도서명: 토지3부3권 (9) 저자명: 박경리 출판사명: 솔출판사 차례 제 4편 긴 여로 7장 마약의 심연 8장 판정패 9장 풍류따라 10장 사랑과 미움 11장 어머니의 노여움 12장 귀부인들 13장 왜 혼자 사는가 14장 쫓기는 사람들 15장 살해 16장 잠든 것같이 17장 카페 18장 장 기인인가 제 5편 젊은 매들 1장 번뇌무한 2장 손목 잡고 하는 말 3장 마차를 기다리다가 4장 주사 5장 호호야 6장 민족개조론 7장 하얀 새 한 마리 8장 배신자 9장 동승 10장 명장 11장 젊은이들 12장 잘못된 계산 13장 편지 14장 용의 죽음 15장 만주행 16장 지시 17장 사랑 18장 결혼 19장 햇병아리 20장 젊은 매 [부록] 어휘 풀이 제 4편 긴 여로 7장 마약의 심연 무거운 철문이 열리고, 냉담하고 무관심한 간수의 눈을 뒤통수에 느끼며 서희는 형무소를 나왔다. 일순간만 같 은 길상과의 대면, 창살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에서 서로 바라본 짧은 시간, 목이 타던 시간, 만남은 빗방 울이었던가. 언제나 그랬었지만 사막을 걷듯 서희는 언덕길을 내려온다. 일체를 차단하고 만 높은 담벽, 붉은 벽돌의 담벽과 서대문 종점의 우중충한 풍경은 인생의 종말같이 서희 마음을 눌러지른다. 이곳의 풍경은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늘 잿빛이었다. 형무소 문을 드나드는 죄인과 죄인들 가족의 마음과 같이 황량한 바람의 잿 빛이다. 한 가지 희망이, 빛이 있다면 그것은 재소자의 건강이 그런대로 괜찮다는 것뿐이다. 흰 무명 두루마기 에 옥색 명주 수건을 아무렇게나 목에 감은 서희는 잠시 멈추어서며 '겨울을 어찌 날꼬?'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는데 유모가 다가선다. "마님." "..." "마음을 단단히 잡수셔야 합니다." "가요." "네" 남편에 대하여 원망과 존경도 없었다. 그리움도 없었다. 다만 절대적인 관계가 있었을 뿐이다. 절대적인 관계, 현재의 상황만이 팽팽하게 가슴을 조여온다. 서희는 걸음을 옮겨놓으면서 남편의 눈빛을 생각한다. 눈에 담긴 빛의 함량은 어느 만큼이든가. 그것은 생명력을 측량해보는 것이기도 했다. 잘 견디고 있는가. 잘 견디어낼 것 인가. 길상의 눈빛은 서희 자신의 눈빛이었다. 그쪽에서 빛나면 이쪽도 빛이 난다. 그쪽에서 못 견디면 이쪽에 서도 못 견딘다. 종점에 종을 땡땡 울리면 전차가 온다. 전차는 멎고 그곳에서 을씨년스런 조선의 백성들이 쏟아져내린다. 암석 으로 깎아지른 산등성이의 가난한 주민들도 있겠지만 형무소를 찾는 어두운 얼굴들이 더욱 많으리라. 잿빛 산 과 언덕 위를 흐르는 흰 구름, 서희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마님." "전차 탑시다." 유모는 서희를 부축하여 전차에 오른다. 차창 밖의 거리는 올망졸망한 장돌뱅이 모습 같았다. 마고자 입은 노 인이 구멍가게 앞에 앉아 있었다. 덧문을 꽉꽉 닫아놓은 찌그러지고 녹슨 함석판같이 살벌한 곳이 있었다. 지 저분한 주점에 들어가는 사내, 입술을 닦으며 나오는 사내, 강아지가 쫄랑거리며 지나간다. 서희와 유모가 효자동 임명빈 집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저기, 저기 서 계시는 분, 도련님이구먼요." 골목 한곁에 교모의 챙을 깊숙이 내리고 책가방을 든 환국이 서있었다. 사람 오는 기척을 느끼고 얼굴을 든다. "벌써 학교가 파했느냐?" 서희가 묻는다. "아닙니다." "그럼?" "걱정이 돼서 조퇴했습니다." "..." "아버님 만나보셨습니까?" 마른 입술을 축인다. 턱 언저리에 소름이 돋아나 있었다. "오냐. 가자." 서희는 아들의 등을 민다. "건강은 어떠신지," "괜찮으시다." 모자는 천천히 발을 떼어놓고, 유모는 발끝을 내려다보며 뒤따른다. "어머님." "..." "저도 한번 가 뵈면 안 되겠습니까?" "너를 보시면 마음이 약해지신다." "저도 이젠 어머님을 대신할 수 있는 나입니다." "..." "아버님은 절 보시면 오히려 맘 든든해하실 것입니다." "부모 눈에는 언제나 자식은 어리게 뵈지."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햇볕 바른 마루에서 옷감을 펴놓고 마름질을 하던 백씨가 얼른 내려온다. "다녀오세요? 그래 면회는 하셨습니까?" 하고 묻는다. "네." "건강은 어떠신지," "보기엔 괜찮았습니다." "그래요? 아암 그래야지요. 하느님이 도와주실 거예요." "고맙습니다. 임선생님께 안부 전하고 감사의 말씀 전해달라 하더군요." "별말씀을, 우리 애아버진 늘 할짓 못해서 부끄럽다 하는걸요." 백씨는 부엌을 향해 미음을 데우라는 말을 하고 나서 "그런데 환국이 너 웬일이냐? 너도 함께 갔었니?" "아닙니다. 학교서 조퇴하고 오는 길입니다." "왜 안 그러겠니. 너도 속이 타서 그랬구나. 자아 피곤하실 텐데 어서 들어가서 쉬십시오." 임명빈이 관련될까봐 몹시 신경을 쓰면서도 백씨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는 불만이 없었고 성심성의껏 서희 에게, 또 담장 너머 서의돈 식구들을 대해왔다. 환국이 거처하는 작은사랑으로 들어간 서희는 두루마기를 벗는다. 그걸 받아 옷걸이에 건 유모는 "미음보다 밥을 한술 드시는 게 어떨까요? 줄곧 굶으셨습니다." "아니 미음을 마시겠소. 유모도 고생이 많구려. 저 방에 가서 좀 쉬어요." "저야 뭐 이렇게 몸이 튼튼한걸요." 유모가 물러나자 서희는 환국이를 바라본다. 환국은 불만과 근심에 찬 눈을 들어, 그러나 감싸듯 쳐다본다. 어 머니를 쳐다보는 눈에 은행빛 저고리가 몹시 헐거운 것 같았다. 눈밑과 눈썹 언저리에 거뭇거뭇하게 나돋은 기미, "환국아!" "네." "이리 가까이 오려느냐?" 환국이 서희 옆으로 다가앉는다. 손을 들어 아들의 얼굴을 쓸어본다. "어머님!" 울먹인다. "기죽지 마라." "아버님을 걱정할 분입니다. 일본제국을 증오하구요. 무엇 때문에 기가 죽습니까." "그래 넌 아버님 아들이구 내 아들이다. 그러나 무모하게 칼을 뽑으면 안 되느니라. 개죽음은 우리의 손실이고 그들의 이득이 된다." "알고 있습니다." "마음 편히 갖고 명년 진학을 생각해야겠지?" "..." "너의 입에서 공부는 해서 뭘 하겠느냐 그런 말이 안 나오길 바란다. 안 하는 것은 쉽고 하는 것이 어려워. 사 내는 어려운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 '이 애는 아직 연약하다.' 마침 유모가 미음 그릇이 놓인 상을 들고 들어왔다. "도련님도 함께 잡수세요. 어머님한테 권하시고," 모자는 말없이 숟가락을 든다. 환국은 서희가 뜨는 미음 그릇의 양을 가늠해가면서 천천히 자신도 미음을 먹 는다. "내일은 내려가야겠다." "내일, 내려가시렵니까?" 미음을 떠넣으려다 말고 서희를 쳐다본다. 나약할지는 모르지만 자신하고는 다른, 그리고 길상이하고도 다른 끈질긴 우수가 타는 눈이라고 서희는 생각한다. 서희 뇌리엔 순간 부친 최치수의 노여울 때 하는 버릇, 입매가 뱅글뱅글 돌던 얼굴이 지나간다. 부친에 해한 기억엔 인자한 면모가 없었다. 무서웠던 기억, 심장까지 얼어붙 게 하던 그 웃을 소리, 눈빛 서희는 고개를 흔든다. 환국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작은 공자니 성자 같다느 니 했었다. 소학교 때 순철이를 돌로 쳐서 상처를 입혔는데 그 일은 만 십칠 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 행사한 폭력이었으나, 상대편보다 환국의 충격이 컸었고 오랫동안 괴로워한 것을 서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어 째서 부친을 연상한 것일까. 환국은 서희의 응시가 의아스러웠던지 눈빛으로 왜 그러시냐 하고 물었다. "음, 변호사 말씀이, 한 달 후에나 재심이 있을 듯하다니까." "네. 한 달 후에... 재판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글세... 무죄는 어렵겠다는 의견이고, 잘되면 집행유예, 형기가 줄든지 그렇지 못할 경우도 각오해야겠지?" "원심대로 될지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그렇게 안 될 거라 장담을 하겠느냐?" "네." 미음은 다 식어버렸고 두 사람은 숟가락을 놓는다. 들창에서 한줄기 햇빛이 새어 들어온다. 비스듬히, 상을 가 라서 세모꼴을 만든다. 그 한줄기 빛 속에 수많은 먼지가 날고 있다. "네가 중학을 졸업하구 진학했을 때 그땐 아버님을 찾아갈 수 있을 게다." "그땐 나와 계시길 바라야지요." 서희는 말없이 아들을 보며 미소한다. "어머님은, 세상에서 우리 어머님만큼 아름다운 분은 없다 생각했는데 많이 상하셨어요." "그러냐? 환국아." "네." "넌 내가 학교 얘기만 하면 회피하려 드는데 강요한다는 생각이 드느냐?" "아닙니다." 부인했으나 벌써 얼굴빛이 흐려진다. "나는 네가 스스로 뜻을 세워 그 길로 가는 데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몇 달 남지 않았는데 진학 문제는 결정돼야겠지? 내가 언젠가 법과로 가라 했을 때 엄마의 생각을 넌 불순하게 생각했던 것 같았어. 변호사면 어떠냐, 해도 넌 엄마 희망을 불순하게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생각해보겠어요." 고개를 숙인다. "그래." 한숨을 마신다. 뉘우침, 어디서 오는 걸까. 뉘우침이 통증처럼 스며온다. '이 아이한테 최참판댁 가통이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김환이 진주경찰서에서 자살한 것은 이 년 전의 일이다. 어둠 속에 묻혔던 인물 긴환, 그의 죽음은 최참판댁의 그 엄첨난 비극의 종언을 뜻한다. 김환을 마지막으로 비극의 주인공들은 다 사라진 것이다. 최참판댁의 영광, 최참판댁의 오욕, 이제 최참판댁의 상장은 재물로만 남았고, 호칭도 최참판댁보다 최부자댁으로 더 많이 불리 게 되었다. 최서희의 집념은 창 없는 전사, 노 잃은 사공, 최참판댁의 영광과 오욕과는 상관없이 단절된 채 아 이들은 자라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존재만이 그들 가슴속에 신화요, 아버지의 존재로 하여 아이들 가슴속에 는 민족과 조국에 대한 강렬한 의식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왜 돌아왔을까?' 왜 돌아왔을까. 반드시 조선으로 돌아와야만 했을까. 아버지와 아들이, 남편과 아내가 헤어져야 했던 이유가 이제 와선 무의미 한 것이 되어버렸다. 서대문의 붉은 담벽은 뉘우침이 매질을 하였고 아들의 창백한 얼굴도 뉘우침이 매질을 한다. 과거는 무의미한 것이며 없는 것이며 죽는 것이다. 현재만 살아 있는 것, 미래만이 희 망이다. 아이들은 현재요 미래다.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고 이튿날 서희는 서울을 떠났다. 눈을 감고 기차에 흔들리는 서희 귓가에, "별일 없는데 뭣하러 왔소." 남편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얼굴도 똑똑하게 떠오른다. 흰무명 바지저고리룰 입은 창백한 얼굴이 망각 속에서 미소짓고 있다. 깡마른 모습, 빛나는 눈동자, 이야기할 때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눈밑에는 잔주름이 모 여들었다. 기름기 군살이 다 빠져버린 모습에는 자질구레한 생각마저 걸러낸 듯 확실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 다. "임선생하고 환국이가 자주 책을 넣어주어서 감옥살이한다기보다 학교에 온 기분이요. 하하핫핫..." 웃었을 때 양 볼엔 더욱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한 이 년 동안 공부 많이 하고 나갈 텐데 변호사가 하도 성화여서 항소는 했지만 아무렴 어떻소? 너무 걱정 마오. 겨울 걱정도 말아요, 만주 벌판 삭풍에 단련된 몸인데. 나는 죄를 져서 이곳에 온 게 아니오. 좀 쉬려고 왔지. 허허헛..." 감았던 눈을 떴다. 기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서희는 이틀 동안을 묵은 뒤 유모와 함께 평사리로 왔다. "어이구 마님 우짠 일입니까?" 길섶에 서서 얘기하고 있던 아낙들이 펄쩍 뛰듯 놀라며 인사를 한다. 서희는 인사만 받고 말없이 지나간다. "별일이구나. 올해 추석엔 안 오시더니 우짠 일일꼬? 신색이 말이 아니구마는." "그러씨. 얼굴에 근심이 가득 차 있구마는. 무신 일이 있기는 있는 모앵이다. 나도 좀 들은 얘기가," "무신 얘긴데?" "머,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당황하며 강하게 부인한다. "사람도 싱겁기는, 들은 말이 있기는 있는가배?" "있기는 머가 있노." 하다가 아무래도 좀이 쑤시는지 "헛소문이지 싶다마는, 말이 나믄 큰일날 기다." "허허 참, 말이 나기는 어디서 날 기고?" 아낙은 귓속말을 한다. 듣는 아낙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아이구 기가 막힌다. 맞아죽었다고?" "쉿!" "세상에, 그러니께 독립운동하다가 그리 된 기제?" "그러는 모리겄고 왜놈한테 맞아죽었다 카이." "그 말이 어이서 나왔는고?" "진주서 듣고 온 사램이, 뭐 두만이가 그랬다 카든가?" "아무튼 집터가, 남자는 수를 못하는 집터니께." "말을 하자 카믄 최씨네 사람도 아닌데 와 그랬일꼬?" 서희가 언덕길을 올라갔을 때 대문 앞 빈터에 기화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서희가 오는 것도 모르는가, 기화 는 멍청히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흐트러진 옷매무새에 시골 아낙같이 아무렇게나 쪽찐 머리였다.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아이구, 아, 아씨!" 후다닥 일어신다. "몸은 좀 어떠냐?" "쉰네야 뭐, 그보다 서방님은 어떠신지요." "음." 기화를 바라본다. 빛이 없는 눈동자다. 탄력이 없는 피부의 빛깔은 누리팅팅했다. 서희는 외면을 하며 먼산을 쳐다본다. 만산이 단풍이다. 섬진강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르고 나룻배가 간다. "가자." 기별없이 나타났기 때문에 집안이 술렁댄다. 올데 갈데 없는 떠돌이를 남편으로 맞이하여 아비 육손이와 함께 행랑에 사는 언년이가 맨 먼저 뛰어왔다. "마님 어서 오십시오." "음." 이번에는 계집아이가 행랑 쪽에서 팔짝팔짝 뛰어나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계집아이의 눈이 서희의 눈과 마주친다. 멈칫하고 놀라며 물러서려는 시늉을 한다. 커다랗고 겁에 질린 듯한 눈동자, 자그맣게 다문 입술, 햇 볕에 그을었을 터인데 살빛이 희다. '역시...' "양현아." 겁에 질린 눈동자가 기화한테 옮겨졌으나 어미를 대하는 눈에도 스스러움이 있다. "마님께 인사드려야지?" 아이는 고개만 숙인다. "이리 와." 서희가 손짓한다. 머뭇머뭇하며 아이는 다가왔다. "많이 컸구나." 머리를 쓸어준다. '가엾은 것들!' 서희는 아이를 볼 때마다 상현의 자취를 느낀다. 항상 옆에 있었으면 그것을 느끼지 않았을지 모른다. 한참 보 고 있으면 아이의 얼굴에선 상현의 자취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기화는 아이 아비가 누구인지 한번도 말한 적 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의 대면에서 더욱 확실하게 상현의 모습을 서희는 아이한테서 보았다. "양현아?" "예." "내년에는 진주 집으로 가야지. 오빠들이 널 보고 싶어하니까." 오빠들이라는 말에 기화, 언년이, 다함께 놀란다. 뒤눚게 쫓아나온 육손이, 언년이 남편 막동이 넋을 잃은 표정 으로 서 있었다. "그러고들 서 있지 말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요." 유모가 나무라듯 말했다. "예, 예," 막동이가 달려간다. "마님 우짠 일이십니까." 육손이 새삼스럽게 나서며 인사를 했다. 유모는 들고 온 트렁크를 마루에 놓고 언년이랑 함께 부엌으로 들어 간다. 서희는 안방에 들어섰다. 불기 없는 방이 썰렁하다. 자리에 앉지 않고 선 채 들창밖을 우두커니 내다본 다. 들창 너머 저만큼 별당의 지붕이 보였다. 선명하게 물든 은행나무 윗부분이 보인다. 노오란 빛깔에 푸른 하늘, 눈이 시리도록 푸른하늘이 보인다. 기화가 방석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 "불 지폈으니까 곧 따뜻해질 거예요. 자아 이거 깔고 앉으십시오." 돌아선 채, 들창 밖을 내다보며 말이 없다. "마님, 앉으십시오." "..." "무슨 일로 오시었습니까." "그냥, 봉순아." "예." "저기 은행나무, 연못가의 수양버들이 이젠 고목이 되었구나." "예." "양현이가 일곱 살이니... 자네가 일곱 살 되던 가을에 내 어머니가 이 집에서 떠났다." "그런 말씀을 지금," "삼십 년 하고도 일 년이 더 지났구나. 저 나무들이 고목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 "그야," "너랑 나랑 상복을 입고 연못가에서... 다 지나간 얘기다." "예, 다 지나간 얘기지요." 돌아선다. 서희는 기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얼굴이 안됐군. 나는 옛날 일을 잊어야겠지만 자네는 더러 옛일을 생각하게." "지나간 일 생각하면 뭘 하겠습니까? 다 부질없는 짓이지요." 두루마기를 벗는데 기화가 받아서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 서희의 말뜻을 기화는 모른다. 아마 오늘 현재가 얼 마나 비참한가를, 기화는 그것도 모르는 것 같다. "따끈한 생강차 한잔 주겠나? 유모한테 일러." "예." "두 잔 가져오라 하게." 현재 기화는 서희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지만 세월은 이들 사이에 가로놓인 주종이라는 벽을 차츰차츰 허물어왔다. 그것은 기화보다 서희가 더 많이 느낀다. 극심한 사회적 변동이 원인이겠지만 가장 오래된 추억을 함께 간직한 두 사람이 처지 탓이며, 가시밭길을 걸어왔고 지금도 걷고 있다는 실감은 어쩔 수 없는 연민, 애 정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애정은 권위를 무너뜨린다. 양현에게 하늘 같은 제 아들을 가리켜 오빠들이라 한 것 도 비단 상현의 딸일 것이란 짐작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기화가 생강차 두 잔을 받쳐들고 들어왔다. "함께 들자." 기화는 안절부절한다. 황송하여 그러는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병든 영혼이 술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안정을 못 찾는 분위기는 아까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마을을 내려다보던 그 모습에서도 이미 볼 수 있었던 것이 다. "요즈음에도 역마살이 남아 있느냐?" 뜨거운 생강차를 마시며 서희는 희미하게 웃는다. "아씨도 참," 얼굴이 구겨지면서 어둡게 가라앉다가 솟다가 자맥질하다가, 헐겁게 옷고름을 여민 인조견 저고리가 연방 펄 렁펄렁 나풀거릴 것만 같은 불안감을 준다. "내년에는 양현이를 학교에 넣어야 할 터인데," "..." "진주 집으로 데려가야겠다." "..." "자네도 함께 안 가겠나?"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왜?" "아씨도," 기화의 얼굴이 구겨지면서 어둡게 가라앉는다. "양현이가 올해 일곱 살이니까." "..." "명년에는 진주로 데려가야겠구나." "..." "자네도 함께 가지." "제가 어떻게? 현이한테도 좋지 않지요." 그 말은 옳았다. "보고 싶지 않겠느냐?" 힐끗 쳐다본다. 그러나 양현을 생각하는 눈은 아니다. 보다 견고할 것이 예상되는 감옥에 대한 공포다. 갑자기 기화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기 시작한다. "아씨! 저, 저는 떠나야 합니다. 보내주십시오!" "..." "이대로, 이대로 여기 있다간 숨통이 막혀서 사, 살지 못할 것입니다. 강물에 빠져 죽고 말 것입니다. 아씨! 제 가 이곳에서 죽어야 합니까!" "양현이 크는 것 보며 낙으로 삼을 수 없겠느냐?" "사람 되기 글렀습니다. 이, 이제는 사, 사람 되기 글렀지요, 어미될 자격도 없구요. 으흐흐흣..." "여기서 나가면 넌 거릿귀신이 된다. 마음을 잡아보아." "현이 앞길을 생각해주십시오, 아씨! 기생에다 아편쟁이, 그런 어미 두어서 뭘 하겠습니까? 나가서 거릿귀신이 되게 내버려두십시오." 거짓말이다. 나가고 싶은 일념뿐이다. 도망을 시도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물론 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가끔 경풍 든 아이처럼 달아나려는 발작을 일으키는데 지금이 그 발작의 시초인 것이다. "어째 아씨는 옛날처럼 꾸짖지 않으십니까?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라고 내쫓으세요. 그, 그럼 사람들이 절 잡 지 않을 것입니다. 아씨! 저는 몹쓸 계집이옵니다! 모, 몹쓸 계집! 으흣흣흣 제발 살려주십시오. 아씨!" "봉순아." "예, 아씨!" "몹쓸 계집을 덮어줄 만큼 내 날개는 크고 넓다. 아무리 몹쓸 계집이라도 자식한테는 어미가 있어야 하느니라. 자네는 그걸 잘 알 터인데 어째 그러느냐." "아, 아니옵니다. 지체 높은, 예, 기생이 있을 곳은 아니옵니다. 아편쟁이 계집이 누를 끼칠 뿐이지요. 아씨! 제 발 저를 내보내주십시오." 이번에는 소리를 내며 엉엉 운다. 눈물이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 내린다. "내가 널 지키고 있단 말이냐?" 서희는 어이없는 듯 웃는다. "온 동네 사람들인 매눈같이 예, 아이구 참말로 답답해서, 현이가 누구 딸인지 아, 아씨는 모르실 거예요. 아시 면 저 쫓아낼걸요?" "알고 있어." "예?" 얼굴을 감쌌던 손을 풀고, 흐릿한 눈이 의심에 가득 차서 서희를 쳐다본다. 탄력을 잃은 피부가 축축 늘어질 것만 같다. 누리팅팅한 피부 빛깔은 무겁고 암울하다. "알 턱이 없어요! 모르실 겁니다. 이 세상에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나 혼자만 아는걸요? 아씨가 어떻 게? 쫓아내세요 아씨! 현이는 이부사댁 서방님 딸입니다. 이제 내쫓으세요! 내쫓으란 말입니다.!" 기화의 눈이 별안간 커다랗게 벌어지면서 발광하듯 악을 쓴다. "그쳐!" "내쫓으시면 될 거 아닙니까! 쫓아내세요! 쫓아내세요! 전 가야 합니다!" "그치지 못하겠느냐!" 고함 소리에 유모가 놀라며 방문을 연다. "유모는 나가 있어요." 손짓을 하고 서희는 "나가려거든 나가! 나가서 죽어!" 기화의 풀이 꺾인다. 무안 풀인가 기화는 다시 엉엉 소리내어 운다.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인연인고?' 한참을 울다가 "아씨! 다시 한번 창을 해보겠어요, 아씨!" 또 시작이다. "아씨! 이렇게, 이렇게 빌어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두 손을 맞잡고 빈다. 서희는 외면을 해버린다. 차마 정시할 수 없다. 창을 하겠다는 것도 물론 거짓이다. 기화 는 치매 상태로 가고 있는 것이다. '불쌍한 것.' 다정다감했던 그 감성은 어디로 갔는가, 사무치게 깊었던 그 숱한 한은 어디로 갔는가, 너그럽게 이해하고 푼 수를 알며 물러나 앉을 줄 알던 그 조신스러움은 어디로 갔는가, 욕심 없고 거짓 없던 그 천성은, 아니 연연하 고 그 풍정이 사내들 마음을 사로잡던 기생 기화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그에게서는 양현을 향한 모성마저 없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나. 마약의 심연으로, 다정다감이 유죄요, 다정다감함 의 단죄인가. "제가 잘못했소. 아씨 용서해주십시오." 희미하게 이성을 찾는 것 같다. "참겠습니다. 예. 여기말구 어디 갈 곳이 있겠습니까?" "모르겠구나. 하느님은 공평하신가 보다." "예?" '연한 심장이 찢기어 죽지 않으려면 너처럼 병들어야 하나 보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 그거 거짓말입니다. 용서하시오. 현이는 이름조차 모르는 사내," "부질없다. 가서 쉬어라. 그리고는 새는 날엔 절에나 가자." 8장 판정패 "말순아! 말순아!" 목청껏 소리를 지른다. 열두시가 되기도 전에 정성을 다해서 한화장이 일그러질 만큼 선혜는 입을 벌리며 다 시 "말순아아! 이 기집애, 말순아!" 말순이는 늑장을 부리며 주둥이를 있는 대로 내밀고 온다. "이 기집애, 재수 없게 사람 신경 돋울 참이냐!" "이쪽 저쪽에서 쌍나발을 불어대니 전들 몸이 두 갠가요?" "뭣이? 이 버릇 없는 기집애를 봤나? 쌍나발이라니!" "쌍나발이라는 편이 낫지 쌍소리라면 더 우습잖아요?" 하다가 저도 우스웠던지 킥 하고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린다. "기가 차서, 구두 닦아놨냐?" "아니요, 안에서 불러요." "넌 내 심부름만 하면 돼. 일할 사람이 너뿐이냐? 잔말 말구 어서 구두나 닦어. 깨끗하게 닦아야 한다아." "저를 부르는 게 아니고요, 아씨를 부른단 말이에요." "뭐?" "마님하고 나리가요. 빨리 오시래요." "어이구 신경질나. 가서 말이야, 피치 못할 일이 있어서 나가는데 저녁에 와서 들어가겠다고 전해! 그리고 빨 랑 와서 구두 닦어." "어이구 참 저쪽에선 긴한 얘기가 있다고 하고 이쪽에선 피치 못할 일이 있다 하고 어느 장단에 춤을 추죠?" 선혜는 말순의 머리를 쥐어박는다. "쪼그마한 게 입만 까져서, 도무지 상하 구별이 없단 말이야." 그것은 선혜 자신에게 책임이 있었다. 부모가 무식한데다가 외동딸의 처지고 보니 집안에서 버릇 없기론 선혜 가 첫째였으니까. 게으르고 생활은 무질서했다. 명령은 끊임없이 번복되고 신경질을 남발했다. 그러나 생래가 독한 성질은 아니어서 영이 서질 않았다. 부모들 역시 재산 관리는 잘했지만 가풍이 없는 탓으로 하인 부리는 데 굴곡이 많아 돌아서면 빈축을 사기 일쑤였다. "하여간 나 지금 바쁘다. 빨랑 구두나 닦어." "그럼 아씨가 대신 야단 맞으세요." "누가 누굴 야단해? 이 나를?"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방으로 들어간다. 거울 앞에 앉아 얼굴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탄력을 잃은 눈 언저 리를 손끝으로 눌러보다가 시계를 본다. "늦겠다!" 양복장을 연다. 손질해놓은 회색 투피스를 꺼내어 살펴본 뒤 어깨에 걸쳤던 가운을 밀어내고 슈미즈 위에 자 주색 블라우스를 입는다. 투피스를 입고 손가락을 입에 물며 양복장 안을 한동안 오려본다. "에따 모르겠다." 투피스와 같은 천으로 된 코트를 걸친다. 자주색 장갑, 검정 핸드백, 옷은 늘 잘 입는 편이다. 소위 취미가 좋 다는 얘기겠다. "닦았니?" 방에서 나오며 묻는다. "닦았어요." 됐다." 바람을 끓듯 선혜는 활발한 걸음걸이로 집을 나섰다. '빌어먹을, 뭐가 이래?' 웃음을 흘린다. '이건 승부야. 승부를 걸었으면 이겨야지, 흥.'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걷는다. 옷이 괜찮은 것 같아서 기분은 과히 나쁘지 않았다. '밑져야 본전이지 뭐. 나도 계산하고 덤빈 일이니까 모욕감 가질 필요는 없는 게야. 처녀도 아니겠고 수절 과 부도 아니겠고, 오늘은 일단 잡지에 출자하는 사무적인 일에서 얘기를 끝내야 할 게다. 낚싯밥에 걸리나 안 걸 리나 어디 두고보자.' 뱃심 좋은 사내처럼 마음속으로 큰소리 탕탕 치며 걸어갔으나, 그러나 전차를 타고 내리고 창경원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팔목을 들고 시계를 들여다보는 선혜 얼굴에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오 분 가량 약속 시간이 늦 어 있었다. '저기 와 있구나!' 급히 걷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느덧 선혜는 소학생처럼 절을 하고 있었다. "숙녀를 기다리게 해서야 되겠소?" 오송은 슬그머니 웃었다. "표 사야겠지요?" "여기 사놨습니다. 손을 펴 보인다. 선혜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웃는다. "별로 사람이 없죠?" 창경원으로 들어간 선혜는 사방을 둘러보며 들떠서 말했다. "일요일이 아니니까, 그리고 날씨도 꽤 쌀쌀해졌지요." "오래간만에 오니까 참 좋네요." "그런 것 같소. 소풍 온 아이들처럼 사람들이 싱싱해 뵈는군요." 천천히 보조를 맞추며 걷는다. 권오송은 항상 그대로, 그 어조 그 모습이었다. 얘기의 내용과는 관계 없이. "늘 생각만 하고 바빠서 실행은 못했는데, 이번 겨울엔 경주를 다녀와야겠소." "겨울에요?" "겨울이란 계절은 좋지요. 그냥 쓸쓸한 게 아닙니다. 뼛골에 스며드는 그런 갈증의 계절이니까요. 여행하기엔 더없이 좋은 계절이지요." "선생님도 쓸쓸할 때가 있어요?" "나는 사람이 아닙니까?" 발부리의 돌을 걷어차고 얼굴은 선혜에게 돌리며 묻는다. "아니에요. 그런 뜻으로 한 얘긴 아니에요. 냉정하시구 너무 균형이 잡힌 것 같아서 말예요. 저 같은 왈가닥도 권선생님한테만은 마구 대하기가 어려워요." "그렇습니까? 하하핫 하하핫핫..." "정말이예요." "그것도 일종의 호신책인지 모르지요." "...?" "그래서는 안 되는데 말입니다." 권오송은 할 얘기가 뭐냐고 묻지 않는다. 물으려 하지도 않는다. "저기 건물 보십시오." "네." "내가 다녀본 곳은 일본과, 봉천에 한번 가본 일이 있는데, 아전인순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조선의 고궁같이 짜임새 있는 것은 없을 것 같더군요. 저기 저 조그마한 별당, 규모는 작지만 완벽하지 않습니까? 아주 힘이 있 지요? 작아도 장난감 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요. 저야 뭐 그런 것 아나요?" "요즘엔 다들, 양풍이 안 들면 행셀 못하는 세상이니까..." "양복 입은 저를 나무라시는 것 같네요." "아, 아닙니다. 그럴 처지도 아닙니다만 선혜씨만큼 양복을 입을 줄 알면 됐어요." "영광입니다." 비원 후문이 보이는 곳까지 왔다. "저기 벤치에 좀 앉았단 갈까요?" "네. 그러세요, 선생님." 권오송은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침묵이 흐린다. 선혜는 불편하다. 그러나 권오송은 담배맛을 즐기는 듯 태 연했다. 여전히 무슨 얘기냐 하고 묻지 않았다. 차츰 선혜는 권오송이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나더러 얘기를 하라는 겐가?' "선생님." "네." "결혼 안 하시나요?" "글쎄요." "남자분들은 혼자 사시기 힘들 텐데요." "좋은 사람 있으면 해야겠지요. 하지만 여자가 고생할 겝니다." "애정만 있으면 고생 같은 것 극복할 수 있는 일 아니겠어요?" "애정도 나름이겠지요, 피차가... 나는 사람의 애정을 내가 하는 일만큼 믿지 않습니다." "그건 불행한 일이에요." "네. 불행한 일이지요." "예술에 대한 집념이 강하다는 뜻인가요?" "허허헛 허허허..." 권오송은 담배를 버리고 구둣발로 문지른다. 웃음의 뜻이 무엇인지 선혜는 알 수 없었다. 사람 없는 고궁에서 독신인 남자에게 독신인 여자가 결혼에 관한 얘기를 했다면 그것은 노골적인 의사 타진이다. 선혜도 말을 하 려 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어떤 서슬에 나온 말이긴 했다. 그런데 권오송의 태도는 다름 화제 때와 조금도 다 름이 없다. "한 바퀴 더 돌아볼까요?" 권오송이 일어섰다. 선혜는 말없이 따라 일어선다. 동물원 쪽으로 걸어간다. "어제, 제가 잡지사에서 화낸 얘기 들으셨어요?" "화를 냈습니까?" 장난스럽게 웃는다. 얘기를 들은 눈치다. "어째서 모두 손끝으로 절 튀기려 하는지 모르겠어요." 동물 우리에 거리를 두고 만들어놓은 철봉 울타리에 상체를 기대며 권오송의 웃음이 맘에 안 들었던지, 자기 흉을 봤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지 선혜는 뾰로퉁해서 말했다. "자신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주먹을 쓸 수 있는 남자였다면... 모두 생쥐 같아요, 조선 남자들 말예요. 여자가 조금만 잘난 소릴 하면 그걸 못 삭여서 몸살이 난다니까요. 저희들 영역을 침해하는 원수처럼 말예요. 그야말로 얼마나 자신이 없음 그러겠 어요? 얼굴 하나 치켜들고 여기저기 미낄 던지는 여자도 치사하지만 남자들은 그보다 더 옹졸하구 인색하고, 여자는 오로지 남자의 노예요 노리개감으로 작정하고 있는 게 조선의 남자들이란 말이에요. 해외에 나가서 교 육을 받는 남자도 마찬가지예요. 아니 더했으면 더했지, 그러고도 입센의 "인형의 집"이 어떻고 로라가 어떻고 천연덕스럽게 말을 하니 기가 차지요." 내친 김에 앞 뒤 생각 없이 선혜는 지껄이며 흥분한다. 아까 결혼 얘기와 마찬가지로 본의 아니게 대화가 빗 나간 것이다. "강여사."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이런 식으로 쏟아놓기 때문에..." 선혜는 자기 성격에 절망하는지 갑자기 풀이 죽는다. "물론 강여사가 말한 그런 경향이 없다 할 수도 없지요. 그러나 남자 대 여자, 그것 다 자신 없는 얘기 아니겠 소? 쌍방이 다아. 인간 대 인간, 우열을 가리든지 싸움을 하든지, 허허헛 허헛헛... 어째 이런 얘기가 나왔지 요?" "말로는 뭣인들 못하겠어요. 실제가 그렇지 않으니까," 권오송도 철봉에 상체를 기대며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이런 좋은 곳에서 화나고 흥분될 얘기는 하지 맙시다. 나도 다른 사람들이 강여사한테 얘기하는 만큼 독설갑 니다. 남녀평등주의자도 아니구요. 오히려 상대가 여자이기 때문에 할말 안 하는 경우가 많지요. 솔직히 말해 서 강여사는 아직 철이 덜 났어요. 좋게 표현해서 말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본위로 할려는 거는 여자뿐만 아 니라 남자에게 있어서도 나쁩니다. 어떻게 마음대로 하고 삽니까? 참아야 할 때는 참아야지요." "저한테도 미움 받을 요소가 있는 건 알아요. 나이값 못하는 것도 알구요. 하는 일이 없이 사치만 하고 다닌다 고, 그런 반감도 알아요. 오늘은 모처럼 어려운 기횔 만드셨는데 이젠 용건을 얘기해야 되겠지요?" 권오송은 뭔지 잠시 고통스런 표정을 짓다가 대비하는 자세를 취한다. "잡지에 관한 일인데요," 운을 뗀다. 권오송은 말없이 담배를 피우며 맞은켠 나무숲을 바라본다. "어렵다는 얘기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제가 출자를 하면 안 될까요?" "우선 반갑고 고마운 얘깁니다." "우선이라면?" 권오송은 대답을 안 한다. 철봉에서 몸을 일으켰다. "슬슬 나가볼까요?" "네?" 권오송은 시계를 본다. "나가봐야겠습니다. 약속이 있어서요." 뺨을 찰싹 때리는 것만 같은 반응이다. 선혜는 숨을 마시듯 말을 잃었다. "강여사," "..." "그 제의는 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시간을 갖고 서로 얘기해봐야잖겠습니까." "그는 그래요." 좀 풀이진다. 창경원 앞에 나왔을 때 권오송은 픽 웃었다. "강여사는 연애 못하겠소." "왜요?" "좋은 시간을 분개하고 남성들을 규탄하는 것으로 모조리 다 써버리지 않았소? 분위기를 박살내고 말았지요." 선혜는 비로소 킥 소리를 내며 웃는다. "자아 그러면 어떻게 한다아?"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더니 호주머니 속에서 수첩을 꺼낸다. 수첩을 팔랑팔랑 넘기고 들여다보던 권오송은 "내일 모레, 모레가 좋겠군요." "네? 뭣 말예요?" "만나서 얘기 좀 할까요? 잡지에 출자하시겠다는 그 문제 말입니다. 생각해보고 그때 말씀드리지요." 장소와 시간을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온 선혜는 여우에 흘린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어제 기회를 만들어달 라 했을 때 응해준 권오송의 의도가 아리송했던 것이다. 뺨을 찰싹 때리는 것만 같았던 반응을 모욕을 받아들 인 것은 속단이며 오히려 그 만대로 생각 할 수도 잇는 일 아닐까? 권오송은 이해 문제보다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헤어질 때 그는 그 문제를 위해 다시 만날 것을 원했었다. 그러나 분위가기 박살났다는 말은 농담이겠지만 뭔가 의미심장한 것이 있었다. '이건 더 답답한 노릇이야. 권오송 씨는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걸까? 관심 있는 척한 것일까?' 권오송 씨는 언닐속이지 않을 것이란 명희의 말이 달콤하게 귓가에서 울렸다. 한데 왜지 더 불안하고 초조해 지는 것이다. 기분이 나쁠 리 없는데 불안하고 초조한 기분은 저녁때 그의 부모 앞에서 신경질로 폭발되고 말 았다. 매파가 가져온 혼담은 이미 있었던 것이며 양자 문제도 계속 논의돼온 것인데, 다른 때보다 부모의 태도 가 강경하긴 했었다. "제가 그런 사내하고 혼인할 여자예요? 그런 여자로 봬요? 어림 없어요. 그건 절대로 안 될 거예요!" "그런 남자라니?" 온통 얼굴이 수염이 묻힌, 우락부락하게 생긴 선혜의 부친 강서방은 담뱃대로 재떨이를 치며 말했다. "조합에서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돈이나 세고 있는 서기, 그 따위한테 제가 시집갈 것 같애요?" "안 하니만도 못한 전문핵교 나온 것밖에 너 잘난 게 뭐 있냐! 천하일색 양귀비냐! 아일 낳아도 서넛은 낳았 을 나인 몰라!" 소리를 지를 때마다 담뱃대로 재떨이를 친다. "좋아요! 저도 할말 있어요! 결혼을 왜 못하는 줄 아세요?" "못 가나! 안 가지이!" "김서방 박서방 아무데나 가는 게 그게 결혼인가요? 마포강 강서방 딸이라 아무데나 가도 좋단 말이에요!" "이런 년을 봤나. 이런 천하에 불칙한 년!" 담뱃대로 딸을 치려고 하자 금가락지를 양손에 끼고 얹은머리를 한 선혜모친이 영감을 막아선다. "골병이다, 골병이라. 그냥 소핵교나 마쳐서 얌전한 데릴사위 얻자했더니 부득부득 영감이 우겨서 참 꼴 좋소. 콧대만 천왕간겉이 높아가지고 부모 알기를 발싸개만큼도, 어이구. 나도 모르겠다! 죽든지 살든지, 이제는 입 이 열 있어도 양자 들이라 마라 못하겠다." "알았어요! 알았단 말예요! 나 부모 번 돈 한푼 안 받겠어요! 거지가 되는 강물에 빠져 죽든 상관 마세요! 양 자 들이세요! 나 안말려요!" "이년이 환장을 했나?" 악을 쓰는 딸을 보며 모친의 얼굴이 질린다. "마음대로 해! 죽든지 상든지. 아, 자식 없는 중이 살까?" 부서져라 방문을 닫고 제 방으로 내려온 선혜는 책상 위에 이마를 대로 운다. 울면서 생각하기를 내가 왜 그 랬을까? 밖에서 머리끝까지 화가 나도 그렇게까지는 안 했는데? 권오송과 약속이 된 날, 약속한 시간에 본정통의 향리라는 찻집으로 선혜가 들어섰을 때. 시간은 이 분 가량 일렀건만 권오송은 먼저 와 있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등을 보이고 있는 남자와 이야기에 열중해 있었다. "안녕하세요?" 권오송이 얼굴을 들었다. "아, 나오셨군요. 않으세요." 자기 옆자리를 가리키다가 "참, 인사하세요." 선혜가 몸을 돌렸을 때 권오송과 마주앉은 남자는 선우일이었다. "선우선생이 웬일이세요?" "난 누구라구?" 우물쭈물하다가 선우일이 웃는다. "이미 아는 사인가?" 권오송이 물었다. "임명빈이 그 형님 매씨하고 함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아, 그럼 동경서 친면이 있었겠군." "이번엔 고생이 많으셨지요?" 선혜가 인사를 차린다. "저야 뭐 물려났으니 괜찮지만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이 고생이지요." "운이 나빴어요." "운이 나쁘다면 우리 조선 사람 모두가 운이 나쁜 겁니다." "얼굴이 수척해지셨어요." "감옥살이 몇 달 했다고 수척해진 건 아닙니다. 여러 해 만에 만났으니까 늙은 거지요. 하하핫... 요즘에도 명 희씰 만납니까?" "네, 만나요. 며칠 전에 만난걸요." "명빈 형님보고는 민망해서 물어보지 못했습니다만, 잘살아요?" "상상에 맡기지요." "그거 묘한 대답이군." "양반이나 귀족들은 우리 서민들과 달라서 늘 안 편한 사람들 아니에요?" "그런가요? 하하핫... 선혜씨도 안 편하겠소." "그건 왜요?" "요즘 세상엔 부자가 귀족이니까요." "한데 이상현 씨 그분 소식 들어요?" "잘 있겠지요." 냉담한 대답이다. "중국에서 안 돌아왔겠지요?" "글쎄요. 들어왔다는 얘긴 못 들었소." "미남이고 재주꾼이고... 왜 중국엔 갔을까요? 실연이라도 하고간 거 아니에요?" 선혜는 화제를 이어가기 위해 상현을 두고 물고 늘어진다. "여자들이란 만사를 그렇게 결론짓고 싶은 모양이죠?" "이 사람아, 그런 소리 말게, 강여사한테 혼날려구," 권오송이 핀잔을 주듯 끼여들었다. "괜히 여투사로 만들지 마세요, 권선생님. 전 삼일만세도 못 부른여자니까요." 권오송을 찻집 소녀를 불러 선혜를 위해 커피를 주문한다. 그리고 말을 잇기를 "말이 났으니 얘긴데 상현이 그 사람 소설하고 담을 쌓았나? 그 곳에서라고 써서 부쳐주면 좋으련만," "열등감 때문에 안 돼." "작품이 좋은데 왜?"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 그중에서도 시골 선비의 기질이 남아 있어서, 청백리 조상을 둔 게 잘못이라." "그건 또 무슨 뜻인고?" "소설 쓰는 데 대해서 뭐랄까? 수치심 비슷한 걸 가지고 있거든. 부친의 존재도 상당한 영향이 있었을 거야." "음..." "그 사람 부친, 연추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끝내 못 돌아오시고 세상을 떴는데 합방되기 훨씬 이전에 가셨 다니까 선구자라 할 수 있겠지." "소설 쓰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면 우리 같은 연극쟁이는 사람으로 안 보겠군." "광대가 사람인가?" "에키 이사람." "배 쫄쫄 곯지 말고 일찌감치 집어치우지." "흥, 독립운동에만 선구자가 있나? 사회주의자가 할 말은 아니고," "이 사람아 도장 찍지 말게. 또다시 감옥살이 하라는 게야?" "공산당들 삼차나 검거됐는데 한 번에서 꽁지 빼면 어쩌누. 하하핫 하하핫..." 격의 없는 친구간의 농담 반 진담 반의 얘기를 옆에서 듣는 선혜는 '우연히 만났을까? 아니면 미리 약속이 돼 있었을까? 도무지 권오송이란 사낸 속을 모르겠어. 농담할 때도 진담 같고, 진담도 농담같구, 구렁이 담 넘어 가는 듯,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아주 확실하고, 여자 관계에 대한 뜬소문 같은 것도 없었던 것 같다. 선우일 이는 여기 왜 나타났을까? 이들은 단순한 친구사일까?' 선혜는 커피를 한모금 미시고 나서 "선우선생, 인실이는 괜찮습니까?" 하고 묻는다. "건강 말입니까?" "여러 가지로." "여러 가지라면, 잘 모르겠는데요?" 어조가 삐뚜름해진다. "항간에서는 그 일본 청년 때문에 말들이 많든데요?" "우매한 사람들이 입을 놀리지요. 인실이 발밑에도 못 오는 사람들이 돌질을 하는 거지요." 선우일의 얼굴이 벌개졌다. 선혜는 무안하여 얼굴을 붉힌다. "하기야, 인실이 그애는 똑똑하구 의지도 강하구..." 중얼거리듯, 선혜는 자신이 비참해진다. 선우일은 들락날락하는 찻집출입구를 한번 돌아보고 나서 "두 분, 말씀하십시오." 전과는 달리 깍듯하게 변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강여사," 하고 권오송이 서두를 꺼내었다. "나 그 문제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사실은 잡지 형편상 생각하고 어쩌구 그럴 여유도 없는 거지만 강여사의 의도랄까, 그게 중요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출자하겠다, 그 말씀은 투자하겠다는 뜻인데 이윤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겁니다." "알아요." "출자한 돈을 걷어낼 수 없는 사정도 아십니까?" "그것도 알아요." "그럼 출자 아닌 회사가 됩니다." 그렇게 따지고 드니까 선혜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딱딱한, 사무적인 어조는 목을 누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그것도, 아무튼 전 돈빌려고 그러는 건 아니에요. 돈을 회수한다는 생각도 안 했구요, 다만," 외로운 생각에서 그랬다는 말은 목구멍에서 삼켜버린다. "알겠습니다. 다음은 경영 문젠데 그것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뭐 제가 알아야지요? 잡지 만드는 것은 전혀 백지 아니에요?" "그럼 간섭은 안 하겠다 그 뜻입니까?" "왜 그리 따지고 드세요? 꼭 구두 시험 치는 것 같아요. 전 그저," "아닙니다. 불쾌하겠지만 명확히 해두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습니다.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지요. 강여사께서 자금을 냈다 하여 잡지에 어떤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을 나는 원치 않습니다. 가령 이 원고를 실어라, 저 원고 는 싣지 마라 하는 등, 물론 강여사 자신의 글도 포함해서," 정곡을 찌르듯 권오송은 무자비하게 말했다. 선혜의 낯빛이 달라진다. "없는 처지에 이것 저것 가릴 게 뭐 있누. 호의는 무조건 받아들이는 게야. 왜놈들이 회유책으로 내놓는 돈도 아니겠고," 선우일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자금을 댔다 해서 강여사의 시녀 노릇은 못한다, 잡지를 못 내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되 면 "청조"는 난장판이 될 겁니다. 남 보기엔 빈약한 책이지만 우리대로의 기준은 있으니까요." 창경원에서 뺨을 찰싹 때리는 것 같았던 느낌은 유가 아니다. 머리채를 잡고 얼굴을 확 젖히며 눈을 들여다보 는 것 같은 느낌, 선혜 눈은 선우일의 양복 단추에 가서 머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도 고지식하긴, 그렇게 따질 건 뭐 있누. 잡지의 사정이란 다 그런거지. 어느 미친 사람이 돈 벌려고 돈 을 내나. 또 선혜씨는 잡지에 대해서 백지라 했고 문사도 아닌 사람이 들은 뭣하러 써." "아닐세. 무외한인 자넨 몰라. 권오송의 눈빛에 거절하고 싶은 충도이 일렁이고 있었다. 돈의 유혹은 말할 수 없이 컸어나 결과가 시끄러워 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권선생님." "말씀하십시오." "좀 비열한 것 같아요." "..." "이제 알겠군요." "뭘 말입니까?" 선혜 얼굴엔 배신감에서 오는 노여움이 있었다. "이 자리에 선우선생이 어째서 합석했는가 그걸 말예요." "네? 무슨 소리지요?" 선우일이 시트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며 의아한 낯빛으로 말했다. 그러나 권오송은 입을 다물고 있다. "선우 선생이 증인이지요? 그렇지요?" 다잡는다. "증인이라니? 내가 무슨 증인입니까." 선우일이 제 가슴을 가리킨다. "이 친구는 모르는 일이지요. 저녁이나 먹자고 나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 의도는 강여사가 말한 대로지요." "알겠어요. 애당초 저의 의도도 순수하진 않았으니까 피장파장이에요. 간단하게 결론짓지요. 희사하겠습니다. 그까짓 마포강에서 뱃사공이 모은 돈, 값있게 쓰는 것 나쁘지 않을 거예요.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선혜는 핸드백을 들고 일어섰다. 찻집 밖으로 나왔을 때 선혜 눈에선 눈물이 쏟아진다. "공연히 긁어 부스럼이다. 저렇게 되면 돈 받기가 어렵잖아? 자네가 한 대 맞은 셈이야." 선우일은 웃었고 권오송은 침묵을 지킨다. 9장 풍류 따라 평사리에서 빠져나올 때는 도망을 가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과녁을 노리는 궁수처럼 도망이라는 한 곳에 생 각을 집중되었었다. 그러나 진주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내가 여기는 왜 왔을까?' 도망을 치려고 했으면 부산 방면으로나 나갈 것이지 왜 하필이면 진주로 왔을까, 기화는 퍼뜩 그 생각부터 했 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하기 위해 미친 듯이 절절하게 도망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처럼 사로잡혔는가, 기화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자신의 갈등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깨닫는다. 깨고 나면 꿈은 멀어져가는 것처럼 자 신의 갈등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깨닫는다. 깨고 나면 꿈은 멀어져가는 것처럼 진주까지 허겁지겁 치달은 과정이 희미하게 엷은 의식 밖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눈에 익은 강물과 대숲, 멀리 보이는 옥봉의 가와집들, 처음 기생이 되었던 곳이며 달갑지 않던 중년 사내가 머리를 얹어주었었다. 아무려면 어떠리, 임자 없는 나룻 배, 농 삼아 그런 말을 하고서 구레나룻이 짙고 얼굴이 둥글넓적한 구두쇠, 전참봉 소실이 되었던 기억이 되살 아난다. '그때 석이는 물을 길러 오던 물꾼이었다. 나는 꽃같이 젊은 기생이었지. 이제 나는 서른여덟이고 아마 석이는 서른다섯? 그러니까 십오 년도 더 된 옛날 일이야' 남강 다리 위에는 쉴새없이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꼬질꼬질 때묻은 터럭수건으로 양귀를 싸잡아 동여매 고 누비옷을 입은 마부가 말을 몰고 지나간다. 강바람은 차다. 겨울 바람이니까. 기화는 보따리 든 손을 늘어 뜨리고 다리 난간에 앞가슴을 붙이며 강물을 내려다본다. 가장자리, 강가에는 희끗희끗 살얼음이 잡힌 모양이 지만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강물은 푸르고 물살 세게 출렁이고 있다. '미쳤다, 미쳤어. 여긴 뭣하러 왔지?' 양현의 얼굴이 눈앞을 지나간다. 엄마를 꺼려하는 차디찬 눈이다. 고개를 들고 강 언덕 옥봉 쪽을 바라보다가 '에미 없이도 그애는 자랄 거야. 양현이한텐 내가 없는 편이 낫다.' 다리를 건너서 기화는 옥봉 가는 길로 접어든다. 감색 세루 두루마기에 자줏빛 털목도리, 회색 털장갑, 그만하 면 진주의 추위쯤, 든든한 차림인데 그러나 기화는 춥다. 몹시 춥다. 헐벗고 벌판을 거니는 것처럼. 그것은 추 위하기보다 막막한 외로움이었는지 모른다. 지난 여름에도 기화는 도망을 시도한 일이 있었다. 그때도 오늘과 꼭같은 기분이었다. 실상 도망, 도망, 했지만 그것은 기화의 의식에 실려오는 강박이지 평사리의 생활이 감금된 상태는 아니었고, 끊임없는 감시 속에 있었 던 것도 아니었다. 처음 평양에서 데려왔을 무렵, 진주 박외과의원에서 치료를 받는 기화는 평사리로 실려 갔 었는데 그때는 서희의 엄명이 있고 해서 감시를 받았지만 그 이후론, 작별을 고하고 나섰다면 물론 여러 사람 이 말리고 타이르곤 했겠으나 몰래 빠져나올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기화 자신이 체념한 듯 어느 정 도 답답한 시골 생활에 순응하려고 노력한 것도 사실이다. 이십 년 가까운 발랑 생활, 창으로써 일가를 이루겠 다고 굳게 굳게 결심하고서도 하루아침에 결심을 내동댕이친 일이 몇 번이며 보잘것없는 사내를 따라, 그것도 진정 반해버린 사내도 아니었는데 기생으로 닦은 기반을 걷어차고 전전했던 일은 또 몇 번이었던지, 종국에서 는 마약에까지 손을 대어 한줄기의 빛과 같았던 양현을 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최초엔 길상을 잃었고, 다음엔 상현으로부터 버림받았고, 잃어버렸기 때문에 스스로를 버린 기화는 또 버림받았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을 망각한 것이다. 도망은 상실과 망각에서 오는 일종의 충격일까. 지난 여름에도 새벽길을 걸어서 하동까지 나왔다가 나루터에서 이부사댁 억쇠를 만났던 것이다. 기화를 보자 마자 "봉순아! 니 어디 갈라꼬 여기 또 왔노!" 억쇠는 새우같이 작은 눈을 부릅뜨고 반백의 상투를 흔들며 화부터 냈다. "저기, 저어 여수 좀 갈려구요." "여수는 멋하로!" "..." "니가 또 맘을 잘못 묵는다. 그 문전에서 나오믄 고생밖에 할 기이 없는 거를 와 모리노?" 새벽길을, 두 활개를 휘저으며 나오긴 했으나 나룻배 탈 돈도 없이 막막하고 후회스럽기도 했던 기화는 그러 나 "나 가야 해요. 제발, 제발 박서방, 날 보내주시오." "가기는 어디로 가야! 잔소리 말고 날 따라오니라." 억쇠는 기화의 등짝을 치듯 하며 떠밀었다. "싫소. 나는 가야 해요." "참말이제 니도 예사 벵이 앙이다. 설사 나가라 캐도 주질러 앉아얄 긴데 무슨 놈의 염치가 그 모양고? 니 일 아니라도 근심이 태산 겉은 그 댁 마님 생각을 좀 해라." "산송장이 무슨 염치가 있겠소. 쓸데없는 짐인데," 기화는 흐느꼈다. "알기는 아는고나. 말이 주종이지 형제겉이 함께 컸이믄 그 정리를 생각해서라도, 천지간의 의지할 곳 없는 서 로의 처지를 생각해서라도 그라믄 못씬다." 어세를 누그러뜨리며 달랬다. "정신차리라. 딸 생각도 해야지. 자아 가자. 우리집 할망구가 평사리꺼지 데불다줄 긴께." 더 이상 고집은 피우지 않았다. 기화는 느적느적 억쇠를 따라 걸었다. 평사라와 하동은 지척이어서 억쇠는 기 화 근황에는 소상했다. 뿐만 아니라 윤씨 생시에 그랬듯이 가을 추수가 끝나면 서희는 잊지 않고 이부사댁에 곡식을 실어 보냈기 때문에 친지 같은 양기의 인연은 끊이지 않았고, 해서 억쇠도 허물없이 기화를 나무라고 몰아세운 것이다. 이부사댁으로 가는 도중 기화는 중학생 교복에 교모를 쓴 소년을 만났다. "도련님 어디 가시오." 억쇠 말에 기화는 펄쩍 뛰듯 놀랐다. "저기," 소년은 그렇게만 말하고 억쇠를 따라가는 기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기화는 넋을 잃고 멀어져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가자." "야." "지금 지나간 학생은 우리집 큰도련님이시다. 헌칠하제?" 억쇠는 자랑스러운 듯 기화에게 동의를 구했다. "어머님을 닮았나부지요?" "외삼촌을 닮았지." 이부사댁 집안은 적막했다. 뒷뜰 쪽의 방문은 열려 있는지 모르지만, 여름인데 장지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마루에 나앉은 사람도 없었다. 기화가 안채 장지문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은 본 억쇠는 문득 깨달아 지는 일이 있었는지 "봉순아, 이, 이리," 갑자기 당황하며 기화의 옷자락을 잡아 끌었다. 행랑채 앞뜰에는 옛날에 있던 감나무가 아직 살아서 매실만한 풋감이 매달려 있었다. 감나무 그늘 아래는 멍석이 깔려 있었다. "앉아라. 여기가 우리집에선느 제일 씨원타." 억쇠는 멍석을 가리키며 푸대접을 변명하듯 말했다. "이기이 누고오? 봉순이 앙이가?" 장독에서 된장에 묻은 콩잎을 꺼내다 말고 억쇠댁에 유월이 반가워서 쫓아온다. 유월이 얹은머리도 잿빛이었 다. 웃음과 함께 눈밑에는 거미줄 같은 잔주름이 모여들었다. "오래간만이요." "와 아니라? 참 오래간만이다." "아지매도 늙었소." "내사 갈 날이 가까운께 그렇다 치고 분길겉이 곱던 니 얼굴이 와 이리 됐노? 말로는 들었다마는 니 형상이 이런 줄은 몰랐구나." "잔소리는 두었다 하고 어서 점심이나 채리라. 그라고 임자, 봉순이를 평사라까지 데리다주어야겄는데..." 무안스럽게 억쇠는 가르고 들어서듯 말했다. 기화는 빨리 보내기 위해 서두르는 기색이다. 입 밖에 낸 일은 없 었지만 억쇠는 상현과 기화의 관계를 어슴푸레 눈칠 채고 있었다. 해서 아까 상현의 처, 시우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올까 봐서 억쇠는 순간 당황해했던 것이다. "아씨, 억쇠옵니다." 작은방 문 앞에 가서 억쇠는 허리를 굽혔다. "무슨 일이오." 방문은 열렸으나 발로 가려진 방안은 확실찮았다. 시우어머니는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기, 최참판댁 식구가 왔는데," "무슨 일로?" "집 나온 모앵입니다. 성한 사램이 아니라서 안사램을 딸리 보내야겄십니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성한 사람이 아니라면... 옛날의 침모딸이라는 그 사람이오?" 기생이냐 하지는 않았다. "예. 그렇십니다. 인사를 시킬라 캐도 사, 사램이 온전찮애서," "괜찮소. 그렇게 하시오." 억쇠는 돌아와서 허락을 받았노라 했고, 유월이는 기화 덕분에 평사리에 가게 됐다면서 좋아했다. 그리고 나들 이에 설레이듯 머리를 털면서 "청솔가지로 빨래 좀 삶았더마는 온통 불티다. 기화도 유월의 옷에 앉은 불티를 털어준다. "밖에서 삶았나 부지요?" "오뉴월 앙이가? 부석에서 빨래 삶을 수 있이야제. 빌어묵을 남정네가 값이 싸다믄서 청솔가지만 사들이놓은 께, 마누라 눈깔이 뭉개지는 생각은 안 하네라." "허허어. 잔소리가 와 그리 많노? 해 좀 치다보고 시부리라." "나릿선 타고 가도 해 안에는 못 돌아올 기요. 영은 떨어졌고, 나중 일이사 내 모리겄소." 유월이는 서둘러서 점심을 차려 왔다. "찬이 없어 어쩌꼬? 머 좀 맨들어볼라 캐도 저눔의 늙은네, 발등에 불 떨어진 거맨크로 깝채싸니께, 요기 삼아 한술만 뜨라. 얼굴에 물은 찍어 바른 유월이는 옷을 갈아입는다고 행랑방으로 들어갔다. "어 묵어라. 여기가 씨원타고 우리집 도련님도 곧잘 여기서 밥상을 받네라." 곰방대를 물고 앉은 억쇠는 또다시 변명 비슷하게 되풀이 말했다. 기화는 목이 탔는지 숭늉부터 들이켠다. "할아범!" 순간 밥 얻어먹으러 왔던 거지처럼 숭늉 그릇을 내려놓은 기화는 쫓아오는 사내아이를 훔쳐본다. 뛰어오다 말 고 사내아이도 기화를 유심히 바라본다. "무신 일입니까, 도련님?" 억쇠의 작은 눈이 가물가물해지면서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고 아이를 쳐다본다. "응, 아까 어디 갔었어." "예. 나루터까지 나가보았습니다. 행여나 하고," "작은아버님댁에서 누구 오신대? "그런 거는 아니지마는, 예," "방학인데 형님들은 왜 안 오지?" "그러씨요. 소인도 오늘 낼, 하마 오실 거라 생각하고," 양자 가서 남해에 사는 상현의 동생 상열이에게는 열여섯, 열두 살의 아들 형제와 아홉 살, 다섯 살 난 딸이 둘 있었다. 큰아들 세민에는 시우와 함께 부산의 P중학을 다닌다. "할아범, 이 사람은 누구야?" 아이는 기화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물었다. 기화는 허둥지둥 눈길을 떨어뜨리며 입이 미어지게 밥을 입속으로 밀어넣는다. "최참판댁 식구올시다." "으음 그래? 그렇다면 환국이 윤국이 그 형님들, 다 안녕하시냐?" 이번에는 기화를 향해 의젓하게 묻는다. "예, 예." 입속에 가득 밥을 문 채 기화는 대답한다. "작년 여름엔 여기 송림에 놀러 왔었는데, 낚시도 하고... 가거든 내가 안부 묻더라고 전해. 알았어?" "예, 도련님." 곰방대를 털고 허리춤에 찌른 억쇠는 집모퉁이를 돌아가는 아이의 잘생긴 뒤통수를 바라본다. "작은도련님이제. 저만할 때 서방님 그대로다. 그리내듯이 닮았제. 감나무를 오르내릴 적에는 세월 간 줄 모리 고 상현도련님이거니, 깜박 잊일 때가 있단 카이." '우리 양현이도 서방님을 꼭 닮았소.' 기화 눈에 눈물이 고인다. "어서 밥 묵으랴." "야. 작은도련님은 몇 살이요?" "올해 열 살이구마는. 성미도 옛날 서방님 그대로고... 흠, 우짜다가 하나씩 맨들어놓고 가신 거지. 지금은 어디 서 머를 하고 기시는고." 한숨은 기화 입에서 먼저 나왔다. "어디서 술타령이나 하고 계시겠지요." 숟가락을 놓고 일어선 기화는 옷매무새를 고치는 시늉을 하며 억쇠를 외면한다. "안 하든 나들이를 할라 칸께 옷이야 머야 구생이 맞아야제." 유월이 행랑에서 나왔다. 올은 굵었지만 모시 적삼에 인조견, 회색 보이루 차마를 입고 옥색끈으로 허리를 질 끈 동여맨 모습이다. 허리끈에는 남색 염낭이 매달려 있었다. "보소, 나도 이리 꾸민께 좀 젊어 보이요?" "지랄하네. 어 갔다 오기나 해라." 유월이를 따라 기화는 이부사댁을 나섰다. "펜하게 가자." "아지매." "와." "나룻선 타고 갈 겁니까?" "그래야 안 하것나?" "그만 걸어가요." "와. 대낮에 들어가기가 민망스러바서 그라나?" "그런 셈이요." "그럴 거를 나오기는 아 나오노." "병이지요," 넓은 하늘을 질러 멀리 날아가는 새를 올려다보다가 눈이 부신지 기화는 손바닥으로 얼굴에 그늘을 만들며 "병이지요." 다시 뇌이고 웃는다. "서울 소식은 좀 듣나?" "나는 캄캄절벽이요." "꼭 남우 말 하듯이, 와 그라노? 니는 길상이하고 함께 컸고 길상이를 좋아 안 했나!" 기화의 기색을 살핀다. "아지매도 참, 철나기 전의 일을 가지고 무슨 그런 싱거운 소리를 하요. 지금 처지가 어떤데, 함부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요." "안 듣는 데서야 상감님 흉도 본단다." "뭍으로 가는 겁니까?" "니가 그렇게 하자며?" "햇볕이 뜨겁소." "뜨끈해서 도리어 좋거마는. 나락이 무럭무럭 커겄다. 어이구 강바람도 씨원코." 공기는 맑고 햇볕은 뜨거웠다. 그저께 흡족하게 내린 비로 산천은 씻은 듯 푸르렀다. 논가 도랑엔 풍부한 물이 햇볕에 희번덕이며 흐르고 있었다. "아지매." "와." "서방님 소식은 듣습니까?" 서울 소식은 듣느냐던 유월의 어조와 같이 이번에는 기화가 묻는다.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유월이는 내키지 않는 대답을 했다. "들으나만, 어디 한 해 두 해 된 일가? 이자는 우리 아씨도 자파하시얄 기다." "그래도 기다리면 돌아오시겠지요." 이제는 기다릴 처지가 못 되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며 기화는 말했다. 설사 양현을 기르며 기다린다 하더라도 이상현이 자신에게 돌아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기화는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때든 설마 돌아오시겄지. 천지 신명께 밤낮으로 축수했지마는 소용 있더나? 우리 나으리 객사하신 거를 몰라 하는 소리가?" "그 어른께서는 돌아오실 형편이 아니었지요. 독립운동하신 어른이 왜놈 천하에 오실래야 오실 수 있겠어요?" "그놈의 독립이라는 기이 멋인고. 나으리께서도 허사였고 기다린 사람들도 보람이 없었제." "노마님께서는," "말도 마라. 숨찬 병 따문에 기동도 못하신다. 우떤 때는 얼굴이 진짝겉이 부어서 눈뜨고 못 본다. 다 심홧벵 이제. 무자석 상팔자라고 차라리 우리겉이 자석 없는 사람이 나올라?" 길은 강변을 따라 뻗다가 강변에서 멀어지기도 하고, 푸른 강물위에 물새는 흰 손수건처럼 보이기도 한다. 강 변 따라 이어지는 산기슭에 마을이 이어지고 끊어지곤 한다. 인가가 모인 곳의 지붕들은 제법 큼지막하고 외 딴 곳에 한두 채 있는 초가 지붕은 고막 딱지처럼 작다. "큰도련님은 중학교에 다니시지요?" 중학교 교복과 교모의 소년은 기화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갔었다. 그의 부친처럼. "부산서 다니시는데 방학이라고 돌아와 기신다." "몇 살이지요?" "열일곱 앙이가. 옛날 겉으믄 벌써 장가 드싰지." "우리 환국이 도련님하고 동갑이네요." "만주서 돌아오시가지고 낳았인께. 어이구 불쌍한 우리 아씨, 앞날이 첩첩태산이다. 후명년이믄 시우 도련님도 웃핵교에 가시얄 긴데 우찌 될랑고." "환국이 도련님은 명년인데요?" "우리 도련님은 소핵교를 한 해 늦기 가시서, 이곳에선 그것도 일찍은 편이었제. 그 댁이사 머, 어느 모르 보 나 청풍당석 앙이가." "속을 헤치고 보면 청풍당석이 어디 있겠소." "하기사 옥사겉이 험한 일이 어디 또 있겄나마는, 말 듣기로는 두해만 있이믄 까막소에서 나온다믄? 그래도 쌯이고 쌯인 재물, 한 해만 있으믄 걱정이사 없으까?" "그 재물을 어떻게 모았기에요?" "어쨌거나, 아무보고도 이런 말은 안 했다마는, 우리 아씨 삯바느질하시는 거를 어느 누가 알겄노." "삯바느질을 해요?" "남들은 여기저기서 부동하여 편히 살기다 생각할 기다마는 그것도 한 해 두 해... 외할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로는 외가서도 전과 같지 않네라. 양자 가신 작은 서방님은 이녁 자석들이 많은께 조카 자석가지 일본에 보내 시겄나." "..." "우리끼리닌 하는 말이지마는 최참판댁에서 추수 때마다 곡식을 보내주시니 망정이지... 우리 이씬 굶고 앉았 느니보다 더 못 전 딜 일이라 하시지마는, 집안형편이 말이 아니라네. 작은댁에서도 일 년에 한 분 목돈을 보 내주시는데 말이 지주지 삼사백 석하는 형편에 그것도 감지덕지 앙이것나? 그러나 시우도련님 학자에 선영봉 사, 벵든 노마님 치송, 아무리 가용을 절용해도 우리 아씬 밤잠 못 주무신다. 세상이 더러바서, 참 세상 더럽더 마. 옛날에는 굽실굽실하든 아전놈들, 하정배하든 상것들이 둔푼 잡았다고 갈롱피는 거를 보믄, 세상에 우리 아씨가 그런 것들 삯바느질 안 하시나? 그거는 노마님도 모리시는 일이제." "우리 아씨한테 말씀," "아이고 큰일날 소리!" 유월이는 걸음을 멈추고 펄쩍 뛴다. "그 말이 났인께 하는데 우리 박서방이 시우도련님 학자 따문에 그런 말을 한분 했다가 혼벼락이 났다. 평생 이 그렇기 노발대발하는 아씨를 본 일이 없구마 말심하시기를 작은댁, 외가는 핏줄이니 학자를 아니 받아도 굽혀야 할 처지요, 받았단 하여 각별히 굽힐 필요도 없는 일, 그러나 금전으로 인하여 남에게 굽히게 될 그 따 위 학문은 해서 뭘 하겠느냐! 추수 때마다 최참판댁에서 보내주시는 것은 정의로 받는 것이요 그것조차 아니 받느니보다 못하거늘, 그런 넋빠진 얘기를 할려거든 썩 내 집에서 나가거라! 우리 박서방은 풀죽 겉은 땀만 흘맀제." "아지매는 쫓겨나는 게 그리 무섭소?" 유월이는 유심히 기화를 쳐다본다. "무서블 거 머 있건노. 설마한들 두 식구 바가지 들고 빌어묵기야 할라꼬?" "그러면 나오는 게 뭐가 어렵소? 어려운 살림살이에 두 식구 줄면 그 댁에서도," "모리는 소리다. 우리가 객식구가? 묵으나 굶으나 우리는 한식구다. 요새 세상에는 상전 노비가 어디 있느냐, 그렇기들 말하지마는 노비 신세 명했다고 잘 삼사? 못살기는 매일반이더라. 우리 내외는 그 댁에서 낳고 한평 생을 그 댁에서 살았고, 우리집이지 남우 집이앙이다. 말이 상전이제. 만주 가신 서방님도 우리 손에서 컸고 지금 두 도련님도 우리 내외 마음으로는 손주거니," "..." "우리 일은 그렇다 치고 니는 우짤라꼬 자꾸 이러제?" "모르겠소." 기화는 쓴웃음을 띤다. "그 댁 마님이 평사리로 자주 오시는 것도 아니고 죽은 듯이 들엎으리고 있음 될 긴데," "우리 아씨가 왜요?" "성정이 무섭다믄? 여자가 오죽하믄," "그런 소리 말아요. 우리 애기씨처럼 정이 짙은 사람은 없을 게요." "말 듣기론 찬바람이 솔솔 분다 카든데?" "옛날에... 어머님을 잃으셨을 때 우리 애기씬 일 년 열 두달을 울었답니다. 무서운 성미도 그 탓이요. 할머님, 어머님에 대한 그 절절한 심정, 정이 많아서 병드는 대신에... 예 그렇지요. 독사같이 무섭게 살았지요. 우리 양 현이는 에미를 찾지 않소." 기화는 나직한 목소리로 웃었다. 얼마를 걷다가 유월이는 길섶에 주저앉았다. "상것이라 할 수 없고나. 나들이한다고 보선을 신었더마는 발이 괴이서 못 걷것네." 꿍꿍 앓으며 버선을 벗은 유월이는 맨발에 하얀 고무신을 신는다. "시우도련님이 공부 갔다 오시믄서 이 고무신을 한 켜레 사다주싰지." 자랑스럽게 말하며 유월이는 웃는다. 최참판댁을 향해 언덕을 올라갔을 때 강물과 산에는 어슴푸레한 저녁이 찾아왔고, 마을도 저녁 안개에 싸여가 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용이 "돌아오는고나, 그래야지." 올라오는 기화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이구 몸도 편찮으신데 나와 기시오?" 우월이 인사하고 기화는 운다. "아무래도 돌아올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집안에는 별고 없지요." "야." "보, 보수이 와, 와소오!" 똥장군을 지고 나오던 개똥이, 얼른 지게를 내려놓고 대문 안을 향해 소리지르고 나서 기화를 보고 벙실 웃는 다. 울다 말고 기화는 "이 천치야!" "내, 내는 보, 보시 처치지마는, 이 인지느 어이가, 가이 마아." 개똥이는 또 벙실 웃으며 좋아한다.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병신들 운동회 열어야겠다, 흐흐흐흣..." 기화는 저도 모르게 낄낄 웃었다. 어이가 없었는지 유월이 "아이가아? 지랄하네. 웃음이 어이서 나오노." "아이고 우스워라. 아지매 이 집에 병신에 셋이요. 육손이, 개동이, 봉순이. 흐흐흐흣..." "그만 해라. 남도 미치겄다. 용이 나무란다. 언년이 쫓아나왔다. "아지매도 참! 가면 어딜 갈 거라고, 보따리 이리 주시오!" 보따리를 뺏아 들며 혀를 찬다. "언년아." "돈 한푼 없이 가면 어딜 갈려고 나갔습디까?" "양현이 고년 날 찾지도 않지?" "..." 대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던 양현이 어미를 보자 집안으로 내뺀다. "그럴 게야. 왜 안그러겠어. 어미 험한 꼴을 다 아는데, 현이는 훗날 커서도 그걸 못 잊을 게야." 혼잣말 처럼 중얼거리며 사람들을 헤치고 기화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무관세음보살,' 기화는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간다. 추석도 지난 늦가을의 발작은 서희가 와서 저지해주었다. 오래간만에 쌍계사에 가서 혜관도 만나보았고 불공 도 드렸다. 그때 혜관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무관세음보살,' 서희는 지금 서울에 가고 집에 없다. 찾아가면 따뜻한 방에 발을 뻗고 앉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서 도 기화는 '봉춘네를 찾아갈까? 찾아가면 며칠을 재워줄 건데... 어디서 살까?' 그러나 기화의 발은 곧장 옥봉을 향하고 있었다. 옥봉 연홍이 집은 옛날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어머님 여기 안 계시오." 기화의 행색을 살펴보며 젊은 기생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사를 하셨단 말이요?" "왜 찾지요?" "왜 찾긴? 기생이 기생 어미 찾는데 이유가 있겠느냐?" 상대가 기생이라 기생의 가락이 나온다. 젊은 기생은 숙어들었다. "아, 예... 저기," 하다가 말고 길에까지 나와서 손가락질하며 연홍의 집을 가르쳐준다. 옛날 집에서 여남은 채 지난 곳에 규모 는 작으나 조촐한 기와집에 있었다. "자네 누군가?" 연홍은 기화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 기화예요. 어머니." "뭐라구?"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긴 했으나 연홍도 나이보다 늙은 것 같았다. 옥색 반회장 저고리에 가지색 양단 치마, 금 비녀에 금가락지를 끼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아 생활은 부유한 듯, 그러나 얼굴의 잔주름은 기화의 변모 못지 않게 참담했다. "그러고 보니, 으음, 한데 여긴 뭣하러 왔지?" 순간 연홍의 목덜미가 벌개진다. "왔으니까 올라오기나 해라." "예." 방안에는 놋화로에 빨간 숯불이 타고 있었다. 군불을 땐 뒤 방금 불을 담아 들여놓은 것 같다. 기화는 비로소 추위를 느낀 듯 후들후들 떤다. "앉아라. 장석같이 서 있지 말구." "예." 목도리를 끌러 한곁에 놓고 앉는다. "소문으론 들었다만 네 신세도 말이 아니게 됐구나." 부젓가락으로 화롯가에 흩어진 불씨를 복판에 옮겨놓으며 연홍은 냉담하게 말했다. "뵐 낯이 없습니다." "이리 가까이 앉아라! 떨고 있지 말구." 기화는 화로 가까이 다가앉는다. 방안의 의걸이 비품들은 모두 옛날 그대로다. 손때 하나 묻지 않은, 백동 장 식은 그림자가 비칠 만큼 깨끗이 닦여져 있었다. 세간 가꾸기에는 신경질적이며 까다롭던 성품은 예나 지금이 나 다름이 없다는 생각을 기화는 한다. "네 손가락으로 내 눈 쩔렀지이. 옛날 생각을 하면 꼴도 보기 싫어. 더러운 게 정이라고, 그새 세월도 많이 지 나갔고." "욕 많이 하셨을 거예요." "욕? 욕만 해? 그때 내 손에 잡혔으면 머리끄댕이 성해놨을까? 하필이면 소화 그년하구 짝짜꿍이 맞아서," 또다시 연홍의 목덜미가 벌개진다. "그 얘기 하면 어머니가 한사코 말리실 거라 생각하구요." "전참봉한테 맡긴 이상 가라 마라 할 처지도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소화 그년이 너를 빼내? "그, 그건 제가 부탁을 했던 거예요." "하가야 뭐 이제 다 늙어가는 처지, 소화하고도 오가며 지내고 있다만 그때 일 생각하면 산 넘어간 부아가 돌 아온다. 그땐 소화 그년, 날 곯려줄려고 널 운삼이한테 건네준 게야." "그게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냐! 그래 그러고 나가서 넌 명창이 되었느냐?" "..." "이 꼴하구서 날 찾을 생각을 했으니, 하기야 아편쟁이 체면 차린다는 얘긴 못 들었다. 입음새를 보아하니 약 값 떨어져서 날 찾아온 것 같지는 않고," "아편 뗀 지 오래됐어요." 기화는 고개를 숙인다. "아편쟁이치고 아편 안 뗐다는 연놈 못 봤어!" "..." "계집이란 조모가 없으면 빌어먹어. 기생은 더욱 그렇다. 옛날엔 너도 날보고 돈만 안다고 했지만 겨울이와서 메뚜기 신세 깨달아도 소용 없지. 죽네 사네 하는 것도 젊은 한시절, 늙은 놈 깝대기 벗기는 짓도 삼십 안짝의 일이야." "이젠 다 글러버린 일이지요." "하긴 그래. 사내를 후려먹기에 넌 이미 늙었고 망가졌고 나도 곰부리는 중국놈 행세하기 어려운 나이가 됐 지." 연홍이 갑지가 서글프게 웃었다. "그래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느냐?" "혹, 봉춘어머니 사는 곳은 아시는가 싶어서요. 어머니도 한번 만나보고 싶었구요." "봉춘에미? 그 예수쟁이 할망구는 찾아 뭣하려구?" "좀," 연홍은 기화를 빤히 쳐다본다. 그의 얼굴에는 차츰 심약한 빛이 돌았다. 그것은 변모한 기화에 대한 연민이기 보다 여자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진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인 것 같다. 금불이도 비단옷도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늙은 몸에 대한 자기 연민인 것 같았다. 그리고 무료한 시간. "그보다 소화 말이 혹 너가 찾아오면 저한테 보내달라 하더구먼. 그까짓 것 어디 가서 뒤졌지 여태 살았겠느 냐 했다마는," "무슨 일로 절 오라 했을까요?" "뭐 전할 게 있다나?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그보다 봉춘어머니는요?" "시은학교 근처에 산다든가? 그건 소화가 잘 알 게야." "그 어머닌 그냥 그 집에 사시나요?" "응. 부자영감 얻어 살다가 먼저 죽어주어서 한밑천 잡았지. 돼지처럼 살이 쪄서 잘산다." "그럼 이제 됐어요. 가보겠어요." "곧 죽어가면서도 오기는 있어서, 듣기 싫은 소리 좀 했기로, 십여년 만에 와가지고 저녁 한 끼도 안 먹고 가 겠다 그 말이냐?" "..." "너는 마음속으로 이런 말 하고 싶을 게야. 어머니가 나 땜에 손해 본 일 있어요? 하고 말이야." "악착같이 살고 싶었다면 그런 셈도 해보았을지 모르지요." "그건 믿을 만한 말이야. 그래도 못 죽고 살았느니 어쩌누. 저녁이나 먹고 가거라. 꼴을 보니 춥고 배고프고, 봉춘네를 찾는 걸 보니 최부자댁에 갈 처지도 못 되는 모양이고." 기화는 고개를 숙인다. 연홍은 밖을 내다보며 저녁을 차리라고 이른다. 저녁상을 함께 받은 연홍은 "자식 없는 내 신세도 그렇고 그런 거지만 너도 어쩌다가 그 몹쓸 짓을 하게 됐지?" "..." "소화 말로는," "그 어머님 운삼어른께 들으셨겠지요, 저 얘길." "글쎄다. 기화 너 운삼이 그 작자하고 관계가 있었더냐?" "아니에요. 절대로 그런 일 없었어요." "운삼이 너한테 반한 것은 틀림없는 일이지?" "운삼어른께서는... 제 소리를 아까워하셨지요." "..." "무던히 애를 쓰셨는데 그럴 때마다 중도지폐하고, 제가 나쁜년입니다. 은공을 모르는 금수가 됐지요." "천하의 잡놈이, 수없는 기생을 울러더니만 어째 너한테는 그리 진심이었던지 모르겠구나." 기화를 유심히 본다. 소화가 기화를 보자는 이유는 운삼이한테 있는 듯하고, 연홍은 그것을 알고 있는 눈치다. "하기야 버럼받은 기생치고 한 년도 그 자를 원망하는 년은 없더라만, 그게 인복이라는 걸까. 아무튼 창악계의 큰 봉우리였던 것만은 틀림이 없고, 끝까지 한량이었지. 그러나 흐르는 물 따라 사람은 가게 마련이고," "무슨 말씀이신지요?" "운삼이 죽었어." "예?" "소문도 못 들었나?" "도, 돌아가셨어요...?" "풍류 따라 한평생... 죽음도 홀연히 갔다니까, 병고 없이, 그것도 복이지." 기화는 멍청할 뿐이다. "이제는 촉석루의 한량도 없고 기생도 없고, 그것 다 옛말이야. 연홍이만 퇴물인가? 기생들 다 퇴물 됐다. 신 식 식자 제놈들이 풍월을 어찌 알 것이며 추수 끝낸 촌부자들 외입하는 기생집이지. 그러고 보면 운삼이도 귀 한 사람이었던가. 흥, 그래서 소화도 의리를 지키는지 모르겠구나. 젊은 시절에는 상판만 반반하지 듬짜라고 멸시 받는 소화가... 어느 날, 네가 또다시 날 찾아왔을 때 나도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른 다." 연홍은 한탄하듯 말했다. "죽음에 노소가 있겠습니까?" "누구나 해보는 얘기지." "제가 먼저 갈지 누가 알겠습니까?" "아직 사십이 못 된 년이 무슨 요망스런 말버릇이냐!" 연홍은 화를 낸다. "하지만," "아편은 끊었다며? 아직 생각이 있어 그러는 게야?" "아, 아니에요. 미칠 것같이 답답하고 명대로 살 것 같지가 않아서요." "그게 다 아편독 땜에 그렇지. 그 해독을 몰라서 시작했냐?" "할말 없지요." "..." "일생동안 살고 싶고 꼭 살아야겠다. 생각한 일이 한 번 있었지요. 생각지도 않았던 계집아이를 하나 낳아서, 그땐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볼려고 했어요. 한 이태 살았지요. 그러나 수중에 돈이 떨어지고 보니 기생하든 년이 뭘 하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엄두가 안 나요."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으면 될 거 아니야?" "죽어도 그 짓을 못하겠데요. 계집애를 업고 평양으로 갔지 뭡니까? 멀리 가지고 간 곳이지요." "그곳에서 기생집에 나갔더란 말이지?" "예." "삼십 넘은 기생 눈먼 새나 돌아보았겠나. 그놈의 간장 찢어지는 소리 덕을 보았겠네." "그런 셈이지요. 나무아미타불이었어요. 술을 마시게 되고 어린것도 어미한테 희망을 버렸겠지만 저 역시 제까 짓 것 커봐야 기생 딸년 기생밖에 더 되겠는가, 희망을 버렸지요. 마음에 없는 사내를 끌어들이고 그 사내한테 서 아편 찌르는 걸 배웠어요. 아주 미쳤던 거지요. 기화도 가고 내 딸도 간 거예요. 쓰레기가 돼버린 거예요." "딸애는 어떻게 했나?" "그건 어머니가 알아 뭐하실래요? 데려다 기생으로 키우시렵니까?" "술도 안 마셨는데 주정하냐?" 기화는 숟가락을 놓는다. "어머니, 나 밥 못 먹겠소. 술 있으면 한잔 주시오." "그래 좋다." 연홍은 문밖을 향해 "여기 저녁상 물리고 술살 들여오너라!" 소리친다. "오래간만에 너의 "적벽가"한번 들어보자." 연홍이 가야금을 내린다. 소매끝을 한번 걷고 줄을 고르며 퉁겨 본다. 옥색 저고리와 가지색 양단 치마, 금비 녀, 금가락지가 비로소 빛이 나기 시작한다. 한 겹 걷어올린 소매끝과 소맷부리가 아름답게 흔들린다. 맑은 가 야금소리, 기화는 옷깃 쪽에 턱을 묻는다. 차츰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다. 10장 사랑과 미움 낡은 조바위를 쓰고 두둑한 솜저고리를 입은 봉춘네는 끼었던 팔짱을 풀면서 교지기가 사는 집안을 들여다본 다. "보소." 엉덩이를 쳐들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교지기 노인 권서방이 그런 자세인 채 돌아본다. "어제 왔던 사람인데 장선상님 나왔십니까?" "직원실에 가보소, 나왔일 기요." "직원실이 어디요?" "핵교 문을 들어서믄 바로 옆이니께 가보소." 봉춘네는 다시 팔짱을 끼고 얼굴을 향해 불어닥치는 바람은 마시며 뛰어간다. "아이고 치버라. 그치겉이 날씨도 맵다." 텅 비어버린 운동잘을 질러서 건물 안으로 들어간 봉춘네는 몸을 부르르 떤다. 운동장의 바람 대신 교사 안의 냉기가 심장을 꿰뚫는 것 같다. 그것은 추위 때문만은 아니다. 봉춘네는 교회당을 제외한 큰 건물에 대해서는 늘 무섬증 비슷한 것을 갖고 있었다. 기웃기웃하다가 봉춘네는 눈이 띄는 도어를 살며시 밀어본다. 난롯가에 의자를 끌어다놓고 책을 읽고 있는 석이 뒷모습이 보인다. "보레?" 석이가 돌아본다. 봉춘네는 물을 밀고 들어왔다. "아주머니." "니가 와 있다 캐서," "추운데 이리 와 앉으십시오." 석이는 의자를 끌어당겨 난롯가에 놓는다. "날씨도 고치겉이 맵다." 의자에 앉은 봉춘네는 어줍은 듯 옷고름으로 눈가를 닦는다. "늙은께 조금만 바램이 불어도 눈물이 나와사아서, 청성궃게 와 눈물이 나는지 모리겄다." "어제 오셨다구요?" "응. 너그 집을 몰라서, 집 가리키돌라고 왔더마는 내일 일직아라 카든가 니가 나올 기라 캐서," "아침에 나오니까 권서방이 그러더군요." "그래 어무이랑 잘 기시나?" "네." "아이들도 잘 크고오?" "네." "너거 장모는 가끔 길에서 만나네라." "그런데 무슨 일로, 무슨 일이 있습니까?" 석이 표정은 우울했다. "저기, 기화가 지금 우리집에 와 있다." "네?" 놀라며 석이는 봉춘네 얼굴을 쳐다본다. "언제 왔습니까?" "어제 아침에 왔더라." "어디 간다고 하든가요?" "아니 그런 말은 안 하더라마는 맴이 안 놓이서 니를 찾아 안 왔나. 최부자댁에는 죽어도 안 갈기라 카고," "그래요..." 얼굴이 구겨진다. 석이는 등을 돌려 책상 위의 담뱃갑을 집는다. 담배를 붙여문 그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다. 바람에 창문이 흔들린다. "그것뿐이라믄 또 모르겄는데 난데없이 돈 칠백 원을 나한테 맽기믄서," "돈 칠백 원? 무슨 돈인데요?" 얼굴빛이 달라진다. "돈 칠백 원이라 카믄 큰 돈 앙이가? 나도 대기 놀랬다. 그런데 듣고 보이, 니도 아는지 모리겄다마는, 운삼이 라고 창을 하는 사람인데 그 길에서는 명이 났제. 옛날에, 우리 봉춘이가 살아 있일 직에 나도 한분 본 일이 있네라." "그 위인이 기화를 데려갈려고 돈을 주었다 그 말입니까?" "그기이 앙이고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죽어요?" "죽었다는구나. 천하의 난봉꾼이고 한량이라 카든데 죽었단다." 운삼이 난봉꾼이요 한량이라는 것은 석이도 잘 아는 일이다. "소화라고 옛날 운삼이하고 살던 기생인데, 그런께 소화 주선으로 기화가 서울의 운삼이를 찾아간 일은 너도 알 기다." "알지요." "그 소화한테 운삼이가 죽기 전에 기화한테 전할 수 있이민 저하라고 돈 칠백 원을 맽기놨더란다." 석이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고맙기야 얼매나 고마분 일고? 그러나 영문을 잘 모리겄더라." "그 사람, 기화누님을 많이 도왔지요. 명창 만들려고 애도 썼고, 그렇게 생각해주는 사람이라도 있었으니 다행 이지요." "그러씨, 그 박복한 것이,"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나한테 돈을 맡아 있으라 카고는 내처 잠만 자고 있다. 정신 없이, 그래 우짜믄 좋겄노? 저라다가 또 어디로 내빼부리믄 우짤꼬?" 석이는 또 한숨을 내쉰다. "생각하면 밉기도 해요. 죽든지 살든지 내버려두고 싶기도 하고,"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끈다. "그거는 석이 니가 몰라서 글허다." "모르기는 뭘 몰라요? 훤하게 다 압니다. 서울서부터," 석이는 강하게 증오감을 나타내었다. "그 불쌍한 거를 너무 그러지 마라. 산 게겉이 팔도 강산을 돌아댕기든 거를 촌구석에 꽉 처박아놨은께 우째 벵이 안 날기고. 지 팔자가 좋았이믄 기생이 됐겄나. 기생이믄 기생으로 살아야제 별수 없네라." "교회에 나가시는 아주머니께서 그런 말씀 하셔도 좋습니까?" "성내지 마라. 나도 처음에사 와 그런생각을 안 했것노. 그런데 기화를 쳐다보이, 그때 여기 벵원에 있일 적보 다 더 못씨게 됐더라. 사램이 그렇기 망가질 수 있이까. 마치 물고기를 물에다가 올리 놓은 것 겉이, 차마 못 보것더라." "맘을 못 잡으니 그렇지요. 타고난 창부요." 석이는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 놀라 얼굴이 새파래진다. "그래 기화가 요조 숙녀더나! 머를 니가 알기는 아노! 하기사 나는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니께 기생 같은 거를 언제꺼지 돌봐주는 것은 달갑지 않을 기다. 그래도 니는 그렇기 못한다! 개고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기이 어디 선생가! 니한테 우찌 했다고 그런소리를 하노!" 봉춘네도 발끈해져서 언성을 높인다. "나한테는 돌보아줄 능력도 없거니와 착실하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을 난들 어찌 하겠습니까." 냉정하게 칼로 자르듯 말했으나 다시 담배를 붙여물고 신경질적으로 성냥불을 흔들어 끈다. "세상에는 끼니조차 잇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의식주의 걱정 없이 아이를 기르며 왜 못 삽니까? 남이 그 이상 어떻게 해주겠어요? 부모 형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거는 글허다마는, 차라리 묵고 살기가 어러바서 품팔이라도 할수 있음사? 그 편이 낫제. 날이믄 날마다 먼 산 보고 할일 없이 한숨 쉬는 그기이 어디 할 짓이가? 까막소거이..." "..." "봉춘이 그년은 지 목심을 지 손으로 끊더마는 기화는 산송장이 되고, 우찌 그리 복도 없는지 모리겄다. 석 아." "네." "내가 머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마는 뜬금없는 돈이 생기고 했이니 차라리 진주서 무신 장사라 도 시키믄 우떨꼬?" "타고난 재주도 고비를 못 넘겨서 성공 못했는데 장사라고 고비를 넘기겠습니까? 그저 헤매다가 죽자는 거지 딴 생각은 없을 겁니다. 본시부터 그랬지요. 아주머니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어디 돈 생각는 사람이오?" "하기사 그렇다. 하도 딱하이 해본 소리제. 그 불쌍한 것 섬기줄 마땅한 사람이라도 있었이믄 좋겄다마는, 저 러다가 돈 생긴 김에 또 아편을 맞일라 카믄 우짜꼬?" "맘대로 하라 하소!" "니가 성을 내는 것도 당연하다마는, 나도 부애가 나가 아까 언짢은 말을 했다마는 길을 두고 메를 못 간다고 우떡허든 길로 끌어주어야 안 하겄나." 조바위 속의 봉춘네 눈이 희미하다. 옛날부터 바느질 솜씨가 좋아서 항상 깔끔하게 차려 입었던 봉춘네, 여전 히 옷매무새는 깔끔했으나 늙음은 초라하고 어쩔 수 없이 궁상스럽다. "우짤래? 지 하는 대로 그만 내비리두까?" 풀었던 팔을 모으며 봉춘네는 다시 팔짱을 낀다. "아니믄 최부자댁에 기별을 하까?" "아주머니 먼저 가십시오. 좀 있다 가볼 테니까." "올래? 그라믄 기다리고 있이께." 봉춘네가 나간 뒤 석이는 석탄이 타고 있는 난로만 쳐다보며 움직일 줄 모른다. 창문은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 고 있었다. 기화의 일을 생각해야 할 것을 석이는 아내 생각을 한다. 날이 갈수록 방자해지는 아내와 손자 때 문에, 어미 없이 자라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어머니의 굽혀드는 모습을 생각한다. 눈앞에 없고 뚜렷한 사건도 없는 기화를 두고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아내의 행동이 실상 기화하고는 무관하며, 불평 불만에서 온 트집 인 것을 석이만 아는 일은 아니다. 시어머니도 아는 일이다. 그러니 우쩌겄노, 새끼들 생각하고 다둑거려야지, 그 말이 어머니의 입버릇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석이는 책을 집어들고 책장을 넘긴다. 활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허사였다. 서울 이범준한테서 온 편지를 꺼내어 펼쳐본다.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박아 쓴 글씨, 몇 가지 중요한 일이 숨겨져 있었지만 일견해서는 평범 한 근황을 전하는 글귀에 지나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관수와의 연락이 이범준을 통해 취해져왔었다. 석이는 그 편지를 한번 훑어보고 나서 난로 속에 집어던진다. '폭탄을 안고 도청에나 들어갈까 부다!' 진주서 도청을 부산으로 옮겼을 무렵 이전을 빌미 삼아 한방 터뜨려볼까 하는 얘기는 있었다. 얘기로 그치고 만 일이었지만. 석이는 일어서서 방안을 왔다갔다한다. '사로잡히면 안 된다. 냉정해야 하나. 기화에게는 평사리에 남는 길밖에는 없다.' 눈을 감으면 망막 속에 비치는 꽃무지개 같은색채를 띤 생각들이 머릿속에 계속하여 출몰한다. 한없는 나락으 로 몸이 떨어지는가하면 솟구쳐오른다. 떨어지고 싶은 마음과 솟구쳐오르고자 하는 마음이 심한 갈등을 일으 킨다. 기화의 출현은 먹구름을 몰고 올 것이라는 예감, 파괴 직전과도 같은 위태로운 느낌이 엄습해온다. 석이 는 방안을 걷다 말고 고개를 흔들어댄다. 가슴속에서는 일을 향한 것이든 기화를 향한 것이든 그 어느 것이든 간에 행동하고자 하는 정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가 하면, 지칠 대로 지쳐버린 패잔병처럼 자리에 주질러앉 고 싶은 피곤이 몰려오곤 한다. 대추씨같이 생긴 서의돈의 모습이 눈앞을 스치고 간다. 형무소에서 붉은 옷을 입고 복역하는 서의돈이 나약한 놈! 하고 침을 뱉는 모습이 떠오른다. '서의돈 선생... 구변 좋고 배짱 좋고 훌륭한 사내지.' 존경할 만한 값어치가 충분히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석이도 안다. 그러나 석이 마음속에는 반감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질투하고는 다른 감정이다. 기화를 깊이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연은 그쪽에서 잘랐다. 그것은 사내의 의지였는지 모른다. 기생의 처지에서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고, 발길을 끊었을 때고 그러려니 무 심하던 그때의 기화도 상기된다. 만일 서의돈이 조국의 독립이라는 큰 뜻을 품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시 마찬가지로 기화는 버림받았을 것이라고 석이는 생각한다. 명문의 후예들, 선비의 후예들, 그들에게 애정 이란 이른바 풍류에 불과한 것이었을 테니까. 또 기화는 기생이었으니까. 풍류와 기생의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 른다. 다른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의돈은 기화에게 미쳤다. 바로 그 미친 상태에서도 발길을 끊었던 서의 돈의 냉정함에 석이는 반감을 가졌던 것이다. 그것은 통틀어 양반들의 냉정함이요 기생이나 서민들에 대한 근 본적 모멸이기 때문에 서기는 서의돈에 대하여 순수한 존경을 바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서의돈에 대한 기 억을 되살린 것은 석이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기화를 생각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학교 교사와 기생, 일가의 가 장과 기생, 어떤 시기가 닥치면 자신도 결별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생각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대체 진실이란 무엇일까? 진실을 위해 진실을 희생해야 하는 것은 모순이다. 하물며 평정을 위해 진실을 희생하는 것은 모순 이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람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사람의 도리는 무엇이며... 약자를 희생시켜온 것이 대부분의 도리가 아니었더란 말인가? 사내답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약자를 보호하기 보다 약자 위에 군림하는 것을 두고 사내답다 해오지 않았던가?' 석이는 외투를 걸친다. 교사를 나섰을 때 권서방이 석탄 바케스를 들고 들어왔다. "선생님 어디 가십니까?" "잠시 다녀오겠소. 권서방은 직원실에 계시도록." "예. 다니오시이소." 봉춘네 집은 학교를 오가는 길켠의 조금만 함석집이었다. 이곳으로 이사온 지 일년 남짓, 지나가는 길에 전보 다 자주 봉춘네를 만나곤 했었다. "어디 가십니까?" 판자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봉춘네는 손가방을 들고 마당에 서있었다. 조바위 대신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막 예배 보로 갈라 카이 오네. 나는 저녁때나 올 줄 알았지." "네." "나선 길이니 내 퍼뜩 갔다올게. 기화도 일어나 있인께 들어가서 좋은 말로 달래봐라. 니 말은 좀 안 듣겄나?" "..." "기화가 예수만 믿었이믄 똑 좋것는데, 예수님을 의지하고 살수는 없이까? 보통 사람도 믿음 없이 살기가 어 러븐데, 아마도 내 신심이 약해서 하나님 앞에 못 데리고 가는갑다." 혼잣말같이 중얼거리며 봉춘네는 장독 울타리에 널어놓은 버선 몇 짝을 걷어 마루에 올려놓고 "그라믄 나 갔다오께." 석이는 외투 호주머니 속에 두 손을 찌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울타리가 얕아서 거리가 내다보였다. 방안에 서는 숨을 죽인 듯 아무 기척이 없다. 신돌 위에 구두를 벗고 석이는 마루로 올라섰다. 방문을 열었다. 기화는 방 한구석에 처박히듯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힐끗 석이를 쳐다본다. 계속 잠만 잔다고 하더니 기화의 얼굴에 는 다소 생기가 있어 보여다. 무릎을 모아서 세우고 그 위에 얹은 하얀 팔목이 가늘어 보였다. 남색 법단 저고 리에 자줏빛 치마를 입고 있었다. 농짝과 이불 한 채밖에 없는 방이 그래도 좁아 보였다. 벽에는 기화의 두루 마기가 걸려 있었다. 석이는 말없이 외투를 벗어 밀어붙이고 자리에 앉자마자 담배부터 꺼내 붙여문다. 서로 고집 세게 입을 열지 않는다. 기화는 전과 다른 석이 표정에 겁을 먹은 것처럼 "나 평사리 데려갈려고 왔어?" 석이는 대답 없이 휴지를 꺼내어 담뱃재를 떤다. "내버려두지 않고 모두들 왜 이리 성가시게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애야? 소새끼야?" 그래도 대답이 없자 불안해진 기화는 "난 그곳이 답답해서 못 산단 말이야. 미칠 것 같고 강물에 뛰어들고 싶고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 같단 말이야. 내가 무슨 몹쓸 죄를 졌다고 간 곳마다 사람을 놔서, 아이구 참!" 몸을 쩔쩔 흔든다. "어디 갈려고 나왔소?" "그, 그건 나도 모르겠어." 풀이 죽는다. "무슨 일을 할 요량으로 나온 거요?" 대답이 막혀버린다. 기화는 석이를 한번 쳐다보고 장지문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아무말 말고 평사리로 돌아가시오." 뱃속에서 밀어내는 굵은 목소리에 압도당하면서, 그러나 기화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담 어떻게 하려는 거요!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을 못하는 사람이 보따리는 왜 싸!" 소리를 버럭 지르는 바람에 기화는 움찔한다. "말 잘했어요! 애도 아니고 소새끼도 아닌 어른이면 얘를 돌봐야지 소도, 제 새끼를 돌보는 법이오!" "내가 머 에민가!" 중얼거리듯 낮은 목소리다. "참는 것도 한도가 있지, 환국이어머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이럴 수 있습니까?" "나, 나도 참았어,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너, 넌모른다." "아편 맞고 싶어서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싶어서요? 사내하고 함께 노닥거리고 싶어서요?" 기화의 얼굴빛이 변한다. 길 가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크게 벌린 눈이 석이를 응시한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것 같은 표정이다. "왜요? 나는 그런 말 못할 줄 알았소? 항상 당신 눈에는 물지게지든 선머슴아이로만 보이는 거요?" 정신없이 휴지에다 피우던 담배를 말아 쥔 석이는 손아귀 속에 그것을 으스러지게 누르며 이를 악물고 기화를 본다. 잡아먹을 듯 험악하다. 기화는 그런 무서운 석이 얼굴을 본 일이 없었다. 여간해서 감정을 나타내질 않 았던 석이가 "언제부터 그리 도도해졌니? 너 앞에서도 죽어지내라 그 말이야?"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기화는, 그러나 어세만은 강했다. "신세 좀 졌기로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어! 뭐 어쩌고!" "자존심 따위 옛날 옛적, 쓰레기통에 버렸을 텐데요?" "오냐! 쓰레기통에 버렸다. 난 쓸개도 없는 년이야! 하지만 이젠 너이들 도도한 사람들한테 폐 끼치지는 않을 테다." "늙은 난봉꾼의 그 알량한 유산 덕분이군요." 석이 눈이 이글이글 탄다. 절망에다 예기치 않았던 질투의 감정이 피를 끓게 한다. "흥! 그 돈으로 아편 맞고, 정석이도 사내니까 술 사다놓고 어디 한번 노닥거려보겠소? 이 년 동안 많이 참지 않았소?" "아니 이게." 기화는 푸들푸들 떤다. 석이는 더욱 잔인하게 "퇴물이라도 기생은 기생이오. 상하 가릴 게 뭐 있어?" 두 주먹을 쥐고 기화는 벌떡 일어섰다. "이, 이놈아! 가, 감히," 마주보며 일어선 석이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른다. 석이는 그 팔을 낚아채어 비틀며 갑자기 발광한 사람처 럼 기화의 뺨을 두 차례나 갈긴다. "병신! 천치!" 석이는 무릎을 꿇고 앉으며 흑 하고 흐느껴 운다. 그는 오랫동안 그런 자세로 울었다. 기화는 넋이 나간 듯 우 는 석이를 내려다본다. 맞은 쪽 뺨은 발갛게 물들었고 다른 한쪽의 뺨에는 소름이 돋아낫 듯 오소소해 보였다. 손수건을 꺼내서 코를 풀고 눈물을 닦은 석이는 잠긴 음성으로 말했다. "아마 내가 미쳤던가 부지요." "..." "아무리 둘러보아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데, 미쳤지요." 하다가 이번에는 울부짖듯 "자신의 불행은 자기 혼자 짊어지시오. 남까지 불행의 구렁창으로 끌고 가면 안 돼요!" 기화는 하늘 말엔 대꾸 없이 "왜 울었지?" 하고 묻는다. 석이 역시 그 말 대꾸는 않고 "나는 내가 파멸하는 것을 지금 원하고 있는 거요. 나까지 불행하게 하지는 말아요!" "나까지..." "기화 때문이오. 측은하고 불쌍하고, 세상에는 더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안 그렇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내가 나쁘다." "어디든 가서 잘살았으면 잊을 수도 있었는데." "석아!" "나하고 어디 멀리 만주나 시베리아로 달아난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무슨 소릴 하는 게야?" 서로 쳐다본다. 눈과 눈이 강하게 부딪는다. 바람 소리, 함석 지붕에 모래 구르는 소리. "산중에서 나하고 화전민이 되어 숨어산다면 기화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잠꼬대같은 석이 중얼거린다. "아마 내가 미쳤는가 부지요. 옛날 물지게 졌을 그 시절 전참봉이란 사내를 죽이고 싶었을 때처럼, 물지게로 면상을 쳐죽이고 싶었던 그때처럼," "어, 어지러워라." 기화가 픽 쓰러진다. "왜 이래요?" 순간적으로 기화를 안아 일으킨다. 얼굴이 백지장이다. "왜, 왜이래요!" "날 반듯이 누, 눕혀주어." 허둥지둥, 이불 사이에 끼워둔 베개를 뽑아 기화 머리 밑에 받치며 눕힌다. "저, 정신차려요!" "좀 있으면 나, 나을 거야." "내가 잘못했소." 백지장 같은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며 "나 평사리 갈게." "괜찮소?" "좀 누워 있으면... 손, 손을 꼭 눌러주었으면," "그, 그러지요." 기화의 손을 눌러잡는다. 잡는데 심장의 고동처럼 손이 뛴다. 이마에 땀이 솟는다. "좀 괜찮은 것 같다." 눈을 감은 채 기화가 말했다. "너무 심한 말을 했소. 용서해주시오." "그런 말 들어 싸지. 나 평사리에 갈께." "아무말 말고 편히 누워 있어요." 오랫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듣는 듯 침묵을 지킨다.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기화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다. 기화가 얘기를 시작했다. "내가 세상에 나서, 석이처럼 나한테 잘해준 사내는 없었다. 언제나 너를 대하면 마음이 편했어. 어딜 가도 어 느 누구랑 같이 있어도 어찌 그리 마음이 안 편했을까." "아무말 말아요." 아까 안아서 누일 때 그 가뿐하던 기화의 몸무게를 생각하며 다시 끓어오르는 어떤 격정을 누르며 석이 말했 다. "아니야. 우리가 언제 또 이렇게 만날 수... 없을 거야. 집 없는 강아지 같고 항상 떠날 차비를 하는 철새 같 고... 어디 비비고 기댈 것이라곤 없었어. 어쩌면 그렇게들 인색했던지."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인색했었다는 말을 했을 때 기화는 상현을 생각했다. 상현의 본가를, 그 집의 아 들 형제를 눈앞에 떠올리고 있었다. 개밥의 도토리 같았던 그때 자기 모습도 생각이 났다. 인생의 종말같이 피 폐한 자신을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러주는 사내가 있다니, 운삼이 남겨놓고 간 칠백 원을 무감동하게 받았던 기화였는데 석이의 눈물은 어찌하여 크나큰 경이였을까. "어릴 적에 엄마가, 무당 될라꼬 그러나, 기생 될라꼬 그러나, 하면서 쥐어박고 하더니, 동티는 조상에게서 난 모양이야. 우리 외할아버지라든가? 그 어른이 운봉의 광대, 명창이라 하든지..."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데 기화는 눈을 감은채 미소한다. 봉춘내가 돌아왔다. 손을 호호 불며 방으로 들어온다. "아니 와 이라노!" "어지럼증이 생겼는갑소." 대답하고 석이는 외투를 챙겨 든다. "그렇다믄 이부자리를 깔고 눕히야제." 봉춘네가 이불을 내리려 하는데 "이제 괜찮소, 이불은 무슨," 기화기 일어나 앉는다. "그럼 또 오지요." 석이는 허둥지둥 방문을 열고 나간다. 마당에서 외투를 입으며 삽짝을 나서려는데 봉춘네가 쫓아나온다. "그래 머라 카더노?" "뭐라 하기는요. 평사리로 돌아가겠다고 하기는," 외면을 하는데 봉춘네는 집요하게 석이 시선을 찾는다. "그 생가이 며칠이나 가겄노." "글쎄요." "따신 거라도 끓이서 좀 마시고 안 가고?" "생각 없습니다." "그런데 니 눈이, 대기 운 사람 겉다. 와 그렇제?" "울기는요. 가, 갑니다." 휭하니 나가버린다. "얄궂어라.? 기화는 백날 울어도 씨원찮을 기다마는 석이가 와 울었일꼬?" 마루에 놔두었던 꾸러미를 부엌으로 가져간다. 교회에서 나오는 길에 장을 보아온 것이다. 솥에 물을 부어놓고 장작불을 지핀 뒤 봉춘네가 방으로 들어왔을 때 기화는 벽을 향해 돌아누워 있었다. "자나?" "아니요." "지금도 어지럽나?" "많이 좋아진 것 같애요." "죽을 좀 쑤까?" "생각 없소." "안 묵어서 그렇다. 아침도 드는 둥 마는 둥, 묵고 정신부터 좀 차리야제." "걱정 마세요. 나 평사리로 갈께요." "누가 니보가 가라 카나? 내사 니하고 같이 있는 기이 좋다. 어디 후딱 달아나까 싶어 그기이 걱정이지." "이젠 어디 달아나지 않을 거예요." "니 맘을 우찌 믿노." 기화는 누운 채 돌아본다. "그보다도 석이가 운 것 겉은데 와 그랬제?" "예? 아 저기, 총 맞아서 죽은 아버지 얘길 해, 했더니," "얼버무리는데 얼굴이 빨개진다. "지나간 얘기는 멋 땀시 해가지고 그 사람도 영 맴이 안 편한갑더라. 그보다도 교회서 돌아오는 길에 석이 장 모를 만났네라." "석이 장모를요?" "응, 니가 와서 석이가 집에 와 있다는 얘기를 했지." "그런 말은 뭐할려고 했어요." "서로 잘 아는 사이 앙이가." "처가까지 아나요, 뭐." "하기는 말을 해놓고 보이 좀 뒷맛이 안 좋기는 하더라마는 석이댁네 심성은 우떤지 모르겄다만 그러씨, 장모 는 새를 딸는 사람이제. 없는 사람 하시하고, 하자마는 사위가 오늘 저렇기 된 거는 다 니덕 앙이가." "지나간 얘기 하면 뭐 해요. 오늘 내 꼴이 이 모양인데," "니가 우때서? 맘만 잡으믄 최부자댁에서도 니를 우천좌천하는데," "..." "죽물이라도 마시야지, 부석에 불 때놓고 왔는데 깨미음 쑤어올게." 11장 어머니의 노여움 직원실에 들어갔을 때 권서방이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아니요." "안색이 안 좋십니다." 권서방이 나간 뒤 석이는 책상 위에 엎드렸다. 후회한다기보다 부끄러웠다.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없 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오랜 멍울이 풀린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미진한데, 갈증을 느끼는데, 어떤 가능성도 찾아볼 수 없는데 멍울이 풀린 것 같은 기분은 감정을 발산한 데 연유하는것이리라.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들어오시오." 석이 책상에서 얼굴을 든다. "정선생 안녕하시오?" 농조로 말을 걸며 들어선 사람은 뜻밖에 처남 양필구다. 누이동생 을례의 모습이 비슷이 있긴 했으나 완강한 체구에 담백한 느낌을 주는 사내다. 석이는 당황한다. "오래간만이오." 양필구는 껄껄걸 웃는다. "오래간만이요? 음 그렇지, 우리가 처남 매부간이었지." "웬일이야?" "지나는 길에," 했으나 지나가는 길에 별 볼일 없이 들른 것 같지 않다. 그는 의자를 끌어당겨 난롯가에 앉아서 손을 싹싹 비 빈다. "우리 매씨께서는 요즘도 속 썩이나?" 석이는 대꾸 없이 난롯가로 옮겨 필구와 마주보고 앉는다. "혁명가의 아내 될 자격이 없단 말이야." 여전히 농담조로 말하는 필구를 힐끗 살핀 석이는 "거창하게 나오시는군." "친구를 생각해서 나는 별 찬성 안 한 결혼인데..." 이번에는 농담이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무슨 얘기 하는 거야?" "역시 딸자식은 모친이 좋아야," "생모 같으면 자네가 그런 말 했겠나?" "그야 물론이지. 자기 혈육에 대해선 객관성을 잃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니까." 석이는 필구의 의도를 가늠해보듯 깍지낀 손에 머리를 얹고 등을 뒤로 젖히며 고갯짓을 몇 번 해본다. 방금 있었던 기화와의 일을 필구가 알 턱이 없다. 필구의 용무는 무엇인가. "그래 매씨 때문에 날 찾아왔나?" "할일이 없어서? 그런 일로나 만났다 해두지." "집안은 편안한가?" "다소의 불평이야 왜 없겠나. 다 남자 하기 탓이지. 여자에게 아첨떠는 것도 좀 배워둘 필요가 있어. 더러 허 풍도 떨구," 석이는 쓰게 웃는다. "그것도 살아가는 방법이지. 자네는 융통성이란 게 없어서 그게 흠이다. 담배라도 좀 권해볼 수 없겠나" "잊었다." 또 쓴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내민다.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필구는 "진주란 참 묘한 곳이야." "묘하다면 다 그렇지." "아니 특히 그렇다는 얘기지. 극과극이 공존해 있는 본보기 같은 도시 아닐까?" "여러 가지 여건이 그렇게 만든 거야 역사적으로도... 모든 것이 수용될 수 있는 공간인데 또 그게 알맞게 크 니까 서울 같을 수도 없고, 유동이 안되니까 부산 같을 수도 없는 거 아니겠어?" "그건 그래. 사회주의의 온상 같은 형평사운동의 시발점이 진준가하면 부수적 기풍이 강하고, 기생 문화에 절 은 부패가 있는가 하면 서릿발 같은 열부의 절개를 숭상하고, 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근왕사상은 확고하고 상중하의 계급의식은 여전히 투철하지." "그건 이 나라의 축도 일 게야." "관수형님은 선견지명이 있었어. 확실히 인물이야."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야?" "옹달샘에서 빠져나가기 잘했다 그 얘기지." "도망쳤지 선견지명 때문인가 어디," "어쨌거나," "움직여볼려고 그러나?" "내 의사리기보다," "가겠어?" "자네 최범준이한테 연락 안 받았는가?" "..." "하여간 부산에 가봐야 알 일이지만," "언제 떠날 거야?" "자네는 어쩌려구?" "나도 가야지. 볼일이 좀 남아 있어서," "모레쯤 갈까 싶어." "나는 며칠 더 걸릴걸." "하기야 뭐 개인 행동 하는 게 좋지." "일직이란 건 어떻게 알았나." "집에 갔었다. 신변 정리 좀 해두는 게 좋을 게야." "자네는?" "별수 있어? 사태 불리하면 처가에서 먹여살리겠지." "사태 불리는 어느정도로 보나." "콩밥 일이 년 먹겠지, 왜? 자네답지 않게, 불안하나?" "지루해서 그런다." "그건 무슨 뜻인고?" "계속 뛰고 싶어서." "사정이 바뀌었군." 석이 필구를 쳐다본다. "중국놈같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자네 그런 사람 아니었나? 서둘기야 내가 서둘렀는데 어지간히 답 답해진 모양이구나. 그건 적신호야. 전에 자네가 나보고 한 말일세." "그랬던가?" "실은 일직인 줄 모르고 한잔 할려 했더니..."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끈다. "최부자댁 일은 어찌 됐나." "사는 거지." "원심대론가?" "그렇다는 얘기더군," "연학이는," "어젯밥에 내려왔어." "나형사가 연학이를 찾는다는 소문이든데," "최참판댁 일 땜에, 뜯어먹을려고 그랬겠지." "하기야 그 능구렝이가 나형사 속을 쏙 뽑아놓기야 했을 테지." 필구가 돌아간 뒤 석이는 창가로 가서 교정을 걸어나가는 필구의 윗모습을 바라본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내던지던 말만큼 그의 뒷모습이 확고한 것은 아니었다. '왜 기화한테 그렇게 폭행을 했을까. 미친 것처럼 왜 그리 덤볐을까.' 비로소 석이는 자신이 일을 앞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울기는 왜 울었을까? 천하에 못난 자식같이 울었다.' 그것도 비로소 깨달아진다. 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로 함께 달아나자고? 시베리아로 가자고?'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일이었다. 희망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른다. 일직을 끝낸 석이는 봉춘네 집앞을 지나가다가 잠시 머물렀다. 다시 걷기 시작한 그는 영팔이 집을 찾아간다. "춥다. 여기 구둘막에 앉거라." 판술네가 아랫목의 자리이불을 걷으며 권했다. "들으니 어매가 다리를 꼽쳤다믄?" "네." "늙은 사람은 잘 안 풀리는데 침이나 맞았나?" "맞았지요. 이제 그만한 모양이더군요." "거 며눌아이가 아이들을 안 돌본께 할마씨 혼자 지고 안고, 그러이 다리 심이 빠진 기지. 농사를 짓나 길쌈을 하나, 젊은 사람이 양끼 밥 짓고 무신 일이 그리 많아서," 영팔이 불만스럽게 내뱉았다. "날이 갈수록 말만 늘고, 석아, 그러러니 생각해라. 남자가 무신 잔소리가 그리 많소," "잔소리라니, 나 겉으믄 그런 며누리 안 본다. 석이가 장개는 잘못 갔다. "석이가 갈라 캤던데? 석이어매가 우기서 한 혼사 앙이요. 자석들바서 씨어마시가 감싸야지 우짜겄소." "지난분에도 내 한분 가서 봤다마는 씨어무니 말에 어디 글리 불칙하게 대할 수 있나. 근본이 돼 있이믄 그렇 기는 안 할 기다." "모두 제 불찰이지요." "또 보따리 싸거든 이분에는 내삐나도오라." "씨그럽소. 사람 하나 들고 나는 기이 그리 시운 일이건데? 자석이 장석이라 안 합디까? 자석들이 걸리 있인 께 서로 참아야지요. 아니 할 말로 늙은 사람은 갈 길이 바쁜께 어린것들 생각 먼저 해야제." 판술네는 걸레질을 하며 말했다. "사람이 경망하고 성질도 안 좋다 하믄 흥이댁네가 오히려 생각보다는 시아배 공경할 줄은 알더마. 그거 다 근본이 있인께 그런 기라." "와요. 석이댁네 집안이 어때서요? 오라비는 좀 똑똑하건데?" "밭이 다른께 그렇지. 임자, 저녁상이나 차리지." "야. 그란해도," "집안이 조용한데 모두 어디 갔습니까?" 석이 묻는다. "판술이 권속은 모두 처가에 갔구마. 내일이 장인 환갑 앙이가." "그라믄 나 저녁 채리울 긴께 앉았거라. 판술네가 나가자 석이 말했다. "한복이형님은 더딜 모양이지요?" "어디 한 발 두 발이건데? "사오 일 내로 와야 하는데," "그러씨..." "..." "무신 별일이야 있겄나. 아이가 원체 탄탄하고 직심이라서 걱정할 것 없다." "걱정하는 건 아니지마는..." "연학이한테 얘기 들었제?" "네." "얘기는 할 수 없는 일이고, 몸 성키 있다가 나올 날이나 기다리야지. 길상이가 돌아오믄 머가 좀 달라지기는 달라질 기다." "그거는 그렇고 아저씨," "와." "기화누님이 지금 진주에 와 있소." "머? 진주에 와 있다고?" "네." "그거 자꾸 그래사아서 큰일이네. 최참판댁에 와 있나?" "아니요. 학교 근방에 있는, 옛날의 수양어머니 집에 와 있는데 아저씨가 좀 수고해주십시오. 최참판댁엔 아무 말씀 마시고," "그런께 날더러 봉순이를 평사리까지 데리다주라 그 말가?" "네." "그거사 어렵잖은 일이다마는 자꾸 그래사아서 야단이네. 최참판댁에서도 좋아라 하겄나?" "그러면 내일... 내일 학교로 절 찾아오시겠습니까?" "그러지. 내가 그 집을 모른께." 저녁상을 함께 받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석이는 일어섰다. 겨울의 저녁은 여덟시였지만 한밤중처럼 캄캄 했다. 석이는 집으로 가는 도중 길거리 주점에 들러 혼자 앉아 술을 마신다. '한번 더 들여다보고 올 걸 그랬나?' 소주를 계속해 마신다. '어머니, 아이들...' 컵을 내민다. "한 잔 더 주시오." 주모가 기울이는 술병에서 찬물 같은 술이 콸콸 쏟아지는 것을 쳐다본다. 술은 유리컵의 전 가까운 곳에서 멎 었다. "손님, 독한 소주를 우짤라꼬 그리 많이 마십니까?" 주모가 말리듯 말했다. 석이는 컵을 눌러 잡으면서 "그것은 그쪽에서 걱정할 일이 아니오." "술이사 팔믄 좋지마는, 막걸리 마시듯이, 그래가지고는 속 버리요." "허허, 쓸데없는 걱정 말아요. 내 속 버리지 당신 속 버리는 건 아니니," 주점에서 떠드는 소리는 벌떼가 닝닝거리는 것같이 의식에서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곤 한다. 추운 날씨에 밀폐 된 주점 안은 목이 멜 만큼 담배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며 영원히 사라지는 것도 아 닌데 석이는 기화로부터 영원히 떠난다는 생각을 한다. 영원히 떠날 것이면 한번쯤, 의지나 목표나 일상의 테 두리를 벗어나서 자신을 위한 자유를 누릴 수는 없었더란 말인가, 석이는 자문해본다. 고작 한다는 게 나약한 여자의 뺨을 때렸고 감정을 짓이겨 난도질하듯, 그리고 부끄러운 고백으로 그쳐버린 일을 석이는 목구멍에서 타는 술기처럼 되씹어본다. 서의돈이나 이상헌도 결코 진실이 아니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화를 농락 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기화가 기생이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아니 받았거나 혹은 덜 받 았을 것이란 말은 이쪽에서 할 수 있다. '개새끼들! 양반이랍시고 떵떵거리는 놈들! 그중에서는 눈알이 똑바로 박혔던 개새끼들! 처음부터 풍류로 나갈 것이지 진실이니 애정이니 동정이니 뭐 말라비틀어진 거야?' 오입이 아닌 사람은 했으나 책임은 아니 져도 좋은 편안함, 한여자가 쓰레기로 전락되어가는 일과는 무관했던 그들에게 대체 진실이란 무엇일까, 그들의 아픔이란 대체 어떤 종류의 아픔일까, 면면하게 이어져 내려온 자부 심을 희생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석이는 연달아서 쫓 아오는 의문과 분노를 마시듯 술잔을 비우고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술값 여 있소!" "조심해 가시이소." 주모의 말을 뒤통수에 들으며 석이는 바람 부는 밤거리로 나섰다. "그들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배반할 것이며 모멸하고 지배할 것이다. 관수형 님!" 석이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며 거리를 헤매듯 걷는다. "형님, 기대할 것 한푼 없다구요! 형님 말씀은 맞습니다. 이론도 밝고 정세에도 밝고 전술 전략에도 능하겠지 요. 하지만 그들은 영웅주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단 말입니다. 빈자의 자부심과 e들의 자부심이 같습니까? 결코 같을 순 없단 말입니다! 그들은 사나이의 자부심, 강자로서의 자부심, 그거 아닙니까? 인간의 존엄성은 아니지요. 네, 아닙니다! 베풀려고 하지요. 베푼다고 생각하지요, 안 베풀 수도 있는 일이지요. 왜 베풉니까? 왜 같이 가지는 것을 그들은 모욕으로 느끼지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집 앞에까지 갔을 때 집안은 깜깜했다. 판자문을 와락와락 잡아 흔든다. "문 열어!" 대답이 없다. 빈집같이 아무 소리도 없다. "문 열어!"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다. "어머니! 문 열어주시오!" 이번에는 마누라 대신 어머니를 불렀으나 마찬가지다. "후우..." 석이는 판자문 앞에 퍼질러앉는다. 호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붙여본다. "달 참 조오타!" 동그마니 떠 있는 달을 보며 석이는 담배 연기를 뿜어낸다. "흠, 평사리에만 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진주에서 달이 있었던가?" 나오는 대로 무심히 지껄여놓고 석이는 왜 오늘 밤에 그것을 느꼈을까, 달을 느겼을까? 하고 생각한다. "어머니! 문 안 열어주시겠습니까!" 퍼질러앉은 채 소리를 지른다. "이놈아! 이 불효 막심한 놈아!" 언제 나왔던지 마당에서 들려온 굵은 음성이다. 석이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술 좀 마셨습니다.!" "내가 문을 안 열어줄라 캤는데 이웃이 부끄러바서 열어준다." 문이 열렸다. 하얀 무명 치마저고리의 꾸부정한 모습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달 참 좋지요, 어머니?" 석이 비틀거리며 들어간다. "니가 그래도 교사가?" "왜 이러십니까? 교사는 술 마시면 안 됩니까? 전에는 안 그러든 어른이 오늘밤따라 왜 이러시지요?" "이놈아! 누가 장난으로 말하는 줄 아나! 싱둥겅둥, 술주정으로 넴길라 카지 마라!" "어머니도 참, 사십을 바라보는 아들인데 이놈 저놈!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마루에 철썩 엉덩이를 박듯 앉는다. "어머니, 이 사람 어디 갔어요?" 석이네는 아들을 노려본다. "냉수 한 그릇 주십시오. 술이 좀 과했던 것 같소." 떠왔다. "다리는 아주 나으셨습니까?" "우째서 니 기분이 그리 좋노?" 석이네는 속삭이듯 묻는다. 강한 눈초리로 아들을 노려보면서. "제 기분이 좋아 보입니까? 어머니도 늙으셨소. 아들 기분을 몰라보시니," "이놈아! 이 환장한 놈아!" 냉수를 들이켠 석이는 사발을 내민다. "이사람 어디 가고 밤 늦게까지 시어머닐 부려먹지요?" 사발을 받아 마루 구석이 밀어놓은 석이네는 "너 내 방으로 좀 들어오너라." "오늘 밤은 몹시 취했습니다. 자야겠소. 내일 아침에," "들어오라믄 들어와!" "네, 네, 정신 없는데요?" 더듬더듬 큰방으로 들어간다. 석이네는 등잔에 불을 켰다. 이부자리도 깔아놓지 않은 말끔한 방안은 썰렁했다. 이가 빠져서 홀쑥한 석이네 얼굴은 더욱 홀쑥해 뵌다. "내 묻는 말에 속이지 말고 대답해라." "네." "너 지금 어디서 술 마시고 오는 길고오." "오면서 길거리 주점에서 마셨습니다." "이자는 에미보고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 "술은 술집에서 마셨다 치자. 그라믄 지금까지 어디 있었노?" "판술이 집에 있었지요. 대체 왜 그러십니까?" 술이 좀 깨는지 석이 정색을 하고 되묻는다. "그라믄 오늘 그곳말고 간 곳이 없었더나?" 순간 석이는 움찔하고 놀란다. 술기가 싹 가셔지는 것을 느낀다. "그건 왜 묻습니까?" "대답이나 해!" "..." "왜 대답을 못하나!"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군요." "대답을 못하는 거를 보이 사돈이 한 말일 틀림이 없구나." 석이는 얼굴이 일그러진다. "니 처는 아이들 데리고 친정에 가부렀다." 석이 자세를 바로하고 눈을 내리깐다. 한참 만에 "장모가 와서 뭐라 했습니까?" "봉춘어매 집에 봉순이를 불러다놓고 네가 댕긴다 하더라. 이젠 살림 다 살았다. 친근 겉은 내 새끼들, 석이 니가 그럴 줄은 장돌에 바람이 들믄 석돌만도 못하다 하더니 어이구 이 일을 우찌 하믄 좋을꼬." 운다. 석이는 한숨을 내쉰다. 갔었다고 얘기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모친에게도 변명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노라고 말하기가 싫었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만 사램이 그 짓을 해도 내 아들만은, 철석겉이 믿었는데 우리 석이만은. 우째 아무말이 없노! 할말이 있거 든 좀 해봐라." "..." "명색이 생도를 가르치는 교사 앙이가. 은혜는 은혜고 하필이믄 봉순이가하고. 내가 무신 얼굴을 들고 고향 사 람들은 대하겠노." "..." "기생에다가 아편쟁이, 넘이 부끄러버서 우찌 살꼬, 성환네가 뭐라카고 간 줄아나? 핵교에 말해가지고 니 모가 지 떼어놓고 안 살아도 안 살끼라 카더라." "나도 그 여자 데리고 살 마음 없소." 처음으로 석이입을 열었다. "니가 환장을해도, 어림없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못그란다! 불쌍한 내 새끼들 에미 없이 우는꼴 나 는 못 본다! 며누리거니 생각하고 내가 살았는 줄 아나? 내새끼들 어미거니 하고 살았나. 니는 와 그리 못하 노?" "일없습니다. 나도 참을 만큼 참았고 그 여자하고 헤어지는 일이 라면 없었던 일도 있었다 하겠소" "그, 그라믄 봉순이 데꼬 살겄다, 그, 그 말이가?" "왜 안 돕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혼자 살겠소. 자식한테 정이 있는 여자라면 그렇게는 안 할 겁니다." "석아 제발," 석이네는 어세를 누그러뜨렸다. "내가 빈다. 제발, 새는 날이 처가에 가거라. 그런 일 없다고 잡아떼고 달래서 데려오너라. 니가 에미 말 안들 은 일이 있었나? 내가 빈다. 마음 잡아라. 마가 끼어서, 봉순이 그년도 그렇지, 세상에 어디 사내가 없어서, 옛 날에는 안 그렇더마는 동생겉이 생각한 너를 그럴수가 있나." "어머니!" "와? 봉순이 욕을 한께 억울하나? 분하나? 눈이 멀었구나! 아주 눈이 멀었구나!" "어머니 눈이 멀었소. 어머니 눈에 봉순이가 그런 여자로 보입니까? 어머니는 잣기 때문에 눈이 멀었소. 성환 네하고 다를 것이 없단 말입니다. 나가서 눈 좀 붙여야겠어요." 멈칫하다가 석이네는 아들을 잡는다. "그렇다믄 내일 아침에 가거라. 처가에 가서 니 아내랑, 아이들을 데리고 오너라. 소원이다. 달래서 데리고 와 야 한다." "지가 빌고 들어온다면 구태여 이혼하자 하지는 않겠지만 제가 갈거라는 기대는 갖지 마십시오. 시어먼, 나면 을 업신여기는 여자가 자식이라고 대수로 여기겠어요? 할머니든 어머든 아이들에게는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 12장 귀부인들 이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소위 귀부인 두 여자가 병원 문을 밀고 들어섰다. 그 사치스런 차림새에 사람들 눈 이 일제히 쏠린다.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양교리댁 부인인 것을 알고 호기심에 찼던 시선을 내 리깔아 버린다. 경이를 표하는 동시 위축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두 여자는 그러니까 양소림의 어머니 홍씨와 그의 동생 홍성숙이었던 것이다. "아이구 마님게서." 나무 걸상에 기대어 앉아 있던 여자가 뒤늦게 메뚜기처럼 뛰어 일어난다. "어인 일로," 여러 번 빨아서 소매가 짧아진 양회색 누비저고리의 앞섶을 모으며 여자는 공손히 절을 한다. "자네는 웬일인가?" 홍씨는 점잖게 물었다. "예. 아이가 아파서 왔십니다. 이놈아, 마님께서 인사 안 디리나?" 얼굴이 부석부석 부은 여남은 살 된 소년이 겁에 질린 듯 일어서서 절은 한다. "부기가 있는 걸 보니, 거 좋잖은 징조구먼." 상대편 근심에다 칼질을 하듯 말해놓고 다시 "요즘엔 살기가 좀 나아졌느냐?" "우환만 없이믄은 사는 거사 우찌 살아도 안 살겄십니까." 여자 눈에 눈물이 도는데 "언니, 뭘 하는 거예요?" 눈살을 찌푸리는 성숙은 검정색 나무 무늬가 회려한 은회색 양단 두루마기를 입고 자줏빛 치마, 갈색 여우 목 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홍씨는 옥색 법단 두루마기를 입었고 남색치마 밑에 눈빛같이 버선발이 두드려졌으며, 홍옥을 끼운 금봉채는 나이에 비하여 야했다. 화장이 짙은 성숙보다 피부 빛깔은 언니 편이 맑았다. 이목구비 도 훨씬 더 다듬어진 느낌이었고, 그러나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메마른 종이꽃처럼, 홍씨의 미모 는아슬아슬했다. 그들은 기다릴 것도 없이 당연한 얼굴로 진찰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난로에는 석탄이 타고 있었다. 햇볕이 가득 들어찬 진찰실, 소독 냄새와 훈기가 얼굴을 스친다.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홍씨는 친숙한 음성으로 박효영 의사에게 인사를 했다. 성숙은 목에 감은 여우 목도리를 끌러 팔에 걸면서 박 의사의 안경 쓴 얼굴을 힐끗 쳐다본다. "오래간만이군요." 박의사는 안경은 밀어 올리며 말했다. 치료실 쪽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병원 출입이 잦아서는 안 되지요. 안그렇습니까, 선생님?" 홍씨는 입을 가리며 웃는다. 약지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가 찬란하게 빛났다. "그렇지요. 병원을 모르고 지내는, 그 이상의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영업이 안 되겠지만," 박의사는 홍씨를 바라보며 웃었다. "오늘 환자는 제가 아니구요," 말을 하다 말고 홍씨는 동생을 돌아본다. 성숙은 다소 겸연쩍은 듯 벽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서울서 온 제 동생인데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요." "네. 앉으시지요." 세련된 성숙의 모습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박의사는 환자가 앉는 자리를 눈으로 가리킨다. "선생님께서도 혹 아실는지, 홍성숙이라고 제 동생은 성악가예요." 진찰보다 소개가 더 중요한 것처럼 홍씨는 또다시 말했다. "그렇습니까? 나는 문외한이 돼나서," 성숙이 모욕감을 느낄 만큼 반응은 냉담했다. "성숙아, 너도 인사 드려라. 진주서는 제일가는 명의시다." "처음 뵙겠습니다." 쌀쌀하게 고개도 숙이지 않았다. 성숙은 두루마기를 벗은 뒤 진찰을 받기 위해 박의사와 마주 앉는다. 치료실 에서는 여전히 아이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악하는 사람이라 목이 상하는 일엔 무척 신경을 쓰는 것 같아요." "그러실 테지요." 가슴과 등을 누르며 진찰을 한 박의사는 청진기를 내리고 목 안을 들여다본다. "좀 부었군요." "괜찮겠어요?" 홍씨가 물었다. "대단치는 않습니다." 거만스런 표정으로 옷매무새를 고치는 성숙에게 혐오스런 일별을 던진 박의사는 "무리하지 말고 쉬십시오." 아내였었던 익란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부류의 여자, 예술이 뭔지도 모르면서 만 사람이 칭송해주기를 바라 는 여자, 야비한 허영을 고상하게 분식한 여자, 다음 순간 박의사는 자신의 편견을 뉘우치듯, "잠깐 기다리세요. 허군," 흰 천으로 칸막이가 된 곳에서 허정윤이 모습을 드러낸다. "안녕하십니까." 정윤이 홍씨를 향해 인사한다. "아니, 그 도안 통 볼 수 없더니?" 정윤에게 종이를 건네준 박의사가 "방학 동안 도와주고 있지요." "방학이라면?" "의전 학생입니다." "네? 그럼 의학 공부를 한단 그 말씀이에요?" "그렇지요. 이 년만 고생하면 의사가 되는 거지요." "잘됐네요.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약제실을 다녀온 정윤은 주사기에 주사약을 뽑아 넣고 "팔 걷으실까요?" 성숙이 곁으로 다가왔다. 빈한한 애숭이 같았던 지난날의 모습은 아니다. 삼사 년동안 심신이 성숙한 탓도 있 겠으나 자신과 긍지를 찾은 정윤은 옛날과 다름없이 조수복을 입었건만 그 걸음걸이부터 전과 같지 않았다. 피곤하고 고생스런 자취는 있었지만. 성숙은 박의사에게 진찰을 받을 때보다 오히려 냉정하지 못하다. 흰 가운 처럼 정결한 젊음이 풍겨오는 정윤에게 압도된 것처럼 보였다. "소림이도 집에 와 있겠군요." 박의사가 말을 걸었다. "와 있기는 한데... 요즘엔 늘 우울한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홍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럴 나이지요. 명년 봄엔 졸업이군요." "전문학교에라도 보내고 싶지만, 영감도 그럴 의향인데 소림이가 안 가겠다고 고집이지 뭡니까." "본인이 싫다면 무리하게 권하지 않는 게 좋지요. 명랑한 것 같지만 퍽 내성적이더군요." "점점 그러는 것 같아요. 작년까지만 해도 어린애였어요." 잠시 망설이다가 "선생님." "네." "언젠가 농담 삼아 한 얘기," "그 얘기는," 당황한다. "잊으셨든가요?" "아닙니다. 기억하고 있지요." "아무 말씀도 없으시길래, 그러려니 했지만," 홍씨 얼굴은 한층 더 어둡게 가라앉는다. "그 댁 사정이, 아시다시피," "네, 그건 알아요." "그 댁 아니라도 좋은 혼처가 얼마든지 있을 텐데 무슨 걱정입니까?" 했으나 음성은 겉도는 것 같았다. 박의사 자신도 그것을 느꼈던지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뭐, 기대하고 말씀 드렸던 건 아니에요." "언니, 안 가시겠어요?" 주사를 맞은 뒤 얘기 끝나기를 기다리던 성숙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소림이 혼담이 굴욕적인 것 같아서 불쾌 했고, 예술가에게 경의를 표할 줄 모르는 뭐 저 따위 시골 무식쟁이 의사, 하는 기분도 있었을 것이다. 치료실 의 아이 우는 소리는 멎었고, 새로운 환자도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를 내보낸 뒤 진찰실로 나온 간호 원 숙희는 대합실에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 생각을 하는지 초조한 눈으로 박의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제된 약봉지를 받아들고 병원 밖으로 나온 성숙은 "언니,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뭐가," "소림이 문제 말예요." "답답하니까," "우리 소림이한테 다소 약점이 있기로 저 따위 의사한테까지 매달릴 건 없지 않아요? 자존심 있는 짓은 아니 지요." "매달리긴?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니까 그랬던 거지. 우리집 영감하곤 각별한 사이야." "그래도 그렇지요. 될 일이라면 박의산가 뭐 그런 사람의 힘 안 빌려도," "조병모 남작의 자부 말을 하려는 거지?" "그래요. 그 선배언닌 최참판댁하고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건 네가 모르고 하는 얘기야." "모르다니요? 뭘 몰라요?" "그건 나중에 집에 가서 얘기하마." 성숙이 힐끗 쳐다본다. "하기는 뭐 욕심이지. 그 댁하고 혼인이 되리라 믿지도 않지만." "그 댁엔 약점이 없나요? 부친이 형무소에 있는 일은 그럴 수도 있지만, 신분을 따진다면 보통 약점이 아니지 요." "그러나 단자에 비하면... 옛날과 달라서 당자끼리의 조건이 더 중요하지. 성품이나 인물이나 그 댁 도령은 너 무 출중해." 자매는 행인들의 시선을 끌며 천천히 걸어간다. "역시 시골은 따분하군요." "그야," 하다말고 "넌 서울도 따분해서 못 견디는 성미 아니냐?" "그건 그래요. 불만이 많아 그런가 봐요." "쓸데없는 소리 말어. 너만큼 고루 갖춘 사람이 몇이나 되겠니?" "고루 갖추었다구요? 남편은 골샌님, 무골호인이구, 물쓰듯 할 만 한 재산이 있나요?" "넌 어릴 적부터 욕심이 많았어." "언니, 나 평범한 여자 아니에요. 주위 환경이나 남편도 내 예술을 살려주어야 하는 거예요, 물심 양면으로, 이 놈의 나라도 그래. 미개한 나라, 우매한 백성들, 예술이 꽃피기는 아득해요. 민도가 얕으니 예술을 이해할 턱이 없지요. 외국에선 성악가로 성공하면 그야말로 여왕이에요, 여와. 이거는 뭐, 수심가 부르는 기생쯤, 애당초 성 악 공부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아니면 남의 나라에서 태어나든가," "그래도 많이 개명한 거야. 내가 자랄 때문 해도 여자가 일본 유학 생각도 못했어. 성악이 다 뭐야? 광대 취급 이었을 거구." "언니까지 그러시기예요?" 성숙은 발끈한다. "내가 그렇다는게 아니구 한 시절 전의 얘기 아니냐." "하기야 뭐, 의사라는 것도 옛날엔 중인들이 해먹던 건데 요즘엔 언니까지 굽신굽신, 한데 그 박의산가, 그 사 람 콧대는 왜 그리 높지요? 삼정승, 오판서라도 난 집안인가요?" 드디어 뭔지 모르게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분통으로 터진다. 엉뚱한 데다 고리를 걸고서. "집안 사정이야 모르겠지만 의사치고 콧대 안 높은 사람 있든? 환자들한테 하느님이지. 자기 생명을 맡겨놨는 데 왜 안 그러겠냐." "흥! 시골 의사 따위, 콧대 높아봐야 별수 있겠수? 친정에 이마빼기 부딪기밖에 더 할려구." 보기 싫게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애두 참, 심사가 왜 그리 틀어졌지?" "까닭 없이 미워요." 홍씨는 곁눈질로 동생의 오똑한 콧날을 보며 "좀 무뚝뚝했기로, 그래도 너이 형부는 서울 일류 병원의 의사보다 박의사가 실력이 낫다 하셔. 아는 것도 많 고 존경할 만한 인물이라 하시던걸?" 약을 올리듯, 웃는다. 무안해진 성숙은 "존경할 만한 인물이라면 어째서 여자가 달아났지요?" "그 소린 뉘한테 들었냐?" "소림이 고모님이 그러데요." "그런 말을 너보고 해? 점잖은 처지에, 하긴 박의사 부인하고 친한 사이긴 했었지만," "그 얘기뿐인 줄 아세요?" "...?" "최참판댁," "최참판댁?" "네에, 최참판댁, 그 댁 부인 말예요." "그 부인은 또 왜?" "사모한대요." "누가?" "누구긴, 박의산가 그 사람이요. 그래서 재혼도 안 한다든가?" "고모가 그 얘길 하더란 말이냐?" "그렇다니까요." "고모도 여간 실없는 사람 아니구먼." 홍씨는 마땅찮아한다. "그만한 근거가 있으니까 한 말 아니겠어요? 여자한테 무관심한척, 그런 사내일수록 엉뚱한 생각을 한단 말예 요." "여자란 혼잣몸이 되면 언동을 삼가고, 그래도 구설수를 면하기 어려운데 소림이고모는 옛날 같지가 않아." "무슨 뜻이에요?" "너니까 하는 얘기다만 실은 박의사를 두고 우리 시누이랑 얘기가 있었거든." "혼담 말인가요?" "음. 피차 초혼은 아니지만 얘가 없고 어지간히 걸맞는다. 싶었는데," "어느 쪽에서 거절했나요." "술자리에서 너의 형부가 말을 꺼냈는데, 간 사람의 친구를 그럴수 있겠느냐고 박의사가 회피하더라는 게야." "어지간히 자신 있는 사내구먼." 다른 여자에게도 냉정했었다는 얘기가 성숙의 노여움을 다소는 풀게 한 것 같다. 더 이상 박의사에 대한화제 를 끌고 가려하지는 않았다. 어마어마하게 규모가 큰 집, 대문 안으로 들어간 자매는 하인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으며 안방으로 곧장 들 어간다. 널찍한 방에는 화류장, 괴목장이며 일본식 경대 등 세간이 가득 들어차 있다. 모두 값진 것이지만 어 쩐지 들쭉날쭉, 안정감이 없는 방이다. 자매는 다같이 두루마기를 벗고 보료 밑 따뜻한 방바닥에 손을 밀어넣 으며 앉았다. "너 괜찮냐?" "골치는 좀 아프지만," "점심 먹구 누워 있어." "누워 있기도 답답하구 서울 가야 할까 봐요." "쉬이 못 올 텐데 더 있단 가려므나. 허락받고 왔다며?" "글쎄요..." 순간 초조한 빛이 성숙의 얼굴을 스치고 간다. "마님." "문밖에서 부른다. "왜 그러느냐." "진지상 올릴까요?" "노마님께서 점심 진지 드셨느냐?" "예." "그럼 애기씨랑 함께 할 테니 들여오너라. 그리고 손 씻을 물 좀 다오." "예." 놋대야 두 개가 마루 끝에 놓여졌다. 손을 씻으면서 수건을 들고서 있는 계집아이한테 홍씨가 묻는다. "도련님들 아직 안 오셨느냐?" "오싰다가 점심 드시고 작은 댁에 가싰습니다. 점심상을 들여놓은 찬모는 "애기씬 점심 안드시것다 하십니다." "왜?" "그냥 안 드시것다고," "어쩔려고 그러는지 모르겠구나. 맨날 방안에만 틀어박혀서," "내가 가서 데려올께요." 성숙이 일어서서 나간다. "소림아?" 건넌방 다음의 방문 앞에서 성숙이 부른다. "소림아." "왜요, 이모?" "들어가도 되니?" "그러세요." 소림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얼굴빛이 창백했고 웃지도 않았다. "어머님 너가 와야 진지 드시겠대. 가시 한술이라도 뜨는 게 어떨까? 자아 가자꾸나." 살그머니 두 어깨를 잡는다. "이모, 병원에 갔다 왔어?" "응." "박외가 말이죠?" "그래." "우습다. 감기 들었는데 외과 병원엔 뭣하러 갔을까?" "이애가 난데없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이들은 무슨 병이든 그 병원에 가지 않았나?" "그러니까 우습다는 거예요." "시골이니까 할 수 없지. 자아 쓸데없는 소리 말구," "이모." "점심 먹자니까?" "나 그 병원만 생각하면 죽고 싶어." 성숙의 낯빛이 변한다. 어릴 때부터 서울 외가에서 자랐고 성숙이 보살펴주었던 소림은 홍씨보다 이모를 따랐 으며 성숙이도 조카를 무척 사랑했었다. '이애가 제 손등 때문에 이러는구나. 가엾은 것,' 물론 손등에 있는 괴물 때문에 소림은 죽고 싶은 생각을 한다. 그러나 박외과, 그러니까 손을 쓸 수 없는 외과 병원을 원망한 것은 아니다. 지난 여름 그 병원 앞에서 환국이를 만난 사건, 자신의 치부를 보고 겁에 질렸던 환국의 눈빛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 눈을 하고 날 보아요? 이제 그런 눈은 지긋지긋해! 어머니도 아버지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고모 삼 촌들!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나, 나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소림아, 소림아." "나 참아왔어요. 어릴 때도 참았어요. 동무들이 놀려도 참았어요. 제발 모르는 척하세요. 날 내버려두란 말예 요. 이모도 날 내버려두란 말예요. 날 사랑하거든," 소림은 울지 않았다. 펜촉으로 책상을 꼭꼭 찌르면서, 괴물이 없는 오른손은 왕후의 손같이 아름다웠다. "그래. 내버려둘게. 배고프면 나중에라도 밥 먹어, 응?" 성숙은 안방으로 건너오며 눈믈을 닦는다. 홍씨는 밥상을 마주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동생의 눈의 눈물을 본 홍씨는 "배고프면 먹겠지. 시장할 텐데 어서 먹으렴." 자매는 수저를 든다. 말없이 한동안 밥을 먹다가 "아까 집에 가서 얘기하겠다. 했는데 무슨 얘기예요?" 성숙이 물었다. "음, 뭘?" "서울의 조남작댁 자부 얘길 했을 때 말예요." "아 그 얘기..." 떨떠름해하는 어투다. "좋잖기보다, 하긴 좋은 얘긴 아니지. 너 정동의 왕고모님 아냐?" "왕고모님... 왜요?" "지난 가을에, 서울 갔을 때 어머님이 함께 가자 해서 찾아뵌 일이 있었다. 팔십 고령이라 언제 세상을 뜨실지 모르겠고," "그래서요?" "우리하고 상관이 없다면 없는 일인데," "답답하게, 얘기나 빨리 하세요." "이런저런 집안 얘기를 하다가 소림이 얘기가 나왔지 뭐냐? 그래서 자연히 혼처를 말하다보니까," "최참판댁 얘기가 나왔겠군요." "그랬단다." 홍씨의 얘기에 의할 것 같으면 팔십 고령인데도 부골스럽게 생긴 왕고모는 "본시는 하동 사람이라? 하동의 최참판댁? 오오라 생각이 나는구먼." "고모님께서 아시옵니까?" 친정어머니 유씨가 물었다. "나는 그 댁을 모른다. 허나 그 댁에 출가한 조씨네 집안하고 사돈간이라," "우리가요?" "촌수를 따지자면 팔촌이 넘을 게야. 나도 조씨네 집안으로 출가한 아이는 본 일이 없고 얘기를 들었을 뿐인 데 그 아주 몹쓸 계집이라더구나. 최시네 살림을 몽땅 집어삼켰다든가?" "예에?" "집안이 넓다 보니 별 우스운 게 다 있게 되는데, 게다가 소생으로 하나 있는 게 꼽추라나?" "저런?" 홍씨는 순간 가슴이 썰렁했다. 소림의 손등을 생각했던 것이다. "조시네 사람들이 원래 사지가 짧고 볼품이 없는 골격이라 그쪽 내림이겠으나," "촌수가 어찌 되는지요?" 아까 들었는데 다시 따지듯 묻는다. "너희들하고는 팔촌이 넘어. 팔촌이 넘는다니까." 그것을 명심하라는 듯 왕고모는 팔을 흔들며 말했다. "나한테 육촌 오라버니의 손녀니까. 지금은 망해서 아무것도 없다더라마는 문중에서도 제쳐놓은 사람들이라, 심성들이 나쁘고 사람들이 인색하기로 호가 났었지. 그중에서도 조씨네한테 출가한 고년이 독종이라더구먼. 파 락호가 된 서방놈하고 작당을 해서 최씨네 살림을 결단냈다는구나. 병신인아들놈은 어디다 버렸는지 알 길이 없고 남의 재물로 광산인가 해서 알거지가 된 서방놈은 자취를 감추고, 그 계집은 산귀신이 돼서 혼자 살고 있다든가? 악종이지. 홍씨 집안의 망신이야. 척이라도 멀었으니 망정이지. 그란 최참판댁에서 그 일을 알게 된 다면 좋을 건 없지 않겠느냐?" "참말로 금시초문이군요, 고모님." "상종 안 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너희들이 알 턱이 없다. 몰라도 되는 일이고. 그래 관옥 같다는 그 도령을 사 위로 삼으려거든 덮어두는 게야. 아암, 팔촌이 넘으면 친척이라 할 수 없지. 촌수를 찾고 따지지 않는다면 남 인 게야. 인물 좋고 똑똑하고, 너희들이 봐도 안그러냐?" "저는 홍씨 아니옵니다, 고모님." "아 그런가? 그렇구먼. 유씨였지." 왕고모는 웃었다. "그리고 소림이는 양씨옵니다. 홍씨는 외가지요." "허허허헛... 참 그렇구먼." 친정어머니와 왕고모의 대화를 들으며 홍씨는 그 저주스런 손등의 혹을 생각했던 것이다. "언니도 참, 홍씨가 세상에 한둘이에요? 몰라도 될 일 가지고 공연히 신경 쓰는 거예요." "차라리 그런 일로나 신경 쓰게 될 형편이라면 얼마나 좋겠니." 상을 물린 뒤 "너는 가서 좀 쉬려므나." "언니?" "왜." "소림이한테 그럼 험이 없었다면 이 집에선 그 댁하고 혼사 안 할거예요." "그건 또 왜?" "그 도령 부친이 하인 신분 아니에요?" "글쎄다." "그렇지만 이젠 신분 제도가 타파된 지 오래예요. 조병모 남작, 그 쟁쟁한 권문세가에서도 중인 집안의 딸을 데려가는 걸 보면, 후취이긴 하지만 세상이 아주 달리진 거예요." "무슨 말을 할려고 그러니?" "소림이가 큰일이유. 전과는 달라요. 전문학교 보내는 것은 권하지도 마세요. 아까 난 눈물이 나서 혼났어요." "..." "소학교에서 여학교까지 소림이가 얼마나 참고 견디며 다녔는가 그걸 깨달았어요." 홍시는 픽 웃는다. "그렇담 어떡허면 좋겠니?" "언닌 화내실지 모르지만요, 손쉬운 곳에 신랑감이 있을 성싶어요. 아까부터 내내 그 생각을 했는데, 인물도 그만하면 잘생겼고 체격이 훤칠하고, 병원의 그 청년 말예요." "무슨 소릴 하는 게야?" 홍씨는 펄쩍 뛴다. "아무리 내 딸이 병신이기로 병원의 조수 따위! 그런 소리 말어." "조수가 아니잖아요. 의전에 다닌다는 말을 똑똑히 듣잖았어?" "그래도 조수는 조수야. 박외과 병원의 조수였단 말이야." "장차는 언니가 굽신굽신하는 박의사같이 될 텐데요?" "뭐?" "아니면 상것이나 백정네 집안이라 싫은가요? 그렇담 얘기는 달라지지만." "집안이야 뭐 선비 집안이라든가? 하지만 부모 형제도 없고 혈혈단신," "그건 오히려 잘됐네요." "잘되기는 뭐가 잘돼! 남의 이목이 있지. 고공살이나 다름없는 병원의 조수 따위를 사위 삼는다면 남들이 뭐라 겠니? 그건 안 돼." "하인의 아들을 사위 못 삼아 노심초사하면서." "그래도 최참판댁 핏줄이야." "그 청년은 선비집 자손이라면서요?" "그, 그건 그래도 형편이 달라." "소림이 처지를 생각하셔야지요. 저러다가 큰일날 거예요. 이러고저러고 하다 혼기 놓치면 처녀로 늙는 꼴 보 시겠어요?" "그, 그거야, 그렇지만 너 형부가 들었다 봐라. 기둥뿌리에 도끼질 하실 꺼야." "언니, 세상 물정은 언니보다 내가 좀 알아요. 우리 소림이 손만 안 그랬으면 조선의 젤가는 사윈들 못 데려오 겠어요?" "그러니 가슴에 멍이 들지. 얼굴이나 못생겼더라면 버린 자식으로 치부하고 아무에게나 주어버리겠다만, 억울 하고 분하고 미련은 버릴 수가 없구나." 홍씨는 제 가슴을 치면서 눈물을 흘린다. "삼신께선 무슨 억하심정이든고. 어디 한 곳 안 예쁜 데가 없는 내 딸을, 옛날 같으면 왕비감인데, 그것이 팔 뚝에만 났어도," 흐느껴 운다. "언니, 그만두어요. 나도 언니만큼 소림이 사랑해요. 사랑하니까 그애를 위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궁리해보 는 거 아니겠어요? 잘 생각해보아요. 부모나 집안의 체통 같은 것보다 소림이 장래를 먼저 생각해야 해요. 물 론 최참판댁 도령하고 혼인이 된다면 그 이상 좋을 것이 없겠지만요." "그건 우리들 희망이지 안 될 게야." 홍씨는 고개를 흔들었다. "너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지만, 세상이 달라지는 바람에 돈푼 모아서 양조장이다 정미소다 차려놓고 거들먹거 리는 상것이 글쎄, 우리 소림이를 두고 청혼하려 했다는 게야. 생각만해도 치가 떨려, 그 분한 생각을 하면. 성 숙아 글쎄 청혼을 하려다가 소림이 손등 때문에 그, 그만두었다잖겠어? 근본 없는 상것들이 말이야." 홍씨는 이성을 잃고 발작처럼 소리를 내어 운다. "그만 그쳐요. 소림이 듣겠수." "그, 그런 형편인데, 안 될 거야. 최참판댁에서 우리 소림일 데려가겠니? 아, 안 될 거야." "그러니까 진정하고 내 말 들어요. 병원의 그 청년 잡는 거예요. 보나마나 고학이거나 어렵게 공부할 거예요. 지금 잡아야 하는 거예요. 학비라도 대 주고 졸업 후 병원 하나 차려주면 소림이도 열등감 같은 것 안 가지고 살 수 있지 않겠어요? 냉정히 생각하세요. 처음엔 나도 어떨까, 그러나 생각할수록 안성맞춤이에요." 성숙은 열심히 설득하는 것이었다. 이날 밤, 너 형부가 들었다 봐라, 기둥뿌리에 도끼질 할 거라 했었는데 뜻밖에 남편 양재문의 입에서 그 얘기 가 먼저 나온 것이다. 얘기의 발단은 "처제 데리고 병원에 갔었소?" 양재문이 물었다. "갔었어요. 목이 좀 부었단 하더군요." "허정윤인가 하는 그 청년 와 있지요?" 홍씨는 찔끔한다. 낮에 성숙이랑 한 얘기를 엿들었을 리는 없는데 싶었으나 "왜요? 보기는 보았습니다." "어떻습디까?" "네?" "훤칠해 뵈지 않든가요?" 양재문은 보던 신문을 놓고 홍씨를 쳐다보았다. "그건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오래 전부터 생각한 일이오만, 소림이도 봄엔 졸업이고... 그 아이를 사위 삼으면 어떻겠소?" "네? 무슨 그런 말씀을," "당신은 반대다 그 말이요?" "병원의 조수 하던 사람을," "그것은 지난 일이지요. 지금은 의학 공부하는 어엿한 학생이오. 장차 의사가 될 사람이면 우리 소림이한테 부 족함이 없는 신랑감 아니겠소?" "영감께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줄 정말 몰랐습니다." "과년한 딸 가진 사람이 어찌 그 생각을 한하겠소." "실은 낮에 소림이 이모가 그런 말을 하길래 제가 화를 냈습니다." "차제가 그런 말을 하든가요?" "네." "이제부터 처제를 달리 봐야겠는걸?" "우리 소림이한테 결점만 없었다면 성숙이가 그런 말 했겠습니까?" "나는 소림이 손이 안 그렇더라도 의사 사위 보았을 게요. 우리 양주가 늙어서 병들어도 걱정 없을 것 아니겠 소?" 양재문은 농조로 말했다. 그 얼굴 표정으로 보아 내심으로 이미 작정한 것 같았다. "그럼 박의사한테 영감이 말씀하셨습니까?" "당신 허락 없이 내 마음대로 했을 것 같소?" "제가 못하겠다면 아니 하시겠습니까?" "못한다 할 이유가 없지 않소? 근본 없는 집 자손도 아니요, 빈한하고 부모 형제가 없는 것이 흠이라면 흠인 데 의사치고 못사는 사람 없고 부모 형제가 없어서 다소 쓸쓸하겠으나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지 않소? 대신 처가속이 번창하니 외로울 것도 없고," 양재문은 시종 마누라를 놀려주듯 농치듯 말하였으나 그것은 딸아이에 대한 아픈 마음을 위장한 것이었다. 엄 격하면서도 자상한 아버지, 다정스러운 남편 양재문. "이제 잡시다. 불 끄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잘 생각해보시오. 당신도 신교육을 받을 신여성 시절이 있었으니까 체통보다 실속을 취하게 될 게요, 양반이라 뽐내다간 양씨 집안도 양조장 이가한테 뒤지고 말 테니까." 이순철네 집에서 청혼하려다가 소림의 손등이 거론되어 결국 보류되고 말았다는 항간의 소문은 양재문한테도 상당한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13장 왜 혼자 사는가 석이네가 손녀 남희를 업고 영팔이를 찾아왔다. "우짠 일이요?" 영팔이 방문을 열고 나오며 물었다. 석이네는 울었는지 눈자위가 빨갰다. "판술이는 아즉 안 왔겄지요." "와 그랍니까? 치분데 들어오소." "들어갈 새도 없겄소. 아아가 아파서 벵원에 가는 길이구마요. 늙은 기이 혼자 갈라 카이," 영팔이는 낡은 아비 외투를 뒤집어씌운 아이 옆으로 가서 들여다보며 "꽁꽁 앓네. 벵원보다 한약국에 가입시다." "사타리에 종기가 났는데 언간찮게 부었소. 그런 거사 벵원에 가는 기이 안 좋겄소?" "그러씨, 그라믄 벵원에 가보까요?" 판술이댁네가 부엌에서 나온다. "오싰습니까." "운냐, 시어무니는 어디 갔나?" "장에 가싰습니다. 아아가 아픕니까?" "응. 그만 개똥겉이 아무렇게나 컸이믄 좋겄는데," 방으로 들어간 영팔이는 두루마기를 걸치고 나온다. "가입시다." 집 밖으로 나온 영팔이 묻는다. "성환네는 왔소?" "오기는요. 인벵이 듭니다." "그라믄? 아아들만 보냈다 그 말이요?" "지도 부애가 난께 그랬겄지마는, 어린기이 비쭉거리고 댕기서 성을 냈는가배요." "허허어 참, 하늘이 무섭소. 시어무니가 아이 업고 벵원 간다 캐도 따라나서지 않더라 그 말이구마는," "..." "잔말 할 것 없이 이차에 성환이놈도 데리오소. 새끼 간수도 못하는 에미 있이믄 머하겄 소." "악정에 그랬겄지요. 석이 그놈도 직일 놈이요. 에미가 그렇게 울믄서 사정을 했는데, 달래 서 데리다놓고 갔이믄 이런 일도 없었을긴데 성환네도 남정네가 안 온께 어디 두고보자 하 고 빼물었겄지요." "듣기 섭섭할지 모리지마는 석이어매가 아무리 며느리를 감싸사아도 내 사람 되기는 어러 불 기요." 영팔이는 길가에 코를 휭 하고 푼다. "며느리 성정도 좋다 할 수 없지마는 성환애비도 잘한 거 없고." "나도 그 얘기는 들었소. 봉순이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애맨 소리하는 것은 미친 지랄이요. 이분만 해도 만나자고 해서 만낸 것도 아니겄고," "소견이 좁은 제집을 갈바서, 아, 선이 이렇고 후는 이렇고 달래서 데리오믄 지가 떨어지겄 소? 여자란 나무랄 때는 나무라더라도 달래는 일도 있이야지. 사내자식 소가지가 그렇기 손바닥만해서야 무신 큰일을 하겄소. 아 그래놓고 떠난 지 맴인들 편할 기든가?" 석이네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는다. "버러장머릴 고치놓을라꼬 그랬일 기요." "사람이란 어디 오기대로 다 하고 삽네까? 반평생은 자식을 위해 사는 건데, 죽어 하는 이 별이사 할 수 없지마는 살아서 이별을 관대로 하는 기요? 나는 에미 없는 자식 못 보요. 헤미가 천만 분 코를 닦아주어도 에미 실안개를 마시야 아아는 잘 크니께요. 며누리가 이 삐서 시에미가 세 분 네 분 찾아간 줄 압니까?" "..." "성이 나서 바우를 차믄 지 발만 깨지더라고 석이가 일처리를 잘 못하는 기라요. 벌써 핵 교에까지 소문이 들어가서 말성이 난 모앵이고," "소문이야 성환네 어미 입에서 났겄지요. 그러이 남자 얼굴이 똥칠하는 거 아니겄소. 망치 는 기지요. 아아, 임이네를 몰라서 그러요? 제집 하나 잘못 만내믄 사내는 평생 헤어나지 못한께." 지나칠 정도로 영팔이는 부정하고 든다. 박외과를 찾아들었을 때 아마도 남희는 마지막 환자인 것 같았다. 해는 저물어 있었다. "째야겠는데요?" 박의사가 말했다. 석이네 얼굴이 쌍그래진다. "째믄은," "몇 살이지요?" "세 살입니다." "아버지 어머닌 어디 가고 할머니가 데려왔어요?" "저기, 다 일 보로 가고 없어서... 어린기이 괜찮겄십니까." 겁을 먹은 아이는 울어댄다. 종기는 주먹만큼 부어 있었다.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두다니," 박의사는 혀를 찼다. "사타리가 돼놔서 몰랐던갑십니다." 숙희 간호원이 아이를 안고 수술실로 들어간다. 아이는 할머니를 부르며 울부짖는다. "할머니는 나가서 기다리시오." 정윤이 석이네 등을 밀었다. 대합실로 나온 석이네는 안절부절이다. 영팔이는 나무 걸상에 앉아서 눈만 꿈벅이 고 있었다. 수술실은 멀어서 아이의 울음 소리가 크게 들려오지는 않았다. "죽일 년!" 비로소 석이네 입에서 며느리에 대한 욕이 나왔다. "모질고 독한 년!" 치맛자락을 걷고 눈물을 닦는다. 자신이 받은 가지가지 수모, 오늘만 해도 "복에 과한 계집, 복에 과한 며누리를 보아서 그러는 거요? 그 주제에, 하늘로 머리 둔 사 람은 다 웃일 기요, 기생 외입을 저저이 다하는 줄 아요? 선생질 하는 것은 고사하고, 미꾸 라지 용 된 거는 와 생각 못하는고? 나도 이자는 딸 살리고 저븐 생각 별로 안 하거마는. 염치 없고 주리팅이 없다! 물지게나 지고 빨래품이나들믄서 살 것들이 그것도 복이라고 욜 랑거리서 털어부릴라꼬, 흥! 살아봐야 별수없을 기구마는," "사돈, 아무리 버릴 말이라도 무신 그런 말심을 하십니까?" "아아니 그라믄 이녁들이 잘했다 그 말이요?" 석이 장모는 삿대질을 하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이년아! 한 나이나 젊어서 막설해라! 그놈의 집구석, 그 피를 받았는데 자식새낀들 별수 있겄나? 다 데리다주고 그까짓 팔자 고치고 살믄 될 거 앙이가. 겨우 입에 풀치하는 놈이 기생 외입이믄, 개기 묵고 이 쑤실 형편 되믄 참말로 언간찮을 기다." "허허어 참, 이편 말도 좀 들어보고 갈라지든지 살든지 해야 안하겄소? 일이 그렇게 된 기 이 앙이고," "듣기 싫소! 제놈이 떳떳하다믄 와 지 발로 걸어와서 기집 자식을 못 데리고 가는 거요?" "지도 청백한께 오기가 나서," "오기는 무신 얼어죽을 오긴고? 다 일없소. 기생년, 아편쟁이 들앉히고 살라 카소! 옛말에 도 딸은 치혼사 하고 며누리는 내리혼사 한답니다. 애당초 안 할 혼사 한 기라요." "그, 그라믄 자식들은 우찌 되겄소?" "정가네 자식 우리가 무슨 상관이요?" 철이 난 손자 성환이는 친할머니 외할머니 시비 속에서 "그만 하라 카이, 그만 하라 카이!" 하며 울부짖었다. "할머니 들어오세요." 숙희가 내다보며 손짓을 했다. "아이고 우짜꼬." 석이네는 허둥지둥 들어간다. 허벅지에서 궁둥이 쪽으로 붕대를 감은 아이를 정윤이 안아왔다. 할머니한테 안 간 아이는 부들부들 떨었다. "아가 내 새끼야." 옷을 챙겨 입히며 석이네는 연신 눈물을 흘린다. "고름이 엄청나게 나왔어요." 숙희가 소곤거리듯 말했다. "그, 그라믄 이제는 괜찮겄십니까?" "매일 치료 받으러 다녀야 해요." 옷을 입은 후에도 아이는 개구리처럼 할머니 목에 매달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할머니," 박의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렀다. "예, 선상님." "부모가 누군지 모르겠소만 낳아놓기만 하면 그만인가요? 죽으라고 내버려둔 게지, 온 세 상에," "볼낯이 없십니다." "매일 꼬박꼬박 오야 해요. 치료비 무서워서 중도에서 그만두면 안 돼요. 아시겠소?" "예. 고, 고맙십니다." 석이네가 나간 뒤, 병원의 환자는 끊어졌다. "속병이면 몰라서 그렇다 하지만 어린애가 그 정도로 되기까지 몹시 보챘을 텐데, 나쁜 것 들, 어린애를 개 돼지 기르듯 하니 한심스럽다." 박의사는 담배를 붙여물며 분개한다. 어른들 중에는 썩은 다리를 톱으로 잘라내는 환자도 있었다. 별의별 험한 환자들이 찾아온다. 그런데 묘한 것은 어린애에 대해서만은 언제나 박의사는 감정적이었다. 난로 앞에서 정윤 이 박의사를 힐끗 쳐다본다. "무식한 부모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요." "자네 아는 사람인가?" "안면은 있습니다. 시은학교 교사 어머니군요." "그 할머니가?" "네." "나쁜 놈의 자식, 그러고도 남의 자식을 가르치나?" "착실한 사람인데, 뭐가 잘못됐나 부지요." 밖에 나갔던 숙희가 들어온다. "양교리댁에서 심부름꾼이 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심부름하는 소년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편지를 받아든 박의사는 "회답 받아오라 하시더냐?" "아닙니다. 안녕히 기시이소." 절을 하고 나간다. 담배를 눌러끄고 편지를 집어들다 말고 박의사는 "저녁들 하지 그래." 정윤과 숙희를 보며 말했다. "아직 이른데요." "이르면 들어가 쉬어." 신경질적으로 말한다. 혼자 있고 싶은 것이다. 물이 빠지듯 환자가 다 돌아가고 병원이 조용해지면 정윤과 숙 희도 다 걸리적거리는 존재로 변한다. 박의사는 그런 습성을 아는 정윤과 숙희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나간 다. 수부를 보는 소녀만 남겨놓고 정윤이 없을 때는 조수를 겸하는 약제실의 강남이도 함께 안으로 들어가는 기색이다. 속절없이 노처녀로 되어가는 숙희의 을씨년스런 뒷모습이 박의사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짜증스럽게 되살려진다. 인고의 아름다움보다 초라하고 불안스런 뒷모습이요 쌀쌀하면서 묘하게 죄인 같은 느김의 정윤이 뒷모습, 박의사는 다시 담배를 붙여문다. '피곤한 때문일까? 나이들어가기 때문일까?' 정신 없이 바쁘게 돌아갈 때는 환자의 오물과 환부의 계층 따라, 개인 따라 풍겨오는 갖가지 냄새, 그리고 신 음, 고함과 같이 남의 감정, 남의 동작도 그러한 일부로서 상황에다 밀어붙이지만 일단 그런 일이 끝나고 정지 상태로 들어서면 감각은 결벽증으로 치닫고, 모든 상황은 잔기침처럼 신경을 괴롭히고 사물은 확대되고 세분 되어 감정의 짙은 그늘이 실리게 되는 것이다. 정윤과 숙희, 그들의 미묘한 감정의 갈등이 비위에 거슬리고 뭐 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은 타인의 일인데도 박의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며, 숙희에 대하여는 정윤과 자 신이 공범자만 같은 착각에 빠지는가 하면 숙희가 채권자처럼 미워지기도 했다. 정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 다. 그의 젊음과 야망을 위해 한없이 동정이 가는가 하면 한편 약아빠진 쥐새끼 같은 놈! 모멸감을 느끼는 것 이다. '양지바른 곳의 겨울 노인같이 궁상도 이만저만이 아니군.' 한없는 생각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보고, 결국 그것이 박의사의 휴식의 방법인가. 또 한 가지 사위가 조용 하게 가라앉으면 자신은 왜 혼자 사는가, 반드시 그 일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다. 왜 혼자 사는가. 봉투를 찢는다. 박선생, 오늘 우리 한잔 합시다. 누이 얘기는 안 할 터이니 안심하고 나오십시오. 매월에 일곱시쯤 나가 있겠 소. 양재문 편지를 구겨 휴지통에 집어던진다. '이 양반이 되게 심심한 모양이야.' 나이는 양재문이 두세 살 위였다. 선후배의 그런 특수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신학문을 한 그들 또래의 인물이 드문 지방이어서 의사와 환자라는 처지를 떠나 이들은 친숙하게 지내온 터였다. 양재문은 졸업하지 못했으나 동경의 Y대학에 적을 둔 일이 있었다. 막대한 토지의 지주로서 한인인 양재문과 날이면 날마다 환자에게 시달 리는 박의사, 서로의 사정은 달랐으나, 바쁜 척 해보아도 늘 무료한 양재문은 무료했기 때문에, 박의사는 풍차 같이 도는 일상으로부터 숨구멍을 트기 위해서 함께 술을 마시는 일이 흔히 있었다. 박의사는 회중시계를 꺼 내어 본다. 다섯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다. 시계를 집어넣고 창문 쪽을 쳐다본다. '좀 있으면 어둑어둑해지겠지. 그러나 일곱시까지 뭘 하구 기다리지? 그 동안 환자라도 한 사람 왔으면 좋겠다. 바빠도 걱정, 한가해도 걱정,' 자리에서 일어선 박의사는 뚜벅뚜벅 치료실 쪽으로 걸어간다. 수술실에서 아이의 울음이 울리고 있는 것 같다. 유리창 문을 연다. 깨끗하게 소독하여 놓여진 수술 기구, 그중에서 메스를 꺼내어 우두커니 내려다본다. 병 때 문에, 혹은 외상 때문에 살점을 가르고 도려냈던 잔인한 연장, 빛나는 작은 이 연장이 자신을 위해 쓰여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창가로 걸어온 박의사는 어둠이 오고 있는 거리를 내다본다. 날씨가 풀리는 대로 신축하게 될 병원을 눈앞에 그려본다. 생각 같아서는 중심가에서 먼 곳에 넓은 대지 위에다 저택 같은 병원을 짓고 싶었다. 잔디밭과 수목이 있는 병원을 짓고 싶었다. 그러나 박의사는 그 꿈에 연연하지는 않았다. 사무실 같이 네모 반듯반듯하고 쓸데없는 공간이 없고 입원실을 늘린 병원 건물의 설계는 이미 끝나 있는 것이다. '아내가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 내가 잘못하였나? 양씨네 그 청상을 데려올 걸 그랬었 나? 전문학교 출신이 아니니까 유식하지 않을 거구, 여학교는 나왔으니까 무식하지 않을 테고, 흠, 유식하지도 무식하지도 않은 여자라면 나는 보모로 생각하는 걸까? 그래 박효영 한텐 보모가 필요해. 그는 그렇고 삼월이 되면 더욱더 바빠진다. 한참 잊어버리고 살겠구 나.'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놓고 뭘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인지 박의사 자신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또한 우스꽝스런 일이기도 했다. 청진기를 들고 진찰실 밖으로 나간다. 텅 빈 대합실 나무 걸상에 앉아서 숙희는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정윤과 강남이 안에서 쉬고 있는 눈치다. 숙희는 모습은 처량했다. "날 따라와요." "네." 입원실의 환자를 살펴본 뒤 박의사는 시계를 들여다본다. 시간은 여섯시를 훨신 넘어서고 있었다. 안방으로 들 어간 박의사는 와이셔츠를 갈아입고 감색과 녹색, 갈색이 섞인 화려한 넥타이를 매면서 문득 생각한다. 문학이 다, 음악이다, 예술이다, 그런 말을 하지 않는 유식한 여자는 아마도 최서희 그 사람일 거라고. 거울에 비친 얼 굴은 창백하였다. 굵은 테 안경이 희 번득인다. "선생님, 진지상 올릴까요?" 식모 아주머니가 뒤에서 기척을 내며 물었다. "오늘은 밖에 나가서 하겠소." "예." 말소리를 죽이며 물러간다. 거리는 우중충했다. 박모를 헤치듯 박의사는 걷는다. 상가의 가등 빛이 길바닥에 드러누워 말할 수 없는 외로 움을 몰고 온다. 상점 안에서 어른거리는 사람의 모습들은 멀고 먼 피안의 환영같았으며, 알룩달룩한 잡화상 상품들은 종이꽃처럼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의사로서는 한창 일할 나이, 소쇄한 양복 차림의 신사 박의사는 고아같이 박모를 헤치며 간다. 요리집 매월에 갔을 때 "아이구 박선생님, 오래간만이에요. 양교리댁 나으리께선 벌써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른 풀꽃 같은 향기를 풍기며, 비단 옷자락을 끌고 기생 화선이가 환영했다. 무르익은 여체, 요리집 여주인으 로서 몸에 붙은 자신감, 그것도 매력이었다. "화선이는 이제 살 그만 쪄야겠어? 그라다가 병나아." "어이구 선생님도, 선생님 눈에 병자밖에 안 보이세요? 이곳은 말예요, 선생님 같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랍니다. 마음의 병도 병 아니겠습니까?" "하하핫 하하하... 화선이 말이 맞아." 양재문은 안방 보료 위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대머리에 동안인 그는 싱글벙글 웃는다. "박선생." "네, 숨 좀 돌립시다." 박의사는 코트와 윗도리를 벗어 화선에게 넘겨주고 하얀 와이셔츠 바람으로 양재문과 마주보고 앉는다. "금랑아 소심아, 두 어른 잘 뫼셔라." 화선은 옷걸이에 옷을 걸어놓고 인사하며 나간다. "박선생." "네." "우리 금랑이가 지금 뭐랬는지 아시오?" 양재문의 겨드랑 밑에 바싹 다가앉은 나이 어린 기생이 깔깔깔 웃는다. 하얗게 빛나는 이빨, 붉은 입 모습이 귀엽고 깨끗하다. "들으나마나, 뻔하지요. 철부지한테 좋잖은 충돌질 했겠지요." 차분하게 생긴 소심이 웃음 짓고 따른 술잔을 받으며 박의사는 말했다. "오늘 밤에는 박선생이 고잔지 아닌지 증거를 보이라는 거요. 하하핫 하하하," "어머나 나으리? 입에 침도 안 바르시고 그런 말씀 하셔요? 언제 금랑이가 그런 말 했습니 까? 나으리께서 그런지 안 그런지 증거를 잡으라 아니하셨습니까?" "거 보시오." "이자식 보게나? 언제부터 이래가지고는 촌놈들 상투 잘라먹기 문제도 없겠는걸?" 금랑이는 또 깔깔깔 웃어젖히고 소심이는 "선생님 어서 잔 비우셔요." 술을 마시는 박의사를 건너다보며 양재문은 "어떻소, 박선생?" "뭘 말씀이오!" "오늘 밤 증거를 보이겠소?" "그거 어렵지 않아요." "말로만 그러지 말고 금랑이 소원 한번 풀어주시오." "말로만 그러는 양반이 바로 양선생 아니시오?" "적반하장, 아니 언제 말로만 그러든가요." "허허 누구 장님으로 아시었소? 금랑이 다리뼈 부러질까 걱정되어 그러는 것 아니겠소? 병 원으로 들쳐업고 오시는 것도 보기에 딱하고, 절름발이가 된 금랑이 애처로워 어떻게 보지 요?" 한바탕 웃음이 벌어진다. "박선생도 수가 늘었소이다." "돌팔이 의원, 입으로 먹고산다는 얘기 못 들으셨소?" "아닌게아니라 서울서 온 내 처제가 야부이샤(돌팔이 의사)라 하긴 하더구먼." " 그 성악가께선 아직 목의 부기가 덜 빠졌던 모양이군요." "박선생이 역린을 건드린 모양인데, 눈치코치도 없이 위대한 성악가를 왜 소홀히 하시었 소? 예술가치고 자신을 천재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 없고, 왕자 대접 받기를 원치 않는 사 람 없고오," "사면초가요. 눈치코치는커녕 음치니 어찌 합니까. 뭘 알아야지요." "왕시 숨어서 바이올린을 켰다는 사람은 누구시든가?" 주거니받거니 실없는 서설을 늘어놓으며 두 사내는 취기가 도는 것을 기다린다. "그는 그렇고, 요즘 병원은 어떻소?" "..." "여전히 번창일로, 돈 받고 치사 받고, 그러니 의사들 콧대가 높아질밖에," "양선생하고 엇비슷하지요." "어째서요?" "두 가지 면에서 비슷하지요." "두 가지 면이라," "첫째는 등골 빠지게 일하여 추수 바치고 절해야 하는 지주, 둘째는 대체적으로 왜놈의 보 호를 받는 층에 지주와 의사가 든다 볼 수 있으니까요." "듣고 보니 결국 우리는 친일파에다가 도둑놈이군 그래." "안 그렇다 할 수 있겠소?" "그, 쓰고도 매운 말씀인데?" "자기 비판 합시다." "좋소. 자기 비판 합시다! 이애들아, 술을 따러! 너희들도 자기 비판 하는 뜻에서 벌술 먹기 다!" "어머, 저희들이 어째서 친일파 도둑입니까?" "서장 군수가 부르면 아니 갈 테냐? 논개 얼굴에 똥칠하는 너희들! 부끄러워할 것 없느니 라. 동병상련 피장파장, 자아 벌주 마시자꾸나." 두 시간 넘게 그러고들 술잔이 오고갔는데 갑자기 양재문은 기생들을 물리쳤다. "이제 잡소리 다 걸러버리고 우리끼리만 생소리 좀 합시다." 양재문은 박의사 술잔에 술을 치면서 말했다. "무슨 모의를 할려고 이러시오." "모의는 모읜데," "독립군이 담 넘어왔던가요?" "경험이 있으시오?" "불행인지 다행인지," "속절없구먼." "속절없는 친일분자지요. 우리 너무 오래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소." 두 사내는 껄걸 웃어젖힌다. "박선생" "말씀하시오." "허정윤이라는 그 청년 어떻게 생각하시오." 양재문의 얼굴은 갑자기 엄격해졌다. "허정윤이," "사람됨이 어떤가 그 말이오." "장래성은 있지요. 왜 그러십니까? 학자라도 보태주시려구요?" "보태줄 수도 있는 일이지요. 인물만 믿을 수 있다면은." 박의사의 의아해하던 얼굴은 싹 변한다. 짐작이 간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능청을 떨 듯 "믿는다는 것도 그렇지요. 어떤 면에서 하시는 말씀인지,"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사윗감으로, 내 딸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인지," 박의사는 침묵할밖에 없다. "박선생께서도 아시다시피, 내 여식한테는 지울 수 없는 험이 있질 않소? 삼월에는 졸업을 해야 하는데 결함만 없다면 일본 유학을 시킬 수도 있고 혼처 걱정은 할 필요도 없겠으 나," 너털웃음을 웃으며 호걸스럽게 굴던 바로 전의 양재문을 의심할만큼 비통한 빛이 얼굴 전체를 감싼다. "내가 알기론, 최참판댁 자제한테, 일전에 부인께서 오셨을 때도 그 얘기를 하시던데요." 박의사는 가까스로 도피구를 찾는다. "그 일은 우리의 희망일 뿐이지, 성사 안 될 거요." "부딪혀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지요." "그렇다면 박선생은 어째 오늘까지 침묵을 지키셨소." "그 댁 사정이, 좀 기다려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허정윤이가 사윗감으로 적당치 않다 그 말씀이오?" "양교리댁하고는 너무 동떨어지는 혼처 아니겠소?" "내 자식한테 험이 있으니 할 수 없지요. 사람됨이 시원치 않다면 거론할 필요도 없을 일 이지만, 붙이라곤 아무도 없는 모양이지요?" "아닙니다. 형이 하나 있어요. 가세가 형편없어 그렇지, 별로 하자가 없는 선비 집안이고 야망도 있는 청년이지요. 그러나," "그러나," "너무 가난해서요. 아직 공부중이고, 서둘 것 있습니까?" "그런 일이라면 우리 쪽에서 해결될 문제지요." "글세올시다. 본인들의 의향도 있을 것인즉," 박의사는 계속 꽁무니를 뺀다. "현재는 학자금을 어디서 조달하고 있습니까?" "우리 병원에 있으면서 저축한 돈이 좀 있었을 것이고, 주로 고학이겠지요." 박의사는 숙희가 학자를 보태고 있다는 얘기를 못하는 만큼 자신도 다소 보태고 있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 았다. 양재문도 체면이 있는 사람이어서 그 이상은 서둘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는 오해를 했던 것이다. 최참 판댁 정도라야 혼사가 걸맞지 않겠느냐, 박의사의 의도를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한데 소림의 그 고약한 것은 설마 유전은 아닐 테지요?" "선천적인 거지요." 박의사는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싶지 않은 듯 술잔을 들었다. "물론 후천적인 거라면 고칠 수도 있는 일 아니겠소?" 박의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양재문을 힐끗 쳐다본다. "선천적이어서 불행 중 다행이지요. 후천적인 거라면 그건 암 종류이기 십상이죠." "네?" 양재문의 얼굴이 겁에 질려 파아래진다. "병원 밖에서까지, 양선생, 병에 관한 얘기는 그만둡시다. 소림인 병자 아니며 불구자일 뿐 이오." 갑자기 신경질을 내듯 박의사는 말했다. "네 압니다, 알아요. 불구자지요." 양재문은 억지 웃음을 웃는다. 분노와 서슴없이 말을 내던지는 박의사에 대한 증오감을 누르면서. '이 말라비틀어진 뼈다구 같은 작자, 소갈머리 없는 놈! 자식 없는 인간이니 내가 참아야 지.' "어서 술이나 드시오. 내일 땅이 꺼지고 하늘이 내려앉지 않을 테니 내 여식 문제는 박선 생께서 두고 생각해주시오." 심했다 싶었던지 박의사는 쓴웃음을 띤다. "홀아비보고 매번 중매를 서라니 양선생도 딱하시오." 얼버무린다. 양재문은 두 가지 면에서 박의사의 의도를 오해했다. 정윤과의 혼담에서는 지체 때문에, 불구자라 고 화를 낸 것은 암에 대한 공포와 소림에 대한 측음함에서 충격적으로 내뱉은 박의사의 심약한 마음을 양재 문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감정의 빛깔이 섬세하기 때문에 오히려 냉혹하고 무뚝뚝하고 신경질적으로 괴팍한 사람으로 오해받는 것은 역시 박의사의성격상의 결함이라 할수도 있겠다. 박의사의 귀로는 우울했다. 술기도 가셔졌다. 텅하니 비어버린 대합실, 나무 걸상에 걸터앉아 뜨개질을 하던 숙희의 을씨년스런 모습이 눈앞에 밟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이 혼사는 되는 거다.' 밤바람을 마시며 담배를 붙어문다. '어느때든 내 손은 무디어지고, 눈은 어두워질 것이다. 그때가 오면 정윤이는 패기에 찬 의 사로서... 내가 신경 쓸 것 없어. 그들은 그들대로 길을 찾아갈 것이다. 외로운 길이든 찬란 한 길이든 고통스런 길이든 안이한 길이든, 흥, 나는 언제부터 운명론자가 됐지?' 몇 발짝 못 가서 박의사의 생각은 다시 정윤과 숙희에게로 돌아갔다. '결국 숙희가 잘못한 게야. 숙희는 청춘의 희생을 보상받으려 할것이며 그렇게 되면 정윤이 비참하다. 한때의 외로움 때문에, 야심 때문에 받지 않을 수 없었던 보조, 그로 말미암아 일생을 함께 하는 것은 가혹하고, 함께 하기엔 정윤이 너무 커버렸어. 아니아 아니야, 다같 이 억울하다. 저울대같이 이쪽이 올라가면 저쪽이 내려가고 저쪽이 올라가면 이쪽이 내려 가고, 흠, 운명의 주만이 결정할 문제야. 흥, 언제부터 나는 운명론자가 됐지?' 병원 앞에까지 온 박의사는 우두커니 병원을 바라본다. 진찰실에 불이 꺼져 있었다. 약제 쪽에는 불이 켜져 있 었다. '내가 구세주 노릇을 못한 탓이다. 정윤의 학자를 전적으로 내가 부담했더라면... 어어 아니 지. 내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괴로워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구세주 돌 이유도 없고, 선 심을 좀 썼으면 그것으로 내 할 일은 한 셈이야.' 문을 밀고 들어섰다. 약제실에서 박의사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며 정윤은 책을 읽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합실 로 나오면서 "이제 오세요?" "음. 강군은 갔나?" "네." "문단속하고 내 방으로 건너오겠나?" "그러지요." 한복으로 갈아입고 담배를 붙여무는데 정윤이 들어왔다. "방학도 얼마 안 남았지?" "네." "형님댁에 안 가보아도 되겠나?" "갈 때 잠시 들르지요." 그의 형은 사천에서 살고 있었다. "졸업은 아직 멀었지만 숙희 혼기가 늦어지고 있는데, 자네 무슨 계획이라도 있나?" 예상했던 대로 정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아무 계획도 없습니다." 성난 목소리다. "무작정 저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 확실한 약속이라도 돼 있다면 모르지만 숙희는 집 에서도 상당히 시달릴 텐데." 입술을 깨물며 말을 못하고 정윤은 고개를 숙인다. 한참 만에 "제가 나쁜 놈입니다." 14장 쫓기는 사람들 보리쌀과 소금이 든 부대를 짊어지고 굵직굵직한 돌멩이와 바위가 굴러 있는 개울을 따라 올라가는데 큰 바위 와 개울을 향해 기울어진 철쭉 사이에 등을 보이며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 있다. 한 사람이 아니다. 남정네 와 아낙, 강쇠가 가까이 갔을 때 등을 보이고 있던 어린 사내아이와 열네댓으로 보이는 계집아이도 겁에 질린 눈으로 강쇠를 올려다본다. "보아하니 산에서는 못 보던 얼굴인데, 권속을 데불고 어디로 갑니까. 가보아야 첩첩산중이 요." 강쇠 행색을 보고 다소 마음을 놓았는지 사내는 "어디로 가는 것도 앙이고 지망 없이 나왔소."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눈치를 살핀다. 강쇠는 허리께까지 오는 바위에 짊어진 짐을 얹듯 기대어 서서 "무신 사정이 있는지 모르겄소만 곧 해가 질 긴데, 여기서 어물적 거리믄 노숙할밖에 없고, 산짐승이라도 나오믄 우짤 기요?" "사, 사, 산짐승이 나와요?" "아 그런 것도 모리고 산에 들어왔소? 산막이라도 하나 구방해서 밤샐 요량도 않고, 더군 다나 어린것까지 데불고, 딱한 사람 다 보겄소." "그, 그라믄 형씨 따, 따라가믄 안 되겄소?" "할 수 없제요. 가입시다. 가기는 가되 내가 산도둑이믄 우짤라요?" "무신 그런 말을," 사내와 아낙이 찔끔한다. "호랭이밥 되는 것보담이사 도둑놈 지붕 밑에서 밤새는 편이 나을기요. 하하하핫..." 강쇠 웃음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가입시다." 일행은 느릿느릿 각자 들고 온 짐을 챙겨서 강쇠를 따라간다. 남편 오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았던지 강쇠댁네 가 뛰어 내려온다. "보소? 웬 사람들입니까?" "지리산을 신선 노는 곳인 줄 알고 찾아온 사람들이제." 마당으로 들어서자 부엌에서 아배! 하면서 계집아이가 쫓아나왔고, 안방 문이 열리면서 "애비왔나?" 머리칼이 눈빛같이 하얗게 된 강쇠네가 내다본다. "어인 사람들이 이리 많이 왔노?" 짐이 이고 지고 병신스럽게 서 있는 일행을 강쇠네는 반기듯 바라본다. "강쇠야, 저 사람들 누고오?" "길을 잘못 든 사람들이라요." "하모, 잘했다. 잘 데리고 왔다. 산중에서 길을 잃으믄 큰일나제. 아이들까지 데불고," 산중에는 해가 빨리 지고 어둠도 빨리 온다. 봄이라지만 산속의 밤은 냉한하다. 보리쌀을 넣은 콩죽으로 저녁 을 치른 뒤 아낙과 아이들은 강쇠네가 있는 큰방으로 몰아넣고 강쇠는 남정네하고 작은방에서 마주앉았다. "형씨도 참 짓궂소. 아까는 참말로 산도둑인가 생각했구마요." 하며 사내는 비시시 웃었다. "날이 밝아봐야 알제요." 강쇠도 싱긋이 웃는다. 마음놓고 서로의 관상을 보니 박복하게는 생겼어도 나쁜 놈으론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처자식 거나리고 사냥하로 온 것도 아닐 끼고, 약초 캐로 온 것도 아닐 끼고, 뭣 하 러 왔소?" "오고자 해서 온 기이 앙이고 어마도지해서 오고 보이," "와요? 샐인이라도 했소?" "샐인이사 했이까마는, 빚지고 도망온 기라요." "빚을 지고 도망할 생각을 했이믄 미리 갈 곳을 정하고 나서야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도 아니겄고," "그럴 사정이 있었소." "새는 날부터라도 식구 거나리고 살 작정을 해야 긴데 무신 사정인지 애기해보소." "그러잖애도 형씨한테 사정 얘기를 해야겄소" 산짐승 울음이 바람결을 타고 들려온다. "우리도 옛날에는 땅마지기나 가지고 남부럽잖게 살았소. 그랬는데 왜놈들이 들어오고 영 문이 깨지믄서부터 문서 없는 땅아리꼬 솔딱 뺏기고 말았구마요. 아부지는 그때 홧벵으로 돌아가시고 우리는 고생길에 들어선 기라요. 산 목심 굶고 앉아 있일 수 없는 일이고, 빼앗 긴 내 땅을 소작할밖에 달리 길이 없더마요. 거기다가 무신액운인지 지주라는 놈이, 독사보 다 모진 왜놈을 만냈이니, 추수한 곡식을 반식 나눈다든지 아니믄 육, 사로 한다든지 그런 기이 아닌기라요. 숭년이 들거나 말거나 소작료를 딱 정해가지고 꼬박꼬박 물어야 했인께 요. 거기다가 마름놈이 어찌나 숭악하든지," 사내는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우짜겄소? 이작은 형제 이별보다 애처롭지 안카요? 빚이 지나 걸이 지나 해나갈밖 에 없는 기고, 형씨도 알겄지마는, 다문 밭 한 때기 논 한 마지라도 이녁 땅이 있어서 남우 땅하고 쩌잡아 농사를 지어야지 남우 땅만 가지고는 밥 못 묵소. 골벵이 들어도 땅이나 많 이 얻으믄은 모리까 여간한 면이 없이믄 누가 땅을 많이 줍니까? 그런께로 자연 마름한테 빚을 내어 소작료를 물게되고 마름놈은 불쌍한 농사꾼을 상대해서 돈요리로 단물을 빼묵는 기라요. 마름놈이사 추수 때 들판에서 곡식으로 걷어간께. 그러니까 마름놈 농간으로 소작 인을 자꾸 갈아치우게 되는 기고," "오나 가나 사정은 다 마찬가지구마. 목을 쳐 직일 놈들!" "마름놈들이사 작인들 집에 숟가락몽댕이가 몇 갠지 훤하게 다 아는 일이고, 그래서 앞으 로 어럽겄다 생각하믄 피도 눈물도 없는 기라요. 들판에서 본전 이자 셈해서 곡식을 몽땅 가져가부리믄 머 묵고 농사 짓겄소? 빈손 털고 나갈밖에 더 있겄소?" "배애지를 걷어차지 그냥 나가아?" "강약이 부동인데 그렇기도 못하고," "그라믄 형씨는 그 빚을 띠어묵고 나왔다 그 말이요?" " 그런 셈인데, 들판의 곡식으로라도 갚을 수 있다믄 갚고, 차라리 빈손 털고 나왔이믄 나 도 이리 수풀에 앉은 새맨치로 가심이나 안뛰지요. 가실에 추수해봐도 빚돈 갚기는 태부족 인께 마름놈 우리딸애를 데리가겄다," "소실 삼을라꼬요?" "소실이나 정기 가시나로 달라 캄사? 청루에 팔겄다, 그란하요? 청루에, 소개쟁이를 데불고 낼 온다 카이." "기가 맥히서," "나오기는 나왔는데 사람우 눈을 피하다 보이 산으로 올 수밖에 없고 어디 포전 쫏아묵을 만한 곳이 없는지, 참말로 난감하게 됐소. 곡식은 좀 가지왔지마는," "그렇기 하시오. 우선 새는 날에는 막살이부터 맨들고," "연장이 있겄소, 뭐 못 하나가 있겄소. 목수일이라고는 난생," "연장은 우리집에 있고 지천으로 있는 나무, 기둥 세우믄 되는 기요. 기둥은 칡넝쿨로 얽어 매믄 될 기고, 겨울이 갔인께 나무 껍질을 벳기 묵어도 굶지는 않을 기요. 포전이야 쫏을라 카믄 얼마든지 있인께," "그렇기 해보까요?" 사내 얼굴이 활짝 핀다. "그렇기라도 해야지 식구들 데불고 쪽박 찰 수도 없는 일 아니요!" "아이구, 이자는 반쯤 살아난 것 겉소." "고생할 것은 작정해얄 기요." "무신 고생인들 마다 안 할 기요." "사람 사는 기이 멋인지..." 강쇠는 등잔불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사팔뜨기 눈에는 전과 다른 깊은 비애가 넘실거린다. "형씨는 이 산에서 얼매나 살았소?" "나는 날 적부터 산에서 살았소. 한 일 년 객리 생활을 해봤지마는, 산놈이 도방에 나가봐야 뭍에 오른 개기 꼴이지 머겄소? 밤도 저물었소. 이자 잡시다." "야." 불을 끄고 따끈한 방바닥에 등을 붙이고 눕는다. 방문에서 달빛이 비쳐 들어오고 그림자가 흔들린다. 얼마 후 사내는 몹시 피곤하였던지 잠이 든 것 같다. 강쇠는 눈을 감은 채 잠을 이루지 못한다. 김환이가 유치장에서 목을 매달고 죽은 그해, 강쇠는 쫓기는 관수를 따라 부산에 나가서 부두 노동을 한 일 년 했다. 김환이와 동행 했다가 산천 석포 주막에서 튀기는 했지만 신원을 몰랐기 때문에 관수처럼 지명수배가 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산에 있는 가족에게 손이 뻗치지 않았던 것이다. 처자와 처가 식구들을 부산으로 옮긴 관수는 처가의 재력으 로 기반을 잡았기 때문에 강쇠더러 부산서 함께 일을 하자고 집요하게 권유했으나 그것을 뿌리치고 재작년 여 름 산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남원의 지삼만을 염두에 두고 산의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긴 했었다. 짝 잃은 외기러기, 김환의 죽음은 강쇠에게는 삶의 지주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는 복수를 맹서하지 않고는 허무의 바다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다. 관수의 간곡한 청, 지당한 설득을 뿌리치고 산으로 돌아온 것도 실은 도시가 생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보다 복수의 맹서 때문이다. 부산 부두에서 노동하던 일 년 간 그 시 기는 참으로 강쇠에게는 참담한 것이었다. 그는 불면에 시달려야 했었고, 찝찔한 바닷바람은 죽음에의 유혹을 해왔고, 깊은 곳에서 스며나는 비애를 그는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만해두라니께! 덩치 아깝다. 언제꺼지 찔찔 울고만 있을 기고!" 바닷가에서,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강쇠의 등짝을 관수는 냅다치곤 했었다. "와 내가 대신 안 죽었는지 모리겄다! 그만 내가 죽을 거로. 불쌍한 우리 성님, 흐으흣! 죽음도 유만부동이지, 그, 그렇게 참혹, 으흐흣..." "그만두라니께! 하루 이틀이지 귀신이 붙었나! 누구는 가심이 안 아파서 이러고 댕기는 줄 아나! 그럴수록 이 를 악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와 못하노!" 부산의 일 년은 참담했다. 그러나 그 참담한 슬픔 속에서도 부두는 일해볼 만한 곳이었다. 갖은 신산을 맛보고 철새같이 모여든 부두 노동자들, 한 가락씩 하는 거칠고 배짱 좋은 사내들, 연공을 쌓아 이력이 난 강쇠는 그 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힘들지 않았다. 상당한 내부 조직은 강쇠의 공적이었던 것이다. 누구나 쉽게 알아들 을 수 있는 언변으로, 소박하고 단순한 행동으로, 자제와 지구력, 그리고 힘센 주먹, 사팔뜨기 눈을 부릅뜨면은 거칠고 황폐해진 그 곳 사나이들은 복종 아닌 미묘한 사랑을 느끼는 것이었다. 우리 다 서러운 놈들끼리, 흔히 하는 강쇠의 말투는 어느덧 우리 다 서러운 놈들끼리, 그들의 말투가 되었으며 미약하나마 앞날의 등불 같은 것을 그들은 느끼곤 했었다. 그것은 산에서 나서 산에서 살아온 생래의 순박한 것, 환이를 통하여 부단히 훈련 받고 합당하게 굳어진 생각, 그리고 환이를 잃어 사무친 비애, 그런 것이 저도 모르게 배어난 인간적 매력으 로, 성실한 투지로, 옳다고 믿게 하는 것으로, 우리 편이라는 친애감으로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물 론 부산을 떠나왔다 하여 그들과의 유대가 끊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지난해 섣달 그믐께 부두 노동자를 위 시하여 어업과 해운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소요가 실패로 끝났으나 강쇠는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이 관련되 어 있지는 않았지만 원산의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은 상당히 광범위했다는 소식을 강쇠는 듣고 있다. 부산에서 의 실패, 불발을 두고 강쇠는 관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불씨 하나 던진 거지 머." 김환이가 살아 있었다면 이번 일은 어떤 결과를 빚었을까 생각하면서. 이튿날 강쇠가 일어났을 때 옆에 누워 자던 사내는 간 곳이 없었다.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사내의 딸아 이가 싸리비로 마당을 쓸고 있었다. "아가야, 니 아부지 어디 갔노?" 밖으로 훌쩍 뛰어나오며 강쇠가 물었다. "둘러본다 캄서 나갔십니다." "온 성미도 급하다." 그러는데 아낙이 보리쌀을 씻어 이고 들어온다. "잘 주무셨습니까?" 인사성 바르게 아낙은 아침 인사를 했다. 딸이나 아낙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새벽부터 사내는 이곳에 정착한 다는 말을 그들에게 한 모양이다. "우리집 사람은 어디 가고 아지마씨가." "예. 밭에 거름 내길래 지가 밥을 할라꼬요. 여러 가지로 고맙고 미안스럽십니다." "별 걱정을 다 하구마. 너 나 할 것 없이 산의 인심을 그렇지 않은께 미안해할 것 없소. 사램이 기러분 곳인 께." "예. 그런갑십니다. 노인네도 우찌나 잘해주시는지 천정 온 것 같십니다." 아낙은 퍽이나 상냥했다. 아침에 새삼스럽게 바라본 딸애도 예쁘장하고 덕성스러워 보였다. 한나절은 도끼와 톱을 꺼내어, 오막살이를 지을 나무를 베는 사나이를 도와 강쇠는 일을 했다. 나무를 찍다 말 고 담배 한 대를 피우며 "형씨." "예." "나도 어지간하지마는 형씨도 어지간하요." "예? 와 그랍니까?" "여태 통성명이 없지 않소?" "앗, 참, 이거 내 정신이 아닌갑소." "나는 김강쇠요." "예. 지는 안가고 이름은 또병입니다. 형씨 나이는 우찌 됩니까?" "마흔다섯이요." "아이고, 그라믄 형씨뻘이구마요. 지는 마흔하나올시다. 그라믄 앞으로 형님이라 부르겄소." 하더니 넙죽 절을 한다. "한창 일할 나이구마." "그러씨요. 사십이 넘어서 처가숙 데불고 길거리로 나왔인께 나일 헛묵은 거 아니겄소?" "거기보다 백 배 천 배 나은 사람도 나이 헛묵었다 하더마. 사람사는 기이 다 그런갑소." "말심 낮추시지요." "차차 그렇기 안 되겄소. 자아 일이나 합시다." "이자 지 혼자 해도 될 긴데요." "나도 오늘은 별로 할일이 없인께 거들어주는 기요. 차차 산의 생활을 하다보믄 익을 기고, 숯 굽는 법도 배우 고 짐승 잡는 법도 배우고, 약초도 캐믄 살림에 조금은 보탬이 될 기요. 여기는 대개 이녘겉이 도망 온 사람들 이 많은께 들어오기가 어렵지 일단 들어오고 나믄 명 보전은 할 수 있소." "예. 신령님이 도와주신 거로 생각합니다. 아이 에미도 피가 나게 살겄다 하더마요. 다시는 사람 사는 마을에 는 안 가고 칡뿌리는 캐묵어도 남우 농사 짓지 말자 하더마요." 구덩이를 파서 개울의 자갈을 담아다 붓고 낫으로 대강 껍질을 벗겨낸 기둥을 묻은 뒤, 기어이 필요한 곳에만 강쇠가 내놓은 대못을 몇 개 박고 칡넝쿨로 기둥과 지름나무를 얽어맨다. 그리고 해 넘어가기 전에 지붕의 서 까래가 올라갔다. 아낙과 딸아이와 사내아이를 합해 그들은 희망에 차서 온종일 집 짓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자갈을 나르고 구덩이를 파고 칡넝쿨을 베어오고, 그 일은 아낙과 아이들이 했다. 아낙은 보기보다 힘이 좋아 서 일을 잘했다. "내일은 벽을 치고, 수숫대가 많이 있인께 얽어서 흙벽을 치믄 될기요. 바닥에는 마린 풀을 깔고 봄 여름 넹길 생각하소. 찬바람 불거든 구둘을 놓고 우선 비바람만 피하믄 될 긴께." 집 자리는 강쇠의 집이 있는 훨씬 뒤켠이었다. 소나무 몇 그루 베어낸 자리가 펑퍼짐해서, 강쇠가 그곳을 집 자리로 정해주었던 것이다. 사내는 관솔불이라도 켜놓고 집일을 더 하고 싶어하는 눈치를 보인다. "급히 묵는 밥 치하기 십상이제. 내일도 날인데 서둘 것 없소." 사내는 마치 신주처럼 강쇠의 말에 무조건 따랐다. 이튿날 새벽 강쇠가 길 떠나려고 일어났을 때 사내는 피 곤한 잠에 빠진 채 꼼짝하지 않았다. "맴이 앞서서 미치괭이겉이 일하더마는 곯아떨어졌구나." 방문을 열고 나간 강쇠는 개울로 내려가 세수를 하고 나서 "히야, 히야," 하며 안방을 향해 낮은 소리로 부른다. "야." 강쇠댁네가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나온다. 휘는 아들의 이름이다. 김환이 자신의 외자 이름과 마찬가지로 지어 준 이름이다. "어디 갑니까." "음, 옷 좀 가지고 나오라고." "멋 좀 자시고 가시야지요." "일없어. 가다가 주막에서 해장국이나 한 그릇 사묵으믄 된께." "어디 가실 겁니까?" "그거는 와 묻노? 언제 내가 어디 간다 카고 떠나드나?" "그런께 노상 간장이 타지요. 집에 남은 식구들 생각도 좀 해주소." "잔소리 말고 옷이나 내와." "야." 어두운 산길을 나섰다. 바위 틈을 구르며 흐르는 물 소리, 달빛도 물결 따라 바위 틈을 구르며 흘러가는 것 같 다. 봄의 냄새는 새벽의 싱그러운 기운과 함께 사방에서 묻어온다. 새벽의 산길을 갈 때는 언제나 강쇠는 환이 를 생각한다. '과부의 소원 한번 풀어주었이믄 성님도 그런 죽음 안 했을라...' 그것도 새벽 산길을 갈 때면 늘 생각하는 일이다. 환이에게 거역당하고 목을 매어 죽은 인이댁네. 강쇠는 그 여자의 원한 때문에 환이도 목을 매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옹졸하고 괴팍하고, 그러이 우찌 옳은 죽음을 할 기든고?' 그럼에도 강쇠는 남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택한 환이의 죽음을 눈물 없이 되살릴 수 없는 것이다. 환이와의 가지가지 추억, 죽음으로써 그의 사무치던 한을 강쇠는 알 것 같다. '불쌍한 성님. 내가 성님 원수를 못 갚으믄 죽어도 눈을 못 감을기요. 지삼만이 그놈의 외목을 이 내 손으로 비틀어부릴 기요.' 변을 당했을 때 강쇠뿐만 아니라 환이도 지삼만의 소행임을 대개 짐작은 했었다. 미심쩍은 면이 있었으나 강 쇠가 산으로 돌아온 뒤 첫번째 한 일은 이종사촌 짝쇠를 남원으로 이사시킨 것이다. 지삼만이 다스리는 청일 교의 교도로, 말하자면 잠입케 하기 위해서. 언뜻 보기엔 쓸모없는 병신 같았으나 천성으로 말이 똑똑하지 못 하고 의사 표현이 어려운 짝쇠는 도리어 독사같이 약고 눈치 빠르며 잽싼 지삼만의 눈을 속이기엔 안성맞춤이 었다. 지삼만의 목숨을 노렸던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거니와 강쇠는 그를 때려잡을 기회와 더불어 일의 진상 을 똑똑히 알아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상은 짝쇠의 염탐에서 알아낸 것은 아니었고, 우연히 사당 출신인 주모 비연을 통해서다. 생래부터 음탕한 비연은 죽은 이모가 얼마나 얌전했는가를 들먹이며 행사 못 고치겠느냐고 노상 욕설인 강쇠를 할퀴듯 대들다가도 다시 만나면 추파를 보내는데, 이날도 강쇠는 환이 생각 을 하며 홧술을 마셨다. "비연아." "야." "그날 밤 품고 자든 놈이 우떤 놈고?" 술이 취해서 혀 꼬부라진 소리로 물었다. "그날 밤? 무신 날 밤 말이요?" "행사가 하도 더러부이 생각도 안 나는갑다. 오밤중에 잘생긴 사내하고 내가 왔일 직에 네년이 꼬리를 쳤는데 잊어부맀나?" "아아 깽판 부리든 그날 밤, 흥, 재수 더러분 날이었제요." "와." "술값만 떼있소." "니가 좋아서 안 받았겄지." "좋고 궂고가 어디 있소, 방에 들어와본께 뒷방문 열고 달아났십디다." "뒷문을 열고 달아나아? 와."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께 다칠까 봐서 삼십육갤 놨겄지요." "미친놈 다 보겄다. 내가 니 서방도 아닌데 갈라 카믄 앞문으로 버젓이 나갈 일이지, 도둑놈도 아닐 길데 뒷문 으로 와 달아나노." 순간 강쇠 머릿속에 번개같이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술값도 떼어묵을 겸, 그랬겄지요." "몸값도 떼어묵고," "그럴 새나 있었건데!" "우찌 생기묵은 놈인데 사당년 깝대기를 벳길라 했던고?" "흥!" "개 핥아놓은 죽사발겉이 멀끔하게 생깄든가 보제?" "멀끔하기는커녕 똥짤막한 작자가 팔은 길어서 똑 원숭이 겉십디다." 비연은 약이 올라 강쇠에게 눈을 흘겼다. '옳지! 한가 그 직일 놈이 성님을 보고 갔고나! 이 목을 쳐 직일 놈을!' 그 말을 들은 후 강쇠는 미친 것처럼 한가를 찾아 헤매었다. 그리고 기어이 작년 여름 한가를 산으로 끌고 왔 던 것이다. 한가는 손을 비비며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서, 서 성님, 나, 나는 등을 돌맀소. 죽도 살도 못해서 등, 등 돌린 죄밖에 없소. 사, 살리주이고." "누가 니보고 등 돌린 죄 이외 딴 일이 있다 하더나?" "예, 예, 그것밖에, 서, 성님도 지삼만이 성질을 아, 알 깁니다. 예, 할 수 없이, 묵고 살자 카이, 다, 다른 죄는 없소." 사시나무 떨듯 한가는 인왕같이 뻗쳐선 강쇠의 팔에 매달리며 애원했다. 그리고 환에 관한 것은 필사적으로 엄폐하는 것이었다. "오냐. 우리를 배반하고 등 돌린 죄도 작은 것은 앙이다. 그 이상 머를 또 했을 기라고 다른 죄는 없다고 발명 을 하노." "예, 예, 다른 죄는 없소." "네 이노옴! 주막에서는 와 달아났노! 이 동가리 동가리 썰어 직일 놈아!" 창백했던 한가의 얼굴이 주황빛으로 변했다. "예? 아이고오, 그, 그날 밤, 나, 나는, 아니오! 나는 아니란 말이오!" 비로소 살아남지 못할 것을 깨달은 한가는 울부짖었다. 그리고 미친 것처럼 횡설수설, 결국 모든 것을 실토하 고 말았다. 피가 뚝뚝 듣는 비수를 개울가에서 씻으며 강쇠는 목을 놓고 울었던 것이다. 도중에서 자는 주모를 깨워 시래기국에 찬밥 한 숟갈을 말아 먹은 강쇠는 곧장 남원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남원에 닿아 짝쇠사는 집으로 들어갔다. "성, 기다리고 있었십니다." 짝쇠는 얼른 방안으로 강쇠를 데리고 들어가며 말했다. "오늘 제가 끝났다 캤제?" "야." "고단하다. 그래 별일 없나?" "야." "제수랑 아이들은 거기 갔나?" "야." "그놈이 니 댁네는 가만 두든가 몰라?" 짝쇠는 화를 벌컥 낸다. "꽃 겉은 기이 새비맀는데 못난 호박을 머한다꼬, 별 실없는 말을 다하요. 명색이 손아래 제수를 두고 무신 그 런 말을 하요!" "내가 입이 험해진 것은 틀림이 없지마는 니 입에서 말 나오는 거를 볼라꼬 안 그랬나. 야, 야, 하는 말밖에 안 한께." "타고난 거를 우짤 깁니까." "거 보라. 타고난 거도 아닌가배? 말할라 카이 잘하구마는." 할 수 없이 짝쇠는 웃는다. "술 좀 받아올까요?" "그럴래? 저녁꺼지 기다릴라 카믄 답답할 긴께 술이나 마시까?" "좀 기다리소." 짝쇠는 이내 술을 사왔다. 짠지하고 술주전자, 사발을 들고 들어왔다. "니도 좀 마시봐라." 부어주는 술을 마시고 빈 사발을 내민다. "나는 안 할라요. 술 취하믄 아무 생각도 못한께요." "그라믄 그만두던지. 그래 지가 그놈 요새도 신수가 좋든가?" "노상 그렇소. 돼지겉이 살이 찌고." "한가놈 죽은 뒤 눈치가 우떻더노." "죽은 줄이나 알까봐서요. 안 보인다, 안 보인다 하면서 의심을 하기는 하는 모앵인데." "누굴? 니를?"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소." "어이구, 니를 보고 말을 하느니 서산의 쇠를 보고 말을 하지. 묻기 전에는입 떼는 법이 없고 대답이라는 것도 우찌 그리 시원치 않노." "지가가 거처하는 내부 사정만 자세히 알믄 될 거 아니오. 집 뒷담 쪽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고요." "그래 그래 알았다. 니는 그곳에 가서 얼쩡거리고 있어라. 저녁때쯤 돌아와서 나랑 밤에 가믄 된다." "알았소." 15장 살해 일월성신에게 올리는 봄의 대제와 교주의 쉰여덟 번째 탄일을 곁들인 잔치는 온종일 거창하였고 상남도 막대 한 것이었다. 일 년 중의 가장 규모가 큰 행사를 무사히 치른 청일교의 회당은 요기를 품은 채 어둔 속에 묻 혀 있다. 검은 도포, 도금한 관을 쓴 지삼만이 일월궁이라 자칭하는 회당 높은 곳에 좌정하여 회중을 굽어보는 모습도 사라졌다. "가긍한 내 백성들아! 칭송하라! 칭송하라! 우리 청일교를 칭송하라! 어둠 속으로 새벽이 오나니, 그날이 오면 억조창생이 사함을 받을 것이요 영생불멸할 것이로되, 청일교를 믿지 아니하는 무리는 그때를 기하여 금수로 환생될 것이요 청일교를 비방하고 이 나를 비방하는 무리는 다시 생을 받지 못할 것인즉, 복되도다 내 문전에 선 자들이여! 복되도다 내 앞에 앉은 자들이여! 복되도다 내 품에 안긴 자들이여! 모든 내 백성들아! 칭송하 라! 칭송하라! 그대들의 맹주를! 일월같이 옹위할 것이며 부모같이 섬길 것이며 내가 있으므로 그대들이 살 것 이로다! 장차 칼과 창을 든 수만 신장이 내게로 올 것이니 그때는 산이 무너져 바다가 될 것이요 바다가 솟아 산이 될 것이며 내 창업을 도울 것이니라!" 등등 누리끼한 수염을 흔들며 비대한 몸을 흔들며 고래고래 지르던 그 소리도 사라졌다. 신도들은 손뼉치고 예배하고 통곡하며... 회당과 뜰을 메운 그 광란의 물결도 이제 사라지고 없다. 먹고 마시고 가락에 흥겨웠던 사람도 잔칫상도 다 걷혀버리고 없었다. 회당 높은 용마루에 초생달만 멍청히 떠 있었다. 연이어진 방에는 팔 신장에다 십오수문장, 그리고 전령들, 그러니까 전령이랑 포교사들인데 소위 청일교의 간부금 인물들이 진종일 마신 술에 녹아떨어져 업어가도 모르게 한잠에 빠져 있었다. 코고는 소리, 이빨 가는 소리, 무엇에 쫓기는지 소리치는 잠꼬대, 그들은 진정 그날이 와 홍포도사, 청포도사, 황포도사가 될 것을 꿈꾸는 것인지, 전력도 각색 각양의 사내들이 야수같이 시근거리던 즐빗한 그 방에는 불이 다 꺼져 있었다. 제일 늦게까지 남아서 일을 하 던 주방의 여신도들도 이제 잠자리에 든 모양이다. 자정이 넘어서 한 시각이 더 지났을까? 봄을 시샘하듯 꽃 바람이 불고 숲에서 부엉이가 운다. 장비며, 관운장을 그린 회당의 벽면, 단청을 입힌 처마며 휘늘어진 수양버 들, 그리고 초생달, 인가 먼 곳에 사교의 전당은 무시무시한 요기를 뿜으며 어둠 속에 서 있다. 일진의 바람이 지나간다. 덜커덕 하고 방문 하나가 열린다. 바람 탓이 아니다. 소피를 보러 나오는가 희미한 어둠 속에 장대 한 몸집의 사내가 마당으로 내려섰다. 흐트러진 상투, 어둠 속에서도 머리털은 희끄무레하다. 술 냄새를 피우 며 사내는 용마루에 걸린 초생달을 향해 씩 웃는다. 그날 밤, 그러니까 화개 주막에서 김환을 본 한가가 새벽 길을 줄달음쳐서 이곳까지 왔을 때 마당에서 마주친 그 늙은이다. 그는 그때 칼을 들고 있었다. 칼을 갈다 말 고 나왔다고 했었다. 성씨는 지가, 지삼만과 인척 관계는 아니었지만 하여간 같은 성씨였으며 늙었다고는 하나 저눔의 첨지 동삼 삶아먹었나 보다 하며 쑤군거릴 만큼 힘이 장사요, 서열은 낮지만 지삼만의 심복 중 한 사 람이며 육십을 넘은 나이에 처자는 물론 일가붙이 한 사람도 없는 처지여서 지삼만의 의심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물이라 할 수도 있었다. 나이에도 불구하고 음탕한 것이 그의 병이었으며 젊었을 시절 망나니였다는 둥 백 정이었다는 둥 말이 있었으나 근거 없는 것이었으며 거론될 만한 존재도 아니었다. 어슬렁거리듯 뒤꼍으로 돌아간 지서방은 얼마 후 칼을 들고 나타났다. 손가락 끝으로 칼날이 무딘가를 점검하 듯 만져본다. 심야에 칼은 왜 들고 나온 것일까. 진일 마른일 안살림을 돌보아주는 지서방인 만큼 칼을 가는 것이 그의 소임임엔 틀림이 없다. 이따금 잠이 안 온다 하여 새벽녘에 일어나 칼이랑 낫을 갈고 산에 가서 잡 목을 베어오기도 했으나 지금은 한밤중이 아닌가. 지서방은 하늘도 땅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 잡신이 우글거리 는 회당도 그 속에 모셔놓은 갖가지 신주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 꼿꼿한 허리를 세우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놓는다. 지삼만의 그 처첩이 기거하는 살림집 일각대문 앞에 가서 대문을 한번 밀어본다. 다시 몸을 왼편으로 꺾어 돌담을 따라 여남은 발자국 떨어진 곳까지 걸어온 지서방은 돌담 가까이 해묵은 소나무 한 그루를 올려 다본다. 솔잎 사이로 별이 한창인 듯 반짝이고 있었다. 지서방은 허리춤에 칼을 찌르고 두 손바닥에 침을 뱉는 다. 엉금엉금 늙은 곰처럼 소나무를 타고 올라간 그는 젊은 사람같이 가볍게 돌담 위로 건너뛴다. 다시 안마당 으로 내려서서 허리춤에서 칼부터 뽑아 들고 대문의 빗장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아까처럼 용마루 위에 걸린 초생달을 올려다보는데 미친 사람처럼 끼룩끼룩 웃는다. 불이 켜져 있는 방은 한 곳도 없었다. 밤잠이 없다면 서 늦게까지 등잔불을 켜놓던 별궁이라 불리는 여자의 친정 어미, 그 방도 불이 꺼져 있었다. 거창한 행사 때 문에 이곳에서도 모두 지쳐떨어진 것 같다. 학이 나래를 뻗친 것처럼 치올라간 지붕 처마 끝과 기와를 얹은 돌담 사이를 발소리를 죽이며 걸어가던 지서방은 어느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방문을 살며시 열어본다. 여 자가 혼자 잠자고 있었다. 월궁이라 불리는 여자, 별궁 때문에 밀려난 여자다. 지서방은 학춤이라도 출 듯 양 어깨를 들어올리며 팔을 펼쳤다. 이때였다. 뒷담을 넘어선 짝쇠와 강쇠는 길모퉁이를 돌아 나오려다 말고 방안 을 들여다보던 허여끄름한 것, 춤추듯한 사내 모습에 주춤한다. "누, 누가 오요, 성님!" 방문을 닫아주고 난간으로 둘려진 쪽마루를 지난 지서방은 짚신을 신은 채 그림자처럼 대청으로 올라간다. "누, 누구까요?" 당황하며 짝쇠가 소곤거렸다. "아가리 닥치고 있어." "서둘기는 서둘러얄 긴데, 성사도 못하겄소." "좀 기다리믄 처자빠져 자겄지. 아가리 닥치고 있어!" 강쇠는 짝쇠 옆구리를 쥐어박는다. "어, 언제꺼지." "계집이더나 사내더나?" "계집은 아닌 것 같고," "그라믄 지가 그놈이라 말가?" "아, 아니요. 키가 후, 훌적하니 크고 버마재비겉이 팔도 길고," "재수 더럽기 됐다!" 강쇠는 담벽에 몸을 붙이고 주저앉으면서 담배를 붙여문다. "성님도 참 어지간하요." "초조하기 기다리느보담은, 어쨋거나 잠이 들 때꺼지 참아야 한께." "어쩐지 그놈의 첨지 겉기도 하고..." "머라 카노?" "지서방이라고, 하지마는 그 늙은이가 멋 땀시? 야밤에 이곳으로 올 리는 없일 기고 지가 놈이 불러서 왔다믄 불이라도 킬 긴데 이상타?" 강쇠도 초조했던지 곰방대를 물고 자리걸음을 하며 "말할 때는 말 못하고, 니도 겁이 난께 헷소리가 자꾸 나오나?" 하는데 별안간 방문 열어젖히는 소리와 함께 "엄니! 사람 살려요! 지, 지서방이 칼부림! 아앗!" 비명 소리, 마루를 구르는 발소리, 뛰쳐나가는 소리, 강쇠와 짝쇠는 납작하게 땅바닥에 엎드린다. "샐인이야! 샐인 났다아!" 이윽고 바깥마당 쪽에서 여자의 외치는 소리가 밤을 찢는다. "안 되겠다! 우선 담장 밖으로 넘어가 있자!" 강쇠와 짝쇠는 허둥지둥 담장 밖으로 뛰어내린다. "샐인이야! 샐인 났다!" 여전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서, 성님 이기이 대관절 우, 우떻기 된 일이겄소?" 짝쇠는 부들부들 떤다. 졸지에 생긴 일이라 강쇠도 어지간히 당황한다. 담벽을 따라 살금살금 걸어나간다. 한 참을 돌아갔을 때 즐비한 행랑이 보였고 마당이 보였으며 방방이 문을 열고 사람들이 쏟아져나오는 판이었다. 몇몇 장정들은 까대기 쪽으로 쫓아가서 관솔불을 켜 들고 나온다. 노파는 여전히 샐인이야! 하며 외쳐대고 있 었다. 산발을 하고 나온 여자, 몽둥이를 든 남자, 일대 혼란이다. "주, 죽기는 죽은 모앵인데 누가 죽었이까요?" 강쇠는 묵묵히 담벽에 몸을 숨기고 마당 쪽을 지켜본다. "교주가 죽었다아!" 누군가가 외쳤다. 돌아가셨다가 아니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 말투는 구세주가 아니며 착취자라는 것을 알고 있 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성님!" 짝쇠는 강쇠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성님!" 대답이 없다. "이러고 있일 때가 아닌 기라요." "허허어 참, 일이 우찌 이렇게 돼가노?" "태펭한 소리를 고만하고 다, 달아나입시다. 여기서 어물쩍거리고 있다가 들키는 날이믄 애맨 때 입겄소." "..." "성님!" "방정 고만 떨고, 갈라거든 니 혼자 가라모!" 신경질을 낸다. "죽었이믄 됐지, 이자는 여기 볼 일 없일 성싶거마는," "허허어!" 지삼만이 죽었다면 삼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시원할 터인데 그러나 강쇠는 무슨 까닭인디 기분이 매우 좋 잖은 것 같다. "나는 잡신들 노는 꼴 좀 보고 갈 긴께 니 먼저 가거라." "혼자 살겄다고 내가 갈 성싶어서 그러요?" "죽기는 어느 놈이 죽어?" 누군가가 또 이쳤다. "별궁도 죽었다." 죽었다는 딸에게는 가볼 생각도 않고 노파가 땅바닥에 펄쩍 주저앉으며 통곡한다. 그러니까 지삼만을 죽이려 들어간 범인이 범행을 했을 때 별궁이라는 여자가 깨어 있었거나 아니면 범행하는 기척에 깨었거나 해서 비명 을 지르며 도망쳐 나오는데 당황한 범인이 뒤쫓아서 칼질을 한 모양이며 딸의 비명에 노파는 본능적으로 행랑 을 향해 뛰쳐노안 것이라고 강쇠는 추측한다. 이윽고 관솔불을 치켜든 장정들이 지서방을 끌고 나온다. "저, 저거는!" 짝쇠는 깜짝 놀랐다. "이상타! 저 늙은것이 지가놈을 와 직있이꼬?" 범인이 잡힌 것에 안심을 한 짝쇠는 가자고 조르는 대신 호기심에 차서 마당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숨어 본 다. 지서방을 질질 끌고 나오면서 장정들은 연신 발길질을 하고 상투를 잡아 끌고 밟아 죽여라! 찢어 죽여라! 아 우성이다. 그중에서도 선창하듯 죽여라! 죽여라! 고함을 치는 사내는 지삼만의 제일가는 심복이요 참모격인 임 가였다. 날이 밝기 전에 지서방을 죽여서 매장이라도 해놔야만 직성이 풀릴 듯 임가는 거의 필사적인 몸짓이 었다. 교주의 죽음을 실감할 수 없고 슬픈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임가 명령에 따르는 사냥개처럼, 그리고 참극이 빚어낸 피비린내에 미쳐가고 있는 듯싶었다. 그런데 돌연 지서방은 성난 황소같이 소리를 지르 며 달라붙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네 이노옴! 임가야!" 임가는 그 소리를 덮어씌우듯 "저 늙은 놈의 혀를 뽑아라!" 사나운 짐승같이 이빨을 드러낸다. "네 이놈 임가야!" 지서방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흔든다. "네놈이 시키 한 짓인디, 발각이 됐인께로 관가에 끌려갈까 그래 날 직이자는 거여!" "저 악종 보게나? 물귀신겉이 뉘를 끌어딜이자는 게야!" 임가는 옆사람이 들고 있는 몽둥이를 빼앗아 지서방에게 돌진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지서방 발길에 채여 나 가떨어진다. "이 뱅신 겉은 것들아! 몸뚱어릴 찢든지 지지든지, 말할 주둥이만은 남겨두란께!" 미쳐 날뛰던 사람들의 손길이 순간 느슨해진다. "그려, 그려, 내 말 잘 새겨 듣더라고, 날 직여서 관가에 불려댕길 것 없이 새는 날 관가에 넘기면 될 거 아니 더라고? 죽는 놈도 헐말은 허고 죽어야 쓰겄제?" "이 숭악허고 무도헌 늙은 놈아! 사람을 둘씩이나 숨통을 끊어놓고!" 거품을 물며 임가가 또 달려든다. 어느덧 사람들은 구경꾼으로 변해 있었다. 지서방은 끼룩끼룩 웃으며 임가를 메치고 나서 "깜쪽겉이 했더라면, 나 좋고 네놈 좋고, 허나 워쩔 것이여? 단념하더라고, 운이 이것뿐인께로. 교주를 직이믄 월궁하고 나는 살림 차렸을 것이고 자네는 전주 부자가 청일교 재산을 몽땅 주었을 것이고. 아 금매 나는 자 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남?" "짝쇠야." "야," "가자." "가다니요?" "머 볼 거 있다고, 가자. 알 만치 알았인께." 등을 민다.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강쇠는 "박살이구나." 하고 길섶에 침을 뱉는다. "성님." "와." "그놈의 첨지 말대로 임가가 시킸이까요?" "두말하믄 잔소리제." "기가 맥히요." "기가 와 맥히노? 우리는 샐인하로 안 왔더나?" "우리사, 아 우리사 사정이 다른께요." "버러지보다 못한 놈들!" "그런데 전주 부자, 그 말은 무신 말이까요?" "그놈도 버러지겄지. 무슨 몹쓸 짓을 했길래... 평생 쥐여사느니보다 죽이는 편이 낫겄다 싶었겄지." "그런께 임가한테 축축거맀다 그 말이요?" "십중팔구." "사람을 직이놓고도 그놈의 첨지 능큼해가지고 두러버하는 기색한품 없더마요." "사람? 죽은 놈이 사람가?" "남우 목심 끊은 것도 그렇지마는 지도 죽을 긴데 우째 그리 하낫도 안 무서분 얼굴이까?" "그런 놈이 간혹 있기는 있지. 타고난 악당이다. 지삼만이보다 임가놈, 늙은 그놈이 몇 배나 악종일 기다. 어째 속이 느글느글하구마." "우리 할일을 대신해주었이니 고맙기는 하지마는 능지처참할 놈들," 한참 가다가 강쇠가 "담배 한대 태우고 가자." 하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담배를 붙여문 강쇠는 별이 나돋은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성님." "..." "가다가 술이나 하입시다." "짝쇠야." "니는 그리 기분이 좋나?" "그라믄 성님은 안 좋다 말입니까? 우리 대신, 이리 맘놓고 앉았이니 얼매나 좋십니까." "짝쇠야." "야." "니는 우짤래?" "머를요?" "남원서 살래?" "그러씨요. 이자는 머," "산으로 들어갈래?" "..." "산으로 들어가거라." "들어가라니, 성님은 또," "산으로 들어가서 편키 살아라. 아무것도 하지 말고 화전이나 해묵고 숯이나 굽고..." "성님도 그랄랍니까?" "니 얘기 하는 거다. 그 동안 니를 고생 많이 시킸다. 구박도 많이 했고," 짝쇠는 불안한 듯 눈을 치뜨며 담배를 빨아대는 강쇠 얼굴을 살핀다. "세상이 이치대로만 되는 거는 아닌갑더라. 사람우 맘도 이치대로만 되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다 갔다. 쓸모 없이 늙은 혜관스님하고... 일할 사람은 관수 하나가 남았제. 생각해보믄 환이성님도 잘 죽었다. 애통해할 것도 없일 성싶구나. 석포 그 양반, 지삼만이 말로가 얼매나 비참하노, 성님은 성님답게 죽은 기라." 강쇠는 울먹인다. "허전하고 맘 한구석이 텅 빈 것 겉애서 갈 바를 못 잡겄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당대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일 기다." "..." "짝쇠야." "야아," "눈먼 말이 요롱 소리만 듣고 따라온다 카더마는 니가 그 짝이다. 이자는 내가 흔드는 요롱 소리 그만 듣고 산으로 들어가는 기라. 세상에 나오지 마라." "그, 그라믄 성님은 어디로 갈 깁니까?" "작정한 바는 없다." "..." "가자." 강쇠는 곰방대를 털어 허리춤에 찌르며 일어섰다. 짝쇠 집에 닿았을 때 새벽으로 접어드는 시각이었지만 아직 사방은 캄캄했다. "아주버니 오십니까?" 삽짝문을 따주며 짝쇠댁네는 말했다. "낮에 묵던 술이 남았일 긴데 술상 보라 칼까요?" 짝쇠가 묻는다. "일없다. 한잠 자야겠구마. 제수씨 밤 늦기 미안합니다." "별 말심을 다 하십니더. 술상 차리겄십니다." "아, 아니요. 나는 좀 잘랍니다." "작은방에 잠자리는 보아놨십니다마는," "그라믄 됐소." 작은방으로 들어간 강쇠는 불도 켜지 않고 그냥 자리에 드는 기색이다. "이녁은 여기 와 이리 쯘벙겉이 서 있십니꺼? 들어가입시다." "음, 응? 그러지." 대답은 했으나 짝쇠는 그냥 우두커니 선 채다. "새북 바램이 찬데 감기 들겄소." "술, 술은 내가 좀 마싰이믄 싶은데," "얄궂어라? 질기지도 않음서 깨꽝스럽기 술은 와 찾소?" "속이 느글느글해서," 강쇠가 한 말을 그도 한다. 사실 짝쇠는 맘놓고 앉으니 얼마나 좋으냐 하기는 했지만 어리둥절한 기분이었고 아닌게아니라 속이 느글느글했던 것이다. "그라믄 들어가시이소. 술상 보아 갈 긴께요." 차려다준 술상 앞에서 술을 마시며 짝쇠는 새삼스럽게 흥분하기 시작한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이 꿈 같기 도 했고 거짓말 같기도 했다. 관솔불 밑에 드러난, 산발하고 피로 물들어 있는 지서방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 다. "꿈자리에 밟힐라." 중얼거리는 말에 "야?" 짝쇠댁네가 얼굴을 쳐다본다. "머라 캤십니까?" "아 아무것도 앙이다. 임자," "야." "이자부터는, 산으로 들어갈 긴데," "또 이사요?" "음," "아이구 무서리야 또 이사, 우째서 한곳에 못 있고, 무신 일이 생깄십니꺼?" "무신 일이 생기?" "순사가 또 쫓십니꺼?" "그런 일 없다." 건성로 대꾸하며 짝쇠는 '정말 지가 그놈이 죽었이까?' 잠시 눈을 붙였다 일어난 강쇠는 아침이라도 먹고 가라는 짝쇠댁네의 말을 뿌리치고 새벽길을 나섰다. 화개까 지 와서 강쇠는 주막으로 들어간다. "오늘 또 장사는 다 했거마는," 주모 비연이 강쇠를 보고 눈을 흘긴다. "가재미 될라꼬 저거이 저러나? 야, 눈까리 좀 바로 떠라." "사팔때기 안 될 긴께 걱정 마소." 술판 위에 술잔을 거칠게 놓으며 비연이 내뱉는다. "상판을 보아하니 간밤에 혼자 잤는갑다." "상판을 보아하니 간밤에 이장하고 왔는가배요?" "저놈우 가시나가 머라 카노?" "가시나라꼬요? 이 머심아가 뭐라 카노?" 비연은 눈썹을 곧추세운다. "쪽도리 안 썼이믄 할매가 되도 가시나가 앙이가? 술이나 어서 부어. 하기사 고렇기 땡삐겉이 쏘아야 맛이지 헤롱헤롱 사내놈 옷자락 잡고 늘어지는 꼴, 그건 다시없는 추물인께." "얼씨구 벵신 멋 한다 카더니," "오늘은 술판 안 엎을 긴께 병신 육감한다 해라." 강쇠는 부어주는 술을 단숨에 들이켠다. "자 한 잔 더." 마시고 술잔을 내민다. "부어." "사래 들겄소. 천천히 마셔도 누구 잡으러 안 올 낀께." 빈 술잔을 또 내린다. "국상이 났나? 와 이러요?" "국상이 나믄 음주와 가무를 금하는 법인데." "나라가 있일 적에 그랬겄지요. 야장스럽게, 이름이 좋아 국상이제," "니도 제법 말할 줄 아는고나. 하기는 국상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라믄 또 독약을 먹이서 직있다 그 말이요?" "독약을 믹이 직인 기이 앙이라 칼부림해서 직있제." "목을 쳐 죽일 놈들!" "비연아," "와요." "니도 청일교 믿었나?" "남원에 있다는 그거 말이요? 내가 와 그걸 믿소?" "교주가 죽었인게 국상 난 거 앙이가? 그놈이 옥새를 받았다고 허풍을 떨었이니. 하하핫 하하하... 으하하핫..." "나는 또, 실업쟁이 겉은 소리 대강 허소. 만세 소동이 나고 우리 주막에서도 술 좀 팔아묵겄고나 싶었더마 는," 한결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비연은 농조로 말했다. "하하핫... 핫핫핫핫!" "숨 넘어가겄소. 무신 웃음이," "술이나 부어." "천천히 드소." "날 생각해줄 때도 있나?" "미운 것도 정이라 카든가요?" "비연아." "그렇기 부른께 징그럽구마는," "니 춘매 그 할망구 알제?" "이 지리산 근동에서 그 할매 모릴 사램이 있겄소? 우리 이모하고도 아는 처지였인께," "니 보기가 우떻더노?" "산 구신이지 그기이 사람우 형상이겄소? 납독이 올라서 싯퍼런 그 얼굴 인가를 피해서 살았이니 망정이지." "니 눈에도 그렇더냐?" "아, 죽은 사람 가지고 와 그러요?" "니는 더 빠르기 그렇기 될 기다." "머라 카요!" "그 할망구, 본시 심성이야 안 나빴지. 젊은 시절, 그 시절이 나빴던 기라, 니도 좀 생각해야 할 기구마." 비연의 얼굴이 샛파래진다. 자주색 저고리의 빛깔도 우중충하게 변하는 것 같다, "머, 이래도 저래도 한평생 아니겄소!" 발끈했으나 불시에 봉변을 당한 듯 그의 낯빛은 회복되지 않았다. "못생기고 어줄이 겉은 놈이라도 찾거든 살림 채리라. 젊은 한철은 잠시고 늙고 벵든 날이 긴께." "누가 그때꺼지 산답디까?" "젊었을 때는 다 해보는 말이제." "치우소! 남우 걱정 말고 술 마시로 왔이믄 술이나 마시고 가소!" "내 가고 나거든 곰곰이 새기보아라. 지 멩대로 못 사는 기이 다행이지," 뒤의 말은 강쇠 스스로 누굴 향해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어허이, 참새가 방앗간을 두고 그냥 지나갈 순 없지." 두 사나이가 들이닥친다. 강쇠와 나란히 술판에 앉은 사낻르은 성급하게 술 달라고 서둘렀다. "거 술안주는 낙지로 하고." "에이, 낙지는 그만두고," "와?" "생각이 나서 안 되겄다. 속이 느글느글하구마." "오늘은 속이 느글느글한 사램이 많네. 무신 일로 속이 그리 느글느글하요?" 강쇠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묻는다. "송장을 만졌지요. 그것도 물에 빠져 죽은 송장 말이요. 낙지 말을 하이," "저승차사도 사람을 물물이 잡아가는 모양인데 이분에는 칼 맞아 죽은 송장 앙이고 물에 빠져 죽은 송장이라? 어디서 그랬소?" 수염에 묻은 술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강쇠 옆에 앉은 사내가 얼굴을 돌린다, "화심리 근방이었소. 배를 타고 오는데 시체가 떠 있지 않았겄소? 기생이라 카는데 생시에는 인물 좋았겄십디 다. 비단옷에다가 살성이 어찌나 희든지." "여자구마." 우울해 있던 비연이 기생이라는 말에 귀가 쫑긋해지며 "어디 사는 기생이라 캅디까?" 하고 묻는다. "최참판댁에서 살았다 하고 송장도 그곳으로 옮겨갔는데." "최참판댁?" 강쇠는 놀란다. "형씨도 아는 여자요?" "모르요." "어째 죽었이까요?" 비연이 또 묻는다. "아펜쟁이라 카든가? 아펜을 못 맞인께 미쳐서 물에 빠짔겄지." "나이는요?" "서른너댓? 그렇기 안 됐을지도 모르지." "아무튼지간에 최참판댁 그 집터가 안 좋은 기라." 끝에 앉은 사내가 중얼거렸다. "무신 소리 하노? 봉황이 집 짓고 살든 자리 앙이가," "그 소리는 또 처음 듣겄다." "그 말이사 머 그런 기고 대대로 만석 살림을 누리는데 집터가 나쁘다 할 수는 없지." "만석 살림도 좋지마는 씨가 말랐는데 무신 소요고. 사내는 대대로 소년 죽음이요,. 근자에 와서는 샐인에다가 곱새가 살았는가 하믄 또 물구신이 둘이나 났고," "물구신이 둘이라니?" "그것도 옛날 일이구마, 삼십년은 못 됐일 기고 내 나이 스물 안짝의 일인께. 종년이 하나 물에 빠지 죽었제. 그 밖에도 험한 일이 많았구마." "어느 집치고 사람 안 죽어 나가는 집 있더나? 우호나이야 있기 매련 앙이가." "우환도 우환 나름이라, 어디 집집마다 샐인 나든가?" "허허어, 그렇지가 않네. 아 그러씨 조씨네한테 뺏긴 것을 모조리 찾아낸 거를 보더라도." "비싼 술 마시고 별 할 일 없는 사람 다 보겄다. 남우 일에 와 그리 용을 써싸알꼬." 강쇠는 술판에 돈을 놓고 일어서며 말했다. "비연아 잘 있거라." 강쇠는 횡하니 낙나다. 쌍계사 쪽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 올라간다. '지가 그놈 정말로 죽었이까?' 이상하게 안 죽었으면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은 조금도 일지 않는다. 죽어주어서 좋고 그것도 남이 죽여주어 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 마음도 없다. '그놈이 미쳤지. 더럽게 죽을라꼬 그리 미쳤던가.' 지삼만의 성글고 노리끼했던 머리털이 생각났다. 독사처럼 꼿꼿하게 대가리를 쳐들던 옛날의 그 독살스런 얼 굴이 떠오른다. '그놈이 환장한 기라.' 강쇠는 허전했다. 다리에 힘이 빠져버린 듯 허전한 것이다. 여러해 전에 굴 속에서 그와 맞붙어 싸운 광경이 생각났다. 코피로 물들었던 얼굴, 관수가 허리춤에서 수건을 빼어 던져주었으나 지삼만은 그곳을 쓰지 않고 손 바닥으로 얼굴을 닦았었다. 그리고 비스듬히 드러누운 자세로 제 옷고름 한짝을 잡아 뜯어서 한쪽 귀퉁이를 찢어 콧구멍을 막고 나머지 고름짝으로 산발된 머리를 걷어 이마빼기를 동여매던, 그때 광경이 선명하게 눈앞 에 보인다. '그놈이 이런 말을 했지. 어느땐가 네놈의 그 막걸리살이 허옇기 오른 배때기를 푹 찔러서 돼지우리에다 던져 줄 긴께로, 확실허게 명념혀둘 것이여, 하고 그놈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강쇠 얼굴에 쓴웃음이 지나간다. '환장한 놈, 하기사 모두 친일파로 탈바꿈을 해가는 세상인데 지삼만은 잡신의 교주로 탈바꿈한 것인가, 그렇 게밖에 갈 수 없었던 길까. 미칠 수밖에 없었던 길까. 사방이 첩첩, 길이 맥힜인게 그 모지고 독한 놈이,' 휘청휘청 걸어 올라가는 강쇠의 얼굴에 옛날 동지였던 지삼만의 변신과 배반과 죽음에 대한 한줄기 눈물이 흘 러내린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환이 죽은 뒤 지삼만은 더욱더 깊이 주색에 빠졌다는 것이며 몸짓은 허황하게 더욱더 호들갑스러워졌고 웃고 울고 광대 같은 옥황상제 놀음에다 여자 옷을 입고 잠자리에 드는가 하면 동침 하는 계집 가슴을 더듬으며 비수를 내놓으라고 소리소리 치곤 했다는 것이다. 쌍계사에 가까워졌을 때 강쇠는 문득 주막에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기생? 그렇담, 봉순이라든지 그 여잔가?' 강쇠는 기화를 직접 만난 일이 없다. 혜관한테선지 아니면 관수한테선지 얘기는 더러 들었던 것 같았다. '옳지, 맞다! 그때 그런께 환이성님이 잽힜일 적에, 진주로 왔일때구나. 생각이 나누만. 석양이가 폐양 갔는데 그 기생을 데불로 갔다 캤지? 깨닫기는 했으나 그의 죽음에 대하여 강쇠는 별 관심이 없다. 그에게 죽음이란 늘 곁에 있는 일이었으니까. 16장 잠든 것같이 돋보기를 벗어놓고 일어선 혜관은 합장하며 "송안거사께서 어인 일이시오." 내방한 노인은 깡마르고 얼굴은 유순해 보였다. 남원에 사는 길서방, 그는 불교에 귀의한 지 오래였고 신심도 매우 깊었다. 우관선사가 살아 있을 적에 그를 신임하여 윤씨부인이 아들 김환에게 주라고 맡긴 토지 오백 석 지기를 길서방으로 하여금 관리케 했으며 그는 또한 하동의 장서방, 그러니까 연학의 부친과도 매우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앉으시지요." "예," 길서방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방이 밝아서 좋은디, 요즘도 출타가 잦은 게라우?" "옛날 같지는 않지요. 힘이 남아 있을 때 지그시 앉아서 시왕관음을 그릴 작정인데..." "그렇잖애도 이점 저점, 스님헌티 의논 좀 헐러고 왔지라우." "의논이라면?" "스님도 아시다시피 중 없이 수삼 년을 지내고 본께로 도솔암이 산짐승 놀이터가 되지 않았겄소? 헌디 이분에 젊은 중 한 분이 수도허겄다고 도솔암에 드싰지라." "그래요?" "말이 암자지 작은 절이라 혀도 과언이 아닌디 우리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단 말씨. 늦기나마 퇴락헌 암자를 바로허자니, 지금 목수 한 사람을 보내서 잡아보곤 있는디," "그러니 탱화 한 폭 장엄하라 그 말씀이지요." "바, 바로 그렇소." 길서방은 빙그레 웃는다. "하하핫 하핫하 송안거사께서 수고하시는데 소승도 힘을 보태야지요." "고맙구만이라우." 상좌가 작설차를 날라왔다. 찻잔을 들고 차 향기를 맡으며 "송안거사를 만나 뵌 지가 사오 년이 넘었을 터인데 어째 그런지 엊그제 본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구먼요." "맴이 가까이 있은께로 그럴 것이요." "그 말씀이 옳아요. 우리가 서로 알게 된 것도 삼십여 년, 우관선사 생존시부터니까 세월도 많이 흘렀소이다." "죄만 짓고, 쌓아놓은 공덕도 없이 허헛, 세월만 보냈지라우." "그런 말씀 하시면 이놈의 중 얼굴 들기 부끄럽소. 송안거사께서는 극락왕생할 것이요." "부처님의 말심을 깨닫지도 못헌 주제에 극락왕생이라니, 허허헛..." "요즘에도 하동 장서방 더러 만나시오?" "가끔 만나는디," "장사는 어떻소?" "아들놈이 맡아서 허고 나는 거드는 편인디 늘도 줄도 않은께로," "그게 좋지요." "나도 그리 생각허요. 장사라는 것도 생각허기 나름인디 갑재기 늘게 되면 갑재기 줄 수도 있고 천지지변이야 비단 장사꾼헌티만 미치겄소? 가령 물건 실은 배가 바닷속에 가라앉았다 그런 일, 실상 밑지고 남겼다는 것이 그리 대단찮은 일이란께요. 욕심이 큰일이지라우. 대개 밑졌다 헐 것 같으면 본전치길 것이고 많이 남겼다 헐 것 같으면 이익이 배가 되았다 볼 수 있는디, 다음 이치가 워떠크름 되느냐, 시세의 오르내림새 따라 값의 고 하는 있어도 물건의 수량에는 변동이 없인께 그런께로 밑진 사람은 싸게 판 것이요, 많이 번 사람은 비싸게 판 것인즉 한두 번 지나고 난달 것 겉으면 자연고로 형편이 거꾸로 된다... 허허헛... 장사꾼이 서둘지 않고 과 욕허지 않는다면은 허허헛 맘 편키 사는 것이 제일 아니더라고?" "그래서 상업이 성하면 백성은 방종해진다 하였소.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은 장사는 커지고 대신 맘은 비천해 지기 마련이지요." "그런 것은 모리겄는디 살다 보이." 상좌가 왔다. "손님 오셨습니다." "누군데?" 혜관이 묻는다. "저기 사팔뜨기," "이놈아, 사람의 성씨를 물었지 눈까리를 물었냐?" "성씨를 몰라서 그랬습니다." 하는데 강쇠가 "시님!" 하고 불렀다. "들어오게."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온 강쇠는 "아이고, 어르신네가 웬일이십니까?" "자네는 웬일이여?" "예. 지나가는 길에 들맀십니다." 자리에 앉는다. "어르신." "워째 그려?" "남원으로 돌아가시면 희한한 소문을 들을 깁니다." "희한한 소문?" "예. 지삼만이가 죽었십니다." "청일교의?" 혜관의 낯빛이 달라진다. "간밤에 칼에 찔려 죽었지요." "그럴 수가." 혜관은 강쇠를 노려본다. 강쇠의 소행인 것을 믿었고, 그 소행을 노여워하기보다 길서방 앞에서 거리낌없이 말 하는 행위를 노여워한 것이다. "자업자득 아니겄십니까?" "그러씨, 남원 일대를 족쳐놨인께 그 소위는 벌받아 마땅허겠으나, 누가 죽였는고?" "기른 개한테 물어뜯긴 거지요." "기른 개라니?" 처음으로 혜관이 입을 뗐다. "그곳에 함께 있는 늙은 것이 계집을 탐내고 저지른 모앵인데 사주는 임가놈이 했다는 겁니다." "자네는 워디서 그리 소상허게 얘기를 들었는감? 간밤의 일을." "볼일이 있어 그곳에 갔다가," 혜관이 숨을 크게 내쉰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천운이야." 강쇠는 쓴웃음을 흘린다. 길서방은 영문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곳엔 뭣 땀시 갔단가?"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조용한 절간의 한나절 숲속에서 산비둘기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주지스님을 만내서 인사 디리고, 그럼 먼저 가겄는디, 스님 안녕히 계시시오." 길서방이 나가자마자 "아까 한 말 정말인가?" 혜관이 성급하게 물었다. "거짓말을 와 하겄십니까. 그 어른까지 기시는데," "자네, 일 치러 갔던 게지?" "죽일라고 갔지요. 그것도 발등치기하는 놈이 생겨서 뜻을 못 이루었소." "참말 무슨 조호나지 모르겠다. 살다가도 아찔아찔해지니까 말이야." "내가 한 발 먼저 갔었더라믄, 임가놈이사 언제 가도 내 손에 갈 놈이었지만 칼질한 늙은 것, 그놈은 횡재했을 깁니다. 박복한 버러지였지요." "관대로?" "손 싹 씻고 앉아서 악종 세 놈, 아니 네놈이 가로 간 게지요." 결코 유쾌해질 수 없는 일인데 그러나 강쇠는 신이 난다는 몸짓을 하며 지껄이는 것이었다. "넷이란 또 무슨 소린고?" "청일교에 돈을 대주었다는 전주의 그 부자가 또 임가한테 지시를 했다는 것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강쇠야." "예." "이제 나한테 그런 말 하지 말게. 그멍로 돌아가야겠네." "언제 스님께서 일하겄다 말심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안 하겠다 안 듣겠다 하심서 하시야 했고 들어야 했인께 요." "이제는 신물이 나고 넌더리가 난다." "환이성님 원수를 갚은 셈인데 시니은 반갑지고 않십니까? "반갑기는 머가 반가워! 명색이 중인데 샐인을 반갑다 할까!" "명색이 중인데 동학 일 보신 거는 우짜고요." "이눔이 날이 갈수록 죽은 환이를 닮아가는구먼." "서당개 삼 년이믄 풍월을 안가 카는데 와 안 그렇겄십니까. 반평생을 함께 있었는데," 노닥거린다. 울적하여 견딜 수 없으면서 강쇠는 노닥거리는 것이었다. 혜관이라고 입 밖에 내는 말과 심중이 같았을 리는 없었다. 김환에 대한 애정이 강쇠와는 또다른 면에서 각별했으니까. 그러나 반가워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복잡한 심리는 강쇠와 같았을 것이다. "지가 그놈이 죽으려고 그랬던가." 입맛을 다신다. "와요? 모슨 일이 있었십니까? "얼마 전에 그놈이 졸개들을 끌고서 나를 찾아왔더구먼." "해서요?" "뭣 때문에 왔는지 가고 난 뒤에도 알 수가 없어. 씨도 안 먹는 말을 혼자서 잔뜩 지껄여놓고, 미친 놈이지 그 게 온정신인가." "머라 카든가요?" "지가 옳다는 게야. 지가 한 짓이 옳고 지가 판단한 게 옳았다는 게야. 불티같이 신도들이 늘어나고 수삼 년 내로 왕시 동학을 뺨치게 될 거라는 게야. 숨어서 일할 필요도 없고 고방마다 곡식은 가득하고 자금 조달쯤 누워서 떡 먹기요, 부자놈들 몇몇 목을 치면 황금이 쏟아져나온다, 그런 말을 지껄이면서 다시 회동하자든가? 제정신이 아니더구먼. 미친놈." 한동안 침묵을 지킨다. "한데 자네는 무슨 일로 왔다." "관수가 오기로 돼 있느데 행여 싶어서 와봤십니다." "아직은 안 왔네." "예." "석이도 온다며?" "관수하고 함께 올 깁니다." 혜관과 강쇠는 서로 맥바진 시선을 교환한다. "이곳에 들르게 되믄 저이 집말고 전에 환성님이 거처하든 그곳으로 오게 말심하십시오." 한동안 침묵이 지나간다. "서울에 있는 사람이 돌아오면은," "최참판댁의?" "천수관음을 조성케 할 게야." "무신 말심입니까?" "우관스님의 소원이었다." "그렇게는 안 될 깁니다." "와 안 돼?" "그거는 시님의 꿈이지요." "다시 만주로 갈 성싶은가?" "아마도," "왜놈이 가게 두지는 않아." "그라믄 우리가 다 가까요?" "흠," "..." "자네는 남아야 할 게야." "와 그렇십니까." "관수하고 석이가 떠나야 하니," "..." "도시 세상이 어찌 될 것인고, 선 자리가 날로 줄어드니 하늘로 날아 올라야 하는 겐지... 아닌게아니라 답답해 서 서울에나 한번 다녀올까 싶은데, 내 나이 좀 젊었더라면 중옷 벗고 싶은 심정이야." 혜관은 아까 한 말을 뒤집어놓는다. "환이성님만 살아 기시도," "심약한 소리," "힘찬 말심 아무리 해도 시님은 이곳에서 부처님이나 그릴 수밖에 없일 깁니다." 이번에는 강쇠가 아까 자신이 한 말을 뒤집어버린다. 두 사람은 겉보기에 화창한 봄날씨, 노곤한 한낮의 한가 로운 사람들처럼 허허헛 하고 웃는다. 강쇠가 혜관과 작별하고 동구 밖으로 나왔을 대 길편 숲속에 사내가 한 사람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었다. 그 는 강쇠를 보자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석이 앙이가?" "네. 저는 손님이라기에 누군가 싶었습니다." "관수는 안 오고?" "내일쯤, 진주의 나형사 그놈이 따라붙길래 따로 행동했습니다." 석이 얼굴은 말할 수 없이 수척했다. "또 들어가기가 뭣하니께 나랑 가자. 관수가 오면 만나게 연락이 돼 있이니께." "그러지요." 쿵쿵 소리를 내며, 바위 틈을 굴러내리는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두 사내는 내리막길을 내려온다. "나형사 그눔의 새끼 따문에 큰일이제." "..." "그만 콱 직이부릴까." "일 커지지요." "점점 일하기 어러버진다." "장소가 넓어지니 그물 구멍이 커지는 겁니다." 석이는 걸으면서 담배를 꺼내어 강쇠에게 권하고 자신도 붙여문다. "나형사 그놈이 최참판댁 바깥사람 따문에 바싹 달라붙은 모앵인다," "그렇지요. 연학이 그 사람도 꼼작할 수 없게 됐지요. 관수형님을 잡을려고 혈안이 돼 있습니다." "그쪽뿐인가, 부산서도," "관수형님만 안 잡히면 다른 사람들은 안 다치게 돼 있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강쇠형님이 부산으로 가셔야 합 니다." "니는?" "관수형님과 비슷해졌지요. 게다가 학교에선 쫓겨나고." "거기까지 손이 뼏쳐왔다 그 말가?" 하다 말고 "저기 가서 좀 앉자." 숲속을 가리킨다. 나무를 등지고 나무 밑둥에 퍼질러앉은 석이는 "학고에서 떨려난 것은 순전히 제 일신상 문제 때문인데 어떻게 보면 그걸 이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부 산으로 파고들어가는 기회일지 몰라요. 형님같이 완전하진 못합니다만 나형사나 부산의 경찰에서도 관수형님 만 추적하고 있어요. 관수형을 찾기 위해서 연학이, 양필구, 그리고 나 세 사람을 지목하는데 세 사름 중에 제 가 젤 흐미한 셈이지요." "빌어먹을! 수년 전의 일을 와 되삶는고 모리겄네. 아무 흔적도 없는 일을 가지고." "김선생께서 자살을 하셨기 때문이지요." "하고 싶어서 했나? 그 길밖에 구할 길이 없인께 했지."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놈들 머릿속의 의혹은 짙으게 남아 있는 게지요." "그러나 서울 까막소에 있는 사람하고 줄을 긋는 거는 순 억지다." "그거는 그렇다마는, 밥이 되기도 전에 재를 뿌린 부산의 일이 억울코나." "억울할 것도 없습니다. 그대로 있으니까요. 만주 국경이 가까운 원산하고 부산의 사정이 다르고." "부산서 관수가 쫓기게 된 건 극히 작은 실수 때문이었다.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나올 때 등사판으로 민 반일 구호의 삐라 한 장을 호주머니에 넣었던 것을 잊고, 술값을 치르면서 그게 돈과 함께 딸려나와 땅바닥에 떨어 졌던 것이다. 그가 나가자마자 심부름꾼 머슴 아이가 주워씅며 "아지매, 이기이 머요? 이상한 말이 씌여 있소." 하는데 술을 마시고 있던 형사가 낚아챈 것이다, 그러니까 사건은 삐라 한 장에 관수 한 사람, 우선 그 범위에 서 벗어나지 않고 있긴 있었다. 관수가 피신을 하였고 가게까지 추적을 당했지만 가족들의 거처나 관수의 신 상이 일체 비밀로 부쳐져 있었기 때문에,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는 사실이 경찰서의 긴장을 초래했으며 관수를 찾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쇠가 구축한 부두의 조직은 완전히 은폐되어 있었고 관수가 부상된다 하더라도 표면상으론 부두 노동자들 조직과 관수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돼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전적지가 불명하고 변성명을 했기에 나형사가 찾는 송관수와 부산 경찰에서 찾고 있는 인물이 동일하다는 것 은 모르는 형편이어서 다행이었다. "그보다 부산 일을 그냥 주저앉혔기 때문에 간도에서 가져온 자금을 지가 보관하고 있는데요, 그걸 강쇠형님 이 맡으셔야겠습니다." "관수한테 안 주었나?" "되돌려받았지요." "내가 맡을 순 없어. 혜관시님한테 드리도록 해라." "그렇게 할까요?" "아마 관수가 오믄 함께 오실 기다. 그는 그렇고 아까 핵교 쫓기 나온 것이 일신상 일 때문에 그렇다 했는데 일신상 일이란 멋꼬?" 석이는 대답을 안 한다. "말 못할 일이라믄 그만두고... 이자 생각하이께 한심스럽고 우스운 생각도 들고, 사람우 맴이란, 헛 참." "..." "담배 하나 더 도라." "네." 담뱃갑을 건네준다. 담뱃불을 붙이고 깊숙이 한모금 빨아당긴 강쇠는 "니 지삼만이 죽은 거 모리제?" "죽었십니까?" "음." "형님이 일 쳤군요." "앙이다. 일 치로 갔다가 횡재 만났지. 온 그게 횡잰지 먼지 모리겄다마는," "...?" "일은 남이 치러준 기라." 하고 강쇠는 간밤의 일을 대강 설명한다. "하하핫... 하하하핫, 일은 그렇기 된 기라." 석이도 쓴웃음을 머금는다. 그것은 비극이기보다 희극이었다. 언젠가 봉기 늙은이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속죄 하고 몰매를 맞던 그 이상의 희극이라 석이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한께 생각이 나는데 전에 니가 폐양 가서 기생하든 머? 봉순이라 카든가? 그 여자를 데리고 왔나?" 석이 눈알이 순간 새빨개진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지난 가을에 시든 잡풀을 뜯는다. "아편쟁이라믄? 아까 혜관시님보고 물어본다는 기이 깜박 잊었구나." "그것은 순전히 제 일신상의 일입니다. 아무도 관여할 수 없지요." 고개를 숙인 채 말한다. "머라 카노? 내 말은 그 여자가 죽었다 그 말이다." "뭐라구요?" 고개를 들고 강쇠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것도 물에 빠져 죽었다 카든가? 시체를 건져서 최참판댁으로 옮겨갔다든가?" "뭐라구요?" "놀랠 것 없다. 죽는 일은 우리하고 늘 가까운께... 주막에서 술 묵다가 귀담아들은 얘기제. 죽은 넋이 지가놈 하고 동행하겄고나 싶었다." "기화가 죽었다구요?" "봉순이 앙이가? 유모딸이라 카든가?" 석이가 벌떡 일어섰다. "가볼라꼬 그러나? 아서." 석이는 쏜살같이 숲속을 누비며 뛰어 내려간다. "저 아아가 와 저라제?" 강쇠도 일어선다. "석아! 석아!" 그러나 석이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겨울을 이 땅에서 보내고 아직 조춘이라지만 떠날 차비도 아니 하는가, 섬진강 위를 나는 철새가 석이 눈에 보인다. 나는 철새, 그 철새만 석 이 눈에 보인다. '거짓말이다! 오다가다 들은 헛소문이다!' 그러나 기화는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짓말이다! 주막에서 하는 말, 헛소문이지. 기화가 죽기는 왜 죽어? 지금까지도 살아왔는데.' 여전히 석이는 기화가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었다. 그는 걸으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다. "석아, 기별 받고 오나?" 보리를 밟다 말고 밭둑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야무네가 석이를 보고 달려왔다. "그 불쌍한 기이 어이구." 치맛자락을 걷으며 운다. 갈고리 같은 손, 잿빛 손등은 갈라져서 피딱지가 앉았고 팔목에도 피딱지가 점처럼 붙은 험악한 손이 떤다. 꽃샘바람, 흙바람은 아직도 야무네 손을 위해선 매운가 보다. "그 불쌍한 기이 하필이면 와 강에 빠지 죽었겄노. 아이구 불쌍해라. 내 딸 푸건이를 보듯기 했더마는." 석이는 야무네를 떠밀어내고 넋이 빠진 것처럼 최참판댁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 올라간다. "아이고, 기별이 벌써 갔을 리가 없는데 벌써 오시오?" 언년의 남정네가 말했다. 마루 끝에 지팡이를 짚고 앉아 있던 용이 슬며시 일어서며 백지장 같은 석이 얼굴을 빤이 쳐다본다. 집은 대궐같이 컸으나 상가집 같지 않게 조용했다. 하기는 침모의 딸이 어디 이 집 식구던가. 용이를 향해 석이가 다가갔을 때 용이는 "정신차리라." 하면서 석이 정강이를 지팡이로 후려쳤다. "기화는 어디 있습니까." "뒤채에 있다." 용이 지팡이를 짚고 앞서가고 석이 느릿느릿 뒤를 따라간다. 마루로 올라갔을 때 용이는 시신이 누워 있는 작 은방을 피하며 큰방으로 석이를 밀어넣는다. "기화는 어디 있습니까?" "앉아라." "네." 석이는 병신같이 무너지듯 자리에 앉는다. "우찌 알고 이리 속히 왔노. 아마 진주에 기별이 갔이까 하고 생각했는데." "쌍계사에 왔다가," "그래? 그라믄 오믄서 얘기 다 들었겄구나." "..." 두 무릎을 짚고 석이는 방바닥을 내려다본다. "봉순이는 니를 망쳐놨다믄서, 아마 그래서 지 목심을 끊었는갑다." "누가, 누가 그런 말을 했지요?" "누가 하기는, 연학이가 와서 나보고 한 얘기를 봉순이가 밖에서 들은 모앵이라. 핵교를 그만둔 얘기를 했제. 니 안사람 때문에 그랬다믄?" "..." "평생을 남우 폐만 끼친다 함시로, 죽으믄 애기씨한테 누가 되니 죽을 수도 없다 하기에 설마 이리 될 줄이야 몰랐제." "제가, 제가 기화를 죽인 것입니다." 그 말은 너무나 생소했다. 핏기 잃은 입술과 황황히 빛나는 눈동자에 비하여 그 말은 너무나 생소했다. "누가 직인 것도 아니고 지가 지를 직인 것도 아니고 멩이다, 팔자라. 처음에 잘못되믄 끝까지 잘못되는 기 고." 용이를 석이 마음을 자신의 마음같이 헤아리고 있었다. 아니 석이 아픔은 자기 자신의 아픔이기도 했다. 사나 이로 태어나서 하고 많은 일들이 있겠으나 창공을 나는 철새같이 짝을 찾고 짝을 잃는 그 절절한 염원과 절대 적인 고독을, 용이는 그 비슷한 생각을 한다. "기화는 어디 있습니까?" "저방에, 볼라나?" "네." "잠든 것 겉다. 물도 덜 마싰는가." 용이 음성은 평정했다. 그들이 막 방을 나서는데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개똥이가 지난 가을 열매를 맺어놓은, 새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꽃같이 매달린 망개나무를 꺾어 한아름 안고 마루로 올라섰다. 한 손에는 백자병을 들고 있었다. 석이 걸음을 멈추고 망개 열매를 쳐다본다. 그리고 시신이 있는 작은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개똥 이를 따라 석이도 용이고 말없이 들어간다. "염은 했다만 입관은 아직 못했다." 개똥이는 망개나무를 백자병에 꽂아 촛불과 향이 타고 있는 상위에 올려놓고 흐느껴 운다. 서럽게 흐느껴 운 다. "보순아, 와 주었노. 시, 시지(시집)도 모, 모 가오(못 가고) 와 주었노!" 발을 탕탕 구르며 울다가 그는 나갔다. "얼굴 한분 볼라나?" 용이는 얼굴에 씌운 것을 걷었다. 용이 말대로 기화는 잠든 것 같았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가지런한 눈시울, 백랍 같은 낯빛, 얼굴 위에 쓰러지려는 석이를 용이 막고 선다. 도로 얼굴을 씌우고 하얀 홑이불을 덮 어준 용이는 "분향하고 나가자." 간신히 분향을 한 석이는 비틀거리듯 방을 나섰다. 대청의 기둥을 잡고 채마밭을 바라본다. "처음 잘못 되믄 끝까지 잘못 되는 기라. 니는 앞길이 길고 할 일도 있인께 남 보기 거북하게... 니가 그러믄 봉순이도 나쁜 계집 안 되겄나." "..." "그만한 지각은 있일 기마다는, 관이 되믄 니가 입관하고 그 동안 술이나," 하다가 들어오는 한복이를 본 용이는 좀 난처해한다. "석아." "네. 한복이형님 오시오." 석이 기둥에 기댄채 말했따. "우찌 알고 니가 이리 빨리 왔노?" "쌍계사에 갔다가 소문을 듣고 왔단다. 모두 들어가자." 용이 대신 말했다. 한복이와 석이는 방으로 들어가고 용이는 언년이를 불러 술상을 차리라고 이른다, "졸지간에 무신 일이 이렇기 됐는고 기가 맥히서, 모도 안 좋은 일만 생기서 우짜노." 한복은 태연한 채 말했다. 자살은 언제나 그에게 어미 함안댁의 죽임을 상기시킨다. 안 좋은 일만 생긴다는 것 은 석이가 학교를 물러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또 형을 찾아간다는 명목으로 간도에 간 한복이는 공노인으로부터 적잖은 돈을 받아와서 석이에게 수교했는데 관수가 경찰에 쫓기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 다. "안 좋은 일이 있이믄 좋은 일도 있겄지." 용이 들어오면서 말했다. "솎아감서 살아야제요." "금년 보리 농사는 우떨꼬?" "그러씨요, 독새풀 때문에 애 좀 묵을 것 겉십니다." 17장 카페 "아제씨 안녕하십니까?" "아니, 이기이 누고?" "삼석이 친구 홍이 아닙니까." "아아 참 그렇고나? 이거 어디 말 안 하믄 알아보겄나?" "여전하구만요." 홍이 지난날 일본 가려다 말고 주저앉아서 반 년 동안 일을 했던 자전거포를 휘이 둘러보며 웃는다. "니 운전수 됐는가배?" "야." "잘됐고나. 삼석이가 그런 말 하기는 하더라만." "재식이는 장가갔지요." "그러모. 아아애비다. 도청 서기로 있지." "네. 저같이 공불 하기 싫어하더마는 그래도 관리가 됐구만요." "우찌 왔노?" "자동차가 고장나서 공장에 넣고 오는 길에 들렀습니다." "앉거라." "요새 재미가 어떻습니가?" "이 장사 말가?" "네." "밥 묵고 사는 정도지." "아주머니는 안녕하십니까?" "다 늙어빠졌지 머. 손주를 보고 나서 더 늙었다. "그때는 철이 없어서 애 좀 멕였습니다." "흠, 가끔 니 말을 하지, 인물 좋았다고. 여자란 늙으나 젊으나 면판 반반한 것만 친께." 자전거포 주인은 웃는다. "요즈막에는 살림집을 따로 해서, 가게는 나 혼자 보는데 손주 재미에 깨가 쏟아지는 판이라. 영감은 뒷전이 고," "아저씨." "음." "저기 건너편에 이발관이 그대로 있는데 아직 상길이라는 사람 저기 있습니까?" "상길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있었지. 그 아이도 늘푼수가 없어서 남의 고공살일 영 못 면한다. 아아새끼가 셋 이나 되니 허리 필 날이 없일 기라. 너는 성공했는데," "고공살이는 매일반 아닙니까." "그래도 다르지. 기술자치고 운전수라면 월급 칭아가 얼매나 난다고?" "어디로 옮겨갔습니까?" "옮기간 곳은 아니 먼 곳이다. 이편 모퉁일 돌아나가믄 저기 이발관이 하나 또 있는데, 월급 몇 푼 더 주겄다 고 뽑아갔는데 맘에 안 맞는 모양이라." "성질은 착한데," "심성이야 괜찮지." "옛날에는 지가 구박도 많이 했지요." "그러믄 가다가 술이나 한잔 사주어라. 푼돈이지만 술 좋아하는 것도 돈 못 모우는 원인인갑더마." "이거 빈손으로, 지나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왔더마는," "지나치다가 디리다보는 것만도 고맙지. 요새 젊은 사람들이야 어디 그런 인사성이나 있던가? 잘될수록 모른 척하기 일쑤고, 세상이 전과 같지 않아. 부산 어디서 사노?" "부산 있는 기이 아닙니다, 진주 있어요." "아 그래? 그라믄 삼석이 가아는 요새 우떻더노?" "맘 잡고 여관집 주인 노릇 자알합니다." "나이가 나인데 지도 맘 안 잡고 우짜겄노." "그럼 아저씨," "갈라나?" "네. 다음 부산 오면 또 들르지요. 안녕히 계십시오." "음, 야무지게 해라." 자전거포를 나온 홍이는 자동차 수리가 끝나기까지 별 할 일이 없고 갈 곳도 없어서 가르쳐준 대로 길모퉁이 를 돌아 이발관을 들여다본다. 이발관 안은 한산했다. 상길이 의자에 걸터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옛날같이 찌꾸기름을 바른 머리는 반들반들했고 햇볕을 못 보아 창백한 얼굴, 염증을 느끼게 하는 하얀 손, 모두 옛날 그대로였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오서 오십," 신문에서 눈을 떼고 하던 말을 마셔버린다. 홍이 웃는다. "호, 홍이 앙이가!" 신문을 팽개치고 벌떡 일어난다. 신문이 발빝으로 떨어진다. "왜 아니라." "어, 어떻게 알고 왔지? 자전거포 아제씨가 그러더나?" 홍이는 그냥 웃기만 한다. "참말 반갑다. 나를 찾아준께 고맙다." "이발관을 보니 생각이 나데." "나 니가 그리 될 줄 알았다." "뭘?" "운전수, 모자 본께." "바쁘나?" "월요일이라서 별 손님도 없다." "그라믄 나가서 점심이나 하자." "그, 그러자." 상길이는 연장자요, 기술도 좋았기 때문에 기죽을 처지는 아니었던 모양으로 점심먹고 오겠다, 봄내는 투로 마 하고 홍의 등을 밀며 이발관을 나섰다.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다 말고 "술집에 갈까?" 홍이 돌아보며 묻는다. "아, 아니 대낮부터," 상길이는 팔을 내저었는데 술 마시고 싶은 유혹을 간신히 누르는 것같이 보였다. 식당에 마주앉아 설렁탕을 청해놓고 "몇 년 만이고?" "칠판 년 됐는가?" "그렇기 되겄고나." "아이들이 많다며?" "말도 마라. 어디 도망이나 갔이믄 싶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든기라. 와 하필이믄 이발을 배웠는지 모리겄다." "유리창 밖에서 보면 제법 근사하니까 그랬겠지." "하기는, 촌에서 나와보이 내 눈에 그리 뵈더마. 흙 하나 안 묻히고 하얀 옷 입고 머리에 기름 바르고, 촌놈이 실속 없는 직업이라는 걸 알았어야 말이지." "지금 내 눈에도 넌 편안한 사람으로 보인다. 기름때 속에서 사는 나보담은," "공연히 날 위로할라꼬 그러제?" "돈은 좀 벌어도 고되서 못해먹겠다." "부산서 하나?" "진주," "음. 고되기 아니라 뼈가 뿌러져도 좋으니 지금 심정으로는 돈 좀 벌었이믄 싶다. 식구는 많지, 고향에 돈푼이 나 부치주어야지, 여편네 아아새끼들 헐벗겨놔도 돈 한푼이 안 모인다." 날라온 설렁탕을 홍이 편에 밀어주고 자기 앞에도 당겨놓으면서 상길이는 비관스럽게 말했다. "그때 너 친구, 벽돌 쌓는 기술자라 카든가? 그 사람은 성공했나?" "덕용이 말이구나." "착실해 뵈든 그 사람, 그때 벌써 고향에다 논 사고 밭 사고 해놨다며?" "말도 마라, 말도 마. 가아는 지금 까막소에 있다. 거기 비하믄 내 사는 거는 정승이다, 정승." "와 그리 됐지? 나쁜 짓 했나?" "나쁜 짓, 흥, 그것도 법을 어긴 일인께 나쁜 짓은 나쁜 짓이겠다만," "무슨 짓을 했는데?" "무슨 운동을 했단다." "무슨 운동?" "식는다 어서 묵어." 얼굴을 찌푸리며 상길은 설렁탕을 먹는다. "그러면 무슨 사회주의운동을 했다는 거야?" "그렇지. 바로 그거, 노동운동을 했단다." 세월이 무섭다. 마음이 착해도 다소 경망했던 상길은 아주 신중하게 보였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덕용이를 부러바했는데, 사단은 그 아아 기술이 좋아서 시기를 받았다는 것, 또 왜놈 오 야가다 밑에 있었다는 것, 그것 때문인데 성질이 무던해서 웬만했이믄 견딨겄지. 다 같은 일꾼이면서도 왜놈들 등쌀에, 그것도 그렇거니와 그놈의 오야가다 근모이 덕용이를 놔주지 않았거든. 일본까지 따라갔다가, 일자리 를 옮기기만 하믄 야료를 부리고 아이구찌(비수)로 얼굴까지 그어놓는 판국이라." "알 만하구나. 그러니까 일본에서 그런 운동에 가담했다, 그 말이야?" "그렇지. 조선에 나온 후에도, 말도 마라. 집안이 쑥밭이고, 촌사람들이 뭘 아나? 변호사다 머다, 오고가고, 논 밭 있는 것 다 날렸지. 효자라고 소문난 아인데 어매가 울고불고 해도 통 맘을 고쳐먹지 않는다 하더구만. 나 도 한분 가아 어매를 따라 면회하로 갔더마는 본인이 거절한다 해서 면회도 못하고 왔다." "딱하군." "딱할 정도가 앙이다. 사람 인심 참말로 고약하데." "..." "촌에서 밥술이나 묵을 때는 아들 잘 두었다고 칭송이 자자하더마는 아들이 그 지경이 되고 논밭 전지 날리고 보이 살아간 근거는 없고, 친척들도 화를 입을까봐 외면하더라는 거지. 할 수 없이 까막소에 있는 아들 근가죽 에 있일라고 부산으로 나왔는데, 겨우 딸아이가 고무 공장으로 나가 입에 풀칠을 하더마는, 그것도 오라비가 그리 된 거를 우찌 알았던지, 인벵할 놈들! 쫓겨났다 안카나?" 설렁탕 국물을 입속으로 떠넣는데 숟가락과 이빨이 부딪는 소리가 났다. "그러면 어떻게 살지?" "모진 목심, 못 죽제. 모녀가 뱃머리에 나가서 반팅이장사를 하는데 뱃머리 그곳이 좀 험한 곳가? 별의별 인종 이 모이서 하루살이 하는 곳인데 과년한 처자아이가 그 짓을 할라 카이, 참혹해서 못 본다. 왕치기 꽁보리밥에 숭년 들믄 나무뿌리 캐어 묵고 살아도 촌사람들 양반 앙이가. 처자들 집잭이는 거사 인종지말자가 하는 일이 고. 내가 있는 이발관이 뱃머리에서 가까운께, 오래비 함서 울고 뛰어온 기이 한두 번이 앙이다." "그새 장가는 안 가고?" 그 말에 상길이는 머쓱해진다. "왜? 안사람이 달아났나?" "달아났다 할 수도 있일 기다. 성례는 안 했어도 혼인할 거를 믿었는데 덕용이가 저리 되고 보이 뭐 후실 자 리로 갔다 카든가? 그기이 그놈아한테 큰 목을 박은 것 겉은데, 하기사 자식 낳고 사는 계집도 달아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홍이는 석이의 경우를 생각했다. '봉순이하고 어쩌고저쩌고 그거 다 핑계라. 그 계집이 안 살라꼬 그러는 기다. 살아볼 생각이믄 남정네 얼굴에 먹칠을 하고 학교 가서 모가지꺼지 짜르게 했겄나. 아, 아이새끼를 죽게 처박아둔 순악종인께 막설할라 카믄 진작 하는 기라. 새끼들이 불쌍치마는 그런 에미 있이나마나, 애새끼들보다 석이어매가 거무겉이 돼가지고 손 주새끼 따문에 우는 거는 차마 못 보겄더마.' 영팔의 말을 생각하며 홍이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석이 처 양을례의 경우는 어떤 의미에선 홍이에게 도 공포감을 안겨주었다. 아내 보연이도 그럴까? 자식을 버리고 등을 돌리는 여자, 그보다 무서운 존재는 없을 것만 같았다. "그거는 혼사를 안 했으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겠지. 남자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쑥스럽게 웃는데 순간 홍이 뇌리에 장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일어설까?" 숟가락을 놓고 이를 쑤시는 상길의 을씨년스런 모습을 쳐다보며 홍이는 불에 덴 사람처럼 일어섰다. "그래" 나를 찾아왔는데, 하며 점심값을 내려는 상길을 밀어내고 계산을 한 홍이는 밖으로 나왔다. "그, 그래 니는 언제 갈 기고?" 상길이는 마치 외로운 강아지가 매달리듯 물었다. "내일은 가야 할 건데," "어디 유할 기고?" "해가 지면 아무데나 여관에 들어야겠지. 어제삼엔 차 속에서 잤지만," "그, 그라믄 저녁에 한분 더 만내자. 이대로 갈라지믄 만내기 어러불 긴데 내 술 사께." "술이야 누가 사든 상관 있겠나만 공장에도 한번 들러야겠고, 조수를 놔두고 왔는데," "그래도 여관에 와서 자기는 잘 거 앙이가." "밤새 술 마시고 내일 일은 어찌 할려고? 면도하다가 남의 목줄기 찌르면 큰일 아니가." "잔소리 말고 저기 봐라." "뭘?" "저기, 부일여관이라 간판이 붙었제? 그 여관에 들어라. 니가 일찍 오믄 먼지 들어서 날 기다리고 내가 먼저 가믄 방 잡아놓고 기다릴 긴께, 알겄나?" 다지듯 말했다. "참," "니가 안 오믄 여관비만 내 손해본께 꼭 부일여관에 오니라." "그래 알았어." 비로소 상길이는 벙긋 웃는다. 홍이를 만나 반가워하면서도 우울한 빛을 감추지 못했던 상길이 처음으로 밝게 웃은 것이다. 손이 곱고 청결하다 하여 찌든 생활의 때가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며 머리칼에 찌꾸기름을 발랐 다 하여 노동자가 아니라 할 수 없는 이발사 상길이, 저보다 활달하게 발전한 gdh이의 출현은 이루지 못한 꿈, 눈부신 존재였을까. 홍이는 바지 주머니 속에 두 손을 지르고 마치 건달처럼 부둣가로 이르는 길을 걸어간다. 삐뚜름하게 쓴 운전 수 제모는 후리후리하게 큰 키에 잘생긴 그의 얼굴을 한층 돋보이게 했으며 우울한 것 같은데 한편, 자동차를 공장에 넣어버려 잠시나마 그 거대한 물체에서 놓여났다는 홀가분함, 해방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길편을 지나가는 여인들의 의상은 봄답게 산뜻한 것 같았고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한결 부드러운 것 같았다. 그리고 상길에 대한 우월감도 장난스럽게 고개를 쳐들었다. 식당에서 들언 어두운 얘기도 거리에 나서자 무산 되고 말았다. 석이의 딱한 처지, 보연의 경우, 아이들도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통증처럼 잠시 지나간 장이의 얼 굴도. 왜 부둣가로 왔는가. 홍이는 부둣가 큰 배 작은 배가 정박한 방천가에 여전히 바지 주머니 속에 두 손을 찌른 채 항구를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다. '훨훨 한번 날아보았으면, 멀리 먼 곳으로 가보았으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홍이는 참 오래간만에 그런 생각을 해보는구나, 하며 웃는다. "배 들어올 시간이다. 봄날의 개팔자 늘어져 자빠져서, 밥멕이줄 주인이라도 있나? 일어나라!" 지게를 받쳐놓고 햇볕을 담북 받은 채 입을 헤벌리고 낮잠을 자는 동료를 지게 한쪽 질빵만 어깨에 건 지게꾼 이 발길질하며 깨운다. "고동 소리 듣고 일어나도 늦잖어. 먼지 가나 늦기 가나 운수가 좋아야 짐을 얻지." 헤벌렸던 입을 우물거리며 눈을 감은채 중얼거린다. "내비나두어. 짐 얻어봐야 술 처묵을 긴데 마누라 머리끄댕이 좀 성하게 내비나두라니께." "흥, 그런다고 내 마누라 니 줄까봐?" 부스스 일어나며 흐릿한 눈이 항구를 바라본다. 홍이는 내 마누라 니 줄까봐? 하는 말에 우스워 발끝을 내려 다보며 웃는다. 배는 보이지 않는데 먼 곳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온다. 부둣가의 지게꾼들이 슬금슬금 모두 일어선다. 떡장수, 사과장수, 팥죽장수, 국수장수, 목을 뽑으며 항구 쪽을 본다. 기선회사 사람들도 어슬렁어슬 렁 걸어나간다. 항구는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지금 들어오는 배는 어디서 오는 거요?" 홍이 지게꾼한테 묻는다. "여숫배요." "아아." 배는 항구에 들어오면서 도 한 번 고동을 울렸다. 사람들은 산판쪽으로 밀려간다. '배 들어오는 거나 보고 갈까?" 방천 쪽에서 걸음을 옮긴 홍이는 산판으로부터 큰 거리로 이르는 통로 쪽에 우두커니 와서 멈춘다. 낮배 타고 오는 사람의 마중 나온 것처럼. 배가 산판에 닿자 작은 배들이 심하게 그네를 뛰고, 뱃고동이 둔중한 울림으로 사방에 퍼지고, 그러자 부둣가는 삽시간에 고함과 소음의 도가니로 변한다. 산판을 통해 선객들이 꾸역구역 밀 려나온다. 짐짝같이 밀려나온다. "아아니, 이게 누군가?" 구식이기는 했지만 의복이나 패물이 값진 초로의 부인이 홍이를 보며 걸음을 멈춘다. 홍이는 그 부인 뒤에서 걸음을 멈춘 젊은 여자를 멍청이 쳐다본다. 순간 여자의 얼굴이 빨개졌다. "거 이서방 아닌가." "네?" 초로의 부인에게 눈길을 옮긴 홍이 당황한다. 그는 장모의 시외숙모, 그러니까 보연의 할머니뻘 되는 사람이었 다. 홍이와의 혼사를 극력 반대했던 사람이다.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누구 마중 나왔나?" 했으나 어투에는 손톱만큼의 친밀감도 없었다. "아, 아닙니다." 얼굴을 붉혔던 젊은 여자와 또 그 옆의 젊은 남자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홍이를 쳐다본다. "아, 안녕하십니까?" 홍이는 모자를 벗고 허겁지겁 인사를 한다. "어머님, 이 사람이 누굽니까?" 나이는 동배, 아니면 한두 살쯤 아래인 듯싶은데 젊은 남자가 이 사람이라 한다. 상길은 우러러보았건만 이들 에겐 운전수가 천업이었던 모양이다. "음." 장모의 시외숙모는 시답잖은 것, 너희 들이 알아 뭐하겠느냐는 표정이었지만 "음, 너, 보연이 그 애를 아나?" "네. 전에 한두 번 본 일이 있지요." "그 애 남편이다." "아아 그 사람이요?" 웃음을 참는 얼굴이다. 이쪽이 누구라는 얘기만 했지 그쪽이 누구라는 말도 없이, 이 사람이요, 하며 웃음을 참는 그들의 태도는 더할 수 없이 모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홍이는 "제가 보연의 남편올시다." 하고 고개를 꾸벅한다. 젊은 여자는 물론 젊은 사내도 홍이의 인사를 묵살했다. 그들은 부부인것 같았다. 그러 니까 안늙은이의 아들과 며느리겠다. "자네 요즘에도 보연이 속썩이는가?" 그 말 대답은 없이 "바쁘실 텐데 어서 가보시지요." 웃음을 참던 사내는 태연할 수 없는 처지에 태연한 홍이 태도에 약이 오르는지 불쾌해하는 빛이 역력한 얼굴 을 쓰윽 돌리며 지나간다. '개새끼!' 왜 웃음을 참는가 홍이는 그 이유를 안다. 별 지체도 아닌 집안을 내세워 상민인데다가 어미가 어떻다 하여 홍이를 멸시하는 것도 그러려니와 통영서 있었던 사건, 장이와 만난 그날 밤 차고에서 있었던 사건은 그들에 게 꽤나 화제거리였던 모양이다. 홀가분했던 홍이의 기분이 꾸겨지고 말았다. 그는 사람들을 헤치고 거리로 나 왔다. 모멸을 나타내는 태도에 대하여 홍이는 벌써 오래 전에 그것을 극복했다. 그러나 차고 속에서의 사건, 그 수치 감은 여전히 홍이 내부에서 극복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수치와 더불어 장이에게 향한 연민도. '개새끼! 웃는 얼굴은 그야말로 후안무치다!' 홍이는 그런 유의 인간이 내 마누라 니 줄까봐 하던 주정장이 지게꾼보다 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교육을 받고 높은 지위에 있다 하여도 비천함은 고쳐지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인성이 나쁘다는 것이며 근본 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것이다. 홍이는 공장에 가본다는 것도 팽개치고 무작정 거리를 쏘다녔다. '상길이같이 심술도 없고 시기심도 없고 결코 인성이 천하지도 않은데 왜 세상에선 그를 업신여기나. 잘난 체 하고 돈이라면 족보라도 팔아먹을 것이요, 시기심 많고 강자에게 빌붙는 천한 것들이 왜 세상에선 우대를 받 는 것일까?' 땅거미가 질 무렵 홍이는 오기 바람에 번화가에 있는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일본 있을 때 동료들과 몇 번 가 본 일이 있어서 익숙할 것까지는 없지만 촌놈티는 내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조명 밑에 여급들 얼굴은 꽃같이 예뻤다. 신파에 나오는 여배우같이 모두 예뻤다. "당신 마도로스예요?" 몸을 한들거리며 여급 하나가 다가오더니 물었다. 붉은 조명에 여급 얼굴은 복사꽃 같았다. "아니, 그런 것 아니야." "그럼? 나 앉아도 돼요?" "마음대로." 여급은 홍이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목둘레를 많이 판 드레스, 목덜미 쪽에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마도로스 아니면 뭐예요?" "운전수," "아아 그래요? 운전수 돈 많이 번다지요?" "술값이 궁하지 않을 만큼은 벌겠지." "당신 참 미남이네요?" "얼굴보다 호주머니 사정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 유식해 뵈구요." "흥!" "바가지 안 씌울께요. 우리도 기분이거든요. 돼지같이 더러운 자식한텐 인정사정 볼 것 없지만," 여급은 손뼉을 쳐서 웨이터를 부르고 술을 주문한다. "저기 저 구석에 앉은 더러운 자식을 피해 나왔더니, 나 이래봬도 이 집에선 넘버원이거든." "술 마시고 나가다가 뒤통수 맞으면 어떡허지?" 홍이의 수작도 제법이었다. 거칠고 입빨라야 하는 운전수, 몇 해 해먹고 보니 홍이의 배짱도 어지간히 두둑해 졌던 것이다. "주먹에 자신 없으세요?" "운전수치고 주먹 못 쓰는 놈 없지. 그러나 뒤통수에 눈이 있어야지." 여급은 목소리를 굴리며 재미난 듯 웃었다. 아닌게아니라 구석에 앉은 사내의 눈이 순간 휘번덕였다. "운전수치고 주먹 못 쓰는 사람이 없다지만 이곳은 험한 곳이에요. 일전에도 왜놈 하나가 아이구찌를 휘두르 는 바람에 손님 하나가 다쳤어요." "주인이 공술을 아꼈거나 호주머니에서 돈 내는 게 늦었기 때문이겠지." "어마, 어떻게 그리 이곳 사정을 잘 아세요? 하지만 그 왜놈은 요다모노(깡패)는 아니었어요. 여급을 사이에 두고 쌈이 붙었다니까요." 술을 마시면서 홍이는 "그 여급이 너였지?" "그렇다 하면은 혼줄날까봐 손님이 피할 거구 안 그렇다면 내 인기가 없는 거니까 어떡허죠?" 홍이는 여급과 수작을 하며 꽤 많은 술을 마셨다. 유성기에서 음악이 흘러나왔고 붉은 불빛, 그야말로 홍등가, 홍등가의 밤이 저무는데 상길과의 약속은 까맣게 잊고 홍이는 기분을 낸다. "손님 장가갔어요?" "간 것 같나?" "갔을 테죠 뭐. 아이는?" "술맛 떨어진다!" "어떤 여잘까? 복도 많지 뭐유?" "언더막에 앉았다가 산태복을 만났지." 그 말은 장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처가 아닌 여자, 다른 남자한테 시집간 여자... 통영의 그 음침한 차고 속에 서 장이는 산태복을 만난 것이다. 얼마나 더 술을 마셨을까? 사내가 와서 여급의 팔을 끌었다. 음악이 귓전에 왕왕거렸다. 여자가 몽르 흔들었다. 여자의 혀 꼬부라진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머리채를 잡아챈다. "왜 이래!" 홍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주먹이 날아왔다. "나를 쳤어?" 여자의 비명 소리, 홍이 주먹이 사내 턱을 젖혔다. 비명 소리, 사내가 자빠지면서 홍의 정강이를 걷어찬다. 남 자들이 달려왔다. 남자들이 홍이를 카페 밖으로 떠밀어낸다. 사내를 끌어낸다. "밖에서 싸워!" 치고, 박고, 두 사내는 치고 박고 뭣 때문에 싸우는지 무조건 치고 박고 싸우는 것이었다. 서로가 지쳐서 나가 떨어졌다. 구경꾼들을 의식한 것이다.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뭔지 모르게 후련하다. 홍이는 비틀거리며 일어섰 다. 사내는 숨을 헐떡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다. "재수 더럽다!" 내뱉었으나 재수 더럽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홍이는 카페로 다시 들어가 모자를 찾아 들고 좀 억울하지만 굉 장히 비싼 술값을 계산했다. "손님 저 땜에, 미안해요." 풀이 죽어서 사과하는 여자 얼굴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지배인한테 야단을 맞은 눈치다. "술값은 제가 계산할 수도 있었는데," "남의 술값 낼 여우가 있으면 이런 데를 왜 나와!" 홍이는 소리를 팩 질렀다. 지배인인 듯 사내가 달려와서 굽실거리나. 술값 떼일 작정하고 밖으로 내쫓았는데 들어와서 술값 치르는 것이 의외였던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손님, 여급의 잘못이지요. 이봐! 싫고 좋고가 어디 있어! 적당히 놀아야지! 어디 한두 번이야? 아 아 죄송합니다." "그만두시오." 나오는데 지배인은, "또 오십시오." 홍이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또 와? 누구 패가망신시키려고?" 홍이는 거리로 나왔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헐떡거리던 사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홍이는 일본서 배운 유행가 를 흥얼거리며 방향도 잡지 못하고 거든다. 유행가도 그만두고 "개새끼! 산태복! 개새끼! 산태복!" 소리를 지른다. 밤하늘은 까마득했다. "여보!" "네? 날 불렀소?" 하다가 다시 "개새끼! 산태복!" "이봐!" 이번에는 여보가 아니다. "왜 그러십니까, 뭐가 잘못 됐소?" 걸음을 멈추고 빙그르르 돌아선다. 순사가 샤벨을 짤랑거리며 다가온다. "주정버리면 경범죄에 걸리는 것 모르나?" "어이구 나으리." 홍이는 모자를 벗고 꾸벅 절을 한다. "술 좀 마셨습니다." "떠들지 말고 가아." "네, 네," 모자를 도로 쓰고 홍이는 비틀거리기만 하며 걷는다. '제에기, 나으리? 지깟놈이 나으리? 똥개 같은 놈이 나으리?' 한참을 더 걷다가 홍이는 고개를 흔든다. 상길이 생각이 났다. "몇 시나 됐을까? 약속은 지켜야지. 없으면 그만이고." 사방을 둘러보았을 때 부둣가, 그곳과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것을 깨닫는다. 카페를 나온 뒤 부둣가하고는 반대 되는 방향을 향해 사뭇 걸었던 것 같다. "밤새도록 걷겠다. 제에기랄!" 방향을 잡는다. 거리에 사람이 오가는 것으로 보아 한밤중은 아닌 것 같다. 부일여관을 찾아들었을 때 "이홍 씹니까?" 여관 종업원이 묻는다. "그렇소." "저어기 들어가믄 칠호실이 있십니다." 손가락질을 해보인다. "사람 있소?" "기다리고 기실 겁니다." "오래 됐소?" "벌써 왔십니다." 홍이는 칠호실이라 씌여진 방문을 열었다. 상길이는 방바닥에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워 있었다. 눈은 천장을 보 고 있었다. "미안하다." "기다리노라고 목이 뿌러지겄다." 하며 상길이 일어나 앉았다. "아아니, 니 얼굴이 와 그 모양고?" "응?" "눈두덩이 시퍼렇고 입술에는 핏자국이고, 어느 놈이 그랬노!" "어느 놈이 그러긴, 왜? 찾아내서 그 새뼉다구 같은 손으로 원수 갚아줄래?"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집 아아들 다 끌고 갈 수도 있다! 안 되믄 뱃머리 불량배 한두 놈 응원해달라 할 수 있 인께 니를 친 놈이 누고?" "니 말 들으니 이젠 부산 와도 걱정 없겠구나." "실실 웃어?" "내 눈덩이 시퍼렇고 입술에 피딱지가 앉았다믄 그놈은 아마 팔이 뿌러졌거나 가슴팍에 피멍이 들었을 게야." "어이서 그랬노?" "술 마시다 그랬지." "제에기." "미안하다. 지금부터라도 술 마실까?" "미친 소리," "아아 또 마실 수 있다니까," "내일 차 몰고 가야 아 하나." "걱정 마." "정말로 공매 맞인 거는 아니겠제?" 술에 대한 유혹, 상길은 그것에 이기려고 애쓰며 화제를 돌린다. "내가 어떤 놈인데 공매를 맞나. 옛날 헌병놈한테 붙잡혀서 공매 맞은 것밖에 없다. 술이나 하자. 아직 초저녁 이야." 홍이는 손뼉을 쳐서 심부름꾼을 부른다. 상길이 눈에 희열의 빛이 돈다. 혀 끝에 느껴지는 술맛과 좋은 친구와 의 대화, 고독한 사나이가 고독을 푸는 밤. 부둣가에서 밤배가 들어오는지 뱃고동 소리가 꼬리를 물며 들려온 다. 18장 기인인가 "중도 늙으면 별 수 없는 게야. 이제는 탁발도 못하게 생겼으니 마지막인 셈치고 공노인을 한번 만나봐야겠네. 그 늙은이도 오래 사는구먼." 아침에 그런 말을 남겨놓고 혜관은 소씨 집을 떠났다. 관수는 지리산에서 강솨와 석이를 부산으로 보내놓고 혜관과 동행하여 서울까지 왔는데 숙소를 시구문 밖 소씨 집으로 정한 것이었다. 스물대여섯 칸쯤, 사랑채가 따로 있고 본시는 탄탄하게 지은 집인 것 같은데 오랫동안 손을 못 보아 그런지 황폐해 있었으며 식구가 적어 절간같이 조용했다. 게다가 당주인 소씨는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소씨란 누군고 하니 이범준의 외사촌형으로 서 소지감이란 사람이다. 나이는 관수보다 두세 살 위였으니까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으로서 세상에선 그를 두 고 기인이라 하는가 하면, 학문이 도저하다 했고, 더러는 천박한 한낱 야바위꾼에 지나지 않으며 지조 없는 인 간이라 했고, 고자가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문중에서는 소씨 가문 족보에서 할명해야 마땅할 놈이라 했다. 소 씨 가문이 경향에서 이름을 떨친 명문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하자 없이 이어져왔었고 무반으로서 현직은 아 닐지라도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적었다 할 수 없었는데, 당대에 이르러 국운이 쇠하여 주권을 잃게 되니 이런 부류의 반가가 영락의 경로를 밟은 것은 대동소이한 것이다. 소지감이 이십 년 가까운 방랑 생활을 시작한 것 은 의병에 가담한 형이 포살당하고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본 부친이 자결하는 격랑을 겪은 뒤부터였다. 그는 부친의 상을 벗자마자 홀연히 입산하여 명산대찰을 전전하며 승적에 드는가 싶었는데 오 년 만에 그는 노모 곁으로 돌아왔다. 집안에서는 절손을 근심하여 혼인을 서둘렀으나 한사코 마다하며 그는 또다시 엉뚱하게 성 당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유고를 숭상하며 불교를 배척하고 특히 천주교에 대해서는 완고한 편견을 가지고 있 던 문중 사람들은, 하여 소지감을 두고 족보에서 할명해야 마땅할 놈이라 지탄하고 외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성당을 드나들던 일도 때려치운 소지감은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알 길이 없으나 사십이 다 되어 노모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오랜 방랑을 청산한 것처럼 술회했으니 자위에선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대처를 아니 하고 가끔 광주로 나가는 일이 있었는데 겨우 명맥을 잇고 있는 그곳 가마에서 도공들과 어울려 그릇을 굽곤 했던 것이다. 관수가 소지감 집에 묵게 된 것은 이범준의 주선에 의한 것이지만 왕시 승문에 들려고 사찰을 찾아 돌아다녔 을 무렵 소지감과 혜관 사이에 면식이 있었고, 혜관이 금어였었던 것을 상기하여 소지감은 관수를 흔쾌히 받 아들였던 것이다. 혜관은 이곳에서 이틀밤을 관수와 함께 묵고서 떠났다. "형님, 오늘 제가 여기 왜 온지 아십니까?" "우리집 묵은 술 생각이 나서 왔겠지." 관수가 혜관을 따라 나간 뒤 소지감은 젊은 친구를 맞이하여 사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젊은 친구란 다름 아닌 극작가요 잡지 '청조'의 발행인 권오송이었따. 젊은 친구라지만 그도 사십을 넘겼다. "항상 호주머니는 빈털터리지만 술이야 어디 가나 만수판입니다." "흐음." 소지감은 허위대가 좋았다. 정수리가 성글어지기 시작한 것이 약간의 험이지만 눈이 검실검실하고 면도 자국 이 새파란, 낯빛이 깨끗한 사내였다. 표정이 움직일 때 반듯한 이마에 밀리는 듯한 굵은 주름이 지곤 한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은 형님 장가드시게 하려구요. 그래 왔지요." 중키에 다부지게 생긴 권오송이 소지감 앞에서는 작아 보인다. "내 걱정은 말구 자네 앞이나 가리게." "총각이 먼저 가야 홀아비도 가게 되는 것 아닙니까? 무슨 염치로 한 번도 아니요 두 번이나 순서를 바꾸겠습 니까." "뺨 세 차례로 끝나지 않을걸? 죽어서 이별하는 거야 인력으론 아니 되는 일이지만 독수공방도 유만부동, 어 느 계집이 생과부로 살려든고?" 소지감은 술잔을 들고 껄껄껄 웃는다. "내가 다 알지." "뭘 말입니까?" "네놈이야마로 흉물이다. 제 먹기 싫으면 남이나 주지? 그런 말이 있긴 있더라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요?" 권오송이 시치미를 뗀다. "청존가 뭔가 그놈의 잡진 뭣하러 해. 무익무해한 것 있으나마나," "첫술에 배부릅니까." "여자 돈까지 댕겨쓸려니 그놈의 궁상이 좀 하겠나?" 이번에는 권오송이 껄껄껄 웃는다. "선우일 그놈이 고자질을 했군요." "앉아서 구만 리 밖을 보는데, 몰랐나?" "비신술을 가졌다는 소문이야 들었지요만, 하하핫... 하하핫..." 흉허물없이 한바탕 웃고 나서 술잔을 든다. "형님," "또 장가 얘긴가," "왕사는 일단 논외로 하고 순수한 입장에서," "이사람아, 소씨 집안에서도 내가 마지막 보루라는 걸 몰라 하는 소린가? 혼담을 가져와도 하필 데릴사위," "허허 그러고 보니 형님께서도 관심은 있었던 모양이지요? 미주알 고주알 어찌 그리 잘 아시오?" "당연한 얘기 아닌가. 장가 안 간 총각, 시집 안 간 처녀, 관심이 없을 수 있나? 기대는 항상 있는 법이야." "그렇다면 간단하지요. 아주 간단합니다. 데릴사위 안 하면 될 것 아닙니까. 재물이 썩어나는 판인데 양자 갈 놈 없을라구요. 남들은 뭐라고들 하지만 제 생각엔 아주 순진한 여잡니다. 마포강 강서방이든 어쨌든 돈 많고 전문학교 나왔으면 귀부인 흉내는 못 내도 새침데기 흉내야 왜 못내겠습니까? 순사 누이도 잘해나가는데 이건 굴레 벗은 말같이 그 나이 하고서도 순진하다 그 말입니다. 지물포 황태수는 점잖은 영국 신사 아닙니까?" "그거야 그 사람 인품에서 온 거 아닌가." "하지만 주판을 잘 놓는다는 특성을 배제할 순 없지요." "주판 잘 놓기론 자네 편이 면수 아니던가?" "왜 이러십니까. 방직회사를 요리하는 사람과 딱종이로 그것도 일년에 서너 번 나올까말까, 그런 잡지 요리하 는 사람을 두고 누구 놀리시는 겁니까?" "자네가 그런 자리에 앉아보아. 주변에 얼마만큼이나 사람이 모일까?" "그런 자리 앉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글T[요." "황태수를 과소평가하지 말게. 성질이 눅은 것은 타고난 것이라 하더라도 절도란 상당한 수양에서 이루어지는 게야. 맺고 끊고, 판단이야 자네가 능하겠으나 음, 그렇지, 자네에게 있어서 냉정하다는 것은 일종의 처세술 아 닐까? 술이란 수양보다 처지는 것이요 본색으로 볼 것 같으면 눅고 격한 차인데 그 역시 눅은 편이 덕성에 가 깝고 격한 것은 편협에 빠지기 쉬운 만큼, 하기야 자네는 예술하는 사람이요 황태수는 장사하는 사람이니 적 소에 적재라... 그러나 주변에 사람은 많아도 황태수는 외로운 형편일 것이며 자네는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을 수 있는 처지고 보니 글쎄, 허허헛..." 권오송은 쓴웃음을 띤다. 정곡을 찌른 말이었기 때문이다. "형님은 어느편입니까?" "나야 폐인이지. 보다시피 장가도 못 가게 된 폐인이야." "뜨물에도 아이 생긴다는 말이 있어서, 하긴 기대하고 온 건 아닙니다만," "술이나 하게." "형님한텐 태평성세군요." 권오송은 술을 마시고 나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술맛 떨어지게 무슨 소릴 또 하려는 거야?" "만사를 구경만 하고 계시니까 말입니다." 순간 소지감의 한족 눈썹이 치올라갔다. "출발부터 그러했지. 형이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았고 아버님이 자결하시는 것을 보았다. 소씨 가문의 씨받이 로 홀로 남아 구경을 해야만 했지. 허허허허허..." 권오송은 아차 싶었던지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아직 소지감의 방황은 끝이 나지 않았구나 하 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마침 이범준이 관수랑 함께 들어왔다. "술들 하시는군요. 오래간만입니다, 권선생님." 이번준이 싹싹하게 인사를 한다. "어이구 투사, 오래간만이야." "지깐놈이 투사는 무슨 놈의 투사, 공연히 덤벙대는 거지. 아참, 권군 인사하게." 다소 겸연쩍게 서 있는 관수를 바라보며 소지감이 말했다. "시골서 오라오신 우리 조선 동포시다." 묘한 소개말이다. 그러나 조금도 농이 섞인 투는 아니었다. 권오송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든다. "송형, 이 사람은 굿쟁이요. 앞으로 알고 지내도 무방한 인물이요." 소지감은 관수에게 상당한 비중을 두고 소개를 했으며 권오송도 직감적으로 관수의 작은 눈매가 보통이 아니 라 생각한다. "권오송이올시다." "예. 나는 송관수요." 하여 네 사람이 술상 앞에 앉았다. "스님은 떠나셨소?" 소지감이 묻는다. "예." 이범준이 대신 대답했다. "어멈더러," 소지감이 이범준에게 눈짓을 했다. 밖으로 나간 이범준은 술잔부터 가져왔고 그리고 이 집에 비자로 있다가 그냥 눌러서 사십 년을 한결같이 봉사해온 중늙은어멈이 새로 술상을 차려왔다. "범준이 넌 빠졌으면 좋겠다." 술을 치는 범준에게 곁눈질을 하며 소지감이 말했다. "그런 고루한 말씀 마십시오. 제가 몇 살인데 그러시지요?" "아무리 그러셔도 형님은 아이고 범준이는 어른입니다." 네 사람은 술을 마시며 한바탕 웃어젖힌다. 그리고 관수와 권오송은 초면인 만큼 서로를 의식하며 술을 마신 다.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 말고, "계명회사건, 그거 말이야," 하고 소지감이 화제를 돌렸다. "기치가 뚜렷하지 않아." "그건 무슨 뜻입니까?" 하고 이범준이 반문한다. "사회당인지 공산당인지 어느 거야?" "당은 무슨 당이겠습니까, 요즘 흔히 있는 연구 단체지요. 굳이 붙인다면 독립당, 독립사상을 고무하는 반일 단체로 기소됐으니 말입니다." 권오송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술쩍 흘려버리려 든다. 관수는 잠자코 술만 마시고 있었다. "권군은 겉보기보다 소심하군 그래." "소심한 건 사실입니다만 그 문제에 대해선 소심할 이유가 없지요. 나는 그 어느것도 아니니까." "자네하고 나하고, 그런데 당이 되려면 한 사람이 모자라. 찬성하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 중립하는 사람, 최소 세 사람은 돼야 당이 구성되는데 말씀이야?" 하며 소지감은 관수를 힐끗 쳐다본다. "그럼 형님 말씀대로 뚜렷한 기치는요?" 이범준이 웃으며 물었다. "그야 구경등이지 뭐겠나." 권오송이 술잔을 들며 대답한다. "어떻습니까 송형? 우리 당 하나 안 만드시겠소? 범준이놈이야 이미 사회당이니까요." "고려해보겠소. 하하핫..." 실없는 말이 오가면서 술자리는 차츰 어울려져갔다. "한데 말입니다. 왜놈들이 조선에 있어서도 독립사상보다 공산주의를 더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범준이가 권오송 술잔에 술을 부으며 말했다. "그야 말할 나위 없지. 조선이야 저희들 전리품이요 이미 기득권을 가졌으니 독립 독립 해봐야 물어뜯는 모기 정도 귀찮겠으나, 공산주의야 그렇지는 않지. 재작년인가, 다나까(전중)가 시정 방침을 발표할 때 중국에 있어 서의 공산당 활동은 일본과 무관할 수 없다 한 것을 보더라도 그들이 내심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거든." 소지감 말에 관수는 "소형 말심을 들은께 그라믄 우리 조선 백성은 모기다 그 말심이요?" "호랑이지요. 원숭이 눈에 우리가 그리 뵌다 그 말 아니요. 과욕은 눈을 멀게 하는 거 아니겠소?" "서의돈 그 형님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물산장려운동에 소극적으로 관여하거나 방관하는 총독부의 속셈은 장 차 허울만의 민족자본 진영을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방패막이로 삼겠다는 포석이라고 한 말이." 권오송 말에 "그 사람과는 면식이 없어서 그 고견을 들어볼 기회는 없네만 대체로 옳은 의견 같구면." 약간 비꼬는 투로 소지감이 말했다. "그러고 보면 황태수는 그 방패막이가 아니겠습니까?" "아까 한 내 말을 그런 식으로 둘러치긴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허나 그런 것쯤은 알고 있는 사람일 게고, 그렇게 안 할 궁리는 하는 사람이니 어렵지." "황태수 혼자 안 하겠다 해서 되는 일입니까? 자본이라는 구조 자체가 제멋대로 돌아가게 마련인데 자본금을 노동자들한테 나누어주고 공장 때려치울 용기가 황태수에게 있단 말씀인가요?" "너무 극단적으로 몰아치는 것은 금물이야. 그게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소위 소아병적이란 말을 듣게도 되는데 연장은 쓰기 나름이라 했다." "하지만 원리 원칙은 어디까지 원리 원칙이니까요." "원리 원칙대로 안 할 수도 있는 일이고 원리 원칙대로 안 되는 일도 얼마든지 있어." "그건 시간 문젭니다." "그 말엔 동감이다. 그러니 불은 시간을 보아가며 서서히 붙여야, 성급하면 원리 원칙으로 도달하기 전에 동강 이 나든지 역전될 수도 있거든." "독소가 넓게 퍼져도 말입니까?" "홈싹 곪게 두었다가 째야지 곪기 전에 째면 어떻게 되나?" "반대의 비유는 얼마든지 있겠습니다마는 그렇게 되면 계란과 닭의 얘기가 되겠기에 한 가지만, 이건 제 얘기 가 아닙니다. 서의돈 형님의 말씀인데요, 우선 다 함께 굶주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이상론이 어디 있어? 그 사람 생각한 것보다 무척 어리석군." 소지감이 비웃는다. "물론 그건 극단적인 말이겠지요. 그러나 민족의 분열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가, 그것을 한마디로 어리석다 하며 비웃을 순 없을 것 같아요. 옛날의 당쟁이란 그런대로 명분이 있었고 또 권세에 눈이 뒤지힌 무리라 하 더라도 최소한도 명분이나 구실은 내세울 수 있었지요. 매국노라는 지경에서 보면 안전 지대에서의 쌈질이었 으니까요. 지금 친일파나, 본의 아닌 것이지만 친일하지 않고는 명맥을 이을 수 없는 사람, 반일사상을 가졌음 에도 이적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 그런 무리들을 통틀어서 생각할 때, 오늘, 혹은 장래에 있어서 그들 이 서야 할 자리는?" "물론 매국노, 민족반역자가 설 자리겠지. 자네한테도 이적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걸 뉘 알겠나." 소지감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부텁니다. 그들 매국노, 민족반역자들의 정신적 궁지, 명분이나 구실이 절대로 허용될 수 없는 정신적 궁지, 그 상태를 우리는 생각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의식하건 아니 하건 그런 정신적 궁지는 생존하는 데 있어서 마지막 절벽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지요. 마지막 절벽에서 이성이나 양심이나 여유를 가질 자가 과연 있겠습니까? 왜놈들은 적어도 애국이니 충성이니 하는 명분이나마 내세우고 서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침략을 자행하고 무자비하게 식민지를 통치하는데, 낡은 인조견 같은 것이지만 눈가 리개 같은 명분은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네들과 우리 서로가 분명한 적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민족반역자 들은, 우리가 그네들의 동집니까? 대일본제국이 그네들의 동집니까? 대의명분이 없는 적과 동지가 있을 수 있 습니까? 말하자면 기막힌 외톨이지요. 이들의 생존 본능이 얼마나 비천한가를 설명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그 러나 포악성만은 적의 유가 아닐 것이며 교활한 것 역시 적의 유가 아닐 것이며 정신적인 그 아무것도 지킬 것이 없는 자들이야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앞잡이가 아닌가." 이범준은 사촌형과 권오송의 대화를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으며 관수는 무관심한 듯 술만 마시고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건 배신자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며 특히 타민족에게 정복당한 땅에서는 민족반역자란 독버섯처럼 자라게 마련이고, 또 식민 정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복한 민족의 마지막 한사람까지 민족반역자 를 만드는 데 있는 것이고 보면, 침략의 군대를 막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반역자도 막을 수 없는 것은 필연이 아니겠나? 내가 이런다고 해서 사태를 절망하여 체념한다고 생각하지는 말게. 왜냐하면 일본도 불가사 의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 식민 정책의 궁극적 목적은 결코 달성할 수 없는 것이며 또 운명에 맡기고서 인위적인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도 아닐세. 하기야 내 얘기도 따지고 보면 서의돈인가 그 사람의 이상론과 별 다른 것이 없다 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가능한 한 족치고 메어치는 것보다 안아들이는 것이 교활한 방법이지 만 전략 전술의 견지에서 본다면 못할 것도 없고 절벽에다 몰아세우는 것보다 평지로 몰아내리는 것이 긴 안 목으로 볼 때 유리하지 않을까? 오늘 황태수 그 사람 귀가 가려울 것이네만 그 사람을 얘로 들더라도 어째서 자네들은 그 사람을 적의 수중으로 넘겨주지 못해 안달이냐, 나는 그 말을 하고 싶네. 연장은 쓰기 나름이요, 또 굶어야 한다는 구령 하나로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애당초 남한테 내 나라 빼앗겼을 리도 없지. 사람 의 마음이나 살아가는 방법이 천태만상이니 이론대로 틀 속에 끼우려 들면 그 이론은 쇠붙이처럼 굳어져서 사 람들 마음속에 스며들질 못하고 사람들 배만 째는 결과가 되는 게야." "그렇지만 나는 형님 말씀에 승복 못합니다. 온건주의와 기회주의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그래? 내 기억엔 극좌파 기회주의란 말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럼 제가 극좌파다 그 말씀입니까?" "그럼 내가 온건주의다 그 말인가?" 하다가 두 사람은 껄껄껄 웃고 이범준도 웃는데 관수는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 었다. "그나저나 요즘 국제 정세가 어떻게 되는지, 큰 변화게 있지 않겠습니까?" 이범준은 두툼한 입술을 모으듯 하며 물었다. "큰 변화라... 글쎄," "변화가 있지 않겠느냐가 아니지.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어." 권오송이 이범준에게 말했다. 소지감은 "장강(양자강) 일대가 붉은 깃발로 메워졌던 시절이 가는 거지." "그렇게 쉽게요?" 권오송의 어투는 강경했다. "누가 뭐라든 손문은 거인이야. 손문이 살았더라면 국민당 내부의 좌우 대립이 그리 심각했을까?" "나는 그렇게 보진 않습니다. 손문이 살았어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났을 거란 생각입니다." "어째서?" "심복인 장개석을 소련으로 보낸 것은 물론 보로틴의 영향이며 소위 손문의 용공 정책을 위한 포석이겠지만 그의 용공책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현실이 빚어낸 것에 불과하며 정치 이념에서 작정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의 삼민주의라는 것도 널리, 시끄럽게 퍼진 데 비하면 실상 별 보잘것없는 것이며 오히려 분주했던 정치적 행동에 의의가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골수에서부터 부르조아의 민족주의자, 의도는 당세의 확장 이외 아무것도 아니었을 겁니다. 손문이 죽었건 아니 죽었건, 장개석이 돌아왔건 아니 돌아왔건 사태는 매한가지였 을 겁니다. 공산당이 국민당에 가입하면서부터 대중을 획득하는 운동은 성공하였고 노동자 농민들의 조직이 급진전했다는 것은 국민당이 우파로선 좌시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 물결을 탄 것이 소련서 돌아온 장개석 이 아니었을까요? 국민당의 좌파가 재작년에 무한정부를 따로 수립한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 나는 생각합니 다." "바스라지기 시작하면 한없이 바스라지게 마련이지." "네. 그 뜻 압니다. 형님의 종전의 이론과 상맥하는 말씀인 줄 잘 압니다. 분열은 분열을 부른다, 그러나 형님 빙탄불상용은 엄연한 진리 아닙니까? 국민당의 좌파 무한정부에서 공산당이 떨어져나간 것은 바로 빙탄불상용 이기 때문이며 손문이 살았어도 그 진리는 진리대로 통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농민협회 회원이 오백만, 오사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상해 청도를 비롯한 각처에서의 노동자들의 격렬한 스트라이크, 그런 힘의 팽창은, 그것을 공산당의 침투로 생각할 때 국민당 우파는 물론 좌파에게 있어서도 공포 아니겠습니까? 해서 무한정부 왕조명이 공산당을 축출하려 했고 공산당은 또 자퇴하는 사태를 빚었는데 그것은 장개석을 위해선 그럴 수 없 는 요행이며 어부지리를 얻었다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 장개석은 무한정부 토벌령을 내리고 있으니 말 입니다." 소지감은 웃었다. "그래서 지금 일본은 장개석하고 손을 못 잡아 환장하고 있질 않나. 자네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장개석의 국민 당 정권과 우리 조선 독립의 유관이지?" "그렇습니다. 일본과는 전쟁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장개석의 속셈일 겁니다. 일본이 던지는 추파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음..." "일본의 보수파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두려워하는 것은 거의 광적인 것인데 이 몇 해 동안 중국을 흔들어대 고 있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는 거의 일본인 경영의 방직 공장, 혹은 동척에서 자금을 대는 위탁 경영업체 에서 발생했는데, 물론 영국도 같은 처지지만 그런 운동이 중국을 석권한다면 일본이나 영국의 자본이 축출될 것은 물론 집권당이 무너질 것은 뻔한 일 아니겠습니까? 영국이나 일본이 결코 국민당과 친구가 아니면서도 이들은 공동의 적을 맞이한 셈이지요. 그러나 영국과 일본의 사정이 다른 것이, 영국은 자본이 축출당하고 시 장을 잃는다는 것, 그 직접적인 이해 관계가 화급한 일이겠으나 일본의 경우는 중국으로부터 탈취한 권익을 잃는 것도 그러려니와 보다 심각하고 치명적인 것은 중국과 소련의 접근이지요. 따낸 기득권은커녕 그들의 발 뿌리가 흔들릴 테니 말입니다. 아까 형님이 말씀하신, 다나까가 중국에 있어서의 공산당 활동은 일본과 무관할 수 없다, 그 말에서도 우리는 그간의 사정을 충분히 알 수 있지요. 우리 처지로서는 국민당이건 공산당이건, 그 어느 당이건 상관없어요. 일본과 전쟁만 해주면 좋다, 그 말입니다." "서로 치고 싸우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우니까 결국 싸우기는 싸우겠지만," "언제 싸우느냐, 우리로선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거 아닙니까?" "무조건? 그렇게 돼서도 안되지. 청일전쟁, 노일전쟁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나?" "그야 이기는 전쟁이라야겠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요. 그땐 선잠 깬 아이 같은 우리의 형편 아니었습니까. 총검 든 얼마간의 군사가 궁궐을 지키는 정도, 웃기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적어도 사람들의 의식은 무장되어 있으니까요." "그건 오산이야. 연극을 만드는 자네 머리의 판단이고, 싸움이란 물량이 앞서는 게야. 내 생각엔 일본을 향해 덤비기 보다 일본에 의해 일본의 적을 향해 총대를 들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요?" 긴 얘기를 하면서도 다부지고 냉정한 자세를 허물지 않았던 권오송 얼굴에 처음으로 분노의 빛이 떠오른다. "등바닥에 총대 들이대면 별수없지. 게다가 그들은 아주 확실한 인질을 붙잡아놓고 있으니 말이야. 나같이 허 랑한 사람에게도 늙으신 어머님이 계신데, 안 그런가?" "..." "모두 굶어야 한다, 하듯이 모두 싸워야 한다... 안 통하지. 만셀 불렀다고 군대를 불러 학살을 자행한 소위 대 일본제국, 뿐이겠나? 제 나라 인민들의 소요를 막기 위해 그 인민들로 하여금 조선인을 살육하게 한 관동진재 의 사건은 아직 생생해. 흠, 전쟁이 어떤 건데? 호전적인 그놈들 미치지 미쳐. 제 나라의 제 백성들을 개 몰 듯 전선으로 몰아내는 판국에 하물며 식민지 백성들, 사람 백정의 군부에서 무슨 짓인들 못할려구." 관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범준이 당황하여 관수의 빈 술잔에 술을 붓는다. "군대뿐일까?" "..." "계급과 착취를 부정하는 소위 사회주의자들, 사실은 그 사회주의자들이 안고 있는 허약성은, 지식인으로서 착 취를 당하는 계급이 아니라는 점, 하여 일본의 사회주의 지도자들 거반이 학벌이나 가문을 볼 때 명문 출신이 며 선택받았다는 의식이 새로운 사상을 영합하게 한 것이고 따라서, 보호받고 잘 자란 아이가 새로운 세계를 엿본 흥분이나 호기심이라 할 수 있는데 과연 그네들이 자신들 계급과 완전히 절연하겠는가? 하여 국가의 경 우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그 말인데, 논리적으로 계급과 착취를 부정한다면 식민지 정책도 부정해야 마땅하 거늘 편리하게도 사상 놀음은 어디까지나 집안에서만, 허허헛... 강식약육의 팽창주의를 지탄하기는커녕 군부의 앞잡이로, 옛날 남의 궁궐을 넘나들며 남의 나라 국모를 시해하던 낭인들과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를 것이 없 으니," "군부의 앞잡이라는 것은 좀 심한 말씀이군요." 이범준의 말이었다. "거짓말 같은가?" "탄압받고 투옥에 살해까지 당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 아닙니까." "저희끼리일 때는," "무슨 뜻입니까?" "저희끼리 대할 때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군국주의 자본주의 국수주의, 별의별 것이 다 있겠으나 일단 타민족 을 상대하여 이해타산을 따질 적에는 어려울 것 없이 모두 군국주의자가 된다 그 얘기야. 내 말이 틀린 것 같 은가? 그것도 동양의 평화라는 그럴듯한 깃발을 치켜들고서," 소지감은 마른 명태를 질겅질겅 씹으며 메마른 표정으로 이범준을 응시한다. "민족의식이란 가지가지 낯판대기를 지닌 요물이야. 악도 되고 선도 되고 야심의 간판도 되고 약자를 희생시 키는 찬송가도 되고... 피정복자에게 있어서 민족의식이란 항쟁을 촉구하는 것이 될테지만 정복자에게 있어서 의 민족의식이란 정복을 고무하는 것이 되니 말씀이야. 민족의식, 동포애, 애국심, 혹은 충성심, 따지고 보면 그것들은 인간 최고의 도덕이면서 참으로 진실이 아닌 괴물이거든. 집단의 생존 본능이요 집단의 탐욕을 아름 답게 꾸며대는 허위, 어디 민족이나 집단뿐일까? 일가에서 개인은 어떻고? 결국 뺏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투쟁 아니겠나?" "너무 자학적으로 그러지 마십시오." "사실이 그렇지." "형니임! 인간은 말입니다, 고귀한 것도 아니며 비천한 것도 아닙니다." "허허헛..." "현실적 동물일 뿐이지요. 자아 수이나 드십시다." 자포자기하는 투로 권오송은 내뱉으며 술잔을 든다. "고귀한 것도 아니며 비천한 것도 아니라.. 아니지. 비천한 거야. 말할 수 없이 추악하고, 제 밥그릇 작은 것을 곁눈질하면서 뭣인가로 항상 가리면서 감추면서 사는 게 인간이야. 어쩌면 인간이란 죽음 그것까지도 허위로 장식하는 동물이 아닐까?" 권오송은 눈살을 찌푸린다. "그만해 두십시오. 그렇다면 도대체 사람은 뭣 때문에 삽니까? 인생이 아무 의미도 없다 그 말씀인가요?" "어째서 아무 의미가 없나. 뭣인가로 가려면서 사는 그 자체가 의미 아니겠나?" "그런 역설이 어디 있습니까? 허위가 사람이 사는 의미라구요?" "나는 아니야!" 순간 소지감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나는 살고 싶은 본능 때문에 살아온 게야. 그러니 인간 이하 아니겠나?" 메어친다. 이범준은 소지감의 갑작스런 얼굴빛의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기색이다. 그는 얼굴을 숙여 버린다. "내 부친이 이조 오백 년, 운명을 같이하시고 형이 의병으로 총살당한 그때 장성했던 내가 홀로 살아남은 것 을 두고 말하기를 대를 잇기 위하여, 소씨 가문의 단절을 막기 위하여, 그것은 참으로 타당한 내 생존의 이유 라 할 수 있었지. 남에게도 내 자신에게도,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했어. 대를 이 어야 한다, 소씨 가문의 문을 닫아서는 안 된다, 하는 의무도 죽음에 대한 공포, 그 불명예스런 감정을 교묘하 게 안성맞춤으로 은폐해주더군. 하하하핫핫..." 권오송과 관수는 놀라며 온통 웃음으로 주름이 잡힌 소지감의 얼굴을 쳐다본다. 이범준은 더욱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것은 심정적으로 국가에 대한 반역이며 부친과 형에 대한 배신이었다. 뜨거운 낙인같이 달팽이가 집을 짊 어지고 다니듯이 평생 배신자의 죄책감을 짊어지고 다녀야 했으니... 그놈의 짊어진 짐을 부리려고 온갖 지랄 을 다 해보았으나 무슨 소용이 있어? 여전히 배가 고프면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었고 눈꺼풀이 무거워지면 잠 자리를 찾았고, 연명할 이유도, 연명해가며 해야 할 일도 없으면서 죽음은 여전히 두려운 것이더군." 아무도 그 말에 대하여 입을 여는 사람이 없다. 관수와 권오송의 눈이 마주친다. 그새 여러 차례 술을 날라왔 고 상당한 주량이 창자 속으로 흘러 들어갔을 터인데 술에 취한 기색이라곤 없는 네 사나이. 이범준은 연소자 라 다소 삼갔었겠지만. 소지감이 훌쩍 일어섰다. 툇마루 쪽의 장지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햇볕에 녹은 공기가, 그러나 아직은 냉기를 품은 바깥 공기가 방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해는 서편에 기울어가고 있었다. 황폐한 고 가, 돌담 위의 용마루 기와는 부서지고, 다만 삼십 년은 족히 될 성싶은 목련 한 그루가 있어서 하얀 꽃이 사 랑 앞마당을 가득 채우고 은은한 향기를 뿜는다. 지는 해를 받은 목련의 하얀 꽃가지는 장관이였다. 잠시 동안 목련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듯하던 소지감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면대한 지 며칠도 안 되는 터에, 송형, 추태를 보여 미안하외다." 이범준이 마음을 놓은 듯 피시시 웃는다. "지한데 미안할 것 머 있겠십니까?" 관수의 무뚝뚝한 대답이다. "여기 두 사람은 내 성품을 익히 아는지라, 또 짖어대는구나, 할테지만," "본시 배운 기이 없어서 언애꼬꾸랭이도 실하지 못한께 알아들을 말심도 있고 못 알아들을 말심도 있고 그런 대로 심심치는 않았소만 답대비 서울 사람들은 입으로만 일을 다 보는 모앵이라 그 생각은 드느만요. 하하 핫..." 관수 웃음에 따라 소지감이 웃고 권오송은 담배를 피우다 말고 재떨이에 눌러 끈다. "송형 제 잔 받으십시오." 권오송이 술잔을 내민다. "아이고 이거 미안하구마요." 부어주는 술을 마시는 관수를 살펴본 권오송이 "실은 형님 장가 보내려고 찾아왔는데, 아 글쎄 뜨물에도 아이 선다는 시골의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너스레를 떤다. "있지요. 허허헛..." 제 5편 젊은 매들 1장 번뇌무한 십칠팔 년 전이었던가, 기화랑 함께 간도의 용정을 찾아온 것이. 그 후 다시 한 번, 그러니까 이번으로써 혜관 은 세 번째 용정을 방문한 셈이다. "하동을 떠나올 때 진달래가 피기 시작한 걸 보았는데 역시 북쪽이라 봄이 더디 오는 모양이오." "그야 아무래도," 공노인은 곰방대를 문 채 말했다. "옛날에는 이 집을 대궐같이 크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때는 새 집이었고, 많이 낡았습니다그려." "용정도 그새 많이 발전했지요. 큰 건물도 많이 들앉아서, 그래도 아직은 이 집이 큰 편이오." "안주인이 누워 계셔서 어렵겠소이다." "누워 있질 않았다 하더라도 나이가 있질 않소? 몸이 성할 때는 그런 말 입 밖에 내지도 않더니만 드러눕고부 터 고향 간 꿈을 꾸었느니 어쩌니 하며 타국살일 시킨 나를 원망하는 거요." "허허어 그러시겠소. 허나 소승 같은 운수는 머무는 곳이 처소요 고향이 어디 있을까만 사바세계에서는 가족 이 함께 있는 곳이 고향 아니겠소? 또오 나라가 있다면 모르겠는데 타국이긴 그 곳도 매한가지요. 그래 그때 하시던 객줏집은 어떻게 됐소?" "남한테 넘겨주었지요." "소승이 처음 간도에 온 것이 십칠팔 년 전인가 싶은데 그새 세상을 뜬 사람이 많소이다." "..." "복장 터지는 얘기는 새삼스럽게 할 것 없고 그때 함께 왔던 봉순이가 죽은 것은 노인장께서 모르시지요?" "예?" "소승이 떠나오기 전에 죽었지요." "어떻게, 병이 들어 죽었소?" "병이... 글쎄올시다. 그것도 병이라면 병이겠지요.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아불." "참상이었구만. 박복하게 안 생겼더마는," "그렇게 박복할 수가 없었지요." "허허어 참," 하다가 공노인은 언짢은 감정을 피하듯이 말했다. "주갑이가 알면 눈물 바가지나 흘리겠소." "네?" "곧 대사도 만나보게 될 거고 봉순이 가아 얘기를 하면 주갑이 가락이 나올 게요. 허허어." "그나저나 젊었을 시절에 산삼을 많이 잡수셨다는 그 소문이 과연 헛소문은 아니었던 것 같소." 혜관도 봉순의 죽음을 떨쳐버리듯 화제를 돌린다. "어째서요?" 알면서 능청이다. "장수하시니 하는 말 아닙니까." "젊은 사람들이 퍽퍽 쓰러지는데 유감이다 그 말인가요?" "무슨 그럴 리가," "남의 나일(팔십 세) 먹으려면은 이삼 년을 더 보내야 하는데 무슨 나이가 많다고 지천인고?" 일부러 성난 척한다. "욕심도 많소." "나보다 대사야말로 육십을 넘긴 지 오래일 텐데 수천 리 길을 멀쩡하게 찾아왔으니 아무래도 지리산의 동삼 을 혼자서 결단낸 것 같소." "기차가 실어다주어서 수천리 길은 왔고 중놈이 무슨 수로 동삼을 먹겠소? 아시다시피 본래 중이란 섭생을 하 게 돼 있는 거고." 상노인과 중늙은이 두 사람이 산삼을 먹었느니 아니 먹었느니 농담 삼아 말을 주고받는데 그러나 이들은 결코 노익장의 쾌적한 건강 상태론 보이지 않았다. 비대했던 몸이 다소 줄어든 것 같았지만 혜관의 얼굴과 손의 살 가죽은 늘어져서 흐물흐물했다. 긴 여행에 체력이 부쳐서, 풍치가 말썽을 부리려는지 이따금 이빨 사이로 바람 을 불어넣는 소리를 내곤 했다. 울퉁불퉁한 머리빡만은 옛날과 변함이 없고 힘이 남아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했다. 작은 체구였지만 깡마르고 참나무같이 단단해 보였던 공노인, 그도 이제는 아주 쓸모없이 쭈그러들어 굶 주린 새같이 가뿐하게 무게가 없을 것만 같이 보였다. 집안은 절간같이 조용했다. 혜관은 문득 용정으로 오는 도중 구름을 뚫고 이동해가는 철새의 무리를 본 생각 을 한다. 힘찬 날갯짓, 날개 하나로 수만리 창공을 오직 인내와 지혜로써 나는 새, 그 힘찬 날개 소리가 귓가 에 울려오는 것만 같다. 산삼 타령만 하고 있는, 인생을 거의 다 살아버린 두 늙은이, 오히려 일사불란 나는 데 모든 것을 바치는 철새에 비하여 인간이 미물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할망구나 묻어주고 죽어야 할 텐데 중풍으로 저리 누워만 있는 할망구보다 내 몸이 더 빨리 쇠해가니." 재떨이에 담뱃재를 떨며 공노인은 중얼거렸다. 혜관은 쭈그러든 공노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며 수미산에 있다는 사대주 중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인간계를 잠시 생각한다. 인간의 수명은 천세요, 아기는 길가에서 오가 는 사람들 손끝으로부터 나오는 젖을 빨고 이레 동안에 어른이 되며 고통이나 고민이 없고 의식의 걱정도 없 으며 노쇠도 없으며 죽음은 슬픈 것이 아니요 길가에 꾸며서 내놓은 시체는 큰 새가 날아와 실어가고... 혜관 은 묘한 미소를 띠며 "그러기 중 팔자가," 하는데 가로막고서 "자식이 없는데 중 팔자와 다를 거이 뭐 있겠소." 혜관의 웃음이 비위에 거슬렸던지 발끈한 목소리다. "가숙은 애물이 아니란 말씀이오?" "흥, 중 팔자도 옛말이오. 요즘의 중놈들 계집 자식 거느리기 예사 아니던가요?" 심술궂은 노인 특유의 표정으로 변한 공노인이 혜관을 빤히 쳐다본다. "허 참, 소승이 뭘 잘못했기에 노인장께서 이리 역정이시오?" "세상만사가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고," "..." "세월이 가는 것이 안타까운데 해는 또 왜 이리 긴지 모르겠소." "그러니 저울대 한복판에서 기울지 않고 사는 게요. 그게 못 견딜 노릇이지요. 세월 가는 것이 안타까운데 해 는 길고, 자식이 있어 걱정, 없어도 걱정, 너무 사랑해도 외롭고 사랑이 없어 외롭고, 재물이 많으면 세상이 좁 고, 재물이 없어도 세상이 좁고, 인간 고해 허위적거리긴 매한가지 아니겠소? 해가 길면 극락왕생을 빌어야지 요." "대사 말씀이 맞기는 맞소. 빈손으로 세상 밖에 나왔다가 빈손으로 갈 곳도 모르는 곳으로 가는데 소리치고 했다는 일도 지나놓고 보면 티끌이고 세월이 잡아묵고 가버리면 그만인 기라. 악하면 얼마나 악하고 선하면 또 얼마나 선할꼬? 또 극락은 어디 있으며 지옥은 어디 있는 기든고? 일장춘몽, 다 덧없는 일이오." 눈빛이 흐릿해진다. "내가 늙었기 때문에 이런 소리 한다 하겠지마는 김환이 그분이 죽은 뒤로는 자다가 눈을 뜨면 허무한 생각이 들고." "그런 생각은 하나마나. 그보다 이곳의 사정 얘기나 좀 들려주시오. 조선의 형편은 소승이 소상하게 말씀을 드 렸고요." "대사는 아직도 무슨 일이 될 거라 생각하시오?" "글쎄올시다. 소승은 그런 생각 해본 일이 없고, 또 안 될 거라는 생각도 해본 일이 없소이다." "예... 내 비록 몸집은 작았지마는 세상을 두려움 없이 사라왔는데, 한번은 가시덤불이 키를 넘는 왕청현의 서 태포라는 곳에서 마적단에게 붙들린 일이 있었지요. 그때도 담력 하나로 살아났고, 흠, 한창 시절에는 하룻밤 에 백 리 이백 리 식은 죽 먹듯..." 하다 마는데 눈빛은 더욱더 흐려진다. '이 노인도 이젠 멀지 않았구나. 깐깐한 성미에 목소리도 카랑카랑 하더니만.' "참, 아까 이곳 사정 얘길 물었지요?" "네." "이곳 사정이라, 실은 나도 어떻게 돌아가는 판국인지 자세히는 알 수 없고 하는 얘기를 들어도 이제는 명념 이 흘해서... 늙어빠진 당나귀 꼴이 된 게지요. 바깥 출입도 잦질 않으니, 환국이부친이 연해주에서 왔다갔다할 때는 그래도 괜찮았소만," "..." "환국이부친이 이 집에서 잡혀간 후로는 모두들 조심하노라 내왕도 않고 있으니 소식도 캄캄절벽이고 며칠새 주갑이라는 사람이 올 것이니, 그 사람한테 얘기를 들으시든가, 뭣하면 연해주를 다녀가시지요." "글쎄올시다. 그게 쉬운 일인지 모르겠소." 안방에서 인기척이 났다. 공노인은 꾸부정한 허리를 펴고 할멈이 누워 있는 안방에 건너갔다 와서 "하노라고 해도 남의 속에서 빠진 것은 소용이 없더구먼요. 양자니, 양녀니 그것 다 밸이 빠진 놈들 하는 짓일 게요. 제 핏줄이 아니면 아무리 해도 남은 남이고," 또다시 눈빛이 흐려지며 중얼중얼 중얼거린다. 옥양목 겹옷이 이리저리 도는 역시 초라한 모습, 자리에 앉기가 바쁘게 곰방대부터 찾는다. "공덕을 쌓는다 생각을 하십시오. 예, 그렇게 생각하시야지요." 풍치가 드디어 성질을 내는 모양이다. 뺨에 손을 갖다대며 건성으로 말한다. "한두 번이랴아지, 대사는 모를 게요. 한두 번이라야지?" "허허어." "처음에는, 내 말 들어보시오. 처음에는 송애라는 계집애를 양녀로 삼았는데 아 글쎄 그 죽일놈 그놈 김두수가 꼬여내서 신세를 망쳐놨고, 뭣이 어떻게 됐는지 길러준 양부모를 원수 취급을 하더란 말씀이오. 다음에는 그놈 의 임이년, 대사께서도 임이는 아시지요?" "임이네 딸 말씀입니까?" "네. 바로," "본 일은 없지요. 혹 어릴 적에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간에 인복이 없을라 카이," "그 애가 지금 마흔쯤 됐을 걸요?" "그쯤 됐지요." "지금 어디서 삽니까?" "허참, 기가 맥히서, 지금 용정에 있소. 그것이 또 맹랑한 짓을 했단 말입니다. 양녀라 할 수는 없지마는 길을 두고 메를 못 가더라고 재작년에 난데없이 나타나서, 꼴을 보아하니 거지 중 상거지라. 내 한복이 그 사람이 왔을 때는 임이 말은 하지 않았소만. 임이네 말도 듣기 거북할 게고 또 김두수 말도 나오게 될 거고 해서 한 복이 그 사람한테는 잠자코 있었소." "..." "임이넨가 그 계집 생각을 하면 그까짓 것, 거들떠볼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이서방을 생각해서 거둬주었지요." "그전에는 어디 있었기에," "그러니까 이서방이 용정에 온 후 임이를 퉁포슬에서 농사를 짓는 허가한테 시집을 보냈지요. 아들아이 하나 까지 낳아놓고 그 몹쓸것이 바람 잡아 나간 기라." "아이도 버리고?" "그렇지요. 서방놈이 미친 듯이 찾아댕깄지마는 십여 년 동안, 그렇게 되고 보니 남정네 아들놈도 종무소식이 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뭐 과거사는 접어두고라도, 타고나면 할 수 없는 겐가 일 년을 내 집에 붙어살면서 사람 꼴을 찾게 되니 또 지랄이라요. 어떤 놈팽이하고 눈이 맞아서, 차라리 그까짓 것 잘됐다 싶었지요. 한데 알고 보니 그놈이 앞잡이라, 김두수하고도 손이 닿고." "알겠소이다. 환국이부친이 여기서 잡힌 것은," "맞소. 바로 임이년이," "마목이군요." "그 빌어먹을 년만 아니었으면 왜경들이 환국이부친 얼굴을 모르는 터라 얼마든지 피신할 수 있었겠지요. 김 두수는 그때 봉천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으로 손이 닿지 않았고, 그러나 그놈이 이쪽 동태를 살피게 한 것만은 틀림이 없을 게요. 그놈이야 큰 고기 낚으려고 항상 노리고 있었으니까." "어째 한 뱃속에서 동쪽 서쪽으로 자식이 태어났는지 모를 일이오." "왜 아니겠소." "봉천서는 헌병대에 있는가요? 아니면 경찰서에 있는가요." "여관이랍시고 하는 모양인데 그게 본업은 아니겠지요. 뒷구멍으로 안 하는 일이 뭐 있겠소. 재산도 상당히 모 았다는 소문이며 회령에서 순사부장할 적에는 식범같이 생긴 왜년을 데리고 살더니 그 후 하얼빈에서 독립운 동을 하는 여인네를 집안에 가두었다가 욕망을 채울 수 없으니까 머리통을 바수어서 죽였다 하더구먼요. 능히 그런 짓 할 놈이지요. 해서 이쪽에서도 그놈을 없애버리려고 무던히 뒤쫓는 모양인데 그물을 빠져 달아나는 거는 귀신 같은 놈이라, 그런 만큼 그놈 역시 독립투사라 카면 눈에 쌍불을 키고," "나무 될 것은 떡잎 적부터, 그러기 한번 인연을 잘못 맺으면 인연이 인연의 고리를 걸고 끝이 없는가 봅디 다." "결국은 그놈이 독립군 총검에 찔려 죽고 말 게요. 만주 땅이 어떤 곳이라고? 왜놈이 날고 뛰어도 구석구석 박혀 있는 독립군을 이 잡듯이 할 수는 없을 거고 백두산부터 흑룡강 유역 일대 하늘을 찌르는 산림 속에 우 글거리는 우리 독립군을 제놈들이 무슨 재주로? 해서 그놈들이 도처에 친일파를 내세워 조선인민횐가 그런 것 을 맨들기도 했지만 우리 독립군은 그걸 보고만 있었겠소? 모가지를 댕강댕강 짜르고 보니, 그런 시시한 거를 맨들어 독립운동이 근절될 기든가? 청산리 싸움 후 우리 동포들이 죽기도 많이 죽었지요. 방비 없는 조선인 부락을 습격해서 아이 어른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왜놈들은 참살하고 불지르고, 그런다고 해서 쌈이 결판 나 겠소? 토벌대랍시고 큰 병력을 풀어놔 봐야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독립군 몇 명, 그러니 방비 없는 부락을 습 격해서 불지르고 아녀자 노인들을 죽이고, 속이 타니까 중국 정부에 지랄 발광을 하지마는 중국 정부도 일본 이 뭐 그리 이뻐서? 만만디지 뭐. 만주의 마적단이라는 것도 그렇소. 물론 양민의 재물을 약탈하고 왜군과 내 통하는 마적단도 있지마는 마적단이 다 같질 않소. 사실 만주의 군대라는 것은 마적단일 수도 있고 마적단이 군대로 변할 수도 있는 형편이고 보면 우리 독립군도 그들과 손을 잡는 만큼 때론 마적단으로 행세하게도 되 며 또 왜군들 성화를 받는 중국의 형편을 생각하여 독립군을 마적단으로 변장하게도 되는 모양인데 물론 독립 군이 왜군을 만주서 몰아내진 못하겠지요. 그러나 왜군도 우리 독립군을 만주서 몰아내지 못할 게요.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하더만요. 내가 말하기를 어째서 독립군은 산산이 흩어져서 모두 독불장군이냐고. 농담 비슷하게 대 답하기를 만주 벌판에 독립군이 한덩어리가 돼서 깃발을 높이 쳐들게 되면 왜군과 일대 결판을 내게 될 것이 며 그렇게 될 때 왜군을 당적하기 어렵고 한입에 먹으라고 내주는 격이 된다, 농담이지만 그 말을 새겨보니 일리가 있는 것도 같더만요." 말을 끊은 공노인은 볼일이 급하여 뒷간으로 가는 사람처럼 후다닥 일어섰다. 종종걸음으로 마루를 지 안방으 로 들어간다.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후 방에서 나온 공노인은 "영선네! 영선네 거기 없나?" 뜰 아래를 향해 부른다. "여기 있소꼬망." "방에 들어가보게. 자주 들여다봐야지." "그렇잖애두," 공노인은 돌아왔다. 독립군 얘기를 할 때와는 달리 몹시 심란해 하는 얼굴이다. 그새 마누라가 죽었는지 모른 다는 생각에서 급히, 허둥지둥 안방으로 건너갔을까? 아니면 이부자리에 오물이 고였을까봐 급히 건너갔을까. 혜관은 새삼스럽게 마누라가 저지경이 되지 않았더라면 공노인은 여전히 깐깐하고 다부졌을 거라는 생각을 한 다. 혜관이 어젯저녁 늦게 이 집을 찾아왔을 때 공노인은 마당 한복판에 서 있었다.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소년이 서 있는 것같이 혜관은 한순간 착각을 했었다. 그것도 집 잃은 소년. 휑 뎅그렁하니 넓기만 한 집안에는 안방과 행랑 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나왔을 뿐이다. 혜관은 악신거리는 잇몸 을 볼 위에서 누르며 민망할 만큼 무뚝뚝하고 심술궂고 때론 애처롭기조차 한 공노인의 앉은 모습을 쳐다본 다. "남의 속에서 빠진 것 그것들, 거둬보아야 다 헛일이오." 또 시작이었다. 어쩌면 요즘 그의 일과가 그런 불평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왜 또 그러시오?" "예?" 힐끗 쳐다본다. 그 눈에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아까 하시던 말씀이나 계속하시지요." "하나마나한 얘기, 해보아야 나올 것은 먼지밖에 더 있겠소. 별수 없는 기라요. 별수없소. 아, 독립군이면 모두 독립군인 줄 아시오? 내 잘났다 니 잘났다 하는 놈들은 그나마 체면치레라도 하지마는 남의 재물 뺏아가는 것 이 목적인 비적놈도 있을 것이요, 동포에게 독립군을 빙자하고 사기치는 놈인들 왜 없겠소. 원수하고 내통하는 놈들이야 전부터 있어온 터이고... 일하는 사람은 이름이 없소. 일하다 죽은 사람은 무덤도 없소! 이게 만주 바 닥의 우리 독립군의 실정인데 대사는 뭣하겠다고 꼬치꼬치 알라고 덤비는 게요! 아 그래 그 복쟁이 같은 몸 하고서 강우규가 될라는 게요! 흥! 아직은 이 공가보다 젊다 그 말을 하고 싶은 게요? 공산당, 조오치! 민족주 의, 그것도 좋구말구요. 그걸 한데 붙여놓으면 우리 가난한 동포! 안 그렇소, 대사? 그런데 그 배애지를 찢어 죽일 놈들이, 가난하지 않기를 바라는 동포와는 등 돌리는 것이 능사이니, 공산당! 민족주의! 하고 갈라지는 것 아니겠소? 의리 없는 놈들! 엉성하고 팔푼이 겉은 중국 사람들, 다부지고 야멸차고 민첩한 조선놈들, 그 팔 푼이 같은 중국놈 하나를 다부진 조선놈들 몇이 못 당한다면 거짓말 같은 얘기 아니겠소? 우리 동포! 우리 동 포! 외치는 조선놈은 동포에게 해악을 끼치고 우리 동포, 우리 동포, 하지도 않고 하늘이 있고 땅이 있으니 우 리는 산다 하는 중국놈이 우리네 같이 동포한테 해악을 끼칠까?" "노인장, 그거는 억지 말씀이오." "뭐가 억지란 말이오." "동포에게 해악을 끼치는 점을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조선의 경우는 구우일모요. 해악을 끼칠 힘이나 있습니 까? 나라가 있어야 힘이 있질 않겠소?" "..." "노인장께서는 중국을 과찬하시고 우리를 짓밟았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소이다. 중국의 군벌들을 생각해보십시 오. 오히려 등잔 밑이 어두운 모양이오. 너무 땅이 넓어서 보이지 않았던가. 군벌이 가난한 백성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기름을 짜는 것은 제 동포에게 끼치는 해악이 아닙니까? 그들 자신의 권력 투쟁을 위한 전쟁 생각도 해보시오. 전쟁을 위해 불환지폐를 발행하여 상공업을 망쳐놓고, 그들의 전쟁을 위하여 식량과 가축을 징발함으로써 농촌을 망쳐놓고, 그리하여 유랑민 비적들이 들끓게 되고, 그것은 동포에 끼치는 해악이 아닙니 까? 그런 정도는 약과지요. 열강의 후원을 얻기 위해 혹은 차관을 얻기 위해 제 몸뚱이 중요한 부분을 일본이 다 영국이다 떼어주고, 그 잃은 것을 찾겠다고 나서는 학생들, 노동자, 병사, 시민들의 시위를 철퇴로 내리쳐서 그들 상전의 눈치를 보는 놈들, 그것은 동포에게 끼치는 해악이 아니란 말씀이오? 이미 조선은 한 놈이 먹어 치웠고, 일본이 약해지면 어떤놈이 또 손을 내밀지 그건 모르겠소. 그러나 중국은 아직 갈라 먹기 시대요. 중 국이 통일이 되면은 갈라 먹기 시절이 끝나는 거고 해서 열강들 손끝에서 춤을 추는 앞잡이들은 계속하여 동 포에게 해악을 끼칠 것이오. 영국놈 방직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나면 영국놈과 합세하여 제 백성을 치고 일본 놈 방직 공장에서 사건이 벌어지면 일본놈들과 합세하여 제 백성을 치고, 하기야 뭐 그네들은 앞잡이라 생각 지는 않을 게요. 장차 자신들의 뿌리를 뽑을 백성들의 힘을 두려워하는 게지요. 그들의 적은 외세가 아니라 바 로 제 나라 제 백성이니까 이래도 제 동포에게 해악을 끼친다 할 수 없겠소?" "대사는 어찌 그리 잘 아시오?" "목탁만 뚜드리고 있었더라면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일이지요." "흠," 공노인은 한풀 꺾인다. "그러면 나보고 물어볼 것도 없거마는," "그거야 중국 사정이지요. 조선에서 신문이나 훑어보고 남의 말에 귀 귀울이면 그만 정도는 다 알게 되는 거 구요." "결국 정국 정세 따라 독립군도 운동가고 이리 가고 저리 가고 할 테니까." "아라사도 있지요." "대사 말씀대로 하자면 중국과 일본이 한판 붙기 어려운 거 아니요?" "허허헛 공연한 소리 해가지고, 귀동냥한 얘기 아니겠소. 소승이 뭘 안다고, 그런 일엔 연추, 할빈 등지에서 귀 신같이 훤한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모두 하는 말들을 들으면 일본과 중국이 싸워야 한다," 하다 말고 "도둑놈들 입만 까가지고 무슨 일을 얼마나 했다고, 가산 잃고 처자 잃고 그런 사람들은 말이 없는데 양복 쪼 가리라도 걸친 놈들은," 근질근질하고 악씬악씬거리기 시작한 풍치도 그러했으나 혜관은 공노인에게 짜증이 났다. 주거니 받거니 하느 니보다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한다. "그러면 많이 쉬었으니 슬슬 거리 구경이나 해볼까요?" 혜관은 만지작거리고 있던 염주를 목에 걸고 일어섰다. 혜관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신경질적이던 공노인 얼굴에 순간 서운해하는 빛이 돈다. "거리 구경, 뭐 할 거나 있어야지..." 입속으로 우물거린다. 대문을 나설 때 따라나온 공노인은 "대사" "네." "곧 돌아오시오?" "글쎄올시다." 이번에는 혜관 쪽에서 약올리는 대답이다. "뭐 저녁 준비 땜에 물어본 게요." 매달리듯 하던 표정을 거두고 실쭉해지며 응수한다. "저녁 준비는 마시오." 돌아서서 지신지신 땅을 짓누르듯 밟고 가는 혜관은 마음속으로 킬ㅋ리대며 웃는다. 돌아보면 손가락이라도 입에 물고 있을 성싶은, 팔순이 가깡누 늙은 소년의 모습이 있으리란 생각을 하며. '빌어먹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견디어보자. 어이구.' 혜관은 풍치를 지근지근 씹는다. '아프다 생각하면 더 아프고, 잊어야지. 이놈의 풍치야!' 혜관은 거리에 나섰다. 지나가는 청인들이 혜관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혜관은 그네들을 또 신기하게 쳐다본다. 남십자가로 이르는 상가를 거쳐서 혜관은 작정없이 걷는다. 이곳 특유의 바람이 부는 거리, 모래바람이다. 하 늘을 맑고 푸르고 멀리 해란강 강물이 햇빛에 휘번덕인다. '많이 변하긴 변했군... 흠, 갈 수 있다면 흑룡강 그쪽을 쭉 따라서 올라가보았으면 좋겠는데,' 걸음을 멈추고 강물을 바라본다. '얼음은 녹았지만 아직 수량은 모자라는데 뗏목이 흘러 내려오는군.' 다 같은 강물이요 다 같은 뗏목인데 혜관은 섬진강과 해란강이 왜 다를까 하고 생각한다. 아름답기론 섬진강 편이다. 조촐한 여자같이, 청아한 소복의 과부같이. 백사는 또 얼마나 청결하였는가. 산간의 강물과 대륙의 강 물, 모두 숱한 사연을 흘려보낸 강물. 혜관은 섬진강에 몸을 던진 기화를 생각한다. 십칠팔 년 전에 처음 이곳 에 동행하여 왔을 때 법단 남치마에 옥색 두루마기 미색 목도리를 둘렀던 아름다운 기생 기화의 모습이 뚜렷 하게 강물 위에 떠오른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변발한 청인을 보고 머리를 반쯤 깎았으니 반중이 아니겠느냐 했을 때 끼루룩 웃던 기화의 웃음 소리가 귓가 에 들려오는 것 같다. 살가죽이 늘어지고 이빨은 모조리 거덜이 나서 성한 것이라곤 앞이빨뿐인데, 육십을 넘 은 몸이, 인간과의 인연을 버린 몸이, 벼랑의 꽃같은 여자, 이제는 섬진강 푸른 물에 넋을 버린 여자, 그 여자 를 중생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혜관. 괴물 같은 혜관의 마음속에 엷은 한 같은 것이 솟는다. 최서희 일행이 간도로 떠난 후 홀로 나아서 절로 은신해왔었던 꽃다운 처녀 봉순, 절마당을 왔다갔다하던 그 자태에 젊은 사미승들은 오뇌의 밤을 보내야 했었고 중년이던 혜관마저 남모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봉순이는 기화가 뇌었고 노류장화, 그러나 출가한 중에게는 여전히 꺾지 못할 벼랑의 꽃이었다. 혜관은 한순간 해란강 강물 위에 진분홍 복사꽃, 흩어진 꽃이파리가 떠내려가고 있는 듯, 환상에 빠진다. '나무관세음보살, 제행무상, 제법무아, 반야적정, 찰나에 생멸하고 떠나서 또다시 크게 사멸전변함을 피할 수 없나니, 여하한 곳에도 고정 존속하는 내가 있을 수 없으며 주재자도 없느니라. 번뇌 떠난 곳에 빛이 오나니 그것이 반야로다. 시끄러운 번뇌의 동요가 멎을 때 그것이 적정... 번뇌의 속박을 떠나 대자재에 이르면 그것이 불보살이 아니고 무엇이랴.' 혜관은 염주를 걷어 해란강 강물 속에 넣고 발길을 돌린다. 강변을 따라서 남쪽 육도구 쪽을 향해 기약 없는 걸음을 옮긴다. 마침 육도구 강변 사장에는 소시장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백 마리, 헤일 수 없이 많은 우마와 돼지가 와글거리고 사람이 와글거리고 나뭇배, 나무 실은 우마차가 수백 대, 제행무상과는 아득한 삶의 활기가 넘쳐 흐르는 강변, 혜관은 멀찍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순간순간의 목숨을 부지하는 인간들의 길고 짧은 얼굴 들을, 늙고 젊은 모습들을 바라본다. 인간의 힘을 당하고도 남아도는 우마는 고삐를 맡긴 채 하늘을 우러러보 고, 큰 눈에 하늘이 비치고 구름이 비치리라. 그 묵시적 모습은 자연인가 제행무생인가. 주재자는 없다 하였거 늘 어찌 삼라만상이 저리 한결같이 다르고 또 저토록 한결같이 같을 수 있을 것인가. '갈 수 있을까? 이곳에서 북쪽으로 치올라가면 흑룡강이고 그 흑룡강 너머가 시베리아 아라사 땅, 그곳에서 서쪽으로 가면 몽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면 서장이다. '서유지', 흠, 삼장법사가 서천취경의 길을 떠날 때 손 오공, 저팔계를 거느렸는데 흠, 내 꼴이 저팔계는 아닐까? 허허헛!' 초라한 농부 모양의 젊은 사내가 어린 송아지 한 마리를 몰고 휘적휘적 소시장 쪽을 향해 걸어간다. "여보시오 젊은이," "나르 불렀음?" 젊은 사내가 혜관을 본다. "좀더 키워서 팔지, 그 어린 것을 장바닥에 몰고 나오다니," "앙이 팔 수 없으이, 그러문 어쩌란 말입내까." 화를 낸다. 별놈의 중을 다 봤다, 웬 간섭이냐 하듯. 그러나 젊은 사내는 힘없이 송아지를 몰고 터벅터벅 소시 장으로 들어간다. 그의 모습은, 어린 송아지는 이내 많은 우마와 많은 장꾼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2장 손목 잡고 하는 말 술집 유리문을 열고 나온 홍서방이 흔들흔들 어깨를 흔들며 걸어오는 사내를 보자 "이보게 주갑이." 하며 어깨를 툭 친다. "아이고, 성님 아니랑가요?" "왜 아니라. 너 언제 왔어?" "방금 오는 길이여라우." "그래?" 홍서방은 벌거숭이 친구가 유난히 붉어 보이는 길 건너편 포목점을 바라본 채 "큰놈이 돈 좀 주어서 오래간만에 기갈은 면했는데," "술 못 묵어서 기갈 들었다는 이야그는 처음 듣겄소잉." "능청스럽기는, 밀밭에도 못 가본 놈겉이, 흥." "대강, 대강 허소. 딱허니께 허는 말 아니겄소?" "이놈아! 언제 내가 술 사라 했냐? 훈계는 무슨 놈의 훈계고!" "아따아, 술 사달라시면 사드리겄으라우." "뭐?" 눈알이 오므라든다. "성님 술값쯤, 그만헌 돈이 없을 것 겉으면 이 주갑이 접시물에 빠져 죽을 것이요." "곧 죽어도 주둥이는 살아서, 임마!" "허헛엇 그러지 마시란께? 임마, 거 듣기가 심히 거북허요. 어디를 가도 이자는 할애비 대울 받는디," "너스레는 그만 떨고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술을 산다고 했겠다?" "야, 알겄소. 용정 와서 첫개시 헙시다요." 두 사내는, 아니 두 늙은이는 등지고 섰던 술집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다. "애구망이나, 또 옵매?" 주모가 술판에 걸레질을 하다가 딱하다는 듯 홍서방을 쳐다본다. "손님이야 또 오고 또 와야지, 뭐가 이상해?" 홍서방은 민망한 마음을 감추듯 엉거주춤 자리에 앉으며 눈을 까뒤집는다. "손님도 손님 나름 앙이겠소꼬망." "손님 따라 금돈, 은돈, 쇠돈으로 달라지기도 한단 말이야?" "글세 말입꼬망." "술이나 빨리 내놔." 놓칠세라 서두른다. 주갑이는 궐련을 피워물고 벽에 기대듯 담배연기에 흐려진 홍서방의 초조한, 그러나 기대 에 찬 얼굴을 바라본다. 주독이 올라 빨개진 코, 술 때문에 추하게 늙어버린 얼굴이다. 홍서방은 삼사 년 전에 환갑을 보냈고 주갑이는 아직 환갑 전인데, 하기야 뭐 환갑 잔치 차리지 않기론 마찬가지겠으나. 홍서방은 십 여 년 전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가난하고, 이제 늙었기에 떠도는 생활을 청산했지만 대신 주량은 더 늘어서 염 치없는 마음이 선량한 마음을 압도하고 술 없이는 못 사는 신세가 된 것이다. 독한 소주 한 잔을 허기진 창자 에 들어부은 주갑은 파전을 젓가락으로 찢어서 입속에 밀어넣는다. "성님," "들으나마나 또 훈계, 좋다! 술 얻어먹는 죄가 있으니 할말 있으면 해봐." "할말이야 많지라." "제에기, 늙은 놈이 가리늦기 과거 볼 겐가? 서산에 지는 해, 다 살았는데 수신제가할 새가 어디 있어?" "다른 것은 모리겄소. 허지만 한 가지 아들아이헌텐 손 내밀지 말더라고요. 고것이 돈 쪼깬 벌어서 많은 식구 거나리고 사는디 애처럽지도 않소?" "그것도 옛날 얘기야. 아 궂으나 좋으나 애비고, 애비가 못나서 호강스럽게 크지 못했다고, 또 잿나을 못 남겼 다고, 아 그러면 애비가 아니란 말이야? 이렇거나 저렇거나 숲속에 안 버리고 키웠으니," "성님이 키웠단 말씨?" "아암 안 버렸으니 키운 게지." "안 버렸음 다 절로 큰단가? 아 생각해보시더라고요. 식구들 양식 값보다 성님 술값이 더 든대서야," "그 죽일 놈이 자네보고 그런 말 하든가?" "그 아이가 입 밖에 말이라도 낸달 것 겉으면 덜 불쌍하지라우." "..." "일허는 데까지 가서 손 내미는 짓만은 제발 그만두시시오. 죽고 싶을 게요." "박가 그놈의 첨지, 주둥아릴 문드러버려야지. 밥술 먹고 살게 됐다고 지가 암만 그래봐야 갖바치, 내가 제놈 을 사돈 삼을까? 흥." 용이가 간도를 떠날 때 갖바치 박서방과 엿장수 홍서방에게 월선이 살던 집을 주었는데 그들은 십여 년을 그 집에서 함께 살았으며 아직 함께 살고 있었다. 박서방은 근검 절약하여 신집을 늘려서 운동화며 고무신을 팔 고 있으며 당혜를 짓는 일, 신발을 고치는 일은 그만두었고 세월 따라 짚신도 팔지 않게 되었다. 한편 엿도가 를 차린다던 홍서방의 그 꿈은 꿈으로 끝났고 이제는 허풍도 떨지 않게 초라해진 홍서방, 큰아들이 성당의 잡 역부로 나가서 근근히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처지다. "그 성님쯤이나 된께로 한집에서 살았제요." "내가 그놈의 집에서 살았나? 그 집이 뉘 집인데?" "허허엇, 술병말고는 경위가 훤헌 성님이 설마 모르고서 허는 말심은 아니겄지라우?" "하기야 뭐, 박가 그놈도 이제는 탕수국 먹을 나이라, 자식놈들이 실권을 쥐고 있으니," 자식들이 실권을 지고 있다는 말은 박서방이 전과 같이 술잔이나 사줄 형편이 못 된다는 뜻이다. "그는 그렇고 공노인댁 안노인은 아직 그대론가?" "그 병이 나을 병도 아닌다, 그렇다고 쉽기 돌아가실 병도 아닌께로," "공노인 바싹 늙었데?" "나이가 얼만데 안 늙겄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짱짱해서 우리가 먼저 갈 것 같았지." "..." "길서상회 그 양반 잽히가고서 그리 된 거 아니야? 기력도 쇠한 것 같지만 노망까지 든 것 같더란 말이야." "괜헌 소리 마시시오. 그 어른이 노망들었으면 우리는 벌써 공동묘지 갔을 것이여." "전에는 안 그랬는데 볼 때마다 남의 속에서 빠진 것 소용없다, 소용없다, 한두 번이라야지? 그 옛날에 송앤가 뭔가 기집앨 두고 그렇게까지 할 건 없는데, 말이 양녀지 뭐 강보에 싸인 것을 길렀나? 그것도 언제 일인가? 십오 년이나 되는 옛일 아니야?" "나보고도 뭐 그런 말심을 허기는 허든디, 본심은 따로 있을 것이여." "본심이라면?" 게걸스럽게 술잔을 비우고 굽은 등을 더욱 굽히며 주갑을 치올려본다. 기름기라곤 없이 겨울 바람에 바싹바싹 말라버린 것 같은 주갑은 "아따 늙으면 다 안 그렇겄소? 외롭고 쓸쓸한께 그렇지라우." 휘저어버린다. 주갑의 얼굴에도 외롭고 쓸쓸한 빛이 지나갔다. 공노인의 본심과 주갑의 외로움과, 그것에도 상 통되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 "이보게 주갑이," "왜 또 그런다요?" "저 구석에서 술 마시고 있는 사내 누군지 아나?"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내가 알기는 워찌 알겄소?" 오십이 좀 넘는 듯, 한 사내가 옆모습을 보인 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모의 눈길이 이따금 그곳으로 가 곤 한다. "누군고 하니 송병문 씨 큰아들이라." 거의 귀엣말이다. "송병문 씨를 내가 워찌 안다요?" "싯!" 사내는 주갑의 목소리를 들었던지 부스스 일어나 술값을 치르고 나가벌니다. 그의 뒷모습을 쫓아가던 홍서방 이 다시 주갑에게 돌아온다. "부친 이름을 들었느 모양이다. 그래도 살던 찌꺼기가 있어서 차림은 그만하구먼." "누군데 그러요?" "송병문 씨라 하면 용정뿐만 아니라 간도 일대, 멀리 연해주까지 알려진 어른이었지. 용정 제일가는 부자요, 덕망이 높고 해서 그분이 하고 간 일이 많았는데, 허 참 그 어른 돌아가시고 나니 일패도지, 큰 아들이 이런 술집을 찾게 됐으니 세상일이란," "워째서 망혔지라?" "방금 나간 그 사람이 못난 탓이지. 게다가 천하절색인 마누라가 중놈하고 붙어묵었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니 아편쟁이가 되고 속내막은 모르겠는데 아까 그 사람도 아편을 했다는 말도 들리더군." "그러면 송선생 형님 아닌게라우?" "맞어, 송선생 형님이지" "그래요? 거르크름 진실한 송선생이 워쩌다 그런 형을 두었을까요 잉." "이 사람아, 그거야 하느님이 하신 일 아니겠나? 순서가 바뀐 게지. 송선생이 형으로 태어났더라면 송씨 가문 도 안 망했을 것이며 좋은 일도 많이 했을 건데 일이란 좋게 되게 돼 있기 보다 안 좋게 돼 있는 경우가 훨씬 많지 않던가?" "허긴 언제나 착한 사램이 고생허게 돼 있는개비여. 워째 그렇단가? 아무리 생각을 혀도 모르겄으라. 하느님 뜻이 그렇지는 않을 것인디 세상이 잘못되고, 세상이 잘못되얐다는 것은 사람의 잘못이다 그 이약 아니겄소 잉? 말허잘 것 겉으면 성님 같은 사람 말슴이요." "뭐?" "구름 겉은 허풍을 잔뜩 머금고서, 반평생을 떠돌며 어령누 일은 아니 허고서." "내 말이야 너 말이야? 피장파장이다." "그런 말심 마시시오. 나 이래 봬야도 누구 고생시킨 일 없고오. 넘헌티 몹쓸 짓은 안 혔지라우." "그러면 내가 남한테 몹쓸 짓을 했다 그 말이야?" "아 금매, 권속들을 내뻔지고 아직꺼지 자식 괴롭히는 그 이상 몹쓸 짓이 어디 있을 것이여?" "네놈은 홀몸이라 큰소린가?" "아아문이라우." "제기, 사사건건 거기다 갖다붙이는군 그래." "허허헛헛, 허기사 뭐 무슨 말을 혀도 그 병 못 고치는 것 모를 내가 아닌디, 허허헛헛... 드시시오. 성님, 많이 드시란께료? 주모! 여그 술 싸게싸게 날라오더라고!" "옳거니, 그래야지. 그래서 자네만 보면 저승에서 할아부지 만난 것처럼 좋다니까. 이봐! 주모 봉 한 마리 날아 들었으니 군소리 말고 어서," "염치 좋습매." 주모는 술을 가져오며 홍서방에게 눈을 흘긴다. 피차 사정을 다 아는 처지였으니까. 얼근히 취한 주갑은 "주모!" "옛꼬망." "내 지금으로부터 소리 한 판 부를 것이니 지금으로부터 마시는 술은 공술이라 그 말심인디," 주모는 웃는다. "워찌여? 부를까, 아니 부를까?" "좋습매다. 오래간만에 주서방 노래 듣겠음," "으흠!" 주갑은 술판 위에 주먹쥔 두 손을 올려놓고 등을 꼿꼿이 세운 뒤 눈을 감는다. "으음! '새타령'을 헐 것이여." 또다시 기침을 하고 새가 새가 날아든다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아! 남풍꽃아 떨치나니 구만장천에 대봉새 문광이 나 계시니 기산조양에 봉황새 문한기우 깊은 회포 울고 넘는 공작새 소선적벽 칠월이야 우연장명 백학이 글자를 뉘 전하리 가인상사 기러기 생증장액수고란 어여쁠사 채란새 약수 삼천리 먼먼길 서왕모의 청조새 위보가인수기서 소식 전든 앵무새 성성제혈 염화지 귀촉도 불여귀! ... 눈물이 주름진 얼굴 위로 흘러내린다. 주모도 행주치마를 걷어 눈물을 닦는다. 한구석에서 술을 마시던 젊은 층의 두 사나이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모습은 달라졌어도 주갑의 한맺힌 목소리는 변함없이청아하고 보잘 것없는 한 인간이 홀연 고귀한 모습으로 주변을 압도한다. "주서방 새타령으 들을 때마다 창자가 끊으지느 것 같재잉요? 애그머니, 무시기 한이 그리 많답매?" 주모는 연신 행주치마로 눈물을 닦는다. "저놈의 청성, 저러니 몽다리귀신 될밖에," 홍서방은 계속하여 술을 부어 마신다. '새타령'을 끝낸 주갑은 "성님, 몽다리귀신도 그리 나쁜 거는 아니란 말씨. 한이 많은 것도 반드시 불행한 거는 아니여라우. 나는 한평 생을 이리 살았는디 그래도 후회는 허지 않소 내 옆에 지금은 없지마는 보고 저븐 사람도 많고 나헌티 잘혀준 사람도 많고...... 허허헛, 답대비 그놈의 계집허고만 인연이 없는 것이 자다가 생각혀 봐도 억울허고 눈물 나는 디 지내놓고 보이 그것도 견딜 만했지라우. 이 만주 바닥으로 흘러 들어오길 잘혔지요." "미친놈, 내 땅 두고 쫒겨온 신세가 뭣이 잘한 일인고? 흥, 미친놈." "서러운 사램이 많으면 위로를 받은께. 나보담도 서런 사램이 많은꼐 세상을 좀 고맙기 생각허게도 되제요. 조 선에 남았이면 그 더런놈의 왜놈우새끼 똥딱개나 됐을 것이요. 누가 뭐라 뭐라 혀도 여기 온 사람들, 나쁜 놈 보담 이사 좋은 사람이 많질 않더라고? 이 주갑이야 본시부터 사람도 재물도 없는 혈혈단신, 잃을 것이 개뿔 이나 있었간디? 사람 잃고 재물 내버리감시로 설한풍 모진바람 마시가며 내 동포 내 나라 생각허고 마지막 늙 은 목숨 바친 어른들 생각허면... 목이 메어 강가에서 울 적에 별로 크고오 물살 소리도 크고 아하아 내가 살 아 있었고나, 목이 메이면 메일수록 뼈다귀에 사무치는 설음, 그런 것이 있인께 사는 것이 소중허게 생각되더 라 그 말 아니더라고?" "어이구, 듣기 싫다. 무슨 염불 같은 소릴 하는 게야? 서런 맘이야 술 마시고 딱 잊어버리는 것이 제일이지. 아암,"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술집을 나설 때 주갑은 "아짐씨," 비틀거리며 주모의 손목을 와락 잡는다. "애구망이나 어찌 이러지비? 늙으가 므스리 앙이 할 짓으 한답매." "늘고 젊고가 워디 있다요? 평시 아지마씨 손 한 번 잡아봤으면, 이자 됐구만이라우. 거 보란께? 얼굴이 빨개 지지 않았소잉? 하하핫..." "미쳤다이. 앙이 하든 짓으." "오십이 넘어도 여자는 여자, 하하핫... 얼굴 붉히나 안 붉히나 보고 저벘소. 하하핫..." 바람 부는 날 수수깡 같은 몸을 흔들며 주갑은 나간다. 먼저 나간 홍서방은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성님 펜허게 집으로 가시시오. 그러고 한 열흘, 많이고 말고 열흘 속앓이허고 나오지 마시시오. 알았지라?" 주갑은 건들건들 상체를 흔들어대며 홍서방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몸을 돌린다. "아제씨! 아제씨!" 큰 소리를 지른다. "주갑이 왔어라우!" "저놈의 인사 또 술 처먹었구나." 방문을 열고 방에서 기어나오듯 공노인이 마루로 나앉는다. "밤바램이 찬데 들어가시시오. 예, 술 좀 마셨지라우." 공노인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주갑이는 방으로 들어간다. "아짐씨는 좀 어떠신지 모르겄소잉." "어떻기는, 노상 그 타령이지. 어서 죽어야만 나도 이것저것 따둑거려 놓고," 자리 이불을 밀어붙이고 앉으며 말했다. "오다가 홍서방을 만났지라우." "해서 술타령 했고나." "못 고칠 병이라면 할 수 없인께." "이 빌어먹을 중놈은 함흥차사가 됐는가 나간 뒤론 소식이 없네?" "예?" "하동서 혜관이란 중이 그저께 왔더마." "예. 그러면 조선의 소식은?" "뭐 별달리 변한 것은 없고오, 한복이 그눔아아가 왔을 때 한 얘기, 그 얘기가 그 얘기라." "그러면 그 스님이 어디로 갔을까요?" "설마 붙잡히기야 했을라구." "..." "전에도 두 번인가 왔었지. 그때도 산 게처럼 사방을 불불 기어댕기더마는. 나잇살이나 처먹었으니 설마 상해 겉은 곳으로 빠져 나가진 않았을 게야." "흥이랑 용이성님," "그까짓 것 소식은 알아 뭐해." 주갑이 힐끗 쳐다본다. "저녁은 우쨌나? 영선네보고 차리라 할까?" "술 먹은 속에 밥은 무슨 밥이겄소. 일찍 자야 쓰겠소." "긴긴 밤에 뭘 벌써부터, 간 일은 잘됐나?" "잘되고 말고 지는 전하고만 왔인께요." "음...." "참 하얼빈에서 두수 그눔아아를 보았지라우." 공노인은 슬그머니 주갑을 바라보다가 그 말 대꾸는 하지 않는다. 곰방대를 챙겨서 담배를 넣고 불을 붙이고 뻑뻑 빨아당긴다. "주서방." "예." "자네 봉순이, 아니 기화를 알지?" "워찌 그걸 물으시오?" 주갑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진다. 반대로 공노인의 시무룩하던 표정이 장난스럽게 변한다. 아니 심술궂게 변 한다. "거의방한 계집한테 욕심을 가져도 가져야지. 그런 웃음거리가 어디 있을꼬?" "아이고매, 워찌 이런다요? 그 기생이 서방 얻어 아들딸 낳고 산답디여?" "죽었다." 담배를 뻑뻑 빨아당긴다. "죽어요? 청춘이 구만리 겉은데 죽기는 왜 죽는다요?" "이놈아! 죽음에 노소가 있더나!" "그러면 죽기는 정녕 죽은개비여." 여전히 심술궂은 공노인의 눈이다. "그 소리 들은께 쪼깬 안됐기는 안됐소잉. 그러크름 꽃같이 이삔 사람도 죽는개비여." "선잠 깬 소리 하네." 주갑은 서글프게 웃기만 한다. 이때 마침 혜관이 돌아온 것이다. "노인장께서 구박이 자심하여 탁발이나 하고 다닐까 싶었는데. 해가 길다는 말씀이 생각나서 왔소이다." 공노인은 반가우면서도 "중이 돌아다니기에는 만주 땅이 좀 시끄러운께." 하며 외면을 한다. 주갑이와 혜관이 서로 인사를 하고 상호간 소식을 전하는데 공노인은 또 시작이었다. 남의 속에서 빠진 것 소용없다는 그 얘기였다. 주갑이는 하던 말을 끊고 입을 다물어 버린다. "또 그 말씀이오?" "대사는 모를 거요." "모르기는 왜 모르겠소. 실이 노가 되도록 말씀하시지 않았소?" "아, 그 아이를 모른다 그 말이오!" "...?" 주갑이 혜관을 보고 눈을 깜짝인다. '허허어, 이 노인이 정녕 노망이구먼.' "모를 게요. 알 턱이 없지. 어떤게 된 아인고 하니, 어릴 적부터 우리 내와가 돌보아주었지요." "예. 김두수가 꼬여냈다는 계집아이 말씀 아닙니까." "잠자코 들어보면 알 거 아니오?" "말씀하시오." "자식 없는 우리 내외 그놈아이한테 공이 안 들었다 할 수 없제. 맘이야 내 친자식, 부모의 맘이 그런 걸 거 요. 어떻게 된 아인고 하니 애비 에미가 없는 천애고아라, 에미는 얼굴도 모르고, 애비는 아이새끼를 공부시키 겠다고 용정으로 데리고 나와서, 송장환이라고 그 사람도 대사는 모를 게요. 여기 상희핵교 교사였제요. 무던 한 사람이었소. 흥이가 잘 알 게요. 아 글세 그 교사한테 학비랑 아이새끼를 맡겨놓고 떠난 후 뭐 총이 잘못돼 그랬다든지, 죽었지요. 포수라 카더만. 한데 그 아이놈이 기차게 머리가 좋고 마 신동이라 할 만치, 인물은 또 좀 좋았으야지. 해천에 용이 난 거라. 복에 과해서 애비는 자식놈도 못 보고 죽었지. 한데 그 남의 자식이란 소용없다만요." "이녁 자식인들 뜻대로 되든가요?" "아 그놈아아야 군관핵교를 나와가지고 장차 왜놈을 쳐부수겠다는 결심으로 앞길이 훤한데 지 애비가 살았으 면... 애비에 대한 정이 그렇기 절절할 수가 없고. 핏줄 안 닿은 우리가 섭섭해서 그렇지. 놈이야 어디다 내놔 도... 죽은 애비는 그리 못 잊어하면서 살아 공이 든 우리 내외는 그냥 은인으로밖에 안 생각하는 괘씸한 놈!" "..." "삼 년 전에는 환국이부친이 권해서 장가도 들었지요. 환국이어머님이 들으시면 섭섭해하겠지마는 그런 과수 가 하나 있었지요. 그 여자의 소생인데 아이가 영민하고 에미가 미국 선교사 집에 있으면서 딸아이는 가르칠 만큼 가르쳤고, 그 새아기가 지금 이곳에서 선생질을 하고 있지요. 내가 이런다고 환국이부친을 오해는 마시시 오? 사내란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해야겠지만 멀리서나마 잘되기를 바라는 맘까지 끊어서야 안 되지요. 우리 그 새아기도 어릴 적에 환국이부친을 몹시 따랐다 하더구먼." "네." 혜관으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는 그렇고 그놈이 아무리 독립운동이 바쁘기로, 흠, 그래도 전에는 바람겉이 왔다가는 가곤 했는데 근자에 와서는 얼굴조차 구경하기 어렵게 됐단 말이요. 달포 전에도 훈춘까지 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기어오지는 않 고 인편에 편지 한 장 보내고는 그만이라. 할망구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남의 자식 아니라면 그러겠소? 다 소용없는 것들. 조카자식이라도 내 붙이가 있었더라면 이리 적막강산일까? 할망구가 죽어도 머리 풀 종자 하 나 없으니." "섭섭한 마음이야 모를까마는 얘기를 듣고 보니 마음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지 않소?" "0어디 두매 그놈뿐이겠소? 흥이 그놈은 어떻고? 대사도 아시다시피 내 조카딸 월선이가 그놈한테 어찌 했소? 무덤 하나 댕그마니 맨들어놓고 가버린 후 종무소식 아니오? 천리길 아니라 만리길이라도 찾아와서 벌초라도 한 번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 아니겠소? 이서방도 그렇지. 요즘같이 편리한 세상 기차 타면 올 건데 괘씸한 놈들 같으니." '흐흠, 그러니까 흥이 얘기가 하고 싶었던 거로군. 처음부터 그럴 일이지 늙은이도 참,' "의리 없는 놈들! 나쁜 놈들!" 담뱃대 든 손이 떤다. 얼굴도 핼쑥해졌다. "이서방 심정은 소승이 잘 알지요." "알기는 뭘 알아! 그까짓 것들," "누가 그걸 모른답디까?" "그간의 사정이," "내가 하는 말은 이서방이 안 온다 그 말이 아니오. 지가 사람놈 같으면 계집에 대한 전정도 전정이거니와 흥 이 그놈을 어떻게 키웠다고? 자식놈을 타일러 한 번 보내는 게 옳은가 그른가! 흙 속에 묻혀 썩기로, 그리 매 몰차고 박정할 수 있이까? 옛날에도 타국 수 만 리, 기차 없는 시절에도 부모의 뼈를 찾을라고 음, 그런께 남 은 소용없다는 말이 나올밖에, 하기야 뭐 죽은 조카딸 그년이 병신이지. 지 일신 하나 편하게 살다 갔으면 가 슴이 이리 메일까? 제놈들이 명 보존한 게 누구 덕인가? 최참판댁 덕인가?" 곰방대로 재떨이를 두드린다. "여비가 아까우면 성묘 오는 비용을 내가 못 줄까?" "노인장," "내 말이 글렀소?" "아니오. 당연한 말씀인데 그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계시오. 이서방은 성묘 정도가 아니라 흥이를 아주 이곳 으로 보내려 했지요." "보내?" "네." "..." "그것은 이서방만의 생각이 아니지요. 영팔이도 그렇고, 흥이도 틀림없이 그럴 생각인 줄 소승은 알고 있소이 다. 그간의 사정이, 어미 일도 그렇거니와 네, 처음엔 그 에미 때문에... 인륜상 안된 얘기 같지마는 흥이로서는 아비 마음을 편하게 하고 싶었을 것이고, 에미를 이서방한테서 떼어놓고 싶은 심정, 소승은 잘 알지요. 다행인 지 불행인지 임이네가 먼저 갔으니 일은 잘 해결이 된 것 같았으나 아시다시피 이서방의 몸이 성찮고 흥이로 서는 부친의 사후 정리를 위해서 고향 근가죽에서 떠나지 못한 모양인데," "듣기 싫소! 떠나지 않기는? 일본으로 간 것은 떠난 게 아니란 말이오?" "처를 두고 갔었지요. 물론 돈을 벌려고 갔겠지만 흥이 속셈으론 돈보다 기술을 확실하게 배워두고 싶었을 겝 니다. 처음 조선으로 나왔을 때는 아이 버리겠다 하는 생각을 했으나 지금은 의젓하고 생각이 깊어서," "흠," 했으나 공노인 얼굴에는 뚜렷하게 회색이 돌았다. "지 애비 장사 치르고 올라면 그땐 우리 두 늙은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텐데..."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주갑이는 두 무릎을 세우고 두 팔을 얹은 채 말이 없었다. 3장 마차를 기다리다가 망망한 대륙, 사위는 아득한 지평선뿐인데, 모래바람만 휩쓸어오고 주춤주춤 봄조차 발길은 더디다. 사월이 중 턱을 넘어섰지만 간밤에는 창 밖에 눈발이 희뜩거렸다. 혜관과 주갑은 왕청으로 가기 위해 초온가도에서 가야하를 바라보며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갑은 벌목꾼 과 같은 차림으로 목에는 때묻은 타월 한 장을 매고 있었으며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혜관의 뭉실한 코끝은 불그레했다. 서북풍이야 불거나 말거나 실구름 한오리 없는 맑고 푸른 하늘이 길가는 사람에겐 얼마나 다행인 지 모른다 진눈깨비라도 내린다면 그렇잖아도 험난한 길, 사람이나 말이 고생을 하게 되니까. 온성과 백초구의 대강 중간 지점이라 마차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도보로 가는 사람도 있다. 백초구로 직행하는 사람들은 마 차를 기다리는 것 같았고 왕청, 동영 등 오지로 가는 축들은 대개 보행자, 그리고 장사꾼들은 마차편을 이용하 는 듯, 가난한 이주자들은 도보를 택하는 것 같다. "땅도 넓기도 하다." 혜관이 중얼거렸다. 땅바닥에 다리를 뻗고 앉아서 담배를 말고 있던 사내가 힐끗 눈을 치뜨고 쳐다본다. "파종은 했을까요?" "아직이야, 오월도 넘어가야지요." 담배를 말던 사내가 말했다. 주갑은 긴 목을 뽑고 저만큼 서 있는 사람의 녹핀지, 짐승 가죽으로 만든 망태를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오월이면, 양력으로 말인가요?" "그렇지요." "조선서는 똥장군 지고는 올라갈 수도 없는 까꾸막 땅도 얻기가 힘드는데 참 넓구먼." "여기선 사방에 삽 드러갈 땅이 굴러 있지요. 이곳이. 내 나라 땅이면 얼마나 좋겠소." 사내는 말아서 침을 바른 담배를 피워문다. "청나라 적에 봉금이 된 땅이니까 그렇지요. 마음대로 드나들게 했다믄 땅 한 치가 남아났겠소?" "글쎄올시다." 주갑이 고개를 휙 돌린다. "옛적에는 이곳이 모두 우리 땅이었다 허든디 조상을 잘못 두어서 우리가 군식구 된 게 아니어라?" 화제 속에 끼어든다. "지금 와서 그런 소리 해봐야 못 잡은 가오리가 멍석만 하다든가?" 혜관이 비웃듯 말했다. "한시절 전만 해도... 요즘에는 어디, 깊숙이 들어가야 삽질이라도 하게 되니." 사내도 주갑을 못마땅한 듯 외면을 하며 중얼거렸다. "삽질도 삽질이지만 비적은 어떡허구요?" "하기야 뭐 비적뿐이겠소? 왜병놈들 독립군 잡겠다고 설치는 것도 큰일이지요. 도방에서는 남의 나라 눈들이 있으니, 그래도 그만 하지만 깊은 구석에서는 구덩이 파놓고 몽땅 생매장한대도 나라 없는 백성, 조선 사람 지 켜줄 법이 있어야지요." "그려. 몇 해 전만 혀도 젊은 사람들 방바닥에 등 붙이고 자질 못혔인께로. 뿐인감? 그 밟아죽일 놈들, 그 원 수놈들이 연장을 마구 들내놓고서 댕기는 개쌍놈의 새끼들이 아 금매," 긴 팔을 훌렁훌렁 저으며 "시아부지 앞에서 며느리를 범하는디 그런 일들이 부지기수였다니, 젊은 사내는 보는 쪽쪽 작살내고 젊은 여 인네는 보는 쪽쪽 겁탈이라, 혀서 목 매어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몇 해 전의 얘기만도 아니오. 저기 올망졸망 지고 이고 가는데, 차라리 흑룡강을 넘어서 시베리아로 가는 편 이 살기가 나을 게요." 사나이는 씹어뱉듯 말하며 피우다 만 담배를 길섶에 던진다. 그리고 일어섰다. "제에기, 기다리느니 걸아가야겠구먼. 스님, 저는 먼저 갑니다." 사내는 주갑을 무시하고 가버린다. "나무관세음보살." "누가 자개보고 뭐랬남? 나이도 훨씬 아래인가 본데 볼촉스럽긴." 주갑은 사내 뒷모습을 향해 눈을 흘긴다. "철이 덜 들어 보여서 그런가 부지." "시님꺼지 이러시면 참말이제 접시물에 빠져 죽어야겠어라우." 벌목꾼 같은 차림의 주갑이 건들건들 몸을 흔든다. 아닌게아니라 수숫대같이 비쩍 마른 몸집은 옛날과 별 다 름이 없었고 흰머리도 눈에 잘 띄지 않아 주름진 얼굴을 가까이서 보지 않는다면 그의 육십 가까운 나이를 헤 아리기 어려웠다. "시님." "접시물에 빠질 것 없이 저기 싯퍼런 강물이 있구먼. 얼음도 녹았고," "허기야 소싯적에는 듣기 싫은 말이었지마는... 철 덜 들었다는 말도 이제는 반갑다면 반가운디, 날씨도 좋고 헌께 우리도 그만 걸아가십시다요," "그럴까?" "가다가 저물면 삼두구나 신흥서 자고 가도 무방헌께요." "뭐 마차는 편한가? 엉덩이뼈가 아파서. 서둘러야 할 것도 없고 먼 길도 아니니 그러면 걸어볼까?" "그게 좋겠구만이라우." 바랑을 짊어진 혜관과 보따리 하나를 든 주갑이 걸음을 옮겨놓는다. 그새 풍치는 가라앉았는지 비대하고 늘어 진 살가죽하고서는 혜관도 뒤지는 기색은 아니다. 두 사람은 꼿꼿한 자세로 걸어간다. 늙는다는 것은 걸음걸이 에서 나타나는 법인데 운수의 일생, 뜨내기로서의 생애, 쇳덩이같이 다져진 다리만은 힘차게 땅을 밟고 간다. 망망한 지평선이다. 야트막한 구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훤하게 트인 시야, 얼굴을 치는 것은 모래바람뿐이 다. 이따금 밭둑에, 강가에 우뚝 선 고목이 유랑민의 심사를 산란하게 한다. 움은 트고 있었겠지만 멀리서는 죽은 나무같이 가지는 엉성하고 이역 벌판에 수없이 쓰러진 실향민들의 고혼, 마지막 순간 뭔가를 움켜쥐려는 손짓과도 같이 엉성한 나뭇가지. 이곳에서 죽음과 같은 땅 시베리아의 벌판은 어디메쯤인가, 북쪽으로 북쪽으 로 치올라가면 비옥한 농경지와 넘치는 물고기와 풍부한 수렵지가 있다는 흑룡강 유역, 그 강을 넘으면 시베 리아인가. 거대한 빙산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 흰곰이 느물대고 끝없이 살육당하는 해마며, 물개며, 제 새끼를 기르기 위해 남의 새끼를 먹이로 하는 잔혹한 생존의 투쟁이 그곳 빙산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알래스카는 어디 매쯤이며, 일찍이 동방에의 길을 찾아 대상들이 사막을 건너서 오던 돈황, 그 실크로드는 이곳에서 어디메쯤에 있는 것일까. 이별할 때 옷을 찢어주고 말을 몬다는 몽고인, 구라파를 짓밟고 세계정복의 꿈을 안았던 영웅이 태어난 가장 강건했던 민족이 사는 곳이며 노영 양국이 남진을 위해, 또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간단 없는 각 축전을 벌였던 신강 밖의 중아지대며, 서장 넘어 인도는 어디메쯤인가. 빙산과 열사와 만년설의 가장 냉혹한 자연을 딛고 서서 생존을 계속해야 하는 인간들이 있는 곳, 땅은 있으되 소유하는 토지는 거의 없고 목초와 물을 찾아 떼지은 가축을 몰고 지나가는 땅, 초록을 불면서 사슴을 따라가는 광대한 설원 일엽편주, 고기떼를 쫓아 해빙한 바다를 지르는 사람들, 짐승 가죽이 침구요 의복이며 생선뼈, 짐승뼈는 바늘에서 연장, 장신구까 지, 동물의 피지는 등유로 쓰이며 가축의 배설물조차 땔감이 되는, 자연에 반역하면서 자연에 순응하는 그네 들, 토지(소유) 관념은 거의 없으며 머무는 곳에 지은 가건물은 떠난 뒤 오는 사람이 쓰고, 소위 흉노요 북적 이요, 남만이라 불리던 미개한 민족과 각박하고 험난한 지리에 둘러싸인 금송아지 같은 대륙이 중국이다. 현 란한 문화 방대한 토지를 점유한 수억의 민족이 한족인 것이다. 동이니 북적이니 하던 여진족이 발해와 금을 쳐서 성쇄를 거듭하더니 근세에 와서 남만주 무순 동쪽에 할거하다가 또다시 대두하여 한족을 정복하고 한, 만, 몽, 회, 장의 오족과 오대 지방의 땅을 장악하니 대청제국이라, 유례 드문 독재 정치를 완성한 대청제국의 육대 황제 고종은 말하기를 "주가는 가색으로써 기틀을 잡았거니와 이 나라는 나무 화살로써 천하를 정하느니 라." 마상에서 천하를 얻었음을 상기시켰고 나무 화살이 수 천 년 문화의 한족을 꿰뚫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족의 유구한 문화가 또한 여진족의 나무 화살을 무력하게 할 것임을 예상했을 것인즉, 그네들 소수민족의 정권 유 지에의 유념이야말로 어찌 처절했다 아니 할 수 있겠는가. 민족의 순수를 지키기 위하여, 강건한 기풍이 나약 한 문화에 물들지 않기 위하여 그 방책의 일환으로 청조 발생의 땅을 성역화했으며 산해관에서 개원, 길림에 서 봉황성에 이르기까지 유조변장, 변문을 설치하여 타민족의 내왕을 금하였던 만주 일대, 아직 도처에 벌판은 있고 개간할 만한 땅은 가는 곳마다 있건만 타민족에 의해 이미 만주는 봉금된 땅은 아니요, 대청제국도 망한 지 이십 년이 가까워온다. 문은 무에 의하여 주살당하고 무는 문에 의하여 쇠망하는 역사의 이치는 생과 사와 같이 인류와 더불어 영원히 끝이 없는 것인가. 고목 한 그루, 경우 두 마리, 해빙한 가야하의 물살, 망망한 벌판을 수숫대 같은 사내가 건들건들 몸을 흔들 듯 하며 가고 늙은 중은 법의를 펄럭이며 간다. 토지(소유)하고는 관계없는 두 사라 내가 땅을 밟고 가는 것이 다. 평생이 운소요, 평생이 뜨내기, 바랑과 보따리 하나면 족하고 그것조차 잃는다면, 그래도 그만인 것이다. "시님." "모래가 씹히는데 입 다물지 못하겠소?" "아따, 한섬지기 염불도 겁낼 것 겉지 않은디 모래 알갱이가 그리 무섭소잉? 그렇다면 듣기만 허시시요이. 이 런 정도의 모래바람이야 사철 부는 거니께, 그래도 청국놈들 벙어리 없는 것 겉고요." 곁눈질을 한다. "함섬지기 염불도 겁낼 것 같지 않다? 그건 또 무슨 소린고?" "되나캐나 나오는 대로 헌 말인디, 옛적에 늙은 영감 할멈이 주야로 왼 염불을 담은 빈 섬, 그런 이약이 있었 지라우. 아무도 그 빈 섬을 들질 못혔다는 이약이 있질 않습디요? 시님이야 염불이 함섬지기만 되갔건디?" "알겠소, 알았어." "뭐 말이여라! 뭘 알겄다 그 말씀이랑가?" "안태 밖에 나왔을 때 천개골 구멍이 따바리 구멍만 했을 거라." "무신 말슴이다요?" "주서방 말이요." "천개골 구멍이 어찌여?" "갓난애길 보면은 정수리에 말랑말랑하고 빨락빨락 숨쉬는 곳이 있지." "야. 있지라우." "그 구멍이 따바리 구멍만 했다면은 골이 덜 여물었다, 그러니 달을 채우지 않고 나왔다 그 얘기라." "얼시구, 그러니 팔푼이다 그 말씀이란가요?" "허허헛 허허헛... 그러면 돌대가리는 스물넉 달 채우고 나왔다 그런 이약이 되겄는디 듣자니께 돌대가리 속에 먹물이 못 들어간다, 시님 대가리는 차돌도 아니고 울퉁불퉁하니께 지리산 바윗돌 아닌가 모르겄소잉." "에키! 이 못된 송아지야." "피장파장 아니겄소?" 혜관은 껄껄껄, 퉁겨나온 배를 안 듯 하며 웃는다. "시님." "또 무신 소리 할려고? 해초리 꺾으려면 한참 가야겠는데?" "버릇이야 이십 전에 가르치는 법이고 그보다도 지금쯤 고향에 있었으면 보리국을 먹을 것인디, 파릇파릇하게 돋아나는 것 연하디연한 것을, 뜨물 붓고 된장을 연하게 풀어서 끓인 국 냄새가, 봄 냄새여. 깡보리밥을 말아 서 무짠지허고." 침을 꿀꺽 삼킨다. "오동지 섣달에 죽순 구해오라는 사람이 있었다든데 내 옆에도 노망든 사람이 하나 있구먼." "갑아, 양이 덜 차지야? 불쌍한 내 새끼, 꼬막 겉은 새끼 배를 채우들 못허니 사람이 워찌 금수보다 낫다 헐 것이여. 우리 엄니 허시든 말씀이지라우." "점점 병은 깊어가는군." "지가 생각혀도 그런 것 겉소잉. 오만 잡생각이 끝도 없이 찾아드니 아무래도 좋잖은 징조 아니겄소?" "..." "어헛어!" "워따매, 모래바람 들온다 그 말씀이여라? 이젠 바람도 어지건히 잤는디, 중이 몸 대게 섬기요잉. 부처님 말씀 대로 허잘 것 겉으면 삼라만상이 공이요 없는 것이라는디, 목구멍에 모래 알갱이 좀 넘어갔기로 육신이 없다 생각헐 것 겉으면 모래 알갱이도 없는 거 아니겄소?" "흠, 중도 중 나름이지 땡땡이중보고 그런 말 해보야 소용없고 나무관세음보살! 원래는 없는 거구 끝에도 없는 건데 어째서 가운데 토막이 있는 건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건지, 그것을 아직 못하니 알지 못하는 것은 없는 것이라. 오고 가는 중간이 가운데 토막이니 즉 인생," "그러면은 극락도 없고 지옥도 없다 그 말슴이란가요?" "누가 없다 했소!" "오매, 누구 닮아가는개비여? 앞뒤가 없다면 가운데 토막이 길어야 허들 안 허겄소잉? 성질부리지 마시시오." "누가 없다 했소? 모른다 했지!" 허공과 바람을 쳐부수려는가 혜관은 가는 방향을 향해 주먹질을 하며 화를 낸다. "그 말이 그 말 앙이간디? 아 금매 아까는 원래가 없는 거고 끝도 없는 거라 허시든디요?" "그게 모르겠다는 얘기 아니요." 변덕스런 여름 날씨처럼 혜관은 웃는다. "허허헛 허허헛, 세상에 요상스런 시님을 다 보겄소 허허헛..." 혜관도 따라서 웃는다. 호걸 웃음과 해해거리는 주갑의 웃음소리가 인적 끊어진 길가 들판에 울려퍼진다. "워쨌거나 배짱 맞은 말슴이여라. 좋구만여. 중들은 모두 지옥이 있다 허고 야소쟁이도 지옥이 있다 허고, 혀 서 겁을 주는디 시님은 안 그러신께로 속이 씨원허요." "죄 많이 지었구먼." "아암요. 죄 많이 졌제요. 지금도 제집을 보면 손목 잡아보고 접고 부모 공양 못허고 마지막 가시는디 사잣밥 도 못 지어드린 죄가 좀 클 것이여? 남 속이먹는 일은 식은죽 멋듯 혔고 욕허고 거짓말허고 아 금매 마음속으 로 짓는 죄는 또 얼마겄소? 수백 섬이 넘을 것인디 염라대왕께서 불쌍한 몽다리귀신 왔다고 동정을 허신대도 지옥 면허기가 어려울 것이요잉. 그래도 이승에서는 조선, 대국, 노국, 두다리가 성헌께로 세 나라를 왔다갔다 산 게처럼 싸돌아댕깄는디 지옥열화 속에서 워찌 전딜 것이여? 더군다나 반평생을 북쪽 설한풍 속에서 지낸 놈이," "그러면 한빙 지옥으로 가면 되겠군." "그런 말씀 마시시오. 그런디 스님, 지금 무슨 생각을 지가 허는지 그거는 모르실 것이요 잉." "모르기는 왜 모를꼬?" "야?" 주갑은 궐련을 꺼내 붙여물다 말고 혜관을 쳐다본다. "봉순이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야?" 성냉개비를 버리고 허기진 사람같이 급하게 담배를 빨다가 "워찌 고것을 안다요? 휘안허단께로? 이거 참말로 놀랍소잉?" "정말 주갑은 놀란 것 같다. 목덜미의 잔주름이 땟자국같이 밀리는데 입을 병신같이 헤벌리고 혜관을 쳐다본 다. "푼수없이 봉순이를 좋아했던 모양인데 죽었다는 소식 듣고도 도통 말이 없었으니 생각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 지." "허허헛... 으허허헛 시님도 가만히 본께 한가락 허시는디 허허헛..." "나이가 몇인데 부끄럽다는 생각도 않는가 부지." 하면서 혜관은 해란강에 염주를 떠내려보낸 자기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운 마음과 함께 상기되는 것이었다. "나이는 워찌 됐거나, 사모관대 못혔으니 총각이고, 그렇다고 혀서 손을 한 번 만져보았겄소, 품에 안아보았겄 소? 맴으로 기리는 거는 남녀노소 다를 것 있겄으라우? 사람의 상정인디, 그뿐이겄소? 사람뿐이것소? 짝 잃은 외기러기 슬피 운다 안 헙디여? 만고의 영웅호걸 성인인들 안 그럴 것이여?" 혜관은 심술궂은 웃음을 흘린다. 멀리 인가가 나타났고 검정 조끼에 흰 수건을 두르고 밭둑길을 지나가는 조 선인 농부의 모습이 멀리 보인다. 혜관은 머릿속에 안개가 가득 찬 그런 기분이었다. 목적 없이 떠나온 여행 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목적이 전혀 없다 할 수도 없고, 어쩐지 짜증스럽고 심술이 불끈불끈 솟아오를 것만 같 다. 왜 그런가 자신에게 따져보는 것도 귀찮았다. 그냥 발이 제 혼자 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문뜩 생각이 나는디, 이 주갑이가 살아온 것이 죽도 밥도 아니었다, 야 그런 생각이 든단 말씨. 죽이면 죽, 밥 이면 밥." "밥은 뭣이며 죽은 또 뮛인고?" "들어보시시오. 옛적에 그런께 소싯적인디 어떤 사램이 나를 보고 소리 공부 허는 게 좋겄다는 말을 허더란께 요. 틀림없이 명창이 될 거라 장담을 허더란 말씨. 솔깃허더마요. 명창이 되면은 허리 휘도록 농사짓고오 보리 죽 먹는 신세는 면할 것인께요. 헌디 명창 되기꺼지 뭘 먹고 산다요? 그것도 뭐 건덕지가 좀 있이야, 수숫대 우막에서 농사보다 나무꾼인디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는 꼴이었제요. 그나저나, 그보다고 그 때 동학 난리가 나들 않았겄소? 내 아부지가 동학당이었지라우. 그런저런 연고로 이날 이곳을 이리 걷고 있는디 그때 소리 공 부를 허고 명창이," "봉순이 얘기구먼." "야, 맞소. 섬진강 푸른 물에 함께 풍덩 빠져 죽었을지 뉘 알겄소?" "송장이 일어나서 제 관 짊어지고 가는 그 따위 시시한 얘기는 그만두고." "그럽시다요." 주갑은 순순히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턱을 쳐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는다. 보 따리는 엉덩이에 붙이고 따라서 두 어깨가 꾸부정했으며 종전의 주갑과는 사뭇 다른 늙은이로 보인다. "왠지 이번에는 조선에 돌아가고 싶지 않구먼. 어디 암자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혼잣말같이 하는 혜관 말에 "이곳에선 목탁 뚜디리곤 못 먹고 산단께요." "어째서?" "왜놈허고 손잡으면 그야 모르지요." "..." "공산당 천지 앙이란가요?" "공산당은 왜 중을 싫어하는고?" 몰라서 묻는 말은 아니었다.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라는 것도 주갑이 안다. "지옥 극락이 없는디 가만히 앉혀놓고 중 먹여살리겄소?" "금강산 중들이 그래서 중옷을 벗었나? 밥벌이 못할까 봐서." "그 사정이야 모르겄소. 길서상회 김선상이 어서 와야 허는데," "그건 이미 종결된 일이고 기다릴밖에 없소. 잘못되기는 분명 잘못된 일이지만 그 정도로 막아버렸으니 다행 이라고나 할까. 머리도 여러번 풀면 눈물도 안 나온다 하더니만 전자에 하 험악한 꼴을 당해서." 김환의 죽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곳도 마찬가지 아니겄소. 처신허기론 조선이 어럽겄지마는 희생자는 이곳이. 비할 게 못되지라우." "죽을 때 죽더라도 숨이나마 크게 내쉬니 살 것 같구만." 그 말 대답은 없이 주갑은 별안간 "어화아 저 오작아 네 어데로 향하느냐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밭둑에 내려앉았던 까마귀 몇 마리 후두둑 날개를 털며 날아오른다. 칠월 칠석 멀었으니 은하수 깊은 물에 우녀성 가련허고 강남의 기러기 짝을 잃고 우는 소래 계명산 추야월에 사향함과 같다마는 고향 소식 네 알소냐 고당상 학발 양친 이별헌 지 몇 해든고-- 악을 쓰듯 '사향가'를 불러젖힌다. 그러나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러대듯 하던 주갑의 소리는 차츰 본래 의 노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혜관의 눈이 둥그래진다. 주갑은 보따리 안 든 편의 팔을 학의 날갯짓처럼 펼치 며 몸부림치듯 몸을 흔든다. 곽산만리 찬바람은 낙매곡이 서러워라 운무에 싸인 달은 상심빛을 띠여 있고 원포의 여울소리 단장서 화답헌다아-- '허허어 참, 저 사내는 전생에 새였을까? 노송 위에 홀로 앉은 한 마리 학이었을까?' 혜관은 용정 올 때 구름을 뚫고 이동해가는 철새 생각을 한다. '저 사내 어느 구석에 저리 귀한 곳이 있었던고? 반하게 예뻐 보이는군 그래. 소리 공부 안 해도 명창이다, 허 참.' 그러나 혜관은 "관세음보오살! 관세음보오살! 관세음보오살! 관세음보오살! 관세음보오살! 우렁우렁 울리는 음성을 크게 높이며 염불을 하는 것이었다. 주갑은 노래를 멈추고 "그러잖아도 목이 말라서 그만둘라 혔지라우. 물이나 마시고 가야 허겄소." 강으로 내려간 주갑은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 듯 엎드려 강물을 마신다. "이자 정신이 나는디. 시님! 쉬었다 안 가시겄소?" 혜관은 못 들은 척 강언덕에서 강을 바라보며 목탁을 치고 독경을 하고 있었다. "울퉁불퉁 돌대가리 중이 그래도 불경 욀 줄은 아는디." 주갑은 중얼거리다가 킬킬대며 웃는다. 그리고 조끼 주머니 속에서 귈련은 꺼내어 붙여물고 피어오르는 연기 속의 강 건너편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본다. "참 세월 좋다. 이리 강물은 맑고 하늘은 높기도 헌디, 수수 알갱이 서너 주먹 넣고 끊이면 주린 창자 채울 것 을, 워찌 세상의 인심은 그리 험하든고. 고대광실 높이 앉을수록 인심이 험한 것은 무슨이치며 계급이 높을수 록 사람을 많이 직이야 허는 것은 무슨 이치며 배불리 먹고 힘이 솟아오르는디 게을러지는 것은 무슨 이치 며... 어린 자식 배고파 우는 꼴을 차마 못 보고 천지신명 원망허며 남의 곡식 훔쳤다고 이 뺨을 맞고 저 뺨 맞고 아랫도리 벗어야 허는 것은 무슨 이치든고? 어하 이놈의 세상 언제 끝이 날꼬." 목탁소리, 염불 소리가 바람 타고 윙윙 울려온다. "저놈의 미친 중 지옥이 없다면서 극락왕생 비는 거여? 사람은 모두 나면 죽는 것, 나도오 조만간에 이 세상 을 하직헐 것인디, 워떠크럼 죽으까이? 사방을 바라보니 봄도 아니 멀고 저 뚝에는 샛파란 풀이 돋아나겄제잉. 그러나 내 인생은 추색이라, 헌 일 없이 가는 것도 원통허지마는 저승이 없고 보면 불쌍헌 우리 부모 다시 만 날 길 없으니, 강선상님은 어디 가서 또 만날 것이며, 기화아씨도 흙 속에서 썩어부리면 그만인가. 어헛! 아서 라! 잡생각 고만 허고 가든 길이나 갈 것이여." 주갑은 보따리를 집어들고 짧아진 귈련을 아까운 듯 끝끝이 피운 뒤 버린다. "시님! 날 저물었소."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한다. "나는 왕청 가서 송선생님 만내본 뒤 연추로 갈 것인디 시님은 위찌 하시겄소?" 묻는다. "연추까지 따라갈 수는 없는 일이고 소승은 발 닿는 대로 떠나겠소." "그래도, 어느 방면으로 가시겄소?" "글세요. 흑룡강을 따라가봤으면 싶은데 가다 못 가면은 용정으로 돌아가겠소." "청국 사람들은 불교를 안 믿는디 동냥도 못헐 것이고, 그 사람들이야 쪼로마하나 쪼로마마를 믿지." "그게 뭔데?" "나도 잘 모르겄소. 그런 거이 있다 하든디요? 무당 같은 것 아니겄소?" 죠르마하와 죠르마마는 모두 석상으로서 여진족의 종교, 샤만의 여러 가지 신 중의 하나인데 말하자면 병을 고치는 보호신인 것이다. "추서방이 있었으면 편하게 갔다올 수 있을 것인디." "그 사람은 어디 있는 사람인데?" "죽었지요." "죽었다면은 하나마나의 얘기," "본래 그 사람은 모피 장사였는디, 공노인허고도 절친한 사이였지라우. 사람의 심성이 곱고 애국자라 헐 수 있 고오, 헌디 흑룡강 근방에 사는 만주인들은 우리가 아는 다른 만주 사람허고는 딴판이라요. 말씨가 다르고 습 관도 다르고 짐승겉이 산다든가, 추서방 말슴이, 중국놈들 아편 때문에 그곳 사람들 다 망친다, 아편, 소금, 화 약 겉은 것으로 값진 모피를 그저 뺏아온다 험시로 늘 욕을 허드란말씨." "한데 추서방인가 그 사람은 왜 죽었소?" "비적놈들이 모피를 뺏고 직였지라우." "허허허." "시님 잘 생각혀서 용정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것소." "글세..." 4장 주사 상현이 하얼빈에 주거를 정하고 신태성 집에 온 것은 지난달, 그러니까 달포 가까이 된다. 신태성을 알게 된 것은 상해 시절이었다. 그는 길상과도 지면이 있었으며 십여 년 전 용정에 있는 길상의 집에 권필응이 묵었을 때 상해서 찾아온 일이 있는 사내였다. 그느 상해임정, 이동휘 계열이었으며 참담한 동족 상쟁이었고 후일 공 산당 내부 분열의 분수령이 되었으며 작년에는 코민테른 제6회 대회에서 조선공산당 승인 취소의 굴욕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던 원인, 흑하사변, 그 참변을 야기시킨 결과가 되고 만 국제군 창설시에 수많은 독립군, 그들 인솔자 지도자들이 소만 국경을 넘어서 시베리아로 들어갈 때 행동을 같이하지 아니하고 상해에 잔류했던 인 물이다. 몸집은 작았으나 중후한 중년 신사로 변모한 신태성은 여전히 싸늘하고 정확하고 이론에 밝았으며 여 유있는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가 어찌하여 상현의 장기 체류에 싫어하는 낯색을 보이지 않고 직장 알선 도 하겠다 자청하며 편리를 보아주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상현의 부친 이동진이 연해주 일대에 심은 공적에 대한 보답인지, 아니면 권필응을 염두에 둔 계산이었는지, 그도 야심가인 만큼 권토중래의 장차를 위한 포석이었는지 모른다. 현재의 그의 활동은 뭔지 모르게 침체된 느낌을 주었으니까. 그러나 그와 동서하고 있는 여자 이은혜는 결코 상현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귀찮은 식객이라 그럴 만도 했으나 그러나 보다는 상대적 인 것이었을 것이다. 여자에게 불친절했고 모멸적인 언동을 서슴지 않는 사내, 자존심이 강하고 남녀 동등을 주장하는 은혜로 하여금 증오감을 가지게 했던 것 같다. "옹졸한 졸장부! 저런 사내는 해당 분자야!" 하면은 신태성이 "그 친구는 당원 아니야." "그럼 뭣 땜에 공짜로 먹어요?" 신태성을 애매하게 웃는 것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식탁에 앉은 채 은혜는 뜨개질을 하고 있었고 신태성을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상현은 비스듬히, 은혜와 또 마주본 자리에 앉은 신태성에게 등을 돌린 자세로 신문을 읽고 있었다. 월세로 빌려 든 집이지만 침실이 두 개, 거실도 상당히 넓어서 실내 분위기는 아주 넉넉하게 느껴진다. 그건 생활이 어렵잖다 는 얘기가 되겠다. "이봐요." 눈을 내리깔고 바늘에 실을 감으며 은혜가 말했다. "왜 또 그래?" 신태성 역시 글을 쓰면서 말했다. "생활비 내놔요." "내놓으라니?" "다 썼단 말예요." "알았어." 상현은 신문을 뒤집어 든다. 은혜는 미인이 아니었지만 상당히 매력적인 여자다. 나이는 삼십이 넘은 듯, 아무 렇게나 동여맨 머리에 검정빛 다브잔스를 입은 화장기 없는 얼굴이 창백할 만큼 희다. 상해 있을 때 은혜는 조직에서 일한 일이 있고, 그러니까 신태성과는 동지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만나 함께 살게 된 것은 일 년 남짓, 연애도 결혼도 아닌 그야말로 동서 생활인데 보기와 달리 신태성을 여성 관계가 꽤 복잡한 사내 였다. 정식 결혼은 한 번도 한 일이 없었고, 실은 복잡했다기보다 화려했다고나 할까? 카바레에서 이름을 날린 댄서, 백계 러시아 여자, 여교사와 매춘부 출신, 그러나 그는 여자 때문에 일을 저지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이은혜도 조금은 알려진 독립지사의 딸이었는데 그 역시 결혼에 실패한 여자였다. "이봐요." "허참 왜 그래!" "어머? 왜 신경질이야?" "너 말버릇 안 고칠 거야?" "난 고집에 세거든. 우리 아버지도 못 고쳤어. 중국 바닥의 생활이 한가하지 못했던 거야." "아버지는 못 고쳐도 남편은 고쳐준다." "남편? 우리가 언제 결혼했지?" "함께 살면 그게 결혼이다." "흠," "그래 무슨 얘기야?" "나 이 옷 벗으면 봄옷 없다구요." "내 옷 입으면 되겠군. 스무 살까지는 남자 옷 입었다며?" 신태성을 쓴 것을 접어서 봉투를 훅 불어 그 속에 넣는다. 처음에는 이들의 말버릇이나 행동이 아니꼬웠던 상 현도 이제는 무관심하게 됐는지 신문을 던지고 하품을 한다. 상현은 중국에 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가 발붙일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연해주로 갈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최근에 와서 한번, 귀국이라 는 생각에 퍼뜩 스쳐간 일이 있었다. 그 생각을 떠올리며 상현을 혼자 웃었다. "웃기는 세상이오." 상현이 내뱉는다. "신문에 무슨 얘기가 있소?" 봉투에 침을 바르고 봉한 뒤 접어서 호주머니 속에 넣으며 신태성이 물었다. "아니오. 송병준이가 조선소작인상조회를 만들었다니 웃기는 일 아니겠소." "오래된 얘기 아니오?" "오래됐거나 말거나 웃긴다는 얘기지요." "그보다 더 웃기는 얘기는 조선 내정독립 청원운동이지요. 허허헛... 친일 파 송병준한테 총리자리 줄지 뉘 알 아요? 허허헛헛..." 상현은 자신이 말을 꺼내놓고는 싱거운 생각이 들었던지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만화지 만화, 완전히 만화요." "흠, 케케묵은 그 따위 얘기 뭐가 재미있어요?" 은혜 말에 상현의 눈꼬리가 까끄름해진다. "웃기는 얘기는 또 있지요. 한일합방 조인에 가담했고 대일본제국의 작위를 받았던 김윤식이 죽자 사회장으로 하자고 주장한 민족주의자들 얘기 말입니다. 사회장 대접을 받게 되는 공로가 뭔고 하니 삼일만세 때 후안무 치하게도 작위를 일본 정부에 반환했다 그거요. 굿 뒤에 날장구 친다는 속담은 후한 것인데, 뭐 김윤식이란 본 래 반역자의 배짱도 못 가진 겁쟁이 지만 세상이 다 아는 민족주의자들 노는 꼴이 뭡니까? 만화지요. 신형 말 씀대로 만화란 말입니다." 상현은 은혜가 얄미워 일부로 빗대서 말하는 것 같았다. "그거는, 그렇게만 말할 것도 아닌 것 같소." 신태성이 팔을 저으며 말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은 그렇지요. 친일파를 반일주의자들이 떠받쳐 사회장을 주장한다는 게, 물론 그 민족주의 자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또 장차 그들하고 싸워야 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네들도 능구렁이오. 세상이 다 아는 인물을 집찔한 그 따위 감상 땜에 그러했겠소? 사람은 상관없었지요. 작위를 반환한 사실만 상기시키면 됐던 거요. 왜놈들 약올려주고 사회장으로 떠들썩하게 떠들어본다는 것은 밑지는 일이 아니거든요. "동아 일보 " 일파의 독선이 우리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가증스런 것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어쨌거나 휘저어주는 것은 좋아요." 상현으로서는 호되게 당한 셈이다. 약관의 이 도련님아, 하는 야유가 어투에서 배어났던 것이다. 은혜는 조롱 하듯 웃었다. 상현의 얼굴은 파리해진다. 반격을 할 수도 없었다. 얘기의 시작부터 유치했다고 느꼈기에 상현 을 자기혐오를 수습하기에도 벅찼던 것이다. 결국 상현은 자신의 본래의 것을 하나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오 년 넘게 상해 뒷거리를 헤매며 의식도 해결 못한 세월을 보냈으면서도. "누구 온거 아니야?" 신태성이 말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난다. "나가보아." "일찍 자야겠는데 누가 또 오는 거야?" 은혜는 짜증을 내며 뜨개질을 던지고 일어섰다. "어머! 웬일이세요?" "신선생 계신지요?" "있어요." "지나가다 들렀는데," "들어오세요." 문간에서 주고 받는 목소리다. 은혜와 함께 들어온 사내는 뜻밖에도 송장환이었다. "아니 이거 이선생 아니시오?" 송장환을 상현을 보자 깜짝 놀란다. 상현도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오래간만이오." 굳게 악수를 한다. 그리고 송장환은 "신선생 그간 별고 없었소?" 하며 신태성한테도 인사를 하고 신태성도 반갑게 손을 내민다. "언제 오셨어요?" 자리에 앉으며 송장환은 상현에게 물었다. "달포쯤 될 게요. 그곳은 모두 안녕하신가요?" "네. 그간 고생 많이 하셨지요." 힐끗 쳐다보는 송장환 눈에는 힐난의 빛이 있었다. 초라한 행색과 의기소침한 모습에 대한 노여움이었던 것이 다. 삼 년 만의 대면인가. 용정서 만났었는데 연해주로 가자고 권했을 때 단호히 거절하던 상현. "내가 하는 고생이야 무슨 값어치가 있으며 무슨 보람 있는 것이겠소? 출가한 몸이라면 남들도 그러려니 하겠 으나 뒷간에서 허위적거리는 구더기 같은 인생이지요." 상현은 처절하게 자학하듯 말하며 그러나 부드러운 몸짓으로 송장환에게 담배를 권한다. 은혜의 눈이 커다랗 게 벌어진다. 처음으로 상현의 참모습을 본 모양이다. "이선생께서 여기 계시는 줄 알아다면," 잠시 말을 끊었다가 "혜관스님을 뫼시고 오는 건데," "혜관스님? 그 중이 왔었다 그 말씀이오?" 낯빛이 변한다. 그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담배를 붙여문 송장환은 타는 성냥개비를 재떨이에 놓으며 "네. 용정을 거쳐서 왕청으로 오셨더군요. 그곳에서 만나 함께 여까지 왔었는데," 순간 상현은 도망이라도 칠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무너지듯 도로 앉는다. "발 닿는 대로 가보겠다 하시면서 아침에 숙소를 떠났어요." "어딜 간다 하든가요?" 역력히 안도의 빛을 띠며 의례적으로 묻는다. 상현의 그런 변화를 신태성을 냉철히 관찰하고 있었다. "글쎄요, 말렸는데... 뭐 흑룡강을 따라 가보시겠다고, 고집이 여간 아니더군요." "승려라 고행하려는 거 아닐까요?" 마음과는 딴판으로 상현은 비꼬듯 웃는다. "나이가 적잖으니 그렇지요." "열반하려고 자리 찾아간 게지요. 중들은 흔히 그런다더군요. 홀가분했을 것이니 걱정 마시오." "..." "그러면 각별히 볼일이 있어 온 것은 아니겠군요?" 다시 불안해지는 상현은 확인하려 든다. 송장환은 너그러운 형님같이 그런 상현의 못난 모습을 평정하게 받아 넘긴다. "그런 모양인데, 그러나 국내 사정, 특히 길서상회 김형에 관한 소식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지요." 신태성이 화제에 끼여든다. "송선생을 외곽 단체에 불과한 계명회사건에다 매우 큰 비중을 두시는가 부지요?"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 친분, 네, 김길상 씨하고는 오랜 우의 관계가 있어서요." "그런 자질구레한 거야 사건이랄 수도 없고," 옛날 길상과 대면한 일이 있는 신태성은 그때도 그러했으나 현재도 모멸적인 투로 말했다. "우리 동지들이 천 명 가까이 검거된 사건에 비하면 새발의 피 같은 거지요." 송장환은 눈을 껌벅껌벅하며 "천 명 가까이 검거됐다는 얘기지만 조선에 그리 많은 공산당원이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아요." 심약한 듯 신태성의 기색을 살핀다. "그만한 숫자는 아닐 게요만 어쨌거나 조선에서는 공산당이 전멸이오." "중국의 사정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 그런 셈이지요." "중앙군이 한구까지 함락시켰으니, 국민당을 앞으로도 공산당의 씨를 말리려 들 게요." "한구 함락이야, 남경과 무한, 저희들끼리 싸움인데 공산당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요?" "그래도 무한 정보는 왕시 국민당의 좌파 아니었소?" "보수당의 좌파란, 오히려 공산당 영역을 먹어 들어오는 독충 아니겠소? 재작년에 있었던 일, 무한파의 그 추 악한 배신을 모르고서 하시는 말씀인가요?" "글쎄올시다." "중국공산당도 무너지고, 그보다도 우리 조선의 혁명 세력 정예부대가 완전히 괴멸한 사실," 신태성을 탁자를 짚은 자기 손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뇌이기를 "재건하는 게 살아남은 우리들이 앞으로 수행해야 할 임무요." "신형," "네." 상현을 쳐다본다. "우리라는 말은 마시오." 내뱉는다. "어째서요?" "나야 중국 바닥에 빌어먹으려고 찾아온 사람이지, 독립운동이나 이념을 위해 투쟁하러 온 사람은 아니니까 요." "불면의 법칙입니까?" 놓치듯 말하며 신태성을 웃고 은혜는 슬그머니 일어선다. "이여사." 신태성이 재빨이 불러 세운다. "왜요?" "안주 좀 내와요." 눈으로 압력을 가한다. "알았어." 은혜는 술잔과 안주가 든 접시를 챙겨서 내왔다. 술을 신태성이 꺼내왔다. "이 집 주부께서는 요리 솜씨가 엉망이라 주로 이런 안주를 애용하지요." 은혜는 흥 하는 식으로 "그러면 많이들 드십시오." 뜨개거리를 안고 제 방으로 가버린다. "앓던 이 빠진 것 같소." 상현은 아닌게아니라 기지개를 펴듯 말했다. "중국 생활이 몇 핸데, 이선생을 아직도 여자 위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구려." 송장환이 나무라듯 말했다. "양반 의식의 잔재겠지만 그보다 이형은 여자에게 한 번 호되게 당하지 않았소?" 신태성이 정곡을 찌르듯 말했다. "당했지요." 상현도 솔직하게 긍정한다. "그러니 여자를 보면 저항을 느끼게 되고 자기 감정에 반발하여 불친절해지는 게요. 자랑 같지만 나는 어떤 여자를 보아도 그런 저항감은 안 느끼지요." "그러니까 바람의 명수 아니오?" 술을 마시고 여자얘기로 옮겨가면서 분위기는 한결 풀어진다. "여성에게 저항을 안 느낀다는 것이 반드시 좋다고만 ,할 순 없지요." 송장환이 말했다. "어째서요?" "저항을 안 느낀다는 것은 노력에서 온 겁니까? 그러기로 작정을 했습니까?" "조직 생활 하는 사람으로서 작정도 했겠지만 본시 내 성정도 그랬던 것 같소." "그건 결국 애정을 못 느낀다는 얘기지요. 갈등이나 압력으로 힘을 소비하지 않은 것은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때론 그런 갈등 때문에 힘이 솟는 경우도 있지 않겠소?" "그것은 운동을 자연에 맡긴다는 얘기와 다를 것이 없소." "그럴까요? 나도 늘 여자한테는 저항을 느끼는 처지라서, 네. 이선생과 마찬가지로 출발 때 실연을 한 번 했기 에 하하핫..." 송장환은 술을 마신다. "그는 그렇고, 국내 사정을 어떻다 하던가요?" "대체적으로 변한 게 뭐 있겠소? 흐름이야 중국 사정과 대동소이하겠지요." 송장환은 소극인 태도를 취한다. "독약에 사탕을 발라 내민 총독부 문화 정치에 민족주의자들이 마비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뻔한 일이겠지만 그 럴수록 노동자 농민운동에서 역량을 축적해나가는 데 주력하는 것이 앞으로 해야 할 우리들의 과젠데 그 방면 의 바탕에 대해선 나도 좀 알아두어야겠는데요," "그 스님의 말씀은 대체적인 인심, 그런 것이었고 다만 길서상회 김형의 일은 그 집안과의 오랜 유대 관계가 있어서 재판 과정 같은 것 소상히 말해주었지요." 송장환은 역시 화제에서 비켜서듯 말했다. 상현은 또다시 우울해지며 술을 마신다. 김길상, 깊은 패배감이 엄 습해온다. 사정 없이 달겨든다. 용정 땅을 밟았을 때 예상을 했으면서도 김길상의 존재에서 받은 충격은 너무 나 큰 것이었다. 그때 김길상의 존재가 부친 이동진의 존재로 대치된 것임을 상현은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김길상, 부친이 그의 앞에 섰던 거대한 바위였다면 김길상도 그의 앞에 우뚝 선 거대한 바위였던 것이다. 그것 은 어쩌면, 단 일격으로써 상현을 쓰러뜨리게 한 것과도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미 사랑의 적수라든지 하 인 출신이라든지 그런 의미는 다 소멸하고 없었지만, 바로 그 숙적과 같은 감정과 주종같은 의식이 완벽하게 무너짐으로써 상현은 자기 자신도 아주 완벽하게 무너져버렸다는 것을 자각했던 것이다. 이조 오백 년의 권위 의식과 그 존엄성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순간 상현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만주 바닥을 헤매는 들개 같은 존재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당시 길상이나 송장환은 연해주로 갈 것을 상현에게 간곡히 권하였다. 그러나 상현은 그것을 뿌리쳤다. 그리고 상해로 떠났는데 그곳에서의 세월도 심신을 피폐하게 하는 것 이외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중국 바닥을 헤매는 들개 같은 존재다! 뻗치게 한 것은 다만 자학에 가득 착 그 독백, 아무곳에도 갈 수 없는 절벽 그런 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현은 가장 중요한 시기에 변천이 눈부시고 격동이 물결치는 중국 역사의 현장에서 그것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그가 실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 지만 영웅주의적인 테러리스트들이 역사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 거대한 중국 민중의 원동력을 무엇이 폭발하 게 하였는가, 또 그들은 어떻게 괴멸당하였는가 그 비극을 목도했으며 문어발같이 소리 없이 뼈도 없이 감겨 드는 식민주의 국가의 마수가, 홍수 같은 대자본의 위력이, 얼마나 거대하고 또 치밀한가를 알게 되었다. 완전 히 와해된 상해임시정부, 중국 혁명에 참가하여 거의 모조리 쓰러져버린 조선 혁명의 지도자들, 그들의 정예 부대, 한마디로 그것은 조선 독립의 희망에 종언을 보는 것과 같은 양상이었다. 3.1만세 후 조선 국내에서 일 고 있는 패배주의, 비관주의는 그 심각한 면에서 국외도 다를 것이 없었다. 민족자결주의라는 국제 이념만을 태산같이 믿고 평화적 시위를 내걸었건만 열강은 일본의 기색만을 살피며 무자비하게 국제 이념을 배신하고 조선 민족을 배신하였다. 그러한 국제적인 귀추는 오히려 국내보다 국외 편이 피부에 가깝다. 불교에, 삼계에 발붙일 곳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조선 민족의 현실은 오계에 발붙일 곳이 없는 형국이었다. 조선 국내에서는 이 잡듯 독립사상가를 색출하여 학살하고, 일본에서는 학생 노동자의 학살, 소련에서는 동족상쟁의 흑하사변을 비롯한 일련의 살육, 중국과 만주에서는 어떠한가. 독립군을 소탕하는 것은 비단 일본뿐이던가? 누가 조선 민 족을 두고 분열을 일삼는 민족이라 할 것인가. 사계, 오계에서 살아남을 사람들이 각기의 입지 조건에서 각기 의 방법에 익숙해지는 것은 민족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요, 그것은 바로 역학적 결과일 따름이다. 또 그것 은 일본을 위시한 열강들의 죄악상인 것이다. 그러나 상현은 그런 목소리들이 비행기 폭음에 지워지는 참새 울음에 불과한 것을 안다. 상현은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민족 앞날이 암흑인 것에 실망하고 갈 데 없는 패 배주의자가 된 것이다. 패배주의자의 변이란 아까처럼 송병준을 흉보고 김윤식을 사회장으로 대접하고자 한 국내 민족주의자를 비웃고, 바로 그것이 패배주의자의 비애에 가득 찬 광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신태성의 얘 기 소리가 들려왔다. "유태인은 그 독선과 선택 의식과 예수를 살해하게 한 죄목으로 하며 세계의 유랑민이 됐으나 우리 조선은 무 슨 죄목으로 아시아 일대를 유랑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총부리에 쫓기면서 말이요." "신선생은 민족주의잡니다그려." 송장환이 허허 하고 웃는다. "지금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는 동의어에 속하지요. 왜냐 할 것 같으면 우리 민족을 내몬 것이 바로 제국주의 자 자본주의니까, 앞으로 민족주의자들이 변질만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공동의 적을 가지는 것 아니겠소?" 상현의 눈이 게스츠레해진다. "신선생 객쩍은 소리 작작 하시오. 적이 어디 있어요? 우리가 활을 가졌어요? 그들이 산돼집니까? 그들은 하 느님입니다. 하느님요!" "허허 주정이 심하신데요?" 신태성은 슬그머니 웃는다. "지구 끝까지도 내몰 수 있을 게요! 생각만 한다면! 선이 어디 있고 악이 어디 있어요? 악도 힘이 세면 악신 이 되는 게요! 네 맞아요! 힘이 세면 모두 악신이 된다 그 말이오! 힘 없는 놈이 선하지요. 네! 힘 없는 놈 항 상 선했다 그 말이오. 나도 별수없이 선한 놈 핍받는 놈이 됐수다! 왜냐구요? 힘이 없거든요. 왜 힘이 없느냐, 못났기 때문이오. 못난 놈은 다 선해요. 못난 놈만이 천당으로 갈 거다 내 얘기는 그거요!" "그 이론도 얼핏 듣기엔 그럴듯 하군요. 하하핫." "이선생." 송장환이 술을 부어 내민다. 술을 마신 상현은 담배를 붙여물려는데 수전증인가 그의 손은 불을 붙일 수 없을 만큼 떨리고 있었다. 신태성이 얼른 불을 켜서 붙여준다. "신선생." "말씀하시오." "신선생을 왜 자꾸 악신이 되려 하시오?" 목소리는 낮았다. 신태성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송장환의 표정이 굳어진다. "어째서 힘을 그리 원하시오?" "그건 또 무슨 뜻이지요?" "당신 너무 잘났어! 너무 머리가 좋다 이거야!" "허허헛헛헛 그만들 하시오. 울분을 내게 풀면은 되겠소?" "당신은 야심가야. 너무 힘을 원하고 있어. 당신은 테러리스트를 조정할 사람이야. 바로 당신 자신을 위해서," "아아니," "방법은 무엇이든지 오케이! 당신은 돌아가서 설 자리가 있거든. 언제나 마련해놓고 있지. 그러니까 머리가 좋 다 그 얘기요." "이선생, 주정이겠지만 너무 심하시오." 송장환이 나무란다. 그러나 "당신은 누구든, 좀처럼 알 수 없는 사람이라 하지. 그러나 느낌으로는 알지. 당신의 언동은 완벽해. 바늘 하나 도 안 들어가게 그렇게 방어가 철저할 수 없단 말씀이야. 잠자리를 같이한 어떤 계집도 당신을 몰라." "그야 당연한 일 아니요? 조직 생활 하는 사람의 에이비씨, 새삼스럽게 무슨 소릴 하는 게요?" "당신 우리는 어떻게 믿지? 난 공산주의자 아니야. 어째 나를 믿느냐 그 말이오. 밀고하고 상금 받고 삼십육계 놔버리면 그만인데 너무 확실하잖아?" 신태성의 얼굴이 시뻘개진다. 다음 순간 창백하게 변한다. 그러나 그는 웃고 있었다. "당신이 공산주의자라는 것만은 나도 틀림이 없다 생각하지만 그리고 당신 머릿속에는 혁명을 위한 계획이 지 도처럼 정확하게 짜여 있는 것도 짐작할 수 잇는 일이지만," "그래 그게 어찌 됐다는 게요!" 드디어 신태성은 노성을 질렀다. "신선생, 참으시오. 이선생은 주사가 심하니까 이해하시고." 송장환은 신태성의 등을 두드리며 한편 상현을 무섭게 노려본다. 신태성은 술잔을 기울이고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를 한번 문지른 뒤 "나 이형 형편이 딱해서 숙식을 제공한 잘못밖에 없는데, 남이 좀처럼 나라는 인간을 알지 못하느니, 그러나 느낌으론 알 수 있다 그 말이 이형 언동에 해당되는 것 같소. 좀더 명확하게 얘기 해줄 수는 없겠소? 느낌만 으론 나도 명확하게 답변을 할 수 없으니 말이오." 다가서듯, 그리고 상현의 눈은 빤히 쳐다본다. 느낌만으론 명확하게 답변할 수 없다는 말은 상현의 경우도 느 낌만으론 명확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신태성은 그 점을 잡고 다가서듯 따지는 것 같았다. 네놈도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답변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에 차서. 아닌게 아니라 상현의 눈에 당황하는 빛이 돈다. "주사라고 들어넘길 말이 따로 있지, 송형도 들었으니, 거 묘한 말 아니었다 할 수 없겠지요?" "화내실 만도 하지요. 이형 주사도 주사지만 본시... 네." "아무리 불우하기로 사람이 삐뚤어지지는 말아야지. 주변에 피해를 주어서야, 의지 박약을 남의 탓으로," 하다 만다. 상현의 눈에 핏발이 섰다. "뭐 어째 이놈아!" "하하하핫... 하하핫핫... 송형이 백만원군이 모양이요. 저 친구 별안간 왜 저리 용을 쓰지요? 하하핫 핫핫..." 술잔이 신태성 얼굴 위로 날았다. 술잔은 어깨 쪽을 스쳐 마룻바닥에서 깨어지고 신태성 얼굴에선 온통 날아 간 술이 물방울이 되어 떨어진다. "이선생!" 송장환이 소리치며 상현의 한 팔을 비틀듯 잡는다. "창피스럽지도 않소! 이게 무슨 추태요!" 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으며 신태성이 응수한다. "치사스럽구나.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어. 아무리 못났다 해도 이동진 씨 아들이면 십분의 일이라도 닮았거니, 그게 잘못이었지. 허참," 상현은 송장환의 팔을 뿌리치려고 몸을 흔든다. "치사스럼다, 치사스러워. 여태껏 국으로 있더니, 계집하고 아웅다웅하는 것도 철없는 동생같이 보아주었는데 이젠 얻어먹을 곳이 생겼다 이거야?" "위대한 공산주의자 신태성 이새끼야! 도대체 이 집은 누구 돈으로 세 냈지? 쓰고 먹는 것 냄새가난다! 고약 한 냄새가 난단 말씀이야!" "신형, 술 먹은 개라니, 끌고 가겠소. 용서하시오." 송장환은 질질 상현을 끌어낸다. 상현은 욕설을 계속하며 몸을 흔든다. 이런 소동이 벌어져도 은혜는 기적을 내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까지 상현을 끌고 나온 송장환은 상현을 담벽에 처박듯 세우고 "이상현 씨!" "흥! 독립운동에 방해가 됐나요?" "실망했소." "언제는 실망 안 했던가요? 나 독립운동! 애국지사! 혁명투사! 그런 것 모르오." "이선생은 크게 잘못을 저질렀소." "왜요? 위대한 혁명투사 면상에다 술잔 던졌다구요? 그까짓 왜놈한테도 주리를 틀리는데 약과지 약과 아니란 말씀이오?" "자아 걸으시오! 이상현 씨 주량 많이 줄었구려. 걸어요!" 송장환은 구타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 것 같다. 상현은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없이 송장환의 숙소까지 따라 간다. 방으로 들어가 마주보고 앉는다. 상현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송장환이 담배를 붙여준다. 한모금 깊숙 이 연기를 빨아당긴다. "아편쟁이가 따로 있겠소?" "..." "나는 이제 구제 불능이오." "따지고 보면 이선생만 그렇겠소? 최악이오." "나야 언제나 최악이었지요. 제대로 서본 일이 없었으니까요." "실은 내 이선생이 그곳에 계신 것을 알고 찾아갔었소." "뭐라구요?" "알고 갔다 말입니다." "어떻게요?" "애기를 들었지요. 좀 일찍 들었더라면 낮에 갔을 꺼구 아까 같은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인데," "그럼 송선생은 날 데리러 왔다 그 말씀이오?" "그렇소." "그렇다면 왜 아무말 안 하셨지요?" 송장환은 대답 없이 상현의 얼굴만 쳐다본다. "역시 이상했군요?" "속단은 마시오. 다만 가정해본 거요. 만주 일대도 아주 험악하니까요. 장학량은 우리 조선 독립군에 호감을 갖는 인물이 아니지요. 하기야 종전에도 그랬었지만." "그러면 송선생, 신태성이 어째서 나한테 선심을 썼을까요?" "그 친구가 순수한 호의로 그랬다 할 수 없는 것만은 단언할 수 있지요. 가정한다면 일종이 보호색?" "미안합니다." 한참 있다가 상현은 "길서상회 김형은 어찌 되었소." 비로소 묻는다. "이 년 언도요." 하고는 계명회사건은 간략하게 설명한다. "그러면 서의돈형님이 주모자란 말씀이오?" "그런 셈이오. 구분이 공노인댁에서 붙잡혔는데, 그래서 김형도 연루된 거지요." "작년이라구요?" "네, 서의돈인가 그분, 속 시원하더군요." "사내답지요. 몸은 대추씨처럼 작지만." 상현은 못 견디어하는 얼굴이다. 그는 자기 아이를 낳았다는 기화를 연상한 것이다. 가화의 연상은 명희의 연 상으로 옯겨갔다. 부끄럽고 처참하고, 영원히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정망감, 안 돌아갈 것이라는 결의, 가족에 대한 뼈를 깎는 듯한 죄책감, 그런 것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5장 호호야 검정 치마에 자줏빛 저고리를 입은 여자는 마른 빨래를 걷고 있었다. 망태를 짊어진 주갑이 다가간다. "숙이엄니," "어머, 오세요?" 여자는 돌아보며 웃었다. 눈매, 입매가 가냘프고 조심스러워 보이는 여자는 지난날 김훈장 생시 때, 한동안 묵 었던 일이 있는 농가의 아들 박정호의 아내다. 김두수에 의해서 일군에게 넘겨졌고 처형을 당했던 의병장의 둘째아들 박정호, 홍이와 함께 용정서 상희학교를 다니다가 숙부를 따라 연해주로 떠난 소년, 그도 스물아홉인 가? 일찍이 모스크바로 유학했는 그는 러시아 혁명을 겪었고 그는 지금도 모스크바에 체류중이다. 형 정석은 지금 훈춘에 있었으며 연추에는 그의 모친, 지체 높은 반가의 여인으로 법도에 엄격했으며, 그러나 야채 장사 까지 하여 가난을 타개했던 기장한 신씨부인이 둘째며느리와 손자 손녀랑 함께 살고 있었다. "날씨 좋구만이라우." 엉거주춤 선 채 주갑이 말했다. "네. 볼일은 다 보고 오셨어요?" "본 셈인디, 아기들은 워디 놀러 갔단가요?" "조금 전에 있었는데?" 여자는 주변을 둘러본다. "아저씨 오신 것 보고 하마 쫓아올 거예요." 주갑은 연추에 오면 정호네 집에서 지낸다. 옛날 김훈장처럼. "저기 오누만." 주갑의 눈은 당장 새우눈이 되고 눈가장자리에 잔주름이 왈칵 모인다. "어련할라구요?" 아이엄마는 빨래를 안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일곱 살 먹은 사내 아이와 다섯 살짜리 계집애가 손을 흔들며 마 치 바람개비처럼 달려온다. "할아버지이! 할아버지!" 주갑은 양무릎을 벌리고 주저앉는다. 날개처럼 긴 팔을 벌린다. 계집아이가 총알같이 달려와 품에 안긴다. 사 내아이는 목에 팔을 감고 늘어진다. "아이고매, 할아부지 엉덩방이 찧겄이야." 아이들은 킬킬거리고 새처럼 재잘거린다. "밥 잘 먹고 잘 있었지라?" "네!" 두 아이를 앞으로 몰아 머리를 쓰다듬는다. "할아부지 이번엔 일찍 왔네?" "암, 숙이가 보고 저버서 한달음에 갔다왔제잉," "이번엔 얼마나 오래 계실 거예요?" 사내아이가 묻는다. "금매, 할아버지도 오래 있고 접은디, 일이 생기면 또 가야 안 허겄남?" "할아부지 없음 심심해." 주갑은 계집아이 볼에 입 맞추며 "그려. 종훈이는 핵교 갔다왔냐?" "네!" 아이들은 주갑을 좋아한다. 동무들보다 주갑이 더 잘 놀아주었고, 또 긴 겨울엔 밖에 나가 놀 수 없기 때문에, 주갑은 다정한 할아버지면서 동무였다. 피리며 탈이며 연을 만들어주었고 노래도 불러주었고 들판에 나가면 뜀박질도 함께 했다. 할아버지가 없음 심심하다 했는데 주갑이 역시 아이들이 없으면 쓸쓸해한다. 그러나 아이 들이 주갑이 길 떠난 뒤 눈이 빠지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망태 속에 넣어오는 사탕이며 과자 때문이다. 명절 을 앞두었을 때는 더욱 초조하게 아이들은 그를 기다리는데, 그때는 때묻은 망태 속에 아이들의 옷이며 신발 같은 것을 마치 보물처럼 넣어가지고 주갑은 돌아오는 것이다. "자아 집에 들어가자고, 할머님께 인사디리야 헌께." 아이들은 신이 나서 주갑의 손을 잡으려는데 주감은 망태를 지고 한 팔에 하나씩 아이를 안고 집안으로 들어 간다. "주서방은 기운도 좋소." 신씨부인은 좀 나무라는 듯, 그러나 그 이상 뭐라 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내려놓고 "아주머니, 다녀왔습니다." "점심은 어떻게 했소?" "요기는 했지라우." 하면서 주갑은 망태 속의 사탕 봉지, 과자 봉지를 아이들에게 준다. "아이들 버룻 되게 그러지 말라는데요," "아이들은 잘 먹고 잘 놀고 그러면 된께로, 버릇이야 크면 절로 알게 되는디, 걱정허실 것 뭐 있다요?" 신씨부인은 쓰게 웃을 뿐. 옛날 자식들을 길렀을 때처럼 손자들에게는 그리 엄하지가 않은 모양이다. 아이엄마 는 아이들을 불러서 "두었다가 조금씩 먹는 거야." 사탕과 과자 봉지를 거둬들인다. 그리고 접시에 덜어서 "할머님 갖다드려라." "네," 아이들은 과자 접시를 할머니 앞에 가져다 놓고 그들도 얼마씩 나누어가진 뒤 껑충껑충 뛰며 밖에 나가 자랑 하려고 쫓아나간다. "훈춘의 우리 아이들은 모두 잘 있던가요?" 신씨부인이 묻는다. 훈춘에는 큰아들말고도 딸네 식구들이 살고 있었다. "예. 모두 별일 없이 잘 기시고, 막내가 홍역을 잘 치렀다 허든디요." "다행이구먼. 아이들이 앓지만 않으면 한시름 놓는데," "그러고 듣자니께 외손녀 혼사가 마무리졌다 그런 말 허드만요." "에미가 바쁘겠구먼." "바빠도 좋은 일인께로, 그런 일로만 바빴으면 얼매나 좋겄어라?" "온갖 풍파를 다 겪더니, 세월이 가면 아이들도 가게 되는 겐가." "이치가 그러크름 돼 있인께요." "공노인댁은 아직 아무 차도가 없소?" "아는 벵인께 가실 날이나 기다리는 판인디 공노인 보기 딱혀서 맴이 안 좋구만이라우." "..." "그러고 조선서 중이 한 분 오셨지라우. 홍이도 아들 낳고 딸 낳고 운전수 함씨로 잘산다 그러들 않겄소." "아 그랬단가요?" "우리 종훈애비가 늘 홍이 말을 하지요." "무정헌 놈이여. 한번 못 올 것도 없는디," 주갑은 모처럼 한가하게 연추서 정호네 집 농사일을 도와주고 아이들과 놀아주며 날을 보냈다. 보름이나 지났 을까. 외양간을 늘리려고 주갑이 통나무 몇 개를 잘라 짊어지고 오는데 멀리 양복 입은 두 사내가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송선상이 이제 오는구나." 주갑은 나뭇짐을 내려놓고 그들을 기다리기 위해 담배를 붙여문다. 두 사내는 멀리서도 뭔가 잔뜩 긴장해서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슨 일이 있단가?" 무슨 일,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가장 예민해지는 것이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의 거의 공통적인 생리다. "전라도 할아바이, 무시기 나무르 그리 해온답매?" 지나가는 농부가 말을 걸었다. "외양간 손볼려고 해오는 거여. 당신네들 씨는 다 뿌맀단가?" "겨우 했답매." "담배 태울랑가?" "예꼬망. 고맙소꼬망." 담배를 주고 불을 붙여준다. "그러믄 먼저 간답매." 농부는 가고 송장환의 일행은 다가온다. "얼래? 저쪽 사람은 누구라? 어이서 본 것 겉은디," "주서방," "야. 이제 오시오? 좀 더디었구만." 송장환의 옆에 선 이상현, 그는 주갑을 바라보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서 지체됐어요." "뜻하지 않은 일이라면?" 순간 주갑의 표정은 오줌마려운 사람같이 변한다. 용정의 공노인댁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야?" "우리가 상제 노릇 했지요. 그러노라 늦었소." "어이구매! 그, 그러면 어째 이 주갑이는 부르지 않았단가?" 노기를 띤다. "공노인이 폐스럽게 못하라 당부를 해서요. 그러나 용정서 사람들이 많이 와주어 외롭지는 않았소." "그놈의 영감탕구, 나를 서푼어치로밖에 안 보았구만. 아이구, 인정스런 안늙은이였는디, 전에는 내 옷도 빨아 주고, 으흐흐흣... 돌아가실 줄은 알았짐나 어이구 으흐흐흣..." 길섶에 퍼질러앉으며 운다. "그놈의 영감탕구 이녁이야 그렇겄지마는 내 맴이사, 마지막 얼굴 한번 흙속에 묻혀버렸으니, 어이구 으흐흐 흣, 자식 없이 불쌍허고." 닭의 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주서방 그만하시오. 돌아가실 때가 돼서 돌아가셨는데, 그보다 손님," 하자 이상현은 "어째 만날 때마다 우는 꼴만 보게 되는지 모르겠군. 주서방!" 울다가 주갑은 얼굴을 쳐든다. "날 모르겠어요?" "모르겄소." "담벽에 붙어 서서 울었던 사람도 주서방 아니었소?" "야?" "서울서 말이오. 강의사 돌아가셨을 적에," "아아, 야! 젊은 선상님," "어째서 만날 때마다 우는지 모르겠소?" "내가 본시부텀 눈물이 헤픈 사낸개비여." 송장환이 픽 웃는다. "못 전딜 때는 절로 울음이 나온단 말씨. 헌디 젊은 선상님 못 알아보겄소잉? 만낸 지가 십 년도 안 됐을 것 인디 워찌 그리 변혔더랑가?" "무위도식을 하자니까 자연히 변했겠지요." 송장환 가로막듯 "주서방, 짐 지시오. 이젠 자주 만나게 될 게요." "야, 그러여라?" "갑시다. 길가에서 이럴 게 아니라." "가야제요." 마을로 들어온 세 사람은 잠시 멈춘다. "권선생님 만나 뵙고 주서방내일 만납시다." 상현이 악수를 청했다. "그럭 허시시오." 지게를 짊어지고 정호네 집으로 돌아온 주갑은 나무를 풀지 않고 지게에 올려놓은 채 양지바른 곳간 앞에 가 서 들을 기대고 앉는다. "참말로 인생이란 허망헌 거여. 멩이란 질기고도 약헌 것, 차례차례 세상을 떠나누만." 곳간 앞에는 파릇파릇 풀이 돋아나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무서운 겨울알 견디어내고 돌아나는 새 풀. '가만 있자 그런께로 이동진선상님 자체분을, 옳거니! 기화아씨댁 그 집 뒷벽에서 내가 울었제. 그런께로, 그런 께 기화아씨허고는 워씨 된 사이여? 주갑이 머릿속에 가억이 살아난다.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이상현이 기화 집에 들어섰을 때 느낀 질투의 감정까 지 되살아난다. 함께 술을 마셨던 일이며. '그때 나는 강우규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억장이 무너지고 온 천지가 새까맣게 보였는디, 그런데도 샘이 났다 그 말인가? 허허어. 헌디 그 사람이 기화아씨 죽은 거는 모를 것이여. 상해에 있었다는 이약을 들었 인께, 음 정녕 모릴 것이여. 헌디 사람이 워떠크름 그리 변혔이까이. 헌헌장부였는디 워찌 그리 몰라보게 외얐 시까잉. 고생이 막심혔든 모양인디, 훌륭허신 아버님만 못허다는 이약을 들었는디,' 하다가 소스러치듯 놀란다. 갑자기 주갑은 "어이구, 불쌍헌 할매! 어이구우!" 하며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한다. 맨 먼저 종숙이가 달려왔다. "할아부지 왜 이래? 응, 왜 우는 거야?" 팔을 잡고 흔든다. "어이구, 불쌍허고, 만리 타국에 자식 없이, 어이구우 어이구우." 닭의 똥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이진다. "할아버지이! 울지마 ! 울지말래도!" "숙아." 주갑은 울면서 팔을 뻗쳐 어린 것을 안는다. "어이구우 어이구우!" "할아부지이!" 종숙이도 함께 운다. "아니 왜 이래요? 주서방, 초상났소?" 신씨가 달려와서 말했다. 신씨는 주갑이 외로워서 우는 줄 안다. 전에도 한 번 인가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아. 초상났단께로, 어이구 불쌍헌 할매! 그놈의 영감탕구를 다시 상면하믄 주갑이 네놈은 개새끼다! 어이구 우," "아, 글세 초상이 어디서 났단 말이오." "공노인댁 할머니가 돌아가셨구만이라우." "그랬구먼." "아주머니 들어보시시오. 세상에 이런 법도 있소?" "아니 왜 또 이래요" 병으로 돌아가신 게 아니란 말이오?" "공노인 얘기여라. 나도 외로운 놈이고 공노인 내외도 자식이 없지 않이여? 혀서 만리 타국 남의 땅에 와서 부모겉이 생각허고 의지허고 살았는디 금매 부고 한 장 없이 장사지냈다 허들 않겄소? 어이구우 어이구우." "그거는 주서방이 잘못 생각하는 게요. 부고를 받고 보면은 이곳에서 초상에 가야 할 사람이 한두 사람이겠 소?" "그야 그렇제요. 공노인 신세 안 진 사람이 몇이나 되겄소." "그러나 지금 이곳에선 마음 편히 초상집에 갈 형편이 못 되니까 부고 받고 못 간다면 얼마나 괴롭겠소? 공노 인은 세상을 많이 살아서 그런 것을 다 생각했을 게요. 특히나 초상이면 사람이 모여들것이고 왜놈들한테 점 이 찍혔으니 그것은 공노인께서 잘하신 처사요." 신씨부인은 달래듯 말했다. 종숙이는 할머니와 주갑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손가락을 물고, 볼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생각 못헌 것도 아니여라. 허지만 야속허요." "야속할 것 없소. 주서방이 죽으면 다 모여들 것이라는 말이 부끄러웠던 것 같다. "놀리지 말시더라고, 지가 무슨 독립지사라고 모여들 것이여?" 화를 낸다. 다음날 해거름에 상현이 주갑을 찾아왔다. 누구네 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면식이 없고 여자들만이 있는 곳이어서 상현은 노는 아이를 보고 "아가, 주서방 좀 불러다오." "할아부지 말예요?" "음, 전라도," "우리 할아버지 어제 막 울었어요." 종숙이는 두 손으로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한다. "그래? 할아버지 울보구나. 지금 어디 계시냐?" "오양간 고치고 있어요." 하면서 아이는 "할아부지! 할아부지!" 부르며 뛰어간다. 상현도 아이의 뒤를 따라간다. "할아부지, 손님 왔어!" 톱질을 하고 있던 주갑이 들을 세운다. "근력 좋소." 상현이 웃으면 다가간다. "어서 오십시오, 젊은 선상님." 주갑은 할아버지라 부르는 종숙이가 자랑스럽고 자신도 어른 대접받는 것을 상현이 보아주어서 매우 기분이 좋은 것 같다. 어제는 흐렸는데 오늘은 활짝 개어 있는 것이다. "일 치우고 우르 술 마시러 갑시다." "야. 그럽시다요." 주갑이 연장을 챙기는 동안 상현은 토막 나무에 걸터앉아 황혼의 서편 하늘을 바라본다.. "할아부지, 어디 갈 거야?" "잠시 나갔다 올 것인께 숙이는 저녁밥 먹고 할아부지 없어도 발 싯고 자야 혀." "알았어." 아이는 뛰어간다. "이 집 손녀요?" "야." "제 아버지가 모스크바에 가 있다지요." "그렇구만이라우." 상현은 서쪽 하늘을 바라본 채 기화가 낳았다는 계집아이 생각을 잠시 한다. 그러나 생각을 떨쳐버리듯 담배 를 꺼낸다. "참말로 분명허고 똑똑헌 청년인디, 홍이허고 친구랑께," "홍이가 누구요?" "홍이를 모린다 말씨?" "누군가?" "이서방도 모리겄소? 용정에 살다 간 국밥집의," "그 사람 아들인디 모른다 말씨?" "아아 상의학교에 다니든... 실은 이 집 정호 그 애는 내 제자였소." "야?" "잠시 상의학교에서 교사질을 했기에," "오매, 그러믄 잘 아시누만." "똑똑했지요. 그런데 그 애가 귀화를 했나요?" "야. 사정상 부득이..." "음." 연장 망태를 헛간 속에 집어넣고 손을 털면서 "그러면 가십시다요." "그럽시다." 몸을 일으킨다. "옛날의 선상님이면, 그 댁 아주머니를 한분 만나보시들 않겄소?" "아니, 그만두겠소." 상현은 강한 몸짓을 했다. "그라믄 먼저 가시시오. 내 곧 따라붙을 것이니," 상현은 천천히 들길을 걷는다. 술집이 있는 곳으로 나가자면 들길을 한참 걸어야 한다. 연주라지만 농사를 짓 는 정호네 집은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오지 않으려던 곳, 유골은 고향으로 옮겼지만 부친의 반평생 이 묻혀 있는 곳, 길상이 없는 연추라 온 것일까? 송장환의 간곡한 권유 때문일까? "아 그놈이 날 처넣을 거다 그 말씀이오?" "그런 일은 없겠지만." "처넣으려면 처넣으라지요. 유치장이든 감옥이든 현재 내게는 그런 곳도 황감하지요." "만일의 경우가 있다면 그건 이선생 혼자 일인가요? 혼자만 겪게 될 일 아니지요." 그래서 이곳으로 왔단 말인가. 상현은 발부리의 돌을 걷어차며 웃는다. 어제 권필응 씨를 만났을 때 당분간 이 곳에서 학교 일이나 보아주고 있으면 어떠냐는 말을 했었다. 상현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하다, 참 조용하군. 가라앉는다, 끝없이 가라앉는군.' "자 가십시다요." 주갑이 헐레벌떡 다가온다. "참말로 오래간만이여라." 새삼스럽게 말한다. "죽고 싶을 만큼 조용하군." "지금이니께 그렇제요. 난리를 얼매나 걲었기에, 죽을 고비도 몇번 넘겼는지 모르겄소. 백군 적군 함서, 우리 조선 사람들 양새 낀 나무맨치로, 왜놈 군대꺼지 올라와서, 왜놈허고 아라사는 원수지간인디, 내야 무식헌께 잘을 모르겄는디요, 금매 백군을 도와서 싸운기이 왜놈이라는 말도 있더마요. 백군 시체 속에서 왜놈 병정 시 체가 나왔다 혔으니 참 세상 요상허게 돌아가제요. 아무래도 고놈들이 백군헌티 알랑방귀 껴서 언해주 조선 사람들 다 직일 계획 아니었는지 모르겄소잉. 그러이 수풀에 앉은 새맨크로, 참말이제 가나오나 조선 사람들 워디서 맘 놓고 살겄소? 독립이 되기 전에는 발뻗고 살기 어렵제." 지껄이면서도 주갑은 기화의 얘기를 할까말까 망설인다. "헌디 이선상은 여기 오래 기실 거여?" "모르겠소." "뭐가 잘못됐나비여." "잘못되기야 잘못됐지요." 돌을 차며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은 찌른다. "주서방," "야." "잊고 물어보질 않았는데 장선생, 그 양반 지금 어디 계시오?" "장선상이라믄 장인걸 선상 말슴이요?" "장인걸 그 양반이오." "그 선상님 돌아가셨지라." "돌아가셨다구요?" "그래서 권선상님 왼팔 하나 짤맀다고들 허들 않겄소?" "어떻게 해서?" "이곳에서 일허신다는 분들 방바닥에 누워서 돌아가시기 어럽제요. 왜놈헌티 붙들려가시다가 도망을 치시는디 뒤에서 총질당렸지라우." "..." "모두들 울었제요. 그 양반 한도 많고 일도 많이 허셨는디 안됐소. 하기야 뭐 버리지겉이 죽은 나 겉은 게 안 됐기로야 더 안됐지마는... 나쁜 놈들도 많지만 훌륭한 어른들도 많았제요. 내가 고생허고, 입만 다물면 고향서 편키 사실 분들이 참말로 말로는 다 못헐 고생들 하셨지요." "그만하시오." "야, 그만하지라우. 말혀보아야 속에서 불만 붙은께." 한동안 침묵이 지나간다. 짧은 해는 서산에서 깜박 숨어버리고 사방에 어둠이 묻어온다. 목덜미에 스며드는 바 람이 차다. "저기 혜관스님 오신 것 아신다요?" "알아요." "그라믄 만났단가?" "아니." "못 만냈으면 소식 못 들었겄소." "무슨 소식 말이오." "고향의," "고향의?" 상현이 걸음을 멈춘다. "야. 좋은 이약은 아닌디," "누가 죽었다 그 말이오?" "야." "누, 누가? 어, 어머님이, 송선생은 그런 말 안 했소!" 상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저기, 기화아씨가 죽었다 하더마요." "기화!" "야." "..." "그것도 물에 빠져서 자게 목심을 끊었다 하니, 딸아이도 하나 있다든디," 상현은 멈춘 채 움직이지 않는다. 6장 민족 개조론 "설렁하구먼." 목도리를 두르고 급히 상현을 뒤따라가며 송장환이 말했다. 밤안개를 헤치듯, 상현은 "밤이라 기온이 내려가는군요." "이곳에선 젤 지내기 좋은 철이지만, 가을은 겨울 오는 게 무섭구," "주서방은 용정 갔지요?" "그 고집쟁이가 안 가고 배기겠어요?" "좀 묘한 인물이오." "좀 묘하다는 정도가 아니지요. 아주 교활하거든요." "교활해요?" 상현은 어리둥절해서 반문했다. "지혜롭다 해야겠지만 하도 능청스러워서," 송장환은 껄껄 웃는다. "어떻게 보면 주서방 그 사람은 모든 인간적인 요소를 다 갖추었다고나 할까요? 욕심만 빼고, 그런데 조금도 위대하진 않단 말입니다. 비극적인 요소를 낙천적으로 발산하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지만. 어린애같이 무심한가 하면 수천 년 묵은 구렝이 같고," "좋으면 화를 내고 싸움할 때 존대 쓰고," "네 맞아요. 하하하핫... 염치 바르고 마음이 여리고 소심하면서 자존심은 하늘은 찌르지요." "뭐라 할까, 여자들한텐 좀처럼 없는 성질인데 여성적인 걸 느끼거든." "소설가라 그런지 관점이 매우 예리하오." "소설까요? 누구 말입니까?" 상현은 따지듯 물었다. 너무 분위기가 강했던지 송장환은 대답을 못하고 상현도 발끈했던 것이 멋적었던 모양 이다. 잠자코 만다. 한참 만에 "송선생." 하고 상현이 불렀다. "네, 소설가 선생." 송장환은 좀 화가 났던지 놀리듯 대답한다. "허 참," 상현이 웃고 만다. "이선생도 사십을 바라보는데" 송장환이 곁눈질을 한다. "바라볼 정도가 아니지요. 서른아홉입니다." "좀 능청스러워도 되는데, 이십대, 그 시절같이 생마음이오." "생마음 같으면 연애 소설이나 써서 돈벌지 썩은 나무 둥치 모양으로 이러고 있겠소? 나는 얘기꾼은 되기 싫 소이다. 누구처럼 설교하는 소설도 싫구요. 싫고 좋고 그런 말 할 처지가 아니지만, 뭔지 몰라요. 전신에 진딧 물이 달라붙은 느낌이 든단 말입니다. 소설가다 예술가다 하면 말이오.? "왜 그럴까요? 러시아의 톨스토이 같은 작자는 위대하지 않습니까?" 한참 있다가 상현은 "도스토예프스키가 낫지요." 혼잣말처럼 뇌었다. "그보다 송선생은 아들 딸이 몇이오?" 상현이 가정에 관하여 물어보기는 처음 있는 일이다. "내 형편에는 많습니다만, 딸이 둘, 아들이 하나지요." "장가는 늦게 드셨는데 서둘렀군요." "허허헛헛... 삼신이 서둘렀지요." "실례지만 부인을 사랑하시오?" 상현은 의식적으로 화제 방향을 돌려놓는다. "왜 그런 걸 묻소?" "글쎄요... 오나가나 우국지론, 혁명 얘기, 지겨우니까요." "..." 밤바람이 두 사나이의 얼굴을 치고 지나간다. 밋밋한 나무, 불빛 새나오는 창문이 지나간다. "내 죄상에 뚜껑을 닫아놓고 사는 것도 이젠 지쳤어요. 어떻게 하다가 죄인이 되었는지... 어딘지 모를 곳에 동 전을 잃어버린 아이같이 아이같이, 그러고 영영 찾지 못하는 아이같이... 네. 나는 죽을 때까지 그 동전 한푼을 못 찾을 겝니다." "..." "왜 말씀이 없소? 옛날에는 의론을 즐기시던 송선생께서, 공격이라도 좀 하시구려." "하얼빈에서 실컷 했지 않았소? 이젠 김 빠져서 못해요." "박정호의 누님 생각은 어찌 되었소?" "허허어 이선생 왜 이러시오? 흘러간 세월이 얼만데 새삼스럽게, 이젠 만나도 친척만 같소이다." "부인이 미인인 모양이지요?" "박색이오. 짧다막한 팔다리며, 볼품없지요. 그러나 나 같은 놈 가장으로 받들고 자식까지 낳아 길러주니 고맙 지요. 내 형수는 비단에다 은금 보화로 싸서 모셔왔지만 아편으로 집안을 망치고 남편을 망쳤는데 말입니다. 우리 집안의 소식은 들으셨는지요?" "조금은," "이선생도 우리 형수라면 잘 아실 터인데," "알다마다요. 양귀비가 무색할 지경이었지요. 백치 미인이어서 딱 하긴 했지만," "결국은 형이 못난 탓이지요. 그놈의 중놈 탓도 있었고요. 그러나 현명한 아내를 보았더라면 그리 급속하게 집 안이 기울지는 않았을 게요. 백치의 여인과 성격 이상자... 아편은 다만 촉진제였을 뿐이며 구제할 길이 없었지 요. 형은 산송장입니다." "아편... 아편 말입니까?" 어리둥절하다가 송장환은 "그런 얘기 못 들었던가요?" "얼마나 황홀했을까요. 세월을 잊을 수 있었을 게고 고통을 잊을 수 있었을 게고," "아아니 이선생, 무슨 말을 하시오?" "내가 아는 어떤 여자도 아편장이였으며 강물에 빠져 죽었다, 그 생각을 했던 게요." 상현은 웃는지 우는지 목을 굴리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한데 송선생, 형수씨한테 아들애가 하나 있었던 거를 기억하는데요?" "그 애가 지금 스물둘이요." "용정에 있소?" 아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운무 속에 부유하듯 아이의 형체는 있는데 얼굴이 뚜렷하지 않다. 어쩌면 뚜 렷하지 않은 아이의 형체, 그것은 기화가 낳았다는 계집아이였는지 모른다. "유섭이는 지금 북경에 있지요. 내가 데리고 있다가 북경으로 보냈습니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아이가 좀 유약한 편이지만 머리가 좋고 학자형이라서,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생각합니다만," 상현은 그 말을 귓가에 흘려듣는다. "내게는 그 애 하나 건져낼 힘밖에 없었지요." 무거운 바퀴가 가슴 위를 지나가는 것 같다. 다리가 뻣뻣하게 저려오는 것 같다. 뜨거운 것이 상현의 눈앞을 가린다. 죄의식이 괴물같이 달겨든다. 어머니를 버리고 아내를 버리고 아들을 버리고, 그러나 상현은 버렸다기 보다 그들로부터 버림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들은 뿌리를 가진 식물 같은 존재였다. 그들 에게는 가족이 있고 집이 있고 그들은 존엄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에 대한 생각은 늘 아픔보다 그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그들 생각을 안 하려는 것이었다. 기화에게도 그랬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화, 그가 낳았다 는 계집아이에 대한 기분이 그러했었다. 타인같이 연관이 없고 모르는 존재로 치부하려고 했었다. 한데 사태처 럼 무너져서 덮쳐씌우는 아픔과 연민을 상현을 이 순간 감당을 못한다. 상현은 자기 자신 속에 부성애가 아니 었는지 모른다. 가슴을 찌르는 이 감정은 부성애하고는 다른 성질의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너무 짙다. "그까짓것!" 낮았지만 그것은 울부짖음이었다. "네?" 의아해하며 송장환이 되묻는데 상현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흔들면 담배를 입에 문다. 뒤돌아본 송장환은 성 냥불에 비친 상현의 얼굴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눈물에 젖는 얼굴, 상현은 담배를 빨며 얼른 다가갔다. "왜 그러시오, 이선생?" "..." 풍문이긴 했다. 조선에 있어서 이상현의 처신에 관한 얘기, 사람이 우습게 변했다는 것이었다. 끝없는 여성 편 력과 음주로 지새는 나날이라는 것이었다. 눈물의 찌꺼기 같은 시시한 소설을 쓰며 문사연한다는 얘기였다. 이 곳으로 온 후에도 들려오는 얘기는 결코 향기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하얼빈 신태성의 집에서 보인 어리석은 추태는 어떠했던가. 그러나 지금 상현의 눈물 젖은 얼굴만큼 송장환을 놀라게 하지는 않았다. 송장환은 이 사람 이제 다됐구나, 왜 이런 절망 같은 것을 느끼는지 송장환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떤 곳 어떤 경우에도 상현은 자기 삶의 지렛대 같은 자의식을 내동댕이칠 위인이 아니다. 신념이나 사명감 같은 것 을 잃었을지라도 인생의 가치를 부인하고 허무에 주저앉는다 할지라도 허무 그 자체가 자의식의 방패로 될 것 이며 부도덕과 방탕과의 보루 같은 것인지 모른다. 여성 편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것은 알 수 없으나 청교도적 인 그의 여성관은 결코 극복되지 않았을 것이며, 주의와 주장이 없어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증오와 핍박을 받 을지어정 항복하거나 빌붙거나 계책을 농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상현을 꿰뚫고 있는 그런 심지는 의지라기 보다 천성이기 때문에 경도 높은 자질이 비혁명적이라는 것도, 송장환은 대체로 그렇게 상현을 파악하고 있었 다. 또 그것은 거의 옳은 파악이었다. 사람이 운다는 것은, 특히 사내가 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순수한 것이다. 순수한 인간적이 일면이다. 그러나 송장환이 충격을 받은 것은 그런 순수성에 감동하거나 상현의 앞날 을 희망적으로 본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였다. 반대였기에 송장환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결코 상 현을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한 일이 없었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눈물이건 간에, 그 눈 물은 자신의 포기, 포기보다 항복의 의미로 송장환은 받아들인 것이다. "이선생 왜 그러시오?" 다시 되풀이했으나 타성이었다. "어쩌다가 하나 떨어진 계집아이 생각을 했던 게요." 최초의 고백이었다. 송장환은 묵묵히 걷는다. "어미는 아편장이, 물에 빠져 죽엇다던가...허허헛헛..." 송장환은 여전히 말없이 걷기만 한다. "기생이 뭣 땜에 아이는 낳았는지 모르겠소. 그나마 계집애였으니 망정이지, 허허헛헛..." "..." "얼굴도 한번 봄 일이 없소. 이조 오백 년이 사라졌기 때문에, 대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내 눈에 서 눈물 방울이 떨어졌을 게요.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말입니다. 하하하... 하하핫핫..." 상현은 웃으면서 눈물을 흘린다. "양가집의 규수, 혁명지사의 따님도 개명 바람 사상 바람이 불어서 남장하고 나서는 세월인데, 지까짓게, 기 생이면 기생답게 사내들 창자나 끄내먹고 살 것이지 아이는 왜 낳아!" 술의 힘 안 빌리고도 주정이다. "창피스럽고 수치스럽고 그래서 도망온 게요. 아시겠습니까, 송선생? 나 어느 여자 땜에 온 게 아니요. 남작인 지 공작인지 그런 놈 집구석의 귀부인 땜에 온 거 아니란 말이오. 이동진 씨가 세상을 떠났기에 중국 바닥 연 해주 천지가 넓어졌다고 찾아온 게 아니란 말이오. 나, 나 못가겠소. 돌아가겠소." 발길을 돌리는데 송장환이 팔을 잡는다. "그건 안 됩니다. 이선생을 위해 준비한 저녁이니까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겠지요." " 왜 그런 건 따지시오." "이동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거겠지요." "그럼 어떻습니까? 부친의 명성을 매물로 삼고 다니는 못난 자식도 있지만 이선생같이 그러시는 것도 돌아가 신 분을 욕되게 하는 겁니다. 참으셔야 합니다." "못 참겠다는 얘긴 아니오. 위대한 부친에 개망나니 같은 아들, 그런 신세를 부끄러워한 세월도 지나갔구요, 지금 심정은 그런 것과 상관없어요. 하지만 참지요, 참아야지요." 뒷간에서 허위적거리는 구더기 같은 인생이지요, 하면서도 부드러운 몸짓으로 담배를 권하던 신태성의 거실에 서처럼 상현은 묘하게 순순히 말했다. 이들이 초대받아 가는 곳은 쎄리판 심, 러시아에 귀화한 동포의 집이다. 본명은 심운회, 부유하며 인품이 원만 한 사람이다. 생시에 이동진과 장인걸은 곧잘 그 댁을 드나들며 망향의 시름을 달래곤 했었다. 금녀도 상당 기 간 동안 그곳에 기거했으며 그들 부부, 특히 부인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또 두 딸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도 했었다. 상현도 물론 초행은 아닌 집이다. 처음 부친을 찾아 연추에 왔을 때 화조아가씨라고 애칭하던 심씨 의 두 딸 수련과 수앵은 여덟 살, 여섯 살이던가. 쎄리판 심 저택 앞에서 상현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층 창문 에선 불빛이 새나오고, 발코니가 둥실 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여전히 부유한 모양이지요?" 상현이 집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옛날 같지는 않지요." 러시아풍의 건축 양식에, 중국 취향을 약간 가미한 벽돌 건물은 옛날과 변함없이 육중해 보였다. 그리고 평화 스럽게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맨먼저 쎄리판 심의 부인이 쫓아나왔다. "어서 와. 이게 얼마만이유?" 상현의 손을 잡는다. 부인의 손은 따뜻했다. 전보다 비대해졌지만 은회색 비단 치마저고리를 깨끗하게 차려입 은 부인은 상현을 아들처럼 대한다. "오래간만입니다, 아주머님. 많이 늙으셨군요." "자네가 사십 길인데 무슨 수로 내가 안 늙겠나." "그렇군요." 둘째딸 수양이는 검자줏빛 드레스에 진주 목걸이를 걸고 웃고 있었다. 그의 미소를 띠며 서 있었다. "수앵이도 이젠 훌륭한 부인이 됐구먼." "참 반가워요, 선생님." "나도." "그때 장례식 때 뵙고는 처음이죠? 소식은 가끔 들었지만요.' 상현은 쓰게 웃는다. "언니는?" "하바르스크에 있어요. 애를 낳았는데요, 너무너무 예뻐서 인형 같아요. 정말 너무너무 예뻐요." "수앵아, 너 혼자 다 할 참이냐? 차례를 기다리고 있잖니?" 수양은 깔깔깔 소리내어 웃으며 "알았어요, 엄마." "언제 철이 들꼬. 애길 인형으로 알구 있으니," "천당 갈 때 철들 겁니다." 젊은 신사의 말이었다. "아이는 언제나 엄마하고 합작이라니까. 인사하세요, 이상현선생님이세요. 선생님? 이이는 저의 남편이구요." 삼십은 넘었겠는데 청년같이 쾌활한 신사는 "윤광옵니다. 선생님 존함은 진작부터, 반갑습니다." 서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한다. "언제가 선생님 소설 읽은 일이 있습니다. "헐벗은 나무 밑에서", 기생 얘기였지요?" 윤광오는 친밀을 나타내며 말했다. 송장환이 당황한다. 상현은 말없이 발끝을 한번 내려다본다. "너무들 하시는군요." 송장환은 엄살을 떨 듯 화제 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무슨 말이든 저에게도 한 말씀 해주십시오. 이렇게 무시를 당해서야 서러워 어디 살겠습니까?" 모두 웃는다. 가족들은 상현을 따뜻하게 맞이해준 것이다. 둘러싸이듯 상현은 홀 안으로 들어간다. 넓은 홀에 는 아늑한 가정의 분위기가 충만해 있었다. 페치카 가까운 곳에 은발을 곱게 빗어넘긴 쎄리판 심과 낯선 노신 사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간만일세. 어찌 이리 더디게 왔나." 가슴을 끌어안듯, 쎄리판 심은 상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상현은 고개를 깊이 숙인다. "안녕했다 할 수는 없지. 여러 가지 고비를 많이 넘겼다네. 아무곳이나 사람 사는 데는 다 마찬가지 아니겠 나?" "여러 가지로 면목없습니다." "아니야. 와주어서 고맙네. 그는 그렇고 인사하게. 묵당선생이시다." 상현의 얼굴에 긴장이 나타난다. 묵당 손유진이라 면 석학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지조 높은 선비로서, 서 양 철학에도 심오한 조예가 있다는 말을 상현도 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생님의 존함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만."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상현은 이 어른이 이곳에서 무슨 일로 와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묵당은 고개만 끄덕였 다. 키가 작고 둥근 얼굴에 노리끼한 낯빛, 별 특징 없는 노인인데 다만 큰 눈이 어린애처럼 무슴해 보였다. 나이는 쎄리판 심과 동배쯤, 육십은 넘지 않았을 것 같다. "앉게." 상현은 쎄리판 심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부인은 식당 쪽으로 사라졌고 수앵이, 윤광호는 송장환과 어울려 자리에 앉는다. "문사라든가?" 묵당이 물었다. "아, 아니옵니다." 상현은 당황하며 얼굴을 붉힌다. "음풍농월하던 시절은 아닐세. 광대 갖바치도 자기 직능을 부끄럽게 여겨서는 아니 될 것이야." 따금한 일치이다. 송장환이 상현을 힐끔 쳐다본다. "그런 뜻은 아니옵고, 감히 문사라 칭할 처지가 아니어서," "흠, 그렇다면 갈고 닦아야겠군. 나는 벌목꾼이요, 나는 미장이요, 자기 직능을 똑똑히 말 못할 만큼 자신이 없 다면 그건 어딘가 잘못 돼 있는 게야. 잘못 살고 있다는 얘기지." "이군, 아직 초장이네." 쎄리판 심의 말이었고 "아저씨, 이선샌님은 겸손하게 말씀하신 거예요." 수앵은 묵당을 아저씨라 부르며, 어리광피우듯이 상현을 옹호하고 나선다. "지나친 겸손은 오만보다 나빠. 위산이며 비굴해진다. 허허헛..." 웃는다. 상현은 상대가 연만하여 그랬던지 저항 없이 "앞으로 명심하겠습니다." 의외로 시원스럽게 나온다. "그러면 자네가 문사라니까 내 한마디 묻겠는데 이광수를 어떻게 생각하나. 훌륭한 소설가인가?" 화살을 꽂듯 묻는 말에 상현은 얼떨떨해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매우 흥미로운 것을 날라왔지만 그것을 든 사람 은 쎄리판 심 혼자였다. "훌륭한 소설가임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가?" "싫고 좋고는 각인의 취향에 달린 것이겠습니다만." "자네는?" "저는 싫습니다." "어째서?" "설교자의 옷을 늘 입고 있어서 진실이 가려져버렸다는 느낌 때문에 싫습니다." "음" "그런 의상은 성직자나 교직자의 것으로서, 저는 그 옷이란 것 방편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방편의 문학이 따로 있어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방편이라면 무슨 뜻이지요?" 윤광오가 물었다. "세상을 다스리기 위한 방편이라 해야겠지요." "그러면 철학이나 종교, 교육을 방편으로 보신다 그 말씀입니까?" "철학이나 종교, 교육은 물론 진리거나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을 관장해온 사람들에게 있어선 방편 이었다, 그게 역사적 현실 아니었을까요?" "보다 진리는 문학, 혹은 예술에 있다 그런 말씀이 되겠군요." "그것은 윤광오 씨의 착각이오. 아까 나는 진실이라 했지 진리라 하지는 않았소." 묵당은 싱긋 웃었다. "물론 진리와 진실은 다르겠습니다만 문학에 있어서 그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특히 이광수의 경우를 들어 서 말씀하신다면," "글세... 문학보다 소설의 경우를 말한다면 소설은 구체적인 것이지 추상적인 거시 아니라 할 수 있겠지요. 종 교가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 귀납시킨다든지 철학이 인간에게 사상적 지침을 제시한다든지, 교육이 사회에 적 응하게끔 인간을 훈련하고 지식을 넣어준다든지, 그러니까 진리로, 방편으로도 불 수 있겠는데 어떤 범주 속에 사람을 집어넣는다, 극단적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겠소?" "그러면 소설은?" "이것 참, 땀 빼겠는데요? 음, 그러니까 그와는 반대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추상적인 것에 인간이 이끌려가 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둘러싼 모든 것은 그 개인의 운명을 창조하는 데 파생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학의 입장 아닐까요? 물론 작가가 만드는 것은 선택이니까 엄격하게 말한다면 공식이 있을 수는 없지만." "이광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 사람이 탁월한 소질을 타고난 것만은 부인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그의 이상주의를 펴기 위한 문학으론 역부족 아닐까? 설교가 눈에 띈다는 것은 불쾌하니까요. 선생님,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네. 나보고 공박하는 거 아니니까." "이선생님께서도 계몽문학을 반대하신다, 그 말씀인데 우리 민족이 처한 이런 시기엔," 성미가 여간 끈덕지지가 않다. 상현이 쩔쩔매기 시작하는데 윤광오는 결론을 내려는 듯 물고 늘어진다. 송장환 은 안심한 듯 의자에 등을 기대고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구태여 반대할 것까지 없지만 이마빼기에 써붙일 필요까지 있을까요? 애매하면서 민족지도자연하는 것도 아 니꼽고, 문학과 운동이 양립 못한다는 얘기는 아니오. 그에게는 양립이 안 된다, 그 얘기지요. 차라리 그 재주 가지고 칩거하여 문학이나 할 일이지 능도 없으면서 운동은 무슨 놈의 운동이오. 그러니까 마각이 드러나지." 마음으로는 엉덩이를 빼면서 오리려 입으론 격렬하게 내뱉는다. "아닌게아니라 저도 "민족개조론"인가 그거 읽고 실망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윤광오는 묵당에게 시선을 돌리면 묻는다. "놀랄 정도로 졸문이더군. 너절해. 그 글 길이의 십분지 일만 가지고도 할말 하고 남았을 게야. 젊어서 그랬겠 으나 아는 것 자랑이 심해." 묵당이 씹어뱉듯 말했다. "저는 문장가가 아니어서 그런 걸 가지고 논할 자격은 없겠습니다만 거 이상한 얘기가 여간 많지 않더군요. 영국의 식민지 정책이 어떻고 어떻다는 그런 대목이 있었는데, 어째서 이광수는 하필이면 "민족개조론"에서 영국의 식민지 정책을 추켜세웠을까요? 일본이 아닌 불란서의 식민지 정책과 비교는 하고 있었습니다마는 도 대체 그 저의가 뭐냐 그 말입니다." "뻔하지." 쎄리판 심이 말했다. "일본도 영국식으로 조선을 다스려준다면 용납하겠다 그 얘깁니까? 아니면 영국을 본받아 좀 잘 봐달라는 얘 깁니까? 아 글쎄 노골적인 것은, 그래도 영국은 실리를 취했다 하고 노닥거리지 않았겠습니까? 그 반역자가 따고 들면 뭐라 대답할까요." 느물대듯 끈질기던 윤광오가 입에 거품을 물고 흥분한다. "민족을 위해서, 왜놈들에게 눈가리개 해놓고 표면상 합법적으로 조직을 확대한다 답변할까요?" 한마디 말도 없던 송장환이 야유하듯 말했다. 윤광오는 "그러면 그것은 합리중의 책략인데 "민족개조론"에선 도처에 도덕을 운운하고 있지 않아요? 그건 모순입니다." "지적할 것도 없이 모순을, 그것도 솜씨 사납게 엮어놓은 게야." 묵당이 말했다. 말광량이 기질인 수앵이 dia전하게 이 얼굴 저 얼굴을 번갈아 보며 흥미있게 듣더니 "그 사람 애인 때문에 변절했다면요?" 자세히 더 알고 싶다는 듯 상현을 쳐다본다. "그런 풍문이 파다했으나, 애인 때문이라기보다, 지금은 부부가 됐지만," "그럼 애인 때문이 아니라는 거예요?" "수앵이도 여자라 그 문제에 흥미가 있는 모양이군." "그럼요. 딱딱한 얘기보담," "사내새끼가 일개 계집 때문에," 어머! 이이 좀 봐! 일개 계집이 뭐예요?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해요. 사랑을 위하여,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그 점은 동정할 만한 것 같은데, 광오씨는 그럴 경우 날 헌신짝같이 버릴 거예요?" "아예, 자네 상대하지 말게. 인형이나 안겨주고 사탕이나 물려주면 돼." 쎄리판 심의 놀려주는 말이었고 "옛날 같으면 골목이 좁다고 쫓겨났을걸?" 했으나 손녀를 바라보는 살아보지 같은 묵당의 눈이었다. "아저씨까지 그러시기예요? 제가 어릴 적에는 업어주시고 해놓고서," 모두 웃는다. "후회막심이다. 업어주지 말고 종아리나 때릴걸." "그럼 아저씨 겨울 샤쓰 안 짜드릴 거예요." "수앵이가 고생이지 내가 답답할까?" "어머, 왜 제가 고생이에요?" "덩치들을 봐. 실이 내 두 몫은 들걸?" 수앵이 깔깔대며 웃는다. 웃다가 "이선생님 아까 얘기 끝내주시지 않았어요. 애인 땜에 안 그랬다면 뭣 땜에 이광수 그 사람 그랬을까요?" "부부가 닮았구먼." "네?" "말끝을 물고서 안 놓아주는 점이 닮았다 그 말이야." "이거 참," 윤광오는 머리를 긁적인다. 버릇없는 수앵, 결혼을 했으면서도 뜰 안을 뛰어다니며 재롱꾼이었던 옛날의 모습 을 그대로 간직하고, 하여 사람들은 버릇없는 것을 나무라기보다, 세월이 흐리지 않았거니 하고 위안을 받는 걸까. 조선 땅이 아니요, 또 조선 백성도 아닌 심씨 일가, 아라사 기풍을 다소는 따랐을 터이고 한편 피부 빛 깔로 동화되지 못하는 소외감, 모국을 그리워하는 맘, 그런 것을 달래는데는 단란한 가정이 최상이던가. "수앵이가 실망하겠으나, 내 생각엔 말이야, 무슨 일을 한다 하는 남자는 좀처럼 여자 때문에 굽히는 일이 없 을 것 같다. 이십 전후에 혜성같이 나타났던 이광수, 그리고 그의 경력을 살피더라도 그의 야심은 보통을 넘거 든. 그리고 삼일운동 그 무렵엔 거의 영웅이 되다시피한 인물이야." 얘기하는 상현의 얼굴은 자신의 고뇌를 잊은 듯 보였다. 밝고 아늑한 가정 분위기에 차츰 싸여들어 어느덧 그 의 어세는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러한 사람이 생나무 가르듯 허씨, 그 여자와 갈라서게 될 처지도 아니겠고, 보고 싶고 함께 있고 싶은 마음 만으로 상해서 발길을 돌렸겠나? 그 사람은 자신의 명성 때문에 조선으로 돌아갔을 거야." "변절을 했는데 어떻게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나요?" "본인은 변절이라 하지 않았을 게고 변절이라 생각지도 않았을 게야. 어째서 명성 때문에 그랬겠느냐, 내가 생 각하기론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일보다 국내로 돌아가 소설을 쓰는 것이... 생황이 어려웠다는 변명도 있 음직하지만 이광수처럼 다작의 작가가 지면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거의 치명적인 일 아니었을까? 그것은 명 성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어? 참고 견딘다 하더라도 이광수의 판단으론 독립이 쉬이 오지 못하리라, 대 부분 그렇게들 생각했지." 묵당은 쎄리판 심과 술잔을 나누며 웃는다. "생각해 보아. 그 약점을 애인이 찌른 거야.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이다 뭐다 하고 시시한 것을 발표하는 이유 는, 그가 어째서 한때 영웅이 되었는가 그것을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알지. 그의 문학과 그의 반일사상 그 두 가지가 합친 때문이라는걸. 그 야심가, 명성에의 노예는 양자 중에 보다 유리한 것을 택하였고 그러고도 연연 하여 자기 문학에다 애매모호한 것을 풀칠해서 붙이고 있는 거야. 두 가지를 다 갖고 싶겠지만 두 가지를 다 잃는 결과는 아니 될지. 그는 약한 사람 같다. 두 가지를 다 해낼 뜨거운 피, 강인한 의지가 없었을 게야, 글은 칼이 될 수 있는 거고 꽃도 될 수 있는 건데 칼은 무디어졌고 꽃은 종이꽃이 되고 그래서 괴상망칙한 "민족개 조론" 같은 것도 튀어나오게 된 거지. 나는 독자의 입장에서," 잘 나가다가 상현은 기어이 자기 위치를 설명하려 든다. 그는 자신이 뭣인가를 깨닫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사랑 때문에 변절했다, 그 편이 휠씬 낫지 않습니까?" 윤광오 말이었고 수앵은 "그렇담 참 추악한 거 아니에요?" "여자든 명성이든 다 같다. 그러나 여자보다 명성에의 집념이 더 강한 게야." 묵당은 웃으며 말했다. "대단한 성토 대회군요. 그 민족개조주의자는 민족개조가 실현될 날이 멀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넘치는 기쁨으 로 작은 자신의 생명을 고귀한 사업에 바치겠다 했는데 조금은 동정할 여지가 있는 것 아닐까요?" "허 참, 송선생님의 그 호인풍이 또 나옵니다? 친일파 거두들도 조선의 자치제를 들고 나오는 용맹함을 보였 는데 반일 작가 이광수가 고작 한다는 게 꼬리도 대가리도 없는 유령 같은 개조론으로 왜놈을 안심시킨 그 따 위 행위, 동정할 여지가 있습니까? 방구석에 처박혀 소설이나 쓰지, 문화 유산이나 되게요." 동경에서 관동 진재를 겪은 뒤 학업을 중단하고 형을 찾아 연해주로 온 윤광오는 이곳에 눌러앉아 수앵과 혼 인까지 한 처지지만, 그러니까 유학 당시는 3.1운동 전이었고 이광수도 상해로 탈출하기 전이어서, 비록 유학 초년생으로 면식은 없지만 윤광오는 이광수의 영웅 시절을 비교적 소상히 안다. 숭배하고 동경했던 사람인 만 큼, 그런만큼 배신당한 기분은 짙었는지 모른다. "윤광오 씨 말에는 가시가 있소, 변절자는 소설이나 써라. 허허허..." "아, 아닙니다. 그런 뜻6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이선생님은 변절자가 아니어서 소설에서 손뗐다, 그 렇게 되나요?" 대화는 농으로 풀렸다. "이제 그만들 하세요. 저녁 드신 뒤 계속하는 게 어떻겠어요?" 왔다갔다하면서 얘기를 주워들은 눈치다. 부인이 다가오며 말했다. "어이구, 그렇게들 합시다. 저녁 후 묵당께서는 이 버릇없는 젊은 친구들 혼 좀 나게 하셔야겠소?" 세리판 심이 몸을 일으켰다. "선생님 저는 아닙니다." "아 송군 자네야 언제나 묵당의 애제자지." "사랑하면은 매 하나 더 든다 하던데요, 아버님?" 말하며 윤광오는 안내하듯 식당으로 들어간다. 식탁 앞에 자리를 잡는다. "회야?" "네." 계집아이가 쫓아왔다. 부인은 "오늘은 수고 많았다. 밖에 누구 찾아온 모양인데?" 어투를 보아 집에서 부리는 아이는 아닌 것 같고 손님 초대 때문에 농가에서 일을 거들러 온 것 같다. 쎄리판 심의 가정에서는 유일한 변화였다. 하녀들이 없어졌다는 것이. 밖에 나갔다 온 아이는 "저기 송선생님을 찾으세요." "송선생님을 찾아오신 손님이념 들어오시라 해야지." 갈비를 뜯으며 쎄리판 심이 말했다. "안 들어오시겠다 하십니다." "누군데?" 송장환이 묻는다. "전라도 할아버지예요." "그래?" 송장환이 일어섰다. 쎄리판 심이 "서로 모르는 처지도 아니겠고 들어오시라 하게." "네." 급히 나갔다 돌아온 송장환은 낯빛이 달라져 있었다. "무슨일이오?" 상현이 묻는다. "식사 도중인데, 이선생,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겠소. 놀다 천천히 오십시오. 아주머니, 죄송합니다." "아아니, 저 사람이?" 허둥지둥 홀로 나온 송장환은 코트를 집어들고 입을 새도 없이 나간다.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주갑을 향 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설명 좀 하시오." 연신 코트에 팔을 끼면서, 걸으면서 송장환이 묻는다. "다짜고짜 끌고 갔인께 머이 워떠커름 된 것인지 나도 모르겄으라우. 거기 사정도 딱허기야 허겄소만 송선상 이 일 당허면 워쪄? 혀서 여기부터 왔단께로." "두매가 공노인댁에서 잡혀갔다, 그러고 또 뭐랬습니까?" "하얼ㄹ빈서 몇 사람 당혔다 허든디," "누구 누구 잡혀갔어요?" "그거는 모리겄고오, 나도 훈춘꺼지 와가지고 그 소식을 들었단 말씨. 훈춘의 선상님댁에도 그 개놈우아아들이 선상님 잡겄다고 진을 치고 있덜 않겄소? 안에는 들어가보들 못허고," "두매는 뭇하노라 용정서 어물적거리고 있었답디까!" "장사 끝내고 공노인 땀시, 차마 못 떠나고 차일피일, 새댁도 있인께로 그랬는개비여." "바보 덩신 같은 놈!" "뭣이냐, 공놈인 혼자 남게 되얐이니, 두매는 새댁 식구랑 합가헐려고 의논이 돼서," '그건 사사로운 일 아니오!" 송장환은 냉정해지려고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공노인댁이 오구삼살방인가 워째 거기서 사램이 자꾸 잽혀간다요?" 송장환의 눈앞에 신태성의 웃는 얼굴이 뚜렷이 떠오른다. "쳐죽일 놈!" "야?" "어서 갑시다." "워디를 간단가요. 이선상은?" "그 사람 걱정할 것 없어요!" "두매 그눔아아 죽어나겄소." "..." "어이구 숨차." "훈춘 와서 하얼빈 소식을 들었다 하셨지요?" "야." "그건 또 어찌 된 일이오?" "금매, 훈춘 선상님댁에 개놈들이 먼저 와서 진을 치고 있었는디, 하얼빈서는 모리고 달리왔는개비여, 선상님 이 훈춘에 기신 줄 알았겄제요" "기별 온 사람은," "밖에서 사정을 알고 튀었인께 탈 없지라우. 나랑 함께 았인께로." "쳐죽일 놈!" "누가 밀고했다 그 말심이여라?" "..." "누가 했는지 아는 모앵인디 이래가지고 일허겄소? 헌디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여?" "권선생님은 아직 모르시오?" "아니여라. 하얼빈서 온 사람은 그리로 가고 나는 새르빵 집으로 뛰었인께 이잔 알고 기실 것이여."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소?" "뭐가 이상허다 말씨?" "하얼빈서 온 사람하고 주서방이 함께 왔으면서도 누가 잡혀갔는지 그걸 모른단 말이요?" "어이구 그런 말심 마시시오. 어마도지혀서 정신이 나갔는디, 아 그러고 본께 내 물어보들 안 혔구마요." 7장 하얀 새 한 마리 방학을 며칠 앞두고 동경서 서울로 간 환국이는 어머니와 합류하여 서대문 형무소의 아버지 길상과 면회를 했 다. 동대는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소원대로 법과를 지망하여 조도전 예과에 입학한 환국이는 동경으로 떠나기 전에 아보3지와 첫 면회를 했었고 여름 방학 귀국길에, 그러니까 두 번째 면회를 한 셈이다. 삭막한 그 거리, 붉은 담벽에 여름 태양이 튀고 걸레처럼 후즐군해진 사람들이 오가던 그곳, 옥중에 있는 사람도 물론 그러했 겠지만 어머니완느 또 다르게 환국은 형무소의 철문을 나서면서 심한 갈증을 느꼈던 것이다. 절대적인 존재, 환국의 마음속에서는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다. 독립투사로서의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 아버지라는 존재 그 자체가 환국에게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핏줄의 부름이며 어릴 적에 뇌리에 박셔버린 그 모습, 그 음성이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세월과 더불어 한층 강하게, 굳게 각인된 것처럼 마음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것 이다. 이따금 아버지의 체취 같은 것을 환국은 느낀다. 경련처럼 이는 그리움, 바람 부는 음지에서 환국이는 오돌오돌 떨 듯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이쪽과 저쪽 손 한번 마주잡아볼 수 없던 그 짧은 시간, 갈증이 난다. 혀끝이 굳어진 듯 할말을 못하고 오열하지 않으려고 주먹을 쥐었던 그 짧은 시간, 아버지의 눈동자만이 심장을 태우는 것 같았던 짧은 시간이었다. "사내자식이 눈물 같은 것 흘려서는 못써." "네, 아버님." 철문을 나서면서부터, 임교장댁에 하룻밤을 묵고 기차를 타고 지금은 레일을 구르는 기차 바퀴 소리가 규칙적 으로 들려오는데 줄곧 환국은 갈증을 느낀다. 차창 밖에는 싱그럽고 짙푸른 수전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논 둑에 휜 새 한 마리 하늘을 우러러보며 그림같이 서 있다. 순간 환국이는 그 휜 새 한 마리가 어머니의 모습 같이 생각되는 것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수전에 머문 흰 새 한 마리.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을 오르내리 는, 그때마다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할까. 환국이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어머니의 두 손 위에 눈을 떨어뜨 린다. 창백한 손이다. 창백한 손에, 푸른 정맥이 내비치는 투명한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샛파란 비취 반지에 눈이 머문다. 물방울 같은 짙은 녹색의 보석이 흰 모시 치마 위에서 어머니의 성품같이 고귀하게 보인다고 환 국은 생각한다. 푸른 수전과 흰 새 한 마리, 눈물의 응결 같은 푸른 보석과 어머니의 하얀 모시옷, 환국은 눈 길을 들어 차창 밖을 내다본다. 손 안에 물이 흘러버리듯 만남의 그 격렬한 시간은 가고 없다. 차창 밖의 시시 각각 날아가버리는 연변 풍경 같은 것인가.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다시 맞이하는 풍경, 처로 양켠에 비스 듬히 드러누운 듯 석축이 계속된다. 청회색의 그 돌 빛깔에서 어찌 갑자기 아버지의 가슴팍을 느끼는 걸까. 레 일을 구르는 가차 바퀴 소리는 간단없이 정확하게 울린다. 그 바퀴 소리를 한꺼번에 잡아젖힐 수는 없는 것일 까. 세월이 그냥 주렁주렁 끌려와서 당장에라도 옥문이 활짝 열려질 수는 없을까. "환국아." "네." "시장하지?" "아니요, 어머니." "시장하면 식당차에 가자꾸나." "그럴까요?" 환국은 어머니를 위해 일어섰다. 서희는 아들을 위해 일어섰다. 식당차에 마주앉은 모자는 모래알 같은 밥알을 씹는다. 점심 시간이 훨씬 지났었기 때문에 식당은 조용했다. "그래 하숙은 지낼 만하더냐?" 처음으로 묻는다. "네. 과분하지요." "풍습이 달라서 불편한 점이 있을 텐데," "처음에는 좀 그랬었지요. 조선에 나와 있는 일본인보다는 다소 점잖은 것 같구요." "순철이는 아직 안 왔겠구나." "네. 공부하겠다면서 귀성 안 할 모양이더군요." "너는 방학 동안 공부할 생각 말아라. 건강이 좋잖은 것 같구나." "보기에 비해 괜찮습니다. 저보다 어머님이 여위셨어요." 그 말 대답은 하지 않는다. 절반도 못 먹은 채 탁자의 접시를 물리고 모자는 날라온 커피잔을 든다. "여름이 빨리 갔으면 좋겠구나." 여름이 빨리 가기를 원하는 것은 형무소의 아버지를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환국이는 안다. 지난 겨울에는 "겨울이 빨리 갔으면 좋겠구나." 하고 말했었다. "기운 내세요, 어머니." "그래." 모자는 서로 바라보며 웃는다. "이 년만 기다리면, 이번에는 집으로 돌아오실 테니까요." "쉬이 못 돌아오시더라도 그런 곳에만 안 계셨으면 좋겠다." "만주 연해주에선 고생 안 하셨겠습니까?" "..." "양현이는 학교 잘 다니겠지요?" "음. 윤국이가 귀여워하니 다행이다." "엄마... 찾지 않습니까?" "글쎄다. 마음속으로 찾겠지." 이때 푸른 블라우스에 흰 마직 슈트를 입은 여자가 식당칸으로 들어섰다. 환국이와 마주보이는 위치에서 다가 온다. 새까만 에나멜 핸드백을 팔에 걸고 걸어오는 여자는 홍성숙이었다. 환국의 눈과 부딪친 홍성숙은 "아니, 최참판댁 도련님이지요?" 하며 반색을 한다. 환국이는 엉거주춤 일어서며 "안녕하십니까." "몰라보게 되셨네? 동경으로 갔다는 얘긴 들었어요. 명희 언니한테서," "네." "커피 한잔 마시러 왔는데 앉아도 될까?" "네. 앉으시지요." 환국이 옆에 앉으려다 말고 빤히 쳐다보는 맞은편 자리의 서희 눈과 마주친다. '바로, 최서희라는 여자구먼.' 처음부터 그러려니 의식을 했었다. 차갑고 아름다운 눈동자, 의아해하는 빛도 없다. 흔들리지 않는 호수 같다. "저기, 어머님, 그렇지요?" "네. 어머님이세요." 환국이 어쩔까 망설이는데 홍성숙은 스스럼없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 네?" "진주 양교리댁 아시지요?" 서희는 고개를 끄덕인다. "저희 언니예요." "그러세요? 앉으시지요." 희미한 미소를 띤다. 높은 교양을 가졌을 텐데 어딘지 모르게 천기가 엿보이는 홍성숙을 어머니가 어떻게 대 할까 근심이 된 환국이 "어머니? 성악가, 성악을 하시는 분입니다." 소개를 한다. "홍성숙입니다. 부인 말씀은 진작부터 들었습니다만 이제 뵈게 되는군요. 반갑습니다." "특수한 분야에서, 힘이 드시겠습니다." 연장자로서의 태도만을 취한다. "네. 고충이 많습니다. 예술가를 이해 못하는 풍토가 가장 고통스럽지요. 그보다 걱정되시겠어요." "..." "얼마나 괴로우실까. 하지만 나라를 위해 겪는 곤욕이니까 영광으로 아셔야지요." "고맙습니다." "저희들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족구에 이바지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성숙은 날라온 커피잔을 든다. 한모금 마셔보고 눈살을 찌푸린다. "커피맛이 형편없군요." 서희는 아까처럼 희미하게 웃는다. "진주의 언닐 통해서도 그렇지만 임교장댁 명희언닌 저희 선배예요. 서울역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때 아드 님을 보았지요." 성숙은 조병모 남작댁 며느님이라 하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임교장댁 명희언니라 하는 것 같다. "이렇게 훌륭하고 잘생긴 아드님을 두셨으니 얼마나 큰 위안이 되겠어요? 나서면 동경, 은좌 거리가 훤해질 거예요. 호호호..." "..." "하기야 어머님이 아름다우시니 당연하겠지만 정말 듣기보다 몇 배나 더 아름다우세요." 노골적인 찬사에 서희는 머쓱해진다. 여태까지 이런 식으로 서희에게 접근해오는 사람은 없었다. 기질적으로 친밀하게 접근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나이도 예닐곱 위였으나 어릴 적부터 남을 이끌고 오늘에 이른 서희는 연령보다 정신이 훨씬 노숙해 있었기 때문에 사실 멋모르게 솔직하고 다변하고 여자를 넘 지 못하는 감성을 상대하는 것이 거북하다. 불쾌해하는 빛이 스쳐간다. 자리를 뜨는 것이 상책이지만 서희도 이젠 어른이 된 아들의 어머니인 것이다. 남편을 옥중에 두고 사는 여자인 것이다. 성숙은 자신이 가난해서도 아니요, 지체가 형편없는 처지여서 그런 것도 아닌데 명성이나 재력에 약한 여자다. 실제 이해 관계가 얽혀 있 다든지 경쟁자로서 출현했다면 모를까, 그럴 요인이 없는 상대에게는 단연 경의를 표하고 환심을 사려 하고 친하게 교제하며 자신을 빛내려는 경향이 짙은 여자다. 그러니까 자신보다 못한 사람은 버리고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취하는 성향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숙은 지금 서희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최서희의 아름다움에는 자신이 미치지 못하나 서희보다 젊다는 자신이 있었다. 지체는 그쪽이 다소 높다 하더라도 하인 과 혼인하였다는 하자로써 상쇄가 되었으며 막대한 재력에는 자신의 학벌, 예술가로서 대항할 수 있다는 생각 이었다. "혼자 여행이란 아주 지루한 거예요. 심심해서 어쩌나 했더니 마침 귀한 분을 만나 얼마나 다행이니 몰라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행선지까지 함께 얘기하며 가겠다는 것인데 서희는 마음속으로 딱하게 됐다는 생각을 한다. "진주까지 가세요?" "네. 하지만 부산서 며칠 볼일 본 뒤 진주로 갈 거예요." 환국은 창 밖을 바라보며 혼자 있고 싶어하는 어머니 심정을 생각하여 초조해진다. "독창회 관계로 부산서 협의할 일이 있어요. 부산의 청중들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모르지만 간곡하게 권하 는 바람에, 사실 서울도 아직 형편없어요. 결국 우리 세대는 희생되고 지반 닦아주는 것 이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요. 여자가 무슨 일을 한다는 것, 그리고 인정받는다는 것, 그건 우리 조선에서는 백 년 후에나 가능할 까요? 서양보다 뒤떨어진 일본만 하더라도 예술은 신성시되고 예술인들은 동경과 존경을 받는데, 여기선 한숨 밖에 나오는 게 없으니 용기를 잃을 때가 많지요. 백로가 까마귀 속에서 비웃음을 받는 격이지요. 창가 들으러 가자, 네, 창가 들으러 가자예요." 서희는 쓰게 웃는다. "나도 창간 줄 알고 있어요." 순간 성숙은 당황한다. 환국은 창가를 내다본 채 혼자 생각에 잠겨버린 것 같고. "부인께서는 가정에만 계시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일본서 유학했다는 남자 중에도 그런 말 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마 일본서 인력거나 끌며 공부한 사람일 테지만." 서희가 일어설 기색을 보이자 성숙은 화제를 바꾼다. "실은 저희 조카에가 쉬이 약혼할 것 같아서 진주 가는데 진주 가면 다시 뵐 기회가 있을 거예요. 일이 거의 결정났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깔깔깔 웃으며 환국의 옆모습을 살펴본다. 환국의 귀뿌리가 빨개져 있었다.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아닌게아니 라 환국은 비로소 양소림을 상기했고 오랫동안 괴롭혀온 망상과도 같은 혐오감이 되살아난 것을 느꼈다. 홍성 숙을 보는 순간 양소림을 생각했을 터이데 어째서 까마득하게 그것을 잊고 있었는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 망 상과 같은 혐오감은 아버지의 투옥 사건이 있은 후 사라졌다. 아버지의 투옥 사건뿐만 아니라 일 변 동안 자 기 자신의 진로에 대한 번민, 학교 진학 문제, 낯선 동경에서의 새로운 생활, 그런 것들이 소림을 깡그리 잊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홍성숙을 보고도, 마치 홍성숙과 양소림이 아무 관계 없는 사람같이 착각한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양소림이 약혼을 한다...' 깔깔대는 성숙의 웃음은 물결같이 양소림의 그 징그러운 손등을 싣고 온다. "언니하고 형부가 이 도련님을 두고 얼마나 침을 삼켰는지 아마 부인은 모르실 거예요." "무슨 말씀인지?" 서희는 좀 놀란다. 환국의 귀뿌리는 더욱더 붉어진다. 수치와 노여움이다. "박의사한테," 하다가 성숙은 의미 모를 웃음을 흘린다. 반사적으로 서희는 불쾌하고 모멸하듯 성숙을 눈을 주목한다. "네. 박의사한테 중매드시라고 형부랑 언니가 몹시 조르기도 했나봐요. 그뿐인 줄 아세요? 저도 명희언니한테 여러 번 얘기를 했었지요. 우리 소림이, 조카 이름이지요, 그애도 남에게 뒤떨어지는 인물은 아니예요. 예쁘고 마음씨 착하고 그렇지만 아무도 중매에 나서려 하지 않는 거예요. 집안에 불행한 일이 있으니 말 꺼내는 것은 실례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집안이 엇비슷하고, 본인끼리도 서울서 공불 했으니까 면식이 있었을 거구. 전혀 걸맞지 않는 혼담도 아닌데 말입니다." 성숙은 양소림의 그 치명적인 손등에 대해선 일체 비추지 않았으나 망설임 없이 쏟아놓는다. 환국의 어색한 처지 따위는 염두에도 없는 것 같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쓰게 웃는다. "어떻습니까? 아드님 혼인 문제는 생각하고 계시나요?" "아직은, 어린데 공부해야지요." "아드님이니까 그렇지요. 딸애 같으면 적령기 아닙니까? 적령기를 넘기면 여자로선 큰일이지요. 그래서 형부가 서두셨는데 언닌 아직도 분해서 울고불고." "..." "상대가 불만이라 그런 거예요. 언닌 아무래도 좀 고루하니까요. 결단은 형부가 내렸고 저는 형부를 응원했지 요." "네," "아닌게아니라 우리 조카애한텐,"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많이 부족하지요. 누군고 하니 부인께서도 이실 거예요. 지금은 의전 학생이지만 박외과병원에 있던 청년인데 요, 언닌 병원의 조수였다는 게 남부끄럽다고," "환국아?" "네, 어머님." "너 피곤한 얼굴인데 자리에 가서 쉬어라." "네." 구원을 받은 듯 성숙에게 가벼운 인사를 남긴 환국은 급히 식당차를 떠나간다. 말을 중단당한 성숙은 "아드님 앞에서 그런 말 안 할 걸 그랬나요?" 좀 탈선했다 싶었던지 풀이 죽어서 사과 비슷하게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간밤에 잠을 설쳐서 쉬라 했어요." "너무 말씀이 없어서 제 혼자 지껄인 것 같군요." 냉정하고 무관심한 서희 앞에서 냉정을 잃은 것은 틀림이 없다. 그것을 깨달은 성숙은 뒤늦게 자신을 지나치 게 비하한 행동에 화가 난 것이다. 비하는 갑자기 존대로 튀어오른다. "간도에 계셨다는 얘길 들었는데 그곳에선 사업을 하셨다지요? 여자의 몸으로 대담한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노래는 아무나가 부를 수 없지만 장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아니겠어요?" "그럴까요? 조용하 씨 말씀이, 조용하 씨 아시지요?" 이때도 성숙은 명희언니의 남편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한번 뵌 일은 있지만 모릅니다." "음악 애호가지요. 저도 그분의 후원을 받고 있지만 귀공자답게 취미가 좋고 예술에 대한 이해도 깊은데 그분 말씀이 앞으론 주먹구구식의 무식꾼들은 장사 못한다 그러더군요." 조용하를 내세워 자신은 솟아오르고 서희를 무식한 장사꾼으로 차던지려 한다. "회사를 설립하여 많은 자본을 한곳에 모아야 일본 자본과 싸울 수 있고 따라서 지식과 두뇌가 없인," "만들어서 파는 것은 그럴 테지요. 나는 쌀장수였으니까, 무식꾼이 하는 장사를 했으니 실패가 없었지요." 언제까지나 졸렬한 실랑이를 하고 있을 수 없다 생각한 서희는 "자리로 돌아가시지 않겠습니까?" 성숙은 머쓱해져서 일어섰다. 그도 이등 차칸이었다. 좌석이 떨어져 있었으므로 성숙은 미련 없이 서희는 어색 하지 않게 갈라졌다. 시트에 기대어 잠을 자는 척 눈을 감고 있던 환국은 성숙이 지나간 뒤 "피곤하시지요." 등을 일으키며 묻는다. "음. 언변 좋은 사람도 어렵고 말 안 하는 것도 어렵고." 모자는 함께 쓴웃음을 띤다. "너 양교리댁 따님을 아느냐?" 귀뿌리가 빨개졌던 일을 생각하여 서희는 아들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알기는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서울 아주머님하고 역에서 우연히, 아까 그분을 만났지요. 그때 여학생이 옆에 있었습니다." 화가 난 것같이 말했다. "그래? 하지만 양교리댁에서 따님을 허군한테 보내다니, 의외구나." 환국이 어색해하지 않게 한 말이었는데 "그럴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럴 이유라니?" "글쎄요." 얼굴이 흐려진다. 그의 외조부 최치수와 같이 이마빼기에 신경질적인 정맥이 나돋는다. 서희는 더 이상 추궁하 지는 않는다. 그러나 환국의 표정이 마음에 거리고 허전한 생각이 든다. 아들은 이제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모자 사이에 대화는 끊어졌다. 홍성숙을 만나기 전의 상태로, 그때 생각으로 돌아간 듯, 그러나 서희는 이따금 눈살을 찌푸리곤 한다. 해가 서편에 떨어지려는데 부산에 도착한 서희와 환국은 유모의 마중을 받아 여관으로 직행한다. 기차를 내릴 때 서희 모자는 홍성숙을 보지 못했다. "친척은 만나보았소?" 여관의 조용한 방에서 여장을 풀었을 때 서희는 유모에게 물었다. "예." 유모는 서희와 함께 서울까지 갔다가 환국이 서울에 도착하는 것을 본 뒤 그 자신의 일신상 문제로 한 발 먼 저 부산에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서희는 등을 구부리듯 하며 이맛살을 찌푸린다. "어쩐지, 유모." "예." "자리 좀 깔아주겠소?" "어디 편찮으세요. 아이구, 마님 안색이," 환국의 시선이 펄쩍 뛴다. "어머니 어디 불편하십니까?" 서희의 얼굴은 창백했다. 유모는 서둘러 이부자리를 깐다. "괜찮을 거야. 배가 좀, 기차간에서 먹은 게 체했나 부지?" 태연하려 하는데 몹시 아픈 눈치다. 그 도안 혼자 참아보려고 애쓴 것 같다. "안 되겠습니다. 제가 의살 불러오지요." "무슨 소리, 유모?" "예, 마님," "등뼈 좀 주물러 주겠소?" 등을 구부리듯 하며 입술을 꼭 다문다. "예, 예. 하지만 도련님 말씀대로 의사 선생님이 오셔야겠습니다." "아니오. 여관에서 수선떨 것 없소. 등뼈나 눌러보시오." 유모는 환국에게 눈짓을 하고 나서 서희 등뒤에 쭈그리고 앉으며 손가락 끝으로 등뼈마디를 더듬어가며 누른 다. "더윌 마신 것은 아닐까요?" 유모는 서희 목덜미를 향해 부채질을 한다. 현관 옆에 있는 사무실을 찾아간 환국은 고수머리의 낯익은 사무원에게 "수고스럽지만 의사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누가 편찮십니꺼?" "어머님이 복통을 일으켰어요." "많이 아프십니꺼?" "웬만해서는 내색을 안 하시는 분인데, 밤중에 악화되면 의사 부르기도 어렵군요." 겉보기에 환국은 침착했다. "네, 알겄십니다.." "부탁합니다." "부탁이고 뭐고 있겄십니꺼? 손님 심부름하는 거사 당연하지요. 이봐라! 승구야!" 심부름꾼이 달려온다. "니 말이다, 지금 후지이벵원에 가서 말이다, 의사 선생님 좀 모시오너라. 퍼떡 갔다와." "알았소." "그라믄 올라가 가시이소. 의사는 우리가 안내해 갈 긴께요." "아니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환국은 창가에 가서 머문다. 여관은 왜식으로 지은 상당한 규모의 건물이었다. 도심지하고도 멀었고 깨끗하고 조용했다. 서울을 오며가며 서희가 묵고 가는 곳이며 환국이도 일본으로 건너갈 때, 돌아왔을 때도 이 여관에 서 묵는다. 창 밖의 정원이 넓었다. 수목도 종류가 다양했으며 여름 햇볕에 탄 것처럼 짙푸르게 보인다. 넓은 복도, 천장에 매달린 전등에 희미한 불빛이 들어왔고 현관으로 이르는, 자갈 깔린 길가의 가등에도 불이 켜져 있었지만 수목 사이에 찢어진 듯 보이는 하늘은 아직 박명이다. 환국은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으며 깊은 한 숨을 내쉰다. 왠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복통이 심상치 않을 것만 같았다. 갈증과는 다른 어떤 공포 같은 것이 엄습해온다. 불운할 때는 불운만 찾아온다!' 누가 그런 말을 옆에서 지껄이는 것만 같다. 불운할 때는 불운만 찾아온다... 갈증과 공포, 공포는 갈증을 잊게 하지 않는다. 갈증은 공포를 감소시켜주지 않는다. 서로가 보강하듯,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환국을 몰 고 간다. 방대한 최참판댁 땅과 막대한 재산이 마치 허섭쓰레기같이, 그 허섭쓰레기 위에 윤국이가 동그마니 쭈그리고 앉아 있다. 환국은 저도 모르게 넓은 복도를 둘레둘레 살핀다. 휭하니 비어 있다. 전등만 높은 천장 에 동그마니 매달려 있다. 병원 복도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붉은 벽돌의 철문, 병원의 복도, 윤국의 심술난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관에 들지 않고 진주로 직행했을 것을.' 박의사가 옆에 있었으면, 한결 마음이 놓였을 것 같았다. 불운할 때는 불운만 찾아온다. 환국은 다시 깊은 한 숨을 내쉰다. 이러한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아플 때마다 느껴야 했던 공포였으며 반드 시 윤국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곤 했었다. 서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결코 흐트러진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았으며 약해지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지 않던 그였으나 자신이 병드는 것을 두려워했다. 아이들을 바라보 는 그의 눈은 공포에 떠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두고 죽을 수 없다,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외쳐대는 것 같았 다. 서희와 환국이는 필사적으로 그런 공포를 엄폐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들은 어머니에게 태연했다. 그러 나 다같이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방대한 땅, 막대한 재산, 허섭 쓰레기 같은 재산 위에 사람은 없고 윤국이 혼자 쭈그리고 앉은 모습만 있었다.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이었다. 아들을 위한 외로움이었고 어머니를 위한 외로움이었다. 환국은 골똘히 뜰을 바라본다. 좀 체하신 거야. 주사 한 대 맞으면 나을 거야. 내일 아침엔 진주로 가게 돼. 아버님만 오시면 나는 이런 고통 에서 해방이 된다. 아버님만 오시면.' 일꾼이 나와 뜰에 물을 뿌린다. 가등과 집안에서 비쳐나가는 불빛과, 하늘은 한결 짙어져 있었다. 후텁지근했 던 바람이 시원하게 피부에 느껴진다. 물방울이 나무에서 떨어진다. 일꾼이 호스를 치켜들었던 것이다. 나무에 쌓인 먼지가 말끔히 씻겨져 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버님만 오시면 나는 순철이처럼 신나게 놀 거야. 여행도 할 거야. 술도 마시고... 의사는 왜 여태 안 오지?' 어머니의 복통이 가라앉았는지 환국이는 방에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갈 수 없었다. 어머니는 신음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을 것만 같았다. 아버님만 오시면 고성방가, 등산도 하고, 아니야, 나는 그림을 그릴 거다. 반드시 나는 그림을 그린다! 나는 나 약한가? 나약하다. 말할 수 없이 나약하다! 아버님은 계시고 내가 갈까? 시베리아로 내가 간다? 사람은 누구 나 혼자 서야 한다. 결국엔 모두 내 곁을 떠나고 아무리 그리워도 사람은 혼자 가는 거야. 그래, 어떤 사태도 조용하게 받아들이자. 어머니는 다만 조금 체했을 뿐이다.' 일이 년 동안 서희는 앓지 않았다. 많이 여위었으나 몸져누운 일은 별로 없었으며 강건하게 버텨왔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할까?' 환국이 양미간을 모으며 눈을 꼭 감는다. 양소림의 손등 위에 있던 그 징그러운 이물에 대한 혐오감을 품었던 데 대해 벌받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무식하고, 간섭하고, 난 딱 질색이야. 부모도 자식이 크면 놓아주어야지. 자식을 소유물이라 생각하는 그 사상 을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돼. 그러니까 젊은놈들이 나약하고 자신 없고 병신이 되는 거 아니겠어? 이제나 저 제나, 나이들어 담뱃대 두드리며 큰기침할 날만 학수고대, 그래가지고 뭐가 되겠어?" 거침없는 순철의 말이 귓가에 울린다. 내 경우하곤 다르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그런 처지에 처해 있다면 그 껍질을 찢어발기고.' 자갈을 밟는 소리가 들린다. 환국의 시선이 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간다. 두 남녀가 바싹 몸을 가까이하고 여관 의 현관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남녀는 홍성숙과 조용하였던 것이다. 낮에 기차 속에서 만났던 바로 그 홍성숙이며 명희의 남편 조용하. 환국은 어리둥절하다. 현관으로 들어온 그들은 사무실 쪽을 향해 뭔 가 얘기를 주고받다가 여관 종업원에게 안내되어 모습을 감추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이 어찌하여 함께 여 관으로 들어왔을까, 이유는 명확한데 환국은 아직 연소하고 그보다 남의 일에 사로잡힐 여유가 없다. 고대하던 의사가 왔다. 의사와 함께 환국이 방으로 돌아갔을 때 유모는 허둥지둥 밖으로 쫓아나올 기색이었고 서희는 눈을 감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진단은 쉽게 내려졌다. 맹장염. 의사는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환국의 낯빛은 하얗게, 흡사 가면같이 굳어진 다. 8장 배신자 집안에는 손아래 올케와 숙희, 둘만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수박 한 트럭을 식도 부산으로 떠났으며 어머니와 사내동생은 시장 과일 가게에 나가 있었다. 숙희가 병원을 그만둔 것은 정윤이 양교리댁 양소림과 혼담이 있 다는 뜬소문이 한창 돌았는데 그것이 헛소문이 아닌 거의 확정된 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다. 박의사도 그것 을 시인했다. 환자가 뜸한 저녁때 약제사와 조수가 안으로 들어가 식사하는 동안, 숙희는 울고 박의사는 신경 질적으로 담배를 피웠다. 선생님이 그러실 줄은 몰랐습니다." 항간에는 박의사가 중매를 섰다고 했다. 그 일을 알고 있었으나 쌍방간 어느편에도 권한 일은 없다." 선생님이 막을 수도 있었던 일 아닙니까?" 악에 바친 숙희는 박의사에 대한 평소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당돌하게 말했다. 숙희, 나도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으나 혼전의 여자가 그렇게 나보고 얘기할 수 있는 겐가?" 지가 망신을 생각하겠습니까?" 더욱더 흐느꼈다. 숙희가 내 밑에서 일해온 간호원이라면 정윤이도 내 밑에서 일해 온 사람이다. 두 사람은 다 같이... 나는 어느 편에 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야." 박의사로서는 궁색한 변명이 아닐 수 없었다. 본인들끼리 해결할 문제..." 하다가 박의사는 화가 난 듯 벌떡 일어서서 창가에, 숙희에게 등을 돌린 자세로 말했다. 허군 생각에 달렸던 거야. 허군도 야망에 불타는 보통 청년의 한사람이었을 뿐이야. 숙희는 현명하게 처신할밖 에 없다." 어떻게 처신하는 게 현명한 거지요?"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아." 아랫방의 들창만 열어놓고 장지문을 닫아 건 숙희는 차가운 방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워 있다. 동생댁은 장독 가에 김칫거리를 절이고 있었다. 아무리 몸을 뒤쳐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진주의 갑부 양교리댁, 거목처럼 진주 일대에 뿌리를 박고 있는 집안, 권속은 얼마며 그들 밑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은 또 얼마인가. 숙희는 양 소림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손등의 혹도 알고 있다. 바로 그 혹 때문에 정윤을 빼앗긴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 결함이 정윤을 되찾을 구실을 하 지 못하는 것도, 결함을 가산하더라도 양소림은 자신의 적수가 아니다. 어느 모로나 양소림은 높은 곳에 앉아 있고 자신은 다만 올려다볼 뿐이다. 부모와 동생은 벼르고 있으나, 일이 작정될 때를 기다려 벼르고 있으나 거 목이 흔들릴까? 이놈이 오기만 해봐라. 다리몽댕이 뿌질러 앉혀서 못 묵는 밥에 재라도 뿌려야지." 아버지의 말이었다. 그러믄 머하겄소. 다 소앵이 없는 일이요." 아 그라믄 알겄십니다 하고 나앉으란 말가!" 나앉기는 와 나앉아? 숙희 평생 묵고 살 거를 물리야제요. 다리 몽댕이 뿌질러 앉힌다고 내 딸 신세가 고치지 겄소?" 의사 사위 볼 날을 꿈꾸던 내외, 그러나 입으로만 큰소리였지 초장부터 기죽고 들어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 다. 그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고요, 아 양교리댁이 무신 상관이겄소? 허가 그놈을 족쳐야지, 허가 그놈 맘묵기에 달린 기니 매가지를 잡고라도 끌고 와야지요." 동생의 말이었다. 그것도 세가 있어야 하지 아무나 하나? 육례를 갖추어도 버릴라 카믄 버리는데." 어머니가 제일 소극적이며 또 현실적이었다. 아버지와 동생은 분함이 앞섰고 어머니는 보다 딸의 장래를 생각 하는 것이다. 숙희는 가족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방학이면 돌아올 정윤에게도 기대를 걸지 않았다. 다만 저기 자신에게 기대를 걸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한테 물어보아." 박의사의 말이 마치 무당의 푸닥거리처럼 따라다녔다. 이 엄청난 짐을 어떻게 풀 것인가. 죽어버릴까, 목숨을 걸고 행패를 부려볼까? 미쳐버릴까? 먼 곳으로 달아날까? 누님, 정신차리이소. 엎질러진 물이라요." 동생댁은 그렇게 말했다. 내 생각에는 세상 없이도 이 혼사는 되는 깁니다. 하니께 누님도 곯거 없고 내 봐란 듯 살아보는 기라요. 밥 잡숫고, 위자료 받는 거는 누님 경우 에는 하낫도 수치가 아닌 깁니다. 어무이 말씀이 맞십니다. 아 누님이 학비를 댔는데 당당하게 받아낼 돈 아니 겄십니까? 그 돈 받아가지고 누님도 공부하이소. 요새 세상은 여자도 남자겉이 의사도 되고 선생님도 되고 한 께, 그라믄 더 훌륭한 사람 만낼지 누가 알겄소?" 한결같이 식구들은 숙희를 나무라지 않았다. 혼전의 계집아이가 사내아이하고 눈이 맞아 신세 망쳤다는 꾸지 람이 없는 것은, 물론 결혼을 전제하고 숙희가 정윤의 학비 일부를 부담한 그 일이 이미 양해된 것이기 때문 이지만 장사꾼으로 조촐하게 살아온 이 집 식구들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에도 그 이유가 있는 것이나 아닐 는지. 상당히 큰 위자료가 나오리라는 기대 말이다. 죽어버릴까? 달아날까? 행패를 부릴까? 차라리 미쳐버렸음 좋겠다!' 베개를 안고 얼굴을 문지른다. 눈물도 말라버리고 나오지 않았다. 정윤의 얼굴이 떠나지 않고 눈앞에 있었다. 왜 내가 혼자 죽어? 함께 죽자! 어떻게? 독약을 타서 함께 마실까? 자는 데 들어가서 목에 칼을 꽂을까? 그라 고 나도.' 숙희는 벌떡 자리에 일어나 앉는다. 자기 자신이 무서워진 것이다. 누님, 누님요." 방문 밖에서 동생댁이 불렀다. 왜 그래?" 부연이생이가 왔십니다." 아무도 만나기 싫었다. 그러나 친구 부연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학교를 함께 나왔고 이미 시집가서 아이 엄마가 된 친구다. 입술이 튀튀하게 나왔고 쌍꺼풀이 굵었으며 몸도 뚱뚱하다. 이라고 있이믄 일이 되나? 일어나라. 내 소식 가지왔단 말이다." 사내같이 발끝으로, 누워 있는 숙희를 툭툭 찬다. 가만히 두어." 그러면서 숙희는 머리를 걷어넘기며 일어나 앉는다. 어이구 얼굴이 퐅쪽만해졌구나. 영 반쪽이네?" ..." 덩신겉이 이리 누워 있이믄 우쩔 기고? 직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라 그것가?" ..." 그러니 만만하게 보고, 세상에 어디 시집갈 데가 없어서 총각 학비까지 대주었노 말이다. 니는 실개도 간도 없 는 가시나가?" 얼마든지 비웃어." 그래애! 다 니를 비웃는다. 미친년이라 카더라. 니가 기생가? 기생이라서 남자 뒷돈 대주었나? 세상에 그런 망 신이 어디 있노?" 망신이 무서울까? 그런 할려면 가아!" 얼시구! 가라 칸다고 내가 갈 기든가? 누가 오라 캐서 왔건데?" 참견 말어. 아무 참견 말란 말이다! 구경거리 났나?" 나도 분하고 답답한께 왔지. 쥐어박아주고 싶을 만치 니가 밉다." 그새 말라버렸던 숙희 눈에서 눈물 방울이 떨어진다. 운다고 떠난 님이 돌아오나? 그래 사내자석이 매꼬름하게 생깄이믄 횡토가 있는 기라. 마, 시집을 간다 캐도 니를 데리고 살 놈이 아니다. 신발이란 발에 맞아야, 내가 왜 왔는고 하니, 올 때도 하도 분해서 가심이 벌렁 벌렁 하더라마는 니 꼴을 본께 이거는 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드누마. 그래 어쩔래? 내가 방금 만냈는데." 누굴?" 누구긴? 정윤일 만났지." 뭐라고!" 가방 들고 가는 거를, 신수가 훤하데! 그거를 본께 쫓아가서 얼굴을 깔헤비주고 접더라. 나쁜 자식!" 어딜 갔어?" 박외과병원으로 들어가더마. 방금 오는 길인 갑더라." 혼자서?" 그라믄 누구하고? 양교리댁 딸하고 함께 왔일 성싶더나?" ..." 아이고이이, 그래도 태산겉이 미련이 남아서, 둘이 함께 왔이믄 새보로 쫓아갈라 캤나?" 부연이는 방문을 드르르 열고 야야야! 나 냉수 한 그릇 안 줄래?" 야아." 동생댁이 냉수 한 대접을 떠왔다. 그릇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사람 왔십니까?" 조심스럽게 묻는다. 오믄 머하겄노." 대접을 내준다. 온다고 해겔이 되겄나. 우리집 아아 아배도 가만 두믄 안 된다 카더라마는, 정윤이하고 친구간 앙이가." 그라믄 장에 가서 어무이한테 알리야겄소." 대접을 툇마루 끝에 놓고 나가려는데 올케!" 날카롭게 숙희가 불러세운다. 야, 누님." 올케는 참견 말어. 제발 날 좀 내버려두어." 숙희는 동생댁 코앞에다 대고 방문을 닫아버린다. 오뉴월에 한정할라 카나?" 했으나 부연은 방문을 도로 열어젖히지는 않았다. 숙희야." ..." 이 일을 양교리댁에서 알고 있나?" 소리를 낮추었다. 그걸 누가 알어? 그런 것 무슨 상관 있어." 우리 아아 아배 말이 양교리댁에서 그 일을 알믄 혹 혼사가 안될지도 모른다 하데." 아닐 거야." 아닐 거라고? 무슨 얘기 들었나?" ..." 그렇다믄 니가 약점인데? 정윤이가 활갯짓하고 장개가겄고나. 참 돈 좋다아, 돈 좋아." 이제 가아. 나 기운 없다." 흐느낀다. 하기야 돈만 있나. 손에 벵신이라 카기는 카더라만 절색에다 공부 많이 하고 참말이제 강약이 부동이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가?" 시뻘개진 눈이 부연이를 노려본다. 그 자석 온 거를 보고 속이 부굴부굴 끓어서 안 왔나. 오늘 밤에라도 찾아가서 실컷 분풀이를 하든지, 타협을 보든지, 나쁜 자식!" 어서 가라니까!" 나도 젖이 불어서 있이라 캐도 더 못 있겄다. 우리 아아 아배보고 좀 때리주라 카까?" 듣기 싫다! 다 듣기 싫어?" 부연이 가고 난 뒤 숙희는 계속 운다. 당장 정윤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한낮이어서 그럴 수는 없었다. 햇빛이 싫고 햇빛이 무서웠다. 그 동안 정윤이가 있는 대구로 찾아갈 생각도 여러 번 했으나 실행할 용기가 없었다. 동생이 찾아가서 다지겠다 했으나 내가 만나보기 전에는 아무도 나서지 마라, 그거 한 가지만 내 부탁이다." 숙희는 한사코 그것을 말리었다. 누님." 죽그릇을 들고 동생댁이 들어왔다. 죽 좀 마시고 정신차리이소. 기운이 있이야 사생결단을 내도 내겄지요." ..." 자 좀 마시보이소.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고 이럴수록 숭한 꼴로 나타나믄 안 될 깁니다. 나도 가만히 생각해 본께 어무이 아부이가 나서는 것보다 당자가 나서야 꼼짝 못할 것 겉소. 넘이 가믄 반감만 사고 만의 일, 될 일도 안 될 성싶십니더." 만의 일..." 중얼거리며 숙희는 순순히 죽을 먹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사램이 그리 모질고 독하지는 않을 긴데, 나는 나쁜 사람으로 안보았는데 워낙 상대가 그렁이... 누님도 잘 생 각해보이소. 물불 안 가리고 나가는 기이 좋은가 애원하는 기이 좋은가." 듣는지 안 듣는지, 숙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죽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누님,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십니더. 찬물로 찜질을 하믄 저녁까지 부기가 좀 안 빠지겄십니까?" 동생댁을 쳐다본다. 희미했으나 감사의 빛을 담은 눈이다. 어쩌면 집안 식구들 중에서 순수하게 숙희를 이해하 는 사람은 동생댁인지 모른다. 아버지와 동생은 숙희 심정보다 자신들의 분노 때문에 펄펄 뛰었고 어머니는 보다 딸의 장래를 근심하는 편이어서... 어느편에서도 숙희는 위로받질 못했다. 그러나 손아래 사람이요 나이도 어리고 야학을 좀 다녔을 뿐인데 동생댁은 아픔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죽 한 그릇을 비운 숙희는 한동안 들 창만 바라보고 있었다. 동생댁이 죽그릇을 들고 나간 뒤 숙희는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본다. 포동포동하고 혈색이 좋았던 얼굴이 누우렇게 뜨고 귀염성스러웠던 눈매는 퉁퉁 부어올라 음산하고 흉했다. 사회적으로 간호부라는 지위가 그리 존경받을 만한 것은 못 되지만 서민층의 여자로서는 출세한 것이며 소학 교를 나왔다는 것도 서민층의 여자치고는 상당한 학벌이다. 하여 집안에서 위함을 받아왔던 숙희, 장차 의사 사위를 본다는 꿈 때문에, 그리고 과일 가게를 하며 아버지와 동생이 번갈아서 여름 한철은 진주의 유명한 백 도, 수박, 참외 등을 외지로 실어가서 팔고 겨울 한철은 대구에 가서 사과를 실어다 진주서 도매를 하고, 부자 가 부지런히 뛰었기 때문에 살림은 넉넉한 편이어서 정윤의 뒷바라지를 반대하지 않았었다. 정윤을 잃는다는 큰 충격, 다음으로 숙희를 괴롭히는 것이 집안에서의 열등감이다. 소금에 절여진 김칫거리를 동생댁이 씻고 있는데 방문을 열고 숙희가 나왔다. 누님 머리 감으실랍니꺼? 아짐태서 물 데우놨십니더. 찬물에 감으믄 머리서 신내가 난께요." 고맙다." 동생댁은 장독가에서 얼른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솥뚜껑 여는 소리, 더운 물을 한 통 퍼내온다. 그리고 놋대야를 가져다 놔준다. 숙희는 오래오래 머리를 감는다. 몸이 쇠약해진 탓이겠지만 뭔가 골똘히 생각하며 머 리를 감는 것 같았다. 올케?" 머리를 감고 나서 불렀다. 야." 어머니나 너이 남편이 들어와도 왔다는 얘기는 말어." 그렇지마는 호욕 밖에서 듣고 올 수도 안 있습니까?" 아무튼... 올케는 암말 말어주어." 야." 머리를 감고 난 숙희의 마음은 서둘러진다.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말리며 들창에 수없이 눈을 보낸다. 밤이 되어도 깊어져야 갈 수 있는데 초조한 마음에 해는 그냥 한 곳에 머물고만 있는 것 같았다. 다 말려진 머리를 땋아본다. 처녀들은 모두 엉덩이까지 머리를 기르고 땋아서 자줏빛이나 주홍빛 댕기를 물리고 다니는데 숙희 는 직업 여성이었기에 짤랐었다. 짤라서 등까지 내린 머리를 두 번, 세 번 정도 땋아서 검정 고무줄로 묶는다. 스물세 살의 노처녀, 수물세 살까지 머리를 땋고 다니는 여자는 거의 없다. 결혼 적령기가 십육 세, 열여덟도 늦은 편이며 스물을 넘긴 딸을 가진 집안에선 우환 덩어리로 생각하는 세풍에 머리를 땋고 있어야 하는 숙희, 머리를 땋을 때마다 우울했으나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이제는 캄캄한 절벽이다. 살을 꼬집어보아도 꿈이 아 닌 현실인 것이다. 머릴 깎고 절로 갈까?' 그러나 숙희는 일어서서 남빛 순인 치마를 꺼내어 입는다. 옥색 깨끼적삼도 꺼내어 입어본다. 뭐가 미진한지 숙희는 농 문을 열고 한참 휘젓다가 다시 서랍을 열어젖힌다. 검자줏빛 짧은 댕기를 찾아 등에서 흔들리는 머 리꼬리에 댕기를 물린다. 그러나 희망을 벗어버리듯 댕기를 풀고 저고리를 벗고 치마도 벗는다. 지옥같이 길고 답답한 시간이다. 악을 쓰고 싶을 만치 시간은 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걱정이 되어 들여 다본 동생댁이 벗어 던져놓은 옷을 얼른 주워들고 나간다. 땀을 뻘뻘 흘리며 불을 피우고 말끔하게 다려서 아 랫방으로 가져왔을 때 숙희는 지쳐빠져서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밤이 깊어서, 열한시쯤 됐을 때 숙희는 몰래 집을 빠져나온다. 밤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조용했다. 땅은 식었고 바람은 서늘한데 숙희 콧등에 땀이 솟는다. 불빛이 밝은 한길에 나갔을 때 드문드문 사람들이 지나갔다. 숙희 는 얼굴을 숙이고 병원 앞에까지 갔다. 외등이 켜져 있고 박외과의원이라는 간판이 선명하게 눈에 띈다. 낯설 고 쌀쌀하게 느껴지는 박효영이라는 이름 석 자도 선명하게 보인다. 병원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약 제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숙희는 울부짖는 것 같은 마음으로 문을 꽝! 꽝! 친다. 약제실에서 강남이 쫓아나온다. 아니!" 응급 환잔 줄 알았던 강남이 맥빠진 듯 숙희를 쳐다보다가 슬며시 외면을 한다. 정윤씨 왔지요?" 와, 왔지." 있어요?" 없어." 거짓말 말아요!" 숙희는 어깨로 떠밀 듯 병원 안으로 들어간다. 대합실 나무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숙희는 나오라고 해요." 없다 하는데 왜 이래?" 강남씨도 한통속인가요?" 입술을 떨며 노려본다. 기다려. 기다리면 올 거다." 어디 갔기에?" 술 마시러 간다더군. 저녁에는 오겠다 했어." 강남은 곁눈질하며 숙희를 본다. 아주 몰라보게 예뻐 뵈는군.' 흰 간호원복을 입었던 모습에 익혀진 강남의 눈에는 수척해진 숙희 한복 차림이 아름답게 보였던 것이다. 약제실로 들어가 기다려." 강남은 대합실의 전기를 끈다. 약제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은 강남은 안됐지만 단념하는 게 좋을 거야." ..." 나쁜 놈이라고 나도 욕은 했지만... 정윤이한텐 두 번 다시 안 올 기회지. 마음 돌리긴 어려워." 선생님은 안에 계세요?" 부산 가셨어." 왜요?" 최참판댁 부인이 부산서 맹장 수술을 받았거든. 아마 오늘 퇴원하는가 본데 오는 도중 돌봐드리려고." 부자라면 사죽을 못 쓰는군." 강남은 묘하게 웃는다. 부자라면 중매쟁이도 되고." 그건 오해야. 숙희가 몰라 그렇지." 모르긴 뭘 몰라요? 누구 바보 덩신인 줄 알아요? 거기말고 누가 말 건네줄 사람이 있어서." 원한에 눈이 탄다. 내가 누구 변명이나 해줄 사람이야? 사실이 그렇다는 게지. 모르긴 몰라도 선생님 오시면 정윤이 병원에 못 있게 할걸?" 약아빠져서, 남한테 욕 안 먹으려고 그러겠지." 정윤이한테 물어보면 될 거 아니야. 중매를 부탁받은 것은 틀림이 없지만 선생님은 정윤이한테 그런 말 비추 기 않았다는 거야. 몸이 달아서 양교리댁 그 양반이 대구까지 찾아갔다는군. 일은 그렇게 된거라구." 하지만 선생님이 막을려면 막을 수도 있었던 일이지." 눈물을 참으려고 얼굴을 숙이며 힘없이 말했다. 그건 숙희 욕심이야. 어떻게 선생님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골칫거리였을 거야. 이래도 저래도 욕을 먹게 돼 있으니." 얘기를 하면서 강남은 힐끔힐끔 숙희를 쳐다본다. 평범했던 여자가 갑자기 평범하지 않은 여자로 보여져서 강 남의 마음이 시끄러워진 것이다. 동정하는 마음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어쩐지 숨이 가빠온다. 단념하고 마음잡아." ..." 그냥 넘기기야 하겠어? 결혼 문제말고는 선생님도 너를 위한 방도를 생각하실 거야. 정윤이 그 새끼도 빚은 갚아야지." 누가 빚 줬어요?" 기어 숙희는 울음을 터뜨린다. 입맛을 다시며 강남은 담배를 붙여문다. 그거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곳에서 뜨는 거다. 일본에나 가아. 가서 정식으로 간호원 공불 한다든지, 너는 예수쟁이니까 공부해서 그쪽 일을 본다든지, 깨어진 그릇이야. 단념을 하면 오히려 속이 편할 게다." 강남은 담배를 붙여물었지만 숨결은 여전히 거칠어진다. 참다 못해 그는 일어섰다. 나 안에 들어가 자야겠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정윤일 만나." 하고 허둥지둥 나가 버린다. 열두시가 지나고 한시가 가까워졌을 때다. 시계 초침 소리가 심장을 찌르며 지나가는데 약제실 창문 밖에 발 소리, 말소리가 들려 온다. 숙희는 창문 커튼 사이로 거리를 내다본다. 정윤이 비틀거리며 오고 있었다. 정윤의 팔을 낀 사람은 양소림의 친척 오빠였다. 매부, 걱정 말라니까! 나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구. 진주 바닥에서 그걸 누가 몰라? 흠, 양교리댁 사위 된다니 까 그 계집애말고도 우는 가시나들 많았다 카대. 짝사랑한 계집들이 많았다면 그건 내 누이를 위해서도 다행 이면 다행이지 불행은 아니라구. 그만큼 잘났다아 그 얘기 아니겠어?" 정윤의 팔을 끼고 앞으로 넘어졌다 뒤로 목을 젖혔다 하며 양소림의 친척 오빠는 떠들었다. 어이구 취한다! 나 기분 나쁘지 않다구요! 못생긴 부잣집 놀량패한테, 내 누이가 시집가는 것보다 열 배 낫지 이. 자신을 가지란 그 말이야! 사내자식이 배짱부려보라 그 말이야. 쥐어살 것 없어! 그 서울내기 오촌 아지매, 소림이엄마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술수는 장가간 뒤 내가 가르쳐줄 테니까, 아아 아아 걱정할 것 없어!" 소림의 친척 오빠는 정윤이를 병원 앞에 밀어붙이고 나서 내를 부르며 밤길을 돌아간다. 숙희는 병원 문을 열었다. 정윤은 놀라지도 않고 숙희를 빤히 쳐다본다. 나, 숙희 올 줄 알았어." 전등 밑에 숙희는 유령같이 서 있었다. 피한다 생각할까 봐 온 거야." 술 취한 사람 같지 않고 말씨는 똑똑했다. 곧이듣고 안 듣고는 숙희 자유다. 나는 이번 혼담이 있기 훨씬 이전에도 너랑 결혼할 생각은 아니었다." 이 배신자!" 입술이 찢어질 만큼, 악을 쓰고 이빨을 악문다. 문제는, 좀 치사하지만 내 학비를 보내준 사람이 진주 유지가 아닌 여자였다는 데 있어. 그것뿐이야." 만세를 부르듯 두 팔을 번쩍 든 숙희가 정윤에게 달려든다. 9장 동승 자기 자신에게 타일러본 일은 없었지만 이미 단념을 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최서희로부터 뼈에 사무치는 모 멸과 함께 거금 오천원을 받은 후 십 년 세월은 조준구에게 완전히 미친 세월이었는지 모른다. 미친 세월, 무 엇을 어떻게 하기 위하여? 그것은 조준구에게 일생 일대의 모험이기도 했을 것이요, 옳건 그르건 의지의 시기 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성이 비천하고 간교하다 해서, 강자에겐 강아지, 약자에겐 늑대가 된다 해서,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뒷거리 전당포 주인이며 고리대금업자로 전락했다는 것은 조준구의 최대한도의 인내를 의미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물론 아니었으나 탐욕보다 강한 허영을 조준구는 회생시켰으니 말이다. 명문의 후 예로 남 먼저 깬 개명의 지식 분자로 자부하던 조준구가. 재물을 딛고 일어설 야망, 과연 그 야망이 무엇이었 는지 실상 조준구 자신도 뚜렷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은 날 품었던 야망의 연속으로 생각했을까. 애초 에는 염치 좋게 최서희에게 보복의 칼을 갈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주점에서 자신을 도둑으로 몰려 했던 무리 들의 잊을 수 없는 수모에 대하여 반드시 보복을, 그러나 보복이란 물거품같이 허망한 일이었다. 재물보다 강 한 무기는 그들이 젊다는 것이다. 조준구 자신보다 절반이나 젊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뛰어가고 자신은 걸 어가도 숨이 찬 형편이다. 육십대 중반기에 들어선 나이는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지 않더라도 단념할밖에 없는 일이다. 오천 원을 밑천 삼아 시작한 전당포, 고리대금으로 사오만의 재산을 모은 것은 사실이다. 그 재산 관 리만으로도 이제는 힘에 벅차다. 정실이었던 홍씨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은 연전의 일이다. 홍씨 친정 쪽에서 흘러나온 얘기에 의할 것 같 으면 홍씨가 죽은 뒤 그 많은 패물이 흔적 없이 됐다는 것이었다. 생전에 생계를 위해 혹은 병을 고치기 위해 팔아버렸는지, 아니면 주변에서 시중을 들고 병간호를 했던 사람이 가로채었는지 그것은 모를 일이라 했다. 패물일 얼마나 됐을꼬? 수울찮았을 텐데... 그걸 다 팔아버렸을 리가 없다! 필시 누가 가로챈 거야.' 조준구는 목털을 곤두세우는 투계같이 그게 다 누구 돈으로 산건데, 누구 돈으로 산 건데! 하며 흥분을 했고 달려갈 기세를 보였으나, 나도 상가에는 가보지 못했고, 알뜰히 기별해주는 사람도 없었으니, 그래 일 끝난 뒤 얘기만 들었지요. 거, 사 람이 그리 살다 갈 게 아니더군요. 방안의 악취 때문에 염도 제대로 못했다 하질 않겠소? 살았을 때보다 죽은 형상이 더 무서웠다 했으니 짐작할 만한 얘기지요." 홍씨의 몇 촌간 동생이라던 사내를 우연히 만나 들은 얘기는 조준구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병석에 일 년 넘기 있었으니... 기와는 얹었다 해도 오막살이나 다름없는 작은 집을, 뭐 옛날의 몸종이라든가 요? 그 계집한테 죽고 나면 그 집을 주기로 하고 시중을 들게 했다든가, 그러니 오죽했겠습니까?" 그 좋은 집은 어떡허구!" 줄였겠지요. 줄이다보니 그리 된 거 아니겠습니까? 생활비 때문에 그랬는지 아니면 늙어가는데 재물을 누가 탈취해갈까 봐서, 그런 면에서도 남의 눈에 뛰지 않게." 아무것도 남긴 게 없었다는게 무슨 놈의 재물?" 글쎄올시다. 집안에서 상종한 사람들이 없었으니까 그 내막이야 알 수 없지요. 추측만 해보는 거지요. 패물만 은 없애지 않았을 텐데, 패물말고도 돈이 있었을 터인데 하구. 해서 몸종이었다는 계집을 닦달했다는 겁니다." 닦달을 해도 내가 하지 무슨 권리로?" 자형 거처를 모르니 그야," 그랬더니 어찌 됐다는 겐고?" 생래가 천치였다니까 몸종 계집이 가로챘을 거라는 것도 신빙성이 없는 일이라 의견을 모았다더구먼요. 초상 이 나자 자형이 어디계신지 연락할 길도 없고 친정붙이들이 겨우 초상은 치러주었는데 십여 년 동안 사람을 내버린 채 돌보지 않았던 자형을 원망하는 친정붙이가 없었다 하니," 내버린 채 돌보지 않았다구? 몰라서 하는 소린가! 그 계집이 내 재산을 탈취하고오, 내가 망할 적에," 팔을 휘둘렀으나 흥분 때문에 숨이 막힌 모양이다. 허허어, 그러니까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질 않소. 이미 세상 떠난 사람, 이런 말 해서 안 되겠지만 악독해 도 여간했어야지, 벌받은 게지요, 벌받았어요. 악취 때문에 염도 제대도 못했다니, 임종하는 사람 하나 없이, 사람치고 욕심 없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그것도 어느 정도." 네 그 계집이 그리 죽을 줄 알았다. 죽었다는 말 들어도 터럭만의 연민도 없네. 천벌을 받아 마땅한 계집이야. 가장 알기를 옷고름의 패물만큼도." 기왕에 죽은 사람은 그렇고 자형도 생각은 고쳐야 할 겝니다." 내가 어째서!" 죽음을 남의 일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까?" ..." 나 역시 잘살아본 일이 없고 남한테 잘해본 일이 없고 일개 필부로서 명 보존한 것에 불과하지만 다행히 아들 손자를 거느리고 있으니." 조준구에게는 비로서 아픈 말이었다. 오 년 전만 해도 그까짓것, 했을 것이다. 아니 홍씨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그까짓것 했을지 모른다. 그 사내를 만난 뒤 조준구는 여전히 패물의 행방을 궁금하게 생각 했다. 그게 다 누구 돈으로 산 건데!" 혼자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달려가서 계집종의 머리끄덩이 끄덕이며 자복시킬 용기도, 집 어느 구석에 숨겼을지 모를 일이라 벽을 뜨고 구들을 파헤쳐볼 용기도 없었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 럼 홍씨의 악령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은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미련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렇 고 조준구는 홍씨가 죽은 뒤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왕시 그를 본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비 오는 날 강아지 꼴을 하고 쏘다니더라, 그것은 다소 과장이지만, 시정잡배와 다름없는 꼴을 하고 다닌것만은 사실이었다. 변화 는 옷에서부터 서서히 왔다. 회중 금시계를 꺼내어 사용했고 스틱을 짚었으며 고급 이발관을 찾아가는 것이었 다. 양복은 구식이라 하여 일류 양복점에 가서 최고의 천으로 맞춰 입었다. 미친 것 같던 십 년 세월의 초라한 옷을 벗고 옛날같이 미식미복에 탐닉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은 그것 이외 변화할 징조는 없었으나 미식을 즐기면서부터 식모 겸 마누라 역할을 해온 무식하고 못생긴 파주댁을 못살게 들볶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심의 뭉게구름이 일면 덮어놓고 욕설과 매질도 서슴지 않았다. 이년! 상년 같으니라구! 내 죽기를 바라는 게야? 내가 죽으면 이 재물이 네 것 될 것 같으냐?" 그, 그런 일 없어요." 황당한 그 따위 생각을 한달 것 같으면, 추호라도 그런 생각을 한다면은 동전 한닢 어림없다! 어림없어! 계집 치고 구미호 아닌 계집이 어디 있어!" 지, 지는 그런 생각 안 했어요." 듣기 싫어! 도둑년 아닌 계집이 어디 있어!" 손텁만큼도." 천하고 박복한 계집! 누구 은덕으로 밥 쳐먹는가, 국으로 있어야, 그래야 떨어진 밥풀이라도 줏어먹게 된다. 왜 그걸 몰라!" "지, 지는 아무말도 안 했어요." 가난뱅이 아낙같이 악센 삼베옷 아니면 굵은 세 베옷 이외 인조견도 걸쳐보지 못한 파주댁은 안 했다는 대꾸 밖에 할 줄 몰랐다. "호박같이 못생긴 게 꿍꿍잇속은 있어서."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안 혀요." "흥! 바라지 않는다구? 그것부터 거짓이야, 어리석고 못난 것!" 어리석은 여자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배고프지 않은 것만 다행으로 여겼으니까. 보잘것없고 재주 없는 여자가 홀로 된 후 배고픔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다만 소망이 있다면 내쫓기지 않는 것, 어떻게 하면 야단을 덜 맞 고 하루를 보낼까, 재산에 대한 야심은커녕 조준구는 천년 만년 살 것 같이 파주댁은 생각하는 것이었다. 팔월이 거의 끝날 무렵, 조준구는 행선지를 알리지 않은 채 며칠 걸릴 거라는 말을 남기며 인력거를 타고 서 울역을 향하였다. 파주댁과 전당포 종업원이 좋아한 것은 물론이다. 하기는 여름 한철 전당초 영업이 안 되기 도 했었지만, 손가방 하나를 들고 스틱을 팔에 걸고 서울역에 내려선 조준구는 새로운 천지가 눈앞에 전개된 것처럼 숨을 크게 내쉰다. 고리대금업자, 전당포 주인, 치욕스런 허울을 벗어던지고 중추원 의원이나 작위를 받은 친일 거두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걷기 시작한다. 수행원이 없다는 것만 유감이었다. 놀아본 풍월이 있어 서, 십 년 간의 공백이야 어떻든 차리고 나선 품은 어디로 보나 근사한 노신사다. 회색빛이 도는 푸른색 나비 넥타이가 세련돼 보였고 연하디연한 회색 마직 여름 양복이며, 흰 구두와 흰 캉캉모자, 회색으로 변한 머리털 하며 어디에 명함을 내놔도 손색이 없을 그런 차림이다. 키가 작고 두상이 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등 차칸으로 들어간 조준구는 손가방을 짐칸에 올려놓고 스틱은 좌석 한켠에, 모자와 윗도리를 벗어 건 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맞은편에는 사십대의 사내가 존대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사내를 보는 순간 조 준구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저, 저게 누구야!` 조준구의 낯빛이 변하는 것을 본 사내는 먹이를 노리듯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묘하게 웃는 듯 마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그럴 리가 없지.` 조준구는 불안하게 다시 사내를 훔쳐본다. 김평산이 그곳에 앉아 있다는 착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김두수, 그는 김두수였다. 눈두덩이 부숭부숭하고 이마가 좁고 입술이 나왔으며 비대한 몸집이, 김평산 생시 그대로의 모습이다. '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흔히 있다고들 하지만 허어 참...' 조준구는 부채를 쫙 펴서 손끝으로 와이셔츠를 집어올리며 부채질을 한다. 그러면서 연신 김두수를 숨어 본다. 김평산과 다른 것은 도포 대신 양복을, 그것도 값진 양복을 입고 있다는 것뿐이다. '가만있자아. 혹? 평산이 그자의 아들놈인가! 허나 그럴 리가 없지이. 이등 차칸에 앉아 있을 리도 없고, 살인 자의 아들놈이 저렇게 버젓이,' 웃는 듯 마는 듯 시선을 거두었던 김두수가 무슨 생각을 했던지 역습하듯 숨어 보는 조준구의 시선을 잡아챈 다. 만주 중국 일대를 누비며 눈빛 강한 사내들의 목을 엮어낸 김두수다. 조준구 따위, 일별로써 내리누를 김 두수의 안력인 것이다. 조준구는 허둥지둥 눈을 피해 달아난다. '늙은 게 뭐 먹을 것 있다고 내 얼굴을 훑어?' '도대체 이놈은 조선놈일까? 일본놈일까? 만만치 않군 그래. 뭐하는 놈일까? 김평산의 아들놈이라면 나이는 이쯤 됐겠다. 삼십 년이나 지난 옛날, 평사리에서 그놈의 아들놈을 보았던가? 아들 형제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 고 어미는 목매달아 죽었다 했고... 그 자식놈들이 제대로 살아 있을까 싶지도 않은데... 아, 아니다. 생각나는 군. 분명히 작은놈은 평사리에 살고 있다 했어. 살고 있어봐야 머슴 아니면... 이놈은 왜놈임에 틀림이 없다.' 처음에는 전혀 몰랐는데 김두수 역시 어디서 본 것 같다 얼굴이라 생각한다. '어디서 보았을까?'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 그리고 김두수는 조준구처럼 호기심이 강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한 가지 작정하지 못한 일이 있어서 두수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한복이를 만나고 가느냐, 만난다면 어디서 만날 것인가. 서울은 몇 번 다녀간 일이 있었다. 부산행 열차, 고향길 가까이 가는 기차를 타보기는 처음이다.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타기는 했었지만 김두수의 심경이 한복이를 만나는 문제말고도 복잡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기차는 영등포를 지났다. 기차안은 한결 선선해졌다. 부채질을 하던 조준구는 '통성명을 해봐도 원수진 사이는 아니겠고, 설령 평산의 아들이라하더라도, 마주앉았으니 여행길에 말 걸어보 기 예사 아닌가.' 해서 부채를 접고 "어디까지 가십니까." 왜말로 정중히 묻는다. 서울 억양의, 조선인이라는 것이 확실한 일본어다. "동경이오." 돌아온 말은 유창했다. '왜놈이군.' "나는 부산까지 가는데, 날씨가 몹시 덥군요." "여름이니까요." 당연하지 않느냐 하듯 대꾸한다. "하, 서로가 몸이 비대한 편이라서 하하핫..." 김두수도 쓰게 웃는다. "한데 조선에는 볼일이 있어 오신 모양이죠?" "조선에 볼일이 있어 온 게 아니오. 일본에 볼일이 있어 가는 길이오." "아아 그러면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이군요." "조선이 아니고 중국이오." "아아, 중국에선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무슨 일을 할 것같이 보이오?" "글쎄올시다. 물론 사업이겠지요." "사업? 사업은 사업이겠지요." 김두수는 낄낄 웃는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흑?" "흑? 노인장 편안한 대로 생각하십시오." 창 밖으로 얼굴을 돌린 김두수는 "조선이란 변함없이 가난하게 게으르기 짝이 없는 백성들의 땅이 구먼."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예. 희망이 없지요. 희망 없는 백성이오." "어째서 희망이 없소? 대일본제국의 식민지라 그러는 게요?" "아 아니지요. 희망 없는 백성이니까 일본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그 말이외다." "흠, 조선에 나오니까 한결 공기가 다른걸?" "다르고말구요. 만주 중국은 아직 시끄럽지요? 일본이 밀고 들어 갈 때도 됐는데." "밀고 들어갔지. 일본이 손가락 물고 구경하고 있을 성싶소?" "내 말뜻은 그게 아니오. 아주 완전히 장악해야 한다, 조선처럼. 그래야 동양이 평화를 얻을 것 아니겠소?" "노인장은 뭣 하는 사람이요?" 친일파인 것을 상당히 풍겼는데 김두수는 시큰둥하게 물었다. "나는 말할 것 같으면 한말에는 개화당이었지요." 조준구는 약간 상체를 비틀듯, 뽐내듯 여음을 두며 말했다. "그러면 양반이겠군요." "가문이야 빠지는 편은 아니지요. 양주 조씨니까, 합방 후에는 일본인과 손을 잡고 광산을 하다가 만석 살림을 털어넣었지만." 이때 김두수 머릿속에 번개같이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조준구를 빤히 쳐다본다. '맞아! 바로 이 자가 조준구다!' 어릴 적에 말을 타고 서울서 오던 모습이 뚜렷하게 되살아났다. '세상이란 참, 넓고도 좁다.' 조준구가 생각했던 것처럼 원수를 만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동지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상한 얘기지만 최참판댁의 가해자라는 입장에서. 그러나 김두수는 마음을 열어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다. 조 준구를 본 것은 삼십 년 전쯤, 어릴 때의 일이지만 서희가 간도에 있을 때 공노인의 서울 출입을 조사한 바 있는 김두수였으므로 조준구가 광산을 한 사실은 소상히 알고 있었다. 회령서 순사부장 할 때였던가. 공노인을 협박했을 때 공노인은 그런 말을 했었다. "누구네 부친은 그놈을 손바닥에 올려놓질 못해서 이용만 당했다하긴 하더라만," "누구네 부친?" 김두수는 반문했었다. 그러고 다시 "그게 누구지요? 최서희의 부친 말씀이오?" "글쎄, 그것까지는 모르겠구, 재주는 곰이 넘었는데 돈은 중국놈이 먹었다 하기도 하더구먼." 그 말은 두고두고 김두수의 동감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바로 이놈이 중국놈이었고 내 부친은 곰이었다 그 말이겠다?' 별안간 김두수는 허허헛... 하고 웃는다. "...?" "세상 참 우습구먼." 여전히 조선말은 아니었다. "아니 뭐가 우습다는 게요?" 어리둥절하기도 했으나 따지고 보면 굽신거릴 이유도 없을 것 같아 조준구는 못마땅한 눈으로 두수를 쳐다본 다. "잡아온 쟝고로 생각이 나서 말이오." "...?" "총검으로 애목을 찔렀는데 웃고 있더란 말이오." 세상이 우습다는 말과는 맥락이 닿지 않았다. 그러나 공포감을 주는 말이었다. "담이 큰 놈이던가 부지요?" "허허헛... 허헛 담이 큰 게 아니지요. 웃으면서 아첨을 떠는 놈을 쿡 찔렀으니까요." "..." "비천한 놈들, 돼지 같은 놈이지요. 그런 놈들은 우리 일본군의 끄나풀 노릇을 하다가도 여차 하면 등뒤에서 덤빈단 말이오." "하아," "친일파라 해서 믿었다간 일본도 큰코다친다 그 얘기 아니겠소? 조선에 나와보니 친일파도 많고 친일파 되려 는 놈도 많은데 등뒤에서 언제 덤빌지, 하하핫핫 노인장이야 진짜 친일파겠지만 하하핫핫..." 조롱이며 협박이다. 또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겠나? 하며 육박해오는 말이기도 했다. "한데 동경에는 무슨 일로," 조준구는 자리가 나빴다 생각하며 화제를 돌려놓으려 한다. "아들놈이 지난 봄에 고등학교에 갔지요. 그 아일 보러 가는 길이오. 다른 공무도 있지만." 김두수는 쓴 입맛을 다신다. 아들놈이 지난 봄에 고등학교에 들어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아들 때문에 동경으로 가는 것이기는 했다. 일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그러니까 두수에게는 장남인데 생모인 일본 여자와 헤어진 것은 오래 전 일이며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어 중학에 넣으면서부터 어미 감독 하에 두었었다. 그랬는 데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불량 소년으로 풀리어, 미성년인데 불구하고 계집아이 때문에 싸움을 벌려 상대 에게 칼질을 하고 상해를 입힌 사건, 그 일 때문에 김두수는 지금 동경으로 건너가는 길이다. 자식에게는 각별 한 김두수, 그는 여러 번 중국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축재도 상당했으므로 조선에 나와 서울서 자리를 잡을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조선으로 나온다면 물 없는 고기 신세가 될 것을 두수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 었다. 경찰서장 자리라도 하나 준다면 모를까, 재산이 평생 놀고먹을 만치 있다 하더라도 평범한 시정인이 될 때 자신의 보호 문제 같은 것도 상당히 심각했으니까, 결국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지만 자기 직업에 후회한 일은 없었고 아니 오히려 만족해하며 언제나 성공했다는 생각을 하지만, 조선에 돌아와 모은 재산으로 내보란 듯 살아보고 싶은 유혹은 늘 있어왔다. "나도 실은 아들 손자들을 보러 가는 길이지만," "아들 손자?" 김두수는 반문했다. 조준구가 가족을 데려오기 이전에 두수는 평사리를 떠났기 때문에 가족 상황은 잘 모른다. 그러나 그 반문은 내버려둔 채 "지금도 광산을 하시오?" 홀랑 망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조준구가 아직 잘 차려입은 것이 궁금하기도 했었다. "내 나이 몇인데 그 짓을 하고 있겠소." 차창 밖의 풍경은 좁혀졌다. 기차는 산과 산 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김두수는 안동서부터 줄곧 기차를 타고 왔 기 때문에 진력이 났고 따분했다. 두 다리를 조준구 쪽으로 쭉 뻗으며 크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한다. '버릇없는 놈, 개상놈이라니, 이놈이 중국 바닥에서 사람깨나 잡아족친 눈친데.' "조준구 씨!" 별안간 들려온 소리, 벼락이 떨어진 것만큼 놀라웠다. 백주에 유령과 부딪친 기분이었다. "으허허헛... 으하하하핫핫..." 김두수는 입을 쩍 벌리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 호탕한 웃음 소리만은 김평산이 아니었다. "놀랐소?" 조선말이었다. "누, 누구요? 다, 당신은." "알 만하실 텐데요?" "기, 김평산..." "내 부친이지요." "여, 역시." "장난이 지나쳤는가요?" 존중하는 기색은 추호도 없었고 놀려대듯, 상대가 연로하다는 것쯤 도외시하듯 두수는 웃는다. "감쪽같이 왜놈으로 속으셨군." 조준구의 얼굴이 시뻘개진다. "감히, 가 감히 알고서 희롱했더란 말이냐?" "알았으니까 속인 게지요." "뭣이 어째? 노소는 고사하고 지난 일들을 생각한다면 이럴 수가 있나? 허허어 참 기가 차서," "지난 일들 말입니까? 그건 나보다 조준구 씨께서 더 많이 생각 해야 할 거요. 안 그렇습니까?" "뻔뻔스런 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 아시오?" "살인자의 자식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은 바로 네놈을 두고 한 말이야!" "어허어. 목소리가 크시오. 나보다 조준구 씨께서 곤란하실 테니하는 말인데, 그 말 나오길 기다렸소. 생각보다 는 성급했소이다. 여하튼 통성명도 상대 보아가며 하는 게 내 오랜 버릇인데 하하하핫하핫핫..." 몹시 유쾌한 듯 꺽쉰 소리로 웃는다. 방약무인이다. '이놈이 뭘 믿고, 마적질을 했나, 강도질을 했나? 이렇게 나오는건 무슨 까닭인고?' 기세가 꺾인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말도 있고, 조참판, 아니 실례했소, 조준구 씨가 나를 만나면은 만석 살림의 십분지 일은 사례로 주실 줄 알았는데," "뭐, 뭐라구?" 조준구는 자리에서 일어날 자세다. "가만히 계시오." 팔목을 꽉 잡는다. 잡아 앉혀놓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는데 그 침묵은 고양이가 쥐를 노리는 순간같이 잔인했 다. "어떤 노인이 내게 이런 말을 했지요. 그 늙은이는 눈꼽만치도 나라의 혜택을 받은 일이 없는데, 내 부친이나 나처럼 말이오. 헌데 애국자로 겁적거리는 위인이었소. 누군지 아시겠소? 하하핫... 하하핫... 조준구 씨를 손바 닥에 올려놓고 놀려먹던 사람인데 아실 만하지요?" 조준구는 신음 소리를 낸다. 공노인을 두고 하는 말인 줄 깨달았던 것이다. "그 노인의 말입니다. 누구네 부친은 그놈, 그놈이란 조준구 씨를 이름이고, 그러니까 조준구 씨를 손바닥에 올려놓질 못해서 이용만 당했다 그러질 않았겠소? 누구네 부친이란 말할 것도 없이 내 부친을 가리킨 거지요. 그리고 또 말했지요. 재주는 곰이 넘었는데 돈은 중국놈이 먹었다, 곰은 내 부친이요 중국놈은 조준구 씨지요. 알아들으시겠소?" "..." "어째서 통성명을 했는가 아실 만합니까?" "네놈은 어디서 뭘 해먹고 굴러다녔어!" "어허어 큰 소리 내지 마슈. 개화당도 하구 광산도 하구, 살인을 사주하여 만석 살림도 횡령한 그런 화려한 이 력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자들을 똥을 싸게 하는 짓을 해먹고 살았지요." "강도 같은 놈! 무슨 증거로! 살인을 사주해? 무, 무슨 증거로," "조용히 하시오. 그리고 용기도 내시고, 삼십 년 전의 일이니 증거 운운할 필요가 있겠소? 내가 십여 년 전에 회령서 순사부장을 할 때 당신 같은 좀도둑을 수없이 보았는데 그네들은 많아야 기십 원, 그러니가 당신 같은 좀도둑이 만석 살림을 삼켰다면은 그것은 운이 좋았던 게요. 그 운은 말할 것도 없이 내 부친이 갖다준 게고, 그래도 날보고 뻔뻔스럽다 하시겠소?" 조준구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아아 참 아까 어디서 뭘 하고 굴러먹었느냐 하셨는데 아까 말했듯이 십여 년 전에 회령서 순사부장을 했으니 지금은 무엇일까요?" "..."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동지가 됐으면 됐지 적이 될 이유는 없는것 아닙니까? 이거 독립운동한다는 놈들의 말투지만요." "두려워할 이유가 없지. 나야말로 대일본제국의 훈장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야." 조준구는 두수를 노려본다. 두수는 일어섰다. 혁대를 풀어 구멍을 하나 줄여서 다시 졸라맨다. "점심 하러 안 가시겠습니까?" "..." 두수는 등을 구부리고 조준구 귓가에 입을 가져온다. 조준구가 놀라며 몸을 흔드는 바람에 옆좌석에서 졸고 있던 일본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조준구 씨, 다시 한 번 최서희를 결단낼 생각은 없으신지요." 귀엣말로 속삭였다. 그리고 껄걸 웃으며 여전히 안하무인, 거칠것 없다는 듯 식당칸을 향해 간다. 일본 여자는 불쾌한 듯 혀를 찬다. 조준구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서둘며 손가방을 짐칸에서 꺼 내 들고 모자는 머리 위에, 그리고 윗도리, 스틱을 챙겨 든다. 허둥지둥 두수가 간 곳과는 반대쪽을 향해간다. 삼등칸으로 도망쳐가는 것이다. 좌석도 없는 삼등칸에 엉거주춤 서 있던 조준구는 천안에서 내렸다. 역을 빠져 나온 조준구는 다음 역을 향해 떠나는 기적 소리를 들으며, 그늘진 가로수 밑에 가서 털썩 주저앉는다. '독사 같은 놈, 애비는 유도 아니다. 무서운 놈이다.' 조준구는 호구를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조준구 씨, 다시 한 번 최서희를 결단낼 생각은 없으신지요.' 두수의 음성이 주술같이 귓가에 쟁쟁 울린다. 호기도래, 펄쩍 뛰며 좋아할 그 말이 어째서 조준구를 떨게 했으 며 도망을 치게 했을까. '그놈은 나를 곰으로 만들려 했다, 그놈이. 거기 넘어갈 내가 아니다!' 십 년 전 진주에서 정석을 만났었고 자신이 폭도로 몰아 죽게 했던 정한조의 아들임을 석이가 밝히고 나섰을 때 일이 생각났다. 그때도 오늘같이 진주로 도망쳐 나왔었다. 그러나 오늘같이 무섭지는 않았다. '그놈이 나를 곰으로 만들려 한다. 그리고 지 애비 꼴을 만들려 한다. 제놈은 중국놈이 되겠다는 게야. 지 애 비의 복수를 할려는 게야. 석이놈은 오랜 세월을 두고 나를 망하게 했다. 그러나 그놈은 오늘 처음 만났지만 당장에서 피 묻은 칼을 내게 내밀었다!' 두수가 계획적으로 하지 않았던 것은 조준구도 안다. 만난 것은 전혀 우연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조준구는 무서 웠다. 아무도 모르리라 믿고 있던 비밀, 살인을 교사한 사실, 그러나 자신이 그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서웠던 것이며 두수는 살인자의 피를 받은 사내다. 뿐인가, 길거리에서 굶어죽거나 거지가 될밖에 없 었던 김평산의 아들이, 십여 년 전에 회령서 순사부장을 했노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등칸에서 군 림하듯, 그 변모는 가공할 만한 것이 아니었던가. 유창한 일본말, 거칠 것 없이 내어뿜던 독침과도 같은 말이 며 호탕한 웃음, 그는 완전히 강자였었다. 붙잡히면 놓여날 것 같지 않았던 질기고 거센 분위기, 숨도 쉬지 않 고 나락으로 몰아붙일 것 같은 집요함. '잘했다! 천안서 내리기를, 아암 잘한 일이고말고.' 김두수는 세상 참 우습구먼, 했었다. 아닌게아니라 세상 참 우습다. 악당과 악당이, 묵은 인연이 얽힌 악당과 악당이 하필이면 기차속 마주보는 좌석에서 해후를 했다는 것은 신기하기보다 우스운일이다. 조준구는 무서워 서 벌벌 떨었지만 실상 두 사내는 서로 미치지 못하는 곳, 미칠 필요도 없는 범위에 있는 인간들이다. 다만 그 들은 스치고 갔을 뿐이며 부산까지 동행했다 하더라도 스치는 관계에서 끝날 인간들인 것이다. 유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무슨 증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더위에 긴 여행이요, 여행의 목적도 좋았던 것이 아니어 서 김두수는 짜증을 달래보았을 뿐이며 언동의 잔인함은 그의 일상이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서로 알길 없는 이들은 아마 다시 만나는 일은 없으리라. 10장 명장 배는 하얗게 물살을 가르며 쾌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점철된 섬 사이로 들어서면서부터 굼실거리던 배는 안정 을 찾은 듯, 멀미하던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치고, 갑판 쪽으로 나가는 사람, 여객선에서 파 는 점심을 청해 먹는 사람도 있었다. "이만하면 날씨 조오치. 가덕만 지나고 보믄 여름 뱃길은 신선놀음 앙이가." "내사 기름 냄새, 기계 돌아가는 소리, 앵이꼬바서 죽겠는데, 신선놀음은 무신 신선놀음이요." "이 오뉴월 얼매나 씨원노?" 어떤 부부의 대화다. 기차나 여객선이나, 호화스런 외항 여객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빛깔부터 다른 것이 이등과 삼등의 손님이다. 더욱이 여객선의 선창과 선창 위의 선실은, 지옥과 천당? 그것은 과장이겠으나 그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조준구는 배를 타본 일이 거의 없었지만 몸보신을 잘해 그랬던지 뱃멀미도 않고 가덕 바다를 지나왔다. 오히려 그의 옆에 앉은 여학생이 토할듯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을 때 등을 두드려주곤 했었다. 얼굴이 하얗고 쌍꺼풀이 굵게 진 여학생의 얼굴은 희다 못해 새파랗게 보였다. 가덕을 지난 뒤 그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왔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고맙긴." 여학생은 바람을 쐬어야겠다면서 이등 선실에서 나갔다. '고것 참 예쁘게 생겼는걸?' 이등 선실에서는 조준구가 최고의 신사로 보였다. 지방의 유지들이 적잖게 있었으나 시골 신사에 불과했고 양 복 입은 역사도 길거니와 유행의 첨단을 걸었고 값진 것들이어서, 육십이 넘었어도 조준구는 단연 빛이 났다. 기차에서 겪었던 쓰고 기막힌 일은 까맣게 잊은 듯 만족한 얼굴이다. 여학생이 선생님이라 하던 호칭에도 대 만족이었다. '세상은 넓다. 십 년 동안 나는 돼지우리 속에 있었던 게야. 옛날 같은면 내 집의 종년도 못 될 계집을 데리고 살았으니 빌어먹을!' 신여성이라 하여 몇 해 데리고 살았던 여자에 대한 기억이 새로워졌다. 돈을 물 쓰듯, 결국엔 조준구를 버리고 달아나고 말았지만. 삼월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종이었기 때문이요, 향심이를 빈몸으로 내어쫓은 것은 기 생이기 때문이요, 그러나 정실인 홍씨에게 약탈당한 것은 그가 정실일 뿐만 아니라 양반 출신이기 때문이다. 신여성에게 물 쓰듯 돈을 쓰게 한 것은 학식 있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한 탓은 아니다. 의 복처럼 조준구는 고급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물꾼의 여편네 같은 파주댁을 지금 선실에 앉아 생각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오욕인 것이다. 돼지우리 속에선 돼지로 살았으나 돼지우리 밖에선 모든 것이 새로워야 하는가. 그의 눈앞에는 여학생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손녀뻘밖에 안 되는 여학생을 어쩌자는 것인가. 그는 몸을 일으켰 다. 벗어놓은 윗도리를 걸치고 왕족이나 귀족이 된 것처럼 거룩하게 걸음을 옮긴다. 여학생은 갑판 난간에 기 대어 지나가는 섬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짤막하게 묶은 머리가 바람에 나부낀다. 감색 치마, 반소매 하얀 블 라우스가 바람에 나부낀다. 눈이 부시게 흰 종아리다. 미끈하게 빠진 종아리다. "이제 좀 나은가?" 다가가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네." 대답은 했으나 코먹은 소리다. "음. 바다란 언제 보아도 넓어서 속이 시원하다. 처음 현해탄을 넘을 때는, 젊은 시절이어서 가슴이 마구 뛰더 군. 망망대해, 연락선이 일엽편주 같았지." "젊으셨을 때 일본 가셨어요?" "음, 유학차." 모두 거짓말이다. "그러셨어요?" "경응대학엘 다녔지." 여학생은 경의를 표하며 조준구를 바라본다. "아니 울고 있지 않나." "아, 아니에요." 조준구는 여학생과 나란히 난간에 기대 선다. "왜 우는지 얘기해보아." 할아버지 같은 노신사, 일찍이 경응대학을 나왔다는 지식인, 소녀가 신뢰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실은," "음." "학교는 이번이 마지막일 거예요." "왜?" "집이 망했거든요." "뭘 했는데?" "어장이 망했어요. 빚더미 위에... 서울에 남아서 고학이라도... 하지만 뜻대로 되질 않아서 집으로 내려가는 길 이에요." "졸업은 언젠데?" "내년 봄에 졸업이에요." "학교는 어딘가." "근화여고예요." "나이는?" "열아홉이에요." "좀 늦게 들었구만." "아부지도 작년에, 사업 실패 땜에 심화병으로 돌아가시구요." "허허어 참 그거 안됐구먼. 그러나 학비 문제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네?" 소녀의 얼굴이 상기된다. "그거 어려운 일 아니야." "저, 정말이세요!" "향학열에 불타는 젊은 사람들을 그냥 보아넘기지 못하는 게 내병이라." "선생님!" "여학교뿐인가? 하겠다면 전문학교 가는 것도 불가능한 얘긴 아니야." "그, 그럴 수가!" "여자도 할 수 있으면 공부를 해야, 옷은 해어지면 내버리지만 속에 든 학식이란 죽는 날까지 크나큰 재산이 야. 무슨 일이 있어도 두뇌를 썩여서는 아니 되느니," 여학생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행운을 믿을 수 없는 듯 조준구를 쳐다보기도 한다. "이름은?" "석난화예요." "음, 이름 좋구먼." "선생님은 어디로 가세요?" "통영에 볼일이 있어서. 석난희, 그래 난희도 통영인가?" "저는 여수예요." "그러면 어떻게 한다? 늦어도 사오 일이면 나는 서울로 가게 되는데 난희가 서울 올 때, 음 그러면은... 그, 그 렇게 하지. 주소를 적어줄 터이니 오는 날짜와 시간을 편지로 알려주어. 그러면 내 사람을 시켜 마중하러 보낼 테니까." "아, 아니에요. 제가 찾아가지요, 뭐." "집 찾는다는 것도 번거롭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조준구는 주소를 적어준다. "뭐라구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선생님댁에서 심부름이나 하겠어요." "허허 그건 두었다 생각할 일이야." 조준구는 통영 부두에 내리고 난희는 배 위에서 무한한 감사의 뜻을 싣고 손을 흔들었다. 그야말로 즉흥적인 것이었다. 갖은 친절과 감언을 베풀었으나 나중 일은 난희가 서울에 나타난 후 흐를 대로 흘러갈 것이다. 아무 튼 조준구는 매우 기분이 좋다. 옛날보다 규모는 작지만 사치한 의식주를 누릴 여지는 있었고 첨화격으로 의 식주에 어울리는 여자도 있어야 한다. 난희를 반드시 그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로 단정하지 않아도 좋다. '자아 그러면 무슨 일부터 한다아? 우선 좋은 여관을 찾아야 하고 한숨 자고 나서.' 짐꾼이 가르쳐준 여관으로 들어섰을 때 여관에서는 그글 귀한 손님으로 맞아들였다. "좀더 나은 방이 없느냐?" "이 방이 젤 좋은 방입니더. 그리고 통영서는 우리집이 젤 좋은 여관이고요." 특별히 준구를 안내해준 여관 안주인이 말했다. "좁은 지방이라 할 수 없군. 좀 씻어야겠는데." "예, 씨원한 새미물 떠다드리라 하겠습니더." 잠옷으로 갈아입은 조준구는 마루 끝에 세숫물을 떠온 계집아이에게 "여기 세탁소가 있느냐?" "예. 있습니더." "그러면," 벗어놓은 옷과 손가방 속의 양복, 와이셔츠를 꺼낸다. "이것은 세탁하라 이르고 이것은 다려서 가지고 와." "예." 세수를 끝낸 조준구는 화문석을 깔아놓은 요 위에 벌렁 자빠진다. "어이 씨원타." 모시 베갯잇을 씌운 베개가 목덜미에 시원하게 닿는다. "기분 좋다. 진작 나설 것을." 한참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조준구는 정종 몇 잔을 곁들인 생선회 한 접시를 먹어치웠다. "얘야." "예." "이곳은 나전칠기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는데에." "나전칠기가 머입니까?" "허허어, 그것을 모르다니. 조개껍질 아, 아니 소라껍질 박아서," "아아 예, 자개 박은 농이나 밥상 말입니꺼?" "오냐," "그거라믄 통영이 젤입니더. 제일이라 카데예." "그걸 젤 잘 만드는 사람은 누구냐?" "젤 잘 만든다 카믄... 지가 그거를 우찌 알겄십니꺼. 그렇지만 소목일은 곱새가 젤 잘한다 카데예." "곱새..." "하지마는 일을 많이 못한다 카든데,"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 "명절골에 산다 카더마는, 지는 잘 모르겄십니더. 우리집 안주인이 알 깁니더." "그러면 안주인을 불러라." "예." 이윽고 "손님, 지를 찾았십니꺼." "그렇다네." "아이 말을 들은께 곱새 소목장이를 찾으신다고요." "음. 이곳에 들른 기념으로 의걸이나 한 짝 맡겨볼까 싶어서," "그 사람 워낙 일손이 더디서 쉽기 안 될 깁니더. 우리도 농 한벌을 부탁해서 일 년 만에," "일 년이면 어떻고 이 년이면 어떤가, 상관없네. 물건이 되면 기차편에 탁송하면 되는 거구." "지금 가보실랍니꺼." "이따 저녁 후, 그보다 그자가 만들었다는 장롱 한번 볼 수 있겠나?" 안주인은 사십대쯤, 조준구가 노인인 만큼 저항 없이 반말을 받아들인다. "그거는 어렵잖은 일입니더." 안주인은 조준구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이거는, 나전칠기가 아니군 그래." "감나무장입니더. 통영 사람들은 자개장은 별로." 박쥐 모양의 백동 장식을 물린 장롱은 정교하고 매우 견고해 보였다. "거 좋군 그래. 서울서는 이런 장식이 없지. 특이하구먼." "탄탄하지요. 빈틈이 없어서 약 한 분 넣어놓으면 몇 년이 지나도 냄새가 그대로 남아 있십니더." "흠." "말이 소목꾼이지, 병신이고, 그렇지마는 양반입니더. 손님이 가시더라도 마구잡이로 대하시믄 물건 안 맨들라 칼 깁니더." "뭐가 그리 도도한고? 일개 소목장이가," "소목장이도 나름이지요. 다 그렇지는 않지만 장롱 짜는 소목꾼은 식자도 있어야 한다 카든데요. 곱새 소목은 웬만한 사람 가봐야 밑천도 못 찾는다는 말이 있십니더." "그건 왜?" "고학을 많이 해서, 통영서는 내로라 하는 옛적 선비들도 그 사람을 받든다 합니더. 본인은 말이 없지마는 양 반도, 보통 진사나 생원 정도가 아닌, 그런 집안이라 하기도 하고, 그래 그런지 자식들이 모두 관옥 겉고 공부 도 보통 잘하는 게 아니라 카더마요." "음..." 방으로 돌아온 조준구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천장을 멀둥멀둥 쳐다본다. '관옥 같고 공부도 보통 잘하는 게 아니라구?' 입맛을 다신다. '관옥 같고... 공부도... 그중에 한 놈만 데려다가 공부를 시켜볼까? 그중에서 똑똑한 놈 하나를 골라서...' 여객선에서 난희에게 한 약속을 생각한다. '그까짓것,' 조준구는 천정을 쳐다본 채 자신의 재산을 계산해본다. 자신이 누려야 할 몫을 최대한도로 잡아놓고 만일 손 자를 데려다 공부시킬 경우 그 비용을 줄이고 또 줄여가며 계산을 해본다. 그러고 보니 전당포를 때려치우는 일이 불안해지는 것이다. 난희와의 약속 따위는 술 마시다가 기생에게 한 약속과 다를 것이 없었고 자신의 노 후 문제와 관련이 있는 손자에 관한 것은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한번 길을 터놓고 보면 앞으로 복잡해지지 않을까? 일도 많이는 못한다 하는데 식구는 많고 자꾸 손을 벌린 다면 그것도 골치다. 다른 자식까지 공부시키라 한대도 곤란하구, 공연히 여기 온 것은 아닐까? 아니다. 그렇 지는 않을 게야. 그놈이, 그 병신놈이 오기가 있어서 나를 상면 안 하려 할지도 모를 일이고 자식을 내놓지 않 으려 할지도 모르지. 그놈이 병신만 아니었더라도... 내가 심하기는 좀심하게 했나? 그러나 지 에미보다야, 병 신이라 해서 눈앞에 얼른거리지도 못하게 한 지 에미보다야. 독선생 데려다 글도 가르쳤고 짝도 지어주었으며 망하기 전에는 종들 거느리고 평사리서 편하게산 것은 다 누구 덕인데? 병신을 그 이상 어떻게 해. 일본 유학 하여 판검사 될 처지던가? 육신만 성했다면, 그놈이 가문을 무시하고 소목장이가 된 것부터, 그래도 애비니까 찾아볼려는 거지. 다른 자식들 같으면 나이 사십, 부모 공양... 아비 덕 볼 처진가?' 서울을 떠날 때와는 달리 생각이 차츰 불투명해진다. 아들과 손자를 만나게 됨으로써 앞으로 과중한 부담이 되지 않을까 주저되는가 하면 아들과 자부가 상면을 거절할지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이 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십 년 동안 자기 나름대로, 물론 대단히 불만스런 것이기는 했지만 쌓아올려놓은 형태를 허문다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의혹이 솟는 것이다. 허물다 보면 옛날같이 일시에 허물어지는 것은 아닐까? 어느 구석에서 구멍 이 뚫릴지, 재물이란 물과 같아서 뚫리기만 하면 계속하여 흘러나가고 바닥이 나게 마련이다. 조준구는 기와를 올렸다뿐이지 오막살이나 다름없었다는 홍씨의 집, 그간의 사정을 전해주던 사내의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재물에 대해서는 거머리 같은 여자, 그 여자도 재산을 유지하지 못했었다. '가만있자아, 대강 줄잡아서 오만 원을 전재산으로 생각하고, 한달에 사오백을 써도 십 년은 간다. 곶감 빼먹 듯 쓰는 것도 아니겠고 돈이 어디 잠자듯 가만히 있을 겐가? 아무리 저리로 늘린다 하여도 돈은 불게 마련이 야. 그까짓 전당포는 때려치우더라도 말씀이야. 또 그렇지. 한 달에 사오백을 뭣에다 다 쓰누. 백 원으로도 넉 넉할 것이요, 고급 관리 월급인데? 이백 원이면 쓰고도 남는 금액인 게야.' 대충 주먹구구를 하고 보니 한결 마음이 놓인다. 마음이 놓이니까 십 년 인고가 억울하고 전당포 영감쟁이, 고 리 대금업자라는 명칭이 치욕스럽게 가슴을 찌른다. 커다란 감투 아니면 적어도 회사의 사장이나 광주라도 됐 어야 할 사람이 어쩌다 뒷골목에서 썩어야 했던가. 그러나 남은 세월을 십 년으로 잡고 주먹구구로 해본 것이 동티였다. "십 년? 십 년!" 충격적인 공포다. 앞으로 십 년이라니, 죽음이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방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은 공 포, 새까만 죽음의 심연, 죽음이라는 것, 악취 때문에 염도 제대로 못했다는 말이 비로소 자신의 죽음과 결부 되어 되살아난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홍씨의 악령 때문에 무서웠지만 지금은 자신의 죽음 자체와 밀착되어 몸이 떨려오는 것이다. 조준구는 자리에서 벌떡 이렁나 앉는다. 가슴이 뛰고 끈적끈적한 땀이 전신에 흐른다. 어두워지면 가리라 생각했는데 조준구는 곱새 소목의 집을 안다는 여관의 심부름꾼을 앞세우고 나섰다. 열일 고여덟쯤 보이는 사내아이는 양복바지도 고의바지도 아닌 어중간한 삼베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뒤통수가 예 쁘게 생긴 아이다. 해는 떨어졌지만 여열 탓으로 소금기 머금은 바람은 후텁지근했다. 갈매기가 무수히 날고 항구 쪽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온다. 거리는 조용하고 서두는 행인은 없다. 그러나 특이하게 차려입은 노신사 를 신기한 듯 사람들은 바라본다. 골목으로 접어든다. "한참 더 가느냐?" "예. 서문 고개를 넘으믄 있십니더." 사내아이가 대답했다. 돌다리를 지나고 석류꽃이 핀 울타리를 따라 꽤 넓었던 골목길이 차츰 좁아진다. 잿물과 숯과 등유를 파는 구멍가게는 지키는 사람도 없다. "아직 멀었느냐?" "조금만 더 가믄 됩니더." 하수구 같은 개천과 나란히 뻗어간 골목은 더욱더 좁아져서 지렁이 같은데 가파롭게 변해간다. 집들의 지붕은 한결 낮아지고 풍경은 삭막해진다. 부스럼이 나서 밤송이 같은 머리와 벌거벗은 알몸의 어린것들이 눈에 띈다. "왜 이렇게 멀리 가느냐?" 조준구는 숨찬 소리로 말했다. "처음 가는 길인께 그럴 깁니다. 우리는 지척 겉은데요." "지지리 궁상이고나." "예?" "집들이 돼지우리 같구먼." "기와집도 많이 있십니더. 여기는 기찹은 사람들이 사니께요." "기찹다? 그게 무슨 말인고?" "가난하다는 말입니더." "가난한데 뭘 처먹였기 아이새끼들 배가 저 모양이냐?" "횟배겄지요 머." 사내아이는 기분이 나쁜 것 같다. 대답이 퉁명스럽다. "흠, 아무거나 퍼먹이니까 그렇지. 전염병이라도 돌면 싹 쓸겠군." "손님은 부잔가배요?" "뭐?" "금줄 시계도 하고, 그런 사람이사 이런 길 안 다닙니더." 비꼬듯 말한다. "못 배워먹은 것들, 말버릇 고약하다. 상하 구별도 모르는 촌것들이라니," "우리 곳에서는 다 이렇기 달을 하는데요?" "갯바닥이라 더한 겐가?" "갯가라 카지마는 옛날에는 사또보다 높은 수군통제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는 명정리에는 이순 신 장군을 모시놓은 사당도 있고요. 저어기 저, 왜놈들을 몰살시킨 판데목도 있고 통영 사람들 콧대가 얼마나 높으다고요? 그래서 왜놈 서장도 보통내기가 와서는 맥도 못 춘다 안 캅니까?" "대통으로 하늘 보기다. 왜놈, 왜놈 하고 함부로 지껄이다가 혼날줄 알아라."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기 말해왔십니더. 손님은 부잔데 와 그리 벌벌 떨어샀십니꺼?" "이놈 봐라? 못하는 말이 없구나." "서울은 우떤지 모리겄십니다마는 우리 곳에서는 왜놈들이라 카믄 업신여긴께요. 통영은 왜놈들이 와서 박살 난 곳이라요. 그런 놈들이 다시 와가지고 우리 동언 터를 헐어서 신사를 안 지었습니꺼? 그때 추굴을 받아서 왜놈들이 직사했다 카데요. 충렬사에도 이순신 장군의 큰 칼을 모시놨는데 그놈들이 몇 명이나 달기들어서 용 을 썼지만 그 칼들 못 들어냈다 안 캅니꺼? 그라고 또 아까 판데목 이야기는 했지요? 와 판데목이라 카는지 압니꺼? 임진왜란 때 그놈들이 도망갈라꼬 엉겁결에 손으로 팠답니더. 그래서 판데목이라," "주둥이는 닫아두고 어서 가기나 해." "손님이 숭을 본께, 통영을 찾아오는 다른 손님들도 경치 좋고 인심이 좋고 해물이 좋다고 칭찬인데, 손님은 아마도 신선 노는 곳에서 오싰는가배요?"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던 눈치다. 사내아이는 당돌하게 일침을 놓았다. "허허어, 이놈이 겁 없네?" 조준구는 아들을 만나게 되는 일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 말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또 숨이 차기도 했었다. "우리 통영에서는요, 손님 겉은 노인치고 양복 입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십니더. 그래도요, 통영 갓 통영 소반 이라 카믄 외지의 양반들은 다 안다 캅니더. 하다못해 전북도 통영 거라 카믄 돈을 더 받는다 하데요." "잔말 말고 가기나 해!" "예!" 사내아이는 일부러 골탕을 먹이려는 듯 날 듯이 빨리 걷는다. "이놈아!" "예?" "숨차다, 천천히 가자."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겉푸른 수목, 연두빛 대숲이 눈에 뛴다. 큼직한 기와집도 더러 보인다. 가파 롭던 고갯길 주변보다 한결 유복해 뵈는 마을이다. "아직 멀었느냐?" "아니요. 저기 저 집입니더." 사내아이는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아낙들, 처녀아이들이 물 길러 가면서 양복장이 노신사를 신기한 듯 숨어 본 다. "그러면 너는 돌아가거라." 십 전짜리 하나를 내밀었다. 그러나 "언지요." 고개를 저으며 횡하니 오던 길을 돌아간다. '저 집이라...' 사내아이가 가리킨 집은 생각한 것보다 말끔했다. 아래 위 두 채는 초가였고 울타리는 판자였다. 마을에서 종 류는 되는 것 같다. "이리 오너라!" 하고 조준구는 큰기침을 한다. "뉘시오?" 자부의 음성이다. "으흠!" 대문 밖을 내다보다 말고 "아이구머니!" 놀라서 낯빛까지 달라졌다. "어, 어서 드십시오." 자세를 고치고 냉정해지면서 자부는 고개를 숙였다. "으흠, 애비 있느냐?" 부채를 펴 들며 비스듬히 자부를 내려다보고 묻는다. "예." 예닐곱 된 사내아이가 마루에 걸터앉은 채 조준구를 빤히 쳐다본다. 자부는 급히 아래채 쪽으로 걸어간다. 이 윽고 헐렁한 삼베옷을 입은 병수의 꼽추 모습이 나타났다. 병수는 자부보다 훨씬 침착했다. "어인 일이십니까." 난처한 듯 외면을 하면서 조준구는 "볼일이 있어 이 근처까지 왔다가, 그래 별일은 없었느냐?" "네. 드시지요." 사랑 겸 안방 겸인 듯 아래채로 안내한다. 방안은 별로 놓인 것이 없고 문갑과 사방탁자, 서책과 벼루집 붓 같 은 것이 있을 뿐 소목장이와 관련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마루 옆에 헛간이 있었는데 아마 그곳이 일방인 것 같다. "절 받으십시오." 자부는 함께 들어오지 않았다. 병수 혼자 조준구에게 절을 한다. 그리고 마주보며 앉는다. "아이들은?" 우선 마음을 놓으며 묻는다. "밖에 나갔나 봅니다." 창백한 병수 얼굴에는 듬성듬성 수염이 길었고 푹 꺼진 눈은 지친 듯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십여 년 만에 만 나는 부자였다. 준구는 어딘지 어색해했고 병수는 흥분하는 기색이 없었다. 냉담한 것인지 침착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옛날과 같은 청순한 분위기가 남아있긴 했으나 나이보다 늙은 것 같다. "서울의 소식은 들었느냐?" "무슨 소식 말씀입니까?" "너 어미 죽은 것 말이다." 넓게 퍼진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못 들었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인다. "실은 나도 장사를 지낸 뒤 들은 얘기다만 그 계집 죽은 일은 너나 하고는 상관없는 일이고." 병수는 묵묵부답이다. "지난날 사업에 실패하여 내 몸 하나 가누기도 어려워졌기 너이들을 벽촌에 둔 채 거두지 못하였네만 네 어미 를 말할 것 같으면 내게서 탈취한 재산이 적지 아니했고 채귀에 쫓기는 신세도 아니었건만, 생각하면 이가 갈 리는 일이나 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람, 피차를 위해 잊는 것이 상술 게야." 자신의 잘못까지 홍씨에게 떠다넘기듯 말한다. "거두지 않았다 하여 부모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몸은 성치 못하였으나 성년 후의 일이오니 사람 구실 못한 일만 송구할 따름입니다. 허나 남에게 가혹하였던 처사는 잊기 어렵겠습니다. 기일이 언제인지, 자식된 도리로 서 멧상은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기일?" 조준구는 팔을 내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이니라. 기일 따위, 알지도 못하거니와 조씨 가문의 사람이 아닌 게야. 너의 어미도 아닌 게야." 타인보다 가혹했던 생모, 자식을 우리 속의 동물로 취급하던 생모, 그들의 악행이 더하고 덜하고가 없었지만 병수에게는 어미보다 아비가 다소 나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뼈에 사무친 숱한 그 고통들을 지금 병수 가 못 잊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잊으려 했고 잊었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용서한 것이 아니며 병수는 용서를 받은 것이다. 불구자로서의 번민이나 부모가 자식에게 가한 수모, 천지간에 맘도 몸도 기댈 수 없었던 처절한 고독, 그것은 병수 자신을 위한 목마름이었지만 그 목마름 같은 것을 누르고도 남을 크나큰 고통은 자기 자신 이 죄인이라는 의식이었다. 부모의 큰 죄는 바로 자신의 죄요, 부모의 악업으로 얻은 재물로 자신이 연명되고 있다는 그 뼈를 깎는 고통, 더러운 곡식을 아니 먹으려고 수없이 기도했던 자살, 그러나 생명에의 집착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포기하였고 더러운 물 더러운 곡기를 미친 듯 빨아당기지 아니했던가. 병수는 죽지 못하는 치 욕 때문에 미쳐 날뛰었다. 그를 구원할 것이 바로 이 소목일이었다. 이제 병수는 용서를 받은 것이다. 자학은 일(예술)에서 승화되었다. 일은 그에게 만남이었다. "네가 정히 생모의 기일을 챙기고 싶거든 그 계집의 재산을 찾아라." 하며 시작하여 조준구는 집이며 패물이며 돈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병수 는 그냥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그걸 네가 서둘러서 찾는다면 나도 너 어미 제사 지내는 것을 반대 안 하겠다." 반대 안 하겠다는 것도 비윗살 좋은 얘기지만 홍씨의 악령이 달라붙을까봐 자신은 접근 못하였던 곳을,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몸도 온전찮은 아들을 밀어넣으려는 조준구, 인면수심의 정도가 아니다. "그 일도 그 일이려니와, 나도 얼마간 기반을 잡았고 너는 세상에 나올 몸이 아니니 기왕지사, 손자놈 하나쯤 은 하는 데까지 학문을 하게 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나. 우리 조씨 가문을 공고히하는 일이니," "애들은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학교야 다니겠지. 어느 학교에 다니느냐, 장차 어느 학교까지 갈 것인가, 똑똑한 놈 하나 서울로 데려가서 장 차 일본에 유학하게 하고," "늙으신 아버님께 폐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저만 좀더 애쓰면 자식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그 정도의 얘기라면 병수 인품으로 보아서는 명확한 거절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도 아니었는데 거절을 당하니까 갑자기 뭔가 강하게 엮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그렇기야 하겠지. 그러나 나도 이제는 늙었고 자식 하나쯤은 옆에 있어주어야. 너 에미 경우도 옆에 사람 이 없었기 때문에 남이 들어먹었지." 병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저녁은 어찌 하셨습니까?" "여관에 가서 먹지." "여관이라니요?" "이곳은 협소하고 잠자리가 편치 않을 것 같아서," "아버님!" 조준구는 아들을 힐끗 쳐다본다. "앞으로 저희들이 아버님이 원하신다면 모시겠습니다." "..." "그러나 아버님께 가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뭐?" 조준구의 얼굴이 시뻘개진다. 옛날 아들에게 군림하던 그 모습, 그 노여움, 그리고 다음에는 조롱의 웃음으로 얼굴이 변한다. "나일 사십이나 처먹어도 그 따위 소릴 해? 흥! 이놈아 그렇다면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게야! 세상에 태어났을 그때 그러지 왜 못 그랬나? 응 고얀 놈!" 병수의 얼굴이 샛파래진다. 억설이지만 그 말은 가장 아픈 말이었다. 조준구는 삿대질을 하며 "부정한 재물이다 그 말이겠다! 그 말이겠다! 오오냐 이노움! 그렇게 결벽하고 그렇게 도도한 놈이 스스로는 왜 태어나질 못했나? 오려거든 오라!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 그래 그런 잘난 소리 하는 놈이 부모의 몸은 왜 빌렸나? 병신이면 병신답게 주는 밥이나 처먹고 국으로 있을 것이지 가문에 똥칠하는 놈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보고 짓는다더니, 고얀 놈 같으니라구! 야 이놈아!" 조준구의 노성은 돌발적이었다. 병수가 한 말이 아비에 대한 비판이었다 하더라도 저자세로 나온 처음 태도를 생각하면 심정의 얼룩이 여간 심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어머님, 저 노인은 뉘시오?" 집안에서 큰 소리 난 일이 없는 만큼 마루에 앉아 있던 막내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물었다. "할아버지시다." "네에?" 병수댁네는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노여움 거두시거든 가서 인사드려라." "아버님 무슨 잘못을 하셨습니까?" "음," 병수댁네는 어둠이 묻어오는 안산을 바라본다. 11장 젊은이들 "환국아." 모래밭에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던 환국이 살며시 돌아본다. "아니, 순철이 너," 흰 셔츠를 입은 순철이 피식 웃는다. 건강한 체구, 거무스름한 낯빛, 나이보다 훨씬 성숙해 뵌다. 그리고 젊음 이 싱그럽다. "집에 널 찾아갔더니 윤국이가 남강에 갔을 거라 하더마. 한참 찾아다녔다." "앉어." "음." 순철이 모래 위에 엉덩이를 박고 앉는다. "안 오겠다 하더니 언제 왔어?" "그저께. 날마다 편지가 날아오니까, 우리 어머니도 어지간하거든. 내가 졌지 뭐." 환국은 세웠던 무릎을 뻗는다. 순철이처럼 근육형은 아니지만 환국의 체격도 발달은 잘 되었다. "어머니 수술 결과는 어때?" "좋아지셨어." "설상가상이었구나." "그런 셈이지. 앞으로도 뭔가 자꾸 겪을 것 같다." "미리 생각할 것까진 없지. 해가 지는구나. 아이들도 다 돌아가고 강변은 쓸쓸해졌다." "..." "여기는 뭣하러 나왔어." "답답하니까." "답답하지." 순철이 한숨을 내쉰다. "사실은 나 어머니 편지보다 동경서 도망쳐왔다는 게 정직한 고백일 게야." "그런 왜?" "유혹당할 것 같아서." 환국이 웃는다. 여자 문제라 생각한 것이다. "비겁하다 하겠지만 난 순탄하게 가고 싶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글세." "나도 혈기는 있는 놈이고 영웅심도 남 못지 않다. 그러나 순탄하게, 대학을 나올 때까지만이 아니라도 정상적 으로, 어떤 영향 같은 것 받고 싶지 않아." "모를 얘기야." "환국이 너는 아버지의 경우가 그렇고 분위기적으로 익숙해져 있겠지만 내 경우는," "너 사회주의에 흥밀 느낀 거로구나." "호기심 정도는 있지. 그러나 기질적으로 난 바닥이 다르다. 우리 집이 부자라는 것 과히 기분 나쁜 일 아니거 든." "그럼 왜 도망 왔나?" "이상한 놈이 있지. 왜놈인데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 새끼가 자꾸 끌어들이려 하거든." "알 만하다." "싫건 좋건 알 건 알아야 하는데 머리 좋고 똑똑한 놈들이 그쪽으로 빠져 들어가는 걸 보면 어쩐지 내 다리도 건들건들하는 것 같거든." "아까 뭐랬나? 미리 생각할 것까지 없다 그러지 않았어?" "넌 그 방면의 책 많이 읽었겠지?" "더러."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너한테 도움이 안 될 거야. 나는 그림을 그릴 작정이다.' "제에기랄!" 순철이는 벌떡 일어서서 역기 운동을 하듯 두 팔을 올렸다 내렸다 하다가 도로 주저앉는다. "환국이 너 양소림이 약혼한 것 알지?" "그 얘기는 왜 해." 순철의 얼굴이 구겨진다. "박외과의 허정윤이 그 사람이라며?" "박외과의 허정윤이 아니지. 의전 학생이야." "누가 모르나. 개새끼!" "..." "지저분한 자식!" 증오의 빛이 눈에 이글거린다. "나도 가난하면 그런 짓 할까?" "신부감은... 얼굴도 예쁘니까," "얼굴이 예쁘고 돈이 있고 그런 얘기가 아니다. 캄캄 소식인가 부지." "허정윤이 그 사람도 잘생기고 의전 학생인데 뭐." "소식 불통이구나. 결혼을 약속하고 학비까지 보조받은 여자를 버렸다 그 얘길 하는 거다. 박외과의 그 간호부 말이다. "뭐?" "여자가 실성실성 미쳤다든가, 양소림이 집에서 돈을 주겠다 했다든가, 그래도 온전한 사내자식가? 불쌍한 양 소림이." 순철의 눈알이 빨개진다. "난 양소림을 사랑했어. 좀처럼 잊을 수 없을 게다. 어저께 그 말듣고 분한 생각에서," 환국이 놀란다. 순철은 목소리를 낮추며 "나 이 혼사 깨버릴까?" "어, 어떻게?" "내가, 우리집에서 청혼하면?" 환국의 낯빛이 변한다. "너, 환국이 너! 너도 양소림이 생각한 거지?" "그건 전혀 다르다." "아무리 손이 그렇기로, 그건 더러운 혼사다! 양소림이 불쌍해. 그런 치욕이다! 돈 때문에 애인을 버린 사내, 파렴치한, 그런 놈은 장차 양소림도 버릴 수 있어. 나, 소림이가 정상적으로 결혼한다면 이런 말 안 할 거다." "..." "얘기를 들으니까 우리집에 대한 원한도 상당히 작용했다, 그러더구만. 어떻게 해서 그런 말들이 귀에 들어갔 는지. 양소림에게 청혼하려다 그 손 땜에 우리 어머니가 반대했다는 얘기 말이다. 나는 이렇게 빨리 소림의 혼 담이 결정될 거를 몰랐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흥분하고 괴로워하는 순철의 얼굴은 역시 나이가 반영되어 소년같이 갈팡질팡이며 자신의 감정을 통어할 수도 없거니와 표현도 못하는 혼란을 나타내었다. 그것은 환국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움을 남긴 순철과는 다르게 혐오감에 대한 깊은 자책이었지만. "혼담을 깰 자신이 있거든 한번 그래보아." 순철은 흥분한 동작을 멈추고 환국이를 쳐다본다.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안 될 거다. 못할 거란 말이다!" 두 어깨가 처진다. "먼저보다 어렵게, 더 어렵게 됐다." "나는 속이 시원하다." "어째서!" "나는 이제 그 손 생각을 안 하게 될 테니까." 환국이는 모래밭에 침을 뱉으며 잠재적인 것을 강조하듯 말했다. 순철의 커다란 손이 환국의 뺨을 갈긴다. "도도하고 유아독존! 네가 뭐야!" 서슴지 않고 환국이도 순철의 가슴팍을 잡으며 일어섰다. "말만 가지고 동정하는 너 역시 나하고 뭐가 달라!" "약은 놈! 소학교 때도 네놈은 선생만 찾아다녔다! 네 자신만 존엄하고 남들은 버리지가!" 주먹으로 얼굴을 친다. 그들이 함께 뒹굴며 싸울 때 어둠이 찾아오는 강가 모래밭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참 동 안 치고박고 뒹굴다가 어느 서슬에 떨어진 이들은 모래밭에 무릎을 박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이 자식아! 좀 유치해져라!" 순철이 악을 썼다. "어른이 다 된 자식이 누굴 보고 하는 말이야." 입술이 터진 환국은 손등으로 피를 씻으며 말했다. "씨원하지 이 자식아!" 순철이 또 악을 썼다. "씨원하다." "모범생 집어치워." "출세할 생각도 말구." "출세 안 할려면 뭣 땜에 고생스럽게 공불 하노. 이제 일어나 가자." 둘이 모래밭을 걷다가 "아이구 답답해 못 살겠다!" 순철이 주먹을 휘두르며 강을 향해 소리지른다. "어른도 애숭이도 아닌 것이 답답해서 못 살겠다." "넌 폭군형이다." "넌 햄릿형이고?" "그런 건 언제 줏어읽었지?" "읽기는 누가 읽어. 귀동냥한거지." "술 좀 마셨으면." "너 썩 잘 생각했다." "어디서 마시지?" "우리집에 가자." "거긴 싫다." "그럼 좋은 데가 있다!" "어딘데?" "중학교 동창놈, 넌 모를 거다. 사천 아이였으니까 단살림에 꺼리낄 것 거이 없다." "단살림?" "장가를 들었거든. 나보다 두 살 위니까. 여기 조합에 취직해서 사천 사는 부모가 살림을 내주었거든. 가면 대 환영일걸?" "그래도 좋은지 모르겠다." "염치 차릴려면 술 배울 생각 말아야지." 봉산동으로 간 순철이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어떤 자그마한 집 앞에서 "용칠이 없나!" 소리를 지른다. 하얀 행주치마를 두른 앳된 새댁이 쫒아나왔다. "용칠이 있습니까?" "아아, 있다." 마루에서 몸을 일으키며, 목을 뽑듯 용칠이 말했다. 서슴지 않고 문을 들어선 순철이는 "뭐해? 들어오지 않고," 환국의 손목을 잡고 끌어들인다. "귀한 손님이 왔는데, 마루에서 좀 내리서는 게 어떻노?" 고의적삼을 입은 용칠이 "누군데?" 하며 신발을 찾아 신는다. 전등빛이 비친 마루엔 먹다 말았는지 참외 접시가 놓여 있었다. "보면 모르나. 여기는 윤용칠이, 이쪽은 최환국이." 환국이는 초면이라 생각했지만 용칠이는 환국이를 알고 있었던 눈치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웃었다. "자아 자아, 작은방으로 들어가자." 책상과 책장이 놓인 방안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얼른 발을 내려놓고 용칠이는 부엌 쪽으로 달려간다. "얼른 가서 정종 한 병 사오고 안주감도 장만해야겠는데, 어서 어서!" "모두 부잣집 도련님인데 우짜요? 내 솜씨 부끄러바서 우짜요?" "술상 차리라 했지, 밥상 차리라 했나? 어서 어서, 서둘러." 이르고 허둥지둥 방으로 들어온다. "얘기는 많이 들었지마는 반갑습니다." 용칠은 새삼스럽게 환국일 향해 인사를 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폐가 안 될는지," 얼굴을 붉히며 환국이 말했다. "치워라 치워! 사돈 맺으러 온 사람같이 샛파랗게 젊은것들이 무슨 놈의 수인산고? 그래 용칠이 넌 조합 서기 질 해먹을 만해?" "해먹을 만 안 하면 집어치울 처진가?" "정 못해먹겠거든 우리 술도가에 와서 일하면 된다." "지랄하네. 내가 왜 거기 가나." "조합 서기나 술도가 서기나 서기는 마찬가지 앙이가." "굶어죽을 지경이면 가지. 그래 동경서 유학하는 기분은 어때?" "파랑새가 어디 있노? 찾아가보면 실망이지." "이 자식아, 덩치에 어울리게 말해라." "그라면 넌 쥐새끼 얘기만 하고 나는 호랭이 얘기만 하자." 쥐새끼로 비유할 만큼 용칠의 몸집이 작은 것은 아니었으나 순철이 환국이보다 작기는 했다. "저 자식이 저래봬도 주먹은 세다구. 주먹은 작은데 차돌 같거든." 순철은 환국이를 보고 말했다. "마당에 나가서 한판 벌여볼래?" "아서라, 깨진 상판대기 쳐들고 출근하겠나." "보아하니 두 사람도 어디서 뒹굴어본 모양인데," "연습 한번 해봤지, 옛날 대갈통에 구멍 뚫렸던 생각이 나서 사나흘쯤 자빠져 있게, 그러려다가 그만두었다. 수술한 이 자식 어머니가 쳐들어오시면 어쩌나 싶어서." 환국이 쓴웃음을 띤다. "그런 생각도 할 줄 아는 걸 보니 부잣집 아들치고는 잘 풀린 셈인가?" "주둥이 매워졌네?" "언제는 안 그랬고?" "벤또밥 옆구리에 끼고 한 삼 년 다니고 나면 주둥이도 풀리고 주먹도 풀린대더라." "그럴거야, 후우." "그러다가 자식 서너 생기면 허리 굽고 죽는 거라." "안 죽을 사람이 어디 있어. 허리 안 굽어도 죽고 젖먹이도 죽더군. 그보다," 용칠이는 환국에게 얼굴을 돌린다. "정석이라는 분, 잘 아시지요?" 하고 묻는다. "압니다." "허허어, 입맛 없게 그놈의 존대 그만둘 수 없나?" "존대하고 뺨 맞는 일 없다 하더마." "인생 입문이 끝났구나." "윤형은 전선생을 어찌 아시오?" 환국이 묻는다. "갈수록 산이구나. 양반끼리 잘해봐." 어떻게 안다는 설명도 없이 "할머니가 손자를 데리고 고생이 심한 모양이던데..." 홀리듯 말했다. "정선생 누이동생이 함께 와서 산다는 얘길 들었는데," 연학이로부터 대강 얘기를 들었기에 환국이도 석이 형편에 대해서는 좀 알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훌륭한 사람 같았습니다. 최형 아버님께서도 고생하시는 것 알고 있지만," "동경서 도망왔는데 여기에 사회주의자 또 한 놈 있군." "미친 소리 말어. 나는 독립주의자다. 독립주의자 아닌 사람 몇이나 될꼬? 몇 중의 한 사람이 이순철인지 모르 겠네." "뭣 같은 소리 한다. 장차 판검사 되는 날 네놈부터 잡아들이야지." "동경서 카페 출입이나 하면서 어느 세월에 판검사 되나 응?" "누가 그런 소릴 해!" "다 듣는 구멍이 있어. 술도가 아들이 남의 술 팔아주면 파산한다." "자알 논다. 그런 소리 아무리 한들 내가 독립주의? 흥, 투사는 안 된다." "누가 투사 되라 했어? 술도가나 자알 지키라 했지." "이거 주먹이 떠는데 어짤꼬?" "대숲에 가서 대 한 까치 꺾어올까?" 몸집이 큰 편도 아니고 다부진 인상도 아닌데 용칠의 입심은 좋았다. 그러나 순철은 개의치 않았고 기분 나빠 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술상이 왜 이리 늦노? 새댁이 거북이 타고 술 사러 갔나?" "너거 술도가에서 배달이 늦는가 부지." 하는데 마침 술상이 들어온다. 계란부침에 풋고추 졸인 것, 마른 명태를 뜯어놓고 초고추장, 보기에 맛깔진 술 상이다. "임자는 친정에 가 있으라구. 이 친구들 술 심부름 하자면 밤새야 하니까." 새댁이 고개를 숙이고 나간다. "의처증도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무난하지." "장가도 안 간 놈이 어른 다 된 소리 하네, 자아 잔 받으시오." 술잔을 환국에게 내민다. "배우기는 잘 배웠다. 시골 가면 이장 하고 서울 가면 소사 하고, 제법 기분내는군." "내 할아버님은 일곱 살 때 술독에 빠졌고 아홉 살에 상투 올렸다하시더군. 우린 중년이야." "환국이 너 잘 들어. 우린 중년이란 말이다. 자네 어머님한테 가서 그리 여쭈어라." 실없는 말들을 주고받다가 용칠이는 환국의 굳은 자세를 풀기 위해선지 "최형은 인감만큼이나 확실하게 믿을 수 있겠지만 순철아 너, 너는 총각 아니지?" "무슨 소리 하노!" 순철의 얼굴이 시뻘개진다. "거봐, 너도 얼굴 붉힐 때가 있긴 있구나. 최형까지 덩달아 얼굴 붉히는 걸 보니 하하핫 핫핫..." "죽을라고 저 자식이 환장했나?" "총각인가 총각 아닌가 고백이나 해." "윤형도 짓궂게," 웃었지만 벌개진 환국의 얼굴은 차라리 울상이라 해야 옳을 것 같다. "총각 아니다 왜! 어쩔래!" 술상에 술잔을 치면서 순철이는 소리쳤다. "최형 들었지요? 지가 무슨 수로 여태까지 동정을 지켰겠소? 저눔 자식 동경 가기 전부터 총각 아니었을 거 요." "그건 아니다. 그것만은 절대 아니다. 남 장가도 못 가게, 질게 그러면 너 죽인다!" "장가?" "돋아서 내일이라도 장가가야겠다. 제에기랄!" "양교리댁 딸 땜에 그러나? 민적거리더니 빈털터리한테 빼앗겼으니 돋을 만도 하지. 밤잠 못 자고 보고 싶어 하던 그 시절이 좋았지." "그 말은 끄내지도 마라!" "알기는 아는구나. 하기야 진주 바닥에서 그 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하여간 그 집에선 대단한 모험을 했더 군." "별수 있어? 자기 딸이 모자라는 데야 도리 없지." 모래밭에서 하던 말과는 사뭇 다른 말을 한다. "손이 그래 그렇지 양소림 그 아인 괜찮지. 그 어머니에다 고몬가 이몬가 하는 여자들이 교만해서 구역질이 나지만." "너의 집, 그 사람들 작인 아니었던가 몰라?" "이거 왜 이래? 지체 얘기한다면 순철이 너 알아듣겠나?" 절제 없이, 거북한 김에 술을 여러 잔 마신 환국이 "순철이는 지금 사회주의자 될려고 생각하는 중이라 아마 못 알아 들을 거요." 하고 한마디 거든다. 다 실없는 일이었다.밤길을 순철이와 함께 돌아오는 환국의 마음은 황막했다. 겉돌았기 때문에 피곤하기도 했 었다. 순철이 역시 뭉글뭉글한 감정을 폭발 못 시킨 채 나온 때문인지 우울해 보였다. 가문이다 양반이다, 총 각이다 아니다, 그런 것쯤은 신경 밖의 일인 것 같다. "그 계집애가 말이다, 간다 안 간다 말도 없이 간다는 게야. 흠," 술 냄새를 풍기며 순철이 또다시 지껄였다. "아이새끼들 풀어서 그놈의 새끼 실컷 뚜딜겨줄까?" 환국이 길바닥에 주저앉는다. 정신은 말짱한데 속이 울렁거렸던 것이다. "이 병신아, 안 좋으면 토해! 토하란 말이다!" 등을 꾸부리고 순철이 등을 두드린다. 헛구역질을 하다가 "괜찮다." 일어선다. "뱃멀미하는 것 같을 게다." "이리 괴로운데 술은 왜 마실까?" "이열치열, 괴로우니까 괴로움으로 상쇄하는 거다. 환국아." "말 시키지 마."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겠다. 소림이가 시집간다 하니까... 불이 붙는다. 그까짓 손등, 붕대 감고 살면 될 거 아니 가?" "동경으로 가면 잊겠지." "아, 아니다. 첫사랑은 못 잊는다 하더라." 환국이는 또다시 길바닥에 주저앉는다. 헛구역질이 아니다. 토하기 시작한다. 토하면서 술 탓만은 아니라는 것 을 환국인 깨닫는다. 소림의 손등이 눈앞에 크게 떠올랐던 것이다. 꾸물꾸물 움직이며 다가오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어째서 그것을 잊을 수 없을까. 환국인 손수건을 꺼내어 입가를 훔친다. 뭐라고 지껄이며 앞서가던 순 철이 되돌아온다. "환국아, 나 말이다, 낮에 널 찾은 거는 말이다, 그까짓 사회주의, 그깟것 얘기하려던 거 아니었다. 소림이 얘 기가 하고 싶었던 거다. 니도 소림일 좋아했지? 알어, 안다! 우리 둘이서 허가놈 찾아갈까? 찾아가서 뚜딜겨주 자. 나쁜 놈의 새끼, 비루하고 더러운 새끼! 사내 기생인가?" "그만두지 못하겠나!" 별안간 환국은 소리를 지르며 다시 구역질을 시작한다. 순철이와 헤어져 간신히 집앞까지 왔을 때 연학이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술 마싰구나. 어머니가 아시믄 걱정하실라." "아저씨는 왜 여기 서 계세요?" "손님이 오시서 밖을 좀 내다봤다." "손님?" "여자 손님인데," "그런데 왜 밖은 내다봅니까?" "그러씨 그기이, 아무말 말고 들어가거라." "아저씨." "와." "술 마신 것 나쁩니까?" "마시는 것도 나름이지." "공부하는 학생은 안 된다 그 말씀입니까?" "지장 없으면 무방한 기지." "그렇담 어머니도 나무라지 않겠군요. 답답해서, 답답해서 못 견디겠어요. 나도 뭔가 때려부수고 싶단 말입니 다. 왜 이렇지요? 아저씨들이 희망 없다면 우리도 희망 없는 거 아닙니까?" "자아 자아, 들어가자." 환국의 팔을 잡는다. 그리고 사랑으로 끌어들인다. 신돌 위에서 환국은 나자빠졌다. "윤국아." 윤국이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형님 팔 좀 잡아라." 윤국이는 두 팔을 잡고 연학이는 두 다리를 잡고 방으로 들어가 눕힌다. 연학이 나간 뒤 "형, 손님 왔어." 윤국은 쓰러질 만큼 술에 취해 있는 형에게는 관심이 없는 듯 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여자 손님이요. 아주 미인이든데?" "서울 아주머니야?" "젊어 뵈든걸? 처년가봐?" "나, 나 냉수 좀, 네가 떠와. 식구들 술 마신 것 알면," 윤국이 냉수를 떠왔다. "마셔요 형." 냉수를 들이켠 환국은 "박선생님 오셨더랬나?" "응." "뭐라 하셔?" "이제 괜찮은데 뭐라 하시겠어?" "손님은 어머님 방에 계시냐?" "얘기하고 있나 봐요." "어머님이 아시는 분이라든?" "그렇지 않나 봐요." "꼭 배 탄 것 같다. 천장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한다." "기분이 좋은 거요?" "이제 기분이 좀 좋다. 아까는 죽을 것 같더군." "형도 이제 술 좀 해요. 쌈도 하고, 나는 순철이형 같은 사람이 좋아." "미안하다. 너나 크거든 그래라." "물론이지. 난 꼼샌님은 안 될 거요." 환국은 눈을 감은 채 한숨을 내쉰다. 12장 잘못된 계산 처서, 말복이 지나자 한증막 같은 더위도 고개를 숙이는 것 같았다. 조용하 부부가 거처하는 별관은 숲이 짙어 아침 저녁이 한결 선선해졌다. 한더위 때는 모시 고의적삼을 입던 조용하가 침실에서 나올 때 가운을 입기 시 작했다. 아침부터 매미가 운다. 집안은 무인지경처럼 조용하다. 거실에 마주앉아 아침 커피를 마시는 부부 사이에 오가 는 말이 없다. 매일 아침 되풀이 되는 풍경이다. 커피를 마신 뒤 조용하는 탁자 위의 신문을 들었다. 명희와의 사이에다 병풍을 치듯 신문으로 얼굴을 가려버린다. 신문을 든 창백한 손의 표정, 어째서 손에까지 그 사람이 지닌 성격이 나타날까 하고 명희는 매일 아침 생각하던 의문을 머릿속에 스쳐 보내며 권태롭게 찻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명희라고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모를 리 없다. 귀를 막고 싶지만 놓칠세라 소문들을 물어 나르는 강 선혜. "제발 언니, 알고 있는 얘긴데 왜 하시는 거예요? 그런 얘기 자꾸 하려거든 오시지 말아요." "그래 알았다. 하지만 유부녀가 그럴 수 있니? 아니할 말로 홍성숙이가 독신녀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이건 언어도단이야. 명희 너를 위해서만 하는 얘긴 아니다?" "나를 위하는 게 아니지요. 상처를 주는 일이에요." "뭐라구?" "그렇지 않아요, 언니? 하지만 상처를 받을 만큼 인간적이지 않으니 그게 문젤 거예요." "명희야!" "언니 얘기나 하세요." "그, 그래." "순선데 뭐." 선혜는 무안한 듯 웃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래 결정은 했수?" "거의, 너도 생각해보아. 내 나이 몇이니?" "사십을 바라보지요." "참 세월도 빨라. 너하고 동경서 지내던 일이 엊그제만 같은데, 이나이 해가지고서 전도부인이 될 수도 없는 일이고 이런 풍토에서 여자가 독신을 고수하면 괴물 취급이니 말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잘하셨수." "잘해?" "왜 또 그래요?" "넌 결혼 후회 안 한다 그 말이야?" "언니 자신의 문제 아니겠어요? 남의 사정 보아가며 결혼하실 건가요?" "음, 그야 그렇지. 내 인생 내가 사는 거구. 또 내 상대는 귀족도 부자도 아니니까 말이야." "언니한텐 과분해요." "이애가? 날 무시하는 거니?" "상대가 훌륭하니까요." "훌륭하긴? 가난뱅이 예술가를," 했으나 선혜는 만족한 듯 눈꼬리에 주름을 모으며 웃는다. 아직은 젊었다. 쪽머리에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다 른 조선 여자들에 비하여. 선혜 나이면 며느리 본 사람도 허다한데 화장은 옛날같이 짙지 않았으나 꽃무늬의 푸른 원피스의 모습은 아직 풍만했다. "하기야 뭐, 경제적인 거는 나한테 문제가 안 되지만," "뭐가 문제예요?" "그것 따지게 생겼니? 아이들 기르고 살림에만 전념할 각오 없이는 결혼은 생각 안 하는게 좋을 거다, 그런 배짱 좋은 말을 하지 않겠니? 설사 내가 그런 생각, 각오를 한다 해도 그렇게 목박는 말은 듣기 싫거든. 사내 들 이기심이 밉단 말이야. 자존심도 상하고, 내가 뭐 보모, 식모로 취직하는 거니?" "권선생만 그런 거 아니잖아요. 남자들은 다아," "안 그런 사람도 있더라 이애. 가장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음에도 집에선 보수적이란 그거, 이중 인격 아니니?" "권선생님보고 그러시지 그랬어요?" 그 말 대꾸는 없다가 한참 만에 "이번 기횔 놓치면 난 아마 결혼 못하고 말 거야." "알기는 아네요." "어떻게 보면 사내답기도 하지만 말이야. 나도 많이 생각해봤지만 너 알지? 그 자금 문제 말이야." "몇 번 얘기했수." 그러나 선혜는 되풀이한다. "글세 다른 사내 같으면 자금부터 받아놓고 이러니저러니 하고 나왔을 거야. 헌데 그 사낸, 기부라면 받겠으나 [청조]에는 관여 말아라, 사람을 앉혀놓고 코빼기를 치더란 말이야, 증인까지 앉혀놓고 그때 생각을 하면 아직 도 분해서 이가 드걱드걱 갈려. 좋다! 비록 나는 치마를 두른 여자지만 째째한 사내한테 본때를 보여주마, 오 기였지 오기였어. 그게 인연이 되어, 하하핫... 하하핫..." "언니도 참," "권오성이 그때 날 다시 본 게야. 그러고 나한테 한방 맞은 거지. 누가 그랬다더라? 그런 여자를 들앉혀놓으면 살림이 엉망진창이 될 거라구, 했더니 권오송이 말이 그 점은 나도 동감이다, 그러나 엉망진창이 될 살림이나 있는가, 애들한테 잘하면 그거로 족하고 강선혜 그 여자 이중 성격은 아니니까 애들한텐 잘할 거다, 그런 답변 을 했다는군. 흥, 누굴 애보개로 생각했나 부지?" "매사에 명확하다는 건 좋은 것 아니에요?" "그렇지만 명확한 것도 표현은 완곡해야지." "그런 충고는 언니한테 드리고 싶어요." "하하핫... 하하핫, 나도 좀, 그런 편이지." "좀 정도가 아니에요. 쓸데없는 남의 일에도," "관두어, 관두어라. 내 성질 내가 알고 있어. 웃는 낯으로 송곳 찌르는 그 따위 짓은 나 못해. 그런 인간들 많 지. 앞에선 온갖 아첨 다 떨다가 돌아서면 침 뱉고, 일 대 일일 때는 가장 친밀한 친구같이 대하다가 제삼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갑자기 잘난 체 사람을 무시하려 드는, 그 따위 인간을 난 믿지 않아. 오히려 일 대 일일 때 는 심한 말로 충고도 하고 하는 사람이 남과 합석했을 때 따뜻하게 옹호해주는 태도로 나오더구만. 여자도 그 렇지만 사내새끼들, 네 네, 강여사, 하다가 누구든 하나 끼여들면 강선혜라는 여자가 어쩌고 저쩌고, 마치 내가 유혹이라도 한 것처럼. 화가 난다기보다 불쌍해지더군. 그런저런 생각하면은 시집가기는 가야 해." "..." "또 누가 그랬다나? 부잣집에 양자간다며? 하고 말이야. 그랬더니 권오송이, 오라는 말도 없었고, 내가 데려오 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처가에서 자금을 보태주겠다면 그걸 사양할 생각은 없다. 하고 응수했다는 게야. 날 보 고는 또 뭐라 했기? 기가 막혀서. 아 글쎄 어떤 노총각한테 중매 들려다 실팰 했기 때문에 결국 내가 떠맡게 됐다면서 그 작자 실실 놀리지 않겠어? 자릴 박차고 일어서려다 그 사내한테 기죽어보기란 처음이야. 감언이 설보다 신뢰감이 가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지만." "아무말 말고 언니 시집가서 잘살아요. 잘살 거야. 언니 말마따나 귀족도 부자도 아니니까." "그래, 나도 뭔지 운명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애들 있는 것도 싫지 않고 말이야. 이제 시집가서 아일 낳겠 니? 공짜로 생긴 내 아이다, 생각하기 탓이지. 집에서 할일 없으면 아이들 사랑하고 함께 놀아주고 그런 일밖 에 더 있겠어? 고 약은 생쥐 같은 사내가 그 점을 노렸던 것 같애. 그걸 생각하면 약이 오리지만, 빌어먹을! 그는 그렇고, 지금 내 형편이 이렇지 않다면. 여자란 별수없어, 사내 손아귀 속으로 들어가버리면. 다른 때 같 아보아, 내가 가만 있나? 홍성숙 고걸 만천하가 다 알게 난도질을 쳐놓을 텐데 말이야. 하기야 뭐 나 아니라도 일은 터지게 생겼더군. 홍성숙은 물론이지만 욕은 네 남편보다 홍성숙이 남편이 더 먹는갑더라. 쓸개 없는 놈 이니, 병신 같은 놈이니,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냐는 둥, 아 그래 명희야," "..." "넌 아무렇지도 않니? 넌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처지 아니냐? 어째 꿀먹은 벙어리같이 말이 없느냐 말이야. 널 보고 있으면 그림자가 앉아 있는 것 같단 말이야. 그까짓 홍성숙쯤, 그러는 게냐? 자신이 있어 그래?" "희망도 없는데 무슨 자신이 있겠수 참," 명희는 서글프게 웃는다. '그까짓 홍성숙쯤...' 선혜 말을 생각한다. '그까짓 홍성숙쯤,' 홍성숙의 존재가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명희는 경쟁 상대로 혐오감 같은 것은 거의 느끼질 않았다. 홍성 숙이가 조용하의 사랑을 믿는다면 그건 오해일 거라는 생각은 했었다. 만일 오늘날의 남편이 조용하 아닌 조 찬하였었다면, 조찬하였다면, 상대가 어떤 여자이건 그것은 틀림없는 사랑일 거라고, 그런 생각을 문득 하다간 주여, 하며 명희는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고 죄의식에 빠지는 것이었다. 성실한 인간성, 나이가 들어도 이십대 그 시절같이 순정적인 사나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명희가 남편으로부터 받는 고통은 홍성 숙의 문제보다 조찬하의 존재로 인한 고통이 훨씬 컸었다. 오랜 독신 생활을 청산하고 일본 여자와 결혼 한 뒤 조찬하는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서울에 머무는 동안 제반 행사 때면 아내를 동반하고 큰집으로 오는데 그런 기회이야말로 조용하가 가장 환영하는 것이었다. "제수씨는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들뜬 목소리로 찬하의 아내 노리코를 제 옆에 앉히고 찬하와 명희를 나란히 앉히는 것이었다. '자아 어떻습니까? 당신과 나는 공동의 피해자인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노리코에게는 그런 몸짓이요, 명희와 찬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양을 노리는 이리같이 잔인하게 빛나는 것이 었다. 그는 어쩌면 명희와 찬하가 불륜을 저지를 것을 바라고 있었는지 모른다. 형의 눈빛을 비난으로 응수하 는 찬하의 강한 몸짓을 명희는 느낄 수 있었다. "형수씨, 형님 성지이 까다로워서 힘드시지요." 하면, 명희 대신 용하가 "힘드는 것은 시간이야. 그래서 이 사람은 사시사철 머릿속에서 여행하고 방랑하는 게야. 상상에 골몰하면 임 신도 한다지, 아마?" 냉혹하게 내뱉는 것이었다. 노리코는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아이가 없어 그런가 보다, 그러나 찬하는 그 말이 얼마나 지독한 악의 인가를 안다. 물론 명희도. '너희들은 정신적 간음을 하고 있다!' 형의 의도, 남편의 말뜻이 그렇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명희는 그런 말뜻은 남편의 진실이 아닌 것을 안다. 조용하는 결코 명희가 정신적인 간음을 한다고 믿지 않았으니 말이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한둘 더 낳으면 될 거 아닙니까?" 명희를 보고 한 말인데 이번에는 용하가 말했다. "허어, 너의 형수가 잠 못 자겠군." "형수씨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노리코, 고생 좀 해야겠소." 찬하는 한술 더 뜨듯 말했던 것이다. "아이 참 당신도, 그걸 어떻게 마음대로," "책임이 무거워.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니까." 노리코는 얼굴을 붉혔다. 지난 봄 조찬하는 아내와 함께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나올 때는 조선서 뿌리를 박으려고 생각했던 모양인 데 결심을 바꾸고 돌아간 것이다. 찬하의 심정은 아무도 짚어볼 수 없었다. 명희를 잊었는가, 노리코를 사랑하 게 되었는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는 떠날 때 형에게 말하기를 "나는 결국 국적 없는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게 됐군요." "그게 무슨 말이지?" "왜요? 모르셔서 묻는 겁니까? 형님한텐 자손이 없다는 건 다행한 일입니다." "무슨 소릴 하는 게야!" "이상한 아이로 성장할 테니까요. 말하자면 문제아가 될 거란 말이지요. 인간적으로 형수님을 동정합니다. 그 리고 노리코를 사랑하니까 죄 없는 사람 괴롭히지 마십시오. 괴로움을 받는 사람보다 괴로움을 주는 사람이 불행한 것이니까요." "그래?" 했으나 조용하의 얼굴은 일그러졌던 것이다. 난생 처음 조용하는 동생에게 패배감을 느꼈고 압도당하였던 것 이다. 홍성숙과의 밀회도 어쩌면 찬하에 대한 증오와 패배감에 대한 반발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유부녀와 유 부남의 정사는 남의 이목도 두려워하지 않는 난맥 상태였으니 말이다. "서방님." 문밖에서 하인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용하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저기,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예." "어떤 몰상식한 작자가 아침부터 방문이야!" "여학생입니다." "여학생?" "예. 여학생입니다." "여학생이면 방문객 아니란 말이냐? 찾아올 여학생도 없어! 고학생이라면 윤군보고 돈푼이나 주어 쫓아보내라 고 해!" "그게 아니옵고, 저기, 심부름 왔다, 그 그러는뎁쇼. 저기," 무척 거북해하는 하인의 음성이다. "누구 심부름 왔다더냐." "예, 저기 말씀드리기가," 한동안의 침묵이 지난 뒤 "들여보네." 신문을 탁자 위에 놓으며 혀를 찬다. 나갔던 하인이 돌아온다. "저기," "뭐가 저기야!" 보이지 않는 하인에게 주먹질이라도 하듯 조용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예, 저 학생이 안 오겠다고," "뭐?" "별관 아, 앞까지 와, 왔습니다만 드, 들어오지는 않겠다고 고, 고집이 여간 아닙니다." "그럼 관두라 해!" "서, 서방님께 주, 중대한 일이라," 종시 침묵을 지키던 명희가 "나가보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제가 자릴 비울까요." "그런 걱정 말아요." 조용하가 별관을 나섰을 때 거목이 된 오동나무 밑에 양소림이 서 있었다. 양소림은 가운 차림으로 걸어나오 는 조용하를 보자 당황하며 고개를 숙인다. 한편 손은 습관적으로 치마폭을 감추듯, 콧등에는 땀방울이 송글송 글 솟아 있었다. "학생은 누군데 날 만나러 왔지?" "홍성숙 씨 심부름 왔습니다." 누구라는 물음에는 대답 않고 성난 듯 소림이 말했다. 조용하도 짐작은 했던지 놀라는 표정은 아니다. "음 그래서?" "지금 곧, 세검정 그곳으로 오시란 말 전하라 하더군요." "지금 곧?" "중대하고 급한 일이라구요." "알았다. 학생은 누구지?" 다시 묻는다. "조카예요." 눈길을 피한 채 불쾌감을 완연하게 나타내며, 그러나 고개를 한번 숙이고 나서 발기를 돌려놓는다. '조카라? 조카... 으음 진주에 있다는 언니 딸이구먼. 이모보다 월등하구나.' 조용하는 이빨에 이물이라도 낀 것처럼 이빨 사이에다 바람을 넣으면 정원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별관으로 들 어간다. 명희는 난에 물을 주고 있었다. 소팡 걸터앉은 조용하는 명희를 힐끗 쳐다본다. "찾아온 여학생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소?" "누구지요?" "홍성숙이 조카라 하는구먼." "..." "이모보다 월등한 미인이오. 아주 싱싱하든걸." "그 소녀 본 일이 있어요." 명희는 지금부터 전개될 조용하의 작전이 단축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도 동감했겠구려." "예쁘게 생겼더군요." "흥." 담배를 붙여문다. "무슨 일로 왔는지 그건 왜 묻지 않는 게요?" "말씀하실 테니까요." "이혼을 바라는 게요?" "..." "임명희는 무엇 때문에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조용하의 부인을 고수하려 하는지 난 모르겠소." "전 고수하겠다는 말 한 적 없어요." "그랬던가?" "뜻대로 하세요." "무저항주의구먼." "그건 제 자신의 책임일에요." 난에 물을 주고 나서 창가에 머문 채 명희는 대꾸한다. "그건 무슨 뜻이오?" "타고난 성미니까요." "그 말뜻은 따로 있을 듯 싶은데?" 명희는 돌아본다. 그렇다는 대답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네, 그래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조 찬하 그 사람은 아니에요,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여자가 신학문을 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명희의 침묵은 시인하는 것이었다. 조용하는 홍성숙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보다 명희와의 대화를 그 정도로 해 두고 싶은 눈치였다. 옷을 갈아입고 그는 집을 나섰다. 홍성숙과 두 번 밀회한 일이 있는 세검정 별장까지 가 조용하는 자동차를 돌려보내지 않고 기다리라 이른 뒤 별장 안으로 들어간다. 별장지기는 상전 쳐다보기가 민 망하였던지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네놈이 상전을 어줍잖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냉소를 이마빡에 쏘아붙이며 지나간다. 방으로 들어갔을 때 홍성숙은 긴장된 얼굴을 쳐들었다. "약속한 날까지 닷새나 있는데 왜들 이 야단이오?" 무슨 일이 필시 있으리란 생각을 하면서 조용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으흣," 홍성숙은 울음 먼저 터뜨린다. "으흐흐흣... 제가 오죽했으면 소림이 앞에서 손까지 비벼가며, 죽어도 안 가려는 애를 으흣흣흣... 으흣... 흣, 그애를 그곳까지 보냈을까요. 호, 혼자 힘으론 감당할 수 없었단 말예요." "..."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나 하세요? 이젠 파멸이에요." 조용하는 담배를 붙여물고 방바닥에 성녕갑에 던진다. "왜 아무 말씀 안 하시는 거예요?" "글세." "글쎄라니요?" "우리에게 이제 종말이 온 것 같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악을 쓴다. "파멸이라 하지 않았소, 방금?" 담배 연기를 뿜어낸다. 성숙은 입술을 깨물고 눈무를 흘리며 "남은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데 어쩜 그렇게 태평하세요." "그럼 우리 함께 죽기로 할까?" 처음으로 다정스런 목소리로 여자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준다. "그런 농담이나 하고 있을 때 아니에요." "남편한테 혼이 났군. 매라도 맞았소?" "모욕적인 말씀 삼가세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매를 맞다니요?" 화를 내면서도 성숙은 정답게 몸을 기대어온다. "하긴 그 사내, 신사라는 말은 들었지, 동서고금을 통해 사랑이란 괴로운 거 아니겠소? 자아, 울지 말고 얘기 해요." 그러나 조용하의 말은 어설펐고 여자 어깨 너머, 드리워진 발을 뚫고 가는 시선은 차가웠다. "차라리 그 사람하고의 일이라면 해결이 쉬웠을 거예요. 실은 시, 신문에 나갈 모양이에요. 우, 우리들 일이." "신문에?" "성악가 아무개하고 어쩌고, 우리들 관계가 만천하에... 어떡허면 좋지요? 난, 어떻게 되는 거지요? 으흐흣흣," 순간 조용하의 낯빛이 변했다. "어떻게 되긴? 보다 더 유명해지겠구먼." 여자를 떠밀어내고 담배를 피운다. 성숙은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여유만만이군요." "안 그럴 까닭이 뭐 있겠소." "막을 자신 있으세요?" 성숙의 눈에 생기가 돈다. "막는 거야 당자가 할 일 아니겠소?" 냉정하게 내뱉으며 담배를 눌러끈다. 성숙은 순간 당황하다가 "저는 각오가 돼 있어요. 이혼할 각오가 돼 있단 말예요." '이 계집이 무슨 소릴 하는 게야?' 조용하는 여자의 접근을 막듯 담배를 꺼내 붙여문다. "이혼하는 혼자서 하는 거요?" 조용하 심중에 불안을 느낀 성숙은 "그렇게 냉정하게 말씀하시는 것 아니에요. 선생님도 아시는 바와 같이 그 사람 신사예요. 예술가의 입장도 이 해하구요. 아직까지는, 여성이 가정 밖에서 활동하면 오해받는 일이 많고 구설에도 오를 수 있다 하며 오히려 저를 위로해주는 형편이거든요." "그거 다행이오. 그럴 때 홍성숙 씨 표정은 어떠했을까?" 낄낄낄 웃는다. 성숙은 얼굴이 빨개진다. "제발, 제발 좀 그러시지 말구 진지하게 제 말 들어주세요. 어젯밤엔 한잠도 못 잤어요. 날 새기를 얼마나 기 다렸는지 몰라요. 오죽하면 조카애를, 이모의 위신 따위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어요 아무튼 밤새도록 생각하여 얻은 결론은 이혼을 하면 된다 그거예요. 아무튼 이혼은 혼자서 하는 거냐 하셨지만 그인 응할 거예요. 법률에 호소하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음 어떻게 되지? 파멸을 구하는 게 이혼이다. 그 말이오?" "자유의 몸이 되는 거예요." "자유?" "그것도 되도록이면 빠르게요." "그러고 보니 나도 상당히 구식 사내로군. 여자의 파멸은 이혼하는 그 자체로 알고 있었는데 이혼이 파멸을 구한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홍성숙 씨?" 홍성숙 씨, 그 호칭에는 먼지를 털어내는 것 같은 혐오가 있었다. 성숙은 머쓱해진다. 그러나 결코 불리한 방 향으로 생각하려 하지는 않는다. 뭉게뭉게 피는 불안을 두고. "외국에선 얼마든지 이혼하고 재혼하는 사례가 있지 않나요? 유명한 사람치고, 우린 평범한 사람들 아니에요. 낡은 인습에 얽매여 살아서는 안 된고 사실 애정 없는 부부 생활이란 죄악이니까요." 조용하는 아까처럼 낄낄낄 웃는다. "파멸을 막기 위해 이혼하는 것도 좋고 자유의 몸이 되는 것도 좋고 재혼하는 것도 하기는 나쁠 것 없지요." "설사 신문에 대서특필한다 하더라도 그건 시일이 지나면... 그 동안은 괴로울 거예요. 하지만 무대에 다시 서 지 말란 법 있어요? 선생님 후원이 있고 따뜻한 이해, 사랑만 있다면 전 언제든지 재기 할 수 있을 거예요." '이건 완전히 바보다. 제 마음만 결정되면 다 되는 겐가? 성악가, 그걸 여의봉으로 아는 모양이지만 어디 혼 좀 나봐라.' "그렇지요? 선생님, 안 그래요?" "하하핫 하하핫핫, 그거 어려운 일 아니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또 이혼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그런 농담하실 때가 아니란 말이에요! 남은 속상해서 죽겠는데," 몸을 던지려 하는데 한 손으로 막은 조용하. "내가 농담하고 있는 것 같소?" 갑자기 얼굴은 무섭게 변했다. "홍성숙 씨," "말씀하세요." 했으나 성숙의 얼굴빛도 달라졌다. "만일 재혼의 상대자를 조용하, 이 나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오." "네?" "새삼스럽게, 놀라기는 왜 놀라는 게요? 분명히 나는 당신한테 결혼 약속 같은 것 한 일 없어." "뭐, 뭐라 하시는 거예요!" "당신 선배하고의 이혼을 생각한 일이 없었고 이혼하지도 않을 게요." "그, 그렇다면!" "...." "이, 이 사태 수, 수습은," 입술이 새하얗게 된다. "수습하는 길은 한 가지뿐이오." "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부정하시오.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시오." "부,부정," 숨이 차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부정하라구요?" "그렇소. 소문만 가지고는 얘기가 안돼." "그, 그럴 수가, 안 하겠다면?" "당신은 영리한 여자니까 그럴 수 있을 게요. 나하고의 문제만은 크게 오산을 한 모양인데," "그래요? 오산을 해요? 오산을 저만 했나요? 조용하 씨 불편이 없게 그, 그렇게 시키는 대로 부정이나 할 그 런 여자로 아셨나요? 그야말로 오산이군요." 드디어 홍성숙은 입술을 실룩거리며 역습으로 나왔다. 그 얼굴은 보기 민망했다. "그런 여자 아닌 줄 대강 짐작은 했으나 그러나 승산이 있어야 덤빌 것 아니겠소?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 면?" "저만 잃게 되나요? 피장파장 마찬가지 아닐까요?" "나는 무대에 서는 가수가 아니오. 당신은 남녀평등을 표방하는 모양이지만 남자가 바람피우는 것 그게 뭐 대 단한가. 조강지처를 거금을 주어 이혼하고서 중인집 딸을 모셔온 내 전력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달콤한 꿈을 꾼 모양인데. 아니면 미인계라는 것이 있다더군. 사내를 협박하여 끝없이 돈을 뜯어내는 사기단도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명예와 재물이 있고 보니, 하하핫핫 하하핫... 남의 이목 생각할 양이면 애초 조강지처를 쫓아냈 을까. 하하핫..." "이 악마!" "당신은 악마를 상대할 요녀도 못 되니 불행한 일이구려. 하하핫..." "나, 나, 파멸을 각오할 거예요! 그리고 조용하를 망쳐놓을 테에요!" "뜻대로 하시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매력 없는 일편단심, 사랑을 위한 순교자, 그것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아 시오. 홍성숙 씨는 그러니까 행복한 여자도 불행한 여자도 아니라는 뜻이지요. 마지막으로 후원하는 뜻에서 기 부금이란 명목이라면 만족할 만한 금액을 내놓겠소. 옛날 양반은 약탈만 했다지만 오늘날 귀족은 베푸는 거 요." 조용하는 일어섰다. "이대로는 못 가요!" 성숙은 발딱 일어서며 두 팔을 벌린다. "요망스럽게, 뉘 앞에서," 떠밀어내고 방을 나섰다. 홍성숙의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조용하는 침을 뱉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끝내 그 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러나 침착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기분이 좋을 건 없었다. 묘하게 외로움 같은 것 이 엄습해오는 것이었다. 솔나무에 덮힌 산허리, 그 위에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멀고 먼 곳에 있는 여 자 마음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홍성숙이 그리 쉽게 본심을 노골적으로 내보이지 않고 비에 젖는 갈대같이 울 고 있었다 하더라도 조용하는 틀림없이 짜증을 냈을 것이요 헤어질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놈은 어쨌든 행복한 놈이다. 그놈은 늘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왜 나는 이렇게 메마른 인간일까.' 동생 찬하를 두고 조용하는 쓰디쓴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항상 장자로서 우선이요 이겨야만 했으나 기실 양 보하고 져야만 했던 찬하 쪽이 승자 아니었던가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충족된 일이 없었던 이상, 조용하는 차 디찬 이성으로 이유 모를 결핍감을 감내해왔었는지 모른다. "회사로 가게." 자동차에 몸을 싣고 우울하게 뇌었다. 회사로 나온 조용하는 책상 위에 놓인 봉투를 집어든다. 조용하라는 이름자와 마찬가지로 듬뿍 찍힌 먹글씨, 임명빈의 이름이 씌어져 있었다. "윤군," "네, 사장님." 얼굴이 기다란 사내가 얼굴을 내민다. "이거 언제 왔나." 봉투를 가리킨다. "조금 전에 임교장께서 기다리시다가 두고 가셨습니다." "알았다." 사내가 나가버린 뒤 내용을 꺼내어 본다. 사직원이었다. 일신상 사정으로 사임하겠다는 것이다. "무슨 뚱땅지 같은 소린고?" 혀를 차며 꾸겨 휴지통에 집어던진다. 회전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창문과 마주보고 앉으며 담배를 붙여문다. '임명빈 씨가 소위, 자유... 명희의 자유를 위해, 길을 터놓는 뜻으로 이 따위 짓을 한 걸까?' 13장 편지 "아이고 작은아씨 어쩐 일이세요?" 올케가 반색을 한다. 명희는 "오라버니 계세요?" "예." 하는데 올케 백씨 얼굴에 심약한 표정이 지나간다. "사랑에 계세요?" "예.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오라버니 뵙고 들어가겠어요." 백씨는 마당에 엉거주춤 섰고 명희는 사랑을 돌아가는데 두 여자는 동시에 '언니도 많이 늙으셨어.' '그 곱던 얼굴이, 수심이 가득 차서,' 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것이다. "네가 올 줄 알았다." 들어서는 명희를 힐끗 올려다보며 임명빈은 말했다. 명희는 자리에 앉으며 "저하고 한마디 의논도 없이 왜 그러셨어요?" "그 일이라면 더 말하고 싶지 않다." 손을 내저으며 물러나 앉는 시늉을 한다. "하지만 왜 그러셨는지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이유가 뭐 새삼스런 거냐?"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 원체 무능력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겠나." 하고 임명빈이 멋쩍은 웃는다. 명희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저 땜에 그러시지 않았어요?" "이유야 어디 한두 가지냐?" 쓰거운 표정인데 명희 눈길에서 허둥지둥 달아난다. "한마디로 내가 못난 탓으로... 고용된 교장으로 소신껏 뭘 했겠나. 하기는 못난 덕분에 오랫동안 뭉개고 있었 지만," "소신껏 못하실 것도 없었지요. 공연히 자격지심에서 오라버니는 그러셨던 거예요." "..." "아무 말씀 마시고 없었던 일로 돌리십시오. 그이도 그러시길 희망하고있습니다." "그이? 헛," 헛웃음을 웃다가 명빈은 무엇을 찾는 것처럼 방바닥을 더듬었다. "언니랑 아이들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더 이상 설득해볼 의사도 없으면서 명희는 물었다. 실은 친정으로 올 때부터 명희는 설득한다 하여 굽힐 오라 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만했으면 긴 세월을 잘 견디었다는 생각도 했었던 것이다. 조용하가 뭐 래서도 아니요 사돈댁에서 이러쿵 저러쿵 해서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뜻에서 사돈은 아니었다. 마음 바닥에서 뿜어내는 찬바람, 그것은 신분에서 오는 장벽이요 조씨 가문의 얼음장 같은 기질은 무언의 모멸로써 임명빈은 가슴을 찔러왔던 것이다. 물론 임명빈은 의식에 궁하여 그 교장 자리를 지켜왔던 것은 아니다. 3.1만 세로 말미암아 임역관이 사망하고 임명빈이 옥고를 치르는 동안 쑥밭이 된 집에 세정 모르는 여자들만 남았으 니 최서희의 도움을 아니 받을 수 없었지만 임명빈이 출옥한 후 가산 정리를 한 결과 의식 문제, 자식들 학자, 그런 것에 궁색할 정도는 아니었다. "생각해보았지. 별로 걱정할 것 없더군. 몸만 건강하면," "저 알아요." "뭘." "그 동안 그만두지 않으셨던 것도 저 때문이었고 이번에 사표 내신 것도 저 때문이라는 것 알아요." 연분홍빛 은조사 깨끼적삼 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명희는 눈물을 닦는다. 명빈은 누이와 함께 울먹일 듯하다가 "그때는 할 만한 일이 없어서... 이번에는 그만두어도 밥은 먹을 만하니까, 이제 더 이상 그 일은 거론하지 말 기로 하자." "저 때문이라면 그러실 필요는 없었는데," "하, 하기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지." 혼잣말처럼 뇌이는데 명빈의 눈에는 회환이 가득 실린다. "모두 내 잘못이다. 남자가 바람 피우기 예사라지만, 바람 정돈가? 피를 말리는 그자 성품을 내가 모를까? 그 쪽에서 이혼을 요구할지 모르겠다만 지금 내 심정으로는 너를 데려오고 싶다." 명희는 희미하게 웃는다. "오라버니가 그런 생각 하실 줄 알았어요. 그렇지만 이상해요." "뭐가," "이혼하겠다 안 하겠다, 이혼당할 건가 안 당할 건가 그런 생각 해본 일이 없으니 말예요." 명빈은 외면을 한다. 명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가 공부 같은 것 하지 않고 무식한 아낙이었다면, 남편 성미가 까다롭다, 세 끼 밥 챙기고 빨래하고... 오만 한 얘긴지 모르지만 그런 아낙들의 체념과 비슷한 것 아닐까 하구요." 명희는 자신 속에 어딘가 있을 생각을 찾아내듯 어물적거리며 말했다. "생각을 묻어버린 뒤의 억지 생각이겠지." 하다 말고 명빈은 스스로 놀란다. 얼른 화제를 바꾼다. "하여간에 어중간한 고개에서 너나 내가 이 무슨 꼴이냐? 아버님 뵐 낯이 없고 모두가 다 어리석은 내 잘못 아니겠나." "그런 말씀을 왜 하세요? 저는 익숙해져 있는데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오히려 저 땜에 오라버니가 당하신다. 잘잘못을 따진다면 잘못은 저한테 있을 거예요." 눈살을 찌푸린다. 명희는 좀 여위었다. 젊음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나이가 가지는 아름다움은 지니고 있었다. 연분홍 깨끼적삼에 검정 숙고사 치마를 입은 모습은 역시 청초했다. 하얀 손, 갸름한 손가락, 무명지의 초록색 쌍가락지도 아름다웠다. 일상의 균형을 변함 없이 유지하고 있다. '바로 저것이 병인이다.' 명빈은 눈앞에서 누이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십 년 가까운 세월, 명희가 조병모 남작댁에 출가하고 자신은 그들이 설립한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그때부터 명희와 자신은 일종의 박제된 인 간으로 존재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친다. 앙혼이 빚는 관습적인 알력이나 갈등과는 차원이 다른 것,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었던,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숨막힐 것만 같았던 세월 을 임명빈은 새삼스럽게 통감한다. 행위의 언어도 흔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매부이면서 매부가 아니요 사 돈이면서 사돈이 아니었다. 비인간적인 권위 의식이 다른 양반님네보다 훨씬 세련되었고 고차원적이라는 느낌 뿐이었다. 결코 임명빈은 자유 분방한 사내는 아니다. 자존심이 하늘 높게 솟은 사내도 아니었다. 그러나 비굴 한 사내는 아니었다. 비굴하지 않는 사내가 비굴하게 살았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명희에게 아이라도 있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러나 명빈은 아이가 태어났다 해서 조용하나 그 집 자체의 세련되고 고차원의 권위 의식, 비인간적인 권위 의식과 기질적인 것에 변화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무식한 아낙들의 체념과 같은 것이라구? 아니다. 코흘리개 아이를 안고 있다면, 살림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 다면, 저기 저렇게 유연한 자세로 앉아 있는 귀부인보다는 나았을 게야. 와글바글 살아있는 소리들이 들렸을 게야.' 홍성숙과 조용하에 관한 추문은 상당히 넓게 퍼져 있었다. 임명빈도 그 일에 관해서는 알고 있다. 마누라는 근 심했으나 임명빈의 심정은 근심이 아니었고 다만 착찹했다. 남들은 마치 행복하기 이를 데 없는 명희의 둥우 리가 태풍을 앞두고 있는 듯 그렇게들 수군거렸다. 명희가 추락할 것인가 태풍은 그냥 지나갈 것인가 호기심 에 가득 차서 떠도는 소문에 귀들을 기울이고 있었다. 홍성숙과 임명희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품평에 열을 올 리는가 하면 서로의 지체를 들고 나왔고 그럴 때 홍성숙의 남편은 잊혀진 존재였다. 어째 그리 요란했을까. 유 명한 사람이라서? 미인이기 때문에? 성악가? 그러나 그런 모든 것보다 조용하는 조선의 희귀한 귀족이요 조 선에서는 대실업가, 비중은 거기 있었다. 임명희는 신데렐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며칠 새 소문의 방향에 변화가 왔다. 명희의 위치는 반석 같다는 둥 홍성숙이 발밑에나 가겠느냐 하는가 하면 홍성숙이 성악가로서 자질을 뻗치기 위해 조용하에게 추파를 던졌으나 막상 잡으려 했을 때 달아났으니, 그들 부부의 금슬에 금 갈 짓은 아니 했으니, 어쨌거나 그것은 모두 피상적인 데 불과했다. 명희가 뼈에 사무치게 고통스러울 때 그들은 명희만큼 행복한 여자는 없다고들 생각했고 그들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명희를 상상했을 때 명희의 마 음은 명경지수였다는 것, 그러하기 때문에 너도나도 대부분의 인간들은 고독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인지 모 른다. 명희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명빈의 경우도 비슷했다. 누이동생 덕분에 행운을 잡은 사내, 중학교 교장직 은 아무데나 굴러 있는 건가? 그것도 재단이 튼튼한 학교고 보면 행운이 아니라 할 수 엇다. 대우받을 만한 자리, 존경받는 것은 당연한데, 뿐인가 조병모 남작의 사돈이면 그것만으로도 행세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 는 교장 아닐 때보다 자신이 비천하고 작아져간다고만 생각했다. 타협하고 비굴하게 안주한 자리였으니 말이 다. 가족에 대한 애정을 부인할 수 없고 자기 자신의 능력과 그 한계를 자인했기 때문에 택하였다 한다면 임 명빈에게는 구실이 될지 모른다. 변명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라면 치욕감이 그렇게 끈덕지게 따라다니지는 않았 을 것이다. 주변에서 부산스러웠던 친구들, 후배들, 그들이 대개 망명하거나 도피하거나 철창 신세가 됐을 시 절, 홀로 교육자라는 방패 뒤에서 그것도 침략자의 두호를 받는 계층이 설립한 학교에서 풍설을 피하며 있었 다는 치욕감과 소외된 것만 같은 외로움, 민족의식이나 반일사상이 잠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행동이 없 는 생각뿐이었고 젊은 날의 꿈과 이상을 외면한 채, 그것은 또 조로를 재촉한 것이기도 했으며 만주 중국 땅 을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방랑한다던 이상현의 소식을 열등감 없이 들을 수 없었던 임명빈이었다. 그래도 상 현이 그놈은 나보담 낫다, 무기력한 이 늪 속보다 자학의 아픔으로 아프다는 그 자체가 생동의 증거가 아니냐, 명빈은 마음속으로 그런 말을 수없이 뇌었다. 아니나다를까 상현으로부터 편지와 원고 뭉치를 받은 것이다. 십 여 일 전의 일이었다. 명빈이 교장직을 때려치운 것은 어쩌면 직접적 동기가 상현의 원고 뭉치에 있었는지 모 른다. 명빈은 명희와 마주앉았으면서도 아직 그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다. 편지는 두 통이었다. 한 통의 수취인은 임 명희다. "며칠 동안 생각해보았는데," 명빈은 끊어진 얘기를 이었다. "변두리로 나가서 기와 공장이나 차리면 어떨까 하고," "기와 공장이라구요?" "음. 학부형한테 얘길 들었지. 자본도 적게 들고 일도 복잡하지 않으니까, 괜찮을 거라 하더군." "기와 공장이 없을라구요? 많이 있을 텐데 경험이 없는 오라버니가 어떻게 하실려고 그러세요?" "조선 기와말구 양기완데, 뭐 작정한 건 아니다.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란 얘기지." "글쎄요. 경험이 많은 사람하고 함께 하신다면," "황태수도 있고 월급 자리라면... 새활 문제보다 일을 놔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남의 밑에 가시는 건 반대예요. 오라버니 연세가 몇인데 그러세요?" "오십이 될려면 아직 멀었어. 그놈의 교장질 하는 바람에 늙은이 취급 받은 게야." 오누이는 기쁠 것도 없는데 웃었다. "지겨운 세월이 왜 날아가는 것만 같을까요? 모순이지요?" "왜 아니냐." "서참봉댁은 요즘 어찌 지내시는지요." "둘째가 이럭저럭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황태수도 도와주고," "은행에 그냥 다니나요?" "동생?" "네." "아니지이. 황태수 회사로 옮겼다." "고맙네요." "의돈이 그자가 아무리 지랄 발광이 나도 황태수를 괄시하진 못할걸. 친척들도 외면하는 마당에서," "본시 가까웠지요?" "마음속으론 가까웠지. 친구란 그런 거 아닐까? 나야 뭐 일 터져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지만 별 수 있나? 어릿광대," 하다 말고 쓰디쓴 웃음을 띤다. "며칠 동안 생각을 해보았는데," "기와 공장 얘기예요?" "아, 아니다. 저어," "거북한 말씀이세요?" "거, 거북한 말이다." "오라버니 얘긴가요?" 고개를 저었다. "저에 관한 얘기라면 말씀 마세요." "그, 글쎄 그걸 안 할 수도 없고 며칠을 두고 생각해보는 일인데," 그쯤 운을 뗀 임명빈은 갑자기 당황한다. 그리고 훌쩍 일어서서 마루로 나간다. "여기 뭐 마실 거라도 좀 갖다주시오!" 안을 향해 악을 쓰듯 소리를 지른다. "오래 있는 기색이면 뭐 마실 거라도 가져와야지 맹해가지고 왜들 그 모양이야." 중얼중얼 중얼거리며 발을 걷고 방으로 돌아온다. 모시 고의적삼이 설렁해 보이고 곱슬머리 두상은 큰데 설렁 한 모시옷처럼 명빈은 계절의 마지막 사람처럼 초라하게 느껴진다. "후우-" 한숨을 내쉰다. "명희야." "네." "실은 상현이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네?" 명희의 표정이 달라진다. "아직 내가 보관하고 있다." "..." "너한테 주어야 하는지... 네가 달라 하면 주지." "오라버니한테 온 편진가요?" "나한테도 왔고," "내용을 보셨나요?" "아니." 명희는 발 너머, 사랑 마당을 바라본다. "제가 그 편지 본다고 해서 뭐가 어찌 달라지겠어요? 달라졌을 것 같으면 옛날에 달라졌겠지요 그분 역시," "..." "오라버니한테 온 편지는, 인사 편지였어요?" "인사 편지는 아니었고 부탁을 해왔더군." "부탁이라면?" 천천히 얼굴을 돌려 임명빈의 얼굴을 바라본다. 실제 그랬었는지 명빈의 눈에 비친 누이의 얼굴은 갑자기 늙 어버린 것같이 보여지는 것이었다. 힘에 겨운 권태가 그 양 어깨에 실린 것같이 보였다. 붕괴되는 찰나, 이미 명희에게는 새로이 생성될 세포 하나 남아 있지 않는 듯 느껴지는 것이었다. "원고를 부쳐왔어. 아무데나 잡지에 주선해달라고," "소설을 썼군요." "음." "읽어보셨어요?" "좋더군." "성공하셨네요." 명희는 기운 없이 웃었다. "그런데 내가 이 말을 너에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정이 있긴있어." 애써 누이를 보지 않고 말한다. "고료를 받으면 너에게 전달하라는 편지 내용이었어." "고료를 저에게 전달하라구요? 왜, 왜요?" "그 이유는, 아마 너에게 쓴 편지 속에 있을 것 같다." "이상하군요." 그 말까지는 평정했다. 지극히 평정했다. 그런데 별안간 명희는 울기 시작한 것이다. 눈물만 흘리는 게 아니었 다. 소리를 깨물어가며 두 손에 얼굴을 받쳐 들고 우는 것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눈물 방울이 무릎에 떨어진 다. 명빈은 숨이 막히는 것 같다. 철늦은 부채를 들고 부치다 말고 그만둔다. "그쳐!" "오라버니," "그치라니까." "그분하고 저 사이엔 배신도 신의도 없었어요. 한데 뭣 땜에 편지를 보냈지요?" "울음을 그쳐. 편지는 주랴?" "오라버니가 읽어주세요." "내가? 그럴 수 있나?" "아무 비밀 없어요." 눈물을 닦는다. "줄 테니 네가 읽는 게 좋겠다." "아니에요, 읽으세요." 투정을 부리듯 하던 명희는 편지를 서랍 속에서 꺼내자 "인 주세요. 생각해보구요, 버리든지 읽든지." 받아서 한곁에 놔둔 비즈백 속에 집어넣는다. 넣으면서 "집에 있는 양반, 이혼 안 해줄 거예요." 뜻밖의 말을 한다. "뭐라구?" "지금 생각해본 거예요. 그걸 생각하니까 울음이 터지네요." "..." "이쪽에서 할려면 더욱, 놓아주질 않을 거예요." 옷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는다. "거머리 같은 놈이다!" 사무쳐서 힘껏 하는 욕설이다. 이때 "작은아씨." 백씨가 마루 끝에 와서 불렀다. "네, 언니." "여기 손님이 오셨어요." "저한테요." "오빠한테 오신 손님인데 작은아씨 제자라고, 어서 들어가세요." 백씨가 권한다.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아니, 인실이 아니냐? 네가 웬일로?" 놀란다. "교장선생님 뵈러 왔는데 마침,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인실은 임명빈을 향해 공손히 인사한다. "앉어." 명빈이 앉기를 권한다. "네."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침착하게 무릎을 끓고 앉는다. "오빠는 별고 없으시지?" 임명빈이 묻는다. "네." "모두들 고생했는데 몸이나 건강해야지." 인실이는 명희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우셨구나. 내가 잘못 온 것 같네.' 그러나 자연스럽게 "선생님 한번 뵙고 싶어도, 너무 문턱이 높은 것 같아서 망설여졌습니다." 하고 미소한다. 명희도 웃는다. "그보다 처녀가 안 갈 곳에 갔다왔으니 어떡하지?" "선생님도 가보시고서 그러세요?" "아아 참, 그랬었지. 그때는 도매금으로 넘어간 거구. 얼마나 욕을 봤니?" "저희들이야 뭐, 남아 계시는 선생님들 고생이 많으시지요." "죽일놈들, 나는 욕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지만." 명희는 자신의 눈이 새빨갛게 부풀어 있는 데 대해선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조선 사람이면 욕할 자격은 다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암, 그렇지." 명빈이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선생님이 그렇게 결혼하신 것만은 의외였습니다." "투신 자살한 셈 치려므나." 명랑하고 밝은 음성으로 농친다. 위태스러운 것이었지만. 계집아이가 비로소 모과차 석 잔을 날라왔다. "들어." 명빈이 권한다. "들겠습니다." 명희가 찻잔을 드는 것을 본 뒤 인실은 예의바르게 말하고 차를 한모금 마신다. "학교 다닐 때부터, 오라버니, 이애가 보통 아니었어요." 일러바치듯 말했고 명빈은 "보통 아닐 정도가 아니지. 그야말로 투산데." "아니 선생님도." 인실이 얼굴을 약간 붉힌다. "얼굴 생긴 것 보세요. 그래 집에서는 걱정 많이 하시지?" "오빠가 안 계셨음 쫒겨났을 거예요." "오빠야 동진데 상부상조 안 할 수 없지."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인실이 "저 얼마 전 진주 다녀왔습니다." "진주는 왜?" 명희가 묻는다. "남선 일대를 바람 쏘일 겸 다녀왔습니다. 전도부인 언닐 따라서요. 그 언니랑 헤어진 뒤 진주에 갔었습니다. 김선생님댁에," "김선생님댁이라면?" "저기 최참판댁 말예요." "아아." "아직 형무소에 계시고 해서 얼마나 가족이 상심하고 계실까, 뭐 위로가 되지도 않을 테지만 그냥 지나올 수 가 없었습니다." "하마 서울 올라오실 때가 됐는데." 명빈의 말에 "곧 올라오실 모양이예요. 함께 가자 하셨지만 그 부인께서는 맹장염 수술을 하시고 정양중이더군요." "맹장염 수술을!" "네. 그것도 지난달 서울서 내려가실 때 부산서 발병하여," "경과는 어때?" 명희가 서둘며 묻는다. "좋으시다 하시더군요." "다행이군." "심약한 환국이가 혼났겠군." 임명빈이 눈살을 찌푸린다. "심약하질 않아 보이던데요, 교장선생님?" "심지야 굳지." "그 댁은 모두 미남 미녀, 놀랬습니다." 인실이 킥 하고 웃는다. "아 인실이 미녀 아닌가?" 명빈도 슬그머니 웃는다. 나잇살이나 먹은 처지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근엄한 교장선생님이던 명빈으로선, 누 이는 그렇다 치고 나이 젊은 인실을 대하고 있기가, 어색하다. "공판 받으면서 김선생님도 몇 번 뵜지만 참 잘 어울리는 내외분인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투사라도 필경 여자는 여자로구나." "오라버니도 참, 남자들고 그런 말 하든걸요?" "남자 나름이지. 여자들이야 거의가, 인실이 같은 처녀애도 이러지 않나?" 인실과 명희는 함께 웃는다. "저는 집안에서 여자답질 못하다고 하도 꾸중을 하셔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 "그래? 그는 그렇고 무슨 할말이 있어서 온 것 같은데," "네. 부탁 좀 드리려구요." "명희선생은 비밀을 누설할 염려가 있으니까 내쫒을까?" 명빈이 농담 비슷하게 말했다. 명희 심정을 생각하여 안으로 들여보낼 심산이었던 것이다. "아니에요 선생님. 애제자를 위해서 도와주실 것 같은데요?" "그런가?" "인실이 너 말재간이 여간 아니구나. 언제 그렇게 어른이 됐니?" "선생님 저 이제 노처녀예요. 선생님들은, 대개 모든 분들이 엣날 생각만 하시는 것 같아요." "하긴 그래. 나도 이제 중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인실인 당당한 성인이지. 그럼 말해보아. 내가 도와줄게. 무슨 얘기지?" 순간 인실 얼굴에 긴장이 나타났다. 건중건중 말하고 싶어서 인실이 그랬던 것은 아닌 성싶다. 운 자국이 역력 한 명희 얼굴 때문에 의식적으로 화제를 가볍게 이어온 눈치다. 여자 대학을 이미 졸업했고 나이도 많았지만 그간의 풍파가 그로 하여금 한층 성숙한 여자로, 사려 깊은 여자로 성장케 한 것인가. '이애를 예뻐했을 때 그때 내 나이는 지금 인실이보다 어렸을 거야. 나는 그 무렵 형편없는 정신 연령이었다. 인실인 당당하구나. 정말 당당해. 눈빛이 살아있다, 살아 있다는 것 이상 소중한 것은 없다.' "인실아." "네." "어려운 청이냐?"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실은 교장선생님께 취직을 부탁하러 왔습니다." 또박또박 사무적으로 말한다. "취직? 어디에?" "학교에, 안 될까요?" "내가 있던 곳은 중학교, 그걸 몰랐었나?" "압니다. 같은 재단의 여학교가 있다는 말 들었습니다." "그, 그건 여학교가 아니고 수예 학교인데 일본 여자 대학 나와서, 그런 학교에 가겠나?" "교장선생님, 제가 전과자라는 걸 모르십니까?" "집행유옌데 뭐." "저는 오히려," "허허어, 그나마 학생들이 모이질 않아서 주간은 폐지할 모양이고 결국 야간 학교로 남게 될 텐데 그래도 하 겠나?" "하겠습니다." "월급은 쥐꼬리만하고." "그래도 할 수 없지요." "인실이 집 형편은 어렵잖을 텐데?" "너무 염치가 없어서," "그렇다면, 허 참 일이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저 같은 선생은 안 쓰게 돼 있습니까?" "쓰고 안 쓰고 나는 이제 교장이 아닌데," "아니," "그만두었다. 명희선생보고 졸라보아." 세 사람은 함께 웃는다. 아무튼 이렇게 돼서 인실의 일은 명희가 떠맡게 되었다. 그런 정도의 일이라면 조용하에게 말할 필요도 없고 집사를 시키면 될 일이다. 다만 이상한 것은 인실이 하필이면 그런 학교에 가려하는지,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 도 좋았다. 명희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인실의 사정이 궁금할 뿐 학교나 재단 쪽에 끼칠 결과에 대하여 터럭만큼의 관심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처지가 다르고 오랫동안 만난 일이 없어서 서로 대하기가 꺼끄러웠으 나 사제지간이라는 특수한 감정은 아무래도 서로를 아끼게 되는 모양이다. 인실과 함께 친정에서 나온 명희는 아쉬워하는 듯 할말이 남아있는 듯 그런 표정인 인실에게 서둘 듯 작별하 고 집으로 돌아온다. 별관 앞까지 왔을 때, 따라오는 하인을 손짓하여 가라 하고 명희는 도어를 민다. 손잡이 의 싸늘한 감촉과 형태가 뇌수를 꿰뚫는 전기처럼 감각된다. 소파에 가서 두 다리를 모으고 앉는다. 방금 걸어 온 곳은 땅 아닌 허공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인실의 살아 있는 눈동자며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것 같은 표정 으로 어색하게 웃고 얘기하던 오라비의 얼굴도 줄 끊어진 연과 같이 멀리 멀리 날아가버리는 것만 같다. 명희 는 마룻바닥을 한번 굴러본다. 이상현의 편지가 손 끝에 느껴진다. 도어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처럼 날카롭고 아픈 것이 전신을 꿰뚫으며 지나간다. 그러나 명희는 비즈백 속에 든 편지를 꺼내 들지 못한다. "이제 곧 가을이 올 거야." 중얼거린다. "왜 그렇게 오빠는 초라하게 보였을까, 기와 공장은 잘 생각하신 일인지 모르겠다." 끊어진 연줄을 찾아 끌어당기듯 명희는 중얼거린다. 일어서서 창가로 간다. '돌개바람아! 불어라! 내 형체가 바스라지고 없어질 때까지 불어!' 외친다. '누가 나를 묶었나, 내가 나를 묶었지! 풀어라! 풀어버리는 거야!' 아우성이다. 부서지는 파도다. 격렬한 감정이 출구를 찾듯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상현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 다. 조용하에 대한 증오도 아니었다. 자신의 생명, 생명의 불꽃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기나긴 숨결, 부패의 늪에서 몸을 일으키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사는 게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중독이야. 이 집안에는 사방이 독버섯이다!' 출구를 찾는 격렬한 감정의 아우성은 그러나 분출되지 못하고 명희 입에선 "오빠, 잘 생각하셨어요. 기와 공장, 그거 썩 잘 생각하신 일이에요." 그런 말이 나왔다. 되돌아와 소파에 앉은 명희는 편지를 꺼낸다. 서슴지 않고 봉투를 찢는다. '명희씨 보십시오,' 그 글자에 머물러 있던 눈이 다음으로 옮겨간다. 나는 이 일을 누구에겐가, 특히 명희씨에게 밝혀두지 않고는 소설을 쓸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나도 그 이유를 뚜렷이는 알지 못하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사랑이 있는 것 같소. 사실 여러 가지 사랑이 있소. 남 녀간의 사랑, 육친에 대한 사랑, 우정,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 여러 가지 성질의 사랑이 있소이다. 불타는 사랑, 연민도 사랑일 것이며 때론 미움이 사랑일 수도 있을 것이오. 지금까지 내 몸속에 우글거리던, 중요하지 않았 던 것을 모조리 쫒아내고 생각한 것은 그 중요하지 않은 것에 우리가 얼마나 얽매여 살아왔던가 그 일이었소. 얽매여 살아왔다, 하면은 사람들은 옷을 입을 것이오. 이상현이 언제 얽매여 산 일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 나 나는 어느 누구보다 얽매여 살아왔다 할밖에 없소이다. 일견 얽매여 사는 것 같은 그런 사람 이상으로. 나 는 그것을 풀려고 끝없는 도피의 길을 찾아다녔던 것이오. 그러나 나를 얽어맨 그것들이 사람 사는 데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내가 자유인 것을 깨달았고 정적해지는 것을 느꼈소이다. 앞서 사랑에는 여러 가지 성질의 것이 있다고 했지요? 그것도 나로서는 깨달음이었소. 나는 지난달 어떤 기생을 사 랑했소이다. 기생이기 이전에는 최참판댁 침모의 딸이었지요. 나는 그 여자에 대한 감정을 동정이라 생각했소. 나중에는 바람기라 생각했소. 더 나중에는 수치로 생각했소. 그는 남몰래 내 딸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곳으로 도망온 뒤 그 여자는 비참하게 세상을 떴고 내 딸은 지금 최참판댁 부인이 거두어주고 있다는 것입니 다. 나는 진실로 그 아이에게 내 사랑을 전하고 싶소. 그리고 그 아이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핏줄의 정이 필요 할 것이오. 나는 어느 시기가 오면 조선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간 명희씨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앞으로도 부쳐 보낼 예정인 원고, 물론 잡지사에서 소화해주어야겠으나 그 원고에서 받게 될 원고료를 아이 양육비로 도움되게 선처하여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말미에 인사말이 있었고 편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14장 용의 죽음 마을 정자나무 밑에 봉기노인과 윗마을의 늙은이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놈이 우리네가 못 시키는 공부를 제 새끼한테 시켜? 아 세월이 얼매나 좋으믄 섈인 죄인 손이 상급 핵교로 다 가노 말이다." "뒷북 치는 소리 하네. 꽤깡스럽게 그 말은 와 끄내노." 피워물었던 곰방대를 내저으며 봉기노인은 "아까 그놈의 손, 가방 들고 나릿선 타는 거를 봤인께 하는 말 앙이가. 심술이 나서 하는 말은 아인 기라." "심술이 안 나는데 와 그런 말을 하는고?" 윗마을 강노인은 실실 웃는다. 봉기노인은 이빨 사이로 침을 칙 뱉는다. "세상이 꺼꾸로 될라꼬." "이미 꺼꾸로 된 거는 우짜꼬?" "그새 세월이 많이 지났고 옛사람들도 거반 저세상으로 갔이니 네 활개치고 댕기는 것꺼지는 좋다 카자, 그래 제놈이 무슨 염치로?" "백정놈 새끼들도 공부시키는 세상인데 머 어떻노? 성시가 되믄 하는 기지. 만판 그래봐야 입술만 타제." "이보래?" "와. 무신 말 할라꼬 눈이 쪼맨해지노?" "염치도 없기사 없지마는 그놈이 무신 수로? 돈이 어이서 나노 말이다." "지 성이 잘됐다 카데? 만주 가서," "그럴 리가 없다. 나무 될 거는 떡잎 적부터 알더라고 그놈은 어릴적부터 손톱이 길었네라. 도둑질하다가 까막 소에서 뒤졌음 뒤졌지, 아무튼 무신 곡절이 있일 기구마. 한복이놈, 그놈 사정을 뉘 몰라서?" "내사 머리빡이 허옇기 돼가지고 말소도레기 이는 것 달갑잖구마. 누구맨치로 타작 마당에서 몰매 맞는 건 싫 은께. 자식들 보기 부끄러버 우찌 사노." "그 소리는 와 하노!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분 두분이다." "그런께 귀한 음식 묵고 남우 말 하지 마라 그 말이다. 황천길이 가까운데 남 잘되는 기이 머가 그리 배아프 노. 지고 갈 기가, 이고 갈 기가, 눈 한분 감으믄 고만이고," "그때 일을 생각하믄 요새도 잠이 안 온다. 석이 그놈, 목을 쳐직일 놈! 주제넘기 지놈이 뭔데? 식자가 들었이 믄 얼매나 들었이꼬? 진주서 물지게 지든 놈이, 왜놈 종살이하다 왜말깨나 배웠는지는 모리지마는 건방진 놈!" "그만해라. 그런 말 해봐야," "모리거든 말 마라! 나잇살 처묵은 용이 그놈까지," "용이가 어쨌다고," "간에 간 붙고 실개가 가 붙고," "못 알아듣겠네." 강노인은 지겨운 듯 외면을 한다. "다 그놈들 샐인 죄인 손들하고 한통속인께. 한복이놈 새끼도 석이 그놈 연줄로 공부 갔다 하더구마. 옛날에는 나를 은공 모리는 금수 치부를 하더마는 제놈들은? 시적 최참판네 덕을 봄시로 최참판댁네 원수 한복이놈하고 배가 맞아서 성이요 아우요 아제요 조카요, 우째 낯이 간지러바서 그리 하노 말이다." 한복에 대한 심술도 심술이지만 타작 마당에서 마을 사람들한테 돌을 맞은 사건으로 하여 석이에게 깊은 원한 을 가지고 있는 봉기는 그들 사이가 가깝다는 데서 감정이 더욱 좋잖은 것 같았다. "거 이문가문하는 사람 두고 그러는 거 앙이다." "와, 다돼간다 카더나?" "아들까지 와 있는 거를 보믄 갈잖을 모앵이라." "진주서 넘어졌을 때 가는 줄 알았더마는 한 십 년 더 살았이믄 됐제 뭐," "우리한테도 곧 닥치올 긴데 남우 일가?" "아아, 제 멩대로 사는 긴데 남우 일이제 우애 내 일일꼬?" "흔히들 하나 자식 소자 없다 하더라마는 용이가 아들 하나는 잘 두었제." "흥, 그만 안 하는 자식이 어디 있어서?" "그나저나, 금년 농사는 그럭저럭 펭작은 될 모양인데, 적기 묵고 가는 똥 싸는 기이," "거기도 들뜬 놈이 하나 있는가배?" "손자놈이 모집에 가겄다고 생지랄 앙이가. 이놈아 할애비 죽는거나 보고 가라 하고 호통을 쳐놨지마는 전딜 까 싶잖어." "갈 만하믄 가지 머, 얼매나 갈 긴고 그거사 두고봐야겠지마는. 야무에미 요랑거리샀는 꼴 눈이 씨어서 못 보 겄더라마는 아들놈 일본 가서 돈벌어 보내는 덕에." "그것도 운이 좋아야, 대개는 돈도 못 벌고 몸만 망친다 하기도하고 그뿐이믄 좋게? 누가 잡아직이도 모린다 카이." "하기사 몇 해 전에 일본 간 조선 사람 몰살시킸다는 말도 있긴 있었제." "지 애비는 밤낮 그런 일이 있을 긴가, 밤낮 농사지어봐야 그 태롱이고 젊었일 때 한분 나부대보는 것도 괜찮 다 하더라마는 없는 놈이야 오나가나 무신 뾰족한 일이 있겄나. 내 땅에 살아도 왜놈들이 들어가라 나가라 임 우로 하는데 그놈들 땅에 가서 부모 형제 기리믄서 그 서름을 어찌 받을꼬? 아이고오 설설 올라가보까?" 강노인이 몸을 일으킨다. 그러나 봉기는 목을 쑥 뺀 시늉으로 앉아 있다. "아침 저녁이 제법 선선해졌제?" "출출하구마. 초상집 술이라도 얻어묵었이믄 좋겄네." "지랄 같은 소리 그만 하고, 한분 딜이다보았나?" "눈도 못 뜬다 카든데 가보믄 머하노. 개밥에 도토리제." 강노인은 윗마을을 향해 가고 봉기는 그냥 앉은 채다. "개밥에 도토리제." 혼자서 한번 더 중얼거려보다. 욕을 하고 험담을 했지만 이미 독기는 빠져 없었고 봉기노인의 모습은 외롭게 보인다. "이평이는 떼부자가 됐고 영팔이도 살림이 따시다 카고 멩이 다돼 그렇지 용이도 아들이 잘 벌어서, 한복이 그놈까지, 거지 중의 상거지든 그놈까지 그런데 와 나는 이리 헹펜이 안 풀리는고 모리겄다. 식구는 많고 앞 으로 우애 살 긴고, 입이 많아서 내 죽고 나믄 생이 뒤는 걸겄다마는," "혼자서 무신 얘기를 하고 기시오?" 봉기가 돌아본다. 서노인의 양손 복동이다. "어디 갔다오노?" 한결 다정스러워진 목소리였다. "읍내 볼일이 있어서," "좀 쉬었다 가라모." "야." 복동이 땀을 닦으며 봉기 노인 옆에 앉는다. 복동네 장례날 상제라 하여 매맞는 것만은 면했으나 그럴 수 없 이 곤욕을 치른 복동이와 그 안사람은 그 후 마을에서 소외당하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자연 함께 당했던 봉기 와 심정적으로 가까워질밖에 없었다. 당하기로는 그날, 봉기가 훨씬 가혹하게 당했으나 노인이며 비윗살이 좋 아서 그런대로 마을 사람들과 쉬이 어울릴 수 있었다. 그러나 복동이 내외는 계속 백안시당해왔던 것이다. "마을을 떤다는 말이 있든데 그기이 정말가?" "떠고 저븐 맴이사 시시각각이지마는 비비댈 언덕막이 있어야제요. 저분 때는 항구로 나가서 고깃배나 탈까 싶어... 그래서 떤다는 소문이 났던가배요." "그런데 와 고깃배는 안 탔노?" "얘기를 들어본께 이력이 나기꺼지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가 어렵다 카고 사시사철 하는 일도 앙이라 카이 할 수 없이 자파했심다. 그라고 부산에 나가믄 부둣가에서 짐 푸는 일꾼이 있다 하더마는... 그것도 이자는 꽉 째 어서 들어가기가 어럽다 카고," 골이 파인 듯 울퉁불퉁한 손톱을 들여다보며 복동이는 우울하게 말했다. "읍내에는 머하로 갔다오노?" 픽 웃는다. "핵교 소사 자리를 처삼촌이 말해주겄다 해서 갔더마는 그것도 발덩거지한 놈이 있더마요." "아아니, 말해준다 해놓고 다른 사람을 갖다 붙이놔?" "처삼촌도 연비 연비로 말했인께, 한발 늦었던 기지요." "핵교 소사라 카믄, 그기이 됐이믄 좋았제. 첫째 집을 준께로. 마할 수 없다. 여기서 구박받고 살라 카는 팔자 라믄 그렇기 살 수밖에 더 있겄나?" "그러시오." "사램이 살라 카믄 그보다 더한 일도 겪는다. 미련한 듯기, 밥 들어가는 볼때기다가 주먹질하는 사람 없이믄 견디보는 기다. 흥 세상 꼴 더럽다. 샐인 죄인의 자존심도 상급 핵교로 가고, 아 그래, 샐인 죄인 자손이 고사 가 되믄 아아들한테 머를 가르칠꼬? 한복이 그놈 어이서 금댕이를 줏어왔나? 살묵살묵 금댕이 짤라다 팔아 사 는가? 집도 곱돌겉이 손질해놓고오, 새끼들도 많은데 죽 묵는 일이 없다 카이 구신 곡할 일 앙이가?" "말이 났인께, 지도 들은 말이 있십니다." "무신 말?" 올빼미 같은 눈을 꿈벅거리며 다잡듯 묻는다. "읍내 우편국에서 돈포 바꾸는 거를 처삼촌이 한분 보았다 하더마요." "돈포? 돈포라 카믄," "와 그 야무어매," "아, 알겄다. 그 빌어묵을 제집년!" 가래를 돋우어 칵! 뱉는다. "아들놈한테서 돈포 왔다고 반치해샀던 그거 앙이가." "야 맞십니다. 누가 돈을 보내주까요?" "그, 그렇다믄 거복이놈이 참말로 잘된 길까?" 순간 봉기 눈에 겁이 실린다. 한복의 경우는 마음놓고 욕을 할 수 있었는데, 거복이 잘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두려움을 몰고 왔다. '영악한 놈인데 앙갚음할까 무섭네. 동생놈한테까지 돈을 부치는 거를 보믄 잘돼도 아주 잘됐는갑다.' 함안댁이 목을 맨 살구나무에 맨 먼저 기어올라가서 목맨 줄을 차지한 봉기였다. 한복이 달구지를 타고 평사 리에 올 때면 봉기는 반드시 살인 죄인의 자식이란 말을 들먹였다. 원망에 가득 찬 한복의 눈을 봉기는 기억 한다. 그러나 언제나 말이 없었던 한복이, 한복은 견디었고 봉기의 독설은 습성이 되어 방금, 조금 전까지 욕 을 했었다. 맺힌 원한도 없건만 석이 그를 두둔한다고 해서, 뭐 석이 그러지 않았다 하더라도 샐인 죄인의 자 식놈이 우째서 그리 잘사노! 한복이 들으란 듯 서슴없이 말했을 것이긴 했다. 복동이도 가야겠다며 가버리고 봉기는 여전히 장자나무 밑에서 떠날 줄 모른다. 늙은 부엉이 같았다. 발톱과 주둥이는 날카로움을 잃었고 윤기 없고 엉성한 털, 가지 위에서 간신히 옆걸음질하는 것으로 살아 있음을 시 위하는 늙은 부엉이. 봉기는 늙은 부엉이 같았다. '애비 에미 없이도, 거복이 한복이뿐이건데? 석이놈도 그렇고 홍이놈도 그렇고 사람 구실 못할 기라 여깄든 것들이 내봐란 듯 잘됐는데 명천의 하느님요? 우째 내 자식들은 황이 안 풀립니까?' 높은 하늘에 철새들이 날아간다. 들판의 벼는 영글기 시작했고 그렇게 햇볕이 내리쬐던 고추밭에도 설렁한 바 람이 지나간다. 마을을 들끓게 했던 봉순의 죽음, 그 숱한 뒷이야기가 길상에 관한 얘기며, 그런 것들도 삼베 옷을 땀이 가신 것처럼 사라졌다. "덕수할배, 여름도 지나갔는데 여기서 머합니까?" 끝물의 호박이랑 호박순을 따 넣은 광주리를 겨들랑이에 끼고 지나가던 마을 아낙이 말을 걸었다. "여름 지나가믄 나무 밑에 못 있는가?" "덕수네 조밭에는 온갖 뭇새가 다 있십니다. 허세비나 하나 세우지요." "별 걱증을 다 하네. 남이사 하든지 말든지 흥! 남 먼저 나부대사아도 부신 별수가 있던고? 천지개벽이나 했이 믄 속이 씨원하겄구마는," 하다 말고 "남의 걱정은 와 하노!" 역정을 벌컥 낸다. "아이고 얄궂어라. 이웃간에서 그런 말 하기 예사 아니겄소?" "늙은 사람보고 젊은 기이 하라 말라! 그기이 무신 버르장머리고오! 내가 니 동무가!" 그래도 심이 차지 않았던지 눈알이 시뻘개지며 "네년도 나한테 돌멩이질 안 했나! 내가 안다! 내가 와 모릴 기고오!" 곰처럼 일어서서 두 팔을 번쩍 올린다. 아낙을 칠 듯이. 아낙은 광주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달아난다. 달아나면 서 "이자는 노망꺼지 들었구마." "네이 이년! 내가 안다! 알고말고!" 그러나 노망도, 정말 화를 낸 것도 아니었다. 봉기 노인은 그냥 그래본 것이다. 노망이라도 든 것처럼 그래보 았을 뿐이다. 해질 무렵, 새들이 잠자리를 찾아 날아가는데 용이네 집에서 곡성이 울렸다. "초상났구나." 마을 사람들이 용이 집을 향해 달려간다. 상가에는 홍의 사무치는 울음 소리, 보연의 호들갑스런 곡성말고는 모든 절차가 정연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장지도 마련돼 있었고 영팔이, 연학이, 그리고 뜻밖에 두만아비까지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사돈뻘인 한경이가 의관을 차려 입고 나타났으며 최참판댁 언년이 부부도 와 있었다. 보연이가 시아버지 병간호를 하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평사리에 온 것은 석 달 전의 일이었다. 홍이는 진주 에 있으면서 이따금 평사리를 다녀가곤 했는데 보름 전부터 휴직을 하고 아비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와 있었 다. "마 언제 가도 가기사 가겄지만 어이구 용아!" 영팔이 흐느껴 울었다. 울면서 염을 한다. 한마디 한마디 시신을 묶을 때마다 "용아, 이자 저승 가거든 월선이 만내서 살아라." 다시 한마디를 묶어놓고 "좋은 때 갔다. 우리도 간도에 있을 때 우찌 살았노? 어이구 이만 하믄 갈 긴데 그리 대쪽겉이 살 기이 머 있 든고?" 염이 끝나고 입관이 끝나고 빈소가 차려졌다. 분향하고 나오는 사람, 분향하러 들어가는 사람, 멍석을 깔아놓 은 마당에는 문상객들이 모여앉아 술상을 벌인다. 머리빡이 하얀 야무네는 부엌 밥솥에 불을 지피며 눈물을 짜고 있었다. "나이를 봐서는 좀 더 살아야겄지마는 마 그래도 호상이라 할 수 있일 기거마는." "아암 그렇지. 아들이 잘돼서 할 짓 다 했고 양반댁 딸을 데리와서, 원 없이 시중도 받았겄다, 손주도 보고 용 이성님은 편키 가신기라." "그거 다 심덕 탓 앙이가. 사람마다 그렇기 살믄 법 없이도 될 기고, 그라고 또 이런 좋은 철기에 자식을 앞에 놓고, 남은 식구 걱정없이 간다믄 그것도 대복 아니겄나. 하는가 하면 한편에는 "이평이성님, 고맙십니다. 참말로 어러분 걸음 했구마요." 아첨 떠는 사람도 있었고 "어러불 기이 머 있노. 나이든께 할 일도 없고, 옛나 생각도 나고 오고 저버서 왔구마." "소문 들은께 큰부자가 됐다 카든데 이평이성님은 옛적이나 지금이나 별로 안 달라졌십니다." "자식놈이 부자지 내가 부자가." "자식이 부자믄, 마찬가지 아니겄소. 주머니 돈이나 삼지 돈이나," "밥 두 그릇 묵는 사람은 없인께, 근근히 포전 쫓는 그 시절이 좋았지." "있인께 하시는 말심 아니겄소?" "그러씨." 밤에는 차일을 친 마당에까지 밤샘하는 사람들로 붐볐고 기둥마다 등이 내걸렸고 뿌연 밤풍경 속에서 사람들 은 술잔을 나누며 지난 얘기들을 학 있었다. 상청에서는 홍이도 지쳤는가 조용했다. "사람의 일이란 관 뚜껑에 못질을 해놔야, 그래야 말할 수 있는거 아니겄소? 칠십 팔십이 되고 다 살았다 다 살았다 함시도 험한꼴 볼라카믄 얼매드지 본께. 관 뚜껑에 못질하기까지는 장담 못하제요." "우떻게 생각하믄 용이아제는 남보다 별나게 살은 것 겉소. 생시에는 한이 많고 액운도 많은 사람이라 생각했 는데 세상을 떠고 본께, 어느 농사꾼이 그러고 살았겄소? 하기사 농사꾼 되기 아까분 인물이라, 우리네하고 다 르지마는 부모가 만나준 계집, 살다보믄 곰보라도 그만, 째보라도 그만, 정분 난 일도 없고오, 한 여자를 그렇 기 못 잊어서 그 당시는 숭도 보고 했지마는, 하 참 우리는 그냥 돼지맹크로 묵고 자고 자식 내지르고, 그라고 늙은 거 아니겄소? 한이 많은 거는 우린가 그리 싶으그마는." "아따야, 한이 되거든 다시 환생해서 죽자 살자 은앙새를 찾으라모." "흥 임우로 될 일 겉으믄 누가 안 그러고 저버서? 그거 다 타고난 팔자라." "용이성님이 돌아가싰인께 그런 말들을 하지, 당하는 당자야... 따지고 보믄 다 그만큼, 그만큼 공펭하게 사는 긴지 모리겄다. 사람을 기리고 만내고 그러고 보면 안 기리고 못 만내는 우리보다 가심 저리는 일도 따라서 많은께, 불경서도 안 그러든가배? 애착을 못 끊어서 괴롭다고, 애착을 끊으믄 맴이 편안한 거라고," "그라믄 우리는 부처님 될 기다 그 말 앙이가, 애착이사 사람마다 있는 건께." "아따 시시한 소리들 하네. 병고를 안고 십 년을 살았는데 정분 얘기가 머 말라 죽은 기고. 본인은 얼매나 고 생스러웠겄노. 부귀영화도 소용 없고 애착도 제 몸 성할 적의 일이제." 사람들은 밤을 보내기 위하여 이런저런, 깊은 생각 없이 말들을 지껄이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나이 를 봐서는 더 살아야겠지만 호상이라 할 수 있는 상가의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오랜 병고 때문에 용이 머지않 아 죽을 거라는 사실이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병고말고는 용이 만년이 비교적 풍파 없이 조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를 위해 마음 아파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누구 가슴에 못질을 한 일도 없었으며 깊이 관 여하지도 않았고 어딘지 도인같이 표표했던 그의 일상은 사람들에게 병고로 빚은 음산함을 느끼게 하지 않았 던 것도 사실이다. 날이 밝아왔다. 늙은 부엉이, 늙은 부엉이같이 봉기가 꾸부정하게 등을 꾸부리며 상가에 들어섰다. 그의 등뒤 에 뿌연 아침 안개가 서려 있었다. "아따 일직이 등장 가나!" 누군가 빈정거렸다. "지랄하네." 봉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왔으면 들어올 일이지 수문장겉이 거기 와 그라고 서 있노." 두만아비의 말이었다. "나는 베린 놈가? 여기 와 있음서," "죽어감시도 지 생각만 한다. 아픈 사람이 있음 니가 찾아오는 게 순서 앙이가." "세 따라가는 인심이 야박해서 안 왔다 와." "늦기 온 무안수세가." "빈소는 어디 있노?" 대청에 마련된 빈소를 보면서 묻는다. "부엉이는 낮에 눈이 안 뵌다 카더라마는," 젊은 축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 날 발기 전에 상가에 와서 거들던 야무네와 마당쇠댁네가 부엌에서 "음훙스럽기는, 상가에까지 와서 트집 부릴 거는 뭐 있노." "그래도 이자는 기가 폭삭 죽었소. 소리질러도 뒷심이 있어야제요." 흉을 본다. 빈청으로 올라간 봉기는 분향하고 재배에 반절을 올린 뒤 상제인 홍이와 맞절을 한다. "마 철기도 좋고, 하낫도 아심찮아할 거 없다. 죽음치고 한이 안남는 경우는 없인께." 평소같이 한마디 한다. 그리고 부조를 내놨다. 작은방으로 들어간 봉기는 갑자기 활기를 찾은 것처럼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갔다. "뭐니뭐니 해도 죽음을 보믄 늙은 사람 맴이 젤 안 좋네라. 젊은 것들이사 남의 집 불구경하는 것겉이, 저거들 도 늙을 긴데," 젓가락으로 안주부터 집어먹으며 "나는 술 한잔 안 주나?" 연학이 술을 부어준다. "우떻게 했노. 며칠 장을 할 기고?" "오일장으로 결정났소." 연학이 대답했다. 15장 만주행 들일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었는지 범석은 말끔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땅거미질 무렵이었다. 여름도 지났는데 멀리서 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늦은 저녁을 짓는가 한두 집, 피어나는 연기를 볼수 있었다. 마루에 나 앉아서 남포 등피를 닦고 있던 보연이 "오라버니 어서 오시오." 반긴다. 범석은 잠자코 마루에 걸터앉는다. 등피를 끼운 남포로 한곁에 밀어놓고 마루에 걸레질을 한 보연이, 각별하게 할말이 있는 듯 저고리 앞섶을 잡아당기며 자세를 가다듬는다. 짚베로 만든 상복의 모습이 밀려오는 저녁빛이 아련하다. "내일 진주 간다며?" 보연이보다 범석이 먼저 물었다. "네." "며칠 있으면 추석인데, 추석이나 쇠고 가지." "추석에는 잠시 다녀가겠답니다. 진주서 기별은 발발이 오고, 남의 월급 받고 사는 처지니까 가기는 가야 하는 데 나 혼자 걱정이오." "그럼 매제는 계속 왔다갔다해야겠구나." "그럴밖에 없지요. 그보다," 망설인다. "아무튼 일은 끝났으니까, 그 동안 손님 치송하노라 너도 욕봤다." "아닌게아니라," "큰일 뒤에는 으레 말들이 많은 법인데 그만하기 다행이다." "아닌게아니라 오라버니, 정말 뼈마디가 부서지는 것만 같고 자리에 한번 눕기만 하면 영영 못 일어날 것 같 은 생각이 들지 뭡니까." 힐끗 쳐다본 범석은 다소 못마땅했든지 "누구나 다 치르는 일인 게야. 농사지어가면서 거상을 감당하는 농촌의 아낙들 생각을 하면 넌 편한 백성이 다." 보연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발명 대신 입을 다물고 말았다. 따지자면 이들은 남남이다. 처음 만난 것도 보연이 홍이와 혼인하여 마을에 왔을 그때였다. 그러나 범석은 양 자 소생이지만 김훈장의 엄연한 장손이며 보연은 외손녀다. 그러니까 고종사촌인 셈인데 아무래도 서로가 다 소 생소하게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보연이보다 두 살 위였고 혼인 전부터 평사리에 오면 홍이가 찾아가 곤 하여 친분이 두터웠던 이들 처남 매부는, 홍이가 두 살 연장이다. 집안은 조용했다. 삼우제도 지났고 상가 에 왔던 손님들도 다 떠났다. 영팔이만 추석을 쇠고 가겠다며 남았을 뿐이다. "어째 집안이 조용하군. 아이들은 벌써 자나?" "상근이는 자고 상의 는 최참판댁에 갔어요." "요즘, 상의는 최참판댁에서 사는구나." "진주할배랑 갔는데 집이 넓어 놀기 좋으니까요." "매제는 어디 갔나?" 보연은 작은방 쪽으로 눈길을 보낸다. "대낮부터 한잠이 들어서 저녁도 마다하네요." "그 사람도 큰일 치르노라 애썼다. 마음을 놓으면 잠이 오는 법이야." "입술이 부르트고 얼굴이 반쪽이요. 큰일을 당하니까 독신이 얼마나 외로운 지 알겠대요. 이런 때를 두고 집안 이 넓어야 한다 했던가 봐요. 게다가 이서방은 늦게 둔 자식 아닙니까. 겨우 세 살백이 손주 하나, 머릴 풀겠 어요, 상복을 입겠어요? 하지만 아버님께서 생시 인심을 안 잃었으니 망정이지, 먼 곳에서도 일부러 문상오는 사람도 많았고. 거기 비하면 친정 식구들이 소홀했던 것 같아서 이서방 보기가," "이젠 할일 다한 셈이니까, 그런 일이야 뭐," 사방은 아주 어두워졌다. 보연은 남포에 불을 켜고 마루 시렁 위에 올려놓으면서 "자식들 일은 어쩌구 오라버닌 할 일 다했다 하시오." "그렇게 따지자면 죽는 날까지 할 일은 남겠지." 낮게 웃으며 범석은 담배를 붙여문다. "오라버니," 아까처럼 저고리 앞섶을 잡아당기며 보연은 자세를 가다듬는다. "실은 오라버니한테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외가집에 갈려고 했지만 틈이 있어야지요. 마침 오셨으니까," "의논을 해?" "네. 누구보고 이런 얘기 할 수도 없고 외숙모님께 말씀드릴까 했지만 그렇게 되면 제가 부탁한 것이 들날 거 구요. 처남 매부 사이지만 오라버닌 이서방하고 친구간 아닙니까?" "무슨 얘긴데 그리 뜸을 들이나." "이서방이 그냥 진주에 눌러앉아 있을는지 그게 걱정이 돼서," "무슨 소리야?" "오라버니가 한번, 넌지시 한번 마음을 떠봐주시오. 이서방은 늘 아버님 땜에 아무곳에도 갈 수 없다, 그런 말 을 입버릇같이 했거든요." "그야, 직업 따라서 갈 수도 있지. 사장께서 세상 버렸으니까 고향 변두리만 서성거릴 필요가 있겠나?" "아이 참 오라버니도, 직업 따라 떠난다는 얘기가 아니지요. 조선에서 뜬다 그 말입니다." "설마, 조선서 뜬다 하더라도 상을 벗은 뒤, 삼 년 후의 일을 미리 조바심할 건 뭐람." 보연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지요. 어차피 탈상까지 전 여기 남을 건데 이서방 혼자 만주로 훌쩍 떠나버리면 어떡허지요?" "만주로," 하다가 비로소 범석도 짐작이 갔던지 침묵해버린다. "그러니까 오라버니, 어쩔 요량인지 한번 넌지시 떠보시오." "..." "네? 오라버니," "떠보고 자시고, 그 사람 생각했으면 생각한 대로 할 테지. 집안 사람은 밖에서 하자는 대로 할밖에 없지 않느 냐." 범석은 그답지 않게 신경질적으로 내뱉았다. "정녕 가버리면 아이들 데리고 저는 어떻게 살랍니까?" 울먹인다. "허참, 누가 내일이라도 떠난다는 건가?" 다소 빈정거리듯, 오누이간에 주고받는 대화이나 툭 터놓지 못하는 생소함은 여전하다. 보연이보다 범석이 쪽 에, 범석이 보연을 좀 경망하다고 생각하는 탓도 있었다. "근심이 되니까 그렇지요." "매제가 어린애도 아니겠고 풍상도 겪을 만큼 겪었으니 경거망동 할 사람은 아니다. 쓸데없는 걱정이지." "하지만 전사가 있어서," "전사라니," "여자, 여자 말입니다. 통영서, 친정 식구들한테 얼굴을 못 쳐들게 된 것도," 그 말에는 범석이 당황한다. "아버님 생시엔 뜻대로 못했지만, 차라리 아버님 생전엔 아버님 말씀대로 만주로 가버렸던 편이 나을 뻔했어 요. 그때는 식구들 데리고 가라 하셨거든요." "쓸데없는 소리, 두 아이의 애빈데 그런 추태가 또 있을까?" "오라버닌 세상 버린 시아버님의 이력을 모리시오?" "시시한 소리 그만두어." "혼인 전의 여자를 못 잊어서, 그 무당 딸을 평생 데리고 살았다는 얘기, 마을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아 요? 그 얘긴 이서방 앞에선 비치지도 못한답니다. 천길 만길 뛰면서 주먹질이라도 할 것 같아 말입니다. 한밤 중에도 부자가 닮았다, 그 생각을 하면 잠이 안 와요." "그만두어. 아무리 오라버니기로 듣기 거북한 얘기다. 거 쓸데없는 걱정은 관두고 매제나 깨워라. 만나보고 가 야지." 그러나 보연은 매달린다. "부탁이오 오라버니, 무관한 사이 아닙니까? 한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봐주시오." 무안쩍기도 했겠지만 아첨하듯 웃는다. 범석은 순간 아내 생각을 한다. 메주콩을 삶으려고 수수깡 옥수숫대로 부를 지피던 아내의 옆모습, 수건을 쓰고 땀을 흘리던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남편에게는 물론 시집 식구 남에 게도 수줍음이 가하여 말을 제대로 못하는 아내, 아이를 낳은 뒤에도 여전한 그 성질이 때때론 답답했었다. '보연이가 처녀 적보담은 사람이 됐지. 어지간한 남정네를 만났으면 여간 요망하지 않았을 게다. 심성이 나쁜 아이는 아니나 당돌하고, 그런가 하면 턱없이 어리석거든.' 흉을 보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모자간에 허물없이 한 어머니의 말이었다. '어질어서 어리석은 것하고 사리 판단을 못하는 어리석음하고는 다르지만 어쨌거나 이서방을 하늘같이 생각하 니 시부모한테도 자연 잘하게 되는 거고 가장 앞에선 설설 기는 거를 보면 호랑이 잡아먹는 담보가 있다든가? 혼사 때는 지체가 어떠니 하고 말도 많더니 너의 고모님이 단을 잘 내리신 거다. 여자는 남자하기 탓이지. 부 모가 못 고친 버릇도 잡게 되니 말이다.' 모친이 그런 말을 할 때 범석은 소문이 파다했던 통영에서 유부녀와의 사건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것이 이상했 다. 자신도 홍이의 그 행적을 깊이 마음에 끼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여인네 처지에서 어머니가 남자 편의 비행에 과대한 것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들의 경우라면? 며느리의 경우라면 어머니는 어쩌실까?' 그 순간 범석은 며느리에 대하여 한번도 칭찬한 일이 없는 평소의 어머니를 상기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생 각이 미친 것이다. 불효하다는 자의식과 더불어 그는 아내의 강한 수줍음은 수줍음만이 아닌 억제인 것을 깨 달았다. "오라버니, 어째 말씀이 없으시오." "음, 아. 알았다." 작은방 앞에 간 보연은 "상의아버지." 남편을 부른다. 다시 "상의아버지," 하다가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등잔에 불부터 견 모양이다. 어둡던 방안에서 불빛이 새어나왔다. 홍이 자리에 서 일어나는 기척이다. 열려진 미닫이 사이로 눈을 비비며 홍이 내다본다. "정시 없이 잔 모양인데 어서 들어오게." 범석이 방안으로 들어서며 "밤도 수울찮이 길어졌는데 대낮부터 무슨 잠인가?" 보연은 잽싸게 이부자리를 개켜서 머릿장 위에 올려놓는다. "냉수 한 그릇 가져와요." "네." 범석에게 담배를 권한 홍이는 자신도 담배를 붙여문다. "내일 진주 간다며?" 그 말 대답은 없이 "처남은 어쩔래?" 느닷없이 묻는다. "뭘?" 범석이 반문하는데 홍이는 애매하게 웃을 뿐이다. "어쩌기는 뭘 어째?" 다잡듯 다시 물었지만 "그냥 해본 말이고..." 한숨을 쉬며 "마음이 허전해서 갈 바를 못 잡겠다." "그럴 게야." 처남은 어쩔 거냐 한 말은 의미 심장한 것이었다. 범석은 직감적으로 처남도 어디 안 가겠느냐 하는 저의를 느꼈다. 하여 추궁한다면 보연의 부탁대로 홍이의 마음을 떠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장부터 그 문제에 덤벼들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범석은 고삐를 늦춘 것이다. "불시에 당한 일도 아니었고 오래 전부터 각오를 했었는데, 아니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도 몰라. 한데 사람이란 죽을 때가 되면 모두 죽는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보연의 말대로 등잔불 밑의 홍이 얼굴은 반쪽이었다. 입술은 부르트고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보연이 냉수 한 대접을 떠왔다. 냉수를 마시고 빈 그릇을 내민다. 보연이 묻는다. "저녁은 어쩌시겠어요?" "술이나 내와요." 술상은 마주한 홍이와 범석은 술부터 한 잔씩 마시고 나서 "요즘엔 세상 돌아가는 게 어떤지 모르겠네." 범석이 말을 꺼내었다. 그런 얘기를 하자고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운전대 잡는 놈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어찌 알겠나. 순사 앞이라면 불쌍한 조선놈들 사시나무 떨 듯 하는 것 밖에 모르네." " 그렇게 말한다면 땅 파먹는 두더지가 세상 돌아가는 것 알아도 별 수 없는 노릇이지만 허허헛..." 술잔을 놓고 새 담배를 붙여문다. "그는 그렇고 최참판댁의 일은 어떻게 되는 건가." "환국이아버지 말인가?" "음." "어떻게 되긴, 이미 판결은 났고 재판장이 매긴 것만큼 콩밥 먹을 수밖에 더 있겠나? 술이나 마셔." "판결 난 걸 몰라서 물었나?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이상하게 생각는다기보다 실은 궁굼해서 물어본 게야. 알기론 계명회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일본 유학생이거나 유학을 끝낸 사람들인데 유독 만주에 있었던 그분이 국내 단체에 가입했다는 것은...그점이 늘 궁금했다." "나도 뭐 자세한 건 알 턱이 없고 다만 들은 말에 의하면 주모자 서의돈이라는 사람이 간도 할아버지하고 아 는 사이였다는 게야." "그러니까 공노인이라던," "음. 그 어른이 최참판댁 재산을 조준구로부터 거둬들이는 데 앞장선 것은 사실인데 그 무렵 간도 할아버지는 이상현 선생님을 통해서," "하동의 이부사댁," 홍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선생님을 통해서 서의돈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여러 가지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더군. 그런 처지 인 만큼 용정촌을 드나들면서 자연 할아버지댁에 머물게 됐을 것 아니겠나? 그러다 보면 환국이아버지하고 접 촉할 기회가 있었던 것은 조금도 무리한 얘기는 아닐 거란 말이다." "그렇겠군." "뭐 이런 얘기는 되도록 안 하는 편이 좋겠지만 자네 속에 들어간 것은 내 속에 든 것보다 튼튼하니까." "흥,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든가?" 담배를 손에 낀 채 술을 마신다 "그래도 그렇지. 신문에는 불온한 비밀 결사라 했는데, 하기야 독립운동하는 사람은 모두 불온한 사람이요 민 족주의자는 불온한 사상가니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연결지어서 무리할 것 없지만 변호사 쪽에서는 일분 유학 생들이 모여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순수한 단체라 했으니," "그러니까 환국이아버지 땜에 사건이 커진 것 아니겠나." "사건이 크고 작은 것보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말을 끓고 담배를 연달아 피운다. 범석의 표정은 시골 농사꾼의 평범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무곳에서나 흔 히 볼 수 있는 얼굴이지만 지적으로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보통학교를 나온 뒤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그 이 상 진학을 못했는데, 한편 연학이 인재를 아끼는 뜻에서, 하며 서희에게 범석의 일을 꺼낸 일이 있었지만 웬일 인지 김훈장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을 턱도 없겠는데 서희는 묵살했던 것이다. 무론 그런 사실을 범석이는 모 른다. 아무튼 보통 학교만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으면 계속하여 꾸준히 독학을 했으므로 웬만한 중학교 출신보다 학식이 깊다고들 했다. 게다가 사람됨이 진중하고 착실하여 홍이는 처남이라는 인척 관계 이상으로 친구로서 신뢰하고 존중해왔던 것이다. "최참판댁 그분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까놓고 얘기하자면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뻔하지. 다른 여자를 얻어서 사느니 어쩌니, 내가 용 정서 떠나올 때도 그런 얘기가 파다했지. 그러나 그거는 왜놈들 눈을 가리느라 그랬을 거고," "그런 정도야 나도 충분히 알 수 있어. 그분이 공산주의잔가 아니면 무정부주의잔가 그게 궁금하다, 그 얘기 지." "뭐?" "사회과학을 연구하기 위한 모임이 계명회라면 말일세." "그런 것 나는 모른다. 유식한 자네나 알지. 사화과학은 뭐고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그런 것 알 턱이 있나." 홍이는 갑자기 야유조로 나온다. 그런 것이 새로운 사상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사화과학이라는 말이 생소했고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란 글자 그대로 평등하게 소유하자는 것이며 무정부주의는 억압하는 권 력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그것들은 현시점에서 일본과 대항하는 것이며 일본은 또 혈안이 되어 그것을 쳐부수 려 한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간도 시절 보고 듣고 했었던 독립투사들의 행동과 별다를 것이 없다는 막연 한 인식이었다. 관수나 석이나 그런 사람들을 통해 느끼는 것도 대개 그러했다. 두 번의 경험, 헌병대에 잡혀 갔었던 일과 장이하고 함께 당했던 통영, 그 차고에서의 능멸은 홍이를 개인적으로 성장시켰지만 어떤 면에서 는 사회에의 관여나 관심을 저지했는지 모른다. "유식하고 무식하고 그런 얘기보다 각기 처지 따라서 할 일은 있을 것 아닌가. 촌구석에서 농사를 짓고 있을 망정 세상 돌아가는 것은 알아야 하고 정신만이라도 똑바로 세워놔야 앞으로 대처해 나갈 것 아니겠나. 그러 니까 칠 년 전인가? 동격에 지진이 나던 그해, 일분의 홀실과 대관들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된 박열이 말이야." "그 얘기는 나도 들은 것 같다." "그 사람이 무정부주의자거든. 한데 그 마누라도 같은 사상을 가진 일본 여자였고 상당히 많은 일본인이 그런 사상 단체를 만들어서 그 단체 안에는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활약을 하고 판을 치고 있다는 게야. 물론 무정 부주의자뿐만 아니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도 비슷한 모양인데, 내가 왜 얘기를 하는고 하니 일분이과 손잡고 하 는 그런 운동이 우리나라 독립하고 절대적인 관계가 있는가 그 의문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식민주의를 배격 하고는 있지만, 또 과격하게 일본에 저항하고 있지만, 일분의 자본주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투쟁인지 침략자인 일분을 조선서 몰아내기 위한 투쟁인지, 말하기로는 그 두 가지 목적이 도달하는 곳은 한군데다, 그러나 확실 하게 그렇다 할 수 없는 의분이 생기거든. 그러고 무슨 일이든 일사분란하기론 어려운 일이겠으나 또 파벌을 없앨 수도 없는 일이지만, 듣자니까 일본서 운동하는 조선 청년들 사이에 충돌이 보통 아니라는군. 작년에도 수차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서 사상자를 냈다 하니, 이론으로 볼 때 서로 부리가 다른 만큼, 그것도 그렇지만 내 역시 농민치고도 빈농이요 사회 계층에서는 밑바닥이며 또 책을 읽어보면 그 사상의 이론이 각기 정당하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어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나라가 있은 뒤의 개혁이 아닐까 싶어. 우선 나라 찾는 그 목적에다가 맨 먼저 말뚝을 박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네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나. 그런 책들은 또 어디서 구해 읽었으며. 하 참, 금매고 논갈이하면서 도시놈 들 뺨치겠네." 농담 반 진담 반 놀라움을 나타낸다. "다 듣는 곳이 있고 책도 빌려보는 곳이 있지." "그건 또 무슨 소린고?" "실은 보통학교 때 친구가 하나 있었지. 지금은 중도지폐했으나 동경 유학을 한 친군데, 하기는 그 친구 중학 때부터 방학이면 찾아가서 외지 소식도 듣고, 알다시피 내 처지가 책 사볼 형편도 아닌지라 그 친구한테 구하 기 어려운 것 값나가는 책을 줄곧 빌려봤지. 그 친구도 독서인이라 장서가 많았고," "독학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학교 과장도 안 밟고 서양 학문까지 했다면 놀라운데?" "서양 학문이라? 일본말로 번역된 걸 읽었을 뿐이다. 거창하게 학문이랄 것까지는 업고 내 생각에 한학을 한 덕분에 다소 수월했지 않았나, 학문이란 그 근본에 있어서는 동과 서의 차이가 그리 큰 것은 아닌 성싶더군. 인종이 다르다 해서 사람의 기본이 다른 것은 아니니까." "흥, 하라 하라, 제발 하라 해도 안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 다 팔자 소관인지. 어렸을 적부터 공부라면 담을 쌓고 어디든 훨훨 날아만 가고 싶었다." 홍이는 소리를 죽이며 웃는다. "그는 그렇고 우리가 무슨 얘기를 했더라?" 취한 목소리다. 처음부터 대화에 열중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최참판댁 그분 얘길 했지." "그런데 일본서 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가 어떻고 했는데 그 얘기하고 환국이아버지하고 무슨 상관이지?" "그분 생각이 궁금하다." "뭣 땜에 궁금하나. 하인 신분이던 사람이 일본 대학 나온 도도한 사람들하고 어울렸기 때문인가?" "유치한 소리 말아. 계명회가 어떤 건지 대강 짐작이 가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얘기 하고 싶은 거야? 환국이 아버지, 길상이아제, 옳지 못한 일 할 사람 아니다. 남자 중의 남 자다! 곰팡내 나는 족보 때문에... 으음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내 아버지, 나를 가슴 저리게 한 아버지한 테 딱 한 가지 잘못이 있네. 처남, 그 곰팡내 나는 족보에 눈이 멀어서 음, 하기야 장가는 내가 갔으니, 하지마 는 나는 그렇고 그런 놈이 아닌가. 족보에 허리 굽힌 내 아버지는 그러니까 별수없이 상놈의 피가 흐르고 있 었더라 그 말일세." "허허어 그만 술에 주정인가." "어째서 자넨 길상아제 생각이 궁금하나? 어째서?" "그거는 다름이 아니라, 그분은 지식보다 경험에서 판단했을 테니 그분의 생각이 궁금한 게야. 공연히 트집잡 지 말어." "그렇다면, 그렇지만 알 만한 애기군. 자네 만주 가고 싶은 게로군. 그렇지?" "속단하지 말게. 나보다 매제 쪽의 속마음이 그런 거 아닐까?" 드디어 홍이 쪽에서 기회를 준 것이다. 홍이는 눈을 내리깔며 술잔을 들었다. "만주 갈 건가?" "가야지." 의외로 쉽게 대답이 나왔다. "가족은 어떡허구." "탈상하면 데려가야지." "벌어먹고 사는 데는 자네 직업이,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 아닐까? 달리 생각하는 일이라도 있는 겐가?" "자네 말대로 속단하지 말게. 내 쪼에 무슨 운동가나 될 것 같은가?" "하면은," "그건 내 개인의 일이다 왜놈 밑에 고공살이하는 것도 싫지만," "때놈 고공살이는 괜찮고?" "고공살이를 할지 장사를 할지 그것을 가봐야 알 일이고 그곳은 내 고향이니까 가야 한다." "삼 년 동안이나 안사람한테만 맡길 수 있는 일일까?" "그곳에 안 가도 마찬가지 사정이다. 외지에 나가 있기론," "진주로 빈소를 옮겨가면 어떨까?" "빈소를 옮긴다는 것도 말이 안되겠지만 진주로 옮길려면 만주로 옮긴들 무슨 상관이겠나." "그러나 생각을 깊이 해보게." "하루 이틀의 생각일까." 범석은 일어섰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방문 옆에 보연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좀 당황해했으나 보연은 얘 기를 엿듣고 울었던지 눈을 훔치며 큰방으로 건너간다. 어째 아이가 저 모양일까." 범석은 혀를 차고 마당으로 내려갔다. 뒷간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사립문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이를 안은 영팔이와 또 한 사내가 함께 들어온다. 시렁 위에서 비쳐주는 희미한 남폿불, 영팔이와 함께 들어온 사내 는 관수였다. "홍이 있나아!" 관수가 고함을 질렀고 영팔이는 마루 앞에서 "아아 좀 받아주었이믄 좋겄거마는," 엉거주춤 말했다. "오셨습니까." 범석이 뒤에서 인사를 한다. "누군고 하니 이거 훈장 어른 장손이구마." 관수가 손을 잡으며 여전히 큰 목청으로 말했다. 홍이 방에서 나오고 보연이도 나와서 잠이 든채 안겨 있는 상의를 영팔로부터 받아 안는다. "잠이 들어서, 거기서 좀 재웠구마. 가자 캐도 노는데 잠차져서 올라 캐야제. 그러더니마 나가떨어지데." "저는 뭐 걱정도 안 했습니다." "잠이 들어 그런가 와 그리 무겁노." 영팔이 팔은 흔든다. "홍아 니 대기 섭섭하제?" 관수는 홍이에게 위로를 하고 있었다. "내 거치가 확실찮으이 기별할 수 없었일 기고 쌍계사에 왔다가 소식을 안 들었나." "올라오십시오." "음." 영팔은 범석이랑 함께 방으로 들어가고 관수는 상막에 분향을 한다. "하나 둘 다 떠나고 아제요, 적막강산입니다." 울먹이듯 하다가 분향을 끝내고 상주의 맞절을 한다. 눌은 영팔이와 젊은 사람 셋이 방에 들앉으리 방안이 그득해진 것 같다. "초상 치르니라고 욕봤다." "산 사람이야 욕이라도 봤겄지마는 한분 간 사람은 다시 안 온께." 영팔이 콧물을 마신다. 한동안 방안은 조용해졌다. "한 사람 두 사람 다가고 훈장 어른 장송을 여기서 만나보이 지난 일이 생각나누마요. 그땐 혈기가 왕성해서 그 양반 속을 뒤집어 놓곤 했는데," "와 아니라. 훈장 어른께서는 고집이 애단하시고 니는 또 얼매나 성미가 팔팔했기," "젊은 사람들은 우리 하는 얘기 모를 기구마는." "그런께 그 해가 정미년인가 이십년도 훨씬 전이구마. 우리 군대를 왜놈들이 해산시킨 그 해제." "산으로 들어가신 일 말입니까." 범석이 웃으며 말했다. 영팔은 "바로 그 일이구마. 산에서 게울을 나는데 식략은 떨어지고 왜병들한테 쫓기믄서 어째 내땅 내 나라서 섬나라 도적놈한테 산짐승모앵으로 쫓기는가 훈장 으른께서 우셨지. 그래도 윤보성님이 살았일 적에는 그고함 소리에 희맹이라도 가졌지마는 윤보형님이 죽음므로 해서 삼지사방 잽히가고 총맞아 죽고 도망치고, 피를 쏟을 일은 머니머니 해도 내 동포가 우리를 화적떼로 몰믄서 왜병정한테 고자질하는 그 일이었다. 아마 무지한 백성이로 고 함서 너거 할아버님께서는 하늘을 치다보고 한탄하싰구마. 그래 우리는 간도로 갔고 관수 이 사람은 이곳 에 처졌는데 생각해보믄 그런 일들이 모두 꿈길 겉다. 어짜믄 넘어야 할 고개가 그리 많았던고. 이만하믄 세상 하고 하직할 것을." "그래도 아제씨, 옛날이 좋았을 깁니다. 그때는 젊었인께." "그거는 그래. 이자는 산에 갔던 우리 또래는 다 없고 내가 아마 마지막이 앙인가 싶네. 그러고 보이 활국이아 부지는 그렇고 관수니 혼잔갑다." "가끔 아버지는 윤보 그 어른 말씀을 하더마요." 홍이 말이었다. "뻐라도 찾아서 무덤을 맨들겄다고 입버릇이더니, 지 몸이 성해야 그 일을 했제? 아기사 뭐 자식이 있나 무덤 만들어봐야 우묵장성 풀 배줄 사람이 있어야제. 죽으믄 그만이고 흙이 되는 기라. 산 사람이 서분해서 이러고 저러고 하지. 고관대작, 명문거족, 명당 찾아서 묏자리 크게 잡고 비석 세우고, 그래봐야 죽은 사람이 뭐 알기 고. 핼로에서 죽은 구신이나 뻐도 찾을 길 없는 구신이나 다 마찬가지제. 홍이 니도 털털 털 어부리고 이자는 날개를 펴봐라. 조선 땅에서는 젊은 사람 못 산다. 니 아부지도 소원했고 하니," 그새 말할 기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관수가 온 김에 영팔은 말을 꺼낸 것 같다. "식구들은 어떡허구요." 범석은 아까 홍이에게 한 말을 되풀이 했다. 홍이 명백하게 의사를 표했는데, "어럽기 생각하믄 한없이 어러분 기고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믄 그렇기 되는 거 앙이겄나? 너거들은 상막을 생 각하겄지. 그러나 아까도 내가 말한 거맨치로 산 사람이 서분해서 그렇지 죽은 사람이 밥묵고 술마시겄나. 마 거산해가지고 식구들 데리고 가는 기라. 가서 제반사 할 짓 하믄 된다. 다른 사람 겉으믄 모리겄다마는 그곳에 는 홍이 니가 설 기반이 있인께, 할매는 돌아가싰다 카더라마는 공노인은 아직 살아 기시고, 간도서 죽은 니 어매 전정을 생각해서라도 공노인 죽음은 니가 봐야 안 하겄나. 그기이 또 니 아부지 평소 생각이었인께." "아저씨 말씀이 옳으신 것 같네 매제도 그렇게 방향을 잡는 것이 좋을 것 같군." 범석이 구부렸던 등을 펴며 영팔이 말에 동조하고 나왔다. "홍이 니는 이런 말 하믄 도리어 엇길로 나갈라 할 기다마는, 재물이란 없어서 못 쓰지 있으믄 얼매든지 좋은 일에 쓸 수 있고오 공노인이 니 오기를 소원하는 것도 물리줄 재산이 있인께, 앞으로 그 노인이 살믄 얼매나 살겄노. 그 노인이 다지놓은 기반이 어디 재물만으로 되는 기반이가. 너만 똑똑하믄 월급쟁이 같은 거사 유도 아니고 아 그런 데다가 생판 모리는 땅가? 철들기까지 니가 거기서 컸는데. 니 아부지 생전에는 니 아부지는 말할 것도 없고 나도, 그라고 여기 있는 관수 이 사람도 니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인께 그러나 병든 아비 두고 못 떠나는 니를 우리가 뭐라카겄노. 또 그런 니 맴이 고맙기도 했고," "생각해보지요." "생각해볼 것 머 있노! 사내자석이 단을 내릴라 카믄 주저없이 내리야지!" 갑자기 관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피시시 웃는다. 홍이도 픽 웃는다. 범석과 영팔이 마음을 놓은 듯 서 로 쳐다본다. 홍이는 관수 얼굴에 초조한 빛이 있는 것을 간파한다. "그런데 석이형님은 어떻게 된 겁니까?" 관수로부터 눈을 떼며 홍이 물었다. 석이는 초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석이네가 다녀갔을 뿐이다. 출가했던 막 내딸이 함께 들어와 살기 때문에 아이들을 맡겨놓고 왔다면서 장례가 끝나자 총총히 진주로 돌아갔다. "나두 그눔아아 소식은 못 듣네." 우울하게 말했다. 그리고 순고나 관수의 한쪽 어깨가 축 처지는 것 같았다. "천하에, 죽일 년 같으니라구. 사내가 기집 한분 만내믄 패가망신이라. 홍이 니도 거울 삼아서 처자는 꼭 달고 댕기야 한다. 16장 지시 범석이 가겠다고 일어섰을 때 관수도 따라 일어섰다. "아니 어디 가실려고요." 홍이 말에 "나하고 오늘 밤 여기서 자지 어디 갈라 카노?" 영팔이도 거들었다. "함께 주무시지요." 범석이도 말했다. "안 할라누마. 한복이 집에서 편키 자야겄고 아제씨도 편키 자야제요." "흠, 눍은 사램이 옛날 이바구함서 잠 못 자게 하까바서? 좋을 대로 하라모. 새는 날에는 또 볼 긴께." "야아. 새는 날에 또 보입시다." 집을 나와 마을길에 나섰을 때 추석이 가까워오는 하늘에는 좀 이지러지기는 했으나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마을길도 훤했다. 정자나무는 시커먼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내일 모레면 추석인데 이놈의 신세도 더럽다." 침을 뱉으며 관수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범석은 관수에 대하여 잘 모른다. 조부 김훈장과 함께 산으로 들 어갔다는 얘기도 처음 듣는 얘기다. 관수가 자기를 김훈장의 장손인 줄 아는 만큼 범석도 관수가 옛날에는 이 마을 사람이었다는 정도, 그리고 연학과 어울리는 것을 보았고 현학이 깍듯이 대하는 것을 보았기에 다소 각 별한 사람이란 인식는 했었다. 그리고 뉘한테서 들었는지 기억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진주서 시끄러원던 형평 사운동에 가담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뿐이다. "금년 농사는 어떤가." 뭔지는 모르지만 내부의 홀란에다 기둥을 세웠는가, 자포자기한 것 같은 아까 독백과는 달리 무겁고 침착해진 어조로 물었다. "평작은 안 되겠습니까?" 정중하게 대답한다. "그러씨. 나는 어릴 적부터 장돌뱅이라 농사일은 잘 모른께." 뭘 하는가 어디 있는가 그런 말을 물어볼 수 없었기 때문에 범석은 화제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왜 물어볼 수 없는지 막연한 판단이었다. "아저시는 서울 형무소에 계시는 그분을 아십니까? 범석이 자신도 뜻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아저씨라..." 관수는 사십이 넘었고 범석은 스물여섯, 아저씨라 물러서 잘못된 것은 없다. 지금은 김훈장이 살아 있던 시절 도 아니다 그러나 관수는 약간 저항을 느낀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겄이었다. 그는 느닷없이 범석의 질문에서 잠시 비켜섰던 것이다. "알지이. 어릴 직에 한마을에 살았는데 모릴 기라?" "네." "와 묻노." "그런 분에 대해선 누구나 관심 안 가지겠습니까? 아저씨가 옛날엔 산에도 들어가셨다, 그러니까요." "그 시절이야 어중이떠중이 훈장 어른만 치다보고 따라간 기지." 곁눈질을 하며 희미하게 웃는다. "그래도 길상이는 지금이야 최참판댁 사위지만, 그 사람은 출중했제 면판에서부터 우리네들하고는 달랐인게, 훈장 어른의 훈도도 받았고오," 누구나 다 아는 얘기, 그것이다. "요새 촌사람들 사는 기이 우떤지 모리겄네." "형편없습니다." "연학이가 원성 많이 듣겄네." "근동에서는 젤 괜찮다는 우리 마을에서도 근로자 모집에 들먹거리고 있으니까요." "입에 풀칠을 못해서 들먹거리는 거하도 돈푼 모아서 좀 잘살아보겄다고 들먹거리는 거하고는 성질이 다르지 러." "두 가지 경우가 다 안 있겠습니까." "일본 간다고 떼돈 버나? 실정을 모리니깨 그렇지." "푸건이어매," "야무어매 말가?" "네 그 댁 형편 피는 것 보고 마음들이 달뜨기는 했을 겁니다." "그 겡우는 모집에 간 기이 앙이고 좀 괜찮은 왜놈을 만내서 따라갔인께, 그런 요행이 어디 흔하든가? 운수 나쁘믄 뼈도 추리지 못할긴데," "시골이지만 그 정도는 다 알고 있지요. 결국 발버둥치다가 지치겠지요." "흠, 그나마 발버둥치는 것은 드문 일이고 지치기는 항상 지쳐 있었닌께. 옛날 옛적, 구릿적부터 지쳐 있었닌 께." 껄껄걸 웃는다. "지주놈들 배때기에 기름 올릴라 카믄 지치고 또 지쳐서 뒤질바께 없는 일이제. 흥." 범석과 헤어진 관수는 김훈장 집 앞을 지나서 외떨어진 한복의 집을 향해 간다. 한북이 집에 들어선다. 얼굴을 한번 쓸어보고 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형님입니까." 방문을 열고 나오며 한북이 말했다. "음." "들어오이소." "그래." "영팔이아제는 만났습니까." "자는 아이를 안고 최참판댁에서 내리오시는 걸 만냈지." "홍이가 대기 허전해하지요?" "머, 삼십이 다 돼가는 놈이, 졸지간에 생긴 일도 아니겄고, 무보 죽음도 못 보고 기일도 모리는 자식도 있는 데 그런 사람한테 비하믄 한 될 것도 없고 원 돌 것도 없다." 그말에는 한북이도 동감이다. 서로 경우는 다르지만 부모 죽음에 대해서는 피맺힌 한을 가진 두 사람이었으니 까. "밤새가 우는데 흥, 우리 어매 죽은 넋인가 우리 아매 죽은 넋인가. 이 한을 자식대까지 내리보내야 하니 기가 차구마." 울타리 위에 머문 달을 바라본다. "들어가입시다." "술 있나?" "있지요." 관수는 신발을 벗는다. 홍이 집에서는 쌍계사에서 소문을 듣고 왔다 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쌍계사에 간 것은 사실이지만 어두워진 뒤 한복이 집에 찾아들었던 것이다. 한복으로부터 용의 죽음을 듣고 선걸음에 홍이 집으로 갔었다.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서 한복이 따른 술잔을 들고 관수는 한동안 술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석이 땜에 큰일이다." 뇌었다. 석이의 그간의 사정은 한복이도 잘 알고 있다. "이번 초상 때도 석이어머니만 오싰더마요." "그 노친네," 하다 말고 관수는 술을 들이켠다. "돋으면 그 계집년 배때기를 푹 찔러 직일 기다!" 술잔을 거칠게 놓으며 뱉아냈다. "노친네도 노친네지마는 일 그르쳤다." "무신 일이 또 있십니까?" "무신 일이 또 있을 정도가 앙이다." "그라믄 잽히갔단 말입니까?" 한복이 얼굴빛이 달라진다. "부산서 튀기는 튔는데 일이 난감하게 됐재. 하마 지금쯤 진주서는 그 노친네가 닦달을 받을 거로?" "우짜다가," 그 말 대답은 하지 않는다. 표면으로 들나지는 않았으나 사건은 두곳에서 추적당한 것에서 발단되었다. 그 하 나는 관수를 쫓던 진주의 나형사가 풍문을 잡았고 그 풍문에 근거하여 이혼 상태에 놓여 있는 양을례를 그슬 렀던 것이다. 의식적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또 남편 하는 일을 명확하게 아는 것도 아니었지만 막연한 느낌은 나형사에게 전달이 되었고 나형사는 관수와 석이는 관련이 있다, 그 심증을 걷혔던 것이다. 그것은 가 정의 불화가 빚은 결과였지만 부산서 강쇠와는 별도로, 석이는 다소 의식 분자라 할 수 있는 계층에 파고 들 어 항일 투쟁이라는 뚜렸한 명재를 내걸고 비밀조직에 착수했었는데 동지 한 사람이 배신을 했던 것이다. 그 것은 석이의 실책이었고 가정 형편과 기화의 죽음이 안겨준 정신적 해이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동지 몇 사람이 잡혀갔고 석이는 튀었지만 사태는 위급했다. 서울서 그 소식에 접한 관수는 황황히 내려와서 우선 석 이를 통영의 병수 집에다 은신하게 한 것이다. 병수하고의 관련은 관수가 기식하고 있는 서울의 소지감이 생 래의 방랑벽도 있어서 이곳저곳 다니다가 우연히 통영에 들렀었고 도자기에 대한 관심은 또한 목공예에 대한 관심으로도 통하는 만큼 명장으로 소문이 난 병수를 찾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교우는 시작된 것인데 알고 보니 관수로서는 병수가 초면이 아니었다. 병수가 그의 아비와 다른 점도 익히 알고 있는 터이다. 병수 역시 서로 모른다 할 수 없는 석이, 아비 업보를 자신이 감당하리라는 생각도 있어서 쾌히 은신처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길게 있을 곳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그 중은 와 안 오는지 모르겄다." "혜관스님 말입니까?" "하도 답답해서 행여 소식이라도 있었는가 하고 절에 갔더마는 깜깜 소식이기는 매일반이라. 아무래도 만주 바닥에서 죽었는갑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더란다. 그자도 이자는 다 늙어빠져서 일하기도 어렵게 된 모양이고 죽을 자리 찾을 만도 하 다마는," 말로는 그랬다. 그러나 관수는 이런 시기, 혜관이 없다는 것에 좌절감을 느꼈고 돌아오지 못할지 모른다는 예 감이 절망을 몰고 었다. 절 문을 나섰을 때, 그때의 심정은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강한 유혹이었다 "어디 깊숙한 곳에 들앉아 자식들 크는 거나 보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한복이를 찾아온 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그것은 아들 때문에 한복이가 석이와 각별한 사이라는 사적인 이유에서보다 이미 한 배를 탄 동지로서 임무를 부과하러 온 것이다. "손발은 있지마는 대가리 없는 형편이라 내가 줄을 지겡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일에서 손 떨고 나오겄나? 중 도지폐가 있일 수 있겄나?" 그 말은 지신을 두고 한 말이긴 했으나 한복이한테도 해당이 되는 말이며 어떤 면에선 협박 같은 것이기도 했 다. 한복은 딋걸음쳐지는 마음이었지만 그러나 관수의 의도가 한없이 섭섭했다. "죽으나 사나 지도 등 돌리지는 않을 깁니다." 성난 목소리였고 관수는 자신의 의도를 간파한 한복이에게 미안하다는, 엷은 웃음을 보낸다. "처음부터 나는 자네한테 미안하다 생각했네. 처음 자넬 만주로 보낼 적부터, 용서해주게. 일을 할라믄은 늑대 겉이 흉악한 마음을 안 가지믄 안 된께. 정에 쏠리믄 십중팔구 일 그르치네. 이번 석이겡우만 해도 그렇제. 그 눔아아가 쇠뭉치겉이 단단하더마는 가정사에다가 또... 하여간 맴 한구석에 열리 있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일이 벌어진 거다." "석이는 지금 어디 있십니까." "음, 거기도 오래 있일 곳이 못 되제." 어디 있느냐는 말의 대답이 그렇다. "그라믄 지가 할 일이 멉니까?" "만주 한번 다녀와야겄다." "혜관스님 뫼시고 오라 그 말입니까." 관수는 고개를 저었다. "석이를 데려다주었으면 좋겄다." "석이를요?" "음. 석이는 나하고 다르다. 나는 흔적이 없인께. 그러나 석이는 진주에 가족들이 있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가족은 움직일 수 없을 기고 또 그아아 심정이 이곳에서는 일 저지르게 돼 있거든. 어차피 당분간은 숨 죽이 고 있이얄 기니, 만일에 그아아가 우떻기 된다믄 다칠 사램이 많은께. 뭐 불어서 그렇다기보다는, 잽히지만 안 하믄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는 것도 앙이거마는, 시초 가정 불화가 여자 때문이라," 그것은 한복이도 안다. 그의 둘째가 석이 집에 기거했던 만큼, 기화 때문에 분쟁이 시작된 것을 안다. "계집 문제로 몰아붙일 수도 있지마는, 어이구 참 술맛 없내." 하면서 관수는 술을 마신다 "아까 홍이 집에 갔더마는, 영팔이아제가 홍이더러 만주로 가라하든데 아마 쉬이 가게 될 거로. 가족을 데리가 느냐 혼자 가느냐 작정을 못한 모앵이더라만." 한복의 해답은 들을 생각을 않고 석이 문제에서 비켜서듯 화재를 돌린다. "그곳 형편이야 자네도 잘 알고 안 있나?" "예. 가야지요 홍이아부지가 그래 그랬었지, 늦었담 늦은 거지요" 한복이도 간도 가는 결정은 당연하다는 듯 "가믄 기반이 튼튼하고 머를 하든지간에 낯설지 않고 홍이 장래를봐서." "장래? 독립운동하라 카믄 우짤기고? 편키 살기는 어러불 긴데?" "그거야 홍이 생각하기 탓이겄지요. 안 하믄 안 할 수도 있는 기고, 공노인이 홍이 오기를 바라는 것은 순전히 개인으로 바라는 기니께요. 먼저 갔다온 사람들도 길상이 형님말고는 다 제가끔 생업하고 살았인께." "하기는 그렇다. 누가 하라 해서 하고 마라 해서 안 하는 거는 아닌께. 그는 그렇고 자네 성한테는 무신 연락 이라도 있더나?" "지난 여름에 일본 갔다옴서, 부산서 한분 만내자, 그래 만나기는 만났소." 별반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말했다. "아무튼 거복이 은덕이 크다." 비꼬듯 했으나 반드시 비꼰 것만은 아니었다. "사람 살아가는 기이 참으로 기기묘묘하다. 검정과 흰빛으로 구벨 지을 수 없는 거이 인간사라 길상이도 하인 신세에서 만석꾼의 바깥주인이 됐는가 싶더마는 타국 땅에서 설한풍 맞으며 편한 사람눈으로 볼 적에는 지랄 겉은 짓을 하고, 니는 반역자 성을 둔 덕분에 애국을 하게 됐이니 기기묘묘한 세상이지 머겠나. 옛날의 선비들 은 악산을 안볼라꼬 부채로 얼굴을 가리믄서 지나갔다 하더라마는 그런 생각 때문에 나라가 망한 기라. 안 본 다고 해서 악산이 거기 없는 거는 아닌께. 악산도 이용하기 나름이제. 또 군자 대로행이라 하기도 하더라만 법 이 마르고 늑대가 없는 세상이라야제? 늑대한테 안 잽히묵힐라 카믄 두더지맨크로 땅속을 갈 수도 있는 기고 스스로 늑대 노릇도 해야, 끝끝내 해야, 석이 맘도 내 알지러. 그놈의 성정은 군자 대로 행이거든. 허허헛...허 허헛...조상과 자손과, 상놈과 양반과 부자와 빈자 그리고 또 인종들이 얽히고 설키서," 빈 술잔에 한복이는 술을 채운다. 그는 관수보다 길상이를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연충서 길상이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너의 아버지는 너 한 사람을 가난하게, 핍박받게 했지만 세상에는 한 사람이, 혹은 몇 사람이 수천만의 사람 들을 가난하게 하고 핍박받게 한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말이다! 지금 당장 목전의 원수는 일본이지만 따라서 너의 형도 목을 쳐야겠지만, 제발 일하라 않겠으니 숨지만 말아라, 너의 자손을 위해서도. 너의 아버지의 망령 을 평생 짊어지고 다니다가 너의 자손에게 물려줄 작정이란 말이야?" 그때 차가웠던 밤바람 생각도 난다. 생소하고 기이한 그곳 풍경도 눈앞에 떠올랐다. 고맙소, 힘든 일을 해주어 서, 하고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던 사나이, 왼편 귀 근처에서 입술 가까운 곳까지 푸른 반점이 퍼져 있던 사 나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도 죽었다고 했다. "아까 홍이 집에서 김훈장 양손자를 만났는데 젊은 아이가 착실해 뵈더구마." 관수는 석이 문제를 팽개쳐놓고 화제를 다시 범석이에게로 돌렸다. "착실하지요. 성품이 진중하고 부친과 함께 농사일을 하면서 보통핵교밖엔 안 나왔어도 식자가 놓다더마요. 양 자지마는 문장가 집안이라 그런지 모리겄소. 아래윗사람 알아보고," 문장간지 우떤지 나 겉은 무식꾼이 알까마는, 오리 새끼는 물로 가더라고 김훈장 냄새가 나더구만." "그거는 형님 잘못 생각이오. 반상을 구벨한다거나 그런 일도 없거니와 젊은 사람이 관이 트여서 글 모리는 사람 편지도 대신 써주고 대소사를 의논하면 대신 읍에도 가주고 면소에도 가서 대신 일을 봐주고 그렇건만 싫은 기색 하나 없으니, 그해서 동네 사람들 말이 김훈장댁 손주가 면서기를 하믄 좋겄다, 식자를 봐서는 면서 기 아니라 군청서기도 하고 남는다 하더마요. 아버지는 마음만 착했지 사람들이 불출이라 하는데 아들을 잘 두었다고 칭송이 자자하지요. "김훈장은 안 그랬나? 농사짓고 글 가르치고 동네 축문은 도맡아 썼고 대소사를 그분한테 의논했고 그래도 상 반 사이를 지른 울타리가 하늘 꼭대기에 닿을 만큼 높았지." "글쎄요." 하다가 한복이는 "그쪽도 그러했지만 형님이라고 억지가 없는 거는 아니제요." "뭐?" "양반이라 카믄 불문곡직 씹어묵을 듯이 미워했으니께요. 그렇다믄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관수는 웃는다. "부모가 물려주어서 반갑잖을 거야 없겠으나 해 안 끼치고 산 사람한텐 억울하지 않겠소? 뭐 상사람이라고 다 착하고 억울한 것만도 아닌데 말이오." "허허헛 그거는 니 말이 맞다. 그러나 해를 안 끼치도 김훈장 같은 사람은 마음의 해를 끼친 사램이다. 지조가 높고 청빈한 거는 좋지마는 종자가 다르다는 생각은 때에 따라서 배고픈 설움보다 더한 설움을 안겨주니 말이 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밤이 깊어져서 두 사람은 자리에 들었는데 피자 간도행에 대하여 해담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해답을 주지도 않은채 다음날 아쳄늘 맞이 하였다. 잠이 깬 것도 밖에서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 때문이 다. "세상에 제삿밥을 아쳄에 나르는 사램이 어 있겄노? 그렇다고 숭보지마라." 야무네 음성이다. "하기사 여기는 외떨어져서 맨 나중인께 더 늦기사 했다마는, 내 깐에는 아침 전에 갈라묵을라꼬 한창 바빳네 라." "형편대로 하는 기지 머를 그리 마음을 써샀십니까." "아 그러시 제사를 뫼시고 막 제삿밥을 나를라 카는데 며눌아아가 딩구는 기라. 가심을 치믄서," "급체든가배요." "일한 끝이라서 얼매나 놀랬는지, 정신이 부실해서 추굴을 받았는가 생각했다 카이. 그도 그럴 것이 사지가 싸 늘해지고 입에서 개버큼을 뿜고 시적 숨이 넘어갈라 안카나. 사람 하나 놓친 가심이라 환장하겄더마는. 딱쇠가 지 사람 뺨을 치고, 그러는데 뱃속에서 꼬그르르 소리가 나더란 말이다. 사지를 주물렀제. 자꾸 주물렸더마는 손에 온기가 돌아오데 딱쇠는 웃마을 도식이 어른을 데물러 가고 나는 연방 수족을 주무르고 십년감수했네 라." "이자 좀 괜찮십니까." "그만한 거를 보고 왔인께. 밤새도록 그 싱갱이를 하니라고 제삿 밥이 어 있더노?" "아무튼지 만분 다행입니다." "어이구 참말이제 근심 떠날 날이 없구나." 야무네는 마지막 제삿밥을 나른 집이어서 그랬는지 떠나지 않고 마루에 걸터 앉은 채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 다. "너거 집에는 금년에 미영 많이 땄제?" "예년하고 같십니다." "이자는 깃구들도 많아지고 큰아이는 시적 장개를 보내야 할긴께 너거 집도 면포는 못내겼제?" "야. 찍어붙일 등이 많아서 장에 나갈 기이 없으십니다. 와요" "그러씨... 맨날 베틀 위에 앉아서 짜니라고 짜도 내솜씨 열다섯 열여섯 새는 어림도 없제. 열석 새 짜믄 대금 산이고, 시어미 닮아서 며눌아이도 선일이나 잘하지 이새는 볼 기이 없다." "다 고를 수가 었겄십니까." "우리네사 열석 새라도 황감하제. 그런데 어디 선사를 좀 했이믄 싶어서," "그러니께" "음 장에 가믄 만수로 있겄지마는 같은 거라도 니가 짠 것만 못하더라. 어짤래? 한 필만 팔아라." "꼭 소용된다믄 그렇기 하지요 머 지 꺼라고 더 나을 기이 없일성 싶은데," "그라믄 한 필 주는 기다?" "야. 요새는 아지매 집은 재미가 납디다." "너거 집은 우떻고?" "우리사 머." "아들은 상급 핵교에 보냈고 또 너거 서방님겉이 엄전하고," "아지매도 아들 잘 낳아서," "그거는 그렇다마는, 우리 푸건이가 지금까지 살았으믄 얼매나 좋았겄노. 물물이 생각이 난다. 그기이 애척을 남기고 갈라꼬," "사우는 새장개 들었는가요?" "새 장개를 들었는지 그거를 누가 알겄노. 어디 있는지도 모리는데" "그라믄 복가에 안 가있다 그 말입니까?" "푸건이 따라 나오믄서부터 그쪽에서는 자석 앙이다, 동기간도 앙이다, 했는갑더마. 종적이 있어야 알제. 그 사 람도 세상을 자파하고... 내 딸 못 잊어하는 거사 얼매나 고마분 일고? 그렇다고 해서젊은 사램이 장개도 들고 자식도 보고 해얄 긴데 어디 가서 멋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믄 푸건이 그놈의 가씨나가 못할 짓 안했나." "아이구 참, 죽고 저버서 죽었겄소? 아무리 살라꼬 해도 못 살고간 사램이 불쌍채요." "에미사 그당장에는 너무 불쌍해서 관 속에 함께 들어갔이믄 싶더라마는 세월이 가이 며느리 보고 손자 보고, 하기사 손자는 말만 들었제 일본 있는 놈을 우찌 보겄노. 그래도 낙 붙이서 사는데 남정네가 더 불쌍타." "누가 압니까. 새 장가 들어서 자식 낳고 사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기는 안 했을 성싶으이. 피나게 벌어서 지제집 약값 대노라고, 그렇기 살리볼라꼬 애를 쓰더마는 죽고 나이 무신 보램이 있노. 이자는 지 오래비도 살 만하다 카고 우리도 살ㅣㄻ이 피지니께 처가라 고 우죽우죽 찾아오믄 손목 잡고 장개가라 하겄다. 성시가 못 돼서 장개를 못 산다믄 내똥 묻은 중우를 팔아 서라도 우리가 장개 보내겄다. 세상에 어느 남정네가 병든 가숙을 그리 섬길꼬? 다 푸건이 그 가씨나 복이 없 어서 갔제." "와 아니라요." "가을이 되믄 찹쌀 두 되 담가서 떡을 하고 밤 두 되랑 싸들고 아 파누운 푸건이 보로 오리섬에 간 생각이 난 다. 그때는 얼매나 기찹 았든지 딸네 집에 갈라꼬 조가비 속에 일전 이전 여비를 모았네라. 그래 사돈댁이라고 간께 딸 준 죄인이라 그 냉대를 머라 캤이 믄 좋을꼬? 돌아올 직에는 눈물이 앞을 가려 길이 안 보이더마. 내가 기찹고 못난 죄로 그런 괄시 받고 돌아간다마는 아파누운 내자식 조석이나 챙기주까? 시퍼런 바닷물에 빠져 죽었이믄 싶더마. 그것도 다 옛말이 됐는데 가을이 오믄 생각이 안 나나." "우리라고, 그 기맥힌 말은 책으로도 다못 모울 깁니다." "그거사 내가 어디 모리나. 너거 산 역사는 잘 알지, 알고말고, 이자는 밥술 두고 묵은께, 이 보래, 내 말 좀 들어봐라. 그러씨 사램우 맴들이 와 그러꼬? 이거는 우리만 보고 그러는 기이 앙이고 너거 집 우리 집을 두 고," "와요?" "오라니? 니는 모리나?" "뭐 말입니까." "아 그러씨 우리가 못살 직에 천대를 복 받듯기 안 받았나? 그런데 이제는 우떻노? 니나 너거 서방님이나, 또 나하고 우리 딱쇠도 마찬가지제. 우리가 천성으로 잘산다꼬 갈롱을 피울 사람들가? 잘 산다꼬 빈치를 했다 말 가? 또 잘살았이믄 얼매나 잘살았겄노. 게우 어리 필 만하다 그건데 세상에 이자는 밥술 묵는다꼬 눈에 까시 앙이가 말이다. 너거는 머심아를 상급 핵교에 보냈다고 얼매나 말들을 하노. 또 우리보고는 최참판댁에 가서 알랑방구를 뀌어서 땅을얻었느니 우리 얀무가 일본서 도둑질을 햇느니, 세상에 그런 벼락맞일 소리가 어 있겄 노 북동네가 억울키 죽은 지 얼매나 됐다고그 지랄들을 하노 말이다. 필시 그놈의 봉기 늙은 것하고 복동이놈 그제집하고 작당이 돼서 말들을 꾸미는 모앵인데," 흥분하여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이 될모양이다. 어쩌면 그얘기를 하려고 제삿밥을 맨 마지막에 가져왔는지 모 른다. 다른 때 같으 면 내다보며 인사라도 할것을, 한복이는 바깥 얘기를 귓가에 흘려 들으면서 반듯이 누운 채 천정만 멀뚱멀뚱 올려다보고 있었다. 관수는 가슴에 베개를 안고 엎드린 채 궐련을 피우며 역시 말이 없다. 아직 햇살은 퍼지지 않았고 장지문엔 옥색 아침빛이 스며들고있었다. "그 소나아에 그 제집이라, 그러씨 아침에도 제삿밥을 가지고 안갔더나? 봉기 그 늙은올빼미 겉은 눈을 회뜨 고 말 한마디 없이 뒷간을 가더마. 복동네 글 일 따문에 나를 안좋아라 하는 거는 알지. 그래도 이웃간에 그집 만 쏙 빼놓겄더나? 사람이 우찌 그리 하노 말이다. 그런데 할망구는 머라 칸 줄 아나? 이리저리 해서 제삿밥 이 늦었다 한께 야무네 니는 우찌 그리박복하노, 딸 하나 잃었이믄 될 긴데 며느리꺼지 잡아묵으믄 안돼제, 세 상에 안그라더나? 분해서 살이 떨리더마는 성님 무신 말을 그리키 합니까, 우찌사램이 안 아프고 사요, 이자 는 괜찮은께 섭섭히 생각 마소, 했더니 누가 제삿밥 갖다 돌라 캤나 와 아침부터 재수 없게 제집이큰 소리고, 하참 갈지도 못하고," "말해봐야 소앵이 없이께 야무어매가 참으소 우리도 속 틀어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마는 아아 아배가 참아라, 서천 쇠가 우는 갑다 그리 생각해라 하고 하기사 요새 당하는 거는 아무것도 아닌 기라요 우리 아아 아배 어릴 직에는 참말로 그럴 수 없이 천대를 하고 말말이," 하는데 한복이댁네 목이 잠간다. "인간 악종은 새로 환생을 해도 못 고치는 갑더라. 저거들은 갈불라 카믄 나도 그 문전에 얼씬도 안할 기다마 는 빌어묵을, 못살믄 못산다고 천대, 밥묵으믄 저것들이 와 죽 안 묵고 밥 묵는가 하고 심술이고, 참말이제 아 들 자식이라도 없었이믄 칼을 물고 안죽겄나? 그러이 복동네가 죽었제." "참, 이자 그만들 하소." 관수가 방문을 열고 나간다. "하마나 하마나, 방안에서 똥싸겄거마는," "아이고 나는 또 누구라고?" 야무네는 마루에서일어서며 웃는다. "초상에는 못오고 이제 왔는가배?" "야. 볼일이 있어 어디 갔더마는, 기별을 못 받았소." "그래도 늦기나마 왔인께 고맙다. 어디 오고가는 일이 그리 쉬버야제. 홍이아배가 세상을 버리고 난께 죽지 뿌 러진 새맨크로 홍이 가안됐더마. 어느 형제가 있나 일가 친척이 있단 말가" " 그래서 안 왔십니까." "온 김에 추석이나 새고 가지?" "여기서 추석 샐건덕지가 있어야제요. 남과 겉이 부모 산소가 있는 것도 아니겄고," "그, 그거는 그렇지마는, 아이구 나도 모리게 말이 길어졌네. 집을 얼산겉이 해놓고," 관수와 얘기하는 동안 한복이댁네는 부엌에 가고 없었다. "나 간다아!" 부 엌을 향해 소리지흔다. "야. 잘 묵겄소." 한복이댁네가 내다보며 인사한다. 야무네는 삽짝을 나서다 말고돌아본다. "우리집에서 밥 한끼 안 묵고 갈래?" 한탄하고 흥분하고 억울해하며 부산스럽게 말하던 야무네, 그러나 함지를 이고 종종걸음으로 가는 그의 뒷모 습은 과히 불행해 보 이지는 않았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 되고, 석이어매가 이만하믄 살거로, 했일 때 야무어매는 지지리 가난했는데 야 무어매가 이만하믄 살거로, 그 참석이어매를 어쨌이믄 좋을꼬.' 뒷간에 갔다가 세수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한복이는 없었다. 관수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할일 없이 또 담배를 붙여문다. 어젯밤 한복의 대답은 못 들었으나 관수는 그가 거절하지 않을 것을 믿었다. 그러나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복의 간도행은 석이를 무사히 넘겨중는 데 목적이 있지만 혜관의 소식도 알아 야 했고 가장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데 목적이 있지만 혜관의 소식도 알아야 했고 가장 최악의 사태에 대비 하는 데 종전까지 이어지고 있던 길상을 대신하는 다른 줄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만큼 석이가 만주로 가는 데도 피신과 함께 그곳과의 연결을 짓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화급히 필요로 하는 자금문제도 있 었다. 무사히 석이로 하여금 국경을 넘게 하는 것과 여러 가지 주선, 그 것은 그곳을 두 번이나 다녀온 한복이 만이 할 수다녀온 한복이만이 할수있는 일이었다. `석이하고 함께 가는 것은 한복이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지. 한복이그 점을 꺼리는 것은 당연하다. 위험하니까.' 절문을 나섰을 구때처럼 형용할 수 없는 와로움, 절망이 치민다. 획획 돌아가던 생각도 멎어버리는 것만 같았 다. 주변 사정도 그러했으나 갑자기 자기 자신이 쓸모없는 일간이 돼가는 것은 아닐ㄲ? 하는 위구심도 모릿속 에서 맴돈다. 솥발은 세개요 상다리는 네 개다. 세 개나 네 개는 능히 무게를 지탱한다. ㄱ러나 두 개라면? 한 개라면? 두개, 한 개가 바뎌야 하는 위태로움이 관수로 하여금 갈팡질팡, 이러기는 처음이었다. 김환이 죽었을 때도 이렇게까지 당황하지는 않았다. 서울 소지감의 집에 피신해 있을 적에도 여유는 있었다. 한복이 들어왔다. 책상다리를 하고 담배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눈을 치뜨며 쳐다본다. "어이 갔더노" "뒷산에 갔다가," "너 어매 산소에 갔더나?" 대답이 없다. 한참 있다가 "형님은 어디로 가실랍니다." "행방이야 니가 정해야제." "제가요?" "니가 결정지우는 대로 해야 한 하겄나." "야. 그라믄 형님이 지시하이소." 17장 사랑 기예여학교, 그것도 야간이어서 보통학교를 나온 학생도 있었지만 중퇴했거나 교회에서 설립한 야학을 다녔던 아이들도 많았다. 뱃속의 아이가 팔 개월쯤은 됐을까 얼굴에 기미가 슨 정귀애라는 여선생이 을씨년스런 동작 으로 책보를 싸고 있었다. 그는 수예 선생이다. 발가숭이 전구지만 촉수가 높아서 교무실 안은 환했다. "우선생은 안 가시겠어요?" "가야지요." 인실이 기운 없이 대답했다. "어떠세요? 해볼 만한가요?" "글쎄..." "오래견디는 사람이 없는데 우선생은 어떨는지," "정선생님은 오래 하시지 않았어여?" "나야 뭐 생홀 땜에 할 수 있나요?" "다른 사람들은 나은 직장을 찾아가는 거지요. 알고 보면 보통학교보다 못하거든요. 실습을 할래야 시설이 안 돼 있구," "그저, 시집갈 동안을 메꾸어주는 거지요." "하지만 대개 려운 아이들일 텐데 앞으로 독립할 수있는," "그거 잘못 생각하시는 거예요. 야간학교니까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한다,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요. 또 남학생 의 경우가 그러니까요. 아직조선에선 전혀 없다 할 수는 없지만 대개는 집에서 가사를 돕다가 밤에 나오는 학생이고 어떤 사정에서 보통학교를 중퇴했다가 나이 차서 갈 수 갈수 없으니까 야간에 오는 수가 있지요. 반드시 가난한 가정애들만 오는 건 아니에요. 기초가 안 돼 있어서 정 규학교를 못 가고 오는, 대개 그래요." 기미가 잔뜩 슨 정귀애 얼굴에는 이 철없는 아가씨야 하는 조롱의 빛이 있었다. "하긴 그럴 거예요. 여자애들 한테 일자리가 흔한 것도 아니겠고 고무 공장이나 방직 공장 같은 곳에서 일하 는 애들도 시적 먹어야 하고 가족들 부양해야 하고 공부 같은 건 꿈도 꾸어보지 못한 무지갠지 모르지요. 일 전에 남선 일대를 여행하면서 보았는데요, 해변소도시에서 어업이 성하니까 그물 짜는 공장이 있었어요. 경영 은 일본인이 하구요. 한데 품살ㅅ이란 생활비의 절반이나 될까요? 그것도 기술이 좋은 사람들인데 점심 싸와 서 먹는 사람은 드물었어요.영양 부족으로 얼굴들이 샛파래요." "글쎄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요." 냉담한 반응이다. 인실은 빤히정귀애를 쳐다본다. 생활에 지친 얼굴, 그도 생활의 노예였던 것이다. "그런 데 비하면 이곳 아이들은 귀족인 것 같아요." "네.돈푼 있는 장사꾼 딸도 있고 시골서 곡식섬이나 하는 집의 딸도, 딴에는 공부해보겠다고 올라온 모양인데 자격 부족이니 어쩝니까? 이런 학교라도 안 다니는 것보다, 그래도 시골 가면 뻐기겠지요?" 심술궂기조차 한 어조다. 인실은 회미하게 웃는다. "다갔는ㄷ 우선생은? 나 그럼 먼저 갑니다." 인실은 자신도 일어서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은 하면서 움츠러들듯 양 어깨를 좁힌다. 인실의 생각은 비약한다. 왜 명휘가 최서희의 막내딸_인실이는 기화의 ㅏㄷㄹ 양현을 서희 소생으로 오해했다_에 대하여 민망할 만큼 그리 꼬치꼬치 캐물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명희의 인품을 보아 석연찮은 일이었다. 꼬치꼬치 물었을 뿐만 아니라 인실이 자신도 불안해질 만큼 명희의 태도는 균형을 잃은 것이었다. 허둥지둥 서두는가 하면 암울한 눈이 창밖으로 향해지곤 했다. `아이가 없어서 그랬을 테지.' 그날 돌아오면서 내렸던 결론을 인실은 자기 손톱을 들여다보며 되풀이한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란 서로가 다 언동에 질서를 유지하는 법이다. 그런 관계에서 명희를 대해왔기 때문에 명희의 그런일면을 몰랐는지도 모른 다고 인실은 생각한다. 명희에게 느끼는 실망은 그러나 이상하게 친근미를 갖게 한다. 귀족으로 보일 거라는 생각을 인실은 한 일이 없다. 여자다운 샘이나 집착을 볼 수 없었던 명희는 그런만큼 만사에 무관심한 것 같 았고 거리를 느끼게 하였고 그 거리 때문에 인실은 옛날 명희를 동경했었다. 이미 그때 인실은 명희를 귀족적 인 여성으로 생각했었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늦겠다!` 시계를 보며 일어 섰다. 엉성한 목조 건물, 손바닥만한 운동장을 질러서 나오며 인실은 춥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명희를 생각한 것은 앞자리에 앉아 있던 가리마를 똑바로 낸 여학생 얼굴이 명희를 조금 닮았기 때문 이라 생각한다 . 그리고 생각도 해본다. 근본 문제란 무 엇인가. 꽤 저물었기 때문에 골목은 아니었지만 희미해진 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전봇대가 우뚝하니 시야를 가리곤 한 다. `남들이 뭐라든가? 짐안 좋고 먹고 살만하고 그래서 계짐아리를 동경 우ㅠ학까지 시켜놓으니 별 희ㅎ한한 시 ㅈ을 다 한다, 독립운동인지 뭔지 그런것은 사내들이나 할 일이지, 아아 이건 남의 말이 아니었지. 바로 외할 러니가 하신 말씀이었구나.` 땅을 내려다본다. 사방에서 부딪쳐오는 것은 닿아서 아픈것뿐이었다. 조금 전의 정귀애의 언동도 아픈 것이었 다. 내살기도 바빠요, 얼굴이 샛파랗다는 여공 걱정이야 당신같이 책임이 없고 먹을 것 것정 없는 사람이나 하 는 거예요, 정귀애는 언외에 그런 말을 담고 있었다, 참된 삶이란 반드시 사회의 됴구와 부합되는 건 아니야.` 인실은 가장 가혹하고 금욕적인 것, 그것이 종교의 형태든 자연현상에 부딪침으로써겪는 일이든 그런 곳으로 도피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어디까지 인간은 그런 것에서 견딜수 있는가. 그리고 고독한 그런 고난의 길로 도피한다면, 그렇다면버리고 혹은 도망쳐버린 현실보다 견딜만한 것이더란 말인가. "히토미상" 인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걸음을 멈춘다. "히토미상" 오가다 지로, 그는 남의 집 담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나 아까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뭐라구요, 저를 말예요?" 뻔한 애기를 인실은 나직이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여기 나온다느 ㄴ애기 듣고,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기에 혹 길이 엇갈리지 않았나 생각했어요" 꾸중들을 각오를 한 알이같이 양복 윗도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언제 오셨어요?" "어제 저녁때 서울에 닿았습니다" "왜 오ㄱ셨어요?" 나란히 걷는다 "히토미상 데리러 왔지요." "우리 애기, 다 끝나지 않았어요.?" "나는 한번도 애기 끝낸일 없었습니다." "한쪽에서 끝내면 끝난 거예요." 화를 내면서 그그러나 인실은 울음을 참는 것 같다. "하여간 어디든 갑시다. 조용한 데로가서 얘기합시다." "너무 늦었어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인실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웃는다. 그 말은 들은 척만 척 오가 다는 "어디로 갈까?" "내일, 내일 만나면어때요?"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이대로 헤어지면 히토미는 도망치고 말겁니다." "그럼 어디로 가지요?" 인실은 저망적으로 말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증오했던 민족, 대일본제국에 국적을 둔 사나이, 순수한 일본 남 자를 헤어져 있는 절대로 합칠수 없습니다. 친구도 될 수 없어요." 체포되기 전에 인실이 오가다의 마음을 어느 정도 허용했던 것은사실이다. "하여간 날따라와요." 모래 위에 다리를 뻗으며 인실이 뇌었다. 물결 소리, 모래의 촉감, 오가다와 헤어지면 그때부터 지옥을 느끼겠 지만 순간 인실은 가장 편한 곳에, 있어야 할자리에 자신이 와 있는 것 같은 안도를 느낀다. "맞아요. 나는 유령입니다. 동경에 있을때도 나는 유령이 되어 바다를 넘어 히토미 옆에 있었으니까." 웃는다. 그러나 오가다의 웃음에는 초조와 불안이 있었다. "나는 유령이지만 히토미는 허영 덩어리야." 오가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인실은 알고 있었다. "동경서는 어떻게들 지내고 있어요?" 한숨을 내쉬며 오가다는 "시끄럽지요." 담배를 붙여문다. "낮에 신상(선우신)을 만났어요" "그분한테 제가 나가는 곳 들으셨어요?" "아니," "..." "신상하고 있던 사람,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여자군요." 오가다는 시인하듯 대답을 안했다. "많이 놀림을 받았나 부지요?"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처음으로 조선 사람도 편견이 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히토미상을 비롯해서, 울 분 느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한다는 것은 순수한 것입니다. 내가 일본의 위정잡니까? 조선 총독부의 관립니까? 남의 사랑을 욕되게 하는 사람은 그사람 자신이 불결하기 때문입니다." 벌떡 일어선다. 동멩이를 주워서 힘껏 강물을 향해 던진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나도 오가다 당신만큼 당하는 일이에요. 우리는 둘이 다 이단자예요. 반역자예요 용 서받지 못할 여자예요. 민족반역자, 뿐인가요? 매춘부보다 더러운 여자, 우리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지요? 그래 도 나를 갈보, 왜갈보라 한답니다.' "히토미도 나빠요! 비겁하고 겁쟁이! 사회주의에 공명하면서 가장보수적 거짓말쟁이요! 그래 거짓말쟁이야! 일 본인에 댓한 증오감 때문이라구요? 그건 변명에 불과한 거요. 히토미는 세상의 요설이 무서운 거구 민족을 배 반했다는 그 거창한 소리가 듣기 싫은게요. 용기가 없어.그건 신념이안이오. 허영이며 체면 치레요. 그리고 당 신이 당신 나라를사랑한다는 것, 그것도 허영이오.처음에 히토미는 일본인을 다 싫어했소원수라 생각했어요.그 래서 나에게도 가슴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나도 일본인이었으니까요. 그것은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이전의 감 정이며 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히토미는 나에게 대한 애정을 감추려 해써요. 거것까지도 나는 이해합니다.그러나 다음 히토는 나를 사랑했습니다. 사랑했지요. 사랑했다면 일본인이라 하여 거짓 증오를 할 수 있습니까?" "오가다상을 증오한 일 없었어요. 친구일 때도."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원수가 아닌데 만나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데 결혼을 어째서 못합니 다?" "..." "세인의 입이 무섭지요? 나는 무섭지 않습니다. 불쾌할뿐입니다. 그야말로 불결하게 상상하는 사람을 증오합니 다. 정말 미칠 지경으로 미웠습니다." 나중의 목소리는 울먹이는 것 같았다. 바로 그러한 오가다를 인실은 사랑하게 됐는지 모른다. 소년 같은 사내 , 집 잃은 고아 같은 사내, 한국의 남자들한테서는 좀체 없는, 나니 어리지도 않은데 어린애 같고 신중하면서 도 솔직하고 소심한 것 같으면서 엉뚱하고. 담배를 붙여물면서 오가다는 인실이 옆에 와서 앉았다.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우리 일본 가서 북해도나 가서 살아요." "당신 사촌누이는 어떡허구요?" "문제는 나한테 있는것 아니잖소." "..." "일본이 싫으면 중국에 갑시다." "우리 나라 독립운동 해주시겠어요?" "그건 졸렬한 얘깁니다. 그 일은 두사람 밖은 일이지요." 껴안았으나 인실의 얼굴만 쳐다본다. "사랑은, 남녀의 사랑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 이상을 포기하지는 않을 거요." 인실은 오가다를 두팔로 떠밀어낸다 "오가다상." "말하지말아요." 오가다의 목소리는 절망적인 것이었다. "나약속하겠어요." "무슨 약속!" "나, 오가다상을 위해 결혼 안 할 거예요. 당신에게 하는 약속이에요." 인실이는 울어버린다. "용기가 없어요 나는 겁쟁이예요 부모 형제 때문에 그러는 건아니에요. 허영도 아니에요 남의 이목도 안니에 요. 내가, 내가 나를 도난 내가 당신에게 가는 것을 허락할수 없어요. 남에게 는 이미 낙인이 찍혔어요. 더이상 무슨 말을 듣겠어요? 이해하고 옹호해주는 사람은 숫 몇 사람에 불과하구요." 열두시가 다디어 이들은 헤어졌다. 집에 갔을 때 유인성은 자지 않고 인실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요? "글쎄 난 모르겠는데," "피곤해요. 내일 아침이면 안 될까요? "여태 아가씨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알았어요." 인실은 밖에 나가 세수를 한뒤 울었던흔적이 남았는가 잠시 거울을 들여다본다. "오빠, 부르셨어요?" 사랑 앞에서 인실이 말했다. "오냐! 들어오너라." 인성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얼핏복기에는 퍽 유순한 얼굴이다. "학교는 어때? 나갈 만하냐?" "기대한 것보다는," "그럴 테지, 아직 여자애들한템 암흑기다. 더세월이 흘러야겠지." "할말씀이란," "음, 대단한 거는 아니고 천천히 하지." "..." "며칠 전에 외가에 갔다가 이제는 말씀을 안 하시려니 했는데 왠걸, 할머니 앞에 한 시간이나 꿇어앉아서 야 단을 맞았다. 인실이 네 잘못이 아니라 시는 게야. 모두 오라비 잘못으로, 내가 기운이 있다면 몽둥이로 종아 릴 치겠다 히시더구나." "어ㅣㄷ 오빠잘못이겠어요?" "내가 성급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보수적이다, 뭐그런 일은 그렇고, 너 결혼해라." "네?" "결혼하는 거야. 내 그 말 할려고 시회를 보아왔다마는," 인실은 고개를 떨어뜨린다. "사람이 똑똑하고 생각도 건전하니까 너만 결심하면 별문제가 없을 거다." "세상에 떠도는 얘기 같은 것 불문에 부치겠다 그러든가요?" "넌 지나치게 명확한 것 그게 탈이다. 처녀 애가 수치심도 좀 가녀보아." 농담으로 돌리며 인성ㅇ느 웃었다. 물론 헛웃음이었다. "제발 부탁이야. 외할머님 앞에 꿇어앉지 않게해다오." "오빠." "음." "저결혼 안 할 거예요." 인상은 당활해지는 것을 감추며 "그건 어릴 때 하는 얘기야." "결혼 안 할 겨예요, 평생." 인성은 허둥지둥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너 오늘 오가다를 만났냐?" "..." "왜 만나!" 소리를 팩 지른다. "저는 결혼 안 할 거 예요." 인실은 화를 내는 오빠에게 되풀이하며 나직이 말했다. 결혼할 것을 강압적으로 말한 것도 아니었는데 인실은 단호하고 강경하게 선언하듯 말했던 것이다. 인성은 순 간 의아해하는 것 같았으나 이내 얼굴이 굳어졌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고가다가 왔다는 얘기는 저 녁때 찾아온 선우신에게 들었다. 일말의 불안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또 오가다가 서울에 왔다면 곧장 자기를 찾아오는 것이 지금끼지의 관례였다. 그런데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도 마음에 걸리었다. 게다가 인실은 평소와 달리 귀가가 늦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성은 설마 했다. 누이동생이지만 여자로서는좀 지나치다 싶을만 큼 성격이 강인하여 근심했을 정도였으니까 믿었던 것이다. `왜 저렇게 강경한 어조로 말해야 하나.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쩌면 인실이는 오가다에 대한 감정을 저런 식 으로 내게 고백하는걸까?' 그러나인성은 의혹을 털어버리듯 종전과 같은 어조로 "혹 오가다하고 어쩌니, 하는 세평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건가?" ".." "네가 그따위 뜬소문 때문에 상처를 입었으리라는 짐작은 했고나도 불쾌하기 짝이없었다."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면" "..." "결혼 안 하겠다는 이유가 뭐냐?" "..." "네가 남다른 아이라는 것 오래비도 안다. 그러니까 독립운동에 트신하기 위하여 결혼은 아니 하겠다 그말이 냐?" 인실은 입을 떼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다물고 있다. 콧날이 날카롭다. 내리깐 눈은 긴 꼬리를 물고, 소위 범눈썹이라 하던가, 흩어지고 알맞게 짙은 눈썹, 소녀라기보다 소년 같은 모습이ㄹ다. 나이도 적잖은 스 물일곱인데, 인성은 주이동생이 그런 모습일 때말을 안하는 습관을 잘 알고 있었다. 말을 아 하려 드는 것은 무엇을 의밋하는가, 인성은 이성을 잃었다. "너, 너 ㄴ설마," 하다 말고 담배를 붙여문다. 성급히 빨아당긴다. 그래도 인성은 냉정을 되찾지 못한다. "오가다 때문에 결혼 안 한다는,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 "..." "그런 일은 절대로 없겠지?" "..." "왜대답을 못하는 게야. 대답을해!" 인실은 더욱더 고개를 숙인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안 될 말이야!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잉야!" "네. 알아요. 절대로 안되지요." 비로소 인실의 입에서 말이 튕겨져 나왔다. 안되는일이라고 시인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오가다에 대한 마음, 사 랑의 고백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그래서 겨, 결혼 안 하겠다," 말끝을 잇지 못하는 인설의 얼굴은 주황빛이었다. 야밤에 고함을 쳐선 안 된다는, 가족이 알아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인성을 간신히 휘어잡는다. 항간에 이러쿵저러쿵 말도많았다. 불쾌할 정도가 아니 었다. 그런 말을 입 에 올리는 사람들의 입을 찢어놓고 싶을 만큼인성은 분노했다. 그러나 인성은 인실일 믿었다. 그의 치열한 배 일 사상을 믿었고 강인한 성격을 믿었다. 일말의 불안, 오가다가 왔다는 소식과 귀가가 늦는 인실이, 해서 인 성은 자리에 들지 못하고인실이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런 사태는 상상하지 않았으며 전혀 대비도 없었다. 상상 만 해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그랬는지 모른다. "어찌 너같은 애가, 너 같은 애가 그, 그럴수 있나. 너 같은 애가," 신음하듯 뇌인다. `그놈은 누구냐! 오가다 그놈은 어떤 놈이냐!' 민족의식 없이, 거의 동족같이 상종해온 오가다 지로, 그의 결점까지 인간적인 매력으로 보아왔다. 더 솔지기 말하자면 동생같이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했던 오가다가 갑자기 흉물같이 압도해온다. 송충이같이 징그러운 존재로 의식을 점령해온다. 이민족, 정복자, 거대한 발바닥으로 강산을 깡그리 밟아 뭉개는 괴물. 인성은 머리 를 흔다느다. 그런 악몽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듯이. 누이동생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또 결혼을 하겠 다는 것도 아니요 맺어질 수없지 때문에 어느 누구와도 결혼을 아니하겠다는 감정 그 자체 때문에 오가다는 돌연 괴물로 변신한 것이다. 판단이나이해나 가려가 끼여들 여지 없이,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는 가조차떠오르 지 않는 본능적인 거부 반응만이 아우성이다. 남자들은 더러 일본 여자와 관계를맺었고 인성도 그런 사내들 을 몇 보아왔다. 물론 바람직한 일로는 생각지 않아ㄲ지만 이렇게 결렬항 치욕과 혐오감을 갖게 하지는 않아 ㄲ다. 저 북만주 땅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는 일병에게 능욕 당한 조선의 여인들이 자결로써 생을 결산한 사건 들은 가슴에 응어리져 남아 있는데. 한동안 오누이는 대좌한 채 침묵을 지킨다. 18장 결혼 "골벵도 예사 골벵이 앙이다. 정 니가 이럴 것 겉으믄 내 지금이 라도 가서 돈 돌리줄란다." 어미한테 등을 돌리고 앉은 채 숙회는 대꾸를 안한다. 팔짱을끼고 쭈그려앉은 숙회네는 달비를 물린 머리를 곱게 얹었고 나들이 차림이다. "하루 이틀도 앙이고 이기이 어디 할짓인가? 니때문에 식구들 모두가 지레 말라 죽겄다. 니가 가심이 아프믄 이 에미ㅏ는 가심이 안 아프겄나? 그만 털털 털어부리고 나랑 함께 예배당에 나가자. 미등ㄹ 곳은 주님밖에 더 있겄나? 예배 디리고 나믄 한결 맴이 깨운할 기거마는, 자아 옷 갈아입고 나랑 함께 가자." "남사스러바서 못 가겠소." 주일마다 되풀이되는 대화다. "그라믄 펭생 방구석에서 햇볕도 안 보고 이리 살 기가! 가씨나가 아이를 배도 할말이 있 카는데 니가 남 못 할 짓을 했다 말가? 죄를 져도 그놈이 졌고 몹쓸 짓을 해도 그놈이 했제." "알면서 엄마는 와 자꾸 그런 소릴 하요!" "어나마나, 아나마나 이치가 그렇다 그말 앙이가. 내가 지금 와서 옳고 그른 것을 가리자 하는 거는 앙이다. 이제는 쏟아진 물이고 깨진 그릇인데 생각하늠 머하겄노 니가 곯지 . 제발 맘 잡고 어디 보자아 하고, 사람의 일은 모리네라, 짧고 긴 거는 대 봐야 안다고 어디 다 살았나? 앞길이 구만리 겉은데, 그라고 성심으로 살믄 은 설마 주님이 니를 버리시겄나. 원망 말고 그러믄 은혜를 주실기다. 자아 자아, 숙회야. 설사 니가 그런 놈 하고 혼인을 했다 하더라도 니를 눈밑으로 보는데 버릴라 카믄 사정 보겄나? 그리 생각한다믄," "결혼을 했더라면 더 많은 돈을 떳떳하게 받을 수 있었겄지요." 등을 돌린 채 목만 비틀듯 어미를 쳐다보며 비웃는다. 숙회네는목줄기에서 부터 벌개진다. 눈에 눈물이 고인 다. 그러니까 그저께 밤에 숙회네는 양교리댁에서 일금 오백 원을 받아온 것이다. 조촐한 가와집 한채 값은 되 는 급액이다. 처음 그들은 사람을 기켜 그돈을 보내왔었다. "우리가 양교리댁한테 돈 받을 이유가 없느데 우쨋 그 댁에서 돈을 보냈는가 만내보아야겄소. 그렇지 않다믄 허정윤이가 지 발로가지오라카소." 숙희네는 치마끈으로 허리를 묶으면서 새파란 얼굴에 입술을 실룩거리며 말했던 것이다. 허정윤이 거져오라는 말이 주효했던지 양교리댁에서 그러면 만나자는 제의가 왔다. 양재문과 숙희네가만나는 자리에 소림의 어머니 홍씨도 함께 있었다. 집을 나설 때는 별의별 생각을 다했는데 숙희네는 으리으리한 양고리댁, 사는 풍도가 상 상 이상으로 거창한 데 풀이 죽었다. "얘기를 듣고 보니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소이다 우선 사과부터 드리지요." 양재문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숙희네는 또 한 번 훌이 죽었다. "나도 자식자진 사람이니 댁의 억울한 심정을 왜 모르겠도. 우리가 파혼을 해서 정윤이 그사람이 댁의 아이랑 혼인을 하게 된다면 그러고 싶은 심정이오." 그것은 노회한 얘기다. "향학열이 불타는 젊은 사람이 상대방에서 도와 주겠다 한는데 거부할 사람이 있겠는가? 상대가 여자니까 문 제가 생긴 거지. 얘기 들으니까 책임 질 일은 아니 하였더구면." 홍끼가 아니꼽다는 듯 말했다. "실은 우리도 혼담이 오고간 뒤 알았던 일이었소. 정윤이 그 사람도 맘이 약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만 결 혼할 생각은 없었다., 그 말은 확실히 하더구면요. 파혼을 한다 해서 댁의 아이한테 돌아갈 사람도 아니고 학 업을 중도지폐하여 유능한 인재가 폐인이 된다면 그것은 피차간에 잘하는 일은 아닐 것이오." 자신들을 합리화시킨 말이었지만 어쨌든 그른 말은 아니었다. "정윤이도 학생의 신분이라 마음은 있겠으나 무슨 돈이 있겠소. 하여 본인도 몰래 우리가 대신 하려 했던것이 오. 댁의 딸아이도 \희망 없는 사람 언제까지나 연연해하는 것보다," "연연해하기는 누가 연연해합니까. 소위가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되고 없이 산다고 버르지맨치로 밟아뭉개는 그 인사, 잘되기를 바랄 사램이 어디 있겄소." 숙희네는 울먹였다. "그것은 그쪽 생각 아닌가. 한쪽에서 작정한 대로 다 될 일이라면 왕빈들 아니 될까? 손바닥도 맞아야 소리가 나지, 안 그런가?" 양재문은 정중했으나 홍씨는 말씨부터 소위 상것 취급이다. "허허허," 양재문이 눈살을 찌푸렸고 숙희네는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그거사 당자들이 알 일이제요. 그라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실 기고요." "육례를 갖추고 만난 사람도 안 살려 하면 못 사는 게지. 남자란 그러기 예사, 잘되길 안 바란다는 악담까지 할 것 없고요, 딸자식 간수 잘못하여 그리 되었는데 명천의 하느님까지 불러댈 것 있겠나?" 조소를 띤다. "예애, 천하고 없는 것들이 딸 덕에 쌍가마 탈 긴가 싶어서 간수를 안 했십니다." 숙희네는 홍씨를 노려본다. "아무리 세상이 막돼먹었기로 뉘 앞에서 눈을 부릅뜨나!" "예애, 강약이 부동이고 지체가 하늘 땅맨치로 다르다는 것을 와 모르겄십니까. 하지마는 한 가지 같은 기이 있십니다." "뭐라구?" "마님도 한 딸의 어머님이고 지도 딸자식의 에밉니다. 어느 부모치고 제 자식이 안 귀엽은 사램이 있겄십니 까?" 홍씨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귀여우면, 그래 귀여우면!" 홍씨 얼굴이 험학해졌다. 대등한 사이처럼 대어드느느 것은 심히 모욕적인 것이었으며 더군다나 딸 소림을 동 렬에 세워놓고 겨루는 것 같은 느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것이 더듬지도 않고 또박또박 말하는 그것도 화가 났다. "감히 내 집 문전에 서지도 못할 것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허허어, 부인은 잠자코 계시라니까!" 결국 양재문이 달래고 어르고 해서 숙희네는 오백 원을 받아쥐었던 것이다. 어미가 돈을 받아 돌아온 그날 밤 엔 정작 숙희는 말이 없었다. 넋빠진 사람같이 어미가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았다. 그런데 하룻밤 자고 난 뒤 숙희는 노골적인 적의를 어미에게 나타내었다. 위로하는 동생댁에게 "올케는 신이 나겠소. 오래비 장사 밑천 두둑하게 생겼으니, 호호홋, 잔치라도 한판 벌여야겠소." 동생댁은 어떻게 할 바를 몰라했고 그 말은 숙희네도 들었다. "장사 밑천이라니!" 하다 말고 숙희네는 주춤했다. 숙희 눈에 푸른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입술을 비틀며 웃는 얼굴이 간담을 써늘하게 했다. '이게 미치차 카나!' 그런데 오늘 또 돈에 대하여 숙희는 비튼 것이다. 숙희네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낸다. "내가 오기로만 하라 카믄 그놈의 돈 그 집구석에 가서 메어치고 접다마는, 자식 하나 없는 셈치고 니사 혼삿 날에 가서 굿을 치든 매구를 치든 우찌 그리 에미 맘을 모리는고." 숙희는 아까처럼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다. "그래도 더러운 기 정이고 간에 붙었던 기라... 내가 참을밖에더 있겄나. 지도 얼매나 억울하믄 그러까, 에미보 고 악정을 내지 뉘보고 하겄나 싶어서... 아무리 돈이 좋기로 자식하고 바꿀 그런 오살할 에미가 세상에 어 있 겄노. 나도 그 돈 받아 나올 직에 그만 그 문전에서 칼을 물고 죽어버리까 싶었다. 우리 살림이 하다못해 백석 꾼만 됐더라도 그 돈 안 받았일 기다. 우떻기 하든 공부를 할라 카믄 공부를 하고 기술을 배울라 카믄 기술을 배우고 흐흐흣흣... 우리가 그, 그럴 행펜이 되나?" 흐느낀다. "진주 바닥이 뒤비지도록 소문은 났고 나이나 어리다 말가. 그 목이 뿌러질 놈 기다리니라고 좋은 세월 다 보 내고 어디 눈까리 똘박한 사램이 니 데리고 가겄나? 그러이 니 앞길 생각해서 논박을 받아감서 돈을 받아온 긴데 우째 그리 에미 맘을 모리노." "논박을 받아감서 누가 돈 받으라 하든가요?" 돌아앉은 채 지껄인다. "자꾸 억으로 나가거라. 어디 내가 자작으로 혼자 한 짓가! 그라믄 니 아배 니 오래비 하자는 대로 했으믄 니 신세는 우찌 되든 좋을 뻔했다 그 말가!" "좋을 기 뭐가 있어서, 이러나 저러나 다 마찬가지 아니겠소." "그런께 내가 혼자 자작으로 한 기이 앙이고 의사 선상님을 찾아가서," "박의사는 뭣하러 찾아갔습디까! 아무렴 가재는 게 편이지," "그래도 의사 선상님은 니 편이든데?" "돈 받으라 하든가요?" 숙희는 바람을 일으키듯 돌아앉는다. 숙희네 눈이 둥그래진다. "선상님은 그런 말김 안 하시고, 숙희를 위해 심이 돼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러심서 정윤이는 양교리댁하고 혼사 안 해도 결과는 마찬가진께 단념하는 기이 좋겄다, 그런 말심이고 돈을 받으라는 말심은 목사님이 하시 더마. 당연히 받아야 한다, 미련을 갖지 마라, 그라고 또 교회 일을 보겄다믄 서울 가는 일을 주선하겄고 그러 지 않겄다믄 일본 가서 양복이라 카든가 뭐 그런 핵교가 있다 카데?그란하믄 간호부 공부를 더 해서 큰 벵원 에 취직을 해도 좋고 아무튼 다 같이 하시는 말심이 잊어부리라, 아 니도 생각해보아라, 양교리댁에서 돈을 내 놓는 판국에 혼사가 깨지겄나? 니 오래비는 그깟 돈 받으믄 머하노, 혼삿날 치고 들어가서 깽판을 부리겄다, 하지마는 강약이 부동이고 그 사람들 머가 답답노. 범의 장다리 겉은 하인들이 진을 치고 있다가 냉큼 들어낼 긴데, 양교리댁에서도 그러더마. 당신네들이 끝내 시끄럽게 할라 카믄 우리는 구태여 진주서 결혼식을 안 해도 된다, 서울 가서 신식으로 결혼식 못할 것도없다," 숙희네는 열심히 설득했으나 비꼬는 볓 마디 한 뒤론, 돈을 받아왔던 그날 밤처럼 넋이 빠진 듯 숙희는 아무 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숙희네는 말을 끊고 끝내 통곡을 하고 말았다. 며느리가 달려왔다. "어무이 와 이라십니까." "아이구우 주여! 아이구우 가심이야!" 가슴에 주먹질을 한다. "어무이 이러시믄 안 됩니다. 참으이소. 시일이 가믄은 설마 애씨도 잊어부리고," 통콕을 그치고 콧물을 닦으며 "야아야, 자아가 저래가지고 온전한 사람 되겄나? 어이구우, 차라리 앙조가리고 에미한테 달라드는 편이 낫지, 쯩범겉이 저러고 앉아 있어이 내가 그만 환장을 하겄고나." 사연도 복잡하고 항간에 숱한 화제를 뿌렸던 허정윤과 양소림의 혼레는 시월 마지막날에 거행되었다. 날씨는 쾌청했다. 신랑의 얼굴에는 긴장과 불안이 감돌았으며 신부는 시종 무표정이었다. "신랑은 일가친척도 없는가, 상객 따라온 사람들 꼴이라니," "상객은 형인가 분데 순 농사꾼인가 부지?" "상사람은 아니라 하더라만, 보기 민망스럽군. 양교리댁 사돈이 저래 되겠나? 볼품이 없어도 어느 정도." "그래 그런가? 신랑이 풀이 죽어 있구만." "인물은 거의방하다만," "장차 의사가 될 거라고 사위를 삼는 모양인데 병원에서 조수질하든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어째 체면 깎 이는 일 아닐까?" "연분이면 할 수 없지." 으레 따르는 신랑에 대한 품평들이다. 결혼식은 성대했다. 문중이 넓은 양교리댁에는 행세하는 면면들이 한자 리에 모였다. 축하객들도 이 지방 상층에서 노는 얼굴들이었으며 서울서는 홍씨의 친정 식구들이 대거 출동했 으니 차림새며 행동거지가 세련되어 냉담하였고 위선이 난무하는 화려함 속에 장터에 나온 수탉처럼 상객 온 정윤의 형은 전혀 이질적 존재였다. 정윤은 그런대로 깨끗한 용모에 의전 학생이란 자부심도 있어서 손색은 없다. "아까워. 무슨 꽃이 저리 예쁠까?" "왜 아니래? 그러니 소림이어머니가 가심을 치지." 지난 봄에 환국이는 오년제 중학을 졸업하였고 양소림은 사년제 여학교를 졸업했다. 환국은 동경으로 유학길 을 떠났고 양소림은 의견이 분분한 혼담을 귓가에 흘리며 진주 집안에 칩거해 있었다. 혼사가 결정되기론 여 름이었다. 소림은 일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초가들에 이모 집을 다녀오겠다면서 훌쩍 떠났던 것이 다. 서울로 간 소림은 이모의 생활이 난맥인 것을 목격하였다. 빌다시피 애원하는 이모에게 일말의 동정이 없 던 것도 아니어서 그는 조용하의 본가까지 심부름을 갔었다. 불론 그런 심부름은 안 하겠다고 우겼었지만, 조 용하를 만나고 돌아올 때 느낀 불쾌감, 싸늘한 아집 같은 것이 타고 있는 것만 같았던 가운 입은 사내에 대한 불쾌감을 소림은 잊을 수 없을 것이며 그날 세검정에서 돌아온 이모의 새파랗게 질렸던 얼굴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소림은 그들의 관계가 파탄에 빠진 것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그 일보다 평소 선량하고 줏대가 약한 남 편에게 방자했던 이모가 갑자기 정숙한 아내로 변모한 데 대하여 소림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밀회의 연락 을 취하게 한 것도 조카에게 보인 치부였지만 전에 없이 남편에게 아양을 떨며 "얼마나 말 많은 세상인지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이건 생사람을 잡으려 든단 말예요. 남다른 일을 하니까 나 야 무슨 소릴 들어도 상관 없지만, 당신에게 누가 될까 그게 걱정이에요." 천연스럽게 말했던 것이다. "나 이모 두번 다시 보기 싫어! 구역질이 나아!" 소림은 여행가방을 들고 나서면서 말했다. "이 애가? 네가 뭘 안다구 그러니?" 송숙은 애매하게 웃으며 소림을 애 취급하듯 넘겨버렸다. 진주로 돌아온 소림은 주변에서 쉬쉬 했지만 정윤과 숙희의 관계를 알게된 것이다. 약도 발라주고 주사도 놔주던 그들, 다만 직업인들로 대해왔으며 한편 신체적 결함 때문에 신체를 보여야 하는 병원이 달갑지 않았고 그들에게도 늘 어색하긴 했었다. 여하튼 소림은 그들 의 관계며 경위 애기를 들었지만 평정한 외양이었다. 소림은 자기손등 위에 있는 추물같이 인간은 추악한 것 이며 인생은 오욕에 가득 차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모 홍성숙이 허영심이 강한 여자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 고 있는 일이었다. 늘 예술가를 코에 걸고 교만스럽게 사람을 대할 때 소림은 혐오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예술가가 어떤 존재이며 예술은 어떤 것인지 뚜렷하게 인식한 일은 없었지만 예술을 위하여 진실을 팔아야 하 고 남을 기만해야 하고 목적을 위해 부도덕한 행위를 감행해야 하고, 그러고도 양심의 가책이나 고뇌가 없다 면, 예솔이라는 것 역시 추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서울을 떠나는 차창 밖의 충경을 바라보면서, 소림 은 그 생각을 내내 했었다. 맹목적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던 이모, 거의 결함까지 소림은 육친의 정으로써 받아 들였건만, 어째서 돈과 명성의 도움 없이 예술이 발전할 수 없고 존재할 수 없단 말인가. 이모한테서 받은 충 격은 정윤의 과거로 하여 되풀이되지는 않았다. 물론 배신당하였다는 분노도 일지 않았다. 누가 상대이건 자신 과의 인연을 맺을 사내라면 불순한 계산 없이 덤비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림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목 숨을 다하는 날까지 자의 아닌 타의로 살아가야 할 처지임을 깨닫고 있었다. 부딪쳐서 불꽃을 일게 할 자신의 진실이나 영혼은 마음 깊은 곳에 가두어놓고 살아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봄바람같이 감미로웠던 먼곳의 그사람, 그 모습은 시초부터 먼 곳의 것이었고 자기 역시 그러했었다. 먼 곳을 지나가던 여자로 환국이 기억해 주길 바랐들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자신의 치부를 발견한다는 것, 자신의 진실과는 상관이 없는, 자신의 잘못 과도 상관이 없는, 다만 조물주의 저주를 그의 기억 속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 간절한 소망도 부서지고 말았다. 병원 앞에서 공포에 가득 찼던 환국의 눈, 그 눈은 영원한 고독의 형벌을 받으라는 무서운 질타였던 것이다. 축하객들은 많았고 절차도 성대하였건만 묘하게 냉랭한 혼례는 끝이 났다. 사람들은 거의 돌아갔고 가까운 문 중 사람들, 먼 곳에서온 손님들이 남은 듯한데 넓은 집안의 어느 곳으로 다 들어갔는지 집안은 별안간 정적에 묻히는 듯, 해는 이미 떨어졌고 쾌청했던 저녁 하늘은 무겁게 내리덮이는 것 같았다. 피곤하다면서 안방으로 물러간 홍씨와, 형제들과 함께 사랑으로 든 양재문은 다 같이 기분이 저조해 있었다, 밑진 장사를 한 것 같은, 그런가 하면 이제 칼을 이쪽에서 쥐었다는 심리적인 냉담으로 볼 수도 있었다. 초조하고 불안했으며 허정윤의 말썽 많은 여자문제까지도 감수하며 간신히넘은 결혼이란 고개, 성깔깨나 있어 뵈는 허정윤에게 깊이 따져볼 수 없었던 분노, 그러나 그것은 혼인을 하기까지의 시름이었다. 더 이상 오냐 오냐 해서도 안 될 것이며 베푸 는 처지의 권위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그런 기분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젠 고삐를 바싹 잡아당겨요. 처음길을 잘 들여놔야지. 없는 것들 대개가 염치없이 구니까 말예요. 처가 것 은 그저 얻는 줄 알거든요. 뿐인가요? 의도는 안 하게? 꼼짝 못하게 기를 콱 죽여놔야지." 홍성숙의 말이었고 사랑에서는 또 "그 사람 근본이야 있다지만 조실부모하고 남의 집 고공살일 했으니 뭐 배운 게 있겠나. 예의범절부터 가르쳐 야 하고... 양씨 가문의 체면이 있으니까." 양재문의 오촌의 말이었다. 밤이 저물어서 정윤은 신부가 기다리고 있는 신방으로 들어갔다. 불빛 아래 그의 얼굴이 창백하다. 자리에 앉 은 정윤은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가 마음 밑바닥을 씹는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이 가슴을 조여온다. 한마디로 비참했던 것이다. 숙희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소림의 손등은 의식 밖의 일이었다. 장자 집에 비럭질하러 온 거지처럼 오두마니 혼자 앉아 있을 형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갈고리 같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끔 천장을 오려다보곤 할 것이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늦가 을의 빗소리는 다소곳이, 조심스럽게 내린다. 소림은 그림같이 병풍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족두리를 벗겨주어야지' 슬픔이 와락 치민다. 자기 자신을 위한 그것은 울분이 아니고 슬픔이다. 철저하게 짓밟힌 결혼이었다는 것, 소 림이 쪽에도 그러했겠지만 정윤은 자신의 결혼도 마구 짓밟혔다는 생각을 한다. 양교리댁에서 숙희 집에 돈을 보냈다는 애기에서 정윤의 심장은 난도질을 당한 것이다. 오늘의 결혼식은 또 어떠했던가. 백로들이 노니는 곳 에 가마귀가 섞인 듯, 자신과 상객 온 형의 존재는 바로 까마귀 두 마리였던 것이다. 미소짓는 얼굴 뒤의 차가 운 눈, 경멸의 눈, 야유의 눈, 그 수많은 눈들에서 마치 가시밭에 홀로 선 느낌을 받았다. 정윤은 자신이 출세 를 위한, 공부를 하기위한 야심만으로 결혼을 결심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소림을 결코 도외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외시하기는커녕 자신의 처지로선 과남하다는 생각이었다. 처음 소림의 손등을 보았을 때 다 소 놀라기는 했으나 정윤은 소림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늘 행운을 꿈꾸었지만 소림이 행운을 갖다주 리라는 상상을 한 적이 없었다. 행운이 이같이 비참한 수모 위에 쌓여지는 성이라는 것도 미처 몰랐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앉아 있어야 하나.' 소림은 피곤했다. 비녀랑 족두리가 무거웠다. 철저하게 자신이 관심 밖에 밀려난 여자인 것을 절감한다. '저 남자는 이용하고 버린 숙희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내 손이 징그러운 걸까?' 순간 소림은 저도 모르게 흑 하고 흐느끼다 눈물을 마셔버린다. 정윤이 당황했다. 급히 다가앉으며 족두리를 벗겨주고 미녀를 뽑아준다. 그러는 동안 말이 없다. 대례복은 소림이 스스로 벗었다. 조심스럽게 손등을 감추 고 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홍치마에 반회장 유록 저고리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주홍 및 감댕기를 물린 쪽의 금빛 봉채가 찬란했다. 정윤은 황홀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나 입이 붙은 듯 말을 할 수가 없다. 잠자코 물러나 앉은 정윤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마련돼 있는 주안상을 끌어당겨 자작으로 술을 마신다. 다시 한 잔, 또 한 잔, 그럴 때마다 들리지는 않았으나 소림은 남자의 한숨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경멸하겠지요" 술잔을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뇌었다. 소림이 꿈적 하고 놀란다. 의외였던 것이다. "양교리댁 문중에서는 한빈한 무명 청년을 경멸했을 테지만 소림씨는 이 집에 장가 온 나를 경멸했을 거요." 소림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진다. "여러 번 파혼하고... 어디든 떠나려 했었소. 믿고 안 믿고는 소림씨 자유겠지만, 네, 자유지요." "그, 그런데요?" "고집, 빗발치듯하던 비난과 과장된 화제, 조롱, 그런 것들과 싸우는 심정으로 이겨보려 했지요." 또렷하고 단호한 목소리다. 정윤은 당황하며 소림을 쳐다본다. 눈이 처음으로 마주친다. "애초엔 무, 물론 그렇지 않았지요. 그럴 이유도 없었고, 양교리댁이나 소림씨가 다 함께 다시없는 좋은 혼처 라 생각했을 뿐이었소. 다만 내 자신이 실수한 일이 있어서 그것만 맘에 걸렸지요. 양교리댁과 소림씨가 그 일 을 알게 되면 안 되는 혼사라구 말입니다." 고통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린다. "그, 그만둡시다. 애기한다면 변명밖에 더 되겠소? 나는 오늘 밤에 이렇게 신방을 치르고 싶지는 않았소. 이렇 게는," 목소리가 떨리었다. 정윤은 다시 아까처럼 술을 마신다. 별안간 창백했던 얼굴에 피가 모인다. "나는 내 진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양소림하고 결혼한 것은 아니오!" 정윤의 어세는 내려갔다. 술잔을 부서져라 꽉 잡는다. "양교리댁 가풍이 나를 못난 놈으로 만들든지 나쁜 놈으로 만들든지, 다 참아야겠지요, 참아야 할 거요. 내 심 정을 귀기울여 들어줄 사람도 없었지만 내 심정을 나는 전할 수도 없소. 어떻게 설명을 해도 그건 배신자, 출 세에 눈이 어두운 놈, 그런 말을 뒷받침해줄 뿐이니까." 말을 끊었으나 정윤은 마음소으로 외쳐댄다. '나는 숙희를 사랑한 적이 없었어! 도움을 달라고 간청한 일도 없었고 바라지도 않았다! 가난하고 불우한 나 를 감싸주고 격려해주는 마음을 고맙게 생각했다. 숙희의 애정이 애처로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짐스럽고 귀찮 을 때가 더 많았다. 명백하게 내 의사를 밝히지 않았던 것은 나빴어. 비겁하고 교활했지. 의전에는 합격이 되 었고, 저축한 돈과 원장의 도움만으론 어려웠다. 도저히 해낼 수 없었다! 도둑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어! 결혼이라는 사슬을 목에 거는줄 알면서 안 쓸 수가 없었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숙희는 혼기를 놓치고 을씨 년스럽게 나만 기다리고, 아아 몸서리쳐지던 그 고통, 양교리댁 혼담은 내게 구원이었다. 구원이었고 말고!' 이 무렵, 숙희 집에서는 숙희가 없어졌다 하여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락가락 내리던 비는 멎었고, 그러나 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아, 가씨나가 그만 물에 빠지 죽었는갑다!" 숙희네는 울음을 터뜨렸다. "별 사스러운 소리를 다 하누마." 숙희아버지 김서방이 나무라면서도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아들 영태도 신발을 찾아 신으며 마당에 내려섰 다. "어디 동무 집에라도 갔겄지요. 벵원에 갔나?" "이 한밤중에 미쳤다고 가아. 더군다나 그놈 혼삿날에 가기는 어디 갈 기고. 그기이 실성이나 안 하까 시피어 애간장이 타더마는, 내 기도가 모자라서 그렇다는 생각도 했더마는," 숙희네는 마당에 끓어앉는다. "주여! 굽어살피시오서." 손을 깍지끼고 기도한다. "강가에 나가보자." 김서방이 말했다. 영태는 "넓은 강가, 설령 나갔다 해도 어이서 찾겄십니까." "하야간 찾기는 찾아야제. 아가 초롱 내오너라." 오돌오돌 떨고 있는 며느리보고 말했다. "예." "빌어묵을, 자기가 저지르놓고 식구들을 말려 직일라 칸다. 차라리 죽어부리는 편이 낫겄소." 영태가 내뱉았다. "시끄럽다. 니 어매 죽기 됐다." "지가 뭐라 캤십니까. 그깟 돈 메치고 휘휘 저어부리자 안 했십니까." "지금 그런 소리 하믄 머하노. 어 나가보자. 인생이 불쌍해서,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캤는데, 할 마이 너무 걱정 마소. 인명재천, 하느님 뜻인께." 며느리한테 초롱을 받아든 김서방이 앞서 나간다. 두 부자는 새벽이 다 되어 돌아왔다. 물에 흠뻑 젖은 숙희를 앞세우고. 숙희는 촉석루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가기론 달래듯 젖은 옷을 벗기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힌다. 죽지 않았던 것만으로 하느닌께 감사하는 듯. "감기 들믄 우짜겄노. 미음 좀 쑤라 칼까?" 숙희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 "운냐." "이제 다 소영없는 일이지요?" "하모. 잊어부리라. 꿈을 잘못 꾸었다. 생각해라." " 나 말이요," "그래 말해라. 니 하고 저븐 대로," "목사님하고 의논해서, 나 외지로 가겄소." "잘 생각했다! 하모 그래야지. 니 맘묵기 달린 기다." "맘에 없는 소리 많이 했지요? 끼지 마소." "모녀간에 맘에 낄 기이 머 있겄노. 아가아 미음 한 그릇 묵자. 기운을 내야제?" 19장 햇병아리 연학이 찾아와서 말을 하지 않았어도 초상 때 온 석이네를 보고 그런 생각을 퍼뜩 했었다. '성환이할머니가 와 계시면 어떨까?' 연학이는 허두를 꺼내기를 "최참판댁에서는 물론이고 나도 나설 수 없는 형편이라 이분에는 자네가 좀 수고해주어야겄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정선생 집 헹편이 말이 아닌 기라." "가본다 가본다 하면서 못 가봤습니다마는." "가볼 필여는 없고오, 그 계집 따문에 일이 크게 벌어졌어이 정선생이 돌아올 수 없게 됐거든. 한두 달에 끝날 일이라믄 어덕하든지 뭉개보겄지마는 몇 년이 걸릴지 그거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몇 년?" 홍이 놀란다. "사실 식구들이 할 짓이 앙이지. 그는 그렇고 자네가 간도로 가게 되는 날에는 어차피 평사리 그 집은 처분을 하든지 뉘한테 맽길 거앙이가?" "그렇지요." "해서 하는 말인데, 설령 안 간다 하더라도 상막을 진주로 옮기믄되느 기고," "올해나 넘기고 가야지요." 홍이는 다음 말을 듣기 위해 석이네 식구들에게 집을 맡길 생각을 했다는 말은 안 한다. "날이 갈수록 일이 어렵기 돼간다. 자네도 어물적거리지 말고 서둘러보는 기이 좋을 기다." "지야 뭐 밝은 일이지만 석이형님이 큰일이지요." 정선생이 자취를 감춘 것은 양현어무니 때문이라, 소문은 그렇기 퍼뜨리놨지마는 나형사 그놈 끈덕지거든. 정 선생을 찾이믄 관수형님도 찾게 된다 믿는 모앵이라. 게다가 실성한 놈이든가 되지 못한 고자질을 해놨으니 수습하기도 난감하게 돼 있다. 어떠헥 매수라도 할까 싶었으나 약도 잘못 쓰믄 사약이 될 수도 있이니 마, 그 는 그렇고 자네가 설득해서 성환이할무니를 평사리에 가 계시도록, 다행히 지금 들어와서 함께 사는 사우가 힘이 좋고, 날품팔이보담이야 농사짓는 일이 월등 나을 긴께, 평사리에 가 있으믄 음으로 양으로 도와줄 수 있 지." "집이라면 어려운 일 아니지요." "집도 집이고 자네가 나서서 일처리를 하라 그말인데, 노친네 팍싹 늙었더마. 손자들 따문에 끼니를 챙긴다는 말을 들은께 영 맴이 안 좋고 배를 찔러 직일 놈들의 업을 와 우리 가난뱅이들이 갚아야하는가 생각하니 눈에 서 불덩이가 떨어질 것 같다." 항상 무심상하고 온건했던 연학이 입에서 격렬한 말이 나오는데 대해 홍이는 다소 놀란다. "일전에 영팔이아제를 만났더니 성환이할머니가 경찰서에 불려갔다 하시면서 그 계집 만나기만 함녀 귀싸대길 때리겠다, 벼르더군요. 아무리 갈라섰기로 남정네가 잘못되면 지가 내지른 자식새끼들 앞길이 뭐 좋을 거라고, 하시믄서 노발대발," "그런 말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겄노. 친정에미가 더 나쁘제. 옆에서 축축거린께 속아지 못된 계집이, 소문을 들은께 나형산가 그놈이 들락거린다 하니, 그러다가 형사놈 첩이나 안 될란가. 약아도 헛약았다. 배가 다르기 는 하지마는 오래비 신 벗어놓은 데라도 갔이믄 그 짓을 했이까. 그러고 보이 홍이 자네는 장개 잘 들었네. 삼 이웃이 시쓰러분 외도를 했건만 꾸린 입이나 한분 떼었든가? 그 여자 걸었이믄 칼부림 안 났이가?" 홍이 쓰게 웃는다. "지난 애기 나오게 됐제. 아무튼 그런 짓까지는 안 하더라 캐도, 자식새끼 내부리고 보따리 싸는, 그것만도 보 통 일은 아니라. 우리도 이자 가숙 귀한 줄 알아야 안 하겄나?" "석이형님이 용해서 그랬을 거요. 처음부터 버릇을," "앙무리 해도, 개터러기 굴뚝 속에 삼 년 묵어도 제 빛이라. 타고난 천성이 어디로 갈꼬?" "글쎄요. 식구들은 평사리로 가면 그럭저럭 지내겠지만 석이형님이, 언제꺼지 도망만 댕길수 없는 일 아니겠 소?" "아따, 언제는 호강하고 살았더나. 사람의 일은 모리는 기라. 누가 아나? 자네가 간도에 가서 우연찮기 정선생 을 길에서 만낼 긴지." 그 말은 암시 이상이었다. 홍이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납득했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도대체 그 여자 무슨 심뽀로 그랬을까요?" 화제를 돌린다. "살기 싫으니까 그랬겄지." "살기 싫어서 갔다면 석이형이 어디 못 가게 붙잡았습니까?" "지 묵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깝다는 말이 있제. 뭐 처음부터 정선생을 엉구렁에 밀어부릴라고 한 짓은 아닐 기다. 안 살고 나갔이니 욕을 해야 자신이 옳다는 주장이 될 것이고, 살기 싫으면서도 정선생을 찾아와서 손이 야 발이야 빌지 않는 것이 괘씸했을 것이고, 욕을 하다 보니 이상한 말이 나갔을 테고, 그 풍문이 나형사 귀에 들어갔고, 결국 접시 바닥만한 계집이 나형사 유도에 걸린 기지. 그러나 막상 애기는 막연한 것이었으니 근거 가 있는 거는 양현어무니 일뿐이고. 하여간에 그런 여자 데꼬 살다가는 큰일나제. 아이들이 불쌍해 그렇지 막 설한 거는 잘한 일이구마. 이런 말 성환이 할무이가 들으믄 섭하겄지마는," "봉순이누님..." 언젠가, 밤이었던가, 술을 함께 마시면서 홍이 넌지시 물었을 때, 석이는 봉순에 대한 감정을 부인 안 했던 생 각이 난다. 연학이와 그런 대화가 있은 며칠 후 홍이는 영팔이 집을 찾아갔다. 부산을 떠나 새벽녘에 도착하여 차고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나온 것이다. 수염이 자라 텁수룩한 모습, 얼굴은 피곤해 버였다. 아이들이 많아서 늘 시 끄러웠던 영팔이 집이 빈집같이 조용하다. "아무도 없나?" 아랫방 문이 열렸다. "아저씹니까?" 한복의 아들 영호가 급히 나온다. "음." "식구들 다 나가고 없십니다." "다 나가고? 어디 갔는데?" "제술이아제 집에, 아아 돌이라고 모두 갔십니다." "그래?" "지 혼자서 집 봅니다." 영호는 빙그레 웃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었구나." "네. 아저씨는 일요일에도 안 노십니까?" "일요일이 어디 있어, 밤낮도 없는데. 화주 형편 따라서..." 담배를 붙여문 홍이는 담배 연기를 날리며 뜰안을 왔다갔다한다. 담장도 없이, 야트막한 축대 아래 내려앉은 앞집을 기웃이 내려다보는 홍이. "하마 오실 거로요." 영호는 어거주춤 홍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돌집에 갔는데 쉬이 오시겠나." "할아버지 할머니는 하마 오실 겁니다. 세 집 식구들이 다 모이니까 집이 비좁아서 오래 못 계십니다." "하긴 그렇겠다." "아저시." "왜?" "천일이형은 언제 운전수 됩니까?" "글쎄...답대비, 시험을 치면 떨어지니까 그게 탈이지. 면허를 따야 운전대를 잡게 되는데," 떨떠름해하는 목소리다. "집에서는 살기가 어려운 모양이든데," "차라리 농사나 지을 걸 그랬는지..." "날씨가 좀 쌀쌀하지요?" "응. 이제 겨울이 멀지 않았다. 산이 허퉁한 것 같구먼." "지 방으로 들어오시지요." "그럴까? 좀체 틈을 낼 수가 없어서, 좀 기다리기로 하지." 담배를 버리고 영호 방으로 들어간다. 방안은 깨끗하게 청돈이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교과서말고도 다른 책 이 몇 권 눈에뛴다. "공부 방해한 것 아닌가?" "아, 아닙니다." 당황하듯 손을 저었다. 영호는 홍이와 애기를 나누고 싶은 눈치다. "나른하다." 방바닥에 털석 주저앉은 홍이 기지개를 커며 하품을 깨문다. "정작 자동차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멀미는 땅 위에서 나려는가? 골이 띵하구먼. 여러 날째 수염도 못 깎 고," 턱을 만진다. 영호는 남자답게 참 잘생겼다는 생각을 한다. "밤에도 많이 운전하십니까?" "밤에도 하지." "그러다가 졸음이라도 오면?" "깜박했다가는 황천길이지. 강을 낀 절벽 낭떠러지를 돌 때 깜박했다가는 영락없을 게야. 하하핫..." "하지만, 그래서 남자다운 일 같고 지도 상급학교에 안 왔으면," "뭐?" 하다말고 "너 정말 그새 많이 컸구나. 아버지보다 키가 더 크지?" "네 조금," 머리를 긁적인다. "아부지는 작은 편이니가 지는 더 커야지요." "처음 진주 왔을 때는 밤송이 같더니만 땟물을 벗고 의젓해졌다. 널 보면 아버지가 공부시킨 보람을 느끼겠구 나." 수줍고 풀이 죽었던 촌머슴애가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활기에차 있는 것 같았고 척박한 땅에서 모질게 영근 것 같은 한복이와는 다르게 넉넉함이 엿보인다. 영호에게는 할머니 함안댁의 모습이 있다. 할아버지 김평산과 큰아버지 거복의 그 독특한 돼지상하고는 거리가 먼 얼굴이다. 솔밋하게 얼굴이 좁을 것도 함안댁의 느낌을 준다. 물론 홍이나 영호나 다 같이 그들을 만난 적이 없다. 김두수는 생존해 있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이들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 죽은 사람들이다. "올해 몇 학년이지?" "삼학년인데 곡 사학년이 될 겁니다." "절업하자면 앞으로 이 년이 남았구나. 공부 열심히 해라. 나같이 후회하지 말고," "아저씨가 어때서요?" 홍이는 다리를 뻗고 비스듬히 드러눕는다. 피곤해서 못 견디겠다는 눈치다. "하기는 식자 든 사람들 살아가기가 더 어려운 모양이더라만... 너도 공부해서 혁명투사 되겠어?" 영호를 올려다본다. "그런 것 생각 안 하는 아이들, 우리 친구들 중엔 별로 없을 겁니다." "그것도 팔자에 있어야 되는갑더만. 이십, 삼십이 넘으면 글세, 그런 생각 안 하려고 도망치게 되고, 비법하다 고 자부한 자신이 초라한 사람으로 뵈게 된다. 너 평사리 김훈장댁의 범석일 더러 만나지?" "네." "그런 성싶더라. 법석이 그자가 너 머리빡에 뭔가 자꾸 넣어주고 있는 모양이다." "훌륭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공부도 굉장히 많이 하셨고요." 영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방학에는 그 선생님이 계셔서 평사리로 돌아가는 일이 즐겁습니다. 저는 앞으로 농민운동을 할려고 생각하  있습니다." "사람이 진중하니까 잘못 가르치지는 않겠지. 어쩌면 대학에 가고 전문학교에 가고 한 사람보다 범석이가 진 짜 공부를 했는지 모르지." "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 중에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일본 사람들이지만, 진주서는 정선생님이 지를 이끌어주시고..." 얼굴이 흐려진다. "앞으로 어찌 될까요." "..." "정선생님은 어찌 될까요. 걱정입니다." "어른들이 걱정할 일이고 너는 공부나 해!" 하며 홍이는 별안간 영호를 노려본다. 이들은 꽤 친밀하게 애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수일 전에 만주로 떠난 한 복에 대해선 의식적으로 화제에 올리지 않는다. 한복이가 만주로 갔다는 것은 형을 만나러 갔다는 애기가 되 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알 수 없는 막연한 일이었지만 오래 전부터 홍이나 영호 의식 속에는 김거복, 그러니깐 김두수에 대한 의혹과 불안이 있었다. 영호는 평사리에서 자랄 때 마을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봉기노인으로 부터 받은 갖가지 모욕적 언사에서 집안의 부끄러운 내력을 알았고 큰아버지에 대한 평이 가장 가혹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놈은 손톱이 길었다. 그러니까 도벽이 있었다는 애기였었다. "만주서 돈을 벌었다 하지마는 옳은 짓을 해서 벌었이까? 도적질 강도질 앙이믄 아편장사 해서 벌었겄지. 지 가 옳게 성공했다믄 떳다바라 하고 고향을 돌아올 긴데," 봉기노인도 그러했지만 아버지의 태도도 석연치가 않았다. 만주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는 우울해 보였고 형에 대한 말은 일체 하지않았다. 어머니가 물어보면 "그저 그렇지 머," 하며 회피하듯 바짓말을 치키며 밖으로 나가버리곤 했었다. 홍이는 한복의 집안 내력보다, 그 집안의 내력과 자기 생모의 내력은 무관하지 않았고,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었지만 하여간 그보다 거복이라는 그 인물에 대 한 느낌은 훨씬 구체적이었다. 그는 밀정일 것이다. 왜놈의 앞잡일 것이다. 어릴 적에, 간도에 살았을 적에, 기 억할 수는 없지만 뉘한테 애기를 들었는지 모른다. 공노인한테 들었을까? 어른들 하는 애기를 들었을까? 아무 튼 한복의 만주행을 화제로 삼지 않는 것은 의식적인 것이었다. "공부도 물론 해야겠지만 학생들이라고 편하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도 은밀한 조직을 갖고 있 습니다." 영호의 말은 부자연스런 것이었다. 자신을 의식해달라, 그리고 신뢰해달라, 그런 바람, 기대 때문에 말할 필요 가 없는 일을 말하는 부자연스러움이었다. "너 뭐라 했지?" 홍이는 몸을 일으켰다. 담배와 성냥을 꺼내었다. 담배를 붙여물고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담뱃재를 떤다. "우리 학생도 뭔가 해야잖겠습니까." "영호야." 똑바로 쳐다본다. 쌀쌀한 표정이다. 영호는 겁먹은 얼굴이 된다. "나도 그런 일에 대해선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 "그러나 만일에 내가 경찰의 끄나풀이라면 너 지금 한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겠지?" "그, 그거는." 당황한다.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 자랑하려고 그 짓을 하는 줄 알았나?" 영호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독립운동이 그리 식은죽 먹듯 쉽게 할 수 있는 일인 줄 알았나? 혁명투사는 이마빡에다 나는 혁명투사요, 써 붙여놓고 다니는 사람인 줄 알았나? 나는 운전대나 잡고 집안 걱정이나 하고 사는 놈이다만 그런 정도의 상식 은 안다. 사내 자식이 일을 하렴녀 부모 형제, 처자도 타인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정도의 상식 말이다. 너는 내 어디를 믿고 그런 말을 하느냐 말이다. 내가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이가! 너 같은 생각을 가진 놈들이 운동을 한다면 독립이 되기는커녕 빗자루로 쓸듯이 일하는 사람 말짱 감옥행이다." 영호는 고개를 꺾었다. "그러니 공부나 하라 했다. 아까같이 그 따위 소리를 지껄이고 댕긴다면 공부는 말짱 헛공부고 장바닥에 앉아 서 구멍난 솥이나 때워주는 땜쟁이보다 나을 것이 한푼 없다!" 영호는 더욱더 고개를 수그린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해두겠는데, 그런 말을 쉽게 하는 놈치고 밀정 아닌 놈은 거의 없을 게야. 상대방 속을 빼내자면 그것도 술수 중의 하나니까, 네가 내 속을 빼낼려고 그런 말 지껄인다는 의심을 받아도 별수 없는 일아니겠나?" 영호는 얼굴을 들고 홍이를 쳐다본다.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저씨 잘못했습니다." "앞으론 조심해! 무슨 일을 하든, 너가 생각는 세상하고 세상은 다르다." 홍이는 성이 난 것처럼 담배와 성냥갑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꽁초를 버린 종이를 꾸겨 쥐었다 놓고 일어섰다. "더 기다릴 수 없어 간다. 할아버지 오시거든, 저녁에 차고로 오시라 하더라 전해." 밖으로 나온 홍이는 이내 후회한다. 종아리를 한두 대 때렸어도 됐을 것을 발질을 하고 소금을 뿌렸다는 생각 이 들었다. 나중의 말은 더욱 영호에게는 아팠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상처받기 쉬운 나이, 아직 소년기를 벗 어나지 않고 있었는데, 용정 상의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일인이 주관하는 학교에 다닌다 하여 책보를 빼앗아 강물에 던지던 일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면서 그 누군가의 잘못 때문에 소년기는 위험한 것이다. 살인자의 후손 김영호, 다 같은 아픔도 그에게는 몇 갑절 더 아프게 갔으리라. 그의 잘못이 아니면서 햇볕이 눈부시고 두려운 것은 가혹하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허전함이 마음 바닥을 쓸며 지나간다. 바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돌아가다가 운전대를 놓고 할 일 없이 거리를 헤맬 때면 갑자기 거리는 낯선 거리로 변하고 주체할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오는 것이다. 죽은 아버지 생각이 나는 것이다. '어딜 가나.` 차고로 돌아가서 영팔이를 기다릴 때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홍이는 당황하기까지 한다. 번화한 거리로 나왔다. 한 무리의 기생 아씨들이 지나간다. 돌돌돌 웃음을 굴리며 지분 내음을 풍기며 지나간다.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아니면 어느 부잣집에 환갑 잔치가 있었는지 한곳에서 몰려나온 것 같다. 늦가을이지만 봄같 이 화사한 빛깔, 형형색색의 모습, 다만 눈부시게 하얀 버선발만은 똑같다. 그 하얀 버선발의 꽃신들이 화려 하다. '외씨 같은 발, 참말 간들어지게 말도 만들었다.' 돌아보는 기생들 눈길을 느낀 홍이는 슬며시 외면을 한다. 가슴이 떨리지는 않았다. 녹슨기계처럼, 그러나 깐 깐하리만큼 틀이 잡혀가는 가정에 대하여 염증 비슷한 것이 스쳐간다. '퉁포슬까지 가던 들판, 그때는 조춘이었던가. 봉순이누님은 옥색 두루마기를 입었었다. 하얀 비단 목도리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무슨 빛깔의 옷을 입었던가? 보따리를 이고 걷던 것은 기억에 뚜렷한데 어 머니는 흰 당목 치마에 옥색 명주 저고리를 즐겨 입었으니까 아마 그때도 그랬을 거야. 지금은 다 가고 없는 사람이다. 옥색과 흰 빛깔, 그러고 또 한 어머닌 무슨 빛깔일까?' 보따리를 이고 간 어머니는 윌선이며 또 한 어머니는 임이네다. 홍이 눈앞에 월선이, 봉순이는 다 걷고 있는데 임이네만은 눈을 뜬 채 숨을 거둔 모습만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죽음의 모습은 살았을 때보다 흉하지는 않았 다. 피골이 상접했으나 살겠다는 의지로 형형히 불타던 눈동자, 끊임없이 저주를 내뱉던 입모습, 그러한 삶의 추악한 찌꺼기를 걸러낸 듯 피부는 투명하였고 영혼이 나간 뒤의 눈동자는 다만 유리알 같았다. '얼마나 죽기 싫었을까?' 아비의 상을 당한지 얼마가 안 되었는데 홍이는 임이네를 위한 슬픔을 느낀다. 얼마나 죽기 싫었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고. 가을 바람같이 뜻하지 않게 찾아온 순수한 슬픔이다. 홍이는 시장기를 느낀다. 쪼깐이 비빔밥집이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그곳으로 들어간다. 대부분 차부 가까운 식 당에서 매식을 했으며 거의 오지 않는 집이다. 이따금 거리에서 마주치게 되는 두만의 불쾌한 태도 때문이며 또 차부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새 비빔밥집은 크게 확장되고 안은 휭하니 넓었다. 그런데 공교롭게 두 만이는 미곡 도매를 하는 거상 하대완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대완은 두만이보다 연소했으며 석이 또 래였으나 두만이는 동년배같이 존중하는 태도다. 화주로서 홍이하고는 자주 대하는 처지였으며 동생처럼 무관 하게 대하기도 했었다. 생기기론 뒷골목의 왕초 같았고 차림새 언동은 상인으로서 틀에 박힌 듯했지만 그의 외모와는 달리 상당한 학식이 있다는 중평이었다. 배짱 좋고 상소리 잘하기로도 유명했다. 들어선 홍이를 두만 이 먼저 보았다. 술맛 떨어진다는 표정이었다. 홍이 그들을 피해 다른 자리에 등을 보이고 앉으려는데, "홍이 앙이가아! 홍아!" 하대완이 큰 목청으로 불러대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앉으려던 엉덩이를 들고 그들 옆으로 간 홍이는 "안녕하십니까."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십니까가 뭣고! 형님, 해도 아직 남았는데 무슨 술입니까, 그래라. 내가 핵교 선생가? 여기 있는 두만이 형같이 핵교 학부형 회장도 아닌께." 뒤에 한 말은 언중유골이다. 홍이는 픽 웃는다. 두만이는 못 들은 척 "임마, 손님 기다린다. 부지런히 날라라!" 음식을 나르는 머슴아이에게 신경질 비슷하게 말했다. 하동 사람들을 미워하는 마음은 이제 김두만에게는 병 적인 것이 되었다. 날로 앙진해가기만 하는, 자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병이 된 것이다. "장석같이 서 있지 말고 앉아라." "아니 저는," 홍이가 사양하는데 두만이 얼굴을 획 돌리며 "젊은 아이들하고 무신 술인고?" 어세가 날카로웠다. "젊은 아이들이라니 두아이 애빈데 젊나? 기껏 아제비뻘, 형뻘인데 함께 술 마시는 거 험 될 거 없다. 맞담배 질은 못해도 술은 노소가 없는 벱이라." 하며 홍을 잡아끌어 자기 옆에 앉힌다. "노소는 없더라도 푼수가 있지이." 두만이 홍이를 노려본다. 홍이는 눈은 깜박깜박하며 어색하게 웃을 뿐 발끈하지 않는다. "치우소. 푼수라는 말도 낡아부맀지마는 그것도 족보 있는 사람들이나 쓰지이, 형님이나 나나 장사꾼이 할 말 이었소? 쌀장사 술장사 사람 가리가믄서 쌀 팔고 술 파는 겁니까. 홍이를 말할 것 겉으믄 일등 운전수, 기생들 이 목을 빼는데, 허허헛... 나이만 어리고 장가만 안 들었다믄 사윗감으로 춤이 꿀떡꿀떡 넘어갔을 기요. 하하 하핫..." 두만은 아무말 못한다. "홍아 자아 내 술 한잔 받아라." 하며 술잔은 내민다. "아닙니다. 제가 올리지요." 홍이 공손하게 주전자를 들고 술을 붓는다. 쭉 들이켠 하대완은 홍이에게 술을 부으며 마시기를 권했다. 홍이 외면하듯 술을 마시는데 "이봐라! 야들아! 여기 술잔 하나 더 갖고오고오, 술, 안주도 더 가지오너라!" 하대완이 고함을 친다. 두만이는 자리를 뜨고 싶었으나 하대완을 무시 못할 사정이 있어서 꾹 참는다. "그런데 홍아," "네." "니 월급 얼매 받노? 그놈의 노랑이가 월급 많이 주겄나. 뻔하지. 나하고 일 안 해볼라나?" "화물차 한 대 사시겠습니까?" "그거사 머 어러불 것도 없제." "저는 그만 진주를 뜰까 싶습니다." "와?" "이번에 부친도 세상 뜨셨고 넓은 바닷물을 먹어야 고기도 크겠지요." "그는 옳은 말이다. 가믄 어디로 갈라카노?" "일본이나 서울이나 생각해봐서," 홍이는 두만이를 의식하며 간도로 간다는 얘기는 입밖에도 내지 않는다. "자알 생각해서 해라. 아즉 나이 젊은께 나부대보는 것도 괜찮을기다." 술을 마시고 하대완은 화제를 돌리다. "두만형님, 소문을 들은께 한고향 사람들하고는 앙숙이라 카든데 와 그랍니까?" 슬쩍 약을 올리듯 말한다. "앙숙일 까닭이 없제. 내가 성공을 했이니 배가 아파서 짛고 볶고 헐뜯는 기지. 내가 저거 몫을 뺏아왔나, 못 되라고 축수를 했나, 와 그리들 지랄인지 모르겄다. 사촌이 논 사믄 배 아프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일 기고 그 러이 조선놈들 망해서 싸지." 으르렁거린다. 얼굴까지 시뻘개진다. "홍이 니도 배 아픈 사람 중의 한 사람가?" 하대완이 웃는다. "아닙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프다는 말이 있긴 있는 모양이지만 내 땅 까마귀도 반갑 다는 말도 있지요." 홍이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또 하동 사람 인심이 고약해서 상종 못할 긴가 싶더마는 니가 그러이 다행이다. 허허헛... 허허헛... 아무 래도 두만형님이 잘못하는 것 겉소. 못사는 것도 어럽지마는 잘사는 것도 어러분께 내치지만 말고 좀 품어보 소. 없는 사램이 설지 있는 사람이 답답겄소?" "그런 소리 마라. 관수, 그 백정이 사위놈이 농청에 술 팠았다고 와서 야료를 부리고, 내 그놈이 눈앞에 있이 믄 잡아다가 경찰서에 디밀겄다." "설마 술 팔았다고 그랬겄소. 술장사가 술 안 팔믄 우떡해? 형님이 농청 사람들한테 공술 먹였다는 소문이야 다 아는 일인데," "아아니 이사람이 뭐라 카노? 얘기가 삐딱한 거를 본께 자네는 백정네 편역이다 그 말가?" "나는 백정네 편역도 아니고 농청 사람 편역도 아니요. 예수쟁이도 아니고 중놈 편도 아니요. 장사꾼은 돈 버 는 일이 제일이고 실데없이 남우 일에 어성 높일 필요가 없다 그 말이오." "하여간에 평사리에서 홍 패거리들 사람놈 하나 없인께 무신 대역죄를 졌는지 모르지마는 그놈들 와 항상 쨋 기댕기는지, 아야간에 관수, 석이놈, 그놈들 눈앞에서 얼찐거리지 않은께 그것만이라도 묵는 기이 잘 삭는 것 겉다. 평사리의 누구네 아들인지 모리겄다마는 저 아아도 진줄 떠난다 카이," 용이아들이라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두만이는 긁는다. "아무래도 최부자댁 그 집도 떠나게 되는 거 앙일까?" "손가락에 불을 켜보지." 하대완은 입맛을 다신다. 비윗살 좋고 능청스럽게 얼렁뚱땅 잘하는 하대완도 두만의 옹졸함에 정이 떨어진 것 같다. 홍이는 하대완이 권하는 술은 마다하고 비빔밥을 시켜서 먹는 데만 열중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음속 으로 콧사배기를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못들은 척 내버려두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만석꾼도 망할라 카믄 하루아침이다. 남정네가 까막소에 있으니 그 집구석 기둥뿌리가 흔들흔들 안 한다 할 수 있이까?" "사촌이 논 사믄 배가 아프다, 그 말은 형님을 두고 한말 앙이까요?" 두만이는 용케 길상에 관한 말은 하지 않는다. 종이니 하인이니, 홍이가 없었더라면 곤란하다. "하야간에 관수 그놈이 진주 바닥이 다 아는 백정놈, 못된 짓은 찾아가믄서 꾸미고 댕긴다고 호가 나 있는 놈 이지마는, 그놈은 그렇다 치고 정석인가 그놈 노는 꼴이라니, 석이 그놈을 말할 것 겉으믄 물지게 지던 놈 앙 이가. 그러던 놈이 뭣을 우떻게 재주를 부맀든지 그 미련한 놈한테도 팔랑개비 재주가 있었든지 지가 선생이 라? 서천 쇠가 웃일 일이제. 양복을 입고 교단에 서? 내가 벌써부터 알쪼다 싶었더마는 아니나다를까, 기생년 하고 이러고 저러고, 그것만으로도 남우 자석들 가리키는 선생이 할 행토든가? 그러나 그보다도 경찰서에서 잡을라꼬 눈이 벌개져 찾아댕기는 거를 보믄, 그놈이 기생년 따문에 개망신을 당하고 도망간 것만은 아닌 기 라." "형님, 실데없이 와 그러요? 참말이제 제절꾼이 아니거마는. 거 몸도 많이 불어났는데 핏데 세우믄 해롭을 거 로요." 제물에 흥분한 두만이는 팽이가 제 혼자 도는 것처럼 멈추질 못하는 것 같다. "나는 누구 말마따나 친일파도 아니고 애국자도 아니다마는, 장사를 하다보이 더러 일본 사람들하고 술도 마 시게 되는데, 지깟놈이 머를 안다고? 그럴 자겍이나 있건데? 양복입고 교편을 잡은께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기라. 가소러버서. 아 그러씨 제놈이 그런 운동하겄이믄 대국에나 가서 할 일이제. 늙은 에매 경찰서에 불리가 고 불리오고, 그러니 반풍수 집안 망해묵고 돌팔이가 사람 직인다 하지." 더러 일본 사람들과 술은 마신다는 말은 홍이에게 위협, 그러니까 심약한 위협에 불과한 것이었고 늙은 어매 가 경찰서에 불려 다닌다는 얘기는 독골 모친한테서 들은 말이었다. "아따 실이 노이 되겄소. 남의 일에 그렇기 용 쓰다가는 똥 싸겄소." 하대완이 째려보며 쏘아준다.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온 듯, 그리고 똥 싸겠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움찔하 고 놀란다. 홍이 일어섰다. "잘 먹었습니다. 밥값을 제가 내고 가면 화를 내실 거고 해서, 그만 가볼랍니다." "오냐. 가봐라," 하대완은 손을 흔들었다. 20장 젊은 매 뒤뜰 은행나무 밑에서 계집아이는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줍고 있었다. 새로 주운 잎을 먼저 주운 잎하고 비교 를 한다. 비교하다가 하나는 버린다. 그리고 다시 새것을 줍는다. 유록색 모슬린 치마에 연분홍 모슬린 저고리, 짤막하게 머리를 땋아서 나비같이 자줏빛 댕기를 물렸다. 하얀 운동화를 신고. 아이는 새것을 주우면 다시 비 교해보곤 하나를 버리는 그 짓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잎이 떨어지고 있는 은행나무 위엔 남빛 하늘이 빛깔의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다. 아이는 평화스럽고 축복받은 존재 같기만 하다. '저 아이는 최상의 은행잎 하나를 찾고 있다. 아마 윤국이가 돌아올 때까지 저러고 있을게야.' 대청의 뒷문을 열어놓고 후원을 바라보며 서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양현은 삭막한 이 집의 한떨기 꽃과 같은 존재였다. 피폐하고 황막한 서희의 요즘 일상에 양현은 큰 위안이었다. 아비가 누구이든 내로라 하고 나 서지 않는 이상 양현에게 아비는 없다. 어미는 보다 확실하게 없는 것이다. 양현은 그것을 안다. 생과 사가 무 엇인지 몰라도 없다는 것은 안다. 조용한 아이였지만 남의 눈치를 보거나 청승스럽지가 않았다. 뛰어가다 넘어 지면 앙! 하고 울었으니 울음을 모르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거의 울지 않았다. 그는 서희를 어머님이라 불렀고 윤국이와 환국이를 오빠라 불렀다. 환국이는 양현을 미소로써 바라보았으나 윤국이는 그와 더불어 뒹굴며 무 척 사랑했다. 서희는 집안 어느 누구에게도 양현에 대한 환국이 윤국이 이하의 대접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봉순의 정의에 대한 보상은 아니었다. 양현이 어떤 인연으로 서희에게 왔건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양현 의 존재 자체가 위로였다면 그것은 사랑인 것이다. "양현아." 아이는 돌아보며 빙긋이 웃었다. 서편의 해가 아이 얼굴 위에 가득 실린다. "은행잎은 다 같은데 버리고 또 새로 줍고 왜 그러느냐?" "더 예쁘고 빛깔도 고운 걸로 줍는 겁니다, 어머니." "내가 보기엔 똑같은데?" "아닙니다. 똑같지가 않습니다." "그걸 주워 뭘 할려구?" "동경의 오빠한테 부쳐줄까, 어머님이 서울 가실 적에 드릴까 생각는 중이에요." 서희는 웃는다. "너는 윤국이 오빨 좋아하지 않았드냐?" "오빤 여기서 저랑 함께 노는 걸요?" "아아 참 그렇지." 서희는 또 웃는다. "좀 있으면 해가 진다. 바람이 차질 테니 그만 들어오는 게 어떨까?" "네." 양현은 은행잎을 든 채 치마를 떨고 타둑타둑 뛰어온다. 그는 혼자서 곧잘 놀았다. 소꼽도 하고 그림을 그리며 서희가 서울서 사다준 그림책을 보기도 했다. "마님, 방에 드십시오." 유모가 뒤에서 말했다. 며칠 전에 서울서 내려온 뒤 서희는 계속 앓았다. 서희는 몸살이라 우겼지만 박의사는 빈혈증이라 했다. 얼굴이 창백했고 빔범하게 현기증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여름에 맹장염으로 받은 수술의 결 과는 뒤탈이 없었으나 아직 보행할 땐 뱃가죽이 당기는 듯했으며 궂은 날에는 신열이 나고 뼈가 쑤시는 것이 다. 결국 건강이 회복되지 못한 채 서울을 오르내려야 했고 보약같은 것은 마다했으니 주변 사람들은 어쩔 도 리가 없었다. 안방으로 들어온 서희는 자리에 눕는다. "뭐 마실 거라도 올릴까요?" "그만두시오." 유모는 물러났다. 서희는 방안이 휭하게 넓다는 생각을 한다. 계절 탓이려니 하며 반지가 헐거워진 손을 올려다 본다. 분홍빛이 던 손톱이 히여끄름하다. 서희는 손을 내리고 돌아눕는다. 방의 넓이만큼 아마도 그 비슷하게 외로움이 스며온 다. 서희는 결코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두 사람이 자기 곁을 떠난 것을 깨닫는다. 두 사람이 자기 곁에 있 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건만 왜 떠났다는 생각을 하는지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다. 어제 박의사는 왕진을 왔었다. 그는 간호부를 대동하지 않고 오는 버릇이 있었다. "부인답지 않으십니다. 어머님의 몸이 튼튼해야 환국이 윤국이가 불안을 느끼지 않지요."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별로 대단치도 않는 걸 가지고..." "건강을 스스로 포기하면 의사도 속수무책이지요." "포기하다니요?" "포기 안 하셨습니까? 옆에서 보기엔 포기한 듯 생각이 드는군요." 서희는 애매하게 웃었다. "서울 계시는 분도 창백한 부인의 얼굴을 보시면 고통스러울 텐데요." 그 말을 할 때 박의사 안경 속의 눈동자엔 절망적인 빛이 보였다. 다음 순간 자조의 웃음이 입가에 감돌았다. "병원에 조수로 있던 그 학생 결혼했다지요?" 자조의 웃음을 흐트려버리듯 서희는 말했다. "했지요." "부조라도 할걸, 몰랐군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빈한한 청년이 부잣집에 장가들었으니까요. 행운압니다." 그 목소리는 잔인했다. "아주 큰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졸장부가 되겠어요?" 응수였는데 박의사의 말보다 더 잔인했다. "네. 아마도," "양교리댁이라지요." "그렇지요 환국이를 무던히 탐냈습니다만," 서희는 그 말 대꾸는 하지 않는다. 박의사도 중매 서달라고 부탁하더라는 얘기는 안 한다. "선생님." "네." "물론 결정적인 질병일 경우는 별 문제겠습니다만 웬만한 병이라든가 쇠약 같은 것은 정신력에 따라 치유될 수도 있는 일 아닐까요?" "서울에 계시는 분을 위해 물으시는 건가요?" "아니 일반적으로... 나는 내 체질에서 그런 것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무시할 수 없지요. 생명력은 신비스런 것이니까요. 의사로서도 간혹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반대로 정신력이 허약해지면 없는 병도 불러들이는 경우가 있을 테지요. 삼년고개의 얘기도 바로 그런 것 아닐까요?" 서희는 앳되게 웃는다. 어릴 적에 듣던 얘기였기 떄문일까. "삼년고개에서 넘어지면 삼 년밖에 못 산다. 결국 삼 년밖에 못 사는데 그것은 자기 의식이 자신을 죽인 것 아닐까요? 그 치유법이라는 게 두 번 넘어지면 육 년, 세 번 넘어지면 구 년, 하는 식인데, 해서 삼천갑자 동 방삭이도 생겨나는 거구요." 박의사는 껄껄껄 웃었다. 그리고 청진기를 말아 가방에 넣고 주사기도 소독해서 넣으면서 "나도 장가들게 됐는데, 부잣집에 장가드는 게 아니니까 부인께서는 부조를 해주셔야 합니다." 환자에게 진찰 결과를 일러주듯 평이하게, 그러나 웃음 위에선 괴이한 느낌이 온다. 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당 황한다. 그리고 아무말도 못한다. "놀라셨습니까?" "네. 결혼 못하실 줄," 서희로서는 대단한 오발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을까요?" "그, 그건," 박의사는 일어섰다. 방문을 열려다 말고 돌아본다. 박의사 뒤통수를 바라보던 서희의 눈과 부딪친다. 서희는 묘하게 사과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인다. "환자와 의사, 우리는 끝내 환자와 의사... 진실로 원했는데 말입니다. 그럼 안녕히, 몸조리 잘하십시오." 박의사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면 같았다. 안경이 희번덕였다. 서희의 낯빛도 변했다. 박의사의 감정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감정을 그런식으로 쏟아버릴 줄은 상상조차 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제, 지나가버린 일이다. 그 일은 아직 서희 마음속에 충격을 주고 있는 것이다. 서희는 다시 반듯하 게 누우며 천장을 올려다본다. 이성으로서 호감이나 호기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의사로서 존경하고 신뢰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는 직업인으로서 거의 완벽했으니까, 그러나 서희에게는 완벽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 다. 부산서 맹장염 수술을 하고 난 뒤 연락을 받고 진주서 달려왔을 때 그 완벽하지 못했던 것은 여지없이 노 정되고 말았다. 박의사는 자신의 직업을 망각했을 정도였다. 낯선 곳에서 갑자기 당한 일이었기 때문에 외로웠 던 환국이와 서희는 직업을 망각한 의사 박효영을 친척같이 친애의 감정으로 의지한 것은 심리적으로 자연스 런 일이었다. 서희를 자동차에 싣고 진주로 들어섰을 때 그때 비로서 박의사의 얼굴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 다. 물론 수술이란 예측키 어려운 것이지만 맹장염이란 그리 중대한 병이 아니다. 환자들 쪽에서는 배를 짼다 는 사실만으로 겁을 먹게 되지만 의사의 입장에서, 그도 수술이 끝난 후였었는데 이성을 잃었다는 것은 그야 말로 우스운 얘기다. 그는 서희의 창백한 얼굴, 고통을 참는 모습에 괴로워했는지 모른다. 서희는 박의사가 자기를 짝사랑하여 결혼을 안 한다는 항간의 소문도 알고 있다. 어쩌면 환국이도 박의사의 감정을 아는지 모른다. 예민한 환국이, 특히 부산서의 박의사 거동에서 그것을 느끼지 않았다면 바보다. 그리 고 어쩌면 환국이도 서희와 같은 마음인지 모른다. 그는 시종 신뢰로써 박의사를 대하였고 박의사가 오면 맘 을 놓는 것 같았으니까. 한 인간의 진실,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불쾌해할 이유가 없고 경계한다는 것은 무자비 한 일이다. 어제 일에 연쇄된 것처럼 보름 전의 일이 생각난다. 아무 예고도 없이 뜻밖에, 참으로 뜻밖에 임명 희가 시중꾼을 하나 데리고 서희를 찾아왔던 것이다. "부산에 왔다가, 만나 뵙고 싶어서," 했으나 그렇지는 않고 일부러 진주에 온 것 같았다. 그는 수수한 한복 차림이었다. "모두들 안녕하세요." 서희는 반갑게 인사를 했으나 명희가 찾아온 목적이 궁금했다. 만나고 싶어 왔다는 것은 구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오신 김에 여독도 풀고 구경도 하시고," 서희 말에 명희는 "내일 떠나야 합니다." 묘하게 긴장을 나타내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빨리?" "서울을 비울 수가 없어서, 그보다 아이들은," 마침 저녁때였기에 윤국이는 귀가해 있었다. "유모, 아이들 손님께 인사드리라 이르시오." 윤국이와 양현이 들어왔다. 명희의 눈은 마치 직선처럼 양현에게 쏠렸다. "인사드려라. 서울 임교장님 매씨 되시는 분이다." "안녕하십니까. 형님한테 말씀 들었습니다." 윤국은 어른스럽게, 그러나 수줍음을 감춘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나도 환국이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부드럽고 점잖은 환국에 비하여 윤국은 용모에서나 표정에서 패기를 느낄 수 있다고 명희는 생각하며 이내 시 선을 양현에게로 옮긴다. "양현아, 인사 올리지 않느냐? 아주머님께 인사드려라." 양현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 대신 활짝 웃었다. "이리 온?" 양현이 다가가자 명희는 안아준다. 그러나 이내 명희 무릎에서 미끄러져 내려앉는다. "아주머니가 양현에게 주려고 선물을 사왔다. 아 참, 윤국에게도 줄 선물이 있어." 명희는 흥분한 것 같았다. 허둥지둥 시중꾼을 불러 꾸러미를 가져오게 했다. 서희는 미소지은 채 풍경을 바라 보듯, 그러나 얼굴에는 일말의 의혹이 있었다. 양현이란 이름이 어째서 명희 입으로부터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 왔는지, 서울서는 양현의 존재는 잘 모를터인데, 선물까지 사오다니, 서희는 궁금했으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윤국에게의 선물은 스케이트였고 양 현에게는 커다란 인형이었다. "고맙습니다." 윤국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흉내내듯 "고맙습니다." 양현도 큰 소리로 말했다. 명희와 서희는 웃었다. "어머니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양현이는 따라오지 마. 공부 방해야." 눈을 부릅뜨는 시늉을 하고 윤국은 명희에게 고개를 숙이며 나갔다. "든든하시겠습니다. 환국이 못지않게 잘생겼군요." "성질이 거칠어서 걱정이지요." "남자는 그래야," 명희의 목소리는 계속 허공에 뜬 것처럼 들렸다. "양현아." "네, 어머니." 어머니라는 호칭에 명희는 움찔한다. "좋으냐?" "예뻐요. 안고 자도 되지요, 어머니?" "그럼, 되구말구." "아주머니?" 양현은 명희를 올려다보며 불렀다. "우리 큰오빠 알아요?" "알구말구," "우리 큰오빠 한 달만 있으면 오신대요." "그래? 양현이는 학교에 다닌다지?" "네 일학년이에요. 나 큰오빠한테 편지 쓴걸요?" "그랬었니? 참 장하구나." "하지만요," "음?" "우리 큰오빠도 참 좋지만 난 작은오빠가 더 좋은걸요." "큰오빠 샘 나겠네?" 저녁을 함께 먹고 저물어서, 양현은 유모가 데리고 가서 재운 모양이다. 서희와 명희는 마주보고 앉았다. 명희 는 긴장해 있는 것 같았다. 명희의 긴장은 서희에게 전달이 되었다. "양현에 대해서는 인실이한테 얘기를 들었지요." "아아 그러셨어요." 납득이 간다. 그러나 명희가 양현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느낌이 가셔지지는 않았다. "인실이는 부인의 친딸인 줄 알고 있더군요." 서희는 뭔가 아연해지는 기분이다. "친딸 아닌 것을, 명희씨는 환국이한테서 들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명희는 짜르듯, 단호한 것같이 말했다. "이상현 씨가 편지를 보내왔더구먼요." "이상현 씨가!" "네."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것은 저도," 서희는 생각에 잠긴다. 깨달아지는 일이 있다. 만주를 향해 떠난 혜관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혜관스님은 양현이 그분 딸인 줄은 모르신다. 이상한 일이야. 그렇다면 그분은 조선을 떠나기 전에 봉 순이가 자기 딸을 낳은 것을 알았더란 말이냐?`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명희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진주로 왔다. 솔직하게 사무적으로 양현의 일을 상의 하리라 생각하고 왔었다. 그러나 자신의 계획에 차츰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실은, 이선생께서 소설 한 편을 부쳐 보내셨어요. 지난달에 그것이 발표되어 반향이 좋았습니다. 그 원고를 부쳐 보내면서 편지가 함께 왔더군요." "..." "앞으로 가능한 한 소설을 쓰실 모양이더군요. 그리고 그 원고료를 양현을 위해 썼으면 좋겠다는 그런 의향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랬군요." 서희는 나직이 말했다. 예기치 못했던 감정이었다. 적요한 바람 같은 것, 상현이 지난날의 거역을 보복하기 위 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의식 밑바닥에 가라앉혀 놓은 것이 별안간 일어서며 결별을 고 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아버지라면... 당연히 그랬어야 했지요. 아마 이곳서 떠난 스님이 그분을 만난 모양이지요? 스님은 그런 일 모 르시지만 양현의 어미가 죽은 얘기는 했을 것입니다." 서희는 깍지낀 손을 풀었다. '그들은...사랑했구나.' "제가 여길 내려올 때, 남편하고 상의를 했습니다만, 부인도 아시다시피 소생이 없어서..." 더듬거리다. "명희씨가 양현을 양녀로 삼겠다 그 말인가요?" "네. 가능하다면," "이상현 씨의 의사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건 어렵겠습니다. 내게는 양현어미에 대한 의무가 있으니까요. 아버지가 와서 찾아간다면 모르지 만." "허행한 것 같습니다." 명희는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하긴 아까 보니까 양현에게는 이곳에 있는 것이 행복하겠구나 생각했지요." 서희 얼굴에서 긴장이 풀린다. "그애는 이 집의 꽃입니다. 어느 누구도 남의 자식으론 생각지 않지요.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된다면, 부모 밑 에 자라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러나 일그러지게 자라지는 않을 겝니다." "그, 그런 것 같았습니다." 실망에서 절망으로 옮아가듯, 명희는 뇌었다. 그리고 명희는 양현의 머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다가 진주를 떠 나갔다. 서희는 양현과 이상현을 결부시켜 양현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양현이 집 안의 꽃이며 위안이기 때문에 내놓으려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명희가 살고 있는 그 집보다 이곳이 양현 을 위해 보다 낫다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떳떳하게 거절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육신에는 불가사의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정신력인지, 그것만도 아닌 것만 같다. 며칠을 굶고 며칠 밤을 잠 자지 않아도 끄떡없이, 쇳덩이같이, 그게 이상하다. 그 쇳덩이 같은 것이 자자부레한 일로 망가지고 무너지는 것이 이상하다. 그런데 몸이 허약해지면 잠결에 뭘 자꾸 먹어댄다. 콩, 어포, 소화가 안 되는 것을 잠결에 먹었 는데 체하지도 않는다. 의학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육신은 스스로 삶의 의지를 가진 것일까? 내가 지금 허 약해져 있는 것은 서울의 환국이아버지 때문이 아니다. 이 허약은 나를 쉬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지금 어지럽고 잠들고 싶다. 그러나 잠들 수 없다. 잠들 수 없다, 잠들 수 없...' 하다가 서희는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꿈결에 윤국의 음성이 들려왔다. 환국의 음성 같기도 했다. 절규하는 것 같은 소리였다. 양현이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양현이 아니었고 봉순이었다. "봉순아 안 되지 응? 안 되지 안 되지 응? 양현이 보내면 안 되지? 안 되는 거지? 봉순아, 봉순아!" 몸을 흔드는 바람에 서희는 눈을 떴다. "헛소리를 막 하세요. 선생님 뫼셔올까요?" 윤국이 내려다보며 묻는다. "아니야. 꿈을 꾸었어. 난 아무렇지도 않다. 피곤할 뿐이니까." "미음 좀 드십시오." 아무리 식욕이 없어도 운국이가 권하면 먹기 때문에 앓아 누웠을 때는 윤국이가 먹을 것을 가져온다. "음, 양현이 있느냐." 양현이 있는 것은 당연하데 왜 그런 말을 물을까, 윤국은 의아해한다. "인형 갖고 노는데 왜 그러세요?" "음, 꿈자리가 좀," 일어나 앉아 미음을 마신다. 미음 그릇을 비우며 "이제 한결 나아진 것 같다. 보약도 먹고 기운을 차려야겠지?" "그럼요 어머님," 윤국이 기뻐서 얼른 말했다. 그러자 발소리가 타둑타둑 난다. 양현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머님 미음 다 잡수셨어요?" 미음 그릇을 들여다본다. "오냐, 다 먹었다." 서희는 양현을 안아준다. "양현아." "네." "넌 윤국이오빠가 젤 좋고 다음이 환국이오빠라 했지?" "네. 그렇지만 환국이오빠도 이뻐요." "그럼 어머니는 몇 째번이나 예뻐?" "첫째 둘째, 그런 거 아니고 이뻐요." "그래?"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머님." 윤국이 다소 심각해져서 불렀다. "왜 그러느냐?" "광주학생사건 아시지요?" "음. 일본 학생하고 조선 학생하고 기차 속에서 패싸움이 붙었다는 얘기 말이냐?" "네." "크게 일이 벌어질 모양입니다. 우리 학교에서도 가만 안 있을 것 같습니다. 연일 학생들이 잡혀간다는 소식이 고," "설마 네가 주동하는 건 아니겠지?" "상급생이 있으니까 그렇진 않지만 주동이 되면 안 됩니까?" 모자는 서로 쳐다본다. "안 된다 할 순 없지만 너는 아버님이 서대문에 계시니까 신중히 처신하는 것이 좋겠구나. 그리고 만용은 금 물이니라. 보다 큰일을 위해서 너희들은 자라야 한다." 서희 얼굴에는 애원하고 달래는 빛은 없었다. "이번엔 어른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학생들 문제 아닙니까?" 윤국은 불만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상대는 어른이다. 어른이다뿐이겠느냐? 너희들이 사슴이면 그들은 사냥꾼인 게야." "사자가 되면 될 거 아니겠습니까? 모두 사자가 되면 말입니다. 설사 우리가 학생의 신분을 잃고 정당치 못한 짓을 한다 하더라도 그네들은 근본에서부터 지엽에 이르기까지 정당하지 않았으니까요!" 윤국은 공박으로 나왔다. 눈이 빛난다. 이제 윤국이도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어미 품에서 떠날 차비를 하는 다 자란 한 마리의 매다. [4부 1권으로 이어집니다.] 어휘 풀이 *괄호 속의 숫자는 본문 속의 면수와 행수를 가리킴 무안 풀이(24 : 24): 면목없음, 멋쩍음을 면하려고 하는 행동. 연연(25 : 7): 가냘프고 연약함. 터럭수건(40 : 23): 털수건. 타월. 세루(41 : 3): 얇고 부드러운, 모직물의 한 가지. 깝채싸니께(45 : 7): [방언] 재촉해대니까. 자파(48 : 10): 포기. 진짝겉이(48 : 24): [방언] 징같이. 부어오는 모습을 '징'에 비유. 갈롱피는(50 : 4): [방언] 잘난 척 까불다. 듬짜(57 : 24): [방언] 덤짜. 가무가 시원치 않은 하급 기생. 교지기(59 : 18): 학교를 지키는 사람. 청성궂게(60 : 13): [방언] 청승맞게. 세를 딸는(73 : 13): 세를 따라 행동하는. 내삐나도오라(78 : 11): [방언] 내버려두어라. 전(80 : 3): 물건의 위쪽 가장자리의 약간 넓게 된 부분. 금봉채(86 : 21): 봉황을 새긴 금비녀. 분식(88 : 12): 좋게 보이기 위하여 겉을 꾸밈. 부골스럽게(96 : 21): 부자다운 골격이 두러나게. 파락호(97 : 17): 행세하는 집 자손으로, 난봉이 나서 결딴난 사람. 인벵(103 : 13): [방언] 인병. 사람으로 인해 드는 마음의 병. 소가지(104 : 7): '마음속`의 낮은말. 주리팅이 없다(105 : 22): [방언] 주책없다. 욜랑거리서(105 : 23): [방언] 촐랑대서. 소쇄(111 : 4): 산뜻하고 깨끗함. 지망 없이(118 : 24): [방언] 마음에 정한 바 없이. 어마도지해서(120 : 7): [방언] 당황해서. 쩌잡아(120 : 29): [방언] 함께 껴서. 기러분(124 : 24): [방언] 그리운. 외목(127 : 20): [방언] 목 한복판, '애목'으로도 쓰였음. 애맨 때(135 : 26): [방언] 누명. 쯘벙겉이(140 :27): [방언] '쯘벙(쭌범)'은 범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을 형상한 말. 무료하게. 땡삐(142 : 13): [방언] 땅벌. 야장스럽게(142 : 25): [방언] 서글프게. 늘푼수(163 : 8): [방언] 늘품. 앞으로 좋게 발전할 품성. 칭아(163 : 12): [방언] 충위. 차이. 근가죽(167 : 5) [방언] 근처. 반팅이장사(167 : 29) [방언] 목판에 물건을 놓고 파는 노점상. 막설(167 : 29): 하던 일을 그만둠. 할명(179 : 2): 이름을 지움. 비자(183 : 18): 여자 종 복쟁이(204 : 3): 복어 볼촉스럽긴(225 : 5): [방언] 볼강스럽다. 어른 앞에서 버릇없고 불경한 태도가 있다. 따바리(228 : 12): [방언] 똬리. 황감(263 : 9): [방언] 황송하고 감격함. 소분지애씨(264 : 24): [방언] 비하여 약과, 유도 아님. 어구삼살방(283 : 25): 가장 나쁜 방위. 생이(302 : 8): [방언] 형. 횡토(302 : 2): [방언] 행티. 한정(304 : 6): [방언] 한증. 아짐태서(306 : 19): [방언] 혹시나 해서. 호욕(306 : 30): [방언] 혹. 혹시. 놀량패(310 : 27): [방언] 난봉꾼. 동언(337 : 5): [방언] 동헌. 추굴(337 : 6): [방언] 신벌. 말소도레기(390 : 1): [방언] 구설 이문가문하는(390 : 26): [방언] 숨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는. 발덩거지(393 : 4): [방언] 발을 걸어 방해하는 행위. 고사(393 : 16): [방언] 교사. 돈포(393 : 23): [방언] 돈표. 황(394 : 21): 일이 뜻대로 안되고 엇나감. 등장(398 : 15): 연명으로 관아에 올려 하소연하는 일. 잠차져서(412 : 12): 열중해서. 미영(425 : 29): [방언] 목화. 이새(426 : 6): [방언] 시집가기 전에 배우는 바느질 따위의 제반사. 빈치(428 : 7): [방언] 내놓고 자랑함. 얼산(430 : 1): [방언] 일이 마구 어질러진 채 쌓여 있는 모양. 매구(447 : 20): [방언] 꽹과리. 엉구렁(459 : 22): [방언] 구렁텅이. 떳다바라(464 : 1): [방언] 보란듯이. 설지(470 : 12): [방언] 서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