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토지5부1권 (13) 저자명: 박경리 출판사명: 솔출판사 토지 5부 1권 차례 제 1편 혼백의 귀향 1장 신경의 달 2장 춤추는 박쥐들 3장 섬진강 기슭에서 4장 몽치의 꿈 5장 관음탱화 6장 해체 제 2편 운명적인 것 1장 밀수 사건 2장 송화강의 봄 3장 서울과 동경 제 1편 혼백의 귀향 제 1장 신경의 달 아이들은 초저녁에 잠이 들었고 덥다. 덥다, 흐느적거리듯 중얼거리며 저녁 늦게까지 설거지를 하던 보연이도 기척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잠에 떨어진 모양이다. 상의 방에도 불은 꺼져 있었다. 홍이는 식당을 겸한 거실에 앉아 연거푸 담배를 피우다가 사무실에서 들고 온 신문을 펴든다. 신경서 발행하 는 1940년 8월 1일자 "낙토일보"다. 전에 없이 신문을 들고 온 것도 그렇고 이미 사무실에서 대강 훑어보았는 데 새삼스럽게 왜 다시 펴드는지,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짤막한 기사가 있었다. 한구석으로 밀어붙여 놨지만 호열자에 관한 기사가 실리기로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 으며 그 전염병에 대한 공포로 상당히 확산되어 인심은 흉흉했다. 뿐만 아니라 호열자가 와전되어 그랬는지 아니면 그럴 만한 꼬투리가 있었는지 페스트가 발생했다는 풍문도 끈질기게 나돌고 있었다. 금줄을 치고 발생 지역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니, 떼죽음이 있었으니, 심지어는 발생지역에 불을 놓아 살아 있는 사람들까지 함께 태워죽였다는 끔찍한 소문도 있었다. 호열자에 관한 기사 윗단에는 스파이 혐의로 취조받던 '로이터' 통신사 동경 지국장 '코쿠스'가 투신자살한 사건을 다루었는데 병원으로 실어가고 어쩌고 했다 해서 제목을 뽑기를 일본 무사도의 정화라, "이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아예 염치라는 것이 없는 종자들이다. 아이들까지 난도질해서 죽여놓고, 남경에는 아직 그 피냄새가 남아 있을 건데 영국놈 시체 하나 병원에 떠메다놨다 해서 뭐? 일본 무사도의 정화라고? 뱃 가죽 터지게 웃을 일이다. 개새끼들!" 시원할 것도 없는 욕설을 퍼붓는데 별안간 아이들 방에서 외마디 소리가 들려왔다. 신문을 팽개치고 홍이는 급히 방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외마디 소리는 보연의 잠꼬대였다. 맨바닥에 배게도 없이 누운 보연은 흠씬 땀 에 젖었고 전등 이래 얼굴을 백랍같이 희었다. 땀을 닦아주고 홍이는 보연을 안았다. 몸뚱이가 여름날 엿가락 같이 팔 위에서 축 늘어졌다. 그 가벼워진 체중에 홍이는 내심 놀라고 당황한다. "다, 당신 왜 이러요? 제가 뭘 어쨌기에..." 실눈을 뜨고 중얼거리던 보연은 어리광스럽게 홍의 목을 두 팔로 감았다. 안방으로 안고 가서 침상에 누이는 데 보연은 이내 잠에 떨어지고 만다. 아이들 방으로 되돌아온 홍이는 잠든 두 아들의 모습은 한 동안 내려다 보다가 거실로 나온다. 지난 봄, 조선으로 나갔던 보연은 두 달 가량 친정에서 정양을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썩 좋아 뵈 질 않았고 피곤해야하는 것도 전과 다름없었다. "아들 딸, 일월 겉은 자식들 두었겠다, 살림은 일고 서방은 제집을 하늘겉이 우다아쌌는데 머가 모지라서 그러 노. 복에 겨워 밤낮 골골거리는 기가. 나겉은 년이사 죽고 저버도 그놈의 저승차사가 잡아가야 말이제. 아이고 오 시장스럽다. 산은 오를수록 높고 강은 건널수록 넓고, 내 팔자는 와 이렇노. 넘들이 복타로 갈 적에 이년은 살강 밑에서 자불고 있었든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도 있습디까? 답답한 사람은 누님이 아니라 접니다." 뾰르둥해서 보연이 대꾸하면 "그러이 하는 말 아니가. 이 좋은 집에서, 하기는 너거들 나보고 샛집이라 하더라마는 내가 없이 사이께로 그 러는 모앵인데 집 사돌라 안 칼 긴께 비밀로 할 것 없다. 너거 성시에 이만한 집 못 산다믄 넘들이 믿겄나?" "뭐가 무서워서 내 집을 샛집이라 하겠습니까. 못 믿우면 관청에 가서 알아보시오." "하여간 비단가리 하나 없는 나한테 비하믄 아프다, 아프다 해사아도 올케 니사 청충당석에서 하품하는 꼴이 제. 사람이란 예사 팔자가 늘어지믄 아픈 데가 많아지네라." 공장 근처에 허술한 집에서 홍이 가족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은 작년 봄의 일이다. 상의는 제 방이 필요할 만 큼 과년해졌고 보연의 건강도 문제였으며 한편 홍이 벌여놓은 사업의 규모를 생각할 때 지나치게 누추한 집에 산다는 것이 이상하게 비쳐질 수도 있는 일, 해서 그 점도 고려하여 이사를 결정했던 것이다. 집은 햇볕 바르 고 넉넉했으며 편리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셋집인 것만은 사실이다. 임이 말대로 집을 살 능력은 있었다. 다만 뿌리박고 살 수 없는 형편,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뜨내기 생활 방식을 청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식구들을 조선으로 보내버릴까? 저 사람 건강도 그렇지만 앞으로 무슨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만 보연이 동으할 것 같지 않았다. 지난 봄만 해도 안 가려는 것을 우격다짐으로 보내면 서 홍이는 신신당부를 했다. "몸이 온전해질 때까지 돌아올 생각 말어. 장모님께 송금할 테니 돈 아끼지 말고 보약 먹도록, 알아들었나?" "예. 하지마는 무슨 죽을 병도 아닌데 아이들 두고." "아이들 다 컸어. 여기 걱정할 것 없다." 그러나 보연은 아이들과의 이별도 어려웠겠지만 남편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 장이의 존재, 장 이와의 사건이 있은 후 보연은 늘 그런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 두달 만에 서둘러 돌아왔다. 그는 홍이와 함께 아니면 결코 귀국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담배를 붙여물고 홍이는 피어나는 연기를 막연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사방은 쥐죽은 듯 괴괴했다. 내리쬐던 뙤 약볕과 열풍이 일렁이던 한낮의 거리를 생각하면 기온은 많이 떨어졌는지 창밖에서 스며드는 외기가 제법 서 늘하다. 이미 자정은 지나갔다. 홍이는 정수리를 가르며다가오는 한밤의 정저이 전혀 새로운 경험처럼 불 것이 고통스럽기도 했다. 거대한 도시 신경의 깊은 밤, 요란하게 울리는 심벌즈와 달콤한 클라리넷의 선율과 휘황한 불빛 아래 난무하는 군상, 완숙한 과실 냄새가 감도는 환락가에도 하마 불은 꺼졌을 것이며 노동자들이 찾아 들어 황주를 마시는 뒷골목 목로는가. 어둠 속의 사악한 음모 때문에 도시는 지금 꿈틀거리고 있는지 모른다. 군마와 일장기와 부의의 종언을 기다리는 숨막힌 병실인지 모른다. 덧없는 집념의 망령들이 떼지어 거리 모퉁 이를 돌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도시는 편안한 잠, 꿈을 꾸지도 않는다. 휘고 일그러지고 비틀거리는 도시, 일본 인은 말하기를 왕도낙토라, 왕도낙토의 수도는 낙토 중에서 낙원일진대 그러면 그것은 부의의 왕도인가 히로 히토의 왕도인가. 만주인의 낙토인가 일본인의 낙토인가, 하 참, 사변의 허황함이야말로 칼을 능가하는 살육이 요 유린이며 강탈의 무기인지 모른다. 홍이는 손끝 가까이 타들어오는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끈다. 필요 이상 힘을 주어 누르고 문지르는데 별안간 몸이 붕 뜨면서 눈앞이 캄캄해졌고 어지러웠다. 뿌옇게 뭔가 보였다가는 먹물같이 새까맣게 닫혀지는 의식의 바닥에서는 그네를 타는 듯도 했고 배를 탄 듯 흔들리는데 그 배는 도시였다. 신경 전체가 떠오르고 있었다. 떠올라서 기구처럼 하늘을 떠돌며 흐르는 것이다. 신경의 인구에 갇혀 있으며 자신과 아내와 아이들도 그 속 에 같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지상을 떠나가고 있다, 가고 있다, 하고 생각을 되풀이하는 것이 었다. 그랬는데 눈앞이 환해지며 섬광이 교차하고 무너져내리는 것이었다. 뭔가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숱한 건물들이었다. 한없이 넓고 하얀 가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카키빛 군용차, 마차, 인럭거, 바람에 서걱거리던 가 로수, 무리지어 가는 사람들, 꽃잎 같은 아이들이 있고 행진하는 일본 병정, 그 모든 것이 소리 죽인 채 땅속 으로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땅속으로 꺼져들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질러서 "그만 하늘하고 땅하고 딱 붙어서 한날한시에 세상 끝내부맀이믄 좋겄다! 이래가지고는 못 산다!" 생모 임이네의 새된 고함이 귀청을 찢듯 들려왔다. 홍이는 진저리를 치며 가위 놀림 것처럼 몸을 흔들고 버둥 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 속의 행동이었을 뿐이다. 비몽사몽이었는가. 잠시 넋이 나갔던 것이었을까. 멀쩡하 게 두 눈 뜨고 앉아서 무슨 그런 해괴한 것을 보았는지, 재떨이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가 비로소 홍이 눈에 들어왔다.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몇 번 고개를 흔든다. '도대체 무슨 징조일까?' 기분이 좋을 리 없고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밤이 오싹오싹 심장을 쬐듯 스며드는 것 같았다. 자정이 넘었는데 잠 이루지 못하는 일이며 상상해본 일조차 없는 그 따위 환각에 빠진 것은 무슨 까닭인지 참으로 희귀한 체험 이었다. 홍이는 애써 그것을 털어버리려 했다. 특별히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은 이니며 다만 피곤하여 그렸을 것 이라고 자신에게 강조했다. 자신도 보연이 못지않게 지쳐 있었던 것이라고. 어쩌면 얼마 전에 만난 송장환과의 대화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어서 그런 환각에 빠졌는지도 모른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것은 이유가 될 만 했다. 달포 전에 홍이는 용정촌을 다녀왔다. 송장환의 형, 영환의 부고를 받고 갔던 것이다. 장례에 참석하기에 앞서 홍이가 찾은 곳은 월선의 묘소였다. 공노인 부부의 묘도 그 부근 멀지 않는 곳에 있 었다.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산재해 있는 산속의 무덤 세 곳을 차례차례 돌며 술을 부어 놓고 절을 한 뒤 홍이 는 월선의 무덤가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일어섰다. 달리 할말도 없거니와 감회도 없었다. 할말이나 감회 가 없었다기보다 죽음과 이별의 냉혹함을 이제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해야 옳은지 모른다. 절대적 침묵이 냉혹 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절대적 사실에는 누구든 길들여지게 마련이다. 홍이도 길들여졌던 것이다. 그리움이 며 고마움이며 한 인간의 심신을 형성해준 요람이었을지라도 그 인연들이 형체 없이 사라지고 청산이 되었는 데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영원한 침묵의 냉엄함과 망각의 비정,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등뒤에서 넋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산새울음, 그 소리를 들으며 산을 내려온 홍이는 상가로 향했다. 송영환의 후실 염씨가 흐느껴 울곤 했지만 장례는 쓸쓸하고 조용했다. 장례가 끝난 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동 성반점의 진씨와 매갈잇간 박서방이 남아서 술상 앞에 앉았다. 송장환은 그들에게 술을 권했고 홍이는 오래간 만에 송장환 술잔에다 술을 따랐다. "유섭이어마임으 소식 상기도 모릅매까?" 술잔을 비우고 나서 박서방이 느닷없이 물었다. "모르지요." 했으나 송장환은 깊은 주름으로 팬 박서방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집안 사정에 소상한 그가 왜 새삼스럽게 그 일을 묻는가. 그 물음에 기분도 과히 좋질 않아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러믄 이 세상 사람 앙임매. 어디매든 살아 있다문 흔적으 없을리 없지비. 그렇잲응가?" "십중팔구... 세상 떠났겠지요." 송장환은 시선을 떨구었다. "설사 살았대두 부부라는 거느 돌아누우문 남이라 합두구만. 맞는 말입매. 그렁이 왈가왈부할 것 없습매. 하지 마느 아들 유섭이느 어째 오잽매? 어째 앙이 오느냐 말이. 상주 빠진 초상 되우 섭섭했슴둥. 송씨 가문 초상으 꼬락지 그래 되겠능가. 남보기 우세스럽고 한심하지 안았음?" "올곧잖게 따지듯 말했다. 진씨와 홍이는 잠자코 있었다. 용정촌의 명망가 송병문 씨, 그가 생존했던 전성 시대 박서방은 송씨댁 마갈잇간을 맡아 일해왔다. 송병문 씨 가 세상을 뜬 뒤 집안은 풍비박산, 사업에 실패를 거듭한 송영환이 아편과 방탕으로 몰락이 가속화되었을 때, 팔기만 해봐라 그날로 불 싸질러버리겠다 한 사람이 박서방이었다. 덕분에 송영환은 유리걸식을 면했고 매갈 잇간 수입으로 여명을 잇다가 간 것이다. 동성반점의 진씨 역시 청인이지만 송씨 일문과는 선대 때부터 인연 이 깊었고 송씨 집안의 파산을 막아보려고 동분서주했던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용정촌의 순수한 토박이였었 다. "송씨 집안의 우세라... 옛날 옛적에 고랫적 얘기겠지요. 우세할 송씨 집안이 남아 있기나 합니까? 누가 기억하 겠어요. 한심스러울 것도, 우세스러울 것도 없소이다." "그런 말씀 마시오." 하다가 진씨는 눈에 티가 들어갔는지 눈을 비비면서 말을 이었다. "재물로 가문에 빛나는 것은 아니오. 재물은 없어졌으나 인물로 가문이 남는 거요. 송병문 선생의 뜻도 용정에 남아 있구요." 중국어로 정중하게 말했다. "글쎄올시다... 과연 그럴까요?" "돌아가신 분의 뜻을 받들어서 열혈적 애국심으로 행동한 송선생도 물론 조선인의 모범이지만 절세가인을 닮 아서 자태 용모가 수려하고, 듣기로는 재능 또한 발군이라 하니, 송유섭은 과히 송씨 가문의 주옥이오. 반드시 큰 인물이 되어 지하에 계시는 조부님을 기쁘게 할 것이오." 진씨는 옛날부터 유섭의 모친 장씨를 말할 적에는 절세가인이라 했다. "절세가인이문 무시래? 집안으 쑥밭 만든 안깐이 뉘기관디?" 한방 쏘듯 박서방은 불만을 터뜨렸다. "절세가인에게 무슨 죄 있소? 가인으로 태어난 죄밖에는." "흥! 양귀비 같은 말으 합매다." 티격태격하는 것을 말리듯 송장환이 말해다. "실을 유섭이 그 아이, 형이 세상 떠난 것을 모르고 있어요." "무시기라?" "연락할 길도 없지만 지금 어디매 있지비? 그 아이가 북경으 대학교 댕긴다 하잖앴습둥?" 박서방은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이다. "대학 졸업은 벌써 전의 얘기구요. 학교에 남아서 학문의 길로 가려 했었는데... 유섭이가 지금 어디 있는지 나 도 확실하게 모릅니다. 확실하게 모르는 게 요즘 세월 아닙니까? 다만 풍문으로 들은 얘깁니다만 연안으로 갔 다는." "그러문 유섭이느 공산당이라 말이?" 눈이 휘둥그래진다. "박서방은 공산당이 싫습니까?" 우물쭈물하다가 박서방은 "싫을 것도 좋을 것도 없습매. 뉘기든 왜놈우새끼들만 몰아내주므느 그거 다 우리 편 아님둥? 앙이 그렇습 매?" 동의를 구하듯이 진씨를 쳐다본다. "그럼, 그럼, 하하핫하... 옳은 말이오. 국공이 합작해서 왜귀를 치는데 싫고 좋고 따질 것 없어요. 모두 동지, 당신들과 나같이 친구지요. 아암 친구구말구." 진씨는 비대한 몸을 흔들며 확 트인 표정으로 웃었다. 그리고 술잔을 높이 쳐들며 "건배합시다. 국공합작을 위하여! 동지들을 위하여, 우리의 승리를 위하여!" "술 몇 잔 마시고서리 주정임둥? 초상집으 와서 우스거 건배? 진대인도 한물 갔소꼬망." 타박을 준다. "하, 참 그렇군." 진씨는 높이 쳐들었던 술잔을 내리며 슬그머니 웃는다. 홍이도 웃었다. 송장환만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 었다. 형의 죽음이 그를 울적하게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형의 죽음이 그를 울적하게 한 것이지만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집안을 결딴내고 무능한 삶을 마친 고인에 대하여 아무래도 좀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 이 있었다. "연해주 형편은 도통 알 수 없습니까, 선생님." 처음으로 홍이 입을 열었다. "주갑노인이 걱정되어 그러나?" "네." "지금으로선 알 갈이 없다." "하얼빈의 운회약국에서도 그쪽 소식 전혀 모를까요?" "운회약국에서 아는 일을 옆에 사는 내가 어찌 모르겠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댁 윤선생께서는 사업상 국경 지대 출입도 잦고 해서 더러 듣는 얘기도 있을 텐데..." 미련을 남기며 홍이는 말끝을 맺지 못한다. "국경이 삼엄해서 모피 장사는 벌써 그만두었다. 지금은 약국만 경영하고 있어." "..." "삼강 방면의 독립군이 가끔 월경하여 소련으로 넘어간다고들 하는데 확실치 않고, 윤광호 씨 부처도 연추의 부모님 걱정을 하고 있지만 속수무책이다. 심운구 노인도 노심초사, 연로하여 그럴 테지만 조석으로 연추는 들 먹이며 심란해하신다. 하더군. 그분들 형제지간의 우애가 보통이 아니거든." 진씨가 말을 받았다. "그분들 우애가 깊다는 것은 나도 들어서 아는데 동생 심운회 씨가 연추에다 집을 지을 적에 심운구 씨가 중 국인 벽돌공까지 보냈다 하더구먼." "혁명전의 일이었지요." "생각해보면 그분들 이력도 남다르고 기구하지. 형은 청국에 귀화하여 하얼빈서 약종상을 시작으로 거상이 되 었고 동생은 아라사에 귀화하여 군납업자로 자산을 모았고 그러면서도 조국을 위하여 재물을 쓰고 그 많은 독 립지사들 뒷바라지, 쉬운 일 아니지요. 아라사의 혁명으로 어떤 풍랑을 겪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앞일은 더욱더 캄캄하오. 작은 섬나라 야만족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 명운이 그야말로 풍전등화라." 진씨는 탄식하듯 말하면서 굵은 목덜미를 두툼한 손바닥으로 쓸고 있었다. 팔자눈섭에 작은 눈, 눈동자에는 지 혜로운 빛이 있었다. "역시 현재로서는 모든 것이 요지 부동이군요." 홍이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랑이? 무스그 말잉야?" 산소에서도 술을 마셨고 해서 취기가 쉬이 도는지 박서방은 공연스리 홍이를 노려보며 따지듯 말했다. "네, 저기, 재남재북으로 모두가 갈리어 만날 수 없게 됐다 싶어서 한 말입니다." "음... 그렇기는 합지. 이제느 아는 사람 보기도 쉽잲쿠, 모두 떠나고 죽구 세상이 얼매나 변했능가." "..." "연해주 말이 났으이 가스댁, 옥이어망이 말입매. 딸으 따라 가덩이 굶잲쿠 사는가 모릅지. 하기느 낯선 땅 그 고생으 말해 무실하겠습꽝이. 지난날 용정이 불타고 재만 남았을 때 재봉소 일자리 잃고서리 어린 간나아 옥 이를 끌구 회령으루 가든 가스댁이 되새 불쌍하덩이. 생각으 해보랑이, 상기도 어제 일 같잲이요? 삼십년이 지 난 옛일인데 말입매." 모두 말이 없다. 무시무시했던 화재, 용정이 전소하다시피 생활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버린 그 재난을 이들은 함께 겪었다. 덧없이 날아가버린 삼십 년의 세월이 새삼 놀랍기도 했던 것이다. "그 고생으 했이문 말년으 낙이라도 있어야 옳잴까? 박복하답매. 팔자가 기박하다 말이." 팔자가 기박하다는 것은 길상과의 그늘졌던 인연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요 뭐. 그러나 크게 고생은 안 할 겁니다. 심운회 씨가 돌봐주고 정호 식구들도 그곳 에 자릴 잡고 사니까 외롭잖을 거구요." 했으나 자신이 없어하는 표정의 송장환은 담배를 찾는다. "잘못한 기야. 연해주로 앙이 가는 긴데." "두매가 한사코 보냈지요." "어째서? 옥이느 교사질해서 살았잖았능가. 생활비 달라 했다 말이? 책임지라 했능가?" "사사건건 답답한 말만 하는군요. 강두매가 주색잡기, 노름하면서 가족들 내몰라라 했으요?" 송장환은 역정을 내고 박서방은 머쓱해진다. "경찰에서 강두매 잡겠다고 혈안이 돼 있는데 가족들 신변인들 안전하겠어요? 두매가 깊이 생각해 한 일이니 염려 마시오." "그거르 뉘가 모르관디?" 하다가 "소련이 그냥 단숨에 밀어붙여야 했음. 무시레 중도지폐했능가!" 별안간 어성을 높이며 이번에는 박서방이 역정을 냈다. 장고봉, 노몬한 두 사건을 두고 억울해하는 말이었다. 이별하고 고생하며 불행해진 조선인의 처지는 모두 일본으로 인한 것인 만큼 일본을 섬멸하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으니 억울하다는 박서방의 심정 토로, 항의였던 것이다. 두만강 하류, 장고봉에서 발생한 재작년의 사건도 그랬었지만 만몽국경 하루하 강에서 지난해 소련과 일본이 충돌한 노몬한 사건도 국경 분쟁이 발단이었으며 장고봉에서보다 훨씬 규모가 큰 전투였었다. 소련의 막강한 화력과 최신식 무기는 가공할 만한 것으로서 초장부터 일본은 참패의 연속이었고 전세 만회의 비장한 희망을 걸었던 고마쓰하라 중장 지휘 23사단조차 전멸하여 일본을 경악하게 했던 것이다. "노몬한에서는 왜눔우군대가 몰살으 했다 하재능가. 그랬이문 밀구 나가얍지 무시레 협상으 하내야. 머저리새 끼들!" "독일이 뒤통수 칠까봐서 그랬겠지요. 그리고 소련이 요구한 대로 일본이 다 수용한 만큼, 전투를 계속할 명분 도 없었고." "독일이구 나발이구 달 일없습매. 왜눔우새끼들으 먼저 쳐얍지. 마우제새끼구 되놈으새끼구 덩치만 컸지 맹탕 이당이. 쥐새끼 한 마리에 쬐끼는 곰 같은 머저리. 생각으 해보라우! 송선생 내 말으 틀렸슴둥?" 송장환의 잘못이기나 한 듯 삿대질까지 하며 박서방은 입술을 실룩거렸다. "더디어 주기가 여기까지 온 모양이군 그래." 진씨는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다음 순서는 술상 엎어버리기, 자아, 자아 박서방 이제 하직합시다. 상가에서 그 못된 버릇 나오기 전에." 놀려대면서 진씨는 박서방의 팔을 잡아끌었다. "말으 해봐야 무스그 소앵이 있겠음. 가기요. 가, 가잔 말이. 되놈우 욕으 막재느 심보 내가 압지." 박서방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그들은 떠났다. 밤은 깊어 있었다. 스승과 제자 어질러진 술상머리에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본다. 상의학교 교주의 둘째아들이 자 청년 교사였던 송장환과 단정하고 명석했던 박정호, 비범한 강두매와 늘 붙어다니던 이홍, 그들 중에서 젤 공부는 못했으나 순진했던 소년이 초로와 장년의 모습으로 서로 마주보는 것이다. 이들은 물론 일 년에 몇 번 은 만난다. 그러나 두 사람만 만나게 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다. "내일 떠나는 거지?" "네. 선생님은 어쩌시렵니까." "뒤처리를 좀 해드리고, 그러자면 아무래도 이삼 일 후에나." "하얼빈에는 별일 없지요." "아직은." "석이형님, 두매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정석씨는 일진스님하고 상해로 갔고 두매는 삼강 방면에 있는 모양인데, 중공군에 합류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정을 빤히 알면서, 선생님 만나뵈면 혹 주갑아저씨 소식이라도 들을까 싶었습니다." "그런 줄 알고 있다." 두 사람은 술을 들었으나 취해지지 않았다. 초상이 끝난 뒤의 공허함과는 별도로 두 사람의 공통된 느낌은 고 립감이었다. 홍이 신경서 용정까지 일부러 오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송장환이 섭섭히 생각할 리도 없었다. 그러나 홍이는 만사 제쳐놓고 왔다. 주갑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송 장환을 불현듯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뭣 때문에 만나야 하는가, 이유는 홍이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홍이는 좀처럼 자신에 관한 얘기를 남에게 안 하는 성미였다. 그런 태도는 보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해해줄 국량도 없는 여자지만 자신의 역정이나 심정 같은 것을 그가 이해해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주갑이, 그 가 가까이 있었을 때 늘 임의롭게 얘기를 했던 것 같았다. 실제는 별로 말한 적이 없었지만 기분이 그랬었다. "아저씨는 내가 죽거든 홍이 니가 묻어달라, 그런 말을 하곤 했는데..., 저는 지금 그분의 생사조차 모르고 있 습니다." "연로하시지만 단련이 되고 워낙 건강한 분이니 염려 말게." "저에게는 아버지 같은 분이지요." 술을 마신다. "핏줄이 안 닿은 어머니, 핏줄이 안 닿은 아버지, 그리고 공씨할아버지 할머니 그분들 때문에 그나마 제가 오 늘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선생님도 대강 아시겠지만 저의 생모는 억새풀같이 강한 생명력과 물욕 으로 자기 자신만의 성을 가진 분이며 부친은... 존경했지요. 깊은 애정도 느꼈구요. 그러나 그분 역시 그분만 의 고통에서 떠밀려나온 존재가 제 자신이었습니다." 하고는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월선의 얘기가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말을 하게 된다면 감정에 복받쳐서 횡설수설이 될 것 같았다. 묘소에서는 그렇게 냉담하게 돌아섰으면서. "월선옥 아주머닐 처음엔 자네 친어머님인 줄 알았지. 착하고 아름답고 그같이 천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위로 삼아 한 말이었으나 감정에 북받치는 홍이 분위기에서는 어설프기만 했다. 송장환은 당황했던 것이다. 어 릴 적에는 적잖이 개구쟁이였던 홍이가 조선으로 나간 뒤 가정을 이루고 다시 용정촌으로 돌아왔을 때 점잖 고, 여간하여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며 신중한 사내로 변모된 것을 보았으며 그 후에도 자질구레한 가정사나 자기 개인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무너지듯 나약하고 섬세한 자기 내면을 들내보 인 적은 처음이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생각해보면 나쁜 조건에서 태어난 제가 평생 쓰고도 남을 선물을 받은 거지요. 피도 살도 닿지 않는 분들께서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중에서도 꾸밈없고 우러나는 그분들 애정은 시궁창에 떨어 질 수도 있었던 저를 건져주셨지요. 아주 어릴 적의 일입니다만 보따리 하나를 든 아저씨를 따라 해란강엘 간 일이 있었습니다. 아저씨가 사주는 사탕을 손에 쥐고서, 강가에 갔을 때 어지씨는 절 보고 돌아서라 하더군 요. 입은 옷을 빨리구 새 옷으로 갈아입을 참이던가봐요. 하얀 광목옷이었던 것 같습니다. 옷을 갈아입은 아저 씨는 신선같이 보였습니다. 씨꺼멓게 담배진에 절은 들쑥날쑥한 이빨에 잘생기지도 않았는데 어린 눈에 아주 고귀한 사람같이 보이더군요. 그분은 학이 날개를 펴듯이 두 팔을 활짝 들어올리고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해 란강을 향해 새타령을 불렀습니다. 선생님도 잘 아시겠지만 명창 뺨치게 좋은 소리꾼 아닙니까. 그 소리가 해 란강 물결을 타고 멀리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 광경을 저는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합니다. 순진무구 그때 일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사람에 대한 깊은 신뢰와 우리 민족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뼈에 사무치는 한을 느 끼게 됩니다. 아저씨의 의로움은 늘 그렇게 아름다웠습니다. 잘 웃고 만사를 익살로 넘기든 그분이 왜 그렇게 서러워 보이든지요. 다만 수집어할 때만 우서웠습니다." "..." "왜 그런지,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같았고 형님 같았고 친구 같이 임우럽고 언제나 감싸주는 고향 같았습니다. 내가 죽거든 홍이 니가 묻어라, 하시더니 살아나 계신지, 소식을 끊기라도 한 것처럼 배신감을 느 낄 때도," 홍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송장환은 말없이 바라본다. 그 말들은 모두 홍이 자신의 외로움 때문일 거라고 송장 환은 생각한다. "전에는 더러 건방진 생각을 하며 우쭐대기도 했지요. 오가는 사람들의 뒷바라지를 제가 한다구요." "그건 사실이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저의 울타리였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불안하구 긴장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든든했거든요. 요즘은 고립무원, 외토리가 된 것 같고 길을 가다가도 목덜미가 설렁해지는 것을 느낍 니다." "그 기분은 알 만하다. 나도 요즘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갔거든." 송장환은 담배를 붙여문다. "마치 쏘아버린 화살같이 떠난 사람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고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도 자신도 없어지구요." "희망은 있다. 자신을 가져도 돼. 다만 일본이 어떤 식으로 망하느냐 그게 문제다." 쏟아놓다시피 한 마음을 추스르듯 홍이는 송장환 술잔에 술을 부었다. 몹시 계면쩍고 후회스럽기도 했던 것이 다. 스승이 아니었다면, 친구지간이라 해도 그런 내면적, 감성적 얘기를 홍이로서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입지는 지금 절망과 희망의 양면을 지닌 날카로운 칼끝으로 볼 수 있는데, 자넨 근심도 그런 것 에 대한 예감일 게다." "..." "떠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다. 우선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다. 그러나 돌아와도 이미 활동 구역이 달라 졌을 경우를 생각할 수 있고 또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일본군의 전선 확대 때문일 수도 있고, 보기에 따라 점 령 지역이 넓어지면서 밀리어 달아나거나 잡혀서 죽는 확률도 높아진다 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속사정은 딴 판이다. 점령 지역의 확대가 이번의 경우, 이기고 있는 전쟁이라 할 수 없거든. 일본 정부나 군부는 점령, 전과 를 내세우며 군민을 교묘히 오도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의 내부적 고민이야말로 각일각, 목을 죄는 느낌일 게 다. 일본은 여태까지 전면전 장기전을 치른 일이 없었다. 역사상 한번, 임진왜란을 들 수 있지만 전면전 장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실패한 게야. 일본은 이번 전쟁에서 속정속결, 국지전으로 결과가 날 것으로 믿으려 했지. 장개석이든 모택동에 의해서든 중국이 통일되기 전에, 사실 서안사건 후 장재석이 공산당 토벌을 중지하 고 항일로 돌아선 것과 중국 국민의 여론이 한결같이 항일로 굳게 뭉친 것은 일본에게 더 기다릴 수 없는 초 조감을 안겨 주었고, 과거에는 물론 근자에 있는 만주사변 역시 속전속결, 국지전으로 계속 재미를 본 그 단꿈 도 버릴 수 없었고, 때에 따라서 불안이나 불확실하다는 것이 결단력을 부추기고 자신을 부추기는 경우가 있 지. 결국 일본은 시기상조를 주장하는 신중파를 누르고 전쟁으로 건너뛴 건데, 돌아가신 권필응 선생님도 말씀 하신 적이 있지만 소위 대학살은 속전속결, 전략의 일환이었던 거야. 중국인에게 극단적 공포심을 심어서 전의 를 잃게 하는 것, 자국 병사에게는 추악한 본능의 짐승으로 만들어 구원을 잃은 절망적, 발광적 용기로 내몰려 는 것, 그게 모두 단기전 전략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일본이 그 얼마나 속전속결을 원했는지 짐작할 만하 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어. 지구전론을 발표한 모택동은 물론이고 전쟁의 시작부터 장개석 은 장기전을 각오했으니까, 일본은 거대한 공룡에 물리 격이고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진 거다. 그들은 이미 국가총동원령을 선포했고 인원과 물자를 모두 전쟁에 투입한다는 것인데 인원과 물자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 계에서 물리적으로 일본은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야. 시간은 힘을 소모하고 자리는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인원 과 물자에 엷게 깔릴 수밖에 없고 성글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면 결국 녹아버리게 돼 있어. 엷어지고 성글어지 고 힘이 바진 곳을 지금 팔로군이 뚫고 있는 게야. 장개석은 오히려 일본은 도외시하고 전쟁 후 중공에 대비 하여 군사력 소모를 견제하고 있는 형편이며 국민당에서 이당활동제한변법을 내놓은 것만 보더라도 그간의 사 정을 알 수 있지. 그러나 일본은 끝없는 늪인 줄만 알면서도 고통스런 행군을 아니 할 수 없게 돼 있다. 일본 을 위해 중재에 나설 나라도 없고 전쟁 물자를 대주기는커녕 팔아주는 곳도 없어. 작년에는 미국에서 미일통 상조약을 폐기했고 영일회담 결렬, 국제연맹이사회에서는 중국원조 결의안을 가결했고 뿐인가, 여태까지 소련 은 무제한으로 중국을 원조해왔거든. 중국에서 손털고 철군하는 것 이외 일본은 달리 방법이 없다. 그것은 패 전을, 항복을 의미하는 거니까 늪이든 지옥이든 갈 데까지 가보자, 한가닥 희망은 지금 구라파에서 독일이 전 쟁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것과 국공이 분열하기 시작했다는 점인데 그러나 일본은 너무 깊이 물려 버렸고 바닥 이 나버렸어. 문제는 우리다. 우리민족의 운명이다." 송장환은 술을 마셨다. 홍이는 묵묵히 비어버린 술잔에 술을 채운다. 어떻게 된 영문이지 깊은 이 밤에 멀리서 아슴푸레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 민족은 일본의 볼모다. 일본이 망하리라는 희망적 정세 앞에서 우리가 앞날을 어둡게 절망적으로 내다보는 것은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우리 민족이 얼마나 소모될 것인가, 얼마나 살아남을 것인가, 해서 희망과 절망의 양면을 지닌 날카로운 칼끝에 우리가 서 있다고 말한 게야. 벌써 수많은 우리 동포가 각 처로 끌려나가 고혈을 짜내고 있으며 현재까지는 지원이지만 머지않아 징병으로 우리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몰 아낼 것이며 남경 학살 때도 그랬지만 여자들은 성의 도구가 될 것이다. 일본은 조선 민족을 지옥까지 동반할 거야. 참으로 무슨 힘의 가호 없이는."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볼모가 된 조선 민족이 저들의 패망 과정에서 어떠한 환난을 겪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도 먹물 들고 의식 있는 사람이면 대개 해보는 걱정도 그날 밤의 얘 기가 고약같이 눅진눅진 머릿속에 들어붙어 기분이 좋잖았고 송장환의 우울한 얼굴이 때때로 떠오르곤 했다. 벽에 걸린 괘종이 덩! 하고 울렸다. 세 번 울린다. 줄담배를 피워 혀끝이 얼얼했지만 홍이는 무의식적으로 또다시 담배를 a물로 불을 붙인다. 쓰디쓴 담배,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는 담배. 보연의 잠꼬대 때문에 팽개쳤던 신문을 집어든다. 8면의 광고를 홍이는 골똘히 들여 다본다. 사무실에서 신문을 들고 온 것은 바로 이 광고 때문이었다. 큰 활자와 함께 신경 공연은 주야 이 회, 팔월 삼사일 양일간으로 돼 있었고 극장은 풍락이었다. 사진과 그림 을 곁들인 팔단짜리 큰 광고다. '틀림없이 영광이도 왔을 거다' 홍이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송관수는 지금 신경에 없었다. 사무실에서 광고를 보았을 순간에도 홍이는 송 관수가 신경에 없다는 것을 맨 먼저 생각했다. 열흘 전에 목단강에 간다면서 송관수는 떠났는데 여태 목단강 에 머물러 있는지, 정확하게 그의 소재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홍이는 초조했다. 이번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부 자가 상봉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홍이는 생각하는 것이다. 사 년 전이라던가, 송영광이 공연차 신경 에 왔을 때, 서로간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기는 했겠지만 영광이 공연장 입장권을 들고 홍이를 찾아왔을 때는 부친을 만나게 해달라는 의사 표시였을 것이고 아들 만나기를 마다할 송관수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 신을 용서치 않았다고 판단한 영광은 그냥 떠나버리고 말았다. 홍이는 그때, 자신의 중간 역할이 미숙해서 그 리 된 것으로 생각했으며 두고두고 후회를 했다. 그러나 그보다 그 이로 인하여 사람이 달라지 송관수를 볼 때 느끼는 책임감 같은 것은 홍이에게 적잖은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처음 송관수는 자식 하나 없는 셈치겠다 며 스스로를 달래곤 했으나 시일이 흐르면서 차차 엉뚱한 방향으로 사람이 달라져갔다. 불효막심의 아들을 원 망하기보다 아들에게 지워진 백정이라는 신분에 병적인 혐오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술만 들어가면 "내가 와 백정고? 나는 백정 아니다. 영광이도 백정 아니다. 우째 그아가 백정이란 말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아니지, 아니고말고. 그놈은 내 아들인께, 동학당, 등짐장수 울아부지 손자니께, 말이 무슨 소앵이 있노. 씨가 젤 아니가." 실성한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분명하게 마누라 영선네를 부정했던 것이다. 평생을 그림자같이, 구 석지에서 남몰래 피는 꽃같이, 남의 앞에 나오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살아온 영광의 모친, 그 여자에 대한 연민 때문에 지난날 송관수는 진주에서 형평사운동에 가담했으며 그 연민은 그의 투쟁의 의지로 나타났고 불꽃이 되기도 했었다. 가족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진 것도 백정으로 낙인 찍힌 신분을 바라보는 사회적 통념에 대 한 분노 때문이었다. 그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백정이라는 용어를 입에 올리지 못하였다. 언제였던지, 구례 길노인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던 그 날, 김강쇠가 부아를 돋우노라 이 백정놈아! 했다 해서 혈투를 벌인 일도 있었다. 그러던 송관수가 그렇게 오래도록 금기되어왔던 백정을 들먹이며 흰머리가 돋아난 영선네 앞에서 크 게 비웃기 일쑤였고 때론 그 일로 인하여 분탕질도 서슴지 않게 되었으며 죽은 장인까지 끌고 나와 "이녁 당대로 끝낼 일이지 멋 땜에 딸년을 내질러 여러 사람 신셀 망치느냐 말이다." 가당치도 않은 욕설과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얼마 전에 홍이는 의논을 좀 하기 위해 그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어두컴컴한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땅바닥으 로 된 복도 옆에 문을 활짝 열어젖혀 놓은 방에서 땅콩이 든 접시 하나를 무릎 앞에 놔두고 헐렁한 광목 적삼 을 입은 송관수는 빼주를 병째 마시고 있었다. 학생복을 입은 막내 영구가 두 무릎을 모으고 부친과 마주보고 앉아 있었는데 홍이 들어서자 몹시 당황하고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영선네는 옆방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눈치였다. 등을 보이고 앉은 관수는 인기척을 들었을 텐데 돌보지 않았다. 부자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가 거 북하여 홍이는 그들에게 등을 돌린 꼴로 문지방에 걸터앉아 담배를 붙여 물었다. 복도 바닥에는 빼주 빈병이 몇 개 굴러 있었다. "제집 잘못 얻은 기이 천추에 한이 된다. 정은 정이고오 은혜는 은혜다. 와 내가 그때 그거를 몰랐일꼬. 경찰 에 쬐기는 몸이고 보이, 숨기주고 믹이주고오 하하핫하 하하하핫, 의지가지할 곳 없는 젊은놈이 꼼짝없이 옭아 매인 기지." 술을 얼마나 했는지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지금 와서 그런 말씀 하시면 뭣합니까. 어머니 가슴에 못박는 말씀을 꼭 해야겟습니까. 아버지답지 않습니다. 영구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는 신경의 동방대학 학생이었다. 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게 돼 있는 교칙 에 따라 그곳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모처럼 외출 허가를 받아 집에 들른 것 같았다. "아부지다운 기이 멋꼬?" "..." "그래. 전에는 아부지다워서 니 성이 집 나간 기가? 혈육의 정을 끊고 말이다." 아들을 비웃는다. "그, 그건 형의 의지가 약한 탓이지요. 누가 잘못해서 그런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백정이면 눈이 한 갭니까 코 가 둘입니까? 똑같은 사람입니다. 모두 다 편견 탓이지요." "니 말 잘했다. 하모, 똑같은 사람이고말고. 하지마는 내가 두고 볼 기다. 가시나하고 눈이 맞아서 혼인 말이 나와도 그런 소리 할긴가 두고볼 기구마. 하기는 만주 땅은 넓어서 근본 감추고 못살 것도 없지. 그러이 네놈 도 큰소리치는 모양이다마는." "큰소리치는게 아닙니다. 저는 이치를 말했을 뿐입니다." "이치? 내가 여기 이러고 앉아 있는게 이치대로 된 기가?" "이치대로 되게 해야지요. 그래서 공부도 하고 투쟁도 하는 거 아닙니까." "그 따우 시건방진 소리는 두었다가 후제 선생질할 때나 써묵어라. 흥! 입 열었다 하믄 모두 배우고 투쟁하고, 신물이 난다. 니 누부 영선이를 와 산놈한테 떠넘기고 왔노? 니도 그거는 알제? 똑똑하고 인물 좋고 보통핵교 까지 나온 제집여아를... 섬진강 칼날은 바람 마시믄서 염소새끼 몰듯기 그 제집아이를 데리고, 지리산 골짜기 산놈한테 주어부리고 돌아선 애비 맘을 니가 아나? 내 가슴에는 피멍이 겹겹이 쌓여 있다." "시끄럽소 그만, 아이들 데리고 삼대 구년 묵은 얘기는 왜 합니까?" 내뱉듯 말하며 홍이 방안으로 들어갔다. 영구는 비실거리다가 아이를 피해 방에서 나갔다. "머하로 왔노. 니가 안 와도 나 할 짓은 다 하고 사는 사람이다. 내일은 떠날 긴께 걱정 마라." 관수는 병을 입에 물고 술을 마신다. 그리고 땅콩을 입속에 집어넣고 오도독 씹는다. "도대체 왜 이럽니까. 참말로 보기 안 좋습니다." "몰라서 묻는 기가?" "알지요." "알믄 와 묻노." 노려본다. "그까짓 자식 하난 없는 셈치자,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습니까." "..." "형님 보고 있으면 봄에 싹이 돋아서 조금씩 자라다가 오뉴월이 되면 미친 듯이 폭발이라도 할 것처럼 왕성해 지는 일도 잊기 마련인데, 날이 갈수록 이래가지고는 식구들이 배겨내겠습니까?" "잊을 일이 따로 있지. 니는 자식 안 키우나?" "니는 내 맘 모린다. 니가 우찌 내 맘을 알 기고. 애시당초 뿌리부터 잘못 박은 기라. 잘난 것 한푼 없는 놈이, 어디라고 이 바닥에 끼여들어... 머를 했제? 해놓은 기이 멋꼬? 강가에서 쇠가죽을 쓰든지 장돌뱅이가 돼서 이 장 저장 돌아댕기야 할 팔자를 어긴 죄 아니겄나." 슬며시 비켜버린다. "형님." "..." "왜놈한테 잡혀가고 싶지요?" "머, 머라카노!" 펄쩍 뛴다. "헌병한테 붙잡혀서 총살이라도 당했으면, 생각하는 거지요?" "미친놈 다 보겄네. 말도 가이방해야 대꾸를 하지." "집에 들면 분탕질이고 밖에 나가면 겁없이 행동하고 그 힘이 어디서 나오지요? 만약에 폭탄 안고 관동군 사 령부에 돌진할 사람 누구냐 묻는다면 맨 먼저 형님이 손들고 나가지 않을까요? 대체 무엇을 작심했습니까." 관수는 동요를 나타내었다. "대체 무엇을 작심했습니까." 홍이는 재차 물었다. "집어 치아라! 내가 무신 애국지사 독립투사라고, 무지랭이 촌놈이 넓은 만주 바닥에 와서 심부름하는 것도 과 남한데, 사람을 이리 놀리도 되는 기가!" "..." "유식한 놈, 똑똑한 놈, 이론인가 먼가 무장이 됐다는 놈, 날고 기고, 젋어서 펄펄 뛰는 놈, 쌔이고 쌔있는데, 나는 이자 헌 생이틀이 되었고 신다 버린 짚신짝 꼴이 되었는데 무신 놈의 씨도 안 묵은 말을 하노." 전혀 무고나하지는 않으나 결국 관수는 어물쩍 넘기려 한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홍이는 비꼬듯 농치듯 묘하게 웃었다. "형님은 제발 날 잡아가달라, 잡아가서 죽여달라, 그것도 처참하게 시끌버끌 요란하게,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합니다. 첫째는 순국지사가 되고 싶은 거지요. 영광이한테 명예를 유산으로 남기고 싶다 그거 아닙니까? 그래야 백정의 신분도 상쇄가 될 테니까요. 둘째는 복수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배신감 때문에 영광이 가슴에다 한을 남기고 싶다, 또 있지요. 형은 원래 강쇠형님과는 달라서 야심이 있는 편이고 그 형보다 듣고 보고, 훨씬 유식하니까. 한데 만주는 형에게 안맞아요. 산적질을 해도 조선의 산골짝이 좋지." 관수는 홍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낯빛은 달라져 있었다. 한참 만에 신음하듯 "머이라?" "면상을 내리치고 다리 몽댕이를 뿐지르고, 그러고 싶겠지만 헌 생이틀이 무슨 힘이 있겠소. 하하핫 하하하..." "니 질기 이럴 기가! 누구 기넘어가는 꼴 볼라 카나!" 소리를 지른다. "그런 말 안 들을려면 몸 좀 아끼시오. 위태로워서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아질하던 것과는 달리 홍이 어투는 냉정했다. 관수는 대답 대신 술병을 들어 술을 마신다. "형수씨도 그만 볶으시오. 보기 딱합니다. 세상 버린 우리 아버지... 참다가 참다가 못 견디면 얼굴이 새파래져 서 어머니를 두딜겨팼지요. 그러나 단 한번도 어머니 전력을 들먹인 일은 없었어요. 그 험한 전력을 말이니다. 형님도 잘 아시는 일 아닙니까. 어질고 말 없으시고 평생을 든구름 같은 형님 따라 살면서 고생도 많이 하셨 는데 늙어가면서 왜 이래야 합니까." "억울해서 그런다 와!" 했으나 관수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아니지요. 측은해서, 내 죽고 나면 어쩌나, 그게 지나치니까 역으로 나가는 겁니다." "이놈아! 니가 묻고 니가 대답하고 함서 더 무신 말, 필요 없는 거 아니가. 이리 찌르고 저리 쑤시고 니가 형 사가! 헌병가! 대체 무신 말 듣고 저버 이러노!" "같잖고 가소러워 그러요." "머 어쩌고 우째?" "서천 소가 웃을 일이니 그러지요." "건방진 놈! 허 참, 살다보이 별 휘안한 꼴을 다 본다. 니가 언제 그리 컸다고 까부노." "저는요, 형님한테 말할 자격 있습니다. 형님이 지금 앓고 있는 병을 저는 스물 살 안짝에 치루었으니까요." "..." "백정하고 살인자하고 어느쪽이 험합니까?" 관수는 입맛을 다셨다. "제 아버진 아니지만 생모의 전남편이 살인자라는 것, 형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간도에서 진주로 왔을 그 때, 기억하실 겁니다. 빗나가서 갈 바를 못 찾는 저에게 충고한 사람이 형님 아니든가요? 누구든 절룸바리 언 챙이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났어요? 죄없이 핍박받고, 그런 게 세상 아닙니까. 우리 조선 사람이 무엇을 잘못해 서 왜놈들한테 시달림을 당하는 겁니까? 그래도 형님은 자신의 의지로 택한 일이니 덜 억울하겠소. 하기는 요 즘 백정이라는 말을 자주 입밖에 내는 것을 보면 차츰 관이 트이는 모양이고 형수님을 볶아대는 것도 그만큼 임우러워진 탓인가요?" 꽈배기처럼 말을 꼬았으나 홍이는 아까처럼 실실 웃지는 않았다. 듣는지 마는지 대꾸가 없던 관수는 손에 들 고 있던, 비어버린 빼주 병을 복도 바닥에 휙 내던진다. 두 사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로가 다 한심스럽고 멋쩍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틀렸어!" 별안간 관수는 팔을 들어 허공에다 곱셈표를 그었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 앉으며 한 다리는 뻗고 한 다리는 세운다. "틀렸단 말이다. 니놈이나 내나 다 틀렸어." 뭐가 틀렸다는 건지. "니는 여전히 이홍이 그놈이고 나는 여전히 송관수다. 내 살아온 대로, 누구 말마따나 독사겉이 내 타고난 태 성대로 변한 거 없다! 골백년이 지나봐라. 세상이 변하는가. 내가 안 변하듯이 세상도 안 변하고 이자는 자식 이고 여편네고 그게 다 걸거적거린다. 나도 늙었거든. 늙은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의 하나다." 틀렸다는 것은 잘못 살았다는 것인가 희망이 없다는 것인가 알쏭달쏭한 말이다. "그는 그렇고 날 찾아온 용건이 멋꼬?" 뻗었던 한 다리를 끌어들여 자세를 고쳐서 앉은 관수는 물었다. 어느듯 그는 평상시로 돌아와 있었고 감정을 정리한 것처럼 보였다. 맺고 끊고 전환이 빠른 송관수의 특성, 그것은 중첩된 험로에서 이루어진 습관이었다. 새까맣게 쪼그라든 얼굴에 눈만 붉게 타고 있었다. "이래가지고는 어디 의논이나 하겠습니까." 뒷걸음질치듯한 홍의 목소리였다. "언제 기분 따라 우리가 일했고 날 받아서 의논을 했더나." "급한 일도 아니고... 좀 짬이 나길래 왔더니만." "말해봐라." "실은... 공장일인데요, 공장을 처분하는 게 좋잖을까 해서." 홍이는 굼뜨게 말을 꺼내었다. 꺼내놓고도 다시 생각해보는 표정이다. 관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예 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떴다. "더 이상 뻗쳐볼 힘도 없고." 하다가 홍이는 갑자기 허둥대며 담배를 찾았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는 홍이를 바라본 관수는 쓴웃음을 머 금는다. "나는 술고래가 됐고 홍이 니는 골초가 되었구나. 결국 올 데까지 온 거 아니겄나." 그러니까 공장 처분에 송관수도 찬성이라는 의사 표시였으며 그간의 홍의 고초를 잘 알고 있다는 뜻도 있었 다. "삼사 년을 견디다보니 이제 피가 마를 지경입니다." 삼사 년이란 홍이 운영하는 서비스 공장에 김두수가 나타나고부터를 말하는 것이다. 일본 군부의 폐차를 불하 받게 해줄 터이니 동업하자고 제의 해왔던 김두수, 말을 붙여온 이상 무슨 수를 쓰든지 관철하고야 말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 어떤 해악을 끼칠지, 해서 고육지책으로 그의 제의를 받아들이되 동업은 할 수 없고 폐차 불 하에서 얻은 이득만 가르자 하며 성립이 된 김두수와의 관계였다. 불하받은 폐차를 재조립하여 검사를 받고 군부에 납품을 하고 일반에게도 팔아서 그 동안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사실 그 점을 노리지 않았던 것은 아 니었다. 그러나 처으부터 그것은 엄청난 곡예였던 것이다. 김두수가 위험 인물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독립운동의 자금줄이 되어온 내막을 안고서 일본 군부를 상대하여 거래를 지속해나간다는 자체가 화약을 안은 꼴이었다. 송관수가 한 말대로 홍이 골초가 된 것은 그 때문이다. 헌병대 앞잡이로 수많은 독립지사들을 엮어 들여 악명을 드높였으며 한때는 회령에서 경찰 간부직에 있었던 김두수의 전력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돈 버는 일에서도 그의 악행은 전율을 느끼게 했고 이득이 있는 곳이면 쇠나막신에 쇠지팡이 짚고서라도 지옥 까지 찾아갈 그런 위인인데 표면상으론 첩보기관에서 밀려난 듯했으나 기실 그가 현재 무엇을 하며 어떤 임무 를 띠고 있는지 그 정체는 모른다. 그리고 군과 거래를 하는 만큼 사찰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정확하게 만 삼 년 동안 홍이는 이 일에 종사하면서 차라리 총 들고 싸우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처음에 는 김두수가 나타나면 마음속으론 이 매국노 반역자! 하면서도 겉으로 천역덕스럽게 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차차 자신을 엄폐하기가 어려워졌다. 요즘에 와서는 뱀과도 같은 김두수의 눈을 바라볼 땐 소름이 쫙 끼치곤 했다. 살인자의 눈, 말로만 들었지만 그의 아비 김평산의 눈이 저랬으리라 홍이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김두수 는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 '박정호의 아버지를 죽인 놈! 정호삼촌이 비수를 품고 찾아다녔으나 용케 빠져나와 아직도 살아 있는 놈!' 홍이는 어진 한복이 두수의 동생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처분하고 나면 다음은 어쩌고." 관수가 물었다. "아직 거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고 하얼빈으로 가서 송선생님하고 의논해서 다른 사업을 하면 어떨까... 하구 요." "들통이 나기 전에 삼십육계 줄행랑이 상수라, 이쯤 해서 걷어버리는 것이 내 생각에도 좋을 듯하긴 한데." "앞으로 물자도 어려워질 겁니다. 따라서 부속품 구하기도 힘들 것이고 규모가 작으니까 그럴 염려는 없겠지 만 군수공장으로 징발 될 경우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놈들 똥줄이 땡기믄 크고 작고를 가리겠나?" "그럴까요?" "그것보다 처분하는 데 합당한 구실이 있어야 안 하겄나? 거복이(김두수) 그놈이 믿을 만한 이유 말이다." "그것을 저도 생각해봤습니다. 연강루하고 상의를 해야지요." 김두수하고 관계를 맺기 직전, 만일의 경우를 염려하여 요리점 연강루에서 공장 세울 때 빚을 얻은 것으로, 그 때 공장을 담보를 넣은 형식을 취해놨던 것이다. 연강루를 말할 것 같으면 소유주의 성씨는 진이다. 그러니까 용정 동성반점의 진씨와는 인척간이며 또 하얼빈 에 있는 심운구의 맏아들 재용의 처가 연강루 진씨의 딸이니까 양가는 사돈지간이 된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 한 것은 구너필응과의 관계다. 재작년에 작고한 권필응과 진씨는 항일에 뜻을 같이해온 동지로서 진작부터 이 들은 한중공동전선을 역설해온 터이라 의기투합하여 많은 일에 서로 관여해왔었다. 심씨 집안과 진씨 집안의 통혼만 하더라도 권필응의 존재로 인하여 양가간 친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이 정도의 설 명이면 연강루와 홍의 예사롭지 않은 연결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연강루는 사업 중의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며 진씨는 다른 사업체도 상당수 가지고 있는 자산가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로 알려져 있었다. 만주국 정부 요로에 지면도 많았으며 일본 군부에서도 환영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정체는 철저하게 엄폐돼 있었던 것이다. 현재는 고령인 탓으로 사업에서 손을 뗐고 아들들이 모든 것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점에서는 하얼빈의 심운구와 비슷헸다. 또 한가지, 빠뜨릴 수 없는 것은 항일 의 투철한 투사 이며 황야의 영웅 마점산과의 관계다. 마점산, 북만주를 무대로 싸우는 사람 중에서도 마점산 은 특출하다. 일본이 만주를 침공했을 때 치치하얼에서 패한 마점산은 만주 건국에 참여했었다. 군정부총장과 흑룡강성 성장으로 취임하면서 일본과 타협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탈출했고 소련에 피신해 있다가 돌아온 뒤 결사 항쟁을 전개하여 황야의 영웅이 된 것이다. 내몽고, 황하 북변 강기슭에 있는 포두 방 면에서 그는 일군과 싸웠으며 테러와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몇 해 전에 관동군 사령관, 만주국 총 리를 암살하려다 체포된 자도 마점산의 휘하였었다. 특히 게릴라전은 끈질기고 치열했는데 일본은 그것을 모 두 비적의 소행으로 호도하면서 그들의 습격을 두려워하여 북만주 일대에는 입식 못한 곳이 많았다. 물론 이 같은 저항에는 마점산뿐만 아니라 수많은 조직이 있었는데 조선인들과의 혼성 부대, 혹은 공동 작전과 행동이 특색이다,. 특히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위대한 거사가 있고부터 재만 조선독립군과 중국의용군의 합동작전은 눈에 띄게 증가했는데 예를 들자면 조선혁명당과 중국의요령 구국회와합작, 항일 전선을 결성한 일, 재만독립군과 중국의용군이 사도하자에서 일본군을 공격한 일, 독립군과 중국의용군이 동경성을 점령, 대 전자령 대첩도 한중연합군이 일본의 나남 72연대를 쳐부쉈던 것이다. 여하튼 그와 같은 항일전을 지원하는 것 이 진씨 일문의 숨은 사업이었지만 특히 진씨의 아들 형제는 마점산과는 맥이 닿아 있었고 그를 열렬히 지지 하고 지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홍이는 진씨나 그의 아들 인원과 접촉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용정 동성반점의 진씨 소개로 연강루와 친교를 맺고 있다는 정도를 내세우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연강루는 조직이 위 장해놓은 접선 장소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날, 홍이는 공장 처분 문제를 상의한 뒤 집으로 돌아왔고 이튿날 관수는 목단강 방면으로 떠났던 것 이다. 홍이 잠자리에 든 것은 세시가 훨씬 지난 뒤였다. "상의 아버지, 상의 아버지, 저넹 없이 웬 늦잠일까?" 조반 준비를 벌써 끝내놓고 보연은 남편을 흔들었다. "상의 아버지, 일어나요." 겨우 홍이 눈을 떴다. "당신도 늦잠 자는 일이 있네요. 술도 안 했는데 여덟시가 넘었어요." "뭐?" 했으나 홍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보연은 분홍빛 은조사적삼을 입고 있었다. 평소보다 차림에 신경을 쓴 것 같았다. 홍이는 누운 채 머리맡으로 팔을 뻗어 담배를 찾다가 신문이 손에 닿았다. 간밤에 신문을 들고 방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홍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영광이 악단을 따라 반드시 신경에 와 있으리란 법은 없다. 어제는 왜 그렇게 와 있으리라 철석같이 믿었는지, 홍이는 담배를 찾아 피워물었다. "눈 뜨자마자 또 담뱁니까. 좀 줄였으면 좋겠거마는." "음." 홍이는 코대답만 한다. "상의 아버지." "..." "당신이 어젯밤에 절 보듬고 왔습니까?" '뭐라구? 보듬고 왔다... 데리고 왔느냐 할 것이지, 가정부인이 술집 작부도 아니겠고, 천박하구나.' 홍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잠도 모라잤고 여러 가지 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서 그랬겠지만 그러나 미묘한 그런 거부 반응은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보듬고 왔느냐는 보연의 말은 육감적이기보다 무신경에 가까운 것이었다. 무신경이든 육감적 이든, 홍이는 그게 어느쪽이든 비위에 거슬렸다. 그러지 않으리라 하면서도 역시 마음 어딘가에 걸리고 마는 것이다. 홍이는 어쩌다가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여자를 보면 외면해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생모 임이네가 연 상되어 그랬을 것이다. 도발적이거나 교태를 부리는 여자의 경우에도 홍이는 신경질적인 혐오감을 나타낸다. 일본에서 차부조수 노릇을 했을 무렵, 한밤중에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온 일본 계집에게 느낀 강한 모멸감이 되살아나 그랬는지 모른다. 그러나 보연은 야한 여자가 아니다. 법도를 중히 여기는 소위 반가 출신이어서 그 런지 남편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으나 교태를 부리고 보비위를 맞춰 남편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작위적 행동은 하지 않는다. 게다가 십수년, 자식을 셋이나 낳고 살아온 부부간인데 사소한 언동을, 비록 입밖에 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마음속으로나마 용납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결벽증이며 보수적 성향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출 생과 신분에서 오는 열등감은 아닐 것이며, 허튼 말 허튼 행동이 없었고 해란강 맑은 물 같은 월선의 사랑으 로 자란 옛 기억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십 문턱을 바라보면서 투명하고 섬세한 감성에 대한 그리움을 아직 간 직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임이는 사내가 계집을 하늘같이 섬긴다 하며 곧잘 비아냥거렸지만 실상 홍이는 다정한 남편은 아니었다. 보연 에게는 늘 무뚝뚝했고 아이들에게는 과묵했다. 그러나 그는 누가 보아도 자상한 남편이요 아버지였다. 공장 근 처 허름한 집에 살았을 적에 아무리 귀가가 늦어도 부엌에 석탄 날라다놓는 일을 잊은 적이 없었다. 눈에 띄 면 빨래도 걷어주고 어질러진 집안 청소도 했으며 보연에게 힘든 일은 시키지 않았다. 몸이 약하고 험한 겨울 을 보내야 하는 타국살이를 고려했겠지만 여자를 종 부리듯, 그것은 사내장부가 할 짓 아니라는 그의 생각이 었으며 여자에게 짐을 잔뜩 들려놓고 자신은 빈손인 채 뒤로 나자빠지듯 걷고 있는 사내를 꼴불견으로 치부하 는 홍이였다. 그 점에서는 부친을 많이 닮았다. 초취였던 강청댁이 월선을 투기하여 패악을 부리는 것을 보고 동네 남정네들이 탕탕 두들겨패서 버르장머릴 고쳐라 했을 때 용이는 "조막만한 걸, 때릴 구석이 어디 있어서," 쓰게 웃었는데 사랑이 아니어도 여자에 대한 연민에는 확실히 부자간에 공통점이 있었다. 살림을 못해도 잔소 리가 없고 돈의 쓰임새에도 무관심, 그것도 부자가 닮은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연이나 아이들까지 홍 이를 어려워했다. 어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보연은 남편이 먼 곳에 서 있는 것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보연은 장이 얼굴을 떠올리며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었다. 가족이 조반상에 둘러앉았을 때 "아버지 우린 어떻게 해요?" 어여쁘게 자라서 지난 봄 여학생이 된 상의가 말했다. "학교에서 창씨개명하라고들 하는데." "..." "우린 안 할 거예요?" "하라면 해야지." "제 이름은 말에요, 상짜를 따서 나오꼬라 하고 싶어요." "그대로도 괜찮다." "그대로요? 그럼 나오요시, 남자 이름이잖아요." "나라없는 백성이 남자 이름 여자 이름 가려서 뭣하나." 상의는 멈칫하며 홍이를 쳐다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무표정했지만 아버지 모습에서 비애 같은 것을 느낀 것이 다. "거 봐. 구둣방 할아버지도 말했어. 성을 바꾸는 것이 젤 나쁘다구. 부모 조상을 팔아먹는 일이래." 상근이 씩씩하게 말했다. "복 나가게 밥 먹으면서 왜들 이래. 어서 먹어." 보연이 나무란다. 뜨는 둥 마는 둥, 조반을 끝낸 홍이는 일어섰다. 방으로 들어가면서 물었다. "양복 어디 있지?" "양복은 왜요?" 보연이 말하며 따라 들어간다. 공장에는 늘 작업복 차림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어디 갑니까." "음." "어디루요." 대답이 없다. 챙겨둔 양복으로 갈아입는 홍이를 보연은 바라보고 서 있었다. 분홍색 은조사 적삼 탓인지 얼굴 에는 다소 생기가 있어 보였다. "어젯밤 당신이 날 보듬고 왔어요?" 아까 대답을 듣지 못해 아쉬웠던지 보연은 다시 물었다. "알면서 왜 물어." "글세 꿈을 꾼 것 같기도 해서요." 하얀 노타이셔츠에 연회색의 마직 여름 양복을 입은 홍이는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갔다. 공장 사무실에 나온 홍이는 작업장에 있는 천일이를 불렀다. 걸레로 기름 묻은 손을 닦으며 사무실로 들어온 천일이도 어디 가느냐 하고 물었다. 홍의 신사복 차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훤합니다. 새신랑 같소. 어떤 사람은 인물이 좋아서 청요리집에 가는데 이 못생긴 이내 신세는." 노랫가락처럼 뽑다 말고 천일은 "제기랄! 그래 무슨 일이오." 대강 할 일을 지시한 홍이는 서류철을 꺼내어 넘긴다. "형님." "음.' "조선서 악극단이 왔다데요. 여편네가 쫄라쌌는데 형님은 안 가볼 랍니까." 홍이는 들은 척도 안 한다. 그새 천일이는 진주 있던 처자를 신경으로 데려왔다. 공장 뒤편에다 가건물을 지어 살림을 차린 것이다. 버릇이 없고 좀 우둔한 것이 탈이었지 홍이 밑에서 착실히 기술을 배운 천일은 비교적 공원들과도 잘 지내는 편이며 홍이 왼팔 노릇을 해왔는데 그런 만큼 월급도 많았고 돈도 알뜰히 모았다. "가타 부타, 말이 있어야지 형님도 참 속터지는 사람이오." 매번 당하는 일이지만 그때마다 천일은 불평이다. "극장에 갈 시간이 어디 있어." "사람이 살믄 몇백 년을 살 기라고,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이놈의 세상, 어젯밤에는 잠도 못 잤어요." "왜." "한밤주에 자동차 끌고 와서 문을 뚜디리고 지랄하는 바람에." "그래서." "충전해달라고 말입니다. 낮에는 시간 두었다 멀 했는지." "그럴 경우도 있지. 불평 그만해." "제에기랄, 죽어나 사나, 고향 가서 사는 건데 형님 땜에 못 가요!" 하며 천일은 나간다. 서류철을 덮은 홍이는 극장에 전화를 걸어서 반도 악극단 단원들이 묵은 여관을 확인한 다. '하늘이 두 쪼가리가 나는 한이 있어도 이 자식을 붙잡아야지.' 공장을 나선 홍이는 차를 잡아타고 극장에서 알려준 산월여관으로 찾아갔다. 들어서자마자 들떠 있는 내부 분 위기가 성큼 다가왔다. 화려한 옷차림의 여자들이 여기저기 지분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며 들락거리는 남자들, 심부름꾼들은 왁자지껄 공연히 신바람이 나 있었다. "송영광이라구요? 그런 사람 없는데요?" 러닝 바람에 수건을 들고 나오던, 뺀질뺀질하게 생긴 사내가 홍이 묻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안 왔습니까?" 눈에 띄게 홍이는 실망을 나타냈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는다. "그런 사람은 본시부터 없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몇해 전에도 와서 공연하고 갔어요. 색소폰인가 불고, 얼굴에는 엷은 흉터가 있어요. 다리 도 좀 불편하구, 그러니까 송영광은 본명이오." 홍이는 저도 모르게 서둘렀다. "아아 나일성 씨 말이군요. 왔어요." "왔어요?" "어떤 사인데 찾으시지요?" 비로소 사내는 홍의 행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친척이오." 일부러 친척이라 한다. 그간의 내력으로 보아 친척이라 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봐 우식아! 나일성 씬 어디 들었지?" 저만큼 얼쩡거리고 서 있는 청년에게 사내는 큰소리로 묻는다. "저쪽에요." 하고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청년은 가버린다. "경성여관에 가보십시오. 나일성 씨는 거기 들었다는군요." 노타이에 연회색 양복을 입은 홍이는 신사로서 손색이 없었고 다소 거칠었으나 얼굴은 준수했으며 게다가 나 일성의 친척이라 하니까 그랬는지 사내는 매우 공손하게 가르쳐 주었다. 경성여관으로 찾아갔다. 산월여관보다 훨씬 차분하고 극단 패거리가 든 것 같지도 않았다. 아마 산월여관에 수 용 못한 나머지 몇 사람이 투숙한 것 같았다. 나일성을 찾으니 청년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 나일성은 지 금 외출중이라 했다. "언제 오면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네댓시쯤이면 안 올까요?" 대답이 애매하다. "네시쯤 다시 오지요." 여관을 나서는데 홍이는 맥이 쑥 빠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혹 공장으로 날 찾아갔는지요,' 부랴부랴 공장으로 돌아왔으나 아무도 찾아온 사람은 없었다. 어쨌거나 송영광은 신경에 와 있고 만나는 것도 시간 문제일 뿐, 그러니 홍이는 손에 일이 잡히질 않았다. "망할놈의 자식, 이번에도 그냥 갔다만 봐라. 죽여버릴 거다." 네시, 홍이는 경성여관에 다시 갔다. 영광은 면도도 하지 않은 부스스한 꼴을 하고서 여관방에 혼자 있었다. 어쩌면 아침나절에 찾아왔었다는 사람 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홍이를 보는 순간 영광은 숨이 막히듯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사 년 전에 비하 여 많이 피폐한 것 같았다. "앉으시지요." 마주보고 앉는다. 홍이는 담배를 붙여물고 성냥개비를 재떨이에 던지며 "어제 왔나?" 하고 물었다. 나이는 많이 처지지만 사 년 전에 한번 보았을 뿐인데 홍이는 반말로 허두르 뗐다. "어제, 네." "얼마 동안 머물 건가?" "신경서 이틀 공연하고 길림으로 갈 겁니다." 간밤에 술을 많이 마신 것 같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지도 사람인데 마음이 편했을 리 없지." 영광은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었고 홍이는 담배연기 가는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방안의 침묵 사이 사이에 저 녁상을 나르는지 복도를 지나가는 발소리 여자들의 목소리가 끼여들었다. "나가지." 담배를 눌러끄고 홍이 일어섰다. "어디로 말입니까?" 영광의 목소리는 왜 그랬는지 도발적으로 퉁겨나왔다. "저녁 먹으며, 이야기 좀 해야 안 하겠나? 자네 부친은 지금 여기 안 계신다." 일어서려다 말고 영광의 낯빛이 변했다. 벼랑 끝으로 몰린 짐승 같이, 그런 눈으로 홍이를 쳐다본다. "그, 그건 무슨 뜻입니까." "걱정되나? "..." "잡혀갔을까봐? 세상 하직했을 것 같은가?" 윽박지르듯 그러나 홍이는 엷은 웃음을 띠고 "목단강 방면으로 장사 가셨다." 무표정으로 돌아간 영광은 셔츠 하나만 갈아입고 긴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넘긴 뒤 홍이를 따라나왔다.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다. 아스팔트 지면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는 거리, 오고가고 사람은 많았다. 그럴 시각 이다. 한쪽 다리를 끌 듯이 걷고 있는 영광은 키가 컸다. 홍이도 부친을 닮아 키가 컸다. 단단한 홍이 체구에 비해 영광은 다소 메말라 보였다. 구겨진 회색 바지에 수박색 남방 셔츠를 입은 영광은 방안에서 그 부스스했 던 모습과는 달리 거리에서는 아주 세련돼 보였다. 직업상 그랬을 테지만 그러나 직업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 고 불편한 걸음걸이 때문만은 아닌 듯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마차를 타고 이들이 간 곳은 연강루였다. "술 좀 하지." "간밤에 과음해서." "서로가 다 마음 안 편한 처지, 술로나 풀어야지." 홍이는 안주와 맥주부터 가져오라 하며 종업원에게이른다. "지난 얘기 해봐야 소용없지믄 그때 형님을 만나지 않고 자네가 가버렸을 때, 다음 만나면 뚜딜겨패주겠다, 생 각했지." "안 올려고 했지요." "어째서." "하지만 오고 말았습니다." 술을 따르고 술을 마신다. 영광은 술잔을 비운 뒤에도 어머니와 동생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입밖에 그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색소폰인가 그걸 아직도 부나?" "네, 작곡도 조금 하구," "장차 작곡가로 나갈 건가?" "내일 일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냥 해보는 거지요." "시국 땜에 그러나?" "글쎄요. 시국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그러고는 화제가 끊어지고 말았다. 영광은 화제를 잇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고 홍이는 원했던 물건 을 손에 넣기라도 한 듯 느긋해 있었다. 장본인인 송관수가 신겨에 없다는 사실이 홍이를 막연하게 하기도 했 다. "요즘 국내 사정은 어떤가." "그저 그렇지요.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앞으로 더 어려워질 거 라고들 하더군요." "글세... 그럴 게야. 지원병에는 많이들 나가나?" "도시에서는 그렇지도 않지만 지방, 시굴에서는 관원 유지들 감언이설에 속고 혹은 강제 협박하는 등살에 심 약한 청년ㄷ르은 못 견디어 나가는 모양이더군요. 더러는 출세의 길로 착각한 무지랭이들이 자진해 나간다는 말도 있고." "자네는." 질문의 뜻이 무엇인가 한동안 망설이다가 "머지않아 조선 노래도 부르지 못하게 되겠지요. 벌써부터 학교에서는 조선어 과목이 폐지되었고 창씨개명하 라고 성화가 이만저만 아닌데 노래라고 부르게 내버려두겠습니까." "그럼 뭘 하고 사나." 말을 해놓고 보니 맥빠진 것이기도 했지만 우문이었다. 홍이는 멋쩍게 웃었다. "군가 나부랭이나 부르게 되겠지요. 그리고 전선의 위문단으로 추럭 타고 다녀야 할 겁니다." "그렇겠지. 그럴 거야... 이곳에서도 남 먼저 창씨개명인가 뭔가 하고서 날뛰는 친일파, 그놈들이 안 한 사람을 역적 대하듯 하니, 참말로 역적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 "도처 마찬가집니다. 왜놈이 못 되어 환장하든 새끼들이 창씨개명에 감읍하는가 하면 어떤 시골무지랭이는 밭 갈다 말고 덴노헤이까 반자이를 외치며 두팔 치켜들고 지원병으로 나갔다 하고, 한마디로 만화지요." 술잔을 거듭 들면서부터 영광은 좀 적극적으로 얘기를 했다. 어쩌면 당장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자신의 처신 문제를 잊고 싶어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조선은 그 자체가 감옥입니다. 아무도 어느 누구도 어쩔 수 없어요. 죽어서 도망치지 않는 이상 그놈들 구령 에 따라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영광의 말을 들으면서 홍이는 송장환의 모습을 떠올렸다. 조선 민족을 볼모라고 말하던 그의 모습을, '선생님, 그 말씀은 틀렸습니다. 볼모에게는 고국이 있고 백성이 있고, 또 임자도 따로 있지만 우리에게 그것 이 있습니까? 문서가 있습니까? 약속이 있습니까? 풀려날 기약이 있습니까? 고립무원입니다. 우리에게는 비 벼대볼 언덕 하나 없습니다." 총칼과 교지로써 우리 속에 가두어진 조선 민족, 성질 사나운 놈 있으면 잡아먹고 지혜로운 놈 하나 있으면 잡아먹고 먹음직스러우면 잡아먹고 허약한 놈 잡아먹고 나머지는 부려먹으면서 필요할 때 조금씩 , 유사시에 는 비상용이고, 분명 볼모는 아니다. 일본이 강탈한 강산에 노닐던 짐승들이다. 그들 재산 목록에 들어 있는 것이다. 어찌하여 이같이 하늘과 땅 사이에 법이 없는가. 그러나 법을 바라는 자는 어리석고 어리석은 자는 죄 인이 되어 가둠을 당하며 모든 것, 생명까지 박탈당해야 한다. 이 무법의 벌판을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 걸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누군가 죽으면 서럽게 울면서 장사 지내고 만나고 이별하고, 무법의 벌판에서 그들은 어떤 앞날을 꿈꾸는 걸까. 조선에서 숱하게 만주로 팔려오는 처녀들에게도 앞날은 있는 걸까. 칼의 문화, 유곽문화, 그것도 문화의 범주에 속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여하튼 일본 군화가 지나간 곳이 면 맨 먼저 어김없이 서는 게 유곽이다. 그러고 보면 칼과 섹스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 같고 생과 사의 윤회인 것 같고, 이 미망의 유전은 진정 끝남이 없는 것인가. 유곽으로 끌려온 조선의 딸들, 그것은 죽음인가 삶인가. 죽음도 아니며 삶도 아니다. 그럼 그것은 무엇인가. 땅도 빼앗기고 삶의 터전도 다 빼앗기고 마지막 남은 딸을 팔아 넘긴 부모의 그 죄업의 생애를 전율 없이 생각할 수 있는가. 공장 월급의 몇 달치 선불이라 속이고 얼마 간 금액을 떨어뜨린 사내들은 딸을 끌고 간다. 가난과 생명의 존재는 이토록 처절한 것인가. 참 그렇다! 이 길 에서 김두수를 빼놓을 수 없지. 김두수의 돈줄이 본시 그 길이었으니까. 소싯적부터 만주로 흘러 들어와서 한 손에 검을 쥐듯 밀정으로 출발했고 한 손에는 황금을 쥐듯 아편과 여자를 팔았다. 특히 여자 장사에는 이골이 난 사내다. 그는 지금 한창 재미를 보고 있을 것이다. 일본의 전선이 넓어지면 질수록 사냥감의 수요는 늘어 날 테니까. '그놈은 일본놈 개라기보다 지옥에서 도망나온 야차 같은 놈이다. 지 애비가 그리 됐다 해서, 지놈이 설움을 좀 받았다 해서 조선 사람 다 잡아먹기로 작정한 놈이다. 기막힌 일이지. 그 놈 애비 손에 죽은 사람의 자손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작두에 목짤라 죽이고 일시키다 병나면 늑대먹이로 던져서 죽이고 그런 왜놈한테 죽 은 자의 자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김두수 그놈이야말로 작두에 걸어서 목을 짤라 죽일 놈 아니고 뭐겠나. 제 살을 무는 놈, 천하에 악종이지.' 언젠가 정석은 그런 말을 했다 홍이는 고개를 흔든다. 김두수 생각만 하면 진저리가 쳐진다. 웬 까닭인지 요즘 김두수가 의식속에 기어드는 일이 종종 있다. 어젯밤에도 김두수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영광은 요리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맥주말고 다른 술을 달라고 해서 주문한 빼주를 마시고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하다가 돌아온 홍이는 갑자기 영광에게 짙은 연민과 애정을 느낀다. 혈육 같은 것을 느낀다. 그도 몰린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무수히 상처받고 승복과 부정의 가름길에서 방황하며 갈등에서 허우적거렸을 그의 세 월은 홍이가 떠나보낸 세월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외가를 닮은 모양이다.' 하얗고 반듯한 영광의 수그린 이마를 바라보며 홍이는 맘속으로 뇌었다. 영광의 얼굴은 좀 독특했다. 관골에 그어진 흉터 때문인지, 그러나 그것은 과히 흉업지 않을 만큼 엷었으며 창 백한 낯빛에 굴곡이 깊고 음영이 짙었다. 소위 범눈썹이라고들 하는데 부드럽게 퍼지면 모양을 이룬 눈썹은 특히 보기 좋았다. 청춘의 표상같이 싱그러웠다. 산수화 한 폭이 걸려 있는 요리집 방안은 깨끗했다. 조황빛 수술이 늘어진 화려한 등은 창밖의 바람 따라 조 금씩 흔들리곤 했는데 창밖 그곳에는 황혼에 물든 하늘이 있었다. "최참판댁 소식은 더러 듣나?" 침묵을 깨듯 홍이 물었다. "그 양반들 소식을 어찌 알겠습니까." 통기듯 말하다가 "환국이는 가끔 만납니다." 환국이라 말할 적에 영광의 표정은 흔들렸다. 고뇌스럽다 할까 감미롭다 해야 할까, 그가 보인 최초의 순수한 정감의 표현이었다. "교사로 있다는 말을 나도 듣기는 했는데." "서울서 사립 중학교 미술 선생님으로 있지요. 황태수라고 방직공장하는 사람의 막내딸과 결혼도 했구요." "자네는?" "결혼 말입니까." "그래." "가정 갖는 것은 단념했습니다." 학교에서 퇴학당한 일에서부터 집을 뛰쳐나가게 된 것은 어느 여학생과의 연애 사건이 원인이라는 것, 사건으 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은 백정의 신분이 발각되어 여학생 집에서 들고 일어난 때문이라 했는데, 여하튼 문제 의 여학생이 영광을 뒤쫓아 동경까지 갔고, 두 사람은 동서 생활을 한다. 그것까지는 홍이도 대충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그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송관수도 그렇고 홍이도 아는 바 없었다. 홍이는 섣불리 그 여자와의 현재 사정을 묻지 않는다. "단념을 해?" "저는 결혼 안 할겁니다." "어째서? 집안 내력 땜에 그러는 건가?" "..." "딱하구나.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곰팡내 나는 그 따위 생각을 하나. 그도 젊은 사람이."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제 개인, 내면에 관한 문젭니다." 영광은 여전히 가족에 관한 것, 안부에 대해서 묻지 않았고 홍이 역시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접근하지 못한 상 태였다. 깨지기 쉬운 유리 그릇처럼 자칫 잘못하다가는 부자 상면도 틀어지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조심하 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자니 화제가 궁색해질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상당량의 술을 마셨고 술을 절제 하기 위해서도 무엇이든 얘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환국이 동생은 뭘 하나." 겨우 말을 이었다. "윤국이 그 애는 대학 농과를 졸업하고 다시 경제과로 들어갔다든가요? 사회에 나오기 싫어 그랬을 겁니다. 나와봐야 조선인들 하는 일이란 뻔하지요. 그 애는 성질이 팔팔해서 형하고는 딴판입니다." "형이 어때서." "나약한 편이지요. 너무 맑아서 저 사람이 왜 사바세계에 있을 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상당히 부럽지요. 하기는 뭐 아무나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타고난 거, 천성일 겁니다." 나약하다는 것은 허두였을 뿐 영광은 환국을 깊이 경애하듯 말했고 그것은 또한 인간의 순수성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인 성싶었다. 그리고 앞서 말하기를 그 양반들 소식을 어찌 알겠느냐, 그때는 분명히 거부감 같은 것이 있었는데 결국 최참판댁이라는 틀 속에다 환국을 집어넣고 생각하는 것이 영광은 싫었던 모양이다. "어릴 적에 네댓 살쯤 됐을까? 그러니까 용정에 있을 땐데 그 사람을 어린 공자라 했었지. 생각이 나는군." "글너 말이야말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요?" 그렇게 발끈할 필요도 없었는데 영광은 화를 내듯 말했다. "도덕적이라는 말처럼 환국이를 그릇되게 표현하는 것은 달리 없을 겁니다. 만약 도덕적으로 무장이 되었더라 면 환국이는 훨씬 강해졌겠지요. 그리고 정치적으로 변신했을 겁니다. 그 사람은 순수합니다." 홍이는 내심 놀란다. "정치적이라 하면 독립운동을 말하는 건가?" 영광은 대답하지 않았다. "환국의 부친을 두고 정치적으로 변신했다 그 뜻이야?" "그분에 대해선 모릅니다." 일단 그 질문은 회피해놓고 그 자신 지나쳤다 생각했는지 얘기의 방향을 돌렸다. "사상범에게 예비 검속령이 내리지 않을까 환국이 걱정하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근화방적에서 그분을 국외 로 나가게 할려고 궁리를 한 모양인데 뜻대로 되지 않는가 봅니다. 환국이 어머니께서 그 일은 서두셨다 했고 시기를 놓쳤다는 말도 있구요." 근화방적은 황태수가 경영하는 업체인데 몇 해 전부터 만주 방면으로 진출했으며 방직공장뿐만 아니라 적잖은 황무지를 매입하여 개간 사업도 아울러 진행하고 있었다. 사돈간이 된 길상을 이곳 사업체의 무슨 직함이라도 붙여서 내보내려고 공작을 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간의 사정을 홍이도 다소는 알 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길상이 국외 탈출의 시기를 놓쳤다고들 했다. 그러나 송관수의 견해는 달랐다. "시기를 놓친 기이 아니고 아예 조선을 떠날 생각은 안 했다, 그렇게 봐야 할 기구마. 여기 온다 해서 소련이 나 저쪽으로 빠지지 않는 이상 발걸음이 사납기로는 다를 기이 없고 말이 남의 땅이지 만주가 조선하고 머가 다르노. 왜놈이 숨통막고 있기로는 매일반, 그렇다고 해서 소련이나 중경 쪽으로 가는 일이 쉬운가? 그 사람이 야 왜놈 총칼 위에 서 있는 형국인데 자칫 잘못, 꼬타리가 잽히는 날에는 사돈 사업 망하는 거는 둘째치고 여 기 일에 화근이 안 된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기라. 그래서 한분 찍힌 사람 운신하기도 어렵지마는 쓸모없다고 들 하지. 또 길상이 그 사람 이곳 사정 꿰뚫어보고 있을 긴데 자기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도망을 성 질도 아니고 그럴 바에야 죽든 살든 앉아서 뭉개자 그런 심산일 기다." 얼마 전에 정석이 왔을 때 관수가 한 말이었다. "그 양반들 소식을 어찌 알겠느냐 하더니, 꽤 소상하게 알고 있네." 빈정거리는 듯한 홍의 말에 영광은 거칠게 술잔을 들었다. 솔직하지 못했고 비겁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영 광은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던 것이다. "추럭 타고 전선 위문단으로 댕기느니 차라리 이곳에 오면 어떨까?" "독립운동하라 그 말씀입니까?" 비웃었다. "그런 뜻은 물론 아니다. 내 자신 운동하고는 무관한 사람이고, 북만주 그쪽이면 모를까 이곳이 독립운동의 근 거지였던 것도 옛말이다." "형님, 아 그게 아니지." 영광은 고개를 흔들었다. 호칭이 마땅하지 않았고 헷갈리기도 했지만 진심을 털어놓기가 어려웠으며 홍이에게 대항하기도 어려웠다. 주량은 많았으나 도무지 취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저씨... 그것도 이상하구 이홍 씨!" 영광은 냅다 던지듯 소리를 질렀다. "이거 참 촌수가 어찌 되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촌수 없는 서로간의 사저인데 아무려면 어떤가. 상관없다. 편한 대로 하게. 하하핫핫..." 홍의 웃음 소리도 턱없이 컸다. 서로가 서로를 느꼈는데, 동질감을 느꼈는데 하여간 뭔가가 어려웠던 것이다. 거의 초면이나 다름없는 처지에다 가로놓인 문제도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지, 그러나 그보다 지 극히 예민하고 섬세한 공통점이 이들을 어렵게 하는 것 같았다. "저는요, 모두가 잘 알다시피 저는 별볼일 없는 놈입니다. 하지만 종기에 손을 댈까 말까 망설이듯 그렇게 대 하지 마십시오. 들겨들어서 짜든지 아니면 외면해버리든지, 어릴 때부터 그런 것에는 딱 질려버렸습니다. 물론 성질이 못돼서 그랬겠지만 저는 종기도 화약도 아닙니다. 한때 일본서 난동을 부리고 죽을 둥 살 둥 세상 무 서운 줄 모르고 덤비다가 이 지경 몸을 망가뜨렸지만 계속 그랬다면 살아 있기나 했겠습니까? 백정이란 말만 나와도 상대를 들고패는 아버지를 닮은 것도 아니구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하지만 말입니다. 솔직하게 말하지요. 솔직하게 말입니다. 저는요, 송관수 김길상 그분들을 우러러 받들 만큼 어리지도 않고 자신을 기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독립이 될 거라는 달콤한 꿈도 꾸지 않 습니다. 내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애국애족, 독립을 논하지 않으면 순 날건달로 치부 하지만요. 소위 운동하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그 실체 이상으로 침소봉대해서 감격하고 찬양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나도 동참하고 있다는 자기 만족 같은 것 아닐까요? 그것은 환상, 일종의 환상이며 기만입니다. 마른 자 리에 앉아서 손뼉만 치고, 그러고는 말없는 사람을 비난합니다. 과연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요?" "어째 얘기가 그리로 빠지나 응? 그리고 날 들으라고 하는 얘기야?" "손뼉만 치는 사람인지 투쟁하는 사람인지 어찌 알고서 형님 들으라고 말을 했겠습니까." 어느덧 호칭은 형님으로 돼 있었다. 홍이 소리내어 웃고 영광은 그러는 홍이를 삐딱하니 쳐다보면서 "과연 영웅 호걸이란 있습니까?" 묻는다. "영웅 호걸, 위대한 애국자, 신출귀몰하는 의인, 사실 그런 게 있습니까?" 재차 묻는다. "있었으니까 역사책에도 나와 있겠지." 농치듯 말하고 홍이는 또 소리내어 웃었다. 영광은 바닥 깊이까지 들이키듯 술을 마셨다. "그건 말입니다, 그건 사람들이 치장을 해서 내놓은 것들입니다." 술잔을 놓으며 말했다. "되잖은 소리, 치장을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알어. 자네는 자네 부친도 모르고 있잖은가." "왜 모릅니까. 압니다." "안다면 이럴 수가 없지." "아니까 이러는 겁니다. 사람이 뭐 그리 대단하고 독특하겠습니까." "복잡하군. 뭐이 그리 설명이 필요해." 그러나 영광은 무가내로 계속한다. 그러나 이야기 내용 따로, 균형 잃은 마음 따로, 지리멸렬이었다. 목말라하 는 고통 같기도 했다. "보지도 못한 하나님을 만들어내고 귀신을 만들어내고 영웅을 만들어내고 왜들 그러지요? 사람답게 못 사는 한풀입니까? 왜 사람들은 남들에게 이런저런 옷을 입히기를 좋아하는 거지요? 아름다우면 추하게 입히려 하고 추하면 아름답게 입히려 하고, 반대로 아름다우면 더욱더 천상적으로 꾸미려 하고 추하면 더욱도 지옥으로 만 들려 하고, 진실은 어디 있습니까? 온통 빈 껍데기, 빈 껍데기만... 그럴듯하게 치장하고 화려한 무대에서 연주 할 때 관객들은 환호합니다. 영광합니다. 껍데기만 보구요. 껍데기를 벗어버린 무대 뒤가 얼마나 살벌한지 아 십니까? 추악한 일들, 더러운 몰골들이 여기저기 웅크리고 있습니다. 지분으로 떡을 쳐서 청중의 인기를 독차 지한 가수가 무대 뒤에선 임자 없는 추녀라든지, 많은 사람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여배우가 기둥서방한테 머 리채를 잡힌채 지갑 바닥까지 털어야 했다든가, 인생이란 따지고 보면 본시 그런 모습, 으스스하고 을씨년스럽 고 과히 아름다울 것도 없는, 그게 삶의 현실 아닐까요? 대체 신성한 곳은 어디 있습니까?" "자네 말대로 하자면 담요 한 장 둘러메고 얼음판을 뛰다가 얼어죽은 사람, 굶주리며 행군하는 사람, 붙잡혀서 고문당하고 사살되는 사람, 그들도 치장하고 무대에 선 가수나 배우와 같다, 정말 그런 거야?" "독립이라는 헛된 꿈을 꾸는 사람들이지요." 처음으로 홍이 얼굴이 노기가 떠올랐다. "젖비린내 나는 소리 짝짝 해! 자네 아까 뭐라 했나. 그런 사람들 때문에 독립이 될 거라는 달콤한 꿈 같은 것 꾸지 않는다 했지? 자네만 그런 줄 알어? 그들에게도 꿈 같은 것 없다!" "그럼 왜지요?" "달콤한 꿈이 없어서 인정 안 하려는 자네와 달콤한 꿈을 꾸지는 않으나 목숨을 거는 사람, 그 차이점 때문이 다." "차이점이 뭡니까." "구제불능이군." "맞습니다. 구제불능! 하하핫... 하하 도시 누가 구제하고 누가 구제를 받지요? 구제한다, 구제받았다, 참 우습 군요. 정말 엉터리군요. 교활하고 어리석은 영웅과 교활하고 어리석은 대중이 눈가리고 아웅하는 관계 속에서 적당하게 만들어낸 것이 그놈의 구제니 구원이니, 해방, 자유 따위의 말 아닙니까? 김길상! 송관수! 네에 그분 들 애국자지요. 소위 독립투사 아닙니까. 하지만 어쩌다가 그분들이 그 판에 뛰어들었을까요. 자신을 구제하기 위하여, 동족을 구제하기 위하여, 어느쪽이지요? 한풀이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자기 신분에 대한 한풀이 말 입니다." "그러면 안 되나? 한풀이하면 안 되느냐 말이다." "된다 안 된다는 문제가 아니지요. 과연 한풀이가 되겠느냐 그겁니다. 언제 세상이 변하지요? 어느 천년에 변 하느냐 말입니다." "세상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선 부자간 의견이 일치하는구먼." 홍이는 시답잖다는 듯 술을 마신다. 그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영광은 계속한다. 집요하게 그야말로 집요하 게 신작로를 달리는 마라톤 선수같이. "내 처지나 지 처지나 다를 것이 없는데, 비오는 날이면 빗줄기 바라보고 노가다 죽이는 데 아이꾸찌 필요 없 다, 비가 와서 일 못하면 굶어죽는다, 그 말인데요, 그렇게 한탄하는 밑바닥 인생인데 말입니다. 조선을 지배하 는 왜놈의 종자랍시고 그놈들, 왜놈 노가다 패가 조선인 노가다를 떡치듯 패고 망가뜨리고 병신으로 만들고." 잠시 동안 말을 끊었는데 다음 순간 허겁지겁 누가 뒤쫓기라도 하듯 목수니 듯한 음성은 이어졌다. "그거는 예를 들어서 한 말이지만 계층 따라서 그 방법은 물론 달라지겠지요. 그러나 맞는 놈 때리는 놈, 도처에 있는 그런 관계가 없어지겠습니까?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밥그릇 크기를 따져서 생긴 일입니까? 진주서 농청과 백정이 싸웠을 때도 이해와 상관없이 순전히 우월감 때문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누르고 짓밟지 않고는 못 견디는 인간의 본성." "그만해 그만." 홍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들어보십시오." 영광의 몰골을 애원이었고 비참하기까지 했다. 술주정을 한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그렇습니다. 인간의 본성 말입니다. 그 본성, 본성 말입니다. 밥그릇이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위냐 너가 위냐, 그것 때문에 더 많이 때리고 맞는 것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구요. 재물이나 권력 이 한 인간의 생존을 지탱하는 데 얼마만큼이나 필요하겠어요? 천재지변이 없는 한 평등이면 굶는 사람은 없 을 겁니다. 보다 많은 재물, 보다 강한 권력을 가지려는 것은 실상 배고픈 것하고 절실하게 관계되는 것은 아 니지 않습니까. 잘나고 호령하고 지배하고, 그런 걸 위해 권력과 재물을 가지려 하는 거 아니겠어요? 안 그렇 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생에서 얻은 것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다, 대체 그건 무엇일까요. 호령하고 뽐내 고 남을 짓누르는 것 말입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일까요? 자유와 평등과 정의, 잘난 사라들 걸핏하면 흔 들어대는 깃발이지만요, 그것은 거의가 불순합니다. 우월감이 딱 자릴 잡고 있거든요. 지배를 예비하고 있단 말입니다. 깃발처럼 높이 솟으려는 의지가 있단 말입니다. 사실 그것으로 권력을 잡았구요. 정의니 팔굉일우니, 공영이니, 침략자 왜놈들이 즐겨 쓰는 말 아닙니까? 과연 정의가 있습니까? 자유가 있습니까? 평등이 있습니 가? 있어 본 일이나 있습니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 하고 있어. 왜놈 군화 밑에 우리가 지금 있는 걸 몰라? 태평세월 같은 말 하고 있 네." "왜 모르겠습니까. 독립투사의 아들이 그걸 모를 리 없지요. 해서 하는 얘깁니다. 눈구덕에서 얼어죽고, 왜놈한 테 총맞아 죽고, 감옥에서 목매달아 죽고, 네 , 그것으로 한 인생 땡 치는 거지 뭐 달라진 것 있겠느냐 말입니 다. 제 한목숨 끝난 것 이왼 달라지는 거는 아무것도 없다 그 말입니다." "친일파 찜쪄먹겠다. 왜놈들이 들으면 상 주겠구나." "뭐라 해도 좋습니다. 살아 있는게 제일 이지요." "마른 자리에서 손뼉 친다 하더니 네놈이야 말로 마른 자리에 편히 앉아서 욕설을 일삼는 거짓말쟁이다. 말로 써 못할 일이 어디 있어. 누군 입이 없어 가만히 있는 줄 아나? 횡설수설, 야 이 자식아!" "네, 아 네 그렇지요." 영광은 갑자기 초점을 잃은 듯 멍한 눈으로 화가 나 있는 홍이를 쳐다본다. 내가 무슨 말을 했었지? 어디서부 터 시작했더라? 하고 생각해보는 듯한 표정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딴전만 펴고 있을꺼야!" 홍이 소릴 질렀고 영광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갔다.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만 같은, 조각처럼 다듬어진 얼 굴이 시뻘겋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만일 이번에도 그냥 도망가는 날엔 각오해. 나머지 다리는 내가 뿐질러놓을 테니." "..." "어쩔 거야!" "만나지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아버지가 절 잡아죽이는 한이 있어도 이번에는 만나보고 가겠습니다." 홍이는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순순히 나오는 영광의 태도에 오히려 홍이 쪽이 당황한 것이다. 사설을 늘어 놓는 꼴을 보아 애먹이겠다 싶었던 것이다. "잘 생각했다." "..." "그럼 일어서라. 가자." "어디루요?" 여관방에서 홍이 나가자 했을 때 어디로 말입니까 하던 그때와 흡사했다. 도발적으로 튕겨져나온 목소리가 흡 사했다. "어디긴 자네 집이지." "그렇게는 못합니다." 단호했다. '...?" "아버진 목단강인가 그곳에 가셨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럼 아버지만 만나고 어머니 동생은 만나지 않겠다 그 말인가?" "아버지 오신 뒤 함께 만나지요." 역시 단호했다. 밖으로 나왔을 때 하늘엔 달이 댕그머니 떠 있었다. "아버지 오신 뒤에 집으로 가겠습니다." 걸음을 옮기지 않고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영광은 그 말을 되풀이했다. "이해해 주십시오. 공연이 끝나도 아버지가 돌아오시지 않으면 돌아오실 때까지 신경에 남아 있겟습니다. 약속 하지요."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그리고 제가 왔다는 것, 집에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그 이유가 뭣인가." "어머니가 두렵습니다." "어머니가 두려워?" "네." 영광은 눈을 들어 달을 본다." "그 어진 분이 어째 두렵나." 한동안 말이 없다가 두 손으로 머리를 긁듯이 쓸어넘기고 나서 "배신했지요... 어머니를 말입니다." 말이 떨어지는 순간 홍이는 큰 바위를 안고 넘어진 것 같았다. 진득진득 발이 빠지는 갯벌, 해질 무렵에 부는 바람 소리 같은 것이 심장을 휩쓸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문제로, 그것은 복병의 습격을 받 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랬구나.' 그때 가족을 만나지 않고 그냥 가버렸을 때 홍이는 영광을 망나니가 아니면 옹졸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 생각 했다. 부자간의 문제이기보다 기실, 가장 강하게 의식했던 사람이 어머니 영선네였다는 것을 홍이는 전혀 생각 조차 해보지 않았다. 사실 홍이는 지나치게 백정에 대하여 과민했던 송관수가 못마땅 했고 그 때문에 때론 관 수가 몹시 왜소한 사내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 초점이 맞았을 때 홍이는 거의 본 능적으로 모든 형편을 여실하게 파악한 것이다. 낮추고 또 낮추고 자기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듯 영선네의 그 같은 모습이 새삼스럽게 홍의 마음을 뜨겁게 했다. 핏줄을 부정한다는 것은, 그중에서도 어머니, 그 속에서 생명이 생겨났고 그 속에 머물렀던 모태를 부정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다. 해서 부정의 그 깊이만큼 넓이만큼, 또 농도만큼 배신했다는 회한 도 깊어지고 넓어지며 짙어지게 마련이다. 그것은 상승 작용하는 것이며 끝없는 평행선인 것이다. 홍이는 뼈저 리게 그 갈등을 겪었고 임이네가 세상 떠난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되살아나면 용납할 수 없었던 생모에 대한 죄의식과 회한에 사로잡히곤 한다. 영광의 경우, 백정을 부정한 것은 어머니를 부정한 것이며 가 정과 가족을 버린 것도 결국은 어머니를 버린 것이 된다. 인연을 끊었다면 그것도 어머니와 인연을 끊은 것이 다. 홍이는 그 따위 곰팡내나는 생각, 더군다나 젊은 사람이, 하고 나무랐지만 백정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 별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내 자식을 백정의 자시고가 함께 공부시킬 수 없다. 벌떼같이 학부 형들이 몰려오면 백정의 자식은 학교를 떠나야 했다. 사춘기에 흔히 있는 여학생과의 편지질도 신분을 감춘 백정의 혈통이기 때문에 보무가 들고 일어나 문제삼는 것이다. 송관수가 비밀 조직 속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관헌의 눈을 피하여 전전한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 신분의 노출을 꺼려 보초같이 일가가 떠돌아야만 했던 청소 년 시절 부딪치는 것은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었으며 스스로도 정신적 울타리를 치지 않고는 안주할 수 없었 다. 의식이나 생활면에서도 그것은 가둠을 당한 상태, 동굴속과도 같이 외부와 차단된 세계였다. 영광은 자기 존엄에 상처를 받은 분노 때문에,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것은 어머니를 부정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행동이었다. 최참판댁의 길상으로부터 학자금 지급의 제의를 받았을 때, 완곡하게 마 지막까지 환국이 설득하려 했을 때도 대학 진학을 마다하고 학원을 전전하며 경음악의길로 들어선 것은 물론 재능이 있었고 취미도 있어 그랬지만 영광으로서는 최소한도 그러한 자신의 처지에서 해방되기를 원한 때문이 다. 그는 높은 교육을 받아도 그들 계층에 들어설 수 없으며 설령 들어섰다 하더라도 더욱더 자신을 옥죄는 존재가 될 것을 잘 알고 있엇다. 이러한 과정에서 홍이와 그가 다름다면 영광이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했다는 점일 것이다. 미움과 사랑의 격차는 엄청난 것이지만 그러나 이들의회한과 자괴심은 같은 것이다. 일교차가 심하여 밤거리에 부는 바람은 선선했다. 어디서 전쟁을 하고 있는지, 도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카키 빛을 지운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고 있엇다. 승객을 기다리는 마차가 머문 곳을 이들은 지나치며 걷고 있엇다. "우리 집에 가지 않겠나?" '아닙니다." "내일 한 시에 공연이 있지." "네." "우리 집에서 자고 아침에 가도 되겠는데, 여관 보담이야 낫겠지." "아닙니다. 가야지요." 그러면서도 영광은 발길을 돌려놓지 않았다. "서울서 거처는 어떻게 하고 있나." "일정하지 않습니다." 내키지 않는 대답이었다. "생활은 할 만한가?" "네. 그럭저럭." 한 다리를 끄는 소리, 때론 휘청거리며 영광의 몸이 홍이 쪽으로 쏠리곤 한다. "얼마 전에 서울서 악사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 "아꼬디온을 연주하는 사람인데 전부터 안면은 있었지요.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는 신경의 달을 얘기했습니 다." 영광은 댕그머니 떠 있는 달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신경 어느 카바레서 아꼬디온 연주로 밥벌이를 했다는데 얼마 전에 아주 조선으로 나와버렸다 하더군요. 왜 나왔느냐고 물었더니 달 땜에 그리 됐다 하고 웃어요." "달 땜에?" "네. 그가 하는 말이, 어느 날 카바레를 찾은 손님 중에서 우연히 고향친구와 마주치게 됐는데 반가움보다 왠 지 마음이 울적하여 친구가 권하는 대로 술을 마셨다는 겁니다. 원래 술을 못하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니 어디 견딜 수 있었겠어요? 너무 고통스러워 옥상으로 기어올라갔더랍니다. 뿌연 하늘에 달이 댕그랗게 떠 있었는데 그의 말이 신경 와서 처음 보는 달이었다나요? 달이야 보름 전후에서 노상 떠 있는 것이지만 밤에 밥벌이를 하다보니 그의 눈에 띄지 않았겠지요. 그 달을 보는 순간 그 친구,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랍니다. 내가 왜 여기 와 있지? 달보고 물어보았지만 만주 벌판을 부는 바람 소리뿐, 그 친구 술취한 것을 핑계삼아 대성통곡을 했 답니다. 그 길로 카바레를 때리치우고 조선으로 나왔다, 그런 얘기였습니다." 달을 보았기 때문에 그 얘기가 생각나서 한 말인지, 아니면 그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안 가려고 마음먹었던 공연에 따라오게 됐다는 것인지 영광의 그 속마음은 알 길이 없으나 여하간 타국살이 어려움을 잘 나타낸 이 야기 한 토막이었다. 신경에서 이틀간의 공연을 끝내고 길림으로 떠났다. 그때까지 송관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길림에서의 공연은 5일서부터 8일까지 주야 이 회, 그러니까 사일간 팔 회인데 악극단으로는 제법 장기 공연 이라 할 수 있고 출연진도 다소 지루해지는 기간이기도 했다. 공연장은 시공회관이었다. 낮 공연을 끝내고 재 빨리 옷을 갈아입은 영광은 술렁거리는 무대 뒤 분위기를 해치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려는데 복도 끝에 무용 수 배용자와 마주쳤다. 감색 스커트에 진홍빛 블라우스를 입은 용자는 영광을 보는 순간 고개를 홱 돌리고 바 람을 가르며 거친 몸짓을 하며 옆을 지나갔다. "병신 주제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용자 목소리였다. 영광은 한 대 갈겨줄까 생각하다가 못 들은 척 밖으로 나온다. 뭐 그리 화가 났던 것도 아니었다. 병신이니까 병신이라 하는거다, 그쯤 생각했던 것이다. 높은 산을 넘어온 사람은 낮 은 산을 수월하게 넘는다. 영광이 넘어온 인생산하도 어지간히 험하고 고달팠던 터여서 병신이라는 야유쯤 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 이편에서 용자에게 가해한 일이 있었기에 야유든 수모든 간에 마음에 꽂히지는 않았다. 영광은 배용자와 결혼할 마음도 사랑을 나눌 마음도 없었다. 책임질 언행을 취한 바도 없었다. 책임이 있다면 완곡하게, 여자 마음을 다치지 않게 거절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는 것, 그만큼 집요하게 성가시게 용 자는 구애를 표시해왔던 것이다.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지방공연에 갔었을 때다. 영광이 든 여관방에 느닷없이 용자가 나타났다. 놀라기도 했지만 성가시게 구는데 화가 난 영광은 그를 방 밖으로 떠밀어냈다. 그 순간 복도 에 발랑 나자빠진 용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문을 꽝! 닫아버리고 숫제 방문을 잠가 버렸다. 그 후 벌어진 것이 자살 소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늘 동료들과 티격태격 사이들이 나빴던 용자 에게 단원들 동정이 쏠린 일이었다. 용자를 몹시 미워하는 여자들조차 너무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될텐데, 하는 눈초리로 은근히 영광은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용자를 편들어 그랬다기보다 가까이 가면 사람을 떠 밀어내는 듯한 영광의 묘한 분위기, 그것 때문에 자존심 상한 경험들이 있고 자연 까끄럽게 생각한 탓일 것이 다. 자살 미수로 끝난 용자는 동정에 힘입었는지 풀이 죽기는커녕 복수하겠다 하며 공공연히 떠들고 다닌다는 것이다. 비윗살 좋고 거침없이 말하며 떠벌리는 성격의 배용자,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왈, 나 는 상해 본바닥에서 무용을 격식있게 배웠다. 상해는 망명한 부모를 따라갔다, 본시 우리 집은 상당한 문벌이 었고 수많은 종을 부리는 처지였는데 아버지가 반일인사로 주목받아 풍비박산이 되었고 결국 망명길을 떠나게 됐다, 으리으리하게 잘 사는 친척도 있지만 너무 어릴 적에 부모가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줄을 찾을 근거가 없어졌다, 그러나 그러한 말보다 용자는 자신을 대단한 미인으로 자부하고 믿어의심치 않으며 안하무 인으로 놀았기 때문에 살결이 희고 눈이 크고 콧날도 오뚝해서 얼핏 보기에 때깔을 좋았다. 어떤 옷을 걸쳐도 세련돼 보이는 것이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특별히 미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일성 씨, 거 큰 업덩이를 만났구려." 자살 소동이 있은 후, 술자리에서 꽹꽹이란 별명으로 통하는 바이얼린 주자 유인배가 걸어온 말이었다. 다른 또 한 사람이 그 말을 받아 마했다. "떠벌리고 다니는 모양인데 실상 뒷심도 없고 단순한 여자요. 그러다가 제풀에 주저앉을 테니 염려할 것 없어 요." 악단의 섭외일을 보고 회계도 관장하며 제일 바쁘고 실권도 있는 한민수였다. "제깐에는 그래도 첫사랑이었을 거야. 눈이 천왕산같이 높아서 누굴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까." 양 볼이 홀쭉한 유인배는 입가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듣고 보니 이거, 나형에 대한 찬송가군 그래." "사실 매혹적인 사내지. 불완전의 비애까지 곁들여서 말씀이야." "바이런처럼?" 이들의 이십대 시절, 젊은 층을 풍미했던 낭만파 시인 바이런, 다리를 절었고 수많은 여자가 염문을 뿌렸던 사 내를 어디서 귀동냥 했는지 한민수는 매우 적절하게 써먹는다. "왜들 이러십니까." 영광은 쓰게 웃는다. "수수께기의 사내고." "하 참." "또 있지. 얼음장같이 차디찬 사내, 시인같이 홀로 방황하는 사내, 그게 다 여자들 죽여주는 거지." "..." "아무튼 부럽소이다. 연예인으로서 삼박자를 고루 갖추었으니 한량없이 부럽소." 빈정거리는 투가 없지 않았으나 진실성이 전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술자리였지만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 색 소폰에는 일인자라는 게 중평이었고 작곡의 수준도 만만치가 않아 실력을 인정하기 때문인 것 같았으며 어떤 면에서는 영광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우울하게 술잔을 들며 영광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이들은 영광의 내력을 모른다. 알고 있다 한들 명문대가 자제들이 노는 무대도 아니겠고 사당패 창극패를 천 시하던 구습이 뿌리 깊게 남아서 신파나 경음악을 딴따라라 하며 시답잖게 보는 형편이니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영광이 전혀 동하지 않고 어우러지려고 하지 않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별수없이 두 사람의 화제는 용자에 게로 되돌아갔다. "배용자한테 무용하는 언니가 하나 있다 하데." "있지이." 자신 있는 유인배의 어조였다. "대단한 여자라며?" "대단한 그런 정도가 아닐세. 배용자를 거기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야. 피래미지, 피래미." "기량 말인가, 성깔 말인가." "춤추는 실력이야 뭐 피장파장일걸? 그러나아, 소위 가짜가 붙은 무용가다 그 말씀이야. 무용가 배설자." "이름이, 일본 냄새 하네." "용자는 요오꼬, 설자는 유끼꼬, 본시 일본 이름이지. 하여간 무용가, 가짜가 배설자에게 붙은 것은 실력으로 된 것도 아니구 인정을 받아서 된 것도 아니구, 행세를 그렇게 하고 다닌다 그 말슴인데, 발표회도 한 번인가 가졌을걸? 누구를 구워삶았는지 알 수 없지만." 유인배는 꽤 소상히 내막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미인인가 부지?" "미인?" 낄낄 웃었다. "배용자를 살짝 그슬러놨다, 그렇게 상상해봐. 조형도 약간 못한 편인가?" "이 사람아 배용자한테서 흰 살결을 빼고 나면 뭐가 남나. 게다가 조형까지 못한다면 그건 추녀 아닌가." "추녀까지는 아니지만 보아서 기분 좋은 얼굴은 아니고, 음산해. 그러나 체격 하나는 그만이야. 마치 무용가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처럼 완벽해." "결혼은 했나?" "그게 분명치 않아. 그들 자매의 과거는 오리무중인 셈이야. 왜? 딴생각 있어서 묻는 거야? 아서라 아서." 팔을 휘휘 내저었다. "흥, 처자 있는 몸, 절세가인인들 어쩔 것인가." "외도 안 하는 사람 같은 말 하네." "중상모략 말게." "자네 같은 사람, 배설자 안중에도 없겠지만 잘못 건드렸다간 골로 가네. 쫄딱 망하는 거야." "그리 말하니 호기심이 생기는군." "사교술의 천재, 권모술수에 능하고 마타하리, 한마디로 가까이 안하는 게 상책인 그런 여자야." 마타하리는 유명한 여자 스파이의 이름이다. "떠벌이 배용자가 언니 얘기는 도통 안 하던데?" "이복자매라고도 하구 아버지가 다른 자매라고도 하구, 모르지 확실히는. 사이가 나쁜 건 사실이다. 서로가 시 기해서 그런 것 아닐까?" 귓가에 흘러들은 그저 그런 얘기였다. 물론 기분 좋은 내용은 아니었고 배설자라는 여자의 이미지는 험했다. 밖으로 나온 영광은 잠시 동안 머물러 서서 광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낮 공연이 끝나면 거리 로 나와 혼자 배회하는데 길림에 와서 오늘이 사흘째다. 낯선 고장에 가게 되면 언제가 거리를 헤매는 것이 영광의 오랜 습관이었다. 사람들과 함께 이러쿵저러쿵, 마음에 없는 말, 헐뜯는 말을 듣는 것도 지껄이는 것도 싫었고 감정 품은 눈빛도 불편하여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이지만 낯선 고장이 그는 좋았다. 낯설다는 그 자체 가 그에게는 자유였고 해방이었던 것이다. 길림은 조용하고 은은한 도시였다. 마치 여기저기 청태낀 바위들이 흩어져 있는 듯, 그러나 암울하고 음습하지 는 않았다. 비오신 뒤 햇빛 받는 순간처럼 싱그러웠다. 아마 송화강과 곳곳에 늘어진 버들의 그 영롱한 푸름 때문이 아닐까. 이랑을 지은 기와의 처마가 가지런히 연이어진 주택가 역시 청태와 같은 고풍이 감돌았고 모 든 빛깔이 풍우에 어우러져 차분하게 관조하듯, 그러나 세월과 인생에 쓸쓸한 미소를 던지고 있는 것 같았다. 뛰노는 어린 것들에게, 당나귀를 몰고 가는 소년에게 쓸쓸한 미소를 던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얗게, 넓게, 곧게 그리고 유장하게 드러누운 가로 양편에는 여진족의 꽃으로 핀 청조의 자취를 머금은 웅장한 건물들이 역 사의 부피와 숱한 사연을 견디고 있어 예사롭게 볼 수 없었다. 훤하게 트인 길 위에 오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또각또각 말발굽 소리를 내며 마차가 달리고 이따금 자동차 트럭이 지나가곤 했다. 길림은 신경에 비하여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와 유곽문화의 침투가 적은 것같이 보였다. 영광은 송화강 강가에까지 갔다. 강은 도시를 휘감으며 흐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길림은 수향이다. 백두산 천 지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강물은 만주땅 광활한 들판 거반을 적신다. 하얼빈을 지나 멀리멀리 우수리강과 합류, 노령 하바로프스크까지, 송화강은 가히 만주의 젖줄이며 대지의 생명선,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다. 땅문서가 없 었던 땅, 땅임자도 없었던 땅, 흑룡강 우수리강에는 어족이 지천이며 사계절 유목과 수렵, 나무열매의 채집으 로 굳이 땅을 일구지 않아도 넉넉했던 삶의 터전, 기름진 망망대륙인 만주땅, 대궁을 사용했었다는 동이족이 송화강 따라, 우수리강 흑룡강을 건너 시베리아 벌판인들 아니 넘나들었다고 어찌 단언하리. 강물은 청록빛, 청자를 빚은 물빛인가, 고구려의 남정네가 이 강물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았을 것이다. 고구 려의 아낙이 이 강가에서 빨래를 했을 것이다. 지난날은 모두 아름답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날이 설사 질곡의 하늘 밑이라 한들 어찌 오늘만 할 것인가. 그 옛날 나라의 기틀을 잡아주고, 무지 몽매하여 고구려에서 보낸 국서도 오직 읽는 이가 왕인의 자손 한 사람뿐이었다든지, 그런 그들에게 지식을 전달해주고, 죽통에 밥 담아 먹는 그들에게 도예를 가르치고 불상을 바다에 띄워 보내주고 그렇게 예술을 전해주었는데 우리는 지금 저들 에게 야만족으로 매도되고 있다. 금치산자로 선고받은 것이다. 어느 나라 지도에도 조선은 없고 조선이라는 나 라는 없는 것이다. 멀리 야트막한 산들이 보인다. 신경은 물론 길림 오는 동안에도 산은커녕 언덕 하나 볼 수 없었는데 영산 백 두를 옹위하여 중첩되는 산맥들은 이곳에서부터 시작인지. 영광은 강가에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강변에도 묵직한 중량으로 버들은 늘어져 있었다. 버들 그림자가 드리워진 강물 위로 배가 가고 오고 강언덕을 의지하 여 선체를 붙인 작은 배달, 언제부터 사람들은 저토록 지혜롭고 안쓰럽게 살아왔을까. 영광은 담배를 붙여물엇 다.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속되고 천박했던 자신의 언행은 술 탓이다, 술이 과했던 거야, 하며 그 일을 외면하 려 하지만 대가리만 숨기고 몸뚱이는 드러낸 채 숨었다고 생각하는 꿩과 같은 것이었다. 연강루에서 행한 그 장광설, 그날 밤을 생각하면 영광은 손바닥에서 땀이 질적질적 솟아나듯 불쾌하고 자신을 경멸하는 마음이 치 솟는다. 뭐가 그리 잘났다고, 뭘 안다고, 뭘 잘했다고, 그것은 요즘 며칠 동안 자기 자신에게 던져온 자기 경멸 의 반복되는 말이었다. 어째서, 무엇 때문에 그같은 장광설을 홍이 앞에서 늘어놓게 되었는지, 영광은 원래 말 수가 적은 편이었다. 의사 표시를 할 적에도 어눌했고 때론 앞 뒤 잘라먹고 몇 마디로 해치우는 경우가 있어 듣는 사람이 얼른 이해 못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성미가 급하다고 생각했고 사실 충분히 성 질이 급하여 그 예로 동경서 난동부린 일이며 다리가 부러지고 얼굴에 흠집이 남은 것을 들 수 있다. 오직 유 일하게 마음을 열어놓은 환국에게도 영광은 그같은 장광설을 늘어놓은 적이 없었다. 왜 그렇게 지껄였는지, 전 혀 제동이 걸리지 않았고 후반에는 매달리다시피, 숨이 넘어갈 듯이 지껄이게 된 그 목마름, 부끄럽고 창피했 다. '미친놈, 누가 목을 조르려고 덤비기라도 했나? 펄적펄적, 용수철 튀듯이, 왜 그랬지? 뭐? 마른 자리에 앉아 박수 친다 했던가? 그 형은 날 보고 마른 자리에 앉아 욕설을 일삼는다 했었지. 친일파 찜쪄먹을 놈이라고도 했고.' 영광은 마음속으로 끼룩끼룩 웃는다. 그때 그 광경, 내 말 좀 더 들어보라 하며 매달리듯 애원하듯, 그 광경은 자신이 되새겨보아도 가관이었다. 왜 그렇게 지껄여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강언덕에 아랫도리가 숲에 가려진 채 하늘로 치솟은 고딕식 성당이 서 있었다. 첨탑 위에 눈빛같이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신을 영접하고 경배하는 곳이어서 그런지 어디로 가나 성당은 가장 좋은 장소에 세워지는 모양이다. '칼든 도적을 힘센 놈이라 인정치 말라. 보따리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은 골생원을 너무 비웃지 말라. 칼든 도 적과 대적치 못한 것은 치욕이 아니며 다만 칼을 멀리한 도덕군자의 어리석음이니라. 세상에 칼든 도적만 있 다면 어디 사람 사는 곳이라 하겠느냐. 금수보다 못한 아비규환의 지옥과 무엇이 다를꼬. 저 계몽주의의 탈을 쓴 친일분자들이 민족을 개조한답시고 내 것을 깡그리 내다 버리고 내 것을 깡그리 부숴버리고 내 모든 것을 부정하며 애국, 우국의 지사로 세상에 그 얼굴을 드러내니 사람들은 그를 선각자로 섬기더라. 연이나 내 가진 것 다 버리고 풍찬 노숙, 그 가여운 신세가 거지와 무엇이 다르리. 빚도 내 것이 있어야 주는 법, 이미 도적질 당한 강산인데 이제 와서 내 세월까지, 모조리 부정하니 그것은 육신과 더불어 혼령까지 팔아먹는 것이니 이 어찌 이보다 더한 반역이 있을손가. 우중들아! 칼든 도적을 인정치 말라. 영원한 것은 없나니, 칼든 도적은 칼 로 인하여 가고, 어리석은 자는 그 순직함으로 하여 오게 될 것이니라. 만고의 진리는 무상함이요, 윤회 유전 은 인과응보를 이름이라. 우주의 질서는 사람의 질서보다 더디게 오느니라.' 어디서 들었는지 말한 사람을 기억해낼 수 없었다. 어디서 읽었는지 그 책의 이름이 기억에 없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알지 못할 목소리였는지, 스스로 의식 밑바닥에서 우러나온 소리였는지 알 수 없었다. 영광은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담배연기와 함께 흩날려버리려 한다. 민족이니 독립이니 그런 것에서 놓여나고 싶었다.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는 본능적 동류의식도 부담스러웠다. '어디든 떠났으면 좋겠다.' 가족을 만나게 될 괴로움 때문에 그는 지금 떠나 있는 것을 잊고 있었다. 사실 그는 항상 떠나 있었다. 중학교 시절, 조숙했고 독서광이었던 영광은 책 속에서 어느 사막이며 호수며 바닷가 고원지대 벌판 또는 어떤 도시 를 만나게 되면 그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원시림을 헤매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고 낯선 어느 고장 누추한 방에서 혼자 쓸쓸하게 죽어가는 자신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젊은 날에 흔히 있는 감상이지만 영광의 경우는 감상으로 끝나지 않았다. 깊이 뿌리박혀버린 방랑에의 동경 때문에 그는 늘 우울했다. 언제였던지 외할 아버지를 보고 영광은 말했다. "왜 그럴까요? 할아버지, 어디로 떠나는 꿈을 자꾸 꾸어요. 늘 어딘가 떠나고 싶기도 하구요." 야단을 칠 줄 알았는데 할아버지는 영광의 얼굴을 골똘히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역마살이 들었나부다, 혼자 말같이 중얼거리며 담뱃대를 찾는 것이었다. 책만 산다고 하면 언제든지 쌈지를 풀어 돈을 꺼내어주던 외할아 버지는 골수에서부터 백정이었다. 그러나 영광은 시퍼런 칼도 피냄새도 그에게서 느끼지 못했다. 집을 비우기 일쑤인 아버지 자리를 외할아버지는 채워주었다. 그가 눈물을 보인 적이 한번 있었다. 보통학교를 다니지 못하 게 된 영광이 때문에 재산을 모조리 정리하고 진주를 떠날 때 외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린다. 그 후 그는 소를 잡지 않았고 푸줏간도 그만두었다. 여하튼 중학교 오학년, 졸업반에서 쫓겨나기까지 영광은 문학 서적뿐만 아 니라 다방면의 책을 상당히 광범위하게 섭렵했다. 책은 그에게 구원이었고 숨쉴 통로였으며 외롭지 않았다. 동 굴 속과도 같이 차단 된 세계 속에 책은 유일한 벗이었다. "또 책 살 기가? 책 가지고 집 지을라 카나. 이사갈 때마다 니 책 때문에 골이 아프다." 영선네는 노인이 쌈지를 풀 때 아들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하곤 했다. 늙은 아버지에게 경제 문제를 의 존해왔기 때문에 영선네는 죄송했고 진주서 정리해온 재산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곶감 빼먹듯, 불안했을 것이다. "시끄럽다. 머릿속에 넣어둔 것만큼 확실한 재산은 없다." 강혜숙과의 만남은 등교길에서였다. 여학생들은 올라오고 중학생들은 내려가는 완만한 언덕길, 봄이면 벚꽃이 억수로 피는 길이었다. 갈래머리 소녀는 열여덟이었고 곧은 체격, 청년기에 들어선 영광은 스무 살이었다. 여 학교는 사년제이며 중학교는 오년제인데 영광은 한 해를 쉬었기 때문에 두 살 나이차가 났다. 상급 학교에 가 지 않는 일반 처녀애들의 결혼 적령이 십육 세 전후인 데 비추어 혜숙이나 영광의 나이는 꽉 찼다 할 수 있었 지만 그러나 역시 성숙한 사랑을 하기에는 어렸다. 다가오기로는 혜숙이 먼저였다. 혜숙은 혼신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신분에 대한 자의식 때문에 피동적인 면도 있었겠지만 영광에게 혜숙은 문학적인 어떤 풍경같이 눈에 비쳐졌고 순결한 한송이 꽃처럼 느껴졌지만 그것이 그리움이었는지, 막연했다. 영광은 편지를 받으면 읽고 나 서 한 장 한 장 불을 붙여서 소지를 올리듯 살랐다. 타서 흐트러지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혜숙 은 늘 푸른빛의 반지처럼 얇은 편지지에 깨알 같은 작은 글을 써서 보내왔다. 왜 편지를 태우며 그것을 하염 없이 바라보는지 영광이 자신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러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고 나면 시를 쓰듯 소설 을 쓰듯 영광은 열렬한 답장을 띄웠다. 등교길에 마주치는 것과 편지 내용뿐인 사랑이었지만 혜숙에게는 필사 적인 일이었고 영광에게는 모험이었다. 그러나 혜숙의 부모나 오라버니가 경악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거의살인 적 분노로 일을 크게 벌인 것은 사회적 습관상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상처입은 맹수같이 동경바닥을 헤매다닐 때 혜숙이 뒤쫓아왔다. 그러나 영광은 결코 위로받지 못했다. 몇 해 동안 그들은 동거했지만 영광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운명적인 여자로, 혜숙을 깊이 사랑했더라면 극복될 수 있었던 일이었고 영광의 생의 방향도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다가온 것도 헤숙이 먼저였고 떠난 것도 혜숙 이었다. 마음이 얼어붙은 남자 곁에 타인으로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영광에게 혜숙은 타인이 었다.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그들 사이에 있었다. 혜숙은 지금 서울에 있다. 혜화동 길모퉁이, 자그마한 양재점을 하며 살고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영광은 그 길모퉁이 양재점을 찾아간다. "잘 있었어?" "잘 있어요. 요즘에도 술 많이 해요?" 미싱을 밟다가 일어서며 혜숙이 하는 말이었고 어렵지 않으냐고 영광이 물어볼라치면 "엄마가 아버지 몰래 도와주시니까 괜찮아요. 나도 일이 있어야잖겠어요?" 하곤 했다. 그리움도 죄책감도 없었지만 신세를 망친 여자, 전력 때문에 당한 재출발도 하기 어려운 여자, 그 현실이 영광 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나이도 생각도 모습도 성숙해진 혜숙이, 세파에도 시달린 혜숙은 오히려 누님같이 침 착하게 영광을 대해주었다. 그러나 영광은 거의 혜숙을 잊고 살았다. 금욕주의자가 아닌 그는 이따금 여자를 만나 미래가 없고 인색한 풋사랑을 나누기도 했지만 상대는 대개 화류계의 여자들이었다. 강가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낸 영광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면서 지팡이를 곁에 놓고 앉아 있는 노인을 바라보 았다. 노인이 웃었다. 영광이도 웃었다. 잡상인들도 더러 있어서 과일이며 조롱에 든 새, 자잘부레한 골동품 엽 전 따위를 펴놓고 오가는 사람들을 한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영광은 시가를 헤매다가 어느 반점에 들어가서 요기를 하고 공연장으로 돌아왔다. 연주를 끝내고 무대에서 나왔을 때 악극단의 단원 한 사람이 급히 영광에게 달려왔다.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영광은 무심하게 들었다. 극성스런 팬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신경서 오셨답니다." "신경서?" 놀란다. 처음에는 목단강에 갔다는 아버지가 돌아와서 소식을 듣고 이곳까지 찾아온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다음 에는 미덥지가 못해서 동행하려고 이홍이 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급한 일이랍니다." "급한 일?" 영광의 안색이 확 변한다.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뛰게 했다.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복도로 갔을 때 촉수가 낮은 어두컴컴한 전등 아래 낯선 사내가 몹시 초조한 모습으로 연신 땀을 닦고 있었다. "제가 송영광입니다. 뉘시지요?" 서둔 나머지 셔츠 하나만 갈아입고 온 모양이다. 즈봉에는 기름때가 묻어 있었다. 마천일이었다. 그는 대뜸 "어서 신경으로 가야겄십니다." "무슨 일입니까." "형님이 목단강으로 떠나믄서 급히 댁을 데려오라 했십니다." "무슨 일루요." "저기, 저어, 송씨아저씨가 세상 버맀십니다." "..." "호열자로 별안간." 2장 춤추는 박쥐들 "원장 계시냐?" 한복 차림의 강선혜가 들어서며 물었다. 서른 안팎으로 뵈는 여자가 마당에 물을 뿌리다 말고 곁눈질을 한다. "계십니다." 강선혜는 올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여자의 눈길이 마음에 안들었다. "명희야 나 왔어!" 하는데 여자도 "원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쌍나발을 불 듯 큰소리로 말했다. "언니, 이렇게 일찍 웬일이우?" 방에서 나오는 명희는 의아해 하는 표정이다. "웬일이나마나, 사람 사는 게 이래 되겠니? 같은 서울에 살면서 너 본 지가 일 년은 넘은 것 같다." "홍천댁, 나 냉수 한 그릇 줄래?" "방으로 올라오세요. 곧 가실 거 아니지요?" 홍천댁이 내미는 물사발을 받으며 선혜는 "물이나 마시구, 아이구 덥다." "방이 더 씨원한데." 물 한 그릇을 벌덕벌덕 들이켠 선혜는 마루로 올라왔다. "너 조반은 먹었지?" "그럼요. 언닌 식전이에요? 조반 차릴까?" "아니야. 먹었어. 친정에서." 두 중년의 여자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에는 뒷벽을 트고 쪽마루를 붙였으며 유리 덧문에 활짝 열려 있었 다. 목련 한그루가 있는 뒤뜰 돌담 너머, 양옥 건물의 빨간 지붕이 보였다. 목련의 그늘이 짙어서 좀 어두웠지 만 꽤 시원한 바람이 그곳에서 스며들었다. "몸이 더 난 것 같아요." "왜 아니라니. 이러다가 대마도 씨름꾼 되겠다. 너는 더 마른 것 같구나. 조물주도 어지간히 심술궂으셔. 반반 씩 나누면 어때서, 세상일 참으로 맘대로 안 되는구나. 권선생은 핀잔이구 아이들까지 밥 덜 먹어라 구박이 니." 방안은 시원했는데 강선혜는 부채를 집어들고 부산스럽게 부쳐댄다. 동경 유학을 했던 신여성 강선혜, 첨단을 가면서 열정적으로 멋부리기를 즐겼던 그도 오십을 바라보게 되었다. 담청색 숙고사 치마에 흰 모시적삼을 입 은 그의 모습은 이제 평범한 중년 아낙에 불과했다. 명희도 얼굴에 잔주름이 잡히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청초 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권선생님하구 쌈했어요?" "쌈했느냐구?" "이렇게 일찍 찾아온 일은 없었지 않아요?" "지금 권선생 집에 없어." 명희는 농치듯 말하고 웃었다. "조선 팔도 어디메 살기가 좋은가, 죽장 짚고 집 나간 지 사흘이나 됐어." "그럼 정말 가출이네." "강우너도 정선인가, 철원인가 거길 갔는데 글쎄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어. 어제 친정에 갔다가 하룻밤 자고 집에 가는 길에 들른 거야." 말투로 보아 문제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권선생님 안 계시니까 천천히 놀다 가도 되겠네요. 나도 방학이구." "언제 내가 그 사람 눈치 보아가며 살았었니?" "말로는 그러지만 안 그랬어요? 하여간 저심 먹구 저녁도 잡숫고 가세요. 그러는 거지요?" "앳다, 모르겠다, 그렇게 하자꾸나." 명희는 홍천댁을 불러 뭐 시원한 거를 내오라고 이른다. 강선혜는 부채질을 하다 말고 "그 블라우스 빛깔 참 예쁘다." "관심은 여전하군요." "관심까지 없어지면 나는 뭐야. 그러잖아도 억울해 죽겠는데." "억울하긴? 그런 말 말아요." "하여간 빛깔 예쁘다. 살구빛이네. 하기는 아무나 입어 좋은 색은 아니지. 너만하니까, 내가 입었다간 갈데없는 광대꼴," 하다가 "명희야." 새삼스럽게 이름을 부른다. "넌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니?" "그 말 나올 줄 알았어요. 언닌 무슨 재미로 살지요?" "나야 권선생하고 쌈하는 재미로 살지. 하기는 뭐, 요즘 같아서는 홀가분한 너가 부럽기도 하지만." "부러워요? 그렇담 자부심을 좀 가져도 되겠네." "누가 말려서 못 그랬니? 이런 꼴로 사는 것도 자업자득, 너 자신이 원한 길, 별수없지." "내가 뭘 원했기에..." "관두자. 말해보아야 소귀에 경읽기, 너만 보면 답답해서 같은 말 자꾸 하게 된다." 변함없는 그 말가락에 명희는 피식 웃는다. 임명희가 서울로 올라온 것은 조용하의 자살이 있은 지 오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남쪽 바닷가, 통영읍에서도 서편으로 빠져나간 곳에 해저 터널은 있었다. 저승길 같은 그곳을 지나갈 때 노인 들은 소리내어 염불을 했다. 해조음 이었는지 억겁 피안에서 업을 전하는 사자의 목소리였는지 임진왜란 때 그 목에서 몰살을 당했다는 왜병들 원혼의 신음이었는지, 바다 밑의 울림 소리를 헤치고 밖으로 나오면 한간 의 가장 좁은 수로를 볼 수 있었다. 수로 맞은편 완만한 언덕은 파아란 보리밭,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물결 소 리가 들려오는 듯도 했다. 해안길을 따라서 돌아가면 쓸쓸한 그곳에 외딴 분교 하나, 넓어지고 확 트인 수로는 잠긴 호수 같았고 물 위에는 섬이 둥둥 떠 있었다. 분교에서 정식 교사도 아닌 촉탁으로 예닐곱 여자아이들에 게 재봉과 수예를 가르쳤던 임명희, 신분을 감추고 두드러진 모습을 낮추고 호기심과 의혹에 가득 찬 시선을 피하며 또 학교에 소개해준 바 있는 읍내의 젊은 교사 엄기섭의 오뇌에 젖은 시선을 침묵으로 방어하면서 육 년 같을 견디어낸 명희는 별안간 그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에 와서 유치원을 개설했던 것이다. 뒤뜰 돌담 너머, 붉은 지붕의 건물이 바로 그가 경영하는 모란유치원이다. 법적으로 조용하의 아내로 남아 있던 명희는 상당한 유산을 분배받았다. 장례식이 끝나고 조찬하가 형의 재산을 정리하려 했을 때 집안에서는 임명희의 가출을 문제삼아 유산 분배를 반대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임명희가 최우선 이었다. 조용하는 폐암이라는 치명적 병을 숨겨왔고 따라서 양 자에 관한 일은 거론되지 않았으며 재산을 정리하는 조처가 일체 없었기 때문에 사후 처리에 임하면서 사실 조씨 일문은 두 번 머리를 푼 꼴이 되었던 것이다. 임명희는 물론 임명빈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만약 법 적으로 문제가 제기된다면 조씨 집안에서는 대항할 뾰족한 방안이 없었다. 하여간 조찬하의 끈질긴 노력으로 상당한 재산이 임명희에게 돌아왔고 나머지는 양친과 가까운 친지들에게 나누어졌으며 회사는 당분간 제문식 이 맡아 하기로 결말이 났다. 그러나 결말이 나기까지 고비는 많았다.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은 조찬하 의 늙은 부모였다. 임명희에게 재산이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친척들에게 분배되는 것조차 한사코 반대했 다. 그것은 조씨 가문의 몰락을 의미하게 때문이다. 모든 재산은 찬하가 관리해야 하고 양자 문제는 찬하에게 아들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자는 주장이었고 명희 쪽에서 소송을 제기한다면 끝까지 싸우겠다, 감정이 격해진 양친은 명희와 불륜의 관계가 있기에 명희 편에 서는 것 아니냐 극언까지 하며 찬하를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 구구하게 말한다는 자체가 치욕스럽습니다. 더군다나 형님이 안 계시는 이 마당에 왈가왈 부하고 싶지 않지만 아버님 어머님께서 그토록 저를 면박하시니 지난 허물을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아시다 시피 형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형님은 기혼이었고 저는 미혼이었습니다. 미혼인 청년이 규수를 보고 청혼할 마음이 생겼다면 그게 어째서 잘못이겠습니까. 형님은 저의 마음을 알고, 알았기 때문에 서둘러 이혼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규수댁에 매파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저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주저 앉았습니다. 형수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을 했고 이유고 모르고 시달렸습니다. 집 나간 것도 그렇습니다. 형 님이 이혼을 선언했고, 그 자리에 저도 있었습니다. 임교장도 계셨구요. 후에 형님은 이혼의 의사를 철회하고 형수님을 찾기는 했습니다만, 도대체 그분 잘못이 뭣이지요? 돌아가진 분을 원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 지나간 일이니까요. 다만 저는 차남으로서 이미 분배받은 재산이 따로 있고 그것으로도 자식을 양육하기에 충분하니 형님 유산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형님에 대한 저의 감정일 수도 있고 오기일 수도 있겠지요. 그 러나 형수님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분은 지금 유일한 상속잡니다. 그럼에도 유산을 주지 않겠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절제하며 한 말이었으나 찬하의 거짓 없는 진심이었고 명희에 관한 일 역시 냉정하고 객관적이며 한오라기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인실과 오가다와 함께 바닷가 분교를 찬하가 찾아갔을 때 얼굴이 진홍빛으로 변하면서 눈은 증오심에 타듯 희 번득이던 명희의 모습은 완전무결한 타인이었다. "상관 마세요. 제발 상관 말아주세요." 하던 명희, 내 불행은 모두 당신 때문이야! 당신 때문이야! 하고 외쳐대는 것만 같았던 눈동자, 인간과 인간 사이가 얼마나 비정해 질 수 있는가를 전신으로 느꼈던 그 순간, 찬하의 가슴을 얼어붙게 한 것은 명희의 이 기심이었다. 마지막 자기 존립을 위한 방어, 적대감이었다. 화약과도 같은 인실과 오가다를 그 항구에 남겨놓 고 황황히 떠난 찬하는 뱃길에서 환상을 버렸고 인간의 영원한 외로움을 인정했다. 그러나 찬하가 오해한 부분도 있었다. 살아남으려고 몸부림 친 것은 본 그대로였고 방어의 굳은 몸짓, 참혹하 리만큼의 증오심을 담은 눈빛도 찬하가 느낀 그대로였다. 그러나 명희는 다른 사람의 경우에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그때 조용하에게 납치되어 산장에서 심한 성적 학대를 받은 뒤 자신은 도살당 한 짐승, 육체를 통해서 영혼의 도살을 당했다고 생각한 그때부터 명희는 자신이 만신창이가 됐다는 자의식을 털어버릴 수 없었다) 드려내는 것은 치욕이었다. 초라하고 남루하며 바위에 들러붙어 바닷물에 이리저리 쏠리 는 작은 고동같이, 미물같이, 투신했다가 어부에 의해 건져 올려져서 죽지도 못한 여자, 사람에 대한 혐오감이 광기에 가까웠던 그런 시기였다. 어쨌거나 재산 처리에 마무리를 짓게 된 것은 혜택을 받게 될 친척들이 단결하여 찬하의 방안을 밀었기 때문 이며 형의 유산은 받지 않겠다는 찬하의 결심이 확고부동했기 때문인데 그 후 부친은 울화병으로 세상을 떴 다. 어떤 뜻에선 찬하야말로 비정하고도 이기적인 인물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의 의식 속에는 조씨 가문을 묻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지 모른다. 형, 그 인간성에 대한 혐오감은 혈통에 대한 증오감으로, 나라를 강 탈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조씨 가문의 치욕스러움은 혈통에 대한 열등감으로, 찬하는 가문을 묻어버리 고 말살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국 그는 집안을 매장하고 만 것이다. 얼음을 띄운 시원한 수박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잡담을 하는데 점심상이 들어왔다. 맛깔스럽게 차려진 점심상 이었다. 그러나 역시 선혜는 홍천댁의 곁눈질이 마음에 안 들었고 반소매 블라우스를 입은 홍천댁 팔뚝에 털 이 많은 것도 신경에 거슬렸다. 맛나게 점심을 먹은 강선혜는 식상하다 하며 치마끈을 풀고 누울 자리를 찾는다. 명희는 옥색 누비 베갯잇의 베개를 벽장에서 꺼내주었다. "늙었다, 별수없이 늙었어. 누울 자리부터 찾으니 말이야." 편안하게 누운 강선혜는 이따금 느슨한 부채질을 하곤 한다. "언니 대단해요." "뭐가?" "이 더운 날씨에 버선 신고 배기는 것 말예요." 말도 말어. 집에서는 잘 때말고는 버선 못 벗어. 권선생이 맨발엔 질색이야. 하기는 그래, 남자들도 맨발은 숭 업더라 이애." "그러면서도 권선생님한테 복종 안 하고 산다 하겠어요?" "복종이 아니구 자존심 때문이야. 마포 강서방 딸이라 그렇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거든. 요즘에야 습관이 돼서 괜찮지만 처음엔 발이 아프고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양말 신으면 될 텐데." "조선 옷에 양말이 될 말이냐? 기본은 지켜야지. 한데 이게 무슨 냄새지? 아까부터 나는데." "냄새라니요?" "향수는 아닌 것 같고." "아아, 옥잠화예요." "옥잠화라니." "뒤뜰에 피었어요. 지금이 한창이라 향기가 짙어요." "어디." 강선혜는 일어나서 뒤뜰 쪽으로 다가가 내다본다. 하얀 옥잠화가 꽃대를 따라 맺어가며 시작 부분에서는 활짝 꽃이 피어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꽤 여러 포기 옥잠화는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순백이라는 말은 아마도 옥잠화를 두고 표현해씅 frj야. 저런 흰빛ㅇ느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눈도 저 빛 은 아니야. 어떤 꽃도 저 같은 흰빛으론 피지 않아. 백합 따위는 옥잠화에 비하면 지저분하지."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에 취한 듯, 선혜는 침이 마르게 옥잠화를 찬송하다가 풀어진 치마끈을 여미고 다리를 쭉 뻗는다. "옛날의 임명희가 저 옥잠화 같았지." "무슨 말 할려고 또 그래요? 전주곡은 늘 그렇게 시작하니까 겁나요." 명희는 강선혜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듯 웃으며 쳐다본다. "변했어. 변해도 아주 많이 변했어." "변할 수밖에요." "변한 김에 아주 변해버려. 좋은 사람 만나 연애도 하구 결혼도 하는 거야." "언니 벌써부터 노망 들었수? 나이 생각해보고 하는 말이에요?" "넌 아직 아름답고 매력이 있어." "우린 좀 있으면 오십이에요." "그런가? 하하핫핫..." 선혜는 깔깔거리며 웃는다. 웃다가 "세월이 무섭. 늙은 것보다 사람이 변하는 게 무서워." "..." "옛날 친구들을 만나면 늙었다는 것보다 맑은 샘이 없어진 듯 생각이 말라버린 느낌이 들 때 슬퍼." "언닐 슬프게 해서 미안해요." "솔직히 말하자면 넌 생각이 말랐다기보다 현실적인 여자로 변한게 아쉬워." 명희는 잠자코 있었다. "별난 성미였는데, 한없이 약하고 얼띠고 길 가다가도 뒤에서 웃음 소리가 나면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했 고 색다른 옷을 입고 나갔다가 놀림을 당하기라도 하면 두 번 다시 넌 그 옷 입지 않았다. 조그마한 변화에도 엄마 잃은 고아같이 얼굴이 오소소해지고 신경이 거미줄 같았어. 그나마 신경이 강철 같은 강선혜가 끌고 다 녔으니 사람도 만나고 했지." 알아요. 나 자신도 힘들었으니까요. 우리 유치원에도 수집음을 많이 타고 심약해서 말을 못하는 아이가 더러 있는데 내 어릴 적 생각이 나서 어떤 땐 쥐어박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해요. 화초같이 살든지 그렇잖으면 짓밟혀 갈가리 찢어지게 마련이에요." "이젠 너, 갈가리 찢겨지지는 않겠다. 무슨 말을 해도 별 신경 안 쓰는 것 같고 삭이노라 애쓰는 애처러운 모 습도 아니구, 너 대하기가 편해졌다. 그러나 옛날 임명희가 그립다. 강하게 딱 뻗치고 서 있는 여자는 징그러 워. 아시겠어요? 원장님." "난 이제 죽을 수 없어요." 그 말에는 관심 없었고 선혜는 다시 말했다. "옛날 조용하 씨 어부인으로 세상 여자들이 부러워 몸살 앓는 지경인 그때도 나는 너가 애처러웠다. 죽지 부 러진 작은 새, 고개 떨군 한떨기 꽃." "뭐하는 거예요? 언니 시 읊으시는 건가요?" 낄낄 웃는다. "그런데 요즘엔 이 궁상으로 혼자 살고 있지만 애처럽지가 않으니 웬일일까?" "얼굴 가죽이 두꺼워져서 그래요." "뭐?" "도망갔던 여자가 자살한 남자 유산 받아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고 있으니 그게 보통 심장이겠어요? 그만한 배짱이면 종로통에 나가서 고리대금인들 못 하겠어요?" 무표정해지면서 명희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강선혜는 놀라고 당황한다. "내가 널 그렇게 생각한다 그 말이냐?" "아니오." "그럼 왜 당치도 않은 그 따위 말을 하니? 바람나서 남자 따라 집 나간 것도 아니구 남편 학대에 못 견디어 나갔는데 당연히 받을 걸 받았을 뿐, 어째 그런 식으로 얘기하니? 아니 오히려 많이 양보한 셈이지." "양보?" "가만있자... 그러니까 그게, 넌 여기 없었고 조용하 씨 유산 문제가 풍문으로 나돌았을 때 일이구먼. 명희야 너 정상조 그 사람 생각나니?" "누군데요?" "동경 있을 때 너에게 관심이 있어서 접근해오던 남자, 왜 그 이찌마루, 스시집에서 장장, 여성론을 거나하고 입정 사납게 논하든 법학도, 생각 안 나?" "아아 생각나요." "생각나지? 그 치가 고문 패스를 하고 검사까지 해먹었는데, 우리 권선생이 잡혀갔을 때 고약하게 굴었다 하 더구나." "그 얘긴 왜 해요?" "그때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났단 말이야. 검사는 때리치우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하면서 너에 관한 얘길 묻더 군." "언니 무슨 뜻으로 그런 말 하는 거지요?" "내 얘기 더 들어봐. 법률가니까 의당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지. 그의 말에 소소을 하게 되면 너가 이긴대." "그 따위 얘기 관두세요." 언짢은 기분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었다. "나도 뭐 그것에 관심이 있었던 거는 아니지만 답답해서 그런다. 당연한 일 가지고 얼굴가죽이 두껍네 어쩌네 하니까 해보는 말이잖니?" "정말 당연한 일이었을까요? 사랑하는 남자, 조찬하 씨가 베푼 호의 때문에 그나마 한몫을 얻은 거 아닐까 요?" 서슴없이 내뱉는 말에 강선혜는 어안이 벙벙해진다. "점점 한다는 말이, 무슨 그런 흉칙한 말을 하니? 너 나한테 좋잖은 감정이라도 있어 그러는 게야?" "뒤에서 모두 그런다든데요?" "먹고 할 일 없는 것들이 배가 아파서 하는 마리지. 아직도 널 부러워하는 모양이다. 샘이 안 나면 그런 입방 아 찧지도 않아." "부러울 게 뭐 있수." "미모와 재산이지 뭐겠나." "..." "사실 너에게 무슨 죄 있니. 죄 없다. 조찬하 씨도 죄 없다. 잘못은 조용하 씨의 욕심이었지. 그보다는 어쩔 수 없는 운명, 비극이야." "죄가 있어 벌 받나요? 불운이지요. 아무리 도망가도 불운이 따라오면 도리없어요. 뛰든 멈추든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멈추어서 불운과 친해질밖에요." "맞는 말이야. 맞어. 요즘 내 심정하고 꼭 같은 말을 하네."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래. 어쩌면 우리 시굴로 내려갈지도 몰라." "시골? 왜요?" 놀란다. "글세 그게 권선생 결심이라지 뭐니. 권선생은 애들 모두 시집 장가 가서 분가를 했고 내 아들 혁이는 중학생 이니 외가에 맡기면 된다는 거고, 서울 생활 끝장내자는 거야." "그럼 권선생님 고향에라도 내려간다 그 말이에요? "권선생 고향이 어딨어. 서울토박인데." "하면은." "강원도 산골에나 갈까, 갈까가 아니지. 이미 갈 곳 찾아나섰다." "뜻밖이네요. 뭘 하구 사시자는 건가요." "농사 짓재, 기가 막혀서. 그 사람이나 나, 호미 한번 잡아본 일도 없는데 농사를 어떻게 하니." "말이 그렇지, 농사 안 지으면 먹고살 수 없는 처지도 아니구, 부잣집 상속녀가, 그야말로 돈키호테 같은 얘기 군요." "얘가, 농담 아니야." "권선생니이 어째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미심쩍어한다.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모양이야. 너도 알다시피 그 사람 야심은 좀 큰 편이지만 경거망동하는 성미도 아니구 매사를 분명하게 처리하려는 편이잖니." "그렇지요." "나도 권선생 계획을 옳다고 생각해. 그 동안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그런 결심 한 것이 무리는 아니다, 너도 그랬지만 우리도 좀 풍랑을 겪었니? 권선생은 어떻하든 살아남아야지, 죽어서도 안 되고 협력을 해서도 안 된 다, 협력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 말을 여러번 했어." "시국 얘기군요." 비로소 명희는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친정에서는 남들도 다 사는데 하필 권서방만 유별을 떨 거 뭐 있느냐, 남 하는 대로 하고 살아라, 하지만 우 리 속사정을 몰라 하는 말이지."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폐간되고 기분 나쁜 징조가 나타나니까 하기야 우리 오빠도 불안한가 봐요." "표면적 변화도 그렇지만 권선생의 경우는 훨씬 복잡하고 위험해. 차라리 나 같은 것하고 결혼 안 했더라면... 권선생 결혼 잘못했어." 강선혜의 얼굴은 심각했다. "시국하고 언니 결혼하고 무슨 상관이 있기에?" 강선혜는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며 감정을 억제하는 그런 모습이다. "이야길 할려면 길어... 참 사건이 많았다. 너가 모르는 사건들이 많았어. 넌 시굴에 내려가 있었으니까 잘 모 를 거야." "예맹검거 때, 권선생님도 들어가셨든 그 일을 말하는 거 아니에요?" "음, 그 일 하지만 권선생의 경우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입술을 깨물다. "내막이 추악해. 몇 사람이 뭉치면 매국노를 만들 수 있고 미치광이도 만들 수 있고 살인자도." "그게 언니 결혼한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요?" "명희야, 조선 사람들 의식 구조가 어떤 건지 너 아니?" 가라앉은 눈빛으로 명희를 바라본다. "아직은 지독한 봉건주의 아닌가요?" "이중 구조야. 이를테면 수구와 개화가 따로 있는게 아니구 함께 있는거야. 너도 그렇구 나도 그 이중 구조의 희생물이라 할 수 있어. 신여성이라 일컫는 교육받은 여성들, 그 대부분이 완상품이며 고가품일 뿐 사람으로서 의 권리가 없다. 좋은 혼처에서 주문하는 고가품이요 돈푼 있는 것들이 제이제삼의 부인으로 주문하는 완상품 이다 그 말이야. 그러면 진보적인 쪽에선 어떤가. 그들 역시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여자에게 주려고 안 해. 이 론 따로 실제 따로, 남자의 종속물이란 생각을 결코 포기 하지 않아. 여자가 인간으로서 있고자 할 때 인형처 럼 망가뜨리고 마는 것이 현실이야. 신여성이 걸어간 길은 완상품이 되느냐 망가지느냐 두 길뿐이었다." "지금 언니가 겪는 일이 그것도 상관이 있나요?" 그 말 대꾸는 없이 "같은 부르좌라도 마포강 장배로 시작해서 부자가 된 강서방과 권문세가의 후예로서 유산이든 당대에 번 것이 든 간에 그런 자산가와 다르다는 것, 몰랐지. 부르좌는 무슨 계급의 적이요 탐욕은 인민의 적, 그렇게만 들어 왔으니까 말이야. 나라 팔아먹는 데 나설 자격도 없었고 백성에게 호령하며 수탈하는 처지도 아니었고 장사해 서 돈 벌었다, 그게 멸시와 야유로 나타나고 그런가 하면 조상의 이름 석자 알려진 부르좌에 대해선 공연히 켕겨서 입을 헤벌리고 말 못하는 남아장부, 나라를 팔았건 백성의 고혈을 빨았건 기득권을 인정해주는 사회풍 토." "언니 다 그런 건 아니지 않아요. 어디든지 변두리 클럽은 있게 마련이구, 일부의 그같은 모순 때문에 전부를 매도할 순 없어요." "나는 당하는 당사자니까, 그 피해가 권선생한테까지, 사실 우리에겐 심각한 문제야." 옛날에 비하면 침착해졌고 무게를 갖게 되었으며 아내와 어머니로서 평균점은 얻고 있는 강선혜, 본시 성격이 야 소탈했으나 물정 몰랐던 그가 비교적 신중하게 사물을 보게 된 것은 전적으로 권오송의 영향이겠으나 오늘 은 감정의 노출이 심한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사정이 심각한 모양이다. "이런다고 우리 아버지 두둔한다 생각지 마. 잘한 것도 없으니까. 나 역시 잘한 거 없지. 천방지축, 계집애가 집안에서 왕노릇 하니까 밖에서도 통할 줄 알았지. 지금 생각해보면 미꾸라지 용춤 춘 꼴이지 뭐니? 여자도 사람이 되자! 하하핫핫 하핫핫핫." 갑자기 선혜는 소리내어 웃었다. "언니이." "그래, 그래, 하하핫핫핫... 나 안 미쳤다. 생각하니까 우습지 뭐냐? 여자도 사람이 되자! 그 따위 평등론을 쓴 용기가 참으로 가상하지 않니? 명희야. 설익은 밥 해서 손님상에 올린 밥장수같이 말이야. 생쌀이 목에 넘어가 겠어? 꼬타리는 거기 있어.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부모 죽인 원수같이, 일이 어찌 그렇게 꼬여 들었는지... 애당초 마포강 강서방의 딸이 일본 유학 간 것 부터가 잘못이었던 거야." "그런 말이 어딨수? 그럼 역관딸이 동경 가서 공부한 것도 잘못이겠네. 언닌 말말이 마포강 강서방, 아버님을 그래도 되는 거유?" 핀잔을 주었으나 오래전 그때 일은 명희도 잘 알고 있었다. 웃음거리 놀림감 사면초가였던 당시의 강선혜를 기억하고 있었다. 치졸한 글이었지만 내용이 그렇게 심히 지탄받아야 할 만큼 엉터리는 아니었다. 화제거리로 삼은 쪽이 지나쳤고 악랄했던 것이다. 글의 내용보다 그것을 빌미로 강선혜를 조롱하는 쾌감이 있었기에 집요 하기도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미운놈, 그러나 약한 것 (거침없이 행동했지만 선혜는 독하지도 못했고 깡다구 도 없었다) 하나 골라서 떡치고 분풀이하는 군중심리라고나 할까. 강선혜의 말대로 마포강의 뱃사공 강서방이 장배를 부리며 돈을 벌었고 중국과 피혁을 무역해서 거부가 되었으니 대조적으로 보잘것없는 출신을 들추는 것이 인심이요 일자무식 아비의 딸이 최고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꼽고 약오르는 일이었을 것이며 이혼까지 한 주제에 콧대를 높이고 다니는 꼴도 심기 사나워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문예지 청조사를 맴도는 지식 인 예술가로 자부하는 고만고만한 무리 속에는 선혜만한 학벌 가진 사내들도 흔치 않았으니까. 사실 문벌 좋 고 벌족 넓은 집안의 규수였더라면 그토록 마음 놓고 갖고 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권오송 씨에게 접근하고 청조지에 후원금을 내고 한 것은 괄시받고 능멸당한 분풀이를 하고 싶었기 때 문이며 그것을 발판 삼아 글도 쓰고, 그땐 젊었지. 젊었다기보다 철부지였었다. 내소박하고 뛰쳐나온 것부터가 그래. 아무튼, 청조 주변에 모여든 떨거지들이 젤 나한테 심하게 굴었거든. 권오송 씨에게 호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와 결혼이나 연애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았다. 그도 아이가 딸린 홀아비요 나도 결혼에 한번 실패한 여자, 불가능할 것도 없지만 권오송 씨는 좀더 좋은 여자를 고를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 계산 빠른 사내는 내가 단순하고 악의 없는 여자라는 점에 주목한 거야. 자기 아이들을 위해 괜찮은 계모가 되겠다, 하긴 틀린 것은 아니었지. 애들은 잘 커주었고 친엄마보담이야 못했겠지만 정도들었고, 다음은 어차피 쓸 사람 없는 마포 강서방 재산 아니니? 사용하자는 것도 아니고 공익을 위해 쓰자, 청조도 늘리고 극단 산호주도 살리자, 결국 우리의 결혼은 그런 거였어. 야심은 크지만 권오송은 그러나 괜찮은 남자야. 결혼 생활을 후회해본 적은 없 다." 거기까지는 명희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날 괄시하고 능멸했던 그들이 당황했지. 그들이 권선생보고 뭐라고들 했던 모양이야. 전해들은 얘긴데, 사내 자식이 사생활까지 자네들하고 의논을 해야 했는가, 일언지하 입을 막아버렸다 하더군. 그들은 내가 잡지며 극 단을 휘두를 거라 속단한 거야. 권오송이 휘두르게 내버려둘 사내냐? 처음 그들은 멋쩍고 민망하여 멀어지기 시작했고 권선생한테서 일체 반응이 없으니까 돌아오기도 어려워졌고 그냥 있자니 약이 올랐겠지. 결국 권선 생을 성토하기 시작했는데 돈에 팔려간 비루한 인간이라느니, 부르좌와 결탁한 변절자라느니 별의별 험담을 일삼았지만 권선생은 개의치 않더군. 부화뇌동하는 분자들, 사회주의 겉옷만 걸치고 속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구름모양 보아가며 입방아나 찧고 별난 재주도 없이 별난 작품도 내놓지 못한 것들이, 하고 말이야. 그럴 무렵 에 예맹검거 선풍이 불었어. 권선생 말처럼 사회주의 겉옷만 걸친 소위 성토 부대에서는 검거된 사람이 없었 고 조사받은 사람도 없었는데 불똥이 권선생한테 튄 거야. 어이구 속에 불나야." 선혜는 부채를 집어들고 부산하게 부치다가 홍천댁을 불렀다. "나 물 좀 주어." 홍천댁이 물을 가져왔다. 선혜는 물그릇을 받아 몇 모금 마시고 나서 "그때 당한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울화가 치밀어." "언니도 참, 고정하세요." "아니야. 넌 몰라서 그래. 하여간 내 얘기를 들어보아. 권선생이 느닷없이 잡혀갔는데 글쎄 알고 보니 예맹하 곤 상관없이 끌려간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 다만 한 가지 짚이는 것은 청조사 아래 층에 있는 다실에서 밤늦게 했든 고리키의 <밑바닥> 이었어. 동호인들만 모여 비공개로, 말하자면 실험 삼아 해본 연극이었는데 말이야. 이상한 것은 비공개로 한 거시었고 그것도 시일이 함참 지난 뒤에 문제삼는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더군. 경찰에서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가 됐지만 어쨋거나 권선생은 불기소로 풀려나왔는데, 끔찍스런 일이 벌어진 것은 석방 후의 일이었다. 흉칙한 소문, 그 일만 생각하면 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것 같 다." 선혜는 말을 끊고 숨이 찬 듯 숨을 내쉬었다. "냉정한 권선생도 이성을 잃더군. 그 흉칙한 소문의 내용이라는게, 경찰과 사전에 양해가 있은 뒤 잡혀갔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풀려나온 것을 보면 사정은 자명해진 것 아니겠는가, 극단 산호주에 정체불명의 전 주가 붙었다. 앞으로 극단 산호주는 일본제국주의의 선전장이 될 것이다 등등, 친일파는 약과요 숫제 첩자로 모는 거야. 연기처럼 소문은 퍼지고, 그때 난 죽고 싶었고 권선생이 나하고 결혼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어. 권선생이 제자리로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혼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더군. 세상에 그런 가혹한 형벌이 어디 있니? 살인 죄인은 경우에 따라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겨레를 팔아먹겠다는 것만은 용서될 수 없는 일 아니겠니? 오명을 무엇으로 씻겠어. 다행히 선우신 씨가 분개하여 나서주었고 서의돈 유인성 두 분이 권오 송을 옹호하여 그 일은 그런대로 슬그머니 사라졌지만 권선생이 예맹하고 상관없이 왜 잡혀갔느냐, 잡혀간 원 인은 중상모략의 근원지 그곳, 바로 그 곳에 있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이 들더란 말이야." "그런 일이 있었군요. 기가 막혀. 나는 전혀 몰랐어요." "모를밖에, 서울에 없었으니알 턱이 없지. 그땐 너 자신의 문제만도 감당하기 어려웠잖았니." "오빠도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어요." "그게 뭐이 좋은 일이라구, 얘기할 겨를이나 있었겠니?" "그럼 지금부터의 문제는 뭐예요?" "성토부대야. 성토 부대에 문제가 있어. 그 박쥐들! 그들은 지금 일본과 독일이 세계를 지배할 것으로 판단한 모양이야. 그래서 추위를 타고 재채기를 시작한 건데 결국 일본에 추파를 던질 수밖에 없었겠지. 살 구멍 찾을 려니까. 그들은 그쪽에서 힘을 얻어낸 거야. 무슨 잡지도 하나 내게 돼 있다 하며 사람들을 긁어모으는 모양인 데 앞으로 물귀신처럼 권선생을 끌어들이든지 아니면 첩자, 친일파로 몰아댄 것과는 다르게 반일분자로 낙인 찍어 장례식을 치르든지." "왜 그래야 할까요? 저이들이 친일했음 했지." "모르는군." "뭘요?" "인간의 심리를 모른다 그 말이야. 집요한 것은 언제나 가해자다. 보복당하리라는 두려움이 있으니까 상대를 뿌리째 뽑아서 후환을 없이하려는 집념, 너 생각해보아. 도둑놈 경우를 생각해보아. 남몰래 도둑질하다가 들키 면은 칼을 들이대는 것이 그들 본능이야. 배은망덕한의 경우도 그래. 은혜 베푼 상대를 모략하고 중상하고 이 간질하며 씹고 다니는 것도 자신의 합리화 배은망덕을 덮으려는 심리 아니겠어?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삭막하 고 살아가기가 힘든 거지. 그러나 권선생은 이런 말을 했어. 죄를 짓게 되면 그것을 은혜하기 위하여 또 죄를 짓는다, 그 죄를 또 은폐하기 위해 죄를 계속 짓게 되는데 그게 바로 형벌이라는 거야. 결국 기가 쇠하고 무게 때문에 파멸하여, 후회나 회개가 구원이 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는 거지. 나 그 말 듣고 많이 위로 받았 다. 속수무책이라도 덜 억울하더구나." "하면은 권선생님이 낙향하신다고 뭐가 해결이 되겠어요? 어떻게 보면 도피주의 비겁하다고 욕먹을 수도 있잖 겠어요?"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종로통에 나가서 목에 칼 꽂고 자결하는 이외 저항해볼 수 없는 게 지금 현 실이다. 사실 국내에서는 어떤 형식이든 일해온 사람들은 모두 지하에 숨어버렸어. 이미 감시를 받고 있는 사 람들은 어쩔 수 없지만, 권선생도 시골 가는 것을 최선의 방법으론 생각지 않아. 다만 잠시 동안이라도 비를 피하자, 멀지 않아 일본이 망할 거라 그는 확신하고 있거든. 어떻거든 그때까지는 살아남아야 한데." "정말 그럴까요? 대부분 사람들은 일본이 이기고 있다는 생각들 하든데, 이젠 글렀다, 희망 없다 하면서 체념 하는 것 같든데 정말 일본이 망할까..." "지금 독일이 구라파를 휩쓸고 있기 때문에 더욱 비관적으로 생각 하는 거야. 나도 그런 말 들을 때마다 불안 해져. 과연 일본이 망할까 의심이 들 때도 있지만 권선생은 모든 조짐이 그렇다는 거야. 뭣보다 물자가 바닥나 고 있다는 거고 오죽하면 놋그릇 공출에다 소학교 생도들까지 동원하여 송진을 채집하겠느냐." 명희는 몸을 기울여 발을 쳐놓은 방 밖을 내다보고 나서 "언니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우." "그럼, 너니까 하는 말 아니니." "철없는 사람들, 들었다고 아무데나 가서 얘기하면." "말조심은 해야지." 서로 마주보는데 두 여자의 기분은 어쩔 수 없이 가라앉는다. "오빠도 걱정하더군요. 머잖아 사상범들 잡아들일 거라 하면서." "권선생도 그랬어. 임선생님은 삼일운동 때 들어가셨지?" "네. 그때 아버진 대구에서 돌아가시구요." "맞어. 대구서 시위하시다가 군중 속에서 총 맞으시구, 그때 넌 명화여학교 교사였다. 이십 연도 더 된 일이구 나." "이십 연도 더 된 일." "명희는 나직이 뇌어본다. 유학을 끝내고 돌아와서 여학교에 취직했던 그때, 명희는 그때 일을 까맣게 잊고 있 었다. 왜 한번도 생각 해보지 않았을까, 이상했다. 그리고 그 세월이 별안간 되살아난 것이 놀라웠다. "임선생님은 괜찮으실 거야. 범위를 그렇게 잡는다면 형무소 하나 더 지어야 할 걸." "그건 모르지요. 아무튼 주변의 사람들 많이 다칠 것 같아요. 사상범들 예방구금령인가 뭔가 실시하게 되면 서 의돈 유인성 두 분과 최씨댁 바깥분, 계명회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여지 없을 거라 하는데 참 큰일이지요." "살벌해. 동아일보 조선일보도 퍠간되고 모두 전전긍긍이야. 날새면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을까..." "..." "계명회 얘기가 나오니까 생각나는데 유인실은 어떻게 됐을까?" "저도 방금 그애 생각을 했어요." "인경이도, 그애 올케도 일체 인실에 관한 얘기는 안 해." "그게 십 년쯤 될는지, 인실이 한번 찾아온 일이 있었어요." "어디로? 시골 말이니?" "네, 그때 보고는." 그 말 많았던 오가다와 함께 왔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지난 일을 다 털어버린 듯 변하여 서울로 돌아온 명 희였으나 바닷가 외딴 분교를 찾아왔던 인실과 오가다 조찬하 그 기억을 되살린 것은 역시 고통이었다. "죽었을까?" "글쎄요. 죽었을까요." "총명한 아이였는데 아까워. 너무나 아까워." "어떻게 생각해보면 인간이란 환경의 동물 같기도 해요." "얘, 그런 절망적인 얘낀 하지 말어." 하는데 밖에서 "원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홍천댁이 마당에서 말하는 목소리와 거의 동시 발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저예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낮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아 네. 들어오세용." 발을 걷고 들어선 여자는 삼십쯤 됐을까. 검정 무명실로, 아마 손뜨개인 듯 엉성하게 짠 반소매 상의에 연한 녹색 주름치마를 입고 베이지색 핸드백을 팔에 걸고 있었다. 단발머리, 아주 세련된 모습이었다. 그는 강선혜 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이 컸고 눈 가장자리가 꺼무꺼무했으며 턱은 짧고 낯빛은 검었다. "웬일이에요? 배설자 씨." 명희가 말했고 강선혜는 "뭐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내뱉었다. 배설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사모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허리를 한번 굽혔는데 말투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강선혜는 발끈하다가 성질을 삭이는 눈치다. "지나가는 길에 들렀더니 손님이 계시는군요." 하고 긴 다리를 꺾듯 앉는다. 참으로 천연스럽게 뱀처럼 유연하게 소리 없이 몸을 자리에 놓았다 해야 할지, 유인배의 말과 같이 체격은 그만이었고 완벽했다. 괴기와 사악함이 보일락 말락 떠도는 얼굴에 아름답기 그지 없는 몸매, 하여간 매우 인상적이다. "아는 사인가 본데." 명희 말에 "알아도 이만저만." 외면을 하며 선혜가 말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그 이유를 묻듯 명희는 배설자를 바라본다. "뭐 제가 잘못한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미소를 머금은 배설자는 점잖게 말했다. "알긴 아는군." 명희는 심히 난처했고 선혜는 말을 해놓고는 감정을 꿀컥꿀컥 삼키는데 "분명희 잘못이 있어 사모님께서 노여워하시나 분데 사실 전 무슨 잘못을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뭐라구?" 선혜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이러저러한 잘못이다, 하고 지적할 수 없는 것을 잘 알고서 배설자는 역습을 했던 것이다. 명희는 유치원 일로 두 번인가 배설자를 만난 일이 있었다. 만날 때마다 내키지 않는 여자라는 생각은 했지만, 매우 사악하다는 것을 지금 분위기에서 확실하게 느낀다. "사과를 하든지 잘못을 고치든지 저도 알아야 행할 것 아닙니까? 세상에는 오해라는 것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요." "그래? 그 정도의 악행은 다반사다, 그러니 각별하게 기억에 남아 있겠느냐, 그런 얘긴 모양인데 어느 정도의 악행이라야 기억하겠니? 배설자!" "언니 왜 이러세요?" 명희는 말리려 든다. 그러나 강선혜는 만만하게 주저앉을 성미는 아니다. 다만 명희 앞이어서 자제하는 눈치였 다. "사모님 흥분이 지나치십니다. 피차가 다 손님인데 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도 교양 있다 그 말이군. 남의 등 치고 간 내먹는 교양 말이냐?" "술취한 사람을 상대하지 말라, 우리 아버님이 늘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독립지사인 아버님께서? 거 참 좋은 교훈이시다. 배은망덕하지 말라는 말씀은 안 하시더냐?" "베풀고 공투세는 하지 말라 하시더군요." 배설자는 공투세, 평안도 사투리를 썼다. "거룩하신 말씀이다. 한데 배설자 씨." "..." "거 멋진 핸드백은 가죽 제품인 모양인데 그렇지?" 이야기의 줄기가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배설자는 저도 모르게 핸드백을 내려다본다. "거룩하신 집안의 따님께서 백정의 핏줄과 관련이 있을까마는, 내 듣자하니 마포 강서방네가 중국하고 피혁 무역을 했다 해서전신이 백정일 것이다, 그런 말이 떠도는 살벌한 거리에 가죽가방 들고 다니다가 배설자도 모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야. 가죽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니 전신이 백정일 것이다, 피혁 무역보담은 리얼리티가 부족하지만 말이야. 하기는 인심이 험하다 한들 세상에 배설자가 두 명 세 명 있는 것도 아니니 염려 놔도 되겠지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니 귀담아 들어두어." "언니 그만하세요." 명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배배 꼬아대는 선혜는 말투가 싫었고 넌더리가 났던 것이다. 배설자는 소리내어 웃는 다. 웃다가 손수건을 꺼내어 눈언저리를 닦으며 "그래서 사모님께서 노여움을 타신 모양이네요. 하지만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단호했다. "그런 말 한 적이 없다?" "네.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아마 전한 사람의 말이 아닐까요?" '구미호 같은 계집, 사람을 잡아도 여럿 잡겠다.' 선혜는 배설자를 노려보다가 "그래? 그럼 괜찮다. 그런 말쯤은 연회장의 술안주 같은 거니 대수로울 것도 없지. 생사람을 잡아 가죽도 벗기 는데, 그는 그렇고 요즘엔 어디서 살지?" "삼청동에 살아요." "아니 멀군." "..." "이곳에서 아니 멀다는 얘기야. 목표를 정하면 발바닥에 불이 나게 댕겨야 하는데 가까워 다행이란 뜻이다. 그 러나 이번에는 뜻대로 안 될걸."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설자는 조금도 기죽은 구석이 없었다. 여전히 여유만만 선혜를 얕잡는 눈빛이었다. "알게 될 거야. 너 홍석숙이하고 단짝이라며?" "네?" 설자는 처음으로 동요를 나타냈다. "배설자에게 비하면 어린애, 속이 여물지는 않았다만 서로 비슷한 데는 있지." "왜 이러세요. 여기가 경찰서 위조실인가요?" "설자의 눈꼬리가 치올라갔다. "으음 이제야 흥분하는군. 먹이감을 놓쳐 분통이 터졌다, 그러지? 천하에 못된 것! 홍성숙하고 찧고 볶고 까불 고 했으면서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내 다른 곳에서 널 만났다면 귀싸대기를 갈겨버릴 것이나 명희 앞에선 차마 그짓 못하겠다. 운수 좋은 줄 알고 썩 물러가아. 이 집에 다시 나타나면 그땐 내 가만 두지 않을 거다." 배설자는 맹수 같은 눈을 하고서 선혜를 노려보다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정신 온전한 사람으론 볼 수 없어. 사내 단속 잘못하구서 이런식으로 분풀일 하는 거야? 기가 막혀." 하다가 나갈 때는 명희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걸 잊지 않았다. 명희는 완전히 얼어 있었다. 선혜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배설자가 마지막 던져놓고 간 말은 아무래 도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꼴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미안해." "그런 말 듣자는 게 아니예요. 정말 험하네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지난 일을 들춘 것이 되고 말았어. 속상하고 기분 나쁘지?" 선혜는 풀이 팍 죽어 있었다. 버선목이라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그런 말 하고 싶은 표정이기도 했다. "언니, 나 홍성숙이 땜에 이러는 거 아니예요." 그러나 선혜는 혼란이 수습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홍성숙이도 행실이 나빠서 한물 갔고, 나이도 들었지만 음악계에서 밀려난 모양인데 그걸 데리고 사는 남편 을 병신이라고들 하더구나." "그런 얘기 듣고 싶지 않아요. 다 조용하 그 사람이 그렇게 만든 거 아니겠어요? "하긴 조용하한테 보기좋게 당한 거지. 본시 부박경조 그런 여자였어." "관두세요. 언니나 나나 남의 입질에 좀 올랐수? 우리는 그러지 말아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어쨌거나 배설자의 경우는 너의 집에 드나들어서는 안돼. 고래심줄같이 질긴 계집이야." "내가 뭐 어린애유." "몇 사람이 당했는데?"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수." "너는 어떻게 된 거니? 배설자하고 어떻게 알게 됐지? 금전 거래는 없었고?" 되묻는다. "유치원 보모들한테 무용을 좀 가르쳤어요. 두 번인가 세 번인가 만났는데, 금전거래 같은 것도 없었구요." "천만다행이다. 접근 방법치고는 제법 그럴듯했구나." "그 여자의 얘기, 언니의 얘기는 또 뭐예요?" "이런 경우를 두고 날벼락이라 하는 거야." "..." "배설자를 알게 된 것은 삼 년 전인가 그렇게 될 거야. 어떻게 알았는고 하니, 유인경일 알지?" "인실이 언니 아니예요?" "그래, 그애가 내 여학교 동창이거든. 그애네 집엘 갔더니 배설자가 있더구나. 이웃에 산다나? 인경의 시부모 가 다 돌아가시고 집안이 적적하니까 드나들었던 모양이야. 인경의 말이 배설자의 양친은 중국에서 독립운동 을 하다가 죽었고 배설자는 대련에서 백계 러시아인한테서 발레를 배웠다는 거야. 한때는 최승희의 제자였었 다나? 그러니 소위 다이렌가에리 (대련에서 오다) 지. 대련서 온 것만은 사실인 모양인데 나머지는 거반 거짓 이고 인경이 고지식한 데다 남의 말 믿는 데 뭐 있는 애니까 깜박 속은 거야. 나 역시 속은 거지. 목적을 달성 하기까지 배설자는 그야말로 입안의 혀같이 굴어. 인상이 안 좋다, 안 좋다, 생각하면서도 끌려 들어가는 거야. 무용발표회를 갖겠다 해서 내가 적잖은 돈을 대주었다. 그 방면의 일을 잘 아는 권선생한테 내가 부탁도 하구, 권선생은 쓸데없는 짓 한다고 타박을 주었지만 부모가 독립 운동하다 죽었다는 말에 마음이 약해진 거지. 그 랬는데 어느 날 권선생이 집에 돌아와서는 화를 내는 거야. 강선혜도 별볼일없는 여자라 하면서. 왜 그러느냐 했더니 이 맹추야 앞으론 그 낮도깨비같은 계집 일체 상대하지 말라 그러질 않겠어? 또 왜 그러느냐 하고 물 었지만 이유는 말하지 않더란 말이야. 한데 권선생 후배가 와서 귀띔을 해주더군. 배설자가 권선생을 유혹하려 다 혼났다구, 만일 그 유혹에 넘어갔더라면 형님 뼈도 못 추렸을 거라 하며 웃더군." "정말 무섭네요." "한데 아까 말하는 것 보아. 너도 들었지? 사내 단속 잘못하구서 분풀이한다구." "전 속으로 깜짝 놀랐어요." "그 말 들었을 때 정말 기넘어가겠더군. 그런 일이 있은 후 배설자는 앉은 자리 선 자리 가는 곳마다 권선생 은 물론 나를 헐뜯는다는 거야." "누가 믿겠어요." "안 믿으면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구나 하는 게 인심이거든. 권선생이 바람쟁이가 된 거지. 운수가 나빴던 거 야. 아니 마누라를 잘못 만난 거야. 아무튼 한번 붙었다 하면 찰거머리같이 떨어지질 않는다는구나. 인경이도 혼났지." "어째 그런 일이 통할까. 한두 번이면 몰라도." "통하니까 그런 것들도 생존하는 거야. 어디서, 누굴 구워삶았는지 무용강습소도 차렸다 하고 요지경이야." 유인배가 한 말은 대체로 정확한 편이었다. 실은 바이얼리니스트를 꿈꾸다가 경음악으로 빠져버린 유인배는 유인경의 육촌 동생뻘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배용자는 상해에서 무용을 배웠다 했고 배설자는 대련서 배웠 다는 것이다. 해거름에 선혜는 돌아갔다. 가면서 "하여간 오늘은 재수 없는 날이야. 혈압만 올려놓고 간다." 이튿날 아침나절. "아주머니." 하고 부르면서 양현이가 왔다. "웬일이니? 이따 갈 텐데." 명희는 양현을 반기면서 물었다. "맡겨놓은 블라우스 찾으러 가는 길이에요." 양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명희가 이따 갈 텐데 하고 말한 것은 환국의 아들 돌잔치에 간다는 얘기다. 환 국의 집에서는 오늘 첫아들 재영의 돌잔치를 한다. 모란유치원에서 오륙 분쯤 걸어올라가면 환국이 사는 집이 있었다. 정원이 넓고 칸수도 많은 하옥이었다. 가족은 젊은 내외와 아들, 양현이와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 나 길상이 서울에 머무는 일이 많아졌으며 서희도 서울 출입이 잦았다. 돌잔치에는 친가와 처가의 부모들과 서울서 학교 다닐 때 환국이를 맡았던 임명빈 부부 그리고 명희가 초대된 것이다. "양현아 올라와. 차 한잔 안 마시겠니?" "네." 양현은 마루로 성큼 올라섰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명희는 그런 양현에게서 가끔 이상현의 자취를 더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때는 본정통에서 이상현과 함께 있던 기생 기화의 모습을 보기도 한 다. 조용하와 비교적 원만했던 시절, 명희는 양현을 양녀로 성장하여 여의전의 학생으로 명희 가까운 곳에 살 고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차를 마시면서 "그 양재점, 옷 잘 만드니?" "잘해요. 일본서 양재학원을 나왔다나 봐요." "나도 거기다 옷 맡길까?" "그러세요. 솜씨도 좋지만 참 좋은 분이에요." "네 눈에야 모든 사람이 다 좋은 분이지." "어머, 철이 없다 그 말씀이에요?" "그럴 리가 있나. 좀 있으면 의사선생님 될 건데." "또 놀리시네요. 아직, 아직 멀었어요." "네, 아씨 이제 안 놀릴께요." "몰라요." "나도 함께 갈까?" "어디루요." "양재점." "그래요. 든든한 부자 단골 하나 생겨서 그 언니 좋겠다." "친하니?" "네 친해요. 우수에 젖은 얼굴에 왠지 마음이 끌려요." "샘나는데?" "그러지 마세요. 참 안됐어요." "왜?" "혼자니까요." "나도 혼잔데." "아주머니 나이 드셨잖아요. 그 언닌 아직 젊은데." "그럼 시집 가지." "시집은 갔었다나 봐요." "그럼 어째 혼자래?" "죽었대요." "음." "한데 아주머니 저 내일 시굴로 가요." "아버님 어머님 다 올라와 계시니까 안 간다 했잖아." "아버지가 내려가래요." "왜 무슨 일이 있니."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큰오빠도 함께 가요." "윤국이는 서울 안 왔잖아." "바로 시굴로 갔어요." "하긴 방학 아니면 못 가는데 양현이 너도 큰집에 가봐야 할 거다." "알아요." 하는데 얼굴에 그늘이 진다. 아버지도 없는 큰집, 아버지 얼굴도 본적이 없는 큰집, 두 오빠가 잘해주지만 환 국이 윤국이보다는 서먹하고 큰어머니는 더욱더 서먹하고. "가기는 가야 하는 거예요. 섬진강을 보아야 하니까요." 양현은 눈을 내리깔았다. 왜 섬진강을 보아야 한다고 표현하는 걸까. 명희는 생각한다. 섬진강에 투신하여 죽 은 어머니 때문이라면 양현의 섬진강에 대한 감정은 무슨 빛깔일까. 강물에 대한 원망일까 아니면 어미 넋을 불러보려는 애절한 마음일까. 그는 분명히 어미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전혀 그늘 없이 서희는 양현을 키웠 고 또 양현은 그렇게 커주었다. 함에도 명희는 가끔 양현의 안개와 같은 비애의 또 다른 분신을 느끼게 된다. 양현은 서희를 한없이 사랑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일면이 명희 앞에서는 언뜻 지나갈 때가 있었다. "자아 가세요 양현아씨." 멀지 않는 곳에 양재점이 있었기 때문에 명희는 입은 옷에 머리만 매만지고 나섰다. 거리는 호젓했다. 물을 뿌 려놓은 길 위에 햇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아주머니." "음." "의과 잘못 택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양현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명희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장다리의 연한 줄기같이 섬약하고 눈이 맑은 양현 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너무나 삭막해요. 사람을 부분으로 가라놓고 생물로... 물체로 들여다보고 있는 저 자신이, 더럭 겁이 날 때가 있어요. 과연 내가 사람일까 의심이 들고, 차라리 보육학교에나 갈 것을, 후회스럽고, 졸업하면 모란유치원에서 아주머니랑 함께 일할 수도 있을 텐데." "..." "사람의 병을 고쳐주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주고 박애정신으로 인생을 산다는 것이 저의 꿈이었고 지성적인 그런 여성을 선망했는데 막상 학교에 들어오고 보니 하루 하루가 사막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실제 우리는 사막을 걷고 있는 거야. 매일, 매일." "그럼 사막을 걷기 위해 사람은 사는 걸까요." "너에게 그 대답을 하기엔 내가 너무 어리석고 모자라게 살아온 것 같다." "그런 말씀을." "얘기는 다르지만 어떤 사람이 한 말인데, 사람에게 가장 강한 거는 생존 본능이라는 거야. 그건 누구나 다 아 는 얘기지. 그러나 때에 따라서 그보다 강한 것은 생명에 대한 연민이래. 말하자면 어머니의 사랑은 그 생명에 대한 크나큰 연민이라는 거야. 불교에서 말하는 대자대비, 그런 거겠지. 가령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고 뛰어 들었다가 함께 죽은 경우, 기차가 달려오는 철길에서 노는 아이를 구하려고 뛰어들었다가 치여 죽는 겨우, 흔 한 일은 아니지만 그건 생명에 대한 연민이 자기 생존의 본능을 앞지른 것 아니겠니?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 하는 심약한 사람은 의학을 공부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들 하지. 그러나 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거야. 냉 정하고 결단력과 기술이 의사의 첫째 조건이지만 사람이 물체가 아닌 생명인 이상 이성의 토대는 생명에 대한 연민이라야, 그래서 의학을 인술이라 하는 것 아니겠느냐, 아무리 심약한 사람도 그 생명에 대한 연민이 크면 얼마든지 냉정해질 수 있고 결단하는 용기도 생기고 기술의 깊이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야. 그 말에 비추어본다면 사막을 걷는 인내와 용기도 절로 생기는 거 아닐까? 내 생각에는 인술이야말로 양현이 같이 무구한 마음이 가야 할 길인 것 같다." "저, 저는 그렇지가 못해요. 아주머니께서 과대평가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출세하고 돈 벌고 그게 목적이었니?" "그거는 아니지만." "하긴 너 나이에 무슨 확신이 있겠니. 너보다 배는 더 산 내게도 확신이 없는데." 명희는 쾌활하게 웃는다. "벌써 다 왔네." 쇼윈도우에는 갈색 원피스를 입은 마네킹이 있었다. 아동복도 내걸려 있었다. 혜화 양재점, 두 사람은 문을 밀 고 들어간다. 양현이 또래의 여자가 재단대 앞에 앉아서 홈질을 하고 있었다. "어머! 양현이학생." 반색을 했다. "선생님 양현이 학생 왔어요." 양재점 뒤편에 살림방이 있는 모양이다. 쪽문을 열고 강혜숙이 나왔다. 동경 간다 부근에 있는 병원에서 부들 부들 떨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던 그 소녀, 소녀의 모습은 간 곳 없었다. 세월이 흘러갔는데 모습인들 어 찌 머물 것인가. 강혜숙의 얼굴에는 가을빛이 깃들여 있었다. 쓸쓸해 보였다. "일찍 왔네." 미소 짓던 혜숙은 명희를 보자 멈칫했다.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양재점 앞길을 오가던 명희 모습은 눈에 익었고 모란유치원의 원장인 것도 알고 있었다. "언니 우리 아주머니세요." 자랑스럽게 양현이 말했다. "앞으로 아주머니께서 옷도 맞출 거예요." 다시 못을 박듯 말했다. 명희는 슬그머니 웃었다. 그리고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손님을 대하는 양재점 주인 같 지 않은 혜숙과, 유치원 원장의 티도 없고 옷 맞추러 온 손님의 본새도 아닌 명희는 서로 엇비슷하게 얼떨떨 해한다. 나이의 차이는 많았으나 두 여자에게는 다같이 다부진 구석이라곤 도무지 없었다. "양현이 성화 땜에 옷 하나 맞춰야겠는데 뭘 할까..." 걸려 있는 옷감을 만져보다가 좀 망설인다. "요즘 전시라 쓸 만한 감이 없습니다." 혜숙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명희는 회색 혼방 사지를 가리키며 "이걸로 하지요." "투피스로 하시겠습니까." "그러지요." 해서 치수를 재고 혜숙은 스타일 북을 내놓으며 어떤 형을 하겠느냐 하고 물었다. "그냥 기본으로 해주세요." 두 사람이 양재점을 나서려 했을 때 양현이 당황하며 돌아섰다. "참 언니 내 옷은요." "아, 그래 내가 깜박했구나." 모두들 웃었다. 혜숙은 진열장에서 포장한 것을 두 개 꺼내었다. "입어보겠니?" "아니오, 그냥 가져갈래." "그리고 이것은 재영이 옷이다. 오늘이 돌이지?" "언니도 참, 재영인 옷이 많은데 뭣하러 이런 수골 했어요? 오빠 걱정 들을려구." "그냥 지나기가 섭섭해서 그래. 최선생님도 안녕하시고?" "네." 양재점을 나와서 한참 가다가 "집안끼리 아는 사이니?" 명희는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단순한 친분 같지는 않는데?" "큰오빠가 동경 있을 때 절친하게 지낸 친구의 미망인이래요." "음." 비로소 납득이 된 얼굴이다. "지금 가게도 오빠가 물색해주었구요. 새언니랑 저에게도 오빤 엄명을 내렸어요. 다른 데 가서 옷 해입으면 안 된다구 말예요. 새언닌 우리 옷을 주로 입으니까 양재점엔 잘 안가지만." 양현은 혜숙을 미망인으로 믿고 있었다. 하기는 혜숙에게 송영광은 죽은 거와 다를 게 없었다. 모란유치원 앞에서 "양현이는 먼저 가아. 효자동 언니가 오시면 함께 갈게." 명희하고 헤어진 양현이 집 가까이 갔을 때 초로의 신사 두 사람이 대문 앞에 있었다. "양현이 아니냐." 말한 사람은 임명빈이었다. 본래 두상이 컸고 몸집도 큰 편인데 살이 빠져서 그런지 늙은 탓인지 사람이 영 헐거워진 것처럼 보였다. 깨끗한 양복을 차려 입었는데도 어딘지 모르게 궁색하고 초조해 있는 낯빛이다. 여러 가지 일로 심간이 편치 못하여 그런 것 같다. "안녕하세요. 교장선생님." 양현은 절을 했다. 임명빈 옆에 서 있는 사람은 키가 작았다. 별명이 대추씨였던 서의돈이었다. 반소매 노타이셔츠를 입고 합죽선 을 들고 있었다. 일본을, 중국을 방랑했으며 짧지 않는 기간 옥고를 견디기도 했고, 그러나 의외로 그는 단단 해 보였다. 다만 돋아나기 시작한 턱수염과 머리칼이 희끗희끗하여 늙음에는 그도 예외가 아닌 것을 말해준다. 서의돈은 어둡고 가라앉은 눈빛으로 양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만나기로는 처음이지만 말을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아이, 기화의 딸이자 이상현이 아비인 아이, 기화의 면모가 역력했으며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생장한 양현 을 보고 어찌 감회가 없고 회한이 없을 것인가. 화류계에 몸담은 여자였지만 아편쟁이로 전락했고 섬진강에 투신하여 생을 마친 기화의 비극이 잘났다는 사내들 풍류가 빚은 것이라면 기화를 사랑했고 사랑하다가 버린 서의돈의 가슴이들 애상에 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행랑아범 손서방이 문을 열었다. "어서 드십시오." 그러나 임명빈은 멈춘 채 "공부하기 어렵지?" 하고 양현에게 물었다. "네, 어렵습니다." "의사가 되기가 쉬운 일 아니다. 열심히 해야 돼." "네." "참 양현아 인사드려라. 아버님하고 각별한 분이시다." 이 겨우 아버님이란 무론 길상을 두고 한 말이었다. 양현은 서의돈에게 깊이 머리 숙여 절을 했고 서의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으로 안내되어갔으며 양현은 서희가 있는 안방으로 갔다.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음." 서희는 단정한 모습으로 보료 위에 앉아 있었다. 환국의 처 덕희는 시어머니와 마주보고 앉아 얘기를 하고 있 었던 모양이다. "옷이 맘에 들더냐?" 웃는 모습으로 양현을 건너다보며 서희는 물었다. "아직 안 입어봤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아들형제에 대해서조차 절도를 잃지 않는 서희였으나 양현에 대해서만은 그 자상함이 각별 했다. 언젠가 서희는 양현을 보고 말했다. 너하고 나하고 전생의 무슨 인연이었을까 하고. 양현의 처지 때문에 다소 소홀히 대할 경우 서희는 그가 누구이든 결코 용서치 않았다. "아가씨는 뭘 입어도 어울립니다, 어머님." 덕희가 말했다. 시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한 말이었으나 내심으론 반드시 그렇지도 않았다. 깍듯하게 양현을 시 누이 대접하는 것이 덕희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핏줄도 아닌 군식구 아니냐는 반발심도 있었다. 물론 그것은 모두 시샘이었다. 덕희는 깔끔하고 기품은 있었으나 남의 눈을 끌 만큼의 미모는 아니었다. "새언니도 양장하면 좋을 텐데." "저는 다리 모양이 숭해서요." "참 또 잊을 뻔했네. 새언니 이거." 양현은 재영의 옷이 든 꾸러미를 내밀었다. "이거 뭡니까?" "돌선물이에요. 양재점 언니가 주셨는데 재영이 옷이래요." 덕희는 떨떠름해하는 표정이다. "그냥 지나기가 섭섭해서 그런다고 했어요." "초대도 안 했는데 이런 걸... 받기 민망하네요." 민망하다는 어투에는 미안하다는 뜻보다 곤란하다는 감정이 강하게 풍겼다. 서희는 말없이, 다른 생각을 하는 듯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영광이와 관련이 있는 양재점 여자는 서희도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송관수의 권속이라면, 권속이래야 조선에는 영광이 혼자였지만 그에게 무관심할 수 없는 것 이 길사을 비롯하여 서희나 환국의 입장이다. 길상에게는 영광을 돌보아줄 의무가 있었고 송관수하고 약속한 바도 있었다. 송영광과 동거했던 여자, 의당 결혼했어야 했던 강혜숙에 대해서도 그 같은 맥락에서 그 존재를 인식한 것이다. 환국의 경우, 아버지의 의무를 대행한다 할 수도 있었다. 애초 영광을 찾은 것이며 접근한 것 부터가 아버지 분부에 따른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것만은 아니다. 그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환국은 그들 상처에 깊이 동정했고 철저하게 모든 것, 희망을 잃은 혜숙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가진 것을 부인 못한다. 그러저러한 내막을 덕희나 양현에게 설명할 수도, 설명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친구의 미망인으로 어물쩍거렸던 것이 이들 두 여자에게 기정 사실로 되어버린 것이다. 서희는 혜숙에 대하여 덕희의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을 알고 있지만 환국의 슬기로움과 깨끗한 천성을 믿었다. 덕희 역시 남편의 그런 면을 믿고 있으리란 생각이었고 미묘한 갈등도 시일이 지나면 해소될 것이며 섣불리 충고 따위를 한다면 그것은 환국의 인격을 모욕하는 것이니 일체 관여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서희는 판단 하고 있었다. 양현에 대한 덕희의 시샘도 서희는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덕희 심사를 헤아려서 여태까지의 애 정 표시나 관습, 그 밖의 것을 조절할 생각은 없었다. 덕희가 황태수의 막내딸로 귀엽게 응석받이로 자랐기 때 문에 애정을 독점하려는 성향이 강하기는 하나 본성이 착하고 교양이 있으니까 상식 밖의 해동은 안 할 것이 며 만일에 양현을 격하한다면 오히려 갈등이 커질 것으로 서희는 생각했다. 양현의 심리가 위축되어 가족들 마음을 어둡게 할 것이며 덕희는 교만해져서 집안의 수평이 무너질 것이다. 또 그것을 길상은 물론 환국이나 윤국이 바라지 않은 것이니 덕희를 위해서도 적절한 처방이 못 된다. 결국 덕희 쪽에서 집안 분위기에 따라 줄 수밖에 없다. 서희의 그같은 세밀한 생각은 그러나 양현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사실 이다. "임선생댁에 들렀었니?" 서희가 물었다. "네. 함께 양재점에 갔었습니다. 아주머니도 양복 한벌 맞췄어요." "그럼 함께 오지 않고서." "효자동 사모님을 기다렸다가 함께 오시겠다 하셨습니다. 방금 임교장님 오셨으니까." "사랑에 드셨느냐?" "네." 집안은 조용했다. 아주 조용했다. 돌상은 일찌감치 차렸고 우는 아이를 달래어가며 돌사진도 찍었으며 아이는 유모가 데려가서 잠을 재우는 모양이었다. 사랑손님이 서너 명, 안방의 안손님이 서너 명, 그들의 점심상만 차 려서 내면 되게 돼 있었다. 돌잔치를 차린 혜화동의 이 가옥은 진작부터 서희가 마련해두었던 것이다. 이재에 밝은 서희가 근화방직의 주 를 상당히 가지고 있어서 성루 출입이 잦은 탓도 있었지만 장차 아들 형제가 서울서 운신하게 될 것을 고려하 여 근거지로 장만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행랑아범을 두어 집을 관리하게 했으나 환국이 일본서 돌아와 사립중 학의 미술교사로 취직이 되면서부터 살림 규모가 잡히기 시작했는데 결혼 후에는 덕희가 친정에서 유모와 심 부름아이를 데리고 왔고 양현이 여의전에 입학하여 합류하게 된 것이다. 꽤 넓은 사랑은 연못이 있는 후원에 있었다. 몸채 안방은 서희가 서울 오면 사용했고 건넌방과 그 방에 잇달린 또 하나의 방은 덕희가 거처했으며 몸채에서 ㄱ자로 꺾인 곳의 방은 유모가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그 옆이 양현의 방이었다. 행랑채는 행랑아범 의 부부가, 찬 방 옆의 널찍한 방에는 찬모와 심부름아이가 함께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규모가 큰 집이었고 식솔도 적은 편은 아니었다. 사랑에는 벌써 술상이 들어갔다. 안방에도 점심상이 들어갔다. 덕희 친정어머니는 불가피한 일이 있어 못 온다 는 전갈이 있어서 서희, 명희, 명희의 올케 백씨 그리고 덕희와 양현이 교자상 앞에 앉았다. "임교장댁하고 우리 최씨 집안의 인연도 이십 년이 훨씬 넘었나 봅니다." 음식 들기를 권하면서 서희가 한 말이었다. "삼십 년이 가까워지지요. 삼일운동 훨씬 이전이니까요." 국을 뜨다 말고 백씨는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군요. 우리가 조선으로 나온 뒤 삼일운동이 일어났으니까. 세월도 빠르고 생각해보면 돌아가신 임역관께 서 공노인에게 협조를 아니 하셨든들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고마운 마음은 항상 있었지만 저희들이 너무 한 일이 없었습니다." "천만의 말씀을, 그 동안 입은 은덕이 얼만데 그러십니까." "아니지요. 여러 가지 고초를 겪다보니, 미치지 못한 점이 많았습니다. 재영애비가 서울서 오 년 간 공부하는 동안에도 임교장의 보살핌, 훈도가 없었다면 오늘 저와 같이 심지 깊은 사람으로 자라겠습니까. 더구나 그때는 재영할아버지가 옥고를 치를 때였고 오며가며 걱정도 많이 끼쳤습니다." 능란한 거야 옛적부터지만 서희는 많이 소탈해졌고 말도 전보다 많아진 것 같다. "천부당한 말씀을, 환국이학생, 이 아니, 최선생이야말로 저의 자식들한테 큰 모범이 되었지요. 늘 부러웠습니 다. 마음이 공평하고 인물은 관옥 같고 자식 잘 둔 것 이상으로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백씨는 그저 황송해한다. "임선생께도 그렇습니다. 어려웠을 때 도움이 되지 못했던 일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한편 야속하기도 했구 요. 글쎄, 진주에서 아니 먼 곳에 와 계시다면서 오시기는커녕 서신 한 장 없었고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전혀 사정을 모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명희는 입안의 음식을 삼키며 "부끄럽습니다. 그땐 세상 끝에 선 것같이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몰골을 하구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 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여유 있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흔히 나이가 가르친다는 말을 한다. 서희는 모가 깎이어 부드럽고 포 근했으나 역시 노희의 술수의 흔적이 있었고 명희는 여기저기 흐트러진 신경의 부스러기들을 모아 뭉쳐놨는지 의젓하고 제법 관록이 있어 보였다. 나이가 가르친 것일까. 늙는다는 것은 뻔뻔스러워지는 것인지 모른다. 젊 었을 그 시절, 조용하의 초대를 받아 서희가 그 집에서 저녁을 함께 했을 적에 두 여인의 아름다움은 실로 백 중지세였었다. 서희에게는 아직 서릿발 같은 성깔이 남아 있었고 명희에게는 청초함이 남아 있었지만 마흔여 덟과 마흔여섯의 나이가 되어 영롱한 두 젊음 앞에 그 잔영을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늙음은 이들에게 한층 잔혹한 것 같고 인생무상을 절감케 한다. 안방에서 다분히 격식적인 대화가 오고가는데 사랑에서는 길상과 서의돈 임명빈이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를 하 고 있었다. 소싯적부터 술에 약한 임명빈은 벌써 얼굴이 벌겋게 돼 있었다. "어디 가셨다는 얘길 들었습니다만." 길상의 말에 서의돈이 "한동안 대구에 가 있었지요." "잔치랄 것도 없고 실은 마음이 울적하여 술이나 마시자고, 임교장을 오시라 했는데 마침 서형께서 계시다 하 기에, 건강은 어떠신지요." "늙은 것 이외 별탈은 없는 것 같소. 앞으로 잡혀가고 어쩌고 하면 그럭저럭 한세상 끝날 거요." "잡혀갈 때는 가더라도 미리 작정할 필요는 없고 오늘은 오늘 일만 생각합시다. 자 술 드시오." "그럼 그럼 오늘 생각만도 벅찬데 앞날까지, 그랬다가는 머리가 돌아버릴 거요." 임명빈의 말이었다. "울적하다 했는데 무슨 일 있습니까?" 서의돈이 물었다. "친구가 세상을 떴다는 기별을 받았는데 영 마음이 안 잡히는군요. 고생만 죽도록 하고, 내가 죄인이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죄인인 것 같소." 길상의 표정은 비통했다. 좀처럼 그런 면을 보이지 않는 길상이었기에 임명빈은 긴장했고 서의돈은 생각을 굴 린다. 임명빈은 몰라도 서의돈은 송관수를 몇 번 만났을 것으로 길상은 기억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송관수 라는 것은 입밖에 내지 않는다. '일하는 사람이 죽었군.' 서의돈은 짐작한다. "자네 신수가 어째 그 모양인가?" 별안간 서의돈은 화제를 확 꺾었다. 임명빈은 움찔하고 놀란다. "근심걱정 없을 건데 늙기는 남 먼저 늙는구먼." "근심걱정이 왜 없겠나." "조용하의 엄청난 유산이 굴러들어왔는데 무슨 근심이 있을꼬? 자식도 없는 누이 그 돈이 어디 가겠나. 허 참 내게도 미인 누이가 하나 있었더라면 동가식서가숙은 아니 했을 터인데." "밥도 단밥이 있고 쓴밥이 있다네. 번연히 사정을 알면서 쑤시기는 왜 쑤시나." 임명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버릴 용기도 줏을 욕심도 없는 위인 같으니라구, 그 따위로 노니까 죽도 밥도 아닌 게야." "죽도 밥도 아니지. 하니 세상에 나와 무엇을 했겠나. 나 같은 무능한 인간이야말로 형무소에 들어가서 푹 썩 어야 한다구." "무능하기야 했지. 그러나 형무소는 무능한 작자들이 가는 곳 아니야. 도둑놈도 능력이 있어야, 안 그런가?" 보통 약을 올리는 게 아니다. "접시물에 빠져 죽어야겠군." "딱해서 그런다. 나 같으면 그 따위 공돈, 맨날 기생집에 다니겠다." "돈도 돈 나름 내가 무슨 권리로." 전에도 술자리에선, 더구나 입정 사나운 서의돈이 끼여들 때는 늘 그래온 풍경이었지만 길상은 오늘 따라 왠 지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화제를 돌려보려 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길상의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기만 하는 것이었다. '저래도 서의돈이 옛날에 비하면 아주 점잖아진 거지요. 젊었을 때는 개차반도 이만저만, 아는 게 많고 곧은소 릴 하니까 승복은 했지만 그 독설에 걸려들었다간 모두 묵사발이 되었지요.' 황태수의 말이 생각났다간 이내 사라진다. 술을 들이켠 임명빈은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무능 인사에게도 좋은 게 하나 있지. 친일파 되라고 성가시게 구는 놈도 없고 숫제 끼워주지도 않아. 그곳 역 시 유능 인사들이 노니는 곳이거든." "얼씨구, 늙은 곰이 재롱 떠는구나." "나는 옛날 옛적, 내 누이 시집 보내면서 어느 개골차에다 자존심을 내동댕이쳤지." "자알했다. 장한 일 했군 그래." "그래서 교장 노릇도 해보구 내 누이 몸값으로 남긴 재산, 그것으로 자식 공부... 생활 다아 했지. 본시부터 이 무능 박재는, 자네가 그랬든가? 곧잘 놀려먹지 않았나. 덕구 덕구 덩더구, 덩더엉 덩덕구 하면서 말이야, 지하 의 내 부친 임덕구 여관이 입놀려서 얼마간 모은 재산 다 발가먹구, 누이가 없었다면 아마 다리 밑 신세 면하 기 어려웠을 게야." "알기는 아는군." "알다마다." "허허어 임교장 왜 이러시오? 벌써 취했소?" 길상이 겨우 말을 내밀었다. "저게 요즘 저자의 십팔번이니 개의치 마시오. 입으로나마 발산을 해야 견디지." 하고 서의돈이 어울리지 않게 큰소리를 내어 웃었다. 웃다가 덧붙여 말하기를 "꼴같지도 않게 죽어지내다 보니 저 꼴이 된 거요. 재물이 생기면 모두들 신수가 훤해지고 거드름을 부리기도 하는데 저 화상 보시오. 팍싹 늙지 안았소?" "늙을 때도 됐지요. 서형하고 달라서 체구가 크니까 그래뵈는 거지요. 술이나 듭시다. 그리고 잊어야지요. 우리 다 잊읍시다." 서의돈의 언동은 역설적인 위로라 할까 우정이라 할까, 어릴 적부터 앞뒷집에 살아서 늘 쥐어박고 쥐어박힌 습관 때문일까, 답답하고 딱해 뵈는 것도 사실이었고. 임명빈은 부친의 유산을 다 발가먹었다 했지만 방탕해서 가산을 날린 것은 아니었다. 게을러서 놀고먹었기 때문에 가산을 털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젊었을 때는 문학을 하네, 잡지를 하네 하며 동분서주 돈도 적잖게 쏟아부었으나 허송세월이었고 교장직을 그만둔 뒤 기와공장을 하다가 실패했다. 무능 박재의 탓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불운을 해치고 나가려고 누이를 조용하에게 주었던 것은 아니었다.어디까지나 명희의 자유 의사에 의해 성립된 결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희가 불행해졌을 때 임명빈은 자기 강압에 못 이겨 결혼을 했을 것이란 착각에 빠졌으며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재산을 탐내어 누이를 주었다는 항간의 소문 역시 어느덧 명빈 자신의 생각이 되고 말았다. 그 리하여 자신이 부끄러운 삶을 살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명희가 유산으로 분배받은 재산을 관리 하면서 한편 또 명희의 재산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리면서 임명빈의 부끄럽다는 생각은 병적으로 발전하여 뭔가 불안하고 초조하며 안정할 수 없게 되었고 남들이 욕한다는 강박관념 피해망상으로까지 가게 된 것이다. 명희는 친정에 잘 가지 않았다. 명희를 보면 그 증세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오늘도 다소 그런 경향으로 나타난 것은 명희가 지금 이 집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용기가 없는 양심... 오늘날 우리 조신인들, 특히 지식분자들이 앓는 병 아닐까요?" 서의돈은 새삼스럽게, 또 전에 없이 신중한 태도로 말을 꺼내었다. "아무것도 되는 일 없고 이룩하는 일도 업소 자기 자신만 갉아먹는 병, 사실 총독부에 폭탄하나 던진다고 독 립이 되겠소? 길가에서 독립만세 부른다 독립이 되겠어요? 그러나 그것은 용기 있는 양심이지요." 늘 이죽거리는 투로 말해왔으며 맨정신으로 얘기하는 일이 드문 서의돈이 정색을 하며 그것도 지극히 형식화 된 상식적 얘기를 꺼낸 것은 의외였다. "우리는 매사를 비극적으로만 받아들리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소. 독립운동이나 혁명운동도 비극적 색조를 깔 아서 그것으로 통합하려는 경향, 무론 우리 민족의 현실은 비극임이 틀림없고 국내에서는 싸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입지에서 그런 감정의 유도가 화약이나 무기의 역할을 안 한다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지나치게 정서적 면만 부각이 되면 튀겨서 부푼 옥수수 같은 소영웅들의 목소리만 요란해지고 실질적으로 거둬들이는 실은 보잘것이 없이 될 수도 있을 거시오. 쉽사리 비관주의에 빠질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용기 없는 양 심 때문에 자기 자신만 갉아먹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게 비관주의의 주범이지요." 하다가 서의돈은 씩 웃는다. 그 웃음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웃음 뒤에 나타난 것은 맨정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저 두상 큰 사내도 행할 수 없는 양심을 안고 자기 자신을 평생 갉아먹고 온 좋은 예인데, 오십을 넘기고 육 십이 다가오는데도 어찌 감상의 허울을 못 벗는지 모르겠소." 서의돈은 허허하고 웃었다. 머리만 상둥 잘라내어놓고 다음 말은 생략해버렸는지, 또다시 임명빈을 안주로 삼 는다. "마음대로 하라구. 내키는 대로 지껄여, 모두 사실이니까. 형무소 가기 전에 한껏 마시고 두들기고." 임명빈도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서의돈은 임명빈에 대한 처방법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모른다. "저 두상 큰 사내뿐인 줄 아시오? 누이 명희도 마찬가지요. 오누이가 똑같소. 자기 자신을 갉아먹으며 사는 사 고방식이." 어릴 적부터 이웃에 살았기에 서의돈은 아직도 명희 이름을 그냥 불렀다. "김형 안주가 모자라는 것 같소. 원래 짜게 먹는 서가 입맛을 내가 알거든. 소금으로 아예 절여놓든지 해야 지." 임명빈 말에 모두 웃었다. 그러고 보니 서의돈은 울적해 있는 길상의 기분도 고려하여 지껄인 것 같기도 했다. 또 어쩌면 양현을 만나 소위 정서적으로 기운 자신을 다스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고 어찌 여태 안 오나?" 서의돈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좀 늦을 거란 전갈은 받았소." 길상의 말에 "황태수의 행차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지." 임명빈이 말하자 "뭐가 안 쉬워? 친일파가 이런 자리에 불려온 것만도 영광인데, 옛날 옛적 개골창에다 자존심을 내동댕이 쳤 다 하기는 하더라만 제발 기지는 말어. 제발 명희한테도 기지는 말어. 이 화상아." 타박이다. "아무리 그래봐야 열 손가락으로 물튀기는 꼴이지. 황태수 아니면 서의돈이 동가식서가숙도 못할걸? 집구석에 엉덩이 붙이고 굶어죽었지." 오래간만에 임명빈은 반격을 했다. "아, 이 임가야, 거지는 형무소에도 못 가아. 나 정도 사기꾼이라야, 내 이르노니 얻어먹더라도 등뼈는 꼿꼿이 세워야 하느니라. 약은 황태수가 어찌 양다리 걸치는가. 좀더 약기 때문에 양다리 걸치는 게야. 김형 안 그렇 소. 김형하고 사돈 맺은 그 계산속 내가 모를까봐서? 김형도 마찬가지, 그렇지요?" "상상에 맡기지요. 허나 양가 젊은 사람들이 정략을 수긍했을까요?" "알쏭달쏭이네. 술 드시오." 서의돈은 길상의 술잔에 술을 부었다. "김형, 정신차려야 하오. 한번 문 열어놓으면 심장까지 파먹으려는 위인이니. 독사의 환생인지 저놈의 입에 걸 렸다가는 피 보게 마련, 소싯적부터 전후좌우 구별 없이 마구 뚜딜기는 것이 특기요. 집에서는 날갯짓도 못하 는 햇병아리같이 지지리 궁상인데, 밖에만 나왔다 하면." 하는데 밖에서 "아버님." 환국이가 불렀다. "장인께서 오셨습니다." 길상이 일어서서 마루로 나갔다. "어서 오시오." "이거 늦어서 미안합니다." 방문이 열려진 방에서 머리를 들내보인 서의돈 "거 환국이 자네 손 좀 봐야 알겠나?" 삐딱하게 말했다. 환국은 얼른 마루로 올라와 절을 한다. "엄연히 우리는 손님이고 저 늙은 여우는 자네 빙부에 틀림없으렷다!" "네." "하면은 손님 대접이 어찌 이러한가. 빙부는 모시러 가면서 손님은 제발로 걸어오게 해?" "광증 또 쏟는군 그래." 황태수는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니옵고 볼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가 집 앞에서 우연히." 환국은 고지식하게 해명한다. 길상은 환국이하고 마룻가에 서서 무슨 일인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부골스럽게 늙은 황태수는 미소를 머금으 며 "오랜간만이다. 그간 별일 없었지?" 임명빈에게 물었다. "그럼, 무슨 일이 있겠나. 괜찮아." 자리에 앉은 황태수는 잔기침을 하다가 서의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자네 옛사랑 생각이 나서 조 흥분한 것 같네그려." 목소리를 낮추어서 말했다. "뭐라구? 흥! 거울이나 들여다보고 나서 그딴 소리 해라." 말로는 그랬으나 평소의 그답지 않게 서의돈은 당황한다. "사돈 앞에서 내 체면 깎는 말만 했다 봐라, 내가 가만히 있나. 홀랑 벗겨버릴 거야." "뭐 어쩌고 어째?" "기화 딸내미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 "보았어." "아까 대문 앞에서 마주쳤거든." 임명빈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가슴이 처렁했겠구나. 아니면 회한의 눈물이라도 쬐꼼 나든가?" 서의돈은 술잔을 들었다.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으며 "어리석은 위인 같으니라구." 하는데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잠시였다. "기화를 쏙 빼닮았지?" 목을 죄듯 황태수는 늦추지 않는다. "그만두게. 아린 가슴에 소금 뿌리는 것." 역성은 드는 척하면서도 황태수에게 합세하여 임명빈이 말했다. 서의돈은 "내가 지랄발광 네굽질하면 어떡할 테야." 하고 배짱으로 나왔다. "곤란해질걸?" "여기가 어디메냐?" "어디긴? 혜화동 사돈댁이지." 서의돈은 낄낄 웃었다. "맹세하겠나?" "뭘 맹세해?" 황태수는 어리둥절한다. "발설하는 일 말이야." "뭐!" "만일에 발설을 아니 한다면 내 앞에서 물구나무 서겠다고 맹세해라." "이크! 내가 또 당하는구나." 황태수는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탁 쳤다 서의돈은 의기양양했고 황태수는 낭패한 얼굴이다. 최씨 집안에서 금지옥엽으로 기른 양현이다. 생모인 기화를 들먹이는 것도 뭣한데 서의돈과 이러저러한 관계 였었다는 과거지사를 얘기한다는 것은 사돈댁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그것은 모욕적 언동으로 보아야 한 다. 해서 서의돈은 황태수의 그 점을 노려 반격을 했던 것이다. "영약하고 교활한 푼수가 그대로군. 변하지 않았어." "본성이 변할 때는 죽는 법이야. 죽으려고 환장했다는 말도 못 들어봤나?" "그래, 그래, 서의돈이 잡아갈 귀신은 늘어지게 낮잠 자고 있는 모양이다." "건드려봐야 선불 맞은 멧돼지, 이로울 것 한푼 없다구, 내버려두게. 우리가 어디 하루 이틀 겪었나?" 임명빈이 말했고 초로의 세 사내는 소리내어 웃는다. 뭣 때문에 웃는지도 모르고 웃는다. 모시 고의적삼을 입은 길상이 성큼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거 실례가 많소. 뭐 재미나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길상은 자리에 앉았다. "그럴 일이 좀 있었습니다. 하하하..." 웃으며 황태수는 양복 윗도리를 벗는다. 손서방이 술과 술안주를 새롭게 들여다놨다. "자 술들 드십시오." 술은 몇 순배 돌았으나 방금 떠들썩했던 것과는 달리 모두 말이 없다. 알콜이 목구멍을 타고 창자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뿐, 마치 시간이 멎어버린 것처럼 묘한 침묵이다. 사랑에서 남자들이, 그것도 나이 지긋한 남 자들이 돌잔치 운운하는 것도 쑥스러운 일이겠지만 도시 뭣 때문에 이 자리에 모였는지, 모여서 술상머리에 앉았는지조차 까맣게 잊은 듯한 그런 분위기다. 어느 순간에 찾아온 우울증, 불안 같은 것, 정체 모를 공포 같 은 것이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에게 찾아왔던 것일까. 하기는 비단 이 세 사람뿐이랴. 조선인들은 모두 순간 순간 그것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불안과 공포, 억압에서 빚어진 습성 같은 것이지만 이제는 북녘땅에 서 실려오던 신화 같은 것은 없다. 한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 있을 뿐 전쟁의 함성 전과만 대서특필, 전 해질 뿐, 모든 것은 일본이 파놓은 깊이 모를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창씨개명, 조선어 금지, 지원 병 제도, 민족 신문의 폐간, 노동력 차출, 식량 공출, 유명무명의 조직 확대, 관리들과 학교 교사까지 준군복인 카키빛 국민복으로 갈아입은 지도 오래이며 중학교는 물론 여학교까지 교련이라는 명칭 하에 군사 훈련이 실 시되고 있었다. 친칠파는 친일파대로 우국지사는 우국지사대로 서민은 서민대로,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 지식인 학생들, 장 사하는 사람, 막노동꾼, 농민, 고기잡는 사람, 하급관리, 월급쟁이들 할 것 없이, 각기 위치와 관점은 다르지만 보다 가혹한 수난이 이 민족에게 닥쳐오고 있다는 예감에 별 차이가 없었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으로 감지되 는 것이며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젊은 엄마에게도 어느 순간 불안과 공포는 찾아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 이놈의 세상이 우애 될라꼬 이러노. 젊은 놈들 다 직이겄네." 담뱃대를 두드리는 촌로에게도 달겨드는 공포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폐간되었고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서형께서 한번 점쳐보시오." 수렁 속에서 솟구쳐오르듯 길상은 힘들게 말했다. 서의돈은 놀란 듯한 눈초리로 길상을 쳐다본다. 정말 길상은 달리 할말이 없었던 것이다. 수렁 속에서 솟구쳐오르듯 침묵을 깨기 위하여 겨우 골라 낸 말, 그것은 종이조각 처럼 메마르고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즐거운 일, 고통스러운 일, 평범한 일상,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길상 은 할말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는..." 하다가 황태수는 술을 마셨다. "다음에는 글쎄... 어떤 사람이 한 말이지만." "..." "그 사람의 추측인지 아니면 어디서 얻어낸 정보인지 모를 일이나 기독교인들을 소탕할 거다, 그런 말을 하다 구먼요. 반전운동하는 교도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사람들, 모조리 옭아넣을 거라는 얘기였소." "정말 그럴까?" 임명빈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고 서의돈은 "신빙성 있는 얘기다." "그러나 손을 대기엔 광범위하고 벌집 쑤신 꼴이 될 텐데도?" "왜놈들에겐 식은죽 먹기지 뭐. 시마바라의 난을 보더라도 제 민족이건만 불을 싸질러 천주교도들을 몰살했거 든. 조만간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은 시작될 게야. 영미에 원한이 사무쳐 이를 갈고 있는 일본이고 보면 감정적 으로도 그렇고 실제 무시할 수 없는 조직이니 부숴버릴 필요도 있고, 삼일운동 때 그 조직력이 두드러진 것을 일본은 경험했거든. 그리고 이제는 일본에게 회유할 여유가 없어. 얼마만큼, 심장을 뚫고 지나가는 찬바람 같 은 세태다. 하여가 그 얘기는 결코 추측은 아닐 게야." "그럼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올까?" 한순간이었지만 그 말을 할 때 임명빈 얼굴에는 치매 같은 표정이 스쳤다. "우릴 잡아들이겠지. 다음은 자원병 제도를 징병제로 전환할 거구 징용으로 조선의 노동력을 바닥까지 훑을 거야." 목을 축이기 위해 술을 마시는데 서의돈의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불원간 일본은 물자 확보를 위해 동남아를 침공할 거구 미국과의 충돌도 시간 문제, 미국과 붙게 되면 중일 전쟁과는 양상이 달라진다. 말하자면 물량의 싸움이 되는데 그때에 대비하여 저이들 인원을 비축할 필요가 있 겠지, 한다면 병력과 노동력을 어디서 구하겠니? 조선인이지. 그놈들은 한방울의 기름을 얻기 위해서도 조선인 생체를 능히 압축기에 집어넣을 그런 인종이야." "그러면 누가 살아남지?" 술에 약한 임명빈의 목소리는 나사가 빠진 것 같았고 길상과 황태수는 말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미국이 서둘러주어야지. 초장부터 와장창!" "소련은 어쩌고." "소련도 와장창! 하고 나오면 오죽이나 좋을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독일이 등을 찌를 테니." 하다가 서의돈은 "왜 갑자기 소대가리가 됐나? 그것도 몰라!" 화를 벌컥 낸다. "또 병 도지네." 하다가 속이 뒤틀렸던지 "지껄여봐야 이불 밑의 활개짓, 원래부터 별볼일 없었다구." 애들 쌈같이 된다. "날이 갈수록 사람이 미련퉁이 돼가니 딱해서 그런다. 보약 먹고 정신 좀 차려." "성미 하고는." 황태수는 혀를 찼다. "김형 미안하오. 술취해 그런 거는 아니었소." 서의돈은 드물게 사과를 했다. "어릴 적부터 친구간인데 서로 맘에 낄 것 있습니까. 술자리에선 다 그렇지요 뭐." "실은 얘기를 하다가 부아가 났소. 얼마 전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소이다." "무슨 일인데?" 황태수가 서의돈에게 술잔을 내밀며 물었다. 술잔을 받아든 서의돈은 "얼마 전에 대구에서 이원진의 강연회가 있었다." "대구는 뭣하러 갔어." "남천택이 내려오라 해서 갔지." "뭐? 남천택이 내려오라 해서 갔다구? 피장파장 잘도 어울렸겠다. 그자는 뭘 하나." "뭘 하긴? 뭘 하는 그게 바로 싫어서 전문학교 교수 때려치웠잖아. 세상 편한 인간이라구. 영원한 자유인." 마신 술을 이기지 못해 애를 쓰며 임명빈이 화제 속에 끼여들었다. "미친놈, 그래 전주의 전윤경이 아직도 뒷배 봐준대?" "봐주기도 하지만 지금은 대구의 갑부 염씨 집에서 귀빈으로 좌정하구 있네." "그 차주에 자네까지 합류했다 그 말인가?" "아암. 환영하는 데야 낸들 어쩌누. 어차피 김삿갓 신세 아닌가." "기가 막혀서, 쌍나발을 불어댔을 터인데 그 염씨라는 사람 귀머거리였던 모양이지?" "천만에, 두 귀가 자알 뚫린 사람이지." "남천택이 그자가 남의 호주머니 털어먹는 데는 천하 명수라 하든가?" "천하 명수지. 얻어먹어도 허리 안 굽히고 주는 사람 마음 또한 편안하니 그게 어디 보통 재주겠어? 그 자식 이 후배이긴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선 나도 경의를 표하는 바이라." 얘기는 사뭇 딴 곳으로 흘러가고 길상은 단정하게 앉아서 경청하는 모습이다. "오래 전에 남척택이 전윤경하고 날 찾아온 일이 있었지. 꼬라지는 극단 패거리처럼 요상하게 하고 왔더라만 역시 천재는 천재야. 능변인 데다가 사통팔방 두루 꿰더라구." "자넨 잠자코 있어, 이기지 못하는 술도 그만하구." 임명빈의 입을 막은 황태수는 "남천택이 그자가 공산당이라는 말이 있든데 그게 사실인가?" "그건 나도 모르는 사항이다." "서의돈도 양의 탈을 쓴 이리지 뭐." "서의돈도 공산당이다 그 말이야?" "아닌가?" 서의돈의 얼굴이 차갑게 변한다. "공산주의는 사상이며 이론이다. 평등주의 박애주의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이리도 아니구 양도 아니다. 순수 한 사랑일 뿐이지. 다만 그 사상을 실천하는 공산당이 실천하는 데 따라 양이 될 수도 이리가 될 수도 있어.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양면을 지니고 있는데 부정적 면에 치우치면 이리가 되고 긍정 적 면을 부추기면 양이 되는 거야. 그리고 또 하나, 공산주의 이론에 투철하지만 공산당이 아닐 경우가 있고 이론에 어둡지만 공산당일 경우가 있어." "알쏭달쏭, 그 궤변이야말로 서의돈의 특기지." "자네는 자네의 처지를 떠나서 공평해야 하네. 나는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했지만 당원도 주의자도 아니야. 다 만 이론 자체를 순수하게 보고 싶어. 오늘 우리 조선의 현실 앞에서 순수하게 생각하고 싶단 말이야. 물론 나 는 자네를 신뢰하고 있고 욕심이 똥창까지 차있는 그 따위 자본가가 아니며 민족주의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 서로 공평해지자. 자신들의 위치를 떠나서." 오리무중, 핵을 비치는가 하면 안개 속으로 잠적해버리고 휘두르는가 하면 꼬리를 감추어버리고 직설보다 은 유로서, 거의 진지한 적이 없었던 서의돈 화법에 익숙해져 있던 황태수는 어이없다는 듯 서의돈을 바라본다. "나는 남천택을 두둔할 생각이 없다. 남천택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서 그런 것은 참으로 값싼 것이며 때에 따라서 두둔하는 자체가 편견이요 불공평하며 불순할 때도 있으니까 그런 것은 두었 다가 태평세월에나 가서 티가태각할 일이지. 그런데 편견이 없고 원만한 자네가 유독 남천택에게만은 날을 세 우는 것이 마땅치 않아. 불공평하다 그 말이야. 그냥 지나갈까 하다가 앞으로 자네를 또 언제 만나겠나." "이거 참. 서의돈이 왜 이러지? 유언하는 건가?" "유언이 될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남천택의 경우, 그의 달변, 그의 박식, 천재적인 어학 능력, 경박한 언동과 남다르게 사는 방법 등, 그 모든 것은 몸에 걸친 의상이며 속은 단단한 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황태수 자네와 마찬가지로 그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란 점이다. "..." "우리가 이 순간 바보같이, 미치광이가 되어 술을 마시고 있지만, 또 손 하나 발 하나 내밀 수 없는 철저하게 무력한 상태에 놓여 있지만 우리는 항복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는 결국 자아에 대한 방어요 민족 적 존엄은 결국 내 자신의 존엄이기 때문이다. 다 빼앗기고 벌거숭이 되어도 우리는 항복하면 안 돼,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고 하니, 얼마 전에." 들창을 지르며 지나가는 새 그림자에 눈이 끌려 잠시 말을 끊었다가 "아까 하다 말았는데 이원진의 강연회 말이야, 천택이하고 장난 삼아서 그 강연장엘 가지 않았겠나. 귀빈석에 는 유지들 관가 사람들이 앉아 있더구먼. 예상한 대로 문학 강연은 아니었고 소위 시국 강연회라는 건데 연제 는 '조선 민족의 살 길', 어떻게 동원을 했는지 아니면 이원진의 이름 때문에 자발적으로 나온 건지 꽤 넓은 회당에 청중이 꽉 차 있더구먼. 한데 내가 놀란 것은 이원진을 수행해온 몇몇 문인들 얼굴을 보았을 때였어. 이원진을 열렬히 성토하고 민족반역자로 규정하며 끝가지 타도하자고 선봉에서 외치든 바로 그자들이었단 말 이야." "그걸 이제 알았어? 한물 간 얘길세." "얘기로야 들었지. 그러나 마주치고 보니 무섭더군. 그러나 그보다 더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찬조 연사로 나온 성삼대였다." "성삼대가 찬조 연사로 나와?" 임명빈이 되물었고 듣기만 하고 있던 길상도 서의돈을 쳐바보았다. 서의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정말 뭐가 뭔지 앞이 캄캄해지더군." "뭐 놀라운 일도 아니지." 황태수는 비운 술잔을 길상에게 내밀었다. 사장께서 지루하시겠습니다." 하며 술을 따랐다. "아닙니다. 제가 너무 가라앉아서 죄송합니다." 결국 모두 우울해지고 만다. 성삼대는 황태수의 사랑방을 거점으로 하여 서의돈이 대장 노릇을 했던 젊었을 그 시절부터, 이상현과 더불어 한 수 아래의 멤버로 그들 무리에 끼여 있었으며 계명회 사건 때도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던 인물이다. "술이나 마시자고. 그런 사람이 한둘인가. 다 살라고 그러는 게지. 잊어버려." 황태수는 비어 있는 술잔에 일일이 술을 채운다. 그새 손서방은 곰쥐처럼 드나들며 꽤 여러 번 술을 날랐다. 그러니까 이들은 상당량의 술을 마신 셈이다. 다만 임명빈은 게슴츠레한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술잔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삼대가 원래 가정적으로 불행했지. 그래서 사람이 삐뚤어지기 시작했는데 만나는 여자마다 고약해서... 한마디 로 여자복이 없는 놈이야." "하여간에 그 새끼 연설을 들었으면 자네도 기절초풍했을 게야. 그 비굴한 꼴이라니, 목불인견이라." "이젠 그 얘기는 관두지. 오늘은, 사장께서는 첫손자요 내게는 외손자 돌이 아닌가. 기분 좋은 얘기, 기분 좋게 술 마시자구. 내일은 내일 생가하기로 하고, 그러고 보니 우리도 어느새 해거름에 서 있네그려. 하하핫..." "환갑이 멀었는데 무슨 놈의 나이타령, 그는 그렇고 사업은 잘 나가고 있나?" "근화에서 한솥밥 먹는 식구가 자네 집에 있는데 더 할말이 뭐 있겠나." "집에 붙어 있어야 말이지. 일년 가야 설 명절에 얼굴 한번 볼까말까, 원래부터 내가 뜨내긴 것을 몰라 하는 소리야?" 한솥밥 먹는 식구란 근화방직의 간부사원으로 있는 서의돈의 아우 서영돈을 두고 한 말이다. 형 대신 가사를 책임지고 있던 서영돈이 계명회 사건으로 형이 구속되면서 은행을 그만두었을 때 황태수는 영돈을 근화방직 에 데려갔던 것이다. "그나저나 저 화상 아무래도 병원에 한번 데리고 가야겠는걸." 서의돈 말에 "나도 그 생각을 했네." 벽에 기대어 졸고 있는 임명빈을 바라보며 황태수도 동의를 표했다. 이들이 비틀거리는 임명빈을 끌어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밖은 황혼이 깔려 있었다. 여자 손님은 이 미 귀가했고 서희는 양현과 아이를 안은 덕희를 거느리고 길상과 함께 중문까지 손님들을 전송했다. 환국은 어디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손님이 떠난 뒤 길상은 손자 재영을 한번 안아주고 나서 곧장 사랑으로 들어갔다. 손서방이 그새 술상을 내어가고 방안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들창 밖에서도 노을진 하늘이 붉게 타고 있었다. 길상은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으며 고개를 푹 숙인다. 몇 시간 동안의 주연이 악몽 같았고 그 시간은 기나 긴 통로와도 같아서 길상을 지치게 했다. 그들과 함께 처음 술을 마신 것도 아니다. 그들은 낯선 사람도 아니 었으며 꽤 오랫동안 서로를 보아온 처지다. 그럼에도 오늘은 왜 그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말을 할 수 없 었을까. 물론 송관수의 죽음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지만 길상은 그보다 훨씬 본질적인 착오, 의문에 부딪혔던 것이다.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전적인 부정 그것이었 다. 지리산 골짜기든 만주 벌판이든 자신은 그들과 함께 있어야 했다는 뼈저린 통한, 사명감도 양심의 소리도 아니었다. 길상은 다만 자신의 삶의 진실한 의미를 물었던 것이다. 3장 섬진강 기슭에서 기적을 우리며 멈춘 종착역, 쏟아져나온 사람들 속에 송관수의 유해를 안은 영광과 영선네도 있었다. 그들은 지주 시내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후주레한 짚베 치마 저고리를 입고 흰 댕기를 감은 쪽에 나무비녀를 찌른 영선네는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없이 아들 등 뒤 숨듯 걷는다. 얼마 만에 찾아오는가. 그러나 영광에게 진 주는 낯선 고장이었다. 남의 당, 하염없이 송화강 강가에 앉아 있곤 했던 길림보다 멀고 스스러워지는 진주, 참으로 얼마 만인가. 저녁 노을에 잠긴 남강은 아름다웠다. 두지를 찾아가는지 무리지어 우짖으며 새들이 날아 가고 있었다. 남강 다리 위에서 영광은 과연 저 강물에서 어릴 적에 개구리헤엄을 치며 놀았는지 의심스러웠 다. 촉석루와 이헤미 바위를 오가던 기억, 일렁이는 강가 대숲에 과연 어린 날의 꿈이 실려 있는가 의심스러웠 다. 그런 심정은 영선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니 그는 더더욱 가슴이 메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에게 는 고향이 없는 것과도 같았다. 그것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틀 자리가 없었다는 뜻도 된다. 시내로 들어온 영광은 사람들에게 물어서 남강여관을 찾아갔다. 거리엔 더러 전등불이 나돋은 그런 시각이었 다. 여관 입구에는 조그마한 사무실 같은 것이 있었다. 오십 세 안팎으로 뵈는 사내가 돋보기를 쓰고 신문을 읽고 있다가 얼굴을 들었다. 유해를 안은 영광을 보는 순간 사내 얼굴에는 경련이 일었다. 그는 다름아닌 장연 학이었다. 오 년 전에 연학은 최씨집을 떠나 독립을 했다. 그리고 여관업을 시작한 것이다. 외견상 그는 최씨 네와 소원해진 듯 보였지만 그들의 밀접하고 은밀한 유대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미 연학은 영광이 올 것을 알 고 있었다. 성루서 전갈을 받았던 것이다. 영광이 역시 서울역에서 잠시 동안 환국을 만났고 남강여관을 찾아 가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시선을 멀리 둔 연학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만주서 왔제?" "네." "항구야! 항구야!" 소년이 뛰어왔다. "칠호실로 손님 안내해라." 그러고는 연하기 문이라도 닫아버린 듯 신문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안내된 방은 깨끗하고 상이 하나 놓여 있 었다. 영광은 상 위에 유해를 내려놓고 윗도리를 벗어 벽에 건 뒤 슬그머니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두 손을 깍 지끼고 방바닥을 내려다본다. 영선네는 보따리를 끄르고 수건을 꺼내어 비로서 땀을 닦는다. "고단하시지요." 방바닥을 내려다본 채 영광이 말했다. "아니다." 그러고는 모자간의 대화는 끊겼다. 옆방에는 손님이 들지 않았는지 사람의 기척이 없고 소년이 켜주고 간 전 등 주변을 하루살이가 날고 있었다. 영선네도 그랬지만 영광이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양볼이 홀쪽해졌고 눈동자는 빛을 잃고 있었다. 보름 가까이 이들은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다. 이제는 슬픔과 고통에도 지쳐버린 상태였다. 홍이가 동분서주, 모든 일을 처 리해주었으나 호열자로 사망했기 때문에 관수의 시신이 화장터에 가는데 시간이 걸렸고 살림 정리를 하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반넋이 나간 영선네는 울지도 못했고 아무 일도 못했다. 옷보따리를 쌌다간 풀고 쌌다간 풀고, 결국 영광이 자신을 타이르고 다스러가며 영구와 함께 짐을 챙겼다. 그리고 영구를 남겨둔 채 신경을 떠났던 것이다. 영선네가 정신을 차리고 한 일이란 신경역에서 꼬깃꼬깃 접은 십원짜리 지폐 한장을 꺼내어 "아가, 상의야 공부 잘해라." 하면서 전송나온 사의 손에 쥐여준 그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영선네는 눈물을 흘리고 울었다. "좀 누워보시지요." 영광이 말했다. "아니다. 괜찮다." 다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저녁상이 들어왔다. 여름인데 미역국이 놓인 밥상이었다. "산에까지 갈려면 많이 걸어야 하는데 밥 좀 들어보세요." "나는 괜찮다." 영광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영선에 앞에 놓아준다. "자아 어머니." 영선네는 영광이 말아준 밥을 다 먹었다. 영광이도 오래간만에 밥그릇을 비웠다. 상을 물리고 또다시 모자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연학이 향로와 향을 들고 들어왔다. 유해 앞에 향을 피워놓고 연학은 엎드렸다. "형님 이런 형상하고 돌아올라고 갔십디까." 연학은 흐느꼈다. 영선네와 영광은 놀라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형님! 용서하이소. 너무 억울합니다. 왜 그렇게 가야 했십니까." 연학은 한참 동안 흐느꼈다. 눈물을 닦고 연학은 영선네에게 절을 했고 상주인 영광에게도 절을 했다. 그의 눈 에는 또 눈물이 흘렀다. "고생 많이 하셨지요." 연학이 영선네보고 말했다. "아, 아닙니다." 영선네는 당황하고 낯설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지가 다 압니다. 옛날에 진주 기실 때 한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영광이가 조맨할 때." 영선네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는 뜻인 모양이다. 영광은 방바닥에 두 손을 짚으며 "고맙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인다. "그런 말 마라. 그라믄 내가 부끄러버서 우짜노." "아닙니다. 아버지가." 하다 말고 목이 메는지 말을 끝맺지 못한다. "우리는 살아 있고, 그래 우리는 살아 있는데, 젤 고생 많이 한 형님이 먼저 갔으니 원통하고 억울하다. 우리 는 모두 죄인이다. 살아 있으니 죄인 아니가." 연학은 길상이 한 것과 꼭 같은 말을 했다. "사람이 잘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병으로 그리 됐는데,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자네는 모를 기구마. 우리들 맴을 모를 기다." 부지런하고 지혜로우며 온갖 뒤처리를 도맡아 해온 연학이, 냉정하고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것으로는 그를 따 를 사람이 없었는데 그 둑이 터진 듯 주체하질 못한다. 그러한 자신을 추스르듯 "하여간에 이야기는 두었다 하기로 하고 내일 아침 일찍이 출발해야 할 기다." "차편은 어떻게 됩니까." "자동차로 하동까지 가서, 거기서 나룻배를 타믄 된다. 그리고 화개에 가믄은 아마 사람이 나와 있을 성싶다. 사람을 못 만날 경우를 생각해서 일러두는데 찾아갈 곳은 도솔암이다. 알겄제?" "네." "기별이 갔이니께 통영 사는 사우하고 딸도 하마 내일 저녁때쯤 당도할 상싶은데." 딸이라는 말에 영선네는 움찔한다. 무슨 말을 하려고 주뼛거리다 만다. "그라믄 내일 생각을 해서 일찍이 주무시이소." 연학은 영선네에게 말하고 나갔다.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 모자는 계속 잠만 잤다. 늪에 가라앉듯, 덮쳐오는 수마였다. 극도에 이른 신경들이 일 시에 와해되어 기능을 완전히 잃은 것처럼. 꿈도 없는 먹빛과도 같은 잠이었다. 그러나 여관방에서 불을 끄고 드러누웠지만 모자는 다같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 괴롭고 긴 밤이었다. 막상 깨어 있는데 꿈을 꾸는 것 같았 다. 그간에 일어났던 일이 모두 꿈만 같았다. 현실 같지가 않았다. "어머니 주무십니까." "아니다." "어머니." "..." "지를 용서 안 하시지요." "그런 말을 와 하노." 새벽녘에 살풋 잠이 들었다가 모자는 놀라서 일어났고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연학은 조그만한 사무실 같 은 곳에 앉아서 어제 들어올 때와 같이 여관의 주인으로서 손님 대하듯, 여관비도 받았고 떠나는 모자 뒷모습 을 덤덤히 바라보았다. 그들 모습이 사라진 뒤 연학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동까지 간 모자는 연학이 말한 대로 나룻배를 탔다. 이들에게는 초행인 고장이며 처음 보는 산천이었다. 강 물을 거슬러 나룻배는 상류를 향해서 간다. 구성진 뱃사공의 노래를 들으며 장돌뱅이들의 수군대는 목소리를 들으며, 술집 작부인 듯, 머리는 지지고 눈썹을 그린 젊은 여자의 간드러진 웃음 소리를 들으며, 강은 유장했 다. 잔물결이 햇빛에 부서지며 희번덕거렸다. 뱃전에 부딪쳐오는 물살, 영광은 갑자기 아버지가 이 강을 얼마 나 많이 오르내렸을까 하고 생각했다. 동학란에 죽었다는 친할아버지는 또 얼마나 이 나룻배를 탔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유해를 안고서 왜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목이 뿌러져 죽일 놈이 내 신세를 요모양 요꼴로 만들었지. 술집에 나를 팔아묵고 그러고는 종무소식이라. 어디서 뒤졌다는 소문도 없는 거를 보믄 살아 있기는 한 모양인데, 어찌 내가 꿈엔들 그놈을 잊겠나." 방금 간드러지게 웃던 작부풍의 여자는 제 또래의 여자를 상대로 신세타령이었다. "소나아들은 모두 도둑놈이라. 늙고 젊고 할 것 없이... 계집은 한번 허바에 발 디디놓으믄 그것으로 끝장이고 무신 희망이 있노. 빚만 없이믄 만주 가서 돈이라도 벌겠는데." 어느덧 배는 화개에 닿았다. 영광은 보따리를 든 영선네를 한손으로 부축하며 배에서 내렸다. 내렸는데 그들 앞에 다가선 사람은 강쇠였다. "아저씨!" "운냐. 온다고 욕봐제. 아지매 오래간만이오." 강쇠를 유해를 외면하며 덤덤히 말했다. 영광이 아저씨라 한 것도 강쇠가 아지매라 한 것도 다 틀린 호칭이다. 사돈지간에 그러는 법이 없는데 이들은 전혀 깨닫지 못한다. 아짐시, 아저씨 하다가 이들이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이 십 년 넘게, 사돈으로서 어디 상면 한번 했던가. 산놈한테 맡긴다 하며 관수가 딸을 데리고 가는 것을 영선네는 보았을 뿐, 그것이 마지막이었고 영광은 휠씬 훗날에 영선이 시집갔다는 얘기를 뉘한테서 들었는지, 그나마 기억이 희미했다. "아짐씨 보따리 이리 주이소." 강쇠는 영선한테서 보따리를 받아들었다. 이번에는 아지매가 아니고 아짐씨라 했다. 태연한 척했지만 강쇠 마 음속에서는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있었을 것이다. 오랜 친구, 오랜 동지, 생사를 같이 한 쌍두마차였고 분신이 었던 김강쇠와 송관수, 장연학이 유해 앞에서 흐느껴 울었지만 강쇠의 슬픔, 충격에 비할 것이 못 된다. "날 따라오니라." 영광에게 말하고 강쇠는 앞장서서 간다. 나루터의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은 다름아닌 민지연이었다. 삼베였지만 깨끗한 고의적삼에 흰 모시 조끼까지 입고 대님을 쳤으며 검정고무신을 신은 강쇠의 모습, 후주레한 짚베 치마저고리에 나무 비녀를 곶은 영선네, 그리고 유해을 안은 영광이, 누가 보아도 객사한 사람의 유골을 절로 모시고 가는구나 하고 짐작했을 것이지만 지연의 짐작은 단순하지가 않았다. 유해을 안은 도시풍의 잘생긴 남자가 맘에 걸렸다. 왜 강쇠가 일 상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그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객사한 사람일 거라는 짐작이 지연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뭐 하나 확실히 잡히는 것은 없었지만 무엇인지 모르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의혹 의 짙은 안개가 그의 심장을 죄는 것이다. 사십을 겨우 넘긴 지연은 아직 지리산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떠나지 않았다기보다 아주 붙박아 살고 있었다. 머리만 깍지 않았다뿐이지 그는 중옷 차림이었고 은젓가락같이 가는 손에 염주를 들고 있었다. 가냘픈 몸매, 여름 햇볕에 그을리기는 했으나 야들야들하고 아리송하고 권태스러움이 감도는 얼굴에 구심점과 도 같은 붉은 입술, 신기하게도 옛날과 별로 달라진 것 같지가 않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도 비단실같 이 부드러운 게 옛날 그대로였다. 어느덧 나룻배는 상류를 향해 떠나고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하늘에 까마귀떼가 날고 있었다. "소사야 가자." 소사 역시 중옷 차림이었다. 읍내에 나가 장을 보아온 소사는 짐 꾸러미를 들고 말없이 지연을 따랐다. 지연은 나루터에서 소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실은 소사를 기다렸다기보다 할일이 없이도 지연은 나루터에 곧 잘 나와 있곤 했다. 여러 해 전에, 지연이 간청하여 친정에서 암자를 하나 지어주었는데 어떤 면에서는 그랬던 것이 친정 부모의 마음을 홀가분하게 했는지 모른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 산에 있느니 차라리 형식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세상을 버리고 산에 있는 편이 낫다 생각했을 것이다. 외사촌 오라비 소지감이 있는 곳이니 마음을 놓고 암자를 지어 주었을 것이다. "소사야 오늘이 며칠이냐?" 산길을 오르며 물었다. "글쎄요. 양력으로 스무엿샛날인지 이레인지요." "좀 있으면 여름도 가겠구나." "가지요." "너도 가고 싶지?" "지금 가서 뭣하겠습니까. 이제는 아씨가 가라 하셔도 갈 곳이 없습니다." "너만 그러냐? 나도 이 산말고 있을 곳이 없다." "그것은 아씨가 청하신 일 아니었습니까?" "그래. 너는 안 그렇다 그 말이지?" "저야 뭐 아씨 분부에 따랐을 뿐이지요." "원망하는구나." "원망 같은 것 없습니다." 나이 훨씬 젊은 소사가 지연보다 더 늙어 보였다. 손은 거칠었고 살갗은 꺼실꺼실했다. 삼십을 갓 넘긴 그는 본시 민씨집 내림종의 딸이었으니 갈곳이 없다 한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주종간에 주거니 받거니, 오늘 처음 해본 말도 아니었다. 단순한 산중 생활 속에서 별 지겨움 없이 되풀이되어온 얘기의 내용이었다. "소사야." "예." "아까 그 사람들 말이다." "누구 말씀입니까." "나루터에서 너랑 함께 내린 사람들 말이야." "아아 예. 유골을 가지고 온 사람들 말씀이지요?" "그래." "김장사말고는 낯선 사람인데요." "그렇지? 못 본 사람들이지? 어디서 왔을까." 지연은 갑자기 흥분했다. "이 근동 사람이겠지요. 영가를 천도하는 법사 때문에 절에 오는 길 아니겠어요?" 절 변두리에 살다보니 소사도 들은 풍월이 있어 제법 유식하게 말했고 나이 탓인지 말주변도 늘었으며 상전을 어려워하는 기색도 준 것 같았다. "아니다. 그렇지가 않아. 근동 사람이면 어째 유골을 안고 오니?" "객사했으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게 뭐 이상해서 그러세요?" "객사를 해도 그렇지. 아주 먼 곳이 아니면 시신을 옮겨왔을 거구." "이 한여름에요?' 지연은 소사를 상대해서 말한다기보다 생각을 더듬고 생각을 꿰어맞추어 어떤 사실에 접근해보려고 열중해 있 었다. "젊은 남자 보았지?" "예." 지연은 걸음을 멈추었다. "어떻게 보이든?" "잘 생겼대요. 그리고 다리가 좀 성찮은 것 같구요." "그게 아니야, 도시 사람, 그것도 아주 큰 도시에 살았을 것 같애." "말씀을 듣고 보니 근동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데 김장사가 왜 마중을 나왔을까?" "아씨도 참, 남의 일에 뭘 그리 깊이 생각하세요?" "김장사가 마중 나온 걸 보면 도솔암으로 갔을 거야." 지연의 눈이 반짝였다. "만주서 왔을까? 왔을지도! 그래 그게 틀림없을..." 말끝을 맺지 못하고 양 어깨가 축 늘어진다. "아씨 어서 가세요. 짐이 무거워 죽겠는데." "그래 가자." 지연은 가끔 일진이 만주로 갔을 거란 말을 해왔다. 만주로 찾아가겠다는 말도 했었다. 소사는 걸음을 빨리한 다. 일진에 관한 얘기라면 참을성 있는 소사도 이제 넌더리가 났던 것이다. 암자에 돌아온 지연은 해가 깜박 넘어갈 때까지 꼼짝없이 소나무 밑에 있는 바위에 앉아 있었다. 열심히 염불 을 하고 염주를 굴리다가도 어떤 계기가 있으면 지연의 병은 도진다. 그것을 알기에 소사는 모르는 척 못 본 척 제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오늘 밤엔 잠 설치겠다.' 소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지연은 저렇게 꼼짝없이 앉아 있는 날이면 밤새 소사를 상대로 넋두리를 했으 며 새벽녘에 통곡을 하다가 흐느껴 둘다가 잠이 들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미신과도 같았고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혼약한대로 혼인의 의식만이라도 거행해달라, 그같은 지연의 의지는 미신같이 완명했고 신앙같이 절대적이었다. 출가한 일진에게 그것을 요구하기 그것을 요구하기 위하여 지연은 지리산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일진이 모습을 감춘 지 십 년이 넘었는데 그 집념의 굴레에서 벗 어나지 못했고 이제는 다만 기다림이 되고 말았으니, 어쩌면 그것은 지연이 살아가는 지렛대 같은 것인지 모 르고 삶의 정열 같은 것인지 모른다. 해가 지는 산속에는 새 소리, 짐승 울음이 적막을 깨뜨리곤 한다. 싸아 하고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 맞은편 산허리는 붉게 타고 있었다. 한편 도솔암으로 간 일행은 그곳에서 해도사와 소지감을 만났는데, 영광의 모자와는 초면이었지만, 놀라운 일 은 소지감이 삭발을 하고 승려가 돼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도솔암의 주지였다. 일단 절에 들었다가 강쇠는 영광 이만 남겨둔 채 영선네를 데리고 거처로 돌아왔다. "아이구 사돈!" 휘의 모친이 맨발로 뛰어나왔다. 비로소 강쇠 내외와 영선네는 사돈으로 대면하는 인사를 나누는 것이었다. 휘 의 모친은 영선네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울기는 와 우노. 그 더러분 놈 생각하지도 마라. 나쁜 놈!" "보소 그래도 되는 겁니까? 사돈한테." 눈물을 훔치다가 휘의 모친은 질겁을 하며 말했다. "사돈이고 오돈이고, 숭악한 놈이다. 사람우 가심에 못을 박아도 유분수, 지 혼자 편할라꼬 저승에 가버린 놈, 생각하믄 머하노." 하며 씩씩거리는데 "어무이! 어무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아이를 업은 영선이 들어섰고 휘와 딸아이가 뒤따라 들어섰다. "영선아!" 영선네의 고함은 차라리 산짐승의 포효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제물에 놀라 뚝 그치더니 영선에게 "씨어른한테 인사는 안 하고." 낮은 소리로 일깨운다. "밖에서 이럴 기이 아니라 방에 들어가입시다." 강쇠는 병아리 몰 듯 팔을 벌렸고 아이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면서도 어른들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간다. "장모님한테 먼저 절 올리라. 애기도 어무이한테 절하고오." 강쇠 말이 떨어지자 딸과 사위는 이별의 긴 세월을 잡아당기듯 마음을 다하여 절을 했다. 주눅이 든 영선네는 처음 만난 사위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한다. "장모님 볼 낯이 없십니다. 용서하시이소. 이렇게 상면하게 된 것이 한스럽십니다." 귀밑에서 턱밑까지 면도자국이 파란 휘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니네. 우, 우리가 무신 부모 할 짓을 했다고 절을 받나." 간신히 말한 영선네는 꼬깃꼬깃 접어진 손수건으로 입을 막으며 울음을 삼킨다. "이분에는 선아하고 선구가 외할무이한테 절을 해라." 해도사가 이름을 지어준 선아 선구, 열한 살의 계집 아이와 네 살바기 사내아이, 어줍은 몸짓으로 아이들은 절 을 했다. 마당의 밀보리를 늘어놓은 멍석 옆에 짝쇠와 안서방이 쭈뼛쭈뼛하며 서 있었고 그들의 댁네들도 장 독가에 팔짱을 끼고 우두커니 서있다가 슬그머니 사라진다. 띄엄띄엄 세 가구가 사는, 물소리 바람소리 까마귀 울음을 벗삼는 첩첩산중의 수수깡 갈대로 덮은 산막, 산사람들의 인륜지사는 대강 그 정도로 끝이 났다. "절에는 안 가고 바로 왔나?" 휘의 모친이 아들에게 물었다. "잠간 들리서 처남을 보고 왔십니다." "이자 우리는 도솔암으로 내리가자." 강쇠가 일어서며 아들을 돌아보았다. "사돈은 저녁 잡숫고 눈 좀 붙이이소." 영선네한테 말하고 부자는 종종걸음으로 산길을 내려간다. 그들이 가고 난 뒤 "어무이 저녁을 어찌할까요?' 영선이 시어머니한테 물었다. "저녁은 내가 다 해놨네라. 채리기만 해서 가지오니라." "예." "그라고 깨미움을 좀 쑤어놨인께 그것도 한 그릇 상에 올리서 가지오고." "예." "선아야, 니도 나가서 엄니 거들어라." "예 할무이." 선아는 어미 치마꼬리를 잡고 방에서 나간다. "사돈." "예." "이자는 그만 우리하고 사입시다." "그, 그렇지마는." "다 잊아뿌리고 도솔암에 댕기믄서 저승길이나 딲업시다. 살믄 우리가 엄매나 살겄소." "..." "십여 년 전에 우리 선아에미 놔두고 가심서, 맴이 아파 그랬겄지요, 한분도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든 바깥사돈 이 지금도 눈에 삼삼합니다." "..." "언제가는 식구들이 모이서 옛말하고 살 기다, 하고 생각했더마는 천지신명이 무상하요." "원망하믄 머하겄십니까. 다 소용이 없는 일이라예. 생각하믄 야속하믄서도 불쌍하고." 처음으로 영선네는 제대로 된 말을 했다. 딸을 마나 마음이 한결 진정된 것 같았다. "단 하루도 편키 못 살고 갔인께요." "와 아니라. 그것은 나도 아요." "사고무친한 곳에서 임종에 아무도 없이, 어, 어떻게 혼자 떠났는지... 그기이 젤 서롭소." 붙었던 입이 떨어진 듯 겹겹이 싸인 한을 찢어내듯 영선네는 스스럽게 울고 휘의 모친도 눈물을 닦는다. "선아할배가 말하더마요. 가솔의 일이라 카믄 그렇게 애살스러울 수가 없고 자개는 거기 비하믄 벅수라 캄서, 식구들 남기놓고 참말 이제 우찌 눈을 감았일꼬." "집에서는 그렇지도 않았십니다." "아무튼지간에 사우도 자식 아닙니까. 아들이라 믿고 으지하고 사입시다. 산 사람은 살아야 안 하겄소." "예. 밥 묵고 잠자고 금수만도 못합니다." 저녁은 먹는 둥 마는 둥, 영선네는 깨미음에도 손도 대지 않았다. 입속이 마르는지 숭늉만 마셨다. 설거지를 끝내고 영선이 손을 닦으며 방에 들어왔을 때 사방에서 어둠이 밀려왔다. 배를 타고 차를 타고 걷고 해서 고단했는지 선구는 할머니 무릎에서 어느덧 잠이 들었다. 선아는 등잔에 불을 밝힌다. 지치고 여위어 눈 만 퀭하니 뚫린 영선네 얼굴이 벽을 등지고 있었다. "어이구 내 새끼, 떨어졌구나." 휘의 모친이 선구를 안고 일어선다. "그라믄 애딸이 그 동안 쌓인 얘기나 하시이소. 선아야 니도 가자. 할매랑 함께 자자." 아이들과 시어머니가 나간 뒤 "엄니!" 영선은 어미에게 몸을 던졌다. "엄니!" "운냐, 운냐." 영선네는 딸의 등을 쓸어준다. "불쌍한 울아부지!" 소리를 죽이며 운다. 한동안 모녀는 하염없이 울었다. 산에서도 소쩍새가 구슬피 울고 있었다. "영선아." "엄니." "울지 마라. 이자 그만 울어라. 어디 얼굴 한분 보자." 영선네는 치맛자락을 걷어서 어릴 적에 그랬던 것처럼 딸 얼굴의 눈물을 닦아준다. "그 동안 얼매나 고생을 했노." "엄니한테 비하믄 내가 한 고생이사 머." "통영서 아아들 애비는 머를 하고 사노." "소목일이요." "그것 해가지고 살 만하나?" "밥은 안 굶소. 오두막도 하나 장만했고, 처음에는 좀 고생했지만." "사람은 우떻노." "학교 공부는 못했지만 고학을 읽어서 사리에 밝고 근실합니다." "니한테 잘해주나." "야." "니 오래비하고 니를 만내는 것이 내 소원이더마는, 우째 소원이 이렇기 이루어지는지 모리겄다. 내가 죽고 니 아부지가 살아야 하는 긴데." "이제는 엄니라도 오래 살아주어야 한이 없을 깁니다." "살고 접잖다." "그런 소리 마이소. 울고 갈 친정도 없었던 생각을 하믄, 그기이 얼매나 서럽고 외로운지 엄니는 모를 기요." "..." "그런데 엄니 영구는 와 안 데리고 왔십니까." "그 아는 핵교 댕긴께 대학교를 댕긴께." "대학교를요?" "운냐, 공부를 잘해서 들어갔는데 니 오래비 몫까지 해야 안 하겄나? 영구도 따라올라고 하더라마는, 모두가 의논을 해서 영구는 남아 있기로 했다." "학비는 어쩌고." "그기이, 학비가 별로 안 드는 핵교고, 기숙사가 있어서 묵고 자는데는 지장이 없고, 또 책임을 져줄 사람이 있어서 그 아 걱정은 안한다." "그 사람이 누군데요?" "니 아부지하고 태생이 같고 공장도 하고, 그 얘기는 차차로 하자. 그런데 니는 터울이 와 그리 늦노." "하나 잃어부맀십니다." "우짜다가?" "홍역 끝에 그만." 소쩍새는 여전히 울었다. 쉬었다가는 또 울고. 모녀도 흔들리는 호롱불 밑에서 얘기를 하다간 울고, 울다간 얘 기하고, 밤은 깊어갔다. 도솔암에서 늦게까지, 소지감이 영가를 위하여 목탁을 치며 지장경을 독송하고 있었다. 백골이 되어 돌아온 지 난날의 동지, 아니 친구,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친구일 수도 없었고 동지일 수도 없었던 이상한 만남으로 이 루어졌던 교류를 생각하면서 소지감은 목탁을 두드리고 독경을 하는 것이었다. 진보적 사회주의자였던 이종 이범준, 그가 진주의 형평사운동에 가담하면서 동지가 된 송관수와 소지감, 살아온 역정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 고 생리적으로도 친구가 될 수 없었으며 더더구나 동지도 될 수 없었던 사이, 그런 그들의 교류는 어떤 것이 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민족의 동질감이었을 것이다. 운동권 밖에 있었던 소지감이 십여 년 전 군자금 강탈 사 건에 미약하나마 가담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민족의 동질감 때문이 아니었던가. 아무튼 소지감이 산 사람이 된 데는 해도사의 존재도 컸지만 송관수와의 만남이 무관하다 할 수 없고 삭발하고 가사 걸친 중으로 변신한 것에는 구자금 강탈 사건의 영향이 컸던 것을 부인 못한다. 소지감은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토록 긴 방 랑, 그토록 깊은 고뇌를 끝내고 젊은 날 입산한 일이 있었던 자리로 돌아와 지금 목탁을 치고 있는 것이다. 소 짐감의 마음은 비통하지 않았다. 평화스러웠다. 소지감의 마음은 서글프고 쓸쓸하지가 않았다. 자신을 위해서 도 송관수를 위해서도 어딘지 모를 뿌듯함이 없었고 교류가 아닌 합류를 느끼는 것이다. "아땀 참 길기도 하다. 대강 하믄 좋겄구마는." 강쇠는 혀를 찼다. 강쇠의 추도하는 방법은 목탁이나 염불이 아니었다. 그는 고함 지르고 소란을 한바탕 피우 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밤은 깊을 대로 깊었고 법당 문을 열고 소지감이 나오자 송영광과 휘는 절방으로 들어 갔고 가사와 장삼을 벗은 소지감 해도사 강쇠는 도솔암 가까이 새 둥지를 틀어놓은 해도사 산막을 향해 마치 개구쟁이들처럼 달려가는 것이었다. 술과 안주는 다 준비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땡땡이중이라 카는데 무슨 염불을 그리키 오래하요." 강쇠가 허두를 텄다. "무식한 귀신은 진언도 못 듣는다 했소이다." "그라믄 내가 진언도 못 듣는다 그 말이오?" "아암, 그러니 김장사는 죽어서 혼백이 절 근처에 떠돌아도 법의 보시를 못 받는다 그 말이오." "그런께 저승으로 못 가고 거릿구신으로 떠돈다 그 말이오?" "그렇지요." 하자 해도사가 "걱정 마시오 김장사, 어차피 저승으로 간다면 지옥밖에 갈 곳이 없을 것인즉, 이곳에 남아 있는 편이 백번 낫 지." 하고 실실 웃는다. "하지마는 해도사 소지감선상이 모두 지옥으로 가부리고 나믄 나 혼자 심심해서 안 될 긴데." 술잔이 돌았다. 반백머리의 해도사는 희미해 보였다. 나무 옆에 있으면 나무 같을 것 같았고 바위 옆에 있으면 바위 일부일 것 같았고 물가에 있어도 눈에 뛸 것 같지가 않았다. 소지감은 깡말라서 팔다리가 길어 버마재비 같았고 눈은 아주 맑게 갠 하늘 같았다. 강쇠만은 머리가 비교적 검고 잔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살빛이 흰 덕 택인지 늙은 푼수가 꽤 괜찮았다. "그것은 염려 놓으시오. 내가 옆에 끼고 가리다. 원하면 말씀이오." "되잖은 소리 하지도 마소. 아아니 이 김장사 거구들 우떻게 잔내비 겉은 해도사가 끼고 간단 말이오. 서천 쇠 가 웃겄소." "허허어, 저러니 무식한 귀신은 진언도 못 듣는다는 말을 듣지. 혼백한테 무슨 놈의 무게가 있단 말이오. 자아 사레 들지 않을 만큼 천천히 술 마시고 울든지 웃든지, 한바탕 분탕질을 치든지 해야 할 것 아니오." "흥! 울기는 와 우노. 뭐가 서러바서, 사내 대장부가 울믄 산천초목이 흔들린다 카는데 그 귀한 울음을 내가 울 상싶소? 뒤쫓아가서 그 숭악한 놈, 다리뭉댕이 뿌루고 눈두덩이 터지게 주먹질 못하는 게 한인데 흥!"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언젠가 한번 그린 일 있었지요?" 소지감 말에 해도사가 "구례 길노인 생신 때 한바탕 붙었지요." "맞소. 그때는 누구 눈두덩이 터졌든가?" "말하믄 잔소리지. 그때 내가 개 패듯 그놈을 패주었지요." "나 땜에 그랬지요? 애꿎은 송형이 당했지." "아직 꼬투리가 남아 있소?" "머리 깎을 때 버렸소이다." "허 참, 그때까지 그라믄 유갬이 있었다 그 말이구마는." "나를 친 거나 진배없는데 꿀먹은 벙어리 냉가슴 앓았으니 그게 그리 쉽게 잊을 일이든가." "그릇이 제법 큰 줄 알았는데 형편없구마. 왜놈 술종지요 술종지."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어먹으며 강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산밑에서는 사람들이 소선상보고 땡땡이중이라 캄서 숭들을 보는데. 그 염불이라는 기이 진언이오? 하기시 부시기 어매야 아배야 그냥 줏어삼키는 말 아니오?" "하시기 부시기지 뭐." "그럴기요. 몇십 년을 중질 해도 나무아미타불하고 관세음보살밖에 못하는 중이 많다 카든데 벼락치기로 중이 된 소산상이 무슨 진언인가, 머 지신 밟는 소린가 그걸 하겄소." "부처님 같은 말씀 하시네." "야? 뭐라 캤소?" "부처님 같은 말씀 한다 했소이다." "그기이 무신 소리요? 답대비 유식꾼들은 바람 소리 겉은 말을 한께로 종잡을 수가 있어야제." "허허어. 김장사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오. 본시 아무것도 없거든. 아무것도 없단 말씀이오." 해도사가 또 실실 웃으며 말했다. "하믄은 중질은 와 하요." "없어질려고 하는 거 아니오, 하핫핫핫." 소지감은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나는 또 불사나 받아서 묵고 살라고 그러는 줄 알았지. 없어질라 카믄, 그기이 머가 어럽어서 관수 그놈맨치 로 불간에 들어가믄 될거 아니오. 안 그렇소?" "없어지기는커녕 지금 법당에 와서 딱 앉아 있질 않소?" "내일 강물로 들어가믄 고기밥 되지." 하는데 강쇠 목소리는 "또 한번 힘이 빠진다. "송형 아들 말씀인데." 해도사가 말머리를 돌렸다. 순간 강쇠는 표정이 달라지면서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천고가 든 상호더구먼." "그런 말은 와 하요." 퉁명스럽게 매우 불쾌해하는 투로 강쇠는 말했다. "무슨 악의가 있어 한 말은 아니오. 그럴 리도 없고 그것이 반드시 나쁘다는 뜻만은 아니외다. 가슴이 아파서 한 말이었소." "한치 밖을 모리는 기이 사람인데 그런 말 마소." 심각해지면서 강쇠는 강하게 말했다. "가슴이 아프다 하니 기분이 좋잖았던 모양인데, 하 참 저러니 무식한 귀신 진언도 못 듣는다는 말 들을밖에." "한판 붙어볼라요?" "아아 천만에 사양하겠소이다. 분탕질하는데 이 산막은 내놓았소만 나는 아니오." 해도사는 팔을 휘휘 내저었다. 강쇠가 더 이상 응수하지 않고 술을 마시니 방안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울어도 할 수 없고 웃어도 할 수 없고 사람이란 명대로 살 수밖에 없는 것, 명대로... 김휘도 그렇고 몽치놈도 그렇고 송형의 아들, 영광이라 했든가? 세 사람 모두가 범속하지 아니 한 것 또한 웃어도 울어도 할 수 없는 명운인 것을." 해도사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울렸다. 강쇠는 여전히 응수하지 않았고 소지감은 개의치 않겠다는 듯 술잔을 들 었다. "범속하지 않은 명운이란 사람에게만 한한 것은 아니며 천지만물 억조창생, 생을 받은 그 모든 것에도 해당이 되는 것인즉, 천년을 사는 거목의 신령함이 있는가 하면 같은 나무로 태어나서 진작부터 베어져 불간으로 들 어가는 불운이 있고 동네 어귀에서 세상 구경, 귀가 시끄러운 나무가 있는가 하면 벼랑끝에 홀로 있기도 하 고." "어디서 많이 든든 풍월이긴 한데, 해도사, 자다가 봉창 뚜디리는 거요?" 소지감이 핀잔을 주었지만 해도사도 개의치 않겟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날짐승 들짐승 벌레며 초목 미물에 이르기까지, 물속에서 기고 헤엄치는 목숨들, 생을 받은 억조창생 그 수없 는 거의 명운이 어찌 그다지도 신묘하게 같지 아니한지, 연이나 각기 다르되 각기의 순환, 운동은 한결같이 같 으니 그 조화가 대체 무엇일꼬. 운동은 시간의 연속이라, 하면은 유구한 시간을 돌아서 사람이 되는 시점이 있 고 짐승이 되는 시점이 있고 초목이 되는 시점이 있고, 재앙의 자리 홍복의 자리도 번갈아서 오고가는 것, 그 것이 법일진대 그 법을 짜놓은 존재는 대체 무엇일꼬. 조물주라고도 하고 창조주라고도 하고 신이라고도 하 고." 하늘의 별과 산막에서 새나간 불빛밖에 없는 심산유곡의 깊은 밤, 물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데 이따금 고라니 울음도 들여오는 듯한데 주연이라 할까 송관수의 추도회라 할까, 그것 자체가 괴이쩍은 일이거늘 소지감이 ' 자다 봉창 뚜디리느냐', 했듯이 해도사의 모습이야말로 한층 기괴스럽고 주술적이다. "그 조물주의 무자비함이야말로 목숨 속에 깃들여진 원초의 두려움이요 슬픔이라. 허나 그 무자비함이 공평인 것을 어쩌랴. 여지 없는 순환은 선악의 인으로서 과로 통하고 물의 정연함과 더불어 영 또한 정연하니 오늘과 같은 말법의 시대도 세 법의 도래를 준비하는 것으로 보아야 옳고 정연한 순환에 따라 말법은 썩어서 새것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 흔적 없이 되는 것이, 병든 목숨이 죽어서 썩어 없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 하여 우주 는 나요 나는 우주라. 홍복도 내 자신의 것이요 재앙도 내 자신의 것이며 벌레인들 내 자신 아니라 못하리. 날 짐승 들짐승도 내 자신이며 간 사람도 내 자신이며 오는 사람도 내 자신, 모든 것은 일체요 또한 낱낱이라. 일 체가 같은 것이라면 낱낱은 다른 것, 이 무궁무진함을 어찌 인간이 헤아리고 가늠하리." "보소 해도사!" 하다가 강쇠는 목이 따가웠는지 캑캑 기침을 했다. "사레 들지 않게 천천히 술 마시라 하지 않았소." 해도사는 지금껏 한 자신의 말을 두동강이로 분지르듯 어세를 바꾸고 놓치듯 말했다. "개대가리 죽쑤어 묵고 옴대가리 찜쪄 묵는 그 따우 소리 그만 못하겄소!" "김장사 죽어서 절 근처를 맴돌 때 법의 포시라도 받으라고 지감 법사 대신으로 해본 말 아니오. 또 세 사람 젊으니 명운 얘기를 했던 거구요. 뭐 잘못되었소?" "김장사 그 따위 잡설에 귀기울일 것 없소. 성도를 포기한 가짜 도사의 말이 뭐 그리 대수겠소, 하하핫핫..." 소지감의 웃음 소리는 아까보다 컸지만 맥이 쑥 빠져 있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보고 짖는다 하더니 불과를 포기한 땡땡이중이 할 말은 아닌 듯싶소이다." "흥! 놀고 있네. 점쟁이 땡땡이중, 죽이 맞구마는. 보소 해도사, 머라 캤소? 세 사람 젊은이의 명운 얘길 했소? 앵이꼽고 참말로 가소롭다. 애비 에미 없이 산중에 떨어진 몽치놈이나 산놈으로 태이나서 숯을 굽다가 도방으 로 나간 내 아들놈이나 백정의 피를 받고." 또 기침을 한다. "범속인지 굴속인지 팔자가 사나울 것은 까막눈 졸때기, 살강 밑을 드나드는 생아쥐도 알 만한 일, 유식한 문 자 써가믄서 말할 것도 없는 기라. 본시 문자라는 그기이 알쏭달쏭해서 점치러 온 사람 주머니 털어묵기 십상 이고 자고로 그것 가지고 백성들 가르치기보다 등쳐서 간 뽑아묵는 데 쓰여오기는 했지마는 대나깨나 대가리 디미는 거 아니라고 가아들 앞날이 고생바가지라는 거는 태어날 적부터 점지된 거를 새삼스럽게 나베어살 것 머 있소? 오장 뒤집히서 술맛 떨어지게시리." 소지감은 삭발한 머리를 슬슬 긁으며 웃고 있었다. 해도사는 안주를 집다 말고 젓가락을 상 위에 탁! 놓으며 "등쳐서 간 뽑아먹는 데 쓰이는 그놈의 글, 술병 들고 눈길 헤치며 찾아와서 아들놈하테 글 가르쳐달라, 내게 너부죽 절한 사람이 누구더라? 지리산 중놈이던가?" "그거야 머, 간 뽑아묵는 놈 실개 씹으라고 그랬제." 강쇠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허허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식자한테 무슨 놈의 쓸개가 있누. 쓸개, 간 다 뽑아버린 지가 이미 오랜 옛일인데. 허나 오늘은 그 얘기 일단 접어두기로 합시다. 불끈뿔끈 성질낸 까닭을 이제사 겨우 알게 되었으니, 해서 하는 말인데 이보시오 김장사, 아까 내가 송형 아들한테 천고가 들었다고 했는데 그 말을 꼬깝게 생각한 모양이오만 그건 오해요. 그런 것쯤은 아녀자들도 알고 있는 일이라 설명을 아니 했던 것이 잘못이었소." 하면서 해도사는 사팔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강쇠 얼굴을 슬쩍 쳐다본다. "그 천고의 고짜는 괴로울 고가 아니며 홀로 고란 말씀이오. 그러니까 알기 쉽게 말을 하자면 고생상이 아니 라 외로울 상이다 그 말이오." "그거나 저거나, 메치나 엎어치나 매일반 아니요! 맘고는 고가 아닌가? 사람이 외롭지 않다믄 멋 땜에 고생을 하겄소.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손가락만 물리믄 젖이 저로 나와서 그거를 빨아묵고 컨다는 천상의 아아들 이야 기는 들었지마는 이 풍진세상 천애고아가 고생 없이 자랐다는 말 듣도 보도 못했소!" "제법 귀동냥은 했구먼." "머이 어째요?" "지감법사와 나를 보시오. 지감 법사는 백정 혈통도 아니구 숯 굽는 산놈 자손도 아니오. 나 역시 물배나 채우 는 가난뱅이 자손도 아니었소. 허나 지감이나 나는 천고성이오." "그래서 우떻단 말이오." "지감께서는 고생을 했소이까?" 해도사가 넌지시 묻는데 소지감은 또 음흉스럽게 "글쎄올시다, 흐리멍텅하게 살아놔서, 어느 만큼을 고생이라 하는지. 자로 재볼 수도 없고 그러나 굶주린 일은 없었고 모진 일 해본 적은 없었소." "거 보시오. 쓸 고와 홀로 고가 다르지 않소?" "이거 머 아아들 동전 갖고 노는 기가? 와 이라노." "천고도 모르는 사람 알기 쉽게 하는 거요. 송형 아들한테 천고가 들었다 하니 김장사는 쪽박차고 빌어먹는 것으로 알았소?" 강쇠의 낯빛이 싹 변한다. "영광이는 내 아들과 진배없소. 그런 말 함부러 해도 되는 기요?" "함부러 한 게 뭐 있소? 쪽박차는 팔자 아니라는데 어째 징을 내시오? 여하튼 오늘은 김장사한테 몽땅 내놨으 니 한껏 핏대 올려보시오. 왜요? 하든 지랄도 멍석 깔아놓으면 안 한다 하더니 말이 막혔소?" "집어치아라! 양반 소반 안 부럽다! 그 다우 졸부 안 부럽다! 씨도 못 받은 주제에 세상 나온 값도 못한 주제 에, 니깟것들 사람 사는 기이 먼지 알기나 하나? 사람 사는 기이 멋꼬! 유식한 것들 어디 말 좀 해보라고! 돈 푼 있는 놈, 문벌이 있어서 덕분에 식자깨나 얻어걸치고 그것 밑천 삼아 입치레하고 살아온 것들이 머 어쩌고 어째? 몸으로 때운 기이 머 하나 있다고 잘난 소리 하노 말이다. 매맞고 걷어채이고 손바닥이 논바닥 되게 일 을 해도 못 묵고 굶는데 일 안 하고 안 굶은 기이 자랑가! 그기이 호패가!" 강쇠는 펄펄 뛰며 악을 썼다. "낱낱이 다 맞는 말이오. 허허헛헛 맞는 말이고말고. 한데 김장사 말로는 그러지만 어째 화를 내시오? 겁을 내 고 있는 것 아니오? 자랑스럽지 못한, 잘먹고 잘사는 꿈 그 따윈 잊어버리시오." 태연하게 해도사는 말했으나 그 말 속에는 준열함이 있었다. 말이 막힌 강쇠는 입을 실룩거리다가 슬그머니 한다는 말이 "자식 없는 것들이 어디 사람가. 하루 이틀 사귄 사이도 아니요 십여 년을 산에서 함께 살면서 서로가 서로의 뱃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처지, 신분의 차이라든지 식자유무 따위는 벌써 옛날에 헐어버린 담이었다. 그것은 가 쇠가 인간으로서 그릇이 크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청춘을 다 바쳐 그림자같이 따라다녔던 김환의 영향력은 절 대적인 것이어서 강쇠의 판단력, 사고의 깊이는 본래의 소박함, 우직을 능가했고 한 우두머리의 풍모를 엿볼 수 있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래 그들의 노는 푼수가 그러했고 유독 오늘 밤 강쇠 비위 를 긁은 것은 말하자면 참담한 일에 대한 살풀이 같은 것이라 할까. 송관수의 죽음은 사실 죽음 그 이상의 의 미로서 이들을 응축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술잔을 메어치고 강쇠는 밖으로 나왔다. 달이 휘영청 밝았다. 무작정 걷는데 가슴이 타는 듯했다. 입속이 바싹 말라서 혀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발에 익은 산길을 한참 지나서 개울가까지 온 강쇠는 엉덩이를 치켜들고 물을 굴컥굴컥 들이켠다. 손바닥으로 입가를 닦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별안간 중천에 떠 있는 서 늘한 달이 슬렁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마치 밤바다에 떠 있는 차디찬 해파리처럼. 동시에 산기운 이 싸! 하고 전신을 감싸면서 다리가 후들후들, 한기가 든다. 그러나 얼굴은 뜨거웠다. 목에서는 단내가 나는 것 같았다. 개울가에 있는 썩은 등걸나무에 걸터앉은 강쇠는 옷 앞자락을 끌어당겨 얼굴을 문질러본다. '다아 끝장난 기라. 끝장이 났어.' 조끼 주머니 속에서 궐련을 꺼내어 붙여문다. 소쩍새가 자지러지게 울어쌌는다. '내 한평생도 이자 끝이 안 셈이고 간 사람 남은 사람, 와 이렇기 모두 허망하노 말이다. 끝간 데 없는 이 깊 은 산이 나를 미치게 하네.' 순간 강쇠 귀에 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억서억 칼 가는 소리, 김ㅅ환이 유치장에서 목을 매고 죽은 뒤, 그를 밀고한 지삼만을 죽이려고 한밤에 강쇠는 칼을 갈았다. 그러나 그때 생각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고 해 도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술병 들고 눈길을 헤치며 찾아와서 아들놈한테 글 가르쳐달라, 내게 너부죽 절한 사람이 누구더라?' 강쇠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날의 정경 하나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상을 뒤덮은 하얀 눈에서 시작된다. 눈이 내린 뒤, 산속은 급격히 기온이 떨어져서 나뭇가지에 실린 눈은 설화이기보다 빙화였었 다. 끝없는 빙화의 수림 속을 헤매듯, 미끄러지며 걸으며 떨어뜨려서 깨지 않으려고 해도사에게 가져가는 술병 을 신주 모시듯, 가다가 한 구절밖에 모르는 노래 "한 오백년"을 되풀이하여 불렀는가 하면 흐느껴 울었고 고함을 치기도 했었다. 딸아이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렇게 혼자 발광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실 로 놀라운 일을 경험했던 것이다. 죽은 김환과의 산중문답 그것인데 강쇠로서는 아직도 설명이 안 되는 신령 스런 경험이었다. 그 후반을 되새겨보면 다음과 같다. ...만물이 본시 혼자인데 기쁨이란 잠시, 잠시 쉬어가는 고개요 슬픔만이 끝없는 길이네. 저 창공을 나는 외로 운 도요새가 짝을 만나 미치는 이치를 생각해보아라. 외로움과 슬픔의 멍에를 쓰지 않았던들 그토록 미칠 것 인가. 그러나 그것은 강줄기 같은 행로의 황홀한 꿈일 뿐이네. 만남은 이별의 시작이란 말도 못 들어보았느 냐?... '그거는 머, 다 하는 얘기 아니겄소.' ...부처는 대자대비라 하였고 예수는 사랑이라 하였고 공자는 인이라 했느니라. 세 가지 중에는 대자대비가 으 뜸이라. 큰 슬픔 없이 사랑도 인도 자비도 없을 수 있겠느냐? 어찌하여 대발 하였는고. 공이요 무이기 때문이 며 모든 중생이 마음으로 육신으로 진실로 빈 자이니 쉬어갈 고개가 대자요 사랑이요 인이라. 쉬어갈 고개도 없는 저 안일지옥의 무리들이 어찌하여 사람이며 생명이겠는가... '성님!' ...마음으로 육신으로 고통받는 자만이 누더기를 벗고 깨끗해질 것이며 뱃가죽에 비계 낀 저 눈물 없는 무리들 이 언제 그 누더기를 벗을꼬. 고달픈 육신을 탓하지 마라. 고통의 무거운 짐을 벗으려 하지 마라. 우리가 어느 날 어느 곳에서 만나게 된다면 우리 몸이 유리알같이 맑아졌을 때일까... 그 만남의 일순이 영원일까. 강쇠야 그것은 나도 모르겠네... '참 내, 무신 그런 말이 있소. 그렇다믄, 성님 말씸에 따르자믄 성님은 후회도 여한도 없거구마요. 그러크럼 고 달프고 고통시럽게 살다가 갔인께요. 무신 후회가 있으며 한이 남았겄소.' ...하하핫 하하핫핫 후회라, 회회는 없겠구나. 내 생전에도 회회는 아니 했으니, 한이야 지가 어디로 가겠나... '우째서 한이 남소? 후회 없이믄 한도 없제요.' ...한이야 후회하든 아니 하든, 원하든 원치 않든, 모르는 곳에서 생명과 더불어, 내가 모르는 곳, 사람 모두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온 생명의 응어리다. 밀쳐도 싸워도 끌어안고 울어도, 생명과 함께 어디서 그것이 왔을꼬? 배고파서 외롭고 헐벗어서 외롭고 억울하여 외롭고 병들어서 외롭고 늙어서 외롭고 이별하여 외롭고 혼자 떠 나는 황천길이 외롭고 죽어서 어디로 가며 저 무수한 밤하늘의 별같이 혼자 떠도는 영혼, 그게 다 한이지 뭐 겠나. 참으로 생사가 모두 한이로다... 그때 강쇠는 자신이 저승, 삼도천 강가를 지나가고 있는 것 같은 환각에 빠졌었고 정신을 차린 뒤에는 김환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눈에 덮인 산의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튿날. 도솔암 법당에서는 새벽부터 지감의 독경 소리가 들려왔고 날이 희뿌옇게 밝아왔을 때 상좌 일봉이 빗자루를 들고 나와 절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일휴는 도솔암에서 사미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해인사에서 수도중이었다. 도솔암에는 주지 지감과 상좌 일봉, 공양주인 늙은이 세 사람이 있었다. 큰 불사가 있을 때는 산밑 마을의 신 도들이 와서 거들어주는 형편인데, 길노인은 세상을 떠났고 소지감이 술을 마시며 속인과 같은 행동을 곧잘 해서 땡땡이중이란 말을 듣기는 했으나 학식이 깊었고 경전에 능하며 가사를 걸치고목탁을 들 때 그 위엄이 예사롭지가 않아 불사를 맡기는 신도가 적지 않았다. 해서 도솔암은 길노인이 공양미를 대주던 시절과는 사정 이 달랐다. "일봉아, 일봉아." 나직이 부르는 소리에 "누구요." 일봉이 돌아보았을 때 소사가 팔짱을 끼고 새벽 이슬에 젖어 오종종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침 일찍 웬일입니까."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제 유골 모시고 온 손님 말이다." "...?" "그 손님 어디서 오셨니?" "그거는 왜요?" "글쎄 어디서 오셨느냐구." "부산서요." "김장사가 마중나온 걸 봤는데 그 사람들 누구지?" "참 별걸 다 묻소." "일봉아 얘기해봐. 누구지?" "김장사 사돈이래요." 역시 퉁명스럽고 귀찮다는 듯 말했다. "사돈..." 소사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지연이 가서 알아보고 오라는 성화에 못 이겨 투덜거리고 나온 소사였 으나, 또 지연이 희망을 걸고 있는 그같은 실마리가 있을 리 만무이며 부질없는 짓, 언제 그 병에서 풀려나나, 짜증을 부리기도 했던 소사였으나 일진이 만주로 갔을 거란 지연의 믿음이 어느덧 소사에게 반영이 되어 알게 모르게 그도 믿었는지 모른다. 그 유골이 만주에서 왔다면 일진의 행방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란 지연의 생각 도 어느새 소사 의식 속에 옮겨져 있었는지 모른다. 여자의 직감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지연의 추리는 정확히 들어맞은 셈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볼 때 그것은 황당한 것이었고 지연이 자신조차 구우일모의 가능성에 집착 하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무위하고 덧없이 가는 시간 속의 몸부림이며 고인 물을 흔들어 파도치게 하려는 충동이었는지, 어둠 속에 도사리고 앉은 산고양이가 반딧불에도 덤벼보는 그같은 심사였는지, 여하튼 소사는 실망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사돈이라 하는데는 더 이상 뭣을 물어보겠는가. 날씨는 청명했다. 늦더위가 남아 있었지만 습기 없는 산들바람이 사람들 살갗을 쾌적하게 스쳐가곤 했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 유해는 도솔암을 나섰다. 목탁을 치며 독경을 하며 지감이 앞장서서 유해를 인도했고 유해를 뒤따른 사람은 영선이와 영선네, 휘의 모친 그리고 휘와 강쇠 해도사 짝쇠 안서방이었다. 가파로운 곳 에서는 목탁과 독경 소리가 멎었고 순탄한 길에선 목탁이 울리고 독경 소리가 울렸다. 일렬종대로 가는 일행 을 떡갈나무 그늘이 사로잡았다가는 놓아주곤 한다. 하늘이 숨었다가는 나타나곤 했다. 강가에 당도한 일행은 그곳에서 멈추었고 미리 얻어놓은 작은 배에 유해를 실었다. 영광과 김휘가 승선하자 사공은 노를 저었다. 지감은 눈을 감고힘찬 목소리로 독경했으며 여자 세 사람은 오열했고 나머지는 배를 바 라보았다. 강심을 향해 멀어져가는 배를. 망자의 아들과 사위가 유골을 강물에 뿌리기 시작했다. 휘는 굳은 침묵으로 그 일을 행하였고 영광은 아이처 럼 흐느끼며 아버지를 불렀다. 그 일이 다 끝났을 때 휘는 먼산을 바라보았으며 영광은 뱃바닥에 엎드려 뱃바 닥을 치며 통곡했다. 강물은 무심히 흐르고 하늘의 실구름도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도솔암으로 돌아온 일행은 절마당 여기저기 흩어져 우두커니 서있다가 여자들과 안서방 짝쇠는 집으로 올라갔 고 나머지 다섯 명의 사내들은 절방에 모여 앉았다. 앞으로의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시종 말이 없었던 영 광이 호주머니 속에서 접은 봉투 하나를 꺼내었다. "먼저 이것을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서, 아저씨." 봉투를 강쇠에게 건네주려 하자 "아저씨라니, 사돈어른이라 해야지." 해도사가 나무라듯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아저씨믄 우떻고 아부지믄 우떻노 괜찮다, 한데 이기이 멋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홍이형님한테 남긴 유서입니다." "그래?" 언해는 겨우 해독하는 강쇠가 봉투 속에 든 것을 꺼내었다. 홍이 보아라. 내가 아무래도 심상찮은 병에 걸린 것 같다. 신경으로 돌아가자니 심상찮은 병 때문에 어러불 것 겉고 가다가 죽어도 곤란한께, 아무튼지 만일을 생각해서 한자 적기로 했다. 자손한테 물리줄 전답 한때기 없 는 처지에 무신 놈의 유서인가 할지 모리겄다마는 이대로 내가 가믄 남은 사람들 가심에 한을 심을 것 같애 서... 와 이렇게 맴이 담담한지 참 내가 생각해도 이상타. 내가 죽으믄 무도 고생만 하다가 갔다 할 기고 특히 영광이 가심에는 못이 박힐 기다. 그러나 나는 안 그리 생각한다. 그라고 후회도 없다. 이만하믄 괘찮기 살았 다는 생각이고, 장돌뱅이로 장바닥을 돌믄서 투전판이나 기웃거릴 놈이, 하늘 밑의 헐헐단신 계집이나 어디 하 나 얻어걸리겄나. 그렇다믄 많이 출세한 것 아니가. 새삼시럽게 지나온 길을 돌아보이 정말 괜찮기 살았구나 싶다. 넘하테 큰 실수 안 하고 이렇기 가는 것도 다행 아니겄나. 이것은 진정이다. 여한이 없다. 자식들은 제 갈길 갈 것 이고 다만 내 모친이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싰는지 자식 된 도리, 시신이 어느 산천에 묻혔는가 모 리고 가는 것이 나한테 남은 응어리다. 그라고 내 내자가 불쌍할 뿐이다. 그러나 본시 심성이 착하고 가는베 재놓은 듯키 말이 없는 사람이니 크게 남한테 폐가 되지는 않을 것이자만 그 사람을 당부한다고 전해주라. 흥 이 니한테는 신세 많이 졌다. 고향 산천이 보고 싶고 작별하고 싶은 얼굴도 많다마는 어차피 사람은 혼자 가 는 거 아니겄나. 강쇠는 옆에 앉은 해도사에게 편지를 넘겨주고 나서 담배를 붙여물었다. 몇 모금 피우다가 "빌어묵을 놈."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모두가 돌려가며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강쇠에게 돌아왔다. 강쇠는 편지를 영광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 펜지는 최씨댁 그 사람도 보아야 할 기다. 연학이한테 주믄은 그리고 갈 기구마." 영광은 평사시로 가서 환국을 만난다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비밀로 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라믄 이제부터 사부인을 어디 계시게 할지 일단 우리끼리 의논을 해봐야 안 하겄나." "그건 당연히 제가 뫼시야지요." 영광이 의외란 듯 말했다. "나는 미장가의 몸이고 일정한 거처도 없으니." "거처라면 서울 가서 마련할 수도 있고 그만한 준비는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라믄 장개부터 들어라." "그거는 차차..." 처음으로 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출가외인인데 그럴 수는 없지." 영광이 강한 어세로 말했다. "그럴 기이 아니라 당분간 안정이 될 때까지 우리랑 기시믄 안 되겄나?" 강쇠가 의견을 내놓았다. "이런 일은 가족끼리 의논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송형의 부인 의사가 중요하니." 해도사 말이었다. "그건 그렇네." 강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쇠 부자와 영광이 집으로 갔을 때 마당에서 선일이는 안서방 외손자랑 함께 놀고 있었다. 영선과 휘가 혼인 할 적에 죽네 사네 했던 순이는 그 후 산밑마을 농사꾼한테 시집을 가서 잘살고 있었다. 얼마 전에 출산을 하 여 산후 뒷바라지를 하러 갔던 안서방댁네가 돌아오는 길에 아우본 외손자를 데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멀찌감 치 짝쇠가 얼쩡거리고 있다가 사위 아들을 거느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강쇠를 바라본다. 방에 들어와 자리에 앉은 양편 식구들은 영선네 거취 문제를 놓고 각기 저네들 생각을 개진했다. 절에서 말했 던 것처럼 영광을 따라 서울로 가느냐, 당분간 통영의 영선이집에 가 있느냐, 아니면 산에 남아 정양을 하느 냐, 말없이 의견을 듣고 있던 영선네는 "나는 그만 절에서 공양주하고 함께 있었으믄 싶습니다." 하고 말했다. 영광과 영선은 비로소 모친이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것을 상기했다. "사돈댁도 가깝고 오며 가며." 영광과 영선은 그러는 어미를 설득하려 했지만 자식들 집에 가서 살지 않겠다는 영선네 의지를 꺾을 수 없었 다. "그것도 마 괜찮겄십니다. 당분간 절에 기시믄서 관수 명복도 빌고 그러는 기이 신양에 좋을 깁니다. 너거들도 너무 우기지 마라. 어무이가 편한 대로 해야 하는 기라." 강쇠는 단을 내리듯 말했다. 영광과 영선은 서로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자식들과는 함께 살지 않으려 하는가, 영선이나 영광은 알고 있었다. 자식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되다는 영선네 결심을. 어쩌면 그는 지상에 서 사라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만큼 그의 출생의 멍에는 무겁고도 가혹한 것이었다. 영광은 산에서 이틀을 더 묵었다. 그러는 동안 매부 김휘와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고 산속을 헤매어 다니기 도 했다. 산에 남은 영선네와 그곳 사람들과 작별을 하고 산을 떠날 때는 영선의 식구들과 함께였다. 그들도 통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화개까지 나와 강가에서 나룻배를 타고 하구를 향해 배가 내려 갈 때 "처남 이거 받아두소." 하며 휘가 접은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통영 우리집 주소요." 영광은 그것을 받아 호주머니 속에 간직한다. "오빠 꼭 한번 오이소. 우리 사는 것도 보고." 아이를 안고 옆에 있던 영선이 말했다. "그래 갈게." "오빠." "..." "부디... 엄니를 잊으믄 안 될 기요. 불쌍한 울엄니, 찾아보기가 어러부믄 편지라도 자주 하이소." "알았다." "엄니가 말은 안 했지만 오빠 형상 보고 맘속으로 많이 울었일 깁니다." "..." "잘난 내 아들, 잘난 내 아들 하믄서 울든 엄니 생각이 나요." "불편할 것도 없는데 뭘." "만나믄 할말이 태산이라 생각했는데 한마디고 못하고..." "사람이 할말 다 하고 살 수 있나. 나 같은 놈, 오라비로 생각해주는 것만도 과남하지." "그런 말 와 합니까." "내 잘한 것 없지. 식구들 못만 박았지." "그러고 싶어 그랬겠소." 나룻배가 평사리에 가까워졌을 때 영광은 조카 선일을 영선한테서 받아 안았다. 그리고 얼굴을 비비며 가느다 란 한숨을 내쉬었다. 나룻배에서 내릴 적에는 선아의 머리를 쓸어주고 호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돈을 꺼내어 쥐 여준다. "오빠!" "그럼 잘 가아." "처남 꼭 한번 오소." 휘가 말했다. "그러지. 매부도 몸조심하구." 하동을 향해 떠나는 배 위에서 두 내외는 강가에 선 영광을 멀어져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는 것이었다. 영광은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마을길로 들어서지 않고 강을 따라 천천히 걸어올라간다. 강물에 씻기고 햇빛에 바래어 하얀 자갈을 밟으며. 강언덕 아래 널찍한 바위 하나가 있었다. 바위에 걸터앉은 영광은 담배를 꺼내어 붙여불며 강 건너 산을 바라본다. 마을에서 상당히 떨어졌는지 인적기가 없었다. 눈에 비치는 것은 푸른 하늘, 강 건너 푸른 산, 그리고 청록색 강물이었다. 너무 조용했다. 공간이 유리처럼 눈부시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 남강여관에서도 그렇게 느꼈지만 꿈 같기만 했다. 방금 헤어진 누이 영선, 세파에 시달린 그러나 옛모습을 간직한 그를 꿈속에서 본 것처럼 느껴졌다. 남 강 다리 위를 유해를 안고 걸었던 일이며 법당의 독경 소리, 지감에게 인도되어 일렬종대로 내려가던 산길, 그 푸름의 공간도 꿈길에 있었던 일만 같았다. 그런가 하면 이십일 넘게 진행되었던 일들이 모조리 선명하게 상 세하게,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과도 같이 마음속에서 펄러덕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 강가 바위가 종 착역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죽음에 대한 강렬한 유혹이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진정 자신의 삶에 후회가 없었을까? 무엇이 아버지로 하여금 후회 없게 했을까?' 물새 한 마리가 돌팔매처럼 강물 수면 위로 핑! 핑 건너지르다가 날아오른다. 뗏목 하나가 하류를 향해 흐르 고 있었다. '서울 가면 혜숙을 찾아볼까? 혜숙과의 관계를 되돌려볼까? 그 여자에게 어머니를 맡기고... 서로 의지하며.' 영광은 다시 담배를 꺼내어 붙여물며 쓰디쓰게 웃는다. 웃던 얼굴은 차츰 일그러졌다. 타산과 냉혹함, 자신의 추악한 부분이 구역질나게 싫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자신이 걸터앉은 널찍하고 편안한 바위가 종착역같이 느 껴졌다. 아까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죽어버릴까... 저 강물에 들어가서 드러누워버릴까.' 물리치기 어려운 유혹이 영광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나는 벌써부터 어머니한테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슬픔에서 놓여나기를 원하고 있 다. 나쁜 놈! 나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 혼자만의 동굴을 찾고 있다. 그것이 추방이든 도망이든 죽음이든.' 바로 옆에서 자갈 밝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운동화를 신은 여자의 발이 맨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날씬한 종아리, 주름진 꽃무늬 치마, 녹색 계통이었다. 미색 블라우스, 미색 블라우스를 느꼈을 때 그것은 여자의 뒷모 습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여자, 우선은 인기척을 낼 겨를도 없을 만큼 놀랐지만 영광은 뭔지 침해를 당한 것 같은 기 분이었다. 별안간 돌팔매가 날아와서 의식세계가 찢겨져버린 듯 당혹스럽고 화가 나는 묘한 그런 기분인데 그 보다 인적 없는 곳에 여자가, 그것도 이런 시골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도시풍의 젊은 여자가 세련된 양장 차 림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영광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여자는 영광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바위 옆을 지나갔는데, 그러니까 영광이 앉은 언덕 밑 바로 옆에 강으로 내려오는 좁은 길이 있었던 것이다. 흰빛 보랏빛의 과꽃을 예쁘게 묶은 꽃다발을 여자는 들고 있었다. 천천히 물가까지 간 그는 무슨 말인지 중얼 거리는 것 같았다. 아니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강물을 향해 꽃다발을 획! 던지고 다시 누군가를 애절 하게 부르는 것 같은 음성이 들렸다. 이상한 그 행동은 어떤 무속적 의미를 담은 의식같이 느껴졌다. 한밤에 소지를 사르며 천지신명에게 소망을 고하는 소복의 연인과도 같은 엄숙하고 신비스러우며 절실한 염원을 느끼 게 하는 모습, 어느덧 여자는 망부석이 된 듯 움직이지 않았고 말도 없었다. 강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며 옷자 락을 휘날리며 움직이지 않았다. 영광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인기척을 내자니 이미 시기를 놓쳤고 또 인기 척을 낼 그런 분위기도 아니었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 영광은 시간 속에 밀폐된 것 같았다. 결박을 당한 것 같았다. 여자는 몸을 굽히며 앉았다. 엎드려서 두 손에 물을 걷어올리며 얼굴을 씻는다. 아마 그는 울었던 모양이다. 꽤 오랜 시간 얼굴을 씻은 뒤 머리를 묶은 손수건을 풀었다. 소담스런 머리칼이 양 어깨 위에 물결치듯 흔들 렸다. 얼굴을 닦고 일어선 그는 손수건을 펴서 비쳐보고 두세 번 털더니 다시 접어서 흩어진 머리를 모아 묶 는다. 영광의 가슴은 방망이질하듯 뛰었다. 이제는 현장을 들키는 순서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본의는 아니었 지만 남의 은밀한 행동을 지켜보게 된 무례한 사내로서, 어느덧 영광은 가해자 입장이 되어 있었다. 여자는 돌아섰다. 고개를 숙이고 몇 발짝 걷다가 얼굴을 들었다. 순간 영광의 눈과 여자의 눈이 정면으로 부딪 쳤다. "아..." 아연실색하여 멍해 있던 여자 얼굴이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격렬한 분노의 눈빛으로 변했다. 그러나 영광의 옆을 스쳐갈 때 그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영광은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여자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양현이었다. 최양현, 아니 이양현이었다. 환국이와 함께 서울서 내려왔으나 따로 볼일이 있어 진주에 머물렀던 양현은 환국이보다 하루 늦게, 어제 평사리에 도착했던 것이다. '봉변도 보통 봉변이 아니구나.' 분노의 눈동자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목례를 하고 갔는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만한 나이의 젊 은 여자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옆을 지나가는 것을 용서하라, 실례한다, 그 런 뜻의 소위 교양을 나타낸 것이었을까. 무례한 사내에게 예절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 어느편이든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무례한 정도가 아니라 여자의 은밀한 행동을 지켜본 치한 취급을 당한대도 별도리가 없었다. '이런 경우를 두고 꼬지는 타고 고기는 설다 하는가? 아니 버선목이라 뒤집어 보일 수 없다 하는 편이 들어맞 겠구나. 허 참.' 한 마리 현란한 새가 날아왔다가 떠난 자리처럼 풍경은 본시로 돌아갔다. 영광의 마음도 본시로 돌아갔다. 바 위에 죽치고 앉아서 그는 다시 혜숙이 생각을 한다. '결혼을 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미고 어머니랑 함께 살아본다? 무엇이든 일정한 직업이 있어야겠지. 장사를 해 보는 것은 어떨까? 부탁하면 환국이 아버님께서 도와주실 거구. 양품점? 문방구? 아니 책방, 레코드 가게는 어 떨까? 자본금은 얼마나 들까? 혜숙이 양재점을 하니까 최소한도의 생활은 보장이 돼 있는 거구.' 하다가 영광은 크게 소리내어 웃는다. '미친놈, 어떻게 하면 최소한도의 나를 깎아주고 최소한도 주변을 조용하게 할까 궁리하는 좀생이 같은 놈! 네 놈이 그 생활에 견딜 것 같으냐? 일 벌여놓고 밤낮 도망갈 궁리만 할 게 뻔한데 무슨 놈의 잠꼬대 같은 생각 을 하누.' 다시 자기 자신한테 심한 혐오를 느낀다. 영선네는 자식들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분명히 선언했다. 그 결심을 굽힐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영광이 잘 알고 있었다. 한데 왜 그같은 생각을 해보는지. 말하자면 일종 의 모형이었다. 모형이나마 만들어보면서 자신의 반윤리적 의식을 엄폐하려는 자기 기만, 영광은 자신의 그 심 보가 한심스럽고 슬펐다. 담배를 붙여물고 엉덩이를 털면서 영광은 일어섰다. 물가까지 가서 강물을 따라 걷는다. 강물은 포구를 향해 흐르고 영광은 흐름을 거슬러 걷는다. 물결이 다가오 고 밀려갔으며 축축이 젖은 고운 모래를 밟는 발이 무거웠다. 발자국을 남기면 물결이 와서 지워버리곤 한다. 보라빛 휜빛의 과꽃을 묶은 꽃다발이 지금 어디메쯤 떠내려가고 있을까, 문득 떠오르는 생각과 동시 영광은 자신의 장례식을 눈앞에 본 듯한 환각에 빠진다. '방금 본 여자가 어쩌면 현실의 사람이 아니고 환상이었을까? 아니 죽음의 여신이었을까? 그것은 현란한 저승 의 새였는지 모른다. 한발짝 한발짝 이렇게 내가 걷고 있는데 ㄱ자로 꺾으면 저 푸른 강물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강심을 향해 걷다가 드러누우면 영원히 잠들 것이다.' 졸음같이 달콤한 죽음의 유혹이 또다시 영광에게 스며들었다. 소년 시절에 겪었던 죽음에 대한 센티멘털, 그 미숙한 동경에 삼십 장년이 휘청거린다. 아무 희망도 없었다. 정열과 그리움도 없었다. 세월에 바래어지고 마 모된 것 같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초라한 모습에서 느낀 것은 슬픔이나 애달픔보다 세월의 찬바람이었고 움 츠려지는 뭔가 형용하기 어려운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뼛가루를 강물에 홑뿌리고 뱃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했 지만 그 순간이었을 뿐, 모든 것은 슬픔조차 남기지 않았고 마음은 사막이 되고 말았다. 어린 조카들의 눈망울 만이 한방울 이슬같이 가슴에 남아 있을 뿐. '세사에 나와서 뭘 했으며 뭘 알았는가. 별로 한 일이 없고 깨달은 것도 없고 날건달이지 뭐. 확실한 것은 죽 는다는 것과 끝난다는 것, 아버지처럼 백골이 되어 강물에 뿌려지고 그리고 사라져버린다는 것, ...확실하지, 그 것만은 확실해. 통속 시인 사이조 야소가 뭐랬지? 장려한 장례? 장려한 죽음의 행렬? 그런 시구절이 있었던 가? 에에라 순 날도둑놈! 긴란돈스(금실과 비단실로 짠 직물)를 걸친 막대기 같은 얘기다. 죽음은 현란한 환상 의 새도, 장려한 행렬도 아니다. 바람에 나부끼는 만장도 아니며 꽃상여도 아니다. 슬픈 상두가도 아니다. 다만 초라할 뿐이다. 누구의 죽음이든, 살아 있는 모든 것,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죽음은 다만 초라할 뿐이다.' 초라하다 했으나 실상 영광은 장려한 행렬과도 같은, 현란한 환상의 새와도 같은 죽음의 그 짙푸른 색채에 쫓 기듯 맞이하듯 평사리 마을과는 반대 방향으로 계속 걷고 있었으며 마을과의 거리는 차츰 벌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강을 따라서 곧장 걸어가노라면 아까 내가 나루터에서 떠나온 화개라는 마을에 당도하겠지. 거기 가 서 산으로 되돌아간다? 산으로 가면 어머니가 몹시도 낯설어하며 계실 것이다. 거미같이 여윈 어머니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그 엷은 가슴, 가랑잎같이 된 그 엷은 가슴, 가랑잎같이 된 그 엷은 가슴으로 나는 돌아가야 한 다. 그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수없이 회전하고 또 회전했던 심경에 비쳐진 상황중에서 가장 강렬하고 충동적인 감정이었다. '어머니랑 함께 세상을 등지고 산다, 얼마나 좋은가. 평생 세상과 등지고 싶어했던 어머니, 밤낮 달아나는 꿈 을 꾸었던 나. 조그마한 초막을 짓고 나무꾼으로 살아본다, 숯을 굽고 약초를 캐며 살아본다, 영을 넘나들며 산짐승을 잡으며 살아본다, 아아 그 자유는 얼마나 싱그러운 것이냐.' 그러나 영광은 얼마 가지 않아서 방향을 바꾸었다. 강언덕을 향해 달음박질쳤으며 강언덕에 올라선 그는 평사 리 마을을 향해 급히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마치 생각의 허울을 홀랑 벗어버린 듯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마을 어귀에 들어섰을 때 위풍당당한 기와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상곽과도 같은 그 집을 바라보며 영 광은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자전거를 탄 사내가 그의 옆을 지나갔다. 사내는 자전거를 타고 앞서가면서 몇 번 인가 돌아보았다. 음험한 눈빛이었다. 도덕적인 표정이었다. 그는 단꾸바지에 카키색 군민복 윗도리를 입고 있 었는데 행색이 말단 관서의 직원 같았다. 기와집 가까이까지 갔을 때 길은 오르막이었고 대문간에 이르기까지 길 양편에는 보랏빛 휜빛, 그리고 분홍빛 의 과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 걷다 말고 영광은 꽃을 내려다본다. 벌들이 닝닝거리고 있었다. '그 꽃다발엔 분홍꽃이 없었다.' 대문은 열려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선 영광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현란한 저승의 새인지 모른다고 생각한 환상의 여자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마주본 자리에서 낚시 도구를 챙기고 있던 윤국 이 얼굴을 들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형!" 외침과 함께 양현이 돌아보았다. 양현과 영광은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쩔쩔맬 뿐이다. 윤국은 의아해하며 당 황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웬일이오? 형." 했으나 아까보다 윤국의 어세는 처져 있었다. "오래간만이구나. 몇 해 만이야?" 윤국이 묻는 말에는 대꾸 없이 딴전을 폈다. "이삼 년 됐지요. 형은 악극단에 그냥 계세요?" "응." "작곡을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조금." "그런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윤국의 물음에는 두 가지 내용이 있었다. 어떻게 여기가지 오게되었느냐는 물음과 혹 양현과는 아는 사이가 아니냐는 물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좀 그럴 일이 있었다." 영광이 역시 모호하긴 했으나 두 가지의 뜻을 포함한 대답이었다. 윤국의 표정에 의혹의 빛이 나타나기 시작 한다. "양현아, 사람에 가서 손님이 오셨다고 형님보고 말해." 약간 신경질적이다. "알았어, 오빠."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양현은 도망치듯 급히 사랑으로 달려간다. 영광은 마루에 가서 걸터앉으며 담배를 꺼내어 뭍여문다. 그는 웃음이 터질 것만 같은 것을 간신히 참는다. 이들 형제에게 누이동 생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했으나 그러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멀쩡한 이 집의 딸을 두고 비현실적 상상을 했던 것이 우수웠던 것이다. 윤국은 영광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유해를 가지고 지리산 절에까지 왔다가." "유해라니요!" "일 다 보고 가는 길에 들른 거야. 환국이하고 약속도 있고 해서." 영광의 어투는 딱딱했다. 이들 누이동생인 것이 밝혀져 꽃다발을 던진 여자에 대한 망상은 깨어졌으나 그의 이상한 행동을 생각하니 쉽게 발설할 수 없었고 그 일은 양현이라 하는 여자의 형편 따라 그쪽에서 밝힐 일이 라 생각했으며 놀라고 당황한 자기 태도에 대한 해명을 못하니까 자연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아버지께서." "세상 떴어." "그렇게 됐군요." 윤국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릴 적에 집에 드나들던 송관수를 윤국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것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 만주서..." 하다가 말을 끝맺지 못한다. "형 모습이 말이 아니오." "..." "상심이 컸겠소." 애도하는 마음은 깊었지만 석연찮은 기분은 남는다. "어떻게 그리 됐어요?" "호열자로." "더 사셔야 했는데, 뭐라 할말이 없군요." "왔어?" 환국이 나타났다. 영광은 담뱃재를 떨며 일어섰다. "고생 많았지?" 환국은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며 영광은 희미하게 웃었다. "다 그런 거지 뭐." "형색이 말이 아니군. 어머님께서는 건강이 어떠신지 걱정이구나." 양현은 환국이 등뒤에 숨듯 서 있었다. "비교적 잘 견디시는 것 같더군." "들어가자. 가서 자세한 얘기 듣기로 하고." 환국은 영광의 등을 밀었다. 두 사람은 사랑으로 들어갔다. "오빠 저 사람 누구예요? 이상한 사람이네." 양현이 숨가쁘게 물었다. "이상한 사람? 어째서?" "다리가 그래서?" "다리도 좀 이상하긴 해요." "왜놈들한테 뚜딜게 맞아서 뿌러졌던 거야." "아까 강가에서 보았어요." "강가에서?" "바위에 앉아 있었어요. 돌부처같이 말예요.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얼마나 놀랐던지." "그래? 해서 두 사람이 당황했구나." "네." 윤국은 양현이 혼자 강가에 가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꽃다발을 만들어 가는 것도 알고 있었다.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양현이도 식구들에게 구태여 비밀로 하고 있지는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았다뿐이지. "한데 그 사람 누구지요?" "형 친구야. 동경 있을 때 만난 친구." 의혹을 푼 윤국은 가볍게 말했다. "양현이 너 안 갈래? 낚시하러 가자." "싫어요. 햇볕이 따가워서요. 작년에 오빠 따라 다니다가 얼굴 껍질이 다 벗겨지고 혼났는데." 지금의 양현이 빛이라면 강가에서의 양현은 그늘이라 할까. "엄살 부리지 마." "엄살 아니에요. 정말 그랬단 말예요. 어머니가 야단치시던데, 어딜 쏘다녀 얼굴이 그 모양이냐구." "고명딸 시집 못 갈까봐서?" "오빠두 참, 나 시집 같은 것 안 가아." "두고보자, 가는가 안 가는가." "남 얘길 말구 오빠 걱정이나 하세요. 가고 싶어도 오빠 땜에 못가요." "나 땜에? 왜." 윤국은 양현을 쳐다본다. "순서라는 게 있잖아요. 하지만 나 시집 안 가요." "혼자 살 거야?" "어머니하고 살지요." "저러니 이 집의 며느리가 점술 못 따지." "치이." "그럼 어디 설설 나가볼까?" 윤국이는 낚시 도구를 들고 나가려다가 돌아보았다. "양현아." "왜요?" "사랑에 차라도 내가." "나, 민망해서 어떡허지?" "건이엄마 시키지 말고 너가 해. 형한테 소중한 손님이야." "알았어요." 윤국은 집을 나섰다. 그는 환국이만큼 영광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첫째 경음악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여자 문제도 있어서 건전치 못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무시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언젠가 그는 환국이를 보고 말한 적이 있었다. "영광이 그 형, 지적 콤플렉스가 있었다면 결코 형하고 친해지지는 않았을 거요." 그것은 영광을 인정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형의 감성에는 우리하고 전혀 다른 게 있는 것 같아. 그로테스크하다 할까." 했을 때 환국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너 영광이 혈통에 대한 선입관에서 하는 말 아니냐?" "형! 나 그런 것 없어. 정말이오. 언젠가 영광이형이 베르드랑의 "밤의 가스파르"를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나는 영광이형한테서 느낀 그 묘한 것이 규명된 듯싶었단 말이오." "이른바 그로테스크냐? 그게." "물론 그것만은 아니지. 환상적인 면도 있지만 악마적이고 괴기적인 것도 사실이잖아." "나도 한때는 베르드랑에 끌린 적이 있었다. 시심으로 그리며 화심으로 시를 쓴다는 그의 예술세계는 일단 관 심의 대상이 될 수 있어. 일본에서도 히나쓰 고노스께를 위시하여 고답파 시인들이 베르드랑을 많이 모방했다. 물론 속빈 껍데기였지만. 영광의 경우도 옛날에 베르드랑을 한번 통과해본 것뿐인데 하필 넌 너 자신이 부정 하는 면만 들추어 영광을 거기다 끼워보는 것은 경우에 따라 악의적이라 할 수도 있어. 영광의 생장과정에 대 한 편견이랄 수도 있고." "하지만 형, 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은 싫어. 그것에 무슨 생명이 있어. 청동의 시체 같은 것." "그건 얘기가 다르지 않아. 나도 영광이도 좋다 하진 않았다." "영광형은 한때 경도됐었다는 말을 했어." "한때지. 누구에게나 흔히 있는 일이며 그래서 통과라 했다. 나 역시 통과했고." "형은 지나치게 영광형을 옹호하는 것 같아요." "너는 지나치게 사시로 보고 있어." 베르드랑은 19세기 프랑스 파르나시앵에 속하는 시인이며 그의 댄대즘과 환성적 악마 취미는 보들레르에게 깊 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람이다. "밤의 가스파르"는 그의 유일한 시집이다. '선입관 때문이라 해도 그렇다. 그의 배경의 칼과 피를 연상하기 때문에 그렇다 해도 역시 나는 그 형에게서 전해지는 악마 취향, 그게 허무주의와 상통한 것인지 모르지만, 하여간 나는 그것을 부정 못하겠다.' 윤국은 마을길로 들어서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낚시하러 갑니까?" 남자치고는 좀 높은 음성의 사내가 자전거를 끌며 윤국이 옆에 바싹 다가섰다. "아아." 윤국은 그를 외면하며 내키지 않아 했다. 상대도 이미 달가워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 듯 눈을 내리깔며 곁 눈질을 했다. 아까 영광을 음험한 눈으로 돌아보고 돌아보곤 하며 자전거를 타고 가던 그 사내다. "비가 좀 와야지, 그래야 낚시질도 할 만하지요." "..." "학교 졸업은 아직 멀었습니까?" 윤국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싸움 끝에 낫에 찔려 죽은 우서방 둘째아들이었다. 전 같으면 먼 발치에서 인사나 하고 지나갔을 것인데 친숙한 체 얘기를 걸어오는 데는 그럴 만한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죽은 우성방의 셋째아들 재동이 작년 가을, 자원병으로 나가게 되면서 둘째 개동이가 면소 서기로 취직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유세를 부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최씨 집안에 대해서조차 무슨 감시병이나 된 것처럼 당당해진 것이다. 우서방 일가는 조상 대대로 평사리에 살았던 농사꾼은 아니었다. 조준 구가 최참판댁에 살림을 통째 들어먹은 후, 군대 해산이 있었던 그해 평사리에서는 마을 장정들이 들고 일어 났고 김훈장과 목수 윤보를 따라 산으로 들어가는 등, 마을 전체가 큰 변동을 겪었을 무렵, 슬그머니 흘러들어 온 뜨내기가 우성방 일가였던 것이다. 해서 마을 사람과 최참판댁의 인습적인 주종 관계에서는 비켜선 처지이 기는 했다. "면소말고 주재소 순사라도 됐이믄 사람을 잡아도 몇은 잡았을 기다. 세상에 사람 영악한 것겉이 무서븐 기이 어디 있노. 그 악종들은 건디리지 않는 게 상수라." "엽이네 처지가 기막히제. 까막소에서 나온 오서방이사 진작 식솔 데리고 떠났이니 빌어묵든 얻어묵든 다리 뻗고 자끼다마는." "떠나고 싶어 떠났나아? 우가놈의 식구들, 밤낮없이 직이겄다고 굿을 치는데 견딜 재간 있든가? 그 억울한 사 정, 다 말 못하지. 적반하장이라 카더마는 우가놈이 오서방 직이겄다, 낫을 들고 나왔는데 그라믄 가만히 앉아 서 당하겄나? 안 죽을라고 실갱이를 하다 보이, 그리 된 긴데 전생에 무신 원수가 졌일꼬." "오서방이사 당사자니께 그렇다치더라도 엽이네가 무신 할 짓인고. 본 대로 증언하지 그라믄 저거들 원하는 대로 거짓말 해서 오서방을 죽게 하겄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운수불길이지. 말도 마라. 일일이 말할라 카 믄 해질 기다마는 콩밭에 소를 몰아놓질 않나, 울타리를 걷어차서 망가뜨리질 않나, 앵구 목을 짤라 마당에 던 져넣질 않나, 만나기만 하믄 증언 잘못해서 원수놈이 살아서 까막소 나왔다, 퍼붓고 시비 걸고." "퍼붓기만 함사, 듣기만 해소 소름이 끼치는 악담은 어쩌고, 입에 담기조차 무서븐 말, 아이구 그런 소리 들은 날이믄 밤의 꿈자리도 시끄럽다카이." "엽이네 심장이 질기서 산다." "심장이 질기서 사나? 낭개도 돌에도 못 대니께 사는 기지." "어지간해야 동네서 몰아내지. 그랬다가는 그놈의 식구들 동네 사람 몰살시킬라고 할 기구마. 그나마 이자는 왜놈하테 붙어서 재동 이놈은 병정 가고 개동이놈은 면소 서기 되고, 날개를 얻은 기라." "최참판댁에서도 이자는 다스릴 힘이 없어이." "무신 소리 하노? 어림도 없다. 벌써 상투 끝에 앉아서 쥐락펴락, 최씨집도 멀지 않았다고 큰소리 탕탕 치는 판국인데." 쉬쉬하면서도 몰래 하는 마을 사람들 말이었다. 둘째 개동은 끝내 윤국이 말이 없자 침을 탁 뱉고는 자전거에 올라 타고 가버린다. "죽일놈!" 윤국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강가로 내려간 그는 낚시줄을 드리워놓고 고기 잡는 일보다 생각에 빠져든다. "그놈 꼴 보기 싫어 이제는 평사리에 못 오겠다. 오늘은 더럽게 재수 없는 날이다." 윤국은 개동이 행투에도 화가 났지만 영광을 맞이하고 자신이 행한 태도나 심리 상태에 대해서도 화가 났다. 영광과 양현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왜 그렇게 심사가 올곧지 않았는지, 거의 이성을 잃을 뻔했던 자신을 도 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그들이 몰래 만나기라도 한 것 같은 성급한 판단은 대체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 것은 너무나 엄청난 비약이었던 것이다. 양현이 영광을 강가에서 만났다 했을 때, 이상한 사람이라 했을 때 비 로소 마음을 놓았고 마음이 가벼워졌던 것 역시 지금 생각하면 수치감이 솟는다. 심리적으로 영광을 야수로 본 것이며 양현을 미녀로 본 것도 이 무슨 속단인가. 어쨌거나 윤국은 여태껏 경험한 일이 없는 깊은 갈등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런 그것을 규명하는 것이 두려웠다. 오라비로서의 보호본능인가, 양현을 누이동생이기보다 여자로서, 잠재의식 속에 있었던 것이나 아니었을까. 윤국의 얼굴은 붉어졌다가 창백해졌다가, 하늘과 강물이 마주보는 공간에 앉은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러운 존재로 느껴진다. "내일 양현이하고 하동에 가야지." 윤국은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듯 중얼거렸다. 그 순간 떠오른 것은 어머니의 이상한 변화였다. 벌써 오래전부터 양현의 이복 오라비 이시우가 요청해온 일이 있었다. 양현을 이씨 호적에다 입적시키겠다는 요청이었다. 의전 을 나온 시우는 현재 진주 도립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사실을 안 이상 핏줄을 내버려둘 수 없다는 주 장이었고 그의 모친도 전적으로 아들과 의견이 같았다. 그러나 최서희는 단호히 그것을 거절했던 것이다. 이유 는 양현의 장래를 위해서, 그렇게 문제를 끌고 왔는데 별안간 최서희는 표변했던 것이다. 이씨집의 요청을 받아들여 양현의 호적을 옮긴 것이다. 최양현서 이양현이 된 것이다. '어머니의 심경이 변하신 것은 무엇 때문일까? 왜 그렇게 갑자기 단을 내리신 걸까?' 양현의 문제라면 당연히 아들과 상의도 했어야 했는데 일절 그런 일이 없었고 그 일에 대해서는 환국이도 의 아해했다. 길상에게는 상의를 했는지 전적으로 동의한 것 같았다. 양현에 대한 애착을 알고 있는 환국이나 윤 국은 그것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서희가 응하지 않는 이상 이씨 집안에서도 양가의 길고긴 인연을 생 각하면 강경하게 나올 처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질 무렵, 고기 몇 마리를 낚아들고 윤국은 나갈 때와는 달리 몹시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양현이 잡아온 고기를 들여다보며 어쩌구 저쩌구 지껄였지만 윤국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은 많이 못 잡았십니다." 건이아비가 고기를 가져가면서 말했다. "아가씨 저녁은 사랑으로 차려갈까요." 언년이, 그러니까 건이네가 물었다. "오빠 어떻게 해요?" 양현은 윤국에게 물었다. "안채에서 함께 먹지 뭐. 그리고 건이엄마 저녁은 좀 천천히 해요." "알았습니다." 환국과 영광의 얘기가 대강 다 된 것으로 짐작한 윤국이는 사랑으로 가서 그들과 합류했다. 그리고 다시 정식 으로 영광에게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러고 나서 "형, 형은 앞으로도 경음악을 계속할 겁니까." 불쑥 물었다. "내 하는 일이 밤낮 그렇지 뭐. 장담할 일이 뭐 있겠나. 세상을 핑계삼는 것 같지만 요즘 맨정신으로 할 수 있 는 일이 대체 뭘까?" "왜 형은 보다 나은 길을 놔두고 그리고 갔습니까." 윤국은 영광에게 그런 식으로 단도직입적인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보다 나은 길이 뭘까..." "형은 본래 문학을 하려 하지 않았소." "문학... 글쎄 그것을 설명하려면 철학적으로 하하핫핫... 개똥철학이지만 말이야. 그보다 안 하는 이율 생각해 본 일은 없지만 아마 샘이 말라버린 때문이 아닐까?" 영광의 표정이나 말투는 어딘지 모르게 너그러웠다. 홍이를 대했을 때와는 딴판으로, 강가를 헤맬 때와도 딴판 으로 평화스러움, 무장을 해제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감성 문제를 말하는 건가요?" 윤국의 말에 환국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놈의 그로테스크가 나오면 어쩌냐 싶었던 것이다. "감성 문제뿐이겠나." "내일 하동에 갈 건가?" 화제를 꺾듯 환국은 윤국에게 물었다. "왜요? 형은 안 갈 거요?" "나는 영광이하고 등산하기로 했다." "그럼 양현이하고 저만 갔다오지요 뭐. 시우형도 없는데." "양현이는 그쪽에서 묵게 되더라도 넌 당일로 돌아와야 해." "알고 있어요." "넌 서울에 들리지 않고 바로 갈 거냐?" "형님은 언제 돌아가시게요." "온 김에 스케치나 좀 할 생각이다. 서울서는 답답하고, 그림이 안돼." "그까짓 학교 때리치우고 그림에 전념하세요." "..." "영광형도 그렇고 모두 답답합니다." "너는 안 답답하구?" "하긴 그렇군요." 윤국은 픽 웃었다. "형님 서울 가실 때 저도 함께 가지요." 윤국은 덧붙여 말했다. "자네도 여기서 머물다가 우리랑 함께 서울 가자." 환국이 영광을 보고 말했다. "글세..." "시골 바람이 필요한 꼴들이야. 세상일 좀 잊고." "생각해보구." "그런데 형." 불러놓고 윤국은 마른기침을 했다. "거 우개동이라는 그자 알아요?" "아비가 낫에 찔려 죽은 그 집 아들 아닌가. 막내가 자원병으로 나갔다며?" "맞아요." "그 얘기는 왜." "아까 길에서 만났는데... 행패가 심한 모양입니다. 상당히 마을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얘기였소." "건이엄마가 그런 얘길 하더군." "들어낼 수도 없고 골칫거리요." "우릴 들어내려 할 텐데 그 자를 들어내?" "악종도 보통 악종이 아니랍니다. 아들 삼형제와 그 어미까지." "견디야지. 모든 것을 다 견뎌야 해. 이 마을뿐이겠나? 물밑에 가라앉은 것처럼, 자칫 잘못하면 영광이 저 다 리꼴이 된다. 얻은 것은 없고 잃었을 뿐이지." 영광은 쓰게 웃었다. 하룻밤을 이야기로 지새운 환국과 영광은 또 일치감치 일어나 모두 함께 둘러앉아 조반을 끝낸 뒤 등산한다며 집을 떠났고 윤국은 양현을 데리고 나룻배에 올랐다. 뱃손님은 서너 명 가량, 남정네들이었다. 낯이 익은 뱃사 공이 윤국과 양현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사각모를 쓰고 제복 차림의 준수한 청년과 눈부시게 아름 다운 양현 모습에 얼이 빠졌는지 하던 얘기를 중단하고 남정네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윤국은 이런 처지에 부딪칠 때마다 괴로웠다. 죄의식과 자신이 도둑놈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등을 돌린 자세로 멍하니 하늘가를 바라본다.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강물로 시선을 옮긴다. 흐린 탓인지 강물마저 우중충했다. "하마 한줄기 퍼붓겄네." 남정네들 중에 누군가가 말했으나, 그러고는 아무도 말을 잇지 않았다. 윤국은 양현을 흘끗 쳐다본다. 쓸쓸해 보였다. 낙엽이 다 떨어진 가지에 홀로 앉은 새처럼 양현은 외로워 보였다. 하동으로 갈 때마다 양현의 표정은 늘 그랬다. 어제 낚시질 갔다가 돌아온 후로는 내내 무뚝뚝했고 말이 없었던 윤국이 말을 걸었다. "가방에 뭐가 들었어?" 발치에 놓인 가방을 내려다본다. 자신이 들고 왔고 별로 무겁지 않던 영현의 가방이었다. "갈아입을 옷하구 어머니, 진주 새언니가 전하라고 주신 것이 들어 있었요. 왜요?" "가벼워서." "어머니, 또 진주 새언니가 주신 게 옷감인가 봐요. 그보다 오빠." "..." "비 오시면 어떻게 해? 등산한 큰오빠 말예요." "등산은 무슨 놈의 등산, 가다가 주막에 들러 술이나 마시고 있겠지. 아니면 절에 갔거나." "그럴까?" "이부사댁 민우가 와 있는지 모르겠다." 그 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양현은 이복오라비 민우가 남해 작은집에라도 가고 없엇으면 생각하곤 했던 것이다. "동경서 만나지 않았어요?" "가끔 만나기는 했지." 이상현의 둘째아들 민우는 경성제대에 시험을 쳤다가 떨어지고 이듬해 경의전에서도 시험에 떨어졌다. 집안 사람들은 형인 시우 못지않게 머리가 좋고 열심히 공부도 했는데 학마가 들어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두 번이 나 고배를 마신 민우 본인도 그랬지만 모친 박씨도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하든지, 그러길 원했으나 시우가 우겨서 동경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는 현재 사립인 법정전문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시우는 일찍부터 양자로 간 숙부와 외가의 도움으로 간신히 학업을 마친 뒤 진주 도립병원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결혼도 했다. 민우는 심성이 괜찮은 청년이었다. 그러나 번번히 낙방을 하고 동경 바닥에서 보잘것없는 사립전문학교에 적 을 두면서부터 형에게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최씨네 형제들에게, 심지어 여의전을 다니는 양현에게까지 그는 열등의 비애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보다 민우가 심한 충격을 받은 것은 양현이가 자신의 이복누 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였다. 한번은 동경서 술에 만취가 되어 윤국의 하숙방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몰골 이 말이 아니었다. "남들은 대학 하나도 못 가는데 형은 대학을 두 개나 다니고, 팔자치고는 상팔자요. 무슨 놈의 학운이 그리도 좋습니까." "술 많이 했군." "네. 술 진탕 마셨소. 동경 하늘이 돈짝만 합니다." "기분 좋게 마신 술은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래?" "동경서 기분 좋게 술 마실 조선놈의 새끼가 있을까요? 있다면 그건 돈 쓰고 기집애 사귀는 재미로 유학 온 졸부 집구석 놈팽이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내말 틀렸습니까? 형님!" "맞다." "공부 방해됩니까?" "공부, 공부 하지 마. 나 공부벌레 아니야." "일류 농과대학을 마치고 또 경제과에 들어갔는데 공부, 공부, 공부벌레 아니라 말할 수 없지요. 아무리 세상 이 다 알아주는 천재기로서니." "사람 민망하게 하네. 비꼬는 것도 정도껏 해라. 출세도 못하는 학문에 무슨 의미가 있어서 공부벌레가 되누. 부잣집 아들, 놈팽이가 안 될려면 공부라도 해야지. 놀고먹을 순 없잖은가. 그는 그렇고 자네는 뭣 땜에 화풀 이 술을 마셨나." "이유야 어디 한두 가지겠소? 가련하고 불쌍한 조선 민족을 위하여 화풀이 술밖에 마실 수 없는 그놈의 지성 들이 친일해서 땅마지기 생기고 친일해서 이권 나부랭이 따내고 그 따위 매국노와 한푼 다를 게 없다는 뜻에 서도 술 마셨고." 하다가 민우는 트림을 했다. "과연 이놈의 돌대가리, 형의 호주머니 축내가면서 공부를 계속할 필요가 있겠는가, 해서 술 마셨고, 처자를 내동댕이친 채 평생을 자신의 자유를 찾아 방랑하는 내 부친 말이오, 얼굴도 모르는 그 양반의 그 배신과 기 만을 씹으며 술을 마셨고, 철저하게 속았소. 세상 떠난 억쇠할아범한테 속았고 어머님한테 속았어요. 밤이면 밤마다, 삯바느질로 지새며 한숨 쉬던 어머님의 세월, 상전이 뭐길래 뼈를 깎고 살을 저미듯, 백발이 되고 허 리가 고부러질 때까지 봉사한 억쇠할아범, 유월이할멈, 도대체 그분들 희생에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분노를 느낍니다. 우리 형제가 이렇게 자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거짓의 지릿대 때문이었소. 할아버님처럼 아버님 도 나라를 위해 큰일 하신다, 하하핫핫 하하핫... 그 큰일이 알고 보니 방탕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아버님 나름으로 고민도 하셨겠지. 글을 쓰셨잖았나." "형도 생각 밖으로 속물이군요. 소설 나부랭이, 기생하고 연애하는 그 따윗 걸 썼다 해서 주색잡기는 이해하라 그 말씀이시오?" 윤국은 할말이 없었다. 그러나 감히 말한다. "민족을 위해 일하는 것만이 지고선은 아니지 않는가." "형 오해하지 마시오. 나는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사는 것만이 지고선이라 하지 않았소. 그것이 과장되고 분식될 때 오히려 혐오감을 느끼곤 했어요.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고 목적도 다르다, 그 걸 모르는, 그렇게 순진한 이민우도 아닙니다. 하지만 묻겠는데요, 내 부친의 생애가 그럼 지고선에 속하는 건 가요?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인가요?" 민우는 억지를 썼지만 윤국은 할말이 없었다. "사나이의 풍류로서 기생과의 로맨스,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딸애도 낳을 수 있는 일이지요." "듣기 거북하군." "내 말이 뭐 틀렸습니까? 다만, 그렇지요, 다만 내가 분노를 느끼는 것은 늑대 울부짖는 벌판에 처자식을 내동 댕이치고 떠난 사람, 형은 모를 겁니다. 가난이 어떤 것인지를, 겉은 멀쩡하면서 속으론 찬바람 굶주림에 웅크 려야 했던 우리들 세월을 모를 거요. 평생을 외가의 도움, 넉넉지 못한 숙부의 도움으로 연명했던 우리들 심적 고통... 무책임하게 비정하게 내버리고 간 부친의 목적이 무엇이며 가치관은 무엇이냐, 새삼스럽게 그걸 따지자 는 그걸 따지자는 건 아니오. 버릴 수 없었던 것은 어떤 면에선 모질고 강한 거지요. 하면은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또 뭡니까? 기생과 동거했고 기집애까지 낳았으면." 민우의 어세가 흐트러졌다. "그들도 독립운동하기 위해 내동댕이치고 간 건가요? 여자는 물에 빠져죽고 딸애는..." 하다가 민우는 웃었다. 숨이 막히게 웃었다. "배다른 누이인 줄도 모르고, 마, 만일 내가 양현이를 사랑했다면 어쩔 뻔했어요?" "입 닥쳐! 그 따위 모독적인 얘기 입에 담는 것 아니야!" "형! 그게 내 잘못이오?" "그런 말 하는 너 자체, 부친을 비난할 자격 없다. 누이로 순수하게 인정하는 것 이외 내 앞에서 다른 말 하지 마! 그애한테 상처 주는 말 두번 다시 했다 봐라, 가만 두지 않겠다!" 민우는 순간 풀이 죽었다. "이를테면 그렇다는 얘기죠 뭐." 나루터에서 내린 윤국과 양현은 읍내로 들어갔다. 장날이 아니어서 빈 장터는 썰렁했다. 비가 쏟아질 듯, 쏟아 질 듯 하늘이 내려앉았으나 비는 아직 내리지 않고 목덜미에 땀이 베어날 만큼 날씨는 무더웠다. "오빠." "음." "오늘 갈 거예요?" "그래." "나는 어떻게 해?" "이삼 일 묵었다 와야지." "이삼 일... 힘들어요. 오빠." "..." "낯설어서 어려워요." "초행도 아닌데... 그래도 그래요." "누가 언짢게 대하든? 환영하지 않는다면 안 가도 돼." 윤국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쪽에서 원한 일 아니야. 정 그렇다면 돌아가자." "그, 그게 아니에요. 민우오빠가 날 미워하자 봐요." "그건 부친에 대한 감정 때문이다." "민우오빠말고는 다 잘해주셔요." "당연하지. 호적 옮겨달라고 강경하게 말한 사람이 누군데? 기죽을 것 없다. 가고 안 가는 것 아무도 너에게 강요할 사람 없어." 했으나 윤국은 양현이 애처러웠다. 어떤 뜻에선 이부사댁 그 자체가 양현에게는 상처였기 때문이다. 양현은 하얀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았다. 땀을 흘려서 그런지 얼굴은 더 희고 맑았다. "양현아." 얼굴을 돌려 윤국이를 쳐다본다. "이제부터는 견디는 힘을 좀 길러야겠다. 너 말이야." "알아요." "다 컸고 넌 이미 성인이다. 앞으로 수많은 일에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데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험하고 각박하다. 사람들의 관계도 저마다 복잡하고, 복잡하지 않는 경우란 드물어." 어린 계집아이한테 타이르듯 한다. "오빠." "음." "오빠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울한 거 아니에요. 실은 말예요, 나같이 행복한 사람 없을 거야." "정말 그리 생각하냐?" "응, 오빠, 난 말예요. 오빨 너무 사랑해. 어머니 아버지 큰오빠, 가슴이 찢어질 만큼 사랑해. 내 인생이 지금 끝나도 난 다 누린 거예요. 앞으로 어려운 일에 부닥쳐도 억울하지 않을 거구요. 진심이야." 양현의 표정은 환했다. 반대로 윤국의 얼굴은 어두었다. "나 이틀밤만 자고 갈게요." "생각 잘했다. 꽃 같은 기집애." "어어? 그건 어머니 하시는 말인데? 오빤 어릴 적에 종달새야, 다람쥐야, 곰새끼야 그랬지요?" "곰새끼는 형이 말했어." "그랬나?" "어서 가자. 남들이 들으면 웃겠다. 어른이 다 된 멀쩡한 것들이." 이부사댁에 들어섰을 때 민우는 모시 고의적삼을 입고 마당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왔어?" 마치 이웃에 사는 아이에게 하듯 양현을 바라보고 나서 "형, 그 동안 뭘 했어요? 낚시질했구나. 얼굴이 새까만 걸 보니." 반갑게 말했다. 부엌어멈 순천댁이 내다보며 인사를 했다. "방에 들어가보아. 어머니 계셔." 듣기에 따라 어서 내 앞에서 사라지라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인사해야지." 윤국이 민우를 뿌리치듯 나서는데 마침 방에서 양현이 온 기척을 알아차린 시우의 모친 박씨가 나왔다. "양현이 왔구나. 윤국이도 오구. 어서 올라와." 두 사람은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갔고 민우는 마당에 선 채 내려앉을 것만 같은 흐린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윤국이와 양현이 절을 한다. "그래, 집안은 두루 평안하시고. 부모님께서는 서울 계신다며?" "네." 하는데 그새를 못 참겠는지 민우는 "형 우린 밖에 나가지요." 했다. 윤국이 엉거주춤하니까 "모자하고 양복 윗도린 벗어놓고." 몹시 서둔다. "그럴까?" 윤국은 저도 모르게 민우가 서두는 데 따라 모자와 윗도리를 벗고 셔츠 바람으로 마루에서 내려섰다. "점심때까지 돌아오너라." 박씨 말에 "그러지요." 대답한 민우는 꽁지에 불붙은 것처럼 윤국을 끌고 나간다. "순천댁." 박씨가 불렀다. "예." "점심 준빌 하게." "저거, 도련님 안 오실 거인디." "어째서?" 순천댁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다. "왜 웃느냐?" "술생각 허시든 참에 윤국이도련님이 오셨지라, 그런게로 쉽게 들어오시겄소?" "기가 막혀서. 형은 술을 모르는데 그애는 누굴 닮아 그런지 모르겠구나." 혀를 찼으나 그럴 나이도 됐다 싶었는지 슬며서 웃는다. "그러면 마님허구 애기씨 점심만 헐가요잉?" "그래라." 박씨는 얼굴을 돌려 양현을 쳐다보면서 "방학인데 안 내려오나 하고 기다렸지. 공부는 할 만하냐?" "힘듭니다." "그럴 게다. 허나 공부 끝마치면 우리 집안에 의사가 둘이 난다. 경사지. 아무쪼록 열심히 해라." "네. 이거." 양현은 가방에서 보자기에 싼 것을 꺼내어 박씨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냐?" "하나는 서울서 어머니가 주셨고 또 진주 새언니가 드리라구 해서, 옷감인가 봐요." "옷이 많은데. 이건 두었다 양현이 출가할 때 쓰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빗방울은 이내 세찬 빗줄기로 변했다. 그리고 뇌성벽력이 천지를 흔든다. 4장 몽치의 꿈 집이래야 큰방 작은방 부엌, 삼칸짜리 오막살이였다. 마당은 다소 넓은 편이어서 강아지 한 마리가 졸랑거리며 놀고 있었다. 장독가의 분꽃 봉선화는 한물 간 것 같았고 맨드라미가 타듯이 새빨갛게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 었다. "선아야, 선일이 나갈라. 아아 단속 잘해야 한다." 영선이 말에 마당을 쓸고 있던 선아는 "자는데 머." "깨믄 말이다." "알았구마. 옴마, 올 때 사탕 사올 기제?' "운냐 사올게." 영선은 삶은 빨래가 든 통을 이고 휘는 작은 꾸러미와 술병을 들고, 양주는 나란히 집을 나섰다. 영선은 명정 리 빨래터에 빨래하러 가는 길이었고 휘는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있는 곱새 소목장이 조병수의 집, 그러니까 휘에게는 스승뻘인 그에게 가는 길이었다. "보소 선아아부지, 술 과하게 하믄 안 될 기요." 갈라지는 골목까지 왔을 때 영선이 말했다. "술 많이 할 처지나 되건데?" "참말로 그집 일도 큰일이요. 그라믄 엇 가보소." 영선은 내리막길을 곧장 내려간다. 치맛자락을 걷어 끈으로 허리를 잘쑥 동여맨 영선의 뒷모습, 바라보다가 휘 는 걸음을 옮긴다. 고만고만한 오막살이, 싸리 울타리도 있고 판자 울타리도 있고 울타리 없는 집도 있었다. 삽짝문은 모두 열려져 있어 마당이 훤하게 들여다보였고 삽짝 없는 집은 부엌의 부뚜막까지 볼 수 있었는데 부잣집같이 큰 솥 작은 솥은 윤이 나게 가꾸어져 있었으며 장독들은 햇빛에 반들거렸고 마당은 깨끗이 쓸려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동네다. 그런 집을 여남은 채나 지나갔을까, 제법 반듯한 대문에 짚으로 된 용마름을 얹은 토담이 나타났다. 휘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집안에서는 아무 소리가 없었다. 조용하다는 것은 대개 이 집안에 사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휘는 성큼 집안으로 들어간다. 본채는 초가였으나 사칸 접집으 로 대청이 넓었다. 본채와 마주보는 아래채는 삼칸, 두 개의 방 사이에 도장이 있었다. 휘는 마당에 서서 함숨 을 쉬다가 아래채, 오른편에 있는 방 앞에까지 간다. "선생님." "..." "선생님." 마른 기침 소리가 났다. 휘는 방문을 열었다. 조병수가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휘를 쳐다본다. 비애와 공포에 지린 눈빛이었다. 마치 소년과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휘는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병수를 향해 절을 하고 자리에 앉은 휘가 말했다. "일은 잘 치렀느냐?" "예." 병수는 여위어, 얼굴은 주름투성이였고 한층 더 작아 보였다. 그러나 눈빛만은 벼함없이 맑았다. "지감께서는 안녕하시고." "예, 선생님께 안부 전하라 하시믄서 일간에 한번 오시겄다, 그런 말심이더마요." "그래? 참 오랫동안 못 뵈었구나." 방은 넓었다. 문갑과 사방탁자에 책자가 쌓여 있을 뿐 그 밖의 것은 없었고 깨끗했다. "주안상 차릴까요 ?" "그래라." 별안간 병수 얼굴에 생기가 돌았고 음성에도 탄력이 있었다. '불쌍한 선생님, 아직도 고가 안 끝났다 말가.' 휘는 환하게 눈에 익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소반을 부뚜막에 올려놓고 찬장문을 열며 뭐가 있나 하고 들여다 본다. 십 년이 휠씬 넘는 술시중이었으니 어줍을 것 하나 없었다. 콩자반, 잘 삭은 콩이 파리, 멸치볶음, 가모 의 알뜰한 사림 솜씨가 역력하다. '빌어묵을 영감탱이 와 안 뒈지노. 살 만큼 살았는데 머 얻어묵겄다고 살아서, 사람우 형상을 하고 짐승보다 못한 늙은 것이, 무신 대복을 찌고 나서 저런 효자를 낳았는고, 하야간에 하루라도 속히 죽어야만 나머지 사람 들이 살지.' 안주와 술잔 두 개, 젓가락 두 개, 술상을 본 휘는 상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산의 선생님이 선생님 드리라고 하심서 머루주를 한 병 주시더마요." 산의 선생님이란 해도사를 이름이다. 실로 이 두 스승은 휘에게 막강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다. "고마운 분이시다. 그분 뷘 지도 오래구나." "아마 지감스님 오실 적에 동행할 요량인 것 같더마요." "그래?" 병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넘친다. 휘는 하얀 술잔에 붉은 머루주를 따라 두 손으로 조병수에게 바친다. 병수는 생명수를 대하듯 눈을 지금시 감 고 그러나 깊은 한숨을 내쉬며 술을 마셨다. 그러고 나서 휘에게 술잔을 돌렸다. "술 받아라." "예." 휘는 고개를 돌리며 받은 술잔의 술을 마신다. 스승과 제자, 그 예절이 각별하다. 이들은 소목장이의 기능을 전수하고 전수받는 단순한 관계를 넘어서 있었다. 조병수의 도저한 학문의 세계를 휘는 십여 년 동안 곁에서 엿보았고 불구의 몸이었으나 그의 청명한 감성과 인품에 접해왔으며 그의 비애와 고통을 지켜보았다. 해도사 는 휘에게 기본적인 학문과 사람의 도리, 세상의 이치를 다져준 사람이다. 그러나 조병수는 그 다져진 터전에 실로 많은 빛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예술에 대한 휘의 개안이었다. 조병수가 소목일에서 손을 뗀 것은 이 년 전의 일이었다. 딸은 오래 전에 출가했고 막내아들도 사범학교를 나 와 사천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중학교를 마친 큰아들은 취직을 마다하고 갯가에 어구점을 차렸는데 그것이 성공하여 돈을 벌었고 사업의 규모도 차차 커졌다. 뿐만 아니라 근검절약, 건실한 아내 덕분에 병수의 수입에서 양도에 족할 만큼의 전답도 장만했으니 그만했으면 몸이 성치 못한 병수의 처지, 일에서 손을 뗄 만 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질 않았다. 지식들이 한사코 부친의 소목일을 반대하고 나섰지만 그는 역시 자식들 희망에 따르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연장들을 정리하고 일방을 폐쇄한 것은 마지막 쇠전 한푼까지 털어먹은 조준구가 내려오면서부터였다. 쇠전 한푼까지 털어먹었다 했지만 그는 영락하고 쇠잔한 몰골로 아들을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놀던 푼수가 있어 그랬겠지만 고급 스틱을 짚고 위풍당당하게 아들을 찾아온 것이다. 얼마나 보약을 질렀는지 팔십을 눈앞에 둔 노인답지 않게 힘이 세었고 허리도 꼿꼿했다. 그러나 그 추함은 모골이 서 늘해질 만큼, 혐오감을 주는 것이었다. 노추라기보다 악행과 범죄의 세월이 각인처럼 그 모습에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도착하여 그가 한 첫마디는 "사랑도 없이 이게 행세하는 집구석이냐?" 행세하는 집구석이기는커녕 소목장이의 집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기거할 처소를 염 두에 두고 한 말이었던 것이다. 사람이란 늙으면 대개의 경우 어깃장도 놓고 이기적으로 되다고들 한다. 하니 평생을 철판 깔고 살아온 조준구, 이를 말해 뭣하리. "독선생 앉혀서 글이라도 가르쳤으니 이 짓이라도 해먹고 살았지. 애비 없는 자식이 어디 있으며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느냐. 팔십이 다 되도록 자식놈 신세지지 않고 산 것만도, 아무나가 하나? 내 갈 날도 멀지 않 았으니 깊이 명심해라." 탕탕 큰소리치기도 했다. 처음부터 고압적으로 나가기로 작심을 했던 것 같았다. 병수는 큰아들 내외를 내보냈다. 그들은 집을 장만할 여력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간창골 어귀에 가게를 하나 세내어 휘를 독립시켜 주었다. 아들과 자부에게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생각과 자신은 소목일에서 손을 떼겠다는 결심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일년 동안 조준구는 호의호식, 보약이다 뭐다 하며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은 몇 번이고 퇴하면서 아들의 사람을 뿌리째 뽑으려 들었다. 그는 잔인한 폭군이요 악마였다. 특히 아들에게는 가학적 쾌감으로 괴롭혔다. 때로 노 망이 든 것처럼 가장을 하면서 행패를 부렸고 때론 노골적인 잔인성을 얼굴 가득히 나타내며 아들의 불구를 조롱하곤 했다. 희망도 낙도 없이, 죽음의 공포를 잊으려고 그랬는지 모른다. 아니면 마약같이 강도를 높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악도 그러한 생리일까. 악을 행하는 것도 쾌감일까. 지금은 그의 인생의 끝머리, 그 대 항이 아들말고 누가 있는가. 실로 저주받은 생애라 할밖에 없다. 보다 못해 손자나 자부가 항의를 하면 어디서 힘이 솟는지, 아래말고 위쪽의 눈 흰자위를 허옇게 드러내며 스틱을 들도 쫓아오곤 했다. 뿐만 아니었다. 집에 서 부리는 여자아이나 아낙에게 추잡하게 굴어서 집안 망신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일하는 사람이 집에 붙어나질 못했다. "양반꼴 좋다. 세상에 며느리보고 이년저년 욕하는 시애비가 어디있노. 우리 겉은 상사람도 그런 망측한 짓은 안 하거마는. 늙어서 덕본다. 젊었이믄 동네 가운데 두기나 할 기든가?" 동네 사람들 말이었다. 언젠가 병수는 혼잣말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내가 불구자로 태어난 것도 운명이며 저런 부친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운명이다. 운명을 어찌 거역하겠느냐." 비애에 젖은 눈으로 병수는 휘를 바라보았다. 휘는 그때 눈물을 흘렸다. 조준구가 중풍으로 쓰러진 것은 작년 이맘때였다. 하반신 마비였던 것이다. 중풍으로 쓰러졌다 해서 집안이 종 요해진 것은 아니었다. 잔혹한 상태에서 조준구는 광란 상태로 변하여 집안은 한층 더 시끄러워졌던 것이다. 별의별 요구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기막히는 것은 송장 썩은 물을 구해오라는 주문이었다. 송장 썩은 물이 중풍에 좋다는 말이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어디서 구해오는가. 오늘도 집안이 조용한 것은 한바탕 폭풍 이 지나간 때문이다. 병수댁네는 속이 상해 아들집에 갔는지 없었고 조준구는 한바탕 광을 친 뒤여서 잠이 들 었는지 기척이 없었다. 조준구는 한바탕 과을 친 뒤여서 잠이 들었는지 기척이 없었다. 병수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조준구의 상태는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발작을 하면 삼이웃이 시끄러웠다. 한번은 병수가 오물을 치우려고 방에 들어갔을 때 대변을 거머쥐고 있다가 아들 면상을 향해 던진 일이 있었다. 그때 병수는 통곡을 했다. 가엾고 측은하다 했다. 사람이 어찌 저렇게 살아야 하며 떠나갈 길을 생각지 않는가 하며 그는 울었던 것이다. "소가죽을 뒤집어써도 유분수!" 조준구의 소문을 듣고 진주의 영팔노인이 담뱃대로 재떨이를 치며 내뱉는데 마누라가 받아서 "와요? 소가 우때서요? 얼매나 어진 짐승인데 거기 비하는 깁니까." 하고 타박을 주었다. "천벌을 받을 그놈이 아직 안 죽고 살아서 자식 못할 짓 시키고 있다 카이 참말로 하늘이 있나 없나." "벌 받니라꼬 살아 있는 거 아니겄소. 벼루박에 똥칠 해감서 벌 받니라꼬." "그기이 벌가? 어림없다! 적악을 어디 한두 사람한테 했든가?" "와 날보고 징을 내요. 그렇기 억울하믄 가서 직이든 살리든 해보소. 다 살 만큼 살았인께." "그놈의 죄는 삼악도에 떨어져도 다 못 갚는다. 내가 만주서 그 고생할 직에는 씨퍼런 칼 가지고 그놈의 배애 지 찔러 직이고 싶은 생각 한 두 번 한 줄 아나? 그래도 나는 소분지애씨라 관수나 석이 가아들한테 비하믄." 평사리 마을에서는 야무네와 천일네가 그 소문을 입에 오리곤 했다. "최참판댁 털어묵은 거는 그렇다 치자. 상전을 배반하고 조준구 수족 노릇을 했던 삼수놈을 무신 까닭으로 그 랬는지 모리겄다마는, 왜헌병한테 찔러서 총상을 시킨 그 일도 접어두고, 많은 사람한테 해악을 끼친 것도, 곱 새도령은 지 자식 앙이가. 그 자식한테 한 짓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거기가 어디라고 찾아가노 말이다. 무신 염치로? 무신 낯짝 치키들고 갔일꼬? 우리가 그 내력을 다 아는데 그런 뻔뻔스런 인사가 어디 또 있겄 나?" "와 아니라요. 그 불쌍하고 가련했든 곱새도령, 지금도 눈앞에 삼삼하요. 눈뜨고는 못 볼 그 정상, 우리가 다 아는데, 죽을라꼬 물에 빠진 기이 어디 한두 번이든다?" "호랭이도 지 새끼 귀타 카믄 내던지고 간 나물바구니 집 앞까지 물어다놓는다 카는데." "사람 아닙니다. 밥이나 믹이달라꼬 기어들어와도 그 꼬라지 못 볼 긴데, 그 곱새도령 몸은 병신이지마는 마음 은 관옥이요. 이 세상 사람 아닌갑소. 컬 때도 보아서 알지마는 그 눈이 실프고 우찌나 맑고 빛이 나든지. 우 째서 그리 착한 사램이 그렇기도 무도한 부모한테서 태어났을까요." "목련도사도 그렇다 안 카드나. 어마님을 지옥에서 구해낼라꼬 오만 짓을 다했지마는 악한 본심이 변하지 않 은께 구할 도리가 없었다 안 카드나." 절에서 귀동냥을 한 모양이었다. 목련존자나 목련도사나 뭐 크게 차이는 없을 것이지만 아무튼 야무네의 기억 이 확실찮은 것만은 사실이다. 어쨌거나 진주에서, 평사리에서, 통영에 있는 조준구의 소식을 알게 된 데는 그 럴 만한 연비가 있었다. 그 소문이 굼뜬 한복의 입에서 나왔던 것이다. 영호는 통영 어업조합에 취직이 되어 가족을 데리고 그곳에 가서 산 지가 오래되었다. 해서 한복이 아들집에 가는 일이 더러 있었고 그러나 그보다 먼저 경위를 설명하자면 몽치 얘기부터 하는 게 순서다. 영호의 처 숙 이가 몽치의 누님이었고 휘는 산에서 몽치와 함께 해도사로부터 글을 배운 처지, 동문이라기보다는 산속에서 이들의 잔뼈가 굵어진 만큼 휘와 몽치는 형제와 같이 유대가 깊을밖에 없었다. 해서 몽치는 열아홉 되던 그해 산을 떠나 통영으로 왔던 것이다. 그러나 몽치는 그 제의를 모두 마다했다. 그리고 그가 택한 길은 고깃배를 타는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몽치를 고리삼아 숙이와 영선이 알게 되었고 객지의 외로운 처지, 친하게 지냈는 데 이들에게 인연이라 할까 우연이라 할까, 여러해 전에 이들 두 여자, 여자라기보다는 두 처녀는 이미 만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영선이 아비 송관수를 따라 지리산으로 갈 때 일이었다. 그해 겨울의 추위는 혹독했다. 송관수 말마 따나 칼날 같은 섬진강 강바람을 마시며 육로로 평사리에 닿은 부녀는 영산댁 주막에서 뜨거운 국밥으로 허기 와 추위를 달래고 하룻밤을 그곳에서 묵었다. 그때 자줏빛 모슬린 치마에 주란사 검정 저고리를 입고 목에 흰 명주 수건을 감은 계집아이 모습을 숙이는 기억하고 있었으며 술항아리에 기대어 졸고 있다가 소스라쳐서 일 어난 숙이는 뜨거운 국밥을 말아주었으며 이부자리를 깔아주었고 말없이 한방에서 잠들었던 것을 영선도 기억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억을 되살린 것은 서로의 신상 얘기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쩐지 어디서 본 듯싶더마는, 참 이상도 하지. 여기서 이렇게 또 만나게 될 줄이야." 숙이는 그들의 인연을 신기해 했다. "그때 일을 생각하믄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다짜고짜 옷보따리를 싸라, 영문 모리고 따라나섰는 데... 야속한 울아부지, 떠날 때는 엄니도 울고 나도 울고, 울기는 와 우노, 죽으로 가나! 하심서 욱대지르든 울 아부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리고 부산에서 하동까지 왔는데 어찌나 날시가 칩든지 강이 얼어서 나룻배가 있 어야지. 해는 저물고 아부지는 걸어서라도 가야 한다, 해서 걷기 시작한 것이 그러크름 먼 길인 줄 누가 알았 겄노. 치분 거는, 간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배는 고프고 밤길이 무서바서 죽겄더마." "아닌게아니라 그때 손을 호호 불믄서 얼굴이 새파래가지고." "말도 마라." "하지마는 옷맵시가 어찌나 이삐든지 도방서 왔구나 싶었지." "그때 울아부지가 날 산에 놔두고 떠난 후로는 이날까지 식구들 종적을 모리니 울엄니 내 동생은 우찌 되었는 지, 시아부지는 늘 걱정 마라 하시지만, 밥 묵고 잠자고 모진 기이 사람 맘인갑제." "그 심정 왜 내가 모리겄노, 알지. 나도 겪은 일인께. 주막에서 자고 일어나니까 온데간데없이, 아부지가 몽치 만 데리고 떠나부리고 천지가 아득하더라. 얼매나 울었는지, 강가에 걸레 빨로 가서도 울고 부석 앞에서 불을 때면서 울고, 돌아가신 할무이가 안 계싰다믄 나는 살지도 못했일 기다." 영선과 숙이는 가끔 서로의 처지를 얘기하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집도 가까이 있었다. 비탈진 곳에 옹기종기 초가가 모여 있는 가난한 동네 그러나 삼간 오두막이라도 집이 있 다는 것은 이들의 안정된 생활을 의미한다. 여러 가지 면에서 영선과 숙이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서로의 처지 도 그랬지만 깔끔하고 차분한 살림 솜씨, 다부지면서도 대범한 성품, 눈에 확 들어오는 용모는 아니었지만, 하 기는 가꾸지 않는 탓도 있었지만 은근히 특색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오목오목하게 생긴 영선의 얼 굴은 총기가 있어 보였고 윤곽이 뚜렷한 것은 영광을 연상하게 했다. 숙이는 엷은 쌍꺼풀의 눈매가 고왔으며 숨은 꽃같이 아른아른한 자태였다. 보통학교를 마쳤고 독서광이던 영광의 영향도 있어 유식한 영선에 비하여 숙이는 무식한 것 같았지만 언해 정도는 깨치고 있었으며 감성이 풍부한 데 비해 자제력이 강하여 영호도 마 음속으론 아내를 무시하지 못했다. 이들이 친숙해진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신상 얘기도 거침없이 하는 사 이, 그러나 한가지 영선은 외할아버지가 백정이었다는 말만은 하지 않았다. 숙이 역시 시할아버지가 살인 죄인 이라는 것, 시할머니가 목매달아 죽은 일만은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 안사람들끼리는 서로 의지하며 흉허물없 이 지냈는데 영호와 휘는 수인사만 했을 뿐 각별하게 대하는 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서로가 못마땅해하는 점이 없지도 않았다. 중퇴이기는 하나 중학 과정을 거의 마친 영호는 그 학력에 걸맞은 양복 입은 월급쟁이였 고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휘는 일개 소목장이, 터놓고 친구가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의지가지할 곳 없는 처남 몽치를 성질이 거칠며 본바 없다 하여 무시하고 경원하는 영호의 처사를 휘는 마땅찮게 생각했으며 영호 는 영호대로 무식한 산놈 주제에 공부한 여자를 얻었다, 그게 기분을 뒤틀리게 했다. 사실 영호는 숙이가 교육 받지 못했고 어디서 흘러들어 왔는지 근본도 모르며 주막집 양녀였다는데 대한 열등감이 항상 마음속에 도사 리고 있었다. 부모 강권에 못이겨, 또 혼처를 고를 만한 처지도 아니었기에 울분을 누르고 결혼하기는 했으나, 그러면서도 윤국이와 숙이의 뜬소문은 그에게 다른 또하나의 열등감을 안겨주었다. "내가 마음만 모질게 먹었음 동경 유학도 했을 거라구." 곧잘 입에 올리는 말이었다. 윤국을 염두에 두고 한 영호 말이었다. 숙이의 비천한 전력과 윤국과의 뜬소문은 서로 상반된 열등감으로 영호 맘속에 있었는데 어쩌면 그 상반된 열등감의 균형이 이들 결혼 생활을 파탄에 몰아놓지 않는 역할을 했는지 모른다. 한번은 영선과 숙이 개발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봄이면 들판에 나물을 캐러 가기도 했고 산에 가서 갈비를 긁어다가 땔감으로, 살림에 보태기도 했으며 때론 바다 쪽으로 나가는 일도 있었다. 그날은 일찌감치 집을 나 섰다. 해저 터널을 지나 발개라는 곳으로 간 이들은 사리 때라 그렇기도 했겠지만 유별나게 물이 많이 빠져나 간 갯벌, 허허벌판이 되어버린 갯벌에서 얘기를 주고받으며 조개를 파기 시작했다. 조개는 많았다. 횡재라도 한 듯 영선과 숙이는 신을 내며 조개를 파서 바구니에 주워담는다. 점심때가 지났을 때는 제법 바구니가 그득 하게 조개를 팠다. 울려퍼지는 뱃고동 소리, 두 여자는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늦여름의 갯바람은 시원했으나 하얀 물살을 가르며 연신 뱃고동을 울리며 지나가는 윤선이 이들을 심란하게 했다. 배를 타고 떠나간 사람은 없었지만 죽음이든 어떤 모양으로든 떠나간 사람들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뱃고동 소리만 들으믄 왜 이리 서러분지 모리겄네." 머리에 슨 수건을 벗어 얼굴의 땀을 닦으며 영선이 말했다. "와 아니라. 손수건 흔들며 떠나보낼 임도 없는데." 숙이 웃으며 말했다. "울오빠가 떠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람의 운명이다, 그런 말을 하더마는, 기약도 없는 세월이 이리 가는데 내 부모 내 형제를 언제 다시 볼꼬." "선아엄마는 희망이 있인께 기다리기나 하지. 그라고 신랑이 점잖고 가숙을 귀히 여기니 나보다는 세월도 덜 서러벘을 기고." "이녁은 어때서?" "그냥 살았지 머." "아들 있고 학식 있는 월급쟁이 남편, 그만하믄 남부러울 기 없일성싶구마는." "속이 좁아 터져서 답답할 때가 있지. 핵교서는 무신 운동인가 하다가 퇴학을 당했다 하더마는 그런 사람치고 는 국량이 모자란다. 시어른들 땜에 정붙이고 살았는데 하기사 나 같은 처지에는 과남한 사람이지." "..." "다만 어매 아배도 없는 내 동생, 천지간에 누부 하나뿐인데 그 아아한테 하는 짓이 서분코 야속하다. 아무리 출가외인이기로, 가숙을 생각하믄 그럴 수가 없지." "마음으로야 생각 안 할라고? 오세바세 안 하는 성미니까 그렇겄지." 속사정은 다 알지만 영선은 그렇게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처남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산에서 지쪼대로 컸어이 배운 기 머 있겄노. 불쌍한 우리 몽치, 저러다 가 장개도 못 가고 몽다리귀신 안 되겄나." "자기가 안 갈라 하든데 머." "선아엄마 보고는 속맘 얘길 하제?" "속맘 얘기라기보다." "오므은 내 얼굴만 한분 보고 선아네집에 가서 뼈대니 자형 노릇은 선아아부지가 하신다. 숙이는 눈물을 씻는다. "선아아배가 장개부터 가라 하니까, 돈 벌어서 가겠다, 지금이야 머어 보고 딸을 주겄는가, 가진 거라고는 못 생긴 얼굴에 몸뚱이밖에 더 있는가, 함서." "그거는 틀린 밀이 아니제." "선아아배 말이 장개만 간다믄 해도사한테 몽치 몫이 있다 그러더마." "...?" "진규엄마는 그 소리 못 들었어?" "나보고는 말을 해야지. 일체 얘기를 안 한다. 내 걱정 안 시킬라고 그러겄지만 어떤 때는 서운한 생각도 들 고." "얼매나 누부 생각을 한다고, 모린다 카이 하는 말인데 해도사한테 있다는 몽치의 몫은 돌아가신 주막집 할무 이가 장개갈 적에 주라 하심서 해도사한테 맽기놓은 거라 하데." "할무이!" 숙이는 별안간 울부짖었다. 흐느껴 울면서 "머리털을 뽑아서 신을 사, 삼아도 그, 그 은공은 다 못할 긴데, 다 가심에다 못박아놓고 가신 기라 하, 할무 이! 으흐흐흣..." 한참 동안을 숙이는 울었다. "울어라. 언제 맘놓고 한분 울었더나. 실컷 울어.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파도 소리뿐이다." "그래, 그러니께 몽치가 뭐라 하든고?" 목이 꽉 잠긴 소리로 묻는다. "한탐 동안 말이 없다가, 나도 생각한 일이 있인께 장개갈 때가 되믄 가겄다, 그러이 형님 아무말 마소, 하더 마." "마음속으로 무슨 놈의 육도벼슬을 하는지, 우리 시아부지도 땅때기 좀 띠어주겠으니 장개들어서 농사 짓고 살아라 하싰는데, 그 아아는 농사 안 하겄다, 그놈이 와 그라는지 모리겄네." "세상에 그런 시어른은 안 기실 기다. 우리 어무이 아부지도 그렇지마는." "부모복은 없임서 피도 살도 닿지 않는 분들 땜에... 우리 시아부지 말심이 부모가 안 기시니 누부가 부모 맞 재비다, 그러이 우리 책임 아니가, 그 생각을 하믄 내가 무신 탓을 하겄노." 해가 중천에서 많이 기울었는데 영선과 죽이는 일어설 줄 몰랐다. 파기만 하면 나타나는 조개를 놔두고 차마 일어서지질 않았던 것이다.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욕심을 뿌리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몇 명 안되는 개발꾼들이 다 떠나고 조수의 울림이 거세어지면서 차츰 갯벌을 물이 점령하기 시작했을 때 "아이구! 안 되겠다. 이러다가는 한밤중에 저녁하게 생겼네." 숙이 소스라쳐 일어섰고 영선도 따라 일어섰다. "이 많은 걸 다 우짜지?" 갈 채비를 차리다가 바구니를 들여다본 숙이 중얼거렸다. "가다가 장에서 팔지 머." 영선이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그럴까? 그럼 서둘러 가야겄네." 두 여자는 검정 인조견 치마에 바람이 나게 부지런히 걸어서 장까지 왔다. 흥정을 하고 어쩌고, 조개를 파는데 시간이 걸렸다. 또 부지런히 걸어서 영선의 집 가까이까지 왔을 때 사방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미쳤다, 미쳤어. 집에서 난리가 났을 긴데." 숙이 걱정을 했다. 쫓겨나믄 우리집에 오지 머." 약을 올리듯 영선이 말했다. 속 편한 소리 하네." 와, 걱정가? 서방님이 무섭기는 무서븐 모양이제." 무서바서가 아니라 성가시니께, 남자가 한두 마디로 끝내지 않고 곱씹어싸아서." 영선은 삽짝에 들어서며 보소 나 왔소." 휘가 남폿불을 들어올리며 내다보았다. 가난한 동네에는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어찌나 조개가 많든지 팔고 오니라고 늦었소." 아아들 울리고 머하로 그런 짓 하는고." 하다가 휘는 진규어머니, 진규가 자는데 깨울까요? 그냥 자게 둘까요." 숙이에게 물었다. 예, 이거 참 미안스러바서." 당황하자 어서 집에 가는 기이 좋겄네. 내가 좀 있다 진규 데리다 줄 기니께." 영선이 말에 숙이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삽짝을 나섰다. 어두운 골목을 뛰다시피 집에 왔을 때 초 롱에 불을 켜놓고 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영호가 벌떡 일어섰다. 대관절 이게 머하는 짓고!" 눈을 부릅뜨고 우레같이 소리를 질렀다. 잘못했소. 일이 그렇게 됐구마요." 숙이는 바구니를 장독가에 팽겨쳐놓고 부엌으로 달려가서 밥쌀부터 씻으려 하는데 부엌 앞까지 따라온 영호는 설명이 있어야 할 거 아니가! 와 늦었노." 밥쌀 앉히놓고 말하겠으니." 일없다! 나와!" 부엌까지 들어와 숙이 팔을 잡아끈다. 이거 놓으소. 갈께요." 영호를 따라나온 숙이는 마루에 걸터 앉는다. 개발하러 간 것은 알겄는데." 선아 한테서 얘기는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캄캄한 밤에도 개발을 했나?" 억지소리다. 가고 오고 걸리는 시간이 있는데 밤에 개발을 했느냐, 영호 자신도 억지라는 것을 알고 한 말이었 다. 젊은 계집년들, 개발이라고? 핑계 한분 그럴듯하다." ..." 대체 어디 갔더노? 어떤 놈팽이하고 눈이 맞았노?" 마주보고 선 영호는 어둠을 등지고 초롱불을 받는데 묘하게 키가커 보였다. 얼굴도 길었고 목도 길어 보였다. 숙이는 그러한 남편을 말없이 바라본다. 근자에 와서 영호는 사람이 달라졌다. 옹졸한 면은 본시부터 없지 않 았으나 내성적인 성격이여서 말은 적은 편이었는데 말이 많아진 것이다. 말이 많아지고부터 사람이 유치해졌 다. 영호 자신도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표현부족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옛날처럼 말을 줄이면 될 텐데 이미 그는 통제력을 잃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 생긴 버릇이 억지소리였으며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저도 모르게 엉뚱한 말을 해 놓고는 스스로 놀라고 수습이 안되니까 또 유치해질 수밖에. 와 말을 못하노! 놀기는 논 모양이구나.두 년이 죽이 맞아서." 저보고는 무신 소리 해도 좋소. 줏어담지 않아도 되니께요. 남의 가숙 헌해하는 못난 남자, 선아아부지가 들어 보소 가만 있을 기든가." 가만 안 있음!" 이녁 다리가 성하겄소?" 남편을 두려워하는 가색이 조금도 없다. 딱해하는 것 같았다. 흥! 무식한 게 입은 살아서 제법 말하네." 질게 말해봐야 늘 하는 그말 아니겄소? 저녁이나 해묵고 따지든지 캐든지 하입시다." 안돼." 그라믄 이렇기 앉아서 밤 새기로 합시다. 사람이 나이 묵을수록국량이 좁아지니 나도 이자는 못 살겄소." 이 계집이, 간이 덕석만 하네. 남편 알기를 발싸개만큼도, 정 말 못하겠나?" 조개가 많아서 장에서 팔았소. 그러니라 늦어진 겁니다." 머라? 뭐라 캤노?" ..." 이자는 남편 얼굴 깎기로 작심했단 말이제? 우세시킬라고 장바닥에 나앉은 기가?" 하다 말고 별안간 고함을 지른다. 내가 밥을 굶겼나! 옷을 벗겼나! 계집 장바닥에 나앉힐 만큼 이내가 그렇기 못난놈가!" 하는데 영선이 다섯 살짜리 진규를 업고 들어왔다. 두 번이나 아이를 잃고 겨우 길러낸 영호와 숙이의 외아들 이었다. 아이는 영선의등에서 잠들어 있었다. 진규아부지 지가 잘못했습니다. 진규 엄마는 자꾸 가자 하는 거를 지가 욕심을 부려서 지체된 거니께 용서 하이소." 상관마소. 남의 가정사에 와 끼여드는 겁니까." 끼여든다기보다 지가 잘못해서 불화가 생겼으니 하는 말이지요."해서 주거니 받거니 말다툼을 했던 것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영호는 영선이 송관수의 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진주 농업학교에 다녔을 때 송관 수와 정석, 그리고 영팔노인은 영호의 울타리가 되어주었던 사람이다. 광주학생운동때 농업학교에서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영호가 퇴학을 당한 것도 송관수 정석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부친 한 복이가 영선을 며느리로 삼고 싶어했던 심중, 그것은 한복의 마음이었을 뿐 입밖에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영선 은 강쇠에게 맡겨졌고 한본이 실망한 것을 영호는 알 턱이 없었다. 영선이라는 계집아이의 존재조차 그는 모 르고 있었던 것이다. 영선과 말다툼이 있은 지 한달이 지났을까? 아들집에 왔던 한복이 영선의 집 앞 골목에서 우연히 영선과 마주 치게 되었던 것이다. 아, 아니 이기이 누고?" 한복이 먼저 알아보았다. 관수형님 딸네미 아니가?" 예?" 영선은 기억이 확실치 않은 듯 생각해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었다. 그도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았기 때문 이다. 여러 해 전에, 부산서 그 와."하다말고 송관수 그분의 딸이제?" 예." 그럼 맞다. 부산서 그 와 검정다리 근처에 있던 너거 집에 간 일이 있는데 나를 모리나?" 아 예! 아이구 참." 여기서 니를 만나다니 참말로 세상이 좁구나. 한 골목에서 서로친하게 지내믄서 그거를 모리고 있었다니." 저녁에, 숙이가 차린 밥상머리에 두 집 식구들이 모여 함께 저녁을 들면서 한복이 한탄스럽게 말했다. 참말로, 관수아저씨 딸이라는 걸 어찌 알았겄십니까?" 누구보다도 태도가 돌변한 것은 영호였다. 그는 새삼스럽게 자기자신의 변한 모습 찌들어진 모습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가장 순수했던 시기의 기억이 영호를 순수한 상태로 되돌려 놓은 듯, 관수에 대한 친애의 정이 영선 에게로 옮겨갔고 누이동생을 대한 듯, 그의 배우자 휘에게조차 남다른 감정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진정한 우정 이 시작된 것이다. 아부님은 편안하시고." 깊이 알지는 못하나 한복이는 김강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해서 휘에 대해서도 존중을 표했던 것이다. 어쨌든간에 이렇게 만낸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앞으로는 친형제가 진배없어이, 서로 의지하고 도아감서 살아 라. 그래 자네는 살기가 우떻노?" 예, 괜찮십니더." 휘의 점잖은 행동거지는 영호 눈에도 돋보였다. 한편 한복이는 휘의 스승이 조준구의 아들 조병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근처에 살고 있으며 조준구가 아들집에 와 있고 그의 횡포가 얼마만한 것인지 소송히 알게 된 것이 다. 그러니까 진주의 영팔노인 분노하는 것도, 평사리 마을에서 아낙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것도 그 진원지는 한복이었던 것이다. 허튼말을 하지 않는 한복이었지만 그러한 한복이조차 분개했고 조준구의 근황을 입밖에 낸 것은 조병수가 평사리 마을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병수는 휘를 바라보았다. 경주에 한분 다녀오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제가 뫼시고 가겠습니다." 언젠가 한번 경주에 가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구경을 한다기보다 신라 천년의 고도 그곳에 남은 구조물에 접하고 싶은 병수의 심정을 휘는 알고 있었다. 휘는 스승을 위로하고 싶었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 며칠 동안이라도 그를 끌어내고 싶었다. 일에 대한 정열을 되살려주고 싶었다. 어떻게 가겠나. 자네나 내 형편이 그렇게 안 돼 있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병수의 눈은 한순간 빛났다. 형편 생각만 하시믄 아무 일도 못합니다." 그건 그래." 훌훌 털어부리고 다녀오시지요." 그새 지감과 해도사가 오시면 어떻게 해?" 염려하는 병수의 표정은 마치 천진무구한 아이 같았다. 그리 쉬이 오시겠습니까." 그 사람들 하는 짓이 늘 엉뚱하니까." 그게 염려시라믄 경주로 뒤쫓아오시라는 전갈을 두믄 될 것입니다." 그럴까..." 술을 마시며 한동안 생각에 잠기듯 말이 없더니 휘야." 예 선생님." 나는 집을 짓고 싶었네라. 몸만 이렇지 않았다면 집을 짓고 싶었다." 저하고 함께 집을 지어보시지요." 휘는 미소하며 말했고 병수도 싱긋이 웃었다. 내 소원이 무엇인지, 모르지?" ..." 옛날에 내가 살았든 동네에 목수 한 사람이 있었다. 못생긴 곰보였지. 처자도 없는 혈혈단신, 몇 번밖에 본 일 은 없었지만 얘기는 많이 들었어. 나는 그 사람이 부러웠다. 연장망태 짊어지고 발 닿는대로 떠다니는 그의 팔 자가 부러웠네. 자유인이지.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이." 선생님." 하고는 휘가 머뭇거리자 말해보게." 떠다니는 사람이믄 집은 왜 짓습니까." 글쎄, 자네 말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 떠나는 것과 머무는 것, 해서 사람들은 괴로운 것, 안 그러냐? 예." 머무르고 싶은 욕망이 집으로 나타난다고 한다면 집을 짓고 싶은 내 마음도 욕망일까? 지리산의 해도사는 산 속에다 집, 집이래야 산막이지만 지었다가는 버리고 또 지었다가는 버리고 한다는데, 집을 짓는 것도, 버리는 것도 자재로우면서 번뇌에도 자재로울 것이야." 그런 말심을 도사님께서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 해도사는 자재롭다 하시더냐?" 아니지요. 그러질 못해서 버린다 하시더마요." 하하핫핫핫..." 오래간만에 병수는 소래내어 웃었다. 참 선생님." ..." 평사리 최씨댁의 그 어른을 아시는지요?" 길상이 그분 말이냐?" 예." 알지 알다마다." 순간 병수의 얼굴에 안개 같은 슬픔이 모여드는 것 같았다. 내 어릴적에... 내가 어렸을 적에 나를 알아주든 단 한 사람이었네. 마른땅에 봄비같이 나를 적셔주든 소년이었 네. 내 영혼을 어루만져 주셨고... 세월이 이렇게 흘러갔을 줄이야." 목이 메는지 병수는 술잔을 들고 눈물을 아니 흘리려는 듯 눈을 감으며 술을 마셨다. 실로 그는 만감에 사무 쳤던 것이다. 그는 조준구와의 견디기 힘든 투쟁, 아니 자기 자신고의 투쟁도 새롭게 그의 가슴을 저미었다. 술잔을 놓으며 그래 그분 얘기는 어째 하는 건가?" 며칠 후에 도솔암으로 내려오신다는 얘기였습니다." 뭣하러? 그분 운신하기 어려운 형편일 텐데?" 병수는 진주서 독립자금 강탈사건이 있은 후 소지감의 부탁으로 집에 와서 며칠을 묵었다가 만주로 같 사람들 생각을 했다. 시국이 시끄러바서 그 어른이 언제 우떻게 될지 모리는 일이라 그리 되기 전에 도솔암에다 관음보살 탱화를 그릴라고 내리오신다는 얘기였습니다." 뭐? 관음의 탱화를?" 잘은 모르지만 돌아가신 스승과의 약조 때문이라 그런 얘기였습니다." 스승과의 약조..." 돌아가신 스승이란 우관선사를 말하는 것이다. 우관이 생존시, 천수관음을 조성하여 도탕에 빠진 이 나라 백성 의 원을 걸어라 하고 길상에게 당부했던 것이다. 그러나 천수관음의 조성은 대역사이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그 일에서 떠나 있었던 길상이고 보면, 해서 관음보살의 탱화를 착안 했고 그 동안 길상은 꽤 오랜 시일을 두고 붓을 풀어왔던 것이다. 그분이 오랫동안 붓을 놨을 터인데 그러나 진심이면 무엇을 못하리." 선생님." 또 왜." 휘가 할말을 짐작하듯 병수는 또다시 술잔을 들었다. 어디 병수가 한이 그것뿐이겠는가. 불구의 몸으로 서희를 엿보았던 마음, 서희와 자신을 결합시키려 했던 부모 의 간교에 빠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던 그 세월, 서희는 그에게 빛이였고 우주의 신비였다. 관음상이요 숭배의 대상이며 그것은 인간적이 아닌 천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난 그는 길상을 만날 수는 없었다. 간절하게 만나고 싶은 길상이지만 서희의 존재는 그것을 상쇄했다. 도솔암으로 가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그 어른도 만나고 선생님 어떻습니까." 아니나다를까 휘는 병수가 예상한 대로 말했다. 말이 그렇지. 아버지 땜에 내가 어디를 가겠느냐." 하지마는." 아니다. 생각해본 것만도 좋았구나." 휘는 더 이상 말할수 없었던지 한숨을 내쉬었다. 해거름에 아들집에서 병수댁네가 돌아온 것을 보고 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영호와 숙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출장갔다 오느라고... 그래 일은 잘 치렀소?" 영호가 물었다. 예, 괜찮기 끝났소." 가보지고 못하고 내가 생각해도 한심스럽구만." 떠벌리고 할 형편도 아니었은께, 나 역시나 사위로서 술 한잔 대접한 일이 없으니 어찌 한이 남지 않겠소." 이점, 저점, 술이나 합시다." 영호가 술을 사온것 같았다. 영선이 술상을 차려왔고, 그새 또 울었는지 눈이 빨갛게 돼 있었다. 그리고 여자 들은 작은방으로 갔고 큰방에서 두 사내는 마주앉았다. 나도 한때는 관수아저씨 뜻에 어긋나지 않는 인물이었는데 살다보니 사람이 치사해지고 우물 안에 갇힌 개구 리처럼 세상 보는 눈이 좁아지고 여러 가지로 김형한테 부끄럽소." 영호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 말 마시오. 나한테 부끄러울 기이 머 있겠소." 김형의 인품을 몰라보고 경박했던 언동을 용서하시오." 자꾸 그러믄 입장 곤란합니다. 평사리의 춘부장 말심대로 형제겉이 지냈다믄 서로 무신 흉허물이 있겠소. 안사 람끼리 다정하니 우리도 그러믄 될 기고." 맞소. 나도 수양을 해야겄소. 사실 내 경우, 내 부친의 강경한 성품 아니었다면 무엇일 됐을지, 그거 생각해보 니 부친과 백부, 이를테면 흰색과 검정색 같다 할 수 있는데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어중간하게, 내 세월에 곰팡이가 쓸었던 것 같소." 이제 보니 김형 말솜씨가 보통 아니구마는." 마음에 있는 대로 얘기를 하니까 그렇지요." 김형도 가끔 우리 선생님을 만나보시오. 참말로 이슬같이 맑게 살아오신 분이라 말씀이 없으시도 몸으로 전해 오는 귀한 것이 있소." 그렇게 하리다." 그리고 지리산 산속에도 더러 가보시고요. 나는 항상 그 산 생각을 합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재주를 다 부려도 그 산의 바위 하나를 따를 수 없고, 훌훌 털어부릴 수 있는 곳도 산이오." 김형." 예." 알고 보면 내 부친이나 내 어머니, 한에 사무친 분들인데 착하게 살았소. 지금도 착하게 살고 계시고, 그분들 사이에서 태어난 내가." 그런 말심은 마시오. 이 경우는 다르지마는 야차 겉은 어매 아배에서 태어난 사람도 부처같이 어진 경우가 있 더만요. 하물며 착한부모 밑의 나쁜 자식은 없을 거요." 영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야차 같은 부모 사이에 부처같은 자식이 있다는 말은 상당히 큰 위안이 되었다. 야차 같은 할아버지 야차같은 큰 아버지. 그 말은 맞는 것 같소. 내 부친도, 내 집안 얘기를 해서 안됐소만 내 부친도 그러한 부처가 아닌가 싶소." 두 사람은 위기투합하여 많은 술을 마셨고 까닭 모를 눈물도 흘리곤 했는데 휘는 느닷없이 몽치 문제를 꺼내 었다. 첫째 김형이 해야 할 일은 몽치에 대해서 생각을 바꾸는 일이오." 순간 영호는 무척 당황했다. 나, 나도 그렇지만 처남도 나를 바로 보는 일이 없고." 그거는 김형이 달가워하지 않으니께 그런거요. 누님을 소홀히 한다는 것도 몽치 맘에는 아팠을 거요." 그, 그거는 모리는 말이요. 집사람이 얼마나 도도한지 몰라서 그러요." 그럴까요?" 휘는 웃었다. 하여간 몽치 그놈은 장래성도 있고 뚝심이 보통 아니오. 누구한테 눌리서는 못 사는 성미니 우격다짐으로도 안되고 그 놈을 다스릴 사람은 해도사말고는 없을 기요. 지몫 지가 찾아먹을 기니 머를 우찌하라는 것보다 붙 이로 생각하면 다 잘될 깁니다." 선창가 뒷골목에는 색주가도 못 두는 영세한 술집이 많았다. 그런 술집을 다치노미집이라 했는데 종래의 주막 이 이런 항구 도시에서는 일본말로 바뀌지 않았나 싶다. 모처럼 뭍에 오른 몽치는 그러한 술집들이 모여 있는 골목을 동료 한 사람과 함께 어슬렁어슬렁 걸어들어간다. 몽치는 회색 무명바지에 낡은 낫파후쿠 윗도리를 입 었고 동행은 때묻은 바지 적삼을 입고 있었다. 키는 몽치와 엇비슷하게 큰 편이었지만 몸은 깡말랐다. 이들은 단골인 다치노미집으로 들어간다. 주인 여자 사천집이 몽치를 힐끗 쳐다보았다. 다치노미의 주점 풍경은 살벌했다. 송판으로 두들겨맞춘 탁자 걸상은 낡고 기름때에 절어 있었으며 벽 천장은 회갈색으로 그을어서, 땅거미가 지는 밖은 아직 희미한 밝음이 남아 있었는데 켜진 벌거숭이 전등빛을 받은 주점 내부는 오히려 어두컴컴해 보였다. 서너명 가량 술손님이 있었다. 뱃사람. 부두의 지게꾼과 하역부, 생선 도가의 일꾼, 경매장을 얼쩡거리는 건달과 투정꾼들이 주된 고객인데 드나드는 대개의 술꾼들 기질은 드세었 으나 지지리 궁상 남루한 행색들이었다. 여기 국밥 두 그릇하고 막걸리 한 잔씩 갖다주소." 몽치가 사천집 모화에게 우렁우렁 울리는 목청으로 말했다.몽치는 거구였다. 누구의 눈에도 힘깨나 쓰는 사내로 비쳤다. 못생긴 얼굴, 입술이 터져서 딱지가 앉아 있었고 햇볕과 바닷바람에 얼굴은 검붉었으며 정맥이 솟은 손은 몹시 거칠었다. 아짐씨!" 뭉치는 또다시 그 목청으로 불렀다.」 와요." 뱃놈들 배애지 큰 거 알지요?" 올 때마다 하는 소리, 귀에 못이 박이겄네." 사천집 모화는 사발에 밥을 담으며 쌀쌀하게 말했다. 여자는 허리가 홍두깨처럼 가늘었다. 가늘다 하여 가냘픈 것은 아니었다. 탄력이 있고 강인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눈썹이 짙고 눈시울도 길고 짙었다. 그것 이왼 그 저 보통 흔히 보는 얼굴인데 그 여자 기상이 대단한 것은 좀 유명했다.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폭행하려던 주 정꾼이게 칼을 들이댄 사건으로 유명해진 것이다. 그냥 방어나 위협이 아니었고 정말 죽일 듯 눈이 빛나던 그 를 바라본 술꾼들은 한순간 숨을 쉬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술꾼들도 모화를 함부로 대하 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른 안팎으로 보이는 사천집 모화의 전력이 어떤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과부인지 소 박데긴지, 아들이 하나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아들을 본 일이 없고 심부름꾼 머슴아이 하나를 데리고 주점을 꾸려나가고 있었는데 손님하고 함께 술을 마신다거나 젓가락 두들기며 노래 부르는 그 따위 짓 을 결코 하지 않았다. 작년 가을이었던가 무슨 일이 있긴있었던 모양인데 술을 마시던 놈팽이가 별안간 모화 에게 덤벼들어 머리채를 감아쥐고 구타하려는 순간 마침 옆에서 국밥을 먹던 몽치가 일어섰다. 그는 사내 멱 살을 잡고 끌어낸 뒤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사내 면상을 쳤다. 아이크!" 사내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모화는 떨어진 비녀를 주워 입에 물고 머리를 감아서 비녀를 꽂은 뒤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몽치에게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머슴아이가 김치 보시기 하나 막걸리 두 잔을 갖다놨다. 성님 드시소." 음." 두 사내는 단숨에 술을 마시고 김치를 두어 젓가락 집어먹는다. 함께 온 사내는 몽치보다 한해 늦게 고깃배를 탔다. 본명은 이양생이었지만 뱃사람들은 그를 얌생이라 불렀다. 아직 앳된 자취가 남아 있는 모습이었고 장가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배를 탔다는 얘기였으며 병든 홀어머니와 생선을 가공하는 사쿠라보시 공장에 다니 는 누이동생이 있다는 말을 했다. 국밥 두 그릇을 머슴아이가 가져왔다. 확실하게 분량이 많았다. 묵자." 야." 몽치는 뭍에 오르면 대개 혼자 와서 국밥 한 그릇 막걸리 한 잔을 마시고 돌아갔다. 일행과 함께 왔을 때도 그는 절대로 막걸리 한 잔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성님 국밥 하나 가지고 간에 기별이나 가겄소?" 술도 딱 한 잔, 취한 거를 본 일이 없소." 맹물에도 취한단 말 못 들었나? 나는 술 안 마시도 늘 취해 있다." 머라꼬요?" 취하지 않고 이눔의 세상의 우찌 살아갈 기고." 양생은 웃다가 말했다. 성님은 술 안 마시도 취할 수 있이니 얼매나 좋소. 평생의 술값모우믄 집이라도 안 사겄소? 나는 술 안 마시 믄 취할 수 없이니 그게 사단이지요." 장개 밑천은 좀 모아놨냐?" 몽치는 실실 웃으며 물었다. 말 마소. 우떤 때 그 생각을 하믄 눈이 뒤집힐 것 겉소. 뼈가 빠지게 일을 해도 남는 기 없이니 어느 세월에 가숙 거느리겄소." 빚 안 지니 다행이다. 계집아한테 옷감 끊어주고 크리무 사다주고 그러이 그렇지." 언제요?" 했으나 양생은 당황한다. 내가 난전에서 그거를 봤는데 시치미 뗄 기가?" 그거사 머, 어쩌다가... 술잔 마시고 집에 보탤라 카이, 동생이 사쿠라보시 공장에서 버는 거 가지고는 생활이 택부족이라요. 어매는 늘 골골거리고, 이러다가 내라도 아파 누 으믄 속절없이 식구들 다 죽는 판이오." ..." 다 복이 없어서 안 그렇겄소." 복이 없어 그렇건데? 세상이 고르잖으니 그렇제." 그거나 저거나, 매치나 엎어지나." 그 따우 생각 한께 평생 종놈의 신세 면키 어러버." 나부댄다고 세상이 어디 달라지겄소? 달라지기만 한다믄 모가진들 못 걸겄소?" 알고는 있이야제." 머를 말입니꺼." 와 뼈빠지게 일을 해도 묵고 살기 어러분지 그 이치 말이다." 이 갈아봐야 이빨만 뿌러지지, 이치 겉은 거 알아 머하겄소. 알고 접지도 않구만요." 양생은 시들하다는 듯 말했다. 실개 빠진 놈, 우리 몫을 누가 가리단죽 하는가, 뺏기더라도 셈은 해봐야, 그것도 안 하믄서 무슨 놈의 복타령 이고." 그라믄 성님이 셈 한번 해보소." 선창가에 한분 나가봐라." ...?" 어구점 기름집 할 것 없이 큰 장사는 모두 왜놈들이 하고 있다. 통영 바닥의 돈은 그놈들이 긁어들이니께 우리 손바닥에 남는 돈이 적어진다. 그거는 그렇고 어장을 한분 생 각해봐라. 대구릿배는 죄다 왜놈이 가지고 있다. 니도 알 기다마는." 그거 모리는 뱃놈이 있겄소?" 그놈들 구역에는 어업권이다 뭐다 함서 조선놈 배 얼씬이나 하나? 모조리 다 차지해서 잽히는 개기는 모도 일 본으로 가지가고 우리 쌀을 가지가듯이, 쌀이사 대신 알량미를 풀어 놓기나 하지마는 개기는 그것도 없다. 하 니 산중 사람들 개기 천신이나 하는 줄 아나? 도방에서는 비싼 개기 묵어야 하고 팔 물건이 적은께 우리 손바 닥에 놓이는 돈도 적은 기라. 물건을 비싸고 우리 수중에 돈은 적고 뼈가 빠지게 일해보아야 묵고 살기 어러 분 것은 당연하다." 양생은 흥미없는 듯 멍하니 앉아 있었다. 조선놈들은 게우 대구리선 몇 척 가지고 길목 나쁜 데를 훑어야 하고 주낙배를 의지해야 하고, 다만 하나 결 판 낼라꼬 덤비는 기이 봄철의 멸어장이라. 돈푼 있는 것들, 아니믄 빚을 끌어댕기서 대가리 싸매고 디리덤비 지마는 그거는 노름과도 같아서 운수 좋으믄 돈방석에 앉고 운수 불길하믄 빚더미 위에 앉고 해마다 망하는 자흥하는 자 물갈이가 심하제. 하니 어장애비들 노름하는 기분, 그거 야 머 어쨌거나 돈방석에 앉든, 빚더미 위에 앉든 왜놈들한테 비하믄 새발의 피고 젓꾼들이 거머쥐는 돈이라 는 것도 가랑잎 같은 건데." 성님, 언변이 그리 좋은 걸 몰랐오. 목청만 큰 줄 알았더마는." 잠시 말을 멈춘 몽치는 화난 목소리로 네놈이 하도 복타령을 한께 그랬다. 다 사람이 하는 짓이지 구신이 춤추나? 다 사람이 하는 짓이제, 사람이 하 는 짓이믄 와 못 고치겄노. 팔자도 고치는데." 그만 했이믄 알아듣겄소. 제발 목소리 좀 낮추소." 와." 잘못하다간 콩밥 묵소." 보니께 모도 조선종잔데 와 내가 할말 못할 기고, 겁날 것 없다." 강약이 부동인데 우짤 깁니까?" 가진 놈들이 겁나지 몸뚱이 하나 머가 무섭노." 하 참, 이제 그만 가입시더." 왜놈한테 고해바칠까봐?" 툭 불거져나온 눈을 부릅뜬다. 낮말을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한께... 사람들 맘을 누가 알겄소." 흥! 내가 이래봬도 산에서 비신술을 배우믄스 컸고 이자는 바다 한가운데서 비신술을 배우는 중이라. 어느놈 이고 간에 왜놈 턱밑에 가서 고해바치는 놈이 있이믄 배애지를 칼로 푹 찔러서 직이비릴 기다. 갬히 나한테 대적을 해?" 어릴 적부터 산짐승 무서운 줄 모르고 이산 저산 헤집고 다니던 몽치였다. 그의 발이 귀신처럼 빠른 것은 사 실이나 비신술 운운,그것은 허풍이다. 그러나 배를 칼로 푹 찔러죽이겠다는 말에는 사람들을 전율하게 하는 괴 기 같은 것, 피바람과 같은 살기가 있었다. 그의 말에 귀 기울이던 주점의 술꾼들 표정이 달라진 것이다. 어릴적에 험준한 산속을 쏘다니는 그를 보고 산짐승에게 해를 입을까 걱정들 했을 때 해도사는 말했다. 짐승 들이 그를 피해가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몽치는 어릴 적부터 기가 세었다. 첩첩산중, 행로에서 쓰러져 죽은 아비 시체 곁에서 홀로 지새웠던 어린 아이는 그때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체 무슨 경험을 했을 까? 몽치는 겁내는 것이 없었다. 이자 그만 나가입시더, 성님." 양생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몽치의 팔을 잡아끌었다. 사천집 모화가 혼자 슬그머니 웃고 있었다. 와 이카노!" 양생이 잡는 손을 뿌리치고 내가 가고 저버야 간다. 가라 마라, 누구 맘대로."하면서 일어섰다. 몽치와 양생이 밖으로 나왔을때 사방은 어두워져 있었다. 선창가에는 노점상의 가스불이 늘어놓은 울긋불긋한 잡화를 화려하게 비추어주었으며 마치 굴비 엮어놓은 듯 항구에는 작은 배 큰 배가 빽빽이 정박해 있었다. 기 름은 부은 듯 매끄러운 바다, 바다 위에 달빛이 희번덕이고 멀리 등대섬의 등댓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고동을 울리며 떠나가는 밤배, 들어오는 밤배, 어쨌거나 항구는 활기에 넘쳐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서 난 신작로말고는 거의 평지라고는 없는 이 고장, 부자들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건 빈자들의 오막살이건 모두다 산비탈에서 뻗치고 있었다. 그 산비탈에 등불 들이 나돋아서 부자 빈자 구별없이 아름다웠다. 옛날, 일개 편벽의 갯촌이었고 고성군에 딸린 관방에 불과했던 이 고장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구국의 영웅 이순신의 당포와 한산도의 대첩을 거두게 되는데 그로 인하여 삼도통제사 군영이 이곳 갯촌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바로 통영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통영에는 벼슬아치들을 따라 서울의 세련된 문물이 흘러들어 왔을 것이며, 팔도 장인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을 것이며 나라를 구하겠다는 지순한 영혼들이 이곳을 향해 팽 패했을 것인즉, 그 위대한 힘과 정신이 마침내 찬란한 승리의 꽃을 피게 했던, 그것은 편벽한 갯촌의 엄청난 변신, 변화였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귀향을 서둘렀겠지만 해류 관 계인지 천하일미를 자랑하는 해물이며, 아름다운 풍광, 온화한 기후, 넘실대는 바다, 아득한 저편에 대한 동경, 그러한 생활의 터전을 사랑했을 감성 풍부한 장인들 자유인들이 잔류했을 가능성은 충분하고 상상키 어렵지 않다.그들이야말로 남쪽 끝머리 새로운 모습으로 떠오른 통영의 주역들이며 뿌리가 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유례 없는 아름다움과 정교함을 자랑하는 통영 갓, 전국에 명성을 떨친 통영 소반을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나 전칠기며 독특한 목공예가 뿌리 없이 되어진 것은 아니다. 선자방 칠방 주석방 등 공방이 이곳에 국영으로 있 었던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이들 자유와 창조의 정신들은, 고깃 배 찔러먹는 뱃놈이라 하시를 하면서도 그 바다에서 신선한 활력을 받아 쇠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피는 맥맥히 흘러 이 땅에서는 아직 숨쉬고 있 다. 자긍심 높은 후손들이 치욕을 씹으며 그러나 오기를 잃지 않고 거닐고 있다. 사람들은 성지, 충렬사의 붉 은 동백꽃을 마음으로 몸으로 수호하며 이 순신이 팠다는 명정리의 쌍우물, 어떠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해서 가뭄 때는 통영 사람들 유일한 식수가 되는 명정리 우물을 바가지로 퍼올리는 아낙들 마음은 늘 경건했다. 왜 국 군선들이 몰리었던 판데목, 어마지두한 왜병들이 손으로 팠다는 판데목,사람들은 그곳에 설치한 해저터널을 다이코보리라 부른다. 그것은 일본의 참패를 상징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우람한 기둥의 세병관이 학교 교실로 쓰이며 퇴락해가는 것을 슬퍼한다. 어떤 여인이 일본인과 동서한다 하여 그의 부모가 집밖 출입을 아니 하고 형제자매 일가친척이 여인을 외면하며 고장 사람들 모두가 그 여인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니, 파문으로 철저하 게 응징하는 그 치열함, 여하튼 일제 치하의 통영, 남쪽 멀리 멀리 날아가버린 자유의 새가 돌아올 것을 기다 리는 사람들, 자랑스러움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 활기에 넘쳐 있다, 통영은. 양생과 헤어진 몽치는 간창골 입구에 있는 휘의 일방을 힐끗 쳐다보며 지나간다. 문이 잠겨져 있었던 것이다. 명정리 휘의 집에 몽치가 들어갔을 때 해도사가 그집 작은방에 좌정해 있었다. 몽치는 절을 하고 해도사를 바라보았다. 남폿불 아래 해도사의 신수는 훤했다. 풀기가 빳빳한 베옷 고의적삼에 옥색 대님,때묻지 않은 버선은 진솔 같았다.도방 출입이라 그랬겠지만 이상한 점이 없지도 않았다. 벽에는 흰 두루마기가 걸려 있었다. 몽치는 불거진 눈망울을 굴리면서 스승이자 자신을 길러준 해도사를 뭐가 틀어졌는 지 올곧지 않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옷 꼬라지가 뭐냐?" 스승도 첫마디가 삐딱하니 나왔다. 갓쓰고 자전거 탄다는 말은 들었다만 아래 위가 따로 놀고 있구먼." 더운밥 찬밥 가릴 처지라야지요." 큰소리 땅땅 치고 길이 좁아라며 다니는 모양인데 그러다가 뜨거운 물 마시지." 우찌 그거를 압니까." 상호에 씌어져 있다." 몽치는 피시시 웃는다. 소년같이 무심한 웃음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술집에서 큰소리 좀 치고 왔십니다." 술집?" 걱정 마시소.뭍에 오른 날만 막걸리 딱 한잔입니다." 휘가 들어오면서 거들었다. 그건 틀림없십니다." 어릴 적부터 숨겨놓은 술을 귀신 같이 찾아먹든 놈인데 믿을 수 없군." 언제 왔노?" 휘는 뭉치에게 물었다. 방금 왔소." 기별받고 왔나?" 야. 선생님 오셨다 캐서." 그거라도 알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해도사는 여전히 쓴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지가 그렇기 불학무식한 놈은 아닌데 와 자꾸 그러십니까." 뉘한테 볼멘 소리야." ..." 어서 자형집에 다녀오너라." 거기는 와요." 그러면 안 갈 작정이더냐?" 가기야 가겄지마는 들어서자마자, 발밑 불 안 붙었십니다." 허허허 저것 보게?" 휘는 웃고 있었다. 이들의 만남은 늘 이렇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가 오믄은 함께 밥 잡술라고 기다리고 기심서 어멍은 와 떠는 깁니까." 아닌게 아니라 그랬었다. 자형한테 가서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와야 그게 도리 아니겠나.엎어지면 코 닿을 데 집이 있어." 할수 없이 달래듯 말했다. 지나온 것도 아니겄고 형님 집을 지나칠 수도 없고, 늘 그런께 걱정 마이소." 늘 그런다구! 이집 양식 축내려고 작심을 했구먼. 먹기나 적게 먹으면 말도 안 하겠다." 나중에 열곱으로 갚을 긴데 머가 걱정입니까?" 뭘 해서 열곱으로 갚는고?" 지한테 생각이 다 있인께요." 생각을 하면 뭘 하나. 뱃놈 지 입치레도 못할 게 뻔한데, 산적놈 꿈이라도 꾸는 게야?" 요새 세상에 산적이 어딨십니까." 공연한 말들을 주고받는데 영선이 저녁상을 가져왔다. 해도사는 독상이었고 휘와 몽치는 겸상이었다. 반찬이 너무 없어서, 용서 하이소." 영선이 해도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만하면 됐네. 아이들은?" 저 방에서 지하고 묵을 깁니다." 남자 셋은 수저를 들었다. 거구인 몽치 탓도 있었지만 방안은 남자 셋으로 그득했다. 몽치놈이 요즘에도 자형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나?" 해도사는 휘에게 물었다. 그런 모양입니다. 고집불통, 지 말도 안 듣십니다." 형님 그러지 마소. 사람이 우찌 손바닥 디집듯이 달라지겄소." 입안에 음식을 가득히 밀어넣고 콧잔등에 주름을 모으며 몽치는 못 마땅해한다. 그쪽에서 달라지믄 이쪽에서도 좀 달라져야지. 김형은 잘해볼라고 애를 쓰는데 누님을 생각해서라도 그러믄 쓰나." 휘는 타이르고 해도사는 몽치를 노려본다. 근수가 안 나간께요." 밥 먹는 것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해도사는 근수라니?" "사람의 근수 말입니다. 평사리의 사장어른이 백근이라믄 매부는 열근도 안 되는 사람인께요." "뭐라? 그럼 넌 몇 근이나 나가는고?" "지야 머 몸무게만큼 나가겄지요." "미친놈." 하는 수 없이 해도사는 웃고 휘도 웃었다. 몽치는 평사리 한복의 집에서 영호와의 첫대면을 잊지 못한다. 차갑게 쳐다보던 영호의 눈빛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때 화가 나서 저보다 나이 위인 영호의 동생 강호에게 주먹질을 해서 코피를 쏟게 한 것을 기억한 다. 어린 마음에도 괄시를 받은 것이 분했던 것이다. 저녁상을 물리고 숭융으로 입가심한 몽치는 "지감스님하고 함께 오신다 하더마는." "스님은 선생님댁에 계신다." 휘가 말했다. "지도 인사를 올리야 안 하겄십니까." 지감 역시 한때는 몽치의 양부 노릇을 했다. 그러나 해도사는 아무말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재수야." 하고 몽치의 본명을 불렀다. "모두들 의논을 한 일인데 이번에는 장가를 들어야겠다." "…" "마침 마땅한 처자도 있고 하니 언제까지 홀몸으로 떠돌 거냐?" 몽치는 마음속으로 지감이 동석하지 않았던 이유를 깨닫는다. 홀몸이긴 지감이나 해도사가 다 마찬가지였지만 장가를 간 일이 없는 지감에 비하면 해도사는 한 번도 아니요 여러 번 여자가 죽고 달아나고, 처운이 없어 세 상을 버리고 산에 들어온 사람이다. "왜 말이 없느냐." "지는 장개 가고 저븐 생각이 없십니다. 가더라도… 갈 때가 되믄 가겄십니다." "그때가 언제냐? 도통할 때냐?" "그거사 선생님 길이제요. 지는 신선될 생각 없십니다." 몽치는 농치듯 말하며 대답을 회피한다. "니가 마다는 데야 할 수 없지. 허나 누이 생각을 한다면, 평사리 사돈댁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고집만 부릴 일 이 아니다." "선생님 말심이 옳다. 무슨 배짱으로 그러노? 도모지 속을 알 수 없어이." 휘도 거들어서 말했다. "지는 맘을 작정했십니다. 어장애비가 되기 전에는 장개 안 갈 깁니다." "뭐?" 휘는 놀라고 해도사는 어리둥절한다. "사내자식이 세상에 나와가지고 아침 저녁 끼니 걱정이나 하믄서살 바에야 차라리 죽어부리겄소. 모두 사람이 하는 것인데 못할 거 없지요." "씨름판에 가서 소 타오는 일이라믄 모릴까 되지도 않을 그런 꿈을 와 꾸노? 생각한다고 아무나가 하나?" "질고 짧은 거는 대봐야 알제요. 가보지도 않고 안 된다 하는 거는 밥솥에 불도 지피지 않고 밥 안 된다는 말 과 같소." "가이방해야 말을 안 하지, 그래 배 살 돈이나 있어서 하는 말가?" "누구 깝대기를 벳기든 나는 하고 말 기요." "잔말 말고 장개나 들어!" "그만두어라." 해도사가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휘는 "선생님 어디 가실라고 그럽니까?" 물었다. "음." 해도사는 밤길에 나섰다. '그놈이 상호대로 살려고 저런다. 말려봐야 소용없고 대역을 하든 대적이 되든 그놈은 저 갈길을 갈 게야'. 어릴 적부터 상식으로는 다스려지지 않았던 아이였다. 아니 다스려지지 않는 아이였다. 어쩌면 그는 아비 시체 옆에서 밤을 지새웠을 때 인간을 묶은 보이지 않는 속박에서 풀려났는지 모를 일이다. 슬퍼하거나 기뻐하거나 괴로워하는 빛이 나타난 일이 없었던 몽치의 얼굴, 결코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아이, 제 마음대로 먹고 제 마음대로 쏘다녔고 제 마음대로 일하던 아이, 도무지 남의 말이 필요없던 아이였다. 해도사의 이번 행로는 한복의 부탁을 받은 때문이다. 혼처를 정해놓고 해도사를 찾아왔던 것이다. "저렇기 떠돌게 내비리둘 수는 없는 일이고 자식놈이 속이 좁아서 처리를 못하니께 우리라도 나서야, 형편이 안 된다믄 모릴까 그만한 정도는 되니께." 한복은 띄엄띄엄 말을 했다. 해도사는 통영 오는 길에 평사리에 들러서 신부감의 모자라는 아비도 만나보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몽치만 응하게 되면 다 된 혼사였다. 해도사는 조병수의 집으로 갔다. "지감 나 왔소." 병수가 일어서서 방문을 열고 "들어오시오." "술 생각이 났던 모양이구먼." 지감도 내다보았다. 방으로 들어간 해도사는 "내일 날씨 좋겠구먼. 하늘에 별이 또렷또렷 박혀 있소." 하고 말했다. 집안은 아주 조용했다. 두 사람은 술상을 마주하고서 얘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혼담은 어찌 되었소." 소지감이 물었다. "그놈이 대역도가 될려고 마다하는구먼." "내버려두시오. 몽치 그놈 바다 한가운데서도 살아갈 놈이오. 상상봉에 홀로 있어도 살아갈 놈이오. 해도사 격 에 안 맞는 일을 하더라니, 자아 술이나 드시오." 하며 소지감은 술잔을 내밀었다. "그거 참, 해도사는 대단한 제자를 두었소. 바다 한가운데, 상상봉에서 홀로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부럽군 요." 병수가 말했다. "글쎄올시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럴듯도 하구, 뭔지는 모르지만 글쎄 그게 뭔지 모르지만 그놈 옆을 뭔가가 늘 비켜가는 듯, 그게 재앙인지 홍복인지, 애비 에미 없이 홀로 산중에 내던져졌던 놈인데 그게 저절로 자란 듯싶기도 하고 하여간에 별남 놈이지요." 해도사는 자신의 느낌을 표현할 수 없었던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모르는 손이 있었을 게요." "모르는 손, 조선생님께서는 그것을 믿으시오?" "믿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신령입니까? 명운입니까." "운명이라기보다, 가혹한 운명에 대한 연민 아닐까요? 방금 말씀하신 그 젊은이는 의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힘들었을 겁니다." "보이지 않는 무엇의 자비다, 그런 뜻의 말씀인데 지감법사 한 말씀 해보시오." "불성을 말하라는 거요? 일체중생, 본디 가지고 있는 불성이라면 우주 공간에도 그 본성이 있다고 보아야지. 부처가 눈에 봬요? 안 보이지." "실은 아까 해도사가 말씀하신 그 젊은이, 남의 일 같지 않소." "어째서요?" "글쎄올시다. 왠지 그렇구먼요. 어쩌면 그 사람 운명 앞에 큰대자로 누워버린 사람 아닐까요? 아주 편안하게 요. 해서 자유롭게 거동하며 복종도 반항도 아닌 생각한 대로 구름 가듯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놈이 대단한 인물, 아니 도를 통한 인물 같지만 그렇지는 않소이다. 완명하고 독불장 군." "몽치는 귀가 가렵겠소. 어른들이, 그도 한가락씩 한다는 어른들이 아이를 두고 왈가왈부, 그만둡시다." 지감이 손을 저었다. 병수는 무안 타는 아이같이 삐죽이 웃는다. "한데 조선생께서는 일손 놓고 적적해서 어떻게 지내십니까." 해도사가 물었다. "적적하긴? 풍파를 겪는데 적적할 새가 있겠소." 지감이 대신 대답을 했다. 해도사도 대강 사정은 알고 있었기에 "하기는." 하다가 "조선생, 그러시는 게 효도 아닙니다. 더러 막아보기도 하시오." 병수는 소스라쳐 놀라며 해도사를 강하게 쳐다보았다. "아버님의 악행을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아버님의 지옥행을 재촉하는 거나 다름었소." 사정없이 내리지른다. 병수의 얼굴이 추위 탄 것처럼 오종종해졌다. "해도사!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 거요." 지감이 나무란다. "아니오. 해도사 말씀이 옳소." 서둘러 말하고 나서 "저는 아마도 부친을 버렸을 겁니다. 미움을 버리면서 부친을 버린 셈이지요. 그, 그렇소. 부친에 대한 연민은 혈육에 대한 그런 아픔과는 다르오. 한 생명에 대한 것, 그, 그것 이외 아무것도 아닐거요, 아니 그보다 나는 불효라는 말을 두려워했소. 불효라는 말은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소." 오종종했던 얼굴이 풀어지면서 병수는 솔직하고 담담하게 심경을 털어놨다. 지감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올곧잖 게 해도사를 노려보면서 "몹쓸 사람이구먼." "허허어 참." "상처에 소금 뿌리기, 손님된 처신도 모르오?" 강한 어조로 힐난한다. "상처에다가 소금을 뿌리면 상처는 아무는 것이 이치요. 심약한 소리, 지감은 조선생을 강보의 아인 줄 아시 오." "점점 한다는 소리가." "그게 다 어른이 돼보지 못한 탓이지 뭐겠소." 해도사가 태연하게 투박스럽게 말했다. "기가 막혀서, 살다보니 별 회한한 말을 다 듣겠소." "그는 그렇고 지감은 내일 용화산에 가시오?" "들렀다 갈 작정이오. 해도사는 어쩌겠소?" "새는 날 생각해보지요. 오래간만에 나왔으니, 언제 또 오겠소? 바다 구경도 좀 하구 찾아볼 곳도 두어 곳 있 으니." "조형" 지감이 불렀다, "네" "산에 한번 안 오시려오?" "휘도 그런 말을 하던데 한번 가지요." 그러다 병수는 길상이 떠난 뒤 가리라 마음먹는다. 현재 길상이 도솔암에 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일손도 놓고 했으니 더러 다니시오. 산천도 볼 만하고 인심도 각색이니." 조병수는 흥분해 있었다. 지감의 내방은 오로웠던 그에게 큰 기쁨이었던 것이다. 출가하기 전에는 주유가이던 지감이 일년에 한두 번 병수 앞에 나타나곤 했다. 그러나 이번의 내방은 삼년만인지라 감회가 깊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손을 놓고 있는 처지였으니, 휘가 산을 다녀올 때마다 소식은 들어 그의 형편을 소상히 알고는 있었 다. 병수는 지감이 염려하는 것처럼 해도사 말을 고깝게 들은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정곡을 찔려오는 바람에 충 격을 받긴 했지만 이들과의 만남이 너무나 흡족하여 해도사 말을 마음에 끼워둘 틈새도 없었다. 그리고 부친 의 일, 부친에 관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이골이 나 있어서 웬만한 것으로는 마음이 상하지도 않았다. 그의 말 대로 육친을 떠난 연민이라면 다분히 객관적인 것으로, 또 그렇게 타인과 같은 마음이 되지 않고서는 병수도 견디어 배길 수 없었을 것이다. 해도사의 경우도 그랬다. 결코 무신경한 사람은 아니었고 거칠게 병수를 쓰다 듬었던 것이다. 지감은 해도사와 병수가 주고받는 얘기를 들으면서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일을 하나 끝내고 나면 왜 그리 허기가 드는지요. 밥은 먹어도 허기는 가시질 않고, 알 수 없는 허기, 속이 텅 비어서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아서 말할 수 없이 쓸쓸핸집니다.' 언젠가 병수는 그런 말을 했다. 어느 도공도 지감에게 한 말이었다. '일을 다 끝낸 뒤 다 된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과연 내가 한 일일까? 의심이 들지요. 정말 저걸 내가 만들 었는가. 일한 시간은 간 데 없고 흔적도 없는데 물건이 하나 내 눈앞에 있다는 것이 여간 신기하지가 않소. 내 손은 연장에 불과한데 무엇이 나로 하여금 만들게 하는가. 생각이야 늘 하는 거지만 그것이 어떻게 물건으로 나타나 있는가.' 그런 말도 병수는 했다. 지감은 오래간만에 병수를 만나면서 자신이 출가한 몸이라는 것을 얼마 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옛날과 같 은 번뇌가 되살아난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어떤 홀가분한 안도감 같은 것, 그것은 지극히 세속적인 편안함 같은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조병수와의 교유도 오랜 세월이다. 어느 향반의 집에서 묏자리를 보기 위해 불러온 해도사를 우연찮게 만나 알게 되면서 지리산과 인연을 맺었고 이종사촌 이범준을 통하여 송관수를 알게 되었 으며, 그런 일들이 복합이 되어 강쇠와 그들이 중심인 패거리들과 붕우유신이랄까, 그런 지경에까지 갔는데, 껄껄한 사내들, 조야하고 분노에 가득 찼으며 거친 언행 속에 정을 간직한 그들 속에서 지감은 자신의 본래적 인 것과 부딪는 일도 더러 있었고 소외감은 느낄 때도 있었다. 서울은 태생인지라 지적으로 세련된 지우가 많 았으며 그밖에도 여수의 최상길을 비롯하여 전라도 경상도에 걸쳐, 향반 지주들을 적잖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병수와의 교분만큼 애틋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동질감에서 그랬던 것 같았다. 병수가 젊어진 육체적 인 명에와 자신이 짊어진 정신적 멍에, 여하튼 명문 출신인 그들의 정서적인 공통점, 학문의 세계, 예술관에서 공명하는 바가 많았고, 그러나 그런 모든 것보다 지감은 병수의 맑은 감성을 사랑했다. 조선 팔도를 누비고 다 니는 자신이 주유가라면 병수는 한칸 얼방과 한칸 서재에서 망망한 세계를 주유한다고 지감은 생각한 적이 있 었다. "길은 다르지만 한때 저는 불상을 조성하고 싶었습니다." 병수의 말이었다. 길상이 도솔암에 와서 관음탱화를 그리고 있다는 화제에 이어진 말인 것 같았다. "무슨 원을 거시려구요?" "원을 건다구요? 그런 것 없었소. 그냥 마음으로요." "그게 최상이지요. 지금이라도 해보시지요." "너무 늦었습니다." 하는데 눈을 감고 있던 지감이 번적 눈을 떴다. 괴상야릇한 고함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병수가 자리에서 일어 섰다. 그리고 방을 나가는데 해도사가 뒤따랐다. 병수댁네가 나와서 마루에 서 있었다. 몸채 작은방 문을 열고 병수는 들어갔다. 해도사 역시 병수를 뒤따라 들어갔다. 병수는 해도사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조준 구가 눈을 희뜨고 병수를 노려보았다. 큰 호박덩이 하나가 굴러 있는 것 같았다. "이 죽일 놈! 천하에 불효막심한 놈!"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병수는 잠자코 이불자락을 걷으며 아이같이 기저귀를 찬 조준구 아랫도리를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오물을 닦아내고 기저귀를 갈아끼운다. "네놈은 누구냐!" 뒤늦게 해도사를 발견한 조준구는 물어뜯을 듯 말했고 조병수는 깜짝 놀란다. "예, 소생은 잡인올시다. 지리산에서도 잡인이었습지요." 태연하게 말했다. "나, 나가시지요 해도사." 기저귀를 싸들고 병수가 황망하게 말했으나 해도사는 "조선생은 먼저 나가십시오. 적적하실 터인데 영감님 말벗이나 하다가 가겠으니 염려 마시고." 거의 강압적으로 병수를 떠밀어내었다. 그리고 방문을 닫은 해도사는 조준구 머리맡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자 리를 잡고 앉는다. 방안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조준구가 입은 옥양목 고의적삼, 이부자리도 깨끗했으나 퀴 퀴한 냄새만은 고약했다. 말벗이라는 말에 다소 솔깃해진 것 같았으나 그러나 조준구는 의식을 풀지 않고 "뭣하는 놈이야!" 눈을 부릅뜨고 이빨을 드러내어 짐승같이 으르렁거렸다. "아까 말씀드렸습지요. 지리산에서 온 잡인올시다." "잡인이라면!" "예. 점도 치고 묏자리도 보아주고 때로는 병을 고치기도 하옵니다만 돌팔이지요. 어쩌다 연때가 맞으면 병자 가 낫기도 하더구먼요." 적당히 주워삼킨다. "뭐? 묏자리 보아준다구? 그럼 내 묏자리를 보아주러 왔다, 그 말이냐!" 병을 고친다는 말은 마음속에 접어두고 조준구는 또다시 으르렁거렸다. "아니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런 판국에 보아드릴 묏자리도 없거니와 영감님께서는 장수하실 상호인지라, 아 아주 근력이 좋아 보이십니다." "…"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도 그러하오나 머리숱이 많은 것으로 보아 풍만 아니었더라면 젊은놈들 뺨치게 기운이 좋았을 것을." 머리숱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화색이 돌기는커녕 조준구의 누리팅팅하고 부석부석 부은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 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야 그랬지." 어세가 누그러졌고 풀이 다소 죽은 듯했다. 해도사의 말도 싫지가 않았지만 공손한 말투와는 달리 형형히 빛 나는 해도사 눈빛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병을 고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도 있었다. "산에는 뭣하러 들어갔는고?" "원래는 불로장수, 신선이나 되어볼까 해서 입산을 했습지요. 한데 중도에 마음을 잘못 먹은 탓으로 용이 승천 을 못하고 이무기 꼴이 되고 말았습죠." "마음을 잘못 먹다니?" "비신 둔신 변신의 술법을 익혔고 앉아서 천리를 보는 안력도 길렀으며 불로장수의 약초도 식별하게금 되었는 데 그것을 악용했습지요." "어떻게?" "도둑질을 했고 남의 계집을 탐내어 겁탈을 했고 그리하여 술법을 잃고 말았습니다." "허허헛 허허헛헛." 목쉰 소리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조준구를 웃었다. "사기꾼 같으니라구, 비신술 둔신술이 어디 있누, 도적놈 같으니라구, 뭐 천리 밖을 본다구? 천리 밖을 본다면 도적질한 것도 없지. 일본 해군에 가서 쌍안경보다 나은 그놈의 눈깔 가지고 활약을 하면 얼마든지 출세할 터 인데 미친놈, 거짓말도 가이방해야 믿어주지." "믿든 아니 믿든 그것은 영감님 마음이니 소생 뭐라 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려면, 왜놈에게 빌붙어서 출세를 하겠습니까? 조상들이 산발하고 통곡할 일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도둑질 계집질은 재미있군 그래. 하하핫 하하하하… 젊었을 한때, 나는 계집에 관심이 없었다. 재물 있으면 권력 생기고 권력 있으면 재물 생긴다, 그렇게만 생각을 했지. 허나 나라가 없어지고 보니 재물이 있어 도 세도를 잡을 수 없더군. 명문세가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그 울울한 심정을 뉘 알겠는가. 허나 멸문지화를 자 초할 수는 없는 일, 이미 대세는 굳어졌고 오." 하다가 별안간 어세를 높였다. "못난 것들! 바늘 가지고 대포 찌르는 격이었지. 세계의 열강으로 일본은 지금 중국 땅을 석권하고 있는데, 허 허어 종놈이 애국지사가 되고, 백정놈이 진보주의 지도자라, 세상이 돌기는 돌아야겠지만 그렇게 돌아서는 안 되는 법이야. 아주 고약하게 돌았어. 나도 일찍이 개화당 한 사람이지마는, 하기야 누대에 걸쳐 빛나던 권문의 자손이 이 편벽한 고장에서 소목장이로 영락을 했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고. 병신에다가 천하에 못난 놈 이니 할 수 없다 생각은 하나, 독선생 앉혀서 그만큼 가르쳤고 학문도 깊었으니 다른 일도 할 수 있었으련만, 조상에게 부끄럽고 죄스러울 뿐일세." 해도사의 능청, 거짓부리도 예사 재주가 아니었지만 조준구의 연극은 신묘의 경지다. "어버이의 마음을 어찌 저러히 못난 자식들이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허나 영감님 슬퍼하지 마십시오. 신양에 해롭습니다." 점입가경이다. "그놈이 이 애비 아니었던들 어찌 세상에 살아남았을꼬? 함에도 병든 애비를 박대하며 애미 병 고칠 생각은 아니 하고 원하는 약도 구해오질 않으니 내 죽기를 바라는 거 아니고 뭐겠나. 인간지사 효행이 으뜸이라 했거 든, 불효막심한 놈! 생전에 이러하니 사후, 시묘 삼 년을 행할 놈이든가?" '시묘 삼 년이라, 허허어 망령기도 좀 있는 모양이고, 혀는 짧아도 침은 길게 뱉는 겐가?' 해도사는 웃음을 참고 경청한은 자세를 고수한다. "그놈을 낳은 계집, 그러니까 내 정실인데, 그 계집은 탐욕이 천하 제일이요, 표독스럽기가 살쾡이 저리 나앉 으라, 나한테서 긁어간 재물만 하더라도 실로 막대한 것이었건만 그래도 탐심은 불길 같았으니, 서울서도 누구 라 하면 알 만한 가문의 계집인데 천성에는 엄한 가풍도 아무 소용이 없는 모양이라. 천벌을 받아서 임종할 시에는 곁에 사람 하나 없이,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뒈졌는데 그 많은 재물이며 패물들이 뉘 손에 넘어갔는 지, 그게 다 뉘 돈인데!" 하다 말고 조준구는 호박덩이 같은 머리를 치켜들려고 용을 쓰며 흥분한다. 그것이 다 최참판댁 재물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는 모양이다. "찾지 못하셨습니까?" "찾을 길이 없었네. 자식놈이라도 성했으면 어미 재산을 그냥 떠내려 보냈겠느냐? 우리 집안이 망한 것은 병 신놈을 낳았기 때문일세. 여하튼 에미라는 년이, 지가 내질러놓고서 병신이라 하여 자식을 돌보지를 않고 죽기 만을 바랐으니, 이 애비가 없었던들 그놈이 연명은커녕 배필이나 얻었을까? 가난한 선비 집구석에 땅마지기 떼어주고 데려왔는데 그게 지금의 자부일세. 은공 모르기론 연놈이 다 같아. 내가 애비 노릇 못한 게 뭐 있누?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만도 그나큼 은혜, 비록 병신으로 나타나기는 했으되." "아암요. 그렇고말구요. 개똥밭에 궁굴러도 이승이 좋다 했으니 이승에 나타난 것만도 큰 복입지요. 해서 바리 대기는 병든 부친을 위하여 서천 서역구에 약물을 구하러 갔고 엄동설한 병든 모친을 위해 죽순을 캐온 효자 도 있었구요." 해도사 말에 조준구 눈이 빛났다. "개동밭에 궁굴러도 이승이 좋다? 그럼, 그건 맞는 말일세. 이승이 좋으니까 모두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야. 허나 내가 이 누옥에 병든 몸으로 누워 있으니 실로 만감이 오락가락하네그려. 옛날이 좋았지. 만일에 내가 옛 날로 돌아간다면 결코 놓치질 않아. 놓치질 않지." "뭘 말씀입니까?" "잃은 것, 잃어버린 그 모든 것, 어찌다가 그것을 다 잃었는지 자다가도 분하고 꿈속에서도 분하고?" "예… 그게 무엇인지요." "혁혁한 가문은 어디로 갔을꼬? 만석꾼 살림은 다 어디로 갔으며 서울의, 시골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는 씨 종, 하인배가 입안의 혀같이 돌아주었건만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갔으며 내 곁에 있던 처첩들은 또 어디로 가고 시중들 사람 하나 없는 고적한 처지가 되었는지 허허어 참, 이럴 수가 있나. 이럴 수는 없지." "고정하십시오. 한탄하시면 신양에 좋을 것 없습지요." "잊어야지. 재물이고 계집들, 자식놈, 모두가 다 배은망덕일세." "인사가 아니라 세월이지요. 세월이 사람을 배반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세월, 하기는 그렇구먼, 세월이 늙게 하고 죽게 하니…" "밤이 깊은데 주무셔야지요." "아, 아닐세. 낮에, 온종일 잠만 잤네." 조준구는 황급하게 팔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해도사를 잡아두기 위해서 얘기를 잇는다. "젊었을 시절 나는 정실 하나를 두어서 자식 보고 가문의 모양만 갖추면 된다는 생각이었다네. 그때 나는 개 화당이었고 개화사상에 깊이 빠져서 구습을 타파하고 일본과 서양의 문물을 들여와야 한다, 해서 서양 풍속에 는 없는 첩실을 둘 생각을 아니 했던 게야." '식객이 무슨 놈의 첩실.' 해도사는 조준구의 양미간을 내려다며 참으로 인간이란 기기묘묘하다는 생각을 한다. "남 먼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으며 일본말 일본글을 배우고,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는 정말 내가 소쇄한 청년 신사였네. 꿈도 컸고, 그러나 차츰 계집을 탐하게 되었고 이 세상 어느 낙에도 비할 수 없는 그것들에게 빠져들기 시작한 게야. 장안의 명기는 말할 것도 없고 전문학교를 나온 신여성에서 통지기에 이르기까지, 어린 것 늙은것 할 것 없이 두루 섭렵했는데, 좋은 시절이었지. 재물은 썩을 만큼 남아돌고 할일은 없어. 계집에게 쓰는 돈이야 새 발의 피, 결국 미두를 하고 광산을 하고 사는 바람에 살림을 고스란히 날렸지만 좋은 시절이 었다. 삼삼하게 떠오르는 계집들의 그 자태, 원 없이 놀았지. 헌데 이 사람아." "예 영감님." "우리가 수을찮이 얘기를 했네만 자네 성명 삼자도 모르니, 성씨가 어찌 되는고?" "성씨랄 것도 없고 남들이 해도사라 부르지요. 수십 년을 그러다 보니 성명 삼자는 잊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해도사라? 그렇게 부르는 연유가 무엇인고?" "처음 입산하여 도를 닦을 적에 해를 향해서 며칠 몇날이고 기도하는 꼴을 보고서 붙여진 이름인가 봅니다." "어인 까닭으로 해를 보며 기도를 했는가?" "불로장수는 하자면 생명의 원천부터 알야야겠기에, 해는 천지만 물의 힘이 아니옵니까? 힘이야말로 모든 생 명을 부지하게 하는 것인즉." "자네 말이 맞네. 여부가 있나. 힘이야말로 생명이지. 힘이 없이 움직여지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느니, 으흠, 그러고 보니 자네 학식이 제법 도저한 듯하이. 의관의 집안이냐?" 학식이 도저하다든가, 의관의 집안이라든가 그런 것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 슬쩍 추켜세우는 조준구의 말씨 는 기름을 친 듯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아니올시다. 부친은 장사꾼이었고 선대는 아전살이를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중인이군 그래." "예. 돈푼이나 있는 덕택에 독선생 앉혀서, 예, 글을 배우기는 했습니다." "독선생을 앉혔다구?" 독선생이라는 말이 심히 비위에 거슬린 듯, 그러나 이내 기색을 감추어버린다. "그럼 그렇지. 처음부터 예삿사람으론 보지 않았네. 먹물 먹은 사람은 어디가 달라도 다른 게야." "과찬의 말씀을, 먹물을 먹었다기보다 선비도 아닌 주제에 글줄깨나 읽다 보니 온갖 잡설에 사로잡혀서 중도 속도 아닌 꼴이 되고 말았습지요." "아닐세. 학문하는 데 신분의 고하를 논하든 것은 다 지나간 시절의 얘기고 양반을 소반으로 부르는 세상의 추세, 개의할 것 없네. 그보다 아까 불로장수의 약초를 식별한다 했든가?" 드디어 꼬기꼬기 접어서 넣어둔 말을 조준구는 꺼내었다. "예, 하오나." "뭐 불로장수의 약초를 구해달라, 그럴 만큼 내가 어리석은 사람은 아닐세. 불로장수의 약초를 식별한다면 풍 을 낫게 하는 약초인들 모를까. 부탁 좀 하세나." 해도사는 씁쓰레 웃는다. "나, 이 풍 좀 바로잡아주게. 이제는 아무 소망도 없는 몸, 자식놈은 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불우한 처질 세. 다만 한번 걸어보고 싶어이." "…" "저 배가 나고 드는 항구에 나가보고 싶고 한산섬에라도 한번 가 보았으면 여한이 없겠네." 처량하게 애원한다. "그것은 아니 될 일인 듯싶습니다." "아니 될 일이라니!" 순간적으로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일본하고 제승당은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인데 가셔서 무슨 횡액을 당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농담인 듯 진담인 듯, 해도사는 웃을 듯 말 듯, 조준구는 안도와 함께 연꽃이라도 매만지듯 조심스럽고 그윽한 음성으로 "그래서 안 될 일이라 했구먼. 에키 이 사람아." "영감님 이곳이 어딥니까." "통영이지 어디겠나." "날이 새면 마주보이는 곳에 충렬사 사당이 있습지요. 영감님은 이곳에 좌정해 계시고, 일본을 높이 반드시는 영감님이고 보면 상극이 마주한 셈인데 그러고도 동티가 안 난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해도사의 심술도 어지간하다. 조준구는 꾸역꾸역 치미는 것을 꿀꺽꿀꺽 삼키면서. "허허어, 자네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이구먼. 개화당과 친일파를 혼돈해서는 아니 되네. 내가 나라를 위하여 진작부터 개화를 주장하기는 했으되 친일은 아나 했느니라. 합방에 찬동한 바 없고, 그네들에게 협력한 일도 없었네. 하기야 뭐 일본말 일본글에 농틍하고 집안을 보나, 또 요로에 지면이 많아서 내가 원하기만 했다면 도 백쯤은 했을지 모르지. 허나 사기꾼 왜놈한테 폐광을 사서 그로 인하여 일어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설 마한들 내가 친일 파겠느냐? 다만 세계 대세가 그렇다는 얘기, 칼자루를 일본이 잡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 이고 보면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지." "예." "정 자네 말대로 그러하다면 한산도에 아니 가면 될 일이요, 굳이 가야 할 이유도 없으니, 충렬사의 경우는, 글쎄 그걸 어쩐다?" 마음속으로는 미친놈! 콧방귀를 뀌면서 겉으론 고분고분하게 나온다. 간교한 지혜가 일품이지만 이상한 것은 치매 현상도 두드러져 뵈는 일이다. 간교한 지혜에는 늘 이같이 치매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옛사람들은 그런 경우를 두고 약은 쥐가 밤눈 어둡다 했는가. "어떤가? 풍에 좋은 약초를 구해다 주겠느냐?" "글쎄올시다. 사심을 품은 후로는 도술을 다 잃었으니 약초가 눈에 뵐지." "병도 고쳐주었다 하지 않았느냐? 내 병만 고쳐주면은 상아 소낮ㅂ이가 붙은 개화장을 자네에게 줌세. 아주 고가품이네. 뿐인가? 아들놈한테 내 엄명을 내릴 걸세. 집을 파는 한이 있어도, 약초값을 흡족하게 치르라 하 겠네." "병을 고친 것은 연때가 맞아서 그랬던 거고,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나하고 연때를 맞추면 되는 게야." "인력으로는 아니 되지요. 신령의 힘을 빌지 않고는." "허허어, 해보지도 않고서?" "명심은 하고 있겠습니다만." "그래, 그래, 아암 그래야지." 조준구 얼굴에 희색이 돈다. 난데없이 나타난 해도사다. 조준구의 감각에도 산내음이 풍겨오는 사내,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 조준구는 믿는다. 해도사가 기적을 이루어 자기 병을 낫게 할 것이라는 예감을 믿는 것이다. 자기와 무관한 일이거나 불리할 경우에는 귀신이건 영신이건 미신으로 간단하게 단정해버리지만 자기 자신에게 유리 할 경우에는 미신이 아닌 것이다. 악과 탐욕의 속성인 것이다. 하여 치매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완전하다고 믿 는 것이 또한 그들의 속성인 것이다. "영감님." "어째 그러나." "영감님께서는 저승이 있다고 믿으시는지요." 조준구는 희망을 쬐듯 해도사는 질문을 던졌다. "그게 무슨 소린고?" 해도사의 속셈을 몰라 일부러 내숭을 떤다. "저승이 있다고 믿으시는지, 물었습니다." "그건 또 왜 묻는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 게 아니냐? 산에서 도를 닦았고." "죽은 뒤엔 어찌 되겠습니까? 소생은 늘 그게 걱정입니다." "죽은 뒤 일을 뉘 알겠나. 죽으면 흙이 되는 거지 뭐." "흙이 되는 것은 소생도 아는 일입니다만 흙이 되는 것은 형체가 있는 것이라야지요." "사람이 형체지 뭐겠나." "형체 없는 것이 있습지요." "그게 뭔데?" "마음입니다." "…" "그것은 형제가 없으니 흙이 될 수도 없고 썩지도 않을 것이니." "쓸데없는 소리." "저승길 갈 때, 아, 아니 영혼이 떠돌 대 영감님을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영을 넘고 내를 건너면서 이승 얘길 하는 광경을 상상해보기도 하구요." 해도사의 목소리를 젖은 듯, 부드러웠다. "별놈의 생각을 다 하는군." 했을 뿐 조준구는 전혀 무반응이었고 자신으로선 이미 할말을 다 했다는 그런 얼굴이었다. '혹을 떼러 왔다가 혹을 붙이고 가는 꼴이군. 겁을 좀 주어서 집안이 조용하게끔, 하기는 기대한 것도 아니지 만, 내가 가고 나면 송장 썩은 물 대신 날 잡아오라고 성화겠지. 그거야 뭐 몸에 해롭잖은 풀이나 풀뿌리면 당 분간은 괜찮을 게고.' 해도사는 휘한테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똥벼락을 맞은 조병수가 대성통곡을 했다는 얘기, 가엾고 측은하며 사 람이 어찌 저렇게 살아야 하는가, 떠날 길을 왜 생각지 않는가 하며 통곡을 했다는 얘기, 해도사는 병수의 심 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심정이 바로 지금 그와 같았다. 측은하고 가엾고, 미워할 수가 없었다. 정말 통곡 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구제받지 못하는 자에 대한 슬픔이었다. 하늘 아래 홀로 서 있는 자에 대한 슬픔이었다. 삭을 대로 삭어버린 육체를 안고 버둥거리는 한 생명에 대한 슬픔이었다. "어르신." 해도사는 영감님이라 하지 않고 어르신이라 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승 얘기라면 관두게. 나는 믿지도 않고 흥미도 없네. 바로 눈앞의 일로 내 마음은 가 득하이. 아무조록 약초를 구해다주게." "예, 염려 마십시오." "오늘 밤은 편한 잠을 잘 것 같네. 밤도 길고 해도 길더니, 그러고 밤에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가 신경에 걸려 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부탁하네. 참 자네는 부친이 생존해 계신가?" "세상 떠났습니다." "그래? 하긴 자네 나이 있으니 그랬을 게야." "그러면 밤도 깊었고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밖으로 나온 해도사는 별이 총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해도사는 조준구 방에서 밤이 깊었고 지감과 병수는 또 얘기에 밤 저무는 줄 몰랐다가, 세 사람은 아주 늦게 자리에 들었다. 지감만 일찍 일어났을 뿐 병수와 해도사는 늦잠을 잤다. 병수댁네가 아침장에 가서 신선한 참 거리를 사다가 정성껏 차린 조반상을 물렸을 때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지감이 떠날 채비를 차리고 있었는데 몽치가 찾아왔다. 물론 초행의 집은 아니었다. 휘로 인하여 몇번인가 와본 집이며 붙임성이 없고 무뚝뚝하며 못생긴 몽치르 병수댁네는 어떤 점을 좋게 보았는지 아들처럼 대해주었다. 언젠가 한번 몽치는 장작을 패준 일이 있었다. "몽치총각, 밥은 어떻게 했나." 병수댁네가 부엌에서 나오다 말고 웃으며 물었다. "아침 묵은 지가 언젠데 묻십니까." "좀 이르지만 점심 먹겠나?" "아입니다. 양가에서 다 아침을 먹었더니 너무 많이 묵었는가배요." "몽치총각도 밥 마다할 때가 있는가 부지?" "너무 그러지 마이소. 몸통이 커다보이, 하지마는 식충이는 아입니다. 산에서 오신 선생님 기십니까?" "그 방에서는 방금 조반상이 나왔네." "야아." 어슬렁거리듯 방 앞에까지 간 몽치는 "성생님 지 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해도사가 방문을 열었다. 몽치는 쪽마루가 휠 만큼 무거운 체중을 실었다가 방으로 들어간다. "선생님 절 받으이소." 지감에게 넙죽 절을 했다. 옛날부터 몽치는 넙죽넙죽 절 하나는 잘했다. "제법 사람 구실 하는구나. 조금만 늦었으면 스님을 못 볼 뻔했지. 흠, 지딴에는 지감한테 인사하고 가려 했던 모양인데." 그러나 몽치는 병수에게는 절을 하지 않고 쳐다보며 친근하게 웃었다. "그래 배타기, 할 만하냐?" 지감이 물었다. "예. 이 덩치 해가지고 멀 못하겠습니까." "하기는 그렇구나." 지감은 거칠 대로 거칠어진 몽치 얼굴을 바라본다. 해도사나 지감은 다같이 몽치의 양아버지인 동시 스승이다. 서로 무심상한 것 같았지만 숨은 정이 있었다. "배에서 주는 밥은 양에 차고?" "안 그러면 일을 우찌 하겠습니까. 걱정 마이소." "바다에서는 싸돌아다닐 데가 없어 어쩌누." "마, 그거사 속이 확 트이는 게 바다니께 안 싸돌아댕기도 갑갑할 것 없십니다. 선생님 오늘 떠나십니까." "그래." "몽치야." 해도사가 불렀다. "야." "몇 번을 말해야 알겠나." "머 말입니까." "선생님이라 하지 말고 스님이라 하지 않았더냐. 이놈의 까마귀 고길 먹은 화상아." "잊임이 헐해서 그런 거를 우짭니까. 지한테는 선생님이지 중이 아닙니다." "저놈의 버르장머릴 보았나! 중이라니?" "그래도 지가 타는 배 선장하고 선주는 지를 보고 잘 배웠다 하든데요?" "알 만하다. 그자들이 오죽 못 배웠으면 너 같은 놈 보고 그러겠나." "하기사 머, 한문은 선주어른이 지보다 못한 모앵이더마요. 자네 글씨를 보니 뱃놈 되기 아깝다, 서기질도 실 컨 하겠는데 하시고 시장은 뱃놈 때리치우고 대섯방 하나 차리라 하더마요." "뭐? 서기질? 대섯방을 차려? 으하하핫 핫핫… 그 꼴 생각한 해도 절로 웃음이 난다." "웃지 마시이소. 산에서는 늘 불학무식하다 하심서 대가리를 쥐어 박는 바람에 정말 그런 줄 알았더마는 도방 으로 내리오니께 온통 모두가 불학무식하더마요." "몽치야." 지감이 불렀다. "추석에는 절에 다녀가도록 해라. 공양주할머니가 추석에 오면 너 주겠다고 옷 한벌 지어놨다." "머할라꼬요. 할매가 눈 짜부리감서 머할라꼬, 옷이 있어도 입을 짬도 없십니다. 그러나 누부가 한벌 해주든 데." "그래 어젯밤에는 어디서 잤나." 해도사가 물었다. "형님 집에서 잤십니다." "저, 저놈 보게. 저 고집불통의 대가리를 도끼를 패든지 해야지. 어젯밤에 누누이 타일렀건만." "가기는 갔십니다. 양가에서 다 아침밥을 묵었인께요." 해도사와 지감은 할 수 없이 웃는다. 병수도 웃었다. "네놈 팔자가 상팔자로구나. 한 집에서도 밥 얻어먹기 어려운 세상인데, 허 참 저놈의 짚섬 같은 배를 채울 곳 이 두 곳이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고." "원래부터 식복은 타고났다 하시고서." "누가?" "선생님이 말심해놓고 그럽니까." 주점에서 놀던 품과는 사뭇 딴판이다. 바다의 사나이답게 거칠었고 힘깨나 쓰는 처지라 제법 의젓했고, 나를 대적할 놈 그 누구냐하며 자신감에 넘쳐 있던 몽치가 아니었다. 이 동네에 들어서면서부터 떼쓰는 아이 같은 꼴을 나타내더니만 이제 해도사와 지감 앞에서는 덩치 큰 아이, 숫제 어리광이 줄줄 흐르는 모습으로 변해 있 었던 것이다. "몽치야." "야."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지감은 다소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게 그러니까 십 년도 더 된 일이구먼. 까투리르 잡아서 볶아먹은 생각, 나느냐?" "나구만요." 지감은 웃는 얼굴을 해도사와 병수에게로 옮기며 "그때, 산막하고 몽치놈을 내게 떠넘기고서 해도사가 떠나든 날이었소. 온종일 아이가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됐 는데, 그놈 짐승밥 될 놈 아니오. 기가 보통으로 세야지, 떠나면서 하든 해도사 말도 있었고 혹 해도사를 뒤따 라갔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해질 무렵 나타나질 않았겠소? 씩씩거리며 까투리 한 마리를, 그 것도 목을 꽉 눌러잡고 있더란 말이오. 어디서 잡았느냐, 놀라서 물었더니 저어기서요, 하고는 뒤꼍으로 휭하 니 가버리더군. 저녁 밥상에는 꿩고기가 한줌 가량, 하기는 다 먹지 않고 한줌이나마 밥상에 올려놓은 것은 기 특한 일이었지. 저놈의 먹새를 내가 알거든. 허허헛 허허허헛… 식복을 타고났다, 그럴는지도 모르지. 남이 한 술 뜰 때 열 술이 들어가야 하는 저놈의 소 배애지, 그것도 식복이라면 그렇다 할 수 있겠군. 하하핫하…" "술상에 손이 쑥 나타나서는 어포를 집어가든 생각은 안 나시오? 손을 탁 치면 한참 있다 또 수욱 나타나서 어포를 거둬가고, 한번은 어디 갔다오니까 숨겨둔 술을 얼마나 퍼마셨는지 하루낮 하룻밤을 꼼짝 않고, 죽었나 싶어 귀를 잡아댕겨보기도 하구… 저놈이 저만큼이나 된 걸 보면 신기하지. 홀로 산중에 뚝 떨어져서, 우리야 뭐 식자 나부랭이나 가르친 것뿐이고 산이 길러준 셈이오. 산의 품에 안겨서 자랐다 할 수도 있고, 사시사철 싸돌아다니면서 안 처먹는 게 없었으니,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열매며 풀이며 나무뿌리까지 산의 기운까 지 몽땅 마시고서 몸뚱이가 저 지경 됐을게요. 참으로 조화가 신기하지 않소? 도시 사는 의지를 누가 점지하 였을꼬?" 해도사는 어떤 감동을 나타내었다. "생명 있는 천지감의 만물이 다 그러하나 그 이치를 뉘 알겠소." 소지감이 대꾸했다. 말을 하려고 입을 주뼛거리고 있던 몽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삼대 구년 묵은 얘기는 와 자꾸 합니까. 그보다 이자는 이놈 저놈 하지 마이소. 덩치를 보나 심쓰는 거를 보 아 놈자 들을 시절은 벌써 지나갔는데 언제꺼지 그럴랍니까." "오냐, 네놈이 장가만 간다면 여부가 있나, 놈자 빼고 재수야 하고 불러주마. 그리고 자형도 이보게 박서방, 할 터이니 염려 말아라." 해도사 말에 모두 크게 소리내어 웃는다. 몽치야, 몽치 하다가 박서방이라니까 세 사람은 물론 몽치 자신이 킬 킬대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슬슬 떠나볼까?" 지감은 바랑을 짊어졌다. 병수 내외와 작별을 하고 몽치와 함께 집을 나선 지감은 새터로 나가는 길을 잡아 내려갔고 몽치는 누이 집으로 향했다. 갈 때는 꼭 집에 들렀다 가라는 숙이의 신신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가부린 게 아닐까 하고 속을 태우고 있었다." 삽짝 밖에 나와서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던 숙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집안으로 들어와서 마루에 걸터앉은 몽치는 "아아는 어디 갔나? 집안이 쥐죽은 듯 조용하구마." "떼를 쓰다가 방금 잠들었다. 누굴 닮았는지 한분 떼를 쓰기 시작하믄 학을 떼겠다 카이." "아들 하나라꼬 오냐오냐 한께 그렇겄지요." "둘이나 실패를 하고 보이, 그란할라 캐도 자연히 위하게 된다." 숙이는 몽치와 나란히 마루에 걸터앉는다. 어디선지 수탉이 한낮 울음을 한가하게 잡히고, 그러고는 사방은 다 시 조용해졌다. 오누이가 느긋하게 한자리에 앉아서 얘기하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숙이 얼굴은 밝 았고 충족된 듯 보였다. 평사리의 한복이가 아들 내외를 위해 큰 맘 먹고 장만해준 집은, 규가 잡힌 조병수 집에 비할 것은 못 되지만 휘의 집보다는 훨씬 나았다. 우선 칸수가 넓었고 집의 뼈대가 성했으며 시원해 뵈는 대청이 있었다. 대청은 반 들반들 윤이 났다. 장독대의 크고 작은 항아리도 햇빛을 바당 반들거렸으며 마당은 깨끗하게 비질이 돼 있었 다. 정갈한 숙의 살림 솜씨가 일목요연했다. "마음에 맞잖은 사람이지만 매부가 있어야지, 없을 때는 이 집에 오기가 싫더마." 손을 깍지끼고 허리를 구부려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몽치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와?" "내가 머 얻어묵으로 오는 것도 아닌데 마치 매부 눈 피해감서 드나드는 거 겉애서, 도독괭이겉이 그러기는 싫다 그 말이요." "니가 그런 생각을 하니 매부도 설풋하게 대하는 거 아니겄나. 임의러운 것이 형제지간인데 제발 그러지 마라. 누부집에 동생이 오는데 누가 머라 칼 기고." "잘 사는 처가집, 덕본다고 창자가 꼬인 놈도 그렇지마는 보잘것 없는 처가라고 하시하는 놈도 곤장한 새끼들 이제. 지가 잘난 사내라믄 그런 생각 안 하거마는." 그간에 쌓였던 울분을 한꺼번에 토하듯 몽치는 말했다. "요새는 사람이 달라졌네라." "달라졌이믄 얼매나 달라졌겄소. 개꼬리 삼년, 흰털이 검정털 되겄소?" "아니다. 이자는 니 걱정도 하고 잘못했다는 생각도 하는 모앵이더라." "내 걱정은 할 것 없고 누부나 하시하지 않았이믄 좋겄소." "그거는 니가 모르이 하는 말이다. 날 무식하다고 입으로는 그러지마는 내가 정색을 하고 따지믄 꼼짝 못한다. 선아엄마한테 물어봐라.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평사리 사장어른 반몫만 돼도 내가 안 이럴 기요. 배웠이믄 얼마나 배웠다고 배운 사람이 그러요? 그 따우 핵교공보 하낫도 안 부럽거마는. 나도 불학무식은 아닌께." "태성이 그런 거를 우짜노. 부모도 못 고치는 거를 니가 고칠라나? 사람이란 천층 만층, 어디 다 같더나? 니가 넓기 생각하고 매부를 감싸주믄 안 되겄나? 자꾸 이래싸으믄 양새 낀 나무맨크로 내가 못 젼딘다." 울먹인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성지릉ㄹ 죽이며 몽치는 물었다. "머할라고 들맀다 가라 했소." "옷 갈아입고 가라고, 옷 한벌 해왔다 안 카드나." 실은 그게 아니었다. 숙이는 어떻게 하든 몽치를 설득하여 평사리에서 주선하는 혼사를 성사시키고 싶었던 것 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몽치가 치고나오는 바람에 말 꺼내기가 어려워졌다. "저기, 아까 선아엄마 말로는 니가 선생 보고 장개 안 간다 했다믄?" "야." "어째 그러노." "…" "평사리의 아부니가 혼처를 봐놨다고 하시더라는데 아부이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그러믄 쓰나. 나도 인병이 든 다. 니가 이러고 댕기니께." "오죽하믄 나 겉은 놈한테 시집 올라 카겄소." "니가 우때서? 남자 인물 묵고 사나?" "사람이야 안 봤인께, 형편이 그렇다 그 말이요. 하야간에 장개갈 생각 없소. 천천이 갈라요." 타일러보아야 소용없는 것을 숙이는 깨닫는다. "하기사 머 선생도 손을 들었다 하는데 내가 무신 수로… 옷이나 갈아입어라." "…" "출입옷도 아니고 보통때 입으라고 광목을 바래서 해놨다. 그냥 빠대리서 입으믄 된다. 자신의 마음을 달래듯 숙이는 큰방으로 들어가서 보자기에 싼 것을 내보인다. "방에 와서 갈아입어라." 그러나 몽치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몽치 옆으로 온 숙이는 "니 매부가 해주라고 권해서 한 옷이니 딴생각 마라. 나도 니 매부한테 숨기가믄서까지 이런 짓 할 성질 아니 다." "자게 체면 깎일까 봐서 그랬겄지요. 호욕 길에서라도 만내믄 서기나으리, 입장이 난감해질 기니." "몽치야!" "…" "니도 그렇다. 매부 체면 좀 세워주믄 안 되겄나? 그라믄 어디가 덧나기라도 하겄나?" 노기띤 눈초리로 숙이는 몽치를 쳐다본다.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있던 몽치가 일어섰다. 부스스 방안으로 들어 간 그는 한동안 부시럭거리더니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양말을 신고 대님을 치고 조끼까지 입은 몽치, 얼굴이 야 못생긴 그대로지만 사람이 달라져 뵈는 것은 틀림이 없다. "옷이 날개라더니 그렇기 입으이 얼매나 좋노." 숙이는 우람한 몽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린다. 목이 메었던 것이다. '불쌍한 내 동생, 어매 아배 없이 절로 커서 이만큼이나 되었구나.' 자신이 돌보아주지 못했던 세월도 서러웠고 원망스러웠다. 그것은 영호에 대한 원망이기도 했다. "매부가 권해서 맨든 옷을 입으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겄소." 쑥스러워서 한 몽치 말이었다. "인자 그만해라. 실이 노이 되겄다. 니 매부도 본심은 그리 나쁜 사람 아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가심에 맺힌 한이 있다. 꼬장꼬장한 성미라 답대비, 하기는 우리 시아부니겉이 되기가 어디 쉬운 일가. 저저히 말을 못해서 그렇지 김씨집 식구들은 모두가 다 피멍이 든 사람들이다. 몽치야 부탁 좀 하자. 매부 맘이 달라졌어이 니도 풀어라. 뭐니 해도 남보담이야 안 낫겄나. 나를 생각해서라도, 우리 형제가 갈라져서 생사조차 모리고 눈 물로 세월을 보냈는데 우리가 못 참을 일이 머 있겠노. 이리 만낸 것만 해도 얼매나 고맙노." "…" "아이구 내 정신 좀 보래. 깜박 잊고 니를 그냥 보낼 뻔했다." 숙이는 급히 부엌으로 달려간다. 삼베 수건에 싼 것을 가지고 그는 이내 나왔다. "이거 가지가거라." "머요?" "찰밥이다." "머할라꼬, 그만두소." "아무말 말고 가지가거라." "내 한입도 아니고 어디다 찍어붙일라꼬." "와, 그래도 서너 명은 실컷 갈라묵을 기다. 어이구 불쌍한 내 동생." "하 참, 맥지 그래쌓네." 숙이는 헌옷과 찰밥을 싼 삼베 보자기를 함께 싸면서. "니만 끈을 붙여주믄 나는 더 바랄 기이 없다. 평사리에서는 철마 다 양식을 보내주시고 니 매부 얼굴 타고 살기가 괜찮으니 무신 걱정이 있겠노." 혼담을 매듭짓지 못하여 아쉬움은 남았겠지만 몽치에게 옷을 해 입힌 것을 몹시 흡족해한다. "시어무니가 길쌈한 베를 세 필이나 보내주싰다. 솜옷도 한불 맨들어줄께." "별걱정을 다 하네." 집을 나선 몽치는 지감이 간 방향과는 반대편 비탈길을 내려간다. 내려갈수록 큰 함석집 기와집이 눈에 띄고 담쟁이가 무성한 양옥집도 나타났다. 그는 간창골 입구를 향해 가는 것이다. 몽치 역시 누이가 해준 옷을 입고 걷는 기분이 좋았다. 영호에 대한 섭섭한 마음도 다소 엷어지는 듯했다. 가슴에 품었던 말을 쏟아놓고 나니 속 이 후련하기도 했다. '나는 어장애비가 될 기다. 돈 벌어서 기와집도 사고, 우리 누부도 기 피고 살아야지.' 간창골 입구에는 휘의 목공소가 있다. 목공소 옆의 좁은 골목에서 대패질을 하고 있던 목공 최병태가 "어, 몽치형 새신랑 같네. 무신 바람이 불었소." "새옷만 입으믄 새신랑가." 대꾸하면서 몽치는 목공소 안으로 들어가는데 휘는 먹통에서 먹실을 뽑아 널빤지에 금을 놓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쌓아놓은 편자 위에 어떤 여자가 걸터앉아서 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몽치가 들어서자 얼굴을 돌렸다. 순간 눈이 부딪쳤다. 화장을 곱게 하고 검자줏빛 감댕기를 감은 족에는 비취 빛깔의 사기 비녀 와 역시 비취 빛깔의 나비잠, 말뚝잠이 꽂혀 있었는데 간드러지게 찌른 쪽은 날아갈 듯 예뻤다. 연분홍 물항라 저고리에 생고사 옥색치마를 입고 흰 고무신에 담은 흰 버선발이 역시 예뻤다. 요염한 맵시로 보아 여염집 여 자 같지는 않았다. 기생인 것 같았다. "형님." 몽치 어세가 온당치 않았다. 휘는 쳐다보지도 않고 일을 하면서 "이제 가는 기가." 했다. "야 갑니다. 그렇데 형님은 세월 좋네요." 여자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무신 말고." 역시 쳐다보지 않고 일을 하며 말했다. "이 각시는 누요?" 비로소 휘는 일손을 놓고 몽치를 쳐다본다. 눈에 노기를 띠고 있었다. "와 그건 묻소?" 여자의 불쾌해하는 목소리였다. "그러시, 젊디 젊은 각시가 일하는 남정네 앞에서 턱 받치고 앉아있이니 물었소." 거침없이 그야말로 방약무인이다. "턱 받치고 앉아 있다니!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고?" 여자는 빨딱 일어섰다. 입술이 떨고 있었다. "몽치야!" "와요?" "손님한테 그 무신 행패고!" 꾸짖은 뒤 휘는 여자에게 "미안합니다. 저놈 머리통이 좀 비어서 양해하시이소." "형니임! 머리통이 비다니요? 이거 참 생사람 잡네." "시끄럽다! 안다니 나홀장 간다 카더니마는, 빌어먹을 자식!" "개 모래 먹듯이, 아무나 보고 턱아리 놀리는, 나쁜놈!" 여자의 얼굴은 새파랬다. 부릅뜬 눈으로 몽치를 노려본다. "내가 참아야지. 미친 개한테 물린 셈치고." 치맛자락을 홱 걷으며 바람같이 여자는 나가버린다. 이때 대패질을 끝낸 병태가 널빤지를 들고 들어왔다. "화심이가 눈물을 닦으며 가든데 무신 일 있었십니까?" 병태가 휘에게 물었다. "이 빌어묵을 놈 때문이다." 했으나, 휘는 아까처럼 심하게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머를 어쨌기에요?" 그 말 대꾸는 없이 "몽치야!" "와요." 태연하다 "니 우리 일 훼방 놓을라고 마음묵고 온 기가? 응? 경우가 없어도 유분수지." "훼방을 놓다니요? 머를 훼방 놨다 말이요." 시치미를 뗀다. "잘 들어라. 이 멍충아. 장롱은 누가 쓰노? 늙든 젊든 여인네가 쓰는 거 아니가." "그렇지요." "그러니 손님은 늙든 젊든 여자다 여자손님이 와 있는 기이 머가 이상하노? 아까 그 여자만 하더라도 동생 장 개 보내겠다면 농 맞추로 온 사람인데 니가 지랄하는 바람에 쫓겨갔다. 대관절 와 그랬노?" "행토를 보아하니, 여염집 여자가 아니라서 그랬소. 남자 간 뽑아먹게 생겼더마요." "니놈 간 봅아묵을라 카더나." "우리 형수 속 터질까 봐서요." 휘는 껄껄걸 소리내어 웃는다. "흥, 부지런히 걷어믹이더마는 공력이 어디 안 갔구나." 휘는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그나저나 큰일이네." 담배연기를 뿜으며 휘는 다소 풀이 죽은 듯한 몽치에게 곁눈질 한다. "일감 놓쳐서 그러요?" "일감도 일감이지만 그보다 그 여자가 노류장화이긴 하나 지금은 누구라 하믄 알 만한 사람의 소실인데 마누 라가 그것도 총각놈한테 수모를 당했으니 가만 있겄나? 니 다리가 성할지 걱정이다." 병태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몽치형, 걱정 마이소. 그런 일은 없일 기요." "무슨 말고?" "화심이가 영감쟁이한테 그런 말 못할 기니께요. 형님한테 반해서 이 핑계 저 핑계 찾아오는데 영감쟁이 보고 말할 입장이 못 된다 그 뜻이요." "쓸데없는 소리, 이놈아 니 함부로 입 놀리다가 뒷감당을 우짤라고 그라노. 머리빡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정색을 하고 꾸짖는다. 기가 살아난 몽치는 "하 참, 내가 꼭 짚었네. 내 눈은 못 속이다 카이." 기세 좋게 말했다. "들어서는데 벌써 여자 눈빛이 다르더마. 만일에 사불여의 할 적에는 그놈의 계집 온전치 못할 긴데 형님도 조심하소." 사뭇 협박조다. "사불여의? 문자를 쓸라거든 좀 제대로 써라." "틀린 거는 머 있소. 비슷하믄 됐지 머." 휘는 담배를 눌러 끄고 하던 일을 시작한다. 사실 휘의 처지는 좀 난처했다. 화심은 아름답다 생각한 일은 있 었으나 결코 마음이 동한 것은 아니었다. 화심이 탄식을 하고 추파를 보내고 했지만 고객에 대한 예의를 지켰 을 뿐, 장롱을 해가고 머릿장을 해가고 또 일이 얼마나 됐는가 보러 오고 하는 화심에게 사사로이 대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부담스럽게 느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직접으로 유혹해온 것도 아닌데 부리칠 수도 없었다. 해서 몽치가 화심에게 수모를 준 것에 안됐다는 생각은 했으나 그게 화는 내지 않았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홀가분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우울해지는 것이었다. "그라믄 가겠소." 몽치가 말했다. "어서 가아." "병태야 니 감시 잘해라. 알겠나?" "걱정 마소." 몽치는 나가고 병태는 "화심이가 또 올까요?" "잔말 말고 일이나 해." 장 관음탱화 진주서 자동차를 대절한 서희는 안자와 함께 하동으로 향했다. 자동차 운전수는 만주로 간 홍이 또래였으며 같은 직업이라 서로 친면이 있었다. 그리고 홍이를 통하여 알게 된 연락이하고도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었다. 말씨에서 짐작이 되지만 연학은 그를 우녘(서울 방면)에서 온 사 람이라 했다. 그러저러한 관계로, 자주 자동차를 이용하게 되는 서희도 그를 임의롭게 대했다. 달리는 차창 밖의 하늘은 맑고 높았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무르익고 있었다. 인사는 음산하고 각박했으나 가을은 찬란하고 자연은 풍요로웠다. 새들은 자유롭고 풀꽃이며 코스모스는 평화스러웠다. 다만 인간만은, 조 선 땅에 태어난 사람들만은 날로 찌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조선 땅뿐이랴, 조선 사람뿐이랴. "며칠 안 가서 아마 다꾸시도 폐지될 듯싶은데 사모님께서는 불편해서 어쩌지요?" 운전수 윤씨가 신작로를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 때문에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겠지. 불편한 대로 살아야 할밖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서희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 배급제라 그렇지도 하지만 그보다 불급한 것은 다 없앤다는 방침 때문일 겁니다." "점점 더 어려워질 게야."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물자가 바닥날 때도 멀잖을 것 같고, 어제는 형님 환갑에 구두 한 켤레 지어드리려고 양화점엘 갔더니 돼지가죽밖엔 없었습니다. 그나마 여자 구두 한 켤레분만 있다 하더군요. 아마 알음알음으로 해주는 눈치였습니다. 야미로 해준다는 말도 있고, 우리 이웃에 사는 어떤 사람은 어장하는 친척한테서 돛베 몇 쪼가리를 얻어다가 신발을 지었다 하더구먼요." "돛베로 신발을 지어?" "네. 그것도 배급으로 나오는 모양인데 가죽 못잖게 질기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나가 얻을 수 있는 것도 아 니고." "창씨는 했는가?" "했습니다. 안 하고 배기겠습니까? 학교 다니는 아이들 때문에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성을 갈겠다는 말이 큰 욕인데 이제는 속절없이 모두가 다 성을 갈아야 할 팔이니 조상한테 면목이 없지요." "이 자동차가 폐지되면 윤씨 일자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것은 염려없습니다. 운전수는 흔치 않으니까요. 하다 못해 도라쿠라도 몰 수 있으니까요. 다만 한가지 걱정 되는 것은 군에 끌러가지 않을까, 그겁니다." "운전수로 말이지?" "네, 다른 거야 뭐 지 나이가 있으니까, 하여간에 지원병 제도가 생기고부터는, 말이 지원병이지, 산골의 낫 놓 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면 모를까 누가 전장에 나가려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수 저수 써가면서 강제로 내 보내는 거지요. 젊은 사람들 나다니기도 어렵습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을 트집잡아서 경찰서 오라 가라, 결국 나가네 됩니다." "탄광에 사람들이 많이 뽑혀간다는데 그것도 강제로 가는 겐가?" "아직은, 그러나 먹고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이판사판 돈벌어 오겠다며 떠나는데 처음 한두 달은 돈도 오고 편 지도 오지만 좀 지나면 종무소식이라 하더군요. 하니 그곳 사정을 어찌 알겠습니까. 급해지면 그것도 강제로 뽑아가겠지요.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하자세월 전쟁 시작한 지가 벌써 몇 년입니까. 이래가지고는 못 살지요." "그러게 말이다." 차창 밖에 벼 익는 냄새가 풍겨왔다. 나뭇잎은 높은 곳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으나 찢기고 먼지를 뒤집어 쓴 길 양편의 포플라가 휘딱휘딱 지나간다. 초가 위의 붉은 고추가 눈부시다. 전개되는 풍경을 바라보며 서희 는 한숨을 깨문다. 하루 하루가 고문의 연속이었다. 숨을 죽이며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아예 이별을 하고 나면 체념이 될지 모른다. 얼마 전에 반전공작을 했다 하여 다수의 기독교 교도들이 검거되었다. 그것은 첨예하게 대립되어온 영미를 의식한 때문인지 모른다. 황국신민화의 강도를 높이기 위한 예비 작업인 지 모른다. 여하튼 그 사건은 서희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그러한 사건들은 남편 길상의 예비 검속의 날이 멀 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나 남편 앞에서 늘 태연하게 처신해왔지만 이렇게 혼자, 풍경과 자신이 마주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문제의 핵심속에 자신이 앉아 있는 것을 느낀다. "아, 참." 말없이 앉아 있던 안자가 무슨 생각이 났던지 서희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저기 마님은 모르시지요?" "뭘?" "박의원의 의사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서울 계시는 동안에." "지금 뭐라 했느냐?" 서희는 몽롱하게 물었다. "박의원의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언제?" 서희의 안색이 변했다. "보름쯤 됐나 봅니다. 갑자기 그리 되셔가지고." 안자는 머뭇거렸다. 서희는 서울서 밤기차를 타고 내려왔는데 집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하동으로 향해 출발했던 것이다. 그 러니까 박의사의 죽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어떻게? 무슨 병으로." "그게, 그, 글쎄요.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말해보아." "자살을 하셨다 하더구먼요." "자살을…" 서희는 전신이 떨려옴을 느낀다. 자기 자신의 생각에도 충격이 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최씨 집안의 오랜 주 치의였던 박의사의 갑작스런 죽음, 그것도 자살이라니, 충격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자살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서희는 돌팔매가 심장 한가운데에 날아든 것 같았다. 그것은 박의사의 죽음에 자신이 관련되어 있 다는 바로 그 느낌이었다. 안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서희의 충격이 상상 밖이어서 당황했고 뭐라 더 이 상 말하는 것이 무서웠다. 안자는 어느 정도 박의사와 서희의 내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박의사는 서희에 대한 감정을 가슴에 묻어둔 채 간 것은 아니었다. 항간에 소문이 나돌 만큼 그는 서희에 대 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특히 본인인 최서희에게는. 그런데도 서희는 박의사를 회피하지 않았다. 쏟아놓 은 감정을 마치 박의사 가슴에다 주워담아 주듯이, 그것은 서희의 일관된 태도였다. 거의 당황하는 일 없이, 주저하는 일도 없이. 박의사가 서희를 단념하기 위하여 최후의 수단으로 결혼을 한 것은 서희를 눈앞에 두고 이루지 못할 사랑을 번민한 불행보다 더 큰 불행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결혼과 가정, 그것은 결혼이 아니었 다. 가정도 아니었다. 전투장이었고 살벌한 벌판이었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마지막의 것까지 내버려야 했던 일종의 지옥이었다. 물론 여자가 나빴고 저속했으며 아귀와도 같이 물질을 탐했지만 박의사는 그것을 방치했 다. 애당초 골라서 잡은 여자가 아니었고 그는 다만 형식만을 통과하자는 무책임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박의사 의 자살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서희가 심장에 돌팔매가 날아든 듯 느낀 것은 박의사의 죽음에는 자신의 무게가 실려 있다는 자각 때문이지만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 때 자신으로 인하여 박의사가 불행했고 불행한 결혼을 했으며 자살을 택할밖에 없었다 는 것에 대한 가책보다, 그 가책을 진부한 것으로 밀어붙여놓고 그에게 엄습해온 것은 왜 자신은 박의사를 회 피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어째서 쏟아놓은 감정을 그의 가슴에 주워담아주듯 그런 태도로 일관했는 가 하는 의문이었다. 최소한 친구로서 그를 잃지 않으려 했던가. 길상이 만주에 있는 동안 또 감옥에 있는 동 안 박의사의 지극한 사람이 버팀목이 되어 준 것은 아니었던가. 아니 그런 것 이상의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 니었던가. 서희는 눈물을 흘렸다.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는다. 안자는 또다시 당황하고 놀란다. 서희가 눈물을 흘리 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얘기가 나오고 분위기가 이상하여 그랬던지 윤씨도 말없이 운전만 한 다. 가로수가 얼마만큼이나 지나갔을까. 하동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부사댁에 들렀다 가자." 서희는 평사리에 직행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시우의 모친 박씨는 언제나와 같이, 그렇다, 그에게는 서희를 맞이하는 데 고정된 표정이었다. 은근하면서 차 갑고 단정하면서 모면감을 숨기고 감사하면서 원망하는, 그 미묘한 심리가 만들어낸 표정. "어서 오십시오. 오르시지요." 두 여인은 방으로 들어갔다. 바느질감을 한곁에 밀어붙인 박씨는 자리에 앉으면서, 그리고 두 여인은 예의바르 고 그윽하게 맞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무릎 위에 두손을 얹고 서로 마주본다. '내가 그대 간도에 아니 갔더라면, 이동진어른께서 그곳에 계셨다 하더라도 이댁 서방님은 따라나서지는 않았 겠지요. 댁은 평생 동안 나를 원망하고 계십시다.' 서희 눈은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때 당신이 이 집에 오지 않았더라면 남편이 저리 되지는 않았을 게요. 내 세월 자식들의 세월도 그렇게 험 하지는 않았을 게요. 수없이 흘린 눈물을 당신은 아십니까? 알 리가 없지요.' 박씨의 눈도 늘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서희는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혼자 적적하시겠습니다. 아드님댁에 가시지요." "아닙니다. 평생을 이리 살아서 그런지 새삼스럽게 적적할 것도 없습니다. 그보다 걱정되시겠습니다." 걱정되겠다는 것은 길상을 두고 한 말이었다. 길상에 대해서는 대개 지칭이 없는 것이 박씨 대화의 특색이었 다. 길상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하는 망설임 때문은 아니었고, 삼십 년 넘게 세월이 흘렀으며 자식들이 장성하 여 손자까지 본 마당에, 변함없이 확고부동한 박씨의 의지 표명이었다. 최참판댁의 하나 남은 혈육 최서희와 혼인을 했다 해서 하인 김길상을 격상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문벌과 부와 미모, 강인하며 위엄으로 무장이 된 최서희를 대적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박씨였지만, 그들 최서희와 김길상의 결합을 철저히 부정하 는 단연 압도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의 시샘, 수십 년 가슴에 묻어두고 있는 원망과는 별개 의 문제였다. 사대부 집안이라는 연대감에서도 물론 그러했지만 오랜 세월 돈독하게 지내온 양가의 내력을 보 아서도 하인과의 혼인은 용납될 수 없는 수치요 오욕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최씨 문중의 불명예였을 뿐만 아 니라 이부사댁도 무관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박씨였다. 길들여진 가치관, 그 가치관은 그토록 오래 인고를 지탱할 수 있었던 지렛대이기도 했다. 앞서 대적이라는 말을 했지만 당대의 두 여인은 사실 균등한 자존심으 로 양가의 형식적 교류를 유지해왔다 할 수 있겠다. 한쪽은 장자풍으로, 다른 한쪽은 청백리의 가풍으로 크게 손상되지 않고 이어져왔다고 볼 수 있었다. 서희는 도와주어야겠기에 도와주었을 뿐, 아니 도와준다면 어폐가 있고 가을 추수가 끝나면 인사차 곡식이며 피륙을 한 바리 이부사댁 문전까지 실어다 날랐고 박씨는 또한 고 맙게 받았으되 그것으로 인하여 사리 판단을 달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규범이었던 것이다. "걱정한들, 속수무책이지요." 서희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길상을 존중하지 않는 의도에는 무관심이었던 것이다. "시우는 진주저 가끔 봅니다만 민우는 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다들 잘 있는지요." "젊은 애들이야 뭐, 윤국이는 동경서 더러 만난다 하더구먼요." "그런 모양입니다." "우리 민우는 학운이 없어서… 수재 아드님을 둔 환국이어머님은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학벌이 좋으면 뭣합니까. 써먹지도 못하는데, 시우같이 의학을 해서 의사가 되는 일 이원." 관례적인 인사치레 몇 마디, 괴롭다면 괴롭고, 불편한 대면을 굳이 아니 해도 될 일이었다. 하동을 지나쳐 평 사리로 곧장 갈 수도 있었다. 특히 심경이 혼란스러운 오늘 같은 날에 왜 하필 이부사댁에 들렀는지 서희 자 신도 알지 못했다. 자동차 안에 앉아 있을 기분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막연한 상실감 때문에 견딜 수 없었는지 모른다. '서른 두 해 전이던가? 이 집에서 용정으로 떠나던 그 해가. 이동진어른의 생사를 알기 위하여 우리 일행과 함께 떠나려고 이상현씨가 나섰을 때 나이 어린 댁네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꼬? 내가 없었던들 그렇게 마음이 괴롭지는 않았을 것을.' 정작 가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은 다른데 그와 상관없는 지난 일을 서희는 떠올리고 있었다. 회한도 아 니요, 인위적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 발뺌도 아니요, 새삼스런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눈앞에 앉아 있는 초로의 여자 모습이 갑자기 기이하게 눈에 비쳤다. 고집이 뭉쳐진 듯 하나밖에는 알려 하지도 않는, 완강해 뵈는 두 상, 결코 웃을 것 같지 않는 갸름한 얼굴, 회색 자미사 저고리 앞섶에는 바늘이 꽂혀 있었다. 눈을 내리깐 채 한번도 서희를 정면으로 보려 하지 않았던 서른두 해 전의 깡말랐던 그 새댁, 도대체 그 사이 무엇이 지나갔 으며 어떻게 빼앗아갔는가 숙연해지면서 일종의 전율을 느낀다. 박시의 세월은 서희 자신의 세월이었기 때문 이다. "양현에게 혼담이 있을 법도 한데 어떻습니까?" 벼르고 있었던지 박씨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아직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니까 서둘 필요가 있겠습니까?" 했으나 다분히 곤욕스러워한다. "학생이라도 그렇지요. 과년한 처녀 아닙니까." "네. 나이는 꽉 찼지요." "혹 그 아이 근본 때문에 혼인길이 쉬이 열리지 않는 것이나 아닌지." "웬만한 곳에서 감히 청혼을 못하는 거지요." 처음으로 서희 음성에 감정이 실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겠습니다만, 그러나 혼담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 일이 거론될 것인즉 미리 생각은 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이야 골백번도 더 하지요. 아이가 총명하니까 그 아이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을 듯도 하고, 부인께서는 양현이 어여쁘지 않습니까?" 매우 원색적인 질문이다. "말 가지고 환국이어머님께서 믿으시겠습니까?" 질문에 상응한 답변이다. 당신이 내 마음을 의심하는데 굳이 변명할 이유가 없는 뜻이다. 서희는 희미하게 웃 었다. "용서하시오. 제가 지나쳤나 봅니다. 양현의 근본 얘기가 나오니 어째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저 역시 근심이 되어 한 말이었고, 하기는 품에서 기른 환국이어머님만이야 하겠습니까만 그래도 명색이, 어 찌 되었거나 어민데 그 애 장래를 걱정하는 마음은 다를 바 없는 줄 압니다." "덮어두고 넘어갈 일은 아니지요. 그것을 알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여의사가 되라 하며 길렀습니다. 만일의 경 우를 생각해서, 본인이 원한다면 독신으로 살 수도 있는 일 아닐까요?" "그러나 출가는 해야지요. 좀 낮추어서 고른다면." 그 말 대꾸는 없이 "그 아이 근본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처지라면 양현을 굳이 여의고 싶지 않습니다." 박씨 얼굴에 완연히 불쾌해하는 빛이 나타났다. 비록 양현을 길렀다고는 하나, 이씨 집안의 엄연한 핏줄이며 이미 호적까지 옮겨온 형편인데 여의고 싶지 않다는 서희의 말은 깡그리 이쪽 의사를 무시한 독단적인 것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간, 양현을 저만큼이나 길러주신 것을 모르는 바 아니요, 고맙게 생각합니다만 이씨 집안의 핏줄인 만큼 혼 사에 관한 일은 저희들도 알아야 하고 상의도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서희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다. 한참 후 "그야 말할 나위가 없지요." "진작부터 우리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당연히 데려다 길러야 했던 아이였고, 터놓고 얘기하자면 그 점, 유감 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죽은 봉순이가 저더러 길러달라 하기도 했지만 시우아버님께서 밝혀야 했든 일이었기에." 그 말에 대해서는 박씨도 반격할 여지가 없었다. "하기는 저만큼 훌륭하게 기르지는 못했겠지요. 한데 이번에는 무슨 일로 내려오셨습니까? 박씨는 화제를 바꾸었다. "네, 도솔암에 가보아야 할 일이 생겨서요. 내일 법당에 관음탱화를 장엄하는데." "내일까지 대 갈 수 있을까요?" "글쎄, 서둘렀지만 이미 늦어진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하고 서희는 일어섰다. 대문을 나서려 했을 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어디 불편한 데라도." 박씨가 말했다. "차멀미 땜에 그런가 보지요." 작별을 하고 자동차에 오른 서희는 "나루터까지." 하고 말했다. 네? 운전수 윤씨가 돌아보며 의아해한다. 나루터에서 날 내려주고 윤씨는 돌아가도록. 어째 그러십니까? 안자가 물었다. 나룻배를 타고 가겠다. 한없이 가라앉는 서희 분위기에 질려서인지 윤씨나 안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항상 그림자같이 서희를 따라다니던 유모는 요즘 병이 잦아 진주 집에 남았고 혼인한 지 십여 년이 지났으나 아이가 없는 안자가 유모를 대신하여 서희를 수행해온 것이다. 나루터에서 윤씨는 진주를 향해 돌아갔고 옷가방을 든 안자와 서희는 나룻배에 올랐다. 높고 푸른 하늘과 같 이 강물도 푸르고 잔잔했다. 건너편 강가에는 가을을 타는 숲이 있었고 어디로 가는지 철새들이 높이 떠서 날 아가고 있었다. 애처롭게 날아가 있었다. 어찌하여 삼라만상, 머무는 것이 없는가. 마흔여덟의 최서희는 아직도 아름다웠다. 서산에 해가 지는, 그 노을빛같이 아름다웠다. 물살을 가르며 가는 배, 뱃전에 서 있는 여인, 하얀 숙소(熟素) 겹저고리치마를 입고, 옷고름이 나부끼고 치맛자락이 강바람에 나부낀다. 그는 진정 아름다웠다. 고 귀하고 위엄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외로운 모습이었다. 안자는 근심스럽게 서희 뒤에 서서 상류를 바라보 고 있었다. 평사리에 닿기까지 서희는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마을길로 들어섰다. 집에 이르는 오르막길로 접 어들었다. 이때 길가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석이의 모친, 성환할머니가 늙은 몸을 일으켰다. 마님! 부르며 서희에게 다가서려는 순간, 쏜살같이 내려오던 자전거가 서희와 성환할머니를 가르듯, 그러나 핸들을 휙 꺾는 바람에 성환할머니가 길 위에 나둥그러진다. 어떻게 보면 고의적으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자전거에 서 내린 개동이 어성을 높여 말했다. 할일이 없이믄 집구석에서 낮잠이나 자지, 무신 청승 떠노라고 날마다 길거리에 나앉아 있소! 적반하장, 도리어 입정 사납게 개동은 노인을 몰아세운다. 안자는 얼른 가방을 놓고 나둥그러진 성환할머니르 안아 일으키고 있었다. 국가 비상시국에 식량도 모자라는데 늙으믄 죽어야 하는 기라. 강아지맨크로 발질에 걸거적거려서 사람 부아 돋구기 딱 알맞구마는. 하면서도 개동은 서희에게 곁눈질을 하며 기색을 살핀다. 처음부터 시비를 걸자고 시작한 노릇, 두려워서 기색 을 살핀 것은 물론 아니다. 이놈! 서릿발같이 매서운 서희 눈이 개동을 쏘아본다. 이놈이라니요? 일부러 어리둥절해하는 시늉을 하며 푸르죽죽하고 두툼한 입술을 혀끝으로 핥으며 되뇌었다. 네가 면소에서 서기질 한다는 바로 그놈이냐? 지가 머를 잘못했길래 놈자를 붙이는 깁니까. 알기는 잘 알고 있구마요. 최참판댁 종놈 아닌 면소 서기라는 것 을. 아심서 국가와 관리를 보고 놈자 붙이도 되는 깁니까? 기고만장이다. 목을 꼿꼿이 세우고 눈을 부릅뜨며 거칠 것 없이 지껄였다. 성환할머니는 허리를 다쳤는지 앉은 채 일어서질 못한다. 차서방댁. 서희가 불렀다. 혼인한 이후로는 안자를 차서방댁이라 불렀다. 가서 건이아범을 불러오게. 네. 안자는 가방을 놔둔 채 집을 향해 급히 달려간다. 면소 서기면 서기지. 면민들한테, 더구나 노읺나테 일부러 자전거를 들이대어 부상을 입히고, 뭐 강아지? 죽어 야 한다구? 그런 희롱을 해도 괜찮다는 상부 허락이라도 받은 게야? 허 참, 그만 가시이소. 남의 일에 와 그캅니까? 최참판댁이 일일이 참견할 그런 시절이 아닌 기라요. 자기 숙모나 이웃집 아주머니 대하듯, 친숙한 말투가 서희 자존심에 흠집을 내고 분을 참지 못하여 파랗게 질 릴 것을 예상하며 능글맞게 군다. 허파에 바람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구먼. 말귀도 어두운 모양이니, 내 내일이라도 하동에 나가서 군수보고 따져 봐야겠다. 일개 면소 서기가 이 같은 행패를 부려도 되느냐구. 행패는 무신 행팹니까. 일부러 그랬든 것도 아니겄고 길이 가꾸막이라. 당황한다. 군수에게 가서 따지겠다는 말에 켕긴 것이다. 할머니한테 빌어! 그, 그거는.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었다. 얼굴빛도 달라져가고 있었다. 공연히 몸이 근질근질하고 자기 과시도 해보고 싶 었으며 까닭 없이 미웠던 최씨네 식구들, 심술을 부러본 것인데 일 크게 벌어진 것을 개동은 깨닭은 것이다. 오서방을 죽이려고 낫을 휘둘렀다가 되레 자기 자신의 목숨을 잃고 만 아비 우서방보다 배짱이 작은 건지, 보 통학교는 나왔다 하나,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서기 직함에 거는 집착이 너무 강한 때문인지, 개도의 낭패 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길상이 요주의(要注意) 인물로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사실 서희의 경우는 외관상 분리된 다른 세계에 속해 있 었다. 간도에서 돌아온 후 이십여 년 동안, 김환과 길상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활동과 투쟁을 교묘히 엄폐해가 면서 꾸준히 최씨 일문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져왔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앞뒤가 다른 가면을 쓰 고서도 늘 앞면만 보여왔다 할 수 있고, 그러니까 친일적 경향을 띠면서 회유의 손길을 뻗쳐놓을 필요가 있었 고 요소 요소, 상당히 광범위하게 호의의 통로를 만들어놨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자 막대한 재력이 투 입되었고 서희의 지략이 탁월했기 때문이지만 한편 그의 미모, 천성적으로 부여된 위엄, 그리고 어렸을 적에 조준구에게서 배운 일본말 일본글을 기초 삼아 능란하게 일본말을 구사하고 독서를 통하여 일본 사정에 소상 했던 것이 큰 비중으로 작용했음도 부정 못한다. 만석꾼의 대지주요 근화방직의 대주주, 또한 근화방직의 사주 이자 사장인 황태수와는 사돈지간이니 그 세가 대단하다면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길상을 약점으로 보고 방 자하기 짝이 없는 우물 안 개구리 개동이가 생각하듯 주재소 순사가 들락거리며 죄인 다루듯 그런 수준은 아 니라는 얘기다. 계명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지만 독립자금 강탈 사건에서는, 길상에게서 혐의가 멀어졌고 그 사건 자체가 미궁으로 끝난 지 십여 년, 잊혀진 상태였다. 그 사건이 길상의 주변에서 무산된 데는 서희의 노 력, 서희의 존재 자체가 큰 몫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하튼 군수를 만나 따지겠다 한 말은 으름장이 아니었 다. 서희는 그럴 수 있었다. 동네에서 횡포가 자심하다는 말을 듣긴 들었으나 이토록 방자하고 포악한 줄은 몰랐구나. 할머니한테 무릎 꿇 고 빌지 못하겠느냐? 어느새 소식이 갔는지 동네 사람들이 나와 먼발치에서 맴돌고 있었다. 노인네 부상이 심하면 고소할 수도 있고 치료비도 물어야 할 게야. 동생이 지원병으로 나갔으면 형은 더욱 모 범을 보여야 하거늘. 개동은 결국 마음을 정한다. 시간을 끌어봐야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며 입장만 난처해질 것이 뻔 했다. 빨리 끝을 내고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지가 잘못했십니다. 이후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예. 개동은 길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성환이할무이 잘못해소. 일진이 나빠서 그만, 용서하시이소. 성환할머니는 물끄러미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허리를 다쳤는지 다리를 다쳤는지 얼굴을 찡그리곤 한다. 건이아범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안자도 뒤따라왔다. 건이아범은 할머니를 집까지 업어다 드리게. 서희가 말했다. 예 마님. 땀을 닦고 나서 건이아범은 안자의 도움을 받아 성환할머니를 들쳐업는다. 개동이도 도와주는 척했다. 가자. 안자에게 말한 서희는 앞서간다. 서희가 가고 성환할머니가 업혀간 뒤 마을 사람들은 개동이 주변에 모여들었 다. 무슨 구겡거리가 났나! 악을 쓰며 개동은 눈을 희번덕거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 하나 말없이 개동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제에기랄!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라니. 투덜거리며 자전거를 끌고 가려 하는데 뒤늦게 소식을 들은 개동의 어미 우서방댁이 거품을 물고 달려왔다. 그의 뒤를 쫓아 맏이인 일동(一東)이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무신 일고! 우서방댁이 아들에게 소리쳐 물었다. 어느 연놈이 내 아들을 갬히! 나라에서 녹을 묵는 내 아들을 갬히! 무릎을 꿇렸다고? 딱 바라진 체구,, 길길이 뛴다. 개동아! 대관절 우찌 된 일고오! 내가 알아야 사생결단을 내든지, 지 죽고 내 죽지 해볼 거 아니가! 늘 하는 그 투에 그 말이 총알같이 퉁겨져나온다. 큰 시비건 작은 시비건 간에 초장부터 험하게 몰아치는 것 이 우서방네 식구들의 상투적 싸움의 수법이다. 그리고 식구들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도 그집 식구들의 특징 이었다. 대관절 누하고 머가 우찌 됐다 카노! 말을 해라 이놈아! 나는 자식까지 나라에 바친 몸이다! 그런 내가 무서블 기이 머 있겄노! 수 틀리믄 싹 씻갓아 엎어부리든 불을 싸질러부리든지 그라고 나 하나 죽으믄 그만 아니가? 말을 하면서 치맛자락을 걷어 질끈 동여매고 소매도 걷어붙인다. 좀 모자라는 일동이는 소울음 같은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모두들, 흔히 있는 우가네 식구들 광증을 지켜볼 뿐 누구 하나 나서서 경위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아! 말 좀 해도고! 와 말이 없노! 꿀묵은 버부리가? 아이고오 알겄다, 운냐 너거들 심보를 알겄다. 인 심이 이래가지고 우찌 살겄노. 나중에 우떤 연놈이든 내 집에 와서 아습은 소리만 했다 봐라 쇳바닥을 뽑아부 릴 기다! 아이구야아 숭악한 인심이네! 우서방댁은 개동을 흔들었다. 와 니는 말이 없노! 강약이 부동이라. 씹어뱉듯 개동이 말했다. 머라? 강약이 부동이라니? 무신 말고! 이 동네에서 니를 하시라는 연놈이 있다 그 말가? 개동이는 어미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귓속말을 했다. 우서방댁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리고 풀이 죽는다. 그만 떠들어라! 우서방댁은 신경질적으로 큰아들 일동이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개동은 뭇시선을 뒤통수에 느끼며 볼서납게 자 전거를 끌고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우서방댁도 일동의 등을 떠밀다시피 슬그머니 사라졌다. 군수 한번 들먹인 것이 포악한 우씨 일가의 즉효약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사람들은 와글바글 떠들기 시작했다. 하늘 높은 줄 모리고 깨춤을 추더미는 꼴 좋다! 어이구 씨원해라. 삼 년 묵은 체증이 내리간 것 겉다. 아침 저녁 자전거 끌고 댕기는 꼴만 봐도 독사를 만난 듯 가심이 설렁하더마는. 와 아니라. 제세상 만낸 듯키 갈롱 피는 그 꼬라지 눈이 씨어서 못 보겄더마는 코가 석자 오치나 빠져서 가는 꼴을 보이 정말 씨원하다. 개도 방 봐감서 똥 싼다 했는데 개동이 그놈이 감히 최참판댁을 대적해? 하늘을 쓰 고 도리질을 하지. 예날로 치믄 면소 서기는 아전 찌꺼러기도 안 되는데, 언감생심, 말이나 되나? 그러이 면장이라도 됐더라믄 동네 사람 달 삶아 묵을라 안 카겄나? 우서방을 동네 사람들이 직인 것도 아니겄 고 잘못한 기이 없는데 동네 사람이 오서방을 사형하라고 소청해야 했든가? 밤낮 하는 말이 원수 갚겄다. 아 까도 들었제? 씻갓아 엎어부리느리 불을 싸질러부리느니, 세상에, 살다 살다 그런 악종은 처음 봤다. 한두 분 하는 소리라야제. 구보다 니 무신 소문 못 들었나? 소문이리니? 아들 때문에 쉬쉬했다 카드마는, 그저껜가? 우서방네 제집이 김훈장댁에 가서 산청댁한테 온갖 행패를 다 부 렸다 카데. 아니! 행패를 부리다니 무신 소리고? 세상 참 많이 변했제. 명색이 양반댁 마님인데 개망나니 짙은 제집한테 욕설까지 들었이니, 사람이나 엄전하지 않다믄 또 몰라. 엄전하고 사리 밝고, 없이 살아 그렇지 만사가 칠칠한데 그 제집이 년자까지 놓으믄서 퍼부었 다 카이 복통을 칠 일 아니가. 남의 일일 지마는 내가 다 분해서 벌벌 떨리더마. 멋 땜에 그랬든고? 대단치도 않은 일 가지고, 아마 산청댁이 아잇살이나 위일 거로? 위지이. 네댓 살은 조히 더 먹었일 기다. 그 제집 입이 하도 험해서 사람이 그리믄 못쓴다 했다든가? 다짜고짜 삿대질을 함서 달라들더라는 기라. 주제 넘게 누굴 훈계하는가, 별의별 소리를, 내사마 더러바서 입에 올리기도 싫다마는 양반년의 무엇에는 금테두리 둘렀느냐. 그년 정말 미쳤구나. 곱다시 당하고 말 한마디 못했단다. 그거를 갈바서, 체통이 있지 욕을 하겄나 쥐어박겄나. 한대 때맀다가는 머 리채 감으믄서 달라들기고, 멍하니 쳐다만 보더라 그러더마. 남이 부끄러버 우애 얼굴 들고 댕기겄는가 한탄함 서, 그 자리에 있었든 사람보고 신신당부를 했다누마. 아들 모리게 하라고, 하기사 그 유순한 아들이 알았다 봐라? 분을 못 참고 머라 하는 날에는 그놈 집구석 벌떼겉이 달겨들어서 아들이 무신 봉변을 당할지 뻔하제. 참 세상 많이 변했다. 그 계집이 김훈장댁에 무신 유갬이 있었든가? 있었제. 무신? 오서방댁이 여기 살 때까지만 해도 김훈장댁을 자주 드나들었거든. 글을 모르다 보니 까막소에 있는 오서방 일로 의논도 하고, 김훈장맨크로 범석이 그 사람도 동네 사람 일이라 카믄 어디 마다할성미더나. 자연고로 가 게 되믄 산청댁보고 하소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그것을 우가네 제집이 가심에 접어두었던 기라. 이자 아들이 면소 서기가 됬이니 기고만장해서. 앙갚음한다 그거지. 하모 그러이 무섭제. 아낙들이 그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남정네들은 우가네 식구들을 마을에서 쫓아내느냐 마느냐 양쪽으로 의견 이 갈리어 떠들고 있었다. 쫓아내고 싶은 심정이야 꿀떡 같지. 하나, 재동이놈이 지원병인가 뭔가 나갔고 개동이놈은 면소 서긴데 그기이 어디 쉬운 일이겄나? 자칫 잘못 건디맀다가 무신 횡액을 당할지 그 악종들을 몰라 하는 소리가? 다 당해본 경 험이 있음서, 안 될 일 가지고 왈가왈부할 것 없다. 하지마는 최참판댁에서 나서주믄은 안 될 것도 없지. 읍내에 가서 군수를 만나 그놈 악행을 고하고 우리도 연 판장을 내고 해서 개동이 모가지를 짤라부리믄 되는 기라. 동네가 시끄러버서 견딜 수가 있어야제. 친정에 구 렝이 든 것 갚애서 맨날 기분이 안 좋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최참판댁 마님이 나서주시믄 개동이놈 모가지는 뗄 수 있겄지, 그러나. 그놈 서기질만 그만 두믄은 쫓아내는 거사. 허허허, 하나는 아는데 둘은 모르고 있네. 지원병으로 군대에 나간 재동이놈 가족을 동네에서 내어쫓는다믄 문 제가 크지지. 순순히 나갈 것들도 아니지마는 당국에서 가만 있겠나? 도리어 발목 잽히는 꼴이라. 그거는 그렇네. 최참판댁에서도 그거를 아니께. 오늘도 그댁 마님이 그 정도로 하신 기라. 예날 같으믄 내어쫓을 것도 없이 나 무에 매달아서 패직이제. 김훈장이 기실 적에는, 하기야 김평산이 같은 놈도 있어서 동네가 쑥밭이 되다시피 했지마는. 조준구는 우떻고? 그기이 다 왜놈들이 들어온 탓이 아니겠나. 길섶에 쭈그리고 앉아 곰방대를 빨면서 들판을 바라보고 있던 바우, 이제 동네에서 연장자가 되어 있는 바우 는 큰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입조심들 하라고. 고해바치는 연놈이 있을지 누가 아노. 답대비 주둥이만 가지고 일 치를라 카는 기이 사단이 라. 정작 일 벌어지믄 자라모가지맨크로 쑥 들어감서.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착잡하고 이상야릇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성환할매가 허리를 뿌라았다 카든데 그기이 정말가? 누군가가 유독 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아니, 다리를 삐었다 카지? 건이아배가 와서 업고 갔이니 어딜 다쳐도 다쳤겄지. 그러나 목소리들은 어딘지 공허했고 불안스러움이 깃들여 있었다. 바우가 곰방대를 길가 돌에다 대고 탕탕 치 더니 일어섰다. 그리고 중얼거리기를 사람 같은 거는 다 가고 없으이. 하다가 모두 돌아가서 구들막이나 지키라. 그래야 신상에 안 좋겄나? 하고는 횡하니 가버린다. 사람들은 차츰 흩어지기 시작했다. 성환네 집에 가자. 야무네가 말했다. 그러입시다. 친일네가 일어섰다. 두 사람은 질러서 가느라고 논둑길로 들어섰다. 논둑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간다. 허탈한 듯한 모습이다. 뜻밖의 사건이 터지고 사람들이 와글바글 모여들었으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개동은 내일도 자전거를 타고 마을길을 지날것이다 성님 마목이지요. 친일네가 앞서가는 야무네한테 말했다. 마목이제. 동네 마목이다. 왜놈 세를 업고 그라는데 그놈이 좀체 해서는 씨러지겄나. 어이구이 사는 기이 와 이런지 모리겄소. 세상만사 다 귀찮고 딱 눈 감아부맀이믄 좋겄소. 자네는 대금산일세. 나겉은 것도 숨이 붙어 있는데. 야무네의 머리는 백발이었다. 허리도 구부정했다. 천일네도 많이 늙었다. 내사 우리 야무 때문에 죽을까 겁난다. 그 불쌍한 거 내비리두고 내가 가믄 어느 누가 돌보겄노. 그거를 생각 하믄 밤에도 잠이 안온다. 성님 그 심정 아요. 모린다. 우째 저저히 그거를 아노. 골병이 든 내 가심 천지간에 어느 누가 알꼬. 제집아 하나가 내 가슴에다 못을 박고 가더니 그거를 잊을 만하니까 야무가 저 형상 되어 돌아오고. 세상에 버선목이라 뒤집어 뵈겄나, 시시로 억울한 맴이 들믄 하늘이 원망시럽다. 그래도 성님 그 일만은 발설하믄 안 됩니다. 그러이 가심이 터지제. 내 속에서 났는데 우리 야무가 도적질했겄나? 청백 같은 내 자식이 도적질해서 까막소 살았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안 그라나? 밤낮없이 방구석에서 천정만 보고 있는 것만도 가심이 찢어지는데. 눈물을 닦는다. 빌어묵을 놈, 남 안 하는 노동운동인가 머 공산당이라 카든가 일본에 보낸 기이 이리 후회가 된다. 죽이라도 묵음서 함께 살았이믄 장개도 가고 며느리 볼 나이 아니가. 성님 그 말만은, 입 꼭 다물고 있이소. 그거를 알믄은 주재소에서도 시끄러불 기고 개동이 그놈한ㄴ테도 구실 을 주는 기라요. 내 아들은 도둑놈이다 아예 그리 생각하고 기시이소. 하니 내가 이리 가심이 터지지. 아이구 숨 차다. 좀 쉬었다가 가자. 그라입시다. 두 늙은이는 논둑길에 주저앉는다. 벼익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개구리들이 퐁당퐁당 논물 속으로 뛰어든다. 천일네. 야. 생각해보믄. 오복이애비도 괘씸타. 그리 생각지 마소. 딱쇠 맘인들 오죽하겠소. 지가 뉘 덕에 논마지기나 가지고 굶잖고 사노. 그걸 모리겄소. 다 지 성이 일본 가서 피땀으로 벌어 부치준 돈 아니었으믄 우찌 땅을 장만했을꼬. 그런 성이 병들어 돌아왔 으믄 받드는 것이 도리아니겄나? 설사 성이 할 짓을 안 했다 카더라도 내 살인데 내치겄나? 그거는 성님이 이해해야 합니다. 어디 한두 해요? 십 년 넘기 저러고 있이이 짜증날 만도 하지요. 아니다, 아니다, 딱쇠각 예날에는 안 그랬네라. 지금도 생각이 난다. 우리 푸건이 병났다도 시가서 데리가라 했일 때, 딱쇠하고 둘이서 섬에 갔던 일이 엊그제만 같다. 푸건이를 집에 데리와서 병수발을 할 직에 우리 딱 쇠는 약값 대노라 참 나뭇짐도 많이 졌제. 날이믄 날마다 나무를 해서 하동으로 팔러 갔다. 그래도 어디 한분 군담을 할까. 그러든 그놈이 제집을 얻고부터는. 제집 말 안듣는 소나아가 없다 안 카요. 집집마다 다 그렇지. 그거 일일이 생각하믄 논이 나서 못 사요. 그래도 너거사 무신 걱정고, 집안에 우환이 없으이. 결국 논둑길에 퍼질러 앉아서 두 늙은 여자는 익어가는 벼를 등지고 함께 울기 시작했다. 임인년(壬寅年)의 호열자와 그 이듬해 보리 흉년을 겪었을 떄 삼십대였던 천일네와 야무네는 마을에서도 몇 안 남은 세대다. 진주에 영팔노인과 두만네가 살아 있었고 평사리에는 문밖 출입을 못하게 된 봉기노인, 그의 안사람 두리네와 윗마을 강노인 정도, 좀 나이 처지는 축에 김훈장의 양자 한경이가 있었다. 끝봉이 오서방의 외사촌 전사방, 바우는 육십줄의 중반이었으며 성환할매 야무네보다 서너살 딸어지는 천일네가 칠십 고령이었 다. 사십 년 가까이 흘러버린 세월, 많은 사람들이 갔고 자취도 남아 있질 않았으며 몇 사람 있는 늙은이들에 게 황혼은 더욱 짙고 어둡게 다가오고 있었다. 천일네의 눈물은 날로 무력해지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또 멀고 먼 만주 땅에 있는 큰아들 천일의 식구들이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떠나버렸음을 슬퍼한 것이다. 들려오는 말 에 의하면 처남과 의논하여 진주에다 기와집 한 채를 사놨다는 것인데 어미에게는 의논이 없었다. 함께 사는 둘째며느리 성자네의 경우도 뜻이 맞지 않아 더러 티격태격 다투게도 되는데 그럴 때마다 아들은 제 가속 편 이었고 정성을 다하여 기른 손자 손녀까지 제 어미 편을 드는, 그런 저런 일에 대한 설움인데, 야무네는 노인 들이 대부분 겪게 되는 고적, 쓸모없는 존재를 한탄하는 그런 눈물은 아니었다. 병들었다 하여 시가에서 내친 딸을 데려다가 병을 고쳐보려고, 그때 딱쇠는 누이를 위하여 허리가 휘도록 나무를 해서 하동장에 내다 팔곤 했다. 그러나 허사였고 푸건이를 보내고 말았다. 오직 등불과도 같았던 야무가 일본서 파업에 가담했다든가, 노동운동을 했다든가, 여러 해 복역ㅇ르 하고 폐인이 되어 돌아와서 아직도 신음중이니 야무네로서는 설사 불 측한 자식일망정 살아남아 있고 몸 성하게 부모 곁에 있다면 그 이상 부러울 것이 뭐겠느냐 싶었을 것은 당연 하다. 한편 성환할매의 경우도 여러 가지 형편이 딱하게 돼 있었다. 요즈막에 와서 성환할매는 길가에 나앉아 하염없이 강가에 이르는 길 쭉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나이 드니까 돌아오지 않는 아들 석이를 기다린다고들 했지만 물론 아들을 기다리는 마음이야 한결같았지만 보다 절실한 일이 또 있었다. 애당초 고향 으로 돌아와 거처하게 되면서 못사는 딸네 식구들을 불러다 합가했던 것이 잘못된 일이었다. 늙은몸, 어린것들 을 위탁했다기보다 성환할매는 오히려 짐을 하나 더 짊어진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육친의 배신을 뼈가 저릴 만큼 체험하였다. 딸 귀남네는 친손자 손녀만을 위한다 하여 불만이었고 최참판댁에서 성환을 학교 에 보낸 것까지 시기하여 노골적으로 어미에게 몹쓸 딸이 되었고 성환할매는 또 아비 어미 없는 조카들을 눈 밖에 내며 제 자식만 챙겨먹이는 귀남네에 분노를 느꼈다. 게다가 동네에서 이마빡에 소우자를 붙이고 다니는 사내로 치부하는 사위는 본 바 없고 제 욕심만 채우는 미련한 위인이었기에 최참판댁에서 떼어준 땅이며 훙이 가 물려준 집이며 다 성환할매와 석이 자식들을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식구처럼 노인과 어린것들의 설 자리는 좁아지기만 했다. 그러던 참에 소같이 일하고 제 식구밖에 모르던 귀남아비에게 바람이 들기 시작 한 것이다. 일년 열두달 너절한 옷차림이던 그가 나들이옷으로 갈아입고 읍내 출입이 잦아졌을 때 사람들은 소가 제법 사람 같다는 말로 놀려댔지만 차마 그가 딴짓 하리란 생각은 못했다. 그러나 집에 들면 곧잘 귀남 네를 두들겨패고 읍내서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투전판에서 많은 돈을 땄다, 어떤 과부와 눈이 맞았다, 장터 야바위꾼과 어울려 다니더라 등등, 기어이 그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가 사라진 지도 팔구 년이나 된다. 귀남네는 풀이 죽었고 성환할매를 의지하는 이와 살아갈 방도가 없어졌다. 사람들은 어매와 조카들에게 몹시 하더니 벌을 받아 그렇다는 둥 쑥덕공론이었다. 귀남네도 딸자식, 그의 시름을 생각하면 불행한 일이었지만 어 쨌든 집안은 소강상태였다. 보통학교를 나온 성환은 연학이 진주로 데려가서 중학교에 넣었고 지금은 최씨집 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졸업도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귀남은 남의 집 고공살이로 떠났 고 남희는 읍내 보통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땅은 마을 사람들이 부쳐서 식량은 되었고 고성에 사는 작은딸 복 연이가 많이 도와주는 편이었다. 시부모가 다 세상을 버렸고 살림이 넉넉해졌기에 친정을 많이 돌보아주는 것 이다. 이런 참에 평지풍파가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아닌 성환과 남희의 생모 양을례가 평사리에 나타났던 것이 다.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머리를 지지고 나타났다. 원래 살빛이 희었지만 잘 가꾸어서 윤기가 도는 얼굴하 며 야하게 보였으나 세련이 된 모습이었다. 결혼 전에는 크리스천이었고 독립운동을 하는 이복(異腹)오라비의 영향도 있어서 꽤 괜찮은 여자였던 양을례가 와서는 안 될 곳에 나타난 것이다. 작년 봄의 일이었다. 기화(봉순이)와 석이 사이를 의심하고 질투의 불길을 태우며 매달리는 시어머니르 뿌리치고 어린 자식 둘을 팽개치고 떠나버린 양을례, 석이에게 보복하기 위하여 아합했던 나형사와 추악하게 이별을 했던 양을례, 성환 할매는 망연자실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일본놈하고 산다, 젊은놈을 꿰어차고 대만(臺灣)에 가서 가시나 장사 를 한다, 더러 들려오는 말은 그러했다. 도대체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다 이제 나타난 것일까. 뭘 하기 위해 나타난 것일까. 벌겋게 성이 난 사타구니의 종기, 몸이 불덩이가 된 어린 남희를 을례 친정에서 데리고 나온 성환할매는 밤늦은 시간, 박의원의 문을 두드렸다. 종기를 째고 고름이 쏟아지고 자지러지듯 우는 아이의 울음 소리, 성환할매의 기억에는 생생하게 어제일같이 뚜렸한데 양을례는 말했다. 성환은 진주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으니까 그대로 두겠지만 남희는 데려가서 명년에 여학교를 보내겠노라. 니가? 와 그래야 하노. 성환할매가 뇌듯 말했을 때 어미니까요. 니가 에미가? 우째서 니가 에미고. 지난 일 따지면 뭐하겠어요. 내가 아이들 어미인 것만은 사실이잖아야. 애바가 기르고 있다면 나 오지도 않았 을 거요. 니한테는 심장이 몇 개 있노? 당당했다. 자신만만했다. 동네 사람들이 이 이상한 양복쟁이 여자를 보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우떤 제집인지 얼굴 한번 보자. 성환할매와 양을례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면서 동네 사람들이 가세했다. 간이 덕석만한가부다.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여놓노 말이다. 자식 두고 가는 제집 간장이 오죽 찔기문 그러겄나. 중과부적, 배짱 좋은 을례도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타협을 포기한 양을례는 그러나 읍내 학교로 찾아가서 몰 래 남희를 만났고 어떻게 꼬드겼는지 전학 수속까지 밟아서 아이를 데려가버렸던 것이다. 기별을 받은 성환이 진주서 달려왔다. 넋이 나간 듯 손녀 이름을 부르는 할며니를 달래가며 읍내 학교에서 성 환은 전학해간 학교를 확인하고 할미와 손자는 부산으로 남희르 찾아나섰다. 학교문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남 희를 붙잡았을 때 할무이 나 안 갈 기요. 남희는 외면을 하며 말했다. 뭣이 어째! 성환이 노한 얼굴로 다가서자 오빠, 나그만 여기 있을란다. 여기서 상급학교도 가고 이자 촌구서에서 살기 싫다. 성환은 남희의 뺨을 후려쳤다. 두번 다시 그런 소리 했다 봐라 직어부릴 기다! 나는 엄마 옆에 있고 접다! 와 엄마하고 못 있노! 아우성을 치던 남희는 순간 몸을 날렸다. 남아! 성환할매는 울부짖었다. 보행이 더딘 할머니르 차마 두고 뛸수 없었던 성환은 남희를 놓치고 말았다. 이 일을 우짜믄 좋노. 걱정 마이소. 학교에 가면 주소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이튿날 주소를 알아낸 이들이 찾아간 곳은 양을례가 일본인 정부(情夫)와 함께 경영하는 사가미라는 요정이었 다. 사가미온나라 하면 정이 짙고 호색(好色)이라는 전설인지 뭐 그런 말이 있어서 붙여진 요정 이름인 것 같 았다. 으리으리하지는 않았지만 깨끗하고 아담했으며 상당한 고급 요정인 것 같았다. 성환은 그곳에서 일본옷 을 입은 생모와 대면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왔어요! 양을례는 당황했으나 한편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와, 여기는 사람 올 곳이 못 되나? 그렇기 험한 곳이가? 주저하는 기색 없이 성환할매는 을례르 노려보며 말했다. 촌 늙은이가 감히 남의 영업 방해하겠다 그거요? 어서 돌아가요! 가지 말라 캐도 갈 기다. 이 더러분 곳에 누가 있고 저블꼬? 아이만 내놔라. 우리 남희 내놔. 대체 뭐를 바라는 거요? 바라는 것 없다. 인연도 없고 아아만 내주라. 성환은 두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동안의 양육비 내놔라 한다면 생각해줄 터이니 어서 가요! 이년이! 처음으로 성환할매 입에서 욕설이 나왔다. 뭐라구! 촌것이 도통 세상일ㅇ르 모르는군. 이년이라니? 어디에 와서 행패를 부려? 성환이 을례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할머니의 그 정도 말씀을 고맙게 여기시오. 뭐라구? 내 주먹이 날아가지 않은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시오. 이놈이! 남희를 순순히 내놔요. 불 같은 증오심이 타고 있는 성환의 눈동자가 을례의 눈을 놓치지 않고 잡고 늘어진다. 어미를 보고 감히! 을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미? 당신이? 네가 누구 속에서 나왔니! 그것이 한탄스러울 뿐이오. 나를 때린다구? 어디때려봐! 때릴 그런 정도가 아니지요. 죽이고 싶소. 별안간 을례는 미친 듯 웃었다. 병신 같은 놈!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중학교르 나오고 나면 대학은 내가 시킬까 생각하고 있었 는데 병신 같은 놈. 그런 공부 하느니 차라리 죽지. 을례 웃음 소리에 살그머니 남희가 얼굴을 내밀었다. 남희야! 이눔 가시나 못 오겄나! 여기가 어딘지 알기나 해! 성환이 외쳤을 때 남희는 재빨리 숨어버렸다. 남희가 숨는 것을 본 성환할매는 아이구. 하며 바닥에 철썩 주저앉는 것이었다. 야 이놈아! 니 애비는 뭐야! 니 애비는 뭐가 그리 위대해! 자식 버리긴 매한가지 피장파장이다. 니가 내력이나 알고 하는 소리야! 을례는 히스테리를 부리며 꽃병을 집어들고 바닥에 메어쳤다. 그러자 서방인지 정부인지 몸집이 작은 사내가 안에서 나타났다. 여자같이 얼굴이 하얗고 앏은 입술이 불그스레했다. 마치 노멘 같았다. 난다! 나니오 호자이데루노카!(뭐야! 뭘 지껄이는 게야!) 얇고 불그스레한 입술이 가로가 아니고 세로로 입술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칸카! 고노 바카야로! 구빗타마오 힛코누이테야루!(못 가겠나! 이 바보 같은 놈! 모가지를 뽑아줄 테다!) 결국 성환할매는 물벼락을 맞았고 성환은 불러들인 불량에 의해 몰매를 맞고 밖으로 들려 나왔다. 그 사건은 성환이나 성환할매에게 치유될 수 없는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물벼락을 맞고 불량배에게 몰매를 맞은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할머니와 오라비가 수모를 당하는 꼴을 보고도 숨어버린 그 육친의 배신은 너무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성환은 흐느껴 울었고 성환할매는 넋이 빠져 있었다. 그런 일을 당하였는데 도 불구하고 성환할매가 길거리에 나와 앉은 것은 행여 남희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가냘픈 기대 때문이었고 못 견디게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자 그만 가입시다. 서산에 해가 거렁거렁 넘어가요. 천일네가 먼저 치맛자락을 걷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자. 눈물 짜봐야 달라질 기이 머 있겄노. 두 늙은이가 성환네 집에 들어섰을 때 집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누구 아무도 없나? 천일네가 중얼거리는데 부엌에서 귀남네가 내다보았다. 오십니까? 내키지 않는 듯 그러나 인사는 했다. 여러 해 전에 성환할매한테 잘못한다 하여 야무네가 뼈아픈 말을 한 적 이 있었다. 그리 풀세기 날뛰다가 뜨거운 일 볼까 무섭네. 죄는 지은 대로, 부모 눈에 눈물나게 해서 니가 복 받을 것 같 나? 어디 세상에 그런 법이 있노. 저거집에 얻어묵으로 가도 안 그랄 긴데. 그런 말이 나오게끔 주거니 받거니 했으나 심하기는 심했다. "야아, 그러믄 오복이할매는 지은 죄가 많아서 소싯적에 남편 잡아묵고 딸자식 잡아묵고 지금도 방안에 산송 장이 앉아 있십니까?" 귀남네는 눈이 새파래져서 악을 썼던 것이다 그때 아무네는 까무라치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두 사람 사 이는 항상 뜨악했으나 귀남네는 남편이 있을 때처럼 도발적이지는 않았다. "어매가 우떻다 카노." 천일네가 물었다. "머 괜찮은 갑십니다." "그래도 노인이라, 며칠 두고봐야 알 기다." "약을 가져와서 붙있인께." "약은 어디서 가져왔노?" "최참판댁에서 보냈더마요." "고맙다. 그리도 그댁을 의지한께 성환할매가 살지, 성환이가 알았이믄 분해서 펄펄 뛰었을 기다." "일부러 그런 거는 아니라 카데요." "누가 그러더노." 야무네가 날카롭게 물었다. 귀남네는 그 말 대꾸는 하지 않았다. 암울한 표정, 찌들리어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복동이 제집이 왔다 간 모앵이구나." 야무네 정곡을 찌른다. "동네가 두 패로 갈리어 큰일이다. 서기질 한다고 해서 먹이살리 줄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와 그럴꼬? 옛날의 조준구 시절에도 두 패로 나누어져서 왼수맨크로 으르렁거리더마는 귀남네." 천일네가 불렀다. "야." "복동이댁네하고 친한 거는 알것는데 개동이 그놈 편드니라고 깃대 치키들믄 안 될 기다. 니가 뉘 덕에 사노? 사람이란 인공을 모르믄 금수만도 못하지. 안 그렇나?" 타이르듯 말한다. "지사 뭐... 패거리에 끼여들 처지나 됩니까. 내 앞길만 생각해도 눈앞이 캄캄한데 누구 편역을 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십니다." 옛날같이 톡 쏘는 말투는 아니었다. "하기야 뭐 무슨 경황이 있겄노." 두 늙은이는 힘들게 마루로 올라간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간다. "좀 우떻소 성환할매." 야무네가 물었다. "괜찮은데 오기는 머하러 오요." "정말 꽨찮겄소?" 천일네가 물었다. "허리를 삐끗했지마는 자고 일어나믄 낫겄지. 전에도 종종 그랬인께, 별일 아닌 거를 가지고 동네가 시끄럽고, 참판댁 마님이 그놈한테 수모를 당한 것이 미안스러바서 죽겄구마는." "그래도 그놈이 오늘은 혼이 났일 기요." 천일네 말에 야무네는 "그놈이 어디 혼날 놈이건대? 서기질 못하게 될까 봐서 혼이 난 척했을 뿐, 두고보아라. 잠잠해지믄 무신 지랄 을 또 할지, 그 심보가 어디 가겄나? 옛날의 삼수 그놈 같다. 두리어매는 지금도 삼수 말만 나오믄 이를 뽀도 독 갈더마." "어느 세상이든 그런 놈이 더러 있어서." "꼭 삼수 그놈 같다 카이. 그런 놈들은 남을 해코지 안 하믄 밤에 잠이 안 오는 모앵이라." "그나저나 석이네 성님." 천일네가 정색을 하고 불렀다. "이자는 길가에 나앉지 마이소." "..." "남희 그 제집아 땜에 그러지요?" "가깝해서." "그만 잊아뿌리소. 다 컸는데 머가 걱정이오." "여식아아는 생물 겉애서."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귀타 캅니다. 직일 년 살릴 년 하지마는 에미 아니요. 할매만 못하겄소?" "그거는모르이 하는 말이제." 성환할매는 듣기 싫은 듯 얼굴을 찌푸렸다. "돈도 많다 하고 달리 소생도 없다 카이 그 제집도 돈벌어 어디다 쓰겄소? 공부도 시키준다 카이." "벌써 상급핵교에 들어갔다 카든데? 지난 봄에." 야무네 말이었다. "돈이 있이믄 머하노. 호강을 하믄 머하노. 철없는 것이 꼬임에 빠졌지. 그곳이 우떤 집인데, 소나아를 상대해 서 술 팔고 여자 팔고, 그 일을 생각하믄 자다가도 가심이 두근거린다. 제집아아가 허방에라도 빠지믄 신게, 그거로 조지는 것 아니겄나. 내가 그거를 우떻게 키았다고. 눈물로 키았다." 성환할매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다. "시끄럽소. 다 팔자요. 에미 애비 없이 큰 것도 팔자고." 그러자 야무네는 "팔자라 하지마는 사람의 맴이 안 그렇네라. 눈감는 날꺼지는 단념을 못한께. 자식 그거 다 피멍 겉은 기지. 집안이 와 이리 허퉁하노?" 하고 말했다. "식구가 없어이, 귀남에미하고 나밖에 더 있나. 사람 사는 것 같지도 않다. 그놈의 제집아가 눈에 자꾸 밟히 고." "허 참 성님도 그만 했이믄 좋겄소. 그렇기 가아들만 찌니게 귀남에미가 섭섭하고 속상할 만도 하요." "에미 애비가 없인께 그러지." "귀남이는 잘 있다 카든가요?" "잘 있다 카기는 하지마는 남의 집 고공살이, 고생 안 한다 하겄나." "연학이 그 사람이 자게 여관에 둘라꼬 데리갔다믄서요?" "그러이 보냈제. 아직나이도 어린데." "그만하믄 다 컸지 어리기는." "장래를 생각해서 보냈는데 지 에미가 보고 저븐 눈치라." "보고 접겄지요." "진주 한 분 다녀오겄다 하는 거를 내 허리가 어서 나아얄 긴데." "그나저나 귀남애비는 영영 그만입니까?" "그놈 말은 끄내지도 말아라." "어디 가서 죽었이까?" 하는데 야무네가 "그게 언제였든지, 산에서 약초 캐는 거를 보았다 카든가." 기억을 더듬듯이 말했다. "말짱 헛소문이다. 근가죽에 왔다믄 제집은 그렇다 치고 지 새끼가 있는데 도척이 겉은 놈이라 캐도 안 와보 겄나? 면목이 없어 그럴 놈도 아니고, 가도 멀리 갔든지 아니믄." "하기사, 죽었거니 생각하는 기이 차라리 속 편할 기다. 십년이 다 돼가는데 일본 간 것도 아니고 만주 간 것 도 아닌데 와 못 올 기고. 귀남이나 믿고 살아야지." 한동안 말이 끊겼다. 성환할매 천일네는 어쩔수 없이 잊고 살자던 아들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만주에 간 아 들, 거처가 확실하든 확실치 않든 만주는 이들에게 멀고 먼 곳 아득한 곳이었다. 한참 후에 성환할매가 말했 다. "귀남에미 듣는 데서는 그놈 말 끄내지 마소, 야무어매 천일네도. 다 부모 잘못 만내서... 그런 놈한테 보낸 내 불찰 아니겄소." 이 무렵, 최참판댁에서는 서희가 별당 연못가에 서 있었다. 계획으로는 오늘중에 도솔암으로 가게 돼 있었다. 해서 밤기차를 타고 왔으며 진주서는 집에 잠시 들렀다가 서둘러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부사댁에서 시간을 잡아먹고 자동차는 진주로 되돌려 보냈으며, 무의식적인 계획의 변경이었지만 오늘은 도솔암에 가지 않겠다는, 역시 무의식적 마음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역사, 사연이 똬리를 틀 듯 둘러싸여 있는 평사리의 최참판댁, 고래등 같은 기와집, 꿈에서도 잊지 못 했던 탈환의 최후 목표였던 평사리의 집을 거금 오천 원을 주고 조준구로부터 되찾았을 때, 그것으로 서희의 꿈은 이루어졌고 잃었던 모든 것을 완벽하게 회수했던 것이다. 그때 서희의 감정은 기쁨보다 슬픔이었고 허망 했다. 그리고 뭔지 모르지만 두려움 낯설음, 과거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낯설움이었다. 서희는 회수한 평사리의 집에 꽤 오랫동안 접근하지 못했다. 그렇다. 서희는 과거를 두려워한 것이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일들은 모두 음산한 비극뿐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평사리의 집은 의식 속에 방치된 채, 서희는 현실에 쫓겼는지 모른다. 연못가에서 서희는 새삼스럽게 그토록 열망했던 곳을 찾는 순간부터 회피하려 했던 그 모순을 의아하게 되새 겨본다. 그리고 처음으로 옛집에 돌아온 사람같이 집안 여기저기를 마음속으로 짚어보고 매만져보는 것이었다. 호열자에 할머니 윤씨가 떠났을 때 홀로남은 서희, 그때 열 살이었던지, 역시 어미를 호열자로 떠나보낸 봉순 이는 열한 살, 열두 살이었던지 짚베 옷을 입고 낙엽이 떨어져 내려앉는 연못을 바라보며 서 있었던 광경을 마치 한폭의 그림 보듯 서희는 눈을 감고서 골똘히 바라본다. 평사리의 집은 그런 그림이 천폭 만폭, 쌓여 있 는 곳이다. 서희는 별당 마루에 가서 걸터앉는다.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안자를 불러 따끈한 작설차 한잔 마시고 싶 다는 말을 한다. 왜 오늘 도솔암에 가는 것을 포기했는가, 서희는 그 일에 대한 생각을 쉽게 버릴 수 있었다. 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자신만을, 서희는 자기 자신만을 지금 현재 생각하고 싶었다. 자 신을 위한 시간 속에 있고 싶었다. 박의사, 박효영, 그의 자살은 서희 자신에게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자기 자 신에 대한 추구다. 물론 그것은 길상과 무관하지는 않다. 안자가 다기를 올려놓는 다반을 들고 왔다. "가보아라. 혼자 있고 싶다." "네." 안자가 물러갔다. 자동차 안에서부터 서희는 안자에게 자기 감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감추려 하지 않았다기 보다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 옳았다. 천천히 작설을 덜어서 넣고 주전자를 기울여 물을 부은 뒤 다 완에 옮겨 붓고 두 손으로 다완을 싸안는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를 한동안 느껴보다가 마신다. 황 혼에 물들어가고 있을 하늘, 대기에서 차가움을 뿜어내는 일몰의 시기, 작설차는 정답게 서희 심장을 적셔주었 다. 분, 초로 나누어보면 흘러가버린 시간이 얼마인가. 천문학적 숫자다. 그 많은 숫자 속에 순수한 자신의 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을 서희는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것은 서희에게 매우 충격적인 자각이었다. 가문과 자식과 그 리고 남편이라는 존재, 그것과 그들을 중심하여 모든 것을 돌게 하였던 자기 자신은, 애정이든 의무이든 자기 자신은 시계바늘 같은 것이나 아니었는지. 중심에서 멀리 벗어난 박의사는 자신에게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 는 서희를 위한 시계바늘이었는지 모른다. 의술을 원했다면 박의원 아닌 곳에도 있었다. 박효영의 심중을 알면 서 주치의를 변경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때, 서울서 내려올 때, 급성맹장염으로 부산에서 수술을 받았을 때 진주서 달려왔던 박효영의 얼굴이 서희 눈앞에 풀쑥 솟아올랐다. 사랑은 박효영뿐만 아니었고 서희 자신 속에도 있었음을 강하게 느낀다. 서로의 사랑 이, 한쪽은 개방되고 한쪽은 밀폐된 사랑이 박효영을 불행하게 하였고 자살에 이르게 했다. 서희는 흐느껴 울었다. 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았으나 흐르는 눈물은 멎지 않았다. 그가 앉은 별당, 어머니 별당아씨가 거처하던 곳, 비로소 서희는 어머니와 구천이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과연 어머 니는 불행한 여인이었던가, 나는 행복한 여인인가 서희는 자문한다. 어쨌거나 별당아씨는 사랑을 성취했다. 불 행했지만 사랑을 성취했다. 구천이도, 자신에게는 배다른 숙부였지만 벼랑 끝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살다간 사 람, 서희는 또다시 흐느껴 운다. 일생 동안 거의 흘리지 않았던 눈물의 둑이 터진 것처럼. 어느새 사방은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마님." 어둠 속에 안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님." "무슨 일이냐." 목이 꽉 잠긴 목소리였다. "저 저기." 안자는 되돌아갈 듯 몸짓을 하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말해보아라." "네. 낮에, 그 불량했던 놈이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로?" "사과를 올리겠다 하면서." "그래?" "..." "이번만은 그냥 넘어갈 터이니 앞으로 그런 일 없도록, 돌아가라 하게." "네. 바깥 기운이 찹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오냐. 그러마." "이튿날 아침 일찍 서희는 안자와 건이아범을 거느리고 도솔암을 향해 떠났다. 도솔암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때가 훨씬 지난 뒤였고 관음탱화를 장엄하는 의식도 끝나 있었다. 절마당까지 내 려온 지감에게 서희는 합장하고 인사를 했다. "늦었습니다, 부인께서." "네. 제 사정 때문에 죄송합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절은 적막했다. "법당에 드시겠습니까? 아주 훌륭한 관음상을, 김형은 성취했습니다." 하며 지감은 미소를 머금었다. "나중에 뵈옵지요." "일봉아!" "예!" 상좌 일봉이 달려왔다. "모셔라." "예." 일봉이 안내하는 방으로 서희가 들어갔을 때 길상은 단정하게 앉아서 불경을 읽고 있었다. "늦었구려?" "네. 좀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길상의 얼굴은 환하게 밝았다. "관음상을 장엄한 뒤 당신 생각을 했소." "어째서요?" "당신 모습이 있어서 그랬나 보오." "관음상 말씀입니까?" "그렇소." "관음께서 어찌 수전노를, 저를 두고 수전노라 한 사람이 있었지요." "몰라 그랬을 게요. 당신을 두고 친일파라 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건 사실이지요." "친일파가 나 같은 사람을 감추어두겠소?" "..." "시장하지 않소? 점심 먹을 시간이 없었을 터인데." "화개에서 주막에 들러 국밥을 먹었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네. 일행도 있고 배가 고파서야 산길을 오르겠습니까?" "그건 참 잘한 일이오." 길상은 유쾌하다는 듯 껄껄걸 소리내어 웃는다. "참 송관수의 부인이 이곳에 계시는 거 모르지요?" "이곳에요?" "그렇소." "왜 그랬지요? 갈 곳이 없었나요? 자식이, 그 누구죠? 영광이 그 아이가 있질 않습니까? 또 재영애비는 어째 뒤처리를 못했을까요." "웬 성미가 그리 급하시오. 전에 없이,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서?" "..." "만나보면 당신도 느끼겠지만 영광이어머니는 조신하고 어린아이같이 낯가림이 심한 사람이오. 말수도 적고, 갈 곳이야 아들, 딸, 사돈도 있었고 한데 본인이 이곳에 있기를 간절하게 소망했다는 게요. 본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했소. 공양주하고 함께 기거를 하는데, 착하고 부지런하고 지감스님이 절에 큰 복이 터졌다며 여간 기뼈하질 않았소. 보기에도 영광어머니는 이곳에 있는 것을 만족해하는 것 같더구먼. 우리가 섣불리 금전적 도 움을 준다는 것은 오히려 상대 자존심만 상하게 할 것 같소." "어렵게 지냈을 텐데 어째." "어렵고 가난하게 지낸 사람들 속에 오히려 귀한 그런 정신이 있는 거요." 서희는 말이 없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재영애비는 토요일에 내려오겠다 했습니다." "무리해서 내려올 것까지는 없는데." 무안을 타듯 길상은 묘하게 이지러진 웃음을 보였다. 아주 드물게 길상은 그렇게 웃는 일이 있었다. 영광의 모친이 절에 있었고 송관수의 사후 처리가 미진하다고 생각하는 환국이 겸사 겸사 내려오는 것이겠지 만 주목적은 길상이 완성한 관음탱화를 보기 위해서인데 자식의 도리, 뭐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관음탱화를 보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자신이 화가였으니까. 미술학교를 마친 후 환국은 동경서 유수한 미술 단체와 기타 권위 있는 공무전에 입선한 바 있었다. 개인전도 동경서 한 차례, 서울서 두 번, 상당한 반향이 있었으며 역량 있는 화가로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길상의 경우 는 환쟁이가 아니었다. 금어라 할 수도 없었다. 다만 어릴 적에 그 재능이 비범하다고들 했으나 어깨너머로 익 힌 불화였고 그나마 오랜 성상, 붓을 놓았던 처지, 그야말로 소인에 불과하다. 환쟁이도 금어도 아닌 그가 관 음탱화를 조성한 것은 우관의 당부도 있었지만 원력을 건 행위 이외 그 아무것도 아니었다. 준비 작업으로 이 삼 년 동안 수천 장의 초화를 그렸으며 마지막 신명을 다하여 조성했고 또 부자지간 스스러울 것도 없으련만 길상은 환국이 내려온다는 서희 말을 듣는 순간 왠지 쑥스럽고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그 쑥스러움이나 위축 감은 아들과 아내게 대한 어떤 거리감이었는지 모른다. 어떤 낯설음이었는지 모른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서희는 일어섰다. 밖으로 나온 그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든 안자와 함께 도솔암을 나 섰다. 눈익은 오솔길을 지나 한참 갔을 때 길이 깎이어지면서 개울이 나타났다. 개울을 따라 좀더 올라갔을 때, 언덕을 휘돌아서 물이 흐르는 곳, 바위와 언덕과 나무숲에 가려진 곳에 폭포라 할 수도 없지만 두자 가량 높이에서 물이 떨어지고 우물보다 훨씬 큰 웅덩이에 옥수 같은 물이 넘치고 있었다. 서희는 도솔암에 오면 이 곳에서 목욕재계하고 법당에 드는 것이 순서였다. 절에 큰 불사가 있을 때말고는 인적이 전혀 없는 곳이었지 만 안자는 멀찌감치서 망을 보고 서희는 옥수 같은 물속으로 들어간다. 눈을 감고 살속으로 스며드는 냉기를 심장 깊이까지 느끼며 산 속의 다정하면서도 무서운 정기를 느끼며 서희는 자신의 마음이 맑아지기를 기다린 다. 올 때는 들려오던 새소리 뻐꾸기 울움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뭇잎 서걱거리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 다. 오로지 물소리만 의식 속에서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곤 했다. 이윽고 물을 털고 나온 서희는 옥을 깎아 만든 듯 단려하고 아름다운 몸을 수건으로 닦은 뒤 새옷으로 갈아입 는다. 말없이 왔던 길을 말없이 되돌아간 서희는 법당으로 곧장 들어갔다. 후불탱화 앞에 대지권인을 쥐고 연 화대에 앉으신 대일여래상을 향해 수차례 예배를 한 서희는 동편 벽면에 새로 장엄된 관음탱화 앞으로 옮겨간 다. 감식할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서희에게 그같은 속기는 발동하지 않았다. 그림이라는 생각에서 떠 나 다만 관음보살을 대하는 것이며 느끼는 것이며 일체 잡념이 없었다. 그 앞에서 수없이 예배를 하다가 염주 를 건 손을 모아 깊은 정적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법당 밖에 해가 훨씬 기운 것도 모르고. 일봉이 저녁 공 양을 들여왔다. 가사를 걸친 지감이 목탁을 두드리며 예불을 시작했다. 서희는 본존 앞, 지감의 뒤쪽으로 자리 를 옮기며 예배를 한다. 산사는 마치 이 세상이 아닌 곳처럼, 육신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오로지 목탁 소리, 자 감의 송경 소리만이 흐르듯 구르듯 가득 차듯, 정적 이상의 세계로, 억겁무진한 세계로, 티끌 하나 없는 세계 로. 법당을 나서는 순간 아아 사람은 도시 무엇일꼬? 번뇌의 본체는 대체 무엇일꼬?' 서희는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방금까지 자신이 있었던 자리, 그 법열의 여운이 급 속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낀다. 야망인가 존엄인가 모성인가...' 가슴 가득히 슬픔이 밀려왔다. 사람으로 태어난 슬픔, 사물을 쓸어안고 놓을 수 없는 슬픔이었다. 일봉이 들여온 저녁상을 마주하고 내외는 말없이 저녁을 먹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서희에게 길상은 구태여 말을 걸려 하지 않았다. 물린 밥상을 가지러 온 사람은 영선네였다. "아니, 일봉이를 시키지 않구요." 길상이 나무라듯 말했다. "아, 아입니다. 인사를 디릴라고 왔십니다." 영선네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여보 영광이어머니요." 하고서 길상은 서희를 쳐다보았다. "아아." 영선네는 서희에게 큰절을 했다. 서희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큰일을 당하여 얼마나 상심이 됩니까." 서희는 위로의 말을 했다. "다아 가는 길인데 우짜겠십니까?" 하다 말고 영선네는 당황한다. 자기 처지로서 대단한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한 말이 잘못 아닌가 싶었던 것이 다. 영선네는 옷고름을 비틀면서 "저기, 저어 우리 영광이를, 그 못된 놈을 돌보아주시서 머라고 은혜를 가, 갚아야 할지 모리겠십니다." 영선네는 절에서 처음 길상을 만났을 때도 꼭 그같은 말을 했다. 밖에서 하는 일도 그랬지만 관수는 사람 관 계에 대해서도 일체 말하는 일이 없었고 영선네 역시 남정네가 하는 일을 알려 하지 않았으며 특히 사람 관계 는 영선네 스스로 회피해왔기 때문에 최참판댁에 관해서 거의 아는 바 없었다. 그러나 만주로 떠날 때 오매불 망, 자식들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영선네에게 "최참판댁에서 영광이를 책임지겠다 했고 공부도 시키겠다 했이니 그놈 걱정은 안 해서 될 기고 영선이는 강 쇠가 맡았이니... 핵교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머심아가 출중한께 걸맞은 짝이라, 우리 처지에 그만한 작도 달 리 없일 기구마." 하며 관수는 달랬던 것이다. 영선네는 그 말을 잊지 않았고 또 이것은 홍이하고 관수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일본 노가다패한테 두들겨맞아 다 죽게 됐을 때 환국이 덕분에 다리가 약간 잘못되기는 했으나 생명은 건졌다 는 내용, 해서 영선네는 그 못된 놈이라 표현했던 것이다. 권하는 대학을 마다하고 경음악으로 빠져버린 일도 포함해서. "오히려 부끄럽소. 우리 노력이 부족해서." 서희 역시 영광이 경음악 쪽으로 나간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절에서는 지낼 만한지요." "예." "전부터 절에 다녔어요.?" "예, 그, 그라믄 지는 나가보겠십니다. 편히 쉬시이소." 영선네는 물린 밥상을 들고 서둘러 나갔다. 길상은 한동안 무표정이었고 서희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법당을 나서는데." 하고 말문을 열었다. "왠지 모르게, 막연하게 관음보살께서 저를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째 그런 생각을 했소." 길상은 서희를 쳐다보았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슬픈 생각이 들었어요."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요?" "있었지요. 이일 저일... 용정의 운흥사 생각나십니까?" 서희는 화제를 돌렸다. "...?" "관음탱화 생각을 하니까 그때 운흥사 법당이 떠오르는구먼요." "이상하군요. 관음상을 그릴 적에 나도 운흥사의 흑탱 생각을 했는데, 아마 그게 후불탱화였지요?" "네. 당신이 그리신 관음상이 너무나 현란하여 그곳 생각이 났을까요? 법당에는 협시보살은 물론, 본존 자리도 비어 있었고 후불흑탣만 댕그머니 장엄되어 있었습니다. 채색이라돈 불단을 두른 붉은 천밖에 없었구요." "현몽을 해서 찾았다는 자그마한 관음이 한 구 있었소." "단청도 입히지 않았고 법당문이 열려 있던 절은 흡사 부웅새 같았습니다. 어찌 그리 황량했는지 바람 소리마 저 마치 신음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고향 잃고 타국에 모여든 사람들의 마음이 황량해서 그랬겠지요. 사실 좋잖은 일도 있었고." "그때 쫓겨난 본연스님의 설법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일체중생아! 어디 있느뇨! 망상으로 있는 것이라, 십이망상이 어디 있느뇨! 십이망상은 본래 공이거늘, 망상으 로 있는 중생을 어찌 있다 하느뇨! 만법도 무명의 그림자이어늘 하물며 천지간에 무엇이 있다 하느뇨!' 본연의 쩌렁쩌렁 울리던 목청, 형형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러고도 그 망상 때문에 쫓겨났으니." 서희의 혼잣말이었다. "송씨댁 자부 얘기요?" "네. 결국 그댁도 몰락했으니 전생에 무슨 인연이었을까요?" "중도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기는 남의 땅까지 왔다면 무참괴승인지 뉘 알겠소. 설법은 잘하든가 요?" "글쎄요. 잘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속이 비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눈이 빛나고 목청이 좋아서 맹목적 인 신도들에게는 대단하게 보였을 것이오. 그런데 어제 오면서 하동 이부사댁에 들렀습니다." 별안간 서희는 또 화제를 꺾었다. "시우어머니를 만났는데 양현의 얘기를 하더구먼요." "양현이? 무슨 얘기를?" "혼담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학생이니, 하고 얼버무렸습니다만 기분이 좋지 않았고." 하다가 서희는 몸을 일으켜 등잔에 불을 밝힌다. 뚜렷한 서희 얼굴의 윤곽이 드러났다가는 흔들리곤 한다. 장방형 절방의 공간이 외부와의 단절을 새삼 일깨워 준다. 서희는 세운 무릎에 두 손을 올려놓고 길상을 응시하듯 쳐다본다. 소쩍새가 울었다. 아주 먼 곳에서. "시우어머니는 양현이 근본 때문에 혼담이 쉽지 않는 거 아니야, 하고 물었습니다." "..." "사실이 그렇지요." "사실이 그런데 새삼스리 문제삼을 거는 없지 않소." "그렇지요.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밖에서는 끊임없이 문제가 되는 거지요. 아이는 탐이 나는 데 근본에 가서 걸리게 되고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가 넘볼 수 있는 그런 양현이는아니고, 자연히 어려워질밖 에요." "어렵게 생각할 것 없소. 집안이나 재산 같은 것 생각지 않고 사람 하나만 보면 될 거 아니오." 다소 짜증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날 택할 때 집안 보고 재산 생각했느냐 하는 의도를 나타낸 말이었다. "가문을 보자는 것도 아니구 재산을 따지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가문이 실하지 않고 재산도 없는 사람이 대학 교육까지 받기가 쉬웠겠느냐, 양현이 의전에 다니는데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하고 짝지워줄 수는 없 는 일이지요." 서희는 물고 늘어지듯 그 화제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본 일이지만 아예 양현이를 내보내지 않는다면." "무슨 뜻이오?" "윤국이하고 맺어준다면 출가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는 게요!" "왜 그리 역정을 내시오." 서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눈치다. "당신은 어느 하나도 잃지 않으려는 욕망, 그 욕망 때문에 젊은 아이들까지! 그들은 남매로 자랐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오." "제 욕심으로, 진정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욕심이 아니면?" "윤국이는 잘 생기고 똑똑한 청년입니다. 양현이는 총명하고 아름다운 처녀구요. 그리고 그들은 타인입니다. 이부사댁 핏줄과 최씨네 핏줄, 같은 조건의 그들이 맺어져서는 안 될 이유가 있습니까? 어쨰서 그게 저의 욕 심인지요. 사랑하는 마음도 욕심입니까?" 같은 조건이라는 말에는 길상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강요할 일이 아니오. 윤국이 양현이 두 얘들이 선택할 일이오." "당연히 그렇지요. 다만 우리는 그 아이들이 갈 수 있게 길을 막은 바위를 치워주어야 합니다." 서희는 강력하게 말했지만 강압적인 것은 아니었다. 뭔지 처첨한 표정이었다. 그것은 윤국과 양현의 문제인 동 시, 그들 자신의 건드리고 싶지 않는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리라. "어째서 당신은 양현에게 고통을 주려 하는 거요." 길상은 한탄하듯 한숨을 쉬었다. "그 아이를 사랑하는 제 마음을 몰라 하시는 말씀입니까?" "놓아주시오." 서희 얼굴빛이 변했다. "놓아주어도 이제 양현이는 제 갈 길을 갈 수 있게 다 자랐소. 매우 분명한 성품으로 자랐소. 우리가 염려한다 는 것은 그 아이 짐일 뿐이오." "놓아주라 하시었습니까?" "..." "혹." 길상은 응시하는 서희의 눈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혹 당신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은 아닌지요." "..."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부인은 모르고 계시었소?" 이번에는 서희 쪽에서 대답을 못한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기 태생대로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오." "당신의 경우도 그렇다 그 말씀이군요." "지금은 양현의 얘기를 하고 있질 않소." "당신 경우도 말씀해주십시오." 전에 없이 서희는 핵심을 찌르며 다가왔다. "지나간 얘기는 해서 뭘하겠소. 무의미하지요." "후회하시는군요." "후회하지 않소. 다만 자기 뿌리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 그건 인지상정 아니겠소?" 한동안 말이 없다가 서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로잡혀 있기론 피차 마찬가지지요." 전에는 부부간의 이런 일이 없었다. 발단은 양현이었지만 서로 회피해온 문제가 정면으로 부딪쳤던 것이다. 서 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그러나 항상 가로녾여 있던 벽에 부딪친 것이다. "법당에 가겠습니다. 예배 드리다가 마음이 편안해지면 오겠으니 먼저 주무십시오." 서희는 낮에 한 묵상을 다시 한번 시도해볼 것을 작정한 것 같았다. 서희의 치맛자락이 사라지면서 방문이 닫 혔다. 길상은 치맛자락이 방금 사라진 곳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어디서 잘못 되었을까? 언제부터 내가 내가 이 안일지옥에서 무너지기 시작했을까? 나는 그렇다 치고 저 사 람은 전과 달리 몹시 불안정해 보인다. 사로잡히기론 서로 마찬가지라 했던가? 옳은 말이다.' 길상은 손자 재영의 돌잔칫날 생각을 한다. 그날의 고통스러웠던 침묵, 가끔 만나 술잔을 나누며 비교적 격의 없이 지내는 사람들이었는데 입이 붙어버린 듯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날의 고통스러움을 생각한다. 손님들이 다 돌아가고 빈 자리에 홀로 앉아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가 하며 자신에게 물었고 자신의 삶의 진실한 의미를 물었던 일, 관수의 유서 생각도 났다. '...내가 죽으믄 모두 고생만 하다갔다 할 기고 특히 영광이 가심에 못이 박힐까. 그러나 나는 안 그리 생각한 다.그리고 후회도 없다. 이만하믄 괜찮기 살았다는 생각이고...' 그것은 길상이 되풀이하여 생각해보는 구절이었다. 주어진 자기 삶에 밀착하여 혼신으로 끊어안고 치열하게 살다 간 송관수, 길상은 자기 삶이 얼마나 낭비적인 것인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마치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지 렛대를 받쳐가면서 그것은 정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생활도 애정도 바로 그 정체 상태였다. 순환이 안 되었다. 약동도 없었다. 한 개인의 삶은 객관적인 것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불행이나 행복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모 호한가. 가령 땀흘리고 일을 하다가 시장해진 사람이 우거짓국에 밥 한술 말아먹는 순간 혀끝에 느껴지는 것 은 바로 황홀한 행복감이다. 한편 산해진미를 눈앞에 두고도 입맛이 없는 사람은 혀끝에 느껴지는 황홀감을 체험할 수 없다. 결국 객관적 척도는 대부분 하잘 것 없는 우거짓국과 맛좋은 고기 반찬과의 비교에서 이루어 지며 남에게 보여지는 것, 보일 수 있는 것이 대부분 객관의 기준이 된다. 사실 보여주고 보여지는 것은 엄격 히 따져보면 삶의 낭비이며 진실과 별반 관계가 없다. 삶의 진실은 전시되고 정체하는 것이 아니며 가는 것이 요 움직이는 것이며 그리하여 유형무형의 질량으로 충족되며 남는 것이다. 길상의 생각은 그러한 변두리로 맴돌고 있었다. 젊은 날, 상전으로서 어린 서희를 지켰고 간도까지 그를 수행 해 갔으며 타국, 사고 무친한 곳에서 절치부심, 조준구에 대한 복수와 최씨 가문의 잃은 것의 탈환을 맹세하는 서희를 길상은 도왔다. 회령에서 돌아오는 길, 학성 부근에서 마차가 굴러 서희가 부상을 당하는 일로 인하여 결혼을 했던 길상이, 그러나 그는 가족과 동행을 포기하고 간도에 남아서 그것 조직에 합류했다. 그때부터, 포 승에 묶이어 왜경에게 끌리어 조선으로 나왔고 옥고를 치렀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길상은 아내와 두 아들의 비호를 받으며 견디어 왔다. 어찌하여 길상은 사랑하는 가족을 보내면서 그 곳에 혼자 남았던 것일까? 만주에 있는 오늘의 홍이처럼 독립운동 단체의 뒷바라지를 했으며 직접 운동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길상이는 가족과 함께 돌아올 수도 있었다. 대의를 위하여, 물론 그렇다. 그러면 왜경에게 체포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돌 아오지 않았을까? 그랬을는지도 모른다.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충정은 흔들릴수 없는 확고한 신념이었지만 그 러나 길상의 경우, 대의와 가족을 두고 선택한 길은 결코 아니었다. 자아와 가족을 두고 선택한 길이었다. 실 로 어렵게 그는 자기 설 자리를 선택했으며 지킨 것이다. 이씨왕조가 간신히 그 잔명을 이어가고 있었을 무렵, 최참판댁을 찾아온 하동 이부사댁 이동진이, 서희의 부친 최치수에게 작별을 고했을 때 최치수는 울었다. "자네가 마지막 강을 넘으려 하는 것은 누굴 위해서, 백성인가, 군왕인가?" "백성이라 하기도 어렵고 군왕이라 하기도 어렵네. 굳이 말하라한다면 이 산천을 위해서, 그렇게 말할까?" 이동진의 산천과 김길상의 강산, 청백리로 이러졌던 선비 이동진의 산천과 버려진 생명을 우관대사가 거두어 길렀으며 윤씨부인 요청에 따라 최참판댁 하인이 된 김길상의 강산은 다르다. 이동진이 이 산천을 위하여 강 을 넘었다면 길상도 이 강산을 위하여 간도에 남았다. 그러나 다 같은 길이었지만 길상의 경우는 일종의 귀소 본능이라 할 수 있었다. 제 무리에 어우러지기 위한 귀소본능, 이동진은 돌아오기 위해 떠났지만 길상은 제 무 리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남은 것이다. 절에 와서 관음탱화를 그린 것도 입적한 지 오래인 우관대사 뜻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귀소본능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애정 때문에 길상은 자신과 동류였던 그 무리에 대한 그리움이 잊혀졌던 것은 아니었다. 아픔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심신을 저미듯 그렇게 살다간 김환, 우관이며 혜관 관수 석이 용이 영팔노인 그 밖의 수많은 사람들, 용정촌 연해주의 그 끌끌한 사내들, 그 뜨거운 피를 잊지 못하는 것이 며 그들로 인하여 끝없이 인내하고 협조하는 가족들마저 낯설어지는 것이었다. 밤은 깊어갔다. 얼마 동안이나 생각에 잠겨 있었던지 자정이 지난 것 같았다. 그러나 서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길상은 절 마당으로 나갔다. 법당에도 불은 꺼져 있었다. 초가 다 타서 저절로 꺼진 것 같았다. "법당에서 잠들었는가?" 하늘에도 달이 교교히 떠 있었다. 바람 소리도 없고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도 없고 네모난 절 마당은 달빛에 바래지기라도 한 듯 하얗게 떠 있는 듯, 처마 그림자가 새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세상은, 아니 산중은 오로 지 적막할 뿐이었다. "잠이 들었나?" 다시 중얼거린다. 법당 마룻바닥에 엎드린 채 서희는 잠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회령 병원에서 작은 새처럼 잠 들었던 서희 모습이 생각났다. 애써 서희와의 혼인을 회피했으며 회피하기 위하여 가스댁 옥이네와 동거까지 했던 길상은 잠든 작은 새와도 같은 서희에게 꺾이고 말았다. 결국 길상은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건만 다 이루 어진 서희에게 더 이상 헌신할 필요가 없게 되고 오히려그에게 무거운 짐만 지게 했다. "차서방댁." 길상은 공양주 방 앞에 가서 나직한 소리로 불렀다. 건이아범은 서희를 따라왔다가 돌아갔고 안자는 고양주 방에서 영선네와 함께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차서방댁." 영선네가 먼저 기척을 냈다. 안자를 깨우는 모양이다. 안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길상을 보자 놀란다. "마님이 법당에서 잠이 든 모양이오." "저를 어찌! 산을 오르시느라 고단하셨든 모양입니다." 안자는 법당으로 달려가고 길상은 절을 나섰다. 그가 찾아간 곳은 해도사의 산막이었다. "해도사 계시오?" "뉘시오?" 귀도 밝지 이내 해도사는 되물었다. "나요." "들어오시오." 자다 일어난 해도사는 등잔에 불을 밝히고 눈을 비비면서 "이 오밤중에 무슨 일 났소?" "내소박을 당한 사내가 나와보니 갈 곳이 있어야지요." 길상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오. 팔자 기박한 홀애비 샘이 나서 잠이 안 오더니 그 참 썩 잘된 일이오." "심보가 그러하니 홀애비 신세 면칠 목하는 거요." 두 사내는 껄껄걸 소리내어 웃는다. "잠자리 얻으러 왔소? 아니면 술동냥이오?" "달도 밝은데 술이나 하지요." "우리 마을로 내려갈까요?" "마을에는 왜요?" "주막에 가잔 말이지요. 주막에 당도할 즈음이면 해장국이 구수하게 끊고 있을 게요." "주모가 젊소?" "젊지요. 게다가 머리를 지진 하이칼라요." "하이칼라라." "마음이 동하시오?" 하다가 해도사는 고개를 설레걸레 흔들며 "큰일 해놓고 부정 타면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그렇지요?" "여보시오 김선생, 핑계한번 좋소. 부정 탈까봐 그러시오? 엄처시하라. 동정하오." "홀애비 동정받는 신세 처량하구먼. 하기야 쫓겨나면 나는 갈 곳도 없는 사내요." "머리 깎지 뭐. 본시 절식구였으니." "그래 볼까요? 허나 경찰서에서 멀지 않아 날 찾을 테니 두고봅시다." 주거니 받거니 실없는 말을 하며 해도사가 차려온 술상 앞에서 천천히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마시다가 "이거 참 무슨 청승인지 모르겠소." 길상이 한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절에 오기만 하면 언제나 이 산막에서 술을 마신다. 해도사, 지감과 함께, 때 론 강쇠도 어울리곤 한다. "옛날에 강포수가 있었는데." 길상이 말을 하자 아아 강포수? 나도 압니다. 내 팔자나 강포수 팔자나, 어디 가서 죽었을까?" 그러나 길상은 강포수를 간도에서 본 얘기, 가야호에서 오발 사고로 죽은 얘기는 하지 않는다. "새장에 갇혀보지 않은 새는 넓은 하늘이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고 나 같은 사내 꼴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강포 수 팔자가 얼마나 좋은 지를 모를 게요." 상머리에서 물러나 앉아 담배를 꺼내어 길상은 붙여문다. 아주 가끔 길상은 담배를 피운다. "하하아 그러고 보니 생판 찌그러진 인생은 아니구먼." "뉘 말이오?" "이 해도사지 누구겠소." 해도사는 손을 제 가슴 위에 놓으며 히죽히죽 웃었다. "동녘동 하니까 서녘서 한다더니 강포수 팔자를 말했지 누가 이녘 얘길 했소?" "강포수 팔자나 내 팔자나 다를 것 하나 없지. 계집을 데려다놓으면 죽기 아니면 달아나기, 산에서 사는 것도 같고." "등천하려는 도사하고 총대 멘 포수하고 어찌 같겠소." "그거야 남들이 보기 나름이고 강포수라 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는 아니지 않소." "죽어도 얽매이고 싶지 않는 강포수와 얽매일 곳이 없어서 홀로 있는 해도사가 어찌 같다 하겠소." "너무 그러지 마시오. 사방천지 발 닿는 곳이면 얽어매려고 시퍼런 칼이 날을 세우고 있는데 얽매일 곳이 없 다니요? 머릿속에 먹물이 좀 들다보니 속세가 걸거적거리는 거지." "통영까지 가서 도인 행셀 했다든데요?" "그야 뭐 그렇게 대접을 하니 낸들 어쩌겠소." "지감스님 말씀으로는 해도사가 조준구의 중풍을 고치겠다, 장담을 했다면서요?" "허허어, 그 땡추, 입이 무거운 줄 알았더니 언제 고자질을 했을꼬?" "정말 그랬소? 자신은 있구요?" "정말 그랬지요. 자신은 손톱만치도 없었지만 하하핫 핫핫..." "거짓말 그리 하다가 조준구한테 팔뚝 물어뜯기면 어쩌려구." "거짓말은 아니었고 진정이었소. 그 형상을 보니 너무나 가련하고 측은하여 희망이라도 보시하자." "꿈보다 해몽이 좋소. 그래 다 죽어가든가요?" "오래 가면 식구들 다 잡는 거지." "병수 그 사람 고생하는구먼." "전생의 업을 벗노라, 한꺼번에 갚아버리고 천상행하려고 그런 거지요." "..." "그나저나 겨울이 오기 전에 어딜 옮겨갔으면 싶은데, 이제는 힘이 부쳐서 새로 마련할 수도 없고 어디 반반 한 목기막이라도 있으면 하고, 찾아나설 작정이오. 김형, 동행 안 하겠소? 봄도 좋지만 가을산도 볼 만한데." "해도사가 옮겨가면 지감스님은 어떡허구? 술 생각 나서 못 견딜텐데요." "그 땡추, 요즘엔 술 별로 안 합니다. 마지못할 때만 조금 드는 정도, 내가 떠나는 편이 훨씬 홀가분할 게요. 김형이나 절에 남아서 탱화를 더 그려보시지요." "글쎄올시다." "재줄 썩이면 되겠소? 큰 공덕인데 말씀이오. 지감하고도 얘기했지만 한 폭만 달랑하니, 허전하지 않소?" "생각해보지요." 씨도 먹지 않는 이런 저런 얘기를 어수선하게 하며 술을 마시다가 두 사내는 새벽녘에 곯아떨어졌다. 점심때가 지나서 길상이 절로 돌아왔을 때 서희는 단정한 모습으로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법당에 잠이 들었던 거요?" 길상이 물었다. "그랬던 것 같습니다." 서희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감기 들면 어쩌려구 그랬소." "신심이 불실해서... 조반은 드셨습니까." "조반은 안 했고 점심은 들고 왔소." "안 오시면은 차서방댁하고 바람이나 쐬러 나갈까 했습니다. 함께 안 가시겠어요.?" "그러시오." 두 사람은 나란히 절문을 나섰다. "어젯밤에 달이 밝더니 날씨 참 좋군." 두 사람은 다 같이 어젯밤 빚은 갈등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재영애비가 내려온다니까 떠날 수도 없고, 천상 와야 떠날 텐데 예배 볼 기분이 아닙니다." "토요일에 온다니까 기다렸다가 함께 가야지요." "당신은 안 가시게요?" "당분간 절에 있고 싶소." "그렇게 하세요." 어제 갔던 그 길을 따라 이들은 서희가 목욕재계했던 그곳까지 갔다. 개울가 큰 잡목을 타고 청설모 두 마리 가 오르내린다. 울음 소리인지 이상하게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새끼를 기르나 봐요." 서희는 잡목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얼마 동안은 먹을 것이 풍성할 거요." 서희는 치맛자락을 걷으며 물가 바위 위에 앉았다. 좀 떨어져서 길상도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서로 마주 쳐다보다가 눈길을 돌렸다. 옥색 수단 치마저고리를입은 서희 모습은 서리맞은 푸새 같았다. 얼굴은 투명하고 창백했다. 길상은 간밤의 술 탓인지 수면 부족 때문인지 눈이 충혈돼 있었다. 개울에 물 흐르는 소리, 흐르고 돌돌 구르는 소리를 듣는다. 서로의 마음속에서도 가느다란 물 소리가 나는 듯했다. 물이 흐르고 있는 듯 느낀 다. 청설모 두 마리가 나무를 오르내릴 때 들려온 소리 역시 뭔지 모르지만 흐르는, 흘러 내리는 것 같은 그런 소리 아니었을까? 서희는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한다. 청설모를 보는 순간 그 소리가 청설모한테서 났던 것을 깨달았고 깨달았을 때 이미 소리는 끊겨 있었다. 그게 울음 소리였는지 오르내리는 기척 소리였는지, 무척 화 사하고 음악처럼 경쾌한 우짖음 같기도 했지만 아슴푸레했다. 마치 미지의 새를 인식하려는 순간 푸드득 날아 거버리고 느낌만 남아서 그 새의 모습이 환상으로 화해버린 것 처럼. '바로 그게 세월일 거야. 잡히지 않는 안개 같은 그게 세월일 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시시각각 달아나고 희미해지는 것을, 새삼스럽게 서희는 가슴이 죄어드는 것을 느낀 다. 묵은 상처들이 모조리 들고 일어나듯 가슴이 아파온다. 길상은 바라본다. 두 어깨가 좀 구부정해 보였다. 흰 머리칼도 제법 눈에 띄었다. 오십을 넘긴 사내의 모습이다. 면도한 지 이삼 일이 지났을까. 턱수염이 파아 랗게 돋아나 있었다. 어디서 오는 슬픔일까. 어디서 온 지난날들일까. 그것은 모두 바람이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서희 의식 속 에서는 바람 따라 나뭇잎 풀잎이 드러눕고 흔들리고 나부끼며 전율하고 있었다. 눈보라가 치고 나뭇가지가 휘 면서 신음하고 울부짖으며 여자의 머리칼 옷자락이 끊어질 듯 찢어질 듯 바람 가는 곳을 향해 나부끼고 있었 다. 지난날들이 눈보라같이 함박눈같이 흩어져 내리고 있었다. 서희는 두 손을 들어 두 눈자위를 꽉 누른다. "왜 그래요? 어지럽소?" 길상이 물었다. "아니오." "감기 든 모양이구먼." "그렇지 않습니다." 가을 하늘은 어디까지 가면 닿을까? 한없이 높았다. 노오란 은행잎 하나 놓아보고 싶게 하늘은 푸르렀다. 유리 파편처럼 햇빛은 물길에서 회번덕이고 유리가루처럼 햇빛은 나무숲에 내려앉곤 했다. 풋풋한 숲의 냄새 상큼 한 향기, "박효영 의사 죽었대요." "뭐라구요?" "그분은 자살을 했대요." 길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다음 뭔지 모를 것이 치밀어올랐다. 서희는 울기 시작했다. 계집아이 같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길상에 대한 무한한 신뢰였는지 모른다. 어릴 적에 떼를 쓰고, 등에 업혀서 버둥거리며 주먹으로 길상의 등짝을 때리며 울던 그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아직도 길상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일, 산에서 토끼를 놓쳤을 때 일이었을까? "커다란 연을 타고 올라가봤이믄 얼매나 좋겄십니까. 자꾸자꾸 연을 타고 올라가봤이믄,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 가보믄 참 희안하겄지요?" "뭣하러 올라가아?" "스님이 말심하싰습니다. 자꾸자꾸 올라가믄 수미산이 있다 캅니다. 그 수미산에 가믄 말입니다, 은금보화로 말짱 집을 맨들어놨다 캅디다." "은금보화가 뭐야?" "와, 애기씨 설날에 찬 노리개 안 있십니까? 그 파아랑 구슬이랑 마님께서 손가락에 끼신 가락지랑 그런 거를 은금보화라 합니다." "아아 알어! 나도 알어. 울어머니도 파아랑 가락지 노오랑 가락지 하얀 것 그리고 또, 또 비녀랑 또, 또..." 하다가 서희는 말을 탄 것처럼 등에서 한 번 우쭐대더니 두 팔을 벌리고 "이반큼, 이만큼 많이 있어." "..." "어머니가 그랬는데 그것 다 나 준댔어. 구슬이랑 가락지랑 비녀랑 그것 다 나 준댔어." 어머니 데려오라 하며 악을 쓰고 기암을 하고 집단 사람들 넋을 쑥 빼놓던 서희는 차츰 그짓이 소용없음을 깨 닫게 되었다. 그런 뒤로는 꼬투리가 있기만 하면 은근슬쩍 어미 얘기를 꺼내어보곤 했지만 역시 어미에 관한 일에서만은 모두 입을 다물었고 아무도 그를 상대해주지 않는 것을 서희는 알게 된 것이다. "길상아." "예." 공연히 한번 불러보고 등에 볼을 비비며 서희는 엎드렸던 것이다. 당배를 꺼내어 붙여문 길상은 연거푸 담배를 빨아당기고는 연기극 뿜어낸다. 그도 항상에 떠도는 소문을 얼마 간 알고 있었다. 박의사의 도전적인 시선도 여러 번 느꼈다. 그러나 길상은 주치의를 갈아보자는 말을 꺼낸 적 은 없었다. 아프면 찾는 곳이 병원이요 주치의라는 것에 개의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고 갈고 어쩌고 하는 호들갑도 같잖 은 일이거니와 소인배 같은 짓거리로 생각한 때문이지만 환국이나 윤국이 박의사를 존경하고 감사해하는 것도 그렇고 그러나 무엇보다 길상은 서희를 모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왜 아무 말씀 안 하세요?" 흐느껴 울면서 서희는 말했다. "어째 비난을 안 하십니까." 또 말했다. '뭘 비난하라는 거요?' 길상은 피우던 담배를 던졌다. 일어서서 서희 곁으로 다가왔다. 덥석 팔목을 잡았다. 팔목에 힘이 물려들었다. "갑시다." "이거 놓으세요." 그러나 길상은 서희 팔목을 거칠게 잡아채듯 하며 걷는다. "남편 앞에서 다른 사내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도대체 당신 나이 지금 몇 살이오?" "이거 놓으세요." 길상은 손목을 놓아준다. 서희는 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자국을 부지런히 닦으며 걷는다. 걷는데 미 쳤구나 하는 생각이 별안간 떠올랐다. 어제 자종차 속에서 울었고 별당에서도 울었고 오늘 또. 철나면서 오늘 까지 울어야 할 일이 없어서 울지 않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천애고아가 되어 이곳까지 오는 동안 뼈 마디 마디 으스러지는 슬픔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는가.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보지 않았는가. 길상은 한 마리 염소 새끼를 몰고 가듯 서희를 앞세우고 가면서 "내가 목석이오? 바지저고리요? 정 그러면 내 머리 깎고 중이 되리다." 했으나 그 목소리에는 이미 노여움이 없었다. "패주고 싶었지만." "..." "참는 게요." 절에 돌아오자 서희는 무안하여 그랬던지 평사리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환국이가 올 텐데 함께 안 가구요?" "어차피 평사리에 올 거니까요." "그런가?" 길상이 어정쩡하게 말하자 서희는 "저를 패주겠다 하셨습니까?" 따지듯 묻더니 다시 "지가 뭘 어쨌기에요?" 하고는 돌아섰다. 길상은 화개 나루터까지 서희와 안자를 데려다주고 돌아왔다. 도솔암 가까이까지 왔을 때 해는 떨어지고 사방 에서 저녁안개가 밀려들었으며 새들도 서두르릇 날아갔다. 달이 떠올랐다. 나무 잔가지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반달 '추석도 며칠 안 남았구나.' 환국은 온다는 날보다 이틀이나 앞당겨서 나타났다. 그러니까 서희가 떠난 다음날이었다. 부자는 절문 앞에서 마주쳤다. "웬일이냐? 토요일에 온다는 말을 들었는데." 길상은 놀라면서도 몹시 반가워했다.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떠나고 수업고 없고 해서 내려왔습니다. 어머님은 어디 계시는지요." "평사리에 들르지 않고 왔느냐?" "네. 갈 때 들르려구요." "네 어머니는 어제 평사리로 가셨다." "들렀다 올 걸 그랬습니다." 넥타이는 매지 않았고 연회색 셔츠에 연갈색 양복을 입은 환국은 좀 수척해진 것 같았다. 나란히 절문을 들어 서는 부자는 키가 비슷했고 분위기도 비슷하여 남의 눈에 썩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부자지간이기보다 선후배 사이처럼 보였다. "식구들 잘 있겠지? 재영이는?" "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탄력이 없었다. "그는 그렇고 어쩐다?" 갑자기 생각이 난 듯 길상은 걸음을 멈추었다. "뭐 말입니까?" "우선 너는 지감스님한테 가서 인사부터 하고 나는, 저어 해도사한테 가기로 했는데..." 길상은 머뭇거리듯 말했다. 환국이 슬그머니 웃었다. "그럼 가보아라. 나는 해도사한테 갔다오마." 심약하고 눈부신 듯한 표정의 길상은 발길을 돌려 허둥지둥 내려간다. '아버지도 참.' 부친의 뒷보습을 바라보다가 환국은 지감이 있는 거처로 걸음을 옮긴다. 부친이 왜 그러는지 환국은 알고 있 었다. 평소에는 자상하면서도 의연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는 부친을 환국은 존경해왔다. 그리고 신분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비굴함을 한번도 본 일이 없는 호나국은 아들로서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그것은 본 래적인 것이겠지만 수줍음을 부친한데서 가끔 발견하는 일이었다. 그가 걸어온 역경을 생각한다면 일종의 수 수께끼 같기도 했다. 그 나이에 소년 같은 면모가 남아 있다는 것이 신비롭기도 했다. 그것은 혁명가의 모습이 기보다 예술가의 모습이었다. 환국은 과음탱화가 거론되는 것을 부친이 두려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더더구나 아들과 함께 법당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그린 것을 바라보는 그 쑥스러움을 감내할 수 없어서 피해가 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환국에게 초화를 보인 적이 없었다. 언젠가 한번 환국이 보고 싶다고 했을 때 길상 은 몹시 당황했던 일이 있었다. "뭘, 반푼수, 돌팔이가 그리는 걸 봐서 뭘 해." 중얼거리듯 그러고는 외면을 했다. "스님 계십니까." 지감이 거처하는 방 앞에서 환국이 말했다. "뉘시오." "환국입니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호나국이 들어갔다. 뭔가를 쓰고 있던 지감이 얼굴을 들었다. "토요일에 온다고 들었는데." "네. 좀 일찍 왔습니다." "앉게." 환국은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래 아버님은 만나뵜나?" "네. 해도사 산막에 가셨습니다." "그랬을 테지." 지감은 웃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자네 오는 걸 보고 피해간 게야. 참 별난 사람을 다 보았네. 탱화얘기가 나오면 안절부절, 영자신이 없는 모 양이야." 갑자기 환국은 가슴이 두근거렸다.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없는 모양이야, 하고 말하는 지감의 속을 짚을 수 없었다. 환국이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부친의 말대로 돌팔이가 그린 그런 그림이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스님게서는 어찌 보셨습니까." "화가가 보아야지. 이 땡추가 알게 뭐람." 지감은 미소를 띤 채 환국에게 곁눈질을 했다. 환국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중으로서는 그의 말대로 땡 추인지 모른다. 그러나 지감의 안목이 대단하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청년기 장년기를 방랑으로 보낸 그는 한때 가마를 찾아다니며 그릇을 구워본 적이 있었고 통영의 조병수를 사귀게 된 동기도 목공예에 대한 관심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도 두루 돌아다니면서 미술에 대한 이론서를 상당히 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예비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방학 때면 환국이 평사리에 내려왔고 평사리에 오게 되면 자연 도솔암에도 들르게 되어 지감과 심심찮게 나눈 대화에서도 능히 짐작이 되는 일이었다. 지감은 개 인적인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지만 서울서 그에 관한 얘기는 많이 들었다. 장인 황태수도 그렇고 임명빈 서의 돈 유인성이 모두 지감의 또래이며 집안 내력이나 그의 청년 시절, 장년 시절을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국은 내온 작설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영광이어머님은 요즘 어떠신지요." 하고 물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계신 것 같더군. 아직 만나지 못했겠구나." "네." "읍내 장에 갔을 거야." "절에 눌러앉으실 작정인지." "아마 그럴걸?" "영광이가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생각하기 나름이지." "..." "보나마나 그 사람, 자신의 영혼을 위해 고통받고 있겠지. 어머니의 영혼을 생각한다면 괴로워할 필요가 없어. 세속적으로 생각 안하면 되는 게야." "그럴까요? 그렇게 됩니까?" "멀리, 멀리서 비잉 비잉 돌다가 이곳에 와서 머리를 깎고 법의를 걸친 나보다 신심이 깊다면 쉬이 절을 떠날 수 없을 게야." "스님께서는 아직 번뇌가 남아 있습니까?" "말해 뭘 하나. 내 형편이 진작부터 사바를 떠나 있어서 세속적 욕망 번뇌는 어느 정도 극복이 되었다 할 수 있겠지만 진리에 대한 확신이... 어려워. 착한 심성의 단순함이야말로 불심이며 천심이겠는데 먹물에 대가리 적 신 놈치고... 복잡하거든. 그리고 무엇이든 틀에다 끼우려 하는 합리주의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지. 그나저나 자 네 왜 이러고 있나?" "네?" "민적거리고 있는 꼴이 부친과 흡사하구먼. 두려운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어서 가보게나." "네." 환국이 방문을 열고 나오려 했을 때 바로 방문 앞에 지연이 서 있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의 눈에 는 환국이도 잘 뵈지 않는 것 같았다. 아주 흥분된 상태였다. 환국은 신발을 신고 나서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했다. 십 년 가까이 도솔암에 오곤 했기 떄문에 지연과는 구면이었다. "아아 참, 언제 내려오셨소?" "방금 왔습니다." 지연의 목소리를 듣고 지감도 방에서 나왔다. "또 무슨 일이냐." "오라버니,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이상한 일이라니?" "너무 놀라서 아직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알게 아니냐? 또 마당에 구렁이가 나타났느냐?" 신경질적으로 말했으나 옛날같이 지감은 지연에게 각박하지 않았다. 환국은 오도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 었다. "암자 앞에 누가 갖다놨는지 갓난애기가 있지 뭡니까." "갓난아기?" "허허어. 그러면 마을로 내려가서 물어볼 일이지, 여기 오면 어떻게 해?" "마을로 내려가다니요?" "젖이라도 얻어먹여야지." "에그머니, 끔찍스러워라. 네가 기르란 말씀입니까?" "부처님이 너를 가엾게 생각하셔서 점지해주신 거다. 아암 길러야지." "싫습니다." 그들의 실랑이는 좀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환국은 법당으로 갔다. 법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낡은 것들 속에 새로움이 한결 선명한 관음탱화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천천히 관음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미동도 없이 관음상을 응시힌다. 오른손에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에는 보병을 든 수월관음, 또는 양류관음이라고도 하 는데 아름다웠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청초한 선에 현란한 색채, 가슴까지 늘어진 영락이며 화만은 찬란 하고 투명한 베일 속의 청정한 육신이 숨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찌 현란한 색채가 이다지도 청초하며 어찌 풍만한 육신이 이다지도 투명한가. 환국은 감동에 전신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겼다. 법당을 나선 그는 절 마당에 멍하니 서서 산을 하염없이 바라 본다. "할말 없지?" 등뒤에서 지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국은 말없이 돌아본다. 지감이 다가왔다. "저어 일봉이는 없습니까." 첫마디 말은 엉뚱했다. "뭐할려구?" "김장사댁에 갈 일이 좀 있어서요. 길을 모르니까요." 지감은 관음상에 대하여 언급이 없는 환국의 심정을 충분히 아는 것 같았다. "나하고 가지. 일봉이는 영광어머니랑 읍내 가고 없다." 두 사람은 절문을 나서서 한동안 말없이 산길을 올라간다. 한참을 가다가 환국은 좀 쉬어가자고 했다. 나무 밑 에 그들은 나란히 앉았다. "아버지는 참 외로운 분 같습니다." 환국이 말문을 열었다. "관음상을 본 감상인가?" "네." "자네 말이 맞네. 원력을 걸지 않고는 그같이 그릴 수는 없지. 삶의 본질에 대한 원력이라면 슬픔과 외로움 아 니겠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 "그렇게 오랜 동안 붓을 들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세월인 게야. 자네 부친의 세월 말일세. 식을 맑게 간직하고 닦아온 자네 부친의 세월. 사람들은 대부분 본래 의 때묻지 않는 생명에 때를 묻혀가며 조금씩 망가끄려가며 사는데 결국 낡아지는 것을 물리적인 것으로 인식 하지. 생명은 과연 물리적인 것일까?" 지감은 자신에게 묻듯 말했다. "말로는 탱화를 또 그려라, 그러나 김형은 두번 다시 탱화를 그리지 못할 거야." 지감은 앞서 한 말을 놔둔 채 화제를 옮겼다. "어째 그럴까요." "종교적 의식이었으니까." "금어는 항상 그 의식을 되풀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네 부친은 금어가 아닐세. 금어가 탱화를 그리는 것은 예불과 그 성격이 같다 할 수 있으나 자네 부친은 원력을 걸고 한 일이었네. 매번 어찌 원력을 걸겠는가. 또 자네 부친이 환쟁이로 그림을 되풀이 그린다면 그건 세속적 욕심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게야." "그렇게 됩니까?" 환국이는 처음으로 웃었다. "내 식대로 한 말이다." "저의 경우는 그럼 욕심이군요." "그렇지. 야심작이다 하는 말이 그냥 된 건 아니거든, 예술 자체에 대한 것이든 명리를 위한 것이든 하여간 욕 심이 포함된 것을 틀림이 없다." "하긴. 사바의 일이니까요." "슬슬 가볼까?" "네." 두 사람은 일어서서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로잡히지 말아야, 사로잡히지 말아야지. 예술가도 어떤 면에서는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다. 그러나 자유 는 쓸쓸하고 고독한 거야." 지감은 앞서가며 탄식하듯 말했다. 6장 해체 환국이 재판소 앞을 지나가려는데 간수 두 명이 짐승 몰듯 몰고 나온 것은 용수를 쓰고 오랏줄에 엮은 네댓 명의 죄수였다. 언제보아도 그것은 끔찍스런 풍경이었다. 비교적 한적한 거리였는데 죄수랑 간수가 떠난 곳에 이번에는 삿갓을 쓰고 긴 작대기, 지팡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길어서 작대기로 보였는데 그것을 들고 종을 치면서 나타난 것은 왜중이었다. "나무묘호렌겟쿄 나무묘호렌겟쿄, 나무묘호렌겟쿄!" 소위 일련종의 삼대비법의 하나를 외면서 왜중은 지나갔다. 그것 역시 기분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호나국이 자신은 불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어릴 적부터 절과는 친숙해져 있었고 이번에는 더군다나 부친의 관음탱화를 보고 머릿속이 씻긴 듯 맑아 있었는데 진주 거리에서, 그것도 재판소 앞에서, 죄수들이 지나간 자리에서 왜중 을 만났다는 것이 기이했고 거부 반응이 심하게 발동했다. 긴 작대기가 순식간에 나기나타로 변하여 벤케이처 럼 그 중이 난동을 부릴 것만 같았다. 벤케이는 일본에서 숭상되는 사람 중의 하나로서 가마쿠라 시대, 유명한 미나모토 요시쓰네의 부하로서 성질이 거칠고 많은 인명을 살상한 중이다. 중이 사용하는 무기가 주로 나기나 타였던 것이다. 중의 모습에서도 위협적인 것을 느꼈지만 일련에 의해 창시된 일련종 자체도 결코 조선인에게 는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법화경에 의거한 것이지만 타종에 대하여 가장 공격적이며 전투적인 일련은 이른바 국난내습을 외치면서 입정안국론을 주장했는데 후일 일련은 국수주의의 괴뢰로서 정한론자 군국주의자들이 곧 잘 치켜들고 나오는 역사적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군국주의가 완벽하게 일본을 장악한 현재에서 본다면 신도 에 비하여 허울만 남았다 할 수도 있겠다. 기분이 잡쳐진 환국이 찾아간 곳은 장연학이 경영하는 남강여관이었다. 그가 막 여관으로 들어서려 하는데 안 에서 불쑥 나타난 사람은 뜻밖에도 이순철이었다. "이게 누고! 환국이 아니가!" 잠바 차림의 몸이 비대해진 순철이는 소리지르듯 말했다. "이거 참, 왼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허더니 거 틀린 말 아니네. 너 참 잘 만났다!" "오래간만이다. 여기는 웬일로 왔어." 환국이도 상당히 반가웠던 모양이다. 순철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야말로 코흘리개 때무터의 친구였으니. "거래처 손님이 서울서 왔거든. 잠시 인사차 들렀는데 하여간 반갑다. 우리 이대로 갈라설 수 없는 일 아니 가." "그럼." "무슨 일로 왔는지 모르지만 시간 걸리겠나?" "아니, 잠시면 된다. 지나가는 길에 장서방 보고 가려고 왔어." "그러면 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볼 일 보구 나와라." "그러지." 환국은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순철이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기 전에 나왔다. 두 사내는 어깨를 가지 런히 하고 거리로 나왔다. "몸이 많이 났군." 환국이 말에 "늙는 거지 뭐." "그런 소리 말게. 사업을 하면 노티를 내야 하는 겐가?" "그런 경향도 없진 않지."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며?" "응, 작년에." "훌륭한 어른이신데." "훌륭하게 된 거는 다 자네 부친 덕이지. 돈이야 기천원 잃었으나 하하핫." "무슨 그런 말을 하나." "왜? 내가 빈말하는 것 같은가? 강탈당하고서 고마워하는 쪽이나 강탈해가고서 존경하는 쪽이나, 참 기기묘묘 한 우리의 현실이지."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다." 하면서도 환국은 마음속으로 찔끔했다. "다 농담이고 자네 처가가 굉장하다며?" "그런 쑥스러운 얘기는 그만두자. 오십보 백보지 뭐." "하기야 시달리기론 더하지. 그놈들 비위 맞추려니 오장육부가 썩는다." "고문은 왜 그만두었나." "삼 년을 내리 낙방을 하고 보니, 해봤자지 뭐. 요즘엔 사업도 내겐 벅차다. 아버님이 안 계시니 낸들 어쩌겠 나. 고문 패스란 소싯적 꿈이지 패스했다 하더라도 조선놈들 재주 부리자면 피가 마를 게야. 뒷방구석에 처박 혀 있느니보다 못할 경우도 있을 테니. 민족반역자 되고 얻는 거는 쥐꼬리만한 것." 그들은 순철이 단골로 다니는 요릿집으로 갔다. 진주서는 유지요 자산가인 순철을 안내한 방은 운치가 있고 차분했으며 조용했다. 요리상이 들어오고 기생도 두명 들어왔다. "야 너거들 다 나가아. 여기 이 골샌님 켕겨서 술 못 마신다." 순철은 사정없이 기생들을 쫓아냈다. 환국이 생각을 했다기보다 순철은 조용하게 할 얘기가 많은 눈치였다. "술 좀 늘었나?" 순철은 술을 따으며 물었다. "조금." "자네 술은 내가 가르쳤지 아마?" "그랬지." 조용히 술을 마신다. "환국아." "응."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뭘?" "전쟁 말이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내 생각에는 말기에 접어들지 않았나 싶어. 얼마 전에 일본은 불인에 진주했는데 일본의 계산으로는 장개석 의 원조 루트를 차단한다 그거지만 의외로 전선은 확대되어 일본이 말라죽게 되는 거 아닌지." "말라죽는 데는 시간이 걸릴 거고 미국이 나서지 않을까 싶어. 미국만 나서주면 일본의 패망은 눈앞에 있게 되는데." "일본이 그거 생각지 않고 불인에 진주했을 리는 없고." "물론이지. 그러나 미국의 참전은 미지수. 참전한다는 확률이 구십프로라 하더라도 일본은 십 프로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다급한 사정이거든. 당장 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이지. 장개석 원조의 루트를 차 단하는 것도 그렇지만 전쟁물자 고갈이랴말로 발 등에 불 떨어진 격이니." "어쨌거나 일본에 승산이 없는 것만은 확실하지?" "그야 내가 어찌 단언하겠나. 자네 생각이나 내 생각이나 비슷하다는 말밖에." "정말 요즘 같아서는 백화점이고 뭐고 딱 때리치우고 싶어. 어떻게 설쳐대든지. 참 자네도 알 거야 김두만이라 고. 왜 그때 우리 잡히고 함께 털린 그 작자, 술도가 하는." "알지." "그 작자 아들 김기성도 아는지 모르겠네." "동경서 본 일이 있지." "명색이 대학이지,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도 모를 학교를 유학이랍시고 다니면서 뽐내기로는 구역나게 뽐 내든 놈인데 지금 뭘 하는지 아나? 돈을 처넣었겠지만 경방단 단장이야." "출세했네." "알고보면 경찰서 시녀 노릇이나 하는 별 실속없는 거지만 이 작자가 진주 거리를 활갯짓하고 다니면서 어리 석은 사람들을 꽤 울리는 모양이야. 옛날엔 내 앞에서 쪽도 못 쓰든 놈이 하참, 세상 더러바서." "유도의 유단잔데 수 틀리면 내리꽂아. 그러면 될 거 아닌가." "나 농담하는 거 아니야. 옛날의 그 가정부 자금 강탈사건이 있고부터 그놈의 집구석 사사건건 우리하고 대적 하려 드니, 하늘 울 적마다 벼락 칠 수 없고 아주 귀찮어." "같은 피해잔데 그럴 이유가 없잖은가." "왈 우리는 가정부하고 내통하고 강탈극을 꾸몄다는 거고 저이들은 길 걷다가 기왓장 맞았다는 그런 말을 나 불대고 다니는 거야. 사실 그런 풍설이 돌면 지장이 많거든. 하여간에 삼간 오두막 다 타도 빈대 죽는 것 시원 타는 말처럼, 우리집 다 타도 좋으니 그놈의 김두만 빈대나 타죽었으면 속이 시원하겠다." "실은 그 사람하고 우리집하고도 앙숙이네. 자네나 우리 골치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하기는 뭐 그자뿐이겠나. 평사리 작은 마을에도 면서기가 날뛰고 걸핏하면 반국가다 반정부다,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감정이 격해지면 술잔 기울이는 횟수도 잦아진다. 동경에서 일류대학의 법과를 나온 이순철이고 보면 김기성 이 같은 날건달에게 압박을 받는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말단말직, 실속없는 명예직이라도 하나 얻어 걸치고 보면 세력의 판도는 여지없이 뒤집히는 현실. 가진 자 못 가진 자 할 것 없이, 눈먼 구렁이처럼 얽히어 친일에 열을 올리는 군상들. "거 광주학생사건 때 여기 중학에서 주모자로 잡혀갔고 형가지 살고 나온 후배가 있었지. 아마 윤국이는 알 거다. 홍수관이라고." "홍수관이? 알지. 윤국이 일년 선밴데 아주 친하다." "그눔아를 우리가 데리고 있거든. 서기로 말이야." "뭐, 자네가 데리고 있어?" "음." "금시초문이구나. 하여간 고맙네. 그 무렵 강탈사건 땜에 우린 손도 발도 내밀 수 없었는데 자네 좋은 일 했군 그래." "하여간 내가 그눔아아를 끌어다놨는데 잊을 만하면 경찰에서 오는 거라. 김기성 그놈도 기웃거리며 협박을 하지 않나. 악종이다." 순철의 말은 어쩐지 토막토막 끊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뭔지 복잡하고 격해 있는 듯했다. 실제 하고 싶은 얘 기는 정리되지 못했고 표현하기가 쉽지 않는 것처러 느껴졌다. 이들은 독립자금 강탈사건이 있은 뒤 거의 만 나지 못하였다. 만나지 못했다기보다 형편이 서로가 회피할 수 밖에 없었다. 순철은 섬세하고 감각적이지는 않 지만 부유한 집안에서 거리낄 것 없이 자란 탓으로 비교적 통이 컸고 순조롭게 대학까지 마쳤으며 고문에 도 전도 했던 만큼 머리가 명석했다. 게다가 도복을 꿍쳐 메고 도장을 드나들며 유도로 단련이 된 몸은 날렵하면 서도 튼튼했다. 보스 기질이랄까, 협객 타입이랄까 그런 사내였다. 그러나 사명감이 투철한 편은 아니었으며 대학 시절, 사회주의 사상이 일본 전토를 풍미했던 시기, 그도 그 방면의 책들을 탐독한 일은 있었지만 사회 인식은 희박했다. 하여간 환국이를 만난 순간부터 순철이는 흥분해 있었다. 그간의 사정을 생각하면 그의 흥분 은 물론 우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독립자금 강탈사건이 있은 후 환국이 순철이, 이들의 양가를 보는 일반적 시각은 두 갈래였다. 순럴의 부친 이 도영을 피해자로 보고 길상을 가해자로 추측, 길상의 경우는 물론 가정이었다. 당국에서 혐의를 두고 한때 수 사의 대상이었기 때문인데, 다른 한 갈래는 이도영을 협조자로, 길상을 주모자로 보는 시각이었다. 이 두 번째 추측은 이도영이 매우 훌륭하며 추앙할 사람으로 진주 사람들 사이에 부각되었으나 대신 당국에서는 실로 형 용키 어려운 시달림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함께 돈을 강탈당한 김두만이가 협조라라는 불똥이 자기 발등에 떨어질까 봐서 전전긍긍하면서도 바로 그 두 번째 추측 때문에 그는 양가에 대하여 이를 갈며 깊은 원한을 품 게 된 것이다. "김기성이가 그런다고 뭐 어찌 되는 것도 아니겠고 신경쓸 것 없다.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고 술이나 마시자." 환국이 부어준 술잔을 들어올리며 순철은 "신경을 안 써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되질 않아." 한숨 짓듯 말했다. "자네답지 않군. 다 열등감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겠나. 나는 학교가 달라서 소원했지만 자넨 중학교 동문인데 그를 너무 괄시했어. 실은 그의 부친의 경우도 그래. 우리집에 대해서 강한 증오심을 갖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열등감, 그 때문인데, 하기는 뭐 평등의 원칙에서 본다면 우리에게도 문제는 있었어." 환국은 얘기가 깊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김두만의 조부 조모가 최참판댁에서 면천 되어 나간 종의 신분이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공자 같은 말씀 하시네." "공자는 평등주의자 아니었어." "그랬나?" "물론 나도 평등주의를 실천하지 못했구, 우유부단, 그저 콧구멍으로 숨만 쉬고 있는 형편이지만." "문제는 남들한테 있었던 게 아니고 내 자산에게 있는 거지." "...?" "김기성이가 신경에 걸거적거리는 이유도 실은 따로 있네. 그놈이 경방단 단장 아니라 그보다 높이 되었다 하 더라도 또 과거 무시당한 분풀이로 지분거린다 하더라도 내가 꿀릴 게 뭐 있어? 어느 면으로 보나 그놈의 상 대가 되진 않아. 그까짓 날건달 마음만 먹으면 몰아낼 수도 있어." 그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진주에서 순철의 위치를 확고했다. 학벌이며 재력, 사업가로서의 기반, 모두 튼튼했 다. 게다가 순철에게도 일본인 친구가 많았다. 학연 관계도 있었고 사업 관계, 또 유도 도장을 드나들 때 사귄 각계의 일인들. 대개가 상부층이며 서로 연관들을 가지고 있어서 김기성을 깔아뭉개는 것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내성적인 부친 이도영과 달리 순철은 활달했고 대인관계에서도 잘해 나가는 편이며 특히 강자숭배 기질인 일본인들은 순철의 보스 기질, 협객 스타일을 매우 좋아했다. "그놈을 만나면 신경이 곤두서는 이유는 바로 그 사건 때문인데 나는 진실을 모른다." "그 점은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환국은 다소 굳어지며 말했다. 느낌으로는 강하여 온 것이 있었지만 환국이 역시 진상은 모르고 길상으로부터 일체 들은 말도 없었다. "뭐 내가 진실을 캐묻자는 것은 아니네. 지난 일을 왈가왈부할 생각도 없고." "어폐가 있군. 캐묻다니? 뉘한테?" 환국의 어세는 날카로웠다. "야아, 이거 참, 심술 했구나. 하도 일이 혼란스럽고 복잡하게 얽혀서 착각에 빠질 때가 있어. 미안하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자신의 사정을 두고 하는 말일세. 내 나름의 고민인데, 단도직입으로 말을 하자면 돌아가신 내 아버지한테 문제가 있었던 거야." 하고 순철은 담배를 꺼내어 붙여물었다. "가족들에게 보인 아버지의 태도, 그게 문제였다. 어째서 아버지는 가족에게 담을 쌓듯 그렇게 홀로 침묵을 지 켰는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가족에게는 물론 나에게조차 일체 함구하신 그 진의를 나는 아 직도 모르겠단 말이야.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었는지, 누구를 위해 침묵하신 것인지, 환국이 너도 생각해보아. 경찰서에서 아니다 하셨으면 가족에게도 마땅히 아니다 하셔야 하 지 않았을까? 어째서 아버지는 그토록 완강하게 입을 다물고 계셔야만 했는가." 순철은 당시의 괴로움이 생각났던지 얼굴이 일그러졌다. 피우던 담배를 눌러끄고 말을 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의중을 두 가지로 생각해보았다. 하나는 협조,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연극인데 아버지의 침묵 은 가족들에게 연극이었음을 시인한 것이냐, 또 하나는 비록 강탈당하기는 했으되 조선민족으로서 독립자금을 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는지, 그러나 이상하지 않아? 그 정도의 얘기는 어 머니나 나한테 할 수 있는 일 아니겠어? 강탈을 당했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돈을 건넸으면 조선 사람으로서 면 무식은 했다,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는 일 아니겠어?" "..." "만일 협조한 것이 진실이라면 그것은 우리 집안을 송두리째 걸고한 모험이었다 하겠는데 그렇다면 아버지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쪽을 차단하기 위한 침묵이었을까?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침묵이었을까? 아버지 의 생각을 내게 심어주기 위한 침묵이었을까? 지금도 그 의혹은 마치 유혹하듯 나를 그 언저리로 맴돌게 한 다.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환국이도 차츰 이도영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궁금증을 품기 시작한다. "아버지한테 진상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었나?" "자네는? 자네 아버님이 명의를 받았을 때 물어보았나?" "아니." "나는 한 번 물어보았다." "그래서." "대답을 안 하시더군. 마치 돌로 굳어져버린 것처럼. 그렇게 엄한 얼굴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다같이 한숨을 내쉰다. "그 당시, 협조니 연극이니 그런 말만 나오면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어. 아버지가 잡혀가는 악몽도 수없 이 꾸었다. 내가 이런 말을 입 밖에 내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지만 아버지가 생존해 계셨더라면 아마이런 말 할 수 없었을 거야. 그때의 두려움은 아직 남아 있어.. 그런데 두려워하면서도 호기심을 갖는 아이처럼 내 두 려움 속에는 늘 흥분이 있고 자부심이 있는 거야. 그런가 하면 움켜쥔 물이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버린 듯 아 무것도 남아 있질 않는 것을 느껴. 불안해지는 거야. 아버지를 모를 때 이상하게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도 알 수 없게 되는데, 막연하다는 것은 불안이야. 이 기분을 자네는 모를 거다." "알어." "김기성을 만날 때 내 신경이 곤두서는 것은... 그들처럼 우리도 피해자냐, 아니면 가해자냐, 혼란스러워. 까닭 없이 당황해지고 설 자리 잃은 사람처럼 막연해지고, 그놈은 번번이 내 불안의 불씨가 되거든. 그럴 때 내 꼴 이란 찻간에서 자리를 못 잡아 허둥대는 노파 같단 말이야. 아주 기분이 나빠." 환국은 순철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들어." "응." 술잔을 비운 순철은 환국에게 잔을 돌리고 술을 붓는다. "바보처럼 웃고 살자. 광대가 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 "언제까지?" 순철은 환국의 눈을 깊숙이 쳐다보며 말했다. "글세... 멀지 않았다고 믿어야지. 멀지 않았을 거야." "마치 허공을 걷고 있는 것만 같다. 어떤 왜놈도 날보고 그러더군. 이것은 삶이 아니라구, 꽤 괜찮은 녀석인데 소집을 받고 전선으로 나갔지. 바짝바짝 죄어들기론 그네들이라고 다를 게 없다. 언제 소집장이 날아올지 모르 는 강박에 쫓기고 있거든. 겉으로야 천황폐하를 위하여 우리는 죽겠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동강나는 절망이야 감출 수 없는 거지. 어깨디를 두르고 일장기 물결 속에 서 있는 가면 같은 얼굴, 그들 아내나 모친이 거리에 서서 행인들에게 센닌바리를 바툭하는 모습에서도 우수수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 수월찮이 전사도 했을 거고." 센닌바리란 흰 천에 천 사람이 붉은 실로 한 땀씩 매듭을 짓는 것인데 그것을 배에 감고 있으면 총알이 비켜 가고 무운장구한다고 믿는 일본인들의 풍습으로 소집받은 사람의 가족이 거리에 나서서 행인들에게 한 바늘씩 부탁하여 만드는 것이다. 진주 거리에서도 흔히 보는 풍경이었다. "몇 마리의 군국주의 악령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자칫하면 국가 존립조차 어렵게 되어갈 판인데 왜 그 따위 미친 지랄을 하는지, 하여간 일본도가 문제라." "자업자득이지. 반전사상이 지나갈 바늘구멍만한 통로도 없는 게 일본 아닌가." 환국이 말에 순철은 "전쟁이 나면 어느 나라이든 사정이야 비슷한 거지 뭐." "전쟁이 나기 이전의 얘기를 한 거다. 반전사상을 성토하고 말라죽게 한 것은 군부보다 한술 더 뜨는 국민, 그 들 스스로가 앞장선일 아닌가." "그거야 정부가 유도하니까, 일등국민이라느니, 세계의 강국이라느니, 섬나라에서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살아온 백성들을 솜사탕같이 부풀려서 간에 바람 잔뜩 집어넣고 신국이라는 환상속에 대갈통 적셔가며 몰아붙이니, 자고로 대중이란, 아주 허약한 것이거든." "자네 말마따나 몇 마리 군국주의 악령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죽음의 길도 마다 않으며 가는 그 소리에 귀 기 울여봐. 무섭지? 일사불란이 천치들의 행진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그들은 더욱더 무섭다. 아프리카에서 개 비의 대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남은 것이 없다 하는데 마치 그 개미떼처럼 일본인들은 일치단결 대열에서 이탈 하지 않고, 우리들 식자 중에서도 그들 단결을 일본인의 장점으로 꼽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 일치단결이 파 괴로 돌진할 때 가공할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군. 파괴란 새 질서를 세우는 과정이기 도 하지만 휴머니즘을 결여한 새 질서란 허구이며 허구에서 시작되는 파괴란, 남뿐만 아니라 자신도 무너지고 마는 결과를 초재하지. 오늘의 일본을 보면 명백해. 그리고 일본이 패망하는 날 그것은 증명될 것이다. 일본에 서는 여하한 경우에도 혁명은 없을 거야. 자멸할지언정. 그들은 허구를 존재케 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잡동사니 로 호도해왔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로움이 없다는 얘기고 새로움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것, 창조하지 못한다는 것, 그들은 뻔뻔하게도 전쟁은 창조의 아버지요 문화 의 어머니라 했다." 평소 환국이답지 않게 그의 어투는 매우 신랄했다. "나는 그 의견에 반대다. 민족성에다가 못박는 것은 반대다. 체제에 따라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보 편성 아닌가." "민족성에 못을 박은 것은 아니다. 나는 그들의 역사를 말한 거야. 인간의 보편성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 는 것이 있는데 일본의 역사는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변해왔다. 그렇게 본다. 나 는 민족성에다 근거를 두고 말한 것은 아니다. 길들여진 상태를 말했을 뿐, 그러니까 그들 스스로도 피해자인 셈이지."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고 변해서는 안 될 것이 변했다. 그게 뭔데?" "우라시마 다로의 다마데바코처럼 속이 텅텅 비어 있는 신도, 속은 신국사상과 현인신이라 부제가 붙은 만세 일계는 변해야 하는데 변하지 않고 변해서는 안 되는 진리와 진실, 또는 사실은 그들 형편 따라 변화무상이지. 결국 그것들은 일맥으로서 변하건 변치 않는 것이건 허구다 그 얘기야." "음..." "그들은 우라시마 다로의 다마데바코를 열어야 해. 그리고 진실과 직면해야 해. 설령 백발이 될지라도, 그래야 만 다시 태어나고 새로워지는데 일본은 결코 빈 상자 뚜껑은 열려 하지 않을 걸세." 우라시마 다로의 다마데바코는 어부였던 우라시마가 용궁으로 가서 환대를 받고 다마데바코를 선물로 받아 육 지로 돌아와보니 모든 것은 변해 있고 아는 얼굴 하나 없고, 우라시마는 바닷가로 나가서 열어보지 말라는 다 마데바코를 열었다. 그 순간 우라시마는 백발노인이 되었다는 대강 그런 얘기의 일본 전설이다. "글세 알긴 알겠는데, 그러나 일본은 있어왔고 현재도 존재하고 있어. 현실이란 어차피 현실을위해 꿰어맞추어 지는 거 아닐까? 국가 통치의 형태는 각양각색, 현실은 이상과 너무 멀어." 순철은 다시 막연해지는지 자신 없이 말했다. 환국의 이상론에 반박할 적당한 말도 없었고 다만 환국의 논리 가 현실적으로 얼마만큼의 효용성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현실은 정지된 시간이 아니다. 또 추상적인 것 현상적인 것에 비하여 물질이 가시적이며 확실한 것도 사실이 다. 그러나 가시 밖을 생각하면, 확실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눈앞에 있는 것은 하나의 점에 불과해. 시간 역 시 정체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현실의 시간들은 한순간에 불과한 거고, 한 점에다가 한순간을 붙잡아서 아무 리 견고한 성을 쌓아도 그게 뭐겠어? 가시 밖을, 불확실한 것을 탐구하고 과거와 미래가 이어지는 현실 속에 서만이 창조는 가능해. 창조는 생명이야. 창조 없는 곳에선 파괴뿐이고 사람이 짐승으로 전락하지." "예술가인 자네가 지향하는 길과 다른 대부분 사람들이 지향하는 길이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야. 다른 대부 분의 사람들은 특히 현실적 동물이며 잘산다는 것의 기준을 물질의 다과에 두고 있지. 그건 생존 본능으로 당 연한 거고, 올바르게 소신껏, 큰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것, 그러한 삶을 잘사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지극 히 소수라 할 수 있다. 그건 엄연한 현실이구, 정치란 예외 없이 그런 대다수를 상대로 하는 체제 아니겠어? 얼마나 그 대다수를 말아먹느냐, 얼마나 그 대다수의 허리를 펴게 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현인신을 신봉하 건 공자를 떠받들건 또 예수 불타를 섬기든 간에 어차피 정치란 신이든 성인이든 도구화하는 게 그 속성 아니 겠는가 그 말인데, 자아 술 들어." 술을 단숨에 마신 환국은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본다. 외로움, 해거름과 같은 외로움과 어떤 분노 같은 것이 그 의 양어깨에 실리어 있었다. "법과를 나온 나하고, 예술의 길로 간 자네와의 견해 차이겠지만 또 자네는 당연히 그래야 하고, 나같이 사업 을 한답시고 떠벌리고 다녀야 하는 처지로서는 싫든 좋든 현실에 밀착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의 일치점이라면, 어디 우리뿐이겠나? 조선인 모두, 뭐니 해도 우리의 설 땅이 없다는 것, 당면한 우리의 공통된 현실은." 순철은 하다 만다. 환국의 표정은 전에 없이 우울했다. "기운 내! 환국아." "..." "그런 저런 얘기 다 그만두고 요즘 자네 그림 그리고 있나?" "지금 표류하고 있다." "표류하다니?" "갈 곳을 몰라하고 있다 그 말이야.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반문하게 된다." "지금도 반문하고 있어?" "음. 무의미한 것 같아서, 무용지물인 것 같아서." "그런 생각 말어. 소수란 선택받은 존재야. 다수와의 갈등, 이해부족, 있게 마련이다. 내 말이 널 실망시킨 모 양인데 미안하다." "아, 아닐세." "내가 자네 처지라면 학교 관두고 그림에 전념하겠다. 자넨 이제 틀이 잡혔지 않아? 이 소리 저 소리 듣지 말 고 그림이나 그려." "학교를 관둔다고 해서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주저앉고 싶어질 때가 있어. 부잣집 아들이 주색잡기, 방탕하는 모습이 훨씬 정직하게 느껴지기도 하구." "흠, 그런 생각 할 떄도 됐다." "그림 자신 없다. 길을 잘못 든 게 아닌가 싶어." "그런 소리 말어!" 순철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자네가 다른 길을 택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큰 후횔 했을 거다." "재능도 모자라고 불꽃 튀는 삶과의 정직한 대결도 없고 그림이란 화실 안에서 반복되는 수련의 과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새삼스럽게 절실히 깨달았다." 환국은 부친의 탱화에서 받은 충격에서 아직 꺠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관음상으로부터 받은 감동, 자신의 그림 세계에 대한 회의 절망감, 원목을 도끼로 찍어서 세운 건물처럼, 수없는 인생의 영을 넘어 그곳에 우뚝우뚝 선 듯한 김강쇠 지감 해도사 모습에서 자신의 왜소함을 느끼게 된 일, 또 서울서의 다른 일, 그것에 대한 갈등도 아직 정리가 되지 못하고 있었다. "도망갈 길이 딱 하나 있긴 있는데." 환국의 얼굴이 다소 풀리면서 쓸쓸하게 웃었다. "그게 뭔데?" "자연 속으로 파묻히는 것." "머리 깎겠다 그 말이야? 설마." "그런 뚯은 아니고 순수한 생명으로 살아보고 싶어. 또 그려보고 싶어." "못할 것 없지. 산포수가 되건 나무꾼이 되건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그게 쉬운 일이라면 실행에 옮기지 자네보고 얘실 하겠나? 윤국이 같으면 그랬을 거야... 이래봬도 나를 필요 로 하는 사람이 많거든. 칡넝쿨 같은 그 인연들에 칼질하기가." "하긴... 자넨 예술가이기보다 성직자가 더 맞았는지 모르지." "화가 되기보다 그쪽이 더 험난했을 거야. 불가능했지." "생각해본 적은 있었나?" "공상으로, 있었지." "하여간 힘들다 힘들어. 그래 윤국인 잘 있나?" "학교 다니고 있지 뭐." "생각나는 일 없어?" "아 참, 매씨는 잘사나?" "이럭저럭, 그애도 그 사건 땜에 단념은 했으나, 하기야 뭐 윤국이는 심에 차지 않았겠지만." 순철의 누이동생이 윤국이를 짝사랑한 것은 양가에서도 아는 일이었다. 그 사정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아들이 요릿집을 나섰을 때 밖은 어스름 달밤이었다. 초저녁이었다. 환국이와 순철은 굳게 악수를하고 헤어졌 다. 환국은 내일 아침, 일찍이 서울로 떠날 생각을 하며 걷고 있었다. 취기가 올랐다. 요릿집에서 술을 마신 간에 서는 정신이 맑고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걸어갈수록 발끝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곧장 집으로 들어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초저녁의 거리는 상점에서 새나온 불빛의 소용돌이 속에 사람도 주변 풍경도 아름 답게 보였다. 약간은 들뜨고 행복한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환국은 집으로 가는 도중 남강 쪽으로 발길을 돌 렸다. 신사로 가는 돌계단을 피하여 옆길로 빠져서 강변으로 내려갔다. 강가에 앉아 머리를 좀 식힌 뒤 집에 들어갈 참이었다. 달빛 받은 강물이 일렁이고 있었다. 실제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강 건너 대숲에서 싸아! 하며 댓잎을 흔들고 지나가는 사람 소리가 들려오고 것 같았다. 촉석루 굵은 기둥이 그늘져 꺼무꺼무했고 그 뒤켠 신사를 에워싼 나무숲도 꺼무꺼무해 보였다. 산과 밤하늘의 경계선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환국은 담배를 붙여문다. 학교 교사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피우기 시작한 담배다. 생각해보면 강혜숙을 처음 만 난 것은 어수선한 병원에서였다. 간다에 있는 개인 병원, 외과 전문이었다. 안경 너머 눈을 치뜨고 쳐다보던 의사의 눈, 깐깐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수봉이가 "혜, 혜숙씨." 하던 여자, 그는 화닥닥 비켜섰다. 여자이기보다 소녀, 아이처럼 겁에 질려 있었고 그는 연신 떨고 있었다. "내 친구고 또 영광이 친군데 최환국, 그리고 여기는 강혜숙 씨." 수봉이 소개를 했을 때 혜숙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영광이 일본 노가다 패거리한테 두들겨 맞고 사경 을 헤맬 때 일이었다. 환국은 그때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연민의 정도 애정입니까?" 애부사댁에 가던 날, 나룻배에서 환국이 부친에게 물어본 말이었다. 길상은 빙긋이 웃었다. "내 생각에는 그렇다." "..." "아마 너는 연민과 동정을 혼동하여 물어보는 것 같구나." "역시 애정이군요." "대자대비를 한번 생각해보아라." "대승불교, 아니 종교적인 입장에서 여쭈어본 것은 아닙니다." "인간적인 애정 말이구나." "..." "연민은 순수한 애정의 출발인 게다. 젖을 물리는 어머니의 마음도 연민일 것이다. 사별의 슬픔도 다시 만날 수 없는 슬픔보다 연민에서 오는 슬픔이 한층 더 진할 것 같구나." "아버님은 어머님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셨습니까? 어머님은 대단히 강하신 분인데." 공격하듯 말했을 때 "사고무친한 남의 땅에, 타민족이 오고 가고, 이십이 못 된 천애고아인 처녀가 강했으면 얼마나 강했겠느냐." 일렁이는 남강 물을 바라보며 환국은 한숨을 내쉰다. 부친에게 연미도 애정이냐고 물었을 때 애정없는 영광을 필사적으로 바라보던 강혜숙의 애처로운 모습을 떠올렸던 것이다. 연민이든 애정이든 환국은 강혜숙을 멀리서 가까이서 지켜보며 오늘까지 왔다. 부모를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영광을 찾아왔던 여자, 영광이를 놓아주기 위하여 결국 떠났던 여자, 환국은 잔잔하고 조심스런 연민으로 혜숙을 보아왔다. 영광에게, 아내 덕희에게 죄 책감을 느끼며 부끄러워할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환국은 믿어왔다. 그는 친구로서 영광을 무한히 사랑했고아 내 덕희도 그 나름의 애정을 가지고 있다 하며 믿었다. 그랬는데, 얼마 전의 일이었다. 동료 교사 한 사람이 뜻밖에도 강혜숙과의 중매를 부탁해왔던 것이다. 언젠가 한 번 그와 함께 양장점 앞을 지나치다가 강혜숙을 만났고 인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동료 교사는 눈여겨보았고 그 후에도그 앞을 지나치며 혜숙을 보곤 했던 모양이다. 젊은 나이에 그는 상처를 했고 독신이었던 것이다. 마다할 이유도 없었기에 환국은 그들을 만나게 했다. 그때부터 환국은 마음에 이상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강혜숙을 만났을 때 혜숙 은 매우 명확한 어조로 구혼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 순간 환국은 저도 모르게 망연자실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영광씨는 제가 이러고 있는 이상 죄책감 때문에 자유로워질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럼 영광이를 위해 내키지 않는 결혼을 하겠다 그 말씀입니까?" "체념하고 살아왔는데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그건 자학입니다." "아닙니다. 좋은 분 같았고 혼자 이러고 있으니까 여러 사람한테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요." 순간 그의 눈에 눈물이 글썽 돌았다. 폐를 끼친다는 것은 덕희의 의심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덕 희가 강혜숙의 존재를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환국이도 아는 일이었다. '얼빠진 놈,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그 길모퉁이에서 미싱을 밟으며 혼자 살아가길 바랬든 건가? 비정하고 잔 인한 그 따위 생각을 내가 하고 있었단 말이야? 연민이 그렇게 이기적일 수는 없다. 도덕적인 문제를 떠나서, 인간으로서, 사내자식이, 그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환국은 여러 사람한테 폐를 끼친다는 혜숙의 말이 몹시 아팠다. 상처받은 새 같아서 꽉 껴안아주고 싶었다. '그래야지. 그래야 해. 결혼해야지. 바람 부는 거리에 언제까지 홀로 서 있겠는가. 원선생 그 사람 꽤 괜찮은 사내야. 불행하게 하진 않을 거다. 축복을 해주어야지. 행복해지기를 빌면서 누이같이 떠나 보내야지. 사실이 그렇다. 그 길모퉁이에서 미싱을 밟으며 홀로 있는 한 영광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거다.' 하면서도 허전해지고 쓸쓸해지는 것을 환국이 자신도 어쩌지 못한다. '이렇게 모든 일이 엇갈리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인가. 아니다. 그건 네 자신을 위한 변명이요, 합리화하려는 심사다. 너는 용기가 없다. 늘 두려워하고 있다. 너는 소림의 경우도 그러했다. 끝없이 넌 너에게 변명만 했었 지.' 환국은 일어섰다. 걸찍하고 탁한 목소리로 육자배기라도 불러보고 싶은 기분, 환국은 강가에서 올라왔다. 걸직 하지도 못하고 탁하지도 않은 생래의 목소리로 육자배기를 부를 수 있었겠는가. 육자배기 가락도 모르면서. 엇 갈리기만 하는 여인들과의 인연은 엇갈리기 때문이 아니며 생래적인 그의 기질 탓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사랑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멀리서 맴돌다 말았으면서, 아니 의식도 깊이하지 않았으면서 환국은 구름같이 번민하는 것이다. 집 앞에까지 갔을 때 대문간에서 환국은 성환이와 마주쳤다. "선생님 이제 오십니까." 성환은 꾸벅 적을 했다. "음, 어디 가나?" "예. 남강여관에 갑니다. 귀남이가 아프다 캐서요." "어머님 계시지?" "예. 손님 오셨습니다." "손님? 어디서." "서울서 오신 모양입니다. 양교리댁 친척이라 하더마요. 지금 막 오셨습니다." "알았다. 어서 가보아라." "다녀오겠습니다." 환국은 사랑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넓은 방에 막 드러누우려 하는데 안자가 왔다. "저녁을 어쩔까요." "먹었어요." "술 많이 했나 봐요?" "친굴 만나서 했지요." 용정촌에 있을 때, 어린 그 시절, 안자! 서! 안자! 서! 하고 놀려먹은 안자, 안자도 그랬지만 환국이 역시 서로 흉허물이 없었다. "이상한 여자가 왔어요." 안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양교리택 친척이 왔다던데요? 홍성숙이란 그분 아닌가요?" "예. 노래하는 가수, 그 사람은 구면이지만 따라온 여자가 좀." "누가 함께 왔소?" "치렁치렁한 검정 양복을 입고, 눈은 올빼미처럼 큰데 얼굴은 씨꺼멓고 턱이 짧은, 어쩐지 인상이 고약한 여자 더구먼요. 귀신 같고 심술궂게 뵈고." "어지간히 맘에 안 들었던 모양이군. 올 만한 일이 있어서 왔겠지요." "마님께서는 분명히 만나지 않으셨을 텐데 마침 마루에 나와 계시는데 그 사람들이 마당에 들어서는 바람에, 혹 양현아가씨 혼담 가지고 온 사람들 아닐까요?" 환국은 혼자 있고 싶었는데 안자는 전에 없이 말이 많았다. "그렇지는 않을 거요." 안자가 나가자 환국은 윗도리만 벗어던지고 방바닥에 나자빠지듯 눕는다. 천장을 쳐다보는데 천장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했다. '술이 과했구나. 무슨 놈의 말은 또 그렇게 지껄였을까?' 누우면 이내 잠이 들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았다. 돌아누워 본다. 홍성숙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기억이 있었다. 서울서 어머니와 함께 형무소에서 아버지와 면회를 하고 돌아오는 길, 열차 안에서 그를 만났 고 부산서 여관에 들었을 때 조용하와 함께 여관으로 들어오는 그를 보았다. 그 기억은 조용하의 자살에 이어 졌고 임명희를 생각하게 했다. 이웃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임명희, 조용하의 자살에 이어져서 얼마 전에 자살 한 박의사의 모습이 별안간 떠올랐다. 어머니가 맹장수술을 받았을 때 부산까지 달려왔던 박의사. 그때 환국은 그가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적개심이나 반감은 일지 않았다. 아버지한테는 미안한 일이 었지만 환국은 박의사의 순수한 애정을 아름답게 보았고 그의 고뇌에 동정했다. 아주 어릴 적에 아버지와 헤 어졌고 십여 년동안의 공백기를 어쩌면 박의사는 이들 형제를 위하여 부성적인 것으로 메워주었다 할 수도 있 었다. 그는 최씨네 식구들을 위하여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환국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반대편으로 돌아눕는 다. 안방에는 서희와 두 여자가 막 들여온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낮에 올까 했습니다만 안 계시면 어쩌나 싶어서 저녁을 먹고 왔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았는지요." 홍성숙의 말이었다. "괜찮소." 서희의 대답은 썩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습격이라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화급하게 만나뵐 일은 없습니다만 여쭈어볼 말이 있고 인사도 드릴 겸 해서." 여쭈어볼 말이 있다 했으나 서희는 그게 뭐냐고 묻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본다. 임명희의 후배라는 말을 서 희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홍성숙은 자기보다 대여섯 살 나이 아래일 것이다. 마흔에서 한두 살 넘 겼으면 여자치고는 사양길이겠지만 한편 무르익을 나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십여 년 전 서울서 내려오는 열차 안에서 홍성석이 자청하여 자기 소개를 하며 인사를 했을 때, 또 그의 언니 되는 양교리댁 부인과 함께 독창회 초대권을 가지고 찾아왔을 때, 그 무렵의 모습,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홍성숙은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다. 비대해진 것도 그렇고 늙기도 많이 늙은 편이었지만 몸 전체가 망가져버린 것 같은 인상이었다. 눈빛 은 초점이 확실치 않않고 시선은 끊임없이 움직였으며 마치 조울증 환자처럼 행동거지가 불안해 보였다. 미인 은 아니었지만 워낙 가꾸었고 여왕같이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다니던 여자가, 지금이라고 화려하게 치장을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화려한 그 치장이 오히려 육체의 초라함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낡고 때묻은 곳에 페인트 칠을 한 것만 같이 생동력을 잃은 얼굴에는 칠이 벗겨진 것처럼 분이 먹지 않아서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었 다. 아무리 가는 세월이 무섭기로, 저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건지 서희는 마음속으로 심히 놀라고 있었다. 홍성수의 옆에 앉아 있는 여자, 방금 무용가라고만 소개한 배설자라는 여자의 경우도, 젊기야 훨씬 젊었으나 맑고 잘생겼다 할 수 없는 그 얼굴이며 빼어나게 균형잡힌 몸매며 안자의 말대로 치렁치렁, 주름이 많이 잡히 고 긴 검정 새틴 치마에 역시 검정빛 블라우스의 차림아며, 지방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 제아무리 세련되었다 하더라도 이화감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어쨌거나 나란히 불빛 아래 앉은 두 여자는 몹시 희극적 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비극적으로 볼 수도 있었다. "정말 부인께서는 아직도 아름다우십니다. 아룸다움이 유지되는 무슨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용건은 내버려둔채 홍성숙은 아주 친숙해진 사이처럼 말했다. 서희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불로초라도 잡수셨습니까?" "..." "하도 늙지 않으셔서 그러는 것입니다. 설자씨 안 그래요?" 서희가 말이 없으니까 홍성숙은 배설자에게 동의를 구하듯 말을 걸었다. 배설자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 말씀으로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뵈오니까 신비스럽습니다." 말의 품격을 한층 올려서 경건하게 말했다. 그야말로 쌍나발이다. "그렇지? 심미적인 우리 예술가 눈에 저토록 완벽하신데 하물며 일반인들의 선망이야말로 말해 뭣하겠습니까. 조물주의 편애가 야속할 지경입니다." "과공도 비례라 했습니다. 그만들 하시지요." "아닙니다. 과공이라니요? 오히려 모자랐으면 모자랐지." '아무래도 한물간 사람 같구먼. 전에는 저렇게까지는 안 했는데?' "변하지 않는 것은 이 방안도 마찬가지군요. 십여 년 전 그대로예요, 설자씨." "예, 홍여사." 하자, 홍성숙은 다소 움찔한다. 대체로 홍성숙에 대한 배설자의 호칭은 세 가지가 있었는데 상황에 따라서 그 것은 적절하게 사용되었다. 동석한 살마들이 홍성숙을 대수로 여기지 않을 때 배설자는 마치 동료처럼 홍여사 하고 부르며 홍성숙의 콧대를 꺾고 자신을 돋보이게 했다. 그러나 홍성숙의 가족이나 친지들 앞에서는 언니라 부르며 매우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과시했고 홍성숙의 입지가 좋거나 자신의 이해가 걸렸을 때는 홍선생, 그 이상으로 홍선생님이라 칭할 경우도 있었다. 언젠가 불쾌해진 홍성숙이 따진 일이 있었다. "그거야 뭐 누구나 경우 따라서 호칭은 변하는거 아니겠어요?" 배설자는 떠밀어내듯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검고 암울한 눈동자는 홍성숙을 응시했다. 설자 넌 너무나 타산적이고 비정하다." "언니는요? 언니는 안 그런가요." "나는 널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어." "그건 언니 자신을 위한 일 아니든가요?" "나쁜 년!" 번번이 당하고 치사스럽게 싸우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배설자가 가지고 노는데 홍성숙은 그와 헤어지지 못했 다. 상종하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을 하면서도 사흘이 못 가서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배설자를 만나곤 했다. 홍 성숙의 외로움 때문이었다. 사회적 발판을 다 잃은 때문이었다. 그에게서 모든 것은 쇠퇴해가고 있었다. 초창 기의 성악가 홍성숙은 그 희귀 가치 때문에 존재했고 화려한 황금기를 누렸다. 그러나 자질이 뛰어나고 정통 적으로 공부한 후배들에게 밀리면서 급속하게 그는 퇴조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게다가 허영과 사치와 경박한 성품에 불미스런 사생활은 결과적으로 음악계에서 추방당한 것 같은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울분과 초조, 오뇌와 권태, 사그라지지 않는 야망을 안고 뒹구는 가정 생활은 황폐 그것이었고 살림에 무관심 한 나태한 생활은 그를 겉늙게 했다. 무골호인이지만 무미건조한 남편에, 슬하에는 자식도 없었다. 욕구불만에 서 정신없이 먹어대는 음식, 소화불량은 반복이 되고 비대해질밖에 없었다. 몸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배설자를 만났고 어울리면서 홍성숙은 별수없이 유한마담으로 전락해갔다. 배설자는 그런 홍성숙을 앞세 워 그 방면의 사회, 부유하면서 부패의 냄새가 감도는 소위 상류층에 교묘히 잠입해갔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배설자는 애국지사, 독립운동가의 딸이라는 탈을더 이상 쓸 필요가 없었다. 그의 부친이 대련에 살았던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상해에 있었던 것도 그러나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일본의 밀정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배설 자는 조선을 통치하는 당국과 맥이 통하는 여자, 권력을 배경으로 한 무용가 배설자로서 그는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다. 그가 경찰의 끄나풀인 것은 사실이었다. 경찰의 간부이자 죽은 부친과도 지면이던 곤도 게이지의 정 부인 것도 사실이었고. 언젠가 배설자는 무심한 듯 꾸미면서 홍성숙에게 홀린 말이 있었다. 조선의 예술가들을 통합하는 단체를, 관의 주도하에 결성할 것을 추진중이라는 말이었다. 홍성숙을 사로잡는 데 그 이상의 달콤한 미끼는 없었다. 관의 산하 단체, 그 후원으로 재기하고 싶은 욕망, 헛된 꿈을 꾸게 되었으며 통합 예술단체에 서 감투라도 하나 얻었으면, 홍성숙은 멋지게 자신을 추방하고 소외한 무리에게 일력을 가하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 예술자로서 낙오되지 않고 그 명맥이라도 잇고 싶었다. 이리하여 배설자와 홍성숙의 공생 관계는 굳어 졌던 것이다. 공생 관계라기보다 실은 배설자라는 매발톱에 홍성숙은 꼼짝없이 채인 것이다. 부당한 욕망이 없 었다면 어째 함정에 빠졌을 것인가. 소모를 재촉하는 함정에. "서울서도 이렇게 격조 높은 가구로 꾸며진 댁은그리 흔치 않지? 안 그래요? 설자씨." "그렇지요. 가구라기보다 제 눈에는 예술품으로 보입니다. 일본인들도 조선의 가구, 목기를 보면 사족을 못 쓰 던데요? 상당히 오래된 것 같기도 하구." "그럼 유서 깊은 집안이니까." "저 이층장 삼층장의 나무결 빛깔이 정말 기막히군요. 백동 장식의 디자인도 기발합니다." "솜씨 좋은 장인이 여러 해를두고 만들었을 거야." "아까부터 보고 있었지만 정말 황홀하네요." 기발이니 디자인이니, 유서깊은 집안이니, 황홀하다느니, 서로 질세라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서희는 희미한 미 소를 머금는다. 홍성숙은 서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울에는 자주 올라오신다는 얘긴 들었습니다만." "가끔 가지요." "저희들도 저희들 나름으로 사회 활동을 하고 있는 처지라서 좀체 찾아뵈올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설 자씨랑 바람도 쏘이고 유람하는 기분으로 왔더니 마침 계신다 하기에, 네 그렇지요. 저어 그리고 어떤 분의 부 탁도 있고 해서." 여쭈어볼 말이 있다는 데서 어떤 분의 부탁이라는 말까지 진전이 되었는데 아까처럼 그 말은 이어지지 않았 다. "평소 설자씨가 부인 뵈옵기를 소원하기도 했었지요." 시작부터 서툴렀다. 따지고 보면 가정의 주부에 지나지 않는 서희를 어떻게 내력을 알고 만나보고 싶어했는가. 그것에서부터 마각은 드러났는데 홍성숙은 알지 못했고 배설자는 눈치가 빨라서 눈살을 찌푸린다. 이 사람이 이렇게 주책이 없어요, 하듯이. "설자씨를 말할 것 같으면 제 동생이나 다를 바 없고 예술가라는 공통점도 있고 해서 여러 가지 동병상련하는 처지입니다. 조선과 같이 아직 미개한 나라에서는 성악가다 무용가다 하면은 제대로 인식이 안 돼 있는 것 같 더군요. 이런 풍토에서는 예술가가 걸어야 하는 길이 그야말로 가시밭길입니다. 보호는 못할망정 중상모략을 일삼으며 어떻게든 꺾어버리려는 악습이 있습니다." 불미한 소문을 의식하며 그것을 지우려는 듯 홍성숙을 말했다. 홍성숙은 말을 계속한다. "외국에서는 일류 성악가나 무용가라 하게 되면 국가의 보배요 국민들이 아끼고 사랑하며 보호를 받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박해를 당하기 일쑤지요. 하필이면 왜 예술가로 태어났을까 한탄할 때도 있답니다. 사람들의 의식 이 깨어야, 그래야 비록 약소 민족일지라도 그나마 대접을 받지 않겠습니까? 부인에게 이런 말씀 드리는 것이 좀 뭣합니다만 저도 그간에 겪은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숱한 낭설에 시달리기도 했구요. 접시바닥 같은 계집들 입방아." 배설자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홍여사 그런 얘기 좀," 하다가 서희를 보고 어중간하게 웃으며 "뭔가 억울해서 그러는가 봐요. 사람만 만나면 저렇게." 위하는 척하면서 주책을 용서하라는 뜻을 깔며 말했다. "내가 언제 사람만 보면 그랬어?" 이야기의 내용은 균형 잃은 것이며 상대를 고려에 넣지 않는 것이었지만 어조는 평이했는데 갑자기 고음이 퉁 겨오르듯 홍성숙의 어세는 날카로웠다. "말하는 홍여사는 모르겠지만 좀 그러는 편이에요. 신경과민 아닌가요?" "설자씨! 너무 덤비는 거 아니야?" 이성을 잃고 발끈했다. 비윗장을 확 긁는 말도 그랬고 말을 막은 것도 그랬고 특히 여사라는 호칭이 괘씸했던 것이다. 사실 유치할 지경으로 예술가를 연발하여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은 근래에 와서 생긴 홍성숙의 새로운 버릇이었다. 그러나 배설자는 홍성숙의 비윗장을 긁기 위해 한 말이기보다 어쩌면주로 침묵하고 있는 서희의 반응을 보기 위한 시도였는지 모른다.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세요. 누구나 다 겪는 일인데 뭘 그리 꼬장꼬장 생각을 해요." "하긴 뭐... 그렇기는 하지만 남의 일이니까 말로는 그러지만." 슬그머니 가라앉는다. 한동안 시무룩해 있던 홍성숙은 자신을 달래고 타이르는 것 같았다. "가끔 제가 이렇게 흥분한답니다. 용서하십시오. 나이 탓이지요." "그럴 때도 있지요. 개의치 마시오." 서희 마음에 일말의 동정이 일었다. 사람의 형상이 저토록 변했는데 성품인들 어찌 변하지 않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홍성숙은 누가 쫓자오기라도 하는가 다급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설자씨가 곁에서 늘 도와주어서, 동생 같으니까 성질도 부리곤 한답니다. 제 성질을 다 받아주고 무던하지요. 아끼는 설자씨를 무용가라고만 했습니다만 아무쪼록 부인께서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 가지 재능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서울서 공연도 한 번 한 일이 있었고 뜻있는 분의 후원으로 지금은 무용교습소를 운영하고 있 습니다. 본인을 앞에 두고 말하는 것이 좀 뭣하지만 체격을 보아도 그렇고 타고난 무용가예요. 최승희의 수제 자이기도 했구요. 하기야 뭐 제이의 최승희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비꼬시는 건가요?" 배설자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말을 계속한다. "게다가 설자씨는 일본인 실력자 중에 친분 있는 사람이 많아서 발전하기도 쉽지요. 또 여러 가지 어려운 중 개 역할도 맡아서 하고 있는 형편이며 사교의 범위가 아주 넓습니다. 우리의 형편이, 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희망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실현되지 못할 일이면 진작 버리는 게 좋고, 조선이 독립하리라는 것은 버얼써 물건너 간 일 아닙니까? 기왕지사 이렇게 된 바에야 일본과 서로 손잡고 상부상조하는 길밖에 더 있겠습니까? 조선 민족이 다 죽을 수는 없지요. 제가 듣기로는 부인께서 일본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이며 일본에 대한 이해 도 깊다 하더구요. 다만 바깥분이 그래서 심려가 큰 줄 압니다만 그것도 부인께서 하시기 나름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런 일에 대한 복안이라도 있어서 찾아왔단 말입니까?" 서희는 짐짓 관심이 있다는 듯 물었다. "네?" 어리둥절하다가 당황한다. 어디서 얘기가 그리고 빠졌을까 생각하듯 그러나 강하게 부정하는 몸짓으로 "아, 아닙니다. 이번에 찾아뵌 것은 그런 일이 아니며."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필요하다면 복안이야 왜 없겠습니까." 재빨리 배설자가 받았다. 그의 말에는 왠지 모르지만 소름 끼치는 것이 있었다. "네..." 애매하게 대답하고 서희는 배설자를 한동안 쳐다본다. 백해무익의 인물이라는 것은 초장부터 간파하고 있었지 만 배설자의 마지막 말에서 서희는 결코 소홀히 넘겨서는 안 될 여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횡설수설, 정신이 나 갔다 돌아왔다 하는 홍성숙에게 들러붙은 찰거머리 같았고 검정옷에 핏빛이 스쳐가는 것을 느낀다. '섣불리 상대했다가는 큰일날 여자다. 이런 종류의 여자는 흔치 않아.' "앞으로 정세가 나빠지면 염려되는 일이 생길지 모르나 아직은 우리 집안에 별일이 없으니." "네, 앞으로도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너무 노골적이었다고 생각되었는지 배설자는 일단 후퇴를 했고 대신 홍성숙이 드디어 본론을 꺼내는 것이었 다. "실은 따님을 한 번 본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를?" "네, 어떤 분이 함께 가자고 해서 따라갔습니다만, 학교 앞에서 기다리다가 본인 모르게 보았지요. 참 눈부시 게 아름답더군요." "어째 그러셨지요?" "물어보나마나, 선보러 갔지 뭣하러 갔겠습니까. 혼담이 많은 줄 알지만 제가 말하는 혼처는 나무랄 데 없을 만큼 거의 완벽하지요. 총각은 현재 동경에서 유학중인데 경응대학 법과에 다니는 수재구요. 인물도 잘 생겼습 니다. 까놓고 얘기하자면 우리 시댁과는 집안간인데, 해서 어릴 적부터 그 애를 보아왔습니다. 성품도 자상하 고, 마침 규수를 찾던 중이었는데 연비연비로 알게 된 따님이 마음에 들어서 찍은 모양입니다." "그 아이 내력은 아시오?" "물론 알지요. 그러한 약점을 물리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처녀 아닙니까? 눈부신 아름다움에 장차는 여의사 가 될 것이며 친정이 든든하질 않습니까? 그쪽에도 약점은 있지요.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시어머니 될 사람이 홀로 되어 아들딸을 기르다보니 살림이 넉넉지는 못합니다." 벌써 감윽 잡은 서희의 표정은 우울해 보였다. "부인께서는 규수를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사랑받을 만한 처녀였습니다. 옛 날 생각 나시지 않습니까?" "..." "형부하고 저의 언니가 댁의 아드님을 두고 몹시 탐을 냈지요." "아아." "성사가 되지 못해서 얼마나 서운하게 생각했던지요. 우리 소림이도 손 등의 그 흠집만 없었다면 원하는 만큼 사윗감을 고를 수도 있었는데, 하기는 지금 잘사니까 다행이지만 생각해보면 어찌 그렇게 파란만장을 겪으면 서 혼사가 이루어졌는지 신기합니다. 가난뱅이 의전 학생, 의관의 집 자식이라고는 하나, 게다가 짝사랑하던 간호부가 학비를 보태어주었으니, 장래를 믿고 한 일이고 보니 그 분란이 오죽했겠습니까? 용모로 보나 학력 으로 보나 어느 모로 보아도 도저히 짝이 될 수 없는 여잔데 참말 분수 모르고 날뛰었지요. 조카사위는 말하 더군요. 공부는 해야겠고 가난이 죄다, 금전을 내미는데 물리칠 수 없었더라는 거예요. 약속한 바도 없고 손목 한 번 잡아본 일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때 형부가 현명하게 단안을 내렸지요. 그 간호부에게 적잖은 돈을 주고 해결을 보았는데 그렇게 하자니 의견이 분분하고 말도 많았고 양교리댁 체면도 많이 깎였습니다. 친척들은 딸 을 늙혔음 늙혔지 그런 데 시집을 보내느냐고 노골적으로 말하곤 했지요. 사위의 학비 일체를 대고 병원까지 차려주었으니, 우리 언닌 억울해서 많이 울곤 했습니다. 부인께서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소림이도 이 댁 따님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처녀였습니다. 집안 좋고 재물 있고 여학교도 서울서 명문을 나왔고 삼박자가 다 맞았는데, 운명이겠지요. 손등의 흠집은 치명적인 것이었으니까요." 듣기 좋게 흠집이라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치명적인 혹이었던 것이다. 양현의 경우도 그 혹 못지않게 그의 내력은 거의 치명적인 것이다. "솔직히 얘길 하자면 규수의 출생을 상쇄하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서희는 대꾸 없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지참금 문제 아닌가요?" 배설자의 말이었다. "말하자면 그렇지." "혼담 가져간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내용은 잘 몰랐는데 아주 약고 계산이 빠른 사람들이군요." "설자씨! 혼담이란 본시 그런 거 아니겠어? 피차 손해 안 보려는, 그래서 고르는 거구." "여의전을 나오면 장차 의사 아니에요? 거기다 지참금까지, 너무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 시댁 집안이라 해서 그쪽 편을 드는 것도 아니구. 그만한 혼처도 쉽지 않겠다 싶어서 권하는 건데. 시집도 안 간 설자씨가 뭘 안다구 그래." "홍선생이 맘을 써주어서 고마우나 글세 섭섭하게 생각지 않았으면 좋겠소. 우리 아이는 이미 정혼한 데가 있 어서." "네? 정혼을 했습니까?" "했어요." "이거 참 헛수고를 했군요." 홍성숙은 약이 올라 말했다. 서희는 드물게 소리내어 웃으며 "용서하시오. 사람의 욕심이란 원래 미련한 것이어서 더 좋은 자리일까? 하고 듣고 있었지요." "그러면 정혼한 곳이 월등하다 그 말씀입니까?" "그런 셈이지요. 지참금은 필요 없으니까." "..." 맥을 놓고 홍성숙은 서희를 바라본다. 하직을 하고 문밖에 나온 성숙은 "우롱을 당한 것 같다." 하며 길바닥에 침을 뱉었다. "청혼한 곳이 있다는 것은 빈말인 거예요. 완곡하게 거절하기 위해 그랬지 않나 싶은데." "흥! 기생 딸을 지참금 없이 누가 데리구 가누." "지참금보다 장래 의사가 실속은 더 있는거 아니유?" "그래도 여기 조선에서는 아직 안 그래. 우리 소림이는 손등뿐이지만 그 아이는 몸뚱어리 전체가 치명적이야. 지참근 주고도 그런 혼처 구하나 두고보면 알어." "유부녀가 외도를 하면서 꽤 구식 이론이네." 둘이 되면서부터 이들 사이에 오가는 말은 거칠었고 직설적이다. 부패되어가는 감성을 거리낄 것 없이 토한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내 코가 석자나 빠졌는데 남의 일, 실은 처음부터 관심 없었어. 끝없이 권태롭고 죽고 싶 을 만큼 권태로워. 서울을 떠나와도 속 씨원한 그런 일이 있어야지." "밤거리를 좀 걸어봅시다." "그러자꾸나." 하다 말고 성숙은 걸음을 딱 멈춘다. "설자씨, 아까 왜 그랬지? 그렇게 날 망신주어도 되는 거야?" "다 언닐 위해서 한 말인데 뭘 그러우?" "말은 꽃같이 아름답고 비단같이 매끄럽지만 냄새가 나. 창자까지 훤히 들여다보여. 우리가 하루이틀 보는 사 이냐?" "또 시작하네." 혀를 차면서 설자는 홍성숙을 내버려두고 간다. 홍성숙은 또 부지런히 그를 따라간다. "나 솔직히 말해서 홍여사 할 땐 싫어! 설자 너 나이 몇인데 날 보고 여사라 하니?" "밥 짓고 빨래하고 애 낳아 기르는 아낙이 아니잖아요. 사회활동을 하는데 그럼 여사라 하지 뭐라 하지요? 그 말이 어때서? 진주까지 와서 또 쌈 할래요? 그렇담 나 내일 갈 거예요. 바쁜 사람 끌고 와서는." 이들은 어두운 길에서 불빛이 환한 신작로로 나왔다. "생각해보니, 생각해보나 마나지 뭐. 희망이 없어. 집이 지옥 같애. 나이 젊다면 연애하다가 동반 자살하고 싶 어." "침이나 바르고 하는 소리예요? 나이 젊다면 명성을 위하여 동분서주, 혈안이 되어 서울거리를 쏘다닐 걸요? 연애는 무슨 놈의 연애, 계산된 정사지 뭐." "너나 나나 피장파장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오겠든데요?" "누가?" "방금 만난 여자." "최서희? 그거 대단한 여자야. 철옹성이란 말이 있지. 그 여자 철옹성이야. 함락 안 될 거야. 손가락 빨지 말 구, 한데 어지 그리 늙지도 않았지? 볼로초 삶아 먹었나? 그런데 말이지, 설자는 바늘로 찌르면 피가 나올까? 검은 피가 나올지도 모르지." "왜 이래요? 고약하군. 술도 안 마시고 주정하나?" "알어.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느 것, 넌 항상 그랬잖았어?" "하면은 손해볼 시비는 왜 거는 거유?" "심심해서 그런다. 설자 너는 복수심이 강해. 무섭단 말이야." "홍여사는 안 그렇고?' "까불지 마. 쥐꼬리만큼 있었던 것도 옛날 옛시절이고 이젠 맹물이다. 너는 질기고 무자비하고 사악해. 독사같 이." "맞아요. 홍여사는 착해서 버림받는 거예요." "뉘한테?" "조용하, 나같음 놓아주질 않지. 아주 쉬운 상댄데, 바보라구요." "내가 바보라 그 말이지? 흥, 빚 받을 것 없었어. 계산은 다 끝났던 거야." 밤바람이 제법 썰렁했다. 지상에는 불빛이 있고 하늘에는 별이 많았다. 오가는 사람들이치렁치렁, 검정옷 입은, 밤에 보니 흡사 마귀같은 배설자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지나간다. "언니 요즘 형부하고 각방 쓰나요?" "그건 왜 물어." "증세가 날로 심해지니 물어보는 거지요. 정서불안 욕구불만, 형부가 안아주지 않는 모양이죠?" 설자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음탕한 웃음이었다. "옛날 옛적에 졸업했다. 누가 너같은 줄 아니? 한 남자 가지고는 모자라는 여자, 참 살 맛 나겠다." "어디루 가는 거요?" "몰라." "언니댁에선 홍여사 환영 안 하는 눈치든데 밤늦게 들어갔다가 구박받으면 어떡허지?" "형제도 유세해야 대접하는 거야." "유세보다 평판 때문이겠지요." "그럴지도 모르지. 언니는 요조숙녀니까." "언니." "무슨 청이 있어? 겁난다아." "조카딸 집으로 가요. 방도 많은데." 배설자 목소리에 탄력이 실린다. "그럴까?" "술 사가지고 가요." "그러려무나." 하다가 "그만두지. 술 있을 거야. 내놓으라 호통치면 돼. 조카사위가 날 괄시하지는 않아. 저이들이 인연 맺은 것 그게 다 뉘 때문인데? 가자." 홍성숙의 목소리에도 활기가 돌아왔다. 그들은 허정윤과 양소림이 사는 병원 뒤편의 살림집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밤은 제법 저물었는데 응접실에 내외가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잠이 든 모양이다. "밤늦게 웬일이에요?" 소림이 놀라서 일어섰다. "이모님이 웬일이십니까." 정윤이도 신문을 놓고 일어섰다. "우리 또 왔어요." 배설자가 명랑하게 말했다. "네. 오셨어요." 소림이 배설자에게 인사를 했다. "점심을 얻어먹었는데 또 왔지 뭐냐. 잠자리 빌리려고. 허서방 자네도 알지? 자네 장모님께서 나를 박대하는 것."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룻밤만 잠자리 빌리자꾸나." "빌리다니요? 모셔야지요." "됐다. 소림아." 소림은 연민 어린 눈으로 홍성숙을 바라본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것 같은 홍성숙, 옛날 조용하에게 편지 심부 름을 시켰을 때 불쾌하고 불결해 보였던 홍성숙, 그러나 그는 소림을 매우 사랑했다. "우리 술 한잔씩만 하지. 우리 넷이서 괜찮지 허서방." "그럼요." "설자씨우리 조카사위 호남이지?" "이모 왜 이래요? 술 마신 사람같이." 소림이 언짢아하며 말했다. "잔말 말고 술이나 가져와. 너 내 주량 알지 않니? 주정꾼도 알콜중독자도 되긴 글렀어. 자아 설자씨 앉아. 사 실은 우리 허서방을 내가 병원에서 발견했지. 박효영 그 사람 병원에서, 참 박의사가 죽었다며?" "네." 정윤이 대답했다. 소림은 주안상을 차리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살했다며?" "네." "잘 죽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순정파는 죽어야 해. 그런데 설자씨 병원에서 허서방을 발견했을 때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이야 미꾸라지 용됐고 기생들이 목을맨다 하지만 그땐 초라했어. 하나 한가지 귀한 것은 청순했지. 처가 덕에 돈도 벌고 의사 로서 성공은 했으나 또 화목한 가정도 꾸몄지만 그때 그 청순함은 간 곳이 없어. 나같이 명성을 쫓아 다니는 여자가 어찌 허서방을 발견했을까? 그리고 적극적으로 내가 밀었거든." "알고 있습니다." "우리 소림이같이 착한 아이. 허서방 명심하게, 처가에서 얻은 재물보다 자네를 복되게 한 건 우리 소림이야." "이모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겠지요." 배설자가 한마디 했다. 배설자는 백만불짜리 다리를 과시하듯 소파에 깊이 몸을 묻고 다리를 포개어놓고 있었 다. "이모라서 하는 얘긴 아니야. 모두가 다 별신통이지만 이모로서 소림에게 만점받게는 돼 있었는데 다만 한가 지 그 애한테 부끄러운 일이 있었지." "이모 관두세요!" 술과 안주를 준비해온 소림이 날카롭게 말했다. "알았다. 소림아씨." 소림은 낙오자같이 돼가는 홍성숙에게서 때때로 솔직한 면을 보는 것이 괴로웠고 가엾게 여겨졌다. 그리고 지 난날의 불쾌감, 홍성숙에 대한 불결하다는 느낌이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탁자에 놓은 술잔에 술을 붓는데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봐. 내가 할게." 홍성숙은 소림에게서 술병을 받아든다. 방으로 들어온 소림은 우는 아이를 안고 다독거리며 '가엾은 이모, 어찌 사람이 저 모양으로 변해가는 걸까? 아무도 도울 수가 없어. 명성이란 마약 같은 것일까? 마약이 떨어진 아편쟁이... 이모는 아편쟁이처럼 변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명성은 나비 같은 걸까? 너무나 이르게 서리가 내렸어. 가엾은 이모. 어머니 아버지는 왜 좀 따뜻하게 대해주질 않는 걸까?' 소림은 아이를 자리에 누인다. 아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또 울음을 잡힐 모양이다. 소림은 아이 옆에 누워서 다 독거리며 눈을 감는다. 화려했을 시절의 홍송숙을 떠올려보려 했으나 그 모습 대신 응접실에 앉아 비대한 홍 성숙의 모습만 떠오르는 것이었다. 잠은 깨었으나 허정윤은 눈을 뜨지 않고 누워 있었다. 간밤의 일이 게저분하게 떠올랐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는데 머리가 무거웠다. 가슴도 답답했다. 돌아눕는다. 이상한 밤이었다. 악몽 같기도 했다. 붉은빛과 검은빛이 여울같이 휘말리어 눈부시게 돌고 있는가 하면 선명하 게 두 가지 빛깔이 윤곽을 드러내며 갈라지기도 했다. 강렬하게 다가오는가 하면 몽롱하게 멀어져가기도 했다. 정윤은 가끔 흰색과 붉은색의 대비에서 공포를 느낄 때가 있었다. 그것은 수술실 안의 환자 피와 의사의 흰수 술복에서 연유된 것인데 그가 공포를 느끼는 것은 생명이 겪게 되는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생명의 존재 여부 를 기다리는 안타까움 때문도 아니었다. 생명 자체의 부재를 절감하기 때문이다. 여자의 눈은 집요하게 타고 있었다. 때론 그 눈빛이 도깨비불처럼 날아와서 이마빡에 꽂히곤 했던 어젯밤의 느낌들이 되살아난다. 어젯밤 처럼 피가 싸아! 하고 가시는 것 같다. 오렌지빛 전등과 여자의 검은 옷, 창밖의 검은 옷, 그가 눈을 내리깔 떄는 세필로 그린 것 같은 눈매의 선과 입술 턱의 선, 양어깨에 흐르는 선이 선율같이 잔물결같이 흔들렸다. 바라보며 웃을 때 정윤은 여자의 하얀 이빨이 볼에 와서 닿는 것 같았다. 한 마리의 검은 표범이었다. 꼬고 앉 은 긴 다리와 긴 팔은 뱀같이 전신을 휘감아오는 것만 같이 꿈틀거렸다. 섬찟섬찟한 느낌과 함께 이상한 흥분 에 몸이 떨렸다. 그것은 저주 같았고 압박 같았고 여자는 저주의 화신같이 어두웠다. 죄의 심연같이 어두웠다. "닥터 허." 배설자가 불렀다. "네." "젊은 여자의 가슴을 열어놓고 청진기를 댈 때 느낌이 어때요? 의사도 남자잖아요?" 홍성숙은 몇잔 술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었고 우는 아이를 달래러 들어간 소림은 아이와 함께 잠이 들 었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그리 정확하게 발음을 하십니까?" 정윤이 되물었다. "뭘?" "닥터 허라 하셨지요?" 선생님, 의사선생님, 허선생, 원장님, 귀에 익은 말은 그런 것이었다. 일본식 발음의 도쿠도루라는 호칭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닥터라니. "몰랐어요?" "...?" "나 대련서 살았고 한때는 상해에도 있었어요. 그곳 영어는 영국인 혹은 미국인의 혼바시코미의 영어예요." "영어는 잘하십니까?" "좀 배우다 말았어요. 한데 닥터 허, 당신 내 묻는 말엔 대꾸 안했어요." "그런 대답을 왜 당신한테 해야 하지요?" "현명하구먼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거짓말보다는 훨씬 정직해. 호호홋 호호홋... 자아 내 술 한잔 받아요. 이 술은 천국으로 가는 술이야요." "죽기는 싫은데요?" "능청을 떠는 거요? 아니면 아직 애숭인가?" "글쎄올시다." "우리들의 천국은 바로 눈앞에, 손이 닿는 곳에 있고 예수쟁이들 천국은 알지 못할 먼 미래, 있는지 없는지 모 르는게 천국 아니겠어요?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 예술 긴 거야 뭐 우리가 죽은 뒤 일이니까 상관할 바 없고, 인생은 짧아요. 다만 짧을 뿐, 욕망을 위해 사는 것만도 너무나 모자라. 안 그래요? 닥터 허." "그렇군요." "극기하고 인생의 가치를 찾고 도덕을 준수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그 따윈 모두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지. 안 그래요? 닥터 허." "허무주의군요." "천만에, 나는 어느 누구 못지않게 인생을 사랑하는 쾌락주의예요. 술 몇잔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내 옆의 이 여인은 쾌락주의도 도덕주의도 아닌 오락가락, 명성만 잡으려고 기를 쓰다가 이 지경으로 무너진 거 아니겠어 요?" "너무 심한 말씀 아닙니까?" "심한 말? 언제나 사실을 말하면 심하다고들 하지. 인간이란 뭣이든 걸치고 가리기를 좋아하는 동물인가 봐 요." "배선생께서는 그럼 발가벗고 사십니까?" 배설자는 깔깔대고 웃었다. '그러고 싶지만 호호호, 호호. 나 육체에는 자신이 있거든요. 하지만 옷을 입는 것은 생리적 문제고 내가 가리 면서 사는 것은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아요. 삶은선택하는게 아니야요. 욕망을 위해 가는 거지. 욕망을 선택하는 게 아니며 가지는 거. 모든 것은 가지기 위한 수단 아니겠어요? 안 그래요? 닥터 허.' 배설자는 눈을 치뜨고 허정윤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탁자 위에 팔꿈치를 짚었다. 커다란 눈이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정윤은 몸을 젖히며 "발상이 일본식이군요." 거의 무의식적으로 한 말이었다. "뭐라 했어요?" "남의 나라를 먹어치우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말입니다." "애국자시군요. 뜻밖인데요?" 정윤은 멋쩍게 웃었다. 이때 소림이 잠이 깨었던지 거실로 나왔다. "안 주무실 거예요?" 정윤은 저도 모르게 화다닥 일어섰다. 배설자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소림은 "이모! 여기서 주무시면 어떻게 해요? 일어나세요. 방에 들어가서 주무셔야지요." 소파에 기댄 채 잠든 홍성숙을 흔든다. "부인께서는 청초하시고 정결하시고 사바에 계시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 같아요. 수녀원에나 가실 걸 그랬습니 다." 성숙을 깨우다 말고 소림은 배설자를 똑바로 쳐다본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돼 있었다. "제가 실례된 말씀을 드렸습니까? 술잔 들어간 탓이라 생각하세요." 하고는 경멸하듯 배설자는 웃었다. 정윤은 다시 몸을 뒤척이다가 베개를 가슴에 받치고 담배를 찾아 붙여문다. "일어나셨어요?" 소림이 방에 들어오며 말했다. "음." 몸을 일으킨 정윤은 재떨이를 끌어당겨 담뱃재를 턴다. "그 사람들 일어났소?" "아니오." 소림은 올곧잖게 대답했다. "어젯밤 기분이 상했던 모양이군." "이모도 참, 저런 여자하고 왜 어울리는지 모르겠어요." "이름난 무용가라는데 뭐가 어때서." 하고 정윤은 소림의 눈치를 살핀다. "이름난 무용가라구요?" 눈살을 찌푸리며 소림은 남편을 쳐다본다. "예술가라서 그렇게 자유분방한 모양이지?" "자유분방하기보다 예절을 모르는 거예요." 수녀원에 갈 걸 그랬다는 말은 소림에게 상당한 상처를 준 것 같았다. 세수를 하고 들어오면서 정윤은 "그 사람들 깨우지 말아요. 밥상도 안방으로 가져오구." 그러는데 장모 홍씨가 들이닥쳤다. 홍씨의 안색이 나빴다. 항상 조촐하던 옷차림이 오늘 따라 초조해 보였다. "아직 병원에 안 나갔군." "네. 늦잠을 잤습니다." 정윤이 앉음새를 고치며 말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갔나?" "갔어요." 소림이 대답했다. "윤이는?" "미자가 업고 나갔어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모 여기 있지?" 하고 홍씨는 물었다. "네." "그럴 줄 알았다." "..." "그래서 내가 왔지. 젊은 사람들한테 이 무슨 망신인지, 허서방도 그래서 어젯밤 잠을 설쳤겠구나." 정윤은 저도 모르게 당황한다. 장모가 자기 심중을 뚫어보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 그랬다기보다." "말 안 해도 알 만하다. 어째 그 꼴이 되어가는지... 한심스럽다. 그나마 혼자 왔으면 나 말도 않겠어. 그 때위 로 논다니 같은 계집을 달고 와서 이웃 사람들 볼까 두렵구나." "예술하는 사람이라 그렇겠지요." 사위 말에 발끈해진 홍씨는 "춤추는 것도 예술인가? 그럼 기생들 모두가 예술가겠구나." 언성을 좀 높였다. 소림이 받아서 "어머니, 그분은 현대무용하는 사람이에요." "현대무용이고 뭐고 창피스러워서." "남인데 뭐... 그보다 조반은 하셨어요?" "이 애가? 지금이 몇 신데?" "이모 땜에 속상해하지 말아요." "속 안 상하게 됐니? 허서방 보기도 민망하다. 조카딸 생각을 한다면 그런 걸 끌고 여기 와서 처자빠져 자겠 니?" "어머니가 이해하세요. 이모도 여러 가지 괴로우니까 내려왔을 거예요. 저는 왠지 가슴이 아파요." "성숙이는 그렇다 치자. 따라온 그 계집 꼬라지가 그게 뭐냐. 젊은 것이 집안에 어른 계시는 것도 아랑곳없이 잠옷 바람으로 칫솔 입에 물고서 마당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다니질 않나. 너 오라비가 마주치고서 기겁을 했다는구나. 너의 아버님도 민망하여 마당에 나오질 못했다. 아무리 내외가 없어진 세상이기로 그리 막돼먹고 망측스런 계집은 처음 봤다." "오늘 내일 서울로 갈 거예요. 이모 체면도 있으니까 참으세요." "너의 이모 체면 버린 지가 언젠데 그런 말을 하니?" 찬모가 조반상을 들여다놨다. 소림이 밥그릇의 뚜껑을 벗겼다. "저, 혼자 먹겠습니다." 정윤은 수저를 들며 홍씨보고 말했다. "어서 들게.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을걸세. 시간이 수을찮이 지났구나." 정윤은 국에 밥을 말아 술 먹다가 상을 물리고 장모를 피하여 병원으로 나왔다. 왠지 장모는 자기 속을 환하 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불안하고 두려웠던 것이다. 홍씨도 사위가 비켜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던지, 왜 밥을 그렇게 들고 마느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동생에게 따지려고 단단히 작심하고 온 것 같았다. 병원에는 서너 명의 환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울한 얼굴로 대충대충 환자를 보고 난 정윤은 담배를 붙여물 고 창가에 가서 거리를 내다본다. 단조롭고 권태스런 언제나의 그 거리였다.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는, 하얀 길 위에 가을 햇빛이 튀고 있었다. 번화가에서 비켜선 거리의 사진관, 약국, 양복점 그리고 담벼락, 담벼락에는 시들시들한 나팔꽃 줄기가 걸려 있었다. 평범했지만 아이를 셋이나 낳은 결혼 생활은 십 년이 넘었다. 처음 이 삼 년은 돈에 팔려온 것처럼 위축되어 소림에 대한 애정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의 손등에 난 혹을 볼 때마 다 정윤은 혐오감을 느끼기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나 큰애가 자라고 아우를 보고, 병원을 개업하여 성공한 의사로서 지위가 확립되고부터 그런 심적 갈등은 극복이 되었고 소림을 사랑했 으며 처가에 대한 부담감도 엷어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 불우했던 시절의 꿈을 꾸는지 모르겠다.' 그의 꿈은 항상 우중충했다. 가난했던 청소년 시절의 풍경이 꿈속에서 재현되곤 했다. 박효영의원의 그 좁은 방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꾸었던 꿈, 시골의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문짝이 없어진 자기 방에 서 있다든지 문짝 을 찾아 헤맨다든지, 산에 가서 칡뿌리를 캐는데 무지무지하게 큰 칡뿌리가 어느덧 무꼬랑지처럼 작아져 안타 까워했다든가, 그런 중에서도 정윤은 일념에 두세 번은 숙희의 꿈을 꾼다. '나는 너에게 결혼을 약속한 일이 없다! 사랑을 고백한 일도 없다! 동정은 했으나 사랑한 일은 없었다! 학비를 보내달라고 부탁한 일도 없다!' 그렇게 아우성을 치다가 깨곤 했다. 그 꿈은 숙희가 내미는 돈, 숙희의 심정을 빤히 알면서 거절 못하고 받은 돈, 그 사실을 강하게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마음속 깊이 물려든 치욕의 가시였다. 숙희도 이제는 남의 후실댁 으로 시집을 갔고 아이도 하나 낳았다는 소문인데 정윤의 마음속에 박힌 가시는 빠지지 않았다. 그 가시는 숙 희의 행복과 불행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어쩌다가 거리에서 숙희를 만나는 일이 있었다. 숙희는 도전적으 로 정윤이를 쏘아보곤 했다. 입술을 실룩거리며 어디 얼마나 잘사는가 두고보겠다는 저주의 눈길을 퍼붓기도 했다. 그때마다 정윤은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낀다. 이성을 잃고 덤벼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빚진 것 없다! 너에게 빚진 것 없다! 나는 너에게 학비 보태달라 부탁한 일이 없다! 책임질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결혼하겠다는 약속도 한 바 없고! 가난하고 불우하여 호의를 받은 죄밖에 없다! 언제까지 날 괴롭혀야 하는가!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지불했다! 그래서 아직 남아 있단 말이야?' 숙희 눈빛에 대하여 정윤은 마음속으로 아우성을 쳤지만 여전히 치욕으로, 세월이 흘러가도 치유되지 않았다. 치유되지 않는 것이 정윤은 억울했다. 숙희의 꿈을 꾸지 않고 숙희를 만나지 않는다면 잊어질 수 있는 일이었 는지 모른다. 정윤은 다른 지방으로 옮겨갈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처가와의 유대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 다. 그런데 정윤은 창밖을 바라보며 어떤 계기도 없이 지난 일을 왜 생각하고 있었는지, 분명히 그는 어떤 망상으 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간밤의 일 때문이다. 십여 년 결혼 생활에서 아내 이외의 여자와 전혀 접촉이 없 었다 할 수는 없다. 그는 몇 번인가 외도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알게 된 기생, 취중을 핑계삼아 여자와 동침한 일이 있었다. 그것을 소림이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그런데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 었는가. 아무 일도 없었다. 술 마시고 얘기한 것밖에는. 그러나 실제 이상으로 배설자와 간음하고 치정의 극을 넘나드는 것 같은 느낌이 머릿속에 눌러붙어 잇는 것은무슨 까닭일까. 그리고 또 그것에서 오는 죄책감이 강 렬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무서운 여자다! 난 일찍이 그같은 여자를 본 적이 없다! 악마같이 나를 끌어당겼다.' "선생님."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돌아보았을 때 간호원의 난처해하는 얼굴이 있었다. 그새 환자가 밀린 눈치였다. 열두시까지 환자가 붐비는 시 간이다. 정윤은 다 잊고 의사로서 환자에 전념했다. 환자들이 거의 빠져나가고 열두시 반쯤 됐을 때 환자의 발길은 뚝 끊겼고 병원 안은 이상한 침묵 속에 가라앉 았다. 정윤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목을 젖혀 천장을 올려다본다. 몹시 피곤했던 것이다.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하는데 집안 사정이 어찌 되었을까? 장모님은 가셨을까? 처이모는? 그 여자는 갔을까?' 어쩐지 냉큼 일어서지질 않았다. 만일 그들이 아직 집에 있다면 자신의 처지가 난처해질 것 같았다. '이러고 좀 있어보는 거다.' 정윤은 책상을 밀어내고 두 다리를 쭉 뻗었다. "선생님 전환데요?" 진찰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며 간호원이 말했다. "어딘데?" "여자분인데요?" 전화는 조제실 옆 벽면에 있었다. "여보세요?" "아! 닥터 허, 나 배설자예요." "웬일이십니까?" "지금 여관에 있어요. 말하자면 쫓겨난 셈이지요." 하고는 깔깔 웃었다. "농담이겠지요." "농담이긴? 장모님께서 홍여사를 족대기는데 내가 아무리 강심장이기로 뭉개고 앉아 있을 수 있겠어요?" "이모님도 함께 계신가요?" "홍여사는 장모님께서 데리고 갔어요. 아무렴 동생을 여관 신세지게야 하겠어요? 정말 서러워서 어쩌지?" "장모님께서, 그러실 분이 아닌데 이모님 땜에 화가 나셨겠지요." "나 기분 좋아요. 해방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 그런데 닥터 허, 날 위로해줄 사람은 당신뿐인데 어쩌실래 요?"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진담으로 받으면 어쩔려구요." 하고 나서 정윤은 아차! 했다. "낯선 고장에 와서 외톨이가 된 내 심정 알겠지요? 지금 당장에라도 만나서 위로받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고 저녁에 만나고 싶어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야 해요!" "안 됩니다." "부담 가질 것 뭐 있어? 여행이란 사람 마음을 굉장히 로맨틱하게 하는가 봐요. 하여간 저녁 여덟시에서 아홉 시까지 촉석루에서 기다릴 게요." "그러지 마십시오." "지금은 그러지만 마음이 변할 거예요. 하여간 난 기다린다니까." 하고는 전화가 뚝 끊겼다. 정윤의 얼굴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 보는 미자가 조르르 달려왔다. "선생님, 점심 드시러 오시라 캅니다." "알았다." 정윤은 집으로 들어갔다. "당신 얼굴이 왜 그래요?" 소림이 물었다. "어떤데?"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창백해요." "간밤에 잠을 못 잤고, 환자들도 많아서." 방으로 들어온 정윤은 팔베개를 하고 누었다. 심장이 멎은 것 같았는데 눕는 순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뿌 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고 한편 것은 무서운 심연이라는, 상반된 강렬한 감정과 이성이 팽배하여 사투를 벌이 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림이 밥상을 들고 왔다. "그 사람들 갔어요." "음." "배설자 씨가 여관으로 가겠다며 먼저 나갔어요. 이모는 나중에 어머니 따라 갔구요. 어머니가 굉장히 화를 내 셨어요. 그리고 당신한테 미안하다구." "나한테 미안할 것 없구." "역시 기분이 안 좋았든 모양이지요? 당신." 정윤은 밥상을 끌어당기며 소림을 힐끗 쳐다본다. "하긴 되잖은 계집이더군. 삼류의 창부 같았어. 예술가는 무슨 놈의 예술가? 생긴 꼬라지를 보아도 입맛 떨어 지게 돼 있지. 아닌게 아니라 이모님도 그 여자하고 어울리면 좋은 평판은 못 듣겠더군. 한마디로 재수 없는 갈보라." "당신? 어찌 그리 입이 험해요? 전에 없는 말을 서슴없이 하네요?" 소림이 질색을 한다. "내가 어쨌기에?" 정윤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아연한다. "상스럽게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어요?" "불쾌해서 그러오." "남 들을까 무서워요." 그러고는 묵묵히 밥을 먹던 정윤은 밥상을 밀어냈다. "나 굉장히 피곤해요, 한숨 잘 테니까 깨우지 말아요." 정윤은 소림이 깔아준 요 위에 쓰러지듯 눕는다. 세시가 넘어서 정윤은 가슴을 짓누르듯 답답하고 무거운 잠에서 깨어났다. 계속하여 꿈을 꾼 것 같았는데 뚜 렷이 기억에 남은 것은 없었고 마치 쓰레기통처럼 머릿속이 복잡하고 지저분했다. 병원으로 나왔다. 오전에 한꺼번에 몰렸던지 기다리는 환자는 별로 없었고 대합실에서 귀남이와 함게 기다리 고 있던 장연학이 일어섰다. "오셨습니까." 친밀한 어투로 정윤이 말을 걸었다. 박효영의원에서 잔뼈가 굵어진 정윤이는 자연 최참판댁 식구들과 모두 잘 아는 사이였으며 따라서 그 집 일을 도맡아 해온 장연학도 오랫동안 정윤과는 친숙한 사이였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좀 기다리기는 했는데." 박의원에서 정윤이 조수로 일했을 때 말을 놓고 지낸 사이였기에 장연학의 말씨는 다소 어정쩡했다. "들어오십시오." 귀남을 앞세운 장연학은 정윤을 따라 진찰실로 들어간다. "좀 어떻습니까?" 정윤이 물었다. "부기는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좀 빠졌군요. 그런데 약은 아직 남아 있을 텐데요?" 그러니까 병원 올 날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윤은 습관적으로 진찰을 했다. "실은 의논을 좀 할라고 오긴 왔는데." 입맛을 한번 다시고 나서 "여관에 있으니까 아무래도, 챙기노라 챙기지마는 음식도 때맞추고 간맞추고 일이 충실찮은 것 같고 저거집만 큼이야 하겄는가. 아이가 또 염치발라서 누워 있기도 안 편한 모양이라. 그래서 집에 보내어 정양을 하믄 어떨 까 싶어서, 약은 여기서 타다가 보내주믄 될 기고." 정윤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귀찮아서 그러는 거는 절대 아닌께 가서 안 된다믄 물론 내가 데리고 있을 기고." "집에서 지시한 대로 음식 조절만 잘한다면 별 지장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많이 좋아졌어요. 명심할 것 은 절대로 짜게 먹여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정윤은 귀남의 부기가 남은 얼굴을 유심히 쳐다본다. 병은 신장염이었다. 처방을 써서 조제실에 넘긴 정윤은 모처럼 환자도 없고 한가하여 그랬는지 "여관은 어떻습니까? 잘 돼갑니까?" 하고 물었다. "여관 해가지고 무신 떼돈을 벌겄나? 식구들 입치레나 하고 빚안 지믄 되는 기지. 요새는 제법 짭짤한 편이구 마는. 여관업이란 철을 타니께." "다른 사업도 하실 수 있을 텐데 하필이면 여관업입니까?" "이런 시국에 멀 해도 다 마찬가지지 머. 시국 안 타는 일이라 카믄 병원밖에 더 있을라고? 어쨌거나 이렇기 성공을 했이니 고생한 보람이 있고 참 고마운 일이제. 아이들은 잘 크는지 모리겄네." "잘 있습니다. 환국이 윤국이도 잘 있겠지요?" "그 아이들이야 별일이 있일까마는... 편안하게 사는 사램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참 양현이 그 아이가 여의전에 다닌다면서요? 참 세월이 빠릅니다." 장연학은 드물게 환하게 웃었다. "여의사 하나 생길 기구마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정윤이와 작별하고 약을 탄 뒤 두 사람은 병원 밖으로 나왔다. "귀남아." "야." "니 집에 가고 접지 않으믄 가지 말고 여기 있거라. 니가 귀찮아서 보내는 기이 아인께." "아입니다. 집에 가서 병 나으믄 오겄십니다." "염치 채리노라 그러는 거는 아니겄제?" 열여섯의 어린 나이였다. 우락부락, 미련퉁이 아비와는 다르게 귀남은 수굿했다. 개구쟁이였던 어린 시절과는 사뭇 달랐다. 그리고 그 모습에는 어딘지 모르게 서러움이 감돌고 있었다. 아비가 집 나간 후, 자라면서 그는 인생의 슬픔과 외로움을 체득한 것 같았고 어미와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다진 듯했고 세상은 혼자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는 냉엄한 이치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러나 어미와 헤어져서 객지살이는 쉽지 않았고 병까지 겹 쳤으니 어린 마음이 비관이 되는 것 같았다. "아무 염려 할 것 없다. 의사선생님도 괜찮을 기라고 장담을 했고 돈드는 일이라 카믄 조맨치도 걱정할 것 없 다. 사람이란 살다보면 병도 나고 험한 꼴도 보고, 그기이 사는 거 아니겄나. 내일 아침에 나랑 같이 평사리로 가자." "야." "자아 그라믄 나는 어디 들를 곳이 있는데 나는 여관으로 먼저 가 있어라. 저녁답에는 아마 성환이가 올 성싶 다. 그라믄 가봐라." 전에는 정연학이 이같이 자상하지는 않았다. 자상함은 모조리 마음속에다 집어넣고 오로지 행동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세월 때문에 장연학이 변하였는가 관수의 죽음 때문에 심약해졌는가. 귀남을 보낸 뒤 장연학이 찾아간 곳을 영팔노인의 집이었다. 영팔 내외는 마당가에 앉아서 가을볕을 쬐고 있 다가 연하기 들어오는 것을 보자 "장서방 아니가. 웬일이고? 참 오래간만이네." 영팔노인이 반색을 했고 "안 죽으이 또 보네." 하면 판술네도 반가워했다. 두 늙은이는 모두 이가 빠졌고 머리는 백수였다. 주름 사이 사이에 간 세월의 흔적 이 구겨져 있었다. "거동하실 만합니까?" 연학이 물었다. "다 틀렸다. 집 도랑은 사알사알 댕기지마는 문밖 출입이사 어디 하겄더나. 지팽이를 짚어도 어줍어서... 정신 도 오락가락하고, 진종일 늙은네 둘이 마주보고 있일라 카이 참말이제, 해도 질고 밤도 질어서." "그래도 아직은 짱짱하십니다." "짱짱하기는. 노망기가 있는데?" 하고 판술네는 영팔노인에게 눈을 흘렸다. "자개 얘기구마는. 저 할망구 노망들어서 시적 똥싸게 생깄이니 큰 걱정이라." "얼씨구? 내 말 사돈이 하네." "평사리의 봉기도 문밖 출입은 못한다. 카제?" "그런 모양이더마요." "나이 들믄 죽어야 해. 오래 사는 것도 죄다." "그런 말심 마시이소. 판술이가 들으믄 서분타 할 깁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그러나 하고. 실은 내일 평사리에 가는데 함께 가실 수 있을까, 행여나 싶어서 와봤십니다." "평사리는 뭐하러 가는고?" "귀남이가 아파서... 아무래도 어매한테 가서 조리하는 기이 좋을 성싶고 나이 어린께 생각이 안 나겄십니까." "무신 벵인데?" "뭐 큰병은 아닌 것 같고 신장염이라 카는데 얼굴이 붓고 오줌을 잘 못 누고, 그런 병인데 지금은 많이 좋아 졌십니다." "그 벵이라 카믄 좋은 약이 있제." "그게 멉니까?" 장연학이 바싹 다가앉았다. "아주 쉬운 기라. 큰 배를 하나 사다가, 가에 진흙을 발라서 숯불에 뭉굿이 구워가지고 먹이믄 담박이라." "하모. 생각이 나네. 그거 해믹이믄 탈벵할 기다. 우리 판술이도 어릴 적에 그 병을 앓았니라. 그래서 누가 가 리쳐주길래 해믹있더마는 코피를 쏟더니 씻은 듯 나았다." 판술네도 생각이 났던지 맞장구를 쳤다. 이들은 아직 관수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 연학이 말하지 않았기 때 문이다. 관수 얘기만 나오면 흥분하고, 고함치면서 역성을 들던 영팔노인, 연학은 자기 자신이 받은 충격을 생 각하여 관수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만 힘이 있어도 따라가겄는데 늙는 거를 이길 장사는 없는기라." 영팔노인은 한탄하듯 말했다. "석이네도 보고 접고 야무네도 보고 접고 아부이 어무이 무덤에도 가보고 저븐데 몸이 말을 들어야제. 이자는 살아 생전 그곳에는 못 갈 것 같다." 판술네도 한탄하듯 말했다. "웬간하믄 독골에는 한분 가볼까 했는데 할망구가 아야 자야 함서 갈라 캐야제. 그래도 두만어매는 정정하드 마. 일전에 찰떡을 해가지고 한분 왔다가 갔다. 그 직일 놈이 기어 기성에미하고 민적을 팠다 안 카나." "저러이 노망들었다 할밖에. 그거이 언제 일인데 그러요? 그 말도 벌써 수십 차례나 했일 기요." 판술네 타박에 영팔노인은 눈을 부릅뜨고 "내가 언제 그랬노? 허허어, 날이 갈수록 행사가 저 모양이라. 갬히 남정네 하는 말을 가로막고 무신 놈의 못 된 버르장머리고." 영팔노인은 축담에다 대고 곰방대를 두드렸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든 말 또 하고 또 하고 사람이 얼씬했다 카믄 저승에서 할애비 만난 것맨치로 거머잡고 는 실이 노이 되게 말을 안 하나. 그런께 손주들도 절을 하기가 바쁘게 달아나는 기지." "임자는 안 그렇고? 그나저나 그 직일 놈이 조강지처의 민적을 파부리고 서울네 그 제집하고 민적을 했다 카 는데." "저보라고 장서방, 하든 말 또 하제?" 장연학은 웃음을 참는다. "내가 그 말 할라 한 기이 아니고 자식놈 기성이 그놈 얘기를 할라는 기라. 그놈도 직일 놈이다. 어매 앞으로 돼 있는 전답을 말짱 팔아서 기생년 밑구멍에 처넣었다 안 카나. 그 때문에 영만이하고, 그런께 삼촌 조카 사 이에 대판 쌈이 나서 이혈이 낭자하고, 저승간 이평이가 그 일을 알았다믄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났일 기다." "그걸 장서방이 모릴 기라 생각하고 말하요? 사돈지간인데 이녁보다 더 소상히 알 기고 싸움을 말린 사람이 누군데? 저러이 노망 들었다 할밖에." 판술네는 또 눈을 흘기고 혀를 두들겼다. "어허엇! 보자보자하니 말말이 토를 달고 나서네. 어디서 배워묵은 버르장머리고!" 영팔노인은 호통을 쳤다. 그러나 판술네는 끄떡없다. "살 만큼 살았는데 와 내가 할말 못할 기요! 같이 늙어감서." 맞대거리를 한다. "그래도오! 이빠지고 머리빡 허연 나를 우짜리, 싶어서 간 큰 소리를 텅텅 하는 모앵이다마는, 허허어 참 제집 이란 늙으믄 여수가 되는 긴가, 내가 그거를 모리고 데꼬 살았이니 말장 허세비다 그말이제?" "얼씨구, 지금도 늦잖소 길 좁아서 못 가겄소? 하지마는 내가 없어지믄 눈물을 쫄쪼올 흘릴 사램이 누군데 그 러요? 입에 침이나 바리고 말하소." "눈이 불쌍해서 놔둔께 점점 한다는 기이, 이자는 어른 상투 끝에 올라앉을라 카네." 하다 말고 영팔노인은 슬그머니 연학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머리도 돌린다. "하야간에 두만이 그놈도 멀잖을 기다. 그놈이 지 근본도 모리고 돈푼 있다 해서 들까불까 욜랑거리고 뿐가, 하늘이 시퍼런 줄 모리고 왜놈한테 붙어서 내 백성한테 해코지를 하는 천하에 무도한 놈, 연학이 니도 알제? 그놈이 관수를 못 잡아묵어서 미친 개맨키로 지랄하든 거를. 지 앞만 가린다고 숭을 본 이팽이도 아들놈한테 비하믄 성인군자라. 관수는 한동네서 자란 배꼽친구 아니가. 그놈은 애비뻘이나 되는 나한테도 의병질을 했느 니 한통속이니 함서 행피를 부리고, 썩은 새끼줄 내 목에 걸어서 관가에 끌고 가라 하며 내가 그놈한테 다잡 고 하든 일, 그게 이팽이 초상 때 일이었을 기다!" 늙으면 옛일은 새로워지고 방금 있었던 일은 잊기가 일쑤다. 영팔노인도 예외는 아니었고 지나간 일일수록 어 제같이 똑똑히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삼대 구년 묵은 얘기 또 하누마." 못 참고 판술네 또 핀잔이다. "어허엇!" "야아 알았소 알았구마요. 입이 닳도록 말하소. 듣는 사람이사 제옵든지 말든지." 판술네는 일어서서 부엌쪽으로 간다. "집의 식구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연학이 뒤늦게 물었다. "손주며느리는 해산하로 친정에 갔고 자부는 고치 뽀우로 간다 카든지, 아아들은 핵교에 갔제." 하다가 큰기침을 한 영팔노인은 "하야간에 두만이 그놈 멀잖을 기구마.자식놈이 그 꼬라진데 무신 장로가 있을 기고. 말짱 헛공부 시킨 기라. 그 불쌍한 어미를 떠다밀고 논문서를 강탈해가질 않나 삼촌을 들고 패질 않나 하는 짓이란 주색잡기, 살림이 빠질라 카믄 하루아침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 캐도 물이 놓은 곳으로 흐르는 법은 없인께. 지은 죄가 어디 로 가노? 조준구 그놈을 봐라. 최참판댁에서 뺏은 그 많은 재산, 동전 한푼 건사하지 못하고 알거지가 돼서 버 린 자식 집에 기어들어왔다 안 카나? 하기야 그놈이 벌을 받을라 카믄, 어림없제. 멀었다, 멀었고 말고. 개과천 선을 해도 그 죄를 못다 갚을 긴데 머라? 자식한테 호통을 치믄서 수발을 받는다고? 볼로초를 구해오라 하믄 서 지랄발광을 한다고?" 담뱃재로 축담을 탕탕 친다. "설마 들은 말이 있어서 하는 얘기라. 그놈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제." "갈 날이 얼매 안 남았는데 그래봤자 무신 소용이 있겄십니까. 똥오줌 받아내는 처지, 그만하믄 벌받는 기지 요." "이 사람아 장서방, 무신 말을 그리 하노? 갈 길이야 나도 바쁜 사람이다. 노인네가 중풍 들어서 똥오줌 받아 내는 거는 흔히 있는 일이고, 그것으로 죄갚음이 되겄나?" "잊어뿌리이소." "잊어뿌리라니? 우째 잊노? 나한테 조맨치라도 심이 남아 있다믄 가서 그놈 모가지를 비틀어서 직일 긴데 잊 어뿌리라고? 만주 벌판의 설한풍, 그 무서븐 세월을 우찌 잊을 기고. 부모 산소에 풀이 우묵장성했을 생각을 하믄서 울었던 일, 너거들은 모린다. 그 설움을 모린다. 석이 그놈아이를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 아비 직인 원 수놈 밑에서 일하믄서 우떻기 젼딨겄노. 하루에도 수십 분 맘속으로는 칼을 들었을 기다." "다 그렇기 젼딨이니께 조준구가 망했지요." "성환이를 보믄 석이 생각이 난다. 잽히가는 한돌이를 따라 신짝들고 뛰어갔다는 석이 생각을 하믄, 석이어매 한테 맺힌 한은 우쩌고." 옆집에서 거위가 괘액괘액하고 울었다. 영팔노인은 담배쌈지를 열고 손바닥에 담배를 덜어서 침을 뱉고 담뱃 가루를 문지른다. 사실 영팔노인은 그가 말하는 만큼 증오심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한 둘 곁을 떠나버린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모른다. 지난날들을 새김질하노라 그랬는지 모른다. 그에 게는 이제 기쁨이든 슬픔이든 남아 있는 것은 추억밖에 없었다. 영팔노인은 문지른 담뱃가루를 곰방대에 채우고 나서, 수염에 묻힌 입에 물고 불을 댕기며 깊숙이 담배를 빨 아들인다. 유달리 커보이는 손이 떨리는 것 같았고 담배 연기 가는 곳에 시선을 보내고 있는 모습은 외로웠다. 판술네가 풋콩을 담은 바가지를 들고 와서 연학이 옆에 앉아 까기 시작했다. 참새들이 모여들었다가는 한꺼번 에 날아서 달아나고 해는 서산에 걸려 있었다. "장서방." 판술네가 불럿다. "야." "저녁 묵고 갈 기제?" "저녁 해주실랍니까." "하모, 해주고 말고. 안 묵고 가믄 내가 얼매나 섭운컸노. 풋콩 넣고 고슬고슬하게 밥해 줄 기니 묵고 가거라. 저 늙은이, 요새 들어서 부쩍 지난 얘기를 끄내싸아서 내 귀가 따갑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제. 저더 라다 짚불 잦아지듯 안 가겄나." 그러나 영팔노인은 멍하니 담배 연기 가는 곳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해가 지면서 식구들이 모여들었고 정성껏 지어낸 저녁을 연학은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판술이와 함께 저녁 거리로 나왔다. "요새 장사는 우떻노?" 연학이 물었다. "별로, 실속이 없다. 몸만 고단하지." 판술은 시장에서 청과물 장사를 하는데 주로 대구에 가서 사과를 사다가 팔고 있었다. "어디 가서 술 한잔 하까?" 판술이 말했다. "방금 밥 묵었는데, 그보다 자네 여관 맡아 할 생각 없나?" "머라 캤노?" 판술이 걸음을 멈추었다. "여관 맡아서 해볼 생각 없는가 했다." "내가 우찌? 경험도 없지마는 여관 맡아 할 만한 돈도 없고." "그냥 와서 하믄 된다. 필근이가 있어서 일머리는 환한께." "그라믄 자네는 머할 기고." "평사리에 가 있일까 싶다. 세상일 좀 잊어뿌리고." "하믄 좋기야 하겄지마는 겁난다." "겁날 기이 머 있노. 안 돼도 여관 건물은 남을 기고." "생각 좀 해보고." 판술과 헤어진 연학은 이튿날 아침 첫차로 귀남과 함께 하동으로 떠났다. 하동에서는 본가에 잠시 들렀다가 장터에서 배 한 광주리를 사들고 평사리에 왔다. 사립짝 밖에 우두커니 서 있던 성환할매가 "장서방 이기이 우애된 일고!" 귀남이와 함께 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귀남이가 와 오노!" 귀남이 이름을 듣고 귀남네는 부엌에서 달려나왔다. 연학을 따라 마당으로 들어서는 귀남이 "귀남아!" "옴마!" 모자는 부르며 서로 껴안았다. 연학은 마루에 걸터앉았고 성환할매는 불안하고 근심 띤 얼굴로 마당가에 서버 린다. "귀남이가 좀 아파서 데꼬 왔소." 연학이 말에 "어, 어디가요!" 귀남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우리 귀남이가 아프다 캤나?" 성환할매도 어쩔 줄 몰라한다. "걱정마소. 큰 병 아닌께." "아아 얼굴이 부었구마. 귀남아 어디가 아프노? 큰 벵 아니믄 우찌 데리고 왔십니까?" "볼 일도 좀 있고 해서, 오는 길에 데꼬 왔지요." "아아 얼굴이 와 이리 부었습니까?" 귀남네는 날카롭게 연학을 쳐다본다. 연학은 그간의 일이며 의사의 말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래도 그렇지 데꼬 온 거를 보이." 귀남네는 의심이 풀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아들이 와서 반갑기보다 무슨 병일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 같 았다. "신장염이라 하는데." 연학이는 배를 꺼내놓고 영팔노인이 하는 말을 또 상세하게 설명을 한다. "와서 반갑기는 하지마는 우떻기 했길래 벵이 났이꼬? 믿고 어린거를 맽깄는데 성해서 나간 아아가 병이 들어 서 돌아오니." 귀남네는 울기 시작했다. "옴마, 걱정 마이소. 아저씨 말심한 대로요. 며칠 있다가 여관에 도로 갈 기요." "그래 걱정 마라, 아플 때도 있지. 사람이 우찌 무병으로 사노." 성환할매는 딸을 달랜다. 귀남네가 잠자코 있는 것을 본 성환할매는 "귀남아." "야." "성을 만나보고 왔나?" "야." "장서방 우리 성환이는 잘하고 있다 카드나?" "잘하겄지요. 그 아아가 우떤 아인데 못하겄소." 귀남네는 빨근해서 말했다. 순간 성환할매는 당황한다. 귀남네 심사가 왜 틀어졌는가 깨달았고 연학이 앞에서 일벌어졌다, 싶었기 때문이 다. "잘 하겄지요. 잘하고 말고요. 여포 창날 겉은 성환이 무신 잘못을 하겄소!" 울부짓는다. 연학은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다 생각한 듯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묵묵히 있었다. "우리 귀남이하고는 천양지간인데 못할 까닭이 있겄소? 물어볼 것도 없십니다. 우리 귀남이같이 남의 집에 고 공살이하는 처지도 아니고 명색이 학생 아입니까? 병들어서 돌아오는 일도 없일 깁니다.어이구 천천무리, 머할 라꼬 태이났노!" 거의 광란 상태다. "옴마 와 이러요?" 귀남이 어미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놈아 니하고 나하고 그만 죽자! 무신 희망이 있노!" "니가 맘이 대기 상했는갑다. 참아라, 내가 잘못했다. 아픈 아아 앞에서 성한 놈 걱정을 했이니 섭했일 기다." 팔을 잡으려 하자 귀남네는 성환할매를 뿌리치며 "엄니는 언제나 그랬소! 엄니 눈에는 귀남이 겉은 거 사람으로 뵈지도 않았일 기요. 밥이나 축내는 버러지로 보았일 기요." "그런 말 하지 마라.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노?" "귀남이가 병들어서 돌아왔는데 우찌 그리 손톱만치도 생각 안 하고 친손자 걱정만 합니까! 야속하요. 참말로 야속하요. 친정에 얹혀 산다고 괄시하는 거사 내 팔자가 그러려니, 그 어린 것이 에미 떨어져 간 것만도 가심 이 미어지는데, 누구는 팔자가 좋아서 중학생 모자 쓰고." "옴마 이러지 마소. 머가 우떻다고 이러요? 난 진주서 편키 있었고 성이 찾아와서 걱정도 많이 했십니다. 성이 잘 되믄 나도 잘 될긴데 와 자꾸 이러요." "그거는 귀남이 말이 맞소." 처음으로 연학이 입을 뗐다. "말이 사촌이지. 따로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니 친형제나 진배없고 머어보다 아이들 둘이 잘 지내는데 어매가 이라믄 되겄소?" 울음 소리가 낮아졌고 조금 흐느낀다. "하기야 머 맘이 상하기는 상했겄지요. 귀남이가 아프니 걱정도 됐일 기고 그 심정 이해합니다." 귀남네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는다. "귀남아, 니 질기 이럴 기가? 장서방 맨입으로 보낼라고 이러나? 귀남이를 믿고 맡길 사람이 어디 또 있일 기 라고, 죽으나 사나 우리 식구들 장서방밖에 믿을 곳이 없다. 일어나거라." "야 믿어도 좋을 깁니다. 공부했다고 모두 잘 되는 것도 아니고, 곤부 안 해도 성공한 사람 얼매든지 있소. 아 아들 일이란 모리는 기라요. 맘 상해하지 마소." 노여움을 푼 것도 아니었고 의심이 없어진 것도 아니었지만 귀남이를 위하여 힘이 되어줄 사람은 연학이밖에 없다. 그 현실을 깨달은 귀남네 "미안합니다. 아픈 귀남이를 본께 설움이 북받쳐서, 그만 방에 올라가시이소. 점심 잡숫고 가시야제요." "아, 아닙니다.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만 갈랍니다." 연학은 간신히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어이구 가는 곳마다 모두 와 이렇노?" 중얼거리며, 연학은 오르막길을 쉬엄쉬엄 올라간다. 건이네가 대문 앞의 넓은 터에서 고추를 펴널고 있었다. "아이구." 올라오는 연학이를 본 건이네는 인사도 하지 않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남편을 부르러 가는것 같았다. 집안 으로 들어간 연학은 사랑채 쪽으로 갔다. 건이아범이 별채 쪽에서 달려왔다. "이거 웬일입니까." 연학은 웃으면서 "참 오래간만이지?" "예." 사랑 마루에 걸터앉은 연학은 "배가 고픈데 식은 밥이라도, 요기 좀 했이믄 좋겄는데." "예 그, 그러지요." 그는 건이네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예고도 없이 나타나서 놀란 것 같았다.하기는 상당히 오래간만에 연학은 평사리에 온 것이다. 건이아범은 또 이내 달려왔다. "점심은 하라 했십니더." "찬밥 한술 먹으면 되는데, 일찍 오는라고 아침을 드는 둥 마는 둥 했더니," "무신 일로 오싰십니까." 그 말 대꾸는 없이 "집안이 설렁하네." "식구가 없어이 자연." "무섭지 않은가?" "마 습관이 돼나서 무서븐 줄 모립니다." "사당에는 비가 샌다며?" "예. 일전에 마님이 오싰을 때 말심을 드렸는데 그러믄 그 일 땜에 오싰습니까?" "겸사 겸사 왔네." 건이아범은 의외란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관을 차려 나가면서 최참판댁과 일단 관계가 끓어진 것으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연학 은 그간 평사리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궁금했지만 건이아범은 다시 최참판댁 일을 보게 되었느냐 고 물어볼 수 없었다. 그는 전부터 연학을 어려워했고 연학의 태도 역시 성환할매를 대하듯 그러질 않았으며 어딘지 모르게 엄격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점심이 될 동안 집안을 한번 둘러볼까?" 건이아범이 뒤따르려 하자 "자네는 따를 것 없네." 찌르듯 냉정한 어세에 건이아범은 머쓱해진다. 연학은 대숲 사이에 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광선이 차단된 대숲 안은 어두컴컴했고 댓잎의 반영인지 푸르스 름한 기가 서려 있는 듯했다. 냉기가 흘렀다. 대숲 흔들리는 소리, 그 소리. 싸아! 와삭와삭 싸아! 소리는 사방 에서 모여들었다. 바깥 세상은 아득히 먼 피안에 있었고 사람 있는 그곳이 오히려 저승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혼백이 있다면 과연 이 자리는 있을 만한 곳인가 하고 연학은 생각해본다. 사당을 에워싸고 있는 담벽 일부가 무너져 있었다. 무너지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용마름의 기와가 여기저기 깨 어져서 흩어져 있었다. 사당 뒤편으로 돌아가본다. 이끼의 향기와 습기가 스며왔다. 뒤쪽 한부분에 거적때기가 덮여 있었고 떨어지지 않게 새끼로 엮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건이아범이 임시 방편으로 그래 놓은 듯싶었고 그곳에서 빗물이 새들아가는 모양이었다. 최참판댁에도 문제는 있었다. 이 넓은 집을 건이네 부부 두 사람이 건사한다는 것부텨 무리였다. 그들은 김서 방 내외가 거처하던, 채마밭이 딸린 별채에 살고 있었다. 몸채와 사랑은 여름 겨울 방학 때면 대개 식구들이 내려왔고 비교적 길상이 자주 오기 때문에 그런대로 괜찮게 보전이 돼 있었으나 별당과 행랑의 수많은 방, 도 장은 퇴락된 상태였고 마구간에는 말이 없었으며 외양간에는 소가 없었다. 마당에는 대충대충 풀을 뽑은 흔적 은 있었으나 다른 일 다 제쳐놓고 풀만 뽑는다 해도 연방연방 돋아나는 풀을 따라잡기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 이다. 식구들이 많고 오가는 사람 많았던 시절과는 다르다. 추수 때면 그 많은 행랑방에 사람들이 그득그득 들 어찼고 뒤뜰의 큰 가마솥에서는 연신 땀을 흘리며 밥을 펴내던 그런 시절도 있었지만. 건이네 내외는 집만 돌 보고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그들 자신의 양도를 위하여 논 세 마지기와 밭뙈기 하나를 부치고 있었다. 집은 서희가 서울에다 일부 거처를 마련하면서부터 더욱더 소홀해졌고 늙어버린 것이다. 연학은 사방을 다 둘 러보고 별당까지 왔다. 별당 역시 담이 허물어져 있었고 비가 새는 것 같았다. 연못에는 낙엽이 어수선하게 떠 있었다. 가지를 치지 않은 나무들은 제멋대로 햇빛을 찾아 뻗어나 있었다. 풀을 나지 않게 하는 사람의 발바닥 은 지독하고 집안에 온기를 공급하는 사람의 기운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연학은 별당 마당에 서서 연방 잎이 떨어지고 있는 담장 옆의 느티나무를 올려다본다. 서희는 평사리에서 돌아온 즉시 장연학을 불러 의논을 했다. 집수리 문제를 두고. 사랑 마루에서 짐심상을 받은 연학은 얼쩡거리고 있는 건이아범에게 말을 걸었다. "보리밥 한솥에서 한복판에 넣은 쌀밥만 도려내어 밥상에 올려놓은 듯, 집안 꼴이 그 형국이다." "예?" 건이아범은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한다. "사랑하고 몸채만 쌀밥이다 그 얘기지." "예, 영 손이 돌아가지 않아서." "자넬 나무라는 게 아니다. 집의 형상이 그렇다는 얘기지." 건이아범은 집이 퇴락한 것이 자기 잘못이기나 하듯 풀이 죽는다. 연학은 밥을 먹으면서 "적어도 장정이 두 사람은 있어야. 건이아범 혼자서 농사짓고 집안 손질하고 그거는 어렵지." "예, 그렇습니다. 혼자서는." 마음을 놓은 듯 말했다. "목수와 기와장이를 불러야겠는데." "삼사일 후에나 시작해볼까? 일꾼들 주선해두게." "그러겄십니다." 연학은 집을 나와 마을길로 들어섰다. 한복이한테 가는 길이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연학은 자신의 행적이 마 치 먼 길 떠나는 사람이 두루 작별인사를 하고 다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쓰게 웃는다. 하기는 오래간만에 평사리에 나타난 만큼 찾아가서 인사할 집이 더러 있었다. 김훈장댁에도 들러야 했고 문밖 출입을 못한다는 봉기노인도 들여다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마을과 작별할 하등의 이유는 없었지만 이번 행보가 그 이별이라는 것하고 결코 무관하지는 않았다. 그는 내일쯤 그들과의 이별 절차를 밟기 위해 산으로 가야만 했다. "형님 기십니까?" 사립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며 연학이 말했다. 마루 밑에서 강아지 으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덜거 덕 열리면서 "누고?" 한복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 니 장서방 아니가! 어서 올라오게." 연학이 허리를 구부리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집에 혼자 기십니까?" "모두 나갔다. 몸이 찌뿌두해서 좀 누워 있었드마는. 참 오래간만이다. 와 그리 볼 수가 없노." 한복이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친다. "그래도 숨을 쉬고 있이니 이리 만나는 거 아니겄소." "앉아라." "야." "점심은 했겄제?" "했십니다." 그라믄 술을 해야겠구나." "몸이 편찮으시다며요?"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술 없이 그냥 지나가겠나? 몇천 년이나 살겠다고, 잠깐 기다리게." 하고 한복은 밖으로 나갔다. 마누라를 찾아나간 모양이다. 방안은 깨끗했다. 도배를 했고 방문 창호지도 새로 발라서 방안은 은은했다. 머릿장 위의 이부자리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안정된 살림살이를 느끼게 한다. 한 복은 이내 돌아왔다. "그나저나 소식 좀 듣자." 마주보고 앉았다. "무신 소식이 있겄소. 왜놈들 지랄발광하는 꼬라지말고 머가 더 있겄십니까. 형님은 더러 소식을 듣습니까?" 하고 살핀다. 혹 만주에 있는 김두수한테서 편지 연락이라도 있었는가 그것을 물었던 것이다. "없어." 한복은 관수 죽음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통영서도 소식이 없었습니까?" "잘 있다는 말밖에는, 별 소식이 있겄나." 연학은 이상하다 싶었다. 영호가 관수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상했던 것이다. 그는 영선과 휘가 초상 치르러 간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터인데. "가아들 추석에는 올 깁니까." "올 거다. 추석도 며칠 안 남았지." '인편에 전하기도 그렇고 편지 쓰기도 그렇고 추석에 와서 말할 모양이구나. 신중히 하노라 그랬을까? 아니믄 냉담한 길까?’ 그 점은 판다하기가 어려웠다. 한참 후 영호네가 "오싰습니까." 인사를 하며 술상을 들려왔다. "들자." 권하는 데로 술잔을 든 연학은 그러나 술은 마시지 않고 "형님." "말해라. 무슨 어려운 말인가?" "관수형님이 죽었소." "뭐라?" 한복의 목소리는 속삭이듯 낮았다. 무겁고 긴 침묵이 지나갔다. 연학은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었다. "형님도 술 드시이소." 한복이도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었다. 그리고 또 긴 침묵이 지나갔다. "잡혀서 죽었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아니요." "그라면." "호열자로 지난 여름에, 그리 됐다 하더마요." "초로인생이다. 빌어먹을 놈의 세상!" "..." "시신은 어떻게 했다 하든가." "화장해가지고 식구들이 유골만 가져왔소." "그러면 초상은 여기서 치렀겠네?" "그런 셈이지요." "어디서?" "절에서요." "그래?" 한복은 연거푸 술을 마셨다. "나는 사람도 아닌갑다." "예?" "나는 초상에 참여할 자격도 없다 그 말이지." 좀체 그런 일이 없는데 한복은 울분에 차서 말했다. "참여한 사람은 없십니다." "뭐라." "양가 식구 이외는." "아무도 참여 안 했다고?" "나도 안 했십니다." 또다시 침묵이 훌렀다. "무신 죄가 그리 깊어서 작별도 못하고 갔는고." 눈에 눈물이 괴었다. "인자 나는 만주 왔다갔다 안 해도 되겠구나." "..." "나는 이리 편히 있는데." "..." "형님 잘 가소." 한복은 기어이 흐느껴 운다. 이튿날 일찍 연학은 산에 왔다. 도솔암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연학은 바위 위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해도사의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 은 마치 바위의 일부분인 듯싶었다. 연학은 나무 밑에 주저앉아서 쉬어갈 겸 해도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 이 이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산중 풍경은 마지막 정열같이 붉고 노오란 색채를 펼쳐놓고 있었지만 비정의 칼날 또한 숨겨놓고 있었다. 한 계절을 절단하는 칼날을. 하늘은 맑고 햇빛은 따사롭게 보이는데 나뭇잎 나뭇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움츠리며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바람의 틈새로 이따금 산새울음이 들려오곤 했다. 연학은 되도록이면 해도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함께 가고 싶었다. "왼종일 저러고 있을 긴가?" 중얼거리는데 마침 해도사는 움지락거리더니 일어섰다. 그는 연학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연학과 마주쳤다. "머하시는 겁니까? 기도했십니까?" 연학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장서방이 본 것처럼 앉아 있었네." "돌이 될라고 그랬십니까?" "돌? 하하핫 하하 그거 좋지." "어째서 좋습니까?" 해도사는 연학에게 언제나 편한 사람이었다. 해서 연학은 다소 버릇없이 재미삼아 얘기를 걸곤 해왔다. "이유가 뭣에 필요하다고? 있는 거는 다 좋은 거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변하니까" "사람도 그렇십니까?" "아암." "그렇다믄 말입니다. 해도사께서는 와 여기 기십니까? 어디 가시서 임금 노릇이나 하시지 않고." "임금이라는 것에 형체가 있는가?" "야?" "몸뚱아리가 있을 뿐일세." "말뜻을 잘 모르겄십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내버려두게. 아무 상관없는 일이네." "그럴까요? 아까는 앉아서 멀 하셨십니까? 생각입니까?" "듣지." "무엇을요?" 해도사는 고개를 돌려 연학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목숨 있는 모든 것의 숨소리, 살아 있는 소리, 억겁의 소리였다." "바람 소리였겄지요.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였을 깁니다." "다음은 우주의 박동." "바람 소리였일 깁니다." "그리고 빛깔이 살살 스며드는 것 같은 소리, 알겠는가?" "글쎄 도통 모르겄십니다." "허나, 대개는 앞의, 첫번째 소리를 듣는 게 고작이고." 하다 말고 해도사는 깔깔 웃었다. 웃을 만한 일도 없는데 하늘을 보고 웃었다. "도사님." "나 여기 있네." "도인은 과연 있십니까?" "도인은 되어본 사람 알지 진실을 누가 알겠나." "신령은 있십니까?" "그것도 신령이 아니면 뉘 알겠는가." "하 참, 도사님도 하나마나의 말씀만 하십니다." "그런가? 실상은 다 하나마난데 모두들 하고 있는 게지." "부아 돋구기 꼭 알맞구마요. 그래가지고 점을 우떻기 칩니까?" "그게 모두 하나마나의 얘기라." "하든지 말든지 두 개 중에 참말만 해보이소." "허허어, 참 뭘 알아야 그놈의 부안가 보안가를 가라앉혀주지. 저기 굴러 있는 돌멩이, 저기 서 있는 나무, 저 기 흐르는 물보라, 날아가는 저 새, 하늘을 떠도는 구름, 그게 다 나랑 다르지 않다, 그것 가지고는 안 되겠 나?" 할 수 없이 연학이는 웃고 만다. "겨울 준비는 하싰습니까?" "했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물어나르지 않든가?" "날씨 참 좋습니다." 연학은 일부러 딴전을 폈다. "하늘이 높으네, 그러나 참 낮구먼." "학을 떼겄십니다. 멋 모르고 말 걸었다가 질게 하믄 미치겄네요." 두 사람이 도솔암에 당도했을 때 절문을 등지고 강쇠가 인왕처럼 서 있었다. "이자 오나." 연학이를 향해 강쇠가 말했다. "야." "그놈의 점쟁이는 와 달고 오노. 신양에 해롭다." "간밤에 몽정을 했나? 신양 얘기는 왜 나오는고?" 해도사의 응수였다. "몽정이 멋꼬? 몽둥이 말인가?" 연학은 킬킬거리며 웃는다. "김장사." "와 부르요." "안사돈 계시는데 조심하는 게 좋겠소." "우리 사부인이야 보살님 다 됐는데 무신 걱정. 연학아." "예." "구례서는 사람 오게 돼 있제?" "올 깁니다." 밤이 눚어서 해도사 산막에 모인 사람들은, 지감이 빠지고 모두 다섯 명이었다. 길상이 강쇠 해도사 연학 그리 고 길노인의 아들 막동, 장년을 넘어선 연배들이었다. 좁은 방에 다섯 명 초로의 사내들은 무릎이 닿을 만큼 빽빽하게 들앉은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들 다섯 사람, 이 자리에 없는 지감을 합한다 하더라도 그랬겠 지만 도무지 공통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모든 면을 살펴보아도 역시 공통점, 혹은 동질성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어쩐지 그것은 기이한 것으로 드러났다. 모습, 차림새에서도 그러했고 분위기 역시 그랬으며 서 로가 서로를 서먹서먹하게 바라보는 눈빛, 산 중에서 오랫동안 이웃으로 흉허물없이 지내온 강쇠와 해도사 사 이에서도 그랬고 그 동안 수족같이 밀착되어 지내왔던 길상과 연학 사이에서도 그러했다. 결국 이들 모임의 성격이 문제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송관수가 만주로 가기 전에 구례 길노인 생신 때 이같은 모임이 한번 있 었다. 그때만 해도 최소한 동학의 잔당이라는 기치는 있었다. 동학의 골수분자였던 윤도집의 아들 윤필구, 동 학란 때 농민들을 이끌고 참가했으며 여러 가지 일화를 남긴 조막손이 손가의 아들 손태산, 김환의 그림자였 던 김강쇠, 아비를 동학란에 잃은 송관수, 그 밖에도 풍상을 이기고 한가락씩 한다는 사내들, 이들 배후에는 동학군 패배에 한을 품은 적잖은 사람들의 후손이 여러 가지 인연으로 얽혀 있었다. 다만 그때 송관수의 은밀 한 배려 때문에 영문 모르고 생일 잔치에 참석했던 소지감, 출가하기 전이었고 이종 민지연의 약혼자로서 속 세를 버린 일진을 도솔암에 데려다놓을 만큼 실질적 절 임자나 다름없는 길노인과 친면이 있는 터이라 생신 잔치에 참석한 것이 이상할 것도 없었는데 강쇠는 이분자로 간주하고 송관수를 밖으로 불러내어 그의 전횡을 따지며 떡치듯 송관수를 두들겨팬 사건이 있었다. 여하튼 객원 비슷하게 참석했던해도사와 소지감을 제외하면 앞서 말했듯이 모두 동학과는 인연이 깊었던 인물들이었다. 물론 성격은 시초에 비하여 많이 변질되어 있었지 만. 그런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조직의 과정에 대하여 한번 되새기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삼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서, 묘향산에서 숨을 거둔 별당아씨를 입었뎐 자신의 저고리를 벗어 감싸서 묻 은 뒤 김환은 팔도강산을 방랑하며 거지 행각을 했는데 우연히 지리산에서 죽은 부친 김개주를 통렬히 비판하 는 왕시 동학의 장수였던 운봉노인을 만나게 되고, 연곡사에 들른 김환은 그곳에서 뜻밖에 생모 윤씨부인이 남겼다는 유산 얘기를 듣게 된다. 일생을 최씨 가문에 봉사한 새경에 불과한 것으로 기르지 못한 자식에 대한 보속이라 하여 김환에게는 백부였던 우관선사에게 맡겨놓았던 오백석지기의 땅은 구례 사람 길씨에 의해 관리 되고 있었는데 길씨는 평소 흠모하던 김개주가 아들 김혼에게 남긴 유산으로 믿고 착실하게 관리하여 그 동안 추수라는 새끼를 쳐서 적잖은 재산으로 불어나 있었던 것이다. 운봉과 자금, 김환은 운봉을 중심으로 동학의 잔당을 규합하기에 이르렀다. 반일이든 친일이든 조직이 표면화되어 있는 중앙의 동학과는 아무 관련 없는, 동 학란에 참가했고 숨어살고 있는 무리를 모았으며 우관의 제자이자 금어로서 김환이 어렸을 적에 돌보아주었던 혜관까지 끌어들여 도처에서 일어나는 의병 등을 엄폐물로 삼아 교묘하게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시초 부터 그러나 문제는 있었다. 동학을 현실적 강령으로 삼고 항일투쟁이 앞서야 한다는 김환과 동학을 교리로서 교세의 확장이 전제요, 점진적 항일운동을 주장하는 윤도집과의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격론이 벌어졌고 김환파와 윤도집파 사이에 난투극이 있곤 했다. 그러나 흩어지지 않게 가닥을 잡아주 는 사람은 운봉이었지만 자금줄을 쥐고 있는 기환이 주도적으로 밀고 나갔으며 그것을 따르는 것이 추세였다. 운봉이 세상을 뜬 뒤 결국 윤도집 쪽으로 기울었던 지삼만의 밀고에 의해 김환은 체포되었고 유치장에서 자살 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 시절의 사람들은 천수를 다하였거나 비명이거나 간에 거의 다 죽었고 이세들로 볼 수 있는 그들, 구례에서의 모임은 그 동안 활동 무대가 도시로, 혹은 만주로 뻗으면서 방치 상태였던 산과 농 촌과의 연계를 꾀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하겠으나 직접적 계기는 출옥하는 길상을 잡아두기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고 해서 서희는 고육지책으로 오백 석지기의 땅을 내놓은 때문이었다. 그 러나 모인 인물들이 동학의 잔당이라고는 하나 역시 활동의 무대는 산속이 아니었고 농촌도 아니었다. 또 그 러했기 때문에 의병이 소탕되듯 그들은 소탕되지 않았으며 명맥을 이어왔는지 모른다. 그러한 과정으로 끌고 왔으며 다진 사람은 송관수였다. 진주서 형평사운동에 참가하면서 그의 시야는 넓어졌고 활동의 방향을 잡았 으며 의병에서 동학 잔당으로, 형평사운동에서 사회주의 흐름 곁에 서게 된 것이다. 형평사운동을 하는 동안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범준을 위시하여 적잖은 사회주의자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친숙해진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연줄로 하여 서울의 진보적인 식자들과 연관을 맺게 된 것 역 시 무리한 짓은 아니었다. 그러나 송관수는 무조건 그들을 추종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론에 밝다 하여 영문 모 르고 존경했던 것도 아니었다. 식자풍의 허영심 우월감이라든지 실천이 이론을 따라오지 못하는 허약함을 때 로는 비웃고 경멸하기도 했다. 송관수의 사회주의란 지극히 단순하고 명료했다. 그네들 식자가 말하는 남의 나 라의 사상이라는 것도 대충 듣고 보니 동학의 실천적 요강과 그리 먼 것 같지 않게 생각되었으며 사실 동학의 실천적 요강이라는 것도, 그야말로 요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송관수가 파악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간략했으 며 뼈다귀만 추려낸 것이었다. 그에게는 교리 같은 것은 도통 관심이 없었고 복잡할 필요도 없었다. 세상을 바 꾸어놔야 한다는 것, 배고프고 핍박받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그의 정열의 모든 것이었다. 어쨌거 나 송관수는 발바닥에 불이 날 지경으로 돌아다니며 노동 현장에 잠입하여 부산 부두의 파업을 비롯해서 기타 크고 작은 일에 개입하고 측면 지원을 했다. 식자층도 쑤시고 다니며 은근히 충동질하고 유인했으며 또 수삼 차 한복이를 만주로 보내어 그 곳과도 길을 트면서 조직의 형체를 확장해가면서 길상의 출옥을 기다리고 있었 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송관수가 차지하고 있었던 자리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없는 빈 자리는 메 울 수 없을 만큼 컸다는 것을 사람들은 느끼게 되었다. 오늘의 모임은 사실상 해체와 결별의 자리였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해체하고 결별해야 할 당사자 들이 없었다는 점이다. 공통된 것, 동질적인 것이 없는 분위기는 아마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동학당은 한 사람도 없다고 보아야 하며 길상을 동학당이 아니다. 만주서, 그것도 연해주의 권필웅 계열로 일 을 했으면 김환은 어릴 적에 최참판댁 하인, 글을 가르쳐준 일이 있는 구천이기도 했으나 최참판댁의 비극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그와 재회했던 것이다. 그러니 동학과는 관계가 없다. 강쇠는 동학당이기보다 철두철미 김 환의 신봉자였을 뿐이며 해도사는 지리산의 방랑자로서 이기적일 만큼 독자적이었고 지감도 물론 그랬다. 막 동의 경우는 죽은 부친이 김개주를 흠모하기는 했으나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동학군의 패배를 안타까워 한 방관자의 한 사람이었다. 연학은 최참판댁 집사에 지나지 않았다. 길상과 강쇠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동학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열렬한 독립투사 우국지사도 아니었다. 해도사와 지감은 복잡한 역정을 거쳐왔 지만 연학과 막동은 평범하고 자신들의 삶을 신중하게 살아온 그냥 백성이었다. 다만 그들은 이 강산에 태어 났다는 것, 피에 반역할 수 없다는 것, 그것 때문에 주어진 일을 마다할 수 없는 입장을 취해온 사람들이다. 해체를 결심한 것을 길상이었다. 길상은 진작부터 독립자금 강탈을 실패로 보고 있었다. 자금이 국외로 나가서 그쪽의 도움이 된 것은 다행이나 그것은 거사의 큰 비중이 되질 않았다. 체념하고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친일 하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경향에 대한 일깨움과 푸석푸석 속에서만 타고 있는 불길에 기름 역할을 하려 했던 의 도는 크게 주효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쉽게 가라앉고 말았다. 조직의 응집을 계산에 넣었는데 그것도 오히려 반전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었다. 도화선이 되려면 희생자가 났어야 했다. 반대로 조직을 응집하려 했으면 혐 의 밖에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혐의를 받았고 송관수를 위시하여 적잖은 일꾼들이 만주로 탈출했으며 조직은 약화되었다. 게다가 길상이 자신 꽁꽁 묶이어 파상적으로 지속하려던 일은 정지 상태로 빠져버린 것이다. 무위 도식의 세월은 적잖게 그의 신념을 무너뜨렸고 왜소한 상태로 퇴화한 느낌을 주었다. 해체하리라 마음먹은 것 은 정세가 날로 각박해졌고 자신이 수감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며 무의미한 침체 상태에서 조직의 멍에를 벗 겨주는 편이 나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이야기는 연학이 먼저 꺼내었다. "토지 문젠데요, 벌써 대강은 다 알고 기시겄지마는."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길서방하고 상의해서 처분할 일만 남았십니다마는 행여 나은 의견이 있을 수도 있고 해서요." 사실이 그랬다. 해체 문제는 의미 양해된 일이었고 토지 문제도 의견 교환이 있었던 만큼 어떤 방식으로 하느 냐는 것은 연학과 막동의 소관이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길상은 합석했다. 산에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길상이 합석하는 만큼 강쇠 해도사도 자연 함께 하게 된 것이다. "할 수만 있다믄 토지를 매각하는 것이 젤 좋은데 그게 좀." 하다가 연학은 길상을 쳐다보았다. "계속하게." 길상이 말했다. "아무래도 앞으로 공출이 자심할 것이고 정세가 그러하니 토지를 살려는 사람이 쉽지 않을 깁니다. 지금 형편 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실정이니께 호욕 사자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제값 받기가 어럽고." "본시 최참판댁 땅이니 우리가 감놔라 배놔라 할 수는 없지마는, 그라믄 우짜자는 기고?" 강쇠는 연학이 얘기를 끄는 것이 마땅찮았던지 내뱉듯 말했다. "땅을 갈라주자는 의견도 있었십니다마는, 땅 때문에 근거지를 옮기는 것도 야단시럽고 또 땅에 발목이 잽히 있는 것도 그렇고 시국이 시국인 만큼 그 사람들 운신이 편해야 하니께요." "그래서." 해도사도 답답했던지 얘기를 재촉했다. "해서 나온 방안인데 땅을 최참판댁에 되돌려 보내는 것이 우떨까 싶어서."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그건 자네 생각이가." 강쇠가 따지듯 말했다. "야." "그라믄 몇 년 없이 고생한 사람들 빈손 털고 가고 저븐 대로 가라, 그 말이가? 그런 거 바라고 일한 사람들 은 아니지마는 기왕에 내놓았든 것을 되보내는 것은 무신 경우고!" "참 와 그리 성미가 급합니까." "...?" "최참판댁에서 땅값 내놓으믄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거 조옿지." 해도사가 말했다. 다소 무안해진 강쇠는 부르튼 표정으로 "연학이 자네 생각이라믄? 떡 줄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거 앙이가?" 하고는 길상을 그 사팔눈으로 힐끗 쳐다본다. "의향은 떠보았십니다. 알아서 처리하라는 마님의 분부였고." "그거 잘되었다. 길서방." 해도사는 막동을 불렀다. "자네 짐 풀었네. 그 지긋지긋한 일도 끝났으니 얼마나 홀가분한가." "아닌게아니라 그렇소이. 늘 근심이 되얐는디." 막동은 환하게 웃었다. "좋기도 하겄다. 마구 깨지는 판국인데 좋기도 하겄다. 죽은 놈만 말이 없제." 강쇠는 울분에 차서 말했다. "김장사 섭하게 생각지 마시오. 끝난 것은 아니오." 길상도 울적하기론 마찬가지였다. "끝난 거지요 머, 우리 앞날이 얼매 남았다고, 한평생이 모두 허사였소." "삼천갑자 동방석이는 없으니 죽기야 죽겠지요. 김장사 혼자만 가는 길 아니지 않소." 가라앉은 분위기를 휘젓듯 해도사가 말했다. "그 빌어묵을 놈만 뒈지지 않아도 뻗이여보는 긴데 그곳까지 갔이믄. 총에 맞아 죽은 것도 아니고 벵으로 죽 어? 박복한 놈." "너무 상심 마시오 김장사. 사태가 급박하면 할수록 일본의 패망도 그만큼 빨라질 것이오. 우리만 이러는 거 아니오. 모두, 일하는 사람 모두 땅밑에 숨었어요. 우리 생전에 독립이 올 거라 믿읍시다." 길상의 말이었다. "관수형님 얘기가 났으니 하는 말인데 얼마 전에 신경서 짐이 왔길래 찾아다 놨십니다." 연학이 말했다. "짐이 와?" 강쇠는 귀를 발딱 세우듯 되물었다. "홍이가 뒤처리를 다 해서 부 b4쨉 아직 거처를 정하지 못했이니 지가 보관하고 있십니다. 그라고 집도 팔 고 머 이것저것 합해서 수을찮게 돈도 부쳐왔든데 오는 길에 가지고 왔십니다. 일단 김장사하고 의논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나하고 의논할 것 없다. 사부인하고 의논을 해야제." 집을 팔고 해서 홍이로부터 돈을 부쳐온 것은 사실이나 조선에 와서 그 금액의 액수는 달라져 있었다. 지난날 길상은 관수에게 약속한 것을 이행하지 못했다. 그것은 영광이 공부할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갔어야 했던 비용을 첨가하여 금액의 액수가 달라진 것이다. 밤은 점점 깊어갔다. "길서방." 해도사가 불렀다. "여기 자고 갈 건가?" "내려가야 하는디 너무 저물었지라? 아침에 쌀이 들온다는디." "장사는 잘되고?" "아직은 그럭저럭 삐대고 있지라우. 헌디 앞으로 배급제가 된다한께로 근심 아니겄소. 배급소를 줄랑가. 장사 못허게 될랑가." "김장사, 우리 길서방하고 내려갑시다. 주막에 가서 한잔씩 걸치게. 김선생은 안 가겠소?" "모두들 내려가시오." 사내 셋은 산막에서 나갔다. 연학과 길상이 서로 우두커니 바라본다. 제2편 운명적인 것 1장 밀수 사건 1941년 정초의 신경, 거리에는 설 분위기가 아직 가셔지지 않았고 일본인 주택가에는 가도마쓰(설이나 문간에 솔을 세우는 일본 풍습)도 걷어내지 않은 상태였으며 긴 소매에 금실이 든 붉은 오비를 맨 설빔 차림 일본 계 집아이들이 하고이타로 하고를 치는 풍경도 더러 눈에 띄었다. 그러나 신년 분위기에 못지않게 성전완수니 총 력앙양이니 일로매진이니 따위의 군부 고위층 담화를 실은 신문들은 전쟁 분위기를 드높이고 있었으며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지원병에 나갈 것을 독려하며 환골탈태 일본인이 된 이상 부끄럽지 않은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는 등 재만 조선인 친일 분자들의 글귀도 신문에 나 있었다. 거리에는 일본군 기마대가 포도를 차 며 지나가고 관서에는 일장기와 만주국 국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양력설을 쇠지 않는 만주인들의 초라 하고 기죽은 모습들이 대조적으로 포도 위에 흩어져 걷고 있었다. 공장은 삼일까지 쉬기 때문에 홍이는 집에 있었다. 물론 아이들도 집에 있었고 식구가 모두 지내지도 않는 설 때문에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리고 달포 전부터 임이가 와 있었다. 나이는 쉰여덟 아직 환갑이 멀었는데 칠 십 노인처럼 늙고 초라해진 모습을 본 홍이는 차마 가라 하지 못하였고 돈을 쥐어주는 것도 한두 번, 흐지부 지하는 홍이 태도에 얼씨구나 잘되었다 싶었던지 눌러붙어 있었는데 한달 전이던가 보연은 입술이 툭사발같이 부어서 남편에게 임이를 보내라 했다. 뭔지 비위가 많이 상한 것 같았다. "나가면 거지밖에 할 짓이 없을 긴데 당신이 참아." "돈 좀 주면 될 거 아니오?" "돈을 주더라도 해동이나 해야지." 했던 것이다. "아이고오. 점심들 묵자. 머들 하노. 배고파 죽겄는데." 임이 말에 상의와 보연은 다같이 눈을 흘긴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고모는 젤 많이 먹으면서 밤낮 배고프다, 배고프다." 상근이가 핀잔을 주었다. "이눔 자식, 머라 카노? 늙으믄 밥심으로 산다. 니도 늙어봐라. 다른 집에서는 양력설도 쇠든데." 보연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래도 비윗살 좋게 "떡도 묵고 저븐 너물도 묵고 접고 와 이리 묵고 저븐 기이 많은지 모리겄네. 옛날 울 엄니 먹성이 좋더마는 나도 어매 닮았는갑다." 신문을 보고 있던 홍이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점심 차리지." 하고 말했다. 상의가 거들어서 점심상을 차렸고 식구들은 둘러앉았다. "고모!" 밥을 먹다가 상의가 소리를 팩 질렀다. "와 그라노? 사람 간 떨어지겄네." 밥상에는 명란젓이 놓였는데 썰지 않은 상태로 깨소금과 기름을 친 것이었다. 임이는 그 명란젓 한 봉지를 송 두리째 입에 넣고 꿀꺽 삼켰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면 그것 하나로 밥 한그릇 먹고도 남았을 일이다. "위장을 소금에 절이도 분수가 있지 정말 왜 그래요?" 상의는 아비의 눈을 의식하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지금까지 비교적 관대하게 대해왔던 상의는 요즈막에 와서 임이에게 몹시 쌀쌀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임이는 왜 그러느냐 따지지 않고 슬금슬쩍 넘기곤 했다. 상근 이 상조가 재잘거렸다. "복 나간다. 잠자코 밥 먹어." 보연이 아이들을 나무란다. "아버지." 상의가 불렀다. "은자언니가 말예요." 하자 보연이 말을 막듯 "쓸데없는 소리 또 한다." "엄만 덮어놓고 그러시네. 아버지 은자언니가 말예요." "은자언니가 누군데?" "상급반 언니예요. 그 언니 저한테 참 잘해주어요. 같은 조선인이라고." 그래서?" "은자언니는 졸업하면 백의의 찬사가 되겠대요?" "뭐?" 홍이 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여학교 나와서 간호부로 들어가면 대우가 참 좋다는 거예요. 보통 소학교만 나와가지고 간호부가 되니까 말 예요." "그 따위 소리 하지 마." 딱딱한 홍이 음성에 의아해하며 상의는 말했다. "아버지 왜 그래요? 저는 좋아 뵈든데, 병원에 가면 그 언니들 깨끗하고 거룩해 뵈고, 그중에는 굉장히 예쁜 사람도 있었어요." "너도 간호부가 되겠다 그 말이냐?" "그런 거는 아니지만... 그래도 좋긴 좋든데요?"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해." "선생님도 그러셨어요. 백의의 천사가 되어 전선에 나가서 부상병을 돌보는 것도 애국하는 길이라구요." 홍이는 단발머리에 고집 세게 생긴 딸을 가만히 바라본다. '천방지축을 모른다. 애국이라니, 나라가 어디 있다구.' 그러나 홍이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위장을 철저히 해온 처지, 어디서 꼬리가 잡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왜 있잖아요, 아버지. 나이팅게일 말이에요. 지가 존경하는 사람이에요. 부상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을 돌보아 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 아닐까요?" "그 따위 소리 두번 다시 했다가는 매맞을 줄 알아라!" 홍이는 자신도 모르게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다. 군에 납품했던 관계로 일본 군대 사정은 다소 알고 있었다. 종 군 간호부의 실태가 어떻다는 것도. 갑자기 밥맛이 떨어졌다. 아직 철이 덜 든 아이에게 뭐라 설명할 수도 없 었고 설령 철이 들었다 하더라도 아비로서 그 것은 말하기 거북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 일 때문에 신경질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간밤의 뒤숭숭했던 꿈자리가 되살아났고 울적했다. 어디 가서 실컷 화풀이라도 해야 만 할 것 같았다. "거 봐. 쓸데없는 말 하지 말랬잖았어?" 보연히 혀를 찼다. 임이는 열심히 밥을 먹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모두 구부러져서 마치 갈고리 같았다. 그 손으로 반찬 이것 저것을 입 속으로 거머들이고 있었다. 상근이와 상조는 밥을 먹다 말고 뒹굴면서 장난을 치 고 있었다. "밥 먹다 말고 왜 이래?" 홍이는 수저를 놓고 일어났다. 본시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서 습관처럼 신문을 집어들었다. "참 이상해. 화내실 일도 아닌데 아버지가 왜 저러실까? 아이들이 얼마나 동경한다구. 백의의 천사, 듣기만 해 도 멋지고 근사하잖아요?" "그만 해." 보연이 나무란다. "상의야." 음식을 삼키며 임이가 불렀다. 어지간히 뱃속이 찼는지 음식 먹는 속도가 느려 졌다. "니가 몰라서 그런 말을 한다. " "모르긴 뭘 몰라요?" "김두수라고, 니는 모릴 기다마는, 공장에는 가끔 올 기다. 우리가 어릴 적에 한 동네서 살았제. 그래서 잘 아 는데 그놈이," 하다 말고 "아니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는지 니는 모릴 기다." "왜 보지도 못한 사람 얘길 끄내는 거예요?" "잠자코 들어보아라. 그 사람 본업이 가씨나 장산기라. 조선서 데리오는 가시나들을 받아가지고 팔아묵는데 그러이 그쪽 사정은 환하게 안다." "아이들 데리고 별소리를 다 하요." 의도적으로 임이에게 말을 하지 않던 보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머가 우때서? 야아가 백의의 천사라고 해쌓으니께 하는 말이제." 보연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외면을 한다. "상의 니가 몰라서 그러는 기라. 왜년들이사 그렇지도 않을 기다마는 조선 아아들은 맹색이 간호부지 군대 따 라댕기믄서 병정을 받는다 안 카나." "받는 게 뭔데?" "이 덩신, 함께 자는 기지. 몸을 준다 그 말이라." 홍이는 신문을 팽개치고 소리를 질렀다. "교육상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어요. 쓰레기통 같은 말만 하고 아이 버리겠소." 보연이 눈을 치뜨고 화를 냈다. 얼굴이 싯벌개진 상의는 헛구역질을 하며 제 방으로 달아난다. "아이구 얄궂어라. 나이 찼는데 그런 거 모릴까바서? 촌에 가믄 그 나이에 시집 가는 제집아아들이 얼매나 많 다고. 너무 그래쌀 것도 없거마는, 요조숙녀가 따로 있나? 서방 잘 만내믄 요조숙녀지." 하고는 아니꼽다는 듯 숟가락을 놨다. 먹을 만큼 먹었는데 마치 속이 상해서 그러는 것처럼. "며느리가 밉으믄 계란 같은 발뒤꿈치도 숭이라 카드마는. 입만 뗐다 하믄 식구들 모두가 아구성이네. 사람 팔 자를 누가 알 기든고?" 홍이는 화가 난 얼굴로 나갈 채비를 하듯 방에 들어와 옷장 문을 열었다. "당신 어디 가실라 캅니까?" 밖에서 보연이 말했다. "나가면 또 술을 마실 텐데..." "..." "초정월부터 술집에 문이나 열었겠어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홍이는 외투를 입으려다 말고 내던지며 방바닥에 철썩 주저앉는다. 그리고 담배를 붙여문 다. 요즘에는 공장도 불황이었다. 부속품 구하기도 힘이 들었고 군에서 불하하는 차도 거의 없었다. 그 덕분에 김 두수 꼴을 보지 않으니까 속이 편하기는 했으나 종업원들을 줄일 수도 없고 이대로 나가면 적자를 면할 수 없 을 것 같았다. '하얼빈에나 한번 다녀올까? 송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자식들이 다 장성하여 마음은 놓이지만.' 관수가 죽은 뒤 홍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의욕 상실의 징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의욕 상실뿐 아니라 외로움 이 어떤 공포감으로 엄습해올 때도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을 할 때 섬뜩해지는 것이다. 사실 아무 도 없었다. 석이를 본 지도 오래되었고 두매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중국 본토로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사조차 알 길이 없었다. 연해주 쪽은 이제 단념을 했지만. 마 치 빗자루로 싹 쓸어버린 듯 주변은 적막강산이었다. 용정촌에 가보아도 매갈잇간의 박서방 말고는 아는 얼굴 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럴까? 마치 기름이 떨어진 남폿불 같다. 주갑아제는 아마 돌아가셨겠지. 고향처럼 늘 그리워하는 용정이 어째 그리도 낯설었을까? 이렇게 우리가 밀리기 시작하면...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만 끝이 날까?' 신경에 와서 공장을 처음 차렸을 때 홍이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밤낮을 모르고 일을 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고 그들과 어울려 밤을 새워가며 술도 마셨다. '그때가 행복했구나.' 홍이는 간밤의 뒤숭숭한 꿈을 잊으려고 별의별 생각을 다 해본다. "여보 손님이 오셨는데."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는 보연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두 사나이가 방문을 들이차듯 하며 방안으로 들어왔 다. 거실에도 한 사나이가 서서 출입문을 막고 있었다. "누, 누구요?" 순간 홍의 얼굴은 돌덩이같은 굳어졌다. 기어이 올 때가 왔구나 싶었던 것이다. 두 사나이는 아무말도 없이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양복장 서랍을 방바닥에 엎었다. "왜, 왜 이래요!" 보연이 소리를 질렀다. 상의가 제 방에서 달려나왔고 상조가 울음을 터뜨렸다. "왜, 왜 이러는 거요!" 역시 사내들은 아무말 안 했다. 한참 후 방바닥에 쌓인 옷가지 속에서 금비녀와 한냥쭝 쌍가락지 석돈쭝 복숭 아반지 팔찌를 발견한 사내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도, 도, 도둑놈! 도둑이야!" 보연이 입술은 떨면서 목에 걸린 소리를 냈을 때 "뭐 도둑이라고? 아지매, 우리가 바로 도둑놈 잡으러 다니는 사람이라요." 능글맞게 웃으며 말하는 사내는 조선인이었다. 또 한 사내는 일본인이었다. 그들을 형사였던 것이다. "오이 고노 야쓰라 쓰레테 유케(이봐 이것들 데리고 가)." 밖에 있던 사내가 들어와서 홍이와 보연에게 수갑을 채웠다. "엄마!" 아이들이 울며 매달렸다. 보연은 넋이 빠진 상태였으나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고 홍이는 재빨리 사정 을 알아차리고 돌 같이 굳어졌던 얼굴이 조금씩 풀렸다. 그는 비녀랑 가락지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보연이 자기 몰래 장만한 것으로 짐작했고 어떤 경위로 형사대가 들이닥쳤는지 모르지만 사건은 그 금붙 이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홍이는 형사들에게 끌려나가면서 "상의야 걱정 말고 공장 아저씨한테 가서 알려라." 아이들은 문 밖까지 쫓아나갔다. 그러나 사내들은 홍이와 보연이를 차에 싣고 떠났다. 상의는 미친 듯 집안으 로 뛰어들어와 임이를 떠밀었다. "말해요! 당신이 밀고했지요!" "야, 야가 머라 카노?" 임이는 뒷걸음질치며 어리둥절해한다. "형사들이 우리집에 금비녀 있는 걸 어떻게 알아!" "야아가 미쳤나?" "그래 미쳤다! 아버지도 모르는 금비녀, 그, 그럼 네가 스파이질했나? 말해요! 이 천하에 못된 늙은것!" 하다가 상의는 소리내어 운다. "허허 참 도모지 우찌 된 일고? 이거 참 속절없이 내가 당하겄고나 이 제집아야! 내가 아무리 몹쓸 년이기로 한 배에서 난 동생을 엉구렁에 밀어넣겄나!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내사 멋 땜에 금을 가지가는지도 모리겄 고 참말로 귀신이 곡할 일이네." 상의는 소리지르고 울다가 상근이한테 "상조 보고 있어! 아무데도 가지 말고 꼼짝하지 마라! 나 공장 아저씨 데리고 올게." 하고는 쏜살같이 나간다. 상근은 자세한 일은 모르나 누이가 하는 짓으로 보아 아버지 어머니가 잡혀간 것은 이 귀신 같은 고모 탓으로 생각하고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임이를 노려본다. "아이구야 참, 머가 우애 됐다 카노? 팔자 사나운 년은 가는 곳마다." 상의가 임이를 지목하고 밀고했다 하며 울부짖은 것은 그럴 만한 곡절이 있었다. 한 달 전이던가. 임이가 온 지 한 달포 됐으니까 그 일은 한 달쯤 전에 벌어졌던 웃지 못할 사건이었다. 십이 월로 들어선 신경의 날씨는 한랭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상의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상근이와 상조는 털모자 를 쓰고 마당에서 미끄럼을 타며 놀고 있었다. 무심히 집안으로 들어간 상의는 안방에 보연이 있으려니 생각 하고 문을 열며 "엄마." 하고 불렀다. 그러나 보연은 없었다. 임이가 당황하며 돌아보는데 크게 벌어진 눈동자는 마치 허공 같았다. "거기 왜 그러고 있어요?" 장롱 서랍이 열려 있었다. 쭈그리고 앉은 채 뭔가를 필사적으로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뭐하는 거예요!" 이번에는 날카롭게 물었다. "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방 좀 치우니라고." "방을 치워요? 장롱 서랍은 왜 열려 있지요?" 의심을 품은 상의는 책가방을 든 채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편쟁이처럼 자질구레한 것까지 숨겨가지고 팔아먹 는 임이 버릇을 상의는 알고 있었다. 보연의 여우목도리도 그랬고 심지어 상의 손목시계도 그렇게 해서 없어 졌는데 그럴 때마다 임이의 잡아떼는 품은 철석 같았고 오히려 도둑 누명을 씌운다며 되잡기가 일쑤였다. 다 만 그가 손을 대지 않는 것은 홍의 소지품이었다. "거기 감춘 게 뭐예요!" 그때 마침 장에 갔다 온 보연이 목도리를 끄르며 들어왔다. "방문을 안 잠그고 갔었나?" 중얼거리다 말고 다급하게 방으로 들어간 보연의 안색이 변했다. 진퇴유곡, 심장이 질기기로 쇠가죽 같은 임이 도 엉겁결에 일어섰다. 순간 방바닥에 소리를 내고 떨어진 것은 금비녀 금가락지 반지 팔찌 등, 팔면 웬만한 집 한채 값의 금붙이였다. 보연이 그것들을 주워 두 손에 움켜쥐었다. 상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몹시 놀란 것 같다. "가지고 달아나려 했지요?" "아, 아니다. 무신 그런 벼락맞일 소리를 하노." 하면서 임이는 가렵지도 않은 손등을 긁는다. 살가죽이 밀리고 뼈만 앙상한 손등을 뿍뿍 긁어대는 것이었다. "그러면 잠의 장롱은 왜 뒤졌어요!" "구겡한 것도 죄가? 구겡했다고 주리를 틀라나? 좀 열어보믄 우떻노? 남도 아닌 형제간인데 별시럽게 그랬쌓 는다." 차츰 시간이 지나가자 임이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이 분하고 억울했든 것 같았다. 저희들은 그것 없어 도 사는데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절망과 분노의 눈빛으로 보연을 쳐다본다. "나가요! 상의 너도 나가!" 딸과 시누이를 떼밀어내고 방문을 닫은 보연은 비로소 사시나무 떨듯 떤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금붙이를 서랍 속에 간수하고 방안을 둘러본 뒤 방에서 나왔다. "양심이 있어요?" 상의가 임이에게 따지고 있었다. "조막만한 기이 머를 안다고 어른들 하는 일에 나서노." "부끄러운 줄 아세요." "운냐 니 잘났다! 가시나 하나 자알 키워놨다! 똑똑 소리나게, 똑똑하게 키웠구나! 에미 애비 수덕망덕 보겄다! 자식 없는 년은 접시물에 빠지죽어야겄네!" "없기는 왜 없어요! 자식 버린 사람이 누군데." "머 우짜고 우째! 어이서 들었노! 발톱만한 가시나까지 나한테 정게거네!" "방에 못 들어가겠나!" 보연이 소리쳤다. 상의는 "고모라 부르기 너무나 창피스러워." 하며 제 방으로 들어간다. "운냐아! 모녀가 작당을 해서 날 퍼붓는고나. 내가 사람가! 너거들 발싸개보다 못하는 내가 어디 사람가!" 놓친 가오리가 멍석만하더라고, 임이에게는 정녕 그러했다. 눈앞에 있던 황홀한 순간이 어쩌다 캄캄 절벽이 되 었는가, 분하고 억울하여 임이는 바야흐로 장탄식을 잡힐 모양이다. "팔자 좋구나! 팔자 좋다! 우떤 년은 무식 대복을 찌고 나서 전신에 금을 휘감는고, 그것 좀 보았다고 이년은 죽데기를 치는 신세, 아이고 내 팔자야! 야속하고 무상한 놈! 제집은 금으로 휘감아줌서 세상에 둘도 없는 누 부, 실반지 하나 해주었던가. 야속하고 무상한 놈! 내간 살믄 얼매나 살 기라꼬, 혈혈단신 의지가지할 곳 없고 오, 떠도는 내 신세가 가련코 불쌍쿠나! 이런 구박 박고 사느니 쇠를 물고 죽어야 하는 긴데 모진 목심, 그러 지도 못하고 어이구우, 어이구우." 두 다리를 뻗고 넋두리를 하며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짜며 곡을 한다. "상의 아버지가 그런 것 알기나 해야 말이지." 힘이 다 빠져버린 듯 보연이 중얼거렸다. "머라 캤노? 상의애비는 모린다꼬?" 임이는 귀가 번쩍 트이는 듯 반문했다. "상의아버지가 어찌 알겠소. 내 혼자 한 짓인데." 보연은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정말가!" 단순한 보연은 홍이 모른다는 그 말 때문에 한가닥 희망을 가지는 임이 의중을 몰랐다. 우선 금붙이 있는 것 을 홍이 모른다면 오늘의 사건도 발설하기 어려울 것이란 계산이 나왔고 겨울 한철 뭉개고 있을 만하다는 것, 어쩌면 황홀한 기회가 또다시 올지 모른다는 희망, 결코 나쁜 얘기는 아니었다. 아닌게아니라 보연은 그 문제 를 덮어둘 것 같았다. 상의에게도 단단히 일러서 금붙이에 관한 얘기는 입밖에 내지 못하도록 했고, 해서 임이 는 싫어하고 상대하지 않는 것쯤이야 이력이 나 있는 처지, 한 달 동안 불편할 것 없이 지내온 터였다. 얼마 후 상의가 어떻게 설명을 했는지 천일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그의 댁네와 함께 달려왔다. 그들 뒤를 상의 도 울면서 따라왔다. "집안에 있는 구미호부터 치아야 안 하겄나!" 들어서자마자 천일은 고래땅 같은 소리를 지르며 임이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았다. "어어? 와 이라제?" 천일의 표정이 너무나 험상궂어 임이는 질리면서 뒷걸음질쳤다. "와 몰라서 묻소!" "영문을 모리겄다. 자다가 봉창을 뚜디리도 유분수제." 천일의 댁네 호야네도 "세상이 무서바서 우애 살겄노." 한마디 하고 임이에게 일별을 던졌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아이들은 누이를 보자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상의는 우는 동생들을 끌어안고 함께 운다. 호야네가 그들을 달랜다. "하기야, 거기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있이소! 일 돼가는 거 봐감서 사생결단을 내든지 누구 대갈통이 박살나든 지, 참말이제 숭악한 세상이다. 이런 일이 어느 세상에 또 있겄노." 홍이와 오랜 우의도 우의려니와 동기간에 그럴 수 없다는 윤리관 때문에 천일이는 폭풍과도 같은 노여움을 느 꼈던 것이다. 일찍이 천일은 이같이 노한 적이 없었다. "상의야." "예 아저씨, 어떻게 해? 정말 어떻게 하면 좋아요." "울지 말고 내 말 들어라. 니가 이러믄 상근이 상조는 우짤 기고? 셈난 니가 정신을 차리야제. 아부지는 모르 는 일이라 카이 곧 풀리 나올 기고, 에잇! 더러븐 놈의 세상! 천지개벽을 하든지 해야지. 호야 니는 아이들 데 리고 꼼짝 말아라. 저 할망구도 감시하고, 비단가리 하나, 손 못 대게, 알았나!" "할망구라니!" 발악하듯 임이 말했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배추시레기 겉은 상판에다가 짜놓은 걸레맨크로, 그 꼬라지 하고서 할망구도 오감타!" "이노옴! 내 뒤에는 사람 없는 줄 아나! 나한테도 사람 있다아!" "물론 있겄지요." "경찰서장까지 한 사램이 있다! 김두수를 몰라? 질기 이러믄 나도 앉아서 당하지는 않을 기다!" "본색 드러내누마요. 아무리 여수가 사람으로 둔갑해도 꼬리는 못 감춘다 카더마는,그랬을 기요. 김두수를 와 내가 모리겄소. 공장에도 나타나고 옛날옛적 평사리에서 귀에 못이 박일 만큼 듣든 김거복일 와 내가 모리겄 소. 도둑질이든 밀고든 간에 손발이 맞아야 해묵는 기라." 했으나 천일은 눈에 띄게 기세가 줄어들었다. 그는 좀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라믄 나는 여기저기 좀 알아보고 올 긴께 모두 정신 똑바로 채리고 있거라. 상의야, 이 차중에 아이들 병나 믄 큰일인께 놀라지 않게 해라." 가슴을 치고 외쳐대는 임이에게 곁눈질을 한 천일은 허둥지둥 쫓아나갔다. 그가 나가자 집안은 늪과 같은 깊 은 정적 속에 빠져들었다. 임이도 지친 듯 말이 없었고 아이들 역시 섬 속에 갇힌 날개 부러진 새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아니 점심 먹을 때만 해도 아무 일이 없었던 집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수라 장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사건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붙이를 가지고 있다 해서 어미와 아비가 수갑까지 차고 끌려 갔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였다. "상의야." 호야네가 불렀다. "예." "아무래도 식구가 함께 모여 있어야겄다. 나 가서 아이들하고 머 좀 챙기가지고 올게." 상의는 불안하게 호야네를 쳐다보았다. "속히 올게. 아부지 어무이 오실 때까지 우리가 함께 있어야 안하겄나." 상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근아 니도 이자는 다 컸어이 울지 마라이?" 호야네는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아이들은 웅크린 채, 상의도 세운 무릎 위에 얼굴을 얹은 채, 더 이상 임이와 다투려 하지도 않았다. 난생 처 음 겪는 일이며 진이다 빠져버렸던 것이다. 겨울해가 지고 있다는 것을 아슴푸레 느꼈지만 상의는 꿈인지 생 시인지 알지 못햇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갔을까. 상근이가 일어섰다. 상의는 그가 용변을 보러 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목욕탕 쪽으 로 간 상근은 얼마 안 되어 빨랫방망이를 들고 나왔다. 상의가 무릎 위에 얹은 얼굴을 드는 순간 그 빨랫방망 이는 허공으로 올라갔고 다음 순간 "아이구우!" 임이 비명이 들려왔다. 상근은 빨랫방망이로 임이 머리통을 향해 내리친다는 것이 방망이는 어깻죽지를 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직일 놈이!" 한쪽 어깨를 감싸쥐다가 임이는 발딱 일어섰다. 그리고 상근이 멱살을 잡았다. 뼈뿐인 손이 상근의 뺨을 갈겼 다. 상의가 달려들었다. 상조도 달려들었다. 삼 대 일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상조는 임이 손등을 물었다. 그야 말로 소리 없는 격투였고 늙은 고모와 어린 조카들이 뒤엉킨 광경을 비극이라 해야 할지 희극이라 해야 할지, 어쩌면 가장 원시적인 것이었는지 모른다. 두 아이와 함께 보따리를 들고 들어온 호야네가 겨우 뜯어말렸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임이는 임이대로 두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임이는 말을 못하고 입술만 실룩거렸다. 그러더니 드디어 두 다리를 뻗고 통곡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음산한 겨울해는 졌다. 호야네는 저녁을 짓고 상의는 무섭다면서 울며 파고드는 상조를 달래고 있었는데 천일 이 돌아왔다. 두꺼운 외투를 입었고 털모자도 쓰고 있었는데 양쪽 귀는 빨갛게 얼었으며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는 임이를 힐끗 쳐다보며 모자를 벗고 외투도 벗었다. 두 손바닥으로 턱을 받치고 앉은 임이는 이상하게 통 곡을 끝낸 후부터 말이 없었다. 그는 천일을 거들떠보지도 앉았다. 염치없고 넉살이 이만저만 아니며 속이 없 는 임이의 침묵은 어떤 면에선 불안한 것이었다. "안방으로 좀 오너라." 하고 천일은 호야네와 상의를 불러들였다. 반나절 사이, 상의 얼굴은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공포와 분노, 절망 에 절여낸 것처럼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제 겨우 열여섯 살 나이에. "연강루에 가서 부탁을 하고, 알기는 알아봤는데," 천일이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내일쯤 조선으로 압송돼갈 기라 하더마." "왜요!" "형사들이 잡을라꼬 조선서 왔다 안 카나. 일은 거기서 터진 기라. 통영서 말이다." 천일은 입맛 쓰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서 터졌다니, 그기이 무신 말입니까?" 호야네가 물었다. "실은 나도 경험이 없어서 머가 먼지 잘 몰랐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믄 조선서는 금 가진 사람들 모두가 국가에 다 금을 팔아야 하고 개인이 금을 가지는 것을 금한다, 그러이 위법이다 그거지. 그라고 금을 나라 밖으로 실 어내는 것 역시 위법이라, 밀수라는 기지. 그러이 통영서 니 어무이한테 금을 판 사람이 적발되고 보니 자연 모든 사실이 밝혀져서." "아버지는 아니지 않아요." "일단은 공동으로 했다고 보는 기지. 그러나 형님은 모르는 일이고, 조사를 하면 밝혀질 것이니 쉬이 나오겠지 마는 형수는 재판까지 받게 될지 모린다 하더마. 우선 통영 외갓집에다 전보를 쳐놨다." 보연이 아파서 친정에 정양하러 갔을 때 천일은 홍이 대신 송금하러 가기도 했기 때문에 홍이 처가의 주소는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보소, 그라믄 저 할매는 상관이 없는 일이구마요." 호야네가 물었다. "그런 셈이지." 천일은 다시 입맛 쓰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연한 사람을 의심해서 큰일 났네." "이 차중에 그기이 문제가! 의심쯤이사 머가 대수고! 수갑차고 붙들리간 사람 생각하믄 의심받을 짓도 했고." 말은 그렇게 했으나 천일은 낭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까는." 상근이가 빨랫방망이를 휘둘렀다는 말을 하려다 만다. "하기사 머, 모두 제정신이 아닌께." 호야네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내일 떠난다 카이 면회하기는 글렀고." "우리도 가야잖아요." 함께 가지 않으면 영 이별이 될 것처럼 상의는 말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머니 아버지가 상근이 상조 자신으 로부터 떠난다는 사실 이외 아무것도 없었다. "외갓집에 전보를 쳤이니 너거 외삼촌이 아마 올 성싶다. 걱정 마라. 외삼촌이 못 오믄 나랑 가지." 전시하에 개인은 금을 소유할 수 없다., 일본 정부의 그같은 포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정부가 금을 회수하겠다 는 것이며 공출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라에 충성하기 위하여 국민은 고시한 가격으로 금을 정부에 팔아야만 했다. 금이 탄환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쇠붙이는 전선으로 전선으로 가게 돼 있는 판국인데, 물론 많은 사람들은 소유한 금을 내놨고 고시 가격으로 팔았지만 그것에 불응하여 금을 은닉한 소위 반역자가 없지도 않 았다. 은닉한 일부의 금이 비밀리에 유통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만주 혹은 중국 본토, 그 방면으로 유 출되는 것이 이른바 밀수였는데 전문적으로 하는 밀수꾼의 조직도 상당수 있었겠지만 만주서 조선으로 다니러 온 사람, 만주에 볼일이 있어 가거나 혹은 이주해가는 사람, 이들 중에도 조선서 금을 매입하여 실로 기기묘묘 한 방법으로 숨겨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일본제국의 경찰이라고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사람들은 이 윤을 위해 위험도 무릅쓰게 돼 있었다. 그러나 보연의 경우는 장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훨씬 단순했고 물정 모 르는 만용이라 할 수도 있겠다. 지난해 정양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나왔을 때 보연에게는 적잖은 속주머니돈이 있었다. 남편을 속이자는 것은 아니었고 홍이 내놓는 가용은 늘 여유가 있었으며 반대로 보연은 짠 편이어서 자연 모아진 돈이었다. 게다가 조선에 나온 후 약값이다, 생활비다 하며 보내 온 돈도 수월찮이 많았다. 보연은 그 돈을 한푼 쓰지 않았다. 넉넉한 친정에서 베풀어주는 대로, 그 자신 돈을 쓸 필요가 없었다. 하기는 늙은 부모, 어린 조카들, 애정의 베 품을 마다할 사람을 없을 것이지만 결국 보연의 그같은 이기적인 성품은 결혼 전과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친정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옛날의 친구였으며 집안끼리 가닥을 잡아보면 생판 남도 아닌 경선이가 보연을 보러 왔던 것이다. 중년티가 나는 그의 모습은 차림새부터 부유해 보였고 윤이 흐르는 피부하며 건강하고 행 복해 보였다. "너 본 지가 십 년, 그렇게 되나?" 경선은 감개무량하다는 듯 말했고 "경선이 넌 안 늙었네? 살기가 편한 모양이지?" 보연은 무엇보다 그의 건강이 부러워 한말이었다. "소문 듣기로는 큰 공장을 하고 돈도 잘 번다 하든데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늘 몸이 아파서." "하기는 아파서 왔다 하기는 하더라만."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날은 경선이 돌아갔는데 손아래 올케가 말을 꺼내었다. "승아어머닌 보통 사람 아닙니다, 형님." 아이 이름이 승아인 것 같았다. "자랄 때부터 야무졌지." "야무진 정도가 아닙니다. 소문난 알부잔데 안 하는 장사가 없어요." "장사를 해?" "뭐 외고 펴고 하는 장사는 아니지만... 앉은 장사지요." "앉은 장사가 뭔데?" "철철이 값이 오를 만한 물건을 물색해서 사 재놨다가 값이 오르면 장사꾼들 불러다가 물건을 내는 거지요. 장사눈이 여간 밝은 거 아닙니다." "어째 그런 재주가 다 있지?" "두 손 동개얹어 놓고 돈 버는 거지요. 남 보기에는 밤낮 놀러만 다니는 것 같지만. 머리가 참 좋은가봐요." 칭찬인지 비판인지 모를 말을 올케는 했다. 그후 경선은 몇 번인가 찾아왔고 보연이도 그의 집에 가곤 했다. 경선의 집 살림살이는 기름이 좔좔 흘렀다. 보연은 살벌하기 짝이 없는 신경의 집을 생각하며 혼자 쓴웃음을 띠기도 했다. 그날 경선은 사과를 깎으면서 말했다. "보연이 너 패물 많지?" "그런 것 없다." "돈 벌어서 어디 쓰게?" "그런 것 모르고 살았어. 아이 셋을 키워놓고 보니 어느새 세월은 가고." "무슨 소릴 해? 늙어 꼬부라졌어? 지금부터라도 늦잖다." "하긴 몸만 건강하다면, 실은 고운 옷 입고 밖에 나간 일도 별로, 밤낮 골골거리는 데다 우리 애아버지는 노상 바쁘고 어찌 헛산 것 같은 생각도 드네." "하기야 패물이 있어도 차리고 다닐 수 없으니." "너는 많이 있나부지." "보여줄까?" "그래." 해서 본 것이 그 비녀 가락지 팔찌 등이었다. "차리고 다닐 수도 없지만 돈 좀 쓸 데가 있어서 팔려고 해도 아무 앞에나 꺼내놓을 수도 없고." 보연은 패물들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만주 가는 사람들은 더러 금붙이 사가는 모양이더라. 그곳엔 금값이 좋다던데? 무사히 가져가기만 하면." 결국 보연은 돈을 다 털어서 그 많은 금붙이를 샀던 것이다. 이튿날 홍이와 보연이 조선으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상근과 상조는 소금에 절인 푸성귀같이 풀이 죽어 있었다. 천일의 아들 호야하고 놀려 하지도 않았다. 상의도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임이의 거동이었다. 밥만 먹고 나면 방구석에 처박힌 채 꿈쩍하지 않았다.하루가 지나가고 또 하루가 지나갔다. 나흘째 되던 날 천일 부부는 몸살이 나고 말 았다. 아이들 때문에 지나치게 신경을 써서 탈진한 것이다. 상조는 한밤중 자다 말고 일어나서는 어미를 찾고 소리지르며 울곤 했다. 천일은 상조가 병날까봐서 벌벌 떨었다. 천일 부부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상가를 찾은 메까마귀처럼 김두수가 나타났다. 소문을 듣고 온 것 같았다. 집에 오기는 처음이었다. 인버네스를 입고 수달 피 모자를 쓰고 육덕은 여전했다. 동삼을 삶아먹었는지 혈색도 좋았다. 그런데 좋다는 그 자체가 그의 약점으 로 뵈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누워 있었던 천일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밀고에 대한 의심을 풀렸지만 홍이 심중을 잘 알고 잇는 천일은 경계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그를 대한다. "허허어. 무슨 그런 해괴한 일이 다 있는고?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 함께 잡혀갔으니 집안 꼴이 뭐가 되 겠나." "..." "길게 끌면 큰일인데?" "형님이야 무관하니까 곧 풀려나겠지요." "무관한 걸 어떻게 증명하나. 한지붕 밑에서 일어난 일을." 하고는 곁눈질을 하며 천일의 표정을 살핀다. "형님이 관련됐다는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부부지간이라도 얼매든지 비밀은 있인께요." 천일은 볼멘소리로 응수했다. 찌뿌드드한 몸 때문에 신경질이 나기도 했다. "법이라는 게 다 옳고, 참된 것 편에 선다고 믿었다가는 큰코 다치지." "하는 말이 꼭 잘못 돼라 하는 것 같소." 천일은 말투를 바꾸었다. "그럴 리가 있겠나. 노파심에서 한 말이고 또 사실이 그러하니, 한데 이 할망구는 어디 갔나?" 두리번거린다. "누구 말입니까." 알면서 짐짓 그렇게 나가본다. "아이들 고모 말일세." "여기 와 있는 거를 우찌 알았십니까" "여기 간다고 나한테 말하고 갔으니 알지." "예... 어디 갔는지 아침부터 안 보이네요." "흥, 그는 그렇고 공장은 휴업이라며?" "예." "이럴 때일수록 일은 계속 해야지. 쉬었다가 일어설려면 힘들어." "일거리도 시원찮소." "그럴 때도 있지." "내리막길이요. 일을 할래도 자재가 있어야지요 충전만 해주고 밥먹겄십니까." 의도적으로 부수어댄다. 그것을 알아차린 김두수는 씩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헌데 자네 태생은 어딘가? 경상도 말씨를 쓰네? 전에도 한번 물어볼려다 말았지." "하동이요." "하동의 어디?" 악양의 형사리요." 천일의 태생이 평사리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마씨 부부가 평사리에 들어온 것은 김두수가 떠난뒤, 그리고 호열자가 지나간 뒤의 일이었다. 김두수는 노린재 챗국 마신 상을 했으나 그 화제를 계속하지 않았다. "이 집은 어찌 돼 있나? 홍이 소유인가?" "셋집이지요." "셋집이라? 그럴 리가 있나." "객지 생활에 뿌리박고 살 것도 아니겄고 집 장만해 머하겄소." 짜증도 나고 별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어서 천일의 어투는 점점더 소홀해진다. "흥, 불각처에 들이닥쳐서 잡혀갔으니 중요한 서류 같은 것의 보관은 잘돼 있는지 모르겠네? 모두 도둑놈 세 상인데 믿을 만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노골적으로 천일을 빗대어 말핬다. 한번 떠보는 것 같았다. "그렇지요. 상가집의 개같이 머 먿어묵을 거 없나 하고 이분거리는 것들 많지요." 한번 뿌리쳐놓고 "중요한 서류라 카믄 공장에 관한 것 말입니까?" "그렇지이." 김두수의 상체가 성급하게 앞으로 기울었다. 애당초 글러먹은 수작이었다. 엤날의 그 악마의 독기는 녹슨 쇠붙 이처럼 푸석푸석했고 사람에 대한 자질도 엉성했으며 일직선으로 재단된 도화지처럼 그 빳빳한 판단력, 먹이 에 정확히 참을 꽂는 순발력, 모두가 무디어진듯 김두수에게서 어떤 치기마저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조 락의 모습이었다. 심신의 노쇠보다 일본이라는 거대하고 튼튼한 밧줄이 이제는 썩은 새끼줄이 된 때문이리라. 그가 놀던 부대, 그가 주름잡던 인간들, 이제는 가고 없다. 몹쓸여자 장사로 축재는 했겠지만 돈으로 메우기에 는 그 악의 구렁텅이가 너무나 깊고 권력의 단맛은 너무나 절묘했다. 제발 만수무강하여 지하에 잠든 원혼들 의 해원이 될 그날까지 살아주어야 할 터인데, 평범한 천일의 눈에도 김두수는 허수아비로 보이기 시작했다. 비웃들 대답이 없는 천일을 보다 못해 명색이 내가 동업잔데, 마치 샛바람이 자나간 벌판같이 된 이 꼴을 그냥 보아넘길 수는 없지. 차질이 없도록, 홍이 돌아올 대까지 챙겨놔야 할 게다." 동업자라 했십니까?" 천일은 갑자기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래 동업자다!" 무신 그런 말심을 하십니까? 세상에 봉사들만 사는 줄 아십니까?" 뭣이!" 그런 기이 통하든 세상도 있었십니까?" 이놈이 뉘를 놀리는 게야! 수상쩍은 놈이로구나!" 아저씨 이러지 합시다. 아이들만 조선으로 데리가믄 그만인 기라요. 아이들 외삼촌이 시적 을 기고, 아무것도 없소. 빈털터리라요. 공자이라 캐야 휭한 빈 땅밖에 더 남겄소? 건물이야 바라크 아니요. 땔감밖에 안 될 기고 형님은 순전히 기술 팔아묵고 산 셈이제요." 천일은 또다시 너털웃음을 웃는다. 몸살도 다 달아난 듯 속이 후련해지는 것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 잘한 다 싶었던 것이다. 네놈이 벌써 일 저질렀구나! 그렇게는 안 될 거다! 내가 누구냐! 하하핫 핫핫핫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 르더라고 천방지축이네. 형사들이 줄줄이 내게 이어져 있는 걸 모르는 모양인데 뜨거운 맛 좀 봐야겠다." 아저씨 흥분하지 마이소. 없어니 없다 한 기이 죄가 되는 법도 있소? 또 그렇소. 내가 모리는 동업자가 어디 있단 말이요. 그거야 말로 사기죄가 될 성싶구마는. 자동차 불하받을 때마다 아저씨가 와리 묵는 거는 나도 아 는 일이요만 그기이 동업자다 그 말이요? 아따 그렇담 시경 천지 동업자가 얼매나 될지 모리겄네. 머 날 잡아 갈 근거가 있이믄 휘파람 불어서 형사나으리 모시오소." 김두수는 기가 막히는 모양이다. 으르렁거리며 잠시 생각해본다. 공갈 협박이 영 먹혀들어가지 않는다는 생각 이다. 옛날 같으면 이깟놈 내 새끼손가락 하나로 문드러버릴 것을. 대체 저놈은 뒤에 누가 있길래 큰소리 뻥뻥 치느 냐 말이다.' 아저씨." ." 침 삼키노라고 목젖 주저앉을까 걱정되어 하는 말인데요. 공장은 애당초 형님 것이 아니었소. 물론 명의는 형 님이지마는 빚 얻어서 시작한 일이라 공장 등기는 옛날옛적에 저당잡혀 있다, 그 말입니다. 내 말뜻 그래도 모 리겄소? 물론 저당잡은 사람은 부자고 명망이 있고 관가하고도 가까운 중국인인데 형이 원한다믄 공장이야 계 속해 할 수는 있지요. 서류 가지고 따질라 카믄 그 집에 가서 따지시지요. 하하핫핫핫, 그리고 휘파람을 불든 호각을 불든 해서 형사들 데리고 가보소." 이 육시랄 놈 같으니라고!" 그러나 김두수는 미적거리고 앉아 있었다. 왠지 상대를 빠뜨릴 함정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놈아! 처음부터 이거는 잘못된 얘기다! 내가 언제 침을 삼켰느냐!" 그라믄 나는 언제 일 저질렀소.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제요." 내가 흥분 좀 했기로서니 나잇살 먹은 사람한떼 그 따위 버르장 머리가 어디 있어!" 김두수는 목소리를 높였으나 내용은 다듬고 있었다. "이자 그만 가시이요 불난 집에 부채질 하지 말고. 이홍이를 관 속에 넣어 못질한 것도 아닌데 와 그리 성미 가 급합니까." 김두수는 일어섰다. 나 오늘은 이대로 갈 것이로되 내 성질이 남하고는 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게야." 그 말에는 김두수 특유의 옛날 모습이 다소 남아 있었다. 그가 나가고 난 뒤 호야네는 보소 와 그랬십니까. 그냥 귓등으로 흘리고 말 일이지. 사람 영악한 것 범보다 무섭다 안 갑디까." 잔소리 마라! 저런 놈은 쳐직이야 하는 기라. 사람이 천년 만년 살기가! 울아부지는 왜놈 헌병한테 총맞아 죽 었다!" 정말 와 이캅니까. 큰일 나겄네." 아이들 한곳에 모여앉아 천일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들 밥은 해믹있나!" 이자부터 점심 채리야제요." 상근아 상조야! 걱정마라 이 아저씨가 너거들 지키줄 기니 밥 많이 묵고. 외삼촌 오시믄 아부지 어무이 있는 고향으로 갈 긴께." 홍이와 보연이 조선으로 압송된 지 팔 일 만에 보연의 남동생 허삼화가 드디어 나타났다. 깊이 잠든 한반중 같았던 집안이 선잠을깬 듯 요란스럽게 술렁거렸다. 외삼촌!" 상의가 울부짖었다. 어릴 적의 기억은 희미했고, 그러니까 재작년 인가 한번 다녀갔으며 작년 모, 보연이를 데 리러 온 일이 있었을 뿐인데, 그때 아이들은 빙긋이 웃었으나 몹시 낯가림을 했었다. 그런 삼화에게 상의는 스 스럼없이 매달렸고 상근이와 상조도 비실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오냐, 모두 별탈 없이 있었구나." 삼화는 막내 상조를 안았다. 상조는 두팔로 외삼촌의 목을 감으며 어깨에 볼을 대고 눈을 꿈벅거렸다. 삼화의 얼굴은 비교적 밝은 편이었다. 그는 상조를 내려놓고 천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소. 자형이 잘 있을테니 걱정 말라 하기는 하더군요. 믿는 곳이 있어서 그랬든 모양이오." 지가 머," 하다가 인자 정말 살 것 같십니다.' 천일이뿐만 아니라 호야네도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했다. 팔일 동안은 이들 부부에게 힘들고 고통스런 시간이 었다. 가볼 곳이라고는 연강루밖에 없었다. 의논할 곳도 연강루밖에 엇었다. 그러나 천일은 호이만큼 중국어가 능숙하지 않아서 의사 소통이 충분치 못했고 홍이만큼 가깝게 접촉한 사이도 아니었기에 허물없이 비비댈 처 지도 아니었다. 김두수가 왔다간 뒤 그 일을 보고하러 갔을 때도 연강루 주인 진씨는 덮어놓고 염려하지 말라 고만 했다. 어쩐지 그냥 건성으로 하는 말 같아서 친일은 서운했고 불안했다. 홍이가 없는 신경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천일이 부부에게도 공아 된 것처럼 외롭고 두려웠다. 만리타국이라는 것을 뼈아프게 일깨워주었던 것 이다. 그리고 또하나는 슬그머니 나간 채 돌아오지 않는 임이에 대해서도 근심이 안 될 수 없었다. 김두수와 함께 계략을 꾸미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 심히 신경이 쓰였다. 그라믄 형님을 만나보싰십니까." 만났소." ." 전보를 받고 곧장 올 생각이었는데 자형을 면회하고 오느라 늦었소." 우떻게 돼간다 합니까." 모두 놀라기야 했겠지만 대단한 죄질이 아니니 너무 적정들 마시오." 하지마는 조선서 형사들이 온 걸 보이." 전문적인 밀수꾼들 소행인지 알고 그랬겠지요. 그러나 어쨌든 위법은 위법이었으까. 자형은 쉬이 풀리겠지만 누님은 좀 고생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모두 힘들 쓰고 있으니," 했을 때 상조는 삼화의 무릎을 잡으며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상조야 걱정 마라. 조선에 나가면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랑 친척이 많으니까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다."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이들 얼굴에는 이미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생명이란 얼마나 신비스런 것인가. 삶에의 의지는 영악하고 핏줄을 당기는 힘은 불가사의하다. 천일이 부부가 혼신으로 아이들을 감싸왔지만 저 토록 스스럼없지는 않았다. 신뢰하고 의지하면서도 아이들은 엄청난 사건을 겪은 뒤 두려워하며 자신들을 숨 기려 하고 방어하려는 기색이 늘 있었다. 그랬는데 한두 번 본 외삼촌에게 모든 긴장이 풀려 기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솔직히 말해서 천일부부는 다소 서운했다. 오래간만에 이 집 저녁 불빛은 사람이 사는 흔적을 강하게 나타내며 일렁였다. 간혹 웃음 소리가 나기도 했고 호야와 그의 동생 호준이하고 상조는 놀기도 했다. 상의는 아이들 옷을 갈아입히기도 했다. 호야네는 오래간만 에 장을 보아 손님을 위해 정성스런 저녁을 차렸고, 몸집이 자그마한 삼화는 천일이보다 한두 살 아래인 듯 했으나 성품이 온화하고 나이보다 노숙했다. 그는 외할아버지인 꼬장꼬장한 김훈장을 닮은 것 같지 않았다. 말 많고 상민의 자식인 홍이에게 딸을 주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던 부친 쪽을 많이 닮은 것 같았다. 긴장이 풀어진 아이들은 일찌감치 잠에 떨어졌고 천일이 부부, 허삼화, 상의가 거실에 앉아서 떠날 준비에 대 하여 얘기를 하고 있었을 때 뜻밖에 하얼빈에서 송장환이 들이닥쳤다. 아이고 선생님!" 할아버지!" 천일하고 상의가 동시에 소리쳤다. 우떻게 아시고 오싰십니까?" 연강루에서 기별이 있었네. 아이들은 다 괜찮은가?" 예. 저, 이, 인사하시이요. 이 어른은 형님 선생님이십니다." 천일은 삼화를 보고 말했고 다음은 조선서 막, 낮에 오신 상의 와삼촌입이다." 하고 송장환에게 말했다. 네, 자형한테서 선생님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절 받으십시오." 그러나 송장환은 손을 내밀었다. 송장환입니다." 하며 악수를 청했으나 삼화는 기어이 절을 했다. 용기 백배한 천일은 호야네보고 술상을 차리라 하며 서둘렀 고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서운해했던 연강루 전씨에 대하여 미안하게 생각했다. 일부러 하얼빈까지 연락해준 것이 고마웠고 김두수에 대한 공포감도 풀리었다. 상의와 호야네는 안방에서 옷가지를 챙기기 시작했고 남자 들은 거실에서 술상앞에 앉았다. 송장환의 얼굴도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천일은 김두수에 관한 얘기를 소상하 게 말하였다. 그 놈이 진작에 죽었어야 하는데, 몹쓸 놈." 했으나 얘기는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역시 연강루의 진씨처럼. 그놈 걱정은 하지 맣게. 그놈 자신이 아편, 금밀수에 걸려 있고 지금은 실 떨어지 연이다. 이젠 힘이 없어." 하고 말했다. 그리고 삼화에게 헌데 이군은 뭐라 하든가요?" 물었다. 송선생님한테 한 말이 있으니까 공장에 관한 것은 일임하라 하더구만요." 송장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아이들 데리고 되도록 빨리 출발하도록 하시고 천일이는 이군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 있도록, 이군이 돌아와야, 이 기회에 공장은 처분하는 게 좋고 천일이 문제는 이군이 다 생가가고 있을 게야." 지야 뭐 지금 그런 생각할 때도 아니고 아이들만 데리고 간다면 한시름 놓겄십니다." 천일이 자네 수고했네. 사람이 살자면 별의별 일을 다 겪게 되는게야." 이번 일은 제 누이의 생각이 얕아서 저지른 일이라 정말 자형한테도 미안하고 여러 사람한테 폐를 끼치게 됐 습니다." 삼화가 말했다. 이군이 속이 깊고 또 공장 문제는 진작부터 얘기가 있었소. 적당한 기횔 바서 털고 일어날 생각을 했던 거요. 하니 너무 심려 마시오." 그러면 자형은 조선으로 돌아올 생각이었습니까?" 글쎄 그거는, 이군 판단에 달린 거 아니겠소?" 송장환은 자세한 얘기를 할 수 없었다. 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했다. 그럼 언제 떠나시겠소?" 내일이라도 가야겠지요. 누님이 아이들 때문에 온정신이 아닙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오. 내일 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볼일이 있어서 이만 가야겠소." 하고 송장환은 갔다. 이튿날 아침 임이는 어디서 뭘 했는지 옷보따리를 하나 들고 나타났다. 식구들은 모두 그를 의심했던 것이 미 안하여 반갑게 맞이했다. 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추위에 떨고 있었으며 옷도 얇았다. 짐들을 와 싸놨노." 오늘 떠납니다." 호야네가 말했다. 누가? 모두 떠나나!" 임이는 낭패한 듯 말했다. 아니요, 아이들만 갑니다. 아이들 외사촌이 오시서." 그라믄 나는 우짜고." 그나저나 어디 갔십디까?" 천일은 한가닥 의심을 놓지 못하고 물었다. 대련에 갔다가... 거기도 있을 형편이 못 돼 왔는데 그라믄 나는 우짤 기고!" 있는 대로 함께 있어봅시다. 형님 오실 동안 우리는 여기 있일긴께요." 안도하는 것 같더니 다음 다음 순간, 무신 이런 난이 있겄노?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이 수갑을 차고 잽히갔으이 아이고 아이고." 하며 헛울음을 잡히는 것이었다. 방안에 외삼촌이라는 사람이 있을것으로 생각하고 그러는 것이었지만 삼화는 차표를 사기 위해 일찍 집을 나가고 없었다. 어지가지할 곳 없는 나는 어짜믄 좋노! 나이나 젊단 말가. 자식새끼 하나 없고 천지간에 붙이라고는 동생 하 나뿐인데 아이고 내 팔자야!" 상근이는 방안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호야네와 상의는 아침을 짓고 떠날 준비에 바빳으며 어린아이들만 임이 가 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천일이는 임이의 속마음을 알기 때문에 미워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참는 다. 그만해두소.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겄소. 집안이 이 꼴인데 이녁살 걱정만 하고 무신 인심이요." 시끄럽다! 니가 뭐를 아노!" 했으나 방안에서 아무 기척이 없는 것을 깨닫고 흐지부지 울음을 거두었다. 그리고 차려낸 밥상을 차고 앉아 서 여러 끼 룸은 사람처럼 임이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통한 것은 상근이가 빨랫방망이로 때린 일에 대해서는 일절 말이 없었다. 넋두리할적에도 그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어린 조카에게 맞았다는 사실이 그에 게도 창피스러웠던 모양이다. 상근이는 임이 눈을 피해가면서 맙을 먹는다. 떠날 준비는 다 되었고 아이들은 기둥시계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쉬운 생각은 티끌만큼 없었다. 학교며 친구도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쏜살같이 부모 있는 곳으로 마음은 달리고 있었으며 일각이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누나, 외삼촌 왜 안 와." 상근이 물었다. 곧 오실 거야." 올 때가 되믄 올 긴데 오도방정을 떨어쌌는다. 여기 있으믄 누가 잡아묵나. 고몬데 아이들 건사 못할까봐서?" 임이가 말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누가 외삼촌 왜 안 와." 하고 상근이는 또 물었다. 그때 마친 삼화가 돌아왔다. 그는 호야와 호준을 위해 과자를 한아름 사들고 왔다. 그리고 안사돈, 홍이 누님이라는 임이와 수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올캐는 친정이 권속이 많아서 만리 타국까지 일봐줄 사램이 다 있는데 우리 상의애비는 전지간에 누부 하나밖 에 없어이 처가에 눌릴 만도 하제." 삼화는 당황했다. 다소 추격을 받기도 했다. 누이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을 뿐만 아리ㅏ 산전수전을 다 겪은 듯 처연하리만큼 노추가 드러나 있는 노파가 과연 아이들의 고모인가, 점잖고 자존심 강한 매부의 누님 인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좌우간에 이리 오싰이니 고맙기는 고맙소. 집 걱정은 말고 아이들이나 데리고 가이소. 생활비만 좀 있이믄 집 이사 내가 어련히 지키겄십니까." 등다 못해 천일은 시간 늦겄십니다. 할매는 좀 가만히 기시이소." 할매라는? 굴러온 돌이 본돌 찬다 카더마는 말짱 남의 식구들이 판을 칠라 카네. 더러바서 참." 사돈 면전이라 하여 체면 차리는 것도 없었다. 그는 다만 만주바닥의 거리가 무서웠고 그 거리는 그에게 있어 서 굶주림의 거리였었다. 수전노였던 임이네와 달리 임이는 악랄하다 할 수 없는 정신뱍약이었다. 호야네와 임이가 집에 남고 작별을 한 삼화를 따라 아이들과 천일이 집을 나섰다. 얼마만큼 가다가 상의는 되 돌아섰다. 외삼촌 잠시만." 하고 그는 집으로 달려간다. 지갑을 꺼낸 상의는 돈을 다 털어냈다. 고모 이거 받아요." 어리둥절해하는 임이 손에 돈을 쥐여준 상의는 고모 미안해." 하면서 눈물을 닦고 급히 달려나왔다. 상조의 손을 잡은 상의는 뒤돌아보지 않고 한길가까지 나와 마차에 오 른다. 신경은 흐린 겨울 하늘 밑에 소리 없이 드러누워 있는 것 같았다. 마차 속에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말발 굽 소리만 경쾌하게 울리고 있었다. 털외투에 털모자를 깊숙이 쓴 아이들 입에서 입김이 서리고 있었다. 역 대합실의 잡담을 헤치고 개찰구 가까이까지 갔을 때 송장환이 그곳에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오냐." 아이들은 비로소 이별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도 같이 가세요." 상근이가 말했다. 요다음에." 하고 송장환은 웃었다. 와보니, 저의 자형이 외롭지 않았구나 생각했습니다." 삼화 마레 이군은 상근이만할 때부터 내가 가르쳤소. 장난이 심하고 공부는 잘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그간 오랜 세월이 흘렀소이다." 송장환은 잠시 동안 감회에 젖는 듯했다. 선생님을 만나뵈니 자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거의 만나지 않고 지내왔으니까요. 아무튼 선 생님께서는 모조심을 하십시오." 삼화는 송장환을 평범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뭔지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송장환은 조용히 삼화를 바 라본았다. 이군 처남도 만사에 신중하고...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의 얘기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래도 만주는 조선보다 자유로운것 같습니다." 그래요?" 말씀 낮추십시오." 그 말 대답없이, 칼날 같은 세상요. 이군보고도 부디 자중자애하라 전해주시오." 전하겠습니다." 이곳 걱정은 말라는 말도." 하고나서 송장환은 손을 내밀었다. 삼화는 두 손으로 송장환의 내민 손을 잡으며 고맙습니다. 다시 뵐 날이 있을 것을 믿겠습니다." 송장환은 아이들 머리를 쓸어주고 돌아섰다. 2장 송화강의 물 여행 가방을 메고 간편한 차림의 중년 사내가 허공로에 있는 운회약국으로 들어왔다. 매우 세련된 모습이었다. 그는 일본말로 소화제를 달라고 했다.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돌아서서 약을 꺼내는데 머리를 걷어올린 목덜 미가 눈이 부시게 희었다. 여자는 포장을 하다 말고 사내를 쳐다보았다. 동시에 사내도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돌이 된 듯 행동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본다. 여자의 얼굴은 차츰 백지장으로 변해갔고 남자 눈에는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여자는 유인실이었다. 여행 가방을 메고 들어온 사내는 조찬하였다. 그것은 기 구한 만남이었다. 유인실은 얼마 전에 상해에서 하얼빈으로 돌아왔고 당분간 머물면서 수앵이를 위해 운회약국 일을 도와주고 있었던 것이다. 조찬하는 당순한 여행이었다. 울적하거나 딜레마에 빠졌을 때 스스로 자신을 건져올리려 여행 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주에는 전에 몇번인가 온 적이 있었다. 그는 만주의 북부 지방을 여행하는 것을 특 히 좋와했다. 러시아풍 고건축이 들어선 하얼빈도 그가 즐켜 찾는 도시였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인실씨!" 찬하의 목소리는 역시 분노에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인실은 멈추었던 손을 놀리며 약을 포장했다. 그리고 찬하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입술은 얼음장같이 차게 보였다. 오래간만입니다., 조선생님." 조찬하는 뭐라 소리지르려다 간신히 참는다. 정말 무섭군요. 이런 기우가 어디 또 있겠소, 인실씨." ." 어디 가서 차라도 마시며 얘기 좀 합시다. 안 된다는 말은 못할 겁니다." 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글고 느릿느릿 가운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인실은 스프링 코트를 입은 모습으로, 핸드백을 들고 나왔다. 점원 아이에게 중국말로 뭐라 하고 약국을 앞장서서 나갔다. 그 는 느릿느릿하게 걷고 있었는데 때때로 휘청거렸다. 점심 전이시지요?" 인실은 물었으나 찬하는 차츰 유인실을 만난 것을 실감할 수 없었던지 분노는 사라졌고 자꾸만 고개를 흔들곤 했다. 유인실이 찬하를 안내해간 곳은 유명한 양식점 흑룡이었다. 웨이터가 인실의 코트와 찬하의 여행 가방을 받아 간수했다. 테이블에 마주앉는다. 다 같이 바라보면서 침묵한다. 숨이 막히는 침묵이었다. 찬하가 말을 꺼 내지 않는다면 인실은 영원히 침묵할 것만 같았다. 찬하가 먼저 말을 했다. 묻고 싶은 말은 없스니까." ." 뭣이든 물어보십시오." 물어볼 말이 뭐 있겠습니까." 진실입니까?" ." 찬하는 입이 타는지 갖다놓은 컵의 냉수를 마신다. 인실씨에게는 이제 그 솔직함도 없어졌습니까?" 물어볼 권리가 저에겐 없지요." 그 말을 했을 때 테이블 위의 깍지낀 손이 떨었다. 하기는 다 지나간 일이지요. 이제 와서 제가 뭐라 비난을 하겠어요. 인실씨만큼 결단력이 없었던 저 자신 때문 인데." 저에게는 지난 날이 없습니다." 수프를 날라왔다. 샐러드 빵, 인실은 그것들은 차근차근 먹고 그릇을 비웠다. 그리고 고기를 썰어서 규칙적으 로 먹었다. 음식을 못먹는 찬하는 인실의 행위가 거의 무의식적인 것임을 느꼈다. 식사가 끝나고 홍차를 마시면서 찬하가 말했다. 두번 다시 이런 기회는 없겠지요." 아마." 아이가 어찌 되었는지 상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 인실씨에게 고통을 주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아까는 저도 모르게 격해 있었습니다. 인실씨는 물어볼 권리가 없다 했으나 저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가 없습니다." 인실은 눈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본다. 말할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요?" 아이는 열한 살이 되었고 제 호적에 입적하여 기르고 있습니다." 순간 인실의 눈이 돌팔매같이 찬하 얼굴에 날아왔다. 그렇게 시초가 잘못되었습니다. 인실씨는 제가 기르는 것을 원치 않았을 테니까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은 다시 흘렀다. 오가다상이 어디 있는지 모르시지요?" ." 말씀 좀 해보세요." 찬하는 차라리 애원조로 나왔다. 모릅니다." 신경에 있어요. 일 년에 한 번 정도 일본에 오는데 그럴 때는 꼭 저의 집에 들르곤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오가다상이 찾아올 때 마다 저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왜 그렇게 하셨어요." 인실은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그 말 대답은 없이 찬하는 냅킨을 접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송화강 강가에라도 나가보시겠습니까?" 인실은 순순히 따랐다. 송화강 강가 광장을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인실은 따라왔다. 마음도 그러했지만 말 역시, 거의 찬하는 횡설수설이었다. 별안간 부딪친 놀라운 현실 앞에 뭔지 모르지만 사 태가 갈기갈기 찢겨진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인실을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 다. 하얼빈인가 신경인가 어디서 마차를 타고 가는 인실이를 보았다는 오가다의 말이 겨우 생각났다. 그냥 지 나쳐도 죄될 것이 없었던 남의 여자, 그들의 깊은 관계에 다소는 책임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찬하의 마음이 다 소 냉정했더라면 이런 기막힌 해후는 아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강가에 앉아서 대안을 바라본다. 어느덧 겨울은 가고 초봄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지상의 나무며 풀 들은 터질 듯 푸르름으로 발버둥 치고 있었다. 강물 위로 유유히 흐르고 있는 돛단배는 바람을 잔뜩 안고 있 었으며 유람선은 물살을 가르며 지나갔다. 멀고먼 강기슭은 봄아지랑이에 녹아들고 있었다. 바람은 다소 쌀쌀 했지만 구름은 한가롭게 강물 따라 떠내려 가고 있었다. 오늘 이 만남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지요." 찬하는 담배를 붙여물고 그어대었던 성냥개비를 물 위에 던진다. 인실씨는 오가다를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인실씨 자신이 아이의 얘기를 하십시오. 아이가 고아원에 간 것도, 알지 못할 사람의 양자로 간 것도 아닙니다. 그 아이는 인실씨가 알고, 또 오가다가 아는 바로 제가 기르고 있 으니까요. 십일 년의 세월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돼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실씨가 소망한 대로 아이는 일 본땅에 존재도 모르게 묻혀버리지는 않았지요. 이제는 인실씨가 짐을져야 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런 일이라도, 오가다를 만나 얘기하십시오. 당신의 아이를 내가 낳았노라고. 그것도 아니 하겠다면 인실씨는 영원히 용서받 을 수 없을 겁니다." 영원히, 네 그렇지요. 영원히." 나는 사실 그 아이를 사랑합니다. 거의 내 자식이거니, 착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집사람도 그렇구요. 하지만 그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요. 자기 자식을 눈앞에 두고 친구의 자식이거니 생각하고 있는 오가다를 볼 때 나 는 과연 인실씨하고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지 갈등에 빠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내 이성이 마비된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것은 죄악이다! 하고 생각하곤 하지요. 그간 세월이 많이 흐르지 않았 습니까? 인실씨 심경에도 변화가 있는 것이 자연스런 일 아닐까요? 민족의식이 에고이즘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 말 할 자격이 저게는 없는지 모르지만. 일본은 멀잖아 패망하겠지요. 일본인도 사람입니 다. 사람으로서 피해자이기도 하구요. 이런 정세하에서 오가다나 저나 앞날은 안게 속입니다. 일본인인 오가다 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는지 그것도 의문입니다. 일본인을 살아했다는 죄의식에서 벗어 나십시오. 인실씨는 사람을 사랑한 것뿐입니다. 인실씨는 오늘까지 있어온 용기보다 더 큰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얘기를 하다보니 십일 년 전과 내용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찬하는 깨닫는다. 그때 인실은 그 말로 설득되지 않았다. 제가 무지하게 보이지요?" 인실은 혼잣말같이 되뇌었다. 어떤 면에서는." 동경 하비야공원에서 인실은 만났던 일이 마치 어제일처럼 되살아났다. 찬하 눈앞에 머리를 바짝 걷어올려서 고무줄로 동여매고 흰 바탕에 회색 물방울 무늬의 헐렁한 원피스를 입은 인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는 이제 다 끝났습니다. 후회하지 않아요. 두렵지도 않습니다. 다만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그때 인실의 음성도 똑똑히 들려오고 있었다. 하기는 저같이 무위하게 사는, 용기도 결단도 못하고... 가문을 산산조각 박살을 내었건만 그래도 갈 곳이 없더 군요. 어떤 면에선 인실씨는 무지할 만큼, 네, 무지할 만큼 자신을 밟아 뭉개고 나가더군요. 부럽기도 하구요. 그러나 제가 인실씨의 사는 방식에 관여하고 간섭해서도 안 되겠지만 아이의 문제만은 인실씨 자신이 처리하 십시오. 십일 년 동안의 괴로움을 이제 나는 벗어야겠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인실씰 만나지 않았더라도 지금쯤 나는 인실씨와의 약속을 포기했을 겁니다. 신경에 가게 되면 오가다를 만나게 될 테니까요. 불쌍한 친구, 네, 불쌍한 친구지요. 그러나 행복한 사냅니다. 그런 인간이 얼마만큼이라도 현실 속에 있다는 것은 희망이지요." 조선생님." 네." 제가 하지요. 선생님은 약속 안 깨셔도 됩니다. 제가 하지요." 찬하가 벌떡 일어섰다. 정말입니까?" 인실을 내려다본다. 웅크리고 앉은 여자의 눈부시게 흰 목덜미가 보였다. 네. 그렇게 하겠어요." 잘 생각했습니다." 하는데 의외로 찬하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그애는 행복했군요. 행복하게 자랐군요." 영롱한 샛별 같은 아입니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도, 죄송합니다." 실은 저도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농치듯 말했으나 건성으로 하는 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무도한 여자를 누가 용서했을까요? 조선생입니까?" 스스로 용서받은 거지요." 인실은 고개를 들고 찬하를 올려다보았다. 눈에 핏물이 괸 듯 핏발이 서 있었다. 선생님, 저 여기 한 달 가량 있을 거예요. 그 동안은 언제라도 좋습니다. 운회약국, 아까 오신 그 약국을 찾아 와서, 저말고 윤광오씨를 만나면 됩니다. 윤광오 씨는 오가다 그분하고도 아는 사이지요. 오래된 일이지만 동 경에 유학했을 당시 동경 대지진이 있었을 때 윤광오 씨가 피신해간 곳이 오가다 그분의 집이었어요. 만나게 되면 서로 알아볼 거예요." 찬하는 재빨리 수첩을 꺼내어 이름을 적고 약국 이름도 적어넣었다. 설마 인실씨가 결혼하신 거는 아니겠지요?" 찬하는 또 농담 비슷하게 물었다. 결혼이라구요?" 만일 그렇다면 오가다에게 나는 아무말도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인실은 고지식하게 대답했다. 봄인데 참 쓸쓸하군요." 그것도 풍경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것 같았다. 말로는 그랬으나 찬하는 인실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보다 오가다를 만날 때마다 약속을 깨지 못했던 것은 감정 쪽이 훨씬 강했다. 그는 쇼지를 사랑했고 깊은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조선생님." 네." 저 혼자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그, 그러지요. 그럼 나는 강가를 돌아서 가겠습니다. 괜찮겠어요?" 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아서서, 뒷모습을 보이고 가는 찬하에게 안녕히 가세요. 용서하시구요." 그러고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인실이 운회약국에 돌아왔을 때 사방은 어둑어둑했다. 약국 안에는 수앵의 근심스런 얼굴이 있었다. 언니!" 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수앵이 소리를 질렀다. 어디 갔다오는 거예요?" 아는 사람을 만나서." 얼마나 놀랐다구요. 저 애 말로는 이상한 남자가 와서, 그것도 성난 얼굴로 강제로 데리고 나갔다 그러잖겠어 요?" 미안해. 걱정시켜서." 안색도 안 좋은데, 정말 아무 일 없는 거지요?" 걱정 말래도, 이따 얘기할게." 모두들 긴장했어요. 하여간 돌아와서 맘 놨다." 수앵아." 네." 윤성생님 어디 가셨니?" 집에 들어갔어요. 옷 갈아입는다구." 웃을 갈아입니다니?" 언니도 참 까맣게 잊었나봐요?" 뭘." 오늘 밤 큰집에서 잔치가 있잖아요?" 아아 참 그렇지." 우리도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준비해야지요. 언니 기다리느라 늦어졌어. 이애 일찌감치 묻 닫아." 수앵은 점원 아이에게 일러놓고 인실의 등을 밀다시피 밖으로 나왔다. 언니 공기 참 좋지?" 나뭇잎 냄새가 풍겨나오는 것 같아요. 봄은 또 왔는데, 마음은 사춘기만 같은데, 언니 나 늙나봐요." 또 그 소리." 아니야, 요즘엔 좀 불안해. 우리집 그이 나한테 여간 냉담한게 아니에요. 어디 나 몰래 애라도 낳아놓은 거 아 닐까?" 너도 성가신 병에 걸렸구나." 그런 소리 말아요. 언니, 아이 없는 여자의 맘은 당사자 아니면 아무도 몰라요. 언닌 숫제 결혼 같은 것 안 했 으니까 그렇지만." 굽이 높은 구두, 날씬한 종아리, 수앵은 아직 아름다웠으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옛날 같은 사업에 대한 정열도 식어가는 것같았다. 언니 아까 찾아왔다는 사람 누구예요?" 찾아온게 아니야. 우연히 약 사러 들어왔다가 마주친 거지." 엣날 애인이유?" 아니." 한데 기분이 왜 그래요? 굉장히 세련돼 뵈는 남자라 하던데." 굳이 말하자면 애인의 친구야. 더 이상 묻지 말아." 천성이 단순한 수앵이었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몹시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 넘어갔다. 추스르 려 무진 애를 썼지만 인실은 지렛대가 부러진 허수아비였다. 십일 년 전, 부른 배를 안고 동경 바닥을 끝없이 헤맬 때, 그때는 그에게 깡다구가 남아 있었다. 요코하마의 부둣가, 항구에 떠 있는 상선이며 여객선을 바라보 았을 때, 하코네의 그 짙푸른 아시노코를 들여다보았을 때도 그는 자살을 결행하지 않았다.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오가다와 자신과의 핏줄을 버리면서 인실은 자기 자신을 땅속에 묻어버렸다. 깡그 리 묻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두만강을 건너면서, 새로이 태어나려고 몸부리림쳤다. 그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용정, 해란강 강가에서 중학교에 갓 들어간 밤송이같은 소년들이 강물에 돌을 던지며 모래밭을 뒹굴며 목이 터져라 부르던 선구자의 노래였다. 인실을 오늘 존재하게 한 것은 항상 죽음과 맞선 시간 때문이었다. 긴장과 긴장의 연속 속에서 인간적인 사고와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고 황막한 대륙에서의 투쟁 때문에 그는 살아 있을 수 있었다. 눈물 한 방울 허용하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자비, 그것 없이 그는 대지에 발을 붙이고 서 있 을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인실은 자기 내부에서 지렛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수앵의 백부 심운구의 팔십회 생신 잔치는, 팔십회라는 연륜 때문에 의마가 큰 것이었지만 요즘에 와서 만나 지 못하는 연해주의 동생, 심운회로 인하여 깊이 상심하는 심노인을 위로하고자 한 자손들의 배려도 있어서, 집에서 해마다 행사를 치러왔던 관례를 깨고 H궁호텔의 연회장을 이용하여 성대히 잔치가 베풀어지는 것이었 다. 친척말고는(친척도 태반은 중국인이었다) 초대된 사람들 거의가 중국인들, 중에서도 주류를 이룬 것은 하 얼빈의 거상들이었고 심씨 일가가 벌려놓은 사업체에 종사는 식구들, 송장환도 물론 참석했으며 일본인 고위 층도 몇 명 초대받아 와 있었다. 치장하고 나온 여인들의 의상은 화사한 봄을 실내에 옮겨놓은 듯 싱그러웠다. 심노인은 조카딸 수앵이부부를 각별히 사랑하여 곁에 있게 했으며 소식이 끊긴 연추의 동생을 생각하여 한숨 을 짓곤 했다. 잔치는 무르익어 따로 마련된 무도장에서는 나직한 반주, 노래 부르는 가수, 춤추는 사람들, 연보랏빛 드레스 이은 가수는 일본 유행가 [소주야곡]을 부르고 있었다. 꽃잎을 띄우고 흐르는 물의 내일 가는 길은 어디메인지 오늘 밤 비쳐진 우리의 모습 사라지지 말아요 언제까지나 일본 유행가의 레퍼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지나의 밤, 국경의 마을, 상해의 길모퉁이, 심지어 군가 보리와 병 사까지 부르고 있었다. 대일본제국의 대륙 진출, 대륙 강점의 정책을 측면 지원하여왔던 감상의 허울 밑에 숨 겨진 야욕, 값싼 유행가를 중국인들은 부르고 들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연회에 참석한 고위층 일본인들을 기 분 좋게 하기 위하여. 그러나 그들은 비통하여 마음속으로 이를 갈고 있지는 않았다. 엄청난 살육, 아녀자들을 유린한 필설로 안 되는 만행, 섬나라 짐승들을 마음속으로 경멸하며 그들 사탕발림의 노래를 불러주고 있는 것이다. 심노인의 아들 심재용, 못생겼으나 체격 좋고 멋쟁이인 그도 나와서 하일군재래를 부르고 있었다. 봄 이 감돌며 기웃거리는 창밖에는 푸른 가등이 정원을 비춰주고 수목들도 수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모처럼 흥을 돋우고 있었다. 그러나 흥에 취해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이들은 모두 내일을 알 지 못했다. 내년에도 이와 같이 행사가 있을 수 있겠는지 아무도 기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계는 전운에 가 득 뒤덮여 있었고 지금 이 시각에도 중국 본토 어디선가 포성이 울리고 있을 것이다. 만주 일대에서도 저하의 불길은 엄폐된 채 타고 있었으며 비적이라 일컫는 조선독립군 중국의용군의 출몰이 끊긴것은 아니었지만 삼엄 한 소만 국경과 치안이 철통 같은 남만주 사이에서 대부분 전투로부터 공작으로 전환한 항쟁의 투사들이 맹렬 히 활동하고 있었다. 지난 가을에는 일본이 무모한 불인 진주를 감행했고 그보다 앞선 삼월에 왕조명은 위정 부를 남경에다 세웠으며 구라파도 전쟁의 도가니로 화해 있었다.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뚫었으며 영국은 됭케 르크에서 총철퇴, 드디어 파리는 함락된 상태, 각일각 세계의 정세는 예측 불허였다. 뿐인가, 소만 국경은 화약 고나 다름없었다. 언제 어느곳에서 터질지, 언제 하얼빈이 전화 속으로 들어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연회가 성대하고 여인들 의상이 현란하며 남자들이 폭음하는 것은 내일을 모르기 때문일까. 일본인이라고 예외는 아 인 것이다. 절망은 오히려 그들 편이었다. 심씨 일가의 친척으로, 또 중국 여인으로 위장하고 연회에 참석한 인실은 가까스로 윤광오와 마주치는 기회를 잡았다. 윤선생님." 삼재용과 얘기를 하고 있던 광오가 돌아보았다. 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요." 무슨 얘긴데요?" ." 비밀 얘긴가요? 자리 비켜드릴까요." 심재용이 웃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여기선 좀." 그럼 나갑시다." 광오가 말했다. 그래 주시겠어요?" 두 사람은 연회장에서 회랑으로 빠져나왔다. 인실은 광오에게 등을 보인 자세로 회랑 난간을 짚으며 불빛이 뿌려진 시가를 바라본다. 광오는 심상찮다는 생각을 하며 담배를 붙여물고 인실과 나란히 난간 앞에 섰다. H 궁호텔 정원을 두른 철책이 가등 빛을 받고 주뼛주뼛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하늘에도 시가와 같이 별빛이 뿌려져 있었다. 윤선배." 인실은 일상의 선생이라는 호칭 대신 선배라 불렀다. 그가 처음 하얼빈에 와서 윤광오를 만났을 순간 선배라 불렀던 그때처럼. 말하시오." 하고 광오는 담배를 빨아당겼다. 붉은 담뱃불이 그의 콧날에서 미끄러지며 어두운 눈을 비춰주었다. 오가다 지로라는 사람, 기억하고 계신가요?" 기억하구말구요." ." 처음 이곳에서 인실씨를 만났을 때도 맨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오가다였지요. 아무려면 은인을 잊었겠소?" 그 사람 지금 신경에 있어요." 신경에 있다구요?" 광오는 놀란다. 신경에 있어요." 인실은 되풀이 말했다. 만나보고 싶군." 감개무량한 듯 말하다가 하지만 어떻게 변했을까? 충의에 불타는 대일본제국의 국민이면, 전쟁에 이긴다고 믿는 일본인이라면 만난다 는 것, 좀 곤란할 것 같은데." 그 사람, 옛날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진재 때 조선인 학생들을 구해주던 그때처럼, 함께 옥고를 치르던 그때처럼." 만나보았소?" 아니오." 그럼 어떻게 알아요?" 그냥 알아요. 틀림없이 알아요." 광오는 인실의 옆모습을 쳐다본다. 한참 있다가 신경에 오가다가 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요?" 어떤 나그네가..." 하다 말고 인실은 나직한 목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웃음이 아니었다. 이곳을 지나던 사람을 우연히 만나서 알게 되었어요." 좀 납득이 안 되는군. 이야기의 골자가 뭡니까?" 윤광오는 미심쩍어하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었다. 아마 수일간에 그는 운회약국으로, 윤선배를 만나러 올 거예요." 가만 있자아, 그러면 오가다가 나를 만나러 오는 것은 공적인 일입니까, 아니면 사적인 겁니까, 만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아니 사실은 그 친구 만나보고 싶어요. 그러나 전후 사정을 도통 모르겠고 단순한 일 같지는 않은데." 사적인 일이에요. 저 개인에 관한 일입니다." 인실씨 일이라...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요?" 오가다와 인실이 서로 사랑했던 사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퍼뜩 광오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친구로서 만나시고... 저녁을 함께 하시든지..." 인실씨는?" 그걸 지금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점점 오리무중이군. 안 만나겠다는 뜻이 있는 겁니까?" 한번은 만나야 해요. 한번은요. 어떻게 만나야 할지." 하닥 별안간 인실은 울음을 터뜨렸다. 심하게 흐느껴 운다. 광오는 아연실색하여 어떻ㄱ 할 바를 모른다. 인실씨!"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왜 이래요?" 마침 수앵이 남편을 찾아 회랑으로 나오다가 이 광경을 보았다. 처음에는 멈칫했다가 당황한다. 난간에 머리를 얹고 흐느껴 우는 인실, 광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인실의 등을 두드리고 있는 광경을. 수앵의 눈에도 상상하 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보." 저도 모르게 수앵은 날카롭게 남편을 불렀다. 아아 마침 잘 왔소. 당신 인실씨 데리고 집으로 가요. 이거 정말 큰일났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나도 아직 자세한 거는 모르겠고, 그보다 큰아버님은?" 들어가셨어요?" 그럼 됐어. 인실씨!" 광오는 인실의 등을 또 토닥거렸다. 이러면 안 됩니다.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수앵이도 왜 이래요? 언니!" 난간에서 몸을 일으킨 인실은 수앵에게로 쓰러졌다. 수앵이 그를 안았다. 인실은 계속하여 격렬하게 흐느껴 운 다. 수앵이, 당신 인실씨 데리고 어서 집으로 가요. 처남 만나보고 나도 곧 갈 테니까." 광오는 급히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왜 이래요? 정말 언니 왜 이러는 거지요?" 수앵이도 아까 광오가 그랬던 것처럼 망연자실, 어떻게 할 바를 몰라한다. 이럴 사람이 아니데, 이럴 사람이 아닌데 하는 생각만 수앵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흐느껴 울기는 커녕 눈물 한방울 보인 적이 없었던 인실이었 다. 감정의 동요조차 내보인 적이 없었던 인실이 마치 불을 쥐었던 어린 아이같이, 그의 흐느낌은 울부짖음 같 았고 사람의 마음을 찢어놓는 통곡 같았다. 인실을 부축하고 수앵이 호텔을 나서리 했을 때 광오가 뒤쫒아 왔다. 심재용도 따라나와서 걱정스럽게 떠나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집에 온 수앵은 인실을 거실 소파에 앉혀놓고 포도주 한잔을 가져왔다. 마셔요." 인실은 고개를 저으며 냉수를." 했다. 인실은 냉수를 두어 모금 마셨다. 광오와 수앵은 어두운 눈빛으로 인실을 내려다 보면 서 있었다. 수앵 의 얼굴은 창백했다. 광오는 도저히 이해할수가 없었다. 설령 인실이 오가다와 비극적인 연얘를 했다 하더라도 그같이 이성을 잃을 여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니" ." 낮에 만났다는 그 사람 땜에 이러는 거예요?" 인실은 탁자만 내려다보며 대답이 었었다. 정말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 약 잡숫고 한잠 주무시겠어요?" 아니다. 좀 낮아." 뜻밖에 체념한 듯한, 조용한 목소리였다. 윤선생님도 앉으세요. 죄다 얘기하겠어요."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은 인실은 윤선생님 죄송합니다. 아마 제가 미쳤나 봐요." 진정이 됐소?" 네." 인실은 담담한 어조로 지난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따금 이마에 쏟는 땀을 닦으면서 밤이 깊도록 그는 또 박또박 상세하게 얘기를 했다. 수앵은 눈물을 흘렸고 광오는 이해한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인실이 별 안간 왜 그렇게 처절하게 울었는가 그 이유를 이들 부부는 알게 되었으며 인실의 고뇌를 이해하게 되었다. 언니 강한 여자야. 나 같음, 도저히 그럴 수 없었을 거예요." 수앵은 그리고 또 눈물을 흘렸다. 그날 밤 이후 인실은 이틀 동안을 앓았다. 고열에다 헛소리까지 하면서 마치 홍역을 치르는 아이처럼 심하게 앓았다. 앓고 난 뒤 창가에 앉아서 머리를 빗는 인실의 모습이 안쓰러워 수앵 은 눈길을 돌리곤 했다. 오가다는 왔다. 키가 크고 깡마른 그는 헐렁하고 얇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운회약국으로 들어온 그는 낯설어 하듯 윤광오를 바라보았다. 오가다상!" 윤광오가 불렀을 때도 오가다는 망설이는 것 같았다. 잘 왔소." 윤광오는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그는 어리둥절하며 손을 잡았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소?" 어디서 본 듯하지만." 중얼거리듯 말했다. 신경으로 간 찬하는 운회약국과 윤광오의 이름을 적은 부분을 수첩에서 찢어 오가다에게 주면서 거기 찾아가면 인실씨 소식을 알 수 있을 거요." 했을 뿐 그 이외는 일체 다른 말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간 나갑시다." 광오는 오가다의 등을 밀다가 어떤 연민과도 같은 눈빛으로 오가다를 바라보는 수앵에게 저녁 준비하도록, 집에서 할 거요." 말한 뒤 오가다와 함께 나왔다. 나란히 걸으면서 흥분한 광오는 한눈에 나는 알아보았는데, 오가다상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구려. 그건 내가 얼마나 변했는가를 말해주는 거 고 오가다상은 변하지 않았다는 걸, 정말 별로 변하지 않았소." 생각이 날듯 날듯 하는데 영." 오가다는 고개를 흔들었다. 동경진재 때 당신 집에서 신세진 윤광오." 아아 맞다! 맞아!" 오가다는 걸음을 멈추고 크게 소리쳤다. 안경 속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윤상! 맞어." 그는 광오의 손을 굳게 잡았다. 당신도 변하지 않았소. 몸이 좀 나기는 했지만." 그런데 어째 못 알아보았소." 윤상은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 나는 전혀 모르고, 또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거의 이십 년, 우리가 만난 지 거의 이십 년이 다 돼가는 것 같소." 벌써 그렇게 됐어요?" 오가다가 반문했다. 동경진재가 1923년에 있었으니까 지금은 41년 아니오." 하고는 서로간에 말이 끊어졌다. 그들은 어느 주점에서 마주보고 앉았다. 이 이십 년 만의 해후를 기뻐하기에 는 이들의 심정은 사실 착잡했다. 서로가 안고 있는 문제가 무겁고 심각했다. 운회약국을 찾아가서 윤광오 씨를 만나면 인실씨의 소식을 들을수 있다고 해서 왔는데." 오가다는 술잔을 들고 술잔 속의 술을 내려다보며 문제에 접근해왔다. 잘 왔어요. 곧 인실씨를 만나게 될 거요." 뭐라 했어요? 만나게 된다구요?" 오가다는 펄쩍 뛰듯 말했다. 광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지 않고... 아, 아직 살아 있어요?" 그래요. 죽지 않고." 오가다는 술잔을 탁자 위에 놓았다. 만나게 된다구요?" 아아 참 꿈 같은 얘기야." 하는데 목덜미에서부터 면도 자국이 파아란 얼굴에 홍조를 띤다. 맑은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광오를 쳐다본 다. 당신네들 인연도 참 질기군." 광오는 탄식하듯 말했다. 오가다는 술잔을 꽉 쥐고서 술을 마셨다. 부럽기도 하구, 몸서리 쳐지기도 하구." 과오도 술을 마셨다. 불구대천의 원수, 왜놈이 조선의 딸에게 욕을 보였다. 그런 생각은 안했습니까? 나를 잘 아는 조선인 친구조차 그런 생각을 하던데." 그것은 찬하를 가리켜 한 말이었다.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인실씨를 잘 아니까, 그의 진실을 아니까." 모든 사람이 윤상처럼 생각지 않아요. 사랑을 동물적 본능으로 보는 시니시즘, 아니면 명분을 강요하고... 내 가슴 속에 남은 것은 원한뿐이오." 조선인에 대해서?" 조선인,일본인 모두... 세상에 태어난 그 자체부터. 세상을 이끄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바로 그 역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조선인을 비난하지 마시오. 당신이 일본인인 이상." 항상 나는 그것에 걸려 나자빠져왔어요. 그것에 부딪치면 손도 발도 내밀 수가 없었소. 손에 피 묻히지 않았던 한 영혼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더 무거운 까닭이 뭡니까? 더 가혹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인실씨를 사랑한 오가다는 늘 개 취급을 당했습니다. 늘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윤상 당신, 철저하게 이쪽 저쪽에서 소외당한 인 간의 모습을 상상해본 일이 있습니까?" ." 불의 때문에 많은 생명들이 결단났지만 정의라는 이름하에 비인간화돼가는 일을 윤상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 까." 어쩔 수 없지 않아요?" 정의란 뭐지요? 진실이 용납되지 않는 것도 정의인가요? 인간의 염원은 정의입니까 종자입니까?" 나 자신 당신에게 그같이 묻고 싶소. 인간의 염원은 정의냐 종자냐 하고 말입니다. 그란 집단의 불의는 집단으 로 대응할 수밖에 무슨 방법이 있겠소." 또다시 나는 비명을 지를밖에 없군요." 오가다는 서글프게 웃었다. 인실을 만나게 된다는 일에 대하여 그는 조금도 들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보 다 깊은 절망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수첩을 찢어줄 때 찬하의 우울한 표정이며 반가워하면서도 뭔가 분명히 벽을 쌓고 있는 것 같은 광오 태도에서 오가다는 희망을 볼 수 없었다. 어쩌면 결정적으로 마지막이 될지 모 른다는 예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가다는 그 동안 인실을 만나게 될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 다. 어디선가 우연히 만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확실하게 인실은 가까이 있는 것이 다. 한데 어째 두려운가? 어떤 종지부를 찍을것만 같아 두려웠고 자신으로부터 막연하나마 품어왔던 기대를 앗아갈까 봐 오가다는 불안했던 것이다. 인실씨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저녁에 만나게 될 거요." 건강합니까?" 비교적." 광오는 오가다에게 담배를 권하고 자신도 붙여문다. 두 사람은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의 형편이나 하는 일에 대하여 묻질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친구라 할 수 있고 적의를 가질 이유도 없었지만 사실 심리적으로 이들은 팽팽히 맞서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 하얼빈에는 여러 번 왔었는데 어째 윤상을 만나지 못했을까요?" 참 그렇군." 두 사내는 공허하게 웃었다. 숙소는 정했소?" 네. 하얼빈에 오면 늘 들었던 곳이오. 송화강 옆에 있는 H궁호텔이오." 아아." 어딘지 모르게 음산해 뵈는데." 이곳 건물이 대개 그렇지요." 그게 마음에 들어서, 호텔 방안에 들어가면 밀폐된 것 같아서 아늑해요." 여행은 자주 합니까?" 네 자주 하죠. 안 가본 곳이 거의 없소. 요즘에는 소만국경이 삼엄해서 가볼 기분도 아니지만 전에는 흑하 애 훈 만주리까지 꽤 여러 번 갔었지요. 자연 조건이 험하고 준열한 그런 곳이 사람으로부터 도망쳐가기에 알맞 지요. 서로 의지하는 느낌이 드니까요. 국경이라는 절박감도 있구요." 오가다상은 아직 순수하고 낭만적이군요." 낭만적이라..." 쓰디쓰게 웃는다. 낭만적, 낭만," 하다가 그런 여유가 나한테 있었을까..." 하는데 얼굴이 오소소해졌다. 몹시 추위를 타는 것처럼. 그는 마음속으로 인실씨는 멀리 갑니까? 왜 나를 만나려 하지요?' 해가 떨어질 무렵 광오는 오가다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거실 문을 열었을 때 인실은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 었다. 인실씨." 광오가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인실이 돌아섰다. 오래간만이오." 인실은 광오 옆에 장석같이 서 있는 오가다에게 말했다. 옷 좀 갈아입고." 광오는 허둥지둥 침실로 들어갔다. 앉으세요." 인실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오가다는 자리에 앉았다. 수앵이 차를 가져와서 말없이 놔두고 간다. 참 오래간만이오." 중얼거리듯 오가다가 말했다. 차 드세요. 식기 전에." 그러나 오가다는 담배를 붙여문다. 그는 입을 꿰매놓은 듯 말을 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슬픔이 목구멍에서 만 끓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쳐다보아도 인실에게서 감정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그를 위축하게 했 다. 우리에게는 할말이 없는 건가요?" 간신히 오가다가 말했다. 순간 인실의 눈이 흔들렸다. 몇 해 전에 하얼빈 역전에서 마차를 타고 가는 인실씨를 보았어요." 옛날과 같이 오가다는 인실을 히토미라 하지 않고 조선말 발음으로 인실이라 불렀다. 나도 그때 당신을 보았어요.' 인실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뒤쫓았지만 허사였소." 담뱃재가 무릎 위에 떨어졌다. 알고 있어요.' 나는 인실씨를 상상할때 늘, 얼굴이 새까맣고 눈이 빛나고, 거친손에, 손마디가 굵고 남루한 중국옷을 입은 여 자로 떠올리곤 했어요." 왜 그러셨어요?" 투사니까." 처음으로 인실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여자를 끌고 흑하며 만주리,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은 도시로 가는 꿈을 꾸었지요." 인실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꿈, 이제는 꾸지 마세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내일 얘기해 드리지요." 어째서 내일입니까?" 오늘은 윤선생님 초대를 받아 오셨으니까요." 침실에서 나온 광오는 또 허둥지둥 식당으로 간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럿다. 조선생님은 동경으로 떠났어요?" 아니 날 기다리고 있을거요." ." 그 친구 만났습니까?" 내." 한데, 어째서 인실씨 만났다는 얘길 내게 안 했지요?" 그게 그분 성품은 아닐까요?" 만주는," 하다가 오가다는 얘기의 방향을 바꾸는것 같았다. 일본이 망하더라도 떠나고 싶지 않소." 어째서요?"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 같아서, 한 마리의 개미같이 꾸물 거리는 것 같아서." 하다가 오가다가 뭔가 북받치는 듯 말을 끊었다. 광오는 수앵이를 데리고 거실로 돌아왔다. 엉겁결에 집사람 소개도 안 하고." 엉겁결이라는 표현이 말하듯 광오는 안정을 잃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거북하고 불안해지는 것 같았다. 남 의 일이라 구경만 하면 된다는 기분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 혼란스러웠던 것이 다. 수앵이도 그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가다와는 친면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신중을 유지하고 있 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내가 동경진재 때,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오가다상, 이 사람 덕분이오. 당신 감사해야 할 게요. 오가다상 이 여성은 철부지 내 아내요. 러시아어, 중국어로 하라면 달변이지만 일본말은 영 서툴러요." 다소 과장을 하여 너스레를 떨었으나 분위기는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오가다가 일어서서 오가다 지로입니다." 자기 소개를 하고 절을 했다. 환영합니다." 서투른 일본말로 수앵이는 진심에서 말했다. 그럼 식당으로 가실까요? 저녁 준비를 해 놨습니다." 식당은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비극의 연인들을 위하여 수앵은 세심하게 마음을 쓴 것 같았다. 꽃병에도 신 선한 수선화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조촐한 만찬이었다. 부인께서 요리 솜씨가 대단한 모양이군요." 가라앉은 마음일 일으켜세우듯 오가다가 치사를 했다. 아니에요. 큰집에서 숙수를 보내주었어요." 역시 서투른 일본말로 말하면서 머리가 흘러내린 오가다 이마를 쳐다본다. 전쟁은 어찌 될 것 같소?" 화제에 궁한 광오의 말이었다. 이기고 있으면 욕을 하겠는데 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말 못하겠어요. 비극이지요. 전쟁에 지는 것도 비극이 고 내 고향, 내 조국이라는 인식도 비극이지요." 오가다는 음식을 삼키면서 말이 없는 인실을 건너다보았다. 망명하면 되지 않아요?" 수앵이 엉뚱한 말을 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저의 아버지는 조선인이지만 러시아에 귀화했고 큰아버지는 청나라 때 청국으로 귀화했어요." 오가다는 유심히 수앵이를 쳐다보았다. 인실씨는 귀화할 사람이 아닌데요." 그 말에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는 한층 경색되고 말았다. 그러나 인실은 그것을 전혀 모르는 듯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언니!" 으, 음." 소스라치듯, 그러나 그의 시선은 오가다에게 가 있었다. 뭐 말씀 좀 하세요." 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거라 생각을 하고 있었어." 인실은 역시 엉뚱한 말을 했다. 오가다상 돌아가실 때 오빨 찾아봐주시겠어요?" 그, 그러지요." 오가다는 젓가락을 손에서 놨다. 유인실이가 살아 있다는 얘기는 당신 생각대로 하구요." 그러겠소." 참 모질고 독하네!" 광오는 저도 모르게 내뱉고 있었다. 그럼 나, 어떻게 하라는 거요." 내가 하라 한다고 할 사람도 아니고, 오가다상 뭣 때문에 이런 여잘 좋아했어요!" 오가다는 헛웃음을 웃으며 그 말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하긴 우리 부부에게 고백하기 전에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큼 울었어요. 그리고 며칠을 앓았지요." 인실의 의사를 묵살한 채 광오가 그 말을 한 것은 오가다에 대한 깊은 동정심 때문이었다. 압니다." 오가다 말에 어떻게 알어?" 알아요." 참 이상한 일이오." 모두 잠자코 있었다. 인실씨도 안다고 했어요. 그냥 안다, 틀림없이 안다고 했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심전심, 그런 거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겠지요." 그 말은 수앵이가 했다. 당신 참 맞는 말을 했구려." 저녁이 끝났다. 모두 음식 맛을 몰랐고 어떻게 먹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저녁이 끝난 얼마 후, 내일 오 후 두시 송화강 강가에서 인실과 만날 약속을 한 오가다는 더 이상 머물 용기가 없었던지 하직을 하고 떠났 다. 창가에서 떠나는 오가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인실은 말없이 자신의 거처방으로 들어갔다. 수앵과 광오는 서로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광오는 탁자를 탁! 치면서 왜 이리 어렵지? 온몸이 쑤실 만큼 힘든 시간이었소. 두번 다시 이런 기회 갖고 싶지 않아." 이튿날 오후, 약속한 시간에 인실은 송화강 강변 광장에 나타났다. 바람이 좀 불었다. 웅장한 석조 건물 H궁호 텔에 시선을 보낸다. 제법 푸른 새잎이 돋아난 수목들은 투명한 연록색 깃을 하늘에 활짝 펼쳐놓고 있었다. 감 색 코트에 자주색 플란렌 목도리를 두른 인실의 복장에는 봄이 온 것 같지 않았지만 아직 그에게는 미열이 남 아 있었던 것이다. 얼굴도 몹시 창백했다. 강변의 산책길은 세 갈래로 뻗어 있었다. 따라서 길과 길 사이의 가로수도 세 줄로 뻗어 있었으며 군데군데 벤치가 놓여 있었다. 인실은 강 쪽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길은 한적한 편이었다. 저 만큼 벤치에 웅크리듯 앉은 오가다가 다가가는 인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실은 코트 주머니 속에 두 손을 찌 른채 오가다 옆에 가서 앉았다. 얼굴이 창백해요." 오가다가 말했다. 그러는 그 자신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지 핏기 잃은 얼굴이었다. 인실의 옆모습을 쳐다 보다가 오가다의 시선도 인실을 따라 강물 쪽으로 간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다. 말이 없어도 이들 은 어제보다 훨씬 자유스러워 보였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니 그냥 남자와 여자, 연인으로만 보였다. 오가다가 담배를 꺼내어 붙여물었다. 실감할 수가 없어요. 만나지 못했을 때의 그리움이 좀 어이없기도 하구." 실감할 수 없는 것은 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젯밤 생각해보았어요. 인실씨는 나를 안 만나고 피할 수도 있었는데 어째서 만나려 했을까 하구." 한번은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째서 한번입니까? 어디 멀리 떠나갑니까." ." 산카상(찬하)은 어떻게 만났지요?" 우연히, 약을 사러 오셨어요. 운회약국에서." 그 우연이 없었더라면 우린 만나지 못했겠군요. 산카상이 설득하던가요?" 그런 셈이에요." 인실은 시선을 돌려 오가다를 쳐다본다. 두 사람의 눈이 서로를 응시한다. 설득당할 인실씨는 아닐 텐데, 뭔가 이유가 있지요?" 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저에게 처음으며 마지막 사람이었어요. 당신을 잊은 것은 의지였지 감정은 아니지 않아요." 오가다의 물음과는 상관없는 말을 했다. 인실의 소식을 알고자 찾아온 오가다, 그 절망적인 모습의 사나이에게 처음으로 드러내는 인실의 따뜻한 진실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오가다는 불안해지는지 외면을 하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 의지를 굽혔어요?" 아니오." 그럴 테지요. 인실씨가 의지를 굽힐 리 없지. 당신은 그 숭고한 의지를 한번 굽혔어요. 두번 굽히지는 않을 거 요." 자조하듯 그러지 말아요. 정말 그러지 말아요. 나는 생명보다 더한 것을 후회없이 다 드렸어요. 지금의 나는 빈껍데기예 요. 아시겠습니까?" 인실의 말은 번번이 궤도에서 이탈하는 것이었다. 그해 여름, 히비야 공원에서 찬하를 만났을 때 인실은 저는 그분한테 생명보다 중한 것을 주었습니다. 더 이상 나는 줄것이 없어요."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생명보다 중한 것, 그것은 단순히 여자의 순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찬하는 알았다. 인실에게 생명보다 더한 것이란 조국과 내 겨레를 배신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알아요. 그래서 인실씨를 아주 잃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그일이 없었더라면 당신은 이 북만주까지 오지 않았을 거요." 오가다상을 만나려고 생각한 것은," ." 꼭 한가지 알려드려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리 해야 했으니까요. 조선생님을 더 이상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그것은 은인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네, 그래요." 하다 말고 인실은 이내 자신의 말을 뒤집었다. 아니 그것은 아닐 거예요. 조선생님에 대한 것, 그것 생각할 여유는 없었어요. 너무 절박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은 왜 이리 마음이 편안할까요? 참 다행이구나 싶어요." 그 순간 인실은 막연했던 것이 손에 꽉 잡히는 것을 느낀다. 고아원에도 가지 않았고 이름 모를 남의 손으로 건너가 생사조차 모르게 되지도 않았고 조찬하가 아이를 길러주었다는 사실, 그것이 얼마만한 축복인가를, 인 실의 눈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살아 있다는 것 도. 십일 년 전에, 봄이었어요. 나는 동경에 갔습니다." 동경에 왔었다구요?" 네." 십일 년 전이라면 조선서 돌아와서, 내가 삿포로에서 중학교 교사로 있을 때구먼. 산카상을 찾아갔으면 내 거 처를 알 수 있었을 텐데." 조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리고 당신이 삿포로에 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하면은 어째서 산카상은 나에게 연락을 안 했을까?" 못하게 내가 부탁을 했어요." 인실은 간략하게 그때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오가다의 얼굴은 붉으락 푸르락 입이 붙어서 말도 못하는 상태 였으나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인실의 뺨을 때렸다. 다, 당신에게 내 자식을 버릴 권리는 없어!" 외치는 것이었다. 지독한 여자다! 지독한 여자다!" 분노에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급히 강가로 뛰어가서 인실에게 뒷모습 을 보이며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는 깊은 자괴심에 빠졌다. 인실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게 문제가 아니 었다.그와 고통을 함께 할 수 없었던 일을 그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인실을 용서할 수없는 격정을 누 를 길이 없었다. 나 가겠어요." 인실이 다가 오며 말했다. 오가다는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연민의 감정도 나타낼 수 없었다. 분노만이 그의 눈에서 타고 있었다. 가겠어요." 인실이 또 말했다. 그리고 와락 오가다의 허리를 안았다. 그리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일본이 망할 때까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을 잊지 않겠어요." 인실은 오가다로부터 떨어지면서 발길을 돌렸다. 돌처럼 서 있던 오가다는 나는 너를 잊을 거다!" 절규였다. 오가다는 해가 질 때까지 하얼빈 시가를 쏘다녔다. 정신없이 쏘다녔다. 그리고 낯선 주점으로 들어가서 밤늦게 까지 술을 마셨다. 그가 신경으로 돌아온 것은 이튿날 오후였다. 역에서 내린 그는 곧장 회사로 달려갔고 휴가 원을 낸 뒤 찬하가 묵고 있는 호텔에 전화로 찬하가 있는 것을 확인한 뒤 호텔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무서운 사람들이오." 첫 마디가 그것이었다. 소름끼치게 무서운 사람들이군." 하여간 앉기나 해요." 당신네들 심장은 무쇠로 만들어진 서요? 그러고도 어찌 나라를 잃었는가, 이해할 수 없소!"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그리 됐겠지요" 찬하는 오가다에게 담배를 귄했다. 산카상 집에 내가 방문할 때마다 당신 양심의 가책 느끼지 않았소?" 양심의 가책이라니? 다만 마음이 아팠을 뿐이오." 찬하는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 심각해지려는 것을 늦추려는 듯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언어 도단이다!" "일본 여자를 데리고 살며 나라를 망하게 한 고관대작의 자손으로 나는 별볼일없는 인간이지만 오가다상, 내 가 조선인이라는 것은 잊지 마시오. 인실씨가 그리 된 데는 내게도 다소 책임이 있었고 또 그와의 언약은 지 켜주는 것이, 그는 평범한 길을 가소 있는 여성이 아니오. 생각해보아요. 오가다상이 현실을 비판하고 군국주 의를 증오하지만 자기 자신 일본인인 것을 부정할 수 있어요?" "그건 문제가 달라요."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과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야 했던사람, 어느쪽의 고통이 컸을까?" 그 말 대답은 못한다. "몰라 그렇지, 그 여름에 인실씨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신파 같은 건 아니었소. 나는 그 당시 회피할 수 있다 면 회피하고 싶었소. 회피할 수도 있었지요. 인실씨는 매달리며 호소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오가다의 기세는 차츰 꺾였다. 엄청난 변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 그러나 그것은 오가다에게는 희망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너를 잊겠다! 하며 절규했으나 인실은 그에게 진실의 여운을 남기고 갔으며 인실이 낳 아준 자신의 아들이 있었다는 것은 어떤 환를 그에게 안겨주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알지 못할 폭풍이 불고 있 었다. 안정을 잃었고 격노한 것도 그것은 역설적인 것이었는지 모른다. "당신은 아들을 얻었고 나는 아들을 잃었소. 날 위로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나는 당신한 테 축하주를 살 것이니 당신은 나에게 위로주를 사야 할 게요. 자아 나갑시다. 신경의 마지막 밤 술이나 실컷 마시지." 3장 서울과 동경 찬하와 함께 오가다는 유인성의 집 앞까지 왔다. 집주인의 성품처럼 조촐하고 단정해 보였던 옛날과는 다르게 밖에서 바라본 집은 노쇠하여 허덕이는 것 같은, 묘하게 어둡고 찬바람이 이는 느낌이었다. 오가다는 잠시 동 안 눈을 감았다. 지난 일들이 발 밑을 감아 올리는 삭풍과 같이 그의 인식 속을 휘몰고 지나갔다. 그것은 사건 이기보다 세월이었던 것 같았다. 세월이었다는 느낌 속에는 한 아이의 해맑은 얼굴이 있었다. 찬하가 함께 온 것은 오가다가 부탁한 때문이다. 오래된 일이지만 제명회사건 때 함께 옥고를 치른 유인성과 오가다의 관계도 그렇고, 만주에서 오는 길목이어서 혹시나 당국이 주목하게 될까, 염려도 있었지만 옛날 인성 의 집을 찾아봐서 만용을 부릴 때와는 달리 오가다는 위축이 되어 혼자 갈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유인성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었지만, 아니 알려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하나의 사실로서 드러나게 된 아이의 존재가 자기 자신에게는 경이로움이요 희망이었겠지만 유씨 문중으로 보면 치욕일 것이라는 의식 때문이다. 찬하의 경우에 도 유인성과 생판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 죽은 형과 유인성과 그 무렵 모두 함께 동경 유학을 했고 그들의 관계가 그다지 좋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친구할 수도 없었다. 해서 찬하는 유인성과 면식이 있었으며 후배들이 그의 존재에 큰 비중을 두는 것과 같이 찬하 역시 유인성의 학식과 인격에 대하여 존경해왔기에 방문이 생소 하다고만 할 수 없었다. 찬하가 내다보는 행랑아범을 보고 내의를 말했다. "지금 병환이 나셔서 누워 계십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긴장한다. "용태가 심하시오?" "심하신 거는 아니지만, 요즘 손님들을 만나지 않으십니다." "그래요? 하면은 전갈이나 해주시오, 기다릴 테니." "찬하는 명함을 꺼내어 뒷면에다 몇 자 적어서 건네준다. 행랑아범이 들어가고 시간이 꽤자났다 싶었을 때 "들어오십시오." 행랑아범은 그들을 사랑으로 안내했다. 그새 이부자리는 개어놨고 방안도 대충 정리한 듯, 인성은 옥양목 바지 저고리 차림으로 예나 다름없는 단정한 모습을 하고서 이들을 맞이했다. "오래간만입니다. 선배." 오가다는 두 손을 짖고 절을 했다. 오가다로서는 실로 만감이 오가는 대면이 아닐 수 없었다. 찬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오래간만이군." 하고 인성은 찬하에게 눈길을 돌렸다. "조찬하 씨는 왠일이오." 조찬하가 찾아온 것은 의외였던 모양이다. "이 친구가 함께 가자고 해서 인사차 왔습니다. 몸이 편찮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저희들이 무례하지 않았는지 요." "뭐 크게 병이 든 것은 아니고, 울적해서, 요즘엔 늘 이런 상태요." 감정 절제에 엄격한 유인성 입에서 울적하다는 말이 나온 것은 드문 일이다. 표정도 다소흔들리고 있는 것 같 았다. 그는 인실의 솟식을 이들이 가져왔으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는것 같았다. "집안을 박살내버렸다는 소문이든데, 왜 그렇게 했소" 역시 그답지 않은 질문이었다. 불안이 쌓이는 것 같았다. 찬하는 씁쓰레하게 웃었다. "제문식이 고전을 한다는 얘긴데 그 친구 생각했던 것보다 의리가 있는 모양이오." 인성은 다시 조용하기 죽은 뒤 방직회사를 떠맡은 제문식의 얘기를 꺼내었다. "고전이나마나, 어차피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다 끝장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시국에는... 전쟁만 있을 뿐이 지요." 야릇한 표현이었지만 유인성은 "그렇기는 하지." 하고 동의를 표했다. "저의 부덕 탓도 많겠습니다만." 행랑아범이 어줍게 차를 날라왔다. 찻잔을 들면서 인성은 오가다에게 시선을 옳겼다. "자네는 왠일인가? 자네하고 내 사이에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가." 말은 그랬으나 비난하는 투는 아니었다. 일말의 연민이 있었다. 오가다도 그것을 느낀다. "여러가지로 면목없습니다." "으음..." "실은 우연히 하얼빈에서 인실씨를 만났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인성은 차를 마셨다. 찻잔을 놓았다. 얼굴빛은 달라져 있었으나 아무말이 없었다. "건강하게 잘 있고, 신념대로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 그러고는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래... 그러면 됐네." 하고 인성은 다시 찻잔을 들었다. 더 이상 머물러 있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상상 밖으로 유인성의 상심은 큰 것 같았다. 그러면 됐네, 말로는 그 한마디뿐이었지만 희한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눈빛을 두 사람은 더 이상 쳐다보고 앉아 있을 수 없었 던 것이다. 하직을 하고 나왔다. "애씨에 대한 정의가 보통 아닌 것 같소. 유인성 씨같이 깐깐해 뵈는 분도 혈 육에 대한 집착을 끊을 수 없는 모양이지요?" 찬하가 말했다. "늘 인실씨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어요, 전에는, 하여간 내가 나쁜 놈입니다. 내가 그를 국외로 쫓 아낸 거나 다름 없어요." "그건, 그렇다고만 말할 수 없지요." "미안합니다." "나보고 그러는 거요?" "여러 가지로 여러 사람한테 폐만 끼쳐왔어요." "지나간 일 생각지 마시오. 어떤 모양으로든 세월은 우리 곁을 지나갈 수밖에 없는 거고." "돌이킬 수 없으니 괴로운 거지요. "잊어요, 잊어." 하다가 찬하는 화제를 돌렸다. "오래간만에 뵈어 그런지, 그럴 분이 아닌데 상당히 의기 소침해 계시는 것 같지 않던가 요?" "글쎄올시다. 다른 근심되는 일이라도 있는지 실은 나도 맘속으론 좀 놀랐어요." 말하면서 오가다는 자신과 인실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유인성은 과연 어떻게 나올 까? 생각해본다. 그순간 오가다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자각 도 왈칵 덤벼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곧장 산장으로 향했다. 찬하의 양친이 세상을 버린 뒤 본가에는 우선 누이 부부가 들어서 살고 있었고 산장은 찬하가 조선에 오면 묵 는 곳이었다. 제문식도 더러 이용하여 산장은 보존이 잘돼 있었다. 조용하가 자살한 곳이지만 보존하는 데는 제문식과 찬하 사이에 이견이 없었다. 이심전심이라고 할까, 그들 마음속에 조용하를 위한 일말의 연민이 있는 것을 서로 느끼고 있었다. 자식도 아내도 없이, 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조용 하가 최후를 맞이한 산장마저 없애버리다면 그에 대한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질 않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다 소 으스스한 곳이었다. 조용하의 피가 낭자했던 욕실, 제문식은 그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찬하 나 제문식은 되도록 할용하여 사람의 흔기를 남겨두려 했던 것이다. 동생으로서 친구로서, 그것이 그들의 최소 한 조의였으며 행복을 비는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오늘 밤은 제문식이 산장에다 찬하를 위하여 술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산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숙수가 와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는 눈치였다. "제사장말고 다른 사람들도 오는 게 아니오." 오가다가 꽁무니를 뺴듯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오면 오가다가 불편해지고 처지가 난처해지기 때문이다. "왜? 죄지었소?" "죄인 취급하는 건 사실 아니오." "죄인 취급은 조선인만 당하는 줄 알았는데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군." 물론 농담이었다. "걱정 말아요. 제사장과 함께 오는 사람은 선우신." "아아 신상!" 오가다는 기뻐한다. "나하고 친한 걸 어떻게 알았소." "당신하고 학교 동기라며?" "그렇소. 진실한 사람이지요." "실직하고 있는 걸 제사장이 구제한 모양이오. 제명회사건 때 함께 들어갔다면요?" "그래요. 참 오랫동안 못 만났소." 찬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붙여들었다. 거의 잊고 살았지만 이곳에 오면 찬하는 형을 생각하게 된다. 자 신의 운명을 바꾸어 놨고 정자의 특권, 독재로써 모든 것을 제압하려했던 조용하, 그러나 그 스스로가 자초했 다고 하나 고독했던 그의 생애를 생각할 때 찬하의 마음속에서 증오는 사라진다. 아무도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의 불행, 그것은자기 자신도 궁극적으로는 사랑하지 못했던 불행이었다. 살고, 살아 있는 모든 것 은 어느 누구의 곳간 속에 가두어지는 재산 목록이 아니며 박제하여 곁에 두는 것도 아니다. 곳간의 열쇠만이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는 지배자의 고독은 처절한 것이다. 지배자는 지배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며 지배당 한 자는 재산 목록이 되고 박제품이 되어 훼손되기 때문에불행하다. 결국 상호가 다 불행한 것이다. 찬하는 형 과 명회의 그런 관계를 희상해보면서 이제는 완벽하게 자신이 객관적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불 행했던 형, 불행한형수 명회에 대한 연민이 순수해진 것을 깨닫는다. 그 순수는 타인의 입장에서의 순수였다. '망각이란 이와 같이 비정한 것이었던가. 그러면 나는 형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자신을 살리기 위한 이기적 동물에 불과한 것인가...' 그 바닷가에서 자기 방어의 영약함을 필사적으로 나타냈었던 임명희, 그 이기심에 상처를받았고 그로 인하여 인연 없는 타인이 된 자기 자신, 따지고 보면 이기적인 면에서는 별반다를 것이 없을 성싶었다. 찬하는 명회의 소식을 어느 누구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알고싶지도 않았다. 제문식이 그랬던지, 혜화동인가 어디서 유치원 을 운영하고 있다는 말을 듣긴 들었으나 말라버린 우물처럼 마음은 그냥 허공이었을 뿐이었다. 다만 찬하는 자시 자신을 위하여 서글퍼졌던 것이다. '세월이 비정한가 망각이 비정한가, 어느쪽일까?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잃어가며 살아간다.자기 자신도 잃어가 며 살아간다. 잃은 것의 시체가 추억이다. 그리고 마지막 잃는 것이 죽음일 것이다.' 내일이면 찬하는 서울을 떠났다. 동경에 가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곳은 십일 년 간, 세월의 덧없음과 사랑의 덧없음이다. 장중의 구슬같이 기른 아이, 크나큰 위안이었던 아이와 이별을 해야한다. 그리고 세월이 가면 잊 어질 것이다. 찬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당신은 값없이 세상을 살다 갔지만 나 역시 값없이 살다 갈 것 같소. 파장파장이오,하하핫핫...' 한편 오가다는 베란다에 서서 해 지는 산마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뻘겋게 물든 하늘과산마루에 가라앉는 태 양, 장관이다. 그하늘을 질러서 날아가는 새들의 가냘픈 날개, 애잔하게 울음 울며 날아간다. 석양 햇빛이 가득 들어찬 정원에는 산수유 진달래가 체철을 만나그 전성기를 한껏 누리고 있었으며 목련은 터질 듯 봉오리를 물 었고 라일락 황매도 물이 들기 시작했다. 눈보라를 보내고 바람을 보내고 빗줄기를 보내더니 어느덧 자연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현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얼빈에서 신경까지, 신경에서 서울까지 오는 동안 오가다는 줄 곧 들떠 있었다. 노여워 했을 때 자책했을 때 풀이 죽었을 때 절망감을 씹었을 때도 그는 들떠 있었다. 깊은 땅속을 흐르는 물과 같이 마음속에서 흐르는 그 소리 때문에 들떠 있었던 것이다. 산장에서 묵을 하룻밤이 그에게는 아득하게 멀었다. 마음은 동경 하늘을 헤매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알지 못할 두려움이 엄습해왔고 운명과도 같은 두려움이어서 며칠을 서울에 죽치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찬하 집에 갈 때마다 아저씨, 아저씨 하며 유난히 따르 던 아이,산책길에 데리고 나가기도 했고 백화점에 가서 선물을 사주기도 했던 아이, 그렇게 하기를은근히 조장 하듯 한 찬하의 태도,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래서 그랬었구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이상했던 일이 한두 가 지가 아니다. 어째 그 당시는 그렇게도 까맣게 몰랐으며 한오라기의 의심도 없었는지. "일본이 망할 때까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을 잊지 않겠어요." 별안간 인실의 목소리가 뜨겁게 귓가에서 울렸다. "일본이 망할 때까지..." 동시에 아까 유인성의 집을 나서면서 나는 누구인가! 그 강렬했던 자각이 인실의 목소리에 부딪쳐 무섭게 소 리를 낸다. 그 음향이 머릿속에서 진동하고 파장을 일으킨다. 엄청난 사실 앞에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인실의 그 마지막 말이 이제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반전주의자요, 일본의 패전을 예감하는 오가다, 오가다 자신도 그 말이 이렇게 충격을 주리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비수로 꽂혀 있을 줄이야. 그 말이 인실의 입에서 나왔다 는 것이 오가다에게는 절벽이었다. 거실로 들어온 오가다는 찬하와 마주앉았다. "산카상." 찬하가 쳐다보았다. "인실씨는 이런말을 했어요." "..." "일본이 망할 때까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라구요." "그래서?" "그때는 내가 도망갈 차례가 아닐까요?" "당신은 분노하고 있군." "네, 그래요." "그렇다면 인실씨의 모든 행동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 "그, 그렇지요." "사람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부정할 수 없는 거요." "..." "인실씨가 근본은 모르게 아이를 버리려 했던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소." "산카상의 경우는? 말해보아요." "네 경우는, 글세 내 경우라면 아마도 일본이 망할 때까지라기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라했을 거요. 나는 인실 씨처럼 투사가 아니니까." 찬하는 씁쓸하게 웃었다. "산카상도 일본이 망하기를 바라고 있소?" "내가?" 그는 또 씁쓸하게 웃었다. "대일본제국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집안이며 일본 여성과 혼인하여 사는 처지에 무슨 할말이 있겠소. 사회주의 쪽에서는 인민의 적이요, 민족주의 쪽에선 민족의 적, 내 형편이, 잘 알지 않소? 그런다고 해서 일본의 만수무 강을 빌 수는 없지." "..." "일본이 망하는 것을 원치 않는 오가다상이나 망하기를 고대하는 조선인, 따지고 보면 같은 차원이오. 일본을 비판하고 압박 민족에 깊이 동정하는 오가다상도 조국이 망하는 꼴은못 본다, 그와 같이 어쩌다 친일파로 몰 린 사람들 심중에 희한이 없겠소? 종속을 누가 원하겠소. 민족에 대한 존엄은 면할 수 없는 보편적 윤리 아니 오? 게다가 그것은 짙은 감정이니까." "우문이었소." "악질 친일분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자는 제 나라가 융성하면 애국자가 되고 충성을 하고, 항상 강 장 지향의 노예들이지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타은 노예 근성, 나같이 우유부단의 방관자는 있게 마련, 사 실은 조선인들의 경우 그 대부분이 친일하게 하는 잔혹성 밑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친일하는 고통에서 헤어나 지 못하는 것이 실상 아닐까?" "우리의 평행선, 적입니까? 영원히." "그렇지는 않지. 그 해답은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요?" "내가요?" "세계가 하나 될 때, 그게 당신의 주의였고 이상 아니었소? 그리고 또 이웃으로서 우리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 을 때 적이 될 이유가 없지 않아요? 당신의 반전 사상은 그거 아니었소?" "그건 그래요." "하면은 우리가 어찌 적이었소. 친구지." 하는데 제문식과 선우신이 나타났다. "심각한 얼굴들 하고서, 왜들 이래?" 제문식이 말했다. "신상 오래간만이야." 오가다가 일어섰다. "음, 그 동안 별고 없었지?" 선우신과 오가다는 굳게 악수를 했다. 선우신의 미소는 옛날과 다름없이 달콤하고 청순했으나 모습은 피폐한 것같이 보였다. 제문식은 연공의 탓인지 제법 증후해 보였고 혐오감을느끼게 했던 옛날보다 많이 달라져 있었 다. "오가다상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서울에 나타난 거요." 말투만은 거리낄 것 없는, 전과 다름없는 그대로였다. 조용하가 살아 있을 때 이 산장에서베푼 주연에 제문식 과 합석한 일이 있었고 신랄한 일본 비판과 천황이라는 칭호에 대하여야유조로 말하던 제문식의 투를 오가다 는 기억하고 있었다. 몹시 기분이 상했던 것도. 그 후 만주로 가는 길에 조찬하의 부탁을 받고 잠시 제문식을 만난 일이 있었다. 찬하의 태도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거의 사갈시하던 제문식을 형 대하듯 했고 신뢰하고 있 는 것 같았다. 네 사람은 안방에 마련된 술상 앞에 앉았다. "우리 모두의 건강을 위하여, 우리 모두가 무사 통과하기 위하여 건배합시다!" 제문식 말에 따라 네 사람은 술잔을 부딪고 나서 술을 마신다. 모두 샌님이 돼놔서 기생을 부를 수도 없고, 야, 선우야 네가 흥을 좀 돋아야겠다. 제문식의 말에 "제가요? 그런 재주 없습니다. 형님이 기생 노릇 하십시오." "저놈의 버르장머리, 직원이 사장보고 그래도 되는 거야?" 모두 낄낄거리며 웃는다. 선우신은 오가다에게 술잔을 내밀고 술을 부어준다. "서울 형편은 좀 어떻습니까?" 찬하가 제문식에게 물었다. "빈사 직전이지." "인심들은 어떻습니까." "말 마라. 서로 잡아먹으려는 판국이지." "이해 관계에 있어서 그럽니까?" "아암 있지. 서민들이야 진작부터 체념하고 사는 족속이고 뺏을 능력은 물론 빼앗길 것도없고 몸뚱아리 하나 간수하기에 필사적이지만." 표현이 과격했다. 같은 내용이라도 제문식의 입에 오르면 과격해진다. 여하튼 그의 말대로라면 그야말로 동족 상쟁을 방불케 한다. "그런 형편이야 어디 서민들뿐이겠습니까. 몸뚱이 하나 간수하기에 필사적이긴 다 마찬가지요." "그렇기는 하지. 그러나 요상한 곳이 한군데 있어." "그게 어딥니까?" "지식층 한량들이 모여든 곳이지." 네? 지식층 한량이라구요?" "글줄이나 쓴다는 놈, 말깨나 한다는 놈, 그게 다소 쓸모 았게 된 사국이다, 그 말씀이야." 그 말에 대해서는 모두 입을 다물고 반응이 없었다. 새로운 얘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문식은 얘기 를 계속한다. 뭣이든 화제를 이어서 분위기를 녹여가며 주연을 이끌어가야 했고 서로 헤어졌던 기간이 길었던 만큼 거리를 잡아당길 필요가 있었고 아닌게아니라 반가우면서 서먹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후배격인 세명의 사내들은 가기 성격이 다르고환경도 달랐지만 공통된 것이 있었다. 내성적이며 고지식하다는 점, 너스레를 떨 고 광대 노릇을 할 위인들이 못 되었다. 결국 선우신의 말대로 궂은 일을 곧잘 맡아야 하는 제문식이기생 노 릇을 할밖에 없었다. 그러나 얘기의 내용은 술안주에 적합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말발이 거센 편이며 늘 빗 대는 것 같고 과장이 좀 심해 그렇지 실은 제문식 나름의 예리한시각은 늘 그의 말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었 다. "한반도의 인원 구성을 보면, 조선조 시대의 상부층 중간층 소속이 합방 후 아주 소수의 지식인 지주들을 제 외한 거의가 다 어떤 형식으로든 농민층 노동자층으로 흡수되고 말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두 거대한 인간 덩어리 밑창에 간신히 들러붙어 연명하고 있는 것이영세한 상인 어민, 도시의 자자부레한 각종 없소의 경영주 종업원 그리고 하급 사무직, 그런 것들이지. 알다시피 근자에 와서는 농촌에서 많은 인력이 임금노예로 도시 혹은 일본 만주로 빠져나갔고 노동력은 보충되지 않은 채 전과 다름없는 면적의 농경지에서 농산물을생산하고 있는 형편에 노동력 소모에 따른 공급이 마땅히 있어야 하는데도 농토 면적과 마찬가지로 변할 것이 없는 공 급이라, 결국 빈곤과 열악한 생활 환경은 더 내려갈 수 없는 지경까지 온 것이 농촌의 실상이다. 이런 판국에 새로운 복병이 나타났다 말씀이야. 소위 공출이라는 건데 이것이 농민에게 새로운 수탈 방법으로 나타나게 되 었지만 그 동안 복락을 누리고 일본의 비호를 받아온, 하기야 그것은 기업에의 진출을 막는 일본의 정책이었 지만 여하튼 공출이라는 것 때문에 수탈자였던 지주 계급이 피수탈자로 전락한 것은 뻔한 일아니겠소?" 한데 얘기가 왜 그리로 돌아갑니까? 댕강 잘라놓고는 다른 데 가서 불피우고 있습니까?" 선우신의 핀잔이었다. 잠자코 듣기나 하게. 골자 내놓고 사방에서 몰아 들어가고 있으니, 아직은 짧지 않은 봄 밤, 급할 게 뭐 있누. 하여튼 일본은 농민들을 그런 식으로 정비해놨고 다음은 노동잔데, 하 참, 체판에다 걸러서 잘도 가지런하게 해놨지. 절로 돌아가고 있단 말씀이야. 양 날개가부러진 노동자들 뭘 어찌겠나. 이제 그들의 문제는 일자리 그 자체가 풍전등화라. 제발 일자리에 붙어 있게만 해달라, 조건이 없어졌어. 왜냐, 그들이 거리에 나가게 되면 징 용이라는 아가리가 기다리고 있거든. 그 허방에 빠져들어갈밖에 달리 길이 없다. 그러고 아까 말한 밑창에 간 신히 달라붙은 눈물나게 가련한 잡종업의 종사자들은 뿌리박은 양대 덩어리와운명이 같으니까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고, 자아 그러면 명료해지는데 농토 농민을 합하여 농촌은 일본의 군량미 저장소요, 노동자들은 깡그 리 군수품, 그것도 군수품의 부품이다그 말씀인데." 제문식은 일단 말을 끊고 술을 마셨다. 다른 사람들도 술을 마셨다. 찬하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새삼스런 얘기도 아니구먼." 그러나 다소 과장은 있었으나 제문식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고, 그의 유창한 일본말도 오가다의 귀에는 설지 않았다. 그리고 찬하말대로 새삼스런 얘기도 아니다. 하지만 제문식의언변에는 새로움, 새로운 자극을 주는 힘 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는 일본 국내에서도 대동소이한 게 아닐까요?" 오가다가 말했다. "물론 그렇겠지. 전시체제란 바로 그런 것이니까. 그러나 이 전쟁은 조선 사람의 전쟁은 아니거든. 우리가 살 아남아야 하고 우리가 이득을 챙기는 전쟁이 아니란 말이야. 보다 정확하게 얘기를 하자면 자멸 자살을 강요 당하고 있어. 왜냐하면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를 소멸하려 드는 힘에 우리가, 우리의 고혈이 보태어지고 있다는 비극, 오가다신상은 그걸 알고 있소오? 또 한가지, 상부층 중간층이 일본에는 엄연히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들이 주전파요 사령부니까." "..." "무슨 구수회의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형님. 도대체 우리들은 뭐지요? 지식층 한량들, 허허허헛..." 선우신이 서글프게 웃었다. "이제부터야, 대낮에 낮도깨비." "대낮에 밤도깨비가 나오면 안 되지요." 선우신이 또 말했다. "저 자를 대리고 온 것이 화근이라. 선우야 자네 언제부터 그렇게 비뚤어졌냐? 신문사의 밥자릴 일허어서 그 러냐? 아니면 신문사에서 왜놈한테 아부하는 버릇이 생겨서 그런 거 야?" "모두들 환장을 했는데 저라고 돌부처겠소? 하여간 막막합니다." "서울 사정 얘기나 하세요." 찬하가 말했다. "하던 지랄도 멍석 깔아주면 못한다 하더니, 하라니까 주늑드네." "주늑들 사람이 따로 있지, 형님 주무기가 배짱 아니던가요?" "흥 알아주어서 고맙네. 내가 송두리째 다 들어먹으려 했는데 그것도 안 되는 한심한 시절이야." "임자 없수, 누가 말려요?" 찬하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 뭔가 모르고 있군 그래. 내 손이 작아서 못 그러겠나? 다 쓸모가 없게 됐으니 그렇지. 폐차다, 온통 폐 차야. 조용하가 살아 있어도 별수없었을걸? 누구처럼 도망갈 곳이라도있으면 도망갔을게야. 쌍말로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어." "엄살 그만하세요. 태수형님은 자알 해가고 있질 않소." "만주 진출 말인가? 그거 아주 잘못된 일일세. 멀잖아 본전 놓고 손들 게야. 지금은 가만히 있는 거야. 누구든 가만히 있는 게 상수라." 하다가 "여하튼 낮도깨비가 횡행하는 서울 얘기나 끝내자. 어디까지 얘기 했더라? 음 그래, 조금 남겨둔 부분의 얘기 였지. 아주 쬐그맣게 남겨둔 부분, 그러니까 기업체는 군수공장으로 징발되든지 헌납하든지 양단간 그 문제만 남았으니 이익 추구를 위한 경쟁은 물건너갔고, 고문 패스한 몇 송이 꽃은 안배해주는 대로 고분고분 자리에 앉으면 되는 거고, 학생? 참 그래 학생이 있지. 학생은 병영장에 가두어두었으니 학교가 즉 병영장이라. 해서 동원령만 내리면 줄줄이 나오게 돼 있지. 보충병이든 아니면 일본군을 빼내고 최전방 총받이로 세우든지, 그것 도 시간 문제 아니겠나? 신문사 두 개가 문을 닫았지만 까짓것 어차피 관보에다 싣고 애국 충정의 미담이나 대서 특필하고 허위 전과를 배짱 좋게 나열하고 헌금 헌납, 지원병이나 독려하고 그런 거라면 종이가 모자라 죽을 판인데 어용 신문 하나면 족하지 않겠느냐, 옳은 처사지. 그만큼 친일의 금줄이 줄어들 테니 말씀이야. 한데 이제는 확성기가 필요하게 됐다. 그런 시점에 왔거든." 선우신이 그 말뜻을 알고 낄낄 웃었다. "허허어 선우야. 웃을 일 아니네. 자네 모가지에도 칼끝이 닿은 걸 몰라? 울어도 씨원찮은 판국인데." "네. 그래서 남천택이 그 형님이 삼십육계를 놨지요." "남천택이 누군데요?" 찬하가 물었다. "자네 모르나?" 제문식의 말이었다. "모르겠는데요?" "그런 괴물이 하나 있어." 하자 선우신이 "양대 괴물의 하나지요. 제문식이, 남천택이, 장안의 기생들도 다 아는 인물인데 제사장은 그로테스크 귀신이 고 남천택 그 형은 광대 귀신이지요." "눈에 뵈는 것 있어 없어? 밥줄 놓으려고 그러는 게야?" "형님 밥줄은 어디 길게 가겠어요?" "참 선우신이도 많이 늘었다. 남천택이 서의돈을 따라다니더니 못 배울 것만 배워가지고 사람 버렸어." "남천택이라는 사람이 어찌 되었는데요?" "모습을 감춘 지가 한 육칠 개월 된다 했지? 선우야." "그러더군요." "잡혀갔습니까?" "그 꾀주머니가? 흥 잡혀갈 위인이 따로 있지." "소문이 분분해요. 중국으로 갔다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소련으로 월경했다는 말도 있어요." "오나가나 요란한 인물이지. 종잡을 수도 없고 알 만한 사람들의 얘기로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거야. 한번도 콩밥을 먹은 일이 없는 공산주의 골수분자." "아무도 확실한 거는 모르지요. 지나치게 두뇌가 명석하고 가만 천재라 할 수 있는데 사생활이 또 기기묘묘해 서 사람들 입질에 오르내리는 모양이더군요. 신문사 교수직이 얼마 하다가는 내던지고 결혼도 안 했는데 늘 여자는 있고, 볼 때마다 여자가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나 원망하고 매달리는 여자는 없다더군요." "차림은 어떻고? 순 딴따라, 그 이상이지. 그리고 평생 남의 돈으로 살고 남의 호주머니에서 돈 털어내는 것도 천재적이라 하더군. 그런데 돈 대주는 사람들 끝까지 그를 버리지 않는다는 거야. 돈키호테지 원." "제사장은 만나보았어요?" 찬하가 물었다. "만나만 봐? 술자리도 많이 같이했는데." "제사장 보기엔 어떤 인물입니까?" 찬하가 관심을 나타내었다. "천재인 것만은 틀림이 없어. 그의 박식은 당대 첫손가락으로 꼽힐 거야. 한데 그의 정체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단 말이야. 실로 성격이 복합적이고 사람을 매료하는 어떤 힘이 있는 것도 같고 하여간 비밀스런 그것이 사 람을 끄는지, 콩밥 한번 안 먹은 공산주의 골수분자, 사람들의 억측이겠지만." "천택이, 그 형에 관해서 말들이 많은 것은 어쩌면 사람들 심리속의 자기 자신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남천택의 얘기가 깊이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지 선우신은 제문식을 가로막듯 말했다. "자기 자신의 반영이라면?" 찬하가 말했다. "겉으로는 평온한 것 같지만 서울의 기류는 갈팡질팡, 모두가 허둥대고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거지." 제문식이 말하며 술을 마셨다. "작년 초 창씨 제도가 시행되면서부터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아시다시피 폐간되었고 이어서 구월에는 반전운동 단체라 하여 기독교도들을 비질하듯 검거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국민총력연맹의 조직, 그것은 아까 문식형 님이 말씀하신 대로 농촌은 군량의 저장고로, 노동자들은 깡그리 군수품의 부품으로, 그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 로서 그걸 보다 강화하기 위하여 황국신민 운동인가 뭔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데 한마디로 만화지요. 처처에서 만화 같은 작태가 벌어지고 있어요. '윌리엄 텔'의, 압제자 모자 앞에서 절하는 것쯤, 그거 약괍니다. 가장 저 질의 광신을 우리는 지금 강요당하고 있는 겁니다. 가장 야만적으로 가장 무지 몽매한 종족으로 우리는 추락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돼 있어요. 일본인들은 그런 일에는 거의 불감증인 듯하지만 현인신을 믿지 않는 조선인 들 처지에서 보면 뱃가죽이 터질 지경이지요. 그러나 조선인이 그 희극의 관객 아닌 연기자다, 하는 점이 참혹 한 거지요. 여하튼, 금년에 들어와서 종전에 있었던 사상범 보호관찰령이 개정되어 예방구금령으로 공포된 것 은 한층 목을 죄자는 것인데 예상하지 않았던 일은 아니었지만 심리적으로 사람들이 급박해진 것은 당연하지 요. 어디든 국경을 넘고 싶다는 유혹은 거의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을 겁니다. 의식하건 안 하건간에. 그런 심 리 상태가 천택형이 소만국경을 넘었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낳게 한 것 아닐까요?" 겨우 결론이 나왔다. "말하자면 탈출 심리다, 그말이군요." 찬하 말이었다. "그렇지요." "거의 모든 사람이란 말은 정확하지가 않아." 제문식이 말했다. "저는 지식인을 두고 한 말입니다. 애초, 글줄이나 쓰고 말깨나 하는 사람들 얘기가 아니었던가요?" "알어." "친일파들이 뭣 땜에 탈출하고 싶겠느냐 그 말씀인가요?" "하기야 뭐 친일파도 친일파 나름 아닌가. 그것도 여간 복잡하고 다양한 게 아니지." "형님은 인간의 기미를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이론이야 늘 빈틈없이 쏙 뽑아내는 것이 형님의 장기지만 그게 도판이지 입체는 아니지요. 사람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는 모자라요. 하기야 뭐 연애 한번 못 해본 처지고 보면 사람의 마음 심층을 어찌 알겠습니까." 모두 웃는다. "얘기가 왜 그리 빠져? 이 자식아, 누가 안 하고 싶어서 안 했나. 원래 연애란 미남미녀의 불장난인데 나같은 상판은 애초부터 자격이 박탈돼 있었으니 낸들 어쩌누." "노트르담의 꼽추도 있잖아요." "미녀를 납치해갈 종탑도 없었고, 하긴 선우 네가 어떻게 내 사정을 알겠나, 소문난 연애치고 진짜는 드물어." 제문식은 껄걸 소리내어 웃었다. "그 따위 신소리는 그만하고, 어째 술이 고루 돌아가지 않았는가? 얘기가 거듭 행방 불명이네." "원래 그게 형님 화법인걸요. 고자를 던져놓고 둘레를 서서히 압축해가다 보면, 한데 이번에는 너무 속도가 없 어서 그리 된 겁니다." "이 자식아, 이번엔 네가 그랬다. 빙글빙글 돌리더니 얘기를 구석에 처박은 건너야. 그 위인들을 따라다니더니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형님이 말슴하시고자 한 것은, 일본의 몬쓰키 식복을 입고, 조선 신궁에 가서 신관 주례로 혼인하는 순수한 친일파 아닌가요?" "알기는 좀 아네." "탈출 같은 것 생각하지 않는 그들 충의를 말씀하시려 한 거 아닙니까?" "그렇지." "형님 얘기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아니면 건망증이든지, 형님은 늘 그랬어요. 그런 무리는 강자지향의 노예들 이라구, 제 나라가 융성하면 그런 대로 애국자요 충신도 되는 무리들이라구." "그랬지이." "노예들은 주인이 바뀌어도 충성하는 법이라구, 누구든 개줄을 잡은 사람이 주인으로서 그들은 개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는데? 그게 뭐 잘못됐단 말인가?" "그 순수한 친일파들이 누구보다 먼저, 강하게 탈출에의 유혹을 느낄 거라, 저 생각은 그렇습니다." "..." "그들이 살아남는 비밀이 뭔지 아십니까? 힘의 무게를 다는 아주 정확한 저울을 가지고 있다, 저는 그렇게 생 각합니다." "흐음..." "일본이 망할 거란 냄새는 그들이 맨 먼저 맡는 거지요."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선두에 서서 지랄들 하고 있어." "그 속에는 정세 분석을 못하는 바보들, 겁쟁이들, 또 우직파도 있겠지요. 갑자기 각도를 틀 수 없는 미련둥이 는 결국 우치지니를 하는 거지요.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누가 압니까? 순수한 친일파들이 독립국 의 뒷돈의 뒷돈을 대주고 있는지, 형세보아가며 대한독립 만세! 하고 외치며 나왔다가 몇 달 구류 살고 그런 뒤 조선이 독립될 그날 길이 좁아라며 활보할 궁리를 하고 있는지 그건 모를 일이지요. 가장 지혜롭고 영악하 게 사는 사람들, 어디든 적응하는 식물같이 끈질기게, 본시 생물은 다 그렇게 하게 돼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사람이다! 해봤자 별무 소득이지요." 선우신은 이빨 사이에서 밀어내듯 신랄하게 내뱉었다. 오가다는 놀란 듯 선우신을 바라본다. 오랜 세월, 선우 신이 목도했던 현실은 움츠리고 그를 또 움츠리게 했지만 앙금같이 몸에 묻은 때를 의식하듯 그의 눈은 절망 적인 비애에 젖어 있었다. 오가다는 선우신과 부딪친 눈을 간신히 떼어내듯 고개를 숙였다. "이원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찬하도 우울해진 표정으로 별뜻 없이 물었다. "그 사람은 단념한 것 아닐까요?" "단념이라면, 어떻게?" "자신은 어느쪽에서든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그럴까요?" "모르지요. 혹 우직한 편인지, 방향을 틀지 못하고 있는지." "나는 오히려 광신하고 있다는 인상이었습니다. 만주서 발행되는 신문에 실린 신년사를 본 적이 있어요. 첫째 간 데마다 일본 사람 되시기를 바라오며 천황폐하에게 충양한 신민이 되도록 힘쓰시고, 지원병에도 많이 응모 하시고 내지식 씨명도 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말들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저같은 사람도 좀 심하다 싶었어 요." 침묵이 흘렀다. 잠자코 한동안 술만 마시는데 이들은 갑자기 고독해졌던 것이다. "확성기 얘기는 어찌 되었습니까?" 알면서 침묵을 메꾸려는 듯 찬하는 어색하게 말했다. "선우야. 자네가 끝마감 해라. 가로채갔으면 매듭을 지어야지." 제문식이 담배를 뽑아물며 말했다. "허 참, 사람꼴 우습게 돼갑니다. 기왕지사 치마 벗고 사거리에 나 앉은 몸, 뻔하게 누구나 다 아는 일, 핏대 올려보아야 별 수 없는 일, 얘기하지요. 해." 선우신은 상당히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았다. "아까 문식형님이 모판 펴놓듯 하신 말씀, 농민이 어쩌고 노동자가 어쩌고 맞아요. 그 얘기 다 맞는 얘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소림없이 되어진 일이지요. 물밑에서 한 작업이라고나 할까요? 북 치고 나 발 불 필요가 없었지요. 총대면 되는 거 아닙니까? 물밑에서 총을 흔들든 칼을 휘두르든 소리가 나지 않으니 까. 그러나 들내놓고 하는 일, 만천하 명명백백한 일에는 악대 동원하여 혼 좀 빼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확 성기도 설치하구요. 창씨개명에다가 지원병에다가 황국신민의 운동, 여기에 지식인 주둥이가 빠져서야 되겠소? 앞으로 징병이 있을 거구 학병도 있을 거구, 애국지심에 불타는 진리 탐구의 학자님, 인생의 가치를 책정하는 문학가, 대일본제국의 간성을 기르는 교육가, 어찌 그냥 있겠소. 그것에도 주도권 잡은 파벌이 있고 소외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머리 싸매고 다니면서 끼여들려는 분자가 있고 눈치 보아가며 시골로 낙향하려는 양심파, 만주 중국의 천지를 의지하여 달아나는 사람, 병을 칭하여 두문불출하는 사람, 실로 이합집산이 눈부신 상태다 그거지요. 나 같은 존재는 언제 어떻게 예방구금이 될지 모르니까 차라리 속편합니다. 정말 이놈의 세상을 살 아야 하는지 죽어야 하는지... 꽃샘 바람에 중늙은이 죽더라고 겨울 다 나고서 봄을 보며 죽는 꼴 많이 생길 겁니다. 지조를 지키는 사람들이야말로 풍전등화, 변절하기 쉽지요. 친일하여 단물 다 빨아먹고 막판에 와서 독립만세! 하는 애국자하고 수없는 영을 넘어 버티다가 넘어간 변절자, 어떤 계산법으로 해답을 내야 하는 건 지 도통 모르겠소." "그야말로 난리군요." 찬하 말에 "난리이기도 하구 경사 났다 할 사람도 있구요." "말이 났으니, 유인성 씨는 어떻게 지내지는지요." 넌지시 물어본다 순간 술이 싹 깨는지 선우신이 눈이 고정된 채 찬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자신이 취한 언동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조형께서 유선생님을... 아시는 사이신가요?" 하고 물었다. "안면 정도지요. 죽은 형하고는 사이가 나쁜 친구였다고나 할까요?" "그래요? 참 그렇겠군요. 문식형님하고도 사이가 별로인 친구간이니까 그렇게 되는군요." 멋쩍게 웃으며 선우신은 고개를 떨구었다. "진일 마른일 다 봐주었건만 선우야, 네 마음속에는 어찌 그리 계급 의식이 확고 부동하냐. 유인성에 대해서는 항상 선생님이고 나보고는 형이라, 에에라 썩을 놈, 빈말이라도 아첨 좀 해보아."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그만두시오, 형님. 새앙쥐 불가심할 것도 없는 사람 보고 풍악잡힐 겁니까?" "새남터에 나가도 먹어야 한다, 그게 인생 아니냐. 산다는 게 뭐게? 다 그런 거야. 심각해한들 뭐 뾰족한 수 나겠어? 풍악 치고 놀아보는 거지. 그간 기방이 성업한 것도 전후좌우, 사방팔방 콱콱 막혀버린 때문이 아니겠 나? 갈 곳이 없었던 게야. 사실 그렇지 돈푼 있고 친일한다 해서 왜놈들, 살점 좋은 고기 써억 비어서 내준일 있었나? 모두 저희들 차지, 눈물값도 안 되는 돈푼, 이권 받고 알랑방귀 뀐 친일파도 생각해보면 가련한 족속 이야. 여하튼 부럽네. 유인성이 부럽다. 이런 세상에 자네 같은 추종자가 있다는 것은." "유인성 씨한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찬하가 말했고 오가다의 표정은 긴장돼 있었다. "유인성의 집안 꼴이 말이 아니라네." "어떻게요?" 제문식은 잠시 동안 오가다를 쳐다보았다. 눈길을 돌리면서 "불운이란 늘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모양이야." "..." "하나 있는 아들이 지금 마산 결핵요양소에 가 있어. 그것도 상당히 중증이란 얘기고, 딸들은 출가시켜 그런 대로 이럭저럭 괜찮은 모양인데." 하다가 제문식은 중간을 생략하는 눈치였다. "물론 당국도 그렇지만 친일파들이 좀 괴롭혀야지, 과거 논적들도 호기도래라, 송곳 바늘 숨겨서 마구 찔러대 는 판국이고 되잖은 짓 했다가 유인성이한테 무안당했던 소인들은 느긋이 뒷짐지고 서서 그의 불행을 구경하 고들 있는 거지.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믿었던 사람들이 차례로 훼절해가는 꼴을 눈앞에 보는 것이 젤 고통스 러웠던 거야. 그야말로 고립무원, 찬바람이 슁슁 돈다. 서의돈이 같은 사람이야 황태수가 뒷배를 보아주어서 동생 영돈이가 회사의 간부 사원이고 본시부터 형네 식구들 책임을 지고 있으니 내일 잡혀가는 한이 있어도 김삿갓 신세, 넉살 좋고 언변 좋아서 어디로 가나 제자리를 찾지만 유인성같이 원리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하 는 사람은 살기가 힘들고 괴로워. 난세에는 더욱더. 그의 성품이야 그의 아끼던 후배 오가다상도 잘 알 거요." "물론, 아, 알지요." 오가다는 바늘 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제국주의 일본을 성토하는 거야 늘상 그래 왔으니 구태여 유념할 필 요는 없겠으나 중간을 생략한 듯한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필시 자기의 인실에 관한 일일 것이다. 오가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인성이 상처를 받은 것을 물론 생각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들로 인하 여 뭔가 더 심각한 일이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가다의 자격지심이었다. 생략 된 부분은 유인성의 처석씨에 관한 것이었다. 딸들을 출가시켰고 늙어가는 마당에 바람이야 났을까마는, 시어 머니가 세상 떠나고 견제하는 이가 없어지면서부터 석씨의 잦은 외출과 눈에 띄게 낭비하는 습벽, 그로 인하 여 차츰 집안이 황폐해지는데 말로는 아들 때문에 심화가 나서 그런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본 시부터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모성애가 없었다. 할머니가 아이들을 거두어 그랬는지 모를 일이나 하여간 석씨 는 전혀 자식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가끔 유인성은 마산으로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있었다. 그러나 결핵이 라는 병이 옮겨울까봐 그랬는지 어미된 석씨는 일절 아들을 찾지 않았다.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거 다 입고 좀 쇠약해졌다 싶으면 보약 먹고 가고 싶은 곳 다 찾아다니고, 혼인하느라 중퇴했으나 명문예고를 다닌 것이 자랑이요. 생각이 천박하여 일본 통속 소설이나 탐독하고 저속한 잡지 나부랭이나 뒤적이고 그것으로 지성적 여성인 양 착각하는 여자, 너그럽게 그런 면을 덮어주며 사랑했던 유인성은 아들이 병이 나면서부터 모성 부 재인 석씨에게 진저리를 치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짐승도지 새끼를 위해서는 창자가 끊어지게 울부짖는데." 유진성은 한탄했다. 아니 아내를 증오했다. 남의 남자와 불륜 관계에 빠진 이상으로 병든 자식을 팽개친 그에 게 분노를 느끼는 것이었다. 석씨는 석씨대로 남편을 대수로 여기지 않았다. 학벌 좋고 인격자이며 애국지사라 하여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남편을 우러러 받들며 순종했던 옛날을 이제 와서는 갇혀서 허송 세월한 것처럼 억울해했고 다시는 그렇게 안 살겠다며 돈푼 있고 할 일 없는 여자들과 어울려 다녔는데 황새들을 따르자니 그는 빚을 내게도 됐고 잘사는 친정 형제들한테서 돈을 얻어다 쓰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남편을 경제적 무능 력자로 치부했으며 유인성의 입지가 좁아지면 질수록 이빠진 늙은 호랑이 취급이요 방자하기 그지없었다. 한 지붕 밑에서 서로 남남으로 지내게 된 것이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피폐할 대로 피폐한 유인성은 사실 이빠 진 늙은 호랑이였다. "그래도, 땅은 좀 가지고 있겠지?" "모르겠어요." 제문식이 묻는 말에 선우신의 대꾸였다. "아들 땜에 목재소는 팔았다던가? 남의 손에 넘어갔다지 아마? 선우야 안 그러냐?" "넘어갔지요." 찬하와 오가다는 낮에 만났던 유인성의 모습을 생각한다. "당장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딱하지. 성정이 꼿꼿해서 남의 도움 받아들일 위인도 아니구." "구금되는 것을 젤 두려워하는 사람이 유선생님이라 한다면 믿겠습니까?" 선우신은 돌연 냅다 던지듯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지만 그 양반 끝까지 훼절은 안 할 겁니다. 살아남을 겁니다." "어째 그런 말을 하는가." "한마디로 괴로운 투쟁이지요. 자책감도 심할 겁니다. 선생님은 자신이 구금된 후의 아들 운명을 생각하시는 거지요." 유인성의 자책감에는 인실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면서 아들을 원망하는 모친과 인실을 그 길로 내보낸 것은 자기 자신이라 믿는 아픔이 짙게 깔려 있었으나 선우신은 그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아들의 죽음을 생각하시는군요." 찬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죽는 거야 하늘에 맡기고 게시겠지만 죽든, 살든, 어떤 모습으로 죽으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 있을 것인가, 그 걸 생각하시는 거지요." "그러니까 마누라 땜에 그러는군." 제문식의 말을 받아서 선우신은 "그럴 겁니다. 모두 제 뱃속에 집어넣겠지요. 머리카락 하나 다치려 아 s할 거고 바람만 불어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겠지요. 배고프면 청요리 시켜다 먹을 거고 솟정나면 돼지고기 사다가 삶아 먹을 거구, 그러는 사이 아들은 창문만 바라보고 있겠지요. 남몰래 혼자 죽어갈지도 모르지요. 선생님은 자기 품속에서 아들을 보내고 싶을 겁니다. 비참하지요." 선우신은 그런 식으로 유인성 집안일을 조금 건드렸다. "그런 경우는 좀 드물 거야. 성격적으로 일종의 불구자라 할 수 있겠지." "하기야 뭐 딸을 청루에 팔아먹는 에미 애비도 있긴 하지요. 그런 인종들은 저주를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을 겁니다." "가난이 죄라 했다." "효행이 부모의 권리가 된 데 문제가 있는 거지요. 권리 말입니다. 심청전을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하고 말살 해야 합니다. 가장 추악한 에고이즘, 에고이즘의 극치 아닙니까." "그런가 하면 고려장도 있어." 오가다는 슬그머니 일어섰다. 화장실에라도 가는 듯, 복도에 나왔을 때 오가다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머 리가 터질 듯 아팠다. 작은 머리통에 온갖 것을 다 꾸겨서 밀어넣은 것 같은 기분이다. 그는 지난 밤 묵은 침 실로 찾아들어갔다. 달빛을 받은 창가 침대에가서 짐을 부리듯 자기 자신을 던진다. 달은 창밖 느티나무 잔가 지 사이에 걸려 있었다. 물결이 오고 또 오듯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끝없는 지속이며 끝없는 변화다. 밤새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대로 가는 게 아니야. 이대로는 못 가아.' 눈을 감는다. 망막에 아이 얼굴이 나타났다.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다. 깊이 생각해볼 여유도 없이 눈부시게 시 간이 지나간 것이다. 무턱대고 신경을 떠나왔다. 어쩌면 그것은 허우적거리기만 했던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아 이를 만나야 한다! 아이를 만나야 한다! 그 설렘은 먼 곳에서 깜박이는 등불을 향한 것이기도 했으며 아주 가 까이 다가와서 심장을 지져대는 것 같은 불덩이이기도 했다. 오가다는 아이의 운명을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의 운명을 검토하고 떠나야 하는, 오가다는 준열한 현실과 부딪친 것이다.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 또 대체 아이는 나를 어떻게 따라올 것이며 바뀌어진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 가!' 오가다는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런데도 그는 제문식과 선우신이 언제 돌아갔는지 알지 못했다. 길을 떠나는 새벽은 다른 시각에 비하여 한층 어수선하다. 찬하와 오가다는 각기 여행 가방을 들고 역으로 나 왔다. 찬하는 코트의 깃을 세우고 시종 침묵하고 있었다. 차표는 이미 끊어다놨기 때문에 그들은 이등 대합실 에 선 채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가다는 침묵을 깨고 들어갈 수 없는 압력을 찬하에게서 느낀다. 아니 압 력이라기보다 쓸쓸한 그만의 세계였다. 기차에 오른 후에도 이들은 수면 부족 때문에 잠을 잤고 별로 말을 하 지 않았다. 식당칸에서 점심을 먹을 때만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을 뿐이다. 오가다가 심각하게 얘기를 꺼낸 것은 관부연락선 선상, 갑판 위에서 밤바다를 바라보았을 때다. "부인은 알고 계십니까?" "아이 얘기요?" "네. 내가 그 아이의 아비라는 것을." "몰라요." "왜 얘기를 하지 않았소?" "이유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부인을 믿지 않습니까?" "믿어요. 처음엔... 그냥 얘기하고 싶지 않았소.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핑계였고." "혼혈 때문에 그랬지요" "그랬을 거요. 내 자신도 혼혈아를 낳았지만... 그러나 나중에는 이유가 달라졌소." "..." "아내를 실망시키고 싶지가 않았지요. 아버지가 당신인 것을 안다면 그는 아이를 빼앗길 거라 생각했을 게요. 나 역시 그냥 내 아들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집착이 강했으니까. 아내는 쇼지를 사랑했어요. 가끔은 내가 어디 서 낳아 데려온 아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소. 그 사람 이나 나도 그애를 기르면서 행복했으니까." "지금의 생각도 그런가요?" "말할 수 없이 허전하오. 어딘가가 뻥 뚫린 것만 같소. 집사람 생각을 하면 겁이 납니다. 충격을 받을 겁니다. 청천벽력일 거요." "그런 뜻이 아니고, 아이에 대한 애착 애정 말입니다." "참 이상한 걸 다 묻는군. 어떻게 며칠 사이 애정이 변하겠소?" "부럽고 샘이 납니다." "...?" "내 몫을 앗아간 것에 대해 미운 생각도 들구요." "별사람을 다 보겠네." 찬하는 담배를 붙여물고 쓰게 웃었다. "그건 농담이구, 산카상." "이제부터는 진담인가요?" "그렇소. 내 나이가 아직은 쉰 살이 아니오. 마흔의 중반인데 소집을 안 받을 거라 장담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찬하는 놀라며 오가다를 쳐다본다 "어젯밤 꼬박이 생각했습니다. 아이의 앞날을. 그 아이를 만주까지 끌고 와서 홀아비인 내가 기르다가 무슨 일 이 일어날지. 감정으론 그 아이와 헤어져 있고 싶지 않아요. 나는 이제부터 삶을 진지하게 생각할 겁니다. 그 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감정 내 인생이지... 그애는 다정한 부모와 누나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것을 파 괴할 권리가 내게 있는가. 내일을 알 수 없는 떠돌이 같은 아비를 따라서 겪어야 하는 새로운 세계, 물론 이와 같은 전시가 아니라면 나는 결코 그러진 않을 겁니다. 산카상이 원한다면 성장하기까지 그대로 두는 게 어떨 까 싶어서."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찬하 목소리에 탄력이 실렸다. "전쟁이 끝나고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다면 그때 돌려주시오." "잘 생각했소. 정말 잘 생각했어요. 나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 내 처지에서는 그런말 할 수가 없었소." "참 비극이지요?" "그런 생각은 말아요." "어미 아비를 두고... 여하튼 기구한 거지요. 그러나 지금까지 말 못한 것이 있어요." "말하시오." 찬하는 서두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웠어요." 오가다는 절을 했다. "별말씀을, 내가 고맙소. 정말 쇼지를 보내고 싶지 않았소. 여러 가지로 날 용서하시오." 찬하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감정이 흐트러져서 여기 저기 널리는 것 같았다. 오가다도 담배를 붙여물었다. "우리의 인연도 참 질긴 것 같소. 하얼빈에서 윤광오라는 친구를 만났을 때 그는 인실씨와 나의 인연을 질기 다 하더군요. 우리는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달빛 아래, 수평선이 아득한 바다, 오가다는 자신의 앞날을 수평선이 아득한 바다같이 느껴졌다. "네, 그래요. 전쟁이 끝나고 인실씨를 만날 수 있다면, 두 사람이 살아남았다면 그 사람과 내 아들을 끌고 나 는 북국으로 갈 겁니다. 빙하를 건너서요." 믿을 수 없는 꿈을 꾸듯 말하고서 오가다는 소리내어 웃었다. 웃다가 웃음을 거두는 순간 오가다 귀에 연락선 기관 소리가 굉음과도 같이 울려왔다. 쇠붙이가 마찰하고 마모되는 것 같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굉음, 심장 이 파열될 것만 같았다. 그것은 또 자신의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이기도 했다. 파도를 가르며 밤배는 조선해협 을 지나가고 있었다. 관부연락선 공고마루, 끝도 없이 조선인들을 노동자로 실어들였던 거대한 배, 끝도 없이 실어낸 식민지 이주자, 만주 개척민과 병사들, 군부와 결탁하여 착취가 목적인 각종 사업체, 그리고 인원, 오가 다는 자신도 그 사업체에 빌붙어서 사는 한 마리 바퀴벌레인 것을 느낀다. 자신과 자만에 가득 찬 관부연락선 공고마루, 육지와 육지를 이어주는 거대한 기계, 바다를 건너는 동안 그는 절대적인 군주다. 현대 문명의 산물 이며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불 밝히며 그 위용을 자랑하는 배, 그러나 오가다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 한다. 거대한 기계의 박동, 기관 소리만 하늘과 바다를 뒤덮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오가다는 생각한다. 그것 은 공포였다. 이 기계의 무수한 쌍생아들, 탱크며 대포, 비행기며 기차 기선 자동차 군함, 그런 것들에 제압되 고 순종하며 또 비명을 지르는 인간들은 오로지 시간만을 재고 수치만 살피면 되는 또 하나의 기계인가. "언제까지 미쳐 날뛸까요? 얼마나 사람이 죽어야 전쟁은 끝나지요? 전쟁 미치광이 땜에 과학이 발달되고 부를 축적하기 위하여 과학이 발달되고 없어도 될, 아니 없어야만 할 것 때문에 자원과 인력이 동원되고 생산에 미 쳐 날뛰는, 이 끝없는 낭비는 결국 인류가 전멸한 뒤에 끝이 날까요? 그래요. 군국주의는 망해야 해요! 식민지 정책은 끝이 나야 해요. 낭비와 축적의 이 병적 상황을 극복하지 않는 이상 사람답게 살 수 없고 생명이 부지 될 수도 없을 겁니다. 제사장 말대로 농촌은 거대한 군량의 저장소이며 노동자는 모조리 군수품의 부품, 뿐이 겠어요?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볼 때, 지주들이 농민으로 전락하는 것처럼 노동자 아닌 사람도 노동자로 공급 이 될 것 아니겠어요? 이제는 저항 없어요. 망해야 합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역사의 변혁을 위해서, 인류 를 위해서 망해야 합니다." 오가다의 목소리는 비통했다. "맞소. 신국 아닌 지구의 어느 지역에 태어난 사람으로,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야지요. 현인신이 아닌 사람으 로서 추앙을 받아야 할 겁니다. 네 그것이 타파되어야... 허황한 논리는 깨어져야 합니다. 부의 산실이며 상징 인 기계문명도 막아야겠지요. 그러나 언제? 가장 합리적인 과학이 사람의 이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이 아이러 니, 하기는 나타난 이상 끝장보지 않고 물러나겠어요?" 찬하는 비관적으로 말했다. 두 남자가 조후에 있는 찬하 집에 갔을 때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노리코는 가위를 들고 화단의 수선화를 자르고 있었다. "어머!" 노리코는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돌아오셨군요." 하고 인사를 한 뒤, "웬일이지요? 두 분이 함께 오시다니 정말 뜻밖입니다." 노리코는 회색 바탕에 점자줏빛 꽃무늬가 대담한 기모노에 황금빛 오비를 매고 있었다. 그리고 녹색 오비히모 의 큼직한 비취 오비도메가 눈에 띄었고 하얀 다비와 주반이 청결해 보였다. 그러나 그가 기모노를 입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찬하를 의식한 때문인지 거의 일상은 양장이었는데 기모노의 모습은 농염했다. 황급하게 달려나와 공손하게 인사하는 하녀 오하루에게 여행 가방을 넘겨주며 "그렇게 됐어요. 우연히." 찬하는 말했고 역시 오이찌에게 가방을 건네준 오가다는 "오래간만입니다. 부인, 그간 격조했습니다." 하며 노리코에게 인사한다 "잘 오셨어요. 자아 들어들 가십시오." 하는데 "아이들은 어디 갔소?" 찬하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숙제하고 있습니다." 응접실에 일행이 들어가자 "후미짱 쇼짱! 아버지 돌아오셨어." 노리코는 울림이 좋은 음성을 높여서 말했다. 방문이 우당탕 요란스럽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딸 후미와 쇼지 가 달려나왔다. "돌아오셨어요? 아버지." 여학교에 갓 들어간 후미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쇼지는 "아빠!" 하며 찬하의 아랫도리를 감싸안고 턱을 쳐들어 내려다보는 찬하 얼굴을 올려다 본다. 그것은 아름다운 광경이 었다. "아저씨한테는 인사 안 하니?" 노리코는 아이들을 노려보는 시늉을 하며 나무란다. "앗... 참" 쇼지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저씨 안녕." 후미는 배시시 웃었다. 빨간 스웨터를 입어 그런지 부끄러워서 그랬는지 얼굴이 빨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저씨." 다소곳이 절을 하며 어른 같은 말투로 인사를 했다. 오가다는 안경 속의 속살을 좁히며 쇼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토끼처럼 좋아서 깡충깡충 뛰는 아이, 구김살이라 곤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아이도 아니었지만 오가다는 처음 보듯이, 찬하가 인실에게 말했듯이 샛별처 럼 영롱했다. 그리고 그 모습 속에는 마치 각인처럼 인실의 자취가 있었다. 오가다는 저도 모르게 한숨 짓는 다. 이 신비스런 조물주의 귀한 은혜를 도시 어떻게 해야 할지 오가다는 막연했다. 다만 막연했을 뿐이다. "자아, 자아 이제는 방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노리코 말에 쇼지는 "싫어 엄마." "숙제 해놓고 놀아야지." 병아리를 모는 어미닭처럼 두 팔을 벌리고 아이들을 몬다. "그만두시오." 찬하는 오가다르 힐끗 쳐다보며 우물쭈물 말했다. 후미느 순순히 제 방으로 돌아갔으나 쇼지는 노리코의 팔 밑에서 빠져나와 찬하의 겨드랑 밑에 몸을 숨긴다. 노리코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아빠 왜 이리 늦었어요?" "여기저기 좀 다니느라 늦었다." "아저씨는 어디서 만났어요?" "응 만주서." 하다가 "신경에서 만났지. 신경 계시다고 했잖아." "으음." 쇼파에 모두 앉았다. 쇼지는 찬하와 노리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아빠 왜 그리 늦었어요?" 쇼지는 아까 물었는데 또 물었다. "여기저기 다니느라 좀 늦었다." 찬하도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대답했다. 오이찌가 홍차를 내왔다. 쇼지는 소학교 사학년이었다. 그러나 일이 학년 아이같이 응석받이였다. 찬하가 돌아와서 그는 마냥 행복한 것 같았다. "도무지 철이 안 들어서요. 아직 애기예요. 어리광쟁이, 쇼짱?" "네." "오늘은 아버지가 돌아오셨으니까 이대로지만 다른 때, 손님 오셨을 땐 이러면 안 돼, 알았니?" 엄격하게 말했으나 노리코의 눈은 연신 웃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 아저씨도 손님일까?" "음, 그, 그야." "참 오래간만에 오셨잖아요, 그치요? 아빠." 찬하는 고개를 끄덕였고 오가다는 얼굴을 숙였다. "아저씨?" "으, 음." 오가다는 소스라치듯 대답했다. "수염이 막 길었네." 저도 모르게 오가다는 얼굴을 쓰다듬는다. "까, 깎을게." 얼굴이 빨개지며 허둥지둥 말했다. 그새 오가다는 면도를 하지 않았다. 노리코는 오가다를 아주 재미있어하며 까르르 웃었다. "거 보세요. 게으름피우니까 쇼지한테 당하잖아요." "아저씨 바빴어요?" "음 바빴어. 굉장히 바빴다." 찬하의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오가다는 내일 아침에 오겠노라 하며 작별하고 갔 다. "오가다한테 무슨 일 있어요?" 뉴스를 듣고 나서 라디오를 꺼버린 노리코가 물었다. "무슨 일?" 찬하는 아내를 외면한 채 말했다. "통 말이 없었잖아요. 어딘지 슬프게 보였어요." "피곤해서 그랬을 게요." "아직 결혼 안 했나요?" "안 했지." "왜 그러는 거예요? 이해할 수가 없어요." "맺어질 수 없는 사람을 잊지 못해서... 다 나름대로 사정은 있는 거요."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남자가 나이도 들었는데 그러고 있는 거 딱해요." "뭐 적당히 사귀는 여자야 없을라구? 목석 아닌 이상, 결혼하지 않아다 해서 인생을 포기한 사람은 아니니까 염려할 것 없어요. 그는 어느 누구보다 삶을 사랑하고 진실하게 살고 있소." 찬하의 부드러운 음성에는 오가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우정이 서려 있었다. "여보." "..." "저 어떤 땐 샘이 나요."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들 우정이 부러워서." 찬하는 픽 웃는다. "순수한 데 대한 동경이, 아직 당신에게 남아 있소?" "그럼요. 사람마다 다 그렇지 않을까요?" "순수, 하긴 그것은 고향 같으니까... 오가다하고 함께 있으면 센께모도마로 생각이 날 때가 있어." 센께모도마로는 귀족 출신이지만 민중파의 대표적 시인으로, 천진무구, 밝고 깨끗한 영혼과 인간에 대한 사랑 으로 시종 노래했으며 일본 시단의 독특한 존재다. "저도 센께의 [나는 보았다] 그 시집 읽은 적이 있어요. 원래 시인은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일본인에게 가끔 그런 사람이 있어요. 사실은 싫은 사람이 훨씬 많지만, 사악하고 잔인하며 턱없는 겁쟁이 소 심증, 어른이 되어도 골목대장같이 유치하고, 식민지에 나온 일인 중에 그런 유형이 많지. 그러나 오가다를 보 고 있으면 그런 악랄한 무리들도 다 용서하고 싶어지거든." "당신 마음속에도 원한이 있었군요." 노리코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나 친일파는 아니오. 당신은 내게 다만 여자였을 뿐, 그리고 내 아내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저 말이에요." 노리코는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전에 결혼 얘기가 있었던 오가다상 사촌 누이동생... 얼마 전에 남편이 전사했대요." "전사?" "참 안됐어요. 지에코상은 오가다상을 사랑했던 것 같은데." "전사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소." "정말 지긋지긋한 전쟁, 물자도 많이 귀해진 것 같아요. 앞으로 식량도 배급제가 된다든가요?" "당신 오늘 참 예뻐 뵈는군." 찬하는 화제를 돌렸다. "옷 땜에 그럴 거예요." "오늘 무슨 날이요?" "그런 건 아니지만." "안 입던 와후꾸를 다 입고" "앞으로 좀체 못 입을 것 같아서요." "어째서?" "전쟁이 심해지면, 농 속에 넣어두는 거 아깝잖아요." "..." "만주 돌아보시고 온 느낌이 어때요? 얘기 안 해주실래요?" "그쪽으로 피난 가고 싶소?" "이이가? 참, 거긴 전선인데 피난을 가요?" "만주가 어째서 전선이요? 전선은 중국 본토, 그것도 오지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질 않소. 왕도낙토, 만주는 일본인의 천국이지." "만소 국경은 모두들 걱정하고 있어요. 노먼한 사건도 있었고 소련이 언제 어떻게 나올지 모른대요." "그런 얘기는 누가 했소? 마리코상이 하던가요?" "신문을 유심히 보면 그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일 아니겠어요? 만소 국경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쯤. 마리 코 언니도 물론 말했지만, 그 언니 말로는 미국하고 전쟁하게 되지 않겠느냐, 정말 미국하고 전쟁하게 될까 요?" 보다 목소리를 낮추며 노리코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미국하고 전쟁하면 승산은 있다 하던가요?" "그거야 뭐 언니가 어찌 알겠어요?" 말끝을 흐렸다. "남편이 고관 아니오." "군부에서 다 하는데 일반 관직인 국장급이 뭘 알겠어요. 하지만," "..." "하지만 입밖에 내지 말라 하면서 언니가 얘기하더군요. 미국하고 전쟁하는 날에는 끝장이다. 형부가 그러더라 는 거예요." "불인에 일본군이 진주했는데, 불란서가 독일에 패한 틈을 타서, 말하자면 일본은 빈집을 턴 꼴이고, 한편 미 국에 칼을 뽑은 거나 다름없으니 미국이 가만 있지는 않을 거요." 하다가 "일독이 상국동맹이 있질 않소. 상부상조하겠지." 하는데 찬하는 노리코에게 자신이 타인이었다는 것을 인식한다. 국수주의자도 아니요 감상적 애국자도 아니요 일단은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노리코였는데 찬하는 습관적으로 그에게 진정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지 않고 살 아왔다. 미안하기도 했고 죄의식도 있었다. "우리는 잘 몰라 그렇지 아카가미가 많이 나온다는 거예요. 젊은 사람 있는 집에는 거의 나왔다나 봐요. 앞으 로 사십대도 마음놓고 있을 수 없다 그런 말들 해요." "돼가는 대로 살아야지 어쩌겠소? 걱정은 두었다 합시다. 대범한 사람이 이상하군. 조급증을 내는걸 보니." "전사했다는 소식이 여기 저기서 들려오니까 불안한 거지요. 정말 전쟁이구나 실감하게 되구, 아이들 생각도 하게 되네요." "피곤한데 이제 그만 잡시다." "목욕하고 주무셔야지요." "그러지." 목욕을 하고 찬하는 오래간만에 노리코를 안았다. 이튿날 아침, 일요일이었다. 오가다는 면도 자국이 파란 얼굴로, 말끔하게 차려입고 나타났다. "쇼짱, 아저씨하고 구경하러 가자. 날씨 참 좋지?" 아이를 보자마자 오가다는 말했다. "아빠도 함께 가요." 쇼지의 눈은 유난히 반짝였다. "아, 아니야. 아빠는 바뻐. 아저씨랑 함께 갔다 와." "엄마 가도 돼?" "그럼." "아저씨 저도 가고 싶어요. 함께 가도 되지요?" 후미가 말했다. 오가다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넌 안 돼." 굵은 목소리로 찬하가 막았다. "아버지 왜요?" "넌 심부름, 내가 시킬 것이 있어." "함께 가게 하세요. 시킬 일이 뭔데요?" "하여간 넌 남아." "저도 좀 놀다 오고 싶어요. 꽃이 만발해 있을 건데 시킬 일, 오하루나 오이찌가 하면 되잖아요?" "요 다음 일요일에 식구들 모두 가면 되잖겠어?" 찬하는 끝내 완강하게 후미가 가는 것을 막고 나섰다. "그래 아버지 시키는 대로 해. 쇼짱 옷 갈아입어야지." 쇼지도 누나가 함께 못 가는 일에 다소 불만인 것 같았다. 긴 양말을 신고 감색 반바지와 윗도리, 하얀 셔츠를 입고 그러고 모자를 쓰고 쇼지는 나왔다. "소공자님 다녀오세요." 노리코가 손을 흔들었다. 기분이 좋을 때 노리코는 쇼지를 곧잘 소공자라 불렀다. 오가다의 손을 꼭 작고 가다 가 아이는 팔짝팔짝 뛰기 시작했다. "쇼짱 좋은 날씨지?" "응." "기분 좋으냐?" "응 참 좋아. 아저씨." "응." "작년에 말이에요. 아빠랑 모두 요시노야마에 갔었어요. 아유! 온 산이 벚꽃, 굉장했어요." "그건 말이야 산에서 자생한 야마자쿠라고 특히 요시노야마 것은 요시노사쿠라라 하는거야." "지금도 그렇게 많이 피었을까?" "그럼, 하나미 계절이니까 쇼짱." "응." "아저씨 너 안아주고 싶어." "나 어린애 아닌데? 창피스러워." 오가다는 껄걸 웃는다. 웃는데 콧날이 시큰거리는 것이었다. "아저씨 돈 많아. 갖고 싶은 것 말해봐." "아빠가 야단쳐요." "아니다. 절대로 그러시지 않을 거야. 아저씨 장담할 수 있어." 말하면서도 오가다는 물질로밖에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목마름,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아저씨 그럼." "말해보아." "공원에 가서 말이예요. 비둘기들 모이 사줘요. 많이 많이 주고 싶어요." "그래 그러자꾸나." "아아 신난다!" 이들은 택시를 잡아 탔다. 그리고 히비야 공원 앞에서 내렸다. 오다가는 처음부터 히비야 공원에 올 생각이었 다. 인실이 이 아이를 뱄을 때 히비야 공원에서 찬하를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얘기를 찬하 는 자세하게 얘기해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가슴 저리는 얘기였다. 오가다는 아이의 손을 꼭 쥐었다. 축 복 받지 못한 생명을 안고 찬하에게 도움을 청했을 그때 그 모습을 오가다는 히비야 공원 어느 모퉁이에서 찾 기라도 할 듯 '아니다. 이 애는 축복받은 생명이다. 이렇게 무구하고 신비스럽게 자라주지 않았는가. 이 아이는 우리들 사랑 의 등불이야. 세상을 밝혀줄 것이다. 인실의 뜨거운 눈물과 나의 비원을 받아 태어난 아이, 이 영롱한 생명은 세상을 밝혀줄 것이다.' 오가다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빠 왜 울어." 오가다는 아이의 손을 놓고 한발 뒤로 물러섰다. "너, 쇼짱, 지금 뭐라 했지?" "아아, 아빠라는 말이, 습관이 돼서 그랬나 봐요. 아저씨 그런데 왜 울어요?" "아니야 감기가 들어서,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아서." 이들은 비둘기 모이를 샀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 앉아 모이를 뿌려준다. "많이 먹어 비둘기야. 많이 많이 먹고 저기 저 지붕 밑에 가서 쉬어라." 아이는 무아지경에 빠진 듯, 모이를 뿌려주고 또 뿌려주는 것이었다. 누가 보아도 행복하고 다정한 부자처럼. "아저씨." "응." "남자는 울면 안 된다 했지만요 며칠 전에 나 많이 울었어요." 쇼지는 연신 모이를 뿌려주면서 말을 했다. "왜 울었나." "얘기가 길어요." "말해보아." "도둑고양인데요. 추운 날 우리집 헛간에서 새끼를 낳았나 봐요. 내가 발견했을 대는 새끼들 눈도 뜨고 제법 컸어요. 헛간의 판자틈으로 들여다보면 보여요. 엄마는 들여다보지 말라고 막 야단 쳤지만, 들여다보는 것 알 면 어미고양이가 새끼를 물고 달아난다는 거예요. 달아나서 새 보금자리 찾으려면 어미 새끼가 다 고생을 한 대요." "그럴 거야." "하지만 난 엄마 몰래 밥이랑 생선을 근처에다 갖다놨어요. 판자틈으로 들여다보진 않았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니?" "그랬는데 새끼가 우는 거예요. 계속 울어요. 나가봤더니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서 울다가 날 보면 달아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미가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거였어요. 어찌나 그 우는 소리가 슬프던지 밤에는 잠도 잘 수 가 없었어요." "..." "아마 어미는 어디 가서 죽었나 봐요. 그렇지 않고서는 왜 돌아오지 않겠어요?" "그래 새끼는 어찌 되었지?" "밥도 갖다주고 맛있는 생선도 갖다주었는데 그래도 울어요." 하는데 쇼지의 눈에는 굵은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며칠을 울었는데, 그만 새끼들이 없어져 버렸어요. 어미 찾아 나갔다가 어디서 죽었을까요?" "아니다. 어미가 와서 데리고 갔을 거야."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랬을 거다. 틀림없이. 자아 울지 말고." 오가다는 손수건을 꺼내어 아이 얼굴의 눈물을 닦아준다. "남자도 슬플 때는 우는 거야. 그건 수치 아니다." 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쇼짱은 나중에 뭐가 되고 싶지?" "산지기가 되고 싶어요." "산지기?" "네. 아빠는 산지기가 되고 싶다 했더니 막 웃었어요. 엄마는 야단을 치고요." "어째 산지기가 되고 싶지?" "산에 사는 동물들 도와주려고요. 돈 많이 벌어서 배고프지 않게 모이도 나눠주고요." "뱀도 도와줄래?" "싫어! 그건 싫어요. 개구리 잡아먹는 걸 봤는데 징그러워." 쇼지는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쇼지는 동물을 좋아하는 구나." "불쌍해서요. 겨울에 참새들이 울타리에 앉아서 우는 걸 보면 너무 너무 불쌍해요. 철새들도 먼 남쪽 나라까지 가려면 날개가 찢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눈물이 나요." "그래 그렇지. 이 세상에 불쌍한 것이 제일 가슴 아프단다. 추운 것, 배고픈 것, 어미 잃은 것, 자아 우리 모이 또 사오자." "네 그래요!" 쇼지는 지칠 줄 모르게 모이를 뿌리는 것이었다. '자비스런 아이다.' 산지기가 되겠다 했을 때 찬하의 웃는 모습이 오가다 눈앞에 떠올랐다. 그가 어째서 아이에게 깊은 집착을 가 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샛별같이 영롱하다는 표현도. 이들은 한 시가 다 되었을 때 일어섰다. 배고프다는 말을 둘이 동시에 하고는 웃었다. "가자. 가서 비어버린 배부터 채우고 다음 계획을 세우기로 하자." "네!" 둘은 식당을 찾아들었다. 오야꼬돈부리를 시켰다. 식당은 아주 작았지만 돈부리 맛은 아주 좋았다. 맛있게 음 식을 먹는 쇼지를 바라보며 또 바라보며 오가다도 그릇을 비웠고 쇼지가 조금 남긴 것도 제 그릇에 덜어서 다 먹는다. "아아 배 부르다. 아저씨." "응." "오늘 참 재미있었어요. 아저씬 언제 가지요?" "곧 가야 해." "언제 또 오세요?" "명년 이맘 때." "그럼 그때도 우리 비둘기 모이 주어요." "그러자. 한데 오늘 히비야 공원엔 처음 왔어?" "아니오. 몇 번 아빠하고." "아빠하고만?" "네. 아빠하고 외출할 땐 히비야 공원에 왔어요." "그래..." 오가다는 잠시 식탁을 내려다본다. '좋은 사람이다. 따뜻하고...' 쇼지를 데리고 히비야 공원을 찾았다는 조찬하 "참 고마운 아버지다." [5부 2권으로 이어집니다.] 어휘 풀이 *괄호 속의 숫자는 본문 속의 면수와 행수를 가리킴. 우다아쌌는데(13 : 1): [방언] 위하여 받들다. 시장스럽다(13 : 3): [방언] 서글프다. 시들하다. 살강(13 : 5): 그릇 따위를 얹어놓기 위해 부엌 벽에 드린 선반. 샛집(13 : 11): [방언] 셋집. 성시(13 : 13): [방언] 형편. 비단가리(13 : 17): [방언] 하찮은 살림도구. 매갈잇간(16 : 25): 매갈이(벼를 갈아 현미로 만드는 일)하는 곳. 마우제(22 : 18): '러시아 사람'을 얕잡던 말. 가이방(33 : 8): [방언] 맞세울 만큼 거의 비슷함. 생이틀(33 : 21): [방언] 상여. 입식(39 : 14): 개척민을 들여보내는 것. 보비위(41 : 10): 남의 비위를 잘 맞추어줌. 아이구찌(58 : 7): 단도. 공투세(97 : 14): [방언] 공치사. 심간(108 : 6): 깊은 마음속. 지랄발광 네굽질(120 : 28): 미친 듯이 몹시 지랄함을 이르는 말. 사장(128 : 14): 사돈어른. 이헤미(130 : 23): 논개 영가(138 : 5): 영혼. 벅수(142 : 20): 장승. 바보. 애딸(143 : 4): [방언] 어미와 딸. 대나깨나(151 : 4): [방언] 도나캐나. 윷의 도나 개. 덮어 놓고. 나베어(151 : 6): [방언] 되뇌임. 징(152 : 19): [방언] 증. 화증. 신양(161 : 5): 신병. 꼬지는 타고 고기는 설다(165 : 17):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 앵구(174 : 27): [방언] 고양이. 낭개도(175 : 4): [방언] 나무에도. 쥐락펴락(175 : 9): 권력을 마음대로 부리거나 휘두르는 꼴. 양도(190 : 12): 일정한 기간 동안 먹고 살아갈 양식. 소분지애씨(193 : 6): [방언] 비하여 유도 아니다. 약과다. 개발(196 : 29): [방언] 갯벌에서 조개 파는 일. 오세바세(198 : 4): [방언] 자상함. 지쪼대로(198 : 7): [방언] 제멋대로. 삐대니(198 : 13): [방언] 머물다. 맞재비(199 : 16): [방언] 버금가는 상대. 덕석(202 : 11): [방언] 멍석. 가리단죽(213 : 18): [방언] 중간에서 가로챔. 대구릿배(213 : 25): 정치망 어선. 잊임이 헐해서(240 : 3): [방언] 잘 잊어버림. 건망정. 끈을 붙여주면(246 : 28): '결혼'의 뜻. 씻갓아(265 : 1): [방언] 부수다. 논(271 : 8): [방언] 설움. 인공(278 : 29): [방언] 은공. 근가죽(281 : 11): [방언] 근처. 무참괴승(291 : 7): 파계승. 푸새(301 : 28): 풀 논다니(352 : 25): 갈보. 족대기는데(356 : 23): 남을 견디기 어렵도록 볶아치다. 제옵든지(365 : 2): [방언] 지겹다. 뽀우로(365 : 7): [방언] 빻으러. 정게거네(397 : 28): [방언] 오금박다. 외고 펴고(405 : 9): [방언] 내놓고 공개적으로. 잡답(418 : 8): 북적북적하고 복잡한 상태. 볼가심(469 : 22): 적은 음식으로 시장이나 면하는 일. 박경리 1926년 경남 충무 출생. 진주 여고 졸업. 1955년 단편[계산]이 <현대문학>에 초회 추천. 이듬해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 완료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 시작. 1957년 [불신시대]로 제3회 <현대문학> 신인문학상 수상. 1959년 장편 [표류도]를 <현대문학>에 연재. 전작 장편 [김약국의 딸들](1962), [시장과 전장](1964) 간행. 1969년 [토지] 1부를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 1990년 제4회 인촌상 수상. 1994년 집필 26년 만인 8월 15일 민족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 [토지]를 모두 5부로 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