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5부2권(14) 차례 제2편 운명적인 것 4장 명정리 동백 5장 황량한 옛터 제3편 바닥 모를 늪 속으로 1장 소식 2장 산행 3장 모화일가 4장 적과 흑 5장 사랑의 피안 부록 어휘풀이 제 2 편 운명적인 것 4장 명정리 동백 희뿌연 안개 속에 몽유병자같이 도시의 움직임은 나타나고 있었다. 새벽이 아침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차에서 영광이 내렸다. 가벼워 뵈는 여행 가방을 들고 헐렁하고 얇은 회색 잠바 차림이다. 땡땡 종을 치며 우둔한 몸짓으로 떠나는 전차를 잠시 동안 영광은 바라보다가 역 광장으로 들어선다. 땡땡 치는 전차 종소리 가 경쾌하게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으나 눈에 뵈는 모든 물체는 침묵과 안개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보따 리를 이고, 짐짝 가방을 들고, 아이 손목을 잡고, 여자 남자, 젊은이 늙은이 형형색색의 사람들은 광장을 질러 서 역 대합실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남대문 쪽에서 용산 쪽에서 나타난 전차는 사람들을 토해놓고 가곤 했다. 군용 트럭이 질주하고 화물차가 달리고 가끔은 우마차도 지나간다. 사통오달의 광장에 서서 여행 가방을 팔에 낀 영광은 담배를 뽑아물고 두 손으로 바람을 막으며 담뱃불을 붙인다. 언제나 그랬지만 가슴은 설레었다. 어디든 떠난다는 것은 새로움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다른 하나의 자신이 마치 번데기에서 빠져 나온 것처럼, 폐쇄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문을 열고 나서는, 그것은 신선한 해방감이다. 그러나 새로움이란 낯 설음이며 여행은 빈 들판에 홀로 남은 겨울새같이 외로운 것, 어쩌면 새로움은 또 하나의 자기 폐쇄를 의미하 는 것인지 모른다. 마주치는 사물과 자신은 전혀 무관한 타인으로서 철저한 또 하나의 소외는 아닐는지. "역마살이라..."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오늘의 출발은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영광은 뚜벅뚜벅 광장을 질러서 이등 대합실로 들어간다. 황황히 켜진 불빛 아래 그곳은 아직 밤이었다. 매표 구에 돈을 밀어넣고 부산행 차표 한 장을 끊은 영광이 돌아서는데 눈에 익은 여자의 뒷모습이 부딪쳐왔다. 벽 면에 붙여 놓여져 있는 의자에는 드문드문 가방이 있었고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과 마주본 자세로, 두 팔을 모아 여행 가방을 든 여자는 시간과 운임 등이 기재된 현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감색 투피스를 입고 날씬한 몸매, 하얀 블라우스의 칼러가 수수한 양복을 선명하게 했으며 풍성한 머리는 갈색 리본으로 묶어져 있었다. 영광은 가만히 응시한다.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개찰구 쪽을 바라보는데 오똑한 콧날의 옆모습 은 양현이었다. 순간 영광의 얼굴에 상처받은 짐승 같은 표정이 지나갔다. 그는 발길을 돌려 대합실에서 나왔 다. 이층에 있는 구내식당으로 들어간 영광은 창가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리고 다가온 웨이터에게 막 커피를 시키려 하는데 "영광오빠." 미소를 지으며 양현이 와서 불렀다. "어, 웬일이야?" 어색하게 말했다. "대합실에서 오빠, 식당으로 올라가는 거 봤어요." 영광이 자기를 보고 있었던 것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앉어." 양현은 여행 가방을 놓고 맞은편 자리는 앉았다. 엉거주춤 서 있는 웨이터에게 "커피 두 개." 양현의 의사와 관계없이 영광이 말했다. "어디 가세요?" "통영." "거긴 왜요?" "좀 볼일이 있어서, 너는 진주 가는 거냐?" "네. 어머니가 좀 편찮으셔서." "많이 편찮으신가?" "아니오. 그렇지는 않아요. 어머니가 보고 싶기도 하구, 토요일이니까 하루만 학교 빠지고 떠나는 거예요." 떠난다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렸다. 양현은 다소 수척해 보였다. 왠지 곡절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작년 여름, 섬진강 강가에서 서로 뜻하지 않게 은밀한 장면을 보게 된 것이 이들의 첫 대면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영광은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열흘간 묵었다. 이젤이며 캔버스, 화구가 든 박스 등, 그런 것들을 들고 어깨에 메고 지리산 일대를 헤매다가 그림을 그리곤 하는 환국을 따라 영광도 헤매 다녔으며 두 사람은 꾸밈 없는 자연 속에서 참 많은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들고 나고 하는 동안 양현은 영광과 얼마간 가까워 질 수 있었지만 서먹해하는 서로의 감정이 아주 가셔졌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윤국의 태도에도 문제는 있 었다. 윤국은 세 사람에 앞서 서울로 갔지만 며칠을 함께 있는 동안 굉장히 우울해 있었고 건드리기만 하면 부서질 것같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환국은 윤국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을 직감했다. 단순히 영광이 못 마땅하여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윤국도 자제하려고 무척 애를 쓰는 것 같았다. 환국은 그림을 그리려 달 아났고 윤국은 강가 낚시터로 달아났다. 어쨋든 먼저 윤국이 서울로 떠나 아슬아슬한 고비는 넘긴 셈이다. 세 사람은 윤국이 왜 그러는지 모두 알지 못했다. 그리고 윤국은 겨울방학 때 동경서 돌아오지 않았다. 양현이 영광을 오빠라 부르게 된 것은 친밀감을 나타내기보다 거북했기 때문이다. 큰오빠의 친구였고 양현이 자신과는 예닐곱의 나이 차이가 있어서 영광씨 하며 부를 수 없었고 선생이라 하기에는 명목이 없었다. 해서 영광오빠. 모두 서울로 돌아온 후 가을부터는 길상과 서희는 주로 시골에 내려가 있었고 젊은 내외, 양현이 있 는 혜화동집을 영광은 가끔 들르곤 했다. 영광에게 혜화동거리, 혜화동이라는 이름조차, 그것은 마음의 응어리 였다. 그 길모퉁이에서 강혜숙은 사라졌고 그것도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는 것은 영광에게 크나큰 짐 을 내려놓은 듯 일종의 평화스러움이었다. 그는 혜화동 환국에게 가는 것이 금기로 돼 있던 마음의 주문을 풀 었다. 해서 환국을 찾아가는 것이었지만 의식 밑바닥에 있는 양현에 대한 감정도 결코 부인하지 못한다. 함에 도 영광은 양현에게 무뚝뚝했고 때론 의도적으로 양현을 회피하는 경향도 있었다. 양현은 또 무슨 까닭인지 서울 온 후로는 영광에게 친밀감을 나타내었고 그가 오면 늘 반갑게 맞이했다. 이들은 서로 말없이 커피를 마신다. 이따금 증기를 뿜으며 지나가는 기관차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아침은 먹고 나왔어?" "아니오, 오빠는요." "안 먹었어. 나는 생각이 없지만 샌드위치라도 시켜줄까?" "나중에, 식당차에서 점심이나 먹지요 뭐." 한참 지난 후 영광은 시계를 보았다. "거의 다 된 것 같군. 나가지." "네." 두 사람은 일어섰다. 이등대합실로 돌아왔을 때 개찰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플랫폼으로 나왔다. 어깨띠를 맨 여러 명의 병사들이, 서울 방면에서 환송나온 친지들인 듯 그들과 막 작별을 하고 기적이 울려대는 군용차 에 급히 오르고 차창마다 덮개를 씌운 기차는 긴 꼬리를 흔들듯하며 떠나는 것이었다. 떠나는 기차를 바라보 며 남은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다가 힘없이 일장기를 흔드는 것이었다. "많이들 가지요?" 양현이 속삭이듯 말했다. "많이 가는군." 군용차는 떠나고 환송하러 나왔던 사람들도 흩어지고 드문드문 승객들만 서 있는 플랫폼에는 삼엄한 바람이 지나간 것 같았다. "일본서 실어낸 군인들이겠지요?" "소집장 받아 나온 신병들인 모양이야." 삼등실 승객들도 이미 개찰이 시작된 것 같았다. 왈칵 사람들이 밀려들어왔다. 순식간에 플랫폼에는 사람들이 가득 찼고 마치 꿈속에서처럼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광과 양현은 기차에 올랐다. 이등차 칸은 바깥 분위기와 달리 한가했다. 전쟁, 군용차, 나부끼는 일장기, 만 세 소리 그런 것과도 상관이 없는 듯 모두 느긋해 있었다. 영광은 양현의 가방을 짐칸 위에 올려놓고 자신의 가방도 올려버린 뒤 자리에 앉았다. 마주보고 앉은 이들 젊은 남녀는 용모 차림새 분위기에서도 두드러져 보 였고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할 수 없었으며 여생의 동반자로 남들이 생각하지 십상이었다. 양현은 무심했으나 영광은 다소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기차는 용산을 지나고 한강 철교를 지나고 영등포를 뒤로 하면서 벌판 을 달리고 있었다. 마을에는 개나리가 만발해 있었고 산 옆을 지나갈 때는 진달래가 노을처럼 구름처럼 붉게 피어 있었다. 마음도 몸도 척박한 땅에 봄은 저 혼자 호사스러운 것만 같았다. 영광이 입을 뗀 것은 수원을 지난 뒤였다. "언제 졸업이지?" "2년이나 남았어요." "졸업 기다리려면 혼기 놓치겠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양현은 양미간을 모았다. 약간 노한 것 같기도 했다. "여의사면 더욱 어려워질 거야. 양현이를 능가할 만한 남자도 쉽지는 않을 거구." 영광은 심술이라도 부리듯. "그런 얘긴 그만두세요. 결혼 같은 것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어째서?" "그냥요." "독신주의자야?" "영광오빠는 그럼, 독신주의자예요?" "역습이군." 영광은 껄껄 웃었다. 유쾌할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얘기는 끊어지고 영광은 시트에 머리를 얹으며 눈을 감는 다. 양현은 차창 밖을 내다본다. 끝없이 지나가는 들판과 마을, 언덕과 강물, 머물지 않고 풍경은 지나가며 다 가온다. 양현은 자신이 터잡고 살 곳이 어디메쯤인지, 갑자기 눈앞에 캄캄해지는 것을 느낀다. 올케 덕희의 차 디찬 눈동자가 떠오른다. 짐을 챙겨서 가출하는 계집아이같이 나온 새벽이 어떤 상흔처럼 가슴을 뜨겁게 한다. 후회이기도 했다. "아버님 어머님, 집안 식구들이 모두 아가씨를 싸고 돌고, 유리그릇처럼 깨질까 봐서 겁들을 내시는데 도대체 왜들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그게 아가씨를 위하는 일일까요?" 어제 저녁, 교직원들의 모임이 있어 환국이 늦게 들어간다는 전갈을 받고 시누이와 올케 두 사람이 저녁상을 받았을 때 덕희가 꺼낸 말이었다. "어차피 아가씨는 출가할 몸이고, 욕심을 부린다는 것은 한이 없는 일 아니겠어요? 그러나 나무꾼 딸이 왕비 될 것을 꿈꾼다고 왕비가 되는 건 아니지요. 세워란 허송할 뿐, 나는 어머님께서 그 혼인 거절하실 일이 아니 라고 생각해요. 모두들 그 일에 대해서 쉬쉬하지만 그런 일이란 밖에서 더 말이 많은 것 아니겠어요? 신랑감 이 수재인데다가 인물도 준수하다 하더구먼요. 과람했음 했지 모자라는 상대는 아니라는 거예요. 설사 어머님 이 낳으신 친딸이라해도 결코 빠지는 상대는 아니다, 그런 말들이에요. 어머님은 무슨 생각을 하시고 그러시는 걸까요?" "..." "이런 말 한다고 고깝게 생각지는 마세요. 나 한 사람만이라도 이집에서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하지 않겠어요? 언제까지 아가씨는 환상에 빠져 있을 건가요." "나, 환상에 빠져 있는 거 아, 아니에요. 새언니, 내가 누구라는 것 잘 알고 있어요." "그럴까요? 내 보기에는 그럴지도 않은 것 같은데요?" 덕희는 비웃었다. "결코 백마 탄 왕자님이 와서 아가씰 데려가지는 않을 거예요. 자기 자신이 먼저 자각을 해야지, 이 집 울타리 를 뛰어넘어서 자기 갈 길을 가야 해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혜택은 지나친 거였어요. 오히려 역효과 일 수도 있지요. 끝까지 그럴 수 있겠어요? 세상일이 뜻한 대로 되는 것도 아니구요." "알아요." "알면 뭐해요? 실행이 없는데. 이양현이는 이 집의 꽃이지 않아요?" 냉정하게 덕희는 이름을 불렀다. "어머님도 참 딱하셔. 평생 곁에 둘 생각이신지, 왜 그리 집착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친딸이라도 그렇게는 못하 실 거예요. 말이 나온 김에 솔직히 털어놓자면 사실 난 기분 나빠요. 도대체 난 이 집의 뭐지요? 주객이 전도 된 것 아닌가요?" 양현에 대한 증오감을 덕희는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 동안 완곡하게 표현해왔던 감정을 노골적으로 쏟아놓았 다. "제가 어떻게 했음 좋겠어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저도 고통스러워요. 새언니 말 듣고 새언니 원하는 대로 한다면 그 화살이 어디로 가겠어요? 늘 거기서 저도 저의 감정을 달랠밖에 없어요." 그 말에는 덕희도 할말을 잊는다. "나 일하는 사람들 방에 있을 수도 있고 내가 타고난 신분대로 얼마든지 처신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이 집안의 화목은 깨어질 겁니다. 새언니만큼 저도 혜택받는 것 괴로워요. 전엔 철없이 당연한 걸로 알았지만... 그러고 저는 어머니 아버지 오빨 사랑해요. 내가 그분들을 위해 희생할 것이 없는 것이," 양현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않았다. "누가 그러라 했어요? 이건 악연이야!" 덕희는 신경질을 부렸다. 결코 악랄한 여자도 아니었고 교활한 여자도 아니었지만 덕희로서는 어쩔 수 없이 소외감에 빠져서, 양현의 잘못이 아닌 것도 알면서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이 그를 신경질적으로 몰고갔던 것이다. 결국 그가 바라는 것은 양현이 결혼하여 이 집을 떠나는 일이었다.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양현은 마음속으로 후회하며 중얼거렸다. 만일 이 순간 기차가 멎는다면 내려서 되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언니, 어머니가 좀 편찮으시다 해서 토요일만 까먹고 내려갔다 오겠어요. 내일 돌아오겠습니다." 쪽지를 남겨놓고 오긴 했으나 필시 덕희는 오해를 할 것이다. '어머니한테 하소연이라도 하러 간 줄 알면 어떡허지? 새언닌 그러잖아도 후회할 건데.' 새벽에 잠이 깨었을 때 양현은 불현듯 어머니가 보고 싶었고, 한편으론 어디 먼 곳으로 달아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집을 나섰는데 경솔했던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치밀었다. '결혼을 하고 집을 떠나면 그게 젤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그러나 양현은 결혼이라는 것이 너무나 막연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의사가 된다는 목표가 너무 뚜렷했기 때문 인지 모른다. 이성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양현은 창가에서 얼굴을 돌렸다. 영광은 잠이 든 것 같았다.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보기 좋 게 퍼진 눈썹에서 그늘진 것 같은 눈시울은 소년같이 깨끗했다. 엷은 상처가 있는 관골에서부터 깊은 고뇌를 나타내고 있었다. 거칠고 냉소적이며 때론 삭막해 뵈는 평소의 영광과는 다르게 잠든 모습은 귀스럽고 정갈했으며 잘생긴 남자 라기보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여성적인 그런 모습이었다. 한동안 넋을 잃고 쳐다보던 양현은 제풀에 놀라서 시선을 거두었다. 남자의 잠든 모습을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었던 자신의 행동이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까닭없이 속이 상했다. 고아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혼자 내팽개쳐져 있는 것만 같았고 영광이 자신을 소홀하게 대하는 것 아닐까 싶어 섭섭하기도 했다. '이 사람이 누구이길래?' 좁은 계곡 같은 곳을 기차는 달리고 있었다. '오빠들하고는 다르다. 아주 다르다. 자기 내부를 밀폐해놓고 어느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 냉담하고 오만하고 세상을 얕잡아 보는 눈빛, 폭발적으로 포악해질 수 있는 사람같기도 하고 우리 오빠 들처럼 자상한 곳이라곤 없어, 없다. 하지만 외로운 섬 같기도 해. 절망하고 지쳐버린 나그네 같기도 하고 곧 죽어버릴 사람 같기도 하고... 너무 섬세해서 사라지는 무지개같기도 하고.' 감상적인 상념이 간단없이 지나가는데, 폭발적으로 포악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선입견이었다. 얼굴에 남은 엷은 흠집과 다리를 절게 된 내력을 알기 때문이다. 평사리에서는 환국의 친구라는 것 이외 양현은 영광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다. 경음악을 한다는 정도였다. 환국이나 윤국은 그에 관하여 별반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또 그럴 만한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진주로 돌아온 뒤 장연학과 환국이 주고받는 말에서 처음으로 그가 송관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평사리에서도 부친의 상 어쩌고 하는 말을 듣긴 들었으나 죽은 그의 부친이 송관수라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다. 송관수라면 양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람이다. 키는 컸고 몸은 깡말랐으며 얼굴이 까맣고 눈이 작은, 그리고 몹시 드세 보였 던 사람이었다. 어느 봄날인 것 같았다. 울타리 옆에서 양현이 혼자 개나리 꽃잎을 주우며 놀고 있었을 때 석 이와 함께 온 송관수는 측은해하는 눈빛으로 양현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주었다. "봉순이를 빼다박았네. 안 그렇나? 석아." 하고 송관수는 말했다. "이런 흔적이라도 하나 남겨두고 갔으니, 박복한 계집." 그때 석이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양현에게는 석이아저씨, 그에 대한 기억은 훨씬 더 뚜렷이 남아 있다. 그 립고 다정한 기억이다. 어디였는지 알 수 없지만 엄마랑 함께 석이아저씨를 따라 평사리에 온 것이 그에 대한 기억의 첫 장이었다. 그 후에도 엄마가 없어지면 석아아저씨는 늘 어디선가에서 엄마를 찾아 데리고 오곤 했 다. 엄마가 죽었을 때 석이아저씨는 양현을 안고 강가에 나가서 흐느껴 울었다. 요즈막에 와서 양현은 석이아 저씨가 엄마를 사랑했고 그 때문에 성환엄마와 헤어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릴 적에는 무심히 보아온 주변 이었다. 석이의 아들 성환이 진주에 와서 집안 심부름을 하며 중학교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양현은 기억을 되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평사리에 가게 되면 성환할매를 찾는 일도 더러 있었다. 언제였는지, 겨울방학 때였 는지 동석했던 야무어매가 조심성없게 한 말이 빌미가 되어 엄마와 석이아저씨의 지난날을 알게 되었지만 얽 히고 설킨 인연들. 송관수, 그는 백정이라 했다. 아니 백정네집에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백정이라 했다. 독립운 동인가 해서 쫓겨다닌다고도 했다. 누군가 어른들이 한 말을 들은 것이겠지만, 양현은 어릴 적의 기억을 잊으 려 했지만 한편 그리워하고 있었다. 혜화동에 영광이 올 때마다 양현이 친절하게 오빠라는 호칭만큼 다정하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날의 기억 때문인지 모른다. 그 기억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 은 아픔이었다. '영광오빠하고 내 운명은 비슷하다. 영광오빠가 결혼 안하는 것도, 내가 결혼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도, 우린 같은 슬픔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 운명에 따라다니는 그 출생이라는 괴물, 그것 때문일 거야. 내 마음 바닥에 항상 그것이 있듯이 오빠 마음속에도 늘 그것이 있었을 거야.' 양현은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것만 같은 산비탈의 초가가 차창 밖에 지나가는 것을 보며 흥분하기 시작한다. '새언니의 말이 맞어. 지나친 혜택은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말, 엄마가 살던 세상을 내가 살고 관수아저씨가 살던 세상을 영광오빠가 살았다면 우리는 이같은 뼈저린 소외는 느끼지 않고 살았을거야. 끼리끼리 어우러져 서 살았을 거야. 언니 말이 맞어. 신이 주신 지나친 혜택도... 그래 맞어. 그것을 갚아야 하고 되돌려주어야 하 는 부분이 있을 거야.' 집을 지었다가는 허물고 또 집을 지었다가는 허물어버리듯이 양현은 끝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망망대 해를 표류하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기도 했고 환상과 현실의 혼돈 속에 빠져들기도 했다. 차갑게 칼 끝으로 그어대는 것만 같았던 어젯밤 덕희의 말은 무엇이며 지금 기차 속에 마주앉은 영광의 존재는 무엇인 가. 길상과 서희, 환국과 윤국이 둘러서 있는 속의 자신은 무엇이며 봉순이 석이 송관수 영광이 둘러선 속의 자신은 누구인가. "양현아." 부르는 소리에 양현은 매달리다시피했던 차창에서 몸을 떼었다. "늦었네. 배 안 고파?" 영광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점심 먹으러 가자." 하며 일어섰다. 양현도 일어섰다. 식당은 손님들이 거의 빠져나간 듯 빈자리가 많았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 는다. 객차보다 식당차는 유리창문이 커서 그런지 전망이 좋았다. "오빠." "..." "정말 잤어요?" "응, 자다가 깨다가." "송장같이 꼼짝 안하데요." "잠이란 저승길이지." "네?" "꿈길이 어디 현실이냐? 사람들은 매일 죽었다 깨어나는 거야." "죽었다 깨어난다구요..." "점심이나 먹어." 두 사람은 날라다놓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오빠, 날 낳아준 엄마에 관해서 알아요?" 느닷없는 말에 영광은 밥을 먹다 말고 양현은 쳐다본다. "내가 어떻게 알어." "그럼 오빠는 어머니 친딸로 알고 있었어요?" "사정은 잘 모르지만 나중에, 아니라는 걸 알긴 알았는데, 왜 그런 말을 하지?" "오빠 아버지랑 우리 엄마가 한 동네서 자란 것도 그럼, 모르겠네요." "그런 걸 알아 뭘 해." "거짓말 알아요." "아아?" "늘 우릴 따라다니는데, 그런 거짓말 말아요." "..." "나를 낳아준 엄마는 유모 딸이었고 나중에 기생이 되었고 나는 하동의 이부사댁 이상현이라는 분을 아버지로 하고 태어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어떻다는 거야." "거짓말 말아요. 오빤 자기 출생에 대하여 완벽하게 초월했나요?" "그래서 천한 출신끼리 당을 만들자는 겐가?" 영광은 쓰게 웃었다. "천하다 했어요?" "..." "잊었고 초월한 사람 입에서 담박 나오는 말이 천한 출신인가요?" "나 초월했다고는 하지 않았어. 그런 걸 알아 뭘 하겠느냐 했을뿐." "나도 당 같은 것 만들자 하진 않았어요. 난 현실을 사랑하니까요. 어머니 아버지 오빠들 뼈에 사무치게 사랑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들의 근본이 말소되는 거는 아니지 않아요?" "그래 어쩌자는 거야." 영광은 짜증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연민 때문이지요." "누구에게?" "오빠랑 저에게." "너 참 엉뚱한 데가 있구나. 네가 나한테 연민을 느껴?" "네. 오빠 아버지에게 우리 엄마에게도요." "그래서 강물에 꽃을 던지고 울었나?" 놀려대듯 하다가 "그런 것 다 허송 세월이다." "어젯밤, 새언니도 허송 세월이라는 말을 했어요. 여기서 오빠한테 그 말을 또 들으니까 참 이상하네요." 영광은 비로소 양현에게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고 짐작을 한다. 사실 양현은 평소 때와는 영 다른 모습이었다. 온갖 축복을 한몸에 받은 듯 싱그럽고 아름답고 밝았던 양현에게서 영광은 처음으로 짙은 그늘을 본다. 그러 나 영광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양현도 다소 마음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시면서 "통영에는 뭣하러 가세요?" "어머니 부탁이야." "...?" "누이가 거기 있고, 또," 하다가 영광은 픽 웃었다. "양현이 연민을 느낄 그런 부류의 사람인데." "비꼬시는 거예요?" "비꼬는 게 아니고, 아무튼 뭐가 잘못되어 만주서 잡혀왔는데." "독립운동하는 사람인가요?" 영광은 고개를 저었다. "죄목은 밀수에 관한 것이라 하더구먼. 나는 내용을 잘 몰라. 어머니가 계속 편지를 보내오고 화를 내시는 바 람에." 평소 볼 수 없었던 표정이 영광의 얼굴에 떠올랐다. 어머니 앞에서 꾸중듣는, 흔히 보는 아들이 모습, 약간은 어리광스럽고 다소 멋쩍어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홍이부부가 신경서 압송돼 온 후, 수월찮이 시일은 지나갔다. 초정월에 왔으니까 4개월째로 접어든 셈이다. 영 선네가 그 소식을 알게 된 것은 신경에 남겨놓고 온 영구의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며 평사리에 와 있는 장연학 도 산에 찾아와 소식을 전해주고 돌아갔던 것이다. 영선네는 즉시 통영으로 갔고 관가 일이라면 도통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위 휘와 영선을 닦달하듯, 일이 어찌 되어가는지 알기 위해 내몰았던 것이다. 영선네로서는 난 생 처음으로 말하자면 표면에 나선 것이다. 홍이 처가에도 수소문해서 찾아갔으며 그곳에서 아이들을 만나 영 선네는 몹시 울었다. 자연 그러자니 영호도 알게 되었는데 영호가 어디 홍이와 범연한 사이던가, 순수하고 열 정적이던 시절 관수며 석이 홍이는 아저씨 같았고 형 같았으며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다. 학생 운 동의 선봉에 서서 농업학교를 퇴학당한 것도 그들을 우러러 보았기 때문이다. 영호는 홍이를 위하여 진심에서 동분서주했다. 담당 형사를 찾아다니며 만났고 돈도 적잖이 썼으며 영선네랑 함께 면회도 했다. 유치장에 사식 도 넣었다. 그리고 평사리의 한복은 일부러 통영을 다녀가기도 했다. 처음 영선네는 영광에게 사건의 경위와 한번 다녀가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다음에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사람의 도리가 그렇지 않으니 만사 제쳐놓고 와보아야 한다는 애원조의 편지를 보냈다. 세 번째, 그 서투른 언 해로 끄적인 편지는 분노에 찬 것이었다. 니는 니 아부지가 세상 버맀일 짓에 상의아배가 우리한테 우떻기 했는지 벌써 잊었나. 우리가 떠나온 뒤에도 뒷갈미 다 한사램이 누고? 영구를 책임지고 있던 사램이 누고? 그 사람이 우린 친척이가? 핏줄이라도 된단 말가? 피도 살도 안 닿은 그 사람이 우리한테 한 일을 생각하믄 이럴 수가 없다. 남 먼저 달리와야 하는 것이 니 도리 아니가. 일자 소식도 없는 니는 사람이 아니다. 짐승도 은공은 안다 카는데, 정 질기 그런다 카믄 나 는 내 자식 아니거니, 생각하고 제면할 기니께, 그리 알아라. 공연도 있었지만 심리적으로 어찌 그리 쉽게 내려와지지 않았는지, 어머니의 편지 구절을 떠올리며 영광은 사 람의 도리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세 번째 분노에 찬 어머니늬 편지는 기분에 과히 나쁘지 않았다. 레일을 구르는 기차바퀴 소리, 차창에서 풍경은 날아가고, 조용했다. 식당칸은 손님들이 거의 떠나고 텅 비어 있었다. "나 학교 그만두고 싶어요." 양현의 목소리였다. "뭐라구?" "학교 그만두고 싶어요." "그럼 뭘 하게? 결혼할 건가?" 영광은 자학하듯 말했다. "내려앉는 거지요." "어디로?" "본래 있었던 자리로요." 영광은 양현의 눈동자를 말없이 쳐다본다. 한참 동안이나 쳐다본다. 양현은 양현대로 그 말을 해놓고 서희 모 습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어머니 나 이런 생각하고 있는 거 모르시지요? 아신다면 뭐라 하시겠어요? 남이라 그런다고 한탄하실 거예 요. 어머니하고 나하고 남이라는 것, 참 처참하네요. 어머니 품은 너무나 포근하고 따뜻하지만, 그리고 또 난 너무나 어머니는 사랑하지만 남이라는 것이 왜 이렇게도 걸거적거리는 걸까요.' "그런 생각 하지 말어." 영광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학교 그만둔다는 생각은 하지 말어. 언필칭 천한 출생, 그 출생이 천하지 않게 살아가려면 직업이라는 지릿대 가 있어야 해." "그걸 누가 모르나요? 하지만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는 처지를 생각하면 무서워요." "소속되기를 바라나?" "네, 그래요." 강물에 꽃다발을 던지며 울던, 비몽사몽간에 본 듯한 그때 모습을 제외하면 양현은 볼 때마다 단순하고 깨끗 하며 행복해 보이는 계집아이 같았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양현은 성숙한 여자였고 인생의 신산, 쓸쓸함 을 다 알아버린 여자의 모습이다. 의사라는 고급 직업, 조선 여성으로선 귀하게 선택받은 존재이건만 그러나 결코 그 계급에 소속되지 못한다는 것과 바로 귀하게 선택받은 그 존재 때문에 뿌리에 돌아올 수도 없다는 양 현의 느낌과 판단은 틀린 것이 아니다. 또 지난날 영광의 느낌이었고 판단이기도 했다. "영광오빠는 왜 대학 진학을 포기했어요? 지금 내가 생각하는, 마찬가지 생각을 한 거 아니에요?" 정곡을 찌르듯. "파고들면 한이 없지. 난 아무것에도 소속되고 싶지 않아." 뿌리치듯 영광은 쌀쌀맞게 말했다. 양현은 떼밀린 사람같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한동안 영광을 쳐다보다가 눈 길을 돌리고 몸도 돌리며 아이같이 얼굴을 차창가로 가져가며 말했다. "이렇게 기차를 타고 가면 아담하고 후미진 곳이 나타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여기다가 내 집을 지어볼까, 언 제나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이내 그곳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면 또 생각하지요. 나는 어디다 집을 짓고 살 까... 하구요." "양현이가 그런 생각 할 줄은 몰랐다." "풍경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지요, 뭐." "그건 집이 없다는 잠재 의식 때문이야." "그럴까요? 그런 생각 해본 일이 없는데," 하다가 미소지으며 시선을 영광에게 돌렸다. "사람의 본성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있어요. 이상한 것은." "..."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가차없이 배척하는 그 속성 말예요. 그것도 사람의 본성일까요? 이해가 걸려 있 을 경우로 물론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소외시켜버리는 그 잔인성 말예요. 나는 유치원 때부터 그걸 경험 했어요. 아이들에게 무슨 이해 관계가 있겠어요. 안 그래요?" "양현이도 민족이라는 인식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질 않나." "그야." "같은 사람이면서 인종이 다르기 때문에 배척하는 것은 일방적인 것만은 아닐 게야. 너 자신 속에도 배타적인 감정은 있을 테니까. 인종에서 단위가 작아져도 마찬가지다. 해서 끼리끼리 모인다 하지. 쪼개고 쪼개서 하나 가 될 때까지. 단위가 크든 작든 다르다는 것은 거리며 이질적인 것 아니겠나?" "그럼 다르다는 것 때문에 나타나는 적대 의식은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건가요?" "어디 사람뿐이겠어? 생명 있는 모든 것, 곤충이든 식물까지 종이 다르면 배척하고 싸워. 아니면 항복하든가. 이기적인 생존 본능 아니겠어?" "그렇담 영원한 투쟁이네요. 영원한 불평등이고." "누르는 주체만 달라져왔을 뿐 변한 게 뭐 있어. 새삼스럽게 그런 얘기는 뭐할려고 해." "체념하고 사시네요. 언제까지 그같이 은둔하는 기분으로 사실거예요?" 이들은 삼랑진에서 헤어졌다. 양현은 진주행 열차를 갈아타기 위해 내렸고 영광은 기차에 남았다. 기차가 움직 이기 시작했을 때, 역두의 시끄러운 소리들이 멀어졌을 때 영광은 말할 수 없는 허전함을 느낀다. 오빠의 친구 라는 입장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갈 수 없었던 그 강한 구속에 어떤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물론 스스로 구속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플랫폼에 서서 눈이 부셨던지 햇빛을 막듯 손을 이마에 대고 차창 속의 자신을 바라보던 양현의 눈빛은 말할 수 없이 슬퍼 보였다. 벌판에 내동댕이쳐진 한마리 길잃은 짐승새끼처럼 양현은 연약해 보였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우리 신분이 비슷하다 해서 그게 어떻다는 거지?' 마음속으로 비웃어보지만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듯 만나지 앉았던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 것인가. 도망치면서 다가가는 마음, 뿌리치면서 매달리는 마음, 영광이 자신도 갈피를 잡을 수 없 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하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양현이 자신에게 운명적인 여자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여태까지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섬진강 강가에서 기묘한 해후를 했던 자체가 운명적 인 것 같았다. 만일 그와 같은 생각을 아니했다면 오히려 영광은 쉽게 양현에게 접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양현이는 사랑을 한 적이 있을까? 누굴 사랑한 일이 있을까?' 한때 동경에서 싸돌아다녔을 적에, 그때의 광기 같은 것이 되살아나듯 영광은 뜨거운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 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상체는 경직된 듯 꼿꼿해졌다. 느닷없이 어둡고 적의를 품은 윤국의 모습, 그 눈 동자가 시야 가득히 다가왔던 것이다. 뜨거웠던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때는 몰랐었다. 그냥 양현을 그들 형제의 누이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윤국의 행동에 별 의혹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뭔지 모르지만 알 것 같았고 그것은 화살같이 꽂히는 직감이었다. '혹? 양현의 고민은 윤국이로 인한 것이 아닐까? 문제가 있다! 뭔가 문제가 있어.' 의심은 보다 진한 의혹을 불러들였다. '내가 지나친 생각을 하는 거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너의 영역은 아니지 않은가.' 시트에 등을 기대어 영광은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는다. '지나친 생각이야. 그럴 리 없다. 남이든 아니든 누이동생인데... 양현은 어째 수척해졌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망상이었다. 혼란이었다. 망상은 보다 짙은 망상을 불렀고 혼란은 보다 어지러운 혼란을 불렀다. '안된다! 이러면 안된다! 너에겐 그들 형편을 추리할 권리도 이유도 없어. 상상할 권리도 자격도 없어. 그건 추 악하고 치사스런 일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몸부림쳐도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양현과 윤국의 사이를 맴도는 생각에서 떨어져나올 수 없었다. 쇳덩이 같은 물체, 쇳가루 같은 안개비, 쇳소리 같은 울림, 비정의 지옥 밑바닥이 의식 속에 전개되는가 하면 그것들이 순식간에 불덩이가 되어 구르고 폭발하며 불꽃을 튀긴다. 영광은 마음속으로 아아! 하며 신음 소리 를 낸다. 진정 그것은 광기였으며 집요하게 달려드는 저주만 같았다. 악몽에서 깨어나듯 눈을 떴다. 차창 밖 논둑에 백로 한 마리가 있었다. 하얀 손수건 같고 하얀 종이같이 서 있었다. 영광은 의도적으로 회피해왔던 얼 굴들을 떠올려본다. 헤어질 때 강혜숙이 울던 모습이었다. 돌덩이같이 웅크리고 앉아서 영광은 떠나는 혜숙을 잡지 않았다. 어쩌다가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라렸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쓴 모습이다. 배용자의 그 독 기서린 얼굴도 떠올랐다. 문 밖으로 떠밀어냈을 때 소리내어 울던 배용자, 몇몇 치정을 나눈 기생들의 간드러 진 모습, 돈푼 있는 계집들이 죽겠다며 덤벼들던 그 징그러운 촉감, 영광은 자기 자신을 유린하듯 자기 옆을 스쳐간 여자들을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임종한 백발 상투의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강을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일가가 진주를 떠나게 된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참말이지 비참해서 두 눈 뜨고 볼 수 없더마. 사람 될 것 같지 않았다. 얼굴은 묵사발이 되었고 안아 일으키 는데 팔과 다리가 부러져서 제 마음대로 덜렁거리고 마치 망치로 때리부신 장난감 같더란 말이다.' 병원으로 업어다놓고 환국이를 찾아간 김수봉이 나중에 들려준 말이었다. 공지에 끌어내놓고 빙 둘러싼 그들, 한발 한발 육박해오던 일본 노가다패들의 그 악마 같았던 얼굴. 부산에 도착하여 기차에서 내렸을 때 영광은 병자 같은 꼴이 돼 있었다. 기차 멀미를 호되게 한 사람 같았다. 군중 속에서 떼밀려 역 밖으로 나왔을 때 바닷바람이 부는 항구 도시, 왜색 문화가 구석구석까지 배어든 부산, 역전 거리가 그를 맞아하였다. 거리는 거칠고 활기차 보였다. 눈에 익은 거리, 눈에 익은 도시, 소년기에서 청 년기를 보냈으며 남강을 돌아보며 돌아보며 떠나야만 했던 진주보다 더한 충격 속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떠 나야 했던 곳, 일본서 나온 후에도 영광은 공연차 여러 번 왔었던 곳이다. 시내를 서성거리다가 여수 가는 밤배를 탈 예정이었다. 통영의 영선에게도 날짜를 그렇게 편지로 알려놨다. 그 러나 영광은 역전에 있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는 몹시 지쳐 있었다. 여관방에서 한동안 눈을 붙이고 나서 밖 으로 나왔을 때는 초저녁이었다. 항구에서는 뱃고동이 울려왔고 거리에는 불빛이 화려했다. 하늘에는 별이 빛 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부두 쪽애서 귀가하는 노동자들 모습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작업복 차림에 빈 도시락을 들고 바삐 걷는 모습, 새끼나부랭이를 꿍쳐서 이고 가는 아낙들도 부두의 일꾼들이었다. 고급 상점들이 줄을 잇고 밤하늘에 높이 솟은 미나카이의 하얀 건물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얼마간 돌 아가면 부산에서 가장 번화하고 현란한 나가다도리가 있건만 부두 쪽에서, 영도 쪽에서 가장 춥고 배고픈 노 동자들이 빈 도시락을 겨드랑이에 끼고 바지주머니 속에 두 손을 찌르고 계속 걸아나오고 있었다. 영광은 그 들을 바라보며 동경에서의 노가다 생활을 상기한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이 거리는 그들의 거리가 아니다. 성질 부렸다가는 몰매를 맞곤 했던 동경의 거리가 조선인인 영광의 거리가 아니었던 것처럼. 영광은 술집을 찾아들어갔다. 거리의 불빛 현란한 것과는 달리, 명색이 카페인데 썰렁하고 손님이 없었다. 시 간이 일러 그랬는지 그러나 여급들도 어딘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웠다. "왜 이리 손님이 없어." 영광은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불경기니까요." "불경기?" "요즘 같아서는 장사 못해먹어요." 여급은 영광의 행색을 살피며 말했다. "전시니까 그런가 부지?" "그런가 봐요. 문 닫는 집이 많아요. 손님도 줄고 술도 원하는 대로 가져올 수도 없어요." 영광은 술을 마시며 여급을 건너다본다. 짙은 화장 때문에 얼핏 보기엔 젊은 여자 같았으나 상당히 나이든 것 같았다. "손님 서울서 오셨어요? 어디서 뵌 것 같아요." 여급은 서울말씨를 썼으며 풀어헤친 머리, 화장은 짙었고 검정 바탕에 은빛 무늬가 요란한 드레스를 입고 있 었지만 추하게 뵈지는 않았다. 어딘지 교양의 흔적이 있었다. "세상에는 비슷한 사람도 많고 가고 오고 하는 동안 옷깃도 스쳤을 테고, 모르지요, 어디서 만난 일이 있었는 지." 영광은 나이를 가늠하여 말씨를 고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하는데 여급은 태도를 달리했다. "당신 나일성 씨지요?" 찌르듯 말했다. "그렇지요?" "팬이다. 그 말씀이군." 영광은 지겨운 듯 말했다. "팬인지 글쎄... 공연에는 가지 않으니까 딱이 팬이다, 할 수는 없지만 색소폰의 제일인자, 그런 말은 들어서 알고 있어요. 강남 제비 만나듯 이따금 옛날 동료를 만나는 일이 있어서, 사실은 나말예요, 한때나마 나일성 씨하고 한솥밥 먹은 일이 있어요." "한솥밥을 먹어요?" 술을 마시다 말고 뜻밖이란 듯 여급 얼굴을 쳐다본다. 영광은 서울 어느 술집에서 만난 일이 있었을까? 생각 하던 참이었다. 여급은 아주 기분 좋게 소리내어 웃었다. "나일성 씨는 날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나도 당신 다리 불편한 걸 보고 깨닫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테 니까." "다리로써 기억나는 사나이."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말아요." "기분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지만 좀 어리둥절하군요." "나일성 씨가 악극단에 입단하고 얼마 안되어 나는 그만두었으니까. 게다가 막간이나 메우는 시시한 가수, 그 것도 꽤 오래된 일이거든요." 거침없이 말하며 친밀감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어째 여급으로 전락했어요? 나이도 수월찮아 뵈는데?" "여급이나 막간 가수, 그거 다 피장파장이오. 그리고 횟바가지를 쓰기는 했으나 이리 늙은 여급이 어디 있수? 나 여기 마담이에요." 여자는 담배를 붙여물고 술잔에 술을 따랐다. 세련되고 익숙해진 몸놀림이었다. "경기가 좋질 않아서 아이 하나만 남겨놓고 다 내보내고 보니, 자연 나도 손수 술시중을 들게 된 거지요." 영광은 술잔을 비우고 여자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쳐다보나마나, 나 나일성 씨보다 나이가 두세 살쯤 위일 거요." "그런데 어째서 여기 와 있어요?" 여자는 다시 영광의 술잔에 술을 부었다. 자기 앞에 있는 술잔에도 술을 부었다. 투명하리만큼 손을 희고 섬세 해 보였다. "사람들은 어차피 어디든 가 있게 마련 아닌가요? 그리고 또 어딘가로 가겠지요. 술 마셔요. 술값 안 받을 테 니 마시고 싶은 대로." "여자한테 술 얻어마시면 동티가 나던데." "염려 말아요. 나 외로운 여자 아니니까." 그는 술잔을 들었다. "색소폰의 제일인자 나일성 씨를 위하여." 술잔을 쳐들어 보이고 나서 술을 마신다.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볼레로, 빛살 같은 조명의 이동 무대, 군무하 는 데 정석같이 된 무용곡 볼레로, 나직하고 달콤한 선율이 흐르고 있다. 젊은 여급이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는 그 테이블말고는 여전히 카페 안은 비어 있었고 쓸쓸했다. 주거니받거니 얘길 하면서 꽤 많은 술을 마셨다. 공짜술이라서가 아니라, 옛말 동료라는 느닷없는 말 때문도 아니었고 영광은 괜히 여자가 낯설지 않았다. 허식투성이의 몸치장에 비하여 여자 언동에는 허식이 없었다. 팬 이오 어쩌고 하며 치덕치덕 감겨오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없었다. 영광은 무장을 풀고 편안하게 술을 마신다. "철학자 같은 말 하네." 핀잔 주듯 하니까 여자는 "모든 사람은 다 나름대로 철학자 아닐까? 자기 인생을 그 자신만큼 진지하게 철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 어. 해답을 얻기도 하고 얻지 못하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깨닫기도 하고, 나일성 씨 는 도통 궁금해하지도 않네요." "뭘요?" "내 신상 말예요. 많은 남자들을 대하고 보면, 거의 모두가 신상 얘길 듣고 싶어하던데." "듣고 싶어만 하나? 여자들의 신세 타령은 어떻고? 뭐 다 뻔한 얘기 아니겠소?" "청개구리 심사인지 나일성 씨가 그러니까 괜히 얘기하고 싶어지네. 누군지 묻지도 않겠지만 지금도 그 사람 거기 있어요. 그저 그런 사람인데, 처자도 있었던 사람인데 버림을 받은 거지요. 뭐, 그래서 악극단을 나온 셈 인데 결국 나이 든 사람을 따라 여기까지 온거고, 그리고 나도 나이 들었어요. 이 카페는 나이 든 그 사람이 차려준 거고요." "나이 든 사람, 나이 든 사람이라." 영광이 뇌니까 여자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상당히 주기가 돈 모양이며 무방비 상태, 그것은 기분 좋은 무방비 상태였다. 그리고 여자는 조금도 과거에 대해 구애하지 않았다. "영감님이지. 그리고 나는 숨겨진 여자, 소실이구, 사회에서 말하는 기생충." "그래요? 기억에도 없는 우리 선배님, 그렇지만 우리 선배님께서는 씩씩하게 잘 살고 있네. 하하핫핫 핫하하... 별수 있소? 사는 거지 사는 거요. 산다는데 누가 말려? 염라대왕말고는 아무도 못말려." 영광의 음성도 휘청거리고 있었다. "듣던 중 젤 근사한 말 하네. 나일성 씨,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사내새끼들 대개의 경우 눈곱만치의 진실도 없으면서 동정하는 척하구, 뭐 그것은 낯간지러울 정도지만 더러는 더럽게 추근대면서도 성인 군자처럼 도덕 적으로 어쩌구 저쩌구, 한자리에서 염치도 없이 두 개 상판때기를 내미는 거야. 진보적인 모던 보이들은 또 어 떻고? 노예적 환경에서 탈출하라! 신나지. 그러나 그것들이 어김없이 여급을 노리개 취급하니 웃기는 얘기 아 니야? 입 가지고 못한 선심이 어디 있어? 하기야 웃기는 짓을 마음놓고 하는 곳이 카페겠지만, 우리 카페는 부두가 가까워서 선원들이 단골이고 막걸리패들이 오는 곳은 아니거든. 걸멋 든 날건달이나 머리통에 먹물 들 었다는 젊은것들이 오는데 주막집이나 다치노미집 술손님들보다 오히려 속물들이라니까. 조선엔 <부활>의 네 플류도프도 없고 카튜샤도 없어. 기껏 <홍도야 울지 마라>!" "그렇지도 않소. 윤모라는 가수하고 김모라는 문인이든지, 그들이 현해탕에 투신한 것도 그렇고 부산 앞바다에 서 대학생하고 여급이 동반 자살한 사건도 있질 않소?" "그런 말 하는 걸 보니 나일성이도 꽤 낭만적인 사낸가 부지?" "내가아요? 허허헛 허허어." "아닌가?" "그렇게 될려고 지금 노력중이오. 그보다 마담, 상당히 유식한데 책을 많이 읽는 모양이지요?" "내가아요?" 영광의 말투를 흉내내며 여자는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킨다. 그러고는 깔깔대며 웃었다. "카페 마담이 책을 읽는다면 장사는 골로 가는 거지. <부활> 어쩌고 해서 그리 생각한 모양이지만 영화를 봤 거든." "들은 풍월인지 모르지만 말도 썩 잘하고." "그야 세상 구경, 사람 구경이야 많이 했으니까 요조숙녀처럼 한가지 생각만 하지는 않지. 나 남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마음 편하게 살고 있어요. 생각해보아요. 운다고 해서, 웃는다고 해서 뭐 달라지는 거 없잖아? 세 상이 달라지지 않는데 집착할 것 없어. 문이 닫혀 있으면 발길 돌리고 문이 열려 있으면 들어가고 그러는 데 야 누가 뭐라겠어?" 음악도 멎은 지 오래되었고 어느덧 카페는 텅 비어 있었다. 젊은 여급은 테이블에 엎드려 잠이 들었는지, 서 있던 바텐더도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 이런 일이 가끔 있는지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다. 영광도 계속 술을 마셨고 마담도 계속 술을 마셨다. "손님 일어나이소. 시간 다 됐어예."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영광은 눈을 떴다. 카페가 아니었다. 여관방이었다. 어제 들었던 바로 그 여관이었고 영 광은 이불 속에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기억 안 나십니꺼." 여관의 심부름꾼 소년이 물었다. "내가 여길 어떻게 왔지?" "남자분이 모시고 온 거라예." 영광은 신문을 보고 있던 바텐더 생각이 났다. "술이 억수로 취해가지고 잘 걷지고 못하데예. 내일 여수 가는 아침배 탈 손님이니께 시간 되거든 깨우라 함 서." 팁을 쥐어준 눈치였다. "선배가 다르긴 다르군." 영광은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중얼거렸다. "예?" "아무것도 아니다. 냉수 한 그릇 갖다다오." 가져온 냉수를 마시면서 영광은 카페 마담으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기선은 항구를 떠났다. 바다는 잔잔하고 날씨는 쾌청이었다. 배가 가덕 앞바다에 왔을 때 술렁대던 배 안이 잠 잠해졌다. 갑판에 서 있던 사람들은 멀미 때문에 더러 선실로 들어갔고 영광은 바닷 바람에 얼굴을 내맡긴 채 갑판에 서 있었다. 간밤의 술 때문에 속이 쓰라렸지만 기분은 과히 나쁘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렸을 때 그 비 참했던 것을 생각하면 기분은 썩 좋은 편이었다. 가덕을 지나면서 배는 기름 위를 지나가듯 미끄러져갔다. 눈앞에 무수한 섬들이 지나가는가 하면 다가왔다. 그 리고 스쳐가는 배에서 선원들이 손을 흔들곤 했다. 결코 좋은 일이 있어서 가는 길은 아니었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구금되어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 한다면 결코 유쾌해질 수 없는 여행이다. 그러나 영광은 거의 그 일에 대하여 별로 생각없이 왔다. 통영 항구 가 가까워졌을 때 비로소 홍의 얼굴이 눈앞에 언뜻언뜻 지나갔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언 짢은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낙관적인 마담의 기분이 나한테 옮겨왔나? 참 이상한 일이다.' 아닌게아니라, 영광은 자신이 늘 우울해 있었던 일이 새삼스럽게 생각났다. 지나치게 방어적인 자신의 의식 속 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기분이 어둡든 밝든 세상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마담의 말대로 울든 웃든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영광은 바닷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며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바다 풍경이 이 렇게 아름답고 신선한 것을 미처 모르고 살아온 것 같았다. 조촐하고 청정하고 마치 내 집 안마당같이 아늑해 보이는 바다,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은 모두 이 강산에 태어난 사람들의 땅이요, 바다는 내 조국 내 민족의 보금 자리며 요람이며 삶의 터전 아닌가.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귀하고 소중한 민족의 생명이다. 명경 같 은 바다 위에 꿈과도 같이 전개되는 섬, 가고 오고 겹쳐서 나타나고 연이어져 나타나는 각양각색의 섬, 한결같 이 섬에는 푸른 소나무들이 우뚝우뚝 서 있었다. 처음으로 영광은 생명의 신비를 느끼고 자기 내부에 진한 소 속감이 굽이치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한편 솔씨가 떨어져서 자란 저 작은 섬에 양현과 함께 세상을 등지고 살았으면 하는 소망이 마치 상처같이 아프게 되살아나기도 했다. 기선은 뱃고동을 울리며 항구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부둣가에 그 큰 몸체를 갖다대는 것이었다. 기선이 뿜어내는 물결에 부둣가 작은 배들은 그네를 뛰고, 선원은 고함치면서 밧줄을 던졌다. 장사꾼들이 메뚜기처럼 배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정박하는 잠시동안 김밥이며 과일이며 음료를 팔기 위하여. 반가운 뭍으로 오르기 위 하여 선객들도 뱃전에 나와 웅성거리고 있었다. 영광은 삶의 활기를 뿌듯하게 느낀다. 그리고 그 자신도 활기 찬 동작으로 배에서 부두로 건너뛰었다. 출찰구를 막 나가려 하는 순간 "오빠!" "처남!"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중나온 사람들 속에 키 큰 휘의 얼굴이 있었고 발돋움하고 턱을 치켜든 영선의 얼굴이 있었다. 나가자마자 휘는 영광으로부터 여행 가방을 받아들었고 영선은 어릴때처럼 영광의 옷자락을 살그머니 잡았다. "어제 낮에도 나오고 밤에도 나오고 얼매나 속을 태웠는지, 오빠가 안 오는 줄 알았소." 영선은 새처럼 재잘거렸다. "늦어도 꼭 올 기라고 내가 안 그러든가배? 좀을 볶더마는." 휘의 들뜬 목소리였다. "부산서, 저녁배 타려다가..." 술을 마셨다는 얘기는 하지 않고 "아이들은?" 하고 영광이 물었다. "집에 있고 선아는 핵교 가고." "별일 없었지?" "우리야 머 별일 없지마는." "어머니는?" "산에 가싰구마요. 또 오실 거라 하심서, 열흘쯤 됐나?" 휘의 말이었다. "나 오는 거 모르지요?" "그저께 펜지를 받았인께 장모님한테 알릴 틈도 없었고." 영선은 코를 벌름거리며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오라비 마중 나온다고 농 밑에서 새 옷을 꺼내 입은 눈 치였다. 검정 치마에 옥색 저고리를 입은 모습이 앙증스러웠다. 휘도 옥양목 바지저고리에 조끼까지 입고 있었 다. "잠깐만 여기 기다리고 있어." 영광은 두 사람을 막듯이 팔을 벌리더니 급히 돌아서서 걸아간다. 마침 눈에 띈 양과자점으로 그는 들어갔다. 마음속으로 무심하게 떠나온 자기 자신을 탓하면서 영광은 이것 저것 눈에 띄는 대로 싸달라고 했다. 그리고 돈을 치른 뒤 호들갑스럽게도 큰 과자 꾸러미를 안고 나온다. "오빠 머할라꼬 이리 많이 샀소. 밥 묵으믄 되는데 실데없이 돈을 쓰요." 영선은 과자 꾸러미를 받아들며 질색을 했다. "내 성미가 원래 무심해서, 생각 없이 떠났다." "바쁜 사램이 그러고 저러고 할 새가 어디 있어서." 휘가 굼뜬 입을 열었다. 좀체 말이 없는 휘였지만 무척이나 처남이 대견스럽고 반가웠던 눈치다. 왜 안 그러겠 는가. 외로운 그에게는 붙이나 다름없는 영광이였기 때문이다. 간창골 입구에 이르렀다. 기와집, 붉은 벽돌 담장 안의 석류나무 새잎의 푸르름의 선명했다. 기와집 맞은편에 있는 목공소 앞에서 "여기가 내 일방이구마." 휘는 스스럽게 말했다. 대패질을 하고 있던 병태가 돌아보았다. "병태야 인사해라. 선아 외삼촌이다." "야?" 병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말로는 들었지만 이렇게 잘생긴 남자리라고는 상상 못했다. 서울 사람들 땟물 빠졌 다고는 하나 이렇게 땟물이 싹 빠진 사내를 병태는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간밤의 술 때문에 영광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야, 저, 지는," 하다 말고 꾸벅 절을 한다. "일감은 많은가요." 영광이 휘에게 물었다. "생활은 할 만하제요." "머합니까? 어서 가입시다. 오빠 배에서 점심 잡샀십니까?" 영선이 말했다. "아니다. 아침도 굶고 배고프네." 영광은 웃으며 말하고 병태에게도 "그럼 수고해라." "야, 그, 그라믄 살피 가시이소." 병태로서는 최대의 경의를 표하며 또 절을 꾸벅했다. "보소. 나 먼지 갈 긴께 따라오소." 영선은 배고프다는 영광의 말에 마음이 서둘러졌던지 오르막길을 달음질쳐서 올라간다. "그런데 만주서 잡혀온 사람들은 어찌 되었는지." 하대하는 것이 서툴러 영광은 어중간한 말투로 본론을 꺼내었다. "그 일은 괜찮기 될 것 같소. 이선생은 벌써 풀리나왔고." "나와?" 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어무니만 남아 있는데 재판을 받을 기라 하더마요." "재판을 받으면?" "다 손을 써놨인께 집행유예가 되지 않을까, 무죄 석방은 어렵다 그런 얘기였소." "그럼 그 형님은 지금 이곳에 계신가?" "야. 지금 기시오. 그새 만주를 두 번이나 다녀왔제요. 사업을 정리하겠다고." "정리라면 그럼 조선에 나와 살 생각인가?" "이선생은 우짤지 모르겄고 가족들은 이곳에 눌러앉힐 모양이오. 집도 장만했인께. 처남은 전부터 이선생을 알 고 있었소?" "음, 조금." 자신도 확실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휘가 홍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아는지 몰라서 말끝을 흐렸다. "장모님 말심이 돌아가신 장인어른하고는 형제간 이상이었다 하심서, 속을 얼마나 태우시는지 우리도 혼이 났 소." "어머니가 세상에 나셔서 그러기는 아마 처음일 거요." 영광은 웃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서 애먹었소." "그 형님 건강은 어떻든가? 고문 같은 건 당하지 않았는지." "그런 일은 없었던 모앵이오. 처가 울타리가 대단하더마요. 통영유지도 많았고, 모두 발벗고 나서서 일을 본다 카더마요. 사람 뒤에 사램이 있인께 매사 수울하게 넘어가는 것 같았소. 아이어무니가 저지른 일이 돼놔서 그 랬는지 처가에서 이선생한테 미안키 생각하는 눈치였고, 하기는 이선생도 훌륭합디다. 한마디 원망도 없이 오 히려 아이어무니 몸 약한 거를 걱정하믄서 참말 훌륭하더마요." "지금 어디 계시는데?" "아이들 때문에 처가에 기시고 아이어무니가 나오믄 사놓은 집에 든다 그런 얘기였소." 앞서 간 영선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날듯 오르막길을 올라간 모양이다. "이곳 날씨가 훨씬 덥구먼." 영광은 걸음을 멈추고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는다. "게울에도 외투 없이 지내는 곳이니께." 오르막길을 오를수록 양켠 집들은 초라해졌다. 집에 들어섰을 때 숙이까지 동원한 부엌에서는 분주했다. 진규 와 선일이는 벌써 과자를 입에 물고 마당에서 캑캑거리며 놀고 있었다. 들어서는 아비와 영광을 본 선일은 "옴마! 아부지 왔다!" 하며 부엌으로 달려간다. 영선이 손을 닦으며 나왔다. "어서 방에 들어가소. 상 다 봐놨인께요." 숙이 살그머니 내다보았다. 영광과 휘는 방으로 들어갔고 "아직 뜸이 안 들었는데." 주걱을 들다 말고 숙이 말했다. "좀 기다리지 머." 두 여자는 부뚜막에 나란히 앉는다. "잔칫날 같네." 숙이 웃으며 말했다. "우떤 오빠라구." "선아엄마는 좋겄다. 저런 오빠가 다 있으니." 숙이는 정말 부러운 것 같았다. "우리 오빠 참 잘생깄지?" "훤한 인물이더마." "다리 땜에... 그 죽일 놈들!" 자랑을 하려고 꺼낸 말이었는데 갑자기 산 넘어갔던 부아가 되돌아왔는지 영선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울 아버지를 잡을라꼬 밤낮 없이 형사놈들이 뒤쫓아 댕기더마는, 끝내 만주까지 가게 되고 아부지는 종신하 는 사람도 없이 객사하싰는데, 울 오빠는 머를 우쨌다고 저 모양 맨들었는고." "별로 눈에 띄지도 않던데 멀 그래." 위로삼아 숙이 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또 사실이기도 했다. "우리 식구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것도 다 왜놈, 그놈들 때문이다. 철천지 원수." 하며 영선은 코를 홀짝인다. "지나간 일은 잊어뿌리라. 목이 빠지게 기다리든오라버니가 찾아 오싰는데 그렇기 비감하믄 쓰나." "말을 하다 보이, 분한 생각이 치밀어서."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는다. "내가 선아외삼촌을 본께 비할 바는 아니지만는 우리 몽치가 불쌍해서 가심이 아프다. 선아아부지가 가방을 들고 처남 매부 나란히 들어오는 것 얼매나 보기가 좋노. 선아엄마도 기가 살아서 펄펄하는 거를 보이 참말 부럽네. 친정 못사는 것도 인병 든다 하더라마는 나한테는 인병 들 친정조차 없으이." "요새는 진규아부지하고 몽치가 잘 지내는데 머." "진규아부지가 전같이 내 맘을 상하게 하지는 않지만 답대비, 몽치 가아가 무신 놈의 황소고집인지 턱턱거리 싸아서, 하기사 머 우리 몽치가 대접받을 인야가 어디?" 하다가 "선아엄마 뜸 다 들었는갑다!" 숙이 말에 화다닥 일어선 영선은 주걱에 물을 묻히고 솥뚜껑을 드르륵 열었다. 밥솥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 오른다. "밥상 들어가는 것 보고 나는 그만 갈란다." 국솥에서 국을 뜨며 숙이 말했다. "무신 소리 하노?" "오매불망 생각하든 오라버니하고 식구끼리 오손도손, 할말도 많을 긴데." "잔소리 말고, 따신 밥 놔두고 가기는 어디로 간다 카노. 우리는 작은방에서 아아들하고 묵자." 영선은 쌀밥만 골라서 밥 두 그릇을 푸고 나머지는 주걱으로 설설 섞는다. "어제도 손님이 안 오시서 우리 식구가 포식을 했는데 무신 염치로 오늘 또 얻어묵노." "염치가 없는 거는 우리제. 없는 돈에 머할라꼬 개기랑 나무새는 사 왔을꼬?" 기다리는 손님은 안 오고 음식은 만들어놨고, 식구들이 와서 숙이 말마따나 포식을 하여 미안했던지 아침 일 찍 새터장에 간 숙이는 볼락 두 마리, 조개며 미역, 그리고 나물거리를 사왔던 것이다. "진규엄마 모두 챙기가지고 작은방에 들어가아. 아이들도 부르고." 밥상을 들고 나가면서 영선이 말했다. 그리고 한참 후 부엌으로 돌아온 영선은 "대기 시장했던가 부더라. 이내 수저를 드는 거를 보이." 보고하듯 말했다. 숙이는 귀 떨어진 소반에 음식을 올려놓고 있었다. "아이들 밥 묵겄나? 과자 묵니라고 정신 없을 긴데." 숙이 말이 옳았다. 아이들은 과자봉지를 들고 어디 갔는지 마당에 없었다. 두 여자는 작은방으로 들어가서 밥 상머리에 앉았다. "진규아부지도 기깄이믄 좋았일 긴데." "점심 싸갔는데 굶을까 봐서? 그보다 음식이 입에 맞일랑가 모리겄네." 밥을 먹으면서 숙이 말했다. "울 오빠, 음식 까탈부릴 만큼 호강시럽게 자란 사람 아니거마는, 다 알아주는 솜씨 진규엄마가 맨든 음식 맛 없다 한다믄 그거는 그 쪽 입맛이 이상한 거지." 나물은 숙이가 무쳤고 국도 숙이가 끓였다. 음식 솜씨에 대한 영선의 칭찬은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다. 모두 숙이가 만든 음식은 맛이 있다고들 했다. '할무이가 알뜰히 가르쳐주어서 그렇지.' 숙이는 영산댁 생각을 한순간 했다. 솜씨 칭찬은 더러 받는다. 그런데 오늘따라 영산댁을 숙이는 생각했던 것 이다. 영산댁뿐만 아니라, 그곳, 섬진강 강물이 푸르게 흐르는 강변, 영산댁과 함께 살던 그곳이 눈앞에 지나갔 다. "김치는 좀 새큼해진 것 같은데." 손님이 온다고 해서 그저께 숙이는 열무김치를 담궈주었던 것이다. "걱정 말고 밥이나 묵어." 영광은 이들에게 귀빈이었다. 영선에게는 오빠인 동시 무슨 특별한 힘이라도 지닌 것처럼 우러러보는 사람이 었고 숙이는 영선을 통해 많은 얘기를 들어왔기 때문에 대단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숭 늉을 떠가고 열무김치를 다시 내가고 하느라 영선은 여러 번 들락거리느라 그랬지만 흥분도 하고 있어서 밥맛 을 모르는 것 같았고 숙이도 덩달아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안방에서 밥상이 나온 뒤 한참 있다가 휘와 영 광이 밖으로 나왔다. 휘는 마루 옆에 서성거리는 숙이에게 "수고 많았지요." 인사를 하고 나서 영선에게 "우리 이선생 처가댁에 갔다 올 긴께." 말했다. 영광은 엉거주춤, 숙이에게 신경이 좀 쓰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말없이 나가기가 뭣했던지 영선에게 "너 음식 솜씨가 제법이더구나. 오래간만에 맛있는 열무김치를 먹어봤다." 하고 웃었다. "내가 한 것 아닌데, 진규엄마가." 그 말에 숙이는 몹시 당황하여 뒷걸음질치다가 넘어질 뻔했다. 휘가 서둘러서 말했다. "나중에 만나게 되겄지마는, 이분, 이선생 일에도 많이 심을 썼고 돌아가신 장인어른하고도 인연이 깊다 카든 데, 그런께 그 사람의 부, 부인 되는," 하다 만다. 부인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칭호에 걸려버린 것이다. 숙이 역시 난생 처음 듣는 존칭(숙이는 대가댁 마님한테나 붙이는 칭호로 알고 있었다)에 더욱 당황하여 얼굴을 붉힌다. 검정 치마 위에 인조견 옥색 저고리, 폴속하게 솟은 저고리 앞섶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영광은 숙이게게 고개를 숙였고 덩달아서 영선이 말을 이었다. "오빠 오신다고 장을 봐 오고 음식도 장만해주고, 우리도 나중에서 알았지마는 아부지하고 진규할아부지하고 는 그럴 수 없는 사이라 하데요. 우리도 이웃에서 친형제겉이 지내고 있소." "고맙습니다." 영광은 또 한번 고개를 숙였다. 낯설어하는 표정과 서투른 인사, 당황하는 숙이 못지않게 난감해한다. 교만하 다면 교만하다 할 수 있는 영광이 겸손해지려니까 균형을 잃는 것인지, 그러나 그것은 미묘하지만 일종의 콤 플렉스로 볼 수도 있었다. 같은 뿌리에서 나와가지고 같지 않게 된 자기 자신, 그들과의 거리감에 대한 자책, 명확하지는 않으나 분명히 그런 것이 있었다. 영선이나 휘에게도. 그것이 지나치게 되면 영광은 다시 자기 자 신을 가두어버리게 될 것이며 교만하고 냉정한 사내로 변하게 될 것이다. 사실 영광은 한순간 자신을 닫아버 리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휘와 영광이 나간 뒤, 부엌 설거지는 내버려둔 채 두 여자는 마루에 걸터앉아 뜻없이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보다가 장독가에서 팔랑거리고 있는 나비를 보았다가, 그러고 있는 것이었다. 영선은 예정보다 하루 늦게 온 영광을 기다린 탓으로, 또 이것 저것 마음을 쓴 탓으로 힘이 빠지고 노곤해진 것 같았고 숙이는 충격을 받은 것같이 보였다. 그새 잊고 살았던 지난 일, 몽치가 산에서 억새풀 같이 자랐다면 숙이는 벼랑에 매달려 살았다 고나 할까, 영산댁의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근원적으로 벼랑에 매달린 한떨기 보잘것없는 꽃과 같 은 그 시절 그의 삶에 호사스런 순간을 안겨주었던 사람, 그 깨끗하고 화사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그 것은 충격이었다. 아까 영산댁을 생각했던 것도, 영산댁과 함께 살던 그곳 섬진강 강가 풍경이 눈앞에 지나간 것도 그의 의식이 그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영광의 정중한 인사를 받는 순간 선 명하게 떠오른 것은 윤국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귀하고도 멀고먼 곳에 있었던 최참판댁 둘째도련님, 그를 이성 으로 생각하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그 지난날의 일들, 빨래터에 나타나서는 말을 걸곤 바라보던 소년, 아니 소 년에서 청년으로 접어들었던 준수한 귀공자는 동네에 나돈 소문 때문에 영호 마음에다 열등감을 실어준 사람 이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영호할아버지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영호 마음에 상처로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물 론 숙이는 잘 알고 있었다. 동정이라는 것을. 그러나 윤국은 어느 양가의 규수 대하듯 추호의 계급 의식도 없 이 숙이를 존중했던 사람이다. 그 젊은 날의, 그것이 동정이든 사춘기의 연정이든 간에 숙이에게 호사스런 추 억인 것만은 변함이 없다. 그러다가 떠난 뒤 그는 숙이를 쉽게 잊었는지 모른다. 결혼한 뒤 우물가에서 윤국을 만났을 때 윤국의 눈에는 배신을 느끼는 엷은 동요가 있었다. 숙이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광과 윤 국은 닮은 곳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신분도 아주 다르다. 그러나 여하튼 그들은 모두 숙이가 사는 세 상과 다른 곳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의 공통된 느낌 때문에 숙이는 묻어둔 윤국의 얼굴을 떠올 렸는지 모른다. "진규엄마." "음." "생각해보믄 울오빠도 참 불쌍한 사람이다." "실데없이 와 그런 생각을 할꼬?" "악극단 같은 데 따라댕길 사람도 아니었는데 왜 그리 되었는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도 아닌데." "책도 많이 읽었고 대학교에 갈라고 마음만 묵었이믄 갈 수도 있었는데 와 작파를 했일꼬? 아마도 공부하믄 멋하리, 다 소용없다는 생각을 했일까?" "..." "차라리 메주덩어리같이 생깄거나 일자무식이었거나 했이믄 남사는 대로 살았을지 몰라. 백정집에 태어날 것 이믄 와 그리 잘나게, 선비같이 세상에 나왔을꼬? 참말고 한스럽다. 잘났기 때문에 울아부지 울어무니 가심에 다 못을 박았지." "생각하믄 한이 없다. 다 팔자 소관 아니겄나." "나는 그래도 자식 낳고 어진 남편 만내서 사는데 울오빠는 언제까지 저렇기 홀몸으로 떠돌 긴지." "설마 여자가 없어서 장가 못 들까 봐서?" "그건 그렇지만... 맺힌 기이 있어서." 강혜숙과의 연애 편지 사건으로 학교를 퇴학당한 일을 영선은 기억하고 있었다. 강혜숙의 모친이 찾아왔다 가 고 난 뒤 내 잘난 아들! 하며 울던 어머니의 처절한 울음도 영선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 무렵, 휘와 영광은 내리막의 골목길을 나란히 내려가고 있었다. 간창골에서 올라올 때와는 반대 방향의 길 이었다. 대숲을 지났다. 보통학교를 향해 뻗은 신작로를 지르고 또 변전소 옆을 지나서 새터로 빠지는 골목길 에 접어들었다. "저기, 저 저기 보이는 기와집은." 휘가 걸음을 멈추며 손가락질을 했다. "이선생이 사놓은 집인데." 기와집은 초가 지붕에 가려져서 반쯤만 보였다. 지붕 옆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집이 안고하고, 참 잘 지은 집이오. 옛날에 어떤 부자가 막내아들 줄라꼬 지은 집이라 카든데 솜씨 좋은 대목 이 공딜이서 지었더마. 크지는 않지만, 이선생이 장만하기를 참 잘했다 싶은데." 소목이지만 휘는 목수다. 목수의 안목으로 가늠해본 그 집이 무척 마음에 들고 부러운 눈치였다. "그 형님은 여기 눌러앉을 생각인지 궁금하군." 걸음을 옮기면서 영광이 말했다. 아까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서 하던 말이었다. 그 일에 대하여 영광은 왠지 확 실하게 알고 싶었던 것이다. 홍이가 만주로 떠나든, 통영에 눌러앉든 어느 쪽이든 그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 기 때문이다. 휘가 어느 정도 실정을 알고 있는지 그것도 궁금했다. 아마 영광이 자신과 비슷하리라는 생각은 하면서도, 왜냐하면 김강쇠가 휘의 부친이요 영광이 자신은 송관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들 두 사내의 활동은 다 같은 아들로서 비슷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너무나 판이한 아들들이며 처남 매부지 간이라 하더라도 처한 입장은 다 같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식구들만 이곳에 남기두고 떠나지 않을까 싶은데." 휘도 아까와 같은 말을 했다. "형님은 매부한테 아무 말 안했는가." 하다가 갑자기 영광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거 어디 가깝해서 견디겠나. 매부!" 휘가 어리둥절하며 쳐다본다. "우리 나이도 같고 말 놓자. 정말 어중간한 말 하자니 불편해서 안되겠다." 휘가 껄껄 웃었다. 영광도 웃었다. "그러지. 아닌게아니라 나도 목구멍에 실낱 감긴 거맨크로 말이 들어갔다 나갔다," 두 사람은 지나는 이 없는 텅빈 골목에 서서 또 웃었다. 강아지 한 마리가 남의 집 대문 기둥에 오줌을 갈기 다가 제풀에 놀라서 깽깽거리며 달아난다. "하야간에 이선생은 아무 말씀을 안했지마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하던 말을 계속한다. "아주 조선에 나와서 살 생각이믄 진주에다 터를 잡지." 하다 말고 휘는 빙그레 웃었다. "좋잖은 기억이 있어서, 이선생 말인데." 휘는 또 웃었다. 그는 차고 속에서 일본서 돌아온 장이와의 사건 때문에 처가에 대하여 고개를 못 들게 된 홍 이 사정을 어디서 들었던지 영호가 귀띔하여 알고 있었다. 휘가 웃은 것은 점잖은 홍이 어째 그랬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광은 좋잖은 기억이 무엇이냐 묻지 않았고 휘도 더 이상은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이 선생은 만주로 떠날 기구마." "내 생각도 그래. 형님은 그리 쉽게 만주서 손떼고 나올 사람은 아닐 것 같다." 그 말에 휘는 영광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이들과 아이어무니를 데리고 가자니 늘 골골거리는 아이어무니라, 사실 작년에만 해도 아파서 친정에 정양 하러 나왔다가 그놈의 금사건이 벌어졌고 없으니만 못한 일이기는 하지마는, 아이들 어무니가 그리 되기 망정 이지 이선생이 걸려들었다믄 큰일이었제." 이번에는 영광이가 휘를 힐끗 쳐다보았다. "참말이제 이눔의 세상이 운제 끝이 날란고, 만나는 사람마다 하는 말인데 영 끝이 안 나고 조선 사람들 다 죽게 생깄이니." "이놈의 세상이 끝나게 매부는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 해본 일 있나?" 느닷없이 영광이 물었다. "나야 도통 영문을 모르니께, 해야 한다면 해야지." "누가 하라 한다면 하겠다, 그런 뜻으로 들리네." 한참 동안 대답을 안하던 휘는 "나에게 피리가 하나 있는데." "...?" "그거를 아주 어맀을 직에 나한테 갖다준 사람이 있었다. 피리는 그분이 세상에 남겨놓고 간 단 하나의 흔적 이다 하고 아부지는 말심하시더마. 경찰서 유치장에서 목을 매고 돌아가싰는데 그분에 대한 기억은, 얼굴이며 모습은 지금도 똑똑히 남아 있고 그분에 대한 숱한 얘기도 마치 내 머릿속에다 불로 지져놓은 듯 뜨겁게 남아 있다. 선생님한테서 글을 배우기 전까지 만 해도 나는 피리를 들고 홀로 산 속을 헤매다가 불곤 했는데, 그분의 한많은 혼백이 그 피리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만 같애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아부지는 내가 피리를 불 적에는 두러버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시고는 했는데." 영광은 놀라움을 나타내며 휘의 옆모습을 쳐다본다. "아마도 아부지는 피리가 내 운명 같애서 그러시는 모양인데 나 역시... 먼지는 모리지마는 그분의 소망을 피 리에 이탁하고 내게 주신 기이 아니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 사람 광대였나?" "아니?" "그러면 피리는 왜?" "광대놀음하는 데서 얻었다든지? 빼앗아왔다 카든지, 그걸 들고와서 나한테 주싰는데, 불고 놀라고 그러신 거 아니까 싶기는 한데... 그분은 동학당의 이름난 접주의 아들이었제. 전주 감영에서 효수당한 부친의 목을 본 뒤 평생을 근본을 숨기고 사셨고 하지마는 지리산 근동에서 그분, 김환을 모리는 사람은 없다. 얼굴을 보지 못해 도 그분의 행적은 다 알고 있었제. 아부지의 일평생도 그분 빼고는 생각 못할 기고 아부지도 장인도 다 그분 의 그림자였다." 순간 영광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부친 송관수가 하는 일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김환에 관한 것은 처음 듣는 얘 기였다. '아부지도 장인도 다 그분의 그림자였다.' 영광의 마음속에서 뭔가 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부친에 대한 이해였으며 종전과 다른 보다 굴절이 깊 은 송관수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것으로 대화는 끊기고 말았다. 휘는 더 이상 설명하려 하지 않았고 영광은 더 이상 물으려 하지 않았다. 이들이 홍의 처가로 찾아가서 홍을 만났을 때 영광은 몰라보게 수척해진 홍이를 보고 놀란다. "일부러 올 것도 없었는데." 말로는 그랬으나 그는 아주 반가워했다. 휘는 인사만 하고 돌아갔고 홍이와 영광이 사랑에 마주앉았다. "그간 별일 없었나?" "저야 뭐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진작 못 오고, 죄송합니다." "오고 가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매부한테 대강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일이 괜찮게 풀린다 하든데요." "그런 셈이지. 최악의 경우는 면했으니까." 홍이는 담배를 붙여물고 쓰게 웃었다. "만주 다녀오셨다면요." "음, 두 번." "그쪽 일은, 괜찮았습니까?" "대강 정리를 했다. 그리고 영구도 만나봤고, 건강하게 잘 있더군." "네, 형님은 만주로 다시 가실 건가요?" 영광은 묘하게 그 일에 대해 집착하는 것 같았다. "가야겠지." 하다가 "길은 초조해. 집사람이 저러고 있으니까, 병원에 두 번이나 입원도 했고, 나와도 당분간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럼 안 가시고 눌러앉으면 안됩니까." "그럴 수는 없다." 상의가 유자차를 내왔다. "자네 이 애 알지?" "네." "상의야 인사 안 하나?" "아저씨 안녕하세요." "음, 학교는 어떻게 했나?" "아직." 하고 상의는 다시 인사를 하고 나갔다. "애들 학교 문제는 어떻게 하지요?" "두 놈은 여기 소학교에 전학했는데 상의는 진주나 부산으로 가야 하니까, 아무래도 일년은 휴학해야 할 것 같다." "아주머니의 건강은 아주 나쁜가요? "약도 들여주고 아주 나쁠 때 병원으로 나오고 모두 백방으로 손을 쓰니, 공판이 며칠 안 남았다. 여자 몸이고 집행유예가 거의 확실하다." "불행중 다행입니다." "어서 일이 끝나야지. 처가에 이러고 있으니." 홍이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처가에서는 모두 깍듯하게 홍이를 대접해주고 있었다. 장모(김훈장의 딸 점아기)는 본래 평사리에서 홍이 를 본 뒤 사윗감으로 점을 찍었으며 임이네의 좋잖은 전력과 용이 상민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럼에 도 불구하고 혼사를 우겼던 사람이며 장인은 성품이 무던했고 처남 상화는 홍이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홍이는 혼인 초부터 장인의 외가편 양반들 드센 자존심에 질려 버렸고 그 외가에서 뒷배를 보아주어서 산청으 로부터 이곳에 옮겨온 뒤 가세가 펴기 시작한 처가 사정을 아는지라, 진작부터 개명하고 자산을 모은 그들 외 가 일족의 유세가 까끄럽지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장이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정사가 있었던 그 불미스런 차 고사건 때문에 면목을 잃은 홍이는 그간 보연이만 친정을 가고 왔을 뿐 그 자신은 발길을 끊고 살았다. 그 차 중에 이번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번 사건은 과거 불미스러웠던 일을 상쇄한 셈이었지만 그래도 홍이는 마음 편치 않았다. 아이 셋을 처가에 맡겨놓은 맡큼 자기 혼자 거처를 옮길 수도 없는 일, 만일 그랬다 가는 처가와 의절할 판국이니 꾹꾹, 불편을 누르고 있는 형편이었다. 다만 한시라도 빨리 보연이 나와서 거처 를 옮기는 일만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해도 기우는 모양이고, 우리 어디 가서 술이나 할까?" 홍이 말했다. "그러지요." 두 사람은 거리에 나왔다. 거리는 매우 한가했다. "바다하고 별로 인연 없이 살아 그런지 모르지만 나는 바다만 보면 왠지 불안해." 홍이 말했다. "현재 마음이 불안하니까 그렇겠지요. 저는 바다만 보면 가슴이 뚫려서 바람이 싱싱 지나가는 듯 아주 속이 후련해지든데요?" "글세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런 점도 있겠지. 사람이란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게 되는데 작년에는 자네 아버지가 세상 떠나고 올해는 또 생각지 않았던 일이 생기는 걸 봐서, 삼재라도 들었는지 몰라." "그래도 그 정도니 다행이었지요. 만일 형님이 다른 일로 붙잡혀 왔다면 어쩔 뻔했습니까." 영광의 말에 뭐라 해명할 듯하다가 홍이는 그만둔다. "형님, 술집도 어디가 어떤지 모르겠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아는 집이 있다." "아니 그러지 말고 우리 술 사가지고 매부집에 가는 게 어떨까요? 매부랑 함께 말입니다." "그거 좋지." 홍이는 동의했다. 이들은 정종 한되들이 두 병을 사고 고깃간에 가서 쇠고기 세근을 사 들고 간창골 입구 목 공소에서 휘를 불러내어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나 땜에 매부 일 못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영광이 말했다. "하루 쉬웠다고 굶어 죽겄나. 저승서 할아배 만나듯이 만내기 어려분 처남이 왔는데." 홍이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럼. 그런데 서로 말 텄군 그래." "답답해서 저가 트자 했습니다." 영광이 말했다. "잘했다. 형식을 너무 찾아도 정이 안 들지." 그 말은 처가를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어쨌거나 홍이는 오래간만에 해방을 맞이한 듯 매우 기분 좋은 표정 이었다. "자네는 처남이니까 만사 제쳐놓고 그런다 하더라도 나 땜에 김서방 일 많이 못했을거야." 휘를 김서방이라 부르며 말했다. 휘는 싱긋이 웃었다. "지가 뭐 한 일이 있습니까. 처음에는 장모님이 오시서 아닌 밤중의 홍두깨라, 어떻게나 서두시든지 머를 우떻 게 해야 할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홍이는 영광을 뒤돌아보았다. "자네 어머님께서, 나도 처음에는 놀랐지. 유치장에 있는 나한테 면회 오셨을 때, 그분 성질을 내가 어디 모르 나? 그야말로 영원한 새색신데, 오셔서 우시는 바람에 혼났다." 홍의 목소리는 좀 젖어 있는 것 같았다. "그라고 진규아부지가 욕봤지요." 휘는 모든 공을 영호에게 돌리려는 듯 서둘러 말했다. "아마 영호도 곧 퇴근하겠지. 네 사람 밤 새가며 술 마시자.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겠나." 결국 휘의 집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영선과 숙이 부엌에서 지지고 볶고 해서 술안주를 연방 들여가며 술시중을 드는데 영호가 나타나서 합세하게 되었다. 체격들이 좋은 한창 나이의 사내 네명이 앉은 방안은 그득했다. "이렇게 모이고 보니, 우연치고는 참 묘한 우연이구나." 홍이 말에 "무슨 뜻입니까?" 영호가 물었다. "모두가 기구한 운명이고, 김서방은 좀 다르지만 서로 그 한곳으로 인하여 얽혀져 있는 사람들 자손이다 그 말이지." 홍이는 상당히 취해 있었다. 그동안 절주한 탓도 있겠지만, 몸이 많이 상해 있었고 심리적 중압감도 심했던 모 양이어서 취기가 쉬이 돌았던 것 같았다. 술잔을 드는 영호는 침울해 보였다. 홍이 무엇을 얘기하려는지 짐작 이 갔던 것이다. 그 한곳이 어디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여기 앉아 있는 사내들, 모두가 제각기 신상 얘기를 늘어놓게 된다면 아마도 반세기 동안의 평사리 역사일 것이며 바로 최참판댁의 역사를 말한다 할 수 있을 게야. 김서방은 빼고, 우리 세 사람모두, 그렇지, 우리는 아 직도 그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우리들 마음은 항상 자연스럽지가 않았어." "와 지는 자꾸 빠져야 합니까." 그 말을 할 때 휘의 어투나 몸짓에는 김장사, 강쇠의 자취가 이썽T다. 영광은 냉소적인 모습으로 앉아 있었고 영호의 미간에는 비애와 분노가 감돌았으며 어느덧 방안에는 등잔불이 켜져 있었다. "우리 오늘밤은 속시원하게 탁 터놓고 술 마시며 얘기하자. 앞으로는 이렇게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 없겠 지....." 홍이는 다분히 감상적이었다. 유치하기조차 했다. 기구한 운명운운은 특히 그러했다. 끊임없는 균형과 긴장 상 태에서는 그는 무너지고 있었다. 단순한 어린아이들같이 네 편 내 편 가르려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기대려는 것처럼 나약함을 노정하고 있었다. 우선 만주에서 벗어났다, 그 느낌 때문에 의식이 해이해졌을 것이며 처가살 이 몇 달의 압박감도 적지 않았을 것이며 병든 보연이 영어의 상태라 노심초사, 그런 일들의 혼돈 때문에 이 순간 홍이는 무너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네 사람이 모인 것은 홍이 말대로 우연치고는 묘한 우연이었다. 내용에 있어서는 어찌되었든 대륙에 서 성공한 사업가 이홍, 악극단의 색소폰 주자요 작곡가인 송영광, 어업조합에 취직한 월급쟁이 김영호, 이 세 사람은 주권을 잃고 문간방에 밀려난 조선 사람들 처지에서 본다면, 또 면서기, 주재소 순사 한 자리만 해도 대단한 벼슬로 아는 가난한 사람들 눈으로 본다면 출세한 축에든다. 특히 홍이와 영광은 그 차림새에서부터 도시의 냄새가나고 문화적 감각과 생활을 누리고 있다 할수도 있을 것이다. 목공소를 차려서 자유업에 종사하 는 휘의 경우도 집칸 마련하고 밥을먹으니 그 또한 웬만큼 괜찮은 형편이라 할 수 있다. 네 사람은 이같이 직 업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고 지식의 형성 과정도 다르지만 이들에게 공통된 것이 있었다. 공통된 것이라기보다 운명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하는 편이 옳다. 그것은 물론 부모대에서 또는 조부대에서 시작된 것이며 시 세에 따라 부침하고 성쇠를 거듭한 최참판댁 명운과 무관하지 않고 일본의 침략으로 파생되는 사건과도 연관 된다. 만일에 최참판댁 청상 윤씨부인이 동학의 장수 김개주에게 유린당하여 김환이라는 어둠의 자식을 낳지 않았더라면 김강쇠는 숯을 굽고 화전을 부치고 광주리나 엮으며 무식한 산놈으로 살았을 것이다. 만일에 영락 한 무반의 후예 김평산이 최참판댁 당주 최치수를 살해하지 않았더라면 칠성이 연루되어 처형되지 않았을 것 이며 칠성의 아낙 임이네를 용이는 절망적 욕정으로 탐했을 리 없고, 따라서 홍이는 이세상에 태어나지 않았 을 것이다. 영호의 경우도, 아비는 형장의 이슬로, 어미는 살구나무에 목을 매고, 불시에 고아가 된 한복이 길 가 잡초같이 자라지 않았더라면, 저자거리의 거지 처녀를 만나 혼인하지 않았더라면 영호는 이세상에 태어나 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에 극악무도 한 친일파 조준구가 최참판댁을 집어삼키지 않았더라면 그집을 습격할 계 기는 없었을 것이며 송관수가 산으로 들어가 의병으로 쫓기는 신세, 백정네 집에 몸을 숨겨야 할 이유가 없었 고 백정네 딸의 미모에 끌렸든지 보신을 위해 그랬든지 하여간 영선네와 혼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영 광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 일본의 침략이 없었던들 김환은 항일의, 자국마다 선혈인 그 길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강쇠 또한 개도되어 김환의 그림자로서 그가 떠난 뒤에도 중천에 사무친 그의 한을 짊어지고 따가운 뙤약볕을, 스산한 바람 속을 걸으며 살인도 불사하고, 그렇다! 일본이 내 강산을 범하지 않았던들. 처음에는 의병이었고 형평사 운동에서 사회주의 문턱까지...... 그리고 송관수는 만주벌에서 삶을 끝 마감했고, 권속을 끌고 서희 일행을 따라갔던 용의 풍상, 항일의 기운이 팽배해 있던 간도땅에서 홍이는 감수 성이 가장 첨예했던 소년 시절을 보냈다. 한복은 아비와 그리고 애국지사를 악마같이 엮어간 형 거복(김두수) 의 죄업을 보속하기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형의 지위까지 암암리에 이용하면서 조선과 만주를 오가며 전령 노릇을 하고 자금을 운반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인도하기도 했다. 제국주의 일본의 동물적 탐욕은 그 얼마나 많은 조선 백성들의 운명을 바꾸어왔는가. 두메산골, 골짝골짝마다 핏줄같이 시내 흐르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유민이 되어 떠도는 이 그 얼마인가. 만주로 가고 중국으 로 가고 연해주로 가고 하와이 일본으로, 피값도 안되는 노동령을 팔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겄만 도시 에는 여전히 거지들이 떼지어 다니고 지게 하나에 목숨을 건 사대육부 멀쩡한 사내들이 정거장마다 부둣가마 다 허기진 눈빛으로 짐을 기다리고 있는 풍경, 바로 이들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이 방안에 앉은 사내들 부모들 이었다. 정면 돌파를 했든 측면 지원을 했든지 간에 그들의 유대는 동지로서 깊고 강한 것이었다. 그들의 열정 은 투명하고 깨끗했다. 고관 대작을 지냈던 자, 지주들, 친일파, 그들 자손들이 동경 유학길을 떠날 때 산간 벽 천에서 그들은 외롭게 싸웠으며 일본의 치졸한 문화를 묻혀와서 이 강산에 뿌릴 때 왈 신식이라 했던가? 이 무렵 강쇠는 때묻은 바지저고리 입고 광주리 엮어서 등에 메고 활동사진관 앞을 지나다가 왜놈한테 봉변을 당 하고 있었으며, 이 가난한 독립 투사인 아비는 술병 하나 들고서 첩첩산중, 눈 쌓인 지리산 골짜기를 지나면서 목이 터져라! "한오백년"그것도 두 구절밖에 모르는 가락을 되풀이하여 부르다가, 졸지에 잃은 딸아이 생각을 하다가, 죽은 지 오래된 김환을 소리쳐 부르며 욕설을 퍼붓다가, 눈길에 무릎을 묻고 울다가, 그러던 강쇠는 해도사 산막에 당도하자 술병 놓고 절 한번 하고 휘에게 학문을 가르쳐 줄 것을 우격다짐으로 부탁했던 것이 다. 수천 년 경험의 축적인 내 역사를, 수천년 풍토에 맞게 걸러내고 또 걸러내어 이룩한 내 문화를 부정하고 능멸하며, 내 땅에서 천년을 자란 거목을 쳐뉘며 서구의 씨앗 하나 얻어다가 심을 때, 어디 내것을 보존해야 한다는 논박이라도 나올 것 같으면 "뭐 까짓것 무당 푸닥거리 같은 짓거리, 개의할 것 없어요." 하며 그들의 사상을 계몽주의라 했었지. 송관수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진보적 식자라는 그들도 믿지 않았다. 형평사 운동으로 알게된 그 진보주의자들 역시 이론의 수식가가 태반이었으며 학식은 처세요 의복 같은 것, 일본서 한창 유행인 풍조를 옮겨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실정이었다. 결국 그들이 지니고 온 지식의 정체는 내 것을 부수고 흔적을 없게 하려는 것, 소위 개조론이며 조선의 계몽주의였다. 부지불식의 경우도 있었겠으나 동 경 유학생과 기독교와 일본의 계몽주의 삼박자는 잘 맞는 셈이었다. 일본은 숨어서 어떤 미소를 머금었을까? 주권과 강토는 이미 그들 수중에 있는 것, 내용이 문제 아니었을까. 창조의 활력인 사고와 관념과 사상, 즉 혼 의 산물인 유형 무형의 것들을 부수어내고 공동을 만들기만 한다면 일본은 손 안 쓰고 코 푸는 격, 그 텅텅 비어버린 곳에다가 괴상한 현인신이며 만세일계를 집어넣고 꾹꾹 눌러 다져놓는다면 조선족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이모, 최모, 그들 추종자들이 계몽주의 기치를 높이 쳐들고 눈가림의 두루마기 점잖게 입고 우국지사 로 거룩할 때 북만주 설원에서는 모포 한 장에 의지하고 잠들었을 독립군. 밖에는 밤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등잔불과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는 어쩐지 음산했다. 방문 을 열고 나가면 앞산에서 도깨비불이 오고가고 할 것만 같았다. 숙이는 진규를 데리고 초저녁에 제 집으로 돌아갔고 얼마 전에는 영선이 술과 안주를 방문 밖에 잔뜩 준비하 고서 "보소, 선아아부지." 소곤소곤 불렀다. 휘의 머리 그림자가 장지문 가까이 왔다. "마리에 다 준비해놨인께 술 떨어지믄 딜이가이소." "알았이니 임자는 들어가 자는 기이 좋겄다." 그도 소곤소곤 말했다. 작은방으로 들어간 영선은 아이들과 함께 깊이 잠이 든 모양이다. 밤은 깊어서 아마 새벽, 닭이 울 시각쯤 된 것 같았다. 휘는 주인답게 단정한 모습으로 절도 있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영광은 아무래도 영호가 초면일 뿐만 아니라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던지 술잔을 자주 들며 이들 분위기에서 눈을 감으려는 태도였다. 영호는 평사리 최 참판댁 얘기가 나왔기 때문인지, 쓰라린 기억 열등감을 달래기 위하여 마구잡이로 술을 마시는 것 같았다. 홍 이는 취기만 충전해 있었을 뿐 술을 마시는 도수는 더디었다. "영호야!" 홍이 불렀다. 목소리나 몸짓이 흐느적거렸다. "왜요?" 영호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술을 마시는데 왜 그리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가." "뭘 어쨌기에요? 하하핫." 영호는 헛웃음을 웃었다. "칡범 같은 상판을 하구서, 뭐, 뭐가 그리 못마땅한 거야." "형님 말씀대로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해서 그런가 부지요?" "애키! 노래미 창자 같은 놈, 왜 그리 사내 자식이 쫄아들었어? 이방에 열등감 안 가진 놈이 있어? 없다 없 어." 하고 팔을 휘휘 젓는다. "아니오. 이 중에서도 지가 젤 중죄인인 것 같소." 하자 영광은 술을 핑계하여 "아까부터 형님 말씀 유치하다 싶었습니다." 하고 한 대 먹인다. "뭐라? 내가 유치하다고? 그럴 테지. 아아 그럴 게야. 이게 내 본색이다. 자네가 만주서 본 이홍은 말짱 허상 이다 그 말이다. 허상, 허리띠 죄고 노상 똑바로 쳐다보고, 계집질하고 헌병대 끌려가서 뚜딜겨 맞고 집에서는 분탕질하고오, 영광이 자네 소싯적하고 꼭 같은 거였다. 유치해도 좋고 잡놈이라도 좋고 어디 숨 한번 크게 쉬 어보자!" "송형도 형님 말하는 대로 그랬습니까?" 영광은 쓴웃음만 띤다. 영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도저히 그럴 사람같이 뵈지 않는데요?" "어떻게 뵈는 사람이 그러지요?" "그야...... 하기는 관수아저씨도 쌈꾼이기는 했지만 도덕적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 같긴 했소." "영호 자네 말뜻은, 계집질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야 당연하지. 그렇게 생겨가지고 어느 계집이 품에 안기겠 나. 흥! 저승에나 가서 실컷 그짓하지 흥!" "그렇다기보다...... 욕설을 한번 꺼내면 육두문자가 다 나오는데 여자에 관해서만은 아주 깨끗한 것 같아서요." "니가 어떻게 알어? 관수형 한창일 때 넌 머리빡의 쇠똥도 안 떨어졌어. 만고풍상 다 겪었는데 남자치고 한두 번 그런 일이 와 없을까." "형님이 왜 그러는지 이제 알겠소." "니가 뭘 알긴 알어. 이 병신아." "김형도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그 유명한 사건이 그냥 잠자코 있을 것 같습니까?" "흥! 까짓것! 잠 깨려면 깨라 하지. 내 속에서는 사라지고 없는걸." "거짓말 마십시오. 송형은 모르지요?" "뭐 말입니까." "신기할 것 뭐 있소. 로맨스, 하하핫핫......" "말이 로맨스지. 실은 포복절도할 일이었지요. 순전한 희극 말입니다." "입 다물지 못하겠어!" 홍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영호는 먹이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설레는 것 같았고 기분 전환을 한 모양이다. "씨원하게 터놓고 얘기하자 해놓고서 왜 이럽니까? 더군다나 형님 속에서는 사라지고 없는 일이라면요?" "없다 없어! 고릿적이다, 없어진 지가." 영호는 킬킬 웃는다. 아주 완전히 영호의 기분은 달라져 있었다. 휘는 앉은 채, 눈을 뜬 채 잠이 들었는지 아 무 반응이 없었다. " 송형 내 말 좀 들어보시오." 영호는 술을 마셨고 본격적으로 시작할 채비라도 차리는 듯 침을 꿀꺽 삼켰다. 영호가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다. 늘 뭔지 걸리고 속으로 편치 않아하는 기색이 보이기 일쑤였으니까. "장가 전에 형님한테는 애인이 있었지요." 허두를 떼는데 홍이는 입속말처럼 "자알 논다." "그 얘기는 진주서 유명했어요. 물론 형님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이웃에 사는 처녀였는데 함께 도 망가자, 형님 그랬지요?" "몰라." "그러나 처녀 집이 너무 가난하여 오라비를 장가들이기 위해 처녀가 정혼을 한 겁니다. 흔히 있는 일이지요. 남자 집에서 여자를 탐낼 땐 말입니다. 그러니까 형님의 옛 애인은 혼처에서 보내온 예물을 이미 오라비 장가 들 집에 보낸 뒤라 어쩌겠어요? 도망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네. 하여간 그때 형님은 비뚤어지고 난폭하고 성질 나빴습니다. 영팔이할아버지가 한탄하시는 얘길 나도 들었어요. 간도에서는 그렇게 순하고 착했는데 아이 가 와 저 모양 돼가는지 모르겠다 하더군요. 어쨌거나 좋은 집안에 장가들어서 그런지 지금은 용이 됐지만." "잘 논다 잘 놀아." 그러나 역시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모두 점잖아졌다고 칭찬이 자자했는데 그만 일이 터져버렸지요. 그때 형님은 진주에서 통영을 내왕하는 도라 쿠를 몰았소. 통영에 와 있던 것이 동티였지요. 일본서 온 엤 애인의 시가편이 통영에 와 있었고, 옛정을 못 잊어 한밤중에 형님이 자고 있는 차고로 찾아온 거요. 일 터지게 돼 있었어요. 다음은 상상에 맡기기로 하고 문제는 옛 애인 시가에서 쳐들어왔다 그 말입니다. 독안에 든 쥐 꼴이지 뭐겠소? 포복절도할 광경이 벌어졌다 그 말입니다." 영호의 얘기는 하나도 재미없었다. 본시 언변이 시원치 않아 표현이 부족한 탓이겠는데 애정 문제, 남녀 관계, 그런 미묘하고도 섬세한 부분에 대하여 감성이 무디다고나 할까 촌스럽다고나 할까, 그것에 원인이 있을 것 같다. 사람됨이 저속하다 할 수는 없지만 고상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똑 떨어지게 상식적인 인물도 아 니었다. 매사가 어정쩡했다. 영호가 광주학생사건이 터졌을 당시 진주농업학교에서 운동에 앞장섰던 것은 순전 히 송관수와 정석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로서는 가장 화려하고 꽃다운 시절이라 할 수 있었다. 죽은 할머니 함 안댁을 닮았는지 턱없이 외곬인 경우가 있고 모질지도 않으면서 서툴다 보니 남에게 상처를 줄 경우가있었다. 못생긴 한복이와 저자거리를 헤매는 거지 출신이지만 반반한 인물의 어미를 반반씩 닮았는가, 영호는 네 사람 중에서 용모는 좀 빠지는 편이였다. 하여간 애당초 화제 자체가 영호에게 걸맞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그 사건 은 비참한 것이었지만 한편 매우 희극적인 것이기도 했다. 입담 좋은 사람 입에 올려졌다면 능히 배꼽 잡고 웃을 만한 일이었다. 남녀가 속옷바람으로 화물자동차 밑에 숨은 광경이나 쳐들어온 장이 시가 식구들( 시부 모는 진작 돌아갔고 친척들)중 남정네는 홍이를 끌어내어 매질을 했고 여자들은 장이 머리끄덩이를 잡아끄는 가 하면 구경꾼들 앞에서 남녀의 비행을 손을 꼽아 열가하며 일장연설, 죽이느니 살리느니 구경꾼들은 또 구 경꾼대로 고발을 해야 한다, 악대값을 내야 한다, 시끌벅적 떠들었다. 그러나 전보를 받고 일본서 달려나온 장 이 남편이 소리 소문 없이 여자를 데리고 갔기 때문에 일은 끝났지만 홍이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수치심 을 남겼다. "결국 그 여자는 못 살았다 하지요? 그것도 여자 쪽에서 내쳤다하든지." 영호 말에 "물정 모르는 줄 알았는데 미주알 고주알 아는 것도 많다." 홍이 한 말이었다. "그 후 어찌 되었을까요? 형님은 그 여잘 만나봤어요?" "니 주제에 뭐가 알고 싶어 꼬치꼬치 묻는 거야? 가서 잠이나 자아." "사람 괄시 마시오. 오장육부가 성한데 지라고 알고 싶은게 없겠소? 알면 안됩니까?" "그래? 알고 싶다...... 말해주지. 죽은 사람 소원도 풀어주는데 까짓것 산 사람 소원 못 풀어줄 것도 없지. 신경 에 한번 찾아왔어. 형편없는 꼴을 하구서." 홍이는 마신 술에 못 이기는 듯 벽에 기대어 한다리는 무릎을 새우고 한 다리를 뻗고 있었다. 그 모습은 모든 것을 풀어헤쳐 놓은 것 같았다. 영광은 영호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 홍이에게 주의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영 딴판이다.' 작년 만주에서 만났을 때 홍이를 현재의 모습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했고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리고 길림에서 부친의 부고를 받고 신경으로 되돌아온 후, 장례식에서부터 일체를 홍이 관장했는 데 일처리가 명쾌하고 민첩했으며 신경이 구석구석까지 미쳐서 아무런 차질이 없었다. 그는 중후했으며 자신 의 감정은 여간하여 드러내놓지 않았고 어느 면으로나 사나이다웠다. 결코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영광 은 눈앞에 자신을 풀어젖혀 놓은 상태로 수습할 수 없을 만큼 망가진 홍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몰라 모게 수척해졌다거나 얼굴이 황폐하여 감정이 고갈된 것 같다거나, 그런 것 보다 뭔가 본질적으로 사람이 변 한 것 같았다. 영광의 눈에는 두 손 들고 항복한 사람같이 보였다. 기구한 운명이니, 계집질이니 하는 따위가 벌써 홍이 자신의 언어가 아니었다. 병약한 아내가 영어 상태니까 노심초사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나 저렇게 무 너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영광의 생각이었고 처가의 중압감 역시 다소간 차이는 있겠으나 더러 겪는 일이며 경찰서에서 받는 심리적 시달림은 홍이 해온 일에 미루어본다면 오히려 경제 사범쯤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 기 때문이다. "으흐흣!" 고개를 떨군 홍의 입에서 나온 흐느낌이었다. 아무리 취중이기로, 기절초풍할 법한 사람은 휘었다. 앉아서 비 몽사몽하던 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이러십니까!" "왜 그러긴, 옛 애인 생각을 하여 우는 거 아니겠소." 영호가 짓궂게 말했다. "당치도 않은 말, 처남 이선생이 왜 이러나." "글세 많이 취한 모양이다." 영광이 입맛을 다시며 대꾸했다. "나 취하지 않았어." "이러실 분이 아닌데, 누구 돌아가신 분이라도 생각나서 그럽니까." 휘는 슬그머니 앉으며 말했다. "하기는 거기 가서 우는 게 순서인데." 거기란 평사리 부친의 무덤을 가리켜 한 말이다. 말은 천연스러웠다. 그러나 홍은 한동안 흐느꼈다. 영호도 입을 다물었다. 모두 심상찮은 홍이 행동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나 만주로 돌아가기 싫어서 그래." 뜻밖의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가기 싫으면 안 가는 거지요. 뭐, 집도 장만했으니까 여기 눌러 사십시오." 영광이 말했다. "아니다. 여기 눌러앉다니? 견딜 수 없을 거야. 조선에 남아 있다는 것은 더욱더 견딜 수 없을 거야." 그러더니 홍은 일어섰다. "나 가야 해." "가시기는 이래 가지고 어딜 가십니까." 휘가 따라 일어서며 홍의 팔을 잡았다. "가야 해." "그럼 지가 뫼시다 디리겄습니다." 영호가 일어섰다. "나도 가야겠군." 영광이 부스스 일어섰다. 모두 마당으로 나갔다. 그새 비는 그치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소쩍새가 울었다. 다 가고 영광이 혼자 방으로 돌아와 어질러진 술상을 밀어붙이고 팔베개를 하며 누웠다. 소쩍새가 계속 울었 다. '홍이형님의 울음은 무엇일까? 그게 한일까? 자기 생애를 돌아 본 슬픔일까?' 무너진 듯한 모습도 그랬고 그의 흐느낌도 그랬다. 그러지 않을 사람이 그랬다는 것에 영광은 충격을 받았다. '이번에 만주로 만나게 되면 못 돌아올 것을 예감한 때문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영광은 괴로운 잠에 빠져들었다. 영광이 눈을 떴을 때는 한낮이었다. 방에는 어질러졌던 술상은 다 치워져 있었고 자신은 이부자리 속에 있었 다. 맨 먼저 눈앞에 떠오른 것은 흐느껴 울던 홍이 모습이었다. 어디선지 홍이처럼 얼던 사내를 본 것 같은 생 각이 든다. 어디서 보았든지, 그가 누구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담배를 붙여물고 영광은 방문을 열며 마루로 나갔다. "오빠 일어났소?" 영선이 부엌 쪽에서 달려왔다. "해가 중천에 떴구나." 영광은 누이를 쳐다보며 겸연쩍게 웃었다. "무신 술을 그리키 마십니까? 몸 망가지겄소." "밤낮 마시는 것 아니다." "그래도 그렇지요. 아침에 김서방보고 성을 냈십니다." "매부는 일 나갔나?" "기다리다가, 나갔소. 오빠 어디 갈라 카믄 목공소에 들리라 하더마요. 어디 구겡 안 가겄소?" "구경은 무슨, 서울로 가야지." "뭐라 캤소? 오늘 말입니까?" 영선은 다그쳐 물었다. "내일쯤 떠날까 싶다." "서울로?" "..........." "엄니는 우짜고 EJ난다 말이오." 올곧잖은 목소리다. "아무튼 좀 있다가, 지도 할 얘기가 있인께." 영선은 부리나케 부엌으로 간다. 그새 영광은 세수를 했고 영선은 상을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밥 먹을 생각없는데." "술을 그렇게 마시고 속이 아무렇지도 않소? 멩태국 끓있인께 밥 한술 말아서 잡사아보소." "그럼 마루에 놔." 영선은 상을 내려놨고 그리고 자신은 마루에 비스듬히 걸터앉는다. 밤에 내린 비 때문에 사방은 씻긴 듯 맑았 다. 맞은편의 산이 산뜻하게 푸르렀으며 하늘높이, 낮게 새가 날고 있었다. "내일 간다는 거는 말도 안돼요. 엄니도 안 보고 가겄다 그 말입니까?" "........" "그냥 가신 거를 엄니가 알아보시소. 얼매나 상심하겄소." "......" "아부지 기실 때하고는 다르요. 나도 오빠 만나믄 참 할말이 많았는데 이렇거ㅔ 대하고 보이 할말은 다 달아 나고." "하나마나 원망이겠지." 영광은 국을 먹으며 말했다. "지나간 일이사 머, 말하믄 머하겄소. 이자부터는 오빠도 생각 좀 달리해야 안하겄소? 엄니 편지 받아서 알겄 지마는 아부지가 남긴 재산이 수월찮다 카니 집도 사고 장개도 들어야제요." "장가를 들어?" 영광은 쑥스럽게 웃었다. "그라믄 평생 장가 안 가고 혼자 살 깁니까? 그라고 엄니를 절에 저렇게 놔둘기요?" "........." "엄니가 절에 기시겄다, 그런다고 해서 자식된 도리, 모리는 체 해도 되는 일입니까?" "집도 어머니가 오셔야 사든지 하지, 나한테 집이 무슨 소용 있나" "그런께 이분에, 오신 김에 산에 다녀서 가시이소." "어머니 고집을 누가 꺾어." "꺾든지 안 꺾든지 하여간 엄마 만나고 가야 할 기요." "알았다. 조막만한 게 웬 말이 그리 많아. 니 남편한테도 그렇게 쫑알대나?" 영광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김서방이사 머, 쫑알거릴 짓 안하요. 사람이 점잖고." "김서방은 점잖은데 오라비는 점잖지 않다 그 말이야?" "아이구 참, 그런 뜻은 아니고요." 영선은 당황한다. "괜찮다. 난처해할 것 없어. 사실이 그러니까. 매부는 내 보기에도 군자 같다. 아버지가 눈은 작아도 사위는 잘 고른 성 싶다." "오빠도 참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상을 물리며 "아이들은 다 어디 갔나? 어제 작은놈 잠시 보고는." 선아는 핵교에 갔고 그 아아는 도모지 집에 붙어 있지를 않소. 진규하고 개울에 갔는가 배요." "살기는 어때?" "남 줄 것은 없지마는 사는 거사 이만하믄, 남한테 아쉬운 소리는 안하고 사요." "그럼 됐다." "엄니도 니 걱정은 없다 하더마요." "그럼 어디 나가볼까?" 영광은 일어섰다. "시내 구겡하실라 카믄 목공소에 가서 김서방 불러배소. 음식 잘 하는 집도 알고, 제발 술은 그만하는 기이 좋 겄소."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뭐." 영광이 삽짝을 나서려 하는데 "오빠." "또 왜?" "엄니 만나보고 가는 거 약속했소." "그래." 영선은 만족한 미소를 띠었다. "이 근가죽을 돌아볼라 카믄, 충렬사에 가보소." "충렬사?" 영선은 따라나왔다. "저기 보이지요? 동백나무가 줄지어 있는 곳, 저기 충렬사가 있소.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오." "그래." "하지마는 아마도 안에는 못 들어갈 깁니다. 동백꽃 피었을 때는 볼 만했는데, 아직은 꽃이 좀 남아 있을 성싶 은데." 영광은 뒤통수에 대고 하는 영선의 말을 들으며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돌이 여기저기 굴러 있는, 넓지 않은 길 을 따라 평지로 내려왔다. 큰 빨래터가 있었다. 여자들이 빨래를 하며 재잘거리고 있었다. 빨랫방망이 소리 여 자들의 웃음 소리 부서지는 햇빛, 영광은 어제 부둣가에서 그 신선한 삶의 활력을 되새겨보는 것이었다. 삶의 의미, 가능성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다가 영과은 다음 순간 그것은 남의 인생이라는 강한 부정에 빠 지는 것이었다. 남이 바라보는 자신의 있는 모습이 결코 진실이 아니라는 선에서부터 출발하여 영광은 빨래터 에 다시 시선을 던진다. '그렇다, 바로 내 시계에 저들 모습이 들어왔고,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들이 시가 아닌가. 한다면 시는 진실인 가!' 영광은 걸읆을 옮긴다. 길 양편에 우뚝우뚝 서 있는 동백나무는 울창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영광은 동백 나무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곧장 가면 사당이 나타나겠지만 영광은 나무 등걸 밑에 엉덩이를 박고 담배를 꺼 내어 붙여문다. 담배연기를 날리며 영광은 생각한다. 이 고장의 성지인 이곳이 악랄한 일본으로부터 어떻게 지 켜지고 있는지 그것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굳게 닫혀진 사당 문을 멀리 바라보며 영광은 바로 이곳 지형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통영 시내로 가자면 서문안 고개를 넘어서 간창골을 빠져나가야 시내에 나 간다. 간창골 일대 서문안 고개에도 집은 옹기종기 들어서 있었다. 특히 서문안 고개는 가난한 초가들로 이루 어졌고 그곳에서 충렬사로 이르게 되는 내리막의 골짜기는 대개 가난한 서민들의 주거다. 마치 분지 속에 그 가난한 백성들에게 옹위되듯 충렬사로 이르게 되는 내리막의 골짜기는 대개 가난한 서민들의 주거다. 마치 분 지 속에 그 가난한 백성들에게 옹위되듯 충렬사는 자리하고 있었다. '한 위인이 살다간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서가 아닐까? 시일까? 타인에게 투영된 그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갖가지 정서로 재생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자체는 보는 사람에게는 풍경이며 시다. 위대하다는 그 자체가.' 영광은 밑도 끝도 없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고 언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사념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5장 황량한 옛터 "올 줄은 알고 있었다마는, 오는 날이 장날이더라고, 동네가 시끌 시끌하다." 모시 두루마기에 낡은 여름 모자를 쓴 연학이 말했다. 나룻배에서 꾸러미 하느를 들고 내린 홍이 동네 어귀에 들어섰을 때 연학을 만났고 연학은 봉기노인이 간밤에 세상을 떠나 문상갔다 나오는 길이라 했다. 연학은 보 연의 외사촌 김범석과 함께 통영을 한번 다녀왔기 때문에 홍이 만주서 온 후 처음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장수하셨지요 그만하면. 돌아가실 때도 됐습니다." 홍이 말이었다. "하기야 머 원없이 살기는 했제. 옛날에는 욕심 많고 심술궂기로 호가 난 호인이었으나 지금 인심 돌아가는 꼴을 보믄 그래도 그 시절이 좋았든갑다. 마을에는 기강이 있었고 범우 장다리 겉은 장정들이 있어서 조준구 를 직이겄다 했고 의병질도 했고....... 그 시절의 마지막 가는 사램이 봉기노인 아니겄나? 서분코, 허전하고 그 러네." "진주에 영팔아저씨가 살아 계시지요." "하기야, 통영에는 그놈, 조준구도 살아 있다 하니." "거기도 멀잖다는 얘기였소. 이제는 아들한테 횡패 부릴 기운도 없고 정신도 이문가문하다 하더군요." "가만히 생각해보믄 모든기이, 모래밭에 밀려오는 물결 같은 기라. 갔는가 싶으면 오고, 오는가 싶으믄 또 가 고, 편한 것도 잠시, 지금은 이 동리가 우가놈 집구석 땜에 편할 날이 없다. 그는 그렇고 자네 어디부터 갈 기 고?" "집에 가야지요." 집이란 지금 성환할매가 살고 있는 그 옛날의 집을 말한다. 정확하게는 용이 살다가 죽은 그 집을 말하는 것 이다. "떠날라꼬 작별하러 왔나." "그런 성싶소" 한동안 걷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연학은 걸음을 멈추었다. 모자를 벗고 땀을 닦는다. "성묘할라 카나?" "네." "하기야 아부지 산소가 없었이믄 머하러 니가 여기 오겄노." "그건 그렇습니다." "그라믄 나중에 보자." 그들은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연학은 동네가 시끌시끌하다 했으나 홍이에게는 동네가 설렁했다. 상가에 간 사 람도 있을 것이고 들판에 일하러 나간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마을은 텅 비어버린 듯 오가는 사람이 눈에 띄질 않았다. 높은 나무 사이 까치집 옆에서 이따금 까치가 지저귈 뿐 이상한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었으며 돌이 굴러 있는 마을길에 따가운 햇볕만 내리쬐고 있었다. 마당에서 서성대고 있던 성환할매가 들어서는 홍이를 보고 깜짝놀란다. "성환할머니, 그간 별고 없었지요." 홍이 꾸러미를 마루에 놔두고 인사를 한다. "니, 니가 그런께." "네, 지가 홍이 아닙니까." "그래 니가 홍이다!" "......" "맞다! 니가 홍이다. 안 죽고 산께 니를 보는구나!"] 성환할매는 홍이 손을 잡았다. "올라갑시다." 홍이 떠밀 듯 성환할매를 마루로 올려보내고 자신도 신발을 벗고 올라간다. "절 받으십시오." "무신, 그만두자." "아닙니다. 자아 낮으시오." 홍이는 절을 하고 자리에 앉는다. 성환할매는 하염없이 울었다. 물론 아들 석이 때문에 우는 것이다. "집에는 혼자 계시는 모양이지요?" "성환이는 진주 가서 중학에 댕기고 남히는," 하다가 흐느낀다. "그런께 남희는 부산 가서 여핵교에 댕긴다. 귀남어미는 상가에 일하러 가고 그래서 혼자 안 있나." 치맛자락을 걷어서 눈물을 닦고 성환할매는 물었다. "점심은 우떻게 했노." "읍내서 먹고 왔습니다." "아닌게아니라 한복이가 통영 갔다 와서 니 소식을 전해주기는 하더라마는 니 안사람은 우찌 됐노?" "나왔습니다. 진작 온다는 것이, 아이에미가 아팠고, 또 이사하느라 바빴고." "와 안그렇겠노. 거기가 우떤 곳인데, 남정네도 아니고 예인네가 있일 곳이가. 아무튼 나왔다니께 잘 됐다. 세 상에, 한복이가 갔다와서 얼굴이 말이 아니라는 말을 하더라마는, 그 좋은 인물이 와 이리 됐제?" "세월이 가니까, 조선의 물이 저한테 맞지 않는 모양이지요." 홍이 웃으며 말했다. "참 봉기 그 늙은이가 간방에 죽었다." "오면서 들었습니다." "그래? 그라믄 잠시만 앉아 있거라. 머, 입가심이라도 해야지." "아닙니다. 앉으십시오. 성환할머니한테 드릴 말씀도 있고." 드릴 말씀이 있다는 말에 성환할매는 긴장한다. "지가 만주로 떠나게 되면 성환할머니를 만나기는 힘들 겁니다." "만주로 또 갈라 카나?" "예." "한복이 말로는 그쪽 일은 정리했다 카든데." "새로 또 시작해야지요." "그만 여기 살지. 가기는 와 갈라 카노. 그라믄 집은 와 샀을꼬?" "식구는 두고 갈 겁니다." 식구를 두고 간다는 말에 성환할매 표정이 심각해진다. '그래 성환애비도 식구들을 두고 갔제. 그런 연후에는 이날 이적 소식도 없고 니도 그럴라 카나? 홍아.' 그럴라 카나, 그것은 독입운동을 말하는 것이었다. "실은 오면서도 망설였습니다. 역시 말씀 드리고 가는 것이." 성환할매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그는 석이 죽었다는 말을 홍이 할 것 같았던 것이다. 작년 여름 송관수가 죽은 것처럼. "석이형님은 무사히 계십니다." "머, 머라! 그라믄 우리 석이가 안 죽고 살아 있다 그 말가!" "네." "니가 만났더나!" "지도 석이형님을 만난 지는 오래됐고 지난번 사업 정리하노라 만주 갔을 때 하얼빈에 계시는 선생님이 말씀 하시더군요. 석이형님이 며칠 전에 다녀갔다고." "그, 그래, 어이구." 성환할매는 또 울었다. "성환할머니께서 명심해야 살 일은 절대로 이 말을 입밖에 내서는 안됩니다. 여러 사람이 다칠 거고 아이들한 테도 큰 해가 미칠것입니다. 봉기노인 돌아가셨다는 얘길 듣고 보니 이 말 안하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안다, 알고말고. 와 내가 그걸 모릴 기고. 한복이나 잔서방이 입꾹 다물고 있었지마는 성환 애비가 만주 갔일 기라는 짐작은 벌써부터 했고, 하지마는 이날 이적지 그 말을 입밖에 낸 일은 없었네라. 손자들한테 해롭다는 것도 다 알고 있다." "지가 잘한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걱정마라.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 하든 이를 악물고 사셔야 합니다. 형님을 만날 때까지." "내 생전에 만나겄나?" "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힘들 겁니다." "일본이 망하는 것 말이제?" 성환할매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홍이는 고개를 끄덕이다. 홍이는 마루에 놔둔 꾸러미를 끌러서 따로 산 것을 내놨다. "읍내시장에서 떡을 좀 샀습니다. 굳기 전에 잡숫고, 지는 산에 가볼랍니다." 하며 나머지를 싸들고 낫을 빌린 홍이는 집을 나섰다. 강가 후미진곳을 찾아 내려간다. 마직 양복을 벗고 속옷 도 벗고 홍이는 물을 끼얹으며 물속으로 들어간다. 푸르고 맑은 섬진강 강물. 홍이는 몸을 씻으며 주갑을 생각 했다. 새타령의 가락을 생각했다. 나룻배가 올라 목을 내밀었을 때 나룻배는 지나가고 있었다. "시원하겄소!" 나룻배의 사공 목소리가 맑은 햇빛을 뚫고 울려왔다. 그리고 배는 하류를 향해 내려갔다. 맞은편은 전라도 땅, 강물에 기슭을 적신 가파로운 산에는 수목이 울창했다. 백로가 환상같이 흰 깃을 펴고 날아간다. 산기슭에 잠 긴 물빛은 산그늘 때문인지 푸르고도 녹색이다.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이구나.' 하얼빈에서 신경까지, 언덕 하나 없는 광활한 대륙이 눈앞에 떠올랐다. 숨이 막히게 끝이 없었던 광막한 대지, 그것은 어떤 공포감이었다. 홍이는 영광에게 바다는 불안하다고 말했다. 만주의 그 끝없는 벌판을 연상했기 때 문일까, 아니면 들고나고 하는 배들의 그 뱃고동 소리 때문이었을까. 떠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은 더욱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보연이 나오면서 홍이는 차츰 전과 같이 침착해졌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으나 사실 그는 떠나는 데 있어서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 싸워야 하는, 전부를 내던져 서 싸워야 사는 신념에 대한 회의였다. 그러나 그 회의는 그를 조선에 주저앉힐 만큼 큰 것은 아니었다. 어쩌 면 회의라기보다 홍이 지신의 인간적인 약점이었는지 모른다.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이로구나!" 이번에는 목소리를 내어 말해본다. 그리고 이곳 이땅에서 씨앗이 하나 떨어져 자기 자신이 생겨난 것을 새삼 스럽게 깨닫는다. 아주 어렸을 적에 기억조차 없는 어린 시절말고는 고의 홍이에게는 추억이 없는 땅이다. 아 버지가 살아 있을 때 명절이면 찾아왔고 아버지랑 함께 성묘하던 일말고는 싸움을 말리다가 우서방이 휘두른 칼에 맞았던 것이 두드러진 기억이었다. 물속에서 나왔다. 옷을 입으면서 산천은 무릉도원이나 사람은 무릉도원에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순간 가슴 을 저리게 한다. 산으로 올라온 홍이는 할아버지 묘부터 벌초를 하고 제수를 차린 뒤 절을 했다. 다음은 할머니 무덤을 풀을 깎고 제수를 차린 뒤 절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 묘에 제수를 차린 뒤 홍이는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엎드려 있 었다. '아버지, 지는 만주로 갑니다. 왜 가는지 아시지요. 다음부터는 상근이 상조가 할아버지 뵈로 올 겁니다.' 맨 마지막에 벌초를 하고 제수를 차리고 홍이 절을 한 무덤은 강청댁, 보지도 않았던 큰어머니의 무덤이었다. 산을 내려오면서 용정촌에 있는 월선의 무덤을 홍이는 생각했고, 무덤도 없이, 화장한 생모 임이네에게 홍이는 강한 연민의 정을 느낀다. 김훈장댁에 홍이 들어갔을 때 "이게 누고? 이서방!" 마당에서 보리를 펴 말리고 있던 처외숙모 산청댁이 반가워하면 일어섰다. "아범아! 아범아! 이서방이 왔다!" 까대기 속에서 농기구 손질을 하고 있었던지 범석이가 나왔다. "매부 왔어?" 범석이 싱글벙글 웃었다. "숙모님 절 받으셔야지요." 홍이 말했다. "아니다. 이 꼴 해가지고 절은, 사랑에 가게. 거기 가서 인사 올리면 된다." 범석이 손을 털며 앞장섰다. "요즘 건강은 어떠시오." "아버님 말인가?" "네." "들일은 못하시지." 사랑으로 간 범석은 "아버님 통영서 이서방이 왔습니다." 하자 방문이 덜거덕 열리며 한경이 내다본다. 머리가 하얗게 돼 있었다. 책을 읽고 있었던지 돋보기 속에서 눈 을 치뜨고 있었다. "이서방 올라오게." 했다. 방으로 들어간 홍이 절을 했다. "이번에는 여러 가지로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말이다. 미안하네." 한경은 아주 힘들게 말했다. "보연이가 나왔다는 얘기는 들었고 이사는 했나?" 범석이 물었다. "했습니다." 하자 한경은 아들에게 "술상 내오라 하지." 역시 힘들게 말했다. 한경으로서는 회대한의 환영의 표시였다. "말 안해도 내올 것입니다. 어머님이 이서방 오는 것을 보았으니까요." 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주까지 가서 기어이 김훈장 유해를 이장해온 사나이, 사람이 좀 모자란다 했던 한 경의 생애는 양부 김훈장에 대한 효도와 일문을 지키는 데 한치 소홀함이 없었다. 지금도 그는 선영 봉사를 위해 존재하듯 그 일에 대해서는 한치의 오차도 용서치 않는 엄격함을 견지해온 사나이다. 그는 원래 노총각 이었으므로, 마누라 산청댁과는 상당히 나이 차가 있었고 범석이도 늦게 본 자식이라 할 수 있었다. "만주에 안 갈 건가?" 한경이 말이 없으니까 범석이 물었다. "가야지요." "단신으로?" "네." "거기 사정은 어떤가? 무슨 기미라도 있나." "오래 가지는 못하겠지요." "그럴 거다. 오래 갈 수는 없지." "형님은 국내 사정을 어찌 보십니까?" 홍이는 범석의 눈을 주시했다. "전쟁이 끝나는 데 달린 거지. 힘을 모은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어느 정도의 조선인 손상 으로 끝나는가 그것만 남았어." "아버님이 계셨더라면 통탄하실 일이 동네에서도 매일 벌어지고 있다." 한경은 또 어렵게 한마디 했다. 그러고는 세 사람이 침묵하는데 범석의 처가 홍이에게 인사를 하며 술상을 들 여왔다. 홍이로서는 도저히 사양할 수 없는 술상이었다. 한경이 얼마나 마음먹고 술상을 내오라, 아들보고 말 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홍이는 한경의 술잔에 술을 부었다. 마치 그것은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경은 술을 마시고 술잔을 상 위에 놓으면서 말했다. "내 소원은." "............." "일본이 망한 것을 아버님 산소에 가서 고하는 그것이 내 소원이다." 한경이 눈에 눈물이 어리었다. "만리 타국에 가셔서 뼈를 묻으신 아버님의 비통함을 범석이도 잊어서는 안되는 일이나, 그곳에서 이서방은 보아오지 않았는가." "네." "추호, 아버님 뜻에 어긋남이 없게 하여라." "네." "이서방은 할 일 하고 있습니다. 아버님." "그래, 그걸 내가 알지." 한경은 드물게 웃었다. 그러나 웃고 있던 한경이 별안간 당황하기 시작했다. 한쪽 입술이 실룩실룩 거렸다. 그러는 것은 감정이 절실 한데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경우의 버릇이었다. "아버님." 범석이 안정시키려는 듯 조용히 불렀다. "음, 그,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안했는지." "......" "이상하구먼. 왜 그 생각을 안했는지......시, 실은 돌아가신 아버님한테는 이서방이 예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째 이제야 깨달았을꼬?" "무슨 말씀이신지." "나, 나는 너희들도 잘 알다시피 김씨 가문이 절손 지경에 이르러 들여놓은 양자 아니나. 철을 따진다면 팔촌 도 넘을 게야."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서방은 달라. 아버님 외손녀의 배필 아니더냐?" "그렇습지요." "아버님이 이 세상에 남겨놓고 가신 일점 혈육의 사위 아니냐. 그뿐이겠나? 아버님이 간도에 계실 적에, 돌아 가실 때까지 가까이 있었던 사람도 이서방 아닌가. 그런 생각하니 예사 사람이 아니다."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아버님" "우리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구나." 가만히 듣고만 있던 홍이는 "제가 간도에서 할아버님을 뫼신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끄럽습니다." "아아 아닐세. 자네는 연소했으니 그럴 처지는 아니었든 게고." "이서방." 범석이 스스럽게 웃으며 불렀다. "아버님의 말씀은 핏줄의 정통을 따지신 거네. 자네야말로 할아버님 유지를 받들어야 할 사람이라는 뜻일세." 한경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하얗게 됐을 뿐만 아니라 창백했으며 삼베 고의적삼이 우장처럼 헐 거워 보였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앞으로는 명심하여 할아버님의 뜻을 새기겠습니다." 홍이는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원래 한경은 술을 못하기 때문에 범석과 홍이는 그 정도로, 인사를 올린 뒤 물러났다. "지금 가는 거는 아니겠지." 조카사위도 백년손으로 보는가. 그새 저고리를 갈아입고 며느리와 함께 마루에 앉아 있던 산청댁이 사랑에서 돌아나오는 홍이를 보고 말했다. "가볼 데가 있어서." 엉거주춤 홍이 말했다. "그래? 저녁은 집에 와서 잡숫게. 꼭 그래야 하네." "네." 범석이 따라나왔다. 말없이 논둑길을 걷다가 그들은 강가 둑길까지 나왔다. 나란히 앉아서 강물을 바라본다. 강물은 아까 홍이 왔을 때보다 물빛이 짙어진 것 같았다. 해가 자리를 옮겨서 그러리라, 홍이 생각한다. "아까 여기 와서 목욕을 했습니다. 산천은 무릉도원이되 사람들은 무릉도원에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 요." 범석은 말이 없었다. 홍이는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범석은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권하지도 않는다. "은어회 먹고 싶지 않아? 주막에 가서 막걸리 한잔씩 하자." "여기서 얘기나 하다 가지요. 영호집에도 가봐야 하고 장서방도 만나야하니까." 보연에게 장가들기 전에, 그러니까 간도에서 돌아온 후 홍의 정서가 극도로 불안했던 시기, 평사리에 있는 부 친 용이를 찾아올 때면 만나곤 했던 사람이 범석이였다. 청년 시절부터 인품이 중후했고 비록 보통학교 졸업 이 그의 학력의 전부였지만 한학을 했고 신학문도 독학으로 대학 졸업 이상의 식견이며 특히 농촌 문제에 대 해서는 상당한 연구가 있었다. 그의 주경야독의 생활 방식은 소년기에서 40 이 넘은 오늘까지 변함없이 꾸준 했다. 영호나 홍이, 또 윤국이까지 평사리에 와서 방황했던 청소년기, 범석으로부터 그들은 상당한 영향을 받 았다. 홍이는 그를 존경하여 형님 대하듯, 그러나 접근하기로는 범석이 먼저였다. 그 이유는 간도에서의 김훈 장 행적을 알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친숙하게 집을 드나들 때 친정다니러 왔던 보연의 모친이자 김훈장의 외 동딸이었던 점아기 눈에 띄었고 점아기가 간절하게 원하여 혼인이 되었던 것이다. "자네가 가족을 두고 간다니까 부끄럽네. 아까 아버님 말씀이 계실 때도 그랬었지만." "그런 말씀 마십시오. 지가 뭐 혁명갑니까? 독립투사인가요? 왜 그렇게들 생각하시지요?" "아닌가?" 범석은 미소를 띠며 홍의 눈을 쳐다보았다. 홍이는 그 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조선에 주저앉아 살 만도 한데...... 나야 뭐 늘 이불 밑에서 활개치는 꼴이지만." "저 역시 눈먼 망아지 은령 소리 듣고 따라가는 격이지만, 그 동안 많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기둥이 모조리 뿌 러져서 내려앉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모두가 당연히 그랬겠지만, 또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자신들 일에만 너무 집착해 있는 것 같아서 일종의 배신감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걸 느끼기도 했고, 나도 잔말 말고 그렇게 살자는 유혹도 강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못 견디게 한 것은 만주서 뛰는 사람들의 내일이 없는 고난이었습니 다. 관수형님의 죽음도 큰 충격이었고요." "배신감을 느꼈다는 자네 심정 이해하네. 그러나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는 집착할 그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게. 그게 조선의 현실이다. 모두가 피해자며 조선이라는 땅 자체가 집착할 그 아무것도 없는 감옥인 게야." "그렇겠지요. 그럴 겁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냉담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느꼈을까요." "이서방, 파도가 눈에 뵈지 않는다고 바다가 조용한 건 아닐세. 상어떼가 무리를 지어 날뛰고 피래미 할 마리 숨을 곳이 없다면 조용한 그 자체는 더 무서운 것 아니겠나? 그러나 절망하지 말게. 민중들은 아직 순결하다. 친일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지식인들이 일본인이라 할 때 대다수 민초들은 왜놈 왜년이라 하네. 역사적인 자 부심과 피해 의식은 그들 속에 굳게 간직되고 있어. 그들은 일본인을 두려워하면서도 모멸하고 복종하는 체하 면서도 결코 섬기지 않아. 그들은 조선의 대지이며 생명이다.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고 그럴 계기가 주어진다 면 민초들은 다 뛸 것이야. 의병의 의기는 아직 그들에게 등불로 남아 있어." "형님은 사회주의입니까?" "아니다." 범석은 명확하게 말했다. "나는 농본주의다. 첫째 나는 토지의 국가 소유를 반대한다. 일본이 조선의 땅을 소유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고, 땅이란 경작자가 가져야, 아니 아니지. 땅은 경작하는 사람이 자연에서 빌려야 한다는 생각 이다. 사람이 생명을 빌려서 세상에 나온 것처럼, 생명이 나왔기 때문에 자연은 경작자에게 땅을 빌려주어야 한다. 살아 있는 자의 권리지. 땅의 임자는 자연이며 총대 든 이민족은 물론 국가 소유도 개인 소유도 아니며 자연에서 빌릴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경작자뿐인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국가 권력, 총대 든 무리 의 권력을 인정치 않는다. 정부란 단지 관리를 총괄적으로 하는 관리자의 집단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옳은 말씀이지만 이상론이군요." "염철론을 보면, 염철론은 한나라때 소금과 쇠와 술등 그것의 전매 정책을 둘러싼 여와 야의 공박을 수록한 책인데 대부와 문학의 경제 논쟁을 대충 요약한다면, 문학은 상업을 억제하고 불필요한 것의 생산을 반대하며 의식의 근간으로서 농업을 장려하는데, 불필요한 것의 생산과 교역으로 부강해지면 그것은 전쟁을 부르게 되 고 인민은 도덕적 타락으로 빠지게 된다는 주장이며, 반면 대부는 교역의 필요성과 민생의 향상을 위해 생산 고를 독려해야 하며 그것으로 강병책을 도모하여 국가가 부강해져햐 한다고 역설하는데, 예를 들어 그릇에 무 늬를 넣는 것조차 인력의 소모로 본극단적으로 스토익한 문학은 이상론자요, 곤륜밖에서 비취를 들여와서 세 공하여 이윤을 남기는 것을 가하다 생각하는 대부는 현실주의자라, 그러나 없어도 되는 것의 무한 생산의 강 병책이 인력과 물자의 엄청난 낭비임을 부정할 수 없고 그것으로 인하여 인성이 타락하고 국가와 국가, 민족 과 민족, 너와 내가 무한정 경쟁하며, 제국주의 침략도 바로 그것인데, 여하튼 마지막까지 서로가 적으로 존재 하며 무찌르게 된다면 과연 그것은 민생을 위함이겠는가? 현실이 미래를 잡아먹어서는 안될 일이야. 만일 우 리가 이상을 버리게 된다면, 도덕과 종교를 포함한 이상, 그것을 저버리게 된다면 인류의 장래는 어찌 될까? 종말이지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이런 얘기 한다는 것은 모두가 웃을 일이지만 오늘날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 고 있는 전쟁을 보아라." "만일에 전쟁이 끝나고 조선이 독립된다면 형님이 생각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홍의 어투에는 다분히 비꼬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 밖에서 무기를 생산하고 있는 한.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내용으로 보면 다 같이 생산고 위주의 유물론 아니겠어? 다만 어떻게 관리하고 분배하느냐의 차이지. 나는 언젠가 그것이 벽에 부닥칠 것이란 생각 이다. 만가지가 다 이자를 먹고 살아야지 원금을 찢어먹는다면 결국 파탄할밖에 없지. 가령 땅이 원금이라면 그해 나는 농작물은 이자다 그 말일세. 더 비근한 예를 들자면 머릿속에 든 지식은 원금이요 취직하여 받아먹 는 월급은 이자다 그 말이야. 만사 이치를 그 자로 재면 모든 게 합리적이지." 범석은 왠지 말을 해놓고 껄껄걸 소리내어 웃었다. 차림새부터 간데없는 농사꾼, 날이면 날마다 들일에 얼굴이 새까맣게 타서, 그래 그런지 유난히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홍이가 건성으로 따라 웃는다. "아까 자네가 독립이 된다면 내가 생각하는 일이 가능한가 하고 물었지?" "........." "하하하핫 하하하.......... 남이 들었다면 떡방아 소리 듣고 김칫국 찾는다며 비웃을 거네. 자네도 시골에 앉아 있는 몽상가로 날 생각하겠지." "너무 아득해서요." 홍이는 한숨쉬듯 말하며 또 담배를 꺼내었다. 강바람을 막으며 담뱃불을 붙인다. "아무리 아득해도 내 얘기는 몽상이 아닐세. 신이 없다고 믿으며, 그렇게 말하고 보니 실상 나에게 신은 없구 먼. 종전의 그와 같은 신을 믿지 않아. 다만 자연과 우주의 그 절대적 질서, 순환하는 생명의 집합체가 내게는 신인 게야. 그러나 우상을, 또는 심상의 옛 그림자를 믿어온 사람들이 실증적인 과학에 의해 흔들리는, 이게 20세기의 특징 아니겠어?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물질을 절대시하면서 치레하노라 신을 이용하고, 하여간 거의 사물화해버린 자리에 도전자인 과학은 오만하게 들어섰지. 당연히 신의 영역으로 신비하게 보호되었던 곳에 과학이 칼을 대는 것은 수순이라. 자연과 우주는 도전의 대상으로, 인간 승리의 대상으로, 안 그런가" "우리도 지금 전쟁으로 하고 있습니다." 반발하듯이 홍이 말했다. 한동한 대화는 끊기었다. 한참 후 홍이 물었다. "사회주의도 망상이다 그 말이군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우주 질서와 접합하려는 생각들을 안해. 오만한 인간주의, 그것은 폭력이 야. 미친짓이지. 과학은 합리적인 것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이성 잃은 인간에게 칼을 쥐어준 결과가 된 게지." "사회주의에 대한 형님의 견해입니까?" 홍이는 묘하게 사회주의에 매달리듯 질문했다. "그거나 저거나 다아, 종이냐 횡이냐의 차이 아니겠어?" 결국은 대결과 인간 위주의 에고이즘에는 다를 게 없다. 지구와 우주는 생명의 집합체, 아까 말했듯이, 그것은 상생 동화하고 탄생하며 순환하는데 상응은커녕 오로지 도전과 승리가 오늘의 명제 아닌가. 자연의 질서를 능 가하는 인간의 질서를 꿈꾸는 것은 망상이기보다 파멸을 자초하게 되는 게야. 내가 땅의 임자는 자연이요. 경 작자만이 땅을 빌릴 수 있다 한 것도 그 때문이지. 그래 자네는 사회주의인가? 이번에는 범석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무슨 대답이 그래?" "내 능력으로는 판단이 안됩니다. 확신이 없는 거지요. 형님의 말씀 중에는 우리 독립에 대산 생각이 별로, 아 주 희박하군요. 저는 눈앞을 보고 형님은 멀리 보아서 그렇겠지만 어쩐지 실망이 됩니다." "..." "우선은 우리가 어떡하든 살아남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독립을 해야 한다는 생각 이외, 저로서는 더 이상 복 잡한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주 방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사회주의자로 보아야 할 겁니다. 그들의 정열은 그야말로 깨끗하고 순결합니다." "그럴 테지. 그들은 민초니까......." "그들 중에는 상당한 지식인들이 많지요." 홍이는 범석의 말을 수정하듯 덧붙였다. "알어. 그래도 그들은 민초다 자네같이, 나같이." 하다가 화제를 돌렸다. "나는 가끔 생각하네. 동학이 좀 일찍 일어났든가, 아니면 백 년쯤 후에 일어나든가." 홍이는 범석을 쳐다본다. 무슨 뜻이냐 묻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홍이는 답답했고 이상했다. 도대체 앞서가 자는 것인지 되돌아가자는 것인지 그의 진의가 아리송했다. 범석은 슬픈 눈빛으로 홍의 시선을 받았다. 범석과 헤어진 홍이는 한복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만주벌판에서보다 더한, 황량한 바람이 자기 육신을 숭숭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도대체 나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 거지? 거꾸로 매달린 것만 같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데 한 가지 뚜렷한 것은 범석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었다. 뭔가에 들린 사람 같기도 했고 신흥 종교의 교주 같기도 했다. 그의 말을 긍정하고 싶은데 긍정이 안되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은 한가하지도 유장하지도 않다! 신선 같은 소리 하네.' 그렇게 마음속으로 분통을 터뜨렸으나 뭔가에 걸려서 나자빠질것만 같았다. 한복의 집에 들어갔을 때 한복의 댁네 영호네와 죽은 우가의 마누라일동 네가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영호네는 질려 있는 것 같았고 일동네는 푸르락 붉으락 양미간에 성질을 잔 뜩 드러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오가는 말은 없었지만. 홍이를 본 영호네는 반가움보다 살았다 는 표정이 앞섰다. "이, 이게 누군고!" 하며 일어서려는데 "누군고 했더니 이 양복쟁이가 이서방 아들이구나. 흥! 원수는 외나무 다 리에서 만낸다는 옛말 하나도 안 그러네? 그렇잖아도 어디 사는지 상판때기한번 보고 싶다 했더만은." 일동네가 독설부터 시작하면서 마루 끝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마치 인왕같이 홍이 앞을 가로막고 서는 것이었 다. "안녕하십니까. 오래간만입니다." 홍은 애써 감정을 누르고 정중하게 인사한다. "저기, 저 저기 영호아부지 뒷방에 있는데." 영호네는 도움을 받기보다 일이 더 복잡해질 것을 뒤늦게 깨닫고 홍의 퇴로를 열어주듯 말했다. "가물치 콧구멍맨크로 통 볼 수 없더마는 뒷방에 숨어 있었던가배?" 일동네는 헛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눈은 홍이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무신 말을 그렇게 합니까? 무신 죄졌다고 우리 영호아배가 숨어 있일 기요. 남정네가 찾아오는 남의 여인네 를 일일이 만나봐야 합니까? 그런 법 없소." 영호네는 다소 발끈해지며 말했다. "머라? 그런 법 없다고? 그 쪼에 법을 찾아? 또 뭐라꼬? 남정네가 남의 계집을 일일이 만나봐야 하느냐고? 다 늙은 것들이 눈맞일까 봐서? 가소롭다, 가소로워, 혼담이 오간께로 콧구멍이라도 봬주야 그기이 도리제. 너거 들 쪼다리가 날 괄시하게 생겼나? 서천쇠가 웃일 일이다." "참말로 상종 못하겄소." "내 말 사돈이 하네. 내가 너거들을 상종하는 것만도 고맙기 생각해야 하는데 뭐 어쩌구 어째?"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그 이상은 영호네를 공박하지 않고 대신 이도 저도 못하고 서 있는 홍이에게 화살을 날 린다. "아까 안녕하냐 했든가? 그라고 오래간만이라 했든가?" "......" "그래 오래간만이다. 한분 보고 저버서 그기이 소원이더마는 이제사 보네. 그래 오래간만이다. 그라고 안녕하 냐고 했는데 안녕할 리가 있나? 하늘 겉은 가장 잃고 우찌 안녕하겄노. 니는 양복 걸치고 뽄세를 내고 잘난 체 차자왔다마는 남의 가슴에 못질하고 떠난거로 잊었더나. 안녕하냐고?" "지가 머를 어쨌기에 이러십니까?" "머를 우쨌기에? 허허어. 세월 좋구나. 우리 식구 원한이 하늘에 사무치는데 우째 니는 그거를 잊었더노. 연놈 들이 작당해서 철천지 원수, 오가 놈을 살리내고 그 목이 뿌러져 죽을 놈은 하늘 밑을 걸어 댕기는데 우애 우 리 식구 몽매간에 그 연놈들을 잊일 기고. 이 원수 우리 식구들이 안 갚을 줄 알았다믄ㅋ 그거는 큰 잘못인 기라." 길길이 뛰지는 않았고 일동네는 사설만 늘어놓는다. 일동네가 홍이를 퍼붓는 이유는 홍이가 만주로 가기 직전 평사리에 왔을 때 오서방과 우가의 싸움이 붙었고 살인난다는 말을 듣고 홍이 달려갔을 때 낫을 든 우가와 오 서방이 오서방네 마당에서 엎치락 뒤치락하고 있었다. 그들을 말리려다가 홍이는 부상까지 입었으며 상당 기 간 치료를 받았던 것이다. 일동네가 원한을 품은 것은, 엽이네의 경우도 그랬으나 홍의 경우도 법정에서 본 대 로 증언을 한 때문이다. 결국 오서방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기 때문에 오서방이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살지 않 았고 과실치사로 몇 년 복역하다 나온 일에 깊은 원한을 품게 된 것이다. 홍이로서는 길 가다 머리통에 기왓 장 떨어진 꼴이었다. 부상을 당한 것도 운수 불길인데 별안간 일동네가 퍼붓고 나오니, 그야말로 얼이 빠질 지 경이었던 것이다. 한복이가 나왔다. "왔나. 들어가자." 한복은 짐짓 모르는 척 홍의 소매를 잡아끈다. "나 좀 봅시다! 영호아부지." 일동네의 화살이 이번에는 한복에게 날아왔다. "나중 얘기하지요. 머 그라고 할 얘기나 있십니까. 본인이 팔자 안 고치겄다는데." "거짓말 마소! 젊은기이 그럴 리 없소. 하야간에 우리는 물러서지 않을 긴게 그리 아소." "손님이 와서 그만 들어가 볼랍니다." "손님? 이름이 좋아 불로초다!" 그러나 일동네는 슬그머니 놓아주기는 했다. 한복이와 홍이 사라진 뒤 영호네를 잡고 늘어질 걱정을 한 듯 치 마를 고쳐입고 마루에 걸터앉는다. 용건인즉 못 살고 집에 와 있는 인호와 여자가 달아나고 홀아비로 있는 일 동과의 혼담이었다. 처음에는 복동이댁네를 시켜서 마치 은전이라도 베풀 듯 혼담을 보내왔다. 그러나 한복은 얼굴이 벌개져서 일 언지하에 거절했던 것이다. "머이 우째? 인호를 못 주겠다? 혹 잘못 듣고 하는 말은 아닌가? 일동네는 얼굴이 파래지며 말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동네를 발칵 뒤집는 소동은 없었고 그 걸쩍지 근한 사설로 이러니 저러니하고 다니지도 않았다. 뜸을 들이듯 한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복동이댁네를 보내왔 다. 이번에는 처음과 달리 매우 공손스럽고 저자세의 내용을 전해주었다. "본인이 팔자를 안 고치겄다 카는데 아무리 부모라 캐도 우리가 우쩌겄노. 부모 잘못 둔 죄로 처음 그리 된 것만도 가심이 아픈데." 그때는 영호네가 말을 했다. 그런 뒤에도 일동네는 이 사람 저 사람 번갈아 보내면서 영호네를 설득하려 했다. 그 동안 평온하게 지내온 한복이집에 근심거리가 생긴 것이다. 쉬이 물러설 우가네 식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네에서도 이 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아이가아, 만일에 그놈 집구석에 인호가 개가를 한다믄 영호네 집은 쑥밭이 될 기다." 밭을 매다가 호미를 놓고 논도랑으로 가서 얼굴을 씻은 중늙은이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와요?" 중늙은이보다 나이가 좀 처지는 아낙이 도랑에 발을 담그고 쉬면서 되물었다. "일동에미 그 독종이 설마 사람 탐내서 그랬을라?" "안 그러믄?" "아니제, 아니라, 속셈은 따로 있는 기다. 여수 겉은 년." 중늙은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만하믄, 반팬이 일동이보담이사 인물은 인호편이 훨씬 낫고 저거들 처지에." "하야간에 인호는 어매 아배 골병감이다. 아들들은 이리저리 얽어매여 그런 대로 사는데 제집자식은 안 그렇 네라. 평생 오금박히감서 기를 못 피고 살아가야 하니께." "하기는 그렇소. 집안 내력이 같다믄 모를까, 오죽하믄 인호도 그 집에서 죽어라 하는 아배 말을 거역하고 돌 아왔겄소. 처음 왔일 직에는 그기이 어디 사람우 형상입디까? 영호네가 우는데 나도 눈물이 나더마요. 그뿐인 가요? 이혼을 하는데도 또 얼마나 애를 묵었다고? 그 일은 그렇고 사람을 탐내서 그러는 거 아니라는 말은 무 신 뜻이오?" "축구겉이 그거를 와 모리노. 살림 아니가 영호네 살림. 동네에서도 그래도 따신내가 나는 집이다, 그 말이구 마." "그, 그렇네." "인호가 그놈으 집구석에 들어가기만 해봐라. 그 다음에는 우가네 식구들, 영호네집 뼈다구까지 핥아묵을라 칼 기다. 인제 내 말 알아듣겄나." "야! 참말로 그렇구마요." "학을 뗄 긴데, 저 일을 우쩔꼬. 지금 영호네 심정이 천정에 구렝이 든 것 겉을 기라." "야 맞십니다. 듣고 보이 그러고도 남을 기요. 나도 들은 얘기가 있어서." 중년 아낙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 동네에 오기 전이라 카데요." "......?" "우리끼리니께 하는 말이지마는 죽은 우서방 심성이 그래 그렇지, 찬바람이 생생 불고 말수도 적고 생긴 거사 그리 못난 축은 아니지 않았소?" "생긴 거는 그랬제. 깔락깔락한 몸매에다가 눈이 깊숙하게 박히서 제집 끄는 심은 있었제." "하야간에, 이 동네에 오기 전의 일이라 카는데, 우떤 돈이 좀 있는 과부하고 일동네가 일부러 우서방을 붙이 주었다 안 캅니까. 새가 많아서 우서방이 한분 흘기만 봐도 그 여자 집에는 한밤중에 주먹만한 돌이 날아든다 카는데 자진해서 와 그랬겠소?" "과부 돈 빨아 묵을라꼬 그랬겄제." "야 맞소. 그때는 농사짓는 것도 아니고 떠돌이 신세였다 그러더마요. 결국 그 과부한테 빌붙어서 식구들이 뜯 어목고 살았다 안 캅니까? 무섭제요." "그라고도 남았일 기다. 돈 떨어질 때꺼지 거머리맨크로 피 빨아 묵음서 살았겄지." "아무한테도 말하진 마소. 이 말이 나가믄 날 잡아직일라 칼 기요." 겁이 더럭 났는지 여자 얼굴이 오종종해졌다. 무심결에 한 말을 몹시 후회하는 표정이다. "걱정 마라. 누가 그 제집 성미를 몰라서? 들었다고 하믄 이 동네 편할 날 하루도 없일 기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젊은거를 그냥 살라 할 수는 없는 일, 안그렇나? 말이 나왔일 직에 짝을 지어주는 것이 좋을 기다. 인호도 어 매 그래 살았일 때 말이지, 형제간은 다르네라, 한 나이가 젊어서 개가하여 자식이라도 봐야, 그래야만 잊아뿌 리지." "와 아니라. 아무리 잘해주어도 친정밥이 남편밥만 할까. 일동이가 반팬이기는 해도 심이 좋아서 농사일이사 혼자 도맡아 하고." "하기사 그 집 농사, 일동이하고 개동이댁 아니믄 어림없제. 그놈의 우가 제집 조둥이만 깠지, 마실이나 댕기 믄서 새살이나 늘어놓고 하는 일이 머 있노. 요새는 더군다나 면소 서기 어무니랍시고 쪼나 빼고 다녔지." 쪼나 빼고 다니는 바로 그 장본인 그 일동네는 아래 위로 영호네를 째려보면서 바야흐로 장강수 같은 사설을 시작할 판이요 포문을 연 이상 기어이 명중을 시켜야 한다, 거듭 다짐을 하듯 입을 열었다. "그 동안 나도 참을 만큼 참았고 점잖게 대접할 만큼 했고, 이자는 사람이 탐나기보다 내 오기 따문에 물러설 수 없고, 어디 물어봅시다. 우리 일동이 어디가 우때서 딸을 못 주겄다는 것인지, 나 귓구멍 말짱 후벼 파놓고 왔인께 알아듣게시리 말하소. 우리 일동이 어디가 우때서 딸 줄 수 없다, 딱 까놓고 얘기하소." "우리가 못 주겄다 한 기이 아니고 본인이 팔자 안 고치겄다 하는데야 아무리 부모라 캐도 곤리가 없제요. 소 라서 콧구멍을 꿰어 몰고갈 수 없는 일, 자꾸 이래 봐야 소용없는 일이라요." 영호네는 답변을 미리 준비해 놓은 듯 눌변인 그로서는 꽤 탄탄하게 응수한 셈이다. "시집을 한분 갔다왔다 해서 부모 자식 천륜이 변하는가요? 부모 말 안 듣는 자식이 어디 있소? 공연한 핑계, 누굴 눈뜬 봉사로 아나? 생각해보소. 개가 안하겄다 그 말부터가 가소롭기 짝이 없구마. 옛날, 삼대 구년에는 양반인지 소반인지 머 그랬다는 얘기는 나도 들어서 알고는 있지마는 그래서 양반네 가풍상 일부종사하겄다 그 말이오? 아서라 아서, 삼거리에 나가서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잡고 물어보소. 남편하고 사별한 청상과부도 아니겄고 일부종사를 못하고 나온 기집이 설마한들 수절을 말하는 것도 아니겄고 홍살문 세울 푼수도 아니겄 고 세상 사람이 웃소. 웃을 일 아니오? 핑계를 대어도 가이방해야 믿지." "......" "그래 개가 못하는 까닭이나 들어봅시다." "그거를 내가 우찌 알겄소." "그라믄 인호 가아 나오라 카소." "모두 들에 나가고 없소." "하 참, 기가 맥히서, 이럴 줄 알았다믄 애씨당초 말을 끄내는 기이 아니었는데, 감지덕지하기는커녕 머 어쩌 고 어째요? 살인죄인의 집구석에서 그것도 어매는 저자거리에서 밥 빌어묵던 거렁뱅이 처지, 청혼한 것만도 대접해주는 거를 모리고 세상에 이리 빙자한 일이 어디 또 있을꼬?" "맞소. 하낫도 틀린 말이 아입니다. 살인죄인의 집안 내력도 맞고 저자거리에서 밥 빌어묵든 거렁뱅이 신세, 다 맞는 말이오. 그런께 그런 천하고 더러운 집안하고 사돈 맺어 되겄십니까? 장차 자식이 나도 혼삿길이 맥 힐 기고, 더군다나 면서기 나아리까지 있는 집안에 수치가 될 거 아니겄소. 말이나 되는 일이겄소? 그거를 아 니께 우리 인호도 개가를 안할라 카는 거 아니겄소. 제발 없었던 일로 하입시다." 영호네도 만만치가 않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 무는 격으로, 용기가 생기는 모양이다. "얼씨구! 참 말 잘하네. 그렇게 나오믄 내가 물러설 줄 아는가? 내가 우떤 사램인데? 허허어, 장수가 칼을 뽑 았이믄 고목나무라도 한분 찔러봐야지 그냥 칼집에 집어넣을 수는 없지. 거절을 당해도 당할 만한 곳에서 당 해야지. 이런 수모를 그냥 넘기지는 않아. 마음만 묵으믄 그까짓 헌계집 뒤비시 업고 올 수도 있고 멀 못해. 대접을 해주니께 강아지 부뚜막에 똥싼다 카더마는 헌계집 업고 오는 거사 나랏법으로도 못 박게 돼 있는 것 몰라요?" "뒤시비 업고 가든지 가꾸로 매달아 가든지 보쌈을 해가든지 나랏법도 못 막는다믄 두발 가진 사램이 제 발로 걸어 나오는 것도 나랏법으로는 못 막을 기요." "몸을 망칬는데 제 발로 걸어 나올까?" "그거사 법에 걸리는 일 아니겄소. 겁탈하믄 콩밥 묵는거 모리요? 면서기 집안에서 콩밥 묵는 사람이 있다믄 되겄소?" "그 말에는 다소 찔끔했으나 일동네는 이내 전세를 가다듬는다. "보자 보자 하니 사람을 갖고 노네. 갖고 놀 사람이 따로 있지. 이거 뜨거운 맛을 못 보아 이러나? 얌전타 한 것도 알고 보이 까죽을 뒤집어썼고나. 예사 변호사가 아니네. 말하는 거를 보이 예사 변호사가 아니라. 그러나 나를 건디리서 좋을 일 하나 없어. 오냐오냐할 직에 좋기 나와야, 콩밥을 묵는가 밀밥을 묵는가 그거사 두고보 믄 알 일이고. 흥! 우씨네 집안 식구들을 말짱 벅수로 아는 모양이제? 법이라는 것도 사람 하기 나름, 옛날에 는 오가놈이 사형을 당하든지 평생을 까막소에서 푹 썩든가 했어야 하는 건데, 그때는 우리한테 힘이 모자라 그랬으나 지금은 달라. 사정이 다르거마는. 다르고말고. 나는 아들 하나를 나라에 바쳤고 내 아들 하나는 면을 다스리는 면소 서기라. 그래 당신이 말하듯기 콩밥인지 밀밥인지 묵을 성싶은가?" 그 말을 했을 때 일동네는 의기양양, 마치 말탄 장수같이 도도하고 당당했다. 얼굴에는 희열이 넘쳐 흘렀다. "야아 압니다. 그거를 모린다믄 평사리사람 아니제요. 그러나 거기서는 하나는 아는데 둘은 모리네요. 우리 뒤 에도 사람 있는 거를 몰랐십니까? 아아들 큰아부지가 누군지 소문은 들었일 긴데요. 하도 험한 일을 겪은 고 향이라 오시지는 않지마는 전보 한 장이믄 덕달겉이 오실 기요. 우리 위에도 사람 있소. 사, 사람." 영호네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고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다 싶었을 때 쿵! 하고 영호 네는 마루끝에서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입에서 거품을 뿜어낸다. "아아 아니 누가 머라 캤다고 이러제?" 일동네는 약간 당황하는 것 같다. 방안에서 밖의 기척에 귀기울이고 있던 한복이 달려나왔다. 홍이도 뒤따라 나왔다. 부엌으로 쫓아들어간 한복이 물 한 바가지를 들고 나왔다. 영호네 얼굴에 뿌리고 남은 물을, 모르고 그러는 척 일동네 쪽으로 바가지째 내던진다. "아이구!" 일동네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든지 말든지 한복이는 영호네를 안아 일으켜 뺨을 때린다. 영호네는 겨우 눈을 떴다. "보소." "그래 정신채려." "보소, 나는 못 그라겄소. 우리 인호 두, 두 분 죽음시킬 수는 없소. 으허허헛 헛...... 어이구 불쌍한 내 자식! 부모 잘못 만내서 으흐흐헛......" 영호네는 한복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운다. "아따 야! 기갈 무섭네. 누가 머라 캤다고 기절을 하노. 참말이제 사람 잡겄다." 일동네가 말했다. 관여하지 않으려고 집 밖에서 내부를 살피고 있던 이웃의 몇 사람이 어느덧 집안에 들어와 있었다. 홍이 일동네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웃사람들도 쳐다만 보고 있을 뿐, 마치 무언극처럼 분위기는 괴이 했다. "사람들아, 내가 어디 손가락끝 하나, 건드렸나? 왜, 저 지랄이고?" 사실 일동네는 영호네가 기절한 것쯤, 조금도 겁내고 있지 않았다. 잠시 당황했던 것도 기절한 때문은 아니었 고 아이들 큰아버지, 즉 김두수를 들먹였기 때문이다. 그도 소문은 듣고 있었다. 만주인지 북선인지 뭐 경찰 방면의 높은 자리에 있다는 얘기, 해서 그것을 의식하여 일동네는 처음부터, 제깐에는 정중하게 얘기를 진행시 켜온 것이며 또 막연하기는 했으나 큰아버진가 하는 존재야말로 벼슬길에 든 개동이한테 결코 해롭지 않을 것 이란 판단이 섰고 이용할 수도 있다는 저의가 없지 않았다. 누가 전갈을 했는지 밭에서 김을 매던 인호와 둘째며느리가 달려왔다. "엄니!" 인호와 며느리가 동시에 불렀다. "괜찮다, 걱정마라." 한복이 말했다. "아부지, 질기 이러믄 나 그만 머리 깎고 중이 될라요." 인호가 울었다. "중이 된다꼬?" 일동네가 펄쩍 뛰었다. 다 잡은 고기를 놓친 것 같은 그런 표정이다. "흥! 아무나가 중이 되나?" 그 누구도 말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멋쩍어진 일동네는 한편 괘씸한 생각도 들어서 왜 내 편역을 들지 않는가 하듯 위협적인 눈빛으로 이웃사람 얼굴 하나 하나를 차례차례 노려보다가 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홍이 얼굴과 맞딱뜨렸다. "나를 노려보믄 우짤 기고!" 돌파구를 찾은 듯 일동네는 아우성을 치며 홍이를 향해 삿대질을 한다. 홍이 눈에 칼날이 섰다. 한복이 발딱 일어서며 눈을 깜박이고 상대하지 말라는 강한 신호를 홍이에게 보냈다. 이웃사람들 역시 홍이에게 신호를 보 낸다. 상대하지 말라고. "마침 잘 만났다 싶더이, 속이 부글부글 괴는데, 와 노리보노!" 일동네는 홍이 앞으로 다가섰다. 이때 와르르 쾅쾅! 마른하늘에서 날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일동네가 멈 칫했다. "서기어무이, 그만 하소." 누군가가 말했다. 서기어무이라는 말은 다분히 비아냥거리는 것이었는데 일동네가 제일 좋아하는 호칭이긴 했 다. "마른하늘에 벼락 소리가 이리 요란한데 이야기는 새는 날에 하소." 또 누군가가 말했다. 말리는 말보다 벼락치는 소리가 무서워진 일동네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우르르 쾅쾅! 또 벼락치는 소리가 났다. 다시 푸른 빛줄기가 지나가면서 벼락치는 소리, 갑자기 하늘은 어둡게 내려앉았다. 이 웃들은 하나둘씩 비설거지 한다며 달려나가고 일동네는 "그라믄 인호아부지, 다음에 이야기 하입시다." 하고 돌아섰다. 일동네가 삽짝을 막 벗어났을 때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졌다 사방에서 어둠이 밀려왔다. "참말 날벼락이네." 홍이 처마밑으로 급히 피해 들어서며 중얼거렸다. "오래간만에 자네가 왔는데 이 무신 꼴인지, 말도 말 같아야, 사람도 사람 같아야 맞대거리를 하지, 참 내." 한복이는 홍이를 쳐다보며 쓰디쓰게 웃었다. 영호네는 계속 흐느껴 울고 있었다. "야아들아, 너거 어매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거라." "예." 한복이 말에 넋이 나간 듯 서 있던 며느리와 인호가 영호네를 안고 일으켰다. "걱정마라. 그렇게는 안될 기니, 인호야 너도 머리 깎느니 어쩌니 하는 말, 이자부터는 입에 올리지 마라." 영호네는 딸과 며느리의 부축을 받으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서방, 우리도 들어가세." 장대비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마당에 내리꽂히고 있었따. 흙담벽, 용마름에 줄기를 뻗은 박넝쿨, 가냘프게 피어 있는 하얀 박꽃이 빗줄기에 멍이 들고 있었다. 빗줄기를 뚫고 새 두 마리가 필사적으로 날아간다. 뒷방이 아니고, 작은방에서 한복이와 마주앉은 홍이는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말 말게. 온 동네가 쑥밭이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들어서 또랑을 흙탕으로 만든다 하더마는 속담 하나 그린 기이 없네. 우가네 식구들 그악스러운 거는 옛날 그때 살인사건을 겪어서 자네도 잘 아는 일 아니가." 살인사건이라 말할 때 한복은 눈을 내리깔았다. "알지요. 오늘도 보자마자 그때 일을 들먹이면서 행패를 부리려 하더군요. 오서방이 사형도 당하지 않고 평생 을 감옥에서 썩지 않고 나온 것도 내가 증언을 잘못 해서 그렇다 하면서, 참 기가 막혀서 생각 같아서는 주먹 으로 볼때귀를 내질러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자네 만주 못 가지. 그 동안 자네야 멀리 떨어져서 그나마 편키 있은 셈이고 엽이어매가 밤낮 없 이 당하는 것 말도 못한다. 증언 잘못 했다 해서, 하는 말이 원수 갚겠다는 거고 엽이네 콩밭에다 소를 몰아넣 고 콩밭을 온통 망쳐놓질 않나, 말하기조차 몸서리쳐지는데 고냉이 대가리를 짤라서 마당에 던져넣지를 않나 만나기만 하면 욕설이요 폭행할려고 덤비고." 한복은 진저리를 쳤다. "오서방하고 조맨치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이면 이를 덕덕 갈고 꼬투리만 잡았다 하면 욕뵈기 일쑤, 그놈의 집 구석에서도 우가 계집 그거는 순전히 미친년이다. 아무도 갈불 수가 없고 게다가 막내 놈을 지원병으로 보내 더니 그거를 빌미삼아 둘째놈이 면소 서기로 취직이 됐는데, 그놈 집구석, 육모방망이 줏은 꼴이라. 기고만장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고 온통 동네를 휘어잡고, 이거는 주재소 순사놈은 저리 나앉아라, 그런 식이다. 작 년 가슬에만 해도 최참판 댁의 환국이어머님한테까지 그놈, 개동이놈이 대어들었다 하니, 뿐이건대? 김훈장댁 그러니까 자네 처숙모 그분을 보고 미친 계집이 욕석을 했다 하니 더 말해 머하겠노. 세상꼴, 참말이제 안 보 고 살았으면 좋겠다." "......" "따지고 보면 우가나 오서방이 그리 된 것도 자네는 잘 모를 게다마는 그 뿌리는 오래됐다. 우황든 소를 우가 가 속여서 팔라는 거를 보고 오서방은 그러면 쓰는가 하고 말린 것이 사단이라. 소 살 사람이 우황든 것을 알 아차리고 흥정이 안됐는데, 소 살 사람은 타동네 사람이고 말리기는 했어도 이웃간에 설마한들 발설이야 했겄 나? 그러나 용렬한 우가는 오서방이 방해를 놔서 소를 못 팔았다 단정을 하고 무신 짓을 했는고 하니, 뜬금없 이 의병질을 했다 하고 오서방을 관가에 찌른 기라. 다행이 무죄 석방이 되어 나오기는 했으나 그때부터 앙숙 이 되어 서로 으르렁거렸지." "오서방은 어찌 되었습니까?" "나왔다. 나온 지도 벌써 몇 년 됐을 거로?" "이 동네에 안 삽니까?" "이 동네에 살아? 어림도 없다. 살인이 또 날 판인데 이 동네에 살아? 어디 가서 식솔들 데리고 머를 하며 사 는지...... 가이방해야 동네서 좇아내든지 몽둥이질을 하든지 하지. 사람 악한 거는 당할 재간이 없다." "아까 듣자니까 인호를 달라는 뭐 그런 얘기 같은데." "그래." 한복이는 기운이 쑥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큰놈 제집이 달아났는데 그걸 찾겠다고 한동안 미쳐 댕기더마는 우리 인호를 달라 하는 기라. 그렇게 되면 우리집은 보나마나 깝대기까지 벗기려들 기고 인호는 말라죽을 기다." 하는데 며느리가 방밖에 와서 "아부니, 술상 내올까요." 영호네가 가서 물어보라 한 것 같았다. "오냐 내오너라." 한복이 말했다. 그러나 홍이 질겁을 하며 말렸다. "몸이 안 좋아서 술 끊었습니다. 그리고 또 가봐야 할 곳이 있고. 참 봉기노인 돌아가셨는데 문상도 가야 하 고, 천일이 어머니도 찾아가서 인사를 해야 하니까." "그래?" 며느리가 문밖에서 떠나는 기척이다. "내일 하루 더 있다 가면 안되겠나?" 한복은 서운한지, 따로 할말이 있어 그런지 홍이를 쳐다본다. 그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홍이는 슬그머니 외면을 하며 담배를 꺼내어 문다. 불을 댕기고 성냥개비를 재떨이에 던지며 "술은 끊겠는데 담배는 영, 이래 저래 골초가 됐소." 그 말을 하면서 홍이는 김두수 생각을 했다. "영호한테 얘기는 들었다마는, 만주 또 갈 기라며." "네." "이자는 고생 그만 해도 될 긴데." "글쎄요." 한동안 말이 없던 한복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는 어마도지해서 영호어미가 그랬는갑다." "......" "큰아부지가 어쩌구 저쩌구 한 그 말 말이다." 물론 홍이도 들었다. 급해서 한 말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기분이 묘했던 것은 사실이다. "자네를 괴롭혔다는 얘기는 들었다." 홍이는 놀라며 한복이 얼굴을 쳐다본다. "뉘한테 들었습니까?" "영호가 자네 처남한테서 들은 모양이라, 자네 처남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말을 했겄제." "그런 말은 왜 했을까? 처남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천일이가 당한 일이고 보니 자네 처남한테 얘기했는갑대." "......" "미안하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런 사정이야 옛날부터 있어온 일이고, 형님이 미안해할 것 없어요. 추호도." "요즘에도 행패가 전과 같은가?" "사람이 어디 달라지겠습니까? 쉽게 달라질 수는 없지요. 그러나 일본놈들하고는 끊어진 눈치였습니다." "그러면 멀 하는고?" 애증이 함께, 한복은 아주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돈을 벌어놨을 테니, 사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고 옛날 같은 기상이야 아니지요." "전생에 척이 져도 크게 졌다. 남들하고만 그런 게 아니다. 부모 형제도 척이 져서 세상에 나와 맺어진 기라." 한복이 눈에 눈물이 돌았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잊으시오." "어째서 내 짐이 이렇게도 무거운가. 세상을 바로 보고 살라고. 해도 해도 짐이 덜어지질 않네. 관수형님이 세 상 버리고부터는 내 심장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 그 형님이 나를 사람으로 대접해주셨고 일도 시켰고 아비의 죄 형의 죄를 내 마음에서 씻어주더니." 한복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 흘렀다. "참 딱하시오. 형님이 저지른 일도 아닌데 언제까지 이럴 겁니까. 형이 이러면 저도 내 생모 때문에 밤낮 꿍얼 꿍얼해야겠네요." 홍이는 일부러 화를 낸다. "어째 자네가 나를 비하노." "비하고 자시고가 어디 있소?" 형님은 위험한 일 다 맡아서 하시지 않았습니까. 남의 일은 잊으시오. 부모 형 제도 가는 길이 다르면 남 아닙니까?" "관수형님이 그리 되고 보니 의지할 데가 없어진 것 같애서 그런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요." "왜 여태 죽지 않고 살아서 적악을 하고 댕기는지...... 남은 안 그러겠지만 더러운 게 피붙이의 정이라, 어떤 때는 불쌍한 생각이 든다. 사람으로서 어찌 그리 살아야 하는가 싶어서." 대화는 또 끊겼다. 빗소리가 잦아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삐이삐이 새가 울었다. 슬프게 울었다. '슬프게 우는 새가 있고 즐겁게 우짖는 새가 있다. 왜 그런가. 다 같은 그들 나름의 목소리인데 어째해서 우리 귀에는 슬프게도 들리고 즐겁게도 들리는 걸까?' 홍이는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한눈이라도 팔 듯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 인호는 어떻게 할 겁니까?" "음 인호?" "계속해서 저리 소동을 피면 당해내겠어요?" "안되면 머리라고 깎게 하지 머." 홍이는 헛웃음을 웃는다. "웃을 일 아니다. 끝까지 하다 하다 안되면 그래야지." "이쪽에서도 협박을 하시오. 그럴 때 써먹지 언제 써먹겠습니까? 급하면 전보라도 치구요." 해놓고 두 사람은 가만히 잦아지는 빗소리를 듣는다. "문상 갈라나?" "네." "그럼 나랑 함께 가자. 나도 아직 못 가보았다." 두 사람은 우산을 쓰고 집을 나섰다. 장대비가 내리꽂히더니 그새 물이 불어나서 도랑에는 흙탕물이 굽이치며 콸콸 내리쏟아지고 있었다. 들판은 선명하고 쾌적한 푸른빛으로 전개되어 연신 부슬비에 젖고 있었다.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 한복이는 그런 말 할 만했다. 그가 살아남았다는 그 자체가 기적이었으니까. 돌밭의 질기고 못생긴 무꽁댕이 같았던 그, 밟히고 또 밟히는 길가의 잡초같이 자란 한복이, 그에게도 수십 성상의 세월이 실려 이제는 제법, 몸집은 작으나마 의젓하고 사려깊은 현자 같은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숨이 가쁘지요." 한참만에 홍이 대꾸했다. "내 어린 시절에는 구박도 많이 받았다마는 봉기노인도 떠나고 보이 참 세월이 덧없구나. 그만하면 갈 건데 아당바당 왜 그리 살았는고 싶다." "지금도 맘에 맺혀 있습니까?" "아, 아니다. 그런 것 없다. 세월이 가버맀는데 머할라꼬 그런 기이 남아 있겄노." "세월이 가도 못 잊는 일이 있지요." "못 잊는 일이야 많제." 한복은 조심스럽게 물 웅덩이를 건너뛰었다. "하지마는 나는 내 한이 많아서 남 원망할 새도 없었다. 원망을 받아야 할 내가 누구를 원망하겄노." "이제 그런 생각 하지 마시오. 형님이 무슨 죄졌다고." "와 나한테 죄가 없겄노. 전생에서 지은 죄가 있었겄제." "쓸데없는 소리." 한복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키운 거는 바람이고 빗물이고 마을사람이다." "......" "내 어릴 적이 거두어주시든 영만이어무니(두만네)도 생각이 나고, 오늘겉이 창대비가 쏟아지는 빗길을 가는데 이엉 한자락을 짤라 매듭을 지어주면서 쓰고 가라 하든 낯선 아지매, 그런 사람도 가끔 생각이 난다." "잊어버리시오." 세월이 가도 못 잊는 일이 있다 했으면서도 홍이는 한복이더러 잊으라 한다. 홍이 통영에서 답답해하고 고통스러워했을 때 휘는 풀쑥 우리 선생님 한번 만나보겠느냐 하고 말한 적이 있었 다. 답답하고 무료하기도 했으나 순간 홍이는 이상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자학적인 것이었다. 결코 입밖에 내어 말하지 않았던 장이 얘기를 술김에 말했던 그때 심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의 실체 를 추궁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홍이는 휘를 따라 조병수집을 방문했다. 저녁밥을 먹은 뒤 그러니까 초저녁이었 다. "저기 저 방에 그 늙은이가 있거마는." 휘가 가리킨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고 불빛만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랬는데 불빛이 새어나오는 그 방 속 에 수백 년을 묵은 거대한 지네 한 마리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은 환각이 홍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전신이 떨 렸다. 말할 수 없는 공포감 때문에 홍이는 발길을 돌려 그 집에서 도망쳐나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실안개같 은 독즙을 뿜어내며 도사리고 앉은 거대한 지네, 그것은 조준구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어 있던 의식 속에서 홍 이 자신도 모르게 형성되었던 하나의 관념이었다. 지네는 악을 상징한 것이며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해악을 끼쳤던 존재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한복형의 부친과 조병수 씨의 부친, 그들의 악행에서 퉁겨져 나와 한없이 구르고 상처받았던 사람들이 한복 형과 조병수 씨다. 도대체 운명이란 어떤 것이며 핏줄이란 무엇일까?' 홍이는 자기 자신도 그들 죄업으로 하여 상처받았으나 자신에게는 큰 산과 같은 부친이 있었다는 것을 강렬하 게 의식한다. 이용이, 농부 이용이, 삶이 존귀하다는 것을 몸으로 가르쳐준 사람, 평사리는 그 아버지의 삶의 터전이다. '아버지!' 아까 묘소에서보다 훨씬 강한 그리움의 홍의 마음을 적시는 것이었다. "혹, 통영에서 몽치라는 아이를 만난 적이 있나?" 한복의 목소리였다. "네?" "뭉치라꼬, 우리 큰부자의 동생인데 혹 거기서 만났는가 싶어서." "아아 네, 두 번인가 만났습니다. 한번은 영호집에서, 한번은 김서방집에서 만났습니다." "그래, 그래 어떻든가?" "뜻밖이었소. 누님은 그렇게 고운데 이거는 돌뭉치처럼 울둑불둑 참 못생겼습니다." 한복은 웃었다. "왜요? 왜 묻습니까?" 홍이는 우산을 쳐들며 한복을 본다.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그 아아가, 통영 오면 지 누부집보다 김서방집에 많이 가 있을 기다. 산에서 형제같이 함께 컸어이 정도 들었 을 기다마는, 어쩐지 영호하고는 합이 안 맞는지 사이가 별로 안 좋다. 하기야 영호가 좀 속이 좁지." 한복이 말했다. "처남 쪽도 여간 아니든데요? 고집이 대단하고." "매부가 지를 무시했다, 처음 만났을 직에 영호가 섭섭하게 하긴 했다. 산속의 불머슴아이가 풀쑥 나타났고, 지 처하고도 티각태각 했을 테니까." "......" "사돈총각이지마는 그 아이를 보고 있으면 내 어릴 적 일이 생각나고 남의 자식 같은 생각이 안 든다. 그 아 아도 바람이 키우고 빗물이 키우고...... 산신령이 키워주었다는 말도 하더라마는, 서둘러서 어디 마땅한 데 끈 이라도 붙여주었으면(결혼) 땅마지기나 주어서 이곳 이웃에서 외롭잖게 살면 좀 좋아? 그래야 지 누부도 마음 이 놓일 거고, 우리 영호는 처를 잘 만났다. 진중하고 사리가 밝고, 그런데 그놈 아아, 아직은 장가 안 가겠다 하고 고집이 항우장사다. 코를 끼어 데려올 수도 없고." "영호도 잘해볼력도 많이 애를 쓰는 눈치던데, 이건 도모지 틀이 없는 것 같더구만요." "틀이 없다니?" "아마 하늘과 땅이 그 청년 틀인 모양이지요. 하하하핫 하하." 홍이는 다소 유쾌해져서 웃었다. 한복이도 슬그머니 따라 웃었다. 그에게는 몽치에 대하여 각별한 정이 있는 것 같았다. "하기는 자네 말이 맞네. 세상에 겁난 거이 없으니, 천방지축이라, 허나 산에서 아이를 줏어 기른 사람의 학문 이 깊어서 가르치기는 제대로 가르친 모양이라. 무식한 척하지마는 실상은 제법 식자가 있고오 속에는 영감이 들앉았다. 어디 굴러도 지 몫 하고 살기는 살 게다. 어떻게 보면 남 가는 장가 가서 처자에게 얽매여 살 그런 인물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들이 우산을 접으며 상가에 들엉섰을 때 마당에는 멍석을 말아버리고 차일도 걷어버리고 오가는 사람들 발 길에 마당이 질척거렸다. 사람들은 비를 피하여 처마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더러는 마루와 아래채 방에서 술상을 받은 조문객들이 있었으나 상가는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부슬비를 맞고 왔다갔다하며 일하는 아 낙들은 빗물과 땀에 젖은 모시 적삼이 등짝에 달라붙어 분홍빛 맨살이 드러난 것 같았고 머리는 또 이슬방울 같이 뿌옇게 물방울이 머리칼에 실려 있었다. 들어서는 홍이를 보자 사람들은 모두 반색을 했다. 첫째는 그가 이용의 아들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오서방 우서방이 낫을 들고 싸울 때 용감하게 뛰어들어 말리다가 홍이 부상 을 입은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셋째는 만주에 가서 크게 성공했다는 소문 때문이다. 홍이와 한복은 상청으로 들어가서 죽은 봉기노인을 위하여 예를 갖추고 난 뒤 상주에게도 인사를 하고 마루로 나왔다. "여기 술상 하나 가지오니라!" 나이 듬직한 아낙이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저마다 홍이를 향해 한마디씩 했다. "타관에 가서 얼매나 고생을 했노. 좀더 살아도 될 긴데 너거 아부지가 너무 일찍 갔다." "봉기노인 초상에 참니할라꼬 이제 왔나?" "자네도 늙는고나. 니를 보이 니 아부지 생각이 난다." 그러는 사이 사이, "아이고 아이고오 아이고오." 상주의 곡하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홍이는 촌에서는 결코 적다할 수 없는 금액의 부조를 했다. 그것이 또 고맙 다 하여 말들을 했다. "그 아부지에 그 아들이라. 부모 안 닮은 자식이 없인께." 그 말은 한복에게는 듣기 거북했다. "와 아니라. 용이아제가 살았든 그 시절이 좋았던 거라. 지내 놓고 보이 그 시절이 좋았다." "지금도 생각이 난다. 내 어릴 적이었제. 장고 메고 장고채 들고 나서든 용이아제 모습이 눈앞에 삼삼하다. 참 풍신이 좋았네라." "풍신만? 얼굴은 어떻고? 농사꾼 되기 아까분 인물이었다." "동네 여자들 한숨 소리는 어쩌고? 그 좋은 인물도 땅 밑에서 썩으니 소용이 없네." 사람들은 다투어 용이를 칭송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용이를 칭송하다기보다 그들 자신의 청춘,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지 모른다. "어찌 되었거나, 용이형님이 그래도 니를 하나 떨어뜨리놓고 갔이니 그나마 얼매나 다행이고." 언외에는 임이네 존재가 있었다. 그 말 하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모두 입밖에 내지 않았을 뿐 모든 사람 마음 에는 홍의 생모 임이네가 있었다. 술상이 왔다. 연장자격인 바우가 곰방대를 털고 허리춤에 찌르며 한복이, 홍이와 마주앉았다. 돼지를 팔아서 제삿장 보아오라며 아비가 장에 보냈는데 몰고간 돼지를 팔아 놀음판에서 털어버리고 빈손으로 돌아와서 죽일 놈 살릴 놈 말도 많았떤 일이 엊그제만 같은데, 어느덧 바우도 오십을 넘기고 그것도 중반에 들어선 초로, 농 삿일에 찌든 모습니다. 한복이 잠자코 바우 술잔에 술을 부었고 홍이 술잔에도 술을 붓는다. 홍이는 주전자를 받아 한복의 술잔에 술을 붓는다. "들자." 세 사람은 뿌연 막걸리를 마시고 안주를 집는다. "심통을 부리쌓더마는, 뇌성벽력에다가 장대비가 쏟아지니 저승길 떠나믄서 엇뜨거라 생각했일 기다." 바우는 한복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한복은 피식 웃었다. 한복이 어려웠을 때 곧잘 편역을 들어주었던 바우 였다. "그래, 우가네하고는 사돈 맺일라 카나?" "그런 말 마소." 한복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와? 인호가 면사무소 서기 나으리 형수가 된달 것 겉으믄 자네도 덩달아서 세도를 부리게 될 긴데, 안 그런 가?" "진담으로는 못 듣겄소." 하는데 홍이 한복을 거들 듯 "세도를 부릴려면 회령서 순사부장까지 지낸 형님이 계신데 뭐가 아쉬워서 사돈 덕에 세도 부릴 겁니까." 의도적으로 한 마리었다. 바우는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모두 들었제?" 하고 주변을 돌아본다. "순사부장이라 카믄 경찰서 서장 바로 밑인데 면사무소 서기하고 어느 기이 높노? 천양지간이다. 까딱 잘못했 다가는 수갑 차지." 바우는 큰 목청으로 말했다.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한복은 홍이를 쳐다보았다. 목구멍에 가시라도 걸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야간에 세상이 망조가 들라꼬 그라는가, 이놈의 콧구멍만한 동네도 니편 내편, 두 패로 갈라져서 지금 힘겨 루기를 하고 있는 판국이라. 만사가 그리 되니 시비 끊일 날이 없고오, 인호의 경우만 해도 씰데없이 남의 일 가지고, 인호를 보내야 하느니 안 보내야 하느니, 차라리 그럴 것 없이 타작마당에 나가서 줄댕기기랄도 해서 판가름 하는 기이 우떨꼬 싶다. 허 참." 하고는 껄껄껄, 바우는 헛웃음을 웃었다. "그러씨! 그리라도 해야겄네. 그 일 땀씨 동네가 또 한동안 시끌시끌하겄구마는." 누군가가 말했고, 조문객이 뜸해지자 할 일도 별로 없어, 처마밑에 옹기종기 나와서 비를 바라보고 있던 아낙 들 속에서 "옛날 법대로 하자믄 디비시 업고 가믄 그만 아닌가배? 수절 지킬 가문도 아니겄고, 그라믄 젊은기이 우째 혼 자 살 기고." 좀 삐뚜름해진 목소리로 말하는 아낙이 있었다. "이 대명천지, 옛법이 무신 소용고. 요새 법은 어디 그렇건대?" 다른 아낙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요새 법이라 캐도 나라에 아들을 바쳤는데 설마 그 형제한테 쇠고라이야 채우겄소?" 바우는 "봐라. 동네가 저 지경이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상청에서 상주의 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홍이와 한복은 잠자코 있었다. "촌닭이 아이 눈 쫀다 카더마는, 제법 유식하네." 뒤늦게 비꼬는 바우 말에 아낙이 발끈한다. "여기 촌놈 촌년 아닌 사램이 어디 있어서." 그러나 바우는 못 들은 척한다. "세상은 돌고 도는 기라. 어제 그랬다고 오늘 그러라는 법 없고, 오늘 그랬다고 해서 내일 그러라는 법 없고, 세상은 돌고 돈다. 양귀비믄 머하고 항우장사믄 머하노, 좁은 가마솥에서 깨춤 치는 기지." 알쏭달쏭한 말을 하며 빗길을 나가는 사내 등을 향해 다른 사내가 "니 말이 맞다. 피죽이라도 묵고 가는 똥 싸문서 세월 가는 거나 기다리는 것이 마 젤 좋을 것 겉다." 하고 말했다. "와 하필이믄 피죽고?" "세상 돼가는 꼬라지 못 보요? 공출인가 먼가, 곡식을 거두어 갈기라 카는데 농사꾼 밥 묵게 생겼소?" "공출 안해도 죽 묵는 농사꾼 쌨다. 그것도 어제 오늘 일이 아니거마는, 초상집에 와서 술사발이나 마시고 물 밥이나 얻어 묵는다꼬 농사꾼 밥 묵고 산다, 하고 생각을 한다믄 그거는 신선 사는 동네서 온 놈이다." 바우의 말이었다. "하기는 보통일은 아니오. 전에사 돈이 없어 그렇지 물건이 없는 법은 없었는데 요새는 초상이 나도 세도가 좀 있어야 짚베 삼베라도 구할 판이니, 이 집에서는 우쨌는지 모르지만." "이 집이야 먹고 살 만하고 효성이 있는 아들에다가 딸고 잘산께 벌써 다 마련해놨제." "나이 든 노인네가 기시는 집안이야 미리부터 마련해놔야제. 인륜지대사 아니가." "흥, 그것도 저저히, 아무나가 하나? 아무리 인륜지대사라 캐도 뱃속에서 꼬룩꼬룩 소리가 나는 데야 별수없 제. 흔히들 부모, 지게송장 해갔다고 걸핏하믄 험담들 해쌓더라마는 가난이 죄지 사람으 잘못이가. 지게송장 해가는 자식 마음이 오죽할까." "호열자가 돌든 그해야, 빈자고 부자고 어 있더노. 송장 치울 사람도 없었고 니 내 할것없이 모두 지게송장이 었다. 좀 사람이 죽어나갔나?" "참 그렇지! 홍아, 너 바로 네가 호열자 통에 이집 저집 송장이요 발발이 송장을 실어내가든 그때 니가 태어났 제? 임이가 울옴마 죽는다고 울부짖으믄서 뛰어가든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니가 올 해 몇이고?" 바우가 물었다. "갓 마흔입니다. 임인년이니까요." "그런께 아무리 객리를 돌아댕기도 태생은 여기다, 그자?" "네." "강청댁이 죽고 곧바로 홍이가 태어났다 그러데." 누군가가 또 말했다. 그러나 역시 생모 임이네 얘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날에 대한 잡담은 끝없이 이 어졌다. 최참판댁 얘기에서부터, 그리고 아무도 봉기노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다. 호상인데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분위기였다. 궂은 날이어서 어둠은 빨리 왔다. 기둥에 초롱이 내걸리는 것을 보고 한복과 홍이는 상가를 나왔다. 홍이 최참판댁 사랑에서 장연학을 만나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다시 비는 장대비로 변했고 무섭게 비는 쏟아져 내렸다. "대단하다. 큰비가 오래 가면 큰일인데?" 연학이 근심스럽게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강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늘 홍수가 걱정인 것이다. "초상집이 걱정이오." "그도 그렇지." "이렇게 비가 쏟아지면 길이 끊이지 않을까요?" "내일 갈려고 그러나?" "여기 있을 일도 없구요." "날은 잡았나?" "......?" "만주 떠난다며?" "날은 잡지 않았지만 되도록 빨리 갈 생각입니다." "음...... 영광이가 왔을 때 무슨 말 없던가?" "별말 없었습니다." "만주서 부쳐주었다는 돈에 대해서 묻지 않던가?" "네." "하긴 아직 돈은 산에 있으니, 돈에 대해서는 도통 생각을 안하는 모양이다. 철이 덜 들었는가 아니믄 세상일 을 자파했는가." "그렇게 뵈지는 않았습니다. 만주서 만났을 때보다 어딘지 활기가 있어 뵈던데요? 그라고 또 산에 계시는 어 머니를 만나고 가겠다 했습니다." "그래? 마음을 잡아야 할 긴데." "뭐가 어때서요." "사내자식이 딴따라나 따라댕기서 되겄나." "형님도 구식이구먼요. 옛날같이 뭐 사당패 같은 그런 건 아닙니다." "그래도 돌아간 지 아부지 생각을 해야지. 그러고 우리 역시 관수형님 생각을 해서라도 그 아아를 옳게 끌어 야 안하겄나." "영광이는 단순한 성질이 아닙니다. 속에 든 것도 많고 알아서 판단하겠지요." "그거는 나도 알겄다마는, 시골 와서 살 인물도 아니고 그러니 서울서 집칸 마련해서 모친을 데리고 가야지. 나이가 지금 몇인데 장개도 안 가고. 본인이 원한다믄 취직자리야 서울서 구해줄 거고." "그보다 형님은 가족들 어쩌구 여기 계십니까." "나야 항상 그래 왔으니께, 가끔 진주에 간다. 앞으로는 좀 이런 자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자네도 가족 을 두고 떠나지 않는가." 두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날씨와 같이 우중충한 심회를 안고 저녁상을 받았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으라고 산 청댁이 당부했지만 이 얘기가 끝나지 않았고 그보다 비가 억수로 퍼부으니 갈 수도 없었다. "여러 가지로 자네한테는 고마운 생각을 하고 있다. 특히 관수형님의 뒷감당을 잘해주어서...... 나도 이제는 옛 날 같지가 않아. 또 시국이 이렇고, 모두 잘 견디이 나가야 할 긴데 걱정이다. 모든 고리는 다 끊어졌고, 또는 끊어버렸고 환국이아버님이 들어가는 것도 시간 문제 아니겠나?" "그런 기색이 있습니까?" "잠잠하다. 기분이 나쁠 지경으로 잠잠하다. 그러니 우리는 잠잠하게 기다릴밖에." 밤새도록 비는 내렸다. 빗줄기가 잦아지듯 하다가는 다시 세차게 기세를 올리곤 했다. 최참판댁 사랑에서 연학과 함께 많은 얘기를 나누며 밤을 보낸 홍이는 아침 일찍 범석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닌게아니라 그 창대 겉은 비를 맞고 못 올 줄은 알았네. 그래도 혹시나 하고 기다리기는 했지. 어쩌지? 아 침에 올 줄 모르고...... 찬이 이래 되겠나?" 조반상을 사랑에 들이는 며느리를 따라온 산청댁은 몹시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한경은 독상이었고 범석과 홍이는 겸상이었다. 된장찌개에 열무김치 마늘장아찌 그게 반찬의 전부였다. "비가 계속 올 모양인데 오늘 꼭 가야 하나?" 범석이 밥을 먹으면서 물었다. "하루 더 묵어야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그 말은 한경이가 했다. 실은 비에 갇혀서 못 떠난다기보다 홍이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 혹은 계획의 변경이 있었던 것 같았다. "석이형님 아들이 진주서 중학교를 다닌다 하든데요?" 홍이 범석에게 물었다. "다니지." "부모가 없으니, 의기소침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지는 않다. 아이 성미가 매우 진중한 것 같더군." "......" "우리집 재문이하고 또 김위관댁 막내가 한 학교에 다니고 있어." 범석은 옛날 호칭대로 한복의 집을 가리켜 김위관댁이라 했다. 그리고 재문은 그의 외아들이었다. "할머니가 연만하여 걱정이지만 성환이는 제 앞 가릴 만큼 컸고, 여식아이는 생모가 와서 데리고 갔는데 할머 니가 어떻게나 애통해 하시든지." 그 얘기는 홍이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영호가 들려준 말이었다. "가슴에 응어리가 져 있어서 그러실 겁니다." "제 새끼 잡아먹는 호랑이는 없다. 상급학교에도 보내고 있다 하니, 잊어야지." "성환이는 형님께서도 신경 좀 써주십시오." 그 말 속에는 정석이라는 존재를 의식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야, 재문이하고 친구간이라 방학 때 오면 집에도 드나든다. 걱정 말게. 최참판댁에서도 그 아이에 대해서는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니." "그건 저도 알고 있지요. 관수형님이 그렇게 돌아가신 후에, 뭔가 우리들이 잘못한 것 같아서...... 늘 어쩐지 한 스러웠습니다." 하자 "관수 그 사람? 음 그래 그 사람도 아버님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지. 그해가 정미년, 박성환이 자결했던 해였 다." 한경은 지나간 일을, 김훈장이 산으로 들어가기 전, 을사년의 그 해 일을 생각한다. 나라가 망했다 하며 돌아 온 김훈장이 조준구를 찾아간 채 돌아오지 않아 한경은 초롱을 들고 찾아나섰을 때 어둠 속에서 "한경이냐?" 김훈장 목소리였다. "예." 어둠을 헤치고 가까이 간 한경이 "여기 왜 이러고 계십니까?" "음." "날씨가 찬데 병환 나시겠습니다." "그래 가자." 버마재미같이 껑충한 김훈장 옆을 비스듬히 따라가며 한경은 그의 발부리에 초롱불을 비춰주었다. "한경아." "예." "너는 애비가 하자면 하자는 대로 하겠느냐?" "예." "우리가 죽어야 한다면 그때는 어쩌겠느냐." "아버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헤매듯이 가는 김훈장 도폿자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산에서는 뻐꾸기가 울었다. 거사를 위해 근동 유생들이 찾 아나선 김훈장을 따라다녔던 일도 생각이 났다.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나라 지경을 설명하고 일어서 싸워야 한다고 외치다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린 김훈장의 모습이 생각났다. 한경은 상을 밀어내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어본다.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가 더러 있는데 그때 일만은 언제나 기억에 생생했다. "모두 제 땅 놔두고 남의 땅에 가서 뼈를 묻으니 이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어디 있겠나." 말을 한 한경은 우두커니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본다. '아버님 송관수 그 사람의 뼈는 가져와서 섬진강에 흩날렸습니다. 할아버님도 모셔왔구요.' 한결같은 생각 속에 망설임 없이 갇혀서 살아온 부친에 대하여 어떤 안쓰러움 때문에 범석은 한경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혼자 뇌었던 것이다. 비가 멎었는가 개구리들 울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국운이 기울고 보니 사람의 힘으로 어쩌리. 허나 돌아올 게야. 우리 강산도 돌아올 게고 수많은 그 혼백들도 돌아올 게야." 범석과 홍이는 말없이 수저를 놓았다. 사랑에서 나온 홍이는 기다리고 있는 산청댁을 위하여 안채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산청댁이 궁금해하 는 통영의 형편을 대강 설명해준다. "보연이 그 아이가 어찌 그린 간 큰 짓을 했는고. 일이 해결되었으니 불행중 다행이다마는." "크게 잘못된 일인 줄 모르고 그랬든 것 같습니다." "자네가 넉넉하게 그리 생각해주니 고맙네. 만주의 사업도 걷어버렸다 하니 우리로서는 정말 볼 낯이 없구나." "그것은, 어차피 그만둘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홍이는 막 집을 나서서 몇 발짝 걸었는데 천일네와 마주쳤던 것이다. "한 동네서 우찌 그리 사람 찾기가 어렵노." 천일네는 허리를 펴며 원망스럽게 말했다. "지금 천일어머니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홍이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왔다는 말을 듣고 김훈장댁, 한복이집, 헤매다닜으나 니를 볼 수 없었고 저녁에는 성환이네집에 가서 밤늦게 까지 기다맀지만은 허사였고 아침에는 또 최참판댁으로 갔제." 천일네는 숨가쁘게 말했다. "가만 계시면 찾아갈 텐데, 노인네가, 저도 비에 갇혀서 그만." 두 사람은 나란히 마을길을 걸어 내려온다. "웬 비가 그리 쏟아지든지, 아침은 잡샀나?" "네." "그래 우리 아아들은 모두 잘 있겄제?" "네, 염려 마십시오." "내가 통영으로 한분 가볼라 캤더마는 혼자서는 엄두가 나야제? 장서방 가는 거를 알았이믄 따라붙이는 건 데...... 우리 성자애비도 먼가 늘 바빠서." 나중의 말은 변명 비슷했다. 두 사람이 집에 들어섰을 때 둘째며느리 성자네가 마당에서 서성대고 있다가 들어서는 홍이를 보자 다소 어색 해하며 인사를 했다. "아가, 에미야. 이서방 점심은 우리집에서 하게 준비를 해라." 비위를 맞추듯 며느리에게 말했다. "그러지요." 하기는 했으나 어딘지 불만이 있어 보였다. "아닙니다. 간단히 얘기하고 곧 가야 하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홍이 강하게 말했다. "그렇지마는." 성자네는 어정쩡하게 서 있었고 "그런 법 없다. 여까지 와서 맨입으로 갈 기가." "아닙니다. 사정이 그렇게 돼 있어서." "그라믄 방에나 들어가자." "여기서 얘기하지요 뭐." 성자네는 슬그머니 부엌 쪽으로 사라졌다. "성자애비는 읍내에 돈 받을 기이 좀 있어서, 비 끄치는 것 보고 막 나갔다." 역시 변명 비슷하게 말했다. 뭔지 모르지만 아들내외와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았다. 천일네는 감정을 삭이느 라 얼굴을 숙였다가 들었다. "이렇게 섭섭하게 너를 대접해서 되겄나?" "제 사정이 그런데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우리 천일이는 우떻게 할라 카더노." "제가 이번에 가게 되면 거산해서 내려올 겁니다." "정말가!" "네. 당연히 나와야지요." "솔가해서 말이지?" "네. 이제는 아무 걱정 마십시오. 천일이는 그 동안 알뜰하게 했으니 조선에 나와도 먹고 살 만큼 돼 있고 개 인 사업을 하든, 기술이 좋으니까 취직도 쉬울 거고." "정말가? 진주에다가 기와집을 사놨다는 것도 틀림없는 일이제?" "네. 틀림없습니다. 천일이가 나오게 되면 천일어머니도 이제는 큰아들하고 함께 살게 될 겁니다. 다 그런 저 런 생각이 있어서 집도 마련한 것이니까." "그러씨......" 했으나 천일네는 넘치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고 치맛자락을 걷어서 눈물을 닦는다. "아이들은 모두 잘 크고 있나?" "그럼요. 이번에는 저의 일 땜에 천일이 수고가 많았습니다. 의리가 있고 정직하고 또 경험도 많이 쌓았으니 무엇을 해도 어머니한테 걱정 끼치지는 않을 겁니다." "그게 다 니 덕 아니가. 니가 없었이믄 이 촌에서 지가 농사밖에 더 했겄나? 기술도 기술이고 이서방 니가 천 일이를 사람 맨들었다. 니사 아바니가 어진께 배운 것도 많고 참말로 고맙다." 천일네를 안심시켜 놓고 홍이 성환의 집 앞에까지 갔을 때 성환할매는 홍이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삽짝 밖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다가가는 홍이를 보자 성환할매는 활짝 웃었따. 옷도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천일어미 만냈나?" "방금 거기서 오는 길입니다." 홍이도 쾌활하게 말했다. "어제는 밤늦기까지 우리집에서 니를 기다렸데이. 어서 들어가자." 집안으로 들어간 이들은 마루에 나란히 걸터앉는다. 귀남네는 오늘도 초상집에 일해주러 갔다는 것이었다. "오늘이 출상인데 비가 그쳤으니 얼매나 좋노. 창대비가 내릴 직에는 큰 걱정이더마. 아침은 묵었나?" "먹었습니다." "김훈장댁에서 묵었나?" "네." "그 댁은 옛적부터 험하게 음식을 잡숫는데 니 왔다고 머 낫인 것이라도 해주더나?" "어제 저녁에는 저 때문에 음식을 차렸던 모양인데 비에 갇혀서 못 갔고 아침에는 제가 갈 줄 모르고, 그분들 그렇게 검약하게 사시는 것은 본받을 만한 정신이지요." "함모, 그렇고말고. 예사 근본 없는 것들이 돈 좀 있다고 잘해 묵더라마는, 김훈장 기실 때부터 내림이제." "저어, 천일어머니하고 아들 내외간 사이에 혹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닙니까?" 홍이 화제를 바꾸었다. "그거를 니가 우찌 아노." "좀, 이상해서요." "머, 부모자식간에 무신 일이 있기야 있을까마는, 아들 며느리가 서운해서 그러는 갑더마. 어매한테 서운한 기 ㅏ니고 만주 있는 성한테 유갬이 있는 모양이라." 성환할매는 되도록 좋게 말하려 하는 것 같았으나 아까 집안 분위기를 봐서는 꽤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았 다. "천일이한테? 왜요?" "그러씨...... 잘은 모르지마는, 진주에다 성이 집을 사놨다는 소문을 듣고, 저거들 좁은 소견에는 어매를 모시고 있는데 동생은 조맨치도 돌보지 않는다, 머 그런 심사 아니겄나." "하지만 어머니 모실 만큼 땅이며 재산은 둘째가 다 가지지 않았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어디 저저히 다 그런가? 형제라 캐도 잘살믄 바라게 되고 시기하게 되고." "천일이는 빈손 들고 나와서 이제 겨우 살 만하게 됐는데, 그것도 독한 마음 먹고 그랬으니 집칸이라도 장만 했지요." 홍이는 왠지 울분 같은 것이 치밀었다. "원래 성자어미하고 천일어매 뜻이 좀 맞지 않았다. 이세는 말할 것도 없고 살림 두랑하며, 천일어매가 니도 알다시피 예사 사람이가. 뭐 하나 버릴 기이 없는 사람이고 보니 요새 젊은아이들이사 어디 그렇더나? 자연 의견 충돌도 있고 사람 사는 기이 모두 그렇지 머." 그 정도로 성환할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홍이 역시 더 묻지 않았다. "오늘 가는 거 아니제?" "내일 가기로 했습니다. 어젯밤에는 연학이형님과 얘기하느라 밤을 샜더마는 어이구, 막 잠이 쏟아지네." 홍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뿍뿍 문지르며 하품을 깨문다. "그라믄 한심 자거라. 내 이불 깔아줄 기니께." 성환할매는 서둘며 방으로 들어간다. 어제 저녁 홍이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고 방은 말끔히 치워놨으며 베개도 새로운 베갯잇으로 갈아 끼워두었기 때문에 금방 홍이 잠자리는 마련되었다. "그러면 한잠 자겠습니다." 홍이는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가며 방문을 닫았다. 성환할매는 뭔가 홍이로부터 얘기를 더 듣고 싶었다. 새로운 얘기가 없다면 어제 했던 말을 되풀이하여 들려 주어도 그 말들이 한없이 달콤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지 않아도 성환할매는 행복했다. 아들 석이가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저 고맙고 기적만 같이 생각되었던 것이다. "엄니, 상의아부지한테서 무신 좋은 소식이라도 들었소?" 어제 상가에서 돌아온 귀남네가 성환할매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소식은 무신 소식, 이서방이 우찌 알꼬." "얼굴이 환해 봬서 혹, 하고 물어본 거요." "그야 반가운 손님이 왔인께 그렇제. 이 걸레나 어서 빨아도고." 홍이 묵을 방을 구석구석까지 닦아낸 성환할매는 짐짓 화난 척 걸레를 딸에게 내밀었다. "기운도 펄펄 나는 것 겉소." "야아가 생각이 있나 없나. 이서방이 우떤 사람고? 이 집이 누구 집이제? 남으 은공으로 살아온 우리가 부답 하는 거는 마음밖에 더 있겄나? 시잘데없는 소리, 신둥건둥, 그만 해라." 딸이 한 말과는 상관이 없는, 엉뚱한 말을 해놓고 성환할매는 화를 내었다. "얄궂어라. 별말 한 것도 아닌데 와 그리 징을 냅니까?" "내가 멋이 좋아서 기운일 펄펄 날 기고. 늙은 사람보고, 그것도 욕이라는 거를 몰라서 하는 말가. 서방 없는 젊은기이 고개 비틀고 있는데 늙은기이 기운이 펄펄 난다믄 그 말이 욕 아니고 머꼬?" "하 참, 내가 운제 고개를 비틀고 있었소? 심장 긁노라고 하는 말이오?" "말 마라." 아침에도 성환할매는 딸에게 오늘은 초상집에 안 가느냐고 은근히 가라는 투로 말했다. 딸이 옆에서 자기 감 정을 훔쳐볼까 겁이 났던 것이다. 성환할매는 소매를 걷고 치마도 걷어서 짧게 동여매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조왕님네 고맙십니다." 큰솥이 걸려 있는 부엌 벽면을 향해 성환할매는 손을 비비며 절을 하고 나서 바가지를 들고 나온다. 쌀을 떠 내어 장독가로 간다. 쌀바가지를 내려놓고 성환할매는 또다시 손을 비비며 절을 한다. "터줏대감님네, 고맙십니다. 우짜든지 간에 우리 성환아범 명이 쇠땇줄겉이 질기서 자식들하고 상봉하게 하시 고 옛말 하믄서 식구들이 모이 살게 해주이소. 만사는 다 신령님네 요량하시기 탓이니께 이 늙은 것 정성을 헤아리사 부디, 부디, 비나이다." 그러고는 쭈그리고 앉아 쌀을 씻는다. 이때 야무네가 들어왔다. "성환할매." "누, 누고." 성환할매는 쌀을 씻으면서도 마음속으로 수없이 소원을 빌고 있었던 것이다. "야무어매, 어서 오소." "머합니까?" "점심 할라꼬." "따신 점심 할라 카는 거를 보이, 홍이가 묵을 긴가배요. 귀남네는 어디 가고?" "초상집게 간다 캐서 가라 했제." "어제도 갔일 긴데?" "어제 갔지마는 일이 끝난 것도 아니고." "하기는 노인네 있는 집이사 품앗이니께. 한 사람 두 사람 떠나부리고 참말이제 드골에서 바람 소리가 난다. 홍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자는구마. 간밤에 잠을 설칬다 캄서, 들고 있는 그기이 멋인고?" "이제 가고 나믄 홍이를 언제 또 보겄소. 그냥 있기가 섭운해서, 술이요. 작년에 머루를 좀 따다가 담근 술이 쪼맨 남아 있어서 가지왔구마." "야무 땜이 담갔구마. 아닌게아니라 술이 좀 있었이믄 싶었는데 마침 잘 됐소." 이미 부엌일은 놓아버린 두 늙은이가 굼뜬 몸짓으로 부엌을 드나들며 점심 준비를 하는데 이번에는 또 천일네 가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어이구 숨차라. 급히 오느라고 서둘렀더마는, 어이구 숨차라." "니는 와 오노?" 파를 다듬던 야무네가 핀잔 주듯 말했다. "내가 와야제요. 그래야 일이 안되겄소." "얼씨구." "닭 한 마리 장만해 왔는데 두 늙은이, 한물간 솜씨가 미더버야제요." "지는 안 늙었나?" 성환할매는 다시 마루에 가서 쌀을 내와 씻는다. "머할라꼬 쌀을 또 씻소?" "묵을 입이 늘었이니." "보리 좀 더 깔믄 될 긴데 딸한테 지천 들으믄 우짤라꼬 그러요." 야무네 말에 "와 아니라요." 천일네가 맞장구를 친다. "그런 말 마라. 내일 때꺼리가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오늘 내 마음은 안 그렇다. 홍이를 위해서 잔친들 못하겄 나." 세 늙은이는 머리를 맞대고 "머를 했이믄 좋겄노." 잡아서 말끔하게 손질해온 닭 한 마리를 놓고 의논을 한다. "찜으로 하입시다." 천일네 말에 "그, 그러자. 그기이 좋겄다." 천일네도 소매를 걷고 부엌으로 들어서며 작은 솥에 물을 붓고 가셔낸 뒤 닭을 안치고 불을 지핀다. "성님." "와." 야무네가 나물을 무치다가 대답했다. "사깜 사는 것 겉소." "그러게 말이다. 언제 살림을 살아봤는가 싶다." 천일네는 마늘을 까고 성환할매는 성환이가 오면 해주려고 간수해 두었던 건어와 꼬치에 끼워 말린 홍합을 장 독 항아리 속에서 꺼내왔다. 그리고 뒤꼍으로 돌아가서 생강도 한쪽 파가지고 왔다. "홍합은 된장에 넣을라꼬 그러요?" 천일네가 말했다. "그래. 야무어매, 참기름 깨소금 애끼지 말고, 그거 안 들어가믄 무신 맛이 있어야제." "알았소." 세 늙은이는 신명을 내가며,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만든다. 모처럼 그들에게 생활이 살아나 꽃이 되는 것 같았 다. 한곁에 밀려나서 마치 방안에 놓인 장롱과도 같이, 언제부터 그리 되었는지, 눈치볼 며느리 딸도 없고 마 치 자유 천지에서 벗과 노니는 것처럼, 우물가에서 지저귀던 옛날이 돌아온 것같이 이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부엌 안에서 맴돈다. 성환할매와 천일네는 기쁨을 비밀로 간직하고 있었으며 야무네도 요즘 야무가 거동을 하 게 되어 마음이 느긋해져 있었다. "장에 갈 새가 있었이믄 바지락도 사오고 생미역이나 파래를 넣어 설치국이나 했이믄 좋았을 긴데." 성환할매는 몹시 아쉬워한다. "지금 생미역이 있겄소? 철 아닌 소리 하네." 야무네가 타박을 준다. "그런가? 장에 가본 지가 아득해서 그런갑다." "갈 날이 가까워진께 그렇소. 해서 옛날에 늙은 어매가 한겨울에 아들보고 죽순 구해오라, 하는 말도 나왔일 기요." "듣자니께 노망들었다 그 말이네?" 천일네는 웃으며 "통영서 그런 거사 원없이 묵었을 기요, 사위는 백년 손인데 처가에서 배면이 했겄소?" "그거는 그렇다. 그라믄 밥솥에는 좀 있다가 불지피고 밥이 끓으믄 개기 굽고, 나는 어디 좀 갔다 올란다." "어디 갈라 카요?" "술이 있고 하니 흥이 혼자 묵는 것도 여럽을 기고 나 가서 영호애비 오라 칼란다." "생각 잘했구마. 갔다 오소." 성환할매는 나가고 천일네는 "성님." 하고 야무네를 불렀다. "영호네집에서 어제 난리굿이 난 것 아요?" "멋 땜에? 우가놈 제집이 또 지랄을 했는가배." "영호네가 기절을 하고 한소동이 벌어졌더랍니다. 뿐만 아니라 막 이서방이 들어서는데 다짜고짜 퍼붓고 달라 들었다 안카요." "홍이가 무신 죄 졌다고." "그러니 그기이 어디 사람이요?" "그년 잡아갈 구신은 없나? 동네가 시끄러버서 어디 살겄나." "그것도 벼락이 치니께 겨우 겁이 나서 물러갔다오." "그만 벼락이나 맞지. 참. 옛날 같았이믄 버얼써 요절을 냈지 가만 두었겄나?" "하나마나의 얘기 아니겄소. 지랄하는 거사 태성이거니 생각하믄 되는데 영호네가 큰 업을 짊어졌제요." "서기질한다고 해서만 기고만장하는 기이 아니다." "순전히 그 때문이지 머겠소." "모리는 소리, 동네서 그것들 비위를 맞추는 연놈들이 있인께 그러는 기다. 그까짓 면소 서기가 머 대단한 기 라고, 따지고 보믄 역적질인데, 인심이 우찌 이렇게도 야박해졌는지 모리겄다. 사람으 도리보다, 젊은것들이 약 아빠져서 시류를 따르기 때문에 안 그렇나. 그래도 김훈장이 기실 적에는 무경우한 짓 했다가는 동네에 붙임 질도 못했인께." "그거는 성님이 몰라 하는 말이오. 나는 김훈장을 잘 모리지마는, 그 시절에도 조가가 최참판댁 살림 들어묵지 않았던가배? 결국에는 나라가 없어지니께 동네가 이 지경 되는 거 아니겄소. 왜놈들 심을 믿고, 등에 업고, 조 가도 왜놈 심을 믿고 그랬다 카대요." "하기사......" 이윽고 성환할매는 한복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방에서는 홍이 일어나는 기척이었고 한복은 "더 잘 거를 그랬나?"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는 밥솥에 불을 지피고 닭찜을 접시에 꺼내놓고 세 노인은 부지런히 반찬을 그릇에 담으며 서둘렀다. 우선 먼저 술상이 방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 다시 밥상이 들어갔다. 상을 들여놓고 온 천일네 코를 벌름거렸 다. 술안주로 먼저 들어간 닭찜 맛이 좋다고 한복이와 홍이 입을 모아 말을 했기 때문이다. "성님 우리는 채리가고 할 것 없이 그만 정기에서 묵읍시다." "그래 그러자." 세 늙은이는 젊었을 때처럼 양재기에다 밥을 푸고, 차려내고 남은 반찬을 챙겨서 숟가락을 들었다. "와 이리 밥이 맛있노." 야무네가 말했다. "들일 하다가 묵는 밥맨치로 입에 살살 녹소." 천일네가 말했다. 성환할매는 "반찬이 좋은께 그렇지." "반찬도 좋지마는 굼재기고 나니 몹시 시장했소." 천일네 말에 "그 말도 맞다." 야무네가 동의를 했다. 이튿날 홍이는 떠났다. 성환할매가 통영으로 가는 거냐고 물었을 때 홍이는 산에 간다고 했다. 송관수의 마누 라, 영광의 어머니를 만나보고 통영으로 간다고 했다. 제 3 편 바닥 모를 늪 속으로 1장 소식 2월도 중순에 접어들었는데 날씨는 몹시 추웠고 서울 거리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외투 호주머니 속에 두 손을 찌르고 등을 구부리며 걷고 있는 행인의 모습도 그러했으나 얼어붙은 길, 엉성하게 늘어선 건물은 살벌 했다. 그곳을 양철 단면같이 날카로운 바람이 내리꽂혔다가는 맴돌아 나오곤 한다. 봄은 아직, 아직도 멀기만 한 것 같았다. 청량리에서 나온 전차가 멎고 검정색 외투를 입은 명희가 내렸다. 돈암동행 전차를 갈아타기 위해서다. 한동안 전차를 기다리고 있던 명희는 발길을 돌린다. 걷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전차 종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았을 때 그것은 돈암동행이었다. 되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은 거리에 명희는 서 있었다. 무슨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 니었다. 멍청이 서 있는데 전차는 종을 울리며 종로 4정목을 돌아 창경원 쪽으로 향해 떠났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집에 갈 수 있었을 텐데......' 다시 걷기 시작한다. 명희는 늘 이런 식으로 자기 인생도 우회해왔던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종로 입구와 달라서, 동대문 시장을 끼고 있는 4정목에서 5정목에 이르는 길가 점포는 땅에 엎드린 듯 낮은데 다가 구건물이 뒤섞이어 초라하고 을시년스러웠다. 게다가 진열된 상품도 별로 없어 휑뎅그렁했다. 유리창 안 에 시커멓게 칠을 한 관과 백골의 관이 포개어진 광경이 명희 눈에 띄었다. 삼베 피륙이며 향로 촛대따위도 눈에 들어왔다. 장의에 소용되는 물품을 파는 장의사 같은 점포였다. 명희는 그 앞을 서둘러 지나쳤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낀다.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뭘 사겠다는 생각도 아니했고 살 만한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시장은 와글와글 떠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꿈속 같았고 실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사람들은 붕어같이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실상 명희는 아무도 보지 못했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모른 다. 가까스로 시장을 빠져나왔을 때 '우동'이라 써붙여놓은 작은 식당이 있었다. 명희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난 롯가에 남자 두세 명이 불을 쬐고 서 있었다. "시간 지났어요." 하고 여자가 말했다. "......?" "다 팔았어요." 또 말했다. 명희는 몽유병자같이 그곳을 나왔다. 얼마 만큼 걸었을 때 또 식당 하나가 나타났다. 들어간다. 그 곳에서는 시간이 지났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명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식당 안에는 서너 명의 손님들이 우 동을 먹고 있었다. 명희는 구석진 곳에 가서 앉았다. 여자가 말없이 우동 한 그릇과 단무지가 서너 쪽 들어 있 는 작은 접시를 갖다놓고 간다. 배가 고팠던 것은 아니었으며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던 우동을 명희는 꾸역꾸 역 먹는다. 식당 여자는 이상하다는 듯 힐끔힐끔 쳐다본다. 아무리 식량이 배급제라 하지만 이런 서민 상대의 식당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손님이었던 것이다. 밖으로 나온 명희는 본시의 거리로 돌아갔다. 종로 4정목, 전차 기다리는 곳으로. 그리고 그는 돈암동행 전차 에 올랐다. 전차가 멎었다. 창경원 높은 문이 눈앞에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명희는 뒤늦게 허둥지둥 내린다. 매표구에서 입장권을 산 명희는 마치 빨려들어가듯 창경원 안으로 들어갔다. 나뭇가지가 소리를 내며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완전히 격리된 세계 한복판에 내던져진 듯 명희는 막연하게 서 있다가 외투깃을 세우며 벤 치에 가서 웅크리고 앉는다. 한줌의 온기 같은 햇볕이 창백한 얼굴에 와서 걸렸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 나뭇가지에는 마치 명희의 웅크린 모습과도 같이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명희는 손수건을 꺼내어 입을 막으며 흐느껴 운다. "우리집에 가자. 나하고 살아." 했을 때 여옥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여옥아 나하고 살아." "괜찮아. 나 아무렇지도 않아." 여옥의 모습은 해골이었다. 명희는 청량리, 여옥의 친정으로 가서 해골이 된 여옥을 보고 오는 길이었던 것이 다. 그러니까 재작년 9월. 반전 공작운동을 한다 하여 기독교도들의 검거 선풍이 불었을 때 여옥은 체포되었고 어 저께 병보석으로 서울에 왔으니까 만 일년하고 4개월을 형무소에서 보냈던 것이다. 명희는 그 동안 두 번이나 목포로 내려가서 형무소의 여옥을 만나려고 면회 신청을 했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여옥이 왔다는 연락을 아침 에 받고 부랴부랴 달려갔을 때 여옥의 올케가 울면서 명희를 맞이하였다. 친정의 양친은 이미 사망하였고 집 안도 영락하여 문밖 청량리로 옮겨갔는데 집은 그럭저럭 체면을 유지할 만큼의 규모였다. "살 것 같지 않아요. 불쌍한 우리 아씨." 여옥의 올케 신씨는 명희 손을 잡으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명희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여옥은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명희를 보고 미소했으나 여옥은 일어나 앉질 못했다. 믿을 수 없었다. 명희는 참혹한 광경을, 현 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병원에 입원시켜요." 명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생각도 그랬는데 본인이 한사코 반대했어요. 그리고 함께 오신 최선생님도 반대하셨구요." "최선생?" "최상길 씨, 너도 만났지 않아. 여수서." 여옥이 간신히 말했다. "......?" "그렇게 고마울 데가, 그분의 힘이 컸어요. 애아버지 혼자 힘으로는 집에까지 데려올 수도 없었을 거예요. 최 선생님께서 함께 오셔서 데려다주고 어제 밤차로 내려갔어요." 명희는 겨우 생각이 났다. 통영으로 갈 때 여수서 한배를 탔던 사람, 오빠가 교장으로 있었을 때 같은 학교에 서 음악선생을 했다는 사람, "뿐이겠어요? 최선생님께서 용한 한의를 목포까지 데려와서 진맥도 하고 약도 지어 가져왔어요. 고모가 나온 다는 기별도 그분이 해주셨구요." 여수 갑부의 둘째아들이라 했고 아내의 부정 때문에 좌절했으며 미모의 기생을 후실로 맞이했다든지, 명희는 하나 하나, 그 괴로웠던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런 세상에 그런 분이 어디 있겠어요?" "언니 이제 그만해요. 나 괜찮아요." 여옥은 힘겹게 팔을 내저었다. "무모한 놈들, 사람을 어찌 이지경으로 만들었누." 명희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여옥의 모습은 명희의 이성을 잃게 했으며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여옥아 죽지 마!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 명희는 흐느껴 울면서 울부짖었다. 유리창 안의 검정칠을 한 관과 백골의 관을 보았을 때 명희의 공포감은 여옥만을 생각한 때문은 아니었다. 효 자동의 오라비 임명빈도 병중이었다. 뚜렷한 병명도 없이 임명빈은 짚불처럼 생명의 불길이 잦아들고 있었다. 여옥이 해골이 되어 돌아왔다면 임명빈은 몸이 짚둥같이 부어서 산송장이 되어 있었다. 서의돈과 유인성, 김길 상과 선우신이 예비검속령에 의해 수감된 것은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작년 12월 8일 일본은 드디어 영미 를 상대하여 선전포고를 했고 진주만을 기습했다. 해서 유인성 등, 사상이 불온한 인사들의 수감은 놀라운 일 도 예상 밖의 일도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서 임명빈이 제외되고 무풍지대에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경찰 에서는 병든 몸을 끌고가서 여러 가지 조사를 했고 상당한 시달림도 받았던 것이다. 겨우겨우 거동하던 임명 빈은 그러저러한 일로 이제는 자리에 누운 채 운신을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소심한 편이기는 했으나 병 세가 극도로 악화한 것은 일신의 보신 때문에 받은 충격에 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패배감 때문이었 다. 어쩌면 그는 마지막으로 감옥 속에서 죽고 싶었는지 모른다. 언젠가 그는 명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별 쓸모가 없는 인간이다. 젊은 시절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의지대로 한 일이 거의 없었다." "자기 의지대로 살아온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명희는 명빈의 말을 막으려 했다. "아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뜻과는 다르다. 남에 의해서 내 의지를 굽혔다는 뜻은 아닌 게야. 내가 나를 배반 했지. 내 의지에는 능력이 따르지 못했다. 해서 내가 나를 배반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오빠. 왜 그리 자학을 하세요? 우리에게는 설자리가 없지 않아요? 자신이 자신을 배반하는, 그건 오빠만의 경 우가 아니잖아요?" 그러나 명빈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유인성이 서의돈이 환국이아버지 그들은 자신을 배반하지 않고 가고 있어.그들은 신념대로 가고 있어. 내 인 생은 쓰레기야." "저는 오빠가 비겁한 사람이 아닌 것을 믿고 있어요." 명빈은 헛웃음을 웃었다. "비겁하지 않았는지 그건 알 수 없지만 내 존재는 무의미한 것이었어. 나는 청년 시절 시인이 되려고 결심했 지. 그러나 나는 시인이 못 되었다. 작가가 되려고도 했고 평론가가 되려고 결심도 해보았다. 나중에는 문예부 흥을 위해 잡지를 하기로 했지. 그러나 그것은 무참한 실패였다. 왜 그런지 아나? 내가 나를 배반할 수밖에 없 었던 것은 의지에 능력이 따라주지 못한 때문이야.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독립투쟁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였어. 내 의지에 능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단 한 군데 쓸모가 있었다면 일회용 폭탄, 그것이야." "지금 연세가 몇인데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야말로 영원한 문청이시군요." 명희는 결국 짜증을 내고 말았다. 임명빈이 말하지 않아도 명희는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 자신 을 바라보듯 명희 역시 명빈과 같은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밖에 내어 말한적은 없지만 주어진 여 건에 비하여 늘 명빈의 능력이 모자라는 것을 명희는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위로를 하다가 결 국 짜증이 났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임명빈을 보고 호인이며 순하다 했다. 그것에는 둔하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명희는 그가 얼마나 예민한지, 얼마나 사소한 일에 상처를 잘 받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지 말어." 명빈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아니야, 네 말이 맞다. 나는 제문식이, 서의돈을 늘 마음속으로 부러워했다." "......" "상처가 나도 쓰윽 닦아버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그 얼굴 말이다. 내가 너를 조용하한테 시집보내고 그 덕에 교장질을 하던 시기, 그 기간 동안 나는 무의식 속을 헤맸던 것 같았다. 어쩌면 그때부터 내 병이 시작되었는 지 몰라. 명예와 돈의 노예, 아아 나는 진정 그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것을 잘라버리지도 않았다. 지 금도 그래, 지금도." "자학하지 마세요. 저 역시 그렇지 않아요? 오빠가 이러심 저는 서 있을 수가 없어요." 하고 그때 명희는 울어버리고 말았다. 해골과 산송장. '난 정말 서 있을 수가 없다. 여옥이는 어째 그리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여옥아 살아라! 죽지 말고 살 아. 나를 위해서도 살아줘.' 집으로 돌아온 명희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보모 염경순에게 "만신창이야." 외투를 벗으며 말했다. 경순은 놀란 듯 명희를 쳐다보았다. "그래 무슨 일로 날 기다리고 있었어?" "저기," 머뭇거렸다. "말해보아." 경순은 눈이 빨개져 있는 명희 얼굴을 보며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만신창이라 한 말도 그랬고, 분명히 울었을 것 같은 얼굴을 보고서, 말을 해야 하나 망설이는 것 같았다. "이상해서 그러니?" "네." "자칫 잘못 되면 초상이 두 곳에서 날 것 같아 내가 좀 울었어." 경순은 또 한번 놀란다. 초상이 난다는 말보다 그런 말을 내던지듯 하는 명희 태도가 전혀 딴 사람 같았던 것 이다. "재작년에 기독교 교인들이 잡혀갔을 때, 그때 들어갔던 내 친구가 어제 서울로 왔어. 눈동자만 살아 있고 나 머지는 죽은 몸이었어." 경순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그는 순교자 같았다. 왜 사람은 순교자가 되어야 하지? 그게 하나님의 뜻이야? 아니야 그건 일본인, 일본의 뜻이다. 일본은 하나님을 능멸하고 하나님 위에 서 있는 거야." "원장님,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니라니?" 경순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잊은 듯 대답을 못한다. 한동안 침묵이 지나갔다. "염선생, 결혼하는 거지?" 명희가 말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원장님." "그 동안 얘기가 있었잖아. 그래 그만두는 거야?" "저기, 네." "유치원에 나오는 걸 반대해서 그러니?" "그게 아니구요. 시골로 가야 하기 때문이에요." "하긴 뭐, 유치원도 멀잖아 못하게 될 것 같다." "......" 경순이 돌아갔고 명희는 서랍 속에서 예금통장을 꺼내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도장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도장이?" 여기저기 찾았으나 역시 도장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어디 갔지?" 명희는 우두커니 방 한가운데 앉았다. 그새 도장을 어디다 썼는지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으나 머릿속이 뒤죽박 죽이 된 듯 생각해 낼 수 없었고 여옥의 뼈만 남은 얼굴만 눈앞에 떠올랐다. "원장님." 홍천댁이 문을 열고 들여다본다. "점심은 하셨는지요?" 동대문 시장 근처에 있는 시장에서 꾸역꾸역 먹어댄 우동이 위장 속에 그냥 쌓여 있는 것만 같은데, 새삼스럽 게 그것을 먹어댄 자신이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세시가 훨씬 넘은 시각에 점심을 했느냐고 묻는 홍천댁 태도도 좀 엉뚱했다. "먹었어요." "어디서 잡수셨습니까?" "어디서 먹었느냐고?" 명희는 방문을 연 채 서 있는 홍천댁을 바라본다. 의아해하는 눈초리로. 그는 따뜻해 뵈는 푸른색 털재킷을 입 고 있었다. 늘 굳어있는 것 같았던 홍천댁은 무신경하리만큼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명희의 대답이 없자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이번에는 전에 없이 아주 친근감을 나타내며 말했다. "좀 속상하는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인데 속이 상하셨어요?" 명희는 집요한 것을 느끼며 홍천댁을 쳐다본다. 여전히 그는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는 일이었다. 안그러던 사람이 그랬으니까 이상할 뿐이지, 그러고 보면 홍천댁은 요즘 명랑해진 것 같기도 했다. 남편과의 사이도 다정해진 것 같았다. 그의 남편 차서방은 유치원의 소사였다. 그러니까 부부가 함께 명 희 밑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처는 집 뒤편, 유치원을 향해 있는 작은 집이었다. "그보다, 홍천댁, 혹시 내 도장 못 보았어요?" 하고 명희가 물었다. "아! 참." 하다가 "부엌 선반에 놔두고선 깜박 잊었습니다." "부엌 선반에? 도장이 어째 부엌 선반에 가 있을꼬?" "일전에 영월에서 등기 우편이 왔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편 배달부가 도장 달라 하기에 내가 찍고는 도장은 깜박 잊고 우편물만 드렸던 거예요." 생각이 났다. 영월에 가 있는 선혜로부터 편지 받았던 일이. "그게 등기 우편이었어요?" "네. 그럼 도장 가져오겠습니다." 홍천댁은 급히 나가서 도장을 가져왔다. 홍천댁이 나간 뒤 명희는 과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서랍까지 열어보았다는 사실이 당돌하고 버르장머리가 없 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등기 우편에 도장이 필요한 것은 알 수 있는 일이지만 홍천댁 자신의 도장을 찍어도 되는 일이요, 홍천댁의 도장이 없다면 남편 차서방의 도장을 써도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은행에서 돈 삼백 원을 찾은 명희는 효자동으로 갔다. "언니," 얼어서 강정같이 서걱거리는 빨래를 걷고 있던 오라범댁이 돌아보았다. "아이그, 날씨가 추운데 웬일이세요? 어서 들어가세요." "희재 안 들어왔어요?" 희재란 명빈의 막내아들이다. "좀 있으면 들어올 거예요. 들어가세요." 하다가 "희재는 왜요?" 하고 물었다. "심부름 시킬 일이 좀 있어서요." "나 이거 아랫방에 놔두고 들어갈 테니까 고모 먼저 들어가세요. 날씨가 웬 고추 같네." "오빠는요?" "항상 그렇지요, 뭐. 하지만 오늘은 좀 기분이 나은가 봐요. 거동을 했어요." 수년 동안 시름시름 앓아왔기 때문에 그랬는지 희망도 절망도 아닌 그저 담담한 오라범댁의 표정이었다. "그럼 오빠한테 가보구요." 명희는 사랑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들어서며 말을 건다. "늘 그렇지 뭐." 임명빈은 앉아 있었다. "부기가 좀 빠진 것 같아요." "빠졌다가 부었다가." "접때 지은 약은 잡숫고 계시지요?" "먹는다. 이젠 약 먹는 것도 지겨워." "상당히 알려진 의원이래요. 의원도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약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 한다구 요." "늘 하는 말이지 뭐, 한데 웬일이냐?" "유치원도 아직 놀고, 친정 오면 안되나요? 오빤 제가 부담스러운가요?" "앉아라." 명희는 자리에 앉는다. "내가 부담스럽다기보다 너가 부담스럽지, 한데 좋은 일로 온 것 같지 않군 그래." 명빈은 명희 얼굴을 쳐다본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언짢은 일이나 없음 그게 다행이지요." "그래 좋은 일이 있을 리 없지. 간밤에는 꿈을 꾸었다." "......" "서의돈의 꿈을 꾸었어." "......" "검정 옷을 입고 보따리를 겨드랑이에 끼고서 나에게 손을 흔들지 않겠어? 깨었다가 다시 잠들면 그 꿈으로 이어지는 거야. 그자가 나보다 먼저 가는 거 아닌가 싶어 걱정이다." "몸이 허해서 그런 꿈을 꾸시는 거예요." "글쎄다." "서선생님은 원래 튼튼하시고, 그런 걱정은 마세요. 오빠도 그렇지요. 희망을 가지셔야 해요. 저보다 나약해서 되겠어요?" 저보다 나약해 되겠느냐, 명희의 그 말은 명빈의 가슴을 찌르는 비수였다. 명희로서는 여옥으로부터 받은 충격 이 말할 수 없이 컸고 날로 좁혀지고 깊어져가는 고립감, 세상에 단 하나 혈육인 명빈이마저 기대어 설 기둥 이기는커녕 명보전의 기약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워서 한 말이었지만 명빈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네 말이 맞다. 너보다 나약하다는 것은 맞는 말이야. 만신창이가 되어 외딴 바닷가로 쫓기듯 내려갔던 너, 죽 으려고 바다에 투신도 했고 시골 코흘리개한테 수예를 가르치며 하루하루 시간을 저미듯 수년 간을 보내었던 너, 너는 너 자신에게 이기고 돌아왔다. 그런 너의 고통과 희생의 대가로 우리 식구들은 살 수 있었다. 아이들 공부도 시켰고 시집 장가도 보냈고 무능한 나는 기와공장을 때려 엎으면서도 양복때기 걸치고 하늘 밑에서 거 닐고 다녔다. 너무 뻔뻔했지. 낯가죽이 두꺼워도 이만저만? 명희 네가 피 흘릴 적에 이 오래비는 무얼 했나. 물 속에서 너를 건져준 어부만큼의 할 짓도 못한 내가 아니더냐? 그러고서 뭣 땜에 병이 났지? 서의돈 유인성 도 병이 안 나는데 왜 내가 앓느냐 말이다. 감옥에 있는 그들은 지금 화등잔같이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을 건 데 뭘 했다고 임명빈은 병명도 없는 병을 앓고 있느냐 말이다. 약이다, 의원이다, 호강에 받혀서 요강에 똥 싼 다는 말이 있긴 있지. 허허허어, 허허어.' "기운 내세요." "......" "마음 먹기에 달린 거 아니에요? 오빠 병은. 고통스럽고 병이 난다면 어디 성한 사람이 있겠어요? 피할 수 없 는 일이라면 마주 보고 살 수밖에 없는 일 아니겠어요?" 어쩔 수 없이, 명희는 저도 모르게 하는 말이 삐딱했다. 실은 해골같이 된 여옥의 모습이 현실이라면 그 현실 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자기 자신을 타이른 말이었지만.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푸념한 것이 부끄럽구나. 고통스럽다고 병이 난다면 성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맞 는 말이야.' "며칠 전에, 영월에 있는 선혜언니한테서 편지를 받았어요." "잘 있다든가?" "네, 보기 싫은 꼴 안 보고 듣기 싫은 말 안 듣고, 그게 젤 속 편하대요." "그럴 게야." "다만 도피주의자라는 비난의 편지를 받으면 권선생이 몹시 괴로워한다, 그런 말도 씌어 있었어요. 이번에 서 의돈 선생님, 그분들 수감된 소식을 듣고 권선생은 밤에 잠을 못 자더래요." "그랬을 게야." "권선생 적도, 동지도 다 같이 비난한다는 거예요. 혼자 살려고 도망갔다, 비겁하다, 그러고들 하는 모양이예 요." "원래 말이 많은 판이지." "이건 얘기가 좀 다르지만요, 오빠도 좀 추슬러서 권선생 계시는 곳에 당분간 내려가 계시면 어떨까? 그런 생 각을 해봤어요." "내가 왜?" 명빈은 강한 반응을 나타내었다. 명희는 쓰게 웃는다. "도피하시란 얘긴 아니에요. 어쩌면 그런 곳에 가 계시면 몸이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해본 거예요." "......" "진작 그런 생각을 왜 못했나, 싶어요. 거기가 싫으시면 지리산으로 가시든가. 환국이아버님께서 가신다던 절, 있잖아요? 그 절 주지는 오빠하고도 안면이 있다면서요?" 명빈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눈 가장자리가 꺼무스름했고 얼굴 근육은 극도로 이완 되어 모조리 아래로 흝어져 내려온 듯, 나이에 비하여 너무나도 늙은 모습이다. 적이든 고난이든 대결할 대상 이 없다는 것은 그 대결 이상의 불행이라는 것을 명희는 불현 듯 깨닫는다. 삶의 의욕을 철저하게 잃어버린 사람, 삶이 의지가 마모되어 없어진 사람, 그것은 시계바늘이 없어진 시계판과도 같은 것이다. 명희는 명빈의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것을 눈앞에 본다. 가는 시간의 슬픔보다 멈춰진 무의미한 시간이야말로 그것은 삶이 아닌 것이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야말로 삶 자체지만 영원한 생명은 이미 나락이 아니겠는가. 명희는 바닷가 그곳 학교에 있던 일본인 젊은 교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허무하여 못 살겠다는 것이 그의 입버릇이었 고 숙직실에서 자취를 하며 살았는데 밤이 되면 창녀를 찾아 술집에 간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어느 날 그는 출석부로 책상을 치면서 "시간은 공폽니다. 아무 일도 안하고 시간과 내가 마주보고 있을 때, 아아 무섭지요. 그럴 때는 도박이라도 해 야 하고 도둑질이라도 해야 할 심정입니다. 타락한다는 것은 시간이라는 악마 때문이지요. 사랑이라는 것도 바 로 그 시간의 악마 때문입니다. 사람은 왜 두고도 또 두려고 하지요? 그것도 바로 시간의 악마 때문입니다. 그 악마를 잊고 싶은 거지요. 안 그렇습니까? 임선생!" 명희는 대답 없이 웃고 말았다. '일본인들의 자살은 그들 국민성의 깊은 허무주의와 관계가 있을 것 같다. 그들은 구원을 바라기보다 끝장을 먼저 내려고 덤빈다. 그들은 어쩌면 구원 같은 건 믿지 않는지 모른다. 지극히 합리적으로, 신도 종교도 그들 은 합리적으로 끌어들이지, 신비적으로 귀의하지는 않는다. 현실적으로 그건 강점이지만 저렇게 골치 아픈 허 무주의자도 생기게 마련일 거야.' 그때 명희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젊은 일본인 교사가 말한 시간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는 공감이 가는 면도 있었다. 명희는 명빈으로부터 눈길을 돌리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창경원 벤치에 앉아 흐느껴 울었던 일이 생각났다. 아직은 명희 자신에게 슬픔이나 분노, 절망감이 남아 있다는 것을 명빈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인식하 게 된다. 여옥의 모습, 동대문 시장을 헤매었던 일, 우동을 꾸역꾸역 먹은 일, 창경원에서 울었던 일, 그 반나 절이 아주 옛날, 오래 전에 있었던 일같이 회상이 된다. 어떻게 보면 여옥의 존재는 다정한 친구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쓰라렸던 기억들,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기억의 현장을 끌고오는 괴로운 존재 이기도 했던 것이다. 여옥은 처참한 모습으로 가슴 저리게 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그 와중에서도 명희의 잊고 싶은 과거를, 그림자를 그는 끌고왔던 것이다. 명희가 여옥을 만나기 위하여 목포를 갔을 때도 그러했다. 목포에 도착하기까지, 아니 도착한 후에도 남쪽 그곳에서 보낸 기억에 시달려야만 했다. 여옥의 존재와 명희가 벗어버린 지난날 허물은 늘 일치된 것으로 명희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창경원에서 흐느껴 울었던 일, 정신없 이 시장을 헤매었으며 무의식적으로 우동을 먹은 것도 여옥이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실은 여옥이가 나왔어요." 여옥의 말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조카 희재에게 심부름을 시켜야 했으니 어차피 알게 될 일이며 다소 비딱하게 말을 하여 명빈의 기분이 상했을 것 같기도 해서, 변명하고 싶은 심정이기도 해서 명희는 말을 꺼낸 것이다. 그러나 알아듣지도 못했는지 명빈은 물끄러미 명희를 쳐다만 보았다. "여옥이가 어제 나왔어요, 오빠." "여옥이가, 나왔다구?" "네." "어떻게?" "건강이 나빠졌어요." "그래도 나왔으니 다행이다." "아침에 거기 갔다 왔는데 너무 심란해서요. 우리가 도무지 살아있는지 죽어 있는지 분간이 안돼요. 가슴이 몹 시 아팠어요." "......" "그런데 오빠, 최상길이라는 사람 아시지요?" "최상길? 글쎄다." "전에 음악선생으로 있었다 하던데요? 집에서 와본 일이 있다고 했어요." "아아, 그 여수의 갑부 아들?" "맞아요." "학교에 있은 적이 있지." "그분이 여옥이를 위해 많이 힘을 썼나 봐요. 어제 서울까지 데려다주고 곧장 내려갔다 하더군요." "여옥이를 어떻게 알구?" "여옥이가 여수에 있었거든요. 같은 교인이구, 여옥이하구 이혼한 그 남자 있잖아요? 친구였다지요 아마. 저도 여수에서 그분 만난 적이 있어요." "고맙군. 그렇게 하기 어려운 일인데 고맙군. 그때 무슨 일로 학교 그만두었는지 생각이 안 나는군." 그 이유는 명희도 알고 있었으나 잠자코 있었다. "그래 여옥이 친정 형편은 어떤가?" "옹색하지요." "그래서는 마음놓고 정양하기도 어렵겠다." "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어려운 모양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청량리로 나갔겠어요? 참 오빠, 오래 앉아 있는 데 괜찮겠어요?" "모처럼 너가 왔는데, 괜찮다. 오늘은 몸이 좀 가벼운 것 같다." "잘 생각해보세요. 영월이든 지리산이든, 가시겠다면 제가 손을 써놓겠어요." 명희는 일어서려 하면서 말했다. "생각해보지." 하는데 오라범댁이 저녁상을 들고 들어왔다. "언니 나 갈 건데." "그런 말씀 마세요. 그냥 가다니 말이나 됩니까?" "그럼 안에 들어가서 하지요." 밥상을 놓은 뒤 오라범댁은 허리를 펴며 "오빠 좀 드시라구 일부러 함께 차려왔어요." 지금껏 오누이가 겸상해서 밥먹은 일이 없어 명희는 당황한다. 전에는 조용하가 살아 있었고, 별문제가 없었을 때는 여러 사람이 초대되어 그 자리에 명빈도 나타났고 함께 식사를 했지만. "함께 얘기하시면서 좀 권하세요." 오라범댁은 부탁하듯 말했다. 저녁을 먹은 뒤 사랑으로 건너온 조카 희재에게 명희는 약도, 집주소를 적은 쪽지를 주며 말했다. "지금 가야 해." "청량리군요." 희재는 쪽지를 펴보며 말했다. 그는 Y 전문학교 학생이다. "찾기 쉬운 집이야." "설마 집이야 못 찾겠습니까?" 명희는 따로 봉투 하나를 꺼내어주며 "내일 내가 간다고 말해." "내일 가신다면 고모님이 전해도 될 텐데 그러세요?" "사정이 있어서 그래. 나는 그런 것 내미는 게 서툴러서 말이야." 하는데 명빈이 "아무 말 말고 가라면 가는 게야." 하고 거들었다. 목도리로 얼굴을 감아싸고 명희는 친정을 나왔다. 밖은 어두웠다. 바람은 멎은 듯했으나 기온은 더 떨어진 것 같았다. 골목을 빠져나온 명희는 넓은 길을 한동안 걸어서 더욱더 넓어진 충독부 청사 앞길로 나왔다. 마른 나 뭇잎조차 하나 없이 헐벗은 가로수가 가로등 사이에 띄엄띄엄 서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여명과도 같이, 간신히 밝음이 남아 있는 하늘가에 묵시하듯 뻗어 있었다. 명희는 또각또각 언땅에 구둣발 소리를 새기듯 걷 는다. 냉기가 입을 통하여 가슴을 내지르며 발끝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시각각이 절망이다. 시시각각이 무의미하다. 그러나 달래야지. 타일러야지.우리는 이렇게밖에 갈 수 없고 모 두가 다 그렇게 갔다. 일이 보배라 했던가? 돌보아주고 보살펴주고, 그래 일이 보배다. 그런데 여옥이는 어째 그리 평화스럽게 웃을 수 있을까?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처참한 그 몰골을 하구서.' 거대한 총독부 청사, 그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을 등 뒤로 하고 걸어 내려온 명희는 서대문 쪽에서 나타난 전 차에 올랐다. 불빛은 환했으나 전차 안에는 드문드문 승객들이 웅크리듯 앉아 있었다. 앉을 자리는 있었지만 명희는 손잡이를 잡고 서서 차창 밖 서울의 겨울밤을 내다본다. '그 몰골을 하구서, 살아 있는 것이 기적만 같은 그 몰골을 하구서 평화스럽고 밝은 웃음이, 이상하다, 이상하 다.' 건물에서 기어나온 불빛이 보도 위에 깔려 있었다. 건물에서 기어나온 불빛에 따라, 오렌지색 연갈색 진회색 등으로 보도는 얼룩져 보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빛은 어둠 같았고 어둠은 빛 같았다. 그리곤 골짜기에 등불 하나가 가고 있었다. 명희는 혼돈하면서 흐려져가는 의식을 곧추세우둣 매달린 손잡이를 얼굴 중심에 놓고 발 돋움하며 몸의 균형을 잡아본다. 그래도 눈앞에는 골짜기에 등불 하나가 가고 있었다. 거리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많지 앟았다. 화신백화점 앞에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백화점의 임자가 친일파든 아 니든 간에 조선의 소시민들의 자존심 같은 화신백화점에서 새나오는 불빛은 황황했으나 어떤 적요감이 감돌고 있었다. 날씨 탓도 있겠지만 지금은 전시, 구매력이 감소된 것도 사실이며 그보다 현저히 나타난 것은 물품의 기근이다. 사람들은 어디 어느 상점에서 생필품인 무엇을 팔고 있다 할 것 같으면 그곳으로 왕창 몰려갔고 그 러고 나면 그 상점은 잠잠해진다. 보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돈 있는 사람은 암시장을 찾았고 돈 없는 사람 들은 허리띠를 졸라맬밖에 없었다. 다만 일본인 관공리, 권력 있는 자들은 모든 귀한 물품, 생선이며 버터 치 즈에 이르기까지 배급을 받으니 그들만은 전시 밖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아직은 암시장에 가면 값이 비싸 그 렇지 대개의 것은 다 구할 수 있었다. '여옥에게 뭘 사다 먹일까?' 내리는 사람에게 떠밀리듯 명희는 손잡이를 놨다. 비틀거리다가 방향을 바꾸어 다시 손잡이를 잡았다. '건강이 조금이라도 회복될 수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구해다 먹이고 싶어.' 퍼덕퍼덕 뛰노는 잉어 생각도 해보고 쇠꼬리 생각도 해본다. 물론 의원의 지시에 따라야겠지만, 명희는 사람들 이 붐비는 시장, 활기찬 장바닥을 몸 가까이 느낀다. 그러나 그럴수록 여옥은 꺼져드는 등불 같아 명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살 것 같지 않다면서 울던 여옥의 오라범댁과 같이 명희도 희망을 가질 수가 없었다. 평화스런 여옥의 미소마저 이제 생각하니 불길한 느낌이 든다. 떠날 사람의 마음의 준비 같은 것이나 아닐까 하고. 전차는 종로 3정목에서 멎었다. 몇 사람이 내리고 보도에서 전차를 기다리고 있던 몇 사람이 전차를 향해 걸 어온다. '......?' 젊은 여자와 남자, 남자는 다소 휘청거리며 걷는 것 같았다. 두사람은 뭔가 얘기를 하는 듯, 그리고 그들은 전 차에 올랐다. 다름 아닌 그들은 양현과 영광이였다. 명희는 긴장이 되어 돌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명희가 있는 반대쪽 입구 가까이, 나란히 손잡이를 잡고, 그러니까 사선의 위치에서 명희와는 서로 등 을 보인 자세로 서 있었다. '누굴까?' 명희는 몹시 신경이 쓰였다. 저물지는 않았지만 밤에 젊은 남녀가 함께 다닌다는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희가 양보만 해주었다면 명희 자신이 길렀을 아이, 이상현의 당부가 아니었어도 돌보아주고 싶었 고 사랑했던 아이, 지금은 성인이 되었으나 양현에 대해서는 다 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처구니없게도 생각 된다. 쓸쓸함, 배신감 같은 것도 있었다. 명희는 마치 뭘 훔치기라도 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돌아본다. 양현은 회색과 검정색의 체크무늬 외투를 입 고 있었다. 갈색머플러로 양볼을 싸매듯, 머플러를 묶은 매듭 위에 둥근 턱이 얹혀 있는 옆모습을 볼 수 있었 다. 남자는 올리브색 짧은 코트에 검정털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관골 가까이에 나 있는, 매우 희미했으나 흉터가 명희 눈에 먼저 들어왔다. 굴곡이 깊은 옆모습, 조각같이 아름다운 콧날, 싱그럽고 보기 좋 은 눈썹은 한참 후, 명희는 인식할 수 있었다. 세련되고 지적으로 보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흉터처럼 명 희에게는 수용될 수 없는 분위기가 그에게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두 남녀는 다같이 우울 해 뵀다. 양현이 우울한 것은 집안 어른이 감옥에 수감된 탓이겠으나,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을 것만 같았다. 양현은 한달넘게, 하기는 그 동안 방학이었고 진주에 내려가 있기도 했지만 아무튼 명희를 찾아오지 않았다. '어떤 사일까?' 명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위기감 같은 것도 엄습해 왔다. 양현의 행복과 관계되는 일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혜화동에서 명희는 내렸다. 보도에 올라와서 뒤돌아보았을 때 뒤따라오던 양현이 그 역시 뒤돌아보고 있었다. 전차에 남은 남자를 보기 위하여. 그러나 남자는 뒷모습만 보인 채 굳은 자세로 서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전 차는 떠났다. 길을 질러 오면서, 명희 옆을 스쳐가면서도 양현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에 빠져서 명희를 알아 보지 못했다. 혜화동 입구로 접어들었다. "양현아." 양현은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아주머니!" "무슨 생각을 하느라 사람도 몰라보고 가니?" 양현은 좀 당황했다. "어디 갔다 오세요?" "효자동에." 양현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교장선생님 병환은 좀 어떠신지요." "늘 그러시지 뭐. 춥지?" "네. 날씨 굉장하네요." "여기 좀 기다려." 명희는 말하고서 군밤을 구워 파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군밤 한 봉지를 안고 왔다. "너 집에 들렀다 갈 거지?" "네. 그보다 저희들은 교장선생님 한번 뵈러 가지도 못하고, 그러잖아도 오빠가 말은 하던데." "그럴 경황이나 있겠니? 어머님은 좀 어떠시냐?" "진주 내려가셨어요. 이미 다 각오는 하고 있었으니까요." "기막히는 세상이다." "왜들,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 "저 자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얼마 안 남았는데 졸업해야지." "졸업하면 뭐하겠어요? 앞이 캄캄할 뿐이에요." 일이 년 사이, 양현이 많이 변한 것을 명희는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근래에 와서, 집안의 근심이 있기 전에도 양현은 옛날같이 화사하게 웃질 않았다. 집으로 두 사람은 들어갔고 따뜻한 방에 들어서자마자 양현은 무너지듯 방바닥에 앉았다. "아아 추워. 얼굴이 남의 얼굴 같아요." 장갑을 벗고 양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싹싹 비빈다. 명희는 외투를 벗어 걸고 물주전자를 풍로 위에 올려놓는 다. "따뜻한 차 한잔 마시면 추위가 풀릴 거야." 그러나 양현에게는 마음의 추위가 더 큰 것 같아 보였다. 얼마되지 않아 양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번에는 찬 손으로 얼굴의 열기를 식히듯 볼을 감싸곤 한다. "차 마시자. 군밤도 먹구." 명희는 목기에 군밤을 쏟아부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나 여기서 자고 가도 돼요?" "그럼." 전에도 몇번인가 양현은 명희집에서 자고 간 일이 있었다. 양현은 외투를 벗고 편안하게 앉았다. "저녁은 어떻게 했니?" "먹었어요." "밖에서?" "밖에서 먹었어요." 하마터면 그 사람하고 함께 먹었느냐고 물을 뻔했다. 명희는 스스로 놀란다. 그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좀 어이가 없었다. "저는 왜 생겨났을까요?" "무슨 소리야?"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사랑을 해서 제가 태어났고, 그러고 그만 아니에요?" "부모의 책임은 안 졌다 그 말이니?" "비난하려고 한 말은 아니에요. 왜 생겨났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어요." "어떤 때 그런 생각을 하니?" "글쎄요......" "너 무슨 일 있는 거니?" "아니오. 아무 일도 없어요." 양현은 완강하다 싶으리만큼 강하게 부정했다. "아주머니, 이 방은 참 따뜻하네요." "양현이 방은 추워?" "춥지는 않지만." 양현은 등을 구부리고 무릎 위에 얼굴을 얹는다. 왠지 애처롭고 상처받은 것 같은 그 모습을 명희는 쳐다본다. '이 아이가 불행한 연애를 하는 거 아닐까?' "아주머니," "음." "저 말이에요, 이런 말 해도 될는지," "해. 무슨 얘긴데?" "저를 낳아준 사람, 이상현이라는 분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예기치 않았던 물음이었다. 명희의 표정이 몹시 흔들렸다. "왜 그걸 묻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으니까요." "......" "또 어머니 아버지한테 죄송해서 물어볼 수 없었어요." "지금은 죄송하지 않다 그 말이니?" "죄송하지만...... 그래도 알구 싶어요. 그분을 제가 사랑하구 존경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 않아요? 다만 모를 뿐 이지요." "나한테 물어보면 알 거라 생각했니?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언제였는지, 강선혜 아주머니께서 지나가는 말로 하신 것이 기억에 남아 있었어요." 명희는 궁리하듯 한동안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뭐라 했기에?" 하고 묻는다. "저한테 하신 말씀은 아니었어요. 아주머니보구 농담하시면서 흘리신 거예요. 애인이라 하셨어요." 명희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말, 너한테서 들으니까 기분이 묘해진다. 내 나이가 몇인지 돌아보게도 되구, 하지만 그건 잘못 전해진 얘 기다. 이선생님이 효자동 우리집엔 자주 들르셨지만 그건 오빠하구 선후배, 아니 일본어 교습생이었으니까 사 제 관계라 할까, 자연스런 일이었어. 서의돈 황태수, 그분들과 모두 함께 어울렸던 시절이니까." "하여간 그분을 아시기는 아시네요." 양현은 고개를 들고 명희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다. "그야." 하고는 눈물에 젖은 양현의 얼굴은 외면한다. "한데도 어째 저에게 말씀해주시지 않았어요?" "일부러 비밀로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말 할 내 처지도 아니었고 너의 말대로 너의 아버님 어머님께 죄송 한 일이며 예의가 아니지 않아?" "하지만 최양현은 이양현으로 호적이 옮겨졌어요." "그건 나도 안다. 이선생님을 젤 많이 아시는 분은 바로 너 아버님이시다. 얘기할 필요가 있었다면 그분이 하 셨겠지. 그야말로 나는 문외한이거든." "얘기해주세요." 떼를 쓴다. "어머님께서 아시면 오리새끼 물로 간다고, 많이 섭섭해하실 거야." "이미 오리새끼를 물가로 보내셨어요." 명희와 양현은 우두커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양현이가 생부 이선생 때문에 이러는 거는 아닐 거야. 무언가 다른 일이 있는 모양이다. 그게 뭘까? 아까 그 남자? 양현은 왜 울었을까? 무슨 상처를 받았을까?' 명희는 입술이 타는 것 같아서 비어 있는 찻잔에 물을 부어 마신다. 군밤은 손도 대지 않은 채 머쓱해져서 명 희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하기는 양현이가 양가의 부모나 형제에게 물어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거야." 양가란 최참판댁과 이부사댁을 가리킨 말이다. "이선생은 아주 어렸을 때 혼인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너의 어머님이 간도로 가실 적에 이선생이 동행한 것은 아버님이신 이동진 선생께서 당시 연해주에 망명해 계셨기 때문에 소식을 알기 위해서였다 했고 그 후 조선으로 나온 이선생은 아까 말했듯이 서의돈 황태수 그분들과 어울리어 우리 오빠한테 일본어 강습을 받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말하기가 힘들었던지 명희는 또 물을 마셨다. "일본에서 돌아오신 후의 그분은 한때 신문사 기자 생활을 하셨고 소설을 발표하면서 상당한 평가도 받으셨는 데, 그분이 좌절한 것은 3.1운동 이후가 아니었나 싶어. 가정의 사정, 나라의 형편, 아버님의 큰 존재, 그런 것 에 눌리어 갈등하고 방황하고, 원래 혁명가나 행동가라기보다 예술적 기질이 농후한 그분에게는...... 모든 것이 어려웠을 거야." 양현은 눈을 떼지 않고 명희를 쳐다보았다. 내가 듣고 싶은 것은 그런얘기가 아니다 하고 그는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하긴 양현이 너도 이미 성인인데 이해 못할 것도 없겠지. 이선생님하고 나하고는......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선생님을 생각했던 거야. 어느 날 무턱대고 그분 하숙을 찾아간 일이 있었어. 있을 법이 나 한 일이니? 처녀가 남자 하숙을 찾아가다니. 그때 이선생님은 굉장히 화를 내셨어. 생각해보아. 처자 있는 분을, 그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처자가 있었기 때문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기생하고 연애를 했군요. 그래서 제가 생겨나구." "그렇게 말하지 말어." "......" "그렇게 말하지 말어. 여자를 희롱할 그런 분은 아니었어. 날카롭고 냉소적이었지만 문란한 분은 절대 아니었 다. 이렇게 말하면 좀 어떨는지...... 그분은 운명적으로 매우 불운했던 것 같다. 그것은 일본의 침략으로 그런 계층의 사람들이 대부분 겪어야 했던 일이지만." 명희는 말하면서 최서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갈피가 조금만 달랐더라도 이상현과 최서희는 맺 어져야 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서부터 이상현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것을 명희는 쓸쓸하게 되새겨보 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선생님의 모든 것을 물론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내 생각으로는 그분도 이 시대의 희생자라는 점, 그리고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까, 이 기회에 너한테 말해둘 것이 있다. 그분이 다시 만주로 가신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 로 추측은 할 수 있지만 결국은 그분만이 아시는 일이며," 하고 명희는 일단 말을 끊었다. 기생 기화가 아이를 낳은 사실을 알고 두려워한 나머지 떠났다는 말은 차마 할 수도 없었지만 해서도 안되고, 명희 말대로 그때 심정은 상현이만이 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주에서 이선생은 어떤 스님으로부터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소식을 들었다는 거고 나에게 원고 뭉치와 편지 가 온 것은 그후의 일이었다. 작품은 발표되었고 원고료도 받았지. 그때 이선생은 작품을 발표한다는 의의보다 그 원고료가 양현을 위해 쓰여지기를 바라셨다. 가능한 한 작품은 계속 써서 보내겠다 하셨어. 그것은 양현이 너에게보다 세상 버린 네 어머님에 대한 한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어. 그러저러한 사정 때문 이지만 내게는 소생이 없었고 그래 널 데려오려 했으나 지금 어머니의 너에 대한 사랑이 나보다 더 깊었던 모 양이다. 원고는 그후 또 한번 왔지만 결국 두절되고 그분의 소식조차 끊어지고 말았다. 원고료는 저금한 채 지 금 내가 가지고 있어. 네가 아주 어렸을 때 일이야." 양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아무런 감동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분을 사랑하고 계세요?" 마치 기습과도 같이 양현이 물었다. 명희는 몹시 당황했다. 그 물음에 당황했다기보다 그 물음으로 하여 자기 자신이 들여다본 자기 감정 때문에 당황하는 것 같았다. "대답하기가 난처하군. 그런 일은 좀체 잊어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정직하게 말해서." 양현은 군밤을 집었다. 껍질을 벗기고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집어들고 껍질을 벗기고 먹는다. 그 행위는 먹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인 성싶었다. "양현아." "네." "무슨 생각을 하니?" "이 생각 저 생각요." "이선생님 만나고 싶으냐?" "아아니오." "왜?" "실감할 수가 없어서요." "그런데 왜 알고 싶어했지?" "그건, 그건, 글쎄요. 저 자신을 비천하게 느꼈기 때문일까요?" 그것은 정당한 대답이 아니었다. "기가 막히는군, 어머니가 들으셨다면 어쩌실까?" 비로소 양현은 생동하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안돼요! 어머니가 이런 말 하는 걸 아신다면 큰일나요. 나 하나 때문에, 그, 그럴수는 없어요." "너 나한테 감추는 것 있지?" "......" "말해. 혼자 괴로워하지 말구. 나도 너만할 때가 있었어. 지내놓고 보니 가슴에 밀어넣고, 그것 좋은 일 아니 다." 양현은 입을 국 다물고 있었다. 여간해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명희는 저 아이한테 저런 면이 있었던가? 생 각하는 것이었다. 고집스런 모습이었다. "이성에 관한 일이니?" "아니오! 아주머니 그렇지 않아요." 순간 양현은 펄쩍 뛰듯 말했다. 이성에 관한 일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아까 그 남자는?' 여전히 의혹이 남는다. "말해봐. 무슨 일 있지?" "......" "분명히 너, 무엇인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제가 고통받는 것,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 "오늘같이 추운 날, 형무소에 계시는 아버지 생각을 하면 괴롭고 어쩌고, 너무 뻔뻔스런 일 아니에요?" "그러니까 괴로운 일이 있긴 있구나." "......" "말하고 싶지 않으면, 됐다, 그만두어." 명희는 단념을 한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양현의 얼굴에 원망스러운 빛, 쓸쓸하고 외로워하는 빛이 떠돌았다. "아무한테도 말씀 안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면 얘기하겠어요." "그건 쉬운 일이지." "누군가, 위로받고 싶어서 오늘도 나갔는데...... 위로 받지 못했어요. 아니 말할 수가 없었어요." 양현은 흐르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주머니, 저 집을 나오고 싶어요." "뭐라 했니?" 믿을 수 없는 듯 명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참아야 한다는 것 알아요. 죽는 한이 있어도 그래선 안된다는 것 알아요." 양현은 으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만한 것 못 참겠어요? 참을 수 있어요. 가족들 생각하면 참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없어 져야 새언니 마음이 편해질 거고, 그러나 어머니 성질에 무사할 수 없을 거고, 저는 어떻게 하면 좋지요? 흐흐 흣......" 명희가 다가앉으며 양현의 두 어깨를 흔든다. "자세히 얘기해보아." "새언니가, 새언니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나 봐요." "다시 말해보아." "새언니하고 저하고 마, 맞지가 않나 봐요." "그, 그랬구나." 명희는 물러나 앉으며 팔짱을 끼었다. 예기치 않았던 일이었다.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던 일이었다. 양현이는 울고 명희는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양현이, 가족들 사랑을 한몸에 받는 양현이, 의전학생인 양현이, 시샘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기생의 딸인 양현이, 집안과는 아무 상관도 핏줄도 없는 양현이, 그런 그가 장중의 구슬 같은 존재라는 것은 분노를 살 만한 일이 아닌가. 집안의 큰며느리로, 그 역시 귀하게 당당하게 자란 처지고 보면, 덕희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적으로 약자인 양현이 주인처럼 행세한다,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더 이상 얘기를 듣지 않아도 일목요연 하게 명희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양현의 고통을 가족들이 알아서는 안된다는 것,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하 여 가정의 불화가 초래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것 때문이겠는데 양현의 고통은 참는 것에 있는 것 이 아니며, 덕희의 악의를 견디어내기 힘들어서도 아니며 서희나 환국이를 기만해야 하는 자신의 태도에 있는 것 같았다. 명희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울음을 멈춘 양현은 다소 진정이 되었는지 구겨넣어 두었던 것을 꺼내고 보니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홀 가분한 마음이 되었는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그저께는 아버지 면회 가는 날이었어요. 어머니는 올라오시지 못했고, 제가 얼마나 그날을 기다렸는지 아주머 니는 모르실 거예요." 양현은 얘기를 계속했다. 내용인즉, 그날 환국이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먼저 가고 양현은 부지런히 면회 갈 준 비를 하고 있는데 덕희는 재영을 유모에 딸려 친정으로 보내면서 나머지 사람들도 다 보내더라는 것이다. "새언니 집은 누가 보구요?" "양현씨가 봐야지요." 덕희는 식구들이 없을 때는 아가씨 대신 양현씨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덕희는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이 집 식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키려 했을 것이다. 면회를 끝내고 돌아온 환국이는 좀 화가 난 얼굴이었으며 대뜸 "몸이 좀 아프기로 면회를 안 와?" 하며 힐난하더라는 것이다. "아버님이 양현이는 왜 안 왔느냐 물으시지 않아. 공연히 걱정 끼쳐드리고." 그 말을 할 때 덕희는 돌아서 있더라는 것이다. "새언니 감정 이해해요. 문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제 처지예요." 양현은 비로소 명희를 보고 슬그머니 웃었다. 명희는 몸을 일으켰다. "양현아, 가만히 있어." 의아해하며 무슨 말이냐, 양현은 눈으로 물었다. "나 잠시 나갔다 올게." 스웨터를 걸치고 밖으로 나온 명희는 담장에 박힌 쪽문을 열었다. 유치원 놀이터의 미끄럼틀이 망루같이 솟아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총든 감시병이 서 있는 것 같은, 명희는 순간적인 착각에 빠진다. 달이 댕그머니 떠 있 었다. 나무의 잔가지들 그림자가 망모양으로 땅에 떨어져 있었다. 유치원 쪽으로 향해 있는 홍천댁 거처까지 간 명희는 "홍천댁."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방문에 그림자가 흔들리면서 "네 원장님." 하고 홍천댁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기웃이 내다보던 남정네가 자라목같이 문틈에서 얼굴이 사라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홍천댁을 뒤따라 나오면서 "밤에 웬일이십니까?" 굽신거리듯 말했다. "다름이 아니고 홍천댁." "네." "최참판댁에 가서 양현아가씨가 오늘밤 여기서 잔다고, 그렇게 전하고 와요." "그러지요." "임자 어서 가라고, 원장님 날씨가 춥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차서방은 아첨하듯 말했다. 쪽문을 열고 되돌아온 명희는 부엌으로 들어간다. 불을 켜놓고 아궁이 속을 들여다본다. 군불을 지핀 불씨가 남아 있었다. 명희는 부삽에 불씨를 꺼내어 담고 그것을 풍로에 부은 뒤 숯을 몇쪽 올려 불을 피운다. 냄비에 물을 붓고 멸치 한줌을 넣고 풍로에 올려놓는다. 군불솥의 물은 따뜻했다. 명희는 부뚜막에 걸터앉아 밀가루 반죽을 한다. 통영 바닷가에서 코흘리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처음에는 하숙을 했으나 나중에는 방을 하나 얻 어서 자취를 했던 세월, 그때 명희는 곧잘 수제비를 만들어 먹곤 했다. 여옥이 찾아왔을 때도 수제비를 끓여주 곤 했다. 한밤의 바다 울음 소리는 무섭고 외로왔다. "이제 그만 서울로 가아, 여기 이러고 있다간 정신병자 되겠다." 여옥이 한 말이었고 여옥이 왔다는 말을 듣고 인사차 찾아온 엄기섭은"하지만 씩씩하게 견디시는데요 뭐." 명희가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듯 말했다. "내가 공연한 짓을 했어. 엄선생한테 부탁하지만 않았더라도 지금쯤 명희는 서울에 가 있을지도 모르지." 여옥은 엄기섭을 통해 명희에게 이곳 학교 촉탁교사로 직업을 구해준 것을 후회하며 말했다. 그때 명희는 마음속으로 '서울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죽었을지도 모르지.' 중얼거렸던 것이다. 엄기섭의 암울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여옥은 그때 엄기섭의 명희에 대한 감정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았다. 찬하와의 후유증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던 명희는 누구든 자기에게 관심을 갖는데 대하여 공포감을 가지고 있 어서 엄기섭에 대해서도 경계하는 이어외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명희는 끓고 있는 냄비에서 멸치를 건져내고 간장으로 간을 맞춘 뒤 반죽한 밀가루를 빚어서 뜯어 넣는다. "여자대학을 나온 여자가 코흘리개 아이들한테 수예나 재봉을 가르치고, 말이나 되니? 진주에만 나가도 여학 교 선생은 할 수 있는데 말이야. 의지할 곳도 있고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여옥은 올 때마다 그런 말을 했었다. 금니박이에 콧수염을 기른 얼굴이 떠올랐다. 어장을 하며 마을에서 밥술이나 먹는다는 사내. 거만하게 나자빠지듯 걷던 사내, 학부형으로서 인사한답시고 찾아와서는, 함께 살고 있으나 마누라하고는 정이 없으니 어장배가 금은 두 척이지만 앞으로 몇 척 더 사서 크게 해볼 요량이라느니, 마치 내 소실로 들어온다 며 호강을 시켜주겠다는 투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깨춤 추듯 하던 사내, 명희는 거칠게 반죽한 것을 찢어 넣 는다. 왜 그따위 일들이 계기도 없이 생각나는지, 수제비 탓이었는지 모른다. 수제비 두 그릇을 올려놓은 상을 놓고 방문을 열었을 때 양현은 깜짝 놀라며 얼굴을 들었다. "아주머니!" "너 저녁 먹었다는 것 거짓말이지?" "저기," "요즘 밖에서 저녁 먹을 만한 곳이 어디 있니?" "......" "자아 먹어. 나도 효자동에서 저녁 먹는 둥 마는 둥 해서 배고프다. 이 수제비 시골서 혼자 있을 때 곧잘 끓여 먹었어. 어쩌면 이건 한없이 한없이 내려앉았던 시절에 익힌, 그래 나한테는 젤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음식 이야." 양현은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말없이 먹는다. "맛있지?" "네, 맛이 있어요." 양현은 인사말이 아닌 듯 정말 맛있게 먹는다. 그리고 명희의 따뜻한 애정에 감사하듯 수굿한 모습이었다. "저녁 안 먹었지?" "실은...... 안 먹었어요." "이 추운 날에, 그러면 거리를 걸어만 다녔어?" 수제비가 올려진 숟가락을 든 채 말하는 의도가 무엇일까 생각하는 듯 긴장된 얼굴로 양현은 명희를 쳐다본 다. "그 청년은 누구니?" 늦추지 않고 명희가 말했다. 한순간 양현의 몸이 휘청하는 것 같았다. "보셨어요?" "그래 전차에서." "그러고선 어째 모르는 척하셨어요?" 당혹감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것을 역력하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사실 놀라기도 했고." 이번에는 명희 쪽에서 당혹해한다. 수재비를 입에 넣고 씹다가, 또 한 숟가락 입에 떠넣고 씹다가 양현은 "아주머니도 참, 영광오빠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아주 복잡해요." "영광 오빠라니?" "큰오빠 친구거든요." "그,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아니에요." 대답은 확실했으나 양현은 고개를 숙였다. "오빠 친구라 해서 다 오빠라 부르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은, 그러니까 그 오빠 아버님하고 우리 집하고는 특 별한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또 그 오빠를 우리집에서 돌보아주게 돼 있나 봐요." "그렇다면 꽤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였구나." 양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저는 그 오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작년, 아니 재작년에 평사리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그때 오빠 아버님께서 세상을 버리고 그 유해를 만주서 가져온 영광오빠는 지리산에서 행사를 끝낸 뒤 평사리집에 들른 거예요. 그때 처음 봤어요." 명희는 담박 알아차린다. 만주서 유해를 가져왔다는 말에서, 양현이 그때 처음 만났다는 말에서 최씨 일가와 그들 부자와의 관계가 심 상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최참판댁에서 그 청년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말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었다. 오히려 양현이 쪽에서 그 문제에 대해서는 민감하지 않은 겄 같았다. "큰오빠하고는 동경서 친하게 지냈다 하는데 집에는 그때까지 한번도 나타난 일이 없었어요. 굉장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예요. 도움을 받는다는 데 대한 굴욕감 때문인가 봐요." "얼핏 보기에도 개성이 강해 뵈도구나." "큰오빠가 몹시 아끼는 사람이지요. 동경서 일본 노가다패한테 맞아 죽을 죽을 뻔했대요. 그래서 얼굴에 흠집 이 나고 다리도 한쪽이 약간 이상해요. 그때 큰오빠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거라 하더군요." 양현은 백정의 핏줄이라는 것, 생모 봉순이와 영광의 부친이 한마을에서 자랐다는 것, 지금 악극단의 색소폰 주자이며 유행가 작곡도 한다는 얘기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너무 울적하고 괴로워서 그 오빠 만나 좀 울고 싶었어요." 그 어감 속에는 묘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양현은 명희 앞에서 정직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나한테 와서 울어선 안될 일이었니? 어째 섭섭하구나." "결국 아주머니한테 얘기했잖아요. 울기도 하구." "그 청년 만나 울려고 했다 하지 않앗니?" "새언니 일이라서 가까운 분들께 얘기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 오빠는 저와 처지가 비슷하고......" "......" "울지도 못했어요. 말해지도 못했어요. 만나기 전에는 흉허물없이 얘기할 수 있을 것 같구 이해해 줄 것 같구, 하지만 만나면 벽을 느껴요. 냉철하구, 저에게는 감정을 상당히 많이 절제하는 것 같아요." '절제를 한다구? 이 애는 모르고 있는 걸까? 절제를 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양현이는 그걸 모르고 말하는 걸까?" "아주 불우하고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나 이들은 다같이 모르는 일이 있었다. 혜화동 모퉁이에서 양장점을 했던 혜숙이와 영광이 동거 생활을 했던 사이라는 것을. 이들은 헤숙이가 환국의 친구 미망인으로, 그리고 재혼을 축하해주었지만 죽었다는 남자가 영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밤은 깊어갔다. 이부자리를 깔고 불을 끄고 두 사람은 잠자리에 들었으나 다같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양현은 몸을 뒤척이며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밖에서는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춥고 몹시 괴로웠으며 명희가 끓여준 수제비가 따뜻하했으며 바람도 없었고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는 실 구름이 걸려 있었다. 대지는 봄을 맞기 위하여 서두르는 것 같았고 까치 소리가 유난히 울려 오곤 했다. 덕희는 안방에 재영이랑 함께 있는 기색이었다. 묘하게 집안은 가라앉아서 절간과 같이 고즈넉했다. 양현은 제 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한숨 돌리듯 신문을 집어든다. 올해 한해만 죽기로 결심하고 공부를 한다면 내년 봄에는 졸업이다. 그리고 어느 길을 택하든 간에 양현은 자연스럽게 최씨네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양현은 자유로운 천지를 RnaRNs적이 업ㅈㅅ었지만 하여간에 독립을 해야 한다는 문제는 양현에게 초미 의 현실이었다. '일년만 참으면 돼. 일년만 꾸욱 참자.' 양현은 형무소에 있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만나지 못한 기간을 따진다면 어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러나 만나려는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사람과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의 경우는 다르다. 해서 더욱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 그리움 때문에 자기만을 따돌린 덕희의 처사가 그토록 깊이 상처가 되었는지 모른다. 여하튼 덕희는 자기 자신의 생각에도 지나쳤다 싶었는지 요즘 많이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양현이 명희집에서 잔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사실 덕희는 전전긍긍했다. 명희가 진상을 알게 되고 어른들이나 남편의 구에라도 들어가는 날에는 여간히 낭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문에는 온통 전쟁에 대한 기사뿐이었다. 물론 여태까지 신문은 전쟁에 관한 것 일색이었지만 전선이 달라지고 적애국이 달라지면서부터 일종의 히스테 리처럼 신문 지면은 요란해진 것이다. 식량 중산, 저축 장려, 국방 헌금, 유기·기타 금속류의 헌납, 지원병 독려와 아울러 동태 상황에 대한 선전, 각종 단체들은 영일 없이 영미를 성토하고 각계 각층의 인사들은 연일 진충보국과 성전완수를 외쳐대고 있었 다. 특히 지식 층, 그 중에서도 글 서서 행세해왔던 문인들 문학 단체들은 남 먼저, 열렬하게 일왕에 대하여 충성 을 맹세하고 결사보국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마치 총든 놈이 뒤에서 목덜미를 겨누고 있기라도 하듯이. 오늘 신문에도 저명한 여류 시인의 시"전승부"가 실려 있었다. "괜찮을까?" 양현이 중얼거렸다. 시골로 내려간 강선혜와 그의 남편 권오송을 생각했던 것이다. 실은 양현이는 극작가 권오송을 만난 적은 없었다. 명희로부터 얘기를 들었고 명희집에서 강선혜를 만나게 되면 합석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상당히 많이 들었다. 해서 자연 그들이 처한 형편이며 동태에 대해서 양현은 아는 바 적지 않았다. 신문에서 이성 잃은 무리들이 마치 야만인과도 같이 원수에 대하여 충성을 맹세하고 또 맹세하는 그 비참한 몰골을 볼 때마다 양현은 낙항한 권오성 부부가 은근히 걱정되는 것이었다. '영광오빠는 왜 전과 같이 조선에 나오지 않는 걸까? 작은오빠는 영 사람이 달라졌어. 무슨 위험한 일을 꾸미 고 있는 거 아닐까?' 길상이 수감된 후 윤국은 잠시 다녀갔다. 그는 시종 말이 없었고 서희의 어깨를 감싸안으면 눈물을 삼키는 것 같았다. 그 동안 윤국은 동경에 머무르면서 방학이 되어도 조선에는 좀체 나오지 않았고 나왔을 때도 며칠 묵고는 서 둘러 동경으로 가곤 했다. 윤국이 말로는 공부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요즘 공부 잘 되나?" 윤국이 물었다. "어떻게 잘 되겠어? 오빤 일본 안 가면 안돼?" "여기 있으면 뭐하니? 너도 정신차리고 공부나 열심히 해.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하는 거다. 내일 지구가 끝 나더라도 오늘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 그 말 몰라?" 그렇게 얘기하던 윤국이, 양현은 그의 얼굴이 몹시 쓸쓸해 뵌다고 생각했다. 신문을 한곁에 밀어놓고 양현은 책상에 놔둔 가족 사진의 액자를 들여다본다.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작은오빠, 그리고 나.' 환국이 결혼하기 전의 사진이었다. 양현이가 최씨네 호적에서 제적되기 이전의 사진이었다. 양현은 단발머리였고 윤국의 대학생 제복은 어설퍼 보였다. '어머닌 어떡하고 계실까? 큰오빠 내려갈 때 나도 함께 갈 걸 그랬나?' 내려올 생각 말고 공부하라는 서희의 엄명이 잇은 때문이기도 했으나. 죽은 셈치고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이 갑 자기 낯설어지는 것이었다. '공부하면 뭘해? 의사가 되면 뭐해? 인생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거야. 모든 게 피곤하고 괴롭기만 해.' "양현아가씨." 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쉰 듯한 유모의 목소리다. "네?" "새아씨가 오시랍니다." "알았어요." 양현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기탄없이 말을 해야겠어. 아주머니 말씀이 옳아. 침묵은 상대를 불안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다소 다투는 하 닝 있어도 속직하게 말하라......'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고 있을 때 명희는 어둠 속에서 충고를 했다. 양현은 몸을 일으켰다. 덕희 방 앞에서 "새언니, 절 불렀어요?" "들어오세요."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덕희 무릎에 앉아 있던 재영이가 "고모!" 하며 일어나려 했으나 덕희는 잡아 앉힌다. "고모한테 갈 테야." 아이가 버둥거렸다. "가만 있어. 재영인 착하지?" 덕희는 말하며 아이를 놓아주지 않는다. "고모 공부 안해?" "응, 할 거야." 덕희는 유모를 불렀다. "재영이 데리고 가요." 유모를 따라 나가다 말고 "고모도 함께 놀자." 하며 양현의 팔을 잡았다. "고몬 어머니하고 얘기해야 해." "치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내림다가 나간다. 어느새 재영이는 네 살이었다. "앉아요." 썩 기분 좋은 어투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신경의 날이 서 잇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양현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며 마주앉는다. 방안은 밝고 아늑했다. 최고급의 의걸이며 장롱의 백동 겹첩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양현씨 아직 기분 안 풀린 거예요?" 덕희가 물었다. 한참 만에 양현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하면은," "반발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새언니 앞에서 언제까지 제 자신을 속여야 하나요?" "그렇담 여태까지 날 속여왔다, 그 말이에요?" 덕희는 다소 밀리는 듯한 기색으로 되잡았다. "말하자면 참는 것도 감정을 속이는 일 아니겠어요?" "이제는 안 참겠다, 대어들겠다. 집안에 불화가 있어도 상관없다, 그런 뜻인가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런 뜻은 아니에요. 지금 기분이 별로 안 좋은데 기분 다 풀렸다고 언니한테 거짓말 할 수 는 없다, 그런 뜻이지요." 덕희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양단 검정 치마에 법단 흰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아주 화사한 분홍빛 털재킷을 입은 덕희는 여전히 기품이 있어 보였다. 세상 어려움 없이 자란 그에게는 오로지 양현으로 인하여 겪는 갈등이 가장 큰 시련이었는지 모른다. 이목구비가 아름답게 다듬어져 있지는 않았으나 피부빛이 옥같고 희고 아름다워 분홍색 털재킷이 참 잘 어울 렸다. "나도 내 행동을 생각지는 않아요. 기분 좋은 일도 아니구요." "......" "하지만 이건 내 권리예요. 어른들이 계시니까 참아왔을 뿐, 어머님이 안 게신 동안 집안의 기강은 내가 잡아 야 하고 각기 푼수에 따라 처신하게 하는 건 내 권한이에요." "그건 인정해요. 하지만 인정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어요." "그게 뭔데요." "오빠한테 왜 거짓말 하셨어요? 권한이란 당당한 거 아닌가요? 오빠한테 꾸중 듣는 한이 있어도 집이 비어 집보라 했다고 하시면 됐을 텐데." "양현씨! 날 훈계하는 거요?" 옥같이 흰 얼굴에 피가 모여들어다. "그것이 통하지 않는 이 집 형편을 몰라서 하는 말인가요?" "......" "나는 가족 아닌 남의 식구 공경할려고 이 집안에 온 사람 아니에요." "저도 원해서 이 집에 온 거 아니에요. 날 길러달라고 부탁해서 온 것도 아니구요." 덕희는 기절초퐁할 듯 놀란다. 여태까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는 양현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솔직하게 터놓고 얘기하겠어요, 언제까지나 구렁이 담넘어가는 식으로 처신할 수는 없어요." 말하는 양현의 얼굴은 긴장돼 있었다. 너무나 급변한 양현의 태도에 크게 충격을 받는 덕희는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제가 첫째로 생각하는 집안의 화목이 깨어지면 안된다는 일이에요. 더욱이 아버님까지 저리 되셨는데...... 집 안을 어지럽혀서는 안된다. 그건 저의 의무이며 보은하는 도리이며 저의 사랑이에요." "도대체 양현씨가 집안일을 걱정한다는 그 자테가 불쾌해요." "그래도 그건 우리의 현실이에요. 냉정하게, 보다 적합한 방도를 찾는 일 말이에요. 전 언니한테 부탁하고 싶 어요. 일년만, 제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설사 부당한 일이 있더라도 언니가 참아주세요. 자연스럽게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제가 이 집을 나갈 수 있게, 그건 언니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해요." "......" "졸업만 하게 되면 직업을 핑계삼아 지방이든 아니면 만주 방면이든 떠나겠어요. 어딜 가든 취직은 쉬울 테니 까요." "그럼 양현씨는 결혼 안할 작정인가요?" 덕희는 양현의 의중을 의심하듯 물었다. "안할 작정 해본 일 없어요. 하지만 그 문제는 제가 의사로서 직업을 갖는 것만큼 확실한 일은 아니잖아요?" "이미 혼기는 놓쳤어요." 덕희는 여전히 양현의 결혼에 집착해 있는 것 같았다. "알아요. 이젠 노처녀지요." 양현은 며칠 동안 심사숙고했다. 명희는 충고도 여러 번 되새겨 보았다. 결론은 이렇게라도, 말하자면 덕희와 합정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어느 구석에서 터져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양현은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었다. 결국 명희에게 토설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확실히 위험 신호였다. "양현씨가 그렇게 말 잘하는 걸 여태 난 몰랐네. 의사말고 변호사가 될 걸 그랬어요?" 비꼬기는 했으나 양현의 제안을 수긍하는 분위기는 있었다. 이때 "새아씨 손님 오십니다요." 행랑아범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나야, 덕희야." 둘째언니 욱희였다. "언니!" 덕희가 일어서는데 양현도 따라 일어섰다. "양현씨는 앉아 있어요." 하며 떼미는데 덕희는 의사나 힘이 양현에게는 아주 강하게 느껴졌다. "난 인사하고 가겠어요." "가만히 있으래두." 그러나 욱희가 "뭘 하니?" 하며 마루를 올라왔고 방문을 열었다. 행랑아범이 장충동마님이라는 칭호 대신 손님이라 한 이유가 있었다. 욱희에게 동행이 있었고 그는 배설자 였다. "안녕하세요?" 양현이 인사를 했다. "아 참, 오랜간만이군요." 욱희는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덕희는 "배선생 어서 오세요." 덕희와 배설자는 친면이 있는 눈치였다. "언니 전 실례하겠습니다." 덕희는 무슨 까닭인지 아까처럼 강하게 양현을 잡았다. "너무 아름답다. 얘기론 많이 들었지만. 가지 말고 우리 합석해요." 팔을 잡는 매끄럽고 긴 배설자 손길이 어쩐지 양현은 섬뜩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본능적인 경계심을 자아내게 했던 것이다. 자기를 평소부터 달가워하지 않는 욱희보다 훨씬 그 거부감은 컸다. "앉아요." 덕희는 양현을 눌러앉힌다. 세 여자에게 둘러싸인 양현은 마치 세 마리 늑대헤게 둘러싸인 양과도 같은 꼴이었다. 욱희는 여우 목도리를 끌러놓고 두루마기를 벗어놓는다. 벽돌색 아래위가 같은 저고리 치마다. 배설자도 외투를 벗었다. 수박색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벽돌색과 수박색, 화사한 방안의 그 빛깔은 모두 죽은색 같았다. 욱희는 마흔은 안된 것 같았고 서른네댓? 덕희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살결은 약간 누른빛이 돌았다. "어떻게 두 분이 만났어요?" 덕희가 물었다. "실은 너희네 집에 오다가 사례비 드리려고 배선생을 찾아갔었지. 너희네 집에 간다 했더니 함께 오시겠다고 해서." "그래요? 마침 잘 됐네." 뭐가 마침 잘 됐다는 건지 아리송했다. 사례비를 가져갔다는 얘기는 욱희의 딸 민정이가 국민학교 5학년인데 무용을 잘해서 학예회 때 뽑히곤 했는데 보다 더 잘하게 하기 위해 배설자 무용강습소에 보내고 있었다. 그런 기회를 놓칠 배설자인가. 그 능숙한 사교의 솜씨를 발휘하여 욱희의 마음을 잡았고 배설자는 깊이 욱희의 생활 속으로 잠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양현의 혼담 정보를 덕희가 얻은 것도 바로 배설자의 선이었던 것이다. "새언니 제가 차 끓여 오겠어요." 견디다 못해 양현이 일어서며 말했다. 덕희는 양현의 치맛자락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혜산댁이 다 해올 거예요. 걱정 말고 앉으세요." 덕희는 명령하듯 말했고 놓칠세라, 배설자가 재빠르게 말을 걸었다. "양현씨 거기 앉으세요. 아름다운 여인은 바라만 보아도 즐거워요. 안 그렇습니까? 덕희씨." 덕희는 잠자코 있었다. 욱희는 쓴 것을 마신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 진주 본댁에 갔다 온 일이 한 번 있었어요." 양현은 의아해하며 배설자를 쳐다본다. "홍성숙 여사하고 함께 갔었어요." "......" "진주 양교리댁 아시지요?" "네......" "그때 양교리댁에서 내려와 쉬었다 가라 하며 초청을 해주어서 바람도 쏘일 겸 홍여사랑 함께 진주로 내려갔 던 거예요. 양교리댁은 진주서 수대에 걸친 부호고 가문도 좋고 굉장히 명망 있는 집안이라 하더군요. 안닌게 아니라 가서 보니 법도가 있고 한편 개명도 했고." 그것은 욱희와 덕희에게 들으라 한 말이었다. 초청은커녕 쫓겨나다시피, 말할 수 없이 필시를 받았는데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냉대받은 것을 가심에 접어넣고 있을 배설자가 침이 마르게 양교리댁을 추켜세우는 것은 욱희난 덕희에게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여간 천연스럽다. 그것도 배설자가 존재하기 위한 정열일 것이다. "그액 사위가 병원 하는 거는 알지요? 지방이 좁으니까." "압니다." "그 병원집에서도 초청을 해서 저녁을 먹고 하룻밤 잤어요," 하다가 배설자가 갑자기 킬킬거리며 웃었다. "왜 그래?" 욱희가 말했다. "그럴 일이 좀 있어요." "무슨 일인데?" "자꾸 그리 물으면 곤란한데요." "그러니까 더욱 궁금해지는군." 감질이 난다는 욱희의 말투다. "그 병원집, 양교리댁 의사사위, 행동거지가 생각나서 말예요." 또 킬킬거리며 웃는다. 욱희는 감이 잡힌 눈치였다. "사람도 싱겁기는, 그 남자 상당한 꾼인가 봐요." 운을 떼어놓고 "사실 요즘 홍여사는 여러 가지 일로 심기가 불편하고 거의 자포자기 상태거든요. 옆에서 보기 가 민망할 정도예요." 그래, 술을 좀하는데." 이번에는 홍성숙을 치고 나온다. "아닌게아니라 평판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욱희와 배설자는 죽이 맞는 것 같았다. 중년으로 들어선 욱희는 큰 산과도 같은 친정 배경에다가, 친정 덕을 보는 것도 사실이지만 시가 역시 그런대 로 괜찮은 형편이어서 행활은 윤택했고 할 일은 없는 그런, 일상이 무료하고 답답할밖에 없었다. 고약하고 질이 좋잖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여간 유한마담이라 할 수 있고 시간 메꾸기 말상대로는 배설자 같 은 인물이야말로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었다. 사귄 지도 릴년 남짓, 느물느물해지는 중년이고 보면 배설자가 변죽만 쳐도 욱희에게 울려오게 왜 있었다. 얘기는 진짜 내용을 모르는 덕희는 그냥 웃으면 앉아 있었고 양현은 일어설 궁리만 하고 있었다. 마침 혜산댁이 따끈한 홍차와 요즘 구하기 힘든 생과자 한 접시를 가지고 왔다. 모두 찻잔을 들었다. 양현이도 할 수 없이 찻잔을 든다. "그날 그러니까 저녁을 먹은 뒤 홍여사가 조카사의를 상대로 횡설수러하다가 술을 마시게 왰지 뭐예요? 홍여 사가 칭얼거리는 아이 때문에 진작 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고." "그래서?" 욱희는 또 감질이 난다는 듯 말했다. "어어? 어찌 얘기가 이렇게 빠졌지?" 배설자는 웃으면 모두의 얼굴을 둘러본다. "배선생 버릇 하나 고약하지. 얘길 하다가 꼬리를 감추는 것 말이야. 칼을 뽑아가지고 그냥 집어넣는 법이 어 딨어?" "아이구 이거 참, 별일 아니에요. 홍여사는 술이 취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구 그 의사사위는 난처해하구 그러 다 보니 늑대 같은 남자 본성 있짆아요?" "아니 무슨 소리야? 그럼 당했다는 얘기야?" "그럴 리가 있나요? 분위기가 그랬다는 얘기지." 욱희와 배설자는 함께 소리를 내어 웃는다. 하여간 가관이다. 덕희는 얼굴을 붉혔다. 양현은 오히려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날 허정윤은 배설자의 전화를 받고 밤에 촉석루로 나가지 낳았다.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정윤은 지금 복수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복수이니 천만다행이지, 그날 밤 정윤이 촉설구로 나가서 배설자 유혹에 빠졌더라면 어쩔 뻔했겠는가. 배설자에게 물리어 허정윤에게 끔찍스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며 그야말로 패가망신을 했을 것이다. 양현은 비로소 배설자의 정체를 확인하게 되었다. 왜 섬뜩한 느낌을 받았는지.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본능적인 경계심을 자아내게 했고 평소 자기를 달가워하지 욱희보다 더한 거부감을 느 꼈는지 양현은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배설자가 형편없는 놈팽이로 꾸겨놓은 허정윤을 양현은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효영의원에 정윤이가 조수로 있었을 그때부터 집안 사람 모두는 그를 알고 있었으며 박의사가 죽은 뒤, 허 정윤은 최씨 일가와 주치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허정윤에 대해서는 처럭만큼의 의심도 일지 않았다. 양현은 다만 배설자가 무섭고 아주 불결해 보였을 뿐이다. 그와 같은 사정을 몰랐던 것이 배설자의 허점이었다. 정도로 가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든 허점을 드러내게 돼 있는 것이다. 탐탁해하지 않는 양현의 표정을 곁눈질해서 본 배설자는 "어이구, 이거 내가 큰 실수를 했네. 어짜믄 좋지? 사 바의 일을 티끌만치도 모르는 그야말로 청순한 처녀 앞에서." 하며 자라처럼 목을 움츠린다. "상관없어요. 어른이 다 됐는데 뭘 그래? 알거는 다 안다구, 내숭을 떨어 그렇지." 욱희는 내뱉듯 말했다. 양현이 서희의 딸이었다면 감히 사돈댁 따님한테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네까짓 게 깨끗한 체 그래 보아야 기생 딸 아니라 하겠느냐, 그런 저의를 품은 모멸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또 멀잖은 장래의 동업자구, 양현씨 용서하세요." 자기보다 아름다은 양현이, 집안 식구들 모두가 장중의 구슬같이 생각하는 양현이, 덕희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왜 하찮은 출신의 그로 인하여 자신은 빛을 잃어야 하는가, 왜 아무 핏줄도 닿지 않은 그가 식구들 사랑을 독 점하고 있는가, 생각할수록 분하고 얄밉고 눈엣가시만 같은 양현이, 덕희의 감정이 그렇게 치닫고 있기는 했으 나 그는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여자였다. 순결성이 아직은 남아 있었다. 감정적으로 배설자의 분위기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덕희도 양현과 마찬가지로 배설자를 불결하게 느꼈다. "그 양반 어디 말하는 사람인가? 아무 말 안해." "아무 말 안하시는 건 반대 안한다는 뜻이겠지요 뭐." "하여간 재미없어. 관심이 없는 거겠지." "그 일에 관심이 없다는 건가요?" 배설자가 물었다. "아니 얼굴에 잔주름이 모이기 시작한 이 마누라쟁이한테 관심이 없다 그 말이오. 하여가 일을 떠맡기는 했으 나 성가시러워." "그런 말 마세요." 배설자가 펄쩍 뛰듯 말했다. "아무나가 하는 줄 아세요?" 욱희와 덕희가 배설자를 동시에 쳐다본다. "위대한 근화방직회사 황태수 사장님 후광이 있어서 그런 일도 맡게 된 거 아니에요?" "하긴...... 그렇기는 한 모양이더군." 감투란 다름아닌 애국부인회 회장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지부이긴 하지만 굵직굵직한 인사들이 거주하는 구역이어서 배설자의 말대로 아무나가 회장이 되는 것은 아니 었다. "민정어머니는 그런 걸 시답잖게 생각하지만 이런 시국에는 그게 여간한 울타리가 아니에요. 모두 무풍지대에 살아놔서 세상 돌아가는 걸 몰라 그래요. 해 될 것 하나 없으니까 열성족으로 한번 해보세요. 그래야 아버님한 테도 이로울 거예요." "하라는 데야 안할 수 없지." 시무룩하게 말하기는 했으나 시국이 어쩌고, 아버님한테도 이로울 거라느니 하는 바람에 욱희는 좀 긴장했다. 덕희도 마찬가지였다. 수감된 시아버지 생각도 났고, 그러나 배설자는 한결 자세를 누그러뜨렸다. 이 집이 누구네 집인가를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는 할 수 없어요. 우리 조선 사람들 아무리 억울해도 뾰족한 수 없어요. 풀잎같이 엎드려서 태풍이 지나 가는 것을 기다려야 해요. 일본이 진주만을 그같이 처참하게 때려부수리는 것을 어느 누가 상상인들 했겠어 요? 그렇게 생각한 사람 많았지요. 내심 미국하고 일본이 붙을 것을 바라던 사람들도 적잖았고, 한데 현실은 어떻지요? 그야말로 파죽지세 아닙니까? 이제 일본은 중국 대륙뿐만 아니라 동남아 일대를 석권하고 있어요. 불과 몇 개월 안되는데 홍콩이 떨어졌고 마닐라 싱가포르 다 떨어지지 않았어요? 나머지는 시간 문제지요. 어 쨌거나 백인들이 지배하던 동양에 같은 황색인이 백인을 몰아냈다, 아무리 일본이 미워도 그것만은 속시원한 일이었을 거예요." 일장 연설이다. "그건 그렇지." 욱희는 신나하지도 않고 맞장구를 치기는 했다. "그 동안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어쩔까 하던 사람들도 정체가 급변하게 되니까 모두 발벗고 나서더군요." '저건 일본의 끄나풀이다. 틀림없이 스파이일 거야.' 양현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행여 자기 표정 속에 적의가 나타날까 봐서 고개를 숙인다. 배설자는 계속 지 껄이고 있었다. "난국을 지혜롭게 뚫고 나가야지, 이 댁에서는 바깥어른이 그리되셨지만 대신 시어머니께서 매우 현명하게 처 신을 하시니까 그나마 이런 정도로 유지가 되는 거지요. 참 슬기로운 어른이세요. 모습도 아름다우시지만. 그 런데 앞으로가 문제이긴 해요. 일본을 반대하는, 빛깔이 확실한 사람들은 일단 수감이 되고 했으나 이제는 비 협조적인 사람들에게 바람이 불지 않을까요?" 비협조적인 사람들에게 바람이 불지 않겠느냐는 말은 황태수의 두 딸과 양현에게 상당히 자극적으로 들렸다. 특히 양현에게는 그러했다. 맨 먼저 그의 뇌리에 떠오른 사람은 권오송 부부였다. 권오송 부부와 배설자의 관 계를 전혀 모르고 있는 양현이었지만 이들이 찾아오기 전에도 공교롭게 신문을 보면서 권오송 부부를 생각했 고 영광을 생각했으며 길상과 환국이 윤국이를 생각했던 것이다. 생각을 한 순서는 가까운 사람의 순이 아니 었으며 어떤 위험도라 할까, 그것에 따라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러니까 그날 밤, 명희 집에서 자던 날 밤 자리 에 든 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할 때 명희 역시 잠을 못 자고 다시 이들은 어둠 속에서 얘기를 했던 것이다. 그 때 명희 말이 양현에게는 너무 강렬했다. 그것은 목포감옥에서 풀려난 여옥의 얘기였다. "사람이 어찌 그 지경까지 될 수 있는지 상상할 수가 없어. 하나님께서 목숨을 주시고서 어찌 그 지경 되도록 내버려두시는 지 납득이 안돼. 산다는 것이 너무나 참혹하다." 그리고 또 명희는 영월에 가 있는 권오송 부부에 대해서도 몹시 걱정을 했다. 여옥의 출옥이나 길사의 수감, 그리고 권오송이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예상 같은 것은 모두 한 고리에 묶여 있는 일들이며 일본에 의한 감옥 이 강렬하게 인식되고 그들의 운명이 그곳에서 결정될 것이라는 공통점, 송장처럼 되어서 나오거나 그곳에서 죽을지도 모르고 그곳으로 끌리어갈지도 모르는 그들의 운명이야말로 일본의 손아귀 속에 있는 것이다. 그들 일본인들은 일본을 신국이라 하고 왕을 현인신이라 하며 부사산을 지구의 정신이라 했는데 그러면 신은 악인 가, 신은 모든 것을 탐내는 욕망의 덩어린가, 신은 목숨들을 참혹하게 베어 죽이는 잔혹성 그 자체인가? 양현 이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비협조라면 어떤 걸 두고 하는 말인가요." 덕희가 물었다. "그야 뭐 그것에 해당되는 일이 한두 가지겠어요? 나라가 정하고 나라에서 요구하는 일에 열심히 아니면 그게 다 비협조겠지요. 그러나 특히 지식인들 예술가들의 방관적 태도를 중하게 보는 것은 그만큼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문학이든 학문이든 무용이든 뭐 회화 음악 연극 그 모든 것은 싸우는 병사, 생산하는 노동자 그들을 고무하는 것이 되어야 밥값을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무위 도식, 나아가서는 그것 도 항일로 보는 거지요. 전쟁 수행의 걸림돌로 본다 그 말이에요." "하지만 요즘 신문을 보면 학자들 예술가들 모두 굉장히 협조하는 것 같던데? 알 만한 사람들은 모조리 궐기 하고 나서지 않았어요?" 욱희의 말이었다. "그럼요. 인간이란 끝없이 약한 거예요. 하지만 살기 위해선 끝없이 질긴 거예요." 배설자는 한순간 냉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더러는 시골로 도피해 간 사람들도 있어요. 그들에 대해서는 당국도 벼르고 있겠지만 협력하고 나선 사람들이 더한층 미워들 하고 있지요." 양현은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총독부에서 그러는 거는 알 만하지만 협조하는 사람들은 뭣 땜에 그럴까?" 욱희 말에 배설자 얼굴에는 또 한번 냉소가 지나갔다. "너만 청풍당석에 앉아 있겠느냐? 그게 인간 심리예요. 못생긴 사람은 미인을 보면 증오하고 병신은 성한 사 람을 증오하고 그게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증오한다기보다 부러워하는 거지." "부러움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예요. 힘이 없을 때는 부러워하고 힘이 있고 무리를 지을 때는 증오하는 거 지요. 그러니까 어떡하든지 부수고 뭉개려 드는 거예요." "세상 무섭네." "새삼스럽게 무섭긴요. 언제나 그래 오지 않았든가요? 그게 사람의 본성인데." "그, 그야 그렇지만 다 그런 거는 아니지 않아요?" "하이야 뭐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지만, 거기 있지 말고 내려와서 우리랑 함께 손에 피 묻히자는 사람도 있을 거고 지난날의 원한 때문에 도리어 밀어내어 일본 손에 의해 처리되기를 바라는 심리, 또 하나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무리가 많아야지, 만일에 정세가 바뀌게 되면 손 더럽힌 사람들 수효가 많을수록 좋고 심판 하는 깨끗한 손이 적을수록 좋고, 그게 사회심리 아니겠어요? 친일하는 사람이나 반일하는 사람, 방관하는 사 람, 그들도 각기 개인에 따라 사정은 다르지요. 친일도 열광하는 사람, 열광하는 척하는 사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그게 어찌 다 일색이라 할 수 있겠어요? 하여튼 지금은 비상시국 아니에요? 방관자나 비협조자를 그냥 놔둘 여유가 없는 것만은 사실이에요. 어떤 형식으로든 바람은 불 거예요." 스스로 달변에 취하여 배설자의 얼굴 근육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방안에는 무시무시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사람의 마음을 전율하게 하는 협박이었다. 일본 편에서 얘기하는가 하면 조선민족 편에서 얘기하는 듯도 했고 알쏭알쏭, 두 가지 색깔로 현란하고 그로테스크한 피륙을 짜내듯, 배설자의 변설은 순풍에 돛단 듯 미끄러지고 있었다. "검거하기도 하겠지만 징용을 뽑아간다든지 그 밖에도 합법적인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지금 예술계에 서도 전적인 개편이 있었고 국민문학 국민연극 등 전환을 부르짖고 있잖아요? 그게 다 정비 작업의 전초 아니 겠어요?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폐간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새로운 잡지들이 나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지요? 자리를 마련해줄 테니까 대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을, 피 한 방울까지 성전을 위해 바쳐라, 그렇게 떠들라는 거 지 뭐겠어요?" "배선생님은 어, 어찌 그리 꿰뚫고 있어요?" 말 잘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욱희는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하며 말했다. "제 자신이 예술계에 몸담고 있으니까요. 그 방면에 대해선 예민해질 수밖에 없잖겠어요?" "하긴... 그런데 참 모레 글핀가? 최승희 무용발표회가 있지요? 배선생도 갈 거지요? 제자인데 물론 가겠지만." 욱희는 가까스로 화제를 돌렸다. "당연히 가야지요. 만사 제쳐놓고 가야 해요. 선생님 만나뵙기도 하구요." 쇠가죽같이 질긴 심장이지만 그러나 배설자 얼굴에서 동요의 빛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그 얘기를 하니까 얼핏 생각이 드는데요. 무용을 총후보국이라는 그 기사가 나온 같은 날짜의 신문인데요, 박 춘금씨 질문에 대하여 도조 수상이 답변하기를 조선의 징병제도에 대하여 실시 여하를 연구중이라, 그랬어요. 앞으로 조선 청년들도 모조리 전쟁에 나가는 거 아닐까요?" 덕희의 말이었다. "그건 이미 예상된 일 아니겠어요? 그리고 연구중이라 한 말은 곧 실시하겠다는 뜻 아니겠어요?" 그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점심을 함께 먹고 욱희와 배설자는 떠났다. 그들을 보내고 양현이 제 방으로 들어가 려 하는데 덕희가 드물게 양현을 따라 양현의 방으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았지만 두 사람 사이엔 침묵이 흘렀 다.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의 위기 의식은 같았고 불안도 같은 것이었다. "그 여자 무섭지요?" 덕희가 입을 열었다. "무서워요." 양현이 대답했다. "우리집을 탐지하러 온 것 아닐까요?" "설마" "경계를 해야 할까 봐요. 언니집에서 몇번인가 만났지만 그땐 그걸 못 느꼈는데 앞으론 경계를 해야겠어요." "가까이 안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섬뜩해요." "품위도 없고 천해요." 하다가 덕희는 "징병제도가 실시되면 우리집은 어떻게 될까요?" "......" "재영아버지도 그렇고 동경에 계시는 도련님도 그렇고." "나이들이 많으니까." "하지만 일본인들은 삼십대들도 많이 나간다지 않아요? 사십대 초반도 나간다 하구, 정말 무서워 죽겠네." "그렇게 되면,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 모두 죽는 거지요 뭐, 누가 살아남겠어요?" 서로 멀거니 쳐다본다. 그리고 두 여자는 동시에 외로움을 느꼈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을 느낀 다. "정말 친일 안할 수 없네요. 그지요. 아가씨." "..." "실은 이번에 재영아버지가 진주로 내려간 것도 국방헌금 때문인가 봐요." "국방헌금요?" "확실하게 얘긴 안했지만 어머님께서 그 일 때문에 의논하시려고 내려오라 하신 것 같아요." "내라고 강요한대요?" "강요하나마나 날이면 날마다 신문에서 떠드는 게 그 얘기 아니에요? 우리 친정에서도 이미 수월찮은 금액을 내놓은 모양이에요, 우리집도 상당한 액수가 나가야 할 거예요. 아버님도 그렇고 재산의 규모를 보더라도, 정 말 돈으로나마 언짢은 일들이 무마됐으면 좋으련만..." "새언니, 우리 각오는 해야겠지만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해요. 악이 언제까지 유지가 되겠어요?" "그래요. 일본이 망하기를 빌 수밖에 없어요. 신명을 믿을 밖에요. 하도 무서운 얘기들이 많아서, 누가 그러던 데 전선에 처녀애들을 막 실어나른다 하잖아요? 아가씨도 명념해두세요. 의사라고 전선에 끌려나갈지 모르니 까요. 졸업 전에 약혼이라도 해두어야." 그 말은 자신을 생각해서라기보다 양현을 염려하여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저녁을 먹은 뒤 양현은 명희한테 내려갔다. 명희는 전과는 영 다른 표정으로 양현을 맞이했다. 상당히 문제가 있을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양현이 역시 그날 밤과는 사뭇 달라진 얼굴이었다. "청량리의 그 아주머니는 좀 어떠세요?" "글쎄다. 며칠이나 지탱할까 싶었는데 아주 조금이지만 좋아지는 것 같다." "정말 다행이에요. 아주머니, 제발 좋아지셔야지요." "가느다란 희망은 보이는데 뉘 알겠니? 꺼지기 전의 밝아지는 촛불 같은 건지......" "하필 안 좋은 편으로 생각하세요?" "너무 험악해서 생각이 자꾸 불길한 쪽으로만 가는구나. 양현아." "네." "넌 의학을 공부했으니까 묻는 말인데 생명에 기적이 있니? 없는 거야?" "제가 뭘 알겠어요. 학생이고 경험이 있어야지요. 하지만 기적은 있을 것 같아요. 있을 거예요." "그래 있을 거다." "그 아주머니, 너무 가여워요. 일본은 악마의 섬이에요. 물 속에 가라앉아 버렸음 좋겠어요." "가엾지, 가여워, 하지만 여옥이만 가엾겠니? 우리 모두가 다 가엾다." 명희 눈에는 짙은 연민의 빛이 돌았다. 여옥만을 위해 그러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유심히 양현을 바라 보는 것이었다. "어디 거창한 환갑 잔치나 화려한 결혼식 같은 곳에라도 가보고 싶다. 우울하고 요즘 같아서는." "한겨울에 잔치요?" "날씬 춥지만 이내 봄은 올 거야. 한데 오늘밤도 여기 잘려고 내려왔니?" "아니에요. 갈 거예요." "이제는 졸업반으로 올라갈 건데 공부는 안하고 이렇게 마실이나 다녀서 되겠니?" 농치듯 말했으나 명희의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공부는 하고 있어요. 그보다 불안하고 걱정이 돼서요." "무슨?" "낮에 이상한 여자 손님이 왔다 갔어요." "이상한 여자 손님이라면...... 양현이 혼담 가져왔어?" "아주머니도 참, 아니에요!" "그럼?" "그 여자가 와서 막 겁주는 얘기만 하고 갔지 뭐예요?" "......" "무슨 무용을 한다든지, 아주 기분 나쁜 사람이었어요." "아아" "아주머니 아세요?" 양현이는 놀란다. "그 여자 배설자라 하든?" "네 맞아요! 배설자라 했어요." "그 여자가? 너희집엔 뭣하러 왔을까?" 얼굴을 찌푸린다. "사돈댁의, 새언니 둘째언니 되시는 분." "황욱희 말이냐?" "네. 그분하고 함께 왔어요. 그 댁 따님의 무용선생이라 하든데." "안 가는 곳이 없구나. 서울 장안이 좁겠다." "아주머니는 어떻게 아세요?" 양현은 몹시 궁금해하며 물었다. "전에 우리 유치원 보모들한테 자진해서 무용 강습을 한 일이 있었고 선혜언니하고도 잘 아는 사이였다는데 몹쓸 짓을 하고 지금은 앙숙인가 부더라. 아주 질이 좋잖은 여자야." "그랬군요. 역시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니?" "앞으로 비협조적인 사람들한테 큰바람이 불거라 했어요. 그 말 땜에 걱정이 되고, 알고 계시는가 싶기도 해서 요." "비협조적인 사람? 그건 무슨 뜻이니?" "일본에 대해서 말예요. 선혜아주머니 권오송 그분들처럼 시골로 도피한 사람들을 두고 그랬을 거예요." "그 여자가?" 긴장한다. "네." "권오송 부처에 대해서 얘기하더란 말이니?" "이름은 들먹이지 않았어요." "알 만하다." "뿐만 아니예요. 진주가지 가서 어머니를 찾아갔다지 뭐예요." "거긴 또 왜?" 명희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그건, 그건요 진주 양교리댁 처제라든가요? 성악가라는데 그 사람 따라서 갔다지 뭐예요." "하여간 대단한 여자다." 명희는 양현을 상대하여 홍성숙의 얘기는 할 수 없었다. 양현이 아니라도 홍성숙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었다. 양현이 역시 혼담 때문에 왔다는 얘기는 하기가 싫었다. 수치심도 있었지만 결혼에 대해서 저항을 느 끼기 때문이다. "하여간 좋은 여자는 아니니까 멀리하는 게 좋을 거다." "새언니하고도 그런 얘기했어요. 경계해야 한다고." 명희는 웃었다. "어느 분의 며느리 딸이라구, 어련하겠니?" "그보다 아주머니 권오송 씨 어찌 될까요?" "글세...... 그 여자 빈말할 건 아닐 거야. 권선생도 사태를 주시하고 계실 거고 각오도 돼 있겠지. 그 양반 서울 계셨을 때도 여간 어려운 입장이 아니었거든. 누명도 썼고 시골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오늘 같은 시대야말로 배운 것이 한탄스럽지. 배운 것이 무거운 짐이 되는 세상이다." "우리 오빠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될까요." "양현아." "네." "넌 아버지를 사랑하니?" 새삼스럽게 묻는다. "그럼요. 아버지가 그리워요." "그래? 그리워..." 양현은 다른 때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빠는 집에 있니?" 나가려는 양현에게 명희가 물었다. "진주에 내려갔어요." "어제쯤 오는데?" "낼모레쯤 오겠지요." "오거든 나한테 한번 들르라고 전해주겠니?" "네." 양현이 가고 난 뒤 명희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감정적으론 양현에게 말하고 싶었다. '너의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는구나.' 하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최씨 일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명희는 일단 환국이를 불러서 전하는 것 이 순서라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명희는 낮에 효자동에 다녀왔다. 오라는 기별을 받고 갔던 것이다. 명빈은 약간 흥분돼 있는 것 같았다. "어제 남천택이 다녀갔다." "남천택이 누구예요. 오빠." "너 모르니?" "몰라요." "음...... 그런가? 나한테 후배격인데 천재지. 미친놈으로도 보이고, 조선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박식이지." "그런데 그분 얘기는 어째 하시는 거지요?" "음 얘기를 들어보아. 작년 봄인가? 하여간 행방을 감추었는데, 말들이 많았다. 소련으로 들어갔느니 어쩌니 하고. 하도 위인이 황당해서 그런 소문이 나돈 모양인데 실은 중국에 갔었다는구나. 그가 모습을 감추기 전에 는 서의돈과 죽이 맞아서 한동안 어울려 다녔지. 해서 서의돈이 그리 되고 보니 제딴에는 들여다본답시고 의 돈의 집을 찾은 모양이다. 그 길에 여기 들른 거야." "......" "그가 소식을 가져왔어. 일부러 전할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인데 의돈이 집에 오고 보니, 전하고 가자, 그랬다 는 거고, 그건 다름아닌 이상현의 소식이다. 듣고 있나?" "네." "상해에서 만났다는구나. 함께 술도 마시고 몰골이 초라하긴 한데 뭔가 일을 하고 있는 눈치더라 그러더군. 뭐 전할 얘기는 없느냐 하고 물었더니 모두 죽은 줄 알고 있을 텐에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 편하지 않겠느냐 그러 더라는 게야. 그래도 어디 그러냐고 했더니 픽 웃으면서 그렇게 소식을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나거든 임명빈 씨한테나 가서 본 대로 말하라 하더라는 게야." "......" "특별히 상현이가 나한테 소식 전할 이유가 뭐 있겠나. 명희 너한테 전하라는 뜻이 아니겠나?" "그런 것 같군요. 이선생님은 양현이 걱정을 하신 거예요." "그럴까......" 명빈은 똑 떨어지게 말하는 명희를 바라보며 묘하게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무런 구체적인 일도 없었는 데 누이와 이상현을 안쓰러워했으며 깊이 이해하려 했던 임명빈, 그는 아직도 로맨티시스트인가. "상현이가 살아 있을 줄은, 뜻밖이었다. 살아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헌데 이 소식을 넌 어쩔 셈이냐?" "가족들에게는 알려야겠지요." "너가?" "환국이한테 효자동에 손님이 와서 그러더라 한다면 자연히 본가에서도 알게 될 거예요. 이제는 입장이 바뀌 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아들이 성공했고 어느 모로 보나 그분들이 우위에 있으니까요. 어쩌면 이선생님은 그런 소식을 듣고 있는지 도 모르지요." "양현에게는?" "그건 환국이가 알아서 할 일이구요." 명희는 책상 앞에 앉아서 읽다 만 책을 펼쳤다. 아버지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럼요, 아버지가 그리워요, 하던 양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서 명희는 쓸쓸해진다. 그 아버지는 이상현이 아닌 김길상이었기 때문이다. 2장 산행 봄이 가고 초여름에 접어들면서 여옥은 비로소 병자가 되었다. 누가 보아도 그는 병자였지만 미이라는 아니었 다. 해골도 아니었다. 이 병자를 두고 그의 오빠 내외와 명희는 기뻐했다. 또 한 사람이 기뻐했다. 그는 여수에 있는 최길상이었다. 며칠 전에 그는 서울에 다녀갔고 서울 온 김에 들렀다고 말은 그렇게 했다. 여옥이 벽을 대고 앉아 있는데 방문을 열고 오라범댁이 들여다본다. 순인 치마에 생명주 깨끼저고리의 외출 차림이었다. 코가 오똑한 버선이 눈이 시리도록 희었다. "괜찮겠어?" 불안해하는 얼굴로 오라범댁이 말했다.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소영이 보고 빨리 오라 했어요. 토요일이라서, 마음이 영 안 놓이네요." "걱정 말라니까요. 이젠 운신도 하는데." "그럼 갔다 오겠어요." 오라범댁은 친정동생네 아이 돌잔치에 가는 길이다. 며칠 전부터 어쩔가, 걱정을 하는 것을, 여옥이 우겨서 가 도록 한 것이다. 여옥이 혼자 남은 집안은 조용했고 이따금 거리에서 냄비와 양은솥 때우라며 외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오 곤 했다. 고물장수의 가위 소리도 들려왔다. 문밖 청량리는 옛집이 있던 동리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집밖 에 나가지 않았지만, 줄곧 방에서만 몇 달간을 누워서 지내왔지만 여옥은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뭐랄 까. 헐벗은 것 같았고 한데에 나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물론 집밖은 모두 한데겠지만 혜화동이나 명륜동 같이 규모가 짜여진 부촌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철 따라 대비하고 단속하며 제 집 앞은 늘 청결 하며 적잖게 쌀쌀한 데 비하여 계절에는 무저항으로 서 있는 마을, 정결하고 쌀쌀하지 않으나 움츠러들고, 그 러면서도 타인을 거부하지 않는 분위기, 그것은 감출 것도 벽을 쌓을 필요도 없는 가난의 분위기였다. 여옥은 누워 있었지만 피부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들고나는 사람들이 몰고 오는 바람에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옛날 친정의 살림이 부유한 편은 아니었지만 죽은 남동생과 오빠, 사위까지 동경 유학을 보냈고 진작부터 개 명한 부친은 여자인 자신에게도 고등교육을 받게 했다. 그런 정도의 살림 규모, 일하는 사람도 늘 두셋은 부렸 고 오라범댁이 새색시 시절에는 부엌일 같은 것은 하지 않았으며 깨끗하게 차려입고 방에서 바느질만 했다. 여옥은 친정의 몰락을 새삼스럽게 실감한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은 아니었다. 기억의 문이 열렸다고나 할까, 감각이 살아났다고나 할까. 육체보다 훨씬 앞질러서 감각은 제자리를 찾는 것 같았다. 소리에서, 빛깔에서, 코 끝에 감도는 냄새에서도 어떤 형태가 나타나고 내용이 전개되고 그것은 마치 길잡이처럼 숨어 있는 영상을 불 러내고 끝없이 물러나게 하곤 했다. 여수에서의 내용이, 군산에서의 사건이, 좀더 들어가는 벽촌에서의 전도생 활 그 현장이 나타나곤 했다. 형무소의 생활, 고문당하는 일, 목말라서 몸부림치던 일, 어떤 때는 어둡고 희미 하게, 어떤 때는 밝고 선명하게, 그 단시 현장보다 한층 선명하고 현란하게 구두 축이 넓적한 무거운 구두를 신고 검정 새틴 통치마에 모시 적삼을 입고 서울역 대합실에서 서성대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는가 하면 변신 자식 하나 돌보며 사는 할머니를 도와서 풀을 매던, 자신의 흙묻은 손이 눈앞에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 한 것은 오선권과의 결혼 생활, 오선건의 배신으로 저주의 날을 보낸 그 시기는 마치 필름이 끊어진 것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화인같이 찍혀 있던 그 분노의 세월은 어디 가고 없어진 것일까. 여옥은 앙상한 손을 들여다본다. 뼈만 남은 손등 위로 지나가는 푸른 정맥, 여옥은 그 푸른 정맥을 볼 때 자신 이 진정 살아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취조관이 목을 비틀 때, 옷을 벗겼을 때 울부짖었다. '주여! 저를 죽게 하소서! 주여! 저를 데려가주소서!' 여옥이 해골의 몰골이 된 것은 고문과 형무소 생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영혼이 죽어가는 데 앞질러 육신 이 망가졌던 것이다. 여옥을 그나마 있게 한 것은 최상길의 존재였다. 오빠하고는 중학교 선후배였으며 오선권과는 친구 사이였던 최상길이 여수에 전도부인으로 나타난 여옥에게 동정을 품고 여러 가지 힘이 되어주려고 한 것은 있을 수 있 는 일이다. 처음 만났을 때 최상길은 오선권을 두고 그 친구 상종할 놈이 못됩니다. 하고 말했다. 최상길, 그리 고 그의 처 금홍이, 여옥은 그들의 근황을 알지 못한다. 옥바라지를 해주었으며 팔방으로 손을 써서 여옥을 옥 에서 나오게 했으며 서울까지 데려다주었던 최상길 옆에 금홍이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지를 여옥은 알지 못한 다. 남편을 의심하여 여옥의 집 근처를 배회하던 여옥의 명기 출신이며 극도의 의부증 환자였던 금홍이. 그때 여옥은 그런 상황을 희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말똥머리에다가 구두 뒤축이 널찍한 무거운 구두를 신 고 검정 치마, 사시사철 흰 적삼 아니면 검정 저고리를 입고 전도 사업을 위해 말 갈 데 소 갈 데 가리지 않 고 찾아야 했으며 거칠 대로 거칠어졌고 섬세한 부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시기, 세수만 하면 그만, 그흔 한 크림 한번 바르지 않았다. 여자로서의 매력이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일조차 없는 자기 자신을 두고 비 록 기생 출신이기는 하지만 눈에 번쩍 띄게 아름다운 금홍이가 최상길 때문에 자기를 경계한다는 사실은 납득 할 수 없었고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여옥을 의지하여 여수로 찾아온 명희하고 수예점에 들렀다가 노상에서 최상길을 만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음과 같은 말을 여옥이 했다. "지나놓고 보면 웃음도 나오는데 당할 때는 병이 나겠더라니까, 여자가 혼자 산다는 것, 그것 참 어려운 일이 야. 도처에서 다리를 걸어 나자빠지게 하는데 참말 미치겠더군. 전도부인이란 직책을 앞에 걸고 다녀도 말이 야. 명희 너도 앞으로 많이 당할 거야. 특히 넌 그 미모 때문에, 나같이 별 볼일 없는 여자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 도둑으로 의심받는 일 말이야!" 그때 여옥은 산 넘어갔던 부아가 되돌아왔는지 벌컥 화를 냈다. "나 원래는 신경질이구 결벽증, 성질이 그랬었잖니? 그런 것들이 세월 따라 마모되고 좋은 뜻에서도 그렇지만 나쁜 뜻에서도... 결함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장점이 될 수도 있었던 그런 것들이 다 망가져버렸다... 이따금 나는 내가 나무토막인가, 아무 곳에나 굴러 있는 돌덩어린가 하고 혼자 뇔 때가 있어." 여옥은 말하고 나서 웃긴 웃었다. "나도 피해자의 한 사람이지만 결코 남자를 도둑맞았다는 생각은 안해. 또 그런 처지의 여자로서 동정받는 것 도 싫어! 오선권이 내게 준 것이 그게 어디 사랑이었니? 오선권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건 때문에, 그 여자에게 가기 위해 나와의 부부 관계를 취소한 거 아니니? 그건 인간의 본질의 문제지 질투하고는 별로 관련이 없어. 그러나 내가 그 절망의 늪에서 일어나 세상 밖으로 기어나왔을 때 느낀 것은 이방인이구나, 그거 였어. 명희 너도 이제부터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야. 시골에 가도 도시에 가도, 교회당 안이나 밖에서 도... 여자들은 나를 침입자로, 결코 과장이라 생각지 말어. 농가에 들어서도 농가 아낙은 제 남정네 어느 한 부분, 눈 및 하나라도 도둑맞을까 봐 경계하고, 물론 내가 임자 없는 홀몸이라는 것을 전제해서 말이야. 아찔 하고 눈이 멀 것 같은 충격을 헬 수 없이 받았다. 해서 남자라면은 벽을 쌓고 또 벽을 쌓아놓고 여자들과 친 해볼려구, 그야말로 쓸개 다 빼어놓구서, 그럴수록 오히려 그게 약점이 되는 거야. 그 방자함이란... 아니면 위 세 당당하게 동정이나 베풀고, 인간을 어떻게 포기해? 난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 아니니? 도시인간이란 무엇이 냐, 수없이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주여 나는 어찌해야만 하옵니까? 논둑길을 가면서 물어보고 산길을 가면서 물어보고... 이제는 그런 갈등은 극복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고 보니 사람이 억척스러워지고 미련해지고 물 기 빠진 고목이 된 것 같고... 신앙까지도 형식화 해 가는 것 같고, 아무튼 최상길이 그 사람만 하더라도 어느 곳에나 있는 남자 이상으로 생각한 일이 없었지만, 그 사람 역시 옛날 친구의 여자로서 오선권이 걸어간 길을 너무나 빤히 아는 처지, 게다가 선배의 누이로서 그 이상의 관심이나 그런 것 보인 적은 한번도 없었어. 본시 그 사람은 교인이었거든. 도중에 타락하여 교회와 멀어졌다가 지금 여자 만나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됐는데 이 여자가 내게 준 횡포는 상당했다. 그야말로 남의 인생 때문에 혼나 거지. 어떤 때는 남편이 외출하면 행여나 싶었는지 내가 있는 집 근처를 배회하기도 하구, 무슨 일이 있느냐 집으로 들어오라 하면 여자는 아무것도 아 니오 하면서 휭하니 등을 돌리고 가는 거야. 어이구, 하며 난 그럴 때 땅바닥에 주저앉지. 그 칼날 같은 눈빛 은 교회에서도 내 전신을 찌르는 거야. 까닭 없이 다리가 후들거리고 허둥지둥하다가 오냐, 나도 칼을 빼들고 마음으로 그를 대항하리 할 때 여자는 풀이 죽은 거야. 그러다가 언제까지 이런 무위한 짓을 해야만 하는가 혼자 쓴웃음을 띠곤 했다. 그 여자가 풀이 죽으면 참 인간이란 쓸쓸한 거구나, 그 여자도 나와 같이 이방인일 까? 그럴 요소는 있지." 여옥은 금홍이 생각을 계속해 한다. 최상길이 여옥에게 쏟는 정성에 대하여 금홍이는 어떻게 대항하고 있는 걸까? 하고. 같은 기독교도로서 바로 그 신앙으로 말미암아 수난을 겪게 된 교우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는 것을 의무로 양 심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일이다. 남편을 따라 교회에 나오게 된 금홍의 신앙이 깊어졌다면.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여옥은 어딘지 미심쩍고 의문이 남았다. '아직은, 아직은 그런 것 생각하지 말자. 이대로 고맙고 따뜻하고 진실된 삶이 소중하다.' 집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집안에 있는 쥐새끼들조차 어디론가 이사를 다 가버렸는지 바늘 하나 떨어뜨려도 소 리가 날 것처럼 그렇게 조용했다. 여옥은 거울을 찾아 자기 얼굴을 비춰본다. 눈동자가 허공같이 검고 커 보였다. 솟아오른 관골, 홀쪽한 두 볼, 입술에는 핏기라곤 없다. 얼굴은 백지같이 희었다. 가느다란 목은 머리를 떠받치고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 다. '숭업다.' 거울을 놓는다. 그러나 거울을 놓는 순간 여옥은 옛날의 이십대, 그 시절의 모습이 언뜻 지나간 것같이 느낀 다. 말랐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른다. 활동하고 노동할 때 드세고 질겨 보였던 그런 것들이 다 탈락되었기 때문 인지 모른다. 전도사 생활을 하는 동안 여옥의 얼굴은 항상 빨갛고 땀을 흘렸다. 특히 여름철에는 그랬다. 농 가에 들렀을 때 혼자 울고 있는 아이가 있으면 업어서 재워주기도 했고 노인네들이 풀을 매고 있으면 주질러 앉아서 함께 풀을 매어주었고 돌보는 이 없는 병든 사람의 간호도 했으며 상가에서는 허드렛 일도 했다. 야 학교에서는 수예 재봉을 가르치고 글도 가르쳤다. 항상 그는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유별나게 횐 얼굴은 검게 타지 않고 붉게 타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와 같이 힘들게 동분서주했는지. 그것은 신앙의 힘이었 겠지만 여옥에게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가, 그 끝없는 물음의 수행일 수도 있다. 그는 전도사가 되어 활동 하면서 깊이 기도하면서도 오선권을 쉽사리 용서하지 못했다. 따져보면 여옥은 사랑을 배반한 오선권에 분노 를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을 배반하고 진실을 배반한 그것에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그는 명희에게 말했 다. 사랑을 잃어서, 자신의 운명이 망가졌기 때문에, 버림받은 여자라서, 여옥은 그래서 절망했던 것은 아니었 다. 사랑이 식으면 이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도덕에 묶이어 피차 불행하게 사는 것을 여옥은 원치 않았 다. 다만 진실을 입신출세에 이용하는 그 비정에 절망했던 것이다. 여옥은 그 자신이 말했듯이 젊었을 때는 신 경질적이며 몹시 심한 결벽증이었다. 화인같이 남아 있던 비정이 용서가 되지 않았던 오선권이, 그런데 어찌 그 기억이 끊어진 필름처럼 여옥의 마음에서 사라졌을까. "아무도 없어요?" 명희 목소리였다. "여옥아!" "응 나 여기 있어." 명희가 방으로 들어왔다. "모두 어디 갔니?" "모두라니?" "너희 올케 말이다." "외출했다." "아픈 사람 혼자 두고?" "내가 돌잔치에 가라 했어." "놀랬다. 무슨 일 있었는가 싶어서." "좀 있으면 학교에서 소영이가 올 거야." 소영이는 여옥의 조카딸이다. "괜찮니? 너." 명희는 앉으며 말했다. "응." "참 더디게 회복이 되는 것 같다. 하지만 갑자기 좋아지는 것도 비정상이지. 너 나왔을 때 생각을 하면 정말 끔찍스러워." "아직도 끔찍스럽지 뭐." 여옥은 까닭 없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명희는 웃으면서 "이제 살았지 뭐." "넌 유치원 어떡하고 밤낮 오니?" "시국이 말이야, 유치원도 문닫지 않을까 싶어." "왜?" "영미하고 전쟁이 시작되면서 정부 시책도 달라졌지만 인심이 확 바뀌었다. 부모들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데 관심이 없어진 거야. 심리적으로 한가한 마음으로 살 수 없는 거지. 그리고 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아이를 곁에서 떼어놓는 데 불안을 느끼나 봐." "그렇게 심각하니?" "신문 보도를 모면 일본이 계속 밀어붙이고 있지만 집안의 밥그릇까지 내놔야 하고 시골서는 국민하교 아이들 을 동원하고 송진까지 수집한다니까. 날이 갈수록 상점은 텅텅 비고 생활필수품은 구하기가 어렵고 그야말로 비상 시국이지. 당국에서는 식량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발표했지만 식량 문제가 심각하다는 얘기 아니 겠니? 젊은 사람 있는 집안은 전전긍긍이구." "나 누울래." 그런 얘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는지 여옥이 말했다. "그래, 그래 누워라." 명희는 여옥이 눕는 것을 도와준다. 여옥의 체중은 새털같이 가벼웠다. 그러나 마치 피노키오처럼 뼈와 뼈만 이어져서 덜거덕거리는 것만 같았다. 반듯하게 누운 여옥은 무심하게 명희를 쳐다보았다. 푸르게 느껴지도록 맑고 큰 눈이었다. 잔잔한 호수 같아서 새 그림자라도 드리워질 것만 같았다. 여학교 시절부터 긴 세월 동안, 참으로 긴 세월 서로 흉허물 없이 사귀어온 친구였지만 명희는 이같이 맑고 영적인 눈은 처음 보는 것 같았 다. "너의 올케 참 괜찮은 분이다." "무던하지." "어쩌면 이부자리가 이렇게 늘 깨끗하니? 오래 누워 있는 병자에게 이러긴 정말 쉽지 않다. 올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명희야." "왜?" "내가 병자니?" "병자 아니니?" "글세, 못 쓰게 망가지고 고장난 기계 같은 것, 아닐까? 병이란 살아 있는 것에 달려드는 것 아니겠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명희는 어리둥절하며 말했다. "그 동안 겪으면서 내가 사람이란 생각을 못했어. 자전거나 달구지나 불피우는 풍로, 맷돌...... 그런 물건 같았 거든.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면 아마 자살을 했을 거야."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을 계속하지 않았다. 명희도 침묵으로 대하면서 여옥을 외면했다. 한참 후에 여옥 은 다시 말했다. "우리 올케, 우리집에 시집와서 고생만 한다. 나 같은 시누이 꼴도 보아야 하고, 명희 너같이 친정을 도와준 일도 없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염친지 나도 모르겠다." "도우긴, 그런 말 말어. 걱정 끼치기론 너와 다를 게 뭐 있니?" "오라버니는 좀 어떠시니?" "어어? 이제 제법이네. 남의 걱정까지 다 하구." 여옥은 웃었다. "실은 가을쯤 산에 가기로 나하고 약속했어. 처음에는 떨떠름해 하더니, 요즘엔 오히려 오빠 쪽에서 강한 의지 를 보이는 것 같아." "산으로...... 거긴 왜?" "지리산인데 그곳에 훌륭한 분들이 몇분 계신가 봐. 절에 계시는 스님 한분은 오빠하고 안면도 있구, 또 최참 판댁하고 인연이 깊은 절이라 하더구나." "그러니까 정양하러 절에 가신다 그 말이니?" "말하자면 그런 새인데 오빠 생각은 다른가 봐. 처음엔 무심히, 그러다가 차츰 그곳 스님한테 가고 싶은 생각 을 하는 것 같애. 하기는 서의돈 선생이랑 가까운 친구들이 모두 그리 됐으니 오빠로서는 어쩌면 지푸라기라 도 잡으려는 심정인지 몰라...... 그 스님은 출가하기 전에, 서울서도 식자들간에 꽤 알려진 사람이래. 신학문도 동경 가서 했고 본시 서울분인데 집안 어른이 일본과 합방 당시 자결을 했다는 그런 말도 있어. 아무든 좀 특 별한 사람인가봐." 이들은 모두 화제에 오른 스님이 여수에서 만남 적이 있는 소지감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한번은 명희 와 여옥이 수예점을 나서다가 노상에서 최상길과 소지감이 함께 오는 것을, 또 한번은 명희가 통영으로 가기 위해 여옥이하고 부두로 나갔을 때 마침 부산으로 가려는 최상길 소지감, 그들을 전송하기 위해 나온 금홍이, 그들 일행과 만났으며 두 여자에게 최상길은 소지감을 소개까지 해주었다. 그때 소지감은 스님이 아니었다. "오빠의 병은 순전히 마음에서 난 병이야. 살려는 의지가 없으면 백약이 무슨 소용이겠니? 마치 죽음을 기다 리는 사람같이, 아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리 역시도 한땐 오빨 포기하는 심정이었다." "왜 그렇게 되셨을까? 원인이 있을 거 아니야?"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 그 중에서도 내가 오빨 심리적으로 괴롭혔나봐. 어려웠을 때는 그놈의 유산인지 뭔지...... 그때부터 나는 우둔하게 눈감고 살려 했고 오빠는, 그래, 그랬을 거야. 나는 얻어먹는 거지, 완전히 임 명빈이라는 인간은 무너지고 말았다. 눈치보고 풀이 죽고 그러고 나면 심한 우울증에 빠지는 거야. 그런 심리 적 갈등을 되풀이하다가 저리 됐지 뭐니? 어떤 땐 올케하고 자식들까지 남 대하듯, 자기 자신의 부끄러운 일 부같이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나도 의식적으로 친정을 멀리하곤 했는데." "알 만하다, 그 심정 알 만해. 돌아가신 너의 아버님도 좀 깔끔하셨니? 대쪽 같은 어른이셨지. 어머님도 여 간 꼿꼿하셨니?" "사는 게 지겹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여옥은 명희 말을 가로막았다. "만사에 눈을 감고 살다가도 문득문득 사는 게 뭔지...... 고통시러워. 사실 오빨 비난할 자격도 없지." "산다는 것은 아름다워. 생명이란 참으로 놀라운 거야. 어떤 경우든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고 축복으로 느끼 는 한 죽음도 원망스러운 거는 아닐 것 같다." "그런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죽고 싶은 생각 안해봤니?" "했지. 수없이 했다. 그랬기 때문에 삶이 소중한 것은 지금 느끼는 거야. 삶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구." "그런 너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신앙에서 오는 거니?" 여옥은 잠자코 있었다. 대답하기가 어려운 눈치였다. "그거는, 그거는, 글세...... 그거는 아마도 사람에 대한 신뢰 때문이 아닐까? 믿음의 회복 같은 것." 명희는 여옥이 묘한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신뢰라는 것이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웬 까닭인지 신앙에서 오는 거냐는 물음에 대하여 답변이 없었다. "고모 나 왔어요." 조카 소영이 방문을 열고 들여다본다. "어머, 아주머니 오셨네요." 갈래머리의 소녀, 소영은 활짝 웃었다. "잘 있었니?" 명희도 웃었다. "고모 나 뭐 해드릴 일 없어요?" "가서 공부나 해. 어머니 늦게 오시면 저녁 준비하구." "알았습니다." 하고 소영은 방문을 닫았다. "명희야 나도 산에 가고 싶어." "전도부인이 절에 가서 되겠니?" "산에 가고 싶다고 했어." "몸이 회복되면 그것도 괜찮겠지." "그러고 또 당장은 책을 읽고 싶어." "책 읽을 기력 있니?" "천천히 읽지 뭐. 너 요다음 올 때 책 좀 골라서 가져와." "그래 그럴게." 어쨌든 명희는 여옥과 명빈에 대하여 한시름 놓은 셈이다. 늦겨울에 목포 감옥에서 실려나온 여옥은 서울서 초가을을 맞이했다. 마치 저울의 금처럼 한땀 한땀 나가는 실의 흔적처럼 여옥의 건강은 몹시 더디게 회복되어왔다. 그는 집안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고 일요일도 그 랬었지만 평일에도 학교 가는 길에 소영이 부축하여 혜화동 명희집에 데려다주곤 했다. 명희는 여록이 올 때 마다 가지 말라고 붙잡곤 했다. 혼자서 너무 쓸쓸하니까 함께 있지고도 했다. "싫다 이애, 너 인생 내 인생이 뒤섞여서 죽도 밥도 아니게 된단 말이야." 그럴 때마다 여옥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때 명희 네가 여수에 왔을 때 나 힘들었어." "그때 얘기는 왜 하누. 그때하고 지금하고 같애? 너무 절박했고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었던 그 시절, 생각만 해도 끔찍해. 이제는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 아니니?" "이제는 내가 널 힘들게 할 거야. 그보다 홀몸의 여자 둘이 함께 사는 것도 너무 청승스러워." "언제까지 친정에 있을 거니? 그 착한 올케 골만 썩일 작정이야?" "앞으론 날아야지." "어디로?" "어디긴? 저 높은 자유의 하늘로." "얘두 참. 꿈 같은 얘기하네. 누가 너 마음대로 날아다니게 내버려둔대니?" "내 마음까지야 붙잡아매 두겠니?" 여옥은 혜화동에 오면 힘든 일은 못해도 부엌에 나가 반찬 장만하는 것을 즐겨했고 유치원에 나가서 아이들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을 좋아하고 했다. 이날도 아침나절 소영은 여옥을 데려다주고 갔다. 청량리에 여옥을 데려다주는 것은 명희의 소임이었다. "벌써 가을이네." 하늘 높이 무리지어 날아가는 새를 보며 여옥이 말했다. "가을이야. 엊그제 뙤약볕에서 땀을 흘리곤 했는데." 사과를 깎으며 명희는 맞장구를 쳤다. "너희 오빠는 언제 산에 가시니." "너도 가고 싶어?" "아직이야 뭐, 못 가지." "수일내로 가게 될 거야. 그쪽에서도 아마 기다리고 계실걸? 여름방학 때 환국이가 내려가서 거처할 곳도 마 련해놨고." "그댁의 바깥어른은 참 어떻게 지내실까?" "그 얘기는 그만두자. 모두가 다 괴로워. 처음 당하는 일이 아니니 그댁 부인도 잘 견디시는 모양이야." "서선생님댁은?" "사정이야 다 같지. 다만 유인성 선생 그댁이 참 어려운 모양이다." "인실이 오라버니 말이지?" "응, 그댁 부인이 좀, 외아들이 결핵이야. 그래서 마산 요양소에 가 있는데 어머니가 내 몰라라, 그럴 수도 있 는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럼 어떻게 되니? 어머니가 몰라라 한다면 그건 죽으라는 얘기가 아니니?" "있고서야 설마 몰라라 하겠니. 여기저기 사정이 막히고 딱하게 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소문은 아주 고약해." "어떻게?" "황태수 씨가 요양원에 보내라고 상당한 금액을 전했다는데 알고 보니 아들한테 한푼도 가지 않았다는 거야. 그뿐이면 좋겠는데 아들을 핑계삼아 아쉬운 소리 해가면서 돈을 얻어다가 쓴다는, 좀 믿어지지 않는 얘기지?" "세상에 그런 기막힌 어머니도 다 있니? 하기는 딸을 청루에 팔고 그 돈으로 노름하는 아비도 있긴 있더군." "유선생님이 수감되기 전에도 아들 땜에 몹시 가슴 아파했다 하더군." "참 인실이한테 언니가 한분 있었지 않아?" "응, 인경언니, 그러잖아도 인경언니가 대강 뒷바라지를 하는 모양인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니? 하루 이틀도 아니구." 하다 말고 명희는 한순간 망설인다. "너도 알 거야." "뭘?" "인실이 소문." "일본인하고 어쩌고 하는 소문 말이니?" "그래." "그게 어쨌는데?" "이상한 것은 그 일본인이 요양소에다 가끔 송금을 한다는 거야." 여옥은 깜짝 놀란다. "그렇담 인실이가 그 일본인하고 함께 있다 그 말이니?" 이번에는 명희가 펄쩍 뛰었다. "절대로, 절대로 그건 아니야. 선우신이라고 넌 잘 모르겠지만 유선생님한테는 둘도 없는 제자인 셈인데 그 사 람은 유선생 집안 사정에도 소상하구 그 일본인도 만난다고 했어.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일본인 역시 인실의 행방을 알고자 아주 결사적이라 하더군. 오빠 집에도 가끔 오는데 이번에 모두 함께 수감이 되었지." "그렇다면 인실이는?" "인실이 행방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대. 죽었다는 말도 있고 독립군에 들어갔다고도 하고." "그러면 그 일본인은 어찌 알고 요양소에 송금을 하는 걸까?" "작년에도 유선생집에 왔더라는 거야. 그리고 수감되었다는 소식은 동경의 찬하씨로부터 들었겠지. 그들은 아 주 절친한 사이거든." 했을 때 명희는 그 바닷가, 분교에 찾아왔던 조찬하와 오가다, 인실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 날 때마다 날카로운 비수에 심장이 찔리는 것 같은, 그 괴로운 기억. "하기야 뭐 인실이 아니래두 유선생하고는 선후배 사이, 계명회 사건 때도 함께 검거된 처지니까 그럴 수는 있는 일이지만 예사로운 일은 아니지." 그러나 명희와 여옥은 진상을 모르는 만큼 그 추측은 상당히 겉도는 것이었다. 오가다가 만주에서 가끔 요양 소에 송금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가다의 심정은 의리라든지 동지애라든지 인실에 대한 사랑의 표시라 든지 그런 것과는 사뭇 성질이 달랐다. 보다 진한 것이었다. 보다 절실한 것이었다. 유씨 집안은 아들의 외가 요, 유인성은 아들의 외삼촌이며 요양소에 있는 아이는 아들과 사촌지간이다. 아들의 반쪽 핏줄에 대한 절실함 애틋함이 그로 하여금 요양소에다 송금을 하게끔 했던 것이다. 작년 봄에 산장에서 조찬하와 함께 제문식과 선우신을 만나 술을 마셨을 때 유인성의 가정 형편을 알게 되었고 유인성이 수감된 일은 명희의 추측대로 조 찬하가 오가다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사람이 외골수인 모양이지?" "나도 그 일본인 한번 보기는 했어." "어디서?" "그건, 하여간 오빠도 들은 얘기가 있어서 칭찬을 하고 환국이 역시 잘 아는 사인지 그 일본인을 아주 깨끗한 사람이라 하더구먼." "인실이가 어떤 앤데?" "응?" "헛소문이든 사실이든 그 얘가 아무나 상종할 성질인가? 그래도 그만했으니까 화제가 됐겠지. 어쨌거나 아름 다운 얘기야. 인종은 달라도 사람은 다 마찬가지 아니겠니? 극악무도한 흉물이 있는가 하면 빛나는 사람도 있 고 가끔 그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거 아니겠어?" "글세," 명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천하에 대하여 얼마나 자신이 이기적이었나 생각하는 것이었고 지난 봄에 들은 상현의 소식을 생각해보는 것 이었다. 인실은 혼신을 바쳐서 팽팽하게 유감없이 살고 있을 거란 생각도 들어 어떤 선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했던 제자 유인실. '그는 죽었을까? 아니다. 그는 살아 있을 거야.' 명희는 또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p230-231 빠졌음 "네, 건강이 좀......" 명희는 길게 말을 잇지 않았다. "유치원은 잘돼갑니까?" "아마 길게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럴 테지요. 지방에도 유치원은 거의 폐쇄됐으니까요. 대부분이 교회에서 운영해온 까닭도 있지만 결국 불요 불급하다는 거지요. 이런 비상 시국에는." 최상길은 담배를 붙여물었다. 재떨이가 없는 집안이어서 명희는 얼른 접시 하나를 가져왔다.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저녁에는 저 큰아기를 임선생님께서 청량리까지 데려다주신다면서요?" "누가 그랬어요?" 여옥이 물었다. "언니 되시는 분이 그러시더군요. 명희씨가 데리고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혼자 갈 수도 있는데 공연히 모두들, 어찌나 감시가 심하든지 밖에 나와서도 감옥살이지 뭐예요." 여옥은 공연히 엄살을 떤다. "기왕 이렇게 왔으니 오늘은 내가 데려다주기로 하지요. 여옥씨 안 가시겠어요?" "해가 아직인데?" "오늘은 얘기할 것도 있고 저녁 차 타려면 시간도 빠듯해서." "뭐가 빠듯해요? 아직은 한낮 아니에요?" "여옥아," "왜 그러니?" "최선생님 말씀대로 해. 여긴 내일도 올 수 있잖아?" 한동안 가만히 있던 여옥은 "그럼 그러지 뭐." 슬그머니 말했다. "오매불망, 반쪽 같은 친구를 납치해 가니 죄송합니다, 임선생." 최상길은 어릿광대 같은 몸짓을 하며 명희에게 꾸벅 절을 했다. 어색함, 수줍음, 그런 것들이 위장되어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아닙니다 제가 남의 애인을 잡아두어서 죄송합니다." 스스럼없이 한 말대꾸는, 이번 여옥의 일을 통하여 최상길 인간성에 전폭적으로 명희가 신뢰하며 마음을 열어 버린 때문이긴 했으나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기도 했다. "길여옥 값어치가 왜 이리 자꾸만 올라가는 거지? 진작 내 값이 이런 줄 알았다면." 여옥도 한마디했다. "알았다면." 실실 웃으며 최상길이 되물었다. "먼 길, 돌아서 여까지 오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무튼 내 생애, 젤 행복한 시절인 것은 틀림이 없네." 말의 내용에는 알쏭달쏭 것도 있었으나 여옥이 들떠 있는 것도 확실했다. "허 참, 아무나가 비싼 값 매겨주는 줄 아시오?" 최상길 말에 여옥은 웃으며 "무슨 말이에요?" 짐짓 모르는 척 되묻는다. "임선생이나 이 최상길 정도라도 되니까 길여옥을 위하여 눈물 몇 방울 흘려준 거지. 공연히 우쭐하다가 황혼 에 늦바람날까 두렵네." "애걔걔." 웃음이 남은 얼굴을 최상길은 명희에게 돌렸다. "임선생, 여옥씨 건강이 완전하게 회복이 되면 두 분이 함께 한번 다녀가십시오." "..." "여수에 말입니다. 도처에서 비상 시국이라고 쾅쾅 울림장을 놓고 있지만 기죽을 필요 없고 아직은 그곳 해물 맛을 그대로며 인심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한번 오십시오." "거긴, 난 싫어요." 명희는 저도 모르게 거부의 몸짓을 강하게 했다. 의부증 환자하고 여옥이 말하던 그의 마누라, 부두에서 만나 명희 자신도 심한 심리적 압박을 받은 금홍이 생각이 나기도 했던 것이다. "불에 덴 아이같이 왜 그러십니까?" "그쪽으론 가기 싫어요." "입정 험한 뱃사람들한테 히야카시 좀 받았기로,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파르르 하는 겁니까." 어느덧 최상길은 여옥에게 하는 말투로 명회에게 말하고 있었다. "뭐라구요?" 하다가 명희는 언뜻 생각이 나서 여옥을 노려본다. "내가 언제 그런 얘길 했던가?" 여옥은 능청을 떨었다. 여수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아마 무슨 얘기 끝에 여옥이 최상길에게 말한 것 같다. "지나간 일에 집착 너무 하지 마시오. 훌훌 털어버리고,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게 마련이니까." 말투도 달라졌지만 얘기의 내용도 오랜 친구처럼 임의로운 표현이었다. "우린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이곳이 전쟁터가 될지도 모르고 하늘에서 폭탄이 쏟아지게 될지도 모르고...... 세 계는 지금 미쳐버렸어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걸 아셔야 합니다. 괴로웠던 일,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 모두 다 털어버리고, 네, 홀가분하게 사십시오 임선생." "그건 그래. 최선생 말이 맞아." 여옥이 동의를 했다. 최상길이 여옥에게 들었든, 혹은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든지 간에 자신에 관하여 많이 알 고 있다는 것을 명희는 깨달았다. 그러나 과히 기분이 언짢지는 않았다. "그럼 갈까요?" 여옥을 앞세우고 거리에 나온 최상길은 아까 명희집에서 너스레를 떨 때와는 달리 진지하게 "피곤하지는 않소?" 하고 물었다. "아니오." "정말 괜찮겠소?" "나 다니는 것도 이제는 좀 이력이 난 것 같아요." "피곤하면 그렇다 하시오. 업고 갈 테니까." 농담 같지도 않게 말했다. "별 희한한 소릴 다 하네요." "여옥씬 건망증이오?" "..." "목포에서 나한테 업혀서 나온 것 벌써 잊었소?" "정말 그때 그랬어요?" 여옥은 뭔가 북받쳐 오르는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아주 나으면 전도 사업 또 할 거요?" 하다가 맞은편에서 자전거 오는 것을 본 최상길은 얼른 여옥의 두 어깨를 잡고 한곁으로 비켜 세운다. 자전거 는 그들 옆을 지나갔다. "그들이 활동하게 내버려두기나 하겠어요?"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여옥이 말했다. "내버려두지 않아요." "한데 왜 묻지요?" "길선생 신앙이 아직도 그리 지극한 건가 싶어서." "..." "괜한 걸 물었어요?" "내 신앙이 그리 지극했나요?" "아니면 뭣 땜에 그 고생을 했겠소." "심각한 얘기는 두었다 하지요." 여옥은 그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럽시다." "언제 올라오셨어요?" "그저께 왔소" "무슨 이루요." "재산 문제 때문에 좀," 하다가 전차를 기다리고 서 있던 이들은 마치 전차가 왔기에 오른다. 여옥을 자리에 앉혀놓고 자신은 여옥을 막아서듯 최상길은 손잡이를 잡았다. 최상길의 몸에서 체취가 여옥에게로 풍겨왔다. 여옥은 비스듬히 옆으로 몸을 돌이며 고개를 비틀어서 거리를 내다본다. 가로수가 누릿누릿 물들고 있었다. 여름에는 늘 그 언저리를 오가며, 또는 진을 치고 있던 아리스케이크통을 멘 아이들, 청년들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창경원의 돌담 이 보이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무력해진 창경원 돌담은 마치 바보처럼 여옥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 저기 한번도 가보 적이 없어요." 혼잣말처럼 뇌는데 "창경원 말입니까?" 최상길이 물었다. "네." "그럼 지금 가봅시다." "지금요?" 전차가 창경원 앞에 멎기가 무섭게 최상길은 여옥을 끌다시피 내렸다. 창경원 문 앞에다 여옥을 세워놓고 최 상길은 입장표 두 장을 끓어 왔다. "들어갑시다." 창경원 안은 그야말로 초가을이 싱그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빛깔로 나타나 있었다. "동물원 쪽으로 갈까요?" "아니, 역시 좀 피곤하네요. 어디 벤치에 앉아서 쉬고 싶어요." 최상길은 벗나무 밑에 놓인 벤치로 여옥을 데리고 가서 앉힌다. "나 여기 처음이에요." "강원도 산골에 살았나 부지?" 하다가 최상길도 벤치에 앉아 담배를 꺼내어 물고 불을 붙인다. 여옥은 옛날과 달리 쑥색 한복 차림에 버선을 신고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있어서 이들은 남 보기에 중년 부부 같았다. "전에, 내가 서울 있을 적의 하숙이 명륜동이었어요. 그래서 곧장 여기 오곤 했어요." "애인하구요?" 여옥이 장난기를 머금고 말했다. 그 무렵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최상길은 서울서 음악 교사로 있었으며 한때는 임명빈이 교장으로 있었던, 조 용하가 설립한, 아니 그의 부친이 설립한 중학교에도 있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주변은 꽤나 화려했던 것으 로 여옥은 듣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최상길에게는 교사직이 생계를 위한 것은 아니었고, 식민지의 매우 빈약 한 음악계이긴 했으나, 그나마 서울이 아니고서는 설 자리가 없었던 당시, 음악 교사를 하면서 음악 활동을 하 는 것이 상례였었다. 그 점에서는 환국이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그 무렵, 그는 젊었고 소쇄한 음악도였다. 성악 이 전공이었지만 최상길은 결국 낙향하게 되었고 빛을 못 본 채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누가 쑥스럽게 이런 데를 애인하고 옵니까."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말예요." "..." "어째서 그랬는지 저는 지금까지 최선생 부인의 안부를 묻질 않았어요. 고의적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었는데 아마 의식 속에서 묻고 싶지 않은 기분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 "최선생도 부인 얘기는 도통 하지 않았어요." "..." "늦었지만 부인은 안녕하신가요?" "네 안녕합니다." "그 동안 최선생은 저한테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부인께서 저항이 없었는지 역시 신경이 쓰이네요." 최상길은 말없이 담뱃재를 털고 마서 여옥을 빤히 쳐다본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었다. "왜 그래요?" 머쓱해지다가 여옥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혹 자신이 한 말에 잘 못이 있지 않았는가, 한편 이 남자가 왜 이러 지?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여옥은 여태 본 일이 없는 최상길의 차디찬 눈을 간신히 받아낸다. 한참 후 최상길은 얼굴을 돌렸다. 미간을 좁히며 담배를 빨아당기고 연기를 뿜어낸다. "길여옥도 여자구먼." 내뱉듯 최상길이 말했다. "그럼 남잔 줄 아셨어요?" "여자의 특성을 두고 한 말이오." "남자의 특성은 어떻고요? 그렇게 모욕적으로 말하지 마세요." "모욕적으로 들렸다면 미안하오." "여자의 어떤 특성을 두고 말했는지 모르지만 난 다만 걱정이 되어 말한 거예요. 왜 걱정이 되는지 최선생도 알지 않아요." "그 어부인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어요. 신경 쓸 것도 없고 아주 자알 있습니다." 까칠한,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음성이었다. 피우던 담배를 버리고 두 다리를 넓게 잡아서 벌린 최상길은 등을 구 부리고 고개를 떨구어 땅바닥을 내려다본다. 가끔 사람들이 그들 앞을 지나갔다. 까치가 그야말로 까치걸음을 걸으며 다가오다간 날아가곤 했다. '저것들이 겨울엔 뭘 먹고 살까?' 최상길의 심상찮은 태도에 대한 관심에서 떨어져나오듯 여옥은 날아가는 까치를 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병신 자식 하나를 돌보면서 가난하게 지내던 할머니, 함께 풀을 매면서 일이 보배라 하던 그 할머니에게 새들 은 겨울에 뭘 먹고 살지요? 조그마한, 저기 날아가는 철새는 어떻게 강남까지 가는 걸까요?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천지조화가 살게 허는 것이요. 가게 허고 오게 허는 것도 천지조화지 뭣이겄어? 사람은 몰러, 모른단 말씨." "할머니가 이 고생을 해오신 것도 아드님이 불편한 몸이 된 것도 그러면 천지조화의 탓인가요?" "그것은 아니지라. 사램이 천지조화를 어긴 때문이여." "어떻게요?" "천지조화는 공평하들 않는감?" "아드님 불편한 몸도 사람이 불공평해서 그런가요?" "공평하다믄 병신이라도 다 살아가는 길이 어찌 없을 것이요? 손 발 없는 배암도 묵고 살고 물 속의 개기도 묵고 사는디, 일찍이 가고 더디게 가는 거사 천지조화, 사람이 하는 일은 아닌께로." '할머니 말씀이 옳아요. 가두는 자가 없으면 갇히는 자도 없을 것이며 들판의 곡식이며 열매며, 많이 갖는 자 가 없으면 굶어죽는 자도 없을 것이며, 죽이는 자 없으면 죽는 자도 없을 것이며 주인이 있으니 하인도 있는 것, 부리 하나, 작은 밥통 하나 몸속에 달고서 수만 리 창공을 날아 먹이를 찾고 번식하는 새, 겨울 한철 나무 뿌리 갉아먹으며 연명하는 작은 짐승들, 그들은 자유롭다! 해방된 존재들이다! 오직 인간들만이 사로잡혀 있는 걸까? 말, 말, 그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구원의 연장이기도 했지만 피로 물든 흉기는 아니었든가?'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지요?" 최상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이십 년, 그보다 더 되나?" 중얼거렸다. 그 말대꾸는 없이 여옥은 "저한테 할말이 있다 하셨지요? 무슨 말인가요." "할말 없습니다." "하지만 아까 명희집에서." "그냥 해본 말이지요. 무슨 할말이 있겠소." "자꾸만 이렇게 무안을 주실 건가요?" 최상길은 등을 펴고 고개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껄껄걸 소리를 내어 웃었다. "사실 말같이 허황한 건 없어요. 안타깝고 감질나게 하고 안하니만 못한 게 말인 것 같지 않소?" "글쎄요. 그렇군요." "생각을 해보면 여태 살아온 것도 그놈의 말과 같은 것이어서 허황하고 안타깝고 감질나게 하고 안 사니만 못 하게 살아왔고... 허허헛헛 하하핫하, 젊은 시절의 연인들은 도대체 이런 곳에 와서 무슨 말을 주고받았들까." "사랑의 고백을 했겠지요." "고백을."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을 맹서했겠지요." "유행가처럼 말이지요? 꽃반지도 끼워주고." "비웃는 건가요?" "아니 천만에, 그럴 리가 있겠소. 다만 그렇지요. 사랑이라는 말은 방편 아닌가요? 진실 그 자체는 아니지 않 소?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것도,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런 방편을 쓰고도 진실한 것은 젊음의 아름다움 신선 함 때문일 거요 존재하는 것만도 진실해 뵈는 생명의 신비 같은 거지요. 해서 실상은 부럽고 샘이 나고, 비웃 다니 천만의 말씀, 이쯤 나이가 되면 그런 방편을 가능하게 하는 엄폐물도 없어지고 눈멀게 할 현란함도 없어 지고, 한심스러워지는 거지. 안 그래요? 길 선생." "그거야 뭐 남이 보았을 때, 보인다는 얘기죠. 뭐. 방평이라는 것도 안에 실린 내용은 각기 다르니까 그런 것 말할 가치가 없어요." "한방 신나게 맞았군." 최상길은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한번 딱 쳤다. "말을 해놓고 보니까 내가 뭐나 된 것 같네요. 여자 푼수에 제법이다, 하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최선 생." "이거 또 치네. 너무 그러지 마슈. 나도 알고보면 페미니스트랍니다." 두 사람은 소리를 합쳐서 웃는다. "아아 날씨 참 좋다. 이런 날에는 바다가 제격인데." "그저께 오셨다면서 벌써 바다가 그리운가요?" "아니, 그게 아니구." 출입문이 다르다는 듯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면서 "끝없는 하늘과 끝없는 바다가 맞닿아 있는 걸 보면, 그땐 우리 사는 것이 동화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꿈도 있 을 것 같고, 길선생." 여옥이 쳐다본다. "우리 좀 있다가 바다에 안 가보시겠어요?" "아주 회복이 되면 명희하고 오라고 초대했잖아요." "아니 그거말고 우리 둘이서 동해안 쪽으론 가보는 거요. 거긴 햇볕에 녹지 않는 바다가 있을 것 같단 말이오. 희뿌옇질 않고 짙푸른 하늘, 지푸른 바다, 그리고 쿵쿵 소리가 울릴 것 같은 그런 바닷가 말이오." "임시 애인 하는 거지 뭐. 쿵쿵 바윌 치는 파도를 보다가 풍덩 빠져죽어도 좋고." 최상길이 그 말을 했을 때 여옥의 귀밑에서부터 목 부분에 엷은 소름 같은 것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죽을 것이면 업고 나오긴 왜 그랬을까?" "농담이고요. 나 어제 오선권을 만났어요." "무슨일로 만났어요?" "우연히 길에서 만나 한잔 했지요." "..." "아직도 미워하고 있어요?" "아주 가벼워졌어요." "어떻게?" "믿지 않겠지만 다 털어버린 것 같아요. 새 처럼 가벼워졌어요." "이해할 수 있는 말이오. 그 친구 굉장히 불우해진 것 같더군요." 했으나 불우해진 상황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최상길의 이야기는 들쑹날쑹이었다. 길선생이라 불렀다가 여옥씨, 존대를 하는가 하면 반말 비슷하게 했고 아 슬아슬하게 가까이 까지 다가오듯 말했다가는 훌쩍 멀어져갔고 질문을 했다가는 대답이 없으면 그냥 떠내려 보냈고, 그 어느것에도 깊이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자신이 말한 바와 같이 그는 말을 신뢰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허황된 것으로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는 지 모른다. 하기는 옛날부터 그러한 말버릇이 다소 있기는 있었다. 최상길은 지금 산뜻한 가을에 묻혀 있는 고궁인지 공원인지 이곳에 여옥과 함께 머물면 서 심심파적으로 변죽이나 치고 있는 기분인지 모른다. 그의 마음은 사실 그러저러한 얘기와 상관없는 것이었 을 것이다. "참 아까 임교장 건강을 물었을 때 임선생의 떨떠름해하던데 상태가 안 좋은 거요?"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안 좋았지요. 초상이 두 곳에서 날 뻔했거든요. 명희가 한 말이에요. 하지만 요즘 많이 좋아지셨는데 산에 가 시려고 임교장 스스로 굉장히 노력을 하셨다는 거예요." "병이란 병자가 노력해서 되는 일이 아니지 않소?" "그분 병이, 그러니까 그분 뜻에서 난 병이니까요. 마음만 고쳐 잡수시면." "산이라니, 어느 산에 가시는데?" "지리산요. 그곳 절로 가실 모양인데 아마 며칠지간에 가신다나 봐요. 절의 주지하고 안면이 있고 뭐 상당한 인텔리라니요? 서울 사람이래요." "아아 소지감 형님 말이군." "네? 최선생도 알아요?" "길선생은 알아요?" "...?" "언젠가 만난 것으론 기억하는데? 임선생 와 계실 때, 그러니까 뱃머리에서 인사하지 않았어요?" "아아, 그, 그렇지만 스님은 아니었잖아요?" "그 후에 출가했지요." "그래요?" 어리둥절하던 여옥은 놀란다. "세상이 좁네요." "그보다 임교장은 며칠지간에 산으로 떠난다 했어요?" 두 사람은 나란히 창경원에서 나와 전차를 탔다. 그리고 여옥을 집까지 데려다준 최상길은 "나 이제부터 임교장댁에 가는 거요." 서두르며 말했다. "저녁도 안하구요?" 오라범댁이 서운해하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저녁은 그 댁에 가서 얻어먹지요." 왜 갑자기 서두르며 허둥대는지, 여옥은 어리둥절해한다. 최상길의 그 같은 모습은 소년 같기도 했다. "오빠도 안 만나고 가시려구요?" 겨우 말을 골라낸 것처럼 마루 끝에 우두커니 걸터앉은 여옥이 말했다. 아주 피곤해하는 낯빛이기도 했다. "다음에, 다음에요." 하고 최상길은 대문을 향해 나가면서 뒤돌아보지도 않고 한 팔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곧장 가서, 전에 한번 온 적이 있는 효자동 임명빈집으로 찾아 들어간 최상길은 "교장 선생님!" 크게 소리내어 불렀다. "아무도 안 계신가?" 너무 조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건넌방 방문이 열리면서 막내 최재가 나왔다. "뉘신지요." 하고 물었다. "나 최상길이란 사람인데 교장선생님 계신가?" "네." 희재는 마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최상길을 사랑으로 안내했다. 돋보기를 끼고 드러누워서 책을 보고 있던 임 명빈이 몸을 일으켰다. "이게 누군가?" 깜짝 놀란다. "오래간만입니다. 교장선생님." 제자도 아니었고 후배도 아니었으며 교장과 교사의 관계였으므로 임명빈은 말을 낮추지는 않았다. 의아해하고 몹시 놀라는 것 같았다. "허허, 이거 참 이게 몇해 만이지요?" "죄송합니다. 교장선생님 절 받으십시오." "절은 무슨." "아닙니다." 최상길은 허리를 꺼고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하게 절을 했고 임명빈은 자세를 바로하며 절을 받느다. "전에, 학교를 있을 적에 한번 와본 일이 있습니다만 집은 옛날 그대로,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요? 하긴, 사람만 속절없이 변했지요. 하하핫..." "오락가락하더니, 보시는 대로 구차스럽게 살아 있질 않소." "무슨 말씀을 그렇게, 그러시면 저희들은 어디서 쥐구멍을 찾습니까" "지난 봄부터 산으로 갈려고 작심한 뒤 무진 애를 썼지요. 산에는 꼭 가야겠다 싶어서, 산에 갈 계획이 없었다 면 아마 초상 치르지 않았을까? 하하하..." 임병빈 얼굴에서 부기는 많이 빠져 있었다. 손도 통통하게 부어 있었는데 이제는 손등에 힘줄이 나타나 있었 다. "산에는 언제 가시려구요." "이삼 일 뒤에나 떠날까 하는데 맘이 설레는구먼.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오. 가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거리귀신이 되는 거야 상관없으나 데리고 가는 사람들한테 그 무슨 몹쓸 짓이냐 말이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심약한 말씀 마십시오." "그는 그렇고 최선생이 이번에는 좋은 일 했더구먼." "..." "고맙소. 여옥이는 어릴 적부터 내 누이하고는 단짝이어서 그 아이를 잘 아는데 그 아이를 살려낸 것은 순전 히 최선생 혼자 힘이었다 그러더구먼." "..." "이런 칼날 같은 세상에 누가 나서서 그러겠소." 최상길은 그 얘기가 계속되는 것을 원치 않는 듯 "실은 길선생댁에 들렀다가 급히 오는 길입니다만." 하며 말을 꺼내었다. "...? 무슨 일로?" "교장선생님께서 산에 가실 거라는 얘긴 거기서 들었습니다. 지감형님이 계시는 절로 가신다기에." "그, 그럼 그 소지감이라는 분을 최선생은 아시오?" "알다마다요. 잘 알지요." "이거 참, 우연치고는, 하여간," 하다가 말이 막혔는지 숨을 크게 한번 내쉬고 나서 임명빈은 말을 이었다. "나는 그분하고 안면이 있을 뿐이오. 그분에 관한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은, 내 친구들 중에는 그분하고 교분이 깊은 사람도 더러 있고 해서, 그분의 집안 내력이나 학력이며 평생을 방랑인으로 산다는 것도 알지요. 출가했 다는 사실만은 근자에 와서 알았으나 하여간 내가 산행을 결심한 것도 그분 때문인데 뭐랄까, 설명하기가 어 렵지만, 강남으로 벗 찾아가는 기분이랄까... 그런 의욕 때문에 칠팔 개월 동안 그나마 이 정도로 기력이 회복 된 셈이오." 임명빈은 어눌한 말씨로 지루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교장선생님, 그러시다면 내일 밤차로 서울을 떠나지요. 그렇게 하신다면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최선생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던 임명빈은 입을 함박같이 벌리며 웃었다. "그거 조옿지. 아주 잘됐구먼. 내일 밤차라 했소? 그럼 그럼, 서울을 떠나지, 떠나고말고." 여간 기뻐하는 게 아니었다 떠날 준비는 이미 다 되어 있었다. 효자동 명빈이 집은 밤에도 그랬었지만 이튿날 낮에는 더욱더 술렁거렸다. 명빈과 밤을 함께 보낸 최상길은 조반을 먹은 뒤 볼일이 있다하며 나갔는데 나갈 때 기차표는 자기가 끊어오겠다 하고 말했다. 기별을 받은 명 희가 왔고 분가한 장남 성재 내외, 출가한 딸 옥재 내외도 왔다. 명빈이나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물 속에 가라앉은 것만 같았던 집 전체가 물 속에서 떠오른 듯, 근심과 무기력에서 일어서는 듯 활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명빈은 모처럼 지팡이를 짚고 바로 뒤켠에 있는 서의돈집을 방문하여 근황에 대해서 이것 저것 묻고 산으로 간다는 작별 인사를 했다. "이번에 가거들랑 탈병하고 돌아오게." 백발이 성성한 서의돈의 늙은 부친이 말했다. 대쪽같이 곧았던 노인, 아들은 형무소에 갇힌 몸이 되었으나 그 는 아주 기강해 보였다. 애당초의 계획은 막내 희재와 장남 성재가 임명빈을 산까지 데려다주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마침 최상길이 동행한다는 것이어서 직장을 가진 성재는 빠지게 된 것이다. 역에는 명희와 성재 그리고 환국이가 전송하러 나왔다. 임명빈의 집에 기거하면서 중학교를 마친 환국은 성재와 희재, 그들과 형제같이 지냈으므로 서로 반가 워하며 근간의 소식을 묻곤 했다. "희재야, 진주서 하루 쉬어가는 것, 알지?" "네." 환국은 그래도 이들 일행이 폐 끼칠까 보아 여행을 강행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다짐하듯 "진주서 꼭 하루는 쉬어가셔야 합니다. 당일로는 무리니까요." 임명빈을 보고 말했다. 임명빈은 대합실 의자에 지팡이를 세우고 앉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수화물로 부쳤 고 희재는 가방 하나만 들고 있었다. 최상길은 개찰구 근처에서 오락가락 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높이 매 달린 전등 아래 이등대합실은 붐비고 있지는 않았지만 개찰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졌 고 웅성거리기 시작했으며 창밖에는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꼭 나아서 돌아오셔야 해요, 오빠." 명희의 말이었다. "나 그만 안 돌아올란다." 자기 한 사람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동원된 것을 부끄럽고 미안하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명빈은 누이에게 농담 비슷하게 말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그곳에서 죽겠노라, 그런 뜻도 있는 것 같았다. "좋아요." 명희는 명쾌하고 활발하게 말했다. 호각을 불며 유치원 원아들 행진에 앞장섰을 때처럼. "안 돌아오셔도 좋고 머리를 깎으셔도 상관 안하겠어요. 건강만 회복하세요, 제발." 좋아요, 했을 때와는 다르게 명희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젖는다. 산으로 떠나는 명빈의 병든 몰골을 보면서 명희는 이들 세대의 종언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감옥에 유폐되었거나, 친일파로 전락되었거나 해외로 탈출 했거나 혹은 낙향하여 숨어버렸거나 아니면 칼끝 같은 정세를 관망하여 불안하게 사업체를 붙들고 있거나, 어 쨌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만 이들의 세대, 젊었던 한철 의기양양했으며 비분강개하고 3.1운동의 중추 세력이었 던 이들의 세대, 무너지고 산산조각이 난 것을 명희는 새삼스럽게 실감하는 것이었다. 개찰구 근처에서 서성대 고 최상길, 동경까지 가서 음악 공부를 하고 왔건만 그도 갈곳이 없는 사람이다. 보통학교를 나와 어느 부서에 소사로 어렵게 들어가서 천신만고 서기가 된 사람보다 갈 곳이 없는 신세가 바로 저와 같은 인텔리다. 명희는 상해에서 남천택이 만났다는 이상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임명빈이 그를 아꼈던가. 누이와의 로 맨스를 은근히 기대하기까지 했던 철없이 낭만적이던 문청 시절의 임명빈, 늙고 병든 그의 모습에서, 그의 모 습을 통하여 명희는 피폐했을 이상현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상해 뒷거리를 방황하고 있을 이상현, 이들의 세월 은 모두 무위한 것이었으며 안타까운 것이었다. 하기는 무위하게 보낸 세월이 임명빈의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 다. 무능했던 것도 어디 임명빈만의 몫이겠는가. 조선의 세월 그 자체가 무위했으며 무능했던 것이 아니었겠는 가. 소리지를 땅은 어디 있었으며 주장할 연단은 어디 있었으며 터전에다 말뚝 박고 줄 쳐서 내것 만들 권리 는 없었다. 명희는 서울역에 나와서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임명빈이 찾아가는 그 절의 스님이 여수에서 여옥이랑 함 께 부둣가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나 명희는 뚜렷이 그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임며빈이 마치 마지막 희망의 줄인 양 찾아가는 그 절 그곳의 스님, 말할 수 없이 안쓰러우면서도 어느덧 명희 자신조 차 소지감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 안 돌아와도 좋고 머리를 깎아도 상관 아니하겠으니 제발 건강만 회복해 달라, 그 말은 진정 이었다. 불안해하는 눈들을 남겨놓고 기차는 서울을 떠났다. 밤기차 침대칸에서 희재가 내미는 수면제를 먹고 임명빈 은 비교적 숙수하는 것 같았다. 최상길도 잠이 들고, 희재만은 불안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다. 삼랑진에서 진주행으로 열차를 갈아탄 뒤에는 임명빈 얼굴에 피로의 기색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희재는 여러 번 괜찮겠느냐고 물어보곤 했다. 최상길은 아무 말 하지 않아다. 임명빈은 시트에 머리를 얹으 채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으나 그는 심한 두통을 참고 있었다. 안색이 아주 나빴다. 최상길은 차창 밖에서 지나가는 풍경 을 넋잃은 사람같이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괜찮겠습니까?" 희재는 겁에 질린 듯 최상길에게 물었다. "음?" 하며 얼굴을 돌린 최상길은 "걱정 말게. 성한 사람도 기찰 오래 타면 지치는 게야." 냉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허허허, 걱정 말래도. 해골이 되어 목포 감옥에서 나온 길선생도 서울까지 왔어." "네." 희재는 우물쭈물, 공포심을 가라앉히려고 애썼지만 달리는 열차 속에서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쩔까? 나이 어린 그는 전전긍긍이었다. 최상길은 말은 임명빈에게 돌팔매를 친 것처럼 들려 왔다.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었다. 그리고 고통스런 말이기도 했다. '당신은 잉여물이오. 없어도 되는 인간이오, 도대체 뭘 했다고, 가냘픈 여자도 옥고를 치르고 끈질기게 일어서 는데, 줄줄이 나와서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멀쩡한 장정 두 사람이 박달나무같이 양편에서 껴붙들고 가는데 어 리광 부리는 거요? 마음의 병이 왜 나지요? 그 따위 맘의 병은 북만주 얼음판에서 한바퀴 뛰면 싹 없어 지는 병 아닌가요?' 누군가가 귓가에서 꾸짖고 있는 것만 같았다. '호사하는 겁니다. 산으로, 절로 정양하러 가는 사람이 뭐 그리 흔한 줄 아시오?' 임명빈은 눈을 번쩍 떴다. "아버님." 희재가 불렀다. "목 마르시면 물 드릴까요?" "오냐." 희재는 준비해 온 물통에서 보리차를 컵에 부어 내 밀었다. 그것을 몇 모금 마신 뒤 임명 빈은 "최선생." "네." "진주서 하루 묵는 일 말씀이오." "네." "아침나절 진주에 도착할 것인데 온종일 쉬고 밤에까지 묵는 일은 좀."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러느니 차라리 잠시 쉬었다가 하동 평사리에 가서 하룻밤 묵는 것이 어떻겠소?" 글쎄올시다. 교장선생님께서 몸이, 지탱될는지요." 아버님, 그건 안됩니다. 환국이 형도 당부 당부하던데요." 아니다. 내 생각에는 하동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 어째 그러십니까 아버님." 내 말하는대로 하자꾸나." 날 받아놓은 것도 아니고 내일이면 어떻고 모레면 어때서 그러십니까." 반대하는 아들은 내버려두고 최선생." 네 말씀하십시오." 최선생은 진주 최참판댁을 아시오?" 모릅니다. 그런 부자가 있다는 것밖에는 모르지요." 그 댁과 우리집의 인연은 삼십 년 넘게 각별한 사이였소. 내가 그 댁을 찾아가서 며칠을 묵기로 허물될 것도 없소만, 그러나 요즘 그 댁 형편이, 병자가 가서 하루라도 묵기에는 너무 염치가 없어서 말씀이오." "아버님 그렇지 않습니다." "너는 가만히 있거라." 명빈은 아들을 제지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 댁 바깥주인이 지금 감옥에 계시오. 계명회 사건 때 주모자로 징역살이를 했는데 이번에 사상범 예방구금 에 걸린 거요." "계명회 사건이라면 꽤 오래된 일 아닙니까?" "그렇지요. 부인 혼자 노심초사 고통을 받으시는데 무슨 낯으로 한가하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렇기도 하군요." 최상길은 좀 생각을 해보는 듯 한참 후에 말을 했다. "아버님,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런 일을 따질 만큼 양가의 관계가 소원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안타깝다는 듯 희재가 말했다. "소원하고 안하고가 문제냐? 사람의 도리, 예절이라는 게 있느니라." 오히려 그냥 지나쳐버리는 게 도리에 어긋나지요." 그러면 너는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하루를 묵고 가자 그거냐?" ...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거 보아라. 사람이 방편으로 살면 못쓰는 법이다. 그것은 왜놈의 사고 방식이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신의 지 방편으로는 길게 못 가느니, 요즘 풍조가 너에게도 미쳐 있다니 한심스럽구나." 희재가 풀이 팍 죽는다. "그것은 아버님을 위한 충정 때문이지요.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최상길이 희재의 입장을 세워준다. 진주에 도착한 일행은 결국 명빈의 고집대로 버스 차부 근처에 있는 여관에 들었고 조반을 먹은 뒤 명빈은 휴 식을 취했으며 그러는 동안 희재는 버스표를 사러 나갔다. 하동행 버스 속에서는 임명빈의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다. 상당히 그는 견디기 힘들어했다. 해서 버스에서 내 린 뒤에는 나룻가 주막에서 오랫동안 명빈은 누워 있다가 해거름에 나룻배를 타게 되었다. 강바람이 싱그러워 그랬던지 명빈은 기차와 버스에서처럼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대신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뱃전을 안고 비 스듬히 앉아서 해가 떨어지는 산마루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굽이굽이, 어려운 여행을 절반쯤 강행 한 셈이다. 희재의 얼굴에도 안도의 빛이 돌았다. 그러나 나머지 산행이 문제였다. 해가 아주 떨어지고 박모가 사방에서 묻어왔다. 떠나가는 밝음의 날갯짓이라도 있었는가, 바람에 강물이 거슬 거슬 잔물결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이오. 이런 곳에 와보는 것이. 그러고 보니 나는 서울 우물의 개구리였구먼." 명빈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감형님은 서울내기였지만 팔도강산 안 댕겨본 곳이 없습니다. 교장선생님한테는 좋은 말벗이 되겠군요." "말벗이라니요?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어느 모로 보나 그분은 나보다 한수 위가 아니오." "그러시다가 실망하시면 어쩌시게요? 그 형님한테도 뚫려 있는 구멍은 상당히 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상길은 임명빈의 지나친 기대에 제동을 걸 듯 말했다. "그러나 그분은 평생을 방황하며 대처도 아니하시고, 나름대로 얻은 것이 있지 않겠소?" "그건 그렇습니다." 평사리 최참판댁으로 들어간 일행은 모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퍽 다행으로 생각하며 긴장을 풀었다. 본시 부터 장연학은 임명빈과 희재하고는 익히 아는 사이였다. 환국이가 오 년 동안 서울에서 공부했고 길상이 투 옥되어 있는 동안 내왕한 사람이 장연학 이었으며 대소사에 관하여 서로 양해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말하자 면 서로가 편안한 사이였기 때문에 처음 와보는 집이었건만 조금도 낯설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마 음속으로 이들 부자는 놀라고 있었다. 유서 깊은 대가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집 의 규모가 웅장한 데 놀란 것이다. "여독이 풀릴 때까지 쉬십시오. 떠날 준비는 언제든지 돼 있인께요." 내려올 날짜는 정한 바 없으나 명빈이 산으로 간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연학은 조금도 서 두르지 않고 느긋이 말했다. 밤에는 명빈이 누워 있는 방에서 최상길과 장연학은 술잔을 기울였다. 신분의 차이 같은 것 개의치 않고 그들 은 왠지 모르게 의기 투합하여 허물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명빈은 술자리에 끼여들지 못하는 것도 억울했으나 소탈한 최상길의 태도가 몹시 부러웠다. 그것은 자기처럼 서울내기가 아니고 모두 남도 태생이기 때문에 그런 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밤이 깊어져서 모두 잠들었다. 소쩍새가 울고 뻐꾸기도 울었다. 이름 모를 밤새도 호호호 ..... 하고 울었다. 몸 은 천근만같이 내려앉는데 명빈은 잠이 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꿈만 같았다. '어쩌면 서울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라.' 생각하는데 명희의 말이 떠올랐다. "안 돌아오셔도 좋고 머리를 깎으셔도 상관 안하겠어요. 건강만 회복하세요, 제발." 새 울음 소리는 자꾸자꾸 들려왔다. 이튿날 장연학은 며칠 더 묵었다가 떠나라고 권했으나 과히 안색도 좋아 뵈질 않은데 명빈은 기어이 떠나겠다 고 했다. 그를 위해 산밑까지 갈 수 있게 소달구지가 준비돼 있었다. 소달구지 위에는 들것도 놓여 있었다. 3장 모화일가 사천집 모화가 생선 경매장에서 아니 먼 곳에 있는 다치노미집을 덮어버린 것은 몇 달 전의 일이다. 지름은 한해가 저무는 12월 중순이니 초가을쯤의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 식구 멀 묵고 살 기고." 주점을 처분한 뒤 한달 가량 지났을 때 육십을 넘긴 노모는 딸의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설마 산 입에 거무줄 치겄소." 모화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던 것이다. "그래도 시적." "시적? 쌀이 떨어졌소?" 악쓰듯 말하는 딸을 외면하며 "에미 아니믄 니가 누한테 악정을 부리겄노." 노모는 걸레를 끌어당겨 아무것도 없는 마루를 훔치는 것이었다. "가게 판 돈이 있인께 엄니는 가만히 있이소." "그거를 꽂감 빼묵듯 하고 나믄 길가에 나앉을 기가?" "..." "그래서 하는 말인데, 구야네집에 접방 사는 할매 안 있더나? 그할매가 누룩 공장에 댕기거든. 누룩 밟는 일을 하는데 하루벌이가 오십전이라 카든지 사십전이라 카든지, 한달에 심원은 된다 카더마." "..." "놀믄 머할 기고. 나도 그 할매 따라 가보믄 우떨가 싶어서." "그라지 말고 몸 팔아 돈 벌어오라 카소." "우찌 말을 해도 그렇게 하노? 나한테 붙어서 얻어묵고 사니께 그런 말 해도 된다 그거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께 그러지요. 나도 생가가는 게 있인께 제발 좀 들볶지 마이소." "그기이 우째 들볶는 기고. 하루에도 몇번 죽고 접지마는 불쌍한 우리 웅이를 생각하믄." 노모는 옷고름으로 눈가장자리를 닦았다. "그 목이 뿌러져 죽을 놈이." "그만두소! 질기 이럴 깁니까!" 어성을 높이는 바람에 노모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 모화는 휭하니 집을 나섰고 바닷가 방죽에 와서 쭈그리고 앉은 채 한숨만 내쉬었던 것이다. 그도 살려고 버둥거려보았다. 그러나 주점을 걷을 수밖에 없었다. 옛날 같으면 외상이라도 좋으니 제발 좀 가 져가라 하던 양조업계에도 제동이 걸린 것이다. 생산량은 줄었는데 술 찾는 사람은 많아졌고 알음알음을 통해 사가에서도 술을 청하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주점의 배당량이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술집은 모화보다는 사정이 나은 것처럼 보였는데 대강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뚝뚝한 자기 성격을 고칠 수도 없는 노릇이요 이미 성질 고약한 여자로 소문은 나 있었다. 어쨌든 도가에서 나오는 술만으로는 장사를 할 수 없었고 자연 밀주를 사다가 도가술과 함께 파는데 그것도 할 짓이 아니었다. 관서에 들키는 날이면 경찰서에 서 오라가라, 유치장에서 자야 할 경우도 있었다. 그러고 나면 벌금을 물고 나오는데 그렇게 되면 밑지는 장사 가 된다. 다른 술집, 특히 젊은 여자가 하는 술집도 밀주를 팔기론 매일반인데 모화같이 시끄러운 일이 좀체 없는 것 같았고 그들 나름의 수단과 방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모화는 웃고 아양떠는 것은 고사하고 돈 쓸 줄도 몰랐다. 아니 몰랐다기보다 그렇게 못하는 것이 그의 성미였다. 그 동안 모화는 살아갈 길을 뚫어보려고 많이 생각했지만 별무신통 이었다. 군수품을 만드는 어포 공장, 통조 림 공장에 나가볼까도 생각했으나 수임은 쥐꼬리만한데 그나마 감독하고 교제를 해야만 자리 하나 얻을 수 있 다는 것이었고 시골이나 섬으로 돌아다니면서 도붓장사를 하려고도 했다. 입치레는 된다는 얘길 들었던 것이 다. 그러나 이미 먼저 시작한 도부꾼들이 단골을 다 점령해버렸다 하며 말리는 사람이 있었다. 하다 못해 장바 닥에 나앉아 생선장사나 할까, 그러나 그것 역시 수십 년 터를 잡고 드세기로 소문이 나 있는 장사꾼들 속에 끼여들 수 없는 것은 뻔했다. 먼산 숲이 누릇누릇 물들고 가을이 깊어졌을 때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 하던가? 모화가 시작한 것은 밀주를 만 드는 일이었다. 장독의 돌을 걷어내고 독을 묻었고 부엌 바닥도 파서 독을 묻었다. 암거래되는 누룩이며 곡물 을 사다 술을 빚고 장독에는 돌을 도로 깔았으며 부엌 바닥에도 흙을 덮었다.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은 장사라 했다. 누가 밀고만 하지 않는다면 살림집인 만큼 술 치러 나오는 일은 들물다고 했다. 웅이할매는 콩나물을 길 러 장에 내놓는 일을 했다. 그럭저럭 안정이 된 것은 겨울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사천집 있나?" 걸찍한 남자 목소리였다. 소반 위에 콩을 풀어놓고 돌과 병든 콩을 골라내고 있던 모화는 얼굴을 찌푸렸다. "사천집, 있나 없나!" 또다시 걸찍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뉘요?" 하는 수 없었던지 모화는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하루 이틀의 주인 주객도 아니겄고 목소리 들으믄 모리나?" 사내는 권하기도 전에 작은방으로 기어들어간다. "술이 있는지 없는지 묻지도 않고 그러요?" 작은 방을 향해 모화는 올곧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술 맨드는 집에 술이 없다믄 누가 믿을 성싶은가?" 사내는 방안에서 큰소리로 말했다. "그 동안 미린 외상값이 얼맨데? 술값은 있소오?" 마루에 엉거주춤 서서 모화가 말했다. 노모는 웅이를 없고 장에 간 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넘겨준 콩나물 값을 못 받아서 오는 모양이었다. 밀주를 만들면서부터 옛날 단골들이 가끔씩 찾아와 비밀리에 술을 마시고 가는 일이 있는데 지금 찾아온 사내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내가 이까짓 술값 몇푼 띠어묵고 도망갈 사람이가? 어서 술이나 내놔." 방안에서 사내는 위세 좋게 말했다. "그렇게는 못하겄소." 마루에서 모화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으 듣고 사내가 기어나왔다. "니 머라 켔노?" 때묻은 저고리, 소매 끝으로 빨갛게 된 코를 문지르며 사내는 눈을 부라렸다. "못하겄다 했소 줄 수도 없고요." "말 다 했나?" "다 했소" "간이 덕석만하네. 머를 믿고 그러제?" "질기 말할 것 머 있소? 없다 카믄 고만이제." "장사 안할 기가? 콩밥 묵을라 카나?" 그 말 나올 것을 알고 있는 모화는 대꾸하지 않았고 놀라지도 않는다. "하는 꼬라지를 보이 허가받아서 술 맨드는 모양이제?" 알콜 중독이 사내는 어세를 낮추어 타협조로 말했다. "듣기 싫소! 밀린 외상값은 안 받을 기니 그냥 가소." "허허 참 그러지 말고, 술값 떼어 묵자는 것도 아니고 돈 생기믄 한목 갚을 기니 내 사정 좀 봐주라." 애원조로 나온다. 모화는 치맛자락을 걷어서 꽉 잡으며 "내 성질 몰라서 그러요? 한분 안된다 카믄 안되는 기요. 거기가 내 사돈의 팔촌이요? 뭣 땀시 남의 남자 일 년여두달 술을 대겄소. 그럴 여유가 있으믄 이 장사 할 기든가? 잔소리 말고 어서 가소! 나도 할 일 해야 묵 고 살 거 아니오. 보자보자 하니 너무 염치가 없구마." "이년이 뉘 앞에서?" "이년이라니!" "그라믄 마나님이라 할 줄 알았더나?" 술이 나올 가망이 없는 것을 알게 된 사내는 입정 더럽게 말하고서 늑대처럼 이빨을 드러내어 으르릉거렸다. "이놈아! 다리밑에 바가지 들고 있는 거렁뱅이도 네놈보다는 낫다! 이년이라니!" "이년이 하루 살고 말라 카나? 하늘이 돈짝맨크로 보인다 그 말이제? 몇 잔 술 아끼다가는 이 장사 못한다. 가서 찔러부리믄 그만 온전할 것 같나?" 사내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목구멍에서는 술 들어오라고 아우성이니 그도 미치는 것 같았다. 입에 담지 못할 상소리를 하며 모화의 가슴팍 저고리를 잡고 흔들며 거품을 물었다. 모화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욕설 을 하면 사내 얼굴을 할퀴었다. 사내는 또 모화의 뺨을 내리쳤다. "죽여라!" 몸부림쳤으나 사내는 행여 부엌으로 달려가 칼 나올까 걱정되었던지 한 손으로 모화를 꽉 잡은 채 때리는 것 이었다. 이때 웅이 할매가 돌아왔다. "아이쿠 사람 직이네! 동네 사람들아!" 하고 외쳤고 등에 업힌 아이가 땅바닥으로 내려오며 소리내어 울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누군가가 순사를 부르라 했다. 그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사내는 모화를 놔주었고 모화 도 더 이상 덤비지 않으며 옷매무새를 고치고 터진 입술을 치마를 걷어서 닦았다. "내가 오늘은 이대로 간다마는 네년이 뜨거운 맛을 한분 봐야 정신이 들 기다." "돼지 같은 놈!" 욕설을 하는데 사내는 응수하지 않고 비실거리며 문간을 나서려 했다. "가다가 벼락이나 맞아라! 개 같은 놈! 저것도 사람이라고 내질러놓고 미역국 처묵었나?" 웅이할매가 악을 썼다. 동네 사람들은 물러가고 호기심 많은 사람이 남아서 왜 그랬느냐고 물었다. 대강은 짐 작이 되었으나 확실한 싸움의 경위를 모르는 웅이할매는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불쌍한 내 자식!" "할매야!" 손자 웅기가 매달렸다. 그리고 함께 엉엉 운다. 모화 또래의 허리가 굵고 어딘지 모르게 얼굴이 흐리마리해 보이는 여자가 다가왔다. "웅아." 부르며 아이를 떼어내려 한다. 아이는 할머니 치맛자락을 움켜 쥔 채 놓으려 하지 않는다. "옴마한테 가거라. 웅아." 그래도 아이는 할머니 옆을 떠나지 않고 울었다. "웅이할매 이러지 마이소." 두 다리를 뻗고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통곡하는 웅이할매 어깨를 여자는 가볍게 흔들었다. 모화는 마루에 걸터앉은 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흐트러진 머리도 걷어올리려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우는 아이도 노모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호기심이 강한 사람만 몇몇 남았다 했지만 호기심이 강하다 해서 결코 악의적인 것 은 아니었다. 말하나마나 서로의 사정이야 뻔히 아는 터다. 다치노미집을 시작하면서부터 모화는 주로 가게에 서 기거했으나 다섯 살짜리 웅기와 노모가 사는 지금 이 집이 모화에게는 본거지였다. 다 비슷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사는 그저 그런 동네인데 부두가 가까워 그랬던지 대개가 뜨내기들이었고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사 람들, 밀주 장사를 해서 생활을 잇는 몇 집도 있었다. 하니 모화가 밀주를 한다 해서 비밀일 것도 없고 흉허물 이 될 것 없었다. "웅이할매 그만 하소. 어디 하루 이틀 겪는 일입니까?" 여자가 또 말했다. "본시 동네가 그런데 우짤 깁니꺼. 그 꼬라지 안 볼라 카믄 동네를 뜨든지 해야지." 아이를 느직하게 안고 서 있던 여자가 말했다. "내가 죽어야 한다. 내가 죽어야, 아이고오 아이고오 으흐흣흣 에 미 땜에 팔자도 못 고치고 젊은 저것이 우찌 살겄노. 내 딸이 동네북가! 오는 놈 가는 놈, 임자가 있었으믄 저리 팼겄나?" "장사가 더러바서 안 그러십니꺼. 술 처먹은 개라니, 하기사 머, 모화도 그냥 맞고만 있었겄소? 그 성깔에." 아이 안은 여자의 말을 받아서 흐리마리해 뵈는 여자가 모화에 게 말했다. "모화 니 성미도 어지간하네라. 머할라꼬 그런 거를 갈바서, 객구 물리는 셈 치고 술잔이나 주지, 와 시끄럽게 하노. 건디리서 좋을 거 머 있일 기라고." 내가 건디맀다 말가!" 팩 소리를 지른다. "하기사 무신 세월이 좋다고 니가 그랬겄노. 그저 우리네 겉은 인생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흥챙이가 돼야 살제. 옳고 그른 거 따지감서 살라 카믄 내 일신에 피멍만 든다." "그놈 술 처먹일라꼬 내가 이 장사 하나? 그놈이 웬놈고? 내 서방이라 말가." "그만 해라. 살자 카이 우짜노. 그놈이 가서 찌르믄 우짜제?" 흐리마리하게 생긴 여자가 걱정을 하자 제법 깔끔하게 차린 여자가 "며칠 전에도 그놈이 춘자집에 와서 분탕질을 했다 카더마. 관가에 가서 찌르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믄 서 나갔는데 아무 일 없더란다. 하기사 제놈이 그랬다가는 동네에 발이나 딜이놓을 기든가? 그나마 얻어묵는 술도 그만이지 뭐. 별일 없일 기다." 웅이할매는 어느새 울음을 그쳤는지 장독가에 앉아서 웅이 얼굴을 씻겨주고 있었다. "웅이할매요." 아이를 뱃등 위에 붙여서 느직이 안고 있던 여자가 불렀다. "와." "웅이도 다 컸는데 독 겉은 아이를 와 업고 댕깁니까." "그런 소리 마라. 천근 겉은 울애기." 얼굴을 씻겨주다 말고 웅이할매는 아이를 꼭 껴안는다. 통곡을 멈춘 것도 아이 때문인 것 같았다. "노인네가 그러다가 허리 못 씨게 될 기요." "성한께 업어주지. 허리 못 씨게 되믄 업고 저버도 못 업는다." "유별나요." 여자들은 다 돌아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화는 술밥을 안치기 위해 쌀을 씻고 있었다. 웅이할매는 부 엌에 줄줄이 놓인 콩나물 시루에 물을 주고 있었다. 웅이는 할머니 치마꼬리만 잡고 다닌다. "콩기름 값은 받았소?" 쌀을 씻으며 모화가 물었다. "사람을 기다리라 해놓고는 내일 아침에 오라 안카나." "그까짓 콩기름 한 시루 얼마나 남는다꼬." "장사꾼 봇장이 본시 안 그렇나. 콩지름이 많이 나오믄 값도 제값 안 쳐주고 돈 받으로 가도 어디 거들떠보기 나 하든가?" 모녀는 도란도란 얘기를 하면서도 아까 일에 대해서는 서로가 다 덮어두는 눈치다. 너무 가슴에 맺혀서 그러 는 것 같았다. 웅기는 쭈그리고 앉아서 마른 솔잎을 따며 놀고 있었다. "우째겨울 날씨가 이리 따신지 모리겄네." "초겨울인께 그렇지요." "그래도 그렇지. 하지마는 날씨 믿고 있다가 동동걸음 할라? 아짐테서 콩지름 시루를 방에 다리놔야 안하겄 나? 그렇제?" 웅이할매는 딸에게 묻는다. "그래야겄소. 매운 왜설이 오기 전에 옮기야겄지요." 예년보다 날씨가 무척 따뜻하기는 했다. 그러나 본시부터 통영은 따뜻한 고장이다. 겨울이 와도 눈 구경은 할 수 없었고 땅이 얼어도 잠시, 햇볕 나고 바람 없으면 봄날 같아서 가난한 사람들은 외투, 두루마기 없이 겨울 을 보낸다. "아까 장에서 들은 얘기다마는,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웅이할매는 말을 꺼내놓고 딸의 눈치를 살핀다. "내년 봄에 아아를 핵교에 보내야 하는데 민적이 없어서 어쩌느냐고 어떤 여자가 싸라지게 걱정을 하더마." "....." "우리 웅이를 우짜믄 좋겄노." "....." "그 생각만 하믄 가심이 미어지는 것 같다. 천근 같은 내 새끼 벵신 맨들 생각을 하믄..... 니 팔자 내 팔자가 와 이렇겄노?" "될대로 되겄지요! 당장 코가 석자 오치나 빠져 있는데 훗일 걱정을 와 합니까!" 발끈하며 화를 낸다. "우리가 우애 사노? 뉘 땜에 사노? 웅이 아니믄 나는 이 세상 살고 접지도 않다." 아이도 그렇고 모화도 그렇고 이들 사이는 서로 무심한 것같이 보였다. 하기는 낳았을 때부터 할머니 손에 자 랐기 때문에 그런지 모른다. 모화는 술밥을 시루에 안쳐놓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엄니가 그런다고 머가 달라지겄소. 지 타고난 복대로 살겄지요. 너무 그러지 마소." "니는 우찌 그리 웅이한테 정이 없노. 그러이 아아도 에미 보기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안하나." "잘못 태어난 기지요. 복이 있었이믄 나 겉은 에미를 만냈겄소." "웅아, 방에 들어가거라." "싫다." 할매 말에 대한 아이의 대답이었다. "한데서 이러믄 감기 든다." "할매도 가자." "할매는 할 일이 안 있나. 구들막에 고구마 묻어놨다. 가서 묵어라." 그 말에 아이는 졸랑졸랑 부엌을 나갔다. 아궁이에 장작을 지펴놓고 모녀는 부뚜막에 걸터앉아 실파를 다듬는다. 술안주는 늘 장만해놔야 했기 때문이 다. 옛날 단골들이 더러 찾아와서 조용하게 술잔이나 들고 가는 것이 꽤 짭짤한 수입이 됐던 것이다. "아짐씨 있소?" 몽치가 부엌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웅이할매가 벌떡 일어섰다. "참 오래간만이네. 이 사람아 우찌 그리 볼 수가 없노." 반가워하면서도 원망스럽게 웅이할매는 몽치를 쳐다본다. 조금만 일찍 왔어도 그 못된 주정뱅이를 혼내주었을 텐데 하고 생각한 때문이다. "그게 그렇게 안되네요. 우짠지 몸 빠질 새가 없어서. 아아는 잘 크지요?" "하모. 잘 크제." "아짐씨." "야." 파를 다듬으면서 모화는 건성으로 대꾸한다. "손님 데꼬 왔인께 안주 좀 잘 채리주소." "알았소." 여전히 몽치는 쳐다보지 않고 대꾸만 했다. 몽치의 신수가 달라져 있었다. 2년이란 세월이 몰라보게 그를 닦아놓은 것 같았다. 본시의 그 못난 생김새야 어디 갔을까만 옷차림이 깨끗해서 옛날 뱃놈의 행색은 전혀 아니었다. 언동도 침착해 졌고 또 노숙해진 것 같 았다. 몽치는 전과 다름없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직접 고기를 잡지는 않았다. 어장아비 눈에 들어 소위 그는 발탁이 된 것이다. 힘이 좋고 배짱 있고 젓꾼들을 휘어잡는 수단도 만만치 않았으나,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어장아비의 관심을 끈 것은 그의 속에 든 식자 때문이었다. 해서 어장을 두루 감독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장아비의 대소사를 건사해주는 처지가 된 것이다. 출세를 했던 것이다. 몽치는 저보다 나이 한수 위인 듯한 사내의 등을 밀고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뭍에 나오면 장국밥 한 그릇에 딱 막걸리 한 잔이던 그의 습관도 이제는 옛날 얘기가 된 것 같았다. 아무것도 놓인 것이 없는 조그마한 방이었다. 골방같이 어둡기도 했다. 그러나 도배는 새로 한 듯, 깨끗하고 방바닥은 따스했다. 몽치와 함께 온 사내는 엉거주춤 방안을 둘러보다가 슬그머니 앉았다. "나 이런 데 처음 와보네." "와요? 방이 콧구멍만해서 숨이 맥힐 것 겉소?" "그런 게 아니라, 이런 곳을 모르니까." "그럴 깁니다. 여선주 외아들이 나 겉은 것 아니믄 언제 이런 데를 구겡이나 하겄소? 노름하기에 안성맞침이 라는 생각은 안 드요?" "허허, 저눔의 비꼬는 버르장머리 또 나온다." 하며 사내는 쓰게 웃는다. 키가 크고 목이 길며 고수머리의 사내는 너무 말라서 바람 부는 날 거리에 서면 휘 청 휘청 휘청거리다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실속없게 보인다고나 할까. 성격도 섬약해 보였고, 이름은 여동철 이었다. 몽치말대로 여선주의 외아들이며 몽치에게는 고용주의 아들로서 그를 작은선주라고 불렀다. 그는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이곳 수산학교를 중퇴했고 잠시 어업조합에 있었던 일이 있었으나 그만둔 후로는 하는 일 없이 지내왔는데 모친은 아들을 들볶는 대신 날이면 날마나 영감에게 성화를 냈다. "제집 자식까지 있는 놈을, 저리 어정개비로 놔둘 깁니까? 영감은 대체 머하는 사람이오?" 어정개비란 하는 일이 없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실직자라는 뜻도 된다. "빛좋은 개살구, 이름이 좋아 불로초요. 뉴지라 카고 여선주라카믄 이 바닥에서는 모리는 사람이 없다 함시로 그렇기도 심이 없소? 내사 마 그놈 생각만 하믄 산 넘어갔던 부애가 치밀어서 세상만사 뜻이 없어지요." 무식하지만 자산이 있고 큰 규모의 어장도 소유한 여선주는 이지방의 유지였다. 그런 유지가 아들 직장 하나 못 구하느냐 그런 뜻인데 아들이 공부를 많이 하여 무식한 아비의 한을 풀어줄 것을 간절히 소망했던 여선주 는 학업을 포기한 아들에 대하여 분노를 삭이지 못했고 애써 외면해왔던 것인데 결국 마누라의 성화도 성화려 니와 그로서도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어장일을 시킬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고 아들을 몽치 에게 붙여준 것이다. "눈이 밝아서 못하는 일이 없고 꼬라지는 산도둑놈 같다마는, 고학을 해서 배울 것도 있고 드센 젓꾼들을 휘 어잡는 것을 보믄 배짱도 보통 아닌 기라. 내 생각에는 마, 그만한 놈 없일 것 겉다. 니도 생각해봐라. 언제꺼 지 애비 번 것 묵고 놀 기고? 장차 어장을 맡아서 한다 캐도 모를 알아야 면장도 해묵을 것 아니가? 무신 일 을 하든지 간에 문리가 나야." 처음 여동철은 마음속으로 비웃었고 모욕감도 느꼈다. '학교 문턱도 넘어본 일이 없는 그따위 불쌍놈한테 배울 게 있다고? 나를 우찌보고 하시는 말씀인고? 한문 몇 자 굴리는 것을 보고 노라신 모양인데 그게 다 아버지 무식한 탓이지 뭐겠나.' 사실 그런 점이 없지도 않았다. 눈이 밝다는 것이 여선주에게는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눈뜬장님에게는눈 밝은 수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여동철은 심히 못마땅했으나 부친은 전에 없이 강경했고 강압적이었다. 하 는 수 없이 감독하는 셈 치고 따라다녀 보자, 했던 것이 그만 여동철은 몽치에게 꽉 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내 로라하는 불량배를 주먹 한방에 껌짝 못하게 만드는 것을 보았고 몽치 입심에 반하는 젓꾼들 얼굴을 보았고 흥정에는 깐깐했으며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경매장 면면들을 슬그머니 끌어들이는 수작하며 종횡무진 세상 무서운 것을 모르는 듯, 어떻게 구워 삶았는지 군청이며 모모한 관서의 실무자하고도 관계가 부드러운 것 같 았고 경제계 형사들도 몽치를 보면 웃었다. 우선 용모가 아무렇게나 생겨서 사람들은 안심하고 그를 대하는 것 같았다. 주먹이 세니까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지는 심리적인 것과 학식이 있다는 점은 그를 만만히 보지 못하는 이유인 것 같았다. 몽치는 늘 말하기를 도둑놈도 사귀어놓으면 써먹을 때가 있다 했는데, 용병술 이이라고나 할까, 그런 기초적인 것을 터득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다 산에서 해도사와 지감이 그에게 붙여 준 힘이라는 것을 알 턱이 없는 여동철은 여태 겼어보지 못한 독특한 인간으로 몽치를 생각했다. 그에게도 친 한 친구는 있었다, 보연의 동생 허삼화, 꼽추소목 조병수의 아들, 지금은 어구상을 하고 있는 조남현은 보통학 교 동창으로서, 그들은 외지에 나가 중학교를 다녔고 졸업을 했으나 지그껏 친하게 지내는 친구였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업조합에 다닐 때 동료였던 김영호가 몽치의 매부라 했는데 친구들이나 그가 아는 어떤 사람하 고도 그 유형이 다른 몽치가 여동철에게는 신기했다. 신기했을 뿐만 아니라 몽치가 옆에 없으면 허전했고 불안해지기까지 했다. 여동철은 어장이고 술집이고 간에 부지런히 몽치를 따라다녔으며 어장이로 부산에 갈 때도 함께 가곤 했다. 여선주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아주 흡족해했다. "어쩨 찜찜하구만. 이런 데서 술 마셔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여동철은 몽치가 비아냥거리 것을 알면서 공연스런 말을 했다. "아아따 참, 간이 생기다 말았나? 그래가지고는 세상 못 사요. 밀주 좀 마싰기로 까막소 보내겄소? 아마도 내 생각에는 작은선주가 노름인지 몬지를 하면서부터 간이 콩알겉이 되지 않았나 싶은데." "너 오늘 두 번째다! 한번만 더 했단 봐라, 가만두는가. 지나간 일을 왜 들먹이나." 몽치는 낄낄거리며 웃는다. 한때 여동철은 노름에 손을 대어 모친의 속을 썩인 일이 있었다. 기척을 안 뒤 방문이 여렸다. 모화가 술상을 가지고 왔다. 입술이 부르트고 입가에 피딱지가 앉은 모화의 얼굴 을 몽치는 슬쩍 쳐다본다. "안주가 시원찮습니다." 모화는 여동철을 보고 말한 뒤 나가버렸다. "과수댁인가?" 여동철이 물었다. "그거를 지가 우찌 알겄소." "단골이라며?" "단골이면 단골이지 남의 내지구지는 알아 머하겄소." "술이나 마시자." "그럽시다." 몽치는 술을 쳤다. 술 한잔을 쭈욱 들이켠 여동철은 "술맛 좋네." 하며 실파 무친 것을 집는다. "그라하믄 와 가가 캤갔소. 술도가 술에는 댈 것도 아니라요." "쌀은 어떻게 구하는고?" "돈 없어 그렇지 야미쌀이야 와 없겄소. 쌀뿐이던가요? 돈만 있이믄 호랭이 수염인들 못 구하겄소? 그러이 사 람들 돈이라 카믄 환장하제요" "무슨 감정이 있어서 비양거리는 건가? 두리 아버지한테 유감 있나?" "감정은 없지마는 유감은 있일 기요." "....? 감저은 없지마는 유감은 있다? 그게 무슨 소린고? 그거나 저거나 매일반 아닌가." "사사로이는 감정이 없고 공적으로는 유감이다 그 말입니다." "점점 모르는 말만 하네?" "나 한분, 선주어른 딜이받을 깁니다." "어어?" "욕심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겄소. 하지마는 그것에도 절도가 있는 기라요. 그 절도가 없이믄 깨져부리는 기이 이치고." 여동철은 무언가 조금은 깨닫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사실이지 내가 오늘 이만큼이나 된것도 다 선주어른 덕택인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하는 일 이상의 대우를 받 는다고는 생각하지않소. 그라고 빚지고 살고 저븐 생각도 없고, 다만 공평히 생각하는 것이 선주어른을 위하는 것이며 일이 잘 풀린다, 그런 생각은 하지요. 선주어른 말심은 남 하는 대로만 하믄 된다, 그러시지마는 선주 어른한테 돈 벌게 해주는 사램이 뉘요? 젓꾼입니까 다른 선주들입니까." "....." "다른 선주들보다도 우리 선주어른이 선심을 쓰믄 그만큼 젓꾼들은 개기를 많이 잡을라 칼 기고 내 일겉이 한 다믄 그기이 다 어디로 가는 깁니까." "그것은 자네가 몰라 하는 말일세." 처음으로 여동철은 정색을 하고 했다. "모리기는 머를 모린다 말입니까." "임금통제령이 있어서 업주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거를 지가 모리는 줄 압니까?" "그럼?" "생각만 있으믄 얼매든지 비공식으로 하는 방법이 있십니다. 선주어른 딱한 기이 바로 그 점이라요. 얼랑누굴 랑이 없고, 비공식으로 해주는 것이야말로 젓꾼들 마음을 꽉 잡는다는 것을 와 모릴까요? 많은 사람들 맴이 합쳐지믄은 못할 일이 어디있겄소? 내 동기간겉이 내 일가겉이 생각만 한 다믄, 가난하고 찌들은 사람들 맴이 얼마나 약한지 알기나 합니까? 아니할 말로 징용에서 도망온 사람들도 몰래 받아주고, 그런 공을 쌓아놓으믄 어디 안 갑니다. 선주어른이 다 되받게 돼 있는 기라요. 우리끼리니 하는 말이지마는 일본이 언제꺼지 성하겄 소? 미국하고 붙은 후로는 우리 눈에도 날로 물자가 말라가는 것이 뵈니 지탕이 되겄소. 이깄다, 이깄다 말로 는 그러지마는 미국하고 싸워서 기진 맥진해 있는 조깬한 나라가 팔팔한 미국의 큰 나라를 대적하겄느냐 그 말이오. 얼라가 생각해도 빤히 나오는 숫자 아니겄소?" "이놈아가 왜 이래? 콩밥 묵을 작정을 했나?" 여동철은 펄쩍 뛰었다. "귓속말이오, 귓속말. 동족끼리 귓속말도 못합니까? 작은선주는 그라믄 친일파다 그겁니까." "미친놈,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것도 모르나?" "겁 많은 사람들이 쉬쉬하노라고 맨든 속담이지요." "자네같이 천방지축 모르는 것도 화근이다." "그런 말 마이소. 천방지축 모리는 거는 선주어른 부자 아니겄소? 천방지축을 모리고 날뛰기도 하지마는 천방 지축을 모리기 때문에 도망을 가고 숨기도 하고 해서 화를 자초할 경우도 있는 기라요. 천방지축을 안다는 것 은 만물의 이치를 안다는 것이고, 만물의 이치를 알고 보믄 나갈 때는 나가고 들어올 때는 들어오고 남보다 먼저 때를 안다는 얘기 아니겄소?" 그 말은 해도사의 가르침을 인용한 것이다. "그놈의 고학인가 뭔가 사람 잡네, 잡아." 하다가 여동철은 소리내어 웃었다. "일단 자네 얘기 맞다고 치자. 하지마는 나보고 만번 해보아야 소용없네. 내가 무슨 실권이 있어야지. 실권이 야 자네가 쥐고 있는 거 아닌가." 몽치는 술을 마시고 입가를 훔치면서 "그런 소리 마시오. 듣기 좋으라고 그러는 모앵인데 우리네 인생이야 아무리 입으로 잣사 보아도 때가 오믄 떠나야 하는 철새 아니겄소? 여동철이 누굽니까? 장차 어장아비가 될 사람 아니오? 담 좀 키우시소. 매사 뒷 걸음질만 치지 말고." "자네가 철새 되지 말고 텃새가 되면 될 거 아닌가. 아버지가 다 요량이 있어서 불쌍놈에다가 주둥이만 까고 나잇살 어린 것을 내게 붙여주셨는데." "여선주 살림, 작살낼지 뉘 알겄소?" "천방지축을 헤아리는데 그럴 리가 있겠나." "지 상호가 역적질하게 돼 있다 하든데요?" "역적질할 놈이 내 상호는 역적질할 상호다 하며 광고할까."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고 말을 하는 동안 어느새 거나해진 두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에서 나온 몽치 는 아짐씨 술값이 얼매요?" 하고 셈을 한 뒤 "그라믄 또 오겄소." 몽치의 눈은 돈을 받아드는 모화 얼굴에 가서 잠시 머물렀다.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작은선주 가입시다." 하고 등을 밀었다. "갈라꼬?" 웅이할매가 몹시 서운해하는 얼굴로 방에서 내다보았다. "또 오겄십니다. 할매 잘 기시이소." 그들이 나가고 난 뒤 웅이할매는 작은방에서 술상을 들고 나온 딸에게 말을 걸었다. "마침 왔는데 얘기라도 안하고." "무슨 얘기 말이오?" "아까 당한 일 말이다." "우째서요?" "아아 그러씨 ..... 전에도 니가 봉변을 당했일 적에 구해준 사람 아니가." 모화는 대꾸 없이 술상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에 그는 저녁상을 차려서 방으로 들어왔다. 식구 가 상머리에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한다. "우리겉이 의지할 곳이 없는 처지, 니 성미가 웬간하믄 그런 사람 새기서 해로울 것도 없일 긴데." "무슨 소리 하는 깁니까? 그 사람은 우리집 술 손님이오." 볼멘소리다. "누가 그거를 모리나? 동기간맨치로 새길 수도 있는 일 아니가. 그래 가지고는 니껏 없이믄 못 산다." "동기간도 아닌데 동기간맨치로 우애 새깁니까. 내것 없이믄 죽는 거사 뻔한 이치고, 실데없는 소리 말고 밥이 나 잡수이소." "웅아 자아, 입 벌리라." 웅이할매는 웅기에게 밥을 떠먹인다. "지가 묵게 내버리두소. 정말 엄니는 와 그캅니까?" "시끄럽다. 이것도 내 살아 생전이다. 내가 죽으믄 우리 웅이 누가 챙길 기고. 에미라는 기이 지 새끼 귀한 줄 도 모리니 내가 우찌 눈감고 갈꼬." "정말 그만 못하겄소!" 모화는 밥상에 숟가락을 거칠게 놓는다. "알았다. 알았으니 밥이나 묵어라. 내가 빈말 한 것도 아니고 ..... 내가 참아야제. 나한테 성질 안 부리믄 뉘한 테 그러겄노." "할매야." 웅기가 불렀다. "운냐 울 애기야." "나 밥 혼자 묵을 기다." "그래 그래 니가 에미보다 열배 낫다. 할매 야단맞일까 봐 그러제?" "응" "어이고 내 소자(효자)야." 웅이할매가 손주 궁둥이를 툭툭 치는데 밖에서 "웅이어머니." 하고 불렀다. 몽치의 목소리였다. 웅이할매가 화드득 일어섰다. 방문을 열었을 때 몽치는 마당에 서 있었다. 사방은 어둑어둑했고 하늘에는 별들 이 돋아나 있었다. "웬일고?" 했으나 목소리엔 반가움과 기대가 넘쳐 있었다. "머 별일은 아니고요, 좀 물어볼 말이 있어서 왔십니다." "들어오니라, 이거 밥묵다가, 방이 이래 되겄나." 모화는 그새 밥상을 챙겨서 들고나온다. 방으로 들어서며 몽치는 "지 때문에 밥 못다 잡순 거는 아닙니까?" "아니다, 다 묵었다." 웅이할매는 걸레를 찾아 몽치가 앉을 자리를 훔친다. 웅기는 턱을 쳐들고 몽치를 올려다보았다. "앉거라?" "야." 몽치는 자리에 앉았다.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물어볼 말이 머꼬?" "좀 심상치가 않아서요. 웅이어매 얼굴이 와 그렇십니까." "올 옴마 맞았다." 웅기가 먼저 대답을 했다. 웅이할매는 아이를 안아 무릎에 올리면서 "어린것도 가심에 맺히는갑다." 울먹인다. "맞다니요? 누구한테 말입니까? 말심하시이소." 대강 짐작은 하고 온 것 같았다. 놀라는 기색도 없이 몽치는 웅이할매를 쳐다본다. "그란해도 아까 손님하고 함께 안 왔이믄 얘기를 했일 긴데, 흥순가, 흥챙인가 그 주정뱅이 목이 뿌러져 죽을 놈이, 외상술 아 준다꺼 입에 못담을 욕설을 하고 웅이에미를 패고." 흐느껴 운다. "볕바르게 하는 장사가 아닌께 그것을 꼬타리로 삼아서,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 염치 없는 놈이, 피를 빨아묵어 도 유분수지, 임자가 있었으믄 그놈이 갬히 그랬겄나, 다리몽댕이가 뿌러져도 버얼서 뿌러졌제." "...." "전에, 다치노미집을 할 적에도 니가 그런 놈 하나를 패주었다는 말을 듣고 얼매나 고맙든지, 오늘도 그 직일 놈이 분탕질하고 가버린께 니 생각이 절로 나더마. 우리 모녀가 객지에 와서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고 말 한마디 거들어줄 사람조차 없으니 적막강산 아니가. 웅이에미 성질이나 나산타 말가, 뻗장나무맨치로 저러 이." "그러니께 살지요" 몽치는 웅이할매 얘기를 건성으로 들으며 또 건성으로 대꾸하며 바깥 기척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넘들이 쉽기 넘어가는 일도 우리 모녀한테는 우찌 그리 어러븐지, 한겨울 얼음판을 나막신 긴고 걷는 것 같 고 날개 부러진 새가 수리한테 쬐기는 것 같고 정말이제 하루에도 몇번 죽고 저븐 맴이 든다. 웅이만 아니믄 우리 모녀, 이 더러분 세상 살아서 무신 영광을 보겄노." "친척은 하낫도 없십니까." "친척이 있다 한들, 멀리 떠나 있이니 있으나마나고, 설사 가찹기 잇다 카더라도 우리 일에 나서줄 그럴 형편 이 아니다. 그럴 형편이라믄 애시당초, 낯설고 물선 객지에 올 까닭도 없었고." "웅이아부지는 우찌된 겁니까." 망설이다가 묻는 것 같았다. "말 말아라. 말을 할라 카믄 길고, 그놈 생각만 하믄 우둔증이 생긴다." 아이는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웅이할매는 베개를 받쳐 아이를 뉘어놓고 이불을 덮어 다독거린 뒤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아가, 웅이네." 하고 부엌을 향해 딸을 불렀다. "와요" 대답만 했다. "술상 좀 보아오니라. 나도 오늘 밤은 술 한잔 마실란다." 하고 문을 닫은 웅이할매는 "바쁘나?" 이번에는 몽치에게 물었다. "바쁠 거는 없지마는." 술상을 들고 모화가 들어왔다. 술상을 올곧지 않게 놓으며 "술 마시고 신세타령 실컷 하소" 모친에게 성난 듯 말하고 나서 휑하니 나가버린다. 부엌에는 술밥을 퍼놨고 누룩이랑 비벼서 항아리에 넣어야 할 일이 남아 있긴 했다. "성질이 저렇다. 누구를 닮아서 저리 패독스러븐지. 어이구 쯧쯧." 웅이할매는 혀를 찼다. 그러나 몽치는 알고 있었다. 쑥스럽고 민망하고 자신이 처량해 뵈는 것이 싫어서 모화 가 그러는 줄을 알고있었다. 웅이할매는 몽치 술잔에 술을 부었다. 그리고 술주전자를 몽치에게 내밀었다. "나한테도 술 한잔 도고." "아, 그 ,그러지요." 주전자를 기울려 술을 붓고 몽치는 상체를 비틀 듯 웅이할매를 외면하듯 술을 마셨고 웅이할매도 반쯤 술을 마셨다. "우리 모녀 기구한 팔자 얘기를 하자카믄 이 밤이 다가도 못다할 기다마는, 또 해봐야 자랑될 것도 없고 ..... 두건이 목의 피 내묵듯이, 남 해치지 않고 살아왔는데 우찌 이리 액운이 많은지 모리겄다. 자네를 보이 내 붙 이 같애서 하는 말이네마는." 웅이할매는 또 눈물을 흘렸다. 니라는 호칭에서 자네라는 호칭으로 변한 것을 보면 그만큼 웅이할매 심정이 심각해진 것 같았다. "집안의 근본 같은 거사 이제 와 말하믄 머하겄노. 가난이 죄고 가난이 더럽제. 내가 아는 것은 집이 너무나 기찹아서 밥을 굶기를 부자들 밥 묵듯이 했다는 것 그것뿐이다. 엄니가 아이를 낳기만 하믄 모두 젖배를 곯아 서 커지를 못했다 카는데 명을 타고났던지 내혼자 살아남아서 ..... 대신 어매를 잡아묵은 기지. 울아부지는 죽 을라꼬 나를 안고 산에 갔더란다. 목을 매 죽을라꼬. 그랬는데 눈이 말동말똥한 어린 나를 보고는 대성통곡을 하고 산을 내리오싰다 카더마." 웅이할매는 술잔에 남은술을 마셨다. 벼로 술을 즐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기분만 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의 눈은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당이 사설에 취해 있을 때처럼. "그렇기 서럽게 커가지고 나는 부잣집 소실로 들어갔다. 심청이가 된 셈이제. 위로 아들 하나 딸하나를 낳았는 데 홍역에 모두 잃어부리고 제우 웅이에미 하나를 건졌는데 그 설움의 세월은 우찌 다 말로 하겠노. 영감이 세상을 버린 뒤로는, 집안 행세를 잘 아는지라, 영감이 우리 모녀를 위해 따로 땅마지기나 마련해놓았기에 그 집 마나님이나 자식들하고는 제면하고 살았다. 그러자니 우리 웅이에미한테 밴밴한 혼처가 나왔겠나? 그 차에 만낸 것이 웅이애비 그 독사 같은 놈이라. 근본도 모리고 떠돌아댕기는 불쌍한 사람으로 보았제, 처음에는. 그 런 불쌍한 사람임는 우리 모냐 섬기고 살 줄 알았다. 너무 의지할 데가 없었으이. 그러나 화약을 지고 섶으로 들어간 기라. 알고보니 그놈은 우리 가진 거를 노리고 뺏자는 심보, 정을 통한 제집도 따로 있고, 처음에는 야 금야금 내가다가 나중에는 외고 펴고 땅문서며 집문서를," 하다가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끊었다. "아무래도 그냥 살 수가 없고 앉아 있다가는 우리 모녀 알거지가 되어 거리에서 쪽박 들 판이라. 그래 남은 거를 몰래 처분하고 소리도 매도 모리게 야간 도주를 해서 온 것이 여기였다. 이곳에 와서 그놈의 씨가 든 거 를 알았다. 처음에는 원수놈의 씨라고 한탄도 많이 했다마는 낳고 보이 내 핏줄, 이자는 저 새끼 때문에 우리 가 안 사나." "하모요, 살아야제요. 그보다 더해도 사람은 살아야 합니다." "우리 웅이에미가 본시부터 성질이 뚝뚝하기는 했지마는, 저 아아가 그리 된 것도 생각해보믄 까닭이야 있제. 컬 때 큰어무이하고 배다른 오래비들이 얼매나 구박을 했든지, 나중에는 달라들더구마. 그렇게 되니 점점 더 미움을 받게 되고 거기다가 서방이란 것이 무도한 놈이었으니, 묵고 살기 위해 술집을 하다 보이 더욱더 성질 을 베린기라. 늙었지마는 지금은 에미라도 있이니, 내 눈감고 나믄 저기이 우찌 살란고 눈앞이 캄캄해진다." "웅이할무이는 웅이어매 자꾸 말심하십니다마는 그거는 베린 성질이 아닙니다." "머라? 베린 성질 아니라꼬? 저 성질 가지고 일없이 살아갈 성싶나? 오늘만 해도 그렇제. 술 처묵은 개라니, 본성을 아는데 피하든지 아니믄 달래서 보내든지 해야 옳지, 여자가 우찌 남정네를 당할 기고. 욕설 듣고 맞이 믄 내만 설지. 송사를 할 기가 물건이라서 물릴기가." 웅이할매는 낮에 참았던 일이 별안간 북받쳐서 폭발이라도 할 것 같았다. 얼굴은 벌개졌고 눈빛은 사나워졌다. "웅이어매가 안 그래 보이소. 버얼서 짓밟히서 흔적도 없어졌을 깁니다. 그만이라도 한께 한수 놓고 보는 기지 요." "그런 말 하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네." "나는 웅이어매가 칼 들고 나왔다는 말 듣고 비렁밭에다 내다버리도 살아남을 사람이라 생각했제요." 몽치는 가볍게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고 나서 "걱정 마시이소. 내 흥수 그 작자 만나믄 두분 다시 그런 짓 못하게 해놓을 기니깨요." "정말가?" "정말입니다." "그렇기만 해준다믄 얼매나 좋겄노." 웅이할매 얼굴은 환해졌다. "그라믄 나 자네한테 청이 하나 있네." "무신 청입니까." "아마도 우리 웅이에미가 자네보다 두세 살 위인 성싶은데 누부같이 생각해줄 수 없겄나? 헐헐단신에 자네 같 은 동생이 있다믄 얼매나 마음 든든하겄노." 몽치는 몹시 당황한다. "그, 그거는." 하면서 몽치는 꽁무니를 빼듯 몸을 일으키려 한다.L "머가 그리 어러븐 일고." 애원의 눈빛이 몽치를 거머잡는다. "남남끼리도 흔히 의형제를 맺고 잘지내는 사람들이 얼매든지 있는데, 머가 그리 어럽노." "걱정 마이소. 흥수는 지가." "허허허, 누가 그거를 말하기가. 그기이 아이다. 우리 웅이에미한테 자네겉이 미더븐 동생이 있다믄 ..... 나는 내일 눈을 감아도 여한 없이 편키 가겄다. 그렇기 할 기제?" "지한테는 누님이 둘이나 있십니다. 그런 것 안 맺어도 돌보아주믄 될 거 아닙니까." 웅이할매는 풀이 죽으며 눈길을 떨어뜨렸다. "우리 웅이애미가 술 파는 제집이라서 괄시하는 기가?" "아, 아입니다." "슬 파는 제집을 누님이라 하가가 남사스러바서 그러는갑네. 맘은 청백 겉은데 하기사 술 파는 제집, 이름이 더럽기는 하지. 어이구." 웅이할매는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아입니다. 아입니다. 그런 말심 당체 하지 마이소. 그기이 아니고, 하 참, 그기 아니라요. 지, 지는 그마 가볼 랍니다." 몽치는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 밖은 캄캄했다. 불빛 아래 있다 나왔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신발을 신고 돌 아서는데 마당에 서 있는 모화의 모습을 몽치는 희미하게 느낀다. "아니." 소스라치듯 놀란다. 몽치는 삽짝까지 나오는데 허공을 딛는 것 같았다. 모화가 따라나왔다. 몽치는 냅다 뛰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는다. "보소, 저기." "와요." "엄니가 실데없는 말 했지요?" "....." "의형제 맺으라 했일 깁니다." "....." "듬직한 남정네만 보믄 그러는 기이 울 엄니 버릇이라요." "....." "귀담아 들을 필요도 없십니다." "그, 그렇지마는, 어러분 일이 있으믄 나한테 의논하소." "주인 주객인데 염치없는 짓은 하고 접지 않소." "그라믄 의형제 맺느니 어쩌니, 그럴 거 없이 서방 얻으믄 될 거 아니오! 젠장!" 화를 벌컥 내다가 몽치는 급히 삽짝을 나왔다. 얼마를 걷고 있노라니 어둠에 눈이 익숙해졌는지 골목길이 하얗게 보이기 시작했다. 번화한 선창가까지 왔다, 그러나 전 같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은 많았지만 선창가는 쓸쓸했다. 방죽을 등지고 주욱 늘어섰던 잡화의 노 점이 하나도 눈에 띄질 않았다. 울긋불긋한 셀룰로이드 비누갑이며 수건, 보자기, 지갑, 양말, 장갑 같은 것, 손 거울과 가위며 주머니칼 화장품 같은 것을 늘어놓고 좌판, 알고 보면 가장 싸구려의 그런 상품들을 비춰주던 가스등도 보이지 않았다. 쉬쉿 쉿쉿 소리를 내던 가스등 뒤켠에 처음 장사를 시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어리석 게 뵈던 그 낯익은 장사꾼 사내도 볼수 없었다. 방죽과 마주보는 길가의 상점에서만 불빛이 비쳐나고 있었지 만 그곳 역시 휑뎅그렁했다. 여객선에서 내리는 손님들, 모처럼 물에 오르는 뱃사람들을 상대하여 밤에만 장사 를 하던 그 영세한 노점상들은 대체 어디로 갔으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몽치 머릿속에 그 생각이 잠시 지 나갔다. 몽치가 산골에서 처음 이 항구 가득히 정박한 작은 배들과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장식한 어마어마하게 큰 윤선 이 뱃고동을 울리며 입항하는 광경이며 상점마다 물건이 가득가득 쌓여 있었고 잡화상의 밤은 화려했으며 홍 등가의 불빛은 그 얼만 매혹적이었던가. 그러나 몽치는 이내 그런 황홀감과 작별을 했다. 소금에 전 누더기를 입고파도에 휩쓸리며, 파도가 오면 뒤로 나자빠지고 파도가 가면 앞으로 고꾸라지며 고기떼를 쫓아가는 배, 끝 없이 넓은 바다 위에 나뭇잎 같은 배, 어로 작업은 그야말로 혈투였으며 흥분의 도가니였다. 몽치는 생사를 건 것 같은 생생한 그 삶의 현장을 사랑했다. 수만 맹수들의 포효 같은 파도와 맞서는 것이 통쾌했다. 걸걸한 바 다사내들의 목청이며 핏발선 눈동자, 힘줄 솟은 적동색 팔뚝이며 짧게 해치우는 대화, 욕설로 정을 주고 속담 으로 비아냥거리는 사내들, 누더기의 모습으로, 막걸리 한잔 국밥 한그릇 입가심하고 항구의 거리를 누비는 몽 치였지만 그는 자꾸만 가슴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두려울 것이 없었다. 두려움은 산중, 바람소리밖에 없었던 아비 시체 곁에서 이미 다 겪어버렸다. "무엇이 두려불꼬? 이 한몸, 헐헐단신, 한분 살믄 그만인데 사내 자식이 더럽게 살수는 없제." 몽치는 곧잘 중얼거리곤 했다. 산짐승의 울부짖음과 산 속에 있는 모든 생령들의 그 가만가만 부르며 화답하는 숲속을 치닫고 벼랑을 타며 바람이 키웠고 햇빛이 보살핀 아이, 지감은 지식을 배풀었으며 해도사는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주었다. 휘는 우 의를, 영선은 누이 같은 사랑을 주었다. 그렇게 예비된 육신과 영혼이 파도에 부딪치고 바다에 내던져지고, 나 약하며 사악하고 선량하며서 노회하고,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열정과 냉담, 온갖 특성의 인간들 속에서 몽치는 폭을 넓히며 대응해 가고 있는 것이다. 밤거리를 배회하다가 간신히 소주 한 병을 구한 몽치는 서문고개 언덕, 휘의 집으로 갔다. 빈집같이 집안이 조 용했다. 안방은 깜깜했고 작은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형수," 하다 말고 몽치는 아까 웅이할매에게 누님이 둘 있다 한 자신의 말이 생각났다. 그 누님의 한 사람이 바로 영 선이였던 것을 깨닫고 슬그머니 혼자웃는다. "형수." 작은방에서 "몽치가?" 휘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와 이리 집이 조용합니까." "누가 있어야지." "야?" "아아들하고 모두 산에 갔다. 치분데 들어오너라." "그라믄 성 혼자 있다 말이오?" "그래. 안 가도 되는데 별시럽게 가겄다고 고집을 부리서 보냈다." "무슨 일이 있었소?" 방으로 들어가며 몽치가 물었다. "할무이 제사하고 아부지 생신이 겹친데다가 어무이가 편찮으신 모앵이라..... 설까지 거기 있겄다 하더마. "두어 달 홀애비 신세구마요." "씨원 섭섭하네. 그런데 니 누부집에는 안 가보고 오는 기가?" "가기만 하믄 장개 노래를 불러싸아서 딱 귀찮소." "그럴 만도 하지. 벵신도 아닌데 노총각이 돼가는 꼴. 누부된 입장에서 그냥 보고 있겄나. 나도 니 속을 통 모 리겄다. 이자는 자리도 잡힜고 가숙 못 거너릴 형편도 아닌데 대체 와 그라노?" "성, 가만 있이소. 나 술상 가지고 올 긴게요." 몽치는 휘의 말을 막듯하며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김치 보시기 하나 젓가락과 술잔을 놓은 술상을 가지고 들 어온다. "옛날부터 술상 보아오는 데는 내가 선수 아니오. 한데 뭐 집을 기이 있어야지 김치말고는." "멸치볶음이랑, 밑반찬이 있을 긴데, 몰라 그렇지." "도둑놈이 도둑질을 우찌 하는지 모리겄소." 몽치는 이빨로 병마개를 벗긴다. 그리고 술잔에 술을 붓는다. "소주는 어이서 구했노." 술을 마시며 휘가 물었다. "다 구하는 데가 있소." "재주 좋구나." "소주고 밀주고 말만 하이소. 구해다 디릴 긴게요." "밀주야 이 동네에서도 하는 데가 있어서 가끔 받아다 묵는다." "그나저나 성, 화심이 땜에 산으로 가신 거 아니오?" "미친 소리 그만 해. 정신이 있나 없나. 그거를 말이라고 하나?" 휘는 화를 냈다. "한눈 판다꼬 영감한테 쫴끼났다믄서요?" "나보다 더 잘 아네." "요릿집에 도로 나간다 하더마요." "요새도 요릿집이 있나?" "높은 사람들만 가는 비밀 요릿집이야 와 없겄소?" "그 말은 어이서 들었노." "전혀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닌 모앵이네요." "목석이 아닌 바에야....." 하다가 당황하며 "그렇다고 해서 넘겨짚지는 말아라. 다 전생에 무신 인연이 있었던가 싶어서 불쌍했을 뿐이다. 화심이를 만난 적도 없고." "우리 작은선주가 좀 바람기 있는 사람이거든요. 옛날에는 화심이한테 반한 일도 있었다 하더마요." 희미하게 휘의 얼굴에는 동요가 있었다. "그래서." 했으나 휘는 이내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작은선주가 요릿집에 나온다는 얘기를 하더마요." "....." "성은 본래부터 여복이 많은 사람 아니오. 산에서도 죽는다 산다 난리를 겪었인께." "....." "성." "무신 소리 할라꼬 또 부르노." "나 그만 과부나 소박떼기 하나 뒤비시 없고 올라요." "머라카노?" "헛소리하는 것 같소?" "처녀장가도 싫다 하믄서 과부는 멋이며 소박떼기는 또 머꼬." 그러나 몽치는 그 일에 대해서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휘도 그냥 해본 소리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술상을 치우고 거나하게 취한 두 사내는 자리를 깔고 드러누웠다. "아까 그 말은 그냥 해본 말이 아니오, 성." 천장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몽치가 말했다. "꽤깡시럽게 또 머라 카노." "아무리 좋은 신발이라도 내 발에 안 맞이믄 못 신는 거 아니오 짚세기라도 내 발에 맞아야." 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라믄 과분지 소박떼긴지 사람이 있다 그 말가." 다잡듯 묻는다. "있소." "언제부터!" "알기사 오래 됐소만 아직 심정 얘긴 하지 않았소." "이 빌어묵을 놈아, 온 정신 가지고 하는 말가? 니 누님이 허학할 것 같나? 말도 가이방해야." "누부는 누부대로 사는 기고 나는 나대로 사는 기요. 상대방만 좋다 카믄 데리고 살라요." "이거 있났네. 선생님은 또 뭐라 하실는지 니 생각해보았나." "내 생각은 아무도 못 꺾소. 선생님도 그렇제요. 내가 돈 많은 과부를 이용할라는 것도 아니고 잡스런 마음에 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사람 하나 믿고 내 사람 만들겄다 하는데 머라 하시겄소? 선생님은 저울대 들고 기우 나 넘치나 저울 눈금 봐감서 혼인하라 하시지는 않았소. 만일에 무신 말심을 하신다믄 선생님이라 할 수 없제 요." 몽치는 단호했다. 휘는 대답이 막혀 말을 못하고 도로 자리에 눕는다. "성." "....." "아직은 정한 일이 아닌께 형수나 누부한테는 말하지 마소." "대체 어디 사는 누구며 과부인가 소박떼긴가 그것부터 좀 알자." "그것은 뜻이 맞은 뒤 말하겄소." "무신 놈의 홍길동이 수작인지, 아 그라믄 상대방 의중도 모리고 혼자 몸이 달아서 그런다 그 말인데 필시 미 인이겄네." "미인 근처에도 못 갔고, 상대방 의중이야 십중팔구, 안되다믄 심으로라도 잡아제쳐야지요. 이자 그만 잡시다." 두 사나이가 잠이 들락말락하는데 누군가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은 꽤 깊어 있었다. "이 밤중에 누가 왔일꼬." 휘는 풀어진 옷고름을 다시 여미며 마당으로 나가서 삽짝문을 열었다. "뉘시오." "날, 날세." 뜻밖에 조병수가 거기에 서 있었다. "어이구 선생님! 이 밤중에 웬일이십니까." 휘는 깜짝 놀란다. "집에 좀 와, 와주겠나?" 병수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아, 아버님이 세상을 뜨셨네." "뭐라구요!" "내자하고 나, 나만 있으니 어, 엄두를 낼 수가 없고 막막하여." "알았습니다. 마침 몽치가 와 있으니 함께 가지요. 먼저 가 계십시오." "아, 아니네. 자네들하고 하, 함께가지." 집 그림자에 가려져 어두운 골목길을 세 사람은 허둥지둥 걷는다. 걷다 말고 휘가 말했다. "아니다. 이럴 기이 아니라 몽치야." "말하소." "새키 가서 니 매형을 데리고 오너라. 그러는 기이 좋겄다." "그러지요." 병수와 휘가 먼저 집으로 갔다. 병수댁네는 머리를 풀고 마루끝에 오두마니 앉아 있다가 화다닥 일어섰다. "임종도 못했네." 병수는 흐느꼈다. "귀주기 갈아 드릴려고 들어갔더니, 호, 혼자서 세상 뜨셨구나 으흐흣흣." 가느다란 병수 흐느낌 소리뿐 집안은 괸 물 속같이, 그것은 무시무시한 정적이었다. 마당에 떨어진 나무 그림 자는 마치 먹물을 흩뿌리듯 시커멓게 느껴졌다. 기온은 급격하게 하강하여 이 고장의 추위하고는 전혀 다르게 살을 엘 듯 메웠다. 이윽고 몽치와 영호가 나타났다. 그 뒤를 따라 숙이도 나타났다. 숙이는 재빨리 부엌으로 달려가며 사잣밥 지 을 준비를 했고 영호는 "알리더라 캐도 날이나 밝아야겠지요." 하고 말했다. 선창가에서 어구점을 하고 있는 병수의 아들 내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몽치와 휘는 염을 하기 위하여 죽은 자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고 영호는 죽은 자의 옷을 받아서 지붕 위를 향해 던졌다. 눈을 부릅뜨고 죽은 조준구의 형상은 끔찍했다. 몽치는 부릅뜬 조준구의 눈을 쓸어서 감겨주었다. 끔찍했을 뿐만 아니라 삶의 기능, 존재했던 육체의 마지막 한오리 한방울까지 훑어대고 짜내버린 종말의 모습 은 너무나 처참했고 머리끝이 치솟는 것 같은 공포감을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깊은 연민을 느끼게 했다. 생명에 대한,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연민이었다. 호박덩이 같았던 두상은 쪼그라져서 조그맣게 돼 있었다. 몸 도 줄어들어서 아주 작아져 있었다. 손가락은 모두 펴진 채, 그 다섯 손가락은 갈고리처럼 굽어져 있었다. 3년 을 넘게 병상에 있었는데 어쩌면 조준구의 마지막 일 년은 살아 있었다기보다 죽음을 살았는지 모른다. 죽은 후의 과정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진행되었으니 말이다. 시신을 씻을 때 욕창을 탈저된 부분이 문적문적 떨어 져나왔고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의를 입히고 갈고리같이 된 손가락을 펴고 두 팔을 가지런히 한 뒤 염 포로 묶고, 그러는 동안 몽치는 땀을 많이 흘렸다. 거들어주는 휘도 땀을 흘렸다. 염습을 끝내고 나왔을 때 별 안간 "아이고 아이고오!" 머리를 푼 병수댁네가 들린 사람같이 곡성을 올렸다. 그 소리는 심야의 정적을 찢고 사람을 놀라게 했다. 곡성 은 마치 한줄기 빛이 되어 시공을 뚫고 저 머나먼 저승의 나라, 명부의 캄캄한 삼도천까지 울리어 가고 있는 듯 이상하고도 이상한 귀기를 자아 내고 있었다. "어이고 어이고오 어이고." 이번에는 낮은 병수의 곡이었다. 사잣밥을 내놨고 영호가 급히 달려가서 이웃의 밀주하는 집에서 술을 사왔으며 상주는 상청에 남겨둔 채 세 사나이는 아랫방으로 내려와 술상 앞에 앉았다. 밤은 소리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새벽닭 우는 소리도 지나갔다. 드디어 사이렌 소리가 새벽을 흔들었다. 그것 을 신호로 영호는 상가를 나섰다. 선창가에서 어구상을 하는 병수의 아들 남현에게 기별을 하기 위해서이다. 어둠을 헤치고 언덕길을 내려가는 영호는 운명적인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 하필이면 조준구의 장 손인 조남현에게 그 할애비 죽음을 알리기 위하여 김평사의 손자인 김영호가 새벽길을 가고 있는가. 어째 하 필이면 김평산의 손자가 조준구 죽음의 뒷감당을 하는 한 사람이 되었는가. 어찌하여 하필이면 타향인 이곳에 서 이 서문밖이라는 산모퉁이 동네에서 조씨 일족을 만났으며 이웃하고 살게 되었는가. 영호는 고개를 흔들었 다. 이러한 우연에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 동네에 집을 장만했을 때 아내 숙이를 통하여 김휘 내외을 알게 되었고 휘를 통하여 조병수의 얘기를 들었을 때 영호는 내심 당황하고 께름칙했다. 조남현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어업조합과 어구점은 무관하지 않 았다. 우연히 조합에서 이들이 마주쳤을 때 남현과 영호는 서로가 다 난감해했다. 이들이 어릴 적에 평사리에 서는 양가가 모두 패쇄적인 존재였고 특히 병수 식구들은 황폐할 대로 황폐한 최참판댁에서 숨어 살다시피 했 기 때문에 교류는 일절 없었지만 그곳에서 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서로의 얼굴이야 모를 리 없었다. 다 같은 고립 소외 죄의식 심리적 박해를 받았으며 따지고 보며 이들은 모두 피해자였다. 조부들의 악행에 의한 피해자, 피해자, 피해자이면서 이들은 동병상련의 감정을 가지기는커녕 서로 피하고 싶고 마주치기를 꺼리는, 그것은 수치심 때문이며 치욕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업조합에서도 가끔 마주쳤고 거리에서도 이따금 부딪 쳤다. 서로가 어정쩡하고 엉거주춤하는 꼴로 스치곤 했다. 김휘와 영선이가 송관수의 사위이며 딸이라는 것을 알고부터 영호의 태도나 심정에 변화가 오기는 했지만 병수나 남현에 대하여 어색한 것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병수집에 망령과 같은 조준구가 중풍환자로 누워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영호는 어떤 쓰라림, 분노를 느끼곤 했다. '이것이 모두 무슨 운명인가.' 언덕길과 골목길이 끝나고 신작로에 나섰을 때 어둠은 걷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별안간 살을 에는 것 같은 추 위를 느꼈다. 황망중에 외투도 챙겨 입지 않고 나왔던 것이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전신을 웅크리며 걷는데 문득 생각이 났다. '이제는 끝이다!' 그것은 어떤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이제는 끝난 거다!' 자손으로 하여금 그들 조부들 죄의 핏자국을 닦게 하기, 씻게 하기 위하여 모든 우연이 있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상가에 내걸린 등불, 영원히 떠나보낼 그 어둡고 음습하고, 운명을 지배했던 존재를, 뿌옇게 열리고 있 는 하늘을 있는 하늘을 보며 영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호는 굳게 닫혀진 어구점의 문을 두드렸다. 한참 동안이나 두드렸을 때 어구점에서 일하는 청년이 잠을 덜 깬 얼굴로 문을 열었다. "주인 계시나?" 어합조합 서기가 이른 아침에 웬일로 찾아왔을까? 어리둥절해 하다가 청년은 "집에 들어가싰는데요." 하고 말했다. "집에? 집이 어딘데?" 청년이 가르쳐준 조남현의 살림집은 가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역시 영호의 출현을 어리둥절 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노인이 세상 떴소." 할아버지라 하지 않고 노인이라 했다. 남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노인의 죽음을 어찌 당신 이 내게 알려주러 왔는가? 조남현의 표정은 그렇게 바뀌었고 희미하나마 친근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조형은 먼저 가시오. 아버님 경황이 없으시오." "그, 그러지요." "거, 동생하고, 누이동생, 주소가 있으면 주시오. 전보를 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럴 필요까지 있겠소?" 하다가 "아버님이 그러라 하시던가요?" "아니,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날씨가 몹시 추운 모양인데." 영호가 떨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남현은 주소를 적은 쪽지와 자기 외투를 꺼내주며 "우선에 걸치고 가소." 영호는 너무 추워서 그랬던지 사양하지 않고 입고 갔다. 남현은 아이들을 깨워서 옷을 입히고 있는 아내에게 "아이들 데리고 갈 필요 없어! 가게 문은 닫고 덕준이 와 있으라고 하소."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장례식의 기억을 아이들에게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조준구에 대한 남 현의 증오심은 컸다. 과거의 행적도 행적이지만 통영에 나타난 이후의 그 추한 모습을 남현은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남현이 서문밖 집에 갔을 때 상복에 굴건을 쓰고 상장을 짚고 서서 병수는 곡을 하고 있었다. 몽치는 가고 없 었으며 휘가 아래채 툇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고 이웃 아낙 두세 명이 숙이랑 함께 부엌에서 일을 하는 있 는 것 같았다. 남현은 눈짓으로 휘를 불렀다. "준비가 다 돼 있어서 별 어러븐 거는 없었다. 마침 몽치가 와 있어서 그 아아가 염을 했고 김형이랑 대충 하 느라 했는데 한밤중이라 선생님이 놀라신 것 같다." "오면서 생각했는데 부고는 낼 필요가 없고 화장을 해야겠어." 남현의 단호한 어조에 한동한 잠자코 있던 휘는 "선생님이 그러라 하실까?" "그렇게 해야해!" '하기는 그래. 집안에서 죽은 것만도 과람했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으나 휘는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국 화장 문제로 병수와 남현, 이들 부자간에 격론 이 벌어지고 말았다. "어떤 경우에도 부모는 부모, 자식이 행할 도리는 있는 거다." "아버님 당대뿐이지요. 누가 벌초를 하며 산소를 돌보겠습니까. 그러느니 깨끗이 화장해야 합니다." "너희들은 산소를 돌보지 않겠다, 그 말이냐?" "네. 돌보지 않겠습니다." "어째서!" "언제까지나 자손들이 그 악행을 기억하라 그 말씀입니까?" "착하고 거룩한 사람만이 부모더냐?" "나쁜 것도 나름이겠지요. 차라리 잊어주는 것이 효도인지 모르지요." "목련존자는 악모를 천도하기 위하여 지옥에까지 찾아가셨다." "천도할 여지가 있었습니까?" 남현은 강경하고도 냉소적이었다. "애비 뜻에 따라랏!" "그 뜻만은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너, 이놈! 아비를 능멸하는 거냐!" "아닙니다. 아버님! 아버님 서러운 세월을 어찌 지더러 잊으라하십니까!" 처음으로 남현은 눈물을 흘렸고 드디어 그것은 통곡으로 변했다. 결국 남현은 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미리 마 련해둔 장지에 조준구는 묻힌 것이다. 끝내 사천에서 교사로 있는 종현과 출가한 딸 내외는 나타나지 않았다. 장례가 끝난 뒤 휘의 집에서 남현과 영호는 함께 술을 마셨다. 처음에는 남현이 "이 갈린다!" 하며 으르렁거렸으나 술에 취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그걸 내가 아는데, 그걸 내가 어찌 잊을 건가. 불구의 몸만 아니어도 내 맘이 이리 찢어지지는 않았을 거다." "그만 해라. 김형이나 자네는 모두 어진 분을 부친으로 두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고맙기 생각해야 할 기다. 이제 는 다 끝났고 다 잊어야 한다." 휘가 달래었고 영호는 남현의 술잔에 술을 따르었다. 음력 섣달 단대목이다. 장터의 풍경, 중년 아낙이 장바구니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른 가자미가 두 마리, 볼락 이 한 마리, 조갯살 조금, 그리고 푸성귀며 콩나물 미역 등이 들어있다. "이거를 가지고 어디다가 찍어붙이겄노. 머가 있어야 사제. 장바닥은 싹 쓸어놓은 것 같고, 참말이제 설도 설 같잖게 보내겄다." 중얼거리는데 키가 작달막한 여자는 "제사고 머고 때리 엎어부리든지 해야지, 산입에도 거미줄 치게 생겼는데 구신까지 우애 챙기 믹이겠노." 내뱉듯 말했다. "제집이 간둥간둥, 말을 그리 함부로 해대다가 추굴이라고 받으믄? 큰일 나제." "세상 돼가는 꼬라지가 그런데 낸들 우짤 기고. 흥 구신이 참말로 있다믄 이러크럼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지는 않을 기다." "말 마라. 우리 구신보다 왜구신이 더 무서분께 그렇지. 설도 왜 설이 더 춥지 않든가배?" 중년 아낙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무릎이 닳도록 절하고 축수하고, 조상에 빌고 터주에 빌고 조앙에 빌고, 무신 소용이 있노. 빌어묵을 놈은 곰 배팔이라도 됐는가, 글 모리는 가막눈도 아니겄고 우째 일자 소식도 없는 긴지." "편지 쓸 형편이믄 와 안 그라겄노. 그럴 사정이 아닌께 그렇겄지." "넘들은 객리에 나갔다가도 설이믄 돌아오는데." "니도 참 딱하다. 징용간 아아가 설이라꼬 돌아오겄나." "그거를 누가 모리건데? 오죽 답답하믄 그러까. 들리는 소문이 하도 숭악하고 밤마다 꿈 에 뵈고 정말이지 피 가 마르는 것 같다." "소문 그거 믿을 게 못 되네라.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안 땐 굴뚝에 연기 나겄나. 도망쳐 오는 사람이 더러 있다 하든데, 그 사람들 입에서 나온 말이믄." "아무 일 없일 기다. 조상이 굽어살피도록 제사를 때리 엎느니 어쩌느니, 찬물이라도 정성 아니가." "그때 그만 개깃배라도 타라 할 거로. 그 쇠가 오만발이나 빠져 죽을 놈 따문에 일이 이리 됐제." "그거는 또 무신 말고?" "우리 아아가 있던 오복점 주인놈 말이제. 그 쇠가 빠지 죽을 왜놈이 전방을 치우믄서 이자는 일자리도 없어 졌어이 징용에 가믄 돈도 벌고 기술도 배우고 넓은 세상 그겡도 하고, 사알사알 꼬우는 바람에, 어리석은 그놈 자식이 그만." "그때사 꼬우는 바람에 갔겄지마는 요새는 길에서 마구잡이로 잡아간다 하더마. 젊은 사람이 징명서 없이 나 다니다가는 큰일나는 세상이라." 몽치는 얘기하며 가는 아낙들 뒤를 슬슬 따라간다. "참말이제 그러저러한 생각을 하믄 설이고 머고... 자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래도 때 되믄 밥을 묵고 사 니." 평소보다 사람들은 많은 편이지만 장바닥은 허퉁했다. 끝물이기는 하지만 그 흔하고 지천으로 쌓이던 대구 한 마리 구경할 수 없는 섣달 그믐, 단대목의 장터였다. 대추며 잣 땅콩 곶감 같은 것도 더러 있긴 있었으나 다락 같이 비싸서 주머니에 자신 없는 사람은 엄두도 낼 수 없었고 과일도 대개 구색은 갖추어져 있었으나 비싸기 론 마찬가지였다. 아랫도리에서 거슬러 올라오는 바람속을 두 여자는 가고 몽치는 과일가게 앞에서 사과와 배 를 광주리에 넣어 달라 하고 값을 치렀다. 그것을 들고 몽치는 선창가 길로 돌아나온다. 목욕도 하고 이발도 하고 제법 깔끔해진 모습이지만 못생긴 얼굴이 어디 갈 리는 없다. 그는 지금 모화의 집 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누이 숙이와 매부 영호는 어제 평사리를 향해 떠났다. 함께 가서 설을 쇠자고 숙이 가 간곡하게 말했으나 몽치는 볼일이 있다 했고, 휘 역시 함께 가자고 권했다. 예년에는 대개 휘를 따라 산에 갔고 돌아오는 길에 평사리를 들렀는데 몽치는 휘에게도 볼일이 있다고 말했다. 휘는 그저께 처자가 먼저 가 있는 산을 향해 떠났다. "웅이할무이 기십니까?" 부엌에서 웅이할매가 내다보았다. 웅이도 함께 내다보았다. 의형제를 맺으라고 웅이할매가 애원했던 그날 이후 처음 찾아온 것이다. "웬일이고? 이 단대목에." 반가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편 무안하고 괘씸해하는 심정도 나타난 표정이었다. "단대목이니께 왔지요." "고향에는 안 가고?" "지 겉은 놈이 고향은 무신 고향입니까." "고향 없는 사램이 어디 있노." 몽치는 햇볕이 따뜻해 보이는 마루 끝에 가서 걸터 앉는다. "절로 나서 절로 컸제요. 이거나 받으시소!" 몽치는 광주리를 내밀었다. "아아니, 그러믄 우리 줄라꼬 사왔나?" 과일 광주리를 들고 있는 것을 못 본 것은 아니었지만 웅이할매는 자기네한테 가져온 것이라고는 감히 생각지 못했다. 과일을 사가지고 가는 길에 술 한잔 마시려고 들른 것으 로만 알았다. 그러니 반색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리집에 이런 거를 사오는 사람이 다 있다니." 얼른 받아서 살강 위에 올려놓는데 웅이가 목을 빼고 그것을 올려다본다. "고맙다. 명절이라꼬 이런 거를 받기는 여기 와서 처음이구마는." "지도 이런 거 들고오기는 처음이오." "처음이라꼬? 그라문 와 그라제." "..." "사람이 매력궂게 남의 청을 뿌리치더마는." 역시 반가우면서도 무안하고 섭섭했던 감정을 강하게 나타낸다. 그러나 웅이할매는 궁금했다. 저절로 나서 저절로 컸다는 말이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흘러내리는 치마 말기 를 몸을 흔들며 두 손으로 밀어올리면서 "저분때는 누님이 둘이나 있다 안했나? 고향도 없고 저절로 컸다믄." "그거는." 하다가 몽치는 슬그머니 웃는다. "고향도 근본도 모리는데 우애 누님이 둘이나 있노 말이다." "그러는 데는 그만한 내력이 안 있겄소. 나는 마, 신세타령이 딱 질색이라요. 하야간에 빈말을 한 거는 아닌께 요." "자네가 그렇기 말을 한께 이 늙은 기이 부끄럽고 민망하구마." "..." "하지마는 아무나 보고 신세타령하는 거는 아닌께." 웅이할매는 부루퉁해서 말했다. "그보다도 웅이어매는 어디 갔십니까?" "대목이고 해서 외상값 걷으로 갔는데 안 오네." "그라믄 술 한잔 주소." 하고 뭉치는 작은방으로 들어간다. 웅이할매는 끈 떨어진 매 쳐다보듯 작은방 닫혀진 방문을 쳐다보다가 "사나아가 오세바세 안하고 입이 무거븐 거도 좋다마는 남의 말을 귓들으로 듣는 것도 그리 좋은 거는 아니구 마는. 아가 웅아." "응." "능금 하나 주까?" "응!" 웅이할매는 살강에 올려놨던 과일 광주리 속에서 빨간 사과 한알을 꺼내어 씻고 닦고 해서 웅이에게 쥐어준 다. 술상을 디밀어 넣어주고 웅이할매는 부뚜막에 앉아서 나물거리를 다듬는다. 웅이는 사과를 먹지 않고 안고 있 었다. "묵어라, 와 안 묵노?" "옴마 오믄 묵을 기다." 웅이할매는 나무새를 다듬다 말고 웅이를 쳐다본다. '저눔 자식이 에미한테는 잘 가지도 않더마는 마음속은 그기이 아니든가배.' 슬그머니 혼자 웃는다. "웅아." "응." "묵어라. 묵고 나믄 또 줄 기고, 씨고 나믄 옴마랑 할매도 묵을 긴께." "씨고 나믄, 그기이 멋꼬?" "내일이 정월 초하루니께 터줏대감 대접은 해야제. 조앙에도 빌고." 작은방에서는 술을 더 달라는 말도 없었고 돌아갈 기색도 아니었고 얼마후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참 숫구도 좋다. 남의 집에서 잠이 오까? 그것도 섣달 그믐날에." 웅이할매는 중얼거렸다. 모화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어두워진 뒤에도 한참 지났을 때 저녁은 어쨌느냐 하며 그는 돌아왔다. "웅이만 먹었다. 능금 하나를 묵더니 밥은 잘 안 묵고, 지금 잔다." "능금이라니요?" "아 참, 몽치 그 총각이 사왔더라. 지금 작은방에서 코를 골믄서 자고 안 있나." "와요?" 모화는 정색을 하면 묻는다. 그때야 비로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웅이할매 얼굴에 당혹해하는 빛이 떠 올랐다. "그러씨 ... 고향도 없고 절로 나서 절로 컸다 캄서 ... 니는 어디 갔느냐 묻더마." "얄궂어라." 웅이할매는 딸의 얼굴을 살핀다. "니 또 울었더나." "아니오." "눈이 빨간 거를 보이 또 바닷가에 가서 울었는갑네?" "흘릴 눈물이나 어디 남아 있겄소?" "하기사 머, 외상값은 좀 걷혔나?" "더러 받긴 받았소." "섣달 그믐날 니도 와 논이 안 나겄노. 남 사는 거를 보믄 절로 논이 날 기다." "그만두소. 한해 두해 겪는 일이라서 논이 날 기요? 남 사는 거 치다보고 살라 카믄 목이 뿌러질 기요. 엄니가 그런다고 내 속이 편해지겄소!" "그나저나 저 방의 저 사람은 우짤 기고?" "가라 해야지요." 모화는 목에 두른 목도리를 풀고 작은방으로 건너간다. 벌거숭이 전등에 불이 켜져 있었다. 시간이 되면 들어오고 시간이 되면 나가는 전기니까 저 혼자 켜진 거겠지 만. "보소, 일어나소!" 몽치는 한잠이 들어 있었다. "일어나라 카이요! 남자 없는 집에 이래도 되는 깁니까." 방문이 열려 있어서 찬바람이 방안으로 몰려들었다. 깨우는 모화 목소리보다 찬바람에 잠이 깬 듯 "어크, 그새 잠이 들었든가?" 몽치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장석겉이 서 있지만 말고 앉이소."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화를 올려다보며 몽치는 말했다. "날도 저물고 하니 어서 가소." "내가 할 일이 없어서 여기 온 줄 압니까? 술 몇잔 묵을라꼬 온 것도 아니오." "그라믄 머하로 왔소." "앉기나 하소." 어정쩡하다가 모화는 앉았다. 몽치는 팔을 뻗어서 방문을 닫았다. "그런께 내 본명은 박재수요. 몽치는 아명이구, 조실부모, 산 속에 떨어져서 살았소. 누이가 한사람 있고는 천 지간에 혈혈 단신이오." 신상 보고를 하듯이 말했다. 모화는 멍청한 표정으로 몽치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외로븐 사람끼리 우리 함께 살문 우떻겄소?" "머라꼬요?" "의형제니 머니 하는 것보다 부부로 사는 기이 우떻겠느냐 그 말이오." 모화의 좀처럼 변하지 않는 낯빛이 변했다. 벌겋게 됐는가 싶었는데 다음 순간 하얗게 질린다. "실성을 했는가배? 허파에 바람든 소리, 그런 말 하지 마소!" "와요!" "말이라고 하요?" "그러씨, 와 말이 안되는가 이유가 있을 거 아니오." 모화의 얼굴은 한층 더 창백해졌고 눈동자는 이상한 빛을 내고 있었다. "명색이 총각인데 아이 달린 제집을, 그것도 나이 많은 제집을, 누구 놀리는 기요?" 으르릉거리듯 말했다. "법에 어긋난다 그 말이오?" 말에 쫓기는 한 마리 짐승같이 모화는 벽을 등지고 몽치를 쳐다본 채 대꾸를 못한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분 노와 상처받은 신음과 실낱 같은 희망이 타고 있었다. "내가 아는 법은, 장개 못 간 엄더레총각이 과부나 소박데기를 뒤비시 업고 와서 사는 것을 나라에서는 눈감 아주었고 여자가 남자보다 나이 많은 것은 우리네 혼인 풍속 아니었던가요? 머가 또 잘못됨 것이 있다믄 말해 보소." 모화는 도무지 처음부터 몽치가 맨정신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못 가겄소. 그렇게는 못하겄소." "술장사를 하는 여자믄 다 그렇게 쉽기 농락될 줄 알았소?" "내 세상에 살다가 청혼을 농락이라 하는 가람 처음 보겄네. 그러지 말고 웅이어매, 내 하는 말 좀 진중하게 들어줄 수 없겄소?" 결사적으로 치켜들었던 독사 대가리가 힘이 빠져 까부라지듯 모화는 고개를 떨구었다. "노류장화, 노는 곳에서 만난 것맨치로 살다가 그만둘 기라는 생각이 든다믄, 하기는 머 웅이어매가 노류장화 도 아니고 나는 그곳에서 노는 한량도 아니오만, 아무튼 의심이 생긴다믄 민적부터 먼저 하고 살아도 좋소." 모화는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몽치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런 실없는 말 하지 마소. 처녀들이 얼매든지 있는데 왜 하필 나 겉은 여자를 얻을라 카요. 누가 들어도 웃 일 일 아니겄소? 그라고 팔자 기박한 년이 앞으로 무신 일을 당할지 뉘 알겄소. 두분 다시 나는 그런 꼴 안 볼라요." "누더기 무서바서 장 못 당군다는 말이 있더마는 그 짝이네. 앞날을 알고 사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소. 앞날 걱정하다가는 물가에도 못 가고 산중에도 못 가지. 선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그럴 바에야 그만 죽어부리지 와 사는고? 리치가 안 그렇소?" "그라믄 나 겉은 제집을 와 택했는지, 머 볼 것 있다고 그러는지, 나는 아무래도 깨달을 수가 없소." "그야 좋으니까 그렇제. 이유가 머 따로 있겄소? 신발이란 제 발에 맞아야 하고, 내 발에 맞일 기다 싶은께." "얼매나 젂어봤다고 ..." 하다가 모화는 얼굴을 쳐들었다. "나는 남자한테 정이 떨어져부린 제집이오. 이대로 사는 기이 내 소원이오. 하지마는 이대로 살기가 너무 어러 버서," 잠시동안 못이 메는 듯하다가 "세상 풍파 다 겪었는데 못할 말이 머 있겄소. 그라믄 기둥서방 노릇이나 해주소." 서슴없이 모화가 말했다. 4장 적과흑 적갈색 묵직한 도어를 열고 이시다 선생이 들어왔다. 상의는 보고 있던 소설을 재빨리 책상 석에 넣는다. 교실 안의 소음은 새벽녘의 별같이 차츰 사라져갔다. 사라지는 소음의 속도는 교실에 들어오는 선생에 따라서 다르 다. 엄격하고 무서운 선생이거나,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일 때, 그 소음은 일시에 멎는다. 그러나 싫어하는 선 생, 학생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실력이 없는 선생일 때는 소름이 꽤 오래, 민적거리듯 서서히 멎게 된다. "기립!" 당번 열장 구령에 따라 나무의자의 부딪는 소리를 내며 학생들이 일어섰다. "경례!" 절을 하고 "착석!" 앉는데 한동안 또 나무의자 끌어당기는 소리가 꼬리를 이었다. 이시다 선생은 출석부를 펴고 호명을 한다. 재 미없고 지루한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상의는 역사 과목은 좋아했지만 이시다 선생의 수업은 지겨웠다. 서양사 를 하는데 사람도 수업의 내용도 말할 수 없이 구닥다리였다. 나이도 사십은 넘었지만.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이시다 선생의 얄삭한 입술은 달싹거렸다. 안경 속의 쬐그마한 눈은 거의 흰자위가 보이 지 않아 검정콩을 연상하게 했다. 눈썹은 넓게 퍼지고 짙었다. 눈이 작았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작고 턱도 짧 았다. 면도 자국이 푸른 양볼은 푹 꺼져서 그리 크지도 않은 코가 오똑해 보였다. 좀 심하게 표현을 하자면 피 골이 상접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각반을 감은 다리는 막대기같이 가늘었고 뼈만 앙상한 양어깨는 쳐들려서 거 의 직각이었다. 키는 좀 큰 편이었다. 단벌인지도 모른다. 또 언제 세탁을 해 입는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 지만 이시다 선생은 일년 내내 카키색 국민복 한 벌로 지내는 것 같았다. 축제날에는 각반을 하지 않았고 여 름에는 흰 셔츠를 입는 그 정도의 변화뿐이었다. 그리고 올올이 드러난 늑골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그 국민 복은 늘 헐거워 보였고 초라했다. 일견 그는 고지식하고 순한 것 같았지만 원리 원칙대로, 융통성이 없는 고집 은 학생들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도 항상 기계적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워낙 말수가 적고 분노한다거나 흥분한 다거나 그런 일이 좀체 없었으므로 소리내어 학생을 꾸짖는 일은 없었다. 호명을 한 뒤 출석부를 덮어놓고 이시다 선생은 천장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그런 뒤 수업에 앞서 시국 얘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흔히 있는 일이며 다른 선생들도 때때로 시국 얘길 하곤 했다. "우리들은 보다 더 긴장해야 한다. 전선에서는 매일매일 천황폐하를 위하여 대일본제국의 남아들이 죽어가고 있다. 총후의 우리들 마음가짐이 안한 하다면 그것은 불충이다. 우리는 이번 성전에 신명을 다 바쳐서 승리로 이끌어가야 하며 천황폐하의 거룩한 빛이 사해를 덮고 생명 받은 자 그 모든 것들이 폐하 앞에서 감읍하는 세 상을 만들어야 한다. 귀축 영미는 머지않아 이 지구에서 사라질 것이다. 기필코 우리는 그놈들을 몰아낼 것이 며 오로지 매진할 뿐이다. 그러나 가장 명심해야 할 일은 천황폐하의 신금을 편안하게 하는 일로서, 우리 오기 미는 억조창생의 어버이시며 군왕이시며 또한 현인신이시다. 우리는 일사불란,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바쳐서 국가 만대의 안녕은 물론 팔굉일우의 이상을 완수해야하며 영원토록 와가기미의 옥체를 보위해야 한다 ... 우 미 유카바, 미즈쿠 가바네, 야마 유카바, 구사무스 가바네, 오키미노 헤니코소 시나메, 가에리미와 세지." 마지막 부분에 와서 이시다 선생은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 구절을 암송했다. 바다에 가면 물에 잠기는 시신, 산에 가면 풀이 우거지는 시신, 오로지 대군 옆에서 죽겠노라, 결코 돌아보지 않으리, 대강 그러한 뜻인데 "만 엽집"에 실린 오토모 야카모치의 노래 일부에다 곡을 붙인 것으로서 일본 해군의 의식가였으나 요즈막에 와서 는 학교에서도 의식가로서 빈번히 불리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의 여파인 듯, 아무튼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 데, 이시다 선생은 하얀 손수건을 꺼내었다. 안경을 걷어 눈물을 닦으며 "오오 덴노사마 덴너사마." 하는 것이 아닌가. 반의 삼분의 일쯤 되는 일본 아이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감격해 있었지만 조선 아이들은 말 똥말똥, 더러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는 것이었다. 피골이 상접한 사내가 우는 것도 그랬지만 덴노사마라는 용어 자체가 잘 쓰이지 않는 것이었고 다분히 희극적 표 현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면 센세이사마 했 다면 그것은 무식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이 존경을 표하기 위한, 지나친 것으로 간주하는 게 통례다. 수쇼사마 다이진사마 하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한데 불행하게도 교실 한 구석에서 낄낄낄, 아주 낮은 웃음 소리가 났 다. "다레카(누구냐?)!" 이시다 선생의 얄싹한 입이 마치 허공만큼이나, 엄청난 크기로 벌어졌다. 목소리는 뇌성벽력이었다. "와랏타 야쓰와 도 이쓰카(웃은 놈은 어느 놈이냐)!" 교실 안은 마치 죽음의 바다처럼, 정적에 응고된 것처럼 느껴졌다. 상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딸꾹질이 나 올 것만 같았다. 바로 옆에 앉은 옥선자가 웃었던 것이다. "데테고이(나와라)!" 이시다 선생은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를 질렀다. "다마카와! 오마에다로(너지)!" "..." "오마에가 와랏타나아(너가 웃었구나)!" "..." "데데곤카(나오지 못하겠나)!" 달려간 이시다 선생은 선자의 가슴팍, 교복을 움켜쥐고 교단 앞까지 질질 끌고 나왔다. "고노 후추모노, 한갸쿠샤!" 뺨을 연달아 갈긴다. 그러더니 선자를 벽면 쪽으로 끌고 가서 벽에다 머리를 짓찧기 시작했다. 쓰러지니까 발 로 차고 짓밟고 이시다는 완전히 짐승이 되었으며 들린 사람 같았다. 학생들 속에서 고함과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일본 학생들만은 차갑게 구타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서운 폭행이다. 선자의 비명과 이시다의 으르 렁거리는, 포효하듯 외쳐대는 소리, 무시무시한 폭행이다. 바로 이것이, 이시다의 광란하는 모습이야말로 일본인의 실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질고 심약한 자도, 양심을 운운하고 도덕을 논하는 자도, 부자 빈자 할 것 없이, 유식한 놈이나 무식한 놈 가릴 것 없이 일본인은 거의 모두가 신국사상 현인신에 대한 광신자들인 것이다. 일본에는 투철하게 진실을 탐구하는 지성이 없다. 만세일 계, 현인신이라는 황당한 그 피막을 찢고 나오지 않는 이상 그 땅에는 진실이 존재할 수 없고 지식인은 말라 버린 샘터와도 같은 심장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일본이 어째서 섹스의 왕국인가. 말라버린 샘터를 채우기 위함이요 그나마 진실과도 같이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가 말했고 20년대에 유명한 바 있는 에로, 구 로, 난센스, 말할 것도 없이 그로테스크는 칼, 피, 괴기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에로티시즘과 상합하고 무의미 의 결과를 낳는다. 그 세 가지야말로 일본 문학이 변함없이 되풀이해온 주제다. 높게는 탐미주의 문학이요 낮 게는 육체문학이다. 그 땅의 역사는 사람들을 그렇게 가두어왔다. 아무리 석학이라 해도 진리에 봉사하는 것은 차선이요 이른바 일본국체에 관한 한에 있어서 그것이 반진실임이 명백함에도 이론적으로 날조 조작에 동참하 는 것이 그들 석학들의 절대선이요 최고 지상의 사명인 것이다. 그 사명을 위해서 진실은 언제나 서슴없이 필 요에 따라 우그려놓는 구리 그릇과도 같은 것이며 그들에게는 역사의식이 없다. 종교나 철학이 발붙이지 못하 는 것이 그 땅이다. 자체적으로도 그렇다. 소위 신의 말이라는 것이 도요아시하라는 영원히 내 자손이 통치한 다, 그러니까 상속 문제 이외는 달리 말이 없는 신도에다가 다시 말하자면 종교로서 갖추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신도에다가 신불습합 이니 신유습합 이니 하면서 불교와 유교를 끌어다가 신도에 접을 붙이려고 애썼지 만 결국 허사였고 명치 이후 신도는 도독이니 조상 숭배니 애매 보호하게 흐지부지되고 만 것이 그 땅의 실정 이다. 지성이 진리에 봉사하지 않는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그러나 한두 가지, 에도시대 후기 , 국학자사대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히라타 아쓰타네가 있는데 그가 신대문자라고 들고 나온 것이 한글과 흡사한 것이었 고, 그는 이것이야말로 일본의 신대문자로서 조선에까지 전달이 되어 언문이 되었노라 강변했고 일본의 저명 한 언어학자 가나자와 쇼사부로는 그의 연구 저서 "일한양국어동계론"에서 조선어와 일본어는 동일 계통의 언 어로서 조선어는 일본어의 한 분파에 불과하며 그것은 마치 유구어와 일본어와의 관계와 같은 것이라 했다. 그 저서는 영역까지 해서 내놨는데 그 저의는 뻔한 것이다. 그는 진실을 탐구하고 학문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 었고 다만 국책에 순응했던 것이다. 날조하고 기만하는 것도 소위 현인신을 정점으로 하는 국체에 이바지하는 것이라면 그 자체가 그들에게는 진실이요 도덕인 것이다. 우리는 저 유명한 1928년 3월 15일을 기억한다. 그 연월일은 고바야시 다키지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지만, 그 날의 공산당 검거 선풍은, 보통선거에 임하여 공산당 이 내놓은 정책 중 첫머리에 군주제 철폐! 특히 그것에 기인한 것으로 현인신의 광신자들에 의해 그날을 기하 여 공산당은 철저하게 고립무원 속에서 함몰되고 말았다. 반전론자 반군주제를 주장하는 자는 그 땅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같은 틀에서는 비교적 자유롭다 할 수 있는 언론계라고 예외는 아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인데 동경이라 했든지, 아무튼, 서양 포로가 실리어 가는 광경을 본 어느 여인네가 "오카와이소니(가여워라)." 했다고 해서 일제히 신문들이 두들기고 나선 일이 있었다. 소위 히코쿠민이라고 무섭게 몰아댄 것이다. 식민지 인 조선, 진주에까지 그 소문이 날아들었으니 여론의 비등이 얼마만한 것이었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 얌전 하고, 카와이소라는 말에 오자를 붙였으니 필시 얌전한 여자였을 것이며, 인정 많은 그 일본 여자는 어찌 되었 을까? 남경 30만 대학살에 대해서는 구린 데 뚜껑 덮어놓고 견디면서 한 여인의 인간적 연민을 국적으로 몰고 불충자로 매도하는 그 왜소함이여. 하기는 언론계가 군국주의의 첨병이니 말해 무엇하리. 지금 교실에서 벌어 지고 있는 비희극도 바로 그런 것이다. 이시다는 교육자도 선생도 아니고 천황폐하의 첨병인 것이다. 이 사건은 상당한 물의를 일으켰다. 옥선자는 정학 처분을 받았고 이시다는 조선 학생들 가슴에 미친 개로 남 았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서 학부형들간에도 말이 많았다. 남학생도 아니겠고 시적 시집을 갈 과년한 여학생 을 그럴 수 있느냐, 여식아이를 집떠나보내면서까지 다른 지방에 유학을 시켰다면 그래도 행세깨나 하고 집안 일 터인데 부모가 가만있겠는가, 상급학교까지 보낼 형편이면 매 때려가면서 길렀겠는가, 한두 번의 손찌검도 뭣할 텐데 개패듯이 팼다 하니 그게 어디 있을 법한 일인가, 지금껏 여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듣 도 보도 못했다. 교육자가 아니라 순 백정놈 아닌가, 그런 비난의 소리를 학교측에서도 의식했던지 옥선자의 정학 처분은 의외로 빨리 풀렸고 집에서 항의를 했는지 내용을 알 수 없으나 그는 학교로 돌아왔다. 사실, 식민지 조선에 나와 일본인들은 질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약고 냉담하고 악랄한가 하면 포악하고 무지막지해서 더러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그런 부류도 있긴 있었다. 약고 냉담한 쪽은 정신적으로 조선인을 경 멸했고 포악하고 무지막지한 것들은 힘으로 조선인을 지배하려 했다. 그리고 멍청하고 어리석은 부류는 조선 인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어떤 점에서든 월등한 조선인에 대해서는 예의가 바르고 저자세로 나오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말하자면 진실로 존경한다는 뜻인데 그것은 아마도 강자 지향의 그들 역사 때 문인지 모른다. 물론 여학교의 교사들이 최고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지만 약고 냉담하고 악랄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인데 학생들 또한 선발된 상류층 집단인 만큼 때린다는 그 야만적 행위는 금기로 되어 있었다. 결국 그 들도 찜찜하니까 정학을 쉽게 풀어주었을 것이다. 웃었다는 것은 불경죄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웃었다는 것 하 나로 불경죄의 증거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여하튼 돌아온 옥선자에게는 전교 학생들 맘이 모두 쏠렸다. 호기심 의 눈도 있었지만 가슴 아파하고 분함을 참지 못하는 그런 눈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옥선자의 태도 였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학교 생활로 돌아와 있다는 것이었다. 애초, 옥선자가 웃은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시다 선생이 그를 지목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옥선자가 있는 쪽에서 소리가 나기도 했지만 이미 교사들간에 옥선자는 불량학생, 문제학생으로 낙인찍혀 있 었으며 교무실 출입이 잦았고 특수한 용모 때문에 그를 모르는 교사는 없었다. 옥선자의 별명은 많았으나 대 표적인 것이 유령 미인이다. 미인이란 옥선자에게는 일종의 반어였으며 미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를 보면 연 체동물을 연상하게 한다. 낙지와 같은 느낌, 또 하나의 별명은 버들 미인인데 버들가지 같은 몸매를 두고 붙여 진 것이지만 몸이 약한 그는 체조 시간이나 교련 때는 버드나무 밑에 서서 늘 견학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중 심 없이 허늘허늘 걸었고 체중이 가벼워 그랬던지 발소리 없이 다가와 학생들을 곧잘 놀라게 했다. 사실 그는 마음씨 좋은 아이였다. 눈빛이 유순했다. 그러나 뾰족하고 날카로운 콧날은 마귀할멈 같았고 엷고 작은 입술은 꽤 수다를 떨 것같이 보였으나 말수는 적었다. 다만 이따금씩 하는 말은 지능지수를 의심하게 했으며 남의 감 정을 상하게도 했는데 결코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의 또 하나의 별명은 대학생이었다. 지각을 밥먹듯 했 고 결석이 잦았으며 공부하고는 진작부터 담을 쌓은 상태였으나 그럼에도 곧잘 그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곤 했다. 빛바랜 듯한 노랑머리는 숱이 적고 부드러워서 늘 흘러내려 얼굴을 덮었다. 그가 문제학생으로 떠오른 것은 남학생과 편지를 주고받는다거나 몰래 영화 구경을 간다거나 그런 일 때문은 아니었다. 사소한 잘못을 지속적으로 하기 때문에 문제학생이 된 것이다. 첫째, 게으르고 숙제나 일기를 써온 일이 없으며 과제물, 그러니까 재봉이나 수예 같은 것을 마무리하여 제출 한 일이 없고 결석 지각뿐만 아니라 슬그머니 조퇴를 하는가 하면 공부 시간에는 딴 책을 꺼내어 보고 있었 다. 야단맞는 일에 옥선자가 면역이 되어 있다면 선생들은 두손 바짝 들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학교에서 문제 삼은 것은 또 따로 있었다. 여학교에서는 흔히 있은 S에 관한 것인데 소위 의형제, 서로 마음에 드는 하급생 을 골라 프로포즈를 하는데 그것은 연애 감정 비슷한 것이어서 학교에서는 엄금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반반하게 생긴 상급생이나 귀엽게 생긴 하급생은 거의 모두 S를 맺고 있었다. 소위 그 프로포즈하는 편지의 전달자가 바로 옥선자였다. 그 일이 발각되어 번번이 교무실에 끌 려가서 꿇어앉곤 하는데 그는 그 일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누구든 부탁하면 기꺼이 맡았고 때에 따라서는 예 쁜 아이를 점 찍어놨다고 반 아이에게 권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배고픈 사생들을 위해, 그는 하숙을 하고 있었 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하여간 배고픈 사생들을 위해 암거래하는 떡집이나 기타 음식점에 소개하는 것도 그의 소임이었다. 또 한 가지는 사감의 손을 거치고 싶지 않은 내용의 편지를 그는 부쳐주었고 답장을 사생한테 전 해주는 일이었다. 그렇게 봉사를 하건만 반 아이들을 그를 소외했다. 자기 볼일만 보면 그만, 옥선자를 친구로 서 상종하려 하지 않았다. 외모에서부터 그는 회피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고독했으며 고독을 즐기는 듯도 했고 초연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학교에 나오게 되고 시일이 지나면서 모든 것은 원상으로 돌아갔다. 처음 그에게 쏠렸던 동정심은 다 식 어버렸고 옛날 같이 옥선자는 소외되고 소홀하게 대접받는 존재가 되었다. 상의는 그러한 옥선자를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상의 역시 다른 아이들과 관점이 다를 것이 없었고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였지 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늘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비난이 있었다. 게다가 은근히 옥선자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부터 더욱이 그를 멀리하려 했고 기분이 언짢았는데 이상하게 그럴수록 어떤 아픔이랄까 자괴심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날도 수업이 끝나고 종회도 끝나고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옥선자의 가늘고 긴 팔이 상의 눈앞에 쑥 뻗었다. "이거, 우리 오빠가 가져왔는데 너 줄려고 가져왔다." 자그마한 봉지 하나가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었다. "뭔데?" 상의는 쌀쌀하게 물었다. "사탕이야, 딸기사탕. 오빠가 동경에 있거든. 오면서 사왔어" "싫어. 내가 왜 그걸 받니?" 질색을 하며 책보를 들고 급히 교실에서 나오는데 "리노이에산!" 아무개야, 나랑 노올자아! 하며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같이 옥선자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노이에 쇼오기산!" 상의는 더욱더 걸음을 빨리 했다. 두 귀를 막고 싶을 만큼 그 목소리가 싫었다. 신발장 속의 신발을 꺼내어 신 고 운동장을 뛰다시피, 그리고 기숙사고 돌아왔다. 책상 앞에 앉아 숨을 내쉬는데 가슴이 따끔따끔 아픈 것 같 았다.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었다. '정말 싫은데 ... 아이 싫어!' 상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언제였는지, 신경에서 소학교에 다닐 적의 일이었다. 인혜하고 함께 학교에 서 나왔는데 이상한 노파가 계속 뒤따라오는 것이다. 겁에 질린 상의와 인혜는 결사적으로 뛰었다. 상의는 그 때 일이 생각났다. 그 노파는 고모였고 그 고모를 얼마나 싫어했는가, 더욱이 금밀수 사건으로 아버지 어머니 가 체포되었을 때 고모가 밀고한 줄 알고 그 얼마나 노여워했던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을 때 당황 하고 죄책감을 느꼈던 일도 생각이 났다. '공부 그만두고 집에 가버릴까?' 모두들 학교에서 돌아오기 시작했는지 현관 쪽이 시끄러웠다. "무택이가 말이야 막 우릴 째려보지 않아?" "니시야마 선생이 미우면 미웠지, 왜 우리한테까지 그러니?" 목소리와 함께 방 앞을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상의는 소설에서 본 일이 있는, 인상에 남은 한 구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을 얻지 못하는 불행보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이 더욱더 큰 불행이다.' '왜 나는 싫은 것에 대해서 견디지 못할까? 정말 싫다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감정이야.' 17세의 상의는 ES 여고 3학년이었다. 3년 전 정월에 조선으로 압송된 부모를 뒤쫓아, 외가가 있는 통영으로 동생들과 함께 온 상의는 그 불운했던 사건이 마무리된 후에도 어머니 보연의 와병으로 1년간 휴학했다. 일년 을 보낸 뒤 상의는 복학을 강경하게 명령하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고 외삼촌 허삼화는 전학 수속에 필요한 서류와 선처를 바란다는 편지를 매형으로부터 받았다. 3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상의는 외삼촌과 함께 진주에 와서 전학 수속을 마치고 ES여고의 학생이 된 것이다. 상근이도 금년 들어 이곳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학교 기숙사에 들어 있었다. 한편 신경서 진주로 돌아온 천일은 버스회사에 취직을 했으며 진주와 통영을 내왕하는 버스를 몰고 있었다. 그는 집도 넓고 하니 사의와 상근을 맡겠다 주장했으나 보연은 완강하게 그 제안을 물리 치고 오누이를 각각 학교 기숙사에 넣은 것이다. 상의는 옛날같이 명랑한 아이는 아니었다. 내성적이며 병약해 보였고 책을 많이 읽는 여학생, 매사에 소극적인 것 같았으며 옛날의 그 활달한 상의를 상상할 수 없었다. 상 의의 성격이 달라진 것은 아버지와의 이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단순히 사업하는 가람 이상의 다른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되었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도 알게 되었 다. 어릴 적에 부모 다라 만주로 가서 그곳에서 성장한 상의에게 조선은 낯선 풍토였다. 그러나 조국이었고 고 립되고 폐쇄된 남의 땅 신경의 생활과는 달리 눈 들면 가는 곳마다 산이 있듯이 열려진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 은 모두 조선사람이며 귀에 들리는 것은 조선 말이었다. 도대체 일분은, 일본인은 무엇이며 왜 우리 땅에 와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가, 그것도 머릿속에다 실끔을 놓듯 가르쳐준 것은 고국의 산천이며 사람들이었다. 상의 는 일본 사람, 일본인이라는 조선말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왜놈, 왜놈의 새끼, 쪽바리라고들 했다. 통영은 어떤 곳이었던가. 이순신 충무공이 좌정했던 곳이며 왜적이 몰살당한 고장이다. 그 자부심은 맥맥히 흐르고 있 었으며 명정리 충렬사는 통영 사람들 마음속의 영원한 성지다. 상의는 외조부를 찾아오는 적잖은 노인들, 소위 유림들의 깐깐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외삼촌 허삼화를 찾는 친구들의 분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바 닷가 뱃사람들, 기갈센 장바닥의 장사꾼들, 장날이면 작은 배 타고 모여드는 섬사람들, 선창가에서 팔짱끼고 짐을 기다리는 지게꾼, 그들의 목소리도 다 들어었다. 일본, 일본인에 대해 두려움보다 모멸의 감정이 훨씬 강 했고 노골적이었던 그들의 언어. "지금 재판소 있는 곳이 옛날 아문 자리제, 그거를 흘고 재판소 지을 적에 왜놈이 몇놈 급사했구마." "영문이 끼어졌을 적에 모두 땅을 치며 대성 통곡을 했다." "왜놈들, 밤에는 세병관에 얼씬 못한다. 구신들이 나와서 잡아묵을까 봐 겁이 나는 기지." "그놈들이 충렬사를 없앨라꼬 사당에 들어가기만 하믄 뒈지는 기라. 해서 충렬사는 손을 못대고 남아 있는 기 지." 그런 전설 같은 얘기, 그것은 길고 긴 역사에서 오는 자부심이었고 슬픈 넋두리였다. 일본인 또한 치졸하게 거 들먹거리며 동방요배니 황국신민의 맹세니, 기타 만화 같은 행위를 조선인에게 강요하고 결사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것도 선험적 열등의식 때문일 것이다. 상의는 진주에 와서 또 보았다. 남강에 있는 논개바위를, 왜 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해싸는 그 바위 위에 섰을 때 상의는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으며 그 바로 위 촉석루, 또 그 바로 위 한 단 높게 조성된 일본 신사를 보았을 때의 분노, 긴 뱀처럼 꿈틀거리며 진주 시가를 누비고, 계단의 수만큼 높다는 것인지 가파른 계단을 숨가빠하며 올라가서 학생들은 대오를 정비하며 촉석루 를, 논개바위를 내려다보며 신관이 두드리는 막대기 소리에 따라 신사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다. 진주는 일견 유장한 것 같았다. 그러나 결코 꺾이지 않는 기개, 민란의 진원지요, 왜적에게 항쟁한 기골의 흔적은 역 력하며 분위기로서 일본인을 압도하고 있다는 것을 상의는 피부로 예리하게 감독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가족 을 두고 왜 또다시 만주로 떠나야 되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또 한 가지, 상의를 변하게 한 것이 있 었다. 그것은 독서였다. 책을 읽게 된 시초는 외삼촌 허삼화가 소장한 책에서부터였고 처음 재미있는 소설류를 얻어다가 읽던 것이 차츰 독서 범위가 넓어졌으며 허삼화 서가는 그러한 상의의 독서욕의 공급원이었다. 그것 은 굉장한 영향이었다. 남들은 내성적이며 소극적으로 보는 상의였으나 기실 그의 내부에서는 반항의 정열이 불타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리울 때, 아버지 신변에 불안을 느낄 때 반항의 영정은 한층 치열해졌으며 여자 혁 명가를 꿈꾸기도 했다. 그 아버지의 소식이 요즘 뜸해진 것이다. 해서 우울했던 참에 옥선자의 구타사건이 발 생하여 상의를 경악하게 했다. 옥선자가 싫고 좋고 그런 것을 떠나서 상의는 전율과도 같이 일분을 일본인을 증오했다. "리노이에산!" 방문을 두드리며 누가 불렀다. "리노이에산 있어?" "응." 상의는 맥빠진 대답을 했다. 방문을 열고 들여다본 아이는 3학년 2반, 기숙사 5호실에 있는 미나미 준코, 그러 니까 남순자였다. "혼자 있구나, 모두 안 왔어?" "왔다가 나갔겠지 뭐." "안 나가?" "어딜?" "모두 발리볼을 하고 있어." "난 싫어." "얘두 참," 하다가 남순자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가자. 나 너한테 할말이 있어." "뭔데?" "굉장한 뉴스, 하지만 절대 비밀이다.절대로." 남순자는 상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들이 기숙사 현관 문을 열고 나섰을 때 바로 그곳은 학교 운동장이었고 둥 글게 원을 그리고 서서 사생들이 발리볼을 하고 있었다. 2료와 3료는 담장으로 막았고 출입문이 있었으며 정 원이 넓었다. 수목이며 돌이며 제법 근사한 왜식 정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것은 일본 아이들의 기숙사였다. 1료와 4료는 학교 밖에 있었으며 학교 담장 옆의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키 큰 포플러, 포플러 잎새가 바람 에 찢기듯 흔들리고있는 곳이 기숙사 정문이었다. 우리 저어기 가자." 남순자는 상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의 손은 뜨거웠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남순 자가 운동장을 질러서 상의를 끌고 간 곳은 온실 옆의 무화과나무 밑이었기 때문이다. 그 곳은 상급반 여학생 들이 곧잘 밀담을 나누는 곳이었던 것이다. 방과 후의 교정에는 발리볼을 하는 사생말고는 별로 학생들이 눈 에 띄지 않았다. "너 소문 들은 것 없어?" 쌍꺼풀이 굵게 진 남순자의 눈이 반짝반짝 및났다. "무슨 소문? 나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여간 큰일이 벌어진 게 아니야. 지금 중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는 거야." 상의는 공연히 가슴이 내려앉았다. 중학교라니까 동생 상근이 생각이 났던 것이다. 상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본 남순자는ㄴ 그도 상의 못지않게 긴장을 하면서 말했다. "이거는 굉장한 비밀이야. 이런 말 하고 있는 걸 알면 우리도 경찰서에 붙잡혀갈 거야." ..............?" "학교에서도 그러고 경찰서에서도 비밀이 새나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는데." "무슨 일인데?" 상의는 안타깝다는 듯 말을 재촉했다. 남순자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기, 봉안전에 말이야 봉안전 앞에다가 누가 똥을 싸놨다는 거야." "뭐라구!" 상의는 펄쩍 뛰듯 놀란다. "그거 정말이니?" "글세, 나도 전해 듣기만 했으니까 확실한 건 모르지 뭐." "정말 그랬을까?" "지금 경찰서는 불난 집 같다 했어." "잡혔다는 거야?" "안 잡혔으니까 불난 집 같다 하지 않았겠어?" "잡히기만 하면 죽이겠지?" "설마, 징역 살겠지." "아니야. 죽일 거야." "지금 경찰서에서는 밖의. 사람이 했는가 학교 안의 학생이 했는가, 그것도 종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거야. 공 연히 의심나는 사람들만 잡아들이고 있다는 거야." "고문을 하겠지." "그럼." 봉안전이란 일본 천황의 소위 어진영을 모셔놓은 곳이다. ES여학교에는 천황의 척어가 교장실 어딘가에 간수 되어 있겠지만 봉안전은 없었다. 규모가 큰 학교에는 대강 있는 모양이었다. 일분 신사 비슷한 조그마한 석조 건물로서 3단 정도의 기단 위에 있었는데 봉안전 앞이라면 틀림없이 그 기단 위일 것이다. 누구든 앞을 지나 갈 때는 절을 해야 하며 절대로 접근해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그 봉안전 앞에다가 똥을 싸놨다면 그것은 정말 보통일은 아니다. 말하자면 천황 얼굴에다 똥을 싼 격이며 대일본제국에 대하여 그 이상의 모욕이 어디 있겠 는가. 총부리를 겨눈 것 이상이다. 학교 당국이나 경찰서가 벌벌 길 일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결사적인 것 은 너무나 당연하다. 상의는 자기 자신이 범행한 것처럼 새파랗게 질려서 벌벌 떨었다. 남순자도 상의의 그런 태도를 보고 공포를 느꼈는지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미나미산, 아무보고도 그런 말 하지 말어. 누구한테 들었느냐고 추궁하며 큰일 나아. 나도 누구한테 들었느냐 고 묻지 않겠어." "그, 그래." 언젠가 남순자는 만주, 우리 독립군의 지도자는 김일성(전설적 인물)이라는 말을 상의에게 속삭인 일이 있었 다. 신출귀몰, 그 얼굴을 아무도 모르며 절대로 사진을 찍지 않았고 단체 사진을 찍을 때도 찍는 순간 주저앉 아 얼굴을 감춘다는 그런 말도 했다. 남순자가 상의에게 접근하고 그런 비밀스런 얘기를 하는 것은 상의가 만 주 신경에서 전학해 온 때문이며 책을 많이 읽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둘이 아주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기숙사에서 네댓 명 몰려다니는 클럽의 하나이기는 했지만. 어느덧 발리볼을 하던 아이들은 다 가고 없었다. 텅빈 운동장에는 황혼이 스며들고 있었다. 상의와 순자는 동시에 손을 잡고 뛰었다. "이애, 아무도 없다!" "늦었나 봐." 하는데 1료 쪽에서 식사를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둘은 허겁지겁 2료로 달려가서 젓가락통을 찾아들고 뛰어나왔다. 1료 식당까지 갔을 때 쇼쿠젠노 고토바(식사하기 전에 암송하는 말)가 들려왔다. 둘은 생쥐처럼 식당으로 기어들어갔다. 1료의 사감, 무타쿠(무턱이)라는 별명대로 턱과 목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은 사 카모토 선생이 힐끗 쳐다보았다. 2료의 사감 니시가와 선생은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 그는 여선생 중에 유일한 조선인이며 무용선생이었다. 고리(얼음)라는 별명의 냉정하고 매력적인 미야지마 선생은 4료의 사감이었고 눈 이 댕그랗고 얼굴도 둥그렇고 안경을 끼었으며 바보로 착각하리만큼 순진하여 학생들 앞에서도 말을 더듬는 신참 사토무라 선생은 일본 아이들이 있는 3료의 사감이었다. 모두 네 명의 사감과 입이 크고 먹보인 위생실 의 간호부 모리를 합하여 다섯 명이 가로놓인긴 식탁에 앉아 있었다. 사생들은 가로놓인 식탁을 중심으로 세 로 열 줄 가량되는 긴 식탁에 각각 앉아 있었다. 식사가 시작되었다.상의는 뛰어왔기 때문에 그렇기도 했겠지 만 남순자로부터 들은 얘끼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려 쉽사리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다. 식당 안에는 먹 는 소리 이왼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접시에 밥은 아주 소량이었지만 쌀과 보리와 수수를 섞어 한 밥이어 서 맛은 좋았다. 어떤 때는 콩깻묵을 섞은 밥이어서 기름 냄새가 났고 사생들은 사감 몰래 그것을 골라내느라 밥을 더디게 먹곤 했다. 식사가 끝나고 쇼쿠고노 고토바(식후에 암송하는 말)를 끝냈을 때 "일어서지 말고 기다려라." 하고 사카모토 선생이 말했다. 사감 중에서는 그의 호봉이 제일 위였다. "내일은 토요일이지요?" "네." "내일 수업이 끝나면 점심 빨리 먹고 한시까지 사생은 모두 운동장에 집합하세요." 사생들은 의아해하며 일제히 사카모토 선생을 쳐다본다. "과수원에 풀매러 가는 겁니다." 왜요, 하듯 사생들의 시선이 사카모토 선생에게 모였다. 어째서 사생들만 풀매러 가느냐 하고 묻는 눈빛들이 다. "대신 돌아올때는 감자를 얻어올 수 있어요." "와아!" 몇몇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으나 대부분은 불만스런 표정이다. "날로 식량은 부족하고 과수원에서는 일손이 달리니까 서로 편리를 보자는 거예요. 공연히 아프다고 엄살부리 며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하세요. 자아 그럼 됐어요." 식당에서 사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리노이에산!" 몰려나오는 속에서 상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상의 가까이 다가와서 손에 무엇인가를 쥐어주고 급히 가버리는 것이었다. 시라카와 진에이 였다. 상의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 얼굴이 뽀얗고 눈동자가 약간 푸 르며 머리털은 갈색, 아주 특이하게 아름다운 소녀였는데 어른들은 그를 보고 여식답게 생겼다고 했다. 성질이 유순하고 우등생이며 또한 모범생이었다. 상의의 학업 성적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 진영이 와 친 해졌는지 상의는 그 동기가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튼 상의는 진영을 굉장히 좋아했으나 세심한 배려는 늘 진 영이 쪽에서 했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진영은 정다운 언니같이 상의에게 자상했다. 그는 1료의 사생이었다. 상 의는 1료를 나섰다. 사방에서 어둠이 묻어 왔다. 바람이 이는지 나뭇잎새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리 에는 오가는 사람이 더러 있었고 학교의 빨간 담벽을 따라 2료로 가는 사생들이 저만큼 한 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진영이가 쥐어준 것은 데루야의 만게쓰였다. 진주 명물인 생과자다. 어제 저녁 기숙사 사생들이 받은 간식은 사과 한알과 생과자 하나였다. 이미 사생들 뱃속에서 소화가 끝난 간식이 었고 물론 상의도 어제 저녁 한방 아이들과 함께 그것을 먹었다. 식량 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배급에 의존하여 연명하고 있는 상태이기는 하나 여하튼 기숙사에서는 하루 걸러서 오야쓰라는 이름으로 간식이 나오는데 가끔은 맛보기 힘든 만게쓰 같 은 생과자도 있었다. 하루 걸러서 그나마 꾸준히 간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여학생이라 하여 사외에서 귀엽게 보아주는 면도 있었지만 학부형중에는 업주나 상인들이 많았고 사감들의 정치적 수완도 좋았다 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한창 발육기에 들어선 사생들에게는 코끼리의 비스킷 격이었고 늘 사생들은 배고파했다. 식욕이 왕성하고 비윗살 좋은 아이들은 식모할머니한테 따리를 붙여서 누룽지를 얻어먹기도 했으며 비루하고 참을성 없는 아이들은 밤이면 바구니 마다 아침거리로 씻어놓은 쌀을 슬적 퍼다놓고 먹다가 다른 아이들에게 눈총을 받기도 했다. 대개 지방에서는 집안 형편들이 괜찮은 편이어서 사생들은 방학해서 돌아올 때, 미숫가루며 유과 며 여러 가지 먹을 것을 장만해 오지만 열흘을 넘기기가 어려웠고 운수 사납게 사감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혼 이 났다. 기숙사에서 내놓는 음식 이외에 먹어서는 안되다는 규칙 때문이다. 운동장에 들어선 상의는 자기 몫 을 먹지 않고 남겨두었다가, 진영이 지어준 만게쓰를 꺼내어 한입 베어 물었다. 토요일이 지나고 일요일 아침, 기숙사의 기상 종소리는 언제나 그랬지만 사생들에게는 원망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어제는 상당 한 거리의 독골까지 걸어가서 풀을 매고 돌아왔기 때문에 사생들은 모두 녹초가 돼 있었다. 그러나 역시 일요 일은 가슴 설레는 날이다. 신청한 용돈을 받아쥐고 외출을 한다는 것은 신바람 나는 일이었던 것이다. 기숙사 를 나온 사생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짓기도 하면서 흩어 졌다. 상의가 천일이 집에 갔을 때 상근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나......" 상근은 활짝 웃었다. 상근은 제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키가 작았다. 신사참배 띠 어쩌다가 중학교의 행렬과 여 학교의 행렬이 엇갈릴 때가 있는데 일학년에서도 맨 꽁지에서 부지런히 걷고 있는 상근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걸으면서도 누이를 찾듯 3학년 여학생 대열에 힐끔힐끔 눈을 보내곤 했다. "상의 오나?" 호야네도 반가워했지만 호야할매가 더 반가워했다. 천일이 진주에 오면서부터 천일네는 평사리 작은아들 집에 서 진주 큰아들 집으로 옯겨온 것이다. 집도 기와집이었고 만주서 벌어온 돈도 있었으며 안정된 직업, 버스운 전수니까 든든했고 차를 몰고 다니는 만큼 시골서 식량도 구해놓고 아쉬울 것 없이 살고 있었다. 천일네는 아주 신관이 좋았다. 그는 보는 사람마다 "만고에 편하다, 늘그막에, 아무 걱정이 없네라." 곧잘 자랑을 하곤 했다. "상근아." 상의가 불렀다. "응." "얼굴이 까칠하구나. 상급생한테 맞았니?" "아아니." "밥은? 적지?" "날 조끄맣다구.............밥을 뺏아 먹어." "누가?" 그러나 상근은 구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별일은 없지?" 상의는 상근의 표정을 유심히 살핀다. "아무 일 없어." 상근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상의는 봉안전 사건을 물어보려다가 그만둔다. 그 말이 풍설이거나, 아니면 상근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밥이 곧 될 기다. 너이들 배불리 믹일라고 아지매가 바바 안쳐놨다. 모두 귀한 자식들인데 공부 와가지고 배 를 졸졸 굶고 있이니." "점심 먹었어요." 상의 말에 호야할매는 "말 안해도 안다. 접시바닥에 서너 술 깔아놓은 것 묵고 어찌 견딜 기고, 지금 나이엔 돌이라도 삭일 긴데, 집 에 있었이믄 머를 묵어도 너거들 창자사 못 채우겄나. 너거 어매 고집도 어지간하다. 방도 많고 여기 있이믄 묵는 거사 안 기럽을 긴데." 호야할매는 혀를 탔고 상의와 상근은 잠자코 있었다. 오누이는 차려준 점심을 맛나게 먹는다. 모리를 조금 섞 어서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에다가 된장 고추장을 풀고 파롸 풋고추를 듬뿍 넣고 마른 갈치를 넣어서 끊인 찌 개, 마늘장아찌, 된장에 박은콩잎, 사캉사캉 씹이면서 향기가 나는 김치, 주로 왜식인 기숙사에 서는 고추장도 천하 일미요, 누군가가 구해온 고춧가루를 왜간장에 풀어 도시락, 밥 위에 얹어서 먹으면 살맛이 나는 그런 처 지고 보면 실로 오누이가 받은 밥상은 성찬이 아닐 수 없었다. 호야할매는 편히 오누이가 밥을 먹게 배려한 듯 큰방으로 건너갔다. 그쪽에서 식구들은 점심을 먹는 눈치였다. "누나, 입에서 살살 녹는 것 같다." "그래, 참 맛있구나. 하지만 삼 주일에 한번이다. 약속한 것 알고 있겠지?" "일요일마다 오라 하던데, 아저씨도 그러고 할머니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염치를 차려야 해. 친한 사이에도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말 몰라? 요즘 식량 사정이 어렵기는 누구나 다 마찬가지야." 상의는 타이른다. "알았어. 한데 누나." "왜 또?" "아버지 한테서 편지가 왜 안 올까? 누나도 편지 못받았지?" "응 아마 바쁘셔서 그럴 거야." "하지만 전엔 자주 하셨잖아." ".............." "무슨 일 있는 거 아닐까?" "무슨 일?" 어느 정도 알고서 저런 말을 하나 싶어서 상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 그때, 신경서 그 일을 당한 뒤 자꾸 이상한 꿈을 꾸어." "............" "아버지가 수갑 하는 모습 말이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상의는 펄쩍 뛰었다. "그래도 꿈이 그런걸." "그때 아버지 잘못은 없었어. 아버진 결백했단 말이야." 그 말에는 어머니 보연에 대한 불만이 약간 내비쳐져 있었다. "그건 그렇지만........" "쓸데없는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공부? 누나 무슨 말 하는 거야, 공부하는 시간이 어디 있어? 밤낮 훈련이야. 훈련 아니면 군수 공장에 가서 일하고." "하긴 그래." 상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중학생, 그들은 과연 학생인가? 카키색 교복에 전투모를 쓰고 배낭을 짊어지고 각 반을 다리에 감고 그들은 등교한다. 운동장에서는 연일 목총을 들고 군사 훈련을 받는 것이 그들의 교과다. 완 전한 전투 태세였고 사실그들은 전쟁이 쉬 끝나지 않는 이상 고스란히 전선에 내몰릴 판국이다. 지난달 그러 니까 8월에는 드디어 조선에도 징병제도가 실시되었다. 누군가의 말로는 조선인에게는 병역을 실시하지 말 것 이며 절대로 무장시켜선 아니된다 하고 명치천화이 유언을 했다든가 어쨌다든가. 사실이 그렇다면 얼마나 다 급했으면 유언을 무시하고 징병제를 시행하겠는가. 아무튼 앞으로 중학교 군사 훈련에 박차를 가할 것은 너무 나 뻔한 일이다. 공부 안하기로는 여학교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전보다 교련 시간이 많아졌고 목검이다, 나기 나다 . 손잡이가 긴칼. 중이나 여인의 무기, 연습용은다 하며 무술 시간은 체육이나 무용 시간을 완전히 점령 했고 모내기에서 보리베기, 벼베기에 동원됐으며 폐품 수집에서 국채 팔러 다니기, 센닌바라 만들어주기, 공장 에서 미완성으로 나온 군테(목장갑) 마무리 작업, 게다가 방학의 10일 간을 반납하고 교사 부지 고르는 데 동 원 된 근로 봉사, 그런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성가시고 고통스러운 것이 방공 연습이었다. 재작년 12월 8일 영미와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8일에는 반드시 방공 연습을 하는데 그것이 여간한 만화가 아니었다. 의상부터 가 낮도깨비라고나 할까. 한여름 더운날에도 검은 즈킨이라는 것으로 온통 머리통을 감싸고 고테(손등을 가리 는 것)라는 것 역시 검정빛이었으며 몬뻬에서 교복 웟도리, 거르니까 머리에서 발끝까지 검정 일색인데 일본 말로 하자면 구로쇼조쿠가 된다. 전쟁에 나가는 무사인지 시합에 나가는 무사인지, 거기다가 여학생 키의 두 배가 넘는 장대 갈고리며 역시 불 끄는 데 쓰인다는 먼지떨이 같은 것이 부착된 장대를 어깨에 둘러메고 천으 로 된 바케쓰, 들 것, 두급 약품의 상자며, 그런 소도구를 손에 들고 햇빛이 튀는 운동장에서 시꺼먼 군상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호각소리는 요란하고, 그것뿐이면 또 모르겠는데 간첩 잡는 연극까지 하게 된다. 간 첩의 역할은 학교 앞에 있는 약방 주인이 도맡아 하는데 그를 잡아내는 여학생들이 킬킬거리며 웃는다. 그러 면 교련선생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누나." "응." "내일 합동 방공 연습 하는 것 알어?" "알어." 상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합동 방공 연습이란 진주에 있는 중학교 사범학교 농업학교, 이 네 개의 학교, 전 교생들이 남강 강가의 사장으로 나가서 함께 벌이는 방공 연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 살벌하기 짝이 없는 행사 가 학생들에게 로맨틱한 감정의 물결을 일게 하는 이유는 남학생 여학생이 다같이 사춘기였기 때문이다. 심리 적으로 사회적으로도 그랬지만 엄한 학칙 때문에 단절되고 폐쇄된 여학생 남학생의 세계가 어쨌든 한 자리에 모여서 꽤 긴 시간 서로간의 행동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그리 흔히 있는 기회는 아니었다. 기대와 호기심 과 설렘은 당연한 현상이었던 것이다. 신사참배 때도 간혹 중학생의 행렬과 여학생의 행렬이 길 위에서 엇갈 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여드름 투성이의 남학생들은 가자미눈이 될 수밖에 없었고 여학생 들 대열에서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새들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러면 행렬 옆을 따라 가는 선생들은 공연히 옆을 보지 말라고 소리지르곤 했다. 쌍방에서 다같이 볼 수 있는 얼굴들은 뭐니 해도 교기를 든 학생이며 얼굴이 잘생겼든 간에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의 순이 된다. 그러나 외관상으로는 소대마다. 소대의 단위는 한 학급이지만 방장형으로 앞 소대와 거리를 두고서 마치 물체같이 행군을 하고 있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정이나 사회에서도 적령기, 혹은 적령ㄱ를 앞둔 남녀 사이의 접촉은 금기로 되어 있었고 학 칙은 또 추상 같았지만 그럼에도 내밀하게 편지를 주고 받는 학생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소 문이 나면 불량학생으로 찍혀 학생들 간에서 소외되었고 만일 학교 당국에서 아는 날에는 퇴학 처분을 당할밖 에 없었다. 해서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연애 편지가 날아올까 두려워 전전긍긍했다. 수치심도 큰 것이었지만 여 자로서의 일생이 망가진다는 공포심 때문이다. 특히 보수적 성향이 강한 지방에서 모여든 기숙사 사생들에게 그런 경항이 두드러졌다. 1료와 4료는 학교 밖에 있었고 기숙사 문만 나서면 학교 붉은 담벽을 사이로 길이 있었으며 그 길은 등교하는 중학생들의 통로였기에 올라가고 내려가며 중학생과 사생들은 얼굴을 마주치게 돼 있었다. 그래서 여학생들은 기숙사 문을나서기에 앞서 윗주머니 밑에 꿰매어놓은 이름표를 재빨리 윗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어야 했으며 엎어지면 코닿는 곳의 학교 정문에 들어서면 이름표를 꺼내놔야 했다. 그짓을 부지 런히 하는 사생들 중의 한 사람이 상의였다. 그런 살얼음 같은 분위기 속에서도 발 없는 소문은 떠돌았다. 짝 사랑하던 중학생이 결국에는 병들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갔느니, 누구는 편지질을 하다가 여학생 부모가 고발하여 퇴학을 당했느니, 달밤에 강가에서 누가 중학생 누구와 만났느니, 중학생들이 가장 많이 짝사 랑을 하는 당자는 시라카와 진에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범생이며 우등생이었기에 불량소녀라는 점이 찍히지는 않았고 피해도 없었다.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가 무리 속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상 아같이 흰 얼굴과 갈색에 가까운 머리털, 푸른 기가 도는 눈동자, 서양 인형을 연상시키는 미모 때문인데 성격 은 아주 유슨하고 차분하며 참한 규수감이었다. 학교 선생들도 진영이를 좋아했으며 그러나 잘난 체하지 않는 성품 때문에 아이들의 시기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연애 편지에 관하여 근거가 있는지는 모를 일이나 옥선자 가 중계 역할을 한다는 풍문이 있었다. 해서 아이들이 그를 꺼리는 이유 중에는 그 풍문도 포함이 되었다. "이제 그만 먹어. 배탈나겠다." 먼저 숟가락을 놓은 상의가 웃으며 말했다. 상근이는 미련이 남은 얼굴이면서도 배가 불러서 숨이 차오르는지 별수없이 숟가락을 놓았는데 무안 타듯한 몸짓을 하며 픽 웃었다. 사의는 상을 들고 나갔다. 구야네는 밥그릇 을 들여다보며 "밥이 남았네? 와 다 안 묵고." 하고 말했다. "아주머니가 너무 밥을 많이 담아서 그래요." "하기사, 너거들이 언제 밥을 그리 많이 묵던 아이들이가. 신경있을 적에는 뭐가 기럽었노. 쌀밥에다가 개기 반찬이지마는 너거들이 밥을 안 묵어서 얼매나 음마한테 야단을 맞았노. 너거들의 그 쪼매한 양도 못 채우주 는 세상, 참 큰일이다 언제꺼정. 이럴긴가." "그래도 여학생 기숙사의 배급은 많은 편이래요." "화 아니라. 그런께 적어도 밥을 묵지. 다른 사람들은 배급받아서 밥 못 묵는다. 모두 죽밖에 못 묵지." "배급받아서 그것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렇다 하데요." "죽도 씨래기를 잔뜩 넣어서 살알은 오리 가다 하나씩, 참말이제 우리도 밥 묵기가 미안하네라. 이웃이 알까 두럽고, 숭년에 남의 몫을 훔치묵는 기분이 든다." 구야네는 설거지를 하며 부뚜막에 걸터얹은 상의에게 얘기를 계속한다. "어무이도 말심하시기를 우리도 죽 묵자, 하늘이 무섭다, 그러나 우선은 양식이 있인께 사람의 맴이 어디 거렇 나? 내사 마, 너거들이라도 자주 와서 배불리 묵고 갔이믄 싶은데 구야아배도 내가 머 너거들은 푸대접해서 안 오는 거로 아는지 들먹이쌓는다. 뉘 덕에 우리가 오늘 이렇게 사는데? 내가 푸대접하겄노." "외출을 자주 할 수가 없어요." "일요일에는 와 못 오노? 그라믄." "그러는 또..... 볼일도 있고 해서, 걱정 말아요 아주머니, 굶어 죽지는 않아요." 상의는 웃었다. "상근이가 너무 불쌍하다. 삐쩍 말라가지고. 한창 묵을 땐데 아이꼴이 말이 아니다." "크느라고 그렇겠지요." 구야네는 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참 우리 상의도 이자 철 들었다. 요새 니를 보므는 어른이 다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루에서는 구야할매가 상근이를 상대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상의는 설거지하는 구야네를 바라보다가 부엌에 서 나왔다. 구야네도 대강 설거지를 끝내었는지 이내 뒤따라 나왔다. "아이들은 어디 갔어요?" 생각이 난 듯 상의가 물었다. "외갓집에 다 갔다. 외삼촌이 말시바이(곡마단) 구겡시키준다 캐서 갔네라." 구야할매가 말했다. "요새도 그런 것 할 수 있어요?" "머 동네에 들어온 쬐그마한 것이겄지. 그 사람들도 벌어야 배급 쌀이라도 안 타묵겄나?" 하자 구야네가 "그러다가 징용에 붙잡혀 가믄 우짤라고." "젊은 남정네야 있일까? 제집아이들하고 늙은 사람이 하겠제. 그나저나 성환할매가 아프다 카이 큰 걱정이다." "아프다니 어무이는 그 말을 뉘한테 들었십니까?" "독골의 두만네 성님을 장에서 만났다. 평사리 다니온 모양이더마." 구야네는 잠자코 있었다. 평사리에 갔다 왔다면 필시 시동생에 관한 소식도 들었을 터인데 구야할매의 언급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한분 들여다봐야 하겠는데." "다녀오시지요." "그러씨......" 하다가 구야할매는 상의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상의 니도 성환이를 알제? 정성환이 말이다." "네." 했으나 상의 대답은 시무룩했다. 성환은 물론 알지만 성환할매에 대해서는 말로만 들었지 기억은 뚜렷하지가 않았다. 성환은 몇번 만남 적이 있었다. 처음 전학해 왔을 무렵, 진주에 볼일이 있어 내려와 있던 환국이가 기 숙사로 상의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홍이에 대한 배려였던 것 같았다. 그도 선생이 직업인 만큼 사감하고의 대 화가 수월했던 모양이다. 일요일도 아닌 토요일인데 외출을 허가 해주었고 상의는 환국이를 따라 최참판댁에 갓던 것이다. 거기서 상의는 서희를 만났고 그 위엄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자주 들르라는 서희 말이 있었으나 상의는 그 후 한번도 그 집에 간 일이 없었다. 그때 상의는 중학교 상급반인 성환을 만났다. 그러나 중학생 여 학생의 처지도 처지려니와 상의는 극도로 긴장해 있었고 쌀쌀하게 그를 대했으며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 먼발치로 등교하는 성환을 본 적은 있으나 상의는 의식적으로 그를 외면했다. 두 번째 성환을 만 난 것은 작년 가을이었다. 장씨 아저씨가 진주 온 길에 상의를 면회하러 온 일이 있었다. 장씨 아저씨는 아버 지 어머니가 통영경찰서에 갇혀 있을 때 외갓집을 두 번이나 다녀갔고 아버지가 만주로 떠난 뒤에도, 일년 동 안 상의가 어머니의 병을 간호를 하고 있을 때 장씨 아저씨는 세 번이나 찾아오곤 했다. 그런 경위로 하여 상 의는 친척같이 생각하느 터였는데 장씨 아저씨가 기숙사에 나타났을 때는 혼자가 아니었고 성환을 동행하여 왔던 것이다. 그는 대학생 제복을 입고 있었다. "집안 내력을 알고 보믄 동기간이나 진배없고, 성환이도 이자는 대학생이 됐으니께 상의도 오빠겉이 그렇게 알아놔라." 하고 장씨 아저씨는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의는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두 번째도 거부감을 느꼈기 보다 제복에 거부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학교 규칙이나 사회의 눈이 두려웠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그들은 청춘 남녀였으니까. 구야할매 입에서도 성환의 이름이 나오기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오매불망, 손주 때문에 눈물로 세월을 보내더니, 이자는 성환이도 대학생이 되었으니 할매가 원풀이 한풀이를 다 했일 긴데 아프기는 와 아프는고. 옛말 하고 살아야 하는 긴데." "아픈 거사 인력으로 되는 일입니까." 구야네가 말했다. 그 말에 다소 신경이 쓰이는지 구야할매는 며느리 얼굴을 잠시 살피다가 "오죽 답답했이믄 그런 말을 하까. 대학을 아무나가 가는 기가. 하늘의 별을 따지. 옛날로 치자믄 상놈이 과서 한 거 아니든가배? 좀 있이믄 성환이가 졸업을 할 기고 그렇기 되믄은 늙은이가 늘이보고 살 긴데 와 그리 고 랑고랑 아프노 말이다. 그 성님 살아온 거를 내가 아는데, 나도 너거 시아부지 가시고, 그 원수놈, 헌병놈한테 총맞아 가신 뒤로는 세상이 적막강산, 온갖 풍상 다 겪었다. 하지마는 그 성님한테 비하믄은 청풍당석이었제. 하모, 아무것도 아닌 기라. 자식들은 눈앞에 보고 간께....... 상의야." "네." "성환이집이 옛날 너거 할아부지가 살든 집이라는 거 아나?" "알아요." "하기는 알 기다. 상의 상근이가 쪼맨할 때 평사리에 오고는 했인께, 상근이사 너무 애리서 모릴 기다마는." 그것은 어슴푸레 상의도 기억하고 있었다. 공이 구멍이 나 있던 마루에서 성환이 남희, 그리고 몹시 거칠었으 며 못생긴 머슴아이 귀남이, 그들과 함께 놀았던 기억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마루에서 내려가려고 짧 은 다리를 자꾸 자꾸 뻗다가 겨우 신돌에 발끝이 닿았던 그때 불안했던 느낌도 남아 있었다. 구야할매는 얘기 를 계속하고 있었다. "인물이 준수하고 공부 잘하고 아이가 진중하고 어디다가 내놔도 나무랄 데가 없는 성환이 아니가. 아배를 닮 아서, 그 못돼묵은 에미년을 닮아시믄 안 그럴 긴데...... 답대비 아이가 수이 없는 기이 그기이좀, 에미 없이 자 라서 그런지 풀이 죽은 것이 맘에 안좋다." 성환은 물론 출중한 편이었지만 외모는 구야할매가 말하는 것만큼 준수하지는 않았다. 풀이 죽어 있다기보다 말이 적은 편이었다. "석이가 떠난 지도, 몇 세월이 됐는지, 수을찮이 됐일 기다. 그 아아들이 아주 어맀일 직 일인께, 아마 애비 얼 굴도 모를 거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와서 아아들 치다보믄 기가 맥힐 기다." "살아 있이야제. 하모, 살아 있이야 하고말고. 제집만 온당한 거를 만냈이믄........ 숭악한 년. 제 소나아를 형사 놈하고 붙어서 경찰에 잡아넣을라 안했나? 살인죄인이라도 제 가장이믄 못 그랄 긴데. 제년은 조선 백성 아니 든가? 하기사 지금도 왜놈하고 산가 카이 애씨당초 종자가 다른 기라. 영팔이 노인이 지금도 그년 말만 나오 믄 이를 덕덕 간다. 아무튼 그 바람에 석이가 튀고는 감감소식 아니가." "세상이 이런께 살아 있다 캐도 쉽기는 못 돌아오겄구마요." 상근이는 가물가물 눈을 감았다가 뜨곤 한다. 얘기의 내용도 잘 알 수 없었지만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졸음 을 쫓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상의는 유심히 듣고 있었다. 석이에 고나한 것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버지하 고의 어떤 동질감 때문에 상의는 유심히 듣는 것이다. "그러니 성환할매도 골병이 드는 거 아니겄나. 참말이제 죄참판댁이 아니었으믄 그 식구들 살아남기나 했이 까? 그댁 은혜가 백골난망이다. 그댁 아들도 엄전하고 사리가 깊어서, 성환이를 대학까지 보내준다는 것이 보 통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건데?" "장래가 있일 기라고 본께 그랬겄지요." "그래도 그렇지. 애비가 있어도 대학까지 공부를 시켰겄나. 잘해야 중학이지. 남도 그러는데 그 천하에 몹쓸 년, 그 숭악한 년이 이제 와가지고 개까죽을 썼는가 무신 낯짝 치키들고 키우놓은 남회를 뺏아깟노 말이다. 그 성님 그래저래 해서 병이 났일 기다. 명천에 하나님이 기신가, 우째서 악한 년이 성하고 착한 사램이 쇠하는지 정말 모리겄다." "언제고 벌을 받겠지요. 죄지어서 남 줍니까." 구야네 말이었다. 매사에 칠칠하고 안존하던 천일네가 나이 들면서 차츰 말이 많아졌는데 진주에 온 후 구야 할매로 불리게 되면서 더욱 말이 많아진 것은 그의 주변이 적료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연히 화 있을 곳 에 왔고 그만하면 아들 며느리도 괜찮은 편이며 손자 손녀, 평생 처음 살아보는 기와집에다가 남들이 죽 먹을 때밥 먹고 그의 말대로 만고에 신관이 편했다. 그런데도 작은 아들 내외와 갈등을 겪었던 평사리가 천일네는 그리운 것이다. 모두 낯익은 얼굴이며 말벗으론 성환할매 야무어매가 있었고 살아온 내력도 모두 그곳 산천에 널려 있었다. 성환할매 얘기를 지치지도 않고 계속하는 것도 그곳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 모른다. 붉은 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지금이 한창인 고추밭 생각이 났고 논둑길에 물 흐르는 소리며 사공들이 부르는 노랫 소리도 귓가에 쟁쟁했다. "가기는 내가 한분 가야 할 기다." 그것으로서 구야할매의 말은 끝이 났다. 상의는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상근이를 앞세우며 거리에 나왔다. 해는 남아 있었지만 곧 황혼에 휩싸일 거리는 쓸쓸했다. 일요일이어서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봉안전 사건은 헛소문이었을까?' 상근이는 아무것도 모른는 것 같았다. 그런일이 있었다면 누이에게 말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혹 발견자와 학 교 당국만 알고 재빠르게 극비 조치를 취했는지 모른다. 신중히 내사를 하고 있어서 철없는 1학년 학생들은 특히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상의는 그렇게도 생각해보았다. 여학교 정문 앞까지 왔을 때 "시간 늦을라. 어서가아." 하고 상의는 말했다. "힘들어도 참는 거야." "알았어." 멀어져가는 상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상의는 '봉안전 사건은 헛소문이었을까.' 또 한번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허전하고 실망 같은 것을 느낀다. 외출 시간을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거리엔 사생들이 삼삼오오 돌아오고 있었다. 이튿날 월요일에는 수업이 전폐되었다. 교실마다 와글와글 떠드 는 소리, 학생들은 준비해 온 즈킨을 머리에 쓰고 손에는 고테를 감아 묶고, 몬뻬는 교복이난 다름없는 일상용 이니까 갈아입을 필요도 없었다. 치마는 축제날이나 돼야 입는다. 학생들은 운동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집합 종소리가 울리면서 선생들도 한둘씩 나타나기 시작했으면 흩어져 있던 학생들도 사열대를 중심하여 모여들며 대열을 정비한다. 판에 박은 교장의 훈시가 있었고 교련선생의 주의 사항 설명이 있은 뒤 교기의 기수를 선두 로 하여 대열은 교문을 빠져나간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흑색으로 무장이 됀 대열은 시내를 누비며 지 나간다. 대열의 맨 마지막에는 구급 약품이들어 있는 접십자 마크의 가방을 메고 1 학년 조무래기들이 뛰다시 피 따르고 있었다. 시내를 벗어나 들판으로 나왔을 때 흑색 대열은 마치 벌판을 달리는 기타 같기도 했다. 논 에는 꽃이 피기 시작한 벼가 싱그럽게 바람에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낮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도동면(독골)가는 길, 연습장으로 정해진 넓은 사장 가까이까지 갔을 때 맞은편에서 카기색 행렬이 나타났다. 이윽고 네 학교의 네 줄 행렬은 사방에서 휜 모래사장을 향해 행진해 들어왔다. 그 광경을 좀 장관이었다. 큰 덩어리로 학생들이 모여자자 합동 방공 연습에 대한 훈시가 있었고 일단 소대별로 모래밭에 쭈그리고 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호각 소리와 교련선생의 외치는 소리에 따라 원형으로 물러서면서 방공 연습은 시작되가 고 두드리며 허물며 난리 법석인데, 한편에서는 길게 강가에서부터 두 줄로 늘어선 학생들은 천으로 된 바케 쓰는 다른 한줄을 총하여 강가로 돌아오고, 들것에 학생을 실고 나르는가 하면 원이 우왕좌왕, 호각 소리는 날 카롭고 요란했으나 실상 교내에서 한 학교 단위로 연습을 할 때보다 훨씬 느슨했다. 선생들도 워낙학생 수가 많은지라 통제가 잘 안되는 눈치였고 학생들 정신 자체가 벌써 장난기에다가 좀체 없었던 남녀 학생 혼성의 행동인 만큼 완연하게 들떠 있었다. 수를 믿고 농땡이를 부리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들에 게는 이런 행사 자체가 우스웠던 것이다. 하늘에서 폭탁이 떨어지는데 즈킨이다. 고테다 하는 것이 재봉 시간 에 만든 것으로 흘겹 검은 천인데 그것으로 머리를 보호하고 손등을 보호하겠느냐는 것이었고 갈고리 총채 몇 자루 들고 흔든다고 불이 꺼지겠느냐는 것이었다. 강물은 이 만화와도 같은 행사를 무심히 바라보는 것 같았 으며 하늘은 자꾸만 내려앉았고 강가의 이름 모를 풀들이 바람 따라 드러눕곤 했다. 드디어 소나기가 쏟아졌 다. 소나기는 학생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난감해 있던 선생들에게는 구언이었는지 모른다. 학생들은 신이나서 비를 맞으며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인 것 같았다. 빗속에 각각 학교마다 대오를 가다듬고 결국은 비가 그치 지 않아 합동 방공 연습은 중지되고 말아았다. 학생들은 생쥐꼴이 되어 학교로 돌아왔다. 옷들이 함빡 젖었고 시간도 넉넉히 남은 것도 아니었으며 그보다 책가방들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여느날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 2료 사생들마 보면 왜 그러는지 모르겠더라. 괜히 잔소리하고 아무것도 안닌데 야단치고, 2료의 사생들 은 모두 왜 그 모양이야, 참 기가 막혀." 기숙사로 돌아온 아이들은 옷을 갈아입고 잡담을 시작했다. "그거 몰라서 하는 소리니? 무택이가 니시야마 선생이 무워서 그러는 걸." 고수머리 장옥희가 윽박지르듯 말했지만 상의 방에 모여 앉은 사생들이 그것을 몰라서 한말은 아니었다. 사카 모토 선생과 니시야마 선생 사이의 미묘한 갈등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니시야마 선생은 전임자인 무 용선생이 좀 문제가 있어서 사임한 뒤 그 후임으로 왔다. 떠난 역시 유일한 조선인 여선생이었다. 몸집이 작고 다부져 보이며 영리한 눈동자의 니시야마 선생과 달리 키가 훤칠했던 그 무용선생은 성격이 음산했고 거칠었 으며 어딘지 모르게 비꼬여 있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의 무용 실력은 정평이 나 있다고들 했다. 사건의 발 단은 학교 뒤뜰에서 조선말을 쓰고 있던 여학생 두 명을 적발하여 교무실에 불러다가 끓어앉히는 벌을 준 때 문이었다. 그 일은 금방 교내에 퍼졌고 학생들은 흥분하고 분개했다. 같은 조선인이면서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조선말을 쓰다가 선생에게 들키면 어떤 형식으로든 벌을 받게 돼 있었다. 그러나 벌을 준 선생이 조선인이었다는 것에서 학생들은 심한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못 들은 척, 얼마든지 지나쳐버릴 수도 있었던 일인데 일본인과 다름없이 그것을 집어내어 벌을 주었다는 것이 학생들을 심히 자극했던 것이다. 아직 어리고 얼핏 보기에 매우 온순한 거 같았지만 뭔가 쏟을 곳 없는 분노, 반항심이 마음속에서 늘 일렁이고 있 는 사춘기의 여학생, 가령 출석부에 일본인 학생들 이름에다 표시를 해놨다든가, 조선인 선생의 월급이 월등하 게 적다든가, 무슨 회의 때 조선인 선생을 따돌렸다든가, 거런 차별 대우에 관한 얘기를 들으면 굉장히 민감하 게 반응을 나타내었다. 이와사키라는, 고양이같이 살금살금 걷는 국어선생이 있었는데 긴 담뱃대 물고 있는 꼴 이 야만적이라는 둥, 나태하게 한길을 팔자걸음으로 걷는 것은 꼴불견이라는둥, 불결하게 방안에다 요강을 들 여다놓는다는 둥, 수업 때 곧잘 조선인의 흉을 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교실에서는 움직이는 학생, 입을 여는 학생은 없었지만 입속에서 내는 으으으음...............그 목소리는 대단한 힘으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일본인 학생의 수가 적은 탓도 있었겠지만 이곳은 우리 조선인의 학교라는 의식이 강하여 일본인 학생들을 군 식구 취급하는 경향도 있었다. 본시 ES여학교는 미션스쿨이었으나 조선인이 인수하여 조선인 교사들로 구성 이 된 사립하교로서 배일 감정이 농후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5 년 전에 당국에서는 사립을 페지하 고 내선공학이 라는 기치를 내어 걸면서 공립으로 학급도 증설하여 새로 출발했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교장 이하 모든 선생들은 축출되었고 완벽하게 일본인 손으로 넘어갔다. 어쨌거나 그는 그렇고, 파문을 일으킨 무용선생 처사에 대해서 학생들이 교묘하게 은밀하게 배척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절 안하기, 무용 시간에는 이수 저수 써가며 골탕먹이기, 무리지어 가다가 무용선생을 만나게 되면 일제히 노려보기, 지나가다 뒷모습을 향하여 야유하기, 그런 일들은 누가 지휘한 것도 지사한 것도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조선인 학생들이 단결하여 행해진 일이었다. 한두 명의 학생도 아니었고 일본인을 제외한 전교생이 그러데는 무용선생도 속수무책, 그렇 다고 해서 일본인 선생들이 편을 들어주는것도 아니었으며 지식인 특유의 냉담과 방관으로 시종했고 더러는 잔인하 쾌감을 맛보며 그를 바라보기도 했다. 남자선생들 중에도 조선인이 한 사람 있었다. 나이 지긋한 실업 선생으로 매우 심지가 굳은 사람이어서 무용선생은 그 동족으로부터도 위로를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학교를 떠났다. 니시야마 선생은 조심스럽게 처신했다. 그러나 속없이 거만하고 심술궂은 사카모토 선생은 처음부커 조선인이라 하여 니시야마 선생을 얕잡아보았다. 치기어린 그따위 우월감이 차차 증오감으로 변하게 된 것은 4료의 사감 미야지마 선생 때문이다. 니시야마 선생이 오기 전부처 미야지마, 사카모토 이 두 선생 사이에는 암투가 있었던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미야지마 선생은 매력적인 여자였다. 고리(얼음)라는 그 별명같이 차 가운 성격, 쏜살같이 말이 빠르지만 내용이나 음성에서 어떤 여운을 남기는 것도, 투명하리만큼 창백한 얼굴, 외까풀의 긴 눈매, 그런 것이 어우러져서 독특한 매력을 자아내었다. 그를 좋아하는 학생들은 많았다. 남선생 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으며 학벌이 어마어마하다는 젊은 교감이 그를 사랑한다는 풍문도 있었다. 교감은 자유주의자처럼 교육자라는 틀에 박힌 사람이 아니었다. 교감인데고 학교 일은 도외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 다. 그런대로 무슨 특별한 배경이 있었던지 늙은 교장은 그를 은근히 대하는 것 같았고 교직원들 역시 늘 경 의를 표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러한 교감이 호감을, 혹은 애정을 느꼈다면 중환자는 아니었지만 결핵을 앓고 있는 미야지마 선생의 처지, 근무 성적도 그렇고 학교에서 여러 가지 배려하는 면에서도 교감의 입김이 들어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잖은 일이다. 아무튼 처지가 그러한 미야지마 선생과 병정같이 몸집이 크고 건강하 며 일면 날카로움도 있는 사카모토 선생의 반목은 성격의 차이에서 오는 것도 있었을 것이며 호봉의 차이가 근소하여 라이벌 의식, 질투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혹 다른 이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사감들의 세계는 두 꺼운 베일에 가려져 있어서사생들은 그이상의 추측은 할 수 없었다. 이럴 무렵 니시야마 선생이 부임해 왔고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미야지마 선생과 가까워졌으며 그들은 친밀도는 날이 갈수록 더해져서 미야지마 선생이 앓아눕기 라도 할 때는 밤을 새워가며 니시야마 선생이 간병하는 정성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3료의 바보같이 순진한 사토무라 선생도 이들 두 사람을 졸졸 따라다녔으며 덩달아서 간호부 모리까지 합세하여 그야말로 사 카모토 선생은 고립무원, 완전히 소외되고 말았다. 미야지마 선생은 성격이 차갑고 교감의 후광도 있어서 덤벙 대느 사카모토 선생의 적수는 아니었다. 결국 니시야마 선생에게 집중적으로 증오감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2 료의 사생들을 미워하는 아이들 말은 과장도 빈말도 아니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사카모토 선생은 2료의 사생 들만 보면 눈엣가시로 여기는 것 같았고 무엇이든 트집을 잡아서 싫은 소리 하는 것이 요즘의 버릇이었다. 그 것은 니시야마 선생에 대한 미움의 간접 표현이었다. 그렇게 되니까 2료의 사생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분위기적으로 니시야마 선생을 옹호하게 되었고 사카모트 선생을 적대시하여 결코 고분고분하게 대하려 하지 않았다. "1료으 나리타 아키코 알지?" 남순자가 말했다. "할머니같이 생긴그 아이?그애는 무택이 아이코 아니야?" 옥희가 말했다. 그러나 혀가 짧은 듯한 말씨였지만 이들 중에서 제일 어른스럽고 아는 것도 많으며 웅변도 잘 하는 경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이야." "뭐가?" "나리타 그애 말이야. 어째 아이코가 됐지? 공부도 별로고 생긴 것도 그런데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할머니 같은 인상에다 눈동자도 뿌옇게 흐려서, 별로 아이들하고 사귀는 일도 없잖아?" "부려먹기 편하니까 그랬겠지. 그애가 무택이 온갖 심부름 도맡아서 하지 않아? 밤에까지 볼려다놓고 팔 주물 러라. 다리 주물러라, 한다지 뭐니?" " 굉장히 신임을 받고 잇다는 거야. 1호실에 배치한 것도 애당초 심부름시킬 요량을 그랬겠지. 그앨 보고 있으 면 햇빛 보고 눈부셔하는 것 같은 그런 표정이야." 1호실은 사감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요장이 있는데 왜그러지?" "요장 시킬 일 따로 있고 그애 시킬 일 따로 있지. 하지만 진짜 아이코는 시라카와 진에이야." 여드름 투성이의 키가 작으 오송자(. 항씨개명: 구레 마쓰코)가 힐끗 상의를 쳐다보며 말했다. "왜 날 보는 거야?" "시라카와는 리노이에산 너에겐 특별한 친구 아니니?" 모두 웃는다. "하여간에 그애 입에서 나온 말인 모양인데." 남순자가 하다 만 말을 이었다. "니시야마 선생이 기숙사를 비우고 4료에 가서 미야지마 선생을 간병한 일을 무택이가 문제삼았다는 것, 너희 들은 모르지?" "뒷 땜에 문제로 삼아?" "말하자면 책임자가 밤에 기숙사를 무단을 비웠다, 그거 아니겠니?" "그래서 어찌 되었는데?" 모두 긴장하여 남순자를 쳐다본다. "아무 낌새도 없는 걸 보면 흐지부지된 거겠지 뭐, 무택이 인기가 없지 않아?" 그 정보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 사카모토 선생이 직원회 대 그말을 꺼낸 것은 사실이었다. "동료가 아픈데 그럴 수 있는 일 아니겠소? 문제삼을 것 뭐 있어요?" 남자들 반응은 그러했다. "하지만 기숙사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그 책임은 누가 지지요?" "아무 일도 없었지 않았소. 사감이라 해서 개인적 사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불가피한 일이 있으면 귀성 하기도 하는데 그럴 땐 아이들한테 맡길밖에 없지요." "시시한 얘긴 그만하고 회의 끝냅시다." 불쾌해하며 교감이 말했다. 그 말은 코앞에 사람을 세워놓고 문을 쾅! 닫아버리는 것과도 같은 무안을 주었다. "저기, 제가 책임이 잇는 만큼, 보고 안할 수도," 사카모토 선생은 우물쭈물 말했다. 1료의 사감이 수장격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교감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이며 남선생들에게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만 것이 되었다. 미야지마 선생은 저 때문에 미안 하게 됐다 했고 니시야마 선생은 앞으로 그런 일 없도록 하겠다 하여 일은 일단 결착이 되었다. "순악질이야." "비겁하고." "그게 무슨 교육자야. 고자질이나 하고." 같은 여자끼리, 아무리 사이가 나쁘다기로." 성토가 시작되었다. "무택이는 수업 시간에도 제일 차별이 심해. 일부러 책상 앞에까지 가서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물어도 들은 체만체 코대답도 안하고 물어본 아이에게 무안을 주는 거야." 사카모토 선생은 재봉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것뿐이라면? 기숙사에서는 어떻고? 신청한 대로 용돈을 척척 내주는 사람도 있고 신청 금액을 무자비하게 깎아버리는 경우, 그게 지 돈인가? 다 우리부목 쓰라고 보내준 건데 말이야. 숫제 용돈을 내주지 않는 경우도 있어. 그러고는 한다는 말이 이 도 가지고 야미 떡집에 가서 군것질할려고 그러지? 나는 다 알고 있어. 그런다 는 거야. 참, 우리가 1료 사생이 아닌 게 천만다해이지 뭔니." "야미 떡집은 어떻게 알까?" "누가 스파이짓 했겠지." "너희들은 다 모라서 그래." 남순자 말이었다. "모르긴 뭘 몰라?" "그럴 만한 이유가 다 있지." "그 이유가 뭔데?" "누구 누구는 방학에서 돌아오면서 무택이한테 비단 방석을 해다바쳤고 누구 누구는 약과 정과르 만들어 와서 바쳤고." "자알들 노다." "용돈을 숩게 받아내는 처들은 아마 그런 뇌물 덕을 보는 거 아닐까?" "더러바서." "누군 그럴 능력이 없어서 안하는 줄 안? 치사스런 그짓 하고 싶지 않아서 안하는 거지." "요즘에는 말짱 다 그판이야, 야오야노 무스메〔. 야채가게의 딸〕가 열장 된 것도 몰라?" 남순자 말에 모두 낄낄거리며 웃는다. "그애 실력이 있어." 경순이는 옹호하듯 말했다. 그 아이하고 경순이는 친한 사이였다. "그만한 실력이 그애 혼자뿐이니? 목소리만 컸다면 중대장도 시컸을 거야. 어쨌든 선생들이 그애 앞에선 한마 디씩 하거든. 아침이지 그게 뭐겠니?" "먹고 살자니 하는 수 없다, 싸고 좋은 걸 달라, 공짜면 더욱 좋고, 그거지 뭐. 모두 걸신이 들었다." "미술선생은 뭐라는 줄 알아? 애들이 점수가 짜다고 했더니 설탕 가져오면 달게 해주게다, 농담으로 한 말이 지만 그건 진담이야." "통학생 누구는 김치를 담아서 담임한테 갖다바쳤다는 거야. 마늘 냄새 난다고 말말이 흉을 보던 이와사키도 김치라면 사족을 못쓴다는 거야." "이와사키 말이 나왔으니까 그런데 왜 3 학년 3 반에 리노이에 준토쿠라는 아이 있잖아?" "그래. 얼굴이 빨갛고 뚱뚱한 아이 말이지?" "응, 이와사키가 그애 앞에서는 쩔쩔맨다는 거야." "그 얘긴 나도 들었어, 뭐 굉장한 집안이라든가? 이왕가하고 관계가 있다 하던가?" "음, 그애 서울말씨 써." "마늘 냄새 난다고 흉을 보면서 김치를 보면 사족을 못 쓰고 조선인을 야만이라 하면서 신분 높은 사람에게는 사족을 못 쓰고.......... 노예 근성이지 뭐." "리노이에산, 너 오늘은 어째 한마디도 안해?" 경순이가 화제를 중단하고 상의를 쳐다보았다. 상의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어리둥절한다. "뭘?" "왜 말이 없느냐고." "음, 다른 생각 좀 하느라고." "무슨 생각?" "그냥." 상의는 남순자를 힐끗 쳐다본다. 상의는 지금껏 봉안전의 그 사건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남순자에게 다시 한 번 그 일을 확인해보고 싶은 유혹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애는 가끔 이래, 무슨 생각이 그렇게도 많은지, 책도 너무 많이 읽으면 미쳐버리는 사람도 잇다는 거야. 너 조심해라." 그 말은 옥희가 했다. "하리모토산, 너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니? 책 많이 읽는다고 미친다면 누가 학문을 하겠어. 철학자들이 혹 그렇게 된다는 얘긴 들었지만, 우리 오빠는 늘 그래, 조선 사람들 당장은 쓰이지 않더라도 공부하는 길밖에 없 다고, 그건 장애를 위해 비축하는 거라나?" 경순이 말했다. 그의 오빠는 지금 동경에 유학중이었고 경순은 곧잘 오빠의 말이라 하며 인용하곤 했다. 아무 래도 경순의 웅변과박식과 문학 취향은 그의 오빠로부터의 귀동냥인 것 같다. "소설도 공부니?" 꼬집듯이 고수머리의 옥희가 말했다. 그는 성질이 좀 팔팔했고 변덕이 심한 편이었다. "그럼 소설 읽고 미친 사람 있어?" 경순이 반격하자 순간 말이 막혀버린 옥희는 우물쭈물하다가 화르 발끈 내었다. "너가 왜 그리 열을 올리니? 정작 상의는 잠자코 있는데 괜히 잘난 체하네." "내가 잘난 체했니? 너가 어긋장을 놓은 거지." 경순의 혀 짧은 소리가 더욱 짧게 들리는 것을 보면 그도 화가 난 것 같다. "이러지들 말어." 상의가 말리는디ㅔ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고 눈은 열에 젖은 듯 보였다. "잘난 체 안했다구? 말말이 우리 오빠, 우리 오빠 하는 말이 이렇고 저렇고, 흥! 동경 유학은 아키야마 게이준 의 오빠 혼자만 갔니?" 경순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래 우리 오빠 말 자주 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틀니 말 했니? 틀린 말은 바로 너가 하고 있는 거야. 너가." "그만들 두어, 제발." 머리를 지프면 상의가 말했다. "막상막하야. 둘 다 변호사나 해라." 벽 쪽으로 무러나 앉으면 남순자가 말했다. 오송자  웃고만 있었다. "흥! 혀 짜래기는 다 바른 말만 하는 모양이지." "뭐라 했니!" "혀 짜래기는 옳은 말만 한다 했어. 내말이 또 틀렸니?" "악취다!" "어차피 난 문학소녀도 웅변가도 아닌 속물이거든." "아이구 머리야!" 상의는 이마를 치다가 자리에 고꾸라졌다. "얘가 왜 이러니?" "심약해서 그래." "아니야, 아까부터 얼굴이 벌겋더라구. 애 상의야." 남순자가 안아 일으킨다. "열이 대단하다." "비 맞고 감기 들었나 봐." "모리를 불러와!" 상의가 쓰러지는 바람에 일단 시비는 끝이 났다. 남순자와 오송자가 3료에 있는 모리를 찾아갔다. "간고후(간호부)산." 순간 모리의 눈이 가끄름해졌다. 그는 한사코 모리 선생이라 불러주기를 원하는 터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결코 선생이라 하지 않았다. 소학교 나와서 간호부가 되었는데 여학생이 어찌 선생이라 부를까 보냐, 그러나 모리는 철없는 하급생들에게 노골적으로 선생이라 부르라 했다는 것이며 그게 다 웃음거리 얘깃거리가 되었다. 그러 나 온건한 학생들은 대개 간고후라는 호칭을 생략하고 용무를 전하거나 말을 걸기나 했다. 그랬는데 대뜸 간 고후산! 했으니 모리의 심사가 온당할 수 없다. 소문으로 일본에서도 아주 후미진 고장의 갯촌에서 왔다는 것 이며 촌스럽고 무교양하며 어딘지 모르게 지저분했다. 그는 도립병원에서 차출돼 온 간호부였다. "리노이에 쇼기산이 아파요. 와보세요." 오송자가 말했다. "너 구레 마쓰코지?" 엉뚱스럽게 이름을 묻는다. "그건 왜 묻지요?" 오송자가 발끈해서 말했다. 그러나 모리는 그 대답은 않고 "보나마나 감기겠지. 비 맞고 와서 그럴 거야. 요즘 같은 전시에 그까짓 비 좀 맞았다고 병이 나아? 정신들이 돼먹지 않았어." "설교 들으러 온 거 아니에요." "약 줄 테니까 먹여. 그리고 쉬라고 해." "어디가 아픈 것도 모르고 덮어놓고 약 먹여요?" "난 의사 아니야."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 남순자가 쏘아붙인다. "열이 있어?" "펄펄 끊어요." "그럼 감기야. 약 줄 테니, 난 지금 바빠." "뭐가 바빠!" 남순자가 반말로 따지니까 다소 움찔하던 모리는 어세를 누그러 뜨리며 "해열제 줄 테니까 먹이고 찬물 찜질을 해주어. 그래도 심하면 날데리러 와." 하고 말했다. 약을 받아 돌아오면서 "건방지게 지가 뭔데? 참 같잖다." 오송자가 투덜거렸다. 자리를 깔고 누워 있는 상의에게 약을 먹이고 찬물 찜질을 하려하는데 상의는 한사코 싫다 했다. "이제 괜찮아. 아까는 현기증이 나서 그랬던 거야. 감기 들었나봐." 안심한 아이들은 방금 겪은 일을 오송자가 보고하자 모리에 대한 성토가 벌어진다. 한참 도안 신나게 떠들어 대던 아이들, 그 덕분에 경순과 옥희의 시비는 물 건너갔으며 흐지부지 화해가 된 꼴이었는데 어쨌든 떠들던 아이들은 식사하러 가라는 2료 요장의 외침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겠니?" 나가면서 남순자가 물었다. "괜찮아. 어서 가야." 투당투당, 신발장에서 신발 꺼내는 소리, 젓가락통 흔드는 소리, 재잘거리는 소리, 그 소리들이 사라지고 기숙 사 안은 쥐죽은듯 고요해졌다. 상의는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열이 나고 머리가 아팠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 니었다. '상근이는 감기 안 들었을까.' 그도 도동면(독골) 시장에서비를 졸딱 맞고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급생들 식기를 씻어주고 속옷도 빨아 주는 조그마한 상근이 모습이 떠올랐다. 여학교 기숙사에서도 더러 그렇게 하급생을 부려먹는 상급생이 있었 다. '상근이만이라도 호야 집에서 통학하게 엄마보고 의논을 해야겠어. 아이가 점점 크기는커녕 줄어드는 것 같 다.' 일년 동안 병간호는 물론 엄마 역할을 했던 만큼 상의가 상근이를 바라보는 눈은 세심했다. 아버지가 없는 탓 도 있었을 것이다. 신경에서 어린 동생 들을 안고 울었던 기억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상근이가 그때 빨랫방 망아를 들고 나와서 고모를 때리던 생각도 났다. 가끔 생각나는 일이었다. '고모는 어찌 되었을까? 아버지가 가셨으니까 찾아와서 손 내밀어가면서 살고 있겠지. 어째서 세상에 그런 사 람이 다 있을까.' 그러나 그를 밀고자로 의심하였던 생각을 하면 어떤 죄의식 같은 것을 상의는 느끼곤했다. 생각을 하니, 집안 에서 할머니에 관한 얘기가 도통 없었다는 것, 왜 그랬을까? 고모 생각을 할 때는 늘 따라나오는 의문이었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어머니나 아버지도 가끔 했다. "점잖은 어른이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고 아버지는 할아버지 얘기를 할 때는 눈이 젖은 것을 상의는 보았다. '왜 그럴까? 할머니는 고모 같은 사람이었을까.?' 언제였는지 상의는 어머니한테 물은 적이 있었다. "친고모가 아니라면, 그럼 몇촌쯤 되는 고모예요?" "그런 것 알아 뭘해." 어머니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작 궁금한 그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고모였다. "아배가 다르니라. 말하지믄 울 어매가 날 데리고 너거 할아버지 한테 개가를 한 기라. 팔자가 기박해서 일부 종사 못한 기고, 그런께 너거 할아버지는 나한테 의붓아부지 아니가." 식사가 끝난 모양이다. 사생들이 돌아오는 기척이 났다. 그러고는 와글바글 떠드는 소리가 들렸왔다. "언니 밥 가지왔어요." 한방에 있는 2학년의 다카세 신애가 들어오며 말했다. 그이 뒤를 따라 남순자와 진영이가 들어왔다. "몹시 아파?" 하고 진영이 물었다. "견딜 만해." "미나미산한테 들었어." "무슨 큰 병이라구." "그래도 단짝인데 안 알려줄 수있니? 식사하러 안 나왔으니까 어차피 알게 될 테지만 말이야." 남순자는 그러면서 묘한 시기심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언니 어서 밥 잡수세요." 신애가 말했다. "나 생각 없어. 먹고 싶지 않아. 너희들 먹으려무나." "좀 먹어보지 그래." 진영이 말했다. "아니 입안이 써." "그럼 난 간다아." 하고 남순자는 나갔다. 진영이는 상의 이마를 짚어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병원에 안 가도 될까?" "감긴데 뭐." 실장이 들어왔다. "단짝이라 왔구나. 열 좀 내렸니?" 하고 물었다. "열이 많아요." 진영이 대답했다. "내일은 쉬어. 학교 가지 말구. 의외로 리노이에산 약질인가 봐. 보기엔 시라카와산이 더 약한 것 같은데." 하다가 실장은 진영이를 빤히 쳐다본다. "시라카와산." "네." "너를 지독하게 짝사랑하고 있는 남학생이 있다는 것 너 모르지?" "언니도 참 몰라요!" 진영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내 사촌인데 중학교 5학년이야. 그애네 집 굉장한 부자야. 지주고 양조장도 하구. 거기 시집가면 호강할 거 야." "듣기 싫어요. 상의야 나 간다." 진영은 허둥지둥 일어서서 실장에게는 인사도 없이 나간다. "순진해서 저런다." 실장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2학년 한 명 1학년이 두 명인 한방아이들도 덩달아서 웃었다. 그러나 상의는 기분 이 몹시 언짢았다. 갑자기 진영이가 자신하고는 무관한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같았고 이상하게 상실감 같은 슬픔을 느끼는 것이었다. 시집을 가느니, 결혼을 하느니, 그런 일은 여태까지 진영이나 상의 자신의 현실로 생 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실장도 부잣집 딸이라 했다. 그는 물건 사재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일요일 외출 때는 시나게 물건을 사들이는데 요즘에는 살것이 없어 그렇지, 한때는 외출만 하면 별의별 것을 다 사온다는 것이다. 이른바 결혼 준비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진주는 큰 도시였고 작은 지방에서는 살 수 없는 것도 더러 있었겠지만, 심지어 전구까지 사재기를 한다는 것인데, 그 전구도 요즈막에는 구하기 힘든 품목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4학년쯤 되면 대개 화장품 같은 것, 예쁜 그릇이며, 스탠드, 방안 장식품 같은 것을 사놓게 되곤 했다. 이튿날, 상의는 결석을 했다. 좀 무리하면 갈 수도 있었지만, 감기든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상의는 느긋하게 자리에 누워 있었다. 처음 상의가 이 학교에 전학해 왔고 난생 처음 집을 떠나서 기숙사라는 곳에 들어왔을 때는 참 견디기 힘들었다. 취침 시간, 기상 시간, 식사 시간. 자습 시간 또 무엇 무엇 하는 시간이라 해서 하루 에도 여러 번 기숙사 종이 울리는데 상의는 그 종소리에 공포감을 느꼈다.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놀랐고 자기 자신이 어떤 틀 속으로 끼여들어 가는 것 같아서 답답하고 가슴이 뛰곤 했다. 그 증세에 한계가 오면 상의는 별수없이 꾀병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결석을 하는 것이다. 그때는 1료에 있을 때였다. 현관에서 마지막 떠나는 아이들 기척이 사라지고 사방이 고요해지면 상의는 마치 자유의 천지로 나온 것처럼 마음이 기뻤다. 장방형의 기숙사 건물에는 건물 내부에 장방형 잔디밭이 있었다. 그리고 세면실 앞에는 무궁화 한 그루가 있 어서 보랏빛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상의는 혼자 잔디밭에서 뒹굴다가 방마다 돌아다니며 소설책을 집어다 가 시간 가는 줄모르게 탐독했다. 지금은 그 잔디밭에 고구마를 심었고 무궁화도 베어져서 없었다. 상의의 꾀 병은 정확하게 짜여진 시간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어느 한순간도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나타나는 일종의 우울중에 대한 치유법이었다. 그는 수없이 학교를 그만둘 생각을 했다. 그는 꿈속에서도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 고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헤매는 자신을 본다. 그것은 번번이 꾸게 되는 꿈이었다. 3 학년으로 올라오면서 꾀병의 도순는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상의는 가끔 꾀병을 앓는다. 그러나 전과 같이 소설을 탐독하지는 않았고 대신 글을 썼다. 상의가 제일 욕심을 내는 것은 노트였고 그는 상당히 질좋은 노트르 많이 구해다놨다. 운동장 에서는 조회가 끝나고 학생들은 모두 교실로 들어간 것 같았다. 정직, 마음 밑바닥까지 맑은 공기가 스며들어 오는 것만 같은 고요, 상의는 어떤 희열을 느낀다.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소중한 시간, 어느새 알지 못하는 사이에 흘러가버린 것이 아닌 기산, 심장의 고동같이 시간은 상의 곁에 있는 것이다. 상의는 천천히 노 트를 꺼내어놓고 책상 앞에 앉는다. 노트를 한장 한장 넘기는데 거기에는 빨간 잉크로 쓴 글씨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일부러 빨간 잉크로 글을 쓰겠다,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침 검은 잉크가 바닥이 났고 해서 할수없 이 붉은 잉크로 썼는데 이제는 그대로 붉은 잉크로 글을 쓰는 것이다. 이 노트는 상의의 보물이었다. 물품 검 사가 있을 것이란 말이 나돌면 상의는 노트를 신문지에 싸서 아궁이 속에 숨겨놓고 학교에 가곤했다. 가끔 기 숙사에서는 물품 검사가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난 뒤 사감들이 모여 물품 검사를 하게 되는 데 별의 별 것을 다 압수했다. 특히 많이 나오는 것이 미숫가루였다. 그것은 가끔 간식으로 나오게 되는 단팥죽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상의는 펜에다 붉은 잉크를 찍어서 노트에 어제는, 하고 썼다. 어제, 강가 풍경은 너무나 인상 적이었다. 옥봉을 비 맞으며지나올 때 우산으로 몸을 감추고 서 있는 소녀가 있었다. 대열이 술렁거렸다. 그는 얼마 전까지 학교의급사였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권번에 들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소녀는 우산으 로몸을 가린 채 담벽에 붙어 서서 행렬이 지니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옥봉은 기생집이 많은 곳이 다. 학생들은 비를 맞고 걸으면서 가엾다는 말들을 속삭였다. 상의는 한참 써내려가다가 그 이상하고도 불길 한 검은 행렬이 눈앞에 떠올랐다. 동시에 붉은 잉크 글씨가 선명하게 눈에 비치었다. 적과 흑 그것은 너무나 무서운 예감이었다. 아버지르 다시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 5장 사랑의 피안 경인열차였고 낮이어서 승객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출찰구는 다소 붐볐다. 사람들 틈새로 빠져 나온 양현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영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 나왔구나!" 눈앞이 캄캄해졌다. '안 나왔어.' 역 광장에 서서 양현은 막연한 시선을 던진다. 도시에는 가을이 머물고 있었다. 물들기 시작한 가로수 아래, 얼음 갈라지는 소리라도 들려올 것 같은, 서늘하고 푸른 하늘 아래,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는 군상들, 누더기 같은가 하면 곤충 같기도 한 군상들이 서로 방향을 달리하며 짐 실은 우마차를 지나가고 있었다. 여인을 신이 만든 꽃이라고 했던가, 자연의 열매라 했던가, 꽃으로도 열매로도 볼 수 없는 우중충한 모습들, 남자들은 한결 같은 카키색, 사람들에게는 계절이 없었다. 배급소에서 식량을 달아주고 배급표를 챙기는 그 현실만이 있었을 뿐이다. 양현은 걷기 시작했다. 검은빛 슬랙스에 갈색 재킷, 가방 하나를 들고, 또각또각 나는 구둣소리가 색바랜 것 같은 것 같은 마음에 비정한 무게로 실려온다. '전보를 받지 못했을까? 아니면 집에 없었던가.' 그러나 그 생각도 양현에게는 위로나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만일 영광이 서울에 없다면 어쩔 것인가. 어떻게든 양현은 영광을 만나야만 했다. 인천에서 전보를 친 그 순간부터 양현은 영광을 만나야만 했다. 그 하나의 생각 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럼 어떻게 해!' 전차를 타기 위해 길을 건너야 하는 지점까지 왔을 때, 그곳에 영광이 서 있었다. 그는 양현의 모습을 줄곧 지 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빠.....' 소리는 입밖에까지 나오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사라졌다. "무슨 일이야? 전보까지 치구 ." 영광이 물었다. "그냥." "그냥?" 되묻다가 영광은 대답 같은 것 바라지 않는 듯 걸음을 옮긴다. 두 사람을 길을 건넜다. 전차를 기다린다. "오빠." "......" "어디 갈 곳이 없을까?" 갈 곳이 없었다. 남산? 창경원? 우이동? 자하문 밖? 옛날에는 그런 곳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곳도 젊 은 사람들은 마음놓고 갈 수가 없다. 전시라는 의식은 그런 곳에 더욱 높은 장벽으로 군림한다. 히고쿠민이라 는 딱지가 붙기에 십상인 것이다. 총후의 국민이 할일없이 유원지에서 노닥거리고 있어 되겠는가. "대관절 뭣하러 왔어." "오빠 만나려고요." "나 만난 뒤 진주로 내려갈 건가?" "..." 전차가 왔다. 두 사람은 전차에 오른다. 영광은 왜 양현이 자신을 만나려 하는지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때 가 올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들은 돈암동 종점에 내리기까지 각기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집으로 가는 거예요?" "아니." 짤막하게 대꾸하며 영광은 앞서 걷는다. 재작년 가을부터 영광은 돈암동에 정착했다 할 수 있었다. 지리산 도솔암에 있던 영선네가 깊이 생각한 끝에, 사돈인 강쇠와 장서방과도 의논을 해서 관수의 유산이라며 손에 쥐어준 목돈, 내막적으로는 최참판댁에서 보 태어서 내놓은 돈이었지만 여하튼 그것으로 서울 돈암동에다 자그마한 집 한 채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리고 떠돌이같이 생활하고 있는 아들을 위하여 그가 결혼하게 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고 영선이는 서울에 와 있었 다. 영광이도 지방공연이나 위문 공연이 있을 때 부득이 집을 비우지만 서울에 있을때는 어김없이 집으로 돌 아왔고, 말하자면 반란적인 그 자신의 기질을 누르고 비교적 안정된 생활에 적응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양현은 서울 있을 때까지만 해도 가끔 그 집을 찾았고 영선네도 만났으며 환국이 역시 울적할 때는 술병을 들고 와서 영광이와 함께 마시곤 했다. 양현은 금년에 여의전을 졸업했으며, 지금은 인천의 어느 개인병원에 취직해 있었 다. 학교 부속병원에 남을 수도 있었고 진주 도립병원에 갈 수도 있었지만 양현은 덕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 해 인천으로 간 것이다. 서희가 노발대발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서희는 양현의 졸업을 고대했으며 진주에 돌아올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윤국이와 결혼시키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서희 꿈의 완성인지 모를 일이다. 이상현과 봉순의 딸 이양현과 최서희와 김길상의 아들 윤국이의 결합은. 당장 진주로 내려와야 한다고 엄명을 내린 서희를 설득한 것은 환국이였다. " 학교병원에 남을 수도 있고, 진주에도 도립병원이 있고 의논도 없이 그애가 어째 그랬더란 말이냐." "성적이 좋으니까 학교에 남을 수는 있었겠지만 도립병원은 관립이니만큼 다소 문제가 있겠지요." "어째서 하필이면 인천이냐? 그것도 개인병원이라며?" "개인병원이지만 규모가 크니까요. 실은 원장아주머니께서 유치원 문을 닫고 보니, 건물은 비어있고 양현이더 러 경험을 쌓은 뒤 개업을 하면 어떻겠느냐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개인병원에서." 말이 끊나기도 전에 "그것은 안된다. 병원 차릴 정도가 되면 명희씨한테 신세질 이유가 없다." "네, 그건 그렇습니다." 환국은 대답하면서 마음속으로 어머니가 변했다는 생각을 한다. 신세질 필요가 없다 한 말이 너무나 감정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당분간 양현을 놓아주십시오 현명한 아이니까 그릇된 판단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애도 집 떠나 남들이 사는곳에서 부대껴보는 것도 경험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애가 그러는 데는 무슨 까닭이 있을 거 아니냐?" "무슨 까닭이 있겠습니까." 말하면서 환국은 어머니의 기색을 살핀다. "양현이는 까닭없이 그럴 애가 아니다." 하고는 한숨을 쉬는데 그 순간 환국은 어머니와 자신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을 강하게 느낀다. 그것은 원인이 덕희에게 있다는 것과 그 일에 대해서 거론하지 말자는 생각의 일치였던 것이다. "당분간 양현이 하는 대로 지켜보다가 기회를 봐서 진주로 데려오든지 그러시는 게 놓을 듯싶습니다." 환국은 진작부터 양현에 대한 덕희의 거부감을 알고 있었다. 양현이 아프다는 핑계로 아버지 면회에 나타나지 않았을 떄 환국은 한순간 오해를 하기도 했으나 그럴 리 없다는 강한 의문을 느꼈고 어떤 서슬엔가 명희가 암 시적인 말을 하기도 했다. 환국은 비정상적인 덕희의 시샘과 양현에 대한 증오가 이미 위험 수위라는 것을 깨 달았다. 그러나 그것을 문제삼는다면 일이 미묘해질 뿐만 아니라 양현에게는 물론 덕희에게도 좋을 것이 없고 더군다나 아버지가 옥고를 치르고 있는 마당에 집안이 분란과 갈등에 휘말리는 것을 환국은 원치 않았다. 서 희 역시 그런 생각인 것 같았지만 그걸 삼켜버리기가 힘든 것 같았다. 그러니 설득을 하는 아들이나 화를 내 는 어머니나 이심전심은 하면서 말로는 변죽만 친 꼴이었다. "너의 아버지가 저리 되시고 내 마음이 갈피 잡을 수 없이 어지러운데, 양현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싶었다." 서희는 드물게 아들 앞에서 자신의 허약함을 나타냈던 것이다. 어쨌거나 모자간의 묵약이라고나 할까, 양현의 인천행은 흐지부지 승인이 된 것처럼,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영광은 양현이 따라오거나 말거나. 큰 것은 아니었지만 가방을 들어줄 생각도 않고 아리랑고개 쪽을 향해 걸 어간다. "오빠 어딜 가는 거예요?" "산에." 두 사람이 간 곳은 돈암동 뒷동산이었다. 나무도 별로 없는 민둥산이었다. 돈암동 일대, 신설동까지 내려다보 이는 산등성이에 두사람은 다같이 죄인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군데군데 체면처럼 들국화가 한두 포기, 보라색 꽃이 피어 있었다. "왜 전보를 쳤지?"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영광이 먼저 입을 떼었다. 대답대신 양현은 울기 시작했다. 영광은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담배연기를 뿜어내면서 먼산을 쳐다본다. 흐느껴 우는 양현이보다 영과의 누이 더 절망적으로 보였다. 양현이 왜 우는지 영광은 가슴이 저리도록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 일 떄문에 몇 밤 몇 날을 자신이 번민 했던가. '양현이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고 있겠지, 차라리 몰랐더라면.' 담배연기를 후우하고 내어뿜는다. 그것은 얼마전의 일이었다. 함께 술을 마시다가 환국이 흘려버린 말이었다. 어머니가 양현을 며느리로 삼으려 하시는데, 그게 가능할까?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그 순간 영광은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양현에게 사랑을 고백한 일도 없었고 자신의 신부로 꿈꾸어본 적도 없었는데, 그러나 영광은 떄떄로 양현을 소유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그것은 불가능에 대한 몸부림 같은 것이기도 했다. "오빠." 양현은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으며 스스럽게 불렀다. "나 오빠하고 함께 살면 안돼?" 영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신으로 전율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 미쳤어?" 잠긴 듯한 목소리는 지극히 낮고 평정했다. "오빠는 날 사랑하지 않나요?" 쏘는 듯한 영광의 눈빛이 양현에게로 왔다. 눈을 다시 먼산으로 옮기며 "그거는, 그거...사랑한다는 것과 함께 사는 것은 다르다." "어째서 다르지요?" "나는 아마도, 너를 파괴할 거야." "어째서요! 어째서요 오빠!" 양현은 필사적이었다. "내게는, 그, 그런 게 있어. 잠자고 있는 폭력이 있어. 그것은 피, 칼이 야." "그건 아니에요! 오빤 아직도 과거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거예요." "그런지도 모르지.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어." "무슨 뜻이지요?" "아니면 양현이가 술집 여자든지." "아아 오빠,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나는 공주를 얻기 위해 결투장에 나갈 수 있는 기사가 아니야." "그건 오빠의 진심이 아니에요. 기생의 딸하고 백정의 아들, 다를게 뭐 있지요? 우리는 다 사람이지 않나요?" "상투적인 그런 애기 하지 마. 수평이 맞아야 한다는 그 따위 시시한 얘긴 하지 말어." "그럼 워지요? 오빠 난 다급해요. 너무 고통스러워요." "결혼해." "..." "결혼해서 잘 살아. 다 그렇게들 살고 있잖아. 사람은 구십구 프로 상식적인 동물이야." 영광은 일어섰다. "이러지 말아요! 제발." 양현은 영광의 팔에 매달렸다. 그 순간 영광은 양현을 껴안았다. 격렬하게 입맞춤하면서 "사랑해! 사랑한다! 널 잃고 싶지 않다!" "..." 나는 나쁜 놈이다! 나쁜 놈이다!" 영광은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두 사람은 넋이 빠진 것처럼 산등성이에 언제까지나 앉아 있었다. 사방이 어둑어 둑해질 떄까지. 영과은 일어서서 오두마니 놓여 있는 가방을 들었다. "내려가자." 두 사람은 비탈길을 내려온다. "혜화동으로 갈 거지?" "..." "혜화동으로 가아." "안 갈 거예요." "..." "거긴 안 가요." "어떻하겠다는 거야?" 영광의 눈에 두려움이 실린다.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어머니 곁에서 잘 거예요." "어머니는 안 계서." "네?" "통영 가셨어. 누이집에 다니러 가셨다." "언제요?" "어, 어제." 하는데 영광은 왠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한다. 양현은 그러한 영광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조석은 어떡허구요." "앞집 할머니가." 두 사람은 어느덧 전차 종점까지 와 있었다. "이거." 하고 영광은 가방을 내밀었다. 떠나는 것도 보지 않고 영광은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밀치고 들어선 영광은 방으로 들어가서 벌렁나자빠졌다. 그러다가 몸을 굴리듯 엎드러져 두팔 위에 얼굴을 묻느다. . 인천의 양현으로부터 전보를 받은 것은 어제 낮이었다. 영광은 몹시 서둘러서 모친 영선네를 밤기차에 태워 통영 영선에게 가게한 것이다. 영선네는 그 전보가 통영세에서 온 것으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사유를 말하지 않는 아들에게 거듭 물어볼 겨를도 없이 황망하게 떠난 것이다. 어머니를 그렇게 서둘러 보낸 것은 물론 양현 을 만나기 위한 공간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 양현을 얻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하는 것이 옳 았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부끄럽고 치사스런 일이기도 했다. 그 순간에는 그것을 헤아리지 못 했다. 오직 양현을 쟁취하리라는 일념 떄문에 그는 자기 자신 정열의 불덩어리가 되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 다. 욕망과 희생의 싸움이었다. 사람 속으로 뛰어들어 자기도 한 몫을 하겠다는 충동과 세상을 바라보며 국외 자로서 흐르는 대로 흘러가겠다는 에고이즘과의 싸움이 었다. 집념과 포기의 싸움이었다. 도덕과 반도덕, 그에 게는 윤국이 거대한 성으로 인식되엇다. 그것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렇기 떄문에 영광은 더욱더 지신이 피를 많이 흘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치명적인 것을 믿지 못할 자기 성격적 결함이었다. 제2 의 혜숙을 또 만들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은 그의 전진에 제동을 걸었다. 영광은 양현을 사랑했으며 이 세상에 나와서, 가장 강렬한 집념이었다. 영광은 일어나 앉았다. 전등이 켜져 있었다. 재떨이를 끌어당겨 담배를 붙여문다. 그의 얼굴은 온통 눈물에 젖 어 있엇다. 한편 혜화동에서 내린 양현은 영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영광에게 윤국의 얘기를 하지 못했던 것을 생 각하며 걷고 있었다. 너무나 두려워 양현은 그 말을 입밖에 낼 수가 없었다. 편지에는 병원을 그만둘 것, 중대 사안이 있으니까 곧바로 하향할 것, 동경서 윤국이 왔다는 대상 그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양현이 서희의 의중 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양현은 단 한번도 윤국이를 친오빠가 아니 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얼마나 윤국이를 사랑했던가. 그러나 그것은 오빠를 사랑했던 것이며 그를 이성 으로 본다는 것은 끔찍스런 일이다. "아주머니." "양현이니?" "네." 뜨개질을 하다가 명희는 내다보았다. 방으로 들어서는 양현의 얼굴을 본 명희는 깜짝 놀란다. . "이애 니 얼굴이 왜 그러냐?" "왜요? 여위었지요!" "너무 수척해졌다. 남의 밥 먹기가 쉽지 않는 모양이지?" "네." "차 마시겠니?" "주세요.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그럼 밥부터 먹어야겠구나!" "차부터 주세요." 영희는 심부름 아이를 불러 이른다. 유치원을 그만두면서 홍천댁 내외도 그만두게 했고 명희는 대신 여자아이 를 하나 데려왔다. 그만두게 된 홍천댁 내외를 겪어내면서 명희는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배신의 쓰라림을 구역 질나게 체험했다. 여러 가지 교묘한 수단을 써가며 횡령한 금액도 적지 않았지만 그것이 백일하에 드러나가겠 다, 생활의 방도를 강구해달라 협박하듯 대어들던 그 끔찍스런 얼굴은 꿈에서 만날까 두려웠다. 세상에는 가지 가지 삶이 있겠으나 이런 삶도 있었던가 명희는 진저리를 쳤다. "소문 듣자니까 원장도 남편 버리고 갔는데 시동생하고 좋아 지낸 덕분으로 많은 유산을 받았다 하더군요. 우 리가 뭘 그리 큰 잘못을 했다고 빈손으로 내어쫓을라 하지요?" 홍천댁은 잡아 비틀 듯 말했고 남정네는 "수 틀리면 싹 불질러버리겠다. 그까짓 콩밥 몇해 먹지 뭐." 하고 으름장을 놨다. 환국이가 오고 명희의 재산 관리를 하고 있는 변호사가 오고 하는 바람에 사내와 계집은 풀이 죽었고 협박한 일 없다며 잡아떼다가 야간 도주를 했던 것이다. "인천서 곧장 오는 길이니?" "아니오. 어디 좀 들렀다가." 홍차를 마시며 양현이 말했다. "집에는 아직 안 갔겠구나." "네, 나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내려갈 거예요." "인천으로?" "아니, 진주 갈 거예요." "어머니가 보시면 놀라시겠다.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온종일 굶어서 그래요." "당장 병원 그만두라 하시겠네." "그러지 않아도 병원 그만 두고 내려오라는 편질 받았어요." "어째서?" "모르겠어요." 어째서? 하고 물었지만, 명희는 짐작하고 있는 일이 있었다. 고민을 많이 하는가 보군. 가엾은 아이.' 밥상이 들어왔다. 명희는 저녁 전이어서 함께 밥을 먹는데 양현은 몇술 뜨다 만다. 대신 숭늉을 한 대접 다 마 신다. "너 어디 아픈 거 아니겠지?" "안 아파요." "왜 그리 힘이 없어 보이니?" "아주머니." "왜." "서울이라고 와보아도 참 갈 곳이 없데요." "갈 곳이 없다니? 고아 같은 말을 하네." 우리집도 있고 오빠집도 있구 친구들도 있잖아." "집말구요. 아마 요즘엔 거지들도 돌아다니기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 맞어. 얻어먹을 것도 없을 거야 아마." "청량리 여옥아주머니는 어떻게 지내시지요? "괜찮다. 지금 서울에 없어." "어딜 가셨는데요?" "전에 있던 곳에 간다면서......곧 돌아오겠지." "그러다가 또 잡혀가면 어쩔려구." "지켜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하면서 명희는 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을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아주머니도 저랑 여행 안해 보시겠어요?" 양현은 명희를 쳐다보지도 않고 우울하게 말했다. 여행을 할 때는 어느 정도 설렘이나 활기 같은 것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은 무의식적인 것 같았고 죽은 말이기도 했다. 눈동자는 흐려져서 생각은 먼 곳에 떠돌 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의 환희, 사랑의 성취, 목마르게 소망하던 그 진실을 가슴에 안았고 입맞춤의 촉감은 아직 입술에 남아 있는데 그 성취감 환희보다 짙고 절망적인 고통이 옥죄어 오는 것은, 분명 까닭이야 있었다. 양현은 자신을 추슬러보려고 애를 썼으나 허사였다. "양현아." "네." "무슨 일이니? 지금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냥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명희는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양현의 처참하고 절망적인 내면 이 선명하고 안타깝게 명희는 느껴졌던 것이다. "저기 그건." 하다가 양현은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아주머니, 저, 전 의리가 아니에요. 으흐흣흣......그런 것 아니에요." "의리라니?" 얼굴을 가린 두 손, 두 손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진주 어머니한테 말이냐?" "오빠두요, 으흐흐흣......" "윤국이 말이구나. 의리가 아니구 애정이다 그 말이지?" "......" "너 그 남자를 사랑하는 거지? 그렇지?" "그, 그 사람 때문이 아니에요. 혼자서 늙어 죽는다 해도 난 오빠하고 결 혼 같은 것 안할 거예요. 결단코." 막상, 양현이 시인하는 순간 명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결코 누그러질 수 없는 긴장 속으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양현은 계속해서 울었다. 명희는 저도 모르게 뜨개질하다 만 것을 집어들었다. '언제나 그렇게 엇갈려. 왜 그렇지? 그러면서도 사람은 살아간다. 하늘이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그런 슬픔 속 에서도 사람은 살아가고, 얼마나 신기한 일이냐? 양현아, 사실 나도 혼란스러워.' 바늘 에 실을 걸어 빼고, 또 실을 걸어서 빼고 하면서 명희는 어떤 착각에 빠진다. 양현의 운명이 마치 자기 운명인 것처럼, 그러나 깊고 뼈저린 회한이 엄습해 왔다. '나는 세상에 나와 이룬 것이 없지만 너의 눈물은 뭔가를 이루기 위해 흘리는 것이다. 울어. 많이 울어라. 양 현이 너는 나같이 자신을 기만하며 살아가지느 않을 거야. 너의 청춘은 정말 아름답다. 고통도 슬픔도 어쩌면 그렇게 투명하니? 나는 허울만 쓰고 살아왔구나. 세상의 눈이 두려웠고 내 명예 내 결백만을 신주 모시듯, 실 은 그것조차 기만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야. 희생이라는 미명하에 나는 무풍지대로 기어 들어갔고 그러다가 오히려 태풍을 만났던 거지. 왜 나는 전과 같이, 홍천댁이 시동생과 좋아 지냈다 했을 때 억울하지 안았을까? 분노하지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내 명예 내 결백을 위하여 나는 잔인하게 그 진실에 상처를 입혔다. 남이 뭐 라 하건 개의치 않고 나를 염려하여 찾아온 사람에게 나는 오로지 내 자신만을 지키기 위하여, 그것은 참 추 악한 모습이었을 거야. 뭣 땜에, 누구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러워했는가? 지금은 그것조차 알 수가 없 다. 백치 같은 삶이었지. 그러고도 내가 무엇을 이루었다 할 수 있을까? 인실이도 그렇고 여옥이 선혜언니도 그래. 양현이 너도. 분명히 자기 자신보다 소중한 것이 그들에게 있었다. 자신을 내어던질 대상이 있엇다. 살았 다는 것, 세상을 살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세는 살았다는 흔적이 없다. 그냥 그 날이 있었을 뿐, 잘 견디어 내는 것은 오로지 권태뿐이야. 양현아. 난 네가 시집갈 때 꽃 베개를 만들어주고 싶어. 현란한 결혼 의상도 만 들어주고 싶어. 하지만 그것도 내 몫은 아니겠지?' "아주머니." "음." 양현은 눈물을 닦으면서 "실망하셨지요? 아주머니도 절 비난하실 건가요." "어째서." "안 그런가요?" "나는 몰라. 한번 보았을 뿐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데 실망할 단계는 아니잖아?" "아시게 된다면......" "너를 믿으니까." "어째서 저를 믿으시는가요? 아주머니가 믿는 양현이 아니라면 어쩌시겠어요?" "그래, 믿는다는 말 대신 사랑한다 해야겠지." "아주머니는 뜨개질만 하고 계시잖아요. 저는 절박해서......" "우는데." 명희는 웃었다. 양현의 말은 아직 성숙되지 못한 흔적이었기 때문이다. "나 무슨 생각 했는지 모르지?" "......" "양현이가 시집갈 때 꽃베개랑 아름다운 결혼 의상을 만들어주는 것을 공상하고 있었어." 양현은 명희를 쳐다 보았다. '결혼할 수 있을까? 아마 난, 결혼 못할 것만 같다.' 양현은 갑자기 영광과 자신이 쌓은 성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깨닫는다. 무너지고 말 것 같은 예감이 엄습 해 왔다. 늘 그랬었다. 자신에게 비쳐진 영광은 항상 떠나는 사람이었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뒷모습을 보 이며 머리칼을 바람에 나부끼며 떠나는 모습이었다. 가까이 다가오는가 하면 어느덧 뒤돌아서 가고 있었다 너 를 잃고 싶지 않다는 그 절규와도 같았던 고백은 실상 얼마나 불안한 것이었던가. 진실의 한 순간은 이미 지 나갔고 이제는 없는 것인지 모른다. 그의 방은 비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영원히 떠도는 영혼인지 모른다. 그런 부질없는 생각에 양현은 떨었다. 영광이 쪽이 무너지고, 윤국이 쪽이 무너지고, 섬진강 강가에 가서 꽃다 발을 던지며 생모를 부르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크게 떠오른다. 인천서 전보를 쳤던 일에서부터 양현 은 자신이 정상적이 아니었던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영광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고백이 아니었더라 도 양현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 그랬을까? 양현이 자신은 그를 향해 밧줄을 던지는 사람이면 영광은 항 상 밧줄을 걷어내고 도망치는 사람이었고 그의 실체는 언제나 손가락 사이로 빠져버리는 물과 같이 허망했다. 언젠가 서울에서 공연이 있을 때의 일이었다. "오빠, 나 거기 가면 안돼요? 연주하는 모습 보고 싶어요." 그때 영광의 얼굴은 시뻘겋게, 무섭게 변했다. "만일 온다면 나는 영원히 색소폰 불지 안겠다." 양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나 그 태도가 격렬했던지, 그후 영광은 가끔 말했다. "양현이 오지 않았을까 그 생각을 하면 불안해서 연주를 못하겠어. 오지않았지?" "절대로요." 이튿날 아침차로 양현은 지주에 내려왔다. 올 때마다 설레었던 대문 앞, 양현은 가방을 든 채 한참 동안 대문 을 바라본다. 자신이 이 집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이때처럼 절실하게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집안으로 들어 갔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방문 여는 소리, 하얀 버선발이 먼저 나왔다. 여느 때 같으면 "들어오너라." 했을 것을, 서희는 마루에까지 나왔다. 그는 양현을 보고 놀라는 것 같았다. 양현이 역시 놀란다. 서로가 다 말 할 수 없이 수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어디 갔습니까? 왜 이리 조용할까." 뒤늦게 찬모가 부엌에서 내다보여 "아씨 오셨군요." 하고 인사를 했다. "모두 부역 나갔어요. 곧 돌아오겠지요. 차서방댁은 병원에 약 타러 가구요." "누가 아픈가요?" 신발을 벗으며 양현이 물었다. "소화가 안돼서." 서희가 대답했다. "어머니가요?" "음." 방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마주보고 앉아서 서로를 바라본다. "너 많이 수척해졌구나." "차 타고 오느라 그럴 거예요. 저보다 어머니가." "나는 괜찮다. 너 어디 아픈 것 아니냐?" "아니요. 아픈 데는 없습니다. 병원에는 가보셨습니까?" "신경성이라 하는구나. 요즘엔 이래저래 맘 쓰이는 일이 많아 그런가 보다. 너도 사회 생활에 익숙지 않아 그 런 모양이지? 그런데 도무지 여의사 같지 않구나." 양현은 웃었다. "요새도 성가시게 굴어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사람은 가두어놨고, 저이들 하자는 대로 하는데... 헌금 내라면 내고 부인회에 나오라면 나가고." 자조하듯 서희는 웃었다. '어머니 힘이 다 빠지셨다.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병원은 그만 두고 왔느냐?" "휴가를 받아 왔습니다." "..." "일단 혼인부터 하고, 병원을 차리든지." "병원을 차리기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합니다." "그 일은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혼인부터 해야 한다는 말은 예상하고 왔지만 양현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다. 하여간 못 들은 것으로, 양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굴을 숙이며 "작은오빠는 어디 가셨어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리산에." 말끝을 맺지 못하다가 "시우랑 함께 도솔암에 갔다." 서희의 어조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시우오빠하구요?" "음" 각일각 다가오는 사태는 마치 플랫홈을 햘해 돌진해 오는 기관차와도 같이 공포감과 긴박 르 안겨준다. 이제 어쩔 것인가. 어떤 방향으로 돌파해나가야 할는지, 양형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오빠, 작은오빠! 정말 그럴 거예요?" 양현은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도시 윤국이는 지금 위치에서 있는 것일까,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일까, 무슨 까닭으로 도솔암에 가 있으며 병원 일도 바쁠 시우가 어째 동행을 했을까. 시우까지 동원이 되었다 면 구체적인 격식 절차는 이미 다 갖추어졌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우의 등장은 말할 것도 없이 윤국에게 양 현은 완전하게 타인이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일이기도 했으며 이시우의 이복누이, 이상현의 딸 이 양현이라는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하기는 이씨 일가가 양현의 혼사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리를 따지자면 그들이 주도한다해도 과히 틀린 일은 아닌 것이다. 사태의 진전은 명약관화, 그럼에도 양현은 항거, 항변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로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혼인이라는 말이 잠시 나왔으 나 서희는 아직 구체적인 말을 꺼내지 않았고 혼인의 상대가 윤국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지중 지 딸로서 기른 아이, 감정적으로 완전히 딸이 되어 있는 양현에게 별안간 타인임을 선고하고 며느리가 되어 라, 양현이 혼란에 빠지는 것도 염려스러웠지만 심리적으로 자기 자신도 그렇게 급격하게 회전하기가 어려웠 던 것이다. 윤국이와 양현을 맺어준다, 그것은 바람이요 희망이었지만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 역시 어쩔 수 없 는 일이었다. "시우가 떠나면서 네가 내려오면 도솔암으로 보내라 하더구나." "저를요?" "평사리에 가서 장서방더러 데려다달라 해라. 그리고 오랫동안 못 가뵈었으니 너의 본가에도 가보구, 며칠 묵 는 것도 괜찮겠지." '오빠 이건 안돼요! 정말 안되는 일이예요.' "양현아." "..." "얼굴이 왜 그리 어두우냐? 무슨 근심이라도 있어 그러냐?" "어머니." "말해보아." "아버지가 나오신 후에 혼인하면 안되겠습니까?" "뭐?" "아버지가 저러고 계시는데." 돌파구가 되지 못할 것을 너무나 빤히 알면서 해본 말이었다. "철없는 소리." 했으나 웬일인지 서희의 안색이 변했다. "언제 나오실지 기약이 없는데 어째 그런 말을 하느냐." "..." "낸들 어찌 그 생각을 안해 보았겠느냐. 세상이 험해서... 갈 끝에 서 있는 것 같은데, 꿈자리는 시끄럽고." 서희는 간밤 꿈에서 길상을 보았다. 서희는 윤국과 양현의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애들의 혼인을 나는 찬성할 수 없소. 저희들끼리 좋아서 그런다면 모를까." "찬성 못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남매 사이로 그냥 두시오. 순리를 어기면 부작용이 생기는 법이오. 양현이는 당신 딸이 아니었소.?" "그 아이한테 걸맞은 혼처도 없거니와 출생을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애가 출생 때문에 기 죽여가며 사는, 그 꼴 못 봅니다." "그것은 구실이겠지." "어째 그런 말씀을 하시오." "양현이 누그의 딸인가. 이상형의 딸이 아니었고?" "네? 뭐라 하셨습니까?" 길상의 얼굴은 순간 무섭게 변했다. 눈이 이글이글 타듯 빛났다. "최서희는 이상현과 이루지 못한 연분을 윤국이 양현이 그 아이들을 통하여 이루려 하는 거요.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소! 진정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말이오!" "여보!" "나는 빈 껍데기를 데리고 산 게요. 구천에 사무치는 한이오. 내 인생이아니었소." 하는데 갑자기 흰 바지저고리를 입은 길상의 모습은 남루한 몰골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얼굴도 어느덧 구천 으로 변해 있었다. "여보! 환국이아버지." "떠나면 되는 거지, 무거운 절 떠날 것 없이 가벼운 중 떠나면 되는 게요. 진작 떠났어야 했는데 말이요. 천지 가 변했음 변했지 최서희가 변할여자요?" "아아, 아아, 왜 이러십니까! 당신의 몰골은 왜 이리 된 것입니까!" 팔을 잡으려 했으나 그는 안개같이 물러났다. "나는 최가가 아니요! 나는 김가요! 내 자식들은 최가가 아니오!" 안개같이 사라지면서 음성만이 울렸왔다. "아아 아아." 안타깝게 팔을 휘저으며 외치다가 서희는 잠에서 깼다. 가슴이 뛰고 전신이 땀에 흠씬 젖어 있었다. '아아 끔찍스럽다! 어째 그런 꿈을 꾸었을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말인가!" 아침 내내 꿈 때문에 서희는 우울했고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아서 안자를 병원으로 보냈던 것이다. 다른 볼일도 한 가지 있었기 때문에, 안자는 유모가 죽을 뒤 그가 하던 일을 대신 하고 있었다. 평소 그런 말은 고사하고 일치 그같은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던 남편이 꿈속에서 잔인하리만큼 정곡을 찌르 고 나왔다는 것이 놀라워고, 자기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였던 일을 추궁하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일보다 떠나야 한다는 마지막 부분의 말이 마치 화인과도 같이 가슴에 들어붙어 서희는 정말 견 딜 수가 없었다. 불길한 꿈임에 틀림이 없다. '그분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게 아닐까? 신변에 무슨 일이!' 안자가 왔다. 그는 양현이 낮아 있는 것을 보자 필요 이상 놀라움을 표시했다. 약봉지를 내려놓으며 "양현아씨 오셨구먼요." "네, 안녕하셨어요?" "얼굴이 몹시 상했습니다." 하다가 시선을 서희에게 돌리며 "의사선생님이 마님께서 지나치게 신경을 쓰시나부다고 했습니다. 요즘엔 위장병 환자가 많이 적어졌다 하시 기도 하구요." 집안의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의식하며 애써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아무 반응이 없자 안자는 밖으로 나가서 물 한 대접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약 한 봉지를 풀어서 "드십시오." 하며 서희에게 내밀었다. 서희는 약을 받아서 입 속에 털어놓고 물을 마신 뒤 "양현아." "네." "가서 쉬어라." 양현은 나갔다. "가보았는가?" 양현이 나간 뒤 서희는 안자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양현이 나간 뒤 서희는 안자에게 물었다. "네." "어떻게 났던고?" 안자는 지갑 속에서 꼬깃꼬깃 접은 것을 꺼내어 서희에게 건네 준다. '음력 9월 12일... 한 달 넘기 남았구나.' "저기,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안자는 엉거주춤 말했다. 서희가 쳐다본다. "저기, 궁합을 보아주겠다고 자청을 하기에." "그래서." "말씀 드리기가 좀." "안 좋다 하더냐?" "네, 좀 살이 끼었다 하더군먼요."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서희는 이마를 짚으며 "쓸데없는 짓을 했다. 자리 깔아놓고 나가 보게." 아침에 걷은 자리를 다시 깔면서 안자는 스스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마님." 안자는 나가고 서희는 자리에 들었다. 낮에 자리에 들기는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천길만길 나락으로 가라앉는 기분이다. 서희는 돌아눕는다. 정연하게 엮어온 그물코가 일시에 뒤엉켜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 제자리에 돌 여놔야 할지 막막했다. 이제는 아주 지쳐 버리고 만 것 같았다. 위태위태했던 세월, 제반 상황들이 간밤에 꾼 꿈으로 하여 왕창 주저앉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길상의 신변을 조심하다가 그 불길한 예감을 달래고 다독 거리고 나면 또 다른 괴로움이 솟아오른다. '내 마음속에 정말 그이가 말했듯이 이루지 못한 연분에 대한 한이 남아있었더란 말인가. 그렇지는 낳아 결코 그렇지는 않아. 나는 양현을 전생의 인연으로 생각했다. 그 아이의 행복을 원하는 마음에는 추호도 다른것이 있을 수 없다. 이제 와서 날더러 어떻게, 내가 뭘 어떻게 잘못 했는가.' 서희는 다시 벽쪽을 향해 돌아줍는다. 돌이켜야 하는지 진행을 해야 하는지 그것도 구분할 수 없으리만큼 혼 란해 있었으나 일은 이미 서희의 소망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버린 상태였다. 문제는 모두 윤국이에게 넘어간 셈 이다. 윤국은 양현을 누이로서보다 한 여인으로 사랑했으며 오랫동안 감추어졌던 그의 본심을 서희는 알게 된 것이다. '저희들끼리 좋아한다면 모를까...' 꿈속에서 길상은 그 말을 하기는 했었다. 그가 구금되기 전에 도솔암에서 두 사람의 혼인을 반대했던 일도 있 었다. 서희가 그의 의중을 말했을 때 길상은 펄쩍 뛰었다. "당신은 어는 하나도 잃지 않으려는 욕망, 그 욕망 때문에 젊은 아이들 까지! 그들은 남매로 자랐소, 그럴 수 는 없는 일이요." 서희는 그때 길상이 한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욕망이라 했었지. 욕망, 그렇다면 그 욕망이란 바로 이상현 그 사람을 집착한다 그런 뜻이었던가.' 의식 깊은 곳에 그것이 남아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양가의 결합은 다만 할머니 윤씨만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서희가 원했을 때,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서희가 이상현을 잊은 지는 오래였다. '전세가 악화되면 형무소에 있는 사상범은 온전할 수가 없을 게야. 내 자식인들 무사할까?' 서희의 생각은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서희는 애국부인회의 간부였다. 처음에는 회장으로 물망이 올랐으나 길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그것을 핑계 삼아 서희 쪽에서 사양하였던 것이다. 물론 총명하고 품위가 있고 능력 이 있기 때문이지만 뭐니해도 회장이 거론된 데는 그의 막강한 재력 때문이며 지금까지 상당 액수의 헌금을 해온 그 공로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인데 서희로서는 일종의 남편의 구명책이기도 했고 아들 둘에 대한 보호 책이기도 했다. 본시부터 도움이 될 만한 일인들과 연관을 가져온 터이기도 했으나 애국부인회 관계로 그들 요로의 부인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고 민감한 서희는 그들 사회 분위기가 전과 같지 않을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영미와 전쟁이 시작되고 햇수로만 1년 8개월이 지나간 지금, 확실히 사태는 전과 같지 않았다. 신문지상에서도 금년 들어 일본군은 과다카날 섬에서 철수를 했고, 4월에는 연합함대사령관 야모모토 이소로쿠가 비행기 속에 서 전사했으며, 5월에는 또 앗쓰 섬 일군은 전멸했다는 보도였다. 소위 옥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맹 우 독일도 소련의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했으며 북아전선의 독일군도 항복했으며 이태리의 무솔리니도 실각, 파시스트당은 해산이 되었다. 일본의 패색이 짙은 것은 이제 부인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은 희망이기 도 했지만 조선인에게는 절망이기도 했다. 일본은 결코 그냥 물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 옥쇄한다고 떠들지 만 저들만 옥쇄할 것인가. 서희는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어린 처녀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으며 농부며 노동자, 심지어는 도시의 중산층 청년들까지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 학생들이 몽땅 전선으로 내어몰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 전에 조선에도 징병제가 실시되어, 그것에 대비하여 중 학교에서는 그토록 치열하게 군사 훈련을 해오지 않았던가. 식량 배급의 통장은 어디든 달아날 수 없는 조선 청년들 소녀들, 그리고 중장년들의 무겁고도 무거운 멍에였다. 제 방에 가있던 양현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어머니는." 하고 양자에게 물었다. "주무시는 모양이오." "그럼 나 오빠집에 갔다온다고 어머니가 찾으시거든 말씀하세요." "오라버니는 도솔암에 가셨는데요?" "알아요. 올케언니 만나러 가는 거예요." "네, 그럼 다녀오십시오." 거리에 나왔다. 속으로는 헐벗고 굶주리고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위기의식 속에 전전긍긍하고 있겠지만 거리 는 평온해 보였다. 어차피 사람들은 사는 날까지 살 수 밖에 없었고 구르는 바위 아래 새알 같은 순간일지라 도 모질게 순간을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인가. 아들은 모조리 전선에 보내었고 그들이 모조리 전사를 했건만 몬빼 입은 노파는 배급쌀을 타러 갈 수밖에 없으며 장한 어머니로서 나라에서 주는 표창을 묵묵히 받을 수밖 에 없는 것이다. 일본인도 사람이며 일본인도 어머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현인신천황 폐하에게 자식을 모조리 바친 것을 영광으로 아는가, 아니다. 그것은 불가항력인 것 일 밖에 없기 때문이다. 양현은 자신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을 생각하며 길을 걷는다. 자신의 문제에 도망치고 싶은 무의식적인 생각이었는지도 모른 다. '어머니는 칼끝에 서 잇는 세상이라 하셨지만 바로 도상의 세월이다. 아무 일도 없는 듯 이 거리는 평온하지 만, 사람들은 무엇이든, 심지어 양은솥도 식량하고 바꾸어 며칠을 산다. 결혼? 결혼은 왜 해야 하나. 난 작은오 빠하고 결혼 안할 거야. 결단코! 영광오빠하고도 안할 거야!' 양현이 간 곳이 옛날의 그 박효영 의원이었다. 이복오라비 이시우가 그 병원을 인수하여 개업하고 있었다. 양현은 병원 문을 밀고 들어간다. 병원을 통하여 살림집으로 들어가는데 양현은 복도가 어두운 탓도 있었지만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현기증을 느 낀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일하는 여자가 나오다 말고 "아이고." 하다가 "인혜어머니, 인혜고모님 오십니다." 안을 향해 부산스럽게 말했다. 시우댁네 정란이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어서 오시오 아가씨." 정중하게 말했다. 평범한 용모였지만 몸집이 작고 재바르게 보였다. "손님 계신가 본데." 양현이 주춤했다. "소림언니예요." 방안으로 들어간 양현은 구면인 양소림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오래간만이군요." 소림은 반갑게 말했으나 다소 당혹해하는 빛이 있었다. 소림은 양현을 민날 때마다 처음에는 당혹해하는 것이 다. 양현이 환국의 누이로 자랐기 때문이며 환국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소림과 정란은 고종사촌관계였으며 남편의 직업도 같았기 때문에 서로의 집을 자주 드나드는 사이였다. "언제 내려오셨어요?" 정란이 물었다. "오늘, 새벽차로 왔어요." "축하합니다. 아가씨. "나도 축하해요." 소림이도 말해놓고 빙긋이 웃었다. 양현은 다만 망연한 표정으로 그들은 번갈아 바라본다. 소림이나 정란은 다 같이 양현이 쑥스럽고 부끄러워 그러는 줄만 안다. "오빠 윤국씨랑 함께 도솔암으로 가신 것 아시지요?" "들었습니다." "참 잘 됐어요. 오빠가 얼마나 좋아하던지, 조선 천지 다 다녀도 어디서 그만한 신랑감을 구해오겠느냐 하면 서." "정말이야 나도 처음 얘길 들었을 때는 좀 어리둥절했어. 어딘지 이상하기도 하구, 하지만 곰곰히 생각하니까 이상할 것 하나도 없지 뭐니? 정말 잘된 일이고 기가 막히는 한 쌍이 될 거야." 소림은 진심으로 말했다. "하동의 어머님께서도 여간 기뻐하시는 게 아니예요. 한시름 놨다, 이제는 걱정없다 하시면서 말예요." 양현은 주변의 수맣은 사람들에게 등을 돌려야 하는 앞으로의 일이 무섭고 무거운 바윗돌같이 사슴을 짓누르 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아니예요! 그게 아니란 말이예요! 마음속으로 울부짖듯 했으나 입을 떼지는 못한다. 입을 떼지 않았던 것은 양현의 가냘픈 이성 때문이다. 자신의 의사를 어머니나 윤국이를 제쳐놓고 제3자에게 먼저 토설할 수 없었고 그래서도 안된다는 것을. 그러니 재갈 물린꼴이며 소름이 돋아나는 기분일 수밖에 없 었다. "언니, 학벌도 그만하면 최고 아니예요!" "그럼." "대학 나왔다고들 하지만 알고 보면 대개 전문부지 학부까지 나온 사람은 그리 흔치 않아요. 전문부 나와가지 고 징용 피하느라 경찰서 순사로들어간 사람도 두 명이나 있어요." 얘기가 묘하게 꼬인다. "그게 정말이니?" "네, 정말이예요. 누구 누구 하면 알 만한 사람인걸요. 그것도 교제를 해서 들어갔다나 봐요." "기가 막혀서." 얘기는 자꾸 엉뚱한 곳으로 흘러간다. "세상이 그렇게 돼버린 걸 어떻게 해요? 할 수 없지." "그렇다고 돈 쓰고 공을 들여서, 일본까지 뭘하러 공부하러 가느냐 말이야." "처음에야 뭐 순사 될려고 그랬겠어요? 전문부 나와가지고 사실 조선 사람들 취직자리가 어디 쉬워요? 놀고먹 기 십상이지. 소사 급사 서기 순사가 고작 아니예요? 고등문관에나 패스하면 모를까, 그건 하늘의 별따기,선생 이나 의사가 최고급이지 뭐. 어떡하겠어요? 놀고먹다가 징용에라도잡혀가면 그것으로 그만이에요. 살아서 돌아 오기 어렵다 하더구먼요. 차라리 군대 가는 편이 낫다 그러고들 말하대요." "하긴 그래. 징용 안 가려고 성한 다리를 뿌러뜨리는 사람도 있다든가." "어마, 얘기가 왜 이리 돌았지요?" 두 여자는 웃었다. 그러나 양현은 웃을 수가 없었다. 정란이 일어섰다.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면서 "저녁 준비 시켰으니까 언니도 잡숫고 가세요. 형부는 밤 늦게 오신다면서요?" "응." "무슨 일인데요?" "유지들이 모여서 무슨 회의를 한다나? 회의 끝나면 자연 술도 마시게 될 거라 하면서." "아이구, 남자들 없으니 편하지, 안 그래요. 언니?" "그래, 일년 열두달 한지붕 밑에 있으니까 때론 숨이 막혀." 소림은 전적으로 정란의 말에 동조했다. 양현은 가라앉다가는 떠오르고 가라앉다가는 떠오르듯 수없이 자신을 다스리고 또 다스리곤 했다. 소림이나 정란도 차츰 양현이 뭔가 깊이 상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18세 소녀도 아니겠고 어엿한 사회인 인 여의사가 결혼한다 해서 들떠 있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렇게 깊이 깊이 가라앉는 이유는 뭣일까? 그러나 두 여자는 다같이 그것을 물어볼 수가 없었다. 소림이도 원래 그렇지만 정란이 역시 맘이 약하고 선량 한 성품이었으니까. 여자 세 사람은 넉넉한 둘레판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양소림의 손이, 그 손들에 있 는 흉스러운 혹이 눈에 띄게 된다. 그러나 양소림은 그것을 극복한 듯 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그의 결 혼 생활이 순조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니." "왜." "요즘에도 그 여자 형부한테 편지하나요?" "아니." 밥이 입속에 가득해서 그랬던지 소림은 목멘 소리로 말했다. "무슨 여자가 그런 게 다 있어?" "그때 이모랑 함께 내려왔을 때, 어머니가 좀 지나치게 푸대접을 했거든.아마 그래서 앙심을 품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그래도 그렇지. 그게 어찌 언니한테 와? 안 그래요?" "글쎄, 좀 정상이 아닌 것 같기는 해. 인상도 고약했고, 자칭 예술가라 하니까 그런가 부다 하기는 했지만." "형부가 혹 틈을 보인 건 아니예요?" 정란은 웃으며 소림을 놀려먹듯 말했다. "얘두, 참. 틈을 보일 사람이 따로 있지, 나이도 많고 이쁘기는커냥 숭해.이모가 데리고 왔으니까 대접상 그날 밤 술을 몇잔 함께 했을 뿐이야. 틈을 보일 시간이나 있었나?" "순진하기는. 아무렴 형부가 그런 여자한테 관심을 보였겠어요?" "이모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아예 세상을 버린 것같이 자포자기하고, 그런 여자는 왜 상종하는 건지." 양소림은 추호도 남편을 의심하지 않았다. 얘기의 장본인은 다름아닌 배설자였다. 그는 서울로 돌아간 뒤 일부 러 소림이 보란 듯 허정윤에게 편지를 보내오곤 했다. "당신, 어떻게 된 거예요?" 소림이 편지를 내밀며 물었을 때 허정윤은 정신이 번쩍 드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날 밤 촉석루 에 나가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던가를 깨달은 것이다. 말하자면 응해 오지 않았던 허정윤에 대 한 분풀이, 심통 같은 것이었으며 반은 앙심, 반은 장난삼아서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미친 계집이오." 정윤은 비로소 촉석루에서 만나자는 배설자의 전화 얘기를 털어 놨다. "물론 가지 않았지. 당신도 알지 않소. 그날 밤 일직 들어가서 잠자리에든 것." 그런데 그 일을 알게 된 친정어머니 홍씨는 노발대발 서울에 있는 동생에게 편지로써 크게 나무랐던 것이다. 홍성숙은 자신의 행적이야 여하튼 소림을 지극히 사랑했던 만큼 배설자를 찾아가서 대판 싸움을 했다는 것이 었다. "정란이 너 시동생도 곧 장가보내야 하지 않아?' 소림은 새로운 화제를 꺼내었다. "학교를 마치야지요." "아니, 여직도 졸업을 못했어? 누이도 졸업을 했는데." "그게 다니던 학교가 형편없는 사립이었잖아요. 인혜아버지도 그걸 늘 마음에 기고 있었는데 작년에 다시 시 험을 쳐서 와세다 대학에 들어갔어요." "그거 참 잘 됐구나." "그 동안 대련님도 자존심이 상해서 술 마시고 성질도 영 거칠어져서 걱정들 했어요. 그러잖아도 그이 요즘 아주 느긋하게 기문이 좋은가 봐요.아가씨 혼사만 끝나면 걱정할 것 없다 하면서." "이서방 형제간의 우애가 보통 아닌가 봐." "그건 그래요. 진작부터 아버님을 대신해 살았기 때문인지 책임감도 강하구. 도련님이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그이가 먼저 앓아 누웠다니까요. 이번에도 병원일 바쁜데 만사 제쳐놓고 윤국씨를 따라갔지 뭐예요. 하나뿐인 누이동생이다, 하면서." 정란이 힐끗 양현의 눈치를 살피는데 양현은 얼굴을 숙였다. 저녁이 끝나고 소림이도 돌아간 뒤 갓난아기를 돌보는 새 양현은 돌아갈 생각도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란에게 할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가씨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세요?" 왜 그렇게 우울하냐 묻고 싶었지만 정란은 간접적으로 물었다. "아니오,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하며 정란이 긴장하는데 뜻밖에도 시우가 들어왔다. "아니 여보!" "오빠." 정란과 양현은 동시에 불렀다. "양현이 왔구나." 시우는 자리를 털썩 주저앉으며 기분 좋은 표정으로 양현을 쳐다보았다. 그는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되긴? 윤국이가 가라 해서 왔지. 누구 명이라고 거역하겠나, 아암 가라면 와야지." "그건 또 왜 그래요?" 정란이 좀 불안한 듯 물었으나 그 말 대꾸는 없이 "양현아." "네." "너같이 지성적인 여성에게는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말이야, 너 굉장히 복 많은 애다. 윤국이 그 자식 원래 똑똑하다는 것, 내 모르는 바는 아니로되 그 자식 사내 중에 사내야. 잘난 놈이다. 이 나 이시오 두손 바 짝 들었어." "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여보 저녁은 어떻게 했지요?" "저녁 안 먹어도 배불러." "이이는? 샘나게 자꾸 그러실 꺼예요? 누이동생만 보였지 마누라 얼굴은 눈에 뵈지도 않는 모양이지요?" 정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농을 걸었다, "이봐요. 인혜엄마, 이부사댁 자부가 그래도 되는 거요? 청백리 이부사댁 법도가 아니 그렇다는 것 아시오 모 르시오." 정란은 킥하고 웃는다. "아가씨 가관이지요?" "허허헛." "저녁 차려요?" "어디가 경방단 단장인가 뭔가 하는 작자를 만났소. 우리 병원 호나자 아니요." "해서요?" "술 한잔 마시자고 해서 좋다! 하고 따라갔지요." "자알 했소. 그 따위 날건달하고 어울렸으니 출세했군요." "내 기분이 좋고, 술 생각이 났던 참이라 사양할 것 없지." "청백리 이부사댁 당주가 친일파하고 어울린 거는 썩 잘하신 일이지요." "허어? 말할 줄 아네? 양현아." "네." "너 내일 평사리에 가거라. 윤국이 거기 와 있다." "네." "네, 네 하지만 말고, 왜 그리 기운이 없어." "아니예요, 오빠." 정란은 그들을 바라보며 왠지 일말의 불안을 느낀다. 오라비는 한없이 들떠 있고 누이는 한없이 가라앉고 '씨도둑질은 못한다 하더니, 나란히 앉아 있으니까 어쩌면 저렇게 닮았을까? 하기는 누이가 훨씬 더 미인이지 만, 행복의 조건이 넘치고 넘치는데,그런데 왜 저렇게 상처받은 사람같이 우울해 있는 걸까?' "아무튼 세상이 더럽게 돌아가고는 있다마는 우리집은 경사의 연속이니어째 미안한 생각도 드는구나. 돌아가 신 할아버님께 죄송한 생각도 들구,하지만 일본은 머잖아 망할 게야. 아, 암 윤국이는 큰 기둥이야.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고 난처하기도 하겠지만 시일이 지나면 그것도 없어질 것이고... 윤국이 잘난 것도 그렇지만 양가 의 오랜 인연을 생각하더라도 썩잘된 일인 게야." "당신 왜 그리 말씀이 많아요? 어째 두렵습니다." "정한의 말에 시우는 다소 무안한 타는 듯했으나 "말이 없어도 걱정, 말이 많아도 걱정, 여자들이란. 양현이는 제 발 그 뽄 보지 말어. 알았냐?" "오빠 나 갈래요." "좀더 있다 가지?" "내일 평사리 가야 하니까요." "음 그건 그렇다." "집에까지 좀 데려다주세요." "그러지." 시우는 얼른 일어섰다. "언니 저 갈게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양현은 우울해 있는 자신을 근심스럽게 바라보던 정란의 눈빛ㅇ르 생각하며 말했다. 밖으로 나온 오누이는 나란히 밤길을 걷는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번화가에도 불빛은 많지 않았으며 상가들은 호젓하게 어둠에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천륜이라 했던가. 그것은 무엇일까? 참으로 신비한 것이었다. 물론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긴 있다. 이복형제가 원수지간이 되어 지내는 사람도 흔히 있다. 그러나 시우는 처음부터 양현을 애틋하게 생각했으며 호적을 옮기는 일도 그가 가장 강력하게 주 장했다. 민우는 아버지에 대한 환멸 때문에 거부 반응을 했으나 시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귀한 씨앗을 걷어들 이듯. 원래의 성품은 냉담한 편이며 의지적이었느데 양현에 대해서는 오빠인 동시 아버지와도 같은 연민을 가 지고 있었다. 사실 양현에게 육친이라고는 시우와 민우 이외는 없었으니까. "오빠." "응." "나 이 결혼 못해요." "뭐? 뭐라했나!" "이 결혼 못해요. 차라리 죽겠어요." 시우는 걸음을 딱 멈추었다. 어둠 속에서도 낭패하는 그의 모습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일이 왜 이렇게 되어가지?" 혼잣말처럼 시우는 중얼거렸다. "오빠에게도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인지 그거저도 알아요. 하지만 이 결혼 한다면 더 깊은 상처를 주게 될 거예요. 네, 돌이킬 없는 상처를요." "억장이 무너지는구나." "저, 만일 집이 파탄지경에 빠져서 저를 팔아야 한다면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도 팔려 가겠어요. 하지만 이 결 혼만은 안돼요. 오빠 절 이해해주세요." "이유가 뭐냐?" "..." "이유가 있을 거 아니겠어? 윤국이가 싫으냐?"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오빠예요. 저의 오빠란 말이에요.그럴 수는 없는 일이에요." 양현은 흐느낀다. "그게 이유의 전부냐?" 시우는 걷기 시작했다. 양현도 따라 걷는다. "그 기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시일이 지나면 해소될 수 있는 일이고 그런 경우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 지 않아. 윤국이는 한 여자로서 너를 깊이 사랑하고 있어. 그가 여태 결혼을 안한 것도 너 때문이며 혼자서 많 이 번민을 한 모양이야. 너도 어린 나이가 아닌데 그런 여태까지의 감정을 바꾸는 데 뭐가 그리 힘들겠냐." "..." "혹 너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 아니냐?" 시우는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대답이 없자 다급해진 시우는 "말해. 기왕, 둑은 터진 거다." "있어요." 순가 시우의 두 어깨가 축 처졌다. "끔직스런 일이다." 시우는 다시 걷다 말고 서 있는 양현에게 말했다. "그게 누구냐!" "아직은 말할 수 없어요." "떳떳하다면 돼 말을 못하냐!" "오빠." 두 사람은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까지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내일 평사리 간다는 게냐?" "피할 수 없지 않아요. 나 그냥 도망갈 생각 몇번 했는지 몰라요." "가서, 그러면 어쩌겠다는 겐가." "..." "윤국이어머님한테는 말씀 드렸어?" "아니요. 오빠가 처음이에요." "흥! 자알 했다 자알 했어! 네가 나한테 이런 실망 안겨줄 줄은 꿈에도생각지 못했다. 하물며 윤국이는 어떻겠 는가. 정말 이럴 수는 없다." 하다가 땅이 꺼지게 시우는 한숨을 내시는 것이엇다. "어떤 놈이 그리 잘났어! 이놈은 그만 다리 몽댕이를," "오빠." "..." "저를 용서해주세요. 땅 끝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아요. 너무 감당하기 힘들어요. 아까 오빠가 기뻐했을 때 전 그 자리에서 그냥 눈처럼 녹아버렸음 싶었어요." "..."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며, 태어났더라도 온갖 천대 받아가며 자랐더라면." 양현은 더욱 격렬하게 흐느껴 운다. "다 왔다. 들어가보아." 의외로 시우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오빠." "더 이상 너에게서 무슨 말을 듣겠느냐. 나로서는 속수 무책이다. 자아 들어가아." 시우는 허탈한 것같이 발길을 돌렸다. 양현은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빛이 너무나 찬란 했다. "엄마!" 그 엄마가 서희였는지 봉순이였는지 양현이 자신도 구별이 되지 않았다. "나, 저 별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싶어요. 영원히 숨어버리고 싶어요 엄 마." 짚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오세요? 양현아가씨." 안자가 마루에서 내려오면서 말했다. "어머니는요." "기다리시다가 막 잠이 드셨습니다." "아프신 데는." "좀 가라앉으신 모양입니다. 저녁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오빠집에서 먹었어요." 캄캄한 방으로 들어간 양현은 전등을 켰다. 이튿날 아침, 양현은 평사리를 향해 떠났다. 시우와 함께 도솔암으로 간 윤국의 의도나 또 시우를 돌려보내고 혼자 평사리에 남은 윤귝의 심정 같은 것을 양현은 깊이 헤아려볼 겨를이 없었다. 하여간 윤국이를 만나야만 했다. 만나지 않고 연기처럼 그냥 사라져버리 고 싶은 충동과 절실하게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상충하는 자기 자신을 간신히 싸안고 하동 포구 나룻배에 몸을 실은 것은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이었다. 본가에는 들르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었다, 평사리에 올 때는. 하 동을 지나치면서 본가에 들르지 못하는 것은 양현의 의지 밖의 일이었다. 큰어머니 박씨가 그 일을 두고 섭섭 해하는 말을 했으나 또 박씨의 섭섭함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양현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평사리에 가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할 것처럼 발이 그곳으로 향해지지 않는 것이다. 언 제부터였는지 하동 포구는 양현에게 괴로운 곳이 되었다. 본가를 의식하게 되는 것도 그랬고 섬진강에 몸을 던진 생모를 떠올려야 하는 것도 그러했다. 나이 들면서 그것은 더욱 깊어지는 상처였다. 그러나 양현은 지금 그러저러한 생각이 머리속에 없었다. 뱃바닥에 가방을 의지하여 웅크리고 앉은 자기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왜소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세월이 되돌아오기라도 한 듯 점점 자기 자신이 작아져가는 것 같았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고아, 계집아이. 성숙해진 여자도 아니었으며 여의사라는 그 빛나는 사회적 지위도 간 곳 없고 가지가지 누릴 수 있었던 남다른 특혜 역시 환상이었던 것만 같았다. 잎을 털어버리고 헐벗은 겨울나무, 바람 부는 노지에 홀로 서있는 빈집 같은 자기 자신. '옛날과 같은 나의 오빠... 작은오빠였다면 내가 지금 오빠를 찾아가는 것은 아마도 고통스런 내 애정 문제를 의논하기 위하여, 그래 나는 맨 먼저 작은오빠에게 고통을 털어놨을 거야. 그러기 위해 지금 가고 있다면얼마 나 좋을까? 나무라고 야단치고 설령 때린다 하더라도 나는 지금 이같이 불행하지는 않을 거야.' 언제나처럼 강물은 짙푸르렀다. 하늘도 푸르게 드높았다. 나룻배에는 승객이 몇 사람 되지 않았다. 그런데 웬 일인지 그들은 모두 숨을 죽인 듯 말이 없었다. "점심은 어떻게 됐는고?" 연학이 묻는다. "곧 될 깁니다." 건이네는 부리나케 부엌으로 들어갔다. 윤국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성냥을 그어대는그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 는 것 같았다. 흥분과 불안이 얼굴에 역력했다. 연학이 양현의 기색을 살피면서 물었다. "인천의 병원은 그만두고 내려왔나?" "아니오." "그럼?" "휴가를 받았어요." "휴가를 받다니?" "..." 연학은 대답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서울 식구들은 모두 편안한지 모르겄네?" "들르지 않고 바로 왔어요." "일간 나도 한분 올라가기는 가야겠는데." 하자 윤국이가 "어째 안 들르고 그냥 왔어?" 양현에게 말했다. "어쩌다가 그리 됐어요." 윤국은 초췌한 양현의 모습이 마음에 걸리는 둣 눈을 내리깔았다. "오빤...오신 지 오래 됐어요?" "일주일쯤." 그러고는 말이 끊겼다. "요즘 서울 사람들은 머 묵고 사는지 모리겄네." 침묵을 휘저어버리듯 연학이 말했다. "배급 타먹고 살겠지요." 역시 무뚝뚝하게 윤국이 말했다. "배급 가지고는 태부족이니께 그러는 거 아닌가." "시골에 옷가지 일용품 가지고 곡식을 구해오나 봐요." 양현은 간신히 말했다. "양현이 니 임교장 소식 모르제?" "네." "많이 좋아졌더만. 윤국이 자네도 임교장 만나보았제?" "네. 서울에는 안 가시겠다 하시더군요." "친구따라 강남 가더라고, 산골에 모여서 신선돼 갈려는지 온." 비꼬는 투가 없지도 않았다. 윤국은 쓴웃음을 띠었다. 점심은 세 사람이 함께 둘러앉아 먹었다. 양현은 밥보다 물을 많이 마셨다. 안 내려가는 밥알을 어거지로 내려 보내려는 듯 물을 마시는 것이었다. 점심이 끝나자 좀 쉬라는 연학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물가에 가서 손발과 얼굴을 씻은 양현은 안방으로 들어와서 들어누웠다. 이리저리 몸을 뒤쳤으나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잠 을 자려고 드러누웠던 것은 아니었지만, 윤국이와 연학은 사랑으로 간 것 같았다. 건이네도 설거지를 끝내고 채마밭으로 나갔는지 집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다만 시계 소리가 뇌수를 찍듯 채칵채칵 소리를 내고 있었 다. 쉬기는커녕 긴장은 한층 고조되어 가슴을 짓누르기만 하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배어났다. "베주머니에 의송 들었더라고 장서방 사람됨이 그렇다." 무슨 말끝에 나온 것인지 어머니가 유모보고 하던 말이, 아무런 그럴 계기도 없이 양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주 어릴 때 일이었던 것 같았다. "어머니, 의송이 뭐에요? 그런 과일도 있나요?" 했더니 어머니는 유모와 함께 웃었다. "그것은 말입니다. 과일이 아니고 송사에 지게 되면 더 높은 사람한테 항소하는 문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양현아." "네 어머니." "그 속담은 겉보기에는 별수없이 보이지만 실상은 똑똑한 사람이 라는 뜻이니라." "예..." 전혀 뜻밖의 기억이 되살아났다는 것은 그럴 계기가 있든 없든 긴장을 완화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어쩌 면 그것은 본능적인 자구책이었는지 모른다. "양현아." 윤국의 목소리였다. 양현은 숨을 죽인다. "양현아 자는 거야?" "아니오." "바람 좀 쏘이러 안 나가겠어?" "..." "피곤하면 관두고." "아니오. 나갈게요." 양현은 일어났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마루로 나갔을 때 윤국은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양현을 힐끗 쳐다보았다. 보기만 하면 눈에 연신 웃음이 실리곤 했던 그 눈이 아니었다. 뭔지 형용하기 어려운 그런 눈빛이 었다. 함께 집을 나섰다. 해는 서편 산마루에 걸려 있었다. 당국화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윤국의 걸음은 빨라졌다.양현을 의식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마치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그는 앞서서 급히 걸어가는 것이었다. 한복을 벗어버리고 감색 즈봉에 역시 감색의 긴팔 셔츠를 입은 윤국은 발빠르게 걸으면서 한번도 돌아보지 않 았다. 그가 간 곳은 강가, 옛날 숙이가 곧잘 빨래를 하러 오곤 했던 장소였다. 사춘기 무렵, 윤국의 엷은 연정 이 스민 곳이다. 그 일은 거의 다 잊고 있었지만, 무릎을 세우고 무릎 사이 모래밭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호주 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어 붙었다.양현은 모래를 밟고 내려가다가 잠시 멈춘다. 멈추어서 윤국의 뒷모습을 바 라본다. 윤국의 뒤통수는 여전히 보기가 좋았다.진주 남강에서 놀다가 날이 저물어 윤국에게 업혀서 집에 돌아 온 어릴적 일이 생각났다. 양현은 강 하류 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윤국이 옆에 가서 그도 무릎을 세우고 앉 았다. 무슨 새인지, 새는 물장구를 치듯 물 위에 두 발을 담갔다가는 날아오르곤 한다. 둑 길을 도부꾼이 노래를 부 르며 간다. "얼굴이 왜 그래?" 양현을 쳐다보지도 않고 담배연기 뿜어내며 윤국이 말했다. "직장 일이 고단했나?" "아니오." "그럼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역시 양현을 보지 않고 말했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아주 자제하는 음성이었다. 양현의 대답이없자 무릎 사이 로 모래밭을 내려다 보던 윤국은 피우던 담배를 강물을 향해 휙 던진다. "웬 잠자리가 이렇게 많아." 하다가 이야기를 별안간 돌렸다. "얘기 듣고 왔나?" "네." "무슨 얘기?" "오빤 무슨 얘길 말하는 건가요?" 양현은 설움이 복받쳤다. 윤국은 정말 타인 같았다.그보다 심술궂기까지 했다. "우리 혼인 얘기." "..." "모르고 온 건가?" "아니오." "그래서." "어머니는 말씀 안하셨어요. 서울 새언니가." "어떻게 생각했나." 윤국의 목소리도 그러했으나 분위기는 압축기에 넣어서 눌러버린 듯 딱딱했고 뭔가 갑자기 정지된 것처럼, 시 간이 정지된 것처럼 양현에겐 느껴졌다. "오빠, 그건 안될 일이에요." 윤국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심한 동요는 나타내지 않았다. "어쨰서." 절망적으로 신음하듯,그러나 역시 태도는 평이했다. "오빠잖아요." "..." "저는 어느 순간에도, 오, 오빨 남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남자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 말이군." "..." "이유는 그것뿐이야?" "또오." 하는데 윤국은 양현의 입에서 나올 말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낀 듯 가로막아서 말했다. "예상하지 않았떤 것은 아니었다. 양현이 너가 들어서는 순간...그걸 느꼈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오빠. 이젠...우리 남매가 아닌가요?우리 인연은 이것으로 끝인가요?오빠." "인연이 저주스럽다!" "으흑." 양현은 울음을 터뜨렸다. 무릎 위에 얼굴을 묻고 절실하게 흐느껴 운다.윤국은 돌이 된 듯 앉아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일어나야지, 이곳을 떠나야 해, 하면서도 몸이 모래밭에 붙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네가 들어서 는 순간 그것을 느꼈다, 하기는 했으나 윤국의 예감은 그보다 휠씬 전부터 있어온 것이다. 어쩌면 양현을 누이 아닌 한 여자로 의식했을 때,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꺠달았을 그 순간부터 윤국은 내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란 괴로운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도 양현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수없이 생각하곤 했었다. 어머니한테서 양현과의 혼인 얘기를 들엇을 때 전신에서 피가 끓는 것 을 느꼈고 또 피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환희인 동시 일종의 공포같은 것이기도 했다. 양현은 늘 그의 마음속에서 피안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정체 모를 불안이 있었다. 양현이 사랑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불안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에 대해서는 상상의 문에다가 자물쇠를 걸어놓고 굳게 밀폐해 버 렸던 것이다. 스스로 망상이라 생각했으며 터무니없는 일로 치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늘 꿈틀거렸고 숨통을 막 는 것만 같았다. 3,4년 동안 동경 생활에서도 그랬지만 조선에 돌아와도 그는 늘 우울했다. 물론 그것은 양현 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투옥과 윤국이 관계하고 있는 조직이 여러 번 위기에 봉착한 현실의 정세 때 문이기도 했다. 조선 유학생 몇이 주축이 되고 운동에 경험이 있는 노동자 출신을 포함하여 조직이 된 사회주의 성향의 비밀 결사였는데 조직의 두 명은 이미 체포되었고 관헌에게 쫓기는 사람도 몇 있었다. 그러나 조직의 성격상 결사 의 윤곽은 드러나게 돼 있지 않아 윤국에게까지, 아직은 위험이 미치지 않고 있었다. 연장자이며 농과대학을 졸업했고 Y대학에서 다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는 윤국은 비밀결사의 이론적 지도자로서 상당히 깊이 관여하 고 있었다. 그러한 처지에서 사실 윤국은 결혼 운운할 계제는 아니었다. 그는 결혼하기위해 귀향했던 것은 아 니었다. 가능하다면 약혼 정도는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그는 나오라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을 때 일단 끈질기 게 따라다니는 망상에서 떠나고 싶었고 양현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만 양현을 누이 아닌 여자 로 한번 안아보고 싶었다. 살벌하고 긴장의 연속이며 메말라가는 일상에서 양현은 지극히 인간적이며 순수한 것을 지탱하게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 또 다른 이유는 뭐냐." 윤국은 기어이, 결국 묻고 말았다. "저기." "말해. 이제는 괜찮다." 말로는 그랬으나 윤국은 흡사 지옥 같은 곳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 누굴, 사랑하고 있어요, 나룻배 타고 오면서... 그 일을 의논하기 위해 오빠를 찾아가는 길이라면 얼마나 좋을가 생각했어요. 오빠 절 용서해 주세요." "..." 윤국은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성냥을 그어대는데 아까 집에서 그랬던 것보다는 그의 손은 훨씬 심하게 떨고 있었다. "오빠." "그가 누구냐." "저어." "대학생놈이냐? 유부남이냐? 아니면 동료 의사냐!" "아, 아니예요.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제발." "여, 영광이오." 하는데 윤국은 두 손에 모래를 꽉 움켜쥐고 벌떡 일어섰다. 창백하다 못해 그의 얼굴은 백지장이었다. 눈은 형 형이 빛나고 있었다. "오빠! 날 용서해주세요." "너 지금 뭐라 했지! 한번 더 말해보아." "제발." "영광이라 했나? 송영광 그 자라 했나?" 양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돼! 그건 안돼!" 윤국이 소리쳤다. "그 죽일 놈! 만일, 잘 들어. 양현이 너, 단념을 안한다면 나는 그 놈을 죽일 거다." "그러지 말아요. 오빠!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그놈만은 안된다. 하늘이 깨어지는 한이 있어도 그놈만은 안된다. 그 놈은 인간 이하, 악마에 들린 놈이다. 너 를 망가뜨릴 거야. 너를 못쓰게 망가뜨릴 거야! 그놈은 지옥에서 왔다! 음탕하고 무책임하고 영혼이 썩었어!" 윤국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오빤 백정에 대해서, 시, 심한 편견을 갖고 있어요. 그, 그럼 안되는데. 안되는 일이에요. 제발 그 그러지 마세 요." 윤국을 올려다보며 말하는 양현의 눈에 눈물이 또 가득 고인다. "저라고 뭐 별수 있나요? 저도 기생딸인걸요. 세상에서 멸시하는, 안 그래요? 오빠!" 윤국은 고개를 꺾었다. "안된다 양현아." "왜 안되나요? 어째서 그렇지요?" "나하고 약속해. 그를 단념하겠다고 약속해." "안한다면요." "해야 돼." "그럴 수는 없어요." "그놈은 전과자야! 한 여자를 망쳐놓은 전과자란 말이야! 나쁜놈이다! 도덕심이 마비된 파렴치한이다!." 윤국은 또 한번 이성을 잃는다. 양현은 어리둥절하며 윤국을 쳐다본다. "몰랐어? 서울 가거든 형님한테 물어보아." 하다가 윤국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다. "아아. 가아! 집으로 가아! 어디든 가버려! 내 앞에 나타나지 말어!" "..." "제발 양현아." "..." "날 혼자 있게 내버려두어. 견딜수가 없다. 부탁이야." 양현은 비실거리며 일어섰고 몇 발짝 걸어가닥 뛰었다. 뛰어서 그는 둑길로 올라간다. 그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떄까지 지켜보고 있던 윤국은 모래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모래 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사방은 어두워져 오고 있었다. 어느새 해는 지고 없었다. 둥지로 돌아가는 새들의 모습도 끊기고 없었으며 강 물은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 길고 윤국이는 하동으로 나왔다. 옛날 동학군이 쳐들어왔을 떄 벼슬아치들의 목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는 곳, 강가 송림까지 온 윤국은 강쪽 을 살핀다. 하얀 모래가 반달에 반사되어 사람 하나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룻배가 강가에 매 여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윤국은 급히 그곳까지 내려간다. "사공 없소?" 소리를 지른다. 모래밭에 꺼무끄름하게 보이던 사람이 돌아보았다. "와요." 하며 그는 되돌아왔다. 늙수그레한 사공이었다. "배 나갈 수 있소?" "하참, 방금 다녀왔는데." "후히 줄 테니 건넙시다." "그럽시다." 사공은 선선히 말하고 배를 매어둔 밧줄을 푼다. 윤국은 배에 올랐다. 사공은 장대로 배를 밀어내면서 "술 생각이 나서 가는 거요?" 하고 실죽 웃었다. "그런갑소." 강 건너에는 유명한 횟집이 하나 있었다. 섬진강에서 건져올린 물고기가 횟감이었는데 특히 은어회는 천하 일 미였다. 작년 여름 윤국은 밍우랑 함께 그곳에 간 적이 있었다. "젊은 사람 나다니기가 상그러분데 조심하소." 장대를 걷어올리고 노를 저으며 사공이 말했다. "그래서 도둑고양이처럼 밤에 오는 거 아니겠소." "면소에서 통지하고 소집을 해서 데리고 가던 것도 이자는 옛일이요. 대나깨나 마구잡이로 끌고가이 이런 시 절에는 무자식이 상팔자요." "징용 말입니까?" "그거 아니문 머할라꼬 사람 끌고가겄소. 갔다한 연에는 돌아왔다는 사람이 없인께." "전쟁이 끝나야지요." "어느 세월에? 씨 다 말리고 전쟁 끝나믄 머할꼬?" "그래도 살아남는 사람은 있을 겁니다." "일전에도 강가에서 양복쟁이 몇 놈이 서성대고 있더마는 나룻배가 닿자마자 젊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나 이 지긋한 사람까지 끌고가더마요. 모친 약 지으러 왔다가 그리되고 보니 약이나 지어주고 오겄다, 통사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겄소. 절은 댁네는 또 울면서 남정네를 뒤쫓아가고 참말이제 눈 뜨고 못 보겄더마. 저승차산들 어디 그놈들 같을라고." "..." "덕분에 살판난 기이 면소 읍소 서기놈들이지. 그놈의 집구석에 가믄 없는 기이 없다 하더마. 징요을 면해볼라 꼬똥 묻은 중우까지 팔아서 그놈들 배애지다 쑤셔넣는 판국인께." "그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소. 어차피 갈 데까지 가겠지요." "하여간 면소 읍소 서기놈들 살판났다 카이. 아까도 면소 서기놈이 읍소 서기놈 몇 데리고 건너갔구마." 윤국이 배에서 내릴 때 "좀 있다가 이 배가 오기는 올 기요. 그놈들이 오라 했이니. 하여간 젊은 양반 몸조심하소." "고맙소." 윤국은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마을도 아니었고 가파로운 언덕위의 강을 내려다보는 곳에 그 횟집이 한 채 있 었다. 횟집에 들어서자 "저물기 오시네요."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말했다. 벌써 요란벅적한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공이 말하던 그 서기 패거리인 것 같았다. "혼잡니까?" 여자가 또 물었다. "그렇소." "최참판댁 서방님이제요." "어떻게 알았소?" "작년에 이부사댁의." "음." 총각이었지만 삼십이 가까운 윤국을 보고 여자가 서방님이라 한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윤국은 조그마한 방에 안내되었다. "횟거리가 씨원치 않은데." "술만 있으면 괜찮소." "옆방이 좀 시끄럽제요." "그런 것 같군.' "여기서는 굿을 쳐도 모린께 저리 야단입니다." 이윽고 술상을 차려왔다. 깔끔하게 정성들여서 차려온 술상 샅았다. 윤국은 술 한잔을 부어놓고 우두커니 그것 을 내려다본다. '송영광, 정말 그는 도덕심이 마비된 파렴치한인가? 아니다. 그는 정말 인간 이하인가? 그것도 아니다. 여자들 농락을 일삼는 색마인가? 그것도 아니다. 악마에 들린 것도 지옥에서 온 사내도 아니다. 왜그런 말을 했지?' 윤국은 술을 들이켠다. 속이 타는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그는 안돼. 신체가 불구인 것처럼 결코 정성적인 인물은 아니야. 어딘지 병적이고...그렇지만 난 또 뭐 야! 아까 왜 그렇게 미친 지랄을 했지?' 그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 영광이 평사리에 나타났을 때 윤국의 감정이 왜그랬는지, 직감적으로 뭔가가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윤국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격앙했다. 양현과 영광의 태도가 어색하여 그들이 이미 아는 사이가 아닌지 단순 히 넘겨짚은 것만은 아니었다. 강가에서 우연히 만난경위를 나중에야 양현한테서 듣긴 했으나 그래도 경계심 은 남았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격앙했는지, 경위 설명을 들은 위에도 어째서 경계심을 풀지 않았는지, 그것은 결코 오라비가 누이를 걱정한 마음은 아니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윤국은 경악했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 해 여름은 윤국에게 우울한 계절이었다. 어쩌면 그 때 오늘을 예감했는지 모른다. 그후 윤국은 때때로 뭔지 모 를 상실감에 빠지곤 했다. 그럴 때 그를 추스르게 하는 것은 일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구금은 그런 상실감에 제동을 걸었다. 윤국이 사회주의 노선으로 간 것은 아버지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었고 아버지의 신념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다. 그러나 윤국은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사실 전쟁에 광분하는 일본의 김 장부 동경에서 일본의 사회주의는 함몰했고 철저한 군국주의 통제하에서 윤국이 광여하고 있는 조직이란 실로 미미한 존재다. 반전의 기색만 있어도 자유주의의 편린만 보여도 용납 못하는 체제하에 많은 일본의 진보적 인사들은 투옥되었으며 죽임을 당했으며 말살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직은 미미했을 뿐만 아니라 실은 풍전 등화 같은 위험을 안고 있었다. 다만 희망을 일본 패망에 걸고 작으나마 조직의 강화를 꾀하며 이론 무장의 방향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정도였다. 이 조직에는 일본인도 두 명 있었다. 이 같은 윤국의 처지에서는 송영광 은 충분히 비판받을 만했다. 자유주의자, 이기주의, 방관자, 부패분자, 세속적으로도 영광은 결함이 많은 인물 이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순수한 인간적 입장에서 본다면 아무리 헐듣어도 영광은 경멸당할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백정의 자식이라는 것도 사상적으로 윤국은 거론할 처지가 아니었다. 다리가 약간 불편하다 는 것도 그의 모습 전체에서 우러나는 강한 매력은 그것을 커버하고도 남는다. 대학은 비록 나오지 않았으나 그의 지식과 안복, 깊은 물학적 소양을 윤국은 알고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장점과 장래성을 홀연히 버릴 수 있 었던 영광은 얻너 면에서는 정신적 강자라 할 수도 있다. 유랑극단의 색소폰의 주자, 소위 딴따라, 그게 어떻 단 말인가. 강혜숙과의 관계도 환국이로부터 들어서 윤국은 대강 알고 있었다. 한 여자를 버리고 망쳤다고 했 으나 실상 그것은 사실과 다랐다. 사춘기 때 편지질이 유죄일 수는 없었다. 그것도 여자 쪽이 먼저 아니었던 가. 그것으로 인하여, 혜숙의 부모들에 의해 영광은 학교에서 쫓겨나야 했으며 백정의 자식이라는 신분이 공개 적으로 성토되었던 것이다. 영광의 미래는 그것으로 끝장나고 말았다. 일본으로 달아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았고 철저하게 자신을 포기했으며 불구가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본으로 영광을 찾아온 것 도 혜숙이었다. 자포자기한 혜숙과 동서하게 되었으며 공부를 다시 시작하라는 황국의 간곡한 부탁을, 최참판 댁에서 학비를 내겠다는 제의도 다 마다하고, 결국 상처가 깊었던 영광은 혜숙과의 생활도 감당하지 못했다. 혜숙이 떠난 것은 그를 놓아주기 위해서지만 영광을 자신이 망쳐 놨다는 회한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윤국은 자신의 편견이 심한 것이 아닌가고 생각해본다. 영광은 분명히 피해자다. 그러나 역시 아무리 자신이 바로 서보려고 해도 양현과 결부시키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양현을 잃었다는 것도 견디기 어려웠다. 정말 양현을 잃은 것일까? 그는 자문해보는 것이다. '아버지 용서하십시오. 역시 이것은 길이 아니지요? 양현은 제누이지요? 아버지. 저는 누이를 잃었습니다. 차 라리 그애가 죽었다면 마음속에나마 남아 있을 것을...사내자식이 왜 그리 나약하냐,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 지 않을 것입니다.' 윤국은 빈 술잔에 술을 따라 단숨에 마신다. "거 얘기를 들은께 젊은 놈들, 지리산으로 많이 숨어들어간다 카는데 그렇기 내비리두어도 될까 모리겄소? 우 떻게 잡아내올 도리는 없이까요?" 옆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면사무소 서기 우개동의 목소리였다. "무신 수로? 산도 보통 산이건데? 처박히버리문 별수없제. 배애지가 고파서 기어나온다믄모리까, 누구네 방안 이라서 뒤져보겠나." "군대라도 동원한다믄." "이 사람이 정신이 있나 없나. 지금 시국이 우떤데 그런 소리를 하노. 전선에도 병정이 모자라는 판국에, 조선 인 징병제도는 병정을 쓰고 남아서 하는 줄 아나?" "하기사 그렇소만, 징용 할당량은 많고 사람은 없어이." "없기는 와 없노. 아직이야 쌨다. 젊은 놈 없이믄 늙은 거라도 보내야지, 우리가 알께 멋꼬? 시키는 대로 하믄 되는 기라. 우서기집에는 형님이 있잖은가." 걸걸한 목소리에 누군지 모르지만 일부러 약을 올리려고 한말인것 같다. "무슨 소리 하요? 우리 성이 가고 나믄 농사는 누가 지을 깁니까. 우리 식구 죽는 꼴 볼라꼬 그랍니까?" 발끈해서 하는 우개동의 목소리다. "항당량이 많다고 해쌓으니께 해본 말이제." "그래도 그렇제요. 세상 사람이 다 가도 우리는 못 그러요. 남 먼저 내 동생이 지원으로 일선으로 나갔고 그만 하믄 나라에 봉사할만큼 안했십니까? 우리가 출정 가족이라는 거를 몰라하는 말입니까." "그러를 누가 모리나? 그 덕분에 자네는 서기 감투를 썼고,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일 아니가. 출정 가족이라..." "그러지 마이소. 허주사를 지가 얼매나 존경을 하는데 그리 빈정거리 쌓십니까." 우개동이 숙어든다. "말만 가직 존경하믄 머하노. 입다실 기이 있어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안하든가배? 술 몇 잔가지고 고울라 카는 우서기 심보가 훤하게 들여다 보이서 그랬다." "하아 참, 지가 그리 미련둥이는 아닙니다. 그 집 처지가 하도 난감해서 나선 일인데, 원래 돈푼은 있는 집인 께 빈손으로야 부탁을 하겄소? 그 점은 걱정 놓으이소." "하하핫 하하하핫, 좋도록 하지 머, 누부 좋고 매부 좋고, 그거 다 우리 손에 달린거 아니가, 하핫핫핫..." "저러니, 면소 읍소 서기놈들 살판났다 할밖에, 그놈의 집구석에는 범의 눈썹도 안 기럽다는 소리를 듣지." 그것은 다른 목소리였다. "흠! 점잖은 강아지가 부뚜막에 올라앉는다 카더마는 만판 정한 척 그래 봐야 소용없제. 꿩 묵고 알 북고, 배 급계에 있는 놈들 세상이 다 아는 도적놈 아니가." "나는 도적놈으로 치자, 너희들은 지금 머를 하는기제? 목숨들을 바꾸어치기하고 있는 것 아니가." "둘러치나 메어치나 매일반 아니가. 다 살고 볼 일이다. 자네나 내나 시절 따라 살아가는인생이니 별수 있겠 나." "그건 그렇고, 우리끼리니 하는 말인데." 갑자기 목소리다 낮아졌다. "뭔가 조짐이, 영 기분 나쁘다. 전세가 씨원찮은 눈치라, 보도만 보아도 철퇴니 전멸이니 하고." "한두 번의 실수야 병가상사라 하니께요. 걱정할 필요 없십니다." 우개동의 잘난 척하는 목소리였다. "야마모토 사령관의 경우만 해도 미국놈들이 사령관이 탄 것을 미리 알고서 비행기를 떨어뜨렸다는 말도 있 고." "그건 확실히 기분 나쁜 소식이더마. 진주만 공격 때 지휘관이라해서 그놈들이 복수한 걸까? 명색이 별 세 개 짜리 해군대장 아니가. 쭉지가 부러진 기지. 일본 사람들 라디오에서 그 뉴스를 듣고는 얼굴이 노오래지더마. 아닌게아니라 예사 사건이 아닌 기라." "만일 일본이지믄 우리는 우찌 될까?" "재수없는 소리 그만두라! 그렇기 되믄 이판사판, 제에기랄! 머 일본이 질 리도 없겠지마는 징용에 끌리가서 죽느니, 내일 산수갑산 갈갑세, 오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산께." "이태리서는 무솔리니가 손을 들었다 카고, 독일군도 소련에서 항복했다 카고..." "일본은 절대로 손 안들 깁니다. 다 죽었이믄 죽었지 항복할 나랍니까? 일본에 앙갚음할 놈들 살려두지도 않 을 기고, 그렇게 되는 날에느 나라도 가만히 안 있을 깁니다. 안 있고말고요." "어쨌거나 돈으 있어야 해." 나는 도적놈으로 치자, 했던 사내의 말소리였다. '죽일놈들!' 윤국은 술잔을 움켜쥐었다가 또 퍼마시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면서 그는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요? 살아서 만날 수 있을까요?' 정신이 몽롱해진다. 눈앞이 흔들리고 있었다. '양현아! 너 그러면 안된다! 정말 그러면 안돼! 가지 말어! 가지말어! 내 누이로 돌아와. 내가 잘못 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손에 든 술잔이 흔들이어 술이 엎질러졌다. '송영광이, 그래 여자들이 좋아할 만하지. 인정한다. 그에게는 오로움과 절망과 허무주의의 짙은 그늘이 있어. 그는 세상을 용서 안하고 있어. 세상에 안기려 하지도 않아. 나는 그 점을, 바로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송 영광 그대는 죽어야 해! 죽어! 그대는 진실로 여자를 사랑하는가? 양현아 점잖고 머리 좋고 능력 있는 의사하 나 골라. 마음이 따뜻한 사내를 말이야. 아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난 난...한가하게 이, 이러고 있을 수 없어. 양현...' 윤국이 눈을 떴다. 타는 듯 목이 말랐다. 손을 뻗쳐 자리끼를 더듬었으나 없었다. 방안을 둘러본다. 집이 아니 었다. 그리고 밤도 아니며 사방은 환했다. 이불을 걷으며 벌떡 일어나 앉는다. 가슴이 꽉 메인 듯 아팠다. 어젯 밤 일이 생각났다. 뭔가 마음으로 외치다가, 외치다가 쓰러져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일어나싰구마요" 어젯밤 그 여자가 들여다보며 웃었다. "이거, 미안하게 됐소." "아입니다." "나 물 한 그릇 주시겠소?" 여자는 얼른 물 한 그릇을 가져다준다. 윤국을 시계를 보다가 물을 마신다. '저런 남자를 지아비로 삼는 여자는, 우떤 여잘까? 갖출 것 다갖추고 저 잘생긴 얼굴,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뛴 다.' 윤국은 물그릇을 비우고 그릇을 방바닥에 놓았다. "어젯밤 옆방 손님들 데리러 배가 왔일 때 깨우려 했지마는 정신없이 주무시는 바람에." "그 서기놈들 말입니까?" 여자는 킬킬 웃었다. "예, 그 서기놈들 말입니다." 신이 난 듯 그도 서기놈이라 했다. 윤국이도 슬그머니 웃는다. 횟집 주인 남자에게 셈을 하고 나서려 했는데 "좀 있어야 나룻배가 올 깁니다. 여기서 기다리다가 배가 오거든 나가시지요." 여자가 말했다. "아닙니다. 강가에서 기다리지요." 윤국은 횟집에서 내려왔다. 강가에서 얼글을 씻고 손수건을 꺼내어 닦고 나서 담배를 꺼내어 붙여문다. 늦은 아침의 강과 하늘 숲은 마치 사춘기의 시절같이 싱그럽고 좀 어설펐다. 이쪽은 산이 가파르고 산그슭이 강물 에 바싹 다가서 있었다. 저쪽은 하얀 모래밭과 둑길과 마을이 있었다. 그쪽 물가는 흰빛을 띠고 있었으며 이쪽 물가의물은 청록빛이었다. 흐르지 않는 청록빛의 강물, 세월의 이끼와 자연의 엄숙함, 냉담한 그림자가 드리워 져 있었다. 저쪽은 다사로운 햇빛이 부서지고 있었으며 엉성하고 잡다한 사람들의 입김이 서려 있었다. 윤국은 차안에 서서 피안의 양현을 바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강을 결코 건너지 못하리라는 것을, 피안에 닿 지 못하리라는 것을 윤국은 깊이 깨닫는다. 양현은 양현의 길을 가고 자신은 자기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을 받 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자기 자신에게도 어두운 그림자는 있다. 죽을지도 모르고 체포될지도 모른다. 언제 딛고 있는 땅이 함몰할지 모른다. 그것은 현재 조선인이 처해 있는 입지이기 도 했다. 마음으로나마 풀어주자. 양현을 그 인습에서나마 풀어주자, 편견에서나마 풀어주고 세속적 기준에서 도 풀어주자. 나룻배가 건너오고 있었다. 늙은 사공은 이따금 하늘을 올려다 보며, 눈부셔하며 노를 젓고 있었다. 배를 보았 는지 횟집 여자도 비탈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물가까지 온 사공은 간밤에 긴가민가 했는데 낮에 대면하게 된 윤국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여자는 윤국에게 자기는 하동읍에 장을 보러 간다고 했다. 쑥색 치마에 연분홍 저 고리를 입고 있었다. 몬빼가 아닌 여인의 모습이 흔치 않은 때인만큼 여자 모습은 연연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연학은 대문에서 뒷짐을 지고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윤국을 근 심하며 마을길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윤국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윤국이 마 당으로 들어섰을때 건이네가 뒤뜰에서 달려나왔다. 눈이 휘동그래져 있었다. "저기, 저어 양현아가씨가 아침에 떠났습니다." 맨먼저 보고를 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는지 서둘러 말했다. "그래요?" 윤국의 태도가 태연하여 건이네는 당황하고 무안해한다. "걱정 마십시오. 진주에 갔을 겁니다." 윤국은 사랑으로 돌아 나왔다. 연학이 역시 뒷짐진 모습으로 파초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빌어묵을 놈이 들어서 동네 씨를 말릴라 칸다." 그의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양현이가 떠났다든지 어젯밤 윤국이 어디 가서 잤느냐는 따위의 말은 내비치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엽이네 아들을 맨 먼저 보국대(징용)에 내보내더마는 눈밖에 난 사람만 차례차례 뽑아 보내고 이자 는 니내 할 것 없이 싹 쓸고 안 있나, 그래서 그 공으로 표창까지 받았으니 그 직일놈!" "시를 말리기도 하겠지만 더러는 뺴내주기도 한다면서요?" "어디소 그 말을 들었노." "아저씨 저도 귀 있습니다. 남 듣는 말 저라고 못 듣겠어요." 윤국이 웃으니까 빤히 쳐다보던 연학은 얼굴을 돌리며 "옛날 같으면...관수형님이 살아 기싰더라면, 개동이 그놈 못이 온전했겠나..." [5부 3권으로 이어집니다.] 어휘풀이 관골(20:6):광대뼈 제면할 기니께(27:12):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뜻. 벼슬을 면한다는 '제면'에서 나와 얼굴을 없앤다는 ' 제면'의 의미로 파생됨. 지릿대(28:14):[방언] 지렛대.지레. 미나카이(33:27):[일본어] 일본의 유명한 백화점 이름. 다치노미(38:19):[일본어]선술집 좀을 볶더마는(42:8): 가만히 앉아 았지 못하다. 진득하게 참고 기다리지 못하다. 부아(46:26): 노엽거나 분한 마음.'부애'(270:11):는 방언. 인야(47:22): 인품. '대인'이란 뜻이 들어 있음. 나무새(48:8): 양볼락과의 바닷물고기. 안고(53:12): 펴안하고 견고함. 마리(66:20): [방언]마루. 악대값(71:2): 남의 여자를 범했을 때 내야 하는 보상금. 멩태국(75:9): [방언]북어국. 근가죽(77:11): [방언]근처. 호가 난(79:21):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범우 장다리 겉은(79:22): [방언] 힘세고 씩씩한.삼국지에 나오는 키 크고 기운 센 범강과 장달을 가리키는 '범 강장달이'를 잘못 쓴 데서 나온 방언. 섭운코(79:24:): [방언] 서운하다. 이문가문하다(79:29): [방언] 정신이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다. 몽롱한 상태. 예인네(81:30): [방언] 여인네. 까대기(85:27):건물이나 담 따위에 임시로 붙여서 만든 허술한 건조물. 곤륜(93:20): 곤륜산. 중국 서쪽에 있다는 전설상의 신성한 산. 인왕(98:1): 불교에서의 수호신인 금강신. 쪼다리(98:22): [방언] 멍청이. 뽄세(99:4):[방언]본새. 드러내 보인ㄴ 모양. 동작이나 버릇의 됨됨이. 깔락깔락한(102:23): [방언] 날씬하다. 새가 많아서(102;26):[방언] 질투가 많음. 새살(103;23); [방언] 긴하지 않은 자잘한 이야기. 쪼나 빼고(103:25): [방언] 거드름을 피우다. 곤리(104:5): [방언] 권리. 뒤비시 업고(105:20): [방언] 뒤집어 업다. 덕달겉이(106:21): [방언] 득달같이.잠시도 늦추지 않고. 고냉이(110:25): [방언] 고양이. 갈불 수가 없고(110:30): [방언] '갋다'는 '가루다'(맞서서 견주다.함께 나란히 하다)의 경상도 방언. 어마도지해서(113:1): [방언] 어마지두에. 무섭고 놀라워서 장신이 얼떨떨하여. 이엉(116:21): 지붕을 이기 위하여 짚이나 새 따위로 엮은 것. 상청(120:1) '궤연'의 낮은 말. 죽은이의 영위를 두는 영궤와 그에 딸린 물건을 차려놓은 방. 쌨다(123:27): '쌔다' 는'쌓이다'의 준말. '쌔고쌨다'는 '아주흔하다.'는 뜻. 버마재비(129:8): 사마귀. 낫인것(133:29):[방언] 나은것. 낯선것. 이세(135;1); [방언] 바느질이나 음식 솜씨. 두랑(135:2): [방언] 두량. 어떤 일을 두루 헤아려 처리함. 신둥건둥(136:8): [방언] 싱둥겅둥. 건성건성으로 일하는 모습. 징을 냅니까(136:11): [방언] 증. '홧증'의 준말. 조왕(136:27): 민간에서, 부엌을 맡은 신을 이르는 말. 지천(138:21): [방언] 지청구. 까닭없이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 사깜 사는것(139:8): [방언] 소꿉 .소꿉놀이. 설치국(140:1): 나물에 쌀뜨물을 넣어 끓인 국. 배면이 했겄소(140:11): [방언]범연하게. 예사롭게 일을 처리하지 않겠다는 뜻. 여럽을 기고(140:15): [방언] 열없다. 어색하고 겸연쩍다. 정기(142:3): [방언] 부엌 굼재기고 나니(142:12): [방언] 굼적이다. 몸을 조금씩 움직이다. 짚둥같이 부어서(147:23): [방언] 짚동. 짚단을 모아 한 덩어리로 만든 묶음. 총후보국(204:7): 후방에서 나라를 위해 일함.조선 민족을 동원하기 위해 일제가 내걸었던 구호. 말똥머리(215:11): 동그랗게 말아올린 머리. 양머리라고도 함. 숭업다(218:14): [방언] 보기에 흉하다. 소쇄(238:12): 상쾌함. 산뜻하고 깨끗함. 탈병(249:6): 병을 벗음. 병이 나음. 숙수(251:25): 숙면. 박모(255:24): 땅거미. 해가 진 뒤로 컴컴하기 전까지의 어스레한 동안. 시적(258:3): 시적거리다. 힘들이지 않고 조금씩 하다. 악정을 부리겄노(258:6): 못된 행실. 접방 사는(258:11): [방언] 곁방살이 하는. 도붓장사(259:29): 물건을 가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파는 일. 행상. 느직하게(264:22): 여유있고 넉넉하게. 느슨하게. 콩기름(266:7) 콩지름(266:11): [방언] 콩나물. 아짐테서(266:9): [방언] 알수 없어서. 싸라지게(267:3): [방언] 지칠 정도로 몹시. 젓꾼(269:3): [방언] 어부. 내지구지(273:1): [방언] 속사정. 야미쌀(273:9): 암거래 되는 쌀. 얼랑누굴랑(274:21):[방언]형편에따라 다잡기도 하고 늦추기도 함. 지탕이 되겄소(274:29): [방언] 지탱. 유지. 잣사보아도(275:28): [방언] 저어보다. 동기간맨치로 새길 수도(277:9): [방언] 친형제처럼 사귀다. 나산타 말가(279:23): [방언] 나긋나긋 하다. 우둔증(280:9): 무서워서 가슴이 몹시 뛰는 증세. 기찹아서(281:22): [방언] 가난하다. 제우(282:4): [방언] 겨우 외고 펴고(282:18): [방언] 내놓고 공개적으로. 비렁밭(283:20): [방언] 산벼랑이 있는 버려진 밭 꽤깡시럽게(290:10): [방언] 엉뚱하게. 가이방해야(290:24):[방언] 어지간해야.맞잡아 상대할 만해야. 새키가서(292:13): [방언] 속히. 빨리. 귀주기(292:23): [방언] 기저귀 욕창(293:21): 병으로 오랫동안 누워있는 사람의 병상에 닿은 데가 곪는 부스럼. 탈저(293:21): 회저. 신체 조직의 일부가 썩어 기능을 잃는병 염포(293:23): 염할떄 수의를 입은 시체를 묶은 베. 상장(297:10): 상제가 짚는 지팡이. 과람(297:27); 분수에 넘침. 추굴(299:20): [방언] 추구. 일이 지난뒤 그 잘못을 나무람. 여기서는 신벌의 뜻. 곰배팔이(299:28): 팔이 꼬부라져 붙어 펴지 못하거나 팔뚝이없는 사람. 오복점(300:13): 양복점. 살강(302:8): 부엌의 벽 중턱에 드린 선반. 오세바세(303;10): [방언] 잘고 말 많은 것. 숫구(304;8): 숫기. 논이 안 나것노(305:5): [방언] 설움. 엄더레총각(307:2): [방언] 떠꺼머리 총각. 나이가 지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고 머리르 길게 땋아 늘인 총각. 열장(309:2):학급에서 한 줄의 책임을 맡은 학생. 귀축 영미(301:11): 영국과 미국의 귀신과 짐승에 빗대어 부른 일제의 구호성 표현. 신금(310:14): 임금의 마음. 일제가 자신들의 천황을 높인 말. 팔굉일우(310:21): 온 세상이 일본 천황을 중심에 둔 한 집안이라는. 일제의 그릇된 역사관을 선전하기 위한 말. 만세일계(312:20):온 세상이 일본 천황의 한 핏줄이라는. 일제의 왜곡된 역사관을 선전하기 위한 말. 구로(312:25): [일본어] 폭력. 아문(321:10): 옛날에 '관청'을 일컫던 말. 동방요배(321:24): 일제의 강요로,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해야 했던 의식. 칙어(325:12): 임금이 직접 내리는 말. 따리(329:6): 남의 마음을 사려고 알랑알랑하면서 비위를 맞추는 짓이나 말. 신관(330:11): '얼굴'의 높임말. 수이 없는(341:1):[방언] 숫기. 기상. 혀짜래기(355:13): '혀짤배기' 의 준말. 권법(363:8): 일제 때, 기생들이 기적을 두었던 조합. 재바르게(390:26):재치가 있고 날렵하다. 둘레판(393:29): 빙 둘러앉아 먹는 큰 상. 상그러분데(416:6): [방언] 쌍그렇다. 찬바람이 불 때에 베옷 따위를 입은 모습이 쓸쓸하다.여기서는 나다니기 에 좋지 않는상황이라는 뜻. 대나깨나 마구잡이로(416:10): [방언] 도나캐나(윷놀이에서의 도나개). 덮어놓고 마구잡이로. 중우(416:30): [방언] 바지. 고울라 카는(421:29): [방언] 꾀려고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