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일본은 없다 2 저 자 : 전여옥 지음 출판사 : 지식공작소 출판년도 : 1995년 이유 나는 평화형의 인간이 아니라 전시형의 인간이다. 편안하고 좋은 때보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되면 더 잘 견디고 힘이 솟는 형이다. 편안함을 권태스럽게 여기고 행운을 버거워하는 편이다. 그 래서 그런지 편안함도 행운도 내게는 인연이 없었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 늘 힘들고 어려운 상 황이었다. 그런 내게 『일본은 없다』가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이 붙은 책이 된 것은 드문 행운이자 '평화 시 대'를 예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일본은 없다』를 쓰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일 본인은 한국인의 스트레스 해소용, 열등감 위로용이라 했고, 한국인의 마스터베이션을 위한 책이라 고도 했다. 또 편견으로 가득 찬, 균형 감각을 상실한 책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한국 쪽에서도 옹 졸한 기쁨을 안기는 책이고 가뜩이나 좋지 않은 한일 관계를 더욱 악화시킨 문제가 많은 책이라고 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자칫 평화형으로 안주할 뻔한 나를 전시형의 인간으로 전의를 불태우게 했다. 그 모든 덕분에 나는 『일본은 없다 2』를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에서 확실히 말해 두자고 마음먹었다. 내가 단순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책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일본은 없다』라는 책을 썼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 나는 마스터베이션을 좋아하지 않는 다. 더구나 특별한 열등감을 갖고 있지도 않다. 무엇보다도 편견의 대상인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그들의 의견과 관심은 고맙지만 잘못된 것이다. 『일본은 없다』를 냄으로써 나는 아주 귀하고 소중한 인연을 많이 맺을 수 있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한 학생은, '마시는 물도 일본물이 더 좋다'는 재일 교포 숙모로부터 받은 자존심의 상처가 나의 책을 통해 회복되었다고 했다. 또 한 중학생은 일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바로잡고 우리 역 사에 대해 애정과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의젓한 편지를 보내 주엇다. 일본에서 십 년을 공부하고 지금은 한 대학의 교수로 있는 분은 유학 시절 자신이 느낀 것을 대신 써준 데 대해 고마움을 표시 해 주셨다. 많은 분들이 좋은 자료를 보내 주시면서 일본의 본질을 파헤쳐 달라고 과분한 격려를 주셨다. 그러나 가장 기쁜 일은 종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힘을 쏟고 있는 이효재 선생님께서 '좋은 책을 썼다'고 말씀해 주신 일이었다. 『일본은 없다』라는 책을 종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썼던 나였기에 선생님의 말씀은 더 없는 격려가 되었다. 역사에서 약자, 당한 자의 역 할과 몫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나는 종군 위안부 문제를 내내 지켜보면서 철저히 배울 수가 있었다. 나이가 꽤 드셔서 대학에서 은퇴하신 한 선생님의 글도 잊을 수가 없다. 약 60년 전 일본 유학 시절 한국인이라고 방을 빌려 주지 않았던 일본인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60년이 지잔 지금도 나와 같은 젊은 세대가 여전히 같은 일을 당하다니 기막힌 일이라고 가슴 아파하셨다. 그래서 나는 쓰기로 했다. 평생 쓰는 작업에 매달리기로 했다. 도저히 일본을 일본인을 용서할 수 없어 나는 쓰기로 했다. 일본이 내게 한 일을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 한 일을 잊지 않기 위해 나 는 쓰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일본을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죽을 때까지 쓰기로 했다. 나의 후배와 젊은 청소년들이 일본에 가서 나와 같은 일을 겪게하지 않기 위해 나는 이 책을 썼 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나의 세대까지는 기꺼이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하 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21세기가 한민족의 꿈과 힘 그리고 의지대로 펼쳐질 것을 확신 하기에 이 책을 썼다. 나는 이 책을 '전시형의 인간'으로서 '평화형의 인간'이 될 젊은 세대에게 바 친다. 1995년 3월 16일 전여옥 목차 이유 1. 토끼니까 토끼장에 산다. 극치의 쾌감 - 노조키 이지메 - 화를 이루는 길 명함 소사이어티 튀어나온 못은 두드려 넣어라 토끼니까 토끼장에 산다 저항하지 말자 진짜'토끼'는 도망이라도 한다. 생각하지 않는 죄 2. 게임의 법칙 일본은 시골이다 토스트보다는 역시 미소시루 게임의 법칙 일본식 국제화 쾌락의 혼혈아들 오억 엔쯤 주면 하프의'청출어람' 차별이냐, 특별 취급이냐 언제 우리가 차별을 했느냐 3. 석양의 제국 일본은 늙었다. 석양의 제국 모방의 시대는 끝났다 정보 후진국 일본 4. 나는'탈락'하고 싶다 '불멸의 산'회사 '노르마'증권 회사를 상대로 한 불륜 엄마는 자동판매기 스카웃은 악이다 도전자들 나는'탈락'하고 싶다 5. 신데렐라 스토리 남자의 몫을 빼앗었다 기자냐, '여'기자냐 '남자'만'인간'이다 신데렐라 스토리 크로와상 증후군 제도화된'세쿠하라' 여성은'방어'할 수 없다 일본을 떠나는 일본 여성 6. 일어서는 여성들 여성 승리 OL의 애프터 5 나는'결혼'이 싫다 바쓰 이치 빛 지방 의회를 움직이는 보통 여성들 이 여자가 사는 법 한 앵커우먼의 비싼 수업료 미야자와 리에의 성숙 물결을 거슬러 가는 물고기처럼 진짜 사랑을 해본 여자는 무서운 것이 없다 7. 비죤 오부 자빤 21 위험한(?) 바위에 앉아 근사하게 작게, 찬란하게, 천황을 위하여 더 이상 멍청한 경리부서는 싫다 비죤 오부 자빤 21 8. 베일을 쓴 추녀 트로이의 목마 쉽게 삽시다 예쁘게 더욱 예쁘게 사면 된다 융단 폭격 유혹×자극 = 능욕 베일을 쓴 추녀 공격이 최상의 방어다 9. 한국을 버리자 쉬쉬하고 감추어라 이지메의 장난감 추악한 한국인 오늘은 여성 두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켰을 뿐이다 강간의 기념물 절규 친한파들 진실과 정의 10. 적색 경보 야스쿠니 신사는 나이트클럽 한 건씩 합시다 - 아, 옛날이여 아우슈비츠는 날조다 건성으로 이야기하자 적색 경보 마음먹고 주는 것 히로시마의 평화! 평화! 평화! 나도 어른이 되고 싶다 반성 없이 평화 없다 매듭 1. 토끼니까 산다 극치의 쾌감 - 노조키 이지메 - 화를 이루는 길 명함 소사이어티 튀어나온 못은 두드려 넣어라 토끼니까 토끼장에 산다 저항하지 말자 진짜'토끼'는 도망이라도 한다 생각하지 않는 죄 극치의 쾌감 - 노조키 『일본은 없다』의 일본어판을 내면서 나는 편집을 담당했던 사이토씨에게 물었다. "한국인들을 위해 쓴 것인데 과연 일본인들에게 이 책이 팔릴까요?" 그러자 사이토씨는 아주 자신 있는 표정으 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저는 아주 잘 팔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왜냐구요? 전여옥씨가 잘 아시다시피 일본인들에게는 엿보기 취미가 있으니까요. 일본인들은 직접 사람과 부딪혀서 이야 기하고 현장을 확인하기보다는 살짝 숨어서 엿보는 것을 아주 좋아하지요. 숨어서 엿보며 쾌감을 느끼듯이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인들은 조금은 가학적인 쾌감을 느낄 겁니다. 일종의 노조키 취미 지요. 바로 그 심리가 반드시 이 책 『불쌍한 일본인』(『일본은 없다』의 일본어판 제목)에 맞아 떨어질 테니까요." 바로 이러한 일본인의 '엿보기'취미를 최고로 만족시켜 준 사건이 일본에서 일어났다. 제목은 '츠 쿠바 의사 살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 도로 엽기적이다(나의 일본인 친구는 일본인의 상식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일본 츠쿠바 시에 사는 에리트 의사인 노모도 이와오(29세)가 그의 처인 에이코(31세)를 목졸라 숨지게 한 뒤 친자식인 맏딸 아이미(2세)와 아들 유조(1세)를 살해하고 함께 유기한 사건이다. 노모도는 일단 부인 에이코의 시체를 비닐 봉지에 싸서 요코하마강에 버린 뒤 역시 아들과 딸도 비닐 봉지에 싸서 어두운 강에 던진다. 츠쿠바 대학의 엘리트 의사인 노모도는 경찰에 부인과 아이 들의 실종 신고를 하고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병원에 출근해 환자를 보는등 아무런 동요 없이 생활 을 한다. 그러나 완전범죄는 없는 법, 노모도의 행동거지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의 치밀한 추궁이 계속되자 그는 마침내 실종 신고 후 3주 만에 자신이 지은 죄를 모조리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밝혀진 사건의 실상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매스컴은 이 '죽은 자에게는 인권이 없다'는 태도로 이 사건에 달려들었다. 매스컴은 이 ' 부유한 의사의 가정'을 속속들이 파헤치기 시 작했다. 그러자 매스컴의 탐욕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사실이 드러났다. 피해 당사자로서 이미 죽 어 버려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 절대적인 약자, 부인 에이코의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생활이 그것 이다. 일본 매스컴의 보도에 따르면 에이코는 이번이 두번째 결혼으로 첫 남편인 메밀국수집 주인 아들 과의 사이에 이미 아들 둘을 두었다고 한다. 그녀는 단과대학을 중퇴하고 간호 보조원 업무를 익혀 아르바이트로 병원에 다녔는데 바로그 병원에서 현재 남편인 의사 노모도를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당시에이코는 낮에는 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밤에는 '에르시토'라는 술집에 호스테스로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더욱 충격적인 것은 에이코가 전남편과 이혼을 하고 노모도와 정식으로 결혼을 한 뒤에도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살해되기 직전까지도 나간 그 술집은 이른바 '란제리 파브'라는 곳으로 호스테스인 여성들이 브래지어와 팬티만을 입고 손님을 맞는 요상 한 술집이었다. 일본에서도 의사라는 직업은 이른바 '부와 명예'의 상징인데 속된 말로 부러울 것 없는 의사 부인 이 왜 낮에는 검사실의 보조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속옷만 걸치는 술집에 나가야 했을까? 일본 텔 레비젼의 '주간지'라고 할 수 있는 와이드 쇼에 따르면 그녀는 '엄청난 빚'때문에 몹시 고생하고 있 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빚을 갚기 위해 그녀는 병원 검사실로 술집으로 밤낮 뛰어다닌 셈이 다. 그러나 에이코의 생활 수준은 일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정하는 초호화판이어서 이 또한 일본 매 스컴의 흥미를 자극했다. 좋게 말하면 꼼꼼하고 나쁘게 말하면 조잡한 일본의 매스컴은 에이코가 살해 될 때 입은 운동복이 값비싼 '소니아 리키엘'브랜드라는 사실부터 집값이 얼마이고, 두 대의 자 동차가 3자리로 시작한다는 점(일본의 비싼 자동차는 33이란 숫자가 붙어 있다), 기르고 있는 애완 견 두 마리가 엄청나게 비싼 개이고 무공해 자연 식품만을 배달해 먹었다는 등 끝도 없이 파헤쳤다. 와이드 쇼이 한 리포터는 대부분의 사건은 파헤치면 끝이 보이기 마련이지만 이 사건은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더 많은 것이 나온다며 목청을 돋구었다. 드디어 와이드 쇼를 비롯한 일본의 주간지는 에이코의 부엌에는 프라이팬이 없다는 사실까지 발견해 놓고 의기양양해 했다. 이 사건은 용의자 노모도에게는 사귀던 여성이 있어 이혼 위자료를 놓고 싸움을 벌이다 용의자 노모도가 발작적으로 에이코를 목졸라 숨지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극에 이르렀다. 남부러울 것 이 없었던 의사 부부의 이러한 실상은 일본인의 '엿보기 취미'를 크게 자극했다. 이 사건으로 민방 의 광고 수입은 치솟았고 작년의 사건 가운데 가장 많은 시간 동안 텔레비전에 보도되는 신기록까 지 세웠다. 이 사건이 보도된 시간은 자그마치 17시간 55분 22초로 단연 제 1위를 기록한 것이었 다. 이 사건은 일본인의 엿보기 취미를 바탕으로 '타인의 불행은 나의 꿀맛'이라는 일본의 속담을 적 나라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거의 모든 일본인이 이 사건을 '꿀맛'처럼 달콤하게, 깨소금처럼 고소하 게 즐겼다는 이야기이다. '부당한 사생활 침해'와'살해된 자의 명예'에 대해서 언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명제를 일본 매스컴과 국민은 100퍼센트 이용하여 즐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 평론가들은 사건의 본질과는 무관한 에이코의 과거를 들춰내는 것은 사생활 침해라고 강변 했지만 그것은 아무런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되고 말았다. 또 신문에 기고한 한 여성 소설가는 신분 의 차이를 뛰어넘을 수 없는 비극이 발생시킨 살인극이라면서 여성이 남성에게 아이를 가진 것을 이유로 억지 결혼을 강요한 결과라고 독특한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한 사회학자의 분석은 꽤 흥미롭다. 그는 이 사건은 일본의 성인들이 사 실은 '아이들'이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저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사는 오늘의 일 본 젊은이들, 자신의 행동에 아무런 책임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그때 그때'만을 즐기는, 몸 은 성인이지만 정신 연령은 어린이에 불과한 일본 젊은 세대의 초상이 이 사건의 밑그림이라는 지 적이다. 마음대로 기분 나면 신용카드를 그어 대고 산더미 같은 쇼핑을 하고 그 다음에는 카드 도 산을 해버려 신세를 망치는 오늘의 일본 젊은 세대와 마찬가지로 이들 부부는 결혼도 아이도 살림 살이도 생활도 모두 그렇게 무책임한 어린이처럼 '잔고 없는 구좌에 신용카드 긋듯이'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번 사건은 일본인의 이른바 '엿보기 취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의사, 미모의 부인, 속 옷 술집 근무, 이혼, 빚더미 그리고 애인 등등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든 것이 이 사건에는 갖 춰져 있다. 이런 사건은 일본 사회에서 무척이나 몰인정하고 매정하게 다뤄진다. 하긴 원래 구경 꾼의 심리는 잔인한 것이다. 더더구나 숨어 살짝 엿보는 구경꾼은 더할 나위 없이 잔혹하다. 피해 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은면 높을수록, 그 범행 수법이 상상을 넘어서면 넘어설수록 이 '숨어보는 악 취미'를 만족시켜 준다. 많은 일본 주부들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한 살과 두 살 짜리 아이가 있는 엄마가 어떻게 심야에 '그렇고 그런 술집'에 나갈 수 있었는지를 궁금해 하고, 메밀국수집의 며느리에서 엘리트 의사의 부 인이 된 이른바 '계층 이동'의 통로를 알고 싶어한다. 그리고 일본의 민방들은 채널권을 가진 이 주 부층을 붙잡아 놓기 위해 파낼 수 있고 벌거벗길 수 있는 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어 더 이상 항변할 수 없는'한 인간을 난도질한다.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라면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설령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더 라도 피해 여성이 속옷만 걸치고 술을 따르는 술집에 나간 사실이나 그녀의 집에 프라이팬이 없었 다는 사실 등 전혀 사건과 무관한 부분이 폭로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일본인에겐 과연 타인에 대한 존중과 동정심이 있는가? 사생활이란 마땅히 보호되어야 하고 지 켜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일본인의 이른바 '노조키 심리'는 타인의 행복과 잘사는 것을 엿 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불행을 엿보는 마음인 것이다. 속을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에게 있어 노조키 취미는 아마도 극치의 쾌감을 안겨 주는 듯 하다. 결국 이 '속마음'(혼네)을 숨긴 엿보기 취미는 '이지메'행위에 다름아니다. 한 인간을 괴롭히거나 때 리고 살해한 뒤, 숨어서 살짝 엿보는 이 '노조키'는 일본인의 전형적인 사고 방식이기도 하다. 전후 50년을 회고하며 '일본은 아무것도 뉘우칠 것이 없다'고 외치는 일본인의 역사관이야말로 '잔혹한 이 지메'를 확인하며 쾌감을 누리는 '노조키 행위'는 아닌지 묻고 싶다. 이지메 - 화를 이루는 길 아이들이 자살하는 나라 일본. 물론 그 주법은 '이지메'이다. 이지메는 한 명을 정해 놓고 다수 가 집요하게 괴롭히는 행위를 말한다. 이 이지메는 일본에서 '형사 사건'으로 취급될 정도로 이른바 '악질적인 행동'이다. 이'이지메'로 많은 일본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최근에 화제가 된 사건은 일본 아이치 현의 중학교 2학년 오코우치 기요데루의 자살이다. 오코우 치는 같은 학교의 친구들 열두 명으로부터 이지메를 당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오코우치에 게 계속 돈을 가져오라고 협박하고 머리를 강물에 처박는 것은 물론 양어깨를 조르는 등 가혹한 린 치까지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초기에는 미처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다(이지메로 자살하는 일본 아이들은 대개 장문의 유서 를 남긴다.) 처음 학교측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이지메가 있었던 것은 알 수가 없다'라고 주장했 다. 그러나 주위의 상황을 조사하면서 가혹한 이지메를 당한 것이 하나하나 밝혀지자 이번에는 '이지메를 당한 학생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나와 물의를 빚었다. 이런 식이니 '이지메에 대 해 학교측에 물으면 없다고 하고 아이들에게 물으면 너무나 많다'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 다. 나중에 발견된 오코우치 군의 유서는 우리에게 일본의 많은 것을 알려 준다. "오늘 갖고 갈 돈을 아무리 해도 마련할 수가 없어서"로 시작되는 그 유서는 B5용지 넉 장에 빼곡이 씌어져 있었다. 국 민학교 6학년부터 이지메를 당하기 시작해 중학교 1학년이 되자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중학교 2 학년이 되고 나서는 너무나도 지독해졌다고 한다. 오코우치 군은 너무나 견디기 힘들어 실은 일찍 죽고 싶었으나 가족들 때문에 참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또 유서에는 빼앗긴 돈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는 유서와 더불어 빼앗긴 돈의 총액인 114 만 엔의 청구서를 남겼다. 어머니 앞으로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꼭 그 돈을 받으라'고 부탁의 말까지 써 놓았다. 이 사건은 한 소년이 부모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선생에게도 사회에게도 아무런 표시를 못 한 채 결국 '목매 자살할 수밖에 없는'일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말해 준다. 일본의 이지메는 인간 에 대한 박해 행위이다. 물론 어린 학생들뿐만 아니라 성인들의 조직 사회에서도 이지메는 건재하 다. 이지메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정신적으로 나약한 사람, 육체적으로 약하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주위에서 집단으로 이지메를 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가장 약한 사람을 못살게 굴면서 쾌감을 만끽하는 이지메는 일본 성인들 사이에서도 일종의 '승인된 제도'이다. 직접 이지메의 대상이 된 체험을 한 일본의 한 관료는 이지메를 물리치는 비결을 책에다 쓰기도 했다. 그의 이지메 퇴치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집단에 약한 점을 보이지 말 것. 둘째, 당하는 쪽 역시 위압적인 자세를 취할 것. 셋째, 자신이 지닌 능력을 강조할 것. 넷째, 상대의 약점을 강력하 게 공격할 것. 다섯째, 상대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들 것. 마지막으로 상대에게 자신의 강한 점을 알릴 것. 전쟁을 불사하는 듯한 이 이지메 퇴치법은 일본 사회가 얼마나 가혹한 이지메의 현 장인가를 피부로 느끼게 한다. 이지메는 '형태'를 달리한 차별이다. 즉 하나의 집단, 하나의 테두리에서 내몰린 사람에 대한 가 혹한 처벌인 것이다. 그 차별은 폭력과 음모 그리고 가혹한 스트레스를 수단으로 해서 대상을 막다 른 골목까지 몰아세운다. 집단적인 이지메의 대상으로는 일본의 옛 천민 집단인 부라쿠민이 있고, 오키나와 사람들이 있고, 그리고 재일 동포들이 있다. 단지 자기네 집단과 다르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이들에게 가하는 '부당 한 차별'은 일본만의 독특한 이지메의 총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힘이 없고 약한 그리고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은 집요하게 내몰고 이지메를 가하면서 일본인들은 그들의 최고의 목표 화(和)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남을 괴롭히는 쾌감을 즐기면서 그 맛에 빠져들 어 간다. 일본인들에게 이지메의 존재는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자기네와 다르다고 차별하고 '이지메'를 가하는 일본의 현실은 일본 스스로를 자살로 이끄는 죽음 의 병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이 그토록 소리 높여 외치는 이 국제화 시대에…. 명함 소사이어티 일본 사람과의 만남은 언제나 똑같은 순서에 의해 진행된다. '잘 부탁합니다'라는 말에 이어 명함 을 내밀고 신분을 밝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내가 누구'라는 것보다 '어디에 있는 누구'라는 것이 중요하다. 즉 기자, 회사원, 무용가, 요리사, 보모 식으로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소속된 누구'라고 밝히는 것이다. 기자라고 하면 어느 신문사의 기자인가가 중요하고 회사원이라고 하면 무슨 주식회사, 요리사라고 하면 어느 음식점이 중요한 것이다. 학자 역시 마찬가지로 어느 대학이 중요하다. 그래서 일본인 들은 누구나 다 명함을 가지고 다닌다. 말로 하는 것은 신빙성이 없어서인지 명함을 내밀고 교환하 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하다못해 약국 주인, 국수집 주인은 물론이고 재미있는 것은 대학생들까지도 명함을 지니고 있다 는 사실이다. 아마도 세계 어느 나라를 가봐도 대학생들이 명함을 내미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을 것 이다. 대학생들이 내미는 명함에는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 전공 그리고 학과 사무실과 집 전화번호 가 적혀 있다. 물론 주부들도 명함을 갖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주부들의 명함에는 직함이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고 이름과 집 전화번호만 적혀 있었다. 나는 명함이 없으면 '시민권'을 얻을 수 없는 일본 사회를 깨달아 가며 이왕이면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전업 주부'라고 쓰지 하는 생각을 했다. 한 번은장관의 부인을 사석에서 만난 일이 있었는데 역시 명함을 교환했다. 일본 종이인 화지로 그럴듯하게 만든 명함을 들여다보니'남편의 명함'이였다. 나는 참 떨떠름한 기분이었는데 그 부인은 오히려 현직 장 관인 남편의 명함을 건네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했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사고 방 식이었다. 일본 사회에서는 명함이 없으면 꼼짝하지 못한다. 일본에서 내가 뿌린(?) 명함만 해도 지금 대충 어림잡아 보니 적어도 천 장은 되는 듯하다. 그리고 명함을 뿌린 대상도 장관 등 일본의 고위 정치 인부터 내가 살던 아파트의 수위아저씨까지 각계 각층을 망라한다. 일본 사회에서 이처럼 명함이 필요한 데는 '못미더움'과 '개인이 무시되는 사회'라는 두 가지 측면 이 숨어 있다. 마치 일본인들이 아직도 '플라스틱 머니'인 신용카드 대신 '현찰'을 좋아하는 것처럼 개인이 밝히는 '누구올씨다'보다는 인쇄된 명함을 통해 증빙받고 안심하는 것이다. 개인의 존재는 일본 사회에서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그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한 개인은 능력이나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조직에 의해 도매금으로 평가된다. 그 도매금의 평가가 명함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인들이 정열적으로 명함을 교환하는 모습은 일본 사회를 회화적으로 보여준다. 명함을 열심 히 교환하는 개인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마치 시부야역이나 신주쿠역 앞에서 오고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리대금회사 전화번호가 인쇄된 싸구려 휴지를 나눠주는 하루살이 선전원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튀어나온 못은 두들려 넣어라 일본에 처음 가서 아이들을 보고 크게 놀랐던 경험이 있다. 한겨울인데도 아이들이 짧은 반바지 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도 예외는 아니어서 짧은 치마에 허벅지가 다 드러난 채 반양말 만 신고 있었다. 일본의 추위는 우리 나라보다 덜하다고 느꼈지만, 오슬오슬 살을 파고드는 식으로 외려 더 견디기가 힘들어 일본에 가서 처음 일년간은 감기를 달고 살았다. 결코 만만찮은 추위에 왜 국민학교 어린아이들을 저렇게 살이 시퍼렇게 되도록 벗겨 내보내는지 하는 것이 솔직이 내 심정이었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추운 겨울에도 맨살로 지내게 하면 피부를 단련시켜 감기에도 걸리지 않게 되는 것은 물론 하체를 튼튼 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인내심과 근성을 길러 준다고 했다. 일본에서 살다 보면 온 국민이 마치 보이지 않는 규제 속에서 훈련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 론 우리가 보기에 그렇고 당사자인 일본인들에게는 하나의 사회적 규칙, 사회적 규범 정도로 생각되 는 듯하다. 지금까지 일본의 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나라가 국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명령하고 몰아 친 것을 알 수 있다. 전쟁 준비를 하면서 '승리할 그날까지, 우리는 참고 기다리겠다'는 구호를 외 치며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감수하고 군함을 만들었던 일본인, 잘사는 나라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경제대국의 가난한 국민'으로 얌전히 살아가는 일본인들은 정말로 다른 나라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대상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 모든 것은 일본인 나름대로의 규칙, 일본인만의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라고 말한다. 우춘 겨울날에 아이들을 맨살로 내보내는 것은 개인의 요구를 버리고 국가의 요구에 아무런 저항 없이 따랐던 일본인들의 초상을, '보편성'과 '상식'보다는 '일본적인 것'과 '일본인 나름대 로의 질서'를 우선하는 그들의 행동 양식을 보여준다. 일본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일본인이 한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에는 언제나 조직이 있고, 그 조직을 기반으로 해서 일본인들의 인간 관계와 삶이 시작된다. 즉 '무라 사회'인 것이다. 이 '무라 사회'의 기본 방침은 전원이 모두 엇비슷하게 조 화라는 이름 아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다. 튀어나온 못은 두드려 집어넣어라는 일본의 속담처럼, 일본 사회는'화(和')라는 이름 아래 이른바 튀고 개성 있는 사람들에게 스트레스와 규제를 가했다고 볼 수 있다. 학교에서 가정에서 자녀를 키 우는 기본적인 교육 방침은 좋게 표현하자면 '잘 어울리는 사람'을 만들자는 것인데, 실상은 '조직'에 순응하는 사람을 키우자는 것이다. 일본인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귀가 아프도록 듣고 자라는 말이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말이 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고 남의 신세도 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조직의 한 세포를 길러내는 역할을 맡은 곳이 가정과 학교였다. 조직의 한 구성 원으로 살아 온 일본인들은 조직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아 왔다. 물론 자신보다 조직을 우선하고 조직의 미래를 먼저 생각했다. 결국 일본인들에게는 가정도 학교도 하나의 조직이다. 사회의 가치 기준이 그대로 옮겨진 조직인 것이다. 또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강조하는 것이 일본의 자녀 교육이다. 자녀에게 원대한 꿈과 포 부를 가르치기보다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인생을 가르친다. 얼마 전 일본의 부모들에게 자녀들이 어떤 직업을 갖기를 원하느냐는 설문 조사가 있었다. 제1위가 남자 아 이는 공무원, 여자 아이는 국민학교 선생님이었다. 우리 나라의 부모들이 자신보다 훨씬 더 나온 계층 이동과 전문직 지향을 보이는 것과 퍽 대조적이다. 원래 일본에서는 천하제일 정신을 존중하고 기술자를 우대했다. 이러한 요소는 일본의 제조업 발 전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보다 큰 공헌은 일본인들에게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개인이 열심 히만 하고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 복을 받고 훌륭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한 것이다. 즉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분수를 지키게 하고 자신의 계급에 대해 만족을 하게 한 것인데, 이는 달리 본다면 사회에 대한 저항 기제를 원칙적으로 억누른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인들에게는 커다란 힘에 대한 저항, 계층 이동에 대한 욕구, 개인의 생활을 우선하는 사고는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조직과 집단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었으며, 강한 자에 대한 순응이 곧 집단에서 살아가는 규칙이자 방법이 되었다. 바로 일본의 교육이라는 것은 이 방침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주입시켜 일본 사회가 요구하는 인물을 만드는 것이다. 야심만만하고 개성이 넘치는 인물보다는 조직에 적당하게 맞는, 그림자를 너무 길게 드리우지 않 는 튀지 않는 인간을 키우는 데 일본 교육의 목표가 있다. 바로 이러한 일본의 자녀 교육, 사회 교육 방침은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보았듯이 '무엇을 위 해, 누구를 위해, 왜'라는 질문도 없이 목숨을 던지는 많은 일본인들을 만들어 냈다. 언제난 질문이 봉쇄되고 저항이 금기되는 교육 아래에서 일본인들은 부나비처럼 목숨을 던지고 2천만 아시아인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아무런 저항도 의문도 없이…. 토끼니까 토끼장에 산다 일본판 「뉴스위크」가 지난 8월 말에 특집을 냈다. 제목은 '일본인이 이민 가서 살기 좋은 곳 열 나라'였다. 이 특집은 다음과 같이 일본인을 유혹하고 있다. "좁아터진 일본, 여유 없는 생활, 이 미래 없는 일본을 떠나 편안하고 물가 싸고 정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갑시다." 이 특집에서는 일본인이 이민 가서 잘 적응할 수 있는 곳을 물가, 치안, 교육, 병원, 그리고 일본 도(얼마만큼 일본의 소식은 물론 문화를 접할 수 있는가 하는)에 따라 점수를 매겨 고득점 순으로 세계 각국의 나라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에 뽑힌 지역은 쿠알라룸푸르부터 더블린, 미국의 듀크대 학 주변 등 세계 모든 지역을 망라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일본을 떠나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우리는 이민을 떠난다고 하면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 즉 이민 사회에서 돈을 벌거나 크게 성공하는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는 이민이라고 하면 '일본 탈출'이라는 의미가 있다.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벗어나 살고 싶다거나, 자녀 교육도 좀더 인간적인 데서 시키고 싶다거나 또는 좋은 공기와 넓은 집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이민'의 목적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전후 50년을 맞아 일본인의 생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경제적으로 일본은 부강한 나라가 되었지만 여전히 일본인 은 '토끼장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사설에서 한 서양 특파원의 말을 인용해 "일본 인은 토끼장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이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자신이 토끼라는 사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 특파원은 일본인들이 자신을 토끼라고 여기고 토끼장 같 은 작은 집을 찾아 헤맨다는 것이다. 토끼니까 토끼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외국 특파원은 토끼 라는 것을 감수하는 일본인을 동정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고 덧붙였다. 사실 '토끼'가 아닌 외국인들 은일본에서의 삶을 지긋지긋해 한다. 일본에 온 외국인들 가운데는 일본에서 살면서 노이로제 증상 을 보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 이유를 넓디 넓은 자기 나라에서 살다가 좁은 주거 환경에 서 스트레스를 받아 노이로제 환자가 되어 버린다는 것으로 설명한다. 토끼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일본인들은 일본이라는 국가에 의해 희생당했다. 일본의 정책은 생활 대국을 외치지만, 결국 국민 생활보다는 철저하게 산업을 먼저 생각하고 우선해 왔다. 지난해 일본 국민은 가뭄 때문에 절대적인 물 부족에 시달렸다. 이런 경우 가장 먼저 물 아껴 쓰 기를 하는 '절수'의 대상은 언제나 국민학교 수영장과 공원의 분수 등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물을 많이 소비하는 곳은 공장을 비롯한 산업 시설이다. 가정용 물의 소비는 실제로 20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나 국민에게 가장 먼저 요구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체질이자 습성이 다. 국민이 절약하고 참고 견디는 것은 일본 역사에서 언제나 있어 온 일이다. 가깝게는 제2차 대 전중에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때가 그랬는데, 집단 환각에 걸렸던 일본인은 저항이나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국가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가령 주택 문제만 해도 그렇다. 무서 운 속도로 진행된 경제 발전 과정에서 일본의 땅값은 엄청나게 상승을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오르기만 하는 토지를 담보로 은행으로부터 고액의 융자를 받아 설비에 투자했다. 그러나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죽자살자 일했던 서민은 결국 아무리 일해도 내 집 마련의 꿈으로부터 자연 히 멀어져만 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국민들은 정부에 대해, 국가 에 대해 불평을 할 줄을 모른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편한 직업이 일본 국민을 상대로 하는 정치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국 민들은 그저 '위'에서 하는 이야기를 따르고 거대한 권력 앞에 무력한 개인으로서 존재한다. 지금의 상태를 분명히 더 낫게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가는 개선을 생각도 하지 않고 국민들은 개선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일본 국민들은 '쇼가 나이'(할수 없다)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일본 정부 는 '시카다 나이'(방법이 없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일본 국민은 어떤 의미에서 제 밥그릇조 차 찾아 먹지 못하는 무능한 국민이고, 일본이라는 국가는 국가의 역할 방기한 뻔뻔스러운 나라이 다. 토끼장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 실수요자를 위한 과감한 주택 정책을 펼치는 것이다. 토지 정책을 제대로 펼쳐 땅값을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 그리고 집 없는 사람들이 손쉽게 집을 마련 할 수 있도록 금융기관에서 저리로 돈을 빌려 주도록 국가가 권장을 하는등 '좀더 사람답 게 살 수 있도록'일본인을 토끼장에서 해방시켜야만 되는 것이다. '쇼가 나이'와 '시카다 나이'로 되풀이되는 일본식 사고로는 아무런 변화도 가지고 올 수가 없다. 너무나 큰 행운이 없더라도, 엄청난 희생을 치르지 않더라도 국민이 자신에게 맞는 집을 선택할 수 있는 나라 일본은 정말로 요원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끝으로 한 아사히 신문의 사설 제목은 '나는 토 끼가 아니다'였다. 저항하지 말자 고베 지진은 우리에게 일본을 말해 준다. 우리 나라 매스컴의 일본 보도는 마치 각본에 의해 진 행되는 듯 거의가 똑같다. 이번 역시 지진의 와중에서도 아무런 동요 없이 질서 의식을 보여준 훌 륭한 시민 정신부터 슈퍼마켓의 약탈도 없었으며(사실은 그렇지도 않았다) 일본 국민 모두가 차분하 게 이 천재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는 등 감탄 일색이었다. 역시 일본인은 무서운 민족이라는 감탄 과 함께 언제나처럼 질서 있고 인내심 강한 일본 국민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 찬 언론 보도였다. 그러나 나는 고베의 지진을 바라보며 오히려 일본인의 한계를 보았다. 그 한계란 일본인들이 너 무도 길들여졌다는 점이다. 이미 일본인들은 아무런 반응도 못하고 저항도 못하는 국민이 되어 버 렸다는 이야기이다. 패전 후 50년이지만 일본인들은 이미 그 이전에 60년 이상을 전쟁 준비에 휩쓸 려 있었고 그것을 정상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이번 고베 지진은 일본인들에게는 오랜만에 맛보는 '정상 상태'인지도 모른다. 어렵고 힘든 생활을 받아들이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즐기는 묘한 심리가 일본인들에게는 있다. 피 학성이라 할 이러한 일본인들의 특징은 고통스럽고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어떤 즐거움을 찾아내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이번 고베 지진에서도 아수라의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일본인들은 극 한 상황으로부터의 생존에서 오는 묘한 쾌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마실 물을 구하기 위해 몇 집으로 둘러싼 일본인들의 입에서 정부에 대한 지라는 찾아볼 수가 없 다고 한다. 물론 하늘에 대한 비난도 없다. 그저 받아들이고 인내하는, '쇼가 나이'(할 수 없다)라 는 일본식 체념만이 있을 뿐이다. 정부에 의해 길들여지고 지배당해 온 일본 국민들로서는 정부에 대한 저항이나 비난은 접어 두더라도 불만조차 표시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닐까. 이번 지진에서 일본 정부의 대처가 한마디로 후진국급이었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모든 것이 늦 었다. 모든 것이 예상을 빗나갔다. 일본 정부는 로스엔젤레스 지진이 일어났을 때 미국을 비웃었 다. 그러나 막상 고베에 지진이 터졌을 때 일본 정부는 한마디로 속수무책, 행정의 한계와 무능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엄청난 지진이 터졌는데도 불구하고 그처럼 중앙 정부의 대처가 늦었다 는 것은 일본 정부의 '국민 경시'풍조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일본은 해외에서 일본 국민이 테러를 당하거나 납치를 당해도 모른 척하거나 회사와 나라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독특한 대국민 대처로 유명한 나라이다. 이번 고베에서도 제 나라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일본식 관행이 그대로 발휘되었다. 이러한 관행에 젖은 일본 국민들은 저항할 줄 모른다. 아니 문제를 제기할 줄조차 모른다. 이를 두고 우리 나라 언론들은 너무나도 침착하고 성숙한 국민 이라고 추켜세운다. 그것은 노예 근성을 부추기기 위해서인가? 인간은 저항하고 반항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체이다. 성수대교 사건에서 울부짖던 우리 나라 사 람들이 만약 고베 지진을 만났다면 어떠했을까? 성수대교 붕괴는 인재이고, 지진은 천재이니까 우 리도 일본인처럼 얌전히 숙명처럼 받아들였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성수대교 사건 때 정부를 맹공격하고 비난했듯이 천재를 내린 하늘에 대해 저항하고 항의하고 원망 을 퍼부었을 것이다. 살려내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울부짖었을 것이다. 이것이 길들여지지 않은 민족의 힘이고 인간으로서 본성에 충실한 민족의 자연관이다. 그리고 권 력자에 대해 끝없이 저항해 온 민족의 힘이다. 울부짖고 저항하는 것은 살아 있는 영혼을 가진 자 만이 할 수 있는 자기 표현이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에 일본의 화산 지대인 운젠후겐다케에서 화산이 폭발해 약 쉰 명 가까운 이 들이 숨진 적이 있었다. 그때 일본에서 생활한 지 얼마 되지 않던 나는 아주 충격적인 경험을 했 다. 숨진 이들의 시체가 모두 한 중학교 강당에 안치되었다. 하얀 보자기가 덮인 관들이 오십 구 정도 나란히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그 완벽한 침묵이었다. 시체가 담긴 관마다 검은 상복을 입은 가족들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관을 붙잡고 통곡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저 관 앞에서 슬픔을 참고 억누르고 있었다. 마치 얼어붙은 듯 조그만 움직임도 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물론 일본의 문화는 다른 사람 앞에서 크 게 울거나 웃거나 하는 것을 품위 없는 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인간이 죽음 앞에서 그 슬픔조차 도 제대로 표현하지 않고 억눌러야만 하는 문화와 그 문화에 완전히 함몰된 일본인들에게서 나는 커다란 충격을 느꼈다. 천재지변뿐 아니라 보통 때에도 일본인들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는 할 수 없다면서 숙 명처럼 상황을 받아들인다. 바로 이러한 일본인들의 태도는 일본인들이 유달리 성숙하고 질서 의식 이 있고 침칙한 국민이라서가 아니라 저항하지 않고 체념하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보는, 강한 자 와 위에 있는 세력에 대한 패배주의가 몸에 베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매스컴들의 고베의 지진이 났을 때 쥐는 10분 전에 지진을 감지하고 미리 이동을 했다는 둥 개는 어떻다는 둥의 보도를 한다. 그런 보도에 대해 일본 국민들은 아무런 반감도 지니지 않고 학교 강당에 마련된 피난민 수용소에서 '나루호도'(정말 그렇네)하며 받아들인다. 인간으로서의 마 땅한 대우도 받지 못한 채, 동물의 육감을 지니라는 보도에 대해 분노할 최소한의 몫도 일본인들은 챙기지 못한 것은 아닌지? 진짜'토끼'는 도망이라도 한다 일본에 있던 92년 2월의 어느 날, 나는 자다가 얼굴을 얻어맞고 잠이 깼다. 범인은 내 침대 머리 맡에 쌓아 두었던 책들이었다. 수십 권의 책이 내 얼굴을 강타한 것이었다. 이어 자고 있던 침대 가 덜컹거리기 시작해 마치 영화 「엑소시스트」의 한 장면을 방불케 했다. 침대가 순식간에 5센티 미터 정도 흔들거렸다. 나를 엄습한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이러다 죽는다면, 일본에서 이렇 게 죽다니, 할 일도 많은데….'수많은 생각이 재빠르게 오고갔다. 진도 5도로 관동 지방을 뒤흔든 지진이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많지 않았으나 수백 명의 부상 자와 많은 재산 피해를 냈다. 처음 일본에 가서 진도 2, 3도의 지진을 겪으며 '별 것 아닌데, 뭐'했 던 나는 그때의 지진으로 일본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진의 재앙을 품고 있는 '불안 정'한 땅, 일본에 사는 일본인들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의 한 부분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뒤로 언 제 또 지진이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평소에도 나를 오싹오싹 소름 끼치게 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에게 지진은 거역할 수 없는 공포이다. '일본의 샌프란시스코'로 손꼽히는 아름답고 현대 적인 도시 고베를 쑥밭으로 만든 이번 관서 지방의 대지진은 우리에게 '지진과 단단하게 얽혀진 일 본인의 숙명'을 이야기해 준다. 고베는 원폭이 떨어져 폐허가 된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들 이 '아름다운 포토피아'라는 기치를 내걸고 만든 인공 도시였다. 경제 대국 일본이 화장시키고 세련 되게 차려입은 순전히 '보이기 위한 도시'였다. 그런데 그 고베가 폭삭 주저앉고 엄청나게 많은 사 람들이 희생되었다. 관서 대지진이 그토록 큰 피해를 낸 것은 물론 지진 자체가 '진도 7'의 대지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처럼 엄청난 희생자를 낸 이면에는 '일본 사회'가 지닌 모순이 얽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일본의 건물은 지진에 대비하여 단단하게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 말은 옳다. 그런 데 이른다 회사 건물과 관청 건물만이 그렇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번 지진이 그처럼 많은희생자를 낸 이유 가운데 하나로 일본 사람들이 꼽는 것은 '오래된 목조 가옥'이 쉽게 불에 타고 옆집으로도 옮겨 붙어 순식간에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는 점이다. 왜 그처럼 잘산다는 일본에서, 세계에서 제일 돈이 많다는 일본에서, 그것도 지진의 위험이 언제 나 있는 나라에서, 그처럼 낡은 목조 건물에서 사람들은 살아야만 할까? 바로 그것은 일본이 아무 리 부자라 하더라도 일본의 부는 '강한 자의 부'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폼'을 재기 위해 만든 견본형 도시 고베뿐 아니라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일본의 대도시를 가보면 관청이나 회사 건물은 세계 초일류급이다. 정말 신흥 재벌의 나라로 느낄 만큼 번쩍번쩍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그 회사와 관청을 다니는 일본인들이 사는 집은 좁고 초라한 '토끼장'이다. 회사는 부자이고 지진에도 끄떡없는 훌륭한 건물에 들어 있지만 그 회사에 다니는 일본인들은 가 난하고 지진이 났다 하면 마른 장작처럼 불에 잘 타는 '낡은 목조 건물'에 사는 토끼이다. 그리고 지진이 나면 대책 없이 '찍'소리도 못 내고 희생되는 '약한 자'의 집단이 오늘날 일본 국민의 초상이 다. 마치 갖고 놀다가 싫증이 난 장난감을 망가뜨리듯이 가공할 위력을 지닌 지진이 간단하게 파괴해 버린, 한때 일본의 자랑거리였던 미항 고베. 고베의 지진은 '강한 자의 부'에 눌린 '나약한 토끼'의 비 극을, 그리고 '지진의 악연'으로 얽힌 일본인의 비극적인 삶을 우리에게 되새기게 한다. 더구나 그 '토끼'는 미리 지진을 알고 도망갔던 동물들의 원초적인 본능조차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 적이다. 생각하지 않는 죄 일본을 경험해 본 많은 외국인들이 반드시 지적하는 이야기가 '일본은 차별이 심한 나라'라는 것 이다. 겉으로는 모든 국민이 평화롭고 평등하게 살고 있다는 일본이지만 '부라쿠민'과 '재일 조선인, 한국인'에 대한 차별은 외국인의 눈에 지독한 '인종차별 국가'일본의 인상을 각인시켜 준다. 일본의 저명한 여성 소설가 가운데 '스미이 스에'가 있다. 올해 92세의 이 할머니는 일본의 부라 쿠민에 대한 차별을 고발한 소설 『다리가 없는 강』을 52세 때 발표한 이래 우리의 『토지』처럼 써오고 있다. 일본의 천황제에 대해, 일본의 혹독한 차별 문제에 대해 어느 누구 입도 뻥긋하지 않 을 때 이 할머니는 대단한 용기와 열정으로 글을 써 왔다. 부라쿠란 일본에서 신분상으로 심한 차별을 받는 이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살던 지역을 가리킨다. 에도 시대에 형성됐던 이 부락의 사람들은 1871년 법제상으로 모두 해방되었지만 이들에 대한 차별 은 그대로 일본 사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다. 그 옛날 부락 출신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취직은 물론 결혼 역시 완전히 거부당하는 집단이다. 나는 일본에 있을 때 신문에 실리는 신상 상담란에서 부락 출신의 남녀가 결혼 직전까지 갔다 '자신의 출신'이 밝혀져 혼담이 깨진 경우를 호소하는 편지를 수 도 없이 보아 왔다. 스미이 스에는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이 일본에 집요하고 뿌리깊게 있는 것은 '일본의 수치'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녀가 일본 사회의 차별에 눈을 뜬 것은 여섯 살 때였다고 한다. 당시 그녀가 사는 마을에 메이지 일본 왕이 '친히'다녀갔는데 '왕이 피운 담뱃재'를 함부로 했다하여 당사자를 처 벌한 것은 물론 온통 마을이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거기다 한 수 더 떠 변소에다 천황의 똥을 버 린 남자에게 평생의 보물을 버렸다며…. 이런 소동을 지켜보며 당시 겨우 여섯 살인 그녀였지만 마 치 자신이 똥하고 똑같이 더러운 취급을 당한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 철폐를 작품을 통해 평생 외쳐 온 그녀는 '먹으면 누구라도 시간이 지나면 똥을 눈다. 나이를 먹으면 누구라도 죽는다. 시간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라는 것을 여섯 살 때 그 '사건'에서 배웠다고 한다. "일본에서 평등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천황제의 존재 자체부터 되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천황 제가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예요. 항실에 태어난 것 하나로 자유가 없다면 불쌍한 거지요. 그 런데도 그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일본 국민에게 죄가 있는 겁니다." 그녀의 이 말은 물론 왕자로 태어나 자유가 없는 나루히토를 가엾어 하는 말이다. '천황'의 이름 으로 '부라쿠민'을 차별하고 '천황'의 이름으로 일본인들을 '미친 전쟁'에 불나비처럼 뛰어들게 하고, 광분케 한 차별과 불평 등의 상징인 '천황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그녀는 외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이 한마디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또 하나의 결론을 가르쳐 준다. '그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일본 국민에게 죄가 있다.' 일본인들은 모두가 '일본인은 선량하고 온순하며 전쟁의 피해자'라고 말한다. 일본인에게 백이면 백 명을 붙잡고 '일본인 3백만 명은 그렇다 치고 아시아 사람 2천만 명을 죽인 전쟁의 책임자는 누 구냐'고 물을 경우,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일본의 전쟁 책임은 일본 왕인 히로히토에게 있다. 그리고 일본 국민에게 있다. 일본인들이 전 쟁 책임을 서로 묻지 않는 것은 천황이라는 일본 왕과 1억2천만 일본 국민에게 똑같이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왕 히로히토가 2차 대전 항복 선언에서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없는 것 을 견딘 피해자"라고 말하며 서로 감싸 주고 닦아 주고 덮어 주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독일의 양심적인 학자들은 대부분의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을 찬성하지 않았다는 변명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라고 이야기한다. 히틀러가 그토록 잔인하게 유태인 사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다름아닌 독일 국민의 말없는지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유태인 살해 심 리를 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꼭 '죽여버려'라고 말하지 않아도 '살인'을 교사하고 지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 사람들의 그러한 심리를 읽고 계산하지 않았던들 히틀러가 그토록 잔혹한 '홀로코 스트'(대학살)를 벌일 수가 있었겠는가 하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일본 국민의 마음 밑바닥에 일찍이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을 통해 지적했던 '호전성'과 '잔혹 심리'가 있었기에 일본 군부가 아시아인에 대한 '살인 계획'을 세울 수 있었으며 일 본의 왕과 그 신민들이 함께 미쳤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에게도 전쟁의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누구도 전쟁의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일본은 말한다. 바 로 그 말에 대해 우리는 진실의 이름을 가진 명백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 전쟁의 책임은 바로 일본 왕을 포함한 일본 국민 1억2천만 명에게 있다.' 부라쿠민에 대한 일본인의 그 집요한 차별과 괴롭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바로 왜곡과 차 별과 불평등을 상징하는 '일본 천황제'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일본 국민 의 숨겨진 속심리에서 오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왜곡과 인간에 대한 차별을 원하는 일본인의 '혼 네'(속마음)가 '왜'라는 의문 없이 벌이는 '이지메'(괴롭히기)로부터 '부라쿠민'의 비극은 지속되는 것 이다. 2. 게임의 법칙 일본은 시골이다 토스트보다는 역시 미소시루 게임의 법칙 일본식 국제화 쾌락의 혼혈아들 오억엔쯤 주면 하프의'청출어람' 차별이냐, 특별 취급이냐 언제 우리가 차별을 했느냐 일본은 시골이다 일본의 이름난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첫번째 미국 여행을 하고 나서 우리식으로 번역을 하자면 시골에서의 삼 년이 서울에서의 사흘이라고 그 문화적 충격을 비유했다. 일본이 시골이라는 뜻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일본인답게 확실한 답변을 피하면서 인습과 편견 이 인간을 구속하고, 옳지 않은 이유로 삶을 차별한다면 바로 그곳이 시골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시바 료타로라는 역사 소설가는 오늘의 일본을 있게 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그가 역 사 소설에서 즐겨 다뤄 온 인물들은 어려운 상황을 딛고 성공한, 이른바 일본인들이 말하는 '석세스 스토리'의 주인공들이다. 유능한 이야기꾼인 시바 료타로의 소설은 '산업 전사'라고 불리는 일본의 회사원들에게 '박카스 디'처럼 격무에 지쳐도 힘이 나게 만드는 그런 역할을 해줬다. 시바 료타로 소설의 애독자인 일본의 회사원들은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애썼는데 나도 힘내자'라 고 외쳤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시바 료타로의 소설은 거의 90퍼센트가 NHK의 대하 드라마로 방송돼 일본 열도를 강타했다. 시바 료타로의 대하 소설을 일본 NHK가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대하 드라마로 방송한 것은 '국가적 프로젝트'차원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바로 이 시바 료타로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보고 일본을 시골에 비유한 것은 퍽이나 흥미 롭다. 그가 밝힌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일본 사회의 억압적인 구조, 약자에 대한 차별을 시바 료타로 가 아주 잘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러일 전쟁은 강한 자에 대한 약자의 승리, 일본의 정의로운(?) 승리이며, 용기 있는 일본인의 표본 이 그 속에 있다고 추켜올렸던 그는 태평양 전쟁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는 자신 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름다운 심성과 올바른 가치관을 지닌 일본인이 태평양 전쟁을 일 으킨 것이라고 대답했다. 시바 료타로는 태평양 전쟁이 옛날의 순했던 일본인의 심성을 잔학성을 지닌 동물로 바꾸었으며, 자랑스런 일본의 역사를 짓밟고, 약한 자에 대한 횡포로 일관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끊임없는 에너지로 수많은 소설을 써온 시바 료타로에게 많은 일본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써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시바 료타로는 도대체 무엇을 써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다며 계속 거절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시바 료타로는 일본인 앞에 '태평양 전쟁은 침략 전쟁이었 다'고 역사를 바로잡는 소설을 쓸 용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한편으로는 오히려 추악한 그 역사를 덮어두는 것이 좋다고 '일본식으로'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시바 료타로는 작가라기보다는 일본 경제에 헌신한 산업 전사들을 위한 '위안대'였는 지도 모른다. 전후 시바 료타로의 작품을 읽고 주인공의 강인함, 불굴의 의지에 감명을 받다 힘을 얻었던 일본의 회사원들은 이제 그토록 비난받았던 전범(戰犯)의 역사, 수많은 아시아인의 생명을 앗아간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의 침략에 대해 재주 많고 학식이 풍부한 역사 소설가 시바 료타 로를 통해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다'는 달콤한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시바 료타로가 어떤 인물을 다뤄 주었으면 좋겠냐는 데 대해 많은 그의 애독자 가 '다나카 가쿠에이'라고 답했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오늘의 지저분한 일본 정치를 만든 장본인이 다. 그러나 일본을 일단 '경제 성장'의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바로 이러한 묘한 이 중성이 다나카에게 있기 때문에, 노회한 이야기꾼인 시바 료타로에게 '다나카'에 대해 써 달라는 것 은 이른바 그의 소설의 소영웅의 위치에 '모사꾼'이며 '뇌물 수수꾼'인 다나카를 올려놓겠다는 의도 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을 미화하려는 일본인의 의도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긴 일본이 자랑하는 그들의 역사서 『일본 서기』역시 역사적 진실에 입각하기보다는 마치 역 사 소설을 써 내려가듯 했다는 점에서 일본이 현대사를 다시 한번 교묘히 각색하려고 생각하는 것 은 그리 무리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해봤던 일이니 말이다. 최근 일본은 급격한 경제 성장에 힘입어 엄청난 무역 흑자에 세계 제1위의 채권국이 되었다. 일 단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일본은 점차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아시아 침략에 대해, 그리고 가깝게는 한국 점령에 대해 일본이 무엇이 그렇게 나빴는가 하는 질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질문은 과연 바른 질문인가? 일본은 나쁘지 않았던가? 일본인은 아무 죄가 없었던가? 일본 인은 정당했던가? 나는 일본인들에게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묻고 싶다. 처음 종군 위안부 문제가 일본에서 드러났을 때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한 국 점령 당시 강제 동원해 징용을 보냈던 한국인에 대해서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고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결국 일본 정부는 종군 위안부에 대해 강제성과 간여를 시인하기에 이르렀다. 또 강제 동원한 한국인은 약 260만 명에 이른다는 공식 자료도 최근에 밝혀졌다. 하지만 자료에 남 지 않은 사람들,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에서 억울한 죽음과 고통스러운 삶을 산 숱한 우리 한국인들 의 처절한 기록은 아직도 역사의 한켠에 묻혀 있다. 이러한 역사를 돌이켜볼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일본인에게 되묻고 싶다. 정말로 일본은 그렇게 나 쁘지 않았고 아무 죄가 없었고 정당했는가를…. 오늘 일본의 70만 재일 동포들은 거의 이 강제 동원된 징용자들의 후예들이다. 재일 동포들은 유 례없는 갖은 차별과 핍박을 받고 살아 왔다. 지문 날인과 외국인 등록증 상시 휴대 등 어처구니없 는 범죄자 취급부터 세금을 꼬박꼬박 내면서도 투표권조차 행사하지 못하는 대우를 받아 왔다. 이 러한 일본의 실상은 바로 왜 일본이 시바 료타로의 말대로 시골인가를 선명히 말해 준다. 인간에 대한 차별, 역사에 대한 인식 부재, 인간 한사람 한사람에 대한 사회적인 그리고 집단적인 집요한 구속, 바로 그 희생자는 차별받는 한국인이 아니라 무지와 편견의 노예가 된 채 돈만을 버는 일본인 일 것이다. 국제화, 세계화를 일본인은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이러한 자세를 고치지 않는 한 일본은 시바 료타로의 말처럼 영원한 시골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역시 '일본이 시골'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토록 많은 일본의 회사원들이 읽어 주었지만 그의 책들은 외국에는 전혀 번역이 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시바 료타로의 애독자들 은 그의 책이 일본의 역사를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외국 독자들이 이해할 수가 없어서라고 한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소설이 너무나 '일본적'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책은 오 로지 일본인만을 위한 일본의 특수한 사정을 다룬다. 그래서 일본인의 독특한 정서에만 먹힌다. 그의 책은 '일본이라는 시골'에서만 읽힐 수 있는 책이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과 그의 사고는 우리에게 일본의 앞날을 가르쳐 준다. 일본의 경제 부흥에 촉 매 역할을 한 그의 소설을 절대로 '국제화될 수 없는 일본'을 암시한다. 또 시바 료타로와 같은 훌 륭한 지식인이 '일본의 현대사'에 대해'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없다'는 초라한 이유로 외면하고 있는 것은 '역사에 대한 일본인의 변명'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토스트보다는 역시 미소시루 일본의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나오코 B.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서른 두 살인 그녀는 일본의 명문 대학을 나온 미혼 여성으로서 여러 잡지에 글을 써서 살아가는 자유 기고가이 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일본에 가서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일본 텔레비전의 문제점을 취 재하면서 '한국의 경우'를 취재하러 온 것이었다. 나는 혼쾌히 취재 요청을 받아들였다(일본은 워낙 취재 섭외가 어려워 나라도 한국식으로 선선하고 확실히 하고 싶어서였다). 당시 나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여서 복잡한(?) 한국의 공연 윤리 문제 등을 초보적인 일본어로서 는 설명하기 힘들어 '영어로 이야기해도 되느냐'고 물어 보았다. 일본인에게 영어로 말하기는 대부 분 공포의 대상인데 그녀는 의외로 선뜻 '오브 코오스'라고 대답을 했다. 나는 그녀에게 한국에서는 지나친 폭력 장면이나 살인 방법 그리고 여성 혹은 장애자에 대한 차 별 등은 철저하게 규제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공륜을 비롯해 시민 단체나 개인이 텔레 비전에 대한 감시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취재가 끝나고 나는 그녀가 무척 흥미로웠다. 남자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에 물론 있으며 아일랜 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벌써 7년이나 사귀었고 별일 없는 한 결혼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 뒤 그녀와 나는 가끔 만나면서 서로에 대해 좀더 알게 되었다. 일본의 한 대학의 강사로 있는 그녀의 애인은 일본에 온지 11년이나 되었고 일본인 여성과 사귀고 있었는데 자신이 적극적으로 접 근해 그를 사로잡았다고 설명했다. 나오코는 보통 일본 여성들과 달리 아주 독립적이었고 일본이 지닌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의 여러 문제를 비판하는 내게 '일본이라는 나 라는 아무리 비판받아도 지나치지 않다'며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 주기도 했다.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 온 그녀에게 내가 간소하게 저녁상을 차려 주자 애인에게 전화를 하겠다 고 했다. 나는 그 애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오라고 그러지, 뭐"했더니 '그녀의 남자' 가 진짜로 나타났다. 오토바이를 타고 온 그는 마치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서양인 이었다. 일본에 온 지 11년이나 되었다지만 그의 일본어는 기초적인 초급 수준이었다. 나오코는 애정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지금 있는 아파트에서 이사가 '팀'(그의 애칭)과 같이 살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일단 축하한다고 말하며 앞으로의 둘의 계획을 물었다. 그녀는 팀이 자신 의 나라에 돌아가고 싶어하기 때문에 2, 3년 후에는 함께 아일랜드로 갈 것이라고 했다. 물론 자신 이 그곳에 가서도 자유 기고가로 활동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외국 생활에 대한 동경이 있다고 말했다. 또 일본을 벗어나 국제인으로서 살고 싶다는 희망도 덧붙엿다. 그녀의 외국어 실력을 익히 아는 나는 평소 나의 도전적인 자세대로 '미지의 세계에 들어가 일해 보는 것도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 더구나 그녀는 '그린 맨(Green Man)'이라고 하는 서양의 심볼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어 그 문제를 연구해 보라고 말했다. 그 뒤 나는 나오코의 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 내가 일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 보기도 하고 서로 읽은 책 이야기도 하면서 드문드문 연락을 취하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오코한테서 전화가 왔다. 팀과 7년 동안의 관계를 청산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유를 물어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일본에서 활동을 해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팀 을 사랑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문화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새 애인이 나타났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나오코는 답했다.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그와 매일 전 화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역시 모국어로, 일본어로 이야기하는 즐거움은 대단한 거지요. 마치 팀하고 사이가 차가운 샤워 같다면 일본인인 그와는 따뜻한 온천 같아요. 아는 아베(일본인 새 애인)를 사랑해요. 일본식으로 사랑하고 싶어요. 기다리고 참으면서…." 나는 웬 요조숙녀의 출현인가 의아했다. 그러나 이것도 삶의 한 과정이겠거니 싶어 침묵을 지켰 다. 그러고 나서 몇 달 후 그녀로부터 편지가 왔다. 내 안부를 묻고 자신은 아주 잘 지내고 있는데 애인 아베가 '아주 재미있는 글'을 썼기 때문에 내게 꼭 보내 주고 싶었다고 했다. 나오코의 새 애 인 아베 역시 이 잡지 저 잡지에 글을 쓰는 자유 기고가였다. 아베의 글은 일본의 유명한 우익 인사가 만드는 잡지에 실린 것이었다. 내용은 '일본에게 집요하 게 사죄만을 요구하는 한국과는 더 이상 국가 관계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이 제 소련이 붕괴된 이상 한국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 한국은 일본에 지배될 운명을 지니고 있었 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정당했다. 이제 우리는 한국을 무시하고 우리를 짝사랑하는 대만, 태국 등과 우호를 다져 나가자. 한국은 이제 일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입장이 아니다. 한국은 북한 핵이나 막는 데 힘을 기울이게 제쳐놓자'는 것이었다. 나는 몹시 불쾌했다. 이처럼 '왜곡된 사고'를 읽어 보라고 보낸 그녀의 지성에 대해 아주 근본적 인 의문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일절 소식을 끊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오코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실제로 그 녀를 만날 기분이 아니었으나 혹시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기에 역사에 대해 무지한 것은 아닐까'하 고 그녀를 이해해 보기로 했다. 그 날 우리는 『데미지』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본 뒤 극장 옆에 있는 돈까스 집으로 갔다. 나오코는 잘게 썬 양배추와 된장국이 곁들여져 나온 일본식 돈까스 를 앞에 놓고 감격스러운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역시 나는 일본식이 좋더라. 전에는 아침에 간 단하게 토스트로 때웠는데 요새는 반드시 밥을 해서 먹어요.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화식(일본 음 식)만큼 맛있는 것은 없대요. 하얀 쌀밥과 미소시루(된장국) 그리고 말린 이와시(정어리)를 맛김과 먹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요. 아, 일본인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다 하고요." 웬, 국수주의자? 하면서 나는 이야기를 그 당시 한창 화제였던 나루히토 왕세자의 결혼으로 화제 를 돌렸다. 나루히토의 결혼으로 일본 열도는 온통 들끓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사건이 있었다. 일본 경찰이 요요기 공원에 모여 있던 이란인 노동자들을 개끌듯 난폭하게 체포해 버린 것이다. 이 유는 성스러운 왕세자 결혼을 앞두고 '불경스런 이란인'들이 왕궁과 가까운 요요기 공원에 왔다갔다 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일본과 이란은 그 옛날 중동 특수가 있을 때 서로 편의에 의해 '비자 면제 협정'을 맺고 있었다. 오일 특수는 사라졌고 이번에는 거꾸로 이란인들이 일본에 비자 면제를 이용해 관광 비자로 들어왓 다. 말하자면 요요기 공원은 불법 체류자인 이란 사람들이 서로 모여 일자리 정보도 교환하고 담소도 하는 이른바 '만남의 장소'였던 것이다. 나는 그 문제를 꺼내며 우리 나라에서는 '왕세자의 결혼'같 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죄수도 풀어 주고 방생도 하는데 어떻게 일본에서는 '결혼'을 이유로 사람을 잡아들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정말로 일본은 어쩌면 그토록 비인간적이냐고 물었다. 나오코는 그것은 나루히토의 '성혼을 위해서'불가피한 일이라고 했다. '성혼'이라는, 일본 우익이 왕세자의 결혼을 미호하는 용어에 신경이 거슬려진 나는 열이 받아 덧붙였다. "글쎄, 성혼인지 결혼님인지 모르겠지만 다 인간 아니겠어요? 왕세자도 일본 왕도 인간인데, 단 지 결혼에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사람을 잡아들일 수 있는 그토록 대단한 결혼이 있나요? 일본은 변해야만 돼요." "당신이 일본을 변화시키겠다고?" "그럴 수도 있지요." "외국인인 당신이, 일본인의 일본을 변화시키겠다고?" 순간 나오코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돈까스 집을 나가 버렸다. 자리에 잠시 앉아 나는 멍한 상 태로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 나오코는 '성스러운 일본 천황'을, 위대한 황태자의 결혼을 모독하고, 일본을 '바꿔 버리겠다'는 '한국인'인 내게 '일본인'으로서 분노를 나타낸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일본의 현대사를 생각했다. 미국이 일본을 점령했던 7년, 그 이후 미 국 덕분에 부유해진 일본은 끊임없이 미국에 대한, 서구에 대한 '사랑'을 해 왔다. 서양은 그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짝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믿음직한 큰형 '미국'이 안전을 지켜 주고 그 그 늘 아래 열심히 장사를 해서 짭짤하게 돈을 번 일본은 이제 '일본이 제일 좋다''일본이 진짜 최고'라 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음식도 남자도 일본 것이 좋다는 나오코처럼 일본 사회는 스스로 '저팬 이즈 넘버 원'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서양 애인을 갖고 '그린 맨'이라는 서양 문화를 동경하던 나오코의 변화는 내게 일본의 변화를 상 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본 애인과 된장국으로 돌아온 나오코. 그러나 달라진 나오코에게서는 그전의 반짝반짝하던 총기와 균형 잡힌 사고는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수증기의 나라, 일본의 새 일본인 만들기의 묘한 공정을 지켜보았다. 게임의 법칙 일본에 대해 씌어진 수많은 책들을 읽다 보면 재미있는 점이 발견된다. 역사학자나 인류학자 등 이른바 전문가들이 쓴 책들보다 저널리스트들이 쓴 책들이 '일본 문제의 길잡이'로서 더 명성을 얻 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학문적으로 객관적인 대상으로 바라보기에 문 제가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일본인들은 외국인인이 일본의 여러 가지 점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면 누구나 하는 답이 있다. 즉 '일본에는 일본만의 규칙이 있다'는 말이다. 가령 뇌물을 받아먹고 문제를 일으킨 정치가가 다음 선 거에 당선되면 그의 죄는 완전히 없는 것으로 되어 버린다. 이러한 면죄부를 일본에서는 '미소기'라 고 이야기한다. 또 학교에서 아이들 사이에서 한 아이가 따돌림을 당할 경우 지도 감독해야 할 선 생이 오히려 아이들의 '이지메'에 동조하거나 이를 묵인한다. 이러한 일본의 독특함(?)에 외국인이 의문을 나타내면 일본인은 하나같이 '우리는 다르다. 일본은 일본의 방식이 있다'고 조용히 말한다. 하지만 외국인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은 이른바 세계 각국에서 통용되는 '상식선'에서 일본이라 는 나라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저널리스트들은 '일본이 지닌 그들만의 규칙'을 기준으로 '이상한 나라 일본'에 대한 책을 썼다. 영국의 언론인 파워즈는 '일본은 일본인만의 특수한 나라'라고 보았고 네덜란드의 기자 월프렌 역시 '문제는 일본이다'로 출발해 '일본 이질론'을 이끌어 냈다. 이 일본 이질론은 일본의 앞 날을 예측할 수 있는 열쇠와도 같다. 월프렌은 일본이 '국제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왜냐하면 너무나 다른 나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이 '별난 나라'라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이미 진단했다. 그래서 오히려 '일본은 특수하다'라는 입장에서 접근하는 연구 방식에 많은 문제점이 제 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월프렌은 오랜 기자 경험을 되살려 '일본은 이질적이며 문제가 많은 나라'라 는 확고한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월프렌은 일본과 다른 나라(대표적으로 미국)의 경제 마찰을 예로 들어 '일본의 이질성'을 설명한다. 일본은 경제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과 유럽으로부터의 수입을 철저하게 규제하며 일 본 시장의 문을 꽉 틀어막고 있다. 반면에 수출은 '집중호우'와도 같이 세계 각국에 무차별적으로 퍼붓고 있다. 일본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월프렌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풀이한다. 그는 일본이란 나라 에는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비상식적인 행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며 또 일본 은 유럽이나 미국처럼 자본주의적 시장을 가진 나라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국가와의 엄청난 무역 불균형 문제는 결국 '일본이 다른 사고 방식'을 지닌 이질적인 나라이 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본은 한마디로 시장 메커니즘이 움직이지 않는 나라이며 자본주의라기보 다는 신중상주의 아래 있다고 강조한다. 즉 일본은 서양의 보통 나라들과 '완전히 다른 게임'을 벌 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규칙도 다르다. 예를 들어 미국을 비롯해서 보통의 나라에서는 무역 흑자를 국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 사용하지만 일본은 그 이익을 일본이라는 나라의 몫을 확대 하는 데만 사용했다. 따라서 일본과 미국의 근본적인 갈등의 원인은 바로 경제 활동의 목적이 완전 히 다른 데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은 엄청난 무역 흑자를 일본 국민들을 좀더 편안하고 여유있게 살게 하기보다는 '일본'의 회 사와 나라의 입김을 세게 하는 데 거의 100퍼센트 투자했다. 더 많은 나라에 물건을 한 개라도 더 만들어 팔겠다는 욕심에 설비 투자만을 늘렸고 '불가사리'처럼 해외에 땅투기를 했다. 그러나 그 결 과 일본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일본과 가까이하거나 관계를 맺어 손해 보지 않는 나라가 없다는 인식을 '맏형'인 미국까지 하게 만든 것은 물론, 일본의 부는 '탐욕의 결과'라는 결론을 세계 모든 국 가에 심어 주었다. 물론 폭락한 땅값으로 일본은 해외에서 돈만 날린 것은 물론 '경제 발전의 혜택' 의 분위기만 누린 국민들에게 심한 박탈감을 안겨 주었다. 섬나라 일본에는 '섬 기질'(시마구니 곤조)이 있다. 모든 이가 조화를 이룬다는 '화(和 )'의 정신은 다른 한편으로 개인에 대한 철저한 억압 체계를 만들었다. 철저하게 집단을 우위에 놓고 개인을 억 누르는 숨막히는 사회적 규칙과 다른 집단에 대한 배타성은 낳았다. 많은 일본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일본은 다르다' '일본인은 일본인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이중 구조, 이중적인 가치관을 대변하고 있다. 동시에 일본 사회가 '이중 성'과 '모순'을 기본으로 한 '일본인만의 특수성'으로 포장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옷깃만 스쳐도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일본인들, 그들은 자신의 발이 밟혀도'미안합 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의를 차리고 사과를 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는 민족이다. 그러나 정 확히 이야기한다면 일본인들은 '사과는 해도 사죄는 할 수 없는 민족'이다. 여기에 일본인의 특성이 있다. 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인은 과거 청산을 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 불신과 비난을 나타낸다. 그렇 지만 적어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국가로서 최소한 죄의식은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 나 일본인은 '기억하면 이득될 것이 없다는 판단'아래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전쟁을 경험한 일본인들은 '과거에 대한 기억 상실'에 걸렸고 전후 세대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무지 상태' 이다. 패전 후 아노미 현상을 겪었던 일본인들은 왜 전쟁이 일어났으며,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 이 전쟁을 어떻게 정리하고 청산해야 하는지 아무런 방안 없이 오늘까지 왔다. 일본인들이 그렇게 해올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들의 이질성에서 기인한다. 즉 일본인들은 선과 악에 대한 구분이 불분명하고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경계가 없는 아주 특수한 문화적 특성을 지니 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라면 얼굴을 못들 정도로 수치스러운 죄를 저질러 놓고도 일 본인들은 뉘우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을 한다.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일본의 돈을 뜯기 위한 수작'이며 제2차 세계대전은 서구의 침략에 고통받을 아시 아인을 위한 해방 전쟁이라는 궤변을 만들고 있다. 도덕적인 사고와 윤리 의식에 근거한 인간의 기 본적인 반성과 호소는 일본인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다. 패전 50년을 맞아 일본은 올해 대대적인 '이벤트'를 꾸미고 있다. 하타 전 일본 총리부터 현재의 무라야마 총리까지 일본 정부는 올해 안에 일본의 전후 처리를 마무리짓겠노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들의 전후 처리안은 종군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잘 나타나 있다. 절대로 개인적인 보상은 할 수가 없고 대신 일본 정부에서 종군 위안부를 재활 센터를 만들고 민간을 통해 기금을 마련하겠다는, '생색만을 내는 이벤트'가 일본 정부가 내놓은 안이다. 이제 일본은 유엔 상임이사국 의 문턱을 넘으려는 마당인데 발목을 잡고 있는 한국과의 전후 처리를 이런 식으로 마무리짓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전히 차별받고 있는 재일 동포에 대한 인권 문제나 한국인 전범, 강제 징용자, 원 폭 희생자 등 정말로 일본이 진정으로 전후 처리를 위해 '도덕적 자세'를 보여야 될 분야에 대해서 는 아무러 언급이 없는 것이다. 바로 이같은 점들이 일본의 문화적 이질성을 스스로 폭로한다.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현실적인 이익'이 있을 때야 비로소 '선'이 존재하고 '정의'가 있다는 것이 일본인의 가치관이다. 일본인에게 우리와 같은 도덕관이나 윤리관을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경제 활동을 통해 보여준 특수성을 서양인들이 알아차렸듯이 이제 우리 나라 역시 일본인들의 문화적 이질성을 뒤늦게나마 인식해야만 한다. 무역 흑자를 오로지 일본이라는 나 라의 몫을 확대하는 데만 쓰는 일본의 '경제적 이질성'은 일본에게 '경제 동물' '개미'라는 명예롭지 않는 명칭을 가져다 주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일본의 특수성을 명확하게 깨달아야 한다. 일본 과 우리 나라 사이에 얽힌 '풀지 못한 수많은 숙제'는 '일본의 이질성'을 우리가 파악함으로써 제대 로 된 해결의 실마리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는 절대로 사죄하지 않는다. 또한 절대로 적절한 전후 처리나 배상 도 하지 않는다. 일본에게 '지금의 한국'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그렇고 그런 상대이기 때문이 다. 한국의 경제적인 규모나 분단 상황, 그리고 혼란이 계속될 듯한 정치 상황, 아직 터가 덜 닦였 다고 보는 경제 여건 등을 놓고 부지런히 전자계산기를 두드려 본 일본은 한국에 대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이미 내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정보화 시대라는 절호의 기회를 살려 경제적으로 착실하게 성장하고 통일을 이룬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렇게 되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우리 한국인들이 '사 죄'나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알아서 '개인적인 배상'은 물론 그 이상의 것도'미친 듯이' 해올 것이 분명하다. 강한 자에게 일본은 약하다. 강한 자의 말은 진실이고 강한 자의 요구는 정 당한 것이며 강한 자의 행동은 선이라고 일본인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일본에게 요구하고 그 처분을 기다리는 헛수고는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일본을 변 화시켜야 한다. 사죄하지 않고 배상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우리가 일본을 변화시켜야 한다. 다행히 그 열쇠는 '밝은 미래'를 지닌 우리의 손에 있다. 일본식 국제화 일본인들이 무척 좋아하는 나라인 스위스의 바투라는 언론인이 쓴 『추악한 일본인(Ugly Japanese)』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바투 씨는 일본의 부정적인 여러 모습들을 날카롭게 지적 했는데, 서양인이 일본을 우리보다도 더 냉정하고 철저하게 바라본 것이 내게는 상당한 의외로 느껴 졌다. 바투 씨는 이 책의 '세부 섬의 일본인'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필리핀의 아름다운 세부 섬을 관 광하는 일본 사람들을 이리저리 비꼬아 댔다. 필리핀은 일본인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일본인들은 겉으로는 일본에 비해 엄청나게 싼 물가, 아직도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수많은 섬들, 부드럽고 곰살궂은 주민들의 품성 때문에 필리핀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필리핀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여자를 값싸게 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달리 겁많은 일본인들은 필리핀의 민주화 과정에서 치안이 불안 해지자 필리핀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딱 멈추었다. '돈 많은 일본 사람'을 잃게 된 필리핀 관광진흥청은 다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 돈덩어리들을 다시 불러오나'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필리핀 관광진흥청은 기막힌 아이디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멋지고 근사한 휴양지, '필리핀의 세부 섬'에서 '필리핀'을 떼어 버린다는 것이 었다. 세부 섬은 세부 섬으로 족한 것이지 '필리핀의 세부 섬'이라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결론 이었다. 필리핀 관광진흥청은 곧 '일본인 관광객 여러분, 환상의 섬 세부로 오시옵소서'라는 여행 안재책자를 뿌렸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 해 전체 필리핀 관광은 파리를 날렸지만 '필리핀'세 글자 를 떼어낸 세부 섬에는 일본인 관광객이 몰려든 것이다. 필리핀 방송사는 갑자기 최고의 관광지로 떠오른 세부 섬에 대해 방송했다. 물론 일본인 관광객 의 인터뷰가 빠질 리 없었다. "처음에는 필리핀에 갈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정치 상황도 좋지 않 고 치안이 염려되어서 마음을 바꿔 이 세부 섬에 왔어요. 그런데 정말 좋군요. 필리핀 대신 세부 섬에 오길 잘했네요."일본인 관광객의 인터뷰를 바라보던 필리핀 시청자들은 열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일주일씩이나 세부 섬에 머무르면서도 그소이 필리핀 영토인 줄도 모르고 돌아가는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바투 씨는 그런 현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세부 섬을 찾아갔다. 그가 만난 호텔의 여종업원 은 물어 볼 필요도 없는 일이라는 듯이 말했다. "일본 관광객들은요, 도쿄에서 전세기나 마찬가지 인 직항편을 타고 오지요. 물론 그 비행기에 탄 사람들은 모두 일본인들이지요. 내리자마자 가이 드가 이끄는 대로 깃발을 따라 실제 주인이 일본인인 호텔에 묵고, 일본 식당에서 일본 음식을 먹어 요. 또 밤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본식 노래방에 가서 놀지요. 쇼핑은 단체로 면세점에 가고요. 그들은 대부분 이곳이 필리핀인지 모르고 돌아간답니다." 바투 씨가 호텔에 걸려 있는 필리핀 국기를 가리키면서 질문을 하자 필리핀인 종업원은 필리핀 국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일본인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알고 싶어하는 일본인도 없다고 대답했다. 국제화, 국제인을 소리 높여 외치는 일본은 한 해에 1,200만 명, 그러니까 일본 인구의 10퍼센트 정 도가 해외 여행에 나선다. 그렇지만 일본 관광객들은 여전히 '세부 섬의 관광객'수준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깃발만을 고분고분 따라가는 일본인, 백화점 한 구석에 일본인만을 대상으로 차려 놓은 '명품 모 음 코너'에서 슈퍼마켓에서 장보듯 기념품을 사가는 일본인, 때로는 골프 가방을 낑낑거리면서 끌고 아서는 골프 한 번 치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가 버리는 불순한 목적을 지닌 일본인, 일본인들의 한심 한 여행 형태이다. 우리는 흔히 여행에서 '…을 얻고 돌아왔어요' '눈이 새롭게 떠졌어요'라고 말한다. 여행이란 모름 지기 전혀 모르는 세상, 그곳의 자연과 사람과 풍습을 경험하는 곳이다. 결국 세계를 경험하며 세 계를 접하면서 '세계인'이 되어 가는 것이 여행의 참다운 목적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의 여행은 '일 본인이라는 사실'을 계속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일본돈의 위력이나 즐기면서 졸부의 환상을 만끽하려는 것이 일본인 관광객들의 한심한 수준이다. 우리 나라의 어느 면세점에서 일하는 판매원이 일본 관광개들에게 아주 좋은 인상을 지니고 있다 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일본 사람들은 돈 잘 쓰고 비싼 물건을 잘 사기 때문에 손댈 필요 없는 최고의 손님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면세점을 찾는 일본인들이야말로 전형적인 일 본인의 초상이라고 생각했다. 하루가 다르게 가치가 뛰어 오르는 일본돈을 들고 사제기에 몰두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이 일본인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1987년은 태국 관광의 해였다. 태국 관광의 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수많은 일본 관광객 들이 태국을 방문했고 엄청난 일본돈이 태국에 뿌려졌다. 그렇지만 태국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 야 했다. 15만 명의 어린 태국 소녀들이 일본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매춘부로 전락했다. 일본의 관광, 과연 '국제화와 이웃을 알기 위한 것'인가? 일본식 관광은 '국제화' '세계화'의 허울 아래 오로지 쾌락만을 꾀하는 비둘어진 순례는 아닌지 다시 한번 묻고 싶을 뿐이다. 쾌락의 혼혈아들 가끔 의외의 일본인을 만난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아라키 씨다. 그는 일본의 자유 기고가이다. 내 책의 일본어판 출판을 계기로 인터뷰 때문에 만나게 되었다. 사진 촬영을 하고 편집자인 스즈키 씨와 셋이서 간단한 저녁 식사를 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자연히 '21세기 아시아의 시대'로 옮아가고 있었다. 그러자 스즈키 씨가 "필리핀이라면 아라키 씨가 아주 잘 압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취재를 많이 다니셨군요"하며 의례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아라키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과 같은 이야 기를 했다. "필리핀에는 자피노가 자그마치 만 명이나 있지요. 자피노란 저패니즈와 필리피노의 혼혈아라는 뜻이지요. 저는 자피노를 취재하러 갔다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일본 남성들이 필리핀 여성과 하룻밤 사랑이나 계약 결혼으로 잉태한 증거를 보는 것은 같은 일본 남성으로서 너무도 괴로운 일 이었습니다. 거리를 떼지어 누비는 일본인의 얼굴을 한 어린이들을 보고 정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 다. 너무나도 무책임한 일본인의 섹스 관광이 가져온 결과에 두려움마저 느꼈습니다. 필리핀을 다녀온 뒤 저는 친구들과 어울려 필리핀 파브(필리핀 여성들이 나오는 술집)에 갔다가 필리핀 여성인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전과 달리 복잡한 심정으로 그녀들을 보게 됐습니다. 일본 남성들의 무책임한 행각을 저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알게 된 지 2년 만인 최근에 결 혼했지요. 물론 저희 집안의 반대는 대단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요. 아내를 알고 나서 저는 곧 호적에 올렷습니다. 일본 체류 비자를 위해서지요. 아내를 따라 저는 오데마치의 입국관리소에 가 봤습니다. 일본은 아주 묘한 방법으로 외국인을 관리하지요. 비자를 받았어도 일단 일본을 떠날 경우 재입국 비자라는 것을 받도록 하지요. 그러 니까 비자의 비자라고 할 수 있는데 ㄱ에서 제 아내가 어떻게 취급받는지를 보고는 일본인으로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지금 제 아내는 임신을 했징. 또 한 명의 자피노가 태어나는 셈입니다. 저는 자피노의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합니다. 지금 행복하냐구요? 네, 아주 재미있게 살고 있습니다. 필리핀 사람들은 잘 웃고 잘 화내고 그 리고 아주 솔직하지요. 무척 감정적인 사람들이고요. 네, 하지만 자부심과 자존심이 대단한 민족입 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했지만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며 들어야 할 이야기였다. 일본 남성들이 왜 동남아 와 한국으로 여행을 하는가는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다. 골프 여행을 핑계로 동남아를 간다지만 그 남성들의 골프채는 골프백에서 나오는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동남아 여행을 떠나는 남편에 게 콘돔을 넣어 주며 "여보, 에이즈만은 갖고 오지 마세요"라근 부인의 말이 담긴 포스터까지 있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잘 아는 어떤 남자 분은 자신은 절대로 한국에 다시 가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 를 했다. 일 관계로 부산의 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잔 그는 다음날 아침 커피숍에 갔다가 기겁을 했 다고 한다. 커피숍에는 딸같이 어린 여자들과 함께 아침을 먹는 같은 일본 남성들로 가득 차 있었 다는 것이다. 일본 남성들에게 아시아는 손쉬운 쾌락의 장소이자 가장 값싸게 여자를 살 수 있는 곳이다. 나는 8년 전에 경주의 한 요정을 취재한 적이 있다. 옛날 아흔아홉간 최부잣집이었다는 그 집은 '일본인 관광객을 전문으로 하는 관광 요정'으로 성업중이었다. 우리의 젊고 어여쁜 아가씨와 늙은 일본 남자들이 번호표를 받아 들고 짝짓기를 하며 기성을 지르던 모습을 참으로 서글픈 마음으로 지켜보았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일본인들이 해외 근무를 하면 언제나 '현지처'문제가 뒤따른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아주 심각한 상황이다. 나는 94년 8월말에 회의 때문에 인도네시아에 가서 아시아 각국에서 온 대표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 인도네시아 대표는 바로 '일본인 현지처'의 문제를 심각하게 걱정했다. 일본의 가장 많은 정부 개발 원조ODA를 하는 나라는 인도네시아이다. 인도네시아에는 수많은 일본 남성들이 '홀몸'으로 와 있는데 그 대표의 말에 따르면 십중팔구는 인도네시아 여성을 현지처 로 삼고 있다고 한다. 이런 여성을 전문적으로 알선해 주는 업체까지 있다는 등 일종의 매춘 알선 사업이 기업화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 남성들은 이런 업체나 혹은 역시 현지처를 지닌 같은 일본 남성의 소개를 받아 '계약'을 맺 는다고 한다. 이 계약에는 동거 기간과 만일 '아이'가 생기면 여성 쪽에서 알아서 할 것, 절대로 아 이를 미끼로 귀찮게 하지 말 것 등이 명기된다. 서류상의 계약을 마치고 나면 이슬람 종교의식에 따라 반드시 결혼식을 올린다고 한다. 이슬람 종교의식에 따라 인도네시아 고유의 결혼 의상을 차 려 입고 두 사람은 부부가 되는 선서까지 한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일본 엔'으로 생각하면 너무나 싼 값에 '일본 남성'은 이국의 생활을 즐기고 발령이 나면 미련 없이 '처와 자식'이 있는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계약 결혼의 뒤에는 수많은 '쾌락의 혼혈아'들이 태어난다. 이 아이들은 유난히 민족적 인 자존심이 강하고 반일 감정이 숨어 있는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보기 싫은 이방인'취급을 받다가 '부랑아'가 되어 자카르타 거리를 쏘다닌다고 한다. 함께 이야기하던 아라키 씨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나는 그에게 이 일은 일본이라는 국가가, 정부가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덕적으로 마비된 개인에 대한 책임은 결국 은 국가가 져야만 한다. 특히 일본의 경우는 그렇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국민들을 도덕적으로 마 비시켰다고 볼 수 있다. 냉전 구조의 산물인 일본 자민당은 일본 국민들에게 전범으로서의 역사 인 식을 갖게 하지 않은 것은 물론 '도덕성'이라는 덕목을 일부러 유기했다. '회사 사회 일본'은 종업원 들인 '남성'들을 산업 전사로 만들기 위해서 전시에나 공급될 수 있는 '성'을 평상시에 제공했다. 일 본 사회에서 섹스는 철저하게 '상품'이라는 인식이 심어졌다. 초고속 성장을 밀고 나가면서 일본 자 민당 정권은 일에 탈진한 일본인들이 '경제 동물의 스트레스'를 '섹스 애니멀'로 푸는 것을 용인했다 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역할과 국가의 의도에 움직인 일본 남성들이 만든 '자피노'는 일본이라는 국 가가 책임질 문제이다. 지극히 도덕적인 개인들이 모인 것처럼 보이는 일본이라는 나라, 이 나라를 빠져나온 '도덕적이고 깨끗한 일본인들'이 벌이는 성의 행각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교육 방침'에 의거한 것이다. 과연 일 본이라는 나라는 개인이 저지른 무책임을 거둘 수 있는가? 마치 위안부라는 이름이 그런 것처럼 '자피노'와 '아시안 베이비'라는 귀엽고 깜찍한 이름으로 불리는 불행한 '절반의 일본인'은 묻고 있다. 5억 엔쯤 주면 프랑스로 신혼 여행을 갔을 때의 이야기다. 남프랑스 쪽을 돌기로 하고 무작정 지도를 들고 자동 차를 달렸다. 우리는 남프랑스 해안선을 따라가면서 마침내 '겨울 바다는 평생 다시는 안보아도 좋 으리'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우리가 이탈리아 북부를 거쳐 다시 프랑스령인 샤모니로 들어온 날은 매섭게 추운 겨울날이었다. 샤모니는 3년 전 여름 그와 함께 갔던 일이 있었지만 몽블랑에 오르는 기차 시간이 맞지 않아 그 냥 돌아갔던 아쉬움이 큰 곳이었다. 옷 한 벌을 사도 구두 한 켤레를 사도 그 자리에서 입고 신고 오는 나인지라 몽블랑을 앞에 두고 기차 시간이 안 맞아 발길을 돌린 것은 내내 아쉬움이 되었다. 다시 한겨울에 몽블랑에 도착해 이번만큼은 무조건 올라가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표를 사러 매표구로 가니 겨울의 몽블랑을 보러 온 일본인 관광객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때는 내가 일본을 떠난 지 두 달쯤 되는 무렵이어서, 아주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일본에서 보았던 일본인들을 외국에서 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본 밖에서 일본인들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다 하는 생각에 나는 그네들을 눈여겨보기로 했다. 일본에 살면 살수록 모르는게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 고 일본 근무를 마감했던 어떤 아쉬움이 남아서였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타니 일본말을 유창하게 하는 프랑스 관광 가이드를 빼고는 모두 동양인이었다. 우리 둘과 일본인 관광객들로 케이블카가 가득 찼다. 우리를 일본인들로 생각해서 인지 아니면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인이나 한국인으로 생각해서인지 그들은 마음놓고 떠들 기 시작했다. "와, 대단하다. 이건 굉장한 거네요."(확실히 일본인들은 감탄을 잘해, 언제나.) "너무 무서워, 아이 난 몰라."(그렇게 무서우면 올라오지도 말지, 어린아이처럼 응석부리는 일본 인.) "이 몽블랑 얼마면 살 수 있을까? 오억 엔쯤 할까?" "도쿄 건물 하나 팔면 충분히 살 수 있을 거야."(정말 일본인은 대책 없군. 돈이면 다 된다고 생 각하니.) 마치 통조림 같은 케이블카 안을 꽉 채운 일본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니 내가 3년 남짓 있었던 일 본에서의 모든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입을 다물고 일본 사람들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는 내게 남편이 말했다. "어휴, 시끄러워. 쟤네가 이 케이블카 전세 냈나. 일본 사람들 언제나 조용하고 질서를 잘 지킨 다더니 그 반대잖아. 아까 케이블카 탈 때도 봤지? 왜 이렇게 떠들어, 정신이 하나도 없네." 나는 웃으면서 그에게 대답했다. "원래 일본 사람들, 그래. 누군가 자신들을 본다고 생각하거나 자신들이 필요할 때 일본 사람들 은 질서를 잘 지키고 얌전히 있고 그렇지." 이윽고 정상에 도착했다. 이미 몽블랑은 일본 사람들에게 점령당해 있었다. 등산복 차람으로 완 전 무장을 한 서양인들이 몇 명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유리창 너머로 하얀 자연의 장엄함을 지 켜보며 있었다. 고산 지역에 올라와서인 듯 약간 현기증이 나고 속이 메슥메슥거렸다. 그래도 좋 아하는 사람과 함께인데 이 정도야 하는 생각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사람을 왜소하게 만 드는 몽블랑의 모습을 보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참 한심하게 생각되어 평소의 나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얼마쯤 지나 주변을 돌아보니 그렇게 떠들썩하던 일본인 관광객들이 한 사람도 없었다. 한겨울의 살인적인 추위를 못 참아서겠거니 하며 따뜻한 커피나 초콜릿이 마시고 싶어 커피숍으로 갔다. 그 런데 커피숍에 들어선 순간 나는 놀라고 말았다. "아, 머리 아파! 죽고 싶어요." "숨이 막힐 것만 같아요. 어떻게 좀 해주세요." "무서워라, 너무 무서워요." 그 커피숍 안은 아까 함께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온 일본인 관광객들이 너도나도고통을 호소하느 라고 난리였다. 훌쩍훌쩍 울고 있는 젊은 여성이 있는가 하면 의자 두 개를 붙여 놓고 아예 누워 버린 중년 신사(?)도있었고, 머리를 싸매고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 얌전하게 생긴 아줌마도 있었다. 한마디로 몽블랑의 커피숍은 아수라장이었다. 마치 폭격을 맞은 방공호 같았다. 남편이 일본인 들은 고소공포증이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를 어렴풋 이 알 수 있었다. 보통 때 일본인은 질서 있고 참을성 기막히고 얌전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사람이 그 선을 넘고 그래도 괜찮다는 집단의 묵시적인 판단이 서면 일본인 은 '보통 때 볼 수 없는 집단적 광기'를 보인다. 충분히 감당하고 참을 만한 상황인데도(평소에 일본인들이 보여준 자질로 보아서는 훨씬 더 잘 참 아야 된다는 이야기가 되지만) 어린아이처럼 고통을 호소하는 것은 '함께라면 모든 것이 옳고 괜찮 다'는 독특한 일본적인 사고 방식에서 오는 것이다. 아마도 그 단체 관광객들 중 누군가가 먼저 현 기증을 호소하지 않았거나, 지도자인 한 사람이 모두 참지 않으면 안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면 단 한사람도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 초인적인 자세를 일사불란하게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몽블랑 정상에서 내려오는 ㅔ이블카는 일본인 관광객과 서양인들이 절반 정도였다. 나는 일본인 들의 서양 콤플렉스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번은 아주 조용히 내려갈 수 있을 거라고 남편에게 말 했다. 그런데 나의 장담은 완전히 빗나갔다. 아들을 데리고 산에 올랐던 한 프랑스 남자가 옆에 있는 일본 남자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기 때문 이다. 물론 영어로 샤모니에는 어떻게 왔느냐, 어땠느냐는 아주 간단한 질문이었다. 그 프랑스 남 자의 영오도 그리 신통찮았으나 상대인 일본인은 더욱 형편없었다. 자신을 일본 국철의 과장이라고 소개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었지만 그 뒤로는 한마디도 못하는 것이었다. 손짓발짓하는 그들을 보니 다 알아듣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왠지 옳지 않은 듯해 자연스럽게 통역을 해 주게 되었다. 샤모니의 아름다움을 시작으로 일본에서는 이런 스케일이 큰 풍경은 도저 히 구경할 수 없는 것이라며 일본 국철의 과장은 프랑스인을 정신없이 추켜올렸다. 이야기가 오고가면서 그 프랑스인은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일단의 호기심을 갖고 있 던 일본인들은 클린턴 대통령이 잘 쓰는 제스처를 한 번 써먹겠다고 작정을 한 듯, 두손을 올리며 "아이 멋져" "독타 선생님이시군요. 훌륭해요"하며 다들 뒤로 넘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마치 삼류 코미디를 보는 듯했다. 나는 그런 일본인들과 또 일본인들의 약점(?)을 이용해 한 수 위로 뻐기며 들어가는 프랑스인도 꼴보기 싫어졌다. 그러나 말 한마디를 끝내고 마치 애원하 듯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에 계속 내키지 않는 통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은 그 의사가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경이로운 표정으로 존경을 담아 웃고 박수를 치고 난리였다. 나는 도대체 무순 기준으로 이들이 서양 의사 한 사람에게 이토록 열광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 사이에 오고간 대화는 무조건 프랑스는 좋고 샤모니는 멋지고 프랑스 사람들은 훌륭하다는 내용이었다. 하긴 그러한 대화는 일본이 전세계를 상대로 줄곧 말해 온, 서양 속의 한 나라가 되고 싶어하는 '백인 국가 희망'과 별다를 게 없는 내용이었다. 마침내 케이블카가 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무척이나 아쉽게 이별을 했다. 프랑스의 의사 선생 님과 알게 되어 큰 소득이 있다고 여긴 일본인들은 "위 라부 후랑수, 쌍큐"하고 외쳤다. 케이블카를 내리며 나는 그 다정다감한 일본인들이 하나둘 가버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을 지켜보며 왠지 불쾌한 심정이 되었다. 역을 나오며 나는 그 불쾌감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그들 일본인들 은 누구 한 사람 내게 고맙다는 인사도 없었고 어느 나라 사람인가 묻지도 않았고 작별의 그 흔한 인사조차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일본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마치 뇌가 없는 어린아이처럼 서양 사람 앞에서는 그토록 아양을 떨고 난리를 쳐놓고는 통역을 해 준 나에게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 싶게 '아까의 끈'을 가 위로 탁 잘라 버리지 않았는가 말이다. 일개 고용 통역사라 할지라도 그들 나라 일본에서는 '고맙 습니다' '폐를 끼쳤습니다' '신세졌습니다'라며 온갖 치사를 하는 그들이 아닌가? 분노와 낭패감은 뒤로 하고라도 내 마음이 그토록 무거웠던 것은 일본과 한국, 일본과 아시아의 앞날이, 마치 극과 극은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는 말처럼 너무나 암담하게 느껴져서였다. 그 극과 극의 자리에 일본과 한국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프의 '청출어람' 일본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기 전에 아주 독특한 분위기의 여성을 만났다. 그 여성은 한 일본 텔 레비전 뉴스의 진행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 나라와 마찬가지로 꽃 노릇에 불과한 일보의 여성 뉴스 진행자 가운데에서 '꽃'이 아닌 아주 확고한 자리를 구축한 여성이었다. 영어는 물론 중국어도 구사할 수 있고 진행을 살펴보면 '정말 많이 알고 많이 공부하는구나'하고 느끼게 만드는 방송인이 었다. 취재를 통해 직접 보게 된 그녀는 예상대로 아주 지적이고 세련된 여성이었다. 그리고 화면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그녀를 섭외한 까닭은 김영삼 대통령의 1년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그렇고 그런 내용의 취재 때문이었다. 그녀가 속한 프로덕션을 통해 나는 취재를 할 때뿐 아니라 사적인 약속인 경우에도 대개 10분쯤 일찍 나가 기다리는 편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10분쯤 후에 나타나는 것 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미리 와서 기다리는 그녀를 보니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여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서 오는 원숙함에 날렵한 몸매, 그리고 이국적인 분위기가 아주 묘한 느낌을 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뉴스 캐스터의 인기도 조사를 하면 여성에게는 단연 1위의 지지를 받는 반면 남성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는 편이었다. 물론 '지나치게 머리가 좋은'여성을 절대로 좋아하지 않는 일본 남성의 성향 탓이겠지만 직접 그녀를 앞에 놓고 보니 일단 여성적인 매력이 대단한 여성 이라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화법은 결코 남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아주 예의 바르게 할말을 다하는 형이었다. 그리 고 까다로운 나의 일본어 선생이 '품위 있는 일본어'를 사용한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그녀는 김영삼 정부의 1년을 나름대로 평가했는데 1분이라는 방송 시간을 염두에 두며 아주 합리적이고 조리 있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아주 머리가 명석한 여성이었다. 특히 단어를 고르는 솜씨가 프로급이었다. 취재를 끝내고 알고 보니 그녀는 내가 아는 한 한국 여성에게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한국에 도 서너 번 다녀간 적이 있었고 심심할 때 김치도 담가 본다는 그녀는, 어쨌든 한국에 대해 많은 관 심을 지니고 있는 여성이었다. 잠깐의 취재가 인연이 되어 그녀와 그녀의 한국인 선생,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아카사카의 한 한국 음식점에서였다. 국적과 나이 그리고 자신이 자라 온 나라를 떠나 세 여자는 즐겁게 '여자'라는 공통점으로 이야기 를 했다. 우리는 음식점이 떠나가게 웃으며 한국에서 계모임을 하는 아줌마들처럼 요란스럽게 수다 를 떨었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해 민감한 한일간의 문제로 옮겨졌다. 그러자 '한국을 좋아하던'그녀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65년의 한일 협정으로 모두 끝이 났 고 외교적으로 한국은 자신의 손으로 서명한 협정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고 강한 어조로 말하는 것 이었다. 만일 한국이 이제 와서 1965년의 협정은 무효이므로 일본군 위안부에게 일본 정부가 배상 을 하라고 한다면 지구상의 어느 나라가 한국과 협정을 맺으려고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또한 한국인들은 중국에 2천년 동안이나 지배를 받았으면서도 겨우 36년 지배한 일본에게 끊임없 이 사죄를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형평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며 솔직히 일본을 만만히 보는 한국 인의 기질에 문제가 있다는 발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코 감정을 흐트리는 일이 없는 그녀의 억양이 올라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되도록 감정을 억 누르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오늘을 언제나 '치고 받고 반박하는 나'를 떠나 한번 끝까 지 들어 보자 하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수많은 일본 남자들과의 이런 유의 토론에 지긋지긋했던 나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왜곡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게 하지 않을까 하는 어떤 기대를 가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일본의 미래에 대해서도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평화 헌법 9조를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이 평화 헌헙 9조는 이른바 일본이 '전쟁에서 싸우지 않겠다'는 결의가 담 겨 있는 조항이다. 바로 이 조항이 일본이 유엔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서 자위대를 파견할 때 문제 가 되었다. 결국 일본은 원칙적으로 이 조항을 무시하면서 자위대를 '유엔 평화유지 활동군'의 일원 으로 파견한 꼴이 됐다. 그녀는 이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제, 더 이상 일본인은 어린이가 아니에요. 자기의 나라는 자기의 손으로 지켜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일본은 나라가 아니지 요. 일본은 경제 대국으로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돈만 주는 만만한 입장이 아니라 이제 자기 목 소리를 지닌 국가가 되어야지요. 일본은 어린아이처럼 누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그런 노릇은 이 제 더 이상 할 수가 없어요"하고 말했다. 만일 그녀가남자였다면 나는 조목조목 그녀의 말을 반박했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녀의 고운 얼굴 을 보며 전의(?)를 상실했다. '참으로 묘한 느낌을 주는 일본 여성의 얼굴이다'라는 놀라움이 있어 서였다. 일본 여성의 평평한 그리고 흐르는 듯한 얼굴인데도 그녀에게는 어떤 묘한 매력이 있었다. 흔히 어떤 남지들이 말하는 대로 '아름다운 여성과는 싸우고 싶지 않다'는 농담이 이해될 정도였다. 다만 내게 전해진 그녀의 아름다움이 내게 묘한 궁금증을 일으켰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녀는 흥분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의외의 면을 자꾸 발견하며 조금씩 놀라고 있었다. 그 녀는 따지는 어조로 나에게 물었다. "한국은 종군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공격하고 비판하지요. 하 지만 베트남에서 한국 남성들은 어땠나요? 얼마나 많은 베트남 여성들을 농락했나요? 지금도 베 트남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어렵게 살고 있지요. 한국 남성들이 뿌린 씨들이 '라이타이한'이라는 자 랑스러운 이름 아래 있지요. 베트남과 한국이 국교 정상화를 할 때 한국은 충분히 사죄를 했나요? 그 과거에 대해서."그녀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나는 일본인인 그녀가 베트남과 한국의 관계를 부러 끄집어내는 저의가 온당치 않다고 판단을 내 렸다. 언제나 일본은 이런 식이라는 개인적인 느낌도 있었다. 나는 베트남 문제는 당신이 생각하 는 이상으로 복잡한 문제지만 똑같은 피압박 민족으로서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남성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서 행해진 많은 일들을 증오합니다. 물론 남성 자신도 피해자 이지만 저는 폭력과 살인과 강간을 증오합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상황은 이 모든 것들을 정당화 시키고 찬양합니다. 그래서 저는 남성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역사를 믿지 않고 증오합니다. 저는 우리와 베트남이 수교를 할 때 가슴앓이를 하며 지켜봤습니다. 일본의 언론은 한국이 어떻게 사죄 를 하느냐에 초점을 맞췄지요. 한국은 사죄했지요. 그리고 베트남은 받아들였지요. 일본은 아마도 베트남 같은 점잖은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으면 이렇게 골치 아프지 않았을 것을 하고 생각했겟지요. 하지만 왜 베트남이 한국을 그대로 받아들였을까요. 그것은 아픈 과거를 공유한 피압박 민족으로서의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어떻게 베트남에 참전했는지 아세요? 미국의 용병이었지요. 아주 슬픈 한국 역사의 한 페이지이지요. 한국인은 너 무나 여러 가지를 겪었어오. 아마도 그런 점을 베트남 사람들은 알았던 것이 아닐까요? 어떻게 보 면 베트남은 지금의 한국보다는 훨씬 더 좋은 위치지요. 자신의 힘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와 싸워 이겼지요. 세계 초강국인 미국과 싸워 이긴 나라는 글쎄, 베트남밖에 없겠지요. 베트남 사람들은 같은 희생자라고 한국을 분류하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 베트남이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지요. 문제는 그들이 대단한 자신감과 민족적 자긍심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베트남 민족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와 한국인 현지처였던 베트남 여성들과는 엄연히 다른 문제입니다. 물론 저 는 두 경우가 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바로 강제성이 있 었다는 점, 도망갈 수도 그리고 저항할 수도 없는 마치 감옥 같은 곳에 그것이 일본이 만든 유례없 는 제도였다는 점에 있지요. 그것은 커다란 차이입니다." 그녀는 아주 조용히 많은 생각을 하며 듣고만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너무나 유쾌했던 '계모임'같은 저녁이 이렇게 된 게 왠지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냥 '일하는 여자'로서 아주 가볍고 편안하고 즐거운 이야기만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함께 자리를 했던 그녀의 한국어 선생님의 천진하고 유쾌한 성품에 힘입어 우리는 조심스런 가운데서도 기분 좋게 그 성찬을 끝마칠 수 있었다. 새벽 한시 반이 다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나 역시 많은 이야 기를 했지만 결론적으로 그녀도 다른 일본인과 다름이 없구나, 여성이지만 역시 그래도 '일본인'이라 는 집합의 한 부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어를 배우고 김치를 담근다는 그녀도 결국은 '사랑하는 식민지였던 한국'을 좋아했구나 하는 씁쓸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일본인과 한 국인은 영원히 평행선을 가는 민족일 수밖에 없는가. 같은 여성까지도 말이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착잡했다. 그로부터 한 반년이 지나 나의 아주 절친한 친구가 한국에 왔다. 그와 나는 한국과 일본의 미래 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얼마나 한국에 대해 비판적이었는가를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어떠한 시각으로 보고 있었는가를 말했다. 물 론 일본은 반드시 개헌을 해서 정치 대국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그녀의 생각도 전했다. 그는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와 오랫동안 일 때문에 교류가 있었던 듯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그는 무척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정말 그녀가 그랬다구요? 알 수가 없군요. 마치 일본의 관리 같은 말을 했군요. 왜 그녀가 그런 말을 했을까요? 그녀는 엄밀히 말하면 하프(절반만 일본 핏줄인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의 유행 어)지요. 순수 일본인이 아니거든요. 그녀의 어머니가 베트남 사람인 것 모르셨어요? 당시 베트남 에서 일본 음식점을 했던 일본인 아버지와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지요. 바람둥이 일본인 아 버지에게 버림받아서 두 모녀는 참 고생을 했지요. 그녀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오늘의 자리에 올라 왔지요. 그녀가 왜 그렇게 일본인보다도 더 일본인 같은 완전 보수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 요. 글쎄, 아마도 지킬 것이 생긴 인간들의 공통점이 아니겠습니까? 계층을 이동한 이들이 원래 그 계층에 있던 사람들보다도 더 보수적이고 체제 유지적으로 되는 것처럼 그리고…." 그의 다음 말이 내 귀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아, 그랬었구나. 그랬구나. 그제야 나는 그녀의 얼 굴에서 느꼈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다. 일본인보다도 더 일본인처럼 말하고 사고해야만 하는 그 녀의 심정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가 그렇게 하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텔레비전 뉴스 진행자의 자리? 그녀 자신? 그녀는 일본이라는 사회에서 좀더 보수적으로 좀더 일본적으로 스스로를 몰아 가면서 뉴스 진행 자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이 처절한 자기 변신의 대가를 누가 보상할 것인가? 그리고 그녀의 삶 에 누가 올바른 답을 해줄 것인가? 정말 그것은 계산이 맞는 것일까? 나는 잠시 '일본식 계산기' 를 두드려 보았다. 그러나, 그러나 나의 답은 '그러나…'였다. 차별이냐 특별 취급이냐 카루나 신쇼아 달튼 다노나카. 국제화 시대를 지향하는 일본의 위성방송이 키워 낸 뉴스 캐스터들이다. 얼굴은 완벽한 일본인이 지만 일본인으로서는 불가능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하와이 출신 일본인이다. 카루나 신쇼는 우 리 나라에서도 아직 기억하는 이가 많은 일본 NHK 위성방송의 '투데이즈 저팬'의 앵커우먼이고 달 튼 다노나카는 '저팬 비지니스 투데이'의 앵커였다. 내가 이들을 알게 된 것은 지난 90년 말이었다. 도쿄 특파원 발령을 받고 나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세계 여성 언론인 대회'에 참석하러 워싱턴에 갔었다. 카루나는 일본에서 온 세 명의 대표 가 운데 하나였다. 우리는 박물관 구경도 같이 하면서 아주 친한 사이가 됐고 일본에 도착하면 연락을 주고받기로 약속했다. 나는 일본에 도착해 대충 정리가 되자마자 카루나에게 연락을 해서 점심 약속을 했다. 카루나와 약속한 장소에 가보니 웬 전형적인 일본 남자가 함께 있었다. 그는 자신을 같은 위성방송의 '저팬 비지니스 투데이'의 앵커인 달튼 다노나카라고 소개했다. 알고 보니 달튼은 아버지는 일본인이고 어머니는 한국인이었다. 한국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은 달튼인지라 함께 나왔다고 카루나는 덧붙 였다. 달튼은 미국 국적을 지니고 있고(하와이에서 태어난 일본계 3세쯤?) 카루나는 미국과 일본 두 나 라의 국적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하와이 방송에서 앵커를 했던 달튼은 일본 NHK가 스카웃을 해 왔고 카루나는 대학교수인 아버지를 따라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달튼은 전 혀 일본말을 할 줄 몰랐고 카루나는 미국식 악센트의 일본말을 했다. 말하자면 이들은 일본인의 얼굴을 한 미국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사려 깊고 똑똑한 카루나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ㄹ 솔직하게 나누곤 했다. 카루나는 소탈하고 담백했다. 일본에 대해 객관적인 눈을 지니고 일본인으로서 자신의 아이덴터티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심각하게 고민하곤 했다. 나 는 카루나에게 "너는 자신이 미국이이라고 생각하니, 아니면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니?"하고 물은 적 이 있다. 카루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바로 그 점을 결정해야 될 시기를 맞았다"고 털어놓았다. 그 리고 이어 "사실은 자신의 정서는 미국인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했다. 카루나는 중학교 때 대학교수인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돌아와 이른바 '귀국 자녀'로서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었다. 일본은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을 백안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귀국 자녀가 바로 그 예였다. 같은 무리가 아니면 내놓고 따돌림을 하는 일본 사회에서 카루나는 '하와이에서 온 귀국 자녀'로서 쓴맛을 본 모양이었다. 카루나의 경우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지만 '외국에서 돌아 온 아이들'에 대한 '이지메'는 일본에서 사회적인 문제가 될 정도이다. 나는 카루나에게 일본 사회 에 머물기보다는 좀더 공부를 해서 미국을 무대로 기자나 앵커우먼으로 커보라고 만날 때마다 권유 를 하곤 했다. 반면 달튼은 일본 사회에 아주 잘 적응하는 듯했다. 독신인 달튼은 '자신은 인종적인 편견이 없 고 어느 나라 여자하고든지 결혼할 수 있다'고 언제나 주장했는데 그래도 '영원히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초조해 하지 않고 기다리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명하고는 했다. 그는 배우자 의 조건으로 3S(Sweet, Sexy, Smart)를 갖춘 여성을 들었는데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와 카루나에 게 핀잔을 맞고는 했다. 혈통으로 치면 카루나는 100퍼센트 일본인이고 달튼은 50퍼센트 일본인인 셈이지만 달튼 쪽이 카 루나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인들과 더 잘 지내는 듯했다. 일본 생활에서 '한국인이기 때문에'어 려움을 맛본 나는 달튼에게 '일본인들과의 어려움은 없는지'물어 보았다. 달튼의 대답은 '전혀 없다' 는 것이었다. 조금 이상했던 나는 카루나에게 정말 그런가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카루나 는 이렇게 대답했다. "달튼은 일본말을 모르잖아요. 영어만 하고. 일본인들은 달튼을 미국인이라고 생각하지요. 일본인들이 서양인에게 친절한 것 알지요. 내 경우는 일본인으로 여기지요. 외국에서 살다 온, 악센트가 이상한 일본어를 하는 일본인 말이에요. 달튼이 일본인들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그가 미국인이라는 얘기지요." 달트은 한국에 대해 많은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혼할 때 외할머니 가 '일본인은 절대로 안된다'고 했던 이야기를 해주며 '한국인처럼 민족적인 자부심이 큰 국민은 세 계 어느 나라에도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또 김치나 잡채를 비롯한 한국 음식을 넋을 빼 앗길 정도로 좋아해 나는 카루나와 달튼을 초대해 한국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또 휴가 때면 언제나 한국에 갈 정도로 그는 한국을 좋아했다. 한국이 위성방송을 시작하면 반드시 앵커로서 활 동하고 싶다며 그때는 '달튼 다노나카'가 아니라 '달튼 김'으로서 활동하겠다는 실질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특파원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나는 함께 송별의 식사를 했다. 나는 달튼에 게 여전히 일본에서 문제가 없느냐는 질문을 했다. 달튼은 재은 라몬트의 이야기를 했다. '투데이즈 저팬'의 앵커 재은 라몬트는 한국인 어머니와 미 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가씨이다. 카루나 이후 마땅한 앵커감을 못 찾던 NHK가 오디션을 통해 뽑은 사람이 재은 라몬트였다. 아주 총명하고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었다. 그런데 방송 스탭 이 재은에게 한 가지 요구를 했다. '재은'이라는 한국 냄새를 풍기는 이름 대신 '제인 라몬트'로 이 름을 바꾸라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달튼도 그렇고 재은도 그렇고 영어로 뉴스를 하는 앵커는 모두가 한국계였다. 마치 일본의 연예계처럼. 달튼은 이 이야기를 하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국제화 시대의 위성방송을 하면서 '한국 냄새'나는 이름을 바꾸라는 것은 비상식이라고 말했다. 물론 재은을 방송을 안하면 안했지 굳이 '제 인'이 되지 않겟다고 맞서 그대로 '재은 라몬트'라는 이름으로 방송을 했다. 달튼은'일본은 차별의 사회'라고 결론을 지었다. 자신들과 같지 않고 자신들보다 늦게 들어온 사 람들에 대한 구조적인 차별이 있는 사회가 바로 일본이라고 했다. 자신이 일본에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은 '미국인'이어서 '차별'이 아닌 '특별 취급'을 받은 때문이라고 느낌을 털어놓았다. 오랫 동안 저널리스트로서 객관적으로 관찰한 결과라는 점에서 나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달튼과 작별을 나누면서 나는 아무런 편견 없이 일본 땅을 밟았던 나를 떠올렸다. 나와 달튼, 카 루나 그리고 재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어떤 기대'를 지니고 아무런 편견 없이 왔건 만 '차별'이라는 단어로 일본을 기억하며 떠난다. 달튼은 다시 하와이로 갔고 카루나 역시 뉴욕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다. 언제 우리가 차별을 했느냐 스모 선수 가운데 고니시키가 있다. 고니시키는 쓸 만한 씨름꾼이 나타나지 않는 씨름계를 기사 회생시키기 위해 수입한 '하와이 출신의 수입 선수'이다. 몸무게는 자그만치 236킬로그램으로 마치 집채만한,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를 지닌 선수이다. 잔인하고 야비한 일본의 황색 저널리즘은 일 본인이 사랑하는 다카노 하나나 와카노 하나가 고니시키와 한판을 벌일 때면 '괴물 출현' '야수를 물 리친 일본혼'등의 상식을 초월하는 제목을 뽑기도 했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도 위성방송을 통해 스모에 재미들린 사람이 늘고 잇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는 일본식 씨름인 '스모'를 좋아하지 않는다. 남자의 국부만을 가리는 '훈도시'를 찬 일본 씨름꾼 의 모습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금을 정해 놓고 상대를 밀어내는 기본 규칙이 '이지메' 의 전형이어서 나는 '스모'라는 경기 자체가 싫었다. 그러던 가운데 NHK의 KBS지국 옆에 있는 영국의 ITN의 여자 특파원과 알게 되었다. 영국인들 인지라 그들은 수시로 티타임을 가졌는데 대개 위성을 쏜 뒤 오후 네시나 다섯시쯤이면 차를 한잔 하러 오지 않겠냐며 내게 전화를 주곤 했다. 영국식 머핀과 비스킷 그리고 따뜻한 멀크 티를 들며 우리는 수다를 떨었는데 그녀가 어느 날 "스모를 좋아해요?" 하고 물었다. "별로, 특별히 좋아하는 선수도 없고…." 대충 화제를 바꾸려는 내게 그녀는 커다른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말했다. "어머나, 나는 고니시키의 열렬한 팬인데, 그는 대단해요." 이어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자신은 일본에 와서 일본 문화를 접해 보겟다는 생각을 했는데 단연 스모가 최고라는 것이었다. 하나의 경계를 정해 놓고 사람을 밀어내는 것이나, 마구 먹어 거 대한 몸집을 만드는 것은 전후 50년을 제외하고는 끊임없이 팽창주의로 치달았던 '일본의 정체'를 말해 주는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고니시키는 사실 일본 스모의 수입 선수로는 성공하지 못할 거예요. 그의 커다란 눈을 보세요. 얼마나 순수해요. 게다가 그는 머리가 아주 좋지요. 머국어인 영어, 일본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 도 잘해요. 그리고 아주 지적인 사람이지요. 피아노도 잘 치고 유머 감각도 뛰어나고, 일본인이 싫 어하는 타입이지요." 나는 그녀의 짧은 말에서 흥미를 느끼고 고니시키라는 선수를 지켜보기 시작 했다. 내가 있는 동안 고니시키는 점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커다란 제 몸무게를 가누지 못해 별 볼일 없는 선수에게 맨날 엎어지던데서 벗어나 기술도 몸에 익혀 훌륭한 스모 선수로서 두각을 나 타내기 시작했다. 이어서 서서히 여기저기에서 '고니시키를 일본 최초의 외국인 요코즈나(우리 나라 로 치면 천하장사?)'로 만들자는 여론이 외국인 기자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이 얘기는 단순히 일 본 씨름과 외국인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일본이 얼마나 개방적인가?' '일본은 과연 국제화를 할 뜻 이 있는가?'하는 데까지 발전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고니시키는 일년에 네 번 벌어지는 대회 중 봄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그 우승의 기 쁨을 몸무게 50킬로그램의 일본인 약혼인 스미카에게 바치겠노라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소감 을 읊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니시키의 행운과 실력(?)은 여기에서 정지되고 말았다. 문제가 된 것은 고니시키의 발언이 '오래되고 무서운'일본 스모협회를 진노케 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언은 고니시키의 스모관이었다. '스모는 무엇인가?'라는 일본 기자의 말에 고니시키가 '스모는 싸움이다'라고 말할 것이 커다란 소동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상식적으로 두 사람의 스모꾼 이 싸우는 경기를 스모라고 부르는 현실에서, 스모 경기를 보고 있노라면 일본 NHK 아나운서는 '요 쿠 다다카이마시다네(잘 싸웠습니다)'라는 말을 수백 번도 더 한다. 그런 만큼 고니시키의 스모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고니시키가 '스모는 싸움이다'라고 한 데 대해 일본 스모협회는 스모의 정신, 스모의 정수 를 모른다고 몰아세웠다. 그들에 의하면 '스모는 화(和)'라는 것이다. 일본인이 아마도 가장 좋아하 는 단어로 바로 이 화(和)라는 말일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정신이요, 가장 평등한 나라 일본의 상 징이요, 아름다운 어울림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모협회는 스모는 싸움의 형태는 하고 있지 만 결국은 스모꾼의 하모니 화를 모래판에서 이루는 것이라는 것이다. 뭘 모르는 고니시키는 그렇 게 깊은 뜻을 모르고 싸움이라고 함부로 말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고니시키의 일본 사회에 대한 비난에서 비롯됐다. 요코즈나가 되느냐 마느냐로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마당에 고니시키가 한 외신기자와 만나 한 말이 화를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고니시키는 '일본은 인종 차별이 심하고 외국인인 나는 차별받고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고니시키의 이 발언이 나가자마자 일본 스모협회는 물론 일본 사회는 '언제 우리가 차별을 했느 냐?'며 '괘씸한 고니시키'라고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결국 고니시키는 자신의 발언을 취소하고 정정 했으며 그 뚱뚱한 몸매가 금방 날씬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고뇌에 가득 찬 모습으로 스모관에 나타났다. 봄대회 우승 이후 그 다음 스모관은 고니시키에게 무척 중요했다. 일본의 요코즈나는 2회 연속 우승을 하고 까다로운 승격 심사를 거쳐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니시키는 연전연패였다. 물론 본인의 심리적인 부담감도 있었겠지만 문제는 대진표였다. 일본의 스모에는 스모꾼이 소속되어 있는 '헤야(방)'가 있다. 우리 개념으로는 일종의 프로덕션인 데 같은 '헤야'에 소속된 스모 선수끼리는 서로 싸우지 않도록 되어 있어 큰 데 속하면 결정적으로 유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고니시키의 대진표는 초반부터 고니시키를 애먹이는 상대만을 고르고 골라 짜져 있었다. 결국 고니시키는 연패를 기록하며 요코즈나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뒤 일본은 세계가 일본 왕세자 결혼에 이목을 집중하자 보란 듯이 같은 하와이 출신인 '아케보노'를 '최초의 외국인 요코즈 나'로 만들었다. 아케보노는 외국인 기자 클럽의 회견에서 차별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전혀 그런 일 없다' '일본어를 아직 완벽하게 몰라서'하는 식으로 능글능글하게 피해 나갔다. 그는 모든 질문에 '다테마에'로 대답하고 그의 '혼네'를 숨겻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요코즈나가 되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다카미야마(초기 하와이 출신 스모꾼)가 황야를 달려 고니시키가 계단을 만들고 아케보노가 뛰어올랐다"고. 일본인들은 스모를 화의 스포츠로 추켜 올리며 그 증거로 세계 스포츠 가운데 유일하게 '챔피언' 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본의 스모에는 요코즈나가 하나도 없을 수도 있지 만 자격만 있다면 수십 명의 요코즈나가 탄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단 한명의 챔피언에 급급하는 다른 경기와는 차원이 다른 스포츠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결국 단 한 명의 쇼윈도용 '외국인 요코즈나'를 뽑았을 뿐이다. 고니시키가 탈 락한 데 대해 많은 일본인들은 고니시키가 '품위가 없어서'라고 이유를 단다. '스모는 싸움'이라고 진실을 말하고 '차별 받았음'을 당당히 말한 고니시키가 '품위'없다니. 이것이 화의 스포츠, 스모의 '품위'와 '진실'이다. 3. 석양의 제국 일본은 늙었다. 석양의 제국 모방의 시대는 끝났다 정보 후진국 일본 일본은 늙었다 일본은 늙어 가고 있다. 아니 일본은 늙었다. 1억2천만 일본인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 가운데 하 나는 바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급속하게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전철을 타 보면 유난히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래서 일본에서 돈을 벌려면 실버 산 업에 도전하라는 말이 있다. 실버 산업은 노인을 상대로 한 사업을 말한다. 그만큼 노인이 많은 나라 일본은 이제 경제 대국에서 노인 대국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현재 일본인의 평균 연령은 41세이다. 바로 일본의 나이가 41세라는 것은 이제 일본은 펄펄 뛰며 우수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젊은이가 아니라 기력이 떨어진 중년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일본은 이제 씁쓸한 황혼기를 맞은 중년인 것이다. 현재 일본의 전체 인구 가운데 이른바 노령 인구인 65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은 14퍼센트이다. 앞으로 일본의 이 노령 인구는 2020년에 가면 두 배 가량이 더 늘어나 전체 인구의 28퍼센트에 육 박할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그 가운데 생산성이 있는 젊은 인구가 노령 인구를 부양하는 종속 인구 지수를 내보면 2020년에는 약 70퍼센트에 이른다. 그러나 사실 일본은 이미 고령화 사회에 들어서 있다. 조금 잘사는 동네에 가보면 아이는 찾아볼 수 없고 곱게 잘 차려입은 노인들만 눈에 띌 뿐이다. 일본은 최근 유아 사망률이 바닥을 기고 있음 에도 '어린이'가 적은 대표적인 나라로 손꼽힌다. 인구 예측에 따르면 앞으로 일본 도시의 경우 노 인 8명에 아이들 2명이라는 구서을 보일 것이라고 한다. 여성들은 아이 낳기를 거부하고 노인들의 평균 수명은 해마다 늘어나는 상황에서 일본은 고령화 사회로 '신칸센'을 탄 듯 무서운 속도로 달려 간다. 그래서 21세기의 일본은 국민 네 사람 가운데 한 명이 6세 이상의 노령 인구가 될 것으로 예 측되고 있다. 이 노령 인구는 결국 누군가가 도움을 주어야만 하는 대상이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 60년에는 생 산성 인구 12명이 노인 한 사람을 책임져야 했지만 오는 2020년이 되면 생산성 인구 2명이 노인 한 사람을 받들어야 된다. 2040년이 되면 현상은 더욱 심각해진다. 그래서 일 대 일이 된다. 즉 일을 할 수 있는 인구 한 사람이 노인 한 사람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것이다. 이 통계는 이제 곧 일본이 암흑 시대로 들어간다는 것을 말해 준다. 노동하며 경제를 움직이는 인구의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제조업에 매달려 있는 일본은 사업 구조를 연구 구조에 맞춰서 변화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경제는 이류가 되고 있다. 과감 히 규제를 풀고 투자를 해서 정보화 시대의 문을 활짝 연 미국이 엄청난 힘을 과시하고 있고 유럽 이 부지런히 그 뒤를 쫓고 있다. 그리고 한참 처져서 일본이 그 뒤를 헐떡거리며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일본으로선 역부족이다. 일본은 현재 '소프트 후진국'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세계의 젊은이들은 일본의 아이와CD플레 이어로 음ㅇ악을 듣고 돈이 좀 있다고 하는 전세계의 가정에는 소니 텔레비전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일본의 좋은 시절'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이 '하드웨어'의 주 인, 즉 '소프트웨어'는 미국이 전부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자신들의 문제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은 늦었다. 이제 모든 경제의 주 도권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가 쥐고 있다. 하드웨어에 맞춰 소프트웨어가 등장하는 시 대는 가고 이제 모든 것이 소프트웨어에 의해 바뀌고 맞춰지고 있다. 일본은 이제 궁극적으로 미국 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시대를 원치 않는 상대에서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인이 그리고 일본이라는 나라가 늙어 가고 있는 것은 치명타이다. 그레고리 클락 같은 학자는 앞으로 30년 후의 일본은 영국처럼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영국이 노동쟁의와 지 나친 복지에 의존한 '영국병'을 앓고 있다면 일본 역시 '일본병'을 갖고 있다. 이 일본병은 '일본이 늙고 있다'는 점이다. 무기려과 현상 유지가 늙어 가는 일본의 모습이다. 개혁과 변화를 일본은 바 라지 않는다. 늙어 가는 일본은 더 이상 새로운 꿈을 꾸지 않는다. 물론 도전도 없다. 다만 지금 의 일본을 유지하고 그대로 나가기 위한 전략과 음모만을 꾸미고 있다. 일본의 정치가들은 일본의 고령화를 걱정하면서 그 동안 노동 시장에서 소이되어 온 여성들을 제 2의 노동력으로 쓰고 로봇을 통해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고자 꾀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여성들은 일과 가정을 병립할 수 없는 불평등한 구조 아래 놓여 있고 많은 여성들이 해왜로 빠져나가고 있다. 그리고 로봇 산업은 큰 투자 아래 많은 발전을 보이고는 있지만, 일시적인 문제 해결에 그칠 수밖에 없다. 폴 케네디는 로봇이 일은 해줄 수 있지만 결코 문제는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결국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다. 늙어 가는 일본, 생산성 있는 노동력을 내놓을 수 없는 일본에 21세기는 없다. 하시모토 류타로는 일본이 이 고령화 문제를 앞으로 10년 안에 해결하 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10년을 '고령화'라는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다. 일본이 문제를 깨달은 시기가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일본 인구의 평균 연령은 41세, 우리 인구의 평균 연령은 29세. 우리 나라에는 지금도 많은 어린 아이가 태어나고 뛰어 놀고 있다. 석양의 제국 트렁크 두 개만 달랑 들고 일본에 도착한 다음날, 나는 당장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아키하바라에 갔다. 전기밥솥을 사기 위해서였다. 4년 전의 아키하바라는 대단했다. 일본인들은 물론 '메이드 인 저팬'의 가전제품을 사겠다는 외국인들로 아키하바라는 흥청거리고 번잡했다. 한마디로 일본 특 유의 활기가 넘쳤다. 나역시 전기밥통과 몇 가지 가전제품을 사겠다는 목적으로 부지런히 그 인파 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물건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나는 서서히 놀라고 있었다. 선전의 커피 그대로 '단단하고 야무진' 일본 상품에 감탄하고 감탄했다. 이것이 '일본들의 솜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품이 지닌 아름다움에 나는 홀리고 말았다. 깔끔한 마무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깜찍한 모 양새, 요모조모 머리를 굴려 얻어낸 편리한 기능, 그냥 넘어가도 좋은데 그래도 끝까지 신경쓴 배려 …. 감탄을 거듭하면서 나는 일제 물건을 하나둘 사들였다. 동시에 나의 마음은 천근 만근, 그 전 자 제품의 무게가 비교가 안될 정도로 무거워 갔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 이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30년 후? 아니 영원히 우리는 이 일본이라 는 나라의 뒤꽁무니만 찾아다니다 어느 날 항복 선언을 하는 건 아닐까?' '우리는 정말로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되풀이하면서 나의 일본 생활은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보낸 3년 남짓한 기간 내내 아 키하바라에서의 충격은 줄곧 나를 지배했다. 일본은 어떻게 해서 이러한 경제 부흥을 이뤘는가? 가하라를 비롯한 일본의 학자들은 일본인들 이 근면하고 교육 수준이 높았으며 일본 사회는 '평등을 지향하는 열린 사회'였다고 주장한다. 그러 나 나는 그 주장에 조금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스스로 패전의 잿더미에서 일본이 어 떻게 오늘의 경제 대국이 될 수 있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일본인들의 뛰어난 국민적 자질과 근면성, 집단적 응집력이 경제 대국 일본의 원동력이었는가? 일본인들은 서구인들이 경멸하듯 한낱 경제 동물이 아니라 우수하고 현명한 엘리트 경제 인력이었 는가? 물론 아니다. 일본의 경제 부흥에 일본인들의 개인적인 역량, 즉 민족적인 실력이 차지한 비중은 지극히 적다고 나는 단언한다. 일본 경제 부흥의 주역은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다. 초강대국 미국의 필요에 의해 일본의 경제 부흥은 추진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패전국 일본을 점령했던 미국은 골치 아픈 골목대장 하나 손본 정도의 인식밖에 하지 못했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 무식했던 것처럼 일본에 대해서도 무 지했기 때문이다. 일본에 대해 미국은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다나카 가쿠에이가 표현한 그대 로 만신창이가 된 패전국 일본에 '하늘이 내린 선물'이 주어졌다. 그것은 냉전 구조의 출현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판짜기에 들어간 미국과 소련은 급속히 사이가 냉각되었다. 이러한 상황 에서 패전국 일본을 접수한 미국은 당연히 일본의 전략적인 위치에 착안해 일본을 방패막이로 사용 하기로 한 것이다. 공산주의의 영향권에서 일본을 보호(?)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경제적 부흥이 필 요하다는 판단에 이르른 것이다. 일본의 작가 이시가와 요시미는 일본과 미국의 관계를 아주 재미있게 설명했다. 일본이 경제 부 흥을 위해 미국을 멋지게 속였다는 것이다. 구호 물자를 가져온 미국을 상대로 일본은, 감히 미국 에 싸움을 걸던 '태양의 제국, 일본'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도록 자존심을 버리고 납짝 엎드렸다는 것이다. 잡동사니 구호 물자를 나눠 주는 미국 군인들에게 일본인들은 애나 어른이나 안면 몰수하고 '쪼꼬 렛도 구다사이'를 연발하며 초컬릿을 구걸했다. 그 옛날 개항을 요구받았을 때 '일본 기생'을 바쳤 듯 미군에게 '순종적인 일본 여자'를 바쳤다. 그뿐인가. 전 일본 국민이 일사불란하게 '대전향'을 했다. 1억의 전 일본인이 전체주의자에서 민 주주의자로 대전향을 한 것이다. 당초 일본을 점령하며 미국인들은 일본인들의 반란을 우려했다. 그런데 단 한 건의 미군정에 대한 반란도 없었다. 일본인들은 철저히 전향한 것이다. 그래서 놀란 맥아더는 "일본인들은 국민학생 정도의 열한 살짜리 뇌를 지닌 국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시가와 요시미에 따르면 바로 그때 일본 국민들은 마음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는 것 이다. '이제 미국이 속기 시작했구나'하는 생에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일본에 대해 획기적인 제안을 한다. 즉 미일 안보 조약을 제의한 것이다. 미일 안보 조약은 '미국이 일본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맡는 대신 미국은 일본에게 경제 지원은 물론 미국 시장을 활짝 열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인들은 계산했다. 미국의 노예가 되어 부자가 될 것인가? 일본인의 대답은 '예스'였다. 일본은 국가의 자존심을 담보로 활짝 열려진 미국 시장에 서 열심히 물건을 내다 팔았고 돈을 차곡차곡 챙겼다. 냉전 구조를 바탕으로 일본은 우리 나라를 비롯한 전세계가 안보를 위해 돈을 물쓰듯하는 동안 일전 한푼 흘리지 않고 알뜰히 알토란 같은 돈만 챙길 수 있었다. 게다가 이웃나라 한국에서 터진 한국전쟁은 일본인들을 돈방석에 앉혀 주었다. 연이은 베트남 전쟁은 일본 경제에 폭발적인 수요 창출을 가져왔다. 결국 냉전 구조에 따른 한국과 베트남 두 국민에게는 너무도 불행한 전쟁이 일본 에게는 너무나 행복한 전쟁이 된 것이다. 근면, 손톱깎기 하나에도 혼을 집어넣듯 만들어 내는 솜씨, 그리고 이미 2차 세계대전을 통해 획 득한 기술 축적 등 일본인 스스로의 내부적 요인보다는 이처럼 미국과 냉전 구조라는 외부적인 요 인이 경제 성장의 근본 동인이었다. 그리고 이 점은 무엇보다도 오자와 이치로라는 일본 정치판의 막후 실력자가 그의 책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본인들, 그토록 돈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자신들의 초상 '경제 대국'이라는 단어 뒤에는 엄청난 그늘이 자리잡고 있다. 오늘 일본은 경제 활동을 하는 모든 이들을 산업 전사로 정의한다. 무역 전쟁을 위해 세계 방방곡곡의 오지에 파병된 일본의 산업 전사 들은 처절한 경제 전쟁 속에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자존심을 버리고 자아를 버린다. 산업 전사들 은 경제 동물로서 인간성을 포기하고 돈을 위해 자신의 체력의 한계도 잊고 죽자살자 일하다 어느 날 '과로사'라는 이름 아래 영광스럽게 죽는다. 이것이 경제 대국 일본의 실상이다. 우리 나라에서 오래 활동한 한 일본인 기자는 한국인들에게 제발 자존심을 버리고 장사를 하라고 충고한다. 자기네 일본은 미국에게 자존심을 완전히 버리고 돈을 벌어 오늘의 대일본 경제 대국을 이뤘다고. 그러나 한국인들은 자존심을 내세워 괜찮은 상담도 깨뜨리기 일쑤라고. 그는 결론적으 로 한국인들이 자존심을 버릴 때 자기네 일본처럼 될 수 있다고 충고한다. 참으로 이험하고 무시무시한 충고이다. 그 옛날 일본인들이 독을 품고 미국을 솜여넘기려 했듯 이제 한국을 그렇게 속여넘기려 하는 것은 아닌지. 돈은 한번 빌려 주면 나중에 받을 수 있지만 자 존심은 한번 주어 버리면 영원히 회복할 수가 없다. 우리 나라가 만일 자존심을 버렸다면 아마 최 고로 잘돼 봤다 일본 경제의 '하청 국가'일 것이다. 그래도 자존심 하나로 우리는 이 아시아에서 일 본이라는 나라와 어떻게든 한판 붙어 보겠다고 버텨 왔다. 그래서 일본이 우리 나라를 무시하지 못 하고 그나마 껄끄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자존심은 자립의 한 표현이다. 이것은 경제 활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이 '음기'의 민 족이라면 우리는 '양기'의 민족이다. 일본이 자존심이 없는 민족이라면 우리는 자존심이 있는 민족 이다. 일본이 역사가 없는 민족이라면 우리는 역사를 지닌 민족이다. 경제 활동 역시 그렇다. 우 리 한국인에게 경제 활동은 인간의 자립을 위한 삶의 활발한 표현이며 자존의 개념인 동시에 지극 히 인간적인 활동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존심 없는' 일본과 '자존심을 지니고' 한번 겨뤄볼 만한 역 량을 지닌 민족이다. 형편이 어려운 미족일수록 자존심만 높다고 시바 료타로라는 일본의 작가는 말했다. 그는 북한을 직접 빗댔지만 결국 모든 일본인들의 생각 그대로 '한국 전체'를 이야기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인들 의 말을 우리가 어떻게 바로잡아 주는가가 우리의 경제적 자존심이고 자립이 길이다. 냉전 구조와 두 개의 전쟁으로 꽃피운 '일본 경제의 기적'을 '일본인의 근면과 일본인의 평등 사상'이 가져다 준 것으로 억지 논리를 펴는 일본에 대해 우리의 역량을 보여주고 경제적 번영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자존심이다. 지난 가을 나는 다시 일본의 아키하바라를 가 보았다. 그러나 아키하바라는 그 옛날의 아키하바 라가 아니었다. 일본 번영의 상징 아키하바라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이미 구조화된 불 황탓에 아키하바라의 전자제품점들은 하나둘 문을 닫으며 '신화'를 마감하고 있었다. 이미 가전제품 은 발달할 만큼 발달해 '기본적인 역할'을 끝낸 것이다. 최근 일본 가전제품 신상품을 살펴보면 '디 자인' 변화 혹은 '독신 샐러리맨을 위한 오븐 토스터' 하는 식으로 구매 대상을 세분화하는 데 그치 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제 더 이상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획기적인 전자 제품은 나오지도 않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가전제품으로 대표되는 일본 경제에 한계가 확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제조업'에 기반을 둔 일본 경제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외국에서 싼 재료를 사들여 역시 값싼 노동력을 투입하고 엄청난 설비 투자를 통해 물건을 만들어 팔아 온 일본 제조없의 시대 가 가고 있는 것이다. 엄청난 설비 투자를 한 공장은 비어 있고 기계는 놀고 있다. 닛산이 본사 공장의 문을 닫았다. 덩치만 커진 일본 경제, 제조업의 공룡으로서의 최후인 셈이다. 내가 아는 한 경제인은 일본에서 일년 동안 연수를 하면서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일본 의 자본주의 역사 백년, 우리의 자본주의 역사 약 50년, 두 나라의 경제적 상황, 특히 국민들의 삶의 질과 산업의 추이가 얼마나 진취적인가를 기준으로 볼 때 '50년 우리의 자본주의'가 훨씬 바람직했 다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기회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영원할 것만 같 았던 일본 아키하바라에 지금 서서히 해가 저물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모방의 시대는 끝났다 메이지 시대는 일본인들이 그들의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시기이다. 하긴 내가 생각 해도 이 메이지 시대는 활기와 의욕이 넘쳤던 일본의 르네상스 같은 시대였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 들여 경제 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고 부국강병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내세우고 일본이 힘차게 움직 이던 시기였다. 그래서 나 자신 일본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관심을 가진 시기가 바로 메이지 시대였다. 그런데 사실 이 메이지 시대는 일본의 한 역사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찬란한 모방의 시대'였다. 서양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모방의 대상을 두고 일본인들이 그 타고난 본뜨는 솜씨를 발휘했다는 것 이다. 일본의 문화는 모방의 문화이다. 일본인들은 옛날부터 창조적인 것보다는 남의 것을 베끼든 지 본을 뜨든지 해서 근사하게 완성해 놓기만 하면 오히려 이를 더욱 평가하는 측면이 있다. 일본인들은 모방을 하는 것에 대해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일본어의 '마나부' 즉 공부한다는 말 과 흉내낸다, 모방한다는 뜻의 '마네스루'는 그 말의 어원이 같다. 일본인들에게는 모방을 한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을 뜻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능숙하게 베끼고 흉내내고 따라하는 것을 크 게 평가한다. 일본에서는 그래서 이른바 '모노마네' 즉 흉내만을 전문으로 하는 연예인들이 커다란 인기를 누린 다. 말하자면 나훈아의 흉내를 내는 너훈아라는 가수가 있다고 치자. 우리 나라에서는 이 너훈아 라는 가수는 어디까지나 모조품이라는 한계 때문에 지방이나 밤무대로 활동이 한정된다. 하지만 일 본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일본에 '고로케'라는 모창 가수가 있다. 오랜 무명 생활을 한 이 가수는 호모이자 한물 간 미가와 겐이치라는 가수의 흉내를 잘 냈다. 아주 뛰어난 솜씨로 완벽하게 카피를 하자 텔레비전의 출연 요 청이 쇄도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고로케의 흉내내기 덕분에 원래 오리지날인 미가와 겐이치의 인기가 거짓말같이 부활해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폭발적인 호응을 받으며 다시 스타가 되었다. 나는 정말 일본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도쿄를 비롯해 일본 땅 전체가 흉내내기, 모방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처음 도쿄 아카사키의 영빈관을 지나갈 때 나는 어디서 많이 보던 데다 하는 생각을 했다. '일본은 처음인데 무슨…' 하다가 나는 무릎을 치면서 웃고 말았다. 영빈관의 모습이 프랑스 파리의 엘리제궁을 완전 히 100퍼센트 카피를 해 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나는 하라주쿠 거리는 파리의 샹젤리제를 흉내내고, 히비야 공원은 뉴욕의 록펠러 센터를, 도쿄 타워는 파리의 에펠탑을 그대로 흉내낸 것을 알고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엔 자존심도 없나 하는 생각을 했다가 나중에는 일본인들이 모방과 흉내내기에 대해 아주 독 특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한마디로 일본인들은 '서투른 창조보다는 확실한 모 방이 낫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일본인들은 옛날부터 창조적인 사고를 하는 데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아 왔다. 그보다 일본인들은 구체적으로 본뜰 대상을 정해 놓고 모방하는 과정에서 실용성 을 덧붙이면서 나름대로 경제 성장의 길을 걸어 온 것이다. 제조업 시대에 이러한 일본의 천재적인 모방 정신은 진가를 발휘했다. 미국이 애써 발명한 트랜 지스터나 복사기는 일본인의 손에 의해 베껴져 일본에 경제적인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실물을 가 져다 놓고 '어떻게 하면 편리하게 쓸 수 있을까'를 궁리했던 일본의 모방 정신은 그래서 20세기라는 시대의 흐름을 유연하게 탈 수 있었다. 일본의 이러한 원숭이 식의 모방은 물론 커다란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일단 외부 문화의 유입 없이 일본의 독자적인 창조성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일본은 예로부터 스스로 내부로부 터 혁신적인 사상이나 아이디어를 만들어 낸 적이 없었다. 오로지 외국의 풍물과 사조를 들여다가 재포장하거나 재생산한 문화인 것이다.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열등감을 비치는 것 은 결국 일본 문화가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의 문화는 정확히 말 한다면 한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그 틀과 정신은 감히 어쩌지 못하고 일본식 포장지로 다시 싸고 내 용물만 조금 변형한 정도에 그친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치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듯 외래 문화를 들여와 포장만 그럴듯하게 바꿔 급할 때마다 써먹어 왔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모방을 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심적인 거부감도 없다. 일본인들에게 모방은 편리하고 효율적인 외래 문화 접촉이 방법이었고 합법적인 배움의 방편이었다. 그런 까닭에 일본인 들은 만드는 일은 잘한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창조하는 일은 하지 못한다. 앞으로 우리 가 살아가야 할 21세기는 아이디어의 시대, 창조의 시대이다. 누가 무엇을 만드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무엇을 생각했는가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이제까지 없던 것을 얼마나 많이 내놓느 냐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유입 없이 일본은 독자적으로 무엇인가를 사고하고 만들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모방의 목표가 없는 일본인은 양치기를 잃어버린 길 잃은 양떼와도 같다. 집 단으로 떼를 지어 다니는 양떼 국가, 기러기 국가 일본의 미래는 어둡다. 있는 그대로를 모방하고 본뜨는 일본, 변화를 모르는 일본에 도전 정신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저널리스트가 일본을 떠나겠다는 말을 했다. 세계 각국을 떠돌면서 좋은 기사를 쓰 고 사진을 찍어 온 그가 이제 일본생활 십 년을 청산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일본이 라는 나라에는 더 이상 변화가 없어서라고 했다. 이제는 더 이상의 도전을 찾아볼 수가 없어서라고 했다. 21세기, 더 이상 모방이 통하지 않는 창조의 시대를 맞아 일본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힘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일본이라는, 미래가 없는 나라를 떠난다고 그는 짐을 꾸리면서 이야기했다. 정보 후진국 일본 취재 때문에 일본의 관청에 들를 때면 언제나 이상하게 생각되는 일이 있었다. 대장성이건 외무 성이건 최첨단 정보를 담당한다는 우정성이건 간에 예외가 없었다. 좁아터진 사무실이 한마디로 창 고 같았다. 서류 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직원들의 책상 역시 온갖 서류로 완전히 점령된 상 태였다. 또 회의하는 조그만 원탁 역시 거의 대부분 무슨 서류인지 모르겠지만 이사갈 준비를 하는 것은 아닐까 할 정도로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일본의 관리들은 이 처럼 오래된 서류 더미와 낡은 책상을 통해 자신의 관록을 자랑하며 국가 공무원으로서의 자부심을 은근히 과시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왜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저 엄청난 서류를 디 스켓에 담으면 한두 장이면 충분할텐데 왜 미련하게 저렇게 끌어안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결 론부터 이야기하면 이론인들은 컴퓨털르 싫어한다. 컴퓨터뿐 아니라 팩시밀리, 크레디트 카드도 싫 어한다. 아마 일본인이 좋아하는 첨단기기(?)는 똑같이 나오는 복사기밖에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가 최고로 발달한 일본이지만 고급 식당 중에도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 경우가 꽤 있어 나를 무척 당황하게 했다. 또 일본의 술집에서는 신용카드가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거의가 현금으로 거래되 는 것을 보고 나는 참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것은 유달리 현금을 좋아하는 일본인의 정서에도 관계 가 있겠지만 변화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본인들의 사고 방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 발령을 받아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일본은 첨단 정보화 시대가 활짝 꽃을 피운 신세계라 도 되는 거처럼 말해 주었다. 물론 나 역시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에 도착 한 지 며칠 안되어 내가 아키하바라를 비롯한 컴퓨터 전문 상가를 둘러보았을 때 완전히 예상이 어 긋났다는 감을 받았다. 일본의 컴퓨터 전문 상가들은 한마디로 힘이 빠져 있었다. 우리 나라 용산 의 아주 조그만 가게에서도 느낄 수 있는, 보는 사람의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그런 활기와 열기 그리 고 왕성한 호기심의 흥분이 없었다. 컴퓨터광은 물론 학생, 회사원, 주부들 그리고 때로는 장노년층 이나 어린아이들까지 눈을 밝히고 부품을 고르고 조사하고 질문하는 그런 뜨거운 호기심의 현장이 아니었다. 새로운 것으로 가득 찬, 정말이지 말 그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될 만도 하건만 전체적으로 축 쳐진 분위기여서 아주 놀랐던 적이 있다. 그런데 후에 나는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일본인 전체의 퍼스널 컴퓨터 사용률이 겨우 10 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인들의 통신망 사용률도 겨우 14퍼 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숫자는 사실 같은 선진국인 미국에 비해서 족탈불급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동안 제조업 분야에서 따돌린 유럽권에도 명함을 내밀 수 없는 숫자인 것이다. 하기는 일 본의 중고등학교 선생님 가운데 이른다 컴맹인 경우가 자그마치 70퍼센트로 나타난 것은 일본인이 얼마나 정보화 사회에 뒤처져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나머지 30퍼센트 역시 대단한 컴퓨터 메니아 가 아니라 기초적인 워드프로세서 사용자난 일단 부팅이 가능한 사람까지 다 포함한 숫자라는 점에 서 나는 더욱 놀랐다. 일본 국민의 1인당 컴퓨터 처리 능력은 OECD 37개국 가운데 18위로 중위권이다. 일본의 퍼스널 컴퓨터 판매량은 겨우 400만 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컴퓨터 통신의 가입자 수도 극히 저조한 편이다. 특히 관청 등 공공 기관의 컴퓨터 보급률은 바닥을 헤매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도 두툼한 서류에 도장을 쾅 찍어야 직성이 풀리고 팩시밀리로 도장까지 찍어 보낸 서류를 다시 원본을 우편 으로 보내야지 점잖고 예의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본의 관행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인이 정보화, 국제화에 맞는 국민이 아니라는 데 있다. 획일화된 사회적 구조 속에서 일본인들은 이유를 묻지 않는 데 길들여져 있다. 상층부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 종을 강요하고 화(和)라는 통합 개념 아래 모든 인간을 균일화시키고 일반화시켜 개성을 말살하며, 집단의 필요 부품으로 인간을 가치 절하시키는 일본식 사회 구조 속에서 정보화 시대에 맞는 인간 이 태어나고 길러질 수는 없다. 더구나 변화를 싫어하는 일본인의 안정 지향 심리는 엉덩이를 의자 에 붙이고 앉아 물건을 만들어 내던 제조업 시대는 맞았어도 이제 변화와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결 판을 내야만 하는 21세기에는 한물 지나간 장점인 것이다. 일본의 더 큰 문제는 정보의 통제에 있다. 일본 사회에서 강자로 표현되는 정부와 관청 그리고 회사는 완전히 정보를 한 손에 쥐고 독점하고 있다. 일본 사회의 폐쇄성은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 이 세계적인 악명을 얻고 있다. 특히 일본 기자 클럽의 폐쇄성은 유명하다. 일본의 관료들은 외국 기자들을 죽자살자하고 피한다. 나는 그런 경우를 지켜보며 그토록 필사적으로 정보를 통제하고 폐 쇄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은 일본의 관청에 그만큼 밖으로 알려져서는 절대로 안되는 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했다. 마찬가지로 일본 사회에서는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정보화 시대에 등 을 돌린 일본인들의 성격도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정부와 관청이 사실상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을 막고 있다는 데 있다. 일본에서 정보의 값은 지나치게 비싸다. 개인이 정보를 사 고 이용하기엔 그 값이 엄청나게 비싸다. 한 예로 인터네트의 가격이 그렇다. 열려진 꿈의 정보 시장인 인터네트의 이용자 수를 비교해 보면 미국이 150만, 일본이 4만 그리고 우리 나라는 27만 명 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가입자 수는 여러 가지를 말해 준다. 내가 만난 일본 우정성의 한 과장은 일본이 '정보 후진 국'의 길을 아주 착실히 가고 있다고 걱정했다. 일본의 인터네트 가입자 수는 NIES에도 못 드는 말 레이시아보다도 적은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일본인의 영어에 대한 기본적인 공포감과 한자와 히라가나를 섞어 쓰는 일본어의 취약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 그는 일본이 이제 이류 국가로 전락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진지하게 걱정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역시 정보의 값이 비싸 누구나 그 정보를 사용하지 못하는 데 가장 큰 이유 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물가는 살인적인데 특히 정보 사용료, 통신망 사용료는 지나치게 비싸다. 일본인이 개인적으로 인터네트를 이용하려면 한달 사용료로 자그마치 십만 엔, 우리 나라 돈으로 80여만 원을 내야만 한다. 우리의 경우 약 3만 원에서 4만 원으로 인터네트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과 비교하면 아무리 물가 수준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턱없이 비싼 돈이다. 결국 일본 사회에서는 개인이 정보를 다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회사의 종업원인 일본인들이 가난한 살림을 하면서 언제나 회사의 접대비로 고급 음식점과 술집에 가서 질펀하게 마시고 노는 것처럼 일본인들은 회사가 사용하는 인터네트 서비스를 통해서만 정보를 접할 수밖에 없다. 결국 회사 없이 개인적으로 정보를 관리하고 자유롭게 쓰는 일은 불가능하다.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정보 독재 시대를 기획하고 있다. 정부와 회사 등 강하고 거대한 기관들이 정보를 독점하고 관리함으로써 보통의 일본인들을 조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일본이 벌어들인 부를 국가와 회사가 독점한 것처럼 이제 정보 역시 국가와 회사가 독점하고자 한다. 21세기에는 누 가 얼마나 많은 정보를 지니느냐에 따라 빈부의 차이가 정해진다. 그런 점에서 이제 일본은 거대한 정보 정부와 정보 기업을 통해 영원한 부를 향한 집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보에는 국적도 애국심도 의리도 없다. 정보화 시대는 개성의 시대, 혼자의 시대이다. 그런데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모르고 있다. 지금까지 함께 사이 좋게 줄을 맞춰 걸 어 왔으니 함께 끝까지 가자는 주의이다. 개인에게 정보를 통제함으로써 일본 정부와 기업은 착실 히 후진국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일본의 경영학자 오마에 겐이치는 일본이 이미 21세기 첨단 정보 분야에서 경쟁력을 잃었다고 진단했다. 폴 케네디는 일본인의 큰 문제점을 처음 만난 사람들과 끝까지 일하려고 하는 점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일본인은 정보도 그런 것인 줄 아는 듯하다. 공동 급식하듯 공평하게, 모두가 가난하고 부족하게 나눠 가지면 되는 것이 바로 정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것, 완 전히 생각조차 못하던 것이 등장하는 것, 어제의 가치를 엎어 버리는 것이 정보라는 생각은 못하는 듯하다. 4. 나는 '탈락'하고 싶다 '불멸의 신' 회사 '노르마'증권 회사를 상대로 한 불륜 엄마는 자동판매기 스카웃은 악이다 도전자들 나는 '탈락'하고 싶다 '불멸의 신' 회사 1970년, 일본을 뒤흔든 뇌물 사건인 '더글라스 그라먼 항공기' 추문이 있었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이 사건에 관련된 니쇼이와이의 상무가 자살했다. 그는 물론 유서를 남겼다. "회사의 생명은 영원합니다. 그 영원을 위해 우리는 봉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가 남간 유서의 내용이었다. 그는 회사를 지키기 위해, 회사를 위해 목숨을 끊은 것이 다. 일본인에게 회사는 살아 있는 생명체이며 '법인'으로서 존재하는 회사는 동시에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신'이다. 사람은 죽어도 회사는 영원하다는 이러한 생각은 '불멸의 신'이었던 일본 왕에 대한 충성심을 '회사'에 대한 충성심으로 대체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국가 절대주의'에서 '회사 절대주의' 로 변화한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두고 '주식회사 일본'이라고 말한다. 일본인들에게 회사는 '운명 공동체'이자 자신들의 '울타리'이다. 그리고 어떤 회사에 다니느냐에 따라 개인의 급수가 매겨진다. 일본에서 재미있게 느낀 것은 그가 다니는 회사에 따라 '한 개인'이 평가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평가된다. 일본 문제 전문가인 클라크는 '일본인은 회사에 의해 매겨진 계층적 격 차를 지니고 있다'고 분석했다. 가령 어떤 이를 말할 때 '일류 회사원' '이류 회사원'으로 등급을 매 기는 것은 물론, '저 사람은 1부 상장 회사의 부장'이라든가 '2부 상장 회사의 과장' 그리고 '중소기업 아저씨' 등으로 회사의 위치에 따라 칼같이 인간을 평가해 버리는 것을 나는 수도 없이 목격했다. 일본인에게 회사는 곧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회사를 비방하거나 회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인의 '회사 절대주의'를 잘 말해 주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자동차 회사 과장이 '나와 기업'이란 주제로 한 잡지에 글을 기고했다고 한다. 그는 공해가 심각하다는 점을 전제로 자동차 문명에 대한 기본적인 자기 생각을 썼다. 즉 자동차는 인간을 고립 화시키고, 걷는 능력을 악화시키며, 인간에게 차별이 사상을 심어 주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이야기 했다. 그런데 같은 회사 사람이 그 글을 보고 윗사람에게 보고해 결국 그 과장은 사표를 쓰고 말았 다. 자동차 회사의 과장으로서 회사에 해를 주는 글을 쓴 것은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측 면에서 회사 간부는 물론 동료조차도 그를 비난했다고 한다.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는 것은 한 인간 으로서 당연한 권리인데도 이 권리가 '회사 인간'에게는 금기시되는 것이다. 회사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일본인들로서는 회사에 대해 비판을 한다는 것은 마치 '일본 왕'을 욕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 로 '불경스러운 일'인 것이다. 일본인이 회사에 대해 이처럼 충성을 다하는 것은 그만큼 회사가 종업원을 책임져 주기 때문이라 는 생각도 할 수 있다. 일본 사회에서는 회사를 다니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사실 회사에 다니지 않으면 일본인들은 '보호받을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가정주부, 어린이, 노인, 장애자, 농민 등등 커다란 회사의 둥지에 모여 있지 않는 '회사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당연 히 일본이라는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이다. 얼핏 보면 일본의 회사들은 많은 것을 책임져 주지 않 나 하는 생각이 든다. 회사원들에게 장기 저리로 집마련 자금을 빌려 주기도 하고 작게는 회사의 회식이나 접대를 통해 평소에는 엄두도 못 내는 고급 음식점에서 가서 실컷 영양 보충도 하게 해 준다. 일본의 접대비 수 준은 언제나 세계 최고인데 이는 일본인 모두가 회사 돈으로 먹고 놀고 즐기는 측면도 크다. 즉 가 난한 집의 아이가 부잣집에 일하러 들어가 얹혀서 잘 먹고 잘 노는 것과 똑같은 시스템이다. 즉 회 사 돈으로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한'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구조이다. 회사가 부자라는 것은 건물에서도 나타난다. 일본의 기업들은 거품경제 시절 엄청나게 호화스러 운 건물을 지었다. 최근에 지어진 한 방송국의 건물 역시 세계 초일류급의 시설을 해 놓았다. 어 느 정도냐 하면 워실렛(일본의 TOTO사가 만들어 내는 비데 겸용 호화 변기)이 화장실마다 갖춰져 있다. 사실 일본의 웬만한 호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시설인데 바로 방송국의 화장실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일본이 얼마나 돈이 남아도는가 하는 상징으로도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 난한 개인 일본인'에 대한 '부자 회사'의 과시라고도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이 회사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놀아도 회사에서 놀고 하는 것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서라기보다는 회사가 편한 곳이기 때문이다. 일단 여름에는 가장 시원한 곳이자 겨울에는 가장 따뜻한 곳이 근대적인 설비를 갖춘 일본의 회사이다. 개인의 집은 토끼장이지만 회사 건물은 한마 디로 초일류급의 호텔과도 같다. 우리 나라와 다른 일본의 풍습 가운데 '입사식'이라는 것이 있다. 해마다 입사식이 있는 날이면 일본의 매스컴들은 거의가 톱뉴스로 다루면서 입사식의 분위기를 보도한다. 입사식이란 신입 사원 들을 받아들이는 회사의 행사이다. 그러나 이 입사식을 지켜보면서 나는 '결혼식'을 떠올렸다. 부 모들도 참석한 이 입사식에서 회사 대표는 이제까지 정성껏 키워 준 자녀들을 지금부터 회사가 맡 아서 잘 돌보겠다는 말을 한다. 마치 결혼식 때 신부 아버지가 신랑에게 신부를 넘기는 일종의 '양 도 절차'와 완전히 똑같다. 입사식에 참석한 이본 젊은이들의 표정 역시 비장한데, 눈물을 글썽이는 남자 사원까지도 본 적이 있다. 회사에 들어갔다는 것은 일본인들에게 '싫으면 그만 둘 수 있는' 직 업을 하나 얻은 것이 아니고 영원히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는 중세의 '결혼'을 의미한다. 이 결혼 은 마치 가난한 집의 딸이 부잣집에 팔려 가듯 애초부터 불평등하다는 점이 그 특징이다. 회사 지 상주의 아래 그리고 회사의 보호막 아래 오늘 일본인들은 입사식을 치르며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 를 회사에게 맡기는 셈이다. 입사식을 거치면 일본의 회사들은 약 석 달 동안 '신입 사원 연수'를 실시한다. 이 연수는 말하자 면 일본의 젊은이들, 학생들을 '회사인'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회사 인간, 조직 인간으로 만드는 마 지막 마무리 공정이 바로 '신입 사원 연수'이다. 이 공정은 무척 엄격하고 비인간적이다. 얼어붙는 듯한 영하의 날씨에 벌거벗겨 강물 속에서 인내심을 실험하는 것부터 거리에 나가 모르는 사람에게 수없이 절을 하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하게 하는 것까지 여러 방식이 있다. 일본의 한 회사의 연수 부 간부는 바로 이 연수의 목표는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우치는 데 있 다고 한다. 이 연수에서는 무엇보다도 '회사가 우선이며 최고의 가치'라는 점을 강조한다. 심한 경 우는 우익의 이상한 교육 기관을 이용하는가 하면 자위대에 입대시켜 군대 체험을 하게 하는 회사 도 있다. 오로지 '주식회사 일본'이 필요로 하는 '종업원'을 만들기 위한 교육인 셈이다. 바로 이러한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가, '천황'의 이름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목숨을 내버릴 수 있었 던 일본 군인처럼 회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산업 전사'를 만드는 데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노르마' 증권 일본의 이름난 증권회사 가운데 '노무라 증권'이 있다. 그런데 이 회사를 흔히 '노르마 증권'이라 고 말한다. '노르마'는 러시아말로 '노동의 기준량' '해내야 하는 일의 할당량'을 뜻한다. 원래 시베 리아 강제수용소에서 수형인들에게 부과된 하루의 노동량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 '노 르마'에 의해 일본의 최대 증권회사인 '노무라 증권'이 성장할 수 있었다. 일본의 판매회사, 증권,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과 자동차나 아파트 분양 회사들은 사원들에게 '일 정한 판매량'을 부과하고 이를 기준으로 임금을 정했다. 이 노르마를 달성하지 못하면 '비정한 탈 락'이 있고, 달성하면 '출세'와 '성공'이 보장된다. 노르마 제도의 본질은 사원들은 혹독한 경쟁 속에 몰아붙여 회사가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옛날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서 죄수들을 다루는 방식 그대 로 일본의 회사들이 일본인을 다루는 것이다. 이 비정한 노르마뿐만 아니라 일본 회사원들의 생활을 말해 주는 몇 가지 단어가 있다. '과로사' 와 '단신 부임' 그리고 '서비스 잔업'이다. 그중 '과로사'는 90년대에 들어 일본에서 가장 심각한 문 제라고 할 정도로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데 과로사에 대한 재판 결과가 심심치 않게 언론을 장 식하고 있다. 과로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회사와 얼마나 비정하게 회사가 남편을 숨돌릴 새도 없 이 부려먹었는가를 호소하는 부인의 항변을 보고 있으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전형을 보는 듯했다. 서양의 사전에도 이제 '가로시'(과로사의 일본식 발음)가 '가라오케'와 더불어 올라갔을 정도로 많은 일본인들이 '가로시' 피해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단신 부임' 역시 커다란 사회적인 문제이다. 일본의 회사에서는 옛날부터 전근이 많았다. 전국 을 돌며 '회사 전체의 사정을 넓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유나 사원간의 '평등'이라는 이유를 들어 전근을 시키고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2, 3년 정도의 전근에 우리 나라처럼 가족이 함께 가 는 경우는 거의 드문 일이다. 일본의 주택 사정(집을 얻을 때 6개월 치를 지불하는 것을 비롯해 엄 청나게 비싼 임대료 등) 그리고 자녀들의 학교 교육 때문에 일본의 아버지들은 혼자서 짐을 싸 들고 내려간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렇게 단신 부임으로 당장 먹고살 것을 해결해야 하는 '아버지'를 위한 요리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린다. 그 요리책에는 쌀 씻는 법, 꽁치 굽는 법, 감자 볶는 법 등이 아주 자세 하게 씌어져 있다. 이 단신 부임은 그저 일 때문에 남자가 요리를 배우고 청소와 다림질에 익숙해 지는 이상의 의미가 있다. 가족과의 격리가 그것이다. 당연히 결혼한 사람이라면 가족하고 함께 있을 권리가 있고 회사 역시 이 사정을 감안해야만 한다. 일본의 회사는 종업원의 사생활까지도 챙 겨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다못해 부부싸움을 해도 과장이 개입해 조정 작업을 하기도 한다(다른 나라 같으면 분명한 사생활 침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회사는 '가족'이 아버지를, 남편을 정작 필요로 할 때 가장을 가족으로부터 떼어 놓는다. 최근 일본의 남자아이들이 지극히 '여성화'되고 '마사콘'(마더 콤플렉스의 일본식 조어)에 걸려 있 다는 것은 결국 단신 부임으로 인한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다. 결국 일본의 가정은 회사의 횡포에 무방비 상태로 당하기만 하는 존재인 셈이다. 한 3년 전으로 기억되는데 일본에서 큰 화제가 된 소 송이었다. 2년 동안 전근을 갔다 온 남편이 다시 2년 동안 전근을 가게 되자 그 부인이 4년의 전근 은 너무나 길다고 해서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4년 동안이나 마구 전근을 시키는 회 사의 '비인간적인 인사 구조'가 새삼 문제가 된 것 이상으로 부인이 '전근'을 이유로 회사에 대해 소 송을 걸었다는 것이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조금 양식 있는 이들은 '이제 드디어 일본에서도 회사에 대해 개인이 불만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인간 선언을 한 '천황제'를 대신하 여 절대적인 신앙의 자리에 올라서서는, 이제 '맹목적인 충성의 대상'이 되어 버린 일본의 회사에 대 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은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 일본의 회사에서는 '서비스 잔업'이라는 것이 있다. 서비스 잔업이라는 것은 잔업 수당 을 받지 않고 무료로, 그러니까 '서비스'로 잔업을 하는 것을 말한다. 언뜻 자발적인 느낌이 드는 이 용어는 그러나 많은 일본 회사원들이 겪고 있는 '회사 인간으로서의 비극'을 상징한다. 노르마 제도가 치열한 경쟁을 붙여 어쩔 수 없이 그 대열에서 지칠 때까지 뛰게 만들듯 '서비스 잔업' 역시 종업원을 착취하고 혹사하는, '인자한 얼굴'을 한 주식회사 일본의 '종업원 다루기'이다. 흔히 일본의 경제 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루게 한 신종(神種)의 삼기(三器)로서 종신 고용제와 연공 서열제 그리고 기업내 노조를 들곤 한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오늘날 일본의 초고속 성장이라 는 제단에 바쳐진 신종의 삼기라면 '노르마'와 '단신 부임' 그리고 '서비스 잔업'이라는 세 단어가 아 닌가 한다. 물론 일본의 회사원들이 이 세가지 명제 아래 자신을 '희생양'으로 바쳤음은 두말할 것 도 없다. 회사를 상대로 한 불륜 일본의 회사원은 언제나 '불륜 상태'이다. 물론 집에는 정식으로 혼인 신고를 한 부인이 있고 아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는 '바람을 피우고 있다.' 그의 불륜 상대는 다름아닌 '회사'이다. 일본의 직장 남성들은 '가족'은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회사'에 모든 것을 바친다. 가족보다는 회사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은 물론이고 가족보다 회사 사람들과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의 직장 남성들은 회사하고 결혼했다고도 할 수 있다. 집은 그야말로 하숙 집이다. 우스개 이야기로 하숙집 아줌마의 아들이 자신을 꼭 닮았다는 농담을 하는 일본 남성도 보 았다. 또 이런 일본 텔레비전의 광고도 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엄마와 어린 아들이 있다. 곧 후줄근한 차림새의 아버지가 정신없이 나타난다. 어제 저녁 한잔 했음이 분명한 얼굴, 그냥 무 관심하게 밥을 먹고 있는 가족에게 "다녀올게"라고 간신히 한마디 하고 나가려는 순간, 어린 아들이 무심코 한마디 한다. "그래요. 아빠, 그럼 내일 아침에 봐요." 이 한마디에 깜짝 놀라는 아버지의 모습. 아침에 겨우 아이 얼굴을 보는 일본의 아버지를 빗댄 광고이다. 알고 보면 불쌍한 것이 일본의 남성이고 일본의 가정이다. 그래서 사회심리학자인 디 보스(De Vos)는 일본의 가족 관계는 한마디로 '병적이다'라고 진단할 정도이다. 가정이라는 것은 사실 산업 화되고 지독한 경쟁 사회인 오늘 유일한 안식처이며 믿을 수 있는 최후이 장소인지도 모른다. 그렇 지만 일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일본의 여성 인류학자인 나카네 지에가 갈파했듯 일본 사회는 '이에(家)'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 다. 일본에서는 막부 시대부터 집은 권력 구조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였다. 마치 군대의 한 부분 같다고나 할까. 가정은 사적인 장소가 아니라 공적인 장소였다. 메이지 시대의 가정은 '일본 정부의 식민지'라고 규정짓는 이들도 있다. 일본의 가정은 강한 일 본, 절대자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위해 존재했다. 그리고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하며 팽창주의 정 책으로 나아갔을 때 일본의 가정은 충실하게 전쟁 지원 업무를 수행했다. 이러한 일본 가정의 모습 은 오늘도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마치 옛날에는 국가와 나라에 바쳤던 남편을 오늘날에 는 회사에 바치는 것으로 대상만을 달리했다고 볼 수 있다. 언뜻 보면 일본 남성들은 왜 결혼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생활을 보면 굳이 가정이 필 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 일이 끝나도 회사 동료들과 어울려 반드시 한잔을 하면서 여전히 회사 의 이야기를 한다. 그뿐인가. 놀러 가도 회사 동료들과 함께 가고 휴가까지도 회사가 마련해 준 휴양지에서 회사 동료들과 어울려 보낸다. 내가 아는 미국의 한 외교관 부인은 일본 근무가 좋은 것은 부부 동반으로 참석해야만 하는 공식 모임이 거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오랫도안 외교관 부인 노릇을 해 온 그녀는 남편의 직업 때문에 부부 동반으로 온갖 공식 모임에 차려 입고 얼굴을 내미는 '야근'을 해야 하는 점이 참 고달팠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에 오니 부부 동반 모임이 거의 없어 저녁에는 자기 시간을 가져 기쁘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일본이란 사회가 일하는 남자에게 '가정'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점이 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나는 일본의 사회와 회사가 남편을 가정으로부터 계획적으로 격리시킨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본은 한마디로 '회사 사회'이다. 모든 것이 일, 즉 회사의 계획과 의도대로 움직 인다. 개인은 정말 그 조직의 한 세포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본의 가정은 그러한 회사주의의 음모 에 의해 희생된다. 한 예로 일본의 회사들은 사원들에게 수고했다고 회사가 지닌 온천 휴양지에 초 대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회사 업무에 방해가 안되는 주말이다. 사실 개인의 휴일을, 주말을 빼앗는 것도 나쁜 일이지만 더 기가 막힌 것은 '사원'인 남성만을 초대하는 것이다. 즉 가족 동반이 아닌 것이다. 결국 주말조차도 가족들은 아버지와 남편을 회사에 빼앗긴 채 쓸쓸하게 보내는 것이 다. 가족과 정답게 행복하게 보내는 것을 일본의 회사는 눈뜨고 못보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실제 로 '불륜'을 조장한다. 내가 아는 한 여사원은 이 회사가 권유하는 온천 여행을 치가 떨리게 싫어했 다. 이유인즉 남자 사원들이 가는데 꼭 젊은 여직원들도 '회사의 일'이라는 이유로 함께 참가(?)하 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술시중을 들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취한 남자 사원들의 상대로 가라오케 반주에 맞춰 듀엣곡도 불러야 한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여직원들에게 유카다를 입으라고 강요하 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이 유카다란 일종의 목욕가운 같은 것으로 섬나라 일본 특유의 지극히 개방적인 목욕 문화의 산물이다. 술에 취하고 옆에는 젊고 싱싱한 여직원이 있다. 그것도 속옷 차 림으로…. 그래서 실제로 많은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일본의 가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결국 남편을 '일'에 빼앗긴 부인들은 남편으로부터 받는 사랑의 결핍 내지는 외로움을 아이들에게 쏟는다. 차라리 다른 남자에게 쏟으면 그것이 오히 려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아들에게 집착하는 어머니들이 일본에는 수없이 많다. 그래서 일본의 남자아이들은 마마 보이로 길러지고, 일본의 어머니들은 자신의 아들에게 비정상적인 집착으 로 사랑을 요구한다. 그래서 일본의 텔레비전에는 아들과 이상한 일을 벌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심 심찮게 등장하고 신문의 인생 상담란에도 그런 일을 경험한 아들의 고민이 등장하기도 한다. 정말 로 '병적이고 병적'인 일본 가정의 한 단면이다. 회사를 상대로 불륜 행각을 벌이는 일본의 남편, 그리고 그 남편에 욕구 불만으로 '마마 보이'를 만드는 일본의 어머니, 이 모두가 '인간'을 희생시키는 '일본 주식 회사'의 불행한 산물이다. 엄마는 자동판매기 일본인들은 신드롬을 좋아한다. 웬만한 것이면 무슨무슨 신드롬을 하며 무조건 붙이고 본다. 그 가운데 '후유히코 신드롬'이라는 게 있다. 이 후유히코는 일본이ㅡ 보통 남자의 이름으로 내가 일본 에 있을 때 큰 히트를 친 「당신을 줄곧 사랑했다」라는 연속극의 남자 주인공이다. 후유히코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모든 것을 어머니 뜻에 따르는 '마마보이'를 뜻한다. 드라마에서 후유히코는 변태적인 성과 어머니에 대한 애증으로 결혼 생활에 적응을 못해 결국 마지막에 가선 어머니를 흉기로 살해하고 만다. 엽기적이기까지 한 이 연속극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일본 사회 내에 '마마보이'의 존재에 대한 문제 의식이 상당한 정도로 퍼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다. 내가 일본에 있을 때 재미있게 읽은 책 가운데 하나가 『21세기의 아들에게』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일본 산케이 신문의 기자를 지낸 이혼 경력 두 번의 여성이 쓴 자신의 두 아들에게 대한 교육 법이다. 글쓴이인 고무로 가요코는 "매일 아침 유치원으로 가는 어린아이를 보면 멀리서도 여자아 이인지 사내아이인지를 금방 알 수가 있다. 혼자서 씩씩하게 걸오오면 여자아이, 어머니 손을 잡고 매달리듯이 오면 그것은 남자아이"라고 적고 있다. 하긴 최근 '기운이 넘친다'는 일본말 '겐키'는 튼튼하고 씩씩한 여자 어린이를 가리키는 형용사가 됐다고 한다. 고무로 가요코는 그동안 일본 사회에서는 '여성의 자립'만을 외쳐 왔는데 이제 다가올 21세기에는 '유약해진 남성의 자립'을 부르짖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일본에서 수많은 '여성화된 남성'을 보아 온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100퍼센트 동감했었다. 일본의 남성들은 중성적이다. 박력이 없다. 남자답지 못하다 등등의 말을 듣는다. 많은 사람들 이 사무라이로 상징되던 일본 남성의 시대는 완전히 갔다고 이야기한다. 겉모습으로 일본의 남과 여를 표현한다면 한마디로 '남자는 예뻐지고 여자는 씩씩해졌다'이다. '엄마는 자동판매기'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일본 사회에서 아이들의 어머니에 대한 의존은 심각 하다. 일본 구석구석에 배치되어 있는 자동판매기처럼 일본의 어머니들은 아이가 요구하면 뭐든지 '단추만 누르면 되는 자동판매기'처럼 착착 갖다 바친다는 것이다. 또 가뜩이나 지루함을 못 견디는 일본의 신세대에게 엄마는 '콤비니'라는 말도 있다. '콤비니'란 우리 나라의 '편의점', 즉 컨비니언스 스토어의 일본식 준말이다. 24시간 언제나 물건을 살 수 있고 거의 모든 '아쉬운 것'이 망라되어 있는 '편의점'처럼 일본의 어머니는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말 이다. 일본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가리키는 말 가운데 '교육 마마'라는 것이 있다. 우리 나라 못지않게 학연과 학별이 온갖 역할을 다하는 일본에서는 어머니들이 오로지 아들을 대학을 보내는 데 전력투 구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 어머니들을 '교육 마마'라고 부르는데 24시간 편의점처럼 불을 밝히고 아 이들 기다리고 돌보고 먹을 것을 주고 가정교사로서 공부를 가르쳐 준다. 한번은 이에 대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내가 잘 아는 재일 교포분이 일본 주부 모 임에 갔는데 화제가 '콤비니 엄마'였다. 한 어머니가 대학 입시 공부로 늦은 밤까지 공부하던 아들 방에 들어가 보니 아들이 이른바 '음란 비디오'를 보고 주체를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눈이 벌개져 어쩔 줄을 모르는 아들을 보고 그 어머 니는 '살신(?)'을 결의해 아들이 얼른 욕구를 해결하고 입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직접 욕구를 해결 해 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머리가 멍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분 역시 마찬가지로 놀라 그 모임의 어머니들에게 "어떻게 엄마와 아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 자리에 모인 여성들이 '물론 좀 뭐 하긴 하나 충분히 그럴 수도 있잖냐'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후유히코 증후군, 마마 보이 현상이 왜 이처럼 맹위를 떨치게 되었을까? 그 첫번째 이유는 '아버 지의 실종'이다. 한 개인이 사적인 생활을 할 시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회사의 구조 속에서 아이의 얼굴조차 보기 힘든 아버지는 '아이들'에 대한 모든 부분을 어머니에게 몽땅 맡겨 버리기 때 문이다. 결국 가족에게 어느새 아버지는 '있으면 왠지 불편한 존재' '돈 벌어다 주는 기계'로서 자연 스럽게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또 일본에서는 지점이나 지방 근무가 너무도 흔한 일이다. 특히 어느 정도 승진을 한다거나 더 큰 자리를 목표로 할 경우는 꼭 거치는 지방 근무이다. 이 경우 대부분의 아버지는 아이들 교육 때 문에 홀로 쓸쓸히 '단신 부임'의 길을 선택한다. 결국 남겨진 아내와 자식들은 실질적인 '편모 가정' 을 이루게 되는데 마치 여자 선생님한테 배운 국민학교 남자들이 '어머나, 난 몰라'를 입버릇처럼 하 는 식으로 어머니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기 마련이다. '남자'로서의 본보기를 보여줄 아버지의 부재 는 일본 남성을 중성화하고 마마 보이로 만든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일본 어머니들의 아들에 대한 집착이다. 일본의 어머니들은 대개 바쁜 남편에게 서 충족받지 못하는 기대를 아들에게 오롯이 쏟아붓고 살게 된다. 일본의 나이든 여성들의 표현대 로 '신고하고 돈을 내야만 겨우 실어가는' 대형 쓰레기 같은 남편 대신 아들에게 사랑을 쏟고 그 애 정을 확인하면서 살아 간다는 것이다. 다 큰 성인인 아들을 열두 살 어린이의 수준으로 정신적 성장을 정지시키는 일본 어머니들, '교육 마마'의 교육 방침, 마마 보이와 후유히코 증후군. 이 모든 것들은 어떤 의미로는 일본 국민을 어린 아이 취급하는 일본 정부의 국민 훈련과 궤를 같이하는 또 다른 의미의 '사적인 우민화 정책'이 아 닌가 하고 나름대로 정의를 해본다. 스카웃은 악이다 나와 아주 친한 일본인 친구, 유카에가 14년만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나와 그녀는 열심히 일하고 일을 사랑했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잘 통했다. 그녀는 방송국의 프로듀서로 들어가 성의를 다해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영업부의 일까지도 경험했다. 서로 바빠 자주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우리는 가끔씩 한방중에 일이 끝나 웬지 '외롭고 초라해졌을 때' 긴 통화를 하고는 했다. 그때마다 우리가 했던 대화는 '그렇게 일을 해 봐야 소용없다' '우리의 인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메인 테마'였으나 결국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약 3년간을 똑같은 이야 기만 되풀이했다. 결국 그녀나 나나 '일 중독자'였던 셈이다. 더구나 유키에는 온갖 머리를 굴려 '주말만은 내 것으로' 한 나와는 다리 영업부 과장으로 있을 때 토요일과 일요일도 온갖 이벤트를 벌여 주말까지 '회사 일'과 함께 했었다. 그런 그녀가 정든 직장을 14년 만에 그만둔 것이다. 머리도 식힐 겸 한국에 온 그녀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 역시 내 청춘을 불살랐던 KBS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묘하게도 함께 가 는 인생'에 동지애를 느끼며 깊은 이야기를 하였다. 유키에는 이대 후문에 있는 커피숍에서 황혼을 바라보며 말했다. "14년이나 일했지. 사표를 내고 짐을 정리할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알아? 글쎄, 아, 14년 별 거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였어." 유키에는 커피 잔을 내려다보며 쓸쓸히 말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KBS를 그 만두며 상자에 내 소지품을 싸면서 느낀 것은 '참, 대단한 일도 아니었는데 뭘 그렇게 죽자살자 매 달렸을까?'하는 것이었다. 여자가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한국이나 일본처럼 아예 시작부터 여자의 발목을 붙잡아 놓는 분위기에서는 어려움이 더하다. 서구의 여성들이 자신들에게는 유리 천장이 있 다고 하는 것은 사치스럽다. 동양 여성들에게는 높은 문지방과 움치고 뛸 수도 없는 사면의 벽이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 벽을 넘기 위해 바쳐야 될 나의 노력과 에너지 그리고 마침내 간부 사 원이 되었을 경우를 가정해 내가 얻는 것을 계산했을 때, 결국은 적자라는 엄밀한 계산 끝에 사표를 던졌다. 어쩌면 회사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계산'을 해본 것인데 한 발짝 뒤에서 생각해 보니 처음 으로 '인간적인 결론'을 내린 셈이었다. 유키에가 황혼을 바라보며 감상적이 된 데는 직장 여성이 애써 일한 14년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허탈감도 있었지만 또 하나는 스카웃을 죄악시하는 일본이 분위기 때문이었다. 유키에는 일본에서 수도권 지역의 민방으로 출발하는 한 텔레비전의 창립 맴버로 스카웃되었다. 정든 회사지만 라디오 프로듀서로서는 늘 텔레비전 일에 흥미를 가졌던 터라 '놓치기 아까운 좋은 기회'여서 고민 끝에 윗 사람들에게 '사직'의 뜻을 밝혔다. 약 한 달 동안의 유예 기간을 두었는데 사장을 비롯한 윗사람들이 완전히 신의를 저버린 몹쓸 인 간으로 자신을 취급해 참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종신 고용제가 아직도 위세를 떨치는 일본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과 끝까지 일하는 것을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학자 폴 케네디는 국제화 시대의 일본을 암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국 제화, 정보화 시대에는 사람 역시 '정보'라는 것이다. 사람 역시 자꾸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연결 해서 새로운 정보도 얻으면서 발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처음 만난 사람하고 정년 퇴직할 때까지 일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3, 4년 정도면 사람은 대충 파악하게 된다. 그 사람 능력은 물론 성격, 사고 방식까지 모조리 알게 된다. 그리고 한 직장에서 함께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되는 직장 동료라면 '한 사람의 모든 것'이 입력되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결혼 생활에 권태기가 온 부 부마냥 직장 동료에게 흥미도 배울 것도 없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데서 오는 나태주의에 물들 게 된다. 폴 케네디는 바로 이러한 점이 일본의 발전을 저해할 것이라고 했다. 가장 중요한 정보 원인 '사람'이 '고여 있는 물'로서 새로운 것,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데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하는 것 이다. 일본 사회는 '개인의 창의성'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은 마치 그 부서의 전화기 와 같이 맡겨진 일만 묵묵히 하면 되는 것이다. 독특하고 창의성이 넘치는 아이디어를 자주 내는 사람은 귀한 분 대접은 못 받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탐탁하게 생각지 않는 것이 일본의 현실이다. 미국과 유럽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계약'에 의해 이뤄진다. 아마도 일본 사람들이 치과 의사를 찾는 것처럼 미국 사람들이 변호사를 자주 찾는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계약과 개인 그리고 가 능주의가 서양 사회의 기본이다 '경쟁'과 '능력주의'는 당연히 라면과 수프처럼 함께 같은 봉지 안 에 들어 있는 것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스카웃'에 대해 일본처럼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밀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의 울 타리만을 강조하는 '영우너한 촌락 공동체'인 일본에서는 스카웃이나 스카웃되어 가는 것 자체가 경 원시된다. 심한 경우는 배신자 취급까지 받는다. 즉 집단에서 '내놓는 사람' '따돌림받는 사람'인 경 우 아니면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내 친구 유키에는 한달 동안 사장을 비롯한 윗사람들이 복도에서 마주쳐도 시선을 주지 않고 인 사조차 받지 않아 정말로 가시 방석이었다고 했다. 평생 한 직장에 있었다는 것이 '문제 없는 사람' '의리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일본의 구조는 더 이상 통용될 수가 없다. 한 직장에 평생 사람을 옭아매는 제도는 '능력 있는 개인'보다 '무능력한 집단'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집단이 갖고 있는 기득권으로 창조적인 개인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가지지 못한 자, 배경이 없는 자, 기반이 없는 사람, 새로 들어온 사람은 이러한 구조에서는 불리 한 것이다. 직장을 바꾸고 옮겨 다니면서 월급도 올라가고 승진을 해야 되는 사람들은 바로 여성, 젊은이, 별볼일 없는 집안 출신 등이다. 그러나 일본 사회는 이들을 억압하고 기존의 틀 속에 가두 어 버린다. 일본인들은 일본이야말로 최고의 평등 사회라고 말한다. 이 말은 틀리지는 않다. 자본주의의 탈 을 쓰고 있으면서도 '혼네'(속)은 유사 공산주의 같은 일본은 '종업원이여, 모두 가난하게 살자'고 국 민을 세뇌시킨다. 뿐만 아니라 '스카웃은 악'이라는 기본 명제 아래 능력 있고 경쟁력이 있는 이들 을 평준화시켜 버린다. 이것이 평등이라면 일본은 최고의 평등 사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일본의 손실'이며 '노회한 자들이 심어 놓은 일본판 악의 꽃'이다. 국제화 시대, 일본은 무엇 을 먹고 살 것인가. 도전자들 일본에는 '주부'가 있다. 주부(主婦)가 아니고 '주부(主夫)'가 있다. 즉 아내는 직장에 나가서 돈 을 벌어 오고 남편은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집안 일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일본 사회에서 이러한 '전업주부'를 하는 남자들이 엄청난 숫자는 아니지만 간간이 '누구네 아빠는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들을 돌본대요'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다. 전업주부로 전직한(?) 남자들의 경우를 보면 참으로 후륭한 한 사람의 남자였다. 마치 우리가 신 부나 수녀님들을 뵐 때 '아, 저분들이 결혼을 했다면 얼마나 훌륭한 남편과 어질고 현명한 아내가 됐을까?' 하는 생각이 나듯이 말이다. 그들은 훌륭한 대학을 나왔고 일류 기업에 취직을 했다. 남 들이 하는 대로 경쟁을 뚫고 모범적인 생활을 해 왔다. '산업 전사'가 되고 '조직의 세포'가 되어 '과 로사' 직전까지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어느 날 자신이 회사에 다니는 것을 싫어하고 도저히 그러 한 기질도 아니라는 점에 눈을 뜨게 되었다. 만원 지하철에 '뿌시만'(출근길 지하철에서 아침에 사 람을 밀어 주는 푸시맨) 덕분에 출근을 하고 조직의 세포로서 끽소리 못하고 상사의 눈치만 살피는 치열한 경쟁, 회사 업무가 끝난 뒤에도 이어지는 술자리 등이 삶 자체에 회의를 갖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맞벌이를 하는 아내에게 이야기한다. 더 이상 회사 다니기가 싫다. 좀 여 유를 갖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곰곰히 듣던 아내는 "당신 뜻대로 해보세요"라고 말한다. 그는 용감히(?)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집에 있으면서 해방감을 맛본다. 평소에 좋아하는 요리를 만 들고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낸다. 경쟁 사회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인간적인 충족감을 맛본 다. 출근 지옥에서 해방된 것도 그렇지만 더 이상은 비정한 조직 사회에서 긴장과 불안을 맛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주부가 있다. 그의 나이는 45세. 보통 일본 주부들이 젊은 세대인 점에 비춰 조금 늦은 나이인 셈이다. 그런데 그의 주부 경력은 상당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여행이 취미였고 부인 역시 혼자서 여행을 하다 여행지에서 만났다. 자전거 대리점을 하는 집에서 맏이로 태어난 그는 일본의 방식대로 가업을 이어야 했다. 처음 그는 정비사 자격증을 따서 자동차 회사에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얌전히 일을 했다. 그러나 '보통 일본인처럼' 회사가 좋아지지 않 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것말고 분명히 진짜 내게 좋은 일이 있을 텐데'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 는 사표를 내고 후리터(프리 아르바이터라는 일본식 조어)가 되어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마치 뉴욕 의 화가들마냥 여행할 정도의 돈이 모이면 그날로 일을 그만두고 돈이 떨어질 때까지 여행을 다녔 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일본의 전통 가옥에 흥미를 지니고 그 미니어처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부인을 맞아 그는 스스로 주부가 되겠다고 제의했다. 일을 좋아하는 부인 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출근하는 부인에게 "잘 다녀오세요"하고 배웅한다.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가고 데려오는 것도 그의 일, 슈퍼에 가서 장을 보고 저녁을 짓는 것도 물론 그의 일이다. 청소, 세탁까지 모조리 하지만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한다. 물론 '일이 좀 구 질구질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말이다. 그에게는 회사에서 돈을 벌기 위해 윗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잔인한 경쟁에 시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창조적이고 보람있는 일이 집안일이었다. 그의 부인은, 자신의 남편을 두고 한마디로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는 전업주부로서 '돈은 안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100퍼센트 만족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 이러한 전업주부들이 등장하는 것은 참으로 흥미있는 일이다. 여성들의 활발한 경제 활동 에 따라 남자들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직장 생활에 맞지 않는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도축장에 끌려가듯 직장에 출근하는 불쌍한 남자 들이 이제 주위의 시선에서 벗어나 '원초적인 본능'에 충실하게 된 것이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과 지위 향상이 결국은 '남성의 해방'과 그대로 연결된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 일본의 주부(主夫)들 이다. 일본 정부는 '일본은 가장 평등한 국가'라는 개념으로 국민들을 세뇌한다. 이 평등은 사실 좁아터 진 방에 온갖 최신식 가전제품을 창고처럼 쌓아 놓고 '우리는 다 즐긴다우' 하며 찬물에 밥을 말아 먹는 '초라한 행복' '잔챙이 같은 평등'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인들은 누구나 주위 사람을 생각 해서 튀지 않게 산다. 그러나 가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일본 사회에 정면 도전하는 '소수의 용감한 사람 들'이 있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좀 별난 사람들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사회에 대해 완전히 등 질 각오를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산다. 문제는 일본 사회에 그러한 사람이 소수이고 철저히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 사회에 등장한 주부의 존재는 단순히 회사가 싫은 부드러운 남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허구의 평등으로 강요된 '똑같은 삶'에 대한 반기란 점에서 특기할 만한 일이다. 나는 '탈락'하고 싶다 일본에서 알고 지내던 일본 사람들을 만나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요즘의 젊은 아 이들 때문에 걱정이라는 것이다. 하긴 젊은 세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일본만의 일이 아니 다. 세계 공통으로 기성 세대는 인류 시작부터 젊은 세대를 걱정하고 못마땅하게 여겨 왔는데 신통 하게도(?) 인류는 계속 발전해왔다. 이 기성 세대의 테마는 영원한 것이어서 젊은 아이들이 너무 버릇이 없다, 예의를 갖출 줄 모른 다, 놀기만 좋아한다, 목표가 없다 등등이다. 하긴 대통령이 목표였던 기성 세대들에게는 운동 선수 와 연예인이 목표인 이 젊은 세대가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의 나이든 세대의 경우 다른 나라와 달리 언제나 덧붙이는 말이 있다. '나라를 위해 참고자 하는 노력이 없다' '회사를 위해 참으려는 기색이 없다'는 것 등이다. 전쟁의 폐허, 잿더미 위에서 일으켜 세운 '오늘의 일본'을 생각할 때 이 기성 세대의 우려는 이해 가 가기도 한다. 나라와 조직을 위해 인내하며 기다렸던 일본의 기성 세대로서는 과연 일본이 이대 로 가도 좋은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도 못하면서 세계 최대의 군함을 만 들며 '승리의 그날까지 우리는 참고 기다리렵니다'라고 써붙였던 일본인에게 일본의 앞날은 캄캄해 보일지도 모른다. 외국인의 눈으로 보아도 오늘의 일본 젊은이들에게서는 많은 변화가 감지된다. 그들은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나 자랐고 무엇보다도 '국가'를 위해, '회사'를 위해, '조직'을 위해 참겠다는 마음이 없다. 특히 그들이 가장 큰 변화는 일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한때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젊은이들은 자신의 옷보다 한 치수 적은 듯 한 빽빽한 대기업의 조직보다는 마치 캐주얼을 입은 듯한 중소기업 쪽으로 조금씩 선호도가 바뀌고 있다. 일본 사회는 지금까지도 중소기업의 전무보다는 대기업의 상무를 더 대접해 왔다. 즉 어떤 조직 에 속해 있어야만 그 개인의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다. 조직을 떠난 그냥 아무개는 아무런 힘을 발 휘할 수가 없다. 그런 일본 사회의 틀 속에서 일의 정보나 노하우는 조직이 갖고 있지 개인이 갖고 있지 않다. 예컨데 일본에서는 우리 나라처럼 거래선을 들고 자신이 다니던 대기업을 나와 독립해 오퍼상을 차리던가, 미국처럼 회사를 옮김으로써 승진을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나는 일본에 있을 때 오랫동안 회사의 월급쟁이 노릇을 하다가 '탈 샐러리맨'을 선언한 사람들을 위한 강좌가 성행한다는 텔리비전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이른바 창업 강좌, 독 립 경영 강좌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우선 제목이 '회사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위한 강좌'였다. 물론 다소 유머러스하게 붙였을지도 모 르지만 독립을 해보겠다는 이들을 '탈락한 이들'로 부르는 데는 일본 사회의 편견이 담겨져 있었다. 오히려 용기 있고 잘난 이들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또 하나는 그들이 제2의 직업으로 삼은 일이 전의 직업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라는 점이다. 회사원이었던 이가 채소 가게 주인으로, 은행의 차장까지 지낸 사람은 일본식 꼬치구이집의 아저씨로 변신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전 의 직업과는 완전히 다른 쪽으로 신장 개업을 하는 셈이었다. 그런 현상은 그동안 일본의 사원들이 모두 기업의 세포로서 그저 조직원으로서만 존재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변함없이 '일'을 취미로, '회사'를 집으로 알고 참고 일해 왔던 기성 세대와는 달리 젊은 세데는 그와 같은 길을 걸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게 되었다. 내가 아는 한 부인의 아들은 일본의 일류 대학을 나와 누구나 다 아는 일류 기업의 도쿄 본사에 취직을 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돌연 아들이 아무 말도 없이 회사를 그만둬 버렸다. 이유인즉슨 하루에 한 시간 반씩 걸리는 모두 세 시간의 출퇴근 지옥을 도저히 견 딜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젊은 세대인 그에게는 대기업의 엘리트 사원이라는 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 뒤 그 아들은 그가 살고 있는 도쿄 교외 도시의 시청 공무원으로 취직했다. 초일류 대학을 나 오고 일류 기업 시험에 붙었던 사람으로서는 예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지하철에서 하루 세 시간씩 시달리던 데서 벗어나 요즘은 테니스도 치고 친구들도 자주 만나는 여유 있는 생활 을 하고 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아들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처엄 일본이 젊은이들은 좀더 작은 직장으로 좀더 편한 일터로 옮겨가고 있다. 그리고 아예 직 장을 다니지 않고 아르바이트만을 해서 먹고사는 후리터 직종까지 생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 전에는 번역일을 하고 오후에는 카페에서 경리를 보는 식으로 두 가지 작업을 갖는 경우도 늘어나 고 있다. 이러한 일본 젊은이들의 변화는 내가 보기에는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기성 세대보다 훨씬 더 사회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자유롭게 대응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제까지 일본을 경제 부흥으로 이끌었던 종신 고용제 아래에서 일본인들은 선택이 없는 생활을 해 왔다. 그리고 일률적으로 1억2천만 일본인들이 다 똑같은 삶을 살아 왔다. 다른 이들과 다르면 열등하고 나쁜 것으로, 조직의 생리에 적응하지 못하면 무능한 것으로 치부하는 일본 사회에서는 그 래서 영웅도 철학자도 없었다. 이제 일본 젊은이들이 보여주는 변화는 한 개의 세포라기보다는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찾 고 개척하겠다는 신선한 몸짓으로 생각된다. 동시에 국제 사회의 상식에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일 본인의 등장을 기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5. 신데렐라 스토리 남자의 몫을 빼앗었다 기자냐, '여'기자냐 '남자'만 '인간'이다 신데렐라 스토리 크로와상 증후군 제도화된 '세쿠하라' 여성은 '방어'할 수 없다 일본을 떠나는 일본 여성 남자의 몫을 빼앗았다 특파원이 물론 대단한 자리는 아니다. 하지만 일단 기자의 세계에 들어오면 누구나 한 번쯤은 '어디에서 무슨 뉴스, 아무겝니다' 하는 자신을 상상해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한 번도 특파원이 되고 싶다는 꿈조차 꾸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혀 가능성이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자가 아니라 여기자로 불리면서, 나는 넓은 KBS 본부 안에서 나의 존재를 수없이 물 었고 그리고 어느 정도 현실에 적응하는 선에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기자들에게는 출입처가 있다. 기자라는 계츠의 폐쇄성과 특권 의식을 암시하는 출입처를 놓고 기 자들 사이에는 물론 '경쟁'이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이른바 출입처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도 나가 본 일이 없다. 서울 길바닥이 나의 출입처였다. 여자 대학을 나온 내게 별다른 학연 이 있을 리 없었고, 이북 출신의 아버지 덕에 지연의 포대기도 없었다. 물론 누구보다도 그러한 것들을 거부해야 할 기자라는 직업을 지녔으면서도 결국은 '그러한 것'들 에 의해 많은 것이 이루어지는 기자 사회의 현실에서 나는 솔직히 그러한 것들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남자들이 부러웠다. 사회에 나와 보니 정말 남자라는 것, 그 자체가 얼마 나 대단한 능력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기자로서 내가 일했던 부서는 이른바 내근인지 외근인지 구분이 모호한 문화부나 특집부, 국제부, 편집부 등이었다. '남들이이야기하는 별볼일 없는 부서'를 여럿 거치고 많은 부장을 겪으며 기자 생 활 꼭 십 년이 되던 날, 나는 이제 어느 부서에도 어느 부장 아래서도 있을 수 있는 잡초 기자가 되 었구나 하며 내 자신을 스스로 대견스럽게 생각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 내게 어느 날 일어난 '도쿄 특파원' 발령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일이었다. 물론 나는 언젠 가 여럿이 어울리는 술자리에서 "전여옥 씨를 특파원으로 보내면 참 일을 잘할 텐데"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술자리의 농담'으 로 받아들이며 '김칫국부터 마셔서는 안된다'고 내 자신을 진정시키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도쿄 특파원 발령을 받은 것이다. 얼마나 기뻤는지는 말하지 않겠 다. 도저히 표현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 주는 보상, '일이 선물도 주는구나' 하는 기쁨과 성취감에 취했고, 이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더구나 도쿄 특파원 아닌가? '일이 많은 고생스러운 도쿄'지만 어쨌든 어느 언론 기관이고 도쿄 특파원은 상당히 중요한 포스트이다. 많은 사람이 내게 어떻게 도쿄로 발령이 났느냐고 물어 오곤 했다. 그 답은, '내게 선택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특파원 자리가 셋이 비어 있었다. 파리 와 뉴욕 그리고 도쿄였다. 특파원으로 지목된 세 사람 가운데 다른 둘은 나이는 물론 경력도 나보 다 더 위인 남자 선배들이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유럽권을, 그리고 또 한 선배가 익숙한 영어권을 원해 결국 도쿄가 남는 '예 기치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래서 도쿄가 내게 떨어진 것이었다. 어찌 보면 참으로 묘한 일이었 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는 대학교 때부터 일본어로 된 책을 읽었고 일본에 대 한 호기심으로 줄곧 일본 잡지나 소설을 읽어 왔었다. 다만 일본어 회하는 지극히 기초적인 상태였 다. 언론계에서 도쿄 특파원이라는 포스트의 의미를 잘 알고 있던 나는 처음으로 '남들이 다 가보 고 싶어하는 자리'에 가게 되었다는 기쁨을 만끽했다. 물론 내가 도쿄 특파원으로 발령이 나자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많았고, 내 앞에서 "어떻게 해서 가게 되는 거야, 누가 밀었어?" 하고 묻기도 했다. 또 "전여옥 씨는 읽기는 잘해도 말은 잘 못 하잖아. 그런데 도쿄 특파원이 웬 도쿄 특파원이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같은 특파원 발령을 받은 남자들에게는 그런 말을 대놓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뒤에서는 많은 이야기를 했고 내 귀에 도 들렸다. 그 당시 위로가 된다면 '남자들끼리도 마찬가지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진심으로 기뻐해 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난데없는 행운을 차지한 내게 '남자의 몫을 빼앗았다'라는 감정을 지니고 대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물론 흔한 말로 내 부덕의 소 치라고 하겠지만(나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큰 용기가 있는 이들인가를 그때 배웠 다) 그 동안 나 나름대로 따랐던, 나와아주 잘 지냈던 사람들도 그런 태도를 보여 나는 참 많은 것 을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특파원을 하면 아주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지극히 낙천적인 내 성격 탓도 있지만 나는 방송이라는 일이 참으로 여성에게 맞는 일이라고 텔레비전이 얼마나 여 성적이고 감성적인 매체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하긴 입사 때 면접 자리에서 '왜 여자가 기자를 하 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방송 기자라는 일에 맞는다'고 대답했던 나였 다. 물론 오기도 있었다. 도대체 남자들이 얼마나 잘났기에 어쩌다 '어린 여자애'가 복권에 한번 당첨 되었기로서니 이를 함께 기뻐해 줄 수가 없는가. 그토록 마음 넓고 능력 있는 남자들이 왜 흔히 그 들이 말하는 '계집애처럼' 구는지 알 수 없었다. 도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다짐했다. 그래, 부딪히자, 이 일본과. 그래, 해보자, 너의 힘만 으로. 그래, 끝까지 버텨 보자고 나는 수없이 다짐했다. 세상이 너를 여자라는 편견으로 보는 것을 내가 싫어하듯이 너도 이 세상을 그렇게 보지 말라고. 한 사람의 진정한 프로페셔널로서 새하얀 도 화지에 꿀과 버터와 과실이 넘쳐 나는 그림을 그려 보리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일본에 대해 책을 쓰리라고 나는 결심했다. 여자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보여주리라는 다짐도 했다. 도쿄 특파원 생활은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기자냐 '여'기자냐 가끔 일본 생활을 되돌아볼 때 나는 내가 살던 아파트를 떠올린다. 얻기도 힘들게 얻은 입이었지 만 정말로 내 30대 초반의 많은 일들이 그곳에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여자 특ㅍ이 사는 '독신 귀족'의 분위기가 넘치는 곳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솔직히 그곳은 '나의 제2의 사무실'이었다. 집이 아니었다. 팩시밀리와 전화 그리고 수북한 원고 뭉치와 하루에도 산더미처럼 쌓이던 내가 구독하던 여섯 종의 신문들로 가득 찬 창고였다. 휴식을 주던 안식처가 아니라 갈등과 긴장과 초조함을 주던 사무실이었다. 게다가 그 방은 참으로 눈물도 많이 흘리고 깨지지 않는 물건도 많이 던지던 곳이었다. 술에 취 해 들어와 좌절감에 쓰러지던 곳이기도 했다. 요즘도 그 집을 생각하면 일본 생활의 고달픔이 다시 전해져 나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곤 한다. 겉으로 하려하고 씩씩해 보이는 여자 특파원의 다테마에 가 아닌 혼네가 바로 그 방에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회사일로 정말 끔찍하게 속이 상한 나는 그날 퇴근을 하며 결심했다. 오늘은 필름이 끊어지도록 술을 마시겠노라고, 나도 한번 남들처럼 꼭지가 돌아가게 술을 마셔 보겠 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사는 것에 대해 그리고 일하는 여자로서 엄청난 회의가 들었던 날이었 다. 나는 동네 단골 술집에 갔다. 평소 가깝게 지내는 마마에게 오늘 내가 무척 취할 예정이니까 반 드시 집까지 데려다 줘야 한다고 말까지 해놓았다(마마의 집과 내 집은 아주 가까웠다). 걱정스러 워하는 마마의 얼굴은 못본 척하고 나는 정말로 생전 처음 홧술을 마셔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 는 영 취하지를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마셔대도 정말 말짱해지기만 하는 것이었다. 마마는 "쥰짱 은 안돼요"라고 했다. 결국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태워다 준 마마에게 인사까지 다 차리고 나는 집 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뒤를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방에 들어온 순간 그대로 뻗어 버렸던 것이 다. 다음날 새벽 신문이 배달되는 정확한 시간에 눈이 떠지는 나를 발견하고 '직업인'인 나는 쓴웃음 을 지었다. 물론 그것은 '직업 정신'이라고 미화하기엔 참으로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정확히 말한 다면 그것은 일하는 여자로서 내가 가졌던 일종의 강박 관념이라고 생각된다. 밖에서는 절대로 취 하지도 못하고 일하는 기계처럼 시간이 되면 반사적으로 눈이 떠지는 것은 일에 대한 나의 긴장, 사 람을 긴장시키는 외국이라는 상황도 있겠지만, 어느새 내게 주입되어 버린 '남자들에게 져서는 안된 다'라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 나라 사회는 남자의 사회이다. 내가 일하는 방송계도 당연히 그 중심이 남자들이고 모든 결 정권을 남자가 갖고 있다. 중요한 일은 남자가 하고 여자는 뒷전에서 보이지 않게 설겆이를 하고 있다. 가정뿐 아니라 대부분의 우리 나라의 직장이 그렇다. 나는 기자로서 일하면서도 '나는 기자 가 아니라 여기자구나' 하는 생각을 할때가 많았다. 남자들이 세계, 남자가 주인인 세계에 나는 한 명의 틈입자에 불과한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남성들뿐만 아니었다. 여성들도 그랬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금도 잊지 못 하는 일이 있다. 한 7, 8년 전으로 기억되는 데 회사에서 야유회를 가게 되었다. 평소 여기자를 특 별히 챙기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내색도 하지 않는 부장의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할 말도 없고 해서 그저 덤덤하게 '부장께서 고생이 많으시다'고 예의 무난한 인삿말을 했다. 그랬더니 그 부장 부인이 정색을 하고 "여기자들 탓도 있을 거예요. 우리 애 아빠가 그러는데 아 무리 잘낫고 똑똑한 여기자도 멍청한 남자보다 못하다면서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물론 그 부인도 참 눈치 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결국 우리 조직이 특별하고 유난한 조직이 아닌 이상 우리 사회에 서 여자, 일하는 여자를 보는 눈이 이런 거구나 하고 다시 한번 생각했었다. 아무리 일 잘하는 여기자라고 한때 귀염을 받아도 결국은 멍청한 남자 한 명보다는 못하게 되어 버리는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아 왔다. 내가 여기자로 들어와 나름대로 노력한 것이 있다면 그래도 남자에게 지지 않는다라는 아주 소박한 목표에 충실하려고 한 것이었다. 물론 일본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숫적으로 많은 여성들이 선거에서 당선되고 여자 변호사들이 늘 고 있지만 뿌리깊은 차별은 대단하다. 하지만 의과대학에 가고 사법시험을 보고 하는 대(對) 사회 적 라이센스를 따는 움직임은 커다란 의미가 있는 '사회적 사건들'이다. 이러한 일본 여성들의 움직 임은 일본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든지 변화시킬 것이다. 일본에서 지낸 기간은 내가 기자로서 보낸 시간 가운데 가장 즐거운(?) 때였다. 물론 어려운 일 은 많았지만 굳이 '여자'라는 점이 결정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으로는 득 이 되기도 했다. 굳이 남자와 비교하지 않아도 되었고, 나 전여옥,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일할 수 있어 서였다. 그 대가를 여러 모로 치렀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겟다. 일본이라는 나라, 일본인과 실전을 거듭하며 싸우고 터지고 때로는 이기기도 하면서 살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 넘쳐나던 에너지가 놀 랍다. 또 일본 생활의 소득이라면 내가 남자들을 많이 이해하게 된 점이다. 나는 마치 노동자가 사주를 생각하듯 남자들이 '특권 계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국을 떠난 '일본'이라는 외국땅에서 는 한국에서 여러 가지 '특권'을 누렸던 남자들 역시 나와 똑같은, 한국인이라는 '상처입기 쉬운 존 재'임을 알게 되었다. 이미 기자 생활을 통해 길바닥을 출입처 삼아 뛴 나는 도쿄나 서울이나 거기 가 거기라는 생각에 쉽게 적응했고 잘 지냈다. 그러나 남자들은 먼저 지냈던 곳이 괜찮았던지 오히 려 허허벌판에 있는 것처럼 내내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상황이 닥치면 여자나 남자 나 마찬가지로 별수 없구나 하고 느꼈다. 그래서 함께 어려운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며 그래도 열심 히 기사를 써보겠다고 다니는 선배나 동료를 보며 나는 처음으로 남자들과도 일종의 동료애랄까, 한 배를 탔다는 공동체 의식을 느꼈다. 나는 내내 다음에 태어나면 꼭 남자로 태어나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마치 내가 성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일본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이 질문을 다시 했었 다. 답은 그래도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이다. 왜? 내게 변화를 기다리는 느긋함이 없어서이고, 왠지 그 변화의 시기가 너무 늦게 올 것 같다는 초조함 때문이다. '남자'만 '인간'이다 일본이라는 사회는 일본인들이 흔히 하는 말대로 멸사봉공, 집단주의 그리고 남존여비의 세 원칙 으로 이뤄져 있었다. 특히 남존여비는 심했다. 우리 나라보다도 여성을 보는 눈이 훨씬 편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특파원 생활을 서구나 동남 아시아가 아닌 일본에서 한 것은 이중고를 안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령 KBS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NHK만 해도 그랬다. 우리와 일로 연관이 있는 한 부장은 내가 전화를 받으면 언제나 남자 특파원을 바꿔 달라고 말해 나를 질리게 만들었다. 마치 여자와는 이야기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나는 왜 내가 아는 일본 여기자들이 만나면 '이민을 가고 싶어'라고 이야기하는지를 이해했다. 오로지 '남자'만이 일본에서는 '인간'인 것이었다. 그 부장은 내가 귀국할 때까지도 언제나 '남자' 특파원을 바꿔 달라고 했다. 내게 업무적으로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남자들 가운데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시간과 기회 만 있으면 "전여옥 씨는 기자이기 이전에 여자다.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전혀 여자답지 않다"라고 되풀이 하는 이가 있었다. 좀더 상냥하고 부드럽게 일본 여자처럼 다소곳하게 행동해 달라는 것이 었다. 참으로 모순된 주문이었다. 내게 일을 시킬 때는 남자들이 하지 않는 일, 하기 싫어하는 3D 업종 수준의 일을 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여성다움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성격이 직선 적인 나는 참다 못해 "나도 여자답지 않지만 그쪽도 그다지 남자답지 않다"고 말해 버려 기껏 참다 점수만 잃는 한심한 내 전형적인 처세술을 재현하곤 했다. 물론 술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일로 해서, 그리고 술자리를 좋아하는 내 개인적인 기호 로 인해 술집에 가는 일이 잦았다. 물론 어쩔 수 없이 가는 경우도 많았다. 일단 도쿄는 손님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이가 많은 이들과의 부담 있는 자리를 아주 싫어했다. 그것은 한 국에서보다 더 괴로운 자리였기 때문이다. '여기는 일본이니까 어디 여기자가 따라 주는 술을 마실 수 있겠지' 하는 능글형이 있는가 하면, '역시 여자는 일본 여잡디다. 남자를 떠받들어 줄 줄 알지요. 그런다고 어디 자기들 위신이 깎입니 까? 모두 상냥하고 겸손하다고 칭찬할 뿐인데. 한국 여자는 너무나 건방져요, 뭐 그리 잘났다고' 해 가면서 '한국 여자'인 내 앞에서 대놓고 언어 폭력을 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참 하기 뭐한 이야기이지만 이른바 높은 사람 앞에서 '한잔 따라 드리지' 하고 자기가 선심을 쓰 며 술따르기를 강요하는 남자도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묘한 입장이 되었다. 싫다고 하자니 한 사 람의 직업인에서 '콧대 센 계집애'로 전락할 것이 분명하고 웃어 가며 순순히 따르자니 내 처지가 한심했다. 나는 그럴 때 '그래, 전여옥, 너는 기자다. 여자가 아니고'라고 자신을 설득해 가며 온갖 나쁜 말을 마음 속으로 하면서 겉으로는 술을 따랐다. 아마 그때 내 술을 받아 마신 사람들은 대부 분 탈이 났을 것이다. 술에 체해서 말이다. 일을 놓고 볼 때 나는 여성이 뒤떨어진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여자가 낫다고 본다. 특히 해외 업무는 여자가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언어데 대해 여자가 남자보다 빨리 습득하는 것은 물론 여성들이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잘 견디고 빨리 적응하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 사회에서는 그래도 아직 여성이 특파원으로 나가는 일이 드물어서인지 유리한 점도 많 았다. 여자 특파원이라고 하면 놀라워하면서 이름을 기억해 주었고 일단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또 젊은 기자들을 통해 나에게 관심을 가진 부장이나 논설위원들과 자연스럽게 접촉할 기회도 많이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난 한 신문사의 논설위원은 "유감스럽게도 술집 빼놓고 일본에서 일하는 한국 여자는 처음 본다"며 지대한 관심을 보인 경우도 있었다. 안면으로 밀고 들어가야 하 는 일본 사회에서 나는 그런 사람들 덕분에 일본의 정치나 경제에 대해 무보수 가정교사를 둔 것처 럼 많은 지식을 흡수할 수 있었다. 신데렐라 스토리 일본에서 살다 보면 참 이상하다 싶은 일이 많다. '니타니 유리에'라는 여성의 이야기도 그런 일 중의 하나이다. 내가 일본에 가니 일본 연예인들의 동정을 가십 거리로 지치지도 않고 방송하는 와 이드 쇼에 '니타니 유리에 뉴욕에서 귀국' 하는 뉴스가 있었다. "니타니 유리에가 누구예요?" 하고 우리 지국의 재일 동포 여직원에게 물으니 "고 히로미와 결혼한 여자예요" 하는 것이었다. 아, 그 고 히로미. 그러고 보니 외신을 통해 몇 억 원짜리 피로연을 올린 그 배우에 대해 들었던 기억이 났다. 고 히로미는 80년대 일본의 젊은 여성을 열광시켰던 가수 겸 탤런트 겸 배우이다. 춤도 잘 추고 끼도 많아 스캔들도 많이 뿌린 일본의 톱스타였다. 일본 여성들이 애인으로 삼고 싶 다고 언제나 1위로 꼽을 정도였다. 이 고 히로미와 결혼한 여성이 티나니 유리에였다. 니타니는 고 히로미와 결혼하기 전에는 '특별 할 게 없는 여성'이었다. 꽤 이름이 알려진 배우를 부모로 둔 그녀는 유복한 가정에서 아쉬운 것 없이 자랐고 게이오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을 다니면서 부모의 배경에 힘을 입어 연예계에 데뷔했 다. 그러나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음석점에서 우연히 당시의 초슈퍼스타인 고 히 로미를 만나면서 그녀의 인생이 달라진다. 요란한 일본 매스컴에 힘입어 니타니는 결혼이라는 비지 니스에 뛰어든다. 그녀는 일단 『사랑받는 이유』라는 수필집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또 '니타니 유리에' 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패션 산업에 뛰어든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광고에 등장해 떼돈을 벌었다. 모든 주간지와 텔레비전의 연예란에서는 그녀가 뉴욕에 갔느냐 돌아왔느냐 하면서 난리를 쳤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일단 그녀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자그마치 백만 부나 팔렸다는 그녀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면 읽을 수 있는 그 책은 참 한심했 다. 완전히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증상은 이런 것이다 하고 가르쳐 주는 사례집이었다. 그 책에서 그녀는 고 히로미를 만난 지 사흘 만에 결혼 신청을 받았고, 고 히로미가 자신에게 호 감을 가진 것은 함께 골프를 치고 차 안에서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잠이 들었기 때문이라 고 해설을 붙였다. 뿐만 아니라 고 히로미와 뜨거운 관계였던 톱스타 마쓰다 세이코와 만나 느꼈 던, 차지한 자로서의 우월감까지 장황하게 써 놓고 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임신을 스스 로 높여 '회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정말로 일본어 훈련이 되어 있나 하고 사람을 놀라게 만들 정 도였다. 게다가 그녀는 결혼 전엔 남편인 고 히로미에게 결혼을 하게 되면 일 년에 반은 도쿄에서 나머지 는 뉴욕에서 보내자고 제의를 했다고 한다. 그녀의 제의대로 그 부부는 아이도 미국에서 낳고(일본 의 연예인들은 아이에게 미국 시민권을 갖게 하려고 미국에서 출산을 하는 경우가 있다) 미국에서 절반 이상을 사는 생활을 한다. 그런데 기막힌 것은 이 부부가 왜 미국에서 사는지 전혀 설명이 없 다는 이야기이다. 오로지 그저 미국과 일본을 왔다갔다하면서 사는 데 의의를 두고 있는 것 같았 다. 물론 돈은 많고 건강은 안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추울 때는 따뜻한 플로리다로 더울 때는 시 원한 샌프란시스코로 여행 다니는 것이야 그런 대로 이해할 수 있지만 젊은 부부가 뚜렷한 목적도 없이 그저 뉴욕과 도쿄를 왔다갔다하며 산다는 것은 참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직장 여성들에게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가 '하야시 마리코'는 이 책에 대해 '부족 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자란 여자의 철없는 감상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랑하는 이유'가 아니라 『사랑받는 이유』라는 책을 통해 니타니 유리에라는 '신데렐라'가 정당화됐다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은 관계없이 '사랑받는다'는 것 하 나를 확인하면 그뿐이라는 생각을 이 책은 널리 퍼뜨렸다. '선택되고 사랑받으면 행복하다'는 것이 니타니 유리에의 명제인 셈이다. 니타니 유리에가 단지 '고 히로미라는 유명 연예인과 결혼한 것' 일본의 완벽한 신데렐라 스토리 라고 할 만하다. 자신의 노력은 하나도 없이 '왕자님'과 결혼한 덕분에 재투성이에서 공주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미 서구에서는 신데렐라가 사라졌건만 일본에서는 위력을 떨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나는 가볍고 단순한 논리가 지배하는 일본 사회 전체의 문제도 있지만 '일본 여 성 니타니 유리에'의 문제점도 크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닌 것을 이용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그것은 일종의 도둑질이다. 남편의 명성을 발판으로 삼아 '패션 브랜드'를 만들고 광고 모델을 하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정직성'을 물을 만한 것이다. 물론 우리 나랑도 가령 안성기 씨 부인 등 유명 인사와 결혼한 여성들이 많다. 그러나 그 여성들 은 어디까지나 남편의 부인으로서 처신하고 있다. 누구의 부인인 것을 빌미로 개인적인 활동을 화 려하게 펼치진 않는다. 나는 이것이 당당한 여성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내가 노력한, 내가 먹어도 되는 열매인가? 하는 질문이 니타니 유리 에의 신데렐라 스토리에는 빠져 있다. '사랑받는 이유'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는 적극적이고 당당한 자세가 오늘 일본 여성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크로와상 증후군 "자립한 여자야말로 멋진 여자예요. 여성 여러분, 더많은 자유를 누리세요." "결혼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말고 살아요. 지성적인 여자는 날개를 다는 즐거움을 두려워해서는 안되지요." "개인적인 여성에서 사회적인 여성으로." 80년대 일본의 여성 잡지는 이렇게 외쳤다. 아무런 자아 의식이 없는 일본의 여성들에게 자립하 라고, 일어서라고, 그리고 날개를 달고 새장 밖으로 뛰쳐나가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왜 지금까지 여성들만 틀과 굴레를 의식하며 살아야 하나? '캬리어 우먼(커리어 우먼의 일본식 발음)이 되고 싶다.' 이렇게 속삭이면서 '여자이니까' 하는 틀을 벗어나 보세요. 당신의 의식을 완전 히 바꾸세요." 이렇게 일본의 모든 여성 잡지는 '독립한 여자'를 그들의 상품으로 팔았다. 「모아」 「위드」 「 코스모폴리탄」 「크로와상」등 여성지들은 일본 여성에게 무엇보다도 '결혼'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후 십 년, 일본의 여성들 사이에는 '크로와상 증후군'이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크로와상은 무론 프랑스 사람들이 아침에 먹는 초승달 모양의 빵 이름이다. 그런데 이 '크로와상'은 80년대 일본의 아주 인기 있는 잡지 이름이기도 하다. 그 당시 거짓말 안 보태고 일본 여성들은 만났다 하면 「크 로와상」에 나온 이야기를 한마디씩은 올렸다고 한다. 이 크로와상 증후군은 여성지가 만든 허상에 희생된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성의 자립은 결 국 독신이다' 하고 쉽게 등식화한 여성지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여성들이 대책 없이 살다 30대 후반의 노처녀가 되어 버린 현상을 가리킨다. '결혼을 못한 것이 아니라 결혼을 안한 것이다'라는 게 이들 노처녀들의 이야기이다. 80년대 일본의 여성지가 앞다투어 특집을 냈던 '근사한 독신 여성상'은 이랬다. '커리어를 지닌 전문직 직업 여성, 괜찮은 월급으로 멋을 부리고 해외 여행을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독신 여성.' 일 본의 여성 잡지가 만들어 낸 이러한 '근사한 여성상'은 실제로 일본의 젊은 여성들에게 막강한 영향 력을 행사했다. 여성 잡지가 제시한 '라이프 스타일'이 그대로 당시 20대 일본 여성들에게 받아 들 여진 것이었다. 그후 십 년, 이 여성들은 어떻게 됐을까? 여성지가 창조한 '커리어 우먼'들은 한마디로 '캐리어 우먼'에 머무르고 말았다. 한 직장에서 결혼도 마다하고 십 년씩 일한 여성들은 경력인 커리어 대 신 여전히 커피잔을 나르고 복사 종이와 서류를 나르는 캐리어 우먼에 머무른 것이다. 이유는 간단 하다. 일본의 여성 잡지가 커리어 우먼을 잘못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전문직 여성이 직장에서 얼마나 끔찍하게 일하는지, 남성과의 경쟁 그리고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쓰라린 깨달음을 얻는 '땀과 눈물을 흘리는 과정'은 생략한 채 '우아한 옷차림'과 불같은 연애에 뛰 어든 모습만 강조한 탓이다. 일본의 여성지는 이러한 여성들이 어떻게 공부했고 어떠한 경험을 쌓 았느냐는 과감하게 생략했다. 대신 이들 '성공한 여성'들이 잘 다니는 호텔과 음식점 그리고 이들이 쓰는 화장품과 해외 여행지만을 소개했다. 대부분의 전문직 여성들이 허덕거리는 하루를 보내는 것은 모른척하고 잡지의 화보용, 마치 우리 나라 커피 선전에 나오는 여주인공 같은 모습만 강조한 것이다. 해외 여행을 해도 일하는 여자들은 그저 도중에 잠깐 들른 카페의 어수선한 추억밖에 없음에도(아마 나만 그런지도 모르지만), 파리의 유한 주부들처럼 폼잡고 커피 마시는 사진을 곁들이고는 했다. 결혼만 하지 않고, 직장에만 계속 다니면 모두가 다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환상을 끊 임없이 심어 놓은 것이다. 그 가운데서 「크로와상」이라는 잡지는 80년대에 구체적인 '모델'까지 제시하면서 수많은 '독신 여성'을 양산해 냈다. 눈에 보이는, '당신도 이렇게 살아라' 하는 확실한 모 델을 보여준 것은 80년대 「크로와상」의 아주 뛰어난 상술이었다. 언제나 지도자를 따라서 모방하 며 사는 일본인들에게 '모델'까지 정해 준 것은 여성지 「크로와상」만의 아주 친절한 서비스였다. 이는 「크로와상」이 80년대에 다른 여성지를 여유 있게 제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런 모델 가운데 한 인물이 '기리시마 요코'였다. 기리시마 요코는 우리 나라에도 그 이름이 꽤 알려진 일본의 유명한 여성 작가이다. 글솜씨도 뛰어나고 권위 있는 문학상도 받은 적이 있는 그녀 는 무엇보다도 '사는 방식'으로 더 유명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총명한 두뇌를 타고난 그녀는 명문 고등학교를 나왔다. 그러나 시시한 대학 진학 같은 것은 필요 없다며 출판계에 곧바로 들어갔다. 낮에는 잡지사 기자를 하고 밤에는 대학생들의 졸업 논문을 대신 써 주는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 다. 그러면서 기리시마 요코는 젊은 날을 엄청나게 재미있게 그리고 화끈하게 '놀았다.' 그러다 25세 때, 미국의 퇴역 군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정식으로 결혼도 하지 않은 그 미국 인과의 사이에서 세 명의 아이를 낳는다. 그러나 그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한다. 결국 그 미국인과 헤어진 그녀는 인생의 살길을 찾아 미국으로 떠나 거기서 1년 반을 방랑하며 보낸다. 그 당시를 기 리시마 요코는 "창녀만 빼고 모든 직업을 다 해보았다"고 회고할 정도이다. 그후 일본으로 돌아온 그녀는 1년 반에 걸친 미국 인상기를 담은 『쓸쓸한 미국인』으로 여러 상 을 받으며 일본 문다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물론 그녀가 일본 매스컴의 화려한 각광을 받게 된 것 은 '결혼하지 않고 튀기인 세 명의 아이를 둔 미혼모'라는 상품 가치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는 자립 여성'으로서 기리시마 요코는 80년대 일본 여성을 매료시켰다. 「크로와상」을 비롯한 여성지에 등장한 기리시마는 '나도 독립된 인격체로 살고 싶다'는 일본 여성들의 잠재된 욕 구를 일깨웠다. 80년대 일본 여성들은 '여성스러움'에서 벗어나 '인간다움'의 길을 걷겠다고 마음먹 었다. 그러나 문제는 「크로와상」을 비롯한 일본의 여성지들이 '인간으로의 자립'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십 년이 흘렀다. 대학을 졸업하고 「크로와상」을 비롯한 일본의 잡지가 외치는 대로 '독 신'을 고수하며 직장에 남은 여성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개중에는 경제적, 정신적 양면에서 야무지 게 독립과 자립을 이룬 독한 '크로와상'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저 결혼만 안한 노처녀로서 직장의 '시든 꽃'으로서 대책 없이 남게 된 것이다. 여성 잡지가 주창한 대안 없는 '자립한 여성'의 허상에 희생된 크로와상 증후군의 환자들, 희생자들로서 말이다. 그녀들은 결혼했다고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결혼을 안했다고 모두가 자립한 여성은 아니라는 실험할 필요도 없는 한심한 이야기를 남 겼다.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잡지를 팔겠다고 무분별한 '여성 독립 만세'를 외친 「크로와상」 잡지에 있는가? 아니면 잡지에 난 대로 살아 보겠다고 황당한 생각을 품은 어린아이 같은 여성들 에게 있는가? 결국 옷의 유행을 따르듯 삶에도 유행이 있다며 집단으로 무임승차해 버린 80년대 일본 여성들이 문제일 것이다. 깃발을 따라 관광을 하듯 삶의 방식조차도 잡지가 만든 깃발을 쫓아 가 버린 '크로와상 증후군'은 아마도 일본 여성들이 아니고는 걸리기 힘든 증상이겠기 때문이다. 많은 일본 여성들을 부추겼던 「크로와상」 잡지는 아직도 잘 나가고 있다. 「크로와상」은 '자 립'을 외쳤던 분위기를 100퍼센트 바꿔 결혼한 안정된 일본 중산층 여성을 위한 미용, 건강, 요리 그 리고 취미 정보지로서 자리잡았다. 물론 가리시마 요코도 변했다. 여성의 독립을 외치며 결혼을 거부했던 그녀는 그새 십 년 아래의 부유한 화랑 주인과 결혼해 '너무나 행복해 하며' 결혼 예찬론 을 부르고 있다. 정작 90년대의 「크로와상」과 기리시마 요코에게 '자립한 독신 여성'의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제도화된 '세쿠하라' 나와아주 친한 일본 신문사의 한 부장이 있다. 그가 속한 신문사는 부원과 부장이 아무 적의 없 이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분위기가 아주 자유로웠다. 한번은 그 부서의 기자들과 부장이 함께 어 울리는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짓궂은 나는 "그래도 부장에게 싫은 점은 있잖아요?" 하고 굳 이 물어 보았다. 그러자 한 기자가 대답했다. "부장님의 문제는 아침마다 어제 했던 일(!)을 우리 한테 들려 주는 겁니다. 다 좋은데 문제는 언제나 상대가 부인이라는 점이지요." 그 자리에서 우 리는 다 같이 '와-'하고 웃고 말았다. 물론 성적인 농담이지만 모두가 가볍게 웃었다. 특별히 누가 피해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나는 부장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부서원 중 여기자가 한 명 있다고 했지요. 매일 아침 그런 농담을 하면 성회롱 아닌가요?" 그러자 일본인 치고 좀 별난 부장은 내게 대답했다. "성희롱이란 상대방이 싫어하는 경우에만 해당되지요. 우리 부 여기자는 내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죠. 본인이 즐겁게 듣는데 성희롱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름아닌 나 자신의 경험을 떠올렸다. 나자들의 세계에서 살아 온 나 는 지금까지 수많은 성희롱에 대해 그 여기자처럼 반응했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직장에서 쏟아 놓 는 성적인 농담은 한편으로는 남성들의 세계를 비집고 들어온 '여성'에게 겁을 주고 주눅을 들게 하 고 혼을 내주고 싶다는 표현이다. 도저히 참고 들을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별수 없는 여자'라고 전 부원의 웃음거리로 만들었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강심장을 준비해 한술 더 뜨기 작전 으로 나오면 '별걸 다 아는 수상한 여자'로 넘겨 버렸다. 두 가지 결과가 다 내가 원치 않는 것이었 지만 나는 차라리 뻔뻔스럽게 아무렇지도 않게 '성적 농담'에 대항하는 편이 그래도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 그 일본 여기자도 모르긴 몰라도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한 끝에 '남자들보다 더 재미있 어 하는 척' 했을 것이다. 직장에서의 성적인 희롱은 스트레스와 경쟁이 심한 조직일수록 더 많이 발생한다. 또 그 조직이 완전히 남성에 의해 100퍼센트 장악되는 '남성 주도형 회사'인 경우 훨씬 번번히 일어난다. 말하자 면 우리가 생각하는 일류 기업, 엘리트만이 들어가는 특수 조직 등에서 훨씬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이 다. 그런 점에서 최근 우리 나라에서 화제가 된 성희롱 사건이 최고로 꼽히는 대학에서 일어난 것 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또 조직에서 잘 안 풀리는 남자, 동료에 비해 무능력하다고 상사에게 찍힌 사람들이 이른바 화풀이로 약자인 여성에게 '성희롱'을 일삼는 경우도 많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성희롱이 만연한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남성 본위의 가치관을 가지고 여 성을 단지 성적인 대상으로밖에는 파악하지 않는 일본 사회에는 '성적 학대'라는 개념이 필요없을 정도로 성희롱이 널리 퍼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성희롱을 '세쿠하라'라고 부른다. 이 말은 물론 '성적 학대(Sexual Harassment)'라는 영어를 일본식으로 과감하게 토막내 일본식 발음으 로 읽은 것이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여성은 원래 성적으로 희롱하고 성적으로 즐기는 대상이기 때문에 굳이 '세쿠 하라'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어떤 일본의 평론가는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여겨 온 것이 일본 문화의 특성이기 때문에 성적 학대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는 발언을 하여 무식하면 얼마나 용 감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성희롱이 제도하되어 있다시피 한 일본에서도 분 명한 것은, 성희롱은 당하는 여성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안겨 준다는 점이다. 매스컴의 부추김을 받으면서 성희롱에 대한 재판이 일본의 여러 지방에서 열린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이웃에 사는 일본 여성에게 소감을 물은 적이 있었다. 그 여성은 평생 직업을 갖지 않고 가정주부로만 지낸 50대의 아주 나약한 느낌을 주는 전형적인 일본 부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 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저는 평생 집에만 있다시피 했어요. 물론 직상 생활을 하지 않았으니까 남자들을 대할 기회도 많이 없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도 성희롱을 당한 여러 차례의 경 험이 있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는 성희롱이 일상화된 일본의 문제가 짚어져 있었다. 일본의 직장에서는 성적 희롱이 보편화되어 있다. 내가 아는 많은 일본의 직장 여성들은 직장 상 사로부터 성적인 농담을 당한 경우는 물론이고, 포르노 잡지를 보여준다든가 심지어는 성적인 관계 를 요구해 오는 경우까지 여러 경험을 이야기하며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해외로 진출한 일본 기업들 중에는 현지의 여직원들과 마찰을 일으켜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예로 일본의 6대 재벌기업 가운데 하나인 스미토모 상사의 '로스앤젤레스 성적 학대 사건'이 그렇다. 이 사건은 스미토모 로스앤젤레스 법인에서 근무하는 미국 여직원이 일본인 상사들이 성적 인 농담을 하고 포르노 잡지와 포르노 비디오를 권유하며 성적인 학대를 했다는 이유로 관리 감독 의 책임을 물어 회사를 고소한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미국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남 성들이 '성적 학대'로 제소되었다. 그만큼 미국 사회에서는 '그녀가 원치 않는 모든 것'은 절대로 해 서는 안되는 일로 엄격하게 선이 그어져 있다. 그러나 일본인 상사들은 일본에서 하던 버릇대로 했 다가 성적 학대로 제소를 당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고소를 당한 일본인 남성들의 반응이 다. 일본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며 단지 관습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항변하고 있 는 것이다. 일본의 텔레비전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 아니 모든 프로그램이 여성을 모독하고 학대한다. 낮 시간에도 이유 없이 여성을 벗기고 밤이 되면 여성을 만지고 희롱하고 심하면 때리기도 한다. 일본의 모든 상업 방송은 여성이라는 존재를 성적으로 희롱하고 학대해야 되는 대상이라고 생각한 다. 그래서 그 텔레비전에 나오는 여성들은 누구나 옷을 벗고 전 일본인의 성적 희롱과 학대의 대 상이 된다. 이처럼 특정한 대상을 상대로 한 미디어가 아닌, 공중을 대상으로 하는 미디어에서 여 성을 전 인구의 성적 학대의 대상으로 만드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일본 사회가 철저하게 '강자의 횡포'에 길들여진 사회라는 데 있다. 개인은 나라에서도 사 회에서도 강자에 대해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존재에 불과하다. 바로 이러한 사회에서 '가장 나약 하고 힘없는 존재'인 여성에 대한 성적 학대는 당연히 일상화될 수밖에 없다. 강자에 대해 저항할 생각도 못하고, 맹목의 무조건적인 충성에 대해 반항할 생각도 못하는, 그러면서도 끝없이 배신을 음모하는 보통 일본 남자들의 분풀이가 바로 여성에 대한 성적 학대로 발산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 본 사회에서의 '성적 학대'는 서구의 성적 학대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일본 사회의 '세쿠하라'는 말 하자면 일본인 특유의 '성적 이지메'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복종이 아니면 죽음을 선택해야만 하는 공동체 안에서 '약자'를 괴롭히며 스트레스를 풀던 전통적인 일본인의 이지메가 성적으로 여성 을 대상으로 폭발하는 것이 바로 일본의 '세쿠하라'인 것이다. 그래서 일본 사회에서는 성희롱이 제도화되고 일상화될 수 있었다. 이렇게 일본 사회에서 성희롱 이 완전 정착한 것은 약자에 대해 잔인한 일본 사회의 특성 탓도 있지만 성희롱의 피해자인 일본 여성들이 '노예 정신을 발휘'해서 성희롱과 성적인 학대를 감수했기 때문이다. 그 피해자가 침묵했 기에 성희롱은 일본 사회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면서 아직도 제도로서 건재하고 있다. 속으로는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마치 반기듯 온갖 미소를 지어 가며 술을 따르는 한 일 본 여성들은 영원히 노예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자립한다 하더라도 사고와 행동이 변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노예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노예에게는 노예의 삶밖에는 주어지지 않는다. 차별을 거부하 고 인격에 대한 모욕을 거부한다고 눈을 똑바로 뜨고 분명히 말하는 자만이 다시는 차별을 받지 않 고 모욕당하지 않는다. 일본 여성들이 실제로는 너무나 싫어하면서도 웃어 가며 술을 따르는 한 성 적인 학대는 일본 사회에서 제도로서 존재할 것이다. '본인이 싫어하면 성희롱이다'라는 명제는 이제 우리 나라 여성들에게는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있 다. 우리 여성들은 싫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본인이 싫어하는데' 술을 따르라고 강요 한다면 당연히 '성희롱죄'에 해당된다. 이것은 우리 나라 여성들이 '싫다는 표시를 할 수 있는 용기' 를 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우리 사회를 일본과 같은 '성희롱의 제도화'로부터 격리시킬 수 있다.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이것은 일본의 가장 나쁜 것, 저질스러운 것만을 배워 오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며, '성희롱'에 대해 '성적 농담을 즐기는 척해 온' 나 자신에게 먼저 다짐해 보는 것이 기도 하다. 여성은 '방어'할 수 없다 일본의 절에 가면 참 이상한 아기 부처들이 있다. 마치 동자와도 같은 조그만 아기 부처들이 새 빨간 턱받이를 하고 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이미 일본의 잡지를 통해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수백 개도 훨씬 넘어 보이는 새빨간 턱받이를 한 아기 부처를 보 니 어떤 공포의 감정이 느껴졌다. 미치 한밤중에 공동묘지에 나와 앉은 기분이랄까. 이 아기 부처 는 일본 여성들이 자신들이 낙태시킨 아이가 극락에 가도록 빌기 위해 절에다 돈을 내고 세운 것이 다. 나는 이 아기 부처들을 보며 신체적 약자로서, 성의 피해자로서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이 겹쳐 떠올라 한없이 우울했었다. 모든 것이 다 있는 일본,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면 아프리카의 과일까지도 있는 곳 일본. 오늘날의 일본에는 한마디로 없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일본에 없는 것이 딱 한 가지 있다. 여성 들이 먹는 피임약이 그것이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참으로 놀랍고 의외였다. 그러나 일본 사회의 독특한 성격과 숨은 구조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처녀성이 더 이상 여성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고 건전하게 성이 개방된 나라에서는 여성 의 지위 역시 그만큼 보장되어 있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에서는 성의 개방과 여성의 권익이 한 궤도 의 열차를 탔다. 이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먹는 피임약의 개발이다. 먹는 피임약의 개발은 여성을 말 그대로 해방시켰다. 여성의 삶이 달라졌다. 임신의 공포와 더 불어 여성을 남성에게 예속시켰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굳이 여성 학자들의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이 먹는 피임약의 개발이 여성 해방의 가장 큰 원인이 된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리 고 이제 이 먹는 피임약은 세계 모든 나라에서 '얼마든지 어디에서든지' 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우리 나라 역시 약국에 가면 쉽게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슈퍼마켓에서도 손쉽게 살 수 있다. 먹는 피임약을 누구나 손쉽게 살 수 있게 된 것은 성관계에서 엄청난 위험 부담을 짊어져 온 여성이 '자 신의 몸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갖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진국'이라는 일본에는 먹는 피임약이 없다. 일본의 후생성이 피임약의 판매를 허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본의 후생성은 먹는 피임약이 여성의 건강에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이유를 들어 판매를 금지해 왔다. 그러나 호르몬 함유량을 줄인 먹는 피임약의 안전성에 대해서는 전세계 의학계가 공인한 바 있다. 반면에 중절 수술의 위험성은 의사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 는 사실이다. 살이 찌고 현기증이 나는 피임약의 약간의 부작용과 중절 수술의 위험성을 비교할 수 는 없는 것이다. '성은 개방된' 그러나 '여성에게는 피임약이 금지된' 일본에서는 정식으로 보고된 것만 따져도 일년에 약 150만 건의 중절 수술이 행해지고 있다. 많은 나라에서 당연하게 판매되고 있는 피임약이 일본에서만 금지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일단 많은 일본 여성들은 이른바 중절 수술을 해서 돈 을 벌고 있는 일본의 산부인과 의사들이 후생성에 대해 막강한 로비를 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일본의 번화가에 자리한 약국 앞을 지나다 보면 광주리에 수북하게 쌓인 임신 진단 시약이나 아예 세통씩 묶어 파는 콘돔 상자를 보게 된다. 피임약을 콘돔이나 임신 진단제처럼 판다면 당연히 임신 중절의 건수도 크게 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을 잘 아는 사람들은 바로 이것은 일본이라는 국가, 관청 조직의 교묘한 '조작' 내지 '통제'라고 말한다. 일본 후생성의 가장 큰 목표는 일본의 인구를 늘이는 일이다. 1.50으로 내려간 출생률이 더 내려가서는 큰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이라는 국가는 일본 여성들 의 '해방'과 '권익'을 원치 않는다. 일본 사회를 끌고가는 보수 세력들은 절대로 일본 여성들이 서구 선진국의 여성처럼 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 선진국 여성들이 누리는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일 본 여성들에게는 절대로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 더 이상 강해지고 자유로워지면 통 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일본에 있는 동안 일본의 후생성은 먹는 피임약을 92년 2월부터 자유롭게 판매하도록 하겠 다고 밝혔다. 나는 '이제 겨우, 일본도'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막상 2월이 되자 일본의 후생성 은 피임약의 자유로운 판맬르 무기한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심의회가 피임약을 마구 판매하게 해 서는 안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놓은 이유가 대단한(?) 것이었다. '피임약을 자유롭게 판매하게 하면 콘돔 사용이 줄어 에이즈를 마구 퍼뜨리게 한다'는 정말로 '이유같지 않은 이유'를 내놓은 것이다. 이 심의회에는 의 과대학 교수를 비롯해 아주 고명한 분들이 들어가 있었는데 나는 이 심의회가 '콘돔 제조회사'로부 터 뇌물을 받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보통 사람의 기초적인 상식에도 벗어 나는 이야기를 이유로 내세울 수는 없는 것이기에 말이다. 도대체 피임약과 에이즈 그리고 콘돔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일본 정부가 철저하게 일본 여성을 성적으로 억압하고 몸을 유린하고 자궁을 착취하겠다는 것 이외에 더 무엇이란 말인 가? 나는 화가 치밀었다. 사실 콘돔은 불완전한 피임 기구이다. 남성이 사용하는 이 콘돔은 남성 이 에이즈로부터 보호받는 기구로서(사실은 에이즈 감염 역시 완전하게 예방한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일본에서는 여겨지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일본 후생성의 심의회의 결정은 철저히 남성만을 위한 것이고 여성을 메이지 시대의 '애 낳는 도구'로 묶어 두겠다는 음모인 것이다. 그러나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일본 사회의 반응이었다. 원리 이 피임약의 자유 판매는 일본 의 여성 단체들이 후생성에 요구해서 이뤄진 것이고, 일본 정부가 약속한 일이었다. 그ㅓ데 말되 되지 않는 이유로 피임약의 판매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는데도 아무도 항의하지 않는 것이었다. 정말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 여성에게 피임약의 자유 판매는 단순히 일본 여성을 성적으로 더욱 개방시키는 것이 아니다. 불평등한 성에 의해 유린당하는 여성을 지켜 주는 것이다. 결혼을 했든 혹은 하지 않았든 극소수의 여성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섹스를 한다. 그리고 그 섹스를 통해 여성은 임신을 할 수도 있다. 원 치 않는 임신이라면 결국 목숨을 걸고 수술대에 드러누워야 하는 셈이다. 함께 하는 것이 섹스 아 닌가? 그런데 왜, 그 고통은 여성만의 몫이 되어야 하는가? 여성 해방론자들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먹는 피임약은 여성의 '최소한의 방어'인지도 모른다. 여성에게 종교적인 이유를 붙여 피임약을 금지시키는 경우를 보며 나는 '종교' 역시 강한 자를 위 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생명을 죽이면서 어떻게 평화와 평등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그 여성이야말로 나는 절대적인 약자라고 생각 한다. 그것도 처절하게 고통받는 약자인 것이다. 나는 중절 수술도 피임약도 정당방위라고 생각한 다. 일본 문제에 밝은 역사학자 노먼은 일본 사회를 이렇게 표현했다. "일본의 봉건 제도 아래 행해 졌던 혹독한 억압은 지금도 일본 사회에 정신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혹독한 상처를 남기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지극히 조용하고 온화해 보이는 일본, 그러나 그 깊은 바닥에는 끝을 모르는 어둠이 있다. 폭력과 병적인 집단 흥분 그리고 잔혹한 야수성이 도사리고 있다." 피임약이 금지된 나라, 일본의 여성들. 봉건 제도 아래 '제 한 몸의 자유'조차 없었던 그 노예들 과 무엇이 다를까? 일본을 떠나는 일본 여성 일본 여성들이 해외로 빠져 나간다. 최근 일본의 서점가를 돌아보면 해외에서 사는 일본 여성들 의 책이 한 코너를 이룰 만큼 많이 나와 있다. 『뉴욕에서 살고 있는 일본 여자』 『미국에서 새 삶을 찾은 일본 여성』 『나는 이렇게 유럽에 서 살고 있다』 『나의 파리 생활』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렇게 일본을 뒤로 하고 해외로 진출하는 일본 여성들은 대개 두 가지 부류이다. 하나는 해외 유학을 떠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경우이다. 지난 87년만 해도 일본인 5만7천 명이 해외로 유학을 떠났는데 그 가운데 40퍼센트가 여성들이었 다. 해외로 유학을 가는 일본 여성들 가운데는 착실히 토플 시험을 거쳐 유학 준비를 한 여성들과 일단 바람이라도 쏘이고 오겠다는 기분 전환파의 두 유형이 있다. 토플파는 아주 야무진 형으로 경 형학 석사학위 MBA나 경제학 박사학위 DBA를 따기 위해 가는 '능력 개발형'이다. 이들은 대개 일 본에서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 생활을 하다가 '도저히 내 인생 여기서 끝낼 수 없다'고 두 주먹 을 불끈 쥔 여성들이다. 일본 사회는 여성을 유능한 일꾼으로 대접하지 않는다. 아무리 유능한 여 성이라 하더라도 남자들처럼 승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이 닫혀진 정도가 아니라 문턱도 기어올 라가야 할 정도이다. 그래서 똑똑한 일본 여성들은 자신의 능력을 좀더 개발하고,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보람있는 일을 하고 유학길에 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유학을 가서 학위를 딴 일본 여성들은 십중팔구 해외 에서 취직해 그대로 눌러앉는다. 일본에 돌아온다 한들 학위를땄다고 대우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방인 취급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단 경영학 석사학위를 지니면 취직은 보장되 는 우리와는 딴판이다. 또 귀국을 한다 하더라도 여성을 차별하는 일본계 기업이 아니라 거의 100 퍼센트 외국계 기업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참으로 일본으로서는 얼마나 큰 손실인지 모르지만 정작 일본 기업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하다. 재미있는 것은 두 번째 기분 전환형 유학파이다. 이 유학파는 보통 직장 여성들이라는 것이 흥미 롭다. 이들은 대개 20대 중반에서 20대 후반으로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 약 4, 5년 정 도 일을 한 아가씨들이다. 그들에게 맡겨진 일이야 사실 한 달이면 일같지도 않게 느껴진다. 간단 한 사무에 차 나르고 책상 닦고 복사 뜨는 하루하루인 것이다. 이렇게 4, 5년을 보내면 심각한 자 기 회의에 빠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같이 들어온 남자 동료들은 전혀 유능하지도 않건만 벌써 자신의 엄연한 상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본인이 출세할 가능성은 까마득한 일이고. 이럴 때 이들에겐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기분 전환도 할 겸 해외에 나가 어학 코스라도 들어 보자. 더구나 지금은 살인적인 엔고 시대가 아닌가.' 십 년 전만 하더라도 미 국에서 일 년 동안 대학을 다니려면 삼백만 엔이 필요했지만 엔고 시대인 지금은 백만 엔이면 충분 하게 되었다. 월급 받는 대로 썼다 하더라도 직장 생활 4, 5년에 남아 있는 돈은 웬만큼 될 것이다. 다음날 그녀는 해외유학 전문 알선기관에 가서 이렇게 말한다. "미국이나 유럽이나 아무데나 좋아 요. 50만에 정도로 반년 정도 있을 대학 좀 소개해 주세요." 이렇게 반년을 외국에서 보낸 그녀들은 아주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일단 서구 사회에서 여성 은 나이와 관계없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다는 데 눈을 뜨게 된다. 그래서 개중 에는 현지에서 만난 서양 남자와 결혼에 눌러앉는 수도 꽤 있다. 물론 대개는 일본으로 돌아와 전 과 다름없는 회사에서(오히려 더 나쁜 일자리일 수도 있다) 다시 평범한 직장 여성이 된다. 그렇지 만 그녀들은 이미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이 달라져 있다. 일본에서는 '여자는 혼네, 남자는 다테마에' 라고 이야기한다. 어린아이처럼 속마음을드러내는 여자들은 사회 생활을 제대로 할 능력이 없기 때 문에 절대로 무대에 내세워서는 안된다고 일본의 남자들은 이야기한다. 결국 일본에서 여성은 무대 뒤편에만 머물러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동안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여성들이 이제 '다 른 나라'를 보고 돌아와서 '기분 전환'도 하고 '인식의 전환'도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무대를 바꿔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착실하게 준비를 거쳐 외국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일본 여성들이 크게 늘고 있다. 왜 일본 여성들은 세계에서 가장 늦게 결혼하려 할까? 왜 결혼해서도 아이를 낳기를 거부할까? 아니 아예 결혼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이 태어났으나 그들에 게 냉담했던 일본을 스스로 떠나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꾸리려 한다. 유능한 일본 여성들이 일본을 떠나는 것은 얼마나 큰 경제적 사회적 손실인가? 여성에게 닫혀만 있는 일본 기업과 사회 에 맞선 이들의 도전의 몸짓이 그러나 너무나도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6. 일어서는 여성들 여성 승리 OL의 애프터 5 나는 '결혼'이 싫다 바쓰 이치 빛 지방 의회를 움직이는 보통 여성들 이 여자가 사는 법 한 앵커우먼의 비싼 수업료 미야자와 리에의 성숙 물결을 거슬러 가는 물고기처럼 진짜 사랑을 해본 여자는 무서운 것이 없다 여성 승리 일본에서 살다보면 우리와 참 다르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다. 그 중 하나가 성(性)의 문제이다. 일본에서 취재를 하다 보면 대기업이나 각 언론사에 아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사람을 중간에 세워 야 일이 되는 일본인지라 나는 기업체 홍보부의 여직원들과점심도 자주 먹는 등 이른바 '취재원 관 리'를 했다. 그 가운데 한 기업에 '구니야'라는 아주 똑똑한 여성이 있었다. 일처리도 아주 야무지게 해 나는 그 여성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어느 날 만난 지도 꽤 된 듯 싶어 전화를 했다. "구니야 씨 계신지요?" "구니야 말입니까? 그런 사람은 저희 회사에 없는데요." "그럴리가요. 얼마 전까지도 일을 같이 했는데요. 구미야 도모코씨가 그럼 회사를 그만두셨다는 말씀인가요?" "아, 마츠이 도모코요, 아하하, 바꿔 드릴께요." 알고 보니 내가 아는 구니야 도모코가 그새 결혼을 해서 '마츠이 도모코'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일 본은 이렇게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되어 있어 나는 적잖은 혼란을 겪곤 했다. 그런데 일본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눈에 띄게 늘면서 여성들이 결혼과 동시에 이름이 바뀌는 사실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특히 변호사라든가 고급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느끼는 문제 의식은 심각하다. 보통 7년 만에 붙는다는 어려운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하타 게이코'는 남편의 성을 따른 기혼녀 였다. 변호사로서 명망을 얻고 부도 얻은 그녀는 '결혼이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는 법칙에 따라 남 편인 '하타'와 헤어져 결혼 전의 성 '하기와라'를 되찾았다. '하기와라 게이코'가 된 것이다. 이 경우 문제는 심각하다. '여변호사 하타 게이코'로 알려진 그녀가 '하기와라 게이코'로 일하는 것은 그 동안 쌓아올린 모든 경력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혼과 동시에 어느 날 갑자기 유능한 변호사 '하타 게이코'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런 경우는 보통 직장 여성이 결혼 혹은 이혼을 해서 명함을 다시 만들고 의료 보험을 다시 만드는 것과 비교도 안되는(물론 직장 여성 인 경우도 피해가 크지만) 피해를 입는 것이다.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성을 따르는 서양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아는 어떤 서양의 전문직 여성은 이혼을 한 뒤에도 전 남편의 양해(?)를 얻어 여전히 '마담 크레송'으로 남아 있다. 물론 싫 어서 헤어진 마당에 그 이름자 역시 완전히 떼버리고 싶지만 일단 직업인으로 '마담 크레송'으로 알 려진 마당에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난 이혼해서요, 다시 처녀 때 이름인 바루도가 됐다우, 앞으로 잘 부탁해요'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는 아주 용감한 여성들이 이 '부부별성제 관찰'을 위해 사회의 관습과 법률에 과감히 대항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도 호적에 올리지 않고 그냥 동거만 하거나, 법적 결혼을 했어 도 '부부별성'을 고집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서류상 이혼'을 하는 등 참으로 용기있게 일본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시위를 했다. 그런데 일본의 민법이 전후 50년 만에 대대적인 손질을 받게 되었다. 특히 여성 관련 법안이 대 폭 바뀌어 일본 여성들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자리매김이 드디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문제의 부부별성을 인정한 것이다. 현재 법무장관의 자문위원회 안이지만 결혼을 할 경우 여성들이 남편의 성을 따르던 데서 본인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성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개정의 배경은 일본 여성들의 인식 변화이다. 결혼을 해도 자신의 성을 그대로 지니고 싶다 는 여성들이 늘어났고 사회 역시 그 필요성을 느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소유권이 바뀌듯 성이 바 뀐다는 사실에 모든 여성들이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른바 선진국 가운데서 여성의 지위가 가장 처지는 나라이다. 특히 여성이 받는 임금과 직장에서 여성들의 위치 그리고 법적인 대우 등을 볼 때 일본은 완전히 개발도상국 수준이라고 생 각된다. 일본의 경우 여성들이 받는 평균 임금은 남성의 약 49퍼센트이다. 이것은 한국의 50.5퍼센 트보다 낮은 것은 물론 일본과 같은 선진국인 노르웨이의 75퍼센트 그리고 미국의 69퍼센트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이다. 또 어느 국제경제연구소의 조사에서 여성들이 직장 생활을 하는데 가장 여건이 나쁜 나라로 일본 이 꼽힌 것을 보면 일본의 직장 여성들이 승진과 급여의 차별 그리고 성희롱 문제까지 얼마나 많은 문제를 떠안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 동안 일본의 민법은 모든 이는 평등하다는 일본의 헌법을 사실상 위반하며 많은 여성 차별 사 례를 법적인 구속력을 갖고 실행해왔다. 예를 들어 이혼 후 재혼하는 데 여성은 6개월이 지나야 된 다든지 이혼할 때 위자료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든지 정말로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일본 여성들 은 수많은 차별과 편견의 희생자가 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여성들은 일본의 경제 부흥에 지대한 공을 세운 집단이다. 패전 후 잿더미에서 일본 경제를 부활시킨 일본 국민의 검소, 근면, 죽자살자 일하는 이른바 '잇쇼켄메이' 정신까지 여러 가지 있겠지 만 여성 노동력의 존재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힘이 되었다. 싼 임금, 열악한 노동 조건에도 불구하 고 묵묵히 일했던 일본 여성들은 일본 경제 부흥에 꼭 필요한 노동력이었다. 동시에 일본 여성들은 고도 성장의 절대적인 희생자였다. 경제 성장과 언제난 어깨동무하고 오는 오염과 공해의 가장 첫번째 희생자였다. 대부분 열악한 환경에서 일차적인 일을 담당했던 여성들은 공해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공해병의 희생자는 대부분 여성이었고 그 여성들은 인간의 욕심이 저지른 벌로 불행한 아이를 낳 으면서 정신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아야 했다. 바로 이러한 희생자로서의 체험이 있었기에 일본의 여성들이 환경 보호와 자연 보존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 여성들은 아무런 사회적 평가도 보상도 받지 못했다. 여전히 일본 여성들은 일본 사 회에서 소외된 약자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일본 여성들은 엄청난 생명력을 지니고 끈기와 용기로서 여성 지위의 향상을 위해 싸워 왔다. 이번 일본 민법의 개정 역시 수많은 일본 여성이 애쓰고 싸워 온 결과이다. 특히 이번 일본의 민법 개정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이 시정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인간 자체에 대한, 약하고 힘없는 자에 대한 불평등과 차별이 사라지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개정되는 민법에서는 여성의 권익을 신장시키면서 비적출자, 즉 사생아에 대한 상속권의 불평등을 시정했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인 성인들의 뜻에 따라 사생아로 태어난 이들에게 법적인 차별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인권 유린이며 차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의 뜻과 전혀 관계없는 '운명의 결과'를 '차별'로 해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들에 대한 평등권이 보장된 것은 일본 사회가 인간 중심으로 가려는 노력의 증거이며 여성의 지위 향상은 결국 인간의 지위 향상이라는 당연한 진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번 민법의 개정을 계기로 '인간의 따스함'이 살아 있는, 여성성이 이끄는, 평등과 개성 그리고 평화가 존중되는 일본 사회를 기대한다. OL의 애프터 5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도쿄 특파원인 테리사 와타나베와 서울에서 만났다. 일본계 미국인인 그녀를 만나는 것은 내게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일했고 식사 역시 일의 연속이 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본인들의 삶이 참으로 불쌍하다'는 데 의 견을 모았다. 이어 우리는 또 한가지 사실에도 곧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일본에서 가장 인간답게 사는 계층은 '일본의 OL(젊은 직장 여성)'이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본 것이 다. 일본의 직장 여성들은 일본이라는 사회에서 가장 똑똑하게 산다. 일본의 직장 여성들은 '과로 사'할 정도로 무식하게 일하지도 않거니와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고 상사가 퇴근할 때까지 자리를 지 키고 있는 일도 없다. 일과 직장 동료 그리고 술에 찌들어 사는 남자들이 아무 것도 못할 때 그녀 들은 직장 끝난 뒤의 '애프터 5'를 철저히 즐긴다. 영어 회화 학원에 나가는가 하면 요리, 꽃꽂이, 다도를 배우고 헬스클럽에 가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몸매를 가꾼다. 남자들이 엄두도 못 내는 자기 투자와 자기 개발에 열심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 년에 적어도 한 차례씩은 대부분 해외 여행을 즐긴다. 외국 풍물을 돌아보고 신나게 '모르는 세계'를 만끽하고 돌아온다. 엔고는 그녀들에게는 하늘이 내린 선물로 스킨 스쿠버, 골프, 서핑 등 일본에서는 돈이 엄청나게 드는 고급 레저를 해외에서 우아하게 즐기고 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내가 만난 일본의 독신 직장 여성들 가운데는 상당한 수준의 골프 실력을 지니고 있 는 사람도 많았다. 나 역시 독신인 관계로 저녁 시간을 이용해 헬스 클럽과 골프 연습장을 다녔는 데 어떤 경우는 전원이 젊은 여성인 경우도 있었다. 또 노는 데도 빠지지 않아 구슬치기인 파칭코는 애교 수준이고 주식 투자, 경마 등 대형 도박성 투자와 투기에까지 손을 뻗어 큰 돈을 거머쥔 배짱 큰 아가씨들도 많다. 일본의 젊은 직장 여성들의 이러한 여러 측면에서의 '인간다운 삶의 추구'를 알려 주는 몇 가지 재미있는 예가 잇다. 일본의 생수 판매액은 최근 5년간 평균 67퍼센트라는 엄청난 신장률을 보였는 데 주된 소비자가 이들 '돈을 버는 젊은 여성'들이라는 이야기이다. 또 최근에 일본에 인테리어 붐이 밀어닥치면서 인테리어 전문의 고급 백화점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데 값비싼 일본 가구(일본은 가구값이 특히 비싼 축에 든다)를 사들이는 고객이 일본의 직장 여 성들이라는 것이다. 즉 인테리어 소비 계층으로 일본의 젊은 여성들이 크게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좁지만 편안한 소파를 들여 놓고 세련된 전등 스탠드를 구입한다. 물을 끓여 일본차를 타먹 기보다는 수도꼭지에 많은 돈을 투자해 정수기를 턱 달아 놓는다. 좁은 집에서 은행에 돈을 집어넣 고 흐뭇해 하며 사는 일본의 기성 세대와는 전혀 다른 사고 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들 혼자 사는 '여유 있는 독신 여성'들의 소비가 최근 '귀족 소비'에서 '귀속 소비'로 옮겨지고 있다고 말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 동안 일본의 젊은 직장 여성들은 엔고를 충 분히이용해 귀족 생활을 했다. 외국 여행을 갔다 하면 뉴욕, 파리, 싱가포르 등지에서 현지인들의 경우 상류층밖에 이용할 수 없는 디럭스급 호텔에 묵고 일급 레스토랑을 순례하며 맛있는 음식을 맛보고 전문 부티크에 가서 왕창 쇼핑을 해왔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집안 꾸미기에 돈을 들이는 것으로 소비 패턴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지난 86년에 남녀고용균등법을 시행했다. 아직도 일본의 남녀 임금의 격차는 후진국 수준 이지만 어쨌든 이 법은 남녀의 임금 격차를 축소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여성의 직장에서의 위치 도 서서히 땅다지기 작업에 들어간 셈이다. 말하자면 언젠가는 남성과 같은 위치를 보장받을 수 있 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직장에 운명을 거는 것을 거부하는 듯하다. 일본의 직장은 절대적인 충성을 강요한다.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일을 하고 끝나면 역시 회사 사람하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신다. 주말에도 회사원들은 온천으로 초청해 어디까지나 '회사의 울타리'에서 놀게 만든다. 일부 회사에서는 하와이라든가 호주 등지에 회사의 콘도를 구입해 직원들에게 휴가 때 이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얼핏 근사해 보인다. 그러나 사실 휴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의 '일'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휴가를 그것도 기를 쓰고 해외로 나가서 결국은 회사 콘도에 들어가는 것은 절대로 일을 떠난 휴가라고 할 수 없다. 회사의 경계 안에서 회사 일을 생각하며 외국이 아니라 '일본'속에 여전히 머무르는 것이다. 일본의 여성들은 그런 점에서 훨씬 현명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회사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점 을 알고 있는 것이다. 회사에서 조직의 한 세포로 사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그녀들은 일본 남성들을 통해서 이미 보고 알게 된 것이다. 또 '근검'과 '절약'의 습성이 그대로 배어 부자가 되어 도 여전히 '가난의 때'를 못 벗는 일본인의 삶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결혼'이 싫다 일본에 일본인이 줄고 있다. 일본의 출생률은 해마다 곤두박질치기 시작해 지난해는 드디어 출생 률 1.5를 기록했다. 이 수치는 일본 여성이 평생 낳는 아이가 1.5명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담고 있 다. 남녀 두 명이 결혼했을 때 적어도 반 명은 떨어져 나간다는 것으로 급격한 인구의 감소를 뜻한 다. 이미 지난 89년 출생률 1.57쇼크로 일본 열도가 난리를 쳤지만, 몇 년도 채 안되어 1.5라는 더 욱더 충격적인 결과를 본 셈이다. 이렇게 가면 이제 일본은 사람이 없는 나라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인구가 급속히 줄어들면 결국 그 국가는 힘없는 국가, 스러져가는 국가가 된다. 이 식으로 가면 일본은 말 그대로 '일본은 없다' 가 된다. 현재 일본의 인구는 1억2천3백만이다. 그러나 천년 후에는 겨우 4만5천명이 된다는 통계 가 나와 있다. 거기에 더해 인구의 고령화는 당장의 일본 사회가 직면한 무시무시한 현실이기도 하 다. 일본에 이처럼 인구가 줄고 있는 것은 물론 여성들 때문이다. 특히 여성들이 늦게 결혼하기 때문 이다. 월프렌 같은 일본 전문가는 일본을 아주 이상한 나라로 정의하는 이유로서 '여성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나라'라는 점을 들 정도였다. 그런데 일본 여성들의 경우 특히 아이를 활발하게 낳는 시 기의 여성들이 미혼인 경우가 두드러진다. 한 통계에 따르면 20대 후반의 일본 여성의 미혼율은 자 그마치 40퍼센트이다. 결국 20대 후반의 여성 가운데 거의 절반이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 일본 여성들은 결혼을 기피하는 것일까? 물론 가장 큰 이유은 결혼이 이제 '평생 직장'이라는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에는 대학(전문대학 포함)에 진학하는 경우가 남자 들보다 더 많을 정도로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 전문적인 훈련을 받겠다'는 일본 여성들의 의지가 남달라진 것이다. 학력이 높으면 수입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일본 여성들의 이러한 고학력 화는 일종의 계층 이동 욕구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전업 주부 역시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벌어 자신이 쓰는 '경제적 자유'는 절대 로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돈을 벌어 마음껏 쓰는 즐거움을 맛본 이상 전업 주부의 '가계 경리'와 도 같은 역할이 마음에 안 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일본 여성들은 '결혼=즐거운 생활'이라는 등식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20대에 결혼 해서 아이 둘을 낳고, 회사에서 준 집에서 살며 평생 집세를 갚아 나가는, 구질구질하고 고생스러운 '결혼에 걸린 인생'을 거부하고 있다. 특히 아이가 커서 대학을 들어갈 때는 일본인들의 가계 생활 이 가장 어려운 장점에이른다. 일본의 회사는 학자금을 대주거나 융자해 주지 않기 때문에 결국 교 육비는 철저한 개인의 부담이다. 그런데 자녀의 대학 학자금으로 많은 돈이 필요한 바로 이 시기는 집세의 마지막 남은 부분(그래서 액수 역시 많다)을 갚아야 할 때와 대개 겹친다. 그래서 주부가 시간제로 백화점 등에서 고된 노동을 한다 해도 겨우 한달 식비만 떨어지는 고생의 시기를 겪는 것 이다. 이러한 '주부의 일생'을 충분히 지켜본 일본의 젊은 여성들이 이제 결혼을 거부하고 있다. 되도록 늦게 결혼하고 즐길 수 있는 데까지 즐기자. 그리고 결혼해도 아이는 낳지 말자. 낳아도 한 명만 낳자. 바로 이것이 젊은 일본 여성들의 생각이다. 일본 정부의 인구 정책을 담당하는 후생성은 지난해, 일본으로서는 조금 획기적인 '아이 낳기 유 도책'을 발표했다. 즉 이제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서 다루 겠다는 것이다. 이 안은 아이를 낳는 가정에 대해 일정한 육아 보조비를 지급하고 아이를 낳는 직 장 여성에 대해 여러 가지 혜택을 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치매증에 걸 린 노인이나 장애자를 돌보는 데 주력했던 자원 봉사자의 역할을 이제는 이웃의 아이를 봐주는 일 로 대폭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본이 후생성이 '아이를 많아 낳아라' 하고 외치는 것은 지난 메이지 시대에 부국강병책의 하나 로 '낳아라, 불리자' 하고 외쳤던 것의 재탕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노동력으로서 여성을 사용하 면서도 여성에게 다시 새로운 노동력의 생산까지도 명령하는 것이다. 즉 일본 여성들에게는 아이를 낳지 않을 자유조차도 제한되고 있는 느낌이다. 메이지 시대와 비교할 때 일본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국가는 개인을 조종하려고 기도하고 있다. 분명히 여성의 몸은 아이를 낳는 도구가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모성이 여성의 본능이라고 생 각하지 않는다. 아이를 낳느냐 혹은 낳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여성이 스스로의 인생 한가운데서 선 택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여성이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여성에게 스스로 성을 이 해하고 삶의 방식을 선택할 권리와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여성들에게 아이를 낳도록 유도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여성에 대한 엄연한 인권 침해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들을 비난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튼 듯하다. 일본 정부는 아이를 낳지 않거나 낳거나 하는 것은 물론 여성의 선택이지만 결국 이 개인적인 선택이 일 본이라는 사회, 나아가서는 국가를 쇠퇴하게 하고 경제를 무기력화시키는 결과를 빚는다고 강조한 다. 따라서 일본 여성들의 '아이 낳기 거부'는 결국 여성이라는 개인이 사회에 '폐'(메이와쿠)를 끼 치는 반사회적 행동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물론 일본 정부의 이야기대로 '아이 낳기 거부'는 일본 의 경제 성장을 저해하고 장래의 노동력을 고갈시킬 수 있다. 이대로 2020년까지 가면 일본의 노동 시장에서 적어도 700만에서 많게는 1,800만 명 정도의 노동력이 부족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정부로서는 참으로 다급하게 대책을 마련해야 될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 여성들이 결혼을 거부하고 설사 결혼을 뒤늦게 한다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는 진 짜 책임은 일본 정부와 사회에 있다. 그것은 인간을 속박하고 자유를 제한하며 약자를 무시하는 일 본 사회의 속성에 근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과 어린이는 일본 사회에서 약자이다. 바로 이 약자들이 살기에 일본 사회는 알맞지 않다. 사회 각 방면에서 여성은 2등 시민 취급을 받으며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능력과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일본의 가정은 바로 여성에 대한 족쇄 역할을 해내고 있다.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학교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아 이들의 '등교 거부'와 '이지메' 문제로 가득 차 있다. 일본 사회는 개인의 행복이 우선되는 사회가 아니다. '사회의 중심 세력'의 뜻에 따라 개인의 행 복은 조절되며 얼마든지 희생된다. 약자인 여성들은 물론이고 남성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근의 일본 사회는 '남자가 남아도는 사회'이다. 그런데 '젊은 남자들'은 이미 그 젊음과 패기를 회사 일에 모조리 빼앗겨 버려 여성과 사랑할 시간과 힘이 없어져 버렸다. 일본 남성들 가운데는 정자의 수가 크게 모자라는 경우가 많다는 보도도 있었다.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극심한 경쟁 사회 에서 일본 남성들은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불임'인 경우가 많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모든 나라의 여성들은 결혼을 꿈꾸는데 일본의 여성들은 결혼을 거부한다. 다른 모든 나라 의 어린이들은 학교에 가기를 거부한다. 다른 모든 나라의 남성들을 여성들 사랑하고 함께 섹스를 하고 싶어하는데 일본의 남성들은 섹스를 두려워하고 아이를 만들 수가 없다. 그러나 일본이 자신들의 국민수가 줄어든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결코 사려 깊은 일이 아니다. 같은 전범국인 독일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지만 절대로 입밖에 내어 떠들지 않는다. 과거의 죄가 아 직도 정산 안된 전범 국가가 인구 운운하는 것은 우월주의나 팽창주의의 한 표현으로 오해될 수도 있어서이다. 세계 속의 한 나라라는 아주 기초적인 인식이 '일본'이라는 나라에 있었다면 그러한 비 상식을 노출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쓰 이치 '바쓰 이치'라는 일본말이 있다. '곱표 하나'라는 뜻으로 한 번 이혼한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혼녀를 이렇게 '곱표 하나'로 표현하는 것은 일본 사회에 이혼이 이제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 는 이야기이다. 곱표 두 개가 되는 '바쓰 니'(곱표 두 개)라는 말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는 의미니 까 말이다. 일본에는 최근 신혼 부부가 신혼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나리타 공항에서 따로따로 가는 '나리타 이혼'부터 결혼 15년이 넘는 '숙년 이혼'까지 이혼의 종류도 다양하다. 문제는 어쨌든 일본 사회에 이혼이 일상화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지금까지 일본은 이혼이 아주 적은 사회였다. 그것은 일본의 남녀가 유달리 '결혼 생활'에 유능했 다기보다는 일본의 사회적 문화적 특징 때문이다. 일단 일본의 부부는 서로에게 아주 기능적이고 실질적인 역할을 기대한다. '남편'은 '아버지'로서 '돈을 벌어 오는 사람'이며, '부인'은 '어머니'로서 '가사 담당자'이다. 일본에는 부부 동반과 같은 풍 습이 없다.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애정의 관계라기보다는 각자에게 부과된 역할에만 관심을 두는 기능적인 관계가 일본 부부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 이혼의 결정적인 사유가 되는 '상대방의 부정'이나 '성격적 차이' 혹은 '대화 부족'이라는 것은 일본에서 이혼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아예 서로 기대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남자 와 여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이혼의 이유'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예전에는 여성의 경제력이 별볼일 없었던 것도 일본의 이혼율이 낮았던 요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성들이 일단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은 물론 아이를 본인이 맡아서 기를 수 있는 경제력까 지 지니게 되어 이혼 후 여성이 아이를 맡는 경우가 70퍼센트에 이르고 있다. 일본에 이혼이 늘어난 것은 일본 사회가 비교적 건전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를 안고도 체념하며 살았던 일본 여성들이 이제 '이혼'이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눈을 뜬 것이 다. 남자들은 직장에서 산업 전사로서 '노동'에 종사하고 여자들은 그 남자를 위해 음식과 출산 그 리고 섹스를 제공하는 '지원' 역할을 했던 기능적인 관계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남과 여' 의 본연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욕구가 생긴 것이다. 여성에게 경제력이 생긴 것이 이혼을 늘게 했지만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혼' 그 자체가 '이 혼'을 늘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도 이혼하고 또 누구도 이혼했다는 상황이 '집단에 함께 끼려는 의식'과 '누구처럼'이 잘 통하는 일본 사회에서 이혼에 대한 저항감을 줄여 준 것이다. 즉 남도 이혼하니까 나도 이혼할 수 있다는 등식이 일본 사회에서 호소력 있게 성립한 것이다 또한 모두가 오래 산다는 '장수'의 확산이 결혼을 다시 원점에서부터 보게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 들도 있다. 결혼해서 둘이 살아야 될 기간이 이제 장수 왕국 일본에서 엄청나게 길어진 것이다. 남자가 78세, 여자가 83세까지 산다고 가정할 때 '남은 기간'을 좀더 행복하고 뜻깊게 살고 싶어진 것이다. 특히 일본의 부부들은 무엇보다도 서로의 '역할'을 끝낸 뒤의 공포가 있다. 즉 아이들이 모두 커 집을 떠나가고 남편은 정년 퇴직을 해 '돈 벌어 오는 사람'으로서의 '아버지'의 역할을 끝내고 부인 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모두 마쳤을 때 그 '이후'가 두려운 것이다. 나는 일본의 노부부들이 음식 점에서 외식을 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열이면 열 모두가 한마디 말도 없이 그저 조용히 음식만 먹는 것이었다. 물론 이따금 겨우 한마디씩은 하지만 '거기 후추 좀 집어 줘요' 정도 인 듯 몇 초에 끝나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일본 부부들의 위기가 그 삭막한 노년의 식사 뒤에 숨 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는 이제 일본이 '경제 동물'에서 벗어난다면 그리고 일본에 선진국과 같은 노동 조건이 이 뤄진다면 '이혼'은 더욱더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즉 노동 시간이 단축되고 부부가 같이 얼굴을 맞 대는 시간이 많아지면 자연히 '역할'이 아닌 '감정적 대상'으로서 서로 기대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일본에서는 '성격상의 불일치'라든가 '아내의 부정'이 새로운 항목으로 추가되어 '이혼 증가'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혼이 늘어나는 일본 사회, 오히려 건전하고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된다. 빛 자파유키상이라는 말이 있다. 지난해 일본에서 거의 모든 영화상을 휩쓸다시피 한 최양일이라는 한국인 감독이 만든 영화 「달은 어디에서 뜨는가」라는 작품에는 바로 이 자파유키상이 나온다. 자파유키상이란 다름아닌 일본에 돈을 벌러 오는 필리핀 여성들을 비롯한 동남아 여성들을 이르는 말이다. 대개 이 여성들은 이른바 술집의 호스테스로 일하면서 일본의 폭력 조직 밑에서 제대로 돈 도 벌지 못하고 죽도록 고생만 하다 비자 기한이 만료되면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자파유키상은 최근 일본이 잘살게 되면서 나온 말이고 그 원조는 가라유키상이다. 가 라유키란 1910년대와 30년대에 이른바 '일본 최초의 인력 수출품'이라고 알려진 일본인 창부 집단이 다. 그리고 정치적 목적으로 외국에 일본 여성을 '선물로' 바치는 일도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 명한 여성을 들라면 데위 수카르노일 것이다. 데위 수카르노는 일본이 수카르노 전 대통령에게 인 도네시아와 일본의 친선을 위해 바친 '선물'이었다. 물론 데위 이전에도 일본 여성이 보내졌는데 그 여성은 수카르노의 바람기를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 나라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데위 수카르노는 수카르노의 네 번째 부인으로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명실공히 '퍼스트 레이디'였다. 호스테스 출신인 그녀는 수카르노의 사랑을 받으며 숱한 소문과 화제를 뿌렸다. 그러다가 수카르노가 실각을 하자 파리 사교계의 명사로서, 국제 기업 의 로비스트로서 활동을 해왔다. 그녀는 우리 나라에도 다녀간 적이 있는데, 자신을 창부라고 욕한 필리핀 여성을 파티에서 때려 감옥에 들어간 것을 비롯해 52세의 나이로 누드 사진집을 펴내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격분시키는 등 끊임없이 화제를 만들어 왔다. 나는 도쿄 서미트 취재를 하던 중 일본의 오쿠라 호텔에서 우산을 쓰고 홀로 들어오는 그녀를 본 적이 있다. 날씬한 몸매에 자그마한 몸집의 여성이었다. 물론 쉰두 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 을 정도로 젊었고 일본 여성이라기보다 동남아 여성 느낌이 나는, 윤곽이 뚜렷한 얼굴이었다. 내게 인상적인 것은 그녀가 들었던 5백 엔짜리 비닐 우산이었다. 우리 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한번 쓰고 버리는 천 원짜리 일호용인데 '전직 대통령 부인과 비닐 우산'이 내게 왠지 쓸쓸한 황혼녘의 인생을 말해 주는 듯했다. 데위는 일본 매스컴의 '헐뜯기'의 대상이었고 한때 일본의 주간지들은 그녀를 흠잡고 깎아내리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녀의 애인이라고 소문난 남자들 등장시켜 온갖 지저분한 이야기를 폭로시 키곤 했다. 내가 일본에 있을 때 바로 이 데위 수카르노의 딸인 '카리나'가 일본의 연예계에 댈런트로 데뷔를 했다. 카리나의 나이는 스물네살, 그녀는 대통령의 딸이자 데위의 딸로서 꽤 '상품성'을 지니고 주 목을 받으며 등장을 했다. 몇몇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조연으로 나왔던 그녀는 여성 대상 프로그램 의 진행자나 리포터로도 활약했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하는 그녀는 일본어도 웬만한 대화 는 충분히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상깊었던 것은 '데츠코의 방'이라는 대담한 프로그램에 나온 그녀의 이야기 를 들으며 '훌륭한 젊은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어머니 데위와사이가 틀어져 한푼의 도움도 못 받고 일본에 정착한 그녀는 사교계의 화려한 생활 이 싫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통령의 딸이라는 것이 굴레였다는 것을 그녀는 강조했다. 평범 한 사람으로서 일을 해서 돈을 버는 생활을 하고 싶었다며 말했다. 대담자인 구로야나기 데츠코가 그런 소망을 갖게 된 계기를 묻자 카리나는 "모든 것이 평등하고 소박한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비로소 깨닫고 몸에 배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어머니 데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어머니는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얻었지요. 모두가 본인이 노력해서요. 그런 점에서 어머니를 몹시 존경하고 있습니다" 하고 정말로 '대통령 딸'의 품위를 갖춰서 대답하는 것이었다. 옷도 보석도 비싼 것은 몸에 지니지 않는다는 카리나는 방 하나와 욕실 그리고 부엌이 딸린 조그 만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집이 생긴 것이 신기하고 기쁘다 고 덧붙였다. 그는 "전직 대통령의 딸이 그처럼 좁고 초라한 집에 산다면 인도네시아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 겠느냐"는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아버지는 검소한 분이었고 아버지의 딸인 제가 이렇게 사는 것 을 인도네시아 국민드리 알면 오히려 기뻐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데위 수카르노와 카리나 수카르노, 슬프고 왜곡된 역사가 이들 이름 위로 흐른다. 그러나 성숙한 카리나 수카르노의 삶에서 역사의 아픔을 씻어내는 강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빛을 본다. 지방 의회를 움직이는 보통 여성들 일본에서 내가 처음 인터뷰를 한 사람은 미야모도 나오미라는 시의회 의원이었다. 지방 선거를 앞두고 있던 우리의 입장에서 일본의 경우를 취재해 보라는 본사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내가 섭외 를 한 곳은 메구로구라는, 도쿄에서는 중산층 이상이 사는 동네였다. 섭외를 한 미야모도 나오미 씨는 18년 동안 시의회 의원을 한 여성이었다. 이왕이면 집에서 하고 싶다는 내 요구에(일본인에게 집을 공개하라는 요구는 실례에 가깝다)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응해 주었다. 비교적 잘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메구로구였지만, 그녀가 사는 동네는 '가난하다'는 느낌이 드는 곳 이었다. 좁은 골목을 지나 마치 우리 나라 구로 공단의 근로자용 숙소처럼 생긴 집단주택 같은 곳 에 서니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일본은 잘사는 나라이고 여기는 그래도 중산층이 모여 산다는 메구로구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 기자와 함께 무거운 장비를 겨우겨우 들고 좁은 2층 계단을 올라가니 그녀의 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미야모도 의원이 문을 열어 주었다. 한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냥 일본의 거 리에서 하루에 수십 명도 더 만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여성이었다. 집 내부는 한 14평 정도 되어 보였다. 부엌과 마루가 터져 있다고 하기 보다는 부엌을 중심으로 방이 둘러져 있다고 해야 적당한 표현이었다. 다 큰 두 아이와 부부가 살기에는 너무나 비좁은 집이었다. 우리는 그녀와 간단한 이 야기를 나누면서 카메라를 설치했는데 집이 하도 좁아 애를 먹을 정도였다. 미야모도 나오미 씨에게 먼저 어떻게 해서 시의회 의원이 되었는가를 묻자 자신은 원래 공장의 노동자였는데 노동조합 일을 보다가 주위의 추천으로 입후보를 해서 당선되었다고 했다. 남편 역시 같은 공장에서 만났고 아직도 그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시의회 의원의 역할이 무 엇이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가 아주 재미있는 답을 했다. '동네의 카운슬러'라는 얘기였다. 동네 사 람들의 상담역으로서,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불편한가, 좀더 나은 동네를 만들기 위해 개선할 점 은 무엇인가 등을 놓고 함께 의논하는 것이 시의원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그런 점에서 자신처럼 '가장 평범한 노동자'이자 '가정주부'가 시의회 의원으로서는 적격이 라고 했다. 보통 사람보다 높은 학력, 많은 부를 지닌 이보다는, 한 표를 행사하는 '평범한 이들'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이 '시의회 의원'에 적합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한 달에 받는 월급은 약 50 만 엔인데, 소속된 구의 살림살이에 따라 월급이 다르다고 했다(각 구청 공무원의 급여도 일본의 경 우는 그 구의 살림살이에 따라 다르다). 그녀는 우리 나라 시의회 의원이 무급이라는 데 무척 놀라 면서 그러면 사람을 만나고 출장을 가고 하는 것은 다 자기 돈으로 하느냐고 물었다. 미야모도 씨는 이웃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자신의 의원 활동에 기본적인 명제였다고 밝혔 다. 그런 만큼 이웃 사람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도록 열심히 일했다고 했다. 의원 생활이 벌써 18 년째이므로 자신은 다음 선거에는 나오지 않고 새로운 이들이 활약을 하도록 은퇴(?)하겠다고 말했 다. "장기 집권 아닌가요?" 하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차분하던 어조와 달리 갑자기 크게 웃어대어 숨어 있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느끼게 했다. 미야모도 나오미 씨를 비롯해 일본의 시의회에서 여성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점점 증가되고 있다. 그것도 '가장 평범한 여성'들이 시의회 의원에 입후보하고 당선되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나 '맞벌이 직장 여성'이 후보로 나가는 것이다. 최근 우리 나라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동네의 카운슬러'로서 활약을 하고 있다. 웬만한 아파트 동 장은 다 여성이다. 이들은 집안살림을 야무지게 해내는 저력에다 우리 나라 여성 특유의 적극적인 자세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여성들이 우리의 시의회 의원이 되어야 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 여성들이 선거에 나왔다 하면 참패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특별한 여성'을 내 세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러가지 학위를 가진 고학력 여성에다 화려한 전문직 여성을 내세워 '여왕벌'같은 '희귀성'을 강조한다. 대중성이 결여된 이 여성들에게 과연 보통의 시민과 구민들이 한 표를 줄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이제 우리 나라에서도 많은 여성을 진정한 지역 사회의 일꾼 후보로 만들려면 '세미나형'이 아닌 '워크숍형'을 내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고 했다. 일본의 시의회에 수많은 여성들이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생활의 현장'에서 뛴 '평범한 여성 들'이 지역 사회를 위해 일해 보겠다고 나왔기 때문이다. 마을의 동장으로 뛰는 우리 여성들을 시 의회 보낸다면 '우리 동네'는 얼마나 근사하게 될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이 여자가 사는 법 일본에서 인상깊었던 여성 국회의원 중에 이토 히데코가 있다. 그녀는 한창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가 일본 언론에서 터지기 시작했을 때 일본 국회 도서관에서 새로운 기록을 찾아내 한국 언론계에 낯익은 얼굴이 되었다. 이토는 당시 일본 사회당의 초선 의원이었으며, 활발한 의정 활동과 빼어난 미모로 언제나 눈길을 끌었다. 가령 일본의 자민당이 PKO, 유엔평화활동 법안을 통과시킬 때는 의 장의 단상까지 돌격해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투지를 과시하기도 했다. 이 이토 히데코의 이력을 살펴보면 아주 흥미롭다. 1943년생인 그녀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도쿄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문학에 꿈을 두었던 그녀는 중문학을 전공하는 동기생과 졸업 후 이 른 결혼을 했다. 그다지 돈이 되지 않는 중문학을 공부하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그녀는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녀가 10년 동안 했던 일은 도쿄 가정재판소의 조사관이었다. 물론 그러 는 사이 이토 히데코는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집안 일과 세 명의 아이에다 학문에 매달 리고 있는 '그녀의 부양 가족 중의 한 명인' 남편의 뒷바라지까지 했던 시절,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자서전인 『다시 돌아오는 계절』을 보면 그 당시의 고달팠던 일이 선명하게 씌어 있다. 세 아이를 돌보고 식사를 준비하고 그리고 가정재판소에서 조사관으로 면담을 하고 하루하루를 머 리가 팽팽 돌아갈 정도로 바쁘게 지냈던 그녀는 어느 날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잠 좀 실컷 자봤으 면' 하는 단 한 가지 소망만이 남았다. 그당시 그녀의 남편은 삿포로 대학에 교수 자리를 얻어 부 부가 별거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 역시 멀어지는 법. 부부 사이에 묘한 균열이 생 겼고, 어느 날 전화로 부부 싸움을 했다. 너무나 지치고 힘든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남편은 삿포로 에서 '나홀로 편히' 즐긴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부부 싸움을 한 다음날,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가보니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너무나 힘든 자신을 도와주라고' 남편이 SOS를 쳤다고 생각하고 너무나 기뻐했다. 그런데 아주 명랑한 자신을 이상한 눈길로 주시하던 시어머니가 던지는 한마디. "얘야, 사실은 아범이 어젯밤 전화를 했단다. 히데코가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아 아이들을 해칠지도 모 르니 가서 좀 살펴보라고 했단다." 눈치 없는(?) 시어머니의 말을 그녀는 평생 잊을 수가 없었나 보 다. 그녀는 결국 부부는 공동 생활자에 지나지 않는 타인이 아닌가 하는 심각한 회의에 빠져든다. 그녀는 남편에게는 전혀 미련이 없었지만 아이들을 생각해 한창 재미가 붙은 일을 그만 두고 삿 포로에 가기로 결정한다. 삿포로의 생활은 그녀에게 일대 전환기와도 같았다. 십 년분의 퇴직금을 타 '이것만은 나의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준비금으로 쓰겠다'고 야무지게 마음먹고 북해도 대학 법 학부에 등록한다. 얼마나 그녀가 열심히 공부했는지 집에서 책상 앞에 앉은 그녀를 보고 아이들은 "엄마, 눈이 너무 무서워"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마침내 그녀는 대학을 마치고 사법고시에 도전한다. 시험을 치르러 갔던 날, 어스름한 저녁에 아 이들의 저녁 식사를 걱정하면서 종종걸음으로 기차에서 내리는 그녀 앞에 세 아이가 있었다. "엄 마, 엄마, 여기. 고마워요." 손짓을 하는 아이들의 손에는 카네이션이 들려 있었다. 바로 그날이 어 머니의 날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1982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로부터 8년간 꾸준하고 활발한 활동을 해온 그녀는 일본 사회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다. 이토 히데코가 거둔 결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깨끗한 선거 캠페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헌정 사상 최다 표차인 26만표 차이로 압승을 거둔 것이다. 여성으로서, 그것도 엄청난 자금력의 열세를 딛고 거둔 성과였기에 더욱 빛나는 승리였다. 일본의 선거는 돈으로 치른다. 내가 만났던 일본의 참의원의 여성의원 가운데 '주먹밥의원'이라는 별명을 지닌 이가 있었다. 첫번째 선거에서 주먹밥 때문에 쓴잔을 마셨대서 붙여진 별명이다. 상 대 남주후보가 일본식 주먹밥인 '오니기리'에 돈 만엔을 넣고 유권자들에게 돌려 참패를 했다는 것 이다. 물론 그녀는 다음 선거에서 주먹밥을 이겨냈다. 그만큼 여성이 당선되는 것은 참으로 어려 운 일이다. 이토 히데코의 지나 온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가진 것이라고는 빛나는 의지밖에 없는, 하지만 그 뜻 하나를 굽히지 않고 살아낸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준다. 남자에게 얹혀가는 것 이 아니라 남성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해 스스로 인생을 일궈내는 새시대의 여성상을 제시한다. 어려움을 딛고 진정한 행복에 이른 의지의 여성상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여러 차례 일본을 오가면서 나는 이토 히데코의 눈부신 활약을 대하면서 마치 내 자신의 일인 양 뿌듯해 하고는 했다. 대중적인 인기도 상당할 뿐 아니라 '꽃노릇'에 불과한 탤런트 출신의 국회의원들(영향력을 지닌 남성 정치가들은 여성 국회의원 역시 꽃노릇을 하는 멍청 한 여자들을 선택하는 듯하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활동과 역량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번 홋카이도 도지사 선거에 나간다는 소식도 있었다. 만일 그녀가 당선되면 홋카이도라는 중요 도 에서 첫 여성 지사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최근 그녀가 한 주간지가 터뜨린 추문에 말려 아주 어렵게 됐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문제 의 발단은 그녀와 오랜 친분 관계에 있는 한 변호사에게 보낸 '러브레터'가 주간지에 실렸기 때문이 다. 그런데 이 편지를 숨겼다가 주간지에 제공한 주인공은 상대 변호사 사무실의 여직원이었다. 나는 참으로 씁쓸한 마음으로 이 뉴스를 들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공식을 다시 한번 확인 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점을 통감한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정말로 여자 는 '편견과 차별을 받은' 나약한 인간으로서 그 화살을 다시 자신과 같은 '여성'에게 겨누는 비굴한 2등 시민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여성이라는 존재가 수천 년에 걸쳐 '2등 시민'으로서 길 들여진 점을 생가해 희망을 버리지 말자는 지극히 냉정한 결론을 내리곤 했다. 바로 그 여자가 잘 되면 나 역시 잘되고 그 여자의 성공이 나의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아주 단순한 논리를 당사자인 여 성들은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 결점이 없는 인간은 없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이다. 결점이 많은 인간이 사실은 장점도 많 다는 사실을 나는 사회 생활에서 배웠다. 물론 결점도 없는 인간은 당연히 장점도 없다. 노력으로 어렵게 뭔가를 이룬 이토 히데코라는 여성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는 남녀를 떠나 인간적인 동료애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잘되는 여성에게 여성이 격려를 보내고 박수하는 자세가 자리잡아야만 '정신 적인 남녀 행동'이 비로소 이뤄질 것이다. 일하는 여성에게는 모두 세 번의 위기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결혼이고 두 번째는 출산이다. 그 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이른바 그녀를 감싸고 도는 스캔들이다. 결혼과 출산은 무명인 상태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않고 개인적인 노력으로 넘어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른바 스캔들은 다르다. 그 만큼 그 여성이 중요 인물이 됐다는 표시이자 인정사정 없는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이토 히데코라는, 결혼과 출산의 어려움을 훌륭히 극복한 여성이 어떻게 마지막 벽을 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 국민이 클린턴의 사적인 문제를 받아들였듯이 이제 일본의 유권자들이 '잘난 여성'의 사생활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사회적 자세를 묻고 있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앵커우먼의 비싼 수업료 얼마 전 일본 아사히 텔레비전의 앵커우먼인 다마루 미스스 씨를 만났다. 그녀는 나의 책 『일본 은 없다』를 취재하러 일부러 뉴스가 없는 주말 시간을 내서 서울에 왔다. 다마루 미스스하면 일본 에서 '알아주는 앵커우먼'이다. 나는 솔직히 일부러 나를 인터뷰하러 그녀가 온다는 사실에 놀라기 도 하면서, 무엇보다도 '화제의 여성'을 만난다는 생각에 못말리는 내 호기심이 발동해 기꺼이 응낙 했다. 물론 나는 여성을 남성보다 신뢰하는 편이고 일본 기자인 경우는 더욱 그랬다. 직접 만나 본 그녀는 텔레비전에서 볼 때보다 훨씬 미인이었다. 키도 훤칠했고 막 40대에 접어든 나이를 배반하듯 탄력 있는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전형적인 일본 여성과는 전혀 다른 '건강한 양 키걸' 같은 분위기였다. 반면 상당히 소탈하고 겸손했다. 약 두 시간 동안 우리는 끈질긴 인터뷰를 했는데 녹화용 테이프가 다해 갈아넣는 사이사이 그녀와 개인적인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나는 그 녀를 일본 언로의 보도를 통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일본에 특파원으로서 도착했던 때 일 본 전국은 한 일주일쯤 다마루 미스스의 이혼 소동으로 난리였기 때문이다. 일본 후지 텔레비전의 인기 아나운서였던 그녀는 '한참 잘 나가던'때 '결혼'을 발표했다. 상대 남자는 소문 나쁜 신통찮은 국제 관계 해설자였고 게다가 이미 결혼해 아이까지 있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그와 결혼을 감행했고 후지 텔레비전을 퇴사하고 프린스턴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약 일년 반 뒤 그녀는 돌아왔는데 그들 부부의 불화설이 끊이질 않았다. 일에 모든 것을 건 여자 에게 어느 날 찾아온 지독한 고독이 그녀로 하여금 '똑똑한 여자의 멍청한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고 사람들은 떠들어댔다. 나는 나 자신이 인간의 만남에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대목'이 있다는 것 을 배워 가고 있을 때여서 그랬는지 그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녀의 결혼은 '치사한 결말'의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 이혼 가정에서 전 남편 은 억대의 위자료를 챙겼고 절대로 입에 담아서는 안될 둘 사이의 온갖 프라이버시를 주간지에 공 개했다. 그러나 다마루 미스스는 그 치사하고 졸렬하기 그지없는 전 남편의 공격에 가타부타 한마 디 응대 없이 '내 부덕의 소치'라는 한마디를 되풀이할 뿐이었다. 결국 여론은 서서히 그녀에게 기 울었고 그녀의 전 남편은 그해 '일본에서 가장 불쌍한 남자' '남자 망신 다 시킨 꼴볼견 남자'로 각 주간지에 선정되어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다마루 미스스는 정말로 용기 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고 비록 어렵고 힘든 상황이지만 헤쳐 나가는 큰 힘을 지닌 사람이구나 하고 감탄했다. 직접 만나 본 그녀는 예상대로 당당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부드럽고 아주 섬세했다. 그녀는 중간 중간의 휴식 때면 편한 마음으로 담배를 피워 물며 나와 함께 '휴식의 수다'를 떨었다. "인생에는 참 여러 가지가 있지요. 다마루 씨를 지켜보며 극복하는 과정이 참 대단하다 했지요. 삶에는 글쎄 사람을 잘못 보는 실수도 있고, 물론 당신의 결혼이 실수였다는 이야기는 아니구요." "그래요. 내 결혼은 실수가 아니었고, 음 오히려 나는 참 많이 배우고 성장했지요. 물론 힘들었 지만 결과적으로 내게는 플러스였어요. 고통스러웠지만 내 성장의 거름이 됐어요." "언젠가 일본에서 하이비전 시대으 텔레비전을 다루는 특집에서 다마루 씨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어요. 너무나 선명한 하이비전에 주름살이 나와도 방송을 하겠다고 그랬었죠." "나는 어떤 프로 정신이니 하는 것에 ㄷ서 정말로 내가 이 세상에서 아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 하 는 생각이 들어요. 내게는 정말로 방송이 전부라고 할 수 있지요. 할머니가 되도 텔레비전 앞에 서고 싶어요." 평생에 적어도 세 가지의 직업을 가져 보고 싶다는 내게 그녀는 어린아이같이 큰 소리로 웃으며 "꼭 그렇게 될 것이고 모두 성공할 거예요"라고 격려를 해줬다. 미사토 미스스에서 처녀적 이름 다마루 미스스를 찾기 위해 그녀가 지불한 돈(위자료)이 엄청났듯 결국 우리 모두는 '인생'에 대해 수업료를 물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 수 업료가 비싸면 비쌀수록 우리는 더 혹독한 시련을 겪고 조절하고 혼자서 쓰라린 눈물을 흘릴 것이 다. 그러나 이렇게 힘든 시련을 겪고 났을 때 우리 인생은 더욱 따스해지고 여유 있고 성숙해지는 것 아닐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재클린의 삶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재키의 죽음을 애도하는 세계 인들을 통해 이제 한 인간이 얼마나 풍요로운 인생을 살았느냐가 새로운 평가 기준으로 등장한 것 을 알 수가 있었다. 바로 업적과 자리로서 평가되던 남자의 삶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와 실수와 고 통이 있는 여성의 삶이 우리 인생의 본보기로서 등장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우러러보는 훌륭한 인 생보다 누군가가 옆에서 지켜보고 격려해 주는 따뜻한 인생을 실수를 거듭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미야자와 리에의 성숙 영웅이 없는 것이 일본 역사의 특징이라고 했다.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이 지적이 무 색하게 드디어 일본에 영웅이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다카노 하나, 일본 스모계에 4년 만에 탄생한 '일본인 순종 요코즈나(천하장사)이다. 그 동안 하와이 출신 수입 선수들에 의해 점령당했던 일본 스모판은 정말로 오랜만에 단비를 맛 보듯 일본인 요코즈나를 맞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일본 열도에는 끝간 데 없는 환호성과 일본의 자 존심을 회복했다는 안도감이 묘하게 교차되고 있었다. 다카노 하나. 귀티 나는 얼굴에 끝없이 끝없이 인간의 몸을 확대시키는 일본 스모의 스타, 외국 에서 들여온 수입품 스모꾼에 경쟁력을 잃었던 일본 스모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젊은이. 그러나 일본의 이 현대판 영웅은 철저히 사육된 '작은 영웅'이다. 일본의 스모협회와 스모 도장을 이끄는 그의 아버지가 공동으로 합작한 '영웅 만들기'에 의해 태어난 '소영웅'인 것이다. 일본의 스모협회는 그런대로 가능성이 있다고 여긴 다카노 하나를 '스타'로 키우기 위해 치밀하게 공작을 했다. '스모는 싸움이다' '나는 외국인으로서 차별을 받았다'고 입바른 소리를 한 하와이 출 신의 거물 '고니시키'에게 '애물'들만 내세운 대진표로 앞날을 막은 수법 그대로 '황금의 대진표'로 다 카노 하나의 '요코즈나 승진'을 도왔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일본 스모계에서 가장 큰 스모 도장을 가지고 있는 전직 요코즈나 출신 스 모꾼이다. 일본의 스모계는 절대로 같은 도장 출신끼리는 싸우지 않게 되어 있으니 다카노 하나는 정말로 유리한 위치에서 마치 왕자가 왕위를 물려받듯이 '자동으로' 요코즈나가 된 것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다카노 하나는 개인의 실력으로 요코즈나가 된 것이 아니라 '요코즈나'로서 길러진 것이다. 일 년 만에 일본에 가보니 다카노 하나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더욱 뚱뚱해져서 집채 같은 스모 꾼의 몸집을 실감케 했는데, 경기하는 모습을 보니 전보다 많이 노련해져 있었다. 문제는 그의 얼 굴인데 도저히 스물두 살의 젊음과 패기는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었다. 일년 사이 그는 여러 가지 시련을 겪고 직업 스모꾼으로서 '싸움 기계'로 변화한 것이다. 가부키와 마찬가지로 가장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일본 스모계의 규칙과 보호를 받아가며 마침내 요코즈나라는 최고의 위치에 오른 이 젊은이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주 수줍고 내성적인 성 격이라고 한다. 또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방에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독특한 젊은이라고 한 다. 형인 '와카노 하나'가 아주 쾌활하고 씩씩한 보통 젊은이인데 비해 동생인 다카노 하나는 언제 나 사람들에게 한 발짝 떨어져 있는 편이라고 한다. 물론 나는 이 젊은이의 가장 행복한 표정을 알고 있다. 그것은 약 2년 전에 열아홉 살의 탤런트 미야자와 리에와 약혼을 발표하던 기자 회견 때의 모습이다. 분홍색 기모노를 함께 맞춰 입고 손을 꼭 잡고서는 "첫 입맞춤은 언제?" 하고 집요하게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수줍게 웃던 다카노 하나와 리에. 당시 일본 열도는 온통 난리였다. 종합 일간지 역시 1면의 중간 톱을 할애해 '두 유명한 젊 은이의 결합'을 보도했다. 그러나 이 두 젊은이의 사랑은 예상대로 오래가지 못했다. CF스타인 미야자와 리에가 일을 포기 하지 않아서라는 설이 있었으나 원인은 단 한가지였다. 즉 일본 스모협회의 결정이었다. 리에와의 약혼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다카노 하나의 어머니는 기자들에게 "귀여운 리에짱에게 마 음 고생은 절대로 안시키겠다"는 아주 너그럽고 따뜻한 시어머니의 발언을 했다. 그러나 시어머니 인 노리코의 이 이야기는 일본인 특유의, 속마음을 한겹 접어 두고 한 '다테마에'였다는 사실이 나중 에 밝혀졌다. 스모협회 역시 두 젊은이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리에와의 결혼이 '애써 길 러 놓은 일본인 요코즈나의 탄생'에 장애가 된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특히 크리스마스 전날밤 다카노 하나와 리에가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진 축구 선수 미우라와 그 애인과 함께 기자들 앞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며 노는 모습이 보도되자 스모협회는 한마디로 '발칙한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고 한 다. 스모협회의 명을 받든 다카노 하나의 아버지는 다카노 하나에게 리에와 헤어질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일본 스모협회는 어머니라기 보다는 매니저라고 할 수 있는 리에 어머니에게 1억5천만 엔의 위자료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손을 끊는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는 소문이 뒤이어 나왔다. 두 젊은이는 헤어졌다. 잔인한 일본인들은 재미있어 했다. 스모를 그만둔 다카노 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했다. "그냥 돼지잖아요, 먹기만 많이 먹는…" "스모를 그만두면 미야자와 리에 가 방 들고 다니는 것 외엔 할 게 없을 걸요"라고 텔레비전에 나와 마구 웃어가며 잔인하게 말했다. 두 젊은이의 파국은 결코 그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강요된 '가슴아픈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일본 인들은 그저 즐길 뿐이었다. 파혼 기자 회견에서 다카노 하나는 문장 하나조차 제대로 조리있게 말을 못했다. 그저 "그런가 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리에는 "그를 사랑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 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열아홉 살의 나이로는 드물게 성숙하고 침착한 태도로 "사랑했으나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보통 일본 여배우들이 '파국 기자 회견'을 하며 울고짜고 하는 것과 달리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어른스럽게 처신했다. 자신이 다카노 하나를 사랑했던 것은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미야자와 리에는 많은 굴곡을 겪고 성숙한 여성이 되어 있었다. 저열한 일본 매스컴의 장난이 되었던 리에는 '자살미수 소동' '동료 배우와 염문' 등 숱한 화제를 뿌리면서도 여 전히 '여배우'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저 애티 나던 얼굴은 인생이 가르쳐 준 쓰라린 맛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고 총명했다. 사랑을 통해 강해진 성숙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다카노 하나는 '그냥 돼지'가 될 뻔했다가 '요코즈나'가 되었다. 그 소감을 그 는, 노쇠한 젊은이가 되어 그저 어깨가 무거울 뿐이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다카노 하나의 요코즈나 승진 특집이 나가는 그 프로그램에는 미야자와 리에가 출연하는 캔커피 선전이 붙어 있었다. 리에는 묘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한다. "사랑이라는 게 참 어려운 거라니까요." 불행한 젊으니, 요코즈나 다카노 하나를 비웃듯이 말이다. 물결을 거슬러 가는 물고기처럼 『일본은 없다』 출간 이후 일본의 언론들과 인터뷰를 자주 하게 된다. 내가 워낙 인정사정없이 일본을 박살내서인지 막판에 꼭 물어 보는 말이 있다. "그래도 일본에 좋은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 지, 한 가지라도 좋으니 말씀해 주시죠"라고. 그럴 때마다 나는 "역시 일본의 장점은 강인한 여성들 이 있다는 것"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일본만큼 여성에 대한 구속과 억압이 있는 나로도 드문데, 그 가운데서도 두터운 벽을 뚫고 굳세게 살고 있는 여성들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일본에 있을 때 내 친구로부터 한 여자 교장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선생님 은 40년 가까이 교사 생활을 하다가 세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모두 아버지가 달랐고 한번도 정식 결혼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교육자로서의 능력은 물론 인격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분이 어서 별다른 문제없이 명예롭게 교직 생활을 마쳤다는 이야기였다. 또 아주 재미있는 할머니 의사도 있다. 요로 시즈에라는 올해 94세의 이 할머니는 지금도 일본의 옛도시 가마쿠라에서 소아과를 열고 있는 현역 의사이다. 어린이 환자로 찾아왔던 이들이 이제 60 대 후반의 노인이 되어서도 계속 찾아올 정도로 요로 할머니의 병원에는 지금도 단골 환자들이 줄 을 잇고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두 번짼가 세 번째 여의사로 기록되고 있는 기념비적인 인물인데 이 할머니가 살아온 인생은 그대로 한 편의 대하드라마이다. 요로 할머니는 결혼을 두 번 했고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 결혼은 가정이 있는 남자였고 두 번째 결혼 상대는 15년이나 연하인 사람이었다. 연하의 남편과는 정말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냈는 데, 요로 할머니가 52세 때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세 자녀는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였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도쿄 의대에 시험을 보러 갔다. 물론 면접을 하는 교수들은 좁은 의사 사회에서 요로 시즈에 할머니를 잘 알고 있었다. 한 면접 교수가 그 아들에게 "너의 어머니는 사람이 아니란 다. 도깨비란다" 하고 말했다. 그런데 아들 역시 지지 않고 "저희 어머니는 무척 재미있는 분입니 다" 하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요로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산 인생'이라고 간단히 정의했다. 언 제나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멋대로 하고 살았을 뿐이라고 했다. 이러한 그녀의 표현은 한편으로는 일본 사회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그녀가 쓴 '마음대로 멋대로'라는 표현은 물결을 거 슬러 가는 물고기처럼 사회의 구속에 맞서 정면충돌하며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요로 할머니는 오래 사는 것, 본인의 장수에 대해 참으로 감독적인 말을 했다. "지나치게 오래 산 것 같아 장수는 부끄러운 일이다 하는 생각을 했지요. 그러나 결국 인간에겐 오래 사는 것이야 말로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장수는 인간의 예술이지요." 일본이라는 사회에서는 나과 다르면 곧 일탈자로 바라본다. 더구나 여성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 다. 일본 사회의 독특한 억압 구조를 개의치 않고 보란 듯이 산 이 여성들은 사실 겉보기와 달리엄 청난 대가를 치렀다. 오늘의 그 여성, 그 할머니를 바라보면 당당하고 화려하고슨사하지만 그들의 젊은 시절이 얼마나 처절하고 고통과 눈물이 넘쳤는가 하는 데는 곧잘 우리의 생각이 못미치고는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남의 이목에 도전하기 위해 바친 그들의 노력을 우리는 잊고는 한다. 그러 나 어느 셈본보다도 정확한 인간 관계의 결과를 거듭 경험하며 살아온 나는 인생의 셈은 정확하다 고 생각한다. 또 삶이라는 것이 결코 평탄하거나 평온하지 않고 마치 전쟁터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 여성들의 숨은 눈물과 땀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일본 여성들을 포함해서 우리 전세대의 여성들은 일과사랑을 양립시키기 위해 사회에 정 면으로 맞서면서 이겨냈다. 마찬가지로 우리 젊은 세대 여성들은 자신의 인생을 위해 저항하고 거 부해야 한다. 결혼 적령기를 거부하고, 용모로 여성을 채용하는 노예 시장을 거부하고, 남성에 의해 조작된 여성의 이미지를 거부해야 한다. 그뿐인가, 우리는 나이를 거부하고 편견을 거부하고 강요 된 여성의 속성을 거부해야 한다. 이제 강인한 여성의 강인한 시대를 맞이했다. 이제 상식을 넘어 서서 자기의 삶을 최우선으로 놓 는 여성을 기대해 본다. 여성성이 활짝 피는 신세대의 문을 누군가 곧 활짝 열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을 해본 여자는 무서운 것이 없다 구마 가즈코는 오사카의 한 방송국 프로듀서이다. 그녀와 나는 방송 관계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전화 통화를 하는 사이이다. 나와 그녀는 한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한 반년 가까이 함께 방송을 하 다 보니 오래된 친구와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난해 『일본은 없다』의 일본어판을 내는 관계로 오사카에 들른 길에 운 좋게 그녀를 직접 만 날 수 있었다. 나는 원래 '버선 뒤집듯 속을 뒤집어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관동(도쿄) 지방 사람들 보다는 확실하고 솔직한 관서(오사카) 지방 사람들을 좋아했다. 구마 가즈코는 나의 예상 그대로 활달하고 크게 마음껏 웃을 줄 아는 전형적인 관서 지방의 여성이었다. 한국에 가본 적 있느냐고 했더니 그녀가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다. "안타깝게도 가본 적이 없어 요. 사실은 치구하고 한 오 년 전부터 한국 여행을 계획했는데 글쎄 내 친구가 너무나 바쁘게 사는 거예요. 글쎄 가려고 하면 결혼하고 그리고 금방 이혼했지요. 또 그 다음해에 다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지요. 그랬다가 다시 이혼을 했어요. 이제는 둘이 한국 여행을 가보나 했더니 글쎄 일 년 전에는 지치지도 않고(?) 또 미혼모가 됐지요. 그리고 지난 여름에는 또 다시 결혼을 했어요. 한마디로 쉴 틈 없이 사는 거 있지요. 그 친구가 사는 것만 보아도 글쎄 숨이 헐떡거려져요. 이젠 저 혼자라도 한국에 가야겠다 하고 생각 중이에요. 글쎄, 또 아기를 가졌다잖아요." 말을 하는 구마 씨나 나나 우리는 일단 그토록 바쁘게 사는 '그 여성'의 무한한 에너지에 감탄을 했다. "정말 그 친구분 바빴군요. 하지만 저는 솔직히 그 에너지, 끝없는 도전 정신이 부럽네요." 나의 소감에 구마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맞아요, 그것은 대단한 저력이에요. 사실 사 랑을 하고 연예를 하고 그런 것 다 소비이지 낭비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애를 보면 그런 말이 틀리다는 생각이 들어요. 참 지치지도 않고 남자를 만나고 사랑하고 그리고 결혼까지(!) 하고. 그 리고 이혼, 아이도 낳고 게다가 벌써 세번째잖아요. 나는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그 애가 서서히 지칠 줄 알았는데 정반대예요. 오히려 점점 더 기운이 나는 거 있죠. 그 와중에 가게를 두 군데나 더 늘이고 확장하고 참 대단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에요." 오랫동안 방송을 함께 해서 '일종의 동료 의식'이 형성된 우리는 첫 만남인데도 '여자 친구 동지' 로서 '사랑'과 '인생'과 '섹스' 그리고 '일'을 주제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그날 우메다 거리의 조그만 일본식 술집에서 알딸딸하게 취해 우리가 내린 결론은 '진짜 사랑을 해본 여 자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대명제였다. 단순하게 사랑에 바친 그 에너지의 절반만 일에 쏟 아도 안될 일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아주 젊고 앞날이 창창한 여성 가운데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는 것은 너무나 소모적이에요" 하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남자를 만나 그 남자으 전화를 기다리고 온갖 복잡한 심리적 갈등을 겪고 하 는 그 모든 것들이 지긋지긋하고 구질구질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얼마나 사람의 힘을 빼고 녹초를 만드는지 그런 데 쏟을 힘이 있으면 뭔가 창조적인 데 그 에너지를 쏟겠다고 야무지게 말하는 여성 도 보았다. 아니면 오랜 연애에 너무도 지쳐 버려 애인과 헤어진 내 친구처럼 "남자 없으면 참 편 해" 하고 말하는 완전 달관의 경지에 이른 예도 물론 있다. 일단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녀들이 얼마나 고통받았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과연 사랑이 소모적이고 낭비일까? 그들에거 '진짜 사랑을 해보았는가?'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보았는가?' 하고 되묻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자존심도 버리고 이기심도 버리고 그리고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는 사 랑을 말이다. 완전히 눈먼 절망적인 사랑을 해봤는가 말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가진 것이 아 니라 가지지 못한 점을 더 사랑하고 안쓰러워했던 그런 아픈 기억과 함께 한 사랑 말이다. 나는 이른바 '성공한 여성들'을 지켜보며 그들이 모두 대단한 에너지의 소유자라는 점을 발견했다. 그들은 사랑에 완전히 소진해 버려 살아갈 힘조차 없는 여성들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힘과 용기를 배우고 '일'에 대한 발판을 삼은 여성들이었다. 요즘 우리는 여성들이 쓴 자전적인 글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글들에서 공통적으로 보 이는 것은 사랑도 일도 어느 하나 포기하지 않고 바쁘게 사는 여성의 모습이다. 나는 여성들의 수 기나 자서전을 열정을 지니고 열심히 읽는 편인데 읽을 때마다 언제나 새삼 확인하는 점이다. 그들 의 삶에서 사랑과 일 중 어느 것이 먼저냐 하는 순서를 따진다면 언제나 '사랑'이 먼저라는 사실이 다. 철저히 사랑하고 설사 그 사랑의 상대와 상황이 자신을 배신하고 뒤돌아서도 굴하지 않고 그녀들 은 씩씩하게 일어났다. 사랑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한 그녀들은 강해지고 더더욱 기운이 넘쳐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실은 내 경우도 그랬다. 인생이 내게 참으로 고통스럽고 대단한 것을 가르쳐 주려고 작정했는 지 아니면 혼을 내주려고 했는지 정말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사랑에 20대를 보냈다. 그러나 그 사랑을 통해 나는 성장했고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을 만큼 그 몇 배로 용솟음치는 에너지를 얻었 다. 상황이 순조롭고 불리하고를 떠나 모든 사랑에는 공통점이 있다. 즉 사랑은 '투쟁'이라는 점이다. 자기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이다. 자존시과 인내심 그리고 의지의 싸움이다. 그뿐인가, 때에 따라서 는 관습과 인식 그리고 사회에 맞서는 싸움이기도 하다. 결국 사랑을 하는 것은 자신을 단련시키고 시험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한계를 정면에서 맞닥뜨리는 작업이다. 그래서 그 사랑이 이루어지든 혹은 이별로 마감을 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사랑을 해본 사람은 변화한다.'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가고 사랑의 감정도 달라질 수는 있지만, 사랑의 '체험'은 우리에게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남는다. 흔히 많은 젊은 여성들이 사랑과 일을 완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한다. 에너지의 원천은 하나이기 때문에 '사랑'에 모든 정력을 낭비하면 완전히 고갈되어 버려 '일'에 쏟을 에너지가 남아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듯하다. 그래서 '결혼'을 늦추듯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과도 담을 쌓고 살려 는 경향이 있다. 마치 현대인들이 '사랑을 하는 고통'을 두려워해서 '사랑하기'를 회피하듯 말이다. 사랑에 바쳤던 에너지는 환원된다. 그 몇 배의 힘을 지닌 새로운 에너지를 생산한다. 사랑을 한 사람, 인간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을 지닌 사람은 그 사랑으로 인해 더욱 강해지고 성숙해진다. 많 은 사랑을 지치지 않고 했다면 그는 더욱 강한 인간, 강한 여성이 될 것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며 전력투구했던 그 힘이 '일'과 '인생'에 투입될 때 얼마나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는가를 나는 내 경험 에서 확인한다. 한번의 사랑에 기진맥진해 '재시도'를 두려워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사람, 접해 보지 않는 상황, 그리고 미처 느껴 보지 못한 아름다운 감정이 넘치고 있 지 않은가 말이다. 격정적인 사랑을 한다면 전자계산기 액정판에 넘칠 수밖에 없는 무한대의 답을 그 대가로 받게 될 것이다.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사랑을 하는 사람은 대안한 '인간주의자'이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춘 사람이다. 두려움과 이기심을 떠나 '사랑'에 전력투구하면 어떨까? 상대보다 더 많이 더 뜨겁게 사랑하고, 가능하면 지치지도 않고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랑을 상처투성이인 채 끝낸다 하더라도 다시 사랑에 도전해 보면 어떨까? 두 팔을 벌리고 이제 이 세상에 '사랑의 선전 포고'를 해보면 어 떨까? 모든 힘을 다해 사랑하고 그 사랑의 에너지를 생명처럼 키우겠다고, 그래서 그 사랑의 힘으 로 하루하루 성숙하고 강한 여자로 태어나겠다고 말이다. 7. 비죤 오부 자빤 21 위험한(?) 바위에 앉아 근사하게 작게, 찬란하게, 천황을 위하여 더 이상 멍청한 경리부서는 싫다 비죤 오부 자빤 21 위험한(?) 바위에 앉아 근사하게 오자와 이치로는 무척 흥미로운 인물이다. 지금도 일본인에게 누가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을 지녔 냐고 물어 보면 거의 대부분 오자와 이치로를 든다. 그에 대해 다치바나 류 같은 정치 평론가는, 개혁 정치 운운하지만 오자와야말로 일본 금권 정치의 대표적인 인물인 다나카 가쿠에이의 '아이들' 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한다. 그럼에도 '오자와 이치로'라는 이름은 일본의 변화를 꾀하는 상징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 한 오자와의 생각, 21세기 일본을 어떤 나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구상이 담겨 있는 책이 『일본 개 조 계획』이다. 이 책은 오자와가 많은 이들의 자문을 받아 정리한 정책서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오자와는 일본 개혁의 목표를 '일본인의 자립'에 두고 있다. 즉 이제까지 미국의 보호 아래 발전 해 온 비정상적인 의존 관계를 청산하고 일본이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자와는 일본의 자립을 위해 첫째, 일본 정치의 리더십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밀실 정치에서 벗어나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을 명확히 하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그리고 일본이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를 일본 국민은 물론 다른 나라에도 알려야 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는 지방 분권제의 실시이다. 모든 것을 도쿄에 집중시킨 현재의 '일극 중심'을 벗어나 시 골의 몫은 시골에 두어 지방의 자주성을 기반으로 지방 분권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 번째는 규제의 철폐이다. 일본처럼 규제가 많고 안되는 것이 많은 나라는 드물다. 오자와는 경제 활동이나 사회 활동은 그저 최저한도의 규칙만을 설절해 '알아서 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다. 오자와는 이러한 '홀로 서기'가 일본의 진정한 '민주화'를 이룰 것이라고 말한다. 개인이 자유로워 야 국가가 자유로운 법, 따라서 오자와는 일본 국민들에게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의식 개혁을 요 구한다. 오자와는 일본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의 자유를 제대로 주장하지 못한다고 비난하면서 무엇보다도 일본의 가장 큰 문제는 '지도력의 부재'라고 밝힌다. 오자와는 이제 일본은 바야흐로 '정치가의 역할'이 가장 필요한 때를 맞았으므로 강력한 지도력과 정치적 능력을 갖춘 인물을 앞에 내세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이런 오자와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오자와는 일본 국민의 유아성, 무슨 일이든 지도자와 명령이 있어야 움직이는 머슴 근성을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또 정치가들의 무능함과 누구에게도 책임의 소재를 물을 수 없는 일본 정치의 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자와가 꿈꾸는 21세기의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바로 여기에 오자와 이치로의 '혼네 (속마음)'가 담겨져 있다. 오자와 이치로의 목표는 일본을 '보통 국가'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오 자와 이치로의 보통 국가는 그냥 평범한 경제 중진국의 보통 국가가 아니라 사실은 '특별 국가' '강 대국'의 개념이다. 즉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일본의 경제력에 어울리는 수준을 자랑하는 나 라를 말한다. 일본을 가리켜 흔히 '어린이 국가' '상인 국가'라고 말한다. 이는 외교와 군사 관계에는 아무런 신 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돈을 버는데만 전력투구하는 일본의 모습에서 연유한 말이다. 이제 오자와 는 일본이 '정치적 빈곤'을 바로잡아 '보통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밝힌다. 외교면으로는 유엔 중심 외교를 주장하고 있다. 유엔을 개혁해 더욱 강한 유엔으로 만들고 미국 을 유엔에 잡아 두어야 한다고 밝힌다. 오자와는 '문제의 핵'도 유엔에 맡기고 일본은 상비 유엔 대 기군을 두어 세계 평화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자와는 아시아 지역에 일본이 남긴 원한에 대해서는 과거 침략 부분을 성실히 처리하고 아시아 와 '공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책임과 역할을 명확히 해 아시아인들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오자와가 주장하는 핵심은 일본을 '보통 국가'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오자와의 보통 국가 론은 막강한 일본의 경제력에 걸맞는 '초강대국'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즉 '보통 국가'는 오자와의 '다테마에'이고 '강대국 지향'이야말로 오자와의 '혼네'인 셈이다. 오자와 이치롱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미야자와가 총리로 선출될 때 오자와가 미야자와의 면접을 보았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오자와는 이른바 '미국의 노예는 될 수 없다'고 치열한 데모를 했던 '안보 세대'이다. 이 세대는 미국에 대해 '한번은 갚아 주겠다'는 잠재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미국에 대해 숨겨진 적의가 있다. 사실 전후 50년 일본은 '미국 따라잡기'에 국가 적, 민족적 목표를 걸어 왔다. 그래서 일본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와의 50년보다는 일본의 적이자 보호자 그리고 후견인이었던 '미국'과의 50년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제 일본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은 바로 이 안보 세대의 손으로 넘어가 있다. 그래서 일본을 조금 아는 이들은 '안보 세데'와 '풍요롭고 힘센 일본'만 보고 자란 이들이 힘을 합 해 '집단 운동'으로 나아갈 경우 일본의 장래는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자와 스스로 정책 결정의 구조나 상황을 '오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반론'이나 '이 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일본의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오자와는 일본인들이 다섯 가지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말한다. 도쿄로부터의 자 유, 기업으로부터의 자유, 장시간 노동으로부터의 자유, 연령과 성별로부터의 자유, 규제로부터의 자 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오자와가 짚은 이 '자유'는 일본인들의 삶이 어떤 구속 속에 있는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 다. 모든 것이 도쿄라는 거대 도시에서 하달식으로 내려오는, '도쿄 중심' 혹은 '강자 중심'의 명령 체계에 전 일본 열도가 얽매여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장시간 노동과 거부가 통하지 않는 '잔 업'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노동 환경'의 문제가 있다. 동시에 성별에 따른 구조적인 차별 문제가 있 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뭉뚱그릴 수 있는 말은 '규제'라는 말이다. 일본인들은 규제를 좋아한 다. 규제하기도 좋아하지만 규제 당하기도 좋아한다. 누군가가 '하지 말라'고 말해 주기를 기다리 는 국민이기도 한다. 오자와는 책의 서문에서 미국의 그랜드 캐년에서 받은 충격을 적고 있다. 그랜드 캐년에 가보니 일본이라면 당연히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은 물론 철책이 이중삼중으로 둘러져 있을 곳인데 아 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젊은 남녀들이 위험해 보이는 바위에 앉아 데이트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오자와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자신의 안전은 스스로 알아서 '살든지 죽든지' 지키라는 것이다.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국민을 다루는 일본 정부의 허구를 발견 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일본 국민이라면 평생 '위험한(?) 바위'에 앉아 데이트하는 근사한 경 험을 맛보지 못할 텐데 규제가 없는 '미국인'들은 바위에 앉아 근사한 경험을 해본다는 것이다. 이제 일본 국민들은 규제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며, '정치적, 군사적 측면'은 억제당한 가운데 '경 제적 측면'만 비대한 국가 일본으로부터 '균형을 맞춘 나라' 일본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오자와 가 말하려는 요지이다. 오자와의 기준은 '경제 초대국 일본'으로서 정치력, 외교력, 군사력 역시 그 에 걸맞는 수준까지 따라 줘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오자와 이치로가 이야기하는 '보통 국가' '보통 국민'의 나라, 일본 개조 계획의 실제 혼네는 '초강대국 일본'인 것이다. 작게, 찬란하게, 천황을 위하여 다케무라 마사요시는 『일본 개조 계획』의 오자와하고는 완전히 100퍼센트 다른 '21세기 일본'을 지향한다. 그가 꿈꾸는 미래의 일본은 '작지만 찬한히 빛나는 나라'이다. 작은 일본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반짝반짝 빛나는 나라를 지향하는 것, 평화 헌법을 지키고, 생활을 질을 높이는 데 힘을 쏟 고, 지구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 21세기 일본의 목표라고 밝힌다. 그는 팽창주의를 버리고 군사적으 로 커지지 않는 나라가 바로 '작지만 찬란히 빛나는 일본'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의 일본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들은 군사적인 면에서 팽창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지구 환경의 위기를 세계에 호소하 고 스스로 솔선해서 환경을 지키는 평화의 첨병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일본은 지구 환경을 지키는 얼굴을 지닌 세계의 밤하늘에 찬란히 빛나는 별이 되면 어떨까? 세계의 태양이 되겠다는 생각은 이 참에 아예 깨끗이 잊어버리자. 작아도 찬란히 빛나는 나라 일본. 이것이 나의 생각이자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조국 일본의 미래상이다." 다케무라는 학자 가이하라 다케시의 말을 빌려 과거 백년 동안 일본이 빠른 발전을 해 왔던 원인 을 세 가지로 꼽는다. 단일 민족이며, 높은 지적 혹은 도덕적 수준을 가졌으며, 계급 이동이 가능한 평등 사회였기 때문에 빠른 발전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모든 이를 포용하는 '화(和)'의 사 상이 오늘날 일본 경제의 세계적인 성공을 만들어 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후 일본의 모습에 대새서는 비판과 한탄을 금치 못한다. 물질의 향유와 소유에만 급급 하는 서구 문명에 오염되어 '옛 일본인의 아름다움'을 송두리째 잃었다고 비판한다. 다케무라는 일본 사회를 한마디로 '욕망 전개형 사회'라고 규정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뇌물에 관 련된 추문으로 얼룩진 일본 정계를 든다. 또한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와 행정 체제로 일본 정치의 부패는 더욱 심해졌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것이 정치라는 '밀실=정치'의 등식이 성립되어 버렸 다고 한다. 특히 냉전 시대의 유물인 자민당 일당 지배는 냉전 구조가 끝난 지금에는 당연히 붕괴 되어야 하는 시대 착오적인 체제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정치, 경제,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다케무라는 새 일본의 정치적 이념을 첫째, 헌법을 존중하고, 둘째, 침략 전쟁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을 것, 셋 째, 아름다운 일본 열도, 아름다운 지구를 보호하고, 넷째 일본의 문화와 전통의 근본인 일본 왕실을 존중할 것, 다섯째, 자립과 책임을 시대 정신으로 삼아 사회적 공정성이 관철되는 실질 국가를 건설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다케무라의 그럴듯한 '새 일본'의 모습이 '심각한 모순'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다. 그것은 '작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일본'을 지향하고 침략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겠다 면서 다케무라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근본을 '일본 왕실'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불평등 과 차별이 일본의 왕실 제도로부터 나온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군림하는 신'이었던 일본 왕 의 이름 아래 피비린내 나는 침략 전쟁이 치러졌고 인간에 대한 철저한 차별이 행해졌다. 차별이 이유 없는 그러나 잔인한 학살을 낳는다는 것을 일본 왕실은 우리에게 보여줬다. '작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일본 그리고 지구 환경 보호' 운운하는 '세련됨'에도 불구하고 다케무라는 여전히 '일본의 굴 레'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다케무라는 이본 자치성의 공무원을 거쳐 사이타마현 시장 등 지방 정치 경험을 쌓고 51세에 뒤 늦게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다. 만화 주인공인 '무밍파파'라는 그의 별명처럼 고지식하고 수더분한 정치가의 이미지를 팔아 온 사람이다. 그는 이상주의를 쫓는 덜된 정치가로 대중 속에 자신을 심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밍파파'의 '작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나 라 일본'은 보기 좋은 겉치레 말인 '다테마에'에 불과하다는 결정적인 한계를 남기고 있다. 더 이상 멍청한 경리부서는 싫다 "지금까지 일본은 국제 사회에서 다른 나라가 일본의 입장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눈치만 보 아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 일본은 달라져야만 한다. 우리 일본이 국제 사회를 어떻게 구성할 것 인가, 어떻게 지도력을 가지고 참여할 것인가 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구상해 내야만 한다. 이러한 능동적인 자세는 우리 일본의 경제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일본의 경제력을 키워 온 일본 국민들의 자신감 넘치는 표현이기도 하다. 즉 우리 일본이 이제 국제 사회 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표현이다." 이것은 하시모토 류타로의 이야기다. 그는 일본은 경제력 있는 만큼 '지도력'을 갖췄다고 전제한 다. 그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나는 일본이 스스로 놓인 위치를 인식해서 기대되는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 세계를 이끌어 가는 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엄연한 이해 관계나 사고 방식의 차이를 인 식하고 이를 극복해야만 한다. 지금 세계의 안전 보장에 대한 일본의 역할을 생각하면 일본은 상인 국가로서 돈을 내든가, 혹은 최소한의 무기를 지니고 다른 나라와 위험을 함께 나누는 나라가 되든지 아니면 유엔의 이름 아래 완전한 무기를 지닌 '보통 나라'가 되든지 선택을 해야만 한다." 하시모토가 그의 책 『비전 오브 저팬(Vision of Japan)』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 일 본은 더 이상 뒷돈이나 대는 '봉 노릇'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하시모토는 걸프전 때 130억 달러라 는 엄청난 돈을 대고도 아무런 감사의 말도 못 받았던 점(쿠웨이트는 전쟁이 끝난 뒤 세계 주요 신 문에 전쟁 때 도와 준 나라에 대한 감사의 글을 실었는데 일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을 지적하면서 이제 일본은 더 이상 세계 각국의 청구서를 받고 돈을 내주는 멍청한 '경리부서'는 되지 말자고 강조한다. 하시모토는 일본의 '전방위 외교' '유엔 중심 외교'를 비난한다. 하시모토는 이제 일본은 일정한 구역을 정해 돈을 대주고 그 대가로 돈을 댄 지역에서 리더쉽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시모토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일본의 모습은 '자기의 발로 설 수 있는 나라'이다. 하시모토의 표현 대로 하면 아직 일본은 '독립국가'라고 할 수도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하시모토 류타로는 스스로의 발로 일어서는 책임질 수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힘을' 지닌 강대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시모토의 이러한 생각은 모순 덩어리 그 자체이지만 일 본인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즉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이 일본을 점령하려고드는 서구 열강에 대해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생쥐'로서 고양이에게 달려든 전쟁이라는, 일본인 특유의 역사관의 일직선상에 있다. 마치 당하지 않기 위해서 침략했다는 아주 희한한 논리 가 이제 21세기 일본의 강대국론에도 숨어있는 것이다. 하시모토는 일본이 스스로 책임지는 국가가 되려면 국제 질서 속에도 새로운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뜻에서 일본이 유엔 안전 보 장 이사회에서 상임이사국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한마디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한다. 일본 이 유엔의 살림살이에서 두 번째로 가장 많은 돈을 대는 나라인 만큼 당연히 일본이 그 몫을 찾아 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논리는 하시모토의 '정부 개발 원조'에 대한 생각의 일부이다. 하시모토는 '돈이 많은 일본'이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이 돈을 원조해 주는 지역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기득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듯이 유엔에서도 역시 '돈을 댄 대가'를 정확하게 계산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아마도 하시모토의 이런 생각은 가장 일반적인 일본인의 사고를 대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초강대국가 일본'이라는 '혼네'를 감춘 오자와의 '보통 국가론'은 일본인에게 조금은 부담스러운 명 제이고, 다케무라 마사요시가 내세우는 '작지만 찬란히 빛나는 일본'은 이미 '작고 초라한 일본'에 넌 더리가 난 일본인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 그러나 '돈을 댄 만큼' 계산을 해서 '일본의 몫'을 챙 기자는 하시모토의 주장은 '실리적인' 측면에서 보통 일본인들에게 잘 먹혀들어갈 수 있다. 하시모토는 차기 총리감으로 꼽히지만 동시에 '절대로 총리가 될 수 없는 인물'로도 꼽히고 있다. 어떤 이들은 하시모토가 지닌 정책적 모순을 들어 '가부키 배우'와 같다고 몰아세우는 이도 있다. 하시모토는 자신의 책 『비전 오브 저팬』을 두고 '자신이 한 말의 집대성'이자 '가슴에 담은 정책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책에서 아시아와의 유대를 강조하면서도 '아시아 각국'에 대해 '지도권' 을 갖겠다고 이야기한다. 유엔 외교를 비난하고 의미 없다고 싸잡아 폄하면서도 '그래도 돈을 댔으 니' 상임이사국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환경 보존국으로서 일본의 국제 공헌을 소리 높여 요구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절대로 '공돈'은 댈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시모토라는 일본의 정치가는 일본인에게 세 개의 마음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혼네라고 하는 드러내지 않는 진짜 마음, 입으로만 이야기하는 겉치레인 다테마에, 그리고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 를 덮고 '사실과 다른 것을 주장하는' 마음, 이 세 마음이 하시모토에게는 전형적으로 겹쳐져 있다. 여러 가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일본적인 사고만을 드러내고 있는 하시모토의 21세기 일본은 그래서 탐욕스럽고 미래가 없는 삼중 인격 일본의 진짜 얼굴이다. 비죤 오부 자빤 21 일본은 언제나 21세기를 이야기한다. 왜? 21세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부지런히 국가 정책을 세우고 국가 홍보에 돈을 쓴다. 물론 일본의 국가 홍보는 일본을 잘 모르는 나라를 대 상으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과거를 모르는 나라에 대해 '성공적이고 평화적이며 예의 바른' 일본을 알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제 일본은 '가진 나라'로서 감당할 수 없는 흑자와 최고를 자랑하는 기술, 그리고 일본에 대해 국제적인 역할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힘입어 경제력에 버금가는 '힘'을 키우려 하고 있다. 일본의 21 세기의 목표를 말하자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정치 대국으로서의 일본이다. 일본이 지금과 같은 '상인 국가'로 남느냐 아니면 '정치 국 가'로 나아가느냐는 지난 몇 년 동안 일본 사회의 가장 큰 이슈였다. 이제 일본은 어느 정도 입장 정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인 힘을 지니지 않고 미국의 영향력 아래 '돈벌기'에 온 힘을 기울 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상인 국가론'보다 오히려 '상인 국가'로서 일본이 계속 나아가기 위해 서는 '정치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좀더 설득력을 갖기 시작했다. 냉전 구조의 산물이었던 일본 자민당 일당 지배를 종식시키고 일본의 경제는 '다시 태어나기' 위 한 숨가쁜 개편 작업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는 궁극적으로 '일본의 자립'을 위해 유엔 안전 보장 이 사회의 상임이사국에 진출한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자리하고 있다. 두 번째는 군사 대국으로서의 일본이다. 일본은 현재 세계 각국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 가면서도 플루토늄을 다량으로 수입하고 있다. 일본은 에너지원이 부족해서 '에너지원 충당'이라는 이유를 대 고 있지만 이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에너지'가 진짜 목표라고 한다면 플루토늄보다 값이 싼 우라늄을 수입하는 쪽이 훨씬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경제 대국이라는 한 분야의 금메달에 만족 할 수가 없었던 일본은 이제 군사적으로도 좀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어느 의미에서는 '핵무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식까지도 보이고 있다. 즉 강대국이 되 기 위해서는 핵을 보유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생각과 핵을 보유한 14억 인구의 강대국 중국에 맞 서는 '견제'로서 반드시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세 번째는 문화 종주국으로서의 일본이다. 막강한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영향력 없는 국 가'로 남아 있는 이유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일본은 얼굴이 없다'라고 진단한다. 브랜드 국가, 상품 국가라는 일본의 별명대로 일본은 물건만 팔 뿐 '일본의 문화'를 팔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미국이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바로 코카콜라, 맥도널드, 마돈나 그리고 디즈니 만화로 대표되 는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 일본은 '일본의 존재'를 알리려고 한다. 무역 흑자를 밀실에서 즐기면서 '소니'라는 이름을 참 잘 지었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던 데서 소니가 일 본 회사이고(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 어린이의 80퍼센트가 소니를 미국 회사로 알고 있었다) 일본이 얼마나 많은 분야에 진출해 있는지 그 '얼굴'을 익혀 주고자 하는 것이다. 8. 베일을 쓴 추녀 트로이의 목마 쉽게 삽시다 예쁘게 더욱 예쁘게 사면 된다 융단 폭격 유혹× 자극 = 능욕 베일을 쓴 추녀 공격이 최상의 방어다 트로이의 목마 "연민의 이름, 윤희----폭풍에 찢겨진 열일곱 해를 살아낸 그러나 묘하게 솔직하고 신비로운 전갈 좌의 소녀…. 그녀는 카리스마적이다."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이 카피는 「어린 연인」이라는 영화의 선전 문구이다. 나는 이 영화 광 고를 보고 선전 문안이 조금 이상한 것도 거슬렸지만 너무나 '일본적'이라는 것에 마음이 걸렸다.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별자를 끌어들이고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 외국어를 갖다 붙이는 것이 완전 '일본형'이다. 이 「어린 연인」이라는 영화는 이미 국내의 한 신문에 그 내용이 일본 후지 텔레비전의 드라마 를 모방한 것이라고 해서 독자 투고가 있었던 작품이다. 그 독자 투고는 어떻게 일본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그대로 베낄 수 있으며 사제지간의 사랑을 다룬 작품을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만들 필요 가 있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언제나 신문의 독자 투고란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는 나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구나' 하며 반갑게 그 글을 읽었다. 나는 일본에 있을 때 「어린 연인」이 란 영화의 원조격(?)인 「고교 교사」란 연속극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후 「어린 연인」을 감독했던 분이 앞 글에 대한 반박문을 투고해 왔다. 그 감독은 일단 「어린 연인」이 일본의 「고교 교사」라는 연속극의 모방이라는 점을 솔직히 인정했다. 그러 나 자신이 일본에 있으면서 그 연속극을 보며 '세상에 이렇게 진솔한 이야기가 있구나'하고 감탄했 으며 굳이 일본에 대해서만 우리가 베끼면 안된다는 인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놀 란 것은 굳이 '일본 것만 베끼면 안된다는 사고 방식은 이해할 수 없다'라는 내용보다도 그 감독이 '세상에 이렇게 진솔한 이야기가 있구나'하고 생각했다는 부분이었다. 그 감독은 여행중에 그 연속극을 보았다고 했는데 도대체 몇 편(일본의 연속극은 대개 12회분으로 다 보려면 적어도 석 달은 걸린다)을 보았으며 문제는 정말로 그 「고교 교사」라는 작품을 제대로 일본 말을 알아 들어가며 보았는가 하는 점이었다. 나는 그 연속극을 보면서 쓰레기 같다고 생각했 기 때문이다. 정말로 「고교 교사」라는 연속극은 일본 텔레비전의 현주소를 말해 주는 '선정적인' 프로그램이 었다. 선생님과 사랑에 빠지는, 사고방식이 뒤죽박죽인 주인공 역은 원래 미소녀 탤런트로 알려진 '아츠키 아리사'가 맡을 예정이었으나 지나치게 작품이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본인이 거 절해, 신인 '사쿠라이 요오코'에게 넘어 갔을 정도였다. 일본의 텔레비전에서는 사제지간의 사랑쯤 은 '특이한 소재'에 들어가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자극적'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도 없다. 그러나 「고교 교사」라는 작품에는 조각가인 친아버지가 친딸을 상습적으로 범하고 여주인공은 공격적인 자세로 선생님에게 접근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온갖 등장 인물들이 나와 서로 칼로 찔러 죽이고 질투하고 음모를 꾸미는 무시무시한 일상 생활을 벌인다. '지존파'와 '온보현'이 수시로 등장 하는 것은 물로 '성수대교 무너진 것'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수많은 파괴 장면이 화면을 붉은 피로 물들인다. 모든 것을 '좀더 자극적으로 과잉 묘사'하는 게 일본의 텔레비전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단 골 메뉴인 '근친상간' '처절한 사랑' '불륜' '강간' 등 4요소가 모조리 들어 있다 하여 관심을 끈 초 히 트작이었다. 일본에서 나는 그 드라마를 보며 우리 나라에 이러한 지저분한 드라마가 없다는 현실에 감사했다. 한국인인 내게 그 드라마는 재미있고 흥미있다기보다는 일본인의 변태성과 잔혹성을 배우는 기회였 고 오히려 먹은 것이 올라올 정도의 역겨운 연속극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술성' 등의 단어에는 아 예 관심도 없는 연속극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아름답고 진솔한 이야기'라고 느꼈다니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얼마 전에 있어 우리 나라의 한 영화사 대표를 만난 일이 있었다. 이른바 신세대 영화를 만들고 있는 그분은 알고 보니 일본에서 히트를 한 「101번째의 프로포즈」 란 텔레비전 연속극을 번안해 역시 「어린 연인」식으로 국산 영화로 만든 분이었다. 물론 제목도 똑같이 「101번째 프로포즈」였다. 그분은 그 영화를 로열티를 지불하고 들여왔다. 이 이야기는 일본 언론에서 '한국 영화계에서는 처음으로 로열티를 지불하고 사 갔다'해서 꽤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워낙 열받기 좋아하는 나는 생전 처음 뵌 분인데도(게다가 영화에 대해 아주 근본적인 열정을 지 닌 좋은 분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냐'고 다짜고짜 물어 보았다. 대단치도 않은 일본의 텔레비전의 드라마를 굳이 들여와 한국식으로 살짝 바꿔 같은 제목에 같은 주제가로 '일본 영화 풀빵'을 만들어 그렇게까지 돈을 벌 필요가 있느냐가 내 말의 요지였다. 그분 은 사실은 여러 군데에서 비난을 받았다며 일본에 '로열티' 조로 준 돈은 단돈 '백만 엔'이라고 애써 강조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으면서도 나는 그 '백만 엔'이라는 돈에 충격을 받았다. 거저 준 것이 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단돈 1엔도 바르르 떠는 '경제 동물' 일본인들이 왜 얼마든지 챙길 수 있는 막대한 원작료를 포기 하고 단돈 백만 엔이라는 헐값에 넘겼을까? 일본은 우리 나라 영하사가 원작료를 지불하지 않겠다 고 했어도 혼쾌히 오케이하지 않았을까? 사실 일본 영하계에서 백만 엔이라는 돈은 푼돈에 불과하 기 때문이다. 기술 이전을 해 달라는 우리에게 일본은 지금까지 막대한 '로열티'를 요구했다. 또 막상 로열티 문제가 해결됐다 하더라도, 일본 기업은 기술 이전은 정부가 결정할 것이라고 떠넘겼고, 일본 정부 는 민간 기업이 보유한 기술을 가지고 정부로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일본 처럼 수직적인 사회에서 실로 있을 수 없는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일본은 영화를 비롯한 대중 문화의 개방에는 그토록 너그러울까? '영상 산업 시대' '저 작권 시대'에 왜 일본은 '기술 이전은 돈 받고도 못해주겠다'면서도 '대중 문화는 거저 해주겠다'고 나오는 걸까? 그것은 일본 대중 문화의 시장 개방을 막고 있는 한국에서 그 빗장을 끄르게 만들겠다는 목적 때 문이다. 일본의 대중 문화를 한국에 들여보내겠다는 것은 일본의 오랜 숙원 작업이다. 이 국가적 인 숙원 사업을 위해 일본은 언론과 정부와 기업이 똘똘 뭉쳐 일을 추진하고 있다. 문화적인 주도 권을 쥐겠다는 것은 지금 일본 최대의 국가적 목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왜 아직도 막강한 영향력과 힘을 지니고 있을까? 그것은 '미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그토록 강한 프랑스조차도 머리를 뒤흔들 정도로 미국 문화의 '화끈함'을 온 세계인에게 맛들이게 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친근함, 자극, 쾌감은 마치 코카콜라의 맛처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시민'이라는 판짜기를 이루어 놓은 것이다. 미국의 상품이 최근 고전을 한다 하지만 여전 히 미국은 '미국'이라는 나라로서 우리에게 중량감을 지니고 존재한다. 그러나 일본은 정반대이다. 일본은 상품만 있지 '문화'가 없는 것이다. 일본은 세계 각국에 '일본' 이라는 나라가 아니라 여전히 '상품 공장' '브랜드 메이커'로서만 알려져 있다. 어는 구역에도 일본 의 얼굴은 없다. 한 예로 미국의 어린이 가운데 '소니'가 일본 제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는 겨우 15퍼센트에 불과했다는 보도가 나온 적이 있다. 처음 엄청난 무역 흑자를 내고 낑낑 매던 일본은 이를 너무나 기쁘게 생각했다. 일본인들은 돈만 벌면 됐고 미국인에게 자연스럽게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로 포 장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걸프 전쟁에서 웬만한 나라의 일년 예산과도 맞먹는 130억 달러를 쏟아 붓고도 쿠웨 이트로부터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못 들은 일본은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기에 이르렀다. '돈만 있으면 뭐하나?'라는 아주 초보적인 질문이었다. 땅부자가 엄청난 돈을 벌어 상류 사회에 진출했는 데 완전히 '돈줄' 취급밖에 못 받고 한술 더 떠 '돈밖에 없는 너를 끼워 주는 것이 어딘데' 하는 대우 를 받는 것과 같다. 결국 일본은 돈에 걸맞는 힘과 영향력을 원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유엔 안보리 상 임이사국 진출'과 '군사 대국화' 그리고 '문화적 주도권'을 쥐겠다는 3대 목표를 정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오늘 '얼굴'을 드러내고자 노력한다. '소니'가 일본 회사라는 것을 오히려 미국 텔레비전에서 선전한다. 일본풍의 색감, 신비한 전자제품, 일본의 전자제품인 점을 이제는 강조한 것이다. 이제 일본은 편리한 일본 가전제품에 익숙한 이들에게 '일본의 문화'를 길들이고 맛들에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 홍보 정책'에 애쓰고 있는 마당에 「어린 연인」과 「101번째 프로포즈」를 알아서 한국판으로 내겠다는 '한국인'들이 일본인들로서는 얼마나 고맙고 예쁠 것인가? 어렵고 두터운 한 국 시장에 어떻게든 머리를 디밀어 보겠다는 그들에게 '저기 뒤로 가면요, 쪽문이 있어요' 하고 친절 히 안내해 준 꼴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일본 기술을 들여오겠다는 우리 기업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않으 면서 왜 '문화'를 들여오겠다는 것은 문제삼느냐고, 그러나 문화는 '기술'이 아니다. 문화는 정신이 다. 문화는 관습이며 역사이며 사물을 보는 방식인 것이다. 문화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 어'이다. 어떻게 우리의 문화가 일본의 문화를 모방하고 베낀단 말인가? 그토록 우리의 문화가 열 악하고 형편없고 조잡하고 천박하단 말인가? 우리가 '일본 대중 문화의 시장 개방'을 앞두고 걱정하고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일본 문화'의 영향 력이 아니다. '너무나도 자극적인 선홍색 빛깔'이 아니다. 정말로 걱정해야 할 것은 「고교 교사」 를 보고 '너무나도 진솔한 영화'라고 감탄을 하며 「어린 연인」이라는 영화를 만드는 '문화 제작자' 들의 역사에 대한 무지, 자신의 일에 대한 망각 그리고 우리 관객에 대한 무책임이다. 쉽게 삽시다 일본 지하철에서 겪은 일은 지금도 생생하게 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다. 내가 앉아 있던 맞은편 에 자리가 나자 한눈에도 기업체의 중견사원으로 보이는 40대 중반의 남자가 앉았다. 그는 이어 무 거워 보이는 007 가방을 열었다. 나는 당연히 경제학 서적이나 아니면 회사의 서류겠거니 했다. 그러나 그가 꺼낸 것은 마치 사전처럼 두꺼운 만화책이었다. 그 순간의 당혹스러움이라니. 그러나 그후 그와 같은 일을 하도 수없이 목격했기 때문에 이제는 일본의 어른들이 만화를 보는 일이 내게 는 조금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일본은 만화 왕국이다. 일본의 전체 출판물 가운데 만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30퍼센트에 이른다. 우리가 이름을 알 만한 유명한 출판사들은 거의 90퍼센트가 만화 출판을 하고 있다. 한 예로 일본 의 고단샤라는 대형 출판사는 만화 출판으로 많은 돈을 벌고 있는데, 이 돈으로 이른바 '양서 출판' 에 투자하고 있다. 어디에서고 마치 청량음료를 사듯 살 수 있는 것이 일본의 만화이다. 한 해에 공식적으로 출판 시장에 쏟아지는 만화는 자그마치 15억 권이다. 이는 양적으로 같은 만화 왕국을 자부하는 독일을 완전히 제쳐 버리는 숫자이다. 즉 일본인은 한 해에 한 사람당 적어도 열두 권의 만화를 본다는 이 야기이다. 이미 책방을 벗어나 거리의 가판대나 편의점에서 마치 청량음료처럼 만화를 살 수 있을 만큼 일본인들에게는 만화가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일본인에게 만화는 가장 빠른 '국제화의 상징'이자 '자기 표현의 수단'이며 '정보원'이다. 동시에 '꿈과 쾌락의 수단'이기도 하다. 일본인에게 '국제 상품'으로서 문화를 팔게 한 것은 다름아닌 만화 였다. 우리 역시 텔레비전이나 소년 잡지를 통해 잘 알고 있는 「우주 소년 아톰」은 바로 일본 문 화의 자랑스러운 첫번째 '국제화'였다. 이 「우주 소년 아톰」은 우주 시대의 개막을 눈앞에 두고 첨단 기술과 인간의 '함께 사는 삶'을 주제로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 준 작품이었다. 어떻게 보면 '섬나라 일본'을 탈피해 '세계로, 우주로'를 담은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이 만화의 저자인 데츠카 씨는 '만화 문화'라는 신세계를 전개했으며 만화를 통해 작가가 이 세상 에 대해 그리고 시대에 대해 '자신의 사상'을 말할 수 있다는 일본 대중 문화의 국제성을 보여주었 다. 특히 이 「우주소년 아톰」을 보고 자란 일본의 이른바 '베이비 붐 세대'는 만화를 자신의 중요 한 '표현 수단'으로 삼게 되었다. 만화를 보며 자란 세대는 커서도 여전히 만화를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만화 문화의 힘이 라는 것은 대단하다. 이른바 셀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만화 잡지(만화 전문지?)의 절반이 백만 부 이상의 판매 부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또 유명한 인기 만화가의 만화책이 면 초판에 백만 부의 예약이 들어올 정도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70년대에는 운동선수 그리고 80 년대에는 아이돌 가수(청소년들의 우상인 연예인 등) 그리고 90년대에는 인기 만화의 캐릭터를 그리 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아닌게 아니라 일본에서는 인기 만화가는 '스타' 이고 대중에 대해 엄청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또한 무엇이든지 쉽고 간편하게 그리고 자상하게 알기를 원하는 일본인들에게 만화는 중요한 '정 보원'이자 '가정교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일본 경제 신문사에서 펴낸 만화 『일본 경제 입문 1부』가 공전의 히트를 한 것을 계기로 주식, 법률 그리고 유통문제까지 해설판 '비즈니스 만 화'가 붐을 이뤘다. 그뿐 아니라 현대 사회와 문명, 경제나 정치의 움직임을 주제로 한 '시사 만화' 역시 완전히 고정적인 독자를 확보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약 3백만 권이 팔린 것으로 알려진 만화 『일본 경제 입문』은 모두 네 권으로 된 전집인데 독일어판과 영어판까지 나와 일본의 수출 상품 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돈에는 국적이 없다고 말을 하지만 만화에도 장벽은 없었다. 교과서는 물론 학습 부 교재로 만화가 채택되는 등 한마디로 '공인된 표현 양식'으로서 일본의 만화는 확실한 시민권을 얻 었다. 만화가 일본 문부성의 교과서에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1983년이었다. 국어 교과서를 시작으 로 일본의 역사를 만화로 그린 것이 부교재로 추천되었다. 지난 1990년 일본의 중학 1년생을 위한 『신판 중학 국어』에는 작가의 에세이에 만화가 한 쪽에 실린 것은 물론 중학교 2학년 영어 교과 서에도 만화가 등장했다. 일본의 이러한 만화 붐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에세이 만화'와 '레이디스 코믹'(숙녀 만화)이라는 분야이다. 이들 만화의 독자는 물론 여성과 어린이다. 특히 '에세이 만화'라는 말을 만든 사쿠라 모모코의 『치비 마루코짱』의 주인공 마루코는 '오싱'에 버금가는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지금으 로부터 약 20년 전의 일본을 무대로 한 이 만화의 주인공 마루코는 마치 실제로 살아 있는 인물처 럼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다. 별명이 마루코인 아주 평범한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이 만화는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자매로 이뤄진 한 평범한 가정의 일상을 그린 것으로 작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 만화는 무엇보다도 홈드라마의 새로운 영역을 만화에 담았다는 호평을 받았다. '레이디스 코믹'은 또한 일본 만화의 역사를 보여주는 바로 순정 만화를 읽었던 소녀들이 이제 직 장 여성과 가정주부가 되어 이 만화의 독자층을 이룬 것이다. 이 레이디스 코믹 시장은 일본 만화 의 새로운 시장으로서 십년 전부터 폭발적인 증가를 해 왔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큰 만화 잡지 만 50개로 지난 1988년도에는 자그마치 1억 부를 넘어섰을 정도였다. 이 레이디스 코믹은 작가가 당연히 여자이고 직장 여성들이 일상 생활에서 겪는 좌절이나 스트레스, 감상 등을 여성의 눈으로 아주 대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이 레이디스 코믹은 포르노 영화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여 성의 섹스 문제를 과감하게 그리고 있다. 이 레이디스 코믹은 미국의 여성들이 즐겨 읽는, 이른바 로맨틱 소설이라고 불리는 '페이퍼 북'과 같은 것이다. 일종의 욕구 불만의 해소 수단으로서 '멋진 남자'와 '황홀한 섹스' '숨막히는 우연'으로 점철되는, 말 그대로 읽고 버리는 책인 것이다. 그러나 레이디스 코믹을 두고 한 일본 여성은 '인생 교과서'라고 표현을 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욕구 불만 해소용이 아니라 책보다 더 알기 쉽고 실질 적으로 인생을 가르쳐 준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여성의 이야기는 일본의 만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진입했음을 알려 준다. 일본의 만화는 비즈 니스 만화 붐과 함께 전문 만화 시대를 열었다. 만화 캐릭터의 깊이도 꽤 있으며 문학과 다큐멘터 리까지 만화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물론 근친상간과 잔혹한 폭력을 다루고 변태적인 일본인의 성을 주제로 한 저질 만화의 영역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왜 일본에서 이토록 만화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답은 간단하다. '만화는 알기 쉽고 읽기 쉽기 때문이다.' 복잡한 책 한 권을 읽는 것보다는 알기 쉽고 간단하게 요점을 일러 주는 만화를 찾는 것은 '방법론은 어떻든 결과의 효율'을 더 우선하는 일본식 사고에 딱 떨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만화가 지닌 깊이 있는 호소력과 순간적인 영향력은 텔레비전을 능가할 정도이다. 강력한 무엇인가에, 강력한 누군가에 이끌려 가는 것을 좋 아하는 일본인들에게 만화라고 하는 매체는 '일본식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어떤 학자는 일본인은 권력자가 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무척이나 조작하기 쉬 운 국민이라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일본인이 그렇게 관동 대지진 때 헛소문을 퍼뜨려 '한국인 사냥'에 나서게 한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일본은 세계화 전략의 하나로 '문화 수출'을 내세우고 있는데, 헐값에 수출되는 만화 영화가 그 전위대 역할을 맡고 있다. 일본이 추구하는 '군사 대국화' '정치 대국화'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에 의해 만화의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자위대 해외 파병을 다룬 만화가 등장하는가 하면 옛 날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미화하는 만화도 속속 나오고 있다. '알기 쉽고 읽기 쉬운' 일본 만화는 그 옛날 권력자와 마찬가지로 일본인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 치고 있다. 만화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에게 일본의 만화 주인공들은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인생을 가르치기까지도 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강항 영향력을 받는다. 일년에 15억 권이 쏟아지는 일본 의 만화, 그리고 여기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기만 하는 일본인들. 나는 만화 왕국 일본에서 '21세기 일본'의 초상을 본다. 예쁘게 더욱 예쁘게 얼마전 일본의 뮤지컬 극단 '사계(四季)'가 한국 공연을 했다. 나는 그 공연에 대한 우리 나라 언 론과 문화계의 반응이 궁금했다. 오랜 역사의 극단 사계는 아사리 게이타라고 하는 유명한 제작자 겸 연출자가 만든 일본 뮤지컬의 독보적인 극단이다. 일단 이 극단 사계 뮤지컬의 주인공이 되면 출세는 보장되며 간객에게 인기 있는 '스타'가 된다. 극단 사계는 효율적인 프로듀서 시스템으로 많 은 배우를 길러 냈고 수많은 레퍼터리를 개발해 냈다. 어쨌든 일본 연극계에서 극단 사계의 역할과 몫은 엄청나게 크다. 극단 사계는 우리 나라 공연을 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공연장은 '국립극장'으로 하겠다고 고집 했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가 많은 한국 관객을 고려하고 '왜색'을 풍기지 않겠다는 의도 아래 「지 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선정했다고 한다. 나는 차를 타고 달리면서 너무 많지도 않게 너무 적지도 않게 '적당하게' 나붙은 현수막을 보았다. 그 현수막은 일본의 뮤지컬 극단 사계가 한국 공 연을 한다는 냄새는 전혀 풍기지 않았다. 그저 관심 없는 사람이 본다면 한국의 보통 극단이 서양 뮤지컬을 하는구나 할 것이다. 다만 보통 뮤지컬 공연과 달리 일본 문화원을 비롯한 몇몇 굵직한 후원이 붙은 것이 다를 뿐이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고 우리 나라 언론과 연극인들은 흥분했다. 우리 나라 뮤지컬 수준은 아직도 멀었다며 일본 뮤지컬의 숙련도, 멋진 무대장치, 배우들의 연기를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이어 언제나 하는 이야기, '우리 나라에 일본 문화가 개방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큰일 났다'하는 걱정으로 이야기를 맺었다. 나는 그 공연을 보지 않았지만 극단 사계의 다른 공연은 일본에서 몇 편 본 적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이향란」이었다. 이향란은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진 중국의 여배우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야래향」이라는 노래로 한 시절을 풍미했던 그녀는 섹시한 용모에다 춤과 노래에 능한, 말 그 대로 '탤런트'이다. 그녀는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인'이 사실이 탄로나 간첩 혐의로 고초를 겪기도 한 인물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일본에 돌아온 이향란은 '일본 참의원'의 의원님이 된다. 각종 분과위를 섭렵하며(?) 정치인 노릇도 한다. 물론 이 뮤지컬은 일본에서 대 히트를 했다. 나는 왜 우리 나라 문화계 인사들이 극단 사계의 뮤지컬을 보고 입을 딱 벌렸는지를 잘 안다. 극 단 사계의 뮤지컬이 예쁘기 때문이다. 극단 사계는 모든 연극에 일본 백화점이 상품을 포장하듯 온 갖 치장을 한다. 예쁘고 귀엽고 깜찍하게 말이다. 하도 앙증맞아 가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일본 물건처럼 극단 사계의 뮤지컬은 전형적인 '일본제'이다. 그러나 일본인 가운데도 극단 사계의 '예쁘 게 더욱 예쁘게'에 싫증이 난 이들은 극단 사계의 '구미기'를 강도높게 비난하기도 한다. 엄청난 역 사의 무게를 지닌 비극도 일단 극단 사계의 손을 거치게 되면 '귀여운 참새의 눈물'이 되어 버린다 는 것이다. 그선은 「이향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향란」은 한 여성이 일본 침략주의의 희생양으로 서 짓밟히는 역사의 그늘을 묘사해야 했다. 동시에 이향란이라는 여성의 사랑(그녀는 수많은 남자 들과 사랑을 했는데 그 가운데는 유명한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도 있었다)도 참으로 감동적일 수 있 었다. 그러나 「이향란」은 그 엄청난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고 그저 예쁘고 절도있는 연습을 많이 한 뮤지컬 한 편을 선물했을 뿐이었다. 나는 뮤지컬을 보고 나서 '참 좋은 소재였는데' 하는 안타까 움을 느꼈다. 마치 일본의 여성 국극인 다카라즈카의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보고 난 느낌이었 다. 극단 사계는 「이향란」의 중국 공연까지 시도했다. 본토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서의 공연에 대 한 극단 사계의 우려(중국 관객들이 공연 도중 계란을 던지거나 공연을 저지할까봐 걱정했다고 한 다)와는 달리 중국 공연도 무사히 끝냈다고 일본의 매스컴은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극단 사계의 역할은 이렇게 뚜렷하게 정해져 있다. 일본의 만화 영화처럼 이 시대에 일본을 홍보 하는 선전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일본의 기업을 홍보하고 때로는 일본이란 나 라의 과거를 덮고 미화하는 노릇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사면 된다 일본은 커다란 변화를 맞고 있다. '경제 대국 일본'의 현재는 불안하다. 어떤 이는 '앞이 안 보인 다' 혹은 '21세기가 두렵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전에 일본에 가서 만난 일본 우정성의 한 관 료는 '정보 통신 분야'에서 일본의 뒤처짐을 걱정하고 있었다. 멀티 미디어 분야에서 일본은 국제 통신 가입자 수가 한국은 물론 말레이시아보다도 뒤처지고 있다며 걱정이 끝이 없었다. 당연히 영 어를 기본으로 통신을 하니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에 기본적으로 약한 일본인으로서는 가입을 꺼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조업이 기반이 된 일본의 경제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 서 있다. 외국으로부터 값싼 원료를 사다 가 역시 싸구려 노동력을 들여 물건을 대량 생산해 낸 일본의 제조업은 일본 경제를 흑자로 만들었 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 제조업의 시대는 갔다는 점이다. 아주 간단하게 말해 '제조업'이라는 이름 아래 만들어 낼 물건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위기 의식에서 일본은 문화에 대한 투자로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마치 일본은 떼돈을 번 재벌 회사가 으리으리하게 지은 새 사옥에 거창한 조형물을 세우고 엄청난 벽화 를 만들어 놓은 것처럼 일단 '문화'를 사들이는 데 모든 힘을 기울여 왔다. 고호의 「해바라기」를 사상 최고의 값으로 사들이고 전세계의 조각품, 미술품을 모조리 쓸다시피 사들였다. 한 예로 나는 내 사무실이 있던 NHK 근처의 '분카무라'(문화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일본의 백화점 재벌 기업인 도큐 그럽이 만든 문화 센터임)에서 열린 '밀레 전'을 가본 적이 있다. 전세계에 흩어 져 있는 밀레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았다는 것인데 사실 밀레라는 화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 만 얼마나 많은 작품이 모였나를 보러 갔다. 역시 밀레는 일본인에게 아주 인기가 있는 화가였다 (일본인들은 지극히 대중적이고 알기 쉬운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줄을 늘어선 관객들을 뒤 따르던 나는 밀레 작품의 소장에 관한 설명을 읽으면서 한마디로 충격을 받았다. 전시된 작품의 거 의 90퍼센트가 일본의 개인 소장가 혹은 일본 전국의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결론 적으로 일본은 일본인이 지니고 있는 밀레 작품만 가지고도 그 커다란 분카무라 미술관을 다 채우 고도 남는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현상을 놓고 수출 흑자로 남아도는 '엔화'를 주체할 수가 없어 고가의 미술품을 투기성으로 사들였다고도 볼 수 있으나 그 이면을 보면 일본이라는 국가가 지닌 '문화적 탐욕'이 적나라하게 드 러난다. 그래서 일본은 콜럼비아 영화사를 통째로 사들이기도 하고 미국인들의 대표적인 놀이 문화 인 야구 구단을 통째로 사들이고 있다. 전세.계인과 함께 할 수 있는 문화적 자산과 기술이 없는 일본으로서는 초조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편법을 찾는 과정에서 '강한 엔'으로 무조건 통째로 사 들이는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에게 문화는 '사면 되는' 또 하나의 상품인 셈이다. 융단 폭격 일본은 일찍이 '동양 문화=일본 문화'를 인식기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사실 서양인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 문화는 너무나 어렵고 한국 문화는 너무나 조촐한 자연 그 자체라서 선뜻 다가 가기 힘든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일본 문화는 화려하며 아기자기하고 무엇보다 알기가 쉽다. 어떤 이는 중국 문화는 커다란 무대를 포효하는 경극의 대배우이고 일본은 요염하게 떨쳐입은 기생이며 한국 문화는 하얀 저고리를 입은 화장도 하지 않은 여염집 아낙이라고 표현했다. 서양인에게 알기 쉬운 문화, 일본 문화를 심기 위해 일본 정부와 기업 그리고 예술가들은 한 몸이 되어 뛰었다. 한 예로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는 일본 정부와 기업이 그의 든 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고 있다. 우리 나라의 정명훈이 철저히 혼자 컸다면 오자와는 일본이라는 그 의 조국이 키워 주었다. 따라서 오자와는 철저히 '일본인'임을 고집하고 있다. 오자와 세이지와 보 스턴 심포니의 단원들은 사이가 나쁘기로 소문이 나 있다. 물론 지휘자와 단원들 사이라는 것이 원 체 별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좋기가 힘들 수도 있다. 그런데 보스턴 심포니 단원들의 오자와 비난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오자와가 '일본식 생활'을 고집함으로써 단원들과의 융화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자와의 가족들이 모두 일 본에 살고 있을 뿐 아니라 보스턴에 있는 그의 집은 완전히 일본식으로 꾸며져 있다고 불평한다. 오자와는 일본식 덧옷인 하오리를 입고 일본 녹차를 마시고 우메보시(일본식 매실 절임)에 오차츠케 (찻물에 만 밥)를 먹고 사는데 도저히 어울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나 역시 일본의 항공기 안 에서 기내 잡지를 통해 오자와의 생활을 다룬 인터뷰 기사를 보았는데 정말로 놀랄 정도로 '일본식' 을 고집하며 살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오자와가 보스턴 심포니에서 지위가 불안해지려는 찰나 오자와의 후원자들은 재 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보스턴 심포니에 막대한 지원을 해준 것은 물론 오자와 기념관이라는 커 다란 건물을 아예 통째로 지어 보스턴 심포니에게 기증해 버렸다. 단원들의 입이 콱 막아진 것은 물론이다. 하긴 그래 봤자 도쿄 시내의 땅 몇평만 팔면 그만이지 않느냐는 말도 있지만, 일본이 세 계 시장에 얼굴을 내민 예술가를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단순한 패션 디자이너를 넘어서서 당당히 '예술가'로서 세계에서 대접받고 있 는 '이세이 미야케' 역시 일본 굴지의 회사들이 뒤를 봐주고 있다. 최근 우리 나라의 의복 디자이너 들이 도쿄 혹은 파리 콜렉션에 참가하고 있지만 기업이나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유혹×자극=능욕 잘사는 나라 프랑스부터 아프리카 산골짝의 가난한 나라 작은 텔레비전 방송국에까지 일본의 만 화는 방송된다. 보통 영화의 다섯 배에서 열 배의 제작비가 드는 만화영화지만 어떤 프로그램보다 싼값에 일본의 만화영화는 제공된다. 왜냐하면 일본의 만화영화를 보고 자라나는 전세계의 어린이 들은 미래에 가장 확실한 '메이드 인 저팬'의 소비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만화를 보고 일 본식 정서에 물들여진 이들은 일본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을 지니고 일본 상품에 친밀감을 지닐 수 밖에 없다. 결국 우리 나라에 대해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 대중 문화의 시장 개방을 요구하는 일본의 속뜻은 '총체적인 일본'을 팔겠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 시장에 단순하게 코끼리밥통을 팔고 소니 카세 트를 팔던 데서 벗어나 '일본'이라는 나라를 상품으로서 팔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래로 치면 '대 형 비즈니스'이며 밥통 몇 개 파는 것과는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전쟁관' '역사 관'을 조심스럽게 색칠해 팔려고 할 것이며 일본의 대중 문화를 이식시킴으로써 한국을 '일본 문화 의 시장권'으로 개편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또 작게는 경제적 침투를 좀더 세련되게 하기 위한 포장지로서 '대중 문화의 시장 개방'을 요구하 고 있는 것이다. 제조업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이제 일본은 군수 산업과 문화 수출로 산업 구조를 바꾸려고 하고 있다. 이미 '일본의 노래'와 '일본 탤런트'가 지명도를 가진 동남아 시장은 경제에 이 어 문화에서도 일본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유일하게 문을 닫고 있는 한국 시장은 일본에게는 유혹적이고 자극적이다. 마치 그 옛날 페리가 흑선을 타고 와서 능욕하듯이 일본을 개국시킨 것처럼 이제 일본은 한국을 그렇게 만들고 싶을 것 이다. 문화 통신사라는 이름 아래 극단 사계가 한국에서 공연을 하고 일본의 잔인한 만화영화는 텔 레비전에서 한국의 어린이 시청자를 붙들어 놓고 있다. 앞으로 일본의 대중 문하는 서서히 그러나 노골적으로 강도를 더해 가며 우리에게 들어올 게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방의 시기를 언제로 하느냐는 '시기'의 문제에 논의가 머물 것이 아니라, 왜 일 본이 대중 문화의 개방을 한국에 그토록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는가에 우리들 논의의 초점이 맞춰져 야만 한다. 우리는 그 동안 일본의 시장 개방 요구에 대해 그 본질을 꿰뚫어볼 여유를 갖지 못했 다. 오로지 '시기상조' '일본 문화에 대한 두려움' 운운하는 데 급급해 왔다. 그래서 일본 문하의 '경제적 속성'을 단순히 보아 왔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대중 문화는 일본의 상품을 팔기 위한 전위 대이다. 일본은 대중 문화의 시장 개방을 계기로 '한국에 대한 경제적 침투'의 전열을 재정비하려는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막대한 돈을 들여 자위대를 캄보디아에 보내면서 '유엔평화유지 활동'이라는 숭고한(?) 목적, 국제 공헌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목적은 작게는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간섭이나 볼멘소리를 듣지 않고 일본 상품을 '지금처럼' 변함없이 팔 수 있게 정치 적 입지를 다지려는 것이다. 또 크게는 일본의 힘을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넓혀 보겠 다는 '신 일본 패권주의'의 한 표현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의 속성이다.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변함없는 일본의 속성인 것이다. '문화 개방' '문화 교류'라는 아름다운 말이 춤을 추는 일본의 공세 속에서 나는 '경제 침투' '문화 시장 전략'이라는 숨은 의도를 고통스러운 지난 역사와 함께 떠올린다. 베일을 쓴 추녀 1998년은 너무 늦다. 일본의 대중 문화를 단계적으로 오는 1998년까지 개방한다는 이야기는 '정 책'도 '정보'도 그리고 판단력도 없는 우리 나라 공무원 행정의 전형적인 본보기이다. 일본의 대중 문화는 이미 우리 안방 한구석에 들어아 앉아 있는데 1998년 운운하는 것은 뭐가 뭔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물론 그보다 더 한심한 것은 일본의 대중 문화를 개방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아직도 입씨름을 벌 이는 일이다. 아직도 내게 찬성하느냐 마느냐를 묻는 사람들이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일본 문화, 특히 대중 문하의 시장 개방에 대해 적극 찬성이다. 일본의 대중 문화는 이미 우리 곁 에 있다. 일본의 위성 방송이 전파를 타고 들어오는 마당에 문을 닫느니 여느니 하는 것은 이미 아 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는 일본의 워크맨을 알고 일본 노래를 호기심을 지니고 듣고 일본 잡지를 본다. 내 경우를 이야기한다면 '금기된 일본 영화'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해외에 나가면 '일본 영화' 를 상영하는 극장을 일부러 찾고는 했다. 또 일본에서 살았던 3년 남짓한 기간동안 끝없는 호기심 을 가지고 일본의 대중 문화를 적극적으로 접했다. 이 모두가 금기되어 있는 문화에 대한 증폭된 호기심의 결과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일본의 대중 문화를 적극적으로 막아서 피해를 보고 있는 쪽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선 일본 문화에 대해 허상을 지니게 만들었다. 마치 베일을 쓴 추녀가 미녀로 보이는 것과 같이 가려진 부 분의 신비, 금기된 것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만을 부추겼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의 대 중 문화가 엄청난 '실력'과 '품질'을 갖춘 아주 대단한 문화라는 착각을 하게 됐다. 일본 대중 문화의 천박함은 세계적으로 그 악명(?)을 떨치고 있다. 어느 나라의 텔레비전도 일본 민방의 유치함과 잔혹성과 선정성을 뒤따라갈 수는 없다. 나는 일본에 있을 때 일본 대중 문화의 한가운데 있었다. 이른바 '고급 문화'는 일본 사회에서 거 의 그 존재감은 없다. 그 이유는 일본인의 현실주의와 실리적인 성향이다. 일본인에게는 우선 '돈 을 버는 일'이 삶의 기본 명제이기 때문에 고급 문화는 부수적인, '있으면 즐겁고 없어도 지장 없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일본의 저질 대중 문화는 일본인들에게는 바로 '일용할 양식'이자 '삶의 즐거움'을 제공한 다. 하루 종일 일본 연예인들의 스캔들을 파헤치는 '와이드 쇼'는 일본 주부들의 '아침 거리'이며 남 녀 성기를 빗댄 노골적인 저질 코미디가 일본의 텔레비전을 가득 채운다. 술과 눈물과 한탄에 절어 서 끈적끈적한 일본의 엔카는 내게 별난 뽕짝의 세계를 실감케 했다. 기모노를 입고 시도 때도 없 이 눈물을 흘리는 일본 엔카 가수들의 모습은 눈물마저도 '상업화된' 일본 가요계의 적나라한 모습 으로밖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일본의 젊은 세대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가수들의 노래 실력은 우리 가수들과는 도저 히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한심하다. 물론 일본의 대중 음악계가 지닌 '기술적 능력' '스타 만들기 와 관리'등 '하드웨어'는 우리보다 월등하다고 할 수 있지만 '소프트웨어'는 형편없다. 일본의 대중 음악계의 특징이라면 '타고난 스타'가 없다는 점이다. 오로지 '갈고 닦아서 만들어진 스타'가 있을 뿐이다. 우리 영화인들이 그토록 우려하는 일본의 영화 산업 역시 저질과 싸구려 웃음을 강요하는 코미디 영화뿐이었다. 아니면 잔인함과 변태적인 행위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의 기호에 맞춘, 이지러진 성과 피로 물든 폭력 영화만이 나올 뿐이다. 사양 산업이라는 딱지가 붙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연 극도 '인간의 악마성'을 부추기는 '새디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일본의 연극을 몇 편 보았는데 주제나 내용이 판이함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반드시 바닥에 깔려 있던 것은 정말 불가사의하다고 할 정도였다. 우리는 이러한 일본의 대중 문화가 지닌 실체를 모르면서 근거없는 일본 문화에 대한 공포 증세 에 사로잡혀 '문화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 일본 문화의 형편없는 질에도 불구하고 '일본 문화 금기' 가 유혹적이고 작극적인 향신료처럼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대중 문화에 대한 금기 정책은 오히려 일본 대중 문화의 상품 가치를 높여 주고 있다. 마치 판매 금지된 책들이 날개돋친 듯 팔리는 것처럼 '금기'와 '터부'라는 가장 강력한 공짜 선전에 힘입 어 '포르노 영화' 수준의 일본 영화가 어느새 우리들 사이에 상품성을 갖게 되었다. 하지 못하게 하 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싶어지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이다. 문제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서 '일본 것'에 대한 본능적인 호기심까지 부추기고 있는 점이다. 우리 생활에 자리잡은 일제 상품에 대한 선호도는 인도 사람들이 영국 물건을 최고로 치고 아프리 카 사람들이 프랑스 물건을 동경하는 가슴 아픈 식민지 유산을 연상시킨다. 지금 우리 생활에 남아 있는 '코끼리 밥통'이니 '시세이도 화장품' 그리고 '소니 워크맨' 등 일본의 자잘한 부스러기들은 대단 치도 않은 일본 문화 금기가 낳은 상대적인 허기를 메우려는 부끄러운 산물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일본 문화에 대한 '공포 분위기 조성'에 급급해 일본의 대중 문화 가운데 가장 최악의 것들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공식적인 창구가 막힌 상황에서 음성적인 경로가 생겨나 면서 최악의 저질 문화가 지하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문화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모순된 현실에서는 문제 잇는 부분을 소독할 수 도, 강한 햇볕에 쪼여 살균을 할 수도, 거풍을 할 수도 없다.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만이 근본적 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대중 문화 시장이 열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어느 영화인이 걱정한 것처럼 '사무라이 칼잡이' 영화가 갈퀴로 한국 돈을 쓸어담을 것인가? 우리 나라에도 이미 만만찮은 팬이 있다는 '차 게 앤 아스카'의 음반이 하루종일 카페에서 흘러나올까? 우리의 노래방은 완전히 일본의 가라오케 로 변신을 해 '이츠키 히로시'와 '미야코 하루미'가 판을 칠까? 그리고 강남의 아이들은 '나카야마 미호'의 팬클럽을 결성할까?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선 일본 문화는 우리가 수십 년 동안 그토록 열심히 싸웠던 '미국 문화'의 아류이기 때문이다. 미국 문화의 물량과 대형 폭력주의 그리고 강력한 문화 종속주의와도 대항해 마침내 '내성'을 기른 우리 문화의 저력을 믿기 때문이다. 물론 개방 후 얼마간은 우리에게 '홍역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못 듣고 못 보고 했으니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그로 인한 다소의 혼란은 불가피한 것인지도 몰ㄴ다. 우리 자신의 문화 선별력을 시험해 보는 계기가 될 이 시기는 그 동안 타의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 대중 문화의 허상 과 한심한 수준을 알아보는 기회도 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이 '홍역기'를 짧게 그리고 슬 기롭게 넘기느냐에 있을 것이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다 이제 '문화'를 파는 시대가 되었다. 문화만큼 값지고 이윤이 많이 남는 상품은 없다. 바로 이러 한 이유 때문에 일본은 '대중 문화'라는 상품을 들고 집요하게 우리에게 시장을 개방하라고 요구하 는 것이다. 우리 역시 다른 나라의 대중 문화는 받아들이면서 유독 일본만은 안된다고 고집하는 것 은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다. 이는 일본 대중 문화에 대한 열등감의 표현일 수도 있고 우리와는 너 무나 정서가 다른 일본 대중 문화에 대한 착각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일본 대중 문화의 유입을 막고 있는 빗장도 곧 글러질 것이고 우리는 그 문화의 홍수를 맞게 되었다. 문제는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인식이다. 즉 밀려들어오는 이본 문화에 대해 우 리 문화, 특히 대중 문화의 경쟁력을 기르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 나라의 대중 문화 수준은 결코 일본에 뒤지지 않는다. 우리 나라 가수들의 노래 실력은 일본 가수들보다 월등하다. 배우들 역시 그렇다. 이제 우리는 이들 대중 문화의 가수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적절한 대우를 해주어야만 한다. 마치 우리에게 세 끼 밥과 같은 이들의 존재를 아끼고 존중해야 한다. 또한 가요나 영화에서도 국내 시장만을 눈여겨볼 것이 아니라 적어도 아시아권까지 우리의 대중 문화 시장을 확대해야만 한다. 지금 일본의 가요와 드라마, 영화는 동남아 곳곳에 흘러 넘치고 있 다. 쇼핑센터 한구석에서 일본의 애절한 가요가 흘러나오는가 하면 외국 브랜드의 장신구점에서 일 본의 보컬 그룹의 최신곡이 흘러나온다. 우리 가수들의 노래 역시 일본 노래와 대결하면서 당당하 게 '제품 경쟁력'을 길러야 한다. 바로 이 점이 우리 기업과 정부가 지원을 하고 후견역을 맡아야 할 부분이다. 물론 순수 음악인이나 국악인들의 해외 공연, 귀중한 문화재의 외국 나들이 전시회도 참으로 의미 가 깊다. 그러나 그런 것들과 병행해서 우리 나라 대중 연예인들의 해외 공연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하고 밀어 주어야 할 부분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얼마든지 일본 시장에서 가능성이 있는 그룹을 위해 우리 기업이 기금을 만들어 그들이 기죽지 않고 좋은 무대와 좋은 매스컴을 만나 '한국 대중 음악'을 알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 이제 돌여옵네, 아니네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은 이미 때가 지났다. 계속 그런 말을 한다면 정말 우리의 처지가 초라해진다. 일본 대중 문화에 대한 시장 개방은 '완벽한 문화의 국제화'를 향해 문 을 여는 것이다. 이웃을 아는 것은 국제화의 첫걸음이다. 문화 전장 시대에 들어선 지금, 여유를 가지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일본 대중 문화와 부딪쳐야 한다. 9. 한국을 버리자 쉬쉬하고 감추어라 이지메의 장난감 추악한 한국인 오늘은 여성 두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켰을 뿐이다 강간의 기념물 절규 친한파들 진실과 정의 쉬쉬하고 감추어라 일본에서 살 때 같은 한국인들을 만나면 우스개 소리로 일본이 편한 게 딱 하나 있다는 말을 한 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구별이 안된다는 것이다. '말'만 하지 않으면 편안하게 섞여 들여가 살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그만큼 한국인과 일본인의 얼굴이 닮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동시에 한국인이 일본 땅에 발을 붙이고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를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 즉 불평따위는 내비치지 말고 입 다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단순히 시끄럽게 어떤 요구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에 섞여 아류 일본인으로 살기를 강 요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이처럼 재일 동포를 비롯한 한국인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며 조용히 살 기를 권유(?)하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이 일본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쉬쉬하고 감추는 모든 것들은 다 우리 나라 의 것들이다. 일종의 대하소설과도 같은, 일본인이 자랑하는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수많은 익명 의 인물, 도래인, 예술가 등등 그 이름도 성도 모르는 이들이 사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우리 나라 사람들이다. 젊은 날 강제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간 재일 동포 1세가 80먹은 노인이 되어 우연히 찾 은 일본의 고도 '나라'에서 끝없는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는다. 바로 그 자신이 자 란 고향의 절간을 고스란히 빼놓은 '복사판 나라'의 모습을 보고 고향에 온 듯한 감격을 느껴서이다. 일본의 국보 1호인 반가사유상은 우리 나라의 것을 100퍼센트 복사한 완벽한 카피이다. 일본인들 이 그토록 열광하는 그 국보는 실은 '백제의 미소'인 것이다. 아직도 일본인을 집요하게 쥐고 있는 일본의 천황제. 그런데 많은 일본인들은 일본 왕실이 백제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유명한 사회 추리소설 작가 마쓰모도 세이조는 일본 왕실의 피가 백제계라는 것을 공공연히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일본 왕실의 장례 풍습을 보면 완벽하게 우리 나라 식인 것은 물론, 얼마 전까지도 젓가락 만을 써 온 일본의 민간과는 달리 한국식으로 놋그릇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함께 사용했다고 전해진 다. 어느 일본인은 일본 왕실의 생활이 다른 왕실 국가, 즉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과 달리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것은 '일본의 왕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파격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왕실뿐 아니라 일본 국민들의 우상인 연예인, 운동선수, 예술가들의 족보를 캐어 보면 거의 다 한 국계들이다. 정치가 다나카 가쿠에이와 더불어 80년대의 2대 인물로 꼽혔던 가수 야마구치 모모에 도 한국계였고, 현재 일본 가요계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이츠키 히로시 역시 토종 한국계이다. 일본 인들은 일본 왕실이 백제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고 '백제의 미소'를 흘리는 국보 1호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일본이 그토록 한국에 대해 '미묘한 애증'을 나타내는 것은 일본 문화 자체가 한국 문화의 복사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재창조한 것과는 달리 일본에는 고스란히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우리의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특히 일본 왕실의 모든 풍습이 '우리 나라 식'인 것처 럼 일본의 고급 문화 속에 한국 문화는 탁월한 생명성을 자랑하며 살아 있다. 결국 한반도가 일본 문화의 원류라는 사실은 '애증'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일본인들에게 불러일으켰다. 한국은 바로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며 동시에 무너뜨리고 싶은 대상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역사를 살펴보면 국내 의 문제가 있을 때 한반도를 '효과적인 적'으로서 이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두 차례의 침략은 모두 일본 국내의 문제가 폭발 직전에 있을 때 이루어졌다. 임진왜란은 전국 시대 일본의 피폐한 민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일본이 '정한론'을 들고 나와 한국 침략을 본격화한 것은 쇄국 정책을 고집하던 일본에 대해 서구 열강의 개국, 개항 요구가 거세졌던 근대의 문턱에서였다. 즉 일본은 국내의 위기가 있을 때 '우리 나라'를 치고 침략 함으로써 그 위기를 잠재우려 했던 것이다. 일본에게 한국은 영원한 정복의 대상이며 위기 해소와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일본인들은 그들이 태어난 곳이 한반도이며 한반도의 문화를 자궁으로 삼아 일본의 문화 가 태어났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열등 국민 취급하고 업수이 여 기는 그 이면에는 한국인에 대한 두려움이 있음은 물론이다. 한국에 대한 비하와 경멸이 일본 사회 에 뿌리내려 있으면서도 '한국에 대한 정체모를 애정(?)'이 일본인들의 마음속에는 있다. 이지메의 장난감 "저는 현재 치마저고리를 입고 조선인 학교에 다니는 중학생입니다. 치마저고리는 조선 민족의 아름다운 의상이자 비할 바 없는 자랑입니다. 우리들은 일본에 살면서 조선인으로서 교육받았고 치 마저고리를 입는 것에 의해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를, 이론이나 이유를 떠나 본능으로 느끼고 있습 니다. 과거 우리 조선 사람은 이름을 빼앗기고 말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들의 자랑 인 치마저고리마저도 빼앗길 지경이 되었습니다. 나는 일본인 여러분께 왜 우리가 치마저고리를 입 고 있는가를 알리고 싶습니다. 저는 유월에 들어서면서 학교에 갈 때 몇 번인가 이상한 눈초리를 받았습니다. 지하철 역에서 중년 남자가 징그러운 눈으로 한참 보질 않나, 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 도 쫓아 오질 않나, 불을 붙인 담배를 제게 던지기도 하고 저를 보고 '죽여 버릴 거야!' 하고 외치는 무서운 남자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학교를 오고갈 때는 너무나 무섭습니다. 그래도 우리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치마저고리를 벗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일본이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 없는 진짜 국제 사회가 되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일본 가나가와 현에 있는 조총련계 중학교에 다니는 열네 살 강화순 양의 글이다. 이 글은 북한 핵 문제를 빌미로,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니는 조총련계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에게 온갖 테러를 가 하는 일본인들의 만행이 줄을 잇고 있던 94년 6월에 일본의 아사히 신문에 기고한 글이다. 북한의 핵 의혹이 증폭되자 일본인들은 조총련계 여학생들을 상대로 온갖 나쁜 일을 저질렀다. 조총련계 여학생들은 흰 저고리에 까만 통치마를 입고 다녀 금방 눈에 띄는 확실한 표적이었다. 일 본인들은 이 여학생들의 저고리를 날카로운 면도칼로 찢어 놓는가 하면, 가슴 있는 부분을 동그랗게 오려 어린 소녀에게 최대의 수치심을 주고자 했고 심지어는 치마까지 면도칼로 도려내 속살이 다 보이게 했다. 이같은 사건은 경찰에 보고된 것만 해도 2백여 건에 이른다고 한다. 공포에 떠는 여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통학 길을 동행하거나 학생들에게 치마저고리를 입 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러한 폭력을 놓고 일본인들은 핵을 가지고 세계 평화를 아니 일본의 안전을 위협하는 북한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이유가 될 수 없고 부끄러운 자기 기 만에 불과하다. 어떤 경우든 폭력과 린치에는 정당성이 있을 수 없다. 더구나 가장 나약한 자에 대한 폭력과 횡포는 가장 파렴치한 범죄이다. 일본인들이 조선인 학교 여학생들을 잔인하게 괴롭히고 폭행을 가하는 것은 바로 가장 비열한 일 본인만의 속성인 '이지메'의 전형이다. 조선인 가운데에서도 가장 약하고 힘없는 어린 여학생들을 상대로 그것도 '면도칼'이라는 흉기들 들이대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이 조 선 여학생들은 그 옛날 식민지 시대 일본인들이 부려먹기 위해 강제로 끌고 온 이들의 자손이며, 불 행히도 일본을 고향으로 해서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다. 이러한 '불행의 낙인'을 찍힌 채 태 어난 그들에게 일본인들이 '북핵'을 이유로 그처럼 잔인한 일을 저질러도 되는 것인가. 상식을 지닌 세계인이라면 누구나 '일본인의 이지메'의 속성을 재인식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일본인들은 '북핵'을 빌미로 '이지메'를 행사하는 쾌락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약한 자 를 괴롭히고 린치를 가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일본식 이지메의 전형이 바로 이 사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아닌지. 이번 일련의 사건에서 유감스러운 것은 사건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재발을 방지하려는 일본측의 노력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범인들의 검거는 물론 이러한 인권 침해 사례가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 록 노력하는 최소한의 법적, 사회적 배려도 전혀 없었다. 무관심을 가장한 채 다수의 일본인들은 무언의 지원을 보내면서 이 '북핵'을 빌미로 한 '이지메 놀이'를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재일 동포들은 관동 대지진 때 잔악한 일본인들이 '이지메 놀이'의 희생자요, 히로시마 원폭의 희 생자 그리고 일본이 저지른 온갖 전쟁 범죄의 희생자였다. 그런데도 오늘 일본은 또 다시 어린 조 선인 여학생에게 '북핵'을 빌미로 '가학 취미'를 만족시키는 잔인한 '이지메 놀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더욱 불행한 것은 이 '이지메'를 막고 바로잡아야 할 '일본의 양심'이 실종됐으며 '일본의 교사'가 없으며 '일본의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말이 없고 모든 일본인들은 침묵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이지메의 쾌락'을 맛본 '일본인'으로서의 동조이며 '침묵의 지지'이다. 추악한 한국인 가세 히데아키라는 국제 평론가가 있다. 한 인간을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가세 히데아키를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는 일본인이 한국에 대해 지니고 있는 진짜 마음, 그렇 지만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을 입으로 떠들어서 먹고사는 사람이다. 물론 가세 히데아키가 말하는 방법은 '일본식'이다. 그는 숨어서 한국을 헐뜯는다. 이러한 그의 가장 대표적인 산물이 『추악한 한국인』이라는 책이다. 일본의 광문사라는 꽤 큰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한국에 대해 품고 있는 일본의 감정'을 잘 표현해서 23만 부나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 책의 저자라고 알려진 '박태혁'이라는 인물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박태혁은 서울 대학교를 나왔고 도쿄 특파원까지 지낸 인물이다. 1928년생에 이 정도의 인 적사항이면 대충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박태혁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고, 나 역시 몇 차례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출판사로부터 '신변 보호'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런데 바로 이 『추악한 한국인』의 실제 저자가 가세 히데아키라는 점이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 땅 어딩도 없는 터무니없는 지명과 한국의 풍습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씌어져 있는 것을 보고 '도저히 한국인은 쓸 수 없는 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 책 을 읽은 한국인 독자라면 누구나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본은 없다』 의 일본어판 출판 관계로 일본에 가 많은 일본의 출판인들을 만나 보면서 나는 '일본의 출판계'에서 조차 가세가 슨 것이 정실로 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놀랐다. 일본 출판계에서 짐작하고 있는 시나리오는 두 가지였다. 첫번째는 출판사로부터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오히려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는 점과 '계속해서 한국이 이런 식으로 일본에게 사죄를 요구하면 한국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요지의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것이라 는 이야기이다. 그런 제안을 가세가 '좋다'고 승낙을 했고 이왕이면 '가상의 한국인'을 만들어 '한국 인 스스로 일본의 식민 통치를 찬양하게 하면 재미있지 않겠느냐?'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서로 교환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일본의 출판계에서는 이른바 '유령 작가의 활약'이 눈부셨다. 일본에서 대 베스트셀러가 됐던 『이상한 나라 일본인』의 저자인 장 폴 마티스도 '가공의 프랑스 사람'이었 고 『일본인과 유태인』을 쓴 이사야 벤담도 '유령 유태인'이었다. 따라서 일본 출판계에는 '박태혁' 이라는 '가짜 한국인'쯤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토양이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출판인들이 생가하는 두 번째 시나리오는 출판사가 데리고 있는 이른바 서너 명 정도의 유 령 작가나 출판사의기획 담당 직원이 '가세의 말'을 받아 썼다는 것이다. 즉 가세가 한국에 대해 일 러 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출판사 직원이 가세의 자문을 구하는 형식으로 받아 적어서 서너 명 정 도의 사람들이 『추악한 한국인』을 제작했다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를 일본 현지 출판인들은 가장 확률이 높다고 이야기한다. 가세는 "자신은 절대로 이 『추악한 한국인』의 저자가 아니다"라고 주 장을 하고 있는데, 사실은 위에서 말한 방법, 즉 가세가 한 말을 받아 적은 것을 다시 최종적으로 가세 자신이 감수를 하는 형식을 취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아울러 일본의 출판인들은 『추악한 한국인』의인세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에 확실한 '열쇠'가 있 다고 주장한다. 이름 밝히는 것을 꺼리는 어느 출판인은 광문사 내부에서도 『추악한 한국인』에 대해 묻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다며 "반드시 무슨 비밀이 있다"고 말했다. 『추악한 한국인』이 한국인의 손에 의해 씌어지지 않았다는 것인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한국의 지명은 물론이고 일본 발음으로 표기된 많은 한국어가 오류 투성이기 때문이 다. 만일 한국인이 『추악한 한국인』을 썼다면 그는 '한국어를 못하는 한국인'이다. 또 그는 한국 의 어린애도 다 알아 '울음을 뚝 그치는 곶감'을 모르며, 윷이 네 개가 아니라 다섯 개라고 생가하는 한국인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책에 적힌 대로 저자가 1928년생이고 서울 대학교에 들어갈 정도의 지식인(?)이었다면 굳이 히데 아킥 그의 '엉망인 일본어 문장'을 손봐 줄 필요가 없는, '일본인 못지않게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 하고 일본어 문장력도 충분히 갖춘 한국인'이었을 것이다. 가세 히데아키는 『추악한 한국인』의 해설에서, 비로서 한국인의 손에 의해 일본의 식민지 정책 의 정당성을 제대로 평가한 책이 나왔으며 자신은 아주 감동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한국인의 주장이 가세 히데아키의 평소의 주장과 100퍼센트 똑같다는 데 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화해서 오히려 한국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많은 일본인들은 왜 한국인들이 반중 감정이나 반미 감정은 희박하고 유독 반일 감정만 지독하냐고 묻는 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에서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지를 말해 주는 명백한 증거일 뿐이다. '지독한' 반일 감정이란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과정에서 일본이 스스로 촉발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가세 히데아키는 자신은 이미 '박태혁'이라는 인물을 만났으며 이 인물과의 대담집을 올 봄(95년 봄)에 출간하겠다고 밝혔다. 책이 나온 지 거의 2년 만에 '글을 쓴 장본인'이 나타나는 셈이다. 그 런데 정말 그는 왜 2년 만에 뒤늦게 나타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하고 갖가지 소 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때는 왜 나타나지 않았을까? 그가 그토록 겁을 낸 '신변의 안전'이 그렇 다면 2년이 지난 지금은 보장된단 말인가? 나는 '박태혁'이라는 인물이 절대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세 히데아 키와의 대담집이라고 하지만 박태혁이라는 가공 인물은 '와타나베 쇼이치'와 '오선화'의 대담집과 마 찬가지로 일방적으로 가세의 말을 들어 주는 역할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화련한 장정을 하고 선보일 박태혁과 가세 히데아키의 대담집은 우리에게 '거짓으로 일관된 일본 의 교과서'를 연상시킨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새빨간 거짓말'로 가득 차 있다고 용감하게 쓴 서 양의 특파원이 있었다. 그러나 강한 자에 의해, 정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정책적으로 만들어지는 '교 과서'으 거짓보다는 일본의 민간 출판인들이 만들어 내는 끝없는 '허구의 역사'는 일본의 현대사, 일 본의 오늘조차도 '새빨간 거짓'으로 가득 채우는 엄청난 범죄이다. 오늘은 여성 두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일본은 엇다』의 일본어판 출판 관계로 일본에 갔다. 일본의 출판사는 '책의 판촉(?)'을 위해 수많은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아주 흥미로운 행사가 있었다. 즉 『추악한 한국인』의 실제 저자라고 알려진 일본인 '가세 히데아키'와 나의 토론회였다. 일본에 가기 전에 내 의향을 묻는 출판사에게 나는 '좋다'라고 쾌히 응락했다. 물론 일본말로 '일 본에서 일본인들 앞에서' 벌어지는 토론회라서 상당한 부분은 각오해야 했지만 우리의 역사가 바르 고 옳았으므로 어떤 토론을 벌이더라도 나는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토론 장소인 메구로 문화 회관에 도착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세 히 데아키는 일본에서 이른바 '보짱'(우리 나라로 치면 도련님?)이라고 알려진 '국제 평론가'이자 '한국 문제 평론가'이다. 그의 아버지는 '유엔 대사'를 지낸 인물로 가세는 '집안의 배경'을 충분히 살려 국 제 평론가로서 살아 왔다. 워낙 매체가 넘치는 일본에서는 '평론가'라는 이름만 달면 먹고 살 수가 있다. 가세 히데아키는 명함을 건네며 '이름은 익히 들었다'고 말했다. 나는 어차피 세 시간 동안 설전 을 벌일 것을 예상하고 그저 조용히 웃으며 명함을 건넸다. 나에 이어 재일 교포 한 분이 '아무것 도 씌어진 것이 없다'며 이름만 적힌 명함을 내밀었다. 그러자 가세 히데아키는 서투른 한국말로 "저도 놈팽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가세의 한국말을 들으며 아주 묘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놈팽 이'라는 말은 이런 장소에서 쓸 수 있는 말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한국어 표현 가운데 가장 '천박한 말'을 골라 쓴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물론 가세 히데아키는 그 말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몰랐을 것이다. 가세는 이어 내게 '오늘의 여성 두 분을 모시고 왔다'고 말을 붙였다. 가세가 데리고 온 두 여성 을 보고 나는 첫눈에 한국 여성인 것을 알았다. 둘 다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녀들은 앉자마자 담 배를 피워 물었다. 그런 한국 여성의 모습을 보며 나는 왜 가세가 굳이 두 한국 여성을 이 딱딱한 언론장에 '모시고' 왔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갔다. 일본에 온 한국 여성들 가운데는 이른바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이 많다. 그리고 그런 여성들 가운데는 드물게 '일본화'된 이들이 있다. 국제 결혼을 해 일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혼자 사는 여성 도 있고 일본 남성의 '비공식 아내'로서 사는 여인들도 있다. 언젠가 한번 긴자의 한 클럽에 갔을 때였다. 그 클럽의 여주인격인 마마는 정식으로 기모노를 차려입고 손님을 맞았다. 나는 그녀의 일본말을 들으며 '어느 지방 사투리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한국 여성이었다. 일 본 술집의 본바닥인 긴자에서 그것도 마마의 위치에까지 오른 것을 보면 그녀도 참 산전수전 다 겪 었다는 이야기라 나는 일부러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같이 간 사람도 있고 해서 그녀와 깊은 이야 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 이야기가 나오자 느닷없이 "여기에 와서 일본 손님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우리 나라 역시 잘못한 것도 많은 것 아닙니까?" 하고 말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할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 후 상대인 일본 손님들의 영향을 받아 "우리가 일ㄹ본에 점령당하지 않았으면 어차피 러시아한테 당했을 거 아녜요?"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술집 여성들을 가끔씩 만나게 되었다. 나 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한국 사회에서 내몰린' 그들이 일본인에 의해 철저한 친일파로 둔갑되는 현실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토론이 시작되자 가세는 그 여성을 일부러 앞에 앉혔다. 아마도 나에 대한 고의적 배려(?)였을 것이다. 가세는 일본이 벌인 태평양 전쟁은 결코 침략 전쟁이 아니며, 서구 열강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기 위한 '자위 전쟁'이자 '해방 전쟁'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나는 어떤 전쟁이든 침략이 아 닌 전쟁은 없었으며 태평양 전쟁은 아시아인 2천만 명을 살해한, 아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이라고 되 받았다. 가세는 말이 안되자 『추악한 한국인』은 한국인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객관적으로 본 책이라 고 이야기를 꺼냈고 반면 내 책은 일본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했다. 나는 이 두 책 을 비교하는 것은 내 개인에 대한 실례라고 말했다. 저자가 누구인지 아직도 베일에 싸인 『추악한 한국인』은 '일본인의 비겁함' 그 자체이지만, 나는 이렇게 당신네 일본인들 앞에 당당히 나타났다고 응수했다. 드디어 가세는 데려온 한국 여성에게 종이에 뭐라고 써 주며 발언하라고 했다. 나는 그 순간 그 여성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여성은 나를 보며 "자신은 일본에 온 지 십 년이 됐지만 이 런 자리는 처음이라 한국말로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한국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을 사랑합니다. 일본에서 우리 나라 이야기를 들을 때면 슬픈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이제 일본은 국제 사회에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상식을 지녀야 합니다." 그녀의 말은 가세가 원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말을 사회자가 내게 통역을 부 탁한 것이었다. 나는 일본어로 정확하게 통역을 했다. 가세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통역이 끝난 뒤 '내 통역에 만족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여성의 본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서로의 인신 공격 전까지 갔을 정도로 격렬했던 장장 세 시간의 토론이 끝났다. 가세는 토론이 끝나자마자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한국과 일본의 너무도 다른 역사 의식이 첨예하게 드러난 토론 회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잘못된 한일간의 역사를 제대로 바로잡는 작은 시작이 고, 우리 한국인은 어느 한순간도 한국인임을 잊이 않으며, 또 변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바로 그 여성의 기뻐하는 얼굴이 그것을 내게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를 지켰을 뿐이다. 가세 히데아키와 나의 토론은 자그마치 세 시간 반이나 계속되었다. 80만 부라는 부수를 지닌 일 본의 주간지 「주간 포스트」는 이 토론을 요약해 실었다. 「주간 포스트」 1994년 12월 16일자를 그대로 옮겨 보았다. 가세 : 1995년은 한일 협정이 승인되어 한국과 국교가 정상화된지 꼭 30년이 되는 해이다. 현재 아시아 각국은 일본에 대해 적의를 품은 나라와 일본에 대해 커다란 기대를 품고 있는 나라로 나눠 져 있다고 할 수 있다. 8우러에 무라야마 총리가 동남아시아 4개국을 순방했는데 모두들 아주 우호 적이었다. 필리핀의 라모스 대통령, 베트남의 키에트 대통령,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수상 등은 '이제 더 이 상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일본의 사죄를 듣고 싶지 않다'고 발언했다. 우리들과 가장 가까운 한국 의 경우는 지금 일본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다. 일본이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되려 는 의사를 보였을 때 한국 정부는 즉각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이것이 국교 정상화 이후 전면 적으로 지원해 온 이웃 일본에 대한 제대로 된 태도인지 의문이 간다. 전 : 아시아에는 일본에 적의를 품은 나라와 기대를 품고 있는 나라의 두 부류가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틀린 이야기이다. 마하티르 수상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지만 내가 알기로 말레이시아 사람들 은 절대로 일본 사람들에게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시아의 민족을 둘로 나눈다면 일본인에 대한 적의를 확실하게 입과 행동으로 나타내는 민족과 그 속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민족으로 나눌 수 있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쪽은 일본의 경제적인 지원이 지금 단계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그 런 것이다. 한국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가세 : 아사히 신문이 최근 '식민지 시대를 경험했던 세대보다도 해방 후에 태어난 세대 쪽이 반 일 감정이 훨씬 더 강하다'는 요지의 한국인의 기고문을 실었다. 전여옥 씨는 해방 후에 태어났는 데 바로 이렇게 전 세대에 의해 강력한 반일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닌지. 전 : 세대는 전혀 관계없는 문제이다. 일본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사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 하다고 생각한다. 가세 : 이제까지 일본의 국왕이나 역대 수상이 한국에 대한 진사를 했던 것은 당시의 국제 정치 상황에서 한 나라의 독립을 빼앗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볼 때 반성할 만하다고 하는 것 은 반성하고 잘못을 빌 것은 잘못을 빌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인들 가운데는 '일본 통치 시대의 모든 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좋은 점도 있었다'고 인정하는 사람도 많았다. 전후 세대 쪽이 반일 감정이 더 강한 이유는 철저하게 추진되어 온 반일 교육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전 : 그렇다면 물어 보겠다. 식민 통치가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면 왜 일본인은 몇 대에 걸쳐서 총리가 바뀔 적마다 사죄했는가? 일본인이 잘못한 일이 없다면 왜 사죄했겠는가? 스 스로 인간으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사죄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가세 : 나는 노태우 전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과도 만난 적이 있지만 결코 반일 감정을 지니고 있 지 않았다. 일본이 지금까지 나쁜 일만 해 왔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옳지 않은 이야기이며 이런 말 을 듣는 한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장래 정말로 가까운 관계를 지속해 나갈 수 있을까 의문이다. 그리고 나는 일본은 미국에 대한 자위 전쟁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전 :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자위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역시 역사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 의 모든 나라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일본인은 당연한 상식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침략 전쟁이라고 마음속 깊이 사죄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한일 관계도, 일본이라는 나라의 장래도 없다고 생각한다. 가세 :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 말한다면, 당시 수상이었던 도조 히데키는 '기요미즈의 무대에서 뛰 어내리는 기분으로 전쟁 참가를 결의했다'(교토의 유명한 절인 기요미즈데라는 아주 높은 곳에 위치 해 있다. 비장한 결의로 전쟁 참가를 결의했다는 뜻)고 했다. 갈 데까지 다 간 상황에서 최후에 개 전을, 전쟁 참가를 결의한 것으로 이것은 지금처럼 침략 전쟁을 시작하려 했다는 상황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여옥 씨도 일본인의 상황과 역사를 좀더 공부하면 어떠실지? 그리 고 침략을 사죄하다고 친다면 중국이 6·25때 한반도를 침략했는데 중국에도 사죄 요구를 했는가? 나는 한국 사람들이 중국에 대해서는 아주 약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강한 태도로 나온다는 인상을 받았다. 전 : 모든 전쟁은 침략이다. 국제적인 학자와 언론인 모두가 일본은 전후 처리를 하지 않고 있다 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먼저 일본인이 해야 될 일은 전세계에 대해 일본인들이 일 으킨 전쟁이 침략 전쟁인 점을 깊이 반성하고 특히 동남아시아와 한국에 대해 일본이 진지하게 반 성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세 :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부당한 압력을 받고 분연히 일어선 전쟁이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을 침략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전쟁 결의에 대해 나는 일본인으로서 자 랑스럽게 생각한다. 일본의 전쟁 노력에 협력해 준 한국의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를 올리는 바이다. 전 : 세계 각 나라의 사정은 물론 한국 문제에도 좀 안다고 해온 가세 씨가 어떻게 해서 한국인의 기분과 사고에 대해 이처럼 무지한지 이상할 따름이다. 더구나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정말 시대 착오적이다. 가세 : 일본군 위안부 문제지만 한국에 있는 미군 기지 주변에는 지금도 매춘부들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보건소가 정기적으로 검진을 해 건강 보험 카드까지 갖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위안부와 같은 것 아닌가? 또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 병사도 현지의 여성을 똑같이 취급했다. 전 : 한국은 베트남에 대해 국교 정상화를 하면서 분명히 사죄했다. 그리고 종군 위안부라는 제 도는 인류의 역사에 유례가 없었던 일본의 특별한 범죄이다. 종군 위안부는 20만 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18만 명이 한국 여성이었다. 왜 한국인이었을까? 이것은 한마디로 한국인에 대한 인종 말 살 정책이었다. 가세 : 20만 명이라니 그렇게 많았는가? 그 통계는 내가 보기에는 좀 과장된 것 같은데. 전 : 이것은 일본 정부가 내놓은 통계이다. 가세 : 일본인만이 전쟁을 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미국, 영국, 네덜란드를 적으로 해서 일본의 육해군에는 수많은 우수한 한국인 장교가 있었다. 또 이 장교들은 전후에 한국군의 간부가 되었다. 한국인이 전쟁에 협력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 : 식민 통치 아래 강제적 징병에 의해 한국인이 전쟁에 끌려갔다는 점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대해 나는 한국의 군대가 미국의 용병으로서 참전한 불행한 전쟁이라고 생각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베트남과 한국은 직접 전쟁을 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우리 한국 인이 두고두고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전쟁에서 베트남 여성들을 학대했다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매춘(賣春)과 매춘(買春), 양쪽 다 나쁘지만 정말로 나쁜 것은 '제도'로서 종군 위안부를 만든 것이다. 위안부 혹은 위안이라는 말은 아름답다. 그러나 일본인이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면 할수록 그들이 한 짓은 추악했다. 가세 : 나는 일본이 처음부터 승산없는 바보 같은 전쟁에 돌입했다고 생각한다. 싸우지 않고 와 신상담했다면 좋았다고 생각하지만 당시 지도부는 그렇지 않으면 일본이 망한다고 생각했다. 미국 을 비롯한 연합국 측이 일본을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세웠다.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일본에 왔을 때 궁중만찬회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전 대통령은 인사를 통해 '이제부터 한국과 일본은 2인 3각으로 가는 시대. 이제 과거는 물에 흘려 보 내자'고 말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제부터 더 이상 한국 측으로부터 적어도 공식적인 차원 에서는 전후 처리 등등의 문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정말 잘 됐다고 생각했는 데. 전 : 나는 오늘 가세 씨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것릉 배웠고 크게 도움이 됐다. 『추악한 한국인 』에도 써 놓았지만 일본인은 비판을 좋아하고 그래서 발전한다고 했는데 한국인이야말로 그렇다. 한국인은 비난하는 것도 좋아하고 토론하는 것도 좋아한다. 그리고 한국인은 자신의 의견을 정정당 당히 밝힌다. 그러나 일본인은 뒤에서 자신을 숨기고 이야기하는데 이 점이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한다. 가세 : 한일 관계에 필요한 것은 서로가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내가 말한 것은 적지 않은 일본 국민들이 속으로 품고 있는 속마음이다. 결코 일본 국민의 대다수 가 '일본인이 전부 잘못했고 나쁘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오늘 이야기한 것이다. 전 : 나의 책 『일본은 없다』는 일본을 헐뜯기 위해서나 또 일본과 한국 사이를 더 벌려 놓기 위 해서 쓴 것이 결코 아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실제 모습을 한국인들에게 있는 그대로 솔직히 알리 기 위해 쓴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추악한 한국인』처럼 숨어 쓴 것이 아니라 당당히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고 썼다. 가세 : 그러니까 서로 강한 인내심을 지니고 이야기한다면 앞으로 한일 관계도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 : 나는 그렇게 인내심이 있는 편이 아니지만(웃음) 일본을 상대하기 위해 앞으로 내 인내력을 갈고 닦아야 된다는 생각도 든다. 강간의 기념물 "세종로의 막다른 골목에 바위로 뒤덮인 북악산을 배경으로 백악의 궁전 같은 느낌을 주는 수려 한 국립 중앙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아마 서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고 건축학적으로도 가장 아름다운 건물일 것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묘사한 한국에 있는 한 일본 신문기자의 글이다. 일본인 기자들을 만나면 언제나 조선총독부의 철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집요할 정도로 받곤 했다. 그들은 대부분 조선총독부처럼 아름답고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을 파괴하는 것은 한 마디로 무식한 짓이라고 비난한다. 일본인들에게 조선총독부 건물은 너무나 많은 것을 상징하고 추 억하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친한 일본 친구가 서울에 오게 되어 나는 비교적 일본 사람들과 접촉이 많은 이에게 어 디를 구경시켜 주면 좋을 것인지를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박물관을 추전하는 것이었다. "조선총 독부 건물 말이지요. 일본 사람들 그 앞에 데려다 놓으면 까무라치게 좋아하지요. 갑자기 입이 찢 어지게 웃으면서 뿌듯해서 어쩔 줄을 모르죠. 그리운 그 옛날을 생각하며 독사진 찍고 단체 사진 찍고 난리라니까요." 나에게는 바로 그 조선총독부가 우리의 국립박물관이라는 현실이, 그리고 한때 우리의 대통령이 업무를 보던 곳이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암담한 역사로 다가왔다. 많은 일본인들은 이 건물이 근대 건축 역사상 보존 가치가 크고 훌륭한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입 을 모은다. 또한 프랑스의 예를 들어가며 파리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했을 때 독일군 본부로 썼던 건 물을 지금은 '레티샤 호텔'로 그대로 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레티샤 호텔은 파리에서 가장 비싼 최고급 호텔로 독일 부자들이 와서 그 옛날을 떠올리며 아낌없이 돈을 뿌리고 간다는 별 신빙 성 없는 이야기까지 덧붙이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충고하기를, 조선총독부 건물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고급 호텔로 개조하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까지 제공하곤 한다. 그러면 일본인들로 초만원을 이루어 일단 외화 획득은 물 론 한일 친선과 양국 우호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일본인의 돈을 받아'(일본은 그 돈이 얼마가 되든 돈을 낼 것이 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원상 그대로 옮겨 놓으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호텔로 쓰든지(일본인들은 정말 호텔 좋아하고 조선총독부를 호텔로 쓰고 싶어하는 듯하다) 일본 문 화 센터로 하든지 좌우간 두 나라의 우호를 증진하는 데 쓰면 어떻겠는가 하는 이야기였다. 그들의 논리라면 우리 한국인들은 모두가 옹졸한 민족주의에 열받는 사람들이고 건축의 아름다움 이나 역사의 보존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 무식한 집단이다. 게다가 총독부 건물을 그대로 두면 앉아서 '큰 돈을 벌텐데' 그 아까운 것을 폭삭 부숴 버리려고 하는, 몰라도 한참 모르는 대책 없는 '한국 종자'인 것이다. 더구나 그 귀중한 세계적인 문화재를 없애 버리는 것은 '아름다운 건축물을 사랑하는 전세계 문화 애호가에 대한 죄악'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본인들에게 나는 정면으로 '역사에 있어 문화재란 무엇이냐?'고 묻고는 했다. 그들은 아는 체하면서 '역사와 역사를 잇는 고리'라느니 '역사의 흔적'이라느니 하는, 나도 어디서 많이 들은 말들 을 주워섬기곤 했다. 과연 역사는 '문화재', 역사의 흔적을 보존하는 것만을 요구할까? 그것이 역사를 기억하게 해 준 다는 것만으로 과연 보존의 절대적인 가치가 생기는 것일까? 역사란 마치 자식 사랑에 눈이 먼 부 모를 둔 철없는 어린아이의 장난감 방처럼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 차 있는 장난감 박물관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대와 역사는 오히려 잘못되고 왜곡된 상징에 대한 파괴도 요구 한다. 차우세스쿠 독재 정권이 무너진 뒤 그의 동상이 루마니아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듯 조선총 독부 건물은 파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창조적인 파괴'를 통해 지나간 역사의 암흑과 질 곡을 과감히 정리하고 바로잡을 의무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독일이 전략 본부로 썼던 레티샤 호텔과 그 시작이 다르다. 조선총독부 건물 은 조선 왕조의 맥을 끊어 놓기 위해 세워진,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소름끼치는 상징이다. 조선의 왕궁인 경복궁을 가로막고 서 있는 그것은 우리 한국인에게는 분노와 회한의 상징이다. 일본 사람 을 다시 그 호텔의 손님으로 받아들이는 능욕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은 한국인으로서의 수치이다. 어떤 이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두고두고 우리가 뼈아프게 기억하도록 조선총독부 건물을 그대로 놓아 두자는 것이다. 그러나 광화문과 경복궁 사이에 낀 조선총고부 건물은 우리에게 어떻게 비치 고 있는가? 내게는 마치 아직도 구석 구석 남아 있는 식민 유산의 악에 바친 절규처럼 느껴진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아름답다고, 단단하고 품위 있게 지어졌다고 말하는 '일본인의 미의식'에 강요된 우리의 정신, 우리의 눈을 나는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의 나가사키오 히로시마의 존재가 '미국의 침략성'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있어 두고두고 미국의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지 않느냐고, 그것하고 똑같이 우리에게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고발하는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지 않느냐고. 일본인에게는 몹시도 아픈 상처이며 치욕스러운 증거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미국은 내년에 워싱턴에 있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에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자료를 전시하 겠다고 밝혔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미국은 이유야 어쨌든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고 결국 '피 해자' 일본의 원폭 자료는 '가해자'인 미국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참으로 어처 구니없는 논리이다. 일본은 절대로 피해자가 아니고 미국도 절대로 가해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 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연 일본이 미국처럼 식민 통치를 했던 과거를 뉘우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다. 일본이 한국인에게 그들의 왕 아키히토와 히로히토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으며'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엄청난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는 두리뭉실한 그 말뜻이 나마 알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수많은 각료들이 행한 망언의 한마디 한마디는 우 리에게 '일본의 본질'을 알려 준다. 어느 일본인도 일본이 우리 나라에 가한 '엄청난 죄과'를 알고 반성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인에게 무슨 '역사 의식'이 있으며 무슨 '참회와 사죄'가 있는가? 일본인에게 무슨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이 있는가? 일본이라는 국가와 민족은 그런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는 상식 과 양식을 지닌 집단이 아니다. 그토록 문화재를 사랑했다면, 그토록 '한국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다면 왜 수많은 우리의 건축물을 파괴하고 짓밟고 '문화의 씨'를 말리려고 했는가? 우리 나라에 저질렀던 그 잔혹하고 잔인하고 무 지한 일들을 두고 일본은 한반도에 '아름다운 일들'을 했다고 왜곡하지 않았던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역사의 파괴를 그들은 '문화재 보존'이라고 끔찍하게 미화해 왔지 않는가? 역사에 무지한 민족, 참회할 줄 모르는 민족, 살인과 폭행 그리고 능멸을 일삼은 역사에 대해 아 무런 죄의식도 없는 일본 민족의 뉘우침을 기다리기 위해 우리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남겨 두어야 하는가? 일본과 우리의 역사를 청산하는 것은 '파괴'로부터 시작된다. 일본이 우리에게 강요했던 잘못된 역사관의 파괴,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친일파에 대한 우상 파괴 그리고 다른 가치로 인해 면죄 받은 몇몇 '훌륭하다는 인물'에 대한 파괴 작업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역사를 향한 또 하나의 작업 은 청산이다. 청산을 위한 '파괴'의 작업은 일본과 우리 역사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없애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 도록 우리 한국인이 잘못된 역사를 어떻게 파괴하고 원상 복구하는가를 일본에 보여주어야 한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고 광화문과 경복궁이 멋지게 어울린 그 모습을 나는 보고 싶다. 그리고 북악산의 잘생긴 모습도 보고 싶다. 역사를 바로잡은 한국인의 모습으로서. 절규 "좀 창백하고 바싹 마른 얼굴에 생김새가 날카로웠고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총명한 눈을 갖고 있어 첫눈에는 아름답다는 인상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얼굴에서 힘과 지성, 그리고 강한 개성을 읽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니까 생기발랄함과 소박함, 재치같은 것들이 그녀의 용모를 환히 비춰 주고 있었고, 단순한 겉모습의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큰 매력을 느끼게 해주었 다." 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은 바로 명성황후이다. 언더우드 부인이 쓴 이 인상기는 명성황 후가 대단히 총명하고 특별난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녀는 세계의 강대국과 그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자 기가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나라에 이익이 되는 것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고 백성의 복지를 찾고 있었다." 바로 이 여성이 지금으로부터 꼭 백년 전에 일본 공사 미우라와 두 사람의 우익 분자에 의해 시 해되었다. 한 나라의 국모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여염집 아낙의 경우에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잔 인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살해되었다. 칼로 잔인하게 난자당한 것은 물론이고 옷이 벗겨진 채 짚가 마니에 싸여 불에 태워졌다. 역사상 그 어느 악독한 여군주도 명성황후처럼 이렇게 비참하게 숨진 경우는 없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일본과 우리의 역사를 되새길 때 '불행과 치욕'의 역사라고 규정짓곤 한다. 그리 고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치욕적인 부분이 바로 명성황후에 대한 시해 사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일간의 역사는 한마디로 '배신'과 '배은'의 역사였다. 우리 나라의 존재는 일본에게 이른바 '생명 의 교사'였다. 중국이 우리에게 문화를 전해 주었을 때 우리에게는 이미 그 문화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일단 중국의 문화를 즐기고 선택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일 본의 역사서와 수많은 역사적 사건에는 익명의 인물들이 생존해 있다. 이 인물들은 그 옛날 일본에 '문화'라는 생명을 심어 주기 위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다. 우리 나라는 일본에 게 완벽한 '문화'를 그대로 이식시켜 준 '생명의 교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생명'을 준 우리에게 일본은 '반생명'으로 갚음을 했다. 임진왜란과 36년간에 걸친 강제 점령을 비롯해 '배신'과 '배덕'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일본어에는 그 어느 나라 언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성이 있다. 즉 수많은 배신의 언어들이 그것이다. '우라기리' '네-가에리'를 비롯해 수많 은 배반의 단어들이 있다. 그 단어들에서는 생각만 해도 오싹해지는 야멸찬 배신이 느껴진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살펴보면 마치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보는 것 같다. 생명을 잉태하고 그 생명에게 사랑과 헌신을 준 여성에 대해 남성은 이 여성을 지배하고 유린하며 '잔혹한 남성의 역사' 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역사에서 여성은 희생자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마치 남자와 여자의 관계처럼 생명에 대해 반생명으로 갚음했다. 범죄를 저지른 한 인간이 교도소에서 자신의 죄값을 치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나라가 다른 나 라에게 입힌 피해는 당연히 청산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독일이 유태인에게 속죄하고 한 사람 한 사 람에게 개인적인 배상을 하듯 한국에 대한 침략이 잘못된 일이었음을 일본은 정확하게 시인했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 사죄와 배상을 하지 않고 있다. 가장 좋은 예가 일본 군 위안부의 문제이다. 우리가 운동화 선저에서도 보았듯이 꽃다운 나이의 처녀 20만 명이 일본 군 대에 끌려 다니며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뎌 낼 수 없는 모진 일을 ㄲ었다. 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는 일본의 식민지 체제가 얼마나 가공할 만한 범죄였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리고 인간이 어디까지 잔혹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알려 준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나라의 본질은 무엇이며 '일본인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실체를 가르쳐 준다. 인류의 역사상 수많은 성의 유린이 있었고 아직도 매춘이 성행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성을 통한 악행의 제도화'라는 점에서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 다. 뿐만 아니라 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이름으로 전 한국 여성을 상대한 집 단적 강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제노사이드', 즉 종족 말살 정책에 있다. 일본은 1943년 부터 약 3년간에 걸쳐 임신을 할 수 있는 한국 여성들을 계획적이고 강제적으로 붙잡아 '일본군 위 안부'로 만들었다. 이 여성들은 하루에도 수십 명에 이르는, 성에 굶주리고 인간성을 파멸당한 일본 남성들에 의해 수도 없이 능욕당하며 임신할 수 없는 몸으로 되고 말았다.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은 일본군이 철수할 때 그들의 손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다. 이 종군 위안부 제도는 그 어느 상황, 그 어느 제도보다도 극명하게 '종족 말살 정책'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만에 하나 일본이 그 '악마의 놀음'과도 같은 전쟁을(일본인들은 그 전쟁을 성전 이라고 불렀다) 계속해 나갔더라면 나를 비롯한 수많은 젊은 한국인들이 이 땅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의 우리 민족에 대한 종족 말살 정책은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 아래 행해졌다. 일본은 식민 통치 기간 내내 수많은 관료의 발언을 통해 조선 민족의 씨를 말리겠다는 발언을 계속했다. 바로 그런 '비현실적인 공포성 발언'이 우리의 역사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는 것 에 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이 있다. 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성과 일본 사이에 가로놓인 단순한 과거사 ㅁ 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성에 대해, 인간의 양심에 대해 답을 요구하는,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의 절 규이다. 무엇보다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해결은 '인간'이라는 공통된 위치에서 '인간이 저 지른 죄악'을 인정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 일본인들은 '한국과 일본의 모든 문제는 1965년 한일 협정으로 모두 끝났으며 5억 달러 의 경제 지원으로 모든 배상은 끝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 놓여 있는 전후 처리 의 문제는 역사적 사고에서 침예하게 그 차이를 드러낸다. 일본인들에게는 '역사에 책임질 사람'이 없듯이 과거는 흘러가면서 잊혀지고 잊혀지면 용서하는 것이란 도식이 성립된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일본의 잘못된 역사관을 보여주는 것 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국제법상 '개인의 인권에 대한 침해'로 유엔 인권위원회에 회부되어 있 다. 한국과 일본의 문제가 1965년의 한일 협정으로 모두 끝났다는 것은 옳지 않다. 일본이 이토록 한일 협정에 매달리는 것은 이 협정 자체에, 피해를 입은 개인에 대한 배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에 참가해 '모든 것을 보고 알고 있는' 일본인들은 '풍요 속에 자란 젊은 세대'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 젊은 세대는 역사에 대해 죄의식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역사 의식 자체가 없다. 과거 청산, 전후 처리 등 이 모든 것들은 이들에게 허공에 떠도는 한낱 메아리 보다도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이 젊은 세대들은 말한다. "도대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냐?" 같은 전범 국가인 독일은 그러나 어떠했는가? 1951년에 독일의 아데나워 수상은 국회에서 이렇 게 발언했다. "대다수 독일 사람들이 유태인에 대한 범죄를 증오하고 그 잔인한 학살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 나 그 범죄는 독일인의 이름으로 저질러졌고 독일 민족의 이름으로 남았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그 비인간적인 범죄의 책임은 그래서 우리 독일이 져야만 한다. 우리는 고통받은 그들에게 도덕적, 그리고 물질적 배상의 의무가 있다." 물론 일본이라는 나라는 그런 인식까지 가기조차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 아데나워의 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에 참여하지 않았던 대다수의 독일인은 그럼 모두 무죄 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어떻게 히틀러가 6백만 명의 유태인을 사냥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나치의 행동을 침묵과 무언으로 동조해 준 다수의 독일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침묵 하고 묵인했다는 사실 역시 독일인은 좀더 겸허하게 뉘우쳐야만 한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 오늘 일본인들이 왜 한국인들은 과거의 문제를 그토록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그것은 피해자인 나, 한국 여성의 의무라고. 피해자의 역사 의식으로서 일본이 다시는 그러한 역사의 잘못을 우리에게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일본은 계획적으로 치밀하게 한국 민족에 대한 '말살 정책'을 써 왔다. 그 시초는 명성황후 민비 시해 사건이다. 이 사건은 외교에는 문외한인 공사 미우라와 불량배 두 명의 우발적 범행이 아니 다. 이미 일년 전부터 '여우 사냥'이라는 이름 아래 이노우에 공사가 주도 면밀하게 계획을 세웠고 두 명의 불량배는 사실은 외국 유학까지 했던 인텔리였다. 결국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일본이 철 저하게 각본을 짰던 한국 민족에 대한 제노사이드'의 전주곡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생명을 준 일본은 우리에게 '총체적인 제노사이드'로 갚음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다. 그리고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일본의 본질이다. 올해 1995년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이다. 해방 50주년이며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한 지 꼭 30 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명성황후 민비가 일본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된 지 꼭 백년이 되는 해이 다. 바로 이 명성황후의 죽음은 오늘 한국 사회에 '살아 있는' '한국 여성'인 나와 우리에게 '일본의 본질'을 묻는다. '총체적 제노사이드'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자리한 일본에 대해. 친한파들 많은 일본인들이 진지하게 이런 질문을 한다. "어떻게 하면 한국과 일본이 잘 지낼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한일 관계사에서 끝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만큼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일본인 가운데는 한국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을 좋아하기 때문에 조용필의 노 래를 비롯해 한국 가욜르 백여 곡 넘게 외어 부른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다는 사람도 있다. 또 한국이 너무 좋다며 회사를 바꿔 가면서까지 한국 근무를 연장하는 일본인도 있다. 내가 일본 에 있을 때 만난 골수 공산당원이었던 좌파 지식인은 십만 명이 넘는 재일 동포들을 지옥 같은 북 으로 보낸 죄를 갚기 위해 평생을 두고 한국인들에게 참회하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일본인들을 만날 때면, 한국과 일본은 잘 될 수 있지 않을까, 두 나라 사이에 패인 그 깊고 깊은 증오와 미움의 골을 개인과 개인의 만남, 민간 차원에서 하나 하나 매듭을 풀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가져 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일본 국민 역시 군국주의, 집요한 인간 차별, 인권 억압의 희생자라고 생각했다. '천황제'로 상징되는 인간에 대한 억압, 인간에 대한 불평등 제도 아래에서 자신들의 국가에 의해 무 참히 짓밟혀진 존재가 바로 일본 국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 역시 잘못된 역사의 희 생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일본에 대해 알게 되고, 일본어가 익숙해지면서 내 자신이 너무나 단순하고 순진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본이라는 국가뿐 아니라 일본 국민들이 지닌 '이중성'에 내 눈이 떠 졌기 때문이다. 한국 노래를 백여 곡 가까이 부른다는 그 일본인은 몇 번쯤 만나자 긴장을 풀고 그의 한국 사랑 의 혼네,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한국 사람처럼 집요한 민족은 없어요. 언제나 일본의 식민 지배를 비난하지요. 하지만 한국은 그 당시 어차피 일본이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에 먹힐 운명이었지요. 그런데도 일본을 비난하는 것 은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지요." 한국을 좋아해 십 년째 한국 생활을 하고 있다는 한 일본인은 한국에 대해 가벼운 죄의식을 가지 고 한국에 오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타이른다고 한다. "한국을 우리 일본이 지배했다는 것은 일본은 물론 한국의 입장에서도 다행스러운 일이죠. 그 당 시 엄청난 힘으로 몰려오던 서구 열강의 힘 앞에서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이름 아래 한국을 보호했다고 볼 수 있지요. 나는 60년대 중반 일본의 정치가가 말한 대로 한국을 일본이 통합해 '대 일본국'을 만들었다면 두 나라 모두 득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 사실과 다른 근거없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열렬한 공산당원이었고, 십만의 재일 동포를 북한에 보냈던 좌파 지식인은 한때 친한파로 100퍼센 트 전행해 우리 정부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군사정권이라 정통성에 자신이 없었던 우리 정부의 약점을 불모로 그는 어느 나라 고관 못지않은 대접을 받고 또 요구했다. 한국인에 대한 그의 속죄 와 참회 작업은 반민주적인 한국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며 위세를 떨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한구에 점차 민주적인 정권이 틀을 잡아 가면서 당연히 한국의 새 정부는그에 대해 아무 런 이유 없이 칙사 대접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갑자기 100퍼센트 전행해 '반한 파'로 돌변했다. 그는 한국을 철저히 헐뜯고 욕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대해 일본은 잘못한 것이 없었다'는 선언까지 해 스스로 수없이 밝힌, 한국인에 대한 속죄 운운하는 말을 뒤덮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그의 변신은, 또 잇달은 재변신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역사가, 일본인의 타고난 속성이 수없이 반복해 온 일이기 때문이다. 진실과 정의 어느 나라, 어느 사회이건 전향과 변신은 있다. '어제의 혁명가가 오늘의 보수주의자'라는 말처럼 사회주의자의 전향이나 우파의 변신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일본의 경우 한 개인의 전향 이 아니라 집단적인 그리고 일체적인 전향이라는 점이다. 특히 이 전향은 언제나 아무런 회의도 고 민도 저항도 없이 이루어졌다. 60여 년 동안 군국주의 아래서 온 국민이 전쟁에 눈을 붉히고 천황 폐하를 위해 기쁘게 죽겠다고 울고불고 했던 일본의 역사는 김일성 사후의 북한 인민을 뭐라고 할 처지가 못되는 '광기'의 역사였 다. 그러나 패전 후 일본 국민은 군국주의 시절의 그러한 일본인이 어디 있었냐는 듯, 한 순간에 민주주의 신봉자로 돌아섰다. 서구의 어느 역사학자는 일본의 이러한 국민적 전향을 두고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한 시대 한 이즘이 마감되면서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의 전향자가 나올 수는 있어도 전 국민 이 이렇게 확실하게 돌변하는, '일사불란하게' 전향하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고 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집단적 전향은 바로 일본인이 지닌 '이중성'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군 국주의적 성향으로 치닫던 일본 국민이 한 순간에 민주주의 신봉자로 돌변하는 것도, 그리고 친한파 에서 반한파로 돌변하는 것도 모두가 일본인이 지닌 사고의 이중성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일본인의 이중적 가치 체계는 달리 말한다면, 일본인에게는 기본적인 진실된 가치 체계, 윤리 기준, 도덕 관념 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상화'과 '편의'에 따라 모든 것을 정하는, 일본인 스스로가 이야기하는 '유 연성'의 개념은 일본 사회에는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진실과 정의의 기준이 없다는 이야기도 되는 것이다. 흔히 일본인의 의식 체계를 비도덕적, 비윤리적이라고 말하지만 일본인에게는 원초적으로 윤리, 도덕, 죄의식 등의 개념이 아예 없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전쟁의 죄과에 대해 일본이 청산을 하지 않고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는 아예 그런 개념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통 일본인들은 일본이 저지른 죄과를 가슴 아픈 듯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혼네, 속마음을 털어놓 을 때는 100퍼센트 돌변한다. "한국도 그렇지만 중국도 우리한테 할 말이 없어요. 지난번 나가노 법무장관이 남경 대학살이 조 작이라고 난리를 쳤지만 생각해 봅시다. 남경 대학살을 비롯해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해 죽인 중 국인은 천만 명밖에(!) 되지 않지만 중국인들이 문화혁명을 통해 자기네들끼리 죽인 숫자는 이천만 명이나 되는데, 사실 우리 일본인들에게 뭐 할 말이 없잖습니까?' 하고 반문하기에 이른다. 그들이 지닌 이중적 사고, 이중적 행동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혼네(속마음)와 다테마에(겉치레) 의 이중 구조가 하나의 미덕처럼 교양 있고 고상한 행동 양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일본의 이중성 앞 에서 '우리 개인이라도 친구가 되어 한일 역사의 절곡을 극복하자'는 일본인들의 말은 내게는 언제 나 공허하게 들린다. 결국 한국에 대한 사랑(?), 호감이란 그 옛날 '아름다운 식민지'인 한국에 대한 향수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뿐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어떻게 하면 잘 지낼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일본인이 지닌 그 무서운 이중 성의 청산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10. 적색 경보 야스쿠니 신사는 나이트 클럽 한건씩 합시다 - 아, 옛날이여 아우슈비츠는 날조다 건성으로 이야기하자 적색 경보 마음먹고 주는 것 히로시마의 평화! 평화! 평화! 나도 어른이 되고 싶다. 반성 없이 평화 없다 야스쿠니 신사는 나이트 클럽 도쿄 주재 한국 특파원들은 일본의 패전일인 8월 15일이면 야스쿠니 신사를 주목한다. 멋쟁이인 척하는 하시모토 류타로가 회장인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일본 국회의원의 모임'에서 몇 명이 공식적으로 참배하는가 또는 비공식적이거나 개인 자격으로 참배하는 인사는 누구인가를 알아두기 위해서이다. 야스쿠니 신사란 침략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주요 전범들이 묻힌 곳이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또 그들 외에 246만 명의 일본 군인들의 영혼이 있는 곳이다. 즉 2천만 명을 헤아리는 아시아인들을 나치보다 더 잔혹하고 처참하게 살해했던 살인자 246만 명이 묻혀 있는 곳이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해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겉으로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일본인의 의식은 일본이 과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일본이 어떤 곳을 향해 갈 것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일본의 정치인들이 공식적이건 개인 자격이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다는 것은 결국 전쟁 을 일으켜 죄없는 사람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전쟁 범죄인을 찬양하는 행위이다. 같은 전범 국가인 독일의 경우, 신사라는 것이 없기도 하지만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곳을 참배했다면 비난의 대 상이 되는 것은 물론 공직에 있는 경우라면 자리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런 상식을 찾을 수 없다.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면, 그것도 총리나 국회의 원으로서 공식적으로 참배하고 자기 의견을 있는 대로 다 밝히면 그 정치인의 인기는 끝없이 치솟 게 된다. 일본 정치인들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적극적인 이유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지극히 보 수화되는 정계의 흐름 속에서 몰표를 받을 수 있는 '전국유족회'를 비롯한 많은 우익 조직들의 지원 이 약속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런 소규모(?) 지원 외에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원하는 일본 국민 전체의 무언의 지원이 있다는 계산 때문이다. 일본의 보통 국민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에 대해 아주 간단한 논리를 편다. 한마디로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들이니까 참배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냐는 이야기이다. 물론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나라를 위한 죽음'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들의 이웃의 한 국과 중국, 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싱가포르의 사람들을 죽이고 정복하기 위해 총과 칼을 들었던 자들이다. 팽창주의의무서운 기치 아래 그들은 수많은 아시아인들을 죽이고 마침내 '일본 왕'의 이름을 죽음의 잠꼬대로 하며 죽어 갔다. 야스쿠니 신사는 그런 점에서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폭력 조직배의 공동묘지와 같은 곳이다. 일본의 우익 평론가(?) 가세 히데아키는 야스쿠니 신사를 일본의 나이트 클럽에 비유했다. 그는 다른 나라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문제삼는 것은 명백한 내정 간섭이라고 주장했다. 신사 참배 는 일본인에게 있어 종교 활동인 만큼 일본의 각료들이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외국의 각료들이 교 회에 가거나 절에 가는 것과 같다고 떠들어댔다. 더ㅓ구나 공식적이냐 개인적이냐를 따지면서 참배 를 문제삼는 것은 엄연한 인권 유린이라고 했다. 각료가 나이트 클럽에 놀러 갈 때 공식, 비공식을 따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문한다. 결국 그의 말대로라면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일본 의 각료들이 나이트 클럽에 놀러 가는 것과 같은 행위가 된다. 문제는 바로 이곳에 있다. 놀러 가 는 나이트 클럽에 비유한 신사가 하필이면 수만 군데의 일본 신사들 가운데 전범들의 영혼이 있는 야스쿠니 신사여야만 하는가 하는 점이다. 독일과 일본은 여러 모로 비교된다. 독일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학살 50년을 맞아 콜 수상을 비롯 한 모든 독일 국민들이 광기에 휩쓸려 벌인, 인간으로서 차마 저지를 수 없는 범죄에 대해 진심으로 참회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러한 무서운 일을 저지르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를 비롯해 독일인의 손에 의해 희생된 유태인은 모두 육백만 명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어떠했는가? 일본이 우리 나라를 비롯 아시아인을 살해한 숫자는 모두 2천만 명 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 나라에ㄷ 기껏 '통석의 염'이니 하는 겉치레 인사로 얼버무렸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침략성의 생생한 현장이며 이 신사에 참배한다는 것은 마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학살을 저지른 자들의 무덤을 찾아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그날을 그리워하 는 것과 같은 것이다. 침략을 옹호하고 살인을 찬양하고 앞으로 더 많은 살인과 침략을 다짐하는 행위인 것이다. 한 건씩 합시다 - 아, 옛날이여 하시모토 류타로 A 57세, 2남 3녀의 아버지 취미는 검도, 독서, 등산, 스키, 수영, 역도, 사진 촬영 등 다양 일본 대학생이 뽑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 1위 깔끔한 옷차람과 단정한 용모로 여성 지지도 1위 정치인 하시모토 류타로 B 11선 일본 국회의원, 현재 일본 통산성 장관 방직회사 직원 거쳐 부친의 선거구를 물려받아 26세에 첫 국회의원 당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의 회장 일본 전몰 유족회 회장 최근 일본 국회에서 태평양 전쟁은 침략 전쟁이 아니라고 공언 물론 하시모토 A와 하시모토 B는 동일 인물이다. 일본 정치계에서 '단디'(멋장이의 일본식 발음) 로 불리고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차림새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일류 호텔 지배인'에 빗대는 인물이 다. 서양 정치인 같은 호사 취미를 자랑하며 선거구인 오카야마 여성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뿐 아니다. 인기 있는 여자 연예인들하고도 알맞게 사이가 좋아 그녀들이 신변잡기와 완전 잡문을 책 으로 묶어낼 때 '추천의 인사말'도 써 주는 페미니스트이다. 게다가 실력도 있다. 얼마 전에 자신 이 직접 촬영한 수준급의 사진을 곁들인 정책집 『비죤 오부 자빤』('일본의 비전'이라는 책인데 책 제목을 영어로 쓰고 이렇게 일본말 토를 달았다)에서 경제와 복지에 밝은 전공을 살려 '폭싹 늙어 가는 일본, 고령화 사회 일본의 문제점'을 아주 조리 있게 걱정했다. 교통부 장관을 지낼 적에는 일 본의 최대 골치거리인 국철을 쪼개 민영화시킨 결단력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하시모토가 일본은 결코 침략 전쟁을 하지 않았다고 당당히 밝힌 것이다. 태평양 전쟁 은 일본이 아시아를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를 상대로 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의 주장은 결국 일본은 서구의 악랄한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해 싸운 것이라 는 일본의 골수 우익의 주장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그는 남경 대학살에 대한 견해를 묻는 사회당 아베 의원의 질문에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배웠다' 고 아주 묘한 답변을 했다. 일본 정치가들의 이같은 역사 왜곡 발언은 '스테디 셀러'용이다. 지난 53년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많은 득을 주었다'는 구보다 망언을 비롯해 '한국과 대만 그리고 일본을 한묶음으로 하는 일본합중국을 만들어 같이 잘 살아보자'고 한 58년의 오노 망언, '한일합방 은 타당하고 옳은 일이었으며 절대로 침략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한 마쓰노 망언이 있으며, 지난 70 년에는 일본 정치계에서 우익 성향을 확실하게 수혈한 나카소네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한 것은 한국에 오히려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는 말을 당당히 했다. 최근에는 나가노가 '태평양 전쟁은 침략 전쟁이 아니고 대동아 공영권을 이루기 위한 전쟁이고 남 경 대학살은 날조된 것'이라는 망언을 했다. 사쿠라이는 '일본만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는 발언을 했다. 이들의 발언은 호소카와 총리의 뒤를 이은 보수 희귀 정권 하타 내각의 '계산된 작품'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이 두 장관은 '한건'을 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일본 정계의 미래를 담당하겠다는 이른바 '뉴리더'인 하시모토가 2차 세계대전은 침략 전쟁이 아니라는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발언은 국회에서 한 것이므로 취소하거 나 정정할 의사는 조금도 없다고 했다. 게다가 짜깁기 일본 내각은 하시모토의 진의는 그것이 아니 라는 식으로 초점을 흐리면서 결국 그를 감싸고 돌았다. 하시모토는 전 내각의 두 장관과 달리 건 재하다. 일본 최초 연립정권의 얼굴마담 노릇을 했던 호소카와는 우리 나라를 방문했을 때 '2차 세계대전 은 침략 전쟁'이라고 말하면서 사죄했다. 그때 우리 나라 언론은 흥분했다. 일본 총리로서는 사상 최고의 강도 높은 사죄 발언이라는 둥. 나는 그런 뉴스를 보며 "그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람" 하 고 중얼거렸다. 그것은 호소카와 개인의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의 발언이 나가자마자 일본 열도는 발칵 뒤집혔다. 고매한 도쿄대학 교수는 '일본인들의 콘센 서스(합의)도 거치지 않고 그런 발언을 하다니' 하고 분노햇다. 그뿐인가. 이른바 방위족 의원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골수 우익 이시하라 신타로는 '역사에 부끄러운 발언'이라면서 호소카와를 몰아세 웠다. 결국 호소카와는 우익 당원들의 테러 대상이 되는 입장으로 몰렸고 지금의 일본 분위기로 보 아서는 여전히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예전에는 '어느 전쟁이든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는 입장이었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본 일이 없는 일본인들로서는 '다른 나라들이 잘못했다고 하니' 엎드려 있을 시기라고 생 각했던 것이다. 전후 20여 년 동안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은 바로 그런 수준이다. 그러나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돈과 힘을 구축하면서 일본 정치인들과 국민들의 '그리운 옛날'에 대한 향수는 커져 갔다. 이어 '우리에게 좋았던 그 시절, 너희도 좋았지 않냐?'는 인식이 서서히 자 리잡아간 것이다. 호소카와가 '침략 전쟁' 운운할 때 분노한 것은 이시하라 신타로 같은 역사에 무지한, 소설가인 척 하는 정치꾼보다 3백만에 가까운 일본의 전몰 유가족회였다. 또 1억2천만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은 호소카와의 말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패전 이후 '불쌍한 일본인' '원폭으로 고 통받은 일본인' '아시아 해방을 위한 전쟁에 꽃다운 목숨을 바친 일본인'이라고만 교육받아 온 그들 은 일제히 '우리 오빠가 침략 전쟁의 주구였단 말이냐?' '우리가 왜 피해자이지 가해자란 말이냐?'고 들고 일어난 것이다. 패전 뒤 일본 정부는 일본 국민에게 '가해자 의식'은 완전히 빼버리고 '피해자 의식'만을 주입시켰 다. 내가 만난 마이니치 신문의 여기자는 일본 국민들은 아무도 자신이 가해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 는다고 말했다. 그 이유로 일본 국민은 피해자라는 생각만으로 머리가 가득 차 다른 생각을 할 겨 를(?)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정치인들이 이처럼 미친 말들을 되풀이하는 것은 자신들이 세뇌시키고 교육시킨 바로 '피 해자 의식만 있는 일본인'의 존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엄청난 표밭이고 돈줄이기도 하다. 또한 이들이 망언을 되풀이하는 것은 복잡한 일본 정계의 구조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과도적인 성격이 강했던 호소카와에 이은 보수성 짙은 하타, 그리고 사회당 당수를 꼭두각시로 내세운 자민당 정권으로 이어지는 일본 정계의 우익화, 보수화 그리고 복고화를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시모토의 발언이 문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일본 정계가 초당적으로 감싸고도는 것은 실로 현 기증 나는 일본의 '역사 왜곡' '도덕 불감증'의 기나긴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일본은 변했다고 믿는다. 잘사는 나라 일본의 '뉴리더'들은 균형잡힌 사고로 '군국 주의 일본'과 영원히 작별을 했다고 생각한다. 괜찮은 정치가들은 '망언파'와 달리 평화를 사랑하고 과거를 뉘우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를 우습게 보지 않고는 불가능한 망언과 '일본의 뉴리 터'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정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일본의 망언 시리즈에, 이번 에는 새로운 정치인이라는 상표를 달았던 하시모토도 가세했다. 그러나 사실 하시모토는 이미 야스쿠니 신사에 국회의원들이 참배해야 한다고 주장해 온 인물이 고 일본 전몰 유가족회 회장으로 '일본의 보수 우익화'에 정열적인 포부를 가졌던 인물이다. 다만 그런 활동을 조용히 해 오는 한편 '나도 알고보면 부드러운 남자예요' 하면서 스키장에서 폼을 재며 커피도 마시던 인물이다. 일본인이라는 혼네(속마음)를 국제인이라는 다테마에(겉마음)로 교묘하게 감춰온 것이다. 일본인들이 왜 하시모토를 사랑하는가? 스키도 잘 타고 사진도 잘 찍으며 서양 정치인 흉내를 근사하게 내는 등 멋지고 세련되어서? 아니다. 하시모토가 사랑받는 '진짜 이유'는 일본 제국주의 에 강한 향수를 느끼는 보통 일본인이 바로 하시모토 류타로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을 일본인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는 날조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위험한가, 그리고 일본의 이른바 노회한 기성 세대들이 '역사에 무식한 젊은이들'을 어떻게 조종하는가를 보여 주는 아주 좋은 예가 있다. 최근 일본에는 이른바 젊은이들을 겨냥한 우익 경향의 2류 시사 잡지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일본의 문예춘추사에서 나오는 「마르코폴로」라는 잡지이다. 「마르코폴로」는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완전히 잘못된 역사 의식을 심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편집 된다. 가령 '한국을 버려라'라는 특집에서는, 왜 일본은 집요하게 일본을 비난하는 한국에 대해 미 련을 지니고 있는가, 한국 대신 일본에 호감을 지니고 있으며 일본을 짝사랑하는 대만과 더 사이 좋 게 지내라는 식의 이상한 기사를 싣기도 한다. 아니면 북한의 김일성 왕조에 대한 기사를 통해 일 본에 살고 있는 조총련계 교포에 대한 적의를 나타내는 특집을 마련하기도 하는 문제투성이 잡지이 다. 특히 단골 테마는 이제 한국에 대해서는 더 이상 사죄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할 만큼 했다. 이제 귀찮은 한국을 상대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종류의 우익 잡지들은 그 동안 일본 내에서 착실하게 뿌리를 내려 왔다. 그런데 얼마 전에 「마르코폴로」가 자진 폐간을 결정했다. 이유는 「마르코폴로」의 95년 2월호 기획때문이었다. 「마르코폴로」는 아우슈비츠 50년을 맞아 특집을 마련했는데 아우슈비츠의 가스 실 학살이 날조된 것이라는 요지였다. 남경 학살도 날조된 것이고, 종군 위안부도 모르는 일이고, 731부대의 생체 실험도 기록에 없다고 우겨온 일본으로서는 충분히 아우슈비츠 역시 '날조'라고 할 만 할 것이다. 더구나 일본은 독일과 같은 전범국으로서 유태인에 대한 적의가 마치 '한국인에 대 한 적의'처럼 그들의 속마음에 깔려 있다. 일본의 전후 처리 문제가 언제나 독일이 유태인에게 어 떻게 했는가 하는 질문과 함께 오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의 2류 저널리즘은 이러한 역사의 왜곡을 통해 돈벌이와 함께 거짓의 확산을 노린다. 「마르코폴로」를 발행하는 문예춘추사는 처음으로 '반한론'과 '혐한론'에 불을 댕긴 출판사이다. 이 문예춘추사가 「마르코폴로」를 통해 나타내려고 했던 것은 전후 50년을 맞아 '일본 무죄'를 젊 은 세대에게 주지시키는 일이었다. 너희들이 '역사로 배운' 아우슈비츠도 '날조'이니 너희가 '역사로 배운 적도 없는' 종군 위안부와 남경 학살은 물론 '날조'이다. 그러므로 주변국들이 '전쟁 책임'이니 '과거 사죄'니 하고 떠들어대도 상관할 바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역사에 없는 것, 너희가 모르는 것, 너희 젊은 일본인들은 '흘러간 과거'와 상관없으며 '원죄도 없고 무죄이다'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태인 인권 단체를 비롯해 세계 각국으로부터(미국의 엄청난 유태인 파워를 일본은 의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청난 비난이 쏟아지자 문예춘추사는 부랴부랴 「마르코폴로」를 자진 폐간 한다고 발표했다. 「마르코폴로」는 문예춘추사로서는 돈을 갈퀴로 긁어다 주던 귀염둥이 잡지였음 에도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 종군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고 남경 대학살을 날조라고 선정적으로 보도했던 일본 의 2류 우익 잡지들이 자진 폐간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그토록 많은 한국인들이 항의했지만 그 잡 지들은 사과문은커녕 정정 기사조차 싣지 않았다. 그런데 유태인 학살 날조에 대해서는 재빠르게 '자진 폐간'이라는, '눈물겨운 반성과 참회'를 보이고 있다. 정작 더 큰 왜곡과 잘못이 있는 곳에서 당당하고 오만불손하게 왜곡을 계속하면서 유태인과 관련 된 단 한 건의 기사를 두고는 자진 폐간이라는 커다란 단안을 내린 것이다. 서양과 유태인의 힘이 두려워서인가? 아우슈비츠 열기에 휩싸인 서양 언론의 표적이 되기 전에 얼른 사고 처리를 하겠다 는 뜻인가? 일본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을 멸시하고 경시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도 아시아도 두렵지 않다. 한국과 아시아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역사를 왜곡해도 된다고 일본은 생각한다. 왜? 상대가 힘이 없기 때문이다. 아시아란 곳은 일본이 아래로 깔고 보아야 되는 '열등한 민족들'이 사는 곳이 기 때문이다. 한때 한국과 아시아는 일본의 '식민지'였고 지금은 '경제 식민지'이며 앞으로는 명실상 부한 '경제와 정치 그리고 문화의 식민지'가 되리라고 일본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본의 생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일본은 줄곧 그렇게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야 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들과 국민들이 있는 나라에 무슨 평화에 대한 희구가 있으며 무슨 역사에 대한 반성이 있겠는가? 한국이 변화하고 아시아가 변화하지 않는 한 일본은 절대로 달라지 지 않는다. 일본이 왜 유태인에게 벌벌 떨었는가? 그것에 대한 대답은 한 가지이다. 유태인들은 일본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힘과 돈 그리고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성으로 이야기하자 내가 말레이시아의 피낭에서 열린 전문 직업인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그 회의에는 스즈키라고 하는, 유엔평화유지군의 선거감시 요원으로 활동했던 신당 사키가케의 외 교정책 담당관도 있었다. 그와 나는 첫날 일정을 마치고 호텔의 라운지에서 한 자리에 어울려 술을 마셨다. 그는 내게 일본의 전후 처리는 참으로 복잡한 것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본에 대해 끝없이 사죄를 요구하는 나라는 한국뿐이고 중국은 사실 관계치 않고 또 아예 말레이시아 같은 나 라는 오히려 일본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열을 올렸다. 그는 건너편에 있는 말레이시아 대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말레이시아 대표가 나한테 이야기 했어요.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침략한 것은 이미 지난 일이고 말레이시아 국민은 일본을 식민제국 영국을 몰아낸 해방군으로서 생각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서구 세력으로부터 말레이시아를 구해 준 해방군이 일본이라구요." 믿을 수 없다는 내게 그는 내일 일본과 아시아의 관계에 대한 토 의가 있으니까 확인해 보라고 했다. 예상대로 그 다음날 말레이시아 대표가 발언을 했다. 그는 30명의 각국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말레이시아는 두 나라를 겪었습니다.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였습니다. 나는 지금 우리 말레이시 아에 식민 지배를 했던 영국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유감스럽지만 영국의 학교 제도, 병원 시스템, 영국식 글자, 관청의 구조 등 많은 것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영 국이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민족 정서와 자율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유연성 있는 식민 정책을 펼쳤 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습니다.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침략했던 3년동안 그들은 말레이 시아 사람들을 살해했고 무시했고 말레이시아 문화를 파괴했습니다. 일본은 말레이시아 사람들에게 일본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전쟁에 져서 말레이시아에서 물러났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남 기지 않고 깨끗이 물러갔지요. 덕분에 지금 우리말레이시아에는 일본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 습니다." 일본 대표인 스즈키는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회의가 끝난 뒤 나는 말레이시아 대표를 붙잡고 어느 것이 당신의 진짜 뜻이냐고 확인하듯 물었 다. 그러자 그가 내게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 아시아의 모든 친구들 앞에서 한 말이 진심입니다. 저는 일본인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 일가족 가운데 일본인 때문에 평생 병마에 시달린 사람이 있지요. 일본인들과는 진실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일본인들은 언제나 자기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잖아요. 우리 역시 그들 앞에서 건성으로 이야기하면 됩니다. 저는 한국인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일본인을 상대하며 그토록 에너지를 소모하는지요. 일본인들에게는 일본식으로 대해 주면 됩니다." 그는 자그마치 십여 년 동안 말레이시아의 엘리트 관료로서 경제 정책을 이끌어 왔고 일본인과 교류가 많았던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일본에 대해 끊임없이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한국인보다 이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품고 있는 불신과 경계는 더욱 더 깊고 큰 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 일본인들가는 속을 터놓고 솔직히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이들의 인식은 옛날 일본인들이 잔인한 식민통치 기간에 낙인찍듯 새겨 놓은 것들이다. 한편으로는 우리 나라 사람들보다 이들이 더 일본인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색 경보 마하티르는 '일본은 있다'라고 말한다. '말레이시아의 박정희'라고 불리는 마하티르는 아마 일본에 서 가장 인기 있는 외국의 총리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최근 일본인들에게 일본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고르고 엮어 아주 깔끔한 일본식 밥상을 차려 한상 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들갑 떨 기 좋아하는 일본의 언론들은 마하티르를 '정치 의사'라고 추켜세우며 난리를 친다. 전직이 의사니 까 그럴 수도 있겠으나 일본인들은 일본의 경제 시스템을 칭찬하는 마하티르에게서 마취 주사를 한 방 세게 맞은 듯하다. 마하티르는 나라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유보할 수밖에 없다고 확실하게 말한다. 마하티르 는 일본을 칭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경제 성장을 보인 일본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 한다. 말레이시아로서는 일본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본은 관과 민이 한 몸이 되어서 협력했고 그래서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그는 서양에서 일본을 두 들겨 패며 '일본 주식회사'라고 부르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비판한다. 일ㄹ본이라는 나라는 '일본 주식회사'가 되었기 때문에 발전했다고 두둔한다. 결론은 하나, 우리말레이시아는 일본을 모 델로 말레이시아 주식회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외친다. 나는 남의 일에 끼여들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지만 정말로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말리고 싶 은 심정이다. 마하티르라는 정치가가 개인적인 정치욕으로 커다란 시대 착오를 범했기 때문이다. 마하티르는 일본을 모른다. 그래서 일본을 칭찬하고 일본을 본받자고 하는 것이다. 일본과 가까이 접촉하고 사귀어서 피해를 보지 않은 민족은 없다. 우리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전 아시아가 그렇 고 미국이 그렇고 전에는 독립국이었던 류큐(오키나와의 원래 이름)가 그렇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속성은 빼앗을 줄만 알지 주는 것은 모른다. 일본은 단 한번도 다른 나라와 이웃에 좋은 일을 해본 역사가 없다. 그러나 마하티르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용해 보겠다는 계산으로 많은 이야기를 한다. "말레이시 아의 번영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의 투자 때문입니다. 일본이 투자해 주었기 때문에 말레이시아의 고용 창출은 물론 자본 시장의 발전도 가능했습니다. 물론 일본의 투자에 의한 말레이시아의 발전 은 일보늬시장 개척이라는 또 하나의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마하티르는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점령했을 때 '불행한 일'이 있었으나 과거의 일에 이러쿵저러쿵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마하티르는 일본군이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경례를 안한다고 두드려 패고 커다란 돌을 머리 위로 들고 걷게 하는 등의 일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시장에서 식 량을 살 때 일본군은 언제나 돈을 치렀고 자신의 기억에는 일본군한테 부당한 취급을 당한 적이 없 다고 한다. 거기에다 한술 더 떠 마하티르는 일본군의 점령이 결과적으로 말레이시아를 영국이라는 서구 세력으로부터 독립시켜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게 한 역사적 측면도 있다고 이야기할 정도이다. 마하티르는 그래서 이시하라 신타로 같은 골수 우익으로부터 '미래를 짚어 주는 위대한 정치가'라는 칭송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마하티르는 정말 왜 이러는 것일까? 그는 사실 몇 년 전까지도 일본에 대해서 적대적인 발언을 시리즈로 해 왔던 인물이다. 일본이 기술 이전을 제대로 안한다고 맹비난을 쏟은 전력이 있 는 것은 물론 말레이시아 사람은 일본의 노예가 아니라고 목청을 높인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엄 밀히 말하자면 그는 '반일 인사'였다. 그런데 이 마하티르가 정말 왜 갑자기 일본에 추파를 던지게 되었을까? 마하티르가 '친일 인사'로 100퍼센트 변신을 한 이유는 일본이 곱고 좋아서가 아니다. 그의 '친일 정서'는 서구에 대한 증오에서 출발한다. 그는 유럽과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는 결국 아시아를 총칼 없이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것이라고 거세게 비난한다. 무역 불균형 문제를 미국이 입에 올리기 전에 '짧은 노동 시간에 높은 급료를 받으며 생활도 호사스럽게 하는 미국이 못사는 나라에 대해 무 역 규제를 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횡포'라고 몰아붙인다. 그는 서구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며 이제까지 말레이시아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그 자리에 일 본을 앉히자고 말한다. 이미 마하티르는 가까이 있는 호주는 물론 영국 그리고 미국과도 아주 불편 한 관계를 갖고 있다. 또 같은 동남아시아 나라와도 마찰이 끊이질 않고 기존의 에이펙(APEC) 대 신에 일본과 말레이시아가 주축이 되는 새로운 경제 단체를 만들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변화의 가장 큰 원인은 마하티르의 정권 기반이 허약해졌기 때문이다. 이미 13년 동 안이나 마하티르는 말레이시아를 지배해 왔다. 절대정권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말처럼 마하티르 정 권은 부패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일단 마하티르 본인이 한 영국 회사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추문 에 휘말려 있을 뿐 아니라 최근에 실시된 선거에서 잇달아 집권당이 쓴 잔을 마셨다. 아마도 오랜 역사를 통해 특유의 정치 감각을 익힌 말레이시아 국민을 2020년에 말레이시아를 선진국에 진입시 키겠다는 마하티르의 말에 어떤 불안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2020년까지 마하티르가 집권을 기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말이다. 바로 이러한 마하티르의 개인적인 약점과 서구에 대한 공격성은 일본에게 엄청난 호재로 작용했 다. 피해 당사자인 아시아인이 과거에 대해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니 일본으로서는 '횡재'한 기분일 것이다. 또 일본은 마치 그 옛날에 말레이시아 사람들을 두드려 패고 경멸하면서도 먹을 것 을 사면서 셈을 치렀듯(과연 이런 점을 가지고 일본을 칭찬해도 되는지 나는 마하티르의 지성을 의 심한다) 말레이시아에 선물을 안겨 주고 있다. 최근 일본의 기업들이 임금이 싸고 천연자원이 풍부 한 인도네시아나 필리핀에서 말레이시아로 투자선을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에는 정치가 안정되어 있다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이유다. 결국 마하티르의 일본 떠받들기는 작게는 같은 아시아의 투자선을 빼앗는 것이고 크게는 아시아 의 역사에 대한 배신이다. 무슨 자격으로 마하티르는 일본이 사죄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가? 일본의 속성과 본질을 잘 알지 못하면서 혹은 덮어둔 채, 아시아를 배신하면서 일본에 다가가 도 되는 것일까?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정권욕에 맞추고, 관계가 틀어진 서방 국가들에 대한 대안 으로 들고 나온 미봉책인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마하티르의 이익과 일본의 이익이 일치한다. 마하티르도 일본도 그들을 견제하고 때리는 서방이 문제인 것이다. 계속 정권을 유지하려는 마하티르의 이해와 이제 아시아를 만만한 발판으로 삼아 세계로 힘을 뻗치려는 일본의 이해가 일치되는 것이다. 서방측과 심각한 무역 마찰 을 빚고 있고 중국이라는 예측 불가능의 가능성을 지닌 상대를 둔 일본으로서는 이제 아시아를 어 떻게 요리하는가에 따라 '신팽창주의'의 성패가 갈린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은 아시아를 원한다. 이시하라 신타로 같은 우익은 이제 일본은 서방과 관계를 끊더라도 아시아가 있으므로 아무런 문 제가 없다는 말까지 한 적이 있다. 또 미야자와 전 총리는 그의 임기 중에 아시아 각국을 돌면서 '미야자와 독트린'을 발표한 적이 있다. 서양의 정치가를 맞을 때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간이라도 빼줄 듯이 함박 웃음을 주체 못하던 미야자와는 방콕에서 예의 그 오만한 표정으로(일본 국민 앞에 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로지 예외는 서양인이다) 이제 일본이 신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슈로 아시아 와 함께 발전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니 일본에게 협조하라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미야자와는 그 옛 날에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잘살아 보자고 했던 아시아를 얼마나 수탈하고 짓이겼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과거 운운하는 것은 더 이상 상대도 하고 싶지 않고 과감히 제쳐 버리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미야자와의 발상은 이제 일본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으로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지금까지 과거의 일로 인해 약점을 잡힌 국가가 되기를 거부해 왔다. 그런 뜻에서 일본은 일본을 책하지 않고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는 아시아 국가만을 상대하겠다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 마하티르는 이러한 일본에게 적절하게 이해가 일치되는 존재인 것이다. 마하티르는 일본의 속성 과 본질을 과연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일본은 언제나 빼앗고 파괴해 온 나라이다. 그리고 이제 까지 일본과 가깝게 지내 이득을 얻은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었다. 현재 세계의 무역 구조를 보더 라도 일본은 언제나 이득만을 취하고 있다. 손해 보는 적이 없다. 물론 일본과의 관계에서 무역 흑자를 보는 나라도 있다. 그렇지만 그 나라들은 모두가 일본에 자원을 수출하는, 개발도상국의 대 열에도 들지 못하는 가난한 나라들인 것이다. 물론 이들 나라에 일본은 다시 고급 공산품을 갖고 진출한다. 마하티르의 존재는 마치 일제 강점기 우리 나라에서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마름' 같은 존 재이다. 자신의 조그만 이익을 위해 집안을 욕되게 하는 것은 물론 민족을 팔아먹는 존재이다. 마 하티르는 말레이시아를 팔고 아시아인의 자존심을 팔고 있다. 여기에 2등 국민의 비애가 있다. 학대받고 지배당한 쓰라린 역사를 겪은 국민들이 그런 경험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압제자가 원하는 대로 쉽게 굴종하고 부당한 타협에 쉽게 몸을 맡기는 2등 국민이 되어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역사에 대한 책임, 특히 학대받고 지배당한 역사의 책임은 아시 아인에게도 있다. 일본의 본질을 파헤치는 것은 바로 그 '당한 자'인 아시아인의 몫이다. 우리 아 시아인의 마하티르와 같은 2등 국민의 정서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아시아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신팽창주의의 아름다운 구호 아래 다시 일본의 손 안에 들어가고 말 것이다. 마음먹고 주는 것 지난해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있었다. 말레이시아 피낭에서 열린 모임에서 우리 는 ㅎ루 종일 회의에 시간을 바쳐 정작 호텔 한가운데 있는 멋진 풀장에 몸을 담글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젊은 우리들(회의 제목이 '젊은 전문 직업인 회의'였다)은 밤이 되면 피낭의 환락가를 돌며 놀았다. 우리가 주로 갔던 곳은 바투 페링기의 편팝과 한 호텔의 가라오케 바(동남아시아의 가라오 케 열풍도 대단했다)였다. 약 30여 명의 참가자가 있었지만 밤시간까지 열정적으로 노는 사람들은 대개 정해진 열댓 명이었다. 한 사람 앞에 맥주 한 잔이나 위스키 한 잔이 고작이었는데 주로 춤을 추거나 이런저런 농담을 하며 놀았다. 하루 이틀 놀다 보니 서양과 다른 동양의 풍습이 나왔다. 술 주문이 한 바퀴씩 돌 때마다 누군가가 계산을 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동남아시아 나라 가운데서는 그래도 형편이 낫다는 싱가포르의 변호사가 계산을 했고 한번은 우리 쪽에서 돈을 냈다(나 역시 다른 아시아 나라보다는 그래도 우리가 내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사흘째 가라오케 바에 갔을 때는 말레이시아의 공무 원 아저씨가 자신이 한턱 내겠다며 계산을 했다. 물론 술 한잔 얻어먹었다고 기뻐 날뛸 일은 아니었으나 나는 솔직히 몹시 기뻤다. 함께 나누려는 기본적인 인식이 우리 아시아인에게는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말레이시아는 우리 나라보 다 물가가 싸서 내가 한 잔씩 돌렸지만 미화로 이십 달러도 채 안되었다. 그리고 나 역시 더치 페 이보다는 '한번은 이쪽이 다음은….' 이렇게 하는 한국식을 좋아했고 기본적으로 형편이 나은 사람 이 돈을 내는 것이 정당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가령 부자가 되었거나 성공한 친구가 있으면 그쪽에서 점심을 사는 것을 나는 당연하게 여긴다. 한국 물가에 비해서는 싸다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무심코 일본 돈으로 치면 돈도 아니지 하는 생 각을 했다. 그리고 이어 그 회의에 참가한 일본인들이 계속 얻어만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한번도 한턱이라는 것을 낸 적이 없었다. 이십 달러면 일본 돈으로 이천 엔인데, 조금 깨끗 한 집에서 우동 한 그릇 먹는 값이다. 일본인에게는 돈도 아닌 돈인 것이다. 내가 만일 일본인이 라면 매일 한턱을 냈을 텐데 싶었다. 일본인들은 이제 경제 대국의 부자가 되었지만 돈을 쓰고 함 께 나눈다는 생각은 아직 꿈에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생고생해서 부자 가 된 사람이 절대로 돈을 못 쓰고 인색한 것과 마찬가지로 역시 일본인들은 나누고 베푸는 일을 못하는구나 하고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일본이 주는 것도 있다. 언제나 빼앗기만 하다가 마음먹고 주는 것이 있다. ODA (정부개발원조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가 그것인데, 일본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들에게 좋은 조건으로 돈을 빌려 주는 것이다. 일본은 지난 88년부터 92년까지 5년 동안 개발도상국에 500 억 달러라는 돈을 지원했다. 일본이 정부 개발 원조를 이처럼 활달히 하는 것은 가난한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향 상시키는 것이 원조의 중요한 목표로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선심 쓰기(?)를 일본 국민들에게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고 일본 국민들은 '나눠주는' 일본에 대해 대 단한 자부심까지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 정부 개발 원조의 진짜 얼굴은 따로 있다. '일본의 흑자'를 흘겨보는 미국과 유럽의 반 발을 무마하려는 것이 진짜 목적이다. 일본이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이' 주고 있 는 것이다. 절대로 가난한 나라에 대한 '나눔'의 정신, 일본이 그토록 좋아하는 '공영'의 정신에서 나 온 것이 아니다. 일단 일본은 세계에서 정부 개발 원조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그래서 '세계에 공헌하는 일본'이니 '원조 대국 일본'이니 하는 말을 일본인들은 뿌듯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무척 인색하다. 액수 자체로 보면 일본이 가장 많지만 전체 GNP에 따른 비중을 따져 보면 일본은 노르웨이보다도 더 적은 세계 10위권이다. 이것은 자위권조차 없는 나라라고 엄살을 떨면서도 전체 GNP의 1퍼센트를 방위비에 충당해 엄청난 군사 예산을 집행하는 현실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정부 개발 원조의 진실은 절대로 아시아인에게 선의로서 주는 돈이 아니라는 데 있 다. 일본 국내에서 이 정부 개발 원조 자금이 주어지는 과정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다. 어 는 나라에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기준에 의해 그 돈이 주어지는가를 아는 일본 국민은 한 사람도 없다. 모든 것이 일본의 삼류 정치 스타일로 밀실에서 이루어진다. 현재 일본이 가장 많은 정부 개발 원조를 하는 나라는 인도네시아이다. 그런데 이를 둘러싸고 소문이 그치지 않는다. 정부 개 발 원조라는 명목으로 일본이 지원하는 도덕성이 결여된 돈이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독재 정권을 밑받침하는 데 쓰여지고 있다는 비난이 그것이다. 수하르토의 친족들에게 뇌물이 오가고 그 대가로 인도네시아의 산림은 하루가 다르게 황폐해지고 있다고 한다. 나는 많은 아시아인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이 일본의 정부 개발 원조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지니 고 있는 데 적지않이 놀랐다. 그들은 일본의 돈이 도착할 때마다 아시아의 산 하나가 일본인들이 밥 먹을 때 쓰는 나무젓가락을 만드는 데 없어지고 있다고 했다. 일본의 정부 개발 원조가 아시아 의 환경 파괴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또한 일본이 이 정부 개발 원조 자금을 일본의 공해 산업을 해외로 이전시키는 데 교묘하게 활용 하고 있다. 철강 산업의 최대 공해 공정을 필리핀에 이전시킨 것을 비롯해 일본이 저지른 일은 한 두 건이 아니었다. 환경 파괴와 함께 일본의 정부 개발 원조의 진짜 문제점은 바로 그 돈이 아시아 인을 더욱 더 가난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일본이 무역 흑자에 대한 서구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 돈을 풀었기 때문에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가난한 이는 더 가난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아시아 각국에 선심 쓰듯 주어진 정부 개발 원조라는 이름의 돈은 보다 정확하게는 '일본 정부의 개발 투자'라고 해야 옳다. 일본은 모사는 나라에 원조라는 이름으로 공장을 짓고 원료를 선점한 뒤, 이어 그들의 호주머니에 든 돈을 아름다운 일본의 가전제품을 사는 데 털어놓게 만든다. 그래서 더욱더 가난하게 만든다. 바로 이러한 것이 일본의 '정부 개발 원조'의 진짜 얼굴이다. 단순하게, 나눌 줄 모른다고 일본이 라는 나라를 비난한다면 일본에 대한 공부 부족일 것이다. 일본은 빼앗을 줄만 알지 주는 것은 모 른다. 그리고 일본의 빼앗겠다는 욕망은 점점 더 커지기만 할 뿐이다. 일본의 탐욕은 그칠 줄을 모른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아시아이다. 정부 개발 원조가 아시아에 쏟아지는 만큼 아시아는 더욱더 가난해지고 공해에 찌들고 아시아의 자연은 황폐해질 것이다. 히로시마의 평화! 평화! 평화! 히로시마에서 아시안 게임이 열렸다. 아시안 게임 사상 최대 규모로 성대하게 베풀어진 이 스포 츠 잔치는 평화와 평등 그리고 인간의 따스한 마음의 교류를 목표로 하고 베풀어졌다. 일본이 필사적으로 히로시마에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일본의 목적이 어디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본래의 얼굴을 알 수 없게 뽀얗게 화장을 하는 가부키 배우처 럼 이제 히로시마를 비싼 화장품으로 짙게 화장시키려는 일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1945년 8월 6일, 원폭이 투하됐던 히로시마는 나가사키와 더불어 일본을 하루 아침에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만든 곳이다. 지금도 많은 일본인에게 '고통받은 일본인' '불쌍한 일본인'의 결정적인 증 거로서 히로시마는 존재하고 있다. 일본의 아시아에 어떠한 일을 했는지를 모르는 무지한 서구인들 은 뒤라스의 소설 『히로시마, 내 사랑』처럼 일본의 가면에 속고 있다. 또 일본의 세계적인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는 「8월의 광시곡」이라는 끝없이 지겨운 영화를 통해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본이 원폭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착한 일본인을 내세워 호소하기도 했다. 도쿄 대학 교수인 오누마 씨는 '일본인은 미국에 대해 진주만과 히로시마라는 모순된 명제를 지니 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일본과 미국은 서로 공평하게 주고받은 셈이라고 정의한다. 일본이 진주 만을 기습한 것은 물론 비겁한 일이었지만, 미국도 잔인한 원자폭탄으로 20만 명에 이르는 죄없는 시민을 살상했으므로 결국 서로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이다. 빚잔치를 하듯이 일본은 모든 계산을 끝냈다는 것이다. 오누마 교수에 말대로 미국과 일본 사이 는 '적과의 동침'이라는 국제 사회의 규칙처럼 대충 계산이 끝났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히로 시마 원폭 투하는 단순히 미국과 일본 사이의, '네가 치니까 내가 받아친' 싸움의 결과가 아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는 태평양 전쟁을 '성전'이라는 이름 아래 광분하며 수행했던 일본에 대한 '진정 제'였다. 환각 상태에서 일본을 깨운 '쇼크 요법'이었다. 일본인들은 모든 것을 착각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실상을 그대로 망각 상태로 덮어두고만 있다. 이른바 일본에서 만들어낸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아름다운 말은 아시아의 자원과 인력의 착취 를 뜻하는 추악한 용어가 되었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은 아시아인에 대한 살상전 그 자체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백만 명 남짓한 일본군이 아시아를 휩쓸었을 때, 자그마치 2천만 명의 아시아인 들이 총검으로, 생매장으로, 그리고 생체 실험으로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많은 일본인은 평화의 도시 히로시마, 화해의 도시 나가사키라고 말한다. 미국의 무참한 원자폭 탄이 죄없는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했고, 아름답고 조용한 도시 히로시마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만 명의 피폭자 가운데 자그마치 200퍼센트나 되는 2만 명이 징용으로 끌려온 한국인이 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는 군수 공장이 밀집해 있던 일본의 핵심 전략 기지요, 살인 무기 제조 공장이었다는 사실을 말이 다. 미국의 원폭은 일본인들이 주장하듯 평화롭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도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아시아인의 살상을 준비하고 있던 군사 기지에 떨어진 것이다. 인류를 살상하는 원폭 투하를 찬성하거나 옹호할 이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1945년 8월 6일 원폭이 투하되지 않았다면, 당사자인 일본인은 물론 죄없는 아시아인의 목숨이 더 큭 무모 하게 계속 희생되었을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다. 그러므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리게 한 근본 원인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다. 누구의 이름으로 3백만 명에 이르는 일본인들이 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었는지, 왜 일본 국민들 이 전시 체제 아래 배를 주리며 살아야 했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기까 지, 온 국민의 입과 귀를 막고 광기 어린 전쟁으로 내몬 자가 누구인가를 일본인들 스스로가 정리하 고 판단해야만 한다. 일본인들 모두가 '누군가가 만들어 준' 거짓의 피해 의식에만 사로잡혀 역사의 진실을 알고 파헤 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이른바 '평화 일본'은 영원히 구호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 히로시마는 세계 반핵 운동의 메카가 되어 있고, 서구의 반핵 운동가들은 히로시마를 찾아 평화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 아시아인에게는 도대체 어떤 전쟁이었는가를 모르는 저 너머에 있는 서구인들이 히로시마의 진 짜 비극의 의미를 발견해 내기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내내 일본은 평화를 목이 터져라 하고 외쳤다.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의 마 스코트인 포포와 구구라는 통통하고 귀여운 비둘기를 보면서 나는 순진무구한 아시아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평화를 상징하는 수만 마리의 비둘기가 구구거리면서 히로시마 경기장을 날 때, 나는 죄 없이 숨져 간 2천만 명의 아시아인들을 떠올렸다. 이 대회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은 아시아의 평활르 기원하며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기를 다짐했다. 그러나 왜 피해자인 아시아인들까지 그런 다짐에 끼여야 하는가? 히로시마의 비극을 반성하고 평 화를 다짐하는 것은 철저히 일본이 할 일이요, 일본만의 문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만들어진 평화의 도시' 히로시마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 잔치를 베풀면서 손님들에게 '같이 책임 있 지요?' '좋은 일이니까 우리한테 손들어 주세요'라고 흥정과 권유와 강요를 하고 있는 꼴이다. 잔치 에 불려 온 아시아 손님들과 함께, 그들에게 막대한 피핼르 입혔던 일본인들이 마치 선량한 피해자 처럼 '같은 버스에 타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왜 일본은 아시안 게임을 히로시마에 열고자 했을까? 그것은 세계인에게 전범 국가 일본의 모습 을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바꾸어 각인시키려는 계획적인 의도가 아닐까? 그리고 정작 선한 피해자 인 아시아인들을 모양 좋은 들러리로 삼기 위해서는 아닐까? 일본은 순서를 어기는 나라이다. 국내에서는 그토록 줄을 잘 서고 질서를 지키면서, 왜 아시아인 에 대해서는 역사에 대해서는 무질서요, 새치기요, 아예 줄을 설 생각조차 않는 것일까? 아시안 게 임을 통해 요란하게 '일본은 이렇게 가엾게 당했어요' 하고 선전을 할 것이 아니라 조용히 진실되게 과거를 반성하고 작업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아시아의 평화를 논할 자격이 없다. 먼저 일본은 반성하고 뉘우치고 '일본의 평화'를 쌓아야 한다. 일본이 진정으로 평화 로운 나라이며 일본에 평등과 자유가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한다. 아시안 게임이 열린 자칭 평화의 도시, 히로시마. 이 히로시마의 멋지고 훌륭한 평화 공원에는 일본인 피폭자가 잠들어 있다. 그러나 그 공원에서 떨어진 초라한 공동묘지에는 그 평화 공원에 미 처 들어가지 못한 우리 한국인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다. 이들이 평화 공원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는 일본의 우익들은 정기적으로 우리 한국인의 묘소에 불을 지르고 있다. 이것이 히로시마의 평화이다. 그리고 일본식 평화이다.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은 독재 정권이 막을 올릴 때 유치되는 미인 대회와도 같다.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쇼'를 벌어는 일본에게 나는 평화 공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초라한 묘지에서 떠도는 20만 명의 한국인들의 원혼, 그들도 히로시마 평화의 제전의 들러리냐고 묻고 싶다. 나도 어른이 되고 싶다 최근 일본 외무성이 아주 재미있는 통계를 공개했다. 즉 일본이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상임이 사국이 ㄷ ㅚ는 것에 대해 일본 국민들의 생각을 조사한 내요이었다. 극 결과에 따르면 약 53퍼센 트가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을 찬성했다. 그리고 33퍼센트의 일본인은 모르겠다 고 대답했다. 일본 외무성은 이 결과에 스스로 만족할 수 없었던지 일본이 상임이사국에 진출하는 문제에 대해 홍보가 덜 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찬성의 이유는, 경제 대국이 되었으므로 세계 평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가 42퍼센트, 비핵국인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은 세계 평화 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가 27퍼센트였으며, 그밖의 25퍼센트는 국제 사회에서 수많은 재정 지원을 하 고서도 어떤 결정권을 갖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므로 찬성한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경제 대국' 일본에 걸맞는 '힘'을 가져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일본은 걸프 전쟁의 쇼크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걸프 전쟁이 터졌을 때 일본은 130억 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지원했다. 쿠웨이트는 가까스로 사태를 수습하고 난 뒤 뉴욕 각 신문에 도와 준 나라에 대해 감사 의 글을 광고로 실었다. 그런데 심심한 감사를 표하는 그 광고에 무려 130억 달러를 지원해 준 일 본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조차 없었다. 쿠웨이트로서는 미국에 전쟁 지원금으로 130억 달러 를 지원한 일본은 당연히 미국과의 관계로 볼 때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많은 서구 국가들은 단 한명의 인명 희생도 없이 돈만 낸 일본에 대해서 '무슨 일을 했다고?' 하는 느낌 을 갖고 있다. 바로 일본이 처한 딜레마가 첨예하게 걸프 전쟁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걸프전은 어쨌든 많은 일본인들에게 돈만 내고 남좋은 일만 시켰으며 일본이 이대로 나가도 좋은 가 하는 의문을 던지게 했다. 게다가 국제 사회에서, 군비 부담은 물론 선진국으로서 부담해야 하 는 여러 가지 세금을 내지 않고 있는 일본에 대해 '어린이 요금'을 내고 편안하게 지하철을 타고 다 닌다는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이제 일본이 좋아하는 '국제화' '세계화' 그리고 '국제 공헌'이라는 이 름 아래 책임도 역할도 나누자고 요구하는 것이다. 세계 경제가 어려운 이 마당에 '혼자 승리한' 무역 흑자국 일본이 하나의 책임을 떠맡고 역할을 해내는 일은 객관적으로 살펴볼 때 당연한 일로 생각될 수도 있다. 유엔의 살림살이에서 두 번째로 돈을 많이 내는 일본이 유엔의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은 경제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너무 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이 유엔의 상임이사국이 되려는 움직임을 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은 우려하고 있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나라 역시 '상임이사국 일본'을 절대로 반 기지 않는다. 현재 일본의 주 유엔 대사인 오와다 하사시가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유 엔의 가맹국 179개국 가운데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을 찬성하는 나라는 겨우 19개국 나라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온 세계가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을 떨떠름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 것은 단 한 가지, 경제적인 힘에 덧붙여 정치적 군사적인 힘이 일본의 손에 쥐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시아인, 그리고 세계인의 생각은 단순하지가 않다. 아 시아인은 일본이 경제 대국이 되었기 때문에 정치 대국이 되어 국제 사회에서 힘과 영향력을 행사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일본이 비핵보유국가로서 상임이사국이 되어 세계 평화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시아인은 일본을 절대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시아인들은 일본이란 나라의 실체를 경험해 왔다. 일본의 정치적 폭력과 군사적 강제에 역사적으로도 그리고 한 사람 개인의 일생에서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일본이 추구했던 '대아시아 공영권'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종군 위안부'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아시아는 일본의 가 장 처절한 피해자가 됐으며 약한 아시아의 수많은 여성들은 무참하게 유린되었다. 이 모든 일들은 유엔의 상임이사국으로서 화려하게 국제 무대에 재데뷔하려는 일본의 의도처럼 하나 하나가 계획적 이고 조직적이었다. 한때의 실수나 충동적인 전쟁광의 발작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일본인들이 치밀 하게 머리를 짜낸 결과였다. 전후 50년이 흘렀고 미국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일본에게 기본적인 부를 주었다. 거기에다 냉전 구조가 터뜨린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은 일본을 떼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일본의 전후 50년은 과 거를 잊고 일본이 저지른 전쟁을 은근히 미화해 온 기간이었다. 일본은 그들의 전쟁에 대해 '침략 전쟁'이 아니라 서구 식민주의 세력을 막기 위한 '해방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도 차기 총 리를 넘보는 하시모토를 비롯한 각료들이 '아시아 해방 전쟁'이라고 공언하는 마당이다. 아시아와 무역을 하고 교류를 하고 아시아 유학생을 받아들이고 일본의 3D 업종에 수많은 아시아 노동자를 쓰고 있는 일본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독일의 각료에게 그런 말을 하라고 돗 자리를 깔아 줘도 '그런 엄청난 논리'를 펼칠 정신병자는 없을 것이다. 일본의 아시아 경제 지원, 이른바 ODA는 세계에서 으뜸이다. 수많은 일본 돈이 아시아로 들어간 다. 그러나 왜 일본은 아시아에 경제 지원을 하는가? 그것은 물론 아시아를 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다. 일본의 탐욕스러운 경제 침략은 아시아를 거점으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 옛날 한국에 군수 기지, 전략 기질고서 공장을 세웠듯 지금 일보은 아시아에 그렇게 하고 있다. 또 기술 이전이라는 미끼를 순박한 아시아인 앞에 던져 놓고 있지만 일본은 절대로 기술 이전을 해주지 않 는다. 그래서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많은 나라의 회사들이 '기다리다 못해' 다른 나라로 파트너를 바 꿔 버리고 있다. 일본이 경제 대국이 되어 벌인 일들이 추악하고 잔인한 경제 착취인데 만일 일본 이 '정치 대국'까지 되어 유엔을 등에 업고 '무법자'에서 '국제 신사'로 둔갑한다면 얼마나 더 많은 파 괴와 유린과 착취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질 것인가? 일본이 경제 대국이 되어 온 세계 경제를 망쳐 놓았듯이 일본이 정치 대국이 된다면 과연 진정한 평화와 정의가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가? 일본이라는 나라가 보여준 속성, 일본인이라는 민족이 보여준 그 속성은 그래서 우리에게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 자리에 앉을 일본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일본이 알아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경제 대국이 되었다고는 해도 정치 대국이 되겠다는 턱 없는 논리를 내세우지 말 것, 그리고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정말로 경제 대국에서 정치 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고 청 산하는 순서를 밟아야 한다. 먼저 아시아 사람들이 일본을 이웃으로 신뢰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그 뒤에야 일본이 진정으로 평화를 위해, 국제 공헌을 위해 유엔의 상임이사국이 되 겠노라고 겨우 소신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반성 없이 평화 없다 최근 급속하게 우익화되고 있는 일본. 우익을 팔아서 밥을 먹고사는 이들은 요즘은 한술 더 떠 절대로 '미안하다'고 이야기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미안하다고 사죄하면 돈을 내야 되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그 좋은 예로 자동차 접촉 사고를 냈을 때 '미안하다'고 한 쪽이 돈을 내게 되어 있다 며, 일의 앞뒤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일단 우기고 봐야' 한다는 파렴치한 논리를 펼치고 있다. 전후 50년을 맞아 일본은 급속한 보수화의 길로 치닫고 있다. 일본의 국회의원들은 '바른 역사를 알기 위한 모임'(?)을 만들어 국회에서 부전(不戰) 결의와 과거 전쟁에 대한 반성 결의를 반대하고 있다. 또 에히메 현을 비롯해 일본 각지 의회에서 전쟁 때 죽은 전몰 군인들을 위한 추도회를 갖는 등 그들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향수'를 거침없이 드러내며 '복고'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게다가 번 화가 백화점 앞에서는 상이 군인들이 하얀 붕대를 하고 나와 '일본인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몸으로 시위하고 있다. 상이 군인이라면 일본 정부에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어 굳이 구걸할 필요도 없건만 그들이 노구를 이끌고 길바닥에 나와 있는 것은 다름아닌 우익의 사주를 받아서일 것이다. 일본은 다시 50년 전의 전쟁의 광기에 홀린 상태로 돌아가고 있는가? 그 좋았던 시절을 잊을 수 없는가? 아시아인을 종처럼 부리고 한국 사람들을 개취급했던 그때를 도저히 잊을 수 없는가? 많은 서구인들은 일본이 변했다고 한다. 민주주의 맛을 본 일본인들이 다시 전쟁으로 치닫는 일 은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시는 일본이 팽창주의와 제국주의를 외치며 정복 전쟁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언제든지 기회가 생기면 정복과 팽창을 위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나라이다. 왜?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일으킨 전 쟁에 대해 사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을 '방위 전쟁'이고 '아시아 해방 전쟁'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리고 일본인 스스로가 조금도 뉘우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 신이 한 일에 대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얼마든지 그 잘못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것은 상 식이다. 일본인은 한번도 제대로 사죄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일본인은 냉전 구조의 출현으로 다 른 전범국가들이 받았던 '벌'조차 받지 않았다. 전범국 일본은 절대로 사죄하지 않는다. 지금의 아시아, 지금의 무시해도 좋은 한국에 대해서는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서이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에 평화는 없다. 물론 아시아에도 평화는 없다. 매듭 인간이 신을 찾고 기도를 할 경우는 불행한 때이다. 기자가 자신의 기사 외에 끊임없이 다른 글 을 쓸 때는 역시 불행한 경우이다. 기자라는 직업의 한계와 세상일이 간단치 않다는 진리를 고통스 럽게 터득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글을 쓰기 때문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취재 대상으로 삼으면서 나는 기자로서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꼈다. 일본은 보 이지 않는 '혼네'(속마음)로 보이지 않게 움직이면서 언제나 '다테마에'(겉치레)로 객관적인 사실만을 나열한다. 하지만 그 객관적인 자료, 이야기들은 진실을 덮고 감추고 왜곡시키기 위해서 내세운 것 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혼네를 뻔히 알면서도 '객관성'과 '균형 감각'이라는 명제에 발목 을 잡힌 나는 불행한 기자가 되어 언제나 자신이 쓴 기사에 희의하고 고민했다. 너무나도 많은 진 짜 일본의 이야기가 있다.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보도라는 좁은 테두리밖에 있는 진짜 일본의 본모 습이 있다. 그래서 나는 기자라는 객관성과 이성적인 말로 이어지는 답답하고도 좁은 틀을 벗어버 리자고 작정했다. 『일본은 없다』라는 책을 쓰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기자로서 오랫동안 냉정한 시각과 객 관적 보도에 길들여졌던 나는 무엇이 진실된 글인가, 솔직한 글인가를 배웠다. 또한 머리로 쓴 글 과 가슴으로 쓴 글의 차이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감성이 이성에 우선한다는 사실 역시 기 쁜 마음으로 확인했다. 나는 훌륭한 기자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훌륭한 작가가 될 생각도 없다. 누군가에게 평가받고 굄을 받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는 일본인라는 나라에 대해 솔직하게 탐색하는 한 개인으로서 정확한 일본 인식에 글을 쓰는 목표를 두고 있다. 오히려 내 자신이 매도되고 비난받는 다 해도 반역사적인 일본의 실체를 알릴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기쁘게 갚음할 수도 있다. 『일본은 없다』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화제를 모으면서 나는 아주 많은 일을 경험했다. 아주 기 쁜 일도 있었고 견디기 힘든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내게 인생과 사람에 대해 가르쳐 준 많은 것들은 개인적으로 아주 커다란 소득이었다. 이 세상의 커다란 무대에 올라 한판 격렬하게 뛴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아주 가치 있는 한판이었다. 많은 분들이 격려와 지원을 해주셨다. 특히 배사장님을 비롯한 지식공작소 식구들에게 감사드린 다. 일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비춰보는 새 세대의 새 시대를 기다린다. 21세기, 창 조와 개성 그리고 변화가 일상화되는 새로운 시대를 기다린다. 한국과 일본의 위상에도 커다란 변 화가 올 것을 확신하며 '한국인의 자존심'이 만들 한국사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