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공포의 실험실(완결) 관련자료:없음 [181] 보낸이:장선희 (리알 ) 2000-07-17 12:33 조회:73 공포의 실험실 프롤로그 살인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어둠과 비에 젖은 고속도로가 사방에서 그녀를 습 격 하고, 죄의식으로 인한 공포감이 위협적인 파도처럼 물려와 있는 동안 자넷의 의식을 지배하는 건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베이 브리지의 낮은 갑판에서 빠져나온 이후로 그녀는 조그만 혼다에 내리치는 거센 바람과 싸웠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차를 똑바로 몰기 위 해 안간 힘을 썼다. 이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미 자신의 일을 포기해 버렸다. 어쩌면 여태는 올 바 르게 살이온 셈이다.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그 잘못을 바로잡은 셈이다. 아무튼 이제 더이상 그 문제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었다. 임신 휴가에서 돌아온 후 손을 뗐던 일 에 더이상 자책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증거를 갖고 있었다. 이제 그 증거가 너무 늦 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녀의 시선이 옆자리에 놓여 있는 컴퓨터 출력 테이프에 부숴졌다. 그게 사라져 버 렸 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다. 이제 그녀의 시선은 다시 도로로 향했다. 금요일 자정이 가까워져서인지 차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피로가 뼈까지 스며들고 있다. 늦은 시간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끊임없는 긴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비가 내린 탓에 도로의 표면이 상당히 미끄럽고 위험하다는 걸 그녀 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생명을 건 도박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생명을 건 도박을 했었다. 어리석게도 맹목적인 것 이 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커다란 기회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직접 명령을 무시하고 노골적인 항명을 함으로써 그게 모두 사 라 질 위기에 처해 버렸다. 안돼,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어, 올바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한 짓 이 그렇게 모든 걸 잃어야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누군 가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없도록 수호신이 나타나서 지켜 줄 것이다. 그녀는 남편인 마크를 생각했다, 그는 늦게까지 일하는 아내 때문에 기분 나빠했고, 전날 밤엔 계속되는 그녀의 연장 근무 때문에 격렬한 싸움까지 벌였다. 그러나 오늘 밤 은 마크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가 있다. 모든 규율을 깨뜨려 버린 이상 해가 될 게 없으리라. 그에게 자신이 혼자 맞서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시켜야 한다. 틀림없 이 남편은 아내의 편이 되어 줄 것이다. 그래,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린다고 해도 남편만은 곁에 있어 줄 것이다. 일을 잃는 다 고 해도 마크와 아이들은 여전히 그녀의 것이리라. 마크 주니어와 몰리... 어린 몰리 는 이제 겨우 혼자 일어서는 걸 배우고 있었다. 딸을 생각하는 동안 지난 몇 주 동안의 피로와 긴장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앤 을 잡은 손도 훨씬 편안해지고 있다. 삶은 아직도 달콤한 것이었다. 그녀는 약간의 실수를 했고 그릇된 판단에 대한 죄의 식 도 있긴 했지만 우유부단하던 최악의 시기는 끝났다. 정말 힘든 시기가 오겠지만 그 것 도 언젠가는 지나가 버린다. 그녀는 아직도 삶의 나머지 부분을 갖고 있는 셈이다. 칼데코트 터널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터널은 버클리 산을 뚫고 나아가서 오클랜드를 이스트 베이의 다른 부분과 연결시켜 주고 있었다. 길고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가 면 서 그녀는 맞은편에서 불빛이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마크가 기다리며 주방에 켜놓은 불빛일 수도 있고, 그녀가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그의 눈동자에 서렸던 빛일 수도 있 다. 그녀는 차선을 바꾸면서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다. 트럭이 그녀의 차와 부딪쳤 을 때도 그 미소는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차는 고속도로에 미끄러져서 터 널 의 콘크리트 벽에 곧바로 부딪쳤다. 마치 라켓볼처럼 차는 튀어 올라 다시 다른 터널 벽에 부딪쳤다. 차가 뒤집히는 소리가 마치 꺼져가는 드럼 소리처럼 울려퍼졌다. 드디어 차가 2차선 사이의 퇴적물에 처박혔을 때 탱크에서 쏟아진 휘발유에 불꽃이 일 기 시작했다. 곧 그 부숴진 차는 오렌지 빛불꽃에 휩싸였다. 혼다가 폭발하자마자 짙은 녹색 트럭은 터널 맞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자넷의 차를 박살내고도 그 차는 속력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운전수는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 다. 1 조그만 울새들이 날개를 적실 웅덩이를 찾아다니는 맑고 청명한 4월의 아침이다. 샌 프 란시스코의 거리에선 비가 온 후에 그런 웅덩이가 아주 많았다. 하지만 차들이 윙윙 지나다니는 거리에서 안전하게 날개를 적실 웅덩이를 찾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리는 마켓 가의 몇 블록 떨어진 주차장에서 활기찬 모습으로 나타났다. 태호 호수에 서 일주일 동안의 스키 휴가를 즐기고 나니까 훨씬 몸이 가벼워졌고 새로운 힘이 솟는 기 분이다. 그녀의 직장인 배리푸드 인터내셔널의 샌프란시스코 사무실이 새로운 의욕을 불러넣어 줄 것만 같다. 짙은 파랑의 투피스에 산뜻하게 넘긴 머리는 누가 봐도 성공적인 여자 직장인의 모습 이다. 그리고 옅은 금발의 머리칼과 눈빛, 피부색은 그녀의 인상을 아주 섬세하게 보 이게 해주었다. 하지만 177cm 신장에 5cm의 높이의 하이힐까지 신은 그녀의 모습은 남 자 동료들과 거의 비슷하게 보이게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그녀는 몇 명의 직원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8층에 올라선 그녀는 다시 한번 비서에게 아침 인사를 건넨 다음 인사부장 라는 명패가 붙 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컴퓨터의 전자통신문 쪽으로 다가갈 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미소는 그대로 남아 있었 다. 하지만 곧 그 미소는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다른 메모와 똑같은 형식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엄청나게 다 른 것이었다. 그건 죽음을 알리고 있었다. 수신 : 모든 직원들에게 발신 : 해밀턴 자레트 사장 내용 : 직원의 죽음 연구 화학자인 자넷 수 호머가 지난 금요일 밤 칼데코트 터널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 습니다. 장례식은 화요일 아침 10시 라파예트의 홀리 스크립처 예배당에서 거행됩니 다. 미즈 호머를 알고 있는 직원들은 장례식에 참석해도 됩니다. 미즈 호머의 가족들 은 부조금을 암 연구 센터에 기증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라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모니터에 새겨진 파란 글씨를 멍하니 응시한 다음 다시 그 내용을 읽어 보았 다. 드디어 충격이 잠시 밀려나고 고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자넷이 죽다니 말도 안돼. 항상 행복하고 밝고 재미있던 자넷이..., 몇 년 전 리가 바 보 같은 사랑놀음이 제대로 안 돼서 고통스러워했을 때 함께 와인 한 병을 마시며 위 로해주던 여자였다. 그리고 불과 일주일 전에 태호 호수로 향하기 직전 그녀에게 사 랑 의 묘약 한 방울을 건네주던 친구였는데... 그 멋진 자넷이 죽었다니 그건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다. 오, 하느님! 리는 머리를 손으로 감짜안은 채 눈물을 흘렸다. '이건 사실일 리가 없어.' 그녀는 계속 중얼거렸다. 하지만 손을 치웠을 때 그 서신은 여전히 화면에 새겨져 있었다. 그걸 지워 버린다고 해도 그 사실만은 지워져 버릴 수 없다. 인터콤이 울리는 소리에 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슬픔에 젖어 있느라고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인터콤의 레버를 누르고 비서와 통화했다. "그래요, 마지." "리? 음성이 좀 이상해요. 무슨 일 있나요?" 리는 눈물을 훔치며 애써 음성을 가다듬었다. "난 괜찮아요, 마지. 그런데 무슨 일이죠?" "오늘 오후에 사장님과 약속이 있다는 걸 알려 주는 거예요. 그런데 괜찮으세요?" 리는 잠시 당황했다. 그제서야 사장이 휴가에서 돌아오면 함께 만나서 새 업무에 관 해 의논해 보자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자넷의 죽음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모든 사고를 씻 어내어 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지는 결코 그런 약속을 잊어 버리는 법이 없다. "그래요. 그런데 오후 몇 시죠?" "1시예요. 그리고 사장님께선 그분의 최근 보안대책에 관한 메모를 가지고 오라고 하 셨어요." "난 그런 메모를 본 적이 없는데요." "지난주 부장님이 안 계실 때 도착한 거예요. 다른 메모처럼 우리 회사의 게슈타포인 스티브 건이 배달했어요. 십중팔구 그가 직접 작성했을 거예요. 그걸 보시면 내 말뜻 을 아실 거예요. 바구니 안에 들어 있어요." 리는 놀라지 않았다. 8개월 전 해밀턴 자레트가 사장직을 점령한 이후로 그는 보안책 임자로 그의 오른팔격인 스티브 건을 끌어들였고 배리푸드 인터내셔널은 나치스의 제 3 국처럼 돌아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고마워요, 마지." 리는 책상 위의 캘린더에다 메모를 해두었다. "그리고 마지." "네." "자넷 호머를 알고 있어요?" "자넷 호머? 충돌사고로 사망한 화학자 말이군요?" "그래요." "개인적으론 물라요. 그런데 부장님은 아세요." 리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마지. 하지만 방금 전자통신문을 읽기 전까지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내일 장레식 때 마지가 예배당에 꽃을 좀 갖다 놓도록 해줬으 면 좋겠어요." "미안합니다. 부장님이 그녀를 알고 있는지 몰랐어요.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꽃를 보 내도록 하겠어요. 하지만 통신문 내용처럼 부조금은 암 센터에 기부하기로 뢰어 있다 는군요." "그렇다면 나도 기부금을 보내겠어요. 유족들의 뜻에 어긋 나지 않도록 해야죠. 그런 데... 마지, 그래도 난 자넷에겐 꽃을 보내겠어요. 노란 장미꽃을 많이 보내고 싶어 요. 화원에 얘기해서 계산서는 나에게 보내도록 해주겠어요?" "그럴게요, 리. 정말 안됐어요." 자넷과의 생생했던 기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함께 점심시간을 이용 해서 쇼핑하던 일, 아기가 3주일이나 먼저 나오려고 해서 황급히 병원으로 달려가던 일, 그리고 2년 전 사무실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면서 음정도 맞지 않던 노래를 불 러대던 일, 불과 일주일 전에 휴가를 떠나는 리를 껴안고 작별인사를 하던 일들이 기 억의 샘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젠 그런 자넷을 더이상 생각할 수 없다. 다시 눈물이 쏟아져 나오려고 한다. 그 죽 음의 고통은 아직도 너무 생경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결국 슬픔에서 빠져 나 오지 못한 채로 그녀는 다시 일에 몰두해 볼 생각을 했다. 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맨 먼저 한 일은 바구니에 쌓여 있는 수많은 종이 더미에서 보안 메모를 찾는 일이었다. 한동안 허리를 굽히고 바구니를 뒤지던 그녀는 허리를 죽 폈다. 하지만 그 녀가 찾으려던 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그 바구니의 서류철을 모두 들 어낸 다음 나머지 종이들을 책상 위에 쏟아 놓았다. 그렇게 찾아보는 편이 훨씬 쉬울 것 같았다. 그런데 종이 더미에서 하얀 봉투 하나가 떨어졌다. '리, 이런 식으로 너에게 연락을 취하는 게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질 거야. 하지만 나 의 모든 전자통신 체제는 감시를 당하고 있으며 전화도 도청을 당하고 있어. 너에게 꼭 할 이야기가 있어. 뭔가 아주 나쁜 일이 진행되고 있어. 반드시 중단돼야 할 일이 야. 이 미친 곳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 네 가 태호 호수에 있다는 걸 깜빡 잊고 어젯밤 너의 집으로 연락을 하려고 했지 뭐야. 너의 집 주소만 알았다면 안전하게 이 편지를 집으로 보냈을 거야. 하지만 주소를 모 르고 있기 때문에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돌아오자마자 나의 집으로 전화해 줘. 실험실로 찾아오진 말아 줘. 그곳은 너무 위험하니까. 그리고 이 편지에 대해선 아무에게도 말하지마, 절대로.... 자넷' 리는 의자에 앉은 채 죽은 친구의 편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당혹스럽고 충격적인 편 지였다. 그녀는 가장 당혹스러운 귀절을 다시 읽어 보았다. '아주 나쁜 일이 진행되고 있어. 반드시 중단돼야 할 일이야.' 자넷이 그런 편지를 썼다는 게 믿을 수가 없다. 실험실에 있는 그녀의 작업장에선 왜 너무도 위험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리는 몸출 떨었다. 아무래도 누군가와 그 문제로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다. 하지 만 누구에게 상의를 한단 말인가? 틀림없이 사장인 해밀턴 자레트도 뭔가 내부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이 미친 장소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 아무에게도 이 편지에 대해서 말하지 마, 절대로...' 공포심이 척추를 타고 흘러갔다. 혼란스럽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새 로운 보안대책에 관한 메모를 찾아야겠다는 충동이 더욱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그녀 는 필사적으로 바구니를 뒤적였다. 결국 몇 분 후에야 그걸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그 메모는 무려 2장에 걸쳐서 장황하게 작성돼 있었다. 마지의 말이 옳았다, 경비실 장 인 스티브 건이 쓴 게 틀림없다. 비록 해밀턴 자레트가 서명을 했지만 말이다. 사장 의 메모는 간결한 편이었다. 잡다한 이야기를 대강 훑어가다가 겨우 요점인 듯한 내용을 발견했다. 최근의 전화회사의 감시기록에 의하면 우리의 경쟁회사인 티베리푸드 인터내셔널이라 는 업체에서 온 전화가 특별히 나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경쟁업체와 연 락을 취할 타당한 이유가 없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런 비공식적인 전화는 산업 스파이 활동과 관계가 있는 걸로 추정됩니다. 회사의 모든 통신 행위는 사전 연락 없이 감시 된다는 점을 명심하시오. 리는 메모지를 내려놓으며 지난 수요일의 날짜가 적혀 있음을 확인했다. 바로 이것이 자넷이 말하려던 것이었을까? 그녀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전화와 전자통신이 도청당 한 다는 일은 확실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자넷은 자기 혼자만 이 그런 일을 당하 고 있는 것처럼 적고 있다. 리는 그 감시장치에 대해선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보안의 문제를 위해 불가 피한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자넷이 도청을 당하고 있었을까? 누군가가 그녀를 위험 인물로 생각한 것일까? 하지만 그건 미친 생각이다. 절대로 자넷은 산업 스파이 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 런데 자넷은 어떤 사실을 그녀에게만 알리려고 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내용일까? 다시 한번 인터콤이 울리는 바람에 리의 사념은 그대로 깨어지고 말았다. "무슨 일이죠, 마지?" "I. E. 알렉산더 씨가 와 계십니다. 약속을 하고 싶다고요. 이분은 화학연구원을 지 원 하기 위해 면접을 하고 싶대요." "화학연구원? 우린 화학연구원을 선발할 계획이 없어요." 마지가 미안해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결원이 생긴 자리에 어차피 다른 사람을 채워넣어야 하잖아요? 알렉산더 씨와 이번 주 내에 약속을 해도 괜찮을까요?" 그제서야 리의 멍한 두뇌에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지금 문밖의 남자는 자넷의 일자 리 에 지원하러 온 것이다! 순간 리는 탐욕스런 동물이 문밖을 지키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얼마나 몰인정한 인간일까? 하지만 리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남자는 자넷에 관한 건 아무것도 모른 채 일자리를 찾기 위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넷의 사고를 몰 랐다면 어떻게 빈 자리가 있다는 걸 알았단 말인가? 그 사이에 광고를 낸 적도 없는 데... 이제 그녀의 생각은 자넷 호머의 죽음에서 알렉산더라는 인물이 찾아온 이유에 쏠리 기 시작했다. 자넷은 뭔가 잘못 돼가고 있다는 편지를 쓴 다음 죽었다. 그리고 그 즉시 한 남자가 그녀의 일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나타났다. 그 모든 일들이 리에겐 소름이 끼치기만 하다.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만 은 분명했다. 그녀는 그 남자를 만나길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를 만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뿐이다. "리, 듣고 있어요?" 마지가 물었다. 리는 자넷의 편지를 봉투에 넣은 다음 봉투를 접어서 상의 호주머니에 넣었다. "미안해요. 잠시 뭘 좀 생각하느라고... 우선 알렉산더 씨에게 신청서를 작성하시라 고 해요. 그런 다음 내가 만나보겠어요." "이미 작성을 끝냈어요." 그렇다면 이제 그녀는 그 지원자를 만나봐야만 했다. "그럼 그분을 들여보내요." "지금 말인가요?" "지금..." 리는 빈 책상 서랍을 열어서 바구니의 내용물을 쓸어넣었다. 비서가 사무실 문을 열 때쯤 책상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알렉산더라는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그에 대한 첫인상은 그가 면접을 하기에 적합한 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베 이지 색 스포츠 셔츠와 바지 위에 울 카디건을 걸치고 유사한 색상의 레인코트와 우 산 을 들고 있었다. 틀림없이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를 믿었던 것처럼.... 그는 샌프 란 시스코에서 온 사람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녀는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잘생긴 얼굴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 다. 흔히 영화에서 보는 잘생긴 미남은 아니었지만 강인한 인상에다 테 없는 안경 뒤 의 갈색 눈동자가 학자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난 B.A. 리라고 해요. 인사부장이죠." 악수를 나누는 동안 그의 손이 크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리는 키 큰 남자들을 많이 봐 왔으나 아무렇게 차려입은 185cm정도의 체격을 가진 이 남자에게선 뭔가 조용한 힘 같 은 게 전해졌다. "여기 내 신청서가 있습니다. 미즈 리." 어쩌면 신뢰성이 없을 거라고 믿었던 선입견이 그의 격의 없는 태도에 사라지려 하고 있다. 그녀는 계속 머릿속에 떠 돌던 의문을 직접 부딪쳐 보려고 했다. 그래서 신청 서 를 받으면서 짐짓 딱딱한 음성으로 물었다. "알렉산더 씨, 어떻게 배리푸프에 일자리가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됐죠?" 그의 갈색 눈동자에 어떤 감정의 빛이 떠올랐다. "사실 난 일자리가 있다는 얘긴 들은 적이 없어요. 난 그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가 이 회사에 지원서나 써두 려고 들렀던 것뿐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비서가 마침 이곳에 나의 전공분야에 맞는 빈 자리가 있다고 알려 주더군요." 결국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군. 그의 옷차림이 그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그는 전혀 면접 같은 건 기대하지 않고 찾아온 것이다. 리는 긴장을 털어내며 그에게 의자를 가리키고 책상 앞에 가서 앉았다. 자넷의 죽음과 충격적인 편지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긴 했지만 이제 이 지원자에게 최대한의 관심을 집중 해야만 한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먼저 당신의 신청서를 읽어 봐야 겠어요." 그가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청서에 쓴 그의 펜 글씨는 매우 단정했다. 사 실 과학자들은 단정한 필체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신청서의 정보가 다 른 지원자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남자를 보았다. "이름과 중간 이름을 완전히 적어 넣지 않았군요. 그저 L.E.라는 이니셜만 썼는데 특 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원래 이름이나 중간 이름은 사용하지 않아요." 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그녀 자신도 사용하지 않고 있으니까. 그녀는 다시 신 청서를 훑어보았다. "그밖의 다른 것은 모두 제대로 작성이 된 것 같군요. 나는 면접을 통해서 지원자들 에 게 배리푸드를 좀더 자세히 알리고 싶어요. 그러니까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한 후에 궁 금한 게 있으면 마음 놓고 질문해 주세요." "고맙소." 그는 다시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도대체 그는 일자리를 찾으러 온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왜 배리푸드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거죠?" "이 회사가 강력한 연구팀만 갖추면 아주 유망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그건 그녀가 연구직 지원자들에게 흔히 듣는 대답이다. 아무튼 리는 그를 좀더 깊이 파보기로 결심했다. "이 회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요?" 그는 마치 그런 질문이 나오기를 예상했다는 듯 술술 대답했다. "이 회사는 3년 전 트랜스 월드 유한회사가 인수한 이후로 제분업에서 많은 소비재 생산으로 전환하고 있 다고 들었어요. 비록 시리얼과 가공육, 그리고 치즈, 유제품, 과일 주스, 그리고 많 는 특별 품목으로 끊임없는 성장을 하고 있긴 하지만 배리푸드는 그 라이벌인 티베리푸 드 인터내셔널에겐 제대로 도전하지 못했소. 그래서 당연히 당신의 회사인 트랜스 월드 는 좀더 극적인 발전을 모색하고 있을 거요." 그건 아주 뛰어난 답변이었다. 현재 회사의 움직임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답변으로 인해 그의 지원 동기가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알렉산더 씨, 내 비서가 당신에게 화학연구원이 하는 일을 상세하게 적은 종이를 주 던가요?" "그렇소." "그럼 그걸 주의깊게 읽어 보겠어요? 그 일에 대한 책임 뿐만 아니라 급료에 대해서 도 나와 있을 거예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뭐가 문제가 되나요?" "사실은 그래요. 워싱턴의 식품의약국을 이끌던 사람이 1/3이나 월급이 삭감된 배리 푸 드의 화학연구직을 원하는 이유가 뭐죠?" 그가 흔들림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간단해요. 난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싶어요. 정부의 일을 하는 데 지쳤어요. 이제 개인분야에서 일하고 싶어요. 식품의약국에서 일한 경험이 직장을 옳길 수 있게 해주 었소." 감정이 배제된 요점만을 간추린 대답이다. 최소한 겉으로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 다. 물론 그 남자는 신뢰감을 주고 있긴 했지만 그 냉혹한 얼굴 밑엔 그녀가 전혀 감 지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리는 의자 깊숙히 몸을 묻었다. "당신에게 이 일자리를 제공한다고 해도 동부에서 이사하는 데 대한 충불한 보상이 되 지 못할 거예요. 배리푸드는 새로운 고용인에게 이사 비용을 지급하긴 하지만 그런 보 조금으로는 당신처럼 먼 곳에서 오는 사람에겐 불충분할 거예요. 그렇다면 이 일자리 를 포기할 건가요?" "아뇨. 난 나머지 이사 비용을 스스로 충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는 여전히 자신만만했고 침착했다. "그리고 연구직이란 항상 급한 일이 대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만약 당신을 채용하게 된다면 즉시 일을 시작해야 해요. 학기가 끝나는 6월까지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학 기 중에 이사를 하면 당신의 가족들에게 충격을 줄지도 모르겠군요." "난 가족이 없어요." 그가 다시 한번 침착한 갈색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했다. 리는 그의 입가에 슬픔이 서려 있음을 보았다. 마치 고통의 잔재가 그의 입가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다시 한번 신청서를 내려다보한다. 그의 교육 정도와 경 력은 다른 어떤 경력자보다 연구직에 적합했다. 어쩌면 배리푸드가 그를 붙잡기 위해 서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정도였다. "식품의약국에서는 당신의 능력에 만족하고 있나요?" "그렇소."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당신의 근무경력과 업무 상태를 확인해 보기 위해 식품의약국의 당신 상관에게 연락 을 취해도 될까요?" "그건 좀 곤란하겠군요." "그렇다면 그곳에선 당신이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는지 모르고 있단 말인가요?" "그렇소. 그들은 내가 휴가중이라고 믿고 있을 거요." "알겠어요. 당신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 게 밝혀지면 당신의 상관이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한단 말이군요."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날카로운 지적이다. 만약 그녀가 다른 일자리를 찾고 있다는 걸 알면 해밀턴 자레트 는 즉석에서 그녀를 해고해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알렉산더의 질문에 반응을 삼가고 있었다. "물론 당신의 현재 직장을 위험스럽게 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당신을 채용 했을 경우 이 신청서에 쓴 사실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채용 자체가 무효가 된다는 걸 명심하세요." "물론이오." 그는 자신있는 어조로 대답했다. "됐어요. 이걸로 면담은 끝났어요. 우린 당신의 신청서를 좀더 자세히 읽어 보겠어요 . 여러 면에서 당신은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 것 같군요. 하지만 일단 공석이 있는 이상 다른 지원자들도 면담한 후에 최종 결정을 하게 될 겁니다." "언제쯤 최종 통고를 해주겠소." "2, 3주 내에 연락을 하겠어요. 알렉산더 씨, 다른 질문은 없나요?" "당신만 괜찮다면 날 알렉스라고 불러도 좋아요. 그런데 이 회사의 화학연구직은 어 떤 일을 하는지 알고 싶군요." 어떤 면에선 그건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다. 하지만 기업의 비밀 보장을 생각한다면 지 나치게 엉뚱한 질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의약관리국의 생화학자가 사기업의 비밀에 대해서 뭘 알겠는가? "알렉스, 현재의 연구는 아주 은밀히 진행되고 있어요. 산업 첩보활동이 요즘 우리의 주된 관심사예요. 나도 업무상 필요한 부분밖엔 모르고 있어요. 당신도 이 회사에서 일하게 되면 같은 입장일 거예요." 알렉스의 질문을 빌미로 리는 어떤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의 호기심을 이용해서 자신 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보자는 것이다. 자넷은 실험실에 오는 게 몹시 위험하다고 했 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그 두려움을 나눈다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자넷의 죽음이 리를 커다란 상심 속으로 몰아넣긴 했지만 이제 그 고통을 이겨내는 유 일한 방법은 자넷의 마지막 편지를 추적해 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자넷의 작업실에 들어가 봐야 한다. 혹시 그곳에 가면 뭔가 실마리를 찾아 낼 수 있을지도 모 른다. 그렇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재 연구에 대해 상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당신에게 우리의 실험실을 잠깐 보여 줄 수 는 있어요. 시설도 둘러보시고 화학실장인 조지 펙도 만나보시면 좋겠군요. 그 분이 당신의 직속 상관이 될지도 모르니까." "고맙소." 그는 선선히 일어나 리를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우산과 코트를 이곳에 두고 가셔도 좋아요." "이건 아주 가벼워요." 알렉스는 그것들을 팔에 걸었다. 가는 길에 그들은 비서의 책상 앞에서 잠시 멈춰섰 다. 60 살의 마지 클롭맨은 155Cm정도의 자그마한 키에 푸른 눈동자의 여인이었다. 그 녀는 일급 비서였다. "조지 펙이 사무실에 계실까요?" 리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데니스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지만 지금 가시면 그들이... 회담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만날 수가 있을 거예요." "그럼 조지에게 내가 지원자 한 분과 함께 갈 거라고 전해 주겠어요?" 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가락은 이미 조지의 구내 번호를 눌러대고 있었다 . 연구실이 가까워질수록 리의 긴장감도 커져만 갔다. 거의 알렉스의 존재도 잊은 채 그 녀는 자넷의 편지 구절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주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어. 너무 위험해. 너밖에는 믿을 수가 없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2 렉스는 인사부장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마치 두 사람을 따 라다니는 듯한 대형 카메라가 천장에 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잠시 렌즈 뒤에서 누군 가가 숨어서 녹음을 하면서 감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유리에 두 사람의 모습이 반사됐다. 알렉스는 옆에 서 있 는 여자의 모습에 신경을 쏟 고 있었다. 밝은 색 머리칼에 짙은 줄무의 투피스와 하이힐을 신은 여자... 그녀는 묘 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옅은 금발에 창백한 피부, 그리고 어느 색깔이나 흡수할 것 같은 눈동자... 그녀는 30살쫌 되어 보였다. 어쩌면 그보다 1, 2살쯤 위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에서 빠져나 온 것처럼 표정이 자연스러웠다. "알렉스, 왜 샌프란시스코까지 오게 됐어요?" 그녀가 물었다. "리... 아, 당신을 리라고 불러도 괜찮겠소?" "그것도 괜찮겠군요." "배리푸드의 일자리와 기후 때문에 이곳에 왔다고 할 수 있어요. 사실 난 눈을 몹시 싫어하거든요. 지난 겨울엔 눈이 아주 많이 내렸어요." "그럼 스키를 타는 것도 싫어하나요?" 알렉스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게 바로 동부인과 캘리포니아 인의 사고 차이예요. 캘리포니아 인들은 눈이라고 하 면 산의 휴양지나 스키를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동부인들은 찻길을 내기 위해 눈더미 를 치워야 하는 일부터 연상하게 되죠." "오, 저기 데니스 윌리엄스가 오는군요. 우리 회사의 광고 부장이에요. 그녀 역시 조 지 펙을 만나려는 걸 거예요. 내가 소개해 드리겠어요." 알렉스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여자를 보면서 웬지 위축감을 느꼈다. 그 여 자 의 눈동자에 약간 놀라는 빛이 스쳐갔지만 확실치는 않았다. 알렉스는 그녀와 악수를 나눴다. "실험실에 가려는 길인가요?" 리가 물었다. "그래요. 높으신 분께서 호출을 하셔서... 그런데 당신은?" "나도 거기에 가려던 길이에요. 알렉스에게 실험실도 보여 주고 조지도 소개하려고요 . 아무래도 알렉스에게 여기서 하는 일을 직접 보여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데니스가 미소를 지으며 밤색 머리칼을 저었다. "하지만 알렉스를 데리고 들어가진 못할 것 같군요. 컴퓨터에 손바닥 지문이 입력되 지 않으면 1층에서 실험실 쪽으로 향하는 보안화면이 특수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사람을 차단해 버리잖아요?" 알렉스는 홀끗 리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경비원이 알렉스가 들어갈 수 있도록 보조 수동장치를 작동해 줄 거예요. 전에도 내 게 그렇게 해준 적이 있어요." 하지만 데니스는 여전히 머리를 저어댔다. "예전엔 경비원이 그렇게 해줬어요. 하지만 최근엔 게슈타포 사령부에서 명령이 떨어 졌어요. 실험실로 갈 수 있도록 그 수동장치를 작동할 수 있는 사람은 스티브 건뿐이 라는 거예요. 그들은 경 비원들의 제동장치에 다시 전선을 치고 모든 걸 중앙 경비실 로 통과하도록 해뒀어요." "최근의 보안대책 메모에선 그런 내용이 없었어요." 리의 음성엔 항의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데니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경비원들은 스티브 건의 승낙을 받지 않고는 절대로 컴퓨터의 전자 감시경을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 있대요." 리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일그러졌다. "미안해요, 알렉스. 요즘엔 보안대책이 아주 철저해요. 물론 필요해서 하는 일이에요 . 하지만 따라오세요. 스티브의 허락을 얻어서라도 당신에게 실헙실을 보여 주고 조지 를 만나게 해주고 싶어요. 그래야 이곳이 당신에게 맞는 곳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가 있 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리는 데니스를 의식해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알렉스 자신은 실 험실을 둘러보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리는 그에게 그곳을 보여주려는 목적 때문이 아니라 반드시 실험실에 가야 할 일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알렉스와 리, 그리고 데니스는 1층의 경비실에서 몇 분 동안 기다렸고 그동안 경비원 이 건물 내에 있는 경비실장을 찾고 있었다. 드디어 경비실장의 모습이 텔레비전 화 면 에 나타 났다. 그 남자의 표정은 굳어져 있다. 그건 유머를 모두 배제한 자의 얼굴이었다. 리가 화 면 앞으로 걸어가서 용건을 설명하자 스티브 건은 그녀에게 알렉스를 화면 앞으로 데려 오 라고 지시했다. 리는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말없이 그의 지시에 순응했다. 드디어 스티브 건이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경비원에게는 알렉스가 떠날 때 연 락을 해달라고 지시했다. 알렉스는 그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포리고 자신이 그 체제를 때려부수기 위한 시도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러지 않기를 바 랐지만.... 두 여자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들어섰을 때, 리가 상의 호주머니에 오른손을 반복해서 넣었다 빼냈다. 그녀는 거의 무의식중에 손장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알렉 스 는 그녀의 주머니 안에 흰 봉투가 있는 걸 얼핏 발견했다. 그 순간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알아챈 리가 갑자기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 여기서 일한 지가 얼마나 됐소?" 알렉스는 자신의 진짜 관심을 은폐하기 위해 그런 질문을 던졌다. "9년." "그럼 데니스 당신은 얼마나 됐나요?" "난 배리푸드에서 일한 지는 겨우 6개월밖에 되지 않아요. 하지만 모회사인 트랜스 월 드에서 몇 년 근무했어요. 당신은 지금 어디서 일하나요?" "식품의약국에서 일해요." "식품의약국에서?" 데니스의 음성에 새로운 관심이 섞여 있다. 하지만 알렉스는 대답할 기회를 갖지 못 했 다. 그 순간 엘 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리가 그의 대탈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여기가 실험실이에요. 당신은 곧 미각기관의 전문가를 만나게 될 거예요." 연구실이라고 적힌 문을 들어서자마자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황급히 그들에게 다 가 왔다. 실내를 둘러볼 틈도 없이 알렉스는 형편없이 여윈 그 남자와 마주섰다. 40살쯤 돼보이는 사내는 180cm가 넘는 키에 대머리였다. "이분이 화학실장인 조지 펙이에요." 리가 남자를 소개했다. "조지가 실험실을 운영하고 있어요. 일을 계획하고 모든 결과를 평가하는 일을 해요. 이분 밑에는 4명의 화학자가 있어요. 조지, 이분은 화학연구직에 지원한 알렉스예요. " 앙상한 손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알렉스는 두 번 놀라고 말았다. 앙상한 그 의 손에 엄청난 힘이 들어 있고 그 푸른 눈이 교활하게 번득이며 그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잠시 후 펙의 시선이 리에게로 옳겨갔다. 아마도 알렉스에 대한 그의 과학적인 호기 심 은 그 짧은 관찰을 통해 충분히 충족된 것 같았다.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을 것 같소. 난 데니스와 전....전에 의논하던 광고에 관한 이야기를 끝내야 해요. 데니스.... " "우린 이미 광고 스케줄에 대해선 의논을 끝냈어요. 모든 게 준비된 상태예요. 더이 상 의논할 게 없을 것 같은데..." 데니스가 말했다. 그러나 조지의 표정은 데니스가 자신의 사무실 쪽으로 가지 않는 것을 불만스럽게 생 각하는 눈치였다. "제품의 실제 테스트 결과에 따라서는 도입부를 바꿔야 할지도 몰라요." "도입부를 바꾼다고요? 미쳤군요! 햄은 2달이 걸려도 안 된다고 했어요. 그동안 난 매 일 야간 근무와 휴일 근무를 해 왔어요! 이미 텔레비전과 잡지사에도 광고 예약을 해 뒀단 말이에요! 돈도 지불했고요!" 데니스의 얼굴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나 조지 펙은 별로 개의치 않는 얼굴로 데 니 스에게 성큼 한 발짝 다가서며 말했다. "이봐요, 먼저 번 서문은 아주 좋은 뉴스였어요. 그건 테스트가 잘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오. 당신은 그 계획을 비밀로 부치는 게 몹시 어렵다고 불평을 해왔기 때문에 차 라리 당신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소. 자, 내 사무실에 들어가서 바꾸는 문제를 의논 하는 게 어떻겠소?" 조지 펙의 음성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데니스의 얼굴은 어느새 심홍색으로 변해 있 다. 그녀의 커다란 손이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자제력을 잃진 않았다. 그녀는 조지를 응시하면서도 리와 알렉스에겐 다정하고 예의바른 어조로 말했다. "알렉스, 만나서 반가웠어요. 리, 나중에 만나요." 데니스가 조지를 따라 그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리는 상황이 끝난 것에 대한 안도 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스는 무슨 일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데니스는 자신의 계획이 변경 된 것에 대해 화가 나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조지는 고의적으로 데니스를 선동해서 화를 내게 만들고 있었다. "좀 특이한 업무관계로군요." 그렇게 말하고 리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그 미끼에 걸려 들지 않았다. "조지는 곧잘 사람의 화를 돋우곤 하죠. 당신도 미리 그걸 알아두는 게 좋을 거예요. 아무튼 그가 당신의 전문적인 질문에 대답을 못하게 돼서 유감이군요. 하지만 시간이 있으니까 함께 연구실을 둘러보는 게 어때요? 뒤편엔 화학자들이 그들의 혼합물을 뒤 섞는 주방이 있어요. 조지와 화학연구원들만이 열쇠를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에 게 작업실을 안내할 수는 있어요." 알렉스는 다시 한번 리가 그곳에 꼭 와야 할 이유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잠 자 코 그녀를 따라 나섰다. 그 방은 아주 넓었다. 그런데 그 큰 방에 비해 방안엔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단지 천 장에 매달린 형광등의 불빛만이 알렉스의 눈을 부시게 했다. 밖의 날씨가 어떻든 그 방은 항상 으스스한 느낌을 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하기엔 적당한 장소인지 도 모른다. 그리고 중앙 통로 쪽엔 2개의 널은 칸막이실이 있었다. 160cm정도의 칸막이 위로 생 화 학자들의 머리가 보였다. 알렉스가 지나가자 키가 큰 젊은 화학자가 머리를 들어올렸 다. 185cm쯤 돼보이는 그는 검은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 특이한 외모를 한 남 자의 이름표엔 마이클 웨어라고 적혀 있었다. 리가 잡다한 사실들을 설명해 주었다. 컴퓨터가 주방에 있는 기계 손으로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방법이라든가, 여러 가지 식품과 화학제들을 컴퓨터가 뒤섞어서 화학자의 과 학적인 배합법에 따라 배합하는 방법 등. "손이란 조리법에 따라 준비된 다양한 재료들을 흡수하는 진공관이에요." "그렇다면 화학자들이 컴퓨터에 여러 가지 배합을 한 다음 주방에서 최종 상품의 맛 을 본다는 겁니까?" "맛이라고 해야 할 거예요. 아니면 냄새나 색상을 점검하기도 하죠. 맛에는 4가지 것 밖에 없잖아요? 단맛, 짠맛, 신 맛, 쓴맛. 사실 식품이란 냄새와 모양, 느낌도 중요 한 거예요. 그런 다음 영양가도 중요한 요소가 될 거예요. 물론 재료를 구하기도 쉬워야 하고 우리의 문화적 기호와도 맞아야 해요." "그래요." 그 순간 리는 자기가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주제넘게 강의를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 았 다. "미안해요, 당신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일 텐데..."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상관하지 않는다는 표시를 했다. 칸막이실을 지나치는 동 안 그는 그곳이 지나치게 하얗고 깨끗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작업실마다 깔 끔하게 차려입은 화학자들이 몸을 굽히고 현미경을 들여다보거나 컴퓨터 키보드를 눌 러댔다. 그러나 방의 맨 뒤 칸막이 하나는 비어 있었다. 리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알렉스는 더이상 그녀 에 게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빈 칸막이실 쪽으로 다가갔다. 마치 무엇엔가 흘린 것처럼.. . . 그 방은 다른 칸막이실과는 달랐다. 그 안엔 행복한 얼굴 들과 우스운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마치 이곳의 주인은 이 실험실의 깔끔함과 유사함에 저항이라도 한 것 같았 다. 알렉스는 몇 개의 만화를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오른쪽 구석에 조그만 금박 액자 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곳으로 다가간 알렉스는 비로소 그것이 2개의 타원형 사진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오른쪽의 사진은 4살 난 사내아이를 안고서 미소짓는 남자 의 사진이었고 왼쪽의 사진은 생후 1, 2주 정도밖에 안됐을 법한 잠자는 아기의 사진이 었 다. 그는 잠시 그 사진들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그는 서랍을 막 열려고 했을 때, 리가 곁에 와 있음을 의식했다. 알렉스는 돌아서서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채용이 된다면 이 칸막이를 쓰고 싶소. 아주 아늑해 보여 요, 안 그래요?" 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표정은 굳어져 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다시 호주 머 니 속의 봉투를 어루만졌다. 그때 알렉스는 오른편에서 검은 머리가 자신을 응시하는 걸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통 로 맞은편에서 호기심 어린 표정 하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인사를 나눠야겠다고 결심하고 그쪽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난 L.E. 알렉산더예요. 알렉스라고 불러 줘요." "우리 회사에 채용되셨나요?" 작고 둥근 얼굴의 여자가 물었다. "아직 채용된 건 아니지만 여기서 일하게 될 겁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난 팸 헤이어예요. 당신은 생화학자인가요?" "그래요. 지금은 동부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젠 이곳에서 직장을 구하려고 해요. 이 회 사가 내게 맞는 일자리를 제공해 줄 것 같기도 하군요. 그런데 배리푸드에서 일한 지 는 오래 됐나요?" "7년 정도 됐어요." "그렇다면 회사를 아주 좋아하는 모양이군요?" "글쎄요. 사실 난 다른 회사에서 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비교하긴 힘들어요." "그렇군요. 그런데 무슨 일을 하십니까?" 알렉스는 자신의 음성이 자연스럽게 들리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신경은 쓸 필요도 없 었다. 팸은 그의 말은 거의 듣지도 않은 채 그 의 뒤쪽을 바라보는 일에만 정신이 팔 려 있었다. "리는 뭘하고 있는 거죠?" 팸이 거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알렉스는 그녀의 시선을 쫓아 몸을 돌렸 다. 리는 방금 그가 떠나온 책상 앞에 있었다. 그녀는 막 서랍 하나를 닫고서 책상 위와 컴퓨터 작업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책상 위에 흩어진 녹색과 하얀 색의 컴퓨터 종 이 의 구멍난 조각들을 보며 그녀는 몹시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모 아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구부린 자세로 잠시 주저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쓰레기통에서 뭔가를 보고 놀라는 눈치다. 알렉스는 호기심에 쓰레기통을 내려다보았다. 빈 쓰레기통에는 조그만 새 램프가 비 죽 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알렉스는 리의 표정에 잠시 혼란의 빛이 스쳐가는 걸 발견했 다. 잠시 후 그녀는 그 램프를 쓰레기통에서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리가 몸을 움 직이는 동안 호주머니에서 그 봉투가 떨어졌다. 그녀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 았 다. 알렉스는 그녀가 근처의 콘센트에 램프를 꽂고서 스위치를 돌리는 동안 가만히 지 켜보았다. 램프의 조그만 형광등이 빛을 발하고 있다. "이렇게 밝은 방에 누가 램프를 가져왔을까요?" 곁에 서 있던 팸이 은밀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음성은 마치 음모의 속삭임처럼 들 렸다. "불을 켜봤자 아무런 차이도 없을 텐데..." "저 자리에 누가 앉았었나요?" 리의 행동을 은폐라도 하려는 듯이 갑자기 알렉스가 물었다. 갑자기 팸은 신경질적인 표정이 됐다. 그녀의 검은 눈이 그의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자넷 호머였어요. 그녀는 지난 주에 죽었어요." 알렉스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중간 통로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흘끗 바라보니 리는 책상 뒤에서 뭔가를 집어서 재빨리 그걸 내려놓았다. 아주 빠르고 유연한 움직 임 이다. 그리고 그녀는 들어온 사람을 맞기 위해 통로로 나왔다. 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재빨리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스티브." 리가 말했다. "무슨 일로 연구실에 오셨나요?" 그 남자는 경호실의 텔레비전 화면에서 봤던 그 남자였다. 직접 만나보니 그는 생각 했 던 것보다 키가 작은 대신 옆으로 더 퍼져 있는 상태였다. 리는 거의 비슷한 키의 사내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저 순찰중이오. 보안 장치는 아주 좋은 고안품인 것 같소. 사람들을 바르고 정직 하 게 살게 해주거든요." 그의 작고 검은 눈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살폈다. 마치 그는 금방이라도 문제가 생 기 길 기대하는 듯한 표정이다. 그의 체구는 너무도 꼿꼿해서 마치 등에다 합판이라도 붙 여놓은 것 같았다. 스티브의 시선이 여전히 리에게 가 있는 동안 알렉스는 통로로 가서 자넷 호머의 책 상 위에 자신의 우산을 올려놓았다. 잠시 후에 리가 그에게 다가왔다. "알렉스, 이제 충분히 둘러보았나요?"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따라 문 쪽으로 갔다. 몇 발자국 걸어가던 리가 여 전히 통로에 서 있던 스티브 건에게 말했다. "스티브? 알렉스가 떠나요. 사무실로 돌아 가서 전자감시경을 풀어야 하잖아요?" "먼저 이곳을 빨리 둘러봐야겠소." 리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 그들이 조지 펙의 사무실을 지나 칠 때 화학실장과 광고부장이 막 나오고 있었다. 아마 회담이 끝난 모양이다.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리와 알렉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리는 알렉스가 곁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는 듯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을 때 마침 데 니스가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면담이 끝나서 홀가분해요. 두 분은 어땠어요?" 리는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십리 밖에 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하자 그녀는 갑작스런 질문을 던져 그 를 놀라게 만들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실험실의 조직에 관한 얘기라면 아무래도 그건 쉽게 타파 될 것 같지 않았소. 그리 고 그 경비실장에 관한 얘긴데, 그는 아침식사로 총탄을 먹어대고 이야기할 때는 그걸 쏟 아내는 듯한 느낌이었소." 리와 데니스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아준 좋은 표현이에요." 데니스가 말했다. "멋진 표현이군요." 리도 맞장구를 쳤다. "물론 그가 좀 지나치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함께 근무하다 보면 리나 나처럼 익 숙 해질 거예요. 한 가족처럼..." 하지만 리는 데니스의 말에 공감하지 않는 눈치였다. "가족처럼?" 그가 반문했다. "그렇다면 스티브가 <빅 브라더>에 나오는 큰 오빠처럼 느껴진단 말이오?" 리와 데니스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데니스가 음성을 낮춰서 은밀한 어 조로 말했다. "알렉스, 숨겨진 마이크가 있다구요." 하지만 그녀의 음성은 전혀 심각한 게 아니었다. 그리곤 리를 보며 덧붙였다. "리, 이분을 채용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웃을 일이 없어지잖아요?" 리가 기계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때 갈색 콧수염을 한 금발의 남자가 옆의 복도에서 불쑥 뛰어나왔다. 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 같았다. "안녕, 리, 데니스." 금발의 사내는 알렉스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리는 놀라움을 숨긴 채 두 사람을 소개했다. "이분은 우리 회사의 경리부장인 존 카스테어스예요. 존, 알렉스는 연구 화학직에 지 원했어요." 그의 손은 축축하고 불안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알렉스, 만나서 반갑소. 여러분들이 실험실로 가는 걸 보았어요. 일이 어떻게 진행 되 는지 궁금했나 보군요?" 하지만 리나 데니스는 그 질문에 아무 답변도 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그 질문의 의미 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존은 아무 답변도 듣지 못할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별 다 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목요일 밤에 예정된 파티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회사의 창립 파티가 우연히 내 생일이고 배리푸드에 입사한 지3년째 되는 해라고 해 서 두 숙녀께서 값비싼 선물을 하는 건 원치 않아요. 그저 적당한 것이라면 기꺼이 받 겠지만...." "적당한 거라면 뭘 말하는 건가요?" 리가 물었다. "오, 스키 장비 같은 것도 괜찮아요. 비철 세일을 이용해도 상관없어요. 가격표만 떼 어낸다면 난 문제삼지 않을 테니까." "큰 것도 바라는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데니스는 웃고 있다. 두 여자는 존의 행동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듯했다. "이봐요, 나처럼 유능한 경리부장을 구하긴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오늘 오후에 곧 장 백화점에 가서..." 존의 항의가 계속되는 동안 알렉스는 그걸 신호삼아서 입을 열었다. "난 잠간 실례해야겠어요. 우산을 실험실의 책상 위에 올려 둔 걸 깜빡 잊고 있었어 요. 다시 갔다와야 할 것 같아요." 리가 몸을 돌려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나도 함께 가겠어요." "아뇨, 두 분은 존과 선물 이야기나 계속하는 게 좋겠군요. 금방 갔다오겠소. 경비실 앞에서 만납시다." 그리고 그는 재빨리 닫히고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실험실이 있는 층에 엘리베이터가 선 순간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 져나왔다. 그 순간 바로 옆의 엘리베 이 터의 문이 닫히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스티브 건의 모습이 잠시 보였다. 그 경비실 장 은 아마 볼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모양이다. 알렉스는 곧장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는 우산을 집어들고 재빨리 책상 서랍을 열어 보 았다. 그곳엔 별로 특이한 게 눈에 띄지 않았다. 부서간 메모들과 필기구, 그리고 휴지 상 자 가 있을 뿐이다. 그는 서랍을 닫고서 어두운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걸 켜봤 자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는 배리푸드의 내부 컴퓨터 체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 혀 알고 있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런 다음 그는 책상을 둘러보았다. 재미있는 만화들은 여전히 그자리에 있다. 그리 고 행복한 사진 속의 얼굴들도 여전히 금박 액자에 담겨진 채 그곳에 있다. 그 램프도 리 가 놓아 둔 자리에 그대로 있다. 하지만 리가 붙잡은 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왜 그 녀는 그걸 가져가지 않았을까?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그는 책상 밑의 하얀 타일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하지 만 그가 찾고 있는 건 없었다. 그는 재빨리 책상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건 보이지 않았 다. 쓰레기통 속에도 없었다. 누군가가 리의 호주머니에서 떨어진 봉투를 집어간 것 이 다. 알렉스는 연구실을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경비실로 내려갔다. 하지만 갈수 록 의문은 커져만 갔다. 누가 그 봉투를 집어갔을까? 그리고 왜? 리가 무의식중에 그 것에 신경을 쓰는 걸로 봐서 그건 무척 중요한 것일 거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조지 펙은 L. E. 알렉산더라는 귀 큰 사내가 다시 연구실로 돌아와서 자넷의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몇 분 동안 지체하고 있는 걸 지켜보았다. 조지는 그가 뭘 찾고 있는 지 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뭔가를 찾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건 아주 좋지 못한 징조였다. 알렉산더라는 사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는 단순한 지원 자가 아니다. 조지는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타자기를 두드렸다. 확실이 그 키큰 사내는 낯이 익었 다. 몇 년 전 워싱턴 D.C의 세미나에서 그를 보았던가? 어쩌면 인사부장이 그 사내를 배리 푸드의 연구팀에 끌어들이려는 건지도 모른다. 그는 전화기를 집어들려다가 그 전화가 도청당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수화기 를 내려놓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경비실장은 믿을 수가 없다. 스티브 건에겐 그가 알 고자 하는 일만 말할 생각이다. 당분간은 건물 밖에 있는 공중전화 를 이용하는 게 나 을지도 모른다. 15분이면 충분할 테니까. 그는 사무실을 나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 순간 팸 헤이어가 그녀의 칸막이실로 돌아가는 걸 얼핏 보았다. 그녀는 최소한 5분 동안은 다른 곳에 가 있었 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했을까? 그녀는 항상 살짝 빠져나가곤 했다. 조지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 여자는 자넷의 바로 맞은편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가 본 건 무엇이었을까? 아무래도 그 여자를 잘 감시해야 할 것 같다. 3 리는 아침 내내 불안한 느낌이었다. 누가 자넷의 책상을 사용했을까? 자넷의 컴퓨터 와 프린터는 누가 사용했을까? 그리고 누가 그 램프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뒀을까? 그 이 유는? 그리고 자넷의 편지까지 잃어버렸다. 호주머니와 자신의 책상까지 뒤져봤지만 소용이 없다. 그걸 잃어버린 게 분명하다. 하지만 어디서 잃어버렸단 말인가? 그때 인터콤이 울렸다. "마지, 무슨 일이죠?" "l시 5분 전이에요. 햄의 사무실로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시간이 그토록 빨리 흘렀다는 게 믿을 수가 없다. 알렉스와의 면담을 미끼로 자넷의 책상까지 뒤져봤지만 아무 소득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는 아직 친구가 의 미 하는 바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생각에 빠져 있을 수는 없다. 그 녀는 지금 해밀턴 자레트를 만나야만 한다. "리, 내 말 듣고 있어요?" 마지가 물었다. "그래요, 마지, 곧 가겠어요." 그녀는 최근에 배달된 보안 메모를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밀턴 고든 자레트의 외모는 우선 거대하다는 느낌을 준다.195cm정도의 키에 120kg 은 족히 나갈 것 같은 몸무게, 게다가 비록 고급 양복 속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그 몸무 게는 대부분 근육임에 틀림없다. 그가 불쑥 내민 손은 붉은 털로 뒤덮여 있어서 마치 거인의 손처럼 엄청나 보였다. 악수를 한 다음 사장은 그녀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 그 역시 의자 에 그 거대한 육체를 앉혔다. "리, 내가 이 회사의 사장이 된 이후로 우린 별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소. 그 동 안 이 낡은 몸체에 생명을 불어넣느라고 너무나 바빠서 말이오. 아다시피 인사부는 사 람의 몸에서 말초신경이라고 할 수가 있지." 해밀턴은 이전의 사장이었던 데이브 에릭슨과는 달리 매우 독선적인 인물이었다. 그 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항상 시간이 빠듯해서 좀처럼 시 간을 내기가 어려웠소. 이제야 겨우 이 낡은 회사의 모든 정맥과 동맥의 강한 부분과 약한 부분을 좀 알게 됐소. 난 이 회사의 두뇌이고 심방이며 새로운 피요." 리는 점심을 거른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햄이 하는 이야기는 그녀의 상상의 차 원을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심한 구토까지 일게 만들었다. "그래서 인사부장에게 내가 모르게 진행되는 일이 있어선 안된다는 걸 알려 주고 싶 소. 혹시라도 있어선 절대로 안되오." 해밀턴의 이야기는 좀 모호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잃어버린 편지가 뇌 리에 떠올랐다. 혹시 스티브 건 앞에서 그 편지를 떨어뜨린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 가 그걸 주워서 읽어 보고 햄에게 갖다 준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햄은 그녀에게 그 사 실 을 고백하라는 것일까? 리는 홍분된 신경을 가라앉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사람들이 내 뒤에서 내가 과잉 연기를 한다고 빈정대는 걸 알고 있소. 하지만 난 사 실 그 말이 마음에 들어요. 그래서 스티브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더욱 격려해 주 라고 해뒀지. 난 세익스피어의 말을 믿소. <삶은 무대>라고 했던가? 삶의 무대를 지 배 하고 그곳에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게 바로 과잉 연기를 하는 배우가 해내는 일이니 까 말이오." 정말 사장에게 모든 걸 이야기해야 할까? 그는 완고한 성격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래 도 배리푸드의 사장이 아닌가? 예전의 사장이 하던 말이 귓가에 울려왔다. '그는 행동가이며 진정한 스타이지. 트랜스 월드를 통해서 그는 정상의 위치에 올라 설 수가 있게 됐어. 그는 전혀 다른 경영 스타일을 갖고 있어. 아마 그에게서 많은 걸 배 우게 될 거야." 그녀는 복잡한 사념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또한 내가 불성실한 사람들을 참아 주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 두는 게 좋을 거요. 그 들은 쉽사리 대치될 수가 있을 거요." 리는 손에 들고 있던 메모지를 바라보며 말도 안되는 사장의 훈시에 항의하고 싶은 충 동을 애써 눌렀다. 데이브 에릭슨은 새 사장에게서 많은 걸 배을 수 있을 거라고 말 했 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들을 그녀가 배우길 원치 않을 거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 단 말인가? "새로운 보안 메모를 갖고 왔군요. 그럼 펜을 꺼내서 회사 업무를 외부 사람은 물론 같은 직원들끼리도 알려선 안된다는 귀절에 줄을 그어요." 리는 사장의 지시에 순응하면서도 마치 덩치 큰 어린아이가 돼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좋아요, 그럼 내 말을 명심해요. 이 회사 직원들의 태도는 너무나 나태해져 있어요. 이제 더이상 적과 형제처럼 지낼 수가 없소. 이 회사는 말하자면 전쟁중에 있는 셈이 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장은 지극히 만족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회사의 일은 모두 내가 관장해야 하오. 내 직원들은 배리푸드를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일하는 거요. 그리고 그들은 알지도 못하는 주주를 기쁘게 하기 위해 애쓸 게 아니라 날 기쁘게 해줘야 하오. 새로 입사하려는 지원자들에게도 그 사 실을 명기시혀 주시오. 그게 당신의 새로운 임무라는 걸 명심해요." 드디어 그는 리를 부른 진짜 이유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의 전임자는 홍보 관계 일을 모두 직접 수행했어요. 그런데로 효과가 있었는지 모 르지만 그건 사장이 할 일이 아니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선임할 수도 없는 일이오 . 그래서 그 일을 당신에게 맡기기로 했소." 오, 맙소사 ! 전혀 모르는 분야의 일을 추가로 떠맡으라는 건 말도 안돼.... 그 무언의 침묵을 듣기라도 한 듯 햄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물론 당신이 홍보 관계 일에 경험이 없다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은 음료 사업 분야를 잘 알고 있잖소? 에릭슨과 당신의 예전 상관은 당신이 세부적인 것을 벗어나 거시적인 시야를 가진 능력있는 인물이라고 했소. 그거면 됐소. 항상 거시적인 안목 을 갖도록 하시오. 그걸 명심해요." 그는 시선을 돌려 샌프란시스코 만과 금문교의 풍경을 응시했다. 방금 말한 거시적 안 목을 몸소 시험해 보이려는 것처럼... "더구나 당신은 경영학 석사학위까지 받았으니까 홍보에 대한 개념을 충분히 익혔을 거요.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 그 실력을 인정받아야 하오." 햄의 갈색 눈동자가 다시 그녀의 시선을 응시했다. "당신이 비록 이곳에 오래 근무하고 예전 상관이 능력을 인정했다고는 하지만 당신은 인사 분야 이외의 일은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홍보 관계 일까지 맡아서 자신의 능력 을 발휘해 봐요." 리는 혀를 꼭 깨물었다. 다시 햄의 말이 계속되고 있었다. "배리푸드의 새로운 홍보부장이 됐으니 이사들은 언제든 당신에게 제품이나 일의 진 행 과정에 대한 문의를 할 거요. 거기엔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그리고 실수를 했다고 해 도 그걸 만회할 기회를 갖지 못할 거요." 앉은 자리에서 사장을 너무 올려다봐서인지 목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오늘밤 난 은밀한 사업상의 거래 때문에 출장을 가야 해요. 목요일 밤엔 파티가 있 어 서 돌아올 거요. 만약 당신이 처리하지 못할 일이 생기면 연락을 해도 좋아요. 하지 만 뭔가를 처리하지 못할 땐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오. 알겠소." "알겠어요." "좋아요. 내일 아침 10시에 전화하겠소." "그 시간엔 회사에 없을 것 같군요." "왜?" "자넷 호머는 내 친구예요. 그녀의 장례식이 내일 아침에 거행돼요." 순간 사장의 얼굴이 잠깐 찌푸려지면서 갈색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왜 그는 언짢은 기색을 보이는 것일까? 그는 당황하고 있는 것일까? "자넷 호머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였소?" 웬지 그의 어조가 척추를 오싹하게 만든다. 그리고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자 넷의 편지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걸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배리푸드의 다른 직원들을 알고 있는 것처럼 업무상 자넷과 알게 됐을 뿐이에요." 그러나 햄은 그녀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실험실에서 화학연구원으로 일하는 여자와 업무상 알게 됐다는 게 별로 설득력이 없 는 것 같소." 왠지 그녀가 자넷과 알고 있다는 게 그의 신경을 거슬린 게 분명하다. 리는 갑자기 자 신이 호수를 건너려다 너무 깊숙히 빠져 들었음을 깨달았다. 위기감이 그녀를 조여왔 다. 하지만 그녀는 음성과 표정을 침착하게 유지하려고 애썼다. "데이브 에릭슨 사장님이 계셨을 때 그분은 일년에 한번씩 전직원을 집으로 초대하셨 거든요. 몇 년 전 그자리에서 자넷을 알게 됐어요." 갈색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응시했고, 그녀 역시 침착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드디 어 그 거인이 먼저 시선을 돌려 버렸다. "내일 내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이 있으면 내 비서에게 메모를 남겨 둬요. 그리고 내가 출장 가 있는 동안 매일 아침 10시에 직접 당신에게 전화를 하겠소." 그의 음성과 태도가 너무나 초연해서 방금 전에 별로 유쾌하지 못했던 상황이 있었던 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햄은 컴퓨터로 작성된 그녀의 인사기록부를 들어올렸다 . "기록에 의하면 당신의 원래 이름은 버나드 알렌 리로군요. 남자이름처럼 들려요. 혹 시 부모님이 당신이 여자로 태어난 게 서운해서 그런 이름을 지은 게 아니오." 그건 리가 싫어하는 화제 중의 하나였다. 왜 새삼스럽게 햄은 그런 화제를 끄집어내 는 것일까? 나에게 개인적인 관심이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일까? "글쎄요." "부모님께 한번도 여쭤 본 적이 없었소?"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물었다. "한번도 여쭤 본 적이 없어요." 이제 그는 더이상 리를 상대로 시간낭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챈 것 같았다. "밖에 있는 내 비서를 만나봐요. 내가 종이에 적은 지시사항을 건네줄 거요. 그대로 따라해 줘요." 그녀가 문까지 갔을 때 그가 말했다. "행운을 빌어요." 그 말에 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가 미리 그처럼 격려하는 말을 해줬다면 얼 마나 편안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말하자면 그는 고의적으로 그녀를 안절부절못하 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건 그의 스타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리를 다른 병아리들이 있는 닭장 속에 집어넣어 모자라는 먹이를 미친 듯이 쪼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비 록 그녀의 깃털을 뽑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리는 자신이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음 을 알았다. 적어도 홍보부장으로 자신의 감장을 드러내지 않는 능력만은 완벽하게 갖추 고 있는 셈이다. 리는 그에게 자신있는 미소를 환하게 지어 보였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그리고 그녀는 햄이 놀라움과 불신이 뒤섞인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걸 놓치지 않 았다. 리가 사무실을 나가자 해밀턴 자레트는 한동안 멍한 시선으로 닫혀진 문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 여자에겐 수수께끼 같은 데가 있다. 그 여자를 위협하거나, 아니면 강제로 그녀가 방패처럼 지니고 있는 보수적인 분위기를 풀어헤치는 게 아무래도 불 가 능할 것만 같다. 하지만 그 여자는 일을 잘 처리하는 편이다. 사장인 그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을 만 큼 일을 제대로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 사실을 알게 해선 안된다. 사람 의 등을 두드려 주면 그는 금방 교만해지기 쉽다. 직원들을 항상 초조하게 만든 다음 아 주 가끔 칭찬을 해서 그들을 감격시키는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걸 그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는 일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면 종종 말썽을 일으키게 된다. 그는 조지에게도 그 사실을 주지시켰다. 그에게 강한 상관이 되라고 경고했었다. 하지만 조 지는 강인한 일면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적어도 자넷 호머에겐 그랬다. 다행히 도 그녀는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자넷과 리가 친구 사이였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이제 전혀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 셈이다. 그 빌어먹을 화 학자가 모든 걸 털어놓았으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의 이마는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그는 버튼을 눌러 비서를 불렀다. "네, 사장님?" "스티브 건을 들어오라고 해. 즉시...." "하지만 그건 사고가 아니었여요, 윌리." "알렉스, 사고였든 아니든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 자네는 이제 자리를 비울 권리가 없어. 이미 우린 충분한 부담을 지고 있다는 걸 잊었어? 자네가 없음으로 해서 나머 지 요원들이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 알고 있나?" 5천 킬로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월리엄 핸센의 음성은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 "어쩔 수가 없어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녀는 죽 어 버렸어요!" 윌리는 그의 음성이 단호하다는 걸 알아챘는지 다소 누그러졌다. "충돌사고는 매일 일어나고 있다네. 경찰은 그걸 사고로 단정지었어. 그 여자는 잠시 차를 조절하는 능력을 잃었던 거야. 아마 깜빡 졸았을지도 모르지. 자네나 내가 할 수 있을 일은 아무것도 없어." 알렉스는 방안을 서성이다가 호텔 방의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을 꼭 움켜쥐었다. 마치 상관의 어깨를 움궈잡는 기분으로... "왜 경찰은 그걸 사고로 단정짓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판단이 틀렸어요." "알렉스, 제발 그만두라고. 자넨 왜 그게 사고가 아니라고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알렉스는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월리, 그 여자가 전화를 걸어왔다고 말했잖아요? 그 여자는 나에게 부탁을 해왔어요 . 뭔가가 아주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했어요. 전화로는 이야기할 수가 없으니 직접 만 나 서 이야기 하고 싶다고 했어요." 한동안 수화기에선 자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가 다시 조용한 음 성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엔 고통이 배어 있었다. "자넷 호머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나?" 알렉스는 몸을 펴고 커튼을 놓은 채 다시 방안을 서성거렸다. "우린 함께 학교를 다녔어요. 그녀가 서북로 간 후에도 우린 서로 연락을 하고 있었 어 요. 그리고 그녀는... 그녀는 샐리의 언니예요." "샐리의 언니? 맙소사, 미안해, 알렉스... " "그 여자는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죠. 그녀가 뭔 가 가 잘못됐다고 말할 정도라면 그건 내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거예요. 내 직업적 인 도움이..." "하지만 잘못된 것이 정확히 뭐란 말이지?" 비로소 월리는 분노를 누른 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화로는 말할 수 없다고 했어요. 내가 직접 비행기를 타고 와서 직접 이야기를 해 야 한다고 했어요. 그녀는 그 일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전화가 왔을 때 그녀에게 뭐라고 했나?" "당장 갈 수 없다고 말했어요. 새로운 약의 승인을 받기 위한 마감시간에 쫓기고 있 다 고.. 지난 금요일 밤 늦게야 끝낸 도슨 약품을 기억하시죠? 난 토요일 오후까지 거기 있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알렉스는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만약 그때 내가..." "만약 자네가 모든 걸 떨쳐 버리고 비행기에 올라탔다면 그 사건을 막을 수 있었다는 건가? 금요일 3시 넘어서 비행기를 타면 토요일 정오가 넘어서야 샌프란시스코에 도 착 할 수가 있어. 그녀는 전화를 하고 12시간 후에 죽어 버렸어. 자네가 달려갔다면 그 녀 가 차의 조절능력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건가?" 알렉스는 머리를 방의 벽에 세게 눌러댔다. "그녀는 조절 능력을 잃은 게 아니에요. 절대로 사고일 리가 없어요. 회사에서 뭔가 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12시간 후에 죽었어요. 그걸 그저 우연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그녀가 나에게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습니까?" "알렉스, 우린 FBI가 아니라 식품의약국 직원이야. 자네의 친구는 배리푸드에서 일했 고 그 모회사는 트랜스 월드야. 아주 크고 유명한 회사진. 그렇다고 그 회사가 남쪽 국경지대에서 마약을 거래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알렉스는 머리를 흔들었다. "큰 회사라고 해서 반드시 정직한 건 아닙니다. 아니, 그 반대일 수도 있죠. 대제약 회 사가 진통제의 실험결과를 속였던 일을 잊으셨습니까? 그리고 머리칼이 빠질 염려가 있다는 귀절도 고의적으로 자료에서 누락시켰어요. 그 결과 대머리로 고생하고 있는 남녀들이 그 부작용 때문에 우리를 경계하고 있잖아요? 큰 회사가 우리의 눈을 피해 가 려고 했던 게 처음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눈을 피했다고?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제약회사가 아니잖아? 식품회사는 우 리에게 그들의 제조과정을 보고 할 의무가 없어. 그리고 다 만들어진 상품에 우리가 승인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알렉스는 간신히 화를 눌러참으며 대답했다. "마치 우리가 식품에 대해서 아무 책임도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나쁜 약처럼 나쁜 식품도 당연히 사라져야 해요." "알렉스, 배리푸드의 제조설비는 정기적으로 조사를 받고 있어. 그들은 새로운 식품 첨 가제에 대한 승인요청을 하지 않았어. 따라서 회사 내부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우리 가 거기에 간섭할 수는 없지."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요? 자넷은 유능한 화학자예요. 그녀가 좋은 일에 그렇게 화를 낼 이유가 없어요. 만약 배리푸드가 뭔가 잘못되고 있다면 어떻게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을 수가 있나요?" "그래서 자넨 언제 돌아올 건가?" 알렉스는 숨을 내쉬었다. 월리가 아직 인정을 하고 있지 않는다고 해서 그대로 포기 할 수는 없다. 그에게 좀더 기회를 주어 볼 생각이다. "알렉스, 그럼 자넨 누군가가 자넷 호머를 죽였다고 생각하나? 그녀가 비밀스런 사실 을 폭로할까 봐 누가 그녀를 살해했다는 건가?" 잠시 불편한 침묵이 두 사내를 질식할 것처럼 내리누르고 있었다. "알렉스, 샐리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 당시에 자네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월리, 제발 정신분석은 그만두십시오." "좋아, 그만 하지. 하지만 매일매일 내게 전화로 보고하겠다고 약속해 주게. 반드시 보고하는 걸 잊지 말게." "월리, 나 혼나서 처리할 수 있어요." "자네가 처리할 수 없다고 말하진 않았어. 다만 나에게 전화로 모든 상황을 알려 주 겠 다는 약속을 해주게." "알겠습니다." 월리는 알렉스가 조금 주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알겠다고 하는 걸로는 충분치가 않아. 이번엔 반드시 약속을 해주게. 그렇지 않으면 자네가 직장을 비우는 걸 용납하지 않겠네." 알렉스는 상관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 나이 든 사내는 어떻게든 말생을 일으키는 건 피하고 싶은 거다. 만약 자신이 문제를 일으키면 그건 월리와 부서 전체까지 함께 말썽의 소용돌이에 쉽쓸리는 걸 의미했다. "알렉스, 내 말을 듣고 있나? 난 자네의 다짐을 받아야겠네. 자넨 지금 감정적으로 위 험한 상태에 있어, 알겠나?" 그의 말이 옳았다. 알렉스는 자신의 감정이 약간 고조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좋아요, 약속하겠어요." 알렉스는 무겁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다음 창가로 다가갔다. 그는 진실이 밝혀질 때까 지 그곳에 있겠다고 말했었다, 오후 동안 경찰서에서 보내면서 얻은 결론은 그들의 촤 종 결론에도 불구하고 자넷의 죽음은 결코 사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어디에서 밝혀야 하는 것일까? 그의 마음 속에 자넷의 죽음에 대해서 해답을 갖고 있는 단 한 곳의 장소와 단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바로 배리푸드 회사와 B. A. 리라는 이름을 가진 간부였다. 그녀의 행동은 처음부터 의심스러운 데가 있다. 인사부장이라면 무척 바쁜 자리일 텐 데도 그녀는 만사 제쳐놓고 그를 만나 주었다. 그건 그녀의 비서조차도 의아하게 생 각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녀는 왜 나를 이용해서 라넷의 책상에 접근했던 것일까? 그녀는 자넷의 책 상 에서 무엇을 찾아내려고 했을까? 아니면 뭔가를 은폐하기 위해서 그곳에 갔는지도 모 를 일이다. 알렉스의 시선은 다시 앞에 편쳐진 마켓 가로 모아졌다. 쉐라톤 팰리스 호텔 2층에 자리잡은 그의 방에선 거리의 불빛과 건물, 그리고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볼 수가 있었다.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자신을 똑바로 응시했던 리의 시선을 생각했다, 그는 그런 리의 시선이 마음에 들었 다. 아니, 리의 모든 걸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의 행동은 틀림없이 그 녀가 자넷의 죽음에 관련이 있으리라는 암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래 그 여자가 알고 있는 걸 알아내야만 해. 4 라파예트 공동묘지의 오래된 벽돌 예배당은 초록색 산봉 우리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주차할 곳을 찾는 차량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산허리에 걸린 무 거운 구름이 비를 몰고 올 거라고 확신한 듯 저마다 우산을 들고 있었다. 리는 베니카의 집에서 직접 까만 피에로를 몰고 장례식장으로 왔다. 차를 세우고 예 배 당 안으로 걸어가는 동안 그녀는 긴장으로 인한 두통을 느꼈다. 자넷의 기묘한 편지 가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 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자넷의 남편인 마크에게 접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 내 서 자넷이 직장에서 무엇 때문에 괴로워했는지 물어 봐야 한다. 혹시 마크는 알고 있 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녀는 자넷의 남편을 잘 알지도 못한다. 5년 전 그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산부인과 병동에서 잠깐 마주친 적이 있을 뿐이다. 첫아들은 예정보다 3주나 먼저 세상에 나와서 엄마를 놀라게 했었다. 나중에 자넷은 마크 주니어가 의사의 지시를 어기고 성급하게 세상에 나오게 된 건 임신 중에 계속 했 던 에어로빅 때문일 거라고 농담을 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며 흔자 미소짓던 리는 문득 5살 난 소년이 아빠에게 엄마가 정말 닫 혀진 관 속에 있느냐고 질문하는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추도연설이 끝나고 그녀는 맨 먼저 예배당에서 나와서 마크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기 다리고 서 있었다. 그때 실험실에 있는 마이클 웨어가 계단을 내려오는 게 보였다. 그 는 배리푸드에 오랫동안 근무했지만 그와는 그저 인사 정도만 나누며 지내온 사이였 다. 항상 음산하고 내성적인 느낌을 주는 그는 틀림없이 장례식이 끝나는 대로 집으 로 가버릴 것이다. 드디어 리는 계단을 내려오는 마크를 보았다. 검은 머리를 숙인 채 좁은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마크 주니어의 손을 잡고 있다. 그리고 곁에서 나이 든 여인이 8개월 된 여 자 아기를 안고 있다. 엄마를 잃게 된 어린 아기의 현실이 리에겐 깊은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 슬픔은 그녀 자신의 과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도저히 아내를 잃은 남자에게 자넷의 직장 문 제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의 처절한 모습은 곧 무너져내릴 것만 같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문상객들과 함께 묘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관이 무덤 속으 로 들어가는 동안 리는 주위로 시선을 돌려 배리푸드의 다른 직원들이 와 있는지 살 펴 보았다. 자넷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과학자 팸, 그리고 그녀가 불과 4개월 전에 채용한 톰 보 든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과 마이클 웨어가 장례식에 참석한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 다. 그들은 모두 자넷과 함께 일했다. 그리고 그녀는 존 카스테어스의 얼굴을 찾아냈다. 또 그의 뒤쪽엔 데니스 월리엄스도 있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 그들이 자넷을 잘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어제 아침에도 그들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 역시 아무 말도 하 지 않았다. 그 순간 잊고 있었던 얼굴이 떠올랐다. 해밀턴 자레트는 출장중이니까 이곳에 참석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넷의 직속 상관인 조지 펙은 이곳에 참석했을까?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는 듯 스티브 건이 그녀의 뒤에서 말했다. "모두 다 참석하진 못했소. 연구실이 아주 바라서..." 리는 얼굴을 돌려 경비실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미소를 짓는다면 그 날카로운 인상이 조금은 부드러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면을 응시 한 채 눈이 마주치는 걸 피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야생동물을 연상시켰다. 야생동물은 똑바로 응시하는 걸 친밀 감이나 공격의 신호로 받아들인다. "스티브, 시간을 내줘서 기쁘군요." "배리푸드의 직원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내 업무에 속하는 일이오." 그가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리는 다른 식으로 접근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넷 호머를 잘 아세요?" "배리푸드의 직원들을 알고 있는 것만큼 그녀를 알고 있소. 그건 내 업무니까..." 그는 잠시 머뭇거린 다음 천천히 대답했다. 그의 오른쪽 뺨이 약간 비틀리는 듯했고 턱이 조금은 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리는 경비실장의 감정없는 대답을 더이상 참을 수 없어서 관이 자리를 잡는 걸 바라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크가 무덤의 발치에 서 있다. 그는 슬픔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 가 기꺼이 자넷의 미스테리를 밝히는 일에 나서 줄까? 그녀는 며칠 후에 그를 만나봐 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크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자넷의 빈 자리에 지원서를 내러 왔던 그 남자였다. L.B. 알렉산더라는 남자.... 알렉스라고 불리우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녀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친척들이 관 위에 꽃을 던지는 동안 멍한 시선으로 그 를 응시했다. '저 남자는 날 속이고 있었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자넷이 죽은 직후에 나타나서 일자리를 지원했던 그 남자가 장례식에 와 있다니....' 갑자기 그가 앞으로 나왔을 때 리는 순간적으로 스티브 건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가 자신을 알아볼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가 무릎을 꿇고서 조심스럽게 자넷의 관 위 에 노란 장미 한 송이를 던지는 걸 리는 혼란과 경이로움으로 지켜보았다. 잔뜩 흐린 날씨조차도 그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숨겨 주진 못했다. 그때 리는 알아차켰다. 그는 적이 아니라 친구라는 걸.... 그는 몸을 일으켜 다시 조문객들 틈으로 돌아갔다. 새로운 의문점들이 리의 마음속에 솟구쳤다. 그 사람은 자넷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왜 그는 사무실에 찾아와서 자넷의 일자리에 지원했을까? 그리고 왜 죽은 자넷을 알 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조문객들이 사라졌고 알렉스도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리는 생각에 잠긴 채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데, 갑자기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 다. 몸을 돌렸을 때 마크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리가 맞죠?" 마크가 잔뜩 움츠러진 모습으로 말했다. 그의 깊은 갈색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가 지극히 억제된 몸짓으로 악수했다. "그래요, 마크. 날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어요. 우리가 만났을 때 당신의 마음속엔 더 중요한 일이 자리잡고 있었으니까요." 마크는 곁에 있던 아이의 조그만 금발을 두드렸다. "리, 자넷이 당신 이야기를 자주했어요. 아내는 당신에게 애정과 존경을 갖고 있었죠 . 당신이 보내 준 장미가 예배당을 가득 채운 걸 봤어요? 그 꽂들을 금지시킨 걸 후회 했 어요. 아내는 노란 장미를 정말 사랑했는데.... 그녀는 그 꽃들이 항상 밝고 아름답 다 고...." 마크는 슬픔 때문에 더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리는 더이상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서 머리를 돌렸다. 그 곳엔 작은 소년이 아빠의 바지를 움켜쥔 채 서 있다. 마크 주니어 는 엄마의 파란 눈동자를 그대로 닮고 있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맑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리는 쉽사리 방금 전의 결정을 바꾸고 말았다. "마크, 빠른 시일 내에 자넷과 배리푸드의 업무에 관해서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최근에 그녀는 나에게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그 문제 에 대해서 당신과 이야가하고 싶어요. 물론 지금은 적당한 때가 못 된다는 걸 알고 있 어요. 마음이 좀 안정이 되면 나에게 전화 주시겠어요?" 리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냈다. 그리고 펜을 찾아 집 전화번호를 적어서 마크에게 주 었 다. 그런 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리의 뒤에서 큰소리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어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는 손길을 느꼈다. "당신과 그 망할 놈의 회사 때문예요! 그앨 그렇게 밤늦게까지 일을 시키지 않았다면 그앤 무사히 가족들에게로 돌아왔을 거요. 당신이 그앨 죽인 거야! 이제 내 손자들은 어미없는 자식이 되고 말았어. 이제 직성이 풀리는 거요?" 그 뚱뚱한 여인은 장례식 동안 자넷의 어린 딸, 몰리를 안고 있었던 그 여인이다. 아 직도 핑크 빛 뺨을 가진 아기는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이는 할머니의 성난 음 성 에 겁을 먹은 듯 울어대기 시작했다. "윈더미어, 제발..." 마크의 음성이 들려왔다. "마크, 상관하지 말게." 윈더미어라는 부인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리는 부인의 공격에 잔뜩 움츠러들었다. "윈더미어 부인, 자넷 일은 정말 안됐어요. 난 배리푸드의 인사부장이에요." "팸 헤이어가 당신이 누구라는 걸 알려 줬어요! 난 그 회사가 한 일을 알고 있어요. 졸지에 엄마를 잃은 이 아이들을 보세요. 용감하고 위대하신 인사부장님, 똑똑히 보 라 구요!" 마크 주니어가 할머니의 고함소리에 놀라 울기 시작했고 그의 아빠가 아이를 안아 올 렸다. 리는 잠시 멍한 시선으로 늙은 여인의 성난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순간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윈더미어 부인, 이래 봤자 도움이 되지 않아요. 자넷도 이러는 걸 원치 않을 거예요 . " 어디선가 알렉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아주 조용히 화난 부인 곁으로 다가와 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부인이 항의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뜻밖에 그녀는 그의 커다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몰리도 놀라서 다시 울 음을 터뜨렸다. 여인의 머리 위로 알렉스가 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엔 어떤 의문이 떠올라 있었 지 만 리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도 수많은 의문점이 떠올랐 다. 왜 윈더미어는 회사가 자넷을 혹사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랬다면 왜 자넷 은 미리 알리지 않았을까? 편지에 말하려던 게 바로 그것이었을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의 문점을 해결해야 하는 걸까? 그녀는 차문을 열기 전에 스티브 건을 찾았다. 직원이 늦게까지 일을 했다면 경비실 장 인 스티브는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비실장의 모습은 사람들 틈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사무실에서 만나보기로 하고 자신의 까만 피 에 로에 몸을 실었다. 문을 닫고 출발하려는데 알렉스와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리, 제발 좀 기다려 줘요." 리는 유리창을 내리고 두리번거렸다. "네?" 알렉스는 그녀의 차 곁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손은 운전석의 열려진 창문을 붙잡은 상태였다. "그곳에 와서 윈더미어 부인과 나를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무슨 말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넓은 어깨를 으쓱했 다. "부인은 화가 나서 아무렇게 내뱉은 것뿐이오. 당신도 그녀를 이해하고 용서해 줄 수 있겠죠?" 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본 순간 멍이 든 것처럼 보이는 입이 눈에 띄었다. 왜 저런 타박상을 입었을까? "어디 가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소?" 그가 물었다. "어제 아침에 대한 해명을 하실 건가요?" 그가 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그럼 차에 올라타세요. 여기서 이야기해요." 그가 머리를 저었다. "여기서 벗어난 곳이 좋겠소. 배리푸드에서 온 직원이 우리를 발견할 수 없는 곳에서 . .. 24번 고속도로 근처에 다이아블로 길가에 작은 커피숍이 있어요. 거기까지 날 따 라 오겠소?" 그의 음성엔 조급함 같은 게 있었다. 더구나 배리푸드에서 온 직원의 눈에 띄어선 안 된다는 말에는 척추까지 한기가 돌 정도였다. 잠시 후 그들은 그 커퍼숍 뒤쪽의 칸막 이에 자리잡고 앉았다. 여종원이 커피를 따르고 돌아가자 리는 뭔가를 기대하며 상대 방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어떻게 자넷을 알고 있나요?" "14년 전에 우린 함께 대학에 다녔어요." 그가 잠시 창밖으로 사선을 돌렸다. 그가 응시하고 있는 건 빗방울이 아니라 자넷과 함께 했던 시간들일 것이다. 다시 그의 시선이 현재로 돌아와 리를 응시했다. "정말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바로 어제 일만 같은데..." 리는 그의 부드러운 음성이 마음에 들었다. "두 분은 아주 가까운 사이였군요. 그렇죠?"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어떻게 알죠?" "당신이 그녀의 관 위에 노란 장미를 놓는 걸 보았어요. 그리고 당신이 우는 것도... 그 순간 당신을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예요." "남자의 눈물이 한 여자를 그토록 감동시킬 줄은 몰랐소." 그가 아주 나직하고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울음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예요. 전에도 남자들이 우는 걸 봤지만 전혀 아무런 감 정 도 느낄 수가 없었어요. 슈퍼볼 게임을 하는 도중 전기가 나갔다고 사촌오빠가 울어 대 던 걸 난 잊지 못해요. 180cm의 키에 80kg이나 나가는 22살의 남자가 텔레비전 화면 앞에서 엉엉 울어댔거든요." 리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앞에 있는 남자의 잘생긴 얼굴을 응시했다. "알렉스, 당신이 울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이유가 내겐 중요했어요." 알렉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리는 그의 갈색 눈동자를 응시하는 동안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당신과 자넷은 대학 동창이군요." "그렇소. 2학년 때 우린 화학반에서 파트너가 되어 함께 연구를 했어요. 그녀는 아주 유능했죠. 그녀가 잘 도와준 덕분에 난 좋은 학점을 받을 수가 있었소.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끌린 건 학구적인 면 때문은 아니었어요. 그녀는 삶을 사랑했고 모든 일에 정말 열심이었소. 화학수업이 끝난 후에도 우린 서로 만났어요. 함께 공부도 하고 주 말엔 영화관에도 갔어요." "대학 졸업 후에도 서로 만났나요?" "우린 서로 다른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그러나 자주 만난 건 아니지만 우리에겐 만나 는 횟수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소. 내가 친구가 필요할 땐 그녀는 언제나 그곳에 있 어 주었소. 그녀가 마크를 만난 후에도 샐리와 난...." 그의 잘생긴 얼굴에 고통의 빛이 스쳐갔다. 리는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지만 그 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자넷과 당신의 우정에 대해서 말해 줘요." 그녀는 샐리라는 인물이 궁금했으나 드러내놓고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대부분 직장에서 우정을 나누는 그런 정도였어요. 점심시간에 함께 쇼핑을 한다거나 퇴근 후엔 차를 한 잔 마시며 잡담을 하는 정도라고 할까요." "함께 일한 적이 있나요?" "아뇨, 우린 6년 전 사내 모임에서 만났어요. 자넷이 겨우 160cm였고 내가 177cm정도 니까 자루에 양다리를 넣고 뛰는 경주를 했다면 볼 만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린 그 모 임에서 실제로 자루 경주를 했어요. 우린 이기려고 안간힘을 썼어요. 하지만 지고 말 았죠. 그때 난 자넷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어요. 그녀는 이기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막상 지고 나니까 선뜻 상대편 팀에게 가서 축하인사를 건네더군요." "역시 그 여자다운 행동이오. 나도 기억나는 일이 있어요..." 그렇게 두 사람은 자넷과의 추억을 나누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리는 그가 편안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당신의 진짜 이름은 뭐죠?"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그는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내 진짜 이름은 L.E. 알렉산더요. 지원서에 써넣은 사실은 모두 정확해요.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 건 없소." "하지만 지원서 자체는 일종의 계략이 아닌가요? 배리푸드에서 일할 의도 같은 건 애 초에 없었던 게 아닌가요?" "필요하다면 일할 생각이오." 리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오 그게 무슨 뜻이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왜 자넷 호머가 살해됐는지 알아내겠다는 뜻이오." 순간 리의 앞에 있는 물체들이 기울어져 보이기 시작했다. 리는 충격을 가라앉히기 위 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얼굴엔 핏기가 가셨다. "살해?" "우선 커퍼 좀 마셔요. 얼굴이 창백해요." 그가 리의 손을 잡아서 커퍼 잔을 쥐어 주었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강인했다. 그녀 는 잔을 들어 커퍼를 마셨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세요? 자넷의 죽음은 사고였어요." 알렉스는 그녀가 부정하는 이유를 이해한다는 듯이 그의 음성은 침착하고 참을성이 있 어 보였다. "자넷의 차가 칼데코트 터널의 옆에 부딪쳐서 몇 번 구른 다음 불이 난 건 금요일 밤 자정 무렵이었어요. 경찰이 달려 갔을 때 왼쪽 펜더에 짙은 초록색 페인트가 있었어 요. 움푹 패인 곳에..." "패여 있었다고요?" "다른 차가 자넷의 차를 밀어붙여서 터널 벽에 부딪치게 한 거예요." 리는 그가 말한 상황을 그려 볼 수 있었다. "틀림없어요. 그녀의 남편은 바로 그 전날 그 차를 운전했다고 했어요. 그때는 패인 자국이나 페인트가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고 했어요. 터널에 초록색 페인트가 없었다 면 틀림없이 부딪친 차에서 묻은 거예요." "그런데 경찰은 왜 그걸 단순한 사고라고 단정지었을까요?" "차가 너무 심하게 충돌했고 전부 타버렸어요. 경찰은 페인트 자국은 남편이 보지 못 했거나 자넷이 월요일의 작은 접촉사고로 있었던 흔적일 거라고 고집을 피우고 있어 요." "경찰은 그 사고의 보고서를 갖고 있나요?" 알렉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작은 사고는 보통 보고 되지 않는다고 했소. 경찰은 그 사건을 사고로 규정지 을 만한 단서들이 있다고 했소. 터널에 다른 타이어 자국이 없었다는 거요. 그리고 길이 젖어서 미끄러웠고 목격자도 없다는 거요. 자넷의 시체는 심하게 타버렸어요. 검시관 은 그녀가 마약을 먹거나 술을 마신 흔적은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냥 사고로 단정지었다는 건가요?" "경찰은 사고로 믿어 주길 원하고 있소. 하지만 그건 사고가 아니에요. 난 확신할 수 있어요." 리는 그의 침착한 갈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래, 이 남자라면 믿을 수가 있어.' "그렇다면 누군가가 왜 자넷을 살해했을까요?" "당신이 장례식에서 마크에게 말한 바로 그 이유 때문이오. 당신은 자넷이 배리푸드 에 서 뭔가 나쁜 일을 알아냈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마크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소." "마크가 그러던가요?" "아뇨, 엿들었소. 난 장례식에서 계속 당신을 주시하고 있었소. 당신이 참석했다는 게 놀라웠으니까. 난 당신도 한패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럼 내가 자넷을 해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건가요?" "이해해 줘요. 당신이 마크와 만나기 전까진 당신이 자넷의 친구라는 것도 모르고 있 었소. 그 대화를 엿듣고서야 알았죠. 당신이 나쁜 짓에 가담했다면 마크에게 드러내 놓 고 그걸 의논하자고 하진 못했을 거요." "내가 자넷의 친구라는 걸 물랐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의심을.." "어제 당신은 날 면담할 때부터 이상하게 행동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데니스 윌리엄 스 에게 나를 연구실로 데려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도 그랬어요. 결국 당신이 그 곳 에 가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알았죠. 그리고 당신이 자넷의 책상을 뒤지는 걸 보고서. . ." "내가 자넷의 책상을 뒤지는 걸 봤군요?"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증거를 없애려고 그러는 줄 알았소. 자넷이 배리푸드에서 알아낸 나쁜 짓에 대한 증거를... " "그렇다면 당신도 그걸 알고 있군요? 하지만 어떻게?" "자넷이 금요일 날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말해 줬어요." 리는 몸을 앞으로 굽혔다. "알렉스, 그녀가 뭐라고 하던가요?"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누가 엿들을지도 모르니 전화로는 털어놓을 수가 없다 고 했어요. 뭔가 매우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 리는 실망한 듯 머리를 저었다. "그게 전부였나요?" "그게 전부는 아니었소. 그녀는 이렇게 말했소. '난 뭔가를 발견했어요. 아주 끔찍한 일이에요. 즉시 당신에게 알려야겠어요. 너무 늦기 전에 이 일을 저지시켜야만 해요. 하지만 전화로는 말할 수 없어요. 비행기를 타고 우리 집으로 와 줄 수 없나요?' 이 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말이오." 리는 그의 말을 조용히 반추해 보았다. "그래서 당신은 배리푸드에서 뭔가 나쁜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건가요 ?" "그렇소.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비록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우린 아직 좋은 친 구 요. 사실은 가족인 셈이오. 난 자넷의 여동생과 결혼했으니까... " "결혼하셨다고요?" 리는 그런 질문을 한 걸 후회했다. 그리고 왜 그런 사실에 자신이 그토록 실망하는지 의아해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알렉스는 그녀의 반응 따위엔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현재는 그렇지가 않아요. 그런데 이야기가 엉뚱한 쪽으로 빗나가고 있군요. 중요한 건 자넷의 전화가 그저 개인적인 신상문제 때문은 아니라는 거요. 그녀의 음성은 두 려 움에 잠겨 있었어요. 그녀는 내가 식품의약국에서 하는 일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내 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소." 자넷의 편지에도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자넷의 여동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분명히 그녀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었다. 그걸 알아보고 싶지만, 웬지 그럴 수가 없다. 더이상 결혼한 상태가 아니라면 이혼을 한 것일까? 하지만 리는 더이상 그 생각에 매달려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 어 자넷의 전화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신청서를 보니까 식품의약국에서 부장이었더군요. 특별히 맡은 분야가 있었나요?" "그렇소. 내 분야는 신경행동 독물학이오." "기본적으로 뇌와 신경조직의 독성에 관한 일이오. 하지만 이 경우 내 전공분야와 관 련이 있는지 모르겠소. 내 전공분야와는 상관없이 자넷은 도움을 청하려 했는지도 몰 라요." "그렇다면 그녀는 식품의약국 기준에서 뭔가 위법 사실을 발견하고 혼자서 그걸 바로 잡을 수 없다는 걸 알고서 당신에게 도움을 청했군요?" "바로 그거요. 그런데 누군가가 내가 개입하려는 걸 막았던 거요." 리의 눈동자가 휘둥그래졌다. "그렇다면 자넷이 배리푸드에서 발견했던 사실 때문에 죽었다는 건가요?" 차분찬 갈색 눈동자가 흔들림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내가 말하려던 게 바로 그거였소." "그렇다면 배리푸드의 누군가가... " "배리푸드의 누군가가 자넷을 죽인 거요." 그가 대신 말을 맺었다. 5 존 카스테어스는 리가 알렉스라는 사내를 따라 커퍼숍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호기 심이 끓어올랐지만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방법은 없었다. 그는 첨단 도청기를 갖고 있 다. 길 건너에서도 그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걸 트럭에 두고 왔다. 정말 재수가 몹시도 없는 날이다. 하지만 소득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알렉스의 차 번호를 적을 수가 있었다. 그걸 로 도 그 사내의 신분을 확인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가 그저 일자리를 원하는 지원 자 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비밀이 무엇이든 인사부장도 내막을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알렉스와 리가 한동안 커피숍에 있게 되면 그동안 샌 프란시스코로 돌아가서 그녀의 사무실을 뒤져볼 생각이었다. 그녀의 비서는 곧 점심 식사를 하게 될 것이다. 사무실을 뒤져보면 왜 리가 자넷의 책상을 뒤졌는지에 대한 해답도 얻게 될 것이다. 짙은 파랑의 코르벳의 시동을 걸며 그는 새로운 힘이 솟아 나는 걸 느꼈다. 더러운 일 을 맡게 되긴 했지만 누군가가 해야만 할 일이다. 그는 빙긋이 웃었다. "알렉스, 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배리푸드의 누군가가 살 인 자인지 밝혀내긴 어려울 거야. 물론 나는 그게 누군지 알고 있지만... " 커피를 3잔씩이나 마신 다음 리와 알렉스는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 시간에 나 간 다면 누군가와 마주칠 게 분명했다. 리는 아주 어렵게 수프를 떠먹고 있었다. 알렉스 는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응시했다. 아주 사랑스럽고 지적인 외모다. 그는 이 여자를 믿기로 한 게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리, 하지만 당신도 뭔가를 의심하고 있었소. 그렇지 않으면 왜 자넷의 책상을 뒤졌 겠 소?"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넷은 내 바구니에 편지를 넣었어요. 날짜는 그녀가 죽던 금요일이었죠. 그 편지의 내용은 당신에게 전화로 했던 것과 똑같았어요. 뭔가 나쁜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 어 요. 그리고 이 미친 곳에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내가 그녀의 작업실로 가는 건 너무나 위험하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집으로 전화를 해 달라는 거예요." "왜 자넷은 당신 집으로 연락을 하지 않았죠?" "난 태호 호수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어요. 일요일 밤에야 돌아왔어요. 월요일에 사 무실에 출근해서야 자넷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녀의 편지를 발견했어요." 알렉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 편지를 좀 봐도 되겠소." 리가 슬픈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다.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순간 알렉스는 리의 호주머니에서 하얀 봉투가 떨어겼던 일을 떠올렸다. "상의의 오른쪽 호주머니에 넣었던 하얀 봉투였소?" 리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래요." "자렛의 쓰레기통에서 램프를 꺼내느라고 몸을 숙였을 때 호주머니에서 떨어졌어요." "책상 위에? 당신이 보았나요? 오, 그렇다면 어젯밤 청소원이 그걸 치워 버렸겠군요. " "그렇지 않아요. 내가 우산을 찾으러갔을 때는 이미 그 봉투는 없어져 버렸더군요." "그럼 누가 그걸 집어갔단 말인가요? 그런데 누가?" "잘 모르겠소. 내가 알고 있는 건 다시 그곳에 가봤을 땐 그게 없어졌다는 거요." 알렉스는 갑자기 입술이 바짝 탔다. "그렇다면 누가 그걸 읽어 봤단 말이군요. 하지만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혹시 배리푸드에 자넷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소? 아니면 그를 질투하는 사람이라도 . .. " 리가 고개를 저었다. "자넷은 대인관계가 좋은 편이었어요. 그녀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한 건 언젠가 우연 히 마이클 웨어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뿐이었어요. 그것도 별로 심각한 건 아니었죠." "러시아의 중같이 생긴 남자 말이오?" 리가 미소지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군요. 아무튼 자넷은 그 러시아 중이 너무 오만한 것 같 다고 했어요." "그밖에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나요?" "그는 항상 최고의 것을 차지하지 못하면 심통을 부린댔어요. 휴가만 해도 연구실의 서열이 세 번째인데도 항상 가장 좋은 날을 차지하려고 했대요." "화학자들은 휴가를 교대로 갖는 모양이죠?" "그래요. 한번에 한 사람씩만 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자넷은 그 문제로 골치를 앓 았어요. 그 사람은 항상 직접 화학실장인 조지 펙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거예요. 그리 고 그는 늘상 자넷의 칸막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장식을 했다고 불만이었대요. 조 지가 회사 방침에 따라 줄 것을 요구했지만 자넷은 무시해 버렸어요." 알렉스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좋아요. 마이클 웨어가 그 편지를 가져갔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당신이 그걸 떨 어 뜨리고 내가 다시 실험실에 갔을 동안에 그곳에 들른 사람이 누구입니까?" "스티브 건, 조지 그리고 데니스예요. 또 다른 화학자인 팸 헤이어와 톰 보든이있어 요. 누구든 그랬을 가능성은 있어요." "잊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누구죠?" "존 카스테어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나에게 소개했던 경리부장 말이오?" "그래요! 그는 실험실에서 우릴 봤다고 했어요. 그도 실험실에 있었어요!" "그중 누구를 의심해요?" "정말 모르겠어요. 자넷이 우리에게 경고했던 일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누구인지 알 아 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입을 막기 위해 살인을 할 만큼 심각한 일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요?" "화학연구원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뭡니까?" "그건 알아야 할 사람들만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알아낼 수는 없겠소?" "윈더미어 부인의 말이 사실인지는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만약 자넷과 다른 화학연 구원들이 연장근무를 했다면 컴퓨터에 그 사실이 모두 기록되어 있을 거예요." "사실은 마크가 그러는데 자넷은 2주 전 출산휴가가 끝난 이후로 매일 늦게 귀가했다 고 하더군요. 내가 보기엔 마크도 그 정도밖엔 알지 못해요." "자넷이 늦게까지 일했다고요?" 리가 놀라서 소리쳤다. "당신은 모르고 있었소?" "몰랐어요. 자넷의 휴가가 끝나고 돌아오던 주에 2번이나 함께 점심식사를 했어요. 다 시 직장에 돌아온 기분이 어떠냐고 물으니까 생각보다 피곤하다고 했을 뿐이에요. 그 리고 원칙적으로 조지 펙은 나의 허락없이는 화학자들에게 초과근무를 시키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원칙적으로... " "그렇다면 그가 원칙을 어겼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오?" "그랬을지도 몰라요. 자넷이 휴가를 얻었을 당시 그는 일손이 모자랐어요. 그래서 일 을 보충하려 했을지도 몰라요. 그건 컴퓨터를 작동해야 작실히 알 수가 있어요." "당신이 컴퓨터를 검토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왜 그가 그런 짓을 했겠소." "사실 조지는 내가 컴퓨터를 검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3개월 전 그의 요구로 프로그래밍을 교체했거든요. 실험실의 것은 모두 분리된 파일 안에 둬서 그 사 람과 화학자들의 안전 암호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도록 해뒀어요. 그의 직원들의 시 간 기록도 거기 들어가 있어요. 완전히 폐쇄된 회로였어요. 급료에 관한 프로그램도 거기에 접근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의 직원들의 봉급을 산출하는 것도 따로 분리된 회계체제 속으로 입력시켰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시간 기록에 접근할 수가 있소?" 리가 음성을 낮춰서 말했다. "5년 전에 배리푸드에 컴퓨터를 처음 들여놓았을 때부터 난 그걸 다뤘어요. 이제 컴 퓨 터에 대해선 거의 다 알고 있어요. 조지의 프로그래밍 교체에 대해서도 잘 알았죠. 모 든 암호말은 파일의 구성법 안에서 조작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쉽게 그걸 알아낼 수가 있죠." "그러니까 컴퓨터 귀신이군요?" 리가 미소지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저 호기심 삼아서 만져본 것뿐이에요. 그러고 이곳저곳에 강 좌를 쫓아다니기도 했죠. 컴퓨터는 장난감처럼 갖고 놀기에 재미가 있거든요. 그리고 내가 잘 다루는 건 배리푸드의 컴퓨터뿐이에요." "그거면 충분해요. 그런데 만약 조지가 당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연장근무를 시킨 게 드러난다면 벌을 받게 되나요?" "예전 사장님이라면 그랬을 거예요. 더구나 조지가 초과수당도 지급하지 않고 일을 시 켰다면 무거운 벌을 받게 되겠죠. 하지만 현재의 사장인 해밀턴 자레트는 조지 펙을 직접 휘하에 거느리고 있어요. 조지의 프로그래밍 교체를 허락한 것도 바로 사장이었 으니까요." "왜 그럴까요?" "두 사람은 아브라함 링컨과 징기스칸 만큼이나 서로 다른 사람들이에요. 사장이 조 지 에게 전권을 위임한 건 일종의 경쟁심을 길러 주기 위한 것 같아요." "조지가 잘해낼 것 같소." "잘 모르겠어요. 누군가를 과소평가하고 싶진 않지만 그는 나보다 배리푸드에 더 오 래 근무했어도 난 한번도 그가 개혁에 뛰어난 인물이라고 감명을 받아 본 적은 없어요. 화학자들에게 엿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조지가 매우 창조성이 없는 인물이라고 생 각 하고 있더군요." "그러면서도 조지 펙은 자넷처럼 훌륭한 화학자를 거느리고 있었군요." "맞아요. 다른 화학자들도 아주 뛰어난 재능과 배경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조지가 그 유능한 사람들을 제대로 다루고 있는 것 같진 않아요. 오히려 그는 그들의 사기를 저 하시키고 있어요."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군요. 난 장례식에서 팸 헤이어와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녀는 자넷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어요. 하지만 그녀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어요 . " "그녀는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소. 난 그녀에게 자넷의 친구라고 말했어요. 그 리 고 자넷이 연구실에서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했어요. 팸은 아 마도 자넷이 출산휴가에서 돌아온 이후로 실험실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 하더군요. 하지만 바로 그때 데니스 월리 엄스가 지나가자 그녀는 입을 다물어 버리 고 말았어요." "자넷과 조지 사이의 문제일까요?" "그걸 알아볼 기회가 없었소. 데니스가 지나가자 그녀는 황급히 몸을 피했으니까. 아 마도 나와 이야기하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소. 왠지 난 팸은 자넷의 친구일 거라는 느낌을 받았소. 그리고 그녀는 조지를 매우 싫어하는 눈치였소. 그런데 조지 는 데니스를 선동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다루나요?" "조지는 결코 호감이 가는 사람이 아니예요. 그리고 사장의 편애가 그에 대한 적개심 을 더욱 강화시킨 셈이에요." 알렉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매우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좀 이상하군요. 사장이란 사람은 왜 조지 펙을 그렇게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있을까 요 ? 그의 능력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도 아닌데......" "그래요. 사장은 예전의 경비실장을 한 달도 안돼서 해고시키고 그자리에 스티브 건 을 데려왔어요. 하지만 조지는 맹목적으로 편애했어요. 연구팀을 이끌어갈 진짜 유능한 인물을 데려올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요?" "아마 조지 펙에게 남다른 매력이 있었던 모양이오. 그런데 당신은 자넷의 작업실을 둘러봤어요. 특별히 찾아낸 거라도 있었소?" 리가 머리를 저었다. "아뇨. 누군가 나보다 먼저 그곳에 다녀갔더군요." "그걸 어떻게 알았소?" 컴퓨터를 손댄 흔적이 있었어요. 출력 테이프의 구멍난 조각들이 책상 위에 흩어져 있 고 조그만 램프도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군요. 그런데 그게 누군지 짐작이 가는 사람이라 도 있소?" "특별한 의도는 없었는지도 몰라요. 그저 다른 화학자들이 사용했을지도 모르죠. 물 론 자기 것을 두고 왜 자넷의 것을 사용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가긴 하지만... " "그런데 스티브 건이 나타났을 때 뭘 집으려고 했나요?" "자세히도 보셨군요." "미안해요. 이제 나에 대한 경계심을 버려요. 그리고 뭘 집으려 했는지 말해 봐요." "사실은 마크와 아이들의 사진을 가져가려고 했어요. 장례식 때 마크에게 돌려줄까 하 고요. 그런데 스티브가 날 놀라게 했어요. 결국 그가 있는 데선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 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당신은 스티브를 좋아하지 않는군요?"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좀 지나친 것 같군요. 그저 그가 곁에 있으면 편안하지 않 을 뿐이에요. 그는 사장의 측근이에요. 그는 사장이 시키면 무슨 일이든 할 거예요. 맹 목 적으로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에겐 피로감을 느껴요."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요. 그는 안전을 지키는데 유능한 편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인지도 몰라요. 직원이 회사의 기밀을 빼돌 릴 마음만 먹으면 무슨 수를 써서 라도 하고 말 거예요. 우린 아주 유능한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그들이 보안체제보다 한 수 더 위일 수 없는 사람들 이라면 난 실망할 거예요." 알렉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비밀을 유지합니까?" "사실 나에게도 해답은 없어요.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직원들이 일에 흥미를 느끼 고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서 그들로 하여금 회사를 배신할 마음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거죠." "나도 그 방법에 대찬성이오." 알렉스가 미소지었다. 리도 그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서 함께 미소지었다. "대화가 잠시 빗나갔군요. 그런데 프린터를 자넷이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 그리고 램프도 자넷이 버렸을 수도 있잖아요?" "난 자넷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녀는 자정 무렵에 살해됐다 고 했죠?"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자넷이 램프를 사용할 가능성도 있어요. 난 계속 그녀가 5시에서 6시 사이 에 퇴근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녀가 연장근무를 했다면... " "그 문제에 대해서 마크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어요." "좋아요. 청소부가 8시쯤 왔다가 9시가 되기 전에 나가면서 불을 끄죠. 만약 그 시간 이후에 자넷이 연구실에 남아 있었다면 그녀가 인쇄를 했을지도 몰라요. 아무튼 그건 컴퓨터를 조사해 보면 알 거예요. 아까도 말했듯이 컴퓨터엔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이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자넷이 그랬다면 왜 램프가 필요했을까요?" "글쎄요..." 리의 표정이 잠시 혼란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환하게 펴졌다. "물론 전등 때문이겠죠!" "그게 무슨 뜻이죠?" "자넷이 금요일 밤 청소부들이 돌아간 후에도 연구실에 있다고 가정해 봐요. 그녀는 일을 해야만 했을 거예요. 9시에 청소부들이 불을 끄고 나가면 컴퓨터가 자동적으로 모든 사무실의 등을 끄게 하죠. 불을 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건물의 특정구역을 위 한 안전 암호를 사용해서 점등하는 수밖에 없어요."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자넷은 자신의 일을 진행하기 위해 램프를 가졌던 겁니다. 그래서 불이 켜져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따라서 그 안전 암호는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 거예요. 자넷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곳에 있었을 테니까!" "맞아요. 자넷은 몰래 일을 했던 거예요. 만약 우리의 추리가 맞다면 자넷은 컴퓨터 에 서 뭔가 인쇄한 걸 빼내려고 거기 있었을 거예요. 프린터의 구멍에서 나온 조각들이 그 증거가 될 수 있어요. 그녀가 회사측에 알리지도 않고 밤늦게 숨어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뿐이에요." "그것이 바로 배리푸드의 나쁜 짓의 증거가 됐을 거요!" 리가 약간 홍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자넷이 거기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봐야겠어요. 난 곧장 컴퓨터가 있는 곳으 로 가야겠어요." "언제쯤 알 수 있겠소?" 리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12시 30분이 지났군요.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데 30분쯤 걸릴 거예요. 그리고 주차장에서 사무실까지 가는 데 5분에서 10분쯤 걸리고 컴퓨터를 작동하는 데 30분이 면 충분할 거예요. 어디로 연락을 해야 하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난 쉐라톤 팰리스에 방을 얻었어요. 당신 전화가 올 때까지 거기에 있겠소." "좋아요. 뭘 알아내는 대로 연락하겠어요. 아니, 잠깐! 그 전화가 도청될지도 몰라요 . 퇴근 후에 6시쯤 만나는 게 좋겠군요. 내가 호텔에 가서 종업원에게 당신 방으로 연 락 을 해달라고 부탁하겠어요." "좋소. 점심식사도 거의 하지 못했으니까 내가 좀 이른 시간에 저녁식사를 대접하겠 소." 그녀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커피숍 을 나와서 자기의 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알렉스는 리의 차가 떠나는 걸 한참동 안 지켜보았다. 그는 호텔로 서둘러 돌아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차에 올라탄 알렉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자넷의 살해사건에 관한 짐을 리와 함께 나 누게 된 게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정말 그 인사부장은 여러 면에서 매력적인 여자였 다. 24번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리의 마음은 그날 아침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물론 그 녀 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그건 자넷의 의문의 죽음을 믿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상 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알렉스와 더불어... 하지만 그 역시 아직은 의문의 인물이다. 자넷의 여동생과 결혼을 한 것만 해도 그렇 다. 어느덧 그녀는 칼데코트 터널에 다가와 있음을 알았다. 갑자기 마음이 언짢아지기 시 작했다. 리는 항상 긴 터널을 싫어했다. 마치 여러 차에서 뿜어낸 일산화탄소 때문에 그대로 질식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더구나 그 터널은 지난 금요일 자넷이 사고를 당한 곳이 아닌가? 리는 몸을 떨었다. 아직 그녀는 살인에 대한 개념에 익숙해 있지 못했다. 그녀는 어더선가 읽었던 7가지 치명적인 죄를 생각해냈다. 교만, 분노, 색욕, 식탐, 시기, 탐욕, 그리고 나태.... 그녀는 그걸 모두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자넷을 죽인 동기는 그중 무엇이었을까? 리 는 혼자만의 생각에 열중해 있느라고 뒤차가 와서 부딪 쳤는데도 잠시 그게 현실인지 꿈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뒤차는 다시 한번 그녀의 차를 들이받았다. 그제서야 어 렴풋이 그것이 실제 상황임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6 리는 그 충격을 겪으면서 자신의 심장이 심하게 뛰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내부 의 음성이 그녀에게 침착하라고 경고했다. 그녀는 아직도 차를 조절할 능력을 갖고 있 었다. 아마 지금쯤 뒤차의 운전자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을 것이다. 차를 앞차에 너 무 바짝 들이댄 걸 깨닫고 물러설 것이다. 하지만 자넷 호머의 사고를 연상하던 그 순간에 차가 부딪쳐왔다는 그 사실이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백미라를 바라보았다. 뒤차에서 비치는 2개의 헤드 라이 트 가 마치 굻주린 짐승의 눈처럼 빛나고 있다. 하지만 터널이 어두워서 운전자의 모습 이 나 차의 종류는 식별할 수가 없다. 다시 차가 부딪쳐왔다. 그녀는 액셀러레이터의 페달을 밟고서 재빨리 오른쪽 노선으 로 차를 빼냈다. 차의 속도계는 60과 65사이를 움직였다. 뒤차는 그대로 지나쳐갔을까? 하지만 다시 한번 뒤차가 부딪쳐왔다. 여기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까? 그런 속도로는 충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다 시 한번 차가 부딪쳐왔다. 이번엔 왼쪽 펜더를 거칠게 들이받았다. 그래, 뒤차는 나를 터널의 옆으로 밀어붙이려는 거야! 자넷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 법을 쓰고 있는 거야.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차를 몰아야 해.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해 선 안 돼. 그러나 뒤차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차에 계속 부딪쳐왔다. 리는 점점 강 력한 공포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결국 난 저 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밀려서 터널 벽에 부딪치고 말 거야! 그러나 그 절망 속에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터널의 끝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 녀의 시야에 흐린 하늘이 보였다. 드디어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리는 필사적으로 차를 세울 곳을 찾았다. 터널에 있는 한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를 피 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고속도로 옆에 차를 멈출 자리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차량은 쌍둥이 터널 속에서 끊임없이 빠쳐나오고 있었다. 도저 히 차를 멈출 수가 없다. 이제 버클리 교회로 빠져나가는 길로 계속 달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영원처럼 지루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그녀는 겨우 차가 쉴 곳을 발견했다. 리는 시 동을 끄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1분이 지났을까? 아니면 30분 쯤 지났을까? 그제서야 비로소 마음을 조금 가라앉혔다. 그런데 누군가가 차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못한 듯이 머리를 돌리고 눈을 떴다. 그의 손가락 관절이 아주 크게 보였다. 그러나 얼굴은 빗물이 흘러내린 유리창 때문 에 뿌옇게 보였다. 그러나 리는 그가 유니폼을 입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머리를 들어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괜찮아요?" 리는 입을 벌렸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리는 간신히 창을 내렸다. "난 괜찮아요." 공포감이 사라진 자리엔 멍한 느낄만이 남았다. 마치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그런 느낌 이다. "아가씨, 당신은 이곳에 불법주차를 하고 있어요.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할 것 같소." "미안해요, 하지만 난 아주 끔찍한 경험을 했어요. 칼데코트 터널에서 누군간가 나를 따라와서 내 차와 고의적으로 충돌했어요. 어떤 미친 사람이 날 터널 벽에 밀어붙이 려 고 했어요." 경찰관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레인코트를 입지 않아 시간이 흐를 수록 더욱 비에 젖었다. 그는 리의 말을 정리해 보려는 듯 잠시 거기서 있다가 이번 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리고 비에 젖은 얼굴을 그녀에게 돌렸다. "운전할 수 있겠어요?" "그래요." "차에서 내려서 우리와 함께 타고 가는 게 어떻겠소?" 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괜찮아요. 이젠 운전할 수 있어요." "그럼 우리 차를 쫓아서 경찰서까지 따라와요. 거기서 당신의 진술을 듣기로 하겠소. " 이제 환전히 유니폼이 젖어 버린 경찰관이 말했다. 경찰관이 탄 차를 쫓아가는 동안 한 가지 생각만이 그녀의 멍한 머릿속을 채웠다. 역시 알렉스의 말이 옳았다. 자넷 호 머는 살해된 게 분명했다. 스티브 건은 사무실로 들어서서 홈뻑 젖은 레인코트를 벗었다. 코트를 옷걸이에 걸고 서 손으로 머리의 물을 짜냈다. 그 순간 예기치 않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화 들 짝 놀랐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젊은 여비서가 들어서서 그에게 타월을 내밀었다. 그녀의 태도는 지극히 공손했다. "이게 도움이 될까요?" 스티브는 타월을 받아들고 그녀에게 나가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마치 새앙쥐 처럼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스티브의 표정엔 혐오감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눈치나 보 는 여자들은 딱 질색이다. 그런 여자들은 남자를 무기력하고 바보처럼 만들어 버린다 . 그는 자신만만 하고 거침없는 여자를 좋아했다. 그 여자로 인해 남자 자신이 중요하 게 평가받게 하는 그런 여자, 배리푸드의 인사부장도 바로 그런 여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느낌을 주었다. 키가 크고 매력적인 여자.... 자신을 피하는 듯한 그 여 자의 태도도 한층 구미를 당기게 했다. 모름지기 귀한 것은 어렵게 손에 넣는 법이다 . 그는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두었다. 스티브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화면의 스위치를 꼈다. 이제 그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 아가 버렸다. 그 여자는 위험인물임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여자란 얼마든지 있다. 스티브는 노트를 꺼내 들었다. 그는 리와 함께 있던 남자를 조사해 볼 생각이다. 물 론 그 사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잘 알고 있다. 티베리엔 그의 스파이가 있다. 그가 방금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던가? 거의 3시가 되서야 리는 자신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마지가 전화 메모를 건네주며 그 녀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리는 아무 말 없이 사무실로 들어서서 문 을 닫았다. 책상 앞에 앉아서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았다. 육체적으론 아무 이상이 없지만 정서적 으론 엉망이 되어 있었다. 경찰은 공손한 태도를 보였지만 그녀의 이야기에 상당히 회 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자꾸만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충분히 뒤돌아서 범인을 착인해 볼 수도 있었다. 그러 나 그녀는 극심한 공포감과 나중엔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때문에 뒤를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경찰에게 아무 단서도 주지 못했다. 아무튼 그 살인자를 그대로 도망치게 한 건 커다란 실수였다. 이제 그는 다시 그녀를 추격해 올 것이다. 오, 하느님! 그녀는 공포심을 몰아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 살인 자의 정체와 자넷의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는 데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고 화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교적 쉽게 그녀가 필요로 하 는 암호를 찾을 수가 있었다. 곧 실험실의 분리된 기억 매트릭스로 들어갔다. 컴퓨터 의 시간기록을 호출하여 지난 2주 동안의 출퇴근 기록을 살펴보았다. 이럴 리가 없어. 하지만 그건 틀림없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자넷은 휴가에서 돌아온 이후로 밤늦게 근무를 한 적이 없었다! "드디어 당신을 찾아냈군요!" 데니스 윌리엄스가 문가에 서서 말했다. 예기치 않은 음성에 리는 깜짝 놀랐다. "맙소사, 데니스, 다음번엔 노크를 하고 들어오세요. 깜짝 놀랐잖아요?" "두 번이나 노크를 했어요. 못 들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요? 왜 그렇게 깜짝 놀라는 거죠?" 데니스가 책상 쪽으로 다가오자 리는 얼른 컴퓨터를 꺼버린 다음 광고부장에게 시선 을 돌렸다. "데니스, 미안해요. 자넷의 죽음 때문에 내가 무기력해졌나 봐요. 그런데 당신이 자 넷 를 알고 있는지 몰랐어요." "난 그녀를 몰라요." 리는 데니스의 대답에 혼란을 느꼈다. "자넷을 모른다면 왜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했죠?" 데니스는 거대한 체구를 의자에 털색 실으면서 말했다. "내 말은 그녀를 잘 모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실험실에 내려갈때 그저 인사나나누는 정도예요. 몇 주 전 그녀가 아침에 조지에게 광고 문안을 전달하려고 그의 사무실에 갔을 때 그녀가 거기 있더군요. 그때 서로 인사를 나누게 줬죠. 물론 6개월 전부터 떠 도는 소문에 대해선 나도 듣고 있었어요." "소문? 무슨 소문이죠?" "자넷과 조지에 관한 소문 말예요." "자넷과 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데니스는 뭔가 마음을 정리하려는 듯 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예요. 당신은 듣지 못한 모양이군요. 괜한 말을 한 것 같아요. 이제 그만 가보 는 게 좋겠어요." "데니스, 거기 앉아서 무슨 일인지 나에게 말해 줘요." 데니스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한동안 리의 얼굴을 응시했다. "조지와 자넷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에요." "그건 믿기 어렵군요." "나도 그래요. 자넷을 만나고 보니 더욱 믿을 수가 없었어요. 조지가 성적 매력이 있 는 남자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또 모르죠. 조지는 영리하고 힘이 있으니까. 그런 평 판 을 얻은 걸 보면 틀림없이 뭔가가 있을 거예요." "평판?" "그래요. 내가 배리푸드에 오기 전에 일어난 일이에요. 햄이 스티브를 보내서 사무실 의 말썽꾸러기들에게 조용히 충고하게 했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꽤 많았나 봐요 . " "글쎄, 그리 나쁜 일 같지는 않군요. 하지만 그는 그걸 어떻게 알아냈을까요? 난 전 혀 모르고 있었는데... " "아무튼 들리는 말에 의하면 스티브가 직원들의 빈등거리는 버릇을 모두 고쳐놓았다 는 거예요." "어떻게?" "다시 한번 다른 사람과 빈둥거리는 게 눈에 띄면 즉시 해고를 시키고, 결코 다른 회 사에서도 일을 할 수 없게 하겠다고 말했대요. 모두들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거죠 . 햄은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조지에 관한 소문은 뭐죠?" "소문이란 시간이 흐를수록 왜곡되기 마련이잖아요? 자넷 말고도 조지는 몇 번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소문의 대부분은 자넷에 관한 이 야기였어요." "그녀가 유부녀이기 때문인가요?" "그래요. 그리고 그 역시 기혼이잖아요? 그리고 자넷이 그의 밑에서 일하니까요. 모 두 들 8개월 전 자넷이 출산한 아기가 조지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말도 안돼요." "직장에서 흔히 있는 일이죠." "그럴 리가 없어요. 조지는 그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어요." 데니스는 넓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나만큼 조지를 몰라요. 교활한 조지는 한번 마음만 먹으면 반드시 해내고 말 아요." "그래도 자넷은 절대로 그럴 여자가 아니예요." "당신이 그녀를 잘 모르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무슨 일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거죠?" 광고부장에게 진실의 일부를 털어놓는 것도 나쁠 것 같진 않았다. "오늘 장례식이 끝난 후 자넷의 어머니께서 나에게 고함을 질러댔어요. 배리푸드가 그 녀를 죽였다고 비난을 퍼붓더군요!" "도대체 회사가 어떻게 그녀를 죽였다는 거죠? 부패한 음식이라도 먹였다는 건가요?" 리는 그녀의 빈정거림을 무시해 버렸다. "그분은 자넷이 연장근무를 하다가 과로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했어요." "그게 전부예요?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요." 데니스가 말했다. "우린 모두 연장근무를 해요. 정말 집에 돌아갈 때는 운전대 앞에서 졸다가 충돌사고 가 나는지도 모를 지경이에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어젯밤에도 9시경에 퇴 근 하면서 보니까 당신의 사무실에도 불이 켜져 있더군요. 당신도 우리처럼 바보예요. 묵 묵히 연장근무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리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햄이 나에게 다른 일을 시켰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늦게까지 있었던 거예요. 하 지만 자넷은 컴퓨터로 알아보니까 다른 연구원들과 함께 6시에 퇴근한 걸로 되어 있 었 어요. 출산휴가에서 돌아온 이후로 한번도 연장근무를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가 족 들은 그녀가 늦게까지 일을 했다고 생각할까요?" 데니스가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진하군요. 그녀는 일을 핑계대고 다른 짓을 했던 거예요." "남자를 만났단 말인가요?" "내 짐작으론 그래요." 리는 머리를 흔들었다. "8개월 된 아이와 잘생긴 아들, 그리고 존경하는 남편을 두고 그럴 여자가 아니예요. 뭐가 부족해서 자넷이 외도를 했겠어요?" "글쎄요. 결코 만족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자넷 호머도 그런 사람인 지도 모르죠. 물론 당신이 그녀와 친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인간이란 전혀 다른 일 면이 있는 거예요." "그녀의 어머니는 몹시 화를 냈어요. 그렇다면... " "오, 그분은 몹시 슬퍼하고 있어요. 그래서 괜한 사람을 비난한 것뿐이에요. 아마도 그분은... " 그때 리의 비서가 인터콤을 울리는 바람에 헤니스의 말은 중단되고 말았다. "네, 마지?" "조지 펙이 데니스를 찾고 있어요. 몹시 다급한 눈치예요." "알겠어요, 마지. 고마워요?" 리는 데니스를 위해 스피커폰을 눌러 주었다. 화학실장은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본론을 털어놓았다. "새로운 광고 문안은 준비됐나요? 난 벌써 20분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소. 이젠 더 이 상 기다릴 수가 없을 것 같소." 그의 음성엔 위협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순간 데니스의 입술이 굳어졌다. "알겠어요. 곧 가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 이만 실례해야겠어요. 사실은 내일 아침에 만나기로 해놓고 갑자기 날 찾아서 기 다렸다고 난리를 피우는군요." "만약 당신이 나타나지 쟐았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는 더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고 했는데..." "당장 사장에게 달려가서 내가 비협조적이라고 고자질할 거예요. 요즘엔 그게 가장 중 죄에 속하는 일이에요." "사장이 그의 말을 믿어 줄까요?" "그럼 사장이 내 말을 더 믿어 줄 거란 말인가요? 화학실장이 우리의 새로운 상품 견 본을 제시한 이후로 사장은 그가 물 위를 걷는 남자인 줄 알아요." 리가 눈을 치켜떴다. "몰랐어요. 신상품을 개발했나요? 그게 뭐죠?" 데니스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후회하는 눈치였다. "리, 제발 내 말을 잊어 줘요. 이제 가봐야겠어요." 데니스는 급히 리의 사무실을 빠져나가다가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 금발의 사내와 부 딪쳤다. 그러나 그녀는 간단한 인사만을 전한 채 그대로 가버리려 했다. "데니스, 당신을 여태껏 찾아다녔어요. 햄이 특별 자금 일부가 연간 예산에 반영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당신과 이야기 해 보라고 했어요. 오늘중으로 결과를 보고해야 해 요. 30분 내로 잠정 액수를 정해 오라고 했단 말이에요." "존, 급한 선약이 있어서 지금은 안되겠어요. 내 사무실에서 기다려 주면 금방 돌아 오 겠어요." 데니스는 고통스런 표정의 남자를 남겨 둔 채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데니스는 연구실로 돌아가는 중이에요. 그리고 나도 이제 일을 해야겠어요." 리가 말했다. "리, 당신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왜 햄은 당신에게 홍보 부장 일까지 시키는 겁니까 ? 2가지 일이 모두 엄청나게 힘이 든다는 걸 모르고 있는 걸까요?" "아마 햄은 업무의 상호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존은 권하지도 않았는데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1분기의 대실패를 나타내는 수치를 제시하면 그는 자신의 결정을 재고 하게 될 거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1분기의 대실패라뇨?" "내가 괜한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는 몰라도 우리의 겁없는 지도자께선 요즘 경제적으 로 곤란을 겪고 있어요. 내가 제출한 상황보고서에도 별로 관심이 없는 눈치예요. 1 분 기의 예산집행만으로 곤경에 빠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예산을 빠듯하게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회사 자금을 운용하는 기본원칙이 아 닌 가요?" "그거야말로 잘못된 생각이죠. 행동력있는 남자라면 예산을 초과해서 회사 수입을 올 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특히 1분기엔 그렇죠.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 분기 의 예산이 형편없이 깎이고 말아요." 존의 밝은 미소가 조금은 서글퍼 보였다. 아무래도 그건 순전히 농담은 아닌 것 같았 다. "아무튼 햄은 예산을 증액하기로 결정하고서 당신의 업무를 2배로 늘리기로 한 것 같 아요. 그게 새로운 홍보부장을 채용하는 것보다 훨씬 이익이니까요."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난 비밀을 모두 털어놓았는데, 왜 당신은 말하지 않는 거죠?" 그의 표정은 몹시 진지했다. "도대체 뭘 알고 싶은 거예요?" "물론 새 상품에 관한 거죠. 모두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도대체 왜 그렇게 비 밀 을 지키는 거죠?" "존, 나도 새 상품에 관해선 모르고 있어요. 당신은 들은 게 있나요?" 리는 애써 예의바른 표정을 지어 보이고 그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편안한 매력 뒤에 날카롭고 기민한 뭔가가 숨 겨져 있다. 왜 전엔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럼 다음에 봅시다." 존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리는 그의 뜻밖의 질문에 당황 하 고 있었다. 자넷의 편지를 받은 이후로 모든 사람들이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 인 다. 그녀는 다시 화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넷은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금요일엔 알렉 스 에게 전화를 했다. 만약 자넷이 실험실의 일 때문에 괴로워했다면 컴퓨터 파일에 뭔 가 삭제 된 흔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리는 금요일 이후의 파일 작동상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금요일엔 아주 활발했다가, 주말엔 느릿하다가, 다시 월요일엔 원상태로 움직이고 있다. 전혀 아무것도 감지할 수 가 없다. 관련 자료를 은폐하기 위해 모두 지워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주요 프로그램은 전혀 변경된 흔적이 없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삭제되지 않았다. 다만 예전의 암호가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실험실의 출입 보안체제에 2줄의 선이 있다. 보안체제에 선이 쳐져 있다니... 다시 그녀에게 회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리의 손이 재빨리 키를 두드렸다. 7 보안체계의 프로그램 변경을 바라보는 동안 리의 맥박은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그건 손바닥 지문과 관련된 논리에 관한 것이었다. 리는 그어진 선 하나를 유심히 살펴보 았 다. 그건 전에 있던 5초 지연회로를 지운 것 같았다. 그녀는 나머지 프로그래밍 언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5초 지연회로의 내용은 무엇이 었을까? 잠시 후 그녀는 손바닥 지문이 시간기록에 등록되기 전에 서로 상충하는 입 장 에 의해 5초 내에 취소될수가 있다는 걸 알아냈다. 이번엔 논리조작에 두 번째 덧붙린 선을 살펴보았다. 그건 입장 전에 퇴장하는 걸 막 고 있었다. 그렇다면 퇴장은 반드시 입장을 동반하고 있는 셈이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그녀는 다시 프로그램을 읽어 보았다. 입장의 모든 손바닥 지문은 항상 퇴장을 동반해야만 했다. 하지만 두 개의 손바닥 지문이 퇴장과 입장만을 했을 때는 어떻게 되는지 아무런 지시도 없다. 그렇다면 누구든 들어온 표시없이는 다시 실 험실로 돌아올 수 없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변경 전에는 누군가가 퇴장 표시를 하고 갔다가 다시 표시를 하지 않고 들어온 다음 다시 나갈 때 표시를 한다고 해도 컴퓨터는 그걸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사람이 실험실을 떠났다가 경비원과 컴퓨터 의 시선을 피한 채 다시 실험심에 들어올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그걸 조사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녀는 사무실을 나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가서 경비원의 책상 쪽으로 갔다. 그는 낯이 익은 듯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난 인사부장인 리예요." "네, 가끔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가요?" "실험실의 보안체계가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내가 녹색 확인 화면에 손 바닥 지문을 대면 아저씨는 어떤 정보를 받게 되나요?" "일반 사무실에 들어갈 때와 똑 같아요. 들어서서 연구소의 전자감시경을 통과하면 내 가 그 사람을 볼 수 있게 되죠. 물론 먼저 화면에 손바닥 지문을 갖다댔는지 확인합 니 다." 리는 손바닥을 스크린에 댄 다음 전자감시경 쪽으로 걸어 갔다가 다시 경비원의 책상 쪽으로 돌아와 그의 모니터에 나타난 정보를 읽었다. B.A. 리 인사부장 여성 177cm 55kg 금발 : 밝은 눈동자 특징 사항은 없음 마지막 귀절을 읽자마자 화면은 꺼져 버렸다. "몇 초 동안만 나타나기 때문에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시키고 있어야 합니다. 손바닥 지문이 분명치 않으면 화면에 '허가받지 않았음'이라는 글자가 나타나고, 다음 3초 동 안 전자감시경을 통과하는 사람이 있으면 경보가 울리게 됩니다." "손바닥 지문에 의한 정보는 입장을 위한 건가요? 아니면 퇴장을 위한 건가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어느 쪽이나 똑같으니까요." "하지만 컴퓨터가 내가 나가는 건지 들어오는 건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컴퓨터는 부장님의 손의 방향을 감지합니다. 들어올 때는 손바닥이 건물 쪽을 향하 게 되니까 컴퓨터는 입장으로 기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반대로 손바닥이 건물과 다른 방향이면 컴퓨터는 퇴장으로 기록하는 거죠." "알겠어요. 만약 내가 즉시 들어왔다 나가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니까 몇 초 내에 들 락이게 되면... " "어떻게 그런 경우가... " "만약 토의를 하려는데 내가 구석에 있는 우체통에 편지를 부치는 걸 잊었다고 해봐 요. 초록색 보안화면에 손바닥을 대고 입장했다가 전자감시경을 지났다가 곧 편지를 부쳐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다시 몸을 돌려 보안화면에 손바닥을 대고 전 자 감시경을 통과해서 나갔다고 가정해 봐요. 그럼 컴퓨터는 나의 입장과 퇴장을 어떻게 기록할까요?" 경비원이 고개를 저었다. "미즈 리,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절대로 난 이 입장과 퇴장의 효과를 알아내기 위해 컴퓨터에 접근할 수는 없어요." "그건 내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경비원들은 순번제로 근무하나요??" "3교대로 근무합니다. 오전 8시부터 4시, 4시부터 자정, 그리고 자정부터 오전 8시까 지예요. 이곳을 빈틈없이 지키고 있답니다." "하지만 점심식사나 아침식사는 어떻게 하나요?" "그럴 땐 몇 분동안 자리를 비우게 됩니다." "아저씨는 보통 4시부터 자정까지 근무하시나요?" "그런 편이에요." "그럼 이 교대조의 휴식시간은 보통 언제인가요?" "6시부터 6시 30분 사이에요. 가끔 5시 30분부터 6시 사이엔 직원들이 쏟아져 나오거 든요. 그들이 나가는 표시를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보통 10분 정도 휴식시간을 갖죠. 다리 운동을 하느라고 산책을 한답니다." 리는 뭔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녀는 로비를 둘러 보았다. 감시경의 어느 한 쪽 은 휴게실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아저씨의 눈에 띄지 않고도 드나들 수가 있겠군요?" "그래요. 하지만 그럴 경우도 모두 기록이 되죠. 만약 누군가가 불법적으로 입장하려 한다면 경보기가 울려대니까요." "여기서는 경보기를 차단할 수가 없나요?" "없어요. 그건 자동이에요. 우린 작동상태를 감시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즉시 손을 쓸 수가 있어요. 히지만 만약 보안 체제가 침범을 당하면 즉시 경찰이 출동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나요?" "몇 달 전에 그런 일이 있었죠. 내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직원 한 사람이 아이를 데 리고 왔어요. 아마 그는 아들에게 아빠가 일하는 곳을 보여 주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손바닥으로 사인을 한 다음 아이를 어깨에 태운 채 매달려 있는 전자감시경을 통 과했죠. 그 즉시 사이렌이 귀를 찢어놓을 것처럼 울려댔어요. 그는 나중에 마치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즉시 경찰이 출동했고 잠시 후엔 사장님 도 나타났어요." "불쌍한 아기... 몹시 겁에 질렸겠군요." "사실 난 그애 아버지가 더 안됐다고 생각했어요. 당장 해고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 거든요. 하지만 사장님은 껄껄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어요. 그리고 직원 에 겐 경보장치가 그렇게 효과가 우수하다는 걸 입증해줘서 고맙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빠가 아들을 데리고 있었다면 전자감시경이 아이의 어느 곳을 감지했기에 경보장치가 울렸을까요?" "그날 밤 사장님이 말해 주더군요. 그건 심장의 박동을 감지하는 장치래요. 그런데 두 사람의 심장을 감지했으니 그 난리가 난 겁니다." 리는 사무실로 돌아가면서도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식품회사가 아니라 비밀 무 기 공장이라도 차려놓은 것처럼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곧장 자신의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에 그녀는 자신의 수많은 입장 과 퇴장을 컴토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건물 안에서의 자신의 시간기록에 영향을 미치는 가 를 알아냈다. 그건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다. 마지가 인터콤을 누르고 퇴근인사를 알려왔다. 리는 깜짝 놀라 시계를 보았다. 시계 는 어느새 6시 1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생각들을 정리해서 쉐라톤 팰리스로 갈 시간이다. 다행히도 그곳은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다. 알렉스에게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을 것 같다. "난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함께 갖고 왔어요." 리가 말했다. 방금 그들은 쉐라톤 팰리스 구역에 있는 마켓 가 뉴 몽고메리 거리 모 퉁 이 음식점에서 이른 저녁식사를 끝냈다. "그럼 좋은 소식부터 듣고 싶군요." 알렉스가 말했다. "금요일 밤 자넷이 연구실에 늦게까지 있었다는 우리의 추리는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 " "맞아떨어졌다니? 그렇다면 컴퓨터의 기록에선 확인할 수 가 없었단 말이오?" 리는 커퍼에 크림을 넣어 저으면서 말했다. "사실 컴퓨터의 기록은 자넷이 다른 연구원들과 6시에 퇴근한 걸로 되어 있어요. 그 리 고 지난 금요일도 마찬가지였어요. 컴퓨터는 그녀가 2주 전 출산휴가에서 돌아온 이 후 매일 정상 근무를 한 걸로 나타나 있어요. 하지만 난 그 기록이 틀렸다고 생각해요." "변조됐나요?" "정확히 말하면 그건 아니에요. 내가 우리의 연구원이 보안체제를 능가하는 방법을 찾 아내지 못하면 내가 놀랄 거라고 말한 기억나세요?"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난 오늘 아침 보안체제에 관한 프로그래밍을 검토해 봤어요. 주말 동 안 두 번의 변화가 있더군요. 첫번째는 입장과 퇴장의 메모리에서 5초 동안의 지연회 로가 지워져 있었어요. 변경 전에는 만약 누군가가 건물 안에 들어왔다가 5초 안에 나 가게 되면 입장과 퇴장 손바닥 지문은 스스로 지워지게 되고 컴퓨터 메모리엔 아무 기 록도 남지 않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두 번째는 변경 전엔 입장을 표시한 손바닥 지문이 퇴장의 그것과 짝을 이루 는 한 확인작업은 거기서 끝나게 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누군가가 입장이 없이 퇴 장 지문만 연이어서 몇 번 찍어대면 컴퓨터는 그걸 무시하게 되는 거죠. 컴퓨터가 관심 을 갖는 건 오직 입장과 퇴장이 맞물려 있는 상황뿐이었어요." 알렉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가 있겠소. 하지만 그렇다고 자넷이 어떻게 컴퓨터 기록에 정 확한 시간을 남기지 않고 늦게까지 머물러 있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이건 순전히 추측이에요. 혹시 배리푸드의 로비의 배열상태를 기억하세요? 중앙에 경 호원이 혼자 있고 실험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입구 오른쪽엔 초록색 안정화면이 있 죠. 그리고 일반 사무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입구 왼쪽엔 다른 안전화면이 있잖아요 . " "그래요.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럼 이렇게 가정해 봐요. 자넷이 5시 30분에서 6시 사이에 다른 연구원들과 함께 손 바닥 지문을 찍고 나왔다가 그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거나 아니면 로비의 화장실에서 기다렸을 수도 있어요." "뭘 기다렸다는 거요?" "경비원이 쉬는 시간을... 그랬다가 다시 초록색 안전화면을 통과해서 반대편 화면에 손바닥을 대는 거예요. 이때 손바닥은 빌딩의 바깥 쪽을 향하게 하는 거예요. 5초 지 연회로에서 컴퓨터는 입장과 짝을 지으려다가 짝이 맞지 않으니까 메모리에 입력이 되 지 않는 거죠." "그래서 자넷은 흔적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는 거군요?" "맞아요." "하지만 떠날 땐 어떻게 하죠? 컴퓨터가 그전 시간을 기록하지 않을까요?" "아니에요. 프로그래밍에서 두 번째 논리가 변하기 전까지는 여분의 퇴장은 아무 효 과 가 없어요. 자넷이 건물을 떠날 때 퇴장표시를 해도 그건 기록되지 않아요. 컴퓨터는 그녀가 이미 나간 걸로 간주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런 변화는 주말 동안에 행해졌군요. 자넷이 죽은 직후 그들은 그녀가 어떻 게 출입했는지를 알아차리고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문제점을 바로잡은 거죠."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하지만 논리 변화는 연구소의 보안체제에만 행해진 게 아니에요. 일반 사무 실의 보안체제도 변경됐어요. 오늘 오후에 점검을 해봤어요." "누가 프로그래밍을 변경했을까요?" "몇 사람이 그걸 조작한 거예요. 햄은 틀림없고 스티브, 조지, 데니스, 어쩌면 존도 포함되어 있을지도 몰라요. 보안에 관한 거니까 내 생각엔 스티브일 것 같아요." 알렉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몸을 뒤척였다. "리, 만약 배리푸드의 누군가가 그들의 보안체제에 허점을 보완하고 그 사람이 자넷 을 죽였다고 가정한다면 당신이 실험실에서 떨어뜨린 자넷의 편지를 주은 사람도 바로 동 일인물일 거요. 그 사 람은 당신과 자넷의 우정에 신경과민이 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 그리고 그는 당신이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들은 어쩌면.. . " 알렉스가 말을 멈췄고 리가 그 말을 끝냈다. "어쩌면 내 목숨까지 노릴지도 모른다는 거죠? 내가 전하려던 나쁜 소식이 바로 그거 였어요. 당신 말대로 자넷은 살해된 게 틀림 없어요. 누군가가 오늘 오후에 날 죽이 려 고 했어요." "뭐라고요?" 그는 몹시 충격을 받은 듯했다. 리는 라파예트 커피숍을 떠난 후에 칼데코트 터널에 서 의 충돌사고를 그에게 자세히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알렉스가 그녀의 팔 에 손을 얹었다. "당신 자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돼요. 당신은 그 잔인한 공격에서부터 살아남았어요. 차가 반복해서 부딪쳐왔을 때도 당신은 차의 조절능력을 상실하지 않았소. 아주 침착 하게 잘 해냈어요." 그의 따뜻한 시선이 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덥혀 주고 있다. "리, 당신은 위험에 처해 있어요. 그런데도 경찰은 아무런 확신도 갖고 있지 않아요. 이제 그들에게 보호를 요청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 휴가를 신청하고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있어야 할 것 같소." "안돼요. 잠자코 물러나 있을 수는 없어요.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예요. 이미 입을 막 게 하기 위해 살인사건이 벌어 졌어요. 내 친구인 자넷이 죽었어요." "그들은 이미 살인을 저질렀어요. 그리고 다시 살인을 하려 해요. 아마도 당신이 그 다음 명단에 올라 있는 것 같소. 이제 이 문제에서 손을 떼는 게 좋겠소!" 그의 음성은 단호했다. "어떻게 내가 포기할 수 있겠어요? 나에게 도망쳐서 숨어 있으란 말인가요?"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신은 바보요!" 그의 손이 그녀의 팔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아야만 한 다. 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알렉산더 씨, 당신이 원하는 게 그건가요? 그렇다면 당신도 상황이 좀 불리하면 언 제 든 도망칠 셈이군요." 알렉스는 화가 났다. 흥분한 탓인지 그는 리의 음성이 변해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천만에! 난 누가 자넷을 죽였는지 알아낼 때까진 절대로 물러서지 않아요." "나도 똑같은 이유 때문에 물러설 수 없는 거예요. 자넷은 내 친구였어요." "하지만 누군가가 당신을 죽이려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내일이라도 누군가가 칼데코트 터널에서 당신의 차를 부딪쳐온다면 당신은 당장 비행기를 타고 이곳을 떠날 건가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요!" 리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존심이 상해서 도저히 그대로 앉아 있 을 수가 없다. "알렉산더 씨, 오늘은 이만 헤어지는 게 좋겠어요." 핸드백을 집어서 자신의 식사 비용에 해당하는 돈을 꺼내 테이블 위에 팽개치듯 놓고 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밤의 차가운 공기가 뜨거운 피부에 마치 채찍처럼 느껴졌다. 알렉스가 그토록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 줄은 몰랐다. 그녀가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 지 만 리는 무시했다. L. E. 알렉산더와는 이제 더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 다시 그가 부 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대로 걸어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알렉스는 그녀의 곁에 와 있었다. "뭘 원하는 거죠?" 그녀가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코트를 잊고 갔더군요." 그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갑자기 발을 멈춰선 채 손을 내밀었다. 하지 만 알렉스는 코트를 순순히 건네줄 것 같지가 않았다. "내 말을 들을 때까진 줄 수 없어요." 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럼 그 코트 가지세요." "미안해요, 리. 제발 내게 코트를 돌려줄 기회를 줘요." 여전히 화가 났지만 사정조로 말하는 그의 어조에 조금은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서 다 시 발걸음을 멈췄다. "좋아요, 어서 코트를 주세요." 그가 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 말에 대해 사과하고 싶어요. 리, 난 당신이... 당신이 일에 끼어든 걸 원치 않아 요. 당신이 다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오." 그의 얼굴은 그림자에 갇혀 있었지만 그의 음성만은 진지했다. 그의 따뜻한 마음씨에 그녀의 분노는 순식간에 녹아 버렸다. 그녀는 코트를 받으려 했지만 그는 여전히 그 걸 쥐고 있다. "내가 입혀 줄게요. 오늘밤은 추워요." 코트를 입혀 주는 그의 손길이 따뜻하고 강인하게 느껴졌다. "리, 정말 이 일에 끼어들고 싶어요?" 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스, 난 여태껏 한번도 어떤 일에서 도망쳐 본 적이 없어요. 이 일에서 내가 도 망 친다면 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 "안전한 일이 아니오."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경찰도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제 내 가 안전해질 수 있는 방법은 자넷을 죽인 사람을 직접 찾아내는 일이에요. 그렇지 않 으면 난 항상 뒤를 돌아보면서 다녀야 할 거예요. 아시겠어요?" 그가 리의 어깨를 약간 움켜쥔 다음 가까이 다가왔다. 이번에 그의 음성은 더욱 부드 럽고 깊게 들려왔다. "알겠소. 그럼 내가 당신을 돕게 해주겠소? 자넷을 위해서... 우린 아주 좋은 팀이 될 거요." 그가 가까이 서 있는 동안 리는 그의 존재를 의식했다. 그들 사이의 공기가 아주 따 뜻 하게 느껴진다. "좋아요." "됐소. 자, 이제 내가 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겠소." 잠시 말없이 걷던 그가 불쑥 물었다. "나를 당장 자넷의 자리에 채용해 주겠소?" 하지만 리는 그의 물음에 즉시 반응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녀의 어깨엔 그의 손의 감촉이 강력하게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건 안돼요. 그러다간 당신은 금방 의심을 받게 될 거예요. 우선 몇 명의 후보자를 더 면담해야겠어요. 일상적인 과정을 거쳐야 하니까요. 그럼 빨리 서두른다고 해도 2 주일 후에나 당신에게 정식 통보를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신원 조회가 끝나려면 일주일이 더 지체될 거예요." "하지만 3주나 기다릴 수는 없어요. 자넷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 자넷의 음성은 몹 시 다급했어요.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았소." "추가 면담을 주선할 수는 있지만 당신을 금방 실험실로 끌어들일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당분간은 당신이 모든 부담을 져야 할 것 같소. 당신은 컴퓨터 체제에 대 해 서 잘 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화학자들이 하는 일에도 접근할 수가 있겠소?" "물론 그건 가능해요. 하지만 난 결코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그럼 그걸 인쇄해서 나에게 갖다 줘요." 리가 머리를 저었다. "컴퓨터에 수록된 화학 연구자료가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그 많은 파일 중에서 어느 것이 중요한 것인지 찾아낼 수도 없을 거예요." "그럼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가 서 로 연인 사이가 되는 수밖에 없어요." 순간 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슨 뜻이죠?" "리, 잘 들어요. 그래야 내가 당신의 직장에 갈 수가 있어요. 당신이 파일에 접근하 면 내가 그걸 읽는 거요. 나란히 앉아서 컴퓨터를 보다가 누군가 들어서면 난 얼른 당신 에게 몸을 기대고 키스를 하는 거요. 그럼 그 사람은 당황해서 나가 버릴 거요." "하지만 연인 사이가 그렇게 빨리 될 수 있단 말예요? 아무도 믿지 않으려 할 거예요 . " "텔레비전 드라마에선 항상 그래요. 더구나 키스하는 모습까지 목격하게 되면 누구든 믿어 줄 거요." "대단히 비현실적인 생각인 것 같군요." 그녀는 차문을 열고 운전대 앞에 앉았다. "타세요. 내가 호텔까지 태워다 줄 게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옆자리에 앉았다. "내일 점심시간에 내가 점심을 준비해 가면 어떻겠소? 난 일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의 사려깊은 연인이 될 거요. 우린 파일을 찾아 보면서 다정하게 식사를 하는 거 요. 어때요?" "좋아요. 마지막 면담이 11시 30분쯤 끝나게 될 것 같군요. 11시 45분에 오면 어때요 ?" "그건 데이트예요.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소?" "키보드에 흘리지 않는 것이라면 아무거나 좋아요. 호텔 앞에서 내려 드릴까요?" "괜찮다면 내 차 앞에서 내려 줘요. 골목에서 벗어난 차고에 있어요. 저기서 좌회전 해줘요." "어디 가실 건가요?" "잠시 드라이브를 하고 싶소." 리는 그가 자신의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걸 바라보다가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 녀의 차가 출발하자 알렉스는 즉시 리의 피에로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집까지 쫓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건 여자가 아주 독립적인 여자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 이다. 그녀가 칼데코트 터널에서 살해됐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그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의 뇌리 속엔 창백한 얼굴로 죽어가던 샐리의 얼굴과 잔해만 남은 자넷의 차 사진이 어른거렸다. 이제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는 없다. 리의 생명을 절대로 위험 속에 빠뜨릴 수는 없다. 알렉스는 그 매력적인 인사부장에게 자신이 강하게 끌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 감정이 아무리 강렬하다고 해도 그는 그걸 뿌리쳐야 한다, 그와 리는 아주 위험한 적 과 대항해서 싸우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항상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만 한다. 8 11시 30분쯤 리는 세 번째 면접을 끝냈다. 지원자가 막 나갔을 때 마지의 책상 위에 전화 벨이 울렸다. 그리고 수화기를 든 마지가 바라보았다. "리, 급한 전화예요. 시애틀 경찰국의 로저 모리스 경위인데 햄의 비서가 이쪽으로 전 화를 돌려줬대요. 챔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아요. 경위는 아주 다급한 일이라고 하는 군요." "내 사무실로 연결해 줘요. 거기서 받겠어요." 리는 급한 걸음으로 책상 앞으로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당신 회사의 식품 중에 이상하게 변조된 게 있어요." 모리스 경위가 말했다. 순간 리의 가슴이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자넷이 경 고했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녀는 애써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상품이 어떻게 변질됐다는 건가요? 누가 그 음식을 먹고 아프기라도 한 건가요 ?" "당신 회사 제품의 '쿨 앤드 라이트' 아이스 티에서 유해성분이 검출됐소. 340g짜리 유리병에 든 겁니다, 한 남자가 그걸 먹고 발작을 일으켰어요. 상태가 아주 위독해요 . 우린 지금 다른 병도 수거해서 성분을 분석하고 있는 중이오. 오늘 오후에 언론에 이 사실을 알릴 작정이오. 우선 책임자가 이리로 와줬으면 좋겠소." "알겠어요. 우선 병의 하단에 적혀 있는 번호를 알고 계세요? 네, 됐어요. 전화를 걸 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다음 비행기로 그곳에 가겠어요." 전화를 끊고 리는 컴퓨터 쪽으로 가서 그 유해식품을 만들어낸 공장을 확인해 보았다 . 그리고 몇 통의 전화를 건 다음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의 타코마 공항까지 가는 비 행기표를 예약했다. 그리고 햄과 법률 부서에 전자통신으로 다급한 상황을 알려 놓았 다. 핸드백을 들고 나와서 잠시 마지의 책상 앞에 멈춰섰다. "오후 약속을 취소할까요?" "그렇게 해줘요." 그리고 리는 알렉스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11시 35분밖에 되 지 않았다. "맙소사!" 마지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알렉스 때문이에요. 내... 친구, 그가 10분쯤 후에 이곳에 점심을 갖고 올 거예요. 내 사무실에서 함제 식사를 하기로 했거든요. 하지만 기다릴 수가 없군요. 샌프란시 스 코 국제 공항에서 50분 후에 비행기가 뜨게 되어 있어요. 난 그 비행기를 타야 해요. " "알렉스? 그렇다면 L.B. 알렉산더를 말하는 건가요? 월요일에 일자리를 지원했던... " 비서가 놀라는 걸 보고 그녀는 얼른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래요. 우린 그동안 서로 친하게 됐어요." 마지의 눈동자가 관심있게 빛났다. "마지, 그에게 내가 급히 떠난 이유를 설명해 줘요." "물론 그러겠어요. 달리 개인적으로 전할 말은 없나요?" "개인적으로? 그게 무슨 뜻이죠?" "보고 싶다든가, 아니면 사랑의 키스를 보낸다든가..." 리는 애써 웃음을 참아냈다. "마지, 그러다간 해고당하겠어요." "말도 안돼요. 내가 없인 부장님은 꼼짝도 못할걸요. 그럼 내일 만나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해 줘요." 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갔다. 데니스 월리엄스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마자 깜짝 놀랐다.L. E. 알렉산더가 거기 서서 리의 비서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사로잡혀 그녀는 조심스럽게 칸막 이 쪽으로 다가가 말을 엿들었다. "우린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그녀가 떠난 겁니까?" "저도 알고 있어요, 알리산더 씨, 리가 점심 약속이 있다고 그러더군요. 하지만 갑자 기 급한 일이 생겨서 공항에 갔어요." "이해할 수가 없군요. 일 때문에 사무실을 벗어날 수가 없다고 했는데... 정말 그 일 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업무 때문입니까?" "알렉산더 씨, 당신이 실망했다는 건 알 아요. 하지만 리는 분명히 업무상 떠난 거예요. 오늘밤에 집에 도착할지도, 내일 도 착 할지도 몰라요. 틀림없이 연락을 해올 거예요." "마지, 내게 모든 걸 말해 줘요." "난 모두 털어놓았어요." "어디로 연락을 해야 그녀와 통화할 수가 있나요?" "거기까진 모르겠어요." "도대체 급한 일이라는 게 뭡니까? 그걸 말해 줘요." "그럴 수는 없어요. 당신은 배리푸드의 직원이 아니니까..., 제발 이해해 줘요. 회사 방침상 당신에게 업무내용을 밝힐 수가 없어요." "그럼 그녀의 사무실에 들어가서 이 장미라도 두고 나오면 안될까요?" "내가 꽃병에 꽃아 놓겠어요. 내게 주고 가세요." "그럼 이 음식도 가지세요. 바닷가재를 좋아하시길 바랍니다." 그의 음성은 화가 난 것처럼 들렸다. 알렉스가 비서의 사무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로 들어가자 데니스는 좀더 뒤로 물러섰 다. 마지가 큰소리로 불러댔다. "알렉산더 씨, 정말 미안해요. 이해해 주세요. 리가 알면..." 하지만 알렉스가 탄 엘리베이터는 곧 떠나 버렸다. 데니스는 잠시 그자리에 서서 생 각 에 잠겼다. 리가 정말 그 잘생긴 남자에게 빠져 버렸을까? 그래, 리는 그 남자의 학 구 적인 매력에 이끌렸을 거야. 그런데 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데니스는 자기가 받 은 편지에 대해서 리와 이야기할 생각이었지만 이제 그녀는 그게 경솔한 짓이 아닐까 하고 회의가 생겼다. 아무튼 리는 자리에 없다. 그리고 모든 게 아주 위태로운 상황 이 었으므로 누군가와 상의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햄도 출장중이었다. 그렇다면 단 한 가지 방법뿐이다. 그녀는 실험실로 걸어갔다. "조지, 그는 리와 아주 친한 사이예요. 알렉산더라는 사람은 자넷 호머의 장례식에도 왔었어요. 왜 그가 자넷의 일자리에 지원했을까요? 혹시... " "그래요, 데니스. 사실 그 사내가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난 그를 의심했어 요. 그를 세미나에서 본 기억이 난다고 말했잖소? 이런 문제를 스티브와 의논해 보는 게 어때요? 알렉산더를 의심하고 있다면 스티브의 정보망이 제구실을 하게 될지도 몰 라요." "그럼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난 나대로 일이 있어요. 자, 이제 스티브에게 가봐요. 난 할 일이 있으니까." 조지가 오만한 어조로 말했다. 데니스는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알렉산더를 그냥 돌 아 다니게 놔두는 건 너무나 위험한 일이다. 스티브는 뭔가 조처를 취하려 할 것이다. 그 러나 그에게 알리지 않으면 그녀는 혼자서 해내야 한다. 알렉스는 호텔 방의 침대 위에 누워서 치킨 조각을 씹고 있었다. 그는 배가 고팠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하지만 실망감 때문에 음식은 쓰기만 했다. 실망감 과 더불어 리에 대한 걱정도 커져만 갔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확인을 해봤지만 그 녀가 비행기를 타고 나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6시까지 기다려 봤지만 그녀는 사무실에도 돌아오지 않았고, 베니시아의 집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 의 차도 차고에 없다. 결국 10시 경에 그는 단념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그는 문득 월리 와 의 약속을 떠올렸다. 그는 지체 없이 상관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4번째 벨이 울린 뒤 에야 졸린 듯한 음성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월리. 알렉스예요." "맙소사, 알렉스. 새벽 2시에 사람을 깨우면 어떻게 해? 이곳과는 3시간이나 차이가 난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군!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냐?" "저는 무사해요." "좋아. 사실 자네 전화가 반갑긴 해. 오늘 오후에 장거리 전화를 받고서 자네가 연락 을 해오길 기다리던 참이었어." "무슨 전화죠?" "누군가가 L.E. 알렉산더가 식품의약국에서 일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했어. 누가 자네를 조사하고 있는 거지? 음성이 착 가라앉아 있어서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구분할 수가 없더군."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상대방이 신원을 밝히지 않았기에 난 결코 자네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지 . "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게 누구인지 알고 싶군요." "도대체 자네가 무슨 짓을 했기에 뒷조사를 하려는 사람이 있는 거지?" "아마 내가 살인자를 불편하게 한 모양입니다." "그래, 뭘 좀 알아낸 거라도 있나?" "극히 일부만 알아냈을 뿐입니다. 자넷은 실험실에서 회사 모르게 일하고 있었어요. 아마도 그녀는 뭔가를 알아낸 모양입니다." "그럼 불법 첨가물 같은 건가?" "그럴 가능성도 있어요." "그 회사의 인사부장과도 이야기를 해봤나? 그는 믿을 만 하던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는데, 믿을 수 있었어요. 그녀는 자넷의 친구예요. 그녀 역시 목표물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린 함께 이 사건을 파보기로 했어요. 그런데..." 하지만 그는 곧 말을 끊고 말았다. 11시 텔레비전 뉴스에 리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 다. 그녀의 앞엔 마이크가 있었다. "월리...지금은 말할 수가 없어요. 내일 다시 전화를 걸겠어요." 그는 황급히 수화 기를 내려놓고 텔제비젼의 볼륨을 높였다. 그녀는 텔레비젼 카메라 앞에 똑바로 서 있 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는 안도감과 행복감을 동시에 느꼈다. 여태껏 걱정 을 하고 있었다. 기자가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미즈 리, 당신 회사의 아이스 티에서 발견된 '할로페리돌'이란 약품은 어떤 겁니까? " 배리푸드의 상품에서 약품이 발견됐다고? 그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건 식품의약국에서 강력한 진정제로 분류된 약품입니다. 비정상적인 행동이나 사 고 를 조절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녀의 어조는 명료하고도 침착했다. "그런데 어떻게 '할로페리돌'이 당신 회사의 이이스 티에 들어가 있을까요?" "경찰은 문제의 병이 선반에서 수거되어 봉인이 뜯기고 약품이 첨가됐다고 믿고 있어 요. '할로페리돌'의 가루성분 잔유물이 남아 있는 아이스 티에서도 발견됐어요. 선반 에 있던 다른 병들은 모두 손댄 흔적이 없으며 내용물에 다른 불순물도 섞이지 않았 어 요." "경찰은 정신병원에서 최근에 퇴원한 한 남자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 하 면 그는 식품점 주인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그가 이 약에 중독 되어 있을까요?" "네, 경찰은 방금 전에 그 사실을 발표했어요. 혐의자의 의사는 그가 그 약을 사용하 고 있다고 말했어요. 경찰이 그를 의심하는 이유 중엔 그것도 포함될 거예요." "그게 사실이라면 왜 배리푸드는 아이스 티를 모두 회수하고 있을까요?" 순간 리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휘둥그래졌다. "그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것입니다. 경찰의 추정이 사실과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 으니까요." "하지만 그 상품을 수거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 텐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 리는 여전히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우리의 고객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보다는 돈을 잃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어요?" "희생자는 어떻습니까?" "조셉 클레어먼트 씨는 발작증세로 고통을 받았어요. 방금 병원에 갔다오는 길입니다 . 의사는 그가 일단 위험상태는 벗어났다고 했어요. 그러나 며칠 더 살펴봐야 한다는군 요." 알렉스는 경탄하는 시선으로 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거침없고 아주 솔직했다. 그리 고 회사의 입장을 훌륭하게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녀가 말한 대로 회사는 아 무 죄가 없는 것일까? 그리고 회사는 왜 인사부장에게 그 일을 맡겼을까? 그 순간 전화 벨이 울렸다. 상념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알렉스, 당신이에요?" "리, 왜 좀더 일찍 전화하지 않은 거요?" "미안해요.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서... 난 지금 시애틀에 있어요." "나도 알아요. 방금 11시 뉴스에서 당신을 봤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시애틀에 간 거 요? 나와 함께 점심시간에 파일을 점검하기로 해놓고서... " "마지가 설명해 주지 않던가요?" "마지는 그저 당신이 급한 일로 출장중이라고만 했어요. 무슨 일로 어디에 갔는지는 말할 수 없다고 했소. 그런데 인사부장이 기자회견까지 해야 한다니 이해할 수가 없 어 요." 리의 음성에 노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알렉스, 난 배리푸드의 인사부장일 뿐만 아니라 홍보부장이기도 해요." "그래요? 언제부터?" "월요일 오후에 사장에게서 명령을 받았어요. 달갑진 않았지만 배리푸드의 상품에서 약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 일이 자넷과도 관련이 있 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요?" 알렉스의 음성엔 아직도 가시가 남아 있다. "그만해요, 알렉스! 난 어린 아이가 아녜요. 당신의 간섭을 받지 않고도 난 지난 몇 년 동안 내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어요!" 알렉스는 잠시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미안해요, 리." 그가 좀더 자연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데 뭔가 관련이 있는 거요?" 리의 음성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아니예요. 경찰은 그걸 단순한 사고로 믿고 있어요.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난 연구 실 의 화학자들과 함께 있었어요. 그들은 그 상점과 다른 상점의 병을 수거해서 개봉했 어 요. 그들도 배리푸드 공장에서 변조된 게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병 제조부서도 검색을 하도록 요청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었어요." "그것뿐이오?" "그래요. 알렉스, 왜 그렇게 불안해하는 거죠?" "리, 미안해요. 하지만 난 이곳저곳으로 당신을 찾아다녔어요. 어제 당신의 생명을 위 협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혹시 당신이 ....." "알렉스, 미리 전화를 하지 않아서 미안해요. 사과를 해야 할 쪽은 나예요." 그녀의 말에 알렉스의 마음이 훈훈해졌다. "리, 이제부턴 나에게 모든 상황을 알려 줘요. 이 일이 끝나고 당신 곁에 가까이 있 을 때까진 그렇게 해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리가 대답했다. "좋아요. 내일 2시경엔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사무실엔 나가지 않고 곧장 집으로 갈 거예요. 터스틴 코트 105번지예요. 4시 30분 경에 집으로 와주시겠어요?" "무슨 일이 있는 거요?" "그래요. 티버론에 있는 햄의 집에서 6시에 파티가 있어요. 월요일에 데니스, 존과 함 께 그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을 텐데요?" "배리푸드의 창사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 말이오?" "그래요. 금요일엔 휴무예요. 배리푸드 창사 25주년이죠. 목욕일 밤의 파티에 나가면 여러 가지 정보를 들을 수가 있을 거예요. 화학자들이 모두 그곳에 모이거든요." "좋아요. 난 특히 팸 헤이어와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그녀가 도움이 되는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그녀도 자넷의 사건에 연루돼 있을지도 모르죠. 왜 자넷이 그녀에게 배리푸 드 에서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지 궁금해하고 있었거든요."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소. 그리고 그녀는 당신을 의심하는 눈치였소. 그렇다면 그 여자는 나도 믿지 않을지도 몰라요." "당신의 적이 곧 내 적이란 말이군요. 고마워요." 그녀의 음성엔 졸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내일 4시 반에 만납시다." "잘 자요. 좋은 꿈 꾸고... " 그는 행복한 마음이 되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차가운 초면에 강한 식욕을 느 꼈다. 리는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알렉스를 5시까지 기다렸다. 그동안 그의 호텔에 3번씩 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녀는 좀 지 쳐 있는 상태였다. 아주 긴 하루였다. 다행히 그 정신질환자는 아이스 티를 그날 아침에 변조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희생자는 거의 완벽하게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배리푸 드도 온갖 비난의 화살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리는 알렉스에게 그런 사실을 모두 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 고 그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 볼까 하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수화기 저편에서 알렉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780번 고속 도로에서 타이어가 펑크 났어요. 미리 전화를 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지 리를 잘 몰라서 공중전화를 찾느라고... " "지금 어디 있는 거예요?" "'7-일레븐'이라는 가게 앞에 있어요. 6번가라고 써 있는 경사로예요." "알겠어요. 5분 후에 가겠어요." "차를 고칠 정비소를 찾아야 해요. 좀 알려 주겠소?" "괜히 시간낭비할 것 없어요. 내가 데려다 주겠어요. 좀 기다리세요." 5분쯤 후에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멋진 정장 차림으로 8살쯤 돼보이는 2명의 소녀 들과 함께 얽힌 연실을 풀고 있었다. 리를 보자 그는 아쉬워하는 소녀들에게 작별인 사 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당신에겐 얽힌 연실을 풀어 줄 일이 없겠군요?" 그가 농담처럼 물었다. "이젠 연을 갖고 놀 나이는 지났잖아요?" "하지만 마음이 얽힌 것도 같아요. 당신은 결혼한 적이 한 번도 없죠?" 그건 대단히 직설적인 질문이다. "그래요." "결혼에 관심이 없소?"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어요." "아무도 당신의 마음을 두드리지 못했단 말이오?" 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한두 번쯤은 있었을지도 모르죠. 몇 년 전 어떤 남자와 1년쯤 데이트를 한 적이 있 어 요. 그와 끝났을 때 난 좀... 마음이 복잡했어요." "무슨 일이 있었소?" "그저 작은 문제였을 뿐이에요. 그는 매우 내성적인 남자였어요. 그래서 내가 우리의 장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오랫동안의 약속은 믿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 는 모든 관계를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했어요. 그의 상관이나 의사, 개, 그 리 고 나까지도..." 알렉스가 웃었다. "결국 나 자신에 대한 회의를 느꼈죠. 어떻게 상대방을 그렇게 모르고 데이트를 해왔 는지 어이가 없었으니까요. 어쩌면 나 역시 그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 았 는지도 모르죠." "그건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았군요. 결국 당신이 영원한 구속을 원한다면 그 역시 같 은 걸 원해야 했어요. 사람은 주는 것만큼 돌려받을 수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속았다는 느낌이 들게 될 거요." 리는 그의 이해를 받고 있다는 게 기분이 좋아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비소에 왔을 때 수리공은 차를 끌어다가 타이어를 수리한 다음 그가 묵고 있는 곳 까 지 갖다 주겠다고 말했다. "그럼 내 차를 타고 가기로 해요."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들이 이제 더이상 당신 차를 어떻게 하진 못할 거요. 그리고 아무래도 내 렌터 카보다야 이 차가 더 잘달릴 거요. 더구나 난 그 차를 아주 험하게 썼어요. 내 일 은 반납하고 다른 걸 빌려야겠어요." 리는 다른 입구로 해서 780번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어느 새 알렉스의 고장난 차 뒤 쪽 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알렉스가 고속도로의 옆쪽을 가리켰을 때 그녀는 속력을 줄이 기 시작했다. "저기 있어요. 짙은 갈색 크라이슬러가... "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는 불꽃과 함께 귀를 찢는 듯한 폭음을 들었다. 그녀는 급 히 브페이크를 발았고 그 바람에 두 사람은 차창 앞으로 몸이 쏠렸다. 바로 그 순간 알 렉 스가 가리키던 차가 그들의 눈앞에서 폭발했다. 9 "폭발은 고의적으로 설치된 게 아닌가요?" 리가 물었다. 베니시아 경찰의 한 시간에 걸친 심문이 끝난 후에도 알렉스의 표정은 계속 굳어져 있 다. "아마 경찰은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을 거요. 아무튼 나는 신원확인이 끝날 때까지 이 곳에 있어야 한다니까 당신은 어서 파티에 가도록 해요." "당신을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어요." 그가 비로소 미소지었다. "렌터카 중개소에 전화를 걸었소. 그들이 차를 보내 주겠다고 했어요. 아마 그들은 그 사고가 회사의 잘못일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소." "그렇지 않은가요?" "경솔한 결론은 내리지 말기로 합시다. 아마 휘발유가 새어나간 것 같아요. 아무튼 사 람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오." "경찰 조사가 끝나고 렌터카가 오면 파티에 와주실 건가요?" "그래요. 그곳의 주소와 약도를 그려 줘요. 곧 뒤따라가겠소. 하지만 당신 혼자 보내 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그녀가 머리를 저었다. "그 파티에서 뭔가 알아낼 수 있을 지 모르니 나라도 먼저 가 있는 게 좋겠어요. 당 신 은 뒤따라 오세요." "조심해요, 리. 내가 갈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말아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알렉스가 그녀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그의 입술은 거의 그녀 의 입술에 닿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가벼운 키스가 그녀의 온몸에 전율을 일으키게 한 다. 그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연습을 해본 것뿐이오." 리가 햄의 티버론 집에 도착할 무렵 그곳엔 배리푸드의 샌프란시스코 사무실에서 온 직원들로 가득 찼다. 차도 언덕 아래에 세워 두고 걸어가야 할 정도였다. 집안에 들 어 섰을 때 실내는 알코올과 커다란 음악소리, 그리고 담배 연기로 인해 자욱했다. 모두 들 디너 재킷이나 이브닝 드레스에 술이나 전채요리를 쏟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 세 운 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리가 아는 사람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 홍보부장님이 아니십니까?" 존 카스테어스가 다가 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어제 텔레비전을 봤어요. 썩 잘하더군요. 차라리 인사부장 자리를 포기하고 아예 흥 보부 일에 전념하는 게 어때요?" "존, 당신은 아부를 제대로 할 줄 아는군요. 아무튼 고마워요." "술을 갖다 주겠소. 뭘로 들겠소?" "백포주가 좋겠어요." 술을 가지러간 존을 기다리고 있는데 조지 펙이 다가왔다, 크고 앙상한 몸매에 그의 디너 재킷은 너무 컸다. 기혼자는 배우자를 동반하기로 되어 있건만 그의 아내 모습 은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 그의 아내는 과음을 즐기고 다른 여성들에게 지나치게 친절 한 남편을 오늘은 방출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리, 나와 춤을 추겠소? 화학에 관한 토론을 합시다." "난 화학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어요. 그리고 아직 아무도 춤을 추지 않잖아요?" "우리가 시작하길 기다리고 있는 거요. 그리고 화학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아요. 식품 혼합물에 관한 거니까. 틀림없이 당신의 호기심을 자극할 거요." 그의 떠보는 듯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지, 잊어버려요." "아, 당신에겐 알렉스라는 애인이 있다는 걸 잊었군요? 그런데 그 화학자는 식품의약 국의 어떤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거요?" 리는 애써 놀라움을 감추었다. 공포심을 느껴선 안된다. 그의 말에 흔들리고 있다는 걸 보여 줘선 절대 안돼.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조지, 목소리를 낮추는 게 좋겠어요. 햄은 직원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걸 참을 수 없 어하니까." 그는 얼굴에 오만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조지가 당신 기분을 상하게 한 거요?" 어느새 술잔을 갖고 온 존이 물었다. "그렇게 보였어요?" 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좀 지나칠 때도 있긴 하지만 천재형은 흔히 괴팍스럽다고 하잖아요?" "정말 조지가 천재라고 생각하세요?" "햄은 항상 그를 칭찬해요. 그는 원래 칭찬에 인색한 사람인데.... 아무래도 조지의 최신 창작품이 성공을 거둔 모양이오." "최신 창작품?" 순간 존의 시선이 가면 같은 표정 뒤에서 반짝 빛났다. "리, 당신도 알다시피 신상품 말이오." 그들은 테이블에서 벗어나 근처의 의자에 앉았다, 이제 리는 더이상 음식을 먹는 일 에 는 관심이 없었다. "당신은 벌써 상품에 관한 이야기를 두 번째 하고 있어요. 도대체 그게 뭔가요?" 하지만 존은 멍한 시선으로 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난 알고 싶어요." "데니스가 예산문제로 돌아다니는 걸 본 적이 있소?" "그 예산문제가 신상품에 드는 비용이었군요?" "그런 것 같아요." 존이 책망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지나치게 보챈다고 생각하 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곧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린 수요일에 만났소. 물론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상세한 건 철저히 보안유지가 되 어 있어서 내가 그 돈을 할당받게 되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소." "언제쯤 정보를 얻게 될까요?" "월요일쯤이 될 거요. 데니스가 전화하겠다고 했어요. 어떤 시험결과의 일부가 입증 될 거요. 사실 나도 빨리 알고 싶어요. 다음주엔 시즌이 끝나기 전에 스키를 타러가고 싶 거든요. 그런데 당신의 표정은 뭘 의미하죠?" "당신은 정보를 캐고 있는데, 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의미해요." "하지만 당신은 지난 금요일에 살해된 자넷 호머를 알고 있잖아요?" 그의 질문에 리는 놀라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요. 자넷과 난 친구였어요. 그런데 그게 이 신상품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오, 무슨 관계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저 난 당신을 장례식에서 봤기 때문에 호기심 을 느꼈던 것뿐이에요. 당신과 그 지원자가 아무래도 공적인 관계처럼 보이지 않았거 든요." 리는 존의 관찰력에 놀랐다. 하지만 더이상 그 때문에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다. "알렉스는 자넷이 학교 동창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장례식에 참 석 한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자넷을 알고 있나요?" "우린 3년 전 배리푸드에서 처음 일할 때 만났어요. 난 그녀가 태호 호수에서 몇 차 례 스키를 타는 걸 봤어요. 그녀는 아주 능숙한 솜씨더군요. 하지만 남편은 좀 서툰 것 같았어요." "그녀가 임신하기 전의 일인가요?" "그래요. 2년 전쯤 배리푸드에서 온 사람들은 별장을 함께 썼어요. 당신도 스키를 타 는 걸로 알고 있는데 계시판에 공고가 붙은 걸 못 봤어요?" "봤어요. 하지만 난 그때 스키를 탈 줄 모르는 사람과 교제중이었어요. 그를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끌어들이고 싶지가 않아서 가지 않았던 거예요." "스키를 잘 타요?" "타긴 하는데 체계적인 수업을 받진 못했어요." "그럼 다음 번엔 나와 함께 갑시다. 내가 산을 타고 내려 오는 걸 가르쳐 주겠소. 난 자넷도 가르쳤는데, 끝날 무렵엔 아주 훌륭한 솜씨를 보여 줬어요." "자넷을 가르쳤다고요? 두 사람이 그렇게 친한 줄 몰랐어요." "배리푸드의 예쁜 여자들은 모두 가르쳤죠." 그의 말은 농담 같았지만 왠지 그녀를 괴롭히는 게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넷을 본 게 언제였나요?" "일주일 전 조지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들렀을 때 봤어요. 그녀는 무슨 일엔가 열 중 하느라고 차 한잔 마시러 오지 않더군요. 우린 마켓 가 사무실엔 자주 들르지도 못해 요. 아시다시피 우리 경리 팀은 지금은 부시 가에 있으니까요." "아참, 당신 팀은 옳겨 갔었군요. 그곳에 간 지는 얼마나 됐나요?" "6개월 됐어요. 햄은 회사를 인수하고 2달 후에 우릴 내보냈어요. 우리가 그의 소중 한 실험실에 너무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우리의 호흡이 견본을 오염시킨다 고 생각했나 봐요." 존의 음성에 빈정거림이 담겨 있다. 경리부장과 사장 사이엔 아무런 애정도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햄이 몇 분 전부터 눈에 띄지 않는군요. 그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잘 모르겠어요."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리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곳엔 스티브 건의 굳 은 표정이 있었다. "사장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해요." "나를요?" "서재에 계시오. 내가 안내하죠." 스티브의 안내로 서재 안에 들어서자 해밀턴이 서 있다. 하얀 재킷과 주름잡힌 셔츠 가 그의 숱많는 붉은 머리와 깊은 눈동자를 강조해 준다. 월요일 오후 이후로 그를 처음 만난 셈이다. "안녕, 리, 와줘서 고맙소. 자, 여기 앉아요. 당신에게 할 얘기가 있으니까." 그녀는 커다란 의자에 불편하게 앉았다. 하지만 그는 빨간 와인 잔을 든 채 계속 서 있다. "난 여기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조금 놀랐소.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졌더군요. 그들에 게 상황을 아주 정확히 전달했어요. 당신이 그렇게 문제를 유연하게 해결할 능력을 갖 고 있는 줄 몰랐소. 당신은... 훌륭했어요. 정말 훌륭했소."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아무튼 이번 사건이 전화위복이 됐는지 모르겠소. 이번 일을 계기로 당신을 더욱 신 뢰하게 됐으니 말이오. 당신의 답변은 흠잡을 수 없을 만큼 매끈하고 효과적이었소. 텔레비전에 아주 잘 적응하더군. 예전 사장은 당신이 훌륭한 직관력을 갖고 있다고 했 는데 이제야 그 말이 옳다는 걸 알겠소." 그의 칭찬을 기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왠지 마음이 무거웠다. 어쩌면 이 거친 남자 에 게 해고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돼가고 있 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알아 둬야 할 것도 있었소. 예전 사장이 나에게 경고해 주지 않은 것 말 이오." 조그만 음성이 그가 다시 계략을 부리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리는 그의 손 아귀에서 놀아나고 싶진 않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몸을 일으켜서 사장을 향해 자신있 게 미소지었다. 하이힐까지 신었기 때문에 사장의 큰 키가 그리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햄, 뭘 발견하셨나요?" "당신이 스스로 실패의 함정으로 빠져들었다는 걸 알게 됐소. 그것도 엄청난 기회의 문을 들어섰을 바로 이 시기에..." 가슴에 통증과도 같은 매듭이 얽혀들었다. 하지만 그 남자 앞에서 당황한 모습을 드 러 낼 수는 없다. 지금 흩어진 모습을 보이는 건 바로 참담한 패배를 뜻하는 것일 뿐이 다. "마치 내가 고의로 실패를 자초한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요?" 그가 리의 질문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리의 치열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마음대로 요리하고 있다. "리, 나에게 묻치 말아요. 적과 어울린 쪽은 바로 당신이었으니까." "그게 무슨 뜻이죠?" 그의 미소가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무슨 뜻인지 잘 알 텐데... 난 배리푸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두 알고 있소. 나 에게 그 관계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소?" 그는 알렉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섣부른 가정을 할 필요는 없다. 괜히 불필요한 정보만을 노출시키는 결과가 될지도 모 르니까. 그녀는 다시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햄, 우습군요. 누가 적이라는 거죠? 그리고 무슨 관계를 말하는 거예요?" "그 알렉산더라는 친구에게 정보를 넘기지 않았다고 말할 셈이오?" "알렉스가 적이라고요? 그리고 알렉스에게 정보를 넘겼단 말인가요?" 그녀는 최대한 놀란 것 같은 음성을 짜냈다. "햄, 그게 무슨 정보라는 건가요? 우리의 직원 숫자와 그들에게 지급되는 급료 같은 거 말인가요?" 리는 햄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지켜보았다. "그렇소. 당신이 갖고 있는 정보는 그리 세부적인 것은 아니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사내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요?" "이봐요, 햄. 나 역시 보통여자들처럼 잘생긴 남자에게 민감한 여자예요. 알렉스는 아 주 잘생긴 남자예요. 하지만 그가 배리푸드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그 가 괜한 의심을 받을 필요는 없을 거예요. 다시 말해서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리는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잠깐 기다려요." 그녀는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 냉정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햄이 가까이 다가 와서 섰다.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한 건 당신 잘못이오. 난 직원들에 관해 모두 알고 있어 야 하오. 그게 내 일이니까. 그런데 그 알렉산더란 사람은 왜 자넷의 장례식에 나타 난 거요?" "그건 그가 자넷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함께 대학을 다녔다고 했어요." "그가 어디 출신인지 알고 있소." "물론이에요. 그의 신청서를 갖고 있으니까요. 그는 동부 출신이에요." "틀렸소, 리. 그는 식품의약국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의 손이 마치 먹이를 움꿔쥐듯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가 식품의약국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소?" 갈색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는 동안 그녀는 떠오르는 공포심과 치열하게 싸워야 했 다. "그는 부장이에요." "그렇다면 식품의약국의 부장이 배리푸드의 연구직에 적합하지 않단 말이오?" 리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공격을 가하는 방 법 밖에 없어. "물론 그는 자격이 넘쳐요! 우리가 그에게 이사비용까지 지불하고 우리의 연구방법을 모두 가르쳐 주면 그는 6개월쯤 지나서 우리보다 더 많은 급료를 제시한 경쟁업체로 옮겨갈 거예요. 물론 우리의 비밀도 모두 갖고 가겠죠. 내가 회사를 그런 위험 속에 빠뜨릴 거라고 생각하세요?"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햄이 팔을 놓았다. 화가 나 있던 그의 표정이 혼란으로 변해갔 다. "물론 당신 말이 옳아요. 그를 채용하는 건 잘못일지도 모르지." 리는 다시 돌아서 서 문을 열었다. 그러나 다시 햄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리, 나와 한잔 합시다. 당신이 진심으로 회사의 이익을 생각해 주다니 정말 기쁘오. 그런 의미에서 축배를 듭시다." 하지만 그 남자와 축배를 들고 싶진 않았다. "다음에 기회가 있을 거예요." 그녀는 재빨리 문을 닫고 나와 버렸다. 리는 햄이 따라오기라도 할 것처럼 엘리베이 터 쪽으로 달려갔다. 일층에 내려왔을 때도 그녀의 온몸은 심하게 떨렸다. 리는 붐비는 파티의 인파 속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마침 오른쪽에 밖으로 향하는 문이 있는 걸 발견한 리는 그 문을 열고 나갔다. 아래에 금문교와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이 펼쳐졌다. 싸늘한 바람 때운에 그곳에선 혼 자 있을 수가 있었다. 서서히,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새삼 공기가 차갑게 느껴져서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어둠 속으로 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맙소사, 스티브! 깜짝 놀랐잖아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거예요?" "야경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서... " 그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서 연기를 뿜어냈다. 경비실장의 말에 묘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도 같았지만 리는 그냥 무시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스티브, 당신이 담배를 피우는 걸 몰랐어요." "난 당신이 이상한 남자들을 선택할지 몰랐소." 더이상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가 않았으므로 그녀는 스티브를 지나쳐 문 쪽으로 걸어 갔 다. 하지만 그가 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당신을 이용하고 있어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알렉산더. 자넷 호머의 자리에 지원하고 그녀의 무덤 위에 꽃을 놓던 사내 말이오." "어떻게 알렉스가 날 이용할 수 있다는 거죠?" "그는 배리푸드를 파괴하기 위해 온 사람이오. 그는 당신의 도움을 원하고 있을 거요 . 그는 당신과 사랑을 나누면서도 그 목적을 달성하려 할 거요." 리는 그의 말에 모욕감을 느꼈다. 하지만 어쩌면 스티브가 원하는 게 바로 그것인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발끈해서 화를 내는 건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알겠어요, 스티브. 조심할게요." 그리고 그녀는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다시 한번 그가 앞길을 가로막았다. 이 번엔 그의 손이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러고 그의 음성은 다소 감정적이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요." 그가 더욱 가까이 다가 왔다. 그의 호흡에서 불쾌한 담배 냄새가 났다. 순간 분노가 치밀기 시작했다. "이제 이야긴 끝났어요 조심하겠다고 했잖아요? 어서 팔을 놓아요. 난 안으로 들어가 야겠어요." 그를 물리치려 했지만 그의 힘은 더욱 강하게 조여왔다. 그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스쳐갔다. 결코 기쁨의 미소는 아니다. "걱정 말아요. 내가 따뜻하게 덥혀 줄 테니까." 그가 좀더 가까이 다가왔고 그녀의 분노는 두려움으로 변했다. "팔을 놓으라고 했잖아요!" 그가 다른 한쪽 팔마저 붙잡고 그녀를 끌어당기려 했다. 그가 가하는 힘이 강철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심이 몰려왔다. 그녀는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점 차 그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당신이 저항한다면 더 재미있을 거야!" 그의 말이 비수처럼 그녀를 찔러댔다. 10 어디선가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와서 스티브 건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세웠다. 알렉스의 음성은 차가운 밤에 뜨거운 바람처럼 들려왔다. "그 숙녀는 손을 놓으라고 했을 텐데?" 경비실장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알렉스를 향해 몸을 홱 돌렸다. 그 순간 알렉스는 스티브의 턱을 강타했다. 그리고 스티브가 몸의 균형을 잡기도 전에 그는 다 시 경비실장의 복부와 얼굴을 쳤다. 스티븐는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지고 말았다. 알렉스는 그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서 밖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내려가는 걸 바라 보 다가 리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떨고 있는 여자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 리 곤 머리를 숙여 그녀의 머리 위에 키스했다. "리, 이제 괜찮아요. 그는 갔소." 그녀는 이제 더이상 떨리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무튼 고마워요. 날 구해 줘서..." 그가 미소지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오." "누구에게 구조된 건 처음이에요. 정말 근사했어요." 비로소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감돌았다. "고백할 게 있어요. 나도 예전엔 누군가를 구출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소. 오히려 내 가 기분이 더 좋군요." 이제 그녀의 미소가 더 커졌다. "그를 세게 때렸어요?" "힘껏 쳤소." "잘했어요. 그런데 손은 다치지 않았나요?" 그녀가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나 그의 오른손을 잡았다. 알렉스는 그녀의 손가락 감촉 이 좋았다. "걱정 말아요. 난 대학다닐 때 권투를 한 적이 있어요. 펀치를 먹이는 법 정도는 알 고 있소." "그는 당신을 믿지 말라고 경고하더군요." 그녀가 알렉스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 저속한 인간이 당신을 믿지 말라고 하다니 정말 말도 안돼요." "스티브 건은 얼마나 알고 있었소?"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당신이 자넷의 무덤에 노란 장미를 놓는 걸 보았어요. 조지, 햄, 그리고 존도 당신이 자넷의 친구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당신을 의심하고 있는 거예 요. 그리고 햄과도 바로 그 문제로 언짢은 대화를 나눠야 했어요." "결과는 어떻게 줬소?" "당신의 입사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는 우리가 연인인 줄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런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서 노력했거든요." "그렇다면 안으로 들어가서 그런 인상을 더욱 강하게 심어줘겠군요." 알렉스는 여자를 다시 포옹하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말했다. "그런데 파티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거요?" "아직 안에 들어가지 않았나요?" 리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찻길을 따라 걸어오다가 당신이 그 짐승 같은 녀석과 승강이를 하는 걸 보고 곧장 이 리로 올라왔어요." "당신 말대로 이제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화학자들 틈에 섞여 들면 어쩌면 새 상품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될지 몰라요. 그리고 존 카스테어스는 자넷과 친했던 것처 럼 말하더군요." 그의 음성에 놀라움이 섞여 있다. "신상품? 자넷과 친했다는 거요?" "한번 추적해 볼 가치가 있는 화제인지도 몰라요." 리는 뒤를 돌아본 다음 곧장 파티 장으로 통하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데니스 월리엄스는 리를 찾고 있었다. 너무 늦기 전에 그녀와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데니스는 아까 리가 존과 이야기하는 걸 보고 그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스티 브 가 그녀를 나꿔챘다.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가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던 리가 알렉스와 함께 파티장 안으로 들오는 게 보였다. 데니스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리는 걸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서 로 끌리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건 리를 위해선 정말 나쁜 일이다. 어쩌면 이미 때가 늦 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리가 그 남자와 함께 있는 한 아무 이야기도 할 수가 없다. 데 니스는 몸을 돌려 그들에게서 멀어져갔다. "글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라는 거예요?" 팸이 따지듯 물었다. 지금 알렉스는 몇 분 동안이나 그녀에게 리도 자넷의 친구이며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라 고 설득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 3사람은 커다란 방 구석의 펀치 사발 뒤에 서 있다 . 알렉스 곁에 있는 리의 마음은 한결 편안했다. "자넷이 신상품 개발부서에서 일했나요?" 알렉스가 물었다. 팸이 머리를 저었다. "그렇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8달 동안이나 임신휴가를 가졌어요. 조지가 그렇게 빠 른 시일 내에 그녀에게 새로운 사실을 털어놓진 않았을 거예요." "당신은 신상품에 대해서 들었나요?" 팸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들은 건 없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죠. 데니스 와 스티브, 그리고 존이 최근에 연구실을 부지런히 들락거렸거든요." "하지만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물랐소?" "다른 화학자들도 몰랐을 거예요. 마이클 웨어도 그 문제로 나에게 몇 번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그리고 새로 온 톰도 어느 날 무심코 조지에게 물어 봤었죠. 별걸 다 묻 는다고 호되게 야단만 맞았지만 말예요. 솔직히 말해서 화학자들 중 한 사람이 특별 한 일을 하고 있었다면 아무리 숨기려 해도 표가 났을 거예요. 내 말뜻을 아시겠죠?" "활기를 띠게 된단 말이오?" "그래요. 하지만 유일하게 활기가 넘쳐나는 곳은 조지의 사무실뿐이었어요." "자넷도 그랬나요?" "그렇진 않았어요." "연장근무는 어때요? 자넷이 늦게까지 남아 있곤 했나요?" "그녀는 우리와 함께 5시 30분에서 6시 사이에 퇴근했어요. 하지만 좀 이상하다고 느 낀 적이 있어요." "무슨 일인데요?" "지난주 퇴근 후에 한잔 하러 가자고 했더니 다시 일을 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안된 다 고 했어요." "무슨 일인지 말하지 않던가요?" "아뇨. 난 그저 그녀가 몇 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일이 많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팸은 갑자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을 후회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2년 전에도 자넷은 연장근무를 한 적이 있었어요." 팸이 변명처럼 말했다. "중요한 일을 맡았었나요?" "그...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신은 그녀가 외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잖아요?" 이번엔 리가 다그쳤다. 팸은 이제 더이상 진실을 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눈치였다. "네, 그렇게 생각했 어요." "그럼 그녀의 연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정확히 알지 못해요." "하지만 당신은 알고 있죠?" 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날 밤 마이클 웨어와 나, 그리고 어떤 화학자가 한잔 하러 나간 적이 있었어요 . 마이클이 회사 앞에 차를 세워 뒀기 때문에 그를 회사 앞에 내려 주다가 자넷이 회사 에서 나오는 걸 봤어요. 조지와 함께였어요." "그들이 늦게까지 일을 했다는 건가요?" "조지는 늦게까지 일을 하지만 항상 혼자 일을 했어요. 그는 실제로 실험을 하지는 않 아요. 그는 우리가 한 일을 정리하거나 결과를 분석하는 일을 해요." "우연히 자넷에게서 좀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몇 달 동안 그녀는 신경이 좀 날카 로 워져 있었고 주의가 산만한 것처럼 보였어요. 나에게 며칠간 자기 일을 대신해 달라 고 부탁했고, 혹시 마크가 물으면 함께 영화관에 갔다고 말해 달랬어요." "그래서 거짓말을 해줬나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노, 마크가 물어 온 적이 없었어요." "그럼 그는 알고 있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자넷은 그 외도를 끝냈더군요." "그걸 어떻게 알았죠?" "글쎄요. 어느 날 점심시간에 우린 좀 이상한 대화를 나눴어요. 그녀는 남편이 얼마 나 자기에게 중요한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그런 다음 남편과 태호 호수에서 함 께 주말을 보내기로 했다고 고백했어요. 피임약을 떼고 다시 임신하려고 노력하고 있 다는 말도 했어요." "그래요. 나에게도 일년 반 전에 다시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아무튼 그녀는 목적을 달성했어요. 그후로 3개월쯤 후에 임신중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팸의 음성이 웬지 리에겐 석연치 않게 들려왔다. "아이의 아버지가 마크가 아니라고 생각하나요?" 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조지를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리가 더 파고들려 는데, 갑자기 밴드가 멈추고 햄의 음성이 파티 장 안에 울려퍼졌다. "... 신상품은 혁명적인 것이 될 겁니다! 우린 지난 6개윌 동안 비밀리에 그 일을 추 진해 왔습니다. 3주 전 우리는 조그만 아이오와 도시에서 견본품을 배포했습니다, 이 제 아이오와 사람들의 미각은 1세기 전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발전 해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둬야 합니다, 따라서 그들을 속일 수는 없어요. 그들은 맛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들은 우리의 신상품을 시식한 지 2주일 후에 우리의 식품이 모든 면에 서 경쟁사보다 우수하다고 평가했습니다." 햄의 말에 박수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손을 들어 저지했다. "하지만 그걸로 만족할 수는 없어요. 신상품은 가장 뛰어난 식품이 될 겁니다. 심지 어 는 집에서 직접 만드는 것보다 더 맛이 있을 겁니다. 한 아이오와 농부 가족은 우리 의 냉동 옥수수가 밭에서 금방 따낸 신선한 옥수수보다 더 달다고 말했어요!"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에게 팔 옥수수를 키워서 나중엔 다시 우리의 새상품을 사게 된 다는 뜻입니까?" 리는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이 존 카스테어스일 거라고 생각했다. 햄이 미소지었다. "그럴 겁니다. 그들은 우리 상품보다 더 맛있는 옥수수를 생산해낼 수가 없을 테니까 요." "그럼 그 신상품은 언제 출하됩니까?" 그건 마이클 웨어의 음성이다. "다음주 월요일 제조기법이 엄격한 경호 하에 각 공장으로 전달될 겁니다. 그 즉시 상 품생산에 들어가게 됩니다. 적어도 3주 이내엔 신상품이 선을 보이게 될 겁니다, 그 와 함께 대규모 선전도 시작하게 됩니다." 그가 자신있는 표정으로 마이크를 내려놓자마자 리는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 녀 의 귀에다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건 바로 그녀 자신의 생각이기도 했다. "바로 저거요! 자넷이 우리에게 털어놓으려 했던 게 바로 저것일 거요! 아이오와 농 부 들에게 자신이 생산한 식품을 먹지 못하게 만들 수 있는 신상품이라면 정말 혁명적인 게 틀림없어요! 돈을 끌어모으는 혁명일 거요!" "그래요. 하지만 자넷이 관심을 갖고 있었던 건 뭘까요?" "만약 배리푸드의 상품이 그렇게 우수하다면 경쟁업체는 모두 맥을 못추게 될 것이고 , 배리푸드가 시장을 독점하게 될 거요." "알렉스, 내 생각은 달라요. 전에도 우수상품이 시장에 쏟아진 적이 있어요. 그럼 곧 유사품이 쏟아지게 돼요. 그들은 연구비 부담을 받지 않고도 그와 똑같은 상품을 만 들 어낼 수가 있어요. 그리고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경쟁상태가 다시 이뤄지는 거죠. 따 라서 그런 상품은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아요."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당신 생각이 옳은 것 같소. 만약 자넷이 그 신상품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 건 화학성분에 뭔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 거요. 하지만 나의 상관인 월리엄 핸센은 식품의약국에선 배리푸드의 잘못을 찾아 내지 못했다고 했어요." "그게 무슨 뜻이죠?" "그건 신상품이 기존의 성분과는 다를 뿐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거요. 그 리고 신상품이란 으레 과대광고를 하기 마련이오. 혹시..." "혹시?" "내가 견본을 구해다가. 그걸 시험해 보면..." 알렉스는 다시 팸 헤이어에게 몸을 돌렸다. "팸, 정말 자넷이 이 신상품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했나요?"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뭔가 걱정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어요. 그녀는 그걸 숨기려고 했지만 뭔가 괴 로워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어요. 지난 금요일 아침에도 한 시간 동안이나 작업실을 떠나 있었어요.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몹시 화가 나 있는 것 같더군요." "이유를 물써 봤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어요. 아마 개인적인 문제였던 것 같아요." "팸, 됐어요. 너무 많은 질문을 한 것 같군요. 당신이 알려준 정보가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소. 하지만 이 신상품이 자넷과는 아무 관련이 없을 가능성도 있어요." "월요일에 알아보도록 하겠어요." "이제 그만 잊어요. 진심이오." 알렉스가 말했다. 바로 그 순간 존 카스테어스가 알렉스의 어깨 뒤로 스쳐갔다. 리는 대화에 열중해 있 었기 때문에 그제서야 그를 발견 했다. 그녀는 급히 알렉스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존 카스테어스가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햄에게 갔다올 동안 잠 시 팸과 날씨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어요. 금방 돌아올게요." 알렉스는 그 속삭임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는 애 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인파를 헤치고 햄에게 다가 갔다. "햄, 이건 정말 근사한 소식이군요. 그런데 신상품을 발표하기 위해 공식적인 기자회 견을 가질 생각인가요?" 해밀턴 자레트는 마치 불청객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리를 쳐다보았다. "난 한잔 하자는 내 부탁을 거절하는 직원은 별로 내키지가 않는데... " 리는 알렉스가 함께 온 게 새삼 마음이 놓였다. 사장은 잠시 석연치 않은 듯한 시선 으 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래요. 우린 기자회견을 계획해야 해요. 데니스와 함께 자세한 걸 의논하도록 해요 . 난 월요일에 트랜스 월드 회사의 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봐야 하오. 월요일 아침 일찍 내 책상에 적당한 문안을 작성해 두도록 하시오. 내가 갖고 떠날 수 있도록... " 햄은 아직도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의적으로 리에게 등을 돌렸다. 하지 만 리에겐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원하던 걸 얻었기 때문이다. "그건 결국 프리마돈나의 계획이었군요?" 갑자기 리의 옆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리는 얼른 몸을 돌려 그쪽을 바라보 았 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마이클?" 러시아 중 같은 남자가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물론 신상품을 말하는 거요. 그건 팸의 작품도 톰의 작품도 아니오. 그렇다면 내 작 품도 아니지! 그 여자의 것이오!" "자넷의 것이란 말인가요?" 리의 음성엔 어쩔 수 없는 놀라움이 묻어 있다. "설마 그 여자가 당신에게 아무 말도 안한 건 아니겠죠?" 마이클이 도전적인 어조로 말했다. "자넷은 대단한 배우였어요. 우리처럼 조지를 싫어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그와 놀아났 으니 말이오." "마이클, 그건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리는 그에게서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다면 그게 누구의 작품인지 말해 봐요?" 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누구의 작품일까? 그녀가 돌아오자 알렉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오?" "여기서 나가서 우리끼리 이야기할 수 있는 곳으로 가요. 우리 집으로... " 약 1시간쯤 후에 그들은 리의 집에 도착했다. 리는 치즈 오물렛을 준비했다. 둘 다 파 티에서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치즈 오물렛과 뜨거운 머핀이 놓 인 식탁 위에 마주앉았다. "놀랐소. 침실 3개와 욕실이 2개인 집을 쓰고 있다니... " "요즘엔 주택업자들이 집을 크게 짓고 있어요." "아무튼 근사한 아파트요. 당신은 자넷이 외도를 했다는 팸의 말을 믿어요?" 리가 갑작스런 화제의 변화에 놀라듯 그를 바라보았다. "아뇨. 2년 전에 왜 자넷이 늦게까지 일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결코 조지와 놀아나 지 않았을 거예요. 절대로 자넷은 마크를 속일 여자가 아니예요. 몰리는 마크의 아이예 요. 난 그렇게 확신해요." 알렉스는 미소지었다. 리의 신뢰가 마음에 들었다. "틀림 없이 그앤 조지의 아이가 아니오." "그런데 당신은 내가 모르고 있는 걸 알고 있는 것 같군요." "유전법칙을 생각해 봐요. 자넷은 파란 눈이고 조지도 파란 눈이오. 하지만 몰리는 갈 색 눈을 가졌어요. 파란 눈을 가진 부모들이 갈색 눈동자의 아이를 낳는 건 불가능한 일이오." "하지만 난 갈색 눈동자의 부모들이 파란 눈동자의 아이를 낳은 경우를 알고 있어요. " "그래요. 유전학적으로 그건 가능해요. 갈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 중엔 파란 눈동자의 열성인자를 가질 수도 있으니까. 양쪽 부모가 열성 유전자를 가지면 아이는 양쪽 부 모 에게서 열성인자를 취해서 파란 눈동자를 갖고 태어날 수가 있어요." "하지만 파란 눈동자를 가진 부모에게선 갈색 눈동자의 아이가 태어날 수 없다는 거 죠 ?" 알렉스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요. 파란 눈동자는 열성 인자예요. 만약 아이가 파란 눈동자를 가졌다면 양쪽 부 모에게서 각각 인자를 취해야만 해요. 하나라도 갈색 유전자를 갖게 되면 그 아이는 반드시 갈색 눈동자를 갖고 태어나요. 갈색 눈동자 인자는 우성이기 때문이오. 그러 니 까 파란 눈동자의 부모는 항상 파란 눈동자의 유전인자만 갖게 되는 법이오. 그래서 갈색 눈동자의 아이를 결코 낳을 수가 없어요." 리는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크가 갈색 눈동자를 가졌으니까 몰리는 마크에게서 유전인자를 받은 거로군요! 이 제야 알겠어요. 자, 우리 식사해요." 부드러운 음악이 가득 찬 주방에서 그들은 식사를 마쳤다. 그 집안의 모든 것들이 그 를 편안하게 만든다. 그는 리에 대해서 좀더 많은 걸 알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당신은 항상 성으로 불리우나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리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들은 출석을 부를 때 항상 성을 부르잖아요? 때론 이름을 잊어버리기도 하니 까 요." "선생님이 이름을 잃어버리면 기뻤겠군요?" "그래요. 난 버나드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버나드란 이름은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소. 가운데 이름은 뭐요?" "알렌. 그것도 별로 신통치가 않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정말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요?" "그래요. 내 이름은 레이크 어리 알렉산더요." "레이크 어리?" "그래요. 나이 든 과학자 부부가 느지막이 아이를 낳았소. 그들은 지구의를 돌려서 손 가락 끝에 멈추는 곳을 따서 내 이름을 지었어요. 지구의 레이크 어리에서 멈췄어요. " 두 사람은 한동안 함께 웃어댔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버나드 알렌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소?" 그녀는 웃음을 멈추고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난 첫아이였어요. 나의 부모님은 내가 아들일 거라고 굳게 믿었죠. 그래서 관습에 따 라서 난 아버지인 버나드 알렌 리의 이름을 따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아이를 낳으려고 병원에 가던 도중에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가 났고, 아빠는 그자리에 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엄마는 심한 상처를 입었지만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간 신 히 버텼대요." 그건 비극적인 이야기였지만 그녀는 결코 슬픈 어조로 말하지 않았다. "그뒤 숙부님이 날 데려다 키우셨어요. 숙부는 아빠의 죽음으로 경황이 없었기 때문 에 내 이름을 달리 생각해 경황이 없었대요."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아이의 창조성에 많은 영향을 미쳐요! 우리가 다른 이름을 받았다면 훨씬 더 창조적인 아이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당신도 어렸을 땐 친구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겠군요?" "물론이에요. 하지만 10살이 됐을 때, 난 그 놀림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어요. 드디어 친구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여유을 찾게 된 거죠. 그 웃음으로 난 비로소 해방된 셈 이에요." 알렉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10살이란 어린 나이에 놀림감에서 벗어 날 수 있는 힘을 스스로 찾아냈다. 그는 그 어린 소녀의 강인함이 대견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어린 시절을 겪은 자신의 앞에 있는 여인이 좋았다. 아주 많이... 리가 커퍼 잔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햄은 새로운 제품기술이 지난 6개윌 동안 개발됐다고 했어요. 그런데 어떤 화학자도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어요. 팸은 그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 마이클도 마 찬가지예요. 그리고 톰 보든은 불과 4개월 전에 입사했으니까 그도 그 일엔 관련이 없 어요. 그리고 자넷은 3주 전까지 출산휴가중이었어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린 조각그림 맞추기의 그림 한쪽을 잃어버린 셈이오."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알아봐야겠어요. 신상품에 관한 파일을 찾아봐야겠어요. 물론 당신과 함께 찾아야 할 거예요. 신상품이 6개윌 전쯤에 시작됐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파일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좋아요, 내일 조사해 봐요. 내일은 회사가 쉬는 날이니까 둘이서 마음껏 파일을 찾 아 볼 수가 있을 거요! 필요하다면 하루종일이라도... " 리는 일어서서 앞치마를 걸치고 설거지할 준비를 했다. "오늘밤 당신이 이곳에서 묵는다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갈 수 있을 거예요. 객실에 침대 대용으로 쓸 수 있는 소파가 있어요. 그리고 옷장에 담 요도 있고요." 그가 그 초대에 뭔가 개인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듯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녀는 시선을 돌려 설거지에 열중했다. "고맙소, 리.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설거지를 끝낸 뒤, 리는 알렉스를 그의 침실로 안내했다. 복도에 서서 굿나이트 인사 를 나누기 위해 그를 바라보았을 때 갑자기 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곧 그의 키스가 이어졌다. 리는 자신이 그걸 원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 욕망은 좀더 강렬하 게 다가왔다. 이 남자와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싶다. 이제 그를 자신의 침실로 끌어 들 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리는 그 남자에게서 벗어났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녀는 간신히 몸을 돌려 자신의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침실 문을 닫을 때까 지도 그는 복도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에 가려서 그의 표정은 읽을 수 가 없다. 리는 무엇이 자기를 깨웠는지 알 수 없었다. 귀뚜라미 소리였을까? 아니면 개구리의 울음소리? 아무튼 그녀는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무거운 꿈에 짓눌려서 침대에서 벌 떡 일어 났다. 조금 정신이 들었을 때, 리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뭔가가 그녀의 방안 에 있었다. 아주 사악한 것이.... 정맥을 타고 피가 거칠게 몰려오는 걸 의식했다. 그 리고 그녀는 그 숨소리를 들었다. 그건 그녀의 창문 쪽에서 들려왔다. 칠흙 같은 어 둠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유리창에 비친 머리와 어깨의 윤곽을 볼 수 있었다. 그 엄청난 공포 속 에서 그녀는 비명을 질러댔다. 11 상대방은 그녀가 깨어나 비명을 지르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으리라. 리는 그 어두운 물체가 재빨리 창가에서 사라지는 걸 보았다. 아직 자신의 비명소리의 여운이 남아 있 는 상황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마치 태양처럼 방안에 빛이 번져갔다. "리, 무슨 일이오?" 알렉스가 물었다. 그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가슴이 그대로 들어난 상태였다. 리는 창문을 가리켰다. 알렉스가 급히 창가로 다가가서 급히 창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리는 몸을 움직일 수 조차 없어서 커버를 움켜쥔 채 온몸을 떨었다. 다시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왔을 때 작은 비명소리를 냈다. 하지만 알렉스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 다. "미안해요. 당신을 겁주려던 게 아니었소. 하지만 현관문이 닫혀서 어쩔 수가 없었어 요. 침입자는 도망쳐 버렸어요. 차의 엔진 소리가 멀어져가는 걸 들었소." 그가 창을 닫고 커튼을 내린 다음 그녀에게 다가왔다. "차를 타고 도망쳤다구요?" "누구인지 봤소?" 잠시 후에 그가 물었다. "아뇨, 그림자만 봤어요. 하지만 체격이 컸어요. 남자인 것 같아요." "아무튼 당신이 안전해서 다행이오. 당신의 비명소리가 아주 컸어요. 근처의 개들이 일제히 짖기 시작했어요. 이웃 중엔 불을 켜는 집도 있었소." 다시 그의 품 속에 있으니까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거칠게 뛰기 시작 했던 심장의 박동도 제대로 돌아 왔다. 그제제야 그녀는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잠잘 때도 안경을 착용하나요?"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뭘 좀 읽고 있었소. 그런데 기분은 괜찮아요?" "네, 좋아요. 이제 전화로 경찰을 불러야겠어요." 그가 아주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리는 비로소 자신이 나이트가운 차림이라 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전에 더 연습을 해야 할 일이 있지 않겠소?" 리는 그의 초대에 응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알렉스, 난 더이상 연습하고 싫지 않아요." "알겠소. 당신이 옷을 입는 동안 난 경찰을 부르겠소." 그가 너무 쉽게 돌아서 버리자 리는 절망감 같은 걸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알렉스를 원하는 감정과 싸워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들에겐 미래가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상 처만 남게 될 것이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며 옷을 입기 위해 일어섰다 . 경찰이 떠난 건 6시쯤이다. 리는 알렉스에게 커피를 따라 준 다음 자신의 잔에도 커 피 를 따랐다. "경찰은 의욕적이진 않았지만 무척 정중하더군요." "내가 창문의 지문을 지우지만 않았다면 그들도 의욕을 보였을 거요." 리가 고개를 저었다. "경찰도 그 사내가 장갑을 끼고 있었을 거라고 말했잖아요? 그들이 지문을 남겼을 리 가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그를 붙잡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을 뿐 이에요." 알렉스가 커퍼 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역시 당신은 홍보에는 뛰어난 능력이 있는 것 같소. 누구든 당신의 말을 믿게 하는 재주가 있어요. 자, 이제 당신 사무실로 출발해 볼까요?" 잠시 후 그들은 피에로를 타고 780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부숴진 렌터 카에 대해서 물었다. "그 크라이슬러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소.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폭탄 장치를 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증거를 남기진 않았치만 시한폭탄을 만드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오." "시한... 폭탄?" 리는 공포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불꽃이 앞좌석 밑에서 점화됐소. 누구인지는 물라도 내가 그 선물 곁으로 다가갈 거 라고 확신한 모양이오." "오, 알렉스, 당신은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어요. 어젯밤엔 왜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 "어제 당신 머릿속엔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소." 물론 그랬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알렉스의 생명을 잃게 됐을지도 모를 끔 찍 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알렉스, 시한폭탄이라면 누군가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이 만들었을 거예요. 안 그래 요?" "그래요. 폭발에 관한 지식이나 또는... " "화학에 관한 지식 말인가요?" "맞아요! 만약 자넷이 신상품을 만드는 다른 화학자에게 접근해서 뭔가 잘못되고 있 다 는 걸 알아챘다면 그녀는 직접 중지하라고 말했거나, 아니면 그를 중단시킬 수 있는 사람에게 부탁을 했을 거요." "그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일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요. 그럴 경우 팸일 가능성이 커요. 두 사람은 친한 사이였으니까 팸은 자넷에 게 자신이 불법적인 실험을 하고 있다는 걸 털어 놓았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자넷이 뭔 가 잘못 되어 있다는 걸 발견했을 때... " 결국 자넷은 실험에 관한 진실을 털어놓지 못하도록 살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 고 이제 그 살인자가 리와 알렉스까지도 죽이려 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동안 그들은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알렉스를 회사에 들여보낼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리가 배리푸드의 입구에서 경비원에게 물었다. "미즈 리, 미안해요. 어제 제어장치를 바꿔어요. 이제 손바닥 확인 암호가 없는 사람 은 그 누구도 사무실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리는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난 지원자의 면담도 할 수 없단 말인가요? 미쳤군요! 누가 제어 장 치를 바꿨나요?" "경비실장이에요. 어제 기사들이 와서 그동안 우리가 감시경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 을 취소시켰어요. 며칠 전엔 실험실도 그렇게 개조해 버렸어요... 나로선 이해할 수 없 는 일이에요." 리는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알렉스. 나 혼자 들어가서 알아봐야겠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동안 난 우리 둘 다 알고 있는 어떤 화학자를 만나봐야겠어요. 만약 그녀 가 아무 죄도 없다면, 오늘 실험실에서 신상품의 견본을 갖고 나와 달라고 부탁을 해 볼 셈이오. 그리고 그녀가 우릴 속이고 있었다면 이젠 내가 나서서 알아봐야 할 때가 된 것 같소." "하지만 그녀를 어떻게 만나죠?" "어젯밤 내게 주소를 적어 줬어요. 콩코드의 콘도에서 살고 있더군요." 리가 알렉스에게 피에로의 열쇠를 건네주었다. "지금 7시가 조금 넘었는데, 정오에 쉐라톤 팰리스의 로비에서 만나는 게 어떻겠소?" 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곧 사라져갔다.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안전화면에 손바닥 지문을 찍고 안으로 들어갔다. 리가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책상 위에 12송이의 핑크빛 장미가 있는 꽃병이 눈에 들어왔다. 곁에 있는 마지의 메모엔 알렉스가 수요일에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들렀을 때 가져왔다고 씌여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쳐 그 섬세한 꽃잎들을 어루만져 보았다. 그 꽃들은 알렉스에 대한 감 정이 현실로 드러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 러나 한 시간쯤 후에 그녀는 좌절감에 빠진 채 커피를 마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 다. 지난 6개월 동안 신상품에 관한 새로운 방식 같은 건 눈에 띄지 않았다. 만약 알렉스가 있었으면 파일을 읽을 수가 있을 테니까 화학용어를 해독하는 데 도움을 주 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 혼자서 찾기에는 파일이 너무 많았다. 우선 파일의 이름이 필요했다. 그것 없이는 올바른 공식을 찾아낸다는 건 거의 불가 능 한 일이다. 그녀는 커피잔을 손에 들고 다시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돌렸다. 어떤 파 일 은 문자, 약어로 되어 있고 어떤 것들은 숫자로 되어 있다. 아마 화학공식을 다루는 파일에는 암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여기 있었군요, 리?" 리가 컴퓨터를 끄자마자 데니스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당신 사무실에 가볼까 하던 참이었어요. 당신이 나에게 어떤 영감을 불어넣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제발 오늘은 그런 걸 기대하지 말아요. 이 엉망인 머리에서 논리적인 생각이 나오긴 힘들 거예요. 지금 나의 정서 상태가 얼마나 엉망인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어젯밤 파티에서 너무 즐겼다는 뜻이에요?" "파티? 그럴지도 모르죠. 난 쓰레기통 속에 처박혀 버린 꿈을 꾸었어요." 데니스는 리의 책상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 데니스의 화장이 유난히 짙었 다. 마치 십대 소녀가 처음으로 화장에 공을 들인 것 같은 모습이다. "햄은 당신에게 신상품에 관해서 자세한 정보를 얻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요? 에너지가 넘쳐 있군요?" "당신과 신상품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의욕에 넘쳐 있어요. 우선 우리의 신상품 의 기본 재료부터 알아야겠어요. 그리고 그 뛰어난 맛의 정체도 알아야 해요. 그래야 내 가 그 상품을 최대한 훌륭하게 소개할 수가 있어요." 광고부장이 손으로 눈까풀을 들어올렸다. "오, 머리가 아파 죽겠어요. 오늘 10시간쯤 일을 해야 하는데 눈도 들 수가 없으니.. . . 당신은 기자회견 때문에 날 졸라대고 있군요. 제발 날 좀 봐줘요." "데니스, 아주 간단한 일이에요. 나에게 광고 프로그램과 기본 재료에 접근할 수 있 는 파일을 가르쳐 주기만 하면 돼요.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 데니스는 하품을 한 다음 신음소리를 냈다. "햄의 기자회견이 있으니까 이제 괜찮겠죠? 그건 HGJ파일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나의 접선암호를 사용해야 해요. 당신의 것으론 안돼요. 이젠 햄과 조지, 그리고 나만이 기 밀사항을 취급할 수가 있어요. 연필 있어요?" 리는 데니스의 코밑에 연필과 종이를 갖다댔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상태로 여기까지 왔어요? 운전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은데.. . " "운전? 난 걸을 수도 없어요. 택시를 타고 왔죠. 그리고 내 포드 브롱코도 없어졌어 요. 아참, 경찰에 전화를 걸어 도난신고를 해야겠군요." "아마 햄의 집 근처에 있을 거예요. 내 생각엔 당신이 어젯밤 너무 취해서 택시에 태 워져서 집까지 간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아참, 무슨 이야기를 했었죠?" "나에게 당신의 접근 암호를 적어 주려던 참이었어요. 손에 연필이 있는 게 안 보여 요 ?" "오, 그래요. 여기 암호가 있어요. 아무래도 난 아스피린을 먹어야 할 것 같아요." 리는 핸드백에서 아스피린을 꺼내 물과 함께 대령했다. "자, 이제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게 뭐예요?" 데니스는 그 질문의 의미를 어김없이 알아차렸다. 리는 데니스가 아스피린을 삼키는 걸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말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러는 건 아닐 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의심이 리의 마음을 분노로 끓게 만 든 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말을 불신해야 하는 게 가슴이 아팠다. "신상품의 맛은 보았어요?" 데니스가 머리를 흔들었다. "조지에게 부탁을 했지만 거절 당했어요. 하지만 아이오와 사람들은 그 맛에 미쳐 버 린 것 같아요." "이봐요, 이건 조지가 창조한 작은 기적이에요. 그런데 그 교활한 사람이 자신의 전 매 특허를 이 주방에서 마음대로 유출시킬 것 같아요?" 하지만 광고부장이 판촉을 해야 할 신상품의 맛을 보지 못했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 다. 하지만 조지 같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리는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데니스,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요? 정 급한 일이 있으면 내가 도와줄게요. 당신은 우선 몸을 회복해야 할 것 같군요." "당신은 정말 친절해요. 모르는 게 있으면 나에게 도움을 청해요. 난 내 사무실에 가 서 잠깐 누워 있겠어요. 아스피린을 먹었으니 괜찮아질 거예요." 리는 데니스를 그녀의 사무실에 데려다 준 다음 다시 컴퓨터 앞으로 갔다. 데니스의 말대로 HGJ파일이 화면에 나타 났다. 광고부장이 한 말은 모두가 사실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주 뛰어난 배우이거나. HGJ 파일에선 아무것도 지워진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데니스의 말은 아직까진 진실 이 다. 데니스는 그녀와 햄, 조지 만이 접선 암호를 알고 있다고 했지만 리 자신도 충분 히 그 파일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그것의 중요성을 미리 알고만 있었다면 말이다. 바 로 그것이 리의 문제였다. 컴퓨터를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필요한 게 어 떤 것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HGJ 파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렸 다. 아이오와 맛 실험결과와 다가올 광고전략을 상세하게 요약하고 있다. 하지만 알 렉 스가 필요로 하는 정보는 찾을 수가 없다. 각 식품과 음료수의 혼합법은 없었다. 5가지의 식품군이 새로운 제조법을 취하고 있다. 햄버거 고기와 냉동 옥수수, 아이스 크림의 몇 가지 향미, 그리고 비탄산 과일음료와 포장 수프의 몇 가지 향미에 관한 것 이다. 그것들은 새로운 제조법의 기본이다. 말하자면 그것이 여러 가지 식품에 적용 된 다. 그녀는 아이오와 실험결과와 새로운 제조법을 인쇄했다. 그런 뒤 사무실의 인터콤을 작동시켜 연구소의 번호를 두드렸다. 곧 조지 펙의 음성이 들려왔다. "리예요. 지금 햄의 기자회견 내용을 준비중인데 그곳으로 가서 잠깐 이야기를 했으 면 좋겠어요." 조지 펙은 전보다는 약간 여윈 얼굴이다. 하지만 시선만은 변함없이 날카로웠다. "어젯밤 당신의 애인이 스티브 건을 한방 먹였다는 걸 알고 있소. 그의 그런 행동이 이미 소원해진 당신과 햄의 관계를 좋게 해주진 못했을 텐데..." "스티브 건이 맞을 만한 짓을 했어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에요." 조지는 담배를 들어서 불을 붙인 후 고의적으로 리의 얼굴에 연기를 뿜어댔다. "조지, 제발 내가 있는 동안엔 담배를 피우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가 미소지었다. "알겠소. 그런데 당신의 연인은 어디 있소? 두 사람이 한시도 떨어져 있어선 안될 것 같던데... " "조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내게 필요한 건... " "당신은 지금 알렉산더와 괜한 시간낭비를 하고 있는 거요." "조지, 난 지금 그런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에요. 난 새로운 상품에 관한 화학성분표 가 필요해요." 최대한 위엄을 짜내서 말했지만 화학실장은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우리의 제조법은 일급 비밀이오. 도대체 뭘 알아내려는 거요?" "오늘날엔 그 성분 을 노출시키지 않고는 식품을 팔 수가 없어요. 고객들은 식품의 함량을 알고 싶어해요. 칼로리,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염분, 콜레스테롤, 인공 향미료, 색소, 방부제... 그런 것들을 모두 표기해야만 해요." "그렇다면 포장 부서에서 알아서 표기할 거요. 하지만 당신이 그걸 알 필요는 없잖소 ?" "천만에요! 햄의 기자회견은 앞으로 2주일도 남지 않았어요. 그는 우리 신상품을 기 적 의 식품으로 소개할 거예요. 물론 제조공법은 비밀로 해야겠지만 식품의 성분은 공개 해야만 해요. 그는 틀림없이 식품 함량에 질문을 받게 될 거예요." 그녀의 마지막 말이 그의 얼굴에서 미소를 지워 버렸다. 그가 불안한 시선으로 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을 인정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은 결코 그걸 인정하 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물론 그 자신에게까지도... "생각해 보겠소. 지금은 바쁘니 여기서 나가 줘요." 하지만 리는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다. "햄을 바보로 만들 셈이에요? 만약 당신이 그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지 않겠다면 난 그 에게 전화를 걸겠어요. 조지, 10분 동안 생각할 여유를 주겠어요. 그동안 식품의 성 분 표를 내 책상 위에 갖다 놓는 게 좋을 거예요." 좀더 실감이 나게 하기 위해 리는 신상품의 컴퓨터 복사기를 화학실장의 책상 위에 내 던졌다. 그 방을 나오면서 리는 놀라움과 분노가 교차한 그의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10분 이내에 리의 프린터에선 새로운 상품의 함량이 나왔다. 화학실장은 리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그 정보를 보내 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 함량표는 그녀에게 별다른 의미를 주지 않았다. 그녀는 인쇄용지를 말아서 코트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다음 몇 시간 동안 그녀는 바 구 니 속의 메모들을 하나하나 뒤져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전화 벨 소리에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벌써 11시가 된 것이다. "알렉스요. 미안해요. 하지만 꼭 당신과 통화를 해야 할 일이 있었소." 그녀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알렉스, 괜찮아요?" "그래요. 걱정하지 말아요. 하지만 우리의 점심 데이트에 좀 늦을 것 같소."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왜 그렇게 숨을 몰아쉬는 거죠" "난 녹색 트럭을 쫓고 있었소." "녹색 트럭?" "방금 팸 헤이어를 치고 달아난 트럭이오." 12 "정말 그녀는 괜찮은 거예요?" 리가 물었다. 그녀와 알렉스는 늦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쉐라톤 팰리스의 가든 룸 으 로 들어서고 있었다.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앉을 의자를 내주었다. "그래요. 히프에 타박상을 입고 길가에 넘어지면서 긁힌 상처가 있긴 하지만 의사는 부러진 곳은 없다고 했소. 지금 마운트 디아블로 병원에 부모님과 함께 있어요. 곧 퇴 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가 내게 집 전화번호를 알려 줬어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녀의 전화번호를 몰라서 집으로 찾아갔더니 집에 없더군. 이웃사람들이 팸이 근처 공원헤서 열리는 걷기 대회에 참여한 것 같다고 해서 난 그녀의 현관 계단에 앉아서 기다렸소. 마침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일어서려는데, 그녀가 길을 건너오면서 손을 흔 드는 게 보였소. 그 순간 녹색 트럭이 모퉁이에서 나와 그녀를 향해 달려든 거요." "고의적으로 달려들었단 말인가요?" "틀림없소. 그 차는 팸을 쫓아 행단보도까지 올라왔어요. 다행히 팸이 재빨리 길 옆 으 로 피신했고 트럭의 펜더가 그녀의 옆구리를 들이받는 데 그쳤어요. 정말 그녀는 운 이 좋았어요." "녹색 트럭이었다고요?" "짙은 녹색이었소. 자넷의 펜더에 묻은 바로 그 색이오. 번호판을 보기 위해 뒤쫓아 갔 지만 그 차는 그대로 도망치고 말았소." "팸이 결백하다는 게 증명이 된 셈이군요." "하지만 그 사건으로 한 가지 의문점이 더 생겼소." "무슨... " "왜 그녀가 공격을 당했는가 하는 거요?" "살인자가 어제 파티에서 우리가 팸파 이야기를 하는 걸 봤는지도 모르죠. 그녀와 우 리가 친해지면 그녀가 신상품의 견본을 손에 넣기 위해 실험 주방으로 접근할지도 모 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그녀에 대한 공격은 우리에게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는 경고인지도 몰라요." "내 생각도 같아요, 리. 아무튼 이제 모든 걸 잠시 잊고 즐겁게 식사를 하기로 합시 다. 우린 둘 다 아침식사도 못했 잖소?"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는 잠시 말없이 그 여자를 응시했다. 부드러운 불빛 속 에서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어젯밤 그 황흘한 키스와 포옹을 경험한 후에 그는 리가 자신에게 끌리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여자는 미래가 없는 로 맨스 같은 것엔 얽혀들고 싶어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건 알렉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자신을 거절했던 게 얼마나 다행스 런 일인가! 그들은 여유있게 점심식사를 즐겼다. 하지만 식사가 끝나자 그들은 다시 업무적인 화제로 돌아갔다. "당신이 알아낸 걸 말해 봐요." 그가 말했다. 리는 사무실에서 몰래 빼내온 컴퓨터 인쇄지를 꺼냈다. 알렉스는 커피를 마시면서 그 걸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뭐라고 씌여 있어요?" 리가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오. 이곳에 있는 재료는 모두 식품의약국의 합격품이오. 이걸로 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해요." 리는 크게 실망했다. "그럼 무엇이 도움이 될까요?" "상품의 견본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연구실도... 내가 실험을 해볼 수 있는 그런 장 소가 필요해요." "이 성분들이 위험하지 않다면서 뭘 찾아내려는 거죠?" "실제로 조사해 보기 전까지는 확실히 몰라요." "제조과정에서 실제로 맛의 발전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알렉스가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이 여기 5가지 다양한 식품을 갖고 왔어요. 모두 뜨겁거나 차가운 것들이오. 하 지만 뜨겁고 차가운 것에 적합한 혁신적인 새 제조법은 불가능할 것 같소. 그걸로는 별로 영향을 미칠 수가 없어요." "그럼 뭔가 새로운 게 있다는 뜻인가요?" "내 직관은 그래요. 하지만 분명하진 않아요. 배리푸드는 새 첨가물의 승인을 요청하 지도 않았어요." "만약 배리푸드가 새로운 첨가물을 사용했다면 그것들이 해롭기 때문에 승인 요청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게 아니라면 시간이 너무 걸릴까 봐 승인을 받지 않을 수도 있소. 첨가물의 안정 성 을 입증하기 위해서 회사는 3종류의 독성 연구를 해야 하니까요." "어떤 것들인가요?" "첫번째는 예민한 독성 실험이오. 쥐들에게 첨가물을 투여한 다음 그 효과를 기록해 요. 그 다음에는 똑같은 쥐들에게 최소한 90 일 동안 그 첨가물의 다른 농축액으로 된 규정식을 투여한 다음 다시 그 결과를 기록해요." "그리고 마지막 실험은 뭔가요?" "그건 장기 독성 연구기간을 거쳐야 해요. 즉 쥐들이 그 첨가물을 어떻게 신진대사 시 키는가를 알아내고 그것이 그들의 수정능력과 생식, 수유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를 알아내고 그들의 일생 동안 육체에 미치는 다른 효과들에 대해서도 밝혀내야 해요 . "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장기 독성 연구에만 2년 이상이 소요되고 식품의약국이 성분을 검사하고 승인을 하 기 까지 몇 년이 더 걸려요." "바로 그거예요, 알렉스! 해밀턴 자레트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는 올해에 회사를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고 싶어해요. 아마 자넷이 우리에게 말하려 던 것도 바로 그거였을 거예요. 이 신상품에 실험을 거치지 않은 첨가제가 있었을 거 예요." "아니면 실험을 거쳤어도 그 결과가 배리푸드의 실력자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몰 라요. 1958년에 통과된 식품첨가물 수정안에 대한 델래니 조항은 인간이나 동물에게 암을 유발할 수 있는 물질의 상용을 금지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지 않을까요? 설마, 암을 유발하는 식품이라는 걸 알 고 서도..." "이런 사실을 당신에게 인정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이렇게 가정해 븝시다. 배리푸 드 가 실험용 쥐에서 암을 유발하는 식품첨가물을 개발했다고 합시다. 그걸 식품의약국 에 보고하면 금지될 게 뻔하니까 그들은 그 정보를 알리지 않은 거요. 그 대신 그들의 식 품에 넣고서 새로운 게 없는 것처럼 가장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암에 걸리기 시작하면 어쩌려고요?" "사람들은 매일 암에 걸려요. 우린 여러 가지 발암 물질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오. 폐 암이 담배로 인해 발생되는 걸 제외하면 아무도 자신있게 어떻게 암에 걸렸는지 밝힐 수가 없어요. 의사도 마찬가지요. 암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쳐들어오는 질병이니까 . 결국 아무도 암이 새로운 식품 첨가제에서 비롯됐다는 걸 모르게 될 거요." "하지만 식품의 경우 식품의약국에서 검사하잖아요?" "당신은 우리 역할과 우리의 조사범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어요. 첫째, 우리는 시 장 에 나와 있는 식품을 검사하는 게 아니오. 둘째, 우리는 우리에게 허가를 요청한 식 품 첨가물도 보통은 실험하지 않아요. 우리의 역할은 제조업체가 제출한 실험을 평가하 는 데 한정되어 있어요. 그들의 정보를 입증하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 실험은 하지 않아 요." "그렇다면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한 결정권은 순전히 식품 제조업자의 손에 달려 있 단 말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소. 가끔 과학자들은 몇 년 동안 안전하다고 여겨져서 먹어 왔던 식품이 유해하다는 걸 발견 하기도 해요." "차라리 듣지 않았던 편이 나을 뻔했어요. 당신은 안전에 대한 내 환상을 산산히 부 숴 버렸어요. 그런데 만약 당신이 신상품을 실험해서 식품의약국의 승인을 얻지 않은 새 로운 첨가제를 발견했다면 그땐 어떻게 하나요?" "내 상관인 월리에게 그 정보를 알려 줘요. 그는 내가 여기서 하는 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럼 그가 곧 그 정보에 대한 조치를 취하게 되나요?" "그가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내가 식품과 안전, 그리고 인공영양 센터의 국장을 찾아갈 거요. 그리고 국장도 즉시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직접 장관을 만나볼 생각이 오." "하지만 조치를 취하기까진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알렉스가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위험한 식품첨가물을 추방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짓 이든 하겠소."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곧 귀중한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 꼈 는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우린 신상품의 견본을 구해야만 해요." "어떻게 구하죠? 그 견본이 있는 곳은 오직 연구실의 주방뿐이고 그곳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은 화학자들뿐이에요. 그리고 팸은 다쳤으니... " "다른 두 화학자는 어때요?" 리가 고개를 저었다. "톰은 신참인데다가 자기 그림자만 봐도 놀라는 사람이에요. 그가 회사의 기밀사항을 빼내 줄 리가 없어요." "그럼 러시아 수도승은?" "마이클 웨어는 그리 친절하지 않아요. 그리고 신상품 작업에 끼지 못했다고 화를 내 고 있어요. 하지만 그의 말이 진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어요." "앞으로 며칠 동안 특별히 바쁜 일은 없소?" "없어요. 그런데 왜... " "난 이곳을 떠날 일이 있는데, 당신과 함께 가고 싶소." "어딜 가는데요?" "배리푸드의 견본이 있다고 생각되는 유일한 장소요." "아이오와로군요! 그 상품을 실험했던 그곳!" "맞아요. 견본을 받았던 25가구의 이름과 주소를 찾고 있어요. 하지만 그 견본이 아 직 까지 남아 있을 확률은 희박해요. 하지만 1, 2개쯤은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난 화 학성분 분석만 하면 되니까. 당신도 함께 가겠소?" 리가 미소지으며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물론이에요, 우린 한팀이잖아요." 알렉스도 미소를 지었다. 그 여자의 감촉이 아주 따뜻하고 유쾌한 느낌을 준다. 그날 저녁 늦게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이나 갈아탄 다음에야 그들을 다음날 아침 디모인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디모인의 밝은 햇살 아래 나서니 둘 다 새 힘이 솟는 기분이다. 그들은 차를 세내서 배리푸드의 맛 실험을 했던 조그만 아이오 와 의 마을을 향해 떠났다. "25가구나 방문을 해야 하니까 서로 나눠서 조사해 보는 게 좋겠어요." 리의 제안에 알렉스도 동의했다. 차가 마을에 들어서자 알렉스는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하자고 제안했다. "저쪽에 있는 바와 그릴이 어때요? 아마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곳 같은데... " "좋아요, 거기서 2시에 만납시다. 행운을 빌어요." 그들은 헤어져서 자신이 맡은 구역으로 향했다. 그녀는 목록을 보고 가장 가까운 스 튜 어트 가족의 집으로 가서 힘차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 의욕적인 기분은 그리 오 래 가지 않았다. 몸집이 큰 부인은 그녀의 요청에 간신히 화를 억누르는 눈치였다. 안에선 아이가 울 어 대고 있었다. 아마 때를 잘못 맞춰 온 것 같다. "아노, 견본은 조금도 남지 않았어요. 그런데 당신들 미친 것 아녜요? 처음엔 우리 가 족에게 맛 실험에 응해 달라고 해놓고 그 실험이 끝나자 우리가 상품을 사는 걸 거절 하더니 이제 와선 다시 견본이 남은 게 없냐고 묻는 건가요?" "스튜어트 부인, 그 상품은 한달 안에 가게에 나오게 될 거예요. 그때 구입하시면 됩 니다." "난 한달 후에 그 식품을 원하는 게 아니라 지금 사길 원해요.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 리죠? 우리 딸 아이는 지금 당신네 회사의 아이스크림 콘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거 예요. 20분 동안이나 다른 아이스크림을 권했지만 들은 척도 안해요! 그러니 견본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어서 가버려요!" 알렉스는 1시 30분쯤 바와 그릴에 도착했다. 그는 몹시 피곤했고 절망에 빠져 있었다 . 그는 배리푸드의 견본을 조금도 구할 수가 없었다. 맛 실험에 응했던 사람들 모두가 그것들을 먹어치웠던 것이다. 햄도 수프도, 그리고 아이스크림콘도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 버렸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 상품을 칭찬했다. 아이스크림은 다른 것보다 더 달고 크림이 많고 풍요롭다고 했다. 그리고 햄도 더 부 드럽고 연하다고 했으며, 냉동 옥수수는 밭에서 따온 것보다 더 신선하고 달콤하다고 말했다. 그 모든 평가들은 한결같이 그를 혼란에 빠뜨렸다. 갈증이 나고 시장한 나머 지 그는 토마토 주스를 주문해서 긴 의자에 앉았다. "합석해도 되겠소?" 깊고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알레스가 몸을 돌리자 주름살이 깊게 패인 노인이 앞에 서 있었다. 왜 그 노인이 합석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를 거절할 의사는 없었 다. "앉으십시오. 제 이름은 알렉스예요. 한 잔 사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럴 필요는 없소. 난 구걸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 제안은 감사하게 생각 하 겠소. 내 이름은 랠프 보인턴이오. 그런데 당신은 무슨 일로 이 작은 마을에 온 거요 ?" 노인은 알렉스를 보지 않은 채 태연하게 자신의 우유를 마셨다. 하지만 그의 여유있 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알렉스는 그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려는 건 아닐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난 배리푸드의 견본을 찾고 있어요." 노인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마치 그 대답을 예상했다는 표정이다. "그래서 성과를 거뒀소?" "아뇨, 식품이 너무 맛있어서 전혀 남아 있지가 않았어요." "당신은 배리푸드의 직원이오?" "아뇨." "그럼 당신은 누구요?" "난 식품의약국에서 온 화학자입니다." "그런데 왜 그 견본을 찾아내려는 거요?" "그걸 분석하고 싶어요. 이 신상품에 뭔가 잘못된 게 없는 지 알아보기 위해서... " 노인의 표정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우유를 마신 다음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 "갑시다,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소." 그는 알렉스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바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놀랄 만큼 빠른 걸 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 블록 반 쯤 왔을 때에야 노인은 하얀 판자집 앞에서 멈춰 섰 다. 아마도 30년대쯤 건축된 듯한 고가였다. 우편함 위에 병원 간판이 달려 있었다. 의사 랠프 보인턴은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었다. 집의 뒷문으로 들어선 독터 보인턴은 어떤 문을 열었다. 진 바지 차림의 소녀가 의자 에 드러누워 잡지를 보고 있고 구석의 간이침대에선 13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잠들 어 있다. "돈나, 레로이는 오후에 좀 어때?" 십대 후반쯤 돼보이는 그 소녀가 재빨리 잡지를 내려놓고 일어나 앉았다. "훨씬 좋아졌어요. 거의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잠이 무척 많아진 것만 제외하 면... " "돈나, 이쪽은 알렉스야. 이분에게 레로이의 증상을 이야기해 봐. 그 일 때문에 이분 을 데려온 거니까." 그녀가 알렉스를 훑어보더니 다시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가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로이는 걷잡을 수 없는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몸을 떨다가 울기도 하고 우울 증에 빠지는 거예요. 난 이 아이가 자폐증이 재발한 줄 알았어요." "돈나, 언제부터 그랬지?" 의사가 물었다. "지난 월요일이에요. 내가 만들어 준 핫도그를 먹지 않겠다고 했을 때부터였어요." "그리고 그 전엔 뭘 먹었지?" "배리푸드의 사람들이 준 견본 음식을 모두 먹어치웠어요." "됐어요, 돈나." 의사가 말했다. "자, 이제 레로이를 돌봐 줘. 난 잠시 후에 돌아을 테니까." 그들은 그 방을 나와서 독터 보인턴의 사무실인 듯한 곳으로 들어가서 마주앉았다. "방금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소?" "그 소년이 배리푸드의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때 절망상태에 빠진다는 겁니까?"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을 위해서 솔직히 털어놓아야 할 것 같소. 돈나와 레로이는 배리푸드의 맛 실험 에 선정된 25가구에 포함되어 있어요. 당신은 그 실험이 어떤 식으로 진행됐는지 알 고 있겠죠?"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4 식구가 있는 가족을 실험대상으로 선정했더군요. 그리고 그들은 모두 배리푸드와 경쟁사인 상품을 사용하고 있었어요. 2주일 동안 매일 아침 배리푸드에서 나온 사람 이 방문해서 그 날 필요한 양을 제공했어요. 그런 다음 모두들 의견서를 채워야 했겠죠. " "그래요, 하지만 배리푸드 사람이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 있소." "그게 뭡니까?" "돈나와 레로이의 부모는 지난 2주 동안 다른 곳에 가 있었소. 병세가 위독한 친척을 방문하러 갔죠. 그래서 4인분의 견본식품 중에 나머지 2인분은 레로이가 먹어치운 거 요." "그렇다면 그 소년은 3인분을 먹었단 말입니까?" "사실은 4인분을 먹어치운 거요. 돈나는 십대 소녀들이 그렇듯이 다이어트중이거든요 . 첫째 주에 레로이는 다른 건 아무것도 먹지 않고 견본품만 먹었다는 거예요. 누나가 만들어 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대요." "그리고 견본품이 떨어지자 그렇게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는 건가요?" "과민한 정도가 아니었소. 돈나가 그를 데려왔을 때 그는 탈진과 졸음, 그리고 무기 력 상태로 나뭇잎처럼 떨고 있었고 계속 울어대면서 빨리 배리푸드의 견본품을 갖다 달 라 고 애원했어요." "그 아이의 누나가 자폐증이라고 한 것 같은데요?" 독터 보인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달 전에 레로이는 자폐증에 걸렸어요. 고열이 나고 두통에 목이 따끔거리고 피로 증세가 왔었죠. 돈나 말에 의하면 그애가 먹기를 원했던 음식은 배리푸드의 실험 견 본 품이 처음이었다는 거요. 지금 그 애가 먹고 싶어하는 건 오직 그것뿐이오." 알렉스의 머리에 섬광처럼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소년이 음식의 부작용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약물중독과 같은 증상으로?" "이제야 알아차리는군요." 알렉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서야 비로소 그 실험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하나같이 적대적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레로이가 자폐증의 재발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물론이오. 그 병에 걸린 아이들은 보통 식욕을 잃는 법이오. 그러나 지금 레로이는 배리푸드의 식품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모두 먹어치을 거요." "그 소년이 처음 입원했을 때 혈액의 견본을 갖고 계십니까?" 의사가 미소지었다. "이제 당신을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소. 물론 갖고 있어요. 그것도 2개나... 하나는 일 주일 전쯤 채취한 거요. 자폐증으로 인한 변칙 임파구가 깨끗이 정화되어 레로이가 그 병에서 완치됐는지 알아보기 위한 거였소. 그리고 두 번째 견본은 며칠 전 소년이 부 작용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채취한 거요. 내 스테이션 왜건이 고장이 나서 분석 을 하러 디 모인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둘 다 냉장고 에 넣어 뒀소." "그럼 레로이가 그 식품을 먹었을 때와 그걸 중단했을 때의 혈액을 모두 갖고 계시군 요?" "그래요, 이곳엔 혈액을 분석할 기구를 갖추지 못했소. 아무튼 내 차가 고장이 난 게 당신으로선 행운인 것 같소." 독터 보인턴이 작은 냉장고에 가서 혈액의 견본을 꺼내왔다. 랠프 보인턴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에게 머물렀다. "돈나가 레로이를 데리고 온 이후로 난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소. 난 항상 나와 정 부를 신뢰해 왔지만 우린 미친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그래요. 정보를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이 배리푸드 화사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을 막아야 해요. 이런 물건은 절대로 가 게 진열대에 진열되아 판매되어선 안되오. 이런 짓은 그야말로 마약 밀매업자가나 하는 짓이오." 13 "윌리, 난 배리푸드의 신상품에 식품첨가제가 들었다고 했어요. 듣고 계십니까?" 알렉스가 물었다. "물론 듣고 있네. 하지만 자네 말을 이해할 수가 없군. 그럼 그 회사가 식품에 마약 을 넣었다는 건가?" "무엇을 넣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내가 알고 있는 건 아이오와 사람들이 배리푸드의 견본품을 끊고 나서 심한 금단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정말 고약한 얘기로군. 하지만 그 사실을 뒷바침할 증거가 있나?" 알렉스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월리, 배리푸드의 사장은 뜨겁고 차갑고 달콤하고 짠맛을 촉진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제조법을 발견했다고 했어요." "새로운 제조법이라니, 좀 모호하군. 자네가 말하고 있는 맛의 향상이란 차라리 재료 의 변화일 것 같은데... " "그래요. 내 생각도 같아요. 하지만 재료의 목록을 살펴봤지만 새로운 건 아무것도 없 어요. 그런데도 견본품을 먹어 본 사람들은 그 맛에 열광하고 있어요. 이건 절대로 과 장이 아닙니다." "맛에 열광한 것과 첨가물을 넣었다는 건 전혀 다른 얘기지. 자네, 화학분석은 해봤 나 ?" "아뇨, 견본품을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하지만... " "하지만 화학분석을 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월리, 제발 내 말좀 들어 봐요. 전형적인 마약금단증세를 보이는 소년을 치료한 의 사 를 여기서 만났어요. 그 아이는 견본품 시식에 참여했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그걸 훨 씬 많이 먹었대요." "그 아이가 마약을 복용한 건 아니지?" "월리, 그 아이만 그런 증상을 보이는 게 아니에요. 오늘 나와 이야기한 시식자들은 한결같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어요. 뭔지는 모르지만 식품첨가제 때문인 건 확실해 요." 알렉스는 월리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를 들었다. "좋아, 알렉스. 실험을 시작해 보자구." "월리, 규정대로 하자면 몇 달이 걸릴 거예요.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요! 이 상품 은 몇 주 후면 시장에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건가?" "국장님이 제지 명령을 내려 줘야 합니다. 그 상품이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해요." "알렉스, 그건 불가능해. 우선 그 식품이 유해하다는 증거가 아무것도 없잖나? 그 모 회사인 트랜스 월드가 얼마나 힘이 막강한지 알고 있나? 내가 그들의 신상품을 내놓 지 못하게 하면 날 산 채로 잡아먹으려 할 거야. 난 분명한 증거가 필요해. 독자적인 연 구실에서 실험한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말일세." "그럼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걸 속수무책으로 보고 만 있을실 겁니까?" "알렉스, 날 죄인 취급하지 말라구! 만약 이 식품이 잘못 됐다는 게 판명되면 난 적 절 한 조치를 취할 거야." "필요하다면 내가 직접 해결방안을 생각해 보겠어요!" 알렉스는 수화기를 꽝 하고 내려놓았다. 좀더 진작 월리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 어 야만 했다. 그는 결코 자신의 편안한 일자리를 놓고 모험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가 시선을 들었을 때, 리가 그를 만나기 위해 길을 건너 오는 게 보였다. 그녀의 손 은 빈손이었다. 그녀 역시 견본 수거에 실패한 게 틀림없다. 그 순간 알렉스는 이 미친 일을 모두 잊어버리고 그녀와 사랑의 도피행이라도 하고 싶 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는 애써 절망감을 털어내고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에게 절망 을 전해 줄 수는 없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에요! 오늘 만난 사람들이 한결같이 화를 내지 않았다면 난 첨 가제가 들어 있다는 걸 믿지 않았을 거예요." 점심식사를 끝내고 리가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가죠?" "공항으로... 난 빨리 실험실을 찾아봐야겠소." "아이의 혈액 견본을 가지고요?" "그래요. 이제 혈액 검사를 해보는 수밖에 없어요. 동부 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게 어떻겠소?" "왜요?" "이 혈액을 분석하기 위해 식품의약국의 실험실로 가자는 거요. 그쪽이 우리에게 훨 씬 안전해요." 리가 고개를 저었다. "신상품의 성분을 알아낸다고 해도 우리의 문제 중 반만 해결되는 셈이에요. 나머지 반은 배후의 인물을 알아내는 거예요. 그 해답은 바로 샌프란시스코에 있어요." "좋아요. 서두르면 오후 늦게 떠나는 비행기를 탈 수가 있소. 그러면 내일 일찍 캘리 포니아에 도착할 수가 있을 거요. 게누스테크가 그곳에 좋은 실험실을 갖고 있어요." "게누스테크?" "샌프란시스코 남부에 위치한 생물공학 회사요. 그곳엔 최신 설비가 있어요. 대학원 동창이 그곳에 근무하고 있소.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연구실이 비어 있을 거요. 그에 게 부탁해서 이 혈액을 분석해 볼 수가 있을 거요." 그들은 두 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탄 다음에야 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에 오를 수가 있 었다. 안전 벨트를 맬 무렵 리는 이젠 다시는 비행기를 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 다.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왔다. 눈을 떴을 때 리는 자신이 알렉스의 품안에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당황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미안해요, 날 밀어서 제대로 앉히지 그랬어요?" "결코 그럴 생각이 없었소." 그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그녀는 그동안 마음속에 따라다니던 의문점을 밝혀 보기로 했다. "알렉스, 당신의 아내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는 한동안 어둠 속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엔 슬픔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리는 키스로서 그 슬픔을 씻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샐리는 나와 자넷보다 2살 아래였소. 내가 대학훤을 졸업하던 날 우린 결혼했어요. 그때 아내는 아주 유망한 기자였소. 사회의 악을 파헤치려는 의욕에 가득 차 있었소. 난 젊은 화학자로서 인간을 이롭게 하는 새로운 화합물을 발명할 수 있을 거라는 자 신 에 차 있었소. 우린 희망과 꿈에 부풀어 있었소." 리는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비행기는 모체를 흔들면서 급강하하고 있였다. "어느 날 오후 샐리가 전화를 걸어왔어요. 큰 호텔에서 정치모임 겸 처녁식사가 있는 데 같이 가자는 거였소. 난 늦게까지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라도 들르도록 애써 보겠 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내는 혼자 갔던 거요." 알렉스는 다시 말을 멈췄다. 그에겐 고통을 함께 나눠 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어떤 미치광이가 상원의원을 겨냥하고 총을 쏘아댔는데, 샐리가맞고 말았소. 난 그 일 이 있고 난 후 1분쯤 후에 호텔에 도착했어요. 그러나 아내는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에 사망했어요." "알렉스!" "내가 1분만 먼저 도착했어도 샐리는 살았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자넷이 전화를 걸어 왔을 때 바로 그 다음 비행기만 탔어도 그녀는 그 터널에서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알렉스, 괜히 자책하지 말아요. 그런 비현실적인 죄책감에 사로잡히면 안돼요." "비현실적인 죄책감? 재미있는 말이군. 하지만 난 죄책감으로 살아오진 않았소. 심한 무력감을 느꼈을 뿐이오." "무력감?" "죽어가는 아내를 보면서도 도울 수가 없었소. 그리고 자넷이 전화를 걸어왔을 때도 그녀를 돕지 못했소." "알렉스, 슈퍼맨도 미래를 예측하진 못해요. 이제 우리 힘으로 합해서 그 해답을 찾 아 내야 해요." 그녀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새벽 4시가 조금 넘어서야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다.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리는 마 치 몽유병환자가 돼버린 느낌이다. 그녀의 동행인 역시 상태가 매우 나빠 보였다. "베니시아까지 차를 운전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건 안전하지도 못해요. 그리고 범인은 당신의 아파트를 알고 있을 거요. 내 호텔로 갑시다. 당신도 방을 빌려 좀 눈을 붙이도록 해요." 그건 아주 멋진 계획이다. 하지만 쉐라톤 팰리스엔 그녀가 빌릴 방이 남아 있지 않았 다. 호텔 직원이 오클랜드 호텔에 방을 알아봐 줄 수 있다고 했지만 리는 피곤한 표 정 으로 머리를 저었다. "오클랜드는 너무 멀어요. 나 이대로 쓰러질 것 같아요." 그가 리를 바라보았다. "리, 내 방엔 킹 사이즈 침대가 하나뿐이오." "괜찮아요. 당신을 공격하진 않겠어요. 걸스카우트의 명예를 걸고 약속할 수 있어요. " 그가 미소를 지으며 혈액이 담긴 아이스박스를 들고서 호텔 직원을 바라보았다. "이것을 몇 시간 동안 냉장고에 넣어둘 수 있겠소?" "좋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먼저 방에 들어선 그녀는 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곯아 떨어 졌다. 잠시 후에 돌아온 알렉스는 희미한 어둠 속에서 옷을 벗으며 여자가 자는 걸 바라보았다. 긴 금발이 그 녀의 뺨에 흘러 내렸다. 그는 몸을 숙인 다음 그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올렸다. 알렉스는 머리를 저었다. 극도의 피로 속에서도 그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여자 옆에 서 잠이 들 수가 있었다. 리가 눈을 떴을 때 눈앞엔 검은 모피 같은 게 어른거렸다. 죽음과도 같은 잠에서 깨 어 난 그녀는 다시 그 물체를 유심히 응시하며 무의식의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그 리고 잠시 후에 그녀는 그것이 알렉스의 팔에 난 털이라는 걸 깨달았다.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호텔의 커튼을 뚫고 강렬한 빛이 들어왔다. 그 강렬한 빛 처럼 그녀는 지금 곁에서 잠이 들어 있는 남자에게 강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그녀 의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그녀는 이 남자와 더불어 미래를 설계할 수 없 다 는 게 못 견디게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갈등이 찾아들 여지가 없었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을 건드렸을 때, 그가 눈을 떴다. "잘 잤어요, 알렉스?" "리?" "그럼 누구인 줄 알았어요?" 그녀가 그의 오른쪽 귀밑에 키스하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리,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요? 분명히 누군가 걸스카우트의 명예를 걸고 날 공격하 지 않겠다고 말한 것 같은데?" 그가 활짝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사실은 고백할 게 있어요." 그가 목과 어깨에 키스를 퍼부어대는 통에 그녀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 다. "무슨 고백?" "난 사실 걸스카우트가 아니었어요." 그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육 체 가 하나로 결합되는 그 긴 시간은 아주 만족스럽고 따뜻했다. 드디어 그들은 조용히 누워 있었다. 알렉스는 그 사랑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엔 너무 늦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그 일에 빠져들었고 아주 많이 그걸 즐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사랑엔 미래가 없었다. "알렉스, 난 가장 혐의가 짙은 3사람을 생각했어요. 조지 펙, 마이클 웨어, 그리고 존 카스테어스예요." 알렉스는 프렌치 토스트를 씹고 있었다. 비록 완전히 잠에 빠져들진 못했지만 지금의 기분은 무척이나 좋았다. 그리고 그는 맹렬한 식욕을 느졌다. 마치 모든 것에 대한 의 욕이 백 배쯤은 불어난 것 같다. "스티브 건이나 해밀턴 자레트, 아니면 데니스 월리엄스는 어때요?" "사실 스티브는 최고 혐의자에 속해요. 하지만 그 3사람 중 어느 누구도 우리가 팸과 이야기하는 걸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들에게 이야기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소?" "당신 말이 옳아요, 알렉스. 사람들을 불신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에요." 그가 아이스박스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무튼 이 혈액이 모든 걸 말해 줄 거요. 가능한 한 빨리 분석을 해봅시다." "벌써 정오예요. 하루의 절반이 가버렸어요. 나도 실험실에 함께 가기를 바라세요?" "이 일이 끝날 때까지 당신을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겠소." "게누스테크의 친구에게 전화를 했나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샤워하는 동안에 전화를 걸어 모든 걸 준비해 두라고 했소." "이런 일들을 겪고 나니까 어딘가에 농장을 사서 필요한 식품을 직접 재배해 먹는 게 가장 안전할 것 같아요." 알렉스는 그런 화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의 웃음에서 행복을 느끼고 싶었다. 그 들의 상황이 두 사람을 함께 절망 속으로 떨어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 게누스테크로 갑시다." "좋아요. 그런데 거기서 팸에게 전화를 할 수가 있을까요?"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거요. 그런데 왜 팸에게 전화를 하려는 거요?" "그녀에게 알아봐야 할 일이 떠올랐어요." 팸과 이야기를 해본 결과 그녀는 자신을 치고 도망친 운전수가 자넷 호머를 살해한 사 람과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냈다. 팸은 두 사건이 전혀 관계가 없 을 거라고 믿고 있다. 어쩌면 팸은 극심한 공포심 때문에 올바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리는 다른 질문을 던져 보았다. "팸,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당신은 화학자들이 자신의 기획안을 서로 의논하지 못하 게 되어 있으며 조지만이 전체적인 상황을 알고 있다고 했어요. 그 이유가 뭔가요?" "조지는 화학자들이 새로운 제조법을 알게 되면 다른 회사에 그걸 팔아넘긴다고 했어 요. 그래서 배리푸드에선 화학실장만이 완벽한 실험계획을 알고 있다는 거예요. 따라 서 개개인의 화학자들은 일부만을 알고 있는 셈이죠." "그렇다면 자넷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나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리는 상대방의 대답을 인내력있게 기다렸다. "그래요." "하지만 뭔가 들은 이야기도 없었어요?" "사실 알렉스에겐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생각해 보 니까..." "뭐죠?" "3주 전 자넷이 휴가에서 돌아온 날, 우린 커퍼를 마셨어요. 내가 다시 직장에 돌아 온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휴가 동안 자신의 기획안에 많은 변화가 있어서 다시 그걸 파악하려면 몇 주일 걸려야 할 것 같다면서 질식할 것 같다 고 했어요. 그리고 원래의 업무가 훨씬 애정이 갔었다면서 그 일이 무척 독창적인 일 이었다고 하더군요."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았군요?" "그래요. 그건 규정에 어긋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애정이 가는 일이었다는 부분이 좀 이상하게 들렸어요." "어떻게?" "마치 자렛이 조지에게 자신의 업무를 다시 맡게 해달라고 이야기한 것 같은 느낌을 주더군요. 그건 조지에겐 통하지 않는 얘기였어요." "자넷이 휴가를 떠나기 전에 어떤 일을 시작하고 있었는지 전혀 말하지 않던가요?" "전혀 몰라요." "당신과 자넷은 배리푸드에서 알게 된 사이인가요?" "아뇨, 사실 우린 대학원에서 만났어요. 둘 다 MIT에서 미생물학 석사를 땄어요. 졸 업 후에 우린 몇 군데에서 취업 제의를 받았지만 태양이 좋은 캘리포니아의 배리푸드로 온 거예요." 순간 리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흑시 리의 논문 제목을 기억하고 있어요?" "글쎄요. 아, '컴퓨터 모의 실험을 통한 분자 유전에 관한 이론'이었던 것 같아요." "뭐라고요?" "미안해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말하자면 의자 디자인의 개선 같은 거 라고 생각해요. 저... 근처에 의자가 있으면 보겠어요?" 리는 의자 하나를 응시했다. "좋아요, 계속해 봐요." "의자는 항상 다리가 4개이고 등받이, 그리고 앉음대가 있죠. 하지만 다리를 3개나 5 개로 변형시키는 실험을 해보고 싶다고 가정해 봐요. 그전 컴퓨터가 그 새로문 모양 을 모의 실험해 주는 거예요. 그 새로운 모습을 모니터에 비추는 거죠. 그게 적합하다면 컴퓨터는 새 디자인이 공학적인 견지에서 제작이 가능하다고 알려 줘요." "다시 말해서 거기 앉아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군요?" "맞아요." "이해가 가는군요. 하지만 분자 유전의 변화도 방법으로 연구하는 건가요?" "물론이예요. 적절한 프로그램을 넣고 그 결과를 물으면 컴퓨터는 항상 그 결과를 제 시해 줘요. 컴퓨터는 과학분야에서 아주 편리한 실험자가 되죠." "그럼 그 방법을 새로운 식품 맛을 알아내는 데도 사용할 있나요?" "그건 안돼요. 컴퓨터가 음식의 맛을 볼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새로운 배합을 제 시 할 수는 있어요. 예를 들면 아스파탐은 L-아스파르트와 L-페닐알라닌이라는 두 개의 다른 아미노산이 결합한 거예요. 그건 설탕보다 180배나 더 단맛을 낼 수가 있어요." "뉴트라스위트라고 부르는 것 말인가요?" "그래요. 뉴트라스위트는 상품명이에요. 그건 정말 획기적인 발명품이었죠. 탄수화물 이 아니라 단백질로 신진대사가 돼요. 다이어트하는 사람들에겐 아주 효과적이죠. 내 가 그런 걸 발명했다면 엄청난 부자가 됐을 거예요." "자넷의 이론도 그런 배합에 관심이 있었나요?" "아니에요. 난 그저 아스파탐을 식품산업에서 화학적 발전의 예로 든 것뿐이에요. 지 금 생각해 보니까, 그녀의 논문은 다소 이론적이었던 것 같아요. 분자가 변형하면 어 떤 결과가 되는지, 그리고 화학적으로 야기된 변형과 영양분에 미치는 효과, 그리고 세포의 재생성 상태에 관한 것들이었어요." "복잡해서 잘 모르겠군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식품 제조 과정에 응용되기도 하나요? 자넷이 배리푸드에서 적용하려 했을지도 모르잖아요?" 팸의 음성에 피로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녀의 석사학위 논문을 읽어 보세요. 아마 마크가 복사본을 갖고 있 을 거예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사실 그것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14 "됐어요. 전기화학 추적분석이 그걸 확인했어요. 백만 분의 일도 안돼요." "알렉스, 그게 뭐예요?" 팸의 전화를 끊고 난 뒤 그에게 다가가며 리가 물었다. 알렉스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미소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몰라요. 이건 아주 이상한 분자구조를 갖고 있소. 사실 이런 것 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모르겠소!" 그리고 15분 동안 그는 완전히 혼자만의 과학 여행 속에 빠져들었다. "믿을 수 가 없군! 이 컴퓨터는 뇌의 조직에 흡수되어 시상하부의 일부가 되어 있다 고 밝히고 있어요!" 드디어 그가 외쳐댔다. "알렉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제서야 그는 리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한 팔로 그녀를 끌어 안 았다. "시상하부란 우리의 뇌에서 느끼고 맛보고 냄새를 맡는 부분이오. 맛 실험에 참석한 사람들이 계속 새로운 배리푸드의 식품이 너무 맛이 있다고 했던 걸 기억해요?" "그렇다면 그 새로운 물질이 뇌에서 맛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단 말인가요?" "맞아요. 맛을 느끼는 부분을 자극시킴으로써 맛에 대한 뇌의 인식을 증가시키는 거 요. 그 음식맛이 어떤 것이든 음식의 자연조직과 맛을 확대시키는 거요. 부드럽고 달 콤하고 신선한 맛을 무엇이든 훨씬 더 강하게 만드는 거요. 또한 그 것이 어떻게 중 독 현상을 일으키는지도 알 수 있었소. 뇌조직의 비정상적인 흥분상태는 시상하부의 둘 러 싼 조직의 활동을 둔화시키면서 점차 마모시켜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신상품을 먹은 사람들은 짧은 시일 내에 그걸 더 먹고 싶어서 안달을 하 게 된다는 거군요? 다시 세포를 흥분시키기 위해서?" "그래요. 하지만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선 많은 실험을 거쳐야 해요. 사람들의 몸무게와 신진대사가 각각 다르니까." "그걸 지금 할 생각인가요?" "그럴 시간도 없고 충분한 견본도 확보하지 못했소. 이 새로운 물질을 아메스 테스트 를 지치게 해야겠어요." "아메스 테스트는 뭐죠?" "발암물질을 추적하는 실험이오. 자, 나를 도와줘요." 리는 알렉스를 도와서 2개의 견본을 실험대 위에 올려놓았다. 각 견본에는 필요한 성 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일한 차이점은 하나는 기묘한 첨가제를 섞은 것이고 또 하 나 는 섞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녀 역시 곧 그 실험에 빠져들었고, 어느 사이에 몇 시간 이 흘러갔다. "보지 않았으면 믿지 못했을 거요." 드디어 그가 마지막 현미경 슬라이드에 있는 물체를 응시하며 말했다. "뭘 봤는지 말해 줘요." 그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리를 바라 보았다. "난 이 새로운 물질을 사용함으로써 생긴 돌연변이 박테리아의 수를 정상적인 상황하 에서 생긴 박테리아의 숫자와 비교해 봤소. 이 물질이 뭔지는 몰라도 무려 500퍼센트 나 돌연변이를 가속시키고 있소." "그렇다면 그 돌연변이 박테리아가 암을 유발하는 능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까요?" "맞았소. 이 물질은 내가 아직까지 본 중에서 가장 강력한 발암물질이오." "암이 발생하기까진 얼마나 걸릴까요?" "그건 알 수 없어요." "아이오와 사람들이 벌써 암에 걸린 건 아닐까요?" "그렇진 않아요. 사람의 몸은 발암물질의 유입을 방어하는 능력을 갖고 있소. 하지만 그 양이 많거나 오랫동안 발암물질이 유입되면 면역기능이 파괴되고 암이 자리잡게 되 는 거요. 하지만 레로이도 아직은 괜찮을 거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중지시킨다면 그들은 암에 걸리지 않겠군요?" 하지만 알렉스는 그녀의 말은 듣지 않은 채 앞에 있는 자료를 다시 살폈다. "이건 아주 빨리 퍼지는 것 같아요. 아주 빨리...., 한번 암이 자리를 잡으면 뇌까지 퍼지는 데 몇 달밖에 걸리지 않을 것 같소." "뇌?" "이 새 물질은 뇌상하부 조직의 구조와 흡사하기 때문에 쉽사리 뇌혈관을 통과하게 되 어 있소. 한번 뇌에 암세포가 자리잡게 되면 더이상 손을 쓸 수가 없게 될 거요. 모 든 게 끝장 나고 말아요."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도 배리푸드 사람들은 이걸 까맣게 모른 채 신상품을 추진하고 있어요. 이럴 수는 없어요!" 리가 소리쳤다. "그들은 아메스 테스트를 거쳤을 거요. 제조업자들은 종종 그런 식으로 새로운 화학 첨 가물을 숨기곤 해요." "그렇다면 이 성분이 발암물질이라는 걸 미리 알았다는 건 가요? 인간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들은 맛 강화제로 빨리 한몫을 잡고 싶었던 거요. 하지만 첨가제의 요소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독터 보인턴이 레로이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면 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을 거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믿을 수가 없어요!" 알렉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배리푸드의 누군가가 그 새롭고 신비한 식품첨가제를 발견했다고 가정합시다. 그는 그것이 발암물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중독성이라는 걸 알지 못했을 수도 있소. 아 무튼 그걸 신상품에 넣고서 대대적인 선전과 함께 소매상인에게 넘겼다고 합시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되겠소?" "소비자가 먹게 되고 즉시 거대한 수요가 일 거예요. 그리고 엄청난 이익이 남겠죠?" "그럼 경쟁업체는 어떨 것 같소? 그들이 시장을 그렇게 잠식당하고서도 가만히 있을 것 같소?" 알렉스가 의도하는 바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천만에요! 그들은 배리푸드의 식품을 수거해서 분석할 거예요. 그리고 새로운 맛 강 화제가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될테고 즉시 식품의약국에 보고해서 아메스 테스트를 받 게 할 거예요."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소?" "그래요. 왜 그런 식품첨가제를 썼다는 게 금방 드러날 텐데 그런 짓을 했을까요? 결 국 회사가 망하게 된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점이 바로 그거요." "아무튼 진실이 밝혀진 이상 이제 당신은 식품의약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군요. 이 제 그들을 저지시킬 증거가 있으니까." 하지만 알렉스는 조용했다. 그는 뭔가를 주저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 는 게 틀림없다. 리는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알렉스? 이제 이 정보를 식품의약국의 당신 상관에게 보고할 거죠? 그렇죠?" "리, 아직 일러요. 난... 이 화학성분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아내야 해요. 컴퓨터로 그 분자구조를 복사하려 했지만 안 됐어요. 유전공학을 이용한 것 같은데 잘 모르겠 어 요. 원래의 데이터가 있어야 해요. 반드시 그걸 손에 넣어야 해요." 그가 팔을 빼내는 순간 리는 한기를 느꼈다. 그건 순전히 그의 따뜻한 온기에서 벗어 났기 때문이다. "난 그걸 알 것 같아요. 그건 자넷의 프로그램이었어요." "자넷? 아니, 그건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거요." 리는 그에게 팸과의 전화 내용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자넷이 창조해낸 기획안에 대 해 언급했던 것도 이야기했다. "알렉스, 마이클 웨어가 줄곧 그 신상품이 자넷의 기획안이 틀림없을 거라고 말하는 걸 듣고 생각해 봤어요. 다른 화학자들은 그것이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 어 요. 그들의 말을 믿는다면 자넷만이 그 일을 맡았다는 게 돼요. 그렇다면 그녀 혼자 서 만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게 충분히 납득이 가잖아요?" "그 러시아 수도승이 진실을 말했다면 당신의 추리가 옳아요." "그래요. 그리고 그 기획안이 자넷의 것이라면 그게 어떻게 잘못될 수 있을까 하는 의 문을 가져 봤어요." "그렇다면... " "확실친 않지만 자넷이 출산휴가를 가기 전에 뭔가 실험을 시작하고 그 실험이 이 새 로운 식품첨가제로 개조됐다면 다른 화학자들이 아무도 신상품에 관여하지 않은 것처 럼 보이는 이유가 설명될 수 있어요." "알겠소. 자넷이 원래의 계획에 대한 조절능력을 잃었다고 생각한단 말이군요?" "그래요, 햄이 지난 6개월 동안 신상품을 완성했다고 말하는 건 일종의 연막일 수도 있어요. 그 상품이 자신이 사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개발됐으므로 새로운 맛 강화제의 공적을 독점하기 위한..."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신의 추리가 맞는다면 해밀턴 자레트가 이 사건의 배후인물이오, 자넷이 식 품첨가제의 해로운 부작용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하자 그녀를 죽인 거요." 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훌릉한 추리예요. 해밀턴 자레트가 자넷의 살인범에 관여했을지는 몰라도 그는 화학 자는 아니에요. 그렇다면 그 새로운 식품첨가제의 위험성을 알고 있는 화학자도 배우 인물일 거예요." "리, 자넷이 햄에게 그걸 알려 줬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그는 그 물질을 계속 투 입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린 다시 원래의 문제로 돌아가게 돼 요. 왜 해밀턴 자레트는 이 새로운 맛 강화제를 넣었을까요? 그것의 정체가 발각되면 그대로 파멸하고 말텐데... " 리가 머리를 흔들었다. "뭔가를 캐고 들어가면 갈수록 자꾸만 논리에 어긋나는군요" "뭔가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거요. 그리고 그걸 알아내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오. 마 크 를 방문해서 그가 자넷의 논문 복사본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는 거요. 그걸 봐야 할 것 같소." 리가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알렉스, 6시 30분이에요." "다시 시장한 것도 무리가 아니군. 마크를 만난 후에 저녁 식사를 합시다. 자, 그에 게 전화를 걸어 우리가 갈 거라고 말해요." 데니스 월리엄스는 배리푸드의 로비를 서성이며 스티브 건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드 디 어 그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그녀는 즉시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사무실에 돌아왔나요?" 데니스가 물었다. "금요일 아침부터 출근하지 않고 있소." 스티브가 대답했다. "어쩌면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녀는 알렉산더와 함께 가지 않았 는 지도 몰라요." 스티브가 머리를 저었다. "틀림없이 함께 갔어요. 난 컴퓨터에 새로운 암호를 입력했어요. 그녀의 손바닥 지문 이 안전 화면에 기록되는 순간 경비원에게 메시지가 전달되고 나에게 즉시 보고될 거 요. 그럼 내가 당신에게 연락을 하겠소. 함께 그녀가 하는 것을 감시해 봅시다." "어쩌면 리는 월요일 아침에나 돌아올지도 몰라요." 알렉스는 리의 피에로를 몰고 베이 브리지를 지나 이스트 베이와 라파예트 시로 향하 고 있었다. 둘 다 그 엄청난 사실이 주는 공포감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가 다시 상념에서 벗어났을 때 바로 눈앞에 칼데코트 터널이 보였다. 그 어두운 구 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녀는 숨을 죽였다. 알렉스가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좀 이상한 기분이 들죠? 이곳에 들어서면 난 자넷의 무덤으로 들어 서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아직 사고가 난 곳에 페인트 도 다시 칠하지 않았군? 마치 무덤 속처 럼 검게 그을러 있어요." 리는 몸을 떨었다. "난 때로 자넷의 죽음에 보복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이해할 수 있겠어요?" 리는 다시 한번 자넷의 미소 짓던 얼굴과 엄마를 잃은 그녀의 아이들을 생각했다. 마 크 주니어와 어린 몰리의 커다란 갈색 눈동자를....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난 이해할 수 있어요." "그 논문을 그렇게 빨리 찾았어요?" 마른 체격의 남자가 알렉스에게 두툼한 책을 건네주자 리가 소리쳤다. "이건 책상에 꽃혀 있었어요. 자넷이 퇴근해서 돌아오면 때로 한두 시간씩 그걸 읽던 기억이 나요." "최근에 읽었나요?" 리가 물었다. "그래요, 출산휴가 전과 다시 근무한 이후로 읽었으니까요." "혹시 이걸 왜 읽었는지 알지 못합니까?" 알렉스가 물었다. "물어 보진 않았지만 짐작은 할 수 있어요. 아마 좋은 시절이 생각났기 때문일 거요. " "좋은 시절?" "무엇이든 가능했던 좋은 시절..." 마크의 말은 좀 모호하게 들렸다. "난 이해할 수가 없군요." 리가 말했다. 마크가 손님에게 앉으라고 손짓을 하고 그들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가 만날 때부터 시작된 것 같아요. 그 당시 아내는 배리푸드에 막 입사했을 때 예 요. 난 버클리에서 막 교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였어요. 어느 날 우린 샌프란시스코의 통근열차를 타고 있었어요. 그런데 열차가 운행관계로 20분 정도 연착을 하고 있었어 요..." 과거를 회상하는 마크의 음성엔 기쁨과 고통이 젖어 있었다. "그때 아내는 몹시 화를 냈어요. 난 그게 연착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아 내는 상관이 자기에게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는 창조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화를 냈어요. 자유로운 학문의 세계에서 살던 아내는 회사일에 환멸을 느꼈던 것 같았어요 . " "자넷이 대학시절에 추구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던가요?" "구체적인 건 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대학원에서 연구했던 걸 응용해 보고 싶어했 어 요. 그러나 그럴 기회가 없는 것 같았어요." "어떻게 응용한단 이야긴 안하던가요?" "아뇨. 난 역사를 전공했어요. 아내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굳이 설명하려 하 진 않았어요. 다만 회사생활에 자유가 없는 걸 안타까워했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자넷이 논문을 다시 읽었던 게 단지 자유로운 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 을 까요?" 알렉스가 말했다. "내 생각은 그렇지만, 틀렸을지도 모르겠군요. 자넷은 지난 몇 년 동안 연장근무 때 문 에 항상 피로에 지쳐서 돌아오 곤 했어요. 직장에 관한 이야기는 하려고 하지도 않았 어요." "연장근무의 이유에 대해선 말하지 않던가요?" 마크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후회가 돼요. 난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거든요. 단지 난 그녀에게 나와 아이들에게 충실해 줄 것을 원했어요. 내가 너무 심하게 몰아붙였 어 요." 마크가 너무 상심해 있었기 때문에 리는 더이상 질문을 던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마크, 제발 생각해 봐요. 흑시 자넷이 왜 직장에 늦게까지 있어야 하는지 말하지 않 던가요? 지나가는 말로라도... " 마크가 고개를 저었다. "함께 있을 때 우린 업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우리 둘 다 상대방의 일에 대 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도 이유가 될 거예요. 그리고 우린 그 시간에 좀더 상대방 에 게 신경을 쓰려고 했어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우리에겐.. 그리 시간이... 시간 이 많지 않았던 거예요." 마크는 피아노 앞에 멈춰서서 자넷의 사진을 집어들었다. 그는 죽은 아내의 모습을 한 동안 들여다보았다. 알렉스가 리에게 신호를 보냈고, 두 사람은 조용히 그곳에서 빠 져 나왔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서 식사를 했다. 저녁식사는 침묵 속에서 계속됐다. 알 렉스는 자넷의 논문을 읽었고 리는 음식을 먹는 데만 열중했다. 하지만 그 내용이 궁 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드디어 그가 자넷의 논문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그 녀는 알렉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가 귀를 긁적거렸다. 그건 지극히 무의식적이고 정 상적인 행동이다. 그런데도 그의 행동이 그녀를 매혹시키고 있다. 그는 이 미쳐 버린 세상을 바로 잡아 줄 것 같은 유일한 인물이다. "알렉스!" 그는 생각의 여로에서 벗어나 비로소 진지한 갈색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했다. "자넷은 정말 영리한 여자였소. 일급 과학자요. 만약 그가 자신이 창조하고 있는 걸 알기만 했다..." "자넷의 논문에 뭔가가 있군요? 그렇죠?" 알렉스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엔 화학적으로 유발된 돌연변이 배후의 이론을 설명하고 그것이 뇌세포를 흉내 내 는 방법이 나와 있어요. 또한 자넷은 뇌상하 부에 있는 기쁨을 고양시키는 이론을 파 헤쳤어요. 내가 말했듯이 뇌에서 기쁨을 느끼게 하는 곳 말이오. 하지만 분자를 돌연 변이 시키는 방법은 여기 묘사되어 있지 않아요. 그건 너무나 복잡하고 기술적인 것 이 어서 컴퓨터에만 묘사될 수 있다고 적고 있소." "그렇다련 그녀는 배리푸드에 있는 컴퓨터를 이용했겠군요."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신 화학자료를 끊임없이 컴퓨터에 입력시키고 오랜 시간을 계속 모니터를 감시한 다 고 해도 정확한 유전암호를 획득할 확률은 없는 셈이오." "하지만 그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에요. 그건 어떻게 설명하겠어요?" "글쎄요. 어쩌면 뜻밖의 행운이었는지도 모르겠소. 우연히 화학적인 반응이 나타났을 지도 모르는 일이오. 내가 본 물질은 몸체 밖에선 존재할 수가 없는 것 같았소. 또한 식품매개 체내에서도 존재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그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게 존재하는 건 이미 알려진 화학법칙에 부합되지 않아요. 아니면 우리의 화학법이 법 적 효력이 없단 뜻일까? 정말 재미있는 현상이오." 순간 리는 그에게서 과학자의 진 정한 호기심을 엿보았다. 그는 잠시 그 물질이 치명적인 것이라는 걸 잊은 듯했다. "알렉스, 그걸 재생할 수가 없다면 어떻게 그게 재생됐을까요?" "원래의 프로그램에서 추론해야 해요. 원래의 프로그램이나 정확한 순서에 따라 다시 처리해서 제때에 숙성시킨 유사한 변형이 없이는 그 물질은 존재할 수가 없소." "그렇다면 그건 모두 컴퓨터가 해야겠군요?" "리, 우린 그 프로그램을 손에 넣어야 해요. 오늘밤에... 내일은 그것이 제조공장에 분배될 거요. 그걸 당장 중단시켜야 해요. 그러기 위해선 배리푸드로 가야 하오. 어 떻 게든 날 회사 안으로 들어가게 해줘요. 원래의 데이터를 입수해야만 하오." 리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한 일이에요. 허락을 받지 않고 침입하면 즉시 경보가 울리고 경찰이 출동하 게 되어 있어요." 알렉스의 표정에 좌절의 빛이 짙게 베어 있다. "아무튼 여기서 나갑시다. 걸으면서 생각해 봐요." 그가 말했다. 그들은 몇 블록을 걸었다. 하지만 해답은 오직 하나뿐이다. 물론 알렉스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나 혼자 들어가서 그걸 갖고 나오겠어요." "당신 혼자 들여보낼 순 없소." "이게 유일한 방법이에요. 지금은 일요일 밤이니까 아무도 없을 거예요. 난 안전할 거 예요." "하지만 지난번에도 파일 이름을 몰라서 실패했잖소? 그런데 어떻게 찾겠다는 거요?" "하지만 난, 나름대로 컴퓨터를 알고 있어요. 이제 자넷의 파일이 다른 걸 알았으니 까 그녀의 접근암호를 사용하기만 하면 돼요. 이번엔 시간을 상당히 절약할 수가 있을 거 예요." "자넷의 접선암호를 찾을 수가 있겠소?" "다른 모든 것처럼 접근암호엔 소프트웨어 안에 라벨이 붙어 있어요. 자넷의 것을 찾 을 수가 있을 거예요." 그는 계속 항의를 했지만 결국 리가 이기고 말았다. 그들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모 퉁이를 돌아서자 건물 내부의 불빛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건물 옆의 어둠 속에서 그 는 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안은 안전하고 따뜻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꿀 수가 있소." 그가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 유혹은 달콤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우리가 위험을 알게 된 순간부터 다른 방법은 없었어요. 난 가야 해요." "한 시간의 여유를 주겠소. 그때까지 나오지 않으면 난 건물 안으로 들어가겠소. 경 보 가 울리건 말건 상관없소." 그녀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좋아요, 지금이 10시 30분이까 11시 30분까진 나오겠어요." "조심해야 하오, 리." 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따뜻하고 거친 키스를 해왔다. 그녀는 두려움을 떨쳐버 리 기 위해서 그의 품에 안겼다.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15 유니폼의 경비원에게 인사를 건넨 다음 리는 사무실로 올라가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접근 암호에 놓고서 자넷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200개나 넘는 이름이 있었지만 그 중 에 자넷의 이름은 없었다. 이럴 리가 없어! 다시 한번 이름을 훑어보았지만 끝내 자 넷 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다. 자넷은 접선암호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실망감이 고여 들기 시작했다. 왜 자넷의 접선암호가 없을까? 대답은 단 한 가지였다 . 그건 삭제됐을 것이다. 갑자기 지난 화요일에 컴퓨터 자료를 검토하면서 보안체제의 변화와 함께 접선암호가 삭제돼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틀림없이 그게 자넷의 암호였어. 그런데 그전 왜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그녀는 재빨리 과거의 자료로 돌아가서 지워진 암호를 호출했다. 지워진 자료를 되찾 는 일은 일년 전 컴퓨터를 갖고 놀 때 배워 둔 기술이다. 드디어 자넷의 암호가 나오 자 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막상 자넷의 파일이 수백 개나 화면에 나오자 그녀의 가슴은 다시 덜컥 내려앉았다. 벌써 10분이나 흘러갔다. 리는 시간이 주는 초조함을 애써 누르며 화면을 들여다보았 다. 그 파일들은 알파벳 순서대로 되어 있고 모두 암호가 붙어 있다. 그리고 대부분 그 문자들은 단어로 표기되어 있다. 마크라고 표기된 파일이 있어, 그 파일에 접근해 봤지만 그건 4년 전에 개발했던 영양 빵의 제조법에 관한 것이었다. 새로운 식품첨가의 연구엔 어떤 이름을 붙여 놓았을까? 가면? 경구? 방해물? 별? 이 것 저것 가능할 거라고 생각 되는 걸 눌러 봤지만 새로운 식품첨가에 관한 자료는 나타 나 지 않는다. 다 소용없는 짓이다. 리는 자넷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몇 년 전에 어떤 생 각을 했을까 하고 상상해 보았다. 순간 자넷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삶의 풍미를 느 끼게 해 주는 그런 미소였다. 이제야 리는 그 미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자넷은 결 국 독창적인 연구를 해서 자기만의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을 했었을 때 둘째 아이의 출산을 행복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섬광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리는 그 파일의 이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 다. 그녀는 감았던 눈을 뜨고서 다시 파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슴을 졸이며 기 다렸던 이름을 찾아냈다. 아기... 자넷이 자신의 독창적인 연구에 생각한 이름은 바로 그것 일 것이다. 그녀는 과학적 인 연구를 또 다른 아기의 탄생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리는 재빨리 그 정보에 접근하는 키를 눌렀다. 컴퓨터가 응답하길 기다리는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만 느껴진다. 드디어 화면에 방대한 파일의 첫째 페이지가 나타났다. 안도감이 몰려왔다. 바로 그녀가 찾던 파일이다. 모든 걸 인쇄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원래의 특징 요소와 변형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걸 확인한 다음 그녀는 인쇄 키를 눌렀다. 하지만 아무런 작동도 하지 않는다. 다시 눌러 봤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그제서야 리는 뭔가가 잘못돼 있다는 걸 알았다. 그 프로그램은 인쇄 불가의 상태로 서 이중 안전장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그 프로그램에 접근한다고 해도 결코 인쇄는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리는 재빨리 인쇄 불가에 대한 지시사항을 알리는 자료로 돌아갔다. 그 실험자료는 임 의로 인쇄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건 자넷이 죽던 날 밤에 인쇄된 게 분명했다 . 새로운 식품첨가물의 위험을 제시한 실험에 관한 결과였다. 리는 다시 그 프로그램에 집중했다. 그녀는 실험의 특징요소와 실험결과 뿐만 아니라 전체 파일을 인쇄할 수 있 도록 그걸 정정했다. 그리고 다시 파일로 돌아와서 그녀가 필요로 하는 부분을 확인 하 고 다시 인쇄 키를 눌렀다. 프린터가 작동하는 소리를 듣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리는 자넷을 생각했다. 그 밝은 금발 머리가 그녀가 하는 일을 격려하듯 고 개 를 끄덕여 주는 것만 같다. 이제 망설일 시간이 없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프로그램 을 작성하려고 했다. 막 실행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리는 고개를 들고는 깜짝 놀랐다. 너무나 일에 열중 한 나머지 복도의 조용한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데니스! 스티브! 깜짝 놀랐잖아요? 그런데 여긴 웬일 이죠?" 광고부장이 비난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리, 당신이야 말로 여기서 뭘하는 거예요?" "난 햄의 기자회견을 위한 자료 때문에 일하고 있는 거예요. 내일 아침까지 이걸 햄 에 게 갖다 줘야 하거든요." 데니스가 리의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미심쩍은 어조로 물었다. "이렇게 늦게 말인가요?" 리는 데니스가 화면을 보기 전에 얼른 지움 버튼을 눌러 버렸다. 이제 데니스의 음성 은 화가 난 것처럼 들렸다. "리, 이게 뭐죠?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선 당신이 뭘하려는지부터 밝히는 게 좋겠군요." 리가 쏘아붙였다. "스티브, 프린터를 검사해 봐요.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봐야겠어요." 그러나 스티브는 데니스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스티브, 프린터를 검사해 보라고 했잖아요?" 경비실장은 마지못한 듯이 프린터의 커버를 벗겼다. 그리고 인쇄된 페이지를 찢어서 데니스에게 건네주었다. 데니스는 의자에 앉아 그걸 읽기 시작했다. "맙소사! 아 무것도 모르겠군. 하지만 바로 그거야. 자넷의 이름이 기안자 난에 나와 있어. 리,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말해 줘요." 두 사람이 그 치명적인 식품첨가제에 얼마나 관여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그것이 자넷의 작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입을 열어선 안된다. 리는 애써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자넷, 그래 봤자 소용없어요." 데니스가 말했다. "우린 자넷과 알렉스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알렉스를 돕고 있다는 것 도 알아요. 하지만 난 당신이 그러는 걸 내버 려둘 수는 없어요. 당신이 배리푸드를 망치게 할 수는 없어요." 배리푸드를 망치게 한다고? 순간 리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식품첨가제에 관한 진실을 모 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리는 새로운 결심을 하고 데니스를 바라보았다. "데니스, 난 알렉스를 돕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에요. 배리푸드 의 새 식품첨가제는 위험한 발암물질이에요. 그게 발각되면 우리 모두 파멸하고 말아 요." 데니스가 리를 바라보며 머리를 저었다. "새로운 식품첨가제? 그게 뭐죠? 우린 새로운 식품첨가제는 넣지 않았어요. 혁신적인 제조기법으로 신비의 맛을 냈을 뿐이에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리?" 리는 앞으로 다가가서 데니스의 팔을 잡았다. "내 말을 믿어야 해요. 이 인쇄용지의 제조공식은 자넷이 만든 거예요. 그녀가 죽기 전에 나에게 경고하려 했던 것도 바로 이거였어요. 그리고 그녀는 알렉스에게도 알려 서 식품의약국을 끌어 들이려 했어요." "식품의약국? 누가 식품의약국에서 일한단 말이오" 스티브가 물었라. 데니스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알렉산더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하치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리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잖아요? 내가 당신과 햄에게 리는 결코 회사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 아 요? 리는 속고 있는 거예요. 자넷이 그랬던 것처럼... " 리가 그녀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자렛이 속았다니..." "알렉산더가 자넷에게도 식품의약국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뜻이에요. 우리도 최 근에야 진실을 알게 됐어요, 데니스가 호주머니에서 접은 종이를 꺼내 리에게 건네주 었다. 그건 티베리푸드의 인사 파일에서 온 비밀보고서였다. 그건 L.E, 알렉산더라는 산업 스파이의 업무에 관한 것이다. 그의 업무는 배리푸드의 신상품의 비밀제조법을 알아내는 일이었다." 리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불가능해요. 알렉스는 식품의약국에서 일해요. 내가 증명할 수 있어요." "어떻게?" "전화를 걸어 보면 돼요. 그의 상관은 윌리라고 했어요. 그의 성은 생각이 나질 않는 군요." "핸센 말이죠? 월리엄 핸센? 지금은 일요일 밤이라서 전화를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내가 어제 월리엄 핸센과 통화를 했어요.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식품의약국엔 L.E. 알렉산더라는 인물이 없다고 했어요." "틀림없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데니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교묘하게 속고 있는 거예요. 스티브는 이 보고서를 티베리에 있는 그의 스파 이에게서 빼냈어요. 이건 너무 깊숙히 묻혀 있어서 금요일 오후에야 빼내올 수가 있 었 어요. 알렉산더가 티베리의 일급 스파이기 때문에 그의 파일은 일급비밀로 묻혀 있었 던 거예 요. 우린 어떤 전문가가 신상품의 제조법을 훔치는 데 관여 했다는 경고를 받 았어요. 금요일 오후에야 우린 그 전문가가 누구인지를 알아낸 거예요." 리의 가슴에 강한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이어 스티브의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런데 당신은 내 말을 듣지 않았소!" 리는 분노에 찬 시선으로 경비실장을 노려보았다. "스티브, 당신의 말은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요! 당신은 날 공 격했어요." 데니스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스티브가 당신을 공격했다고요?" 그녀는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가 왜 얼굴을 얻어맞았는지 알고 있 나요?" "알렉산더가 두 사람을 미행하다가 스티브를 때렸다고 했어요." 리가 고개를 저었다. "알렉스가 나를 공격하려던 스티브를 때려 줬던 거예요. 그건 거짓말이에요. 데니스, 그가 들은 것도 모두 속이지 않았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어요?" 데니스가 조용히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스티브, 정말 당신이 리를 공격했나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데니스가 리를 보았다. "이제 이해가 가는군요. 저 바보 같은 남자가 알렉산더에게 당신을 구조할 완벽한 기 회를 준 거예요. 그래서 당신은 혼란에 빠진 거예요. 사실 당신같이 이지적인 여자가 어떻게 속아 넘어갈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이제 당신은 상황을 제대로 알아둘 필요가 있어요. 이 보고서는 진짜예요. 그들이 이걸 가져왔을 때 난 스티브의 사무실에 있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가 있죠?" "리, 이 신상품이 개발되자마자 햄은 나를 트랜스 월드에서 빼내서 시장광고에 돌입 하 도록 했어요. 우린 티베리가 그 제조법을 훔쳐가려는 시도를 할 거라고 확신하고 우 리 의 컴퓨터를 티베리에 연결해 뒀어요. 그리고 우리의 스파이도 그 곳에 심어 뒀죠. 그 결과 존 카스데어스가 하는 짓도 알게 됐죠. 하지만... " "존 카스테어스?" "그래요... 그는 3년 전 배리푸드에 온 이후로 티베리에게 정보를 주었어요. 트랜스 월드가 우리를 인수한 직후에 그들이 그를 이곳에 보낸 거예요. 예전의 경비실장도 알 고 있었어요. 그래서 햄이 회사를 인수했을 때 존 카스테어스와 그의 인력을 연구실 에 서 격리시킨 거예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존은 항상 호기심이 많고 뭐든 알아내려고 노력했으니까. "그렇다면 왜 그를 해고하지 않는 거죠?" "그건 어리석은 짓이에요. 그를 해고해 버리면 티베리에선 다른 스파이를 보낼 것이 고 또 우린 그 스파이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해야해요. 몇 년 전 알렉산더를 자넷에게 소개했던 사람도 바로 그였어요." 리가 고개를 저었다. "알렉스는 자넷의 여동생인 샐리와 결혼했어요. 그리고 자넷과 그는 대학시절부터 아 는 사이였어요." "천만에! 그것도 거짓말이에요. 자넷에겐 여동생이 없어요." "데니스,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난 그를 믿어요." 데니스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리, 정신 차려요! 만약 이 신상품이 그렇게 위험한 거라면 왜 햄이 그걸 시장에 내 놓으려고 하겠어요?" 그건 알렉스와 리가 함께 씨름하던 문제였다. 하지만 이제 그 문제는 다른 의미를 갖 고 제기되고 있다. "리, 만약 그 상품이 그렇게 위험하다면 알렉스가 왜 그 프로그램을 파괴해 버리려고 하지 않고 새로운 제조법에 관한 비밀을 빼내 오라고 하겠어요? 당신은 이 인쇄용지 를 그에게 가져다 주려는 거죠? 그렇죠?" "그래요. 하지만 당신이 모르고 있는 게 있어요. 자넷은 나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그 는 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했어요. 그건 신상품을 말하는 거였어요!" 데니스가 호주머너를 뒤져 하얀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편지를 꺼내 그걸 리에게 건 네 주었다. "자넷이 경고를 하려고 했던 사람이 당신 혼자만이 아니었어요. 이걸 읽어 보세요." 그건 자넷이 죽은 날인 금요일에 보낸 걸로 되어 있었다. 데니스,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요. 리는 출장중이고 조지는 너무 바빠요. 티베리푸드의 스파이가 내 새로운 제조기법을 훔치려 하고 있어요. 우린 몇 년 전 태호호수에서 만 나서 한순간의 불륜에 빠졌어요. 그게 잘못이었던 것 같지만 마크와의 사이에 문제가 있었어요. 이제 와서 당신에게 이런 걸 털어 놓은 이유는 바로 그 남자가 내게 신상 품 의 비밀을 꺼내 오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의 이름은 알렉스이고 우리가 만 났을 때 그는 식품의약국에서 일하고 있는 것처럼 행세했어요. 하지만 난 그가 티베 리 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만약 그 비밀공법을 빼내 오지 않으면 마크에게 몰 리가 자신의 아이라고 밝히겠다고 위협하고 있어요. 데니스, 제발 날 도와줘요. 그는 오늘밤 그 정보를 꺼내 오길 요구하고 있어요. 시간이 없어요. 자렛 리는 완전히 멍한 상태에서 그 편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오, 하느님! 이게 사실 입니까? 알렉스는 몰리의 갈색 눈동자가 갈색 눈의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은 거라고 했 었는 데, 그렇다면 알렉스가 그 아이의 아버지였단 말인가? "리, 그 편지는 내 바구니에 있었어요. 불행히도 수요일 아침에야 그걸 발견했어요. 아마 그 전엔 내가 발견하지 못했나 봐요. 그래서 난 알렉스의 지원서가 가짜라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알렉스가 티베리의 스파이였다는 것도..." "아뇨, 이건 사실이 아니에요! 자넷은 터널에서 나를 살해하려고 했고 우리 집에 침 입 했던 그 남자에 의해 살해된 거예요!" "정말 단단히 세뇌당했군요! 리, 아무도 자넷을 죽이지 않았어요. 그녀는 알렉산더에 게 서류를 가져다 주려다가 살해당한 것뿐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 남자는 당신에 게 접근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팸도 초록색 트럭에 치였어요. 그리고 누군가가 알렉스의 차에 불을 질렀어 요 !" "화학자인 팸 헤이어가 치였다고요? 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하지만 차를 불 태운 건 알렉스의 짓일 거예요. 당신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 그가 꾸며낸 일이에요. 당신이 회사를 배신하게 하려고..." 데니스가 일어나서 나머지 인쇄용지를 모은 다음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스티브, 성냥 좀 줘요." 리는 그녀가 인쇄종이를 태우는 걸 물끄려미 지켜보았다. 데니스를 막아야 해. 알렉 스 는 저걸 필요로 하고 있어. 하지만 그는 왜 그걸 필요로 할까? 리는 너무도 탈진한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거운 혼란만이 그녀의 머리를 짓눌렀다. 데니스가 리의 책상 쪽으로 다가왔다. "이제 더이상 인쇄 하지 않을 거죠, 리?" "그래요, 데니스." 그녀의 음성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 여자의 말을 믿는 거요?" 스티브가 화난 어조로 물었다. "스티브, 이제 리의 편집광적인 상태는 끝났어요. 그리고 리가 나갈 때 경비원이 검 사 를 할 거예요. 자, 이제 여기서 나가요. 아래층에서 만나기로 해요." 경비실장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가자 데니스가 리에게로 왔다. "자, 어서 집으로 가 서 푹 쉬도록 해요. 이제 모든 게 해결된 거예요. 그리고 스티브가 당신을 공격한 것 에 대해선 햄에게 알리겠어요. 틀림없이 상황이 변할 거예요."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혼자 있고만 싶었다. 혼자서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했 다. "나도 가봐야겠어요. 이제 티베리의 첩보원을 확인했으니까 햄에게 바보 같은 컴퓨터 개조는 그만두라고 설득시킬 수 가 있겠군요." "컴퓨터 개조라고요?" "그래요. 사실은 그 사람이 가장 편집광이었다구요. 스티브조차도 햄이 보안 소프트 웨 어를 주말 동안 바꾸고 고집을 피웠다면서 불평을 하더군요! 당신이 스티브의 허락없 이는 알렉스를 데리고 들어오지 못하는데도 햄은 스티브에게 전화를 걸어서 일주일 내 내 그걸 바꾸라고 성화를 부렸대요. 결국 프로그래머에게 3배나 되는 돈을 지불해야 했다는군요! 하지만 이제 모두 끝난 일이에요. 난 집에 가봐야겠어요." 리는 데니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뭔가 논리가 맞지 않는다. 햄과 컴퓨터 개조에 관 한 부분에서.,.. "데니스, 햄이나 조지도 알렉스가 티베리의 스파이라는 걸 알고 있었나요?" 데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금요일 밤에 그 사실을 알게 줬을 때 내가 햄에게 말해 줬어요. 그리고 스 티 브의 첩보원이 티베리에서 알아낸 사실을 내게 알려 준 건 조지였어요. 당신도 들었 듯 이 조지는 몇 년 전 어느 세미나에서 알렉산더를 본 기억이 난다고 했어요. 조지는 그 가 티베리푸드의 직원이었다는 걸 기억해냈어요." "그래서 당신이 알렉스가 식품의약국에서 일한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즉각 그게 사실 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던가요?" "사실 난 알렉스가 식품의약국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한번도 말해 본 적이 없어요. 자 넷의 편지를 읽고 식품의약국에 전화를 걸어 본 다음에야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 았어요. 하지만 그들에게 알렉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스티브가 모르고 있었군요." "그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리, 이 일이 당신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는 건 잘 알아요. 당신이 알렉산더를 좋아 한 다는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끝내세요. 내 말을 믿어야 해요. 알았죠 ?" 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니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 이제 가봐야겠어요. 그럼 잘 가요. 내일 만나요." 그녀가 떠난 후에도 리는 아주 오랫동안 혼란으로 멍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어 엄청난 슬픔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하지만 리는 그 슬픔과 싸워야만 했다. 리는 컴퓨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만약 알렉스의 말대로 새로운 식품첨가제가 치명적인 것 이라면 그녀는 변화를 가해야만 한다. 그리고 데니스의 말대로 알렉스가 그녀를 이용 하는 것이라면 삭제 키를 누르고 자넷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놓아 둬야 한다. 그녀의 손가락이 두 개의 버튼 사이에서 멈춰 졌다. 혼란만이 그녀의 의식을 지배했다. 그리고 엄청난 슬픔도 그 의식을 덮치려고 한다. 어떤 음성이 그녀에게 진실로 믿고자 하는 걸 증명해 줄 증거를 찾아보라고 충동질하 고 있다. 하지만 그 증거는 어디에 있을까? 그녀는 윈더미어 부인의 화난 얼굴과 자넷에게 연장근무를 시켰다고 리를 비난하던 모 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알렉스의 위로에 순종하던 것도, 만약 그가 사위가 아 니었다면 어떻게 그런 반응을 보일 수가 있을까? 그리고 자넷의 무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흘리던 알렉스의 눈물과 스티브의 공격 후에 그녀를 끌어안았던 편안한 팔, 그 리 고 샐리의 죽음을 전하던 슬픔 음성을 떠올렸다. 만약 그 당시에 보여 주었던 그의 감 정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녀의 감각자체를 의심해야 옳았다. 서서히 혼란의 모래알이 갇히면서 어떤 결심이 서기 시작 했다. 그녀는 알렉스와 자 넷 을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그녀 자신조차도 다시는 믿지 못하게 될 것이 다. 리는 실행 버튼을 눌렀다. 이제 혼란의 안개도 차츰 걷혀갔다. 이제 데니스와 나눈 대화들을 좀더 랭정하게 분 석 해 볼 여유가 생겼다. 그녀는 조각조각 흩어진 정보를 모아 봤다. 자넷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는 모호한 의미에 직접 손으로 쓴 것이었고, 데니스에게 보 낸 건 의미가 분명하고 타이핑을 했다. 데니스의 편지는 가짜일 수도 있지 않을까? 게 다가 그녀와 데니스만이 알렉스가 식품의약국에서 온 걸 알고 있었다면 햄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을까? 햄이 그의 서재에서 그녀를 다그쳤을 때 그는 분명이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조지 도 춤을 추자고 졸랐을 때 그렇게 말했었다. 조지가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도 몹 시 놀랐던 기억까지 생생하다. 어떻게 그 두 사람이 알렉스가 식품의약국에서 왔다고 주 장한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자넷의 접근 암호를 찾아냈소?" 갑자기 문가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리는 그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 게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16 조지 펙이 리의 책상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자넷의 접근 암호를 적어 둔 종이를 들 어 올렸다. "당신일 거라고 생각했소. 데니스가 그러더군. 당신이 컴퓨터 기록을 보고 자넷이 늦 게까지 일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냈다고... 그래서 난 당신이 실험실의 매트릭스를 찾 는 방법을 알아낸 게 아닌가 생각했소. 내 추측이 맞소?" 리는 화학실장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거친 손 길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 손가락이 그녀의 살을 파고드는 듯이 아파왔다. 그려는 간신히 비명을 삼켰다. "당신이 파일을 갖고 장난을 친 거지? 그래서 합성 중에 그게 멈친던 거야. 그렇지?" 리는 분노로 일그러진 그의 마른 얼굴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그의 공격에 공포감이 물려왔다. 살을 파고드는 듯한 아픔도 참기 힘들었다. "아파요!" 그녀가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더 아프게 해주겠어." 리는 우선 시간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알렉스가 구출하러 와줄 것이다. "그래요, 내가 자넷의 파일을 고쳐 좋았어요. 인쇄 제한을 제거할 수 있도록 프로그 램 을 짜놓았어요. 그 프로그램은 지금 가동되고 있어요." 그녀는 지금 도박을 하고 있었다. 조지가 컴퓨터에 대해 잘 몰라서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기를 빌면서.... 그의 혼란스런 표정을 보면서 리는 자신의 도박이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걸리지?" "15분쯤 걸릴 거예요." "제기랄! 빨리 그 프로그램을 중지시켜! 지금 당장!" 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어요, 조지, 한번 시행이 되면 가동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렇 지 않으면 파일이 손상돼요. 혹시 모두 지워져 버릴지도 몰라요." 물론 그건 모두 거짓말이다. "알렉산더란 녀석을 위해 인쇄한 거지?" 리는 부정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걸 인정하는 편이 다른 거짓말을 믿어 주는 빌미가 될 테니까. "데니스와 스티브가 알렉산더가 티베리의 스파이라는 걸 확실히 납득시키지 못한 모 양 이구만. 이유가 뭐지? 증거가 충분하지 않던가?" "증거는 충분했어요." 리는 내장까지 떨려오는 것만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성을 잃으면 안된 다. "사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그들 말을 믿을 뻔했어요." 조지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햄의 파티에서 당신은 내 연인이 식품의약국의 무슨 부서에서 일하느냐고 물었어요. 기억하세요?" 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니스와 나만이 알렉스가 식품의약국에서 왔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상황은 뻔한 게 아니겠어요? 당신은 알렉스가 티베리의 스파 이 가 아니라 실제로 식품의약국에서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게 돼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네가 알고 있는 건 문제가 안돼. 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테니까." 리는 다시 침을 삼키려 했지만 공포심 때문에 목이 막혔다. 아무튼 끊임없이 그에게 말을 시키는 수밖엔 없다. 시간이 흐르면 알렉스가 올 것이다. "물론 햄도 알고 있겠군요. 당신이 그에게 말했을 테죠?" "물론이지.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어." "그렇다면 당신은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겠군요. 그의 허락을 얻어야 컴퓨터 소프 트 웨어를 변경할 수 있었을 테니까. 당신은 알렉스의 손에 파일이 들어가게 내버려둘 수 가 없었을 거예요. 당신과 햄은 둘 다 자넷이 개발한 식품첨가제를 식품의약국 화학 자 의 손에 넘겨 줄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걸 알아냈다니 대단하군. 하지만 이젠 소용없는 일이야. 자, 일어나라구." 그러나 리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알렉스가 들어오면 이곳으로 그녀를 찾으러 올 것 이 다. "일어나라고 했잖아?" 그녀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어디로 가려는 거죠?" "실험실에 들러서 컴퓨터 메모리밖에 존재하는 유일한 식품첨가제를 가져오는 거야. 정말 당신에게 감사해야겠군. 인쇄한 프로그램을 입수할 수 없어서 오늘밤 내가 갖고 나갈 수 있는 건 견본품뿐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제 당신의 인쇄 프로그램이 끝 나 면 인쇄를 한 다음 파일을 파괴할 거야, 이 비밀은 영원히 나만 알게 될 거야."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당신의 친구 알렉스를 태우러 가는 거지." 조지는 리에게 권총을 들이댄 채 사무실 밖으로 나오게 했다. "알렉스에게 뭘 원하는 거죠? 그는 배리푸드 안으로 들어 올 수가 없어요. 그는 당신 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에요." "그가 살아 있는 한 나에겐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자넷을 처리하고, 그의 차를 불 태 우고, 팸을 차로 친 것만으로 그는 물러서지 않을 거야. 하지만 오늘밤 당신이 좋은 미끼가 되어 줄 거야. 그는 당신에겐 약할 테니까. 당신 집에서 따로 침대를 쓸 정도 의 남자라면 그는 바보이거나, 당신을 사랑하는 거지. 하지만 알렉산더는 바보가 아 니 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그녀는 경호원이 근무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냈다. 어 떻 게든 경호원에게 신호를 보내 구원요청을 해야 한다. 하지만 로비로 들어섰을 때 경 호 원은 없었다. 초록색 보안화면 앞에서 그녀가 주저하자 조지가 그녀의 귀에다 권총을 들이댔다. 리는 화면에 손바닥을 댄 다음 일반 사무실의 전자감시경을 지나쳐서 실험 실의 감시경을 통과 했다. 조지가 그녀를 연구실용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었다. 그에게 말을 시켜, 계속 말을 시켜야 해. 이성의 조그만 소리가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 다. "조지, 난 궁금해요. 당신은 어떻게 알렉스가 식품의약국에 근무한다는 걸 알았죠? 분 명히 당신이 그를 세미나에서 만난 적이 없을 텐데..." "몇 년 전 내가 참석한 회의에 그가 식품의약국 대표로 나온 적이 있었지. 그가 실험 실에 들어오는 순간 난 그를 알아 봤어." "그렇다면 이건 산업 스파이 활동과는 관계없는 일이군요 그렇죠?" "이번에도 틀렸어. 설마 내가 배리푸드의 노예로 일생을 보낼 거라는 생각을 했던 건 아닐 테지? 내가 햄에게 모든 영광을 돌린 채 살아갈 줄 알았나? 이 조그만 발명품은 최고 입찰자에게 돌아갈 거야. 그리고 지금 그 최고 입찰자는 바로 티베리지." "티베리? 그럼 그 식품첨가제를 티베리에게 줄 건가요?" "준다고? 그건 적합치 못한 표현이군. 티베리에 있는 접선책은 내게 현금으로 6만 달 러를 주겠다고 했어. 햄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걸 알았을 때, 난 남미행 비행기에 올 라 타 있을 거야." "당신은 티베리와 직접 거래하고 있나요? 존 카스테어스를 통하지 않고?" "내가 존 카스테어스를 통해서 거래할 리가 없지. 모두들 그가 티베리의 첩자인 줄 알 고 있지. 난 팔아야 할 게 있을 땐 즉시 티베리의 사장에게 전화를 걸지. 난 그에게 스티브의 작은 첩보망에 대해서도 모두 말해 줬어. 인사서류에서 알렉산더의 스파이 프로필을 찾아냈다고 한 것도 바로 사장이었어. 그 거짓 보고서가 경비실장과 광고부 장의 귀에 들어 간 덕분에 난 방해받지 않을 수가 있었지. 어리석은 인간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리는 조지의 권총에 밀려 실험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실 험실 입구에서 멈뤄섰다. "조지, 다 쓸데없는 짓이에요. 경비실장이 그의 모니터로 당신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 고 있어요."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난 10분에 그와 데니스가 나가는 걸 봤어. 그리고 로비의 경 비 원에게도 30분 동안의 휴식을 줬지. 우린 20분이면 필요한 걸 챙겨서 여길 나갈 수가 있어. 자, 어서 들어가라구." 리는 여전히 주저했다. 실험실에 있으면 알렉스가 그녀를 못 찾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지난번 나와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때를 기억해? 당신은 햄에게 달려가서 모든 걸 털어놓겠다고 위협했지? 자, 이제 내가 승리의 기분을 맛볼 차례가 됐어. 기분이 어 때 ?" 하지만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어떠냐고 묻잖아?" 그가 리를 주방이 있는 뒤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주방문을 열어 먼저 그녀를 밀어 넣 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균형을 잃고 조리대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유리 비 커와 다른 도구들이 쓰러졌다. 조지는 그녀를 돌아 조리대 쪽으로 갔다. 그는 조리대 위의 조그만 램프만 켜고 오른 손으로는 여전히 총을 겨눈 채 왼손으로 앞에 있는 약병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반대편 구석에 서서 리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 권총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의 없다. 그녀 앞의 조리대 위엔 몇 조 각의 유리조각들이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슬며시 유리조각 하나를 집어 들 었다. 조지는 병을 수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녀는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만 더 가까이 오면 쏘아 버리겠어." 조지가 말했다. 그는 곁눈질로 계속 그녀를 살피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리는 그자리 에 멈춰섰다. 계속 그에게 말을 시켜서 그의 주의를 분산시켜야만 한다. "당신이 자넷의 편지를 가져갔군요. 그렇죠?" 그가 낄낄 웃어댔다. "맞았어, 그 일은 정말 당신에게 감사해야 했어. 데니스에게도 편지를 보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얻었거든. 데니스가 정말 잘 속아넘어가 주었어." "그럼 날 어쩔 셈이에요?" "당신은 알렉산더가 모는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어 있어. 두 사람 다 죽게 되는 비극적인 사고지." 그의 말이 엄청난 공포를 던져 주고 있다. 그녀는 지금 알렉스가 오지 않길 간절히 소 망했다. 리는 자신이 알렉스를 붙잡기 위한 미끼가 돼선 안된다고 마음먹었다. "조지, 햄이 의심을 할 거예요. 알렉스와 내가 살해되면 그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 다 는 걸 느끼게 될 거예요." 조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햄은 조금도 상관하지 않을걸. 그는 철저한 사업가니까. 그가 우리의 새로운 맛 강 화 제가 암을 유발한다는 걸 몰랐을 것 같아? 아메스 테스트의 결과를 없애 버리라고 말 한 건 바로 그였어. 자넷의 죽음에서 그랬던 것처럼 당신네들 죽음에도 햄은 눈을 감 아 버릴 거야.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면 나와 제조공법은 자취를 감춘 다음 이 겠지." "그래서 당신은 자넷을 죽이고 그녀의 연구를 훔쳐냈군요. 그녀의 원래의 기획안을 변 경시킨 것도 당신이었고요? 새로운 맛 강화제는 그녀의 아이디어였어요. 그런데 당신 이 그걸 제품으로 만들었나요?" "맞아, 그녀가 그걸 시작했지. 처음엔 그녀가 날 비방하는 걸 막으려고 좋은 말로 구 슬렸지. 그녀에게 그 독창적인 기획안을 계속해도 좋다고 말했어. 다만 업무시간에 해 서는 안 되고 그 일로 나까지 연장근무를 하게 해선 안된다고 했어. 난 그걸로 끝난 일인 줄 알았어. 그 여자가 컴퓨터 시간기록을 따돌릴 방법을 찾아낸 걸 오랫동안 모 르고 있었지." "그럼 그녀는 그 기획안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그래. 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지. 그런데 어느 날 밤늦게 로비에서 그녀와 마주쳤 어. 그녀는 나에게 차를 기다리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어. 출산휴가를 떠나기 전까지 아마 꼬박 1년 동안 하룻밤에 한 가지씩 해낸 것 같더군. 그리고 그녀는 휴가 동안에 도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짜놓았더군. 연구실에서 진행되는 다른 실험에 서 얻어진 자료들을 모두 모아서 그 결과를 내고 있었어. 그녀는 계속 많은 물질들을 찾아냈던 거지. 그건 규정에 위배되는 일이었지만 독창적이었지." "그 프로그램이 새로운 식품첨가제의 제조공법을 낳게 한 건가요?" "도움이 되긴 했지. 어느 날 정전이 됐지. 보조발전기도 작동이 되지 않았어. 동력을 수리한 다음 난 피해상황을 알아 보았지. 그런데 자넷의 프로그램에 있는 자료 일부 가 없어졌어. 뭔가 좀 이상하더군. '프로그램 완료'란 활자가 나왔어. 그건 유전인자에 의해 돌연변이된 분자를 생산했어. 화학연산 처리장치가 접속되어 있었고 첫번째 견 본 은 이미 주방의 시험관 안에 있었어." 조지가 마지막 약병을 호주머니에 넣고 권총을 문 쪽으로 흔들어댔다. "그래서요?" "자넷이 바라던 것보다 휠씬 더 잘된 거지. 우리의 식품을 맛본 사람들은 미치기 시 작 했어. 난 실험실의 주방에 있는 신상품의 견본들을 계속 준비했지. 제조공장엔 아무 것 도 나가지 않았어.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난 그걸 혼자서 했지. 데니스가 아이오와의 도시를 실험대상으로 선정했고, 우린 그 견본들을 그들에게 보냈지." "그리고 자넷이 다시 직장으로 돌아왔군요? 그녀도 그걸 실험했나요?" "그녀는 모든 게 잘됐다는 내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어. 난 그녀에게 정전사고에 관 한 이야긴 하지 않았어. 난 그녀의 프로그램을 계속 모니터해 왔으며 그녀가 없는 동안 개조했다고 말했지. 이제 그건 내 거라고 했어. 그리고 그녀를 다른 실험에 배치시켜 서 그녀의 맛 강화제 실험을 더이상 하지 못하게 했지. 하지만 그 금요일 아침 그녀 가 와서 저녁에 그 물질을 점검해 봤으며 아메스 테스트의 결과도 갖고 있다고 하더군. 그것이 발암물질이라고 말하면서 내가 제조를 중단시키지 않으면 그녀가 하겠다고 했 어." 그가 다가와서 주방에서 나가라고 총을 휘둘러댔다. "난 그녀가 파일에서 다른 자료를 추론한 것이라고 설득했어. 그녀는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어. 그리곤 금요일 밤에 다시 그 실험을 했던 거야." "그래서 그날 밤 그가 집에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칼데코트 터널에서 그녀의 차 를 벽에 부딪치게 했군요?" 조지는 그녀의 질문에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건 대단한 행운이었지. 그녀는 당신과 같은 순발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더군. 물론 그녀가 적기에 차선을 바꿔 준 게 도움이 되긴 했지만... " 조지는 리를 그의 책상 옆 의자에 앉게 했다. 그는 시계를 본 다음 컴퓨터 앞으로 다 가가서 아기 파일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다음날 햄이 전화를 걸어 내가 한 짓인 줄 알고 있다고 하더군. 그리고는 다른 방법 을 써야 했었다고 말했어, 그 사람은 결코 그런 짓을 할 위인이 못돼. 용기가 없거든 . 자신의 손을 더럽히길 원치 않는 사람이지. 하지만 그도 그걸 원하고 있었던 게 틀림 없어. 그 역시 이 엄청난 상품이 시장에 나가는 걸 방해받길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 상품의 발암물질이 폭로될 가능성은 생각해 보지 않았나요? 다른 회사나 연구소 에 서 실험을 해서 그 해독성이 밝혀지면 즉시 시장에서 수거명령을 받게 돼요." 조지가 기분 나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게 이 드라마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지! 그 분자는 음식에서 감지되지 않거 든. 그건 마치 단순한 설탕 고리의 일부처럼 보이지. 그건 혀에서 침과 섞일 때 화학 변화를 일으킨다구. 그건 즉시 혈관에 침투해서 혈액과 함께 정확히 시상하부로 향하 는 거지. 그리고 즉시 맛의 감각을 강화시키지." 그건 엄청난 충격이다. 음식에서 감지되지 않다니... 누가 의심을 해도 별 수 없을 것 이다. 분석해 봤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자, 이제 됐지? 난 이놈의 것을 인쇄할 수가 없어! 아직도 당신의 프로그램이 가동 되 고 있어!" 화면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크게 확대됐다. 자넷의 연구가 이제 모두 사라졌다는 걸 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위험 속에서도 그녀는 진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가 총구를 리에게 겨누고 말했다. "이 파일을 어떻게 했지?" "자렛의 실험은 끝났어요, 조지. 난 그녀의 파일을 없애 버렸어요." 그의 깡마른 몸이 분노로 출렁였다. 하지만 갑자기 그의 표정에서 분노가 사라졌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난 이 병 속에 단순한 설탕 체인을 분리할 수 있는 견본을 충 분 히 갖고 있지. 이걸 티베리에 주면 되는 거야.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이 견본으로 재 생산을 할 수가 있어. 따라서 당신이 파일을 지워 버린 건 아무 효과도 없게 돼버렸 어." 조지는 거칠게 그녀를 일으켜 세운 뒤 연구실을 나와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게 했다 . 그리고 열려진 엘리베이터에 그녀를 밀어 넣었다. 그녀는 벽에 부딪쳐 바닥에 넘어졌다, 왼팔을 쓰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다. 조지 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1층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어떻게든 이 남자를 막아야 해. 이대로 견본을 갖고 나가게 할 수는 없어. 더구나 그 녀를 미끼로 알렉스를 위험에 빠뜨릴 순 없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가 다시 그녀의 왼팔을 붙들어 일으켜 세웠다. 엄청난 고 통 이 몰려와서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입 닥쳐! 그리고 앞장서서 걸으라구. 우린 전자감시경을 통과해서 거리로 나가 알렉 산더를 만나는 거야.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이대로 쏘아 버리겠어." 그녀의 오른손에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깨어진 유리를 아직 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살에 박힌 유리조각이 엄청난 고통을 주고 있었다. 그 고통 속 에 서 그녀는 전자 감시경을 통과했다. "손을 화면에 갖다대!" 그녀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 박힌 유리조각을 꺼내기 위해 잠시 머뭇거렸다. 조지가 다 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손을 화면에 대라고 했잖아!" 리는 떨리는 손을 갖다대면서 그 화면이 유리조각만은 감식하지 못하기를 희망했다. 조지는 그녀를 앞으로 밀어낸 다음 총을 왼손에 바꿔 들고서 오른손을 초록색 화면에 갖다댔다. 바로 그 순간 리는 재빠른 움직임을 보았다. 휴게실 왼쪽에 그림자가 있었다. "그를 어디서 만나기로 했지?" 조지가 권총을 오른손으로 옳기면서 물었다. 이제 그녀의 음성은 훨씬 침착해졌다.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차에서...." 그녀는 조지가 그걸 보지 못했기를 기원 했다. "그럼 어서 가자구! 당신의 연인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되니까." 그들이 유리 출입문을 막 통과했을 때 경보기가 울렸다. 조용한 저녁은 순간 엄청난 소음으로 뒤덮였다. 리는 그 소리에 모든 기운이 빠져 버린 것처럼 그대로 멈춰서고 말았다. 조지가 욕설을 퍼부으며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리를 건물 안으로 다시 밀어 넣고 그 녀를 방패삼아 바싹 뒤따랐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권총을 그녀의 오른쪽 귀 에 들이댔다. 그리고 커다란 경보기 소리를 뚫고 큰소리를 질러댔다. "알렉산더, 나오지 않으면 이 여자를 쏘아 버리겠어!" 리는 미친 듯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그녀는 알렉스가 고의적으로 경보기 를 건드렸다는 걸 알고 있다. 그를 지금 나오게 해서 죽일 수는 없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조지는 긴장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황급히 달려나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 그 소리가 구석까지 들려왔을 때 리는 그녀의 손에 든 유리조각을 움켜쥐었다. 지금 이 마지막 기회다. 그가 알렉스를 쏘게 할 수는 없다. 그가 총을 발사하려는 순간 그녀 는 유리 조각을 들어 그의 오른손을 힘것 찔렀다. 커다란 비명 소리에 잠시 귀가 멍할 정도였다. 조지의 총에 맞은 젊은 경비원이 바닥 에 푹 쓰러졌다. 그 순간 조지가 고함을 질러대며 그녀를 밀쳐댔다. 아직도 유리조각이 권총을 든 손 에 매달려 있다. 그녀는 타일 바닥에 쓰러겼다. 바로 옆에 부상당한 경비원이 쓰러져 있 다. 그리고 조지 펙의 살인적인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권총의 검은 총신이 그 녀의 얼굴을 똑바로 겨누었다. 그녀는 엄청난 공포 속에서 그의 앙상한 손가락이 방 아 쇠를 당기려는 걸 보았다. 17 리는 조지의 몸이 비틀거리며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조 지 의 몸 뒤로 알렉스의 머리와 어깨를 보는 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알렉스의 손이 조지의 리볼버를 든 손을 덮치 고 있는 걸 보는 순간 새로운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들의 움직임은 필사적인 생사의 춤과도 같았다. 체격은 알렉스가 컸지만, 조지는 이 미 권총을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위해 거의 필사적이었다. 리는 무슨 일인가를 해보려고 애써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일어나 앉아서 엄청난 공 포심을 품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게서 땀이 홀러내렸다, 그리고 그들의 근육은 무기를 잡으려는 몸부 림으로 긴장되어 있었다. 두 사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직 권총만이 알렉스를 향 해서 아주 서서히 원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갑자기 알렉스가 총에서 손을 뗐고 그 순간 총알이 천장을 향해 발사됐다. 조지는 알 렉스에게서 재빨리 벗어났다. 그 갑작스런 행동으로 리볼버는 두 사람 사이에 떨어지 고 말았다. 그는 알렉스보다 먼저 그 무기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 무기는 알렉 스 와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조지는 권총을 포기한 채 몸을 돌려 유리문 밖으로 튀어 나갔다. 알렉스는 즉시 리에 게로 다가와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주 부드럽고 애정이 넘친 포옹이다. "리, 괜찮소?"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 정말 근사했어요." 그가 가슴을 녹일 듯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곁에서 들리는 조그만 신음소리에 그 녀 는 정신을 차렸다. "경비원이 다쳤어요!" 리가 소리쳤다. 그들은 그에게로 달려갔다. 경비원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난 괜찮아요. 총알이 허벅지를 스치고 갔을 뿐이에요. 미즈 리, 당신이 그의 손에 뭘 찔렀는지는 몰라도 그 때문에 총알이 빗나갔어요. 난 일부러 죽은 체하고 있었던 겁 니 다. 그래야 더이상 총을 맞지 않을 것 같아서... " 그때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를 뒤쫓아야겠소." 리도 일어섰다. "나도 함께 가겠어요." 알렉스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고 그들은 유리문 쪽으로 달려갔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조지의 트럭이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필사적인 힘으로 피에로 쪽으로 뛰어갔다. 그 추격전은 점차 치열해졌다. 조그만 피에로는 몇 번이나 길에서 날아가는 것 같은 곡예를 벌였다. 길 모퉁이에서 몇 번씩이나 타이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거칠게 뛰 는 맥박 소리 너머로 알렉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베이 브리지를 향해 가고 있소. 그의 맞은편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를 멈추게 할 수가 없을 것 같소. 꼭 붙잡아요. 우린 다음 섬을 지나쳐 경사로가지 가야 하니까 . " 피에로가 중앙분리대를 넘어서 길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그녀는 동승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리고 차분한 갈색 눈동자에선 빛이 일었다. "결국 모든 걸 조종한 건 그 사람이었소. 그렇죠?" 알렉스가 말했다. "그래요. 자넷이 발견한 걸 알아채린 순간부터 조지는 모든 음모를 세웠던 거예요." "그리고 햄은?" "그는 아메스 테스트의 결과를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조지가 자넷을 죽였다는 것도 알았어요." 알렉스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다리의 교통량이 적어 그들은 두 개의 차선을 왔다갔다 하면서 그들을 앞서 있는 녹색 트럭을 뒤쫓을 수가 있었다. 리는 큰소리로 스티브와 데니스가 조지에게 속아서 알렉스를 의심했다는 이야기를 털 어놓았다. 그러나 그는 초록색 트럭을 응시하며 굳은 표정을 지어 보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지의 트럭과 피에로가 다른 차를 지나칠 무렵 그들이 제한속도를 넘어서고 있음을 알았다. 가드레일과 차, 그리고 모든 것들이 뿌옇게 보일 뿐이다. 피에로에게 바짝 쫓 기던 조지의 트럭은 다리를 벗어나 오클랜드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달리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트럭이 이스트 베이 쪽으로 향하는 차선으로 돌아서자 더욱 속도를 내어 뒤 쫓았다. 타이어가 다시 비명소리를 질러냈다. 알렉스는 24번 고속도로로 향하는 2차선의 교차 로로 진입하면서 가드레일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오래된 도지를 지나쳐 전속 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도지는 거의 부딪칠 뻔하면서 뺑소니를 치는 녹색 트럭을 향해 경적을 울려댔다. 갑자기 그들의 앞에 노란 경보등이 보였다. "저건 뭐죠?" 리가 물었다. "앞에서 야간작업을 하고 있어요. 아마 터널의 중간 차선이 막혀 버린 것 같소. 조심 해서 운전해야 할 것 같소." 칼데코트 터널이 바로 앞에 죽음의 눈처럼 버티고 있다. 녹색 트럭은 여전히 질주했 다. 그런데 갑자기 그 차는 왼쪽 맨끝 차선으로 옳겨가서 중간 터널 쪽으로 달려가 공 사 철책을 뚫고 지나갔다. "그가 도망치려 하고 있소." 알렉스가 소리쳤다. 피에로는 왼쪽으로 급히 커브를 틀었다. 그리고 알렉스가 브레이 크를 밟은 순간 그녀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차는 공사장 인부를 피하기 위해 도로 옆으로 곤두박질쳐 멈춰섰다. 그리고 피에로의 시동이 꺼져 버렸다. "제기랄, 이제 그를 놓쳐 버린 것 같군!" 알렉스가 다시 시동을 걸면서 소리쳤다. 조지 펙의 트럭은 막 터널로 들어섰다. 순간 그녀의 시선이 놀라움에 젖어든 채 고정되었다. 그 녹색 트럭은 터널의 옆 벽에 부딪 쳐 뒤집어졌다. 차는 엄청난 소음을 질러대며 굴렀다. "알렉스!" 알렉스가 그녀의 팔을 잡아 주었다. "여기 가만히 있어요." 그리고 그는 차에서 내렸다. 그가 터널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공사장 인부인 듯한 두 남자가 즉시 알렉스에게 다가가 그의 양팔을 붙들어 끌어냈다. 리는 이해할 수가 없 었 다. 왜 그들은 알렉스가 조지를 쫓아가는 걸 방해하는 것일까? 리는 차에서 달려나와 그들과 승강이를 벌이고 있는 알렉스 쪽으로 달려갔다. 바로 그 순간 폭음이 밤의 어둠을 뚫고 터져나왔고 곧 그 어둠은 태양과 같은 불빛으로 휩싸 이 고 말았다. 마치 거대한 반딧불과도 같은 그 불꽃은 분노처럼 타올랐다. 홀린 듯이 그걸 바라보 던 4사람은 불꽃의 열기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두 사내가 알렉스를 놓아 주었다. 알렉 스 는 재빨리 리에게 다가와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들은 트럭에서 솟아나는 불꽃을 속 수 무책으로 바라보았다. "아가씨, 난 당신의 친구에게 위험하다는 걸 알려 주려고 했어요." 공사장 인부가 말했다. "20분 전에 트럭 한 대가 전복되어 페인트와 휘발유가 쏟아졌어요. 저 트럭에 600만 불 의 사나이가 탔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을 겁니다. 아무튼 미쳤어요. 저곳으로 차를 몰고 가다니... 저 표지판을 읽었어야 하는 건데..." 결국 조지는 자넷을 살해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같은 장소에서 죽어갔다, 역시 하 느 님은 정의의 편이었다. 알렉스는 불꽃을 응시하고 있는 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 름 다운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자넷, 이제 당신은 편히 쉴 수가 있겠군요. 모든 게 끝났어요." "도대체 누구에게 그렇게 열심히 전화를 한 거요?" 길가 공중전화에서 나오는 리에게 알렉스가 물었다. "전의 사장인 데이브 에릭슨을 깨웠어요. 그에게 햄과 조지가 배리푸드에서 한 짓과 스티브와 데니스가 속아 넘어갔던 사실을 알려 줬어요. 그리고 오늘 저녁 조지와 있 었 던 일에 대해서도 말해 줬어요. 데이브는 몹시 화를 내고 있어요." "햄은 어떻게 되는 거요?" "데이브가 즉시 어떤 조치를 취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 야기를 할 거예요. 그렇지 않더라도 이제 햄은 끝장이 났어요. 그는 내일 아침 이사 회 에 불려 나가게 될 거예요. 그는 8달이 넘도록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문책을 당하 게 될 거예요. 전혀 회사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고될 거예요." 알렉스가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로는 충분치 않아요. 그는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소. 그는 조지가 자넷을 죽였다는 걸 알고서도 모른 척했소." 리가 미소지었다. "당신은 햄 같은 남자를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그에겐 권력이 모든 것이에요. 한번도 실패를 경험하지 못했던 사람이에요. 이제 그는 모든 걸 잃게 돼요. 그가 모든 걸 알 게 된 후엔 틀림없이 자신도 폭발한 조지 펙의 트럭에 타고 있었길 진심으로 바랄 거 예요." 알렉스가 미소지었다. "당신의 의도를 알겠소. 그런데 왜 그는 그 위험한 식품첨가제를 시장에 내놓음으로 써 위험을 자초했을까요?" "조지 말에 의하면 그 식품첨가제는 식품 안에서 검출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건 입 안에서 침과 섞이기 직전까진 단순한 설탕 고리처럼 보인다고 했어요." 알렉스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순진한 소비자에게 퍼져갔다고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오. 그럼 이제 햄은 그 식품첨가제를 시장에 내놓지 않을까요?" 리가 미소지었다. "어떤 식품첨가제 말인가요?" 그 순간 알렉스의 머리에 섬광처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당신이 그 파일을 파괴해 버렸군! 그래서 자넷에게 편히 쉬라고 말했던 거로군. 당 신 이 그걸 없앴다니!" 그가 소리 쳤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 그들이 다시 그걸 만들 수 없겠소?" "물론이에요. 난 그걸 삭제한 게 아니에요. 삭제된 파일은 복원할 수가 있거든요. 난 다양한 바이러스를 적용하는 방법을 썼어요" "바이러스를 적용했다고? 난 처음 듣는 소리오." "때로 불만을 가진 직원들이 고용주의 컴퓨터 체제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침투시키 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경우 모두 소프트웨어를 공격하게 돼서 그것과 연결된 모든 조 직 망에 퍼져가게 되고 아무것도 작동이 되질 않아요." "그럼 배리푸드의 컴퓨터를 그런 식으로 변형시켰단 말이오?" "그렇다고 볼 수 있어요. 프로그램은 바이러스를 제거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어요. 하지만 내가 자넷의 프로그램에 준 병도 암과 같은 거예요. 그건 점차 퍼져 원래의 자 료에 침범해서 그걸 왜곡시키곤 새로운 입력정보를 모두 단절시켜요. 그리고 내가 써 넣은 암 프로그램조차도 변형시켜서 거대한 정보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죠. 자넷의 실 험은 영원히 사라져 버린 거예요." 공중전화 박스를 지나치며 알렉스는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럽게도 난 컴퓨터에 관해 많은 걸 배워야 할 것 같소."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당신 내부에 과학자의 기질이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당신이 자넷의 프로그램의 복사본을 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당신은 나에게 그걸 파 괴시키라고 하지 않았던 거예요." 알렉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소. 내 상관인 월리는 내가 아이오와 맛 실험 결 과를 전화로 알려 줬을 때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알렉스는 식품의약국의 수레바퀴가 얼마나 느리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 다. "알렉스, 나에게 좀더 미리 그 이야기를 해줬어야 했어요. 그럼 나는 좀더 확고하게 당신 곁에 서 있었을 거예요. 내가 당신을 믿었다고 생각해요?" "그렇소. 당신은 그걸 증명했소. 특히 스티브와 데니스가 나에 대한 온갖 혐의점을 늘 어놓았을 때 당신은 그것들을 단호히 거부했소. 그게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이유 중 의 하나요. 친... 친구에 대한 믿음... " 그가 가까이 다가와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를 거부해야 한다는 걸 알 았지만 그녀는 그 남자를 너무나 사랑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그에게 그럴 듯 한 작별인사를 전해야만 한다. 하지만 자꾸만 눈물이 흘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이제 모든 게 끝났으니 당신은 동부로 돌아가서 다시 식품의약국에서 일하게 되겠군 요?" 그가 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난 아무데도 가지 않겠소. 당신과 함께가 아니면 결코... 우린 한팀이라는 걸 잊었 소 ?" "하지만 당신은... " "난 끊임없이 당신을 멀리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소. 당신을 사랑하게 되 고 다시 당신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웠어요. 샐리를 잃은 다음 난 모든 관계에서 멀어져 있 었소." "그런데 왜 마음이 변했나요?" "결국 사랑과 상실이 힘든 일이긴 하지만 사랑없는 삶은 더 나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 거요. 그리고 당신은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닫게 해줬소." 그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그의 팔이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리,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과 결혼해서 우리의 남은 인생을 함께 살아가고 싶소. 이 곳에서 일자리를 얻는 즉시... 솔직히 말하면 난 눈을 싫어해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 리는 그 따뜻한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의 목을 힘껏 끌어 안 았다. "일자리 때문에 머뭇거린다면 내가 괜찮은 정보를 줄까요? 이 도시의 유수한 식품 제 조회사의 화학실장 자리가 나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리고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그 회사의 인사부장은 알렉스란 남자와 깊은 사랑에 빠져 있다고 하더군요." 그가 미소짓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아주 따뜻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입술에 머물 러 있던 슬픔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집으로 갑시다." 그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