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그해 겨울 (Canvas of passion) D. 마든 지음 진웅기 옮김 삼중당 A-15 1984년 바네사는 12월이 싫었다. 판화 제작소에서 제판 기술자로 일하는 그녀는 홀몸이 된지 3년이 되었다. 회사의 운명을 걸고 기획한 유명 화가의 판화시리즈를 담당하게된 그녀는 추상화가 재크를 소개받는다. 그런데 너무나 거만한 그의 태도에 그녀는 강한 반발심을 느끼고... 1장 "사장님이 부르셔, 바네사." 바네사의 책상 위로 뜨거운 커피가 든 종이컵을 놓으며 남자 동료 메이너드가 말했다. 그는 펴놓은 냅킨 위에서 조심스럽게 종이컵의 플라스틱 뚜껑까지 열어 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던데." 메이너드는 침착하게 말했다. "무슨 일인데요?" 바네사는 메이너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보면 알 거야. 하여튼 사장실에 바로 와달라는 전갈이야." 메이너드는 약간 우쭐하는 체하더니 바로 문을 열어 놓은 채 나가 버렸다. "메이너드…." 바네사가 불렀으나 메이너드는 사무실 유리 칸막이 너머에 늘어선 인쇄기 사이를 누비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모닝 커피를 갖다 주어 고맙다고 하려고 했는데, 바네사의 목소리는 기계 소리에 삼켜져 버렸다. 바네사는 한숨을 쉬면서 일어서서 모직 스커트의 주름을 잡았다. 아침부터 사장실에 불려가다니 달갑지 않군, 돌아올 때까지 커피가 식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하며 종이컵의 뚜껑을 덮었다. 바네사는 인쇄기 사이를 지나 형광등이 비치는 복도로 나와 사장실의 문 앞에 섰다. <리처드 바우맨, 콜롬비아 판화제판소 사장>이라는 놋쇠판이 달린 두꺼운 나무문을 가볍게 노크한 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으니 금방 소음이 차단되었고, 바닥에 깔린 두꺼운 베이지색 카펫이 발소리를 삼켜 버렸다. 사장 리처드 바우맨은 유리판을 깐 커다란 크롬 책상 저쪽에서 일어서더니 바네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소개말을 했다. "이쪽은 바네사 밴더폴. 우리 제판소 제일 가는 제판자지요. 선생님의 판화 제작을 거들게 됩니다." 바네사는 바우맨의 책상 오른쪽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 손님을 보았다. 남자는 바네사가 방에 들어가도 의자에서 일어서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바네사를 소개받고도 입 속으로 뭐라고 낮게 중얼중얼할 뿐이었다. "바네사, 이쪽은 재크 파워요. 이번에 우리 제판소에서 추상화의 판화를 만들게 되었소. 영광스런 일이지, 하여튼 재크의 첫 판화니까." 바우맨은 소심하게 자꾸만 손을 비볐다. 바네사는 마음속으로 놀라움을 감추고 첫 대면의 빨간 머리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재크 파워군. 헐뜯기 좋아하는 뉴욕의 미술계도 <영 타이거>라는 별명으로 치켜세우는 그 추상화가인가. <현대에 신화를 가져온 남자>라고도 불리고 있었다. 그의 빨간 머리와 마찬가지로 성질이 급한 것으로도 이름나 있었다. 바네사는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 신이시여, 부디 우리 제판소 사람들 전원에게 가호를 내리시기를. 그건 그렇고, 참 멋대가리 없는 거만한 남자라고 생각하며 바네사는 말없이 파워를 바라보았다. 그는 앞으로 쭉 내뻗는 긴 다리의 발목을 포갠 채 앉아 있었다. 낡아빠진 부츠에는 도로가 얼지 않게 뿌려 놓은 소금이 군데군데 달라붙어 있었다. 입고 있는 것이란 푸른 작업복 셔츠에 진즈 차림이었다. 하도 자주 빨아서 색이 바랜데다가 무릎과 소매 여기저기에 물감이 묻어 있었다. 윤기 없는 빨간 머리가 제멋대로 뻗쳐 있고, 그 아래 얼굴에는 나른한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파워씨. 그리고 일을 돕게 되다니 영광이군요." 바네사는 공손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는 바네사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고 바우맨 사장을 보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 일을 거들다니, 무슨 뜻이오? 난 조수 같은 건 써 본 일이 없는데." "그건 말이오, 재크. 판의 분색은 대개 화가가 손수 하지 않아요, 시간이 많이 먹히기 때문이지." 바우맨 사장은 데스크 앞으로 나오자 바네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 아가씨의 솜씨는 이만저만이 아니란 말이오. 엘테, 나이만, 거기에 달리의 작품까지도 바네사의 손을 거쳐 나갔어요. 달리라고 하면 당신은 헐뜯는 것밖에 모를 테지만, 화가들은 모두 만족해했어요. 당신도 틀림없이 만족할 겁니다. 미스 밴더폴은 우리 콜롬비아 제판소의 보배지요." 바네사는 바우맨 사장의 지나친 찬사를 들으며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바우맨은 어떻게든 파워의 판화 제작의 계약을 따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바네사는 바우맨의 코밑에 땀이 스며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만큼 그는 애를 태우고 있었다. 콜롬비아 제판소는 재정 위기에 빠져서 사장 바우맨은 그것을 헤쳐 나가는 데 애를 먹고 있다는 미술계의 소문인데, 바우맨의 태도가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값이 좋은 파워의 판화를 제작하면 상당한 수익을 얻게 된다. 바우맨이 노리는 것은 그것이었다. 바네사는 비평하는 눈으로 빨간 머리의 화가를 관찰했다. 뜻밖에도 젊은 나이였다. 이제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조수는 필요 없어요." 파워의 무뚝뚝한 태도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나는 내 일은 언제나 나 혼자 해왔어요." "하지만 재크, 누구나 제판자의 손을 비는 거요. 이것은 순수한 판화 제작 기술상의…." "난 필요 없어요. 누구든 간에 내가 일을 하는 주위를 기웃거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결정적인 파워의 그 말에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바우맨의 표정에는 안타까운 기색이 엿보였다. 바우맨은 손을 비비면서 미안한 듯 바네사를 보았다. "바네사, 당신은 가서 커피나 들어요. 난 재크와 좀 이야기가 있으니." "네, 그렇게 하겠어요. 그럼 말씀하세요. 파워씨." 바네사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일그러져 있었으나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사교적인 웃음을 띠고 방을 나오려고 했다. "내게도 한잔 갖다 주지 않겠소? 크림과 설탕을 넣어서." 파워가 불쑥 말했다. "뭐라고 하셨지요?" 바네사는 여전히 다리를 앞으로 뻗친 채 앉아 있는 재크 파워를 돌아보았다. "크림과 설탕을 넣어서요. 아울러 버터롤도 한 개 곁들여서." 바네사의 가슴에 울컥 불길 같은 노여움이 치밀어 올라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 푸른 눈이 재크 파워의 초록빛 눈을 야멸차게 노려보았다. 바우맨 사장이 손을 틀어쥐고 쩔쩔매는 것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바우맨은 자꾸 헛기침을 했으나 마침내 바네사는 노여움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안됐군요. 파워씨. 아무래도 당신은 상대를 잘못 짚으신 것 같아요. 내 직업은 제판자이지 잔심부름꾼이 아니에요." 바네사는 거칠게 출입구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나무문은 너무나 무거워서 꽝 소리가 나게 닫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복도에 서서 노여움으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사람 참 웃기네. 주제넘은 인간 같으니. 혼자 우쭐해 가지고…." 가슴이 터질 것같은 노여움과 눈앞에 어른거리는 빨간 머리를 쫓아 버리기 위해서는 혼자서라도 욕설을 뇌까리는 것이 상책이다. 저 남자의 버릇없는 태도는 구제불능이라 치고, 사장 바우맨까지 저렇게 쩔쩔매는 꼴은 처음 보았다. 재크 파워는 나를 우습게 알고 있어. 일부러 싫은 소리를 하며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해. "못돼 먹은 사람 같으니!" 바네사는 낮게 중얼거렸다. "난 필요 없다구? 나도 저런 잘난 체하는 신경질 많은 화가따위는 볼일이 없어. 그 작자의 판화제작을 거들다니, 천만의 말씀이야." 커피는 아직도 따끈따끈했다. 다행이군, 하고 생각하며 뚜껑을 벗겨 바네사는 천천히 입에 댔다. 가슴의 두근거림이 겨우 가라앉았을 때 노크 소리가 나고 메이너드가 나타났다. "어땠어, 바네사?" 등뒤로 문을 닫으며 메이너드가 물었다. "지독해요, 메이너드." 그녀는 턱을 손으로 받친 채 대답했다. 메이너드는 늘씬한 몸을 그녀의 책상 끝에 올려놓았다. "재크 파워가 와 있어요, 그 유명한." "나도 그가 아닌가 싶었지. 빨간 머리의 남자지?" 메이너드는 책상 위에 놓인 바네사의 한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서 당신은 뭐 불쾌한 꼴을 당했어?" "불쾌한 일인지 어떤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는 이만저만 주제넘은 인간이 아니에요. 너무나 거만해요. 나보고 커피와 버터롤을 가져오라지 뭐예요. 그리고 자기가 일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기웃거리는 것은 싫다나요. 누구의 도움도 빌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남의 사정을 잘 알아주는 메이너드에게 바네사는 자기의 속을 조금 털어놓기만 해도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메이너드는 맞장구를 치면서 그녀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메이너드는 제판소에서, 아니 이 뉴욕에서 바네사의 제일 가까운 친구였다. 바네사는 낯선 사람에게는 새침하다 할 정도의 태도로 대하기 일쑤지만 메이너드에게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다. 메이너드 역시 <심술쟁이 메이너드>라고 흔히 불리지만 바네사에게는 그런 면을 보이지 않았다. 직장에서, 혹은 그의 장식으로 가득 찬 아담한 고급스런 아파트에서 두 사람은 가끔 식사를 같이 했으나 둘 다 경계선을 넘어서는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성격이 잘 맞았으나 성적으로 끌리는 일은 없었다. 이성 관계가 아닌 따뜻한 친구로서의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아까 그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는데, 상당히 멋있는 남자던데." "멋있다구요?" 바네사는 뱉어내듯이 말했다. "저렇게 머리는 수세미 같고 입은 것은 누더기인 사람이? 난 절대로 좋아할 수 없는 타입이에요." "흥, 그럼 당신이 좋아하는 타입은 어떤 거지?" "잘 모르지만 이를테면 앤드류 같은…." "하지만 당신은 또 한 사람의 앤드류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안 그래?" "그래요, 메이너드. 앤드류는 하나로 충분해요. 그런 남자와의 괴로움을 또다시 맛보고 싶지는 않아요. 나를 정말로 필요로 하는 남자가 아니면 안 돼요. 앤드류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어요. 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어요. 그를 위해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바네사는 먼 곳을 바라보는 눈매가 되었다. "당신뿐만 아니라 누구도 앤드류에겐 도움이 될 수가 없었어. 바네사, 그래, 누구나…." "하지만 난 무척 애를 썼어요. 무어시든지 해줄 생각이었어요. 그는 받아 주지 않았지만…." 바네사의 죽은 전남편 앤드류에 대해선 지금까지 여러 번 메이너드와 이야기해 왔다. 그때마다 바네사는 코가 시큰거리고 마침내는 긴 갈색의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하지만 사람은 역시 살아 있는 인간이어야 해요." 하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었다. "죽음이야말로 위대한 정열이 부르는 아름답고도 순수한 결론이니라." 메이너드가 노래부르듯이 말했다. "어머, 누구의 말이지요?" "D. H. 로렌스요." "언제나 좋은 말을 많이 아는군요, 메이너드. 하지만 그것은 맞지 않아요." "왜? 로맨틱하지 않아?" "앤드류는 죽기 전에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서 아무도 그를 도울 수가 없었어요. 위대한 정열은 뭐가 위대한 정열이에요. 내가 결혼했던 상대는, 글쎄 딱딱한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자기를 가둬 놓았지 뭐예요. 자책하는 마음이 그 무렵 늘 날 괴롭혔어요. 하지만 나중에 그의 담당 의사가 말하는데, 그런 증상의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모두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든 대요. 내가 그런 생각에서 풀려난 것은 그 사고가 일어나 앤드류가 죽고 나서였어요." 바네사는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군, 바네사." "아니에요, 당신과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면 좀처럼 그를 생각지 않아요. 그것도, 저렇게 했더라면, 이렇게 했더라면 하는 생각뿐이에요. 그가 죽기 전에는 정말 지독했어요. 상태가 더욱 나빠져 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어요. 글쎄,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지 뭐예요. 하지만 그가 아직 살아 있다면 우린 더 괴로워했을 거예요. 그나저나 모두 지나가 버린 일이에요. 앤드류가 세상을 뜬 지 이번 크리스마스로 꼭 3년이에요. 이제 난 내 생활을 되찾았어요." "난 그래도 로렌스의 말을 고집하고 싶은데, 아름다운 말이지." 메이너드는 앤드류 이야기에서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당신은 야유꾼처럼 보이면서도 속은 늙은 로맨티스트군요." 바네사는 웃었다. "천만에요. 난 어디까지나 위대한 냉소가로 통하고 있어." 메이너드는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이제 가줘요. 메이너드, 일을 해야지요. 난 두 가지나 밀려 있어요." 바네사는 부드럽게 그가 나가 주기를 재촉했다. "파워의 판화는 어떻게 하겠소? 안 할 생각이요?" "두고 봐요, 그에게서 도움을 청해 올 테니. 하여튼 그가 일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려 보자구." 메이너드가 자신있게 말하고 또 바네사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글세, 어떨까요. 이름 높은 재크 파워의 일이니." 바네사는 일어서서 책상 뒤로 걸려 있던 연푸른 스모크를 벗겨 연붉은 캐시미어 스웨터 위에 걸쳤다. "그렇지, 유명하다는 것에 조심하라구, 바네사. 그 남자는 보통 바람둥이가 아니니까."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런 사람에게 무슨 매력을 느끼겠어요." "유명하다는 것도 여자에게는 큰 매력이 되지." 메이너드는 경고했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그의 망이나 보고 계세요. 메이너드." 바네사는 메이너드를 돌아보았다. "<사랑도 싫고 시에는 더욱 싫증나고 나의 보람은 오직 돈>이라고나 할 형편이오, 바네사? 하긴 그것도 어쩔 수 없지. 자아, 나도 따분한 일로나 돌아갈까." 바네사는 하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는지, 일에 열중하다 보니 노크 소리도 듣지 못했다. 보니 문밖에 사장 바우맨이 서 있었다. 사과를 하러 온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언제나처럼 노크도 없이 문을 밀고 들어왔을 것이다. 바네사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바네사, 아까는 미안했소." "어마, 뭐가요?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바네사는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파워에 대해서 말이야. 기분이 나빴지? 그 남자는 크로미스트가 뭔지도 모른단 말이야. 지금까지 판화에 손대 본 일도 없었지. 순수한 화가니까. 당신도 알겠지, 그의 작품은?" "네, 그래서요?" "그러니 앞으로 그의 말에 신경을 쓰지 말아 줘, 그를 대할 때도." "어마, 왜요? 앞으로 난 그 사람과 말할 필요도 없을 텐데요?" "아니, 그게 안 좋단 말이야. 그는 우리의 중요한 손님이지. 우리 콜롬비아 제판소로서는 말이야. 우리는 훌륭한 판화 시리즈를 만들어 나가야 해. 틀림없고 완벽하게." 너무나 강조하느라 바우맨의 말끝이 떨렸다. "그 일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어요? 나의 도움 같은 건 필요 없다고 그는 말했는데." "분명히 말했지. 하지만 그는 아직 뭐가 뭔지 일의 내용을 모른단 말이야. 금방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할거야. 그가 다루기 고약한 인물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 하나 그는 중요한 고객이야. 우리 콜롬비아 제판소가 문을 연 이후 제일 가는…. 그는 지금까지 석판화를 만든 일이 없어. 시장에 내놓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야. 바네사도 알지, 그것이 얼마나 기다려지는 일인지를. 그의 대작에 사람들은 손을 내밀 엄두도 못 내. 그러나 판화라면 만만하게 보고 금방 덤벼들지." "어쨌든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에요, 사장님. 분색판을 만들어 달라고 하시려면 누구 다른 사람을 찾으세요. 커피나 버터롤도 사올 만한 사람을요." "바네사, 우리 제판소는 지금 재정적으로 아주 어려운 형편에 있어. 아무래도 바네사의 협력이 필요해. 아무도 바네사의 솜씨는 따라갈 수가 없으니 말이야. 그러지 말고 돕겠다고 말해 줘."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부탁하는 사장의 모습에 바네사는 문득 안쓰러움을 느꼈다. 리처드 바우맨은 미술학교를 갓 나온 바네사를 채용하여 오랫동안 친절하게 돌봐주었다. 앤드류가 병이 나서 바네사의 결혼 생활이 미로를 헤매고 있을때도 귀찮은 참견을 하지 않았고 일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보아주었다. 마침내는 앤드류가 자동차 사고로 죽어 바네사가 26세로 미망인이 되었을 때도 한 달의 유급 휴가를 내주었을 정도였다. "좋아요, 사장님." 바네사는 한숨을 쉬었다. "만일 그 사람이 부탁한다면 하겠어요, 아마 부탁도 하지 않겠지만, 그렇게 도도한 사람인 걸요. 하지만 파워씨에게 말해 주세요, 제판자는 심부름꾼이 아니라구요. 커피의 잔심부름은 하지 않겠다구요." "알았소, 알았어. 말하고 말고." 바우맨은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일년 동안 받는 거라야 그의 한 장의 그림 값도 못 되지만." "급료를 올려 달라는 말이야, 바네사?" "천만에요, 리처드. 나는 지금 받는 걸로 만족해요. 사장님은 내게 잘 해주신걸요. 사장님을 위해서 그와 잘 지내겠어요." "고마와, 바네사. 내 어려운 형편을 알아줘서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군." "하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뭐지? 말해 봐요. 더 넓은 방에서 일하고 싶어? 아니면 휴가? 신년에 접어들어서는 물론 쉬어도 상관없지." "그에게 너무 아첨하지 말라는 말씀이에요. 품격이 떨어져요." "내가? 그렇게 아첨을 하는 걸로 보였던가?" 바우맨은 어리둥절했다. "내가 그랬던가?" 바우맨은 눈길을 외면했다. "사장님이 무척 어려운 형편에 몰린 줄 알 거예요. 아시다시피 소문이란 금방 퍼지니까요." "바네사의 말이 맞아." 바우맨은 두 손을 비볐다. "파워는 신경질적이라서 말이야, 다른 사람은 그것을 잘 모르지만." 그는 변명스럽게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돼요. 사장님은 뉴욕에서도 전통 있는 제판소 소유자예요. 아무리 파워라 해도 사장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것을 잊어서는 안 돼요." "좋은 말을 해줬어, 바네사." 그러나 바우맨의 힘없는 말투는 그것이 진심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바우맨은 무척 큰 재정난에 빠진 모양이라고 바네사는 생각했다. 안됐군. 그리고 사장 부인의 낭비벽에 관해서는 바네사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의 수입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을 정도인 것이다. 아무리 지금 판화 붐이라고 해도 제작비도 올랐다. 종이나 잉크 값도 뛰었고, 공임, 집세 등 모든 것이 요 5년 동안에 갑자기 상승하고 있다. 바네사는 바우맨을 위해서라면 파워가 신경에 거슬리는 말을 해도 참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바네사가 납득하여 방긋 웃어 보였더니 바우맨도 안심이 된 것 같았다. 29세라는 나이의 바네사의 얼굴은 처녀 시절의 토실토실한 뺨은 가시고 광대뼈도 약간 나와 있으나 흠칫 놀라 쳐다볼 만큼 차가운 아름다움이 있었다. 연한 푸른 눈은 바네사 자신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특징이 있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지금처럼 방긋 웃으면 차가움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따뜻한 눈길이 되는 것이었다. 전에 메이너드에게 여름 동안만이라도 앞머리를 부분적으로 블론드로 염색하라는 권고를 받고 그대로 해보았는데 그 가벼운 인상이 바네사는 마음에 들었다. 처음 그녀는 머리를 인공적으로 꾸미기가 내키지 않았었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이란 뜻하지 않은 시련을 거치다 보니 바네사의 머리에도 흰머리가 생겼다. 20대 후반의 여자가 흰머리라니, 이상하지 않느냐고 메이너드는 말하며, 미장원으로 바네사를 끌고 갔던 것이다. "점심은 어디서 들지?" 하고 바우맨이 물었다. "샌드위치를 사다 먹겠어요. 오늘은 크리스마스 쇼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찍 퇴근하고 싶으니, 점심은 밖에 나가지 않고 간단하게 마치겠어요." "재크 파워와 함께 점심을 들면서 제작 과정의 이야기라도 하면 어떨까 했는데." "뭐라구요? 날 끌어들이려고 하지 마세요, 일은 얼마든지 하겠어요. 그러나 교제만은 사양하겠어요." "아니, 조금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야." 바우맨은 바쁜 듯이 방을 나갔고 바네사는 다시 분색판의 일을 계속했다. 2장 델리커테슨의 가게 안은 점심의 샌드위치를 사는 사람들로 붐벼 후덥지근했다. 바네사는 카운터에 몸을 밀어붙이고 초조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흰빵 다랑어 샌드위치, 그리고 귀리빵에 프로바로니 치즈, 마요네즈도요. 커피는 블랙으로 둘." 겨우 차례가 돌아와 바네사는 소리치듯 말했다. 점원이 그것을 큰 소리로 복창하고 두 개의 봉지에 담아 넣기 시작했다 "한 봉지는 누구 거요? 당신은 잔심부름을 하지 않는 사람인 줄로 알고 있는데." 난데없이 낮은 목소리가 바네사의 귀 바로 뒤에서 들렸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몇 센티도 안 되는 곳에 재크 파워의 초록빛 눈이 있었다. 사장실에서 다리를 내뻗고 있을때처럼 큰 키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바네사가 굽 높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기 때문일까? "부탁한 사람이 대신 사러 올 때도 있어요. 물론 당신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파고들 듯이 바라보는 파워의 눈길을 귀찮게 느끼고 바네사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다른 아가씨거요?" "아가씨가 아니에요. 파워씨. 우리 방에는 아가씨는 없어요." "봐요, 미스 밴더폴. 뭐 나한테 그렇게 톡톡 쏠 것은 없지 않소. 사람 실망시키는군. 당신이 그 나이로 미스라는 것이 이상한데. 서른은 됐지 않소?" 그녀는 뻔뻔스럽게 그런 말을 하는 파워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블론드의 눈썹이 난 그의 눈꼬리에 사람을 놀리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어서 그의 곁을 떠나고 싶었으나 많은 사람에게 밀려 바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네사는 태연한 체하면서도 자기의 볼이 금방 붉어지는 것을 느꼈고 폭발할 것같은 노여움을 누르는데 애를 먹었다. "파워씨, 난 당신하고 뭐…." "내 이름은 재크요, 바네사." "아니, 난 밴더폴이에요. 당신하고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한거요? 난 당신처럼 점잖지를 못해서, 미스 밴더폴. 실례되는 말을 했으면 용서해요.난 당신과 달리 교육을 받지 못해 그런거니까…." "네, 당신이 보스턴의 선박회사에서 부두일을 한 것은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 그렇게 자랑할 것 없이 어서 저리 가줘요." 바네사는 종이 봉지를 손에 들자 사람을 헤치면서 카운터에 다가가려고 했다. 재크도 바네사를 따라와 긴 팔로 사람들을 밀어 길은 내주었다. 벌꿀색의 양가죽 재킷을 입은 재크는 마치 어느 목장에서 온 카우보이처럼 보였다. 그의 빨간 머리가 가게의 불빛에 눈부시게 반짝였다. "이것을 좀 들어주겠어요?" 바네사는 어쩔 수 없이 재크의 커다란 손에 종이 봉지를 맡기고 카운터 앞에 나가자 가죽 백에서 동전 지갑을 꺼내 값을 치렀다. 그런데 거스름돈을 받을 때 손가락이 꼬이는 바람에 지갑을 떨어뜨려 버렸다. 지갑 속의 동전들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흩어졌다. 10센트 동전이며 지하철 토큰들이 샌드위치를 사려고 늘어선 손님들의 발밑으로 굴러갔다. 동전을 주우려고 몸을 굽혔을 때, 열린 채 들고 있던 핸드백에서 또다시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져 나와 아이스크림이며 얼음 조각으로 지저분한 인조 대리석의 바닥에 떨어졌다. 재크도 바로 몸을 수그려 루즈며 콤팩트며 빨간 가죽 수첩 같은 것을 긴 손가락으로 줍기 시작했다. "당신이 옆에서 쓸데없는 말을 걸었기 때문이에요." 당황하여 울컥하는 바람에 바네사는 그렇게 뇌까리고는 아차 싶었다. 이 사람에게 약한 소리를 하기가 싫었다. 떨어져 있는 머리빗에 손을 뻗다가 두 사람의 손이 닿았다. 바네사는 그의 손등에 닿은 자기의 손이 왠지 타는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그만두세요, 내가 주울 테니까." 바네사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재크는 몸을 일으켰고 바네사가 나머지를 줍고 나자 그녀에게 한 움큼의 종이 냅킨을 내밀었다. "핸드백에 넣기 전에 이것으로 물건을 잘 닦아요." "아니, 괜찮아요. 난 어서 방으로 돌아가야 해요." 바네사는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핸드백 속에 처넣으며 재크의 말대로 하는 것이 나을 걸 그랬다 싶었다. 산지 얼마 안 되는 핸드백 안감이 엉망으로 더러워져 버릴 것이다. 그러나 바네사는 어서 빨리 그의 곁을 떠나고 싶었다. 바네사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핸드백만을 생각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돈은 안 주울거요?" "안 줍다니요? 다 주웠는데요." 바네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저기에도 떨어져 있는데." 재크는 바닥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토큰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바네사는 그것이 재크 파워의 말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한 점에 5만 달러가 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겨우 몇십 센트의 토큰의 행방을 걱정하고 있다니. "아니, 괜찮아요." 그녀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재크 파워가 빈민가 출신인데도, 부각되기 힘든 미술계를 자기 혼자의 힘으로 살아왔다는 이야기는 역시 진실인 것이다. "지하철 토큰은 아깝지만 또 사면 돼요." 바네사는 바닥과 핸드백 속에 다시 한 번 눈길을 주고는 핸드백을 소리나게 닫았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난 어서 돌아가야 해요. 친구가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어요." 재크 파워에게 될 수 있는 대로 공손하게 대하겠다도 한 사장과의 약속을 떠올리면서 바네사는 봉지를 받아들고 아직 굳어 있는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띠어 보였다. 재크는 한 손을 바지의 호주머니에 찌르고 바네사에게 다가왔다. "이걸 받아요." 내민 손바닥에 토큰 두 개가 얹혀 있었다. 뜻밖의 제의에 놀라 바네사는 재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말인가? 바네사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만은 감사해요. 사무실에 몇 개 있을 거예요." 사실은 한 개도 여분이 없었다. 그러나 파워한테는 토큰 한 개라도 받기가 싫었다. 뻔뻔스런 그는 토큰을 준 보답으로 커피나 마시자고 할 것이 뻔했다. "오늘 저녁 같이 식사하지 않겠소?" 재크는 느닷없이 바네사에게 제의했다. 다시금 깜짝 놀라 바네사는 입을 벌렸다. "그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마세요, 파워씨. 아까는 날 노처녀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식사 초대를 하다니요?" 바네사는 재크 파워의 속셈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욕구불만의 여자가 하나 있어서, 남자가 따뜻하게 대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줄 알겠지. 바네사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음에 없는 남자의 제의는 언제나 그렇게 물리치곤 했었다. 재크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즉, 싫다 그 말이오?" "네, 다른 예정이 있어요." 바네사는 될 수 있는 대로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할 수 없군, 그럼 또 봐요." 그런 말을 남기고 재크는 가게를 나갔다. 어처구니없는 일막이었다. 빌딩의 7층에 자리한 제판소까지 느릿하게 오르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바네사는 어쩐지 후회스런 느낌이 들었다. 크리스마스의 물건을 사러 가는 것밖에는 예정이 없었고 그것도 꼭 오늘밤이 아니라도 좋았던 것이다. 물론 크리스마스 선물은 자기가 좋아하는 상점에 가서 붐비기 전에 고르고 싶었다. 하나 재크 파워와의 저녁 식사도 그렇게 싫진 않았다. 그러나, 하고 바네사는 생각했다. 저 재크 파워의 당돌한 초대는 아무래도 불쾌하다. 그는 자기 생각을 금방 입에 올려 말하는 성질인 것 같다. 난 화가의 들러리 같은 인물은 아니야. 일을 통해서라면 바네사는 화가라는 것을 평가해 줄 수 있으나 남자로서는 여느 남자보다도 더 재미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화가의 이른바 <감성> 같은 것도 때로는 네 살 난 어린아이보다 다루기가 고약한 때도 있다. "뭐, 내게 온 메시지는 없었어요?" 바네사는 접수에서 물었다. "피너씨로부터 전화가 있었어요. 내일 저녁 식사는 취소해야 되겠다고요. 갑자기 부카레스튼가 부다페스튼가 하는 곳을 가게 되었대요. 내주에 돌아오면 또 전화하겠대요." 상당한 나이의 접수 담당 아가씨 케이트는 바네사에게 더글러스 피너의 이름을 쓴 핑크빛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더글러스 피너는, 바네사의 이웃에 사는 한 부인이 그녀에게 짝을 지어 주려고 목을 매다시피하는 남자였다. "현금으로 하겠어요, 카드로 하겠어요?" 5번가의 백화점 장갑 매장 카운터에서 여점원이 점잔을 빼는 목소리로 물었다. "카드로 하겠어요." 바네사는 핸드백을 뒤지며 카드류나 운전면허증 따위가 들어 있는 조그만 가죽 케이스를 찾았다. "어서 카드를 주세요."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이 여점원이 바네사를 재촉했다. 바네사 뒤에는 크리스마스의 물건을 사는 손님들이 줄을 짓고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 줘요. 카드가 보이지 않아요." 바네사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포트폴리오를 발밑에 내려놓고 핸드백 속에서 지갑이며 수첩을 꺼내어 카운터 위에 늘어놓고 핸드백을 흔들어 보았다. 낙담의 탄식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문득 주위의 공기가 답답하고 무덥게 느껴졌다. 백화점 안에 들어찬 향수 내음으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캐시미어의 스웨터 속에서 땀이 끈끈하게 스며 나왔다. "카드를 잃어버렸어요. 면허증도 신분증도. 이를 어째!" "그럼 현금을 내겠어요?" 점원은 심술궂게 다그쳐 물었다. 바네사는 말없이 핸드백을 거꾸로 흔들었다. 카운터 위에 루즈가 떨어져 바네사의 발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매장의 여점원은 바네사가 사려던 가죽 장갑에 가격표를 도로 달더니 휑하니 다른 손님한테로 가버렸다. 바네사는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워 모아 핸드백에 넣으면서 오늘 이런 꼴을 당한 것이 두 번째라는 생각이 났다. 카드가 든 가죽 케이스는 점심시간에 그 델리커테슨에서 빠뜨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를 아는 점원이 주웠다면 내일 바로 돌려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불편은 생각하기만 해도 오싹 소름이 끼쳤다. 모든 크레디트 카드의 분실 신고를 하고 운전면허증도 재교부받아야 한다. 또 크리스마스 직전인데 신분증도 없이 어떻게 수표를 현금으로 바꿀 수가 있으랴. 바네사는 완전히 낙담하여 백화점을 나왔다. 5번가를 가로질러 지하철을 탈 생각으로 6번가로 향해 걸었다. 흰눈이 섞인 차가운 바람이 몰아쳐 왔다. 택시를 잡을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다섯 시 반이라는 이 시각에 빈차가 있을 리가 없다 싶어 바네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눈은 더욱 쏟아졌다. 지하철 속에 들어가자 코를 찌르는 것 같은 냄새에 바네사는 길이 좀 질퍽거려도 걸어서 돌아갈 걸 그랬다는 후회가 되었다.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서둘러 돌아갈 필요는 없는데... 아파트에 들어서서 우편함을 들여다본 바네사는 조그만 몸집에 새 같은 느낌의 노부인한테 불려서 발을 멈추었다. 옆방에 사는 미스 와이즈만이었다. "어마, 바네사, 마침 잘 만났어요." 레나 와이즈만은 또록또록 눈을 굴리며 빛내고 있었다. 또 선을 보라는 이야기가 틀림없었다. 미혼으로 살아온 그녀는 70을 벌써 옛날에 넘었을 것이다. 1930년대에 세워진 맨해턴, 웨스트사이드의 이 아파트에 처음부터 들어앉아 사는 사람이며,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 못하여 미망인 친구들과 함께 바네사에게 다음 남편을 소개해 주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그녀가 잇따라 듣고 오는 이야기의 상대가 누구냐하면, 그녀들의 손자이기도 하고 조카이기도 하고 혹은 조카나 조카딸의 아들이기도 했다. 모두 젊은 직업인이었으며, 그 중에는 뉴욕 시내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롱아일랜드나 뉴저지에 살며 거기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다. 바네사는 직장 친구 메이너드의 권고도 있고 해서 덮어놓고 거절할 수도 없다 싶어, 남편이 죽은 지 2년가량 지나서부터 맞선 비슷한 것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마침내 그녀는 레나에게 말했다. "이제 맞선은 그만 보겠어요. 언제나 기대에 어긋나 버리는걸요. 내가 재혼할 운명에 있다면 틀림없이 누가 나타날 거예요.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지금의 생활을 충분히 즐기고 있어요." 그러나 레나는 막무가내였다. "이번 한 번만, 바네사. 참 좋은 사람이 있어. 무척 착한 청년이고 핸섬해. 학벌도 좋고 온 유럽을 날아다니고 있어. 더글러스 피너라고 하는데 바네사의 전화번호를 벌써 그에게 가르쳐 주었어." 결국 바네사는 이따금 그 더글러스와 만나게 되었다. 더글러스는 업무 관계로 해외를 나다니는 일이 많으나, 뉴욕에 있을 때는 두 사람은 주에 한 번 때로는 두 번 만나고 있었다. 더글러스는 분명 좋은 청년이며 유별나게 드러나는 결점도 없었다. 레나는 바네사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더글러스는 요즘 어때?" "잘 지내고 있나 봐요. 휴가에는 자기 집에 같이 가자고 하더군요." "그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거겠지요. 하지만 연말엔 난 다른 때보다 더 바빠서 갈 수가 없을 거예요. 해가 바뀌면 모르지만." "알았어요." 레나는 조그만 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틀림없이 당신한테 프로포즈할 생각이야." "그게 아니에요, 레나. 더글러스는 지금까지 나에게 작별의 키스 한 번 한 일이 없어요." "내 말이 틀림없어, 바네사. 그 청년은 당신을 자기 어머니에게 보이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구. 정말 못 가겠어?" "네, 도저히 안 되겠어요. 그리고 나 자신도 갈 마음이 없어요. 더글러스는 가끔 만나는 친구일 뿐이에요."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더글러스는 연갈색의 머리에 잘 다듬어진 용모를 하고있으며 수입도 상당히 좋았다. 그만한 조건이면 여느 여자에게도 나무랄 데 없는 남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안된 이야기지만 바네사는 그런 종류의 여자가 못 되는 것이다. 바네사는 겨우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방안에 전기불을 켠 채로 두었기 때문에 겨울밤에 돌아와도 그리 쓸쓸한 느낌이 들진 않았다. 전에는 마치 남의 집에 화분에 물이나 주기 위해서 들르는 것같은 기분이었다. 지금도 쉽게 마음이 가라앉는 아파트가 아니었으나 불이 켜져 있는 방은 그래도 좀 나았다. 입구에 들어서서 플라스틱 매트 위에 부츠를 벗어 놓았다. 실내는 자기도 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거창하게 꾸며 놓았다. 잿빛 카펫이 좀 어두운 느낌을 주고 있긴 하지만 상당한 돈을 쏟아 넣은 실내장식을 이제 새삼 고칠 수도 없었다. 바네사는 자칫 남들의 눈에는 귀족적이고 약간 새침하게 보이기 쉬웠으나 자신은 매우 실리적이고 실제적인 성질로 생각하고 있었다. 개장을 할 때도 전 남편 앤드류와 같이 쓰던 가구류는 모두 팔거나, 남에게 주거나 버리거나 했다. 앤드류와의 씁쓸한 추억을 상기시키는 것은 남겨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좀 지나쳤는가, 하고 이제 와서는 약간 후회스러워지는 것이다. 스타킹을 신은 채 하얀 벽의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에 들어가 주전자를 불 위에 얹어 놓았다. 물이 끓는 동안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화장을 지웠다. 두꺼운 타월 천의 베스로브를 침실의 클로짓에서 꺼내어 속옷 위에 걸쳤다. 그 베스로브의 가슴 호주머니에는 파리의 호텔 <조르쥬 생크>라는 마크가 들어 있다. 그것은 파리에 다녀온 메이너드가 장난으로, 바네사의 싸구려 호텔에 묵는 증거가 된다고 하며 선물 한 것이다. 바네사는 사실 여행도 파리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3장 바네사가 막 차를 찻잔에 따르려고 할 때 전화벨이 두 번 울렸다. 바네사는 수화기를 집어들었으나 상대방은 아무말도 없이 전화를 끓어 버렸다. 전화번호부에는 바네사의 이름도 실려 있지 않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은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바네사는 자단에 검은 가죽을 씌운 팔걸이 의자에 앉았다. 이 의자만이 바네사가 산 가구 중에서 후회가 없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스타킹을 신은 다리를 길게 뻗고 아래층 우편함에서 가져온 우편물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났다. 옆방의 레나임에 틀림없었다. "네, 가요." 한숨과 함께 찻잔을 내려놓고 바네사는 소리를 크게 질렀다. 외부로부터의 방문객은 로비에서 연락해 주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 연락이 없는 손님이니 레나인 줄 알았던 것이다. 문간 가득 모습을 나타낸 것은 재크 파워였다. 빨간 머리에 하얀 눈이 얹혀 있었다. 한 손에는 기름이 밴 갈색 종이 봉지를 들고 있었다. "당신은 언제나 상대가 누군가를 확인도 않고 문을 열어 주는 거요?" 인사말 한마디 없이 대뜸 물었다. "도어맨이 현관에 있을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바네사는 먼저 놀라움을 나타냈다. "도대체 무엇하러 오셨지요?" "당신이 오늘 저녁 바쁘다고 한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찾아온 거요." 무척 화가 난다는 듯이 재크 파워가 말했다. "거짓말은 왜 거짓말이에요. 정말 바빴어요." 욕의 바람에 화장도 하지 않고 구두도 신지 않은 자기 모습에 바네사는 매우 난처함을 느꼈다. "그럼 어째서 집에 있는 거지? 벌써 잠자리에 들 모습을 하고." 바네사를 화나게 만드는 말이었다. "예정이 바뀌었어요. 당신이야말로 무슨 일이지요?" 바네사는 거칠게 내쏘았다. 남의 방 앞에서 도대체 이게 무슨 수작이란 말인가. "저녁 식사를 가져왔소. 들어가도 괜찮겠지?" 그 말을 했을 때는 이미 재크는 바네사를 밀치듯이 하며 문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벌써 들어와 있지 않아요?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니, 도대체 무슨 뜻이지요? 내가 집에 있는 줄 모르셨을 텐데요. 어떻게 우리집을 알았어요? 어머! 융단에 물방울이 떨어지네." "미안 미안, 부츠를 벗겠소." "누가 벗으라고 했어요?" "그럼 날 내쫓아요. 그러면 당신은 웨스트사이드에서 제일가는 중국요리를 못 먹고 말테니." 재크는 자기 말이 거짓말이 아니란 듯이 기름이 밴 종이 봉지를 바네사의 눈앞에 들이댔다. 보기에도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그 봉지에서 맛있는 중국요리 냄새가 풍겨 왔다. 바네사는 자기가 공복이라는 것을 생각해 냈다. 냉장고 속을 생각해 봤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잘 안 나는 오래 된 피치 요구르트, 거기에 냉동된 다이어트 식품, 그런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좋아요, 들어오세요. 하지만 그 부츠는 매트 위에 벗어 놓으세요." "예, 예, 알아모시겠습니다. 마담." 재크는 종이 봉지를 내려놓고 아직도 물기로 번들거리는 양가죽 재킷을 벗었다. 바네사는 그것을 받아 입구 가까운 옷걸이에 걸었다. 바깥의 공기와 한기를 손에 느꼈다. 남자의 냄새와 가죽 냄새가 뒤섞인 내음이 지금의 바네사에게는 어쩐지 자극적이었다. 재크는 부츠의 끈을 풀어서 벗었다. 양말의 발가락에는 5센티 가량의 구멍이 뻥하니 뚫려 있었다. "새 양말이 필요하군요. 그대로 신고 다니면 물집이 생기겠어요." 갑자기 어머니가 된 듯한 말을 하고 나서 바네사는 쑥스런 느낌이 들었다. "물집이 생기면 또 어떻소." 그 제멋대로의 말투에 바네사는 자기가 금방 한 말이 더욱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는 제멋대로 거실로 들어갔다. "이 요리를 어디다 놓아야하지?" "그 오른쪽 주방에 놓으세요. 난 옷을 좀 갈아입겠어요." "아니, 그 모습도 나쁘진 않은데. 난 여자가 남자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좋아요." "이건 남자 옷이 아니에요, 내 옷이에요." 바네사는 아무것도 신지 않은 자기 발을 내려다보았다. 베스로브는 여유 있게 바네사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두툼한 욕의이기는 하나 그 속에 속옷밖에 입지 않았으니 재크의 눈길에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갈아입겠어요. 좀 기다려 줘요." 재크는 주방으로 향했다. 그동안 바네사는 침실로 들어가 문을 꼭 닫고 욕의를 벗었다. 속엔 푸른 레이스가 달린 슬립을 한 장 입었을 뿐이었다. 클로짓의 문을 열고 무엇을 입을까 망설였다. 바네사는 갑작스런 재크 파워의 출현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재크가 문 저쪽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내가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다르군." "어떻게 상상했어요? 침대에 봉제품이라도 가득 놓여 있는 줄 알았어요?" 그녀도 되받아 소리를 질렀다. "침대는 아직 구경하지도 못했는걸." 이번엔 바네사의 바로 뒤에서 소리가 났다. "보여줄 생각이오?" 흠칫 돌아보니 재크의 키 큰 몸이 입구를 막고 서 있었다. 당황하여 침대 위의 욕의를 다시 집어들어 얼른 몸을 가렸다. "나가 줘요. 뭐예요, 당신은 남이란 말예요. 지하철 토큰 한두 개나 중국요리로 내 침실에 발을 들여놓을 권리가 생긴 줄 아세요?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하찮은 여자들이라면 금방 당신의 발밑에 엎드리겠지만…." "뭐 그렇게 화낼 것까진 없지 않소. 당신은 의외로 유머 센스가 없군." "유머 센스는 나도 있어요. 당신이 하는 짓이 맘에 들지 않을 뿐이지." 바네사는 노여움으로 얼굴이 빨개졌다. "미안, 미안. 요리는 주방에 놓았으니, 그럼 거기서 기다리고 있겠소." 재크는 바네사의 몸에서 시선을 돌리려고도 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더니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사람이 왜 저렇게 뻔뻔스러운지 모르겠어." 바네사는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클로짓에서 카프탄을 꺼내 입었다. 발목까지 닿는 긴 치수인데다가 소매도 긴 모직 카프탄은 바네사의 가는 몸을 폭 감싸주었다. 재크는 아직 문밖에 있는 것은 아닐까. 좀 말이 지나친 것도 같다. 그러나 저렇게 예절이 없고 사람을 짜증나게 만드는 남자도 처음 보았다. 클로짓의 거울에 온몸을 비춰 보며 자세히 점검하고 만족을 느낄 무렵에는 바네사의 노여움도 그럭저럭 가라앉고 붉어진 볼도 회복되었다. 그녀는 살며시 문을 열었다. 재크는 주방에 있는 모양이었다. 얼른 화장대로 뛰어가 꽃내음이 나는 향수를 몇 방울 가볍게 귀 뒤에 발랐다. 그러잖아도 좁은 주방이 재크가 들어앉으니 더욱더 좁게 느껴졌다. "마실 것은 없소?" 재크는 종이 봉지에서 요리를 꺼내면서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방금 침실에서 있었던 일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글쎄, 무엇이 중국요리에 맞을까요?" 바네사도 침실에서 있었던 실랑이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기로 했다. "난 무엇이든지 좋아요. 입이 까다롭지 않아서." 냉장고를 열자면 재크 옆을 지나야 했다. 그의 몸에 닿지 않도록 바네사는 숨을 죽이며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러나 가볍게 살이 스치면서 바네사는 그의 탄탄한 팔과 남성적인 냄새를 느꼈다. 조심, 조심, 하고 바네사는 자기에게 말했다. "백포도주가 있어요. 이것으로 되겠어요?" 바네사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상표의 캘리포니아 와인을 꺼냈다. "됐어요, 됐어. 그럼 당신이 준비를 마칠 때까지 난 방이나 구경하겠소." 아니 준비는 그의 일이 아니었던가? 자기 멋대로 요리를 가져와 놓고, 바네사는 반발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접시며 글라스, 나이프, 포크 등을 갖추었다. 그는 아마 글라스 한 개도 씻어 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애당초 씻지 않은 글라스를 내놓아도 탓하지도 않을 것이다. "판화의 콜렉션이 대단하군." 재크는 거실에서 큰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내가 예상하던 방과는 무척 달라." "아까 한 말을 또 하시는군요. 도대체 이 방이 어떻다는 거예요?" "너무나 다듬어져 있어요." "그렇다면 어떤 방을 예상했다는 거예요?" "음, 말하자면 좀 어질러져 있고, 보통의 낡은 가구가 들어앉아 있고, 꽃무늬의 목면 쿠션이나 고양이가 있고, 즉 미숙한 스타일일 줄 알았지.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쓰고 말이오. 이 방은 당신의 인상과는 전혀 달라." 바네사는 주방에서 거실로 나가다가 발을 멈추고 재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재크의 말은 바네사가 방을 개장하기 전의 상태를 족집게처럼 영락없이 집어내고 있었다. 다만 그때는 고양이는 없었다. 바네사는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앤드류가 알레르기성 체질이었기 때문에 고양이를 기를 수가 없었다. 재크의 날카로운 관찰이 어김없이 사실을 찍어 낸 것을 바네사는 그에게 눈치 채이고 싶지 않았다. 불쾌감과 경계심, 거기에 왠지 두려움까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유리를 깐 커피 테이블에 요리 접시를 놓고 글라스에 와인을 따르자 바네사는 글라스를 들어올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건배." 하고 말했다. "건배!" 하고 재크도 대답하고 글라스를 비웠다. 바네사는 천천히 포도주를 마셨다. 술에 취하고 싶은 마음은 물론 없었고 재크 파워에게 틈을 보일 생각도 없었다. "웨스트사이드에 맛있는 중국요리점이 있는 줄 어떻게 아셨어요? 댁도 이 근처세요?" "아니, 내 아틀리에는 소호에 있소." "그 번화한 곳에요?" "그렇소. 하지만 15년 전에는 그렇지도 않았어요. 식료품을 사는 데도 뉴저지까지 나와야 했으니까. 지금은 무척 붐비게 되어 미장원, 화랑, 레스토랑 등 없는 게 없지. 너무나 시끄러워 난 딴데로 이사 갈까 생각하고 있지만." "이사를 간다니, 어디로요?" 바네사는 스스로도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가 다른 데로 이사를 가지 않았으면 싶었다. "어디라고 작정한 곳은 없어요. 난 어디서든지 일할 수 있으니 말이오. 미술계의 중심지에 살지 않아도 이제 내 작품을 사려는 사람은 찾아오게 되어 있으니까, 테네시의 시골에 살건 러시아에 가 있건." "옳은 말씀이에요." "아니, 이건 허풍이 아니오, 허니." "내 이름은 바네사예요. 허니가 아니에요." "미스 밴더폴보다는 그것이 나은데." 두 사람은 말없이 글라스를 기울였다. "요리를 담아 낼까요?" 바네사가 물었다. "그럽시다." 재크는 일어서더니 마치 화랑이라도 되듯이 넓은 거실의 흰 벽에 걸려 있는 판화를 둘러보고 다니며 이따금 발을 멈추었다. "이렇게 많은 콜렉션을 어떻게 모았던거요?" "작품 말씀이에요, 아니면 액자 말씀이에요? 낡은 액자를 좋아해서 골동품상이나 고물상 같은 데 들러 사 모았어요." 바네사는 어느 사이에 이야기에 열중했다. 재크 파워가 자기의 수집품에 흥미를 가지는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판화는 내 일의 부수입 같은 거예요. 내가 제판을 맡은 석판화를 화가 분들이…." 바네사는 순간 말하기가 어색해졌다. "계속해요." 하고 재크가 재촉했다. "화가 분들이 제작이 끝나면 한 장씩 주셨어요." "그래서 이렇게 화랑처럼 꾸밀 수가 있게 되었군. 40점쯤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이 아파트를 살 때 분위기를 바꾸어 놓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때로는 변화를 바라는 것도…." 바네사는 말끝을 흐렸다. "이 아파트는 당신의 것이란 말이오? 부자군. 처음 만날 때부터 당신은 부자처럼 보였지. 밴더폴이라는 성부터 어쩐지 우아한 것 같아. 당신은 아마 사립학교 출신이겠지?" 밴더폴은 남편의 성이라는 것을 바네사는 굳이 말할 생각이 없었다. 옛성이야 어떻든 눈앞의 이 화가와 무슨 관계가 있으랴, 죽은 남편 앤드류의 생명 보험이 나오지 않았던들 이 아파트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모든 일을 설명하기란 번거로운 일이었다. "부자는 무슨 부자예요. 그야 사립학교는 다녔지만 그런 일쯤이야 누구든지…." 바네사는 하마터면 '당신도 사립학교쯤….'하고 말할 뻔했다. 재크는 분명 자기 성장에 대해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네사가 마치 돈 많은 특권층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정말 골치 아픈 사람이군! 이 사람하고 사이좋게 이야기하기는 틀렸어. 바네사는 약간 모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내 프라이버시는 당신과 아무 관계가 없어요." 두 사람은 또 말이 없었다. 겨우 입을 연 것은 재크였다. "난 가끔씩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되지. 나의 성격 탓이오." "당신의 좋지 않은 성격의 일면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유명인이니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해 나갈 수 있어요." 재크는 무엇에 짜증이 나 있을까. 바네사는 재크가 자기의 환심을 사려고 드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지금부터 나와 침대를 같이하기를 기대하고 있겠지. 4장 바네사는 8년 동안 제판일을 하면서 개성이 강한 화가들과 어울려 왔다. 그래서 그들의 속은 손에 잡을 듯이 환히 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누구나 자기만은 특별 대접을 받고 싶어했다. 결국 명성은 그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일밖에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네사는 자기가 재크의 명성에도, 빨간 머리가 돋보이는 그의 용모에도 별로 끌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유명 화가답지 않은 그의 겉모습에는 의외라고 할까, 바네사로서도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바네사는 어느 사이에 물끄러미 재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크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뭘 그렇게 유심히 보는 거요?" "내가요? 어마, 미안해요." 바네사는 무안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뭐가 그렇게도 재미있지?" 재크는 끈덕지게 물었다. "아니, 별로요. 하지만 굳이 듣고 싶으시다면 당신은 보통 유명인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나요. 유명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일도 없소. 저절로 그렇게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지." "하지만 유명인이라는 것으로 많은 덕을 보고 있는게 아니에요?" "예를 들면 여성에 대해서?" 재크는 바네사를 놀리듯이 웃음을 띠었다. "네, 말하자면 그런 거요." "난 별로 여자를 밝히지 않아요." "난 아마 당신이 좋아하는 타입이 아닐 거예요." 바네사는 왠지 힘을 주며 말했다. "누가 그랬지요? 난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는데." "아니, 분명하게 밝혀 두고 싶어요." 자신도 뜻밖의 방향으로 이야기가 돌아가 버린 것에 놀라면서 바네사는 빠른 소리로 되쏘아 말했다. "놀랐군. 그렇게도 내가 무서운가요? 뭐 당신을 덮치려고 드는 것도 아니지 않소? 사람이 순진한 것도 좋지만 언제까지나 숙맥이어서야 골동품이 되고 말지." 재크가 웃는 얼굴로 눈을 둥그렇게 떠 보이자 그 양볼에 깊은 보조개가 패었다. 바네사는 마치 벌에 쏘인 것처럼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아직 음식을 다 먹지도 않은 식기류를 서슴없이 치우기 시작했다. 재크의 눈이 그녀에게 가만히 쏠리고 있는 것도 모르는 체하며 더러워진 포크 따위를 물 속에 처넣었다. "화났소?" 재크가 물었다. "아니에요. 난 일과 사생활은 혼동하지 않아요." 재크에게 자기의 노여움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바네사는 언제나 자기를 냉정한 성격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재크 파워에 대해서는 제판소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불쾌감을 맛보는 바람에 그럴 때마다 머리로 피가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다. 자기가 마음의 평정을 잃은 모습을, 또 그가 그렇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걸 눈치채이고 싶지 않았다. 바네사는 고개를 숙인 채 남은 중국음식을 치우면서, 어쩔 수 없이 붉게 물든 볼을 상대방이 눈치채지 않기를 빌 뿐이었다. 바네사는 화를 스스로 달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태연한 체했다. "이제 돌아가 주세요, 난 할 일이 있어요."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재크에게 등을 돌려 다행히 그의 빈정거리는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크로디트 콜베르가 나오는 영화가 말이지 모처럼 지금 텔레비전에서 나오고 있단 말이오." 느닷없이 들려 온 것은 메이너드의 목소리였다. 바네사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 손님이 와 있어요." "내가 아는 사람이야?" 바네사는 재크에게 등을 돌린 채였으나 그는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곳까지 메이너드의 전화 목소리가 들릴지도 몰랐다. 들리지 않아도 바네사의 말로 짐작을 하겠지. "그래요, 일 관계로요." 바네사는 대답했다. 메이너드는 눈치가 빨랐다. "아, 그 빨간 머리지?" "잘 아는군요." "아니, 방해할 생각은 없어. 크로디트 콜베르의 영화 따위는 잊어버리라구. 일의 경과는 내일 내게 가르쳐 줘요." "네, 그래요." 바네사는 동조했다. "하지만 말해 두겠는데 바네사, 위대한 화가라고 반드시 청교도인은 아니오. 존경할 만한 자는 매우 적지. 그럼 내일 봐요" 바네사가 커피 테이블로 돌아가 비어 있는 재크의 접시를 들려고 하니까, 재크는 손을 뻗어 바네사의 손목을 눌렀다. "방금 그가 누구요? 저 욕의의 주인이오?" "네, 사실을 말하면 그래요." 바네사는 힘센 손에 손목을 잡혀 마치 최면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대답했다. 재크의 손이 닿은 피부에 타는 것 같은 뜨거움을 느꼈고 그것은 곧 온몸에 퍼졌다. 녹아들 것 같은 이 느낌은 도대체 뭐지? 바네사는 눈썹을 찌푸리면서 재크의 눈을 쳐다보았다. "저 욕의는 내 것이에요. 파리 여행의 선물이에요." "바네사가 전화의 남자와 함께 파리 여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더라도 할말없겠지." 재크가 제판소에서 메이너드를 만나는 일은 좀처럼 없을 거야. 있어도 메이너드의 성향까지는 알 길이 없겠지. 그러나 지금 바네사는 메이너드가 자기에게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 남자라는 것을 일일이 설명하기가 귀찮았다. 재크는 내게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에 대해서까지 이것저것 캐어물을 권리는 없는 것이다. 재크가 자기 손목을 너무나 세게 잡는 바람에 자기가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이지 않으려고 그녀는 태연한 체했다. 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재크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열기에 바네사는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겨우 말을 했지만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 줘요." 대답 대신 재크는 바네사가 다른 손에 쥔 접시를 빼앗아 거칠게 테이블에 놓았다. 접시는 딸가닥 소리를 내며 유리 위에 놓였다. 재크가 두 손으로 바네사를 끌어당겼기 때문에 갑자기 바네사는 소파 위의 그의 옆자리에 쓰러졌고 그 바람에 가죽을 씌운 소파가 삐걱거렸다. 서로의 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이 아닌가 싶게 두 사람의 몸은 바싹 접근되어 있었다. 재크는 상반신을 구부려 얼굴을 들이댔고 바네사의 몸은 어쩔 수 없이 소파 등에 밀어붙여졌다. 재크의 두 손은 아직도 꼭, 그러나 따뜻하게 바네사의 손목을 잡고 놓지 않았다. 바네사의 숨소리가 흐트러졌다. "이제 돌아가 줘요." 그녀는 같은 말을 띄엄띄엄 반복했다. "진심이 아니겠지." 재크는 아주 태연했다. 손목을 더욱 세게 틀어쥐며 최면술을 한단 높이려는 것처럼 번들거리는 눈으로 바네사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바네사의 심장의 고동소리가 높아져서 귀에까지 울렸다. 재크도 아마 이 소리를 들었을 것이 틀림없다 싶었다. 재크의 손가락이 바네사의 손목 안쪽을 살며시 쓰다듬기 시작하자 바네사의 몸이 떨렸다. "무슨 향수를 발랐소? 마치 봄에 갓 피어난 꽃내음 같군." "이것은 골짜기의 백합이라고 해요." 재크의 눈이 바싹 다가왔다. 바네사는 마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몸이 뜨겁게 맥박을 치는 것을 느꼈다. 눈을 감으려고 해도 마치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그럴 수도 없었다. 재크의 얼굴이 흐릿하니 흔들리는 것이 보이며 더욱 가까이에 다가왔다. 따뜻한 입술이 가볍게 바네사에게 닿았을 때 바네사는 피하지 않았다. 갑자기 세게 재크의 입술이 밀어붙여졌다. 바네사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바네사는 덫에 걸린 것처럼 재크의 입술과 소파 등 사이에 끼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생각과는 달리 그녀의 입술은 재크의 입술의 끊임없는 요구에 응하여 어느새 열려져 있었다. 바네사는 몸속이 녹아드는 것 같았다. 재크는 손목을 놓고 팔을 그녀의 허리에 감고 나긋나긋한 바네사의 몸을 탄탄한 가슴에 끌어당겼다. 바네사는 마치 불길을 재크의 입으로부터 옮겨 받은 것처럼 자신을 잊고 그에게 응하고 있었다. 어색한 기분 같은 것은 어디로 날아가 버렸고, 재크의 빨간 머리를 끌어당겼다. 재크는 바네사의 목덜미에 입술을 밀어댔다. 바네사의 몸이 푹신푹신한 소파 위에 밀려서 쓰러지고 재크가 그 위에 덮쳐왔을 때 바네사는 그에게 모든 것을 허락할 마음까지도 갖게 되었다. 재크의 한 손이 바네사의 다리 위를 헤엄쳐 다녔다. 그 손가락은 카프탄 밑으로 들어가더니 다시 슬립 밑으로, 그리고 다리를 덮고 있는 스타킹 위로 헤엄쳐 갔다. 바네사는 몸을 떨었다. 재크는 몸을 움직여 바네사의 몸을 꼭 덮여 안았다. 바네사가 재크를 두려워하던 기분을 생각해 내기도 전에 재크의 입술은 다시 바네사의 입술을 뒤덮었다. 바네사는 5분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적극적인 태도로 몸을 내맡기고 저항하지 않았다. 바네사의 입은 재크의 입에 응하고 혀끝이 서로 얽혔다. 재크의 입에서 욕망의 달콤한 내음이 났다. 꿈결 속에 바네사는 재크도 나와 같은 내음을 맛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크의 몸이 다시 세게 밀어붙여져 오고 그의 노골적인 손의 움직임에 바네사는 몸을 떨었다. 자기와 마찬가지로 재크의 욕망이 고조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재크의 애무에 답하여 바네사는 자신도 모르게 탄탄한 근육질의 제크의 등을 자기의 팔로 감아 붙였다. 재크는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바네사가 입고 있는 카프탄과 슬립을 걷어올리기 시작했다. 바네사의 다리와 가슴께의 매끈매끈한 살이 드러났다. 그 드러난 살에 재크는 얼굴을 묻고 키스를 퍼부었다. 바네사는 몸부림을 쳤다. 짜릿한 전율이 재크의 입술에서 바네사의 살갗으로 퍼져 나갔고 발끝이나 손가락 끝까지 달아올랐다. 바네사의 열에 들뜬 머리에 문득 재크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당신도 별 수없이 여자야. 차가운 것은 겉보기뿐이라고 생각했지." 바네사는 벌떡 윗몸을 일으키고 재크의 가슴을 힘껏 밀어냈다. 감정을 건드린 그의 말 한마디가 바네사의 욕망을 노여움으로 바꾸어 놓았다. 얼른 카프탄을 끌어내려 드러난 다리를 숨겼다. "돌아가세요. 심심풀이 상대라면 당신은 얼마든지 있을 거예요. 왜 남의 생활을 휘저어 놓지요?" 바네사는 소파를 떠나 매무새를 고치자 방안을 걸어다녔다. "뭣하러 찾아왔지요, 일부러 여기까지? 뭐라고 말해 봐요!" "이거 놀랐는데. 당신도 날 원했지 않아. 그건 분명해. 나도 당신을 원했어. 무엇이 나쁘단 말이지? 섹스는 당신의 생활을 헝클어 놓거나 하진 않는단 말이야. 같이 즐기자는 것 뿐이야." "난 그렇게 되는대로 섹스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에요. 섹스는 책임 있는 행위예요. 당신은 누구든지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어쩜 저렇게 뻔뻔스런 사람이 있을까!" "그럼 당신은 나한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단 말이오? 아까 그것은 그저 정열의 흉내란 말이오? 그런 연설은 듣기가 거북한데." "우리는." 하고 바네사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함께 일을 해야 할 사이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나 그 말은 바네사 자신에게도 힘없이 들렸다. 하지만 그건 틀림없는 일이야. 바네사는 속으로 강조했다. 5장 바네사는 재크와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다. 메이너드의 충고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일까? 다시 한 번 재크의 팔을 잡고 지금 내가 어떤 기분에 있는가 알아 달라고 호소하고 싶었다. 그러나 바네사는 그런 충동을 꾹 참았다. 재크 파워는 자기 멋대로인 예술가다. 자기를 묶으라고 다른 사람이 호소해 봤자 이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자를 사랑하고 그리고 떠나간다. 그것이 그의 사는 방식인 것이다. "난 당신하고 같이 일하지 않아요. 전에도 말했지? 난 내 일은 나 혼자 한단 말이야. 누구의 힘도 빌지 않아. 당신은 아마 흥분하기 쉬운 성격인 모양인데. 좀더 날개를 펴고 즐기는 것이 어때? 모험 없이 얻는 것이 있을까? 다소의 위험을 각오하지 않고는 기쁨도 얻을 수 없지. 인생이란 그런게 아니오, 바네사?" "그런 짓을 했다간 실패하기 십상이에요. 당신의 철학적인 가르침에는 사례를 하겠지만 나는 위험을 저지를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어요." "그렇게 무서워하는 것이 뭐요?" 바네사는 금방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입고 있는 카프탄을 꽉 붙잡았다. 난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지? 그의 먹이가 되는 것이 무서운가, 아니면 지금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그의 눈이 나를 비웃는 것이 싫은가, 아니면 그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야, 이런 제멋대로의 인간과 사랑에 빠질 리가 없어. 죽은 남편 앤드류는 전형적인 기품 있는 남자였다. 눈앞에 있는 이 뻔뻔스런 빨간 머리의 남자완 달리 그의 거동은 항상 바네사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재크는 바네사의 마음에 남아 있는 상처 같은 것은 눈치도 못 챌 것이다. 하여튼 자기밖에는 생각에 없는 남자니까. 바네사는 이제 새삼 자기 중심의 남자에 의해서 상처받기 싫었다. 결국 앤드류도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차를 다리에 들이받고 죽은 것이다. 알려 준 경관은 사고라고 말했으나 바네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으며, 바네사도 누구에게도 말한 일이 없을 뿐이다. 무엇을 무서워하느냐는 재크의 물음에 이렇다 할 대답이 생각나지 않은 채 바네사는 문득 더글러스 피너의 온화한 표정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렇다, 좋은 핑계가 되겠지. "재크, 저는 딴 사람이 있어요." 바네사는 거짓말을 했다. "말하지 않는 것도 나쁜 일이겠지요. 난 당신과 허물없이 사귈 입장이 못 돼요. 그건 그렇고 무엇 때문에 오늘 저녁 여기를 찾아왔지요?" 다음 순간 재크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내 재킷이 어디에 있더라?" 성큼성큼 문간으로 걸어가더니 몸을 숙이고 부츠를 신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그의 숱 많은 붉은 머리를 내려다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단념도 빠를까 하고 놀라고 있었다. 속으로는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재크는 나가려 하고 있다. 바네사는 그를 붙잡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재크 때문에 완전히 마음이 동요되고 있었다. "오늘 아침 내가 좀 너무했다 싶어서 찾아온 거요. 당신이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은 델리커테슨의 상점에서 당신의 신분증을 주워서 알게 되었고. 난 집에 돌아가기까지 그 일을 완전히 잊어먹고 있었어." 그는 빨간 가죽으로 된 조그만 케이스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중국요리 고마워요. 맛이 있었어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좀더 여기에 있어 달라고 바네사는 말하고 싶었다. 그 긴 팔로 날이 샐 때까지 날 안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러나 바네사는 한마디도 가지 말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까닭 모를 두려움이 그녀를 싸고 있었다. 재크는 초록빛 눈으로 가만히 바네사를 바라보았다. 조금도 웃는 표정이 아니었다. 바네사는 윗몸을 약간 재크 쪽으로 기우뚱했다. 작별의 키스를 해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크는 벌꿀색 양가죽재킷을 입고는 단추를 잠갔을 뿐이었다. "마음이 있으면 전화를 걸어 줘요. 난 어제든지 시간이 있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하고 재크는 문의 손잡이를 더듬었다. "어떻게 나갈 수 있지?" 바네사는 재크 앞으로 가서 문 위쪽의 고리를 땄다. 손과 손이 닿았다. 바네사가 흠칫 했을 때 긴 팔이 뻗어와 바네사의 목을 감고 끌어당기더니 입술이 포개어졌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굶주린 듯이 키스했다. 양가죽과 남자의 냄새가 함께 떠돌았다. 다음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진 알 수 없으나 그가 이대로 여기에 있어 주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바네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재크는 문밖에 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세게 누르고 있었다. 그는 바네사를 보고 빈정거리는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그것이 헤어지는 인사였다. 바네사는 말없이 문을 닫았다. 다리가 언제까지나 후들거리고 있었다. 이마를 차가운 금속의 문에 밀어붙인 채 바네사는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해 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잘 되지 않을만큼 정신이 멍멍해져 있었다. 다음주, 바네사는 제판소에서 재크와 자주 마주쳤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은 없었다. 재크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아파트에 찾아온 재크에게 육체적으로 끌려 완전히 동요된 뒤인 만큼 바네사는 재크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그러나 바네사는 재크의 따뜻한 몸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은 생각과, 나는 그가 언제나 마음대로 상대하고 금방 침대를 같이할 수 있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재크의 작품을 찍는 인쇄기가 처음으로 가동을 시작하자 바네사는 자기 사무실 유리 간막이 너머로 몰래 그쪽을 엿보고 있었다. 재크는 인쇄 기사 옆에서 시험 인쇄의 색채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바로 가까이에 바네사의 방이 있는데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바네사는 재크의 모습이 눈에 띌 때마다 그의 머리칼이 길었으니 이발을 하면 좋겠는데 라든지 푸른 진즈의 무릎에 조그만 구멍이 나 있군, 하고 생각하며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어느 날 재크는 새 진즈를 입고 나타났는데 그것엔 이미 물감이 묻어 있었다. 아침 일찍, 제판소에 오기 전에 일을 한 모양이었다. 재크의 아틀리에는 어떤 모양일까? 아침에는 거기서 무엇을 먹고 밤에는 어디로 나가는 것일까? 누구와 같이 지낼까? 바네사는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일이 궁금했다. 그러나 재크가 자기를 모른체하는 이상 자기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그런데 이따금 재크의 시선이 자신에게 달라붙는 것을 느꼈다. 바네사는 그 시선과 눈길이 마주치기를 피했다. 메이너드의 이야기로는, 재크는 색의 가짓수가 많은 석판화의 분색에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절대로 자기의 도움을 청하지 않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의 성격으로 보아 시간을 들여 몇 번이나 시험 인쇄를 시키며 틀림없는 좋은 빛깔을 만들어 낼 것이라 싶었다. 석판화의 제작에 익숙하지 못한 재크는 바네사의 몇 배의 노력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바네사는 시험 인쇄가 나올 때마다 재크가 얼굴을 불만스러운 듯이 벌겋게 물들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장 바우맨으로부터는 그 뒤로 아무말도 듣지 않았다. 혼자 하겠다고 한 재크의 말을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을 하고 있는 재크를 바라보면서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바네사를 보고 메이너드는 놀렸다. "사랑의 병, 하지만 그것은 고칠 수 있다." 어느 날 오후, 문을 들어서자마자 메이너드는 그런 소리를 하더니 깜짝 놀라는 바네사를 남겨 놓고 나가 버렸다. 메이너드는 또 찾아와서 말했다. "사랑의 신음소리는 단말마의 신음소리." "그만둬요. 메이너드, 그게 누구의 말이에요?" "말캄 로리지. 그의 작품을 읽어 봤소?" "안 읽었어요. 그리고 난 사랑 같은 것을 하지 않아요. 왜 그렇게 놀리지요?" "그것은 당신이 예전의 당신이 아니기 때문이지. 내가 뭐랬어, 파워는…." "걱정하지 마세요, 메이너드. 그날 저녁은 아무일도 없었다고 말했지 않아요" 바네사는 메이너드에게 그가 온 일을 말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재크가 아파트에 있을 때, 그의 전화가 걸려왔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음 크리스마스 파티 때 그와 어울리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크리스마스 파티라니요? 그도 온단 말이에요?" 바네사는 깜짝 놀라 큰 소리를 냈다. "사장이 초대한 모양이야, 재크의 아버지도 같이. 둘 다 승낙했대요." "그 사람에게 아버지가 있는 줄은 몰랐군요." 바네사는 재크가 보스턴의 가난한 집 출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가족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재크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에요?" "신사라고 할 수 없더군." 메이너드 식의 빈정거림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요전에 재크를 찾아 여기 왔었지. 분명 돈을 뜯으러 왔는데, 재크는 그때 돈이 별로 없으니 집에 돌아가서 주겠다고 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막무가내였지. 글쎄, 재크의 지갑에서 수표를 잡아 뽑아 그 자리에서 사인을 시켰지 뭐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꼴불견이었어. 그 자리에 사장이 있었는데, 비위를 맞추느라 노인을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한 거야. 재크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좋아라고 승낙했지. 거저 마시고 먹고 할 수 있어서 반가 왔던 게지." "슬픈 이야기군요." "사장 부인도 아마 참석할 거야." "물론이겠지요. 자기 집에서 여는 걸요. 불쌍한 사장님!" "나도 새 여자 친구를 데리고 가겠소. 무척 재능 있는 실내장식가지. 멕시코 서부의 휴양지 리스 아다스의 분양 맨션에서 큰 일을 마치고 갓 돌아왔어. 당신한테도 소개해 주겠소." 메이너드가 없다면 바네사의 일상은 아마 쓸쓸한 것이 될 것이다. 메이너드는 바네사가 진정으로 기대는 마음의 친구인 것이다. 토요일, 바네사는 크리스마스 쇼핑을 하러 갔다. 색스의 백화점은 문이 열림과 동시에 손님이 밀려들어 붐비기 시작했다. 손님들 사이를 누비며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면서 매장을 돌아다녔다. 이웃 방 레나 와이즈만을 위해서는 가죽 장갑을 샀고, 클리블랜드의 아버지에게는 캐시미어 조끼, 앤드류의 조카딸에게는 캐미솔과 패티코우트를 샀으며, 아버지와 조카딸에게는 그 상점에서 직접 보내 주도록 의뢰해 놓았다. 백화점을 나와 바네사가 들른 곳은 매디슨 거리의 도자기 전문점이었다. 메이너드가 칠보 미니어처를 모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귀여운 뚜껑이 달린 그릇을 선물하려고 한 것이다. 그 가게엔 바네사가 사려고 한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었다. 계란 모양을 한 크림빛이 도는 흰 자기 그릇이었으며, 놋쇠로 테두리가 되어 있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미세한 오랑캐꽃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빌로도를 덮은 가죽 케이스에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는 모두 미치광이, 그리고 어떤 자는 끝까지 미치광이>. 메이너드는 이게 누구의 말인지 알 것이라 싶었다. 바네사는 시장기를 느꼈다. <뉴욕 타임즈>를 사서 간이식당에 들러 카운터에 걸터앉았다. 샌드위치를 주문해 놓고 신문의 예술란을 펼쳐 보니 재크 파워의 이름이 크게 나있었다. 몇 블록 앞의 화랑에서 재크가 개인전을 여는 모양이었다. 샌드위치를 반쯤 먹다 말고 얼른 커피를 마시고 나서, 바네사는 정신없이 식당을 나와 화랑으로 걸어갔다. 화랑에는 물론 재크는 나와 있지 않을 것이다. 오프닝 날은 벌써 지나 있었다. 바네사는 복제품말고는 재크의 작품을 아직 본 일이 없었다. 화랑의 문을 밀자 저절로 부저가 울렸다. 홀의 조용함이란 차소리가 시끄러운 매디슨 거리의 한 모퉁이가 아닌 듯 싶었다. 검정 일색의 여자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 있으시면…." "아니, 그저 구경하러 왔을 뿐이에요." "모두 파워즈씨의 작품이에요. 이번 연말까지 하고 있어요." 바네사는 그녀가 재크의 성을 틀리게 말하는 데 놀랐다. 원색의 그림 물감이 튀어 있는 커다란 캔버스를 찬찬히 보고 다녔다. 종횡으로 각각 1미터 80이나 될까 싶은 작품의 박진감이 바네사를 압도했다. 그중에는 바네사가 제판소에서 본 석판화의 시험 인쇄와 같은 경향의 작품도 있었다. 조그만 판화로는 작품의 박진감은 감소된다. 재크의 작품을 석판화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사장 바우맨의 의도는 혹시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어느 한 작품이 특히 바네사의 눈길을 끌었다. 다른 작품보다 억제된 좀 우중충한 색조의 작품이었는데 두툼하게 솟아오른 물감의 반짝임은 태양 같기도 하고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는 거품을 생각나게도 했다. 바네사는 화랑의 주인인 듯한 아까 그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 넘버 7의 작품은 제목이 무엇이지요? 가격은요?" "파워즈씨의 작품은 최저 4만 8천 달러는 나가요." "그렇겠지요. 그럼 제목은요? 그리고 그의 성은 파워즈가 아니라 파워예요." "네, 뭐라고 하셨어요?" 화랑의 여자는 책상 위에서 가죽 표지의 노트를 집어들어 바네사 앞에서 펼쳤다. "제목은 허드슨 리버, 값은 5만 7천 달러." 그러나 바네사는 그런 것은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노우트에 적혀 있는 재크의 아틀리에의 주소를 외려고 애를 썼다. 그녀의 위치에선 거꾸로 보는 것이었지만 그럭저럭 읽을 수가 있었다. "참, 고마워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바네사는 놀란 얼굴의 여자를 뒤로하고 화랑을 뛰쳐나왔다. 다운타운행의 버스에 올랐다. 두세 블록을 내려가면 바로 재크의 아틀리에 앞이다. 이런 일을 해서 도대체 어쩌겠다는 것일까. 그러나 바네사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기가 재크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것을 메이너드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바네사는 자기의 마음을 재크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재크와 아직 서로 깊이 알게 된 것도 아니었으며, 쉽사리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마음이 자꾸 그에게 기울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조심해라, 경계해야지. 바네사는 화랑에서 얻어 온 재크 파워의 약력을 훑어보았다. 나이는 36세, 독신, 보스턴 태생. 가족의 반대를 물리치고 그림의 길로 나서다. 미술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부두 노동자로 일하다. 졸업 후에는 런던, 파리에서 계속 그림공부를 하여 귀국하여 바로 뉴욕에 자리잡고, 현재 코네티컷주에 별장이 있다. 그러나 제작은 주로 뉴욕 시 소호의 아틀리에에서 한다…. 버스는 천천히 재크가 사는 소호 부근을 달리고 있었다. 바네사는 재크의 아틀리에가 있는 업타운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불안, 초조, 그런 기분으로 가슴이 답답했다. 모피로 된 장갑을 끼었는데도 손가락 끝이 시렸다. 재크의 빌딩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시 한가운데인데도 별로 사람의 그림자가 없는 기묘한 풍경이었다. 단지 건물 가까이에 뚱뚱한 여자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머리를 표백한 듯 희끄무레한 블론드에 묘한 차림새를 한 상당히 나이 든 여자였다. 염색을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모르는 것일까? 새빨갛게 루즈를 바른 여자의 양볼 가에 희끄무레한 머리칼이 묘하게 초록색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유행이 지난 짧은 코우트를 입고, 흰 부츠 위로 무릎을 드러내고서 이렇게 추운 날에 잘도 서 있구나 싶었다. 재크가 살고 있는 빌딩 앞을 지났으나 거기에는 별로 흥미를 끌만한 것도 없고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서 몇 블록을 바네사는 걸어갔다. 이 거리의 냄새를 맡으며 재크는 콘크리트 위를 걸어다니는 것이다. 식료품을 사는 것은 아마 저 모퉁이의 조그만 슈퍼마켓일까? 일에 지쳤을 때는 저 옆의 어두컴컴한 술집에서 한잔하겠지. 바네사는 교차로를 가로질러 이번에는 반대쪽 보도로 다시 재크가 사는 빌딩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추워서 발가락이 곱고 볼이 차디찼다. 흰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바네사의 발가락은 추위에 감각을 잃을 것 같았다. 도대체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겠단 거지? 이건 정상이 아니야, 나는 정말 바보야! 마치 감상적인 십대의 소녀마냥, 행여나 그 오만한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하고 거리를 서성거리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람! 바네사는 서둘러 버스 정거장으로 돌아왔다. 부디 도중에서 재크를 만나지 않기를 빌면서... 6장 조용한 자기 아파트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자기의 행동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재크의 눈에 띄지 않기가 다행이었다고 바네사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무엇이 나 자신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것일까? 이제 재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말자. 그가 이 아파트에 돌연 나타났던 그날 저녁의 일도 잊어버려야지. 내게선 사라진 줄 알았던 그 뜨거운 키스, 그것을 다시 바라서는 안 된다. 예의 없고 욕심이 많은 재크는 나의 마음을 들쑤시고 무리하게 끌어당겨 놓고는 마침내 아무 것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는 바네사에 어울리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바네사는 낭만적인 환상을 안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재크가 바네사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가는 알고 있었다. 그날 저녁도 그는 자기의 철학을 냉정히 실행에 옮기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요즘 남녀는 누구나 걸핏하면 한데 어우러져 버린다. 오다가다 만나서 서로 매력을 느끼면 부담 없이 한때를 즐기자는 생각들이다. 결국 나는 구식이야. 바네사는 한숨을 쉬었다. 재크와 맺어진들 그가 그런 성격이니 틀림없이 단기간, 아니 어쩌면 하룻밤으로 끝나고 말 거야. 바네사는 그런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서로 끌린다 해도 그런 손쉬운 관계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재크가 만일 그런 사람이라면 바네사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우맨의 옥상 가옥은 널찍했으며 호화롭게 가꾸어져 있었다. 파티에 모여든 90명이나 되는 손님들이 떠드는 소리가 실내에 소란스럽게 울리고 있었다. 누구나 바우맨 부인의 푸짐한 접대를 즐기고 있었다. 재크는 이것이 제판소 직원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파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장 바우맨은 재크와 그의 아버지까지 초대했다. 직원들도,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를 몸에 두른 아내들을 데리고 참석하고 있었다. 재크는 분위기에 허식이 따르는 이런 종류의 파티에는 자주 참석한 일이 있으나 그때마다 진저리가 쳐지는 것이었다. 처음 재크는 파티가 제판소에서 열리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직원이나 그 아내들이 출석하여 실컷 먹고 마시고 취해서 남의 아내 엉덩이나 꼬집고 잘못 키스하고 하다가, 그 여세로 집에 돌아가서도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에는 화해하여 예전의 관계로 돌아간다. 그런 파티라면 별로 부담 없이 참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바우맨의 초대에 좋아라고 덤빈 것도 별로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재크는 바우맨 부인을 눈여겨보았다. 그녀는 이보라는 듯이 여러 개의 보석을 끼고 있었다. 손님이 붐비는 방 저쪽 끝에서도 그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왼손엔 엄청나게 큰 다이아몬드, 오른손에는 호도 만한 토파즈를 끼고 있었다. 두 귀에도 역시 다이아몬드가 반짝이고 있었다. 직원들 앞에서 너무 지나치지 않나 싶었다. 깡마르고 볕에 그을은 바우맨 부인의 "헬로우"라는 말 한마디로 그녀가 왜가리 소리라는 것을 재크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불쌍한 바우맨, 하고 재크는 동정했다. 바우맨이 돈에 궁색하다는 소문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았다. 이 호화로운 아파트에 와보지 않아도, 테이블 위에 넘쳐나는 저 비싼 음식을 보지 않아도, 계약을 얻어내려고 비굴할 만큼 굽신거리던 바우맨의 태도로 재크는 짐작이 갔던 것이다. 미세스 시리어 바우맨 같은 여자를 데리고 살자면 석유왕 같은 부자가 아니고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을 테지. 샴페인을 입에 대면서 재크는 맥주가 마시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곳 여주인은 도무지 그런 사정을 몰라주는 것이다. 이곳에 모인 패들은 맥주나 버본 위스키가 제격이다. 재크는 바우맨 부인이 마치 영국 황태자하고나 이야기하듯이 재크의 아버지와 지껄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노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고 그녀에게 거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이다. 재크는 혼자 마음속으로 킬킬 웃었다. 루비는 또 어디 있는가? 루비는 방 한복판에 있었다. 제판소의 종업원들이 부러운 눈길로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파티에 나오기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요란스런 루비의 차림에 재크는 또 큰 소리를 내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무슨 서슬에 루비가 몸을 수그리기라도 하면 큰 소동이 날 것이다. 루비가 입고 있는 드레스의 등은 까딱하다간 뜯어져 벌어질 것이다. 언제까지나 지금 상태로 있을지, 재크의 아버지조차 조금 전에, 루비가 어깨에 걸친 빨간 여우 가죽의 케이프를 움직인 것을 보고 놀라 말을 그칠 정도였다. 그녀의 우중충한 금빛 아이섀도우는 검은 머리칼과 금 라메의 드레스에 정말 딱 어울리고 있었다. 그때 재크는 바네사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입구에서 웨이터가 그녀의 검은 색 담비 털 코우트를 받아 들고 있었다. 그렇지, 그녀는 싸구려 털 코우트 따위를 두르는 타입이 아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웃어 보이며 두세 마디 인사하는 바네사의 앞머리 블론드가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자자, 이제 취미도 성장도 나무랄 데 없는 여자가 등장했군. 저 세련된 디자인의 스터번 글라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바네사의 아름다움을 그것에 비길 것이다. 재크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네사는 엷은 잿빛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약간 새침한 느낌은 있었으나 그래도 그녀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걸어가면 남자들은 그녀의 잘 맞는 드레스 밑으로 드러난 긴 다리를 손으로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재크는 상대하고 있던 여자 손님으로부터 떨어져 방을 가로질러 바네사가 제일 먼저 들를 성싶은 바로 저도 모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바네사는 다른 어느 여자 손님보다도 얼굴에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정숙해 보이는데다가 위엄이 있었다. 재크가 생각하는 것처럼 30세 안팎의 나이라고 한다면 무척 침착한 셈이다. 많은 손님들이 글라스를 손에 들고 바의 카운터에 팔을 내밀고 진을 치고 있었다. 바네사는 재크보다 조금 뒤에 바에 이르렀다. 재크는 바텐더에게 등을 돌린 채 느긋하게 카운터에 기대서서 바네사가 사람들하고 계속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우맨 부인의 거드름 피우는 듯한 키스를 양볼에 받고 있었다. 이윽고 바네사의 눈길이 재크에게 향해지고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부딪쳤다. 금방 바네사의 목이 빨개져 갔다. 재크를 쳐다보는 바네사의 눈은 스칸디나비아의 차가운 바닷물처럼 새파랬다. 그러고 보면 바네사의 성은 네델란드계라는 것을 재크는 생각해 냈다. 그녀의 뜨거운 피는 지난날의 바이킹의 피 그것이 틀림없다! 가벼운 인사의 말이 바네사의 입 밖으로 나왔다. 얼굴에는 웃음을 띠면서 바네사의 눈길은 냉정하게 재크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다. "파워씨, 오랜만이군요. 작업장에서는 별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군요." 이상하고 말고, 난 당신과 얼굴이 마주치지 않도록 애를 쓰고 있는걸. 재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네사의 아파트를 찾아갔을 땐 재크도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재크는 지금 바네사의 손을 잡고 인사의 입맞춤을 하는 자신에 놀라고 있었다. 희고 투명한 손의 피부 밑으로 푸른 핏줄이 뻗쳐 있었다. 가냘픈 바네사의 손과 재크의 굵은 손가락 사이에 뜨거운 것이 오갔다. "오늘 저녁은 혼자요? 당신 같은 미인을 에스코트하는 남자가 없다니 놀랍군. 예의 욕의의 남자는 어떻게 되었소?" 말하면서 재크는 바네사가 흔해빠진 평범한 미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용하게 발산하고 있는 관능의 냄새. 신비로움과 이른바 자비를 띠고 있는 그 눈망울. 재크가 지금까지 만난 일이 없는 여자였다. 재크의 물음에 바네사는 마치 자기의 비밀을 지키려고나 하듯이 웃음소리를 냈다. "그도 와 있어요. 뭣하면 소개해 드릴까요?" 바네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옆얼굴을 재크는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조각처럼 단정한 얼굴이다 싶었다. 순간 재크는 세잔느가 그린 인물화의 얼굴이 생각났다. "아니, 만나지 않아도 좋아요. 마실 것을 드릴까요?" "와인 스프리처가 좋겠군요. 하지만 시리어의 파티이니 돔 페리논이 있지 않을까요?" 재크는 바텐더를 돌아보고 그 두 가지를 주문했다. "시리어는 당신의 친구요? 어째서 이렇게 거창한 파티를 여는 거요?" "반발심인 것 같아요. 난 시리어와 가깝진 않지만 그녀는 가난하고 매우 엄격한 가정에서 자라난 것 같아요. 아버지는 딸들에게 트럼프놀이도 시키지 않았고 음악은 물론 토요일 저녁에 댄스에 가는 것도 일절 금하고 있었다는군요." "그 제판소에서 일한 지 오래요?" "8년 전에 미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들어갔어요." "아니, 당신은 화가 될 생각이었소?" "그랬어요, 놀랐어요?" 바네사는 재크가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그치듯이 말했다. "왜 그러지요? 여자 화가는 신용할 수가 없어요?" 그 말에서 재크는 어쩐지 바네사의 궁색한 변명을 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런 것이 아니오." 재크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서 했다. "당신은 보기에 말수가 적고 까다로운 것 같으니까. 그렇다고 화가에 맞지 않다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여자가 미술계에서 이름을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지. 이렇다 할 여류화가가 지금 없지 않소?" "어머, 루이즈 니벨손이나 또 조지어 오키프는 어떻고요?" "그 두 사람 말고 누가 있는지 말해 봐요." "헬렌 프랑켄사라가 있어요. 그리고…." "그리고…? 봐요, 그 외에는 이렇다 할 사람이 없지 않소. 당신의 경우도 화가가 될 생각이었는데 제판 기술자가 되었다는 것은…." "후퇴라는 말씀이세요?" "아니, 그런 실례되는 말이야 하겠소." 재크는 어색한 듯이 말했다. 재크는 이 여자 앞에서 굽히고 나가는 자신에 놀랐다. 왠지 이 여자에게만은 상처를 주기 싫다는 배려가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건 신경을 쓰지 않는 그였다. 벌써 오래 전에 자기 명성을 확립한 뒤로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의 언동에 마음을 쓰는 따위는 하지 않게 된 그였다. 그러니 엉뚱하고 예의 없는 남자라는 오해도 받았다. 자기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데는 그것이 효과가 있으나 그의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한 재크지만 이 스칸디나비아의 왕녀같이 보이는 바네사만은 꼭 자기를 호의의 눈으로 보아주었으면 싶었다. 재크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보스턴의 아일랜드계 빈민가에서 빠져 나오자면, 필요한 것은 재능도 감수성도 대망도 아니고 자기 손아귀에 있는 힘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무척 많이 배워 왔다. 양가집 규수인 바네사가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다고 재크는 생각했다. 영국인 유모의 응석을 받으며 자라났으리라 싶은 그녀의 손가락은 어디까지나 가냘팠고 샴페인 글라스를 잡기에는 딱 어울려 보였다. 매니큐어를 하지 않은 것이 재크는 호감이 갔다. 몸차림은 깔끔하고 조금도 부자연스런 데가 없었다. 다만 머리칼만은 부분적으로 블론드가 너무나 완벽해서 자연스럽지 않다고 재크는 생각했다. "어째서 화가가 되려고 한거요?" 재크는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갑자기 바네사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제판소의 사장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는 무척 인상이 다르다. 첫 대면 때는 그녀가 너무나 새침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옆얼굴에 아프게 핀이라도 꽂아 줄까 하고 심술궂은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그 효과는 있었던 것 같았다. 델리커테슨에서 점심때 만났을 때 바네사가 당황해 했던 모습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러한 바네사를 보고 재크는 안쓰러움조차 느꼈고 그녀에 대한 자기의 태도가 너무 거칠었다고 반성했던 것이다. "난 화가가 될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클리블랜드의 신문 미술기자였고 언제나 나를격려해 주셨어요. 하지만 뉴욕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해 보고는 진로를 잘못 든 것을 알았어요. 다만 색채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어요. 리처드 바우맨이 그러한 나를 고용해서 석판의 제판 기술을 가르쳐 주었어요. 나는 이 길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생활도 충분히 이루어 나가고 있는 걸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바네사의 말은 담담했다. 재크는 그녀의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대부분의 여자는 재크의 주의를 끌려고 과장해서 지껄이는 데 반해 바네사는 그 정반대였다. 자기를 낮추는 것도 아니고 재크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혼자 왔어요?" 이번에는 바네사가 묻고는 이상하다는 듯이 재크의 얼굴을 보았다. 재크는 저도 모르게 열심히 바네사를 바라보고 있던 자신을 깨달았다. "아버지와 함께요. 그리고 데이트의 상대를 하나 데려왔소." 재크의 눈은 저도 모르게 방 한가운데로 향했다. 거기에는 아직도 여러 사람을 상대로 애교를 떨고 있는 루비가 있었다. 바네사의 시선도 같은 곳으로 향했다. 한순간이었지만 바네사의 푸른 눈이 크게 떠졌다가는 바로 원상태로 돌아갔다. 그 표정에서 재크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실례해요. 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해야 해요." 하는 말을 남기고 바네사는 재크의 곁을 떠났다. 붐비는 방 저쪽으로 걸어가는 바네사의 모양 좋은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여자가 저렇게 쌀쌀맞을 수 있을까." 하고 재크는 중얼거렸다. 재크는 여자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상대방이 어떤 성격의 여자인지 잘못 보는 법이 없었고 그래서 따귀를 얻어맞는 일은 결코 없었다. 여자의 마음을 기막히게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바네사만은 도무지 어림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예측할 수 없는 이성밖에 있는 것이 전광처럼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것만 같았다. 바네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바네사의 아파트에서 키스를 나누던 그날 밤, 바네사도 재크와 같은 감정을 가졌을 텐데 그녀는 어처구니없게도 재크를 몰아냈던 것이다. 재크는 뜻밖에 자기의 계산이 빗나간 데 깜짝 놀라 약간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그녀의 냉랭한 거절 앞에 어쩔 수가 없었다. 뭐, 물고기는 바다에 얼마든지 있어. 낚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잡혀, 하고 재크는 오기가 나서 그날 저녁 이후 바네사를 피하고 있었다. 바네사를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하던 판에 제판소에서 그녀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다. 바네사는 손에 든 메모에 시선을 박은 채 재크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바네사의 머리칼의 달콤한 내음이 골짜기의 백합 향기를 생각나게 해서, 살며시 손을 뻗어 끌어당겨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싶다고 재크는 생각했었다. 아무래도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니, 한 번 느긋하고 부드럽게 그녀의 신비의 베일을 벗겨 보자. 그때 재크는 마음에 그렇게 작정했던 것이다. 바네사가 자기 사무실의 직원 하나와 얘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무어라고 했지, 저 남자의 이름이? 마이론? 미라드? 옷차림이 깔끔하고 머리가 검은 탓으로 나이보다 젊게 보이는 남자였다. 바네사는 그 남자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 재크의 머리에 무언가가 번득이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 그 욕의의 남자다! 바네사는 그도 이 파티에 와 있으니 소개해 주겠다고 아까 말했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뜨거운 충격으로 재크의 온몸을 달렸다. 아무리 보아도 그 남자는 그녀에게 비하면 너무나 나이가 많았다. 숱이 적은 머리로 보아도 벌써 50이 가깝지 않을까? 키가 크고 마르기는 했으나 무척 건강하게 보이기는 했다. 교양이 풍부한 남자인 것 같으니 아마 바네사가 좋아하는 타입이겠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것을 재크는 느꼈다. 질투…? 바보 같으니, 하고 재크는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바네사의 그 고운 손은 그 남자의 팔에 얹혀 있었다. 재크는 거기에서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바네사의 사랑스런 웃음소리가 사람들 사이를 뚫고 재크의 귀에 울려 왔다. 재크는 욱신거리는 아픔을 느꼈다. 그러나 무리하게 밀고 나가는 것은 금물이다. 차차 기회를 보자. 사장 리처드 바우맨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재크, 많이 먹었소? 한잔 더 어때? 시리어가 이 거리 제일 가는 요리사를 고용했다네." "많이 먹었습니다. 그보다 리처드, 계약에 대해서 좀 할 이야기가 있는데." "뭐 잘못된 일이라도 있었소?" "아니, 그렇지 않아요. 바우맨. 사실은 지불에 관한 이야기예요. 2개월마다 균등하게 지불해 주기로 했는데, 첫 2회분을 남보스턴 클럽 앞으로 보내 주지 않겠습니까? 내 이름은 밝히지 말고 말입니다. 미술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소년들을 위해 대학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해주십시오." "어디에서 나오는 돈인지 모르게 해달라는 말이오? 그렇다면 세금의 공제도 인정받을 수 없어요. 그런 기부금은 PR에는 정말 제격인데. 그런 일을 잘 해주는 선전인을 알고 있어요." 바우맨은 자꾸 손을 비볐다. "선전 같은 건 개나 주라고요. 그래서 제판소가 아니라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익명이라는 것이 조건이에요. 틀림없이 해주겠지요?" "틀림없고 말고요. 당신이 바란다면 말이오, 하지만 이것은 큰 화제가 될 텐데." "보라구요, 바우맨. 이것은 내가 몇 년이나 계속해 온 일이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말입니다. 앞으로 이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간 그건 당신 책임이니 각오해요." 재크의 낮은 목소리에는 위협적인 울림이 있었다. "알았소. 언제나 그렇게 해왔소? 무엇 때문에?" "난 고등학교 때 선생이 알선해 준 소액의 장학금을 얻어 겨우 대학에 갈 수 있었소. 그것도 익명의 사람의 돈이었고 그것이 없었던들 오늘의 나는 없어요. 그러니 나도 같은 방법으로 갚는 겁니다." 바우맨은 새삼 존경심이 깃들인 눈으로 재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걱정 말아요. 절대로 새어나가지 않게 할 테니까." 7장 말하자면 저 사람은 수치를 모르는 짐승이나 같아, 하고 바네사는 불쾌감을 누를 수가 없었다. 요란스럽게 번쩍이는 라메의 드레스를 입고, 몸을 꿈틀거리며 성적 매력과 사향 내음을 뿌리고 있는 여자의 주위를, 주책없이 떠들기 좋아하는 남자들이 둘러싸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자기의 눈길이 그리로 가지 않게 하려고 바네사는 무진 애를 썼다. 메이너드나 그 친구가 있는 곳에 가면 기분이 좀 가라앉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런 노골적인 질투를 저 라메의 여자 따위에게 느끼다니. 마치 고교생 같군. 아니, 그것보다 더 강해. 바네사는 재크의 타는 것 같은 시선을 등에 느꼈다. 하지만 여기에서 뒤돌아보거나하여 저 남자를 우쭐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밝은 불빛에 드러난 빨갛게 된 볼을 사람들이 화장 탓으로 보면 좋겠는데, 하고 바네사는 생각했다. "여어, 왔군, 당신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어, 하지만 당신을 먼저 붙잡은 것은 파워였지." 메이너드는 유럽식으로 바네사의 양볼에 다정한 키스를 했다. "내 여자친구를 소개하지. 안나 실버야. 솜씨가 대단한 실내장식가이고 지금은 남아메리카의 부호들이 귀하게 여기는 존재가 되었지." "만나서 반가와요, 안나 실버 양." 안나 실버는 부드러운 손으로 바네사의 손을 잡으며 허리를 구부리고는 역시 유럽풍으로 입맞춤을 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이 어찌나 유별난 것인지 바네사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안나는 멕시코의 만사니요에서 돌아온 길이지. 저쪽에서는 태평양 연안의 동화 속의 나라라고 하는 리스아다스에서 호화로운 맨션의 일을 맡고 있었던 거야. 이 사람은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이야. 그 재능이야말로 엄청난 것이어서… 바네사, 정말 엄청난 것이란 말이야." 메이너드는 흑인 미녀인 그녀에게 애정이 담긴 눈길을 보냈고 그녀도 방긋 웃으며 그에 답했다. 거품이 이는 샴페인 글라스를 쟁반에 담아 들고 보이가 지나갔다. 안나 실버가 그를 불러 세워 바네사에게 한잔 건네주었다. 두 잔째였다. 차츰 기분이 대담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바네사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고,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방 저쪽에 있는 재크의 귀에까지 흘러갔다. 메이너드가 재크와 그의 아버지를 이제부터 자기 아파트로 저녁 식사에 초대하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 바네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것도 좋지요. 하지만 재크가 승낙할지 의문이죠. 그리고 당신네 아파트 도어맨이 질색할 만한 여자가 따르고 있는 걸요. 그 도어맨은 귀족연감에나 나올 사람이 아니면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을 거예요." "물론 저 라메의 여자에게는 삼가 달라고 해야지 만일 당신이 재크의 아버지도 싫다면 나는 초대하지 않겠소.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별로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 반신반의의 웃음을 띠고 있는 바네사완 상관없이 메이너드는 방을 가로질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재크와 보랏빛 시폰 드레스의 중년 여성 사이에 끼어 들었다. 메이너드가 농담으로 그러는 줄 알았던 바네사는 재크가 눈을 빛내며 바네사 쪽을 쳐다보고 머리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웃고만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메이너드, 진담이었어요? 도대체 어쩌자는 생각이지요?" 바네사는 그녀 옆으로 돌아온 메이너드에게 덤벼들었다. "당신은 너무 오래 혼자 살고 있어. 그리고 파워는 분명 당신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고 당신도 그에게 관심이 있지? 그런데 두 사람 다 어떻게 어울리면 좋을지 모르는 모양이니 내가 둘 사이를 맺어 줘야겠어." "안돼요, 그는 내게 어울리지 않아요. 그와 같이 온 여자를 좀 보세요. 저런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남자에게 내가 흥미를 가질 줄 알아요? 재크도 내게 관심이 있을 리가 없어요. 메이너드, 이번만은 당신이 좀 지나쳐요. 난 안가겠어요. 집에 돌아갈 테예요." "바네사, 그것은 정말 비이성적인 일이야. 내 직감으로 말하자면 저 고양이 같은 여자는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니야. 손톱만큼의 의미도 없어. 재크는 그녀를 전혀 돌보려고도 하지 않잖아. 사장 부인 시리어를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서 데리고 왔을 뿐이야. 저 두 사람을 보고 시리어는 졸도할 뻔했지. 자아, 이 코우트를 입고 2분 안으로 여기를 나가자구. 내 아파트에서 이름 높은 재크 파워를 대접하는 영광을 빼앗으려는 것은 아니겠지. 당신이 가지 않으면 재크도 가지 않겠다고 했단 말이야."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메이너드에게 화를 내는 체하면서도 바네사는 저도 모르게 들떠 있었다. "말했고말고―미스 밴더폴도 가신다면 가지요. 앤드류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거야?" "무엇 때문에 가르쳐 줄 필요가 있겠어요!" 메이너드는 안나와 바네사의 팔굽을 밀며 출구 쪽으로 재촉했다. "재크(젊은이)는 질(색시)을 아내로 맞는다.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메이너드는 붐비는 손님들 사이를 누비며 중얼거렸다. "나 잠깐 화장을 고치고 오겠어요." 바네사는 혼자가 되어 기분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메이너드의 계획이 점점 더 걱정스러워졌다. 그는 분명히 좋은 친구지만 이따금 좀 지나친 일을 하는 것이었다. 재크의 성격이 워낙 저러니 역효과나 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고 걱정이 되었다. 바네사는 잘 꾸며진 바우맨 부인의 침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에 빗질을 하고 립스틱을 고치고 있는데 거울 속을 가로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금빛 라메의 여성이었다. 침대 위에 놓여 있는 코트를 가지러 온 모양이었다. 그렇지, 저 사람도 메이너드의 집에 저녁 식사하러 가는 거야. 바네사는 메이너드의 권유를 거절할 걸 그랬다싶었다. 이제부터 재크와 저 여자를 눈앞에 보면서 어떻게 지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메이너드에게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가기를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코트를 손에 들고 입구로 돌아와 보니 거기에는 메이너드의 모습도 안나의 모습도 없었다. 거울을 붙인 중국풍 가구에 몸을 기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재크였다. 그 역시 코트를 손에 들고 있었다. "모두 어디에 갔어요?" 바네사가 놀라서 물었다. "음식을 사러 가게에 갔어. 나는 여기서 기다렸다가 당신을 데리고 오라고 하더군." 메이너드는 자기의 계획에 바네사가 따르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루비에게 택시를 잡아 주러 갔지." "루비라니, 그 금빛 아이새도우의 여자 말이에요?" 적개심과 멸시를 될 수 있는 대로 누르려고 했지만 말투에 나타났는지 재크는 금방 눈치를 챘다. "그래요, 그 메이크업을 당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군." 그의 눈이 웃고 있었다. 바네사는 재크와 루비가 같이 파티에 나타난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을 눈치채이지 않으려고 신중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뭐라고 할까, 참 인상적인 분이었어요." 바네사는 가볍게 웃었다. "글세, 그렇다고 하고 이 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해요." 재크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다른 때 같으면 비양거리고 냉혹할 만큼 쌀쌀한 태도로 나왔을 텐데 바네사로서는 뜻밖이었다. "자아, 그러면 갈까." 재크는 바네사에게 코우트를 입혀 주었다. 겨우 몇 초였지만 재크가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바네사의 어깨에 손을 댔다고 그녀는 느꼈다. 재크는 전에 바네사가 본 일이 있던 벌꿀색 양가죽 코우트를 입고 있었다. 바네사가 예상한 대로의 수수한 차림이었다. "당신은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마음을 안 쓰는 분이군요." 엘리베이터를 나오면서 바네사가 말했다. "왜, 나도 마음을 쓰지. 신경질적일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오. 또 내 작품을 사람들이 정확한 눈으로 보아주기를 바라고 있소. 하긴 그것은 어려운 일이 기는 하지. 오늘 파티에 나온 패들은 내가 미술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화가인 줄은 알지만 앤디 워홀과 내 작품이 어디가 다른지는 통 모를 거요." "그것은 좀 지나친 말이군요. 당신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대중이 아니겠어요?" "아니오, 매스 미디어요. 대중의 취향과는 관계가 없지. 대중의 취향이라는 말 자체도 수상한 것이지만." "어마, 대중이란 그렇게 바보가 아니에요. 당신은 자기가 그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요? 바네사, 당신은 미술학교에서 많은 친구들을 보아서 알 거요. 거기에는 나보다 뛰어난 화가가 많을 거요. 그중에서 극소수의 행운아만이 신문 같은 데서 다루게 되고 미술계에서 성공하게 되지. 총아가 되는 거요. 이름이 팔리면 물론 돈도 들어오고, 재능과 성공은 관계가 없어요. 슬프게도." 재크는 말하면서도 눈은 5번가를 오가는 택시를 쫓아 빈차를 찾고 있었다. "이 거리엔 빈차가 다니지 않는군." 그는 화제를 바꾸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쳐져 있는 것 같았다. "걸어갑시다. 메이너드의 아파트는 열 블록쯤 가면 있으니까." 바네사는 재크가 팔을 잡아 주는 대로 업타운으로 걷기 시작했다. 5번 가의 가로수가 가로등의 하얀빛에 비치며 나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바네사는 겨울을 말해 주는 나무들의 모습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팔에 전해 오는 재크의 체온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재크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렸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남자에 대한 욕망으로 몸이 반응한 것은 오랫동안 없었던 일이었다. "난 배가 고프지 않은데, 당신은? 당신 친구의 아파트에 가는 것은 그만두고 어디 다른 데나 갈까? 내가 그의 초대에 응한 것도 당신하고 같이 있고 싶기 때문이었는데, 당신은 지금 여기에 있으니…." 재크는 발길을 멈추고 바네사를 돌아보았다. 자기의 장갑을 벗어 그것을 호주머니에 넣더니 바네사의 왼손을 잡아 장갑을 벗기었다. 바네사는 재크의 손안에 있는 자기의 손을 보았다. "어디 다른 데라니요?" 바네사는 대충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당신의 집 말이에요?" "그렇지, 우리집." 거의 동시에 재크는 대답하고 두 사람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바네사의 웃음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재크의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서 곱슬곱슬한 그의 숱 많은 빨간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고 그의 머리를 자기 가슴에 끌어당겨 안고 싶었다. "루비는 어떻게 하구요?" 바네사의 목소리는 먼데서 울려오는 것처럼 가냘팠다. 루비는 재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활의 일부인지 알고 싶었다. 바네사는 자기가 별 수 없는 구식 여자인 줄은 알고 있지만 한 남자의 사랑을 다른 여자와 나누어 가진다는 따위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그런 일은 사람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일이 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재크가 자기 집에 가자고 한 권유가 결혼 신청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엔 노골적인 욕망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바네사도 같은 욕망에 끌리고 있다는 것을 재크는 눈치를 채고도 남을 것이다. 재크의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바네사는 긴장에 숨이 멎는 듯했다. 그 동안의 침묵이 너무나 긴 것 같아 바네사는 재크의 눈을 쳐다보았다. "루비?" 바네사가 잘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 재크의 얼굴에 떠올랐다. "아아, 루비 말이오? 그녀라면 걱정할 것 없어요, 오지 않으니까. 당신은 그녀가 올까 봐 걱정이지?" 재크는 큰 소리로 웃었다. 바네사로서는 조금도 웃을 일이 아니었다. "루비는 무엇 하는 사람이에요?" "모델이오." "무슨 모델인데요? 헐리우드의 모델이에요?" 바네사의 볼은 뜨거워졌다. 재크는 왜 저렇게 웃어대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노여움이 치밀었다. "화가의 모델이오, 잘 팔리는 아이지." 재크의 눈은 아직도 웃고 있었다. "당신은 추상화가인데 모델을 쓸 턱이 없지 않아요? 당신의 작품은 모두 추상화인 줄 알고 있는데요." "당신은 잘 알 수 없을 거요. 루비는 쓸모 있는 여자지. 하지만 누구에게나 모델이 되어 주는 건 아니오. 자아, 택시가 왔군. 가는 거요, 안 가는 거요?" "난 안 가겠어요. 당신의 판화는 제판소에서도 볼 수 있고." 그러나 재크는 손을 들었고, 택시는 두 사람 앞에서 멈추었다. 그는 문을 홱 열자 바네사를 밀어 넣다시피 태우고 자기도 뒤따라 차에 올랐다. "소호." 재크는 분명하게 행방을 알렸다. "잠깐요, 나 집에 돌아가겠어요. 아니, 메이너드한테…." 채 말도 끝나기 전에 재크의 커다란 손이 와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당신은 진심으로 내가 판화 같은 것을 보여 주길 바란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진짜 그림을 당신이 봐 주었으면 싶어." 8장 낮은 목소리와 함께 재크의 뜨거운 입김이 볼에 닿았다. 바네사는 커다란 눈으로 재크를 쳐다보았다. 재크의 말은 바네사의 긴장된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그의 초록빛 눈이 뜨겁게 응시하는 바람에 바네사의 온몸에 짜릿한 것이 흘렀다. 태연한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굳어지고 눈은 어둡게 번쩍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게 거만할 수가 없고 위협적인 느낌을 발산하는 재크지만 그의 마음 밑바닥엔 따뜻한 것이 있다는 걸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갑자기 재크의 숨김없는 욕망이 바네사의 가슴에 전해져 왔다. 바네사는 손을 뻗어 재크의 깊은 곳을 더듬어 보고 싶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잠자코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바네사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게 되어 눈을 감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재크가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어떤지 모를 희미한 끄덕임이었다. 물론 재크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바네사의 입을 막았던 손을 바네사의 머리 뒤로 돌려 끌어당기더니 거칠게 입맞춤을 했다. 재크의 입술이 세게 부딪쳐 오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열려진 바네사의 입술은 재크의 혀까지 받아들이고 있었다. 조심조심 바네사는 자기의 혀끝을 그의 혀에 대보았다. 그에 대답하는 것처럼 재크의 팔에 힘이 가해졌다. 바네사의 몸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재크의 키스는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따뜻한 감각이 머리 속까지 퍼져 가고 마침내 바네사의 몸은 떨리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재크가 얼굴을 떼었다. 틀림없이 승리에 취한 재크의 얼굴이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바네사는 눈을 뜨고 재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따뜻함을 한껏 간직하고 바네사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재크의 얼굴이 있었다. 그것은 그날 저녁 바네사로서는 무엇보다도 큰 놀라움이었다. 재크는 바네사의 턱을 손으로 받쳐 위를 보게 했다. 그녀는 뜨거운 재크의 눈길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당신을 서운하게 하진 않겠소, 바네사." 정열을 가까스로 억누른 것 같은 갈라진 목소리였다. "상처를 주진 않겠어. 그것만은 다짐할 수 있어." 그 뒤 다운타운까지의 상당한 거리를 재크는 다시 키스를 되풀이하려고 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통 말이 없었다. 그 대신 재크는 바네사의 마음이 바뀌게 될까봐 두려운 듯이 장갑을 벗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이따금 바네사는 재크의 옆얼굴에 눈길을 주었다. 거친 숨결도 그럭저럭 가라앉자 바네사는 흐르는 것처럼 지나가는 거리의 불빛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으로는 재크가 속삭인 뜻밖의 말을 몇 번이나 되뇌고 있었다. 재크는 마치 바네사와 사랑의 행위를 이미 끝내 버린 것처럼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그로서는 그것이 전부 였는가하고 바네사는 갑자기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 쉽게 키스를 허락했기 때문에 흥미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바네사는 얼굴을 들어 마음의 평정을 간직한 체하며 창밖만 바라보려고 했다. 그러나 좁은 좌석에서 재크가 바싹 옆에 앉아 있으니 몸이 조금만 닿아도 신경이 찌르르 울린다. 그런 바네사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듯이 재크는 이따금 입을 다문 채 손을 꼭 잡아 주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재크는 바네사의 몸에 팔을 감고 그녀의 목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말없이 방문 자물쇠를 따고 안으로 들어서자 스위치를 켰다. 여러 개의 스포트라이트가 한꺼번에 켜지며 넓은 방안을 비추었다. 그 층 전부를 쓰고 있으며 일부는 아틀리에로, 일부는 생활 주거로 되어 있었다. 그리다 만 것까지 포함해서 벽이란 벽에는 온통 캔버스가 기대 세워져 있었다. 간막이만으로 여러 방으로 나누어진, 문이 없는 실내에 두 사람의 발소리가 울렸다. "배고프지 않소?" "내가 뭘 만들어 올까요? 주방이 어디예요?" 하고 말하고는 바네사는 그러한 자신에 스스로도 놀랐다. 하지만 무언가 재크를 위해서 해주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말하게 한 것이다. "난 굶어죽을 지경이오. 자아, 무엇이든지 어서 먹게 해달라구." 재크는 바네사의 팔굽을 잡고서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다. "어마, 여기는 침실이 아니에요?" 바네사는 후후후 하고 웃었다. 마치 떼를 쓰는 아이 같은 재크의 성격의 일면을 겨우 알게 된 것이다. "누가 음식을 달랬나? 남자는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지." 재크는 서슴없이 자신의 상의를 벗어 의자 위에 던지고, 한 손으로 넥타이를 풀면서 다른 손을 대형 더블 베드의 베드 사이드 램프에 뻗쳐 스위치를 켰다. "하지만 뭐 마시고 싶지 않아? 퍽 놀란 것 같군. 무서워?" "아니오." 바네사는 태연한 체했다. 재크같이 편안한 태도를 취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귀걸이를 빼서 침대 옆의 커다란 궤 위에 놓았으나 손가락 끝이 떨리고 있었다. 자신도 잿빛 실크 드레스를 벗으려고 했다. 소매 끝의 단추를 더듬거리고 있으려니까 재크가 얼른 옆에 와서 말했다. "내가 해 주겠소." 마치 이름 모를 나무 향기 같은 향기가 재크의 주위에서 떠돌았다. 욕망의 내음이라는 것을 바네사는 알았다. 재크의 긴 손가락이 솜씨 있게 단추를 땄다. 바네사의 어깨에 손을 얹어 뒤로 돌려세우더니 이번에는 지퍼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보게 하자 천천히 따뜻한 입맞춤을 했다. 바네사는 재크의 셔츠를 벗겼다. 어깨에서 팔에 걸쳐 우람한 근육이 나타났고 바네사는 재크의 붉은 가슴 털에 얼굴을 묻었다. "타고난 빨간 털이군요." 바네사는 겨우 농담을 입에 올렸다. "물론 진짜지." 재크는 바네사의 드레스를 발 밑으로 끌어내리고 그 가슴의 골짜기에 입술을 댔다. 바네사의 몸이 떨리면서 한숨이 나왔다. 발 밑에 펼쳐진 드레스에서 살며시 바를 옮겨 놓았다. 재크는 바네사의 몸을 뒤로 밀었다. 그 바람에 그녀는 침대 위에 나동그라졌고 두 사람은 그대로 침대 위에서 포개졌다. 재크의 손이 그녀의 슬립을 허리까지 밀어 내렸다. 바네사의 봉긋한 가슴의 굳어진 두 돌기에 재크는 되풀이해서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눈부신 나의 공주마마, 스칸디나비아 왕녀, 얼마나 당신을 갖고 싶었는지." 바네사의 슬립은 바닥에 던져졌다. 눈을 감은 바네사는 재크가 일어서서 몸에 걸친 남은 옷을 남김없이 벗어 던지는 소리를 들었다. 재크는 침대로 돌아오자 시트 위에 바네사와 나란히 누워 탄력 있는 몸을 뻗었다. 재크의 몸은 어깨도 팔뚝도 놀랄 만큼 근육이 울퉁불퉁 솟아있었다. 바네사는 그 두꺼운 가슴에 살이 닿는 기쁨에 몸이 저려옴을 느꼈다. 바네사의 몸에 겨우 한 조각 남아 있는 것까지 재크는 부드럽게 벗겨내 버렸다. 새로운 욱신거림이 바네사의 온몸을 치달았다. 바네사의 나신은 재크의 눈길 아래에 있었다. 저도 모르게 새어나온 그의 찬미의 말에 바네사는 눈을 떴다. 한 팔로 자기 몸을 받치고 재크는 싫증도 낼 줄 모르고 언제까지나 바네사의 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재크는 바네사의 목, 젖가슴, 배에 뜨거운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재크와 한 몸이 되고 싶은 열망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활처럼 휘었다. 재크의 손바닥이 바네사의 매끄러운 몸의 선을 쓰다듬었다. 손은 두 가슴에서 머뭇거리더니 다음에 배로, 이어 다리로 천천히 내려갔다. 입술은 바네사의 목덜미 우묵한 곳에 밀어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바네사도 재크의 몸을 더욱 끌어당기려고 그의 빨간 머리털 속에 쑤셔 넣은 손가락에 정신없이 힘을 넣었다. 어디까지가 재크의 몸이고 어디서부터 자기 몸인지 이제 바네사는 알 수가 없었다. 단편적인 생각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지금까지 만져 본 일 없는 재크의 맨살의 감촉, 어떻게 대응하면 좋은지 알 수가 없는 자신이 바네사는 안타까웠다. 사랑의 행위는 자전거 타기나 같은 것, 결코 잊어버리거나 하지 않는 것…하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앤드류와의 그 일은 너무나 오래 전의 일이었다. 바네사는 즉은 남편 때 이상으로 재크를 갖기를 바라는 자신을 깨닫고 문득 남편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한편 이런 때 앤드류를 생각하다니, 재크에게 미안해, 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앤드류는 바네사가 아는 유일한 남자였다. 지금 재크와의 사이에 일어나는 감각은 모두 앤드류 때와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그래도 바네사는 앤드류의 이름이 자기 입밖에 나올까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윽고 바네사는 자기의 더욱 강한 욕구에 품안에 안기는 것에 대한 꺼림도 죽은 남편의 추억도 모두 잊어버리고 재크의 입맞춤과 애무에 호응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맛보는 감각을 재크의 목에서 그리고 어깨에서 혀끝으로 느끼면서 바네사의 입맞춤은 거세어지고 숨쉴 겨를도 없었다. 재크의 손의 움직임에 신음소리를 내었고 그녀의 손도 어느새 재크의 몸 위를 익숙하게 미끄러져 다녔다. 재크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바네사의 욕망을 부추겼다. 높아지는 감각 하나하나가 전혀 새롭고 처음인데도 바네사는 재크와의 사이에 이미 수없이 사랑을 주고받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서로 가장 큰 기쁨을 나눌 수 있는가를 바네사가 알고 있는 것을 재크도 눈치챘다고 그녀는 느꼈다. 바네사는 재크의 이름을 조그맣게 불렀다. 그에 응하여 재크는 자기 몸으로 바네사의 몸을 뒤덮었고 한순간 두 사람은 망설임과도 같은, 그러나 굶주린 눈길을 주고받았다. 잠깐 한순간을 기다림으로써 일체가 되어 맺어질 때의 기쁨이 얼마나 커지는가를 둘은 다 알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야아, 내 아들 거기 있냐?" 느닷없이 목쉰 굵은 남자의 소리가 들려 왔다. "어마, 누구예요, 이런 시간에?" 비명과도 같은 놀라움의 소리를 지르며 바네사는 몸을 뺐다. 쇼크로 다리와 허리에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부르는 소리는 마치 두 사람이 있는 방안에서 나는 것처럼 가깝게 울려왔다. "아버지가 왔어!" 재크도 튀듯이 일어나며 혀를 끌끌 찼다. "도대체 무얼 하러 찾아다니는지!" 바네사는 바로 사정을 알아차렸다. "당신은 이런 일에 익숙해져 있지요?" 비양거림과도 같은 웃음으로 채워지지 않은 욕망을 숨기면서 바네사는 솟아오르는 분한 눈물을 참았다. "아버지는 당신 친구 집에 만찬의 초대를 받았을 텐데. 이거 안 되겠군, 아버지 혼자가 아니야." 바네사는 얼른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목까지 이불을 끌어올렸다. 바닥에 벗어 던진 드레스가 눈에 띄었으나 그것은 몇백 미터나 저쪽에 있는 것처럼 보여 도저히 손이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재크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바지를 주워 입었다. "잠깐, 이리 오지 마세요!" 재크는 아버지에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나갈 테니 거기 계세요." 재크가 침실을 나가자 바네사는 뛰어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드레스를 주워 입었다. 그리고 빗으로 머리를 빗고 거울을 보면서 얼른 화장을 고쳤다. 재크의 너무나 거센 키스에 입술이 부어 있었다. 어떻게 여기에서 빠져나가 저 패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방의 칸막이 저쪽에서 재크와 아버지의 말다툼 소리가 들렸다. 화를 내는 재크에게 노인은 수세에 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재크는 침실로 돌아와 서둘러 셔츠를 입고 구두를 신으면서 조그만 소리로 투덜투덜했다. "아버지는 글세, 파티에 와 있던 패들을 왕창 끌고 왔지 뭐야.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오다가 들른 술집의 술친구까지 데리고 왔어. 저 취객들을 어떻게 하면 좋지? 정말 울화가 치미는 일이야. 내 일에 대해서 아버지는 눈꼽만큼도 마음을 써주지 않는단 말이야." 재크는 낙심한 듯 침대가에 털썩 걸터앉았다. "재크, 파티에 온 사람들이라니, 제판소 사람들이에요?" 바네사는 재크 옆에 앉으면서 물었다. 재크는 바네사의 한 손을 잡고 힘없이 쓰다듬었다. 바네사는 재크의 어깨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난 그 사람들과 얼굴을 대하기 싫어요. 재크, 아시겠지요? 어떻게 하면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지요? 함께 내 아파트에 가요. 그러자구요. 나가는 문이 또 없어요?" "안돼, 안 된단 말이야." 재크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바네사는 놀랐다. "안 되다니, 나가는 문이 없단 말이에요?" "아니, 문은 있어. 뒷 계단으로 내려갈 수 있어. 하지만 난 당신을 따라갈 수가 없어. 함께 가고 싶어 견딜 수 없는데!" 재크는 바네사를 힘껏 껴안았다. "난 지금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는 것밖에는 아무 생각도 없어. 하지만 저 취객들을 이 아틀리에에 어떻게 그냥 남겨 둘 수가 있지? 들어 보라구, 저 소동을." 바네사는 그의 걱정도 무리가 아니다 싶었다. 스테레오 소리인지 음악이 꽝꽝 울리고 즐거운 웃음소리며 글라스가 마주치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 왔다. 더구나 손님은 자꾸만 불어나는 기색이었다. "당신은 어떻게 할 참이에요?" "어떻게 하다니. 캔버스가 부서지지 않게 지켜봐야지. 미안해, 바네사. 아래까지 바래다주겠어. 택시를 잡아 줄게." "재크, 나야말로 미안해요. 당신과 같이 있고 싶어요. 알지요? 하지만 저 사람들과…." "알고 있어. 우리 아버지의 저런 모습을 처음부터 당신한테 보여주기는 싫었어. 이것으로 내 인상도 나빠졌겠지." 재크는 쓴웃음을 띠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요, 코트를 갖다 줄 테니." 침대에 걸터앉아 재크를 기다리는 바네사에게 금방 발소리가 돌아왔다. 고개를 든 바네사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재크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코트를 침대 위에 내던졌다. 바네사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귀여운 레이디는 여기에 숨어 있었군. 자아, 이리 와서 우리 함께 마시자구요." 서 있기도 어려운 것처럼 노인의 발이 비치적거렸다. "난 이제 실례하겠어요, 파워씨." "오오, 당신은 나를 알고 있군. 난 당신의 이름도 모르는데, 아가씨." 재크의 아버지는 침대에 다가와 바네사에게 손을 뻗었다. 바네사는 예의상 악수를 했으나 자기 이름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다. "아드님과는 친구예요." "무척 가까운 친구같이 보이는데. 당신은 이만저만 미인이 아니군." 그의 거친 말투와 술 냄새가 역겨워 뒷걸음질치다가 바네사는 침대 가에 다리가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손을 댄 침대 위에 모피의 감촉이 느껴졌고, 바네사는 자기가 빨간 여우 가죽 코트 위에 걸터앉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네사는 불에 덴 듯 손을 떼었다. 누구의 코트일까? 동요하는 마음을 누르면서 바네사는 그 코트에 다시 손을 대보았다. 마치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것처럼 방에 들어온 것은 루비였다. "그 코트 이리 줘요, 걸어 놓아야지." 루비는 코트를 손에 들자 아장아장하는 걸음으로 방을 가로질렀다. 꽉 죈 드레스가 그런 걸음걸이를 하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바네사가 미처 못 보았던 곳에 옆으로 밀어 여는 문이 있고 그 속의 재크의 옷가지 옆에 루비는 자기 코트를 걸었다. "내 귀여운 베이비, 잠자리가 없어…." 루비는 그런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갔다. 뒤에는 짙은 향수 내음이 떠돌고 있었다. "이 집 사정에 환한 것 같군." 바네사는 재크가 대수롭지 않은 체하던 여자가 침실의 옷장이 어디에 있는가도 알고 있는데 쇼크를 받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렇지, 자주 오니까. 아들에겐 재미있는 친구가 많아요." 재크의 아버지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조심하며 바네사에게 황홀한 눈길을 보냈다. "저분 이 집에 묵고 있어요?" 부디 사실을 가르쳐줘요, 하고 바네사는 속으로 빌었다. "그럼, 이 방에서." 노인은 침대 위를 손으로 두드려 보였다. 주위의 윤곽이 갑자기 희미해지고 바네사는 자기가 정신을 잃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어디 언짢소? 브랜디를 갖다 드리겠소. 그것을 마시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요, 아가씨." 재크의 아버지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너무나 비참한 심정에 바네사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재크의 말을 믿고 있었는데. 루비와 재크의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겨우 믿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바네사와 재크가 사랑을 나누고 있는 판에 루비가 들이닥칠 뻔했다. 루비가 자는 이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이 벌거벗고 있는 것을 들킬 뻔한 것이다. 바네사는 어서 조용한 자기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 바보란 말인가. 메이너드가 재크를 조심하라고 했던 충고를 무시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자기 쪽에서 재크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크는 바네사를 뒷문 비상 계단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좁다란 계단을 말없이 내려갔다. 바네사는 재크의 몸을 붙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뻔뻔하게 나를 속였을까 하고 마음속은 재크에 대한 노여움으로 활활 타고 있었다. 그보다도 그의 손에 쉽게 놀아난 자기가 분했다. 9장 이 사람은 내게 뭐라고 했지? 바네사는 그의 한 마디 한마디가 다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역시 처음 보았던 인상이 틀림이 없었다. 그는 자기밖에 생각하지 않는 주제넘은 바람둥이였던 것이다. "내일 전화하겠소." 택시 문을 열어 주면서 재크는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그가 팔을 뻗어 끌어당기려 했으나 바네사는 뒤로 물러났다. "날 상관하지 말아요." 그 말에 놀란 재크는 바네사의 손목을 확 잡고 날카로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지? 우린 고교생의 불장난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래요, 불장난이 아니에요. 그러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요." 바네사는 재크의 당황하면서도 쏘아보는 초록빛 눈길을 피하면서 말했다. "전화하지 말아요. 우린 서로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내가 지금 당신하고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은 저 취객들이 내 아틀리에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지 모르니 내가 집을 비울 수 없어서란 말이야, 바네사. 그런데 왜 그러지?" "난 알고 있어요, 모든 것을. 자아, 손을 놓아요. 난 바빠요. 돌아가겠어요." "손님, 어서 태워 드리십시오. 밖은 추워요." 택시 운전사가 궐련을 문 채 말했다. "시끄러워! 당신이 무슨 참견이야!" 재크가 소리쳤다. "잘 있어요, 재크. 아틀리에를 구경시켜 주어 고마워요." 재크는 열려진 문으로 윗몸을 들이밀고 택시에 오른 바네사에게 험악한 기세로 말했다. "난 불장난이 아니니까. 당신이 더 어른이 되면 만나러 오라구. 내가 찾아가리라고는 생각지 말아 줘." 밖으로부터 꽝 하고 문이 닫히고 낡아빠진 택시는 터덜터덜 흔들리며 출발하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행방을 말하고 운전사에게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 좀 다물어 줘요, 그리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궐련 좀 꺼줘요." "예, 마담." 차는 급커브를 그리며 그 자리를 떠났다. 바네사는 뒤창으로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긴 배웅하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자기 아파트로 뛰어들어 혼자가 된 바네사는 몸을 심하게 떨었다. 온몸에 한기가 들고 손발이 아직도 곱았다. 오늘 저녁 그녀는 이때까지 해본 일이 없던 일을 했다. 바네사는 글라스에 철철 넘치게 브랜디를 따라 가지고 침실로 갔다. 일주일쯤 푹 잠들어 있고 싶었다. 자기가 이렇게 외토리라고 느낀 것은 앤드류가 죽은 이후 처음이었다. 마음속은 텅 비어 있었다. 자기가 일생을 혼자 쓸쓸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은 신이 정해 준 운명인지도 모른다고 바네사는 문득 생각했다. 숱한 나날을 교도소에 갇힌 죄수처럼 고독하게 살아야 되는 거야…. 바네사는 옆방의 노처녀 레나 와이즈만을 떠올렸다. 레나는 자기가 급사할 경우의 연락처를 종이에 적어 현관 거울에 붙여 놓고 산다. 끊임없이 눈물이 솟아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파티에서 만난 재크는 제판소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그와는 전혀 딴판이었으며 조소적이데도 거친데도 없었다. 두 사람은 함께 그의 집에 가서 사랑을 나누려고 했다.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바네사의 몸은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재크의 강한 팔에 안기어서 누워 몸을 붙이고 있고 싶었다. 바네사는 낮은 신음소리까지 냈다. 하지만 그 여자, 루비! 바네사는 한없이 분했다. 루비 같은 여자에게 끌리는 남자와 어떻게 제대로 남녀의 교제를 할 수가 있으랴. 그녀는 정말로 화가의 모델일까? "난 질투 같은 것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바네사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리고 그 목소리가 눈물로 흐려 있는 것에 스스로도 놀랐다. 화장지에 손을 뻗었을 때 침대 옆의 전화가 울렸다. 바네사는 망설였다. 수화기를 집을까말까, 재크라면 뭐라고 하면 좋을까.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화를 낸 것은 나다. 하지만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지 않았는가…. 천천히 수화기를 들어 귀에 댔다. 들려 온 목소리에는 장거리 전화인지 잡음이 섞여 있었다. "바네사냐?" "아버지세요? 어마, 깜짝 놀랐어요." 약간 실망한 기분을 눈치 채이지 않으려고 바네사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는 크리스마스에는 카리브해의 바다 여행을 즐기고 돌아가는 길에 뉴욕에 들를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여러 번 전화를 걸었다. 마이애미에서 배를 타기 위해서 오늘 저녁 비행기로 떠나는데 그 전에 너에게 말해 두려고 말이야, 근사한 일이 있어, 내게 말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해 주겠지만."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어서 밖에 나가 있었어요. 재크 파워의 아틀리에에도 들렀고요." 바네사는 재크의 이름을 소리내어 말하였다. 물론 아버지는 재크의 작품을 알고 있을 테니 바네사가 그와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면 기뻐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정이 있는 남자야, 그는." 아버지는 뜻밖의 말을 했다. "인정이 있다구요, 재크 파워가요? 농담이시죠?" "아니, 진담이야. 나는 은퇴하기 전에 신문 일요일에 파워에 대해서 긴 기사를 썼지. 여러 가지 흥미 깊은 일을 취재했어, 그의 변호사 때문에 모두 활자화할 수는 없었지만. 하여튼 좋은 뉴스만으로는 신문은 팔리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 좋은 뉴스라는 게 뭐지요?" "파워가 설립한 장학 기금이야. 자기의 출신지 사람들을 위해서 기부를 하고 있었어. 우리가 바다 여행에서 돌아가면 그 기사의 스크랩을 보내 줄까?" "우리라구요?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방금?" 바네사는 아버지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렇단다, 바네사. 난 아마 결혼하게 될 것 같아. 상대는 너도 아는 사람이야, 그녀의 딸이 너와 같은 학교에 다녔으니까." 아버지는 바네사에게 그 딸의 이름을 말해 주었으나 바네사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가 되지요, 그 행복한 결혼식의 날짜는? 저도 참석하고 싶어요." 바네사의 아버지는 20년 동안을 홀몸으로 지내왔다. 바네사는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의 아버지가 잘 실감이 되지 않았고, 60세의 여성에게 프로포즈한 아버지를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아닌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 오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바네사는 주체 못할 쓸쓸함을 느꼈다. "카리브해에 있는 큐라소 섬에서 간단히 식을 올리게 되었단다. 아무도 부르지 않고 말이야. 하지만 네게는 미리 이 소식을 알려 기뻐해 달랄 생각이었지." "정말 가슴 뛰는 일이에요. 아빠, 인생은 함께 지낼 사람이 절대로 필요해요. 내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바네사의 두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아버지의 행복을 기뻐하는 눈물이라고 바네사는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면 자기도 이대로 20년 동안을, 혹은 끝까지 혼자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눈물이기도 했다. "너도 머지않아 좋은 사람이 생길 게다." 바네사의 속을 들여다보기라고 한 듯이 저쪽에서 아버지는 말했다. "어떠냐, 파워 같은 사람은? 그는 그런 자격이 있지?" "아버지, 그는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에요. 취재 때 그것을 잘 살펴보셔야 했을 거예요." "하지만 말이다, 바네사. 인연이란 것은 이상한 것이어서 세상에는 생각지도 못한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단다." "하여튼 지금으로서는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새해 정월 둘째 주에 아버지는 새 아내와 함께 클리브랜드로 돌아가는 길에 뉴욕에 들를 것을 약속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아버지를 축복하는 마음과 새로 아버지의 아내가 될 사람에 대한 부러움이 바네사의 가슴에 꽉 찼다. 동시에 자기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불쾌한 잠이 바네사에게 찾아왔다. "바네사, 할말이 있는데 들어가도 좋아?" 사장 리처드 바우맨이 바네사가 일하는 사무실 문밖에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신경질적인 그의 얼굴에서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무슨 일이지요, 사장님?" 바네사는 살짝 문을 밀고 들어온 리처드에게 얼굴을 돌렸다. 무슨 걱정이 있는지 리처드는 이마에 주름을 잡고 표정이 굳어 있었다. 바네사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사장이 마치 도둑이라도 된 듯이 부하의 방에 슬금슬금 들어오다니, 너무나 우스운 일이었다. 우선 주위는 칸막이가 유리로 되어서 방안의 일은 밖에서 환히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파워에 대한 일인데, 벌써 점심때가 됐는데도 그는 아직 나오지를 않는단 말이야. 참 곤란하군." "어젯저녁 늦게까지 놀았기 때문이겠지요. 인쇄소 사람들도 아직 반은 집에서 자고 있어요. 출근한 사람들도 졸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예요.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너무 마셔서 모두 숙취와 싸우고 있어요." "아니, 그것이 재미있다는 말이야? 아무리 숙취래도 할 일이 있는 사람은 나오게 마련이지. 파워도 나와서 색채가 나온 모양을 보아주어야 하는데 도무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지 뭐야." "전화를 하시면 어때요? 지금 바로 나와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고요. 사장님과 계약했지 않았어요? 두려워 할 필요는 없어요, 아무리 그라고 해도 물어뜯지는 않을 테니까요." "두려워하는 게 아니야." 바네사의 기세에 눌려서 말은 그렇게 했으나 리처드 바우맨은 분명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왜 재크를 두려워하는지 바네사는 알 수가 없었다. 바우맨은 진정제 캡슐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입안에 던져 넣었다. 연말의 2주 동안은 분명 일년 중에서 제일 바쁘다. 세금 관계가 있어서 연내에 예정한 작품은 모두 12월 31일까지 완성해 놓아야 한다. 세제상의 특혜를 받고 있기 때문에 미술 산업에 대한 국세청의 태도는 참으로 까다롭고, 연내에 완성해야 할 작품이 과연 완성되었는지 어떤지 신년 초에는 반드시 기습 감사가 나오게 된다. 그토록 중요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바우맨의 겁먹은 모습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평상시엔 별로 눈여겨보지 않는 바우맨의 표정을 바네사는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숱이 적은 머리칼은 요즘 부쩍 희어지고 입가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사장님, 우선 파워에게 전화를 하시면 어때요?" "전화를 했는데, 글세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끊어 버리지 뭐야.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지금까지 잘 해 나왔는데." "무슨 오해가 있겠지요. 다시 한 번 걸어 보세요." 바네사는 자기 책상의 수화기를 바우맨에게 건넸다. 바우맨은 한동안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더니 이윽고 덜컥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지금 전화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하는군. 녹음 테이프가 말이야." 바네사는 바우맨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까 싶었다. 뭐라고 위로를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사장님, 지금 무엇이 제일 곤란하지요? 앞으로 몇 장을 더 완성해야 해요? 연말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잖아요?" "여유는 무슨 여유야." "하루도 여유가 없어요?" "없지, 재크가 지금 바로 시험 인쇄를 보아주지 않고는. 바네사, 바네사가 좀 재크의 아틀리에로 가서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봐 주지 않겠어?" "내가요? 나도 할 일이 잔뜩 밀려 있는데요." "부탁해. 바네사 같으면 그에게 사무실에 나와 교정을 해달라고 말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색채 교정을 하는 게 파워보다 배나 빨라요." 사장 바우맨도 그것은 알고 있었다. 바네사는 재크를, 더구나 그의 아틀리에에서 만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오늘 아침 제판소에 나와 재크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던 판이다. 하긴 그 반면에 실망이 된 것도 사실이다. 바네사는 또 자기를 알 수가 없어졌다. "바네사에게 색채 교정을 해 달랄 수는 없어. 재크 자신이 그것을 하기로 계약이 되어 있으니까." 바우맨은 난처한 기색을 떠올렸다. "아, 그래요? 그럼 할 수 없겠군요." 바네사는 불쾌한 듯이 책상 위의 필름류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제 그만 가주었으면 좋겠어요. 하는 말을 몸짓으로 나타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바우맨은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것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야. 파워는 바네사한테 아무런 유감도 없을 테니까 말이야." 바우맨은 변명처럼 말했다. "그야 없겠지요. 나도 알고 있어요." 사실은 바네사는 그 점에 대해서 별로 자신이 없었다. "그는 나뿐 아니라 모든 여자에 대해서, 아니 모든 인간에 대해서도 아무 유감이 없을 거예요." "그것은 좀 지나친 말이군. 우연히 안 일이지만. 재크는 상당히 인정이 있는 사람이야." "나도 재크 파워가 숨은 자선가라는 것은 들어 알고 있어요. 어느 믿을 만한 사람한테서요. 사장님까지 그렇게 말씀하시니 틀림이 없겠지요. 좋아요, 내가 갔다오겠어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장님을 위해서 가는 거예요. 나는 절대로 재크 파워가 좋은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도리어 그런 더러운 작자는 세상에 다시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말은 숙녀답지 않지만…." 그러나 바우맨은 마지막 악담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아, 바네사. 바네사는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몰라. 고마워요." 하고 그는 소리를 낮추었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구." 10분 뒤에 바네사는 택시를 타고 소호로 향했다. 카 라디오에서 한낮의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기 예보는 뉴욕 주와 그 인근 주에 내일 아침까지 강풍을 동반한 폭설이 내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10장 이제 곧 재크를, 더구나 그의 집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니 바네사는 마치 위가 송곳으로 찔리는 것처럼 아팠다. 그 루비라는 여자가 있으면 어떻게 할까. 어젯밤에는 하마터면 이름 높은 화가의 하룻밤 놀이 상대가 될 뻔했다. 불쾌한 기억이 되살아나 바네사는 좌석에서 몸을 틀었다. "…전기 공사를 하고 있어서 차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손님. 지금 50번진데요." 운전사는 재크의 집이 있는 빌딩의 거리 북쪽 끝에서 차를 멈추었다. "좋아요, 걸어가겠어요." 바네사는 요금을 치르고 팁도 듬뿍 주었다. 하여튼 오늘 저녁은 크리스마스 이브인 것이다. 그녀는 이제는 낯익은 빌딩의 입구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돌아가고 싶다, 뛰어서 도망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리는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그가 제판소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것은 어젯저녁 바네사를 유혹하려고 한 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녀는 자기를 그렇게 타이르고 있었다. 유혹? 그것은 아니었다. 바네사는 자진해서 몸을 내맡기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중요한 교정을 보러 나오지 않은 것은 뜻밖의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쇄 기사들은 그의 승낙을 기다려 공정을 진행시키려 하고 있는 것을 재크가 모를 리가 없다. 그는 기분파가 아니다. 약속은 틀림없이 지킨다는 말을 듣고 있다. 바네사와 그가 어젯저녁 말다툼으로 끝났다 해도 일 관계의 의무까지 포기할 리가 없다…. 엘리베이터는 크게 흔들리면서 겨우 4층에서 멈추었다. 프런트에서는 그에게 손님이 왔다는 말을 이미 전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나오니 바로 눈앞에 재크 파워의 험악한 얼굴이 있었다. 물감이 묻은 진즈에 푸른 작업복을 입고, 활짝 열어젖뜨린 문에 기대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람한 몸이 문을 가득 막아서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바네사는 재크의 초록빛 눈 속에 강한 긴장이 들어차는 것을 보았다. 팔짱을 끼고 긴 다리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꼬고 있으나 그의 온몸이 굳어지는 것을 바네사는 알 수 있었다. 먹이를 덮치려고 몸을 사린 고양이와도 같았다. "무엇을 하러 왔지?" 재크의 목소리는 더없이 쌀쌀했다. 처음 흘끗 보였던, 무언가 바라는 것 같던 눈길은 금방 사라지고 그 얼굴에는 분명 성가신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당신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도 오늘은 만날 수 없어." "마음이 바뀌었다구요! 착각하지 마세요. 난 일 때문에 왔어요. 일 때문이라구요. 우린 모두 일을 해서 먹고살고 있어요. 당신 혼자 구름 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바네사는 잔뜩 빈정거리며 말했다. 재크는 바네사가 마음이 바뀌어 자기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고 멋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바우맨의 부탁을 받을 때 그 일을 생각지 못했던가. "당신은 계약을 했을 거예요. 모두 기다리고 있어요. 걱정도 안 돼요? 당신은 필요가 없겠지만 우리는 모두 돈이 필요해요." "지금 바쁜 일이 있어. 내일 가겠소." "내일은 크리스마스예요. 오늘 꼭 마쳐야 할 일이에요. 사장님은 지금 안절부절못하고 있어요. 왜 전화도 받지 않지요? 도대체 뭐가 어쨌다는 거예요? 어젯저녁 나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에 유감을 품고 그러는 거예요?" 바네사는 재크의 표정을 살피려고 했으나 그의 등뒤에서 눈부신 빛이 비쳐 나오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었다. 바네사는 대담하게 재크의 곁을 지나 방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누가 들어오라고 했어. 지금은 안 된다고 했지 않아?" 재크는 바네사의 손목을 잡자 난폭하게 밀어냈다. "돌아가요." 바네사는 두꺼운 모직 코트를 입고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래도 재크의 몸이 조금 닿자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재크의 손의 감촉과 자기의 분노로 바네사의 몸은 뜨거워졌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바네사는 자기를 눌렀다. "난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왔어요. 어젯저녁의 일은 지금 문제도 아니에요." "아니, 문제야. 하지만 당신의 노이로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겨를이 없소." "노이로제라구요? 당신이란 인간은!" "그렇다구. 난 당신의 증상을 잘 알고 있어. 당신은 날 갖기를 원했어. 나도 당신의 희망을 이루어 줄 생각으로 있었어. 그런데 당신은 어땠지? 도중에서 마음을 바꾸는 변덕장이 올드미스하고는 이제 상대하지 않기로 했어." "변덕장이 올드미스! 바라는 걸 이루어 줘요? 마치 자기가 우수한 종마인 양 생각하고 있군요. 난 당신에게든 누구에게든 애걸복걸할 만큼 불만에 차 있지 않아요. 당신같이 교만한 사람은 일 관계에서도 처음 만났어요." "바네사, 하여튼 그 이야기는 지금은 못하겠어." 재크는 차갑게 말하고 바네사를 밀어내려고 했다. "재크, 이것은 당신과 나의 문제가 아니에요. 바우맨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를 여기에 끌어들이지 말아요. 불쌍하지 않아요? 그는 지금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당신을 보냈나? 하필이면 당신을?" "당신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와주겠지요? 별로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예요. 인쇄 기사들도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의 승낙이 떨어지지 않으면 다음 일을 할 수가 없으니까요." "가고는 싶지만 갈 수가 없어, 바네사. 나는 약속한 일에 펑크를 내는 일은 하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여기에 있어야 해. 어떤 사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여기를 떠날 수가 없어." "제판소의 일이 스톱되는 것보다 그 일이 더 중요하단 말이에요? 알 수가 없군요, 당신의 마음을." 재크는 입을 다물고 고집 세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지나가는 소리처럼 말했다. "난 어머니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어." "어머니가 오시기를?" 그녀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를 기다려요?" 바네사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재크의 말이었다. "아니, 교정이 끝난 뒤가 아니면 안돼요?" "난 어머니를 30년 동안이나 못 만났단 말이야." 비밀을 밝히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는지 재크의 눈은 흥분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그래서 바네사가 왔을 때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올려 보내라고 했군. 그러고 보면 바네사가 엘리베이터에서 모습을 나타냈을 때 재크의 눈은 험악함과 함께 실망의 빛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머니와 30년만에… 얼마나 멋진 일이에요. 그러니까 어렸을 때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거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재크." 바네사는 저도 모르게 재크의 몸을 끌어안았다가 당황하여 얼른 몸을 떼었다. 한순간이었지만 그의 몸에 닿는 순간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뜻밖의 고백에 지금까지의 그녀의 분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재크도 팔을 바네사의 몸에 감고 그녀를 꼭 껴안았다. 바네사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사실을 말하면, 당신이 와주기를 잘했어. 누구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했던 판이니까 말이야." 재크는 감았던 팔을 놓고 흰 이빨을 드러내 보였고 바네사도 웃음을 되돌려주었다. "어떻게 어머니의 거처를 알았어요?" "내가 찾은 게 아니야. 어머니가 날 찾았어.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당신은 유명인이 아니에요? 찾기는 쉽지요. 그리고 프랑스풍의 이름과 아일랜드풍의 성을 가졌으니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도 별로 많지 않아요." "그럴지 모르겠군. 난 어머니를 닮은 모양이오." 재크는 약간 볼을 붉혔다. "아버지를 별로 닮지 않은 것은 당신도 알지?" "한데 당신이 몇 살 때 집을…." 하고 말하다가 바네사는 얼른 입에 손을 댔다. "미안해요, 재크 내게 관계가 없는 일까지 물어서." "아니, 괜찮아요." 좀 전까지의 무뚝뚝한 차가움은 어디로 가고 없었다. 바네사에게 자기 비밀을 털어놓아서 마음이 편해진 것일까? 하지만 그는 마음의 아픔을 누르는 것처럼 얼굴을 흐리면서 말을 계속했다. "어머니는 패트릭을―나의 아버지를 버렸어.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나를 주지 않아서 어머니는 혼자 나갈 수밖에 없었어. 아버지는 그 무렵부터 구제 불능의 술고래가 되셨소. 당신도 보다시피 아버지의 관심이라면 지금도 어떻게 하면 술을 마실 수 있을까 하는 것이오. 당신같이 좋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내 어렸을 적의 비참한 일은 이야기해 봤자 상상도 안 될 거야."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버려진 아이의 비참함은 나도 알 것 같아요." 재크의 표정을 보면서 바네사는 그가 멋진 용모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 여태까지 재크가 핸섬하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언제나 재크를 무서워하고 겁을 먹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속마음은 사실은 따뜻하고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재크의 눈에 온화한 기색이 돌고,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인지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뜻하지 않게 재크가 털어놓은 신상 이야기는 그의 지금까지의 냉철하다고까지 할 수 있었던 태도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를 말해 주고 있었다. 기댈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해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갖지 못했던 사랑과 격려를 지금 나는 주고 싶다. 재크의 몸에 팔을 감고 이 세상의 괴로움으로부터 지켜 주고 싶다. 바네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어머니의 출현은 재크로서는 새로운 기쁨이고, 그것은 바네사로서도 기다리고 바라던 꿈의 실현처럼 생각되었다. "재크 파워, 난 지금 재크 파워 같은 남자야말로 내가 사랑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바네사는 자기에게 타이르듯이 중얼거리고, 재크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 것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바네사의 말은 조용하게 실내에 울렸다. "뭐라구? 방금 뭐라구 했지?" 재크는 바네사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려다가 무엇에 발이 걸렸다. 방금 그 말은 정말 내가 한 말일까? 재크의 눈길은 분명 그것을 들었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안 돼, 가면 안 돼요…." 재크의 목소리는 따뜻하게 바네사의 마음에 파고들었다. "네, 하지만 난 가야 해요. 난 지금 그런 말을 할 생각이 아니었어요. 왜 그랬을까. 곧 당신의 어머니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방해하면 안돼요." "바네사, 잠깐…." 그러나 그녀는 무거운 문을 밀어 열고 어두운 복도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서 뒤를 돌아보았다. "바네사, 돌아와 줘!" 재크는 다시 큰 소리로 불렀다. 재크의 등뒤에서 벨이 울렸다. 잇따라 세 번, 대답을 기다리며 계속 울려댔다. 재크는 뒤를 돌아보고 괴로운 듯한 망설임을 그 얼굴에 나타냈으나 위협적인 벨소리를 거스를 수가 없어 방으로 돌아갔다. 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르고 서 있는 바네사의 눈앞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몸을 지키려는 듯이 바네사는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바네사의 마음은 둘로 잡아 찢기고 있었다. 힘찬 재크의 포옹을 생각하면 도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나 지금은 재크를 혼자 있게 해줘야 한다. 어머니와 단둘이 만나게 해야 해. 재크는 나의 사랑에 답해 주었다. 그의 눈빛, 표정으로 분명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을 위한 시간은 뒷날 얼마든지 있다. 바네사의 몸은 조금 전에 재크에게 꼭 안겼을 때의 욱신거림을 느꼈다. 그렇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그도 내가 중얼거린 말을 확인하려고 했다. 바네사는 눈을 감았다. 기쁨과 놀라움으로 바네사를 바라보던 재크의 얼굴이 떠올랐다. 천천히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바네사는 벽에 이마를 대고, 사람의 마음이라기보다 자기 기분의 빠른 변화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이젠 절대로 누구를 사랑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사이에 마음은 열리고 말았다. 그것도 여름의 장미꽃처럼 천천히 피는 것이 아니라, 봄에 아직 눈도 채 녹지 않아서 크로커스가 햇빛을 받아 한꺼번에 피듯이 바네사의 갈증은 기쁨으로 개화한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뚱뚱한 여자가 난폭하게 바네사를 밀며 들어서는 것도 별로 짜증이 나지 않았다. 반쯤 눈먼 것 같은 기분으로 바네사는 빌딩 입구에서 눈이 내리는 한길로 나왔다. 애인들이 왜 걸으면서 노래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봄이 오면 조각 구름처럼 한가하게 센트럴 파크의 상공을 떠가는 애드벌룬처럼, 하늘을 떠다니는 기분으로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다른 때는 지저분하게만 보였던 소호가 지금은 꽃내음까지 떠돌고 있었다. 재크의 그 눈길은 분명 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고 바네사는 생각했다. 기쁨과 놀라움의 표정은 틀림없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11장 바네사는 들뜬 마음으로 빌딩 모퉁이까지 와서 손을 들어 택시를 잡으려 했다. 문득 향수 내음이 강하게 떠도는 것을 느꼈다. 먼 옛날 가게에 늘어놓고 팔던 10센트 짜리 싸구려 향수가 생각났다. 그렇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스쳤던 그 여자가 뿜던 냄새다. 그러고 보니 그 지저분한 여자는 이 거리에서 언젠가 만난 일이 있었다. 설마, 하고 바네사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재크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머니가 바로 그 사람이라니. 뚱뚱하고 불그데데한 얼굴에 입술 연지를 시뻘겋게 처바르고 인생을 막되고 음란하게 살아온 듯한 그 여자를 보게 되면 재크는…. 바네사는 큰 불안감을 느꼈다. 홱 몸을 돌려 다시 빌딩을 향해서 뛰어갔다. 웅덩이를 밟는 바람에 가죽 부츠에 물이 스며든 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빌딩 안으로 뛰어들다시피 하여 엘리베이터의 단추를 몇 번이나 눌렀다. 한참 만에야 겨우 내려오는 낡아빠진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렸다. 4층까지의 시간이 어쩌면 그렇게도 길까. 엘리베이터 속은 예의 그 싸구려 향수 냄새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 냄새에 바네사는 속이 느글거렸다. 엘리베이터가 4층에 채 멎기도 전에 바네사의 귀엔 재크가 지르는 노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방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바네사는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방안에 있는 두 사람은 <소방수역>의 바네사가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바네사는 발을 멈추고 복도 벽에 찰싹 몸을 붙였다. "내 몸에서 손을 떼고 나가 줘요. 그렇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어요. 다시는 당신을 만나기도 싫어요." 재크가 불길 같은 소리를 질러댔다. 여자는 방문에 등을 돌리고 있는지 애처로운 목소리로 뭐라고 사정했지만 바네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내게 무얼 주었단 말입니까?" 재크의 목소리는 문득 낮게 갈라졌다. "나를 버리는 것 말고 뭘 해주었냐고요! 아버지는 나와 같이 있어 주었으니 그래도 나아요. 이제 와서 나보고 돈을 달라구요? 왜 내가 당신한테 돈을 주어야 하지요? 누가 뭐라고 해도 난 줄 수가 없어요. 이젠 늦었어요. 왜 나를 버린 거죠?" 재크의 목소리에는 버려진 어린아이가 울고불고 떼를 쓰는 것같은 안타까운 울림이 있었다. "좋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체념한 듯한 여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란 아이는 옛날부터 떼고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조금도 달라진 게 없구나." 문 쪽으로 다가오는 여자의 구두 소리가 났다. 여자의 말이 강하게 바네사의 귀에 닿았다. 바네사는 예리한 메스로 가슴을 에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패트릭도 너도 항상 내게 매달려 뭘 달라고 조르고만 있었지 않니. 난 젊었고 그런 찢어지는 생활은 넌더리가 났었어. 가난해서 좋을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난 즐기고 싶었다. 자유로워지고 싶었어. 두 사람에게 진절머리가 났었어." "나가 줘요. 이제 다시는 오지 말아요!" 재크의 커다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고 바네사는 복도 벽에 몸을 붙이고 숨을 삼켰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입구에서 바네사 쪽으로 다가왔다. 몸을 숨길 길이 없는 바네사는 그저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재크의 어머니라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검은 에나멜 가죽의 부츠를 끄는 것처럼 지나가는 그 구두 끝만을 보았다. 독한 향수 냄새가 여자가 지나간 뒤에도 남아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소리를 내며 닫힌 뒤의 정적 속에서 바네사는 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의 방문으로 다가갔다. 재크는 한 손을 벽에 대고 문을 닫으려 하는 중이었다. 그의 공허한 눈길엔 그녀를 오싹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 노여움 뒤의 차갑고 기묘한 침착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재크, 내 말 좀 들어요." 바네사는 팔을 앞으로 내 밀었다. "귀찮아. 돌아가 줘." 채찍이 홱 울리는 것처럼 재크의 말씨는 날카롭고 냉랭했다. 우람한 팔로 힘껏 문을 닫으려고 했다. 눈앞의 문이 닫히기 직전에 바네사는 문에 달라붙었다. "날 들여보내 줘요. 할 이야기가 있어요." 재크는 바네사의 몸을 밀어내려고 했다. 기운의 차이는 비교도 되지 않았지만 바네사는 있는 힘을 다 짜내어, 겨우 문이 조금 열렸다. "재크, 부탁이에요. 단 일분이라도 좋아요." "지금 난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아. 혼자 있게 내버려 둬 줘." 재크의 목소리는 기운이 없었고 말을 하기도 성가신 것 같았다. 바네사는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핑계를 찾았다. 재크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찼다. 겨우 문틈으로 푸른 눈을 한껏 뜨고 저도 모르게 호소의 눈길을 보냈다. 입을 다문 두 사람에게 그것은 긴 시간의 경과로 생각됐으나 사실은 몇 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바네사는 알고 있었다. '당신에게 상처를 줄 생각은 없어요. 뭐라고 말해야 당신이 그것을 알아줄 수 있을까.' 바네사의 눈이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통했는지 재크는 마침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말없이 아틀리에 안으로 걸어갔다. 바네사는 그의 굳어진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재크는 넓은 방을 가로질러 전기 불 밑의 드로잉보드 앞에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 보드에는 데생이 흩어져 있었다. 재크는 팔짱을 끼고 바네사를 쳐다보았다. 그 눈이 '자아, 하고 싶은 말을 해 봐요.' 하고 재촉하고 있었다. 바네사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바네사는 앉을 곳이 없었다. "무슨 일이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뗀 것은 그였다. "난 들었어요." 바네사는 대답했다. "모두?" "네, 거의 모두예요. 뭐라고 하면 좋을까. 당신이 가여워요. 재크." 바네사는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재크는 부츠를 신을 발로 걸상을 뒤로 밀어 뜨려 나무 걸상이 바닥을 비비는 소리가 비명처럼 넓은 실내에 울렸다. 바네사는 멈추어 서서 재크의 말을 기다렸다. "옛날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어." 재크가 태연한 체 하려고 애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크의 목젖이 꿈틀꿈틀 떨리는 것을 바네사는 옆에 서서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하고 바네사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녀는 살며시 재크에게 다가갔다. 재크는 바네사에게 등을 돌리고 앉았다. 그 뒷모습은 상처받은 짐승과도 같았다. 팔꿈치를 드로잉보드의 사면(斜面)에 대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바네사, 돌아가 줘. 나는 지금 손님을 상대할 기분이 못 돼." 마음의 아픔을 숨기며 아무렇지 않은 체하는 목소리였다. 바네사는 재크의 목덜미에 가만히 눈길을 쏟고 있었다. 붉은 머리칼이 곱슬거리고 있었다. 굵고 튼튼한 목, 바랜 목면 셔츠가 금방 타지는 것이 아닌가 싶게 어깨의 근육이 팽팽했다. 바네사는 그저 재크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젖은 코트를 바닥에 벗어 던지고 재크의 등뒤에서 살며시 목에 팔을 감으며 부드러운 자신의 앞가슴에 재크의 몸을 끌어당겼다. "난 손님이 아니에요, 재크.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을까. 바네사는 전에도 건너뛰기를 시험한 일이 있는 험한 벼랑을 지금 뛰어넘으려 하고 있었다. "당신과 같이 있고 싶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재크." 마침내 말하고 말았다. 그 말을 책에서 읽거나 들은 일은 있어도 실제로 누구에게 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마치 생소한 외국말이 정확하게 자기의 입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다시는 어떠한 상대에게도 이 짧은 말을 고백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상할 만큼 매끄럽게 액체처럼 바네사의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재크의 긴장이 조금 풀려 나가는 것을 자기의 부드러운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바네사는 큰 한숨을 쉬었고 그 숨결에 재크의 고수머리가 나풀거렸다. 재크는 입을 다문 채였으나 바네사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기의 생각을 고백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제는 재크의 괴로움이 조금이라도 누그러지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재크도 차차 자기가 바네사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겠지. 지금까지 뭐 하나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인생이었지만 이 순간은 자신감 같은 것이 바네사의 내부에서 꿈틀거렸다. 재크의 등에 몸을 붙인 채 그의 가슴에 돌리고 있는 바네사의 팔을 재크의 우람한 팔이 살며시 감쌌다. 바네사는 충족된 기분으로 미소를 지었다. 자아, 다음에는 재크에게 저 어머니라고 하는 여자와의 불쾌한 대결을 잊어버리게 하는 거야. 그러자면 바네사는 재크를 지금 제판소로 데리고 가는 것이 제일 낫다고 생각했다. 일에 열중하면 갑자기 그녀가 나타나 돈을 달라고 졸랐던 불쾌한 일도 잊어버리게 되겠지. 그런 뒤에 조용히 어머니의 출현에 대해서 생각하면 되는 거야… "재크, 자아, 코트를 입고 같이 가요." 바네사는 재크의 기분을 다독거리듯이 말했다. 재크는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가다니, 어디로?" 그 목소리는 이제 여느때와 다름이 없었다. "나와 함께 제판소에 가서 일을 해요. 그러면 아까 그 일도 좀 잊어버리게 될 거예요. 어때요, 좋은 생각이지요, 달링?" 그 뒤에 한순간의 침묵은 바네사의 말이 재크를 화나게 만들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긴장된 공기가 아틀리에를 가득 채웠다. 재크는 느닷없이 걸상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고 그 서슬에 걸상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넘어졌다. 다음 제작을 위한 준비인 듯한, 드로잉보드 위에 놓여 있던 데생류를 재크는 거칠게 손으로 떨어냈다. 켄트지는 팔랑팔랑 허공을 춤추며 아래로 떨어졌다. "달링이라구?" 멸시감을 얼굴에 가득 담고 재크는 바네사를 돌아보았다. 노여움으로 얼굴이 창백했다. 바네사는 팔을 치켜들어 몸을 지키려는 자세를 취했다. 금방이라도 재크가 때리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왜 그래요? 내가 뭐 안 좋은 말이라도 했어요?" 바네사는 소리를 치고 몸을 사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바네사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싹 가셨다. 얻어맞지나 않을까하고 눈앞에 치켜올린 자기 손의 손가락 사이로 바네사는 노여움이 활활 타는 재크의 초록빛 눈을 보았다. 관자놀이가 꿈틀거리고 하얀 피부에 혈관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게 뭐야. 내가 당신을 때릴 줄 알아? 여자를 때리는 것은 공교롭게도 내 취미가 아니야. 썩 돌아가. 제판소에 가서 내 판화의 색 교정이나 하라구! 당신이 하면 될 테니까. 결과가 어떻든 난 알 바가 아니야. 돌아가서 바우맨에게 보고하라구. 임무를 잘 마쳤다고 말이야. 당신은 공을 세운 거야. 당신이 바라는 것은 그것이지? 이 녀석이나 저 녀석이나 내게는 바라는 것밖에 없어. 당신도 아까 느닷없이 찾아와 어머니인 체하는 그 바람둥이하고 다를 게 없어. 아니, 더 악질이야 그녀는 돈을 달라고 즉석에서 노골적으로 요구했으니 그만큼 정직해. 당신같이 훌륭한 교육을 받은 인간은 더 못돼먹었어. '봐요, 재크. 사랑하고 있어요. 함께 침대에 가도 좋아요.' 하! 구역질이 나는군, 썩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어. 나가!" 재크는 바네사의 코트와 백을 움켜쥐자 그녀의 팔을 비틀어 뒤로 돌게 만들어 우악스럽게 문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코트와 백을 그녀 뒤에다 내던지고는 문을 꽝 하고 닫아 버렸다. 너무나 세게 닫는 바람에 벽의 회벽 칠이 몇 조각 떨어졌다. 바네사는 금방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미칠 것처럼 날뛰는 재크에게 한마디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문밖에 잠시 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가 그녀는 다시 재크의 방문으로 뛰어가 쾅쾅 문을 두드렸다. "열어 줘요. 재크. 당신은 잘못 알았어요. 이 문 좀 열고 내 말을 들어 봐요."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바네사의 눈에서는 눈물이 넘쳐흘렀다. 너무나 분해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코우트와 백을 집어들자. 계단을 향해 뛰었다. "재크에게 확인해 보았더니 바네사의 말대로였어. 교정은 바네사의 손에 맡겨 달라는군." 리처드 바우맨은 말했다. "해주겠지, 바네사?" "네, 사장님." "전원이 인쇄가 끝날 때까지 남아서 일을 계속하겠지만, 바네사가 서둘러 주면 몇 시간 안에 끝날 거야.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안됐군." "아니에요, 사장님." 공허한 표정으로 바네사는 사장실을 나왔다. 너무 눈치 없고 둔감하다고나 할까, 바우맨은 바네사가 울어서 눈이 부은 것도 몰랐다. 장례식을 마친 것처럼 핼쑥한 표정을 어째서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 바네사는 마치 우리 속에서 끌려나와 살아 있는 인간의 역할을 하도록 강요받은 사자 같은 기분이었다. 주위의 누구도. 메이너드까지 그러한 바네사를 눈여겨보는 것 같지 않았다. 하긴 메이너드는 일찍 퇴근할 생각으로 마음이 들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는 자료계인만큼 이렇게 바쁜 날에도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 바네사는 인쇄실로 돌아가 민첩하게 일을 진행시켰다. 색채 교정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그 동안의 재크의 방법이 나무랄 데 없었기 때문이었다. 재크의 당치도 않은 폭언을 조금이라도 잊어버리려고 바네사는 묵묵히 일에 힘썼다. 그러나 이따금 오한 같은 것이 몸 속을 치달았고 눈물이 저절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공장장 뷔니는 투박한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고, "왜 그러지요, 바네사?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어요?" 하고 위로의 말을 했다. "그래요, 못 견디게요, 뷔니. 내가 마치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빈집처럼 느껴져요." 변명할 필요도 없는데, 뷔니에게 죽은 남편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믿게 했다. 볼에 잉크가 묻지 않도록 바네사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재크한테서 그런 모진 욕설을 뒤집어썼으니 그가 미워질 만도 한데 그녀는 도무지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어떤 폭언을 퍼부었건 모욕을 가했건 그때 재크는 무척 상처받고 있었던 거야. 너무나 보기 싫게 드러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격분해서 자기의 생모에게 그렇게 거친 말을 내뱉었으니 재크의 가슴도 찢어 질 것만 같았겠지, 하고 생각했다. 재크가 미친 듯이 자기 어머니에게 외쳐대던 말을 떠올리기만 해도 바네사는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그 모자의 애증극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진 것이다. 바네사는 자기를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편이라고 생각했다. 상상만이 앞으로 치닫는 일은 결코 없었다. 자기가 갖기를 바라는 것은 침착하게 찾아 나섰다. 그녀가 화가의 길에서 멀어진 것도 아마 그러한 성격 탓이었을 것이다. 재크는 마치 바네사의 그런 성격을 잘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바네사는 그런 참을 수 없는 쓰라림을 맛보면서도 아직도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재크는 반드시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 아니 만날 기회를 만들어 보이겠어. 틀림없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떻게 나를 사랑하면 좋은지를 가르쳐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장 바우맨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말했다. "오늘 일은 그만 하기로 해요." "어마, 아직 완성되려면 멀었는데요. 기한 내로 마쳐야 하지 않아요? 도대체 왜 그러시지요?" 바우맨이 무슨 말을 하게 될지 바네사는 무서워졌다. 바우맨의 얼굴 표정으로 보면 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파워가, 자기가 최종 판단을 내리겠다는거요. 전화가 왔지. 자기의 승낙 없이 인쇄를 진행시키면 안 된다고 말이야. 난 어째서 그런 까다로운 변덕장이하고 계약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어. 하여튼 그래서 누군가가 그에게 시험 인쇄를 가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야. 크리스마스 다음날 아침부터는 세상없어도 인쇄로 들어가야 하니까." "그럼 됐군요. 그런데 뭐가 문제지요?" 하고 바네사가 물었다. "문제는 바로 그 일이야, 바네사. 바네사가 시험 인쇄를 파워한테 가져다주지 않겠어?" 사장 바우맨은 부탁하는 목소리를 냈다. "내가요? 난 오늘 벌써 충분히 일했고 그에게 가기에는 부적당한 사람이에요. 심부름은 누구 다른 사람을 시키세요." 흥분과 두려움이 바네사의 몸 속을 뛰어다녔다. 재크를 만나고 싶다.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 아까 그 비난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게 하고 싶다. 그러나 어떻게 이야기해야 사실을 알아준단 말인가. 오늘의 그는 너무나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이성을 잃은 사람 같았다. 주인한테 학대를 받던 개는 사람을 다르지 않는다고 하는데 오늘의 재크는 그 이야기를 생각나게 했다. 재크는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다. 하지만 난 그를 사랑할 수가 있어. 바네사는 그렇게 확신했다. 세상에는 믿어도 좋은 상대가 있다는 것, 그 상대가 다름 아닌 그녀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를 만날 기회가 있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가까이하게 되면 이윽고 재크는 날 이해해 주겠지…. 12장 바네사는 바우맨과 마주 보고 있었으나 옆엔 뒤따라 들어온 메이너드가 걱정스럽게 바네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장도 메이너드도 바네사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의 태도 여하에 따라 메이너드의 휴가 계획에 차질을 안겨 주게 된다. 그는 이따금 바네사의 어머니 같은 존재도 되었다. 엉뚱한 모성 본능을 발휘 할 때조차 있었다. 메이너드는 처음부터 바네사에게 재크 파워는 남녀 관계에서는 신용할 수 없는 남자라고 경고했었다. 지금 바네사는 메이너드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가 가지 말라고 고개를 옆으로 흔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메이너드에게는 재크에게 가고 싶지 않은 체해 보여야 하고, 사장 바우맨에게는 언제든지 재크한테 갈 생각이라는 눈치를 보여야 한다. 바네사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망설였다. 바우맨은 그것을 바네사가 거절하려는 줄로 알았는지 갑자기 그답지 않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사장이란 말이야. 자네가 갈 것을 명령해!" 메이너드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네사와 서로 놀라움의 눈길을 주고받았다. 메이너드는 말없이 천장을 쳐다보았다. 벽의 커다란 시계만이 조용한 실내에 소리를 남기고 있었다. 인쇄실까지도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네가 가주지 않으면 우리 제판소는 망하게 되는 거야." 바우맨이 갑자기 메마른 목소리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두 직업을 잃게 돼. 특별히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야. 이런 말을 하긴 안됐지만, 자네는 집에 돌아가도 함께 지낼 가족이 없어… 미안하다고는 생각해. 하지만 난 지금 사느냐 죽느냐의 막판에 서 있어. 자네에게 이런 일을…난 이제…." 마침내 바우맨은 울기 시작했다. 바네사도 메이너드도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바네사는 바우맨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사장님, 제가 가겠어요. 물론 가고 말고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사장님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메이너드는 바우맨의 뒤에서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말없이 문밖으로 사라졌다. 그의 스웨터 가슴팍에 수 놓여진 빨간 사슴이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골치 아픈 일이 있어, 바네사." "네? 또 뭐가요?" 무엇이 그렇게 많은가. "파워는 크리스마스를 코네티컷의 별장에서 지낸다면서 그리로 가버렸어." "어마, 사장님, 날 어디까지 골탕을 먹일 생각이세요?" 하지만 바네사는 그 목소리가 갑자기 활기를 띤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바네사는 서둘러서 아파트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눈이 내리기 전에 겨우 출발할 수가 있었다. 렌트카의 운전석 옆에는 소중한 시험 인쇄를 하드 용지로 싼 것이 놓여 있었다. 휴일인 탓으로 교통량이 많았고 차가 계속 밀렸다. 그러는 동안 갑자기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뉴잉글랜드행의 고속도로로 접어드는 붐비는 길을 바네사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차를 몰았다. 그리고 바우맨이 그려 준 길의 순서와 조잡한 지도를 들여다보며 겨우 웨스턴으로 꺾이는 길로 들어섰다. 재크의 별장이 있는 웨스턴의 시골길은 도로 상태가 나빴다. 눈은 더욱 세게 퍼붓고 바네사는 천천히 앞차의 바퀴 자국을 따라 차를 몰았다. 마침내 길 저쪽에 불이 하나 외롭게 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될 수 있는 대로 그 집에 바싹 차를 몰고 들어갔다. 눈이 두껍게 쌓여 있어서 어디가 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까이에는 다른 집이 보이지 않으니 이곳이 재크의 별장임에 틀림없었다. 바네사는 차에서 내려 현관문에 달린 무거운 놋쇠의 노커를 울렸다. 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한동안 사이를 두고 또 한 번.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바네사는 갑자기 불안에 휩싸였다. 바우맨은 미리 전화를 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재크는 여기 없는 것이 아닐까? 다시 한 번 힘껏 노커를 울렸다. 현관 앞에 밤새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돌아가기도 싫었다. 바네사는 문에 몸을 부딪쳐 보았다. 의외로 쉽게 문이 열렸다. "재크, 있어요? 누구 없어요?" 역시 아무 대답도 없었다. 현관문을 열어 놓은 채 바네사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현관을 들어서니 벽에 캔버스가 많이 걸려 있었다. 틀림없는 재크의 그림이었다. 바네사는 현관문을 닫고 가져온 시험 인쇄의 커다란 보퉁이를 벽에 기대 세웠다. "재크, 바네사 밴더폴이에요. 있어요?" 옆방의 커다란 석조 벽난로에 불이 타고 있는 것이 현관에서 보였다. 춤을 추는 불길이 어두운 방의 천장을 비추고 있었다. 그 따뜻한 불이 지금의 바네사로서는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이었다. 코우트의 지퍼를 내리며 벽난로에 다가갔다. 불이 타고 있으니 분명 누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집 안에는 전등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았다. 이렇게 펑펑 눈이 쏟아지는 밤에 어디로 나갔단 말인가? 바네사는 다시 한 번 재크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벽난로 앞의 커다란 소파 옆에 있는 스탠드를 켰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 소파 위에 긴 다리를 뻗고 자고 있던 재크가 눈을 뜨고 말했다. "왜 대답도 하지 않지요?" 갑자기 눈앞에 누워 있는 재크를 보고 바네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얼 하고 있지?" 바네사가 거기에 있는 것을 나무라는 투였다. "메리 크리스마스를 말하러 왔어요. 난 세 시간 동안이나 뉴욕에서 차를 몰고 온 거예요. 그렇게 사람을 몰아세우지 마세요. 바우맨한테서 전화가 있었지요?" 만일 그가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전화는 받지 않기로 했어. 불 좀 꺼 줘." 반쯤 빈 브랜디 병이 바네사의 눈에 띄었다. 재크는 대낮부터 그것을 마시면서 어두워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시키는 대로 바네사는 불을 껐다. "좀 마셔도 좋아요? 운전하느라 피곤해요." "얼마든지." "이대로 병 째 마셔요?" 바네사는 응석을 부리듯이 웃었다. 재크가 일어나서 마실 것을 만들어 주기를 기대했으나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다. "글라스는 주방에 있어." 벽난로 오른쪽의 문을 가리키며 재크는 성가신 듯이 말했다. 바네사는 주방에 갔다. 스위치를 켜보니 작고 아늑한 주방이었다. 바네사는 그릇장에서 브랜디 글라스를 꺼냈다. 라디오의 스위치를 켜니까 뉴잉글랜드의 고속도로는 폭풍으로 길이 막혔다고 하는 것이었다. 심한 공복을 느끼고 바네사는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고기며 치즈가 접시에 수북히 담겨 있었다. 접시와 냅킨, 포크 둘, 그리고 글라스를 손에 들고 떨어뜨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바네사는 어두컴컴한 거실로 돌아왔다. 여전히 재크는 소파에 누운 채였다. "뭘 좀 들었어요? 여기 가져왔어요." 대답이 없었다. "내가 올 줄 몰랐어요?" 얼마나 내가 여기 오고 싶어했는지 아세요? 바네사는 속으로 되풀이했다. "아니." "오늘 저녁은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어요. 고속도로가 막혔대요. 밤새도록 눈이 퍼부을 모양이에요." 바네사는 속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재크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난 어디에서 자지요?" "침실은 하나밖에 없어." "그럼 이 소파에서 자야겠군요." "좋을 대로 하시라구." 바네사는 말없이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재크도 이따금 접시의 것을 찍어 입에 넣었으나 이내 접시를 옆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글라스에 브랜디를 따르고 바네사의 글라스도 가득 채웠다.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바네사는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이렇게 둘이서 말도 없이 아픔을 참는 것처럼 지내다니. 바보스러워. 무엇이 재크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바네사는 알고 있었다. 목에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바네사는 도로 삼켰다. 재크의 어머니에 대해서 말을 꺼내기가 무서웠다. 그러나 침묵은 더욱 무겁게 바네사를 내리 눌렀다. "어째서 크리스마스를 이런 데서 혼자 보내지요? 크리스마스 트리는 어디 있어요?"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어야 해?" "모양만이라도요. 크리스마스인 걸요." "그럼, 당신의 아파트에는?" "없어요." "그럼, 왜 그런 소리를 하지?" 재크는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는 교회에 가셨어요?" "교회? 아버지가 교회를 가! 교회 좋아하네." 재크는 메마른 웃음소리를 냈다. "크리스마스에는 당신과 함께 뉴욕에서 지내는 줄 알았어요." 바네사는 당황해 하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루비와 라스베이가스에 갔단 말이야. 노름을 하려구. 그것이 본의 아닌 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당신은 생각하겠지. 본의 아닐 것도 없어. 아버지가 나한테 뜯어낸 돈으로 무엇을 하든 난 알 바가 아니니까." 루비와 재크의 아버지! 그것이 차라리 재크와 루비보다 어울려 보여, 하고 생각하며 바네사는 어둠 속에서 빙그레 웃었다. "우리 아버지는 말이야. 할 일이 있으나 없으나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못 살아. 크리스마스에 집을 비우는 것도 보통이야." 재크는 옛날을 생각해 내며 아픔을 참듯이 말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그냥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먼저 입을 연 것은 바네사였다. "그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싫어요? 당신의 어머니말이에요." "우리 어머니가 어디에 있어." 재크는 툭 쏘듯이 말했다. "다시는 그녀에 대해서 입에 올리지 말라구. 나에게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알았지?" "말하지 않겠어요." 바네사는 분명하게 말했다. 재크는 가만히 바네사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으나 어두웠으므로 바네사는 그것을 몰랐다. 재크는 말했다. "그렇지, 당신은 함부로 누구에게 지껄이진 않을 거야. 그리고 나는 잘 알아, 당신 같으면 그런 모진 처사도 하지 않을 거야." 재크는 꿀꺽 침을 삼켰다. "미안해, 나 때문에 당신을 괴롭히거나 하면 안 되지. 오늘은, 오늘은…."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뜬 것 같은 기분이란 말이지요?" 바네사는 재크의 말을 받아서 말했다. 재크는 깜짝 놀란 듯이 바네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바네사의 이해를 예기하지 못했던 그의 놀라움이 그 눈에 나타나 있었다. "어떻게 그것을 알았지?" "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을 맛보았으니까요. 내가 열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나의 남편도…. 난 슬픔과 함께 살아왔어요. 당신도 멀지않아 그것을 알 거예요. 고통은 금방 사라지는 것이 아니지만 날이 갈수록 희미해져요. 버릇이나 피부의 빛깔처럼 자기 몸의 일부가 되어 버려요." "미안해. 당신이 결혼한 적이 있었다니 전혀 몰랐군. 좋아서 혼자 사는 자유로운 여자인 줄로만 알았지. 당신에게는 여러 가지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어." "천만에요. 내가 남편을 잃었다는 것을 당신은 까맣게 몰랐는걸요." 머리를 움켜쥐고 있는 재크를 보면서 바네사는 어서 그를 끌어안고 위로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호되게 거절을 당할 것 같은 두려움으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소호의 아틀리에에서 있었던 정열적인 장면을 떠올렸다. 지금 재크는 상처받고 나약하게 보였다. 불길이 춤을 추는 벽난로 앞에서 바네사가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맥없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바네사는 대담하게 손을 뻗어 재크의 팔 위에 올려놓았다. 욱신거릴 것같은 그 감촉, 바네사의 온몸에 그것이 퍼졌다. "재크, 침대에 가서 주무세요. 내일이면 기분이 편해질 거예요." 몸을 일으켜 주니까 재크는 바네사에게 기대며 비틀거렸다. 팔을 그의 허리에 대고 부축했다. "주무셔야 해요." 바네사가 벽난로 뒤쪽의 침실로 이끄는 대로 재크는 걸어갔다. 거기까지 벽난로의 열이 전해져 왔다. 침대 커버를 벗기고 시트를 젖혔다. "자아, 옷을 벗고 침대에 들어가세요." 시키는 대로 재크는 옷을 벗었다. 어깨의 근육이며 등뼈의 억센 선이 드러나 보였다. 쓰러지듯이 재크는 침대에 누웠다. 바로 잠에 곯아떨어지는 재크의 건장한 팔다리를 바네사는 침을 삼키며 지켜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시트를 끌어올려 그의 어깨까지 덮어 주었다. 13장 거실로 돌아오자 바네사는 그릇을 치우고 주방에서 접시를 씻었다. 통나무를 두 개 더 벽난로에 넣고 나서 재크의 침실로 가보았다. 재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자고 있었다. 바네사는 창가로 다가가서 어두운 창 밖에서 춤을 추는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바네사도 옷을 벗었다. 스타킹도 벗고 나서 재크가 자는 침대 옆자리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재크의 온몸이 손에 닿았다. 그녀는 바위덩이 같은 그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재크는 눈을 뜨고 가만히 바네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재크의 눈은 움푹 들어갔고 머리칼은 이마에 헝클어져 거친 짐승을 생각나게 했다. 바네사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소원을 눈길에 나타내며 재크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당겼다. 재크는 마치 아기처럼 순순히 따랐다. 눈 내리는 밤의 정적 속에 벽난로 속에서 통나무가 타는 소리만이 바네사의 귀에 들려왔다. "남편이 세상을 뜬것은 3년 전의 오늘이었어요." 바네사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재크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아니,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줘요." 바네사는 재크의 이마에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다정스럽게 쓸어 올려 주었다. "그때 나는 누구에게 가만히 안기고 싶었어요. '걱정하지 마, 안심해, 당신이 죽는 게 아니야. 당신은 이제부터 살아가는 거야.' 하는 소리를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는 지금 당신을 안아 주고 싶어요. 그저 가만히 이렇게요. 알겠어요? 이렇게 하고 있어야 해요." 희미하긴 하나 재크가 끄덕이는 것 같았다. 바네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몸으로 부드럽게 그의 몸을 감쌌다. 이윽고 재크는 모든 기력이 사라진 것처럼 다시 잠으로 빠져 들어갔다. 편안한 숨소리를 들으면서 바네사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재크의 어려서부터의 악몽을 이렇게 해서 쫓아 버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쁨과, 죽은 남편 앤드류에게 그 큰 절망에서 일어설 위안을 줄 수가 없었다는 슬픔이 함께 바네사의 가슴에 덮쳐왔다. 탄탄한 근육질의 재크의 몸을 바네사는 힘껏 껴안았다. 이윽고 눈물도 나오지 않게 되었고 바네사의 가슴은 앞으로도 재크를 고통으로부터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침대는 따뜻했다. 바네사는 새벽이 가까워서야 좀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른다. 마치 수면제라도 먹은 것처럼 꿈결 같은 기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바네사의 온몸은 옆에 누운 재크의 탄탄한 몸에 닿으며 사뭇 눈을 뜨고 있었다. 재크의 몸이 움직이며 시트에 스치는 소리가 나고 재크의 숨소리가 바뀔 때마다 바네사의 몸은 찌르르 하고 떨었다. 문득 손바닥이 살며시 자기 가슴에 놓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희미한 애무의 손길이었으며 바네사는 눈을 뜨고 확인해 보려 했다. 재크는 한쪽 팔꿈치로 짚고 윗몸을 바네사에게 기울이고 있었다. 입술은 반 쯤 열려 있었고 초록빛 눈은 지금까지 못 보던 따뜻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쓰다듬어 보는 것 뿐이야, 괜찮지?" 재크가 말했다. 바네사는 숨을 삼켰다. 슬립의 레이스 위로 피부를 만지는 따뜻한 재크의 손길, 그 손은 부드럽게 살며시 바네사의 가슴의 골짜기를 스쳐갔다. 바네사는 자기 몸이 녹아드는 것 같았다. 재크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 바네사의 입술을 더듬더니 스치듯이 가볍게 댔다. 따뜻한 입맞춤은 두 사람의 첫 키스를 생각나게 했다. 그것은 멀고 먼 옛날 일처럼 생각되었다. 바네사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재크의 혀는 천천히 애무하였다. 재크의 손은 바네사의 살을 따라 움직여 나갔고 모양 좋은 가슴을 부드럽게 애무하였다. 바네사가 눈을 감고 있으면 재크는 이대로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바네사는 재크가 그만두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 손가락으로 자기 몸의 모든 곳을 만져 주었으면 했다. 가늘게 떠는 바네사의 온몸에 뜨거운 욕망이 퍼져 나갔다. 크게 숨을 들이쉴 때마다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것은 오렌지 향기와도 같았다. 재크는 천천히 시트를 벗겼다. 몽롱한 눈길이 바네사의 몸 구석구석을, 살을, 흐르는 것같은 가슴의 곡선을 좇고 있었다. 한 손을 바네사의 어깨에 대고 다른 손으로 슬립의 끈을 벗겼다. 핑크빛 가슴이 드러났다. 벽난로의 불은 벌써 꺼졌고 방안의 차가운 공기가 바네사의 벌거벗은 가슴에 와 닿았다. 그녀의 가슴은 불타올랐고, 재크의 입술은 그 몸을 더듬었다. 따뜻한 혀의 움직임에 그녀는 더욱 불타오르고 바네사의 숨결은 가빠졌다. 다음에는 두 입술의 입맞춤이 되풀이되었다. 두 혀가 서로 얽힌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느 미지의 숲속의 향기와도 같은 재크의 내음. 그것은 심산의 삼나무나 동양의 백단나무 향기처럼 생각되었다. 마치 욕망과 환상의 융단을 타고 어딘가로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눈을 감은 채 바네사는 그렇게 느꼈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만일 눈을 뜨면 재크는 어디로 가버리고 없을 것 같았다. 바네사는 꿈결에 재크의 긴 손가락으로 벌거벗겨져 가고 있었다. 그는 고급 실크를 요령 있게 다루듯이 바네사의 슬립을 머리 위로 벗겨냈다. 재크가 침대를 떠나는 기척이 나더니 입고 있는 것을 벗는 소리가 났으며 바로 바네사 곁으로 돌아왔다. 바네사는 최면술에 걸린 상태에 있었다. 어두운, 아직 보지 못한 욕망의 늪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욕망은 강하고 거세었으며 재크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재크의 몸이 자신의 몸을 안는가 싶더니 키스가 퍼부어졌다. 재크의 뜨거운 숨결이 얼굴에, 눈까풀에, 목에, 목 밑에 퍼부어졌다. 포도주에 몸이 달아오듯이 입술이 겹칠 때마다 팔다리가 뜨거워지며 감각이 마비되어 갔다. 두 사람의 몸은 조금의 틈새도 없이 꼭 밀착되고 피부에서 따뜻함이 전해져 왔다. 재크의 손이 바네사의 뜨거운 몸을 더듬었다. 바네사는 그 따뜻한 손길의 움직임에, 달콤한 감각에 몸의 떨림이 멎지를 않았다. 재크는 그 떨림에 응하여 거세게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바네사는 재크의 우람한 몸을 꼭 끌어안으면서 더욱 뜨겁게 그를 요구했다. 밤사이에 폭설도 그친 모양이었다. 눈부신 태양빛이 방에 가득 비쳐 들고, 눈에 반사된 강한 빛이 황토색의 타일 바닥을 환하게 해주고 있었다. 바네사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재크를 보았다. 아직도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눈에 익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상처를 받을 것 같은 볼의 선, 충족되어 반은 웃고 있는 커다란 입술, 따뜻하고 사랑스런 소년 같은 표정이었다. 바네사도 만족하여 다시 가벼운 잠에 빠졌다. 또 잠이 깬 것은 베이컨이 구워지는 향긋한 냄새가 날 때였다. 바네사의 옆은 비어있었다. 벽난로의 불도 다시 타고 있었다. 얼른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에 있던 실크 로브를 걸쳤다. 간단하게 얼굴을 씻고 머리를 다듬고는 방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향긋한 내음을 좇아 주방으로 갔다. "메리 크리스마스, 바네사!" 재크는 바네사 앞으로 오자 긴 팔을 뻗어 그녀의 몸이 꺾어질 정도로 꽉 껴안았다. 재크의 초록빛 눈망울이 비취처럼, 천창에서 비쳐 드는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눈길은 상쾌한 행복을 간직하고 있었다. 바네사는 저도 모르게 위를 쳐다보았다. 재크는 그 시선을 좇으면서 말했다. "지붕의 눈도 쓸어냈어. 밝은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말이야. 자아, 어서 옷을 갈아입어요. 밖에 나가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잘라 와야지. 역시 그것이 없으면 크리스마스답지가 않아." 재크의 변화가 우스워서 바네사는 키들키들 웃었다. "갈아입을 것이 있어야지요!" "무엇이든지 좋으니 입어요." 재크는 그렇게 말하고는 바네사가 그때까지 몰랐던 다른 문으로 나갔다. 그리고 금방 코듀로이의 슬랙스와 부츠 한 켤레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이거면 되겠지. 자아, 서둘러요. 아침 식사는 형편없을 거야. 하지만 콘프레이크와 밀크 정도는 있을 거요." "제가 뭘 만들겠어요." "그건 이따가 하고 우선 크리스마스 트리야." 크리스마스 아침에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받고 놀란 것처럼 재크는 흥분하고 있었다. 바네사도 함께 웃었다. 재크는 침실에 있는 커다란 고풍스런 클로짓을 열자 셔츠며 스웨터류를 끌어내어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괜찮을 성싶은 것을 입어요, 밖은 추우니까. 스웨터를 두 개 겹쳐 입는 것이 낫겠어. 보라구, 이것이 따뜻할 것 같아." 재크는 처음엔 두툼한 낚시꾼 스웨터를 집어들더니 다음에는 다른 것을 들고서 내미는 것이었다. "잠깐, 재크. 내가 고르겠어요. 그보다 나 샤워를 하고 싶어요. 배도 고프고요. 잠깐 기다려 주겠어요?" "그럼, 바네사, 당신은 정말 눈부셔!" 재크는 바네사의 두 손을 잡아끌어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었다. "눈부시고 아름다워! 따뜻하고 부드러워! 당신을 그리고 싶어. 수채화가 낫겠군. 부드러운 터치로. 좋은 여자야, 당신은." 바네사는 놀란 눈으로 재크를 바라보았다. 이게 어제의 재크 파워와 같은 인물인가 싶었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 재크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여자와 침대를 같이한 뒤 당신은 언제나 이래요?" 바네사는 흥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오늘은 특별이야. 당신의 살결, 향기, 정말 근사했어. 당신은 어때? 아무렇지도 않아? 생생한 기분이 안 들어?" 재크는 그녀에게 대답을 청했다. "나도 그래요." 바네사는 가만히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앤드류가 세상을 뜨기 훨씬 전에 침대를 같이했을 뿐이니 그 일이 어땠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의 일은 첫경험이라고 할 만했다. 이때가지 성적으로 완전한 만족을 느낀 적이 없었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도 바네사는 몰랐다. 그건 분명했다. "나도 눈부신 기분이에요!" 바네사는 소리쳤다. 재크의 좋아진 기분이 그녀에게도 전염되었다. "정말 근사했어요. 그러니 난 샤워를 하고 오겠어요." 바네사는 재크의 손을 풀고 욕실로 향했다. 바네사는 머리를 감고 온몸을 씻었다. 혼자 노래를 흥얼거렸다. 재크에 대한 두려움도 망설임도 사라지고 그의 명성도 이제는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그가 자기 집에서 부렸던 지독한 억지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확신에 가득 차고 크리스마스 아침의 기쁨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코듀로이의 슬랙스는 조금 짧았으나 바네사에게 어울렸다. 그것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묻지를 않았다. 모든 것이 지난 일이다. 부츠는 딱 맞았다. 또 재크의 스웨터 중에서 푸른 것을 골랐다. 그것은 바네사의 푸른 눈에 잘 어울렸다. 머리를 빗으면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눈이 생기 있게 반짝이고 있었다. 화장은 아예 안 하기로 했다. 재크의 키스를 받아 발갛게 부어 있는 입술에도 루즈를 칠하지 않았다. 겨우 재크가 기다리는 주방으로 갔다. 재크는 커피 케이크와 냉동 소시지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소시지를, 레스토랑에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오븐에서 구워 내어 두 사람은 맛있게 먹었다. "오븐은 너무 큰 것 같고, 주방은 당신에게 별 쓸모가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도 않아. 중국인 부부에게 이 집의 관리를 맡기고 있어. 부인이 참 솜씨 좋은 요리사지. 나도 주말에는 늘 여기에 와서 지내니 이 오븐도 큰 도움이 되고 있어. 그들은 크리스마스 휴가를 갔는데 저녁에는 돌아올 거야. 당신은 요리를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혼자가 된 뒤로는 거의 요리를 해보지 않았어요. 혼자 지어서 먹기란 참 재미가 없어요. 미망인이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자기 생활을 아껴야 한다고는 하지만…." "당신의 남편은 어떻게 잃은 거요?" 문득 재크가 물었다. 바네사로서는 바로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자동차 사고인 셈이지요."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말투군. 그때 당신도 같이 차에 타고 있었소?" "아니에요. 차 사고였는데, 그는 일부러 부딪친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죽인 거예요. 하지만 내가 왜 이런 말을 당신한테…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일이 없는데." "말하고 싶지 않으면 묻지 않겠소." 재크는 테이블에 손을 뻗어 바네사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그런 일을 물어서." 재크가 사과를 하다니, 도무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지금의 재크 같으면 바네사는 허물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앤드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고뇌나 괴로움, 그리고 그 뒤의 쓸쓸함, 바네사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생각지도 못한 어머니의 출현과 싸움으로 상처를 받은 재크에게 바네사의 이야기는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네사는 거기까지는 별로 자신이 없었다. 14장 재크는 어제의 그 지겨운 일을 모두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아침 식사의 접시를 치우고 나서 두 사람은 새하얗게 쌓인 눈 속으로 뛰어나갔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누 속에서 아이들처럼 장난을 쳤다. 집 뒤로 오륙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 숲이 있었다. 두 사람은 거기에 가서 재크가 헛간에서 가지고 나온 도끼를 두 세 번 휘둘러 조그만 나무를 쓰러뜨렸다. 두 사람은 그것을 베란다로 끌고 와서 세웠다. 거실의 프랑스식 창 바로 앞이었다. 아직 송진 냄새가 나는 그 나뭇가지에 재크는 헛간에서 꼬마전구를 찾아내어 장식했다. 완성된 모양이 마음에 들어 기뻐하는 바네사를 재크가 뒤에서 꼭 껴안았다.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재크는 속삭였다. "이런 행복감을 느끼다니,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야." 바네사도 같은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외국으로 여행했을 때의 신기하고 약간 색다른 체험, 그것과 비슷한 충족감을 바네사는 맛보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벽난로 앞의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재크는 소파 앞의 조그만 테이블에 다리를 얹고 한 손을 바네사의 어깨에 돌려 끌어안았다. 바네사는 재크와 정말 사이좋은 친구가 된 것 같았다. 재크는 겨우 자기의 유년 시대를 담담하게 이야기해 줄 기분이 된 모양이었다. "사실 난 어머니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를 않아. 네 살인가 다섯 살 때였던가 어느 날 아침잠이 깨어 부모의 방으로 가보았더니 어머니가 없었어. 어머니가 쓰던 향수의 냄새만 짙게 남아 있었지. 어머니의 머리칼은 블론드이고 어깨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어. 참 여자다운 따뜻한 어머니라는 기억이 남아 있었지. 나의 빨간 머리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거야. 그때는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도 방에 없었어. 일하러 나갔나 했지. 그러나 화장대의 거울에 루즈로 크게 써놓은 글씨가 눈에 띄었어. 별로 긴 문장은 아니었지만 그땐 난 글자를 읽을 수가 없어서..." 재크의 목소리가 거기서 잠깐 끊어졌다. "어머니는 나갔다, 없어졌다고 금방 생각했지. 부모가 전날 밤 크게 말다툼을 한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러나 아버지까지 없어졌다니, 부모가 무언가 나 때문에 싸우다가 둘이 다 나가 버린 것이 아닌가하고 나는 겁을 먹고 있었어. 온종일 울었을 거야. 아버지는 저녁에 돌아왔어. 하지만 혼자였지. 나는 아침의 파자마 바람 그대로, 엄마가 없어졌어요, 하고 말했했어. '그거 시원하게 잘 됐군.' 하고 아버지는 말했는데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어. 그것뿐이었지. 아버지도 나도 다시는 어머니에 대해서 입밖에 내려 하지 않았지." 재크는 일어서서 벽난로에 굵은 통나무를 던져 넣었다. 소파에 돌아오자 아까처럼 바네사 곁에 나란히 앉았다. 앞으로 몸을 수그리고 팔꿈치를 자기 무릎에 세운 모습으로 이따금 손가락 마디를 꺾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아버지는 지독한 술고래야. 아버지와 나의 차이는 어디에서 생겼나 하고 난 늘 생각했었지. 그것은 내가 어머니의 핏줄을 타고났기 때문이 아닌가 했어. 이것은 나의 공상이었지만, 어머니는 프랑스의 귀족이나 그런 집안 출신이고, 감수성도 미적 감각도 뛰어나고 귀여운 사람이었다고 생각했어. 그랬기 때문에 아버지 같은 거친 남자와 같이 살 수 없었던 거라고 말이야. 그러나 실제는 그런 어머니가 아니었어. 당신은 어제 우리 어머니의 말을 들었지?" "네, 들었어요." "30년만에 내 잘못된 생각을 뜯어고쳐야 할 형편이야." 재크는 짧게 웃었다. 쓸쓸한 메마른 웃음이었다. "내가 동정해 줄 것을 기대하세요?" 바네사는 물었다. "네 살 난 아기 이야기에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해도 어른인 당신한텐 동정이 가지 않아요. 다만 감탄할 뿐이에요. 글쎄 당신은 해내고 만 걸요. 진짜 재능과 야심을 불태워 성공했어요. 길고 긴 괴로움의 나날은 끝났어요. 쓰라린 체험이 당신을 너무 매서운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지금 나의 소원이에요." 당신은 지금가지 너무 날카로웠거든요, 하고 바네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과 지금 사랑을 나누고 싶어졌어." 재크가 말했다. "어머, 여기서요?" "그렇지, 안되나? 아무도 방해할 사람은 없어." "정말! 네, 좋아요." 바네사는 푸른 스웨터를 벗어 던지고 재크의 긴 손가락이 뻗어와 자기 셔츠의 단추를 끌러 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입은 것을 재크가 벗겨 주는 동안 바네사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것이 끝나자 이번에는 재크의 셔츠 단추를 그녀가 끌러 주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소파 위에 몸을 뉘었다. 재크의 손이 따뜻하게 바네사의 몸의 선을 쓰다듬기 시작했고 바네사는 고조되어 가는 정열에 몸을 내맡겼다. 재크는 처음엔 바네사의 입술에, 그리고 목에, 가슴에 찬찬히 키스를 거듭했다. 오늘 아침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할 때와 같은 성급함은 이제 없었다. 대신 나른할 만큼의 느릿함이 있었다. 바네사는 기다림의 기쁨만을 느끼고 있었다. 소파 위에 누운 모습이 그녀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재크의 손은 바네사의 몸을 자기 것으로 확인하는 것처럼 애정을 가득 담고 쓰다듬어 나갔다. 입술이 손길을 뒤따랐다. 바네사가 다음에 키스해 주기를 바라는 곳이 어디인가, 뜨거운 입술을 대주길 원하는 곳이 어딘가를 재크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바네사의 몸은 재크의 강한 팔 안에서 황홀감에 젖어 움직였다. 계속되는 애무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온몸이 재크의 키스를 받고 불타올랐다. 바네사의 손가락은 재크의 빨간 머리를 틀어잡고 키스가 퍼부어질 때마다 그 손에 힘을 가했다. 재크의 눈이 바네사의 비단같이 매끈매끈한 날씬한 다리에 쏠렸을 때 바네사는 저도 모르게 뭐라고 중얼거리며 그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재크는 바네사가 지금까지 몰랐던 격렬한 기쁨을 더욱 크게 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부디 그만두지 말아요, 이대로 계속해 줘요, 하고 바네사는 속으로 외쳤다. 처음으로 알게 된 황홀한 기쁨에 나를 머물러 있게 해 줘요. 그러나 바네사가 황홀감에 겨워하고 있을때 재크는 얼른 바네사의 입술을 덮었다. 두 사람은 완전히 자기를 잊고 소중하게 아껴 둔 기쁨을 향하여 녹아들 듯이 하나가 되었다. "난 이제 돌아가야 해요, 달링." 다정스럽게 <달링> 이라고 부르기가 조금 꺼려지긴 했지만 바네사는 재크에게 달콤하게 속삭였다. "간다구? 가지 말아 줘. 오늘밤까지는 묵어도 괜찮지? 안 그래, 바네사?" 바네사는 자기 이름을 재크가 다정스럽게 불러 주는 것이 퍽 기뻤다. 재크는 바네사와 나란히 누운 채 매끄러운 바네사의 살을 애무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부터는 당신의 판화가 본격적인 인쇄로 들어가게 되니 제판소에 나가야 해요. 당신도 입회해 주겠지요? 오늘 저녁 내 차로 같이 가지 않겠어요? 괜찮으면 내 아파트에서 자도 좋아요." "아니, 내 차가 있어. 어차피 난 그것을 운전하고 가야 해. 부탁이야, 하룻밤만 더 묵으라구. 내일 아침 일찍 돌아가면 되지 않아? 크리스마스 이튿날 아침이니 길도 붐비지 않을 거고." "그렇게 하고싶어요. 하지만 아침 여덟 시 반까지는 나가야 해요. 그전에 아파트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어야 하고. 그러자면 여기서 다섯 시전에 떠나야 한다는 말이 돼요. 지금 시험 인쇄를 보아주면 당신은 내일 오고 싶지 않으면 제판소에 나오지 않아도 돼요. 사인을 넣을 때만 오면 돼요." "시험 인쇄에 사인을 해?" "아니에요. 인쇄가 끝난 판화에 사인을 넣는 거예요. 당신은 내가 가져온 시험 인쇄를 보고 오케이를 내 주면 더는 아무것도 안 해도 좋아요. 알고 있겠지요?" 카다란 벽난로에 활활 불이 타고 있는데도 무언가 썰렁한 공기가 두 사람 주위를 감돌았다. 재크의 표정이 굳어졌다. "장씨 부부가 돌아온 것 같군." 재크는 문득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데요." "어서 옷을 갈아입는 게 좋아. 난 장씨에게 당신 차에 들러붙어 있는 눈을 털어 내라고 이를 테니까." 재크는 얼른 소파를 떠나자 욕실로 향했다. 바네사도 그 뒤를 따라가 보니 재크는 욕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샤워 소리가 났다. 바네사는 재빠르게 자기 옷을 입고 머리를 가다듬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은 쉽게 다듬어지지를 않았다. 바네사는 현관에 놓아든 시험 인쇄 보퉁이를 가지러 갔다. 침실에 돌아와 보니 재크가 없었다. 그는 작업복을 입고 주방에 있었다. "장씨가 돌아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난 도로의 눈을 치우고 오겠소. 당신의 차가 떠날 수 있게 말이야." 재크는 바네사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스쿠프가 또 하나 없어요? 거들겠어요." "아니, 좋아요. 당신은 옷을 갈아입었소?" "뭐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 별로." 차가운 말투였다. "이상하군요, 아까와 다른 것 같아요." "당신의 기분 탓이겠지." 재크는 큰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나갔다. 유리창 너머로 그가 스쿠프질 하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려왔다. 뭐가 어쨌단 말인가? 느닷없이 쌀쌀해지면서 처음 만날 날처럼 되어 버리다니! 내가 너무 서둘렀던가? 바네사는 오랫동안 억눌렀던 자기의 욕망이 한꺼번에 솟아나는 바람에 재크가 진력이 나 버린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었다. 더 천천히 다정스럽게 굴 걸 그랬어. 재크와 함께 하룻밤을 지낸 침실을 바네사는 아쉬운 듯이 바라보았다. 그의 소호에 있는 집의 사무적인 느낌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벽에 따뜻함이 느껴지는 송판을 둘러친 방 한쪽에는 윤기 있는 나무장이 고색을 띠고 자리잡고 있었다. 개척자의 아내인 듯 싶은 여자가 귀여운 어린아이를 무릎에 안은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다. 한동안 그쳤던 스쿠프 소리가 다시 계속되었다. 이번엔 아까와 리듬이 좀 다른 것 같았다. 창 밖을 내다보니 재크보다 훨씬 몸집이 작은 남자가 교대해서 일하고 있었다. 장씨 부부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바네사는 벽난로 옆의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재크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가볍게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바네사는 문득 잠에서 깨었다. 어느새 얕은 잠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아가씨, 차가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출발할 수 있다고 파워씨가 말씀하십니다." 나이를 잘 어림할 수 없는 중국인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들어왔을 때처럼 조용히 나가려 했다. "파워…씨는 어디 있어요?" 바네사가 뒤에서 물었다. 여자는 다시 침실 안까지 돌아와서 말했다. "주방에 계세요. 커피를 드시겠어요?" "네, 고마워요. 지금 가겠어요." 그는 오늘 아침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식사를 했던 커다란 소나무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바네사가 주방에 들어가도 얼굴을 들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오래 된 테이블 위엔 커피잔과 빈 브랜디 글라스가 놓여 있었다. "마시겠소?" 자기 글라스에 브랜디를 채우며 재크가 물었다. "아니, 안 마셔요. 벌써 조금 졸았어요. 잠이 오면 안될 테니." 혹시 어쩌면 바네사가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깨우면 안 된다 싶어 그대로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래?" 재크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장씨 부인이 커피를 바네사 앞에 놓았다. "재크, 왜 그러지요? 뭐 내가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어요? 나를 좀 보세요." 재크는 겨우 얼굴을 들고 바네사를 쳐다보았으나, 그것은 장씨 부인 앞에서 사적인 말을 하지 말라는 신호 같기도 하고, 하여튼 비난의 눈길임에는 틀림없었다. 그의 초록빛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바네사는 알 길이 없었다. "시험 인쇄는 보셨어요? 나온 색이 어때요?" 바네사는 조심조심 물었다. 교사 앞에서 겁을 먹으며 채점 점수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바네사는 불안으로 마음을 죄며 재크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이미 색채 교정을 마치고 있었다. 그는 황판(黃版)에 대해서 두어 가지 주문을 했다. 그밖엔 대체로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바네사는 안심이 되었고, 난 왜 이렇게 잔뜩 긴장하고 있는가 싶었다. 매니큐어도 하지 않은 엄지손가락의 손톱으로 테이블에 가는 줄을 새기고 있었다. 재크의 탄탄하고 아름다운 손가락 끝이 닿는 이 낡은 소나무 테이블, 재크의 소유물에 새로운 표시를 남겨 놓고 싶었다. 긴장 속에서도 바네사는 그렇게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재크는 차로 향해 걸어가는 바네사를 바래다주었다. 재크가 시험 인쇄의 보퉁이를 조수석에 놓는 동안 바네사는 눈위에 그냥 서 있었다. 차안은 장씨가 이미 따뜻하게 해놓았다. 재크는 운전석의 문을 열고 바네사가 타기를 기다렸다. "당신에게 작별의 키스를 하고 싶어요." 재크가 까딱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바네사는 마침내 참다못해 말했다. "그래야겠군." 재크는 가까스로 입술을 내밀었다. 차고 메마른 그이 입술에 바네사는 가볍게 자기의 입술을 대면서 별다른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재크의 태도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재크가 뿜는 백단나무 향기 같은 내음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말하고 싶었다. 바네사는 어젯저녁의 따뜻한 느낌을 되찾고 싶었다. 그러나 재크의 쌀쌀한 눈길을 보곤 그것을 단념하고 말았다. 슬프게도 재크의 갑작스런 변화가 무엇 때문인지, 바네사는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허공에 떠다니는 것 같던 도취경에서 느닷없이 바네사는 무섭고 추운 현실로 내동댕이쳐진 꼴이었다. "기다리고 있겠어요." 바네사의 말투는 그래도 따뜻했다. 집안에서 전화 벨 소리가 울려 왔다. 바네사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떤지 재크는 도무지 대답이 없었다. 차의 문을 소리나게 닫아 주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좁은 길로 차를 몰며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15장 이튿날 바네사는 일에 온 정신을 쏟아 부으며 그럭저럭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의 아픔을 달랠 수 있었다. 아름다운 판화가 완성되어 갔다. 사장 바우맨은 그 눈부신 성과에 미칠 듯이 좋아했다. "기한 안에 완성되는군. 고마워, 바네사. 바네사 덕분이야. 이젠 파워가 와서 사인을 넣어 주는 일만 남았어." 바우맨은 좋아서 자꾸 손을 맞비볐다. "재크는 언제쯤 올까요?" 바네사는 바우맨에게 우연히 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몸속이 꼭 죄는 것같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모레 아침이야. 물론 바네사 자네는 그의 판화를 한 장 얻을 수 있어. 어떤 헌사를 넣어 달랠까?" "그가 좋을 대로요. 어쩌면 내게는 주지 않을지도 몰라요. 가끔 그런 사람이 있어요." "우리 제판소에서 판화를 만들고 제판자에게 한 장도 주지 않은 화가는 한 사람도 없었어." "재크 파워만은 이단자예요. 분명히." "하긴 지금까지 보아 왔던 사람들 중에서 제일 까다로운 화가임에는 틀림없었어. 그러나 보라구…." 바우맨은 재크의 판화를 한 장 집어들었다. 그것은 [허드슨 리버]였다. "이건 금방 팔려 나갈 거야." 바우맨은 만면에 희색을 띠고 있었다. "그렇겠군요." 바네사는 메이너드가 어서 돌아왔으면 싶었다. 그가 있으면 마음이 든든해져 이런저런 상담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일주일의 휴가로 메이너드가 없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재크를 난봉꾼이라고 단정하고 조심하라고 말한 것은 메이너드였다. 그가 한 말이 그대로 지금 바네사의 신상에 일어나려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네사의 마음은 흔들렸다. 그 이튿날도 지나가고 바네사는 연말까지 자기가 하기로 한 일을 모두 마쳤다. 바우맨에게는 자발적으로 다른 일을 거들겠다고 함으로써 그를 기쁘게 했다. 바우맨은 물론 바네사가 마음에 안고 있는 아픔 따위를 눈치챌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바네사는 서40번 가의 포르투갈 거리를 걸어 보았다. 그 거리엔 전기 화학 제품의 염가매장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바네사는 자동응답 전화기를 구입했다. 점원은 기계의 사용법부터 상대방의 말을 기록하는 법까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 기계가 대답하면 짜증이 나요. 하지만 중요한 전화를 놓치면 안 되겠지요." "그럼요! 정말 소중한 물건입니다." 오후 두 시가 되었다. 바네사는 사장실이 보이는 쪽을 향하고 앉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판화의 사인을 하기 위해서 재크가 언제 들러도 유리 칸막이 너머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점심 시간에도 나가지 않고 거기서 지냈다. 많은 사람들이 사장실 앞의 복도를 오갔다. 그때마다 바네사의 고개도 들렸다 수그러졌다 했다. 그러나 빨간 머리의 키 크고 우람하고 당당한 거름걸이의 사람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바네사는 마침내 참다못해 바우맨의 방으로 가보았다. 먼저 대수롭지도 않은 질문을 해서 바우맨은 의아스럽게 만들었으나 그래도 그는 한참 동안 설명을 해주었다. 바네사는 안달을 하다가 드디어 물었다. "재크는 오늘 판화에 사인을 넣으러 올 예정이 아니었어요?" "아니 바네사, 아는 줄 알았는데. 완성된 판화는 어제 재크의 아틀리에로 갖다 주었어. 거기서 사인을 하겠다고 해서 말이야. 이곳은 인쇄기 소리가 시끄러워서 싫다나!" 바네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파트로 돌아가자 밤에 재크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그러나 자동응답 전화의 쌀쌀한 목소리가, 그가 뉴욕에 없다는 것을 말해 주었을 뿐이었다. 바네사의 차가운 손가락은 코네티컷의 별장의 넘버를 두드렸다. 장씨 부인은, 재크가 주일 밤에는 언제나 뉴욕에 있으며 별장에는 다음 금요일까지 올 예정이 없다고,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길게 끄는 어조로 대답했다. 바네사는 고맙다고 하고 자기가 전화했다고 전해 달라고 하고는 낙심하여 전화를 끊었다. 바네사는 다시 재크의 집에 전화해서 자기 이름과 전화번호를 자동응답 전화에 남겼다. 해가 바뀌고 메이너드가 돌아왔다. 바네사에게의 선물은 통에 든 메이플 시럽이었다. "이렇게 많은 시럽으로 무얼 하지요, 메이너드?" "핫케이크를 만들어서 쳐서 먹으면 좋을 거야." 메이너드는 바네사의 놀라는 얼굴을 보고 유쾌한 듯이 웃었다. "그런 건 벌써 3년 동안 만들어 본 일이 없어요." 다음 일요일, 바네사는 메이너드와 안나를 아침 겸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그런데 당신은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지냈지?" 메이너드가 물었다. "이웃 와이즈만 노부인하고 식사를 하러 갔었어." 바네사는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카리브해의 섬에서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 왔어요. 두 번째 결혼식을 벌써 올렸을 거예요." "누구하고? 당신이 아는 사람?" "아니에요. 하지만 아버지는 나도 아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내주에 나를 만나기 위해서 뉴욕에 들른 대요." 노령의 새 부부에게는 어떤 선물이 적당할까 하고 그들은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재크 파워의 개인전 오프닝이 내 주군." 하고 메이너드가 바네사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몰랐군요. 매디슨 애빈뉴의 화랑에서요? 전에도 그는 거기에서 개인전을 연 일이 있었어요." 바네사는 태연한 체하며 소파를 떠나 커피를 따르고 다녔다. "화랑을 바꾸었대. 그는 성질이 까다로와 다루기 힘든 화가야. 안 그래, 바네사?" "하지만 그것은 그의 탓이 아닌 것 같아요. 저 매디슨 애비뉴의 화랑 여주인은 성질이 대단해요. 그런만큼 그가 화랑을 바꾸는 것도 당연하지요." 바네사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재크를 변호하느라 열심히 지껄이고 있었다. 메이너드는 그녀의 속마음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래도 겉으로는 모른체하고 있었다. 바네사는 메이너드와 안나가 흘끔 얼굴을 마주 본 것도 몰랐다. "이번 화랑은 어디래요?" "중근동(中近東) 출신의 젊은 여자가 운영하는 화랑이에요." 도미니카 사투리의 차밍한 말투로 안나가 대답했다. "소호에 가게를 차리고 있어요. 우린 버몬트에서 그 여자를 만난 일이 있어요." "재크가 그 일을 당신한테 말해 주지 않았나?" 하고 메이너드가 물었다. "내게요? 무엇 때문에 그가 그런 이를 나한테 말해 주겠지요. 게다가 크리스마스 이후론 만난 일도 없어요, 아니, 크리스마스 전부터 만나지 못했는걸요." 그렇게 강조하는 바네사의 어조가 어딘지 자연스럽지 못하게 울렸다. 화요일에, 소호의 화랑에서 바네사 앞으로 보내는, 재크 파워의 개인전 오프닝 파티의 초대장을 심부름꾼이 제판소로 가지고 왔다. 그것을 받자 바네사는 속이 뒤틀려 메이너드의 방으로 뛰어갔다. 내 앞으로 무리하게 초대장을 보내게 하다니, 메이너드는 정말 쓸데없는 참견을 했어. 하고 바네사는 성이 나 있었다. 속으로, 이것이 재크로부터 온 것이라면 얼마나 반가울까, 하고 생각하면서. "바네사도 참석하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메이너드는 분명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난 남들의 연애 사건에 간섭할 생각은 없었어." "연애가 아니에요. 남의 생활에 간섭하지 말아 줘요." 바네사는 메이너드의 조수 샐리가 옆에 있는데도 문을 꽝 닫고 돌아왔다. 바네사는 오프닝 파티에 나갈 생각이었다. 제일 세련된 드레스라고 생각되는 검은 모직 슈트를 꺼내어 다리미질을 해달라고 세탁소에 갖다 맡겼다. 그리고 의상실에 가서 짙은 호박색의 실크 블라우스를 한 벌 샀다. 여자다운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블라우스였다. 집에 돌아와 침대 위에 펼쳐 보았다. 그 주름은 너무나 매끈매끈해서 먼저대로 갤 수도 없을 정도였다. 더글러스가 유럽에서 돌아왔다. 그와는 크리스마스 전부터 만난 일이 없었다. 자동응답 전화에 걸려 오는 그의 전화에 대답도 보내지 않았고, 그가 여행 중에 제판소로 걸었던 전화도 마침 일 때문에 받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통화가 되었으나 바네사는 전처럼 그와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바쁘다고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며칠 전 메이너드와 안나를 초대했더니 반가워하던 일이 생각나, 더글러스를 집으로 간단한 저녁 식사에 초대하기로 했다. 더글러스는 잿빛 슈트에 빨간 줄무늬 넥타이 차림으로 아파트에 찾아왔다. 너무나 격식을 갖춘 옷차림이었기 때문에 바네사는 깜짝 놀랐으나 아마 직장에서 돌아오는 길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바네사는 더글러스의 일상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 본 적이 없었다. 조용하고 진지한 그의 태도는 평상시 세일즈맨으로서 활동할 때와는 전혀 딴판일 것이라고 바네사는 상상하고 있었다. 레나의 이야기로는 더글러스는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더글러스의 용모며 연갈색의 머리며 키며 모두가 좋았다. 에스코트를 받으며 다니기에는 안성맞춤의 남자였다. 더글러스는 뿔테 안경을 벗어서 닦으며 살며시 바네사의 볼에 키스했다. "바네사, 오늘은 정식으로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렇다면 주방으로 와줘요. 지금 그레이프 너트를 만들고 있는데 타면 안 되니까요." 좁은 주방에서 마주 보고 앉아 바네사는 다시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2인분의 식기도 챙겨 놓고 있었고, 별로 부족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촛불이 없었다. 레나의 말처럼 더글러스가 프로포즈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고, 그렇게 하도록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낼 생각도 없었다. 재크를 만나기 전까지는 더글러스와의 데이트도 상당히 즐거웠다. 정서적인 면에서나 어떤 다른 면에서나 더글러스는 바네사에게 결코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고 바네사 역시 그랬다. 더글러스는 영원히 독신자이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즉 레나가 비췄던 일은 뭣하나 하려고 하지 않았다. 바네사는 한 컵의 시럽을 작은 남비에 넣었다. 그레이프 너트를 들기 전에 불에 데울 생각이었다. "재킷을 벗고 편하게 계시지 그래요? 무엇이지요, 할 이야기라는 것이?" 더글러스는 그녀의 말대로 재킷을 벗어 식당의 의자 등에 살며시 걸쳤다. 넥타이와 조끼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좁은 주방 끝의 걸상에 앉았다. 더글러스는 헛기침을 했다. "우리는 알게 된 지 무척 오래 됩니다. 그렇지요?" "그렇군요." 바네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첫 대면이 어느 때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도 않았다. "우리는 이제 서로를 잘 알게 된 것 같아요. 둘 다 이렇다 할 결점도 없구요."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해 볼 것도 없다는 투였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그렇군요." 바네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도 이제 35세가 되었어요. 일도 순조롭고요. 당신도 10년 가까이나 일해 와서 지금 하는 일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어요." 종이처럼 얇은 그레이프 너트를 뒤집으려고 하던 바네사의 손이 멈췄다. 그 일이군, 역시. 레나가 말한 대로야. 더 이상 더글러스의 말을 듣고 있어서는 안 되겠어. "더글러스, 잠깐. 그 카운터 위의 남비 집게를 집어 주지 않겠어요?" "바네사, 사실은 당신의 승낙을 받으려고 반지를 사왔어요." 바네사는 천천히 더글러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더글러스의 왼손 손바닥에 빌로도로 씌워진 작은 함이 놓여 있었고, 오른손에는 남비 집게를 들고 있었다. "더글러스, 그 이야기는 음식을 먹고 나서 하면 어때요? 난…." "나는 당신을 생각하면…." 느닷없이 더글러스의 팔이 바네사의 몸으로 뻗어 왔다. "어머나." 바네사는 놀랐다. "미칠 것 같아요. 이젠 한시도 당신한테서 떨어질 수가 없어요." "떨어질 수가 없다니요?" 바네사의 시원스런 눈이 더욱 휘둥그래졌다.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내 아내가 되어 줘요, 바네사!" "당신의 아내?" 바네사는 지금까지 없었던 더글러스의 갑작스런 변모를 얼른 믿을 수가 없었다. 가스 레인지 앞의 좁은 장소에서 더글러스의 몸이 바네사를 뒤덮었다. 바네사는 더글러스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틀었다. 더글러스의 팔꿈치가 시럽이 든 작은 남비에 부딪혀, 되직한 액체가 바네사의 슬랙스에 더글러스의 조끼며 바지에 튀었다. 엉겁결에 두 사람은 뒤로 물러났으나 이미 늦었다. "어마, 더글러스. 당신의 슈트가 엉망이 되었어요." 바네사는 얼른 냅킨을 손에 들고 그의 조끼에 얼룩을 닦아내려고 하였다. "아니, 괜찮아요. 이 옷은 물세탁을 할 수 있으니까 빨면 금방 빠져요. 바로 마르지요." "그러면 벗어 주세요. 내가 빨아 드릴 테니." 바네사는 뜻밖의 해프닝에 숨이 찬 목소리로 말했다. "바네사, 하지만 그것은…." 더글러스는 우물쭈물하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욕의가 있어요. 그것을 입고 계시면 돼요. 그전에 샤워를 하여 끈적거리는 시럽을 씻어내세요. 그동안 나는 이것을 빨아 놓겠어요. 그레이프 너트를 다 먹을 때까지는 마르겠지요. 뉴저지까지 시럽이 찐득거리는 바지를 입고 차를 몰 수야 있겠어요." "당신의 말이 맞아요." 더글러스는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찐득거리는 것은 기분이 안 좋아요." 그러나 바네사는 그의 기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색해 하는 더글러스를 침실로 재촉하고 호텔 조르쥬 생크의 마크가 찍힌 흰 타월지의 바드로브를 그에게 입혔다. 더글러스의 바지를 개수대에서 빨면서 아까 내가 더글러스에게 뭐라고 대답하려고 했는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대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정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던 더글러스가 갑자기 하이드씨로 바뀐 것은 큰 놀라움이었으나 더글러스는 바네사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재크와 같이 지낸 것을 알면 뭐라고 할까. "샤워를 끝냈어요, 바네사." 주방 입구에 하얀 욕의 바람으로 더글러스가 나타났다. 가는 정강이 밑의 까만 양말에 가터를 매고 있었으며 그 부분의 살이 바네사의 눈에 띄었다. "바로 가겠어요. 뭘 좀 마시고 계세요." 16장 재크는 도어맨으로부터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다. 도어맨은 조그만 로비에 있는 전화로 10 D실에 연락을 취하더니 들어가도 좋다고 말했다. 재크는 바네사가 만나기를 승낙해 준 것으로 알았다. 들고 온 커다란 푸른 상자를 엘리베이터의 바닥에 놓고 나무꾼 옷 같은 재킷의 단추를 끌렀다. 자기가 사는 건물에 비하면 이 빌딩 안은 무더웠다. 바네사가 이 선물을 기뻐해 주면 좋겠는데. 아니, 틀림없이 그녀의 마음에 들 거야. 그의 웨스턴의 별장을 관리하는 장씨에게서 이웃집의 고양이가 새끼를 많이 낳은 바람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재크는 바로 바네사에게 선물할 생각이 난 것이다. 재크는 아직도 바네사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강하게 끌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바네사한테서는 이른봄의 꽃 같은 향기가 풍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옅은 푸른색 눈망울이 남자의 마음을 끌었다. 우아함과 순진함이 보기 좋게 조화를 이룬 그것이 바네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네사가 결혼한 적이 있는 여자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환희에 찼던 그 사랑의 행위로 이끌어간 것은 자기편이었다고 재크는 생각하고 있었다. 바네사 같은 여자를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만난 일이 있었던가…. 바네사가 돌아간 뒤에 바우맨이 확인의 전화를 해왔기 때문에 재크의 의혹은 더욱 커졌고 그의 노여움은 거세게 불타올랐다. 바네사가 별장으로 찾아와 침대를 같이한 것은 <순전한 비지니스>였던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판화제작을 연내에 끝내기 위한 수단으로 그랬다고 생각한 재크의 뒤집힌 속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사실 지금도 그 노여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생각이 재크의 가슴에 싹트기 시작했다. 바네사가 별장에 찾아온 동기가 무엇이었든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재크가 지금 바라는 것은 바네사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싹튼 가슴 설레는 생생한 그 느낌은 무엇이었던가. 재크는 나중에야 깨닫고 그것을 붙잡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날 바네사가 그토록 뜨겁게 재크의 요구에 응한 것도 바우맨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여튼 지적으로나 사교적으로나 우아함으로나 뭐 하나 빠진 데가 없는 바네사! 재크는 바네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그것은 그녀도 알고 있으리라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전화를 걸어 온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전갈까지 남겨 놓았다. 그러나 그때도 재크는 여전히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바네사를 만나고 싶어 못 견디게 되었다. 만나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바네사는 만나 주지 않을지 모른다고도 생각되었다. 그래서 거절당하는 것 두려워 찾아오기 전에 전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내리면서 자기의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10 D실의 벨을 누르자 안에서 문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막힐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며, 마치 십대의 소년 같군, 하며 재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일이오?" 안에서 안경을 쓴 남자가 내다보았다. 남자는 하얀 욕의를 입고 있었다. 의아해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당황한 재크는 방문의 넘버를 다시 보았다. "저어, 여기가 밴더폴 양의 아파트가…." "그렇소, 그녀는 지금 샤워를 하고 있는 중이오. 이 상자는 그녀에게 오는 거요? 그럼 내가 받아 두겠소." 남자가 손을 뻗었다. "나는 저어…." "잠깐 기다려 주게." 남자는 푸른 상자를 받아 들자 안으로 사라졌다. 남자가 갈색의 가터를 하고 있는 것이 재크의 눈에 비쳤다. 남자는 바로 돌아왔다. 손에 지갑을 들고 있었다. 1달러 짜리 지폐를 꺼내면서 재크에게 물었다. "저것은 누가 보내는 건가?" "그것은 저어…." 손바닥에 놓인 지폐를 보면서 재크는 말을 더듬거렸다. "보낸 사람이 누구냔 말이야. 자네들은 정말 좀도둑이나 같군." 남자는 불쾌한 듯이 또 한 장의 1달러 짜리 지폐를 재크의 손에 쥐여 주었다. "모릅니다. 선생님. 그저 갖다 드리라는 말만 들어서요. 그 안에 카드가 들어 있을 겁니다. 이렇게 팁을 많이 주시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는 부리나케 재크는 그 자리를 떠났다. 세 노부인이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다. 허술한 차림의 키가 큰 재크가 우뚝 선 채 그녀들을 내려다보자 그 중의 하나가 힐끗 쳐다보고 말했다. "배달꾼은 화물용의 엘리베이터에 타게 되어 있어요." "다음부턴 그렇게 하겠습니다, 예." 재크는 웃음을 띠고 대답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물러났다. 주먹으로 엘리베이터의 벽을 꽝꽝 두들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생각해 보면 이 까다로운 노부인들에게 화풀이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노부인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당신 그 반지를 봤어요?" "봤어요. 1캐럿 반이나 되는 큼직한 다이아몬드지 뭐예요." "재혼해야 해요. 그녀는 이제 29세인 걸요. 하지만…." 재크는 저도 모르게 귀를 세웠다. "하지만 뭐예요?" 또 한 명이 물었다. "바네사에겐 좀 마음에 차지 않을 거예요, 그는." "여자에겐 안정된 가정이…."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여자들이 바를 끌며 나가는 바람에 그 다음은 들을 수가 없었다. 샤워를 하고 난 바네사는 소매가 긴 카프탄으로 갈아입었다. 어떻게 하면 더글러스를 바로 돌려보낼 수 있을까 하고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았다. 두통이 난다고 거짓말을 할까, 메이너드를 부를까.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더글러스와 저녁 식사를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와는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이해시키면 된다. 이제는 재크 말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수녀원에 들어갈 생각이라고나 할까. 더글러스는 고지식한 만큼 그 말을 곧이들을지도 모른다. 거실로 돌아온 바네사의 눈에 문득 커다란 상자가 보였다. 푸른 포장지에 빨간 리본이 달려 있었다. 한눈에 티파니 가게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정말 곤란해. 어서 돌아가 주었으면 싶은 사람한테서 이런 것을 받아서는 더 입장이 곤란해질 것 같았다. "방금 가져왔어요." 더글러스가 말했다. "난 당신으로부터 이런 것을 받을 수 없어요. 더글러스." "그게 아니오. 내가 주는 게 아니야. 배달꾼이 놓고 갔어요. 팁을 2달러나 주었지." "그 2달러는 내가 치르겠어요." 말하면서 바네사는 다가가 상자를 집어들어 살며시 흔들어 보았다. 빨간 리본을 벗기고 포장지와 얇은 덮개를 뜯어보니 상자 구석에 사과 만한 크기의 조그만 고양이가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었다. "어마, 새끼 고양이야." 소리치며 바네사는 손을 뻗어 그 조그만 털 공 같은 새끼 고양이를 들어올렸다. 새끼 고양이는 푸른 눈을 한쪽만 뜨고 이상하다는 듯이 바네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그만 핑크 빛 코를 실룩거리더니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눈을 감고 다시 잠들어 버렸다. "낳은 지 2, 3주쯤 되겠군, 그 고양이는." 하고 더글러스가 말했다. "도대체 누구요, 그런 성가신 것을 선물한 사람은?" "메이너드예요, 틀림없이." 바네사가 말했다. "이렇게 커다란 티파니 상자에 조그만 고양이를 넣어서 보내다니, 메이너드밖에 없어요. 나를 화나게 만들었기 때문에 아마 선심을 쓸 생각으로 보낸 걸 거예요. 내가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을 알거든요." 바네사는 새끼 고양이의 목덜미를 따뜻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난 아직도 그에게 화를 내고 있어요." "그 덜떨어진 인간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난 진저리가 쳐지는군." "더글러스, 메이너드는 나의 친구예요. 그런 말하지 마세요." "나와 결혼하려면 그런 남자와는 교제를 끊어주어야겠소." 그의 갑작스런 프로포즈에 자기가 분명한 대답을 한 것도 아닌데 그런 말투가 어디 있담. 바네사는 차츰 분노가 몸 안에 번지는 것을 느꼈다. 더글러스는 이번에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런 남자와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이 이상해요. 바네사, 그는 진짜 남자라고 할 수 없어요." "메이너드는 신사예요. 네, 그 이상의 사람이에요. 그는 당신을 이러쿵저러쿵 말한 일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와 어울리지 말라니. 나는 앞으로 사뭇 그와 같은 직장에서 일할 건데요!" "직장을 그만두면 되지 않소. 당신은 뉴저지에서 통근할 수가 없단 말이오." "뭐라고요?" 바네사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뉴저지에 살다니, 조금도 흥미 없는 일이에요. 그리고 난 당신하고 결혼할 생각도 없어요." 바네사는 난방기 위에 매달아 말리고 있던 더글러스의 바지를 움켜쥐더니 냅다 더글러스에게 던졌다. 아직 덜 마른 바지는 털썩 하고 그의 발밑에 떨어졌다. "이것을 입고 뉴저지로 돌아가세요. 지금 당장!" "아직 젖어 있어요, 이것은." 더글러스는 가련한 목소리를 냈다. 바네사는 성큼성큼 주방으로 가서 의자에 아직 더글러스의 저고리가 걸려 있는 것을 보자 반지가 든 상자를 그 호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목요일에 바네사의 아버지와 그의 새 아내가 뉴욕에 도착했다. 바네사는 공항에 마중 나갈 수는 없었으나 그들이 저녁때 바네사의 아파트에 들러 함께 칵테일을 마시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네사가 택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현관문의 벨 소리가 울렸다. 막 화장을 끝마친 바네사는 흠칫 했으며 뜻밖에 신경과민이 되어 있는 자신에 놀랐다. 아파트의 내장을 바꾸고 나서 처음 찾아오는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할지 불안했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 사진에서 본 마리와는 전혀 인상이 달랐기 때문에 바네사는 놀랐다. 그녀의 복스런 얼굴은 카리브해의 태양을 받아 황금빛으로 그을어 있었다. 눈가의 주름만 타지 않고 희게 남아 있었다. 마른 몸매의 아버지도, 복스런 마리도 차분하고 느긋해 보였다. 호도 빛의 그 살갗이 건강함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뭐라고 말하고는 바로 서로의 손이나 팔을 잡는 것을 차츰 깨달았다. 아버지는 20년 가까이나 독신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복한 모습에 바네사는 흐뭇함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두 사람은 보네아라는 가게 이름이 들어 있는 커다란 검은 상자를 들고 왔다. 바네사는 칵테일을 만들고 두 사람은 거실 소파에 앉아 바네사가 수집한 판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바네사는 준비해 놓은 커트 글라스의 과일 그릇을 두 사람에게 선물했다. 마리도 보네아의 상자를 바네사에게 내밀었다. 바로 열어 보니 아프리케로 수놓은, 손으로 만든 조그만 쿠션이 네 개 들어 있었다. 아프리케의 무늬는 섬사람들의 일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이야기 중에 재크의 이름을 조금이라도 비칠 수 없을까 하고 바네사는 마음을 썼으나 결국 아버지와 마리의 애정 어린 정경을 구경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재크에 대해서 생각하면 침실의 문을 닫고 그 속에 틀어박혀 울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는 대신 바네사는 아버지와 마리와 함께 플라자호텔의 오크 룸으로 식사를 하러 갔다. 거기 같으면 아버지와 마리에게도 편리했고, 클리브랜드에서는 거의 맛볼 수 없는 신선하고 맛있는 굴이나 조개가 메뉴에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디저트도 끝나고 바네사와 마리는 화장실로 갔다. 마리는 바네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마리는 여전히 온화한 표정으로 거울 속의 바네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빠와 나의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지?" 바네사는 깜짝 놀랐다. "참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샘이라도 내는 줄 아세요? 천만에요.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내가 열 살 때의 일로, 거의 기억도 없어요. 난 언제나 아버지가 재혼하시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두 분이 서로 다정하신 것을 보니 정말 기뻐요." "고마와, 바네사." 마리는 정말 감격한 것 같았다. "한데 바네사는 혼자 된 지 벌써 3년이나 된다지? 왜 재혼하지 않지? 나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면 못써요. 여자가 혼자 사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해." "하지만 알맞은 사람이 있어야지요." 바네사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좋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날 좋아해 주지 않아요. 앞으로도 줄곧 그럴 거예요.' "기다리고만 있으면 안 돼. 좋은 사람의 뒤를 쫓아가야지." 마리는 의미 있게 방긋 웃어 보였다. 그녀는 상당히 적극적인 성격인 모양이었다. "홀몸으로 오래 계셨어요?" "응, 오랫동안 혼자 살았지, 아이들이 어렸기 때문에. 아이를 돌보느라 내 일에까지 손이 돌아가야 말이지. 겨우 풀려나 이제부터 내 인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 하지만 멋있는 남자란 금방 눈앞에 나타나 주는 게 아니야, 찾아내야지." 마리는 거울 속의 바네사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새 엄마는 그렇게 했어요?" 하고 바네사는 물었다. "그랬지. 극장에서 당신의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 난 바로 그이 옆에 가서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다고 말했지." 바네사는 눈을 크게 뜨고 거울 속의 마리를 쳐다보았다. "어머… 그랬더니 아버지는요?" "이렇게 말했지. '글쎄요,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라고. 그 뒤로 이런 결과가 된 셈이야." "정말 멋있어요." "그러니 가만히 있으면 안 돼, 바네사. 인생에는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좋은 사람을 찾는 거야. 주춤하는 태도는 날려보내고 바라는 것을 찾아 나서야 해." "잘 알았어요." 바네사의 푸른 눈망울이 새로운 의욕으로 반짝였다. 두 사람은 바네사의 아버지가 기다리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바네사의 볼은 기쁨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아파트로 돌아오기가 바쁘게 바네사는 자동응답 전화의 테이프를 돌려보았다. 누구의 목소리도 들어 있지 않았다. 욕실에 갇혀 있는 새끼고양이를 보냈으리라고 생각되는 메이너드로부터도 전화가 없었다. 바네사는 재크의 집에 전화했다. 재크 파워는 시내에 없습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코네티컷의 별장에 전화해도 장씨 부인만이 전화에 나왔다. 며칠 전의 메시지 같으면 주인에게 전했습니다, 라는 대답밖에 들을 수가 없었다. 재크는 분명 나를 피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전화를 주기는커녕 전화해도 아무런 연락도 없다. 화랑의 오프닝 파티는 내일 저녁으로 다가왔다. 나이 많은 이웃 노처녀 레나나 마리의 젊었을 때 같은 잘못을 저지르기는 싫었다. 하지만 재크는 내 사랑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싶으니 바네사는 절망과 초조감으로 답답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재크에 대한 사랑은 단념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재크가 만일 다시는 나를 만나 주지 않겠다고 하면 그때는 다시 생각해 보자. 그러나 가령 그런 결과가 온다 해도 재크에 대한 나의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바네사는 생각했다. 레나는 저렇게 늙어서도 여전히 먼 옛날에 죽은 애인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지금도 눈이 불타는 것처럼 빛난다는 것을 바네사는 알고 있었다. 17장 바네사는 소호의 화랑 앞에 서 있었다. 방금 택시 요금을 치르고 내린 참이었다. 벽돌이 깔린 현관 정면에는 호화롭게 차려 입은 쌍쌍이 잇따라 들어가고 있었다. 성대한 오프닝 파티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며 더더욱 명성을 떨치고 돈을 뿌리고 가자,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문이 열릴 때마다 벨 소리가 밖의 차가운 겨울 하늘에 울렸다. 바네사는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좀더 기분을 가라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재크는 지금 이 화랑에 있다. 바네사는 일부러 늦게 온 것이다. 파티 시간의 3분의 2쯤 지나게 되면 그다지 뽐내지 않고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손은 펜으로 써보낸 초대장을 꼭 틀어쥐고 있었다. 재크에게 뭐라고 인사할까. 바네사는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싶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화를 내고 있다는 것도 알아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적개심을 드러내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재크가 왜 그녀를 피하는가 그 이유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핑계를 대든 금방 바네사는 납득해 버릴 것 같았다. 막상 그를 만나면 어떻게 대할 것인지 사실 바네사는 이렇다 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화랑의 커다란 유리문을 들어서니 약 2백 명 가량의 손님들이 붐비고 있었다. 그 중에서 칠 팔십 명은 모피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바네사가 모르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러나 바네사가 겨냥하는 것은 그 중의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소호의 부자들 사이에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이 즐비한 저쪽에 한결 키가 큰 빨간 머리가 눈에 띄었다. 어디에선지 선뜻 팔이 뻗어 와 그녀의 코트를 받아 들고 다른 손이 밀어붙이다시피 음료수가 든 플라스틱 글라스를 그녀에게 건넸다. 바네사는 그 백포도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것은 마치 재 같은 맛밖에 나지 않았다. 주위의 벽에 주욱 걸려 있는 빛나는 유화도 말을 걸려고 눈치를 살피는 젊은이들도 전혀 못 본체하며 바네사는 붐비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재크에게서 5, 6미터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다. 그는 등을 이쪽으로 돌리고 얘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상대방은 신비하리만큼 커다란 검은 눈을 한 입술이 얇은 여자였다. 안나가 말한 이 화랑의 오너인 모양이었다. 바네사는 모르는 얼굴이지만 눈부신 블론드의 여자가 재크의 왼쪽에서 다가오더니 깨끗이 매니큐어한 손을 재크의 모직 재킷의 소매에 얹었다. 말소리가 잘 안 들리는지 재크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에게 돌렸다. 그때 그의 눈이 바네사의 눈과 마주쳤다. 바네사는 순간 심장의 고동이 멎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눈길은 허공에 고정된 것처럼 한동안 움직이지를 않았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주문처럼 바네사는 그 말을 가슴속에 되풀이했다. 그 말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공간을 지나 재크의 마음에 전해졌을 것이 틀림없다 싶었다. 그러나 재크는 블론드의 여자의 드러난 어깨에 팔을 돌리고, 그녀의 모양 좋은 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웃으면서 뭐라고 몇 마디 속삭이고는, 바네사에게서 다시 등을 돌렸다. 재크의 손가락은 볕에 탄 여자의 팔을 가볍게 애무하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무시를 당한 바네사의 볼은 붉게 물들었다. 재크의 뒷모습을 구경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런 곳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파티의 성황도 바네사에게는 희미한 안개가 낀 것처럼 보였고 불타는 노여움만이 가슴속에 퍼져나갔다. 바네사는 재크한테 다가가 그의 팔을 확 끌어당겼다. 이젠 남의 눈을 꺼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요." 블론드의 여자와의 회화를 중단시키고 바네사는 야멸차게 말했다. "그럼 이야기해 봐." 초록빛 눈이 차갑게 바네사를 응시했다. "여기가 아니라 단둘이서." "여기면 어때, 여기서는 누가 뭐라고 지껄이든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아. 자기가 자기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야." 블론드의 여자가 뾰로통한 입으로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 재크는 명령하듯이 말했다. "당신은 저리 가서 뭘 좀 마시고 있어." 블론드의 여자는 순순히 그 자리를 떴다. "여기서는 안 돼요." 바네사는 끝까지 버티었다. "그럼 사무실로 가자구." 바네사는 떡 벌어진 어깨로 앞서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어수선한 사무실 안으로 바네사를 먼저 들여보내고 뒤따라 들어와 문을 닫더니 키 큰 몸을 문에 기댔다. 그것을 보고 바네사는 얼른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러나 먼저 입을 열어 준 것은 재크였다. "참 예쁘군. 그 블라우스 좋은데, 색이 잘 어울려." 재크의 말투도 여느때답지 않게 어색했다. "고마와요." 재크의 뜻밖의 찬사에 바네사의 경계심이 누그러지면서 그때까지 끓고 있던 그녀의 노여움은 이상하게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바네사를 무시하는가 싶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금방 탐하듯이 그녀를 쳐다보며 찬사의 말로 기쁘게 해준다. 어쩌면 저렇게도 뻔뻔스러운 수 있을까! "이리 와 보라구. 그 단추가 좀 이상하군." 재크는 부드럽게 말했다. 바네사는 자기 블라우스의 가슴께를 보려고 했다. "자기 눈으로는 잘 안 보여. 이리 와, 내가 고쳐 줄 테니." 좁은 사무실 안에서 두세 발짝 바네사는 그의 앞으로 나아갔다. 재크의 손가락이 얇은 블라우스에 닿았다. 틀어쥔 단추를 고치는 것 같은 재크의 손 움직임을 바네사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에 빨간 머리가 있었다. 소매 속으로 들여다보이는 재크의 뼈대 굵은 손목에 키스를 하고 싶었다. 바네사의 온몸을 쓸었던 재크의 뜨거운 손길이 생각났다. 바네사는 천천히 재크 특유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살며시 자기 얼굴을 재크의 머리에 기울이고 그의 내음을 더 들이마시려고 했다. 좁은 방안은 따뜻했다. 재크가 토하는 입김이 부드럽게 볼을 스쳤다. 재크가 눈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문득 깨달았으나 바네사는 재크를 바로 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 긴장한 때문인지 바네사의 눈앞이 부옇게 흐려져 왔다. 마치 무슨 약을 먹은 것 같았다. 재크의 살이 닿았다 싶은 순간 바네사의 무릎에서는 힘이 쑥 빠져나갔다. 몸과 함께 입술을 그에게 내맡긴 것은 바네사 쪽이었다. 재크는 입을 맞추고 바네사의 블라우스의 앞가슴을 열어 그녀의 숨겨진 부드러운 핑크빛 가슴을 만졌다. 단추를 고쳐 주는 체 하면서 재크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이미 네 개나 열어 놓고 있었다. 재크의 키스가 목 밑으로 옮겨졌을 때 바네사의 푸른 핏줄이 떨었다. 바네사는 재크의 목을 꼭 끌어안고 가슴을 그의 따뜻한 손바닥에 밀어붙였다. 다시 그의 입술을 찾아 바네사는 몸을 틀었다. 재크는 키스를 계속하면서 천천히 바네사의 허리로 손을 뻗쳐 끌어안았다. 등에서 하반신으로 미끄러지듯이 재크의 손은 바네사의 온몸을 헤매고 다녔다.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는 그녀의 등줄기를 쓸고 더듬으며 확인하려고 했다. 이윽고 조금 몸을 떼더니 재크는 바네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입술을 바네사의 목에 댔다. 거기는 가장 부드럽고 예민한 감각으로 깃들인 곳이었다. 바네사는 재크의 손이나 입술이 자기의 살 위를 미끄러져 다니는 대로 내맡기고 있었다. 키스가 목으로 옮겨지면 그이 빨간 머리 위에 얼굴을 숙였고 그의 입술이 자기 가슴에 닿으면 그의 머리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재크한테 퍼부으려고 했던 수많은 원망의 말들은 온데간데가 없었다. 원망은커녕 기쁨에 떨고 있는 자신에 스스로도 흠칫했다. 문 저편에서는 아직도 성대한 파티가 한창이었다. 바네사는 자기를 잊고 있었다. 재크의 숨결도 더욱 거칠어졌다. "아아." 재크는 숨을 헐떡였다. 그는 바네사의 살에 직접 호소하려고나 하듯이 얼굴을 바네사의 가슴의 골짜기에 묻었다. 그의 숨결은 따뜻하고 촉촉했으며 한여름의 바닷바람을 생각나게 했다. 바네사는 피부로 직접 그의 말을 듣는 것 같은 착각조차 들었다. "아아, 이토록 원했던 일은 이때까지 없었어." 따뜻한 중얼거림이 재크의 입에서 바네사의 피부로 직접 전해져와 그녀는 몸을 떨었다. 바네사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오직 손가락으로 재크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재크의 입술은 다시 바네사의 봉긋한 젖무덤을 맴돌았다. 마치 붓처럼 그의 혀끝은 천천히 원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 불러일으켜진 바네사의 욕망이, 가슴에 맺힌 것을 풀어놓듯이 낮은 흐느낌이 되었다. 재크의 손이 바네사의 날씬한 다리를 미끄러지듯 더듬었다. 다리를 싼 나일론 스타킹이 재크의 손의 움직임에 거스르기라도 하듯 비명같은 소리를 냈다. 그것은 바네사에겐 무슨 노래처럼 들렸다. 재크는 한 손으로 바네사의 허리를 눌러 자기의 탄탄한 양다리로 끌어당겼다. 무릎에서 입술까지 두 몸은 서로 꼭 붙여졌다. 재크는 바네사의 귓볼에 키스하면서 말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반은 자기에게 묻는 중얼거림이었다. 재크는 갑자기 몸을 틀어 바네사의 나긋나긋한 몸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두 손을 바네사의 어깨에 놓고 팔의 길이만큼 떨어져 섰다. 바네사의 앞가슴은 아직도 열어 젖혀진 채였고 어깨 패드가 달린 블라우스도 어깨에서 끌어내려져 있었다. 재크가 힘을 가하는 손가락이 아프게 느껴졌다. 재크의 애무의 손길에서 떨어진 새하얀 가슴을 드러낸 채 그녀는 사무실의 강한 불빛 속에 창백하게 보였다. "당신은 지독한 여자야." 노골적인 감정을 가까스로 누른 목소리로 재크는 말했다. "왜 지금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당신이야말로 잔인해요." 바네사는 반발했다. "어째서 도중에서 그만두는 거죠?" 갈라진 낮은 목소리였다. 바네사는 갑자기 팔다리에 한기를 느끼고 몸을 떨었다. 자기의 몸을 지키려는 듯이 두 손으로 가슴을 감쌌다.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아픔이 되어 남아 있었다. 신경은 날카롭게 눈을 뜨고 피는 거세게 맥박치고 있었다. 부은 입술은 욕망의 흔적을 남기고 반쯤 열려 있었다. 한쪽 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당신이 뭘 하러 여기 왔는지 난 알아. 이제 불장난은 지긋지긋해. 이용당하는 것은 넌더리가 나." 재크의 목소리에는 노여움이라기보단 체념이 담겨 있었다. 하나의 결심이 그 눈에 간직되어 있었다. "무슨 소리예요? 언제 내가 당신을 이용했단 말이에요? 말해 봐요." 재크는 어두운 목소리로 짧게 웃었다. "그 말 참 뻔뻔스럽군. '언제 내가 당신을 이용했어요?' 라니. 말해 보라구? 어디 엊그제 받았다는 반지 좀 구경할까?" "엊그제 받은 반지라니요? 무슨 말이에요, 그게?"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바네사의 머릿속은 혼란해졌다. 재크는 자기 멋대로 날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이다. 여기는 겨우 판자로 둘러쳐진 사무실, 밖에는 많은 손님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이런 데서 사랑의 행위 직전까지 날 끌고 갔다. 날 미칠 것 같은 착란의 한 발짝 앞에까지 끌어내 놓고는 차가운 멸시를 던지고 있다. 바네사는 그의 앞에서 입고 있는 것을 홀랑 벗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놀란 눈으로 바네사는 자기의 드러난 가슴을 보았다. 눈부신 꿈은 금세 악몽으로 바뀌었다. 서둘러 실크 블라우스의 앞자락을 여미고 단추를 끼우려고 더듬거렸다. 손가락이 마치 굳어진 고무 같았다. 재크가 지껄이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듣기 싫었으나 그의 목소리에는 매서운 데가 있었다. "당신을 닮은, 점잖은 체하는 양가집 마님을 알고 있지. 남편은 얌전하고 일하기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 부인은 즐거움을 밖에서만 찾지. 별 수없이 멋대로 놀아나는 꼴이 되었으나 주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는 거야. 당신도 섹스를 실컷 즐기고 싶을 때는 나한테 오라구. 그리고 교외의 근사한 집에서는 점잖은 마님 행세를 하고." 재크는 바네사의 왼손을 와락 잡아채어 그 손가락을 들여다보았다. 노한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반지는 어쨌지? 한 캐럿 반이나 된다는 다이아몬드 반지 말이야!" 재크는 따지듯이 물었다. "무슨 반지 말이에요?" 설마 더글러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재크는 더글러스를 모를 것이다. "시치미 떼지 마! 그 바드로브 씨가 당신한테 준 반지 말이야." 노여움을 누른 낮은 재크의 목소리였다. "어떻게 더글러스씨를 알지요?" 너무나 뜻밖의 일에 바네사는 놀라서 물었다. "그런 말은 무엇 때문에 물어? 당신은 남자라면 누구든 가리지를 않으면서. 날 그 중의 한사람이라고 생각하진 말라구. 당신의 리스트에 내 이름이 오르는 건 싫어." 재크는 휑하니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잠깐, 기다려요!" 바네사는 재크의 팔을 잡아끌어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방금 그 말은 그냥 들어 넘길 수 없어요." 바네사는 날카로운 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벽 저쪽에서 한창 진행중인 파티가 마음에 걸렸다. "내가 전에 당신의 집에 가서 고약한 일을 보았을 때 그걸 추궁했어요? 당신이 별장에서 크리스마스날에 내게 빌려준 바지가 누구 것인지 내가 물었어요?" 바네사는 블라우스 자락을 스커트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도대체 당신은 무엇을 증거로 그런 소리를 하지요? 나와 침대를 같이했으면서 그 뒤 한 번이라도 내게 전화를 주었어요? 내 전화는 받으려고도 하지 않고 나를 마치 매춘부 취급을 하고 있어요. 분명하게 말해 두겠어요, 잘난 체하는 위대한 화가분. 나는 당신이 좋아하는 그런 바람둥이 여자가 아니에요. 나와 그런 식으로 어울리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에요. 제멋대로 우쭐하는 남자는 더 참을 수 없어요. 당신을 쫓아다니는 여자나 모델한테로 돌아가라구요. 당신에겐 그런 사람이 제격이에요. 내가 당신 아니면 못 살 줄 아세요? 세상에는 즐거운 일로 가득 차 있는데 벽돌에 머리를 부딪치며 괴로워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 하긴 지금까지 난 그래 왔지만, 자아, 거기 좀 비켜 줘요!" 바네사는 재크의 몸을 밀어내고 곧바로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18장 바네사는 포도주 잔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메이너드는 왜 이렇게 늦는단 말인가? 바네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심야에도 잘 팔리는 이 프랑스 음식점에는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5분 안으로 메이너드가 오지 않으면 나가자. 바네사는 가게문에 눈길을 주었다. 마침 그때 메이너드가 회전문을 밀고 들어오는 참이었다. 스키로 검게 그을은 그의 얼굴이 빛나 보였다. 그가 이렇게 핸섬한 줄은 바네사도 그 동안 몰랐었다. 많은 여자들이 그의 뒤를 쫓아다니는 것도 당연한 것 같았다. 바네사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메이너드는 곧장 그녀의 테이블로 다가와서 바네사의 볼에 키스했다. "백포도주 한 잔. 그것이면 됐어." 메이너드는 웨이터에게 주문했다. "바네사, 늦어서 미안해. 디너 파티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어. 그리고 당신이 여기에 혼자 와 달라고 해서, 안나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왔어. 이렇게 밤늦게 무엇을 먹을 수 있단 말이지? 물론 난 당신보다 20세나 더 나이를 먹었으니까 말이야." "그럼 나도 포도주나 한 잔 더 들겠어요." 바네사는 웨이터에게 말했다. "그런데 바네사, 이런 한밤중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메이너드, 날 비웃지 말아요."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바네사는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메이너드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섰다 가는 다시 앉았다. 그는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바네사의 손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왜 그러지, 바네사? 울면 못써. 기분이 안 좋아?" 메이너드는 호주머니에서 얼룩 하나 없는 손수건을 꺼내어 바네사에게 건네주었다. "메이너드, 이제 울지 않겠어요. 미안해요." 바네사는 겨우 자제심을 되찾았다. 메이너드는 바네사가 울음을 그치고 말을 시작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나 그와, 그와…." 바네사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글썽였다. "그라니? 재크 파워 말이지?" "그래요." 바네사는 중얼거렸다. "어떻게 재크란 걸 알았어요?" "나이는 멋으로 먹는 것이 아니야. 당신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고 나는 느꼈어." "그의 시골 별장에서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어요. 눈부셨어요. 그런 눈부신 경험은 나의 인생에서 처음이었어요." "그렇게 눈이 부셨는데도 당신은 눈이 멀쩡하군. 울긴 왜 울어." "그런데 크리스마스 뒤에는 통 소식이 없지 뭐예요. 전화도 주지 않고 제판소에도 나타나지 않아요.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도 대답도 없어요. 난 참을 수가 없어서 그를 만나러 갔어요. 거기서 믿을 수 없는 지독한 소리를 들었어요. 입으로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소리예요. 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졌어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바네사, 당신도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야. 대답은 뻔한 게 아니야? 자아, 이 늙은 메이너드의 말을 잘 들어 봐." "재크를 잊어버리라는 말씀이지요? 어떻게 그를 잊을 수가 있겠어요. 재크 같은 남자를 만난 것은 처음이예요.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을까요? 메이너드, 당신은 언젠가 말했지요. 재크는 여자에 있어서는…." "그렇지. 그리고 당신은 내 말을 믿지를 않았어. 나는 그 뒤로 당신에게 더 말할 수가 없었던 거야." 메이너드는 한숨을 쉬고 냅킨으로 우아하게 입을 닦았다. "당신의 충고를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재크와 함께 있으면 내 생각이 바뀌어 버리지 뭐예요. 난 특별하다구요. 뭐라구 하면 좋을까…저어, 내 말 아시겠지요?" "알고말고, 즉 그는 사랑을 하는 남자란 말이야." "사랑해요? 나를요?" 바네사는 갑자기 희망을 발견하고 물었다. "아니, 당신이 아니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 난 경험으로 알고 있어. <스스로 자기 몸을 사랑하는 남자는 그 다정함 때문에 비난받진 말지어다….>" "이제 그만둬요, 메이너드. 난 어떻게 되지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잊어버리는 거야, 파워도 당신의 눈부신 체험도 먼저 당신은 자기를 아껴야 해. 재크 파워가 당신같은 여자를 놓친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야. 하여튼 기운을 내라구. 재크같이 어리석은 남자에게 얽매여 있다간 시간만 아까와. 인베실 톤토." "톤토라니요, <저 하이 호 실버>의 아파치예요?" "아니, 스페인어로 <어리석은 자여>라는 말이야. 난 지금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어. 저녁마다 카세트를 들으면서 음식을 만들고 있지." "어머, 그래요? 안나의 영향이군요. 정말 좋은 일이에요." "그렇지, 바네사, 당신은 따뜻하고 사려 깊은 여자야. 재크 파워는 당신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하는 남자야. 거짓말이 아니야." "아첨이라 해도 고마워요, 메이너드. 당신은 언제든지 내 편인걸요." 바네사는 힘없는 웃음을 띠었다. "하지만 바네사, 당신도 당신 자신의 편이 되어야 한단 말이야. 자기를 아껴야지 남편이 세상을 뜬 뒤로 당신의 마음에 달고 있는 상장을 떼어버리라구. 그를 죽인 것은 당신이 아니야. 당신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어. 당신에겐 책임이 없어." "네." 대답은 했으나 바네사의 마음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편에게 좀더 무엇을 해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남아 있었다. "당신은 자기를 벌주려는 나머지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열 줄을 몰라. 앞으로도 그렇게 할 작정이야?" "아니에요, 그것은 달라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재크와의 일을 이해해 줘요. 난 그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고 교제한 거예요. 그런데 그는 글쎄 너무하지 뭐예요." "그럼 당신은 마음을 여는데 어울리지 않는 남자를 골라잡은 거야. 뒤에 가서 상처를 받게 된다면 처음부터 어울리지 말 걸 그랬어." 분명 메이너드의 말이 옳을지 모른다. '하지만 난 앤드류 때나 마찬가지로 어두운 절망에 갇혀 있는 재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 줄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거예요.' 바네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낙심하여 테이블에 눈길을 떨구고 말했다. "당신의 말은 잘 알겠어요. 그런데 앞으로 난 어떻게 하면 좋지요?"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절대로 반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하지만 먼저 그 생각을 들려줘요." 메이너드는 이따금 엉뚱한 말을 꺼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네사는 메이너드의 볼이 부어오르는 것을 보고 얼른 덧붙였다. "별로 무리한 일이 아니라면 약속해도 좋아요. 그 좋은 생각이 뭐지요?" "한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 멀리에 가 있는 거야. 한가하게 햇볕을 쬐고 재미있는 책이라도 읽어 기분전환을 하고 돌아오는 거야. 그 못난 화가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말이야. 혹시 어쩌면 이상적인 남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안 그래?" "그런 휴가를 얻어낼 수가 있어야죠." "천만에, 바우맨은 제때에 판화가 완성되어 지금 좋아서 어쩔 줄 몰라. 당신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까다로운 재크 파워를 잘 끌어내어 일을 시키는데 당신이 특별히 노력을 기울였다고 보너스와 일주일의 휴가를 줄 것이 틀림없어." '그 노력을 당신은 모를 거예요.' 하고 바네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사장님이 그렇게 해줄지 어떻게 알아요?" "당신은 콜롬비아 제판소를 파경에서 건져낸 은인이야. 그만한 일은 바우맨이 하고도 남아." 그러고 보면 분명 그런 것 같았다. "그럼 어디로 가면 좋지요? 시즌이 한창인데 빈 호텔이 있을까요? 또 보너스가 나온다 해도 이 한겨울에 따뜻한 곳으로 찾아갈 만한 액수는 못 될 텐데요." "그야 그렇지. 하지만 내게 맡기라구." 메이너드는 잔뜩 신이 나서 눈알을 또글또글 굴렸다. "당신의 돈은 1센트도 쓰지 않을 방법이 있으니까." "그러나 당신이 부담할 수는 없어요. 메이너드, 무슨 뜻이지요?" "물론 내가 돈을 내겠다는 말은 아니야. 알았지? 자아, 이제 결정되었어. 당신으로서는 눈부신 인생의 첫걸음이 드디어 시작되는 거야." "어마, 그럴듯한 말만 하시고. 하지만 난 갈 수 없어요. 깜박 잊고 있었는데 그 고양이가 있잖아요." "고양이라니, 핑계를 대지 말라구. 약속했잖아?" "고양이가 있어요. 심부름꾼이 갖다 준 것 말이에요. 놀리지 말아요. 메이너드 당신이지요, 고양이를 보낸 것은?" "아니야. 난 고양이는 싫어해. 그리고 난 이름을 숨기고 선물하는 버릇은 없어." "티파니 가게의 커다란 상자에 넣어져 있었어요. 빨간 리본을 붙이고, 당신이 아니었어요? 그게 정말이에요?" "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어? 좋아, 할 수 없군. 고양이는 내가 돌보겠어." 바우맨 사장은 유급 휴가와 상당한 액수의 보너스를 주었다. 그 봉투 속에는 바네사 앞으로 바우맨이 손수 쓴말이 적혀 있었다. <당신은 우리 회사와 나의 결혼 생활을 건져 주었소. 고마워요. 리처드> 바네사의 눈에 물기가 번졌다. 리처드 바우맨의 재정 위기가 일시적으로나마 해결된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낭비가 심한 시리어 부인을 거느린 바우맨 사장의 개인적인 경제 형편은 얼마쯤이나 호전될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1월 어느 토요일 점심때쯤, 바네사는 운전수가 모는 감색 리무진을 타고 케네디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양옆에는 메이너드와 안나가 앉아 있었다. 뒤의 트렁크엔 열대 지방에서 지내기 위한 옷가지들을 넣은 슈트케이스가 들어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예의 티파니 가게의 푸른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새끼고양이는 메이너드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이것이 만사니요의 휴양지 맨션의 키예요." 하고 안나가 말했다. "라스 아다스에 도착하면 먼저 사무실로 가세요. 호텔 사무실이 아니라 맨션의 사무실이에요. 그리고 이 편지를 건네주면 당신을 잘 돌봐 줄 거예요. 방에는 주방도 있고 가까운 가게에서 식료품도 팔고 있으니, 기호에 따라선 호텔에서 식사를 해도 상관없어요. 나무들을 둘러볼 수 있는 야외 레스토랑에는 고운 앵무새가 있고 진기한 꽃들도 피어 있어 정말 근사해요." "난 아직도 믿을 수가 없군요." 바네사는 반신반의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런 곳을 금방 빌 수가 있었지요?" "부탁하면 무엇이든지 해주는 친구가 있어요. 난 그 집의 실내장식을 해주었지요. 실은 당신이 지금부터 가는 호화 맨션의 주인은 아들을 보러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나서 집이 비어 있대요. 당신의 집이나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써 달라는 겁니다. 위크앤드의 휴양지이니 하인도 없어요." "난 혼자서도 충분해요, 안나." 바네사는 기쁨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의 미소 띤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는군, 바네사." 메이너드는 마음이 놓이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눈이 녹은 밴 위크 고속도로를 내다보면서 말했다. "곧 도착하겠군." 바네사는 두 사람과 작별을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이코노믹 클라스의 자리를 찾고 있으려니까, '당신은 퍼스트 클라스예요,' 하고 스튜어디스가 말하는 것이었다. 공항에서 바네사가 멕시코 정부의 비자를 신청하고 있는 동안 메이너드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하려고 돈을 더 치러 비행기표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바네사는 따라 주는 샴페인을 마시고, 스튜어디스에게 부탁하여 편지지를 갖다 달래서 메이너드에게 고맙다는 편지를 썼다. 멕시코 남서부 태평양 연안의 도시 만사니요가 나타났다. 제트기가 머리를 숙이고 바닷가의 활주로에 보기 좋게 착륙했을 때, 바네사는 창문에 얼굴을 대고 바다풍경을 믿을 수 없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마침 해가 태평양 아래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수평선이 아름답게 타고 있었다. 코코야자 나무가 늘어선 노폭이 좁은 하이웨이에 저녁 어스름이 밀어닥칠 때 바네사를 태운 스프링이 안 좋은 낡은 택시는 지형이 복잡한 휴양지 라스 아다스로 서둘러 달렸다. 이윽고 차는 옆길로 들어섰다. 까만 잉크빛 같은 열대의 어둠 속으로 차는 꼬불꼬불한 자갈길을 올라갔다. 바네사는 좌석에 꼭 달라붙어 차의 헤드라이트가 비춰 내는 덩굴이 우거진 주위의 민가에 눈길을 주었다. 문득 커브를 하나 꺾으니 눈앞에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하얀 탑이 있는 건물이 나타났다. 바네사는 놀라서 숨을 삼켰다. "라스 아다스입니다, 세뇨리타. 멕시코 제일 가는 휴양지이지요." 운전사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런 것 같군요." 바네사는 대답했다. 언덕 중턱에 서 있는 아라비안나이트 풍의 건물에 덤불에서부터 교묘히 조명이 비춰 지고 있었다. 하얀 송이버섯 같은 수많은 발코니가, 여러 개의 소 탑과 함께 험한 벼랑을 뒤덮듯이 위로위로 계속되면서 신비를 간직한 후미의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넓은 후미 건너 기슭이 만사니요의 항구였다. 열대의 꽃내음이 풍기는 밤하늘의 향긋한 공기 속에 밝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인생이란 정말 이상한 거야, 하고 바네사는 중얼거렸다. 만사니요라니, 바로 얼마 전까지는 전혀 들어 본 일도 없는 곳이었다. 그것이 지금 이렇게 자기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앞으로 7일 동안이나 이 풍요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즐기는 거야. 건물과 자연의 눈부심은 마치 꿈과 같았다. 라스 아다스는 밤의 정적 속에 반짝이고 있었다. 욕심을 말하자면 꼭 한가지―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은 이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고 바네사는 생각했다. 19장 재크 파워는 여자를 좋아했다. 튜브에서 갓 짜낸 새 물감의 내음과, 향료를 많이 친 중국요리도 좋아했다. 그 세 가지는 모두 정열이 내키는 대로 그의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의 어느 것이 필요하면 다이얼을 돌리기만 하면 이윽고 노크 소리가 나고 바라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다른 유명인이나 상류층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디에나 그런 욕망을 채워 줄 준비를 갖춘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재크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재크는 요즘 놀이에는 싫증이 나 있었다. 화랑의 오프닝 파티에서 그의 에이전트가 소개해 준 스타 지망의 블론드 여자와 어울린 뒤로는 여자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또 크리스마스 전에 아버지가 떠들썩하니 찾아온 뒤로는 그림에도 손대지 않고 있었다. 그리다 만 작품을 완성하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근질했다. 그런데 막상 화필을 들고 캔버스를 향하면 쓸데없는 일이 생각나서 붓을 놓아 버리기 일쑤였다. 중국요리도 그랬다. 장씨 부인이 만드는 혀가 화끈한 운남요리에 대한 기호도 사라져 버렸다. 소호의 집에서 재크는 테이블 앞에 혼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하얀 사기 그릇에 든 중국요리가 여러 종류 늘어 놓여 있었으나 재크는 내키지 않는 모습으로 이것저것 끄적거리기만 했다. 밖에는 눈이 펑펑 퍼붓고 있었다. 내일 차를 몰고 코네티컷 주의 별장에 갈까말까 망설이는 중이었다. 요즘 통 그림다운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다시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콜롬비아 제판소에서의 석판화의 일이 의외로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탓도 있었다. 사장 바우맨의 권유대로 제판의 기술적인 일은 처음부터 바네사에 맡겼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싶었다. 그녀의 기술은 눈부신 것이었다고 재크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침내는 좋은 판화를 완성해 주었다. 처음부터 그는 시간이 날 때 가끔 얼굴을 내밀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바네사는 무엇 때문에 판화의 완성에 그렇게 기를 썼던가? 제판소의 공동 경영자라도 되는가, 사장 바우맨과의 사이에 특별한 관계라도 있는가? 하고 재크는 우울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분명히 그녀는 계약을 완성하기 위해서 자기 직무 이상으로 바우맨에게 협조를 한 셈이 된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그녀는 회사의 이익을 올리기 위해서 재크 파워라는 고객과 침대까지 같이 한 것이다! 재크는 저도 모르게 테이블을 꽝 두들겼다. 종이 그릇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렇게 성실하게 생긴 바네사가! 재크는 30여 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도 그 크리스마스 때 같은 체험은 다른 어느 여성하고도 맛본 일이 없었다. 그날 길고 긴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바네사 같은 눈부신 여자를 마침내 만나게 되었다고 기쁨에 떨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판화의 제작을 기일에 맞춰야 한다고 말하며 서슴없이 돌아가 버렸다. 그 뒤에 바우맨의 전화가 옴으로써 바네사의 목적은 그것밖에 없었던 거라고 재크는 확신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라스베가스로 데리고 간 루비나 다를 것이 없다. 매춘부 같으니! 재크는 또 테이블을 꽝 두들겼다. 이번에는 그릇에서 고기 국물이 쏟아져서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건축 잡지가 젖어 버렸다. 그의 노여움은 미칠 듯이 활활 타올랐다. 울화가 치미는 바우맨과의 계약, 술고래 아버지, 크리스마스 휴가, 화랑의 오프닝 등을 생각할 때마다 재크는 자기 인생이 엉망으로 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에게 남겨진 것은 그림밖에 없었다. 그려야지, 하고 재크는 생각했다. 그리다 만 그림이 몇 개나 천장이 높은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깡통 맥주를 따서 이따금 들이켜면서 재크는 그 사이를 걸어다녔다. 스테레오의 스위치를 틀어 마음에 드는 재즈 방송에 맞추고 소파 위에 길게 몸을 뻗었다.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지? 바네사 밴더폴이다. 화가 나는 노릇이지만 그녀밖에 없다. 재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잊어야 한다. 그녀는 이 재크 파워를 이용해 먹었다. 아무도 지금까지 그런 짓을 한 자는 없었다. 자기는 그러는 줄 모르고 남을 이용해 먹은 일은 있어도 이용당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재크는 바네사를 단념할 수가 없어서 새끼고양이를 갖다 주었다. 그녀는 재크가 새끼고양이를 프레젠트로 주려고 찾아간 줄 모를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 욕의의 남자가, 안에 가만히 있으면 좋았을 것을 주착스럽게 현관에 나타났던 것이다. 재크는 혀를 끌끌 찼다. 못된 여자 같으니라구! 사장 바우맨, 욕의의 남자, 메이너드 매도크, 모두 수상하다. 메이너드와 바네사가 사이가 좋다는 것은 센스가 둔한 남자라도 금방 눈치챌 일이다. 재크의 머리에는 한없는 의혹이 퍼져 나갔다. 그날 저녁 바네사가 화랑의 오프닝 파티에 오지만 않았던들….다시 그녀의 몸을 만지는 일만 없었던들…. 그 보드라운 입술에 키스만 하지 않았던들…. 바네사의 머리칼에서 풍기던 꽃향기 같은 그 내음, 욕망에 헐떡이던 그녀의 숨결…. 넓은 집에서 혼자 빌리 홀리데이의 애수에 넘치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재크는 지나간 나날을 되생각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누구도 사랑한 일이 없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필요로 했던 것처럼 자라선 여자를 필요로 했다. 많은 여자들이 재크의 거센 기질에 끌려서 다가왔다. 그도 그것에 응했다. 그러나 만족을 얻은 일은 없었다. 아버지 패트릭이 알콜에 중독 된 것처럼 재크는 어머니가 떠난 뒤로 자기 주위의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무감각의 벽을 둘러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에 대한 불신감, 비뚤어진 사고방식, 그것이 살아 나가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때로는 자기 자신조차 돌보지 않았다고 재크는 생각했다. 하물며 남을 사랑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갖지 못했다. 하나 인간으로서의 감정은 마음 밑바닥에서 숨쉬고 있었다. 그것은 바네사를 만나자 없어지기는커녕 더욱 강해져 갔다. 재크는 그 감정을 밀어내려고 했다. 될 수 있는 대로 가혹한 처사로써 특히 육체의 욕망을 가지고 그 여자를 압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도 그것을 절실히 원했고 그 바람에 재크는 뒤흔들려졌다. 흔해빠진 섹스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와 같이 있고 싶다는 소망뿐이었다. 지켜주고 싶었다. 언제나 함께 있고 싶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예를 들면 그녀는 계란을 어떻게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침대에서 둘이 잘 때 어느 쪽을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책은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별장 가까운 숲으로 둘이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자르러 갔을 때와 같은 행복감을 느끼는 나날을 더 가지고 싶었다. 파티에도 함께 나가 그녀가 그 신비로운 푸른 눈으로 다른 손님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알고 싶었고, 숙녀다운 기품 있는 말로 흘러나오는 그녀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바네사는 며칠 전 내가 보았던 그 남자와 도대체 어떻게 결혼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는가? 스칸디나비아의 왕녀 같은 기품 있는 바네사와, 갈색의 가터로 양말을 매고 있던 그 남자와의 연결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를 않았다. 화랑의 오프닝 파티에 나타난 바네사는 약혼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아직 찬스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소파 위에서 웅크리고 있던 몸을 뻗더니 재크는 일어서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져 있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돌렸다. 수화기를 든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쌀쌀하게 되돌아온 것은 테이프에 녹음된 바네사의 목소리였다. 조용한 그녀의 목소리가 끝나자 전갈을 재촉하는 소리가 삐익 하고 울렸다. 재크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수화기를 놓았다. 밤 열 한 시에 재크는 다시 다이얼을 돌려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바네사는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 남자와 함께 자고 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재크는 질투심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2달러의 팁을 주며 투덜거리던 남자와 그녀를 어떻게 하면 결혼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이번에는 딴 옷을 입고 배달꾼으로 변장해서 5분마다 한 번씩 아파트를 찾아가 볼까. 바네사가 이것을 알면 고소해 할 것이다. 푸른 눈을 크게 뜨고 놀라고는, 이윽고 눈꼬리에 주름을 잡으며 키들키들 웃어댈 것이 틀림없다. 다음날 아침 아홉 시가 지나서 재크는 제판소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바네사는 휴가로 출근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 남자와 같이 갔을까, 아니면 그저 단순한 휴가일까, 혹은 허니문일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기가 그는 고문처럼 괴로왔다. 메이너드 같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그에게서 알아낼 수가 있을까? 갈색 가터의 남자와 바네사가 어우러졌다면 이제 메이너드도 챈 꼴이다. 그를 만나서 알아보자. 그러나 제판소에는 찾아가지 않는 편이 낫겠다. 바우맨 댁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메이너드는 자기 집에 식사하러 가자고 날 초대했었다. 그때 받은 주소가 어디 있더라? 그렇지. 그 쪽지가 양가죽 재킷에 들어 있는 것을 재크는 생각해 냈다. 드뷔시의 곡이 방문 저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재크가 파크 애비뉴의 메이너드 아파트의 현관문을 노크하자 메이너드의 볕에 그을은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뜻밖의 방문객에 놀랐다.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메이너드는 빠른 소리로 말했다. 어디로 나갈 참인지 잿빛 실크 스모킹 재킷에 잿빛 바지 차림이었다. "시간을 많이 뺏진 않겠습니다. 잠깐만 실례해도 괜찮을까요?" 스스로도 공손한 말투구나 싶어 재크는 감탄했다. 메이너드는 흘끗 성가신 표정을 보이더니 뒤로 물러나 재크를 안으로 맞아들였다. "파워씨, 일부러 찾아와 주시다니 영광스럽기 이를데 없습니다. 잠깐 어떤 사람과 만나기로 되어 있어서… 다른 때 찾아와 주셨다면…." 이번에는 재크가 놀랄 차례였다. 입을 멍하니 벌린 채 한순간 말도 할 수 없었다. 메이너드는… 그렇다 해도 자기는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매도크씨,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찾아온 건 아니니까요." "그 말은 고맙기도 하고 실망도 좀 되는군요. 하여튼 들어오십시오. 무엇을 마시겠소?" "맥주가 있으면…좀." "맥주를 청하는 사람은 좀처럼 없어서요, 미안하지만 스카치는?" "좋고 말고요. 얼음과 물도 조금 넣어서 섞어 주지 않겠습니까?" 재크는 프랑스제로 보이는 고풍스런 의자에 살며시 걸터앉았다. 메이너드는 수정 유리 글라스를 꺼내 와 그것을 재크 앞에 있는 조각을 아로새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재크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뭐 제판소에서 재미없는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당신의 판화 제작도 끝났고, 제판소가 화재로 불탄 것도 아니고, 당신 판을 누가 브라질로 가지고 도망친 것도 아니고, 하여튼 그 어느 것도 있을 성싶은 일이 아니군요." "네, 바우맨은 상당히 위태로운 줄타기를 한 것 같더군요. 빚에 쪼들리고 있었던 거지요." "예?" 메이너드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세히 좀 말씀해 주십시오." "계약에 사인하기 전에 난 그의 경영 상태를 알아보았지요. 그의 매상 능력과 지불 능력을 미리 알아두고 싶어서요. 그러고는 난 선불을 많이 요구했습니다. 그는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그에게 돈을 빌려줄 은행이 하나도 없는 형편이라 그는 고리대금업자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꼴이었지요. 달마다 그가 빚을 갚느라고 얼마나 울고 있는지 알고나 있습니까?" "아니오. 얼마나 됩니까?" "이자만 해도 종업원 급료의 총액을 웃돌지요." "어이구, 불쌍한 리처드." 메이너드는 안됐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바우맨은 내 판화의 매상을 믿고 많은 돈을 빌었습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반드시 잘 풀릴 겁니다." "그렇지요. 틀림없어요.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중에서 최고의 완성품이었어요." "바우맨은 판화가 기일 내에 완성되지 못할까 초조한 나머지 밴더폴 양을 내 별장으로 보냈습니다." "예, 뭐라구요?" "말하자면 미인계를 쓴 거요. 난 그런 비지니스의 진행은 싫어합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초조해 있었는지는 잘 압니다. 그런데, 오늘 난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잠깐, 파워 씨." 메이너드는 날카롭게 말하고 벌떡 일어섰다. 그 서슬에 손에 들었던 글라스가 바닥에 떨어지고 호박색의 액체가 그의 구두를 적시고 훌륭한 융단에 얼룩을 만들어 놓았다. "바네사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할 여자가 아니오. 당신은 정말 주제넘은 인간이군.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면 되는 줄 아시오!" "그녀가 그렇게 했으니 어쩝니까. 부정할 길이 없단 말이오." 재크도 일어섰다. 그것을 이제 와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재크는 이제 지나간 일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 찾아온 것은 바네사가 지금 누구와 어디에 가 있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하려는 가도. "난 당신의 말을 부정합니다. 그녀와는 8년 동안이나 같은 사무실에서 일해 오고 사귀어 왔어요. 당신이 당신의 어머니를 잘 아는 만큼 나도 그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요. 그녀는 절대로…." "메이너드, 여자란 모두 똑같은 겁니다." 재크는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몰라요. 그런데 메이너드, 당신은 알 것 같은데요, 그녀와 바우맨은…." 문득 입술에 강한 충격을 느끼고 재크는 말을 끊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의자에 주저앉았다. 상대방의 힘에 밀려서가 아니라 메이너드에게 한방 맞아서 놀랐기 때문이었다. 메이너드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의 주먹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당신을 쳤군요.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미안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쩌면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습니까. 바우맨이 바네사에게 코네티컷으로 가달라고 명령했을 땐 나도 옆에 있었어요. 그녀는 말했어요, 당신은 누구보다도 자기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바네사 자신은 당신을 무척 만나고 싶어하는 기색이었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바우맨은 만일 시험 인쇄의 교정이 크리스마스 이튿날 아침까지 끝나지 않으면 제판소 직원 전원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고 바네사에게 호소하며 매달렸어요. 바네사는 크리스마스에 같이 지낼 가족이 없으니 시험 인쇄를 갖다 주는 일을 맡아 달라는 거였어요. 덕분에 우리 직원들은 모두 크리스마스가 엉망이 되지 않게 되었지요. 바네사는 바우맨이 자기를 오랫동안 친절하게 돌봐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맡았어요. 바네사처럼 마음이 따뜻하고 남의 사정을 잘 알아주는 여자는 없어요. 그런데 당신은 뭐라구요? 어쩌면 그렇게 더러운 말로 먹칠을…." 거기서 메이너드는 말을 끊고 가슴 호주머니에서 실크 손수건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주먹에 감았다. 황갈색의 손수건에 희미하게 피가 스며 나왔다. "소독을 해야겠군, 광견병에 옮으면 안 되니까. 하지만 당신을 때리다니, 이렇게 유쾌한 일도 없군." 메이너드는 껄껄 웃었다. "나도 놀랐소." 재크는 소매 끝을 뒤집어 입술에 묻는 피를 닦았다. "이 일은… 하지만 이제는 그만두자구요." "그럴 수는 없어요. 내게는 사라질 줄 모르는 기쁨이니까." "뭐 세게 때리지도 못하고서…." 만일 그때 메이너드가 자기주먹에서 눈을 들어 재크를 보았다면 아픔을 참고 있는 재크가 웃음까지 띠려 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사람을 치다니, 정말 처음 가져 본 경험이지만 기분이 별로 나쁘진 않군. 피가 나긴 하지만." 메이너드는 더욱 신이 나서 지껄였다. "바네사에 대한 당신의 견해를 나는 믿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재크는 참다못해 말했다. 어서 바네사와 욕의의 남자에 대한 일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메이너드는 처음으로 주먹을 휘둘러 본 것에 우쭐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만일 바네사가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형편없는 여자라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비참하게 괴로워한단 말이오! 한 남자 때문에 그렇게 고민하는 여자를 난 본 적이 없어요." 메이너드는 잠깐 말을 끊었다.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하던 끝에 겨우 여행을 떠났단 말이오. 내가 당신에 대해서 잊어버리라고 권했어요. 당신이란 인간은 정말 못돼먹었어. 난 당신 속을 알 수가 없군." "나를 잊으려고 떠났다구요? 혼자서? 그게 틀림없습니까?" "물론 혼자요. 바네사는 여자친구를 끌고 여행을 갈 타입이 아니오. 그런데 당신은 무엇을 바라고 있지요? 당신은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난 잘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도대체 나는 무얼 생각하고 있었지? 그녀는 누구 다른 남자와 결혼 할 예정인 줄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 상대가 누구인가 알고 싶어서 여기에 찾아온 거요. 이것봐요. 바네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멕시코에 가 있어요. 그 이상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그러나 마침내 메이너드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네사는 이미 레저의 패턴에 젖어들고 있었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후미에 펼쳐지는 새벽의 아름다움을 지칠 줄 모르고 바라보았다. 잿빛 하늘이 조금씩 핑크 빛으로 물들더니 이윽고 시원한 코발트색으로 바뀌어 갔다. 발코니에 별처럼 많이 피어 있는 빨강, 보라의 꽃들도 짙푸른 바다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커피를 따라 들고 나이트가운을 입은 채 발코니의 의자에 앉았다. 후미 저쪽에 새끼고래인지 조그만 고래가 헤엄치고 있다. 고래는 뛰고 뒹굴고 장난치면서 분수처럼 물을 뿜어 올리고는 또 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느 날 아침엔 몇천 마리나 되는 나비 떼가 해변서 날아 내려 아침 햇빛을 받아 그야말로 희고 눈부실 뿐이었다. 이런 것은 일생에 한 번밖에 구경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멋진 기회를 만났어도 기쁨을 나누어 가질 상대가 없었다. 풀길 없는 안타까움이 마음속에 퍼져 눈물이 괴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바네사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해변으로 이어진 백 단이나 되는 꼬불꼬불한 돌층계를 내려갔다. 정적뿐인 바닷가에서 한 시간 가량 헤엄을 치고 이른 아침의 조용함을 즐겼다. 라스 아다스에 온 첫날, 바네사는 호텔에 묵는 손님들은 오후나 되어야 바닷가로 나와 붐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침 바다에는 겨우 몇 명, 동부나 북태평양 연안의 각지에서 겨울의 추위를 피하여 파도를 타러 온 서퍼들만 눈에 뛸 뿐이었다. 한바탕 헤엄을 치고 나면 맨션의 넓은 방으로 돌아온다. 오르는 돌층계는 힘이 들어 2백 단이나 되는 것 같았다. 샤워를 하고 나서 팔과 가슴이 다 드러나는 선드레스로 갈아입는다. 얼굴에서 어깨에 걸쳐 바네사는 완전히 해에 그을어 있었다. 어느 날은 렌트카로 만사니요의 거리를 찾아갔다. 중국의 영향이 두드러진 항구 도시였다. 스페인의 식민지 시대에 중국과의 교역에 의해서 멕시코의 서해안 지방에는 급격히 동양계의 인구가 불어난 모양이었다. 어떤 날에는 차를 달려 맨션에서 북으로 7, 8킬로미터 되는 곳에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는 아늑한 후미를 찾아냈다. 라스 아다스에 가까운 조그만 마을의 초라한 식료품 가게에서 산 음식을 가지고 그리고 가는 것이었다. 콜라류의 음료수는 해변의 노점에서 샀다. 그 초라한 노점에는, 소년이 혼자서 톨티야에 저민 고기나 치즈를 쟁여 튀겨 낸 타코스를 팔고 있었다. 시험 삼아 타코스를 사먹어 볼 까도 했으나 몇 마디 서투른 스페인어를 지껄여 차가운 음료수를 사는데 그쳤다. 또 어떤 날은 물가에서 주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풀은 이곳 맨션 소유자들의 공유였지만 바네사에게 방을 빌려준 알바씨처럼 거의가 집을 비우고 없었다. 밤이 되면 바네사는 호텔 테라스의 레스토랑에서 별이 총총한 하늘을 보며 우아한 식사를 즐겼다. 겨우 몇 미터밖에 안 떨어진 곳에서 철썩거리는 물결 소리가, 테이블을 돌면서 연주를 되풀이하는 악사들의 바이올린 소리와 아름답게 뒤섞이는 것이었다. 열대의 별은 한층 낮게 드리워져 바네사에게 다가들고 있었다. 마치 소녀가 펼쳐 내는 아름다운 꿈이 거기에 있는 것 같았다. 바네사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누구 하나가까이 와서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호텔의 숙박객들은 저마다 동반자가 있었다. 아침마다 바네사의 방을 치워 주러 오는 아가씨조차도 하루 일이 끝나고 나면 부겐빌리어의 빨간 꽃 밑에서 젊은 남자와 만나고 있었다. 풀에서 돌아오면서 바네사는 부러운 마음으로 그 처녀를 본 일이 있었다. 처녀는 갈색의 볼을 붉게 물들이며 젊은이의 속삭임에 요염한 높은 웃음소리를 내어 바네사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때론 아무 할 일 없는 나날이 견딜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바네사는 그럴 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고치러 이곳에 온 게 아니냐며 자기를 달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 바네사는 만찬을 위한 옷을 갈아입기 전에 일몰을 보려고 호텔을 나섰다. 먼저 호텔 안의 약국에 들러 페이퍼백 책이나 엽서를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언제나 바닷가로 내려가던 길과는 다른 길을 잡았다. 모퉁이 하나를 돌았을 때 바네사는 문득 택시에서 내려서는 남자의 빨간 머리를 보았다. 펄쩍 뛸 만큼 놀란 바네사는 길가의 벽 그늘에 몸을 숨겼다. 설마 저 빨간 머리의 남자가 재크는 아니겠지, 상상이야,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케네디 공항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빨간 머리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재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돌아본 그 남자는 빨간 콧수염과 턱수염까지 나 있었고 나이도 재크보다 훨씬 많았었다. 바네사는 대담하게 조금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남자는 역시 재크 파워였다! 지갑에서 페소 지폐를 꺼내어 운전사에게 요금을 치르려 하고 있었다. 곱슬곱슬한 그 빨간 머리는 틀림없는 재크였다. 갑자기 강한 확신과 같은 생각으로 바네사는 도망쳐야지, 하고 자기에게 명령했다. 홱 뒤로 돌아서서 서둘러 계단을 급히 올라갔다. 손으로 더듬어 키를 찾아 겨우 방안으로 들어왔다. 등뒤로 문이 꽝 닫혔다. 20장 바네사는 정적에 싸인 방안에서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렸다. 재크가 방문을 노크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바네사는 우연 같은 것은 믿지도 않았지만, 재크가 자기를 만나기 위해 만사니요에 왔다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뒤쫓아온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의 고동을 빨리 가라앉히고 싶었다. 의자 등에 늘어붙은 것처럼 기대고 앉아 문득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방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을 때 바네사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무슨 일이에요?" 바네사는 방문을 빠끔히 열고 내다보며 퉁명스런 소리로 어색하게 응했다. "그게 인사요? 5천 킬로나 되는 길을 만나러 왔는데." 재크는 두 눈꼬리에 주름을 잡으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이쪽에서는 소심스런 눈빛밖에 볼 수가 없었다. "뭣하러 왔어요?" 손잡이를 꼭 잡으면서 만일 그가 밀고 들어오면 정신을 잃을 걸고 생각했다. "날 들여놓지도 않겠소? 할 이야기가 있어요." 재크는 바네사를 밀어내듯이 하며 아래위층으로 나뉘어진 호화로운 거실로 들어왔다. 남자다운 산뜻한 내음이 났다. 키가 큰 재크가 방을 가로질러 발코니로 통하는 슬라드식 유리문으로 걸어가는 것을 바네사는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인도 면셔츠 밑에 떡 벌어진 그의 어깨를 파고들 듯이 보았다. 그는 베이지색 아마 저고리를 소탈하게 한쪽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그의 모습에 바네사의 마음은 흔들렸다. 그녀는 재크가 아무리 매력이 넘친다 해도 다시는 그에게 끌려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당신은 도피행까지도 당신다운 방법으로 하는군." 호화로운 실내에 놀랍다는 눈길을 던지면서 재크는 말했다.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누르면서 바네사도 그의 시선을 쫓아 눈부신 실내장식들 다시 보았다. 유카탄 정글의 애즈텍의 흑요석인 듯한 화강암을 번들번들 깔아서 다듬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파가 마주 놓여 있었다. 방 이쪽저쪽 구석에는 열대 식물이 놓여 있었다. 마호가니 천장에서 팬이 맴돌며 시원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어떤 벽에는 자스파 존즈의 그림이 꽉 짜인 화면을 보이고 있었고, 바다로 면한 벽은 모두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최대한으로 내민 발코니 너머로는 지금 막 넘어가는 태양이 그 빛을, 쉬지 않고 물결치는 넓은 바다에 휘황하게 뿌리고 있으며, 만사니요의 항구에는 지금 막 닿은 여객선이 닻을 내리고 정박하고 있었다. 선수에서 선미까지 좍 둘러쳐진 전기불이 깜박거리며 어스름 속에 보기 좋은 선을 그려내고 있었다. 넘어가는 해는 밤마다의 플로어 쇼를 생각나게 했다. 태양은 구름 위에 노랑과 빨강의 눈부신 빛살을 던졌으며 하늘은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갔다. "월급 생활을 하는 여자로선 그다지 나쁜 곳이 아니지요. 안 그래요?" 바네사는 새삼 주위를 둘러보면서 조심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재크는 해에 그을은 바네사의 다리며 깊게 팬 선드레스의 가슴의 융기를 즐기듯이 바라보았다. 재크가 가만히 바라보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동요를 느끼고 가슴 앞에 팔짱을 끼었다. "어색해?" 재크가 조용히 물었다. "사실 말이지.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잊고 있었어. 이 햇살 속에서 다시 보니 당신은 정말 눈부셔. 화가라는 것은 언제나 햇빛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지." 빤히 바네사를 바라보면서 재크는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석양빛이 제일 고와요. 횃불 같아서 참 무드가 있어요. 공기에도 색채가 있는 줄은 처음 알았어요." 유치한 말장난이라고 생각되었으나 끝까지 말했다. "당신은 클리블랜드 출신라고 했지? 거기도 내가 갔을 때는 그랬어." 재크는 그녀에게 농담을 하려고 했다. "하긴 공기가 너무 두꺼워 나이프로 잘라 낼 수도 있었지." "공기의 냄새도 전혀 달라요, 여기는. 재크, 맡아봐요. 쓸데없는 것이 전혀 없는 느낌이에요." 재크의 이름을 입에 내어 말한 바네사는 문득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서로 말을 나누지 않던 상대와 말을 하는 신기함! 하긴 이상한 것은, 그렇게 쓰라림을 당산 사대인데도 이렇게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는 일이었다. 아무리 엉뚱한 소리를 해봐야 결국은 시간을 벌기 위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재크가 한 발짝 더 앞으로 내디뎠다. 아무리 널찍한 거실이라지만 바네사는 뒤의 벽이 자기에게 다가서는 느낌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지, 하고 바네사는 긴장했다. "뭘 좀 마시겠어요?" 하고 바네사는 물었다. "아이스 티 같으면 만들 수 있어요." "맥주는 없소?" "지금 여기는 없지만 전화하면 차가운 것을 보이가 가져다 줘요." 바네사는 방을 가로질러 서둘러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맥주를 주문하는 동안 재크가 그녀의 뒤로 다가온 것을 느꼈다. 몸이 닿지 않았는데도 바네사는 그의 몸의 온기를 느꼈다. 그는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재크는 수화기를 놓은 바네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입술을 머리칼에 대면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내가 무서워? 왜 그렇게 긴장했지?" 힘이 느껴지는 손이 바네사의 어깨에 놓이고 천천히 목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오싹하는 것 같은 기분 좋은 감각이 온몸을 치달았다. 바네사는 아직도 등을 돌리고 한 손을 수화기 위에 놓은 채였다. 눈을 감고 바네사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바네사, 날 좀 보라구. 난 당신을 만나러 왔지. 태평양의 석양을 구경하러 온 게 아니야." 우악스런 팔이 바네사의 몸을 홱 돌렸다. 어깨를 붙잡은 한 손이 바네사의 드러난 매끄러운 팔을 천천히 위아래로 쓸었다. 바네사는 그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한쪽 눈이라도 그의 초록빛 눈을 마주 보았다가는, 택시에서 내리는 그를 보았을 때부터 기를 쓰며 버티고 있던 자제심이 금방 창 밖으로 날아가고 그에게 매달려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재크가 입고 있는 셔츠의 깃에 눈을 돌리고 그의 달콤한 체취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재크만이 갖는 백단나무 같은 향기가 따뜻한 체온과 함께 밀려왔다. 재크의 한 팔이 바네사의 허리에 꼭 감겨지더니 굳어진 그녀의 몸을 와락 끌어당겼다. 다른 손으로 바네사의 턱을 받치니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재크의 입술이 도전하듯 바싹 다가드는 것을 느끼면서 바네사는 재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마침내 재크의 입술이 살며시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바네사는 대리석 석상처럼 우뚝 서서 눈을 감은 채 반응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다. 재크의 따뜻한 입술이 바네사의 눈까풀 위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코끝에 닿고, 다시 바네사의 보드라운 입술로 돌아왔다. 재크는 처음에는 따뜻하게, 다음에는 힘차게 키스를 되풀이했다. 탄탄한 팔을 바네사의 나긋나긋한 몸에 휘감고 꼼짝을 못하게 하면서 그녀의 반응을 재촉했다. 마침내 바네사도 그것에 응했다. 화르르 타오르는 불길처럼 한 번 불이 붙은 바네사의 욕망은 금방 온몸을 뜨겁게 불태웠다. 팔을 재크의 목에 걸고 끌어당겨서 굶주린 듯이 키스를 되돌렸다. 재크의 손은 바네사의 잔등에서 잘록한 허리로 미끄러져 내려갔고 무쇠 같은 그의 두 다리로 꽉 끌어당겨졌다. 재크의 입술이 바네사의 우아한 목의 오묵한 곳을 사로잡자 저도 모르게 아아, 하는 신음 소리가 바네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재크의 입술은 더욱 파고들어 선드레스의 벌어진 앞가슴을 더듬었다. 그가 그녀의 드레스의 끈을 어깨에서 벗기고 드레스를 밀어 내리자 하얀 가슴이 드러났다. 젖가슴이 한순간 서늘한 바람에 드러났는가 싶자 바로 재크의 따뜻한 입술이 우윳빛 가슴을 만족스런 한숨과 함께 더듬었다. 혀끝이 천천히 바네사의 젖가슴 위를 돌아다녔다. 바네사는 갑자기 두 다리의 힘이 쑥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힘없이 무릎이 꺾이며 스르르 주저앉으려고 했다. 재크는 재빠르게 그녀를 안아 들어 가뿐하게 소파 위로 옮기면서 별 어려움 없이 선드레스의 지퍼도 끌어내려 버렸다. 소파 위에 살며시 바네사를 내려놓고 재크는 민첩하게 그러나 부드럽게 그녀의 드레스를 벗겼다. 바네사는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미칠 것 같은 격정이 바네사의 팔다리에 솟아나는 바람에 재크를 끌어당기듯이 옆에 앉히고 그의 하얀 셔츠의 조그만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손끝이 떨려서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재크는 바네사의 귓가에서 갈라진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바네사, 아아, 얼마나 당신을 안고 싶었는지…." 문득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런 그 소리는 처음엔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 "아니, 이게 뭐야. 이 세상에는 당신과 내가 단둘이 있을 곳은 없단 말인가." 재크는 몸을 떼면서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 주문한 맥주를 가져온 거예요." 바네사는 자기의 목소리도 갈라져 있는데 놀랐다. "할 수 없군. 내가 가져오겠소." 재크는 체념한 듯이 말하고 장난스럽게 바네사를 쳐다보았다. 바네사는 손을 뜨거운 이마에 대고 반은 멍한 상태로 누워 있었다. 목도 가슴도 희미한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숨결을 가다듬으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재크가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마티스가 잘 그리던 그 눈부신 오달리스크 같군. 하지만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건 그만두자구." 다시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네사는 펄쩍뛰어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옆방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것은 어떻게하고?" 재크는 한 손으로 셔츠의 단추를 잠그면서 바네사의 뒤에서 소리를 질렀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선드레스를 움켜쥐고 있었다. "이것 말이야, 당신의 드레스." 재크는 웃으면서 그것을 던졌다. 이윽고 재크는 두 병의 차가운 맥주를 손에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널찍한 침실은 거실보다 더 아늑한 색조로 꾸며져 있었다. 은색, 상아색, 중간색인 따뜻한 회색 등으로 채색되어 있었으며, 여기저기 놓여 있는 캐비닛에는 스테레오, 비디오, 전화 등이 드러나지 않게 끼워져 있었다. 바네사는 침대에 누워 재크를 맞았다. 캐시미어의 이불 밑에는 벌거벗은 몸이 있었다. "할말이 있어." 재크는 바네사의 옆에 걸터앉으면서 말했다. "네, 알고 있어요." 바네사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먼저 사랑을 나누고 싶어요. 그런 뒤에 이야기해요. 당신하고는 오래 떨어져 있었는걸요." "그러나 할말이 많이 있어." 하고 재크는 낮은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네, 나도 그래요, 달링." 바네사는 재크를 달링이라고 부르는데 망설임을 느끼지 않았다. 이젠 무슨 소리라도 입밖에 낼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의 희망대로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재크는 망설였다. "내가 결정하게 해줘요." 바네사는 몸을 일으키자 재크의 몸에 팔을 뻗어 자기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보세요, 내가 하자는 대로해요." 바네사는 손가락으로 재크의 곱슬거리는 빨간 머리칼을 펴듯이 살며시 쓰다듬었다. 재크는 입고 있던 것을 벗어 던지고 그녀 옆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한동안 살며시 끌어안고 있더니 이윽고 재크는 팔베개를 하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이대로 계속하기는 싫어. 난 역시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어." 바네사는 윗몸을 일으켜 팔굽을 짚고 고집 센 의지를 담은 재크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재크는 바네사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고 천장의 놋쇠 팬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저번 크리스마스 이브에 당신은 내 별장에 찾아왔었어. 그것은 시험 인쇄의 교정을 내게 시키기 위해서였고 그것을 위해서 나와 침대를 같이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 계약을 제대로 이행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을 하다니, 다른 여자와 다를 것이 없다, 당신은 바우맨과 한통속이라고 말이야…. 아니, 지금 입에 내어 말하니 왜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 나 자신도 잘 알 수가 없지만, 그때는 당신을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렸어." 재크는 눈을 감았다. "그래서 내 전화에 대답도 해주지 않았군요." "그렇지." 깊은 한숨과 함께 재크는 대답했다. "나한테서 멀어진 이유가 그거예요? 당신이 그런 고리 타분한 생각을 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직접 나한테 따지면 금방 알았을 게 아니에요?" "난 구식 인간이 아니야. 다만 어릴 때부터 사랑의 배신을 받으며 자라는 바람에 조심스럽게 된 것뿐이지. 그러나 그런 건 문제가 아니야. 사실은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마음 밑바닥에서는 잘 알고 있었어. 나와 맺어질 때의 당신은 거짓이 아니었다고 고쳐 생각하게 되었지." "그럼 왜 나를 사뭇 피했지요?" "피한 게 아니야. 난 당신을 의심하던 일이 아무래도 미안하다 싶어 당신의 아파트에 찾아갔었어. 내 마음을 전하려고 말이야. 어쩐지 생색을 내는 것 같았지만. 그런데 엘리베이터 속에서 나이 많은 부인들이 당신에 대해서 말하는 소리를 들었어. 내가 당신의 아파트에서 보았던 그 놈팡이하고 당신이 결혼한다는 말이었어. 나는 미칠 것같이 화가 났지." "더글러스말이군요. 당신은 화랑에서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차갑게…." "그렇지." "그런 사람과 결혼을 할 바엔 차라리 수도원에 들어가는 게 나을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당신의 마음이 바뀐 것은 어찌 된 일이지요?" "고릴라한테 한 대 얻어맞은 덕분이지. 그 바람에 내 돌머리도 풀렸다 그 말이야." "누구한테요? 때린 게 누구예요? 상처는요?" 재크는 아랫입술의 조금 부은 곳을 가리켰다. 조그만 상처였기 때문에 바네사는 모르고 있었다. "알겠어? 메이너드한테 얻어맞은 거야." "메이너드가 당신을? 그 메이너드가?" "그렇다니까." 바네사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하다가 자기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장면을 보았더라면 좋았을 걸요." "지금까지 내가 당신한테 심하게 군것을 용서해 주겠어? 그게 힘드는 일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재크는 바네사를 돌아보며 가만히 말했다. "왜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하지요? 그건 다 지난 일이에요." "정말?" 눈치를 살피듯이 재크의 눈이 바네사를 바라보았고 바네사의 눈도 그것에 응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이 먼 곳까지 찾아와 주셨어요. 이제 저는 더 이상 괴로워하기 싫어요. 하지만 괴로워했기 때문에 사랑은 가치가 있게 되는군요." 바네사는 팔을 뻗어 오는 재크에게 몸을 맡겼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재크는 조용히 바네사의 몸을 끌어당겼다. 눈을 감은 바네사의 한쪽 눈에, 또 다른 한쪽 눈에 살며시 입술을 대고 키스를 되풀이했다. 그는 코끝에도 입술을 대고 나서 바네사의 입술에 입술을 포개었다. 그가 세게 입술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바네사는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재크의 숨결에서 강한 욕망의 내음을 맡았을 때 바네사는 사랑하는 남자를 다시 맞이한 기쁨으로 저도 모르게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재크는 바네사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욕망은 뜨거워진 기름처럼 온몸에 퍼져 불길이 되어 타기 시작했다. 조각가가 대리석을 새기기 전에 모델의 몸의 선을 머리에 꼭 간직하려는 것처럼 재크의 큰손이 찬찬히 바네사의 몸 위를 쓸고 다녔다. 재크는 봉긋이 솟아오른 바네사의 아름다운 가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가만히 바라보더니 입술로 부드럽게 애무했다. 바네사는 눈은 가볍게 감고 입은 반쯤 벌린 채였다. 재크의 움직임은 꿈속을 헤매듯 느릿느릿했으며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바네사의 팔은 재크의 등으로 돌려져 있었다. 그 누구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감촉을 느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애무하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바네사는 재크의 가슴에 난 조그만 상처 자국을 보고 거기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재크는 바네사의 다리에 주근깨가 모여 있는 곳을 발견했다. 몇 년전에 강한 햇볕을 쬔 뒤로 적절한 손질을 게을리해서 생긴 흔적이었다. 그의 손가락은 그 자국을 더듬었고 입술이 다시 그 뒤를 따랐다. 언젠가 바네사를 끓어오르는 기쁨 속으로 몰아넣었듯이 그녀를 새로운 환희로 몰아넣어 불타게 했다. 바네사는 그를 원했으며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두 사람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마치 멈춰 있는 것처럼 조용하게 움직였다. 바네사의 몸속의 피가 끓어올랐고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사랑의 말이 아낌없이 쏟아져 나왔다. 욕구를 폭발시키고 싶은 바네사의 마음은 재크의 그것보다 강렬해졌다. 바네사는 재크의 초록빛 눈을 들여다보았다. 재크는 바네사에게 이끌리는 것을 조금도 싫어하지 않았다. 말없이 그녀가 하는 대로 자기의 탄탄한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바네사는 자신의 대담성에 놀랐다.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한숨이나 신음소리를 듣는 것이 즐거웠다. 이제 재크 없는 인생은 있을 수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재크에게 모든 것을 주고 그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한대도 좋다. 결과는 어떻데 되든 상관없다, 그런 생각까지 머리를 스쳤다. 재크는 바네사의 눈을 바라보았고 바네사도 재크의 눈길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네사는 재크에 대한 사랑이 자기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재크가 다부진 몸을 떨면서 신음소리를 냈을 때 바네사는 그의 눈 속에서 사랑의 빛을 보았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글자를 그의 눈에서 느꼈다. 바네사도 불타는 기쁨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떨고 있었다. 기쁨이, 눈이 아찔아찔해질 만큼 뜨겁게 바네사를 몰아대는 바람에 이대로 자기가 까무라치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재크의 뜨겁고 긴 키스에 의해서 겨우 반쯤 의식을 되찾았다. 재크의 키스는 두 사람의 견고한 결합에 단단한 봉인을 하듯이 계속되었다. 바네사는 조용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밤의 공기가 벨벳 덮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시계를 안 보아도 심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때는 발코니까지 흘러오던 마리아치의 노래도 들리지 않았다. 조용한 물결의 출렁임 소리만 들려 왔다. 팔을 뻗어 어둠 속에서 침대를 더듬었다. 재크는 거기에 없었다. 그러나 바네사는 놀라지 않았다. 일어나서 복숭아 빛의 시퐁 가운을 걸쳤다. 재크가 발코니에 있나하고 바네사는 내다보았다. 집안 어디에도 재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가죽 슈트케이스는 욕실에 놓여 있었다. 발코니로 나가서 저 아래 바닷가의 모래밭으로 눈길을 향했다. 스러져 가는 달빛으로 저 멀리 바위 위에 사람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구두도 신지 않은 채 바네사는 백 단이나 되는 가파른 층계를 뛰어내려가 모래밭으로 서둘러 갔다. "재크? 당신이에요?" 바네사는 재크 같은 인물이 등을 향하여 앉아 있는 조그만 바위로 뛰어갔다. 그는 셔츠도 입지 않고 있었다. 맨발이었으며 카키색의 바지 하나만 입고 있었다. 달빛에 비친 그의 우람한 등의 음영이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그 등을 만져 보고 싶었다. 바네사는 차가운 밤 공기에 몸을 떨었다. "춥지 않아요? 방으로 돌아가요. 뭐 따뜻한 마실 것을 마셔야겠어요." 말이 없는 재크에게 다가가 바네사는 그의 등에 손을 댔다. 재크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크?" "저리 가 줘." 이 난데없는 무뚝뚝함은 또 어찌 된 일인가? 바네사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재크, 지금 말을 하기 싫어요?" "그렇소." "그럼 내 말을 들어 줘요." "말해 봐." 재크의 대답은 쌀쌀하고 무뚝뚝했다. "당신은 내가 가까이 가면 떠다밀고 마음을 열면 닫아 버리는군요. 마치 부서진 금고 같아요. 나를 시험하고 있어요? 내가 그것을 모르는 줄 알아요? 내가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볼 테면 시험해 봐요. 나는 도망을 치거나 하진 않겠어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걸요. 그래요, 재크. 난 그럴 수밖에 없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내게 무엇을 해주는가.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이 크리스마스 뒤로 사뭇 나와 만나는 것을 피했을 때도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어요. 만일 지금 당신이 떠난다 해도, 당신의 인생에서 나를 떠나 보내도 난 여전히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바네사는 바위 앞의 젖은 모래땅에 달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바위에 걸터앉은 그의 무릎 위에 놓인 한 손을 잡고 손바닥에 키스했다. 재크를 쳐다보는 바네사에게 그의 초록빛 눈이 파악하기 어려운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어머니와는 달라요. 아무데도 가지 않아요. 당신이 날 사랑해 주든 말든 나는 계속 당신을 사랑하고 같이 있겠어요. 이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에요." 바네사는 재크의 또 한 손도 잡아 자기 가슴에 갖다 댔다. "당신이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는지 난 알고 있어요. 나도 무서워요. 당신은 벼랑에서 떨어질 지도 몰라요. 버스에 치일지도 몰라요. 갑자기 몸이 불편해져 죽어 버릴지도 몰라요. 하지만 난 무서워하지는 않겠어요. 그것 말고도 무서운 일은 얼마든지 있고 무슨 일에나 끝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인생은 짧아요, 참는 일이 아니라 살아 나가는 일이 중요해요. 기쁨은 그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뿐만이 아니라 구하는 것도 기쁨이라고 생각해요. 안 그래요?" 바네사는 재크의 손을 꼭 틀어쥐었다. "당신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 많아요. 인생은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에요. 낡은 추억이나 옛날의 잘못에 연연하여 살수만은 없어요."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그 동안 재크는 한마디도 입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이윽고 손을 바네사의 등에 꼭 갖다 댔다. 떨림의 물결이 바네사의 몸 속을 치달았다. "당신이 무서워하다니?" 재크는 망설이면서 말했다. "당신은 언제나 자신감에 넘쳐 있어. 당신같은 여자는 만나 본 일이 없어." "내가 자신감에 넘쳐 있다구요? 천만에요. 제판자로서의 솜씨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만은 분명 자신이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차갑게 대하거나 하면 난 금방 비참해지고 자신감 같은 것은 금방 어디로 날아가 버려요. 당신이날 사랑해 주는지 어떤진 몰라도 난 그럴 때가 오기를 기다릴 생각이에요." 재크의 대답을 들을 때까지 조용한 바다의 침묵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겨우 재크가 입을 열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좋은지 난 알 수가 없어.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난 잘 모르기 때문이야. 당신을 사랑한다고는 생각해. 하지만 이것이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 "제발 말 좀 해봐요, 지금 어떤 기분이 들지요?" 바네사의 마음은 기쁨에 차서 그를 재촉했다. "글쎄… 가끔 당신이 여러 사람이면 좋겠다 싶을 때도 있어. 당신이 나이가 들면 어떤 얼굴일까 하는 상상을 할 때도 있어. 나이가 들어도 당신이 옆에 있어 주었으면 싶으니까." 재크는 그 말을 바네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당신의 수레 의자를 이젤 앞까지 밀어다 드리겠어요, 만일 당신이 부탁하신다면." 바네사는 방긋 웃었다. "내 물감 붓을 깨끗이 빨아 주겠소?" "당신은 고양이 상자를 청소해 주겠지요? 아마 그 고양이는 당신이 보낸 거겠지요?" "그렇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바네사의 가슴은 부풀어올랐다. "바네사, 난 내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남자요. 내가 못할 일은 약속도 하지 않아." 바네사의 어깨에 얹은 재크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바네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당신을 놓치지 않겠어. 관속에 넣어져 땅 속에 묻힐 때까지 말이야.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오. 지금은 이것으로 됐어?" "물론이에요, 달링." 바네사는 손을 뻗어 재크의 굵은 팔을 잡고 그가 바위에서 내려오는걸 도와주었다. 재크는 팔을 바네사의 허리에 감고 바네사는 팔을 재크의 목에 둘렀다. 손을 놓으면 그가 땅 끝으로 도망이나 칠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 황금의 아지랑이처럼 행복한 기분이 바네사를 감쌌고, 새로운 기쁨이 재크의 몸속을 치달았다. 새벽 전의 조용한 긴 한때를 두 사람은 서로 꼭 부둥켜안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메이너드에게 고맙다는 전보를 치겠어요." 꼬불꼬불한 긴 돌층계를 오르면서 바네사는 말했다. 재크의 우람한 팔은 속이 환히 비치는 시퐁 가운을 두른 바네사의 허리에 감겨진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가운의 복숭아 빛이 두 사람의 뒤에서 빛나기 시작하는 아침해와 잘 어울렸다. "뭐라고 치지?" 바네사는 웃음을 띠었다. "누군가가 한 말이 메이너드에게 맞을 거예요. <어떤 배려보다도 사랑의 배려야말로 참다운 행복에 없을 수 없는 것이니라.>" "이번 시즌에 처음으로 불을 지피는군." 재크는 날라 온 굵은 통나무를 벽난로에 넣으며 말했다. "가을의 벽난로 불은 정말 좋아." 세 개 가량의 통나무를 쌓아 놓고 재크는 뭉친 신문지에 불을 붙였다. 바네사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통나무에 불이 붙는 것을 지켜보았다. "소호의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군." "하지만 그림을 그리자면 가야 할 텐데요." 바네사는 무릎 위에 펼쳐 놓은 자수의 손길을 멈추고 재크를 쳐다보았다. "아니, 여기에 새 아틀리에를 차렸으니까 됐지 뭐." 재크는 바네사의 옆에 앉아서 긴 다리를 커피 테이블 위에 뻗었다. 그리고 바네사의 왼손을 잡고 약손가락에 끼고 있는 간결한 디자인의 금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내일 당신도 일을 시작하는 거요?" 하고 재크가 물었다. "아니오, 내일까지는 쉬어요. 내일 저녁 리처드가 일감을 보내 주기로 되어 있어요. 난 왜 리처드 바우맨이 우리가 웨스턴으로 이사온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 않았는지 이상해요." "바우맨도 바보는 아니지." 재크는 대답했다. "당신을 일하기 좋게 해주지 않으면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우수한 제판 기술자를 잃게 될 테니 말이야." "당신은 내일부터 일을 시작해요?" "아니, 차를 몰고 단풍 구경이나 나가면 어떨까?" "어머, 좋은 생각이에요. 시간 보내기에 멋있는 방법이군요." "당신하고 같이 있으면 시간 보내는데 특별한 방법은 필요 없어. 매일매일이 눈부신데 뭐, 바네사." 재크의 목소리에 특별한 것을 느끼고 바네사는 그의 초록빛 눈을 들여다보았다. 장작이 소리를 내며 타기 시작하고 사과나무의 향기가 높은 천장 가득 떠돌았다. 기분 좋은 만족감 속에 재크 옆에 앉아 있던 바네사는 재크의 눈빛이 침착을 잃고 있는 것을 보았다. "왜 그러지요, 달링? 뭐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어요?" 바네사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재크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아무 것도 아니야. 저어, 당신한테 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재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두 가지야, 사실은." "뭐 내게 관한 일이에요?" 재크의 말에 바네사는 긴장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어서 말해 줘요, 재크!" "웃지 않겠지?" "웃긴 왜 웃어요. 약속하겠어요." 언제나 자신만만한 남편이 왜 이렇게 머뭇거리는지 바네사는 불안했다. "아이가 있으면 좋겠어, 바네사." 재크는 기침을 하는 것처럼 빠르게 말했다. "물론 당신이 바라면 말이지만." 그는 말하고 나서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손은 아직도 힘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뭔가 다른 걱정이 있는 것처럼. 바네사는 수줍음을 숨기듯이 새침한 웃음을 띠었다. "그것 정말 근사해요, 달링." 재크는 말없이 바네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볼에 따뜻하게 키스했다. 쉽게 입술을 떼려고 하지 않다가 겨우 한숨과 함께 그는 떨어졌다. "또 한가지는 뭐지요? 역시 나와 관계 있는 일이에요?" "그런 셈이지." 재크는 마치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바네사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 손가락이 어떻게 되기 전에 말해 줘요." 재크는 깜짝 놀란 듯이 바네사의 왼손을 바라보고는 살며시 들어올려 손가락 하나하나에 따뜻하게 입맞춤을 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요." 재크는 겨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바네사는 너무나 벅찬 행복감에 눈을 감았다. "네, 알고 있었어요. 훨씬 전부터요. 그런데 보세요, 또 한 번 말해 줄 수 없어요?" "몇 번이라도 말하겠소." 재크는 바네사의 목에 얼굴을 묻고 그 따뜻한 살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바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