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신부 브리티니 영 지음 문화광장 투유-112 아나리자는 아버지에게 임종 직전에 스페인 전쟁에서 만난 라파엘의 아버지와 두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을 결혼시키기로 약속했다는 얘길 듣는다. 아나리자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라파엘과 결혼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가기로 한다. 그러나 그 전에 라파엘이 아나리자를 찾아오고……. 1장 늙은 의사의 눈에는 무척 가슴 아픈 광경이었다.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친구, 그 곁에 앉아 있는 친구의 딸. 그녀는 애원하는 듯한 시선으로 의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의사는 슬픈 듯이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나리자 듀란트는 다시 아버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기운 넘치고 믿음직하던 아버지가 이렇게 여위고 초라해져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니! 아버지를 잃는다는 생각이 그녀를 견딜 수 없게 하였다. 아나리자는 오열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침대에 엎드렸다. 아나리자의 아버지 마커스는 만혼이었다. 딸이 태어났을 때, 그는 이미 50대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는 딸을 얻는 대신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철이 들고나서 지금까지, 아나리자는 넓은 저택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왔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있던 아버지.... 그 때 아버지가 눈을 뜨고 힘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당황하여 황급히 눈물을 손등으로 닦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서야 왔구나. 네게 해 둘 말이 있단다." 아버지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안돼요, 아빠. 지금은 안돼요. 지금은 푹 쉬어야 해요." 아나리자는 주름진 아버지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아버지는 창백해진 얼굴을 힘없이 가로 저었다. "쉬어 봤자, 더 이상 좋아질 것 같지는 않구나. 내가 내 몸을 제일 잘 알지." 마커스는 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다. "얘, 기억하고 있니? 얼마 전에 말했던 라파엘 샌디에고 말이다." 아나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 제일 친한 친구 분의 장남 말이죠? 하지만 왜......" "자,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아버지는 딸의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딸과 똑같이 맑은 녹색에는, 먼 곳을 보는 듯한 표정이 어리기 시작했다. "1930년대의 일이란다. 스페인 전쟁의 광란 속에서 난 호세 샌디아고를 만났지. 그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 이건 이미 했던 얘기지?" "네, 총탄이 빗발치던 전쟁에서 자기 몸을 내던져 아버지를 구해 줬다고 하셨어요." "그래 난 그때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을 거야. 최고의 친구였지. 지금은 비록 멀리 떨어진 스페인에 살고 있지만 지금도 나에겐 둘도 없는 친구란다. 그런데 옛날 일을 끄집어낸 건 다름이 아니라, 내 딸을 그의 장남과 결혼시키기로 약속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란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물론 라파엘도 태어나기 전의 일이지." "약속을 하셨다고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니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 결혼 약속을 하셨다는 말씀이세요?" 아나리자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놀랐다고 하기보다 두려움에 가까운 기분이었다. "그래, 그 얘기를 해 두고 싶었다. 자세한 것은 애머슨에게 맡겨둔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을 게다. 50년이나 전에 쓰여진 거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주 가냘퍼져 있었다. 애머슨 랭훼드는 듀란트가의 고문 변호사였고,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했다. 아나리자는 작은아버지처럼 그를 따랐다. 아나리자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내 남편을 결정해 놓았다니! 그것도 나 모르는 사이에,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아버지는 피곤에 지친 얼굴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옛날 일인데, 호세 라파엘이 우리 집에 온 적이 있었단다. 기억나니? 니가 10살 때였을 거야. 그때 라파엘은 23살이었고, 큰 키에 핸섬한 그 젊은이를 너는 무척 잘 따랐었지. 그런 너를 보고 호세와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단다." 그때의 일은 아나리자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처음 느꼈던 마음의 고통! 어렸을 때의 아나리자는 어떤 남자아이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등산을 잘했고, 무엇보다도 야구를 좋아했었다. 그런 그녀 앞에 라파엘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그녀가 만났던 그 누구와도 달랐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거무스름한 피부, 그 중에서도 아나리자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 바다처럼 짙고 깊은 새파란 눈동자, 그 눈동자는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나리자는 라파엘의 모습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시선을 끌려고 했었다. 그의 시선이 다른 사람에게로 쏠리는 걸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졌다. 그 무렵, 그녀의 옆집에는 글래머인 18세 소녀가 살고 있었다. 라파엘은 일단 그녀가 눈에 띄자, 귀찮게 자기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꼬마 아이를 더 이상 상대해 주려하지 않았다. 아나리자는 어린 마음으로, 지금까지 라파엘은 귀여운 꼬마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마지못해 나를 상대해 준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귀국하기 전날 밤 라파엘은 마커스의 허락을 얻어 그 글래머 아가씨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아나리자는 저녁식사 시간 내내 뾰로통해 있었다. 그 밤을 위해, 가장 예쁜 옷을 입고 머리도 예쁘게 다듬었는데..... 아나리자는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라파엘 쪽으로 걸어가 아무런 말고 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리고 나서 이층으로 뛰어들어가 자기 방의 문을 잠가버렸다. 이윽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그쳤을 때, 그녀는 이제서야 혼자 있을 수 있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라파엘이 장미 울타리를 타고 올라와, 그녀의 방으로 침입해 들어온 것이었다. 설마 그가 창문을 넘어 들어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파엘은 느닷없이 아나리자의 어깨를 붙잡고서 발버둥치지 못하게 부둥켜안은 다음, 엉덩이를 한 대 때렸다. 그녀가 엉덩이를 얻어맞은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아버지에게도 얻어맞은 일이 없었는데..... 그것으로 벌을 다 줬다고 생각했는지, 라파엘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아나리자는 얼얼한 엉덩이를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벌떡 일어나 눈앞에 서 있는 커다란 라파엘을 분노에 찬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그때 그는 무척 냉정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루시에게 빨리 잘못했다고 그래!" "싫어!" 아나리자는 고함을 질렀다. "지금 있었던 일, 다 아빠한테 말할 거야, 그렇게 되면 미안하다는 말은 오빠가 해야 할 걸!"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으며 다짐했다 이 밉살스런 스페인 사람 앞에서는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을 거야!" "미안하지만 그렇지 않을 거야, 꼬마아가씨! 난 제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이 방에 들어온 것이거든."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이런 무례한 짓을 허락하다니! 하지만... 아나리자는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켰다. 만약 사과하지 않겠다고 고집 피우면 또 매를 맞겠지. 그렇지만 머리를 숙이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 남은 길은 하나, 도망가는 길밖에 없겠군! 아나리자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문 쪽으로 한 발 한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단숨에 도망갈 속셈이었다. 그러나 미처 손잡이를 돌리기도 전에 그녀는 라파엘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꼬마 아가씨, 이렇게 되면 프라이드 문제겠지?" 라파엘은 그렇게 말하면서 또 다시 엉덩이를 때렸다. 그것도 잇달아 두 대씩이나. 고집센 아니라자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억지로 참고 있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이었다. 엉덩이가 아프진 않았으나, 분했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은 옷장으로 다가서서 손수건을 한 장 끄집어내더니, 흐느껴 울고 있는 아나리자 옆으로 돌아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자, 내려가자. 루시에게 사과하고 함께 식사를 하는 거야. 알았지?" 라파엘은 손을 내밀려 말했다. 아나리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가 시키는 대로했다. 그러나 마음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라파엘 샌디에고 같은 스페인 사람은 정말 싫어!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홍역을 앓는 것 같았던 첫사랑은 그것으로 완전히 식어 버렸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지금까지도 라파엘의 얼굴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13년, 아나리자는 23살이 되었다. 첫사랑에 넋을 잃었던 그 꼬마 아가씨가 이제는 어엿한 여성으로 성장해서, 초등학교의 선생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아나리자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상대를 만날 때까지, 결혼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결혼 상대를 이미 정해 두었다니.... "아빠, 지금 한 얘기, 진심이 아니죠?" 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나도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단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없기 때문에.... 무척 쇼크를 받았지?" "아빠,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있잖아요!" 아나리자는 억지로 명랑한 목소리를 냈다. 그 때 의사가 다가와서 마커스의 손목을 잡고 맥박을 짚어 보았다. "마커스, 더이상 말을 하지 말게나. 그리고 너도 오늘은 그만 돌아가거라." "잠깐만!" 아버지는 일어서려는 딸의 손을 놀랄 만큼 힘차게 쥐었다. "얘야, 약속해 주지 않겠니? 라파엘 샌디에고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해 다오. 라파엘이 너를 원한다면 그의 신부가 돼주렴. 나와 호세가 약속했던 것처럼." "하지만 아빠....." "이 아빠가, 아무렴 네게 해서는 안될 일을 시키겠니? 아빠를 믿으려무나." "그러나 만약에 라파엘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요?" "그 때는 약속무효란다. 너도 자유로워지는 거지. 난 지금 듣고 싶구나, 라파엘과 결혼하겠다는 네 대답이.... 그렇지 않으면 안심할 수가 없단다. 부탁이다, 아나리자! 약속해 다오." "알았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흥분하지 마세요. 아빠 말대로 할테니까." 딸은 아버지의 손을 자기 뺨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나서 그 손을 살며시 시트 위로 내려 놓았다. "자, 이제는 더 이상 나에 대해 걱정하지 마세요. 아셨죠?" 그 말에 겨우 마음을 놓았는지,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듯 한 숨을 내 쉬었다. 피곤에 지쳐 주름진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까지 어려 있었다. 그 다음 순간, 아버지는 잠들듯이 눈을 감았다. '마음에 걸리던 것을 털어놓은 지금, 더 이상 고민할 것이 없다!' 정말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신 걸까? 의사가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도 훨씬 빨리 마커스 듀란트는 손이 닿지 않는 세계로 떠나가 버렸다. 몇 주일이 지나갔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버몬드 저택의 정원으로 초여름의 부드러운 햇볕이 내리쬐이기 시작했다. 아나리자는 샌들을 벗어던지고 정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구름처럼 너울거렸고, 초록색 선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어깨 위에서는 따뜻한 햇살이 춤을 추고 있었다. 아나리자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여기 저기에 아버지의 추억이 잠들어 있었다.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치밀었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슬픔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다정하던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게다가 이제는 그 많은 빚을 갚기 위해 이 저택을 팔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아버지와 추억이 구석구석 깃들어 있는 이 집을 울면서 뛰어다니고 있던 아나리자는 낯선 스포츠카가 저택 안으로 들어와 멈추어선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차에서 키가 크고 새파란 눈동자를 가진 한 남자가 내렸다. 물론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아나리자는 잘 손질된 잔디 위를 계속해서 뛰어다녔다. 완만하게 경사져 있는 잔디밭 끝까지 가면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여름날 해가 질 무렵, 아버지 곁에 앉아 공상에 잠기곤 했었다. 그녀는 숨가쁜 듯, 연못가에 멈추어 섰다. 순가, 그녀는 금방이라도 잔디밭에 주저앉을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급격하게 변해 버렸다. 둘도 없이 소중하던 아버지의 죽음, 게다가 정들었던 집도 팔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이곳 일이 정리되는 대로 스페인으로 가지 않으면... 13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남자에게 결혼해 줄지, 아닐지를 물어보기 위해서. 그 때, 누군가가 다정하게 어깨를 잡았다. "아나리자...." 약간 외국 억양이 섞인 낮은 목소리였다. 아나리자는 약간 머뭇거리면서, 촉촉히 젖은 두 눈을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거무스름하고 윤곽 뚜렷한 얼굴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은 젊음이 퇴색된 듯 보였지만, 그만큼 여유와 위엄이 있었다. 그다! 순간적이긴 했지만 아나리자는 자신이 10살 꼬마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그 때의 씁쓸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런 곳에 뭐하러 오셨죠?" "생각해 보면 왜 왔는지 알 수 있을텐데?" 무례하고 거만한 말투였다. 눈물을 딱 멈출 수만 있다면 이 무례한 침입자를 그냥 놔두지 않을텐데, 하지만 도저히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돌아가 주세요, 당신이 여기 있는 게 싫어요. 아버지가....."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라파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팔을 뻗어 아나리자의 어깨를 감쌌다. 그녀는 그 팔을 뿌리치듯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알고 있소. 내가 온 것도 그것 때문이오." 그의 자켓이 눈물에 젖은 뺨에 닿자, 차가운 촉감이 전해져 왔다. 어느 사이엔가 다툴 기분이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그의 품속에 안겨 있으니까 왠지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라파엘은 한쪽 손으로 그녀를 안은 채, 다른 한쪽 손으로 새하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마음이 가라 앉을때까지 울어요. 눈물이 슬픔을 씻어줄 거요." 라파엘의 품에 안겨 울고 싶은만큼 울어 버리자, 웬만큼 마음이 가라앉았다. 라파엘은 흐느껴 우는 아나리자의 손에서 손수건을 빼앗아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떻소? 조금 나아진 것 같소?" 아나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피한 듯 얼굴을 딴데로 돌렸다. 그때도 이렇게 눈물을 닦아 주었는데... "미안해요, 폐를 끼치고 말았군요." "우는 것은 여자의 특권이잖소, 일종의 기분 전환도 되고." "그건 남존여비 사상이 낳은 편견이에요. 당신같은 남자들이나 하는 말이라고요." 라파엘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아나리자의 짜증같은 것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라파엘은 교묘하게 화제를 돌렸다. "좀더 일찍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지시는 바람에...." 아나리자의 얼굴에 걱정하는 빛이 스치고 지나가자, 그는 당황하며 덧붙였다. "하지만 이제는 걱정 안 해도 좋을 만큼 나아지셨소. 한때는 잘못되는 게 아닌가 하고 무척 염려스러웠었지만." "다행이군요. 당신 아버지는 정말 좋은 분이였어요. 뵌 것은 아주 어렸을 때 일이지만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요." 잘난 척하는 아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시죠! 아나리자는 마음속으로 덧붙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문득 고개를 드니,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새파란 눈동자 속에 미소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내 마음속을 꿰뚫어 본 건일까? "아 그래, 그때 당신에게 정강이를 채였지.... 멍든게 한 달이나 가더군." 아나리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 때 일은 이제 잊어 주세요." 잘생긴 라파엘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천만에, 절대 잊지 못할 거요." 그는 연못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 집을 팔려고 내 놓았다고 하던데...." "어떻게 아셨죠?" 아나리자는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고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오늘 아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랭훼드 변호사를 만나러 갔었소." 라파엘은 자켓을 벗어 잔디밭 위로 던지더니, 발 베개를 베고 느긋하게 누웠다. 아나리자는 자기도 모르게 발끈하고 말았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세요! 당신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어요.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란 말예요!"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잖소.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당신도 잘 알고 있을텐데" "그렇다면 당신도 알고 있다는 뜻인가요? 대체 당신은 그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죠?" "당신이 태어나는 날부터요. 그 다음부터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왔소" "사실 그때 여기 왔던 것은, 꼬마 아가씨를 만나기 위해서였소. 귀여운 정혼녀를 만나면 내 반항심도 조금은 누그러질 거라고,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셨던 모양이오." "그렇다면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절망의 늪에 빠진 기분이셨겠군요?" 아나리자의 얼굴에 짓궂은 표정이 어렸다. 라파엘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호탕하고 시원스런 소리로 웃었다. "여전히 재미있는 아가씨군." 그리고 나서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덧붙여 말했다. "그 얘기를 당신을 어떻게 받아들였소?" 아나리자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며 얼굴이 찌푸려졌다. "사실은 아직까지도 믿기지가 않아요. 내게는 보람있는 일도 있고 친구도 있어요. 내 말과 집도 있고..... 아니, 있었다고 해야 옳겠죠. 어쨌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생활 전체가 뿌리째 흔들리고 만 거예요. 게다가 내겐 그걸 안정시킬 수 있는 힘이 조금도 없어요...." "그렇게까지 비관할 필요는 없소." 그렇게 말한 라파엘은 바지를 털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나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내로 나가서 해결해야 할 일이 몇 가지 남았소. 변호사도 만나야 하고...오늘 저녁을 식사를 함께 합시다. 우리 두 사람의 처지에 대해 차분히 얘기도 해 보고..... 그러면 몇 가지 해결책은 찾아낼 수 있을 거요.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이런 결혼은 하고 싶지 않소. 그 점은 당신과 같소." 그의 말대로, 이런 결혼은 딱 질색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솔직한 말에 왠지 모욕당한 것 같은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분명히 그의 거만한 말투 때문일 것이다. "알았어요. 하지만 만약에 그 해결책을 못 찾아낸다면요?" 라파엘은 자켓을 집어들어 어깨에 걸치고는 한 손으로 아나리자의 손을 잡고 집을 향해 걸어가게 시작했다. "그때는 죽는 날까지 우리 두 사람의 인생이 길고 지겹고 따분한 것이 될 거요" 그날 저녁 아나리자는 평상시보다 훨씬 정성을 들여 외출 준비를 했다. 길고 윤기나는 브론드 머리카락은 북유럽 여차들처럼 하나로 묶고, 입고 나갈 옷은 회색빛을 띤 하얀 드레스로 정했다. 낙낙하게 늘어져 있는 터틀식 컬러, 주름이 접혀 있는 소매. 그다지 사람의 눈을 끄는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딱 달라붙은 웨스트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스커트가 여성으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마음에 들어하고 있던 옷이었다. 액세서리로는 금색 벨트와 자그마한 금 브로치를 달았을 뿐 화장도 거의 하지 않았다. 매끄럽게 햇볕에 그을은 피부에는 화장이 필요 없었고, 큰 눈과 길고 짙은 속눈썹에 아이샤도우와 마스카라를 바르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장미빛 립스틱을 칠하고 있을 때, 현관벨이 울렸다. 아나리자는 립스틱을 내려놓고, 서둘러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문을 연 아나리자의 모습을 라파엘은 말 그대로 훑어보았다. 금색 샌들을 신고 있는 발 끝부터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 끝까지. "저런! 오늘밤은 다른 남자들로부터 질투와 부러움을 살 것 같은데?" 아나리자도 라파엘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검은색 정장에 새하얀 와이셔츠, 빳빳이 풀 먹인 컬러가 감싸고 있는 목은 갈색으로 그을러 있었다.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것,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남자다왔다. "그렇게 되면 다른 여자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거에요!" 아나리자는 그에게 쏘아붙일 생각이었지만 라파엘은 그런 그녀의 태도가 우스웠는지, 크게 소리내어 웃는 것이었다. 어쨌든 일시적이나마 휴전 상태로 돌입되었다. 아나리자는 웬지 그의 거만한 태도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초조해졌고, 13년 전의 그 일이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수치심과 유감이 반씩 섞여 있는 이 기묘한 기분은 조금이라도 자극을 받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분노로 타오를 것이다. 현관밖에는 재규어라는 이름의 스포츠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라파엘은 운전석 옆자리의 문을 열고서 아나리자가 차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운전만 하고 있던 라파엘이 말을 걸어왔다. "지금은 기분이 좀 어떻소?" 그녀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덕분에 기분이 무척 좋아졌어요. 당신 말처럼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울어버린게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글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는 모르지만." 잠시 아나리자는 골똘히 생각하고 나서 뒷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아버지가 없는 것은 쓸쓸한 일이에요. 이 쓸쓸함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를 잃었다는 슬픔은 조금씩 엷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차는 시내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라파엘은 능숙한 솜씨로 미끄러지듯 자동차 대열에 끼어들었다. "다행이오. 상처가 조금씩 치료되어가고 있는 거겠지. 집 파는 일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조금은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됐소? 물론 말도 함께 팔 생각이겠지?" 아나리자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냉정하게 생각한다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해요. 난 그집과 내 말을 무척 좋아하고 있거든요. 그것을 팔아야 하다니... 그러나 아빠의 병원비가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팔지 않을 수가 없어요." 붉은 신호등 앞에서 차가 멈추었다. "내가 대신 갚겠소." "고맙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빚은 내 책임이니까 내 손으로 해결하고 싶어요" 그 때 신호등이 푸른 색으로 바뀌었다. 라파엘은 가속 장치를 밟았다. "당신이 그렇게 하길 원한다면 할 수 없지만." 혼잔합 가운데를 라파엘은 능숙하게 빠져나갔다. 이윽고 그는 자그마하고 아담한 이탈리아 레스토랑 앞에서 차를 세웠다. "내가 이탈리아 요리를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라파엘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며 아나리자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탈리아 요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잖소. 하지만 이 레스토랑을 선택한 이유는 요리 때문이 아니라 분위기가 맘에 들기 때문이었소." 아나리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그의 마음에 동감할 수 있었다. 조명을 낮춘 실내는 꽤 많은 사람이 있었는 데도 깜짝 놀랄만큼 조용하고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라파엘을 발견한 지배인이 그들쪽으로 다가와서 제일 후미지고 아늑한 자리로 두 사람을 안내해 주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촛불이 부드러운 빛을 흘리고 있었다. 라파엘은 아나리자의 의견은 하나도 묻지 않고 요리를 주문해 버렸다. 웨이터가 사라지자 그는 의자에 편히 기대고 앉았다. "어떻소, 맘에 드오?" "네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아나리자는 그의 말에 순순히 동의했다. 그렇지만 내심으로는 뭘 먹을지 묻지도 않고 음식을 주문해 버린 그의 일방적인 태도가 몹시 못 마땅했다. "이런 레스토랑이 있었다니.... 정말 몰랐어요. 어떻게 이곳을 알게 됐죠?" 라파엘의 푸른 눈동자가 촛불빛을 받아 광채를 내고 있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소, 그래서 오늘 오후에 이 근처 레스토랑을 일주했지. 그런데 이곳 분위기가 제일 낫더군." "나도 마음에 들어요." 아나리자는 생긋이 웃었다. "다행이오. 이것으로 적어도 하나는 서로의 공통점이 생겼으니까, 그런데 과연 더 찾아낼 수 있을까?" 그의 말투는 더 이상 공통점 같은 건 있을리 없다고 넌지시 암시하는 듯했다. 또다시 불안감과 초조감이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다. 주문한 와인이 날라져 왔다. 라파엘은 웨이터의 서비스를 사양하고 직접 와인을 따랐다. "당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행복한 미래가 찾아오기를...." 라파엘이 글라스를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찬사에 아나리자는 얼굴을 붉혔다. 라파엘은 약간 고개를 갸웃하고, 글라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세련된 태도였다. "아나리자, 당신에 대해 말해 주지 않겠소?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이오." 아나리자는 와인잔을 내려놓고 어깨를 치켜올렸다.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것은 없어요. 그러나 무척 행복했었죠. 난 엄마 얼굴을 몰라요. 10살이 될 때까지 아빠가 남자의 손으로 직접 길러 주셨어요. 그 다음에는 기숙학교로 들어가서 숙녀가 되기 위한 여러 가지 일들을 배웠어요. 기숙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이 지방에 있는 대학을 4년 동안 다녔지요. 대학 다니는 동안 교사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작년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해 왔어요. 그런데 바로 일주일 전부터 여름방학에 들어갔답니다." "과연.... 그런데 그만큼 아름다우니까, 남자들이 그냥 놔두지 않았겠지? 당신, 사랑을 한 적은? " 라파엘은 손에 있을 글라스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글라스 안에서는 루비 빛깔의 액체가 촛불빛을 빨아들여 미묘한 빛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조금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던 아나리자의 얼굴이 그 빛을 받아 황홀한 금색으로 물들었다.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없었던 거겠죠. 정말로 사랑에 빠지면 자신도 그걸 느낄 수 있는 법이잖아요?" 라파엘은 얼굴을 들었다. 빨려들어가 버릴 것 같이 깊고 푸른 눈동자가 정면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겠지." 이번은 아나리자가 물어볼 차례였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왔죠? 이 전에 만났을 때는 건축가가 될 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했잖아요?" "지금 마드리드에서 사무소를 개업했소." 무슨 사무소를 개업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건축 사무소를 말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는 건축가? 그것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뭔지는 몰라도, 그에게는 그것보다는 좀 더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항상 죽음과 등을 맞대로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게다가 그 눈동자에 깃들여 있는 표정은, 강철과도 같은 의지를 숨기고 삐딱하게 사물을 보고 있는 듯했다. 때때로 고독한 그림자가 그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표정 때문인지 이 라파엘이란 남자는 무척 가까이 가기 힘든 냉담한 사람처럼 보였다. 분명히 이 사람은 정에 얽매이는 일 같은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저..... 사랑은요?" 아나리자는 망설이 듯이 라파엘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물론 했었소. 그럿도 많이. 나는 벌써 36살이잖소. 그러나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한 것은 딱 한 번 뿐이오." 아주 단호한 말투였다. 아나리자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명치 끝이 죄어드는 듯한 기분..... 이 라파엘의 마음에 그렇게까지 가까이 다가간 여자가 있었다니. 이윽고 요리가 날라져 왔다. 라파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라면 우리 가족과는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거요. 당신, 아버지는 만났었지?" 물론 그 때보다는 훨씬 늙으셨소. 가족이라고 해야 여동생 훌리아, 남동생 마뉴엘, 그리고 아버지의 동생인 마리아 고모. 참 훌리아의 약혼자인 하이먼 함께 살고 있소. 그렇지만 하이머는 일 년의 반은 목장 생활을 하오. 그 쪽 관리를 맡아보게 했거든." "우리집에 비하면 대가족이군요." 요리는 모두 다 맛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아나리자는 마음속으로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생각했던 대로였다. 근처 테이블의 여자들이 라파엘을 자꾸만 쳐다보는 것이었다. 또한 그런 아나리자 자신도 남자들의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모으고 있었다.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은, 꼬냑과 커피를 마셨다. "저..... 정작 해야 할 말은 하나도 하지 못했군요." 아나리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당신 말이 맞소. 보통 상황이라면 일은 간단하오. 아버지에게도 말해 두었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정해둔 결혼 상대와는 정말 결혼하고 싶지 않소. 내 아내가 될 여자만큼은 직접 내가 고르고 싶소." 그 말을 들은 아나리자의 눈은 반짝 빛을 내었다. "참, 아버지가 그랬어요. 내가 당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당신이 원할 때 만이라고요." "하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소." 그 한마디에 아나리자의 마음은 다시 초조해졌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고 했었잖소, 실은 심장 발작이셨지. 아버지도 이제는 늙으셨소.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신다면 그리 오래 사시지는 못할 거요. 지금 아버지에게는 스트레스와 심려가 가장 좋지 않소. 그래서 당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을 때는, 나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었소. 아버지는 나에게 약혼녀로서의 당신을 스페인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소." 그럼 그가 여기까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어길수가 없었기 때문이었구나. 자기 뜻이 아니었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당신 아버지가 건강을 되찾으실 때까지 사실을 숨기고, 임시 약혼녀가 되어 달라는 말씀이시죠?" "맞소. 당신 생각은 어때요? 협력해 주겠소?" 아나리자는 그의 입술을 잠시 바라보다가 푸른 눈동자쪽으로 서서히 시선을 돌렸다. "묻고 싶은게 있어요. 대답해 주겠어요?" "질문에 따라서." 라파엘은 검은 짙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잘 마시지 못하는 와인과 꼬냑 때문인지 조금 취한 기분으로 평상시보다 대담해진 아나리자는 라파엘의 비웃음 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입을 열었다. "당신의 그 푸른 눈동자, 누굴 닮았죠?" 라파엘은 조금 취한 듯 같은 아나리자를 조소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입도 살며시 웃고 있었다. "아버지의 첫번째 결혼 상대는 영국 사람이었소. 그 사람이 바로 내 어머니요." "동생들의 눈동자도 푸른 색인가요?" "동생들은 아버지와 두번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소. 두번째 어머니는 스페인 사람이지. 때문에 동생들의 눈동자는 검은 색이오." "그래요?" 아나리자는 길게 한숨을 지었다. "좋아요" "지금 뭐라고 했소?" "당신에게 협력하겠다고요. 약혼녀인 척 하겠어요. 물론 당신 아버지를 위해서지요." 라파엘은 하얀 이를 보이며 웃었다. "물론 그렇겠지." 그렇게 말한 라파엘은, 천천히 조그만 벨벳 상자를 꺼내어 아나리자 앞에 내려놓았다. "비록 임시이긴 하지만 이것으로 우리는 정식 약혼을 한 거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소. 당신 마음에 들면 좋겠는데, 아나리자." 라파엘이 '아나리자'라는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마음속에서 달콤한 설레임이 솟아올랐다. 웬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름을 불리운 것처럼..... 아나리자는 아무 말 없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조그만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 라파엘 쪽으로 얼굴을 들었다가 또다시 상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 열어봐요." 그라 재촉했다. 아나리자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들었다. 뚜껑을 여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검은 벨벳 위에 놓인 아름다운 반지. 다이아몬드와 에머랄드가 번갈아 가며 배치되어 있는 진귀한 반지가 섬세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이렇게 비싼 것을 받을 순 없어요. 왜...." 말을 계속하려고 했지만 그가 가로막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걸로 바꿔 오겠소. 하지만 괜찮다면 아무 말 말고 끼도록 해요." 그래도 아나리자가 계속 망설이고 있자, 라파엘이 그 반지를 빼어 직접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반지는 꼭 맞았다. 이것은 뭔가의 조짐일까? 아나리자는 자기 손을 들여다보고 나서 라파엘이 볼수 있도록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 손을 잡아 키스했다. "정말 잘 어울려, 아나리자." 라파엘의 눈동자 속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돌아오는 길은 기다지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온화한 분위기 속에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서운한 밤이었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현관까지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안에 들어가 커피라도 들지 않으시겠어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그는 아나리자의 손에서 열쇠를 받아들고 현관 문을 열었다. "푹 쉬도록 해요, 꼬마아가씨." 라파엘은 몸을 굽혀 그녀의 뺨에 살며시 키스했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돌려 재빨리 차로 돌아갔다. 2장 투명한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는 리빙룸으로 벨소리가 울려 펴졌다. 아나리자는 청소하던 손을 멈추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자 노신사 한 분이 서 있었다. 그 순간 아나리자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어머나, 에머슨 아저씨! 연락도 없이 웬일세요?"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와 놀랐니? 하지만 어젯밤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더구나" 노변호사는 길게 닿아내린 아나리자의 머리를 장난하듯 잡아당겼다. 애정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어머, 그러셨어요? 그때 외출했었어요, 라파엘과 같이요." 아나리자는 문을 닫고 에머슨을 리빙룸으로 안내했다. "오늘 오신 건 고문 변호사로서인가요? 아니면 제 얼굴이 보고 싶으셔선가요?" "둘 다지" 에머슨은 피곤한 듯 소파에 앉아 휴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어려운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커피 한 잔 마실수 있겠니? 나이 탓인지 여기까지 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구나." "잠깐만 기다리세요." 아나리자는 주방으로 갔다. "아저씨, 커피와 함께 방금 구워낸 초코칩 쿠키는 어떠세요?" "요녀석, 내 약점을 이용하다니! 내가 초코칩 쿠키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면서. 그리고 보니 그걸 마지막으로 먹은게 요전에 여기 왔을때로구나." 아나리자는 쟁반을 들고 리빙룸으로 돌아와 에머슨 옆에 앉았다. "에머슨 아저씨, 그 어려운 얘기라는게 뭐죠?" 에머슨은 쿠키를 한 개 집어먹고 나서 아나리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이 집을 팔았단다, 건물도 대지도 모두!" "그렇게 빨리요? 아직 부동산 소개소에 얘기도 해 놓지 않았는데.... 난 몇 달은 지나야 팔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나 자신도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거든. 하지만 사겠다는 사람이 예상외로 돈을 많이 내겠다고 하기에 그렇게 하기로 결단을 내린 거지. 그 돈이라면 빚은 전부 갚을 수 있을 거야" "그렇죠, 빚을 갚지 않아서는 안돼죠." 집을 팔아야 하겠다는 생각은 항상 그녀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집이 팔리게 되니까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섭섭했다. 아나리자는 헛기침을 하면서, 솟아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억눌러 참았다. "이 집을 산 사람, 누구죠? 아는 사람인가요?"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더구나.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서 놀라게 할 모양이야. 그러니 그 비밀이 새어나가면 안되잖니. 무척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어." "그래요?" 아나리자는 창가로 다가가, 창 밖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이곳이 이제 내 집이 아니라니.... 도저히 그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가구는 어떻게 됐죠?" "집과 함께 팔았단다. 모든걸 다.... 네 사랑하는 말, 피파도 물론. 그러는 편이 오히려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 아나리자의 입에서 씁쓸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건 그럴 거예요. 스페인에 가 있는동안, 피파를 맡겨둘 곳도 없고.... 돌아온다고 해도, 이제 말같은 걸 기를 여유는 없으니까요." 노변호사는 그녀에게로 다가와, 어깨를 살며시 안았다. "가엾게도, 요즘은 슬픈 일만 계속되는구나. 힘이 되어주실 못해 나도 마음이 아프다." 아나리자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렇게 된 것이 아저씨 때문은 아니잖아요. 난 이제 괜찮아요. 조금 쓸쓸하긴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안락한 리빙룸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피아노 앞으로 걸아가 건반을 눌러 보았다. 문득 어렸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피아노가 치기 싫어 꾀를 부리다가 아버지에게 혼났던 일, 그런 아버지가 무서워 마지못해 피아노 연습을 했던 일.... 그 덕분에 지금은 꽤 어려운 곡이라도 칠 수 있게 되었다. "언제까지 이 집을 비워 줘야 하죠?" "특별히 그런 기한은 없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만약에 갖고 싶은 것 중에서 스페인에 가지고 갈수 없는 것이 있다면, 돌아올 때까지 맡아 주겠다고 하더라" "아주 좋은 사람인 것 같군요." 아나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표현해야 좋을 지 어떨지....." 에머슨은 그렇게만 말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지만 신뢰할 수 있는 상대이기는 하지. 요즘같은 세상에 그런 젊은이는 보기 드문 사람이야." "어머, 젊은 사람이에요? 나는 나이먹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젊은 사람이 누군가에게 집을 선물하다니, 여유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에머슨은 해서는 안될 말까지 해버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쨌든 이 집을 산 사람에 대해서는 걱정 안해도 괜찮을 거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 집을 소중히 다룰 테니까. 그리고 사소한 일은 내가 다 처리할 테니까." 집에 대한 얘기는 이것으로 끝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노신사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어젯밤은 어땠니? 그 스페인 사람, 어떻게 생각했지?" "어려운 질문이군요." 아나리자는 짧게 웃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이었어요. 그래요.... 그 정도라면 아주 멋있는 사람이긴 해요. 하지만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아차릴 수도 없고요. 게다가 툭하면 빈정대더군요. 모든일에 동요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냉정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요컨데 그 사람 없이는 못살것 같은 그런 상대는 아니란 말이구나. 그리고 또 느낀 건 없니?" "글쎄요. 아, 그 사람의 눈동자요! 그 눈동자가 마음에 걸렸어요. 눈의 표정이라고 말하는 쪽이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눈동자를 처다보면." "그래 그래 나도 안다. 웬지는 몰라도, 그 남자는 생명을 가볍게 보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하더구나. 특히 자기 생명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 에머슨도 그녀 말에 수긍했다. "그래요, 저도 동감이에요." "그는 너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나리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 올렸다. "글쎄요, 꽤 원망스럽게 여기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나 때문에 귀잖은 일에 말려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건 네 탓이 아니잖니?" "그래요, 그것은 그도 알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나를 원망하고 있어요. 분명해요. 그의 아버지만 건강해지면 그 약혼은 무효가 돼요. 사실, 그는 나와 약혼할 마음같은 건 손톱 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거든요. 그렇지만 사정이 사정이기 때문에 그도 할 수 없이 있지도 않은 애정을 억지로 꾸며내서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와 약혼을 하게 된 거예요. 모두 자기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예요." "요컨데, 이렇게 됐다는 것이구나. 그는 허위로 가장된 생활을 부득이한 사정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더구나 그런 생활에 혐오감을 갖고 있다라고?" 에머슨은 변호사 기질을 십분 발휘했다. "그래요, 아저씨.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는 나에게 얽매이게 된 거잖아요. 정말 불행한 일이에요." "그가?" "우리 두 사람 다요. 이제 기적이라도 생기지 않는 한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은 없어질 것 같지 않아요." "그러나 웬지 실망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벌써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나?" "어머, 아니에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와 사랑에 빠지다니, 그런 일은 불가능해요. 게다가 우리는 공통점 같은 것도 전혀 없는 걸요. 우리 약혼은 어디까지나 단기간의 휴전 협정같은 거예요." 아나리자는 어젯밤 라파엘로부터 받은 반지를 자기도 모르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 이걸 받았어요." 에머슨이 볼 수 있도록 왼손을 내밀었다. 그는 조그맣게 탄성을 질렀다. "정말 아름답구나! 너에게도 잘 어울리고." 그의 온화한 시선은 아나리자의 손에서 얼굴로 옮겨졌다. "한가지, 쓸데없는 참견을 해도 괜찮겠니?" "네, 물론이에ㅛ. 에머슨 아저씨의 참견이라면 대환영이죠." 아나리자는 그를 쳐다보고 빙긋이 웃었다. "그래, 그렇다면 아나리자, 그에게 찬스를 주도록 해보렴. 엉터리 추측만 갖고 네 마음을 굳게 걸어 잠가서는 안되지. 그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잖니?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단다. 특히 라파엘 샌디에고 같은 남자의 마음을 읽는다는 건 더더욱 그렇고. 그러니까 그에게 기회를 줘 보렴. 성급하게 추측해 버리는 것은 금물이란다." 무슨 말이죠? 그러나 에머슨은 입을 열려고 하는 아나리자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리고는 서류 가방을 집어들었다. "또 가봐야 할 곳이 있단다. 스페인으로 출발할 날이 정해지면 꼭 알려다오." "물론 그렇게 할 거예요." 아나리자는 현관까지 에머슨을 배웅했다. 에머슨은 어젯밤 라파엘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뺨에 살짝 키스했다. "아까 말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달리기 시작한 검은 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나서 아나리자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에머슨 아저씨가 한 말을 잊지는 않을 거지만....그렇다고 사태가 호전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날은 대청소로 하루를 보냈다. 아래층은 물론 이층 침실도 아주 깨끗이 치웠다. 가구 아래로 손을 집어 넣어 멀지를 쓸어 내기도 했고, 가구 위를 털어내기도 했다. 아나리자는 청소를 하면서도 자신이 라파엘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의 그림자를 마음밖으로 몰아내고 청소에 집중하려고 했으나.... 열심히 일한 탓인지, 어두워질 무렵에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채우고 몸의 피로를 풀자, 옷을 다 챙겨 입는다는 것이 귀찮아졌다. 그래서 아나리자는 파르스름한 네글리제만을 걸쳤다. 아직 8시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머리를 정성들여 빗었다. 스페인의 여름이 소문대로 그렇게 덥다면 머리카락을 조금 자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방을 뒤적였으나, 별로 식욕도 없었다. 커피를 한 잔 가지고 그녀는 어두운 리빙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 한구석에 있는 스탠드를 켜자 방 전체가 어렴풋하게 밝아졌다. 피아노로 다가간 아나리자는 매끄러운 건반 위에서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이렇게 이 방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앞으로 며칠뿐, 그렇게 생각하자 또 다시 쓸쓸함이 밀려왔다. 아나리자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브람스의 콘첼토라도 쳐보려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그녀의 모습을 스탠드 불빛이 온화하게 감쌌다. 아나리자는 점점 그 곡에 빠져들어갔다. 그 때 복도 저쪽에서 어렴풋이 사람 발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리빙룸 입구에 라파엘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시선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다 색깔과 같은 그 눈동자, 아나리자는 최면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얼떨결에 의자에서 일어나 불안한 발걸음으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 라파엘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눈 앞에 서 있는 그녀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작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이 가까워졌다. 아나리자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날카로운 충격이 전신을 휘감았다. 라파엘의 입술에 사로 잡힌 것이었다. 이윽고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격렬한 뭔가가 치밀어 올라왔다. 아나리자는 필사적으로 그 키스에 응하고 있었다. 전혀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키스는 처음이었다.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으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저항같은 건하고 싶지 않아! 한참 후 라파엘 쪽에서 입술을 떼었다. 아나리자를 내려다보는 얼굴에서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마치 가면이라도 쓰고 있는 듯했다. "과연! 꼬마 아가씨도 아주 철부지라고는 할 수 없겠는 걸." 그 말 한 마디로 황홀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무슨 의미죠?" "그 말 그대로요." 라파엘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아무 거리낌없이 늘씬한 전신을 훑어보았다. 저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다니, 웬지 그녀는 자신이 천한 여자로 전락해 버린 느낌이 들었다. "집안에서는 항상 이런 모습을 하고 있소? 아니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니오? 전화를 걸고 올 걸 잘 못했군." "실례되는 말, 삼가해요! 당신은 항상 그런 식으로 사람을 빈정대나요?" 그러자 라파엘은 그녀의 왼쪽 손을 거칠게 붙잡고는 그녀 눈앞에다 들이댔다. 그런 다음 자기 턱으로 반지를 가리켰다. "이걸 끼고 있는 한, 우리는 무관계한 사이라고 할 수 없는 거요. 알겠소?" 아나리자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반지는 연극의 소도구에 불과해요. 우린 모두 결혼할 마음 같은 건 추호도 없잖아요." 아나리자는 머리를 쳐들었다. 그렇지만 불같이 타올랐던 분노는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항상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아요. 게다가 오늘밤은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순간 벨소리가 울렸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동료인 존이 책을 돌려주러 온다고 했던 것이 오늘이라는 것을!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라파엘은 조금도 웃지 않고 아나리자의 얼굴을 슬쩍 쳐다본 다음,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제대로 입고 오도록 하시오." 아무 말 없이 따를 수밖에 없는 단호한 말투였다. 아나리자는 침실로 뛰어 올라가, 말다툼의 씨앗이 된 네글리제를 벗어버리고 바지와 스웨터를 걸쳤다. 그리고는 거울도 보지 않고 아래층으로 뛰어내려 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라파엘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예기치 않았던 방문자는 이미 돌아갔소." "오늘 오겠다고 했던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정말이에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명하는 듯한 말투가 되어갔다. 뒤가 켕기는 일도 별로 없었는데. 그의 검고 짙은 눈썹이 '뭐라고?'하고 말하는 것처럼 움찔했다.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거구나! 그렇게 느낀 순간 화가 치밀었다. "내 말을 믿지 않는군요? 좋아요, 그렇다면 나가요! 명령이에요. 당장 이 곳에서 나가줘요!" 그녀는 몹시 화를 내면서 문을 가리켰다. "명령이라고?" 그도 그렇게 쉽사리 물러날 기미는 아니었다. "네, 그래요." 노기등등한 그의 기세에 눌려 박력없는 목소리가 되고 말았다. 단호한 어조로 응수하고 싶었는데. 그는 마치 양해라도 구하듯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그런 태도에는 일부러 꾸민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뻔뻔스러운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저, 잠깐....." 그의 태도에 질려 그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자, 괜찮으시니까 앉으시지." "사양하겠어요." 아나리자는 벌컥 화를 내면서 그 방을 나서려고 했다. "침실까지 쫓아가 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요?" 여유 있는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아나리자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제 자리에 우뚝 섰다. 이대로 나가버리는 쪽이 가슴은 후련할 것 같았지만.... 하지만....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돌아와서 소파에 앉았다. "오늘밤 내가 들른 것은 알려줄 것이 있기 때문이오. 스페인으로 출발하는 날이 결정되었소. 이번 일요일이오." 그는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테이블 위로 비행기표를 꺼내 놓았다. "일요일이요? 그렇게 성급하게는 준비를 다 할 수가 없어요." "변호사에게 듣기로는, 이 집은 벌써 팔렸다고 하던데. 기다가 이곳에서 우물거리고 있을 필요도 없잖소?" "그렇지만 아직 정리하지 않으면 안될 것들이 이것저것 남아 있어요." 아차하는 순간 그렇게 말해버리고 나서, 그것은 그럴듯한 변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이곳을 떠나게 되면 정리하지 않으면 안될 자질구레한 일들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구체적으로 이거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것은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스페인에 가는 일을 그만두게 될지도 모르고...." 난처한 나머지 마음에도 없는 핑계를 대고 말았다. 분명히 라파엘은 불같이 화를 낼 거라고 아나리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밉살스러울 정도로 태연한 척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입을 열었을 때, 어조만은 그걸 숨기지 않았다. "이미 당신은 그렇게 하겠다고 찬성했잖소! 안 그러오? 아버지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드는 일을 당신은 결코 할 수 없을 거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이 서로에게 영구히 얽매이게 된다면 얘기는 달라질 거요. 그 때는 위험도 꺼리지 않을 것이오. 알겠소? " 아나리자는 쓸데없는 말을 한 자신이 창피스럽게 여겨졌다. "네, 쓸데없는 말을 해서 미안해요. 당신 아버지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짓 같은 건 나도 하고 싶지 않아요." 어째서 우리는 얼굴을 마주 대할 때마다, 말다툼을 하게 되는 걸까?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거북한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아나리자는 억지로 입을 떼었다. "커피 드시겠어요?" "호의는 고맙지만 마드리드행 막차를 타지 않으면 안되오. 한 시간 밖에 남지 않았소." 라파엘은 시계를 보고 나서 말했다. "그럼, 스페인에는 함께 가는 게 아닌가요?" 아나리자는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렇소.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 있소."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일' 이라는 단어를 말하기 전에 순간적으로 머뭇거린 라파엘, 그래! 일이라는 건 구실일거야. 그에게는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여자가 있는 거야. 아나리자는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그녀는 라파엘을 현관까지 바래다주었다.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나리자를 돌아본 순간,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의 표정이 희미하게나마 부드러워졌다. 그녀의 턱을 살며시 잡아 자기 쪽을 보게 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파랗고 맑은 스페인의 바다같은 라파엘의 눈동자,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시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하겠소, 꼬마아가씨. 하지만 서로의 오해를 풀지 않으면 좋은 협력 체제는 성립될 수 없는 거잖소?" 아나리자는 머리를 치켜들며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호의는 고맙지만 동정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렇다면 당신 좋을 대로 하지." 라파엘은 또다시 접근하기 어려운 냉정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내가 나간 다음, 잊지 말고 문을 꼭 잠그도록! 알았소?" 그의 차가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아나리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라파엘 샌디에고, 전혀 추측할 수 없는 남자. 금방 다정하고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가 바로 다음 순간 위압적이고 냉랭한 표정을 짓다니.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잊지 않고 현관문부터 잠갔다. 그리고 리빙룸 스탠드를 끄고 이층에 있는 침실로 행했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몰려왔다. 게다가 웬지 불쾌한 기분이었다. 이런 때는 빨리 자는 것이 약이다. 아나리자는 한숨을 쉬면서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3장 스페인까지의 비행기 여행은 지겨울 정도로 길었다. 책을 읽기도 했고 꾸벅꾸벅 졸기도 했지만 문득 정신이 들면 어렴풋이 라파엘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주변에 있는 남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생각해 내고는 라파엘과 비교해 보았다. 그러나 그 만큼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남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반복하고 있는 사이에 아나리자는 깨달은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실은 그 10살 때, 그를 만난 다음부터는 남자와 만날 때마다 이런 식으로 라파엘 샌디에고와 비교하고 있었다는 것 이었다. 분명히 그 때문에 지금까지 한 번도 사랑은커녕 설레임조차 느껴보질 못했던 것이다. 다정한 면과 고압적인 면, 라파엘의 내부에는 상반된 두 개의 성격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런 그를 능가할 수 있는 스케일을 가진 남자는 그렇게 많지 않을 테니까. 조금씩 비행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창을 통해 어수선한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앞으로 몇 달 동안 이곳이 그녀가 살 나라인 것이다. 비행기에서 한 걸음 밖으로 나서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밀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활주로의 아스팔트가 쌩쌩 내리쬐는 뙤약볕을 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눈 앞이 깜깜해지는 듯했다. 아나리자는 어깨끈 하나 없는 노란색 선드레스 위에 자켓을 걸치고 있었지만 이 더위에서는 자켓 같은걸 입었다간 쪄 죽을 것 같았다. 눈부신 태양때문에 눈을 가늘게 뜬 아나리자는, 공항 대합실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무리 속에서 기억이 있는 얼굴을 찾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공항 건물로 들어가 건물내의 어둠에 눈이 적응되었을 때, 그제서야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북적대는 인파로부터 약간 떨어진 구석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자기 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분명히 익숙치 않은 더위 때문일 거라고 필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아나리자가 그를 발견한 것과 거의 동시에, 라파엘도 그녀를 발견했다. 그는 피우고 있던 담배를 가까이에 있는 재떨이에 비벼끄고 나서 그녀쪽으로 다가왔다. "아나리자!"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거의 무표정에 가까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아나리자는 수줍은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여행은 쾌적했소?" 라파엘은 그녀 손을 잡고 터미날 입구로 걸어가면서 물었다. "네, 덕분에요." 대답하는 목소리가 묘하게 들떠 있었다. 웬지 스스로도 다른 사람의 소리같았다 젊은 남자 한 사람이 라파엘을 발견하고 그들 쪽으로 다가와, 빠른 스페인어로 뭐라고 말했다. 그 남자는 라파엘에게 말을 하면서도 아나리자를 힐끗힐끗 훔쳐보았다. 라파엘은 예의를 잃지 않을 정도로 짧게 이야기를 끝냈다. 아나리자를 그 남자에게 소개할 마음은 손톱 만큼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아나지라는 무시를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라파엘은 그런 그녀의 기분 따위엔 전혀 개의치 않고 부리나케 입구로 걸어갔다. "잠깐 기다려요. 나, 세관심사도 아직 받지 못했어요. 게다가 짐도 찾지 못했고" 아나리자는 발걸을 멈췄다. 그러나 라파엘은 멈춰선 아나리자의 등에 손을 대고 앞으로 살짝 밀었다. 그의 손이 등에 닿은 순간, 아나리자는 몸이 뻣뻣이 굳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괜찮소. 벌써 다 해결해 놓았으니까." 두 사람은 주차금지인 공항빌딩 앞에 세워져 있는 은녹색의 메르세데스로 다가갔다. 라파엘이 말한대로 아나리자의 짐은 스페인 소년이 자동차 트렁크에 집어넣고 있는 중이었다. 라파엘은 소년에게 윙크를 한 다음 지페 몇 장을 건네 주었다. 그러자 그 소년은 벙글벙글 웃으며 아나리자의 얼굴을 쑥스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고는, 라파엘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세워 '합격'의 사인을 하고 나서 다른쪽으로 가버렸다. 아나리자는 창피한 나머지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라파엘은 그녀를 차에 태운후에 그녀 옆자리인 운전석쪽으로 돌아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상의를 벗어 뒷좌석으로 던지고 운전석으로 미끄러지듯 올라앉았다. 이번에는 넥타이를 느슨히 하고서 와이셔츠 단추를 두 세개 풀었다. 벌어진 와이셔츠 단추 사이로 햇살에 그을은 믿음직스러운 가슴이 들여다보였다. 차가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나리자는 당황하여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이렇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을 그가 알았다면 큰일인데! "스페인은 항상 이렇게 태양이 뜨거운가요? 무척 더워요." 오랫동안 계속된 침묵을 깨고 아나리자가 입을 열었다. 라파엘은 곁눈질로 힐끗 그녀를 쳐다보고 나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항에서는 인사는 나눴고, 지금은 날씨 얘기도 나왔군. 그럼 다음에는 어떤 화제가 나올까?" 아나리자는 또 다시 기분이 상했다.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창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는 어느 사이엔가 시가지를 벗어나 있었다. 아나리자는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이제 아버지 목장으로 갈 건가요?" "우선 시가지 남쪽으로 있는 작은 비행장으로 갈 거요. 그곳에는 내 경비행기가 있거든. 그걸 타고 고르드바로 갈 거요. 딴 질문은?" 그의 목소리가 너무 쌀쌀맞었기 때문에 아나리자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나리자는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나리자?" "......." 라파엘은 힘들다는 듯 크게 한 숨을 쉬고 길가에 차를 세우더니,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나리자, 나를 봐요." 온화한 목소리로 그가 명령했다. 그러나 아나리자는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는 억센 손으로 그녀의 턱을 쥐고 강제로 치켜들었다. 그런후에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의 입술은 살며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렇게 일생 동안 당신 눈물을 닦아 주시 않으면 안되는 거요, 꼬마아가씨?" 아나리자는 그가 건네주는 손수건을 받아들고 다시 그의 시선을 외면하려고 했다. "자, 그러지 말고 나를 보요. 할 얘기가 있소." "당신 얘기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아요. 그것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했으면 좋겠어요." 아나리자는 훌쩍거렸다. 라파엘은 그녀의 이마에 늘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겨 주었다. "나를 그렇게 미워하고 있소, 아나리자?" 깊이 있는 낮은 속삭임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거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쌀쌀 맞았다가, 바로 그 다음 순간에는.... 다정한 건지...." 마지막 말을 횡설수설하고 말았다. "모를 일이지. 나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데....." 무슨 말인지 덧붙이려고 하다가 그만 둔 모양이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 비행자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메르세데스는 6인승 경비행기 옆에 멈추었다. 라파엘은 아나리자를 차에서 내려준 다음, 재빨리 짐을 옮기고서 그녀를 경비행로 안내했다. 경비행기 좌석에 앉은 아나리자는 라파엘의 움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이 작은 비행기를, 마치 차를 운전하는 듯한 솜씨로 능숙하게 조작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놀라운 일들뿐, 이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을까? 무선기에 이륙허가 신호가 흘러 나왔다. "준비 다 됐소?" 아나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자, 비행기는 굉장한 속도로 활주로를 내닫기 시작했다. 드디어 비행기가 공중에 떠 올랐다. 조종간을 쥐고 있는 라파엘의 믿음직스러운 팔, 전혀 불안감을 주지 않는 능숙한 조종이었다. 아나리자는 마음을 놓고 좌석 등받이에 느긋이 기대었다. 엔진 소리가 너무 요란스러웠기 때문에 이야기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윽고 비행기가 고르드바에 착륙했다. 저녁 8시가 조금 못된 시각이었다. 이미 어둠이 깔려 있는 비행장 밖에서 자동차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번 자동차는 포르쉐였다. "대체 차를 몇대나 갖고 있는 거죠?" 아나리자는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그렇게 물었다. "두대. 한 대는 이것, 또 한대는 아까 마드리드에서 탓던 것. 그러는 편이 훨씬 편리하기 때문이오. 꼭 해 두고 싶은 말이 있는데....." "뭐죠?" 아나리자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버지께서는 다시 만난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지 않다고 여기시도록 해 드리고 싶다는 거요. 요컨대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자는 거지." "지금까지 때때로는 다정한 분위기를 이룬 적이 있었잖아요. 그렇게 하라는 말씀인가요?" 라파엘의 푸른 눈동자가 힐끗 그녀를 들여다 보았다. "아아, 그렇소. 다시 말하면 그런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요. 마음에 안들지도 모르지만 때로는 연극도 하지 않으면 안될 거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아버지를 안심시키고 싶은 거군요?" "맞소. 그러니까 때로는 당신 몸에 손을 댈 수도 있을거고, 사람이 보고 있으면 키스하지 않으면 안될 때도 있을 거요. 그럴때마다 딱딱하게 몸을 경직시키지 말았으면 좋겠소. 공항에서 당신 등에 손을 댔을 때처럼 말이오." "네? 그러지 않았어요." 아나리자는 눈을 크게 뜨고 운전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파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조금 빈정대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니, 어쩌면 움찔했을지도 모르지만 별로 그럴 마음은 없었어요." "당신에게 그럴 마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몰라도 다시는 남 앞에선 그런 행동을 반복하지 말라는 거요." "알았어요. 노력해 볼께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당신에게 들볶이면 나도 참지 못 할 거예요." 자동차 안의 어둠을 뚫고, 미소짓는 라파엘의 얼굴이 보였다. "그거 유감인군. 당신을 들볶는 일은 최상의 기쁨이었는데. 당신 마음을 건드리면 금방 울컥해서 응수해 오거든." 아나리자도 웃었다. 가시가 돋아난 듯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두사람이 친구가 될 수 없을까요?" "무리한 희망이오. 우리 두 사람은 친구처럼은 될 수가 없소." 라파엘은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부정했다. "모처럼 한 얘긴데 유감이군요." 아나리자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렇지는 않소. 스페인 남자들은 거의 모든 여자에게 단순한 우정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었을 뿐이오. 내 말 잊지 말도록 해요." 아나리자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창 밖으로 눈을 돌리자 어둠에 잠긴 경치가 흐르듯이 지나갔다. "가족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주지 않으시겠어요?" 라파엘은 잠시 생각해 보고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어머니는 다르지만 남동생인 마뉴엘, 그는 27이오. 사람을 잘 따르고 붙임성이 있는 아이지. 인간성도 나쁜편은 아니고, 내가 보기에 그 녀석은 여자들이 꽤 따르는 타입이지. 좋은 놈이긴 하지만 당신, 조심하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요. 좋은 사냥감이 왔다고 생각하면 마뉴엘은 금방 당신에게 접근해 갈테니까." "하지만 나는 당신의 약혼녀잖아요?" "이 곳 스페인에서는 약혼한 여자라도 다른 남자들이 접근하는 예가 많소. 얻기 힘든 것을 손에 넣었을 때가 만족감이 훨씬 크잖소?" "그럼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기로 하고.... 그 사람말고는요?" "그 아래 동생은 훌리아, 당신과 나이가 같소. 마뉴엘을 닮아 무척 붙임성이 좋다오. 요 며칠전에 목장 책임자인 하이머 프란시스코와 약혼을 했소. 그는 우리 집의 주인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만날 기회도 많을 거요. 첫 인상은 별로 좋지 않지만 속 마음은 착한 편이오. 그런데 최근에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마음에 걸리는게 있는지 기분이 좋지 않을 때가 많더군." "훌리아는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나요? 아니면 그것도 강제로 결정된 결혼인가요?" 라파엘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 어느 딱 한쪽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거요. 동생도 옛날에는 그를 좋아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사람 마음도 변하니까." "그건 그래요. 하지만 지금도 사랑하게 있겠죠?" 아나리자는 그의 시선이 자기에게로 쏠리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모든 사람이 다 진실된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소?" 아나리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싸움이 아닌 대화를 라파엘과 느긋하게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집은 이 길 끝에 있소." 라파엘의 말에 아나리자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완만하게 경사를 그리고 있는 가로수를 다 돌아가자, 일직선으로 뻗은 자갈길 끝에 전형적인 스페인식 건축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새하얀 건물은 야간 조명을 받아 눈부실 정도로 깨끗해 보였다. "혹시 30분 전부터 이 가로수길이, 이 저택의 드라이브웨이가 아닌가요?" "당신 나라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더군."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자갈이 깔려 있는 길을 걸어 크고 검은 철제문 앞까지 갔다. 라파엘이 그 문을 소리안나게 밀었다. 두 사람이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 길 양쪽에는 갖가지 꽃이 만발해 있었다. 라파엘이 열어 준 육중한 나무문을 통해, 아나리자는 그 저택의 현관에 발을 들여놓았다 나무로 된 현간 바닥은 마치 거울처럼 정성들여 닦여 있었다. 중앙에는 페르시아융단, 벽은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여기 저기에 유화와 금으로 장식된 커다란 거울이 걸려 있었다. 중년이 지난 여자가 두 사람쪽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백발이 섞인 머리카락을 단정히 뒤로 쓸어 올리고, 호리호리한 몸에는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 여자는 라파엘의 두 뺨에 키스를 하고 나서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너라." 그런 다음, 아나리자 쪽으로 손을 내밀면서 말을 걸었다. "네가 아나리자구나? 우리집에 잘 왔다." "아나리자, 이 분이 바로 고모님이오." 라파엘이 설명해 주었다. 아나리자는 마리아 고모의 손을 잡으면서 유창한 스페인어로 인사를 했다. "어머나, 스페인어를 할 줄 아네!" 마리아 고모가 기쁜듯이 말했다. "네, 영어 말고도 다른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하지 못하면 안된다는 것이 아버지의 교육 방침이셨거든요" "하필 왜 스페인어를 택했지?"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라파엘이 그녀를 쳐다 보았다. 그 푸른 눈동자에 자랑스러운 빛을 가득 담고. "스페인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지?" 그는 미소를 띄우며 물었다. "당신이 묻지 않았잖아요." 라파엘은 즐거운 듯 눈썹으 치켜올려 보이고는 다시 고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두 어디 있죠?" 고모는 복도 끝을 가리켰다. "서재에 있단다. 식사하기 전에 가볍게 한 잔 마시고 있는 참이지. 모두를 만나기 전에 거울이라도 한 번 보는게 어떻겠니?" "그럼 그렇게 할까? 아나리자의 방은 그 장미빛 방으로 했죠?" 고모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파엘은 아나리자의 팔을 잡고 복도를 걸었다. 그러자 고모가 잠시 뒤를 따라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저..... 그리고 라파엘, 카르멘이 와 있단다." 의미있는 듯한 고모의 말을 듣고도 라파엘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카르멘이란 사람은 그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아나리자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미리 가르쳐 주셔서 고마워요, 고모." 라파엘은 아나리자를 넓고 긴 복도로 데리고 갔다. 벽에는 유화와 사진들이 나란히 결려 있었다. 그는 카다란 아치형 문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더니 그 문을 열었다. "이 집에 있는 동안 이곳이 당신 방이오." "안내해 줘서 고마워요." 아나리자는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샤워할 시간이 있을까요?" "물론이오. 목욕탕은 방 건너편이오. 나중에 데리러 오겠소. 30분후면 어떨까?" "30분이면 충분해요." 등을 돌리고 걸아가는 라파엘을 향해 아나리자는 망설이면서 그를 불렀다. "라파엘?" "응?"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카르멘이란 사람.... 누구죠?" 그녀는 그렇게 질문하면서 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가버리는게 아닐까 불안했다. 그러나 라파엘은 곧 대답했다. "카르멘은.... 친구요. 당신은 그렇게만 생각하면 돼요." 옆방으로 들어가는 라파엘을 보고 나서, 아나리자는 자기 방으로 눈을 돌렸다. 어느 사이엔가 짐이 옮겨져 있었고, 그 짐을 40대의 여자가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방 전체를 둘러보았다. 벽은 이 방 역시 하얀색이었다. 그 하얀 벽에는 유화 몇 장과 전신을 볼 수 있는 커다란 거울이 걸려 있었다. 바닥에 깔려 있는 융단은 짙은 장미빛으로 푹신푹신하고 부드러웠다. 커튼과 침대 커버도 한 세트로 엷은 장미빛이었다. 짐을 풀고 있던 여자가 일손을 멈추고 수줍은 듯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전 이 집에서 일하고 있는 안젤라입니다." 아나리자도 미소를 보냈다. "처음 뵙겠어요." "목욕 준비라면 이미 다 되어 있어요, 세뇨리따. 목욕하시는 동안 짐을 정리해 두겠습니다." "세뇨리따라뇨? 그냥 아나리자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그리고 내 짐도 그냥 놔둬요. 나중에 제가 정리할 테니까." 지금까지 자기 일은 모두 스스로 해 왔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시중을 받는 게 불안했다. "하지만 이게 제 일이기 때문에.... 혹시..... " 안젤라의 얼굴이 걱정스러운 듯 어두워졌다. "..... 내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건 아니지요?" "당치도 않아요. 다만 난 지금가지 다른 사람의 시중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좀 거북해요. 미안해요." "그렇다면 제가 하녀 다루는 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어떠세요?" 몸집이 작은 안젤라가 빙긋이 웃었다. "네, 그래요. 많이 가르쳐 주세요." 아나리자는 한 번 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장식이 달려 있는 하얀 가구들, 침대는 혼자 자기엔 아까울 정도로 크고 푹신푹신했다. 이 멋있는 방을 찬찬히 바라보며 웃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안젤라가 옷 벗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나리자도 이번만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빌리기로 했다. 긴 여행의 피로에는 뜨거운 목욕이 무엇보다도 좋은 회복제였다. 가능하다면 뜨거운 탕 속에 더 있고 싶었다. 아나리자는 미련을 떨쳐버리고 욕조에서 나와 타올로 전신을 닦았다. 그리고 나서 안젤라가 말끔히 정리해 준 옷장을 열고 엷은 청록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얇고 부드러운 옷감이 몸을 기분 좋게 감싸주었다. 그 감촉을 즐기면서 머리를 정성들여 빗고 아주 엷은 색의 립스틱을 발랐다. 마침 그 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갈색 자켓으로 갈아입은 그가 우뚝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샤워를 한 탓인지 아직 젖이 있었고, 반쯤 단추를 풀어놓은 진한 갈색 셔츠 사이로 믿음직스러운 가슴이 약간 보였다. "준비 다 됐소?" "네." 라파엘은 아나리자의 어깨 너머로 안젤라를 발견하고 미소지었다. "오늘밤엔 아나리자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까, 먼저 자도록 해요!" 안젤라 무릎을 살짝 굽히며 공손히 인사했다. "그렇게 하겠어요." "여러가지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나리자도 안젤라를 돌아보았다. "약속하겠어요, 곧 요령을 익힐테니까 두고 봐요." 문을 닫은 라파엘은 나란히 걸으면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요령을 익할 거라니, 무슨 요령을 말한 거요?" "사치하는 요령요. 예를 들면 하녀의 시중을 받는다든지, 하는 거요." "귀찮았소?" "그렇지는 않지만 익숙해질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두 사람은 긴 복도를 걸어 아까 들어왔던 현관 앞까지 갔다. 그곳을 스쳐지나가자, 멋지게 조각되어 있는 육중한 문이 나타났다. "마음의 준비는 다 됐소?" 라파엘이 물었다. 진심으로 염려해 주는 것 같은 말투였다. 혹시 아까 말했던 것처럼 연극을 시작한 것일가? 아나리자는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대고 심호흡을 해 보았다. "처음 뵙겠어요라고 입을 연 순간, 어쩌면 심장이 터질지도 몰라요." 라파엘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호탕하게 웃으면서 서재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나리자를 서재 안으로 안내했다. 물론 그녀의 허리에 자기 팔을 감고서, 아나리자도 그의 그런 에스코트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서재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녀의 가슴이 세차고 고동치기 시작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정말 눈치채이지 않게 라파엘의 연인 역을 해낼 수 있을까?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라파엘의 아버지인 돈 호세만은 금방 분간해 낼 수 있었다. 그는 옛날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녀 쪽으로 다가와 따스하고 믿음직스런 손으로 그녀의 손을 쥐고서 인사 대신 그녀의 두 뺨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내 아들을 웃게 만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닌데? 저 녀석이 이렇게 소리내어 웃는 건 정말 드문 일이거든.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아가씨가 되었구나." 호세는 아나리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아나리자가 금방 얼굴을 붉히자, 이번에는 호세도 소리내어 웃었다. "게다가 조심성도 많아진 것 같고." 그런 다음, 라파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할 거니? 물론 아버지 말을 순순히 따를 테지?"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는 무척 넓었음에도 불구하고 꽤 안락하게 느껴졌다. 바닥과 벽은 묵직한 느낌을 주는 목재였고, 벽의 두 면은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는 책장이었는데 그곳 모두 빈틈없이 책이 꽂혀 있었다. 그 앞으로는 커다란 책상이 놓였고 건너편 벽에는 페치카가 설치되었다. 페치카 위에 걸려있는 여자의 초상화, 아나리자는 한 눈에 그것이 라파엘 어머니를 그린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림 속에 있는 여자의 눈동자도 라파엘과 똑같이 바다처럼 맑고 푸른 빛깔이었다. 나머지 한쪽 벽은 전면이 유리창이었다. 그 유리창을 통해 넓은 잔디밭과 풀장이 한 눈에 들어왔다. 라파엘은 아나리자의 허리를 안고 페치카 옆의 소파로 다가갔다. 떡갈나무로 만든 티 테이블을 둘러싸듯 놓여져 있는 소파에는 샌디에고가의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아나리자, 여동생 훌리라요." 훌리아는 오빠가 자기를 소개하자, 방긋이 웃으며 가느다란 손을 내밀었다. "이제서야 만나게 되었군요. 정말 기뻐요. 요 며칠 동안 당신 얘기만 하고 있었어요." 따스하게 느껴지는 훌리아의 첫 인상은 두근거리던 아나리자의 가슴을 가라앉혀 주었다. 아나리자는 금방 그녀가 좋아졌다. 결코 미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훌리아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나야말로 만나서 정말 기뻐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훌리아 옆에 서 있는 남자는 그녀의 약혼자인 하이머라고 소개받았다. 악수를 나누었지만 그의 시선에는 전혀 따스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조금 방어 태세를 갖추려는 듯 몸이 경직되자, 그런 아나리자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듯 허리를 안고 있는 라파엘의 손에 힘이 주어병. 마치 '내가 지켜주겠소!'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이머 다음에 일어선 사람은 피부가 거무스름한 잘 생긴 젊은이였다. 그는 아나리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반한 것 같은 눈빛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쳐다보다가 눈알이 빠지면 어쩌려고 그러니, 마뉴엘? 이 여자를 그런 눈빛으로 쳐다봐서는 안된다. 이미 주인이 정해져 있으니까." 라파엘은 농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말투 뒤에 웬지는 몰라도 가시같은 것이 돋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잘 오셨어요. 형수님!"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아나리자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것이었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이런 미인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형, 정신차려 지키는 쪽이 좋겠어!" 라파엘의 눈썹이 움찔했다. "아! 그럴 생각이니까, 너는 안심해도 된다." 라파엘은 그렇게 말한 다음에 마뉴엘 옆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자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이 사람은 세뇨라 카르멘 에레라." 아나리자와 그여자는 서로를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다정하게 하나로 묶은 윤기있는 검은 머리카락, 까맣고 큰 눈동자, 윤곽이 뚜렷한 눈과 코. 나이는 30살 정도로 보였다. 이 여자라면 라파엘의 마음이 끌렸다 해도 조금은 이상한 일은 아닐 꺼야! 카르멘은 품위있게 미소를 지으며 우아한 태도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처음 뵙겠어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으나, 아나리자를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는 날카롭고 냉정했다. 곧 카르멘은 라파엘 쪽으로 몸을 돌려, 느닷없이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이 두 사람은 늘 이런 인사를 나누었을까? 라파엘은 그녀 어깨에 두 손을 대고 재빨리 몸을 떼냈다. 입가에는 긴장된 듯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카르멘, 난 정식으로 약혼했소. 지금까지와는 다르오." "미안해요. 그만 깜박 잊고 있었어요." 카르멘의 검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호세가 아니리자 등뒤에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자, 이곳으로 와서 내 옆에 앉아라, 함께 아버지 얘기라도 하자꾸나." 마리아 고모와 돈 호세 사이에 끼어 앉아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아나리자의 시선은 라파엘에게서 멀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카르멘 앞에 앉아, 고민하는 듯한 눈빛으로 카르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자, 기분이 침체되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런 나의 기분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질투....? 설마! 하지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우울해지는 이 기분은. 이윽고 하녀가 식사 준비를 알려왔다. "이런, 내가 실수를 했구나. 셰리주 한 잔도 권하지 않았다니! 그만 얘기를 나누니라 그렇게 되고 말았어." 돈 호세는 아나리자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세요, 게다가 오늘 같이 피곤한 날은 그런 것 안 마시는 편이 좋아요. 아마 마셨다면 틀림없이 정신을 잃었을 거예요." 돈 호세는 몸을 뒤로 젖히고 큰 소리도 웃었다. 그리고 나서 소파에서 일어나 한쪽 손을 마리아 고모, 다른 한쪽 손을 아나리자에게 내밀고 다이닝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다이닝룸은 긴 형태의 방이었는데, 한쪽 벽은 전체가 거울이었다. 방 중앙에는 묵직한 장방형 식탁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넉넉히 20명 정도는 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장에서 늘어져 내린 6개의 샹들리에에서 화려한 조명이 내리비쳤다. 돈 호세는 테이블 끝 자리를 차지했고, 그 오른쪽에 아나리자 그리고 왼쪽에는 라파엘이 앉았다.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긴 했지만 테이블이 너무 커서 그와 얘기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일일듯 했다. 카르멘은 재빨리 라파엘 옆자리를 차지했고 그 옆으로는 하이머가 앉았다. 돈 호세가 앉은 반대편의 끝좌석은 마리아 고모의 자리였고, 아나리자 옆에는 마뉴엘이, 그 다음에는 훌리아가 앉았다. 금방 요리가 나왔다. 김이 솟아오르고 있는 쟁반에는 스페인 특유의 요리인 파에리야가 담겨져 있엇다. 한 입 먹어보니 맛은 있었지만 식욕이 솟아오르지 않았다. 긴 여행으로 피곤해 있던 참에 잔뜩 긴장하고 라파엘의 가족들 만났기 때문인 것 같았다. 긴장의 연속으로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고 말았으니, 식욕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호세는 아나리자의 글라스에 투명한 스파쿨러 와인을 따랐다. 그리고 사양하려고 하는 그녀를 제지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한번 마셔보렴. 식욕도 되살아나고, 마음도 편해질테니" 마뉴엘이 빙긋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충고 제1조, 샌디에고 집안 사람에게는 고집을 부리지 말 것! 고집 세워 이긴 사람이 하나도 없거든요." 아나리자는 그의 말에 응수했다. "그리고 충고 제2조, 듀란트 집안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렇게 하지 말라고 말하지 말 것! 그런 말을 들으면 갑자기 더 하고 싶어지는 것이 우리 집안 기질이니까요." 그러자 마뉴엘은 '한 잔 드세요!' 하고 말하는 것처럼 글라스를 들고 그녀를 쳐다보며 그녀가 잔을 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런 그의 태도가 라파엘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이쪽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었다. 오빠의 시선을 눈치챈 훌리아가 마뉴엘의 팔을 쿡쿡 찌르면서 아나리자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는 당신을 자기만의 것으로 해 두고 싶은 모양이에요." 아나리자는 그 말을 듣고, 라파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파엘은 저 여자를 세뇨리타라고 소개했던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은 것 아닌가요?" 아나리자는 마뉴엘과 훌리아를 쳐다보며 물었다. "질투하는 거예요?" 마뉴엘이 반문했다. 훌리아는 그런 그를 향해, 말조심하라는 듯 혀를 찼다. "카르멘은 몇 년 전에 미망인이 됐어요." "그렇지만 동정할 필요 같은 건 없어요." 마뉴엘이 다시 끼어들었다. "마흔 살이나 나이가 더 많은 남자와 결혼해서 한 몫 단단히 잡았거든요. 저 여자는 남편이 죽은 그 날부터 형을 쫓아다녔어요. 지금도 그렇구요." 카르멘은 아주 허물없는 태도로 라파엘의 팔에 자기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사이에,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불쾌한 기분이 아나리자를 사로 잡기 시작했다. 식사가 끝나고 커피가 나올 차례가 되자,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마시기 싫은 와인을 마신 탓일까? 하품을 참는 것이 제일 괴로운 일 이었다. 라파엘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알아차렸는지 방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내 모습을 살며시 지켜보고 있었구나! 아나리자는 그제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그때 느닷없이 카르멘이 라파엘의 손을 잡았다. "다른 여자에게 당신을 빼앗긴다면 나는 죽어버릴 거예요!" 카르멘의 눈에는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카르멘의 말로 인해, 잡담을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경악하여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순간 라파엘의 표정이 험악해 졌다. "사과하지 못해!" 카르멘은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로 라파엘을 올려보았다. "왜요? 스페인어잖아요. 저 여자는 못 알아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아나리자는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다 알아들었다. 갑자기 설움이 복받치며 눈물이 솟아 나왔다. 그것이 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라파엘의 얼굴이 눈물도 인해 뿌옇게 흐려 보였다. 그러나 아나리자는 냉정을 되찾고 재빨리 의자에서 일어났다. "사과같은 건 안 받아도 괜찮아요." 그녀는 완벽한 스페인어로 말한 다음, 덧붙였다. "그리고 방이라면 혼자서도 찾아갈 수 있어요." "안돼! 카르멘에게 사과 받을 때까지는 이곳에 있도록 하시오!" 라파엘의 말이 너무 단호했기 때문에 아나리자는 자신도 모르게 제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카르멘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았어요, 사과하겠어요. 미안해요. 스페인어를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재빨리 다이닝룸을 나가 버렸다. 카르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아나리자는 돈 호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웃어 보일 만한 심정은 아니었지만 입가에 겨우겨우 미소같은 것을 띄워 보였다. "스페인으로 불러 주신 것, 감사하고 있어요. 그리고 오늘밤은 정말 죄송해요, 멍하니 앉아 있어서요." "그건 피곤하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감사하거나 사과하거나 그럴 필요는 없단다. 이곳은 네 집이야, 푹 쉬도록 해라." 돈 호세는 의자에서 일어나, 옛날처럼 아나리자의 손을 잡고 그 손에 키스했다. 라파엘에게 에스코트를 받으며, 아나리자는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마리아 고모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훌륭한 식사, 정말 감사했습니다. 세뇨라." 마리아 고모는 빙긋이 웃었다. "모두들 부르는 것처럼 고모라고 부르렴." 그리고 나서 라파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 빨리 방으로 데리고 가거라. 너무 피곤해서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네가 안고 가야 하잖니. 혹시 그렇게 되는 것이 네 희망 아니냐?" 라파엘의 입이 기쁨을 참지 못하듯 살며시 벌어졌다. "그럼 고모 말씀대로 한 번 해 볼까요?" 그 말과 동시에 그는 몸을 굽혀 진짜로 그녀를 앉아들었다.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안 된다고 말할 틈도 없었다. "자, 이제 실례하겠습니다." 라파엘은 웃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다이닝룸을 나섰다. 현관 홀까지 왔을 때, 라파엘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나리자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자, 어떻게 하겠소? 이곳에 내려놓으라고 명령할 거요?" 아나리자는 힘없이 눈을 들며 졸린 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띄웠다. "오늘밤은 좋아요..... 기분이 참 좋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딱 벌어진 라파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사실은 계속 이렇게 당신 품에 있고 싶어요." 라파엘은 아나리자를 안은 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꼬마 아가씨가 와인을 조금 많이 마신 것 같군." "그렇지 않아요!" 아나리자는 입술을 뽀족하니 내 밀었다. "겨우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는걸요. 그것도 아버지가 권하셨기 때문에요." "겨우 한 잔에도 빈 속에는 취할 정도의 양이오. 아나리자, 오늘은 아침부터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 라파엘은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한 손을 뻗어 화장대 위에 있는 스탠드를 켠 다음 그녀를 침대로 데리고 갔다. 침대 위에 막 눕혔을 때, 그의 목을 감고 있던 아나리자의 팔에 순간적으로 힘이 더해졌다. 반쯤 감겨진 졸음이 꽉 찬 눈동자가 라파엘의 입술을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아나리자. 그런 식으로 나를 쳐다보지 말아요." "그런 식이라뇨?" "키스를 졸라대고 있는 것처럼 말이오." "졸라댄 이상의 것을 손에 넣게 되겠지."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라파엘은 자기 목을 감고 있던 아나리자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올리고서 이마를 손가락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걱정 말아요, 그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푹 자도록 해요. 그런 내일 봅시다." 라파엘은 아나리자의 샌들을 벗겨주고 나서 발걸음을 옮겼다. "라파엘!" "응?" "내가 그렇게 싫어요?" "싫지 않소." "그런데 어째서 우리 두 사람은 잘 되어가지 않은 걸까요?" "오늘밤은 좋은 분위기였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그건 모두 연극이었잖아요? 언제 어디서나 사이좋은 척! 척은 어차피 척에 불과해요. 라파엘?" "왜 그러지." "날 정말 싫어하지 않는다고 맹세할 수 있겠어요?" 라파엘은 한숨을 쉬고 나서 침대 옆으로 되돌아왔다. 그가 얼굴을 들여다보았을 때, 아나리자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꿈나라로 반쯤 발을 들여놓은 모양이었다. 그는 미소를 띠고, 그녀의 뺨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당신을 싫어할 리가 있겠소. 아나리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라는 것이 두려운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아나리자는 어느 사이엔가 가볍게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4장 다음날 아침, 아나리자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일찍 눈을 떴다. 어제의 피로는 완전히 풀려 있었다.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장미빛 커튼을 활짝 젖혔다. 넓게 펼쳐져 있는 정원을 보자 날을 것처럼 마음이 상쾌해졌다. 아나리자는 껑충껑충 뛰는 듯한 발걸음으로 목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샤워 후엔 선드레스로 갈아 입었다. 하늘은 눈부실 정도로 파랗고 공기 또한 무척 맑았다. 오늘도 더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그녀는 긴 금발을 리본으로 단정히 묶고 정원으로 나갔다. 신선한 아침 공기와 함께 정원 여기 저기에 피어 있는 꽃들로부터 달콤한 향기가 전해져 왔다. 꽃 사이를 뚫고 가로수와 관목림이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자, 프랑스식 창문으로 된 넓은 테라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테라스도 산책로와 똑같이 바닥이 평평한 돌로 되어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 보니 테라스 앞에는 파란 잔디가 있었고, 그 중앙에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었고, 훌리아 혼자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나리자를 보자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나리자! 함께 아침 식사해요." 아나리자는 잔디밭을 가로질러 테이블의 훌리아 앞자리에 앉았다. "안녕! 정말 멋진 아침이에요." 그녀는 꽃향기를 머금고 있는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셨다. 정말 기분좋은 아침이었다. "무척 빨리 스페인의 포로가 된 것 같군요? 그러는 편이 좋아요. 계속 이곳에서 지낼 거잖아요? 그렇죠?" 아나리자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던 훌리아에게까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되다니...... 아니리자는 미안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오빠에게 들었어요, 학교 선생님이라면서요?" 훌리아는 계속해서 얘기했다. "네. 아직 일년밖에 되자 않았지만 가르치는 일을 무척 좋아하고 있어요." "오빠가 말했는지 모르지만 실은 나도 교사예요." "어머, 그래요? 아직 모르고 있었어요.어느 학교죠?" "저 그것은 ..... 유감이지만 지금은......" 말을 할까 말까, 훌리아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금방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아직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생각해오고 있었어요. 이곳에... 그러니까, 우리 목장 안에다 학교를 세울 거라고요.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 말예요." "학교라면 지금도 없는 건 아니잖아요?" "네, 있기는 있어요, 하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대분분이 교육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아도 그다지 잔소리를 하지 않아요. 또 아이들이란 거의가 학교가는 것보다는 노는 걸 좋아하잖아요, 공부를 하느니 차라리 목장에서 일을 하려고 해요." "그렇군요. 그런데 당신이 세우는 학교라면, 그런 애들도 올 거라고 생각한 이유는 뭐죠?" "글쎄요.... 우선 나는 이곳 사람들을 잘 알고 있어요. 그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죠. 학생수가 많은 공립학교보다 자세하게 가르쳐줄 수도 있고, 단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든 과목을 가르칠 생각이에요. 그러나 가장 힘을 쏟고 싶은 것은, 실제로 일할 때 도움이 될 과목이에요." "정말 멋진 계획이군요. 그런데 왜 실행하지 않는 거죠?" 아나리자는 버터 빵에 손을 뻗었다. "혼자 시작하기에는 조금 벅찬 일일 듯해서요. 적어도 처음에는 혼자 해 내기 어려울 거예요. 그랬는데 이렇게 언니가 와 줘서...." 흥분이 가라앉으며, 아나리자는 현실에 부딪혔다. 확실히 보람있는 계획이었고, 물론 협력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2,3개월! "찬성해 줄 거죠?" 훌리아가 물끄러미 아나리자를 바라보았다. "물론 찬성이에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라파엘과 의논해 보지 않고서는..." 일단을 이렇게라도 말해 둘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미리 오빠에게 물어 보았거든요. 그런데 오빠도 대찬성이었어요. 미안해요,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멋대로 오빠에게 물어 보고 말았어요." 훌리아는 미안해하는 표정에 살며시 미소를 보탰다. "그이가요?" 훌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잔을 들었다. "그것뿐이 아니었어요, 필요하면 일손도 빌려주겠다고 했는걸요. 교과서며 가구며 꼭 있어야 할 물건들도 마련해 줄 거예요. 건물도 생각해 두었어요. 목장 안에 있는데, 언니만 좋다면 오늘이라도 안내하겠어요." "저.... 아무래도 라파엘과 의논해 봐야겠어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당연한 일인 걸요. 사랑에 빠진 여자의 세계라는 건 그 남자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당황스러워하는 아나리자를 훌리아가 의아스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아나리자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라파엘은 아침식사 했나요?" "아까 했어요. 마뉴엘이랑 하이머랑..... 그리고 아마 카르멘도 같이 했을 거예요. 지금쯤 모두 투우장 쪽으로 가고 있을 걸요? 오늘은 소를 선발하는 날이거든요." 아니 뭐라고? 금방 먹은 버터빵이 목에 딱 걸리는 것 같았다. "투우장이라니......?" "우리 집은 투우용 소를 기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목장안에 투우장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죠." "소를 기르고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어떤 소인지는 들지 못했어요, 라파엘은 전혀 얘기하지 않았어요. 투우사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군요." 그 말을 들은 훌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이네, 자기가 투우사면서 왜 그런 얘기를.. 어머! 그것도 몰랐어요?" "못 들었어요....." 목이 바싹 말랐기 때문에 쉰 목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라파엘이 투우사라고?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고 말았군요. 아마 오빠는 화를 낼 거예요. 분명히 때를 봐서 자기 입으로 말할 생각이었을텐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에요. 솔직히 기분이 어때요? 자랑스럽죠?" "자랑스럽냐고요? 불쌍하고 온순한 동물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말예요? 그런 일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어요!" 훌리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불쌍하고 온순한 동물이라고요? 스페인 소를 몰라서 하는 말예요!" "미국에서도 소를 본 적이 있어요. 무척 온순하던데요? 꼼짝 않고 서 있을 뿐, 거의 움직이지도 않던걸요." "아직도 배우지 않으면 안될 것이 많은 것 같군요. 미래의 올케언니. 스페인 소는 세계에서 제일 난폭해요. 소와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투우사도 있을 정도예요. 다친 사람은 헤아릴 수도 없고요. 뾰족한 뿔을 내밀고 그 거대한 몸집으로 돌진해 오는 것을 한 번 봐요. 정면으로 받히면 중상이에요, 중상!" "그럼, 라파엘도 소뿔에 받힌 적이 있나요?" 아나리자는 침을 삼켰다. "투우사라면 모두 경험하는 일이지요. 오빠라고 예외일 수는 없잖아요? 다행히도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래요....?" 라파엘이 난폭한 소와 싸운다는 생각만으로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 지금까지도 투우를 하고 있나요?" "직업적으로는 하지 않아요. 하지만 자선쇼에는 참가하고 있고, 오늘같이 소를 선발하는 곳에도 입회하고 있어요. 보고 싶지 않아요? 우아한 싸움이에요." 투우라니, 그것도 라파엘이 한다고 하니 생각만으로도 섬뜩했으나, 어느 사이엔가 호기심 같은것이 공포를 서서히 밀어내면서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어디 가면 볼 수 있죠?" "내가 데려다 줄께요. 승마할 준비는 되어 있나요?" "바지라면 있지만." "그거면 충분해요. 그럼 옷 갈아 입고 10분 후에 이리고 다시 와요." 아나리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올을 갈아입고 그 테라스로 다시 갔으나, 아직 훌리아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 그녀는 의자에 앉았다. 머리속에서는 커다란 물음표가 네온사인처럼 번쩍거리고 있었다. 라파엘은 왜 얘기해 주지 않았을까? 13년 전 미국에 왔을 때는 분명히 투우사로 활약하고 있었을텐데. '투우'의 '투'자도 꺼내지 않았다니.... 나에게는 알 권리가 없다는 의미일까? 어차피 임시적인 관계에 불과하니까. 어느 사이엔가 훌리아가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챙이 넓은 검은색 모자 두개를 가지고 와 그 중 하나를 아나리자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써요. 습관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고르드바의 태양이 너무 뜨겁거든요." 두 사람은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좁은 샛길로 꺽어져 조금 걸어가자 하얗고 납작한 건물이 나타났다. 마구간이었다. "말을 기르고 있었다면서요?" "그랬는데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팔아버리고 말았어요." 아나리자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아팠겠군요? 말은 가족처럼 느껴지는 존재잖아요." 마구간에 도착하자, 훌리아는 아나리자에게 말했다. "마음에 드는 말을 골라 보세요. 다만 디아로브만 빼놓고요. 그건 오빠말이데, 다른 사람이 타면 가만 있질 않아요." "그래요." 아나리자의 눈동자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띠었다. "그런 눈을 해도 안돼요. 디아로브에게는 장난을 치지 않는 편이 좋아요. 괜히 그러다가는 신상에 해로울 거예요. 그 검은 악마를 한번 타보고야 말겠다는 생각만 갖고 올라탔다가, 지독하게 내팽개쳐저서 일주일 동안이나 절둑거리고 다녔다고요." 아나리자는 소리내어 웃으며 디아로브라고 쓰여 있는 마방을 들여다보았다. "없는데요?" "오빠가 타고 갔을 거예요." 훌리아는 털이 가지런히 난 밤새 말에 안장을 얹고 있었다. 아나리자가 다음 마방을 들여다보려고 하던 찰나였다. "잠깐!" 훌리아가 당황하며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 안은 들여다보면 안돼요." "왜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된대요, 나에게 이유는 묻지 마세요." 훌리아는 반대쪽 마방 문을 열었다. "바빌론은 어때요?" 그렇게 말하면서 훌리아가 끌어낸 것은 갈기가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은 작은 암말이었다. 훌리아의 손에 코를 비벼대며 낮게 울어대는 테도가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아나리자는 각자의 말에 안장을 얹은 다음, 말고삐를 잡고 마구간 밖으로 나왔다. "투우장까지는 어느 정도나 걸리죠?" "금방이에요. 3킬로 정도 되거든요." 투우장까지는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큰길이 닦여져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목초지를 가로질러 가기로 했다. 그들이 달리는 목초지는 마치 풀의 바다 같았다. 상쾌한 바람이 뺨을 어루만졌고, 리본으로 묶은 머리카락은 어깨 뒤로 날렸다. 이윽고 투우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묵직한 나무 울타리가 둘러쳐진 그곳은, 멀리 떨어진 데서도 장내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투우장은 아직 한가로왔다. 갑옷 입힌 말을 탄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어린 황소가 끌려 나왔다. 황소는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말은 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처도 입지 않았다. 이윽고 그 소는 장외로 끌려나갔다. 아나리자가 보기에는 조금도 위험한 일이 아닌 듯 했다. 투우장과 그 주변은 바싹 마른땅이었기 때문에 뿌옇게 먼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투우장을 둘러싸고 죽 늘어선 자동차 행렬, 투우장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었지만 훌리아가 말을 내렸기 때문에 아나리자도 그렇게 했다. "말이 나타나면, 소의 정신이 산란해지거든요. 오늘 테스트에서 합격하지 못하면 투우용 소가 되질 못해요. 그러니까 말은 저곳에 넣어두어야 해요." 훌리아가 가리키는 울타리 안에는 벌써 몇 마리의 말이 들어가 있었다. 소를 선발하는 일은 언제나 이렇게 엄정하게 진행된다고 하였다. 투우장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아나리자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큰 행사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천만에요, 얼마나 큰 행사인데요! 아, 저기봐요. 인기있는 투우사가 저렇게 많이 왔잖아요. 언젠가 자기와 대진할지도 모르는 소들을 보러 말이에요. 게다가 애송이 투우사들이 황소를 상대로 기량을 펼쳐보이는 것도 이 선발전이에요." 훌리아는 가볍게 목례를 하거나 인사를 나누면서 인파를 뚫고 나갔다. 그들이 울타리로 다가서서 안을 들여다 보았을때는, 휴식시간인지 장내는 텅 비어 있었고 소도 보이지 않았다. 아나리자는 물결치는 듯한 인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라파엘의 얼굴을 찾고 있었다. 있다! 그는 그녀의 저쪽 맞은 편에서 옆에 있는 카르멘에게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아나리자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훌리아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어머, 저기 하이머가 있네요. 미안하지만 잠간 이야기하러 갔다와도 괜찮죠?" "물론이에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께요. 무엇이 시작된는지 보고 싶거든요."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소의 선발보다는 더 신경이 쓰이는 듯이 있었다. 도저히 눈을 뗄수가 없는..... 그렇게는 생각하면서도 아나리자는, 라파엘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마치 연인 사이처럼 머리를 바싹 붙이고 있는 카르멘과 라파엘,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스페인에 도착해서 오늘이 첫 번째 날이데도, 이런 큰 행사에 불러 주지 않은 라파엘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들려, 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열살 정도의 남자아이가 그곳에 서 있었다. 다정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 소년도 약간 수줍어하면서 귀여운 얼굴에 웃음을 담았다. "내 이름은 아나리자 듀란트란다, 네 이름은 뭐지?" 세뇨리따에 대한 것은 나도 알고 있어요. 나는 미첼 산체스라고 해요." 소년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서투른 솜씨로 악수를 청했다. "이곳에 자주 오니?" "네. 투우가 있을 때는 꼭 와요. 난 투우사가 될 것이거든요." "왜 그런 것이 되고 싶지?" 소년은 머리가 조금 잘못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아나리자의 얼굴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용기가 없으면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로 결심했어요. 모든 사람이 다 소와 싸울 수 있는게 아니잖아요. 게다가 투우사가 되면 돈도 벌 수 있고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있거든요." 아나리자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여자 얘기를 하기에는 조금 어리지 않을까?" "난 스페인 남자예요! 어릴리가 있겠어요?" 아나리자는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앗다. "목장에 살고 있니, 미첼?" "네, 아버지가 이곳에서 소를 기르고 있어요." "나이는?" "열두 살요." 마치 이제는 어른이에요라고 뻐기는 듯한 말투였다. "그런데 학교에 안가도 괜찮을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신 거예요? 학교라고요? 그런 건 전혀 필요 없어요. 난 투우사가 될 거니까요!" "하지만 투우사가 된다해도 벌어들인 돈을 계산하지 못하면 안되잖아? 게다가 러브레터도 써야 하고." "그런 건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하게 하면 돼요." 소년은 투우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쉿! 조용히 해요, 금방 시작될 거예요. 돈 라파엘은 언제나 제일 먼저 나오죠. 저기 봐요, 내 말이 맞죠?" 미첼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라파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투우장 한가운데 서 있는 라파엘은, 소가 나올 출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짧은 검정 자켓을 입고 투우용 모자를 쓴 늠름한 모습, 그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미첼, 왜 라파엘은 아까 나왔던 사람들처럼 말을 타지 않은 거니?" "지금은 암소를 상대로 하는 투우이기 때문이에요. 아까 나왔던 소는 황소였고요. 저렇게 해서 용기가 있는지를 테스트하는 거예요. 투우용 소는 용감해야만 하거든요. 황소는 두 살이 되면 그런 테스트를 받아요. 하지만 황소를 테스트할 때는 반드시 말을 타고 하지요. 망또는 사용하지 않아요. 황소는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망또를 들고 상대했던 사람 얼굴을 절대로 잊지 않거든요." "그럼 황소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망또가 아니라 사람 얼굴이란 거니?" "그래요. 적이라는 것을 알면, 황소란 놈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향해 돌진해 가죠." 그 이야기를 듣고 오싹하는 순간, 장내에서 와- 하는 환성이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아나리자의 시야에 무서운 광경이 달려들었다. 크고 새까만 것이 굉장한 기세로 달려나온 것이었다. 목주위의 근육은 부풀대로 부풀어 있었고 뒷발로 땅을 찰 때마다 복부가 출렁거렸다. 작고 사나운 눈에 상대를 포착했는지 암소는 라파엘을 향해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돌진력이었다. 아나리자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이대로 그냥 놔둔다면 라파엘은 소뿔에 받혀 죽어버릴지도 몰라. 아니리자는 공포에 사라 잡혔다. 비명도 지를 수가 없었다. 너무 두려운 나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아나리자는 라파엘이 망또를 들고 있다는 것을 겨우 알아차렸다. 라파엘은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손목만 사용해서 망또를 흔들었다. 암소는 거칠게 콧김을 내뿜고서, 보기만 해도 질릴 것 같은 뿔을 쳐들고 망또를 향해 돌격해 갔다. 흙먼지가 장내를 가득 메웠다. 아나리자는 투우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미첼, 암소가 나올 거라고 했잖니?" 목소리가 떨렸다. "맞아요. 저게 암소예요. 암소라기 하니까, 뿔이 짧고 성질도 온순할 거라고 생각하셨나 보죠?" "그래, 그렇게 난폭하리라고는...." 그러자 미첼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암소도 황소만큼이나 거칠고 사나워요. 아주 위험한 동물이죠. 간혹 가다가는 황소보다 센 놈도 나오는걸요." 돌격하던 암소는 방향을 바꿔 서서, 망또를 들고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정말 이해를 못하겠어. 뭣 때문에 이런 걸 하는 거지? 단순한 놀이에 불과하잖아?" "투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미국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는 스포츠니까 그럴 수밖에." 미첼은 혀를 몇 번 차더니, 마치 겁장이 동생을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강한 황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강한 어미소가 필요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방법으로 암소의 용기를 시험해 보는 거예요. 여기서 좋은 소라고 판명이 나면, 투우에는 나가지 않아도 용감한 황소와 교배를 시킨다는 말씀이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물론 교배시킨 황소도 테스트를 받아요. 황소에게도 용기가 필요하니까요." 그의 설명을 듣고 있는 사이에도 아나리자는 투우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암소가 다시 돌진해 왔다. 이번에는 좀더 가까이 접근해 왔기 때문에 오른쪽 뿔이 라파엘의 옆구리를 스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자켓이 소리를 내며 찢어지고 말았다.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아니라자는 정신을 잃을 것처럼 초조하였다. 그러나 눈 앞의 광경을 본 순간, 정신을 잃을 때가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돌진하던 암소가 방향을 바꾸더니, 그 바로 다음 순간에 또 다시 달려드는 것이었다. 라파엘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소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윽고 그 암소가 1미터 정도 앞에서 다가왔을 때, 그의 망또를 따라 돌진 방향을 바꾸어 굉장한 속력을 내면서 라파엘의 허리 옆으로 빠져 나가버렸다. 그러자 라파엘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암소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망또를 팔에 걸치고, 아주 태연한 자세로 투우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소가 뒤쫓아 오는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 여유만만한 퇴장이었다. 아나리자는 뒤로 돌아 투우장 울타리에 기대어 섰다가,주르르 미끄러지며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무릎이 덜덜 떨렸기 때문에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동정하듯 미첼이 쳐다보고 서 있었다. "미국 사람이란 정말 가련한 존재군요. 하지만 세뇨리따, 저 사람의 신부가 되려면, 투우에도 익숙해져야만 해요." 아나리자는 콧등에 주름살을 지으면서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미첼은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내어 웃었다. "다음 것도 볼 거죠?" "그만 두겠어.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심장이 파열해버릴 것 같아." "부탁이니, 제발 또 봐요. 네?" "정말 보고 싶지 않아." "제발.... 제발 더 구경해요! 빨리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해줘요." "그래, 알았어. 또 보기로 하지." 결국 아나리자는 그가 하자는 대로하기로 했으나, 미첼이 왜 그렇게까지 다음 투우에 얽매이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소년은 너무도 기쁜 듯 아나리자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고마워요! 그럼 나, 이제 가봐야 해요." 미첼은 꾸벅하고 고개를 숙이더니 북적대는 인파 사이를 뚫고 민첩하게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아나리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 아침이 훌리아가 말했던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미첼은 순진하고 머리도 좋은 듯 했다. 그런데도 그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미첼같은 아이는 아주 조금만 이끌어 주면 더 멋진 인생을 손에 넣을 수가 있을 텐데. 조금이나마 그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검은 그림자가 앞을 가로 막아섰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화난 목소리. 라파엘! 아니리자는 서서히 눈을 들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투우용 부츠가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은 팽팽한 넓적다리와 긴장된 허리 그리고 넓은 가슴...... 마지막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파란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훌리아가 데리고 와 줬어요. 그러면 안 되나요?" 아나리자는 눈부신 태양 빛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오기를 바랐다면 내가 오라고 했을 거요." 고압적인 자세만큼 화가 나는 일은 없다. 아나리자는 반사적으로 말대꾸를 하려고 하다가, 자기 위치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그를 우러러보면서 말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기울어지는 형세였다. 아나리자는 벌떡 일어났다. "이런 행사가 있는데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면서,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거죠?" "내가 말해 줬다면 오지 말라고 했어도 왔겠지? 난 당신이란 사람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거요." "그건 그렇다치고라도 정말 너무 했어요. 투우를 한다는 것 정도는 가르쳐줬어도 좋았을 텐데, 안 그래요? 훌리아에게 들어서 알았어요. 아마 나를 이상한 약혼녀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자기 남편이 될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으니 말예요!" "하고 있었던 거지, 하고 있는 건 아니오. 지금은 건축기사요." 라파엘이 정정했다. "어머, 그래요? 내가 아주 큰 실례를 하고 말았군요! 과연 당연한 일이죠. 그것이 얘기해 주지 않았던 이유인가요? 하지만 난 그 사실을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어요!" 라파엘의 눈동자에서는 어느 사이엔가 번뜩이던 분노는 사라지고, 그 대신 염려하는 듯한 표정이 담겨져 있었다. "적당한 시기에 직접 내 입으로 얘기해 줄 생긱이었소. 그 점은 믿어줘요.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알리고 싶지는 않았소. 이런 건 미국 사람이 보기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라파엘은 투우장을 가리켰다. "당신 말대로, 여기 이렇게 서 있는 미국 여자는 더더욱 머리가 나빠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해요. 대체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죠? 아까 조금만 잘못했으면 큰 일을 당할 뻔했잖아요. 정만.... 미치광이 같은 짓이에요!" "그것 참, 심려를 끼쳐드리고 말았군요!" 라파엘은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나는 틀림없이 당신이 소를 응원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그렇게 해 줄 걸 잘못했군! 아나리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라파엘을 째려보았다. 내가 그렇게 걱정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당신이란 사람과는 도저히 얘기를 나눌 수가 없어요!" 라파엘은 미소를 지으면서 아무 말 없이 투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면서 냉정하게 돌변했다. 아나리자도 그를 따라 투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이럴수가!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미첼이 망또를 들고 투우장 중앙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소가 나올 곳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아나리자는 무의식중에 라파엘의 팔을 잡았다. "저, 아이를 나오게 해요!" 아니, 저 아이는 무척이나 투우사가 되기를 원하고 있소. 그런데 투우사가 되려면 이렇게 해서 훈련을 쌓는 것 밖에 방법이 없거든. 고작해야 땅에서 몇 번 구를 거요. 죽지는 않으니까 걱정마시오. 저 아이에게는 작은 소를 내보낼 테니까" 라파엘은 인정머리없게 대답했다. 장내로 뛰어나온 소는 확실히 아까 나왔던 것보다는 훨씬 작았지만 소년의 체구에 비하면 절대 작은 소가 아니었다. 미첼은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돌격해오는 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소가 바싹 다가오자, 약간 움찔은 했지만 라파엘이 했던 것처럼 망또를 재빨리 흔들어 보였다. 아나리자는 자신도 모르게 심호흡을 하였다. 소가 소년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번의 성공으로 자신을 얻었는지, 그 다음부터 미첼은 능숙한 솜씨로 소를 다루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기 실력을 과신했는지 망또를 거칠게 흔드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소는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아나리자가 비명을 지르기 전에 그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소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린 다음, 능숙한 솜씨로 출입구로 유도해 갔다. 소를 투우장에서 내보내자마자 라파엘은 넘어져 있는 소년 옆으로 뛰어갔다. 미첼은 있는 힘을 다해 일어나 앉아서는 뿔에 받힌 배를 손으로 만져보고 있었다. 다른 몇 명의 남자들도 울타리를 뛰어 넘어 미첼 쪽으로 몰려갔다. 라파엘은 날카로운 어조로 두세 가지 질문을 하고 나서 소년을 일으켜 세웠다. 미첼은 순간적으로 휘청거리며 몸을 앞으로 구부렸지만 결국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년을 격려하는 박수 갈채가 장내를 메웠다. 아나리자는 투우장 입구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 아이를 위로해 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북적대는 인파 저쪽에서 창백한 미첼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그쪽으로 가려던 그녀는 커다란 라파엘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냥 놔둔는 게 좋을 거요. 저 아이에게도 프라이드가 있으니까. 투우사가 되기 위해서는 한두 번 정도는 소에 받히지 않으면 안되오. 그 덕분에 생명을 잃지 않는 경우도 있고." 아나리자는 세차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냉정해질 수 있죠? 저 아이, 잘 못했으면 큰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르잖아요!" 라파엘은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두 손으로 잡은 다음, 자기쪽을 보게 했다. 그리고 나서 한숨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나리자, 당신은 투우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소. 그건 당신도 인정할 거요. 그러니까 지금은 아무말 말고 모르는 척 하도록 해요. 당신이 저 아이를 위로해 준다면, 오히려 저 아이는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될 뿐이어. 당신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겠지?" "그건 그렇지만.... 하지만...." "그 뒷말을 없는 말로 합시다. 꼬마아가씨, 혹시 또 화를 내는 거 아니겠지?" 라파엘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문득 그녀는 어느새 자신도 미소를 띠고 있음을 알았다. "마음같아선 한 방 먹이고 싶지만 오늘만은 참겠어요." "좋아좋아, 착한 꼬마아가씨!" 라파엘은 재빨리 몸을 굽혀 아나리자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럼 잠깐 실례하겠소. 미첼과 조금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 이런 식으로 별안간 키스를 하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다정해지기도 하고, 정말 모를 사람이군! 아나리자는 미첼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라파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카르멘의 모습이 그녀 시야로 파고 들었다. 카르멘은 아나리자를 꼼짝않고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리자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라파엘이 사랑하고 있는 상대는 바로 저 여자, 카르멘이다! 그것을 생각해 내자, 바로 전까지 느끼고 있었던 만족감이 파도처럼 스러지는 것이다. 마음이 텅빈 듯한 기분,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운 기분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아나리자는 펄쩍 뛸 정도로 놀라. "미래의 형수님이 여기 계셨군요. 그런데 왜 갑자기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으시는 거죠?" 아나리자는 마뉴엘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말 슬픈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럼 화제를 돌리죠. 날씨 얘기는 어떻겠어요? 자, 시작합시다. 오늘 참 좋은 날씨죠? 무척 더워질 것 같긴 하지만...." 그는 아나리자를 즐겁게 해 주려는 둣 원맨쇼를 했다. "그래요. 내일은 어떨까요?" 아나리자는 웃으면서 그의 말에 응수했다. 두 사람이 배꼽을 쥐고 웃고 있는 곁으로 카르멘이 다가왔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요염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 사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남자를 유혹하고 있는 것 같군. 라파엘이 보면 뭐라고 할까?" "카르멘, 그만 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정체가 드러나고 말 테니까." 마뉴엘이 끼어 들었다. "이 일에 마뉴엘은 상관하지 마! 이 여자는 내게서 라파엘을 뺏어가려 하고 있단 말야. 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을걸. 그가 사랑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나니까!" 카르멘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아나리자의 머리카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 머리카락을 뿌리채 뽑아버리고 말겠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카르멘의 마지막 말이었다. 정말로 그가 사랑하는 있는 것은 카르멘이다. 그러나 머리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 직접 듣는 것과는 쇼크의 크기가 다르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될 텐데.... "솜씨를 한 번 두고 보겠어. 신경과민 아가씨가 언제까지 그의 마음을 묶어둘 수 있을지를 말야. 그거 정말 볼만하겠군. 그렇지만 투우도 제대로 보질 못하는 걸 보면, 그의 열이 의외로 빨리 식을지도 모르지." 그의 열이 식는다고? 아나리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카르멘은 우리 계약을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그래! 라파엘은 우리가 결혼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그녀에게 말해 주지 않은 거야! "말도 않되는 소리는 이제 좀 그만해요! 한 마디라도 더하면 오빠한테 다 말해 버리겠어요!" 어느 사이엔가 훌리아가 돌아와 있었다. 훌리아는 매섭게 화난 표정으로 카르멘을 쏘아보고 있었다. "아니, 지금 이 여자 편을 드는 거야?" "그래요. 이 사람은 내 언니가 될 사람이니까, 당연한 이치잖아요?" 카르멘은 훌리아, 마뉴엘 그리고 아나리자의 얼굴을 한차례 훑고 나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훌리아는 미안한 듯 아나리자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혼자 있게 한 것이 잘못이었어요. 이제 돌아 갈래요?" "그래요. 심장을 멎게 할지도 모르는 생각은 이것으로도 충분해요." "그 심정 나도 이해해요. 그럼 시간도 있으니 돌아가는 길에 학교 후보지로 생각해 놓은 곳에 한 번 들러 볼래요? 우리가 없어도 오빠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을테고...." "내가 어떻게 한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라파엘이 다가왔다. "언니에게 학교 건물로 사용할 곳을 보여 주고 싶어서. 오빠, 괜찮지?" 훌리아는 라파엘에게 미소를 지었다. "아, 학교얘기구나. 난 괜찮아." 라파엘은 아나리자를 쳐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아나리자, 당신도 벌써 얘기를 들었소?" "네, 당신이 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의외였거든요." "당신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훌리아, 나도 함께 가보고 싶자만 오늘은 좀 힘들 것 같구나. 마뉴엘, 너는 어떻게 할거니?" "글쎄..... 소 낯짝을 보는 것도 이제 싫증이 났고..... 난 아름다운 여성들과 함께 가겠어. 기분 전환이 될 테니까." "그러렴." 라파엘은 다시 한 번 아나리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오늘은 함께 소풍을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신이 보다시피 지금 내가 이렇소. 그러니까 소풍은 내일로 연기합시다.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소." "기대하고 있겠어요." 사실은 소풍 그 자체보다도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훨씬 더 기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너희들도 함께 가는 거다, 룰을 잊어서는 안되니까." 라파엘은 마뉴엘과 훌리아에게 미소를 지었다. "룰이라뇨?" 아나리자는 세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훌리아가 설명해 주었다. 최근에는 조금씩 변하고 있긴 하지만 스페인엔 지금도 봉건적인 면이 남아 있어요. 특히 결혼도 하지 않은 남녀가 적당한 들러리도 없이 외출하게 되면 대단히 이야기 거리가 되거든요. 더더욱 여자에게는 불명예스런 일로 생각되고 있어요." 너희 둘이, 내 약혼녀에게 이 지방 습관들을 얘기해 주지 않겠니? 고르드바와 안다르시아엔 아직도 성가신 룰이 남아 있으니까 알아 두는 게 좋을 거야." 라파엘은 그렇게 말하고서 투우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뭔가 더할 말이 있는지, 되돌아왔다. 아나리자 옆까지 온 그는 갑자기 그녀의 턱을 잡더니 재빨리 입술에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사람들 면적에서의 애정 표현도 이 지방 법도의 한가지이거든." 라파엘은 장난어린 미소를 남기고 이번에는 정말로 가버렸다. 그의 넓은 어깨가 인파 속에 묻혀버렸다. 아나리자는 그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도저히 그의 행동은 연극인지 진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머리 속으로는 연극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다정한 말과 행동을 보면 진심처럼 가슴에 와닿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나리자는 한 번 더 한숨을 쉬고 나서 훌리아와 마뉴엘을 쳐다보았다. 자, 이제 가요." 아나리자는 그 두 사람과 함께 말을 타고 목초지를 달렸다. 한참 나아가자 돌이 깔려있는 샛길이 나타났다. 집의 반대 방향으로 그 샛길을 따라가니 길 한쪽 옆 풀밭 위에 벽돌집 한 채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예요. 옛날에는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몇 년전에 모두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나서는 쭉 빈집이었어요." 세 사람은 집 옆에 있는 나무에 말을 매놓았다. 훌리아와 마뉴엘은 지체않고 집안으로 들어갔지만 아나리자는 잠시 밖에 서 있었다. 무성한 풀밭 위에 우뚝 서 있는 벽돌집, 그 벽을 타고 담쟁이덩굴이 뻗어 올라갔다. 녹색 잎사귀가 달려 있는 덩굴이 있는 반면 누렇게 마른 잎이 두세 장 있는 덩굴도 있었다. 잠시 후, 아나리자도 집안으로 들어섰다. 실내는 어두컴컴 했다. 그 자리에 잠시 멈추서서 있을 때, 훌리아가 말을 걸었다. "어두운 건 걱정 마세요. 몇 군데 벽을 뚫어 창을 낼 생각이거든요." 눈동자가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되자, 아나리자는 실내를 둘러보았다. 막힌 곳이라곤 없이 훼덩그렁한 실내 한가운데 테이블 하나가 외롭게 놓여 있었다. 가구라고 부를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창만 만들 수 있다면 어떻게든 시작은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실내도 넓어서 두 반은 그 반대방향으로 앉히는 거예요. 그러면 고학년과 저학년으로 나눌 수 있겠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훌리아는 기쁜 듯이 말했다. "하지만..... 만일 우리 두 사람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죠? 예를 들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든가...... 그렇게 되면 혼자서도 해나갈 수가 있을까요?" 아나리자 자신이 앞으로 이삼 개월만 지나면 이곳을 떠나갈 사람이기 때문에 걱정이 앞섰다. 그녀가 떠나게 되면 그 뒷일은 모두 훌리아가 맡아야 할 테니까. "그런건 괜찮아요. 문제는 학교를 시작한 뒤 처음 몇 주일 동안일 테니까요. 아마 몇 학년을 동시에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수업준비 하는데 힘이 꽤 들겠지만 아이들이 학교 생활에 익숙해지고 우리도 어느 정도 가르치는 요령만 깨닫게 되면, 혼자서도 해나갈 수 있을 거예요. 정 안 된다면 다른 사람에게 협조를 구할 수도 있잖아요?" "내가 보기에 제일 큰 일은, 이곳의 청소라고 생각하는데...." 마뉴엘이 끼어들었다. 아나리자와 훌리아는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마뉴엘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훌리아와 아나리자를 쳐다보다가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안돼, 안돼! 자기 학교는 자기 손으로 치워야 해. 미안 하지만 일이 있다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어. 그럼 이따가 집에서 봅시다!" 마뉴엘은 허둥지둥 말에 올라 앉아 전속력으로 달려가 버렸다. 훌리아와 아나리자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배꼽을 쥐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말도 하지 않았는데, 미리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에요." 훌리아는 숨찬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웃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하지 않으면 안될 일들을 생각하면, 웃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아나리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이라도 조금 청소해 두는 편이 좋을지 모르겠군요." "마침 어제 청소 도구를 갖다놨는데, 정말 잘 됐군요!" 대청소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마루 구석구석을 쓸어내고 벽을 닦았다. 두 시간 정도 그렇게 청소를 하자, 두 사람은 땀에 흠뻑 젖은 데다가 먼지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이대로 풀에 뛰어들고 싶은 기분이에요. 언니는 어때요?" 훌리아가 말했다. "나도 동감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어요. 첫째, 나는 수영을 못 한다는 것. 둘째, 그렇기 때문에 수영복 같은건 갖고 있지 않다는 것!" "두 번 문제는 걱정 마세요. 손님용 수영복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첫 번째 문제는..... 솔직이 깜짝 놀랐어요. 미국 사람들은 모두 수영을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맞아요. 지금 시대에 수영을 못 한다는 것은 천연기념물처럼 희귀한 일이죠. 하지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수영을 배울 나이도 아니고...." "그렇지 않아요. 수영을 배우는 데 나이가 어디 있어요? 오빠가 금방 가르쳐줄 거예요. 그는 수영을 뛰어나게 잘 하거든요." "보기에도 수영을 잘 할 것 같아요." 아나리자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한 번 라파엘을 사랑하게 되면 백 명의 남자, 아니 이 세상 어느 남자라도 마음에 들지 않을 거예요." 아나리자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카르멘 얘긴가요?" 훌리아는 아나리자의 얼굴을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카르멘? 아나리자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잠시 갈팡질팡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 그녀 귀를 스치고 지나갔기 대문이었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 말고 또 누가 있다는 말인가? 맞아, 훌리아 말대로 카르멘 얘기야. "다만 카르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에요." "한가지 말해 둘게 있는데.... 그렇게 맹목적으로 카르멘을 동정하지 마세요. 그 여자는 언니와 오빠를 갈라놓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단 말예요. 절대 방심하면 안돼요. 지금 그 여자가 우리 집을 들락거리고 있는 것은, 죽은 그 여자 남편과 우리 아빠가 친한 사이였기 때문이에요. 그런 관계만 아니라면, 벌써 옛날에 절교했을 거예요." "하지만 라파엘은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 것 같던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오빠는 그 여자의 참 모습을 잘 모르기 때문이에요. 오빠 앞에서는 언제나 가식적인 행동만 하거든요 거기다 그 여자.... 아름답잖아요? 남자란 아름다운 여자에게는 약한 법이고.... 안 그래요?" 아나리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건 그래요. 하지만 그 두 사람은 더 깊은 관계일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카르멘이 오빠의 연인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 그래요....." 아나리자는 '연인'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숨을 죽였다. "그건 나도 뭐라 말할 수가 없군요. 사실 카르멘은 그런 기분을 갖고 있을 거예요. 그러나 오빠 마음은 나도 잘 몰라요. 오빠는 자기 마음속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내 보이지 않거든요. 오빠가 자기 감정을 드러냈던 것은 딱 한 번뿐이에요. 부모들끼리 정혼한 상대와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반항했을 때였죠." "내 얘기군요." "상대가 누구였든, 오빠는 순응하지 않을 거예요. 난 오빠의 그런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어요. 두 사람, 결혼할 생각이 아니죠?" "그럼 다 알고 있었나요?" 아나리자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렴풋하게요. 역시 그랬군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요. 두사람 모두 아빠를 위해 그러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요" 훌리아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한숨을 쉬면서 아나리자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훌리아도 그녀를 따라 옆에 앉았다. "깜짝 놀랐어요. 하지만 오히려 마음은 편하군요. 이제 당신에게는 거짓말 안 해도 될 테니까요. 정말 양심에 걸려 견딜 수가 없었어요." 훌리아는 이해할 수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혹시 오빠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요?" "당치도 않은 얘기예요!" 당황한 아나리자는 딱 잘라 부정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자만요. 오빠는 오랫동안 원하는 상대를 원하는 시간에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생활을 해왔어요. 투우사의 특권 같은 거죠. 투우사가 스페인에서는 무척 인기가 있거든요. 그 때문인지, 오빠는 사랑이다 연애다 하는 것에 이상하게 냉담해져 버리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오빠를 사랑해 봤자 마음에 상처만 남을 뿐이에요." 그녀 말을 듣고 보니, 라파엘이 했던 말이 새삼 떠올랐다. 그래, 라파엘도 그 비슷한 얘기를 했었어. "라파엘에게서 들은 얘긴데, 그에게는 진심으로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다면서요? 그 사람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없나요? 혹시 죽은 것 아니예요?" 훌리아는 눈살을 찌푸리고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했으나, 결국은 단념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이 되어 주지 못할 것 같군요. 짚이는 일이라곤 아주 옛날에 있었던 아빠와 오빠의 격한 언쟁 정도예요. 내가 열 살이 될까말까 했을 무렵이었는데, 그때 일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요. 어떤 여자가 원인이었는데,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오빠는 그다지 집을 가까이 하지 않게 되었죠." 틀림없다. 그에게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라파엘은 두 번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좋아한 상대라면, 그 여자가 죽어버렸다거나 다른 어느 남자와 결혼해버렸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왜 아버지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결혼해 버리지 않았을까? 라파엘이란 남자는 한 번 결정한 일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기필코 해버리는 사람인데.... 그런 그가 어째서 그 여자를 단념한 것일까? "자,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요. 아마 오빠도 돌아왔을 거예요." 생각에 잠겨 있던 아나리자에게 훌리아가 일어나며 말을 걸었다. 그들이 현관으로 들어선 순가, 풀쪽에서 즐겁게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뉴엘과 카르멘의 목소리였다 분명히 라파엘도 함께 있을 것이다. 훌리아가 미소를 띄우며 아나리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 각오는 되어 있겠죠? 수영에 도전해 보는 거예요. 잘 해낼 수 있을테니, 너무 걱정마세요. 우리가 책임지고 물고기처럼 물 속을 헤엄쳐 다닐 수 있도록 해 주겠어요. 곧 수영복을 갖다 줄 테니까 방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훌리아는 홀을 가로질러 풀장으로 나갔다. 쾌활하게 인사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나리자는?" 그렇게 묻는 마뉴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파엘의 목소리가 아니였다. 아나리자는 깊게 한숨을 내 쉬고서 자기 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지투성이인 바지와 셔츠를 벗고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샤워를 했다. 샤워 중에도 라파엘의 과거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가 누군가를 사랑했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떨쳐 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녀의 신경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보니 침대 위에 검은 수영복이 놓여져 있었다. 아나리자는 그것을 들어 펼쳐 보았다. 일단은 원피스 스타일이라 다행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몸을 가리는 면적은 아주 적을 것 같았다. 입어보니 예측했던 대로였다. 골반이 드러날 정도로 아래 부분이 깊숙이 파여 있었고, 어깨끈은 목뒤에서 묶게 되어 있었다. 게다가 깊게 패인 가슴은 사람 눈을 그냥 놔두지 않을 듯했다. 패션 잡지에서 봤다면 근사한 수영복이라 생각했겠지만 직접 입게 되자 이것은 다른 문제였다. 아나리자는 어떻게 할까 곰곰이 생각한 끝에 옷장에서 박스형의 흰 셔츠를 끄집어냈다. 이것이라면 비치웨어 대용으로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이다. 그 셔츠를 걸치고서 다시 한 번 거울을 보았다. 셔츠가 짧았기 때문에 창피할 정도로 다리가 드러나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럭저럭 참아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아나리자는 홀을 통해 풀장으로 나갔다. 마뉴엘과 훌리아가 큰 소리로 떠들며 서로에게 물을 끼얹고 있었다. 카르멘은 다이빙대로 올라가 멋진 폼으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그쪽으로 마뉴엘이 몰래 다가가서 카르멘이 물 위로 머리를 내민 순간 다시 물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것을 본 훌리아는 깔깔대고 웃으면서 마뉴엘에게 성원 보냈다. 등뒤에서 라파엘이 다가왔다. 이제 막 풀장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아나리자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벌써 한 차례 수영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럴 수가 없었소. 지금 막 돌아왔거든." "선발 대회는 어땠어요?" 사실 아나리자는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끝났나요?'라고 묻고 싶었다. 라파엘은 그녀의 질문에 가지런한 하얀 이를 드러내며 기쁜 표정으로 웃었다. "미첼은 괜찮으니까 걱정말아요. 그리고 다친 사람도 전혀 없었소." "어떻게 내가 묻고 싶어하는 걸 알았죠?" 라파엘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여기 쓰여 있기 때문에.... 얼굴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지." 그의 손가락이 뺨을 간지럽혔다. 아나리자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감각에 몸을 맡겨선 안된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비록 한순간이라 하더라도 그의 손가락에 넋을 잃게 된 것을 들켜버리게 될 테니까." 그 때 훌리아가 두 사람을 발견했는지 손짓으로 불렀다. 아나리자와 라파엘은 축축한 콘크리트를 가로질러 그녀 옆으로 가서 앉았다. "수영복 딱 맞죠?" 훌리아의 눈동자는 즐거운 빛을 머금고 있었다. "너무 꼭 맞는 느낌이에요." 아나리자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래서 그런 것을 걸치고 있는 거예요?" "뭔가 걸치지 않고는 도저히...." "무슨 예기지?" 라파엘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훌리아에게 빌린 수영복 얘기예요. 너무 대담해서...." 훌리아는 재미있다는 듯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풀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라파엘은 아나리자가 걸치고 있는 셔츠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런 것을 입고 있으니 무슨 얘긴지 모르겠군." "몰라도 돼요." 그녀는 더 단단히 옷깃을 여몄다. "계속 이렇게만 앉아 있을 생각이오?" 놀리는 듯한 라파엘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하게 그냥 놔두지는 않을걸!" 소리를 지르며 다가온 마뉴엘이 느닷없이 아나리자를 번쩍 안아 올렸다. '수영 못해요'라고 말하려던 순간에 마뉴엘은 그녀를 깊은 곳으로 안고 가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물 속으로 집어던졌다. 아나리자는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다. 입과 코로 소독약 냄새가 나는 물이 가차없이 침입해 들어왔다. 숨이 막혔다. 겨우 수면으로 얼굴을 내밀었다고 생각했는데, 뭔가가 강하게 발을 끌어 당겼다. 그녀는 숨돌릴 틈도 없이 다시 바닥으로 끌려내려갔다.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이에 점점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아나리자는 수영 못해!" 다급한 훌리아의 목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 때 힘있고 믿음직스런 팔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그러잡고 재빨리 수면 쪽으로 끌고 올라왔다. 정신을 차린 아나리자는 자신이 라파엘의 품안에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물속에서 구해 준 것이었다. 계속해서 콜록거리며 물을 토해내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라파엘이 단단히 부둥켜안고 있었다. 겨우 기침이 가라앉자 라파엘은 그녀의 이마에 착 달라붙어 있는 젖은 머리카락을 다정히 쓸어 올려 주었다. "좀 가라앉았소?" 아나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안이 마치 불이라도 난 것처럼 얼얼했다. 물이 아니라 불을 집어 삼킨 듯한 느낌이었다. "마뉴엘! 이제부터 누군가를 풀 안으로 집어 던질 때는 수영할 수 있는지부터 물어보도록 해라! 알겠니?" 라파엘은 엄한 목소리로 마뉴엘에게 훈계를 했다. "나도 잘못했어요. 여기 나오자마자 수영하지 못한다고 말해 뒀어야 하는 건데. 요즘 세상에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화내는 게 당연하지요. 형 말이 맞아요." 마뉴엘이 미안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정말 괜찮아요?" 훌리아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풀 안에 있던 카르멘이 지루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외쳐됐다. "그렇게 소란 피울 일이 아니야, 물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 뭘! 자주 있는 일이잖아." 그 말은 사실이었다. 기껏해 봤자 잠시 물에 빠졌던 것으로 야단스럽게 소란을 일으켜 즐거운 한때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앉았다. 아나리자는 라파엘의 품에서 빠져나와 벌떡 일어났다. "카르멘 말이 맞아요. 이 나이에 수영장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니, 정말 창피한 일이에요. 마침 수영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나도 수영을 배우겠어요, 누가 가르쳐주지 않겠어요?" 라파엘은 풀 얕은 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서 아나리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곧 손을 아나리자 허리를 안더니 가만히 물 속에다 내려놓았다. "우선 이 거추장스러운 셔츠부터 벗도록 해요." 언제 나타났는지 훌리아가 눈 깜짝할 사이에 아나리자가 입고 있던 셔츠를 벗겨버렸다. 라파엘은 검은 수영복 하나만 입고 있는 그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런 보물을 감춰두고 있었다니 정말 몰랐소. 일부러 감출 필요는 없소, 아나리자." 귀까지 새빨개지는 아나리자를 본 라파엘은 다정스럽게 미소를 띄워 보냈다. 이런 식으로 칭찬을 받자, 그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당황한 아나리자는 일부러 화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수영을 가르쳐 줄 거예요. 아니면...." "물에 뜨는 법은 알고 있소?" "몰라요. 해 본 적이 없거든요." "자, 내가 받쳐줄 테니까. 물 위에 눕는 것처럼 한 번 해봐요." 아나리자는 그의 말대로 했다. 커다란 그의 손이 등을 받쳐주고 있었다. 라파엘과 함께 있으니 물같은 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래그래, 아주 잘 하는데! 자, 이제 천천히 머리를 담그고...." 라파엘은 그녀 몸을 받친체, 풀 가운데로 천천히 들어갔다. 한 가운데까지 왔을 때, 라파엘은 그녀를 받쳐 주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의지하고 있던 손이 없어졌기 때문에 아나리자는 깜짝 놀라며 당황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안심시키는 라파엘의 낮은 목소리를 듣고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물에 떠 있는 사이에 요령도 터득되었다. 그러자 라파엘은 풀 가장자리로 데리고 가서 다리 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마뉴엘과 훌리아도 쭉 붙어 다니며 이것저것 얘기했다. 카르멘은 기분이 상했는지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연습을 시작한 지 약 40분 정도가 지나자, 라파엘이 말했다. "이제 그만 합시다.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배우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나머지는 내일 하도록 합시다." 라파엘은 아나리자가 풀 밖으로 올라올 수 있도록 손을 빌려 주었다. "먼저 들어가도록 해요. 난 저녁식사 전에 한 차례 수영을 하고 갈 테니까." 라파엘은 다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갈색으로 그을은 두 팔이 힘차게 물을 가르며 탄력있는 몸을 물위에 떠올렸다. 넋을 잃어버릴 정도로 멋있는 수영 솜씨였다. 언제까지라도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곳에 있고 싶지만.... 아나리자는 천천히 일어나 커다란 타올로 몸을 감쌌다. "먼저 실례하겠어요. 식사시간까지 잠시 눈을 붙이고 싶거든요." "저녁식사는 아홉 시예요. 그리고 오늘밤엔 테라스로 나오세요." 아나리자는 훌리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 자리를 떴다. 5장 아나리자가 눈을 뜬 것은 잠자리에 들고나서 두 시간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그것도 안젤라가 아니었다면 잠을 깨지 못했을 것이다. 아주 잠시만 눈을 붙일 생각이었는데.... 아나리자는 자신이 그렇게 푹 잠들었던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미색 원피스를 입으며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은 안젤라가 정성 들여 빗겨준 덕분에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왼쪽 귀 옆으로 하얀 장미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저녁식사 장소는 테라스였다. 아나리자는 산책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갔던 길을 따라 그곳까지 갈 생각이었다. 정원에 밤의 장막이 내리기 시작했다. 상쾌한 밤 공기가 남아 있던 졸음을 조용히 쫓아 주었다. 산책로에는 움푹 들어간 곳이 몇 군데 있었다. 그 위로 가로수 나뭇가지가 축 늘어져 있고, 그 아래로 벤치가 놓였다. 마치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운치 있는 정자 같았다. 아나리자는 그중 한 벤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모두와 얼굴을 마주 대하기전에 잠시 이곳에 앉아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해서였다. 그녀는 가만히 벤치에 앉았다. "마음이 바뀌었다니, 대체 어쩌려고 그래?" 생각지도 못했던 카르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여자랑 라파엘이 결혼하는 것을 그냥 놔둔다면 모든 일이 다 끝장나 버리고 만다고! 그 정도는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아무래도 그 목소리는 바로 뒤쪽 벤치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고의는 아니라 해도 다른 사람 말을 몰래 엿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나리자는 자기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빨리 알리려고 벤치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도로 주저앉아 버렸다. 하이머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때 일이고, 지금은... 그녀는 나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정말 마음의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아." "이 겁장이! 그 여자가 라파엘과 결혼만 했다하면, 훌리아 손으로 들어가려던 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그 두 사람 것이 되어버리잖아! 그래도 괜찮다는 거야? 재산을 노리고 그 촌스런 훌리아와 약혼한 주제에! 정말 어쩔 셈이지?" "예정대로 할거야, 그녀와 결혼하는 것까지 말야."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한다라고 말할 생각이신가? 이봐, 제발 농담 좀 그만해!" "미안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야. 훌리아가 지참금을 산더미처럼 가져오든, 입을 옷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든 이제 그런 거는 문제가 아니라고." 아나리자는 그 말을 듣고 살며시 미소지으며 마음속으로 성원을 보냈다. 하이머, 정말 멋있어요! 다시 카르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입에서 그런 잠꼬대같은 소리를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이제 됐지? 테라스로 가야겠어." 하이머가 짜증스런 목소리로 재촉했다. "아직이야, 얘기가 아직 안 끝났잖아. 당신이 라파엘의 약혼녀를 내쫓아 주겠다고 약속했었지? 바로 지금이 그 찬스야." "그렇게 약속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는 그 여자를 본적도 없었고, 게다가 훌리아에 대한 내 마음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때란 말이야. 아니 왜, 그냥 놔두지 않는 거지? 라파엘은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단 말야. 그 두 사람은 결혼 같은 것 절대 하지 않을 테니 두고 봐!" 그 말을 들은 아나리자는 복받치는 눈물을 억누르기 위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리고 이런 일로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자신을 스스로 꾸짖었다. 돌아봐 주지도 않는 남자 때문에 훌쩍거리다니, 정말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하이머의 말대로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대체 뭘 기대하고 있는 걸까? "그 여자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겠다고 했었잖아, 내 목적은 말야, 그 여자의 신용을 진흙탕에 푹 처박아 버리는 거라고, 라파엘과 돈 호세 눈앞에서 말야. 어떤 수를 써서라도 마뉴엘과 그 여자 사이를 이상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카르멘이 교태를 부리는 듯한 말투로 하이머를 물고 늘어졌다. "그런 짓을 해 보시지. 라파엘이 그냥 놔둘것 같아? 아마 둘 다 살려두지 않을 거야. 이제 당신의 음모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아." "하이머, 달링! 나를 사랑하고 있었잖아." "젊은 혈기 탓이겠지. 옛날 일을 들춰내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잠시동안 이야기가 중단되었다. 바싹 몰려온 땅거미에 섞여 답답한 침묵이 낮게 깔려갔다. 이윽고 다시 카르멘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만약 손을 빌려주지 않겠다면, 좋아! 우리 두사람의 과거를 훌리아에게 직접 다 말해버리겠어 어때? 그래도 협력하지 않을 거야?" "처음부터 훌리아게 다 털어놓았어야 하는 건데. 잘됐어, 이걸 기회로 시간 있을 때 훌리아에게 모든 걸 다 얘기하겠어. 훌리아라면 용서해 줄 거야. 아니, 어쩌면 그녀는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테라스로 돌아갈 테니까, 당신은 당신 좋을 대로 해." 하이머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카르멘도 그를 따라 일어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말소리가 집 쪽으로 멀어져갔다. 아나리자는 지금 막 들었던 얘기들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하이머에 대해 갖고 있던 첫인상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그 평가를 정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이머는 진심으로 훌리아를 사랑하고 있다. 그 두 사람이면 분명히 힘을 합쳐 행복을 움켜줄 수 있을 듯 했다. 문제는 카르멘이다. 그렇게까지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니..... 증오로 뭉쳐진 날카로운 칼이 뒤에서 등줄기를 찢어버릴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카르멘도 가엾은 사람이었다. 라파엘 같은 남자를 사랑한 나머지, 느닷없이 나타난 라이벌에게 그를 빼앗겼다고 굳게 믿고 있을 테니까. 아나리자도 벤치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조용히 앉아 생각에 잠길수가 없었다. 게다가 건드리고 싶지 않은 감정까지 서서히 눈을 뜨며 깨어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감정이 정리되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그녀가 테라스에 도착하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라파엘이 계단을 내려와서 그녀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이건 연기야! 라고 아나리자는 자기 감정을 억제시켰다.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소." 라파엘은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가서 크고 안락한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자기는 테라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낮은 난간에 적당히 걸터앉았다. "안젤라 말에 의하면 꽤 일찍 나간 것 같던데?" "미안해요. 걱정을 끼쳐 드려서요. 벤치에 앉아 잠시 이것저것 생각해 보다가 깜박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그 때 아나리자는 카르멘과 시선이 마주쳤다. 일부러 그녀를 피하고 있었는데. "아무 일 없었소? 얼굴이 창백한데?" 라파엘이 그녀의 귓전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아뇨, 아무 일 없었어요." 태연히 대답하려고 했지만 자기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아나리자는 알고 있었다. 카르멘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이렇게 동요되다니.... 정신 똑똑히 차려! 아나리자는 자신을 향해 경고했다. 돈 호세가 갖다 준 와인잔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때 마리아 고모가 왔다. "자, 이제 식사를 시작하자꾸나." 아침에 식사하던 그 둥근 테이블에 식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늘밤에도 아나리자의 자리는 돈 호세 옆이었다. 또 한쪽 옆에는 라파엘이 앉았다. 카르멘은 마뉴엘과 하이머 사이에 끼어낮아, 그 두 사람을 상대로 무언지 열을 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나리자가 보기에는 라파엘의 질투심을 불러 일으키려고 하는 계략 같았다. 그걸 눈치채고 있는 건지 아닌지, 라파엘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마리아 고모와 돈 호세는 먼저 본채로 돌아갔고, 그 뒤로 하이머와 훌리아도 산보하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카르멘도 산책 나가자고 라파엘에게 치근거렸지만 그가 일어서려고도 하지 않자, 마뉴엘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모두가 테라스에서 나가버리자, 라파엘과 아나리자 둘만이 남게 되었다. "이제서야 둘 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군." "당신이 그렇게 말하다니 정말 뜻밖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다 조금씩은 변하는 법이니까." 라파엘은 아까 앉았던 것처럼 다시 난간에 걸터앉더니, 아나리자의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자, 이제 얘기해 주지 않겠소?" "뭘요?" "당신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것 말이오." 내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것....? 아나리자는 잠시 말설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진심을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게 될까 봐 두렵다고 토로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 말을 한다면 분명히 그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거짓말이 서투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거짓말을 한다 해도 라파엘의 예리한 눈은 곧 그것을 간파해 버릴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아나리자는 다른 고민을 털어놓기로 마음을 정했다. "당신과 헤어져 하몬드로 돌아간 다음의 나 자신을 자꾸만 생각해 보게 돼요. 거기엔 이제 나를 기다려 주는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거든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내 생활을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서요."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라파엘은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생각에 잠긴 시선으로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뭔가를 결심한 듯 주머니에 손을 넣어 접힌 서류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틀림없이 도움이 될 거요." "무슨 뜻이죠?" "당신 손에 있는 것을 펴 봐요. 그러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테니까." 그가 하라는 대로 그 서류를 펼처 본 그녀는 아연해서 라파엘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느 사이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그건 하몬드 저택의 권리서였다. "이제서야 겨우 당신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됐군!" 라파엘은 그녀를 웃기려는 듯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아나리자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라파엘에게로 다가가 천천히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안고 넓은 어깨에 머리를 살며시 기대었다. 라파엘은 잠시 망설이다가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선물은 마음에 드오, 아나리자?" "그걸 질문이라고...." 아나리자는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받을 수가 없어요. 당신에게 이런 폐를 끼치다니...." 라파엘은 아나리자의 몸을 조금 떼어냈다. 거절당한 것 같은 허전함이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돈 같은건 문제가 아니오. 중요한 사실은 당신에게도 돌아갈 곳이 생겼다는 거지. 부담을 느낀다거나 감사히 생각할 필요는 없소. 나도 당신에게 어려운 일을 억지로 떠맡기고 있으니까. 힘든 일이란 것은 나도 알고 있고. 그러나 하몬드로 돌아가면 모두 지나가 버린 과거가 될거요. 정원을 산책하면서 가끔씩 생각해내는 일은 있겠지만...." 아나리자는 라파엘의 얼굴을 살피듯 보았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라파엘이란 말인가? 윤곽 뚜렷한 얼굴에는 지금까지 그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다정함이 깃들여 있었다. 그를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그의 입술 감촉을 느껴보고 싶다는 욕망이 점점 강해졌다. 지금 그녀가 가장 원하고 있는 것은 그와의 사랑이 담긴 입맞춤이었다. 라파엘의 팔에 조금씩 힘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뜨거운 입술을 느낀 순간, 아나리자는 눈을 감아버렸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동 같은 것이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솟아올랐다. 뜨겁게 뜨겁게 열기를 띠기 시작한 깊은 입맞춤에 자신을 맡겨버린 듯, 아나리자는 라파엘의 머리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두 사람의 관계가 임시적인 것이라는 사실도, 연인처럼 행동하는 것은 단지 연극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모두 머리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라파엘뿐, 이렇게 품안에 안겨 있는 것 뿐.... 그 때 등뒤에서 돈 호세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아나리자는 당황하여 라파엘의 품속에서 떨어져 나오려고 했지만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꽉 잡고서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피파 얘기는 했니?" 호세가 물었다. 그러자 라파엘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요." "피파? 피파에게 무슨 나쁜 일이라도? 혹시 새 주인에게 들볶이기라도 하는 게 아닐까요?" 지금까지의 달콤한 분위기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불안스런 기분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라파엘이 미소를 띄웠다. "여기 있소." "여기? 무슨 말인지...." "피파z 우리집 마구간에 있단 말이오. 당신이 타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오." 아나리자가 당장이라도 마구간을 향해 달려갈 듯한 얼굴을 하자, 라파엘은 황급히 덧붙였다. "그렇게 급할 것까진 없소! 내일이라도 늦지 않을 테니." "뭐라 해야 좋을지...." 아나리자는 아직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돈 호세가 입을 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 녹색 눈동자를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구나." 그는 아나리자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라파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태풍이 올 것 같군." 하늘을 보며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아나리자도 하늘을 쳐다보았다. 짙은 밤하늘엔 구름 한 점 보이지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알죠?" "공기의 감촉으로 알지. 쥐죽은 듯 고요하거든." 그렇게 말하는 라파엘은 어느 사이엔가 예의 냉랭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잠시후, 카르멘이 마뉴엘과 함께 테라스로 돌아왔다. 그녀는 라파엘 옆으로 다가와 그의 팔을 잡더니, 아나리자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동안 이 사람을 빌려가도 괜찮겠죠? 남편이 남기고 간 토지일로 두세 가지 물어볼게 있거든요. 이 사람밖에 모르는 일이라서..." "형, 걱정할거 없어요. 형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내가 잘 돌봐줄 테니까." 마뉴엘은 쾌활한 목소리로 끼어 들면서 이인용 흔들의자에 앉더니, 마치 아나리자에게 자기 옆으로와 앉으라는 듯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라파엘은 그런 동생을 노려보았지만 결국 카르멘과 함께 정원 쪽으로 걸어갔다. 마뉴엘 옆자리에 앉긴 했으나, 아나리자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라파엘과 카르멘 두 사람뿐! 한참 시간이 흘렀을 때 돈 호세가 다시 테라스로 나왔다. 그는 마뉴엘과 아나리자를 웃는 얼굴로 바라보면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나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잠깐 별이 보고 싶어서 나온 것뿐이니까. 젊은 사람들을 방해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마뉴엘이 의자를 앞뒤로 천천히 흔들기 시작했다. 아나리자는 기분 좋은 그 리듬에 몸을 맡기고서, 별을 바라보는 돈 호세를 바라보았다. 아들의 약혼이 사실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나리자는 그것이 몹시도 마음에 걸렸다. 언뜻 보기에도 정정해 뵈는 호세도 실질적으론 그렇게 건강하지가 못했다.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 대하면, 확실히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주름잡힌 얼굴에 감도는 피곤한 표정이 아나리자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옆에 앉아 있는 여자가, 내가 아니라 내 아버지만 쳐다보고 있다니.... 솔직이 말해 자존심 상하는데요." 아나리자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래요. 운좋게 내 옆에 앉게 되는 영광을 얻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거든요. 어째서 당신만은 그렇지 않은 거죠?" 그건 아마 당신형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아나리자는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곧 그런 생각을 떨쳐버렸다.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슬픔을 배가시킬 필요는 없어... 문득 아나리자의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아까 라파엘이 키스를 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는 그가 키스하고 싶어 그렇게 한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사실은 테라스로 나오는 돈 호세를 보고, 다정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연극을 했던 것이었다. 그걸 깨닫지 못하고 황홀한 기분에 빠져있었다니! "마뉴엘, 미안하지만 먼저 실례하겠어요. 피곤해요." 아나리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형을 안 기다리고요?" 마뉴엘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요, 내 인사를 대신 전해 주겠어요?"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아나리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돈 호세 옆으로 다가갔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좋은 꿈꾸도록 해라." 다정한 그 말에도 불구하고, 아나리자는 그날 밤 계속 혼란스러운 꿈만 꾸었다. 그리고 어느 꿈에나 라파엘이 등장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아나리자와 훌리아는 일찍 식사를 끝낸 다음, 말을 타고 학교 건물로 갔다. 두 여자는 라파엘과 소풍을 가기전에 어제 하다가 남은 청소를 끝내버릴 생각이었다. 아나리자가 탄 말은 물론 피파였다. 이렇게 다시 피피를 탈 수 있다니! 아나리자는 너무 기뻐 잠시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학교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달라붙어 찌든 때를 벗기기 시작했다. 두 시간 정도 무턱대고 그렇게 일하자, 사분의 삼 정도는 깨끗해졌다. 이젠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아나리자는 한숨을 쉬면서 바닥에 털썩 주저 않아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손이 새카맸지만 그런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어휴, 이렇게 일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구나! 거기다 이 더위, 온통 땀투성이야." 그녀는 한숨처럼 내뱉었다. 훌리아도 그녀옆에 주저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이 정도라면 당장이라도 개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훌리아의 말을 듣고 나서 다시 주위를 살펴보자, 먼지 투성이였던 방이 싹 달라 보일 정도로 깨끗해져 있었다. 이제 바닥의 사분의 일만 더 닦아내면 된다. 어제 오늘 단 이틀동안에, 그것도 여자 둘이서 이렇게 해낼 수 있었다니.... 아나리자는 자기가 해낸 일이 자랑스럽게까지 생각되었다. "가르치는 것도 이렇게 솜씨 좋게 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선 학생을 학교로 불러들이는 일이 문제예요." "그건 문제없어요. 아이들이 배우는 즐거움을 깨닫게 되면 오지 말라고 해도 올 테니까요. 아마 주말에는 학교 문을 잠가둬야 할 정도일 거라고요." "힘이 되어 줘서 정말 고마워요." 훌리아가 아나리자의 손을 잡았다. "협력은 아끼지 않겠어요. 자, 조금 쉬었으니 남은 바닥도 빨리 치워야죠." 그러나 앞으로 몸을 굽힌 순간, 아나리자는 자기도 모르게 낮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다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쉬는 게 아니었는데, 등이 아파 죽을 것 같아요." 그것을 본 훌리아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기 시작했다. "분명히 하이머가 뒷정리를 도와주겠다고 할 거예요. 그때까지 기다리는 게.." "안돼요, 우리 학교는 우리 손으로 치우기로 했잖아요. 난 괜찮아요. 이런 등의 통증쯤이야...." 팔을 앞으로 뻗은 순간 등뼈가 부러지는 것처럼 다시 통증이 왔다. "아참, 하이머 말을 하니까 물어보는 건데, 결혼식 날짜는 잡았나요?" 훌리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곧 잡을 거예요. 사실은....나, 조금 자신이 없어졌어요. 그가 요새 좀 변한 것 같거든요.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에요." 그 말을 들은 아나리자는 어젯밤에 엿들었던 하이머와 카르멘이 주고받던 말을 생각해 냈다. "그가 고민하고 있던 것, 이제는 분명히 해결되었을 거예요." "어떻게 그걸 알죠? 나도 모르는 일을...." 훌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나리자를 바라보았다. 그만 다 말해버릴 뻔했던 아나리자는 퍼뜩 생각을 고쳤다. 하이머는 지금까지의 경위를 자기 입으로 고백하겠다고 했었다. 이런 때 쓸데없는 지껄임은 삼가 해야 한다. "이건 어느 신뢰할 만한 정보통으로부터 입수한 얘긴데, 어쨌든 하이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훌리아를 사랑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그거, 정말 믿어도 되는 정보예요?" "물론 이지요." "아무리 가르쳐 달라고 해도 그 정보통의 정체는 가르쳐 주지 않을 거죠?" "그 대답도 물론이에요." "흠 그렇다면 묻지 않겠어요." 훌리아는 피곤한 몸을 질질 끌 듯 일어났다. "그 말을 들었다고 청소를 포기할 수는 없죠." 그리고 나서 30분 정도, 두 사람은 바닥을 상대로 분투한 결과 반짝반짝할 정도로 윤기를 내 놓았다. 남은 것은 창을 만들고 책상과 의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아나리자와 훌리아는 다시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구간에 도착했을 쯤에는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말에서 내리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 뒷손질도 오늘만은 마부에게 맡겨 두기로 하고, 그들은 말할 기력도 잃은 채 잔디를 가로질러 발걸음을 옮겼다. 테라스에서는 모두가 두 사람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뉴엘이 제일 먼저 그 두 사람을 발견했다. "야, 이제서야 돌아들 오시는군. 슬슬 걱정을 하려던 참이였는데." 라파엘이 웃으면서 계단을 내려왔다. "이 얼굴 좀 봐! 인디안처럼 화장을 한 것 같군. 누구를 상대로 이렇게 싸운 거지?"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나리자 얼굴에 묻은 검정 때를 닦아주었다. 그리고 나서 녹초가 된 두 사람을 부축하여 밀어올리 듯 하면서 테라스 계단을 올라갔다. 훌리아와 아나리자는 의자 앞에 서기가 무섭게 그것에 몸을 던지고 눈을 감았다. 그때 하이머가 재빨리 훌리아 옆으로 다가서더니,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아주 힘든 모양이었군, 훌리아?" "입을 열 기력도 없을 정도예요?" "그렇지만 이럭저럭 다 해낸 것 같은 표정인데?" 하이머의 목소리는 자랑스러운 듯 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아나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사람은 일단 뭔가를 결심하면 무슨일이 일어나도 해내지 않으면 안되거든요 대단한 힘이죠!" "그 힘, 나도 피부로 느꼈어요." 그 때 라파엘이 레몬에이드를 두 잔 가지고 왔다. "자, 이걸 마시고 한 숨 돌리면 좀 나을 거요." 아나리자는 글라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차가운 액체가 기분좋게 목을 식혀 주었다. 물방울이 맺힌 글라스를 달아오른 뺨에 대어 보았다. "아, 기분 좋아! 정말 고미워요. 살아난 듯한 느낌이에요." "그럼 이제 학교는 준비가 다 완료된 거냐?" 돈 호세가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들었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제 남은 건 오빠가 알선해준 창문 공사예요. 책상이랑 의자가 도착하면 준비는 전부 끝나는 거지요." 창문 공사는 내일 저녁이면 다 마무리될 테고, 책상과 의자도 이번주 안에는 도착할 거야. 라파엘은 훌리아에게 대답하고 나서 아나리자를 향해 위로하듯이 미소를 지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믿을수 없을 정도로 따스하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아나리자도 미소로 답했다. 그러나 저 미소는 연극, 모든 이렇게 보고 있기 때문에 거짓 애정 표현을 하고 있는 것뿐.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정한 그의 눈빛을 보니, 몸도 마음도 녹아버릴 듯한 기분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돼! 모두가 안 보이게 되는 순간, 저 미소는 무표정한 진짜 얼굴로 되돌아가고 말 테니까. 라파엘은 그녀 옆에 앉아 돈 호세와 목장 얘기를 시작했다. 핸섬한 옆모습, 아나리자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라파엘은 그녀의 그런 뜨거운 눈빛을 느꼈는지 어깨 너머로 미소를 던져왔다. 그 순간,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더니 곧 마구잡이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진정이라도 시키려는 듯, 라파엘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그는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돈 호세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나리자는 눈을 감고 숨을 삼켰다. 이런 것이 모두 연극이라니..... 그 때 불쑥 카르멘이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라파엘은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고는, 아나리자의 손을 그녀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잠깐 실례, 카르멘과 얘기하고 오는 편이 좋을 것 같소." 안으로 들어가는 라파엘의 뒷모습을 아나리자는 눈으로 뒤쫓았다. 잠깐동안 느꼈던 달콤한 꿈이 그녀 손에서 새어 나가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 사랑스런 머리로 고민할 것까지는 없단다." 돈 호세는 위로하듯 아나리자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눈치채셨군요?" 아나리자는 호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레몬에리드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저도 잠깐 실례하고 샤워나 해야겠어요. 소풍 가기 전에 피곤한 근육을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요. 몇 시에 출발할 거죠?" "아마 한 시간쯤 후에 출발하게 될 겁니다." 하이머가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그럼 그 때 다시 만나요. 훌리아, 당신은 어떻게 할거죠?" "뜨거운 샤워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난 조금 더 이렇게 있고 싶은 기분이에요." "만약, 등을 닦아야 한다면 언제든지...." "마뉴엘, 형의 약혼녀에게 그런 말을 해서 되겠니?" 돈 호세가 큰소리로 아들을 나무랐다. "농담이에요, 아버지 농담요! 반 농담이긴 하지만...." 마지막 한 마디는 돈 호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다. 아나리자는 마뉴엘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방문을 열자 안젤라가 웃는 얼굴로 맞아 주었다. "샤워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들렸기 때문에 준비해 두었어요." "어머, 고마워요! 하지만 내게만 매달려 내 뒤치닥거리만 해주면, 당신의 가족들이 뭐라고 하지 않아요?" "가족이 없어요. 남편은 10전 전에 죽었고 아이도 낳지 못했거든요." 안젤라는 조금도 거리끼지 않고 말했다. 동정받고 깊지 않은 거겠지. "그럼 이 집에서 살고 있나요?" 아나리자는 옷을 벗으며 계속 질문을 했다. "지금처럼 일손이 부족할 때만요. 그러지 않을 때는 제 집으로 가죠." 아나리자는 옷 벗던 손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여기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말투군요?" "그야 물론이죠. 모두 좋은 분들이고, 여기서 일하는게 즐거워요. 집에 돌아가면 너무 적적해서...." 아나리자는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런 기분이었어요. 쓸쓸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손에 닿는 대로 책을 읽었었죠." "네, 그러셨군요. 하지만 누구든지 책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안젤라는 아나리자가 벗은 먼지투성이의 옷을 집어들었다. "그럼 책을 읽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안젤라?" 아나리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어렸을 때는 지금처럼 학교, 학교! 하고 떠들어대지 않았거든요. 내 나이쯤에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아요." "그렇지만 그런 건 절대 바람직한 일이 아니예요! 뭔가 손을 써야만 해요." "누가요? 정부가요? 그건 어려운 일이에요. 어린애들 교육만으로도 힘에 겨울 텐데, 우리 같은 사람까지는 아무래도...." 그때 좋은 생각이 아나리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학교가 시작하면 야간에 성인 학급을 여는 것이다.! 훌리아와 의논해 볼만한 일이었다. 뜨거운 욕조 안에 느긋한 기분으로 앉아 있는 동안 피곤 같은 건 어딘가로 휙 날아가 버렸다. 안젤라가 막 감은 머리카락을 만져주고 있는 동안, 아나리자는 뭘 입고 가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여자답고 우아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말을 타고 갈 소풍 차림으로 그러기가 어려웠다. 망설이고 있던 차에 안젤라가 옷장에서 진회색 큐롯과 그 한 세트인 셔츠를 꺼내왔다. "이걸 입고 가는 게 어떨까요?" "어머, 고마워요. 지금 뭘 입고 갈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정말 오늘 소풍에 딱 어울리는 옷이에요. 난 이 옷을 가지고 온 것도 잊고 있었어요." "피곤해서 그러셨을 거예요. 이 더위를 무릅쓰고 바닥을 깨끗이 닦아내셨잖아요." "더위 얘길 하니까 말인데, 이곳 여름은 항상 이렇게 더워요?" "대개는 그래요. 이따금 폭풍우가 오면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기도 하지만 아주 드문 일이지요." "참, 라파엘이 그러던데..... 태풍이 올 것 같다군요. 대기의 느낌으로 그런 낌새를 알 수 있다더군요." "아마 그럴 거예요. 그런 말씀을 하셨다면 내일 밤쯤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질 거예요. 자, 머리는 다 됐어요. 정말 아름답군요." 안젤라는 황홀한 눈빛으로 아나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고 방을 나섰다. 테라스에는 돈 호세 혼자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나리자를 본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손짓으로 그녀를 불렀다. "젊고 건강하고..... 거기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행복을 혼자만 다 차지한 기분을 갖게 되는 거란다, 아나리자." 돈 호세는 발랄한 그녀를 흡족스럽게 응시했다. "다 아버님 덕이에요.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네가 이곳에 오고 나서부터 계속 기분이 좋구나. 참, 어제 소 선발대회는 어땠니? 처음 본 감상을 한번 말해보렴." "너무 생소한 것뿐이어서...." "그건 내가 바라던 대답이 아닌데?" 돈 호세는 농담하듯 말했다. "라파엘이 나오는 건 봤니?" "네. 라파엘이 쇠뿔에 닿을까말까하는 찰나에 망또를 흔들었어요. 전 그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다른 투우사와 비교하면 별로 다쳤던 편이 아니지, 그 녀석은 솜씨가 좋거든." "아들이니까 그렇게 보시는 거 아니예요?"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투우 팬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고, 신문에서도 그 애의 묘기를 절찬하고 있거든." "그래요? 전 전혀 몰랐어요. 그가 아무것도 가르쳐주질 않았거든요." "그야 당연하지.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니? 내가 세계에서 제일 인기 있는 투우사다! 라고, 투우를 보기 전에는 그 진수를 조금도 맛볼 수가 없는 거란다. 하지만 스페인에 왔으니까 투우를 감상할 줄 모르면 안되지. 그 기술과 용기, 누가 뭐래도 투우는 예술이란다." 아나리자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이, 아직 은퇴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세요? 자선모임의 투우에만 나간다고 했는데...." "그건 그렇지만 한 달에 한번은 소를 마주 대하고 되지." "그럼 일 년에 열 두 번이나요!" 아나리자의 에머랄드 빛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그러나 돈 호세는 소리 높여 웃었다. "은퇴 전에는 한 해 구십회는 투우장에 나갔단다. 걱정되니?" 그는 아나리자 얼굴을 살피듯이 쳐다보았다. "네. 일년에 열 두 번이나 쇠뿔과 격투를 하다니, 죽음을 마주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잖아요! 일년에 한번도 많을 정도인데요." 아나리자는 근심스런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돈 호세는 그녀의 손등을 살며시 두드렸다. "그 기분은 나도 알지. 그러나 이것만은 마음속에 새겨두는 것이 좋을 거다. 혈통이라고 해야할지.... 그 아이에게 투우를 하지 말라고 한다면.... 서로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될 수도 있지." "하지만...." 아나리자가 입을 열었을 때, 라파엘이 모습을 나타냈다. 깨끗이 샤워를 하고 몸에 딱 달라붙은 바지와 파란색 줄무늬 셔츠 차림이었다. 그는 양손에 들고 있던 소풍 바구니를 내려놓고 아나리자 옆자리에 앉았다. "머리를 맞대고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고 계신 거죠?" "미래의 며느리와 좀 가까워졌을 뿐이야. 그나저나 결혼식은 언제로 정할 거니?" "아직 생각하지 않았어요." "믿을 수 없군. 아나리자가 내 약혼녀라면 나는 한시라도 빨리 내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려고 할 텐데." 라파엘은 얼굴을 들고 아버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겠어요, 적극적으로 검토해 보죠." 그리고 나서 테라스를 둘러보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준비가 안된 것 같구나." "라파엘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나리자의 가슴은 또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명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훌리아와 하이머, 그리고 뒤따라 마뉴엘이 테라스로 나왔다. "오래 기다렸죠? 마라아 고모가 바구니는 오빠가 가져갔다고 하시던데.... 이거군요." 그렇게 말한 훌리아는 몸을 숙여 부친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오늘은 무척 기분이 좋은 것 같구나. 학교에 대한 계획이 정상 궤도에 오르게 되어 마음이 들뜨는 거니?" "참! 학교에 대해 생각해 낸 게 있어요." 아나리자는 훌리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머랄드빛 눈동자가 생기를 띠고 있었다. "아까 안젤라와 아야기 하다가 생각해 낼 건데, 이 목장에도 읽고 쓸 줄 모르는 어른들이 꽤 많이 있다면서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야간 학급을 열면 어떨까요? 성인을 위한 학급 말예요?" "아나리자, 정말 좋은 생각이군요! 그만큼 일은 많아지겠지만 아주 보람있는 일이 될 거예요." 훌리아의 눈도 빛났다 갑자기 라파엘이 아나리자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마치 이곳에 계속 머물 결심이라도 한 것 같은 말투로군. 나 몰래 그렇게 작정한 거요?" 그는 한껏 목소리를 죽이며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그 때 카르멘이 테라스로 나왔다. 다리에 꼭 끼는 승마 바지에 핑크색 부츠, 매우 화려한 복장이었다. 그녀는 서슴없이 테라스를 가로질러와 라파엘 앞에서 발을 멈췄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죠? 소풍은 갈 거예요, 안갈 거예요?" 아나리자의 마음은 다시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다. 소풍 내내 적의에 가득찬 카르멘의 시선을 감당해 내지 않으면 안되다니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했다. "자, 나갑시다." 의자에서 일어선 라파엘의 손에 이끌려 아나리자도 몸을 일으켰다. "즐겁게 놀다 오너라." 돈 호세의 환송을 받으며 일행은 먼저 마구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일 앞에 걸어가는 것이 라파엘과 하이머, 그 다음이 마뉴엘과 카르멘, 그뒤를 아나리자와 훌리아가 따랐다. "아까 했던 말 잊지 말아요. 하이머에 관한 언니 정보를 무슨 일이 있어도 캐내 보일 테니까요." 훌리아가 말을 걸어왔다. "그게 무슨 얘기였죠?" "벌써 시치미 떼기예요?" "뒤에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소근소근하고 있지?" 마뉴엘이 발걸음을 늦추며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내가 얼마나 멋있는지? 형보다 훨씬 내조하기 쉬운 남편이 될 거라고 얘기하고 있었지?"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훌리아가 이제 정신 좀 차리라는 듯이 핀잔을 주었다. "정말, 난 불행한 남자야. 형의 약혼녀를 사랑하다니, 비극의 주인이지. 마뉴엘 샌디에고의 운명이란 얼마나 가혹한지...." 마뉴엘은 과장된 한숨을 크게 내 쉬었다. 아나리자와 훌리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마뉴엘을 째려보았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조금 지나쳤어.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조용히 잇던 카르멘이 말 참견을 해왔다. "내가 당신이라면 마뉴엘과 손을 잡고 멀리 도망가버릴 텐데." 마침 일행은 마구간에 도착했다. 짖은 화제를 피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나리자는 재빨리 피파가 있는 마방으로 걸어갔다. 피파읨 모습을 본 순간, 그녀는 만면에 활짝 미소를 지었다. 라파엘은 디아로브 안장에 소풍 방구니를 동여매고 있었다. 아나리자는 다가서서 그의 팔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피파에 대한 것, 다시 한 번 감사하고 싶어서.... 피파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멋진 선물은 다시 또 없을 거예요. 피파를 볼 때마다 감격스런 마음이...." "당신을 감격시키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군." 라파엘은 아나리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만, 지금은 그 정도에서 참으시죠! 곧 나가야 하잖아요." 마뉴엘이 말 위에서 소리 질렀다. 어느 사이엔가 모무들 말에 올라타 있었다. 아나리자는 라파엘의 손을 빌려 피파에 올랐다. 일행은 느긋한 속도로 목초지를 달려갔다. 아나리자는 훌리아와 나란히 달렸다. "어디로 가는 건지 알고 있어요?" 아나리자가 물었다. "오빠는 비밀로 하고 싶어하는 것 같지만 이 길을 통과하는 것 보면 목적지는 프란시스코 할아버지 댁일 거예요." "오래된 저택이에요. 옛날에는 꽤 아름다웠는데, 아마 지금은 황폐해졌을 거예요." "그곳도 목장의 일부인가요?" "아뇨. 그 저택에도 넓은 토지가 딸려있어요. 프란시스코가라고 라면 옛날에는 스페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올리브 농원의 지주였는걸요." 라파엘이 말고삐를 늦추고 아나리자와 훌리아가 쫓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이번에는 무슨 얘기를 나누는 거지?" "우리 둘이서면 얘기를 나누면, 샌디에고가의 남자들은 재미가 없나봐요. 왜 그렇죠?" 아나리자는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을 흔들며 훌리아를 돌아보고 말했다. "정말, 방해꾼만 끼어드는군요." 훌리아도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 대고 있으면 아주 좋지 못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풍기거든." 라파엘은 짙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나리자와 훌리아는 마주보며 어깨를 으쓱 치킨 다음,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네 웃는 얼굴이 다시 돌아와서 뭣보다 기쁘구나." 라파엘은 명랑하게 웃는 훌리아를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이머도 보조를 늦춰 그들과 한 덩이가 되었다. 아나리자 옆에서는 라파엘이 검고 큰 말을 유유하게 몰고 있었다. 마뉴엘은 라파엘 반대쪽 옆에서 말을 몰았다. 카르멘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이었다. 아나리자는 고맙다는 뜻으로 마뉴엘에게 미소를 던졌다. 마뉴엘도 미소로 답했다. 하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검은 눈동자에서 뜨거운 뭔가를 느낀 아나지라는, 황급히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라파엘의 말이 생각났다. 스페인 남자는 장해가 있을수록 타오르는 법이라던가..... 그 때 카르멘이 말을 앞으로 몰아댔다. 억지로라도 라파엘 옆으로 끼어들 생각임에 틀림없었다.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죠?" "아직 모르오? 훌리아쪽이 눈치가 빠르군. 아까부터 알아차린 것 같던데. 그렇지, 훌리아? 네가 말해 보렴, 목적지가 어딘지." "프란시스코 할아버지 댁 아니예요?" "정답이다."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곳에 가는 거죠?" 카르멘은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당신 눈앞에 있는 남자가 새로운 지주이기 때문이오. 완전히 개조를 했지. 정원도 새로 꾸몄고, 잔디로 심었소. 가구도 새로운걸 들여다 놓았고." "왜요?" 카르멘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라파엘은 한참동안 아나리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카르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겐 마드리드에 있는 맨숀 말고는 내 집이라고 부를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오. 내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갖고 싶었지. 아내를 맞고, 자식을 기를 곳 말리오." "그럼 당신 아버지 집은 어떻게 되죠?" 카르멘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하이머랑 훌리아가 결혼을 하면 그 집도 점차 북적이게 되겠지." 하이머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라파엘을 쳐다 보앗다. 라파엘은 아버지 재산이 동생 훌리아의 것이 되도록 미리 조치해둔 것이었다. 모두들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일행은 작은 언덕 꼭대기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일대는 초록빛 바다였다. 잔디의 밝은 초록과 올리브의 칙칙한 초록이 번갈아가며 띠를 이루고 있었다. 한가운데 우뚝 선 하얀 저택, 흰 벽이 주위와 초록과 조화를 이뤄,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아나리자는 넋을 잃고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 같소, 스무 시간 안에 두 번씩이나 당신을 감격하게 만들다니...." 라파엘이 아나리자의 귓전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훌리아도 믿기 어려운 듯 고개를 자꾸만 흔들어댔다. "오빠, 정말 대단해! 그 폐허가 이렇게 멋진 집으로 다시 태어나다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야!" 감동한 훌리아의 목소리였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봐야지!" 마뉴엘은 그렇게 말하고서 말 옆구리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자 말은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그 저택까지는 벽돌 깔린 오솔길이 연이어져 있었다. 멀지않아 저택 정면이 바라다보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마부에게 말을 맡기고, 일행은 저택에 가까이 갔다. 현관은 아치형으로 꾸며져 있었다. 라파엘은 육중한 마호가니 문을 밀어서 연 다음 모두를 불러들였다. 밝은 여름 햇살이 집안 가득 넘쳐흐르고 있었다. 모자이크 바닥인 현관홀을 통해 회색빛 띤 하얀 융단을 깔아 놓은 거실로 들어서자, 대형 그랜드 피아노가 눈에 띄었다. 그것도 두 대나! 협연을 할 수 있도록 두 대를 나란히 비치해 둔 것이다. 한쪽 벽의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형형색색의 꽃이 피어 있는 정원이 한 눈에 들어왔다. 청회색의 시트가 씌워진 소파도 무척 안락해 보였다. 소파 한가운데 놓여 있는 대리석 테이블 위엔 동양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커다란 화병이 있었다.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편안히 쉴 수 있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그런 거실이었다. 다이닝룸은 돈 호세의 저택과 똑같았다. 한쪽 벽은 커다란 거울이었고, 샹들이에도 똑같이 여섯 개였는데, 다만 다른 것은 중앙에 놓인 테이블이 거실에 있는 것과 어울리도록 동양적 분위기의 흑단 제품이라는 것이었다. 넓고 편한 주방, 수공이 많이 든 가구가 놓여 있는 침실, 그 중에서도 아나리자 마음에 많이 끌린 곳은 라파엘의 침실이었다. 다른 방과 똑같이 폭신폭신한 회색을 띤 흰 융단이 깔린 위에 동양풍의 흑단가구, 의자와 소파, 안락한 침대는 전부 연회색 시트로 덮여졌다. 그곳에서 편안히 쉬는 라파엘의 모습을 상상해 본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해서, 아나리자는 황급히 라파엘의 모습을 마음속에서 내쫓아버렸다. 커다란 창을 통해 정원을 바라보고 있을 때 진짜 라파엘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어떻소? 입을 열 수 있게 됐소?" "이렇게 멋있는 집, 정말 처음이에요. 당신이 누구랑 결혼할지는 모르지만 이 집을 보고 가슴 두근거리지 않을 여자는 없을 거예요." "그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든든하오.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조금 더 얘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소. 당신과 둘이서!" 얘기를 한다고? 대체 무슨 얘기를.....? 아나리자는 궁금한 표정으로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그가 입을 연 바로 그 순간, 카르멘이 다가왔다. "이런 일을 하기 전에 내게 의논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기꺼이 도와줬을 텐데....." "고맙소, 커르멘. 하지만 일손은 충분하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라파엘은 모두를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자, 모두 정원에서 소풍을 즐기자!" 심부름하는 소녀들이 정원 잔디 위에다 체크무늬 테이블 보를 펴는 것을 보던 아나리자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샌디에고가의 소풍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 본격적으로 치러지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상상하고 있던 소풍의 이미지 는 종이컵에 아이스티나 레몬에이드를 따르고 프라이드 치킨이나 포테이토 샐러드를 먹는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소풍은 크리스탈 와인글라스에 최고급품 와인을 즐기는 것이었다. 소세지와 막 구워낸 빵, 거기다 여러 종류의 치즈가 바구니 속에서 끄집어내어졌다. 그들은 나무 그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화제는 오직 이 저택에 대해서였으나, 화제의 주인인 라파엘은 거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아나리자의 시선은 어느 사이엔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라파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여기 이렇게 꼼짝 않고 앉아 있으면 그 매력에 굴북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감정을 털어버리고 당돌하게 일어났다. "실례해도 되겠어요? 집안을 좀 더 구경해 보고 싶어요." 아나리자의 발걸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방 한가운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방을 그와 함께 소유할 사람은 어떤 여성일까? 그 옆에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게 될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번 맞춰 볼까?"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라파엘이었다. "맞출 일, 하나도 없어요!" 몹시 놀란 탓인지 쌀쌀맞은 대답이 불쑥 튀어나왔다. "정말 그럴까?" 라파엘은 아나리자 바로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턱을 살며시 감싸들고는 에머랄드빛 눈동자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아까부터 계속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것 같던데, 뭔가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소?" 아나리자는 짧게 소리내어 웃고는 창가로 걸어갔다. "그래요, 당신 말 그대로예요. 나, 자신도 스스로를 알 수가 없어요. 연극을 하고 있는 사이에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 건지.... 어쨌든 내 기분조차 정리할 수가 없어요. 정상적인 나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가 걱정이에요." 라파엘은 아나리자를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스페인을 떠나면 금방 원래의 당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거요." 아나리자는 라파엘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빨려들어 갈 것 같은 그의 새파란 눈동자로 그녀를 마주 쳐다보았다. 아나리자는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얼떨결에 손을 들어 라파엘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스페인을 떠난 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라파엘이 없는 텅 빈 나날들뿐.... 라파엘은 그녀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이 미치광이 짓 같은 연극이 막을 내리면 우리 두 사람이 진실된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안되오. 느긋이 시간을 두고 얘기해 봅시다." "무슨 얘기를요?" "여러 가지 일을." 라파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또 다시 결혼식을 언제할 거냐고 아버지가 물으시면 어떡할 거죠? 얼버무리기만 할 수도 없잖아요?" "그 건 그 때 되어서 생각합시다." "카르멘은 어떻게 할 거예요? 우리 약혼이 임시적인라는 것, 그녀에게 얘기하지 않았더군요. 카르멘은 비탄에 젖어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여자와 결혼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단 말예요. 그게 얼마나 괴로운 건지 당신, 알아요?" "그럼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지?" "내게 떠오른 방법은 한 가지, 모든 걸 카르멘에게 털어놓는 거예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나와 결혼할 생각같은 건 추호도 없다고 그녀에게 말해버리는 거예요."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되겠소? 실현될 희망도 없는 그녀의 꿈을 부풀려 주기만 하라는 거요? 카르멘과 결혼할 생각은 없소. 그녀도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거요. 그런데 내 약혼 얘기를 듣고 그녀가 왜 그렇게 마음의 평정을 잃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소. 게다가 왜 아버지 집에 머물고 있는 건지도...." 정말 오만한 남자군! 여자의 기분 같은 건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다니! 아나리자는 비꼬듯이 말했다. "당신도 때로는 어쩔 수 없이 거만하게 뻐기는군요." "그리고, 당신은 때때로 어린아이처럼 앙탈을 부리는군. 카르멘 일은 당신과 관계없는 문제라는 걸 명심해요!" 그도 지지 않았다. "당신에게 관계없는 일은 아니잖아요!" 강철처럼 죄어드는 라파엘의 팔,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지만 그의 팔은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이것 놔요! 여기는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연극 같은 것 할 필요 없어요. 대체 왜 나를 쫓아온 거죠?" 그 말을 들은 라파엘은 갑자기 팔을 떼었다. "내가 키스를 하거나, 껴안거나 한 것을 전부 연극이었다고 생각하오?" 두렵도록 차가운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않은가요. 내 옆으로, 그러니까 반지름 일미터 이내로 다가올 때는 항상 누군가가 가까이에 있을 때잖아요?" 금방이라도 눈물이 솟구쳐 올라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라파엘이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을 때, 그녀는 그제서야 그의 표정을 알아차렸다. 그는 무척 피곤한 듯한 표정을 띄고 있었다. 아까까지의 오만했던 표정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마치 잠들 수 없는 하룻밤을 보낸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나리자, 나는....." "어머, 여기 있었군요? 돌아갈 준비 다 됐어요." 방으로 들어온 훌리아의 목소리로 라파엘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은 꽤 지루하게 느껴졌다. 웬일인지 기분이 좋은 카르멘, 라파엘은 아무 말 없이 말을 몰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무거운 긴장감으로 인해, 집에 도착했을 때의 아나리자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학교 대청소, 그리고 소풍으로 숨쉴틈없이 움직였던 하루였던 데다가 마지막에는 라파엘과의 충돌까지.... 정신이 아찔해지는 하루의 피로가 밤이 되자 물밀듯이 엄습해 왔다. 아직 아홉 시도 되지 않았는데 졸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나리자는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뜨고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지만 어느 사이엔가 눈을 감도 있었다. 훌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 날밤은 두 사람 모두 저녁식사도 하기 전에 방에로 돌아가 침대에 몸을 맡기고 말았다. 6장 다음날 아침, 라파엘이 목장으로 외출하자 아나리자는 혼나서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하이머와 훌리아도 시내로 쇼핑을 나가고 집에 없었다. 돈 호세도 아침부터 서재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마리아 고모, 카르멘 그리고 마뉴엘조차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나라자는 풀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한참동안 라파엘이 가르쳐 준대로 수영 연습을 해 보았지만 시간을 보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녀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다음, 읽다가 두었던 추리소설을 꺼내어 푹신한 소파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추리 소설에 빠져, 3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카르멘이 노크도 하지 않고 불쑥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글썽이며 당장이라도 히스테리가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리좀 와 봐요. 빨리, 빨리요!" "왜 그러세요?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죠?" 이성을 잃고 있는 카르멘의 모습, 예삿일이 아니었다. 불안한 느낌은 검은 구름처럼 덮쳐왔다. 카르멘이 이렇게 허둥대다니.... 그래, 라파엘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빨리요! 이야기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지금 이러고 있는 사이에 그가 죽을지도 몰라요. 자, 빨리요!" 카르멘은 아나리자의 팔을 잡더니 막무가내로 끌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나리자는 완강한 태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기 전에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어요! 라파엘 일인가요? 그가 다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쇠뿔에 받혔어요! 지금 당신을 부르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빨리 그곳으로 가요!" 카르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라파엘이.... 쇠뿔에....받혔다고! 불안과 공포가 아나리자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아 버렸다. 심장이 터질것처럼 격렬하게 고동쳤다. 그러나 머리만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우선 의사를 불러야겠어요. 그리고 나서 돈 호세와 마리아 고모에게도 알려야해요." "나도 그렇게까지 바보가 아니예요! 그런 일은 벌써 손을 써놓았단 말예요. 자, 빨리요!" 카르멘은 소리 높여 말했다. 아니리자는 카르멘에게 끌려가면서도 필사적으로 안젤라를 찾았다. 항상 옆에 있었는데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이제 찾을 여유가 없었다. 라파엘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으면! 카르멘과 아나리자는 정원을 가로질러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차로 가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차로는 갈 수 없어요, 말이 아니면 힘들어요." 두사람은 안장을 채우자마자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급히 목초지로 달려나갔다. 카르멘이 앞장서서 달렸다. 아나리자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지금은 라파엘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라파엘 죽으면 안돼요..... 한 시간이나 달려온 아나리자는 자기가 지금 어디 있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말을 세웠다. 카르멘은 당황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이 근방에 있을텐데? 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찾아올 테니까. 그를 찾으면 데리러 올께요." "함께 가면 안돼요? 나만 여기서 기다릴 필요가 없잖아요. 당신이 그를 찾으면 또 나를 데리러 와야 하고요, 괜히 시간 낭비예요." 아나리자는 이런 때 이런 곳에 혼자 있게 되는 것이 싫었다. 그러자 카르멘은 말머리를 돌리며 아나리자를 노려보았다. "미안하지만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주지 않겠어? 내 기분도 생각해 줘야지. 어떤 기분으로 당신을 그가 있는데로 데리고 갈 거라고 생각해? 이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아 줘!" 아나리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같아선 한두 마디 되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감정을 억제하면서까지 자신을 데리러 와준 카르멘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아나리자는 말을 타고 달리는 카르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금방 언덕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주위는 온통 목초지로, 나무 한그루 없었다. 태양은 인정사정없이 내리쬐었다. 아나라자는 급히 서둘러 나오는 바람에 선드레스에 샌들 차림이었고, 더더구나 모자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드러난 살갗이 태양열로 인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피파가 더위 먹을까 걱정이 되어, 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어 주었다. 아나리자는 풀을 뜯는 피파 옆에 서서 카르멘을 기다렸다. 20분....30분 한 시간, 그제서야 아득히 먼쪽에서 카르멘같은 모습이 보였다. 아나리자는 급한 마음에 안장도 채우지 않고 피파등에 올라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카르멘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눈의 착각이었던 것이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카르멘이 너무 늦는 것 같았다. 혹시 그녀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한시라도 빨리 라파엘에게로 가지 않으면 안되는데. 눈부신 햇살을 가리기 위해 아나리자는 눈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그 때 피파가 무엇에 놀랐는지, 갑자기 뒷발을 높이 쳐들었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미처 손을 쓰지 못한 아나리자는 말등에서 떨어져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쿵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예리한 통증이 머리를 때렸다고 생각한 순간, 눈 앞이 캄캄해졌다. 차가운 빗줄기가 세차게 뺨을 때리고 있었다. 아나리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몸 여기저기가 욱신욱신 쑤셨다. 주위는 캄캄했다. 어느 사이엔가 밤이 되어 있었다. 거기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그 때 번개가 번쩍이고 요란한 천둥이 울려퍼졌다. 동풍과 어울린 빗줄기가 가차없이 그녀를 내리쳤다. 옷은 완전이 젖어 몸에 착 달라붙었다. 몹시 추웠다. 일어서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피파." 한 번 더 불러 보았지만 들려오는 것은 세찬 빗소리뿐이었다. "피파, 제발 부탁이야. 돌아와 줘." 그녀는 울먹였다. "하는 수 없이 혼자 걸어가는 수밖에." 그녀는 일부러 소리를 내러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그리고 몸이 따스해지도록 손을 비벼댔다. 그래도 추웠다. 문득 라파엘 일이 걱정스러워졌다. 늦지 않고 의사가 왔을까? 그렇지 않으면...거기다 커르멘까지! 그녀도 이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잃고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나를 데리러 왔을 테니까. 바닥은 울퉁불퉁 했고, 주위는 검은 막을 쳐놓은 것처럼 어두웠다. 때때로 번쩍이긴 했지만 발 아래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몇 번이나 헛발을 디디어 진흙 속에 나딩굴었다. 벗겨진 무릎에서 피가 흘렀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계속 걸어가고 있는 사이에 울컥 설움이 복받쳤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억눌렀다. 지금은 훌쩍거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머리 통증이 점점 심해져갔다. 너무 추워 손발의 감각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이대로 이곳에 쓰러져 그냥 자버리고 싶다고도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라파엘과 카르멘을 생각하면 여기서 좌절할 수가 없었다. 언덕을 다 올라간 아나리자는 발걸음을 멈추고 번개가 번쩍이는 것을 기다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탁류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조그맣던 시내가 폭우로 인해 물이 불은 것이었다. 아나리자는 발끝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조심조심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반 정도나 내려갔을까, 발끝이 뭔가에 걸려 주르르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눈깜짝할 사이에 얼음물같은 탁류에 휘말리고 말았다. 급류는 그녀를 마구 끌어 내렸다. '당황하면 안돼' 그렇게 마음속으로 자신을 타이르며, 아나리자는 물 위로 얼굴을 내밀기 위해 힘껏 발버둥질 쳤다. 하지만 겨우 얼굴을 내밀었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 순간 물이 u쳐와서 다시 숨을 쉴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물을 마시고 콜록거리면서도 그녀는 뭔가 잡을 수 있는 것을 찾아내려고 사력을 다했다. 나무, 바위, 뭐라도 좋았다. 뭔가에 매달려 이 급류에서 헤어나야 한다. 그러나 물살이 너무 빨랐다. 피곤에 지친 팔다리에서 힘이 쭈욱 빠져나갔다. 아나리자는 깊게 한숨을 쉬고 나서 물살에 몸을 맡겼다. 이제 소용없어! 난 살아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몸이 딱딱한 것에 부딪혔다. 나무다! 폭풍우로 쓰러진 나무가 마치 다리처럼 시내위에 걸쳐져 있는 것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그녀는 나무 줄기에 매달렸다. 잠시 그대로 거친 호흡을 가다듬고 조금씩 몸을 끌어올려 한발 한발 물가로 기어나갔다. 드디어 그녀는 구르듯이 물가로 몸을 던졌다. 선드레스는 갈기갈기 찢어졌고, 손발과 얼굴의 상처에서는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땅바닥에 엎드린 아나리자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리고 뭔가에 빨려들어 가듯이 의식이 희미해졌다. "있다! 이쪽이야! 빨리 담요를 줘!" 멀리서 라파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째서 이런 곳까지 오게 된 거지?" 마뉴엘의 목소리.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그런 건 나중 일이다." 라파엘이 그녀를 안아들고서 이마에 붙어 있는 젖은 머리타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그러나 아나리자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이런 기분 좋은 꿈에서 눈을 뜨는 일은 싫어..... 뭐라 말할 수 없는 안락한 기분. "아나리자..... 왜 이렇게 된 거요?" 라파엘은 고통스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서 그녀를 가만히 흔들었다. 포근하고 따스한 담요가 전신을 감쌌다. 비도 그친 모양이었다.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 아나리자는 힘센 팔에 안겨 말이 있는 곳까지 옮겨졌다. 라파엘은 말에 올라앉은 다음 그녀를 안았다. 아나리자는 그의 가슴에 기대어 만족한 듯 한숨을 쉬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서야 아나리자는 눈을 뜨고 라파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라파엘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정신이 드오, 아나리자? 내 목소리가 들리오?" 아나리자는 주뼛주뼛 망설이는 손길로 그의 까칠해진 뺨을 살며시 만져보았다. "꿈이 아니야...... 꿈이 아니군요? 정말 아무데도, 아무 일 없었군요, 라파엘?" "물론이오. 그런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카르멘이.... 아 참, 카르멘! 그녀가 아직 그곳에 있을 거예요. 빨리 찾아요. 분명히 다쳤을 거예요!" "이상한 말을 하는군? 카르멘이라면 집에 있소. 그런데 왜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거지? 잠깐, 어쩌면....." 라파엘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그 뒤에서 마뉴엘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말은 모두 마구간에 넣었어요. 그녀는 정신 차렸나요?" 아나리자는 마뉴엘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 봐요. 보시다시피." 라파엘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나리자를 안은 팔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현관으로 들어가자마자 돈 호세와 마리아 고모. 훌리아, 그리고 하이머와 안젤라가 뛰어왔다. 모두가 한마디씩 말을 걸었다. 그렇지만 라파엘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아나리자를 방으로 데리고 가서 침대에 내려놓았다. "가르시아 선생은 아직 안 왔나요?" 라파엘은 아나리자 몸에서 담요를 걷어내며 물었다. "이제 곧 올거다, 그나저나 어디 있었니?" 마리아 고모가 걱정스러운 듯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물가에요. 왜 그런 곳에 가 있었는지 그 이유도 대강 눈치챘어요. 카르멘은 뭘하죠?" "자고있어. 아나리자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태연한 것 같아." 훌리아 씁쓸하게 대답했다. 아나리자는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였지만 라파엘이 제지했다. "뜨거운 목욕이 필요하겠군. 이렇게 떨고 있잖아." 그 말을 들은 안젤라가 목욕탕으로 뛰어들어 욕조에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침대로 다가온 돈 호세는 상처 난 아나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조용히 혀를 찼다. "그런 곳에서 뭘 하고 있었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간 걸 보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정말 이상하다! 아나리자는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라파엘은 생생하다. 소뿔에 받힌 흔적 따위는 손톱 만큼도 없다. 게다가 카르멘은 집에서 잠을 자고 있다고! 그럼 카르멘과 함께 라파엘을 찾으러 나갔던 것이 꿈이었나? 당치도 않은 얘기다. 그렇다면 카르멘에 거짓말을 꾸며댔다는 건데.. 대체 뭣 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마비되었던 감각이 조금씩 되살아나면서 머리의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나리자는 돈 호세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걱정 끼쳐드려 정말 죄송해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얘기는 나중에 해도 된다, 우선 푹 쉬도록 해라." 돈 호세는 그녀의 뺨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목욕 준비 다 됐습니다." 목욕탕에서 안젤라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마리아 고모와 훌리아는 재빨리 남자들을 방밖으로 몰아냈다. 하지만 라파엘만은 막무가내로 그 자리를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가르시아 선생이 오기 전까지 아나리자는 제가 돌보겠어요. 여긴 맡겨두세요." 라파엘이 마리아 고모에게 그렇게 말했다. "잠깐만요, 목욕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아나리자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잠자코 있도록 해요, 꼬마아가씨. 자, 모두 나가 주지 않겠어요." "아니, 그럴 순 없다." 마리아 고모가 반대했지만 돈 호세가 그녀의 팔을 잡고 문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 모두 나가도록 하자. 뒷일은 내 아들에게 맡겨 두기로 하고." 이번엔 아무도 돈 호세의 말을 거역하지 않았다. 모두가 방을 나가고, 육중한 문이 닫혔다. "라파엘, 당신이 이방에 있는한 난 옷을 벗지 않을 거예요.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아요." "아뇨, 할 거예요. 나는 내 발로 목욕탕까지 걸어가 직접 옷을 벗고 내 발로 욕조에 들어갈 거니까요."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디디고 일어서는 순간, 아나리자의 몸은 휘청 꺾였다. 라파엘이 재빨리 그녀를 잡아 주었다. "아나리자, 내가 하라는 대로 해요, 지금만이라도 좋으니까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당신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 거요. 다시 또 헤어지고 싶지 않소. 그러니까 내게 모두 맡겨요." "알았어요. 사실 말싸움할 기운조차 없거든요. 하지만 타올을 펼쳐서 내 몸을 가려주면 고맙겠어요." 라파엘은 목욕탕에서 커다란 타올을 가져다 아나리자가 옷을 벗는 동안 그것을 펼쳐들고 있었다. 아나리자는 그의 손에서 타올을 받아 맨몸을 가렸다. "이젠 이쪽을 봐도 돼요." 라파엘은 그녀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갑자기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를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 거품이 가득한 욕조 속에다 살며시 내려놓았다. 바스샴푸 거품이 몸을 가려 주었다. 아나리자는 몸을 가렸던 타올을 풀어 그에게 넘겨주었다. 라파엘은 그녀가 욕조에 편히 잠겨 있는 것을 확인하고 목욕탕을 나갔다. 뜨거운 물에 전신을 담그고 있는 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자고 싶었다. "꼬마 아가씨, 나갈 시간입니다." 아나리자는 그가 내미는 크고 감촉이 좋은 타올을 받아들고 욕조에서 나왔다. 피로가 말끔히 가신 느낌이었다. 라파엘은 타올에 둘러싸인 그녀의 몸을 솜씨 좋게 상처를 피해가며 닦아주었다. 그리고 아나리자가 네글리제를 입는 동안 자리를 떴다가 곧 다시 돌아와, 그녀를 앉아 침대로 데리고 갔다. 아나리자는 침대 눕자마자 곧 눈을 감았다. 라파엘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의사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아나리자는 문득 중대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닫고 눈을 떴다. "라파엘?" "여기 있소." 그는 아나리자의 손을 살며시 잡아 주었다. 카르멘에 대해 할 얘기가 있어요. 오늘 일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게 아니예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어떤 거지?" 신중히 억누르고는 있었지만 라파엘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진심은 그런 게 아니예요. 다만 당신을 너무 사랑하고 있을 뿐이지요." "당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그런 감정을 당신은 사랑이라고 생각하오?" "카르멘은 나에게 조금 겁을 주려고 생각한 것뿐이예요. 내가 말에서 떨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거예요. 게다가 예상도 하지 못했던 폭풍우가 밀어닥쳤잖아요?" "그녀를 두둔하려는 거요? 당신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라파엘은 놀란 시선으로 아나리자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요! 나도 카르멘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녀가 나를 증오하고 있는 것 만큼요. 하지만 나는 그녀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이해할 수 있어요. 카르멘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 존재는 그녀가 볼 때 위협이었을 거예요.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겠지요. 모두 당신이 진실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파생된 일이에요." 갑자기 머리 속으로 극심한 통증이 내리꽂혔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감자, 라파엘이 다정히 이마에 손을 갖다대었다. "얘기는 그만! 자, 잠자도록 해요." "약소해요. 카르멘을 심하게 나무라지 않겠다고요." "알았소. 약속하지. 그러니까 이제 안심하고 눈을 붙이도록 해요." 아나리자는 안심한 듯 눈을 감고 금방 꿈나라로 빠져 들어갔다. 한밤 내내 비를 맞은 것이 탈이 되어 며칠동안이나 아니라자는 고열에 시달리며 의식도 몽롱해져 시간감각조차 잃고 말았다. 때때로 눈을 뜨면 침대 옆에 항상 라파엘이 있던 것을 어렴풋이 느끼곤 했다. 완전히 의식을 되찾았을 때, 제일 먼저 아나리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라파엘의 등이었다. 창가에 멈춰선 채 정원을 바라보는 그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었다.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띄었다. 마치 그녀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던 양, 라파엘이 뒤로 돌아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아나리자의 뺨을 살며시 감싸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번은 진짜로 정신이 든 것 같군. 사흘동안, 의식을 되찾았는가 싶더니 다시 몽롱해지고..... 그런 반복의 연속이었소." "사흘 동안이나요?" "가르시아 선생 말에 의하면,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던 거랑 고열이 원인이라고 하더군. 기분은 어떻소?" "배가 고파요. 위가 텅 비었나 봐요." 아나리자는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좋아, 좋은 징조요! 내가 곧 먹을 것을 가져오겠소." 라파엘이 뒤로 돌려도 했을 때, 아나리자가 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어때요? 무척 피곤해 보이는데......" 정말로 그는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흘동안 한번도 면도를 안 했는지 수염도 더부룩하고, 입고 있는 옷도 몹시 구겨진 채였다. "날 걱정해 준 것,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그는 그녀의 뺨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잠깐만 기다리도록 해요, 누군가에게 먹을걸 가져오도록 시킬 테니까." 아나리자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눈을 뜬것은 마리아 고모가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라파엘에게 들었다. 식욕기 난다며?" 마리아 고모는 아나리자를 일으켜 앉힌 다음, 등에 베개를 받쳐 주었다. "우선 스프랑 크래커를 먹어 보도록 해라. 맛있고 영양가 많고, 위에도 부담을 주지 않을 거야." "음 - 맛있는 냄새! 그나저나 이렇게 폐만 끼쳐서 정말 죄송해요." "네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데, 이런 것쯤이야..... 네가 기력을 되찾는 걸 보는 게 지금 나의 가장 큰 희망이야. 사실 너를 돌봐준건 내가 아니라 라파엘이지. 그가 고생이 많았어." "그럼, 그가 사흘동안 계속 이 방에 있었나요?" "한시도 쉬지 않고 네 옆에만 달라붙어 있었단다. 지금은 샤워를 하고 잠깐 눈을 붙였을 거야.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하더구나." 경쾌한 노크소리와 함께, 문 큼으로 훌리아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좋은 소식을 듣고 달려왔어요." "어서 들어와요." 훌리아는 반갑게 웃으며 침대로 다가왔다. "정말 다행이에요. 우리 모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특히 오빠가요." "저....카르멘은 어떻게 됐죠? 아직 이곳에 있나요?" 아나리자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훌리아와 마리아 고모는 의미 있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드리드로 갔어요. 일이 있다고 하면서요." "내게 뭔가 숨기고 있죠?" 아나리자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자 마리아 고모가 불쑥 의자에서 일어났다. "스프, 좀 더 먹지 않겠니? 무척 영양가가 많단다." "지금은 됐어요. 나중에 더 먹을게요." "그럼 나중에 다시 오마. 아직 휴식이 더 필요할 테니까 훌리아와 나는 이제 나가 주는 편이 좋겠지?" "아뇨....." 아나리자가 대답을 다 끝내기도 전에, 마리아 고모와 훌리아는 방에서 나가버렸다. 아나리자는 두 사람이 나간 문을 한참동안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두사람,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마리아고모 말대로 몸은 아직 휴식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지 금방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다시 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린 다음이었다. 아까와 같이 라파엘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나리자가 눈을 뜨자 스탠드를 켜고는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이제서야 눈을 떴군." "아까보다 기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에요." 아나리자는 그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요. 어떻소? 기운이 나는 것 같소?" "네,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에요." 일어나 앉으려고 몸을 뒤척이자, 라파엘이 손을 뻗어 안아 일으켜 주었다. "지금 몇 시쯤 됐어요?" "아마 12시가 다 됐을 거요. 저녁때 아바지가 당신을 보러 오셨소. 하이머와 마뉴엘도 왔었고, 당신이 눈을 뜨면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군." "왜......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죠?" "그런 눈이라니?" "뭔가를 망설이고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에요. 카르멘에 대한 얘긴가요?" "그렇소. 난 내일 마드리드로 갈 거요, 그녀와 얘기를 끝내기 위해서. 게다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일도 있고. 아마 일주일 후쯤에나 돌아오게 될 것 같소." 아나리자는 아무 말 없이 라파엘의 얼굴을 응시했다. 스탠드의 은은한 불빛이 뚜렷한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춰주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눈을 감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라파엘이 그녀의 턱을 살며시 잡아 눈이 마주치도록 얼굴을 들었다. "아니, 당신은 알고 있지 않소!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거든. 처음 계획으로는 당신이 내 약혼녀로서 이곳에 있는 것은 불과 이삼 개월의 예정이었소. 그런데......" 라파엘은 피곤한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우리 둘 사이에 예정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만 거요." 그는 턱을 받친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고 도톰한 입술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이곳에 계속있어 주면 좋겠소, 나와함께! 이제는 당신을 놔주고 싶지가 않다오. 당신도 스페인에 있기를 원하고 있잖소, 안 그러오?" 아나리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아나리자,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소?" 결혼......?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저, 나는......" 라파엘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살며시 눌렀다. "예스요, 노요?" "예스예요." 아나리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잠시 후, 라파엘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와 아나리자의 입술과 맞닿았다. 전신이 마비되어 버릴 것 같이 달콤한 감각..... 감미로운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나리자는 그의 키스에 정열을 불태웠다. "당신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소, 아나리자." 라파엘이 약간 몸을 뗀 다음,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당신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요! 뜨거운 감정이 용솟음쳤다. 사랑한다는 그의 말 한마디를, 아나리자는 간절히 기다렸다. 굶주린 것처럼 그 한마디를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사랑'이란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라파엘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카르멘과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소?"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요." "그러나 지금 여기서 내 설명을 들어주지 않겠소? 그러면 내가 왜 마드리드까지 가서 그녀와 얘기를 끝내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 이유도 알게 될 거요. 괴롭겠지만 들어주오." 아나리자는 마음을 굳게 먹고, 라파엘의 말을 기다렸다. "카르멘과 나는..... 사이좋게 지내왔소. 아주 오랫동안. 그렇지만 그녀에게는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뒀소. 그녀와 결혼할 생각은 없다고 말이오. 그러나 그녀는 내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었소. 당신을 미국에 남겨두고 나 먼저 귀국한 것도, 사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녀에게 한마디 해두기 위해서였지. 그렇다고 모든 걸 다 털어놓았다는 건 아니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소?" 아나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멘은 불같이 화를 냈소.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그녀는 화를 내면서도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말았소. 그래서 그녀는....." "라파엘, 이제 됐어요. 더 이상 듣지 않고 괜찮아요." 라파엘은 침대로 다가와서 다시 아나리자 옆에 걸터앉았다. "아니, 끝까지 들어요. 카르멘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 계략이 거의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녀를 죽이려고까지 생각했었소. 하지만 그때 당신이 그녀를 나무라면 안 된다고 하더군.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와 마주치지 않은 것밖에 없었소." "그럼 카르멘은 당신과 만나보지도 못하고 이곳을 나갔나요?" "그렇소." "카르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요?" "말할 수 있소!" 그 대답과 동시에 라파엘의 입술은 한 번 더 그녀의 입술 위로 포개졌다. 그것에 대답하듯 아나리자는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았다. 이렇게 그의 품안에 있으면 그 사랑을 믿을 수가 있었다. 말로 표현해 주지 않아도 그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결혼합시다. 우리는 23년이나 약혼한 상태였소. 약혼 기간으로는 너무 긴 게 아니오?" 아나리자는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 다음에는 햇살에 그을은 믿음직스런 목덜미, 그리고 넓은 가슴까지 더듬어 내려갔다. 그러자 라파엘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잘 토라지는 말괄량이 아가씨에게 이렇게 빠져버릴 줄이야.....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오.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우리는 서로를 소유하게 되오. 자, 이제 자는 게 좋을 것 같군." 라파엘은 아나리자가 침대에 눕는 것을 도와주고는 편히 잠잘 수 있도록 베개 위치를 바로잡아 주었다. "내일 아침 당신이 잠자고 있을 때 떠나게 될 테니까. 지금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해 둬야겠군. 아나리자, 일주일 후면 당신은 내 아내가 되는 거요! 알았소?" 아나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은 그런 그녀의 뺨에 키스를 하고,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라파엘?" 아나리자가 부르는 소리에,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보았다. "저...." 사랑한다고 말하려 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잘 다녀오라는 틀이 박힌 말이었다. 라파엘은 빙긋이 웃으며 윙크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 사랑한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고. 아나리자는 눈을 감았다. 그가 결혼하자는 말은 진심일까? 진정으로 그렇게 원하고 있는 걸까? 그와 함께 있을때는 뭐든지 순순히 믿을 수가 있다. 하지만 그가 보이지 않게 된 순간부터 불안한 기분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었다. 라파엘이 마드리드로 떠난 다음 날에는 아나리자도 침대에서 나올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되찾았다. 그리고 나서 체력도 점점 회복하여 곧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매일 매일이 분주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지나갔다. 그런 와중에도 아나리자는 라파엘만을 생각했다. 얘기를 끝낼 거라고 했었는데 대체 뭐라고 했을까? 과연 카르멘이 납득을 할까? 어느날 아침, 아나리자가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돈 호세가 들어왔다. 그의 팔에는 레이스를 많이 사용한 새하얀 드레스가 걸쳐져 있었다. 그는 넋을 잃고 있는 아나리자에게 그 드레스를 건네주었다. "라파엘의 모친이 나와 결혼할 때 입었던 거란다." 아나리자는 자기 손에 있는 드레스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구름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느낌..... 게다가 몇 겹으로 된 레이스는 놀랄 만큼의 수공을 필요로 했을 듯 했다. "이 드레스, 정말 제가 입어도 되나요? 추억이 담긴 드레스일텐데....." "그러니까 네가 입길 바라는 거지. 자, 나는 그만 나가 볼 테니, 안젤라에게 입는 걸 도와달라고 하렴." 안젤라는 마치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런 손길로 드레스를 입혀 주었다. 등에 있는 진주 단추를 잠그자, 여성스러운 몸매가 완연히 드러났다. 팔에 꼭 달라붙는 소매는 손등에 와 반쯤 갈라져 있고, 가는 허리에 꼭 맞는 상의. 풍부하게 레이스를 사용한 스커트는 우아하고 길게 옷자락을 끌고 있었다. 머리에는 진주를 박은 작은 화관에 함께 스페인식 베일을 썼다. 물안개 같은 레이스가 등뒤에 웨이브지며 드리워져 있었다. 안젤라는 웨딩드레스 차림의 아나리자를 황홀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결혼식 날엔 머리에 오렌지 꽃을 꽂아 드릴게요. 스페인에서 제일 아름다운 신부가 탄생할 거예요. 그건 제가 보장해요." "문제는 라파엘이 그렇게 생각해 주느냐예요." "문제없어요. 분명히 마음에 들어하실 거예요. 분명해요!" 안젤라는 아나리자가 벗은 드레스를 조심스럽게 옷걸이에 걸며 물었다. "그런데 에머슨 아저씨란 분에게는 연락하셨어요?" "그게요,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연락이 되질 않는군요. 다시 전화해 볼 생각이에요." 초대장을 보내고 요리메뉴 따위를 생각하며 결혼식 준비에 쫓기다 보니, 학교 일은 신경이 쓰이면서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마리아 고모가 앞장서 분투해 준 덕분에 결혼식 준비는 결혼 전날까지 완전히 끝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라파엘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내일이 결혼식인데. 혹시 그의 마음이 변한 게 아니까? 카르멘이야말로 가장 사랑하는 여자라고 고쳐 생각했을지도 몰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혹과 불안, 아나리자는 그런 감정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의 마음이 변하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 혹시 그렇게 됐다면..... 아니, 그래선 안돼! 그날 저녁식사가 끝나자 마뉴엘이 말을 걸어왔다. "같이 정원이라도 거닐지 않겠어요?" 요 이삼 일 동안, 마뉴엘은 결혼식 준비에 들떠있는 샌디에고 가족들과는 달리, 혼자 울적해 하고 있었다. 아나리자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돈 호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먼저 어두운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아나리자 쪽으로 얼굴을 돌려 나갔다 오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무 아래 있는 벤치에 앉을 때쯤 되어서,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마뉴엘이 입을 열었다. "정말 결혼할 마음이군요?" "물론이에요. 라파엘이 생각하는 내 마음,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아나리자, 지금까지 이런 말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억제할 수가 없어요." "나도 당신이 좋아요. 다만 남편 동생으로서요. 알죠? 어떤 마음인지?" "알아요. 하지만 그런 마음은 원치 않아요. 나라는 존재로서 사랑을 받고 싶은 거예요. 형과의 결혼을 취소하겠다는 말만 해 주면, 당장이라도 당신을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겠어요." "마뉴엘, 그런 말하지 말아요. 난 라파엘을 사랑하고 있어요. 내 마음은 그 외에는 아무도 받아들일 여지가 없어요. 당신은 멋진 남자예요. 당신에게 사랑 받는 여자는 정말 행복할 거예요. 그렇지만 그건 내가 아니예요." 아나리자가 필사적으로 설득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뉴엘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접근시켜왔다. "마뉴엘, 이러지 말아요! 서로 후회할 행동은 안 하는 게 좋아요!" 아나리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졌다. 결국 마뉴엘은 손을 떼고 힘없이 벤치에 기댔다. "자기 감정에 자신을 갖고 있나요?" "확신할 수 있어요, 이 감정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그렇다면 내가 끼어들 틈은 조금도 없겠군요? 행복해지길 빌겠어요." "고마워요." "자, 이제 집으로 가요. 내가 테라스까지 데려다 드리지요." 아나리자는 그 밤,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마뉴엘과의 일도 웬지 개운치가 않았지만 그것보다도 라파엘과 카르멘의 일이 더 마음에 걸렸다. 라파엘은 결혼식까지 정말 돌아올까? 일주일 동안이나 그녀의 마음을 괴롭혀온 불안이 결혼 전날 밤 극도에 달한 것이었다. 눈을 뜨자 황금빛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다가왔다. 잠시 후 아침 식사를 가져오는 안젤라를 따라 마리아 고모가 방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이 한바탕 수다를 떨고 가자, 이번에는 훌리아가 기쁜 소식을 알려주러 왔다. 그녀가 하이머와 가까운 시일 내에 결혼하리라는 뉴스였다. 훌리아도 한참동안 얘기를 하고서야 방을 나갔다. 겨우 혼자가 되어 한숨을 돌린 것도 잠시뿐, 또 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돈 호세였다. "깜짝 놀랄 선물을 가져왔단다! 네가 만나고 싶어하던 사람을." 대체 누굴까? 아나리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리아 고모 말에 의하면 라파엘은 결혼식 바로 직전에 돌아올 것 같고, 그가 아니고서 내가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니.....? "아가, 그러고 있지 말고 그 사람을 만나보는 게 어떻겠니?" 돈 호세의 말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에머슨 아저씨!" 아나리자는 환성을 지르며 크게 팔을 벌리고 에머슨에게로 달려갔다. 돈 호세는 빙긋이 웃으면서 두 사람을 남겨두고 방을 나갔다. "드리어 라파엘 샌디에고의 아내가 되는구나. 그를 사랑하고 있겠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예요." "잘 된 일이다. 얼굴도 전보다 더 아름다워졌는데! 스페인 태양이 좋긴 좋은가 보구나?" "내 얘기보다 아저씨 얘기가 더 듣고 싶어요. 어떻게 알고 오셨죠?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어디 가셨어요?" "여행중이지. 전세계를 여행하는 게 나의 오랜 꿈이었거든. 네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새삼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았단다. 내 인생도 예외는 아니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으면 꿈으로 끝나버릴 것만 같아, 이렇게 여행을 하기로 한 거란다. 이곳에 온 건, 여행 도중 우연히 들른 거야." "정말 잘됐어요! 이렇게 결혼식에 맞춰 오시다니. 아저씨, 부탁이 있어요. 저를 결혼식장에 데리고 들어가 주시지 않겠어요?" "기꺼이!" "고마워요. 언제까지 여기 계실 거죠?" "내일까지. 그리고 나서 다시 여행을 계속할 거야." "아저씨, 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그 때 마리아 고모와 안젤라가 방으로 들어왔다. "자, 인사는 그 정도로 끝내는 게 어떻겠니? 라파엘이 돌아왔단다. 손님도 하나, 둘 오기 시작했고..... 이제 드레스를 입지 않으면 안되겠거든." 에머슨은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가면서 아나리자에게 말했다. "새신부 될 준비가 끝나면 데리러 오마." 에머슨이 나가자마자 아나리자는 마리아 고모를 쳐다보았다. "라파엘을 지금 만나지 않으면 안돼요. 할 얘기가 있거든요." "당치도 않아요. 결혼식 날, 식이 시작될 때까지 신랑은 신부를 봐서는 안되거든" "하지만....." "하지만이란 말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걸로 하자꾸나." 마리아 고모와 안젤라는 신부 단장을 시작했다. 그 두 사람이 하라는 대로 따르는 아나리자의 마음속에서는 흥분이 조금씩 고조되어갔다. 라파엘이 돌아왔다. 결심은 변하지 않았구나! "아름답구나, 아나리자. 정말 아름다워! 라파엘도 분명히 자랑스럽게 생각할 거다." 마리아고모는 감격한 건지,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안젤라 눈에서도 눈물이 반짝였다. 그리고 나서 아나리자는 에머슨 아저씨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신부차림으로 혼자 있게 되니까 라파엘의 아내가 된다는 흥분과 불안으로 가슴이 터질 것처럼 고동치기 시작했다. 웨딩마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음악과 함께 에머슨이 방으로 들어왔다. 아나리자가 그의 팔을 잡고 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현관홀을 가로지르고 거실을 통해 테라스로 인도되어 갔다. 테라스에서 정원으로 나가자, 초대 손님과 샌디에고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소중한 라파엘이 신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파엘은 새파란 하늘을 그대로 조금 옮겨 놓은 것 같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검은 턱시도우와 프릴 달린 새하얀 셔츠가 그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당당하고 우아하며 핸섬하고..... 그를 향해 아나리자는 한 걸음씩 다가갔다. 드디어 에머슨은 그녀를 라파엘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손은 잡는 순간, 아나리자는 언뜻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무표정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 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 않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되돌릴 수 없었다. 이제 라파엘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격렬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이렇게까지 그를 사랑하고 있으리라고는...... 아나리자는 그런 기분으로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 결혼식이 끝나자, 라파엘은 주례사의 지시에 따라 아나리자의 베일을 뒤로 넘겨주었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헤아릴 수 없이 깊고 맑은 파란 눈동자. 그 눈동자가 가까이 다가왔다고 생각한 순간, 아나리자의 입술에 뜨거운 입술이 겹쳐졌다. 정열이 깃들인 입맞춤에 아나리자의 마음은 뜨겁게 전율했다. 잠시 후 라파엘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의 아나리자에게 팔짱을 끼게 하고는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 나갔다. 손니들과 가족들이 진심으로 축하를 보냈다. 하지만 아나리자의 머리에는 라파엘에 대한 생각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라파엘 샌디에고, 내 남편!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결혼식의 피로연은 댄스파티였다. 모든 사람이 즐겁게 춤을 추고, 쾌활하게 떠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던 마뉴엘도 무척 즐거운 표정으로 함께 춤을 추었다. 아나리자는 그런 마뉴엘을 보고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해질녁이 가까워지자 초대 손님이 하나 둘 돌아가기 시작했다. 헤머슨은 끝까지 남아 주었지만, 그와도 작별을 나누지 않으면 안될 시간이 왔다. 에머슨은 아나리자의 뺨에 키스를 한 다음, 그녀 옆에 서 있는 라파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아이를 부탁하네. 그 아이의 눈에 눈물을 맺히게 해서는 안돼. 알았나?" 라파엘은 아나리자의 허리를 팔로 감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걱정 마십시오. 랭훼드씨. 그렇게 하라고 해도 안 할 테니까요." "정말 걱정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네. 이 늙은이에게도 가끔 전화를 해 다오. 아나리자. 목소리가 듣고 싶을 거야." 에머슨과 헤어진 후에 라파엘과 아나리자는 차에 올랐다. 가족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을 태운 차는 라파엘이 개조한 프란시스코 할아버지 저택을 향해 달렸다. 드디어 차는 황혼이 질 무렵 저택 현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라파엘은 아나리자를 가볍게 안고서 현관문 안으로 들어가 그대로 이층으로 올라갔다. 침실로 들어간 라파엘은 그제서야 그녀를 내려놓았다. "우리 집에 온 걸 진심으로 환영하오. 세뇨라 샌디에고." 뜨겁게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에 아나리자는 수줍은 듯 미소로 대답했다. 라파엘은 그녀의 머리로 손을 뻗어 베일과 진주관을 벗겨 주었다. 그러자 황금빛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에 드리워졌다. "아름답소......" 아나리자는 숨을 죽였다. "두려워요." "내가?" "아뇨, 내 자신이. 당신과 이렇게 함께 있는 내 자신이 두려워요." 그녀의 마음은 아직도 갈등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의 아내가 되는 것에는 아무런 망설이 없었으나 그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한 채,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아나리자는 라파엘의 마음을 물어 볼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때 라파엘의 팔이 그녀를 다정히 끌어안으며 천천히 입술이 다가왔다. 그러자 그녀를 괴롭히던 의혹과 불안은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그의 품안에 있으면 불안 같은 건 저 멀리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아나리자는 모든 것을 라파엘에게 맡겨버렸다. 그의 옷이 의자로 던져졌다. 이윽고 새하얀 드레스도 스르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흩어져 있던 두 마음이 하나로 합쳐져 타오르는 순간이었다. 7장 행복한 날들이 서서히 흘러 어느덧 결혼한 지도 몇 주일이 지나갔다. 마치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듯한 이 날들을 어지럽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아나리자는 그렇게 믿기 시작했다. 그녀의 희망에 따라 안젤라는 이 저택에 머물면서 가사 일을 도맡아보고 있었다. 그 덕분에 아나리자는 남편을 위해 요리를 만드는 일과 학교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학교는 노력한 보람이 있어, 개교하자마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교실이 비좁을 정도였다. 라파엘도 바빴다. 낮에는 목장 일로 눈코 뜰새없이 돌아다녔고, 저녁이 되면 서재에 틀어박혀 건축기사로 돌아가 도면과 씨름하는 나날이었다. 어느 날 밤, 라파엘은 테이블에 팔을 괴고 앉아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국 여자가 이렇게 요리를 잘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소." "괜히 아부하지 마세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눈치챘다면 하는 수 없지. 아나리자, 이리 와 봐?" 그는 자기 무릎을 가리켰다. 아나리자는 하라는 대로 그의 무릎에 앉으며 두 팔로 그의 목을 안았다. "나, 내일 아침에 마드리드에 갈 거요." "왜요?" 아나리자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라파엘의 입에 살며시 입술을 대었다. "사무적인 일 때문에." 그도 그녀의 입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함께 가도 괜찮아요?" "투우를 할거요. 그래도 나를 따라 오겠소?" 뭐라고? 투우를 한다고? 아나리자는 그의 품에서 화들짝 몸을 떼냈다. "왜 투우같은 걸 하는 거죠?"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하지만 만일에 일이라도 일어나면 어떡해요? 경솔한 결정이에요, 당신은 결혼한 몸이잖아요.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요. 지금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해왔거든. 이봐, 그런데도 내 몸은 무사하잖아. 솔직히 당신이 보러 와 줬으면 좋겠소." 라파엘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히 바라는 듯한 여운이 있었다. 그러나 투우라는 말 한 마디만으로도 이성을 잃은 아나리자에게는 그걸 눈치챌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무릎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안돼요, 그럴 순 없어요. 당신이 소를 상대로 싸우는 것은 도저히 볼 수가 없어요..... 미안해요." 아나리자는 발걸음을 멈추고 호소하는 듯한 시선으로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라파엘의 얼굴은 어느 사이엔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결혼하고 나서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그 가면 같은 무표정이 다시 나타났다. 지금까지 바로 옆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의 마음이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라파엘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알았소. 돌아오는 것은 언제가 될지 아직 모르겠소." "라파엘, 제발....." 아나리자는 그의 팔을 잡고 애원하듯 매달렸다. "미안하지만 난 해야 할 일이 있소." 라파엘은 그녀를 떠밀듯이 떼어버리고 서재로 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아나리자는 그가 앉아 있던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이제부터 투우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싸워야 하는 걸까? 역시 그와 함께 가야할지도 몰라. 안젤라가 저녁식사 식탁을 치우기 위해 그곳으로 들어왔다. "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말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더군요. 솔직이 말하면 그건 아씨가 잘못하신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에요." 아나리자는 안젤라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좀처럼 마음을 다시금 먹을수가 없는 걸요." "다음 기회까지는 마음을 굳게 먹을 수 있을 거예요." "다음 기회라니, 그게 언젠데요?" "이주일 후요. 장소는 세빌리아인데, 여기서 차로 45분 정도 걸리는 곳이에요. 갑자기 보러가서 주인님을 놀라게 해드리면 어떨까요?" "이주일 후....... 그 정도라면 마음의 준비도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제가 도와드릴께요." 주방을 다 치운 아나리자는, 안젤라를 차에 태우고 학교로 향했다. 성인 학급수업이 있기 때문이었다. 성인 학급 강의는 참으로 보람있는 일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 11시, 라파엘은 아직 서재에 있었다. 아나리자는 네글리제를 입고 침대로 들어갔다. 책이라도 읽으면서 라파엘은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깜짝 놀라며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 되어 있었다. 읽고 있던 책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라파엘이 올려놓은 거겠지. 그런데 라파엘은......? 침대에 잠잔 흔적은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옷 몇 벌과 옷가방이 없어졌다. 라파엘은 벌써 나가버린 것이었다. 화해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가 무척 지루하게 느껴졌다. 라파엘이 출전하기로 되어 있는 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날이 오자, 아나리자는 아침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가 다쳤다는 연락이 올지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 불안과 초조를 참을 수가 없어 돈 호세의 집으로 갔다. 가족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낼 셈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짧은 편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꼬마아가씨, 이렇게 나는 무사하오, 라파엘.> 아나리자는 그 편지를 들고 안젤라를 찾으러 다녔다. 그녀는 정원 의자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이거, 어디서 온 거죠? 그는요? 집에 돌아왔나요?" 헐떡거리며 묻자, 그런 아나리자의 모습을 본 안젤라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진정하세요. 그 편지는 심부름꾼이 가져왔어요. 주인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다구요." 역시...... 아나리자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그 편지를 뺨에 대 보았다. "언제쯤이나 돌아와 줄까?" "일이 끝나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하실 거예요." "세빌리아에서 열릴 투우는 다음 주예요. 결심은 하셨나요?" "네, 가볼 마음을 먹긴 했지만. 이 얘기, 라파엘에게 해서는 안돼요. 깜짝 놀라줄 거거든요." "아직 확실히 결심이 서지 않은 것처럼 들리는데요?" "나도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요. 하지만 투우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그 정도는 이해해 줘요." 결국 라파엘은 그 주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세빌리아에서 투우가 열리기 전날 밤,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지독하게 잠겨 있었다.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내일, 투우에 나가기로 한 걸 취소할 수는 없나요?" "아나리자, 논쟁을 자꾸 되풀이하고 싶진 않소." "나도 동감이에요. 당신이 걱정스러울 뿐이라고요." "안심해요. 나는 문제없으니까. 내일 집으로 돌아가겠소. 내가 돌아가면 같이 이야기 좀 합시다." "알았어요. 당신이 그런 식으로 화내고 나가버린 것에 대해서도요." 전화 저쪽에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요. 몸은 아무 탈없소?" "네, 단지 당신이 없어서 적적하긴 하지만요." "나도 마찬가지요. 그러나 내일이면 돌아갈 거니까. 그럼 잘 자요, 달링!" "네, 당신도 몸조심해요." 전화가 끊겼지만 아나리자는 오랫동안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라파엘을 만나고 싶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는 더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내일은 그를 만나러 갈 것이다. 세빌리아의 투우장으로..... 아나리자는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고 그 자리에서 훌리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도 투우를 하는 오빠의 모습이 보고 싶다고 했다. 하이머도 함께 가겠다고 했으나, 마뉴엘은 새로 사귄 여자와 데이트하느라 그런데 쫓아갈 여유가 없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아나리자는 훌리아와 함께 하이머가 운전하는 차릍 타고 세빌리아로 달려갔다. 투우가 시작되는 것은 저녁이었지만 일찍 출발해서 그곳 시내를 구경하기로 계획한 것이다. 아니라자는 아름다운 거리를 바라보면서도 라파엘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투우에 임할 마음의 준비는 끝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그녀는 거리를 제대로 구경할 수가 없었다. 여섯 시 조금 전, 아나리자 일행은 투우장에 도착했다. 길게 늘어선 행렬을 따라 투우장에 입장한 아나리자의 가슴은 세차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라파엘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아무데도 없었다. 훌리아가 그런 그녀를 위로하듯 아나리자의 팔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렇게 걱정하지 말아요, 오빠는 이 투우장 어딘가에 있으니까. 투우같은 건 마음놓고 즐기면 되는 거예요." "마음놓고 즐기는 건 죽을 때까지도 불가능할 것 같아요. 멋지면서도 안전한 직업이 많은데 하필이면 왜 투우를 선택한 건지..... 아무래도 나는 밖에 나가 차에서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나중에 어떻게 싸웠는지 얘기나 해 줘요." 일어서려고 하는 아나리자를 하이머와 훌리아가 잡았다. "남편이 실망해도 괜찮아요?" 하이머가 설득하듯 말했다. "그는 내가 여기 온 걸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없어도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계속 그렇게 고집피우면 의자에 꽁꽁 묶어 놓을 거예요. 자, 마음 푹 놓고, 벌써 입장식이 시작됐잖아요." 훌리아의 말에 투우장 안으로 시선을 돌리자, 16세기 풍의 옷을 입은 남자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그 뒤를 이어 투우사가 세 사람. 하이머의 설명에 따르면 그 다음에 입장한 남자들은 소에게 칼을 내리치는 투우를 한다고 했다. 아나리자는 남자들의 행렬을 재빨리 살폈다. 있다! 라파엘은 행렬 제일 앞에 있었다. 짧은 자켓과 조끼 그리고 금은실로 호화롭게 수를 놓은 투우복장. 당당한 라파엘의 모습, 검은 모자가 윤곽이 뚜렷한 얼굴과 아주 잘 어울렸다. 아나리자는 한참 동안, 자기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넋을 잃고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투우사 행렬이 장내를 통과하자, 그곳의 시장이 소를 가둬둔 우리 열쇠를 투우장으로 집어던졌다. 드디어 투우가 시작된 것이었다. 제일 먼저 소와 싸울 남자만 남고 다른 사람들은 재빨리 퇴장했다. 라파엘도 그들과 함께 퇴장했다. 드디어 우리가 열리며 새까만 소가 뛰어나왔다. 그 투우사는 소와 싸움을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저런 걸 하는 거죠. 다치기만 할텐데 말이에요?" 아나리자가 하이머를 바라보자, 그는 웃으면서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라파엘은 절대 안 다칠 테니까요." 드디어 라파엘 순서가 되었다. 아나리자는 아랫입술을 자국이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숨쉬는 것조차 괴로울 정도였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비명만은 절대 지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을 신호로 우리가 열리며, 황소가 뛰어나왔다. 관객석이 술렁거렸다. 소라고 하기보다 거대하고 새까만 근육덩어리였던 것이다. 아나리자는 자기도 모르게 훌리아의 팔을 잡고 말았다. "대체 왜 이 소만은 이렇게 큰 거죠?" "제비뽑기 운이 나빴기 때문일 거예요." 훌리아의 얼굴도 창백했다. 소는 투우사들의 피난 장소인 판자 벽으로 돌진해 갔다. 뿔로 벽을 박자,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라파엘은 투우장 한가운데로 걸어가더니, 그곳에서 발을 멈추고 소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아나리자의 불안은 점점 더 고조되어갔다. 라파엘의 얼굴은 의외로 창백했다. 감기까지 걸린 몸으로 저런 소를 상대해야 하다니..... 너무 두려워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으나, 보지 않고 소리만 듣는 것은 더더욱 두려웠다. 황소는 투우장 구석에서 머리를 숙이고 그를 꼼짝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투우사의 태도를 엿보고 있는 것일까? 라파엘은 한쪽 손으로 망또를 들고 모래 위에서 무릎을 뚫었다. "자, 이리 와! 왜, 무서운 생각이 드나?" 라파엘은 소리를 지르면서, 그 소를 자극시키려는 듯 망또를 흔들어댔다. 별안간 소는 맹렬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천둥과 같은 발굽 소리가 투우장 안에 울려 퍼졌다. 라파엘은 망또 흔들던 손을 멈추고 다가오는 소를 노려보았다. 미터.... 2미터.... 이 상태라면 그는 저 날카로운 뿔에 가슴이 받히고 말 것이다. 아나리자는 의자 끝을 있는 힘껏 잡았다. 황소가 1미터 정도 앞까지 왔을 때, 라파엘은 머리 위에서 망또를 흔들었다. 망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재빨리 원을 그렸다. 그러자 황소는 그것을 따라 휙 방향을 바꿔, 라파엘의 오른쪽 뺨을 거의 스칠 정도로 달려나갔다. 관객은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아나리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린 나머지, 그대로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음을 놓기엔 아직 이르다. 무릎을 꿇고 있는 라파엘을 향해 황소가 다시 돌진해 가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또 멋진 폼으로 소의 돌진 방향을 바꾸었다. 그런 행동이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저돌적으로 돌격해 오는 새까만 근육덩어리, 그 돌격 방향을 바꾸기 위해 펄럭거리는 망또, 망또의 한쪽은 빨간 색, 다른 쪽은 검은 색, 가장자리는 금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망또가 펄럭일 때마다 아나리자는 숨이 끊어질 듯했다. 훌리아도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무해! 저렇게까지 소를 접근시키지 않아도 될 테데....." 이윽고 칼을 내리칠 차례가 되었다. 그것을 담당한 투우사가 칼을 들고 나왔지만 라파엘은 그를 저지하고는, 자기가 직접 칼을 들고 소와 대결하는 순간, 그는 맹렬히 돌진해 오는 소의 목에 있는 힘껏 찔러 꽂았다.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상처 입은 소는 왼쪽 뿔로 라파엘의 자켓을 스치며 달려나갔다. 또 다시 트럼펫이 울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투우사는 자기 적색 망또를 한 손에 다른 쪽 손에는 칼을 들고 등장했다. 표정은 무척 지친 듯 했다. 아나리자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라파엘은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황소에게 소리를 쳤다. 그러자 그 소는 미친것처럼 돌격했다. 그는 그 자리에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가 아주 가까워졌을 때야 망또를 폈다. 소는 그 빨간 망또를 따라 방향을 바꾸었다. 다시 그런 행동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때마다 관객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몇 번째인가 소가 돌진했을 때였다. 망또에 뿔을 쳐박은 황소가 느닷없이 왼쪽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관객석 여기저기서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라파엘이 뿔에 받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것이었다. 아나리자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은 넘어지면서도 소의 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소는 귀찮은 듯 머리를 흔들었지만 라파엘의 팔은 느슨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소가 놀랄 만큼 재빨리 고개를 뒤틀었다. 그 바람에 라파엘의 몸은 넝마처럼 내던져졌다. 그곳을 향해 소가 달려든 순간, 재빨리 뛰어나온 다른 투우사들이 소의 정신을 혼란시켰다. 그러는 사이에 라파엘은 비틀거리며 땅바닥에서 일어났다. 얼굴은 창백하고 자켓은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기적적으로 다치지는 않은 듯해 보였다. 그는 칼과 망또를 집어들었다. "저리 비켜!" 라파엘이 명령하듯 말했다. 하지만 다른 투우사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인지 비키려고 하지 않았다. 라파엘은 한 번 더 명령했다. 그들은 놀란 듯이 두세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나와 소, 둘만 남겨놓고 다 들어가 있으라고 말했잖아." 라파엘은 큰소리로 화를 냈다. 그러자 그들은 하는 수 없다는 듯 투우사 피난처소로 물러갔다. "대체 어쩌려고 저러는 거지?" 하이머가 중얼거렸다. 라파엘은 또 다시 황소와 대결하게 되었다. 거대한 괴물은 앞발로 흙을 파헤치면서 라파엘을 관찰하고 있었다. 라파엘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충혈된 소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런 다음 무릎걸음으로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소가 앞발을 내디디자, 관중은 숨을 죽였다. 소가 돌격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는 쇠사슬로 묶인 것처럼 제 자리에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라파엘은 더욱 소 앞으로 다가갔다. 소의 코 끝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라파엘은,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소의 이마에 팔꿈치를 대고 기대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등을 들려 소의 코끝에 등을 대고 기대섰다. 관중석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아주 작은 소리라도 소를 자극시킬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소가 돌진한다면 라파엘은 피할 틈도 없이 뿔에 받히고 발굽에 짓밟히게 될 것이었다.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즉시 소의 행동이 재개되었다. 라파엘이 흔드는 망또를 따라 소가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객석에서는 맹렬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아나리자는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의자 사이를 뚫고 투우장밖으로 마구 달려나갔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 뿔에 받혀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다니! 그런 지옥 같은 긴장은 더 이상 참아낼 수가 없었다. 그 때 투우장에서 한층 더 높은 환호성이 터졌다. 소의 생명이 끊기고 투우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아나리자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눈물이 샘솟듯 솟아올랐다. 라파엘은 무사하다! 누군가 어깨를 잡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니, 훌리아가 서 있었다. "오빠는 무사해요. 그러니 이제 안심하세요. 자, 빨리 돌아가서 오빠에게 축하인사를 해 줘야죠." "못해요, 훌리아. 미안해요. 지금 그와 얼굴을 마주 대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인 죽을 뻔했잖아요!" 아나리자는 땅바닥에서 일어나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 빠져 나왔잖아요. 오빠는 생명을 건 싸움에서 승리한 거예요. 자랑스럽게 생각해야죠." "알아요. 하지만 지금 라파엘을 보면 축하 인사는커녕, 그의 목을 조를 것만 같아요. 죽을 정도로 사람을 애끓이게 했잖아요. 그렇게 이성을 잃은 내 모습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요." "오빠가 실망할 텐데요." "그것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그와 결혼했을 때는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투우하는 걸 거의 모른 채 그의 아내가 됐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지금 난 그걸 확실히 알았어요. 내가 이런 긴장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지 않는 한, 우리는 이제 끝이에요. 잠시 어딘가에 가서 차분히 생각해 볼 거예요. 그리고 그의 아내로서 어울리는 여자가 되어 돌아오겠어요." "돌아오다뇨? 그럼 오빠를 놔두고 나가겠다는 건가요?" "잠깐 동안만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편지를 써 놓고 가겠지만 훌리아, 당신이 오빠에게 잘 좀 말해줘요." "왜 직접 오빠에게 말하지 않는 거죠?" "그를 보면 내 결심이 흔들릴 것 같기 때문에요. 그러면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게돼요. 그는 한 달에 한두 번은 투우를 할텐데. 그때마다 잔소리를 하고 불안해 할 수는 없잖아요." "알았어요. 오빠에게는 내가 설명을 해줄께요. 그런데 어디로 갈 거죠?" "하몬드 저택으로요. 생각하기에는 아주 알맞은 장소거든요." "오빠에게 말해도 괜찮겠어요?" "물론, 편지에도 행선지는 써 놓을 거니까요." 훌리아는 아나리자의 손을 힘있게 쥐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돌아와 줘요, 언니가 없으면 모두 쓸쓸해 할 테니까요." 아나리자는 하이머를 불러오겠다는 훌리아를 저지시키고 달려온 택시를 잡았다. "이삼 주일 있다가 돌아오겠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라파엘을 사랑한다고 전해줘요.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손을 흔드는 훌리아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집에 도착한 아나리자는 제일 먼저 전화로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런 다음 안젤라를 찾았으나, 아무데서도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지.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침실로 올라가, 수트케이스를 꺼내놓고 손에 닿는대로 옷을 챙겨 넣었다. 그리고 나서 책상 앞에 앉아, 서랍에서 편지지와 펜을 꺼내놓고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그녀는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흐를 듯한 눈을 깜박이면서 아나리자는 편지를 써 내려갔다. <라파엘, 상세한 얘기는 훌리아로부터 들었을 거예요. 오늘, 세빌리아에서 망또를 흔드는 당신 모습을 보고 아버님이 하시려고 했던 말씀을 비로소 깨달았어요. 투우는 당신의 일부예요. 숨쉬는 것처럼 중요한 거죠. 하지만 나는 그 거대한 생물이 당신 옆을 스치고 달릴 때마다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감을 느꼈어요. 그건 집에 있어도 마찬가지예요. 집에서 숨을 죽이고, '남편은 쇠뿔에 받혀 죽었습니다.'하는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노크소리 하나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생활, 그것도 견뎌낼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잠시 동안 이곳을 떠날 결심을 했답니다. 우리가 사랑을 키우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강해지지 않으면 안돼요. 우리의 생활을 불안과 싸움의 연속으로 만들고 싶진 않아요. 라파엘, 이것만은 알아줘요. 당신은 나의 일부, 아니, 나의 전부예요! 12시에 마드리드행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자주 전화 걸어 줘요, 그리고 화내지 말아요. 아버님께 안부 전해 주길 바래요. 안젤라에게도. 몸조심하세요 아나리자> 펜을 내려놓은 순간,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는 편지지를 접어 봉투에 넣은 다음, 그의 베개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문 앞에서 발을 멈추고 눈물이 가득 괴인 눈으로 방안을 한 번 훑어 봤다. 이방에서 사랑하고 사랑 받는 기쁨을 발견해 냈었는데.....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가방을 들었다. 라파엘이 사준 작은 차를 운전해서 고르드바 비행장에 도착한 그녀는 젊은 남자에게 비싼 비용을 치르고, 차를 집까지 갖다 놓도록 시켰다. 그리고는 곧 항공회사의 소형기를 타고 마드리드로 갔다. 마드리드에서 미국행 비행기로 갈아 탈 예정이었다. 하지만 운나쁘게도 소형비행기가 늦은 탓에, 그녀가 마드리드에 도착한 것은 12시가 지나 예정 비행기가 뜬 다음이었다. 하는 수 없이 세 시간 후에 있는 비행기를 다시 예약하려 하자, 카운터의 직원이 손에 든 승객 명부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도 다 있군요. 이것 보세요, 세뇨라 샌디에고는 그 비행기를 탔다고 이렇게 명단에 나와 있는데요. 어째서 이런 실수가 일어났을까요?" "잘 모르겠는데요. 혹시 나 때문에 곤란한 일이라도?" "아닙니다. 이제 이 명부는 사용하지 않을 거니까요." 약간의 비행기 멀미외엔 별 어려움 없이 여행을 끝냈다. 그리운 집 앞에서 택시를 내린 아나리자는 한참동안 그곳에 서서 주위를 바라보았다. 이 집을 떠난 것은 겨우 몇 개월 전, 그런데 몇 년이나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집안에 먼지가 쌓인 것 말고는 출발 전과 무엇하나 달라진 게 없었다. 아나리자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곧장 리빙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파위로 녹초가 된 몸을 던졌다. 아무래도 기분이 나빴다. 속이 메슥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있는 동안은 멀미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혹시...... 순간적으로 아기란 글자가 뇌를 스치며 지나갔다. 30분 정도 쉬었더니 구토 증세는 가라앉았다. 아나리자는 느릿느릿 현관으로 가서 짐을 들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짐을 푸는 것도 대충 대충하고 샤워를 한 다음, 네글리제를 입고 썰렁해 보이는 침대에 피곤으로 지친 몸을 눕혔다. 지루한 날들이 지나고 몇 주일이 흘렀다. 라파엘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전화 한 통화 걸어 주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난 것일까? 에머슨 아저씨에게도 연락해보았지만 아직 여행중이라고 했다. 그러는 사이에 한 달이 지났다. 그 구토증세는 매일매일 그녀를 괴롭혔다. 의사의 진찰을 받아본 결과 이유는 확실해졌다. 엄마가 된다! 그렇게 생각하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기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나리자는 병원에서 돌아와 리빙룸에 있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배에 살며시 손을 대어 보았다. 물론 아직 불룩해지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숨쉬고 있는 것이다. 라파엘과 나눈 사랑의 결실인 신비로운 생명....... 갑자기 지금까지 겁내고만 있던 마음에 불가사의한 힘이 샘솟아 올랐다. 아나리자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손을 뻗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안젤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안젤라? 나 아나리자예요. 라파엘 있나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느닷없이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심한 장난을 하다니! 당신 대체 누구야?" "나예요, 아나리자예요. 대체 왜 그러는 거죠? 전화소리 잘 안 들려요?" 저쪽 목소리는 확실히 들렸다. 안젤라가 손으로 가리고 누군가와 얘기하는 것까지 들릴 정도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생각하고 있을 때, 화난 라파엘의 목소리가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나리자의 마음은 그 한마디만으로도 날아오를 것처럼 기뻤다. "라파엘.... 나, 아나리자예요. 저.... 집에 돌아가겠다는 걸 알리려고 전화한 거예요. 그건...... 당신이 아직 내가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면 말이지만요." "아나리자? 정말 아나리자요? 지금 어디 있소? 왜 연락을 하지 않았지? 당신이 탄 비행기는...... 당신은 죽었을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죽었다고요?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편지, 못 봤나요?" "물론 읽었소. 그렇기 때문에..... 당신 편지는 12시 비행기를 탈 거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 비행기는 추락사고를 일으켜, 타고 있던 사람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거든. 승객 명단에도 당신 이름이 있었소!" "그런 일이..... 믿을 수가 없군요! 미안해요. 그런 사고가 있었다는 것 전혀 몰랐어요. 마드리드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그 비행기를 못 타서 다음 비행기를 타고 왔거든요. 미국에 도착하고 나서는 신문도 보지 않고 TV, 라디오도 일체 켜지 않았어요." "아나리자, 이제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겠소. 제일 빠른 방법으로 당장 그곳을 향해 날아갈 테니까, 꼼짝 말고 집에 있도록 해요. 알겠소?" "내가 전화한 건 바로 그 때문이에요.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당신이 일부러 여기까지......" "아나리자, 아무 말 하지 말고 내 말대로 해요. 그렇지 않으면......." "알았어요. 여기 있을게요." "정말이지?" "정말이에요. 집에 꼼짝 않고 있겠어요." "아나리자?" "왜요?" "사랑하오!" 그리고 전화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나리자는 마치 믿을 수 없는 광경이라도 본 것처럼 수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도 사랑해요." 아나리자는 이미 끊어진 전화에 대고 속삭였다. 시간은 너무나도 천천히 흘렀다. 그 하루가 지나고, 시계가 저녁 10시를 치자, 아나리자는 크림색 실크 나이트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나서 길고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을 정성 들려 빗었다. 그녀는 침대에 드는 대신 리빙룸으로 내려가 소파에 누웠다. 이곳이라면 잠이 들어도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눈을 뜰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나리자는 어느 사이엔가 푹 잠이 들어버리는 바람에, 라파엘이 들어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소파 앞에 서서 잠든 아나리자의 얼굴을 물꾸러미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어 부드러운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아나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눈앞에 서있는 라파엘을 본 순간, 그의 품안으로 달려들었다. 라파엘은 그녀의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아나리자의 이름을 몇 번이나 속삭였다. 한참동안 그렇게 하고 가만히 있던 라파엘이, 이번에는 아나리자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녀도 그를 마주쳐다보았다. 핼쭉해진 얼굴, 그녀는 그의 얼굴을 만지면서 입을 열려고 했다. 그 순간, 라파엘이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런 다음 아나리자의 얼굴을 뜨거운 시선으로 하나하나 훑어나갔다. 이마, 눈썹, 눈, 코, 그리고 입술..... 하나하나 확인하듯 그의 뜨거운 시선이 얼굴을 더듬어갔다. 라파엘이 천천히 입술을 포개왔다. 아나리자는 그의 품속에서 이대로 녹아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도리 정도였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우선 당신은 나에게 혼나야겠소. 이렇게 나를 괴롭히다니, 정말 못된 아내야!" "이곳에 오고 나서 계속 당신 전화를 기다렸어요, 라파엘. 전화가 안 와서 얼마나 슬펐는지......." 아나리자는 작은 목소리고 속삭였다. "당신이 일부러 나를 괴롭히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이제는 절대로 당신을 혼자 내보내지 않을 거요. 이런 괴로움, 두 번 다시 견딜 수가 없소!" "그럼 내 기분도 이해하겠군요? 어떤 기분으로 당신이 소와 싸우는 것을 보는지 말이에요." 무심코 그렇게 말해 버린 아나리자는 곧 자기자신을 책망했다. 라파엘은 창가로 다가가 등을 돌리고 서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또 쓸데없는 말을 해서 그를 화나게 만들고 말았구나!" "이젠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됐소. 당신이 없어지고 나서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소. 두 번 다시 투우는 하지 않을 거요. 그렇게 결정했소." 아나리자는 라파엘 옆으로 다가가 가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래선 안돼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렇게 말하고서 그녀는 그 앞으로 돌아 똑바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달 동안 나, 강해졌어요. 이제 투우 같은 거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우리 두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건 둘이서 사랑을 키워나가는 거예요. 당신이 투우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변할 수는 없어요. 난 지금의 이 행복을 잃고 싶지 않아요. 당신에게 투우를 못하게 하면, 당신의 일부를 뺏는 것과도 같아요. 그럼 당신은 나를 미워하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는 건 정말 싫어요." 라파엘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소! 하지만 그렇지 않소.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난 확실히 깨달았소. 투우를 하는 대신 무엇을 잃었는지를 말이요. 소중한 당신이었소. 당신을 잃으면서까지 투우를 하고 싶진 않소." 그는 아나리자의 눈동자를 뜨겁게 응시했다. "사랑하고 있었소, 계속." "계속?" "23살 때, 난 10살 소녀를 만났소. 말괄량이에다가 고집이 센 소녀였지. 그 소녀는 절름발이가 될 정도로 내 발을 힘껏 찼었는데...... 나는 성장한 그 소녀를 머리속으로 그리며 사랑에 빠지고 말았소." "그때부터 계속해서요? 그럼 재회했을 때 그렇게 쌀쌀맞은 태도로 날 대한 건 왜였죠?" "스페인의 악습 중 하나요. 자존심을 내세우는 악습이지. 자기 결혼 상대가 강제적으로 정해지는 걸 참지 못하는 거요. 상대가 누구든 간에 말이오." "지금은요?" "지금은......." 라파엘은 아나리자를 끌어안았다. "물론 지금도 자존심이 있소. 하지만 그것보다도 당신을 향한 마음이 훨씬 강하오. 나는 그런 내 감정에서 도망치려고 했었던 거였소. 투우도 일종의 도피 수단이었지. 그러나 이제 그것도 끝이오, 잃는 것이 너무 클 테니까." 아나리자의 눈동자가 눈물로 반짝였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라파엘이 다정히 닦아주었다. "왜 우는 거요, 꼬마아가씨?" 아나리자는 눈물 괜 눈으로 생긋이 웃었다. "듣고 싶어하던 말을 이제야 들었거든요."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자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라파엘이 비틀거리는 그녀를 받쳐주면서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어디 아픈 데라도 있소?" 아나리자는 라파엘의 손을 잡아 자기 배로 가져갔다. "라파엘 2세를 소개하겠어요. 하지만 악수를 하려면 아직 여섯 달 정도 더 기다리지 않으면 안돼요." 라파엘은 놀람과 기쁨이 가득한 눈으로 아나리자를 보더니, 다음 순간 환성을 지르며 그녀를 번쩍 들어 빙글 한 바퀴 돌렸다. 그리고는 안은 채 소파에 앉았다. "아빠가 된다는 말에 당신이 이렇게까지 기뻐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아나리자는 흡족스럽게 미소지으며 라파엘의 어깨에 살며시 기댔다. "왜?" "당신은 당신 아기가 갖고 싶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잖아요?" "내 얼굴을 봐. 그래도 내 마음을 모르겠소? 당신과 나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우리 사랑의 결정이오." 라파엘이 뜨겁게 입술을 맞대었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길고 깊은 입맞춤이었다. "우리가 사랑을 확인해도 아이가 싫어하진 않겠지?" "부모가 사랑을 확인하는데 싫어할 아이가 있겠어요?" 라파엘은 살며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나리자를 안고서 계단을 올랐다. "사랑하오. 아나리자, 나의 꼬마아가씨, 이제 다시는 당신과 떨어지지 않을 거요!" 라파엘은 다시 뜨거운 키스로 아나리자의 마음을 빼앗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