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mptation by Charlotte Lamb. (맨발의요정) 진석호 역. 1984년 하이틴로맨스 (R 90) 1 풀밭에 몸을 뻣고 눈워 있는 린덴의 팔에 바람에 랄린 민들레며 여름흰국화의 꽃가루가 내려앉았다. 린덴은 종다리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어느 사이에 오에 빠져들었다. 그때, 발치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밴디트가 벌떡 일어나더니, 눈을 빛내며 털 을 세우고 미친듯이 짖어대면서 생나무 울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린덴은 나른 한 미소를 띠었다. 아마 토끼라도 본 게로군. 아니면 여우인가? 여름에는 생나무 울타리며 덤불에 숨어있다가 낮에도 이따금 나타나는 걸..... 그때 한가한 정적을 깨는 차의 엔진 소리가 그녀의 귀에도 들려 와 린덴은 이 마에 주름을 잡았다. 고트우드 힐은 드라이브하기에는 적당치 못한 곳이었다. 길 은 벼랑에 붙어 급커브를 이루고 노면이 울퉁불퉁해서 매우 위험했다. 산대기로 향하는 샛길 입구에는 주의표지판까지 세워져 했다. 린덴은 벌떡 일어났다. 차의 심상치 않은 스피드에 자극을 받은 듯 밴디트가 미친 듯이 짖어대고 있었다. 그순간 암록색의 차가 눈앞을 홱 스쳐 지나갔다. 고 급 클래식카로구나, 하고 생각한 순간, 격심한 충격음이 귀를 찢는 듯 울렸다. 린 덴은 아름다운 허니 블론드를 날리며 울퉁불퉁한 길을 신도 신지 않은 채 뛰기 시작. 주위는 이미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린덴은 오픈카이기가 다행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핸들 위에 쓰러져 있는 드라이버의머리를 일어켰다. 괴로운 듯 이마에 주름을 잡고 볼의 상처에서 피가 나오고 있었으나, 그녀의 손이 닿자 남자는 천천히 눈을 뜨고는 희미한 눈길을 보냈다. 굳어진 입가에 희미한 웃음조차 떠오 르고 있었다. "라파엘 전파의 화가가 그린 천사 같군..." 린덴은 순간 멈칫했으나 갈색의 커다란 눈을 빛내며 웃기 시작했다. "부축해 드리면 걸을 수 있겠어요? 한시바삐 차에서 내리시는게 좋을 것 같아 요. " 남자의 초록빛 눈이 조금씩 생기를 되찾고, 햇빛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였다. "내가 살아 있군. " "그럼요"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곳에는 가솔린 냄새가 지독하니어 서 떠나야 해요"그녀는 허리를 굽여 남자의 몸에 손을 댔다. "끌어당길 테니 기 운을 내서 밖으로 나오세요" 그렇게 해보겠소"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힘을 쓰며 몸을 일어켰다. "아. 당신은 거기 있어요. 어떻게 혼자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그가 몸을 틀면서 빠져나올 때 까지 린덴은 옆에서, 언제든지 손을 내밀어 그 들 수 있는 자세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꽉짜인 몸매였으며, 까만 오 픈셔츠에 엷은 잿빛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건장하고 힘이 넘쳐 보였으나, 몸을 움직일 때 마다 얼굴에 고통의 빛이 스쳤다. 몸이 크게 기울지며 땅에 발이 닿자, 덴은 얼른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내게 기대세요" 그는 시키는 대로 린덴에게 몸을 기대어 목장 입구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밴디트로 이젠 짖는 걸 그만두고 기심 어린 눈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울타리 문까지 당도하자 그는 걸음을 멈추더니, 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날 놓아줘요" 그는 린덴의 부축을 받으며 풀 위에 주저앉아 눈을 감고 몸의 힘을 뺐다. 얼굴 색이 형편없으며, 광대뼈가 나온 볼은 찢기고 멍이 들어 있었다. 린덴은 걱정스 럽게 그를 들여다보는 동안, 도대체 이 사람은 무엇하러 이런 데를 찾아왔을까, 하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 근처에서는 못 보던 얼굴이었다. 만일 한번이라도 만난 일이 있었다면, 이 렇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얼굴이니 모를 턱이 없다. 속에 숨겨진 힘과 의지가 얼굴에 나타나, 이마에서 코에 걸친 선이 강렬하고 턱이나 입가에서도 힘찬 이군 이 느껴졌다. 아바지 같으면 아마 커다란 흥미를 가지고 얼굴에 구멍이 뚫어질 정도로 쳐다보았을 것이다. 사람의 얼굴에 관심이 있는 점은 아버지뿐 아니라 린덴에게도 유전되어 있었 다. 그녀 아버지의 캔버스에는 갖가지 인물의 얼굴이 그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 느 얼굴도, 인생의 무게를 느끼게도 하고 고뇌에 차 있기하며 아름다운 얼굴이긴 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그가 눈을 뜨더니 잿빛 눈망울이 날카롭게 린덴을 쳐다보았다. "기분이 어떠세요?" 린덴이 따뜻하게 물었다. "최악이군. 이곳이 어디요? 마르비에 가려고 이 길로 접어들었어요. 그런데 차 가 언덕을 내려오다가 브레이크가 파열되었지 뭡니까. 무엇에 세게 부딪쳐서 세 울 수 밖에 없었어요" "주의 표지를 못 보셨군요. 고트우드 힐은 차를 몰기가 힘든 곳이에요" "정말 그렇더군!" 그는 따스한 햇살을 받고 있는 목장을 둘러 보았다. "이 근처 에 자동차 수리공장 같은 것이 없을까?" "마을에 가면 있어" "얼마나 돼요, 아가씨?"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신음소리를 냈다. "이 근처에 전화는 있소?" 린덴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이런 벽지에서 살고 있나요?" "그래요. 조금 쉬고 우리집에 가기로 해요. 하지만 좀더 가만히 계셔야 해요." 그는 뚫어지게 린덴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학생이요?" "지난 주에 졸업했어요. 자, 이젠 입을 열지 마세요. 아직 쇼크가 가라앉지 않 았으니까요" 잿빛 눈이 반짝 빛났다. "천사치고는 잔소리가 많군" "유감스럽지만 천사는 모두 그래요" 린덴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천사는 언 제나 옳은걸요. 천사가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니에요?" "어린애 같은 말이군" "지난 6년 동안 이탈리아의 수녀원에 있었어요" 그녀는 방긋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느님이며 천사에 관 한 일밖에 더 있었겠어요?" "이탈리아의 수녀원? 어쩐지 세속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싶었지." 그의 시선이 린덴의 몸으로 향했다. 하얀 티펴츠와 진즈에 맨발, 그리고 긴 금발에 화장기 없 는 윤기 나는 피부, 핑크빛 입술과 금빛이 도는 갈색의 맑은 눈. "몇 살이지?" "열 일곱이에요" 입가에 보조개가 패었다. "앞으로 6주만 있으면 열 여넓이에 요" "더 어리게 보이는데" 그는 할긋할긋 계속쳐다보며 말했다. 린덴은 별로 기분이 상하지 않는 듯 쾌활하게 웃었다. "린은 내가 일생 동안 열두 살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유가로 집에 돌 아올 때 마다 컸다고 투덜투덜 하지요" "린? 린이 누구요?" "아버지에요" 그렇게 말하고는 나무라는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가만히 있으 했잖아요. 얼굴이 아직 창백해요. 그런 사고의 직후인걸" 그는 갑자기 머리를 뒤로 기대고 눈을 감았다. "당신의 말이 맞아. 머리가 욱신욱신하는군" 주위에 정적이 감돌자, 린덴은 풀잎을 따서 입에다 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태양 은 따뜻한 햇팔을 한결같이 내외쏟고, 향긋한 풀냄새가 코를 찔렀다. 클로우버꽃 주위를 날아다니는 꿀벌의 몸이 벨벳처럼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살며시 다가 든 밴디트를 린덴은 낮은 오리로 나무랐다. 개는 혀를 길게 내밀고 꼬리를 천천 히 흔들면서 그녀 옆에 웅크리고고 앉았다. 린덴도 눈을 감았다. 기분 좋은 초여름 오후의 햇살을 받으니 몸이 나른해졌다. "자고 있소?" 귓가에서 듈린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그리운 울림이 깃들여 있었다. 린덴은 번 쩍 눈을 뜨고는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미소지었다. "볕을 쬐고 있었어요. 기분이 좀 나아졌어요? 우리집까지 절어갈 수 있겠어 요?" "집이 어디요?" 린덴은 뒤쪼게의 누릅나무와 개암나무를 가리켰다. "저 나무들 저쪽이에요. 걸을 수 있겠어요?" "음!"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린덴은 그의 허리에 팔을 돌려서, 자기 몸을 목발대신으로 의지하도록 했다. "나한테 기대세요" 그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손가락을 대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데" 린덴은 금빛 머리를 치켜올리고 그를 당당한 태도로 쳐다보았다. "자, 해봐요. 그러지 않았다간 밴디트의 먹이가 되고 말 거에요" "고약한 개로군" 조그만 테리어는 멍청한 얼굴로 두사람을 쳐다보고 있었으나, 눈가에 난 검은 털로 좀 무섭게 보였다. "왜 밴디트(무법자)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알만하군. 당신의 보디가드요?" "보디가드 따위는 필요없어요. 하지만 그럴 필요있으면 기꺼이 역할을 해 줄 거에요. 사람한테 덤비기를 좋아하는 걸요. 하긴 그런 찬스는 좀처럼 없지만 ..., 한두 번 우체부 아저씨의 다리를 무는 람에 이제 편지는 주인 댁까지 밖에 오지 않게 되었어요" 그는 또 웃기 시악했다. "무척 색다른 부녀군. 그럼 당신의 집으로 데려다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몹 시 궁금한데" 린덴은 천천히 시간을 끌며 걷기 시작했다. "어디 다른 곳을 다친 데는 없어요?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어요?" "몸을 세게 부딪쳤을 뿐이오" 그는 아픈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발을 옮겼 다. "그리고 근육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고 ...." 나무들이 있는 곳의 문을 지나 울안으로 들어섰다. 비바람이나 시간의 흐름에 도 끄떡도 하지 않을 것 같이 단단해 보이는 석조 건물은 고색창연 했으며, 잿빛 지붕에는 이끼가 끼어 있었다.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정원 끝의라임나무에 까마귀 몇 마리가 앉아서 사람이 가까이 오는 것을 내려다 보고 있더니 이윽고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라, 뒤쫓으며 짖는 밴디트를 놀리듯이 높은 소리로 울었다. "린은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린덴은 미안한 듯이 말했다. "그리 고 그림을 그릴 때 방해하면 화를 내고요....." "여기서 단둘이 살고 있소?" "네, 그래요" 그녀는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거실에 좀 누워 계세요. 주전자를 불 위에 앉어 놓고 올께요. 홍차라도 마시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에요" "위스키가 더 낫겠는데" 린덴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집에는 알콜이 든 음료가 없어 요. 그리고 지금은 그런 것을 마시면 안 돼요" 그는 냉랭한 표정으로 린덴을 보면서 암록색의 소파에 걸터앉았다. "술도 안된다..... 수녀원에서 배웠소, 아니면 아버지의 방침이오?" "어느 쪽도 아니에요. 상식이에요, 그런 것은. 사고를 당한 뒤에 술을 마시는게 좋을 턱이 있겠어요?" 린덴은 그를 남겨 놓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목장에다 구두를 놓고 왔군" 그는 린덴의 작은 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애당초 신지 않는 걸요"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린덴은 방을 나갔다. 더운 물이 담긴 오렌지 빛 대야와 타월을 가지고 돌아와 그녀는 소파 옆에 무릎을 끓 었다. "몸을 좀 굽히세요" 미지근한 물로 조심스럽게 상처를 씻어주고 부드럽게 물기를 닦아냈다, 그리고 그의 긴 팔도. "이름이 뭐지?" 갑자기 그가 입을 열었다. "린덴이에요" 얼굴로 들지 않고 대답했다. "린덴 하워드!" "하워드? 그럼 당신의 아버지는 ...." "네, 린 하워드에요" "그의 그림을 본 적이 있어요. 훌륭한 작이지만 어둡고 무거운 느낌을 받았지" 린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눈은 먼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요 ...." 그는 린덴의 매끄러운 살결을 보며 물었다. "당신을 모델로 해서 그린 일이 있나?" 린덴은 가볍게 웃었다. "없어요. 나에게서는 인스피레이션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에요" "설마! 그렇다면 눈이 어떻게 된 게로군" 린덴은 깜짝 놀라 얼굴을 들어 그의 잿빛 눈동자를 되쳐다보았다. 그는 린덴으 로부터 눈길을 돌려 방안을 둘러보았다. 아무 장식도 없이 차분한 빛깔의실용적 인 가구들이 놓여있고, 벽난로 옆의 천반에는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놓 여 있었다. 바람이나 물에 씻겨 동그랗게 된 돌과 부싯돌, 조그만 꽃병에 꽂힌 들 꽃, 잔가지가 꽂혀 있는 진초록의 항아리, 놋쇠종, 초록빛 바늘꽂이 위에 놓여있 는 새알. "도대체 누가 모은 거요?" "린이에요. 작품 구상을 할 때는 무언가를 손으로 만지작 거리지 않으면 마음 이 가라앉지가 않는대요" "아이구!" 그는 린덴의 귀여운 옆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수리 공장엔 어떻게 연락하면 좋지? 택시를 불러 주겠소, 아니면 전화해 주겠소?" "종중전화는 마을에 가면 있어요. 택시는 .....잘 모르지만" "당신네 집에는 차가 없소?" "네, 없어요. 우린 아무데도 갈 일이 없는 걸요. 린은 집을 떠난 일이 없고 ...." "한번도?" 그는 놀라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당신은 이탈리아에서 어떻게 돌아왔지?" "비행기와 기차를 타고 왔어요. 요크까지는 제프가 마중나와 주었어요" "제프는 는 차를 가지고 있나요?" "물론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몇대나 있어요. 제프는 차나 기 계를 매우 좋아해요. 그리고 트랙터의 운전도 잘 해요" "흠, 농민이 .... 그의 집까지는 얼마나 되지요?" "1킬로 반이에요. 자, 얼굴에도 약을 발라야죠" 린덴은 소파에 걸터앉아 그에게 몸을 기대면서 상처에 약을 발라 주었다. 그는 눈을 감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두 손으로 린덴의 가냘픈 몸을 받쳤다. "자, 이제 끝났어요. 아픔이 좀 가셨나요?" 그는 눈을 뜨고 린덴을 쳐다보았다. 창에서 비쳐드는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밝 게 비춰주고 있었다. "조금" 그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부인에게 연락하시고 싶으면 전화해 달라고 제프한테 부탁하고 오겠어요" "아니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내 걱정해 줄 아내는 없어요. 수리 공 장에 연락해서 차를 고치러 와달라고나 하면 좋겠어요. 한 2,3일은 호텔에서 묵 으면서 기다려야 겠지만 ...." "어마, 호텔이라니? 우리 집에 묵으시면 돼요" 린덴은 일어서서 당연하다는 말 투로 말했다. "보시다시피 방이 많아요. 침실로 두 개나 비어 있어요. 어느 것이 든지 좋은 쪽을 택하세요. 하지만 식사는 만속스럽지 못할 거에요. 린이 채식을 좋아해서 우리 집에서는 고기를 먹지 않아요" "낯선 남자가 찾아와 자거나 하면 아버지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아무렇지도 않아요. 당신은 남자인걸요" 그는 눈썹을 번쩍 치켜올렸다. "남자면 왜 괜찮단 말이요?" "린은 여자를 싫어해요. 여자는 우리 집에 얼씬도 못하게 해요" "당신은 여자가 아니오?" "말했잖아요, 아빠는가 늘 열두 살이면 좋겠다고 했다고" 린덴은 어깨를 추슬 렸다. "하여 튼 난 아직 여자가 아닌 걸요. 그래서 린도 참아주고 있는 거에요" "그래요? 아직 여자가 아니니까 ...." 그는 바보처럼 되풀이 했다. 린덴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으로 걸어갔다. "홍차를 가져오겠요" 머릿속에는 그에 대한 일로 가득 차 있고, 마음은 매우 혼란해져 있었다. 얼굴 생김새가 날카롭고 무엇이은지 자기 생각대로 해온 사람 처럼 자신에 넘쳐 있었으나, 인간미가 있는 인품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그는 린 이 좋아하는 타입 같았다. 쟁반에 손을 댔을 때 거실에서 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새 아버지는 거 실로 들어와, 두 사람이 인사라도 나눴는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눈 치를 보니 기분이 좋은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홍차를 따르고 바로 제프네 집에 가서 전화를 걸고 오렴" 린은 린덴을 보고 말했다. 린은 잿빛 머리칼을 한 날카로운 얼굴 생김새의 50대의 남자였다. 암회색의 눈 망울은 이따금 믿을 수 없을 만큼 앍아보이지만, 평상시에는 어둡게 흐려 있었다. 필요하다고 느낄 때 만 날카로운 통찰력이 작용하는 모약이었다. 그의 그림은 폭 풍이 다가오기 전의 하늘이나 황야같은 살펄한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그것에 맞 먹는 어둡고 고뇌에 찬 인간성이 그려지게 마련이었다. 초기에는 아무도 그의 그 림을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린 자신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싶기 때문에 그릴 뿐이지 남의 의견 에는 일체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린덴은 두 사람에게 홍차를 따라 주고 집에서 만든 버터 바른 빵을 내놓고는 문간으로 향했다. "선생의 성함이 뭐지요?" 린이 손님에게 공손하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제임스입니다. 제임스 화이트" "이 근처 출신 같은 이름이군요" 방을 나가던 린덴이 어깨 너머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15킬로쯤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지요. 오늘도 거기에 가 보려고 하다가 ....마침 유가를 낼 수가 있어서, 어렸을 때의 기억이 얼마나 정확 한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이곳을 떠난 것이 몇 살 때였습니까?" 린은 빵을 씹으면서 물었다. "열 살이오" 린은 가볍게 웃었다. "어렸을 때는 사물을 보는 방식이 전혀 다르니까요. 어른이 보는 것보다 모든 것이 크고 눈부시게 보이지요 소년 시절의 추억을 더듬어 찾아가는 것은 그만두 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제임스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린덴의 뒤를 따라 밴디트가, 꽃가루로 덮인 땅을 이리저리 뛰며 달렸다. 집 옆 쪽의붉은 벽돌로 된 헛간의 벽에는 라일락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제프의 아 버지 빌은 이 헛간만 자신이 가축 사료의 저장고로 쓰고 채는 어렸을 때의 친구 인 린에게 빌려주고. 두 사람은 좀처럼 만나거나 이야기 하는 일은 없었지만, 빌 은 린에게 매우 협조적이고,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으나, 린이 이 마을에 살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초원을 가로질러 빌의 짚에 당도한 린덴은 땅을 파기 시작한 밴디트를 남겨두 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에서 라벤더와 밀랍의 달콤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헬렌을 부르면서 걸어가니, 주방의 문이 열리고 헬렌이 깜짝 놀란 얼굴로 내다 보았다. "아니, 린덴! " "전화 좀 빌 수 없겠어요? 고트우드 힐에서 자동차 사고가 나서 수리 공장에 연락하고 싶어요" "다친 사람은 없었나? "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도대체 누구니, 그런 곳에서 차를 달린 사람이 ......? " "모르는 사람이에요.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서 묵기로 했어요" "그럼, 부상은 당하지 않았니? " "얼굴이 약간 벗겨진 정도예요, 정신적인 쇼크를 받은 것같기는 하지만" "그렇겠지. 그래서 린은 뭐라고 했니? " 헬렌은 린이 사람을 싫어하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소리를 낯추어 물었다. "기뻐하는 것 같아요. 린이 좋아하는 타입이에요" 헬렌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구, 그래? 자, 전화를 쓰려무나. 지금 잼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 손을 뗄가 없구나" 헬렌이 주방으로 사라지자 린덴은 웃는 얼굴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제임스와 린은 체스보드를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 린덴이 들어가도 린은 쳐다보지도 않았으나, 제임스는 얼굴을 번쩍 들었다. "와 준대요? " "아무리 급해도 내일 오후에나 올 수 있대요. 차종을 물었으나 알 수가 있어야 지요" "람베리요" 제임스의 린이 고개를 들었다. "람베리? 벌써 여러해째 만들지 않는 차 아니오? " "네, 어떻게 든 고칠 수 있으면 좋데 ...." 제임얼굴이 흐려졌다. "부품은 가져오 겠지....." 그 린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농담하지 마시오. 이 근처의 수리공은 어떻게 손을 대면 좋을지도 잘 모를거 요" "그럼, 요크까지 끌고 가야 하겠군요" 제임스는 얼굴이 이것더욱어두워지며 체 스보드의 말을 움직였다. "당신 차례입니다" 린도 체스보드로 눈길을 돌리더니 다시 게임에 끌려 들어갔다. 힐끗 체스포드 를 본 린덴은 깜짝 놀라 숨이 멎을 것 같았다. 형세는 제임스에게 유리했다. 체스 에서는 누구에게도 진 일이 없는 린을 몰아내다니..... 린덴은 믿을 수가 없어서 제임스의 얼굴내려다보았다. 그도 그녀의 시선을 느꼈 는지 얼굴을 들었다. "아가씨는 구두를 전혀 신지 않나요? " 린덴은 핑크빛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발이 먼저 만들어진 거예요" 린이 말을 움직였기 때문에 제임스도 체스보드로 눈길을 돌리고 무표정한 채 자기의 체스를 움직였다. 린은 얼굴을 들고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명인이오?" "아니? 아마츄어입니다." 제임스는 입꼬리를 희미하게 찡그리고 대답했다. "내가 당해내지 못하겠군" 린은 체념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몸을 일으켰다. "언 제 또 뭘 한다면, 트럼프나 할까요?" "이기는 것만이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하여튼 마음 편하게 있어 주시오, 제임스" 린은 문으로 걸어갔다. "난 당신과 상대할 시간이 별로 없어요. 식사 정도는 린덴이 돌봐 줄 겁니다. 묵고 싶은 만큼 있어도 좋으나 아틀리에에만은 들어오지 마시요. 일을 방해당하는 것은 싫으니까 요 " 제임스는 린의 서슴없는 말에도 전혀 기분이 상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지요." 린이 나가자 린덴은 제임스에게 물었다. "뭘 좀 드시고 싶지 않으세요?" "좀 먹고 싶군요" "하지만 샐러드는 들고 싶지 않으시지요? 차차 익숙해지시겠죠. 아, 계란이 있 어요. 닭을 기르고 있거든요. 샐러드에 삶은 계란을 얹을까요?" "샐러드는 그만두고 삶은 계란이나 줘요" 린덴은 고개를 까딱하고 주방으로 들어갔으나, 제임스가 뒤따라 오는 바람에 깜 짝 놀랐다. "좀 쉬고 있는게 낫지 않아요?" "보기처럼 무르지는 않아요, 난" "어마! 겉보기에도 단단해 보여요. 자기의 제국을 이룩하고 사람들에게 명령할 그런 타입이에요. 우락부락한 얼굴 생김새 탓인가요?" 제임스는 자기의 얼굴에 손을 댔다. "얼굴에 대해서 누가 헐뜯는 소리를 하는 것은 처음 듣는데" "어마, 헐뜯는게 아니에요" 린덴은 끓는 물에 계란을 넣었다. "몇 분쯤이 좋아 요, 4분?" "3분 30초" 린덴은 벽에 걸린 낡은 시계를 보았다. "오우케이" 그러고는 조그만 손으로 커다란 빵을 얇게 썰며 말했다. "어째서 결 혼하시지 않았지요? 그처럼 핸섬하신데"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린덴은 깜짝 놀 라 얼굴을 들었다. "미안해요. 남의 일에 파고들 생각은 없었어요. 말상대가 없다 보니 그만 나도 모르게 열중해 버려서 ..." "하지만 어떻게 이런 생활을 견디어내고 있지요? 당신같은 나이의 아아씨에게 는 맞지 않는 생활아니오? 아버지에게는 맞을지 모르나, 아가씨에게 까지 고독한 생활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마, 나도 좋아해요" 그녀는 목을 움츠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 있어요. 오랫동안 수녀원 생활을 했잖아요" 문득 린덴의 표정이 바뀌었 다. "이상하군요. 이제 수녀원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그곳이 그리워 져요" "수녀원 생활이? 을 수가 없군, 20세기도 다 끝나가는데" "하나에서 열까지 다 그리운 것은 아니지만 ....." 린덴은 끊는 물에서 계를 꺼내어 갈색의 쟁반에 담아 내놓았다. "자, 당신의 간 식이에요" 한순간 두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제임스는 방긋이 매력적인 웃음을 지었다. "린덴, 내 나이가 몇 살쯤 돼 보이지?" "글쎄.... 마흔 살?"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서른 아홉이오" 린덴은 키들키들 웃었다. "미안해요. 기분이 상했나요?" 그는 얼굴색 하나 가뿌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맞는다 해도 당신은 어쩔 수 없어요. 잘 생각하고 한 말이요?" 린덴의 볼에 보조개가 패었다. "나이보다 많이 보인것이 억울하세요? 미안해요. 난 그저 놀리느라고 그랬어 요." "내가 우쭐해 하던가? " "남자란 대개 그래요. 린도 그런 걸요" 제임스는 의자에 앉아 계란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린덴은 그의 잔과 자기 잔에 홍차를 따르고 의자에 가만히 앉았다. "당신은 먹지 않소?" 제임스가 얼굴을 들었다. "이따가 린이 저녁 식사를 할 때 먹겠어요" "그를 사랑하고 있소?" 제임스가 어색하게 물었다. "그야 아버지인걸요. 참 좋은 아버지에요. 소리를 지른 일도, 손을 댄 일도 한 번 없었어요" 제임스는 테이블로 눈을 떨구었다. "그분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제임스는 얼굴을 들고 순진한 린덴의 얼굴을 바라보았 다. 갈색 눈에 슬픈 표정이 어리고 핑크빛 입술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사랑해 준다고 할 수는 없어요" 린덴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를 용서 해 주지 않는 걸요" "뭐라구? 무슨 말이지?" 제임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나만 살았으니까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무척 사랑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일부도 죽어 버린 거예요. 문제는 내가 어머니를 닮았다는 점이에요. 나를 볼 때 마다 괴로와지는지 별로 얼굴도 쳐다보지 않아요.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나만 살아있는 것 에 대해 용서해 주지 않고 있어요" 제임스는 험악한 표정으로 린덴을 쳐다보았다. "그가 그렇게 말 했소?" "아니에요. 하지만 난 알고 있어요. 빌이나 헬렌으로부터도 들었고요" "그게 누구요?" "아까 전화를 빌러 갔던 집 주인 부부웨요. 빌은 린과 동급생이었고 죽은 어머 니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제프라는 이름이 아니었소?" "그것은 그분 아들이에요" 린덴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았다. "제프는 착한 청년 이에요. 아마 당신도 마음에 들 거에요" "그는 몇 살이지?" "스물 셋이에요" "독신이오?" "그래요" 린덴은 당황한 듯이 대답했다. "제프는 당신의 보이프렌드요?" 차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그는 린덴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천만에요! 보이프렌드 같은 것을 만들었다간 린한테 야단을 맞아요" "왜요?" "내가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가 아니겠어요? 린은 나를 어린 아이 그대로 있게 하고 싶은 거예요. 어른이 되었다간 집에서 쫓겨나기 십상이에 요" 제임스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받침접시에 내려놓았다. "그런 아버지가 어디 있어?" "하지만 그런 걸 어떻게 해요. 내가 어른이 되면 쫓아낼 거예요. 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냉혹해서가 아니라, 린은 고독이 좋은 거예요. 만일 내가 예쁜 드레스라도 입고 보이프렌드와 나들이를 다니거나 하면 그때는 모든 것이 달라질 거예요, 아시겠어요?" "무척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군" 제임스는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린은 천재에요. 이제 그 나이가 되었으니 성격을 바꿀 수도 없을 거고, 바꾸려 고 하지도 않아요. 그런 때가 오면 내가 나가는 길 뿐이에요." 제임스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가다니, 어디로? 어디갈 데라도 있소?" "린은 나를 대학에 보내고 싶어해요, 미술 학교로. 그래서 나도 지금 그것을 생 각하고 있어요" "미술을 좋아해요? 과연 그의 딸이군" 린덴은 힘없이 웃었다. "그림은 그릴 수 있어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린의 재능을 이어받지는 못했어 요. 그래픽 아티스트가 되면 어떨까 생각해요. 아버지와 같은 세계에서 일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망설여져... 내가 린의 딸인 줄 알면 사람들은 그를 보는 눈으로 나를 볼게 아니겠어요? 아버지의 이름이 나에게는 무거운 짐인걸요" 린덴은 일어 서서 그에게 미소지었다. "방을 보러 가시겠어요? 어느 쪽이든지 마음에 드는 걸로 택하세요. 슈트케이스는 차 안에 있지요?" "아, 그렇지. 그것을 가지고 와야지" "그대로 둬도 관찮아요. 이런 시골에 와서도 누가 훔쳐갈까봐 걱정이 되세요? 자, 이층으로 올라가서 방을 보세요" "낯선 사람에 대해서 아무 경계심도 갖지 않는군.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직업 이 무엇인지 물으려고도 하지 않고 재워 주다니" "그럼, 어디에서 오셨으며 하시는 뭐예요?" "런던에 살며 무역에 종사하고 있어요" 린덴은 계단을 다 올라간 곳의 방문과 그 옆방의 문을 열었다. 제임스는 씁쓸 하게 웃으면서 두 방을 들여다 보았다. 어느 방이나 거실과 똑같이 검소하고 아 무 장식도 없었다. "이쪽이 낫지 않을까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린덴이 말했다. "목장 쪽을 향하 고 있어서 맑게 갠 날 아침은 전망이 무척 좋아요" "그럼 이쪽으로 하겠소" 린덴은 제임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 창문을 열고 경치를 내다보았다. 산들바 람에 실려 향긋한 풀냄새가 들어오고 있었다. 제임스도 옆으로 왔으나, 그는 경치 보다는 린덴의 얼굴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어때요, 멋있지요?" 린덴은 그의 시선을 느끼고 밝게 웃어 보였다. "이탈리아 에 있을 때도 밤에 침대에 들어가면 언제나 이 풍경을 떠올리곤 했어요. 수녀원 도 산으로 에워싸여 있지만, 이곳과는 비교도 될 수 없었어요" "당신네가 재워 주려고 하는 남자가 도망중인 살인범 일지도 모르지 있소?" 린덴은 남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살인범의 눈이 아닌걸요. 체스보드를 마주 보고 있을 때는 약간 냉혹한 얼굴 이었지만, 악인의 눈은 아니었어요. 약간 지나치게 지성적이긴 했지만 ...... " "그럴까요?" 수녀원에 있을 때, 린도 그 점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고, 그녀 자신도 무척 조심을 해 왔었다. 린덴은 그의 다부진 얼굴과 예리한 잿빛 눈을 쳐 다보았다. "당신 부녀는 너무 호인들이군. 난 당신에게 위험스런 존재일지도 모르는데 ..... 아버지는 동 눈치를 못채시는 것 같더군. 내가 아버지라면 젊은 딸을 위험 속에 내놓지는 않을 거요" 린덴은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 보았다. "위험이라구요? 당신이 강도일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우리집에 훔쳐갈 만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이 있잖아" 제임스의 뜻밖의 린덴은 눈을 깜박거렸다. "나를? 날 유괴할 생각이에요?" 제임스는 어이가 없었다. "그걸 설명하란 말이오? 좋아요, 설명하겠소. 아버지는 당신을 나와 단둘이 있 게 내버려 두고 있어요. 소리를 질러도 들리지 않는단 말이오. 내가 당신에게 손 을 대도 도망갈 길이 없잖소?"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요, 차는 쓸 수도 없는데?" 제임스는 눈을 감더니 이윽고 소리내어 웃기 시각했다. 린덴도 조그만 하얀 이 를 드러내며 따라 웃었다. "당신은 바보가 아니니, 내가 하는 말의 뜻을 알것 아니오" 린덴은 직접적인 대답을 피했다. "린은 사람을 보는 눈이 예리하고, 자기의 통찰력을 믿고 있어요. 당신한테 그 것저것 들어 보았어떻게 속을 알 수 이겠어요? 거짓말을 할지도 모르잖아요. 그 러니 자기의 눈과 머리로 판단하기로 한 거에요. 린은 당신이 마음에 들었던 거 에요. 이건 드일이에요. 그래서 나도 당신을 신뢰하고 있어요. 나는 당신이 좋아 요, 당신은 어때요 제임스. 기뻐요? " 제임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주머니에 두 손을 넣었다. "정말 색다른 사람들이군, 하지만 고맙소, 그렇게 말해 주니 반갑군" "당연해요. 린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좀처럼 없으니까요" 2 린덴이 샐러드를 만들고 나자, 마침 벽시계가 일곱시를 치고 린이 돌아오는 소리가 났다. 저녁어스름이 주위를 감싸고 헛간 벽의 푸그림자도 금세 짙어져 잤다. 멀리에서 소의 울음 소리가들리고, 창 너머로 제비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린은 조용히 들어오더니 힐끗 테이블을 쳐다 보았다. "제임스도 같이 먹니?" "방에서 쉬고 있는데, 이제 잠이 깻을지도 모르니 잠깐 보고 오겠어요" 린덴은 이층의 객실을 향해 계단을 올라갔다. 제임스는 눈 위에 손을 얹고 몸의 힘을 쑥 빼고 누워 있었다. 깨우는 것이 나을까? 린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자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녀의 시선은 목장 저쪽의 푸른 안개가 낀 지평선으로 끌려 가고 있었다. 발길이 자연히 창가로 향했을 때 제임스가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린덴은 뒤를 돌아보았다. 제임스는 린덴이 온 것도 모르고 계속 잠만 자고 있었다. 나이가 내두 배나 되는데도, 어떻게 그에게 이처럼 허물없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언제나 같은 또래의 청년과 어울리자면 따분해지는 것은 오랫동안 린과만 살아온 탓인가? 수녀원에서도 친구가 없었다. 우선 학생의 대부분이 이탈리아인이었고, 가깝게 지낸 몇 명의 친구와의 어울림도 표면적인 것이 었다. 갑자기 제임스가 몸을 움주고 이더니 잿빛 눈망울로 린덴을 응시했다. 린덴은 방긋 웃어 보였다. "푹 주무셨어요?" "음, 곤하게 잤소. 꿈에 당신이 왔지. 긴 금발과 사자 같은 눈을 하고 있는 라파엘 전파의 천사가" 린덴은 어깨에 흘러내린 금발을 뒤로 넘겼다. "이 머리를 자르려고 생각해요" "안 돼요! 왜 그러지?" 너무도 완강한 목소리에 린덴은 깜짝 놀랐다. "손질이 간편하고 시원할 것 같아서요. 손질하기가 귀찮아졌어요" 제임스는 벌일어나서 린덴의 옆으로 오더니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태양빛을 받아들이는 것 같은 머리칼이 아니오! " 길고 보드라운 머리칼을 손끝으로 잡았다. "눈부신 감촉이야, 비단결 같군......." 린덴은 볼이 빨개져서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맞대 놓고 그녀에게 그런 소리를 한 사람은 처음 이었고, 자신도 이머리칼이 마음에 드는지 어떤지 할 수가 없었다. 린덴이 당황하여 뒷걸음질을 치자 제임스는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어요, 샐러드뿐이지만 ....." "무엇이든지 먹겠소" 두 사람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린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제임스를 맞이하였다. "여어, 제임스. 앉으시오. 아까보다 안색이 많이 좋아졌군" "네,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간단한 식사가 끝나자 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난 좀 실례하겠소, 제임스. 오늘 저녁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제임스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식탁을 치우는 린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밤에 언제나 당신을 혼자 남겨놓고 가버리곤 하나?" "네, 대개는 그래요" 린덴은 그릇을 씻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당신은 무엇을 하지? " 그는 행주로 식기를 닦아서 식탁 위에 가지런히 포개어 놓았다.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고, 음악을 듣기도 해요" 그녀는 어깨를 추슬렸다. "무슨 음악이오, 클래식? " 린덴은 장난스럽게 눈을 깜박거렸다. "글쎄, 어떻게 생각하세요? " 제임스는 입가를 일그려뜨렸다. "린이 좋아할 만한 것이 라면 클래식이 아니겠소? " "맞았어요, 린이 사온 레코드를 들어요" "무슨 레코드지? " "모짜르트, 바하, 베토벤...." 제임스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마 당신이 세상으로 나가게 되면, 문화적 쇼크를 받게 될 것이오" "어마, 그럴 리가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 린덴은 그가 나머지 식기를 닦는 동안, 닦아놓은 식기를 그릇장에 챙겨 넣었다. 제임스는 그녀의 가는 몸매의 움직임을 가만히 눈으로 좇있었다. 린덴도 그의 시선을 느끼고는 어깨 너머로 돌아보며 눈썹을 치켜올였다. "뭐가 이상해요? " "당신은 진즈와 티펴츠 외에는 입지 않소? 구두는 안신어? 난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군" 눈이 부신 것처럼 린덴은 미소를 띠었다. "비키디로 가지고 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구, 믿을 수가 없군! " "수녀원을 나올 때 친구가 줬어요" 린덴은 웃음을 참으며 설명했다. "그녀는 미국인이었는데 부자집 딸이고 날씬한 몸매였어요. 엄청나게 값비싼 옷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수녀원에서는 입을 수가 있어야지요. 트렁크에 가득 쌓여 있는 옷을 걸칠 기회가 없어서 미칠 것 같다고 한숨이었지 뭐에요" "알겠어, 그 기분. 그래서 당신에게 비키니를 주었단 말이지? " "웃기는 일이지 뭐에요.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에요. 도대체가 내가 언제그런 것을 입을 때가 있겠어요? 냇물에서 헤엄칠 때는 아무것도 입지 않는데" 그의 눈이 린덴을 향하더니 딱 멈추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 린덴은 태연스럽게 제임스의 잿빛 눈길을 받았다. "알몸으로 헤엄쳐요, 린도 그러고요. 이 근처에는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어요. 몇 주일 동안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지 것은 보통인걸요" "제프는 안 오나? " "냇물까지는 안 와요. 그리고 혹시 온다 해도 1킬로 이상이나 떨어진 데서도 알 수 있는 걸요" "아니 그렇게 후각이 예민하단 말이오? " "트랙터 소리가 나거든요. 제프는 절대로 걸어다니는 법이 없어요 " "무척 멋있는 녀석이군" 린덴은 제임스가 내던진 수건을 집어 보일러의 파이프 위에 펼쳐 놓았다. "밤에 헤엄치는 것도 시원할 것 같군" "어마, 벌써 그렇게 기분이 좋아졌어요? 이곳의 강물은 여름에도 차가와요" "오늘같은 날은 차가운 물에 몸을 담가 머리를 개운하게 식히고 싶군. 트렁크 속에 수영복이 있소. 알몸으로 헤엄치겠다는 것이 아니오" 린덴의 얼굴이 웃음으로 가득찼다. "그럼 나도 비키니를 가져가겠어요. 낮에 쉬었던 곳에서 만나기로 해요. 거기서 10분쯤 가면 냇물이 나오니까요" 약속한 곳으로 가니 제임스는 꽉 짜인 허리에 두 손을 대고서서, 초록빛으로 가득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저녁 어둠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언덕의 사면은 벌써 어둠에 잠겨 었다. 제임스는 린덴이 진즈에 셔츠 바람으로 팔에 목욕 타월을 걸치고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변했소? " "비키니는 속에 입고 있어요" 린덴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말했다. "자, 당신의 타월! " "고맙소, 혹시 린이 반대하지 않았소? " "무엇 때문에 반대해요?" 차갑게 되묻는 바람에 제임스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린덴은 우거진 수풀이며 허리 높이까지 닿는 어린나무들을 헤치며 걷경기시작했다. 초원 끝의 잡목림이 가까와지자, 나무사이에서 부엉이가 날아오더니 모습을 감추었다. 초록빛 둑 사이로 흐르는 작은 강물은 차가운 은빛으로 반짝였다. 린덴은 제임스가 있는 것도 개의치 않고 티셔츠와 진즈를 벗어 잘 개어 풀 위에 놓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제임스의 시선이 자기 몸에 쏠리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니키가 주었던 비키니가 몸에 잘 맞는지 모르겠군. 그녀는 다리가 길고 날씬한 몸매를 하고 있어서 비키니 차림이 잘 어울렸는데...... 린덴은 자기의 몸이 제임스의 눈앞에 드러나 있다 싶자 갑자기 부끄러움이 몰려 왔다. 하얀 브래지어는 조그만 둥근 가슴만 겨우 가릴 뿐, 배 둘레는 훤히 다 드러나 있었다. 물에 잠겨 몸의 선이 흐려지자 린덴은 겨우 안도의 뭄을 쉬었다. 긴 머리칼을 올려 묶었기 때문에 백조의 목 같은 가는 뒷덜미가 아름다왔다. 제임스는 우두커니 둑에 선채, 건너편 기슭의 우거진 갈대를 향해서 헤엄쳐 가는 린덴의 모습에 눈길을 빼앗기고 있었다. 얼마 후에 물 소리가 나더니 거의 동시에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구, 차가와! 왜 말해 주지 않았지? " "시원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요? " 린덴은 놀리듯이 말했다. 제임스는 린덴의 옆까지 헤엄쳐 왔다. "좋아, 혼 좀 내줘야 겠어" 린덴의 몸을 두손으로 붙잡고 머리가 술속에 잠기도록 내리눌렸다. 린덴은 그대로 숨을 죽이고 돌처럼 강바닥에 가만히 웅크리고. 해에 그을은 제임스의 다리가 보이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였다. 이윽고 그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린덴의 몸을 안아 올렸다. 린덴은 힘찬 팔에 안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머리가 제임스의 벌거벗은 앞가슴에 닿아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 그대로 전해져 왔다. 제임그녀의 몸을 반쯤 물에 띄워 기슭으로 끌고 가더니 꼭 안아 들고 물에서 나와 걷기 시작했다. 린덴이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제임스는 상당히 동요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마에는 물방울 뿐 아니라 땀도 배어 나와 있었다. "린덴! 그는 그녀를 풀밭에 누이더니 낮은 소리로 불였다. "린덴! " 옆에 무릎을 꿇고 웅크리더니 꼼짝도 앉고 있는 그녀의 가슴에 손을 댔다. 그러자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눈을 번쩍 뜨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동안 침묵이 흘렸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 그는 너무나 화가 나서 목소리가 떨리고 말도 끊어졌다. "난 오랫동안 숨을 멈출 수가 있어요" 린덴은 아직도 웃고 있었다. "덕분에 난 십 년 감수했단 말이야! "그는 노려보며 말했다. 핏기가 가신 제임스의 얼굴을 보자 린덴은 미안한 생각이 들였다. "미안해요, 제임요! " "미안하다구? " 제임스는 마침내 화를 누를 수가 없는지 불처럼 붉어진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린덴이 사과하려고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제임스의 얼굴이 아래로 내려오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입술을 막아 버렸다. 린덴으로서는 생전 처음 당하는 입맞춤이었다. 그녀는 놀라서 커다랗게 눈을 뜬 채 멍하니 있었다. 제임스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꼭 겨안으면서 키스를 계속했다. "입의 힘을 빼요" 제임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린덴은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도 없었다. "입의 힘을 빼요, 린덴! " 제임스의 입술이 점점 힘을 더해 오자 린덴은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놓아줘요! " 그녀는 그의 몸을 힘껏 밀어내며 버둥거렸다. 겨우 몸이 자유로와지고 제임스의 얼굴이 눈에 비쳤다. 잿빛 눈이 번들번들 빛을 뿜었으며 숨결은 거칠고, 몸에 열이라도 있는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한기가 나요? 물이 차가왔던 탓인가봐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요" 제임스는 뚫어지게 린덴을 쳐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야? "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그가 그런 행동을 한 것도 자기가 그를 놀라게 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제임스의 눈은 한동안 야릇하게 번들거리더니 이윽고 빙그레 웃었다. "그런 짓도 좋겠지. 어렸을 때는 이따금 그런 어리석은 장난을 치게 되지 " 제임스는 어서서 타월을 놓아 둔 곳으로 갔다. 린덴도 뒤따라 가서 자기 타월로 서둘러 몸을 닦았다. "버드나무 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어요"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는 두 그루의 버드나무 밑에서 린덴은 차갑게 살에 달라 붙어 있는 비키니를 벗고 덥게 달아오른 몸을 타월로 닦은 다음 진즈와 셔츠를 입었다. 비키니를 타월로 싸 들고 돌아와 보니 제임스는 벌써 옷을 갈아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밤하늘의 달그림자가 강물 속에서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정말 눈부신 밤이지요?" 린덴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훌륭해! " 제임스는 무언가 다른 일을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린덴의 몸에서 눈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저렇게 먼 곳에 사람이 갔다왔다는 건 정말믿을 수가 없어요......" "정말가슴 설레는 일이야" 제임스도 그제야 달로 눈길을 향했다. "누구든지 손에 넣고 싶다고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 "달어떻게 자기 것으로 만들 수가 있어요. 보세요, 우리를 거부하고 있어요 조수의 간만을 반복하면서 지구 둘레를 돌고 있을 뿐이에요" "하지만 사람은 달을 정복했어" 린덴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차가운 달빛비치고 있었다. "겨우 달에 갔다왔을 뿐인데요? 달로서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어요. 사람의 사소한 행동 같은 것은 무시하고 있어요 " 제임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린덴, 당신도 사람이야. 같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의 행동을 무시하면 못써. 린은 잘못생각하고 있는 거야. 괴로움에 직면할 만한 용기가 없어서 일그러져 있어. 슬픔이 마음을 파먹고 있 는 거야. 하지만 당신까지 파먹힐 것은 없지 않아? " 린덴은 눈을 크게 뗬다. "내가 파먹히고 있는 것 같아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글쎄, 저렇게 먼 곳에 있는 아름다운 달을 무엇때문에 사람이 손에 넣어야 한단 말이에요? 감상하기만 하고 그대로 놓아두면 될 텐데요 " "어쩌면 당신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군" 제임스는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 집을 향해 앞서 걸으면서, 얼굴만 이쪽으로 돌리고 어깨 너머로 말했다. 린덴도 걸음을 재촉하며 늦지 않도록 걸었다. "코코아라도 가져오겼어요" 집 안에 들어서자 린덴은 주방으로 갔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아무말도 없이 차잔을 입으로 가져았다. 벽시계의 소리만 심장의 고동처럼 귀에 울렸다. 제임스는 빈 잔을 받침접시에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당신네 호의는 고맙지만, 내일은 호텔로 가겠소" "그럴 필요는 없어요. 린도 당신이 우리집에 묵으시는 걸 좋아하고 있어요. 정말당신을 마음에 들어하시는걸요. 물론 굳이 다른 데로 가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 제임스는 생각에 잠기듯이 가볍게 눈을 감았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지, 린덴?" "나요?" 그를 좋아한다고는 이미 말했다. "그야 있어 주면 좋지요. 말상대가 있으면 즐거우니까요" "알았소. 그렇다면 여기에 묵겠소" 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잘 자요, 린덴. 아까 그 일이 쇼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내 걱정은 하지 마세요. 난 강한걸요. 열 여섯살 때 한번 감기에 걸렸을 뿐 병은 몰라요. 린의 말로는 채식 덕분이래요" "아이구! " 그는 갑자기 말투가 난폭해졌다. "언젠가는 쇼크를 받을 날이 올거야" 등을 돌리고 성큼성큼 나가는 그를 린덴은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그가 갑자기 화를 냈을까? 내가 몸이 튼튼하다고 자랑했기 때문일까? 이상한 사람이군..... 그건 그렇고, 그는 왜 독신으로 지낼까!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저렇게 매력적인 남성이면서 어째서 .... 린도 제임스의 얼굴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남자나 여자나 이름답기만 하다까 매력있는 것은 아니고, 마음을 끄는 것은 고뇌나 고난을 견디어 온 얼굴이라고 한다. 제임스의 날카로운 얼굴 생김새나 불을 담은 것 같은 그의 눈망울은, 그가 괴로움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린덴은 잔을 씻고 나자 생각에 잠긴 얼굴로 의자에 기대고 있었다. "뭘 생각하고 있니? " 조용히 방으로 들어온 린이 말을 걸었다. "제임스에 대해서에요" "제임스가 어쨌다는 거지?" "그의 얼굴을 아빠가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요....그리고 싶지 않으세요? " "응,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 린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역시! 제임스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린의 호감을 살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직감이 맞았다. "어떤 생각을 해왔는지는 모르겠구나. 뭐 들은 이야기도 없니? " "없어요 " 남의 프라이버시에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고 언제나 말씀하시고는 ....... "순탄하게 살아온 사람 같지는 않구나.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린덴은 제임스가, 사람은 살사가는 방식에 따라 인격이 일그러진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제임스도 역시 쓰라린 과거로 가슴이 멍든게 아닐까? 린덴은 조용한 발걸음으로 방문을 향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 "잘 자거라! " 린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미 린덴에 대한 생각은 그의 머리에서 사라지고, 금련화의 꽃무니가 그녀진 접시를 손에 들고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수공이 왔다. 린덴은 목장의 목책에 걸터 앉아 다리를 흔들면서, 차 옆에서 수리공에게 설명하고 있는 제임스와 차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제프로 트랙터를 몰고 와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차를 바라하고 있었다. "내가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제프는 번들거리는 차체에 손을 댔다. "별로 고장은 크지 않은 것 같군요. 프런트 글라스는 새 것으로 갈아 끼워야 하겠지만, 보네트는 손질하여 다시 칠하면 되겠고, 브레이크도 어렵지 않게 고칠 수 있을 거에요. " 그 말에 수리공은 기분이 몹시 상해 버렸다. "내가 고칠 수 없다고 했소? " 그리고 제임스를 돌아보며 어깨를 펴고 말했다. "제프는 전문가가 아니오, 기계를 만지경기좋아할 뿐이지. 차는 레커차를 가져와 끌고 가야 겠습니다. " 제프도 마지 못해 차에서 떨어져 린덴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린은 요즘 어때! 여전히 바빠? 손님이 왔다는 말을 들었는데, 린의 그림이라도 구경하러 왔어? " "제프, 한꺼번에 어떻게 세가지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니! " 린덴은 그의 푸른 눈을 마주 보고웃었다. "제프, 넌 저 차에 완전히 빠져 버렸구나" "토요일에 마을에서 댄스파티가 있어. 당구대를 살 돈을 모으기 위해서인데, 같이 가지 않겠니? "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난 춤을 줄줄 몰라, 드레스도 없고 " "한 벌 사라구, 춤은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어때 안 가겠어? " "린이 허락하지 않을 거야 " 그녀는 미소를 지이면서 고개를 저었다. "왜, 알고 있잖아! " 제프는 별로 끈덕진 성격이 아니었고, 린의 인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쉽게 물러났다. "유감이군, 너하고 꼭 추고 싶었는데 .... 이제 파티에는 나가도 좋을 나이가 된 것 같은데" "트랙터를 뒤로 빼주지 않겠소? " 뒤에서 제임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수리공이 돌아가겠다고 하니까 ....." 제프는 가만히 제임스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트랙터 쪽으로 걸어갔다.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울리며 트랙터와 수리공의 트럭이 좁은 길을 내려갔다. 린덴은 눈을 감고 하늘을 쳐다보며 햇볕을 온몸 가득히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임스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뗬다. "제프가 마음에 들어요? " 제프는 그녀의 오직 하나뿐인 친구이기 때문에 그가 제임스의 마음에도 들었으면 싶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지? " "물론 좋아해요. 소꿉친구인걸요" "그와 키스한 일이 있어? " 린덴은 눈썹을 찌푸리고 땅으로 내려섰다. "당신은 그런 일만 생각하고 있어요? " 등을 돌리고 걷기 시작하자 제스도 뒤따라 왔다. "그야 사람이면 누구나 거쳐가는 길이 아니오. 멀고 먼 옛날부터 말이오. 아무리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 "난 아직 여자가 아니라고 말했지 않아요? " "소녀와 여자의 경계선이 무엇인지 알아요? " 린덴은 순간 섬뜩했다. "그, 글쎄요..... 무엇일까요? " 갑자기 제임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보고 설명하란 말이오? 몸으로 가르쳐 줄께" 제임스의 말에 린덴은 얼굴을 돌렸다. "당신이 여자가 아니니 알 턱이 있겠어요? " "야아, 슬쩍 피하는군" "오늘은 무엇을 할 예정이에요? " 린덴은 화제를 바꾸었다. "말을 타는 것이 어때요? 플레이보이산으로 피크닉을 가지 않겠어요? " "플레이보이산이라...." 제임스의 눈이 빛났다. "어렸을 때 가본 일이 있어. 다시 가보고 싶군" 한 시간 뒤에 두 사람은 샌드위치와 홍차를 준비하고 헬렌의 집에서 빌어온 말을 타고 떠났다. 햇볕은 따스하고 하늘은 아주 맑았다. 황야로 나오자 두 사람은 말을 멈추고 사방은 풍경을 둘러 보았다. 지평선은 새파랗고, 고추냉이며 양치식물이며 히드에 뒤덮인 평원이 몇 킬로나 펼쳐져 있었다. 린덴은 여기 저기서 히드를 뜯고 있는 양떼를 보았다. "<황야의 장난꾸러기>라고 불리고 있어요" "응, 알고있소" "당신은 무엇이건 다 아는군요" 그의 잿빛 눈이 반짝임을 더하며 은빛을 뿜었다. "당신은 남자의 마음을 간질이는 사이렌이군....." 살며시 중얼거리며 몸을 앞으로 내밀고 린덴의 코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린덴도 이번에는 혼란해지거나 하지 않았다. 맑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다정하게 웃었다. 키스를 받는 것은 즐겁사. 린이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에, 어렸을 때에도 그에게 꼭 안기거나 키스를 받은 경험이 없었다. 린덴은 키스를 되돌려주려고 제임스의 코를 향해 몸을 뻗었으나, 그가 얼굴을 뒤로 젖히는 바람에 입술과 입술에 맞닿아 버렸다. "플레이보이산까지 경주해" 제임스가 말하고 갑자기 말을 달렸다. 꼭대기에 닿을 무렵에는 린덴은 너무나 숨이 찼고, 그녀가 타고 온 암말인 레이디의 숨결도 매우 거칠어져 있었다. "루즈를 따라 갈 수가 있어야지요" 제임스가 타고온 수말은 이미 꼭대기에 올라가 풀을 뜯고 있었다. 제임스는 말에서 내리려고 하는 린덴을 얼른 붙잡고 그녀의 상기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이윽고 그 손이 천천히 등을 따라 내려오더니 린덴을 꼭 끌어 안았다. 뜨거운 입술이 겹쳐지 자, 린덴은 어제 제임스가 말한 대로 눈을 감고 입가의 긴장을 풀었다. 제임스의 격렬한 가슴의 고동 때문에 린덴의 가슴의 고동도 자꾸만 빨라져 갔다. 숨이 답답해져서 두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자, 제임스의 팔에 힘이빠졌다. 그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괜찮으냐는 듯이 린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제발 이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린덴은 그의 눈을 쳐다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왜 이런 일을 좋아하는지 속을 알 수가 없어요. 눈앞이 아찔아찔해져요" 제스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나도 현기증이 나지, 아마 이유는 다르겠지만. 그렇지 ....... 당신은 키스가 싫어? " "이런 것은 좋아하지 않아요. 코끝에 살짝 하는 것은 좋지만 ....."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지? " 제임스는 선뜻 그녀의 가슴에 손을 댔다. 린덴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커다란 손가락의 온기가 티셔츠를 통해서전해져 왔다. "아마 호흡이 답답해졌기 때문일 거요" 제임스는 또 웃었다. "아마라......" "우리 도시락을 먹지 않겠어요? " 그렇게 말하자 제임스는 가만히 손을 놓아 주었다. 린덴은 풀밭에 주저 앉아 주위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초록빛 초원과 보랏빛 히드가 대조를 이루어 한층 아름다왔다. 두 마리의 말은 튼튼한 이빨로 풀을 뜯고 있다가, 제임스가 린덴의 옆에 앉아배 낭을 연 순간 레이디가 그 속에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어마! 사과를 줘요" 린덴이 웃으면서 비명을 질렀다. 말은 사과를 한 개씩 입에 물고 즐거운 듯이 십어 먹었다. "속이 출출하군요" 린덴도 커다란 샌드위치를 한입 가득 베어물었다. 샌드위치를 먹고 홍차를 마신 두 사람은 풀밭에 몸을 뉘었다. 너무도 따사로운 살 때문에 린덴은 기분 좋은 졸음이왔다. 볼에 제임스의 손길을 느끼고 무거운 눈을 떴다. 눈앞에 비친 거무스름한 얼굴이 몇 년이나 보지 못한 것처럼 그립게 생각하였다. "잘 잤어? 꿈을 꾸었지? 뭐라고 잠꼬대를 하면서 몸을 뒤척이더군" "그래요? 생각은 난 나지만 좋은 꿈인 것 같아요 " "아마 이런 꿈이었을 거야 " 달콤한 소리속삭이며, 린덴의 입술을 잡으려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아니에요" 린덴은 얼른 돌아누워 그의 입술을 피했으나 가슴이 두근대고 있었다. "절대로 아니에요" 제임스는 웃었다. "내 꿈은 그랬는데" 린덴은 불안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제임스, 그러지 말아요! " "그러지 말라니, 무엇을? " "나 이빨로 풀을 뜯고 있다가, 제임스가 린덴의 옆에 앉아배 낭을 연 순간 레이디가 그 속에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어마! 사과를 줘요" 린덴이 웃으면서 비명을 질렀다. 말은 사과를 한 개씩 입에 물고 즐거운듯이 십어 먹었다. "속이 출출하군요" 린덴도 커다란 샌드위치를 한입 가득 베어물었다. 샌드위치를 먹고 홍차를 마신 두 사람은 풀밭에 몸을 뉘었다. 너무도 따사로운 살 때문에 린덴은 기분 좋은 졸음이왔다. 볼에 제임스의 손길을 느끼고 무거운 눈을 떴다. 눈앞에 비친 거무스름한 얼굴이 몇 년이나 보지 못한 것처럼 그립게 생각하였다. "잘 잤어? 꿈을 꾸었지? 뭐라고 잠꼬대를 하면서 몸을 뒤척이더군" "그래요? 생각은 난 나지만 좋은 꿈인 것 같아요 " "아마 이런 꿈이었을 거야 " 달콤한 소리속삭이며, 린덴의 입술을 잡으려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 왔다. "아니에요" 린덴은 얼른 돌아누워 그의 입술을 피했으나 가슴이 두근대고 있었다. "절대로 아니 에요" 제임스는 웃었다. "내 꿈은 그랬는데" 린덴은 불안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제임스, 그러지 말아요! " "그러지 말라니, 무엇을? " "나?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돌아가요! " 제임스는 난폭하게 말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린덴은 한동안 멍하니 누워 있다가 티셔츠를 내리고 천천히 일어났다. 발걸음이 비틀거렸다. 왜 갑자기 그만 두었을까? 레이디의 등에서 흔들리면서도 그 의문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생전 처음 맛본 기쁨으로 얼굴은 상기되고, 눈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몸은 뜨겁고 나른하여 마음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꽉 짜인 제임스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 이런 심정은 그에게는 새로운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제임스는 서른 아홉 살이나 되지 않았는가. 나로서는 정신이 아찔아찔할 일도, 제임스에겐 지금까지 수 없이 경험해 온 흔해 빠진 일 중의 하나겠지. 결국 난 그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 그날 저녁, 식사가 끝나도 린은 아틀리에로 돌아가려하지 않고, 또 체스를 두자고 제임스를 꾀었다. "내가 이길 것 같단 말이요" 하고 표정 없는 눈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럼, 어디 해봅시다. " 제임스는 소파느긋하게 앉아 린이 말을 늘 놓는 것을 바라보았다. 린덴도 옆에 앉아 체스보드를 들여다 보았다. 이번에는 어느 쪽이 이겼으면 좋겠는지 자기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제임스는 철갑을 입은 것처럼 자신에 찬 냉랭한 얼굴로 버티고 앉아, 마치 거인 골리앗과 맨손으로 싸우는 다윗을 생각나게 했다. 그의 표정이나 태라가 좀 마음에 거슬렸지만, 그렇다고 결코 린이 이겼으면 하는 마음아니었다. 만일 제임스가 진다면 ........ 그렇게 생각하자 겨 우 자기의 본심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임스가 이겨야 한다. 어떤 일에서나 그가 지는 것은 보기가 싫었다. 발이 저려 왔기 때문에 린덴은 몸을 꼼지락 거렸다. 제임스가 얼굴을 들고 그녀의 동작을 쳐다보았다. 가는 손가락으로 발끝을 살살 문지르는 그녀의 자세로, 조그맣고 불록한 가슴이 강조되어 보였다. "당신 차례요" 린의 말에 제임스는 체스보드로 시선을 돌리고 손을 뻗었다. 그 말을 움직이면 안 돼요! 린덴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제임스의 손은 말 위에서 멈칫거렸다. 그러더니 차차 게임의 전개가 이해 되었는지 진지한 눈길로 체스보드를 노려 보았다. 그러더니 몇 초 후 다른 말을 움직였다. 두 남자가 얼굴을 마주 보며 빙그레 웃는 것을 보자 린덴의 마음도 크게 흔들렸다. "린덴, 커피를 좀 주겠니? "린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린덴은 일어서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두 팔을 위로 뻗고 발끝으로 서서 몸을 활처럼 뒤로 휘는 것을 제임스가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잿빛 눈망울과 마주치자 린덴의 몸 깊은 곳에서 뜨거운 피가 솟구쳐 올랐다. 등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가 커피를 따랐다. 커피를 가져오자 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린덴, 넌 이제 가서 자거라" "네? 하지만 ......" 린덴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린이 얼굴을 드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지금 까지 아버지의 명령을 거스른 일이 한번도 없었는데, 오늘 따라 말을 듣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제임스도 이쪽을 보고 있었으나, 그의 표정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린덴은 한숨을 내쉬고 삐친 것처럼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 제임스"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다음 심플한 목면 나이트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창가에 기대서서 달을 바라보며 플레이보이산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제임스의 애무를 받았을 때, 몸 속 깊은 곳에서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무언가가 눈을 떴는데, 그 뒤로는 자기가 딴사람이 된 것 같이 느껴졌다. 몸도 마음도 어제와는 전혀 달랐다. 오늘밤은 쉽게 잠들 것 같지가 않았다. 겨우 잠에 빠져들 무렵, 두 사람의 발소리가 조용히 계단을 올라오더니, 문소리가 나고 양쪽 방의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린의 발소리는 바라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쪽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보폭이 큰 제임스의 발소리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욕실로 가더니 한참 후에 돌아와 딸깍 하고 전등의 스위치를 껐다. 그러고는 침대가 삐걱거리는 것으로 보아 그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린덴은 차츰 눈꺼풀이 무거워지더니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다. 이튿날 아침, 린덴이 주방으로 내려가니 제임스가 토우스트를 먹고 있었다. "안녕, 잘 잤소? " "네" 린덴은 생전 처음 거짓말을 하고는 자신도 깜짝 놀랐다. 어젯밤에는 꿈만 꾸고, 밤중에도 몇 번이나 눈을 뜨곡 했다. 아침이 되니, 어떤 꿈이었는지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몸 속이 짜릿하고 뜨거워져 있었다. 홍차를 따르고에 버터를 바르는 그녀의 움직임을 제임스의 잿빛눈이 가만히 쫓고 있었다. "아니, 아침 식사를 그것에 밖에 들지 들지 않아요? " 그는 짜증이라도 난 듯이 물었다. "그래요 " "그러니 그렇게 깡마를 밖에 " 린덴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건강한걸요" "그러다는 말이지 " 그의 목소리는 냉랭하고 까슬까슬했다. "감기 한번걸리지 않았다니 강단이 있군" 린덴은 불안한 느낌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왜 이러지요? 뭐 나 때문에 화가 나 있어요? 강단이 있다구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만난지 얼마 안되는 당신의 영향으로 내가 이렇게 달라져 버렸는데요 ...... 린덴은 마음의 동요를 눈치채이지 않으려고 눈을 내리깔고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얼마 후 린덴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은 무엇을 하시겠어요? " "여기서 어린애 상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 제임스는 토우스트를 씹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을까지 걸어가서 요크행 버스를 탈 생각이야. 차 시간은 린에게서 들었어. 앞으로 10분 뒤에는 떠날거야 "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린덴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왜 이렇게 말투가 거칠어졌을까? 린덴은 함께 가도 좋으냐고 물을 용기마저 잃고 고개를 숙였다. 토우스트를 먹고 제임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혼자 있어도 좋지요? " "물론이에요" 린덴은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대답했다. 제임스는 한동안 망설이고 있는 것 같더니 이윽고 문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린덴은 힘없이 의 자에 기대어 몸을 떨고 있었다. 린한테 차갑게 다루어지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으나, 제임스까지 차갑게 나오는데는 쇼크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따뜻하게 대해 주리라 여긴 것은 너무 태 평스런 생각일까..... 린덴은 입술을 깨물고 몸을 일으켰다. 설겆이를 끝낸 뒤 청소를 시작했다. 린 덴이 수녀원에 있을 때 일주일에 한번씩 린이 청소를 했던 것이다. 그는 그것을 위해서 사람을 고용하기를 원치 않았고 , 검소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청소가 끝나자 휘파람으로 밴디트를 불러 목장으로 나갔다. 순한 눈매의 홀스타인이 희고 검은 얼룩 몸을 린덴에게도 밀어 붙여왔다. 밴디트가 그 주위에서 기쁜 듯이 뛰어다녔다. 린덴은 목장 구속에 피어 있는 푸른 꽃을 발견하고는 무릎을 꿇고 들여다 보았다. 종모양의 초롱꽃으로 아주 귀한 꽃이었다. 귀한 꽃을 발견해 기분이 좋아져 풀밭에 주저 앉아 팔다리를 힘껏 뻗었다. 주위에서 뛰어놀던 밴디트가 짖으면서 생나무 울타리 쪽으로 뛰어갔다. 린덴은 미나리아제비의 꽃을 꺾어 화환을 엮 어 아이들처럼 목에 걸었다. 이제 제임스에 대한 생각은 머리에 없었다. 따사로운 햇살과 달콤한 꽃향기와 자유로운 분위기를 마음껏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꽃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였다. 돌아다보니 이 풀에 서 저 풀로 바람처럼 가볍게 날아다니는 귀뚜라미가 눈에 들어왔다. 얼른 팔을 뻗어 두 손으로 확 감쌌다. 조그만 몸이 손 안에서 파르르 떨었다. 연약한 곤충이 도망을 치려고 필사적으로 버둥 거리는 모습을 보고 린덴은 가엾게 생각되어 그만 손을 폈다. 흑갈색의 몸은 있는 힘을 다해 뛰 쳐나가 풀 속으로 사라졌다. 오후에는 설겆이를 한 다음 이웃집으로 놀러갔다. 마침 식탁에 둘러 앉아 있던 헬렌과 빌과 제프는 린덴의 모습을 보자 한순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고마와요" 헬렌이 커피를 따라 주자 린덴도 식탁에 끼어들었다. 이 집안과는 태어날 때부터 오 가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처럼 허물없이 어울리고 있었다. 제프가 헝클어진 갈색 머리를 쓸어올리 며 웃어 보였다. "더워 보이는데 햇볕에 있었니? " "응, 점심때까지 사뭇 "린은 일하고 있니? " 빌도 몸을 앞으로 내밀고 거무스름한 모난 얼굴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는 그림에 대한 취미는 전혀 없었으나, 린의 소꿉친구임을 자랑으로 알고 있으며, 린의 일이 잘 되어 가는지에 언제나 신경을 쓰고 있었다. 거실의 벽에는 흰색과 검정색으로만 그려진 린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린이 가벼운 기분으로 보낸 것인데, 빌은 그 방면의 권위자로부터, 이제는 엄청난 값이 매겨질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있었다. 물론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팔 생각은 없 는 것 같았지만, 그림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에 대해서 그는 매우 흡족해 하고 있었다. "런던에서 온 녀석은 뭘 하고 있니? " 제프가 가시돋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아침 일찌감치 요크로 떠났어. 제프, 그 사람이 싫으니? " 린덴은 실망했다. 제임스가 제 프를 좋아하기를 바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 제프로 제임스에게 호감을 갖기를 원했던 것이다. 자 기의 몇 명 안되는 친구들이 서로 반감을 가지는 것이 슬펐다. "그 녀석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아. 그런 인간은 자기가 있어야 할 장소를 알았으면 좋겠어" "그 사람도 이 고장에서 태어났대" 린덴은 웃으면서 쏘아붙였다. "그리고 그게 무슨 뜻이니? 그 런 인간이라니......" "런던에 살고 있는 녀석들말이야 " 제프는 내뱉듯이 말했다. "도시적이면서 유행적인 남자말이 야. 린덴, 그런 녀석은 조심하라구.고 은데다 나이도 너의 아버지뻘은 되지 않니? " 제프가 자기의 몸을 걱정해 주는 걸 느끼고 린덴은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렇게 한 존재도 아니고, 우선린이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제프는 제임스를 싫어하는 것인가? 사람을 겉으로 보고 판단하다니 제프답지가 않아. "그는 린의 마음에 들었어"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었다. 린은 가짜와 진짜를 알아보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제프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입을 꽉 다물었다. "아이구, 그가 린의 마음에 들어? 하지만 린은 여자가 아니란 말씀이야 " 린덴은 그만 눈이 휘둥그래지고 얼굴이 상기되었다. 헬렌흘끔 린덴을 보고는 야무진 소리로 제 프를 나무랐다. "이제 그만 두려무나. 넌 그 사람을 한번밖엔 보지 못했지 않니? 의심하는 것은 벌 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지 않니? " "의심스럽다니, 뭐가요? " 린덴이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 헬렌은 얼른 그렇게 말하고, 제프가 참견할 겨를도 없이 말을 이었다. "두 사람 다 일하러 가야 하는게 아니에요? " "암, 그렇지 " 빌이 몸을 일으켰다. "자, 어서 가자. 제프? " 제프는 목을 움츠리고 일어섰다. 문간까지 가더니 다시 한번 린덴을 돌아보았다. "역시 댄스 파티에는 못 가겠니? " "말했지 않았니, 난 드레스도 없다구? " 헬렌은 린덴의 맨발을 내려다 보았다. "그 모양을 보니 구두도 없겠구나? 린은 도대체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제프가 나가자 린덴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두가 있긴 있어요. 수녀원에서 신던 검은 구두에요. 하지만 그런 것을 신고 들을 뛰어다닐 수는 없지 않아요? 맨발이 좋아요 " "넌 꼭 집시 같구나" 진즈에 티셔츠를 입은 가는 몸매를 바라보면서 헬렌이 중얼거렸다. 린덴은 방긋 웃었다. "그래요. 이상적인 생활이 아니겠어요? " 린덴은 숲을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도중, 자기가 집시 같다고 한 말을 생각하자 어쩐지 기뻐서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자유란 참 좋은 거야. 지금 까지의 수녀원 생활은 정말 답답했어. 엄격한 규칙에 얽매인 생활에서 벗어나 이 고장으로 돌아오기를 얼마나 원했던가..... 린은 잔소리도 하지 않으며, 식사 시간조차 잊어버리고 일에 몰두한다. 그러니 난 언제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 고 , 또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정말 평가롭고 한가한 생활이다. 뜰의 입에는 벌써 몇 년째 열매가 열리지 않는 복숭아나무가 있었다. 그 낮은 가지에는 예전에 빌이 매어 준 그네가 지금도 드리워져 있었다. 걸터앉는 부분의 빨간 페인트칠은 다 벗겨졌으나, 로우프는 아직 튼튼해서 어른이 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린덴은 그네에 앉아 앞뒤로 구르기 시 작했다. 상기된 볼을 바람이 어루만져 주자 기분이 좋았다. 눈을 감고 그네가 흔를리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갑자기 발소리가 났기 때문에 머리를 젖히고 뒤를 보았다. 제임스의 모습이 거꾸로 비치자 린 덴의 눈이 확 빛났다. 제임스는 움직이는 그네줄을 잡고는 린덴의 얼굴 위에 고개를 수그렸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자, 녹아 들 것 같은 달콤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졌다. "린덴! " 그는 줄을 놓고 그녀의 가슴에 살며시 손을 댔다. 어째서 오늘 아침과는 또 딴판인지 린덴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이번에야 말로 물어보려고 했 지만, 마음은 그럴 겨를도 없이 뜨거운 그의 애무에 응하고 있었다. 제임스가 고개를 들고 깊이 숨을 들이쉬자 린덴은 가벼운 몸짓으로 땅 위에 내려섰다. "요크에 가니 즐거웠어요? " 제임스는 잠깐 쌀쌀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더니 곧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당신한테 줄 선물을 사 왔어" "선물? " 린덴은 말문이 막였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때밖엔 받아 본 적이 없었고, 그것도 빌 이나 헬렌이나 제프한테서 받는, 실용적이고 검소한 생활 필수품에 한정되어 있었다. "선물이라니 뭐에요? " 린덴은 기대로 가슴이 벅차 올았다. "볼 때 까지가 즐거움이라고 하지 않아? " 집 안으로 들어가자 제임스는 계단을 가리켰다. "당신 방에 있어 " 무엇을 사왔는지 알고 싶어 린덴은 단숨에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침대 위에 똑같은 모양의 상 자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하나를 열어 본 순간, 린덴은 너무나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계속 열 어 보면서 놀라움은 더욱 커져 갔다. 순백의 드레스며 지금 까지 한번도 입어 본 일이 없는 얇은 란제리, 실크 스타킹이며 멋있는 하얀 구두. 린덴은 너무나 만나서 어쩔 줄을 모르고 그저 침대에 걸터앉아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문을 닫지 않았기 때문에 문간에 제임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의아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린덴을 내려다 보았다. "마음에 안 들어? " "모두 .... 너무너무 좋아서 ........" 린덴은 자기의 생각 그대로를 말했다. "그런데? " "이런 값비싼 선물을 받을 수는 없어요" "린에게는 이미 말했어 " 제임스는 털어놓고 말했다. "그도 반가와 하는 것 같던데 " "린이오? " 그 말에 상황은 확 바뀌었다. 린이 이것을 받아도 좋다고 한다면 ..... "입어 보라구" 제임스는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 린덴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이라도 선 듯이 일어서서 기쁨에 찬 얼굴로 드레스를 집어들었다. 약 15분 후 조그만 거울 앞에 선 린덴은, 거기에 비친 모습이 자기 같지가 않은데 당황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입었어? 들어가도 좋지? " "잠깐 1띵다려요....." 마음의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문이 열리자 린덴은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아직 안돼요, 제임스! " 제임스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온몸을 달리며 잿 빛 눈이 검정에 가까울 정도로 짙어졌다. 거미줄로 짠 것 같은 보드라운 실크 드레스--네클라인 밖으로 작은 어깨가 드러나 보이고, 웨 스트는 꼭 죄어지고, 스커트는 가볍게 가는 다리를 싸고 있었다. 굽높은 구두는 익숙하지 못해서 불안정하여 걷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제임스의 눈길이 서슴없이 다리며 웨스트며 가슴으로 쏠렸 다. 제임스는 휴우 하고 숨을 크게 내쉬고는 창가에 가서 몸을 기댔다. "자, 이제는 신데렐라도 댄스 파티에 나갈 수 있게 되었군" 린덴은 그 의미를 이해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고 싶지 않아요, 제프에게도 거절했고 ....." "내가 데리고 간단 말이야 " 제임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린덴은 반신반의하며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시골의 댄스 파티에 나가다니 이해할 수가 없 었다. 린덴 자신도 가 본 일은 없지만, 그것이 제임스에게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 었다. 그는 도시나 세련된 사람들과 지내 왔을 것이다. 비로소 제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 았다. 제임스는 이런 한가한 시골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휴가 동안에 처녀들의 마음 을 농락하고, 내 인생에 파문을 던지며 즐기려는 것은 아닐까? "왜 그래. 나와 함께는 가기 싫어? " 린덴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제임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 했다. "당신이 어떻게 마을의 파티에 간단 말에요? " 린덴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를 알고 싶어했지? 그것이 하나의 힌트를 주게 될 것 같은데 " 린덴은 손을 꼭 틀어쥐고 가슴을 펴며 일부러 무리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하나의 레슨이 되겠군요" "그것도? " 제임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린덴은 그의 의아 스러워하는 쌀쌀한 시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네, 난 이미 당신의 개인 수업을 받았는걸요" "어린아이 주제에 꽤나 되바라진 소리를 하는군" 제임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신은 변했어 " 하고 혼잣말처럼 덧붙여 말했다. 그것은 린덴 자신도 절감하고 있었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자기가 변해 가는 것이 그 저 놀라 와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파티에는 가겠소, 안 가겠소? " "가겠어요" 또 짐짓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제프가 좋아할 거에요" "아니, 제프하고가 아니라 나하고 가잔 말이오" 그는 성난 목소리로 말하고 문을 쾅 닫고 나갔 다. 이튿날도 또 그 이튿날도 두 사람은 레코드를 듣고 트럼프를 하고, 그리고 밴디트를 데리고 냇 가에 나다니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린덴은 조금씩 눈 떠 지고 있는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주체하지 못했으나, 제임스는 친구일 뿐이라고 자신을 타이르며 마음 편하게 어울리기 로 했다. 차차 제임스와 같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되어 갔다. 쓸쓸한 소녀 시절과 규율에 묶인 수 녀원 생활을 보낸 뒤, 린덴은 제임스의 입김에 닿아 눈을 떠 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지 금 까지 맛본 일이 없는 생생한 충일감을 느꼈고,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어 생각한 일을 입밖에 내어 말할 수 있었다. 연령적으로는 무척 차이가 있었지만, 경험이 풍부한 제임스는 린덴에게는 제일가는 이해자로 생각되었다. 손을 잡고 들판을 걸으면서 애기를 했다. 린덴은 그의 외국여행에 대한 애기에 열심히 귀를 기 울였다. 제임스는 어디고 안 가 본 데가 없는 것 같았다. 뉴육, 하와이, 동경, 아테네, 시드니 등....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애기며 여러 가지 사건들을 유머를 섞어 가며 재미있게 애기해 주었 다. 그리이스의,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치솟아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보았을 때의 감격, 파리의 아침 장에서의 비에 젖은 포도 위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여인네들의 모습--- 린덴은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당신은 뱃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일이 있나요? " 린덴이 웃으면서 물었다 "음, 옛날에 있었지 " "어떻게 단념할 수 있었어요, 당신한텐 안성마춤의 직업일 텐데요? 전세계 항구에 애인을 만들 고 ...." 제임스는 장난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보라구, 아픈 꼴을 당하고 싶어? " 린덴은 조금도 무서워 하지 않고 웃어댔다. "당신이 책상 앞에 앉는다는 것은 상상도 안되는 일이에요" 하고 코에 주름을 잡아 보였다. "이 렇게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거드름을 피우는데 " "당신은 주근깨가 있군" 제임스는 그녀의 코를 눈여겨 보면서 말했다. "여름이면 생겨요" 언제나처럼의 티셔츠와 진즈에 싸인 가는 몸과 맨발, 그리고 바람에 나풀거리는 금발에 제임스 의 정감 어린 눈길이 쏠렸다. "꼭 허클베리 핀 같군" 린덴의 웃음소리가 더욱커졌다. "마크 트웨인을 좋아하세요? 나는 무척 좋아해요. 존경하고 있어요. 열 살 때 시냇물을 따라 내 려가려고 제프더러 뗏목을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겨울동안의 눈 때문에 망가져 버렸어 요" 제임스의 입가에서 웃음이 얼어 붙었다. 그의 눈길이 갑자기 차갑게 바뀌어가는 것을 보고 린 덴은 오싹 한기를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얼버무리려고 린덴은 빠른 말로 물었다. "댄스 파티에 대해서는 린에게 말했어요? 내가 가도 좋다고 해요? " 제임스는 곁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당신은 아직 말하지 않았소? "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제 애기해 놓았어" "린이 뭐라고 했어요? " 린덴은 숨을 죽이고 그를 쳐다보았다. "보낼까 말까 하고 망설이는 것 같더군" "화는 난 냈어요? " 제임스는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응, 화는 난 냈어" 눈에 차가운 빛을 띠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토요일도 역시 맑고 따뜻한 날씨였다.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고, 목장에서는 소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었다. 제임스가 낚시질을 하자고 해서 두 사람은 냇가로 나왔다. 제임스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린의 낡은 밀짚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뚝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린덴은 진즈의 바짓가 랑이를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시원한 물의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풀밭에 누워 있 는 그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답해지면서 미소가 사라졌다. 제임스도 언젠가는 돌아가겠지,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가버리면 얼마나 공허하고 애절한 느낌 에 사로잡히게 될지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린덴은 열심히 마음의 동요와 싸우면서 물에서 올라왔다. "슬슬 돌아갈까요? 파티에 갈 준비도 해야 하니 다른 때보다 일찌감치 식사를 마쳐야 겠어요" "나도 준비를 거들겠어" 제임스도 몸을 일으켰다. "아니, 괜찮아요. 나 혼자 그럭저럭 할 수 있어요" 린덴은 낚시 도구를 챙기는 제임스를 남겨 두고 혼자 걷기 시작했다. 지금 까지 그에게 너무 허물없이 대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에게 늘 속마음을 눌치채여 버린다. 그의 잿빛 눈 에 마음의 움직임을 눈치채이지 않도록 하는 테크닉을 몸에 익혀야지 ..... 식탁에 앉은 린덴은 미소를 짓고는 있었으나, 제임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린은 찌 푸린 얼굴로 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차갑고 험한 아버지의 눈길에 한기를 느끼고 린 덴은 당황하여 접시로 눈길을 떨구었다. 식기를 치우고 나자 린덴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채비를 마쳤으나, 익숙지 못한 차림이나 구두에 겁이 나서 선뜻 방을 나설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용기를 내서 계단을 내려오니, 아래층엔 이미 제임스와 나란히 린도 서 있었다. 린덴 은 검은 드리피스로 몸을 싼 제임스의 기품이 넘치는 모습에 놀랐다. 여느 때의 제임스와 같은 전혀 다른 매력을 느꼈다. 그러고는 린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그는 입을 꼭 다물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를 내고 있 군, 그렇게 생각했을 때 제임스가 다가왔다. "정말 멋있군! " 그는 머리끝에서부터, 구두를 신은 발끝까지 죽 훑어보았다. "그럼, 잘 자요, 린" 제임스는 어깨 너머로 말하고 린덴을 데리고 문으로 갔다. "잘 다녀와요 " 린은 쌀쌀한 목소리로 두 사람을 보냈다. "많이 걸어야 하는데 이 구두로 갈 수가 있을까요? " "택시를 불러 놓았어" 제임스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하는 말에 린덴은 너무나 놀랐다. "어머나! " 그런 사치는 생전 처음 이었다. 린덴은 아래에서 두 사람을 그다리고 있던 그 고장 의 낡은 택시를 불안한 기분으로 탔다. 마을의 홀에는 상당수의 사람이 모여 있었으며, 두 사람이 들어서자 와아 하고 완성이 일었다. 누구나 린덴의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프는 린덴을 본 순간 각이 진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린덴은 부꺼러운 듯이 그에게 웃음을 띠 어 보였으나, 익숙하지 못한 드레스 때문에 약간 당황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느 때같은 밝은 얼굴 이 될 수는 없었다. 음악이 시작되자 제임스는 린덴의 허리에 팔을 돌리고 플로어 쪽으로 가자고 끌었다. 린덴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난 춤을 못 춰요 " "내가 리드하는 대로 따라 오기만 하면 돼" 린덴은 어쩔 줄을 모르면서 발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머리를 들어요! " 제임스는 주의를 주었다. "리듬에 따라 움직이면 댄스는 별로 어렵지 않아 " 제임스는 스텝을 간단하게 설명한 뒤 힘차게 리드하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맞추어 나가는데 정신이 없어서, 린덴은 그가 말을 걸자 눈썹을 찌푸렸다. "가만히 있어요. 스텝을 세고 있으니까 " 제임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글자를 배울 때 같군, 귀여운 코에 그렇게 주름을 잡지 말아요 " 두 사람이 몸을 꼭 붙이고 춤을 추는 동안 제임스의 온기가 온몸에 전해지고 어느 사이 긴장도 풀려 갔다. 음악이 그치자 제임스는 차가운 레몬주스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회장 안을 빙 둘러보 면서 캔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다시 한 곡을 추면서 상당히 스텝을 익혔을 때, 제프가 성난 기색을 하고 댄스를 청하러 왔다. 어깨에 힘을 주며, 한바탕 말썽이라도 일어킬 것 같은 기색이었다. 린덴은 그와 제임스를 떼어 놓 으려고, 바로 그의 청에 응하여 플로어로 나아갔다. "린덴, 도대체 어쩔 셈이지? " 제프는 화를 내며 따지고 들었다. "그 드레스, 그리고 저녀석....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 "조용히 해 줘요, 스텝을 세고 있어요. 그걸 잊어 버리면 춤을 못 추지 않아요! " 낮은 소리로 받아넘기자 제프도 다소 체면을 차리고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제프의 파트너가 되 니 제임스의 경우처럼 즐겁지가 않았다. 원을 그리며 플로어를 미끄러져 간다기 보다는 이쪽 끝 에서 저쪽 끝으로 끌려 다닌다고 하는 것이 알맞은 표현이었다. 한 곡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린덴은 파트너 신청을 하러 온 청년들에게 에워싸여 버렸다. 얼굴 을 붉히고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쳐다보고 있을 때 뒤에서 제임스가 나타나 더니 선뜻 그녀의 허리에 팔을 돌렸다. "내 파트너니까요 " 험한 얼굴에 은근한 미소를 띠고 가볍게 젊은이들을 쫓아 버렸다. 린덴은 다시 우람한 제임스의 팔에 몸을 맡기고 느긋한 기분으로 춤을 계속추었다. 음악이 팡팡 귀에 울 렸으나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 아무것도 거슬리지 않았다. "자신이 좀 생겼소? " 제임스가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파티가 끝날 무렵에는 천사처럼 가셥게 출 수 있게 되겠군" "어마, 천사는 춤을 추지 않아요. 하늘을 날아요 " 농담을 할 여유도 생겼다. 잿빛 눈이 린덴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너무 멀리 날아가면 안 돼. 그랬다간 그 날개 끝을 자르지 않을 수 없게 될테니까 ....." 린덴은 갑자기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녀는 못 들은체 하고 제임스의 곁을 떠나서, 찌푸린 얼굴 로 왔다갔다하고 있는 제프의 품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제프와 춤을 추면서도 제임스의 모습 이 시야를 스칠 때 마다 가슴이 뛰었고, 그의 은빛 시선을 받으면 온몸의 피가 끓어올랐다. "린덴, 조심하라구" 제프는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저녀석은 신용할 수가 없어. 당 신의 상대가 될 만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심심풀이로 희롱하고 있을 뿐이란 말이야 " "조용히 해 줘. 헷갈려서 춤을 출 수 있겠어? " 린덴은 한숨을 쉬었으나 그의 말이 가슴에 와 서 꽂혔다. 제임스는 나를 심심풀이로 희롱하고 있다 ---그것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은 린덴도 알고 있었다. "린덴! " 춤이 끝났을 때 제프는 그녀의 허리를 세게 끌어당기더니 험한 표정을 지으며 내려다 보았다. "충고하겠는데 ...." "나 역시 즐기고 있단 말이야 " 린덴은 조그만 턱을 쳐들고 분명하게 말했다. 제프가 놀라서 팔의 힘을 뺀 틈에 린덴은 얼른 그의 품을 빠져 나왔다. 조금 지나 그녀의 상기 된 얼굴을 냉랭한 눈으로 보면서 제임스가 다가왔다. "이제 돌아가는 것이 어떨까?" 그는 팔목 시계를 보았다. "열 시까지는 돌아가겠다고 린에게 약 속했으니 슬슬 나서야지 ....." 린덴은 어느 새 그렇게 시간이 흘렀나, 하고 깜짝 놀랐으나 집으로 돌아가는 건 찬성이었다. 처 음으로 춤을 추는 바람에 다리도 아팠고, 오랫동안 구두를 신고 있었기 때문에 발이 욱신거렸다. 두사람이 떠나는 것을 제프는 씁쓸한 표정하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즐거웠소? " 집에 도착했을 때 제임스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정직하게 대답했다. "너무나 시끄러웠고 발이 아파서요.... 구두는 지겨워요" 제임스는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첫 댄스 파티는 완전한 성공일 수가 없었군...." "유감스럽지만 그랬어요. 나를 위해서 여러 가지로 애써 주셨는데 .... 고마와요, 제임스" "제프가 무슨 소리 안했어? " "당신을 조심하라는 거에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였다. 제임스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지? " "나 역시 즐기있으니 상관할 것 없다고 말해 주었어요" 방긋 웃고는 제임스의 시선을 의식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댄스 파티장에서의 조명과 소음 탓으로 머리가 욱신거렸고, 제임스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도저히 잠을 룰 수가 없었다. 침대에 앉아 있어도, 저도 모르게 제임스의 방에서 들리는 소리가 신경에 쓰이는 것이 었다.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조용히 가라앉았다. 린도 잠 이 들었는지 집 전체가 고요속에 파묻혔다. 린덴은 진즈와 셔츠로 갈아입고 목욕타월을 들고 밖 으로 나왔다. 강가의 둑에서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에 몸이 닿자 기분이 좋았다. 갈대가 우 거진 어둠 속을 향해 반짝반짝 달빛을 반사하는 물 위를 헤엄쳐 갔다. 수초 그늘에서 잠들어 있 던 물새가 놀라 날개를 파닥거리더니 부리를 날개 밑으로 밀어넣고 동그랗게 몸을 웅크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가 나서 린덴은 뒤돌아보았다. 달빛을 받고 서 있는 제임스의 얼굴이 릿하게 보였다. 깜짝 놀라서 한동안 멍청하게 쳐다보던 린덴은 자기가 아무것도 몸에 두르지 않고 있음 을 깨닫고 두 팔로 가슴을 가리며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저리 가요, 제임스, 부탁이에요! " 그는 말없이 그대로 물속으로 들어왔다. 도망치려고 하는 린덴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꼭 끌 어안았다. 몸이 그의 가슴에 밀어붙여졌을 때, 린덴은 처음으로 그도 벌어벗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지 말아요, 제임스! " 떨리는 손으로 그의 건장한 어깨를 밀쳐냈다. "정말 멋있어, 당신은 ......" 제임스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고 린덴의 어깨에 입술을 밀어붙였 다. "린덴! 아아, 린덴...... 당신을 가지고 싶어서 미칠것 같아........" 그의 말은 린덴의 가슴을 죄고 신경을 마비시켰다. 밤의 정적이 차차 멀어져 가면서, 린덴은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는 욕구의 외침 소리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이 꿈틀꿈틀 움직일 뿐이었다. "사람을 뒤따라 오면 못써요 " 가까스로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 둑에 옷이 있는 것을 보고, 당신이 이곳에 와 있는 것을 알았지. 거기서 돌아갔 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럴 수가 없었단 말이야" 제임스의 눈길은 린 덴의 희고 윤기나는 어깨와 볼록한 가슴, 수면 위로 아슬아슬하게 나와 있는 허리로 쏠렸다. "당 신의 모습을 한번 안보고는 못배길 것 같아서 " "제임스....." "이런 짓을 할 생각은 없었어" 그의 거친 숨결이 목을 간질였다. "하지만 당신한테 자꾸 끌려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나도 모르겠어" 린덴은 망설이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달빛이 그녀의 열기 띤 갈색 눈과 조그만 코, 아이같 이 빨간 볼, 금방이라도 빼앗고 싶은 입술을 비추고 있었다. 젖은 머리칼은 어깨 부근에서 물결치 며 싱싱한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아아, 미쳐 버릴 것 같아" 제임스는 두 손으로 린덴의 몸을 힘껏 끌어안고 격렬하게 입술을 찾 았다. 린덴도 이성을 잃고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힘주어 끌어안았다. 제임스의 팔 속에서 린덴은 생전 처음으로 관능에 눈을 떴다. 이상한 흥분 상태에 빠져 있었으 나, 달빛이나 차가운 물, 그리고 따뜻하고 나른한 공기를 마음속 어딘가에서 느끼고 있었으며, 이 런 인상이 제임스의 애무에 오버랩 되어 뇌리에 새겨졌다. 제임의 목에 감은 린덴의 손이 그의 굵은 목줄기를 따라 머리칼의 가장자리까지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녀의 몸은 환희의 빛을 발하며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제임스는 갑자기 몸을 확 떼더니 목에 감긴 그녀의 손을 잡아떼었다. "안 돼......"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린덴, 난 돌아가야 해. 안 돼......" 하지만 이미 분별력이 없어진 그녀는 이미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사랑하고 있어요, 제임스" 이런 말을 입에 올린 것도, 그런 기분에 빠진 것도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임스는 괴로운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다가, 참을 수가 없게 되자 그녀의 몸을 안아들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물에서 나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버드나무 그늘 로 옮겨 갔다. 4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하늘은 잔뜩 흐려 있고, 초록빛 골짜기에는 무거운 비구름이 낮게 드리 워져 있었다. 린덴은 한동안 자리에 누운 채 창밖을 보고 있으려니, 어젯밤의 기억이 되살아나 얼 굴이 뜨거워지고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런 일을 저질러 버렸을까. 어디론가 숨고 싶 은 심정으로 뜨거워진 볼을 베개에 파묻었다. 헤엄을 치러 나가지만 않았던들 거기에서 제임스를 만나는 일도 없었을 텐데 ...... 그는 지금 무얼하고 있을까? 어떤 얼굴로 내려가야 한단 말인가. 제임스와 얼굴을 마주치기보다는 차라리 종일 이 침대 속에 누워 있고 싶었다. 한동안 고민 끝에 일어나 천천히 옷을 입고 방을 나왔다. 불안한 마음으로 주방 문을 열어 보 니, 공허한 표정의 린이 이쪽을 보고 앉아 있었다. 린덴은 흠칫하고 발을 멈추었다. "들어온, 린덴! " 뜻밖에 따뜻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시선을 외면 하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일은 안 하세요? "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거기 앉으렴" 린덴은 힐끗 아버지를 쳐다보고 말없이 의자에 걸터 앉았다. "제임스는 떠났다" 린은 조용히 말했다. 린덴은 순간적으로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아버지의 엄격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 뭐라고 하셨지요? " 린은 긴장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린덴, 난 네 아버지로서는 실격이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침착하게 내 말을 듣고, 이 제부터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하지만, 린덴은 아까의 그 한 마디에 너무나 큰 쇼크를 받았기 때문에, 그 뒤의 말이 제대로 귀 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임스가 갔다고 하셨지요? " "할 수 없었다, 린덴" 그는 허리에 손을 대고 꼭 틀어쥐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 손으로 놈 을 죽였을 테니까 " 린덴은 와들와들 몸을 떨며 일어섰다. "싫어요! 이제는 결코 그와 떨 질 수 없어요.... 아빠는 몰라요..." "알고 있다" 린의 창백한 입술이 움직였다. "어젯밤 그녀석이 너와 함께 돌아왔을 때 애기를 들 었다" 린덴의 얼굴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핏기가 가셨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난.... " 망설이다가 다시 계속했다. "왜 쫓아냈어요? "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에 증오의 그림 자가 스쳤다. "난 그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리고 ....." "그녀석에겐 아내가 있단 말이야" 린덴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내가 있다 --그 말은 아무것 도 듣지 못하게 된 귀에 여러 번 메아리쳤다. "그녀석은 어젯저녁의 일을 나한테 말해 두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 린의 목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기가 갔다는 것을 알고 네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더라. 하지 만 넌 사려 깊고 분별력이 있으니까 ....." 린덴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린덴! " 린도 당황하여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녀석은 별로 가치 있는 인간이 못 된다. 그를 믿었던 내가 나빴어...." 린덴은 집을 뛰쳐나와 숨을 헐떡이며 뛰기 시작했다. 이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수치심이 나 죄악감, 고통도 모두 사라졌다. 그녀는 무턱대고 냇물의 상류를 향해 계속달렸다. 양편은 벼랑 으로 바뀌고, 아래에는 얼음같은 차가운 물이 회색 바위 사이를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어려서부 터 결코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어 온 장소였다. 이곳에 뛰어들어 자살한 사람도 있었 다. 바위는 차가왔고, 얇은 셔츠와 머리이 비에 젖어 착 달라붙었다. 린덴은 린이 공포와 죄의식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뒤를 쫓아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진즈에 차가운 물이 스며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날씬한 몸으로 균형 을 잡으며 바위를 기어오르는 모습은 이런 때조차도 우아하게 보였다. 뽀족뽀족한 큰 바위들이 있는 데서 린은 린덴을 따라잡았다. "린덴, 부탁이다. 그러지 말아라! " 린덴은 자기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고 솟아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정신없이 버둥거리며, 자기를 붙잡으려고 하는 린을 떨쳐냈다. 그때 비쩍 마른 린의 몸이 균형 을 잃고 쓰러졌다. 린은 바위 사이에 축 늘어져 움직이지도 못했고, 얼굴에서 흐르는 피가 가는 줄기가 되어 물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린덴은 너무나 놀라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정신없이 뛰어가 맥을 짚어보았다. 상당히 약했다. 그대로 두면 몸이 식어 버릴 것이다. 린덴은 린의 옆구리에 손을 밀어넣어, 있는 힘을 다해 들어 올려 둔덕까지 끌고 가서 조용히 뉘었다. 그러고는 젖은 몸 그대로 전속력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 뛰어갔다. 마침 운좋게 도중에서 트랙터를 몰고 있는 제프를 만났다. 제프는 정신없는 린덴으로부 터 상황 설명을 대강 듣고, 그녀를 옆에 태우고 다시 트랙터를 달렸다. 몇 주 동안 린의 용태는 좋아지를 않았다. 가까스로 퇴원하여 차차 완전히 기운을 되찾자, 그는 린덴을 데리고 긴 유럽 여행을 떠났다. 스케치를 하고 관광지를 돌아보며, 미술관을 찾아가는 등 한가하고 즐거운 여행으로, 린덴은 처음으로 자기에게도 아버지가 있다는 기쁨을 맛보았다. 두 사람이 영국으로 돌아온 것은 한 여름이 되었을 때 였다. 오랜만에 고향의 풍경을 본 린덴 은 처음에는 지난날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나 옛 상처를 다시 긁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마음 아픈 일들을 생각하지 않고도 산책할 수 있게 되었다. 린은 다시 일을 시작 했다. 유럽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그린 림을 보았을 때 린덴은 냉수를 뒤집어 쓴 것처럼 몸을 떨 었다. 어두운 하늘과 골짜기의 물을 배경으로, 절망적인 표정으로 바위 위에 서 있는 날씬한 여 자...... "미안하다, 린덴. 하지만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있었지 뭐냐" 린덴은 눈물을 참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사건이 일어난 뒤로 두 사 람의 사이는 가까와졌다. 이것은 제임스의 덕분인지도 말른다. 제임스는 나에게 진짜 아버지를 돌 려준 것이다. 그때 린이 자신이 갇혀 있던 껍데기를 부수고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 왔던 것 은, 절망에 몰린 나에게서 아내를 잃은 자신의 슬픔 같은 것을 보았기 때문일까? "오랫동안 생각한 일인데요....." 린덴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역시 대학에 가고 싶어요" 린이 홱 돌아보았다. "정말이니? 그럴 필요가 있을까? 네가 가고 나면 난 쓸쓸해질 텐데......" "나도 아빠와 떨어지기는 싫어요. 하지만 자신의 삶을 찾아야 하지 않겠어요? " 시골에서 나 가 세상을 알 시기라고 하던 제임스의 말이 생각났다. 린은 한동안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다가 불분명한 목소로 말하기 시작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너희들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도 알았지 만, 그래도 그를 믿고 있었다. 내가 보는 눈에 자신이 있었던 거야. 하지만 설마 그가 결혼을 숨 기고 있으리라고는 ....." "그만 두세요! 이제 끝난 일이니 잊어버리세요" "제임스는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전해 달라고 내게 말했어. 그리고 ...." "듣고 싶지 않아요. 다시는 그 사람의 이름은 들먹이지 마세요" 또다시 만난다면 나이프로 가슴 을 찌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런 인간이었다. 그 때문에 인간에 대한 신뢰나, 사람을 보는 눈, 그리 고 모든게 다 일그러져 버렸다. 그를 만나기 전의 자기를 생각해 보고, 그 행복했던 지난날을 상기하고는 쓸쓸한 기분에 잠겨 버렸다. 제임스는 평화로운 생활을 마구 짓밟아 놓고 가버린 것이다. 보통 여자들은, 물 속에 들 어갈 때 발부터 조금씩 물을 묻혀 가는 것처럼 해서 어른이 되어 간다. 그런데, 난 자기의 욕구와 에고만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인정도 도덕성도 없는 남자에 의해서 겨우 며칠 사이에 소녀로 부터 어른으로 바뀌어져 버렸다. 그는 틀림없이 만족스런 휴가를 보낸 뒤에 런던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부인한테 ..... 하고 생각하니 린덴의 몸이 떨렸다. 남편의 배신을 까맣게 모를 부인이 불쌍하다 싶었다. 린덴은 핏기 없는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며 린을 보았다. "가을에 대학에 가고 싶어요. 입학할 수 있을까요? " 린은 빙그레 웃었다. "길이야 어떻게든 뚫을 수는 있겠지" "그야 그렇겠지요. 린 하워드의 딸의 입학을 거절할 대학이 어디있겠어요? " 한때는 그것이 어 색하게 느껴졌던 린덴이었지만, 이젠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린은 린이고, 나는 나다. 다른 사 람이 뭐라고 해도 마음을 쓸 필요는 없어. 린덴은 아버지의 아틀리에를 나와 브레이크의 시집을 들고 목장으로 갔다. [병든 장미]라는 제 목에서 페지를 넘기는 손이 멎었다. 오오, 장미여 너는 병들었으니 폭풍이 몰아치는 밤에 날아다니는 보이지 않는 벌레. 새빨간 기쁨의 너의 침상을 찾아냈으니 그 어둡고 숨겨진 사랑 너의 목숨을 갉아먹는다. 린덴은 책에 얼굴을 묻고 실컷 울었다. 그해 가을, 린덴은 런던의 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명성 덕분에 두말없이 입학은 허락되었으 나, 그녀가 아버지만큼의 재능을 갖고 있지 것을 알게 된 교수의 눈은 차가와졌다. <린 하워드의 딸>이라는 딱지만 붙지 않았다면, 장래성이 있는 상당히 우수한 학생이라는 인정을 받았겠지만, 주위의 기대는 너무나 큰 것이 었다. 클라스메이트들도 처음에는 그녀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 나, 이윽고 그것이 동정으로 바뀌더니, 마침내는 호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수녀원에 있을 때 와는 달리 많은 친구들이 생겼다. 적극적으로 교제를 하기도 했다. 또 남녀 공학이어서 남학생들이 매력적인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기 때문에 남자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었 다. 린덴은 반드시 여러 명이 아닌 경우에는 어디에도 놀러 가지 않았다. 더 이상 남자 문제로 마 음에 아픈 상처를 받기가 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일대일의 교제는 거절했다. 무척 차가운 아가씨라고 비난 받는 일도 있었다. "무엇을 그렇게 무서워해? 젊어서 한때인데 " 린덴은 코에 주름을 잡으며 그 청년의 말을 되받았다. "코린, 당신하고는 이제 만나지 않겠어요. 그리고 오늘은 바빠요" 눈 깜짝할 사이에 한 학기가 지나가고 여 방학이 되자, 린덴은 바로 린한테로 돌아왔다. 그녀 의 스케치북을 본 린은 얼굴을 찌푸리고 한숨을 쉬었다. "난, 전혀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 린덴은 가볍게 말했으나, 아버지의 실망한 얼굴보니 미안 하기도 했다. "미안해요, 아빠! " "너는 너야. 나한테 신경쓰지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려무나" 2학년이 된 어느 날, 린덴은 가까운 어느 일류 레스토랑 앞에서 다크 그린의 람베리를 보고 한 순간숨이 멎을 것 같아 그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혹시나 싶은 의혹이 머리를 스쳤으나,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주위를 둘러 았다. 제임스의 차일 리가 없어. 아무리 진기한 차라 해도 단 한 대밖에 없을 리가 없는걸. 스스로 그렇 게 타이르기는 했으나, 린덴은 공포로 가슴을 떨며 그자리를 빠른 걸음으로 떠났다. 그날부터 며칠 밤은 계속잠을 이루지 못했다. 제임스를 미워하는 마음이 이토록 강했는가, 하고 새삼 놀랐다. 증오심은 혈액 속으로 녹아들어 온몸을 뛰어다녔다. 눈에 띈 것이 제임스가 아니라 그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것이 었다는 것은 다행이면서도 유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일 그였다 면 그자리에서 죽여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하긴 그런 행동이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은 잘 알 고 있지만 ....... 다음주에 또 같은 장소에 예의차가 멈추어 있었다. 이번에는 옆에까지 다가가, 제임스의 차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려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넘버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시트는 그의 차와 같은 노 란 가죽이었다. 얼굴에서 피를 흘리며 핸들에 쓰러져 있던 제임스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생각 만 떠오른 것이 아니라 맥박까지도 빨라졌다. 린덴은 잘 생각해 보지도 않고 핸들에 손을 대어 보았다. "좋은 차지요? " 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린덴은 흠칫 놀라 핏기 가신 얼굴을 그쪽으로 돌렸다. 제임스는 아니었다. 린덴과 같은 연배의 청년이었다. 고급스러워보이는 얇은 색깔의 슈트를 착 용하고 있었다. 린덴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쓰러질 것 같아서 얼른 차를 붙잡았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리 가 쾅쾅 울렸다. "아니, 왜 그래요? " 남자는 차의 문을 열고 린덴을 태우고는 걱정스럽게 들여다보았다. "기운 을 내요. 지금 물을 가져올 테니까요 "라고 말하며 레스토랑으로 가더니, 잠시 후 글라스를 들고 뛰어나았다. 린덴은 그가 먹여 주는 물을 다소곳이 받아 마시고 머리를 일으켰다. 무거운 눈꺼풀을 열고 힘 없이 웃어보였다. "미안해요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아서 ....." 거짓말 이었다. 지난주 이차를 본 뒤로는 거의 아무것 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학생이군요? " 그는 진즈며 다갈색의 스웨터, 스니커, 그리고 그녀가 그러안고 있는 스케치북 을 보고 말했다. "식비를 아끼려고 그러는 겁니까? 안 돼요, 그러면 .... 배가 고프면 어떻게 공부 를 하겠어요? 자, 이리 와요, 내가 한턱 내겠소" 린덴은 볼을 붉히며 야무지게 거절했다. "아니, 괜찮아요. 필요없어요 " "그러면 못 써요" 그는 다정하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무엇을 못 써요? " "묘한 프라이드 말이오" 너무나 매력적인 미소였기 때문에 린덴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 다. "아니에요. 당신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인걸요" "걱정하지 말아요, 금방 알게 될테니까 " 그는 린덴의 손을 끌고 무리하게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저쪽에서 걸어오는 급사장에게 한 손으 로 손짓했다. 이 가게의 단골인 모양이었다. "필립, 이 아가씨한테 나를 소개해 줄 수 없겠소? " 급사장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아가씨, 이쪽은 다니엘 와이어트씨입니다. " "됐어요, 됐어. 그럼 자리로 안내해 줘" 급사장은 두 사람을 테이블로 안내하고, 갈색 가죽표지의 메뉴를 가지고 돌아왔다. "난 이제 더 이상 먹을 수 없어요 " 다니엘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이 아가씨가 먹는 것을 구경하겠소" 그러고는 린덴을 돌아보았다. "영양분이 많은 것을 먹어야지요. 나 같으면 .... 글쎄, 스테이크 같은 것이 어때요? "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난 채식주의자에요. 애보카도(열대 과실)를 먹겠어요. 그리고 샐러드하고 ....... " "확실히 실신할 만하군" 다니엘은 비난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늘 채식만 했는 데도 건강했어요 " "흠, 당신의 이름을 좀 가르쳐 줄 수 없어요? " "린덴 하워드에요. 이렇게 대접해 주시니 정말 고마와요. 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 " "선박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 "참 멋있군요" 20세가 넘을까 말까 한 청년인데, 고급 의상에 클래식카를 타고 다니면서 일류 레스토랑을 자유로이 드나들다니 린덴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따분하지요" 그는 어깨를 추슬러 보였다. "하지만 당신은 이런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실 수 있잖아요? " "이따금 오지요. 당신은 대학이 재미있어요? " 린덴이 대학생활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시작하자 그는 열심히 들었다. 커피가 나올 무렵에는 린덴은 다니엘이 예전부터 사귀어 온 친구 같은 느낌이 들어 스스로도 깜짝 놀라고 있었다. 런던 에 나와서 만난 사람중에 제일 멋있다 싶었다. "이제부터 어디로 갈 참이오, 대학입니까?? " 하고 그가 다정하게 물었다. "아파트로 돌아가겠어요. 여자 친구와 둘이서 세들어 살고 있어요. 오늘은 수업이 없어서 오전 내내 공원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었어요 " "집까지 바래다 주겠어요, 또 길가에서 정신이라도 잃으면 큰일이니까 " 린덴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가 마음에 들었고 함께 있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아파트 앞에서 차를 세우더니 좁고 높은 건물을 쳐다보았다. "당신의 방은 어디요? " "제일 위층이에요. 계단을 세 개 올라가서에요. 사치는 부릴 수 없지만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 고 자유롭게 지내고 있어요 " 그 말에 다니엘은 홱 돌아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린덴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래요? 안심이군요" 다니엘의 얼굴이 밝아졌다. "린덴, 당신은 몇 살이오? " "열 아홉이에요" "나는 스무 살이오. 보이프렌드는 있어요? " "없어요 " 입가에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갖고 싶지도 않은 걸요. " 다니엘은 웃었다. "그래요? 그럼 우리, 연애 감정을 뺀 친구가 되면 어때요? " 린덴도 즐거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오케이에요" "내일 저녁에 스케이트 타러 가지 않겠어요? " 린덴은 갈색 눈을 깜박거렸다. "스케이트는 타 본 일이 없어요. 구두도 없는걸요" "빌면 돼요. 즐겁단 말이오. 어디를 약간 긁힐지는 모르지만 ......." "알았어요. 그런 것쯤은 각오하겠어요 " "그럼, 저녁 여섯시 반에 마중오겠어요" 린덴은 진즈 위에 셔츠를 입고 여유 있는 흰 카디건을 걸치고 갔으나, 몸을 움직이니 더워서 카디건은 벗어 놓았다. 얼음 위에서 그럭저럭 균형을 잡을 수는 있게 되었으나 여러 차례 넘어졌 고, 그때마다 다니엘이 웃으면서 일으켜 주었다. 스케이트를 탄 뒤에 두 사람은 조그만 스낵 바에 들어가 햄버거와 커피를 주문했다. 린덴은 자 기 몫은 자기가 내겠다고 고집했다. "친구라면 각자 부담을 하는 거에요" "알았어요" 다니엘은 어깨를 추스르고, 코끝에 케첩을 묻히며 햄버거를 베어 먹은 린덴을 보고 웃었다. "당신은 채식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 "이것은 ..... 거의 빵인걸요 ......." 하고 변명하면서 린덴은 볼을 붉혔다. 던런으로 나온 뒤부터는 자주 햄버거를게 되었다. 값이 싸고 양이 알맞기 때문이이기도 했지만, 고기를 먹는데 대해서 도 거의 저항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먹지 않은 것은 그것이 습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 가 싶었다. "내일 영화 구경 안 가겠어요? " 다니엘이 말을 꺼내자 린덴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자꾸만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더 진전되기 전에 브레이크를 걸어야지 ....... 린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어디로 데리고 갈 차례에요. 영화라면 내일 대학에서도 상영되고 ...." 다니엘의 얼굴이 흐려졌다. "당신은 우먼 리브요? " "사람을 그렇게 단정하지 말아요. 우리는 친구잖아요? 자, 가겠어요 안가겠어요? " "가겠어요, 대학의영화는 별로 신통치 않겠지만 " 사실 지독한 것이 었다. 아마튜어 영화 기사가 자꾸만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 몇 명 안되는 관 객이 휘파람을 불고 발을 구르면서 야유를 하고 해서 도저히 조용히 감상을 할 기분이 나지 않았 다. 다니엘도 갑자기, 의젓한 신사로서의 매너를 내던지고 린덴 또래의 젊은이로 돌아가 떠들며 즐 겼다. 집까지 차로 바래다 준 그를 아파트로 안내했다. 다니엘은 낮고 좁은 아파트 안을 기웃리며 싸 구려 가구와 벽에 붙어있는 학생 운동의 포스터를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이게 누구의 취미요? " "페니에요" 린덴은 흠집투성이의 커피 테이블에 컵과 받침접시를 놓았다. "당신 물건은? " 주위에는 린덴의 소유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 침실에 놓아 두었어요" 린덴은 프라이버시를 간직하고 싶었다. "학생이 이런 아파트를 세낼 수 있을 줄은 몰랐소" 하고 다니엘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색이 바래고 썰렁하기는 했으나, 방이 세개나 되는 아파트는 런던에서도 상당한 세를 물어야 하 는 것이다. "아버지가 보내 주고 있어요 " 린은 그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딸에게도 프라이버시를 간직하는 생활을 시키고 싶어했다. 그리고, 페니의 아버지는 하리가(街) 의 의사인데, 철없이 날뛰는 말괄량 이 딸 때문에 골치를 앓다 못해, 그녀에게 차분한 생활만 할 수 있다면 힐튼 호텔에 방을 빌어 주는 것이라도 마다지 않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샌드위치와 커피를 들면서 책이며 영화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니엘이 험프리 보가드 와 도날드 더크의 흉내를 내서 린덴을 웃겼다. "당신의 도날드 더크는 헐프리 보가드 같군요, 아니면 그 반대인가 ......" 린덴은 힐끗 시계를 보 았다. "어마, 벌써 열 한 시 ..... 페니가 돌아올 거에요" "날 몰아낼 작정이오? " 린덴은 고개를 저었으나 그것은 긍정의 의미였다. 다니엘을 현관까지 바래다 주었을 때 페니가 뛰어들어오더니, 놀라움과 호기심이 깃들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 생김새나 스타일, 몸차림이 모두 페니가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다니엘도 그녀의 긴 머리카락과 검은 눈, 화인레드의 입술에 시선을 쏟으며 빙긋 웃어 보였다. 린덴은 페니가 남자들을 끌고 들어오는 바람에, 일주일에 몇 번씩 한밤중까지 곤욕을 치르곤 했 다. 그녀는 젊은 남자들을 자기 방으로 끌어 들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린덴 은 저래도 괜찮은 걸까 하고 걱정이 되었으나 간섭할 생각은 없었고, 다만 페니가 좋을 뿐이었다. 다니이 따나자 페니는 눈을 빛내며 놀렸다. "얌전한 줄 알았는데 이만저만이 아니군, 저러니 대학의 남학생들은 거들보지 않지. 그인 최고 야.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최고급품으로 감았어 ....... 그와 함께 잤니? " 린덴은 얼굴이 붉어졌고 이어서 파랗게 변했다. "원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하고 등을 홱 들리고 얼른 자기 방으로 향했다. "넌 버진이 아니지? " 페니의 웃음 소리를 뒤로 하고 문을 쾅 닫았다. 다음날 아침 식사 때 페니는 미안해 하며 린덴에게 사과했다. "어제는 미안했어. 조금 취했었어! " 그녀는 린덴의 우정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조용하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린덴은 협조 적이고 이상적인 룸메이트였다. 페니가 늘 어질러 놓는 것을 린덴은 불평 하나 없이 치우곤 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제 괜찮아" 린덴은 미소 지었다. 그러나 사실 어젯밤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오 늘 아침까지도 제임스의 이미지가 검은 비구름처럼 마음에 무겁게 얹혀 있었다. 그날 밤은 다니엘과 함께 오페라 <마적> 을 보러 갔다. 너무나 황홀해서, 극장을 나와 차에 오 를 무렵에는 두 사람 다 멍하니 취해 있었다. "이런 기분일 때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사람도 있을까? " "난 얼마든지 먹을 수 있겠어요" 린덴은 갑자기 공복을 느꼈다. "좋은 레스토랑이 있소" 하고 다니엘은 아늑한 그리이스 레스토랑으로 린덴을 안내했다. 치즈요 리며 샐러드를 먹고, 희미하게 수지 (樹脂) 냄새가 풍기는 레티나(와인)을 마셨다. "우린 정말우정을 잘 지켜가고 있군요" 돌아오는 길에 다니엘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린덴 은 볼이 상기되었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와인 탓일까. 대학 생활의 첫 일년은 조용하고 평범한 생활이었으나, 금년에는 이미 여러 가지 추억에 물들 어 있었다. 런던은 활기차고 늘 변화하는 거리이기 때문에, 다니엘과 몇 시간이고 함께 있어도 따 분한 줄을 몰랐다. 다니엘이 린덴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다는 것을, 페니나 다른 친구들은 도저히 믿어 주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공원에서 말을 타고, 풀에서 헤엄을 치고, 에니메이션 을 구경하고, 예술가의 강연을 들으러 가고, 극장이나 콘서트에도 갔다. 아파트에서 같이 부담없는 수다를 떨며 요리를 만들어서 식사하는 것도 즐거웠다. 참으로 행복 했지만, 언제나 린덴의 마음 어딘가에는 검은 구름이 걷히지 않고 있었다. 조금도 제임스와 닮지 않았는데도, 다니엘의 얼굴이 문득 제임스같이 보일 때가 있었고, 그럴 때에는 심장이 얼어는 것 같았다. 다니엘은 이따금 자기 아버지의 이야기를 했다. 업계의 거물로서 인정 사정 없는 절대군주적인 사장이며, 집에서도 권위를 세우려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의사를 거역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모두 그의 말을 따르고 있어 요 그러지 않았다간 큰 야단을 맞게 되니까 말이오" "전부터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신도 잘 몰랐어요. 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에 하고 있 을 뿐이지. 언제든지 그 모양이오, 우리 집은 " "어머니는요? " "별세하셨어요" "어마, 나와 같군요" 환경이 비슷하다는 점에서도 린덴은 더욱 그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다니 엘에게도 형제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에겐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에 대해서는 애정이 깊 은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할 때면 얼굴이 온화해지는 것이 었다. "가족에게 내 이야기를 했어요? " 다니엘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푸른 눈을 크게 뜨고 린덴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뭐라고 이야기 하면 좋을까요, 여자 친구가 하나 있다고 할까요? " 린덴은 스스로도 모르고 있던 본심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 것을 느끼고 그만 볼이 빨갛게 물 들었다. 다니엘은 그녀의 볼을 살며시 손으로 만지면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첫 키스로 어울리는 가벼운 것이었다. 그가 얼굴을 들고 미소지었을 때 린덴은 바르르 몸을 떨 었다. 그 뒤로 모든게 지금까지와는 달라졌고, 린덴도 두 사람의 관계가 차차 깊어져 가는 걸 느꼈다. 린한테 돌아가야 할 겨울방학이 왔다. 다니엘과 헤어지는 것이 너무나 아쉬워 참을 수 있을지 자 신이 없었다. "린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 린덴은 불안한 느낌으로 물었다. "꼭 만나고 싶군" 다니엘은 열의가 담긴 눈으로 말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전에는 무리요, 일 이 바빠지고 있으니까. 우리 보스는 너그럽게 봐주는 법이 없어요. 자기가 좀휴가를 내지 않으니 까, 다른 사람도 휴가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럼 크리스마스 휴가 때는요? " 다니엘과 함께 휴가를 지낸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다니엘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신음 소리를 냈다. "크리스마스는 와일드미어에서 보내야 해요" 그는 에섹스에 있는 시골 저택의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의 분부로 런던을 떠날 때도 거기에 가서 가족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요? 그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방학이 끝난 다음이겠군요" 다니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봐요, 당신이 와일드미어에 와 줄 순 없겠소? 우리 가족을 만나 주었으면 싶어요 ..... 무서운 아버지하고도 얼굴을 대해야 하겠지만, 포리는 꼭 마음에 들거요. 당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 기를 했더니, 포리도 당신을 무척 만나고 싶어하고 있어요 " 포리는 다니엘의 할머니였다. 속편하게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린덴은 린이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 대답을 망설였다. "아버지한테 물어 보고 나서 정하겠어요 " 그러나 집에 돌아와 보니, 린은 최근에 가졌던 개인전 기간에 일어난 뜻밖의 사건으로 머리가 꽉 차 있어서 그런 애기를 꺼낼 수가 있었다. 골짜기의 시냇가에서 린덴을 모델로 그린 그 그림 이 잘못되어 팔려 버린 것이 었다. 물론 린은 팔 생각이 없었으므로, 화랑 주인한테 그 뜻을 전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가게를 비운 어느날 저녁 술취한 점원이, 엄청난 가격을 매기는 어 떤 사람의 신청을 받아들여 그자리에서 수표를 받아 버렸다는 것이다. 그뒤의 일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하여튼 그림은 그날 밤 안으로 실려 나가 버린 것이었다. 사이 에 끼인 중매인은 사 간 사람의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았고, 그림을 돌려줄 생각도 없단다고 전 해 왔다. 린은 불같이 화가 나서, 린덴이 아무리 위로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으며, 아틀리에에 틀어박혀 무언가에 들씌운 것처럼 그림만 계속 그려댔다. 린덴이 크리스마스를 다니엘의 집에서 보내도 좋으냐고 물어도, "상관없어 " 라고만 하고는 더 이상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역까지 마중 나온 다니엘은 기차에서 내린 린덴을 정신없이 끌어안았다.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무척 애를 태웠소. 아버지가 뭐라고 걱정하지 않았어요? "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 것 같았어요. " "그것 참 다행이군. 하긴 그것이 당연한지도 모르지. 우리 아버지도 그래요 " 린덴은 그의 아버지를 만날 일이 무척 걱정스러웠다. 다니엘이 그렇게도 두려워하고 싫어하기 까지 하는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나에 대해 아버지께 말했어요? " 차는 안개가 깊은 에섹스의 시골길을 달렸다. 길가에는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이 무거운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아니오 .... " 다니엘은 빙긋 웃으며 린덴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이야기 하지 않았어요. 그저 걸프렌드가 묵으러 온다고 했을 뿐이오. 크리스마스에는 늘 손님이 오는데, 올해도 아버지의 친구 가 와요. 그러니 한명쯤 더 온들 아무상관이 없지요 " 린덴은 그것이 좋은 일인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다니엘은 내가 자기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싶어 걱정하는 것일까? "당신의 아버지는 화가나 화가의 딸은 좋아하지 않으세요? " 다니엘은 어깨를 추슬렀다. "린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어요. 당신을 특별한 눈으로 보는 건 싫어요. 아버지는 그림을 무척 좋아하니까요 " 차가 사도로 들어서자, 린덴은 앞쪽에 모습을 드러낸 커다란 흰 저를 보고 눈이 크게 떠지며 몸이 굳어졌다. 다니엘은 왜 아버지에게, 나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을까? 역시 나는 다니엘의 아버지 설 제이슨이 바라는 며느리감이 못 되는 것일까? 다니엘처럼 문벌 좋은 집안 아가씨가 아 니면 안되는 것일까? 현관 앞에 차를 댔을 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먼저 들어가요, 나는 차를 차고에 넣고 들어갈 테니까. 여기에 두면 아버지가 잔소리를 해요. 이 차를 무척 싫어해서 볼 때마다 얼굴색이 달라졌요" 린덴이 약간 몸을 떨며 계단을 올라가자 현관문이 열렸다. 검은 드레스에 흰 에이프런을 두른 아가씨가 방긋 웃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린덴도 미소지었다. "추우시지요, 이런 날씨에 오픈카로 오셨으니까요? 자, 어서 들어오셔서 불을 쬐세요" 린덴의 수에드 코트를 벗겨 빗방울을 떨어내고 열려 있는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어서 들어가세요, 방안 은 따뜻하니까요. 바로 차를 가져하겠어요 " 린덴은 번쩍번쩍 잘 닦여 있는 복도를 걸으면서, 꽃병의 꽃이며 오래 된 아름다운 시계를 보았 다. 아까 메이드가 가리킨 방으로 들어가자, 남자 한 사람이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디캔터(식탁용 유리병)에서 위스키를 따르고 있었다. 남자는 독특하게 디자인한 까만 포멀 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검은 머리가 깃에 닿아 있었다. 갑 자기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방안이 어두워졌다. 린덴은 자신의 눈이 어떻게 된 게 아닌가 하고 의 아스럽게 생각하면서 남자의 뒷모습을 자세히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이쪽으로 돌아서서 글라스를 입으로 가져갔을 때 그의 눈에 린덴의 모습이 비친 모양이 었다. 그의 손에서 글라스가 미끄러져 떨어져 벽난로의 대리석에 부딪쳐 박살이 나고, 호박색의 액체가 털이 긴 융단 위로 뿌려졌다. "린덴! " 그는 입술을 떨며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5 이런 사태는 예상도 못한 일이었다. 린덴은 창백한 얼굴을 그에게 향한 채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설 제이슨 .....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눈치를 못 챘을까 ..... 와이어트라는 것도 화이 트와 비슷한 이름인데 ..... 그는 결혼을 숨기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름까지도 속이고 있어던 것이 다. 거짓말장이에 사기꾼 같으니라구. 어느 쪽도 말 한 마디 못하고 서로 쳐다만보고 있는데, 다니엘이 빗물에 젖은 검은 머리를 번 들거리며 상기된 얼굴로 들어왔다.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냉정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아버지, 린덴을 만나 주셨으면 합니다. " 불안한 눈길로 덧붙여 말했다. "내 걸프렌드입니다. " 아버지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쳐다보고만 있는 것은,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 줄 알았는 지, 다니엘의 얼굴은 더욱붉어지고 목소리도 거칠어. 그는 린덴의 어깨에 팔을 들려서 끌어당겼 다. "린덴은 나의 소중한 친구입니다. " 하고 아버지에게 도전하듯이 턱을 내밀었다. 제임스는 초록빛 눈을 천천히 린덴의 얼굴로 향했다. 옛날에 비해서 얼굴색이 그리 좋지 않았 고, 수척한 느낌이었다. 움직일 수도, 그렇다고 입을 열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린덴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떨리는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악수를 청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설 제이슨" 그는 손도 내밀지 않고 멍하니 린덴의 손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가 린덴을 업신여기는 줄 안 다니엘이 짜증난 듯이 숨을 깊이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제임스 는 겨우 자기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손가락 끝에 강렬한 아픔이 전해 왔다. 린 덴은 다니엘에게 의심을 사지 않도록 얼른 손을 뗐다. "글라스가 미끄러진 것 같군요. "라고 다니엘에게 밝은 목소리로 말하고, 깨진 글라스와 융단의 얼룩을 가리켰다. 융단과 아버지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다니엘의 눈에는 노여움과 혐오감이 스치고 있었다. "실례하겠소" 제임스는 얼굴을 돌리고, 지치고 무거운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다니엘이 혀를 찼다. "또 마셔댔군. 완전히 곤드레가 되었어 ...... " 그리고 린덴을 보고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미리 린덴에 대해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불쑥 만나게 한 나도 잘못 이었어요. 아버지는 늘 저렇게 술 을 퍼마셔요. 취하면 대단하지요 " 그분은 언제든지 대단해요! 하고 린덴은 속으로 생각 했으나, "불이 따뜻해서 아주 좋군요"라고 말하고 몸을 떨면서 벽난로에 손을 내밀었다. 몸이 떨리는 것은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래 도 몸이 따뜻해지니 기분도 한층 누그러졌다. 메이드가 들어와 바닥에 흩어진 유리조각과 위스키의 얼룩을 보더니 다니엘의 얼굴을 마주 보 았다. 린덴은 소파에 걸터앉아, 메이드가 날라온 홍차와 과자를 들면서, 그 동안 다니엘이 아버지에 대해서 한 말들을 모조리 생각해 내려고 했다. 유심히 듣지 않았던 탓인지 머리가 벗겨진 고집 센 50대 남자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할머니와도 만나게 해 주겠지요? "하고 린덴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포리는 저녁때까지는 일어나지 않아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요 " "그래요? 아버지의 어머니지요? "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외할머니요. 어머니가 입원한 뒤로 이 집안의 모든 일을 꾸려 주고 있어요 " 갑자기 슬픈 듯이 얼굴이 흐려졌다.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 겠군. 어머니는 ...... 10년 전에 교통사 고를 당해 식물 인간이 되어 버렸었어요. 그 뒤로는 사뭇 병원 생활의 계속이었지요. 아무도 어떻 게 할 수가 없었어요 " 린덴은 큰 쇼크를 받았으나, 가까스로 참고 귀를 기울였다. "어떤 분이었어요? " "별로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다운 분은 아니었어요. 적어도 그래요. 내가 기숙 학교에서 이리로 돌아왔을 때도 어머니는 런던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 식당에 초상화가 있지요. 참 아름다운 여인이었어요" 린덴은 따뜻한 눈길을 그에게 보냈다. "당신은 가정을 모르고 자랐군요" 처음부터 그에게 마음이 끌린 것도 그 때문이 이었을까? 린 덴도 경제적인 고생은 몰랐지만 외토리의 쓸쓸한 소녀 시절을 보냈다. "그 몫은 포리가 메꾸어 주었어요. 린덴, 당신도 아마 포리를 좋아하게 될 거에요. 나이는 80이 지만 재미있는 분이니까" "80세! " 그렇게 나이가 많은 줄은 몰랐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었다. "만나 보면 나이를 믿을 수가 없을 거요, 지금도 장미빛 같은 피부를 하고 있으니까요. 10대에 는 합창단에도 끼였대요. 당시의 추억담을 꺼내기를 무척 좋아하고, 지금도 같이 있으면 아주 즐 거워요" "어머니가 세상을 뜨신것은 언제였죠? " 린덴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래도 듣지 않고 는 못 배길 것 같았다. "야릇한 일이지요" 다니엘은 한숨 섞인 대답을 했다. "상당히 오래 살았어요, 아무 의미도 없이. 그러다가, 작년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무렵, 병이 좀 나아져서 크리스마스에는 간호원도 함께 라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애기까지 나왔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감기가 폐렴이 되어 어처구니 없 이 죽어 보렸어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포리도 그녀의 죽음을 볼 수 없었고, 그래 서 한동안 더욱 슬픔에 젖어 있었어요 " 린덴은 자기의 손에 눈길을 떨구었다. 그때부터 제임스는 술에 빠지게 되었군. 그만큼 깊이 부 인을 사랑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린덴은 제임스가 얄미웠다. 그가 괴로와하는 것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를 생각하면 동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 당신을 방으로 안내해 주겠소" 다니엘은 핏기잃은 얼굴로 우울하게 앉아있는 린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지쳐 있는 것 같군요, 린덴. 와 줘서 고마와요, 정말 고마와요" 다니엘은 그녀의 슈트케이스를 이층의 호화로운 방으로 가져다 놓고는 빙긋 웃었다. "난 아래층에서 당구나 하고 있겠어요. 린덴은 여기서 좀 쉬는 것이 낫겠지만, 당구를 할 마음 이 생기면 이따가 내려와요 " "당구는 별로 못 하지만, 그럼 이따가 봐요" 다니엘이 나가고 나자 린덴은 방안을 서성거렸다.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힘없이 침대 위에 앉았다. 제임스와의 과거를 아무에게도 눈치채이지 않고 크리스마스 휴가를 같은 지붕 아래서 무사히 지내자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런 상황이면 5분도 견디어낼 수가 없 겠는데 ...... 노크 소리가 나자, 린덴은 굳어 있던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들어오세요" 다니엘인 줄 알았는데 들어온 사람은 제임스였다. "나가세요? " 린덴은 일어서서 온몸을 떨면서 소리쳤다. 제임스는 그 소리를 무시하고 등뒤로 방문을 닫고 험한 눈초리로 린덴을 노려보았다. "여기서 다니엘과 무엇을 할 작정이지? " "다니엘한테 물어봐요. 나가 줘요!" 입술이 떨려서 더 이상은 말할 수가 없었다. 나이프를 들고 있다면 그의 가슴에 콱 꽂고 싶었다. "당신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 " "듣기 싫어요" 등을 홱 돌렸다.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 내게 가까이 오지 마세요. 그렇지 않았 다간 목숨을 보장할 수 없어요 " "결혼은 했지만 하지 않은 것과 같았어. 난 포리나 다니엘에게 더 이상의 괴로움을 주고 싶지 않았던 거야 ...... 그래서 이혼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이제 당신을 만났으니 ......" "왜 거기에 나를 끌어들이는 거에요! " 린덴은 주먹을 틀어쥐고 노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 이야기는 집어치워요! " "당신에 대한 사랑에 빠져 버린 거야" 그의 눈길은 우아한 구두를 신고 있는 린덴의 발에 쏠리 고 있었다. "아아, 속이 뒤집힐 것 같아요! " 린덴은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방구석에 있는 세면대로 걸어 갔다. 정말 가슴이 느글느글했다. 등뒤에서 제임스가 걱정스럽게 들여다보는 것을 안 린덴은 땀이 밴 창백한 얼굴을 들었다. "나가 줘요! " 갈색의 눈망울은 얼음 같은 차가운 빛을 뿜고 있었다. "이야기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 "린덴,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소? " 제임스의 볼에 손바닥이 날아갔다. 상당히 센 손길이었기 때문에, 그의 볼에 하얀 손자국이 나 더니 이윽고 붉게 변했다. "어서 나가요! " 린덴은 악문 이빨 사이로 낮게, 그렇지만 강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생각해 봐. 상황이 달랐다면 그때 결혼했을 거야. 내가 그것을 바랐던 것은 당신도 알고 있지? 당신이 미칠 것처럼 좋았던 거야. 하지만 차마 가족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어. 그래서 그날 밤 나 왔던 거야. " 린덴이 아랫입술을 꼭 깨물자, 어디가 터졌는지 찝찔한 피가 스며나왔다. "난 그때처럼 바보 같은 계집아이가 아니에요. 당신은 거짓말장이에 사기꾼이에요 ..... 처음부터 휴가를 즐기자는 속셈이었어요. 난 좋은 노래개가 된 거에요" 제임스는 눈을 감았다. "린덴, 난 ......"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아요, 난 다니엘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 린덴은 그의 얼굴이 노여움으로 벌겋게 물들고, 초록빛 눈에 고통이 떠오르는 것을 냉랭하게 쳐다보았다. "3개월 전부터 우린 깊은 사이가 되었어요." 거짓말 이었다. 하지만 앙갚음을 해서 나쁠게 뭐 야! 린덴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으로 제임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어깨를 떨구고 천천히 등을 돌리더니 방에서 나갔다.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제임스가 괴 로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속이 시원했다. 자기가 않은 덫에 자기가 걸린 거야, 이제 죽이려고 하지 않아도 그는 자멸해 갈 거야. 그렇고 말고. 술과 죄책감으로 ....... 린덴은 손발의 떨림이 멈추지를 않아 침대 위에 누웠다. 침착해야지 ..... 오랫동안 벼르며 꿈까 지 꾸던 보복을 할 기회가 온 것이 아닌가. 자업 자득이야. 자신의 한때의 심심풀이로 몇 사람이 상처를 입은 줄 알기나 할까? 에고이스트! 나와 같은 괴로움을 좀 맛봐야 해. 저렇게 말은 하지만, 부인이 죽은 뒤에도 나한테 한번도 찾아오지도 않지는가. 비참한 마음과 싸우고 있는 나 같은 것은 깨끗이 잊어버린 거야! 하지만 그의 표정이 생각나자 그렇지 않는다 것을 알았다 --. 아니야. 나를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잊으려고 했던거야. 자기가 한 일을 너무 나 부끄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오지 못했던 거야. 비록 내가 맞아들인다 해도 린이 용서하지 것이 고 ..... 제임스는 차마 우리 부녀의 얼굴을 대할 용기가 없었던 거야 린덴은 샤워를 한 후 금빛 벨벳 드레스로 갈아입고, 아이새도우를 칠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금으로 된 목걸이를 걸었다. 린이 아테네에서 사다 준 것이었다. 머리를 브러싱하다가 린덴은 깜짝 놀라 손을 멈추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까부터 제임스 에게만 신경이 쓰이고 다니엘은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 참으로 한심하다는 듯이 거울 속 의 자기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만일 제임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다니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 었을 텐데 ....... 만났을 때부터 호감이 갔고, 함께 있으면 즐겁고, 서로 상대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제임스는 그의 아버지다. 그는 두 번씩이나 나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려 하고 있다. 린덴은 조용히 방을 나와 오락실로 내려갔다. 다니엘은 마르고 긴 몸을 당구대에 구부리고 가 만히 겨냥을 하고 있었다. 린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놀란 듯에 고개를 들고 꿇어지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멋있어, 린덴! 이렇게 눈부신 린덴을 보는 것은 처음이야. 어쩌면 이렇게 매력적이지! " "다니엘이나만 쳐다보는 동안, 난 서투른 솜씨로 다니엘을 이기겠어요" 린덴은 침착하고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니엘에게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가면을 쓰고 몸을 사렸다. 두 사람이 한 시간 가량 당구를 즐겼을 때 다니엘이 시계를 보았다. "슬슬 그만둘 때가 된 것 같군. 유감스러워 ..... 하룻밤 내내 당신을 독차지하고 싶은데 " 그는 큐를 치우고 린덴의 팔을 잡았다. 그녀가 몸이 굳어지는 것을 알고 얼굴을 들었다. "왜 그러지? 아, 부끄러워하고 있군. 단둘이라고 해서 쑥스러울 것은 없어 " 아니, 단둘이 아녜요. 두 사람에게는 언제나 제임스의 검은 그림자가 따라다니고 있다는 것을 다니엘에게 털어놓을 수 는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다니엘은 자기 아버지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제임스를 죽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거실로 들어가니 에임스와 그의 장모가 글라스를 손에 들고 앉아 있었다. 다니엘은 린덴의 몸을 끌어당기며, 까만 실크드레스를 입은 노부인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포리, 린덴이에요" 린덴은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정말 80세로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주름살은 있었지만 피부는 부드러웠고,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푸른 눈이었다. "다니엘의 편지에는 당신에 대한 애기뿐이었지 뭐에요. 하지만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군요.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군요 ...... 제임스, 린덴에게도 뭐 마실 것을 만들어 드려요 " 아무말도 오가지 않은 채 바로 글라스가 건네졌다. "당신의 아버짐의 이야기를 들려줘요, 물론 책에서는 읽었지만. 훌륭한 분이에요" 린덴은 린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무난한 화제였다. "다니엘도 우리 아버지를 만나 주었으면 싶어요 " 하고 덧붙이며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꼭 만나고 싶어요. 엄격한 눈으로 바라보실 텐데, 유명한 화가의 사위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 제임스가 또 위스키를 따랐는지 유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포리는 눈썹을 찌푸리고 걱정스 러운 듯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 식사를 할까, 제이슨? " 푸른 눈이 말없는 가운데 따뜻하게 나무라고 있는 것 같았다. 제임스는 단숨에 글라스를 비웠다. "네" 하지만 그의 눈은 그대로 디캔터에 쏠린 채였다. 린덴은 그가 음식보다 위스키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알았다. 린덴의 시선을 느끼고 제임스도 얼굴을 들었으나, 그녀는 그대로 포리에게로 눈길 을 돌리고 대학생활이며 페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참 재미있게 생활하고 있어요. 밤에 그녀가 보이프렌드를 데려오면 나는 자리를 비켜 주느라 외출해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어요 ......." 농담이라는 뜻으로 포리에게 눈짓을 했으나 다니엘은 눈썹을 찌푸리고 린덴의 허리에 팔을 돌렸다. "믿지 말아요, 포리. 린덴은 그저 웃기느라고 그러니까요. 그녀의 보이프렌드는 나뿐이에요! " 린덴은 줄곧 제임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즐거운 얼굴을 하며 다니엘에게 기대고 있는 것 도 그 때문이었다. 일부러 제임스를 쳐다보지 않아도, 그의 마음의 움직임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환했다. "식사나 하자" 제임스는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포리도 다니엘의 부축을 받으며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일어섰다. 식당에는 호화로운 상들리에가 다마스크 식물의 테이블클로드에 휘황찬란한 빛을 던지고 있었 다. 린덴의 눈은 벽에 걸린 초상화에 끌렸다. 아름다운 여자 ...... 다니엘이 말한 대로였다. 눈은 푸르고 살결은 윤기가 돌아, 포리의 젊었을 때의 얼굴도 이랬을 것이라 싶었다. 하지만 눈망울에 생기가 없었다. 포리 같은 활기도 다니엘 같은 지성도 느낄 수 없었다. 화가의 솜씨가 서툴렀기 때문인지 모르나,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식사하는 동안 포리는 즐거운 기분으로 계속 이야기를 했다. 다니엘은 아버지의 포도주 잔의 수가 거듭 될수록 말수가 적어지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커피 한 잔 더 들겠어요? " 린덴이 다니엘에게 웃어 보였다. "부탁해요" 하고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이마에 드리워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코 끝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손을 놓아! " 제임스의 노한 목소리에 머리 위의 샹들리에가 흔들렸다. 야릇한 침묵이 흐르고, 다니엘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제임스를 노려 보았다. 이윽고 제임스는 어색하게 일어서더니 뚜벅뚜벅 식당을 나갔다. "정말 오늘 저녁은 어떻게 된 거야! "이를 악물고 다니엘이 내뱉듯이 말했다. "참 걱정이구나" 포리도 슬픈 듯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지독한 일은 처음이야 " "내 탓이에요" 린덴은 두 사람이 부정 할 것은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다니엘이 얼른 말했다. "왜 린덴 탓이야. 아버지는 요 일년 동안 사뭇 저 모양이었어요. 일을 제대로 해나가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야. 일이 아니면 술이 그의 생활의 전부야 " 30분쯤 지나 포리는 린덴의 볼에 키스하고 식당에서 나갔다. "늙은이가 되어 먼저 실례해야 겠어요.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아끼고 싶으니까요 " "오래 살아주세요. 난 할머니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좋은 할머니가 있는 다니엘이 부러워요" 포리의 눈이 빛났다. "반가운 말을 해주는군, 린덴. 내가 린덴의 할머니가 되는 날이 어서 왔으면 싶어요 " 다니엘은 기쁜 듯이 린덴을 보았으나 그녀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졌다. "아직 일러요. 이제 겨우 열 아홉 살밖에 안되었고, 졸업할 때 까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아버 지에게 약속했는걸요 ....." 포리는 웃었다. "아버지! 그 귀여운 손가락으로 꼬집어 드리면 어떻게 되겠지요 " "천만의 말씀이에요! 단단한 차돌에 손가락을 대는거나 같은걸요" 포리가 나가고 나자 두 사람은 거실의 소파에 앉아 레코드를 들었다. 다니엘은 손가락 끝으로 린덴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녀의 옆얼굴을 만족스러운 듯 보고 있었다. "다니엘, 나도 좀 피곤해요" 조금 뒤 린덴이 중얼거렸다. "침실로 가도 좋지요? " "물론이고 말고 " 두 사람은 달콤한 키스를 주고 받았다. 그 입술의 따사로운 감촉에 린덴은 소 리 내어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좋은 사람일까. 우리는 이상적인 애인이 될 수가 있었는데 ...... 린덴은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여기를 떠날 때까지 연극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니엘과 포리를 속이기 위해서는 가면을 쓰고 있어야지 ...... 옷을 벗고 목욕 타월로 몸을 감싸고 몇 개의 방문 저쪽에 있는 욕실로 갔다. 10분 뒤 따끈한 물에 목욕을 마치고 복도에 나오자, 제임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린덴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 도 낮은 소리로 중얼중얼하면서 방금 나오려던 방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그 앞을 지나치다가 얼핏 그의 방을 들여다 본 린덴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쇼크를 받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 버렸다. 시선이 방문의 맞은편 벽에 걸린 거울에 못박혔다. 딘렌은 앞뒤를 돌볼 겨를도 없이 험악한 얼굴로 침실로 뛰어들어, 노여움에 불타는 눈으로 침대 위에 걸려 있는 그림을 노려보았 다. 제임스는 얼른 문을 닫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악마! 짐승! " 린덴은 번들거리는 눈을 향해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어쩌면 이런 일을 할 수 가 있지요! 침대 위에 걸어 않고 있다니 ......." 제임스는 표정이 흐려지며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붙잡았다. "쉿, 누가 들으면 어떡 해! " "아이구, 당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그런 생각뿐이에요! 완전히 흥분해 버린 린덴은 누가 듣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소문이 무서워요? 이 거짓말장이! " 제임스는 린덴의 입을 손으로 막고, 버둥거리는 그녀를 커다란 침대로 안고 가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구, 린덴" 그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들여다 보았다. "난 무슨 말을 들어도 상관없어. 다만 당신을 걱정하고 있는 거야.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 린덴은 입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귀가 꽝꽝 울리고 눈앞이 캄캄해지며 방전 체가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지? " 어디 먼데서 제임스의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린덴, 린덴 ......" 그 는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다른 손을 입에 떼어 조심조심 볼을 만졌다. 압박감이 사라지자 린덴은 무거운 눈을 떴다. "어쩌면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어요? " 하고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 제임스는 괴로운 듯이 린의 그림을 쳐다보았다. 바라볼 때 마다 요크의 어두운 하늘과 절망에 짓이겨진 소녀의 모습이 마음을 짓눌러 오곤 했다. "이 밑에서 잘도 잠을 잤군요. 밤마다 이걸 바라보며 잠을 자다니, 도대체 어떤 신경을 가진 거 에요? " "잔게 아니야. 술을 마시고 있었던 거야 " "기분좋게 바라보면서요? " 노여움이 다시 머리를 들자 빈정거리는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 다. "다른 여자에 대한 기념품은 어떤 것을 남겨 놓았지요? 꼭 보여 주었으면 좋겠어요 " 제임스는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사랑하고 있어 " "알고 있어요 " 린덴은 조금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그의 모습을 본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그때 그가 사랑에 빠진게 틀림 없다고 느낀 것이다. 그 의 사랑이란 자기 위주이고,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욕망이야.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사랑이 아 니야! "린덴 ........" 뜨거운 얼굴이 다가와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그러나 린덴은 아무리 달콤한 키스에 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차가운 입술을 꼭 다물고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싫어요, 경멸하고 있어요. 설령 당신이 죽어 간다해도 여유 있게 구경하고 있겠어요" 제임스는 전신이 굳어진 채, 그녀가 하는 잔인한 말을 말없이 조용히 듣고 없었다. "그 일이 있는 뒤 자살하려고 했어요. 폭포에 몸을 던질 작정이었어요. 하지만 내가 아니라 날 말리던 린이 치명상을 입는 바람에 ......." 린덴은 그림을 쳐다보았다. "당신 때문에 내가 어떤 보 통을 받았는지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린은 저 그림을 그린 거에요. 그런데 침대 위에 걸어놓 고 있다니 ......" "밤마다 나는 꿈속에서 괴로와하고 있었어. 그래서 이 그림을 사 온 거야. 자신을 벌주기 위해 서 " 린덴이 그의 팔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자 제임스는 다시 세게 끌어안았다. "나와 결혼해 줘, 린덴. 어떤 보상이라도 하겠어.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겠어? 더 이상은 고통 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 "다니엘은 어떡하고요? " 린덴에게 아픈 데를 찔린 제임스는 눈을 번들거리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당신은 내 아들과 결혼할 수 없어" "내가 당신의 노리개감으로는 오우케이지만, 아들의 결혼 상대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에요? " 제임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린덴을 노려보았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 "만일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내가 다니엘과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거예요"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 제임스는 악문 잇새로 괴로운 듯이 소리를 밀어냈다. "당신을 빼앗길 바에야 차라리 그녀석과 부자 관계를 끊겠어" 린덴은 경멸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기의 아들과 그래요?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에요? 뜻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니 에요? " 그 말에 제임스는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부인이 돌아가신 뒤에 왜 날 찾아오지 않았지요? " "가고 싶었어. 밤마다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어.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 당신이 얼마나 나를 미워하며 원망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니, 차마 얼굴을 대할 용기가 나지 않더군" "거짓말장이! 겁장이! " "순진한 당신에게 상처를 준 벌로 이 손이라도 잘라 내라면 그렇게 하겠어.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어" "그렇다면, 당신을 만나기 전의 나로 되돌려 줘요" 린덴은 그를 빤히 쳐다보고 분명하게 말했다. 제임스는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틀어쥔 주먹으로 침대를 내리쳤다. "당신에 대한 보상은 그 길밖엔 없어. 당신과 결혼할 수 밖에 없어 " 린덴은 괴로운 듯이 일그러진 제임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이 세상에 남겨진 유일한 남자라 해도 거절 하겠어요 " "다니엘하곤 결혼 못해, 이유는 알고 있겠지? " "다니엘은 날 사랑하고 있어요 " "나와 당신과의 과거를 알고 나서도 의사가 바뀌지 않을 만큼 강한 애정이야?" 린덴은 입술이 와들와들 떨렸다. "그만둬요 ......다니엘에게 털어놓게 되면 우린 결혼할 수 없어요 아버지가 범한 여자하고 어떻 게 ......." 린덴이 쏘아붙인 말에 제임스는 기가 꺾였다. "그만둬, 그런 말투는 ...... 몰래 결혼해 봤자 곧 들통이 나고 말걸. 그러면 그 결혼은 끝장이야. 다니엘은 속은 걸 알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 린덴은 가슴을 펴고 얼굴을 들었다. "나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이제 다니엘과 결혼할 마음은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제임스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나와 결혼해 준다면 무슨 조건이라도 받아들이겠어. 조건을 말해 보라구, 무엇이든지 들어줄 테니까 " "지금은 중세가 아니에요" 린덴은 차갑게 뿌리졌다. "당신의 양심의 가책을 위해서 결혼하다니, 농담하지 말아요. 진실을 고백해도 나를 비난하지 않고 이해해 줄 관대한 사람이 나타날 때 까지 기다리겠어요" 제임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린덴을 쳐다보았다. "린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 줘. 지금 같으면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린덴은 뜨거운 눈길로 쳐다보면서 소리내어 웃었다. "사랑하고 있어요 " 핏기를 잃은 하얀 입술이 움직였다. "그래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하지 만 절대로 결혼은 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지옥 같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 싶어요. 당신 은 그토록 당신을 사랑한 여자보다 자기의 욕망을 앞세웠으니까요. 그때 당신을 뒤쫓아가서 단숨 에 죽여 버릴 걸 그랬어요 " 제임스는 아무말도 없었다. 린덴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서서 방문을 향해 걸었다. 그러고 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제임스와 벽에 걸린 그림에 다시 한번 빈정거리는 시선을 던졌다. "멋있는 꿈이나 꾸세요" 하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왔다. 6장 방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을 때 다니엘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는 자기의 눈을 믿을 수가 없 다는 표정으로 꼼짝도 하지 않고 린덴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긴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단지 목욕 타월 한 장만 두른 린덴의 몸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시간에 제임스의 방에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변명하면 좋을까, 하고 린덴은 몸을 떨며 필 사적으로 생각했다. 다니엘은 다시 시선을 그녀의 얼굴로 옮겼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어떻게 ....... " 입을 다물고 다가서더니, 제임스의 방문을 열고 린덴을 다시 안으로 밀어넣었다. 린덴은 완전히 머릿속이 혼란해져 그가 하는 대로 밀리기만 했 다. 침대에 앉아 있던 제임스는 아들의 모습을 보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니엘은 아버지의 얼굴 을 노려보며 두 손을 꼭 틀어쥐었다. "그녀가 여기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 린덴도 불길한 눈으로 제임스를 쳐다보았다. "넘겨짚지 말아. 그런 일이 아니야 ......... " 말을 끊고 린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린덴, 다니엘한테 말해요,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 "이야기? " 다니엘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런 시간에 저런 모습으로? " 제임스는 턱을 끌어당기고 입을 꼭 다물었다. "자기의 애인을 믿지 못하나? "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요! " 다니엘은 흥분으로 해서 몸을 떨었다. "여자를 유혹하려는 것을 여러번 봤으니까요. 오늘 저녁처럼 취하지 않을 때도요" "지금은 취하지 않았어. 맑은 정신이야 " "다니엘, 정말 아버지와 이야기 하고 있었어" 겨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침착을 되찾자 린덴이 나서며 말했다. "아버지는 우리의 결혼에 반대라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어요" "린덴, 이런 곳에 오면 안 돼" 다니엘의 노여움이 조금 누그러지고 린덴을 위로 하는눈으로 바 뀌었다. "당신은 너무 순진하니까 말이야. 우리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와는 달라서 신용할 수가 없어. 특히 당신같은 젊은 아가씨는 조심해야 해" "알았어요.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어요 " 린덴은 방문으로 걸어갔다. "잘 자요, 다니엘" "잠깐! " 다니엘은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아버지한테 사과를 받아야겠어. 당신한테 무리한 말을 했지? "다니엘은 노여움을 담은 눈길을 제임스에게로 향했다. "그렇지요? 애인이 모욕을 당했는데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사실 린덴은 내게 과분한 사람이에요 따뜻하고 ......." 무심코 아버지의 침대 위의 벽으로 눈길을 던진 다니엘은 갑자기 말이 막혔다. 다니엘은 무거운 침묵 속으로 글려가듯이 그림으로 다가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린덴, 이것은 당신이 아니야? 왜 당신의 그림이 여기에 있지? 처 음 보는 그림인데 ....." 그리고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제임스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지요? 린덴을 데리고 왔을 땐 처음 보는 것 같은 얼굴을 했으면서 ....... 그런데 침대에는 이 렇게 그녀의 그림이 걸려있고. 그녀는 또 한밤중에 벌거벗은 거나 같은 모습으로 이방에서 나오 고 ..... 거짓말은 이제 그만두십시오! 제대로 설명이나 해줘요" "그녀의 아버지를 알고 있단다" 제임스가 빠른 말로 대답했다. "이 그림은 최근에 열린 그분의 개인전에서 사온 거야. 그게 뭐 안 좋은 일이라도 되니? " "우리에게는 보여 주지 않았지요? 비밀로 한 것은 무슨 까닭이지요? " 제임스는 고개를 떨구고 그 말을 받아넘겼다. "이 그림이 도착했을 때 너는 집에 없었단 말이야. 그 뒤 난 깜박 잊었어" "린덴의 얼굴을 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단 말씀이에요?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방에 들어갔을 때 두사람이 갑자기 당황한 것 같았어요...... 두 사람은 첫대면이 아니었지요? " 다니엘은 무서운 눈초리로 린덴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 "네" 린덴은 이제 절망에 휩싸였다. "그랬어요, 전에 만난 일이 있었어요"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는지 이제 알겠어. 아버지를 한번 만나 기 위해서 나를 이용했지? 그게 뭐야,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 린덴은 눈앞이 아찔하고 몸이 휘청거렸다. 그러자 제임스가 당황하여 얼른 그녀를 부축하고 걱 정스러운듯 들여다 보았다. "미안하지만 난 방으로 돌아가겠어요" 린덴은 제임스의 팔을 밀어내고 걷기 시작했다. "도망칠 생각이야?" 다니엘이 살기 등등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여기서 모두 말하라구. 당신은 아버지의 애인이었지? " "아니야!" 제임스가 큰 소리를 질렀다. "목뼈가 부러지고 싶으냐? 그녀에게 함부로 말하지 마! " "네, 그랬어요" 린덴은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안이 조용하게 가라앉고 두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제임스는 린덴의 손을 잡고 씁 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게 아니야 " 그리고 다니엘을 돌아보며 위엄있는 목소리로 계속했 다. "난 린덴을 사랑하고 있었다. 지금도 결혼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던 참이야 " 다니엘은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는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자기의 손바닥으로 눈길을 떨구 었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군....." "너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야. 아무것도 이야기 할 필요가 없어 " 제임스는 떠다밀듯이 말했다. 다니엘은 얼굴을 들고 린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3개월 동안 이 일을 비밀에 붙인 채 나와 사귀고 있었어요. 그래도 관계가 없단 말이 에요? 나를 속이고 사랑하는 체하며 ......." "린덴은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단 말이야 " 제임스가 말했다. "진짜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 으니까 " 다니엘은 얼굴 가득히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래서요? 그것뿐이 아니었지요? 내가 바보인 줄 아세요? 다 말해 줄 때 까지는 여기에서 꼼 짝도 하지 않을 테니까 ......." "부탁이에요, 다니엘" 린덴은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고 애원하듯이 말했다. "이제 됐지 않아 요? 나와 당신과의 관계는 끝난 거에요. 모든 것을 잊고 어서 방으로 돌아가 주지 않겠어요? "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이지? 내가 그렇게 하면, 나중에 당신이 충분히 위안을 해 주겠 다면 이야기는 다르지만....." 그 말에 격분한 제임스가 아들의 목에 손을 대려고 하는 것을 보고 린덴은 당황했다. "안 돼요, 제임스!" 비명을 지르고 그의 몸을 힘껏 잡아당겼다. 제임스는 어깨를 들먹이면서 우 두커니 서 있었다. "고맙다고 하지 않겠어, 린덴! " 다니엘은 거만한 말투로 말했다. "저 얼굴에 냅다 펀치를 한대 먹여 줄 수 있었는데. 하긴 너무 짓이겨서 당신을 슬프게 하면 안되겠지만 ...... 겨우 뜻을 이루어 손에 넣었다 싶었는데 손을 떼야 하다니. 그 동안 시간과 공을 들인 것만 헛수고가 되었군. 진작 에 분명하게 그렇다고 말해 주었더라면, 나도 불쌍하다는 생각에 몇 달 전에 벌써 이곳에 데려다 주었을 텐데" 린덴은 다니엘이 폭언을 쏟아 놓는 것은 괴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모욕도 참아냈다. 물론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상처를 준 것은 사실이었고 지금의 다니엘에게 그 런 말을 해봤자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아까 말했지 않니" 제임스가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단 말이야. 그리고 일년 반이나 만나지 않았어" "일년 반?" 다니엘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 "그럼 휴가를 내어 요크에 갔을 때였군. 하지만 그 무렵 린덴은 겨우......" "그렇지, 열 일곱 살이었다" 제임스가 낮은 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다니엘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내뱉었다. "지독한 일을 ...... 겨우 여고생인데 ....." 제임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 "그건 내게 람베리를 사 줬을 때군요. 시운전을 한다며 타고 갔었지요 " 다니엘의 시선은 린덴 에게 옮겨졌다. "당신이 그날 내 차를 보고 실신한 까닭을 겨우 알겠군. 내가 말을 건넸을 때 아 버지인 줄 알았지? " 린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다니엘의 얼굴에 피로의 기색이 떠오르고 어깨 가 축 늘어져 있었다. "이야기 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 그의 눈은 벽의 그림으로 쏠렸다. "왜 가르쳐 주지 않았지? 이젠 너무 늦었어" "세상은 모두 그런 거에요" 린덴은 한숨을 쉬었다. 다니엘은 그녀의 얼굴에서 눈길을 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에는 참석 안 할 거에요, 그리고 새어머니로서 환영할 수도 없고. 이 집에 다시는 돌아 올 생각이 없으니까, 나는 없는 아들로 생각해 줘요, 아버지! " 고통과 증오가 뒤섞인 말에 린덴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러들었다. 다니엘은 가까스로 문간 까지 걸어가더니 문을 쾅 닫았다. 오랜 침묵이 계속된 뒤 린덴도 문간으로 향했으나, 제임스가 그 손을 잡았다. "가지 말고 내 이야기를 들어 줘" "더 이상 무슨 이야기가 있지요? " "사랑하고 있어. 당신도 날 사랑한다고 인정했잖아? 과거는 흐르는 물에 떠내려 보내고 우리 다시 시작하자구, 린덴. 겨우 손에 넣은 걸 과거의 잘못을 이유로 놓쳐 버린다는 건 어리석은 거 야. 우리 다시 시작해" 린덴은 냉랭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과거를 잊으란 말이에요? " "날 용서해 줘.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라면 난 무슨 짓이라도 다하겠어" 이마의 주름 에서 역력히 그의 고뇌를 엿볼 수가 있었다. "결혼을 한다해도 당신의 몸에 손대는 것도 싫고, 내 몸에 당신의 손이 닿는 것도 싫어요" 제임스는 그 말에 움찔했으나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절대로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맹세하겠어. 린덴, 내게 당신을 돌보게 해줘. 당 신을 지켜주고 싶어" "내가 몸을 지켜야 할 유일한 대상은 당신 자신이에요. 내 몸에 절대로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 하겠어요? " 제임스는 깊이를 들이쉬고 린덴의 차가운 시선을 받았다. "약속하겠어, 린덴" 린덴은 눈을 내리깔았다. "만일 결혼 후에 내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 "당신을 방해하지 않겠어" 린덴은 오랫동안 멈칫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좋아요" 제임스는 뜻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 "네" 린덴은 또 걷기 시작했다. "언제지? 언제 결혼해 주겠어?" 제임스가 뒤따라오며 물었다. "린에게 상의하고 나서 결정하겠어요" "그가 반대하지 않을까? 그에게 설복당하는 건 아니야? " "그런 일은 없을 거에요. 난 내일 돌아가겠어요" 린덴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금년은 정말 바쁜 크리스마스군요" 그녀의 눈에 갑자기 그늘이 생겼다. "불쌍한 포리..... 이 일을 알면 쇼크를 받을 거에요. 어떻게 할 거에요? " "사실대로 이야기 할밖에. 아마 이해해 줄 거야. 연약하게 보여도 강한 여자니까 " "당신을 나무라겠지요. 다니엘을 귀여워하니........" "그래도 사실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어. 하지만 포리도 당신을 나무라지는 않을 거야, 나쁜 건 나니까 " 정말 그럴까? 린덴은 자문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나는 그의 애무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제임스가 브레이크를 걸 수 없었던 책임은 나에게도 있었던게 아닐까? 린덴은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아 몸만 뒤척이고 있을 뿐이었다. 고통과 노여움과 환멸과 멸시가 뒤섞인 다니엘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이런 사태를 피할 수는 없었단 말인가? 다니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왜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 생각하니 다엘의 얼굴에 제임스의 얼굴이 겹쳐져 보인것도 이 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고 다니엘은 말했지만, 역시 피를 나눈 부자간이다. 어쩌면 다니엘이 제임스를 닮았기 때문에 그에게 끌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입술을 겹쳤을 때 제임스의 이미지가 떠오르고 ........ 그렇게 생각하니 린덴은 더욱 흥분이 되어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린덴은, 새벽이 되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슈트케이스에 짐을 챙겼 다. 그리고 한동안 창가에 기대어, 조금씩 밝아오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에섹스의 하늘은 잿 빛이었고, 부드러운 아침 안개가 나무들을 감싸고 있었다. 짧은 동안이었으나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다니엘과 사귄지 3개월에 종지부를 찍은 제임스....... 제임 스는 나의 인생을 두 번이나 엉망으로 짓밟고 만 것이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포멀한 슈트에 몸을 싼 제임스가 창백한 얼굴로 린덴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까지 차로 바래다주겠소" 하고 말하며 린덴의 손에서 슈트케이스를 빼앗았다. "요크까지요?" 린덴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크리스마스 이니 손님이 올거 아녜요? 그리고 포리가 이상하게 생각해요" "바래다 주겠어" 제임스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손님보다 당신이 중요해. 손님은 어떻게 되겠 지. 포리한테는 돌아와서 이야기 하겠어. 그리고 ..... 다니엘은 집을 나간 것 같아, 어젯밤에 " 린덴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말을 들어도 별로 놀랍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뭘 좀 안 먹겠어? 메이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 내가 토우스트와 홍차를 준 비하겠어" "아니, 괜찮아요. 어서 떠나요" 린덴은 한시 바삐 이곳을 나가 린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럼, 도중에서 식사를 할까 ....... " 제임스는 한숨을 쉬고 밖으로 나왔다. 커브가 많은 에섹스의 길을 몇 킬로나 달렸는데도 다른 차는 한 대로 볼 수가 없었다. 하늘은 거의 밝아지고, 먼 곳에서 한 무리의 비둘기가 하늘에 긴 회색 스카프를 띄운 듯이 날고 있더니, 이윽고 천천히 땅 위로 내려왔다. "부인과 결혼했을 때 당신은 몇 살이었어요? " 갑자기 린덴이 물었다. 제임스는 깜짝 놀라 곁눈으로 린덴을 보았다. "18세.어렸을 때부터의 약혼자였지. 아버지가 젊었을 때 코리를 사랑했는데, 결국 그녀의 발에 채었지. 아버지는 그녀와 사돈이라도 맺고 싶어서 말이야 ........ " 밟은 웃음이 제임스의 얼굴에 퍼졌다. "아버지를 탓할 수도 없어. 포리는 정말매력있는 여자이 고 나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어 " "부인도 사랑했어요? "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마음이 아플게 뻔했으나,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제임스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린덴은 그를 야무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거짓말! 나한테 거짓말하는 것은 이제 그만둬요. 나와 결혼하고 싶으면 솔직해져요" "정말이야. 로나는 미인이었지. 깜짝 놀랄 만큼 미인이었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그녀를 잘 알고 있었어. 아름다운 겉모습 속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까지 잘 알고 있었지. 차갑다거나 잔인하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텅 비어 있단 말이야. 어떤 것에도, 어떤 인간에도 흥미를 갖지 못하고 그저 흐 르는 물처럼 살고 있었어. 우리의 결혼은 사실상 다니엘이 태어난 시점에서 끝나 버렸어, 그 이후 로 나는 그녀에게 손 한번 대지 않았으니까. 다니엘만 해도 파티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결과 생겨난 아이야. 그녀를 품에 안는 것은 인형을 안는 것이나 다름없었단 말이야 " 린덴은 초상화에 그려진 공허한 푸른 눈이 생각나, 제임스의 이야기가 정말이구나 싶었다. 린덴 도 첫눈에 그런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부인은 당신을 사랑했어요? " 제임스는 듣기에도 껄끄러운 소리를 내며 웃었다. "로나는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는 여자란 말이야.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했어. 책도 읽지 않고, 연극도 보지 않고, 아름다운 인형처럼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이야 " 린덴은 말없이 생각했다. 18세에 사랑도 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해야 했던 제임스도 안되었고, 그저 아름다울 뿐 인생의 아무런 기쁨도 모르고 산 그의 아내도 아타까왔다. "그래서 당신은 다른 여자로 눈을 돌렸나요? " "그렇지 " 제임스는 쌀쌀하게 대답했다. "그중에 정말로 좋아한 사람도 있었어요? " "없었어, 상당히 열중한 일은 있었지만. 나는 건강한 남자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 니었어. 내 사랑의 대상은 오직 당신뿐이야, 린덴" 차가 간선도로를 달리는 동안에 교통량도 차차 늘었다. 은회색의 리무진은 탄환처럼 달렸으나, 소음이나 흔들림이 적었기 때문에 스피드를 별로 느낄 수 없었다. 린덴은 피로를 느끼고 하품을 했다. "눈을 좀 붙이면 어때? " 제임스는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안색이 좋지 않군. 아직도 시장하지 않아? " "시장해요" 린덴은 아까부터 공복감과 상당히 싸우고 있었다. "그럼, 어디 레스토랑이 있으면 차를 세우자고 " 그는 시선을 길로 돌렸다. 린덴은 시트로 깊이 몸을 파묻고 제임스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힘찬 코와 턱의 선, 여자의 마 음을 두근거리게 할 것 같은 입술, 살이 적은 볼......... 여러 여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정신이 없게 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는 그러한 제임스의 무릎을 꿇게했다. 영광에 빛나는 그의 인생 속에서 처음으로 고개를 숙이게 했으니 우 월감과 승리의 기쁨을 맛볼 만도 한데 ...... 두 사람은 조용한 시골 호텔 앞에서 차를 세우고 한가 하게 아침 식사와 커피를 들었다. 다시 차를 탓을 때는 교통량이 많이 늘었기 때문에 스피드를 떨어뜨려야 했다. "다니엘과는 깊은 관계였소? " 말없이 운전을 하던 제임스가 갑자기 린덴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렇다면 어쩌시겠어요? " 제임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알고 있잖아? " "당신이 관계한 여자는 몇 명이나 되죠? " "우물우물 넘기려 하지 말라구, 린덴. 나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해. 그것이 아무리 바람직한 일 이 아니라 해도 말이야 " 린덴은 잠자코 그의 거무스름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니엘과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제임스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리고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제임스! 난 앞으로도 거짓말은 안 해요. 누구와 깊은 관계에 빠지게 되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겠어요" "그만두라구. 나뿐 아니라 당신 자신도 상처를 받게 돼. 그걸 몰라? " 알고 있다. 그래도 제임스에겐 어떻게 해서든지 복수해야 겠다는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런 뒤에 두 사람은 말없이 드라이브를 계속했다. 린덴은 눈을 감고 있다가 깜박 졸았다. 차가 크게 흔들릴 때마다 제임스의 우람한 어깨에 머리가 부딪혔다. 간선도로에서 2급 도로로 접어들자 스피드가 뚝 떨어졌다. 제임스가 린덴의 몸에 팔을 감자 그 녀는 몸을 움직였으나, 그 온기에 안심이 된 듯 그대로 잠을 잤다. 꿈속에서 제임스가 머리칼에 키스하며, "달링, 사랑하고 있어요..... " 하고 속삭이는 말이 들려, 린덴은 방긋 웃었다. 잠이 깼을 때는 집에서 1킬로 반쯤 떨어진 곳에 와 있었다. 린덴은 몸을 곧바로 일으키고 헝클 어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퀴가 자갈을 밟으며 고트우드 힐의 울퉁불퉁한 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차가 멈추자 린덴은 차에서 내려, 제임스가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 주기를 기다렸다. "여기서 헤어져요. 당신과 린을 만나게 하고 싶진 않아요. 그럼, 안녕"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는 열기 띤 눈길에 린덴의 볼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키스하고 싶어" "안 돼요" 린덴은 차갑게 거절했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지? " 제임스는 그녀의 얼굴에 눈길을 쏟은 채 팔에 살며시 손을 댔다. "크리스마스 휴가가 끝나고요. 당신의 사무실에 전화 하겠어요" "런던의 아파트 주소를 가르쳐 줄 수 없어? " "그럴 필요는 없어요. 내가 전화하겠어요" "마음이 바뀌어, 결혼을 그만두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 눈이나 입술에 역력히 걱정을 드러 내며 다짐을 했다. "한번 결정한 일은 바꾸지 않아요 " 린덴은 그렇게 단언하고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제임스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붙잡더니 뜨거운 입술을 밀어붙였다. 린덴은 그것을 야멸차게 뿌 리치고 나쁜 걸음으로 걸어갔다. 뒷문을 열었을 때 차의 엔진 소리가 들렸다. 린덴은 집 안으로 들어가 슈트케이스를 내려놓았 다. 주방은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으나 린의 모습은 없었다. 아틀리에로 가서 문을 여니, 린은 열 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린덴을 보자 눈썹이 꿈틀했다. "크리스마스에는 오지 않는 줄 알았다. 그 뭐라고 했던 사내와 싸움이라도 했니? " 린덴은 지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할 이야기가 있어요" "무슨 이야기야? 무슨 일이 있었니? " "저쪽으로 가요. 커피를 마시고 싶어요" 린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린덴을 따라 주방으로 가서 의자에 걸터 앉았다. 그는 참을성 있게 린덴이 말을 꺼낼 때 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은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하고 열심히 상상하고 있었다. 린덴은 커피를 좀 짙게 타서 의자에 앉자 잔 하나를 아버지 쪽으로 밀었다. "기운이 별로 없어 보이는군요" "기운을 내지 않으면 안되겠니? " 린은 린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운을 내야 할 것은 제 쪽이에요" 린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커피를 휘저었다. "제임스에 대한 일이구나" 하고 린은 억양이 없는 소리로 말했다. "직감력이 날카롭군요! " 린덴은 몸을 떨며 눈을 감았다. "그는 다니엘의 아버지였어요" 그렇게 말하고, 왜 무의식중에 <였어요>라고 과거형을 썼을까, 하고 생각했다. "다니엘은 네가 요즘 어울린다는 청년이냐? 그 아이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 그의 집에 갔단 말이지? 정말 그거 야릇한 노릇이구나. 하지만 어째서 그것도 몰랐단 말이냐? " "제임스가 이름을 속이고 있었어요. 본명은 설 제이슨 와이어트라고 해요" 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 " 그는 린덴의 말에서 그 이상의 의미를 알아내고 있었다 - 제임스는 처음부터 두 사람을 속일 작정으로 이곳에 온 것이다 - 린의 눈에 노여움이 떠올랐다. "말을 계속해. 모두 이야기 하라구" "제임스의 방에 단둘이 있는 것을 다니엘한테 들켰어요" 린이 깊은 한숨을 쉬는 것을 듣고 린 덴은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우연히 그의 침대 위에 걸려 있는 아빠의 그림을 보았기 때문에 들어갔던 거에요. 믿을 수가 없었어요" 린은 찻잔으로 눈을 떨구었다. "나도 그렇지 않은가 했었지" "그래요? 아무 말씀도 없었잖아요 ......" "너는 녀석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니? 하지만 그 그림이 빼앗기다시피 팔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그가 머리에 떠올랐어" 린덴의 어조가 차차 거칠어졌다. "그 사람은 그것을 자기 침대 위에 걸어 놓고 있었어요, 아침 저녁으로 바라보면서요. 어쩌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정말 속을 알 수가 없어요 " 린은 린덴처럼 흥분하거나 하지 않고 조용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너도 그의 마음을 알고 있지 않니, 그때는 할 수 없이 떠났지만, 너에 대한 생각을 그렇게 쉽 게 잊을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 "작년부터 술만 퍼마시고 산대요" "그것도 하나의 도피구겠지 " "하지만 아빠의 경우와는 달라요" "그야, 그렇지 " 린은 빙그레 웃었다. "너의 어머니와 나는 일심동체였기 때문에, 너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는 나도 죽어 버리고 싶었 다. 하지만 그 마음을 일에다 쏟은 거야 " "제임스의 경우는 그것이 술이 되었나 봐요. 제임스는 아빠에게 부인에 대한 애기는 하지 않았 어요? " 린은 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을 길 없는 병으로 여러 해를 누워 있다고 했는데 ....... 그것도 거짓말이었니? " "아니에요, 정말이었어요. 교통사고로 식물 인간이 되고만 거에요. 죽은 거나 다름없이 몇 년동 안이나 계속 살고 있었대요" 린덴은 괴로운 듯이 한숨을 쉬었다. "죽은 것은 작년 크리스마스 직 전이었대요" "애절한 이야기 구나. 제임스도 불쌍한 남자다" 린덴은 당황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딸의 눈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사정이 그렇지 않았다면 너와 결혼했을 거다. 하지만 병든 아내를 버리거나 하면, 아들이나 가 족을 슬프게 만들게 되니 그럴 수가 없었겠지" "그렇다면 일이 그렇게 되기 전에 잘 생각해야 했을게 아니에요? 나와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나의 몸이나 마음을 빼앗을 권리가 그에게는 없었던 거에요" 린은 눈을 내리빨았다. "물론 너의 말이 맞다. 그것이 정론이고, 그 점은 제임스도 알고 있었을 거야" 린덴도 테이블에 눈길을 떨구고, 마음속으로 괴로운 과거와 싸우고 있었다. "그의 아들은 어떻게 되었니? 다니엘인가 하는 젊은이 ........" 린덴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이젠 끝장이 났어요" 린덴은, 노여움과 고통속에서 그가 집을 나간 일을 이야기 한 다음"그 는 나나 제임스를 일생 동안 용서해 주지 않을 거에요" 하고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린은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일생이란 것은 긴 것이란다. 너는 나이에 비해서 숙성하고 머리도 좋지만, 그래도 아직 19세 야. 무척 괴로울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너의 인생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야. 아 직 배워야 할 일이 많아. 인생의 본질이란,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알수도 없는 깊고 깊은 뿌리와도 같은 거야. 땅 속에서 틀어지고 구부러지고 하여, 어떻게 되어 있는지 상상도 할 수가 없는 것이 란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꽃이나 열매같은 결과뿐이지 " "제임스와 결혼할 생각이에요" 린덴은 야무진 목소리로 단호히 선언했다. 린의 손가락이 굳어졌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 린덴은 불타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임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에요 " "그도 충분히 벌을 받은 줄 아는데. 상대방에서 상처를 주려고 하면 자기도 상처를 입게 된다. 그것은 알고 있지 않니? 나는 네가 걱정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가져 버리게 된다. 증오심란 것 은 무서운 것이고, 마음속까지 병들게 된다. 이제 그만하면 됐지 않니, 린덴? " "제임스와 나는 어울리는 짝이에요. 어젯저녁에 그것을 알았어요. 제임스가 나를 속인 것처럼 나도 다니엘을 속이고 있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19세의 숙맥같은 시늉을 하고 있었지만, 나의 진짜 모습을 본 순간 그는 진저리를 치고 도망쳐 버렸어요. 이제 와서는 이 세상에서 나와 잘 맞 는 사람은 제임스뿐이에요" "린덴, 지금까지 난 네가 살아가는 방식을 방해한 일은 없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부탁이다. 바보 같은 짓을 하진 말아 다오. 그렇게 되면 길을 잘못 드는게 된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와 함께 오지 않은 거예요" 린은 날카로운 눈길을 보냈다. "제임스는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니? " "알고 있어요" 린덴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결혼하고 나면 자기의 매력으로 내 기분을 누그러 뜨리게 할 수 있을 걸로 알고 있겠지요" "아아, 이게 어찌 된 일이냐 ......." "하지만 난 절대 지지 않겠어요. 제임스가 천천히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이 눈으로 똑 똑히 끝까지 지켜보겠어요! " 린은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떠게 말하면 네가 알아 듣는단 말이냐, 그것은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 부탁이니 다시 생각해 다오" "이미 작정했어요" 린은 두 손을 떼고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제임스를 사랑하고 있니? " "네, 진정으로요. 야릇한 일이지요? " 린은 일어서자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나갔다. 7장 린덴은 아버지와 단둘이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채소를 주로 한 식사를 하고, 홍차나 커피를 마 시며 거의 아무말도 주고 받지 않았다. 린은 더 이상 같은 말을 되풀이 하지는 않았지만, 딸을 보 는 걱정스런 눈길은 그의 마음속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린덴이 런던으로 돌아가는 날, 린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사랑하고 있다, 린덴. 자신이 상처를 입는 행동은 피하도록 해라" 린덴은 아버지의 야윈 어깨에 머리를 대고 중얼거렸다. "제임스에게 감사해야 하겠군요. 폭풍 같은 사건으로 따뜻한 아빠를 돌려줘서 정말 기뻐요 ....." "너는 사람을 사랑할 줄도 미워할 줄도 알았으니, 이번엔 이해하는 것을 배워라. 제일 어려운 일이지만, 결국 누구나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란다" 린은 희미하게 웃었다. "나도 제임스에게 여러 가지를 배웠다. 네가 아는 이상으로 그의 영향력은 컸어. 그 뒤로 그림도 바뀌었다. 가을에 로마에서 개인전을 열 테니까 꼭 보러 오려무나. 아마 제임스의 영향력이 큰 것에 놀랄거야" 린덴은 런던으로 돌아오자 바로 대학에 퇴학계를 제출하고 제임스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비서가, 회의중이라고 공손한 체하며 말했으나, 무척 거만한 응대였다. "그럼, 전화가 있었도고 전해 주세요. 내 이름은 린덴 하워드예요" 그러자 갑자기 비서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하워드양 .... 정말 미안해요. 당신의 전화를 무척 기다리고 있었어요...... 곧 회의실에 연락을 하 겠어요" "아니, 괜찮아요. 바쁜데 방해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하고 린덴은 얼른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다음에 전화를 건 것은 3일 뒤로, 비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빠른 소리로 말했다. "연결해 드릴 테니 잠깐 기다려 주세요" 전화에 나온 제임스의 목소리는 조금 쉬어 있었다. "린덴?" "네" 그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몸이 떨리는 것을 겨우 참았다. "어째서 좀더 일찍 걸어 주지 않았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어" 그것이 바로 이쪽의 수법이에요. "바빴어요" 린덴은 냉정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사이를 두더니 제임스가 다그치듯 물었다. "린이 뭐라구 했지?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니야?" "아니에요. 린은 내가 생각한 대로의 말을 했어요" "그래? 오늘 저녁 같이 식사하지 않겠어?" "오늘 저녁에는 선약이 있어요" 제임스의 숨결이 거칠어지는 것이 들렸다. "누구하고?" "내 사적인 생활은 당신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지 않을까요?" "내일 낮에는 어때?" "좋아요. 열두 시에 사무실로 들르겠어요" 린덴은 제임스가 뭐라고 하기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 다. 제임스의 사무실은 회사나 은행이 쭉 늘어서 있는 번화가에 있었다. 런던 거리에는 비가 촉촉 하게 내리고 있어 좁은 길을 다니는 사람들은 우산 밑에서 몸을 웅크리며 걷고 있었다. 맨 위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리자, 고급스런 옷을 입은 여자가 방긋 웃으며 린덴을 맞이했다. 린덴은 목소리를 듣자 바로 그 비서라는 것을 알았다. "설 제이슨이 나오실 때 까지 잠깐 앉아 계십시오" 하고 그녀는 넓고 호화로운 방으로 안내하 고, 크림색의 가죽으로 덮인 소파를 손으로 가리켰다. 벽에는 런던을 그린 현대풍의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린덴은 별로 흥미도 없다는 듯이 힐끗 쳐다보고 앉았다. "지금은 회의중이니 끝나는 대로 전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커피라도 드시지 않겠어요?" 비서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 부탁해요" 린덴은 차가운 눈길을 의식하면서 대답했다. 비서는 잇달아 걸려 오는 전화를 사무적으로 처리하며 차잔을 기울이는 린덴에게로 이따금 시 선을 던졌다. 린덴이 입고 있는 옷은 어제 산 초콜렛 빛깔의 피스로, 브론드와 매끄러운 피부에 잘 어울리고 있었으며, 도시적인 분위기로 린덴을 실제 나이보다 어른스럽게 보이게 했다. 사무실 안쪽의 이중문이 열리고 두세 사람의 남자들이 나타났다. 제임스의 모습이 보이기 전에 그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계약서는 완벽합니다. 해약할 수 있으면 해보시오. 이쪽은 고소해서 ......" 그는 린덴이 와 있는 것을 알자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린덴!" 두 팔을 벌리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많이 기다렸소? 와 있는 줄 알았으면 ......" 그는 비서를 노려보았다. "어째서 즉시 알리지 않았 지?" 비서는 그의 기세에 어쩔 줄을 몰랐다. "회의중이셨기 때문에 ......." "앞으로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건 바로 알리라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 않아?" "죄송합니다" 비서가 조그만 소리로 사과하고 얼굴을 수그렸다. 다른 남자들도 다가왔다. 제임스는 린덴의 손을 잡고 일으키더니 몸을 가까이 대고 그들을 돌 아보았다. "내 약혼녀를 소개하겠소. 미스 린덴 하워드요. 화가 린 하워드의 딸이오" 린덴은 방긋 웃어 보였다. 제임스로부터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들으며 악수를 나누었으나, 린 덴으로서는 그들의 이름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한 남자가 말했다. "아아, 저도 압니다.. 그분은 훌륭한 화가지요. 저도 그분의 그림을 한 점 가지고 있어요" 린덴도 그 남자에게 약간의 흥미를 느끼고 호의적인 눈길을 보냈다. 제임스가보다 몇 살 정도 젊어보이는 푸른 눈을 가진 키가 큰 남자였다. "어느 그림이죠? 미스터 .... 미안해요, 이름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 "찬 후작이야" 제임스가 옆에서 말해 주었다. "한데 당신이 그림을 모으고 있는 줄은 몰랐군요" "모은다고 할 것까지는 없어요 ..... 우연히 손에 넣었지요. <사막>이라는 타이틀로, 아무것도 없 는 황량한 사막에 한 남자가 우뚝 서 있는, 어두운 느낌을 주는 그림이지요" "알고 있어요" 린덴은 그럭저럭 평정을 지키며 대답했으나, 그 밖의 코멘트는 삼갔다. 그 그림 은 그녀가 아주 싫어하는 것이 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2, 3년 뒤에 그려진 것으로 그 그림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는 가슴이 아플이만큼 잘 알고 있었다. 린도 그것을 볼 때 마다 가슴이 죄는 것 같았는지, 그 그림이 팔려서 아틀리에에서 실려 나가자 좋아했던 것이다. "그럼, 우린 이만 실례하겠소" 제임스는 초조한 모습으로 이 말을 남기고는 린덴을 데리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 제임스는 탐욕스런 눈길로 린덴을 쳐다봤다. "린이 뭐라고 했지?" "다시는 당신을 만나면 안된다고 했어요" 제임스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말을 뿌리쳤군, 린덴? " "여기에 와 있지 않아요 " "응, 절대로 후회하게 하진 않겠어. 약속하겠어" 린덴은 여유있게 방안을 서성거렸다. "음, 여기서 일하고 있군요 ..... 이런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가죽 을 씌운 데스크,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전화 등으로 린덴의 시선이 옮겨졌다. "참 멋있어요" 그 러고는 그를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 보았다. "당신도 멋있군요" "고마와. 그런데 언제 결혼해 주겠어?" 린덴은 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긴 다리를 나른한 듯이 뻗고 데스크에 기댔다. "언제가 좋아요?" "지금 바로" 그의 열기 띤 눈길에 린덴은 눈을 내리깔았다. "좀 진지하게 말씀하세요" "난 지금 진지해" 제임스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준비할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않아요" "음, 그럼 3일 뒤로 하지. 그때까지 기다리겠소" 당신은 영원히 기다려야 해요, 하고 린덴은 속으로 쏘아붙였으나 겉으로는 실실 웃고 있었다. "아아, 린덴!" 제임스는 그녀의 몸을 두 팔로 끌어 안았다. "오랫동안 줄곧 꿈꾸고 있었단 말이 야. 당신과 함께 되다니 믿을 수가 없군 ......" 제임스가 입술을 겹치려고 하자 린덴은 그의 어깨를 확 밀어냈다. "허니문은 어떻게 하지요?" "글쎄?" 제임스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어디로 가고 싶지?" "파리가 좋아요. 언제 가봐도 즐거운걸" "어딘가 당신이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고 싶은데" "어마, 그래요? 그렇지만 파리가 좋아요. 예전부터 허니문은 파리라고 하지 않아요?" "당신이 바란다면 그렇게 하지" 즐거운 미소가 갑자기 열기를 띤 목소리로 바뀌었다. "린덴이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해 줘. 달을 갖고 싶대도 당신을 위해서라면 따 오겠어" 린덴은 그와 달 이야기를 하던 날 밤의 일이 생각나 몸이 굳어졌다. "부자시니까요" 제임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응, 다행히 무엇이든지 사줄 수 있소. 당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갖추어 놓겠어" 그의 손 가락이 린덴의 볼을 다정하게 애무했다. "내가 보답으로 바라는 것은 당신뿐이야" 저것 봐, 저런 소리를 진심이라고 하고 있군. 제임스는 이 세상 무엇이고 간에 값을 매기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 나도 돈으로 살 생각 인거야. 두 사람은 거리의 조그만 회원제 레스토랑에 들러 식사를 했다. "다니엘로부터 무슨 연락이 있어요?" 린덴이 이렇게 묻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니, 뉴욕으로 간 모양이야. 포리에게 편지가 왔다는군" 불쌍한 다니엘 ..... 린덴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침울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린덴을 제임 스는 질투가 어린눈으로 바라보더니 단숨에 글라스를 비웠다. "너무 마시네요. 그 정도로 그만두는게 어때요" 린덴의 주의를 받고 제임스는 따르려던 와인을 그대로 테이블에 놓았다. "알았어. 이제 앞으로는 술에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까" 천만의 말씀이에요, 하고 린덴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제임스는 린덴을 보석상으로 데리고가 약혼 반지를 골라 주었다. 린덴은 보석 같은 것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갖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으나, 제임스와 가게 주인은 매우 진지했다. "하워드양의 피부는 아름다우시니 보석이 잘 받겠습니다요" 조그마한 가게 주인이 아첨을 하자 제임스의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찼다. "정말 그래" 그녀의 손등에다 볼을 비볐다. "비단결처럼 매끄럽지" 그러더니 손을 드레스의 네 클라인으로 옮겨 살며시 애무했다. "목걸이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팔찌는?" 남의 앞이 되어서 내가 불평을 못할 걸 뻔히 알고 이렇게 대담하게 나오는군! "다음으로 미루겠어요" 린덴은 흥미가 없다는 듯이 어깨를 추슬렀다. 그러나 가게 주인은 얼른, 다이아몬드를 아로새긴 팔찌를 가져왔다. "손님에게 정말 잘 어울리실 겁니다요" 제임스는 그것을 집어 그녀의 팔목에 끼워 보았다. "어때? 마음에 들지?" "당신이 사고 싶으면 사세요" 린덴은 여전히 냉랭하게 말했다. 그래도 제임스는 팔찌를 되돌려주려 하지 않고 가게주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걸 사겠소. 그리고 여기에 맞는 목걸이와 귀걸이도. 우리가 허니문에서 돌아오면 괜찮은 것 으로 몇 개 가져와 줘요" 제임스는 팔찌를 벗겨 눈부신 보석류와 함께 상자에 놓았다. "이것을 모 두 우리 집으로 보내 줘요. 반지만 지금 가져가겠소" 차 안에서 제임스는 린덴의 손을 잡고 반지를 끼워 주었다. 두 사람 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새 빨간 빛을 뿜는 루비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 이제 당신은 내 것이야" 제임스는 몸을 수그리고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자기가 바라는 대로 나를 손에 넣은 줄 알고 있군. 하여튼 좋아. 이제 차차 알게 될 테니까. 린 덴은 속셈이 있는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저녁 식사도 같이 해 주겠지?" 제임스는 당연한 것처럼 말했다. "저녁때 요크행의 열차를 타려고 해요" "뭣 때문에?" 제임스는 눈을 크게 떴다. "결혼식 준비 때문이지요. 자세한 것은 편지로 알려 드리겠어요. 린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겠 어요? 검소하게 식을 올린다해도 여러 가지 결정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웨딩 드레스만 해도 그렇지 않아요? 내가 웨딩 드레스를 입기를 바라고 있는게 아닌가요?" "당신만 손에 들어온다면 어떤 모습으로 식을 올리든 상관없어" 제임스는 탐욕스런 눈으로 그 녀를 쳐다 보았다. 린덴은 눈을 내리깔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당신은 회사 앞에서 내리고 이차로 나를 아파트까지 보내줄 수 없어요?" "아니, 나도 같이 가겠어" "당신은 올 필요가 없어요. 난 오늘 아파트를 나가는 걸요. 식을 올까지는 집에 가 있겠어요" "바래다주는 것도 안 돼?" "안 돼요" 린덴한테 거절을 당하자 제임스도 입을 다물었다. 사무실 앞에서 차가 멈추자, 제임스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운전수에게, 그녀가 지시하는 곳으로 차를 몰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린덴의 입술을 빼앗았다. 그녀가 거기에 적극적으로 응하려고도 하지 않고 그를 떼밀려고도 하지 않자, 그는 이 윽고 상기된 얼굴을 떼고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린은 입을 다물고, 린덴의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만 보고 있었다. "무척 비싼 것 같구나" "제임스는 대단한 부자인걸요. 무엇이고 못 사는 것이 없어요" 린은 가만히 딸을 쳐다보았다. "너말고는" "그래요. 나는 별도예요. 나는 이 몸을 그냥 주는 거예요. 다만 그의 목숨과 바꿔서요" "반지를 제임스에게 돌려줘. 죽일 테면 정정당당하게 피스톨을 쓰면 어떠냐? 이런 방식은 좋지 못해" "제임스도 이제 그 낌새를 알아챈 것 같아요. 하지만 그는 강해요, 얼마나 강한지 나도 잘 몰라 요 ..... " "하지만 넌 그렇지가 못해. 너 스스로도 강하다고 착각할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버텨 봐야 연약 한 여자가 아니냐. 네가 상처를 받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 과거는 잊어버리고 행복을 찾는게 어떻겠니? 다시 한번 둘이서 해보는 것이 어떻겠니?" 과거를 잊으라니 무리한 말씀이에요. 린덴은 혼자 뜰을 거닐면서 생각했다. 24시간 내내 머릿속 은 제임스로 꽉 차서 어디에 가도 침착할 수가 없었다. 북풍에 흩날리도록 머리를 내맡긴 채 시 간 가는 줄 모르고 서리가 내린 풀밭을 맨발로 계속 걸어다녔다. 제임스와 포리를 태운 은회색의 리무진은 결혼식 전날 밤에 요크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몇 킬 로 떨어진 곳에 숙소를 정해 묵고 당일 아침 린덴의 집으로 왔다. 포리는 요크의 기후가 몸에 맞 지 않는지, 모포로 몸을 싸고 소파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당신 아버지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가는지 모르겠군.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이렇게 바 람만 불어대는 초원에서 ..... 따분하지 않으실까?" "네, 일만 하고 있으니까요" 린은 따뜻하게 포리를 맞이했으나, 일에서 오래 떨어져 있으니 불안한지 조금 있다가 바쁜 듯 이 아틀리에로 들어가 버렸다. "이야기는 제임스한테서 모두 들었다, 린덴" 포리는 따뜻하게 말했다. 린덴의 볼이 확 물들고 눈은 도전적으로 불탔다. "그런 얼굴은 하지 말아 다오." 포리는 린덴의 손을 잡았다. "제임스는 누가 나쁜지 분명하게 이야기 해 주었다. 지금은 늙은이지만 나도 젊었을 때는 사랑도 했단다. 제임스를 사랑하고 있 지?" 그녀의 푸른 눈이 윤기를 머금고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제임스를 좋아하고 고마와하고 있 단다. 불쌍한 로나를 잘 돌바 주었어. 로나는 좋은 아내가 아니었어. 미인이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알맹이가 없는 여자였어. 그것을 알았을 때, 그런 여자를 아내로 삼은 제임스가 불쌍해서 견딜 수 가 없었어 ..... 제임스는 로나와 나, 그리고 다니엘에게도 잘해 주었어.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주었지. 하지만 역시 쓸쓸했던 거야" "알고 있어요" 린덴이 따뜻하게 포리의 볼에 키스했다. "제임스는 널 깊이 사랑하고 있어. 말끝마다 그것이 잘 나타나 있어. 요 일년 동안 그가 술에 빠져 있는 것을 볼 때 마다, 로나를 그와 결혼시켰기 때문에 그의 인생을 망쳐 버렸다고 나는 얼 마나 자신을 책망하곤 했는지 몰라" "당신이 죄책감을 느끼실 필요는 없어요. 제임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당신을 사랑 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포리의 볼이 젊은 아가씨처럼 붉게 물들었다. "어쩜 그렇게 따뜻한 말을 해 줄까. 불쌍한 제임스의 좋은 아내가 되어 주지 않겠니? 그에게는 네가 꼭 필요한걸" 린덴은 얼른 시선을 외면 했다. "다니엘로부터 무슨 소식은 없어요?" "편지가 왔더구나" "어떻게 지내고 있대요?" "시간이 좀 지나야지 ...... 다니엘은 너를 좋아했던 만큼 상당한 쇼크를 받은 모양이야" 포리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자신은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제임스를 존경하고 있었어. 그러 니 더욱 타격이 컸던거야" "네, 다니엘에게 상처를 준 것은 정말 괴로와요. 만일 내가 또 ......" 하고 말하다가, 이제 새삼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노크 소리가 나고 제임스가 들어왔다. "식을 올리기 전에 신부를 보면 안 돼!" 포리가 소리를 질렀으나, 제임스는 싱글거리며 린덴을 쳐다보고 있었다. "며칠이나 못 만났는데요. 뭐. 린덴, 잠시 걷지 않겠소,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제임스, 그러면 재수가 없대" 포리는 난처한 듯이 미소를 띠고 반대했다. 제임스는 몸을 구부려 포리의 볼에 키스했다. "포리, 한 시간 가량 주무시는게 어띠요? 식에는 기분좋은 얼굴로 나가야 하니까요. 낮잠을 잔 뒤가 제일 얼국색이 좋다는 것은 잘 아시지요?" "낮잠?" 포리는 제임스의 손을 탁 쳤다. "누가 들을까 무섭다. 내가 노망한 줄로 알겠어! 난 말 이지,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 몸을 뉠 뿐이야" 제임스와 린덴이 웃으면서 나가자 포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았다. 린덴은 현관에 걸려 있는 수에드 코우트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공기는 건조하고 차가왔다. 밴디트가 짖으면서 두 사람의 뒤를 따라왔다. 린덴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푸르스름한 연한 안개 가 낀 초원을 둘러보았다. "린덴, 옷은 샀소?" 제임스가 물었다. "아니면, 파리에서 사겠소?" "네, 파리에서 사 주면 싶어요. 아마, 무척 돈이 많이 드는 아내가 될 거예요" "좋고 말고. 내가 기꺼이 고르겠어" 제임스의 입가가 누그러졌다. "어마, 고마와요. 로체스타님 ....." 린덴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갑자기 그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 오더니 입술을 맙아버렸다. 가슴이 미친 듯이 고동을 쳤고 린덴은 그가 하는 대로 응했다. 발밑에 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풀들이 서걱서걱 소리를 냈다. 결혼식은 눈깜짝할 사이에 끝나 버렸다. 허니문에 입고 갈 호박색 실크 드레스를 갈아입는 린 덴을 보면서 포리는 걱정스러운 듯 당부했다. "제임스에게 따뜻하게 해줘요" "걱정하지 마세요" 린덴은 방긋 웃어 보였다. "우린 서로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 "제임스가 행복을 찾는 것이 나의 유일한 소원인걸" 포리는 끈덕지게 되풀이 했다. "그는 정말 행복해야 마땅한 사람이야. 오랫동안 불평 한 마디 없이 참아 왔어 ...... 오래전에 이혼을 당했어 도 나나 로나나 말 한마디 못할 처지였는데도 제임스는 참아 주었어 ..... 제임스의 행복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면 난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을 거야" 린덴은 포리에게 키스했다. "그 심정은 저도 잘 알겠어요" 하고 말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이 괴로왔다. 포리의 바라는 바 에 어긋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롭고 목에 꽂혔다. 제임스와 린덴은 빗속을 차로 떠났다. 배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린덴은 몸 을 시트에 깊숙히 묻었다. 옆에서 제임스의 손이 뻗쳐오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입으로 가져갔다. "당신이 너무나 눈부셔서 볼 때 마다 숨이 멎을 것 같아" 쉰 목소리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고마와요" 린덴은 운전수를 의식하며 손을 잡아빼고 창가로 얼굴을 돌려버렸다. 비행기에 오르고서도 제임스는 상냥하고 친절했으나, 린덴은 그가 사뭇 자기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프로포즈에 응할 때 분명하게 조건을 말해 주었는데, 아직도 내 마음 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군. 린덴은 도전적인 눈으로 제임스를 쳐다보며, 진짜 싸움은 이제 부터라고 결심을 새로이 했다. 파리의 호텔 룸은 고 호화로왔다. 조용히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는데, 비단 가운을 걸친 제임스 가 욕실에서 나왔다. 수염을 깨끗이 깍은 그는 의미있는 시선으로 린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 는 그런 제임스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빨간 장미꽃잎에 손가락을 대고 냄새를 맡으려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레이스로 가장 자리를 두른 헐렁한 로브의 깃 사이로, 그녀가 움직일 때 마다 속에 입은 네글리제가 힐끗힐끗 들여다 보였다. 제임스는 천천히 걸어와 린덴의 턱에 손을 댔다. "정말 멋있어"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디려고 할 때 처럼 린덴의 가슴은 이상하게 흥분하고 고동이 빨라졌다. 애써 안정을 찾으며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를 띠고 제임스를 쳐다보았다. "그래요?" "당신이 그럴 마음이 될 때 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지만 ....." "영원히 기다려 주셔야 해요" 린덴은 차갑게 그를 밀어냈다. "일년 반 전에 내 몸을 빼앗은 것 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제임스의 얼굴이 상기되고 말투로 바뀌었다. "그리고 어쨌다는 거지?" 두 손을 틀어쥐고 난폭하게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에요. 결혼은 했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제임스는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띠었다. "어떻게 날 피할 수 있단 말이지? 당신은 내 정식 아내가 되었단 말이야. 내가 가만히 놓아둘 거라고 생각해?" "그럼 어디 마음대로 해보세요" 린덴은 화난 얼굴로 덤벼들었다. "제임스, 어서 해봐요. 힘으로 범하는게 어때요?" 린덴의 고압적인 태도에 제임스는가 질렀다. "부탁이야, 린덴!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알지 않아? 내가 참겠어. 내가 바라는 것은 당 신의 행복이야. 하지만 이대로는 둘 다 불행하지 않을까? 잘 좀 생각해 보라구. 나는 지금 까지 형식뿐인 결혼을 참아 왔어. 이번 결혼도 그렇게 된다면 그건 정말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나 마찬 가지야" "프로포즈 하시기 전에 잘 생각하셨어야 했어요. 당신은 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당신은 미워하고 미워해도 다 미워할 수 없는 상대라고 내가 말했잖아요?" 린덴은 그의 손을 뿌 리치고 침실로 향했다. "난 자겠어요, 혼자서요. 잘 자요, 제임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한참 후에 제임스도 와서 그녀 옆에 몸을 뉘었다. 린덴은 굳어진 몸 으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제임스는 애가 타는지 몇시간이나 몸을 뒤척이며 한숨을 쉬고 있 었다. 린덴은 잠든 체하고 있다가 이윽고 진짜로 잠이 들어 버렸다. 눈을 떴을 때 베개에 몸을 기대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제임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 색이 안 좋고 눈 밑에 그늘이 져 있었다. "잘 잤소?" 하고 그는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당신은요?" 제임스의 시선이 린덴의 어깨며 목을 기어다녔다. "통 못 잤어. 우리 이런 짓은 그만 둡시다. 당신으로선 당연한 처사겠지만 이러지 않는게 좋겠 어" 제임스의 눈속에서 위엄스런 빛이 번뜩임을 보고 린덴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늘 예정은 어떻게 되어 있지요?" 제임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알겠소. 당신의 조건을 받아들이겠어. 다만, 이것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줘, 포리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것저것 파고드는 것도 골치아프고 ......" "완벽한 아내가 되겠어요, 낮 동안에는" "고마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제임스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린덴의 가슴속에는 까닭 모를 불 안감이 퍼져 갔다. 서로 칼을 맞부딪칠 것도 없이 패배를 인정하게 만들었는데도, 린덴의 마음은 승리의 기쁨은 커녕 비참한 심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8장 두 사람은 겨울의 파리를 차로 달리며 사이 좋은 신혼 부부처럼 관광이나 쇼핑을 즐겼다. 하지 만 그것은 겉뿐이고 속으로는 응어리가 져 있었으며, 어쩌다가 몸이 스치거나 하면 두 사람은 벼 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이 굳어져서 눈길을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밤이 찾아올 때 마다 제임스는 욕구 불만에 시달렸다. 린덴과 한침대에 드러누워 잠든 체하면 서 긴긴 밤을 지새웠다. 저녁 식사 때면 저도 모르게 포도주에 팔을 뻗곤 했지만, 그때마다 린덴 의 나무라는 눈길을 보고는 팔을 움츠리는 것이 었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가 알콜의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눈 밑에 생긴 검은 그림자가 무엇보다도 잘 말해 주고 있었 다. 제임스는 린덴을 고급 의상실로 데리고 가, 약혼 반지를 살 때와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옷을 골 라 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가 자기 것임을 실감하고, 다소라도 만족감을 얻고 있는지도 모 를 일이었다. 어느 날, 제임스는 세 겹으로 된 진주 목걸이를 사가지고 돌아와 거울 앞에서 린덴의 목에 걸 어 주었다. 그러고는 머리를 수그려 얼른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는 겨우 손을 놓았다. "마음에 들어?" 린덴은 목걸이를 손으로 만져 보고 피부색과 어울리는지 보고서 방긋 웃었다. "멋있어요. 고마와요" 린덴은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빈정거림이 담긴 눈으로 쳐다보았다. 제임스는 처음 만났을 때의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후줄근한 티셔츠 바람으로, 구두도 신지 않고 맨발로 뛰어다니고 있던 깡마른 계집아이 ........ 지금은 딴 사람 같다. 옅은 화장을 하고, 블론드를 살짝 컬한 완전히 세련된 숙녀가 되어 있었다 제임스에게 잡아 꺽여 온실로 옮겨진 야생의 꽃 ...... 그러나 향기는 이미 사라지고 색이 바래 버린것은 아닐까?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남자들의 시선을 느끼는 일이 있었다. 제임스가 갈고 닦 은 그녀의 외관이 남자들의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은 제임스와 처음 만났을 때 의 나를 상상도 못하겠지. 제임스는 나의 순박하고 순진한 면에 끌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건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 다른 남자들이 그녀에게 눈길을 빼앗기고 있는 것을 보면 제임스는 코를 실룩거리며 적대감을 드러낸 눈길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면, 섣불리 가까이 갈 수 없는 그 눈초리에 사람들은 얼른 눈길을 돌려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어느 날 룩셈부르크 공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인상이 좋은 청년이 미소를 보내왔다. 린덴이 반 사적으로 미소를 되돌리자, 그것을 본 제임스는 불쾌한 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리고는 시무룩하니 말을이 없었다. 뭐라고 잔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그는 시무룩한 얼굴로 콘세주리(법원의 부속 감옥) 쪽으로 걷 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 안을 천천히 구경하면서 시간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이곳은 지난날 혁명 정부가 단두대로 보낼 귀족들을 수용했던 곳이다. 야릇하게도 그들은 행복한 시절에 춤을 추었던 그 방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서 제정 시대와 혁명 정부 시대의 유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형식뿐인 결혼은 제임스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린덴이 자청한 것이다. 그러나 날이 거듭 되도록 그녀의 고통도 커갔고 예상외로 괴로왔다. 이제는 자신도 욕구 불만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밤에 린덴은 제일 우아한 드레스를 입었다. 찰싹 달라붙는 것 같은 하얀 실크가 아름다운 몸의 곡선을 그려내고 있었다. 어깨나 발이 드러나는 심플한 디자인의 드레스였 다. 언젠가 제임스가 사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처음으로 걸어 보았다. 머리를 움직일 때 마다 하 얀 살결 위에서 불꼭처럼 반짝였다. "이거 어때요?" 욕실에서 나온 제임스에게 물었다. "정말 눈부셔" 그의 시선이 린덴의 몸을 찬찬히 훑으며 말로 하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식사때 마신 와인의 양이 여느때보다 많았던 탓인지 린덴은 알근한 기분으로 댄스홀로 들어갔 다. 음악에 맞추어를 추다가 린덴은 제임스의 품에서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마을의 댄스 파티를 기억하고 있어요? 난 이제 숫자를 세지 않아도 출 수 있어요" "글쎄, 하지만 아직 코에 주름을 잡고 있어. 조건 반사인가?" 린덴이 미소짓자 그는 그녀의 코끝에 키스했다. 린덴도 제임스의 어깨에 얹었던 손으로 등을 어루만졌다. 그의 몸의 감촉이 손바닥으로 전해지자 머리가 어찔해졌다. 제임스는 눈에 열기 띤 불꽃을 번쩍이며, 그녀의 몸을 받치고 있던 손에 힘을 가하고, 블론드에 입술을 밀어붙였다. 린덴은 상당히 감정을 억누르고는 있었지만, 그의 격심한 고동이 가슴에 전해 오자 온몸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몇 시간이나 계속 춤을 추었다. 그만 두고 싶지가 않았다. 말없이 서로의 품에서 황 홀하게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중에는 거의 발을 움직이 않고 서로 몸을 붙이고 서 있는 상태였다. 겨우 방으로 돌아오자, 제임스는 문을 열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린덴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린덴의 몸에 팔을 돌리고 입술을 청했다. 린덴도 기꺼이 몸을 내맡겼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정신없이 키스에 응했다. 그때 린덴의 머릿속에서 위험을 알리는 벨이 울리기 시 작했으나 포옹을 그칠 수는 없었다. 그저 게임을 즐기고 있을 뿐야, 하고 자기를 타일렀다. 제임스의 손가락이 머리칼을 따라 등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드레스가 스르르 바닥에 떨어졌다. 제임스의 가슴의 고통과 거친 숨결이 린덴의 귓가에 닿았다. 어쩐지 제임스가 불쌍한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그에게 몸을 내맡기고 싶은 자기 자신이 비참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스름 속에서 린덴의 몸은 진주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린덴 ......." 제임스는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드러난 어깨에 따뜻하게 입술을 댔다. 뜨거운 전율이 온몸을 꿰뚫자 린덴은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제임스는 마라톤을 하고 난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며 린덴을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 앞에 서 발을 멈추더니, 조그만 가슴에 키스하고 사랑의 말을 속삭이면서 정신없이 입술을 탐했다. 제임스는 입술을 떼고 린덴을 침대 위에 뉘었다. 제임스가 바닥에 옷을 벗어 던지는 것을 본 린덴은 문득 제정신이 들었다. 여기에서 멈춰야지 ...... 린덴은 몇초 동안 그의 꽉 짜인 다부진 몸 매를 바라보고, 그리고 최대한의 용기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눈을 감고 등을 홱 돌렸다. "잘 자요, 제임스!" 그의 움직임이 딱 그쳤다. 한참 후에 제임스는 낮은 목소리로 내뱉듯이 말했다. "농담하지 말라구! 너무하는군 ....... 정말 이러는게 아니야!" 제임스는 린덴의 어깨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억지로 자기 쪽을 보게 했다. 그의 얼굴은 노여움 과 욕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린덴의 마음속에 긴장과 불안이 치밀어 올랐다. "놓아요! 당신이 손을 대다니 참을 수가 없어요!" 제임스가 입술을 꽉 깨물고 불쾌한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오랫동안 린덴을 쳐다보았다 "알았어. 날 한번 놀렸군! 일부러 날 타오르게 하고 ......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지?" "당신이 싫기 때문 이에요. 머릿속에 잘 새겨 둬요. 당신에겐 진절머리가 나요! 구역질이 나요!" "아까 그게 모두 연극이었단 말이야?"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다정하게 유혹한 것도 키스를 되돌려 준 것도 모두 나를 괴롭히기 위한 짓이었어?" "그래요" 린덴은 제임스를 믿게 하려고 열심히 거짓말을 했다. "결혼하기 전에 말했지 않아요, 당신을 죽이고 싶다고요?" 린덴은 차가운 눈으로 제임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싫어요. 당신도 슬 슬 사랑과 욕망의 차이를 알 만하지 않아요? 초원에 야생화가 피어 있어요. 그것은 꺾으면 안되 는 꽃이에요, 꺾어 놓으면 바로 시들어 버리니까요. 사람도 갖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할 경우가 있 어요. 하지만 당신은 참지를 못했어요 ......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내가 지금 가르쳐 드리고 있는 거에요" 제임스는 조용히 린덴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 옷을 입고 아무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그날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린덴은 그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했을까, 하고 질투와 사 랑과 비참한 기분에 꺾여 버릴것 같은 자신을 나무라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지새웠다. 런던으로 돌아온 뒤 제임스는 린덴에 대해서 등을 돌린 채 모든 정열을 일에다 쏟았다. 린덴도 집안을 어떻게 꾸려 가야 하고 고용인들을 어떻게 부려야 할지, 새로운 생활의 요령을 조금씩 익 혀 갔다. 두 사람은 늘 손님을 초대했다. 린덴은 이내 호스티스 역할에도 익숙해져, 경험 부족을 느끼게 하지 않는 빈틈없는 태도로 제임스의 친구들을 대했다. 언제나 아름답게 차려 입은 그녀는 의상 이나 태도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두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사이 좋은 신혼부부로 행세했다. 제임 스는 늘 린덴에게 웃어 보이며 두 사람의 뜨거운 결혼생활을 암시하는 것 같은 쾌활한 조우크를 던졌고, 린덴도 이에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은 침실을 따로 따로 쓰고 있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할 때에도 남같이 예절 을 차렸고, 이따끔 단둘이 있을 때 눈이 마주치면 린덴은 긴장을 하곤 했다. 한두 번 와일드미어 의 포리를 찾아갔었다. 그때 마다 제임스는 엄숙한 얼굴로 주의를 주었다. "포리 앞에서는 우리 사이가 잘 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란 말이야" "걱정하지 마아요. 조금도 의심을 받지 않게 할데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상상 외로 어려운 일이었다. 포리가 사뭇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린덴 은 허니문이나 신혼 생활의 이야기를 하면서 몇 번이나 제임스에게 미소를 던져야 했다. 한 침대에서 자야 하는 것도 괴로왔다. "미안해" 무표정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는 린덴에게 제임스가 말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 으니 어떻게 하겠어" "난 괜찮아요" 린덴은 어깨를 움츠리고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상관없어요" 린덴은 제임스가 아직 아래층에 있을 때 미리 침대에 들어가 전기불을 껐다. 조금 지나자 제임 스가 와서 침대로 들어와 등을 돌리고 누웠. 린덴은 쉽게 잠들수가 없었지만, 일단 잠이 들자 아 침까지 깨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몸이 그의 등에 딱 붙어 있고, 볼이 그의 어깨에 닿아 있 었다. 얼른 몸을 떼자 제임스가 졸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린덴은 어색한 듯이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하지요? 난 포리가 앨범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소녀 시절의 추억에 잠기는 것이 포리의 제일가는 즐거움이었다. "드라이브나 골프를 하고 오겠소. 포리에게 따뜻하게 대해 줘서 고마와" 포리는 낡은 사진과 그림을 꺼내어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은 순진한 얼굴로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린덴은 몇십 년이나 된 사진이 진기했고, 포리의 추억담도 매우 재미있었다. "당신과 제임스는 사람들 앞에서는 맨숭맨숭하게 행동하는 것 같더군. 내 눈치는 볼것 없어요. 나는 키스신을 본대도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을 테니 ......." 린덴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싫어요. 제임스를 잘 아시지 않아요? 사람들 앞에서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닌걸요" 하지만 그날 저녁 식구들이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할 때, 린덴은 제임스의 손가락에 자기의 손 가락을 깍지끼었다. 제임스는 깜짝 놀라 손을 보고는 물끄러미 린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린덴은 웃는 얼굴로 포리와 이야기를 계속하면서도 제임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5분 정도 지나 린 덴이 제임스를 놀려 주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입으로 가져가 키스했다. "그런 말을 하면 벌을 줄테니 조심하라구" "어마, 야만스러워!" 린덴은 밝게 웃고 상대하지 않았으나, 제임스가 자기의 입술을 노리고 바 싹바싹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의 가슴은 크게 물결쳤다. 키스를 하려고 하는군. 벌써 몇 주 동 안이나 키스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입술이 닿으면 자기가 어떻게 될지 자신이 없었다. 제임스는 그녀의 턱을 손으로 받치고 가볍게 입술을 겹쳤다. 린덴은 웃으면서 그를 밀어냈다. "제임스, 우린 이제 신혼이 아니에요, 싫어요" 방으로 돌아오기 전에 포리는 린덴에게 키스하고 가볍게 볼을 찔렀다. 그녀의 눈에는 피로의 기색이 보였으나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즐거웠어, 린덴. 이 늙은이를 상대하느라고 무척 힘이 들었지?" "아니에요, 저야말로 정말 즐거웠어요. 애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어서요 ......" 제임스는 짙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린덴의 가는 허리에 팔을 돌려 확 끌어당겼다. "포리, 린덴은 아직 철이 없으니까 이상한 애기는 들려주지 마세요" "이미 때는 늦었어요" 린덴은 제임스를 돌아오고 웃었다. 포리는 미소지으며 나갔다. 문이 닫힌 순간 린덴은 몸을 떼려고 했으나 그는 허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지막의 그 말은 무슨 뜻이지?" 린덴은 망설였다. "조크였어요" "조크? 그렇기를 바라. 하여튼 포리를 즐겁게 해줘서 고마와" 런던으로 돌아오자 다시 언제나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제임스는 항상 일에만 파묻혀 있었고 언 제나 기분은 안 좋았다. 파티에서 누가 귀띰해 준, 제임스의 일에 대한 태도는 냉혹하기 이를데 없으며, 결혼을 했는데도 조금도 나아질 줄 모른다고 한 말이 린덴의 가슴을 찔렀다. 어느 날 파티에 초대받은 린덴은 윤기 있는 피부에 잘 어울리는 까맣고 차분한 드레스를 입었 다. "옷이 어떨지 모르겠어요?" 파티장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제임스에게 물었다. "네클라인이 너무 패었군" 제임스는 할긋할긋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 저녁은 줄곧 제임스의 감시를 받는 기분이었다. 벌써 마음이 맞는 친구나 주위에 서성대 는 남자들이 생겼기 때문에, 린덴은 도착하기가 무섭게 인사를 하느라고 바빴다. 남자들은 그녀의 대담한 드레스를 칭찬했으나, 린덴은 제임스의 날카로운 눈길을 의식하고 조심스런 태도로 응대 했다. "이렇게 나와 줘서 고마와요" 파티의 주최자인 찬 후작은 호의적인 눈으로 린덴을 바라보았다. "꼭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언젠가 이야기 해드린 당신 아버지의 그림을 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그는 린덴의 얼굴색이 달라지는 것을 흥미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별로 즐거운 그림이 못 되어서요" 린덴은 솔직하게 말했다. "당신과는 딴판이지요" 후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린덴은 볼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오늘 저녁은 다른 남자들의 아첨도 많이 들었지만, 그의 조용한 한마디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얼굴을 붉히시는 것도 참 보기 좋군요" 그의 시선이 드레스로 옮겨졌다. "정말 눈부십니다. 자, 그럼그림을 보러 가십시다." 그는 린덴을 다른 방으로 안내해 갔다. 린덴은 그림을 보면서, 어머니의 죽음이 아버지의 그림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담담하게 설명 했다. "고맙습니다. 그려진 배경을 알면 그림의 진가가 더욱 드러나니까요. 물론 아무것도 모르고 보 아도 눈부신 작품이긴 하지만 ......" 그의 말투는 신중하면서도 듣기에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는 자제심이 있는 조심스런 남자였지만, 린덴에 대한 마음은 숨길 수 없었는지 그녀를 뜨거 운 눈길로 쳐다보면서 홀로 돌아왔다. 린덴은 그도, 자기도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제임스의 아내이고, 찬 후작 역시 명예나 지위에 상처를 내 고 싶지 않을 테니 어리석은 짓은 할 턱이 없다고 생각하며 안심했다. "마크라고 불러 주십시오" 린덴에게 음료수를 따라주며 말했다. "고마와요, 마크" 린덴은 글라스를 받아 입에 댔다. "난, 린덴이에요" "당신의 아버지는 정말 천재이십니다. 당신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개성적이고 멋있어요" 소파에 기대어 드링크를 마시고 있던 제임스가 글라스를 비우고, 또 한 잔 따르기 위해서 디캔 터 쪽으로 걸어갔다. 린덴의 눈에 그의 움직임이 비쳤다. 긴 속눈썹 밑으로 린덴은 떡 벌어진 그 의 등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린덴이 마침 마크에게도 시선을 돌렸을 때, 놀라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마, 제임스! 정말 오랜만이에요" 제임스는 가식적인 미소를 띠었다. "알렌, 미국에서 빨리 돌아왔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럴 생각이었어요, 제임스. 이혼할 때 까진 ........." 린덴이 힐끗 그쪽을 보자 제임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린덴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으나, 그녀 는 마음속에 타오르는 질투의 불길 같은 건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다. 옛날에 관계가 있었던 여자 겠지. 두 사람의 허물없는 태도가 깊은 관계였음을 말해 주었다. "내 사촌누이 알렌 이네스요" 린덴의 시선을 눈치챈 마크가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골치 아픈 이혼 문제를 겨우 처리하고 막 돌아왔어요" 린덴은 호의적인 눈길로 마크를 쳐다보았다. "언제 우리 아버지를 만나 주시지 않겠어요? 당신은 틀림없이 아버지의 마음에 드실 거에요. 어마, 실례가 되는 말을 한 것 같군요. 예전부터 전 아버지의 마음에 드느냐 어떠냐로 사람을 판 단하는 버릇이 있어서요" 그는 모양 좋은 눈썹을 움직였다. "아니, 난 반갑습니다. 아버지의 그림에나 그 따님에게나 난 정말 감탄하고 있으니까요" 린덴은 웃으며 그의 찬사를 받아들였다. 마크는 그녀의 다이아몬드 팔찌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정 말 아름답군요" 그 말투에서 비난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린덴은 얼굴을 들었다. "그런데요?" "이런 건 당신에겐 필요가 없어요. 당신의 진짜 아름다움에서 눈길을 돌리게 하니까요" 그러고 는 손을 떼고 다시 냉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한 잔 더 어떻습니까?"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제임스는 사뭇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린덴이 이층으로 가 서 편안한 기분으로 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제임스가 나타났다. 아늑한 기분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자 린덴은 브러싱하던 손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은 마치 결투를 하려는 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불꼿을 튀겼다. "린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좋은 상대를 발견했어?" "어마, 누구말예요?" 일부러 모른 체하며 되물었다. "그 게임에는 또 한 사람 참가할 수 있을 테니 ....." 제임스는 린덴의 물음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기는 것은 한 사람뿐일 거에요" 린덴은 브러시를 놓고 가운을 벗어 의자에 걸친 다 음 모포를 젖히고 침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제임스는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어깨에 힘을 준 채 우두커니 문앞에 서 있었다. "잘 자요, 제임스!" 린덴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의 스위치를 껐다. 어둠 속에서 분노에 떨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찬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구. 그렇지 않으면 ....... 나도 사람이니까 ....." 제임스는 문을 닫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교제 범위는 마크의 교제와 겹쳐져 있어 린덴은 늘 그를 만나게 되었고, 조 용하고 지성적인 그의 인품에 차차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제임스는 어디를 가나 눈부신 미녀들 에게 에워싸였다. 그녀들을 상대로 농담을 하고 있을 때 조차 그는 린덴과 마크에게 눈길을 번득 이고 있었다. 결혼한 지 3개월 가량 지난 어느 날 아침, 제임스는 일 관계로 뉴욕으로 가게 되었다. "일주일 정도면 돌아올 테니까, 당신은 와일드미어의 포리한테 가 있지 않겠소? 데리고 가고 싶지만 일이 바빠서 당신과 같이 돌아다닐 수도 없고, 뉴욕은 여자 혼자 돌아다닐 곳이 못 돼요" 하고 그가 말했다. "그렇게 하겠어요" 선뜻 대답하자 제임스는 표정이 누그러지고 안심한 듯 한숨을 쉬었다. 마크 와 데이트하기 위해서 런던에 남겠다고 말하까 싶어 걱정을 했던 것 같았다. 린덴은 제임스의 부탁으로 공항까지 그를 바래다 주었다. 그녀가 그와 동행하는 세 명의 중역 과 악수를 나눌 때, 그중의 익살스런 한 남자가 푸른 눈을 굴리며 말했다. "우리한텐 마음 쓰시지 마십시오. 신혼이 어떤 것인지 잘 아니까요. 자, 우리는 저쪽을 보고 있 겠으니 작별의 키스를 나누십시오" 린덴은 태연하게 웃고 있었으나 맥박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제임스가 내게 배웅해 달라고 한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린덴은 벌써 몇 주 동안이나 그의 팔에 안겨 본 일이 없었다. 그녀가 침착하게 제임스 쪽으로 몸을 돌리자 햇별에 그을은 볼이 긴장하 면서 파르르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린덴은 다소곳이 얼굴을 들고 가볍게 입술을 댔다. 그러자 제임스는 그녀의 몸을 꼭 안더니 거 친 키스를 퍼부었다. 린덴은 몸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욕구가 시키는 대로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몸을 꼭 붙이며 온몸으로 그에게 응했다. 두 사람의 몸이 떨어졌을 때, 제임의 얼굴은 상기되고 숨결은 거칠어져 있었다. 제임스는 낮은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욕구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 린덴을 남겨놓고, 일행 세 사람과 함께 떠나버렸다. 린덴이 와일드미어에 가자 포리가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두 사람은 완전히 의기 투합해 시간 가는 것도 모르고 수다를 떨기도 하고, 몇 시간이나 아무말 없이 책을 읽거나 음악에 귀를 기울 이거나 했다. 대화가 없다고 해서 어색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포리는 정말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녀의 소녀 시절의 추억담이나 로맨스나 결혼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끝려들었으며, 정말 즐거운 기분에 젖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포리는 두툼한 앨범을 꺼내서 린덴 앞에 펼쳤다. 수염을 기르고 예스런 옷을 입은 남자들의 색이 바랜 사진에 린덴은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포리는 모포로 몸을 싸고, 손가락으로 조그만 흰 이 두개를 만지며 웃고 있는 아기를 가리켰다. "이게 누군지 알겠어?" 린덴은 가슴이 뜨끔했다. "제임스가 아닐까요?" 제임스도 옛날에는 당연히 아기였을 텐데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요, 제임스야" 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턱을 좀 보아요. 그리고 이 눈 ....... 태어났을 때 곤색이었는데 차차 밝은 빛깔이 되어 갔어요 ........ 제임스의 어머니가 부럽군. 나는 로나밖에 없으니 ....." 린덴은 아기의 웃는 얼굴에 눈을 빼앗겼다.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어쩌면 이렇 게 귀여운 얼굴일까. 살결도 정말 보드라와 보인다. 품에 안고 볼을 비비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 나 그녀는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난 그의 아내지 어머니는 아니다 ...... 그리고 나도 내 아기를 갖지 않는다면 어머니로서의 기쁨을 맛볼 수도, 기분을 알 수도 없는 것이다. 그날 밤 린덴은 침대에 들어가서도 계속해서 마음이 심란한 것을 자기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으 며, 오랫동안 잠들수가 없었다. 제임스에 대한 복수 계획을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 보았다. 너무나 괴로와서 이대로 계속할 자신이 없어져 갔다. 린이나 제임스의 말처럼, 역시 자기는 상처를 받지 않고 제임스에게만 타격을 준다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가 아닐까? 제임스를 생지옥에 가두어 둘 작정이었는데, 나까지 그와 함께 끌려들어가 버렸다 ........ 이 괴로움을 참아낼 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가 없다. 완전한 제임스의 아내가 되고 싶다. 다시 그의 애무를 받아들이고, 그를 닮은 검은 머리칼과 잿 빛 눈을 가진 아기를 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린덴은 주말에 런던으로 돌아왔으나, 제임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2, 3일 안으로 꼭 돌아가겠소" 하고 제임스는 전화로 사과했다. "다시 한번 포리한테 갔다오는 것이 어때요? 그쪽으로 걸었더니, 이미 당신이 런던으로 떠난 뒤였소"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전화 고마와요" 애써 실망감을 감추며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제임스는 잠시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린덴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튿날 오후, 본드가에서 물건을 사다가 우연히 다니엘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한동안 숨을 멈 추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윽고 다니엘의 날카로운 시선이 린덴의 몸에 두르고 있는 우 아한 옷이며 값비싼 보석 위를 스쳤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어머니, 안녕하십니까?" 그는 심술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무척 많이 받으신 것 같군요"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린덴은 그의 빈정거림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조용히 물었다. "만나 뵈서 영광입니다. 바로 요 앞의 호텔에 묵고 있는데, 시간이 있으니 잠자리 상대나 해드 릴까요? " 린덴은 핏기가 싹 가신 얼굴을 홱 돌리고 그자리를 떠나려 했으나 바로 다니엘에게 붙들려 버 렸다. 린덴의 린덴의 눈에서는 굴욕의 눈물이 스며 나왔다. "부탁이야. 울지 말라구, 린덴. 사람들이 보고 있지 않아?" 그가 어린아이처럼 당황했기 때문에 린덴도 웃음이 나왔다. "우리 뭘 좀 마시면서 이야기 하자구" 다니엘은 린덴을 호텔로 끌고 갔다. 린덴은 화장실에서 얼굴을 닦고 메이크업을 고치자 겨우 기분이 가라앉았다. 글라스를 기울이면서 다니엘이 린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행복해요, 린덴?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데 ......" 린덴은 짐짓 미소를 띠고 슬쩍 말을 피했다. "당신은 어때요, 다니엘?" 그러나 다니엘의 날카로운 눈은 속일 수가 없었다. "잘 되어 가지 않는 것 같군.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 .......... 그때는 돈이 탐이 나서 그랬던 거 요,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한 거요?" "뭐 별로 생각한 것도 없어요. 그리고 재산이 욕심이 난 것은 아니에요. 그가 버스 운전사라 해 도 같은 짓을 했을 거에요" 다니엘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버스 운전사를 하는 아버지는 상상할 수도 없군" "그렇겠지요. 하지만 제임스 같으면 버스 운전을 하고도 남아요" "그야 그렇겠지" 그의 표정에는 또다시 적대감이 깃들었으나, 린덴은 태연하게 애기했다. "당신을 아프게 할 생각이나 속일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다니엘. 당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전혀 몰랐지만, 만일 알았더라면 절대로 당신을 따라가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다니엘은 어깨를 추스르고 린덴을 노려보았다. "그럼 당신은 우리 아버지와 재회할 찬스를 노린 것이 아니라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었단 말이 야?" 린덴은 대답이 막혀, 뭐라고 하면 좋을지 잠시 생각한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다니엘,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두지 않겠어요? 새삼 그런 걸 따져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요?" "린덴 ......." 하고 말을 하려다가 그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당신의 말이 맞아" "우린 처음부터 잘못 시작한 건지도 몰라요. 제임스에 대해서 털어놓아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 하지만 그런 일을 고백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야 당신하고 결혼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나도 고백했을 거예요. 일생을 속이고 살 수야 없는 일이니까요. 프라이버시와 거짓말은 전혀 다 르잖아요 ........." 다니엘은 오랫동안 그녀를 쳐다보다가 이윽고 손을 내밀었다. 그 위에 린덴의 손이 포개어지고 두 사람은 악수했다. "자" 다니엘은 완전히 밝은 얼굴로 돌아갔다. "오늘 저녁엔 모처럼 같이 식사않겠소? 빨리 돌아 가야만 해요? " "아니에요, 제임스는 지금 뉴욕에 가 있어요" 린덴은 그렇게 말하고 그를 쳐다보다가, 다니엘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다니엘은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욕에 아버지가 왔다는 건 신문에서 보고 알았어요. 그래서 호텔에 전화를 걸어 보았더니 당신 은 오지 않았다더군. 그래서 잽싸게 영국으로 날아왔지" 린덴은 나무라듯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일을 하면 못 써요" "당신을 두들겨 패주려고 했지. 생각나는 욕설을 모두 퍼부어 형편없이 만들려고 했는데, 벼르 고 벼르던 마음이 첫눈에 그만 꺾여 버렸어요. 당신의 그 눈부신 모습 때문에 ....." 린덴도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사실은 그것뿐이 아니었겠지요? 나를 야단치는 것만으로는 마음 이 풀리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제임스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검은 머리칼이나 골격뿐만이 아닐 테니까.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전의 친구 같은 느낌으로 되돌아갔다. 린덴은 자기가 그런 우 정을 얼마나 필요로 하고 있는가를 절실하게 느꼈다. "집에 가서 함께 식사하지 않겠어요?" 린덴이 권하자 다니엘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시는 그 집 문턱을 넘지 않을 생각이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제임스는 당신의 아버지고, 제임스의 집은 당신의 집이에요" "아버지가 나를 용서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분명 다니엘은 집을 나온 날 밤에, 다시는 돌아오 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렇게 당신과 단둘이 있는 것을 아버지에게 들켰다간 내 목숨은 붙어 있지 못할 거요" "다니엘, 그럼 가족은 엉망이 될게 아니에요?" "그렇게 된다 해도 제임스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란 말이오" 다니엘은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포리는 여간 가슴 아파하는게 아니에요. 그리고 나도요 ........ 모든 것이 내 탓인걸요. 당신네 부자의 사이를 갈라 놓은 것도 ......." "린덴, 당신을 만나지 못해서 얼마나 괴로왔었는지 몰라요" 다니엘은 갑자기 진지한 눈으로 말 했다. "당신은 모르겠지. 뉴욕에서 사귄 여자들과 어울려 봤지만 도무지 따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 "나를 당신의 계모로 인정해 줘요. 제임스의 아내로서 인정해요. 그리고 돌아와 줘요, 다니엘!" 다니엘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제이슨이 허락할 줄 알아요? 당신이라면 그저 부르르 떠는데" "어마, 당신은 지금 <제이슨>이라고 불렀어요!" 린덴은 문득 깨달았다. "다른 때는 <아버지>나 <아빠>라고 했는데 ........." 다니엘도 얼굴을 붉히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나간 3개월 동안에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군요. 자립했다는 증거예요" "그럴늘지도 모르겠군. 음, 어쩐지 나 자신도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어. 뉴욕에서 혼자 그럭저럭 해나가고 있으니까 ........" 하고 그는 웃는 얼굴로 린덴에게 말했다. "런던으로 돌아와 당신을 빼앗 아 버리겠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했었지. 잘못 생각했었던 거지. 하지만 저녁 식사는 집이 아닌 어 디 다른 데서 했으면 좋겠는데. 아직 당당하게 발을 들여놓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아" 그래서 두 사람은 거리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린덴은 오랜만에 푸근한 마음으로 즐겼다. 제임스에 대한 일은 머릿속에서 몰아내고, 다니엘의 뉴욕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차가 집에 도착한 건 열 한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다니엘은 차에 탄 채 집을 씁쓸하게 쳐다보 았다. "벌써 여러 해 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것 같군" 양심린덴에게 얼굴을 돌렸다. "오늘 저녁은 고마 왔어요. 내일 뉴욕으로 돌아가겠어. 다시 올 때는 제대로 전화를 걸어, 제이슨에게 탕아가 돌아온 다는 것을 알리겠소" "그렇게 해줘요!" 린덴도 미소지었다. "제임스도 당신을 좋아해요. 하지만 ........" "알고 있어요. 제이슨은 나의 아버지지만 동시에 한 남자이고 더구나 당신을 깊이 사랑하고 있 어요" 다니엘은 무심코 한 말이었으나, 그것은 린덴의 마음을 울렸다. 그렇지, 제임스는 한 남자 - 완 전무결한 신이 아니라 이따금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는 인간인 것이다. 유혹에 져서 본능을 억제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악마나 괴물이 된 것은 아니다. 자기의 본능에 충실했던 것뿐이다. 다니엘은 걱정스러운 듯 린덴을 들여다보았다. "린덴, 왜 그러지?"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미소를 지었다. "다니엘, 너무 2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아요. 포 리는 이젠 나이도 많이 든데다가, 당신을 굉장히 만나고 싶어해요" "나도 그래요" 다니엘은 다정하고 조용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잘 자요, 린덴!" 린덴은 다니엘의 볼에 살며시 키스했다. "잘 가요, 다니엘!" 집안은 어두웠다. 하지만 홀을 가로질러 가다 보니, 서재 입구에 서 있는 제임스의 모습이 희미 하게 보였다.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단추를 풀어서 가슴의 털을 드러낸 채, 수염을 깎지 않 은 무서운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임스! 오늘 돌아올 줄은 몰랐어요!" 그의 모습을 본 순간심히 흔들리기 시작한 자신을 의식 하고 린덴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것 같군" 제임스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린덴, 어디 갔었지? 그것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당신의 계획이야? " 린덴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어쩌면 창밖으로 다니엘의 모습 을 봤는지도 몰라 ....... 제임스는 두 손을 꼭 틀어쥐고 격분하고 있었다. "왜 대답을 못 하지? 다른 남자에게 몸이라도 허락했나?" 제임스의 고통에 찬 목소리에 린덴은 기가 질렸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제임스!" "하지만 그럴 생각이었지? 당신의 계획은 나도 알고 있어. 갓 결혼했을 때는 그래도 나의 지난 잘못에 대해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도대체 얼마나 더 지독한 괴 로움을 준 끝에 목을 따자는 거야?" 린덴은 자기의 행위가 얼마나 잔인하고, 얼마나 그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는지를 생각하고 공 포에 몸을 떨었다. "상대는 누구지, 찬이야?" 혐오에 가득 찬 냉랭한 목소리였다. "아니에요" 린덴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쇼핑을 갔다가 다니엘을 만났어요 ....." "다니엘?" 그는 뱉아내듯이 소리쳤다. 잿빛 눈이 활활 불타고 억센 턱의 선이 굳어졌다. "도대 체 그게 뭐야. 어떻게 ....... 그렇게 까지 형편없이 나를 거꾸러 뜨리려는 거야? " 린덴은 뭐라고 설명하려고 했으나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이제는 그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심, 고통도 모두 사라졌다. 결혼한 후 몇 달 동안에, 태양이 눈을 녹이듯이, 사랑이 천천히 미 움을 녹여 갔던 것이다. 사람을 이해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한 린의 말이 옳았다. 제임스는 참다운 가정을 가져 본 일이 없고, 가족의 사랑에 굶주려 왔다. 그리고 그가 살아온 것은 이해 타산과 성공을 위한 투쟁의 세계뿐이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나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도, 우선 자기 것으로 만들어 않고 봐야겠다는 생각부터 하게 되었던 것이다. 승리자로서 살아온 제임스에게는 진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그에게 한눈에 반했었다. 아직 어리고 세상을 몰랐던 나는 대담하게도 제임스에게 싸움을 걸었었다. 그때 그는 아내나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 2, 3일 휴양할 생각으로 요크에 찾아온 것이 었다. 가명을 쓴 것은 현실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와지고 싶기 때문이었겠지. 재산이나 권력이나 명성의 힘을 빌지 않고, 이름없는 한 남자 제임스로서 다루어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제임스는 자기에게 경계심을 전혀 갖지 않는 나에게 자기도 남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내가 부끄러워하게 만들려고 가볍게 키스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생전 처음으 로 사랑을 했다 - 그렇게 말한 제임스의 말을 나는 믿고 있다. 사랑인 줄 알았다면 그는 늦기 전 에 거기에서 몸을 빼냈어야 했는데도 ........ 하지만 그 일로 더 이상 제임스를 탓할 수도 없다. 왜 냐하면, 그때 그는 진짜 사랑 - 실업가이고 재산가인 설 제이슨 와이어트가 아니라, 한 남자로서 자기를 받아들이는 사랑 - 을 막 발견 했을 때니까. 그녀는 지금,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 제임스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린덴을 쳐다보고 있더니, 그녀가 아무말도 없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걷기 시작했다. "제임스!" 린덴은 그를 부르려 했지만 목이 꽉 막혀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계단으로 접어 드는 제임스의 뒷모습을 본 린덴은 바닥에 주저 앉아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결혼하고 나서도 다시 시작할 찬스는 있었는데, 내가 오기를 부려 두 사람 사이의 틈이 더욱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는 늦었다. 어쩔 수가 없다. 린덴은 비참한 생각에 소리를 내어 울었다. 제임스가 무릎을 꿇고 린덴의 몸에 팔을 돌려 아기를 달래듯이 다정하게 흔들었을 때, 린덴은 흐느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제임스 ...... 제임스 .........!" 흐느끼며 그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아니, 왜 이러지? 울지 말라구, 린덴" 그는 귓가에서 속삭이며 머리칼에 볼을 비볐다.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린덴은 그의 목에 키스하면서 신음하듯 말했다. 제임스는 온몸이 굳어지며 짧은 한숨을 쉬더니, 그녀의 작은 어깨를 잡고 몸을 떼어 놓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당신은 알고 있소? 아니면 또 연극이야? 날 더 이상은 몰아대지 말라구, 그러면 당신을 힘으로 빼앗을지도 모르니까" "날 사랑해 줘요!" 린덴은 그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이제는 참을 수가 없어요. 당신이 좋아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제임스는 눈을 감고 입술을 떨었다. "린덴, 날 놀리지 말아 줘. 난 이제 인내의 한계에 와 있단 말이야. 내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가 없어. 계속 이렇게 나오면 이성을 잃지 않고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 린덴은 그의 눈앞에서 재킷을 벗고 드레스의 파스너를 끌어 내렸다. 제임스는 꼼짝도 하지 않 고 불타는 뜨거운 눈길로 가만히 보고 있었다. 린덴은 그의 품안안에 몸을 던지고, 서늘한 그의 살의 감촉을 느끼면서 목이며 어깨에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제임스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는지 린덴에게 몸을 밀어붙였다. 눈부신 금발이 융단 위에 펼 쳐졌다. 그는 두 손으로 린덴의 얼굴을 감싸고 정신없이 입을 맞추다가, 갑자기 얼굴을 들고 몸을 일으키더니 린덴을 안아 들었다. "여기서는 안 돼. 하지만 침대까지 옮기는 동안 마음을 바꾸지는 말아 줘. 그러면 나는 정말 미 쳐 버리고 말거야 " 제임스는 그녀를 꼭 안아 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린덴은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손가락 끝으로 제임스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예리한 얼굴 모습을 반한 듯이 쳐다보았다. "사랑하고 있어요, 제임스. 뉴욕으로 가버렸을 때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어요. 당신 의 모습을 볼 수가 없어 참을 수 가 없었던 거예요 ........... 당신은 내것인걸요" 분명 제임스는 린덴의 것이 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실로 영 원히 맺어져 있었다. "당신은 내 것이야" 그도 뜨거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용서해, 린덴. 제발 부탁이야!" "벌써 옛날에 용서했어요" 눈물이 마구 솟아났다. "인정하려 하지 않았을 뿐이요. 언제까지 나 당신을 미워한다는 건 무리한 노릇이었어요,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 걸" "아아, 린덴!" 그의 입술은 하얀 목을 타고 내려갔고 손가락은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애무하며 죄어댔다. 린덴은 침대에 뉘어지자 그의 몸을 끌어당겨 키스하면서 떨리는 손가락으로 옷의 단추를 풀었 다 버드나무 밑에서 제임스가 그녀를 이끌어 갔던 밤과는 달리, 오늘 저녁의 두 사람은 몇 달이나 쌓이고 쌓인 욕망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린덴은 오랫동안 자기의 마음을 묶어 놓았던 고통의 실이 제임스의 사랑의 힘으로 한 가닥씩 한 가닥씩 끊어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폭풍우 처럼 거센 사랑은, 몇 달 동안이나 두 사람 위에 낮게 드리워져 있던 검은 구름을 한꺼번에 날려 보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축 늘어져 가벼운 키스와 함께 서로 팔베개를 한 채 기분좋게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이튿날 아침 홍차를 날라 온 메이드는, 눈앞의 광경에 나자빠질 듯이 놀라 얼굴을 새빨갛게 물 들이며 제임스의 차잔을 테이블 위에 놓자 허둥지둥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린덴은 눈을 뜨고 몸을 움직였다. 볼이 제임스의 가슴에 닿는 것을 느끼고 믿을 수가 없어 눈을 동그랗떴다. 그러나 바로 어젯저녁의 기억이 되살아나 행복에 가득 찬 표정 으로 제임스에게 몸을 비벼댔다. 제임스는 나른한 듯이 돌아누워 크게 기지개를 켜더니 붉게 물든 린덴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 다. "린덴, 나의 린덴 ....... 귀여운 린덴 .........." 린덴은 그의 실팍한 어깨에 얼굴을 밀어붙였다. "사랑하고 있어요, 제임스!" 어젯저녁에 이 말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해도 모자라 는 것 같았고, 그때마다 믿을 수 없는 신선한 울림을 느꼈다. "미안해요. 결혼 후에 내가 너무 했어요" "나한테 사과하다니, 그러지 말라구, 린덴. 당연한 보복을 받은 거야. 변명은 아니지만, 어째서 내가 그렇게 자기 위주로 나갔었는지 설명이나 하게 해줘" "나도 알것 같아요. 무척 많이 생각했어요. 당신도 신이 아닌 사람이다, 하는 생각이 든 뒤로 용서할 마음이 생겼어요" "신?" 제임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정말 우습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어?" 린덴도 그에게 끌려서 웃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랬어요. 딴 세계에서 온 힘차고 매력적인 히어로우인 줄 알았어요. 그랬기 때문에 쉽 게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모두 처음부터 계획하고 한 일인 줄 알았는걸요" 제임스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럴 생각은 없었어! 맹새해도 좋아! 런던의 생활에 싫증이 난 내 앞에 세상에 때 묻지 않은 귀여운 소녀가 나타났기 때문에 조금 놀려 주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 어. 첫날부터 그만 당신한테 열중해 버렸던 거야. 누구에 대해서 그토록 격렬하고 뜨거운 마음을 가진 것은 난생 처음 이야. 당신한테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가르쳐 주자, 나를 의식하게 만들자, 하다보니 나 자신이 자꾸 깊은 곳으로 끌려들어가 버려서 ........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되어 버렸던 거야. 당신으로부터 떨어져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런 생각만 해도 참을 수가 없었어. 하지만 댄스파티가 있던날, 당신과 헤어지자고 결심했던 거야. 당신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 함께 있기란 너무 무리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래요?" 린덴은 그의 몸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고 조그만 소리로 속삭였다. "냇가에서 당신의 옷을 보았을 때는, 자제심이 있을 때 돌아가야 한다고 자신에게 타일렀지. 당 신이 실오라기 하나 몸에 두르지 않고 헤엄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어. 한데, 돌아가려고 해도 다리가 말을 들어야 말이지 ....... 그러다가, 당신의 모습을 한번만 보고 가자는 생각에 꺾였 지" 제임스는 스스로를 비웃듯 미소를 띠었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나 자신도 알고 있었어. 당신을 본 순간 이팔에 안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었어 ........" 달빛에 비치는 물, 나른한 공기, 정열적인 제임스의 얼굴 - 그날 밤의 광경이 어제 일처럼 되살 아났다. "아, 제임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나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당신 을 바라고 있었어요" 제임스는 린덴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다정하게 입술을 밀어붙였다. "나 혼자 피해자인 체 했지만 내게도 책임이 있었어요 그때 당신을 밀어냈던들 당신도 무리하 게 나를 덮치거나 하진 않았을게 아니에요?" 제임스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린덴. 나쁜 것은 나야. 아직 나이가 어렸던 당신한테 어른의 사랑을 요구했던 거지. 당 신은 그 의미를 몰랐어. 하지만 나는 달라.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어. 독신 이라고 거짓말까지 했고, 하여튼 나빴던 것은 나야" 침울한 표정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당 연한 벌로 알고 요 몇달을 참아 온 거야" "결혼만 하면 내 기분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의 볼이 붉어졌다. "그러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 하고 린덴의 미소띤 얼굴을 내려다 보며 그는 말끝을 흐렸다. "나도 바보가 아니었어요.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굳게 닫고 고집을 부리 고 있었던 것같아요" 제임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른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는 것까지도 계획에 들어있었단 말이야?" 린덴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잔인해질 수야 있겠어요? 그런 짓을 했다간 나 자신이 먼저 망가져 버리고 ........우선 내 성격으론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제임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에게 보복만 할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자포자기하고 있는게 아 닌가 하고 걱정했었지" "제임스 ......." 린덴은 그가 거기까지 자기를 걱정해 준 일에 목이 메었다. 제임스는 린덴을 끌어당겨 눈을 감고 머리칼에 키스했다. "사랑하고 있어.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청춘 시절을 잃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 어. 젊어서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의 결혼을 강요당한 후 사랑의 기쁨도 모르고 살아왔어. 당신 덕분에 그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나는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거야. 자신이 혐오스러워 죽고 싶었어" "안 돼요, 제임스. 그건 안 돼요!" 그의 괴로움을 잘 알 것 같았다. "꼭 찬스를 만들어 당신에게도 그 기쁨을 맛보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결혼하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말이야 ....... 프레젠트 공세를 벌이며 얼마든지 응석을 받아 주고 싶었어. 하지만 멸시 와 미움이 뒤섞인 당신의 눈길을 볼 때 마다 죽고 싶었어" "사랑하고 있었어요!" 린덴은 눈물을 가득 머금고 소리쳤다. "당신의 아이를 낳고, 죽을 때 까지 함께 살고 싶어요" "나도 ......." 하고 말하며 제임스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난 40이 멀지 않은 나이야. 우리는 너무 나이 차이가 나. 내가 아니라 다니엘하고 결혼했으면 꼭 맞았을 거야" 그렇게 말하 면서도 눈에는 질투의 빛을 번득였다. "난, 다니엘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다니엘은 이제 걱정없어요. 정말이에요. 되살아 났어요. 몇 달 지나면 그는 나를 당신의 아내로 밖엔 생각하지 않게 될 거예요" 제임스는 눈치를 보듯이 린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럼 당신은 다니엘을 잊을 수 있어?" "다니엘의 얼굴을 볼 때 마다 당신의 얼굴이 겹쳐져 보였어요. 처음에는 지나친 상상력 때문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에게 끌렸던 것은 그가 당신을 닮았기 때문이었어요. 와일드미어에서 당신을 보았을 때, 내가 찾고 있던 것은 당신이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처음 만났 을 때부터 나의 마음은 당신의 것이었어요" 제임스는 린덴에게 다시 뜨거운 키스를 퍼붓더니 괴로운 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몇 달만 더 참고 기다릴 수 있었다면 정정당당하게 결혼할 수 있었을 텐데 ....... 하지만 로나가 영원히 살아있고, 나는 일생 동안 당신을 손에 넣을 수 없을 줄만 알고 불안해져서 ......... 그렇게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어서 굶주린 소년처럼 당신을 빼앗아 내 사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던 거야" "하지만 사랑은 강했어요" 린덴은 열심히 말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사랑은 결코 죽지 않아 았잖아요? 이제부터는 앞을 보고 살아야 해 요. 나는 아이를 갖고 싶어요. 당신에게 진짜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이제 이 애기는 그것으 로 그만 끝내기로 해요" 제임스는 눈을 감았다. "아, 그렇게 하자구. 내게 이런 행복이 찾아오다니 정말 꿈만 같군" 린덴은 그를 쳐다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꿈이 아니에요, 제임스. 어젯저녁 나를 손에 넣은 것처럼 행복도 손에 넣었어요" "나를 비웃고 있는 거야?" 제임스는 짙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마, 그렇게 보여요?" "그렇게 보이고 말고. 요 암여우같으니. 미소 하나로 내 피가 들끊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 그는 즐기듯이 천천히 따뜻한 흰 살결을 애우했다. 린덴은 그의 탄탄한 가슴에 얼굴을 밀어붙 이고 중얼거렸다. "있잖아요 ........." 한 손으로 그의 턱을 쓰다듬었다. 제임스는 금세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나도 그럴 생각이야. 몇 달이나 참아 왔으니까 오늘은 정말온종일 침대에서 나가지 않겠어" 린덴은 얼굴이 확 붉어졌다. "온종일? 제임스, 고용인들이 듣겠어요" "무슨 상관이야! 뭣 때문에 급료를 주는 건데?" 린덴의 손가락이 그의 힘찬 골격을 쓰다듬었다. "어마, 뽐내시는군요. 자신의 생각대로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당신과 함께 침대 속에 있으면서도 움직일 수 있고 말고. 린덴, 당신은 모를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참 섹시해. 난 미칠 것 같아 ........." 린덴은 눈을 내리깐 채 몸을 꼭 붙이고 누워 있는 우람한 몸을 힐끗 쳐다보았다. "날 사랑해 줘요 ......." 그녀는 뜨겁게 속삭였다. "린덴 ....." 제임스는 조그만 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기쁨에 찬 소리를 힘찬 키스로 막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