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섬에서 생긴 일 1 얼굴에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숨이 콱 막히고 가슴이 답답했다. 린든은 몸의 균형을 잃고 유리가 널린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치면서 털썩 넘어지고 말았다. 넓적다 리가 몹시 아파 오고, 눈앞에는 잠시 별들이 어른거렸다. 현관문이 꽈당 하고 닫혔다. 멀어져 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린든은 멍하니 바닥 에 쓰러져 있었다. 너무도 충격이 커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아픈 나머지 눈물이 핑 돌았다. 웨이트가 그녀를 때렸다. 뺨을 갈긴 것이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아무리 성질이 급하다 해도 그녀에 게 손가락 하나 댄 적이 없었는데... 오른쪽 뺨이 아직도 얼얼하다. 부어오른 입술에서는 피가 나고 있다. 다행히 이빨은 다치지 않은 것 같다. 몹쓸 인간 같으니! 이젠 끝이야! 정말 끝이야! 그 울뚝밸도, 그 음침한 분위기도. 감 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스커트에 피가 묻어 있다. 스커트를 걷어올리고 살펴보니 넓적다리가 찢겨 있었던 것 이다. 몇 해째 운 적이라곤 없었다. 그런데 지금 린든은 흐르는 눈물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 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냥 울고 있는 것이다. 몸에 상처를 입은 것은 별로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부기는 빠질 것이다. 생채기는 낫는다. 하지만 앞으로도 오랫동안 오늘밤의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2년 이상이나 사랑 해 왔던 사람의 그 보기에도 끔찍한 표정을! 마침내 눈물도 말라 버렸다. 린든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머리카락이 마구 흐트러 져 얼굴을 덮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머리칼 한 움큼을 쓸어올리곤 간신히 일 어나 비틀거리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자기 얼굴을 본 순간 깜짝 놀라서 다시 노여움이 끓어올랐다. 그 인간이 감히 나를 때리다니! 거울에 비친 것은 마치 딴사람 같았다. 린든은 그 잿빛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눈 은 잔뜩 겁을 먹고 있고 입술은 부어 있다. 이런 몰골의 자기를 보는 것은 난생 처음 이다. 이런 기분도 처음이야... 수모를 당하고 짓밟힌 기분이 드는 것도. 일하러 갈 수도 없 다. 호기심 많은 22명의 학생들 앞에 나설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는다. 어떻게 된 영 문인가 하고 모두 궁금해할 것이다. 어떤 사람한테 맞았는지 솔직히 말할 수는 있다. 「어떤 사람인가 하면 바로 여러분이 숭배하고 존경하며 따르는 미술학부 주임교수 웨 이트 클레이턴이다」라고. 하지만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비친 클레이턴 교수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핸섬하고 명석하며 남성적인데다가 매력이 넘쳐, 모든 여학 생 의 동경의 대상이자 모든 남학생의 숭배의 대상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너무나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누구하고든 얘기가 하고 싶 었 다. 그녀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순간 다리에서 전해지는 아픔에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제기랄! 수화기를 집어들고는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졸리는 듯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 고 들려오자 충동적으로 전화한 것을 금방 후회했다. 「리즈? 나 린든이야. 자고 있었어? 미안해, 나, 나...」 「왜 그래?」 리즈의 목소리에서 졸음이 사라졌다. 「리즈, 나... 저어...」 눈물에 목이 멘다. 「린든! 왜 그래? 괜찮아?」 걱정이 되어선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거기 어디야? 방이야?」 「응, 그래. 리즈, 나...」 「알았어, 금방 그리로 갈게」 일분도 못되어 초인종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리즈는 같은 아파트의 두 집 건너에 살 고 있다. 머리는 빗질도 하지 않았고 양말도 신지 않은 채 눈을 휘둥그래 뜨고 문간에 서 서 린든을 쳐다보았다. 「아이고 놀라라! 무슨 일이 있었니?」 이렇게 말하며 리즈는 호들갑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웨이트가 나를 때렸어」 리즈는 천천히 의자에 앉으면서 중얼거렸다. 「설마 농담을 하는 건 아니겠지?」 린든은 고개를 돌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린든은 어깨를 들썩했다. 「아마 돌았나 봐」 「그러다가 버릇되겠는데」 리즈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전에는 한 번도 때린 적 없었어」 리즈는 한동안 린든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하고 어떻게 된 거야?」 린든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알 수가 없어. 하지만 이제 지겨워. 그 이한테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어... 」 목이 메면서 다시 눈앞이 흐려졌다. 「이런 상태로는 더이상 계속해 나갈 수가 없어」 「사랑하고 있지?」 「그래, 사랑했었어, 그렇지만 난 아무한테도 맞은 적이 없었어, 아무한테도」 절망감이 가슴에 번진다. 떠나야지... 날마다 얼굴을 맞대고 같은 직장에서 일할 수 는 없다. 「다리는 어떻게 된 거야?」 스커트에 묻은 피를 발견한 리즈는 린든의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맞을 때 넘어지면서 탁자 모서리에 부딪친 거야. 하지만 대단치는 않아」 「어디 좀 보자」 린든이 스커트를 올리자 리즈가 휙, 하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뭘 좀 바르는 게 좋겠다. 샤워를 하는 게 어떨까? 기분이 나아질 거야. 그 동안 내 가 마실 걸 만들어 놓을게」 잠시 후 그들 두 사람은 럼주를 마시면서 창을 뒤흔드는 10월의 바람 소리를 듣고 있 었다. 「그림이 한 장 팔렸어」 린든이 억양없는 밋밋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강과 하양의 그림」 리즈가 눈을 반짝이면서 흥미를 보였다. 「또 그 사람이 샀어? 몸집이 작고 대머리인 그 사람?」 「그래」 그 사람은 벌써 린든의 그림을 두 장이나 사갔다. 그녀가 가르치는 학생의 돈 많은 아 버지인데 그녀의 그림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웨이트가 그림값이 엉뚱하다는 거야. 너무 비싸다는 거지. 그의 말인 즉 그 그림은 기법이 돼먹지를 않았다나」 「맙소사! 그런 말을 했어? 그라면 웬만큼 센스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넌 뭐라 고 했지?」 「「오이를 거꾸로 먹든 바로 먹든 그것도 제멋이에요」라고 그랬지. 돈을 비싸게 내 줄 만큼 내 그림을 높이 평가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당신이 이러니저러니 할 건 없 잖으냐고 말해 줬어」 「말 한 번 잘했다!」 「그런데 그게 좋지 않았어. 바로 그때였다구, 웨이트가 나를 때린 게」 「이런! 샘을 냈구나」 린든은 지겹다는 듯한 몸짓을 했다. 「하지만 이상하잖아. 그는 나보다 재능도 있고 경험도 많거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여러 달째 아무 것도 그리지를 않고 있어. 지난번에 그린 건 그 사람 것치고는 엉망이었어. 그런데다가 평소의 그 사람 그림하고는 다르더라구. 그 그 림은 건강치 못한 느낌이 들고 왠지 음침한 거야. 그래서 더 무서워」 「어째서?」 「뭔가가 잘못된 증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린든은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를 멍 하니 듣고 있었다. 「내일 일 나갈 거니?」 리즈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냐, 그만두겠어」 「그만둬?」 리즈의 눈에 놀라움이 스친다. 「제발 린든, 너무 조급한 행동은 하지마. 일자리 찾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걸 알잖니 ? 」 그리고 리즈는 지난해 몇 달이나 일이 없이 지내느라고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었는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알아. 하지만 도저히 계속할 수가 없어. 두번 다시 웨이트를 만나긴 싫어」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엉겼다. 「그 사람하고 같은 건물 안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는 없어」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야?」 「잘 모르겠어. 생각해 봐야지」 리즈는 소파에서 자고 가겠다고 우겼다. 웨이트가 돌아와서 린든에게 난폭한 짓이나 하지 않을까 겁이 나는지 문을 잠그고 쇠사슬을 건 다음 창문 밖을 살펴보기도 했다. 귀걸이를 빼서 화장대 위에 있는 조그만 바구니에 넣을 때 문득 열쇠 하나가 눈에 띄 었다. 몇 해 전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뒤로 내쳐 거기에 처박아 둔 것이다. 그것은 인도양 의 조그만 열대 섬에 있는 고상식(高床式) 목조가옥의 열쇠였다. 펠랑기 섬-무지개섬 , 말레이시아서 해안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 열쇠를 보고 있으려니까 옛 추억이 생 생 하게 되살아났다. 푸른 바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 파란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 섬이 눈앞에 떠올랐다. 열대의 꽃들, 정향나무와 육두구나무, 자그마한 폭포, 깩깩 울어대는 원숭이들, 조그 만 불교 사원, 그리고 섬사람들... 그 섬은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등 이질적인 민족들의 혼성체였다. 옛날에 린든의 아버지는 콸라룸푸르 대학에서 6년 동안 도시개발과 교수를 지냈었다. 휴가 때면 식 구 들은 아버지가 펠랑기 섬사람들을 시켜서 지은 그 조그만 오두막집에서 지냈었다. 이미 양친도 이 세상에 안 계신다. 여동생이 하나 뉴올리언스에 살고 있긴 하지만 그 녀는 어린 자식들과 변호사 남편에 얽매여서 여행에 나설 형편이 아니다. 섬에 가보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돈이 없으면 시간이 없든지 아무튼 사정 이 여의치 않았었다. 그 집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린든은 손 안의 열쇠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그 리 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펠랑기로 돌아가자」 웨이트가 만나자고 몇 번이나 연락을 해왔지만 린든은 그를 다시 만나지 않고 떠날 수 있었다. 그가 아파트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리즈의 아파트에 묵으면서 리 즈가 집에 없을 때는 현관의 초인종이 울려도, 또 전화가 와도 나가거나 받지 않았고 짐을 챙기는 것조차 웨이트가 학교에 가고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했다. 이윽고 준비가 끝나자 린든은 말레이시아로 날아갔다. 콸라룸푸르는 린든의 기억 그대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러나 지난 8년 사이에 새로 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도시 어디에서나 그 푸름을 자랑하는 열대의 수목 사이로 높 이 솟은 현대식 건물은 전통적인 모스크(회교의 예배당)나 무어 식 건축물과 좋은 대조 를 이루고 있었다.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말레이시아의 국민들, 그 문화, 그리고 종교가 언제나 린든 을 매혹시켰다. 그것들은 이 나라의 다채로운 특색과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조그만 중국식 호텔은 아직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희고 청결한 건물이었는데, 앞뜰 에 는 옛날 그대로 재스민 한 그루가 풍성한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로비에 들어서니 커다란 놋쇠 화분에 심어진 키 큰 야자수가 대리석 바닥에 줄지어 서 서 그녀를 맞아 주었다. 그녀의 방은 아담하고 소박한 느낌을 주는 방이었다. 창문 바깥으로는 안뜰이 보였다 . 하이비스커스가 만발한 꽃밭,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조그만 연못, 그늘에 놓여 있 는 탁자와 의자들, 의자 위에 엎드려 자고 있는 얼룩 고양이 한 마리. 샤워를 한 후 린든은 침대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너무 피곤해서 아무 것도 먹 고 싶지 않았다. 오직 푹 자고 싶었다. 지난 2, 3주일 동안 머리 속에 꽉 차 있던 비 참한 생각들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린든이 잠을 깬 것은 오전 5시였다. 그러니까 도착한 날 오후부터 내쳐 잠을 잔 셈이 다. 바깥은 아직도 어두웠다. 문 밑으로 신문이 넣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 고 와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영문판 <말레이시아 타임스>였다. 제 1면은 세계 도처의 어느 일류지에나 실려 있는 그런 국제적인 뉴스였다. 맨 뒤쪽 페이지의 여성란에는 중국식 경단 만드는 법이 실 려 있었다. 린든은 침대에 꼼짝도 않고 누워 신문을 대강대강 훑어보았다. 샤워도 하고 대충 머리손질도 끝낸 후 조그만 식당으로 가 아침식사 메뉴를 들여다보 았다. 토종 달걀, 돼지고기, 생선, 닭고기, 생강, 잎양파 등으로 만든 초케를 권하는 글이 씌어 있었다. 이것을 먹고 하루를 시작하면 건강에 좋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 친절함을 받아들일 만큼 자신의 위가 중국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린 든은 커피와 토스트를 주문했다. 잠시 후 린든은 버터워스 행 열차를 타기 위해 택시 를 타고 역으로 향했다. 버터워스에서 나룻배를 타고 페낭 섬으로 건너가 하룻밤 자 고, 이튿날 아침 펠랑기 섬으로 가는 작은 배를 구할 예정이었다. 열차는 쾌적했다. 린든은 창밖을 지나가는 논이며 고무 농장의 풍경을 즐겼다. 그러 나 여섯 시간의 여행은 길었다. 때때로 웨이트의 일이 머리에 떠오르곤 했다. 「그는 자포자기하고 있어」 하고 리즈는 말했다. 「게다가 참혹한 꼴을 하고 있는데, 일주일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은 것 같은 느낌 이 들어. 내가 다 불쌍해질 지경이야」 린든도 2주일 사이에 2kg 이상이나 살이 빠졌다.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울며 지새운 밤이 몇 번이었던가. 즐거웠던 시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간다. 사랑과 웃 음이 넘쳤던 나날, 산행, 화랑과 미술관을 순례하던 필라델피아에서의 주말. 웨이트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웨이트를 사랑했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좋은 것만 은 아니었다. 쾌활하고 매력적이던 그가 무엇에 비위가 틀어졌는지 우울증에 빠지고 툭 하 면 화를 벌컥벌컥 내고 마치 딴사람처럼 변해 버린 것이다. 린든으로서는 온갖 수를 다 써보았다. 사랑하고, 참고, 용서했다. 도움을 줄 만한 사 람을 찾아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웨이트는 린든의 걱정을 비웃으며 받아들이 지 않았다. 울화가 가라앉고 나서는 언제나 사과했다. 그러나 린든에게 화풀이를 하는 회수는 더욱 잦아져 갈 뿐이었다. 그는 일에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학생들의 재능이 신통치 않은 것과 자기의 작품이 인정을 못 받는 것 에 안달이 나 있었다. 펜실베이니아와 같은 조그만 지방대학의 미술학부 주임교수로서는 그의 야심이 만족 하 지 않았다. 그렇다고 현상을 타개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무언가를 시작할 만한 의욕도 없는 것 같았다. 말레이시아의 전원풍경을 바라보면서 어느 사이엔지 린든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이 젠 참을 수 없다. 앞으로는 나 자신의 일을 생각해야지... 나로서는 할만큼은 했는 걸. 그래, 했고 말고! 그러나 눈앞은 눈물에 흐려지고 가슴의 아픔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잠시 후에 보니 섬은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유일하게 도시 냄새가 풍기는 조지 타운에는 삶의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어느 점포에나 한자를 내리쓴 커다란 간판이 매 달려 있고 길가의 노점에는 말레이, 인도, 중국산의 이국적인 음식물이 널려 있다. 린든은 몸이 뜨겁게 흥분되어 오는 것을 느꼈다. 돌아오기를 잘했다! 오늘 하루 시장 과 가게를 돌아다니고 저력에는 조그만 호텔에서 묵자. 린든은 몇 해 동안 안 써서 녹이 슨 말레이어 실력을 발휘하여 먼저 짬뽕을, 그 다음 에는 고기만두를 노점에서 사 먹었다. 그리고는 호텔로 가지고 갈 귤을 두 개 샀다. 몸은 몹시 피곤했지만 웨이트의 꿈에 시달리느라고 잠을 제대로 자질 못했다. 꿈속에서의 웨이트는 매우 여위어 있었다. 앞으로 다시는 손찌검을 하지 않겠다고 맹 세했다. 웨이트는 수없이 약속했고 수없이 그 약속을 어겼다. 다음에는 이빨이 부러 지 고 팔이 으스러질지도 모른다. 그런 두려움을 지니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싫어!」 린든은 꿈속에서 외쳤다. 「싫어! 싫어!」 그러나 린든은 그의 품에 안겨 키스를 당하고 자신도 그에게 키스를 했으며, 그를 요 구하고 또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녀는 흐느끼면서 잠에서 깼다. 일어나 앉자마자 주 먹으로 눈을 누르면서 흐느끼듯 소리쳤다. 「이젠 질색이야. 아 아, 더는 싫어, 싫단 말야!」 택시는 린든을 태우고 교외로 나가더니 회교사원, 캥거루 타운,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기지를 지나 아득히 뻗어나간 모래사장을 따라서 달렸다. 해변에는 야자수가 바람에 너울거리고 있었고 색깔이 화려한 어선들도 보였다. 「바투페랑기에서는 어느 호텔에 묵으실 겁니까?」 택시 운전사가 물었다. 「호텔이 아니에요. 텔록바항 부두로 가주세요. 펠랑기 섬으로 가는 거예요」 중국인 운전사는 잠시 도로에서 눈을 떼고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린든을 바라보았다 . 「거기엘 가시다니 희한하군요. 호텔도 없는 몹시 작은 섬이랍니다」 「알고 있어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어촌, 논과 코코넛이며 과일, 향신료 나무들이 줄지 어 서 있는 전원지대-이것이 펠랑기 섬의 전부다. 인구는 천 명이 채 되지 않는다. 8년 전에는 자동차도 없었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었다. 지금도 여전히 없을 것이다. 운전사는 린든을 텔록바항 부두에 내려 주었다. 어부들이 신기한 듯이 그녀의 슈트케 이스를 바라본다. 관광객이라면 울긋불긋한 어선과 종다래끼, 흔들거리는 나무 잔교를 찍기 위해서 카 메 라를 가지고 온다. 그러나 슈트케이스를 가지고 오는 일이란 거의 없다. 린든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어부에게 다가가서 방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린든이 말레이어로 말을 걸자 그 어부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우리말을 할 줄 아는군요」 하고 영어로 말했다. 린든은 엄지손가락과 둘째 손가락을 1cm 가량 벌려 보였다. 「조금 할 줄 알아요」 어부는 슈트케이스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어디 가세요?」 「펠랑기」 린든은 바다 건너를 가리켰다. 수평선 위로 아련하게 조그만 섬이 하나 보였다. 「누군가 나를 저기까지 데려다 줄 사람이 없을까요?」 어부는 좋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린든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친구를 만나러 가나 보죠?」 「친구? 네, 그래요」 무슨 뜻인지 알 순 없었지만 더이상 긴 얘기는 원치 않았으므로 그저 되는대로 대답 했 다. 배는 한 시간이 채 못되어 섬에 닿았다. 닭은 하늘색 어선에서 내리려다가 문득 어떤 백인 남자가 부두에서 이쪽을 보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어부가 한 말의 뜻을 알 아차린다. 그 남자는 키가 크고 후리후리했다. 후줄근한 진바지에 목이 팬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나이는 30대 초반쯤일까? 까만 머리칼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그의 갈색눈이 다가서 고 있는 린든을 조용히 응시한다. 왠지 친밀감 같은 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린든은 뭔가 살피는 듯한 그의 검은 눈을 마주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미소를 띠지는 않았지만 손을 내미는 것이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았다. 「저스틴 파커입니다」 「저스틴 파커 씨라구요? 어머나, 기억이 나요!」 단단하고 억센 손이 린든의 손을 잠시 쥐었다가는 이내 놓았다. 저스틴은 천천히 고 개 를 끄덕였다. 그 역시 뭔가 기억해 내려는 듯 눈살까지 찌푸린 얼굴이다. 「그런데, 당신은...」 「린든 미첼이에요」 저스틴이 웃었다. 웃는 데 익숙하지 않은 듯한 기묘한 미소였다. 「린든? 그래, 린든이야」 두 사람은 전에 꼭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이 조그만 섬에서. 저스틴은 크리스마스 휴가로 체낭의 부친한테 와 있었는데 펠랑기에서 린든네 가족과 저녁식사를 같이 했 던 것이다. 그때는 정말 시끌벅적했었다. 오븐도 없이 크리스마스 요리를 만든다는 것은 예삿일 이 아니었다. 게다가 냉장고도 어선에서 쓰는 아주 작은 것뿐이었다. 특히 린든의 기억 에 남는 것은 포도주였다. 처음 포도주의 맛을 본 린든은 매우 실망했었다. 왜냐하면 그때 처음으로 포도주를 마 셔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기대가 매우 컸었기 때문이다. 저스틴의 아버지는 3년 가량 말레이시아에서 일을 했었다. 저스틴은 미국에 있는 대학에 재학 중이었는데 부친을 만나러 왔던 참이었다. 그들 부 자는 페낭의 호사스런 호텔에서 일주일간, 펠랑기에선 이틀을 보냈다. 그 이후 린든 은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여기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요」 린든은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스틴은 린든의 슈트케이스를 내려다보았다. 「그 집으로 돌아온 건가요?」 린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 남아 있다면요」 「남아 있고 말고요」 문득 생각이 나서 린든이 물었다. 「혹시 거기서 묵고 계시나요?」 「아니오, 나한테는 내 집이 있어요」 「어머, 그래요?」 저스틴은 허리를 숙여 슈트케이스를 집어들었다. 「갑시다. 내가 그 집까지 바래다 드리죠」 린든은 저스틴과 함께 해변을 따라 마을과 어선들 옆을 지나갔다. 길가에는 조그만 노 천식당이 있었는데 식당에는 몇 명의 남자들이 담배를 피우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윽고 해안 끝에 집이 보였다. 옛날에는 야자수에 둘러싸인 린든네 집밖에 없던 곳 에 지금은 세 채의 집이 더 서 있었다. 세 채 모두 말레이시아의 전형적인 어부들의 오 두 막으로서 둥근 기둥 위에 서 있는데, 지붕은 이엉으로 이어져 있다. 땅바닥에서 현관 까지는 나무계단으로 오르게 되어 있다. 갖가지 열대식물들을 심은 화분이 둘레에 놓 여 있었고, 닭이 모이를 쪼고 있다. 「저것 좀 봐요, 동네가 생겼어요!」 「동네가 아니오. 모두 내 집이오」 「댁의 집이라뇨? 그게 무슨 말이죠?」 「내가 지은 거요. 내 집이라구요」 「다른 두 채의 집은 어떻게 하고요?」 「남에게 빌려 줬소」 저스틴은 린든의 팔을 잡았다. 「이리 와요, 뭐 좀 시원한 걸 마십시다」 린든은 찬찬히 집을 둘러보았다. 집은 아주 깨끗했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돌봐 왔던 것이다. 「먼저 짐이나 내려놓구요」 린든은 핸드백에서 열쇠를 꺼냈다. 「그건 안 맞을 거요, 내가 자물쇠를 바꿨으니까. 새 열쇠는 우리 집에 갖다 뒀소」 「이 집을 돌봐 주셨나요?」 저스틴이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 있으면서 이 집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있어야지요. 몇 차례 아버님한테 연락 을 취하기도 했지만 잘 안되더군요」 「3년 전에 돌아가셨는 걸요」 「... 안됐군요」 린든은 그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여기 와서 집을 손질할 기회가 좀처럼 없었어요. 이 집을 돌봐 주셔서 정말 감사해 요. 사례는 얼마나 하면 될까요?」 저스틴은 손을 흔들었다. 「아아, 괜찮소」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저스틴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자기 집으로 린 든 을 안내했다. 열어젖혀진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들어와서 집안은 시원했다. 바닥에는 야자 섬유로 짠 깔개가 깔려 있고 쿠션을 얹어 놓은 소박한 등가구가 놓여 있다. 벽 쪽으로는 책장이 몇 개 있고, 구석의 조그만 탁자 위에는 석유 램프가 두 개 놓여 있다. 그리고 타이프라이터와 서류더미가 얹혀 있는 커다란 나무책상이 창가에 놓여 있었다. 이 섬에서 뭘하고 있을까? 「일을 하시나 보죠?」 책상을 가리키면서 린든이 불쑥 물었다. 「그거 덕분에 굶진 않죠」 「책을 쓰시나요?」 저스틴은 머리를 끄덕였다. 「첩보소설이지요」 무표정한 대답이다. 「그래요?」 그녀에게는 어쩐지 뜻밖이었다. 「앉으시죠」 저스틴은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뭘 들겠소? 코카콜라? 세븐업? 맥주? 아니면 주스?」 「주스가 좋겠어요」 「망고, 괜찮아요?」 「아주 좋아요」 저스틴은 주방으로 갔다. 린든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이상했다. 그는 차 갑고 붙임성이 없다. 그렇다고 불친절함이나 적대감을 느낀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뭔 가가 결여되어 있다. 도대체 그게 뭘까? 따스함과 생기? 그래, 바로 그거야. 린든이 기억하고 있는 저스틴 은 달랐다. 10년 전 크리스마스 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녀는 그때 16살, 그 리고 저스틴에게 첫눈에 홀딱 빠져 버렸던 것이다. 웃고 있는 입매와 따스한 갈색 눈에, 그리고 대학생활에 대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잔 뜩 해준 대학생에게. 비참한 크리스마스 저녁식사가 끝난 후 린든은 저스틴을 산책에 꾀어내어 섬을 안내하고, 폭포 가까이에 있는 특별히 마음에 드는 장소를 가르쳐 주 었 다. 30분 가량 산길을 걸으면 폭포가 있다. 두 사람은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물에 담그고 장난을 쳤다. 소녀다운 방식으로 린든은 저스틴의 마음을 끌어 보려 했었다. 주위의 분위기도 아주 낭만적이어서 꼭 어울렸었다. 폭포 가까이의 그 자리에서 그는 린든에게 키스를 했다. 그러나 그건 일부러 그녀를 놀리려고 한 짓이었다. 린든도 알고 있었다. 저스틴에게는 자기가 너무 어린 상대라 는 걸. 그러나 그녀는 그 뒤로 몇 주일 동안 황홀하고도 낭만적인 꿈을 엮어 나갔고, 두 사 람 의 정열적인 사랑 얘기를 마음에 그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콸라룸푸르의 외국인 학교에서 정열적인 프랑스 학생과 연애를 하게 되면서부터 저스틴에 대한 몽상은 사 라 져 버렸다. 저스틴이 돌아왔다. 린든에게는 주스를 주고 자기는 맥주를 들고 맞은편 의자에 가 앉았다. 「여기엔 휴가차 온 건가?」 린든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그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직장을 그만둔 직후거든요」 「직장이라니?」 저스틴은 아주 편한 말투를 쓰기 시작했다. 저스틴이 날카로운 시선을 돌렸다. 「남자 때문에?」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당신 눈의 표정하고, 그 얼굴하며 최근에 별로 즐거운 일이라곤 없었던 듯한 느낌 이 들기 때문이지」 저스틴 당신도... 린든은 그런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는 망 고 주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댁은 어째서 여기에 계시나요?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인도양의 조그만 섬에? 여자 탓인가요?」 저스틴은 입술 한쪽을 찡그리며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점도 있지」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세요?」 「3년」 린든이 신음 소리를 내자 저스틴은 야릇한 얼굴을 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난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지 않고서 자신을 회복하고 싶어요. 지옥이나 죽음의 세계 가 차라리 사랑에 실패하기보다는 나은 게 아닐까요?」 저스틴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이번에는 눈에까지 번졌다. 「무지개섬에 온 걸 환영해」 집은 옛날 그대로인 것 같았다. 거실이 하나, 침실이 둘, 주방과 욕실, 그리고 마당 에 서 있는 헛간 하나. 욕실에는 욕조는 있지만 수도는 들어오지 않았다. 물은 우물에서 양동이로 퍼 나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원시적인 샤워 시설을 만들었었다. 조그만 탱크 바닥에 구멍을 내고 사슬을 당겨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주방에는 개수대와 조리대, 가스 스토브 두 개, 그 위에 조그만 석유 냉장고가 있다. 나무 침대 위에 있 던 매트리스는 사라지고 없었다. 「곰팡이가 잔뜩 피어 있어서 내다버릴 수밖에 없었어」 저스틴이 말했다. 「곰팡이 냄새만큼 역한 것도 없어요. 마을에 가서 새 것을 사오겠어요」 린든은 마을로 물건을 사러 나갔다. 쇼핑을 한 후에 산 것들을 리어카로 실어다 달라 고 했다. 집에 돌아오니 말레이 소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홍색 반소매 블라 우스에 전통 무늬의 사롱(말레이 사람이 허리에 감는 천)을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 반들반들한 검은 머리는 귀 언저리와 이마에서는 곱슬곱슬하게 말려 있다. 소녀는 수 줍은 표정을 지으며 린든을 쳐다보았다. 「저, 미스터 저스틴이 도와 드리러 가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집안 청소와 물기르기 를 합니다」 「어머나! 고마와요. 이름은?」 「나지라입니다」 「나는 린든이라고 해. 우선 이 짐을 집안에 들여놓기로 하자. 자. 이 돈을 받아 둬. 그러면 비와 양동이, 그밖에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일을 테니까. 나는 저스틴 씨한테 가서 점심을 먹고 좀 늦게 돌아올 거야」 저스틴은 린든을 점심에 초대해 주었다. 그렇게 하면 집안을 정리할 만한 시간이 생 길 거라면서. 저녁식사는 마을의 노점에서 할 계획이었다. 옛날에 온 식구가 여기서 살았을 때는 모 두가 조그만 노천식당이나 길가의 노점에서 외식을 하곤 했다. 음식은 푸짐한데다 값 도 싸고 맛이 있었다. 볶음밥, 쇠고기 꼬치구이, 라면, 고기만두, 경단 등... 그것들을 생각만 하면 지레 마 음이 즐거워진다. 「우리 집에는 아직 물이 없어서 씻지를 못했더니 몸이 끈끈해요. 욕실을 좀 써도 되 겠어요?」 「그렇게 하지. 이쪽이야. 나지라는 갔던가?」 「네, 왔어요. 감사해요. 그런데 계속 와줄 수 있을지 몰라요. 오늘만 온 건가요?」 「계속 다닐 수 있다면 그 아이도 좋아할 걸. 그 아이는 우리 집 가정부의 딸인데 지 금 일하는 데가 없으니까」 점심은 생선튀김, 밥, 그리고 야채볶음이었다. 어느 것이나 다 맛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당신 집을 빌리나요?」 린든이 물었다.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고, 할 일도 별로 없는데요. 그렇다고 근사한 식당도 나이트 클럽도 풀도 바도 없는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인데 말예요」 「평화와 고요를 원하는 사람들이지. 대개는 내 친구거나 아니면 친구의 친구들이지 만. 그밖에는... 괴짜 작가라든가 신혼부부, 옛 식민지시대 형의 사람 등등이야. 지 금 의 변해 버린 동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 패들이지. 당신이 생각하는 보통 여행자는 전 혀 오지 않아」 저스틴은 차갑고 일그러진 웃음을 띄웠다. 「국제경찰이 수배해 놓은 사나이를 재웠던 적도 있어」 린든은 입으로 가져가던 포크를 도로 내려놓았다. 「알고서 재워줬나요?」 「아니, 본인한테서는 듣지 못했어. 그가 떠난 지 며칠 지나서 국제경찰들이 들이닥 치 더군」 「무엇 때문에 수배되었을까요?」 저스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러주지 않았어. 나도 별로 흥미가 없었고」 「어떤 사람이었나요? 무섭지 않던가요?」 「전혀, 아버지 생각이 날 정도였어」 린든은 방긋 웃었다. 「아버님이 가엾군요. 지금 아버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건강하시지. 작년에 재혼하셨어」 저스틴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한순간 그의 눈이 뭔가 재미있다는 듯 반짝거렸다. 「상대는 보르조이라는 러시아 산 늑대사냥용 큰 개를 기르는 여자야」 그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자 린든은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별난 취미를 가진 사람이 난 좋던데요. 한데 당신은 무슨 취미를 갖고 계세요?」 「별나지는 않지만...」 린든은 포크를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맞혀 볼까요? 혹시... 우표수집? 자수? 난초 기르기?」 「비슷하게 왔군. 아마추어 식물학자야」 「정말? 뭘 하는 건지 궁금해요. 섬을 돌아다니면서 풀꽃이나 나무를 관찰하고 그러 는 건가요?」 저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치는 않아. 그건 그렇고, 당신 취미는?」 린든은 한숨을 쉬었다. 「취미라고 할 만한 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애요. 그림을 그릴 뿐. 하지만 산을 걸 어 다니는 것은 좋아해요. 캠핑을 하고 그러면서...」 린든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두 손을 마주 쥐었다. 얼마나 꼭 쥐었는지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캠핑의 재미를 가르쳐 준 사람은 웨이트였다. 산을 걸어 돌아다니면서 함께 주말을 지내곤 했었다. 산속 호수에서 낚시를 하기도 하 고 모닥불에 요리를 해먹기도 했다. 그리고 차가운 물이 흐르는 개울에서 헤엄을 쳤 다. 웃음과 사랑과 행복을 나누어 가졌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끝났고, 지나갔으며, 사라졌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린 든 은 일어섰다. 「실례하겠어요」 이렇게 말하고는 베란다로 나가 난간에 기대어 서서 주먹을 눈에 가져다 댔다. 울면 안돼! 린든은 자기 자신에게 명령했다. 자, 어서! 뚝 그쳐! 뚝 그치란 말야! 2 등 뒤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옆에서 저스틴의 느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인과 함께 기억도 깨끗이 지워 버리는 편이 좋을 때도 있을 거야」 주먹을 떼고 멍하니 바다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처음에는 눈앞이 캄캄할 뿐 아무것 도 보이지 않더니 이윽고 주위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린든은 크게 심 호 흡을 했다. 「미안해요, 보통 땐 이렇게까지 감정적이진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사과할 것 없어. 안에 들어가서 커피라도 마실까?」 「아녜요, 괜찮아요. 집에 가서 나지라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펴봐야겠어요. 그런 뒤에 수영이나 하러 갈까 생각해요」 「햇볕에 타지 않도록 조심해요. 밖은 몹시 더우니까」 「알겠어요. 점심 잘 먹었어요」 나지라는 침실을 청소하고 침대를 정돈한 후 욕실에 양동이로 하나 가득 물을 길어다 붓고 있었다. 린든은 슈트케이스에서 수영복을 꺼내 갈아입고는 타월과 로션을 가지 고 해변으로 향했다. 레인트리 한 그루가 해변 끝에 커다란 가지를 펼치고 서 있다. 그녀는 그 나무그늘에 물건들을 던져 놓고는 물가로 달려갔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뜨 거운 모래의 감촉이 오히려 시원했다. 해면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다. 그녀 말고는 단 한 사람도 해변에 나와 있지 않았다. 날씨가 너무 더운 탓일까? 정말 조심해야겠구나. 지금은 10월이니 그녀는 한 달 이상 이나 뜨거운 햇살을 쬐지 못했다. 바다는 평온하고 물은 따스했다. 꼼짝 않고 물위에 누워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다. 우계여서 오후 늦게나 오늘밤쯤 상당히 많은 비가 내릴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저스 틴 이 한 말을 생각해 보았다. 「연인과 함께 기억도 깨끗이 지워 버리는 편이 좋을 때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 멋진 나날들을 잊다니 너무 아깝지 않은가? 지금은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만 나는 웨이트를 사랑했었고, 그는 내 생활의 일부였다. 그것을 마치 메스로 도려내듯 도려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린든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러한 그녀의 노력에 호응이라도 하듯 잔잔한 파도가 그녀를 어루만져준다. 파란 하늘을 보며 바다에 떠 있자니 스르르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물에서 나와 나무그늘에 앉았다. 머리를 털어서 물기를 뺀 후 어깨 뒤로 넘겼다. 오른쪽으로 머리를 바다 위로 쑥 내민 바위가 보였다. 파도에 씻겨 매끄럽고 둥근 모습으로 햇빛 을 받아 꺼멓게 빛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저 바위 위에 올라간 적이 있었지. 올라가자면 바위에 낀 것들 때문에 발 바 닥이 꺼끌꺼끌했었지. 따개비며, 조가비 따위는 가까이서 보면 참 아름다운 무지개빛 이었는데... 바다에서 시선을 돌려 야자나무에 에워싸인 조그만 집을 바라보았다. 평화롭고 조용 하 다.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없다. 분별 있는 사람은 낮잠을 자는 시간이다. 이런 것을 표현하는 속담이 뭐였더라? <미친 개와 영국인만이 한낮의 햇살 속으로 나 간다>였어. 아마 거기에 사랑을 잃은 빨강머리의 미국 아가씨도 나간다고 덧보태야겠 지? 저스틴의 집은 해안에서 가장 가깝다. 다른 집들과는 조금 떨어져 있고 왼편에 진홍 색 하이비스커스 덤불이 있다. 그 집 계단 위 그늘진 곳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저스틴이 계단을 가볍게 뛰어내려 오솔길을 따라 성큼성큼 활달하게 걸어왔다. 허리 가 탄탄해 보이고 어깨가 떡 벌진 것이 아주 매력적이다. 10년 전만 해도 어린 티가 남아 있었는데, 이젠 멋있는 어른으로 완전히 변해 버렸는 걸. 여기 온 지 3년이라니 그 동안 참 쓸쓸하게 지냈겠군. 페낭에 가면 갖가지 재미 있 는 일들이 많을 텐데... 하지만 저스틴은 행동적인 사람은 아냐. 레인트리 가까이에 올 때까지 저스틴은 린든 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가 거기 있는 것을 깨닫고는 그녀 앞에 서더니 물었다. 「벌써 수영을 했나?」 「잠깐요. 여기에 오자마자 새까매지기는 싫으니까요」 저스틴은 갑자기 눈살을 찡그리더니 한 걸음 다가와서 린든의 넓적다리를 뚫어지게 내 려다본다. 「그 다리는 어떻게 된 거야?」 린든은 침을 삼켰다. 「멍이 든 거예요」 「굉장하군. 어떡하다 그렇게 됐지?」 저스틴은 린든의 옆에 앉았다. 「넘어지면서 탁자 모서리에다 짓찧어서 그래요」 이렇게 대답하는 린든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스틴이 날카로운 시선을 돌렸다. 모든 것 을 꿰뚫어보고 있는 듯한 눈이다. 「어쩌다?」 린든은 고개를 돌렸다. 「얻어맞고 쓰러진 거예요」 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린다. 「얻어맞아?」 저스틴이 조용히 그 말을 반복했다. 「때린 상대를 맞혀 볼까?」 린든은 저스틴을 외면한 채 어깨를 들썩했다. 「몹시 맞았나?」 「입술이 부었을 뿐이었어요. 부기는 곧 빠졌어요」 「맞은 건 처음이었던가?」 그때의 노여움이 되살아나서 가슴속에서 뜨겁게 소용돌이 쳤다. 「한 번이면 충분하죠. 때리는 데 잠자코 기다리고 있거나 하진 않아요!」 「그래서 여기에 왔군 그래?」 그는 무릎을 세워 팔을 괴고는 하얀 산호 조각을 만지작거리면서 여전히 린든을 바라 보았다. 「거기에 계속 눌러앉아 있을 수는 없었어요. 그는 나하고 같은 대학의 미술학부 주 임 교수라 날마다 얼굴을 맞댈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 걸 어떻게 견디겠어요?」 「왜 때렸지?」 바다로 눈길을 돌리면서 저스틴이 물었다. 「발끈해서 욱했던 거예요. 성깔 있는 사람이었어요. 우울증에 빠져 있었죠. 그게 점 점 더 심해지더니 마침내 나한테 손찌검을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헤어질 결심을 한 거예요」 이런 얘기를 담담하게 하고 있는 자신에게 스스로도 놀랐다. 그러나 손을 내려다보니 단단히 맞잡고 있고 손가락 마디가 하얘져 있었다. 잠시 후 린든은 수건을 집어들면 서 일어났다. 그리고 수건의 모래를 털어 허리에 둘렀다. 「사롱을 사야겠네. 다른 것도 살 게 있으니 표를 만들어야겠어요. 가게는 5시에 다 시 열리죠?」 「응」 저스틴도 벌떡 일어섰다. 「뭐 거들어야 할 일이 생기거든 말하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한순간 저스틴의 눈이 린든의 시선을 붙잡았다. 「이젠 어른이 됐군」 「소녀도 10년이 지나면 어른이 된답니다」 그녀의 목소리엔 뭔가 씁쓸한 느낌이 어려 있었다. 10년의 세월과 웨이트 같은 남성이 있으면 말이죠... 린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돌아가 보니 나지라가 접시와 컵을 닦고 있었다. 린든은 욕실로 가서 몸의 모래와 소 금기를 씻고 머리를 감았다. 드라이어가 없어 머리를 말리는 데 오래 걸릴 것 같다. 하지만 괜찮아. 여기서는 시간이 많으니까.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 을 수도 있어. 여기에는 원하는 건 무엇이든 다 있어. 시간, 평안, 정적, 차분한 환 경, 맛있는 음식, 그리고 태양, 모래, 바다. 야자나뭇잎의 속삭임, 그리고 고독도. 지금 린든에게 필요한 것은 고독이다. 고통을 누그러뜨리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고 독 린든은 베란다로 나가서 삐거덕거리는 등의자에 앉아 젖은 머리를 빗었다. 물방울 이 발치에 떨어진다. 나무 사이에서 작은 새들이 지저귄다. 그것만이 한낮의 늘어지 고 답답한 열기 속에서 들려오는 단 하나의 소리였다.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사방 이 고요한 게 마치 꿈인 것만 같다. 고요... 목이 말랐다. 집 뒤의 우물에서 떠다 놓은 맑고 찬 물을 쭉 들이켰다. 린든 은 냉장고를 살펴보았다. 겉보기에는 튼튼하게 생겼지만 과연 제구실을 할까? 벌써 3년 이 나 된 건데. 저스틴에게 봐달라는 게 낫겠지. 더위 탓일까? 나른하고 졸립다. 린든은 침대에 누워 잠시 눈을 붙였다. 5시에 그녀는 마을에 가서 차와 커피, 그리고 빵, 모기향, 초록색 사롱과 파인애플을 샀다. 그리고는 가게들을 기웃거리면서 쌓여 있는 물건들을 구경하고 다녔다. 머리가 벗어진 백인 하나가 그녀 앞에서 느릿느릿 걷 고 있었다. 배 는 불뚝 튀어나오고 다리를 조금 전다. 반바지에 셔츠 차림이며 끈으 로 매는 샌들을 신고 있다. 저스틴네 집에 세를 든 사람인지도 모른다. 작가일까? 아니면 마피아단의 한 사람? 사 람들이 무엇 때문에 이 작은 섬에 오는지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야. 상가 끝에 주 차해 있는 노란 삼륜차가 눈에 익었다. 다가가 보니 중국인 여자의 얼굴 역시 낯이 익 다. 막롱테였다. 헐렁한 바지에 느슨한 저고리를 입고 여전히 석유 버너 위에서 잽싸게 국수와 야채와 새우를 볶아서 팔고 있었다. 린든은 그녀 앞에 서서 빙그레 웃어 주었다. 「막롱테! 어때요?」 그 부인은 깜짝 놀라며 린든을 쳐다보더니 눈을 반짝이면서 얼굴을 찌그러뜨리고 웃 었 다. 중국인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말레이시아에 와본 적이 없 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막롱테의 손을 잡았다. 「돌아왔구나! 」 「아주머니네 볶음국수가 먹고 싶어서 왔어요」 막롱테는 목구멍 속에서 밀어내는 듯한 독특한 웃음을 웃었다. 「미국에는 볶음국수가 없더냐?」 「아주머니네 것과 같은 건 없어요」 막롱테의 눈이 빛났다. 「하나 들지 않겠니?」 이렇게 말하고는 새우를 듬뿍 넣고 재빨리 만들기 시작했다. 린든이 그릇을 들고 서 서 먹고 있는 동안 막롱테가 옆에서 식구들 얘기를 했다. 최근에 시집을 간 딸이 아기를 낳았다는 얘기며, 아들이 페낭에 가서 캐주어리나 호텔의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을 하 고 있다는 얘기 따위였다. 장에서 산 물건들을 비닐 주머니에 넣어 들고 집으로 돌아오니 날은 이미 어두웠다. 풀섶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해변을 씻는 파 도 소리가 어둠 속에서 메아리친다. 나지라는 돌아가고 없었다. 린든은 석유등을 두 개 켜고 나서 커피를 끓였다. 베란다 의 의자에 앉아 모기향을 옆에 놓고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거기에 앉 아 있었다. 외로움이 온몸에 스며들어 왔다. 웨이트의 얼굴이 떠오르고 목소리가 들려온다. 함께 이 고요를 즐기고 싶다. 그를 품 에 안고 사랑해 주고 싶다. 안돼! 그에 대한 생각을 해서는. 린든은 자기자신을 꾸짖 었다. 웨이트의 일을 생각하는 건 이제 그만두자. 밤에는 비가 내렸다. 린든은 그 소리에 잠이 깼다. 바람이 야자나무 사이를 세차게 불 며 지나가고 덧문이 덜컹덜컹 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사롱을 입고 덧문을 닫았다. 문 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침실이 몹시 서늘해져서 추울 정도였다. 창에는 그물창과 덧문만이 있을 뿐 유리가 끼여 있지를 않다. 린든은 매트리스에 누 워 찌푸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캠핑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밖엔 비 바람이 쳐도 천막 속에 누워 있으면 몸이 젖지 않던 그 캠프... 아아, 캠프 따윈 잊어버리자. 린든은 억지로 생각을 딴 방향으로 돌렸다. 바람이 자고 빗발이 가늘어지면서 나뭇잎 을 때리는 소리도 작아졌다. 그녀는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몇 주일이 지났다. 그 동안 비가 자주 내렸고 시원했다. 집안은 그런 대로 정돈이 되 었고 냉장고가 쾌적한 소리를 내고 있다. 전기와 수도가 없는 생활에도 익숙해졌다. 저녁에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밤을 지샐 텔레비전 프로도 없으니까. 아침에는 일 찍 일어나서 해변을 거닐거나 바다에서 헤엄을 친다. 그러고 나서 커피를 마시고 아 침 식사를 마친 다음 그날 먹을 것을 사러 마을로 나간다. 아침 장의 야채는 갓 뜯어온 거여서 모든 게 한결같이 싱싱하다. 나지라는 따끈한 점 심식사를 장만해 놓고는 돌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저녁식사는 손수 만들거나 마을로 먹으러 가야 했다. 매일 아침 장보기를 마치고 돌아와 그림을 그린다. 이젤과 의자는 마을의 목수한테 부 탁해서 만들었고, 그림물감과 캔버스는 여기 올 때 가져온 것이다. 실내가 밝지 않기 때문에 주로 뜰이나 베란다에서 그렸다. 생활의 리듬도 바뀌었다. 그러나 상실의 무딘 아픔은 남아 있었다. 웨이트가 없어서 적적했고 그의 매력과 온기와 사랑이 그리웠다. 더러는 웨이트의 얼굴이 떠올라 방바 닥에 엎어져 엉엉 울부짖고 싶을 때도 있다. 펠랑기에 온 게 잘한 짓인지 모르겠어. 너무 고독하고 생각할 시간이 너무 많아. 외 로 운 나머지 걸핏하면 쉬이 의심과 불안에 사로잡히고. 진실로 웨이트를 사랑한다면 그 를 용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과연 나는 그를 돕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까? 힘이 돼주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의 마음은 병들어 있었어. 나를 필요로 하고 있었어 . .. 린든은 매일 밤 누운 채 몇 시간씩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림도 제대로 되 질 않는다. 특유의 빛과 생기가 사라져 버리고, 우울하고 침착성을 잃은 속마음이 그림 속에 투영되는 것 같았다. 때로는 붓을 내팽개치고 해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바위에 올라가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거나 바위 사이를 도망다니는 조그만 게를 지켜 보면서 지냈다. 이따금 저스틴이 찾아와 주었다. 대개는 오후의 해도 기울어 그림자 가 길게 끌리고 햇빛이 누그러져 금빛으로 바뀔 무렵이었다. 대개 린든은 차나 카레 빵, 또는 소년이 매일 자전거로 배달해 주는 과자를 내어 대 접 했고, 가능한한 개인적인 화제를 피해 한동안 이것저것 종잡을 수 없는 평범한 얘기 를 주고받았다. 첫날 너무 많은 얘기를 한 탓인지 거리를 두는 일이 비교적 쉬웠다. 낮의 더위가 사 그 라진 저녁 무렵에 둘이서 헤엄을 치러 가는 수도 있었다. 태양이 시뻘건 불덩어리가 되어 수평선 너머로 지고, 하늘이 등나무꽃 빛과 보라색과 엷은 핑크색으로 물들어 가 는 것을 그들은 함께 바라보았다. 엷어져 가는 햇빛 속에서 물과 모래와 바위는 그 선명한 색깔을 잃고 차츰 부드러워 지 고 차분해져 간다. 「그림을 좀 보여 주지 않겠어?」 어느 날 오후 둘이서 베란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저스틴이 불쑥 말을 꺼냈다. 린 든은 망설였다. 저스틴에게 보이기가 싫어서 일부러 쓰지 않는 침실에다 그림을 숨겨 놓고 있었다. 「요즘 별로 마음에 드는 게 그려지지를 않아요. 뭐가 잘 못됐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알 수가 없어?」 저스틴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알고 있을 텐데?」 린든은 손에 든 글라스에 눈길을 떨구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요. 그림 그리는 건 좋아하지만 요즘 자신이 없어요. 그만 둬 버리고 싶을 심정이에요」 「그만둘 수도 없거니와 그만두지도 않을 거야. 당신 스스로도 잘 알 텐데 뭘. 계속 해 서 그리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어」 「그럴 거예요」 린든은 일어섰다. 「원하신다면 보여 드리겠어요. 다만 너무 혹평하지만 말아 주세요」 저스틴은 린든을 따라서 작품이 놓여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진지한 눈으로 살 펴 보기 시작했다. 「그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당신이 한 말의 뜻은 알겠구먼」 「뭐가 보여요?」 「슬픔, 좌절감, 노여움. 선과 색채에 그것이 나타나고 있군. 하지만 기술은 대단해. 역시 아마추어의 그림은 아냐」 린든은 의심쩍은 미소를 띠면서 방을 나왔다. 저스틴은 부담스럽지 않고 같이 있으면 아주 마음이 편하고 즐거워. 「오늘 저녁 우리 집에 식사하러 오지 않겠어? 세든 사람을 하나 불렀어. 조깅을 좋 아 하는 노인인데 재미있는 분이야. 린든도 그 사람을 좋아하리라 생각해」 「아 그래요, 그이라면 어제 해변에서 봤어요. 등이 아주 꼿꼿하고 키가 큰 60살 가 량 의 영국인이죠? 흰털이 섞인 콧수염을 기르고, 뾰족한 귀족적인 코를 하고 있는 분을 말하는 거죠? 매일 아침 조깅을 하는 것 같더군요」 그녀는 그 사람을 이미 몇 차례 본 적이 있었다. 린든은 약속시간보다 일찍 저스틴의 집에 갔다. 초록색 무명 롱스커트에 검정색 V네크 웃도리를 입었다. 디자인이 간단한 데다 값비싼 것도 아니었지만 몸에 딱 맞으면서 색깔도 잘 어울렸다. 늘어뜨린 머리 를 왼쪽만 올려 할머니한테서 얻은 거북이 등껍질로 만든 빗을 꽂았다. 「앉아요. 무엇을 마실까?」 저스틴이 권했다. 카키색 바지에 어두운 청색 셔츠가 산뜻하게 잘 어울린다. 아주 편 하게 보인다. 린든은 그의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었다. 자기 자신이나 세상 모든 것에 잘 적응해서 사는 사람의 푸근하고 차분한 거동이야. 「뭐가 좋겠어? 너무 멋들어진 것은 안돼. 술의 종류가 적어서」 「진토닉은?」 「그거라면 되지」 벽에 그림이 걸려 있다. 린든은 그 앞으로 다가가 섰다. 어선의 그림이다. 트롤선과 그보다 더 작고 색깔이 선명한 프라우선이 그려져 있었다. 「텡의 그림이군요」 린든이 감격해서 말했다. 그녀는 꼭 한 번 그 노화가를 만난 적이 있었다. 중국에서 공부를 했고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다. 「그래」 저스틴은 린든에게 음료를 건네주고서 옆에 가 섰다. 「바투페링기의 야홍 화랑에 가본 적도 있어?」 「네, 여러 차례요. 거기서 한 번 텡을 만나 상당히 오랜 시간 얘기를 했어요. 환상 적 으로 색깔을 쓸 수 있는 분이에요. 그 다재다능함은 정말 놀라운 정도예요. 그 화랑 에 갈 때마다 다른 작품이 있는 거예요. 생명력이 넘치는데다가 아주 자극적이기도 하죠 」 린든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연세가 상당히 높으실 거예요」 「70살일 걸」 「초하고 염료로 용케도 이렇게 정교하게 그려내는군요」 그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코트니가 열린 문께에 서 있었다. 흰 슬랙스, 흰 양말에 흰 구두, 거기에 까 만 셔츠. 백발이 섞인 머리와 밝고 푸른 눈이 햇볕에 그을은 얼굴과 아주 멋있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는 저스틴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와서는 린든을 보고 기쁜 듯이 눈을 빛내면서 악수를 청했다. 저스틴이 주방에서 코트니 씨의 음료를 만들었다. 코 트 니는 의자에 앉아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작품은 잘 진척되고 있나요? 그리고 방콕 관계에서 아직도 문제가 있나요?」 코트니가 저스틴에게 물었다. 저스틴은 스카치 위스키를 한 잔 건네었다. 「별로 없습니다. 선생님의 충고대로 했더니 잘 나가던 걸요」 그렇게 말하고서 린든을 보았다. 「어떤 인물 때문에 콱 막혔는데 코트니 씨께서 도와주신 거야」 노인은 웃었다. 「제 1차 대전 중에 같이 비행한 영국 공군 대령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실론에 주둔 하 고 있을 때였습니다. 현재의 스리랑카지요」 코트니는 잔을 내려놓고 또 콧수염을 쓰다듬고는 몸을 내밀고 열심히 얘기하기 시작 했 다. 몸서리가 쳐지게 끔찍스러운 얘기였다. 폭풍우 속을 뚫고 비행하다가 인도양에 비행기가 추락했다. 코트니와 그밖에 승무원 2 명은 밸브가 망가진 고무보트를 타고 사흘 동안 해상을 표류하면서, 구멍이 난 곳을 교대로 손으로 막아 공기가 새지 않게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겨우 해안에 도착했을 때는 경찰의 마중을 받고 1895년제 소총 앞에 서야 했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상륙 하 려 한다고 어부들이 경찰에 신고했었더라는 것이다. 린든은 코트니의 눈이 웃고 있는 것을 보고, 무시무시한 모험담 얘기를 할 때도 빠뜨 리지 않는 그의 유머 감각에 감탄했다. 그런 시련을 이겨낸 게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기도 했다. 저녁식사는 오래 걸렸다. 수다스러운 코트니의 얘 깃거리는 끝이 없었다. 「그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하며 포크를 놓고 수염을 쓰다듬는다. 그러면 또 다른 얘기가 계속되는 것이다. 린든 은 그에게 전후의 생활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는 실론에 눌러앉아 야자농원을 경영했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몄다. 현재는 아이들 은 장성했으나 부인이 죽어 외토리였고,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즐거움이었 다. 코트니는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말했다. 「젊은이들, 이제 실례해야겠소. 즐거운 저녁이었소이다. 고마와요」 「얘기가 참 재미있었어요」 코트니를 배웅하고 나서 린든은 만족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나도 슬슬 돌아가야겠군요」 「서두를 건 없잖아? 포도주가 조금 남아 있는데 다 마시고 가지 그래?」 그래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집에 서둘러 돌아갈 이유가 없잖은가. 또 별로 졸리지도 않고. 린든은 다시 앉았다. 그리고는 저스틴이 포도주를 따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당신은 항상 심각해 봬는 얼굴을 하고 있군요」 맛있는 식사와 포도주로 혀가 매끄러워져서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옛날엔 곧잘 농담을 하고 웃고 그랬잖아요. 하지만 벌써 10년이나 지났군요」 「10년이면 긴 세월이지」 저스틴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 오기 전에는 뭘 했었나요?」 린든이 물었다. 「베이루트에서 종군기자로 일했지」 뜻밖이었다. 침착하고 조용한 저스틴이 전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위험한 일을 하고 있 었다니... 어울리지 않아. 아니, 오히려 적격일는지도 모른다. 그에겐 냉정하고 무관 심한 태도만이 아닌 그 무엇이 있다. 무표정이란 가면 밑에 숨겨진 그 무엇인가가... 「별로 평화스럽지 못한 곳이죠, 레바논은?」 「그래, 그리고 나는 젊은데다 철부지였었지. 거리를 서성거리다가 가서는 안되는 곳 에 가고 말았어. 결국 십자포화 속에 말려들어 등에 총을 맞았지. 응급조치를 받고 본 국으로 송환되어 병원에서 여러 달을 지냈어. 거기 누워 있으면서 이젠 그만둬야겠다 는 생각이 들어. 내가 아는 가장 평화로운 섬에 가서 건강을 회복하자고 결심했던 거 야」 「그래서 펠랑기 섬을 생각해낸 거로군요」 「옛날부터 소설이 써보고 싶었어. 지금이 다시없는 기회라고 생각되더군. 첩보소설 을 한 권 쓰고는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지 두고 봤지」 한 권 쓴 다음 저스틴은 여기 남아서 한 권을 더 썼다. 그리고는 뉴욕의 편집자의 열 의에 끌려서 지금 여기서 네 권째를 집필하고 있다는 것이다. 간혹 친구들이 섬에 찾 아와서는 더러 묵고 가기도 하기 때문에 저스틴은 그들처럼 평안을 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두막을 한두 채 더 지으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래서 하루종일 타이프라이터를 노려보는 일 이외에 다른 할 일이 생겼고, 때로는 그 것이 소설의 재료가 되기도 했다. 「당신 소설을 읽어보고 싶어요」 저스틴은 일어서서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이걸 읽어 봐. 최신작이니까」 검은색 표지에 빨강과 금빛 불교사원을 배경으로 손에 총을 든 긴 금발머리의 여자가 그려져 있었다. 벌거숭이에 가까운 차림으로, 눈에는 절망의 빛이 어려 있었다. 「굉장한 그림이로군요」 린든이 말하자 저스틴은 신음 소리를 냈다. 「난 지독한 표지라고 생각하지만 독자들의 기호는 편집자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말야」 두 사람은 문간에 서서 마주보고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엇인가가 변했다. 공기가 묘하게 뜨거워졌다. 저스틴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서 린든의 머리칼을 만졌다. 린든은 숨을 삼켰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시간이 멎었다. 저스틴의 얼굴 이 다가온다. 자신도 모르게 린든은 얼굴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저스틴」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등을 돌리고는 계단을 한 단 내려서다가 넘어질 뻔했다. 저스틴이 재빨리 내려와 그녀의 팔을 잡고 부축했다. 「데려다 줄께」 놓아요! 손대지 마세요! 입속으로는 외치고 있지만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그녀는 팔을 뿌리치고 나머지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가슴이 몹시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저스틴이 뒤쫓아왔다. 두 사람은 린든의 집까지 잠자코 걸었다. 따스한 공기가 향기 롭 게 느껴진다. 별이 쏟아져내릴 것 같은 밤하늘이었다. 오후 일찍 비가 내렸기 때문에 땅바닥이 젖고 있고 물방울이 풀섶과 나뭇가지에 남아 있었다. 벌레가 울고 야행성 동물이 어둠 속에서 기분 나쁜 소리를 내고 있다. 주위엔 석유 램 프 서너 개만이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어서 너무 어두워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 당도하여 계단 아래에 섰을 때 린든은 저스틴의 몸을 아주 가까이서 느 낄 수 있었다. 「저녁식사, 정말 감사했어요」 계단을 오르다 말고 뒤돌아 서서 린든은 입을 열었다. 「편히 쉬세요」 「잘 자요, 린든」 저스틴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린든은 안으로 들어가서 램프에 불을 붙여서 침실로 가지고 갔다. 벽에 자신의 그림자가 삐딱하게 꺾여 비친다. 그것을 보면서 천 천히 옷을 벗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묘한 반응을 보이고 말았을까? 저스틴이 키스하면 왜 안된다는 걸 까 ? 린든은 알몸으로 욕실로 가서 양동이의 물을 퍼서 몸에 끼얹었다. 물은 달아오른 몸 에 깜짝 놀랄 만큼 차가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심호흡을 하고 나서 다시 물을 뒤집어썼다. 이번 에는 싸늘한 것이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침실문에 달린 가늘고 긴 거울에 알몸을 비 쳐 보았다. 너무 여윈데다 창백하다. 넓적다리의 상처는 거의 아물어 가고 있다. 린든은 웨이트를 생각했다. 그에게 안겼던 때의 일을. 부드럽고 섬세했던 그의 손가 락 을 생각하니 가슴이 쓰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녀는 몸을 동그랗게 하고 침대에 누웠다. 누군가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안겨 줄 사람... 누구라 도 상관없어, 이 무서울 만큼 공허한 고독감을 덜어 줄 수 있는 사람이기만 하면... 그러나 나는 저스틴이 내민 손으로부터 도망쳐 와버렸다. 누구라도 상관없는 건 아냐 . 웨이트... 아냐, 웨이트는 아니야. 그 사람은 날 입술이 부어오르게 때리고는 나가 버 렸어. 웨이트가 나를 만지는 건 싫어, 다시는 싫어. 린든은 저스틴의 입맞춤을, 애무를, 사랑의 표현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다가는 갑자 기 침대에 일어나 앉아서는 얼굴에 덮인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안돼! 안돼! 비틀거리면 서 침대에서 내려와 사롱을 두르고 어둠 속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벽을 따라 천천히 베란 다로 나갔다. 바닥에 앉아서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모기가 냄새를 맡고 달려들어 발목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문간에서 샌들을 찾아내어 신은 다음 조심해서 계단을 내려갔다. 해변까지는 별로 멀지 않았고 눈도 곧 어둠에 익숙해졌다. 해변에 이르렀다. 샌들을 벗고 걷자니 굵은 모래 속으로 발이 푹푹 빠져들어갔다. 물가까지 간 그녀는 모기에게 물린 곳이 조금이라도 덜 가렵도록 복사뼈까지 물에 잠 기는 곳으로 가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잔잔한 파도가 서서히 밀려왔다가 물가에 닿아 하얀 물보라를 이루었다. 바다의 향내를 가슴 깊숙이 빨아들이자 기분이 가라앉 았다. 「다시 일어설 거야」 린든은 소리내어 말했다.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 사랑에 실패한 것도 아니야」 돌아가는 도중에 저스틴의 집에 아직도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침대에서 책 이 라도 읽고 있는 걸까? 아니면 작업을 하고 있는 걸까? 린든은 저스틴에게서 빌어 온 책이 생각났다. 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램프를 켜놓고 침대에 들어가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잠이 깼을 땐 7시였다. 창문 바로 바깥에서는 새가 즐거운 듯이 지저귀고 있다. 석유 램프는 기름이 떨어져서 저절로 불이 꺼졌고, 책은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어디까 지 읽었는가 싶어서 살펴보니 절반 이상이나 읽고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주방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지라가 청소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린든이 문 을 살짝 열고 그녀를 부르자 얼른 달려왔다. 「커피를 끓여 주지 않겠어? 꿀을 바른 빵 한 조각하고」 「몸이 불편하신가요?」 나지라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다. 언제나 이 시간쯤이면 일어나 있던 린든이 아직도 침대 속에 들어 있어서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린든은 고개를 저었다. 「간밤에 잠을 못 자서 그래. 아직도 몸이 좀 무거워」 침대에서 아침을 먹은 다음 한잠 더 자기로 작정했다. 덧문을 반쯤 내려 아침의 밝은 햇살을 막았다. 시트를 덮어쓰고는 웅크리고 누웠다. 한 시간쯤 지나서 다시 잠이 깼 을 때는 기분이 상쾌했다. 린든은 커피를 한 잔 더 마셨다. 산길을 걸어 폭포까지 가 서 거기서 저스틴의 책을 다 읽어 치우기로 했다. 나지라가 차가운 물이 든 보온병과 닭고기, 둥글게 썬 파인애플을 배낭에 넣어 주었 다. 그 속에다 다시 책과 스케치북, 수건과 사롱을 넣고는 쇼트팬츠와 티셔츠에 운동 화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한동안 포장되지 않은 좁다란 길을 걸어갔다. 자전거를 탄 사람과 짐을 짊어진 여자 를 만났을 뿐 주위는 한적했고, 경치는 숨소리도 내지 못할 만큼 아름다왔다. 산비탈에 논이 계단 모양으로 줄지어 있고, 그 사이에 야자나무와 바나나 나무들이 흩어져 있 다. 논에서는 원뿔 모양의 모자를 쓴 여자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몸을 구부린 것이 김을 매고 있는 모양이다. 이윽고 산길을 지나 폭포로 가는 좁은 오 솔길로 들어섰다. 린든은 산 위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개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길에는 풀이 우부룩하게 나 있었다. 사람들이 여기까지 냇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오는 일이란 거의 드물다. 저 아래쪽 냇물이 마을로 흘러 들어가는 여울목에는 여자들이 빨래를 하거나 아이들 이 놀러오기도 하겠지만. 상류에는 폭포와 천연적인 목욕터가 된 바위가 있었다. 차고 맑 은 물이 동그란 돌 사이를 소리내어 흐르고 있다. 나비와 새 그리고 이따금 원숭이가 끼여들어 고요를 깰 뿐인 낙원이었다. 린든은 거기에서 단 혼자 알몸으로 헤엄치던 때의 그 행복감을 회상했다. 여러 해 전 에 저스틴을 끌고 갔던 곳도 그곳이었다. 그때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의 마음을 끌어 보려 했었다. 지금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오솔길을 오르면서 린든은 그때의 일이 생 각나 웃음을 지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도 소녀였었다... 사랑을 동경하던 어리고 낭 만 적인 소녀. 린든은 물을 마시려고 멈춰 섰다. 울창하게 자란 대숲 그늘의 미끈미끈한 바위에 앉아 경치를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너 무 도 아름다와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흰 꽃과 보라색 꽃이 핀 덩굴 식물이 나무줄기를 감고 올라갔고, 길가에 자연스레 돋아난 관목에는 연분홍과 등황색, 노랑 등의 자그 마 한 꽃이 피어 있다. 큰 나비 한 마리가 사뿐사뿐 날고 있고 가까운 나무 위에서는 작은 새가 지저귀고 있 다. 웨이트가 여기 있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보온병의 마개를 꼭 잠그고 배낭 속에 넣었다. 2년 동안이나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사람의 일을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 겠는가? 거의 날마다 만나고 같이 얘기하고 곁에 있었던 사람의 일을... 그의 생각을 하자니 소풍의 재미가 약간은 김이 빠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계속해서 올라갔으나 갑 자 기 더위 가 느껴졌고 흠뻑 땀에 젖어 있었다. 마침내 폭포 있는 데에 다다랐다. 배낭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나무줄기에 가 앉았다. 운동화의 끈을 늦추고 양말을 벗었다. 발이 후끈거린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았다 . 바위 사이로 물이 소리내어 떨어지면서 물보라를 날리고 있다. 차가운 물이 손짓하고 있는 것 같다. 린든은 티셔츠를 머리 위로 걷어올려 벗었다. 브래지어를 벗고 쇼트팬츠도 벗었다. 팬 티 하나만을 입고 잠시 머뭇거렸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사람이라고는 그림자 도 비치지 않는다. 그녀는 팬티도 마저 벗어서는 바위 위의 옷더미로 휙 던졌다. 팔을 높이 쳐들고는 따 사로운 햇볕 속으로 몸을 쭉 폈다. 해방감과 함께 생동감이 온몸으로 번져 나간다. 린 든은 큰소리로 웃어 보았다. 아! 날아갈 것만 같다. 산들바람이 알몸을 어루만지며 스 쳐 지나간다. 그녀는 다시 한번 크게 소리내어 웃고는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물 가로 내려섰다. 살며시 발을 물에 담갔다. 물은 얼음처럼 차가왔다. 린든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잠 시 후 물에서 나온 린든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머리를 풀어 밑으로 흐르는 물에 적셨 다. 물이 뚝뚝 흐르는 머리채를 뒤로 돌리니 등에 시원함이 느껴졌다. 다 말리려면 시 간이 걸리겠는걸. 햇살이 강해졌다. 린든은 나무그늘에 수건과 사롱을 펴 놓고 그 위에 누워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위를 보 고 눕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하면서 두 시간만에 단숨에 다 읽어 버렸다. 스토리는 손 에 땀이 날 만큼 재미가 있어서 지루한 줄 몰랐다. 그러나 왠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템포가 빠르고 재미있다. 액션 장면이 많은 것은 남성독자들에게 먹혀 들어갈 것 같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다. 어딘 지 모르게 주인공에게 결점이 있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재치가 풍부하며 논리와 이성에 의거해서 행동한다. 그런데 감정 이 없다. 정서라고는 전연 없다. 주인공은 정신이 혼란해지는 법도 없고 성도 내지 않 는다. 슬퍼하는 일도 없고 질투도 하지 않는다. 린든은 한숨을 쉬면서 책을 옆에 놓았다.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표지의 금발미인은 주인공을 사랑하는 여자였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마저 주인공은 차갑게 그리고 제멋 대 로 행동했다. 린든은 다시 물을 마시고는 왕성한 식욕으로 닭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 점심을 먹고 나서 혀에 느껴지는 파인애플의 달콤한 뒷맛을 음미하면서 다시 누웠다. 포만감 탓인지 하품이 저절로 새어나온다. 그늘이긴 했지만 공기는 따스하다. 눈을 감 고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새와 벌레 우는 소리, 나뭇잎을 살랑살랑 흔드는 바 람 소리, 그리고 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떴다. 그런데... 자기 혼자가 아니었다! 저스틴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앉아 가 벼운 미소를 띄우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에덴 동산의 이브 같군」 그가 낮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멋있어」 3 순간 린든은 꼼짝도 않고 묵묵히 저스틴을 쏘아보았다. 그러고 있노라니 온몸이 뜨거 워졌다. 노여움 탓일까 당황한 탓일까? 그 양쪽 모두인지도 모른다.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서 저스틴에게 등을 돌리고는 바닥의 사롱을 집어들어 몸을 감쌌다. 잠이 들었었나 봐. 그렇지 않았다면 말소리가 들렸을 텐데... 린든은 수건 위에 주저 앉아 잠자코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아직 덜 마른데다 여기저기 엉켜 있다. 틀림없이 흉칙한 마녀 같은 모습으로 보이리라. 「책을 읽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지?」 그가 부드러운 투로 물었다. 「다 읽었어요」 그녀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나를 보고도 별로 반가와하지 않는군」 「남을 마중할 만한 몰골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야 생각할 나름이지」 「뭐라구요? 닥쳐요!」 린든은 빗을 내던지고 바위 위의 옷을 끌어당겨 껴안고 갈아입을 장소를 찾았다. 「기다려」 저스틴이 별안간 벌떡 일어나더니 린든 앞으로 다가왔다. 눈썹을 모으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갑자기 왜 그래?」 린든은 밉살스러운 듯이 흘겨보고는 잠자코 등을 돌렸다. 그러자 저스틴이 어깨를 꽉 잡더니 돌려세웠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왜 그래? 내가 뭘 어쨌다는 거냔 말야?」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놓으세요!」 저스틴은 놓지 않았다. 「어젯밤부터 날 그런 투로 대하고 있잖아? 내가 키스도 못하게 했어」 린든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요!」 저스틴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좋아!」 그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해. 마음이 끌려. 같이 있고 싶고, 얘기도 하고 싶어. 어젯밤에는 키스를 하고 싶었어. 그게 그렇게도 나쁜 건가?」 린든은 심호흡을 했다. 「알았어요, 하지만 분명히 밝혀 두겠어요. 현재의 나는 로맨스를 찾을 기분이 아니 라 구요」 저스틴은 그녀의 어깨에 얹었던 손을 한쪽만 떼어 젖은 그녀의 머리를 한줌 쥐었다. 「언제면 되지?」 「언제라뇨?」 「언제쯤에나 다시 로맨스를 찾을 기분이 되느냔 말야? 오래 전, 바로 이 자리에서의 당신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의 눈은 농담을 하듯이 웃고 있다. 「그때는 꽤나 그런 기분이 되어 있었던 것 같았어」 「농담 말아요! 그땐 어린애였어요. 바보에다 낭만적인, 장미빛 안경을 낀 어린애였 다 구요」 「그랬었지. 그리고 지금은 어린애가 아니고」 저스틴이 손을 놓았다. 린든은 등을 돌리고 가려 했다. 「가지 마, 린든. 같이 헤엄치자구」 「벌써 했어요」 「그럼 한 번 더」 「싫어요, 돌아갈래요」 린든은 그늘에서 옷을 입었다. 그러고는 배낭에 짐을 넣고 다시 앉아 머리를 빗었다. 저스틴은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머리를 빗고는 배낭을 맸다. 「기다려!」 저스틴이 불쑥 소리치더니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편지가 왔어」 「편지?」 「우체국에서 받았어」 그는 편지를 내밀었다. 「이걸 전하러 갔더니 나지라 말이 당신이 폭포에 갔다는 거야」 린든은 편지를 받아들고 배낭을 내려놓았다. 편지는 리즈한테서 온 것이었다. 바위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아파트를 빌겠다는 사람이 나섰다는 내용이었다. 린든은 마음이 놓였다. 지금도 저금에서 그 집세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린든은 계속 읽어 내려갔 다. 웨이트는 반미치광이야. 네가 있는 곳을 알아내기 위해 몇 번이나 나한테 찾아왔었어 . 모른다고 우겨대고 있지만 믿지 않는 것 같아. 처참한 상태야. 몹시 괴로와하고 있어 . 그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너도 알고 있겠지? 린든은 편지를 무릎에 올려놓고 눈물에 젖은 눈으로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니 목이 아팠다. 린든은 침을 삼켰다. 하지만 슬픔은 걷잡을 수 없이 오 열 이 되어 치밀어 올라왔다. 황급히 편지를 배낭 속에 집어넣고는 나무줄기에 앉아 목 이 아프도록 흐느꼈다. 있던 자리로 돌아오니 저스틴이 보온병에서 커피를 따르고 있었 다. 「이걸 좀 마시는 게 좋을 거야」 그가 컵을 내밀며 말했다. 잠자코 받아들고는 폭포 옆에 앉았다. 「이름이 뭐지?」 「웨이트」 「봉투의 필적은 여자 글씨 같더군」 「그래요, 내 친구가 보낸 편지예요. 웨이트는 내가 여기 있는 걸 몰라요」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샌드위치를 한 조각 먹어 보겠어?」 「고마와요, 하지만 됐어요. 아까 점심을 먹었는 걸요」 린든은 저스틴을 쳐다보았다. 그는 샌드위치를 먹고 있다. 「오늘 아침은 어째서 원고를 쓰지 않아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우물우물 샌드위치를 삼키고 나서 그가 말했다. 「글쎄, 왠지 일이 잘 안돼, 아침 6시부터 타이프라이터를 붙들고 있었지만 별로 나 가 질 않아. 그래서 아예 단념하고 오늘 하루는 쉬기로 했지」 「조금 아까 다 읽은 책 얘긴데, 맥스는 그 프랑스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었죠?」 「응」 「그 남잔 왜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지 않았죠? 몹시 냉정하던데요」 저스틴은 린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했어?」 「네, 호감이 가는 인물이지만 너무 자기중심적이에요」 「어떻게?」 린든은 어깨를 으쓱 치켰다. 「애인을 이용하기만 했어요 자기가 돌아왔을 때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게 당연하다 고 생각하면서도, 여자 쪽에서 무엇인가를 요구했을 때에는 무시하곤 하니까요」 「그로서는 일생을 약속하기에는 너무나 형편이 안 좋은 시기였지」 저스틴은 입을 일그러뜨렸다. 「스파이 노릇을 하기에 바빠서 말야」 「하지만 그래 가지고는 불공평해요」 「그래 불공평해, 정말」 그의 말에서 어떤 속뜻이 느껴졌다. 「그건 당신 자신의 일이었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전쟁과 혁명을 취재하기에 너무 바빴던 거죠?」 저스틴은 어두운 눈을 하고 린든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눈치가 참 빠르군」 「별로 어렵지 않아요」 「이미 오래 전 얘기야」 저스틴은 셔츠를 벗고 햇살 속에 앉아 있었다. 햇볕에 그을은 가슴의 구릿빛이 하얀 쇼트팬츠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근육질의 다리는 매우 다부져 보인다. 쇼트팬 츠 의 허리띠 바로 위 왼쪽에 상처 자국이 있었다. 「어떡하다 그렇게 됐죠?」 「이것도 전쟁의 상처야. 엘살바도르에서 당했어」 「어머나! 그밖에 또 어떤 곳엘 갔었나요?」 「생각지 않기로 했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화제인 모양이다. 린든은 커피를 마시고 나서 컵을 돌려주었 다. 「잘 마셨어요. 그만 가야겠어요. 그럼 다시 만나요」 그는 입에 하나 가득 샌드위치를 문 채 손을 흔들었다. 린든은 이젤과 그림물감을 들고 해변으로 갔다. 위쪽에는 구름, 앞에는 파랑과 등황 색 의 트롤선을 배치시켜 놓고 바위를 그리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순조롭게 그려지는 그 림이었다. 시간조차 잊고 모양과 구도, 선과 색만을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 너무 몰 두하다 보니 바로 가까이에 와서 멈춰 설 때까지 다가오는 사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훼방꾼이 생긴 것에 화가 나서 린든은 고개를 휙 쳐들었다. 50살 가량의 키가 작고 어 깨가 넓은 사나이가 곁에 서 있다. 햇볕에 그을은 얼굴에다 빈틈없어 보이는 눈빛. 젊 었을 땐 그런 대로 미남이었을 것 같지만 지금은 살이 늘어진 데다 볼품이 없었다. 와 이셔츠에 사롱을 둘렀으며 맨발 차림이었다. 「미스 미첼이시죠?」 사나이는 린든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다. 마치 핥는 듯한 눈초리다. 소름이 쪽 끼쳤 다. 「그런데요...」 린든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난 줄리오 마리노치입니다. 당신에 대한 얘기는 저스틴에게서 들었습니다」 검은 눈이 이번에는 그림 쪽을 향했다. 「아주 뛰어난 그림이로군요. 팔지 않으시렵니까?」 치밀던 노여움이 스르르 사라지고 이번에는 가벼운 흥분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겉으 로 드러내 보이진 않았다. 「아직 다 그리지 않았는걸요」 「다 그리면 나한테 넘겨주시는 거죠?」 린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겠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침실 벽에 처치하기 곤란할 만큼 많은 그림이 쌓여 있다. 이곳에선 생 활비가 많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저 살아갈 수는 없다. 수입이 없으면 어 차피 저금도 바닥이 나고 말 것이니, 그림을 한두 장 팔면-만약 본국에서의 값을 받 는 다면-두서너 달 생활비는 마련할 수 있으리라. 구릿빛 얼굴에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마리노치는 빙그레 웃었다. 「좋아요, 좋아요. 그림이 완성되거든 알려 주세요. 그때 값을 의논합시다. 그럼 실 례 했습니다. 다음에 또 뵙지요」 마리노치는 메마른 모래 위를 걷기 힘든 걸음걸이로 사라져 갔다. 호색한 같으니라구 ! 저스틴의 집에 세든 사람이겠지. 하지만 집을 얻은 지 얼마 안되는 모양이야, 이제까 지 만난 적이 없는 것을 보면. 아무튼 조심할 필요가 있는 인물임에 틀림없어. 린든은 다시 그림에 주의를 기울였다. 선도 색채도 아주 멋있고, 갑자기 하늘로 날아 갈 것만 같다. 계속해서 마저 그리려 했으나 이미 집중력은 흩어지고 말았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수평선 너머로 시꺼먼 소나기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린든은 그림 도구를 챙겨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의외로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나지라가 점심으로 새우를 넣은 카레 볶음을 만들고 있다. 그 톡 쏘는 듯한 냄새가 시 장기를 느끼게 한다. 하늘이 한 줄기 쏟아질 것처럼 시꺼매졌다. 나지라가 주방에서 쓰는 석유 램프에 불 을 붙이고 린든을 위해 책상에 촛불을 두 자루 밝혀 놓았다. 식사 중에 비가 내리기 시 작 했다. 이 고장의 비에는 매번 놀라게 된다. 느닷없이 굉장한 소리를 내면서 쏟아지기 도 하고 갠 하늘에서 별안간 동이로 퍼다 붓듯이 쏟아지기도 한다. 30분 가량 억수같이 내리퍼붓던 비의 기세가 약간 누그러지더니 한 시간 뒤에는 이슬 비로 변했다. 린든은 베란다로 나갔다. 나무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꽃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흠 뻑 젖은 재스민 꽃잎이 물에 잠긴 풀밭 위에 점점이 흩어져 있다. 잿빛 안개가 흐르 고 부드러운 바람이 일어 비에 젖은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시원하다... 그러나 춥지는 않다. 린든은 안개비 속으로 나가 해변을 걸었다. 바다는 잿빛을 띠고 있었고 파도가 높았다. 그녀는 둥글 납작한 조가비를 주웠다. 엷은 은빛 이 도는 것도 있고 검게 반짝이고 있는 것도 있었다. 집에 갖다 모아야지 생각하며 그것들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이윽고 비가 그쳤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린든은 마을로 갔다. 집들 둘레에는 깔 끔하게 손질된 화분들이 놓여 있었고, 마당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으며, 집 처마 밑 에는 빨래가 널려 있다. 아이들은 맨발로 물웅덩이에서 놀고 있었고 5마리의 하얀 거위가 쓰러진 나무 줄기에 한 줄로 줄지어 앉아 제각기 깃털을 쪼고 있다. 그녀가 집에 돌아가니 저스틴이 막 길 을 돌아 나오려 하는 참이었다. 「빗속을 걸어 돌아다닌 거야?」 그는 그녀의 젖은 옷을 보고 물었다. 「춥지만 않으면 근사해요」 「같이 커피 한 잔 할 시간 있겠어?」 「시간이야 많죠」 저스틴의 눈초리가 약간 변했다. 「뭐 잘못됐어?」 「텔레비전 생각도 나고 하는 게 좀 지겨워진 거 같애요. 당신은 따분하지 않아요?」 「나야 따분해지면 방콕이나 콸라룸푸르로 날아가서 친구를 만나고 오지. 그곳에 가 서 며칠 지내다 보면 펠랑기가 또다시 천국 같아 뵌다구」 「그렇겠군요. 조지타운 같은 데 가서 주말을 와장창 떠들고 오는 게 좋을지도 모르 겠 어요. 미스터 이탈리아노한테 그림이 팔린다면 말이지만... 그 사람, 이름이 뭐였더 라 ?」 「줄리오 마리노치. 그를 만났어?」 「해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땐데 내 그림을 한 번 보고는 사겠다고 그러대요」 린든은 배실배실 웃었다. 「물론 값은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요」 「그 점은 염려할 것 없어. 그 사람 탐이 나는 거라면 돈은 얼마든지 내니까」 린든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좋은 정보네요. 그 얘기를 들었으니 값을 한참 올릴 수 있겠어요」 저스틴이 웃었다. 「의외로 욕심이 큰가 본데...」 「그럴밖에요. 마지막 월급 구경한 지가 벌써 얼마나 됐게요!」 「미안미안, 진심으로 한 얘기는 아냐」 그의 눈이 웃고 있다. 「나하고 커피를 마시려거든 마른 옷으로 갈아입어 주길 바래. 그 젖은 티셔츠는 내 심장에 해로와」 린든은 얼핏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셔츠가 몸에 찰싹 붙어서 가슴의 선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그런 심장이라면 일찌감치 떼어내 버리세요!」 계단을 달려 올라가 뒤돌아보니 저스틴이 웃고 있다. 그녀는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저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요즘은 그 심각했던 표정이 많이 사라지고 때로는 웃기 까지 하잖아? 15분 뒤 문간에 들어선 린든을 보고 저스틴은 괴성을 질렀다. 「그런 푸대자루를 입을 건 없잖아?」 「푸대자루라니요? 이건 터키 사람들이 입는 카프탄이에요. 이국적인 멋이 있죠? 잘 좀 봐주세요」 선명한 청색 주름이 어깨에서 복사뼈까지 휩싸서 몸의 선을 감춰 버렸다. 「속알맹이를 보고 싶은데...」 「지난번에 봤잖아요」 그에게 등을 돌리고 린든은 책장의 책을 바라보았다. 「책을 또 좀 빌어야겠어요」 저스틴이 뒤로 와서 린든을 돌려세웠다. 그의 두 손이 겨드랑이를 미끄러져 내려가 엉 덩이에서 멎었다. 「안돼! 저스틴, 놔요」 얇은 옷을 통해서 저스틴의 손의 온기가 전해져 온다. 그 손이 다시 허리로 올라왔다 . 린든은 몸을 움직여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그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오히려 좋아하고 있는 거 아냐?」 「키스 경험 정도는 있어요」 「하지만 나하곤 없잖아」 「아녜요, 있어요」 저스틴은 잠시 아리송한 얼굴을 했으나 곧 눈썹을 치켜올리고 싱긋 웃었다. 「폭포 옆에서 했던 거? 그건 통계에 들어가지 않아. 철부지 소녀에 대한 신사의 키 스 였지. 당신이야 이제 철부지 소녀는 아닐 텐데...」 「어머나,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저스틴! 요즈음 당신은 꼭 뭐에 홀린 사람 같아요 」 「잘 알면서」 저스틴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자, 나를 봐」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다. 그의 눈을 본 린든은 저스틴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랐다. 거기에는 상냥스러움과 따스함이 있고, 조롱하는 것 같던 웃음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 다.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저스틴의 입술이 겹쳐 왔다. 린든은 이번엔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전 신이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격렬한 입맞춤에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저스틴 의 감촉과 체취에 그녀의 무릎에서 힘이 쪽 빠져 버렸다. 그는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당겼다. 피가 끓어오르고 격렬한 욕망이 치밀어 올라왔다 . 황홀하기도 하고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무섭기도 하다. 정신이 아뜩해진다.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냐! 이런 생각이 순간 그녀의 머리 속을 휩쓸었다. 이게 아냐 ! 린든은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써서 버둥거렸다. 겨우 저스틴이 그녀를 놓아 주 었다. 서로 마주 쏘아보는 두 사람 무거운 침묵. 요란스러운 새의 지저귐과 해변에 와 부딪치는 파도 소리. 「커피를 마시고 싶어요」 저스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힘이 하나도 없다. 린든은 겨우 의자에 가 앉았다. 아직도 저스틴의 체취가 그녀의 입에 남아 있었다. 그는 곧 돌아 오 더니 책장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몇 권의 책을 뽑아냈다. 「켄 폴리트나 윌버 스미스의 작품 가운데서 읽어본 게 있나?」 린든은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윌버 스미스 것을 읽어 봐. 마음에 들 거야」 저스틴은 몇 권의 책을 린든에게 주었다. 커피는 가정부인 라마야가 까지고 왔다. 라 마야는 머리를 바짝 당겨서 뒤꼭지에 틀어맨 중년부인이다. 맨발로 조용히 걸어다니 며, 눈매가 날카로와 보는 것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사롱을 허리에 두르고 몸에 꼭 끼 는 소매가 긴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알고 있어?」 라마야가 나가고 나자 저스틴이 말했다. 「앞으로 일주일이면 크리스마스야」 「일주일?」 그녀는 그 동안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 열대의 섬에서 크리스마스를 생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섬에는 기독교를 믿는 중국인도 약간은 있지만, 대개는 이 슬람교도거나 힌두교도, 아니면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중국인들이다.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크리스마스에는 고향에 돌아가겠지?」 「아뇨, 그곳은 내게 있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걸요」 그녀의 말씨는 담담했다. 「여동생은 어떻게 지내지?」 「동생 가족은 언제나 시부모한테 가서 크리스마스를 지내요. 나도 가면 환영은 해주 겠지만... 어쩐지 어색해서요. 게다가 동생과 같이 있으면 늘 조바심이 나요」 저스틴이 시꺼먼 눈썹을 한쪽만 올렸다. 「어째서?」 「동생은 나도 결혼해서 자식을 한 다스쯤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개는 아 이 가 넷이나 있어요, 나보다도 젊은 주제에. 열 여덟에 시집가서 열 아홉에 첫아이, 이 듬해에 또 하나, 그러고는 쌍동이죠. 게다가 지금은 또 임신 중예요. 5살도 안되는 아 이가 다섯이나 있다니 신경이 곤두설 노릇이에요」 저스틴이 유쾌한 듯이 웃었다. 「자식들에게 둘러싸여서 행복해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야」 「제 동생이 그래요.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겠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 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잘못이에요」 「당신은 어떤 걸 원하는데?」 「가족이야 갖고 싶지요... 아이는 두 명 정도. 그렇지만 그림을 그릴 시간도 갖고 싶 어요」 「결혼할 생각이었었나? 웨이트라는 사람하고?」 린든은 포크로 바나나를 집으면서 말했다. 「그런 얘길 하긴 했었죠」 「그래?」 「하지만 무서워졌었어요」 이제는 그 얘기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었다. 「당신도 결혼하려고 생각했던 적이 있나요?」 「너무 바빠서 말야」 조금 주저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너무 내 주장만 내세웠었거든」 침묵이 흘렀다. 「어떤 일이 있었나요?」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는 자기의 컵을 들여다보았다. 「케이트란 여자였어. 우린 4년 이상 같이 있었지만 나는 줄곧 몇 달씩 떠나 있곤 했 었지. 하지만 돌아와 있을 때는 우리는 아주 멋있는 시간을 보냈었지. 그 여자도 일 이 꽤 많아서 굉장히 바쁜 편이었어. 그런데 차츰 그런 생활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된 모양이야. 그녀는 정식으로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기를 바랐어」 「그런데 당신은 그럴 생각이 없었나요?」 「아직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었지. 어째서 이제까지처럼 그대로 지내면 안되는지 알 수가 없었어. 나한테는 썩 편리한 생활이었으니까 말야. 돌아가면 언제든지 그녀가 기 다리고 있었거든. 지금 생각하면 내가 너무 자기 중심적이었지. 그래도 그렇게 일년 쯤 더 지나갔어. 그녀는 내 생각이 변하겠지 했나 봐. 하지만 나는 변하질 않았어. 그러 다가 언젠가 돌아가 보았더니 그녀가 없어진 거야」 저스틴은 컵을 내려놓았다. 「미칠 것 같더군」 「그 여자를 찾아냈나요?」 「응,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더군. 막무가내로 나한테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거야」 저스틴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뒤에 나는 베이루트에 갔다가 총을 맞았어. 병원에 있는 동안은 시간이 많았 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생각을 했었지」 그는 다시 컵을 집어들었으나 바라보기만 할 뿐 입은 대지 않았다. 한참만에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린든에게 시선을 돌렸다. 「크리스마스 때 페낭 섬에까지 않을래? 호텔에 묵으면서 맛있는 요리를 먹는 게 어 떻 겠어? 돈 걱정은 말고」 그래서는 안된다. 린든으로서도 그런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승낙하고 말았다. 「좋아요, 고마와요」 그로부터 며칠 동안 린든은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완성시키고 나서는 그림을 햇빛이 적당히 드는 벽에 걸어 놓았다. 마리노치의 집은 저스틴의 집 뒤쪽에 있었다. 린든은 공연히 빨라지는 걸음걸이로 계단을 올라가 열려 있는 문 앞에 섰다. 마리노치는 책 상 에 앉아 컴퓨터의 프린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들어 그녀를 발견하고는 싱긋 웃 으 면서 얼른 일어서서 그녀한테로 다가왔다. 「들어오시오」 마리노치가 통통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린든은 오싹 몸서리를 쳤다. 마리노 치 는 의자를 권하며 말했다. 「자, 어서 이리로 앉아요」 린든은 그의 팔로부터 살짝 빠져나와 문간으로 돌아가서는 책상을 가리켰다. 「작업중이시잖아요? 방해를 하고 싶진 않아요. 그림이 완성됐다는 걸 알려 드리러 왔 을 뿐예요. 시간이 나는 대로 구경하러 와주십사고요」 「완성됐어요? 거 참 잘됐군요. 그렇지만 좌우간 좀 앉아서 한 잔 하도록 해요」 그는 킬킬 웃었다. 「사실은 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답니다. 의사의 분부죠. 그렇지만 나한테는 일을 한 다 는 게 먹고 잠자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니까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앉아요」 「감사합니다만, 전 이제 가봐야 해요」 상냥하게 응대하는 데만도 큰 힘이 든다. 속에 구렁이가 들어앉은 이 돈환이 도저히 비위에 맞지 않았다. 마리노치가 린든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필요 이상으로 가 까 왔다. 그녀는 황급히 움직여서 계단의 맨 윗단에 발을 걸쳤다. 그때 마리노치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쓸었다. 너무도 화가 나서 한순간 멍하니 있었 다. 그러고는 곧장 계단을 뛰어내렸다. 눈을 딱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스 스로에게 타이르고는 계단 아래의 안전권에서 상대를 쳐다보았다. 「틈이 나시거든 5시경에 들러 주세요, 집에 있을 테니까요」 만일을 생각해서 저스틴에게 뭐 시원한 거라도 마시러 오라고 일러두리라 생각했다.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바보 짓이니까, 하여튼 일은 더없이 만족스럽게 처리되었다. 그 림에 홀딱 반해 버렸노라고 마리노치는 말했다. 「이 그림은 진짜 예술 작품이며 게다가 작가가 젊고 미인이시라...?」 이렇게 말하는 그의 등뒤에서 린든은 저스틴에게 눈을 깜빡해 보였다. 저스틴은 의자 에 깊숙이 묻혀 윙크로 응답했다. 「젊고 미인인데다 프로랍니다」 린든은 순진스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값도 그에 못지 않게 마음에 드시면 좋을 텐데요」 그녀는 값을 말했다. 전에 판 그림의 갑절이었다. 마리노치는 눈 한 번 깜짝이지 않 았 다. 「현금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수표?」 「가능하시면 현금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여기서는 그러는 편이 덜 성가시니까요」 마리노치는 두툼한 뱀가죽 지갑을 꺼냈다. 「말레이시아 달러 괜찮겠습니까? 미국 달러 같으면 2, 3일 안에 준비할 수 있을 텐 데 요」 「말레이시아 달러도 괜찮습니다」 마리노치가 종이에 싼 그림을 겨드랑이에 끼고 돌아간 뒤 린든은 저스틴을 보고 킥킥 웃기 시작했다. 「지갑 속에 그 갑절은 더 들어 있던데요」 「린든이 말했더라면 전부라도 내놓았을 거야」 「그렇지만 그건 너무 비싸요」 저스틴이 어깨를 움찔했다. 「왜? 그림값이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할 수 있는 거야. 그에게 그만한 가치 가 있으면 있는 거지 뭐」 린든은 테이블 위의 돈다발을 바라보았다. 「양말 속에라도 간수해 둬야겠지만, 양말이라곤 가진 게 없으니... 혹시 있어요?」 「무슨 색깔의 양말을?」 린든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돈다발을 그러모았다. 「잠깐 기다려요」 돈다발을 헌 그림물감 상자 속에 넣어 옷장 속에 간수했다. 「하여간」 린든은 돌아와서 말했다. 「이젠 페낭에서 쓰는 제 경비는 충당할 수 있게 됐군요」 「이미 늦었어, 약속했으니까」 「어머. 그건 말도 안돼요! 그때는 돈이 없었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있어요」 「그러니까 한동안은 잘 간수하는 게 좋을 거야. 젊고 미인인데다 직업적인 예술가로 서는... 누구나가 그렇듯이 경제 관념이 없을 테니까」 「무슨 실례의 말씀을...」 「당신을 당신 자신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야」 저스틴은 벌떡 일어나서 다가오더니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나한테 필요한 건 날 당신한테서 지켜 줄 사람이에요」 저스틴의 입술이 턱에서 입으로 옮겨옴에 따라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 다. 그때 이후 최초의 키스였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육체적 인 긴장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바로 그런 점이 린든으로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친구 관계만으로는 되지 않 는 걸까? 아직은 그 이상의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도 않으면서. 저스틴의 변화 는 린든이 보기에도 너무 분명했다. 웃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고 심각한 표정도 훨씬 덜했다. 그 변화가 그녀와 관계 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봐요, 저스틴. 이러지 말아요! 진정이에요!」 린든이 저스틴을 밀어냈다. 그러자 그는 겨우 손을 떼었다. 두 사람은 그 조그만 방 안 에서 마주보며 서 있었다. 두 사람의 감정이 방안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고 있다. 저 스 틴의 눈은 몹시 어두웠다. 머리칼이 흘러 이마를 가렸고 입은 꽉 다물어져 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하나?」 「몰라요...」 「그는 당신한테 손을 든 거야. 그런데도 모르겠다니...」 린든은 한순간 눈을 감았다. 「부탁이에요, 저스틴...」 저스틴의 노여움이 방안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얻어맞으니 어떤 생각이 들던? 뭐라고 쏘아붙여 줬지?」 「아무 말도 안했어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웨이트가 나가고 난 뒤였어요」 「어떤 기분이었지?」 린든은 얼굴을 돌렸다. 「수모를 당한 것 같은 게 굉장히 화가 났더랬어요」 「그런데도 아직 그를 사랑하나?」 심사가 뒤틀린 어조다. 린든은 화가 나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녜요. X를 더하면 사랑하는 거고, Y를 빼면 사랑하지 않는 거 라니, 사랑이 무슨 수학문제예요!」 무릎이 덜덜 떨렸다. 린든은 넘어지지 않게 다리에 힘을 주었다. 「여기에 온 지 벌써 두 달이야. 어째서 우리 둘의 일을 편한 기분으로 생각지 못하 는 거지?」 「우리의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알고 있어요. 나도 바보는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 필요 한 게 당신의 매력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이론으로 감정과 싸우고 있는 거야」 「그래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벌써 펜실베이니아로 돌아갔을 거예요! 한 번 더 새로 시작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이한테는 내가 필요하다 구 요 ...」 목소리가 마구 떨렸다. 「내가 어떤 기분인지 아시겠어요? 내가 그를 버렸다... 그런 생각이 든단 말예요! 그 는 고통을 겪고 있는데 버리고 온 거라구요. 사랑한다면 무슨 일이 있건 함께 있어 줘 야 하는 건데...」 「누구든지 용서할 수 있는 것과 용서해야만 하는 것엔 한계가 있어. 아무리 사랑하 고 있다손 치더라도」 「이로야 알고 있지요. 그러니까 헤어진 것 아니겠어요?」 다리의 떨림이 멎지 않는다. 뒤로 물러서서 의자에 앉아 고개를 의자의 등받이에 기 대 고 눈을 감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갖은 애를 다 써봤어요. 하지만 그는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 요.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강했던 거죠. 같이 의논해 줄 사람을 찾는다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그에게로 돌아가면 더 큰 상처를 받 게 될지도 몰라요... 언제나 나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어요. 나한테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 으니까 두번 다시 그런 취급을 받을 수는 없다고요 아아, 하느님...」 린든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저스틴이 가만히 다가와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눈 물이 어려 바로 앞에 앉은 저스틴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인다. 린든은 미소를 지으려 고 했지만 입술이 떨렸다. 「오, 저스틴」 그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넘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리 와」 저스틴은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 그는 그녀를 의자에서 일으켜 세운 후 자신의 무 릎 위에 앉혔다. 두 사람은 다정한 연인처럼 꼭 껴안았다. 린든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 고 마냥 울었다. 저스틴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녀를 안고만 있었다. 두 사람은 어두워져 가는 바닷가를 거닐었다. 태양은 뉘엿뉘엿 수평선 너머로 지려 하 고 진주빛 하늘엔 야자나무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선착장에 가서 배 들어오는 것을 구경할까요?」 린든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배는 벌써 들어왔을 거예요. 하지만 짐 부리는 건 볼 수 있겠죠」 선창에 매어 놓은 배 안에는 진바지에 잠바 차림의 젊은 어부 네 사람이 산더미같이 쌓인 물고기를 선별하고 있었다. 얘기하고 웃고 하면서 작업을 하다가는 이따금 손을 멈추고 신기한 듯이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선창 끝에 앉아 다리를 건들건 들 흔들면서 조 용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그 여자에 대해 더러 생각하는 일이 있으세요? 케이트라는 여자 말예요」 「가끔 생각이 나지」 「결혼했더라면 좋았으리라 생각하세요?」 저스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지. 하지만 지금은 더이상 생각지 않기로 했어. 그 당시는 아직 결혼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어. 그런 때 결혼한다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가 않 아. 하지만 그런 식으로 끝난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고 있어... 그녀가 내 곁에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그녀의 말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어. 그 당시의 나는 시건방지고 남을 생각해 줄줄 몰랐지. 케이트는 나하고 헤어진 지 일년 반쯤 지 나서 결혼한 모양이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린든은 저스틴을 바라보았다. 그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냉정하고 차분해 보인다. 잘생긴 옆얼굴-곧은 콧마루에 억세 보이는 턱. 그 옆얼굴에 서는 뭔가 강인함이랄까 단호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저스틴은 솔직하게 자기의 결점 을 얘기하면서도 변명하지 않고 그걸 인정한다. 린든은 그의 그런 면이 좋았다. 린든의 생각은 딴 곳으로 흘렀다. 해가 지는 풍경을 그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곧 그 만두기로 했다. 이미 너무 많이 그린 소재였기 때문이다. 린든은 한숨을 쉬었다. 「배가 고파요. 어떤 때는 치즈가 먹고 싶어서 미칠 지경일 때도 있어요. 왜 있잖아 요. 세더 치즈 말예요」 「여기서는 구할 수 없을 걸」 「그럴 거예요. 맛있는 게 많이 있는데도 또 다른 걸 찾다니 내가 너무하는 걸까요? 」 「인간이란 게 원래 그래. 언제나 손에 넣을 수 없는 걸 탐내지. 나는 한 때 딸기 크 림이 그렇게 먹고 싶을 수가 없었어」 린든이 비통한 얼굴을 했다. 「이제 그만 해요」 「아무래도 페낭에 가서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게 좋겠어. 호텔에서는 여행자용으로 정 식 크리스마스 요리를 내놓으니까, 칠면조며 뭐며 죄다 나올 거야」 「점점 더 시장해지는데요」 「좋아, 같이 우리 집에 가서 라마야가 뭘 만들어 놓았는지 보기로 하자구」 저스틴은 벌떡 일어나 린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쌩긋 웃고서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4 비바람 소리에 린든이 잠을 깬 것은 한밤중이었다. 평소 내리던 스콜(열대지방의 소 나 기)보다 훨씬 격렬했다. 기묘한 소리를 내면서 휘몰아치는 비바람은 마치 집을 송두 리 째 날려보낼 듯한 기세였다. 벽틈으로도 세찬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있다. 시계를 보니 2시가 조금 지났다. 새벽 빛 이 하늘을 물들이면서 밤을 몰아가려면 아직도 멀었다. 린든은 침대 옆의 초와 성냥 을 찾아 어둠 속에서 한참 허우적거린 끝에 간신히 초에 불을 붙였다. 이상할 정도로 불빛이 반가왔다. 그녀는 침대를 미끄러져 내려가 창가로 다가가선 조 심스럽게 덧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비바람이 몰아쳐 들어오면서 그녀의 얼굴을 흠뻑 적셔 놓는다. 보이는 것이라곤 기분 나쁜 어둠과 비뿐이다. 린든은 몸서리를 치 면서 덧문을 닫았다. 그리곤 돌아서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혹시 차라도 마시면 진정이 될지도... 초를 들고 주방으로 갔다. 뭔가 축축한 것을 밟고 미 끄러지면서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넘어지면서 조리대를 잡았는데 서랍 손잡이에 다 리 를 긁히고 말았다. 더구나 초가 바닥에 떨어져 꺼져 버리는 바람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혼자 남게 되었 다.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벗은 어깨 위에 떨어졌다. 잠시 후 다시 또 하나가 떨어졌 다. 비가 새는 것이다. 린든은 조심스럽게 쪼그리고 앉은 다음 두 손을 뻗어 떨어진 초를 더듬더듬 찾았다. 한참만에야 겨우 의자 밑에서 찾아냈다. 가스 스토브 옆에 있던 성냥을 그어서 초에 다시 불을 붙이고 나서야 겨우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문 옆으로 물이 괴어 조그만 웅덩이가 생겼다. 비가 어디서 새나 보려고 천장을 올려 다보았다. 그러나 불빛이 천장 가득히 기묘한 그림자를 너울거리고 있어 알아낼 수가 없다. 개수통을 가져다 빗물이 떨어지는 밑에 놓았다. 물방울이 통의 밑바닥에 떨어 져 튀면서 커다란 소리를 낸다. 톰방톰방... 소리가 난다고 해서 그게 어떻다는 거야. 린든은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스대 위에 얹 어 놓고 나서 의자에 앉았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은데... 석유 램프에 불을 켜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촛불을 들고 거실로 조심조심 걸어가 램프를 하나 가지고 돌아왔다. 불빛이 좀더 밝 아 지자 주위에 떠돌던 적의가 약간은 가신 것 같았다. 그러나 밖에서 으르렁대는 비바 람 소리와 파도 소리 탓인지 기분이 가라앉질 않는다. 저스틴도 깨어 있을까? 아니면 세상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을까? 바로 가까이에 있 는데도 아주 멀게 느껴진다. 가슴이 저릴 정도의 고독감이 그녀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 끓는 물에 차를 탔다. 달리 비가 새는 데가 없는지 살피면서 먼저 초와 컵을 침실로 옮겨다 놓고는 램프와 주전자를 가지러 갔다. 시트로 몸을 감싸고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양손으로 싸안고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 았다. 폭풍우는 계속 몰아치고 있다. 이따금 야자나무가 쓰러지는 듯한 커다란 소리, 지붕의 함석이 떨어져 깨지는 쇳소리, 그밖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끔찍한 소리가 어 둠을 가득 채우고 있다. 비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바닥을 울리고 있다. 마을에는 물이 차 오르고 농작물도 모두 쓰러져 버렸을 것이다. 아침이 몹시 기다려졌다. 그러나 시간은 고문이라도 하 듯 그럴 수 없이 더디게 지나갔다. 린든은 눈을 감고 머리를 베개에 얹고는 시트를 얼굴 위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잠시 있다가 그녀는 머리 밑으로부터 베개를 꺼내 어 얼굴을 덮었다. 그래도 바깥의 요란한 소리는 지워지지 않는다. 린든은 저스틴한테로 갈까 하는 생각 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제대로 도착할 수 있을까? 바람에 날려 집이나 나무에 부 딪 칠지도 모르고 바다에 빠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갑자기 쾅 하고 무엇인가가 부딪 치 는 엄청난 소리가 들리더니 집이 흔들거렸다. 순간 린든은 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시트를 꼭 움켜쥐고 공포에 질린 눈으로 벽 과 천장을 쳐다보았다. 집이 무너지고 있다. 아, 아! 집이... 집의 흔들림이 그쳤다. 린든은 침대에서 뛰어내려 미친 듯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서 빠져나가야지! 어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롱을 두르고 램프를 집어들고는 조 심스레 침실 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바람에 덜커덩덜커덩 소리를 내고 있는 외에는 다행히 아무런 이상도 없다. 린든은 밖을 내다보았다. 계단이 보이질 않는다. 처마도 어디론가 달아나고 없다. 비 바람이 몰아쳐 그녀의 머리를 온통 헝클어 놓았다. 몸은 비에 흠씬 젖었다. 나갈 수가 없다! 린든은 당황했다. 밑에는 흙탕물이 소용돌이치고 있었고 부서진 계 단 과 처마의 잔해가 여기저기 떠돌고 있다. 뛰어내렸다가는 몸이 성할 것 같지가 않다. 문득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함께 으르렁대는 바람 소리에 섞여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가슴에 번져 갔다. 「저스틴, 여기에요!」 등불이 다가왔다. 「괜찮아?」 「네」 바람이 목소리를 채어가 버리는 것 같다. 「괜찮아요! 하지만 나갈 수가 없어요!」 비바람을 온몸으로 이겨내면서 쓰레기더미를 헤치며 저스틴이 다가왔다. 그가 들고 있 는 회중전등 불빛에 쓰러진 계단의 잔해가 드러나 보였고 그 위에 야자나무 한 그루 가 쓰러져 있었다. 「잘 들어!」 저스틴의 목소리가 마치 비명 같았다. 「먼저 불을 끄고, 반대로 돌아! 그런 다음에 마루를 잡고 매달리란 말야! 내 말 들 려 ?」 「들려요!」 「매달린 다음에 손을 놓고 밑으로 떨어지라구! 내가 잡아 줄 테니까」 린든은 램프를 입으로 훅 불어 껐다. 저스틴이 회중전등으로 마루바닥 끝을 비춰 주 었 다. 그녀는 발로 앞을 더듬어 보았다. 튼튼한 것 같다. 쪼그리고 앉아서 손을 이리저 리 움직여 못이나 가시가 있나 살폈다. 아무 것도 없다. 뒤로 돌아앉아 무릎을 꿇었다. 조심조심 배를 바닥에 깔고 다리를 아 래로 늘어뜨렸다. 세찬 비바람에 사롱이 펄럭인다. 빗줄기가 세차게 등을 때렸다. 마 침내 마루를 잡은 두 손에 온몸을 실었다. 「손을 놔!」 저스틴이 소리쳤다. 린든은 눈을 꼭 감고는 두 손을 놓았다. 저스틴의 손이 허벅다리 에서 엉덩이로 미끄러져 올라가더니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균 형을 잃고 진창 속에 그대로 쓰러졌다. 린든은 위를 향한 채 저스틴의 몸 위에 길게 넘어져 버렸다. 린든은 멍하니 그대로 누 워 있었다. 잠시 후 저스틴의 손이 그녀의 몸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 저스틴의 가 슴 이 느껴졌다. 목 아래는 여전히 진흙 속에 잠긴 그대로였다. 「미안해」 저스틴이 린든의 귓가에 속삭였다. 「미끄러져서 균형을 잃었어. 아팠어?」 「아뇨, 아무렇지도 않아요」 뺨으로 저스틴의 심장 소리가 전해져 왔다. 고개를 들었지만 어두워서 그의 얼굴 윤 곽 밖에 보이지 않는다. 린든은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사롱이 벗겨져서 복사뼈에 감 겨 있고 온통 진흙투성이다. 저스틴도 일어나서 떨어져나간 계단에 얹어 놓았던 회중 전등을 집어들었다. 불빛을 린든에게 비추어 보고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치워요!」 린든은 화난 목소리로 소리치고는 진흙 속에서 사롱을 주워들었다. 그러나 저스틴은 사롱을 린든의 손에서 뺏더니 내던져 버렸다. 「쓸데없는 건 버려!」 저스틴은 린든의 손을 잡아끌며 전등으로 앞길을 비추었다. 저스틴의 집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 기억이 없다. 그에게 떠밀려 처박히듯이 욕실로 들어가자 이가 덜덜 떨려 왔다. 린든은 눈을 감고 몸을 벽에 기댔다. 눈을 뜨니 저스틴이 밝혀 놓은 램프가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린든은 그의 모습을 보 고는 눈을 의심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다음 순간 그녀는 자 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몸에 걸치고 있지 않았지만, 자신 역시 진흙범벅이여서 별반 차이는 없었다. 린든은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작았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멎지를 않는다. 무릎이 구부러지고, 등이 벽을 타고 미끄러져내리더니 마침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계속 웃음이 나왔다. 저스틴도 입을 크게 벌리고 웃기 시작했다. 린든은 한참 웃다가 보니 뺨에는 눈물까지 흐르고 있었다. 너무나 가슴이 후련했다. 썰물이 빠지듯 긴장감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간신히 웃음을 멈췄을 때는 평소와 거의 다름없는 기분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이를 꽉 물어, 내가 씻겨 줄 테니까. 물이 엄청나게 차거든」 저스틴은 파란 바가지로 양동이의 물을 퍼서 린든의 몸에 끼얹었다. 린든은 숨을 훅 들이마시고 나서 소리를 질렀다. 「싫어요! 내가 할래요」 「당신이 하겠다구? 서 있을 수도 없으면서!」 그런 다음 또 다시 그녀에게 물을 끼얹었다. 린든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스틴은 자기도 물을 뒤집어쓰고 얼굴을 씻었다. 「좋아, 진짜로 하자」 그는 비누를 집어들고 린든을 씻기려고 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무슨 사람이 이렇담! 이리 줘요!」 저스틴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비누를 건네준다. 린든은 등을 돌리고 몸 전체에 비누 칠 을 하고 나서 말했다. 「물을 끼얹어 주세요」 저스틴이 몇 차례 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흘러내리는 진흙물은 끝도 한도 없었다. 머 리도 진흙투성이여서 죄다 씻어내자면 며칠은 걸릴 것 같았다. 저스틴이 갖다 준 커 다 란 수건으로 몸을 감싼 린든은 소파에 앉았다. 「잠깐 기다려. 나도 깨끗이 씻고 올 테니까, 같이 뭘 좀 마시자구」 20분쯤 지나니 위스키를 마신 탓인지 린든은 조금 따뜻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건 한 장 더 없을까요? 머리에서 계속 물이 떨어지는데요」 수건을 가져온 저스틴이 그녀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빗질을 해야겠는데」 린든은 망설였다. 지금 빗어 놓지 않았다가는 내일 아침 골탕을 먹을 것이다. 「하긴 해야지만 내가 직접 할래요」 「그야 할 수 있을 테지」 저스틴은 한 마디 툭 던지고는 빗을 가지러 갔다. 「머리를 똑바로 의자 등받이에 얹고 있어」 돌아오자 그는 이렇게 명령했다. 위스키와 피로 탓으로 졸음이 쏟아져 왔다. 린든은 그가 시키는 대로 앉아 눈을 감았다. 빗질이 매끄럽게 될 때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고마와요」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다. 「아직도 젖어 있어」 린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눈꺼풀이 저절로 다시 내려왔다. 몸이 공중으로 번쩍 안아올려지길래 눈을 떠보니 저 스틴의 옆얼굴이 보였다. 「팔을 내 목에 감아 줘. 나는 삼손같이 힘이 세질 못하니까. 단단히 붙잡지 않았다 가 떨어져도 나는 모른다구」 린든은 또 시키는 대로 했다. 단단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자니 마음이 참 편 하 다. 그 상태로 방으로 옮겨졌으나 이내 침대에 내려져 그와 떨어지지 않으면 안되었 다. 린든은 푹신한 매트리스에 닿자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축 늘어졌다. 저스틴 은 침대 모서리에 앉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에게 미소를 보내고 린든은 눈을 감았 다. 「들어 봐!」 린든은 바깥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아까까지와는 뭔가 다르다. 「바람이 잠잠해졌군요」 「비도 그쳤다구」 「그렇군요」 아직도 내리고 있기는 했지만 아까 퍼붓듯이 내리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다. 「두 시에 잠이 깨고부터는 너무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었어요」 「이젠 잘 수 있어」 그의 입술이 린든의 입술에 천천히 겹쳐졌다. 저 깊숙한 곳에 있는 그 뭔가를 건드리 는 듯한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린든은 저스틴의 목에 팔을 감았다. 입맞춤이 더욱 강렬해졌고 그녀의 입에서는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드럽고 달콤한 입 맞 춤으로 온몸에 열기가 퍼져 나갔다. 깊이 잠들어 있던 욕망이 서서히 치밀어 올랐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 린든은 그의 목에 감았던 팔에 힘을 주었다. 「가지 말아요」 「한숨 푹 자도록 해」 그를 더욱 끌어당기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머리가 흐릿해지면서 린든은 달콤한 잠으로 빨려들어갔다. 좀처럼 눈이 떠지지 않았다. 비몽사몽인 채로 한동안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겨우 눈 을 뗀 그녀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를 생각해냈다. 그리고 그 까닭도. 조용히 내리는 빗 소리 외에는 주위는 아주 고요했으며 밖은 아직 어두컴컴하다.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밀어 상반신을 일으킨 다음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리곤 의자에 걸려 있던 사롱을 허리에 두르고 나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집안이 조용하다. 저스틴 은 어디 있을까? 맨발로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았다. 하지만 저스틴도 라마야도 없었다. 단지 주방에 아 침식사를 마친 흔적이 있을 뿐이다. 간밤에 저스틴은 어디서 잤을까? 침대가 하나밖 에 없으니 틀림없이 소파에서 잤겠지. 린든은 미소를 지었다. 신사로군, 나한테 침대를 양보하다니. 현관문을 열자 온통 비 에 젖은 회록색의 세계가 린든을 맞아 주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 다. 매우 쌀쌀하다. 그녀의 집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고 희뿌연 안개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 고 있었다. 아마 저스틴이 피해 정도를 살피고 있는 모양이다. 저곳엘 가보려면 무엇인가 신을 것이 있어야겠어. 린든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저스틴의 샌들을 하나 찾아냈다. 너무 커서 우습겠는데? 하 지만 이것밖에 없으니, 간밤에는 어두워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 었 다. 그런데 아침 햇살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뿌리째 뽑힌 야자나무가 쓰러지면서 처마와 계단을 부순 모양이다. 「뭘 하세요?」 린든이 말을 건네자 저스틴이 흠칫하고 돌아다본다. 「아, 린든. 오는 걸 못 봤는데」 「잘 잤어요? 어머, 엉망진창이군요!」 「그렇지도 않아, 운이 좋은 편이야. 지붕이 몽땅 날아가 버린 집도 있대. 농작물이 죄다 망가진 건 물론이고」 린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불평할 처지가 아니로군요. 다친 사람도 있나요?」 「대단치는 않다더군. 단지 긁힌 정도인 모양이야」 린든은 찌부러진 처마와 계단을 보며 말했다. 「이런 거 고쳐 주는 사람이 누구죠?」 「지금 당장은 안돼. 지금은 모두들 바쁘니까. 망가진 지붕을 먼저 고쳐야 해. 하지 만 대나무 사다리는 있을 거야. 그것만 있으면 당장 출입은 할 수 있지」 저스틴은 주위의 잔해를 둘러보았다. 「우선 저 야자나무를 치워야겠어. 도끼를 가져와서 운반할 수 있게끔 토막을 내야지 」 「그 일을 해줄 사람이 있겠죠? 당신은 따로 할 일이 있잖아요」 저스틴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하는 편이 훨씬 빨라. 운동 삼아서 하지 뭐」 그는 씽긋 웃으면서 어깨와 등의 근육을 움직였다. 「소파에서 잤더니 여러 곳이 결리는군. 좀 움직여야 나을 것 같아. 소파가 내가 자 기 에는 1킬로 가량이 짧더라구」 린든은 씁쓸한 얼굴을 했다. 「미안해요, 용서하세요. 그러지 않아도 죄송한 기분이니까요」 「알았어, 나한테 커피를 끓여 준다면 용서해 줄 수도 있지. 그보다 먼저 몸부터 말 리 라구. 사롱 여벌이 내 침실에 있어. 위에서 두 번째 서랍을 열어 보면 있을 거야. 10 분쯤 있다가 나도 돌아갈 거야」 린든은 진흙 속을 걸어서 돌아왔다. 젖은 사롱이 몸에 처덕처덕 감긴다. 아마 몰골이 엉망일 게다. 욕실의 거울에 비춰 보니 생각했던 대로다. 머리는 잠을 자는 사이에 말라서 여기저기 일어나 있다. 게다가 지금 또 비를 맞았으 니 이건 영락없는 미친 여자 꼴인 걸. 린든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사롱을 찾기 위해서 저스틴의 옷장을 들여다보았다. 침 입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롱 몇 장이 컬러팬츠 무더기 바로 옆에 있었다. 그 아래 서랍에는 티셔츠가 포개어져 있었다. 한순간 망설여졌지만 맨 위의 것을 집어들었다. 이거 되게 큰 걸. 그래도 벌거벗은 것 보다야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고는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쓰고 사롱을 허리에 두른 다 음 주방으로 갔다. 이윽고 저스틴이 머리에서 빗방울을 뚝뚝 흘리면서 들어왔다. 그는 린 든이 아침식사 접시를 막 치우고 난 조그만 식탁에 앉았다. 「도끼를 구했어」 그녀가 건네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면서 말했다. 린든은 그의 앞에 커피를 내놓았다 . 「뭐 거들어 드릴 게 없을까요?」 저스틴은 고개를 저었다. 「별로 할 일이 없어. 야자나무를 토막내서 걸리적거리지 않게 치우는 것뿐이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즐거운 듯이 커피를 마셨다. 「별일 없거든 한 시간쯤 있다가 점심을 마련해 줬으면 좋겠어. 오늘 아침에는 라마 야 가 나타나지를 않았어. 집에 일을 당한 모양이야」 「한 시간이라구요? 지금 몇 신데요?」 저스틴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ll시 반이야」 「세상에! 난 이제 막 일어났는데...」 「편안히 주무시고 계시던데?」 「보러 오셨었어요?」 「나가기 전에 잠시 들여다봤을 뿐이야」 「이미 충분히 보시지 않았던가요?」 저스틴은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눈은 웃고 있다. 「아무리 봐도 충분치가 못해. 모르겠어?」 린든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빈 컵을 들고 등을 돌렸다. 「당신은 몸이 아주 멋있더군」 저스틴이 그녀의 등에다 대고 말했다. 「그만 하세요, 듣기 싫으니까요」 「아냐, 아주 곱더라구」 저스틴은 말을 그치지 않는다. 「간밤에 나 자신을 억제하느라고 무척 괴로왔어. 당신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고... 나더러 나가지 말라고 했었으니까 말야」 「거짓말장이!」 「거짓말이 아냐. 보이스카우트의 명예를 걸지」 「아무 기억도 없어요」 린든은 이를 악물고 컵을 씻었다. 「거짓말장이라니, 그게 누군데?」 컵의 손잡이가 부러졌다. 「어머나, 이럴 수가. 미안해요, 컵을 깼어요」 저스틴이 바로 뒤에 서서 린든의 몸에 팔을 돌려 컵을 뺏었다. 린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놓으세요」 「간밤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 당신은 상냥하고 귀엽고 적극적이었어」 「위스키를 마셨기 때문이었어요」 「딱 한 잔 했을 뿐인데 뭘」 저스틴은 린든의 목덜미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단 한 잔으로 그만큼 효험이 있다니, 오늘밤에도 다시 한번 시험해 보자구」 그는 몸을 떼면서 팔을 풀었다. 「린든은 남자를 기쁘게 해주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거든」 그는 비꼬듯이 이렇게 말하고는 주방을 나갔다. 린든은 마을의 조그만 사원 앞에 자리를 잡고는 그릴 대상을 찬찬히 관찰했다. 사원 은 마을 반대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파이살이라고 하는 소년을 시켜서 자전거로 이 젤 과 의자와 그림물감을 운반하도록 했다. 요즈음 그녀는 한결 기분이 좋아졌고 생기도 났다. 며칠 전 저스틴의 어깨에 묻혀 비 참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사찰을 그리 고 싶다는 충동이 절로 생겨났다. 빨강과 금빛으로 칠해진 지붕 위엔 무엇을 기다리는지 용의 다채로운 조각품들이 참 을 성 있게 앉아 있다. 확실히 재미있는 절이다. 태양은 눈이 부시도록 빛나고 하늘은 끝 없이 푸르고 맑았다. 불과 하루 전 새벽만 해도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맹위를 떨치는 바람에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 거짓말만 같다. 그날은 한낮이 지나서야 저스틴이 구해다 준 대나무 사 다 리를 타고 올라가서 집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다행히 집안은 모든 것이 나올 때 그대로였다. 내일 아침 목수가 와서 계단을 만들고 처마를 달아 주기로 돼 있다. 재빠른 붓놀림으로 캔버스에 사원의 외곽을 그려 나갔 다. 행인들이 신기한 듯이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지나갔지만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린든은 오랜 시간 그림에 열중했다. 희미한 향내가 절 밖으로 풍겨 나왔다. 사원의 열려진 문 사이로 커다란 놋향로가 어 렴풋이 보이고, 거기에 꽂힌 향에서 파란 연기가 가물가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피곤해서 잠시 쉬기로 했다. 정향나무 밑의 그늘진 풀밭에 앉아 보온병에 넣 어 온 커피를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기에서 보니 시각이 달랐 다. 사원 저편으로 지붕 위에다 십자가를 세운 조그만 교회 탑이 솟아 있는 것이 보 였 다. 린든은 갑자기 격렬한 흥분을 느꼈다. 「완벽해!」 린든은 소리쳤다. 벌떡 일어나 이젤 있는 데로 달려갔다. 거기에선 교회의 탑이 보이 지 않기 때문에 탑이 보이도록 이동하면 사원은 각도가 달라져 버린다. 하지만 그림 이 니까 문제는 없다. 린든은 이젤을 옮겨 놓고 사원은 그대로 둔 채 교회의 탑을 그려 넣었다. 한 발짝 물 러서서 붓끝을 씹으며 그림을 바라보았다. 걸작이야! 하지만 더 손질을 하는 편이 좋 겠어, 멋진 그림이 될 거야! 린든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서 돌아가 저스틴에게 보여 주자. 아직 완성 되 지는 않았지만. 별안간 린든의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지금 웨이트한테가 아니라 저스틴에게 보여 주고 싶어하고 있다. 순간 린든은 기묘한 감정의 교차에 스스로 압도되었다. 완전한 안도감과 그리고 깊은 슬픔에... 5 저스틴은 집에 없었다. 아직 12시 반밖에 안됐으니 평소 같으면 집에 있어야 할 시각 이다. 그는 보통 1시 경까지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아 있다가 그 이후에야 점심을 먹 으 니까. 「어디 갔는지 아세요?」 라마야에게 물어 보았다. 라마야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배를 타고 나가셨어요」 「언제 돌아올까요?」 「저녁이 돼야 될 거예요」 린든은 낙담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아마 작품을 쓰다가 벽에 부딪치자 바다에 나 가 서 머리를 개운하게 식히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페낭 섬에 갔을까? 베 란다에 나가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수평선 위에 여러 척의 배가 떠 있다. 하지만 어부들의 트롤선뿐이지 모터보트는 그 림 자도 보이지 않는다. 린든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고는 안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쌀국수와 야채를 넣고 초를 친 생선 수프는 나지라의 장기였다. 음식 위에다 먹을 수 있는 분홍색 꽃을 흩어 놓은 것이 보기에도 군침이 돌 정도다. 식사를 마친 뒤 린든은 머리를 감아 흙탕물을 깨끗이 씻어낸 다음 리즈와 여동생에게 편지를 했다. 그런 다음 윌버 스미스의 소설을 집어들었다. 그녀는 곧 남아프리카의 개척자 얘기 속 으로 끌려 들어갔다. 쾅쾅거리는 커다란 노크 소리에 현실로 돌아온 린든은 펄쩍 뛰 어 일어나 누가 왔는지 보러 갔다. 공기가 잘 통하도록 열어 놓은 문간에 마리노치가 서 있다.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더부룩하게 자란 얼굴에 달콤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안녕하시오?」 린든은 밋밋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지요?」 마리노치의 시선이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훑으며 지나간다. 등줄기에 오싹 한기가 느 껴졌다. 마리노치는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사원의 그림을 가리켰다. 「또 대작을 그리고 계신 것 같군요」 린든은 고개만 끄덕였을 뿐 말은 하지 않았다. 「다른 거 뭐 보여 주실 만한 것이 없나 해서요?」 「없는데요, 죄송하지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건요? 이건 언제쯤이나 완성될 예정인가요?」 이 그림은 이 사람에겐 주고 싶지 않다. 이 그림만은 절대로. 「이건 팔 것이 아닌데요」 「값만 잘 맞으면야...」 「아무리 많이 내신다고 해도 안되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두세요. 완성되면 보여 주시겠지요?」 「네, 그거야 뭐 어렵겠습니까만, 제 마음이 변하리라는 기대는 말아 주세요. 변할 리 가 없으니까요」 「그건 그때 가서 얘기하기로 하죠」 마리노치는 상냥스레 웃었다. 그러나 린든은 그 얼굴을 한 대 갈겨 주고 싶은 심정이 었다. 마리노치가 돌아가자 린든은 후유 하고 한숨을 쉬었다. 베란다에 돌아와서 머 리 에 빗질을 했다. 누군가가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들어보니 저스틴이 보 따리를 손에 들고 이리로 걸어오고 있다. 「우리 집에 올라오세요!」 린든은 그가 집 모퉁이를 돌아 모습이 사라지기 직전에 소리쳤다. 곧바로 거실 바닥 에 발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멎었다. 그림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린든은 얼른 의자에서 일 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저스틴이 그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 표정으로 보아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건 근사한 그림이 되겠는 걸」 그의 칭찬을 받으니 여간 기쁘지 않다. 저스틴이 문득 뭔가 생각난 듯이 눈살을 찌푸 렸다. 「이 사원 앞을 여러 차례 오갔지만 뒤편에 교회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없어요」 「없어?」 「네, 도로 쪽에서 보면 말예요. 사원 오른쪽에 정향나무가 있잖아요? 거기에 앉아 있 을 때 그 탑을 발견했어요. 하지만 거기서 보면 사원은 전혀 잡히지가 않아요. 그래 서 내 멋대로 조금 배치를 바꿨더니 이렇게 된 거예요」 저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가의 특권이란 말씀이군. 멋있는데」 린든은 고개를 꾸뻑 숙였다. 「칭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저스틴은 잠시 잊고 있었던 듯 손에 들고 있던 보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을 린든 한 테 내밀면서 「당신에게 주는 거야」라고 말했다. 「나한테요?」 린든은 깜짝 놀라면서 받아들었다. 무겁고 단단하다. 보따리를 풀었다. 「세더 치즈네요?」 스스로도 부끄러울 만큼 감격해서 저스틴을 쳐다보았다. 「어디서 구하셨어요?」 「페낭에서」 「치즈 한 덩어리를 위해 일부러 조지타운까지 갔어요?」 린든은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그 얼굴을 보고 저스틴이 웃었다. 「아냐, 바투펠링기의 라사사양 호텔에 가서 그곳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잘 먹었지. 식 사를 마치자 아리따운 웨이트레스가 와서 또 주문할 게 없느냐기에 세더 치즈를 1파 운 드 달라고 했지. 그때 그 아가씨의 얼굴은 정말 혼자 보기 아깝더군」 저스틴은 당시를 생각하면서 큰소리로 웃었다. 「그래서, 웨이트레스가 가져다주던가요?」 「결국 지배인이 나하고 아는 사이여서 별 말썽 없이 넘어갔지」 「너무 기뻐요」 손에 든 치즈가 금덩어리처럼 느껴졌다. 「당신 참 자상하시군요」 순간 린든은 얼굴을 돌렸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같이 맛을 볼까요?」 두 사람은 주방으로 가서 대나무 쟁반에 칼, 접시, 둥글게 썬 망고와 파파야, 점심때 먹고 남은 새우 크래커를 담았다. 린든은 냉장고 속을 들여다보았다. 「아보카도도 있네요. 이것도 썰까요?」 「좋지, 나는 집에 가서 포도주를 가져올게」 얼마 후 저스틴은 보르도 포도주 한 병과 카세트 플레이어를 들고 돌아왔다. 「포도주는 어디서 구하셨어요? 그것도 라사사양 호텔에서?」 저스틴이 웃었다. 「아니, 난 이따금 조지타운에 가서 물건을 사오곤 해. 이건 지난번 파티 때 쓰고 남 은 거야. 그런데 잔이 없어」 「여기도 없어요」 린든은 쟁반 위에 컵 두 개를 놓았다. 「이걸로 때우죠 뭐. 더 많이 들어가니까 도리어 좋잖아요」 두 사람은 쟁반을 들고 베란다로 갔다. 저스틴이 카세트 플레이어의 스위치를 넣자 재 즈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그는 주머니에서 또 하나의 카세트를 꺼냈다. 「베토벤도 있으니까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듣도록 하지」 「재즈가 좋아요. 근사한데요」 린든은 황홀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먹을까요?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요」 그녀는 고갯짓을 해서 머리를 뒤로 넘기고는 치즈를 납작하게 썰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를 위해 예약을 하고 왔어」 시장기가 조금 가시자 저스틴이 말했다. 「지난주에 편지를 해두긴 했지만, 간 김에 확인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말야」 「어디에요? 라사사양? 안돼요! 거긴 너무 비싸요」 「그런 걱정 할 건 없어. 고작 이틀 밤인 걸. 설마 파산이야 할라구」 「저스틴, 그게 아녜요! 당신이 내는 건 싫어요. 호텔 대금은 내가 내고 싶어요」 그녀는 자립을 중요시해 왔고 지금까지만 해도 자기 몫은 스스로 치르고 있었다. 일 거 리를 가지고 있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은 말없이 마주보았다. 「알았어」 마침내 저스틴이 말했다. 「그럼 흥정을 하자구. 내가 크리스마스 비용을 낼 테니까 그 대신 린든은 나한테 그 림을 한 장 줘」 린든은 잠시 생각했다. 「정말 그림을 원하세요?」 「어째서 그렇게 의심이 많지? 당신의 그림을 보고 첫눈에 마음에 들었어. 특히 최근 의 두 작품이 그래. 꼭 한 장 갖고 싶어」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해요」 한 시간 뒤 저스틴이 돌아가려고 일어섰을 때 린든은 포도주 탓으로 머리가 띵해져 있 었다. 집안은 어둑어둑했지만 램프는 켜지 않았다. 「치즈 고마와요. 이렇게 근사한 선물은 처음이에요」 저스틴은 문간에서 그녀 바로 가까이에 멈춰 섰다. 손을 뻗쳐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 졌 다. 「고운 머리야. 이런 식으로 흐트러 놨을 때가 좋더군」 그는 머리카락을 한 줌 손에 잡아 살짝 당겼다. 린든은 그의 셔츠 단추를 보면서 그 가 이끄는 대로 조금 다가섰다. 어둠침침한 속에서 단추가 무디게 빛나고 있었다. 저스 틴 은 손가락을 미끄러뜨려서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고는 위를 향하게 했다. 린든의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만히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키스를 기다렸 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애무하고 있다. 얼굴 을 감싼 손이 따스한 살갗에 서늘하게 느껴진다. 저스틴을 만지고 싶다. 그의 얼굴과 넓은 등을... 손을 천천히 그의 등으로 돌렸다. 저스틴의 숨결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약간 거칠어졌다. 린든의 가슴이 방망이질치고 있 다. 「키스해 줘요...」 그녀는 속삭였다. 저스틴이 얼굴을 수그린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숨가쁜 순간... 아 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입술이 겹쳐졌다. 그녀의 몸속에서 불길이 타오르 고 손발이 뜨거워졌다. 그의 손이 린든의 뺨에서 팔, 겨드랑이로 미끄러져 등으로 돌아 갔 다. 그녀도 저스틴의 목에 팔을 감았다. 두 사람은 꼭 부둥켜안고 뜨거운 키스를 교환했 다. 아,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꼭 안긴 탓인지 숨쉬기조차 어렵다. 린든은 갑작스레 치밀어 오르는 욕망에 깜짝 놀랐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저스틴으로부터 몸을 뗐다. 저스틴이 한 발짝 물러서더니 이마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둘 다 숨이 거칠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쏘아보고 있었다. 상대방의 표정은 보이 지 않고 어렴풋한 윤곽만이 보인다.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다리가 후 들 후들 떨린다. 린든은 두 손으로 등뒤의 벽을 더듬어 몸을 기댔다. 마침내 저스틴이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가는 것이 좋겠어」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었다. 그는 한쪽 발을 계단 맨 윗단에 걸치고 돌아다보았다. 린 든은 마른침을 삼키며 겨우 입을 열었다. 「가세요, 저스틴, 제발!」 이튿날 아침 린든은 다시 사원으로 가서 다른 일은 생각할 겨를도 없을 만큼 부지런 히 그림을 그렸다. 용을 그리는 일에도 골치를 앓았지만 문에 걸어 놓은 액자 속의 복잡 한 한자도 문제였다. 다른 거야 별로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아도 되지만 한자는 어느 정도 정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칫 글자의 획이 틀리는 날엔 그 한자가 어떤 모독적인 의미를 지니게 될 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봐달라는 편이 좋으리라고 생각했다. 파이살이 그림 도구의 운반을 거들 어 주러 왔다. 린든은 막롱테의 가게에 들러 달라고 부탁했다. 막롱테는 손님을 맞기에 바쁜 것 같았다. 손님이 먹고 난 그릇을 그녀에게 돌려주었을 때 린든은 자전거에서 그림을 내려 그녀 에게 보였다. 「이거 어떻게 생각해요?」 막롱테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화가였구나?」 린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그림 좋아요?」 막롱테는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주 잘 그렸는데」 그러고는 고개를 젓고 탑을 가리켰다. 「여기에 교회가 있었나?」 「없어요. 하지만 있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한자는 어때요? 제대로 씌어 있어 요?」 막롱테는 웃었다. 「그럭저럭」 「엉뚱한 뜻이 되지는 않았나요?」 막롱테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주 좋아」 「정말 이상한 데가 없어요?」 솔직한 의견을 얘기해 주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린든은 불안해졌다. 막롱테 로 서는 남의 그림을 깎아 내리거나 하는 짓은 예절에 어긋나는 짓일 것이다. 「아니야, 아니야, 아주 좋아」 주위에는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다들 그림을 보고 있다. 한 노인이 가느다란 손 가락을 캔버스 가까이에 가져가 탑을 가리켰다. 그 노인은 「이거 여기 없다」라고 말 레이어로 말했다. 「네, 알고 있어요」 린든은 한자에 대해서 묻고 싶었다. 구경꾼들을 둘러보면서 중국인의 얼굴을 찾았다. 몇 사람 있었다. 린든은 한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 말을 못하는 외국사람...」 린든은 영어로 말하고 나서 자기가 아는 말레이어를 총동원해서 되풀이했다. 사람들 이 와르르 웃는다. 「한자를 전혀 몰라요」 린든은 말을 이었다. 「이게 이상한지 어떤지 가르쳐 주지 않겠어요?」 사람들은 또 웃었다. 무엇 때문에 웃는지는 알 수 없지만 뭔가가 꽤 우스운 모양이다 . 영락없는 어릿광대로군. 단념하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 말레이인들은 한자를 모르고, 중국인들은 대답을 하려 들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다니까?」 옆에 있던 막롱테가 말했다. 「아주 잘 씌어져 있다구」 저스틴이 거실에 서서 그림을 보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이틀 동안 만나지 않았다 . 린든은 사원의 입구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자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어요」 「괜찮은 것 같은데...」 「당신은 줌국인이 아니어서 잘 모르잖아요」 린든은 막롱테의 가게 앞에서 그림을 보여 주었던 때의 얘기를 했다. 「걱정할 것 없어」 저스틴이 말했다. 밖에서 자전거의 벨이 울린다. 「파이살이 카레빵을 가지고 왔어요. 커피나 차를 드시겠어요?」 「커피를 마시겠어」 나무 계단을 달려 올라오는 발소리가 나더니 짐꾸러미를 든 파이살이 입구에 나타났 다.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탓으로 검은 머리가 흐트러져 있다. 반바지에 티셔츠, 샌 들 을 신고 있다. 똑똑해 보이는데다가 새까만 눈동자가 더욱 핸섬해 보인다. 린든이 돈을 주자 소년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다음 배달을 위해선지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제 몫을 단단히 하고 있어요. 이따금 이젤과 의자를 운반해 주곤 해요」 「학교에 안 다녀도 괜찮을까?」 「물어 봤더니 괜찮대요. 학교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고 싶다 는 거예요」 「부자가 되려면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가르쳐 주지 않았어?」 「물론 일러 줬죠. 읽고 쓰기와 산수는 할 줄 안다는 거예요. 저 아이는 그거면 충분 해요」 린든은 말을 끊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뭐예요? 내가 잘못했다는 건가요? 내 탓으로 학교를 그만둔 게 아니라구요. 내가 일을 부탁하기 훨씬 전부터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걸 봐왔다구요」 「당신이 잘못했다는 건 아냐. 법률로 정해져 있는데 어째서 학교에 다니지 않을까 하 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렇다면 법률에 물어 보면 될 것 아녜요!」 한 마디 쏘아붙이고는 화가 난 듯 주방으로 갔다. 「아니, 왜 그래?」 저스틴이 주방까지 따라왔다. 「나한테 싸움을 걸려는 거야?」 린든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싸움을 걸어요? 내가요? 나는 그런 짓을 한 적이라곤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녀는 커다란 물통에서 국자로 주전자에 물을 옮겨 담고는 가스 스토브 위에 얹었다 . 「그래,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냐. 온화하고 너그럽고...」 「그렇다마다요. 거기 설탕 그릇 좀 주시겠어요?」 저스틴은 설탕 그릇을 건네주었다. 「내일 얘기인데, 일찍 떠났으면 좋겠어. 조지타운에 가서 하루 지내고 저녁에 호텔 에 들어가는 게 어때?」 「좋아요」 「그런데...」 베란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저스틴이 말하기 거북한 듯이 입을 열었다. 「당신한테 또 편지가 왔어」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더니 테이블 위로 휙 던졌다. 린든은 빵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 편지를 집을 때 불안감에 가슴이 설렌다. 리즈의 글씨였다. 린든은 편지를 테이블 위 에 올려놓았다. 「고마와요.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다 전해 주지 않았을까요? 당신에게로 배달된 게 이 번까지 두 번째예요」 「인생은 신비로 가득 차 있다오. 특히 동남아시아에서는 말야」 잠시 후 저스틴은 돌아가기 위해서 일어섰다. 앞으로 몸을 숙여 린든의 입에 재빨리 키스하고는 몸을 돌렸다. 「편지를 읽고 당황해서는 안돼. 내가 바로 곁에 있으니까」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봉투를 뜯어보니 크리스마스 카드가 들어 있었다. 겨울 의 설경-얼어붙은 호수에서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리즈 는 썼다. 엄청나게 추운데 침대를 따뜻하게 해줄 보이프렌드를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 다고 적혀 있다. 남자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나는 밉상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고 신경쇠약도 아니야. 조금은 그런지도 모르지... 하지만 몽땅 다 그렇지는 않잖아? 나의 이상형이란 나와 똑같이 보기 싫지도 않고 바보도 아니며, 게다가 신경쇠약이 아닌 사람이면 되는데 말 야. 리즈가 웨이트의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게 참 다행스러웠다. 웨이트는 어쩜 내가 있는 곳을 알아내는 일을 단념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린든은 마을로 갔다. 조그만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 밖에 놓인 건들거리는 테 이블에 가 앉았다. 초록색 꽃무늬가 있는 헐렁한 폴리에스테르 바지를 입고 나막신을 신은 중국인 여자가 오기에 볶음밥과 닭찜을 주문했다. 요리를 날라온 것은 인도인 소 녀였다. 검은 살갗에 길고 검은 머리를 땋아 등에 늘어뜨린 귀여운 소녀였다. 린든은 식사를 하면서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구경했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 여기저 기 켜진 석유 램프가 불빛을 던지고 있었다. 상점의 사람들도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 두 유쾌한 표정으로 웃고 얘기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은 아직도 길에서 이리저리 뛰어다 닌 다. 「안녕하십니까?」 줄리오 마리노치였다. 프랑스제 지방시 셔츠에다 값비싼 바지를 입고 있긴 하지만, 불 룩 튀어나온 배를 다 가리지는 못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린든은 차갑게 대꾸했다. 「혼자서 식사중이신가요?」 「네」 「같이 앉아도 될까요?」 아니오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시죠」 말로는 허락해 놓고 속으론 그가 앉은 의자 바닥이 무너져 버렸으면 하고 생각했다. 「댁에 들렀더니 출타중이시더군요. 하지만 여기서 뵙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 「무엇 때문에 절...?」 린든은 포크에 밥을 얹어 입으로 가져갔다. 「여자분이 밤에 혼자 다니셔도...?」 「아직 7시밖에 안됐는 걸요. 게다가 여긴 로마도 시드니도 뉴욕도 아닌데요 뭘. 이 곳 은 안전해요」 역겨운 미소를 띠고 있는 당신만 옆에 없다면 말예요, 하고 린든은 속으로 덧붙였다. 헐렁한 바지를 입은 여자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는 차를 주문했다. 인도인 소녀가 차를 날라오자 마리노치는 역시 그 소녀에게 추잡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린든은 테이블 밑에서 그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차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그가 차를 다 마시기 전에 식사를 마치려고 서둘러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림은 다 됐나요?」 「아직 덜 됐어요」 「괜찮으시다면 한 번 더 구경을 시켜 주셨으면 하는데요」 「그래 봤자 소용이 없는데요, 미스터 마리노치」 「줄리오라고 불러 주시구려」 은근한 말투다. 테이블 밑에서 마리노치의 손이 린든의 무릎을 향해 뻗어 온다. 린든 은 몸을 비켜서 피했다. 「어떻게 그렇게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호들갑스럽게 놀라는 시늉을 지었다. 「연세가 아버지 같으신 분한테」 「친구 사이에 나이가 무슨 문제겠소」 친구 사이라니, 오오 하느님! 린든은 밥을 입에 밀어넣었다. 모래를 씹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체하기 전에 그만 먹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테이블에 계산서가 놓여 있어 서 셔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그 위에 놓고는 의자를 뒤로 밀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잠깐 기다리시오」 마리노치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몇 개 꺼내 테이블 위에 놓고는 일어섰다. 「댁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린든은 끄응 하고 속으로 신음했다. 「그러실 필요 없으니까 차나 마저 드시도록 하세요」 아무리 거절해도 허사였다. 두 사람은 부두 쪽을 향해 번화한 상점가를 지났다. 거기 서부터 마리노치가 해변을 따라 지름길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린든은 마을 안 의 길로 향했다. 꽤 멀리 돌긴 하지만 그렇게 가면 인가도 있고 사람의 내왕도 있으니 그 편이 낫다. 마리노치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왔다. 린든은 걸음을 멈추고 어깨를 흔들어 그 손 을 치웠다. 「제빌 부탁이니 손대지 말아 주세요」 마리노치는 놀란 시늉을 했다. 「그저 친구가 되려는 것뿐이오. 자, 마음을 풀어요」 린든은 잠자코 걸었다. 두 사람은 마을 변두리에 이르렀다. 집이 있는 곳까진 가느다 란 오솔길이 뻗어 있을 뿐 사방은 깜깜했다. 너무 급히 걷다가 돌뿌리에 발이 걸려서 하마터면 나동그라질 뻔했다. 마리노치가 팔을 잡아 주었으나 린든은 재발리 그의 손 을 뿌리쳤다. 잘 자라는 말만을 하고 린든은 계단을 잽싸게 오르기 시작했다. 마리노치가 그녀를 따 라 올라왔다. 그녀가 급히 문을 열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문을 닫기도 전에 집안에 들어선 것이다. 손을 뒤로 돌려 문을 잠그더니 그림으로 다가가 구경을 한다. 「댁의 그림이라면 돈은 얼마든지 내겠소」 「그건 팔지 않습니다」 마리노치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미소를 띠고 린든의 가슴에 시선을 던진 채 다가 온다. 「천 달러면 어떻겠습니까?」 「말씀드렸잖아요, 팔 물건이 아니라구요」 린든은 문을 열었다. 「제발 돌아가 주세요」 마리노치는 바싹 붙을 정도로 다가와서 그녀의 머리에 손을 댔다. 그녀가 뒷걸음질을 치자 그는 히죽히죽 웃었다. 「말레이시아 달러가 아니라니까요. 미국 달러라구요」 더운 열대에 있는데도 린든은 노여움 때문에 한기를 느끼면서 마리노치를 노려보았다 . 「마리노치 씨, 이 그림은 팔 물건이 아니고 나도 팔 물건이 아닙니다」 린든은 심호흡을 했다. 「빨리 나가 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이 근처 모두에게 들릴 만큼 큰소리를 지를 테니 까요. 자, 나가세요!」 「흥분하지 마세요. 미스 미첼. 나가겠어요. 하지만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마리노치는 등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린든은 문을 콰당 소리가 나게 닫았다. 자 물쇠를 채우고 나서 문에 등을 기댔다. 온몸이 떨린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치사한 자식, 메스꺼운 자식.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린든은 겁에 질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린든? 나야, 저스틴이야. 문 열어」 마음이 놓이면서 머리가 핑 돈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어 저스틴을 맞아들였 다. 그는 두 손을 반바지 주머니에 찌르고는 걱정스러운 듯 눈살을 모으고 있다. 「어떻게 된 거야? 사납게 문을 닫는 소리가 나기에 내다봤더니 마리노치가 돌아가는 참이더라구. 그래서 와봤어」 「앉으세요」 자기도 의자에 앉고 나서 린든은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 아직도 내 그림을 갖고 싶다고 우기는 거예요. 미국 달러로 천 달러 내겠 다면서」 「음... 그래 뭐라고 대답했지?」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아요? 나도 내 그림도 팔 물건이 아니라고 그랬어요」 「그리고는?」 「나가 주십시오라고 말했죠. 그 사람, 나가면서도 다시 또 찾아오겠다는 거예요」 저스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 사람이 전술을 바꾸기 전에 수를 쓰는 게 낫겠어. 자물쇠를 꼭 채워 두라구」 「해치진 않겠죠 뭐. 날 해칠 생각이었다면 벌써 그랬을 테니까요」 「그건 알 수 없어」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곧장 집을 나서도록 해」 저스틴은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더니 계단을 세 단씩 뛰어내려갔다. 그는 계단 아래에 멈춰 서서 린든을 올려다보았다. 「아침 5시에 데리러 오지. 알겠어?」 「준비하고 있을께요」 저스틴은 마리노치에게 세준 집 쪽으로 사라졌다. 무슨 수를 써서 내보낼 생각일까? 몇 분 뒤 마리노치의 집에서 나와 오솔길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저스틴의 뒷모습이 보 였다. 그리고는 계단을 올라가 집안으로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 5시, 린든과 저스틴은 모터보트에 몸을 실었다. 보트는 이내 바다 한가 운 데로 나갔다. 「마리노치는 오늘 아침에 그 집을 나갔나요?」 「응,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그 사람한테 뭐라고 했어요?」 저스틴이 히죽히죽 웃었다. 「얼굴이 중요하다고 생각되거든 더는 내 앞에서 얼씬거리지 말라고 그랬지」 린든은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 이상 못생기기도 힘든 얼굴인데」 그리고는 이마를 찌푸렸다. 「내 말이 너무 심했군요. 난 원래 그리 좋은 사람은 못되나 봐요」 저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심술궂은데다가 용서할 줄도 모르지」 「어머나,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말할 건 없잖아요!」 저스틴이 웃었다. 린든은 혀를 쏙 내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녀는 뒤로 팔 을 짚어 얼굴에 바람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근사해요. 상쾌한 바다 공기만큼 좋은 것은 없어요」 하지만 나는 펜실베이니아의 어느 시골에서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 모든 것이 상쾌하고 파란 녹색으로 물든 봄날이었지. 들에는 새싹이 돋아나고 바람은 신선하고 맑았었지. 가슴이 메도록 슬펐다. 왜 이렇게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도 슬픈 걸까? 모든 추억이 웨이트와 연관돼 있기 때문이리라. 린든은 눈을 떴다. 저스틴이 보고 있다. 가슴이 미 어지는 것 같다. 그녀는 눈길을 돌렸다. 연인은 원치 않아요. 단지 친구를 갖고 싶어 요. 제발 친구로서 있어줘요... 린든은 무릎에 손이 얹힌 것을 느끼고 눈을 들었다. 저스틴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 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린든은 망설였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연애감정이 없는 우정이라는 게 가능하리라 생각하세요?」 「우정에도 여러가지가 있으니까...」 「진정한 의미의 우정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무리일 것 같애, 적어도 내 경우는」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혹시 우리 사이의 일을 두고 말하는 건가?」 「네, 그래요」 저스틴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린든, 너와 나의 관계가 연애감정이 배제되어 있는 관계라고 말할 순 없어. 겉으로 나타내지 않는다고 해서 속마음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 린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보라가 뱃전을 넘어 얼굴을 적신다. 저스틴의 말이 옳다.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히 사랑의 느낌이 있다. 남은 것은 시간문제일 뿐. 그것 을 피하자면 도망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텔록바항 부두에 이를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저스틴이 뛰어내려서 배 를 대나무 기둥에 붙들어 맸다. 그녀가 배 끝에 서 있었기 때문에 배는 위험할 만큼 흔 들 렸다. 린든은 저스틴이 내민 손을 잡았다. 뛰어오르는 방법이 서툴러서 균형을 잃을 뻔했지만 그가 힘껏 잡아끌었기 때문에 간신히 부두로 오를 수가 있었다. 쓰러질 뻔 한 그녀를 저스틴이 두 팔로 안아세웠다. 「팔이 빠져 버리겠어요!」 그녀는 웃고 있는 저스틴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종알거렸다. 「고치는 법은 알고 있어」 「어련하시겠어요」 저스틴은 아직도 린든을 안고 있다. 「이젠 됐어요. 놓으세요」 린든이 말했다. 「아냐, 아직 그럴 수가 없어」 그러더니 저스틴이 그녀에게 입술을 겹쳐 왔다. 격렬한 입맞춤에 온몸의 힘이 빠져 움 직일 수가 없다. 「앞으로 다시는 우리 관계에 대해 바보 같은 생각을 해서는 안돼」 그는 포옹을 풀고 나더니 갑자기 사무적으로 돌변해 그녀의 슈트케이스와 자기의 낡 은 가방을 집어들었다. 린든은 키스의 후유증 때문에 불안정한 걸음으로 가늘고 긴 잔교 를 건너 부두 쪽으로 따라갔다. 「여기서 기다려. 보트 매놓을 자리를 찾아야 하니까. 저기는 딴사람이 사용하는 장 소 인 모양이야」 보트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두 사람은 거리로 나왔다. 택시 운전사가 차문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사람 어디서 나타났죠?」 「차를 보내라고 호텔에 부탁해 놨지. 짐을 내려놓고는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서 조 지타운으로 나가자구」 조그만 어촌에서 두 달 이상을 지내다가 이렇게 호사스런 곳에 들어서니 기분이 야릇 했다. 바닥엔 온통 보드라운 양탄자가 깔려 있고, 멋있는 커버를 씌운 묵직한 의자가 놓여 있다. 또한 냉방장치도 잘되어 있었다. 양쪽으로 열게 되어 있는 문으로 드나들 수 있는 두 개 짜리 방이었다. 현대식 호텔 방은 어디나 비슷한 것이어서 들어서면 좁은 통로 한쪽에 욕실, 다른 한 쪽에 옷장이 있다. 침실에는 커다란 더블베드와 안락의자가 두 개, 테이블, 책상, 옷 장이 하나씩, 그리고 텔레비전에다 조그만 냉장고가 있다. 냉방장치가 풀 가동되고 있 어서 한겨울의 미네소타 같다. 「어때?」 저스틴이 뒤켠에서 물었다. 린든은 팔을 비비면서 돌아다보았다. 「펠랑기의 촌집보다는 확실히 호화판이로군요. 하지만 꼭 하나 중요한 게 빠져 있어 요」 저스틴이 눈썹을 치켜올린다. 「허, 그래?」 「난로예요. 얼어버리겠어요」 저스틴은 씩 웃고 나서 온도조절장치를 찾았다. 「가장 차가운 곳에 맞춰져 있군. 온도를 좀 높여 주지」 「고마와요」 커피숍의 일부는 노천 카페였다. 꽃이 활짝 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고, 그림엽서에 서 나 봄직한 해변과 바다 경치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하얀 커버를 씌운 테이블 한가운 데에는 예쁜 꽃이 꽂힌 꽃병이 놓여 있다. 케이크니 크림이니 먹을 것들이 잔뜩 실린 이동식 테이블이 그들의 식욕을 자극했다. 「내가 지금 뭘 먹고 싶어하는지 아세요?」 크림을 얹은 초콜렛 케이크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면서 린든이 말했다. 「케이크를 먹으면서 점심 먹을 걱정까지 하다니 대단하군」 「흥, 보통인 걸요. 치즈버거를 먹고 싶어요. 치즈와 토마토와 양파와 피클을 넣은 특 대형 버거에다 감자튀김 곱빼기」 린든은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 푸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저스 틴 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농담이겠지. 세계 최고의 음식들이 있는 곳에 와서 겨우 간이음식을 먹겠다니 말이 나 돼?」 그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으므로 린든은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펜실베이니아에서 온 백인이에요. 아무리 맛이 있대도 두 달 동안이나 내쳐 동 양요리만 먹다 보면 햄버거와 감자튀김 생각이 나게 마련이에요」 저스틴은 단념하듯 한숨을 지었다. 「그야 조지타운에도 맥도널드가 진출해 있겠지. 만일 맥도널드가 없더라도 큰 호텔 의 커피숍이라면 상상력이라곤 씨도 없는 외국인들을 위해 틀림없이 햄버거를 팔고 있을 거야」 린든은 마치 성인군자처럼 웃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화내진 않을 거예요」 「다행이군. 어서 커피를 마시고 떠나자구」 택시의 뒷좌석에서 저스틴이 린든의 어깨에 팔을 돌려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이러지 마세요, 저스틴. 부탁이에요」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신사인 척하려 해도 어려운 걸. 나는 그 동안 여자하고 한 번도...」 「그만두세요. 당신의 여성편력을 자세히 듣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여성편력이라니?」 린든은 진절머리가 나서 한숨을 쉬었다. 「나하고의 관계에선 실패했다고 해도 내 탓은 아녜요. 백인 남자들은 동양 아가씨를 좋아한다면서요? 어째서 그 여자들 중에서 누군가 하나를 골라잡아 결혼하지 않으셨 죠 ? 멋있는 부인이 됐을 텐데요. 예쁘고 상냥하고 남자들의 어떤 요구에도 따른다던데 요 」 저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정말 따분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야. 게다가 그들은 킬킬 웃기만 하거든」 「하지만 당신은 자청해서 이리로 도망쳐 오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날 목표로 삼을 생 각일랑 말아요. 자, 이 손을 치워 주세요」 「마음을 풀어요」 저스틴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택시 안에서 뭘 할 수 있을 것 같애?」 「상상으로 만족하시는 게 어떻겠어요?」 린든이 화난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저스틴은 웃으며 팔을 풀었다. 6 지난 몇 년 동안 이토록 행복했던 적이 없었어. 군밤을 먹으면서 조지타운의 번화가를 걷고 있을 때 린든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스틴 은 줄곧 린든의 어딘가를 만지고 있었다-손을 잡거나, 어깨에 팔을 두르거나,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거나. 그리고 그의 시선 또한 언제나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좀처럼 하지 않던 이런저런 얘기들을 그녀에게 늘어놓았다. 두 사람은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었다. 싫다던 저스틴은 두 개나 먹었다. 「부끄럽지도 않아요? 이렇게 맛있는 요리가 있는데 햄버거 따위를 먹다니」 「햄버거가 어디가 어때서? 미국 시민의 나무랄 데 없는 어엿한 음식이라구」 「그럼 어째서 내가 햄버거를 먹고 싶다고 했을 때 그렇게까지 구박했었죠?」 「내가?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지?」 햄버거를 한입 더 베어물었기 때문에 저스틴은 잠시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린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웃고 있다. 「당신은 구제할 길이 없군요」 오후 내내 두 사람은 이리저리 쏘다녔다. 걷기도 하고 세발자전거를 타기도 하면서. 뒷골목에 줄지어 있는 잡동사니 가게에서는 서로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샀다. 서로 모 르게. 헌 사리(인도 여자들이 몸에 두르는 긴 천)와 사롱, 이가 빠진 도자기, 녹이 슨 숟가락, 한쪽이 깨진 도자기 등 별의별 것이 다 있었다. 린든은 먼지가 뽀얗게 쌓인 헌 상자 속에서 상아로 된 인도 코끼리를 발견했다. 먼지 투성이에 때가 잔뜩 끼어 있었지만 흠집은 나 있지 않았다. 무척이나 정교한 것이었 다. 「저녁식사는 어디서 하지? 뭐가 먹고 싶어?」 린든은 잠시 생각했다. 「따끈하고 향신료가 들어간 칼칼한 것. 인도 카레가 어떻겠어요?」 「본격적인 카레를? 그거라면 좋은 식당을 알고 있어」 저스틴은 웃으며 린든의 손을 잡았다. 「핫도그를 먹겠다고 할까봐 걱정했는데」 호텔로 돌아온 것은 꽤 늦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로비의 바에는 아직도 화려하게 차 려 입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다들 이국적인 음료를 손에 들고 무대에서 가수가 부르 는 크리스마스 노래를 경청하고들 있었다. 「한 잔 어때? 피곤한가?」 저스틴이 물었다. 「내가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설마... 하지만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게는 해주셔야 해 요. 20분 뒤에 로비로 갈께요. 너무 늦은가요?」 「20분만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어 내는 여자가 있단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구 . 기대는 않겠지만 기다리고 있을께」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린든이 아니다. 방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황급히 옷을 벗 고 후다닥 샤워를 했다. 천천히 할 수 없는 게 유감이었다. 진짜 샤워기 밑에 서본 게 얼마 만인가. 린든은 가지고 온 외출복 중에서 하나를 꺼냈다. 소매 없는 비단 드레스인데 홍콩에 서 싼값에 산 지 8년이나 지났건만 샀을 때 그대로 조금도 후줄근해지진 않았다. 고운 청 록색으로 유행을 타지 않는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구김살이 잘 가지 않아서 여행할 때 가지고 다니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서둘러 팔을 꿰고 뒷굽이 높은 샌들을 신은 다음 머리를 빗었다. 귀걸이가 어디에 있 더라? 린든은 귀걸이를 찾아 달고는 향수를 조금 뿌렸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아이새 도 와 마스카라와 루즈를 정말 기록적인 속도로 발랐다.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는 아직도 3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바에 가보 니 밴드가 쉬고 있는 참이어서 음악은 흐르고 있지 않았다. 린든은 복잡한 사람들 틈바 구 니에서 저스틴을 찾았다. 여러 나라말들이 뒤섞여 들려왔다. 젊은 일본 사람들 여러 명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어 대고 있다. 마침내 저스틴을 발견했다. 그녀는 칵테일을 나르고 있는 웨이트레스들 사 이를 뚫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린든을 알아본 저스틴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듯한 눈 을 했다. 그녀는 나직한 소파에 그와 나란히 앉으며 매력적인 미소를 띄웠다. 「예쁜데!」 저스틴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다 속삭인다. 「고마와요. 여자란 비단 조각과 하이힐만 갖고도 놀라울 만큼 달라지죠?」 「정말 당신한테는 계속해서 놀라는 판이군」 「그것도 20분밖에 걸리지 않은 거예요」 「정말이야. 기적은 없어지지 않나 보지?」 저스틴도 멋있었다. 역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으며, 얇은 바지에 스탠딩 칼라 의 검은 셔츠를 입고 있다. 「그 셔츠 마음에 드는데요, 이국적이고」 린든이 말했다. 실은 「눈도, 코도, 머리도 마음에 들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 햇 볕에 그을은 손도 좋아요. 당신을 만지고 싶어요. 키스하고 싶어요」라고도... 「그래?」 「네, 아주 근사해요」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린든의 심장 소리가 누구에게라도 들릴 만큼 커졌다. 그녀는 얼른 테이블 위의 메뉴에 시선을 돌렸다. 「자, 들어 봐요. 콘티키의 해돋이, 사막의 꿈, 우울한 새벽, 페낭 피즈, 꿈꾸는 사 랑, 첫사랑의 추억」 「야! 낭만적인데.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봐」 「당신은 뭘?」 「스카치」 「왜요? 이 중에서 골라 봐요」 「너무 달아」 「그럼 난 <꿈꾸는 사랑>으로 하겠어요. 럼과 칼루아와 오렌지 주스를 섞은 거예요. 맛있을 것 같은데요」 얼마 안 있어 밴드가 돌아왔다. 말레이인과 중국인과 인도인의 트리오라 그런지, 징글벨을 부르기에는 어쩐지 어색하 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상당히 잘 하는데다 손님들도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웨이트레스가 음료를 날라와서 우아하게 무릎을 꿇고는 테이블에 놓았다. 린든의 칵 테 일은 핑크색 난초와 파인애플로 장식된 아주 멋있는 것이었다. 달콤하고 그리 독하지 도 않았다. 별안간 고향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저스틴은 린든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손가락에 감았다가는 풀고 다시 감았다가는 또 풀곤 한다. 마음이 진정되자 이번에는 피로감이 온몸에 번져 왔다. 터져나오려는 하품을 겨우 참는데 저스틴이 알아차리고 는 미소를 짓는다. 「피곤해?」 「아주 녹초가 됐어요. 발이 아파서 죽을 지경이에요. 부르텄나봐요. 이제 그만 가 쉬 어도 될까 모르겠어요?」 「되다마다. 그럭저럭 1시가 다 됐는 걸」 「혼자 올라갈 테니 당신은 더 있지 그래요?」 「나라고 자고 싶지 않을 까닭이 없지」 「즐거웠어요」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린든이 말했다. 저스틴이 침침한 불빛 아래서 린 든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까는 조금 슬퍼 뵈더군, 잠시 동안이었지만」 「슬프다기보다 차라리 서글픈 느낌이었어요. 그래요, 그런 느낌이었어요」 사람이 없는 긴 복도에 깔린 양탄자가 발소리를 죽인다. 두 사람은 문 앞에 섰다. 린 든이 열쇠를 꺼내는 순간 저스틴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더니 키스했다. 길고도 격 렬한 키스였다. 「열쇠를 이리 줘봐」 린든이 열쇠를 건네자 저스틴은 문을 열고 나서 돌려주었다. 「내가 발을 봐줄까?」 린든은 고개를 저었다. 「대수롭지 않으니까 괜찮아요」 「알았어, 그럼 쉬어요」 「잘 쉬세요」 린든은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침대에 걸터앉아 신을 벗고 발을 마주 비비고 있는데 안쪽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린든?」 그녀는 문으로 갔다. 「무슨 일예요?」 문을 여니 저스틴이 문틈에 기대어 서 있다. 「뭘 물어 본다는 걸 깜빡 잊었어. 아침식사는 아래층에서 하겠어, 아니면 방에서 먹 을 테야? 방에서 먹을 경우는 주문서를 문 밖에 놔두기만 하면 되는데...」 「일단 방에서 커피와 크루아상을 먹고, 그 뒤에 아래층에 가서 아침식사를 듬뿍 하 고 싶어요」 「좋겠군. 그렇게 하면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지에 싼 소중한 선물을 교환할 수가 있 겠 지. 몇 시가 좋을까?」 「글쎄요, 12시까지라도 잘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 짓은 않겠어요. 7시에는 틀림없 이 일어나겠어요」 「7시 15분이라고 써놓겠어. 어때?」 「좋아요」 밑바닥에 흐르는 생각을 숨긴 채 사무적인 얘기만 한다는 것도 싱거운 노릇이다. 저 스 틴이 손을 뻗쳐 왔을 때 린든은 피하지 않았다. 내심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의 손이 팔을 잡더니 이어 어깨로 올라갔다가 다시 등으로 돌아간다. 마치 슬로모션 영화처럼... 그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온다. 가슴이 죄어들고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친다. 저스틴의 몸은 욕망을 억제하느라 굳어 있다. 린든은 긴장을 풀었다. 그러나 그 순간 오히려 그 녀 자신의 욕망이 혈관을 타고 온몸에 번져 나간다. 저스틴이 몸을 놓을 때까지 꽤 많 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잠자코 쳐다보자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가슴의 설렘이 가라앉아 준다면 좋으 련만.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그의 눈을 보았다. 「그만 쉬세요」 「잘 쉬어요, 린든」 저스틴은 등을 돌리고 문을 닫았다. 열쇠 돌리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린든도 자기 방 문을 잠그지 않았다. 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문득 화장대 위의 조그만 꾸러미가 눈 에 띄었다. 참, 코끼리를 씻어야 되는데. 비눗물로 코끼리를 씻으면서 세면대 거울에 비 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그만 킬킬 웃기 시작했다. 「저스틴이 보지 않은 게 다행이야」 린든은 혼잣말을 했다. 「세면대 앞에서 알몸으로 칫솔을 들고 코끼리를 씻고 있는 모습이라니...」 잠시 후 침대에 누워 걸지 않은 문을 쳐다보면서, 만일 지금 저스틴이 들어온다면 어 떻게 할까 하고 생각했다. 안돼, 그런 생각을 해선 안돼. 린든은 눈을 감고 편안히 누 웠다. 정신이 들었을 땐 저스틴이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자기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막 잠이 깬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쳐들어오고 있다. 아 침이다.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까지 곤히 잤던 것이다. 「참 멋있어」 그가 속삭였다. 「알몸으로 자는 모습이...」 시트가 가슴을 절반밖에 가리고 있지 않다. 린든은 황급히 시트를 턱밑까지 끌어올렸 다. 「밉살스럽긴! 들어오기 전에 노크쯤은 할 수도 있잖아요?」 「했지, 그런데도 당신은 깊이 잠이 들어 있더군. 게다가 커피는 식어 가고 있고」 「노크 소리가 너무 작았던가 보죠」 「호텔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깨우고 싶진 않았어. 크리스마스를 자면서 지내 려 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니까」 크리스마스! 린든은 시트의 한쪽 귀퉁이를 잡고 일어나 앉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자, 나가 주세요. 이런 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진 않으니까요. 당 장...」 나머지 말은 저스틴의 키스에 막히고 말았다. 시트가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그녀 의 가슴이 저스틴의 가슴에 맞닿았다. 가슴털이 부드러운 살갗을 꼭꼭 찌른다. 팔이 저절로 저스틴의 등뒤로 돌아와서는 손가락끝이 그의 다부진 근육을 더듬고 있다. 이건 순전히 미치광이 짓이야, 아주 즐거운 미치광이 짓. 하지만 이렇게 무단침입해 서 덮치다니 용서할 수 없어. 린든은 얼굴을 돌렸다. 「저스틴, 커피가 식어요」 「커피 같은 거야 아무러면 어때」 「하지만 나는 아침 커피가 필요해요. 그게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저스틴이 목덜미에 입을 대고 웃고 있다. 어떻게 할 방도가 없는데다 몹시 짜증스러 워 져서 그의 몸을 밀었다. 「뭐 때문에 이렇게 굳어 있지?」 「굳어 있긴 누가 굳어 있어요? 머리가 돌 것 같아서 그래요! 당신은 내가 아무 것도 입지 않았을 때만 골라서 들어오잖아요. 예절에 어긋나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던 가 요?」 「그랬던 것 같애」 저스틴이 린든의 귓전에 대고 말했다. 그녀는 그를 밀어붙였다. 저스틴은 몸을 뒤로 빼면서 물었다. 「어떻게 해줘야 되겠어?」 「아무것도 안해 줘도 돼요!」 린든은 시트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왠지 슬픔이 북받쳐 올라왔다. 눈에 눈물이 번진 다. 「나가줘요, 저스틴. 제발」 그는 「커피를 탈께」라고 말하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린든은 시트를 걷어치우고 욕실로 가서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었다. 잠시 후 신문지 에 싼 코끼리를 들고 파란 카프탄을 입고 문께에 섰다. 「들어와서 앉지 그래」 저스틴이 의자를 가리킨다. 조그만 테이블 위에 커피와 크루아상이 놓여 있다. 「메리 크리스마스!」 린든은 저스틴에게 신문지 꾸러미를 건네고 의자에 앉아 따끈한 커피를 입으로 가져 갔 다. 저스틴은 꾸러미를 풀고 코끼리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바라보았다. 공들여 판 조 각 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좋은데」 이렇게 말하고 섬세한 몸통과 상아를 쓰다듬는다. 「아마 고대 인도 시대의 것일 거야. 고마와. 자, 이번에는 당신 차례야」 꾸러미는 저스틴의 의자 옆에 있었다. 「나도 크리스마스를 축하해」 꾸러미를 푸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꾸러미 속에서 나타난 것은 놋쇠로 만든 오래된 향로였다. 「어머, 근사해요! 모래를 담고 향을 꽂아 베란다에 놓겠어요」 린든은 향로를 조금 떨어진 곳에 놓고 바라보았다. 「닦는 게 좋을 거예요. 절에 있는 것은 항상 반짝반짝하게 닦아 놨더라구요. 하지만 녹슨 색깔도 좋은데요. 보라색, 녹색, 금색, 파랑...」 「글쎄, 닦지 않아도 괜찮을 것도 같은데?」 「생각해 볼께요. 고마와요」 활짝 갠 날이었다. 두 사람은 풀에서 헤엄을 쳤고 그 뒤에는 바다에 뛰어들었다. 해 변 에 누워서 트럼프를 치기도 하고, 책을 읽거나 함께 수다를 떨기도 했다. 마치 어린 아 이들처럼. 크리스마스의 저녁식사는 린든이 기대했던 대로였다. 빨간 보가 씌워진 테이블 위에 는 하얀 난초꽃이 그 청초함을 자랑하고, 은그릇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은은한 음악 이 잔잔하게 흐르고, 나무랄 데 없는 분위기에 맛있는 요리, 게다가 저스틴은 재치가 넘 치고 쾌활하다. 린든은 공들여 치장을 하고, 가지고 온 또 한 벌의 비단옷-은은하게 빛나는 하얀색과 크림색의 심플한 드레스-을 입고 있었다. 저스틴이 테이블 너머로 린든의 손을 잡았 다. 「펠랑기 섬에서 먹었던 크리스마스 요리, 기억해? 아버지하고 내가 당신 집에 묵었 을 때」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닭고기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고 포도주는 맛이 변 해 있었죠」 저스틴이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멋진 크리스마스는 아주 오랜만이었거든」 「정말 그랬어요. 그땐 정말 행복했어요」 두 사람은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눈에 미소를 지었다. 웨이터가 포도주를 따르러 왔을 때에야 저스틴은 린든의 손을 놓았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다시 로비의 바에서 캐롤 송 을 들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서 다른 손님들을 구경하기고 하며 한동안 쉬었다. 「해변을 걷지 않을 테야?」 저스틴이 말했다. 린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일어서서 어둠 속으로 나갔다. 호텔 뜰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잔디밭을 지나 인기척이 없는 수영장 옆을 빠 져나가니 모래사장이었다. 아무도 없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총총 빛나고 있다. 보름달에 가까운 커다랗고 둥그스름한 달이 떠올라 사방을 고요히 비추고 있다. 마치 꿈의 세 계 같았다-야자나무와 고깃배들, 모래사장과 회교사원. 바다가 부드러운 파도 소리를 내 면서 살금살금 물가로 밀려 왔다가 밀려가곤 하는 조용한 해변의 밤은 참으로 낭만적 이다. 게다가 숙박하고 있는 곳은 라사사양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호사스런 호텔인 것이다 . 라사사양-말레이어로 <사랑의 감촉>이라는 뜻이다.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말을 아끼 면서 물가를 걸었다. 밤의 정적과 평화와 고독을 즐기면서. 한참만에 호텔로 돌아와 다시 음악과 조명과 웃음이 넘치는 바에 들어가니 딴 세계에 온 것 같은 생각이 든다 . 「한 잔 더 하지 않겠어?」 저스틴이 물었다. 린든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늦었어요. 이대로 방으로 올라가요」 린든의 방문 앞에 멈춰선 저스틴은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녀를 끌어 당겨 입을 맞췄다. 「린든...」 그가 입술을 댄 채 소곤거린다. 「침대가 엄청나게 크던데?」 린든은 마른침을 삼켰다. 「난 큰 침대를 좋아해요. 팔다리를 마음대로 뻗을 수 있으니까요」 「이리 와」 저스틴은 린든의 손을 잡고 자기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스틴, 당신하고 한 침대에서 잘 생각은 없어요」 린든은 더듬더듬 말했다. 저스틴이 불을 켰다. 「누가 언제 자자고 그랬어? 이 침대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냉장고를 비우기 위해 있 는 거야. 이것 보라구」 그는 옆에 있는 조그만 냉장고를 열었다. 「붉은 포도주, 백포도주, 진, 보트카, 스카치 위스키, 어느 걸로 할래?」 「붉은 포도주」 자기도 모르게 냉큼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내가 왜 이 모양이지? 린든은 어깨를 들 썩 이고는 신을 벗고 침대로 올라앉았다. 「그것 말고는 뭘 들겠어?」 저스틴이 묻는다. 「아몬드에 초콜렛, 치즈, 크래커 등등이 있는데?」 「아몬드요」 「받아요」 저스틴이 조그만 주머니를 던진다. 주머니는 린든의 무릎 위에 떨어졌다.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요」 「당신이 서투른 거야」 저스틴이 글라스에 포도주를 따랐다. 「텔레비전이나 켜보지 그래?」 린든은 스위치를 눌렀다. 처덕처덕 짙은 분장을 한 성난 얼굴의 한 중국인이 불쌍한 하인을 꾸짖고 있다. 「쿵푸 영화예요. 중국어예요. 말레이어 자막이 나오는데요」 「그건 재미없어. 그밖에는?」 린든은 채널을 돌렸다. 「사리를 입은 여자가 울고 있어요. 인도 사람이에요」 그녀는 다음 채널로 돌렸다. 크리스마스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런! 도니와 마리 오스먼드예요」 저스틴도 놀랍다는 듯이 콧소리를 냈다. 「믿어지지 않는데」 이렇게 말하고 침대 끝에 그녀와 나란히 앉아 와인 글라스를 내밀었다. 도니와 마리는 무대 위에 만든 동화의 나라에서 가슴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수놓은 하 얀 스웨터를 입고 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아마 35도쯤 되는 8월의 한더위 중에 비디오 촬영한 것일 거예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고?」 저스틴이 나이 많은 영감님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쿵푸가 좋겠어요?」 「어딘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을 거야. 딴 거 뭐 재미 있는 게 있는지 봅시다」 프로그램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저스틴이 집어올렸다. 「오늘이 며칠이지? 아아, 여기 있군. 이것 좀 봐! 재미있는 게 있어. 이건 앞으로 1 5 분이면 끝나고...」 「<달라스>죠?」 저스틴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일이야. 오늘은 007이라구. <007은 두 번 죽지 않는다> 본 적 있어?」 「아뇨」 「다행이군, 나도 그래」 저스틴이 다시 그녀 옆으로 와서 앉았다. 「오늘은 집생각을 했었지?」 「조금요」 저스틴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돌리고 머리칼을 쓸어 올리더니 몸을 기울여 부드럽게 입술을 스쳤다. 아무래도 들고 있는 포도주를 엎지를 것 같다. 린든은 몸을 뒤로 빼 면 서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포도주가...」 저스틴이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는 웃음이 사라지고 진 지 한 얼굴로 변해 있다. 린든은 가슴의 고동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저스틴, 오늘은 정말 근사했어요. 하지만 이젠 정말 가야겠어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다. 「왜 그래? 뭘 두려워하지?」 「모르겠어요. 다만 아직은... 미안해요.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기가 싫은 건 아녜 요. 사실은 받아들이고 싶어요. 그렇지만... 외롭고 쓸쓸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는 것이 분명해지지 않고서는...」 「그게 그토록 중요한 일일까?」 「그래요」 린든은 신발을 찾아 신고 일어섰다. 저스틴도 따라 일어서더니 팔짱을 끼고 그녀 앞 에 우뚝 선다. 눈빛이 냉랭하다. 잔뜩 화가 난 표정이다. 「린든, 당신은 언제쯤이나 그 사내한테서 풀려날 수 있는 거지? 언제가 돼야 그 사 내 한테서 벗어나 자신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갈 거냔 말야!」 린든은 문득 화가 치밀었다. 「몰라요! 어쩌면 그런 때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죠! 저스틴, 당신 스스로를 돌이켜 봐 요. 얼마나 됐죠... 케이트가 떠나간 지? 몇 해가 됐잖아요! 두 달만에 잊혀지던가요 ? 오늘 저녁 당신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든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오늘 저녁만이 아냐. 난 지난 두 달 동안 날마다 당신을 만났어. 우리는 함께 얘기 를 주고받았고, 함께 커피를 마셨고, 식사도 같이 했어. 당신의 표정, 몸짓, 그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이 눈으로 봤고, 당신의 말소리, 웃음소리, 그래, 숨소리까지도 이 귀로 들었지. 그러면서 난 점점 더 당신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같이 있노라면 뭐 라 고 할까...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 것처럼 마음이 푸근했어. 당신을 껴안고, 입 을 맞추고, 또 서로 사랑하고 싶었단 말야」 저스틴이 잠시 말을 끊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렇게 지내기를 두 달...」 다시 천천히 말을 잇는다. 「당신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그 동안 참 많이 참았어. 하지만 지금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다구. 괜히 화도 나고 조바심도 나고, 뭔가 좌절감이 느껴지고 그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당신이 그 사나이를 잊 기만을 바라 왔었지만 지금은...」 텔레비전에서는 마리 오스먼드가 겨울 노래를 고운 목청으로 부르고 있다. 저스틴은 고개를 돌리고는 난폭하게 스위치를 껐다. 숨막힐 듯한 고요... 무거운 침묵. 저스틴 이 피곤한 듯 턱을 쓸었다. 「당신은 이제 그만 가는 게 좋겠어」 린든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나 잠시 후 침대에 가서 누웠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는다. 후회가 가슴 가득히 번진다. 옆방에서는 텔레비전 소리가 웅성거리며 들려온 다. 다시 텔레비전을 켜고 007을 보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 당신은 두 번 살아. 운 좋은 본드. 실패하더라도 본드에게는 기회가 한 번 더 있어. 그렇지만 내 인생은 한 번뿐. 처음부터 실패가 없어야 해. 그러나 별로 잘 살 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길을 잘못 잡은 건 아닐까? 웨이트 곁에 머물면서 그가 재출발하는 것을 도와주었어야 옳은 것이 아니었을까? 린 든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웨이트한테는 돌아가지 않을래」 그녀는 소리를 내어 외쳤다. 「나로서는 할만큼은 했어, 이젠 그만이야, 그만이라구」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호텔을 나와 택시를 타고 텔록바항 부 두로 갔다. 바다도, 태양도, 얼굴을 스치는 바람도 이틀 전 페낭으로 건너오던 때와 똑 같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자꾸만 다르게 느껴진다. 모터보트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까지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즐거웠어요」 이윽고 린든의 집 앞에서 저스틴의 집으로 갈라지는 곳에 이르렀을 때 린든이 먼저 입 을 열었다. 「마지막에 화나게 해서 미안해요」 「아냐, 이젠 괜찮아. 그런 식으로 폭발시켜서 미안해. 더 참았어야 하는 건데. 하지 만 그것만 제외하곤 즐거운 크리스마스였어」 저스틴은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를 띠고 손을 흔들고는 가방을 어깨에 메더니 곧장 집 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린든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열었다. 집안은 조 금도 달라진 데가 없다. 이젤에 걸어 놓은 그림이 방 한 가운데 그대로 놓여 있다. 좋은 그림이야.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스스로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침실에 슈트케이스를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아아, 왜 이리 우울할까? 수영이나 하 러 갈까?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저스틴의 집 열려진 창으로부터 희미한 타자 치 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오자마자 다시 일을 시작한 모양이다. 해변에는 어린아이들이 연을 날리고 있었다. 주황색, 청색, 보라색 또 분홍색 등 선 명 한 색깔의 연들이 하늘 높이 춤을 추고 있다. 사롱을 모래 위에 깔고는 그 위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머리 속에 영감이 떠올랐다. 푸른 바다와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주황, 파랑, 보라, 분홍색의 종이 연들로 캔버스를 가득 메운다. 린든은 벌떡 일어나 집으로 달려 갔다. 집에 들어서서 얼른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스케치북과 연필을 들고 다시 해 변으로 나갔다. 아이들은 아직도 해안에 있었다. 연 하나가 땅에 닿을락말락하게 내 려 왔다.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자 아이들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린든은 싱긋 웃 었 다. 「연이 아주 곱구나. 이걸 그리고 싶은데, 괜찮겠니?」 린든이 말레이어로 물었다. 아이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꺼번에 와악 웃었 다. 그리고는 그녀가 보기 쉽도록 연을 끌어내려 주었다. 가느다란 대나무 뼈대에 색 칠한 얇은 종이를 바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린든이 스케치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이 머 리 와 팔에 따갑게 내리비치고 있다. 햇볕을 쬔 탓인지 집에 돌아오니 목이 바싹 마르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낮의 내리쬐는 햇볕 아래 앉아 있는다는 건 무모한 짓이다. 그러나 스케치는 완성되었다. 이젠 채색만 하면 된다. 멋진 그림이 될 거야. 나지라 가 점심으로 수프를 만들어 놓았지만 린든은 조금밖에 먹지 못했다. 그러자 나지라는 요 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먹지 않은 줄로 생각하고 금방이라도 울 듯이 입을 삐죽거 렸 다. 물 두 컵에 아스피린을 두 알 먹은 다음 창문의 셔터를 반쯤 내려 한낮의 눈부신 햇 빛 을 몰아낸 후 침대에 누웠다. 눈을 뜨니 오후 3시가 가까왔다. 두통은 가라앉고 기분 은 상쾌했다. 주방에서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이젤과 그림 물감을 가지고 뜰로 나갔 다. 그로부터 두 시간 가량은 모든 것을 다 잊고 그림에만 몰두했다. 도구들을 챙겨 집으 로 돌아왔을 땐 몸은 지쳐 있었지만 흥분은 가시지 않은 채였다. 집안이 좀더 밝다면 밤새도록이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을 텐데... 린든은 석유 램프를 켜고 방을 둘러보았다. 너무 어둡다. 가압식 램프 같으면 조금은 더 밝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거름이 가까울 무렵 그녀는 마을로 가압식 램프를 사러 나갔다. 한 가게에서 그것을 발견하고는 얼른 사왔다. 가압식 램프는 성가신 물건이다. 통유를 넣고 몇 분간 펌프질을 계속해야 한다. 불을 붙이자 불꽃은 눈이 따가울 정도로 희게 빛났고 귀에 거슬리는 쉭쉭 소리를 낸다. 그 러나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야 소리 같은 것이 무슨 상관이람. 어느 사이엔지 시간 이 많이 지나 문득 시장기를 느꼈다. 벌써 10시가 가까왔다. 점심을 먹은 뒤로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녀는 냉장고 에 남아 있던 수프를 데워서 주방의 걸상에 앉아 그림을 보면서 맛있게 먹었다. 피로 가 푸근한 담요처럼 온몸을 폭 감쌌다. 더는 그릴 수가 없다. 그녀는 램프 불을 끄고 붓을 빨아 놓은 다음 침대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빨려들어가듯 잠이 들어 버렸다. 오늘은 12월 31일, 페낭에서 돌아온 뒤로 저스틴이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니 이상 하 다. 이미 8시가 넘었지만 린든은 어두운 길을 나서서 저스틴의 집으로 달려가 노크를 했다. 그러자 타자 치는 소리가 뚝 그쳤다. 「들어와요!」 린든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니, 이게 누구야? 어서 와」 저스틴은 머리를 쓸어올리고 후유 숨을 내쉬고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미안해요, 작업중이었군요」 「이제 막 그만두려던 참이었어. 하루종일 했으니까」 그는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서더니 몸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뭘 마실 테야?」 「글쎄요, 진토닉을 부탁할까요?」 저스틴은 마실 것을 가지러 맨발로 주방으로 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서 로 마주보고 있었다. 린든은 글라스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 멍한 표정, 입가에 잡 힌 주름살, 피로의 기색이 역력하다. 「못 만난 지가 꽤 오래 됐군요」 「일을 하고 있었어」 린든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뭐 나한테 화난 일이라도 있었나요?」 저스틴이 안달이 나는 듯한 시선을 그녀에게 던졌다. 「잘 알면서 뭘. 하지만 화를 내고 있진 않아. 내가 올바른 정신을 지닌 채 지내기 위 해서는 당신한테서 떨어져 있는 게 상책인 것 같았어」 그는 술을 쭉 들이켜고는 글라스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참기 괴 로운 침묵이다. 린든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비틀었다. 저스틴이 창가로 가더니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물었다. 「요즘은 뭘 하면서 지내지?」 「그림을 하나 새로 그리고 있어요」 「그럴 줄 알았어. 불빛이 보이더군. 상당히 늦게까지 씨름을 하는 모양이던데?」 「당신도 제대로 진척이 되나요?」 「꽤 나갔어」 「마음에 들어요?」 「이제까지 썼던 것보다는. 당신 그림은?」 「직접 보시는 게 어떻겠어요?」 「글쎄? 나갈 일이 있으면 그때 들를게」 린든은 술에는 거의 입을 대지 않고 일어섰다. 「그럼 그 때 다시 뵙기로 해요. 안녕히 계세요」 「잘 가요」 저스틴은 붙잡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 린든의 가슴은 답 답했다. 섣달 그믐날 밤을 인도양의 조그만 섬에 있는 오두막에서 외토리로 지내게 되 다니. 「새해를 축하해」 이튿날 아침 린든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향해 인사를 했다. 오늘따라 어째서 이렇게 잠이 일찍 깬 걸까? 그리고 어째서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 드는 걸까? 린든은 해변을 산책하다가 커다란 바위에 올라가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기분 나쁠 정도로 잔잔하다. 린든은 사롱을 벗고 바다에 들어갔다. 살갗에 와 닿는 물이 아주 시원하게 느껴진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그녀는 이따금 위를 보고 누워서 머리를 비워 보려고 애썼다. 배가 고파왔다. 커피를 한 잔 마셨을 뿐 아침식사로는 아무 것도 먹은 것이 없다. 몇 시나 됐을까? 나온 지가 한 시간은 된 것 같다. 린든은 기슭을 향해 헤엄쳐가 물의 깊 이가 허리쯤 차는 곳에서부터는 걷기 시작했다. 무엇인가가 발에 닿았다. 해초일까? 발을 비벼 본다. 미끈덕미끈덕한 것이 기분이 나 쁘다. 몇 번이나 비벼서 씻어 보려 했지만 떨어지지 않는다. 물에서 나와 살펴보았다 .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따끔따끔했다. 린든은 몸을 말리기 위해서 매트리스에 가 누웠다. 따끔따끔하던 것이 이제는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들여다보니 넓적다리에 지렁이 자국 같은 게 길게 부풀어올라 있다. 아픔이 갑자기 격렬해지고 불에라도 닿은 것 같 았다. 별안간 무서운 생각이 나서 벌떡 일어났다. 도대체 뭐였을까? 물속에서 뭘 건드렸던 것일까? 곧장 집으로 달렸다. 무엇인가 차가 운 것, 통증을 가라앉혀 주는 것을 발라야 할 것 같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아! 이렇게 아플 수가! 집으로 향한 오솔길까지 왔을 때 저스 틴이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저스틴!」 린든은 목청을 높여 불렀다. 저스틴이 린든을 알아보고 손을 흔든다. 린든은 손을 쳐 들고 저스틴을 부르면서 계속 달려갔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다 솟았다. 저스틴이 급 히 쫓아왔다. 「왜 그러지?」 린든은 숨을 헐떡이며 멈춰 서서 넓적다리를 보였다.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목소리가 높아졌다. 「바다에서 뭔가에 ...아파요. 꼭 덴 것처럼 아파요. 참을 수가 없어요」 저스틴은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힐끗 쳐다보더니 뱉듯이 말했다. 「해파리야, 도대체 바다에서 뭘 하고 있었지?」 저스틴의 말투에 린든은 한순간 아픔을 잊어버렸다. 「뭘 하긴요? 헤엄을 치고 있었어요!」 「그걸 몰랐었단 말야?」 저스틴은 답답하다는 듯 바다 쪽을 가리켰다. 「저걸 좀 봐!」 린든은 얼른 바다를 보았다. 나왔을 때와 다름이 없다.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하다. 「파도 하나 없잖아」 저스틴이 말을 이었다. 「파도가 없을 때는 해파리가 모여든다는 걸 몰랐더란 말야?」 린든은 화가 나서 돌아보았다. 「몰라요, 그런 것! 그리고 그렇게 호령 좀 하지 마세요」 아픈 다리를 끌고 집으로 가려 했다. 저스틴이 팔을 잡았다. 「추 선생한테 가자」 저스틴은 먼저 린든을 자기 집으로 끌고 가서 의자에 앉혔다. 「응급처치를 해야겠어」 그는 튜브에 든 연고를 꺼내더니 허옇게 얼룩진 곳에다 살살 바르기 시작했다. 「열대지방의 마취제야. 한동안은 견딜 수 있을 거야」 「아무리 씻어내려 해도 떨어지질 않는 거예요」 린든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점점 더 깊이 문질러 넣은 꼴이 되고 만 거야. 중탄산나트륨 같은 거로 독기를 죽 였 어야 되는데」 「그랬었군요」 저스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서서 린든을 일으켜 세웠다. 「집에 들어가서 옷을 입도록 해. 추 선생은 70살이 다 된 노인이야. 비키니 차림의 당신을 보고 심장이 견뎌낼지 의심스러워」 「듣기 싫어요, 저스틴!」 저스틴은 마치 고소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새해를 축하해」 한순간 린든은 말없이 저스틴을 쏘아보았다. 「새해를 축하해요」 추 선생은 주사를 놓고 독이 퍼진 자리에 연고를 발랐다. 저녁 무렵에는 하얗게 부푼 곳이 붉은 빛깔을 띠었다. 약 덕분에 조금은 지내기가 편해졌지만 그래도 아픈 건 여 전하다. 그로부터 며칠 사이에 붉은 빛깔이 연보라로 바뀌고 다시 진한 보라색이 되 었 다. 보기에는 아주 심한 것 같지만 통증은 완전히 가시고 없었다. 저스틴은 다시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의 집 옆을 지날 때마다 타자 치는 소리가 들렸다. 먼발치로 보는 외에는 좀처럼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까닭없이 적적함 이 느껴졌다. 저스틴과 나란히 앉아 얘기하고 술이라도 한 잔 마셨으면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스친 다. 새로 쓰는 책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지만 물어 볼 기회조차 없다. 차츰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영원히 숨어 있을 수는 없다. 돌아가서 새로 시작해야겠어. 일자리도 찾아봐야지. 웨 이트하고도 다시 얼굴을 대하게 되겠구나. 조그만 도시에서 언제까지나 피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까. 그보다도 다른 도시로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필라델피아나 여동 생 이 사는 뉴올리안스 같은 곳에. 그러나 미처 생각지도 못했을 만큼 빨리 린든은 웨이트를 만나게 되었다. 어느 날 저 녁 마을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웨이트가 이젤 앞에 서서 연 그림을 보고 있는 것이 다! 7 마치 시간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린든은 시장바구니를 손에 든 채 입구에 우뚝 섰다 . 말이 나오지 않는다. 웨이트는 작은 방이 꽉 차게 들어서서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예전 과 다름이 없는 웨이트... 큰 키에 넓은 어깨, 푸른 눈에 곱슬곱슬한 갈색 고수머리. 그러나 기억 속의 웨이트보단 여윈 것 같아 보인다. 눈빛이 공허하고, 뭔가에 굶주려 있는 듯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했다. 그녀는 한동안 숨을 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 웨이트가 한 손으로 이마를 닦았다. 「잘 있었소?」 린든은 천천히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아, 이건 현실이 아니야. 자신과 웨이트 둘 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 같다. 아무런 느낌도 없어... 심장의 고동 소리와 다리가 떨리는 것 말고는. 「어떻게 여기를 알았죠?」 바싹 마른 목구멍 속에서 말을 짜내려니 목소리가 이상하게 새된 소리가 되어 나왔다 . 「재수가 좋았었지. 리즈를 만나러 갔더니 당신한테서 온 편지가 탁자 위에 놓여 있 더 군. 주소를 베꼈지」 「그러셨군요」 어째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걸까? 노여움도 행복도 그 어떤 것도... 린든은 바구니를 집어들고 주방으로 가서는 조리대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현실이 아냐. 더 위 때문에 환각에 시달리고 있는 거야. 그가 주방으로 들어오는 발소리가 났다. 눈을 떠 보니 그가 옆에 서 있었다. 웨이트의 셔츠가 눈에 띈다. 흰 바탕에 녹색 줄무늬, 넥 타 이도 매지 않았고 겉옷도 입지 않았다. 「린든...」 고뇌에 찬 목소리다. 린든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웨이트가 팔 을 돌려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아 린든 만나고 싶었어」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격렬하게... 그런데 순간 왠지 모르게 린든 은 멈칫했다. 그러나 감각이 되살아나면서 그리움이 북받쳐올라 그녀의 얼어붙은 몸 을 녹이기 시작했다. 그 느낌, 그 체취, 그 애무. 린든은 웨이트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린든은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상한 느낌이다. 뭐라 표현하 기 힘든, 마치 꿈 같은... 웨이트가 그녀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 「울지마, 린든」 쉰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에 울린다. 「당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그러나 그녀는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웨이트가 그녀를 안고 소파로 가 무릎 위에 앉히고는 꼭 끌어안았다. 어째서 울음이 복받치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가 없다. 복잡 한 감정이 치달리고 있다... 사랑, 안도감, 두려움, 그리고 씻을 길 없는 노여움까지 . 「당신은 나를 때렸어요!」 린든은 흐느껴 울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죠! 어떻게 나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냐구요?」 기억이 되살아난다. 선명하게 그리고 가슴 아프게.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입 술이 터지고 다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다.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린든은 별안간 더이상은 웨이트에게 안겨 있을 수가 없었다. 몸을 비틀어 그의 팔에 서 빠져나왔다. 소파의 모서리에 가 앉아 눈물에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 왜 그랬죠?」 웨이트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알 수가 없어. 내가 어째서 그렇게 됐었는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는 거야. 생각해 봤지만 괴롭기만 할 뿐 역시 알 수가 없었어. 하지만 다신 그 따위 짓은 절대 하지 않 겠어. 약속해」 그는 손을 뻗쳤다. 린든은 몸을 비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해요, 웨이트. 그만두라구요」 웨이트의 두 손이 축 내려갔다. 「린든, 다시 시작해 보고 싶어. 당신을 사랑해. 당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과할 수도 없었고, 지옥 같은 괴로움을 겪었다구. 당신한테 그런 짓을 한 내 자신 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 얘기해 주고 싶었어. 그 생각뿐이었어. 부탁이야, 린든. 믿 어 줘」 그의 목소리에 담긴 격렬한 고뇌가 심장을 죄는 것 같았다. 「믿겠어요」 웨이트는 다시 이마를 닦았다. 「당신이 얼마나 괴로왔을지는 잘 알고 있어. 몹시 어려웠으리라는 것도... 하지만 부 탁이야 린든, 다시 한번 새로 시작해 보자구. 당신한테 보상을 해주고 싶어. 행복하 게 해주고 싶다구」 린든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물라 손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말 좀 해줘, 린든」 그녀는 웨이트를 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잘되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 알지? 해보지도 않고서?」 린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젠 그런 일은 견딜 수가 없어요」 그녀는 일어섰다. 너무너무 불안해서 웨이트의 옆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사랑해, 린든」 웨이트는 자신의 얼굴을 양손에 묻었다. 「사랑한다구」 「알아요, 하지만 이젠 끝난 거예요」 린든은 얼굴을 돌렸다. 저녁 어스름이 다가와 있다. 「그만 돌아가 주세요. 페낭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게 쉽게 단념하지는 않겠어.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어. 여기서 한동안 머무를 생각이야」 「여기서는 묵을 수 없어요」 웨이트가 일어섰다. 그의 큰 키가 그녀를 압도했다. 그러나 파란 눈에는 슬픔이 어려 있었다. 「알고 있어. 저쪽 집에서 묵을 수 있도록 하고 왔어」 그는 저스틴의 집 근방을 가리켰다. 평상시의 그답지 않은 태도에 린든은 적이 놀랐 다. 그는 내가 받아들여 주리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순간 저스틴에게도 노여움을 느꼈다. 무엇 때문에 저스틴은 그런 짓을 했더란 말인가? 웨이트에게 묵을 곳을 제공하다니. 웨이트는 언제까지 섬에 머물러 있 을 작정일까? 그녀는 분함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제발 부탁이에요, 나가주세요」 돌아다보니 이미 웨이트는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났고, 그녀는 혼자 남 았 다. 의자에 앉았다. 감각이 마비된 듯 움직일 수가 없다. 어둠이 밀려왔지만 그녀는 불을 켜려고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부르고 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무릎을 끌어당기고 얼굴을 묻고 있었는데, 그 얼굴을 들어올리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린든은 열려진 문간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저스틴이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 앉아서 뭘 하고 있지?」 린든은 멍하니 저스틴을 바라보았다. 저스틴은 방으로 들어와서 램프에 불을 켠 다음 린든의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아?」 「네」 목소리가 갈라져 나온다. 린든은 헛기침을 했다. 저스틴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물 끄러미 쳐다보았다. 「괜찮지가 않은 것 같은데?」 「왜 웨이트한테 집을 빌려 줬죠?」 「절차가 끝날 때까지는 웨이트인 줄을 몰랐었어.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내가 참견할 일도 아니고」 「아주 냉정하시군요」 린든은 비꼬아 말했다. 주머니에 찌르고 있는 저스틴의 손이 주먹을 쥐고 있다. 어쩌 면 그는 별로 냉정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린든은 머리를 쓸어올리고 등을 꼿꼿이 폈 다. 「웨이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죠?」 저스틴은 잠시 잠자코 린든을 내려다보았다. 「조금밖에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마음에 들었어」 그렇게 시인하는 것이 괴로운 듯했다. 「글쎄요. 그렇게 말하리라 생각했어요」 「린든...」 저스틴이 야릇한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의자에서 일 으 켜 세웠다. 손을 마주잡은 채 두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어붙은 듯이 서로 쳐 다보고만 있었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훈훈한 저녁 바람을 타고 밤의 소리가 들려온다-귀뚜라미와 도마 뱀, 그밖에 여러가지 동물들의 콘서트와 그리고 그 모든 소리를 압도하는 듯한 파도 소리도. 린든은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불현듯 저스틴의 표정에서 까닭 모를 불 안 감을 읽을 수 있었다. 입밖으로는 내지 못할 어떤 의문들을... 왠지 불안하다. 가슴이 쓰리고 숨이 답답하 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저스틴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눈에는 그늘 이 져 있다. 그는 린든을 끌어당겨 부둥켜안았다. 그리곤 그녀의 고개를 뒤로 젖히게 하더니 격렬 하게 키스했다. 린든의 무릎이 꺾여지자 저스틴은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사랑해」 저스틴은 두 손으로 린든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천천히 두 손을 내려 가슴을 애 무하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순간 그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저스틴이 하 자는 대로 하고 싶다. 그는 두 손과 입술로 격렬한 애무를 계속하고 있다. 별안간 전율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공포와 노여움과 혼란도... 「놔줘요, 저스틴, 제발!」 저스틴은 린든을 안아올려 침실로 데려갔다. 그녀를 침대에 눕힌 후 몸을 구부려 입 을 맞추고 나서 셔츠에 두 손을 가져갔다. 너무나도 큰 충격에 린든은 꼼짝도 할 수가 없 었다.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흐른다. 「당신을 갖고 싶어」 저스틴이 귀에 대고 속삭인다. 「키스 해 줘, 린든. 키스해 줘」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눈에는 눈물이 넘친다. 「싫어요, 싫어요!」 자기를 건드리는 게 역겨웠다. 저스틴도 웨이트도... 어느 누구도. 마치 물건이나 그 무엇처럼... 그래, 자기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처럼 안고 만지려 하는 남자들의 일방적인 욕망이 싫다. 마치 침범을 당하고 있는 것같이 느껴져. 내가 뭘 바라고 있 는 지는 전혀 신경도 안 쓰지 않는가. 「오늘밤은 안돼요, 오늘밤은」 저스틴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갔다. 「무슨 뜻이지 그게? 웨이트가 오늘밤에 오기로 했나?」 「아뇨, 초대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만일 오면 어떡하지?」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게다가 당신은 상관없잖아요?」 저스틴은 그녀의 시선을 오랫동안 잡고 놓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 저스틴은 갑자기 등을 돌리더니 아무 말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린든은 욕실로 가서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혼자 있고 싶어서 이곳에 왔는데, 두 남자가 나를 요구하고 사랑을 속삭인다. 린든은 거울 속의 자기를 들여다보다가 느닷없이 히스테릭한 웃음을 터뜨렸다. 머리카락은 흐 트러지고 얼굴은 푸석푸석하다. 주황색 그림물감이 묻은 색 바랜 셔츠. 꼴이 아주 엉망이군. 그런데 저 사람들은 도 대 체 내게서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다시 신경질적인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억지 로 참으며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었다. 아아, 하느님, 저를 가만히 내버려두게 해주세요 ! 이튿날 아침 린든은 배낭에 짐을 챙겨넣고 폭포로 갔다. 여기 같으면 혼자 있을 수 있 을 것이다. 웨이트는 이곳을 모르고, 저스틴은 아마 온종일 일을 할 것이다. 시원한 물에 들어가 헤엄을 치고 나무그늘에서 한동안 잠을 잤다.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지만 , 그래도 책을 읽으려니까 여전히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린든은 아직도 자신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뜻 발 걸음이 내디뎌지지를 않고 속이 편치가 않다. 웨이트는 또 올 것이다. 어떻게 얘기를 해야 다시 시작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러나 웨이트는 오지 않았다. 린든은 오전 내내 줄곧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그림도 그려지질 않았다. 밤에 자리에 누워서도 웨이트에게 할 말을 연습하느라고 몇 시간이 나 잠을 설쳤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해안에 가서 대나무 침대에 누워 가물가물 졸고 있었다. 그때 그 녀의 몸 위로 그림자 하나가 떨어졌다. 「여어!」 웨이트였다. 수영 팬티만을 입은데다 어깨에 수건을 걸쳤고 몸에서 물방울이 떨어지 고 있다. 린든은 가슴이 철렁했다. 어째서 이렇게 핸섬할까? 크고 남성적인 그의 몸에서 는 결점이라고는 한 군데도 발견되지 않는다. 차라리 안짱다리나 새우등이나 새가슴이라면 좋으련만, 올챙이배라든가, 머리가 벗어 졌다든가, 코가 유난히 크다든가, 차라리 그러기라도 했으면 좋을 텐데. 그런데 그렇 지가 않다. 웨이트는 완벽하다. 그 완벽한 육체는 지금도 린든을 끌어당긴다. 「잘 잤어?」 린든은 웨이트를 머리에서 몰아내기 위해 눈을 감았다. 모래가 사박이는 소리가 났다 . 그가 옆에 앉은 모양이다. 배를 깔고 엎드려서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웨이트 는 한쪽 무릎을 세운 위에다 한쪽 팔꿈치를 세우고 그녀의 넓적다리를 보고 있다. 「거기는 어떡하다 그리 된 거요?」 「해파리가 상냥하게 쓰다듬어 줘서 이렇게 됐답니다」 「어쩌다가?」 린든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빨리 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웨이트의 사나이다 운 매력이 마음에 걸려서 견딜 수가 없다. 「헤엄을 치고 오셨어요?」 린든이 물었다. 뭣 때문에 이런 뻔한 것을 묻는 걸까 하고 생각하면서. 「응」 웨이트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섬이로군」 「그래요」 「린든, 우리 사이에 이렇게 찬바람이 돌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어디에 있지?」 그의 푸른 눈이 어둡게 그늘진다. 린든은 눈을 비켰다. 「미안해요. 하지만 지난 서너 달이 내게는 굉장히 힘든 시기였어요. 여기서 당신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어요」 「찾지 않을 수가 없었어」 린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막히는 침묵만이 계속 됐다. 「여기서 그린 그림을 보여 줬으면 좋겠어」 「마음에 들지 않을 거예요」 차가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 그림에 대해 그런 몹쓸 비평을 해서 미안했어」 린든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웨이트를 똑바로 펴다보았다. 「비평이라면 누가 뭐라겠어요. 그런데 그건 질투에 불과했어요. 당신은 내게 상처를 입히고 싶었던 거예요」 웨이트가 기가 질려서 주춤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린든은 일어서서 매트리스와 수건을 끼고 뜨거운 모래사장을 걸었다. 발이 타들어 오는 것 같다. 그림이 잘 그려 진 기쁨을 어떻게 웨이트와 함께 나눌 수가 있을까? 그림이 팔린 기쁨에 대해서도 마찬 가 지다. 펜실베이니아에서 팔린 그 그림이 웨이트의 눈에 아무리 서투르게 비쳤다 하더라도 나 를 사랑한다면 같이 기뻐해 주는 게 마땅했다. 린든은 웨이트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무리였다. 섬은 너무나 좁았다. 이튿날 아침에 린든은 마을로 과일을 사 러 가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 그런데 집을 나서는 것을 봤는지 웨이트가 뒤쫓아왔다. 다행히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피상적인 얘기만을 주고받았다. 그날 저녁때는 해변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그때도 역시 그가 어디선지 나타나 같이 어 울리게 되고 말았다. 그후부터 린든은 집에 틀어박히는 일이 많아졌다. 웨이트가 혼 자 서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베란다에 앉아 독서를 하고 있는 게 창을 통해서 보이기도 했다. 어느 날 웨이트가 마을에 간 줄 알고 린든은 해변을 걷고 있었다. 몇 해만에 처음으 로 밖에 나온 죄수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웨이트가 커다란 바위에 앉아 있는 것을 그 근 처 에 갈 때까지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쭈그려앉아 무릎에 팔꿈치를 짚고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몹시 외롭고 쓸쓸해 보여 린든은 가슴이 아팠다. 명치 끝이 죄어드는 듯한 느낌을 느끼면서 그녀 는 얼른 등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웨이트는 며칠 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밤 린든이 가압식 램프 불빛 아 래서 그림을 완성시키려 하고 있을 때 불쑥 문간에 그가 나타났다. 린든의 가슴은 왠 지 불안감에 싸였다. 붓을 든 채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나, 들어가도 돼?」 린든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옆으로 비켜섰다. 웨이트는 그림 앞으로 가서 잠시 말 없 이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좋은데」라고 말했다. 「구도가 아주 훌륭한 걸」 「고마와요」 웨이트에게서 칭찬을 받아도 지금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기쁘게 해주려는 것뿐이겠 지 하는 생각이 든다. 린든은 테레빈유 항아리에 붓을 박았다. 웨이트가 보고 있는 데서 는 제대로 붓을 놀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일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 「오늘은 그만 그릴 거예요」 린든은 테레빈유가 묻은 헝겊으로 손을 닦았다. 「할 얘기가 있어」 웨이트가 그림 옆에서 떨어지면서 말했다. 린든은 헝겊을 내려놓고 웨이트를 보았다. 의자를 권하지는 않았다. 얘기 같은 건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가 주었으면 좋겠다. 「언제까지 펠랑기에 있을 생각이지?」 웨이트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가까운 시일 안에 돌아올 생각인가?」 린든은 석유 램프를 켜고 가압식 램프의 불을 껐다. 불이 꺼지느라 쉿쉿거리던 소리 가 그치자 거북할 만큼 사방이 조용해졌다. 「어차피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겠죠」 「펜실베이니아로 돌아올 테야?」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아파트는 아직 그대로 있지만 일이 없어서요」 「전에 하던 일을 하면 되잖겠어?」 「우리는 더이상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해요」 「돌아와 줬으면 좋겠어. 지난 학기 강의는 내내 대리로 채웠으니까 당신 자리는 그 대 로 남아 있어. 23일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지」 린든은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웨이트」 이런 웨이트를 보기는 처음이다. 초라하고 슬퍼 보이며, 감정이 고스란히 눈에 드러 나 있다. 「린든...」 웨이트가 다가왔다.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는 손을 내밀고 다시 다가온다. 「이러지 마세요, 헛수고예요. 제 말을 믿고 이 섬을 떠나 주세요. 그러는 편이 피차 간단하게 끝나리라 생각해요」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웨이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린든은 그 손을 뿌리쳤다. 「떠나지 않으면 안돼요! 우리 두 사람 사이는 이미 끝났으니까요」 웨이트는 보기에 딱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사랑하고 있어요, 린든」 「이미 늦었어요!」 절망감이 치밀어 오른다. 「늦었다구요. 그걸 모르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 소리 말아 줘, 린든. 당신이 필요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죠? 나한테 필요한 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나는 내 자신의 작 품과 작업에 지주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런데도 당신은 그걸 주지 않았어요! 그 반대 로 날 깎아내리고 헐뜯었구요! 내 자신감과 자존심을 희생시킬 수는 없어요. 당신을 위해서건 어느 누구를 위해서건!」 린든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요. 그리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적어도 연인 한 테서는 조금은 존경을 받고 싶기도 한 거예요. 당신은 그렇지 않았어요. 나를 이용하 기만 했을 뿐예요!」 웨이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냐, 린든. 그게 아니었어」 이렇게 말하며 다시 손을 내민다. 린든은 그 손을 피했다. 「건드리지 마세요!」 공포 때문에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 목소리를 무시한 웨이트의 움직임은 재빨랐다. 린 든은 그의 품에 안겨져 입술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의 입맞춤은 격렬하고도 길었다. 그녀는 얼굴을 틀고 온몸으로 버둥거렸다. 「놔요, 놔!」 그때 마침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나더니 문 앞에 저스틴이 나타났다. 「손을 놓으시지!」 목소리에 담긴 차갑고 얼음 같은 노여움을 깨닫고 린든은 놀랐다. 두 다리가 후들후 들 떨린다. 웨이트를 흘끔 보니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고 창백해져 있으나, 그의 팔은 아직도 그녀의 몸에 감겨져 있다. 한동안 웨이트는 꼼짝도 않고 저스틴을 쏘아보고만 있다. 얼마 후 천천히 팔을 내리 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린든은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아아 하느님, 이 두 사 람을 말려 주세요. 등을 돌린 웨이트가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았 다. 주먹을 꽉 쥔 양손이 옆구리에서 부르르 떨고 있다. 저스틴 역시 다리를 조금 벌린 채 노여움으로 눈이 세모꼴이 되어 무슨 일에라도 맞 서 나 갈 듯한 자세로 서 있다. 방안 구석구석에 숨막힐 듯한 긴장감과 침묵이 흘렀다.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나 아닐까 싶을 만큼 오랫동안 두 사람은 마주 쳐다보고 서 있 었 다. 어느 쪽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윽고 웨이트의 어깨가 힘이 빠지면서 처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린든을 흘끔 보더니 저스틴의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저스틴이 방 안 으로 들어왔다. 「아무 일 없었어?」 린든은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진 않았어?」 「네」 린든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미안하지만 나 혼자 있고 싶어요」 저스틴의 갈색 눈이 탐색하듯이 그녀를 쏘아본다. 「우리 집에 가서 뭘 좀 마시지 않겠어?」 린든은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고맙지만 오늘밤은 안 갈래요」 「내일 밤은?」 「좋아요, 고마와요」 저스틴은 금방 떠나지 않고 한동안 린든을 보고 서 있었다. 「내가 필요해지거든 언제든지 우리 집에 오도록 해」 린든은 가슴이 뭉클했다. 「알겠어요, 고마와요」 「문단속을 단단히 해」 그렇게 말하고는 저스틴은 등을 돌렸다. 린든은 계단을 내려가 성큼성큼 걸어서 돌아 가는 저스틴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웨이트가 머물고 있는 집 쪽을 보니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어디엘 갔을까? 이튿날 아침 웨이트가 해변으로 수영을 하러 가는 모습이 보였다. 웨이트는 그날은 그 녀에게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다. 뭔가를 먹긴 먹어야겠는데 저녁식사 때가 되어도 도 통 식욕이 나질 않았다. 뭘 먹을까 하며 무거운 기분으로 주방을 둘러보니 아침에 나지라가 시장에서 사온 계 란과 과일, 그리고 거기에 빵과 갓 만든 땅콩 버터가 있었다. 버터의 거죽에 얇게 기 름이 떠 있다. 린든은 지겨운 생각이 들어 뚜껑을 덮어 버리고는 바나나를 먹기 시작했다. 어제 저 스 틴 과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그러나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자 기운이 났다. 뭘 입는다지? 옷장 앞에 서서 한동안 망 설이다가 이 지방의 민속의상을 입기로 작정했다. 녹색 블라우스에, 녹색과 백색이 섞 인 사롱을 골랐다. 사롱을 허리에 찰싹 달라붙게 입고 복사뼈까지 내리니 그런 대로 멋있었다. 머리는 빗어서 올린 다음 큰 빗을 꽂아 흘러내리지 않게 했다. 샌들만 신으면 모든 준비는 끝난다. 린든은 저스틴의 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웨이 트 가 묶고 있는 집 베란다에 불이 켜져 있다. 책을 읽고 있는 모양이군. 저스틴한테로 가는 것을 보게 되겠지만 하는 수 없다. 린든은 부리나케 계단을 달려 올 라가 열려진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스틴은 책상에 앉아서 머리를 숙인 채 원고를 읽고 있었다. 「미안해요. 너무 빨랐나요?」 「기다리고 있었어」 저스틴은 원고지를 놓고 일어섰다. 「진토닉 어때, 괜찮겠어?」 「좋아요」 「내가 만들 테니 따라와 봐」 린든은 저스틴을 따라서 주방으로 갔다. 조리대 한쪽 구석엔 별로 많지는 않으나 병 이 늘어서 있다. 저스틴이 냉장고에서 토닉병과 라임을 꺼냈다. 「나이프는 서랍 속에 있으니까 넣고 싶은 만큼 썰어서 넣어」 그는 라임을 내밀었다. 손이 닿았다. 그것이 고의라는 것을 린든은 알고 있었다. 저 스 틴의 시선이 한순간 그녀의 시선을 잡았다. 그녀는 얼굴이 뜨거워져서 얼른 고개를 돌 렸다. 저스틴이 글라스에 진을 따르고는 토닉을 가득 차도록 부었다. 린든은 나이프와 도마 를 찾아 라임을 자른 후 자기 잔에 다 짜넣었다. 미처 다 짜기도 전에 라임이 손에서 떨어졌다. 떨리고 있던 그녀의 손이 라임을 잡으려다 그만 글라스를 툭 치고 말았다. 글라스가 바닥으로 떨어졌으나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다. 「어머나! 내가 왜 이렇게 허둥댄다지?」 린든은 글라스를 집어서 남아 있는 음료를 개수대에 버렸다. 「미안해요. 요즘은 신경이 약간 날카로와져 있어서요」 「그런 것 같군」 저스틴은 그녀의 손에서 글라스를 뺏어서 내려놓고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그런 당신을 보는 건 싫어」 린든은 그의 눈에 눈길을 박은 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가슴이 방망이질치고 맥박이 빨라진다. 저스틴의 엄지손가락이 아랫입술의 가장자리를 살짝 쓰다듬어, 그녀는 고 개 를 돌리며 그 손가락을 피했다. 「이러지 마세요, 저스틴」 저스틴이 얼굴을 숙여 스치듯이 키스했다. 「한 잔 새로 만들어 주지」 린든은 병을 집어드는 저스틴의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탄탄해 보이는 갈색 손 이 다. 저 손가락끝이 부드럽게 내 입술에 와 닿았었다. 안돼! 그런 생각을 해서는 린든 은 등을 돌려 주방에서 나왔다. 거실로 돌아온 저스틴은 린든과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고향에 돌아가기로 작정했어.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생각이 들어」 「오오! 언제요?」 「책을 다 쓰는 대로 즉시. 한 달쯤 후가 될까? 원고를 뉴욕으로 가지고 갈 생각이야 . 이제 슬슬 모습을 나타낼 시기가 됐다고 편집자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애. 내 대리인 도 같은 생각이고. 최신작의 영화계약을 따내려 하고 있는데, 내가 그 자리에 입회하 지 않으면 안될 모양이야」 「영화계약?」 린든은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가 없어요!」 저스틴이 씽긋 웃었다. 「당사자도 놀라고 있는 중이야」 「유명해지시는군요」 「만약에 계약이 되면 그렇게 되겠지. 그리고 또 영화가 성공했을 경우겠지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지는 않아」 「계속 미국에서 살 생각이세요?」 저스틴이 어깨를 들썩해 보였다. 「미리 인생의 계획을 세우면 따분해진다오. 앞날의 일은 알 수도 없거니와 알고 싶 지 도 않아」 린든은 목이 말라 진토닉을 입으로 가져갔다. 「여기 있는 셋집들은 어떡하죠?」 「팔겠어. 흥미를 보이고 있는 사람이 몇 있으니까」 「이 집은 그냥 두나요?」 「그럴 생각이야. 마음이 내킬 때 훌쩍 돌아올 수 있게」 저스틴은 글라스를 비웠다. 「한 잔 더 하겠어?」 「그러죠」 그러나 두 잔째를 마신 건 실수였다. 다 마시기도 전에 속이 메슥메슥한 것이 비위가 상했다. 바나나 한 개로는 저녁을 먹었다고 할 수 없고, 낮에도 거의 먹은 것이라곤 없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저스틴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린든은 의자에 꼿꼿하게 고쳐앉았다. 그래도 저스틴은 금방 알아차렸다. 「왜 그래?」 솔직히 털어놓는 것이 좋겠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속이 메슥거려요.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두 잔째를 마신 게 잘못이었나 봐요」 저스틴은 눈살을 찌푸렸다. 「진토닉 두 잔으론 그렇게 될 리가 없는데?」 「오늘은 거의 먹은 게 없거든요」 린든은 일어섰다. 「집에 가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리고 방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다. 「앉아! 움직이면 안돼」 저스틴은 그녀를 도로 앉혔다. 「배를 좀 채워야 한다구」 그리고 곧 방을 나가서 한참 후에 커피와 토스트 두 쪽을 가지고 돌아왔다. 「전기가 없는데 어떻게 토스트를 굽나요?」 「프라이팬을 가스 불에 올려놓고 구우면 돼」 「그건 몰랐었는데요. 머리가 좋으시군요」 그가 가져다준 걸 다 먹고 날 무렵 그녀는 한결 기분이 나아져 있었다. 「신경이 곤두서는 것도 무리가 아냐. 먹은 게 없기 때문이야」 「전혀 식욕이 없어요. 왠지는 모르겠지만요. 열대성 아메바 탓으로 뱃속이 엉망이 되 었는지도 몰라요」 「그렇겐 생각지 않는데.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건 신장 180cm에 영어를 지껄이는 생 물이야」 그 생물이 두 마리 있을지도 몰라요... 린든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밖에 내서 말하 지 는 않았다. 커피를 마시고 나서 컵을 탁자 위에 놓았다. 「고마와요, 맛있게 마셨어요. 이제 그만 가야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내가 데려다 주지」 린든은 저스틴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아직도 조금은 현기증이 났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스틴은 그녀가 집에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고 나서 등을 돌려 사 라 져 갔다. 그녀를 건드리려고도, 입을 맞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창으로 내다보니 웨이트가 아직 도 베란다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이튿날 아침 린든은 누군가가 침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잠이 깼다. 「누구세요? 대체 무슨 일이죠...」 「나야, 저스틴」 「무슨 일이에요?」 문이 열리고 저스틴이 얼굴을 디밀었다. 「아침식사를 지어 줄 테니 10분 후엔 식탁에 앉도록」 린든은 시트를 뒤집어쓰고 신음 소리를 냈다. 「먹고 싶지 않아요」 「억지로라도 먹지 않으면 안돼」 「속이 메스꺼워요」 「그럴 리 없어. 내 오믈렛을 먹고 속이 메스껍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저스틴이 만든 오믈렛은 정말 맛이 있었다. 린든의 위는 전혀 불평을 호소하지 않았 다. 「맛있었어요, 잘 먹었습니다」 린든은 깍듯이 인사했다. 「원 별 말씀을」 저스틴이 거창하게 머리를 숙인다. 「이제 비참한 수동식 타이프라이터 앞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겠군. 고국에 돌아 가 면 내가 맨 먼저 뭘 살지 맞혀 봐」 「전동식 타이프라이터?」 「틀렸어, 워드프로세서를 살 테야. 원시적인 타이프라이터하고는 작별이야」 「대단하시군요. 나 같은 사람은 무서워서 원」 「타자를 칠 수 있다면 워드프로세서도 사용할 수 있어」 「붓과 원시적인 그림물감 같으면 언제든지 대환영이지만」 저스틴은 린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빙긋 웃었다.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자구」 린든이 그 말의 뜻을 확실하게 이해하기도 전에 저스틴은 자취를 감춰 버렸다. 이튿날 웨이트가 꽃다발을 가지고 왔다. 여러 종류의 난으로 만든 커다란 꽃다발이었 다. 송이가 큰 분홍색 난, 그보다 약간 작은 하얀 난, 작은 가지에 무리져 송이를 이 룬 조그만 황색의 난. 웨이트다운 짓이군... 사람을 당황하게 하다니. 「고마와요, 곱군요」 고운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꽃병이 없는데... 그렇지만 빈 병 몇 개하고 빈 깡통이 있었다. 웨이트는 그녀가 이 그릇 저 그릇에 꽃을 꽂는 것을 보 고 있다가 거실에까지 따라왔다. 린든은 테이블과 책장을 꽃으로 장식했다. 「잼 병에 꽂힌 난꽃. 책제목으로 좋군요」 린든이 말했다. 「영화제목으로도요」 그녀는 웨이트에게 등을 돌리고 책장의 꽃을 보고 있었는데, 그의 팔이 몸에 감기는 것 같더니 휙 돌려 세워지면서 단단히 끌어안겨졌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잠긴 목소리였다. 「당신을 껴안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어. 사랑해! 나한테는 당신이 필요해」 웨이트가 격렬하게 입을 맞췄다. 린든은 얼굴을 돌리고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웨이트, 이러지 말라니까요!」 「간밤에 몇 시간 동안이나 저스틴의 집에 가 있었지? 나는 미칠 것만 같았어. 그 사 람하고는 어떤 관계지?」 웨이트의 팔속에서 린든의 몸이 굳어졌다. 「놓아요, 웨이트!」 「싫어, 놓지 않을 테야! 대답을 해!」 「대답할 의무는 없어요. 나는 당신에게 아무 의무도 없다구요」 웨이트는 린든을 놓았다.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었는데」 「사랑했었죠」 「용서할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 그랬는데」 「한 번으로 충분해요!」 웨이트의 팔을 벗어나서 한시름 놓은 린든은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언젠가는 용서하게 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잊어버릴 수는 없을 거예요. 당신이 한 짓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어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 꼭 한 번이면 된다니까 」 「그런다고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어요. 그걸 모르세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질 않는 다 구요. 당신은 여전히 일과 학생들과 자신의 그림에 불만을 품고는 또다시 나한테 화 풀 이를 하게 될 거예요. 내가 그림을 팔면 당신은 화를 내고, 내 그림이 비위에 안 맞 아 항상 비난만 할 거예요. 그런 꼴을 당하면서 살 순 없어요」 「그런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잖아! 좋았던 때도 있었어 당신만 나를 사랑하고 있었 다 면...」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게 있었다. 그의 말이 머리 속에서 메아리 친다.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면 ... 사랑하고 있었다면...」 노여움이 끓어오른다. 「사랑하고 있었다면이라뇨!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나는 사랑하고 있었어요! 당신 같은 사람은 영원히 깨닫지 못한 만큼 사랑하고 있었다구요」 「당신은 나를 사랑했던 적이라곤 없었어」 린든은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그만큼 둘이서 같이 고생을 했는데?」 그녀의 입에서 오열이 터져나왔다. 「나가 주세요! 나가 달라니까요!」 웨이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젠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 고요 속에서 린든은 자신의 솔직한 소리를 들었다. 「이젠 사랑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 일이 있은 후에도 웨이트는 섬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녀를 만나러 오진 않았다. 혼자 이리저리 섬을 돌아 다 니기도 했고, 해변에 누워 일광욕을 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여위어 수척해진 얼굴 을 빼면 웨이트는 여전히 멋있었다. 창을 통해 보이는 웨이트의 모습에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더이상 어떻게 하 고 싶지는 않았다. 저스틴은 매일 찾아왔다. 그러나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림의 진 척 상황만을 살피고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곧 돌아가곤 했다. 「당신네들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거지?」 어느 날 저스틴이 불쑥 물었다. 「별로요」 「당신 꼴이 참혹해. 그 사람도 처참한 꼴을 하고 있고」 「눈에 거슬려서 죄송합니다」 저스틴이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치켰다. 「허어, 그런 당신은 처음 보겠는데. 그런데 웨이트는 어째서 아직도 여기 남아 있지 ? 」 「모르겠어요」 저스틴은 몸을 곧추세웠다. 「알았어. 이제는 누군가가 행동으로 나가야 할 때인 것 같은데...」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문 쪽으로 향했다. 「무슨 짓을 할 생각이세요?」 「웨이트에게 섬을 떠나 달래야겠어」 「당신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요?」 저스틴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보더니 되돌아왔다. 「참견하기로 했어」 「어째서요? 「알 것 없잖아?」 그렇게 말하기가 바쁘게 저스틴은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이튿날 아침 웨이트는 섬을 떠났다. 웨이트가 없어지고 나자 린든은 믿을 수 없을 만 큼 홀가분해졌다. 그녀는 다시 자유로와졌다. 웨이트를 만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없이 언제든지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었다. 자 유로이 그림도 그릴 수 있었고 식욕도 되살아났다. 밤에는 곤히 잠을 잘 수 있었고 아 침에 눈을 뜨면 몸이 날아갈 듯 거뜬했다. 그러나 저스틴은 그후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의 집엔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다. 작 품 을 마무리하고 있는 거겠지. 귀국할 시기가 멀지 않은 것이다. 8 더이상 섬에 머무를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이 조그만 섬에서도 평화를 얻을 수는 없 었다. 조국으로 돌아가서 다른 도시로 옮겨가기로 린든은 결심했다. 다른 일자리를 찾아 거기에 몰두하자.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거야. 하지만 먼저 두 장의 그림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직도 저스틴에게 한 장 줄 것이 남아 있다. 저스틴과 그녀는 벌써 며칠째 얘기를 하 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책을 마무리하기에 바쁜 것 같다. 그러나 이유는 그것만이 아 니라는 걸 린든은 잘 알고 있었다. 린든이 저스틴 방의 열려진 문을 노크했을 때 그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타이프라이 터 에서 눈을 들어올린 그는 「어서 와」 하고 말했다. 「나도 떠나기로 했어요」 린든이 느닷없이 말했다. 「어디로 가는데?」 「얼마 동안은 여동생한테 가 있을까 생각해요. 이제 곧 아기를 낳을 테니까요. 가서 거들어 주면 그 애도 좋아할 거예요」 「펜실베이니아엔 돌아가지 않을 거야?」 「짐을 챙기러 2, 3일간 들러야겠죠」 「그렇겠군」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 언제 떠날 생각이야?」 「2, 3일 지나서. 금요일이나 토요일께요」 린든은 벽에 기댄 채 문간에 서 있었다. 저스틴은 일어서서 의자를 가리켰다. 「앉지 않겠어?」 그러고는 자기도 맞은쪽 의자에 앉았다. 「알고 있겠지, 린든. 이대로 내 인생에서 떠나가게 할 생각은 없어」 린든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먼저 내 자신부터 정리해야겠고...」 「알고 있어」 저스틴은 말을 더듬었다. 「이렇게 하지 않겠어? 오늘로부터 석 달 뒤에 뉴욕에서 만나기로 하는 거야」 린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다행이군」 저스틴은 의자의 등받이에 기댔다. 「이건 딴 얘긴데, 당신 그림을 한 장 팔아 줘야겠어」 「그럴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한 점 드리기로 약속했으니까요. 마음에 드는 걸로 한 점 골라잡으세요. 사원의 그림이든 연의 그림이든」 「둘 다 가지고 싶어. 당신이 내놓기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한 점은 살께」 「뭣 때문에 두 점 다 가지려고 그래요?」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리고 또 당신이 그리는 것을 봤으니까, 말하자면 당신이 그 린 그림이기 때문이야」 린든은 웃음을 지었다. 「좋아요, 두 점 다 가지세요」 「사원 그림은 따로 챙겨 두지 않아도 괜찮겠어? 팔 것이 아니라고 했었던 같은데... 」 「그래요, 그러니까 페낭에서 보낸 크리스마스의 답례로 드리겠어요. 그런 멋있는 시 간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거니까요」 저스틴의 눈에 따스한 것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린든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날 밤, 역시 당신과 같이 지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아냐, 그렇게 지낸 게 잘한 거야」 저스틴이 일어나서 그녀의 의자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자, 잠시라도 좋으니까 당신을 안고 싶어」 린든은 그에게 안긴 채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이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몰라.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걸 잘했다 고 생각하고 있어」 린든은 놀라서 고개를 쳐들었다. 「어째서죠?」 「당신은 즐겁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 문 이지」 린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참을 수가 없었어. 당신이 당신을 때리고 몹시 구박한 상대를 위해서 슬 퍼 하고 있는 게. 하지만 지금은 당신이 줄 수 있는 것을 쉽게 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 그런만큼 단념하기 어려워서 괴로와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러니까 앞 으로 당신이 나한테 줄지도 모를 것이 더욱 소중스럽게 여겨지는 거야」 린든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감사와 놀라움과, 거기에 또 하나의 감정으로 몸이 뜨거워졌다. 저스틴이 그녀의 고개를 젖히고 입을 맞추었다 . 린든은 아무런 저항감 없이 거기에 응했다. 그러자 저스틴이 별안간 몸을 떼고 등을 돌린다. 「미안해요, 나는 그럴 생각이...」 「하지만 언제나 그랬지!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는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을 피해왔던 거야」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커피나 마시지. 그러면 안전할 거야. 더이상 나한테 키스하지 말라구」 「당신이 먼저 시작해 놓구선...」 「그랬었나? 그럼 같이 주방에 가서 거들어 주겠어?」 저스틴은 물을 끓일 준비를 하고서 린든에게 물었다. 「그 집은 어떻게 할 셈이야?」 「그래요 참, 그 일로 얘기를 좀 했으면 싶었어요. 그 집을 팔고 싶은데요」 「나한테 사달라는 얘긴가?」 「부탁드릴 수 있겠습니까?」 저스틴이 씩 웃는다. 「좋아」 정작 떠나려니까 여간 분주하지가 않았다. 목요일 저녁에 이르러서야 겨우 마무리가 되었다. 입고 있는 옷과 이튿날 아침에 입을 옷을 빼고는 전부 짐을 꾸렸다. 냉장고는 깨끗이 비운 후 스위치를 껐고, 식료품 남은 것은 나지라에게 주어 보냈다. 이제 남은 일은 저스틴에게 잘 있으라는 인사를 하는 일뿐이다. 저스틴은 포도주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된 분위기였다. 두 사람은 포 도 주를 마시면서 실질적인 얘기를 주고받았다. 저스틴이 따뜻한 옷을 가진 게 없냐고 묻 길래 현재 자켓을 하나 갖고 있는데다 리즈가 겨울 코트를 가지고 공항에 마중을 나 오 기로 돼 있다고 말했다. 아파트를 정리하는 동안 리즈의 집에 있다가, 처분되는 대로 뉴올리안스로 갈 예정이 었다. 린든은 그의 눈이 줄곧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성급하게 포도주를 마 시 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린든은 작별인사를 하기가 싫었다. 일어서서 마지 막 말을 하고 이 집을 나서는 순간이 두려웠다. 저스틴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진다. 「왜 그렇게 불안해 보여?」 「안녕이라는 말을 꺼내기가 이렇게 싫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어쩐지 무섭기도 하구 요.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아마 당신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게 진짜 내 본심일 거예요. 「우선 여동생한테 가는 거야. 가서 느긋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뉴올리안스를 즐기도록 하라구. 그러다가 3개월 빼기 4일째 되는 날 뉴욕으로 오면 되는 거야」 그는 이미 그녀에게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 준 상태다 린든은 일어섰다. 왜 이런다지? 목이 마르고 다리가 떨리다니. 「알았어요, 그럼 그때 만나요. 이제 그만 가...」 그 다음 말은 저스틴의 뜨거운 입술이 막아 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열렬 한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린든 자신도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그의 목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린든」 저스틴이 속삭인다. 「한 번 더 당신을 보고 싶어」 그는 조금 물러서서 린든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그녀 의 블라우스 단추를 따고 어깨 아래로 끌어내렸다. 린든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머리끝까지 피가 솟구친다. 저 스틴의 손가락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더듬고 있다. 「아름다와」 저스틴이 다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눈에는 사랑과 욕망, 그리고 슬픔과 같은 것이 어려 있다. 그녀도 저스틴의 셔츠 단추를 따고 그의 구릿빛 가슴에 손을 댔다. 심장 의 묵직한 고동이 전해져 온다. 저스틴이 린든을 소파로 이끌어 갔다. 의자에 앉자 저스틴은 허리를 숙여 그녀의 가 슴 에 입을 맞췄다. 더없는 정겨움을 느끼며 린든은 그의 몸에 팔을 감고 온 힘으로 그 를 끌어당겼다. 「나를 사랑해 줘요」 두 사람은 초 한 자루를 들고 침실로 가서 희미한 불빛 속에서 옷을 벗었다. 저스틴 의 모습을 눈앞에 보면서 린든의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치고 있었다. 그도 그녀를 보고 있 다. 그러나 린든에게 부끄러움은 없었다. 오직 강렬한 기쁨뿐이었다. 저스틴이 손을 뻗치자 두 사람은 다시 한몸이 되었다. 두 사람의 손이 매끄러운 살갗과 부드러운 곡선, 탄력을 지닌 근육 위로 이리저리 미끄 러 지면서 서로를 더듬어 갔다. 린든의 몸은 환희에 부르르 떨리고, 그녀의 모든 신경은 오로지 저스틴의 감촉만을 느 낄 뿐이다. 마치 폭포수처럼 감동의 물결이 그녀의 전신을 휩싼다. 「미소를 띠고 있군」 저스틴이 속삭였다. 「당신은 정말 근사한 사람이에요」 애무가 더욱 깊어진다. 저스틴의 손이 한층 더 성급하게 움직이고, 린든은 아찔한 현 기증에 정신이 아뜩해졌다. 바야흐로 긴장감이 터질 듯이 고조되고 참을 수 없는 욕 망 에 온몸이 몸부림친다. 그리고... 별안간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더이상 기다릴 수 없는 조급함이 애무에 불을 댕겼고 두 사람을 찬란한 성취의 세계로 휩쓸어갔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떠보니 저스틴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린든은 자신의 뺨에 물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스틴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얼마 동안이나 보고 있었죠?」 「조금 전부터야」 저스틴의 눈빛은 한 번 더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시장 하지?」하고 물었다. 린든은 고개를 저었다. 「시장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좌우간 오믈렛을 만들겠어. 빈 속으로는 여행을 할 수 없으니까 말야」 「날 붙잡을 줄 알았어요」 「물론 그렇게 하고는 싶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거야. 우리한테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해」 저스틴은 침대에서 뛰어내려 파란 체크 무의 사롱을 허리에 두르고 침실을 나갔다. 린 든은 조용히 천장을 쳐다보았다. 저스틴의 말이 옳다. 흐트러진 감정을 다시 한번 건 강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펠랑기 섬은 웨이트에게서 받은 마음의 상처를 회복시 키는 데 도움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그 펠랑기 섬을 다른 남성에 대한 생각을 분명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떠 나 려 하고 있다. 분명히 운명의 신이 시간을 잘못 잡은 거야. 이윽고 부두에 서서 린든은 눈물 어린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3개월 지나거든 만납시다」 「빼기 닷새예요」 린든은 몸을 돌려 배에 뛰어올랐다. 「거기서 손을 흔들며 배웅하지는 말아요. 바다로 뛰어들어 되돌아갈 것만 같으니까 요 」 저스틴은 웃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그럼, 갈게」 그는 손을 흔들며 흔들리는 잔교를 천천히 걸어갔다. 오열이 치밀어 올라왔다.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린든 은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둔 채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돌아가는 길은 정말 지루했다. 비행기에서 비행기로 옮겨 타기를 몇 번. 비행기 안에 서 졸거나 자다가 식사를 하기도 하고, 그러는 사이에 흐리멍덩해지면서 시간도 날짜 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해서야 겨우 리즈에게 필라델피아에 도착하는 시간을 전화로 알 릴 수 있었다. 리즈에게로 온 뒤 이틀 동안 린든은 오로지 먹고 자기만 했다. 그러고 나 니 새로운 활력이 솟는 것 같았다. 잡동사니들을 간단히 챙긴 후 뉴올리안스 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떠나기 전날 밤 리 즈가 친구들을 불러 조그만 파티를 열어 주었다. 린든으로서는 자신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지금 친구들 곁을 떠나가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엎질러진 물. 린든은 아무 생각도 않기로 했다. 여동생 스테파니는 린든을 보자 무척 반가와했다. 임신 9개월 째에 있는 동생으로서는 해산구완을 해줄 언니가 이만 저만 반가운 것이 아니리라. 처음 몇 주일은 그런 대로 조용히 지나갔다. 드디어 스테파니가 사내아이를 낳았다. 린든은 음식을 장만하랴 큰 애들 시중들랴 눈코 뜰새없이 바빴다. 침 흘리는 아이 턱 받이 해주랴, 코 흘리는 아이 코 풀어 주랴, 고래고래 소리치는 아이 끌어다 목욕시 키 랴, 아이들 뒷바라지도 정말 큰일이었다. 펠랑기에서 조용히 혼자 지냈던 그녀에게 이러한 생활 은 삶이 아니라 소란 그 자체 였 다. 그러나 4주일 정도 지나자 여동생네 가족은 다시 행복한 혼란상태라는 평소의 리 듬으로 되돌아갔다. 그림을 그리려 했지만 아이들이 신기해하면서 줄곧 옆에 붙어 있는 바람에 린든은 혼 자 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쩌다 시간이 나서 붓을 들면 자꾸만 떠오르는 저스틴 생각에 제대로 그려지지도 않았다. 지금쯤이면 작품을 끝내고 뉴욕에 와 있을 텐데.. . 어느 날인가 그녀는 저스틴이 펠랑기에서 부친 편지를 받았다. 집 대금과 함께 짤막 한 안부편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그의 필적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반가움에 눈물이 쏟 아질 것 같았다. 글씨 하나하나에 사랑이 담겨 있는 그 편지는 그에 대한 그리움을 더 해 주었다. 그녀의 머리는 온통 저스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눈을 들어 구름을 보면 그 구름 이 저스틴의 얼굴로 변하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려 책장을 펴면 저스틴이 빙그레 웃고 서 있다. 나는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데... 혹시 저스틴의 대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그는 당신하고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군요」 하는 대답을 듣게 되는 건 아닐까? 펠랑기에서 는 단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서로 끌렸던 거야. 하지만 여기서는 사정이 달 라. 인기작가에다가 미남이니 주위에 여자들이 많이 몰려들 거고... 그래, 바로 이 사실 을 알기 위한 석 달이었어-환상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를 알기 위한. 린든은 되도록 잡념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순간순간 터져나오는 엉뚱한 생각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저스틴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 저스틴이 우연히 케 이트와 마주쳤는데 케이트가 지금의 남편과 이혼을 결심하고 있다. 저스틴이 사고를 당해 기억상실증에 빠져 버렸다. 저스틴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무시무시한 꿈을 꾸다가 식은땀을 흠뻑 흘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잠을 깨는 밤이 많아 졌다. 저스틴을 만나고 싶다. 그 목소리를 듣고 사랑을 나누고 싶다. 앞으로 4주일, 3 주일, 2주일... 린든은 웨이트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이제는 고통 대신 후회와 슬픔만이 남아 있다. 그 뒤로 어떻게 됐을까? 어느 날 자기 앞으로 온 편지에서 웨이트의 필적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다. 리즈가 주소를 알려 준 모양이었다. 그것은 단 한 장의 짧은 편지였다. 사랑하는 린든에게 당신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이렇게 편지를 보내오. 그러니 참고 끝까지 읽어 주 길 바라오. 내가 당신을 언제까지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아주기 바라오. 지금까지의 내 사랑이 나 위주였다는 사실을 이제는 분명히 깨닫고 있소. 당신을 잃은 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비길 데 없는 타격이었소. 분명히 당신은 나를 사랑해 주었고, 어리석게도 나는 그 사랑이 끝나리라고는 생각조 차 하지 않고 있었소. 나하고 같이 있는 것이 당신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최근 까지 깨닫지를 못했었구려. 당신이 베풀어주는 것 이상의 것을 기대할 권리가 없다는 것도. 당신에게 저지른 내 모든 잘못에 대해 용서해주기 바라오. 이제 카운셀러를 만나러 가기로 작정했소. 당신이 늘 권했었는데 나는 그 말에 따르지 않았었지. 당신이 나를 떠나감으로써 오 히 려 나를 구해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 당신이 떠나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가 문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오. 영원히 당신을 잃었다는 것 을 알고 펠랑기에서 돌아왔을 때야 비로소 나 자신의 문제와 직면할 수 있었으니까 말 이오. 작별인사도 않고 나는 펠랑기 섬을 떠났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거 요. 그러나 이제는 그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구려. 부디 행복하시오. 나는 절대로 당신을 잊지 못할 거요. 언제까지 변치 않는 당신의 웨이트가 린든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번져 편지는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몇 번 이고 되읽었다. 그때까지도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던 후회와 슬픔을 그 편지는 마치 진정제처럼 씻어 주었다. 편지를 소중한 보물처럼 가슴에 안은 그녀는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고마와요, 웨이트. 고마와요, 고마와요」 전화 버튼을 누르는 그녀의 손가락이 떨렸다. 「크로닌 씨하고 통화를 하고 싶습니다만」 린든은 전화를 받은 비서에게 말했다. 「저는 린든 미첼이라고 합니다」 「크로닌 씨는 지금 손님이 오셔서 말씀중이신데 무슨 용건이신지요?」 냉랭하고 사무적인 젊은 여자 목소리였다. 린든은 실망감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파커 씨와 연락을 취하고 싶습니다. 저스틴 파커 씨요」 잠시 말이 없었다. 「상관없으시다면 전할 말씀을 제게 일러주시지요. 아니면 이쪽 주소로 편지를 보내 주시든지요」 「그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셨으면 싶습니다만...」 「죄송합니다만 전화번호는 가르쳐 드리지 못하게 돼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알았습니다」 그녀는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되지 않도록 조심했다. 의뢰인의 주소나 전화번호는 질 문 을 받아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 상례인 모양이다. 「그러면 크로닌 씨하고 얘기를 하고 싶군요.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그분에게 전해 주 실 수는 없을까요?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저에 대해서는 미리 파커 씨한테 서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날 하루 꼬박 그녀는 뉴욕으로부터의 전화를 기다렸다. 아이들도 린든이 안절부절 을 못하고 조바심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접근해 오지 않았다. 「왜 그래, 언니?」 주방 바닥에 묻은 사과 소스를 닦아내면서 스테파니가 물었다. 「뉴욕에 있는 어떤 사람하고 통화를 하고 싶은데, 깐깐한 비서가 단단히 방어를 하 고 있어서 연락을 취할 방도가 없어서 그래」 「뉴욕 사람이라니, 그게 누구야?」 「남자야」 린든은 토마토를 집어다 샐러드 용으로 얇게 저몄다. 「그 정도야 짐작이 가지」 스테파니는 끓는 물 속에 국수를 넣는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너도 알고 있는 사람이야」 「정말? 그게 누군데?」 「저스틴 파커」 스테파니는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 친구분 중에 파커라는 분이 있었지만, 그분은 레온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 아들이야, 펠랑기 섬에 있을 때 자기 아버님하고 같이 크리스마스 때 우리 집에 저녁을 먹으러 온 적이 있었어. 내가 16살 나던 해야」 「어머나 10년 전 일이잖아?」 스테파니는 어릴 때부터의 버릇 그대로 엄지손톱을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하긴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한데...」 「왜, 그날 크리스마스 파티가 엉망이었잖니? 닭고기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고, 포도 주 도 참 맛이 없었지」 스테파니가 마침내 기억이 났다는 듯 환성을 질렀다. 「그래, 생각이 나! 그때는 정말 비참했었지! 그런데 그 사람하고는 대체 어떻게 다 시 만나게 됐어?」 「펠랑기에서 만났어」 그리고 린든은 일부 걸리는 부분만 빼고 전부 얘기해 주었다. 이튿날 아침 린든은 한 번 더 전화를 했다. 그러자 바로 그 여비서가 나왔다. 린든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저, 크로닌 씨한테서도 파커 씨한테서도 아직 전화를 받지 못했는데요」 「죄송합니다」 거침없는 매끄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크로닌 씨는 그 뒤 곧 외출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전화를 걸 시간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린든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알았습니다. 폐를 끼쳐서 미안합니다만, 중요한 일이라서 그럽니다. 말레이시아에 있는 파커 씨 소유의 집을 매매하는 일로 급히 말씀 드릴 게 있는데요」 다급한 김에 그녀는 거짓말을 해버렸다. 「즉시 그로 하여금 전화를 걸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전화를 끊는 대로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조금 주저하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가능한 한 애는 써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린든은 수화기를 놓고 시계를 보았다. 「미스 미첼입니까? 여기는 크로닌 대행사무소입니다. 파커 씨에게 전화를 했는데요, 코네티컷에 가 있기 때문에 현재는 연락이 되지 않는답니다. 다음주 초에는 돌아오신 다고 합니다」 낙심천만이다. 「말씀은 전하셨나요?」 「네, 전해 놓았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는 수밖에 없었다. 린든은 전화기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그래, 여기 앉아서 기다릴 건 없어. 뉴욕으로 가자. 결심한 이상 당장 출발하는 게 좋 겠어. 뉴욕까지 이틀은 걸릴 거야. 이틀 동안의 기나긴 드라이브를 하는 사이 린든은 온갖 잡념에 시달렸다. 그는 코네 티 컷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째서 연락이 닿지 않는 걸까? 만난다고 하더라도 잘되 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다지? 펠랑기에서의 생활은 뉴욕에서의 생활과는 다르다. 여기에서의 그는 그곳에서의 그와 는 다를 것이다. 나 자신만 해도 달라졌으니까. 펠랑기 섬은 몇 달, 그리고 수천 마 일 저편의 일... 꿈이요, 환상이다. 뉴욕을 자동차로 달리기는 처음이었다. 린든은 길을 잃고 고속도로 입구를 빙빙 돌았 다. 겨우 맨해턴에 도착했을 때는 몸이고 옷이고 온통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지하 주차장 한 곳에 겨우 차를 밀어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펠랑기에서 같으면 일주일은 살아갈 수 있는 주차요금을 물어야 했다. 크로닌 대행사무소의 사무실은 몇 블록 앞의 건물 안에 있었다. 린든은 4월의 따사로 운 햇살을 받으며 걸었다. 오랜 시간 앉아 있었기 때문인지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오늘은 월요일 , 저스틴이 돌아와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 건물에 도착한 린든은 안내원한테 이름을 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화장실을 찾아 머리를 빗고 손을 씻은 다음 화장을 고쳤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심호흡을 해서 용기를 냈다. 린든은 융단이 깔려 있는 긴 복도를 따라 크로닌 대행사무소를 향해 걸어갔다. 짧은 연갈색 머리를 한 녹색 눈의 아가씨가 접수대에 앉아 타이프를 치고 있다. 몸에 잘 맞는 실크 블라우스에 스커트 차림을 한 예쁜 아가씨였는데, 린든을 향한 시선은 냉랭했다. 「린든 미첼이라고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도어맨한테서 연락이 왔었으니까요. 크로닌 씨는 지금 회사에 안 계 십니다. 파커 씨도 아직 코네티컷에서 돌아오시지 않았구요」 품평을 하는 듯한 눈으로 린든의 바지, 티셔츠, 니트 자켓을 흘금흘금 보고 있다. 「파커 씨한테 마지막으로 전화를 한 게 언제죠?」 「댁이 올라오시기 2분전입니다. 도움이 돼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조금도 죄송해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이 아가씨가 저스틴을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습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한번 들르죠」 한편으로는 화도 나고 또 한편으로는 실망감도 느끼면서 린든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저스틴 파커, 당신은 내가 필요로 하고 있는데 대체 어디에 가 있는 건가요? 린든은 그리 비싸지 않은 호텔이 근방에 없겠느냐고 안내원한테 물어 보았다. 그는 적 당한 호텔의 위치와 길을 일러주었다. 아일랜드 사투리가 약간 섞인 말투의 남자였다 . 무뚝뚝한데다 자기 일에만 매여서 남을 위한 시간은 조금도 쪼갤 여유가 없는 게 뉴 욕 나기들의 인상인데, 그 안내원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호텔은 낡고 조그마했지만 깨끗했다. 린든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다 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아침 9시, 린든은 부리나케 크로닌의 사무실로 갔다. 그 비서가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저스틴을 만나고 싶을 따름 이다. 비록 하루 온종일 사무실에 앉아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문을 열었을 때 눈 에 들어온 것은 비서의 모습이 아니라 저스틴의 등이었다. 그는 책상에 기대어 서서 비 서 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의 가슴은 몹시 두근거렸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짧은 턱수염이었 다. 쇼트팬츠도 사롱도 아닌, 맞춤바지에 암회색 스웨터,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 리 고 자켓을 어께에 걸친 모습. 변했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변하리라고는.. . 마치 딴사람 같다. 저스틴은 비서에게 「실례하겠소」라고 말하고는 린든의 팔을 잡고 인기척 없는 복도 로 그녀를 데리고 나왔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섰다. 저스틴의 눈이 웃고 있다. 「깜짝 놀랐어」 린든은 마른침을 삼켰다. 겸연쩍은데다가 어쩐지 들뜬 기분이 들었다. 「약속보다 일찍 와서 폐가 되지 않았나 모르겠어요.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연락이 돼 야죠」 「코네티컷에 갔다가 어젯밤 늦게 돌아왔어. 부재 중에 온 전화를 물어 봤더니, 당신 이 여기 와 있다는데 투숙한 곳은 모른다는 거야. 그렇지만 아침에는 이리 오기로 돼 있다기에 기다리고 있었어」 저스틴의 미소가 얼굴 전체로 번졌다. 「어쩐지 불안해 뵈는데?」 「내가요? 불안해 뵌다구요?」 린든은 쾌활하게 대답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요? 당신, 딴사람 같아요」 「당신도 그래. 사롱을 입은 당신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거든」 저스틴은 벽에 기대어 재미있다는 듯이 린든을 바라보았다. 「집에 있을 때는 아직도 사롱을 입어요」 「거 다행이군」 「책은 어떻게 됐어요? 영화계약은 끝났나요?」 땀이 밴 손을 바지 옆솔기에 문지르면서 물어 보았다. 「세부적인 문제는 아직도 협의중이야. 우리 집으로 가서 커피나 마시면서 얘기하자 구 」 저스틴은 벽에서 몸을 떼더니 다시 팔을 잡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에는 어떻게 왔지?」 건물을 나가면서 저스틴이 물었다. 「자동차로요」 햇살 속으로 나가자 눈이 부셨다. 시원한 바람이 볼을 스치며 지나간다. 「대단한 용기로군. 차는 어디다 뒀지?」 「세 블록 저쪽의 주차장에요」 「그래? 그런데 짐은? 간밤엔 어디서 잤지?」 린든은 반대쪽을 가리켰다. 「두 블록 저쪽의 모퉁이를 오른쪽으로 돈 곳이에요」 호텔에서 짐을 찾은 다음 저스틴의 아파트로 향했다. 호화스러운 아파트였다. 두꺼운 융단이 깔린데다가 가구는 하얀 스웨덴제들이다. 벽에는 현대적인 그림이 걸려 있고 거실 한쪽엔 바까지 설치돼 있다. 「으리으리하군요」 주위를 둘러보며 린든이 기가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저스틴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 했다. 「유감스럽게도 내 것이 아니야. 두 달 동안만 세낸 거야. 크로닌이 아는 사람한테서 . 집주인은 더 따뜻한 곳에서 겨울을 지내고 있는 중이야」 린든은 저스틴을 따라서 주방으로 갔다. 그는 커피포트에 물과 커피를 넣었다. 「그래, 지난 석 달 동안 어떻게 지냈지?」 린든은 의자에 앉았다. 「먼저 펜실베이니아에 가서 짐을 꾸렸어요. 짐들은 거의 전부 창고에다 맡기고 내 털 터리 차로 뉴올리안스로 갔어요」 잠시 망설인 뒤 저스틴이 물었다. 「아파트를 정리하는 동안 웨이트는 만나 봤어?」 린든은 저스틴을 쳐다보았다. 「아뇨, 내가 돌아온 걸 웨이트가 알고 있는지 어떤지조차 몰랐어요」 린든은 웨이트의 편지 생각을 했다. 한순간 저스틴에게 보여 줄까 하고 생각했으나 그 만두기로 했다. 그건 내게 온 편지다.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은 두 사람만의 문제 다. 웨이트는 작별의 말을 했다. 이제 모든 게 끝난 것이다. 커피포트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향긋한 냄새가 주방 안에 퍼졌다. 「아침은 먹었어?」 「아뇨」 저스틴이 나무라듯이 고개를 젓는다. 「아침식사는 하루 중에 제일 중요한 식사야, 신문도 안 읽어?」 「그만두세요, 저스틴! 잔소리는 듣기 싫으니까요」 그가 갑자기 큰소리로 웃었다. 「이제야 내가 아는 린든다와졌군」 그녀도 쌩긋 웃었다. 저스틴의 눈이 그녀의 시선을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그가 손을 내밀자 린든의 가슴 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내가 키스하면 당신은 뭐라고 할까?」 저스틴이 물었다. 「「안돼요, 저스틴!」「이러지 말아요, 저스틴」 아니면 「경고해 두겠는데요, 저스 틴!」이라고 할까?」 「왜 시험해 보시지 그래요? 더욱 독창적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게 말로만 하지 말고 어서 키스해 줘요. 어서요! 「그렇군... 내가 좋아할 그런 말일까?」 「글쎄요, 해보는 수밖에 없잖겠어요? 나는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여자니까요. 무슨 말 을 할지 알 수가 없다구요」 저스틴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오해하고 있어」 「나에 대해서 무척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요?」 「당연하잖아? 이렇게까지 되는 데는 형극의 길을 거쳐야 했으니까」 저스틴이 실눈을 뜨며 말했다. 「어째서 두 주일이나 빨리 왔지?」 「나에 대해서 잘 안다면서요. 맞혀 보시지 그래요」 「어린애들이 하도 성가시게 굴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나?」 「아주 착한 아이들이에요. 스테파니는 아이들 다루는 솜씨가 정말 대단했어요. 나도 아이를 다섯쯤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구요」 「얘기를 딴 데로 돌리지마」 「네?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죠?」 「어째서 두 주일이나 빨리 왔느냐 하는 거였어」 「그랬었죠 참, 실은 당신 일이 걱정이 돼서요」 「걱정?」 「펠랑기에서 3년이나 지낸 뒤인지라 이런 대도시에 오면 어떻게 될까 걱정이 돼서요 . 미모에다 세련미까지 갖춘 젊은 여자들이 사방에 쫙 깔려 있잖아요. 그 대리점의 녹 색 눈의 금발 미인처럼. 혹시 보호자가 필요치 않을까 해서 온 거예요」 저스틴의 눈에 미소가 번진다. 정말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염도 근사하고... 아주 섹시해. 수염 있는 사람하고 입을 맞춰 본 경험은 없지만... 그는 린든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저스틴이 얼굴을 숙여 접근해 오는 동안 린든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수염이 살갗에 닿자 전율이 온몸을 스쳤다. 저스틴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서 천천히, 아 주 천천히 움직인다. 「보고 싶었어」 린든은 행복한 나머지 가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9 저스틴이 린든을 바싹 끌어안았다. 욕망을 담은 뜨거운 키스에 그녀의 몸은 감미로운 파도에 휩싸였다. 온몸이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숨을 헐떡이면서 입술을 떼고는 저스틴의 어깨에 얼굴 을 묻었다. 「수염이 나 있는 사람하고 입을 맞추기는 처음이에요」 린든은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제 심장에 좋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깎아 버릴까?」 「아녜요, 안돼요! 좋아요! 아주 섹시한데요. 어떻게 수염 기를 생각을 했어요?」 「여기 돌아왔을 때 추워서 견딜 수가 없더라구. 그런데 왜 웃지?」 「영국인 친구한테서 들은 얘긴데, 남자가 수염을 기르는 것은 빈약한 턱을 감추기 위 해서라던데요」 저스틴은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띠었다. 「거 야단인데. 다들 나를 보고 턱이 빈약하다고 생각할 거 아냐. 약한 인간이다. 사 회의 쓰레기다. 이렇게들 생각할 거 아니냐구」 하지만 저스틴을 보고 약하다고 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 같으면 그런 걱정은 않겠어요. 수염을 매력으로 생각하는 여자는 많아요」 저스틴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안심했어!」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이런 곳에 서서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둘 사이에 서서히 긴 장 감이 돌기 시작했다. 저스틴의 몸에서 발산되는 열기가 그녀의 몸까지 뜨겁게 만들고 있다. 「커피는 어떻게 안 될까요?」 「마시고 싶어?」 「네」 「아냐, 마시고 싶을 까닭이 없지」 저스틴의 손이 린든의 허벅지를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그녀를 바싹 끌어당겼다. 「저스틴...」 저스틴이 그녀를 침실로 인도했다. 봄의 햇살이 온 방안을 화사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쳤다. 부드러운 빛 속으로 저스틴이 다가온다. 린든은 그의 팔 안으로 몸을 던졌다. 저스틴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열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러나 자신에 찬 동작으 로 그녀의 옷을 벗겨 나갔다. 두 사람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웠다. 엷은 빛 속에서 저 스틴의 두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가슴을 애무했다. 린든의 몸은 그의 손짓 하나하나 에 응답을 보내며 그의 손길을 즐기고 있었다. 「아아, 린든...」 갈증에 찬 그의 목소리에 린든의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저스틴의 입술이 린든의 몸 이곳저곳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환희란 바로 이런 것일까? 마침내 더이상 참을 수 없 다는 듯 저스틴이 신음 소리를 내며 그녀를 세차게 껴안았다. 모든 것이 망각의 저편으로 스러져 가고, 린든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저스틴의 존 재와 두 사람을 환희의 절정으로 이끄는 사랑뿐이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 없 이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달콤한 충족감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 두 사람은 다 같이 시장기를 느꼈다. 저스틴이 나가서 쟁반에 먹을 것을 담아 침실로 가져왔다. 침대 위에 앉아서 음식을 먹는 두 사람은 마치 등산을 했을 때 처럼 식욕이 왕성했다. 바삭한 스웨덴식 빵에 프랑스제 고트치즈, 사과와 커피, 초콜렛 케이크까지 먹어 치 웠 다. 「이런 별난 아침식사는 처음 먹어요. 하지만 정말 맛있는데요」 「벌써 11시야. 아침과 점심을 겸한 식사라구」 린든은 환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우리, 코네티컷으로 가자구」 「코네티컷? 무엇 하러요?」 「집을 샀어. 당신이 봐줘야겠어」 린든은 잠시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곧 뉴욕으로 가는 고속도로로 차를 몰 았다. 그리니치 근처에서 속도를 늦춰 톨게이트를 빠져나가, 코네티컷 행 고속도로로 나갔다. 군데군데 새싹이 돋고 있는 나무들이 보인다. 깔끔하게 손질이 된 화단에는 크로커스 와 수선화의 꽃빛이 선명하다. 웨스트포트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난 차는 구불구불한 길을 천천히 달려갔다. 고풍스럽 고 아름다운 대저택이 단풍나무며 떡갈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깨끗한 곳이군요. 부잣집 동네 같아요」 「전부 다 부자는 아냐. 웨스트포트에도 중류계급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구」 「말씀해 주세요, 이 동네에 대해서. 어떤 곳이죠?」 「응, 글쎄 뭐랄까... 예술인 동네 비슷한 곳이 있어. 작가와 화가와 조각가, 거기에 배우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 하지만 모두가 다 유명한 사람들만은 아냐. 이른바 뉴 잉글랜드의 거리지. 하얀 집, 조그만 교회, 그리고 지방도시풍의 가게가 있어. 골동 품 점이며 건강식품점, 철물점, 식료품점, 세탁소 같은 것들 말야. 하지만 레스토랑도 있 고, 재즈 밴드가 들어오기도 하고 피아노 연주를 하는 스낵바도 있어. 아마추어 극단 도 하나 있다구. 여러 가지 면에서 시골 같긴 하지만 주민들은 아주 세련된 사람들이 지」 「재미있을 것 같네요」 「여기가 린든의 마음에 들면 좋을 텐데...」 「내가 이리로 옮겨오기를 원해요?」 저스틴이 곁눈질로 린든을 흘낏 보았다. 「그렇게 해주길 바라고 있어」 그가 하는 말의 뜻을 잘 알 수가 없었다.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얘기일까? 결혼을 원한다는 걸까? 그녀 자신이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인지 우선 그것부터 확실하게 해두어야겠다고 린든은 생각했다. 인생의 항로를 바꾸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결정해야 할 일들이 있다. 지금은 직장도 없 는데다 이런 곳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발견될지 어떨지 알 수조차 없다. 린든은 공연 히 불안감에 싸였다. 저스틴이 차를 왼편으로 꺾어서 속도를 낮출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이 근방인가요?」 「오른쪽 두 번째 집이야」 그 집은 길에서 200m 가량 들어가 있었다. 양편에 소나무가 늘어선 차도가 길게 이어 져 있다.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린든은 황홀감에 빠졌다. 거무스름한 목조 건축 물, 하얀 창문, 담쟁이덩굴에 덮인 커다란 돌굴뚝 마치 그림에 나오는 집 같다. 그가 차의 문을 열어 주자 린든은 밖으로 나왔다. 저스틴이 미소를 띠고 그녀를 내려 다본다. 「감상은?」 「훌륭해요?」 「집이 온통 초록으로 뒤덮이면 더욱 좋지. 나는 컬러 사진으로 봤거든. 저기 저 철 쭉 이 만발하면 정말 장관일 거야」 저스틴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육중한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우리 집에」 그는 야단스러운 몸짓으로 린든을 맞아들인다. 두 사람은 아담한 현관으로 들어갔다. 아 치 형의 복도가 휑뎅그렁한 커다란 거실로 이어져 있다. 린든은 꿈을 꾸는 듯한 기 분으로 이방 저방 보고 다녔다. 아직 가구는 들여놓지 않았지만, 따스한 분위기가 느 껴지는 집이었다. 백 년도 더 됐겠지만 구석구석 알뜰하게 손질돼 있었다. 반들반들한 떡갈나무 바닥, 천연석 난로가 있는 거실, 노거턱 강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 숲이 강 건너까지 펼쳐 져 있으며 커다란 소나무와 전나무가 집을 에워싸고 있다. 침실이 6개나 되고, 바닥에 깔린 융단은 사치스럽다 할 만큼 부드럽다. 「침대와 매트리스를 주문했어. 아마 내일쯤엔 배달될 거야」 「오늘밤은 어디서 묵죠?」 「모텔에서 묵거나, 운동구점에 가서 침낭을 사든가, 두 가지 중 어느 한쪽. 만약 침 낭 같으면 각자 여기서 야영하는 거지」 저스틴은 융단을 발로 비볐다. 「두껍고 푹신해서 하룻저녁쯤은 지낼만 하겠어」 뭔가 기대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본다. 「어떻게 생각해?」 린든은 발돋움을 하여 그에게 키스했다. 「모텔이라니, 촌스럽군요」 그녀는 속삭였다. 「여기서 묵고 싶어요」 「그렇게 말해 주길 바랐어」 저스틴이 그녀에게 키스하고는 몸을 뗐다. 「아직 집안을 다 보지 않았어」 억지로 사무적인 목소리를 내는 그의 눈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다. 린든은 저스틴에게 몸을 붙였다. 「상관없어요」 사랑을 하고 싶었다. 지금 여기서-바로 이 바닥 위에서. 「안돼, 봐야 해」 저스틴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문으로 끌고 갔다. 「여기는 어때?」 그곳은 책장으로 둘러싸인 서재였다. 창문 가까이에 고풍스러운 큰 나무책상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번쩍번쩍하는 컴퓨터가 전혀 어울리지 않게 놓여 있다. 린든은 작은 소 리로 웃었다. 「농담이 아니였군요, 컴퓨터 얘기가」 「워드프로세서야. 이게 프린터고. 대단한 기계지. 사용방법을 가르쳐 줄까?」 「됐어요, 이런 고급 기계는 나한텐 맞지 않아요」 저스틴이 싱글싱글 웃었다. 「붓 두세 자루하고 그림물감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그렇지?」 「잘 아시는군요」 저스틴은 벽 속의 조그만 문 하나를 만지며 말했다. 「이 문은 그저께야 해 박은 거라구」 「방이 또 하나 있나요?」 저스틴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 쪽에서도 들어갈 수 있긴 하지만, 두 방 사이에 문이 있는 편이 편리하리라 생 각해서 말야」 그는 문을 활짝 열고 먼저 들어가서는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린든 방이야」 빛이 눈부셔서 린든은 서너 번 눈을 깜박였다. 벽이 새하얀데 커다란 유리문이 달린 창으로부터 햇살이 흘러 들어오고 있다. 경사진 지붕에도 창 하나가 나 있다. 린든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틀리에로군요. 진짜 아틀리에 말예요」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집을 살 때 날 생각하고 샀던 거군요?」 「그러니까 이 집을 샀지. 이 집보다도 좋은 집이 있긴 했지만 이 방처럼 멋진 건 없 더라구」 「어머나, 저스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린든은 양볼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저스틴의 몸에 팔을 돌리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런 근사한 선물은 난생 처음이에요」 「페낭에서 사온 세더치즈가 그런 줄 알았었는데...」 린든은 저스틴에게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사랑해요, 정말 무지무지하게...」 저스틴의 팔에 힘이 들어가면서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는 얼굴을 그녀에게 바싹 붙 이 며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린든」 잠시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포옹하고 있었다. 「우리 어떻게 할까?」 저스틴이 물었다. 「언제까지나 우리 함께 같이 사는 게 좋겠어? 아니면 결혼을 할까?」 린든은 작은 소리로 웃었다. 「이제 우린 뭐든지 할 수 있잖아요」 저스틴이 씽긋 웃었다. 「맞는 말이야」 「아이들을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좋아요」 「그렇다마다. 몇 명이나 갖고 싶어?」 린든이 환한 얼굴로 웃었다. 「적어도 다섯은 돼야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