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 속의 여인 (Low country liar) 자넷 데일리 지음 이길진 옮김 삼중당 R-186 1985년 1장 "이제 긴 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하자, 리사. 부모님이 건강하시다는 것과, 오빠에게 아직 적당한 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알겠다. 너는 볼티모어에서 여기까지 무사히 도착하여 푹 쉰 데다 술도 약간 마셔 혀도 부드러워졌을 테니 찰스턴에 왜 왔는지, 이제는 말해도 좋지 않겠니?" 52세인 밀리엄 탈메지는 활달하고 생기에 넘치는 브루네트의 미인으로서, 멋진 검은머리를 가지고 있다. 그 머리가 진짠 지는 단골 미용사만이 알 일이었으나, 어쨌든 미치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밀리엄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원숙미를 더하면서도 결코 젊음을 잃지 않고 있다. 리사가 숙모인 미치와 휴가를 같이 보내는 것도 4, 5년만의 일이다. 미치가 고향인 찰스턴에 돌아온 이후 처음이었다. 찰스턴은 사우드캐롤라이나 주 남쪽의 해안평야에 위치하여, 이 주의 사람들은 저지대라 부르고 있다. 리사는 숙모의 날카로운 질문에 방긋 웃었다. "믿어 주실 지는 모르지만, 단지 숙모님이 뵙고 싶어서 왔을 뿐이에요." "나를? 어머나,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니 영광이네." 미치의 풍부한 표정이 웃음 때문에 무너졌다. "설마 남자 문제를 상의하러 온 것은 아니겠지? 나는 그런 일에는 적격자가 아니야. 결혼에 실패한 사람이니까." "그것은 숙모님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에요. 사이먼 숙부님에게도 책임은 있었어요." 리사가 머리를 가로젓자, 금발 사이로 둥근 금귀걸이가 빛났다. "슬레이드도 그런 말을 하더구나." 미치가 길게 한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리사는 반사적으로 입을 꼭 다물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숙모가 말한 인물 때문에 리사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그것을 비밀로 해두어야만 한다. "하지만 말이다." 미치가 말을 이었다. "내가 자랄 때는 지금하곤 시대가 달랐어. 이혼이란 큰 스캔들이었고, 여자는 어떤 경우에든지 참아야만 했지. 그러니, 내가 죄의식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잖겠니? 요컨대 사이먼과는 성격이 안 맞아서였지만." 미소를 짓자 검은 눈동자가 빛나고 볼에 보조개가 패였다. "사이먼의 무뚝뚝한 면이 마음에 들어서 결혼하게 됐지. 결국은 그 무뚝뚝함 때문에 헤어지게 되고 말았지만. 나는 지나치게 로맨티스트였어. 강하면서도 과묵한 남성이라는 점이 순간적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거야. 내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사이먼에겐 안됐지만 난 성의를 다하지 못했어. 나는 소설을 쓰는 일에만 매달려, 다른 일은 전혀 돌보지 못했지. 사이먼은 매일 아침 일곱 시에 맛있는 조반을 지어 주는 부인을 원했던 거야. 그런데 나는 커피 물 한 번 제대로 끓여 주지 못했거든. 정말 어울리지 않는 부부였어. 그 사람의 생애의 마지막 짧은 기간이나마 둘째 번 부인과 행복하게 지냈다는 것만이 내게는 큰 위안이야." "숙모님은 어땠어요? 그 뒤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나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물으면서도, 리사는 녹색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숙모님의 남자 친구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남자 친구? 이 나이에 설마!" 미치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너한테 자극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그것은 그렇고, 네 연애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내 이야기가 나오고 말았을까?" "어때요, 저는 꼬리를 잘 빼죠?" 리사가 방긋 웃었다. "사실은 현재 연애중인 상대도 없지만요." "믿을 수 없어, 너처럼 예쁜 처녀가 애인이 없다니. 엄마를 닮아 얼굴의 윤곽이 뚜렷하고 금발인데...... 그 녹색 눈은 탈메지 가문의 것이지. 그 눈과 검은 눈썹은 사이먼과 똑같아. 정말 개성적이고 아름다워. 어머나, 이런 말을 하고 있으려니 질투가 나는걸." 미치가 노려보는 시늉을 했다. "어째서 여기까지 왔는지 어서 고백해. 좋아하던 사람과 헤어졌든지, 아니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게지?" "아니에요,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건 정말 없어요." 리사는 <좋아하는 사람>이란 부분을 강조하며 말했다. "일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에요." "약혼한 사람으로부터도?" 미치가 리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마이켈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것은 3년 전에 끝난 일이에요. 대학 졸업과 동시에." 리사는 칵테일 위에 떠 있는 빗살 모양의 라임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라임은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올랐다. "무슨 이유로?" "일 때문에 의견이 충돌했어요. 마이켈은 집에 얌전히 있는 아내를 원했고, 나는 일을 하고 싶었으니까요. 나는 일을 하고 싶어서 대학에 갔는데, 마이켈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학력은 만일의 경우가 생겼을 때에 한해서 필요한 것이라면서, 아무 일도 없을 때는 집에서 아이나 키우라는 것이었어요." 그 일도 이미 먼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저는, 그 생각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싫다고 했어요. 오히려 잘된 일이에요. 어차피 우리는 원만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미치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물론이죠." 리사가 후련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후로는 마이켈 같은 타입의 남성과는 교제하지 않으려고 피해왔어요. 그런 오만한 사람은, 프라이드가 충족되지 못하면 참지를 못할 거예요." "너는 조금 전에 일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했지. 일이 재미없니? 기대에 어긋났어?" 미치가 천천히 의자 등에 기대면서 말했다. 오렌지 빛 쿠션이 검은머리와 멋진 콘트라스트를 이루고 있었다. "지난번의 편지에서는 스태프에게나 일하는 방법에도 불만투성이인 것처럼 느껴졌는데." "일년 반이나 가까이 쉬지 않고 일을 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게 돼요. 별로 불만은 없어요." 리사도 의자 등에 기대었다. "우리 텔레비전 방송국이 새로운 쇼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은 일년 전이었어요. 무척 바빴지만, 보람도 있고 즐거웠어요. 처음에 저는 다른 쇼프로그램의 어시스턴트였어요. 그러다가 내 프로그램을 가지게 되자 휴가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하게 되었어요. 제가 없으면 프로그램이 엉망이 되리라는 생각에서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 쉬지 않으면 저 자신이 엉망이 될 지경에 이르렀어요." "그래서 이곳으로 왔다는 거냐?" 미치는 여전히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찰스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지 않아요? 조용한데다 숙모님도 계시고요." 여기에 오게 된 이유는 다른 데 있으나, 그것을 밝힐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와주어서 고맙다. 다만, 여기 있는 동안 지루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방송국에서 바삐 일하던 사람이 2, 3주일이나 여기서 지낼 수 있겠니?" 문제없어요, 하고 리사가 말하려 한 순간, 미치가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면은 예전 그대로였다. "네가 처음 방송국에 나가게 되었을 때 나한테 편지했었지? 그 편지 내용 기억하고 있니? 나는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웃음이 나온단다. 응모했더니, 일기예보 캐스터로 채용하겠다고 한다면서 화를 냈었지?" "그 무렵에는 여성해방운동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이에요." 리사가 킬킬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세상과 적당히 타협을 하고 둥글둥글해졌지만 말이에요." "나이가 들었다고? 이제 겨우 스물 네 살인데." "숙모님은 그 무렵의 저를 몰라서 그래요. 저는 여권 운동가로 제법 이름을 날렸어요. 그때는 방송국의 처사에 대해 한마디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불합격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예요." "슬레이드도 같은 말을 하더구나. 네가 온다고 하기에 그 말을 해주었지." 슬레이드의 이름을 듣는 순간 불쾌해졌으나, 리사는 억지로 명랑한 표정을 지었다. "그 슬레이드 블랙웰이란 분을 꼭 만나고 싶군요. 숙모님 편지에 열 다섯 번이나 그 이름이 나와 있었으니까요." 열 다섯 번이라기 보다 쉰 번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오늘 저녁식사에 초대할 까도 생각했지만, 네가 도착하자마자 그러는 것도 이상해서 그만뒀지. 되도록 빨리 만나게 해주겠다. 내일 저녁에라도." 미치의 머릿속에서 이미 계획이 서 있었던 모양이다. "그 분은 분명히, 숙모님과 친히 지내던 분의 자제일 테죠? 아니면 가족과 친밀한 사이였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물으려 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딱딱한 어조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미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 슬레이드를 만난 것은 정말 우연이었어. 사이먼과 헤어져 찰스턴에 돌아온 직후의 일이었어." 미치는 음료수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조용히 말했다. "너도 기억하고 있을 테지만, 내가 이혼한 직후에 우리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지 않았니. 그래서 당시 2, 3개월 동안은 무척 괴로웠었지." "그러셨을 거예요." "하지만 슬레이드 덕분에 크게 위로가 되었단다." 미치는 슬레이드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미소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나는 사무적인 일을 처리할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탠데 - 이것은 여자기 때문에 그런 머리가 없다는 뜻이 아니야. 그저 몹시 귀찮았을 뿐이야. 이혼과 유산상속이 겹쳐서 그야말로 골치가 아팠어. 내가 그런 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너도 알지 않니." 미치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을 슬레이드가 모두 맡아서 해주었어. 이제 나는 골치를 썩이지 않아도 되게 되었어. 돈이 필요할 때는 수표에 사인만 하면 되는 거지." 리사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역시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숙모님은 깨끗이 속고 있는 것일까? 지난 일년 동안에 받은 편지에는, <슬레이드가 이렇게 말하므로>라든지 <슬레이드의 제안에 따르면>, 또는 <슬레이드한테서 들은 말인데> 등 슬레이드란 이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그가 모든 일의 권위자인 것처럼. 미치가 올드 찰스턴에 있는 친정 집에서 살게 된 것도 슬레이드 블랙웰이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이 호화주택을 수리한 사람도 그가 추천한 실내장식가였다. 리사의 녹색 눈이 거실을 둘러보았다. 천장은 높고, 목조 부분에는 고급 삼나무 재료를 쓰고 있었다. 더 말할 나위 없이 완벽한 구조였다. 장식은 클래식 양식과 모던 양식이 교묘히 조화되어 있어서 방문객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손대지 마시오> 따위의 미술관이 무드와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정원 또한 슬레이드 블랙웰이 추천한 정원사에 의해 손질된 것이라 생각하니 불쾌감이 치밀었다. 정원은 기둥이 있는 포치 저쪽에 펼쳐져 있고, 3월의 황혼 속에 색색의 봄꽃들로 불타고 있었다. 동백꽃, 목련 봉오리 - 주위에는 인동덩굴의 향기가 은은하게 풍겼다. 몇 그루의 아름다운 떡갈나무가 높이 치솟아 있고, 아름답게 은빛 이끼가 줄기를 뒤덮고 있었다. 정원을 관리하고 있는 것은 조경을 담당했던 회사였다. 슬레이드 블랙웰은 이 일을 소개하고 얼마나 돈을 받은 것일까? 이 중요한 두 가지 일말고도 그는 얼마나 많은 사소한 일들을 떠맡은 것일까? 미치는 그가 내민 수표에 사인만 한다고 했다. 그런데, 미치는 자기가 무슨 일에 사인하고 있는지 확인이나 하는 것일까? 슬레이드라는 그 작자는 아무래도, 미치를 속여 돈을 뜯어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숙모님의 돈은 모두 그 사람이 관리하고 있나요?" 리사의 말투에는 약간 나무라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감추려 애썼지만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응. 개인용 구좌에 들어 있는 돈은 그렇지 않지만. 나는 그것을 비상금이라 부르고 있지." 살며시 웃어 보이는 미치는 평소보다 한결 더 젊어 보였다. 그 외의 구좌에 돈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는 신만이 알 것이다. 아니, 신과 슬레이드 블랙웰 뿐일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미치는 이혼할 때 사이먼에게서 상당한 위자료를 받았을 것이고, 또 아버지 말에 따르면, 미치의 어머니는 상당한 자산간 데다 미치가 외딸이라고 했다. 미치에게는 또 로맨스 미스테리의 원고료가 들어온다. 그것은 그다지 많은 액수는 아닐 테지만, 다른 재산과 합치면 상당한 액수가 될 것이다. "숙모님은 너무 쉽게 남을 믿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요?" 리사는 되도록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면서 코스터 위에 글라스를 놓았다. 크리스탈 코스터는 대리석 테이블에 잘 비쳤다. "슬레이드를 너무 신임한다는 뜻이냐?" 미치가 놀란 듯이 되묻고 나서 명랑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 사람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달리 없어. 너도, 만나보면 틀림없어 좋아하게 될 거야." 그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지금 그 말은 취소하겠어. 너는 좋게 여기지 않을 지도 모르니까." "어마, 어째서요?" "조금 아까 오만한 타입은 싫다고 하지 않았니? 슬레이드는 그런 형용사에 꼭 들어맞는 사람이거든. 강인하고 남자답고. 물론 매력적이고 취미도 다양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게 보일 뿐일 테죠, 하고 리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슬레이드 블랙웰에게 있어서 미치는 좋은 밥일 것이 분명하다. 그녀의 부모는 이미 죽고 동기도 없다. 헤어진 남편도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미치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돈을 횡령하지 않는다 해도, 유산을 노리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제가 온다는 말을 듣고 그는 무어라 하던가요?" "별로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만, 사이먼의 핏줄이 나를 잊지 않고 찾아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라고 하더구나." "우리는 숙모님을 잊을 수 없어요." 또다시 슬레이드 블랙웰이란 사나이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미치가 혼자 남아 자기한테만 의지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아니, 잊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야." 미치가 웃으면서 변명했다. "하지만, 사이먼이 살아 있었다면 우습지 않겠니? 너는 사이먼의 조카딸이야. 그러한 네가 나를 찾아온다면...... 나는 이혼하기 전같이 너를 대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 비록 네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으셨다 해도, 내가 사양했을지도 모르지." "저는 지금까지, 숙모님을 친척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리사가 힘주어 말했다. "이혼과 관계없이 말이에요." "고마와, 리사. 나도 너를 친척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 이렇게 와주어서 얼마나 기쁜지!" 미소지으며 말하던 미치가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는 꼭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어. 무엇인지 알겠니? 자식이 없다는 거야. 양자를 들일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사이먼이 반대했어. 지금은 네가 내 딸인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구나. 슬레이드는 수양아들인 것 같고." "슬레이드는 숙모님의 친척인가요?" 갑자기, 그는 미치의 먼 친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미치는 자못 유감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아주 먼 옛날에 슬레이드의 아버지한테서 프로포우즈를 받은 일은 있어도. 감상에 젖어 있기라도 할 때면 문득, 그와 결혼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지. 그랬더라면 슬레이드가 내 아들이 되었을 텐데...... 하지만, 실제로는 그와 결혼하지 않았고, 따라서 슬레이드가 내 자식이 될 수도 없지. 새삼스레 그런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 미치는 빙긋이 웃고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찰스턴에 있는 동안 무엇을 하며 지낼 작정이냐?"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리사는 무릎에 두 손을 모으고 다시 의자에 깊숙이 앉았다. "숙모님은 새 작품을 쓰고 계시죠? 저는 혼자 여기저기 구경이나 다닐 테니, 숙모님의 일을 계속하세요. 두어 사람 만날 사람도 있고요." "대학 동창이냐?" "네, 그런 셈이죠." 그러나 리사의 머릿속에서는 실제적인 계획이 서서히 머리를 틀고 있었다. 우선 슬레이드 블랙웰을 만나 진의를 탐지해야지. 이 일은 미치가 없는 곳에서 실행해야 한다. 그녀는 잠깐 동안 로컬 뉴스 쇼프로그램을 담당했었는데, 그 일을 통해서 배운 것은 사람을 다루는 방법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남의 진실을 캐내는 기술이다. 자기가 직접 상대와 부딪치거나 리포터를 이용하거나 간에. 일을 통해 배운 특기를 마음껏 발휘하여 슬레이드 블랙웰을 궁지로 몰아넣어야지. 미치는 생각난 듯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마, 벌써 일곱 시가 지났네! 밀드레드는 언제나 일곱 시에 저녁 준비를 하는데, 오늘은 웬일일까?" 미치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바라본 식당에서는, 작은 샹들리에 밑에서 하얀 테이블클로드가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요리사 겸 가졍부가 모습을 나타냈다. 입을 삐쭉 내밀고 무언가 불평 같은 것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녁이 30분쯤 늦어질 것 같아요. 또 오븐이 고장났어요." 진절머리가 난다는 투였다. "또?" 미치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런 일은 귀찮기 짝이 없는 모양이었다. "슬레이드 한테 부탁해서......" "네, 그래서 슬레이드한테 전화를 했어요." 가정부는 스스럼없이 그의 퍼스트 네임을 입밖에 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수리공을 보내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녁에는 어쩔 도리가 없어요." 가정부가 주방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리사가 입을 열었다. "숙모님이 단골로 부르는 수리공은 없나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미치는 리사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슬레이드한테 말하는 편이 빨라. 그 사람은 어떤 경우에나 최고의 회사를 불러 주니까." 그럴 테죠, 그 회사로부터 수고비를 받을 테니까. 이 낡은 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들 테니까, 슬레이드 블랙웰은 온갖 업자들과 결탁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수상하다는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분명해졌어! 저녁은, 가정부인 밀드레드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15분이나 늦어졌다. 늦은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무척 즐거운 한 때였다. 이야기의 내용은 옛날의 추억과 신상에 대한 것이었다. 단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끊임없이 슬레이드 블랙웰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니, 서재에서 타자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사는 생긋 웃었다. 미치가 집필을 시작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 말 없이 외출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계단을 내려간 곳에 큼직한 타원형 거울이 있다. 리사는 만약의 경우를 위해서 다시 한 번 복장을 점검했다. 베스트 스타일의 자켓은 보통 키인 그녀를 한결 커 보이게 했다. 스커트는 엘리강트하고 길었지만 곧게 뻗은 다리를 감출 정도는 아니었다. 자켓과 스커트는 연한 그린이고, 자켓 속에는 밝은 프린트의 긴소매 블라우스를 받쳐입고 있었다. 지금 쓰고 있는 터번은 지난해, 모자가 유행했을 때 산 것이었다. 자켓이나 스커트와 마찬가지로 그린으로서, 이렇게 차려입고 보니 매우 세련되어 보였다. 목덜미로 흘러 내려와 있는 금발 한 올을 터번 안으로 밀어 넣고 큼직한 금귀걸이를 다시 달았다. 이것으로 됐어. 리사는 만족스럽게 눈을 빛냈다. 그린 계통으로 몸차림을 했기 때문에 녹색 눈이 더욱 짙어 보였다. 거울 속에서 자기를 되쏘아보는 여성은 제법 야무져 보였다. 자립한 여성으로서의 무드를 풍기는 반면 여자다운 면도 있었다. 시선이 저절로, 왼손에 든 백으로 옮겨갔다. 이 상아빛 백에는 슬레이드 블랙웰의 주소가 적힌 종이쪽지가 들어 있다.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슬레이드 블랙웰이 만나 주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미치 탈메지의 조카라고 하면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승리는 이미 이쪽 것이다. 물고 늘어져서 사실을 알아내야지. "곧 식사하시겠어요, 아가씨? 목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니 밀드레드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아까부터 거기 있었던 모양이다. 리사는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식사는 필요치 않아요, 밀드레드. 나는 배가 고파야 야무지게 되니까요." "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에요." 무슨 의민지 밀드레드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스커트를 매만지며 다른 말을 했다. "미치 숙모님이 묻거든 옛친구를 만나러 갔다고 전해 줘요." 어제부터 노상 슬레이드 블랙웰의 이름만 들어 왔기 때문에, 마치 그가 구면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몇 년 동안이나 그를 증오해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점심때는 돌아오세요?" 밀드레드는 약간 귀찮다는 듯이 이렇게 물었다. 리사는 순간 주저했다. "글쎄요...... 점심때가 지나야 올 것 같아요. 숙모님은 평소에 몇 시까지 일을 하시죠?" "일정치가 않아요. 그날 그날의 컨디션에 달렸으니까요." 아마 밀드레드로서는 그 이상이 것은 알지 못할 것이다. 리사는 저절로 나오는 웃음을 참고, "다녀오겠어요." 하면서 조각이 되어 있는 문을 열었다. 바깥은 따뜻한 봄날이었다. 눈부신 햇살이 내리비치고, 봄에 불게 마련인 강풍도 오늘은 불어 올 것 같지 않았다. 숙모의 집은 폭이 좁은 대신 길이가 길고, 한길에서 한참 들어간 곳에 자리하고 있다. 현관을 나오면 지붕이 있는 멋진 포치가 있고, 대리석 바닥을 걸을 때마다 구두 소리가 울렸다. 포치 앞에 작은 문이 나 있고, 그 바깥은 올드 찰스턴의 좁은 도로였다. 리사가 도로에 나와 문을 닫았을 때, 마차 바퀴 소리와 함께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이윽고 커브진 곳에서 모습을 나타낸 것은 좌석이 두 개 있는 4륜 마차였다. 마차가 움직임에 따라 좌석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차는 올드 찰스턴의 관광객을 위한 것인 듯했다. 여행자들이 가이드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대저택에서 나온 리사에게 신기한 듯 시선을 던지는 것을 보니, 그녀를 순수한 이곳 토박이 아가씨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리사는 미소를 보내며 손을 흔들었다. 사실은 나도 저 사람들과 같은 여행잔데, 라고 생각하면서. 마차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 이 길은 미팅 거리로 통해 있다. 목적지인 오피스는 여기서 멀지 않다. 커트니 블랙웰 법률 사무소. 슬레이드는 그 커트니 블랙웰의 아들이다. 사무실로 쓰고 있는 것은 지붕에 이끼가 낀 낡은 건물로서, 역시 올드 찰스턴에 위치하고 있다. 사무실은 자그마하고 아담했다. 벽은 연륜을 말해주듯 윤기가 나서 안정감을 주었고, 골동품과 가죽의자가 안락함을 더해 주었다. 접수계에 앉아 있는 사람은 흰머리가 섞인 중년 여성이었다. 밑에만 렌즈로 된 안경을 잡고, 그 윗부분으로 리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몹시 차가운 인상이었으나 말투는 친절했다. "어서 오세요. 용건은?" "슬레이드 블랙웰 씨를 뵙고 싶어서 왔는데요." 리사는 짧게 말했다. 뜻밖에도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조각이 되어있는 떡갈나무 문을 가리켰다. "저 방으로 가세요." 이름도 용건도 말하지 않고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양쪽으로 열리게 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책상, 타이프라이터, 파일용 캐비닛 등이 있는 작은 방이 나타났다. 비서실인 듯 싶었으나, 비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뒤에 있는 방이 슬레이드의 방인 모양이다. 가죽으로 된 팔걸이 의자와 매거진 래크와 스탠드 모양의 재떨이가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리사는 팔걸이 의자에 앉지 않고 비서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스케줄을 적어 넣은 노트가 펼쳐져 있는 것 외에는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눈앞에 슬레이드의 방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으나, 귀를 기울여도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벽이 두껍기 때문일 것이다. 리사는 슬레이드의 오늘 예정이 알고 싶어 노트를 자기 쪽으로 돌려놓았다. 이때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안에서 사나이가 나왔다. 깜짝 놀란 리사는 동요를 감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늘씬한 몸, 그 몸을 감싼 엷은 잿빛 양복, 상의 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베스트 - 어디 한 곳 나무랄 데 없는 모습이었다. 어느새 리사의 눈은 그를 변호사로서가 아니라 한 남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듯한 충격! 멈추고 있던 숨을 천천히 토해 내기는 했으나, 자유로이 호흡을 할 수 없었다. 위험스런 예감으로 온몸의 신경이 긴장되었다. 이 사람이 슬레이드 블랙웰이라는 것은 소개받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돈 많은 미망인을 등치는 남부의 사나이라면 간사스런 사람을 연상하게 되지만, 그는 그런 인간상과는 거리가 먼 듯했다. 하기야 그가 어떤 사나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일은 없지만. 강인하고 사나이답다고 미치는 말했었다. 그러나 그런 말로는 그를 정확히 묘사했다고 할 수 없었다. 남성적 매력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하는 샘플을 보는 것 같았다. 잘 다듬어진 석상이 숨을 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그 몸에서 풍기는 강렬한 힘과 사람을 끌어들이는 관능적인 매력에 그만 압도되고 말았다. 어쨌든, 바라보고 있으면 숨이 가빠지는 불가사의한 힘을 그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검은머리가 몇 가닥 이마에 흘러 내려와 있었다. 검은 눈은 다이아몬드와도 같은 빛을 낼 뿐 아니라 매우 날카로워, 남의 비위나 맞추는 사나이의 눈빛은 아니었다. 햇볕에 탄 얼굴이 돋보이고 턱의 윤곽이 뚜렷했다. 한일자로 다문 입은 굳은 의지를 드러내 보여,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건 쟁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눈썹은 검고 짙었으나 지저분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는 눈썹을 약간 치켜올리면서 오만하게 말했다. "그러잖아도 찾아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었소." 나직한 목소리였다. 신경질적인 말투만 아니었더라면 매우 부드럽게 들렸을 것이다. "직업 소개소에서 아홉 시 반까지 누구를 보내주마고 했는데 벌써 열 시가 되었으니 말이오. 중요한 편지가 몇 통이나 쌓여 있으니 어서 부치도록. 딕터폰(dictaphone)에 들어 있으니까 대지급으로 해줘요. 딕터폰 사용법은 알고 있소?" 그는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고는 홱 몸을 돌려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2장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리사는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슬레이드를 부르려고 입을 벌리면서 손을 들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그 손이 차차 밑으로 내려가 입으로...... 여기서 그녀는 손톱을 깨물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상관없지 않아!' 마음 한 구석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슬레이드 블랙웰은 새 비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를 그 비서로 착각한 것이리라. 찬스가 아닌가. 이대로 비서인 체하고 있으면 된다. 비서라면 파일을 볼 수 있다. 의혹을 증명하게 될지 풀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서류를 조사하기에는 제일 좋은 방법이다. 그야말로 하늘의 도움이다. 이 기회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비서 교육을 받은 적은 없으나 타자라면 칠 수 있다. 비록 빨리 치지는 못한다 해도 그렇게 서투른 편은 아니다. 딕터폰 취급법도 알고 있다. 다른 일을 시킬지도 모르지만, 솜씨 있게 처리하면 그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리사는 잽싸게 책상 앞에 앉아 밑의 서랍에 백을 넣었다. 제일 먼저 할 일은 직업 소개소에 전화를 걸어 비서 알선 의뢰를 취소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느 소개손지 알 수가 없고, 그렇다고 해서 슬레이드에게 물을 수는 더더구나 없다. 전화 번호부에 있는 소개소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다. 다행히도, 둘째 번 전화를 건 소개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전화를 해야 할 곳이 또 한 군데 있었다. 리사는 얼른 다이얼을 돌렸다. 상대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리사는 저도 모르게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네, 탈메집니다." 짜증스러워 하는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밀드레드? 리사예요." 리사는 목소리를 낮추고 재빨리 말했다. "저녁때까지...... 친구의 집에 있어야 하니까, 다섯 시가 넘어서야 돌아가겠어요. 숙모님한테 그렇게 전해 주세요. 부탁해요." "저녁때 일은 알고 계세요?" 리사가 얼굴을 찌푸렸다. "저녁때 일이라니요?" "슬레...... 블랙웰씨가 식사하러 오게 되어 있어요." 슬레이드라고 말하려던 밀드레드가 이름 대신 성을 말했다. '어떻게 하지?' 리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분은 몇 시쯤에 오기로 되어 있죠?" "평소에는 여섯 시쯤에 와서 칵테일을 마셔요." "그러면, 그때까지 돌아가겠어요." 수화기를 놓는 동시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정체가 탄로날 것을 걱정하고 있을 경황이 없었다. 딕터폰에 들어 있는 구술을 타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자 소리가 나지 않으면 슬레이드 블랙웰이 의심하게 될 것이다. 편지지와 카본지를 찾는 데 몇 분, 딕터폰을 가동시키는 데 또다시 몇 분 걸렸다. 최초의 편지는 행간과 양쪽 공백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이렇다면 한눈에 풋내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할 수 없이 다시 타자를 치고 있는데, 이번에는 슬레이드에게 몇 번이나 전 화가 걸려 와서 연결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캐비닛이, 어서 조사해 달라고 손짓하고 있는 듯싶었다. 그러나 중요한 편지라는 말을 들은 이상 자리를 뜰 수도 없었다. 파일을 뒤지고 있을 때 슬레이드 블랙웰이 나온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겨우 마지막의 네 번째 편지를 타이프하고 있을 때 슬레이드 블랙웰이 나왔다. 리사는 저절로 긴장되었다. 그녀는 타자를 끝낸 편지를 집어드는 슬레이드를 싸늘하게 쳐다보고 나서 한껏 타이핑의 스피드를 냈다. 그러나 벌써 실패하고 말았다. 철자를 잘못 쳐서 수정액에 손을 뻗쳐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편지를 읽고 있던 슬레이드 블랙웰이 제일 긴 편지를 책상에 도로 놓으며 말했다. "이것은 tee가 아니라 ty야. 그런데 나는 아직 아가씨의 이름도 신분도 모르고 있어." "엘드리지라고 해요." 자기 자신도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가명이 입에서 나왔다. "앤 엘드리지, 기혼입니다." 재빨리 약지의 반지를 돌려 탄생석을 손바닥 쪽으로 가게 했다. 그러면 결혼반지처럼 보일 것이다. "미세스 엘드리지, 이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오는데, 다시 쳐주겠소." 그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네, 곧 다시 치겠어요." 리사는 순순히 대답했으나 마음속으론 긴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슬레이드는 해명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에 리사는 애써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법률용어에 익숙지 못해서 그만......" "나 는 법률관계에 지식이 있는 사람을 부탁했는데." "공교롭게도 소개소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어요." 교묘하게 거짓말을 꾸며댔으나, 아무래도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미안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자기자신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빤히 바라보고 있어서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를 몰랐다. "일할 때도 모자를 쓰고 있소, 미세스 엘드리지?" 깜짝 놀라 머리에 손을 얹어 보고서야 비로소 그녀는 깨달았다. 그린빛 터번을 쓰고 왔던 것이다.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머리가 흐트러졌을 때만 쓰고 있어요." 이번에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방긋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무엇이 우스웠던지, 슬레이드 블랙웰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모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점심 약속이 있어서 나갔다 오겠소. 한 시쯤에 돌아올 거요." 그는 바깥쪽 문을 열고 접수계 쪽으로 나갔다. 정면 입구의 문이 닫히기가 바쁘게 리사는 파일용 캐비닛으로 돌진했다. 겨우 혼자 남게 되었다. 파일을 살펴볼 찬스가 온 것이다. 부정을 행한다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그다지 떳떳한 행동이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파일에 대해서는 익숙지가 못해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다행히도 서랍에 라벨이 붙어 있었다. 숙모의 파일이 들어 있는 서랍은 어떤 것일까? 탈메지...... 탈메지. ..... 이때 바깥쪽 문이 홱 열렸다. 리사는 깜짝 놀라 기절할 뻔했다. "여어," 한 사나이가 들어오며 말했다. 키는 슬레이드 블랙웰보다 작았으나, 나이는 30대 후반쯤으로 그와 비슷해 보였다. 안경을 끼고 갈색 머리가 이마에 흘러 내려와 있었다. "메어리 루 대신인가?" "네, 그렇습니다." 약간 목소리가 떨렸다. 리사는 싱글싱글 웃고 있는 상대에게 애써 웃는 낯을 지어 보이면서 구석방의 문에 시선을 보냈다. "죄송합니다마는, 블랙웰 선생님은 식사를 하러 나가셨는데요." "알고 있소. 밖에서 만났지." 그러나 사나이는 좀처럼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리사의 손은 서랍의 손잡이를 붙들고 있는 채였다. 그 손잡이가 타는 듯이 뜨거웠다. 무엇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태연한 체했으나, 후회스러운 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저어, 무슨 용무신지요?" 빨리 나가 주기를 바라면서도 리사는 친절하게 물었다. "음," 하고 그는 천천히 다가왔다. "탈메지의 파일을 가지러 왔소." "네? 무엇이라고요?" "탈메지. 밀리엄 L. 탈메지의 파일 말이오." 리사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는 한가롭게 되풀이해 말했다.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 것인가....... 리사는 얼굴을 돌렸다. "죄송합니다마는, 외부 사람에게 파일을 넘겨 드릴 수는......" "아, 미안하게 됐군." 그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내 소개를 깜빡 잊었었군. 나는 슬레 이드의 조수...... 조수래도 좋고 고문이래도 좋아요. 어쨌든 이 사무실 사람이니까." 그러면서 리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름은 드류. 정확하게 말하면 앤드류 래트레지. 유감이지만 옛날 찰스턴에서 유명했던 래트레지 가문과는 관계가 없어요. 아가씨는?" "리......" 안된다. 하마터면 진짜 이름을 말할 뻔했다. "앤 엘드리지예요." 악수를 하자, 그는 미련이 있는지 한참 동안 그녀의 손을 쥐고 있었다. 그러고는 약지에 낀 반지를 보고는 실망한 듯 희미한 웃음을 띠고 농담을 했다. "이혼? 아니면 세상을 떠났소?" 리사는 할 수없이 거짓말을 더 보태기로 했다. "오늘 아침 집을 나올 때까지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어요. 남편에게 키스하고 다녀오겠다는 말을 했으니까요." "나는 운이 없군." 래트레지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야 매력적인 비서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더니 남편이 있었군 그래. 남편하고는 원만하오?" "네, 매우." 또다시 거짓말이지만 도리가 없었다. "질투가 나는군." 그는 짐짓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독신자의 딱지를 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당분간은 슬레이드와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하겠군." "블랙웰 선생님은 독신이신가요?" 그러리라고는 생각했으나, 분명히 해 두고 싶었다. "물론이오. 우리는 대학시절부터 누가 먼저 결혼할 것인지 내기를 걸었지. 서로가 위기일발의 지경에까지 이르렀었으나 성공하지 못했소. 두 사람 모두 결혼 일보 직전에서 실패하고 말았지." "세상 일이란 그렇게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모양이군요." 마이켈과의 약혼도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대답하자, 래트레지가 갑자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얼른 다른 말로 수정해야지. "즉, 좋은 사람을 만나도, 좀 더 내기를 걸걸, 하고 나름대로 욕심이 생기니까 결국은 같은 거지요." "그런 것 같군." 그가 빙그레 웃었다. 겨우 호기심이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자, 더 이상 일을 방해하지 않겠소." "감사합니다." 리사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밀려 있어서요." "탈메지의 파일을 주면 곧 나가겠소." 실망...... 그가 온 용건을 잊어버렸을 지도 모른다고 약간의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하지만 파일을 드리기에는......" "왜 그러지요? 파일에 관해서는 메어리보다도 융통성이 없군 그래." 하고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리사는 이때다 하고 버텼다. "그런 말씀을 들으니 점점 더 드릴 수 가 없군요." 물론, 건넬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가 조사하고 싶기 때문이다. "원래 파일은 외부로 가지고 나갈 수 없게 되어 있으니, 내 마음대로 드릴 수는 없지 않겠어요?" "나 역시 중대한 임무가 있소. 하지만 그 파일이 없으면 그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는 좀처럼 단념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임시 직원이라서...... 블랙웰 선생님이 돌아오실 때쯤 다시 한번 와 주시겠어요?" 그렇게 하면 혼자서 파일을 조사할 시간이 충분히 생긴다. "나는 그가 파일을 가져오라고 해서 들어온 것이요. 설마 아가씨가 녹색 괴물로 변신해서 파일을 지키리란 생각은 그도 안 했던 모양이군." 그는 농담 비슷이 말하고 그린 슈트 차림의 리사의 몸을 빤히 훑어보고 서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핑계를 댈 수가 없었다. 써먹을 수 있는 구실은 이미 다 쓰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그가 하필이면 탈메지의 파일을 가지러 오게 된 아이러니컬한 운명을 탓할 수밖에 없다. 절호의 찬스가 와서 일을 진행하려 한 순간에, 소중한 그 목적물이 손에게 떠나 버리게 된 것이다. "파일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을 것이고, 일이 끝나면 곧 돌려주겠소." 그가 손가락 두 개를 세워 보였다.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소." "알겠어요." 리사는 본의 아니게 파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대관절 어디 들어 있는 것일까? "필요하신 파일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저는 그 파일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사실은 어느 파일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다. 볼티모어에 있는 자신의 엉터리 파일 외에는. "좋아요, 내가 찾아보겠소." 리사가 물러서자 앤드류가 서랍을 열었다. 그것은 리사가 손을 대고 있던 서랍이었다. 그는 T 자에 들어 있는 파일을 차례차례 찾았다. "여기 있군." 라벨에 숙모의 이름이 씌어 있는 것을 흘끗 볼 수 있었으나, 파일은 어느 틈에 앤드류의 옆구리에 껴지고 서랍은 텅 비고 말았다. 앤드류가 조금만 늦게 왔더라면 볼 수 있었는데, 하고 생각하니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걱정스런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소. 내일 아침 일찍 돌려주겠소." 앤드류는 농담 비슷이 말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일이 잘만 되면." "별로 걱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리사는 애써 침착해지려고 했다. "다만 다른 사람이 파일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문득 머리에 떠오른 구실이었다. "그 점은 염려할 필요 없어요. 여기에는 지금 우리하고 슬레이드, 그리고 접수계인 엘렌 타일러 밖에 없어. 사실은 보브 태커라는 사람이 더 있지만 현재는 이 고장에 없고, 슬레이드의 조수라 할지 상담역이라 할지, 그런 정도의 사나이오. 주말에는 돌아올 거요. 메어리 루는 2주일 휴가를 받았지만." "메어리 루? 언제나 이일...... 블랙웰 선생님 비서 말인가요?" "그녀는 보브의 아내요. 그녀의 친정에 불행한 일이 생겨서, 두 사람이 함께 간가요. 당신도 일주일 정도면 파일에도 익숙해지고, 훌륭하게 일을 할 수 있게 될거요." "나는 2주일 동안이나 여기 있지 않을 거예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슬레이드 블랙웰이 알게 된다면, 있으려야 있을 수 없게 되지 않겠는가! "어째서지요?" 앤드류는 의 아하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는 법률관계의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요. 마침 적당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가 온 거예요. 소개소에 경험자가 나타나면 곧 교체하게 될 거예요." 무의식중에 그녀는 앤드류가 끼고 있는 파일에 시선을 주었다. 의심하기 전에 책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메어리 루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 있을 수 있도록 슬레이드에게 부탁해 보겠소. 여기 일은 경험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요. 슬레이드는 자기 나름대로 일을 시키니까. 다시 말해서, 교과서대로 일할 필요는 없다는 거요." 그럴테지, 그 사람다운 태도야. 리사는 이런 생각을 했으나 입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친절은 감사합니다마는, 블랙웰 선생님한테는 그 나름의 생각이 있을 거예요." "그가 무어라 말할 것인지 내가 맞혀 볼까요? 뻔한 일이지. 그의 아버지하고 똑같은 말을 할거요. 너무 허둥대는군, 하고 말할 것이 분명해요." "아버지라니, 커트니 블랙웰 선생님 말씀인가요?" "물론이지요." "아까 여기 계신 분들의 이름에는 빠져 있었는데...... 이미 은퇴하셨나요?" "슬레이드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일년도 되지 않아 은퇴했소." 앤드류가 다가와서 리사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는 변호사 생활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노상, 농사나 짓고 살았으면, 하고 말했었소. 그러나 블랙웰 법률 사무소는 오랫동안 찰스턴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왔으니까 쉽게 문을 닫 을 수가 없었소. 그래서, 슬레이드가 자격을 얻게 되지 사무소를 맡기고 자기는 은퇴하여 시골로 내려가 버린 거요." "그럼 현재는 농사를 짓고 있나요?" "그래요, 옛날 블랙웰 농장을 다시 사가지고. 그곳은 원래 그들 집안의 땅이었는데, 남북전쟁때 잃어버렸었지. 아직도 당시의 집이 남아 있는데 대단한 것이지요. 한 채만은 도저히 쓸 수가 없게 되어서 헐어 버렸지만, 나머지는 모두 수리를 했소. 어쨌든 한번 가서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앤드류가 빙그레 웃었다. "네, 아주 훌륭할 것 같네요." 혹시 슬레이드 블랙웰이 미치의 돈을 집수리에 유용한 것은 아닐까? "남편은 질투가 심한 편이오?" "버드 말인가요?" 또다시 리사는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어떻게 이처럼 자연스럽게 그런 이름이 튀어나오는 것일까. "아니, 별로 질투가 심한 편은 아니에요. 그런데, 왜 물으시지요?" "내일 낮에 점심이나 같이 할까 해서요. 지금 당장 그러고 싶지만 이것 때문에......" 하면서 파일을 가리켰다. "오늘은 엘렌에게 샌드위치라도 사오라고 해야지." 이때 그는 리사가 허둥대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러지요, 앤? 무서워할 것은 없어요. 나는 비록 안경을 쓴데다 키도 작지만 최소한 슬레이드보다는 마음은 좋소. 거짓말이 아니라구요." "네, 나도 그렇게 믿어요." 리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괜찮겠소? 같이 식사하겠소?" "그 이야 기는 내일 다시 하기로 해요." 만일 내일까지 내가 여기 있게 된다면, 하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좋아요, 알았소." 앤드류는 일어나면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점심은 일찍 먹어 두는 게 좋을 거요. 정오가 지나면 이 부근은 몹시 붐비니까." 리사도 시계를 보고 놀랐다. 슬레이드 블랙웰이 나간 뒤로 이렇게 시간이 지났다니...... 이미 정오가 가까워져 있었다. 아침을 안 먹었기 때문에 배에서도 식사를 재촉하고 있었다. 타자를 치던 편지는 일단 제쳐놓기로 하자. "그렇군요. 그럼, 식사하고 오겠어요." 얼마 후 리사는 손님으로 혼잡을 이룬 레스토랑에 혼자 앉아서 접시에 남은 빵부스러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천천히 생각해 본 결과, 자기가 무척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앤드류 래트레지는 내일 아침까지는 파일을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길은 두 가지밖에 없다. 첫째는, 사무실로 돌아가 슬레이드 블랙웰에게 신분을 밝히는 일이다. 그러나, 왜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느냐고 따져 물으면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는 이것을 농담으로 여겨 웃어 버릴 만큼 유며 센스를 갖고 있지 못할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숙모의 파일을 돌려 받을 때까지 계속 그를 속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리사 탈메지로서 그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된다. 숙모가 오늘 저녁 그를 초대했기 때문에 이것은 불가능하다. 얼굴이 마주치면 그는 곧, 오늘 낮의 비서가 리사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를 추궁하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추궁을 당하게 될 것이다. 리사는 한숨을 쉬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때마침 햇빛이 스며들어, 터번을 쓴 리사의 모습이 창에 비치고 있었다. 슬레이드는 오늘 아침, 모자를 썼다고 잔소리를 했다. 이때 기발한 생각 하나가 머리 속에 문득 떠올랐다. 매일같이 텔레비전 방송국을 찾아오곤 하던 우체부도 수퍼에서 마주쳤을 때 날 알아보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는 내가 제복차림으로 있을 때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머릿속에서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했다. 변장을 하면 된다. 감쪽같이 속이면 되는 것이다. 리사 탈메지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 앤 엘드리지는...... 터번 덕택에 머리카락까지는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빨강머리. 그렇다. 빨강머리로 해야지. 빨강머리라면 흰 피부와 녹색 눈에 잘 어울릴 것이고, 진짜 머리 빛깔과도 대조적이다. 운만 좋으면, 슬레이드 블랙웰은 이 두 사람을 비교해 보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리사는 얼른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했다. 그리고 가발을 파는 상점 중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세 블록쯤 가면 가발을 진열해 놓은 양장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리사가 찾아가 보니 가발은 여남은 개밖에 없었으나, 그 중에 빨강머리 가발이 하나 있었다. 오렌지 빛깔이 도는 불타는 듯한 빛깔로서, 짧고 귀여운 보브 스타일이었다. 점원의 도움을 받아 써보니, 자신도 몰라볼 정도로 딴 사람이 되었다. "이것으로 주세요." 리사는 가발을 쓴 채 터번을 손에 들고 상점을 나왔다. 입술 연지도 약간 밝은 색으로 칠해 두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도중 보석상 앞을 지났다. 문득 <기혼자>라는 것을 생각하고, 안으로 들어가 처음 눈에 띈 싸구려 반지를 샀다. 그리고 가게를 나오면서 얼른 탄생석 반지를 빼고 그것을 끼었다. 종종걸음으로 사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는 한 시 10분이었다. 지각이었다. 제발 슬레이드 블랙웰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고생을 했는데 목이 잘리고 싶지는 않았다. 소개소에 다른 사람을 보내 달라고 연락하면 모든 일은 끝장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파일을 손에 넣어야지. 유감스럽게도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영락없는 슬레이드 블랙웰 그 사람이었다. 다리가 긴 그는 리사보다 서너 걸음 먼저 와 정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눈이 점수라도 매기듯이 리사를 훑어보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리사는 작은 목소리로 사과하고 빨강머리 가발을 가만히 만졌다. 그가 가발임을 알아볼 것인가. "점심시간에 미장원에 가서 섐푸를 했어요." 슬레이드는 그 순간 리사가 손에 들고 있는 터번에 눈길을 보냈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서는 리사의 말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모자에 관해서 말했기 때문인가?" 그는 문을 열고 리사를 먼저 들어가게 했다. "네, 그렇습니다." 피노키오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피노키오였더라면 지금쯤은 코가 2미터 는 길어졌을 것이다. 슬레이드의 오만하게 꽉 다물어진 입이 약간 벌어졌다. 그것을 곁눈으로 보면서 리사는 먼저 사무실로 들어갔다. "미세스 엘드리지, 난 별로 나쁘다는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오. 보기 드문 일이기에 흥미를 느꼈을 뿐이지. 요즘은 모자를 쓰는 사람이 별로 없지 않소?" "저도 평소에는 쓰지 않아요." 리사 탈메지는 모자를 쓰지만, 앤 엘드리지는 쓰지 않는다. 이것을 마음속 깊이 기억하고 있어야지. "그런데 당신은 짜증을 잘 부리오?" 슬레이드가 재미있다는 듯이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누구나 신경질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신경질을 부리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차이밖에 없지 않을까요? 어디서 짜증을 부리는가 하는 차이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경우는 어느 편이지?" 슬레이드는 아직도 짖궃게 물어 오고 있었다. "저런, 모르고 있었는데!" 앤드류 래트레지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다. 그가 갑자기 들어왔기 때문에 리사는 겨우 슬레이드의 질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자 밑에 그런 머리가 있는 줄 알았으면, 혼자 점심을 하러 가지 못하게 했을 텐데!" "그녀는 유부녀야, 앤드류." 슬레이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도 알고 있네." 앤드류는 의미 있게 리사한테 윙크해 보였다. "그러나 결혼을 했다고 해서 그녀가 혼자 식사해야 한다는 법은 없고, 나도 사양할 이유가 없지. 한 시간쯤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너그럽게 보아줘요, 앤." 슬레이드가 앤드류를 보는 눈에는 우정어린 따스함이 깃들여 있었다. "이 친구는 빨강머리 여성한테는 약하거든." 그는 비서실로 이어진 문을 열고 리사를 기다렸다. "사실이오." 앤드류가 안으로 들어가는 리사를 보면서 말했다. "슬레이드는 금발, 나는 빨강머리지." 여기 그 두 여자가 다 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될까? 리사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이것은 중요한 비밀이다. 이대로 밀어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자리에 앉으면서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때 슬레이드의 엄한 목소리가 날아와KT다. "아직도 편지를 다 마치지 못했군, 미세스 엘드리지?" 검은 눈이 타이프라이터에 끼워져 있는 종이를 예리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네, 아직 끝마치지 못했어요." 리사가 얼른 이유를 말했다. "선생님이 나가신 뒤 곧 래트레지씨가 오셔서, 탈메지의 파일을 달라고 하셔서요. 저는 그 파일에 익숙지 못해서 찾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어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앤드류뿐이었으므로 다시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슬레이드가 앤드류한테 물어 보지는 않을 것이다. "익숙지 못하다고 해도 그 파일은 보통 것과 같아 별다른 것은 전혀 없는데." 슬레이드가 반사적으로 말했다.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러고는 갑자기 신경이 쓰인다는 듯이, "탈메지의 파일이라......"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네, 탈메지의 파일입니다. 래트레지씨가 선생님한테 가져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했어요. 뭣하면 제가 가서 도로 가져올까요?" 기꺼이 달려가겠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슬레이드 블랙웰이 한마디로 부정했다. "탈메지씨한테 전화를 걸어 줘요. 전화 번호는 책상 위의 번호부에 있어요." "알겠습니다." 리사는 당황하는 기색을 숨기고, 재빨리 전화 번호부를 펴서 숙모네 번호를 찾았다. 다이얼을 돌리고 신호가 가는 소리를 듣는 동안 목의 힘줄이 꿈틀거렸다. "탈메집니다." 네 번째 신호가 갔을 때 밀드레드가 나와KT다. "아,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슬레이드 블랙웰이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목소리를 위장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 받으시겠어요, 아니면 방으로 연결할까요?" "방에서 받기로 하겠소." 슬레이드는 등을 돌리다가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한 가지 충고해 두겠는데 미세스 엘드리지, 앤드류는 여러 가지 구실을 대고 방해하러 올 테니까 조심해 주었으면 좋겠어." 리사는 표정이 굳어졌다.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아까 제가 결혼한 몸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래트레지씨도 그럴 생각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개운치 않은 듯한 말투였다. 리사는 화가 나, 자기 방으로 향하고 있는 슬레이드의 넓은 어깨를 노려보았다. "흥, 제가 무엇이길래!" 입밖에 내어 중얼거리는 순간, 수화기를 통해 밀드레드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리사는 송화구를 손으로 막고 목소리를 바꾸어 말했다. "잠깐 기다려 주세요, 블랙웰 선생님을 바꾸어 드리겠어요." "슬레이드씨라구요? 빨리 바꿔 줄 수 없을까요? 하루 종일 이렇게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요." 밀드레드가 불평을 말했다. 이윽고 슬레이드의 방에서 수화기 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가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리사는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3장 숙모의 집에 거의 이르렀을 무렵, 주위에 차도 없고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되자, 리사는 걸음을 멈추고 빨강머리 가발을 벗은 뒤 금발을 고정시키고 있던 핀을 뺐다. 그리고 가발을 백에 넣고 나서 머리를 대강 매만졌다. 어이없는 휴가가 되고 말았어! 익숙지 못한 타이피스트 노릇을 했기 때문에 팔과 목과 어깨가 몹시 아팠다. 비서란 이렇게도 힘든 직업이었던가! 볼티모어의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는 도나 밀즈 생각이 났다. 돌아가거든 곧 그녀의 봉급 인상을 제의해야지. 뒤에서 차가 오고 있었다. 리사는 깜짝 놀라 돌아다보았다. 사무실을 나올 때 슬레이드 블랙웰이 앤드류에게 한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 이제부터 곧바로 미치네 집으로 가겠다고 한 말이. 그렇다면, 언제 그가 따라올지 모른다. 다행히도 이번 차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차가 옆으로 지나갈 때 보니, 운전하고 있는 사람은 대머리로서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 나이였다. 그러나 어쨌든 서둘러야 한다. 슬레이드 블랙웰보다 먼저 집에 돌아가지 않으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다행히도, 집에 도착했을 때 자동차 전용의 철문은 닫혀 있었다. 안에 들어가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안심이야. 어서 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어야지. 그런데, 현관문을 닫는 순간 숙모와 마주치고 말았다. "어서 오너라. 길을 잃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웃으면서 맞이하는 미치의 얼굴에 갑자기 걱정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무척 피곤해 보이는구나, 리사." "네, 약간요." 리사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팔이 아파서 손이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렇게 바쁜 줄 알았으면 슬레이드를 내일 초대할 걸 그랬구나.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말을 해도 소용없지...... 이미 올 때가 되었는걸." "그럼, 얼른 이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어요." "아니, 갈아입을 것까지는 없어. 그보다도 잠시 앉아서 시원한 음료수라도 마시면서 발을 편히 하는 것이 어떻겠니?" 더없이 반가운 말이었으나, 리사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미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입고 있는 옷도 멋진데 갈아입을 게 뭐 있니." 사실은 이 옷이 문제인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갈아입어야 한다. 슬레이드 블랙웰은 거의 하루 종일 이 옷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 말을 이떻게 숙모에게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역시 방에는 다녀와야겠어요.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 기운이 날 거예요." 다른 사람이 되어 나오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그것이 좋겠다면 마음대로 하려무나." 드디어 미치가 양보했다. "제가 내려오기 전에 블랙웰씨가 오시면 양해를 구해 주세요." 층계까지 간 리사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참, 문이 닫혀 있었어요." "괜찮아, 슬레이드는 걸어서 올 테니까. 언제나 그렇게 해왔단다." 한 블록이나 두 블록 뒤에서 슬레이드가 걸어오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자 소름이 끼쳤다. 리사는 층계를 뛰어 올라갔다. 방 앞에 이르렀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 만일 1분만 늦었더라면 아무런 성과도 없이 모든 일이 들통날 뻔했군. 침실은 널찍하고 밝은 그린빛과 금빛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한 구석에 소파, 일인용 의자, 고풍스러운 책상이 놓여 있어 거실이 이어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전에 침실 옆으로 나 있던 화장실은 수리하여 욕실로 개조되어 있었다. 리사는 얼른 욕실로 달려갔다.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싶었으나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냉수로 대강 세수만 했다. 옷은 부드러운 블루의 원피스를 택했다. 상반신은 몸에 꼭 달라붙고, 심플한 라인의 물 흐르는 듯한 플레어 스커트로 이어져 있었다. 디자인과 색상이 입는 사람은 품위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드레스였다. 낮 동안의 대담한 옷차림과는 정반대여서, 슬레이드의 눈을 속이기엔 충분할 것 같았다. 화장을 하고 마스카라를 하려는 순간, 푸른 드레스 탓으로 눈빛이 더욱 돋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치도 이 녹색 눈이 매우 개성적이고 인상에 남는다고 했다. 똑같이 특징 있는 눈을 가진 여자가 두 사람...... 그 정도는 슬레이드 블랙웰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눈빛을 바꾸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그렇다! 리사는 마스카라의 브러시를 화장대 위에 놓은 채 침실로 달려갔다. 백은? 그렇지, 침대 위에 있다. 얼른 백을 열고 안에 있는 것을 모두 침대에 쏟아 놓았다. 가발...... 그리고 ...... 선글라스! 재빨리 큼직한 선글라스를 쓰고 거울 앞으로 돌아왔다. 비록 미러 선글라스와 같이 완전히 눈을 감추는 것은 아니었으나, 렌즈가 푸르스름한 빛을 띠기 때문에 눈빛은 잘 알 수 없었다. "이젠 됐어!" 리사는 안도의 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층계에 서자 거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리사는 그 자리에서 발을 멈추고 동요를 가라앉히려고 가슴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대어도 가슴의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물거리고 있을 수만도 없어서 떨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계단을 내려가 거실로 들어갔다. "자아 이리와, 리사. 기다리고 있었다." 밝은 목소리로 말한 미치가 갑자기 낯을 찌푸렸다. 한편 슬레이드 블랙웰은 리사를 맞이하려고 예의바르게 의자에서 일어섰다. 리사는 물론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숙모에게 시선을 향한 채로 있었다. 미치가 놀란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시간에 왜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 "스튜디오에서 늘 강한 라이트를 받고 있어서 눈이 약해졌어요. 강한 광선을 받으면 안 좋아요. 오늘은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있었더니 눈이 아프군요." 아무래도 나는 천성적인 거짓말장인가봐. "이럴 경우에는 선글라스를 쓰라고 의사가 말했어요." "어마, 그랬었구나.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 네가 아무 말도 안 했으니까." "숙모님한테 보고할 만한 일도 아니니까요. 그저 약간 불편할 뿐이에요." 리사는 슬레이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에 들어온 이후 줄곧 그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으나, 지금의 그녀와 앤 엘드리지를 결부시켜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슬레이드 블랙웰씨죠?" 그러고는 그의 옆으로 가서 상냥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리사 탈메지라고 해요. 미치의 조카딸이에요." "잘 부탁해요." 슬레이드도 웃는 낯으로 답했다. 그의 웃는 낯이 너무도 매력적이어서 리사는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정말 매력 있는 사람이군. 지금처럼 늘 친절하게 대해 주기만 한다면. 악수를 한 슬레이드는 좀처럼 손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리사는 어쩐지 자꾸 거북스럽게 느껴졌다. "미치의 말대로 예쁘고 지적인 아가씨로군요. 그러나 이렇게 손이 찬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슬레이드는 농담처럼 말했으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니 가시 돋친 그 말도 달콤하게 들렸다. "손이 찬 사람일수록 마음은 따뜻해요." 미치가 옆에서 말했다. "혈액 순환이 잘 안돼서 그래요." 리사는 그의 따뜻한 손에 감싸인 자기 손을 얼른 뺐다. 슬레이드에게 황홀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리사 자신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일면을 보면, 숙모가 슬레이드, 슬레이드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센티멘털하고 로맨틱한 여성이기에 그 매력에 곧 손을 들었을 것이다. 그에게 굴복하지 않으려면 그 곁에 가지 않는 길뿐이다. 그를 에워싼 자기(磁氣)에 닿지 않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 곁에 있으면 아무래도 빨려들고 말 것이다. 사무실에 있는 동안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일하고 있을 때의 슬레이드 블랙웰은 매우 무뚝뚝했던 것이다. 리사의...... 아니, 앤 엘드리지의 모자를 보고 농담을 한 것 외에는 완전히 사무적이었었다. "칵테일을 만들까요, 리사?" 슬레이드 블랙웰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리사를 퍼스트 네임으로 불렀다. "리사는 진을 좋아해요." 미치가 슬레이드에게 말하면서 리사를 돌아보았다. "슬레이드는 칵테일 만드는 데는 프로급이지." "진으로 하겠소?" 슬레이드는 리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아니, 주스를 마시겠어요." 피로한데다 술까지 마시면 머리가 혼란해질 것 같았다. 그러게 되면 큰일이다. "정말?" "네, 정말이에요." 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딱 잘라 대답했다. 슬레이드는 주류를 담은 나무 왜건으로 걸어가 등을 돌린 채 물었다. "토마토 주스와 오렌지 주스가 있는데, 어떤 것으로 하겠소?" "토마토 주스로." 리사가 대답하자 그는 얼음을 넣은 글라스에 토마토 주스를 따르고 타바스코를 조금 떨군 뒤 반달 모양의 레몬을 띄웠다. 남의 집인데도 아주 자연스러운 태도로 능숙하게 해냈다. "완전히 익숙해 졌군요. 눈을 감고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니?" 리사가 당당하게 도전하고 나섰다. "노상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슬레이드는 가볍게 받아넘기고 주스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의 검은 눈동자는, 리사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탐색하려 하는 것 같았다. "숙모님의 귀찮아하시지 않는 것을 보니 좀더 자주 들르셔도 좋을 것 같군요." 생각해 보기도 전에 혀가 먼저 움직였다. 하루 종일 하고 싶은 말을 못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맙군.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오." 슬레이드는 웃음을 띠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싸늘함이 감돌았다. 눈은 잔뜩 흐려 있어서 웃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마, 슬레이드! 당신을 귀찮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미치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밝게 웃었다. 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이해하고도 그냥 흘려 버린 걸까...... 그것은 알 수가 없었다. "밀드레드와 나는 언제나 대환영이에요. 날마다 와도 좋아요. 여기를 제 2의 내 집이라고 생각하고 말이에요. 꼭 그래 주세요. 어쨌거나 이 집은 모든 것이 당신한테 달려 있으니까요." "그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요."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또 이상한 말을 해버린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멸의 길로 빠져들고 말 것 같았다. 슬레이드로 하여금 적의나 경계심을 갖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사냥을 잘하는 매는 발톱을 감춘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갑자기 손바닥을 뒤집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 오히려 수상하게 여길 것이다. "숙모님한테서 들었는데, 당신이 숙모님께 이 집에 살기를 권했다면서요? 개축, 수리도 모두 돌보셨다구요...... 그 방면에 무척 조예가 깊으신가보죠?" "이 근처의 집이라면 돈을 들여도 손해볼 것은 없지요. 이렇게 훌륭한 집을 과거의 유물로 묻어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거든." "그 말이 옳아요." 미치가 맞장구를 쳤다. "나는 처음부터 당신 생각에 대찬성이었지. 하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해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여간 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야. 내가 이런 일에 서투르다는 것은 너도 알지, 리사? 역시 슬레이드가 기술자나 그 밖의 것을 주선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집을 이처럼 꾸미지 못했을 거야." "그럴 거예요. 숙모님은 운이 좋았어요. 타이밍에 맞게 모든 것을 보살펴 줄 사람을 발견했으니까요." 리사는 슬레이드를 보고 억지로 웃었다. "찰스턴에 돌아와서 숙모님이 띄우신 편지에는 당신에 관한 이야기만 잔뜩 씌어 있었어요. 물론 칭찬하는 말이죠. 당신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느낌이었어요." "우리는 손발이 잘 맞아요.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 도와주니까." 슬레이드의 음성은 부드러웠으나, 입가에는 약간 엄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미치도 남자의 도움 없이는 불편한 점이 있을 테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와주고 싶어요."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어요." 리사가 빈정거리듯이 말하자 슬레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리사의 마음속을 읽기라도 하려는 듯이. "슬레이드한테는 정말 신세를 많이 지고 있어." 미 치는 여전히 기뻐하고 있었다. "돈에 대해서는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거든. 투자신탁이니 자본이득이니 주식배당이니...... 아, 이젠 지긋지긋해. 슬레이드가 모두 맡아 주어서 여간 도움이 되지 않아. 다만, 너무 신세를 져서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렇게 신용할 수 있는 분이 주위에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신세를 지는 사람은 어느 편일까? "하지만...... 슬레이드," 그를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는데는 약간의 저항감이 있었다. "당신은 책임이 너무 중대하지 않아요? 남의 재산을 모두 관리하니까요." "그것은 사실이오." 슬레이드는 입을 한일자로 다물었다. 아무래도 나의 말이 아픈 데를 찌른 모양이다. 말은 삼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를 난처하게 만든다는 것은 속이 시원한 일이었다.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세워진 작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즉 리사 탈메지는 정면에서 싸움을 걸고, 한편 앤 엘드리지는 배후에서 협공하는 것이다. "리사는 내가 당신을 지나치게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미치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속이기보다 속는 편이 좋아요. 물론 리사는 당신을 잘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만." 미치는 리사가 아까부터 그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처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다만, 이 분위기를 원만히 수습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숙모님 은 너무 쉽게 남을 믿으니까요." 리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가 마음만 먹는다면 쉽게 이용할 수 있을 거예요." 이것은 슬레이드 블랙웰에 대한 교묘한 공격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그도 화를 내며 반격해 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심각한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지만. "한 잔 더 어떠세요, 미치?" 슬레이드가 빈 글라스를 들고 일어섰다. "나는 이것으로 충분해요." 미치는 액체가 약간 남아있는 글라스를 손안에서 돌렸다. 이에 따라 얼음소리가 달그락거렸다. "아직 약간 남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사양 말고 많이 드세요." "네, 마시죠." 슬레이드는 시무룩해 가지고 왜건으로 발을 옮겼다. "오늘은 정말 바빠서 피곤해요." 사실이야. 리사는 바빴던 오후의 사무실을 상기했다. 전화는 끊임없이 걸려 오고, 약속이 되어 있건 안되어 있건 방문객이 줄을 이었다. 이런 형편이라면 언제 편지를 타이프할 수 있을지 절망적인 생각까지도 들었었다.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아직 묻지 않았구나." 미치가 흥미 있다는 듯이 리사를 돌아보았다. "밀드레드한테서 친구 집에 갔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어디에 갔었니?" "점심을 먹고 곧 올 생각이었지만." 리사는 또다시 거짓말을 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 틈에 저녁때가 되었지 뭐예요." "찰스턴에 친구가 있소?" 슬레이드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학시절의 친구래요." 미치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래요. 수잔과 페그, 룸메이트였어요." 두 사람 모두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으나 급한 대로 이름을 댔다. 이름을 빌어서 미안해. "내일 관광을 떠나기로 결정했어요, 다 같이. 그 두 사람도 휴가를 얻었거든요." 이것으로 내일 하루는 더 집을 비울 수 있다. "우리 집에 한번 데려오지 그러니, 나도 만나보고 싶구나." "네, 기회를 봐서 그럴 생각이에요." 리사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치형 입구 근처에서 기침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가정부가 무표정하게 서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가 됐으면 식당으로 가세요. 곧 수프를 가져가겠어요." "응, 곧 가겠어." 미치가 대답하고 일어서자, 슬레이드가 얼른 밀드레드 옆으로 다가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만들었나, 밀드레드?" 농담하듯 가벼운 어조로 그가 물었다. 놀랍게도 밀드레드는 얼굴을 붉히고, 그것을 숨기려는 듯 수줍어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수프말인가요? 그거라면 마련했어요." 숙모뿐 아니라 밀드레드까지도 슬레이드에게 사로잡혀 있다니! 무뚝뚝한 밀드레드를 녹이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며 밀드레드를 따라 식당으로 가는 동안, 리사는 슬레이드가 그녀를 구워삶은 속셈을 알게 되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 그녀가 필요했던 것이다. 숙모와 마찬가지로 밀드레드도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그는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하고 있기는커녕 여유만만하다. 리사는 결의를 새롭게 했다. 그를 더 이상 놀아가네 해서는 안 된다. 조각이 된 떡갈나무 테이블에는 3인분의 식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평소에는 긴 채로 흰 마직물 클로드가 씌워져 있었으나, 오늘은 떼어낼 수 있는 부분을 치우고 좁혀 놓았다. 슬레이드가 상석의 의자를 배어 미치를 앉게 하고 있는 동안, 리사는 숙모 오른쪽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의자 등에 사용된 목재도 테이블과 마찬가지로 조각이 되어 있었다. 리사가 앉으려고 그 의자 등에 손을 대었으나, 깨닫고 보니 그것은 의자 등이 아니라 슬레이드의 손이었다. 리사는 뜨거운 것에라도 닿은 듯이 얼른 손을 움츠렸다. 슬레이드가 뒤로 돌아와 의자를 끌어내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가까이 있는 것을 깨닫자, 리사의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문득 방어본능이 작동하여, 리사는 곁으로 비켜나 그의 매력에서 도망쳤다. 슬레이드는 의자를 빼고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굳어진 몸으로 말하고 자리에 앉으니, 그의 손끝이 어깨에 와 닿았다. 엷은 옷을 통해 느껴지는 손끝의 감촉에 몸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마음속에서는 그를 증오하고 있는데 몸이 제멋대로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두려운 일이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된다. 리사도 자신이 어떤 여잔지는 알고 있다. 결코 둔한 편은 아니다. 어딘가에 몹시 뜨거운 그 무엇을 가지고 있 는 것이다. 과거에도 몇몇 괜찮아 보이는 남자들을 만나기는 했으나, 그들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었다. 그래서 자기를 상실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런 태도로 나가야지. 아무리 그가 성적 매력을 발산하더라도 거기에 넘어가지 말고 본래의 그의 모습을 파헤치는 데 중점을 둬야지. 슬레이드는 맞은 쪽에 앉아 있었다. 리사는 문득, 자신이 너무나 뚫어지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깨달은 것이나 아닐까? 리사는 표정이 풍부하다는 말을 지금까지 여러 사람한테 들었다. 생각과 느낌에 따라 눈빛이 변하기 때문이었다. 화가 났을 때는 짙은 녹색, 난처할 때는 흐린 카키 그린, 무엇에 열중하거나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렸을 때는 신비로운, 투명한 녹색이 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지금은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선글라스가 속마음을 숨겨 주고 있을 것이므로. 그러나 <앤 엘드리지>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감정을 감출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 않으니까. "슬레이드," 미치가 말문을 열었다. "아까 오늘은 무척 바빴다고 했는데,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슬레이드가 대답했다. "다만, 보브와 메어리 루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만큼 더 바빠진 것이죠." "휴간가요?" 미치가 한가롭게 의자 등에 기대며 물었다. 밀드레드가 갖다 놓은 수프에서 구수한 냄새가 났다. "아닙니다. 메어리 루의 부모가 교통사고를 당해서죠. 부친은 그 자리에서 숨지고 모친도 중태에 빠졌어요. 물론 병원에 입원해 있죠. 할 수없이 임시로 비서를 채용했는데 신통치가 못해요. 오히려 일상 업무에 혼란을 일으킬 뿐이거든요." "그 사람 잘못이 아닐 거예요." 리사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 변호를 했다. "그녀가 잘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슬레이드가 무감정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풋내기가 아니라 제대로 훈련받은 비서가 왔더라면 훨씬 일이 수월했을 거요." "훈련을 받아요? 마치 개를 두고 하는 말 같군요. 그건 그렇고, 그녀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을 테니까, 노력만을 높이 사야 하지 않겠어요?" 슬레이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만나 보지도 못한 사람을 위해 변명하곤 하나요?" 가슴이 뜨끔했다. 지나치게 변명을 한 모양이었다. 그 비서와는 전혀 면식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도 리사는 난처하게 여기며 수프를 한입 떠먹었다. "나는 약한 사람의 편이에요." 태연하게 말하려 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격한 말투가 되고 말았다. "아가씨는 여권운동가의 한 사람이오?" 슬레이드의 말투에는 조소가 깃들였고, 눈은 리사를 바보 취급하듯 빛나고 있었다. 리사는 몸을 꼿꼿이 하고 싸늘한 눈초리로 그의 시선을 되받았다. "당신은 남녀평등론자세요?" "이제 그만들 해요." 미차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난처한 듯한, 동시에 재미있는 듯한 표정을 띠고. "괜찮아요, 우리는 싸우는 것이 아니니까요." 숙모 앞에서 싸울 기세를 보인 것은 분명히 잘못이었다. 슬레이드에게는 조금도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우리는 견해가 다를 뿐이에요." "그렇지도 않은 것 같군." 그는 뼈 있는 말을 했으나 리사는 무시했다. "그럴까요?" "아가씨는 오해를 하고 있어요. 내가 비서의 노력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실은 정반대요. 더구나, 그녀가 일을 배우겠다는 성의를 보인다면 높이 평가할 생각이오. 그러나 실제 문제로 볼 때, 그녀가 일을 익힐 때까지는 불편하기 짝이 없어요. 그 사실을 정직하게 말했다고 해서 내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사실은 비서의 노력을 높이 살 생각은 전혀 없으면서도 미치 앞에서는 그런 체 하는군! 하긴 미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는 카멜레온처럼 변할 수 있는 사람일테니까. "메어리 루를 대신해서 들어온 사람은 어떤 타입이던가요?" 미치가 물었다. "풋내기라고는 했지만, 당신 말투로 보아 매력적인 여자 같은데." "겨우 어린아이 티를 벗은 여자예요." 슬레이드가 흘끗 리사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리사와 또 한 사람의 리사, 즉 앤 엘드리지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리사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스물 다섯까지는 안되고, 리사와 비슷할 겁니다. 빨강머리가 아주 매력적입니다. 그리고 눈빛이......" "그것 보세요." 리사가 얼른 입을 열었다. 슬레이드가 앤의 눈빛을 이야기한다면, 미치는 리사의 눈도 그린이라고 말할 것이 틀림없다. "여자에 대해서 물으니, 슬레이드는 얼굴의 특징만을 말하지 않아요? 여성을 능력으로가 아니라 용모로 판단한다는 증거예요. 요컨대, 머리가 나빠도 예쁘면 된다는 식이죠." "리사." 미치가 리사를 노려보았다. "사실입니다, 미치. 리사의 말은 잘 이해할 수 있어요." 슬레이드는 솔직히 리사의 말을 시인했다.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의 고집을 받아들이듯이. "그 새 비서는 예쁠 뿐만 아니라 머리도 좋습니다. 일에 대해서도 칭찬해 주고 싶지만, 아무 기술도 없으니 도리가 없어요. 타자만 해도 1분간에 서른 다섯 자도 치지 못하거든요." "어째서 내보내지 않죠?" 리사는 오기를 내어 당당하게 말했으나, 속으로는 흠칫했다. 앤 엘드리지를 해고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목을 자르는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닌가. "어떤 면에서는 놀라운 능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시켜도 전혀 혼동하지 않거든요. 그것은 높이 살만한 재능이지. 편지의 타자는 메어리 루가 돌아올 때까지 보류하면 되요. 별로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메어리 루가 돌아오지 않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은 아닌가요?" 미치가 농담삼아 말했다. "그렇게 훌륭한 사람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으니까." "유감이지만 그녀는 결혼한 여자예요. 행복한 부인이거든요." "정말 아깝게 됐군요. 그 사람이라면 당신도 교제를 할 마음이 있는 것같이 생각되었는데." "유부녀니 그럴 수는 없죠." 슬레이드가 어깨를 추슬렀다. "그런데, 이번 소설은 어떻습니까?" "자신 있어요, 기대해 보세요!" 미치가 흥분하여 말했다. 이것을 계기로 화제가 소설로 옮아갔다. 리사는 슬레이드 때문에 전혀 식사를 즐길 수가 없었다. 대화에도 거의 관여하지 않았으나, 미치는 소설 이야기에 열중해서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슬레이드는 미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계속 리사에게 예리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하여 리사는 기분이 언짢았다. "밀드레드, 커피는 거실에서 마시겠어." 디저트가 끝났을 때 미치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슬레이드가 적당히 브랜디를 마실 수 있게 될 테니까." 한참 웃다가 그녀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지난번에 펴낸 책의 서평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서재에 있으니까 가지고 오겠어요." "제가 가겠어요." 리사가 얼른 말했다. 잠시라도 좋으니 혼자 있고 싶었다. "그래 주겠니?" 리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치는 말을 이었다. "책상 오른쪽에 있을 거야. 여러 가지 서류와 같이." "찾아보겠어요." 리사는 거실로 향하는 숙모와 슬레이드를 곁눈으로 보면서 식당을 나왔다. 미치의 책상 오른쪽에는 세 개의 서류 더미가 있었다. 모양도 다르고 크기도 각각인 서류 가 쌓여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던 리사는 여러 가지 서류를 훑어보고 마지막으로, 오려 놓은 신문 조각을 집어 들었다. 서류를 원래대로 쌓아 놓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슬레이드가 들어왔다. 순간 리사는 놀란 나머지 말도 못하고 책상 앞에 선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문이 닫혔다. 리사는 슬레이드와 단둘이 서재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쏘는 듯한 그의 시선에 꼼짝할 수가 없었고, 목구멍이 타들어왔다. "저어...... 숙모님이 가보라고 하시던가요?" 겨우 이 말만을 했을 뿐이었다. 왜 이렇게 겁이 나는 것일까? 얼굴에서는 아무런 동요의 빛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시지 않아도 되었는데......" 리사는 고개를 똑바로 쳐들었다. 사실은 침착을 되찾은 것도 아니었다. "신문은 찾았어요." "그런 것 같군." 슬레이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리사가 들고 있는 신문 조각에 일별을 던졌다. 이어서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리사는 어쩔 줄을 몰랐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불안감을 느꼈다. "숙모님이 기다리고 계시니까 얼른 가져가야 해요." 듣기 거북한 메마른 목소리였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슬레이드는 문 앞에 버티고 서서 통과시켜 주지 않을 기세였다. 리사는 거기까지 가면 비켜주리라 여기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나 슬레이드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깐." "왜요?" 리사는 화가 나는 동시에 무섭기도 했다. "어떻게 할 작정인지 설명을 들어야 하겠소. 그때까지는 여기서 나갈 수 없소." 리사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4장 리사는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졌다. 슬레이드 블랙웰은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파일을 보고 그가 수상쩍은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만 잡았으면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건데. 그러나 지금은 변명을 할 여지가 없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할 작정이냐니요?" 리사는 시치미를 떼고 반문했다. "그렇다니까." 슬레이드의 얼굴에는 용서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모른다고?" 슬레이드가 오만한 눈으로 리사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서재에 들어온 이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방안 전체를 한손에 쥐고 있는 듯했다. 리사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가까이 있는 의자에 주저앉아 모든 것을 고백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포기하기엔 너무나 억울했다. 죄를 짓고 있는 것은 바로 슬레이드가 아닌가! "당신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도 거짓말이 술술 나왔는데, 이렇게 더듬거려지는 것은 어째설까? "내가 무엇을 했다는 거예요?" 슬레이드가 한 걸음 다가왔다. 리사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뒤에는 큰 책상이 있다. 발이 움직인다해도 도망칠 곳이 없는 것이다. "시치미를 떼 봤자 나를 속일 수 없어." 부드러우면서도 싸늘한 목소리! 그 침착성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가지고 싶었다. "엉큼한 수작을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리 사는 눈을 내리깔고 손에 든 신문 조각을 바라보았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엉큼한 수작이라니요. 나는 숙모님 심부름을 온 거예요. 당신은 어째서 그런 말을 하죠?" "여기 온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야. 그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하는 말이오." 엄한 말을 하면서도 그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좀 더 알기 쉽게 말해 줄 수 없을까요?" 리사는 가슴을 내밀고 억지로 허세를 부렸다. 그러노라면 좀 더 그럴듯한 말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슬레이드가 쏘는 듯한 눈초리로 리사를 노려보았다. "좋아, 분명하게 말해 주지. 미치는 성격이 안 맞아 충돌할 뿐이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믿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지 않아." 리사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행이다! 탄로가 난 것은 아니다! 그는 아직, 내가 바로 앤 엘드리지라는 것을 모른다. 금새라도 큰 소리로 웃고 말 것 같다. "어마, 그래요?" 리사는 치솟는 웃음을 참고, 뺨에 작은 보조개를 만들면서 말했다. "물론이지. 나는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믿지 않고, 첫눈에 인간을 증오하게 된다는 것도 믿지 않아. 그런데 리사는 나를 증오하고 있는 것 같더군. 조금 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증오하다니, 말이 지나치군요." 리사는 완전히 자신감을 되찾았다. "지나친 것은 바로 리사의 태도요. 만나자마자 나를 공격하는 말만 했어. 왜지? 그 설명을 듣고 싶소." 그렇다면 정면으로 공격해야지. 리사는 심호흡을 하고 돌격을 개시했다. "그야 간단한 일 아니겠어요? 나는 숙모님만큼 당신을 믿지 않아요." "미치도 그 점은 알고 있어." "그렇다면 됐군요." 리사는 맑은 목소리로 말하고 생긋 웃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게임이오?" 슬레이드는 싸늘하고 무표정한 얼굴인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게임?" 리사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선글라스 안에서 눈을 크게 떴다. 슬레이드도 그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간 것을 보았을 것이다. "나더러 그 설명을 하라는 말인가요?" "그렇게 성난 얼굴을 할 건 없잖소, 리사." 슬레이드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속이 들여다보여." "당신은 뻔뻔스러워요!" 리사가 발끈해서 말했다. "숙모님은 아주 좋은 미끼겠죠.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고 가까운 친척도 없는데....... 물론 돈은 있고...... 비위를 잘 맞추면 얻는 게 있을 테죠."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돈이란 말이오?" 리사가 심한 말을 해도 슬레이드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는 더욱 가까이 다가와, 지금은 바로 그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 큰 그 앞에서는 자기가 몹시 작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젖혀야만 한다. 본의 아니게, 강건한 사나이의 육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그의 강점인 것이다. "네, 그래요. 당신에게 소중한 것은 바로 돈이에요. 그런데 숙모님은 당신을 더할 수 없이 신뢰하고 있어요. 당신은 속으로 웃고 있겠죠? 미치를 속이기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하면서." "리사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웃고 있나?" 슬레이드 블랙웰은 무서운 상대다. 자백시키려 해도 쉽게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쪽에서도 마음만 내키면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이미 그를 속이고 있지 않은가. "웃을 일이 아니죠! 숙모님은 당신을 신임하고 있는데, 당신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하고 있으니까요. 미안하지만, 숙모님에겐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전혀 친척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숙부님하고 이혼을 했지만, 우리 부모와 나도 친척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가 곁에 있는 이상, 절대로 악덕 변호사의 먹이가 되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허어." 슬레이드는 경고를 받고도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래 어떻게 할 작정이오?" "숙모님한테, 당신은 노련한 사기꾼이라고 말해 주겠어요." 슬레이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될 수 있을 줄 아느냐고 비웃는 것 같았다. 그럴테지, 앤 엘드리지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으니까. "그래서?" "무슨 뜻이죠?" 그가 무엇을 묻는지 몰라 리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리사한테 무슨 이득이 있느냐는 뜻이지." 슬레이드가 나직하게 말했다. "숙모님이 당신의 정체를 알기만 하면 돼요." "그것뿐이오?" "무슨 의미죠?"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다니 어리석다. 고장난 축음기도 아니고. 하지만 그이 태도를 보고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다. "리사는 애써 미치 곁에서 나를 쫓아내려 하고 있어. 즉, 나를 몰아내고 대신 리사가 들어앉겠다는 속셈이 아닌가?" 리사는 몸을 긴장시켰다. 이제야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 "리사는 미치와 피가 통하고 있지 않아. 그녀에게는 핏줄이 이어진 친척이 없소. 리사는 분명히 미치가 귀여워하는 조카기는 하지만, 이혼한 남편의 조카에 지나지 않아. 이혼한 이상 이젠 아무런 관계도 아니오." "그것은 법률상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아요." "법률은 내 전공이오." 슬레이드가 싸늘하게 웃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어. 미치가 찰스턴에 온 지가 몇 년이나 되는데, 리사가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이지." "지금까지 기회가 없었을 뿐이에요." "지금까지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지." "중요한 것이라뇨?" 리사는 한껏 몸을 폈다. 그러나 슬레이드의 키에는 미치지 못했다. "무슨 뜻이지요?"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리사가 여기 온 것은 결코 순수한 동기에서가 아니란 뜻이지." 슬레이드의 눈이 탐색하듯 리사를 들여다보았다. "동기?" 리사도 도전하듯 물었다. "나는, 리사가 여기 온 것은 숙모의 편지에 너무 자주 내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생각 하는데. 그때까지 리사는 어느 누구보다도 미치가 자신을 귀여워한다고 생각했었을 거야. 그래서 찾아올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지. 지금도 숙모를 상대하기보다는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것이 더 좋겠지? 리사가 여기 오게 된 동기는 바로 돈이야. 미치의 돈이 목적이지." "내가 그런 마음을......" 분개하여 리사는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리사가 나를 증오하는 것은, 미치가 내 충고대로 돈을 쓰고 있기 때문이지. 리사에게는 그것이 점점 더 위협으로 느껴지겠지. 미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리사 자신을 위해서." "당치도 않은 말은 마세요! 나는 숙모님이 자기 돈을 어떻게 쓰건, 또 누구에게 주건 전혀 관심이 없어요. 숙모님에게서 단 10센트도 얻어 가질 생각이 없으니까!" "정말 고귀한 말씀이로군." 하며 슬레이드는 껄껄 웃었다. "미치는 리사에게 약하니까, 그런 말을 하면 금방 믿어 버리겠지. 그러나 안됐지만 나는 속지 않아. 지금 한 말도, 미치에 대한 성의도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야." 리사는 화가 치밀어 말도 하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손을 쳐들었다. 그러고는 번개같이 슬레이드의 뺨을 후려쳤다. 상상했던 대로 그의 얼굴은 탄탄하여 손바닥이 얼얼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슬레이드가 당장 폭력을 휘두르기라도 하려는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 그는 뺨을 얻어맞은 일이 없을 것이다. 더더구나 여자에게는. 방안에는 겁이 날 정도로 침묵이 흘렀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슬레이 드의 거무스름한 뺨에 흰 손자국이 남아 있고, 이글이글 불타는 눈이 이대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을 전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여자에게 폭력을 휘두른 적이 없지만, 리사가 그 기록을 깨뜨려 줄 모양이군." 슬레이드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날카로왔다. "내가 여자라서 해서 사양할 것은 없어요." 리사는 대담하게 맞섰다. 슬레이드가 무서운 눈으로 차차 다가왔다. 깜짝 놀라 뒷걸음치던 리사는 그만 책상에 부딪히고 말았다.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자 억센 손이 팔을 붙들어 일으켜 세웠다. "손대지 말아요!" 매섭게 내뱉는 찰나, 슬레이드가 그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을 뿐이란 것을 깨달았다. 이런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곧 손을 놓았을 것이다. 실수를 했어! 얼른 이 팔을 빼야지. "놓아 줘요!" 리사는 다시 한번 슬레이드의 뺨을 때리려고 다른 손을 쳐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슬레이드가 더 빨랐다. 그는 재빨리 리사의 손목을 붙잡고 자기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 순식간에 그의 손이 금발을 휘어잡고 힘껏 뒤로 젖혔다. 너무도 아파 숨을 죽이자, 슬레이드의 입술이 번개같이 덮쳐 왔다. 그를 밀치려 했으나 두 팔이 두 사람의 몸 사이에 끼여 있어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억센 힘으로 밀어붙이며 거칠게 입술을 포개어 왔다. 입술이 아팠다.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슬레이드의 육체의 감촉도 냄새도 입술도, 모두가 강렬하게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제는 다만 그의 뜻대로 조종되고 있을 뿐이었다. 저항할 수도 없거니와 응할 수도 없었다. 강철같은 그 팔에서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참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밀어붙이고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리사는 몸에서 힘이 빠져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슬레이드의 손은 이미 머리채를 쥐고 있지는 않았으나, 고개를 똑바로 세울 수도 없었다. 몸을 죄고 있는 그의 팔이 서서히 풀렸다. 곧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애써 그의 팔을 붙들자, 탄력 있는 근육의 감촉이 손을 통해 전해져 왔다. 리사는 용기를 내어 눈을 떴다. 푸른 선글라스 너머에 슬레이드의 얼굴이 있었다 - 햇볕에 탄, 무정한 사나이의 얼굴이. 이제 남은 무기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비록 효과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면 남자의 자존심을 만족시킬 수 있나요?" 리사는 떨면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나를 범할 생각이었나요?" 슬레이드는 리사의 등뒤에 돌렸던 손을 목으로 옮기고, 턱 끝에서 목까지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이에 따라 그의 온기가 리사의 민감한 피부를 자극했다. 이윽고 그는 목 언저리에서 손을 멈추고 목을 죄기라도 하려는 듯이 힘을 가했다.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리사는 지금 이런 곳에 있지 않을 테지." 슬레이드의 입술에 희미하게 입술 연지가 묻어 있었다. 키스의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은 그 것뿐이었다. 사나이다운 얼굴은 냉정하여 조금 전까지 격렬하게 키스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입술은 아직도 얼얼하고 뺨이 후끈거렸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약간 자란 수염에 찔렸기 때문일 것이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얼굴이 뜨거웠다. "이제 그만 놓아 줄 수 없겠어요?" "약속할 때까지는 놓지 않겠어." 슬레이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약속?" 리사는 가증스럽다는 듯이 되묻고 그의 가슴을 떼밀었으나 결과는 오히려 안기는 꼴이 되었다. "약속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아요!" "하고 싶지 않아도 약속을 받아야겠어. 한 번밖에 말하지 않을 테니 잘 들어. 앞으로, 리사와 관계없는 일에는 끼어들면 안 돼. 물론 여기에는 미치의 일도 포함되는 거야." "숙모님은 나하고 관계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리사는 볼티모어에 있는 귀여운 조카,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야." "당신은 사기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나를 따돌리고 숙모님의 돈을 가로챌 속셈이죠? 그렇게는 안 될 거예요!" "나는......" 그 다음 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리고 미치가 얼굴을 들이밀었던 것이다. "너무 시간이 걸리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왔지. 싸우기라도 하면 말리려고." 미치의 시선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리사는 얼른 몸을 돌렸다. 그러나 슬레이드는 천천히 팔을 풀었다. 순간 미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말릴 필요까지도 없을 것같군." "아니에요, 마침 잘 오셨어요." 리사는 한껏 슬레이드의 냉정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숙모님의 소중한 슬레이드가 내게 폭력을 쓰려 했어요." 슬레이드는 흘끗 미치를 바라보고 리사에게 얻어맞은 뺨에 손을 가져갔다. "키스했을 뿐이에요.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유도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하게 했다니......" "저런, 어쩌다 그런 일이 생겼지?" 미치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판단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원인은......" 리사가 입을 열려고 하자 재빨리 슬레이드가 가로막았다. "원인은 내가 심한 말을 했기 때문이죠. 지금까지 한번도 숙모님을 찾아 뵙지 않다니 무심하다고 말입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사과했죠." 슬레이드가 리사를 돌아다보았다. 검은 눈에 도전의 빛을 담고. "리사, 그렇지 않아? 더 할 말이 있소?" 뻔뻔스럽게도 배짱으로 나오는군! 사기꾼이라는 말을 해도 좋다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겠다. 그것을 말하는 것은 확실한 뒷받침이 있고 나서다. "그것이 전부예요, 현재로서는." 슬레이드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리사는 똑똑해요, 미치. 대단한 아가씹니다. 이야기를 나누면 아주 재미있어요. 그녀가 여기 있는 동안에 는 저도 정신을 바싹 차려야겠어요. 틈을 보이면 당할 테니까요." "그렇게 할 거예요." 되받아 말하고 리사는 마루에 떨어져 있는 신문 조각을 주워 숙모에게 건넸다. "이를 어쩌죠. 구겨져서. 다투고 있을 때 그만......" "괜찮아." 미치가 받아들고 주름을 폈다. "거실에 커피가 있으니까 생각이 있으면 오너라." 슬레이드가 소매를 걷어올리고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상당히 늦었으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저녁도 잘 먹었어요. 훌륭한 상대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군요. 그 보답으로 내일 저녁에 두 분을 초대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그러고는 무뚝뚝한 어조로 덧붙였다. "물론 시간이 있으시면 말입니다마는." "당신이 초청한다 해서 선뜻 나설 만큼 저는 한가하지는 않아요." 리사가 서슴없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리사 쪽으로 돌아선 슬레이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대답은 한마디로 족해요." "실없는 말은 그만두세요! 싸구려 농담은 싫어요." "실없는 말은 바로 리사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사실은 시간이 많지?" "한가하더라도 간단하 받아들이지는 않겠어요." 저쪽에서 짓궂게 나오면, 이쪽이라고 순순히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고 있소. 중요한 일은 간단히 결정할 수 없는 법이지." 슬레이드는 리사가 싸움을 걸어 오는 줄 알았는지 무서운 얼굴을 했다. 이 정도로 말을 삼가 야지. 이미 미치 앞에서 상당히 심한 말다툼을 하지 않았는가. 슬레이드 블랙웰과 대결하려면, 증거를 확보한 뒤가 좋다. "그럼 결정된 것으로 여겨도 좋겠죠?" 슬레이드가 미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일 저녁 일곱 시에 마중하러 오겠습니다." "싫어요!" 리사가 저도 모르게 소리지르자 슬레이드가 쏘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리사는 잠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뿐이에요." 미치는 두 사람의 말다툼이 재미있는지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내일 저녁이 좋아요. 때로는 리사를 데리고 밖에 나가 식사를 하고 싶어요. 당신은 발이 넓으니까 훌륭한 음식점도 많이 알고 있겠지요?" "싫어요." "리사." 미치가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말했다. 피곤했기 때문에 리사는 더욱 신경질이 났다. 그러나 어떻게든 참아야했다. 슬레이드는 리사가 미치에게 고해 바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난처하게 만들고만 있다. 내일은 또 바쁜 하루가 될 것이다. 그런 뒤에 다시 이런 짓궂은 사람과 얼굴을 대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우울했다. "숙모님, 저는 내일 하루 종일 페그와 수잔 등와 밖에 나가 있어야 해요. 돌아와서 다시 식사하러 나가기는 싫어요." "그렇다면 목요일로 하지, 모레로." 슬레이드가 재빨리 말했다. "좋아요." 모레까지면 필요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을 테지. 슬레이드 블랙웰의 음모에 대한 정보를. "고대하겠어." 슬레이드는 한 껏 매력을 발휘하여 웃고 서재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고 그의 오만한 모습이 사라지자, 리사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정말 가증스러운 인간이야!" "하지만, 그야말로 사나이란다." 미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내가 너만한 나이였더라면......." "그만두세요." 리사는 손을 들어 숙모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제는 슬레이드 블랙웰이란 이름조차 듣기 싫어요. 저를 화나게 하지 않으려면 내 앞에서 그 사람 이야기를 꺼내지 마세요." 미치는 크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변호사와 사랑하는 조카가 반목하고 있다는 것에 실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슬레이드의 본심을 안다면 지금보다 몇 배나 더 실망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니 가혹한 생각도 들었으나, 긴 안목으로 본다면 최선의 방책이므로 어쩔 도리가 없다. 이튿날 아침 리사는 일곱 시 반에 집을 나왔다. 밀드레드는 웬일인가 하고 놀랐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앤 엘드리지로 변신해야 하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집에서 일찍 나가야만 했다. 어느 레스토랑의 여성용 화장실로 들어간 리사는 빨강머리 가발을 쓰고 빨간 입술연지를 바른 뒤, 탄생석 반지를 결혼반지로 바꿔 끼었다. 그럴듯했다. 리사는 자신도 모르게 만족한 미소를 띠고 밖으로 나갔다. 들어올 때의 금발이 빨강머리로 변한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슬레이드가 사무실에 나왔을 때, 리사는 이미 딕터폰에 들어있는 구술된 편지를 타자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전화가 온 것을 적어 둔 메모가 두어 장 놓여 있었다. 그는 쌀쌀하게, "일찍 왔군." 하며 메모지를 들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금처럼 계속 그가 자기 방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제는 그도 리사 탈메지를 알고 있다. 앤 엘드리지와 비슷한 데가 있다고 눈치채면 곤란하다. 접수계 쪽에서 소리가 날 때마다 리사는 가슴을 죄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앤드류가 숙모의 파일을 돌려주려고 올 것이다 - 어떤 일이 있어도 꼭 보아야 할 그 파일을 가지고. 슬레이드도 언제까지나 속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 유리하다. 오전 근무시간이 반쯤 지났을 무렵, 드디어 앤드류가 나타났다. 전화를 받고 있던 리사는 인사 대신 방긋 웃어 보이고, 그가 손에 든 파일 을 보면서 눈을 빛냈다. 환하게 웃는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리사 자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동시에 앤드류가 웃는 낯으로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리사가 전화를 슬레이드에게 연결하고 있는 동안, 앤드류는 책상 끝에 걸터앉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결혼한 뒤에도 이렇듯 아름답다니, 당신은 죄가 많군." 리사가 전화 연결을 마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어서 파일을 받아 들고 싶었으나, 리사는 생긋 웃으며 그런 마음을 숨겼다. "그야 그럴 테지." 앤드류는 불만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낯을 찌푸렸다. "남편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순간 리사는 초조해졌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없이 아무렇게나 내뱉은 이름이었으므로 잊어버리는 것도 당연했다. "버드! 그렇지, 버드였어." 겨우 살았다. 앤드류가 기억해 낸 것이다. "버드의 행운이 부럽군." "감사합니다." 수렁에 빠지기 전에 화제를 바꾸어야지. "파일이 무사히 되돌아온 것 같군요." "네, 곱게 보고 반환하는 길입니다." 앤드류는 농담같이 말하고 책상에 파일을 놓았다. 어서 펼쳐보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다. 애써 참으려 해도 자꾸 손이 파일 쪽으로 나가려 했다. "점심 시간에 어때? 같이 식사하지 않겠소?" "오늘은 안 되겠어요. 다른 날로 정했으면 좋겠어요." 한가하게 점심이나 먹고 있을 수는 없다. 어서 파일을 살펴봐야 한다. "너무하지 않아요? 한 시간만이라도 좋으니 적적한 독신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겠소? 남을 돕는다는 마음으로라도 같이 식사해 주었으면 고맙겠는데." "미안합니다." 아무리 졸라도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 "일이 밀려 있고 편지 쓸 것도 많아요. 오늘은 내가 엘렌에게 샌드위치를 사다 달라고 할 참이에요." "좋아요." 뜻밖에도 앤드류는 깨끗이 단념했다. "그렇다면 내가 샌드위치를 사가지고 오겠소. 여기서 같이 점심을 먹도록 하지." "안돼요!" 리사는 딱 잘라 말하고 나서야 자신의 말이 좀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재빨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고맙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일을 못할 것 같아요. 틀림없이 이야기를 하게 될 테니까요. 모처럼 사무실에 남아 있어도 일을 하지 못한다면 소용없는 일 아니겠어요? 나중에 약속하기로 해요." "그 말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 같군. 나소나마 희망이 있으니까." 앤드류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리사가 방긋 웃었다. "그럼, 실례가 안된다면 일을 계속하게 해주세요." 앤드류가 일어서기가 바쁘게 리사의 손이 파일로 뻗치기 시작했다. "슬레이드 이상으로 일벌레로군. 그러나 아름다운 벌레지." 앤드류는 윙크를 하고 주먹을 꼭 쥐면서 나갔다. 그와 동시에 리사는 파일을 붙들고, 얼른 훑어볼 작정으로 펼쳤다. 처음으로 나온 것은.... .. 아아, 바로 이것이다! 위임장과 중요해 보 이는 서류 - . 이렇게 생각한 순간, 문의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리사가 파일을 닫는 것과 동시에 슬레이드가 나왔다. 리사의 수상한 태도를 눈치챘는지, 그의 검은 눈이 빛났다. "무슨 일이지, 앤?" 모양 좋은 입술에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아, 아닙니다. 다만...... 나오시는 줄 몰라서." 저도 모르게 허둥대며 파일을 꼭 쥐었다. 슬레이드의 시선이 파일의 두꺼운 표지에 와 멎었다. "그것은?" "네? 아아...... 이, 이것 말인가요?" 마치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어린아이 같았다. 정신을 차려야지! "탈메지의 파일입니다. 방금 래트레지씨가 가져왔기에 캐비닛에 갖다 두려던 참이었어요!" "그럴 필요는 없어." 슬레이드가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요. 나도 한두 가지는 조사할 것이 있으니까." 안돼요! 리사는 마음 속으로 외치고 굳어진 손으로 파일을 더욱 꼭 쥐었다. "지금 당장 말씀인가요?" "물론이지." 슬레이드는 쓸데없는 말을 묻는 군, 하는 투로 대답했다. 분명히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말았다. 리사는 할 수 없이 파일을 슬레이드에게 건네주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밖에 다른 일은요?" 애써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와 묻자, 슬레이드는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아무 일도 없어." 그는 손에 든 파일에 시선을 옮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또다시 실패...... 이번에도 입수할 직전까지 이르렀는데 파일을 슬레이드한테 빼앗기고 말았다. 그만 분하게도. 5장 퇴근시간이 가까와질 무렵, 리사는 완전히 지쳐 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파일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가! 점심시간에 슬레이드가 밖으로 나가자 그의 방에 몰래 숨어 들어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책상 서랍은 잠겨 있었고, 브리프케이스는 그가 가지고 나가 버렸다. 아마 파일은 이 둘 중의 한 군데에 들어있는 게 틀림없다. 이렇게 된 이상, 잔업을 하겠다고 하여 사무실에 남았다가 모두 돌아간 뒤에 파일을 찾아야지. 그런데 또다시 슬레이드 때문에 이런 계획도 허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내일 해도 상관없는 일들뿐이므로 잔업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피곤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듣게 되면 기뻐했을 것이지만, 오늘만은 사정이 약간 다르다. 리사는 실내복을 입으면서 의기소침해져서 한숨을 쉬었다. 초콜렛브라운의 실크에 상아빛 실로 자수를 놓은 실내복이었다. 거품이 이는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있었기 때문에 긴장은 풀렸으나, 녹색 눈은 여전히 아쉬운 빛을 띠고 있었다. 앤 엘드리지로서의 나날은 위험의 연속이다. 숙모는 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옷을 갈아입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일단 열었던 장롱을 다시 닫아 버리고 말았다. 실크의 실내복이 맨발인 발목을 매끄럽게 스쳐서 기분이 상쾌했다. 이대로 조용한 한때를 보낼 수 있다면 좋겠는데....... 하지만 이대로도 괜찮을 것이다. 미치 로서도 격식에 매인 식사는 좋아하지 않을테니 이런 옷차림 그대로 내려간다 해도 언짢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계단의 난간에 손을 대었을 때 무슨 소리...... 아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문득 내려다보니, 계단 바로 밑에 슬레이드 블랙웰이 서 있지 않은가! 거무스름한 피부, 야무진 입매, 사람을 사로잡아 버릴 듯한 매력...... 리사는 계단에 못박혀 서서, 느슨하게 걸치고 있던 실내복을 꼭 여몄다. 슬레이드의 눈이 노골적으로 리사의 온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실내복을 꼭 여몄기 때문에 몸의 선이 뚜렷이 드러났다는 것을 깨닫고 리사는 얼굴을 붉혔다. 어쩌면 속에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는 것까지 알아차렸을 지도 모른다. 비웃는 듯한, 그러면서도 마음에 뭔가 동요를 느낀 듯 한 슬레이드의 시선을 받고 온몸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얼른 실내복을 누르고 있던 손을 놓고 침착을 되찾으려 했다. "무엇하러 오셨죠?" 몹시 당황했기 때문에, 리사의 목소리는 날카로왔다. "리사한테 용무가 있어 온 게 아니야. 미치에게 용무가 있어서 왔지." 슬레이드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왜요?" "말했잖아. 리사에게 용무가 있어서 온 게 아니라고." 슬레이드는 여전히 리사의 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가슴이 설레었으나, 리사는 필사적으로 태연을 가장했다. 이런 차림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입장은 불리하다. 더 이상 약점을 보여서는 안 된다. "숙모님과 나와는 친척간이에요. 관계가 없을 수 없지 않겠어요?." "의뢰인가 변호사의 사무적인 일에 간여할 권리는 없어." 슬레이드가 싸늘하게 말했다. "비록 리사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해도." "숙모님은 어디 계시죠?" "안경을 어디다 두었나 하고 찾고 있지." 슬레이드는 리사의 시선을 포착하고 한참 동안 노려보고 있었다. "이리 와서 나를 상대해 주지 않겠나?" "나는 옷을......"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려다, 아차 하고 깨달았다. 평소에는 이렇게 머리가 둔하지 않은데 웬일일까. 그는 옷이 필요치 않은 행위의 상대라는 뜻으로 말했던 것이다. 껄껄거리며 조롱하듯 웃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분명하다. "어마, 징그러워라!" 슬레이드는 리사의 말을 그냥 흘려 버리고, 새삼스럽게 흥미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젯 저녁과는 어쩐지 느낌이 다른데.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탓일까." 리사의 몸이 굳어졌다. 이만한 거리에 있으면 눈빛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냉수를 끼얹힌 듯한 느낌이었다. "당신은 어젯저녁과 전혀 다르지 않군요! 나는 당신이 돌아간 뒤에 내려갈 테니, 숙모님에게 그렇게 전해 주세요." 리사는 몸을 돌려 얼른 침실로 돌아갔다. 몸이 후끈거렸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 구사일생이라고나 할까. 슬레이드가 구석방에서 나왔다. 리사는 타자기에 시선을 떨구고 타이핑하던 편지를 읽는 체했다. 그는 지나가다가 리사의 책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식사하러 나갔다 오겠어. 한 시 조금 지나 돌아올 거야." 어젯저녁의 아슬아슬했던 순간을 생각하자 도저히 그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 표정이나 몸짓 등에서 어딘가 비슷한 곳이 있다는 것을 그가 깨닫게 되면 큰일이다. 지금도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로서는 밑을 보면서 일하고 있는 체할 수밖에 없었다. "네, 알았습니다." 리사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몰래 슬레이드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예정표에 따르면, 그는 오늘 의뢰인 중의 한 사람과 식사를 같이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브리프케이스는 들고 나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의 방에 놓여 있을 것이다. 리사는 숨을 삼켰다. 접수계 쪽에서 슬레이드와 앤드류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리사가 서둘러 편지를 다 타이핑하고 나서 타자기에서 뽑았을 때 정문 입구에서 문소리가 났다. 슬레이드가 나간 것이다. 리사는 재빨리 카피를 떠 놓고, 오리지날과 다른 편지를 들고 슬레이드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에는 책상과 큰 회전의자가 있고, 값비싼 브리프케이스는 그 뒤의 바닥에 놓여 있었다. 리사는 편지를 책상에 놓고 허리를 구부려, 떨리는 손으로 브리프케이스를 열었다. 아무래도 도둑질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꺼림찍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진짜 도둑은 슬레이드인 것이다. 그렇더라도 들키면 곤란하므로,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숙모의 파일은 브리프케이스에 들어 있지 않았다. 리사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서 책상 위에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와 파일을 바라보았다. 이 속에 있을까? 소용없으리라 생각하면서 서류를 들추기 시작했을 때, 슬레이드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지, 미세스 엘드리지?" 리사는 얼어붙은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가!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는데 그의 검은 눈은 소름이 끼칠 만큼 매서웠다. "타이핑을 끝낸 편지를 가지고 왔어요. 사인을 부탁하려고." 겨우 억지 웃음을 띠고 대답했으나, 그것으로는 지금 행동의 설명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다른 서류를 뒤지고 있었으니까. 슬레이드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잠자코 리사가 무슨 말을 하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저어...... 책상에 어질러져 있기에 정리를 좀 하려고 했어요." "고맙군." 말과는 달리 그는 전혀 고마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책상이 어질러져 있는 편이 더 좋아. 그래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 것쯤은 잘 알고 있으니까." "죄송합니다." 뒷걸음치다가 발이 브리프케이스에 부딪혔다. 만일 몇 초만 일찍 슬레이드가 들어왔더라면 정말 난처할 뻔했다.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앞으로는 비서실 일만 해주면 돼." 목소리는 엄했으나, 리사의 설명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브리프케이스를 이리 주지 않겠나?" "네." 리사는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브리프케이스를 들고 책상을 돌아 가 슬레이드에게 건넸다. "점심시간이 가까웠군. 편지도 끝냈으니까 식사하러 나가도 좋아요." 그는 친절하게도 문을 열고 리사를 나가게 했다. "네, 감사합니다." 점심시간에 슬레이드의 방을 뒤져 볼 희망도 사라져 버렸다. 그는 리사와 같이 나갈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리사는 적당히 책상을 정리한 뒤 핸드백과 자켓을 들고 출입구로 향했다. 밖으로 나오자, 슬레이드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하고는 리사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리사는 사무실에 버티고 있었으나, 슬레이드는 더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리사가 서둘러 숙모의 집에 도착한 것은 여섯 시가 지나서였다. 다행히도 숙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밖에 나가 무엇을 했는지 숙모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슬레이드가 마중하러 올 때까지 겨우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옷을 벗고 초스피드로 목욕을 한 다음 화장을 고치고 장롱을 열었다. 입을 것이라고는 지난번의 블루 드레스 외에는 광택이 나는 옷감으로 만든 팬츠 슈트밖에 없었다. 빛깔은 크림빛이 도는 흰색으로서, 머리 빛깔과 잘 어울린다. 오늘 저녁은 팬츠 슈트를 입어야지. 약간의 허영심이 깃들여, 슬레이드 앞에서 한번이라도 입었던 옷은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었다. 일곱 시 10분이 지나 방을 나서자, 슬레이드가 층계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약간 숨이 찼다. 너무 서둘러 준비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이유? 아니, 그 밖의 이유가 있을 리 없어. "상관없어." 슬레이드는 리사의 팔을 잡고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차는 뜰에 세워 두었지." 현관문을 열면서 그는 자세히 리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물론 리사는 빈틈없이 선글라스를 쓰고 나왔으므로 눈빛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아직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군." "관광에 열을 올리다 보니 눈이 피로해서요." 미치에게 하려던 말이라 쉽게 나왔다. "리사는 무슨 일에나 열을 잘 올리는 모양이군." 그 말은 맞는 말이다. 미치의 일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이렇게 스파이 활동을 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저 약간 걱정이 되었을 뿐이었는데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결과가 되어 버렸으니...... 이번 일뿐만이 아니다. 무슨 일이건 시작하고 나면 중간에서 그만두지 못하고, 성공하건 실패하건 끝장을 보고야 만다. 황혼 무렵의 공기 속에는 영산홍의 향기가 넘치고, 밀려오는 저녁 어스름이 주위를 검게 물들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슬레이드의 링컨 차는 뜰에 있는 떡갈나무 그늘에 세워져 있었다. "나는 뒤에 타겠어요. 숙모님을 앞좌석에 태워 주세요." 리사가, 차 문을 열려고 하는 슬레이드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이야기도 주로 듣기만 하고 말을 삼가야지. "이미 늦었어." 슬레이드는 얼른 리사를 앞자리에 밀어넣고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감색 벨루어의 화려한 시트 위에서 리사는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숙모님, 저는......" 뒷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사이에 슬레이드가 운전석에 앉아 차 문을 닫았다. "숙모님은?" "오시지 않아." 키가 돌려지고 시동이 걸렸다. "뭐라구요?" 리사는 시치미를 떼고 있는 그의 옆얼굴을 노려보았다. "어째서죠?" "지금, 주인공이 대활약하는 장면을 쓰고 있는 모양이야. 그래서 여주인공을 구해 내는 장면을 묘사하지 않고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어." 슬레이드는 리사 쪽을 보지도 않고 기어를 넣었다. "당신이 이렇게 되게 꾸몄군요!" 리사가 발끈 화를 내며 대들 듯이 말했다. "리사는 미치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는 줄 알고 있나? 그렇다면 큰 오해야. 미치는 무슨 일이든 자기 페이스대로 해가고 있어. 그녀는 오늘 저녁은 절대로 타이프라이터 앞에서 떠나지 않을 태세였어." "그 말을 내가 믿을 줄 아세요?" "믿지 않아도 나는 별로 상관없어." 슬레이드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당신과 단둘이 갈 수는 없어요!" 그러나 차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와 다투느라고 깨닫지 못했으나, 벌써 미치의 집에서 두 블록은 와 있는 것 같았다. "제발 집으로 도로 데려다 주세요." " 안 돼." 리사는 도어 손잡이에 손을 대었으나 잠겨 있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로크를 풀어 주세요!" "안 돼." 리사는 크게 분개하여 팔걸이에 달려 있는 버튼을 더듬었다. 이중에서 어느 하나는 로크일 것이다. 처음 손에 닿는 버튼을 눌렀더니 시트가 움직였다. 다음에는 창이 열렸다. 그런 뒤에야 겨우 문에서 찰칵 소리가 났다. 이때다 하고 손을 내밀려는 순간 힘찬 손에 팔을 붙잡혔다. 팔을 빼려고 버둥거렸으나, 매끄러운 옷감 속에서 팔이 미끄러질 뿐 그의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내려 주세요!" "어쨌거나 차가 멈출 때까지 기다려. 목뼈가 부러지고 싶지 않으면." "그럼 차를 세우세요!" 슬레이드의 큰 손에서 힘이 전해져 왔다.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리사의 손목쯤은 쉽게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붙잡혀 있는 팔은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지금은 세울 수 없어. 뒤에서 차가 오고 있으니까. 세울 수 있는 데까지 갈 테니 기다려." 그는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게 말했다. 길은 배터리 거리에 이르러서야 겨우 넓어졌다. 슬레이드는 리사의 손목을 꼭 쥔 채로 보도 옆에 차를 세웠다. 그의 손이 느슨해지자, 리사는 도어를 열고 재빨리 내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엔진이 멎고 운전석의 문이 탕 하고 소리를 냈다. 리사는 어둠 속으로 도망치려고 화이트 포인트 가든으로 뛰어들어갔다. 나무 그늘에 숨으면 몸을 감출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러나 희고 광택이 나는 팬츠 슈트로는 무리였다. 슬레이드가 순식간에 달려와서 손목을 붙들었다. 리사가 홱 돌아섰다. "분명히 말했지 않아요? 나는 당신과 같이 있고 싶지 않아요. 비록 천국에 간다 해도 같이 가지는 않겠어요!" "말이 너무 지나치군, 리사. 드라마틱한 것도 좋지만 도가 지나치면 좋지 않아." "지나치건 어떻건, 당신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어요? 나는 숙모님을 위해 억지로 초대를 승낙한 거예요. 당신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숙모님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내게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강제로 나를 차에 싣고..... 그렇지 않다면 난 당신 따위 배신자와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거예요!" "아니지, 할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 "이야기? 내게 무슨 이야기가 있겠어요? 당신이 얼마나 나쁜 사람으로 보이는가 하는 이야긴가요?" 리사는 분노에 떨면서 손을 빼려고 했다. "리사에 비하면 그 빨강머리 비서는 그런대로 얌전한 편이군." 슬레이드는 나직한 소리로 말하고 웃었다. 한 순간 깜짝 놀랐던 리사는 한 템포를 늦추어 말했다. "그렇다면 그 여자하고 식사하지 그래요? 당신은 그녀가 유부녀라 해서 사양할 사람도 아니고, 일을 못한다고 말한 것도 진심에서 한 말이 아닌 것 같던데. 그것은 숙모님의 동정을 사기 위한 수단이었음이 분명해요." "여자에게 정신을 잃고 있다는 말인가? 잘 아는군." 슬레이드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그런 사람은 딱 질색이예요!" "그것은 유감이로군. 나는 그런 사람이기를 바라는데." 그는 더욱 가까이 다가와서 덮어 씌우듯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리사는 지난번의 거친 키스를 상기하고 한걸음 물러섰다. 슬레이드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리사의 어깨가 까칠한 나무 줄기에 부딪히고 말았다. 차차 호흡이 거칠어져 갔다. 무서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공원에는 산책하는 사람이 몇 있었다. 슬레이드도 이런 데서는 거친 행동을 하지 못하겠지. 그는 한 손으로 리사의 손목을 잡은 채 또 한 손으로 나무를 짚었다. 이렇게 그가 가까이 있으니 리사는 아무래도 마음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애프터 셰이브 로우션의 향기가 고통스럽게 코를 간질였다. 슬레이드는 몹시 여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의 검은 눈이 다정하게 리사의 입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다. 냉정을 잃어서는 안 되는데, 맥박까지도 정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 후 리사와 한 이야기에 대해 계속 생각해 봤어. 이야기라기보다 말다툼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슬레이드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아주 정다웠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리사의 소매 속으로 들이밀고 맥박이 불규칙하게 뛰는 손목을 더듬었다. "생각해 본 결과는 어떻게 됐죠?" 리사는 숨이 찬 것을 애써 참으면서 물어 보았다. "선전포고는 서로를 위해 좋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어." 슬레이드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매력에는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었다. 리사는 그의 등뒤에 보이는 대포에 시선을 옮겼다. 남북전쟁의 추억을 간직한 대포로서, 그 포구는 멀리 섬터 요새를 향하고 있었다. 그 요새가 남북전쟁의 시발지인 것이다. "그래서요?" 그녀도 이제는 한결 침착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협정을 맺는 것일 어떨까?" "어떤 협정이죠?" 리사가 예리한 눈으로 슬레이드를 노려보았다. 선글라스로 인해 눈빛은 알 수 없겠지만, 눈초리는 그대로 상대에게 전해질 것이다. "손을 잡고 목적을 달성하자는 협정이지." "당치도 않아요." "어째서? 이대로 서로 갈라지면 두 사람 모두 실패할 텐데." 슬레이드는 아직도, 리사가 숙모의 재산을 노리고 있는 줄 알고 있다. 자기가 돈을 노리고 있으니, 남도 그러는 줄 아는 것이다.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경우에 따라서는 그의 음모를 파헤칠 증거를 잡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슬레이드는 리사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대답을 재촉했다. "어때, 내 말이 맞지?" "그래요." 리사는 일단 수긍하고 들어갔다. 최소한, 생각해 볼 만한 가치는 있다. "이 손을 놓아주세요. 잠시 걷고 싶어요." 정직하게 말해서 그녀는 슬레이드에게서 떨어져 좀 더 맑은 정신으로 생각해 보고 싶었다. 슬레이드는 가만히 손을 놓아주고, 나 무에 기대어 있던 리사가 몸을 일으키자 어깨를 나란 히 하고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별로 그와 떨어져 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손을 그녀의 등에 대었던 것이다. 엷은 옷감을 통해 그 손의 감촉이 민감하게 느껴지고 짜릿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무래도, 지금 나란히 걷고 있는 이 사람을 지나치게 남성으로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의 정체를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아무리 키가 크고 남자다운 매력을 지녔다 해도 악인은 틀림없는 악인이다. 그 가장 명확한 증거로, 그는 지금 리사와 손을 잡고 미치의 돈을 횡령하자고 제의해 온 것이 아닌가. 숙모에게 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여기서 그의 유혹에 넘어가는 체 하는 것이다. 눈앞에 희미한 불빛을 받은 강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화이트 포인트 가든은 반도의 첨단에 위치해 있다. 리사는 반짝이는 수면을 바라보면서 차차 발걸음을 늦추었다. 강물은 불빛을 받은 수정처럼 반짝였고, 전혀 흐르는 것 같이 보이지 않았다. 저 잔잔한 수면 속에도 소용돌이가 있는 것일까? 슬레이드도 이 강물과 같은 것이다. 겉으로 보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아쉴레 강이지. 여기서 아쉴레와 쿠퍼라는 두 강이 손을 잡고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있어. 대서양으로." 슬레이드는 장난스런 어조로, 올드 찰스턴의 관광 안내를 하듯 말했다. "나는 지리 공부 따위엔 흥미 없어요." 리사는 신경질적으로 슬레이드를 돌아보며 약간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을 믿을 수 있다는 보증이 어디 있죠?" "리사를 신용할 수 있다는 보증은?" 슬레이드가 반문했다. "그렇다면 말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겠군요?" "해결책은 서로 신용하는 길밖에 없지." "도둑끼리 신용할 수 있나요? 구두로만 약속하자는 것이죠? 말로만 하는 약속이 어떤 것인지 당신은 모르세요?" "리사는 알고 있나?" "나는 변호사가 아니니까 말할 필요가 없지만요. 숙모님의 이익을 지킨다면서 법률을 들고 나오는 사람과는 달라요." "암, 그렇지. 리사는 미치의 이혼한 남편의 조카에 지나지 않아. 나하고 어느 쪽이 더 부도덕한지 비교해 볼까?" 슬레이드가 비웃었다. 리사는 화가 나서 눈을 감았다. "도대체 당신은 무례하기 짝이 없군요. 지난번에도 심한 일을 하지 않았어요? 내가 잊어버린 줄 알겠지만, 천만의 말씀이에요!" 말을 하고 있으려니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 "절대로 잊지 않아요!" "먼저 실례되는 행동을 한 것은 리사 쪽이야." "당신한테 대들었다는 말인가요?" "리사의 어머니는 남을 칭찬하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 모양이군? 남하고 원만히 지낼 수 있는 비결은 비록 공치살지라도 칭찬하는 일이지. 리사가 무례한 말을 해도 내가 깨닫지 못할 줄 알았나? 그토록 심한 말을 들으면,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가만히 있지 않을거야." "그런 것은 구실이 되지 않아요." 리사가 가시 돋친 말을 했다. 아마 슬레이드는 묘하게 미끼를 던져서 유인할 생각인 모양이다. 리사는 어리석게도 그 미끼에 덤벼들고 말았다. 리사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위험하기 짝이 없다. 여기서 화를 낸다면 그의 뜻대로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 구실은 되지 않지. 하지만......" 슬레이드는 일부러 사이를 두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키스가 아니잖아?" "뻔뻔스럽게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리사는 저도 모르게 발끈하여 말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홧김에 한 키스였지." 리사가 심한 말을 퍼부어도 그는 여전히 태연했다. "점잖은 말씀이시군요!" "화가 난 원인은 리사에게 있었어. 더 점잖게 말한다면......" 슬레이드는 리사의 말을 되받았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어째서 갑자기 손바닥을 뒤집은 듯이 말하는 거죠?" "미치 앞에서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악담을 했으니까, 그녀는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불신감을 갖게 돼. 그렇다면 서로에게 불리하지 않겠나?" "그러면 제 3자에게 숙모님의 돈이 빠져나가겠군요?" 어쩌면 슬레이드가 하려던 말일지도 모르는 말을 리사가 먼저 해버렸다. "우리가 협정을 맺지 않으면 그렇게 될 테지." "알겠어요. 그 협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세요." 리사는 마음속으로 결심하고 심호흡을 했다. "식사가 끝나거든 말해주지." 슬레이드는 빙긋이 웃고 리사의 등에 댄 손에 힘을 주어 차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식사는 일곱 시 반으로 예약했어. 조금 늦기는 했으나 자리는 비어 있을 거야. 잠시 휴전하기로 하지." "휴전?" 리사가 웃으며 말했다. "진심인가요?" "물론 백 퍼센트 진심이지." 두 사람은 큰 목련나무 밑을 지나갔다. "나를 믿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겠지?" "시간이 걸려도 믿을 수 있게 될지는 의문이예요." "좋은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 같군." "어째서요?" "지금 리사가 의문이란 말을 했기 때문이지. 전 같았으면, 절대로 믿지 않을 것이라고 했을 테니까." 슬레이드의 눈이 만족스럽게 빛났다. "그것은 단순히 언어상의 문제일 뿐이예요." 리사는 가볍게 흘려 버렸다. "그런 것을 추구하는 것이 내 일이지." "당신은 너무 자기한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요?"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 의외로 강하게 울렸다. 슬레이드는 리사를 흘끗 바라보고 차의 문을 열었다. 아무 말 없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6장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든다 - 감상을 묻는다면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레스토랑은 매우 호화로왔으며, 품위 있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 두 가지를 다 겸비한 음식점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요리도 맛이 있어 흠잡을 데가 없었다. 와인탓으로 머리가 약간 몽롱해져 있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저도 모르게, 와인 글라스에 자주 손이 나갔다. 어디선지 모르게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와 달콤하고 로맨틱한 무드를 풍기고 있다. 테이블은 자그마해서, 과연 연인들의 좌석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슬레이드가 맞은 쪽에 앉자, 리사는 주저없이 선글라스너머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숱많은 머리는 평소보다 더욱 윤이나고, 검은 눈은 불길을 속에 감춘 듯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있었다. 햇볕에 탄 그의 얼굴은 돌로 조각한 듯 윤곽이 뚜렷하여 사나이답고 강건해 보였다. 아니, 역시 돌 조각과는 다르다. 돌에서는 이처럼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그러한 슬레이드의 생명력과 매력은 리사에게 마술을 걸 듯 작용해 왔다. 이토록 강렬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남성을 만난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신비적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데, 상대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들어 버린다. 사실은 그것이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위험과 맞닥뜨리는 스릴을 즐기고 싶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머릿속이 몇 갈래로 갈라져서 제각기 작용하고 있다. 어느 부분은 슬레이드의 어디가 다른 남자와 다른지 분석하고 있다. 또 어느 부분은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늘어놓고 어떤 대답을 해야 좋을지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부분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슬레이드의 나직한 목소리가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부드러우면서도 풍부하고 벨베트같다. 그 독특한 웃음소리도 마음에 든다. 그가 무슨 재미있는 말을 했기 때문에 리사가 웃었다. "왜 그러지?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웃음이 마음에 드는군." 슬레이드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리사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당신도 지금처럼 웃는 것이 마음에 들어요." 목소리가 묘하게 떨렸다. 하지만 신경을 쓰지 말아야지. "이제 서로가 경애의 정을 나타내기에 이른 것일까?" 슬레이드가 농담 비슷하게 말했다. "숙모님이 깜짝 놀라지 않을까요?" "그렇지도 않을 거야. 미치는 해피엔딩을 좋아하니까. 로맨틱한 사연이 있어서 사이가 좋아진 줄 알겠지." 순간 초조한 듯한 묘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밀드레드한테서 들었는데, 리사는 내가 가기 직전에 집에 돌아왔다면서? 친구들하고 시내 구경이라도 했나?" 그가 교묘하게 화제를 바꾸었다. 어째설까? 리사는 생각에 잠겼다. 그는 내 속마음을 알 리가 없다. 내가 자기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사실은, 그에게 안기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 어쨌든 함부로 대답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적당히 도망칠 구멍을 찾아야지. "페그나 수잔과 같이 지낸 것은 반나절뿐이에요. 오전에는 혼자 상점 구경을 하다가 오후에야 셋이서 만났어요." "어디 갔었지?" 뭐라고 대답할까. 그렇다. 저번에 본 팜플렛에 나와있는 장소...... "브룩클린 가든에 갔었어요. 조각들이 멋지더군요. 공교롭게도 돌아올 때 러시아워에 걸려서..... 그래서 늦어지고 말았어요." "거기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조각가의 작품이 몇 점 있지. 어떤 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지?" 테스트할 작정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어떤 것이 특별히 더 좋다고는 할 수 없더군요. 훌륭한 작품들뿐이어서 말이에요." "하기는 그렇지. 그 공원은 아름다운 곳이지. 특히 떡갈나무 가로수가 일품이고." "네, 정말 그래요." 리사가 방긋 웃었다. "이제 나가기로 할까? 문 닫을 시간이 가까와졌어." "네?" 주위를 둘러보고 놀랐다. 자기네 외에 겨우 두 쌍의 손님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네, 그래요." 핸드백에 손을 내밀자, 얼른 슬레이드가 뒤로 돌아와 의자를 당겨 주었다. 리사는 일어서면서 인사를 했다. "저녁, 아주 맛있었어요. 고마와요." "고마운 쪽은 오히려 나야. 정말 즐거웠어." 말과는 달리 슬레이드의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무뚝뚝했다. 자동차는 한 블 럭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워 두었었다. 슬레이드는 리사에게 잠시 레스토랑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면서 혼자 차를 가지러 갔다. 훤칠한 키의 그의 뒷모습이 차차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밤바람이 피부에 닿아 한기를 느끼게 했다. 레스토랑 정면에는 모닥불이 밝혀져 있어서, 그 불빛이 벽돌 벽과 아치형 창을 비추고 있었다. 불 곁으로 갔을 때, 스마트한 링컨이 길 옆에 와서 멎었다. 슬레이드한테서는 이미, 조금 전에 느꼈던 서먹서먹한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아까는 갑자기 그가 멀리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었는데, 그것은 내가 착각한 것이었을까?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 주는 그에게는 조금도 가운 면이 없었다. 그렇기는커녕, 운전석에 앉아 리사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은 무척이나 정다웠다. "곧바로 돌아가겠나? 아니면 밤의 올드 찰스턴을 잠시 드라이브할까?" 이미 밤도 늦었고, 내일 아침에는 또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곧장 돌아가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입에서는 전혀 반대의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드라이브하고 싶어요." 내가 지금 제정신일까? 리사는 자기 태도가 이상스럽게 여겨져 시트에 기대며 가만히 웃었다. 슬레이드를 증오하고 있는데도 자기는 그의 위험한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지금이 가장 경계해야 할 때다. 그런데도 기꺼이 드라이브하겠다고 대답해 버리다니...... "무엇이 우습지?" 슬레이드는 차의 스피드를 늦추며 커브를 돌아 자갈이 깔린 길로 들어 섰다. "맛있는 와인 때문에 마음이 들떠서 그래요." 느닷없는 물음에 순간적으로 흠칫했으나, 리사는 얼른 이렇게 대답했다. "알고 있어. 리사가 와인을 마시니 상대하기가 쉽게 되는군." "당신도 그래요." 리사는 지지 않고 이렇게 말하면서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차는 바닷가를 달리고 있었다. 부두 저편에 지붕이 맛닿은 낡은 집들이 보였다. "어마, 재미있군요!" 리사가 밝은 빛깔로 칠해진 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부 제각기 다른 빛깔로 칠해져 있군요." 슬레이드가 의아스런 얼굴로 돌아보았다. "저것이 레인보 로지. 이 고장의 명물의 하나거든. 그런데, 며칠이나 올드 찰스턴에 있으면서 아직 보지 못했나?" 리사는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아직 올드 찰스턴을 보지 못했어요. 언제나 다른 코스로만 다녀서...... 섬터 요새라든지 사관학교 따위......" "거리의 상점이라든지?" "네, 올드 찰스턴은 숙모님과 같이 돌아볼 생각에서 말이에요. 숙모님은 이 고장에 익숙하고, 소설의 무대로도 올드 찰스턴이 자주 등장하지 않아요? 그래서 틀림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그렇고, 레인보 로지의 유래를 들려주세요." 리사는 얼른 대화의 방향을 바꿨다. 그가 더 이상 무엇을 하며 지냈느냐고 물으면 곤란하다. "제일 처음 집이 들어선 것은 1740년대였지. 모 두 개인 주택이야. 이 부근은 무역항으로서 당시는 매우 번창했으니까. 빛깔이 다른 것은 트레이드마크 비슷한 것으로서, 각각의 집을 구별하기 위해서였지." 차가 갖가지 빛깔의 집들 앞을 지나 커브를 돌았다. 순간 먼 과거로 되돌아간 듯한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집들은 어둠에 감싸이고,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현실의 세계가 함몰된 듯한 느낌이었다. 다시 한 번 커브 진 곳에서 슬레이드가 왼쪽에 있는 집을 가리켰다. "헤이워드의 집이지. 조지 워싱턴이 묵은 일이 있다고 알려진 집이야. 토머스 헤이워드 주니어는 미국 독립선언서에 사인한 사람의 하나고." 그러고 나서 그는 주위 일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낯이 익은 것 같지 않나?" "글쎄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희미하게 생각나는 것 같기도 했으나 분명치 않았다. 특히 지금은 어두웠기 때문에 더욱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낮에 보면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 "잘 모르겠어요." "뮤지컬 <포기와 베스>에 나오는 곳이지. 이 주위를 캐비지 거리라 부르는데, 그곳이 무대가 되어 있지. 캐비지 거리라 부르는 것은 옛날 이 거리 주변이 야채 시장이 있었기 때문이야." 차는 다시 몇 군데 유서 있는 장소를 지났다. 낮에 다시 한번 와서 보아야지. 구경할 곳이 하도 많아서 도저히 하루에 다 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처음 온 것이 밤이어서 다행이었다. 어두컴컴한 가운데서 보는 옛 거리는 더욱 매력적이고, 과거의 영화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다시 커브를 돌자 낯익은 거리가 나타났다. 슬레이드의 사무실로 왕복하던 길이었다. 숙모의 집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 거리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흰 벽의 호화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쇠격자 문과 큰 떡갈나무의 보호를 받으면서. "나는 저 집이 올드 찰스턴에서 제일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어느 집 말이지?" "저것 말이에요." 리사가 손으로 가리켰다. "지금 지나는 집." "가까이에서 보고 싶나?" 웃는다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용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네, 보고 싶군요." 길가에 차를 세우리라 생각했는데, 슬레이드는 문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왜 이러죠?"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어요. 다만, 매일 아침 이 앞을 지나다 보니까......" "이 앞으로 지나간다고?" 슬레이드의 조용한 목소리가 리사의 말을 중단시켰다. 실수했구나! 와인을 지나치게 마셨기 때문에 그만 마음을 놓고 말았으나, 지금도 슬레이드가 적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정신 차려야지! "그래요." 몇번째 거짓말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으나, 계속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스잔과 페그를 만나러 갈 때는 언제나 이 앞에까지 걸어와요. 저쪽 모퉁이에서 택시를 타거든요." 슬레이드의 얼굴에 그림자가 져 서 분명히는 알 수 없지만, 의아하다는 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린 것만은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하얀 집의 현관 앞에 차를 세웠기 때문에 리사는 불안해졌다. "이런 데 차를 세워도 괜찮아요?" "나는 이 집 주인과 무척 친하지. 리사에게 집안을 보여 준다고 해도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을거야." "아무도 없나요?" 창문은 모두 캄캄했다. 그러나 슬레이드는 차에서 내려 리사 쪽으로 돌아왔다. "응, 모두 집을 비웠어. 그래서 열쇠는 내가 맡고 있지." 그는 차의 문을 열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리사의 손을 잡아 주었다. "당신의 의뢰인인가요?" "말하지만 그런 셈이지. 가끔 법적 절차나 그 밖의 일을 해주니까. 어쨌거나 잘 아는 사이야." 슬레이드는 리사의 팔을 잡고 계단을 셋쯤 올라가 문 앞에 섰다. 이어서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는 전기 스위치를 켰다. 그러면서 옆으로 비켜서서 리사를 들어가게 했다. "가을까지 집을 비우게 되어 가구에는 모두 커버를 해두었지. 그러나 내부 구조는 볼 수 있으니까." 떡갈나무 마루는 반들반들하게 닦여져 있고, 천장과 벽 사이에는 장식이 달린 가로대가 있었다. 벽에는 많은 그림이 걸려 있고, 천장에는 델리키트한 샹들리에가 빛나고 있다. 리사는 흡사 침입자와 같은 기분으로 쭈뼛쭈뼛 벽으로 다가가 그림을 바라보았다. 처음 눈에 뜨인 초상화 속의 남자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하고 있었다. 리사는 그 얼굴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바로 뒤에 서 있는 슬레이드를 돌아보았다. "이 집 주인은 당신 친척이군요?" "우리 부모지." 슬레이드가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죠? 이렇게 훌륭한 집을......" 그 다음은 말하지 말아야지. 이만큼 훌륭한 집을 부모가 가지고 있다면, 미망인을 상대로 못된 짓을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말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말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와인이 마음을 너그럽게 해준 모양이었다. 심한 말을 하거나 그와 말다툼을 할 생각은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남의 집에 불법 침입한 줄 알았나?" 슬레이드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그런 것은 아니에요.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둬요." 리사가 얼굴을 돌렸다. "안을 보여주세요." 가구에 흰 커버가 씌워져 있는데도 방안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일층의 방들을 대충 둘러보고 이층으로 이어진 층계로...... 두 사람의 발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그런데도 전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부모님은 별로 이 집에서 오래 사시지 않은 모양이죠?" "시골에 농장을 산 이후로는 거의 여기서 살지 않지. 늦가을부터 겨울에 걸쳐서 여기 머무르시지." "당신이 변호사 일을 맡으면서 곧 농장으로 가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이야." 슬레이드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숙모에게서 들었어요." 또다시 거짓말! 그러나 위태로운 지경에서는 겨우 벗어났다. "당신, 여기서 살았나요?" "응, 어려서부터 줄곧." 슬레이드는 리사의 등에 팔을 돌리고 함께 걷기 시작했다. "이 집에서 계속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리사가 흥미있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훌륭한 집을 비워두다니 아깝지 않아요?" "남자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어." "그렇군요. 혼자 살 집은 아니에요." 많은 침실이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의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이 생각되었다. "지금 어디서 사세요?" "뒤쪽 셋집에서 살고 있지.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무렵, 전의 사용인용 가옥을 개조해서 남에게 빌려주게끔 한 것이지. 최근 이 부근에서는, 옛날의 사용인 집을 고쳐서 아파트나 셋집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지. 사용하지 않는 집을 그대로 비워 두는 것도 낭비의 일종이고, 고쳐서 세를 놓으면 돈이 들어오니까." "그런데, 당신의 방은 보여주지 않겠죠? 독신 남자들은 모두 수상한 것들을 수집하기 때문에 여성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던데요." 슬레이드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내 방을 보고 싶은가?" "아니, 괜찮아요." 리사는 하마터면 계단을 헛디딜 뻔했다. "그것이 남자들의 정석인걸요." "그런 말이 있기는 하지.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그런 빤한 수법은 쓰지 않을 거야." "다행이군요. 자아, 이제 그만 돌아가기로 해 요. 꽤 늦었고, 숙모님이 걱정하시면 안 되니까 요." 정직하게 말한다면, 더 이상 그의 사생활에 깊숙이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뜻밖에도 슬레이드에게 너무 접근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친해지는 것은 금물이다. 그에게 접근하는 것은 단지 정보를 얻기 위해서 만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틈에 개인적인 이야기에 열중하다니...... 슬레이드와 같이 있으면 그만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나에 비하면 리사는 편한 신세지." 두 사람은 현관으로 나와 입구로 향했다. "실컷 늦잠을 잘 수 있으니까. 나는 일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하거든." "나도 역시......" 하고 말하다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물론 일 때문은 아니지만, 아침 일찍 페그랑 스잔을 만나야 하거든요." "내일도? 미치를 만나러 왔다면서 외출만 하는군." "하지만 숙모님은 작품에만 열정하고 있는 걸요. 작품이 끝날 때까지 매일 집에서 따분하게 뒹굴고 있을 수만도 없잖아요? 이왕이면 즐거운 추억을 남기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너무 변명이 길어진 듯했으나 도리가 없었다. "모처럼의 휴가니까요. 하지만, 주말엔 줄곧 숙모님과 같이 지낼 생각이에요." "그래서 귀엽고 충실한 조카 노릇을 하겠다는 말이군." 당치도 않은 소리! 리사는 매섭게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도중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당신이 충실한 변호사 노릇을 하는 체하는 것과 같아요." 불이 모두 꺼지고, 저택은 다시 어둠에 파묻혔다. 리사는 슬레이드가 문을 잠그기를 기다렸 다가 층계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손이 리사의 팔을 붙잡았다. "휴전이 끝났나? 다시 전투를 시작해야 하다니 유감이군." 말할 나위도 없이 동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이 먼저 공격했기 때문이에요." "리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반격으로 나오지 않았나?" "다시 한쪽 뺨을 내밀지 그랬어요?" "점잖게 물러서는 것이 그렇게도 참을 수 없는 일인가?" 어두웠기 때문에 슬레이드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유감이라 한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었을까? "대답을 원한다면, 그렇다고 밖에 할 수 없군요. 참을 수가 없어요." 리사가 가시 돋친 말로 대답했다. "한편이 되려면 언제까지 맞서고만 있으면 안 돼." "누가 한 편이 된다고 했어요? 나도 당신의 협력같은 것은 필요치 않아요." "아니야, 필요해. 리사는 다만 그것을 인정하기가 싫을 뿐이겠지." 슬레이드가 자신있다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야말로 내 협력이 필요하겠죠?" 리사는 완강하게 버텼으나, 끝내는 자기 쪽에서 꺾일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자기 편이 되었다고 믿게 된다면, 미치의 돈을 어떻게 횡령하고 있는지 밝힐지도 몰라. "분명히 상대방의 협력이 필요한 사람은 당신일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시인하고 싶지 않겠죠?" "나는 이미 시인했지 않아? 손을 잡자고 했으니까. 리사는 어떤가? 파트너가 되겠나?" "조금 생각해 봐야 하겠어요." 어째서 이런 대답을 한 것일까? 그를 초조하게 만들고 싶어설까? "무얼 생각한다는 거지, 새삼스럽게? 리사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지 않았나?" 슬레이드의 어조는, 쓸데없는 저항을 그만두라는 듯하였다. "글쎄요." 리사는 어스름 속에서 눈을 빛내며 고개를 똑바로 쳐들었다. "대답을 해야 한다면, 노우예요. 놀랐나요?" 슬레이드는 입을 한일자로 다물고, 상대를 위압하듯 몸을 쭉 폈다. "그것은 정직한 대답같지가 않군. 노우라면, 리사는 오늘 저녁 나하고 같이 여기 있지 않았을 거야. 화이트 포인트 가든에서 나를 따돌렸을 거야. 하지만 리사는 나하고 식사를 같이 했어. 그렇다면 대답은 분명히 예스야." 리사는 시선을 돌리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무척 자신있는 말투로군요." 슬레이드가 리사의 턱에 손을 대고 자기 쪽으로 향하게 했다. "리사의 생각을 훤히 알기 때문이지." 이 무슴 잘난 체하는 말인가! 그러나 그녀를 더욱 흥분시킨 것은 그의 손이었다. 손이 닿는 순간 등골에 전기가 통한 듯 오싹했던 것이다. 목이 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술을 마신 것이 잘못이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몸이 흡사 작은 보우트를 타고 물위에서 흔들리듯이 지면이 물결치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 우뚝 서 있는 슬레이드의 몸이 무척 믿음직스럽게 여겨져 저도 모르게 의지하고 싶어졌다. 그가 부축해 준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 을 것인가! 안 된다! 그런 상상을 하다니, 머리가 정상이 아니군. 슬레이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리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검은 눈이 리사의 얼굴을 낱낱이 훑어보다가 마침내 유혹하듯 입술 위에 와서 멈추었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저항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도중에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분명히 키스를 하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몸이 확 달아올랐다. 동시에 자기가 그의 키스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마음이 사랑과 증오사이에서 휘청거렸다. 결국 리사는 약간의 저항도 나타내지 않았다. 슬레이드의 얼굴이 다시 다가와,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리사는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가만히 애무하듯 하는 조용한 키스. 그의 입술이 가볍게 리사의 입술 위를 미끄러지더니 떨어졌다. 좀 더 키스를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리사가 눈을 드니, 그는 의아하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그래요?" 리사가 허둥지둥 중얼거렸다. "아니." 리사의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슬레이드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당신에겐 호의를 가질 수 없어요." "알고 있어." 슬레이드는 리사의 턱에 대고 있던 손을 떼고 손가락을 리사의 머리카락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얼굴을 젖히게 하여 입술을 겹쳤다. 리사의 입술은 저절로 열리고, 몸은 환희의 폭풍에 휩쓸린 듯 기쁨으로 떨렸다. 슬레이드의 키스에는 이미 주저함이 없었고, 리사도 뜨겁게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갑자기 슬레이드가 입술을 떼고 미간을 찌푸리며 리사를 내려다보았다. 분노를 억제한 엄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리사는 얼굴을 돌리고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의 키스에 뜨겁게 응했다는 것을 생각하니 얼굴을 똑바로 들 수가 없었다. "이제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 슬레이드가 싸늘하게 말했다. "네." 더 이상 슬레이드의 품 속에 있으면 안 된다. 위험함 시도는 진작 그만두었어야 했다. 이 행위를 시도라 부를 수가 있다면 말이지만. 슬레이드는 리사의 팔을 부축하여 층계를 내려와 차 있는 데로 갔다. 그리고 차 문을 열어 리사를 앉힌 뒤, 이어서 운전석으로...... 그는 여전히 굳어진 표정이었다. 차의 방향을 돌려 한길로 나오면서도 여전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미치의 집까지는 불과 몇 분 거리였다. 그러나 답답한 침묵 속에서 지내는 몇 분은 무척 길게 느껴졌다. 차가 숙모 집 앞에 멎었다. 리사는 슬레이드가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얼른 차에서 내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이 인사는 문을 닫는 소리에 지워져 거의 들리지 않았다. 슬레이드는 따라오지 않았으나, 리사는 무언가 겁을 먹은 듯 빠른 걸음으로 현관을 향해 걸었다. 지금으로서는, 가장 무서운 상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문 앞에 이르러서 돌아보니, 슬레이드는 아직도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여전히 이맛살을 찌푸린 채 어 두운 표정을 짓고. 이튿날, 앤 엘드리지로서 슬레이드를 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앞에서는 애써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려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슬레이드는 바쁜 일에 쫓겨, 비서의 어색한 태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평소 같았으면 금방 알아차렸을 텐데. 오늘 중으로 부쳐야 하는 편지가 있다고 하여, 리사는 얼른 타이프를 쳐서 그의 방으로 가져갔다. 리사는 읽어보지도 않고 사인해 버리는 그의 사나이다운 옆얼굴과 굳게 다문 입을 훔쳐보았다. 지금은 엄하게만 느껴지는 그의 입술이 어젯밤에는 믿을 수 없을만큼 달콤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리사는 그의 입술을 감촉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반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그의 달콤한 키스를. 더구나 그냥 넘겨 버릴 수 없는 것은 자신이 그 키스에 응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결코 불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차라리 불쾌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를 증오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의 매력에 끌려 버리게 되면 목적 달성에 지장이 생긴다. 문득 슬레이드가 눈을 들어 리사의 시선을 받자 의아하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리사는 당황하여 시선을 피하고, 얼굴을 붉히면서 마음의 동요를 숨기려 했다. "왜 그러지, 앤?"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할 말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이야기해 봐요." "아닙니다...... 할 말이 뭐 있겠어요?" "바로 그것을 묻고 있는 거야." "아무 것도 없어요." 슬레이드가 사인을 끝냈기 때문에, 리사는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기 시작했다. "급료 이야기라면......" "그 염려는 마세요. 제 급료는 소개소에서 받고 있으니까요. 선생님한테는 소개소에서 청구서가 올 것입니다." 리사는 얼른 거짓말을 했다. 스파이를 하러 와서 슬레이드로부터 봉급까지 받을 수는 없었다. "다른 용무는 없으신가요?" "밀리엄 탈메지 씨한테 전화를 부탁해요." 명령조인 그의지시에 리사는 파랗게 질렸다. "그녀의 조카가 몇 시쯤에 돌아오는지 알고 싶어." "조카...... 말인가요?" 리사가 작은 소리로 되물었다. 점점 더 창백해지는 것을 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한 줄 아는데."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저어....... 왜냐고 물으면...... 무어라 대답할까요?"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말라고 전해줘." 슬레이드는 냉담하게 대답했으나 곧 부드러운 음성으로 덧붙였다. "아니, 탈메지씨에게 오늘 저녁 리사를 만나러...... 그리고 탈메지씨도...... 만나러 간다고 전해 줘." "네, 알겠습니다." 리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슬레이드가 찾아온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슬레이드는 갈색 상의의 소매를 걷어올리고 흘끗 손목시계에 시선을 떨구었다. "혹시 탈메지씨의 조카가 있으면 내가 전화를 받겠어. 앤드류의 방에 가 있을 테니 그리로 연결해 줘요. 없으면 그녀가 돌아올 시간만 물어봐 줘요." "네." 하고 대답했을 때는 이미 슬레이드는 등을 돌리고 걷기 시작하고 있었다. 슬레이드의 모습이 문 저쪽으로 사라지자 리사는 재빨리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리사 탈메지로 둔갑하여 앤드류의 방에 있는 슬레이드와 이야기해 볼까, 집에 있는 채 하고.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위험한 짓이다. 슬레이드가 미치에게 그 말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미치는 정직하게 리사는, 오늘도 집에 없었다고 말할 것이다. 결국 그녀는 숙모 집에 전화를 걸어 밀드레드에게, 오늘 저녁 슬레이드가 방문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바꾸어 전했다. 이어서 이번에는 슬레이드에게 상대방의 대답 - 조카는 저녁 여섯 시쯤에 돌아올 것이라고 보고했다. 오늘 저녁 슬레이드를 만나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았는데도 시간은 그리 빨리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목적으로 찾아오려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니 더욱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고는 불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걱정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욕이 없었다. 미안한 생각은 들었지만, 밀드레드가 만들어 준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 밖에서 소리가 날 때마다 슬레이드가 오는 것이 아닌가 하여 깜짝 놀라곤 했다. "슬레이드에게 집에 와서 저녁을 먹으라고 밀드레드가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미치는 한숨을 쉬며 커피를 따라 리사에게 컵을 건네주었다. "음식은 충분한데 너는 전혀 먹지를 않 고."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접시에 컵이 부딪쳐 달그락 하는 소리가 났다. 손이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리사는 얼른 접시와 컵을 테이블에 놓고 무릎 위에서 손을 모아 쥐었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사실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그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었으나, 눈앞에 있는 작은 케이크만 보아도 구역이 나려고 했다. "어젯저녁 이야기를 아직 듣지 못했구나. 슬레이드 하고의 외출은 재미있었니?" 미치는 의자 등에 천천히 기대며 검은 눈을 빛냈다. "그저 그랬어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그 화제를 피하려 했으나, 미치는 그런 대답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왠지 시원한 대답이 아니로구나, 리사. 그렇게 시시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리사,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지 않겠니?" "무슨 뜻이죠? 우리는 그저 식사를 하고 잠시 드라이브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에요. 그러고 나서 슬레이드가 바래다주었어요." "뺨을 때리거나 하지는 않았니? 말다툼은? 조용히 있다가 왔다는 말이지?" 미치가 웃으며 물었다. "사소한 말다툼은 했어요. 그것이 알고 싶으세요?" "아니, 별로. 하지만, 다투기만 하지는 않았겠지?" 리사는 손끝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머리가 띵했다. "물론이에요." "사실대로 말하면, 네가 안 갈 줄 알았어. 슬레이드와 단둘이서는." "하지만 좋은 일도 언짢은 일도 없었어요. 강제로 차에 태워져서...... 그런 뒤에야 숙모님이 안 계신 것을 알았거든요." "슬레이드로서는 그렇게 할 법한 일이지." 미치가 킬킬 웃었다. "둘이서 식사를 하다 보니 서로 마음이 맞게 되지 않았니?" "글쎄요." 현관 벨이 울렸다. 깜짝 놀라는 리사를 곁눈으로 보며 미치가, "분명히 슬레이드일 거야." 하면서 마중하러 나갔다. 리사는 긴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이윽고 슬레이드가 들어왔다. 돌아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등에, 아플 정도로 그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잘 있었어, 리사?" 짧은 인사가 들렸다. 긴장된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슬레이드? 어제는 고마왔어요." 리사는 억지로 미소를 띠고 돌아보았다. 슬레이드가 쏘는 듯한 시선을 정면으로 보내 왔다. 리사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는 사정없이 리사를 노려보았다. 리사는 불쾌한 표정을 짓고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에서 해방되어 다행이기는 커녕 점점 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는 무엇 하러 온 것일까? 아까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째설까?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있던 참이에요. 한잔 어때요?" 미치는 이미 쟁반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좋습니다." 슬레이드는 별로 생각이 없는 듯 기계적으로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피곤해 보이 는 군요, 슬레이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나요?" 미치가 커피를 따르며 물었다. 슬레이드는 흘끗 리사에게 눈길을 보냈다가 곧 미치에게로 돌렸다. "일이 바빠서 그렇습니다. 아마 아직 그 피로가 덜 풀린 모양이죠." 그럴 리가 없다. 오전을 제외한다면 오늘은 무척 한가한 하루였다. 왜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리사는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나, 그가 방에서 왔다갔다하고 잇는 듯이 느껴졌다. 아마 두 사람 모두 비슷한 심리상태에 놓여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초조해 하는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리사, 커피가 식겠어." 미치가 말했다. "어마, 미안합니다. 마시려던 참이었어요." 하고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내가 왜 사과한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아까 앉아 있던 긴 의자로 돌아가려면 슬레이드 앞을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곁으로 가니 묘하게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음의 동요를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녀의 움직임을 그의 검은 눈이 뒤쫓고 있었다. 리사는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딴 곳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눈길을 돌리고 있어도 슬레이드의 행동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행동뿐만 아니라 그 마음의 움직임도. 지금 그는 조용히 커피 잔을 받아들고 있지만, 무척 초조해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긴장감으로 가슴이 죄어들어, 리사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는 것이 고작이었다. "저번에는 끝내 서평을 읽지 못하고 말았어요, 미치." 슬레이드가 미치에게 말했다. "지금 읽어 볼 수 있을까요?" "내가 가져오겠어요." 리사가 재빨리 말하고 커피잔을 놓고 일어섰다. 그러나 슬레이드의 손이 리사의 팔을 꼭 붙들었다. "숙모님에게 맡기기로 하지. 어디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 가져오는 것이 좋을 거야." "별로 잘 알지도 못하지만." 미치가 웃었다. "하지만 리사가 가는 것보다는 빨리 찾을 수 있겠지. 두 사람은 여기서 기다려요." "아니, 제가 가겠어요." 리사가 고집을 부렸다. 왜 그런지 온몸이타는 듯이 뜨거웠다. "리사." 슬레이드가 조용히 불렀다.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엄한 어조로. "그런데......" 미치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의미있게 눈을 빛냈다. "그것을 가져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지 모르겠군." 슬레이드가 찌르는 듯한 시선을 리사에게 돌린 채로 말했다. "좋습니다, 미치. 천천히 가져오십시오." 7장 미치가 나가자 슬레이드는 리사의 팔을 놓고는 등을 돌리고 한걸음 물러섰다. 검은 머리가 스웨터 깃을 약간 덮고 있었다. 스웨터 위에는 팔꿈치에 가죽을 댄 코듀로이 자켓을 입고 있었는데, 짙은 갈색 자켓과 크림빛 스웨터가 잘 어울렸다. "서평을 읽으러 온 것이 아니겠죠, 슬레이드? 용건은 무엇이죠?" 리사의 음성은 자기 자신도 놀랄 만큼 침착했다. 마음의 동요를 느끼고 있는데 이런 목소리가 나오다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슬레이드가 흘끗 돌아보며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나는 리사가 당연히 협정을 맺으리라 생각했는데, 어젯저녁에는 분명한 대답을 듣지 못했어." 슬레이드의 음성도 냉정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방안에는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긴장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래요? 나는 이미 대답한 것으로 아는데요." 슬레이드가 리사에게로 홱 몸을 돌렸다. "아니, 대답하지 않았어. 오늘은 그 대답을 들어야 겠어." 이번에는 리사가 등을 돌릴 차례였다. 쏘는 듯한 그의 시선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물론 찬성이에요. 어제 당신이 말했듯 ., 서로 적이 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에요. 손을 잡으면 원만하게 될 텐데." 태연하게 말하려 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이것으로 분명한 대답이 되었을까요? 아니면, 정식으로 계약서에 사인해야 하나요?" "그만둬!" 또다시 슬레이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무엇을 그만두라는 거죠?" 리사는 슬레이드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들 듯이 말했다. "빈정거리지 말라는 뜻이야." 슬레이드는 입을 꽉 다물고 무서운 얼굴을 했다. "당신만 상 대하면 저절로 그렇게 되니,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요." "어젯저녓의 당신의 태도는 솔직한 것이 아니었나?" "어젯저녁엔 와인을 마셨기 때문에 예외예요." 리사는 그의 키스에 뜨겁게 응한 것은 와인 탓이라고 오늘 하루 종일 자기 자신에게 핑계를 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와인 탓이라고? 나는 온종일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리사는 놀라서 입을 멍하니 벌렸다. 슬레이드가 온종일 내 생각만 하고 있었다니! 그가 사무실에서 초조해 하고 있었던 것은 내가 원인이란 말인가? 그는 어제의 일을 되풀이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 나처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에게 있어서도 오늘은 괴로운 하루였을 것이 분명하다. 슬레이드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자, 손발이 떨리고 억제할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슬레이드는 긴 다리로 한걸음 내디디고 리사의 눈앞에 서서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대었다. 리사는 순식간에 관능의 불길에 휩싸여, 슬레이드의 존재 외에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 나는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았어. 리사는?" 슬레이드의 목소리는 기분 나쁠 정도로 나직했다. 리사는 금발을 나부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리에 감겨 있는 슬레이드의 손에 힘이 더해지더니 리사의 몸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그 손이 타는 듯 뜨겁게 느껴졌다. 리사는 고개를 들고 약간 입술을 벌려 슬레이드가 키스를 해오기를 기다렸다. 슬레이드는 격렬하게 리사의 입술을 탐했다. 그 뜨거운 키스는 어떤 와인보다도 리사의 마음을 취하게 만들었다. 리사의 손이 저도 모르게 그의 자켓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꽉 죄어진 웨이스트를 더듬었다. 이와 동시에 슬레이드의 팔이 리사의 몸을 꼭 감싸안아 자신의 몸에 밀어붙였다. 허리를 애무하는 슬레이드의 손길에, 리사의 몸속에서 불밭기 시작하던 불길에 기름이 부어진 듯했다. 두 사람은 지금 똑같이 서로를 희구하고 있었다. 이것을 깨닫자 리사는 모든 것을 잊고 환희에 도취했다. 지금까지 리사가 그 품에 안겼던 남자는 몇 사람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슬레이드에게 안겨 있으려니 벼랑 위에 선 것처럼 온몸이 후들거렸다. 이런 야릇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 남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불쾌하게 느끼고 있던 슬레이드의 오만스러움이, 지금은 믿음직스럽기만 했다. 계속 이러고 있었으면 했는데,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리사는 아쉬움에 몸을 떨었다. "리사는 마녀로군." 슬레이드가 리사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댄 채 중얼거렸다. 그의 따스한 입김이 리사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마녀라도 전혀 힘이 없는 마녀예요." 저항도 방어도 하지 않겠어요, 하고 리사는 속으로 덧붙였다. 사실 그 앞에서는 전혀 힘이 없는 것이다. 그가 키스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해도 그녀로서는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슬레이드는 그런 거짓말은 하지도 말라는 듯이 격렬하게 리사의 입술을 빼앗았다. 그러나 지금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마력을 가진 사람은 슬레이드인 것이다.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 마법에 걸린 듯이 영혼을 빼앗기고 만다. 슬레이드의 교묘하고 뜨거운 키스가 계속되었다...... 황홀했다...... 계속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선글라스를 벗어." 슬레이드가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리사는 퍼뜩 현실로 돌아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등을 돌렸다. 떨리는 다리로 겨우 한 걸음 내디뎠으나 심장은 터질 듯이 고동치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고조된 감정 때문에 명치 끝이 아파서 손으로 누르며 고통을 참았다. "나는 당신과 어울리는 것도, 감정적으로 관계를 갖는 것도 싫어요, 슬레이드." 분명하게 말해 줄 생각이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꺼져 가는 것 같았다. "손을 잡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무적인 일에만 국한하고 싶어요." 언젠가는 결국 그의 못된 음모를 파헤쳐야 한다. 그때 가서 괴로와하지 않기 위해서는, 끝까지 비지니스적으로 나가야 한다. "나도 그럴 생각이야. 당연한 일이지." 슬레이드의 나직한 목소리는 분노를 억제하고 있는 듯이 들렸다. "그렇다면 좋아요." 슬레이드는 뒤에서 리사의 허리에 팔을 감고, 그 손을 위로 옮겨 불룩한 가슴을 감쌌다. 리사의 몸은 그의 뜨거운 욕망을 민감하게 감지했다. "이렇게 할 생각은 없었어. 아니, 절대로 이렇게 하려 하지는 않았어." 슬레이드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그녀의 머리에 입술을 갖다 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말은 이렇게 내뱉었으나, 몸은 황홀한 감각에 떨리고 있었다. 리사는 가슴을 감싼 손을 떼어 놓으려고 슬레이드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다만 그의 손에 손을 겹쳤을뿐, 그 이상의 것은 할 수가 없었다. 슬레이드의 손이 더욱 교묘하게 가슴을 애무했다.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다 - 이러한 생각이 격렬하게, 위험한 생각과 함께 떠올랐다. "원하지는 않지만 어차피 현실이 되고 말았어. 어떻게 하지?" 슬레이드의 뜨거운 입김이 리사의 민감한 목덜미를 간질였다. "제발 그만두세요." "그만 두기를 바라나?" 그가 조롱하듯 웃었다. "몰라요!" 리사는 눈을 감았다.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 슬레이드는 더욱 강하게 끌어안고 온 몸을 꼭 밀어붙였다. "나는 리사가 탐나." 그의 손이 리사의 허리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알고 있어요." 슬레이드에게 요구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도 원하고 있는데. 갑자기 슬레이드는 손을 놓고 성큼성큼 방 한쪽으로 걸어갔다. 리사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품이 아쉽기만 했다. 슬레이드는 커피 테이블에 놓여 있는 에나멜 가죽 상자에서 담배를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연기를 뱉어 내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렸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리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에게 무슨 일을 하게 하고 싶은 거지, 리사? 숙모의 돈을 나누어 갖는 것 외에?" "아무것도." 눈물이 치솟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선글라서가 숨겨 주었다.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나는 리사보다 더 간절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 훨씬 말이야!" 슬레이드는 금방 붙여 문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재떨이에 비벼 끄고 어깨를 추스르고는 문으로 향했다. "어디 가세요?" 리사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돌아가겠어! 미치한테는 리사가 대신 사과해 줘." 슬레이드가 나가면서 문을 탕하고 닫았다. 그 소리를 들으니 리사는 몸이 오싹했다. 이것은 당연한 보복일 것이다 있지를 못한다니까.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 있었니?" "잠시...... 말다툼을 했을 뿐이에요." 리사는 애써 냉정해지려 하면서 대답했다. "무슨 일로?" "말씀을 드려야 하나요?" "아니다, 억지로 알고 싶은 생각은 없어." 미치는 한숨 섞인 말로 대답했다. "너하고 슬레이드는 하나에서 열까지 의견이 맞지 않는 모양이구나. 충돌할 건더기가 없어지면, 태양 빛이 무슨 빛깔이냐고 서로 다투겠지? 어젯저녁 같이 나가기에, 이젠 뜻이 좀 맞는가 보다고 생각했는데......" "어젯저녁 같이 나간 것부터가 잘못이었어요." 여러 가지 의미로 잘못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리사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리사, 왜 그러지, 눈물을 다 흘리고?" 미치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저는 화가 나면 눈물이 나와요." 화가 났기 때문인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인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미치의 표정이 차차 심각해졌다. "슬레이드에게 말해 줘야겠다." "괜찮아요. 무슨 말을 하건 슬레이드는 웃기만 할 거예요." "슬레이드는......." "숙모님의 그 사람에 대해 잘 모르고 계세요." 리사가 미치의 말을 가로막았다. 가슴속의 울화가 폭발할 것 같았다. "슬레이드라는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르고 계세요. 거만하고 뻔뻔스럽고 동물적인 데다......" 안 된다! 왜 이런 말을 한 것일까! 리사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래, 알지 못했어." 미치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분명히 나는 슬레이드의 그런 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해." 이렇게 수치 를 느낀 것은 몇 년 만일까? 아마도 틴에이저 시절 이후 처음인 것 같다. 그때는, 친구에게 어떤 남자아이가 좋다고 했더니, 그녀가 그 남자아이한테 말해 버렸던 것이다. 리사는 말도 안 되는 구실을 대고 거실을 나왔다. 리사는 침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다행히도 미치는 따라오지 않았다. 리사는 실컷 울었다. 이 비참함, 이 굴욕감...... 그러나 그 이상으로 마음이 허전했다. 아주 귀중한 것을 발견했는데, 곧 버려야만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그 귀중한 것이란...... 알고는 있었으나 솔직하게 인정하고 싶지 않다. 머리가 무겁고 몸이 쑤셨다. 그러다가 열 두 시가 지나자 피로에 못 이겨 잠이 들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자 깜짝 놀랐다. 지각이다! 아니다, 오늘은 토요일. 슬레이드의 사무실에 나갈 필요는 없다. 다시 자리에 누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쉬는 날이어서 다행이었다. 도저히 앤 엘드리지로서 그를 만날 용기가 없다. 그뿑만 아니라, 거울을 들여다본 순간 슬레이드뿐 아니라 아무도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어젯밤에 눈물을 흘린 탓으로 녹색 눈에 생기가 없고 충혈된데다 눈두덩이 몹시 부어 올라 있었다. 더군다나 눈 밑에는 검게 기미까지 끼어 있어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리사는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데님 슬랙스와 흰 탱크톱으로 갈아입었다. 몹시 안색이 나쁘고, 핑크빛 입술연지가 이상하게도 천박하게 보였다. 그래서 티슈 페이퍼로 입술연지를 지우고 머리를 풀어헤쳤다. 계단 밑에,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밀드레드가 서 있었다. "마님은 서재에서 작품을 쓰고 계십니다. 오늘은 가구를 닦는 날이기 때문에, 식사를 하려면 잠시 기다려야......" "주스와 커피만으로 족해요." 식욕이 전혀 없었다. 밀드레드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마저도 불필요한 일이 여분으로 생겼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냥 두세요, 밀드레드. 내가 찾아 마실 테니까." "그렇다면, 부탁해요." 밀드레드는 얼른 거실로 사라졌다. 결국 리사는 오렌지 주스 한 잔만 마시고, 아무 목적도 없이 뒷문을 통해 뜰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천천히 떡갈나무 밑으로 향했다. 가지에는 은빛 이끼가 끼어 있었다. 어젯밤에는, 짐을 꾸려 떠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슬레이드 블랙웰한테서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숙모는 슬레이드의 뜻대로 되고 만다. 그렇게 어리석은 리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기 있어도 - 무섭다! 소름이 끼쳤다. 리사도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다. 남자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가 싫다면 깨끗이 거절하면 된다. 문제는 싫지 않다는데 있는 것이다. 슬레이드가 조금 스치기만 해도 그녀는 7월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버리고 만다. 사기꾼을 사랑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구나 나이들고 외로운 여성을 사기하려는 그런 남자를! 아니다, 아직 사랑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 않았다. 외면적으로 이끌리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나 사랑과는 다르다. 그러나 더 이상 그의 곁에 있으면 위험하다. 사랑에 빠질 것이 틀림없으니까. 만일 그를 사랑하게 되어 버리는 경우에는, 미치를 피해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그의 정체를 폭로할 수 있을 것인가? 머릿속이 어지럽고 불안하여 견딜 수 없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생각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작고 연한 녹색의 잎이 달린 떡갈나무 가지가 뺨을 스쳤다. 리사는 신경질적으로 그 가지를 꺾어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어째서 이토록 귀찮은 일이 생기고 말았을까? 이 상태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전혀 없단 말인가. 괴로워하거나 가슴 태우지 않고 빠 져나갈 방법이? 리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몇 겹으로 겹쳐진 나뭇가지를 쳐다보았다. 높은 곳에 넓은 판자가 가로질려 있었다. 굵은 줄기에는 간격을 두고 가느다란 판자가 몇 개나 못질되어 있어, 그것이 사다리 모양으로 위의 판자까지 이어져 있었다. 고민을 떨어버리고 그 판자까지 올라가고 싶다. 아래 세계를 내려다볼 수 있는 나무 위의 집은 절호의 피난처다. 리사는 곧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무 줄기에 못박힌 판자는 의외로 튼튼했다. 그리고, 나무 오르는 재주도 아직은 잊지 않고 있었다. 위에 걸쳐진 넓은 판자도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고, 그 어디도 썩거나 노후된 흔적은 없었다. 리사는 판자에 편안히 앉어 턱을 무릎에 괴웠다. 기분이 더할 수 없이 좋았다. 나무 위에 앉아 있으니 하늘에라도 오른 기분이다. 좋은 일은 오래 계속되지 않는 모양이다. 기분좋고 쾌적한 시간도 잠시뿐. 뜰의 자갈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육감으로 짚이는 것이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침입자는 슬레이드였다. 그는 리사가 보이는 곳까지 오자 걸음을 멈추고 나무 위를 올려다 보았다. 슬레이드의 모습을 보는 순간, 리사의 가슴은 자기 의사와는 정반대로 심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푸른색 슬랙스에 무늬있는 셔츠라는 가벼운 차림으로 가슴의 단추를 몇 개 터놓고 있었다. 리사를 똑바로 쳐다보는, 윤곽이 뚜렷한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리사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 이야기가 있어." "나는 당신하고는 이야기할 것이 없어요." "어리석은 흉내를 내지 말고 어서 내려와."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줄 알았죠?" 리사는 슬레이드의 말을 무시했다. "밀드레드가 리사가 뜰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기에 와 보았지. 미치는 자주 거기 올라가곤 하지. 그래서 자연히 발길이 이쪽으로 돌려진 것이지." "숙모님이 이곳엘?" 설마! 50이 넘은 숙모가 여기 올라오는 모습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물론이지." 슬레이드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리사의 숙모는 재간이 많은 사람이니까. 자아, 어서 내려와. 리사가 내려오지 않는다면 내가 올라가겠어. 두 사람이 앉기에는 약간 좁겠지만." 슬레이드는 정말 올라올 기세였다. 리사는 성이 나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슬레이드가 나무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려가겠어요, 지금 곧." 리사는 투덜거리며 나무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지상에서 1미터 정도 되는 데까지 내려왔을 때, 슬레이드의 손이 리사의 허리를 붙들었다. 혼자 내려가겠다는 리사의 말을 무시하고 그는 그녀의 몸을 앉았다. 발이 땅에 닿기가 바쁘게 리사는 몸을 비틀어 그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동요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무슨 용건이죠?" 싸늘하게 쏘아부치면서도 마음은 슬레이드를 의식하고 불타기 시작했다. 슬레이드는 잠시 리사를 빤히 바라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치의 말을 따르면 리사는 어젯밤 울었다면서?" 그의 손이 썬글라스로 뻗쳐왔다. 리사는 그 손을 뿌리치고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숙모님이 그런 말을 하다니, 지나친 간섭이에요." 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선글라스를 썼으나 운 흔적은 아직 남아 있다. "미치가 어미새의 입장이 된 적은 없어. 하지만 어쩌다 자기 집에 어린 새가 날아들면 보호해 주기는 하지." 그는 리사를 자세히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대하고 보니, 미치가 나더러 리사를 못살게 굴지 말라고 설교한 기분을 알 것 같군. 리사는 매우 순결해서, 누군가가 보호해 주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보이는군." "아니에요, 당신도 숙모님도 나를 모르고 있어요. 나는 적어도 자신의 일만은 처리할 수 있어요." "그래?" 슬레이드는 짜증스럽게 리사를 흘끗 바라보고 눈을 빛냈다. "이상한데. 리사는 숙모의 돈을 노리는 부도덕한 조카로는 보이지 않는군. 마치 청순한 요정 같아서......" "돌아가 주지 않겠어요? 칭찬을 듣기는 싫어요. 더구나 당신같은 사람에게는!" "칭찬하는 게 아니야." 리사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엇때문에 왔죠? 아니면 누가 당신을 부르기라도 했나요?" "나 자신이 불렀지. 리사를 만나고 싶어서." "왜요? 어제 그런 일이 있있기 때문에 내가 약속을 백지로 돌린 줄 알았나요?" "정직하게 말해서, 그런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 슬레이드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있을 수 있는 이야긴데도." "그래요,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예요." 슬레이드가 리사의 팔을 갑자기 꼭 붙들더니 자기 쪽으로 향하게 했다. 리사는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몸을 틀었다. 그의 손의 감촉을 살갗에 느끼고 있으려니 관능이 일깨워지는 듯했다. 눈이 마주치면 매료될 것 같아 고개를 돌린 채로 있었다. "놓아줘요, 슬레이드." 리사는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짜내듯이 말했다. "나는 약속을 어기거나 하지는 않아요." 슬레이드의 손에 더욱 힘이 가해지면서 손가락 끝이 리사의 부드러운 팔에 파고들었다. 끌어안긴 리사는 그의 가슴에 손을 대고 팔을 내뻗었다 . 그러자 우연히도, 손이 그의 벌어진 셔츠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순간, 그의 체온이 손끝에 느껴졌다. "어젯저녁에는......" 슬레이드가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젯저녁의 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리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가로막았다. "사과하러 왔어. 모든 것을 잊고 아무 일도 없었던 일로 하자는 말을 하고 싶어서." 슬레이드의 허스키한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관능적인 데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잊을 수가 없어." 그의 따뜻한 입김에 머리카락 흔들려, 싫어도 그가 옆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사의 시선이 슬레이드의 햇볕에 탄 목에 못박혔다. 그의 목이 심하게 맥박치고 있었다. 리사의 심장과 마찬가지로. "나는 당신과 가까와지고 싶지 않아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떨리는 목소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로 성가신 일이 생길테니까요." "내가 그것을 모를 줄 아나?" "알고 있다면, 나를 내버려 두세요." "오늘은 나하고 같이 지내 줘. 미치는 하루 종일 일이 있어. 그녀의 말에 따르면, 리사는 오늘 친구를 만날 예정이 없다고 하던데." "싫어요." 리사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당신과는 같이 지낼 수 없어요!" "미치의 재산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야. 그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겠어. 다만, 개인적인 친구로서 만나 주길 바라."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유혹이다. 슬레이드와 단둘이서 하루를 보내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집이 여간 아니군, 리사도!" 슬레이드는 화가 나서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는 인간적으로 눈물을 보이더니 오늘은 웬일이지? 내 마음을 알지 못하겠나? 리사를 사랑하고 있어. 리사가 날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간에 리사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어." 리사는 고개를 들고 멍하니 슬레이드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엔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설마!" 슬레이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어." "그렇더라도," 리사는 여우에 홀린 듯한 심정이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다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나도 어젯저녁에 이 집에서 나가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했어." 씁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어. 어제 나는 리사의 제일 나쁜 면을 보고 돌아갔는데도 역시 좋아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어. 오늘은 그 반대의, 제일 좋은 면을 보고 싶어." 그것은 리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기꾼이라는 최악의 면을 보았으면서도 슬레이드에게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슬레이드와는 달리, 그것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용기가 없는 것이다. 그를 사랑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마음은 이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이 좀처럼 시인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같이 있어봤자 별 수 없어요. 점점 더 사태가 악화될 뿐인걸요." "그럴까?" 슬레이드가 의아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충돌하는 것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어. 다소는 말다툼을 해야 자극이 있어서 재미있지 않을까? 아무 일도 없으면 오히려 지루하지." 리사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역시 안 되겠어요." "어째서?" "그것은...... 무서워서 그래요." "무섭다고? 내가 좋아지는 것이 무서운가?" 슬레이드가 물었다. 바로 그것이다. 그는 핵심을 찌른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있나?" 리사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입술을 깨물었다. "네...... 그렇다고 생각해요." 슬레이드의 검은 눈에 이상한 빛이 감돌았다. "그것이 사실인지 여기서 당장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싫다고 말하려는 순간, 슬레이드의 입술이 덮쳐왔다. 달콤한 현기증을 느끼게 하는 격렬한 키스 - 리사는 곧 그 뜨거운 키스에 도취하고 말았다. 그에게 힘껏 안겨 있었기 때문에, 팔이 어쩔 수 없이 그의 목을 감고 말았다. 다정하게 몸을 어루만지는 슬레이드의 손길에, 의혹도 그밖의 것들도 멀리 사라졌다. 그를 경계해야 한다는 마음도 사라지고,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지금 이 순간의 희열밖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이 불타오르고, 마음은 여기에 맞추어 관능적인 사랑의 노래를 불렀다. 입술이 뜨겁게 슬레이드의 입맞춤에 응하고, 가슴은 온통,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들끓었다. 계속 그녀의 몸을 애무하는 그의 손도 같은 생각을 호소해 왔다. 슬레이드는 리사의 몸을 나무에 기대게 했다. 탱크톱에서 드러난 어깨와 등이 거칠거칠한 나무껍질에 닿았다. 그의 상체가 무게를 가하여 리사의 몸은 활처럼 휘어졌다. 그의 손이 탱크톱 안으로 들어와 맨살을 애무하기 시작하자, 고통스러울 정도의 희열이 리사의 몸을 꿰뚫었다. 이윽고 슬레이드의 손이 가슴으로 옮겨 갔다. 리사는 기쁨으로 몸을 떨었다. 슬레이드의 탄력있는 몸을 손끝에 느끼고 싶었다. 이때 슬레이드가 갑자기 몸을 세우며, 나무에 기대어 있던 리사를 껴안았다. "이 이상의 일을 하기에는 적당한 장소가 아닌 것 같군." 그는 리사의 귀에 입을 대고 거친 숨을 내쉬며 가만히 말했다. 리사는 힘없이 슬레이드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좀 더 안아주었으면. "슬레이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사랑하나?" 슬레이드가 재촉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리사는 눈을 감았다. 무섭다! 하지만, 진실인 이상 부인할 수 없었다. "오늘 나와 같이 지내 주겠지?" "네." 슬레이드가 더욱 힘을 가해 리사를 껴안았다. "리사가 필요해. 이 기분을 알 수 있겠지?" "네." 리사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대답했다. 그의 탄탄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손을 가져가면서, 나 역시 얼마나 당신을 원하는지 몰라요, 하고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하지만 아직은 일러." 슬레이드는 리사의 머리에 턱을 문질렀다. 보지 않아도 얼굴을 찌푸리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선, 리사를 안고 싶어도 적당한 장소가 없고......" "그렇군요." 슬레이드는 리사의 턱을 받쳐 위를 향하게 하고 빤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눈에 심각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리사, 나는 리사를 알고 싶어. 아니,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야.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오늘 오후는 리사라는 인간을 알기 위해 시간을 보내고 싶어. 가령 리사의 가족이나 친척에 대한 것, 그리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좋아요." 슬레이드가 무슨 말을 하건 결국은 찬성하게 되고 만다. 그러나 언젠가는 슬레이드를 적으로 돌려야 할 때가 찾아올 것이다 . 그렇기에 슬레이드와 대화를 나눌 약간의 시간이 더더욱 귀중한 것이다. 슬레이드가 재빨리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리사가 그런 즐거운 무드에 잠겨 있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을지가 의문이군. 하지만 손을 대지 않도록 노력하겠어. 리사가 유혹하지 않는 한." 그는 리사의 손목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밀드레드한테, 나하고 외출한다고 말해 줘. 저녁때까지는 돌려보내 주겠어." "옷도 갈아입어야지요. 이런 모습으로는......." 리사는 구겨진 탱크톱과 몸에 착 달라붙은 데님 슬랙스를 내려보았다. "아니, 그대로도 상관없어." "그럼 5분만 기다려 주세요. 머리를 빗고 곧 돌아오겠어요." "안 돼." 슬레이드는 집으로 향하려는 리사의 손목을 꼭 붙들었다. 그가 자기를 응시하면 리사는 늘 마음이 산란해지곤 한다. "머리를 빗을 필요도, 입술 연지를 바를 필요도 없어. 지금 그대로의 리사가 좋아. 내 키스로 상기된 리사의 얼굴이 좋아." "어마, 싫어요. 남들이 무어라 생각하겠어요?" 리사는 이렇게 말했지만, 연인처럼 대해주는 슬레이드의 말이 기뻤다. "남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인 줄 알겠지. 내 사랑의 표현이 좀 격렬한 모양이라고. 오늘은 그렇지 않지만, 멀지 않아 반드시 리사를 그렇게 만들고 말겠어." "어마, 농담하지 마세요." 리사가 뾰로통해서 쏘아 붙였다. "농담이 아니야." 순간 슬레이드는 리사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리사를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선언하기라도 하듯. "어서 집에 돌아가 외출하겠다는 말을 전하고 와. 우물우물하고 있으면 예정을 변경하여 다른 사람을 만나겠어." 하면서 그는 손을 놓아 주었다. "말이 지나치군요!" 리사는 몸을 경직시키고 그 자리에 멈춰셨다. 자기로서는 더할 나위없이 슬레이드를 사랑하고 있다. 동시에 그가 밉기도 하다. "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우선 이것부터 알아두세요. 나는 지시를 받는 것을 제일 싫어해요." "잘 알겠어." 슬레이드가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겠어." 그는 리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집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엉덩이를 툭 때리며 집 쪽으로 그녀를 밀었다. 8장 그 날은 하루 종일 드라이브를 하며 지냈다. 운전에 신경을 쓰고 있으면, 이야기만 나누겠다는 약속을 깨뜨리지 않을 수 있다 - 아마 슬레이드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저지대라 불리는 찰스턴 주변을 드라이브하고, 점심에는 혼잡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카페에서 찬 음료수를 마셨다. 이만큼 남한테 자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 것일까? 두 사람 모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제는 어렸을 때의 추억담으로부터 가족이나 친구, 일과 취미, 좋아하는 책과 음악 등 한이 없었다. 그러나 밀리엄 탈메지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머틀 비치도 골든 스트랜드도 멀리 뒤로 사라졌다. 타이어가 한번 회전할 때마다 찰스턴이 가까와졌다. 안타깝게도, 즐거운 오후가 끝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17호선의 도로표지가 찰스턴까지 10킬로 남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10킬로가 아니라 100킬로였으면 좋겠는데. 리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러지?" 슬레이드가 그러한 리사를 깨닫고 도로에서 리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런 대답만으로 그가 납득할 리 없었다. 다른 이야기로 속여야지. "이 부근에는 광주리 장수가 많군요. 굉장한데요. 상점마다 모두 광주리를 팔고 있군요." "전에 본 일이 없나?" 슬레이드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처음이에요." "브룩클린 가든으로 갈 땐 이 길을 지나야 하는데." "아, 참." 리사는 짐짓 웃음소리를 높였다. "이제 생각나는군요. 수다를 떨다 보니 길가에 가게가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었나 봐요. 여자 셋이 모이면 어떻다는 말도 있지 않아요? 우리도 예외는 아니에요." 슬레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브룩클린 가든에 갔었다는 지난번의 거짓말이 그럭저럭 통과가 된 모양이었다. "그러면 저지대의 명물인 광주리에 대해서도 아직 모르겠군?" 슬레이드는 차의 속력을 떨어뜨리고 길가에 즐비한 어느 가게 앞에 차를 세웠다. "이 광주리 짜는 기술은 노예들이 가지고 들어온 것이지. 제조법과 디자인도 대대로 물려 내려온 것이지. 누군가가 새로운 모양이나 무늬를 개발하면, 그것이 또 대대로 계승되는 거야. 옆에서 잘 보도록 해. 리사를 교육시킬 좋은 찬스야." 리사는 슬레이드와 나란히, 길가에 있는 가게를 기웃거리면서 지나갔다. 크고 작은 갖가지 광주리가 진열되어 있었다 - 장식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뚜껑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어느 가게 한 구석에 늙은 흑인 여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깨에 스웨터를 걸치고, 열심히 손을 놀려 광주리의 밑부분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슬레이드와 리사의 모습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장식용 광주리를 만들지." 슬레이드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남자들은 좀더 크고 튼튼한 실용품을 만들고 있어. 예컨대, 옛날 밭일에 쓰던 것 따위 말이야. 지금도 간혹 농업용으로 쓰고 있지." 슬레이드가 크고 평평한 광주리를 가리켰다. 그것은 쌀을 고르는 데 쓰는 것이라고 했다. 저지대로 불리는 만큼, 이 부근은 지하수면이 높아 예로부터 쌀이 주요 농산물이 되어 있는 것이다. 리사는 작은 광주리를 하나 집어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굉장한 기술이군요. 어떻게 만들죠? 재료는? " "장식이 있는 것은 풀가 갈대잎을 섞어서 짜지." 슬레이드는 중앙에서 소용돌이 모양의 무늬가 번져 나가고 있는, 야자나무 잎의 광주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다른 나뭇잎을 짜넣어 검은 얼룩무늬를 놓은 것도 있지. 밭농사에 사용하는 광주리는 떡갈나무나 야자나무 줄기를 가늘게 쪼개어 거기다 갈대를 감아서 짜지. 그렇기 때문에 아주 튼튼해." "원료는 모두 이 지방에서 나는 것인가요?" "옛날에는 천연 재료가 얼마든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못해. 야자나무가 자라던 곳엔 집이나 오락 시설이 생겼으니까. 기술자들도 차차 천연재료를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 현실이지." 슬레이드가 리사의 손에 들린 고아주리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그것이 마음에 드나?" "네, 아주 멋져요. 하지만......" 돈을 가져오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처음하는 프레젠트야." 슬레이드는 이렇게 말하고, 리사의 손에서 광주리를 빼앗아 들고는 흑인 노파한테로 가서 값을 치렀다. 몇 분 후, 두 사람은 다시 찰스턴을 향해 하이웨이를 달리고 있었다. 리사의 무릎에는 작은 광주리가 놓여 있었다. 슬레이드로부터 받은 첫 선물. 그는 앞으로도 많은 선물을 주겠다는 뜻을 비쳤으나...... 그 선물을 살 돈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의 돈인가 미치의 돈인가? 리사는 창 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이런 것은 생각하지 말아야만 했다. 모처럼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선물까지 받아 마음이 흐뭇해졌으므로. 미치의 집까지 나머지 몇 킬로를 달리는 동안,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리사는 우울한 생각에 잠겨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슬레이드는 운전에만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찰스턴 시내는 차로 붐비고 있었다. 철대문은 열려 있었다. 차는 곧바로 문을 지나 포치 쪽으로 향했다. 슬레이드는 엔진을 끄고는 잠자코 운전석에서 내려 리사 쪽으로 돌아왔다. "자아, 이제 다 왔어." 새삼스럽게 할 필요도 없는 말을 하고, 그는 차의 문을 열었다. "고마와요." 두 사람 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로 묶인 듯, 어딘지 모르게 긴장되고 어색해 보였다. 리사는 현관으로 향하면서 어떻게든 그 실을 풀려고 했다. "지루하지 않았어요?" 애교있게 말할 셈이었으나, 리사의 목소리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깃들여 있있다. "글쎄...... 여자하고 외출해서 이처럼 지루한 적도 없었던 것 같군." 리사는 얼굴을 돌리고 볼멘소리로 말했다. "짓궃게 굴지 마세요." "그렇다면 쓸데없는 질문도 하지 말아야지." 리사는 문 앞에서 손잡이에 손을 대고 돌아보았다. 갑자기, 슬레이드와 영원히 헤어지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차라도 마시겠어요?" "아니, 괜찮아." 슬레이드는 얼른 문에 손을 대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리사를 제지했다. 그의 얼굴이 접근해 왔다. 동시에 리사는 몸을 가까이하여 그의 입술을 기다렸다. 하루 종일 억제되었던 정열로 슬레이드의 입술은 격렬하게 불타고 있었다. 그는 리사의 입술을 마음껏 빼앗으며, 그 나긋한 몸에 자기 몸을 꼭 밀어붙였다. 그러나 불타고 있는 슬레이드의 몸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이러고 싶었어." 슬레이드는 입술을 리사의 귀로 옮겨 귓불을 가볍게 깨물었다. "이 정도가 아니라 좀 더." 리사는 한쪽 손으로 슬레이드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또 한쪽 손은 무의식적으로 광주리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욕망이 달콤한 소용돌이가 되어 치솟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고조될 것인가. 눈을 감고 그의 몸에 꼭 안겨 있으려니, 그의 입술은 귀밑에서 목으로, 다시 리사의 민감한 곳을 향하여 옮겨 가고 있었다. "슬레이드, 계속 이렇게 안아 주었으면 좋겠어요." 리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다음 순간, 살을 태우고 있던 그의 입술이 떨어지고,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강하게 껴안겼다. 지금 슬레이드의 몸속에서는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욕망이 치솟고 있었다. "오늘 저녁 우리 집에 와." 슬레이드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귓전에서 속삭였다. "그렇게는...... 할 수 없어요." "할 수 있어." 슬레이드의 팔에 더욱 힘이 가해졌다. "식사가 끝난 뒤...... 아니면 미치가 잠든 뒤에라도 좋아." "안 돼요!" 리사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가겠다고 대답하고 싶다! 얼마나 그 말이 하고 싶은가! "리사......" 슬레이드는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을 토해내듯 호소했다. "나는 정숙한 체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슬레이드. 다만, 숙모님 앞에서...... 숙모님은 이해심이 많으신 분이지만, 역시 그런 일을 하면 좋아하시지 않아요." "하기는 그렇군." 슬레이드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팔의 힘을 늦추었다. "손님이 와 있으면 책임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지. 만일 우리가 하룻밤을 같이 지내기라도 한다면 리사의 신용은 땅에 떨어질 거야. 이런 일로 미치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지." "그래요." 갑자기 쓸쓸한 생각이 되살아났다. "우리 둘 다 숙모님한테 잘못 보이지 않는 것이 좋아요." 숙모의 돈과 슬레이드의 탐욕이 증오스러웠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미치의 재산을 노리고 있다. 사랑을 위해 돈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증스런 사람. "내일......" 슬레이드가 리사의 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내일은 숙모님 곁에 있겠어요." 리사가 딱 잘라 말했다. 내일 또다시 슬레이드를 만난다는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이곳에 와서 숙모님과 같이 지낸 날이 하루도 없어요. 내일 또 나간다면, 내가 온 목적을 오해할 거예요." 그래도 슬레이드는 그녀를 설득하려 했으나, 마침내 단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월요일로 미루지. 저녁에 식사를 하고......" 리사를 내려다보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후에는 형편이 따르기로 하지." "좋아요." 리사도 어색한 미소를 되돌렸다.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제 그만 들어가야지......" 슬레이드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틀자, 그는 순순히 손을 놓아 주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슬레이드." "리사." 슬레이드는 가만히 서서, 다시 안고 싶다는듯이 그녀를 불렀다. 그의 손이 가볍게 머리에 닿는 것을 느끼면서, 리사는 문을 열고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슬레이드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문에 등을 대고 가만히 서 있으려니, 차 문을 닫는 소리, 이어서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요일은 여간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밝고 명랑한 얼굴로 미치를 상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월요일 아침, 리사는 완전히 피곤하여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다. 그녀는 슬레이드의 사무실로 향하면서 계속 이 연극에 대한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도 앤 엘드리지의 역할을 할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마침내 분명한 결론이 나왔다. 그만 둘 수는 없다. 슬레이드가 어디까지 나쁜 짓을 하는지 알아낼 때까지는. 사무실에 도착하자 앤드류가 기다렸다는 듯이 비서실로 들어왔다. "빨강머리에 검은 옷 - 최고의 콘트라스트로군." 흡사 이리와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그가 말했다. "마음에도 없는 칭찬은 그만두세요." 리사는 땀에 젖은 손으로 검정 팬츠 슈트의 깃을 만졌다. 헐렁한 상의는 리버시블이고, 안은 그린의 체크로 되어 있었다. 뒤집어 입을 것을 그랬다고 생각했다. 검은 색은 상복같아 보일 것이다. "점심은 내가 내지, 고급으로." "괜찮아요." 점심시간까지는 서너 시간 남아 있지만, 도저히 식사를 하면서 속 편히 이야기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몸과 마음이 다 같이 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간청해도 승낙해 주지 않는군." 앤드류가 한숨을 쉬었다. 이때 바깥 문이 열리면서 슬레이드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 모습은 햇빛을 받아 더욱 강렬해 보여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더구나 그는 곧바로 리사 앞으로 걸어와, 예의 그 매력적인 미소를 띠었다. "잘 쉬었나?" 그는 입가에 미소를 남긴 채 리사의 책상에 놓여 있는 편지를 집어들고 읽었다. "안녕하세요?" 리사는 일부러 눈을 내리 깔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뚫어져라 하고 그를 바라보게 되고마니까. 앤드류가 휘익 하고 가만히 휘파람을 불었다. "그 여자를 소개시켜 주겠나, 슬레이드?" "응? 누구를?" 슬레이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주말에 데이트한 아가씨말일세. 오늘 이처럼 기분 좋은 것을 보니 신나는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앤드류는 슬레이드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리사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 다. "만나보고 싶군. 그 정도의 여자라면......" "안 돼." 슬레이드는 목구멍 깊숙이에서 웃음소리를 냈다. 순간 리사의 몸에 상쾌한 전율이 일어났다. "그녀는 백 퍼센트 내 거야. 앞으로도 계속." 슬레이드가 방으로 들어가자, 앤드류가 눈을 빛내며 리사를 바라보았다. "큐피드의 화살을 맞았군. 슬레이드의 가슴에 꽂힌 것이 뚜렷이 보여. 그런데, 운이 좋은 것은 어느 편일까? 슬레이들까 상대방 여잘까........" 리사의 녹색 눈에 뜨거운 불길이 감돌았다. "양쪽 모두가 아닐까요?" 이것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내심의 기도였다. "슬레이드는 멋진 여자를 만나고, 리사는 점심조차 같이 하지 않겠다고 하고..... 아아, 나는 고독해." "다음에는 래트레지씨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할 차례예요." "그럴테지,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우울한 월요일이야!" 앤드류와 교대로 슬레이드가 방에서 나왔다. 서류와 파일을 잔뜩 안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리사의 책상에 털썩 내려놓았다. "오전 중에 이것을 정리해 줘요, 앤." 이렇게만 말하고 슬레이드는 등을 돌렸다. "계약서는 어떻게 하죠? 금요일에 말씀하시기는 월요일 아침 일찍 타이프를 치라고 하셨는데." 슬레이드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어깨를 추슬렀다. "그것은 나중으로 돌려. 타이프는 치기 싫겠지? 오늘같이 기분좋은 날에는 싫어하는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아." 슬레이드는 말을 마치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리사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그와 어쩌면 이렇게도 다른 것일까? 그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는데, 그 자신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은 진심인 것이다! 리사는 행복감에 젖어 살며시 웃고 책상의 파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어느 한 파일의 견출지에 씌여 있는 글자에 눈이 번쩍 뜨였다 - <탈메지 밀리엄>. 순간, 심장의 고동이 멎었다. 숙모의 파일. 이 얼마나 선에 넣으려 했던 물건인가! 그런데도 전혀 반갑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그 파일을 집어들었을 때는 우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런 것은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눈을 감고 생각했다. 이때 요란하게 전화가 울렸다. 리사는 한순간 주저했으나, 재빨리 파일을 서랍에 넣고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슬레이드에게 연결하고, 서랍 안의 것은 그대로 둔 채 책상 위의 서류만 캐비닛에 넣었다. 그리고 순서대로 정해진 장소에 정리하여 넣었다. 파일을 정리하는 법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서투른 상태였다. 그러므로 한 시간 후 슬레이드가 다시 방에서 나왔을 때는, 아직 3분의 1의 서류가 캐비닛에 남아 있었다. "20분 정도 나갔다 오겠어. 누가 묻고든 그렇게 얘기해 줘요." 검은 눈종자에는 여전히 만족스런 빛이 감돌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리사는 책상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아 서랍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파일을 열어 볼 것인가? 무릎 위에서 주먹을 꼭 쥔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드디어 그 손을 전화기로 내밀었다. 무서운 것은 나중에 보기로 하자. 오늘 아침에는 행선지도, 돌아올 시간도 말하지 않고 집에서 나왔다. 사무실에 나갈지 말지 결심을 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거짓말을 머리속에서 생각하며 숙모의 집 다이얼을 돌렸다. "탈메지 씨 댁입니다." 두어 번 벨이 울린 다음에 상대가 나왔다. "여보세요, 밀드레드? 나......" "어마, 리사?"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밀드레드가 아니라 미치였다. "네, 그래요, 저예요." 리사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저어......" "마침 잘됐어!" 미치가 다시 리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정확히 말해서 지금으로부터 16분 전에 대망의 문자를 찍었어." "네? 무엇을 찍어요?" 미치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막 소설이 끝났어. 그래서 <끝>이라는 문자를 찍었다는 말이야." "어마, 축하해요." 리사는 억지로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시름 놓은 듯한 기분이야! 굳 축하회를 갖고 싶어. 너, 지금 어디 있지? 어디서 만나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라도 하자꾸나." "저어..... 실은, 제가......" "못 오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라." 미치가 서운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하고 같이 있으면 함께 오면 더욱 즐겁지 않겠니?" "모처럼의 말씀이지만, 친구는 가지 못할 거예요." 리사는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관자놀이 부근이 욱신욱신 했다. 하지만 숙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괜찮아요. 어디로 가면 되죠? 다행히도 미치는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레스토랑 이름을 말했다. 마음이 들뜬 미치와는 반대로, 리사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수화기를 놓았다. 정신을 차리고 숙모의 파일을 꺼내려고 서랍을 열었을 때, 앤드류가 돌아왔다. 리사는 반사적으로 서랍을 도로 닫았다. "아, 손톱 손질을 하고 있었군. 내 말이 맞지요?" 앤드류가 웃으면서 말했다. "슬레이드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공교롭게도 선생님은 외출하셨어요." 리사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갔지?" "글쎄요, 행선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20분 정도 외출하겠다고만 말씀하셨으니까요." 리사는 일어나서 캐비닛 앞으로 갔다. "그렇다면," 앤드류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리사 쪽으로 건들건들 걸어왔다. "슬레이드가 돌아올 때까지 옆에 있기로 하겠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파일 작업이에요. 도와주시겠어요?" "아니, 사양하겠어." 그는 웃으며 리사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협박해도 소용없을까? 점심식사 말이요. 대답은 역시 노운가? "노우예요." "그럴테지. 슬레이드가 저토록 기분이 좋으니 말해도 소용없겠지. 손톱 손질을 하더라는 말을 들으면, 미장원에 가서 매니큐어를 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 고작일 테니까. 하기는, 그런 손이라면 미장원에 갈 필요조차 없겠지만." 앤드류가 리사의 손을 꼭 쥐었다. "모든 것이 다 예뻐. 손톱까지도 아름답군. 이런 손을 가졌으니 타자를 못 치는 것도 당연하지." "사실 타자가 서투른 것은 그 때문이에요. 큰소리 칠 일은 아니지만." 리사가 손을 빼는 것과 동시에 슬레이드가 들어왔다. "근무 시간에 손을 잡는 것은 엄금이야!"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앤드류, 조심하지 않으면 그녀의 남편한테 혼이 날걸." 앤드류가 무슨 말을 하려 했을 때 전화 벨이 울렸다. 슬레이드는 책상으로 향하는 리사에게, "내가 받지." 하고는 수화기를 들고, "네, 슬레이드 블랙웰입니다." 하고 말했다. 리사는 좀더 슬레이드를 바라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면서도, 등을 돌려 캐비닛 앞으로 다시 돌아갔다. "아아, 미치. 웬일이세요?" 파일을 한 손에 들고 캐비닛의 서랍을 열려고 하던 리사는 얼어붙은 듯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파일을 꼭 쥐고 있었기 때문에 손가락의 관절이 하얗게 변했다. "여기요." 앤드류가 파일 둘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리사는 깜짝 놀라 그곳에 파일을 넣었다. "그래요?" 다시 슬레으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축하합니다...... 네, 식사? 오늘 점심말입니까? 저어......." 리사가 슬레이드를 홱 돌아보며 말했다. "선생님, 오늘 낮엔 선약이 있는데요." 당황하여 재빨리 말하고 나서야, 그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슬레이드는 흘끗 리사를 돌아보다가 느닷없이 빙그레 웃었다. "그녀도 거기에? 가겠습니다. 물론 가고 말고요." "약속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슬레이드가 전화를 끊자 리사가 입을 비죽 내밀고 물었다. "상대가 누구였지?"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예정표를 들여다보았다. "아트 존즈로군. 전화를 걸어 예정을 바꾸도록 해줘요." "그녀가 온다고 했나?" 앤드류가 의미있게 히죽 웃었다. 슬레이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겠다는 듯 검은 눈을 빛내며 앤드류를 일별했다. "자네를 데려갈 생각은 없네, 앤드류. 그녀의 숙모가 있는 것만도 방해가 되니까." "모두들 냉정하군!" 앤드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럴 때도 있어.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슬레이드는 껄껄 웃었다. "그런데, 내게 무슨 용무지? 앤을 유혹하러 온 것뿐인가?" "아니, 잠시 할 말이 있어서 왔어. 5분 동안만 그 여자 생각을 잊으면 끝날 이야길세." "저어, 선생님." 리사가 저도 모르게 슬레이드를 불렀다. "왜 그러나?" "저어, 점심시간에 치과에다 약속을 했어요. 열 두시 조금 전에 나가도 될까요?" "아, 좋아요." 리사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빨강머리 가발은 백 안에 들어가고, 금발이 아름답게 물결치며 어깨에 흘러내려와 있었다. 상의를 뒤집어, 그린과 검정 체크를 밖으로 나오게 했다. 푸른 선글라스와는 어울리지 않았으나, 이 마당에 그런 것을 염두에 둘 수는 없었다. 멀리 테이블에서 사람이 움직였다. 리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슬레이드가 일어섰던 것이다. 그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리사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그를 보고도 놀라는 체조차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 고통을 참으며, 가까이 오는 그에게 웃어 보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저절로 따뜻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두서너 걸음 앞에서 발을 멈추고, 리사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눈앞에 서 있는 슬레이드는 강하고 남자다와,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그에게 이끌리고 마는 것이었다. 슬레이드는 남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굽혀 리사에게 키스했다. 하지만 너무 짧은 키스였다. 슬레이드는 곧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려 하는 리사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테이블로 향했다. "나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 슬레이드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숙모님은 당신이 온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슬레이드의 빛나는 눈이 리사의 눈을, 코를, 입을 찬찬히 훑어 보았다. 그의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으려니 그에게 몸을 던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어제처럼 길게 느껴지는 일요일은 다시 없을 것 같았어." 슬레이드는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랬어요." 미치가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이 지척에 있었다. 슬레이드의 핸섬한 얼굴을 좀더 쳐다보고 있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숙모님." 기분 탓인지 자기 목소리가 어색하게 들렸다. "나는 괜찮아, 슬레이드는 어떤지 모르지만." 미치는 즐거운 듯이 눈을 빛내면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리사는 얼굴을 확 붉히면서, 슬레이드가 끌어내 주는 의자에 앉았다. 앞으로 몸을 굽혀 의자를 밀어 주는 슬레이드의 얼굴이 리사의 머리에 닿을 만큼 가까이 있었다. "이상한 일도 다 있군." 슬레이드가 리사의 왼쪽 의자에 앉으며 조용히 미소를 띠었다. "리사가 쓰고 있는 향수는 우리 비서의 것과 같은 것이로군." 리사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비교되고 있다는 위기감에 신경이 곤두섰다. "어마, 그래요?" 목소리가 어쩐지 부자연스러웠다. "왜, 기분이 언짢은가?" 슬레이드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말을 하면, 두 사람 사이가 어느 정돈지 미치가 눈치챌 것이 아닌가! "질투할 필요는 없어. 노상 리사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지금 나는 리사하고 관계되는 것에 관해서는 무척 민감해져 있어." "이런 향수를 쓰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거예요.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것이니까." "리사에게 어울리는 향수야. 그렇지?" 미치가 끼어들었다. "여자답고 섹시하고 묘하게 황홀해지는 그런 냄새......" "어울린다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 옷도 어울리는군. 지금까지는 리사가 그린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아주 잘 어울려." "감사합니다." 리사는 속으로 깜짝 놀라고 있었다. "물론이지. 그린은 리사에게 제일 어울리는 빛깔이니까." 미치가 리사의 눈에 시선을 돌렸다. "그린......" 이 때, 리사에게 있어서 정말 다행스럽게도 웨이터가 아이스 버킷에 든 샴페인과 글라스를 가져왔다. "와아, 샴페인!" 리사는 천만다행이란 듯이 환성을 올렸다. 이번에도 위기일발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축하하는 기분이 나는군요." 이윽고 세 사람은 슬레이드의 제의에 따라 축배를 들었다. "새로운 작품의 완성을 축하합니다. 지금까지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시기를!" 잠시 동안 화제는 미치의 소설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줄거리나 등장인물 등등. 리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슬레이드가 다시 따라 준 샴페인에 손을 내밀었다. "잠깐." 슬레이드가 리사를 제지하고 상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미치, 편승하려는 거은 아니지만, 또 한가지 축하할 일이 있습니다." 의아해 하는 리사의 눈앞에서 슬레이드는 벨베트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속에서 나온 것은 찬란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리사는 시선을 빼앗기고 숨을 죽였다. "오늘 저녁에 줄 생각이었지만, 지금 이렇게 만났으니까 저녁까지 기다릴 수가 없군. 리사, 손을 내밀어봐요." 리사는 너무나 기뻐서 말도 하지 못했다. 기쁨으로 눈이 젖어 슬레이드의 얼굴이 뿌옇게 보였다. 그역시 검은 눈동자에 깊은 감동의 빛을 담고, 미소지으며 리사의 왼손을 잡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험상궃은 표정을 띠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지, 이것이?" 눈을 빛내며 자기 손을 내려다본 리사는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 결혼반지! 큰 일이다! 그만 반지를 미처 빼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우정의 심볼이에요. 오늘 아침 친구한테서 받은 거예요." 리사는 황망히 반지를 빼었다. "작아서 오른손 약 지에는 들어가지 않아요." 슬레이드가 과연 납득했는지는 의문이었다. 오른손에 쥔 금반지가, 화상을 입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뜨겁게 느껴졌으나, 그렇다고 백에 넣을 수도 없었다. 백을 열었을 때 슬레이드가 빨강머리 가발이라도 본다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나가다가 보석상에 갈까? 곧 늘일 수 있어." "괜찮아요." 리사는 얼른 금반지를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내가 고치곘어요." "어서 반지를 끼워 줘요, 슬레이드." 미치가 재촉했다. "리사가 반지를 낀 모습을 보고 싶어요." 슬레이드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 리사의 왼손 약지에 끼워 주자, 리사의 손이 억제할 수 없이 떨렸다. 슬레이드가 웃으며 보고 있었다. 사나이답고 활력에 넘쳐 있는 그는 얼마나 멋진가! 무슨 일이 있건 그에의 사랑은 변치 않을 것이다. "어때?" 슬레이드가 물었다. "무척 아름답군요!" "정말 훌륭하구나!" 미치는 리사의 손을 잡고 가까이 끌어당겨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구나. 지금 와서 말이지만, 나는 두 사람이 이렇게 될 줄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불꽃이 튀고 있었으니까." "그것 봐, 내 말이 맞지 않아?" 슬레이드가 리사를 보고 웃었다. "결혼식은 언제죠?" 미치는 여전히 반지에 시선을 빼앗긴 채였다. "멀지 않은 장래에...... 아니, 곧 할 겁니다." 미치가 건배하자고 했기 때문에 세 사람은 다시 글라스를 부딪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식사를 주문했다. 그러나 리사는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슬레이드의 태도에는 전혀 불 안을 느끼게 하는 점이 없었다. 다정하게 손을 잡아 주거나 따뜻한 눈초리로 바라보곤 했다. 불안의 원인은 전적으로 리사의 쪽에 있었다. 양심의 가책 때문인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접시가 치워진 뒤에도 미치와 슬레이드는 좀처럼 일어서려 하지 않았다. 리사는 시간이 지나자 걱정이 되었다. 손목시계의 바늘이 한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앤 엘드리지의 점심시간은 한 시까진데. 두어 번 구실을 대어 돌아가려 했으나, 슬레이드는 한껏 즐거워하고 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막 약혼했는데 금새 돌아가겠다고 할 수도 없고, 결국 누군가가 먼저 돌아가자고 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겨우 슬레이드가 아쉬운 듯이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이제 두 시가 되어가는 군. 좀더 곁에 있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 사무실에 돌아가야 하니까." "할수없죠." 리사는 겉으로 섭섭한 체하면서,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슬레이드는 일어서서 리사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미치에게 인사한 다음, 다시 리사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만나러 가겠어, 늦어도 일곱 시까지는." "좋아요." 리사는 얼굴을 들고 슬레이드의 가벼운 키스를 받았다. 이렇게 된 이상 슬레이드보다 먼저 사무실로 돌아갈 가망은 없었다. 도중에 앤 엘드리지로 변신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미치와 몇 분 동안 이야기하다가, 지난번에 써먹은 거짓말을 다시 써먹을 수밖에 없었다. 수잔과 페그를 만나야 하므로 미치와 같이 들어갈 수 없다고. "되도록 빨리 돌아오너라." 미치는 한마디의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 알고 있어. 친구들한테 약혼 반지를 보여주고 싶어 견딜 수 없을테지?" "네, 그래요." 리사는 천만다행이라 여기고 레스토랑을 정신없이 달음질쳐 나왔다. 9장 리사는 다시 앤으로 돌아가 - 이번에는 반지와 같은 사소한 일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리사가 아닌 앤 엘드리지로서는 실수가 없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날카로운 슬레이드의 눈을 대하자 역시 겁을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시가 지났어, 알고 있나?" 그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 오만한 태도로 책상 옆에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늦었다는 것은 알았으나, 시간이 이렇게까지 된 줄은...... 정말 죄송합니다." 리사는 깊이 사과하고, 돌아오는 길에 연습해 둔 대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치과 의사가 마침 외출한데다, 겨우 차례가 왔을 때 급한 환자가 찾아왔어요 - 남자아이가 앞니를 빼겠다고. 그냥 돌아오려 했지만, 곧 끝난다고 하기에 기다렸어요. 그런데 좀처럼 끝나지 않아 그만 이렇게 늦어지고 말았어요. 늦은 만큼 저녁에 남아 일하겠어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설명을 듣고 난 슬레이드의 음성이 약 간 부드러워졌다. 책상으로 가려면, 슬레이드가 서 있는 곳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된다. 리사는 할 수없이 슬레이드 옆을 지나, 핸드백을 서랍에 넣고 의자에 앉았다. 비서답게 자세를 바로 하고. "고맙습니다. 일찍 나간데다가 늦게 돌아와 무어라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결코 일을 소홀히 여겨서가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슬레이드가 조용히 대답했다. "사실은 나도 방금 돌아왔어." "어마, 그러세요?" 긴장 때문에 목소리가 커졌다. 리사는 애써 명랑하게 말했다. "둘 다 상당히 지각한 셈이군요." "음, 다 같이 그 나름의 사정이 있었으니까 도리가 없지. 앤은 치과에서 기다리고 나는......" 슬레이드는 한 순간 말을 끊었다. "나는 약혼하고 오는 길이야." "정말이세요? 그렇다면 너무 일찍 돌아오셨군요! 축하합니다." 이 때처럼 난처한 생각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고마와." 그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약혼 발표가 끝났으니 곧 나가겠지 하고 생각했으나 그는 좀처럼 나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책상 옆에 서 있었다. 빨리 나가지 않으면 머리가 돌 것만 같았다. "블랙웰 선생님, 다른 용무는?" 리사가 살짝 타진해 보았다. "오늘은 더 이상 일이 없나요?" 제가 할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한 가지 묻고 싶은데......" 그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네, 무슨 일이지요?" "이것이......" 슬레이드는 손을 내밀어 책상 서랍을 열었다. 제일 위에 미치의 파일이……. "어째서 이 서랍에 들어가 있지?" "이 파일말씀인가요?" 목이 타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오늘 아침 선생님이 가져오신 서류 속에 들어 있었어요. 다른 일은 오전에 끝났지만 이것만 남았기 때문에, 서랍에 넣어 두었어요. 책상 위에 그냥 두는 것보다 나을 듯싶어서요." "그래?" "곧……정리하겠어요." 파일을 들고 캐비닛으로 가는 동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슬레이드가 천천히 따라와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까지 곁에 있을 생각인가? 신경이 곤두서서 금세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식사할 시간은 있었나?" 갑자기 슬레이드가 물었다. 리사가 미치의 파일을 캐비닛 서랍에 넣으려 하고 있을 때였다. "아닙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미용에는 굶는 것 이상 좋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요." 몸매에 시선이 쏠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슬레이드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리사의 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 옷이 잘 어울리는군. 아주 어울려." 그는 리사의 상의 깃에 가만히 손을 가져갔다. 리사가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그린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눈빛에도 맞고." 슬레이드의 손이 상의의 단추로 옮겨 갔다. 리사는 겨우 힘을 내어 몸을 빼었다. "안 돼요, 블랙웰 선생님!" "뭐가 블랙웰 선생님이야!" 슬레이드가 무서울 만큼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가 메아리처럼 리사의 귓전에서 울리고 있는 동안, 슬레이드의 손이 그녀의 팔을 홱 잡아채고 난폭하게 끌어당겼다. 리사는 놀라서 숨을 죽인 채 그의 가슴에 안겼다. 당장에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 여기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듯 슬레이드의 입술이 겹쳐져 왔다. 야수를 연상케 하는 거친 키스……입술이 아팠다……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의 공격이 계속되었다. 리사는 힘이 빠졌다. 설사 저항할 의사는 있다 해도 힘이 없었다.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분노를 발산시키고 나서야 그는 손을 놓았다. 리사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쳐, 캐비닛에 기대고서야 겨우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슬레이드가 다시 다가와서 리사를 가두는 자세로 캐비닛에 양손을 짚었다. "나를 완전히 바보로 아는 모양이군." "이유가 있어요, 슬레이드. 설명할 기회를 주세요." 가슴이 두근거려 숨도 쉴 수 없었다. 격한 분노의 키스에 아직도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도 깨닫지 못했지. 하지만 이대로 계속 속고만 있을 줄 알았나, 리사?" 슬레이드는 여전히 성난 표정으로 입을 한일자로 꽉 다물었다. "아니에요." "아니라니, 뭐가 아니야! 아까 리사가 결혼반지를 낀 것을 보는 순간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어." 그의 목소리는 환멸을 느끼는 동시에 경멸하듯 일그러져 있었다. 그때 탄로난 것을 알았다면 좀더 설명하기가 쉬웠을 텐데. 슬레이드는 모든 것을 알고서도 리사에게 거짓말을 더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는 도망칠 길이 없다. "나는……." 리사는 그의 무섭고 엄한 얼굴을 보고 말을 더듬었다. "더 이상 거짓말을 듣고 싶지 않아!" 슬레이드는 리사의 설명을 가로막고, 더 이상 말을 못하게 하려는 듯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리사는 눈을 감았다. 금속의 찬 감촉이 전해져 왔다. 그러자 슬레이드가 갑자기 그녀의 왼팔을 비틀어 올렸다. "그 반지는 어떻게 했지?" 팔도 아팠지만 그 이상의 고통이 엄습해 왔다. 슬레이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찔렀다. 한순간 아무 말도 못하고 잠자코 있자, 그는 더욱 힘주어 팔을 붙잡았다. "호주머니에 있어요." 리사는 너무도 아파 비명을 질렀다. "온기가 전해지기도 전에 빼버렸군 그래." 슬레이드는 험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리사의 왼손을 높이 들었다. 그러고는 언짢은 눈초리로 결혼반지를 바라보고 싸늘하게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끼워준 반지를 재빨리 빼고 이것으로 갈아 끼었군, 그렇지?" "잠깐만 내 말을……." "듣지 않겠어!" 슬레이드의 또 다른 손이 리사의 목에 닿았다. 검은 눈이 위협하듯 이글이글 불타고, 입가에는 냉혹한 빛이 떠돌고 있었다.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 그러나 리사는 결코 겁을 먹지 않았다. 아무리 분개 했다 하더라도, 그가 육체적으로 자기를 손상시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말만으로도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데, 손까지 댈 리가 없지 않은가. 이때 접수계의 문이 열리며 앤드류가 불쑥 나타났다. 뜻밖의 장면을 목격한 그는 입을 멍하니 벌리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슬레이드, 이게 대관절 무슨 짓인가?" 겨우 환상이 아니란 것을 알았는지, 앤드류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앤이……." "앤이 아니야." 슬레이드는 리사의 목에 대었던 손을 위로 올려 가발을 벗기려 했다. 리사는 저도 모르게, "앗" 하고 작게 비명을 지르고는 정신없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슬레이드 기다리세요. 핀으로 고정시켰어요." "좋아, 핀을 빼고 당신 손으로 직접 벗도록 해. 이 못된 여자 같으니라구!" 슬레이드가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그의 몸에서는 분노가 풍겨나 오는 것 같았다. 리사가 떨리는 손으로 핀을 뽑고 있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금발이 물결치며 어깨로 흘러내렸다. 앤드류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것 봐." 슬레이드는 불타는 듯한 빨강머리 가발을 앤드류의 눈앞에 내밀었다. "자네는 언제나 빨강머리를 노래처럼 되뇌고 있었지? 이거나 가져가게!" 앤드류는 기계적으로 가발을 받아들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하며 눈썹을 치켜올리고 슬레이드를 바라보았다. "어서 나가!" 앤드류는 흘끗 리사에게 시선을 던지고 나가 버렸다. 조용히 문이 닫히자, 슬레이드는 다시 리사에게 눈을 돌렸다. 그러나 앤드류가 끼어들었던 탓으로 아까보다는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슬레이드는 평가하듯 리사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용케 가발 생각을 했군, 리사. 새빨간 거짓말에 어울리는 빨간 가발. 앤과 리사가 동일인물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어. 리사도, 속일 수 있다는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랬겠지?" "네."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리사는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를 뒤고 쓸어넘기고, 그 손을 목으로 가져갔다. 긴장감으로 인해 목이 뻣뻣하고 아팠다. "눈빛을 감추는 수법도 놀라와, 거침없이 나오는 거짓말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리사는 거칠게 슬레이드한테 끌어안겼다. 위험한 예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순간, 그의 입술로 입이 막혔다. 탐하는 듯한, 분노가 곁들인 키스가 계속되었다. 언제까지나……. 리사는 어느 틈에 입술을 열어 그에게 키스를 되돌리고 있었다. 슬레이드는 점점 더 열띤 호소를 해왔다. 여기에 답하여 리사의 몸속에서도 불길이 타올랐다. 슬레이드의 억센 포옹에 응하여 리사는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았다. 아, 그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고 있다. 속인 일도 용서해 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감에 젖어든 순간, 슬레이드가 홱 머리를 들었다. 놀라서 눈을 뜨자, 그가 자기 혐오와 멸시의 표정을 띠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찌르는 듯한 아픔이 가슴을 꿰뚫었다. 리사가 슬레이드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건,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슬레이드는 난폭하게 리사의 몸을 떼밀고는 몇 걸음 걸어가다 홱 돌아서더니, 어깨에 힘을 주고 무서운 얼굴로 물었다. "정말 나를 사랑하나? 나를 사랑하는 이유는 단지 당신에게 모든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겠지?" "아니에요! 그 반대예요. 제가 어떻게 설명해야 믿겠어요?" 슬레이드는 법에 저촉되지 않게끔 미치의 돈을 이용하려 하고 있다. 이것을 폭로해야 할 사람이 그를 사랑하다니, 이렇게 딱한 일이 또 있겠는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그만 결심이 무디어지고 마는 것이다. 망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슬레이드는 리사에게 등을 돌린 채 괴로운 듯이 천장을 쳐다보았다. "왜 좀더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안타깝다는 듯 숨을 토해내며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는 모든 일이 납득이 가는군. 리사에게 비서로서의 기량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원래 비서가 아니니까. 직업 소개소는 리사의 이름도 묻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네." "내가 리사를 임시 비서로 착각한 것은 엄청난 실수였어." 슬레이드가 씁쓸히 웃었다. "녹색 눈도 선글라스를 쓰면 감출 수 있었으니." "사실이에요." "학교 친구들이란 것도 리사의 창작임이 분명해. 미치한테 낮에 어디 가 있는지 말하지 않으며 의심을 받을 테니까 꾸며댄 것이겠지. 찰스턴에 대학 동창이 있다는 것도 거짓말이지?" "네." "그래서 리사는 시내에 대해 전혀 상식이 없었던 것이군. 브룩클린 가든에는 간 일도 없었지. 길가에 상점이 있다는 것도 알았을 리가 없지, 그 길을 지나간 적이 없으니까." "네, 당신 말이 모두 맞아요. 근처에 간 적도 없어요." 리사는 모든 것을 다 시인했다. 슬레이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찔렀다. 이대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평소에는 공격을 받을 경우 금방 반격을 했고, 절대로 상대에게 말려들지 않았는데. 슬레이드가 홱 몸을 돌려 허리에 손을 얹고 리사를 노려보았다. "지난번에 방에 들어왔을 때는 책상을 정리한 것이 아니라 서류를 뒤지고 있었지? 무엇을 찾았나? 탈메지의 파일인가?" "네." 리사는 얼굴을 돌리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왜? 무엇이 필요했나?" "당신이 숙모님 돈을 어떻게 하려는지, 그것이 알고 싶었어요." 리사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도대체 왜 그런 못된 짓을 했지?" 슬레이드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되죠? 당신이 숙모님 재산을 고스란히 손에 넣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어야만 한단 말이에요?" 금세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리사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눈을 크게 떠서 겨우 눈물을 참았다. "그래, 파일을 손에 넣은 결과 무엇을 알아냈지?" 슬레이드가 다그쳤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어요! 첫 페이지만 열어보고 그 다음은 보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서랍에 도로 넣었나. 나중에 볼 생각으로? 자아 이제 탈메지를 비서실에 있게 할 생각은 없어." 리사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슬레이드를 쳐다볼 용기조차 없었다. 그의 까만 눈은 몹시 싸늘할 게 분명하다. 좀더 일찍, 이런 파국이 올 것을 예측했어야 했는데. "결국 당신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어요. 다행이군요, 슬레이드." 리사는 자포자기에 빠져 말을 내뱄었다. "다행스러운 건 아무 것도 없어. 리사 같은 여자를 신임했다니 정말 나는 어리석었어." "리사 같은 여자를 신임했다? 이 얼마나 가증스런 말인가! 슬레이드가 먼저 비난을 퍼붓다니, 얼토당토않다!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가슴에 치밀어올랐다. 너무나 많은 감정이 들끊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동전의 앞뒷면이 하나로 합친 듯이, 사랑과 미움이 마음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요!" 리사가 강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면, 그건 자존심이 상해서일 뿐이에요. 당신은, 비록 2,3일이지만 나한테 속은 것에 분한 것뿐이에요. 남자로서 자기만 못한 여자한테 속은 것이 자존심이 상한 것이겠죠? 당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내게 속았다는 분함뿐일 거예요." 슬레이든 위협하듯 한 발 앞으로 나왔으나, 더 이상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이 리사의 창백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분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을 증명하고 싶은거지, 리사? 리사가 아무 양심의 가책도 없이 나를 이용했다는 사실 말인가?" "그게 아니에요." 리사가 당돌하게 대답했다. "나는 다만,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솔직하게 알고 싶을 뿐이에요." "내 생각을 알고 싶은가?" 슬레이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가르쳐 주지. 나는 왜 이토록 탐욕스런 여자와 약혼해 버렸는가를 생각하고 있어!" 리사는 뺨을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가슴이 죄어들었다. 그 반지를……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속의 반지를 찾고 있으려니, 딱딱한 보석이 손에 닿았다. "그런 일은 간단히 해결할 수 있어요." 리사의 쉰 목소리가, 상처 입은 동물의 비명같이 울렸다. "반지를 돌려주면 더 이상 고민할 것이 없겠죠?" 리사가 흘끗 반지에 시선을 떨군 순간, 슬레이드는 이미 눈앞에까지 와 있었다. 그는 리사의 손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앗고 그녀의 왼손을 꼭 쥐었다. "반지를 돌려 받을 생각은 없어!" 슬레이드는 딱 잘라 말하고, 리사의 약지에 끼여 있는 결혼반지를 뺐다. 리사는 붙들린 손을 빼내려 했으나, 슬레이드의 힘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결혼반지가 빠지고 다이아몬드 약혼반지가 난폭하게 리사의 손가락에 끼워졌다. "이 반지를 계속 끼고 있도록 해." "싫어요!" "안 돼! 내 말을 들어!" 슬레이드가 리사의 어깨를 붙잡고 격렬하게 흔들었다. "여기서 나가거든 곁눈질도 하지 말고 미치의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고 있는 거야. 알겠나? 리사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변화도 없었던 거야." "실제로는 변화가 있었지 않아요?" "아니야, 없었어." 슬레이드가 싸늘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 내가 찾아가거든, 리사는 행복한 약혼자답게 행동하는 거야. 미치가 마음에 그리는 이미지에 꼭 맞게 연기를 해야 해." "어째서죠?" "우리는 멀지 않아 결혼하는 거야. 미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부부가 되어야 해.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리사의 거짓말을 알게 되었다는 것 뿐이야. 확신은 없지만――아마도 리사는 실토를 할 생각이 없겠지. 그래도 결혼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그것을 잘 기억하기 바라." "그러면……" 리사는 다소의 희망을 품고, 망설이면서 물었다. "숙모님 재산은 어떻게 하죠?" "걱정하지 않아도 돼." 슬레이드가 싸늘한 웃음을 띠었다. "결혼해 버리면, 내 것이 리사 것이고 리사 것이 내 것이니까." 리사는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나하고 결혼하겠다는 건가요?" "쓸데없는 생각은 할 필요 없어." 슬레이드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런 말을 하면, 리사가 그 때문에 나하고 결혼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지 않겠나?" "슬레이드." 리사는 호소하듯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뒤!" 그는 리사의 손을 놓고 심호흡을 하며 물러섰다. "지금은 이것으로 끝내기로 해. 좀 생각해 볼 일이 있어. 미치한테로 돌아가." 억지 웃음이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예정된 귀가 시간보다 좀 이르지만, 리사라면 돌아가는 동안에 그럴듯한 구실을 생각해 낼 수 있겠지." "쓸데없는 걱정은 마세요." 리사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여섯 시에 가겠어." 슬레이드는 리사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오만하게 말했다. "집에 얌전히 있어야만 해." "알았어요." 리사도 슬레이드에 못지않게 오만하게 말했다. "약속할 테니 염려 마세요!" "약속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리사가 집에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리사는 말없이 슬레이드를 바라보고, 책상으로 돌아가 서랍에서 백을 꺼내 들었다. 몹시 자존심이 상해, 눈물로 주위가 뿌옇게 보였다. 슬레이드의 시선이 리사의 동작 하나하나를 뒤쫓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리사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데도. 접수계에서는 앤드류가 책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엘렌과 함께 호기심에 찬 눈초리로 리사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슬레이드와의 말다툼 소리가 일부는 들렸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몹시 흥분하여 큰 소리로 말했으니까. 리사는 앤드류와 엘렌의 시선을 피하면서 정면 출입구로 향했다. 그러자 앤드류가 일어서며 그녀를 불렀다. "앤……." 리사는 고개를 돌려, 의아해 하는 앤드류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내 이름은 리사 탈메지예요." "탈메지?" 앤드류가 멍청히 반문했다. 그러나 리사는 이미 밖으로 나와 있었다. 10장 거실은 평소와 다름없이 아늑했다. 안절부절못하고 손을 비비며 서성거리고 있던 리사는, 미치가 들어오자 걸음을 멈췄다.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겁이 안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실행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슬레......" 부자연스럽게 목청이 높아졌기 때문에 얼른 다시 말했다. "슬레이드는 여섯 시쯤에 온다고 했어요." "응, 아까 연락이 왔어." 미치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그랬군요." 리사는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 몰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슬레이드와 단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어요." "알고 있어. 서로 좋아하게 되면 당연히 둘이서만 있고 싶지. 나는 아직 그런 마음을 잊어버릴 정도로 나이가 들지는 않았어."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리사는 말을 더듬으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숨을 들이마셨다. "슬레이드와 단둘이 잇고 싶은 심정은 진정이지만, 숙모님이 옆방에 계셔 주세요." "옆방에?" 미치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어째서? 설마 도움을 청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것이 아니라...... 이야기 내용을 들어 주셨으면 해서예요." 리사는 시선을 떨구고 손을 깍지끼었다. "이야기를 듣는다고? 왜?"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리사는 말문이 막혀, 깍지 끼었던 손을 풀고 금발에 손을 가져갔다. "분명하게 말을 해야 알지 않겠니?" "저어...... 슬레이드는....... 숙모님의 돈을 훔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고 싶지 않은 말이 드디어 입 밖으로 나왔다. "뭐라고?" 미치는 입을 크게 벌렸다가 깔깔 웃었다. "농담일테지, 리사?" "농담이라면 좋겠지만...... 사실이에요." "어쩌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미치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는 여기 왔을 때부터, 그렇지 않은가 생각했어요. 그래서 슬레이드에게 직접 부딪혀 보았더니 자백했어요." 가슴이 메고 눈물이 솟구쳤다. 리사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미안하지만, 네 말은 믿을 수가 없어." 미치가 한 마디에 힘을 주며 천천히 말했다. "숙모님으로서는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이 당연해요." 리사는 흐려진 녹색 눈으로 숙모를 돌아다보았다. "그래서 증거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증거?" 리사는 당황했다. 앤 엘드리지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밖의 여러 가지 거짓말에 대해서도. "제 말을 믿지 못하시는 게 당연해요. 지금 당장은 그렇더라도, 문밖에서 들어주세요.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슬레이드에게 자백시킬 테니까요." "리사." 미치가 가까이 와서 리사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너 진정으로 하는 말이냐?" "네." 리사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점심때는...... 반지까지 받지 않았니? 결혼 할 생각이 아니었어?" "네. 하지만, 슬레이드를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그런 사람을 사랑하게 되다니, 엄청난 비극이에요."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입술이 떨리고 처량한 말만 나올 뿐이었다. "너는 분명히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어." 미치가 자신 있게 말했다. "슬레이드는......" 이 때 현관 벨이 울렸다. 리사는 온 몸을 긴장시키고 숙모에게 진지한 시선을 던졌다. "왔어요. 아시겠죠? 듣고 계세요." 미치는 입을 꼭 다물고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물론 네 오해겠지만, 이야기는 듣기로 하마." "숙모님 말씀대로라면 오죽 좋을까요." 미치는 리사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고 나서 손을 떼었다. "내가 나가 문을 열어 주겠어. 그 다음엔 슬레이드만 방에 들여보내고, 나는 밖에서 듣고 있겠다." 숙모가 거실에게 나가 현관으로 향하자, 리사는 뒤쫒아 가서 그만두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약해져서는 안 된다. 숙모를 위해서나 슬레이드를 위해서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리사가 이렇게 마음에 다짐하면서 눈에 괸 눈물을 닦았을 때 슬레이드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입구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고 어두운 눈으로 리사를 바라보았다. 엄하고 싸늘한 표정은 과연 접하기 어려운 인간이라는 인상을 주었으나, 그의 모습을 보니 역시 가슴이 뛰었다. 큰 키, 넘치는 생명력, 자석처럼 불가사의한 힘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용케 집에 있었군." "있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음, 그렇군. 하도 거짓말에 능한 사람이라서 믿을 수가 있었어야지." 움찔하는 리사를 곁눈으로 보고 그는 등을 돌렸다. "음료수를 마시고 싶군." 슬레이드는 성큼성큼 술병이 놓여 있는 왜건으로 가서 글라스에 얼음을 넣었다. 그러고는 꼿꼿하게 서 있는 리사를 훑어보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리사도 술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 괜찮아요." 그러나 슬레이드는 이 말에 상관없이 리사의 음료를 만들었다. 리사는 심호흡을 하고 용기를 내어, 왜건 쪽으로 향하면서 흘끗 문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미치가 듣고 있을 것이다. "슬레이드, 할 이야기가 남아 있겠죠?" "우선 이것부터 마시고." 슬레이드가 리사에게 글라스를 내밀었다.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필요치 않아요." "그러지 말고 마셔." 부드러운 음성이었으나, 아직 화가 풀린 것 같지는 않았다. 전보다 더욱 자기를 억제하고 있을 뿐이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리사는 글라 스를 받아들었다. 이런 마당에 하찮 은 일로 다투고 싶지 않았다. 손끝에 글라스의 냉기가 전해져, 싸늘한 가슴이 더욱 차가워졌다. "할 이야기가 남아 있어요, 슬레이드." 리사가 먼저 운을 떼었다. "알고 있어." 그는 글라스를 기울이고 리사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보브 터너가 돌아왔어. 앤드류한테서 그의 이야기는 들었겠지? 우리 사무실의 또 하나의 멤버지. 상의를 하고 왔으니까, 내일 볼티모어에 갈 수 있어. 즉, 결혼하기 전에 리사의 부모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지." "슬레이드......" 리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다. "나는 극히 간소하게 식을 올리고 싶어." 슬레이드는 리사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리사의 가족이 참석할 수 있게 볼티모어에서 식을 올리는 것이 좋을 듯 싶어. 어때? 리사도 그것이 좋겠지? 준비는 일주일이면 충분해." "그만둬요!" 리사는 눈물이 가득 괸 눈을 치뜨고 외쳤다. "그만두다니?" 억제하고 있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한 듯, 슬레이드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결혼하는 거야!"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에요. 좀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아요?" "예를 들면?" 슬레이드는 다시 자제심을 되찾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리사의 눈물을 보았을 텐데도 표정은 조금도 온화해지지 않았다. "예를 들면, 숙모님 일 같은 것 말이에요." "미치 말인가? 미치에 대해 무슨 상의할 것이 있나?" 그는 글라스를 빙글빙글 돌리며, 그 속에서 원을 그리고 있는 얼음을 들여다보았다. "물론 결혼식에는 미치도 초대해야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에요. 분명히 알고 있을 텐데요?" "암, 알고 있지. 미치에 대해 리사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뻔하지. 돈, 돈, 돈, 언제나 돈이지.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 일은 걱정할 것 없어. 결혼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거야. 나머지는 내가 처리하겠어." "얼마나......" 리사는 잠시 말을 끊었다. 도저히 그냥은 다음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숙모님의 돈을 얼마나 훔치셨죠, 지금까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리사?" 슬레이드가 글라스를 입으로 가져가며 쓴웃음을 지었다. "리사 몫을 내가 가로채기라도 할 줄 아나?" 리사는 새파랗게 질렸어나, 용기를 내어 물고 늘어졌다. "솔직하게 대답하세요. 얼마나 되죠?" 슬레이드는 술을 마시고 나서 글라스에 시선을 떨구었다. "리사에겐 그렇게도 돈이 중요한가?" "당신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요?" "닥쳐!" 쨍강하고 글라스가 왜건 위에서 소리를 냈다. "나는......" "실례하겠다, 리사." 입구에서 미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엿듣고 있을 수만은 없어." 리사는 깜짝 놀라 허둥대며 숙모를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미치는 우스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희극인지 비극인지를 끝까지 듣고 있어야 할지 무척 망설였어!" 슬레이드가 리사에게로 향하면서 성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미치에게 엿들으라고 했나?" "네." 리사가 몸을 움츠리고 대답했다. "리사가 하는 말이, 당신이내 돈을 훔친다는 거예요." 미치는 어린아이 달래는 듯한 얼굴로 리사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정말. 그런 어리석은 말은 하지도 말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막무가내지 뭐예요. 할 수 없이, 리사의 말대로 엿듣기로 했던 거예요. 정말 이상한 아이라니까!" "저는 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리사가 어색하게 변명했다. "제일 좋은 방법이라니, 누구를 위해서 좋다는 것이지?" 슬레이드는 여전히 화를 내며 다그치고, 갑자기 등을 돌렸다. "아니, 대답할 것도 없어, 그건 뻔한 일이니까." "리사는 그것이 당신을 위한 길이라고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미치는 당장에라도 웃음을 터뜨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당신도 이제 그만 놀리고 리사에게 사실을 설명해 주세요. 가엾게도 이 애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어요." "알겠습니다." 슬레이드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이 때 전화가 울리고, 현관으로 나가는 가정부의 발소리가 들렸다. 리사는 슬레이드의 상기된 얼굴을 비통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나쁜 짓을 폭로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를 위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도 슬레이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니. 이 얼마나 슬픈 오핸가! "마님, 전홥니다." 무뚝뚝한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치는 흘끗 리사를 바라보고,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하듯 생긋 웃었다. 리사는 방에서 나가는 숙모를 바라보면서, 그럴 리가 없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문이 닫히자 슬레이드가 한숨을 쉬었다. "리사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그 밖에 방법이 없지 않아요?" 리사는 버럭 성을 내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숙모님 돈을 갈취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 "그야 그럴테지!" 슬레이드가 언짢은 낯으로 대꾸했다. "리사의 몫이 없어질 테니까! "그런 것은 지금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아요, 슬레이드? 어차피 숙모님은 내 말을 믿지 않으니까요." "믿지 않아서 다행이야." "믿는다 해도 숙모님은 당신을 용서했을 거예요. 지금까지 얼마나 훔쳤는지 모르지만, 제발 돌려주세요, 슬레이드. 숙모님은 당신을 좋아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당신이 훔친 돈을 돌려주지 않는다 해도 경찰에 고 발하지는 않겠어요." "뭐라고?" 슬레이드는 얼굴을 찌푸리고 리사의 진지한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조금은 도움이 될 거예요, 찰스턴에서 직장을 구해 일하면......." 여기까지 말했을 때, 슬레이드가 성큼성큼 다가와 어깨를 붙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리사는 숙모의 돈을 노린 것이 아닌가?" "아니에요, 나는 다만 그런 체......" "뭐? 그것도 거짓말이었나?" 슬레이드의 성난 표정이 차차 무너지면서 웃음이 떠올랐다. "진지하게 들어주세요, 슬레이드." 슬레이드의 손이 닿으면 마음이 산란해져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나는 숙모님을 지키고 싶었어요." 리사는 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그의 셔츠의 맨 위 단추를 바라보았다. "돈을 노리는 것처럼 보이면, 같은 입장이라 여겨 당신이 털어놓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숙모님은 웬만한 증거를 가지고는 믿지 않아요. 왜냐하면 당신을 매우 좋아하니까요. 처음에는 나도 설마 당신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슬레이드의 어깨가 약간 떨렸다. 다시는, 자존심이 강한 그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지는 것은 보기 싫었다. "슬레이드, 사랑만 있으면 그만이에요. 돈은 돌려드리세요. 돈 따위는 필요치 않아요." 슬레이드의 목구멍 깊숙이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고통의 한숨일까, 회한의 중얼거림일까...... 리사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 소리가 웃음소리 로 변했다. 반신반의하며 눈을 떴더니, 슬레이드가 얼굴을 젖히고 껄껄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리사는 발끈하여 그를 노려보았다. "모르겠어?" 슬레이드는 눈을 빛내며, 유쾌한 듯 리사의 성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단 1센트도 미치의 돈을 훔치지 않았어." "정말이세요? 아아, 다행이에요!" "그뿐만 아니라......" 그는 리사의 턱에 손을 대고 얼굴을 쳐들게 했다. "훔칠 생각조차 한 일이 없어." "하지만...... 하지만, 말했지 않았어요?" "훔칠 생각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어." 슬레이드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리사가 너무나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부인할 수 없었을 따름이지." "그렇다면, 손을 잡자고 한 것은 무슨 뜻이었죠?" 그의 말을 믿고 싶었으나, 역시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사가 미치의 돈을 탐내는 줄 알았기 때문이지. 미치는 훌륭한 사람이야. 나에게는 친척이나 다를 바 없어.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를 리사로부터 지키고 싶었어. 그런데, 리사는 오히려 나에게서 그녀를 지키려 했던 것이로군." "어머나, 그랬었군요, 슬레이드!" 우습다고 해야 할지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지....... 리사도 웃음이 터져 나와 같이 웃기 시작했다. 슬레이드는 웃으면서 리사의 허리에 팔을 감고 끌어 당겼다. 그의 체온 이, 그 동안 가슴을 덮고 있던 싸늘한 것을 녹여 주었다. 마음은 행복감으로 가득 차고,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장이 커플이었군!" 슬레이드가 리사의 머리에 뺨을 대고 웃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의 마음을 속인 적은 없어요." 리사는 슬레이드에게 안겨 황홀한 마음으로 올려다보았다. "거짓으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한 일은 한번도 없어요." "내가 리사를 사랑한다고 한 것도 모두 진실이야." 슬레이드는 몸을 구부려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