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꿈 (RULES OF THE GAME) 저자: 페니 조던 삼중당 R-240 1986년 고영호 옮김 1장 "미안하다, 바넷사, 그러나 어쩔 수 없잖아." 조금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투로, 개빈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입장에 서게 된 것이 처음은 아니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 바넷사는 항상 두 살 위인 오빠를 돕고 있다. "사진의 구도는 알고 있지? 모델에게는 잘 설명해 두었으니까 걱정할 것 없다." 개빈은 스튜디오의 도어를 열고 히죽 웃었다. 도어가 닫힌 순간, 바넷사는 혀를 찼다. 오빠도 참! 물론 오늘의 일은 딱 부러지게 거절해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오빠가 필사적으로 일해온 덕분에 지금은 크레아웰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카메라맨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자기가 맡은 광고사진 일을 누이동생에게 맡기고, 최근 금의환향(金依還鄕)한 이 고장의 영웅 제이 코틀랜드의 환영회에 가버리다니! 바넷사는 화가 나는 것을 참으면서 스튜디오 안의 세트를 체크하고 불만스러운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오빠가 이 고장 최대의 광고주 하드펜스로부터 신제품의 전국적인 광고 캠페인 일을 맡은 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예산이 참새의 눈물만큼이나 적어 불만이다. 이 회사는 경비 절감에 혈안이 되어, 광고비 지출을 극도로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촬영도 로케가 불가능하여, 남국의 풍경을 그린, 세트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드펜스에서 발매되는 신제품은 남성용 화장품으로, 회사측은 늠름하고 섹시한 매력적인 남성의 이미지를 담은 광고를 희망하고있다. 회사측은 <되도록 고상한> 광고라는 조건을 내세우고있으면서도 사실상 누드나 다름없는 남성 모델을 출연시키도록 지시하고 있었다. 개빈은 그러한 촬영을 갑자기 누이동생에게 맡기고, 공회당에서 열리는 제이 코틀랜드의 환영회에 가버렸다. 축구 국가대표팀의 영웅으로 이 고장출신인 제이 코틀랜드는, 최근 그가 옛날에 소속하고 있던, 별로 시원치 않은, 고향축구팀의 스폰서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34세로 이미 현역에서는 은퇴했으나, 소문에 의하면 축구장에서 터득한 전술을 재치있게 비지니스에 응용하여, 사업에서도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도시에서 제이 코틀랜드의 박애주의적 선행(善行)에 감동하지 않은 사람은 나 하나뿐인지도 모르지. 물론, 자기 고향의 마이너 팀을 상위로 끌어올리려는 그의 계획과, 최근 그가 인수한 쓰러져가는 스포츠웨어 회사와의 관계가 수상쩍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은 나 말고도 또 있을것이다. 제이 코틀랜드의 지원을 받아도, 크레아웰의 축구팀이 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다는 보장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바넷사는, 자기가 오빠의 무책임한 태도에 대한 울분을 다른 사람에게 터뜨리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촬영은 오빠가 하기로되어 있었고, 특히 내가 이 일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데. 오빠의 놀리는 듯한 시선을 떠올린 바넷사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22세나 되었는데 아직도 애인이 없다니." 누이동생의생일날에 개빈은 이렇게 놀려댔다.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고 싶었지만, 거짓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바넷사는 잘알고 있었다. 이런 작은 도시에 살려면 프라이버시가 침해당하는 것 정도는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튜디오 안을 힐끗 쳐다 본 바넷사는 벽에 걸려 있는 인물 사진이 눈에 들어오자, 눈살을 찌푸렸다. 어깨까지 늘어뜨린 검은 머리, 진주처럼 윤기 있는 살결, 나무랄 데없는 타원형의 얼굴에 반짝이고 있는 사파이어 빛의 눈동자, 콧날과 입술은 섬세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아름다운 그얼굴에서는 관능적인 매력과 함께 차가움이 느껴진다. 그사진의 얼굴은, 매일 아침 머리를 빗어 올려 묶을 때마다 거울에 비쳐 보이는 자기 얼굴을 꼭 닮았다. 어릴 때, 그녀들의 아버지가 쌍동이였기 때문에 같은 나이인 두 사촌자매는 구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아서 잘모르는 사람은 항상 두 사람을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닮은 것은 얼굴뿐이다. 바넷사가 말괄량이여서 나디아는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오빠인 개빈조차도 사촌동생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더 좋아했었다. 촬영에 필요한 소도구를 준비하면서 바넷사는 한숨을 쉬었다. 등산하다가 조난사고로 부모가 돌아가시자 남매는 숙부와 숙모를 의지하게 되었다. 그 무렵, 개빈은 사진일을 시작했었는데, 나디아의 부탁을 받고 찍은 콘테스트용의 인물사진이 그들의 생활을 크게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둘은 꼭 닮았지만, 바넷사는 나디아의 곁에 있으면 그녀는 태양이고, 자기는 그림자같이 생각되었다. 나디아의 아름다움은 불나비를 유혹하는 불꽃같다. 그러나 불꽃이 가지고 있는 훈훈한 열기가 나디아에게는 없다. 그녀는 주위에 모여드는 숭배자들을 자기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는데 이용하고는 주저없이 버렸다. 일단 톱 모델이 되자, 그녀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개빈조차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개빈이 나디아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바넷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오빠는 어린애가 아니고, 사촌동생이 어떠한 타입의 여자인가를 알고 있다. 바넷사는 더러워진 손을 진바지에 문지르면서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몸에 꼭 끼는 낡은 진바지, 오빠로부터 물려받은 낡은 셔츠 --- 이것이 바넷사가 항상 입는 작업복이다. 스커트는 좀처럼 입지 않고, 화장도 거의 하지 않는다. 다만 나디아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면 어떠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몸치장에 대한 누이동생의 지나친 거부반응에 개빈은 어이가 없었던 모양으로, 누이동생의 열 여덟 번째 생일에 파란 시폰드레스를 선물했다. 그러나 바넷사는 몹시 화를 내면서 그것을 오빠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것은 나를 위해서 산 게 아니라, 나디아를 위해서 산거죠?" "너는 나디아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는 거야. 어째서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지?" 바넷사는 오빠의 비난을 전적으로 부정하기는 했으나, 마음한구석에서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계속비교가 되어 왔고, 자신이 항상 나디아의 그림자처럼 의식되는 동안에, 자기는 결코 나디아의 닮은꼴은 되지 않겠다고결심해 왔던 것이다. 최근에는 좀처럼 나디아와 얼굴을 맞대는 일이 없다. 나디아는 런던에 살고 있고, 숙부와 숙모는 은퇴해서 본머드에 살고있기 때문이다. 나디아는 어쩌다가 크레아웰의 사촌집에 모습을 나타내면 일부러 듣기 싫은 말을 해서 개빈을 놀리고는 한다. 바넷사는 오빠가 사랑의 괴로움을 컴플러치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그녀를 멀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디아의 태도는 고의로 오빠의 가슴을 아프게 해서 즐기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오빠는 언젠가, 나디아의 문란한 생활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괴롭다고 누이동생에게 털어놓았다. 오빠와 나디아가 한때연인 사이였다는 것은 바넷사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나디아가 이성과의 교제를 즐기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것으로, 그러한 교제관계가 자주 신문이나 잡지의 고십란을 장식하고있다. 지난번 찾아왔을 때, 나디아는 영화계 진출을 노리고있다고 두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어떻게?" 개빈은 신랄하게 물었다. "성적 매력으로 진출하겠다는 말인가?" 나디아는 의미심장하게 곁눈질을 하면서 사촌오빠에게 아양을 떨 듯이 미소지었다. "만약 필요하다면." 나디아의 화려한 남성 편련에 대한 반발로 나는 남자에 대해서 이렇게도 겁장이가 되고 만 것일까? 바넷사는 데이트 상대로부터 "너는 건실하구나"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고, 그런 말을잘 받아넘기기는 했으나, 역시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디아하고 데이트할 수 없는 사나이들이, 그 대타로 서자기를 이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넷사는 때때로 나디아의 사진을 스튜디오의 벽에서 떼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감정을 질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질투라기보다는 나디아의 그림자로서가 아니라 참다운 자기를 인정받고싶은 마음 때문이다. 여자라면 누구든지 자신이 유명 모델과 꼭 닮았다는 것을 기뻐하겠지만, 바넷사의 경우는 나디아와 너무나도 닮았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의 곧은 검은 머리와 이상적인 얼굴형, 사파이어빛의 눈동자를 미워했다. 나디아보다 바넷사가 더 개성적이며, 상냥하고 생각이 깊으며 관대한 성품의 소유자라는 것을 깨달은 분은 돌아가신 아버지뿐이었다. "도대체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니?" 바넷사는 스스로를 나무란 다음, 우산 모양을 한 반사경을 조절하고, 매혹적인 배경인 남태평양의 <모래사장>에 스포트라이트를 맞췄다. 인공<모래사장>에 진열되어 있는 것은 이 광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제품들로, 남성다움이 강조되도록 살결을 태워주는 해수욕용 로션이다. 오늘 촬영하기로 되어 있는 광고 문안을 보자 그녀는 섬뜩했다. <당신의 맨살에 선 로션>이라는 문안으로, 만약 오빠의 사정을 몰랐다면 일부러 이 일을 자기에게 맡겼다고 바넷사는 억측했을 것이다. 탐험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남매는 일찍부터 사진기술을 터득했다. 오빠만큼 인기는 없었으나 바넷사는 기록사진에 재주가 있어, 지금까지 여러 번 신문사에 사진을 판 적이 있다. 그들은 부모때부터 살고 있는 교외의 지에서 그럭저럭 생활해나가고 있어서, 도심에 세들어 있는 스튜디오와는 별도로 집의 지하실을 암실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모델이 올 시간까지는 앞으로30분, 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셔터를 누르는 사람이 여성이라는 것을 안다면 모델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 남성이 여류 사진작가의 당혹해 하는 꼴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전문가였으면 좋겠는데.... 개빈이 재촬영을 하게 되면 회사측에서 제시한 예산으로는 적자가 되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커피를 끓이려고 했을 때, 스튜디오의 층계를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바넷사는 등줄기에 떨림이 달리는 것을 느꼈다. 이 불안은 일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벌거벗은 남자 모델을 촬영한다고 생각하니... 도대체 무엇이그렇게 걱정인가? 수줍은 것은 모델 쪽이지 내가 아니다. 만약 나디아가 여기에 있다면 배꼽을 잡고 웃을 것이다. 당혹해 하는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 같은 나디아의 사진을 힐끗 쳐다보고, 그녀는 땀이 촉촉히 밴 손바닥을 낡은 진바지에 문질렀다. 스튜디오의 도어가 열리자, 바넷사는 긴장을 풀려고 자연스럽게 "어서 오세요."하고 인사했다. 그러고는 모델이 자신이 당혹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등 돌린 채 스포트라이트를 만지작거렸다. "칸막이 뒤에서 벗으시겠어요?" 그녀는 스튜디오의 구석에 있는 나무로 만든 싸구려 칸막이 쪽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이쪽 준비는 곧 끝나니까, 준비가 되는 대로 시작할 수 있어요." 모델은 개빈이 말했던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적어도 이 이상 겁을 먹고 기다릴 필요는 없어진 셈이다. "시작하다니?" 약간 기분이 상한 듯한 목소리에 뒤돌아보고, 바넷사는 그의 단련된 몸매에 눈을 크게 떴다. 30대쯤되었을까, 생각했던 것보다는 나이가 많지만 아주 사나이답고 황홀할 만큼 매력적이다. 다이너마이트 같은 남성이다! 저런 눈초리로 쳐다본다면 에스키모 여자들에게도 얼음을 팔수 있을 것이다. 곤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는 사파이어 빛의 눈동자는, 라이트를 받아 호박빛으로 반짝이는 사나이의 눈동자에 붙잡혀 움츠러들었다. 결코 작은 키가 아닌 바넷사와 비교해도 훨씬 큰 그의 앞에서, 그녀는 자기가 마치 태풍속에 피어 있는 아네모네꽃처럼 나약하게 느껴졌다. 바넷사는 마침내 자기가 마음의 우상인 스타에게 열을 올리는 10대 소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슴은 평상시보다 열 배나 빠른 속도로 두근거리고 발은 깃털처럼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아, 얼굴이 붉어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는 꼴이었다. 설마 이 남자가 누드 모델을... 말도 안 된다! 바넷사는 자지러졌다. 오빠는 모델이 어떤 타입인지 알고 있었을까? 웬일인지 오늘 모델은 눈앞에 서 있는 고전적인 얼굴에 호박빛의 눈동자를 한 남자가아니라, 금발의 비치보이 타입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서둘러 줘요." 마음 속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바넷사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두 사람 다 일을 하기 위해서 고용된 프로인 것이다. 그런데 얼빠진 십대소녀처럼 핸섬한 모델을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다니. "거기서 갈아입을 수 있어요." 그녀는 다시 한번 칸막이 쪽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춥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는 진바지에 무명 셔츠 차림이었다. 바넷사는 단추를 풀어헤친 목 언저리의 햇볕에 탄 살결에서 가까스로 눈을 뗐다. 개빈이 나가기 전에 "구릿빛으로 탄 모델의 살결에 소름이 끼치면 볼만하지." 하고 웃으며 한 농담이 생각났다. 상대가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자 바넷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마치 진기한 것이라도 보는 것 같은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것은 난처함때문이 아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자신만만한 남성을 본적이 있었던가? 난처하다는 말과는 거리가 먼 타입이다. 그는 아마도, 자기의 반라의 사진을 많은 여성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음에 틀림없다. 조금도 서두르려 하지 않는 모델의 태도에 화가 나 바넷사는 불쾌하게 말했다. "누드 촬영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죠? 개빈이 말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녀는 세트를 눈으로 가리켰다. "촬영 준비는 다 되어 있어요. 시간이 없는데...." 상대의 잔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 세트로 다가간 그는 해수욕용 로션을 집어들자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관능적인 아랫 입술 --- 바넷사는 순간적으로 이 야무진 입술의 체온을 직접 느끼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해보았다. 바보스런 몽상에 잠겨 있는 동안에 그가 뭐라고 말을 한 모양이다. 그는 이미 세트에서 떨어져서 벽에 걸린 사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꽤 달라졌군. 언제부터 사진작가가 됐지? 이것을 보면..." 그는 사진을 두들겼다. "당신은 카메라 앞에서는 것이 훨씬 어울리는 것 같은데." "자, 서둘러 주세요." 자기가 나디아가 아니라는 것을 굳이 설명할 생각이 없어, 바넷사는 화가 난 듯이 재촉했다. "성급하군." 호박빛의 눈동자가 붉게 물든 볼과 사파이어 빛 눈동자에 스치는 분노를 재미있어 했다. "이만큼 확실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여자는, 요즘 보기 힘들지." 빈정대는 말투에 바넷사는 화를 참느라 양손을 불끈 쥐었다. "오케이." 화가 난 표정에 겁을 먹은 듯이 그는 말했다. "무엇이든지 분부대로 하죠." 진부한 광고 문안을 보더니, 호박빛 눈동자에 웃음을 띠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잽싸게 그는 칸막이 쪽으로 걸어갔다. 옷을 벗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바넷사는 더욱 더 커지는 불안과 싸우듯 다시 한번 카메라를 체크했다. "이렇게 하면 되겠지?" 그는 아직도 진바지와 셔츠를 입고 있는 것 같은 대담한 몸짓으로 칸막이 뒤에서 나타났다. 고맙게도, 그는 속옷은 입고 있었다. 햇볕에 타 탄력있는 몸은 스포츠로 단련된 몸매였다. "어디서 찍지?" 그 질문에 바넷사는 얼굴이 빨게졌다. 그는 상대가 난처해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간신히 침착을 되찾아 세트의 <모래사장>을 가리키고, 모델이 거기에 앉는 것을 프로다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남자 모델이 엎드려 있는 포즈를 취하게 되어 있어, 바넷사는 약간 주저하다가 그에게 포즈를 바꾸도록 부탁했다. 지금까지 남자 모델과 일한 적은 여러 번 있지만, 오늘의 이 모델만큼 뛰어난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프로답지 않은 남자는 처음이다. 포즈를 어떻게 취해야할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바넷사가 세번째 잔소리를 하자 그는 뻔뻔스럽게도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리 와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실제로 당신이 해 보이면 어떨까?" 확실히 스포트라이트는 뜨거웠지만, 포즈를 지도할 때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땀의 원인은 꼭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가슴의 위치가 그의 눈 높이가 되어서, 모델과는 달리 제대로 옷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옷을 꿰뚫는 것 같은 그의 염치없는 시선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그의 팔이 가슴을 스치자, 반사적으로 몸을 뺀 바넷사는 하마터면 균형을 읽을 뻔했다. 그 순간 바넷사는 호박빛 눈동자에 어리는 웃음이 섞여 있는 이상야릇한 표정을 보았다. "아름다운 똑똑새 아가씨." 그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순진함이 남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충분히 알고 있군." 그는 손을 뻗어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바넷사는 '이러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창백하고 투명한 부드러운 살결이군. 어떤 남자라도 매료되고 말거야. 당신의 태도가 남자 마음을 자극한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눈처럼 희고 녹기 쉬운 당신을 보면 남자는 누구든지 안아 주고 싶어 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달처럼 청명하고 아름답지만, 마음은 겉보기만큼 차갑지 않은 것 같군." 마치 날씨 이야기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말투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 당신은 태양이란 말인가요?" 이렇게도 쉽게 마음이 동요된 자신에게 화가 나서 바넷사는 거칠게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나?" 구릿빛 얼굴에 하얀 이를 반짝이며 웃었다. "참으로 좋은 비유군." 그는 어느새 뒤로 물러서서 화사한 목덜미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당신은 달, 나는 태양. 만약 이 두 개가 합쳐지면 굉장한 일이 벌어질 것 같군." 바넷사는 너무나 노골적인 그의 태도와 말에 몸을 떨었다. 이 사나이는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언했다. '그는 위험해.' 바넷사는 자신의 내부에서 경고하는 소리를 들었다. 태양이 너무 근접해오면 그 강렬한 열기에 녹아버리게 된다. 목덜미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늠름한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다가 넘어질 뻔한 바넷사는, 순간적으로 양손을 뻗어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붙잡았는데, 그것이 상대의 어깨라는 것을 깨닫자 움찔 놀랐다. 따뜻한 감촉이 그녀가 마음에 생각지도 못했던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 바넷사는 황홀하게 상대를 쳐다보았다. 심장이 세게 두근거리고 목덜미에 따뜻한 입김이 닿는 느낌에 온몸이 오싹해졌다. 그는 작게 웃었다.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드라큘라가 아니란 말이야, 난. 사냥꾼에게 겁먹은 새끼사슴 같은 눈으로 쳐다보니 나는.. 어디까지 몰고 갈 수 있을 지 모르겠어." 그는 목덜미를 간질였고, 바넷사는 포박을 당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날카롭게 전화벨이 울린 순간, 그는 손을 뗐다. 그 기회를 이용해서 바넷사는 냉큼 일어섰다. 전화는 스튜디오 뒤의,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방에 있다. 결혼식 사진에 관한 문의 전화였다. 그녀는 용건을 마치고 수화기를 놓을 무렵에는 겨우 평상시의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스튜디오로 돌아온 바넷사는 깜짝 놀라 우뚝 섰다. 모델이 없어졌다! 칸막이 뒤를 보니 옷도 없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카메라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보니,그 위에 메모지가 꽂혀 있었다. "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각나 실례. 다음에는 좀 더 편한 자리에서 포즈를 취하고 싶군!" 바넷사의 볼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아마도 모든것을 장난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메모가 암시하고 있는 유혹에 굉장히 화가 났다. 도대체 날 뭘로 알기에 이런 수작일까? 재미로 남자 누드를 찍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녀는 화가 나서 스튜디오를 서성거리면서 오빠가 돌아오면 뭐라고 말해 줄까 하고 궁리했다. 오빠도 장난으로 이런 일을 꾸몄을까? 전혀 이성을 근접시키지 않는 누이동생의 생활을 안타까워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행동거지가 나쁜 건달을 소개하다니, 지나친 참견이 아닌가! 10분쯤 뒤에 층계를 올라오는 오빠의 발소리를 들었을 때까지도 화가 풀리지 않았으나, 스튜디오로 뛰어 들어온 오빠의 표정을 본 순간 준비해 두었던 비난은 목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말았다. "늦었구나." 개빈은 신음하듯이 말하고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쑤셔넣었다. "큰일났어. 이런 실수를 했다간 팀의 전속 카메라맨 계약을 따낼 수 없을 것 같아. 그사람 뭐라고 했지, 굉장히 화를 냈지? 이것도 모두 공회당의 얼빠진 계집애 때문이야. 나에게는 파티에 참석하라고 해놓고서는, 에정이 변경된 사실을 알려 주지않다니! 그의 비서가 오늘 스튜디오로 가기로 했다는 거야, 지방 신문에 실을 사진을 찍으려고. 바보 같은 실수를 간과할 타입이 아니야. 그는 굉장히 화를 냈겠지?" 오빠의 말을 듣고 있는 바넷사의 머릿속을 어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도대체 지금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개빈은 화가 난 시선으로 누이동생을 쳐다보았다. "물론, 제이 코틀랜드의 이야기지. 오늘, 파티에서 그를 만날 예정이라고 말하지 않았어? 그런데 그의 비서가계획이 바뀐 걸 나에게 알리는 것을 잊었다는 거야. 그는 오늘, 신문사에 줄 사진을 찍으러 여기에 오기로 되어 있대." "제이 코틀랜드란 사람, 어떻게 생겼죠?" 자신의 예상이 빗나가기를 하느님께 빌면서 물었으나, 오빠의 대답은들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어떻게 생겼다니? 신문에서 본 적이 있잖아?" 누이동생이 고개를 옆으로 흔들자, 그는 사무실로 들어가 뭔가를 찾더니, 곧 잡지를 손에 들고 스튜디로로 돌아왔다. 예의 사람을 놀리는 것 같은 호박빛의 눈동자까지 똑똑히 나와 있는 제이 코틀랜드의 컬러 사진이 한 페이지를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제이 코틀랜드?" 아직도 반신반의하듯 바넷사는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그래? 그가 여기에 왔었지?" "네, 왔었어요."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참고 바넷사는 말했다. 제이 코틀랜드 ---크레아웰 출신의 영웅으로 개빈의 장래에도 중요한 영향력을 가진 사업가다. 오빠는 제이 코틀랜드가 인수한 스포츠웨어 회사의 선전용 사진을 찍는 일을 따내고 싶어한다. 만약 개빈이 그 계약을 따낸다면 사진작가로서도 일약 유명해질 것은 틀림없다. 코틀랜드는 선전용 광고에는 이 고장의 업자를 참여시킬 생각이라는 것을 공언하고 있다. 오빠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이 PR이 되기 때문이예요."하고 바넷사는 신랄하게 말했던 것이다. "바넷사,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그와 무슨 이야기를 했어?"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마음과는 달리 태연한 어조로 그녀는 대답했다. "사진을 찍으려고, 옷을 벗으라고 말했을 뿐이예요. 아시겠죠...." 잠시 개빈은 말도 못하고 누이동생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듯 머리를 흔들었다. "설마...?" "모델인 줄 알아써요. 난...." "그래서? 그는 그대로 돌아갔어?" "전화를 받고 왜 없어졌어요." "그가 이번 일을 장난으로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는데."개빈은 난처한 모양이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의 장래는 그에게 달려 있단 말이야." "그에게 옷을 벗으라고 부탁한 것은 내가 처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마음 속의 동요와는 거리가 먼, 침착을 가장하고 바넷사는 빈정대듯 말했다. "선 로션의 광고 사진을 찍기 위해 그를 발가벗게 한 것은 네가 처음이야. 그의 사무실에 전화를 해두는 것이좋을 것 같군. 그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겠는데.. 그건 그렇고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를 모델로 착각했나?" 한시라도 빨리 난처한 일을 끝내 버리려고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외의 일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야단났군. 그는 우리의 일하는 모습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오빠의 한숨에 바넷사는 더욱 더 꺼림칙한 기분이 되었다. 그를 모델로 착각한 것만도 상당히 큰실수인데...화나게 한 그의 말과, 목덜미에 닿았던 따뜻한 입김이 생각나서, 바넷사의 볼이 붉어졌다. "그이도 나를 나디아라고 생각한 모양이예요. 착각한것은 나만이 아니예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니?" 개빈은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면서 물었다. "아아뇨. 구태여 정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만약 그가 바넷사가 남자들과의 염문이 끊이지 않는 플레이걸인 나디아가 아니란 걸 알았다면 그렇게 함부로 행동했을까. 제이 코틀랜드와 통화하고 싶다고 송화기에 대고 말하고있는 오빠 목소리를 등뒤로 들으면서 쇼핑이나 가려고 스튜디오의 도어를 닫았다. 자기의 실수로 오빠의 일이수포로 돌아가지 않기를 빌면서 바넷사는 층계를 내려갔다. 내 실수일까? 순간적으로 불끈 반항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오해를 바로잡아 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이 도시에서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모른다. 거만하고 아니꼬운 사나이. 만약 그가 개빈의 장래를 좌우하지만 않는다면 혼을 내주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를 적으로 돌릴 수는없다. 땀을 흘리며 포즈를 잡아 주려 했을 때의 그 웃음! 바넷사는 호박빛의 눈동자에 떠올랐던 장난기 어린 표정을 생각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것이다. 화를 낼 권리는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쪽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2장 "제이의 비서 러셀 잭슨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어." 또 다시 스튜디오에서 얼굴을 마주쳤을 때 개빈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촬영이 늦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제이는 아직 비서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은 모양인데, 그렇다면 좋겠어..., 만약 제이 코틀랜드를 남자 모델로 착각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 스튜디오의 명예에 관계되는 문제야." "축구의 영웅이나 모델이나 그렇게 큰 차이는 없는 것 아니예요?" 그 목소리는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빈정대고 있는 것같이 들렸다. 개빈은 누이동생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너는 뭔가 그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는 것 같구나.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계속 그런 말툰데,그의 업적은 너도 인정하겠지? 고아원에서 자란 서른 넷에큰 부자가 되었으니, 상당히 성공한 것 아니니?" "부자가 되는 것만이 성공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바넷사는 심술궂게 말했다. "인생에는 축구나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얼마든지 있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만, 여하튼 너는 그에 대해서 부당한 선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구나. 사업 수완도 대단하고 기부금도 기분좋게 내놓았어." "그 덕택으로 명사가 된 거죠?" 흔들리는 마음을 억지로 가장했다. "오빠가 어떻게 생각하든 자유예요. 그리고 나에게도 자유롭게 해석할 권리가 있어요." "지금쯤 제이 코틀랜드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개빈은 누이동생을 힐끗 쳐다보았다. "글쎄요, 저쪽에서 연락이 없는 한은 알 수 없죠." "연락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그는 사파이어 빛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만약 네가 제이를 만나서 사실을.." "사과하란 말인가요?" 오빠가 할 법한 말이다. 그녀는 노여움과 불안으로 마음이 떨렸다. "경위를 설명하는 것 뿐이지." 오빠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적어도 그렇게 하는 게 그에 대한 예의야." "오빠, 나는....." "알겠어, 우리들의 장래에 관계되는 일이야. 집을 유지하는 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알고 있지? 세금만도 적은 돈이 아니야. 만일, 이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오빠의 흐려진 얼굴에 한순간 피로의 기색이 떠오른 것을 보고, 바넷사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확실히 오빠의 말은일리가 있다. 제이 코틀랜드의 비웃음을 받았고, 교묘한 유혹에 한순간 정신을 잃었던 사람은 오빠가 아니다. 오빠가 사업상의 득실로 사리를 판단하는 건 당연하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바넷사는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사과하러 가면 그는 얼마나 회심의 미소를 지을까?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제이 코틀랜드는 내가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그런짓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넷사의 투명하리만큼 하얀 뺨이 붉게 물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해명을 하러 갈 필요가 있다. 누이동생의 생각을 알아챈 듯이, 개빈은 난처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제이 코틀랜드를 모델로 착각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요즘 여기저기에 실린 그의 사진은 너도 여러 번 봐서 잘 알고 있을 텐데. 월드컵 대표팀 수준의축구선수가 옛날 소속했던 마이너 팀을 돕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건 그렇게 흔히 있는 일이 아니야. 실제로 지금의 크레아웰 팀의 입장에 침을 흘리고 있는 메이저팀은 굉장히 많대. 빌 스톡스란 사람이 팀의 매니저인데, 그는 구름을 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인 모양이야." "그래요?" 바넷사는 빈정대듯 말했다. "내 의견을 말한다면 제이 코틀랜드가 마음대로 행동하기 시작할 경우, 팀으로부터 쫓겨날 운명에 있는 선수들의 장래가 걱정 이예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지?" 개빈은 화를 내며 누이동생을 쳐다보았다. "제이 코틀랜드에 관한 네 평가를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구나. 축구에 흥미를 가진 일이 없으니 코틀랜드에게 특별한 선입감이 있을리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는데는 특별한 이유가 뭐라도있는 거야?" "없어요." 바넷사는 거짓말을 했다. 제이가 크레아웰로 돌아간다고 선언하기 전에, 그에 관해서 쓴 신문기사를 읽었는데, 그 모든 내용이 마음에들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오빠가 이해해 줄 리가 없다. 고생해서 자수성가했고, 고아원 출신이며, 어떻게 해서현대의 부와 지위를 쌓아올렸는가 하는 입신출세 이야기등 뭐든지 숨기지 않는 자신만만한 태도, 경기장을 축구장에서 비지니스의 세계로 옮긴 수완가. 아무리 생각해도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다. 바넷사가 좋아하는 남성상은 음악이나 연극 등 예술을 이해하고, 축구장보다는미술관에서 즐거움을 찾는 조용하고 지적인 타입으로,제이 코틀랜드와는 정반대 타입의 남성. 만약 어떤 직업을 가진 남자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몸보다는 머리를 쓰는 직업, 예를 든다면 의사나 변호사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 말을 오빠에게 한다면 눈만 높은 바보라고 비난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상한 체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제이 코틀랜드같은 타입은 주는 것 없이 미운 것뿐이다. 지방 단체를 위한 그의 대단한 기부가 순수한 애향심에서 나온 것 이라고는 결코 믿고 싶지 않다. 그의 평판을 생각해본다면 당연하지 않은가. "바넷사, 네 생각은 잘못되어 있어." 개빈은 오빠답게 타이르듯이 설명했다. "제이는 이 도시의 팀을 그대로 유지할 생각을 하고 있어. 실제로 그 사실을 이미 확실하게 밝혀 두고 있지. 그 자신이 축구로 성공의 기회를 잡은 것처럼, 다른 선수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어 하고 있지. 그 때문에 새로운 스포츠 레저의 전당을 이 도시에 세우려 하고 있어. 그것으로 지방 팀의 수준 향상을 도모하려 하고 있지." "그러한 선심이 그가 인수한 스포츠웨어 제작회사인 슈퍼스포츠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인가요?" 바넷사는 약간 빈정댔다. "나는 그것을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예요." "그가 모든 사업과 마찬가지로 슈퍼스포츠를 본궤도에 올려놓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그렇다고 해서 우리 고장을 위해서 그가 한 일을 트집 잡을수야 없지.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슈퍼스포츠가 성장한다면, 결과적으로 이 고장의 실업률을 낮추는데 도움이 될 거야." "지방 축구팀을 후원하여 전국의 관심을 끌었다가, 선수들이나 어린이 팬에게 입힐 스포츠웨어를 팔아 보겠다는 계획이예요." "확실히 회사로서도 이득은 있겠지. 네가 말한 대로 제이 코틀랜드는 빈틈없는 사나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거 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다섯 살 때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아 고아원에 들어갔고,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그 어머니 마저 죽고 말았지. 옥스퍼드 대학에 합격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지만, 장학금만으로는 도저히 자립할 수가 없어서.."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축구선수가 되었단 말이죠? 지성을 연마하기보다는 팬에게 칭찬받는 길을 택했단 말이군요. 더국 실망이군요." "이번 계약을 따내지 못한다면 실망하는 것은 오히려우리쪽이야. 그를 만나러 가 주겠지. 바넷사?"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네, 가겠어요. 그러나 만약 내가 오빠의 입장이라면 진짜 모델은 어떻게 되었는지 정도는 알아볼 텐데요." 골치 아픈 일은 빨리 끝내 버리는 것이 제일이다. 개빈이 전화로 비서로부터 알아낸 바로는 제이 코틀랜드는 슈퍼스포츠에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스튜디오를 나가려는 누이동생에게 개빈은 다시 주의를 환기시켰다. "집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고 가거라. 그런 꼴로 갔다간 문전박대를 받고 말 거야."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태양이 내리쬐는 거리로 나온 바넷사는 오빠와 함께 쓰고 있는 낡은 볼보 쪽으로 걸어갔다. 부모가 결혼해서 바로 산 크레아로지까지는 그리 멀지않다. 체비오트 구릉지대에 있는 그 집에서는 기복이 있는 목가적인 풍경을 한 눈에 바라다볼 수 있다. 로지로 이어지는 도로는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울퉁불퉁하여 스피드를 내어 언덕길을 내려 오고 있는 최고급 스포츠카와는 달리 볼보는 약간 덜커덩거리긴 했지만, 이미 나쁜도로에는 완전히 익숙해져 있다. 그 스포츠카와 마주쳤을 때 도로 옆의 도랑에 빠질 정도로 급히 핸들을 꺽지않으면 안 되었다. 바넷사는 운전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스포츠카를 운전하는 사람이 검은 머리의 소유자라는 것만 보았을 뿐이다. 이 위로는 크레아로지와 영주관(領主館)이 있을 뿐인데, 지금 그 차는 도대체 무슨 용무가 있어서 울퉁불퉁한 샛길을 내려왔을까? 그저 길을 잃은 것일까? 옛영주의 저택 매너하우스는 일년 전부터 팔려고 내놓은 상태다. 그때까지는 아내를 먼저 저승으로 보낸 괴짜 퇴역 장성, 아데아노 장군이 살고 있었다. 호기심에 사로잡힌 바넷사는 자기 집 앞을 지나쳐 매너하우스의 <출입금지>라고 씌어져 있는 자물통이 채워진 대문 앞에 차를 세웠다. <매가(賣家)>라고 쓰여있던 빛바랜 푯말에 큼직하게 <팔렸음>이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다. 며칠 사이에 누군가가 이 집을 산 모양이다. 도대체 누가 샀을까? 언젠가 소문이 있었던 것처럼 이 아름다운 시골집을 헐어 작은 주택을 여러 채 지어서 파는 개발업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느네, 바넷사는 이것저것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크레아로지로 가는 길을 되돌아갔다.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로지는 옛날에는 매너하우스의 관리인이 살던 집이다. 원래는 튜더왕조 양식으로 지은 저택이었는데, 에드워드 7세 당시 영주의 어머니가 살며 개축을 하였다고 전한다. 로지에서 태어나 자란 바넷사가 이 집에 각별한 애정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만약 슈퍼스포츠 사의 일을 따내지 못하면 앞으로 얼마동안 더 이 집을 유지할 수 있을지 난감할 뿐이다. 그것이 제이 코틀랜드에게 머리를 숙이러 가는 또 하나의 이유인 것이다. 집을 팔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스튜디오에서 방자한 행동을 한 남자에게 사과하러 가는 것 정도는 참지 않을 수 없다. 그로부터 한 시간도 되기 전에, 바넷사는 몇 주일전 우연히 산 크림 옐로빛의 심플한 마직 슈트를 입고, 슈퍼스포츠 사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있었다. 전에도 한번 이 공장에 온 적이 있었지만, 여전히 활기가 없는 쓸쓸한 인상으로, 어질러진 창고나 그 앞에 서있는 구닥다리 화물자동차를 보면, 도저히 발전하고 있는 기업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자기 차를 주차시킬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한 순간, 심장의 움직임이 멎는 것 같았다. 겨우 한 대가 들어 갈 수 있는 공간 옆에 아까 매너하우스를 내려 온 유선형의 스포츠카가 서 있는 것이었다. 번호판은 JAC 1. 는 무엇을 뜻하는 지 알 수 없지만, J는 제이, C는 코틀랜드, 1은 여러 대 가지고 있는 차중에서 첫번째 임을 나타내는 것이 틀림없다. 차를 잠그고 건물 쪽으로 걸어가자, 몇 사람의 남자 목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그 중에서도 한결 날카로운 명령조의 말투는 아마도 제이 코틀랜드의 목소리 같다. "모든 상품을 제공해서라도 채무를 갚지 않으면 안될 거야. 적어도 공장이 원활히 기능을 발휘할 때까지는." 누군가가 반대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미 결정한 일이므로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며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강조하는 제이 코틀랜드의 목소리가 매정하게 그 반론을 중단시켰다. 정면 현관 앞까지 왔을 때, 몇 명의 남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물론 제이 코틀랜드는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누구보다도 키가 크고 날씬한 몸매는 어쩔수 없이 사람의 눈을 끌었다. 제이 코틀랜드가 먼저그녀를 알아보고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하자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내 누드를 찍기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오셨어요?" 그는 웃으면서 놀리듯이 말했다. "그 집념에는 감탄하지만, 설마 여기서 옷을 벗으라고는 하지 않겠지? 아니면 이번은 나를 유혹하려 하나?" 그는 넌지시 바넷사의 가슴에 시선을 떨구었다. 집에서는 보통 이상으로 점잖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던 슈트가, 갑자기 너무나도 몸의 곡선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 밑에 받쳐 입고 있는 실크 블라우스는 속이 비치는 감이다. 슈트의 자켓을 여미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으나, 상대에게 기가 죽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가까스로 참았다. 그런데, 마치 그러한 생각을 꿰뚫어본 것처럼, 그는 웃음을 담은 호박빛 눈동자로 몸의 곡선과 붉어진 볼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모델이라니 상상도 할 수 없군. 당신이 이것저것 포즈에 대한 지시를 받고 순순히 따를 타입이 아닌 것 같으니까 말이야. 어느 쪽이냐 하면 사람에게 명령하는 타입이야. 그래서 카메라 앞에 서지 않고, 사진작가로 직업 전환을 했나?" 자기는 나디아가 아니라고 말하려 했을 때, 정면의 도어가 열리며 신경질적인 얼굴을 한 40대 중반의 깡마른 사나이가 잰 걸음으로 나와 제이를 보더니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아 제이, 여기에 있었군. 슈퍼스포츠의 신규계약에 관해서 전화가 왔는데, 사무실로..." "15분 후에 이쪽에서 연락하겠다고 전해 주지 않겠나, 러셀. 이 숙녀의 용건도 급한 일 같으니까." 제이 코틀랜드는, 남자의 호기심에 찬 시선을 받고 얼굴이 붉어진 바넷사의 팔을 잡고, 도어를 열고 융단이 깔려 있는 복도를 지나, 첫번째 방 앞에서 섰다. 도어를 열고 서 있는 그의 앞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새로 칠한 페이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주 최근에 실내를 전면적으로 개장(改裝)한 모양이다. 바넷사는 입술을 약간 일그러뜨리고 빈정대는 웃음을 띠었다. 새로운 주인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번쩍번쩍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양이다. 제이 코틀랜드는 이상하게 이번에도 상대의 생각을 읽은 모양으로, 몇 초 동안인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 다음 이렇게 말했다. "귀여운 나디아, 물론 당신이라면 실내 개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겠지. 어수선하고 초라한 사무실에서 슈퍼스포츠의 제품이 최고라고 아무리 외쳐 보았자 바이어들은 설득 당하지 않거든." "돈을 벌기 위해서 돈을 쓴다는 말이군요?" 바넷사는 매정하게 말했다.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이미 성공하지 않았어요?" "남자에게는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 없어." 제이는 약간 빈정대듯 말했다. "그리고 나는 젊었을 때 돈의 가치에 대해서 많이 배웠어. 돈에 따른 지위와 권력에 대해서도 말이야." "지위와 권력, 그것이 당신이 바라는 모든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안 되나?" 그는 모던한 장식장 쪽으로 다가가 안에서 술병과 크리스털 글라스를 두 개 꺼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것은 누구나가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존경을 돈으로 살 수는 없어요." 바넷사는 완강하게 주장했다. "살 수 없을까?" 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만약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동정으로 살고 있는 불우한 고아라면, 시장이 나하고 식사를 하고 싶어할까? 15세 때의 제이 코틀랜드였다면 당신같이 아름다운 숙녀와 이야기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걸." 호박빛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세련된 도시인의 몸가짐 뒤에는 괴로운 과거의 추억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바넷사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비록 어떻게 살아왔든, 지금 그는 사람들 ---- 특히 여성들 ----의 주목을 받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제이 코틀랜드는손에 들고 있던 술병의 마개를 땄다. 그 기세좋은 소리로 미루어 샴페인인 모양이다. "틀림없이 이것은 당신이 좋아하는 샴페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름답게 커트한 샴페인 글라스에, 거품이이는 투명한 액체를 따르면서 제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말했다. 바넷사는 샴페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다가 당황해서 말을 삼켰다. 대중잡지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나디아는 샴페인을 좋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자기가 나디아가 아니라는 것을 빨리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보다 더 강한 호기심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 샴페인은 일부러 저를 위해서? 그러나 어떻게 제가....." "어떻게 당신이 여기에 올 줄 알았느냐는 질문인가?" 제이는 늠름한 어깨를 치켜올리면서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유쾌한 웃음이 아니었다. 차갑고 심술었다. 빨개진 상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초리에는 상냥함이 전혀 없었다. "여기에 찾아오는 것도 당신의 수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오." 그는 글라스를 내밀면서 말했다. "나는 당신의 새로운 유혹의 수법에 몹시 감탄했어. 그래서 뭔가 상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새로운 유혹의 수법?>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는 바넷사의 머릿속에 갑자기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난폭하게 글라스를 내려놓자 테이블에 샴페인이 쏟아졌다. 분노가 그녀의 눈동자를 짙은 사파이어빛으로 물들였다. "오늘 아침 일을 사과하러 왔어요." 어떠한 오해도 생기지 않도록 바넷사는 한마디 한마디를 분명하게 발음했다. "그런, 실수를 해서 참으로 죄송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착오였습니다. 당신이 찾아오신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고...... 착오란 누구에게도 있는 일이잖아요." 상대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느낀 그녀는 필사적으로 설명을 계속하려 했다. "개빈이.... 광고 사진 촬영을 부탁하고 가서...." 그도 글라스를 내려놓더니, 야생동물을 연상시키는 탄력 있고 냉정한 동작으로 다가왔다. 그 걸음걸이에도 부정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한편에서는 사실을 전달하려고 기를 쓰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멍하니 그를 지켜보면서 그러한 엉뚱한 생각을 하도록 하고 있었다. 두팔이 뻗어왔지만,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는 자기 자신에게 바넷사는 몹시 놀라고 있었다. "이미 시작된 게임을 도중에서 끝낼 수는 없어. 이제부터 재미있어지기 시작하는데, 당신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다면,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착오였다고 치고, 다음 단계를 즐기는 것이 어떨까?" <다음 단계>란 입맞춤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바넷사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마치 마술에 걸린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22세, 남성 경험은 없지만, 남자에게 안긴 것은 물론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나디아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바넷사는 항상 데이트 상대로 육체적인 매력이 있는 사람보다 지적인 사람을 고르는 경향이 있다. 지금 처음으로, 그의 가슴에 안기는 것이 얼마나 마음을 도취하게 만드는 것인가를 알고 쇼크를 받았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깨닫기도 전에, 바넷사는 억센 어깨에 양손을 얹은 채, 그가 하는대로 얌전하게 있었다. 후에 혼자가 되었을 때 생각해 보니 자기가 몸을 빼기 전에 그가 먼저 몸을 떼었다는 굴욕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바넷사는 그저 황홀하여 눈물만 글썽이고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녀에게, 길고 짙은 속눈썹으로 표정을 감춘 제이가 여느때와 같은 놀려대는 듯한 말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게임의 스타트로서는 나쁘지 않군." 엄지손가락으로 바넷사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쓰다듬고, 사파이어빛 눈동자에 차례차례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감정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그는 작게 웃었다. "경험이 풍부한 플레이걸인만큼 확실히 생각지도 못한 여러 가지 수법을 터득하고 있는 모양같군. 순진함과 정열을 적당히 섞는 것이 남자의 마음을 자극한다는 비밀은 어느 보이프렌드한테서 배웠지?" 그 말에 황홀한 기분에서 현실로 되돌아온 바넷사는 상대를 밀쳐 내려 했으나, 그의 동작이 훨씬 더 빨랐다. 제이는 또 다시 거칠게 입맞춤했다. 그것은 장난기 어린 태도가 아닌 욕심스런 정렬의 표현이었다. 바넷사는 온몸에 예리한 아픔이 번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저항하는 것도 잊고 정열에 몸을 맡겼다. 그녀는 마치 술에 취한 듯한 기분이 되었고, 머리가 멍해졌다. 바넷사는 다만 영원히 이 남자의 곁에 있으며 그의 일부분이 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제이 코틀랜드는 순간 몸이 굳어지면서 고개를 들었다. 바넷사는 갑작스런 그의 태도에 어리둥절해져서 약간 부어오른 입술을 어루만졌다. 호박빛 눈동자는 그녀의 그런 동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그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당신은 가는 게 좋겠어." 제이는 다시 한번머리를 숙여 바넷사의 부드러운 볼에 키스하고 태양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올려다보았다. "꿈속에서밖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실현된 것 같아." 제이는 머리를 쓰다듬고는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아침 전화가 방해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모래사장>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거야."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바넷사가 도어 앞까지와 손잡이를 돌리자, 바로 앞에 러셀이 안절부절 못하고 서 있었다. "벌써 15분이 지났어, 제이." 불만스레 항의한 그는, 약간 얼굴을 붉히고 바넷사의 시선을 피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눈치채고 있는 것일까? 제이는 눈 앞에 나타나는 모든 여성을 이런 식으로 유혹하고 있는 것일까? 신문이나 잡지의 보도에 의하면 그를 쫓아다니는 여자는 비로 쓸어낼 정도로 많은 모양이다. 예리한 칼에 가슴을 찔린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질투의 괴로움을 느꼈다. 그것은 나디아에 대해서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미스 마치는 마침 돌아가려고 하는 참이야, 러셀." 제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비서에게 말했다. 현관으로 이어진 복도를 걸어가면서 바넷사는 그와의 일을 생각하고 몸을 떨었다. 불과 15분 동안에 제이 코틀랜드는 그녀의 세계를 뒤집어 놓고 말았다. 그러나, 이 변화는 지금이 아니라, 오늘 아침에 일어났던 것이 아닌가, 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마음의 설레임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입맞춤 -- 바넷사는 슬그머니 입술을 만져보고 몸을 떨었다. 지금까지 이처럼 격렬한 불꽃을 느낀 적은 없다. 그녀에게 있어서 다른 일은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었다. 제이도 마찬가지로 그녀를 요구하고 있었다. 갑자기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다. 어제까지의 세계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리가 없던 일 ---- 사랑? 설마! 사랑을 하다니, 말도 안 된다! 제이 코틀랜드가 자신을 사랑 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 격렬하게 육체를 요구하기는 했지만...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르자, 굴욕감에 얼굴을 붉혔다. 제이는 바넷사가 아니라, 나디아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방금 품에 안았던 여자, 곧 바넷사 자신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려 했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나디아의 그림자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참다운 자기 자신을 주장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혔다. 오늘 아침의 실수에 대해서 사과도 하지 못했고, 오해를 푸는 데도 실패했으니, 일부러 찾아간 목적은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한 것은 스튜디오로 돌아온 뒤였다. 개빈은 몹시 기분좋게 누이동생을 맞이했다. "지금 누구에게서 전화가 온 줄 아니? 러셀 잭슨, 제이의 비서로부터 왔어. 슈퍼스포츠의 신제품을 발매할 경우, 광고용 사진은 우리가 모두 촬영한다는 계약을하 자는 거야. 그것만이 아니야. 축구팀의 PR용 사진도 전부 우리가 찍기로 되었어. 어때, 잘 됐지?" "네, 굉장한 뉴스군요." "뉴스는 또 있어." 개빈은 눈을 반짝이고 말을 계속했다. "매너하우스를 산 것은 제이 코틀랜드래. 아마도도시 생활에 싫증이 나, 고향에 정착할 생각인 모양이야. 어쩌면 결혼하게 될 지도 모르지."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바넷사는 얼른 고개를 숙이면서, 엉겁결에 이렇게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 상대는 정해졌대요? 아니면...." "확실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 멋대로 상상해 본 것 뿐이야. 그러나 그 정도의 재산이 있다면 자손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 나는 내일 그를 만나러 가야 해. 팀의 PR 캠페인 문제로 타협을 해야 하거든." 자기가 나디아가 아니라는 것을 제이에게 어떻게 전해야 좋을 지 고민하고 있던 바넷사는, 갑자기 이상적인 해결방법을 떠올렸다. "오빠, 제이는 아직도 나를 나디아라고 알고 있어요. 만약 내일 그를 만나면 사실을 이야기해 주시지 않겠어요? 그냥 두면 곤란해요." "좋아, 그런데 왜 너는 사실대로 설명하지 않았니?" "말할 기회가 없었어요. 이야기하려 했는데, 그는 급히 전화할 일이 있다고 하며, 그냥 돌아가라고 했거든요." "그래?" 개빈은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앞으로 몇 주인 동안, 집 앞의 길을 상당히 많은 차가 왕복하게 되니까 조금 양해해 달라고 제이가 말했어. 매너하우스는 전혀 손질이 되어 있지 않아서 그는 일류건축가에게 그 집을 수리하도록 한 모양이야." 수리? 바넷사는 섬뜩해졌다. 매너하우스를 모던한 최신식의 설비를 갖추도록 수리한다 ---- 그 결과는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슈퍼스포츠 사로부터 돌아온후 이제야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제이 코틀랜드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으로, 그세계는 결코 바넷사 마치가 살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제이에게 반해 버려서, 앞으로의 일은 그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나디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도 제이는 다시 연락해 올 것인지, 아니면 흥미를 잃고 실망하고 말 것인지? 단지 유명한 모델인 나디아 마치로서 그의 관심을 끌었을 뿐인가? 3장 이튿날은 스튜디오의 일이 없었다. 바넷사는 오랜만에 정성껏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기로 했다. 마침 청소를 끝내고 커피를 끓이려 할 때, 현관 앞에서 차소리가 들렸다. 제이 코틀랜드를 만나고 온 개빈은 의기양양하게 차에서 내리자 바넷사를 향해 두툼한 서류뭉치를 흔들어 보였다. "계약을 하고 오는 중이야." 도어를 열어놓고 기다리고 섰는 누이동생에게 말하면서 거실로 들어와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을 보자 얼굴을 찡그렸다. "커피보다 더 근사한 것으로 축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니? 점심을 먹으러 나가자.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가자." 레몬옐로의 슈트 외에는 <좋은 옷>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에, 바넷사는 흰 무명 스커트에 부드러운 중간색 계통의 T셔츠를 입고 가기로 했다. 그것은 아주 멋있는 T셔츠인데, 너무 커서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나디아가 준 것이다. 두 사람 다 날씬한 몸매지만 나디아는 가슴이 납작한 모델다운 깡마른 형인데 바넷사 쪽은 여자다운 풍만함을 갖추고 있어, 나디아에게 큰 옷은 바넷사에게 는 꼭 맞다. 자동차는 싱그러운 신록이 우거진 전원지대를 달려 부모가 살아계셨을 때에 자주 갔었던, 디킨즈시대를 연상하게하는 고풍스런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주말이 아니어서 레스토랑은 비교적 한산하여 두 사람은 곧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이 레스토랑은 이 고장의 특산물을 내놓는 것이 특징이어서, 바넷사는 칵테일을 든 다음,이 고장에서 난 감자와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요리가 나오자 개빈은 오늘 아침 제이 코틀랜드와 만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 계약으로, 슈퍼스포츠 사의 광고사진과 축구팀의PR 사진을 모두 우리가 맡기로 되었어. 모든 일이 잘 되어 이젠 안심이야. 요즘은 실적이 별로 신통치 않았으니까 말이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사진작가로 성공하려면 런던을 무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오빠는 지금까지는 아주 잘 해왔어요." 바넷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만큼 잘 하고 있지는 않단다." 개빈은 슬픈 얼굴을 했다. "쓸데없는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지만, 이번 일을 따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우리들의 사활이 걸려 있었어. 아빠와 엄마가 돌아가신 뒤 안 일이지만, 아빠는 마지막 탐험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로지를 담보로 돈을 비셨어. 금년 중에 그 돈을 갚지 않으면 은행은 저당권을 행사해서 로지를 경매에 붙인다고 했단다." "어머나, 그런 상태였어요? 진작 이야기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집에서 쫓겨나게 될 지도 모른다고 말하면 네가 얼마나 실망할 지 걱정이 되어서 말할 수 없었어." 개빈은 고개를 흔들었다. "계약할 때까지는, 정직하게 말해서 눈앞이 캄캄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제이는 어제의 오해에 대해서는 아주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더구나. 화가 잔쯕 나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히려 재미있어 하고 있는 것 같더군." "내가 나디아가 아니라는 건 틀림없이 이야기했죠?" 잠시 침묵이 흐르고, 개빈은 약간 얼굴을 붉혔다. "이야기하지 않았군요?" 바넷사는 위를 쳐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이, 오빠도...." "바넷사, 이야기하려 했지만 제이가 축구팀의 PR용 사진의 모델로 너를 쓰고 싶다고 하더구나. 그가 그 아이디어에 몹시 흥분해 있어서 새삼스럽게 네가 모델인 나디아가 아니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 그리고, 네가 내 조수기때문에 우리에게 일을 준 거야. 그 자신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으니까 틀림없어. 그런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도저히 그에 대해 말을 꺼낼 수가 없었지." 바넷사는 얼굴이 파래지면서 먹던 음식 접시를 밀어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어요. 내가 나디아라고 생각하게 내버려 두다니..." "그렇다고만 말할 수는 없지.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받은 것은, 바넷사 너니까. 제이가 실제로 본 것은 너지, 나디아는 아니야. 그렇지 않니?" "그러나 그는 나를 나디아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바넷사는 반박했다. "언젠가는 거짓이 들통이 나게 돼요. 동네사람들은 모두 나를 알고 있으니까." 개빈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네 입장은 잘 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지 않니. 우리와 계약을 맺기로 약속한 뒤에 너를 모델로 쓰고 싶다고 말했으니까." "말하기 어려웠다는 것은 알겠지만, 거짓이 들통 났을때의 일을 생각한다면 지금 이야기해 버리는 것이 훨씬 간단하지 않아요?" "들통이 날까?" 개빈은 나이프와 포크를 불안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아까 알아보았는데, 나디아는 지금 영국에 없어. 모델 일로 아프리카 갬비아에 가 있대. 그녀는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거야." "일부러 사람을 속이다니,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오빠. 나디아의 대역을 하다니, 도저히 무리예요. 그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그래도 나를 모델로 쓰고싶다면 기꺼이......." "지금 그런 짓을 한다면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가게 돼." 오빠의 완강한 태도에 바넷사는 한숨을 쉬었다. 누이동생이 나디아로 오해받고 있다는 것을 이제 와서 제입으로 제이 코틀랜드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오빠의 마음은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고의로 그를 계속 속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오빠가 모를 리가 없다. "내 말 잘 들어, 바넷사. 만약 우리들이 이처럼 다급한 처지에 놓이지 않았다면 너에게 이런 일을 부탁하지는 않겠어. 정말이야." "그러나 그를 끝까지 속인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알고 있어. 먼저 일을 하고 나서 우리가 한 일이 훌륭하다는 평가만 받는다면, 사실을 이야기해도 문제가되지 않을 거야. 그때 나디아의 그늘에 가려 있던 바넷사가 나타나는 거야." 제이와 자기와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면 오빠가 이해해 줄 것인가? 바넷사는 이제 와서 좀 더 빠른 시간 내에 오해를 풀지 않은 자기를 원망했다. 이제진실을 이야기 해 봤자, 오빠의 체면은 엉망이 될 것이고 계약까지 해약 당할지 모른다. 사방이 막혀서 빠져나갈 구멍은 없는 것이다. "제발 부탁이야, 바넷사." 개빈은 누이동생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다그치듯 몰아붙였다. "일주일 동안만 가만히있어 주면 돼. 그 이상 끌지 않겠다고 약속할께. 기분전환 삼아 하는 장난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재미있지 않겠니?" 그는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너는 자주 '나디아 같은 인기 모델이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하고 말했었잖니?" "거짓말을 해서까지 그런 기분을 맛보고 싶지는 않아요."냉정하게 그렇게 말하기는 했으나 조그마한 실망이 가슴을 살짝 찌르는 것 같았다. 제이는 확실히 정열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정말 바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넷사일까? 아니면 그가 그렇다고 믿고 있는 화려한 패션 모델일까? 인기 모델이라는 명성이 그를 사로잡았다면, 바넷사가 보통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속이고 촬영을 감행하는 건 무리예요." 바넷사는 천천히 말했다. "알고 잇어. 그러나 이번만큼은 협력해 주겠지? 너는 항상 일을 냉정히 판단하고 대처하는 야무진 성격의 소유자 아니냐. 자, 빨리 먹어." 개빈은 재촉했다. "오후는 바빠질 것 같아." "왜요?" "이제부터 나디아 역할을 하려면 그에 어울리는 의상이 필요하지 않겠니? 나디아는 진바지 하나라도 이름 있는 상표가 아니면 입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제이는 왜 네가 사진을 찍고 있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더군. 그래서 모델 일은 휴가중이어서 그동안 내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말해 두었어." "잘도 거짓말을 하는군요." 바넷사는 빈정대면서 지불을 끝낸 오빠 뒤를 따라 6월의 밝은 태양 아래로 나왔다. 금년들 어 처음 맞는 초여름다운 상쾌한 날씨여서, 쇼핑 따위로 시간을 보내는 건 자연의 혜택에 대한 모독으로 느껴졌지만, 오빠는 한사코 양보하지 않았다. 오빠는 패션에 관해서도 뚜렷한 기호를 가지고 있어서, 바넷사 혼자였다면 절대로 고르지 않았을 디자인의 옷을 그녀에게 입혀 보았다. 유행에 민감한 나디아라면 크게 기뻐할 실크 블라우스와 드레스, 여자다움을 강조하는 드레시한 의상.... "그 정도면 나디아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아." 누이동생이 입어 보인 옷을 하나하나 평가하면서 개빈은 말했다. "물론 너에게는 너만이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어, 나디아에게는 악녀 같은 매력이 있는데, 너에게는 청순한 매력이 있거든. 실은 제이도 그런 인상을 받은 모양이야. 사진으로 보았을 때는 아주 야하고 섹시했는데, 실제의 너로부터는 청순한 인상을 받았다고 놀라고 잇어. 그는 그 차이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야." 개빈은 사파이어 빛의 셔츠드레스를 골랐다. "이것을 사도록 하자. 머지않아 파티용의 호화로운 드레스를 구입해야 할 테니." "파티라뇨?" "오늘 아침 만났을 때, 제이는 매너하우스의 수리가 끝나면 대대적인 파티를 열 예정이라고 말했어. 입장권판매로 얻은 수익은 고아원에 기부한대. 아마도 상당한 규모의 파티를 열 모양이야. 아직 시일이 많이 있으니 드레스는 나중에 구입해도 되겠지. 우선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만 사기로 하자." 점원이 몸에 꼭 끼는 태피터 드레스를 가지고 올 때까지, 바넷사는 건성으로 몇 벌의 옷을 입어 보았다. 그러나 실크 태피터 드레스를 입자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매혹적인 드레스로 몸을 감싸는 기쁨을 느꼈다. 그 드레스를 입고 오빠 앞에선 바넷사는 오빠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불안해졌다. 세련된 어깨의 라인과 가슴의 곡선을 강조하는 깊게 패인 네크라인. 허리에 꼭끼는 날씬한 스커트. 가만히 오빠의 평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바넷사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 너무 섹시해 보여?" 개빈은 잠시 어리둥절한 듯 웃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다만 지금까지 너를 과소평가 해 온 것에 대해서 생각했을 뿐이야. 만약 나디아라는 눈에 잘 띄는 여자 뒤에 숨어 있지 않았다면 지금쯤 사정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그는 점원에게 말했다. "이것도 싸줘요." 한 시간 후 두 사람은 로지로 돌아왔다. 개빈은 새로운 계약에 관한 일이 산더미같이 밀려 있어 바넷사를 상대할 겨를이 없었다. 바넷사는 어쩔 수 없이 가담하게 된 가짜행세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싶지 않아, 카메라를 들고 뒤뜰로 나가, 매너하우스의 숲으로 이어진 울창한 나무울타리를 따라 난 샛길을 걸었다. 그 숲은 어렸을 때 아주마음에 들어했던 장소로, 바넷사는 곧잘 거기서 생각에 잠기곤 했다. 웬일인지 그녀는 지금 이 그리운 성역(聖域)으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들고 나왔을 뿐인데, 길 양쪽에 산딸기 나무와 쐐기풀이 자랄대로 자란 우거진 샛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카메라를 가져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머지않아 이 숲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잃게 될 것이다. 소녀시절의 추억이 어린 장소를 사진으로 찍는 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해묵은 떡갈나무나 이제 막 부화한 오리새끼를 지켜보던 조용한 연못. 수달이 뛰어다니고, 언젠가물총새를 본 적이 있는 작은 시냇가. 그러한 풍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제이 코틀랜드의 일이나 자기를 그가 나디아라고 믿고 있는 일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오빠와 함께 오소리를 구경하러 여기에 온 적이 있었다. 그건 참으로 멋진 경험이었다. 바넷사는 곧 현실의 세계에서 격리된 고요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태양이 어느 정도 기울었다는 것을 깨닫고 바넷사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어디로 갔을까 하고 오빠가 걱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낮게 한숨을 쉬고 돌아가려고 하다가 바넷사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공포에 떨며 도망치려 했을 때, 제이 코틀랜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그는 샛길이 구부러진 저쪽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나디아 아냐?" 그는 몹시 놀란 모양이었다. "설마 이런 곳에 당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나에게 볼 일이라도?" 제이는, 그녀가 남의 땅에 불법침입 했음을 자연스럽게 일깨워주었다. 바넷사는 갑자기 자기의 꼴을 의식했다. 꿰맨 자국이 있는 더러운 스커트, 얼굴이나 팔에 난 작은 찰과상, 이 이상 모델답지 않은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죄송해요,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바넷사는 사과했다. "매너하우스를 수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전에 사진을 찍어 두려고 생각했어요. 허락을 받았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상관없지만," 제이는 카메라와 더러워진 옷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내가 이곳을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릴 것이라 생각했나?" 바넷사의 표정에서 그 대답을 읽은 모양으로, 제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생각한 거지? 곧 나는 구제불능의 속물이며 자연의 가치도 모르는 교양 없는 벼락부자란 말이지?" "아니예요, 그렇게 생각한 것은...." 상대의 분노를 깨닫고 바넷사는 말을 더듬었다. "저는 다만 자연 그대로의 숲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 뜻밖이군." 제이는 탐색하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손질도 하지 않은 거친 숲을 좋아하다니, 당신은 큐 가든이나 하이드파크 같이 손질이 잘 된 정원을 좋아할 줄 알았는데." "제가 여기서 태어나서 자랐다는 것을 잊고 계시군요."그 목소리는 딱딱하고도 날카로왔다. 그가 자기를 나디아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할 때마다 바넷사는 뒤가 켕기는 것이다. 이런 거짓말을 계속할 수가 없다. 자기는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당신은 사촌들과 함께 살고 있는 모양이지?" 또 다시 제이가 자신에게서 가식적인 대답을 끌어낼 질문을 하자 바넷사는 새파랗게 질렸다. "저어....네.....로지에서. 수리가 끝나면 파티를 연다고 들었는데요?" 그녀는 화제를 바꾸었다. "그럴 작정이야. 당신은 화려한 파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미소를 짓고는 있었지만 그 말투는 상냥하지 않았다. "여자는 아름다운 의상과 액세서리를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야. 소문에 의하면 당신은 많은 숭배자들로부터 멋있는 보석을 산더미처럼 우려냈다던데." 제이는 어느 대중잡지에 나온 인터뷰 기사를 읽은 모양이다. 나디아는 그 기사에서, 팬이 그녀의 누드사진을 찍고 싶어하자. 그 남자로 하여금 다이아몬드 이어링과 네클리스를 선물하게 하여 그것만 몸에 달고 카메라 앞에서준 일이 있다고 자랑삼아 지껄였던 것이다. 누드 사진과 교환조건으로 받은 그 보석이 아주 자랑스러웠던 모양인지 다이아몬드의 가격까지 기사로 나왔었다. "보석만을 몸에 달고 있는 당신을 감상하는 것은 틀림없이 눈요기가 되겠지." 제이는 조용한 말투로 계속했다. "나 같으면 그 매력적인 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다이아몬드보다 사파이어를 사주었을 거야. 우리 선수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는 이야기는 개빈으로부터 들었겠지?" 갑자기 화제가 달라진 것에 놀라, 바넷사는 의아한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네, 들었어요." 제이는 간단히 말했다. "당신과 선수들이 클럽의 욕실에서 같이 목욕하는 장면을 찍는 거야.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곧.....?" 무서운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렇지. 이번은 내가 당신에게 누드가 되어 달라고 부탁한 차례군." 제이는 놀렸다. "그런 부탁을 받은 것은 처음이 아닐 테고, 벗는 것은 아무런 부담없는 일이겠지?" 바넷사는 멍해져서 우뚝 서고 말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디아가 몇 번인가 누드 사진을 찍은 것은 알고있다. 오빠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설마 제이가 그런 사진을 찍게 할 작정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오빠는 알고 있었을까? 아마 몰랐을 것이다. 내가 그런 모습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놓을 리가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오빠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왜 그러나?" "아아뇨, 아무 것도." 바넷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누드 모델은 할 수 없어요. 설령 반나체라해도 거절하겠어요." "그건 또 왜?" 호박빛의 눈동자가 그녀를 비웃었다. 그 눈빛은, 저물어가는 태양이 나뭇가지 사이로 황금빛을 던지고 있는, 어두컴컴한 숲을 배회하는 냉혹한 동물을 연상시켰다. "왜 그래? 당신의 자기 PR도 되리라 생각하는데, 모델료가 부족한가?" "그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여하튼 누드 모델은 거절하겠어요." "그렇게는 안돼. 계약서에는 분명히 그 조건이 들어있으니까. 아직 그것도 모르고 잇나?" "팀의 선수들과 사진을 찍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누드라니....." "듣지 못했나?" 어두컴컴한 숲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른 그의 얼굴은 마치 악마 같았다. "그런 것을 내가 믿어주리라 생각하나? 누드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달라요." 바넷사는 딱 잘라 말하고 나디아가 여러 번 카메라 앞에서선정적인 포즈를 취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런 사진을 볼 때마다, 나디아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어떻게 그렇게까지 대담해질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촬영은 내일 할 예정이야." 제이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실은 지금 그 이야기를 하러 로지로 가는 길이었는데, 누군가가 숲속에 있는 것을 보고 쫓아 왔어. 몇 번인가 집없는 부랑자가 불법침입한 일이 있었거든. 잡초를 밟는 시끄러운 발소리를 들었을 때는 부랑자가 틀림없을 거라고....." "시끄러울 정도로 소리를 내지는 않았어요!" 바넷사는 발끈 화를 내며 대꾸했다. 무슨 말을 들어도 그가 바라는 사진을 찍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제이는 그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모양으로, 그녀가 왜 갑자기 누드에 구애받기 시작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빈정대듯 한 말이 그 사실을 입증했다. "그렇게까지 누드가 싫다면 나중에 내가 보상해 주겠어. 개인적으로." 바넷사가 떨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추운가, 로지까지 바래다줄까?" 바래다주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귀를 기울일 리 없다. 마침내 로지가 보이지 시작했을 때, 바넷사는 얼른 그의 곁에서 떨어지면서 완강한 어조로 선언했다. "이제 혼자 가도 괜찮아요." "그래?" 제이의 웃음은 불쾌했다. "앵돌아지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그렇다고 무엇하나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나는 철저한 사업가여서, 계약을 어김없이 지켜 줄 것을 요구하지." '왜 나는 이렇게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을까?" 그로부터 한 시간 쯤 뒤, 잠을 잘 준비를 하면서 바넷사는 생각했다. 개빈은 외출하여 밤 늦게 돌아오겠다는 메모만 남겨 놓고 없었기 때문에, 제이로부터 들은 뜻밖의 이야기에 대해서 그와 상의하는 것은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이상 자기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운명의 여신은 더욱 괴롭히고 있으니! 점심을 먹으면서 계속 제이를 속이는 것은 불안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야단이다 바넷사는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설령 그것이 일을 따내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그 리고 계약이 해약되더라도 절대로 누드는 하지 않겠다!욕조에서 나온 바넷사는 무명 나이트드레스를 방에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닫자, 서둘러 몸을 닦고 타월을 두르고 침실로 돌아왔다. 바넷사는 타월을 벗기고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자기의 전신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나디아보다는 살이 찌지만 허리는 가늘고, 힙은 보기 좋은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다리는 길고 날씬하게 뻗어 있다. 이대로의 모습에, 귀에다 큰 사파이어 이어링을 달고, 백금줄에 달린 펜던트가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의 골짜기에서 살짝살짝 흔들리는 광경을 상상하자, 바넷사는 심란해져서 눈을 감았다. 제이 코틀랜드는 이상한 생각을 그녀의 머릿속에 불어넣어, 암암리에, 그러나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그의 요구를 그 눈초리와 말로 전달한 것이다. 만약 그가 자기를 나디아라고 믿고 있지만 않다면, 그 호박빛의 눈동자에 비쳤던 유혹에, 몸에 닿는 교묘한 손의 움직임에 무조건 굴복하고 말았을 것이다. "안색이 좋지 않은데 무슨 일이 있었어?" 아침식사를 하는 테이블 너머로 개빈이 걱정스레 물었다. "제이 말로는 팀의 PR사진을 오늘 찍을 예정이라고 하던데요." 바넷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넷사, 걱정할 것 없어."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누이동생의 손을 잡자 격려하듯이 말했다. "너는 잘해낼 수 있을 거야." "아뇨, 나는 가지 않겠어요. 제이는 나를 발가벗길 작정이예요." 오빠의 눈에 놀라는 표정이 떠오른 것을 보면서 바넷사는 언짢게 말했다. "제이가 어떻게 한다고? 그것은 뭔가 잘못된 거야.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 "그래요? 그러나 나는 들었어요. 제이는 아마, 오빠가 그것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 아닐까요? 그는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투였으니까요. 누드가 될 생각은 없다고 했더니, 계약서에 그렇게되어 있다고 말했어요." 마지막 말을 들은 순간 개빈의 눈동자는 불안으로 흐려졌다. 바넷사는 냉정하게 말을이었다. "이 이상 나를 설득해도 헛수고예요. 나는 도저히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어깨끈이 없는 수영복을 입으면 괜찮지 않을까? 물 속에 들어가면 누드같이 보이도록 가슴 아래는 나오지 않도록 사진을 요령 껏 찍겠어." 설령 아래가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을 보는 사람은 나체를 상상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아찔해졌다. 그러나 개빈은생 활이 위기에 처해 있으니 단념하지 않을 것이란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끝내 설득당하고 만 꼴이 되었다. "아마 제이는 촬영에 입회하지 않을 거야." 개빈은 안심시키려 했다. "지금은 슈퍼스포츠 사를 본 궤도에 올려놓는 일에 바쁜 모양이니까. 자, 긴장을 풀어. 긴장하면 사진에 그대로 나타나니까. 조금도 걱정하지 말아. 잘될 거야. 약속하겠어." "내가 나디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제이에게 이야기하라고 했을 때도, 오빠는 약속한다고 말했어요." 자기도 모르게 불쾌한 말을 하고 오빠의 난처한 표정을 보자 바넷사는 후회했다. 때때로 개빈이 힐끗 누이동생의 표정을 살폈을 뿐, 축구장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두 사람은 거의 말이 없었다. 자동차가 축구장으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 시내로 들어선 것을 깨닫고, 바넷사는 의아한 듯이 오빠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개빈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에 차를 세웠다. "곧 돌아오겠어." 오빠는 수영복 전문점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나와 꾸러미를 누이동생의 무릎 위에 홱 던졌다. "이것을 입으면 될 거야. 집에 돌아가서 한번 입어 보겠니? 클럽에는 옷을 갈아입을 곳이 없을지도 몰라, 굉장히 구식이니까. 제이는 그곳도 개축할 생각인가 봐. 시에 새로운 스포츠 전당을 기증할 뿐 아니라, 지금 있는 클럽의 설비도 현대화할 예정이라고 말하더군." "잘도 선심을 쓰는군요." 바넷사는 시트 벨트를 잡아매면서 빈정거렸다. "집에 가서 입어 보고 싶은데, 시간은 괜찮겠어요?" 개빈은 손목시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어 보는 데 그렇게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지?" 오빠가 고른 수영복은 신축성이 좋은 감으로 만든 것이어서 몸에 착 달라붙었고, 색상은 산뜻하여 이국적이었다. 어깨끈을 마음대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그 수영복은, 적어도 몸의 일부분을 감추는 목적에는 안성마춤이었다. 여하튼 바닷가에서 이런 수영복을 입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기는 힘든 일이다. "이제 됐나?" 자동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개빈이 물었다. "그것을 입으면 조금은 마음이 놓이겠지?" 누이동생의 표정을 보고 개빈은 웃음을 보였다. "왜 그런 얼굴을 하지?너는 모델을 지망한다 해도 절대로 성공하지 못하겠구나. 모델이 되기에는 너무 수줍음을 많이 타는구나." "누드를 싫어하니까 실격이란 말인가요? 모든 모델이 카메라맨의 명령에 순순히 옷을 벗는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이것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알고 있어. 그러나 너도 그를 처음 만나러 갔을 때 사실을 말하지 않았잖니?" 그 말에 반박을 하지 못하고, 바넷사는 입술을 깨문 채,오늘 일이 되도록 빨리 끝나기를 바라면서 자동차 시트에 깊숙이 않았다. 개빈이 예상했던 대로 제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넷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오빠가 조심스러워하며 자신을 소개시키기를 주저하는 것 같아 자기가 먼저 팀의 매니저에게 인사했다. "빌 스톡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미스 마치."매니저는 바넷사의 손을 잡고 자기 소개를 했다. "오늘 일은 제이로부터 들었습니다. 젊은 선수들의 준비는 이미 다 되어있습니다. 아니, 그 이상이라고 해야 하겠죠." 빌 스톡스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오늘 아침에 연습이 있었는데, 모두제정신이 아니었죠. 녀석들이 당신을 본다면 더욱더 연습할 의욕을 잃고 말 것 입니다." 눈동자를 반짝이며 빌은 말했다. "클럽의 큰 욕실에서 촬영을 한다고 제이로부터 들었습니다."그는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호화로운 배경이라고는 할 수없지만, 물은 따뜻할 겁니다. "온도가 너무 높아도 곤란한데." 개빈이 옆에서 말했다. "김이 나면 렌즈가 흐려지니까." 매니저는 사진에 취미가 있는 모양으로, 그와 오빠가 촬영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바넷사는멍하니 귀를 기울였다. 지방신문에 실린 사진으로 매니저의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축구라는 스포츠에 흥미를 가진 적은 없었다. 갱의실로 들어가자 팀의 선수 전원이 나와서 바넷사를 맞이했다. 그들이 불어대는 휘파람소리나 명랑한 인사에 얼굴이 붉어지기는 했으나, 그 활달하고 호의적인 수다는 제이 코틀랜드의 빈정거리는 웃음만큼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선수들은 빌 스톡스가 <젊은 선수들>이라고 부를만큼, 그녀와 같은 연배거나 더 젊은 것 같았다. 바넷사는 그들의 놀림 속에서도 차츰 자신을 되찾았다. "됐어, 그럼 전원 욕실로!" 빌 스톡스가 외쳤다. "키가 큰 사람은 뒤에 서라. 조니!" 그는 제일 젊은 선수를 불렀고, 학교를 갓 졸업한 것 같은 미모의 청년은 자기 이름이 불리우자 얼굴을 붉혔다. "너는 제일 앞에 서!" 누군가가 놀리는 소리가 들렸다. 개빈은 촬영 준비에 바빴다. 빌 스톡스는 바넷사의 팔을 가볍게 잡고 이렇게 말했다. "만족할 만한 갱의실은 없지만, 샤워를 하고 싶으면 하세요. 녀석들에게는 잠깐 동안 출입 금지라고 명령할 테니까요." 바넷사는 갱의실에 들어가서 수영복으로 바꿔 입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자기 모습을 점검할 거울은 아무데도 없었다. 촬영하는 데는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 테니잠시 동안 자기가 바넷사라는 것을 잊고 전문적인 모델나디아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고 크게 숨을 쉬고 갱의실 밖으로 나왔다. 생각했던 것만큼 힘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바넷사는 느끼기 시작했다. 수영복 차림을 보고 선수들 사이에서 환성이 터져나왔으나, 빌 스톡스가 눈을 부릅뜨자 곧 조용해졌다. 선수들과 함께 물 속으로 들어갈 때는 그들의 태도는 더 이상바랄 수 없을 정도의 신사로 변해 있었다. 개빈의 지시에 따라 수영복이 완전히 물 속에 잠기게 자세를 낮추었다. 가슴위와 어깨의 둥근 곡선, 그리고 팔만이 카메라에 찍히게 되는셈이다. 바넷사는 샤워를 할 때처럼 머리를 위로 빗어 올려한 가닥으로 묶었다. 개빈은 카메라의 렌즈를 들여다보다가 바넷사에게 다가와 일부러 목덜미에다 머리카락을 몇 가닥 늘어뜨렸다. "좋아, 아주 좋아." 카메라로 돌아가서 개빈은 중얼거렸다. "좋아, 모두 즐거운 표정을 짓고! 조니, 팔을 바넷....... 나디아의 어깨에 얹어. 나디아, 그에게 기대듯이 몸을 조금 뒤로 빼고! 그렇지, 이제 됐어!" 개빈은 큰 소리로 지시했다. "다시 한번 그를 보며 방긋 웃고...." 오빠의 지시를 따르는 데 정신이 없어, 바넷사는 수줍어할 겨를이 없었다. "잘 했어." 누이동생을 끌어내면서 개빈은 흡족한 듯 말했다. "조금 쉬고 나서 몇 커트 더 찍자. 다음 것은 모두가 너를 붙잡고 물에 떠 있는 포즈를 취하는 게 좋겠어." "수영복은 어떻게 하죠?" 바넷사는 겁이 났다. "뭐라고?" 촬영 구상을 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어서 한순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인지 개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아, 그것 말인가?" 그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촬영 결과를보 면 제이도 내 사진에 이의를 달지는 않을 거야.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누드보다 수영복 차림이 훨씬 섹시해." "나디아, 수영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확실히 말했을 텐데." 두 사람 다 제이의 목소리에 홱 뒤돌아보았다. 개빈은 얼굴이 흐려졌고, 바넷사는 파랗게 질렸다. 오늘 제이는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양복차림으로, 순백의 와이셔츠에는 양복에 어울리는 차분한 무늬의 넥타이다 돋보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쩔 수 없이 날씬하고 늠름한 그의 몸매에 끌리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이 몹시도 나약하게 느껴졌다. 바넷사는 처음은 명치끝이 콕콕 쑤시는 것 같았고 다음은 혈관 속을 불덩어리가 돌고 있는 것 같았다. 바넷사는 힘없이, 뿌리가 생겨 못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꼼짝 못하고 서 있었다. 찬찬히 자기 몸을 훑어보는 화난 눈초리와, 방안을 지배하는 고요를 바넷사는 의식하고 있었지만, 그의 자력(磁力)에 사로잡혀,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의 눈, 그의 눈동자 속에서 읽어낸 용서없는 결의에, 바넷사는 오싹하고 말았다. 개빈은 벌써 카메라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있었다. 겁쟁이! 바넷사는 오빠에게 도움을 청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속 으로 욕을 했다. "그럼, 어떻게 하지?" 자신만만하게 양손을 허리에 대고 제이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건 야단을 맞고 있는 여학생 같지 않은가? 부아가 치민 바넷사는, 고개를 들어 대담하게 그를 쏘아보면서 타월을 의자에서 홱 집어들자, 속마음과는 달리 침착하게 몸을 감았다. "누드도 세미 누드도 할 생각은 없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꼭 누드를 찍고 싶다면 누군가 다른 사람을 고용하도록 하세요." "누구보다도 어울리는 사람을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제이가입 을 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순진한 체하는지 모르겠군. 남성용 잡지의 표지를 위해 대담한 포즈를 취해 주었었다는 것을 잊었나? 그것이 언제였지?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아마반년쯤 전이었을 거야." 제이는 타월을 감고 있는 바넷사를 사정없이 훑어보고, 뭔가를 암시하듯 가슴 근처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당신의 몸매는 내 기억보다도 훨씬 더 육감적이군." 나디아는 도대체 어떠한 심정으로 이런 굴욕을 참아내었을까? 육체를 상품이라고 생각하고 대범하게 행동했을까? 생각만해도 바넷사는 혐오감에 몸이 떨렸다. "자, 욕탕 안으로 들어가 촬영을 끝내 버리자." 갑자기 팔을 잡혀 바넷사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려 했다. "내 생각대로 하는 거야. 나디아, 이런 식으로." 그는 갑자기 타월을 벗기고, 눈 깜짝할 사이에 수영복까지 끌어내렸다. 욕탕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선수들에게는 등을 보이고 있었지만, 긴장된 분위기로 보아 모두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음을 느꼈다. "어서!" 팔을 붙잡혀 가슴을 가리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있는 바넷사의 관자놀이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모욕을 당한 바넷사의 몸 안에서 격렬한 분노의 감정이 솟구쳤다. 그러나 마음속에 경계 경보가 울렸다. 어서 여기서 도망치라고, 제이의 손가락이 팔에 파고 드는 것을 느끼고, 공포가 마지막 한조각의 이성 마저 삼켜 버렸다. 시키는 대로는 하지 않겠다! 그럴 수는 없다! 그보다는 죽는 것이 오히려 낫다..... "어서!" 제이는 되풀이 말했다. "얌전하게 말을 듣겠나? 아니면 내가 내던져 주기를 바라나? 좋은 사진이 될 거야. 당신의 숭배자들은 설마 당신이 이런 사진을 찍는 걸 싫어했다고는 믿지 않을 거야. 데일리 글로브 지의 기자에게 당신은 뭐라고 말했었지? '변화가 많은 남성과의 만남은 인생의 양념같은 것이예요.'라고 했었지?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나에게는 연애가 최고예요."라고도 했지?" "그만 하세요." 미칠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그녀는 신음했다. 제이는 몸을 구부리고 협박을 하듯 행동했다. 그의 손이허 리를 붙잡았을 때, 바넷사는 저항하며 발끝을 오므렸다. 설마 그런 짓은 하지 않겠지...설마....방안이 크게 흔들렸다. 바넷사는 그가 자기를 안아올려 욕탕 안으로 내던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지고 귀에는 폭포소리와 같은 둔탁한 잡음이 들려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웅성거림과 개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겹쳤다. 주위가 어수선하게 움직이고 있는 느낌, 치욕과 괴로움을 뒤덮은 것 같은 캄캄한 어둠...... 4장 "곧 좋아질 테니 걱정할 것 없어, 나디아. 다만 기절했을 뿐이야." 개빈은 왜 나를 나디아라고 부를까? 어째서 이렇게 걱정스런 말을 하는 것일까? 바넷사는 일어나려다가 자기가 큰 타월에 싸여서 딱딱한 벤치에 뉘어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와는 다른 방에 있는 모양이다. 개빈과 제이 코틀랜드 이외에는아무도 없다. 아아, 그랬었구나.....,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눈 속을 자극했다. "누군가에게 말해서 가능하면 뜨거운 홍차를 갖다주지 않겠나?" 제이가 개빈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넷사는 오빠를 곁에 있어 달라고 붙잡고 싶었으나, 제이의 날카로운 직감이 그녀의 불안을 꿰뚫어 본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당신을 덮치지 않겠다고 약속할 테니." 타월에 감싸인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바넷사의 시선을 바라보며 제이는 빈정대듯 웃었다. "걱정하지 마. 수영복도 입고 있고, 타월도 덮고 있으니까." "그러나 누가....?" 핏기가 가신 볼을 약간 붉게 물들이며 바넷사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입혀 주었지." 바넷사의 표정 변화를 깨달은 제이는 한순간 망설이는 것 같았다. "신경쓸 것 없어. 잘 알았어, 이제야 겨우." 불쑥 말한 그는 긴장한 듯 약간 얼굴을 돌렸다. 왜 그럴까? 화를 내고 있는 것일까? 기절해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니면, 이제부터 다시 시작할 생각일까? "당신은 아직도 저를....." 바넷사는 당황해서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을 욕탕으로 내던질 생각이냐고 묻고 있는 거야? 아니, 그런 짓은 하지 않아. 아마 내가 사과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제이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걸어 가더니 벽에 기댔다. "지금까지 당신 말을 똑바로 받아들이지 않은 점, 용서해 주기 바라. 그러나 지금까지 당신이 해온 일을 생각하면.....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어. 누드로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두기로 결심했나? 아니면..." 바넷사는 당황해서 얼굴을 돌리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그가 그녀의 표정을 깨닫고, 뭐라고 작은 소리로 욕을 하더니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주 차갑군. 당신 사촌오빠는 도대체 무엇을 하느라 꾸물거리고 있을까? 제이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내 마음은 흔들렸어. 당신이라면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해 주리라고 생각해. 지금까지 나는 성인군자처럼 살아오진 않았어. 욕심나는 것은 바로 손에 넣었고, 싫증나면 버리는 것도 예사였지. 그런데 당신에 대해서는...." 호박빛 눈동자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바넷사에게 속삭였다. "그럼, 이 말만은 해두기로 하지, 어떤 여자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것을 당신에게서 느꼈다고. 그러나 모든 것을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겠다고 약속하겠어, 나에게도 프라이드는 있으니까. 지금까지의 인생에서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입에 담는 여자들만을 사귀어 왔기 때문에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려 애쓰지 않았는지도몰 라. 어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겠어? 가능하면 내가 당신을 발가벗기려 한 그 순간부터. 오늘밤, 함께 식사를 하지 않겠나?" 거절하려 했을 때, 개빈이 돌아왔다. "나디아는 그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 제이는 개빈에게 말했다. "오늘밤,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으니까." 개빈은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제이로부터, 창백하고 불안스러운바넷사의 표정으로 시선을 옮겼으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이가 나가자 걱정스레 누이동생에게 물었다. "괜찮아? 그는 무엇 때문에 너를 저녁식사에 초대했을까?" "뻔하잖아요." 일부러 무뚝뚝하게 말하고, 슬픈 미소를 띠면서 말을 이었다. "남자의 목적은 하나니까." "곧 너를 잠자리로 유혹할 작정이란 말이냐?" 개빈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낭만적인 꿈은 버리는 게 좋아, 바넷사. 그의 결혼관은 알고 있지? 굳이 말한다면 '여자는 얼마든지 널려 있는데, 왜 한 여자와만 살아야 하나?'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 내말 잘 들어. 그는 너를 나디아라고 믿고 있어. 자기와 마찬가지로 경험이 많고 자유분방한 여자라고 말이야. 너는 그런 남자와 사귈 타입이 아니야. 그는 너에게 상처를 줄 거야. 돌이킬 수없는.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바넷사." 개빈은 필사적으로 누이동생을 설득하려 했다. "그가 결혼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은 기억하고 있어. 그러나, 그는 결혼을 비지니스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연애결혼 같은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그에게는 <사랑> 따위의 감정은 아무 뜻도 없는 거야." 오빠의 이야기는 모두 지금까지 자기가 마음 속으로 생각해 왔던 것들과 같았지만, 그래도 그에 대한 그리움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22세인데도 아직까지 애인다운 애인을 가진 적은 없다. 제이에 대해서 느끼는 것 같은 격렬한 감정을 다른 남자에게 느끼는 일은 두번 다시 없을 것이다. 그가 바라는 것이 육체뿐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머리에 새겨 두고 조심만 한다면 큰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품에 안기는 환희는 그 뒤에 기다리고있는 괴로움보다도 더 클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빠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어요." 당황해하는 개빈에게 바넷사는 설명했다. "나는, 이제 바넷사가 아니라 나디아예요. 그렇죠?" "겉으로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마음 속은 역시 바넷사야. 언젠가는 그가 사실을 알게 되리라고 생각한다면, 나 같으면 스스로 빠져들어 가지는 않겠어." 개빈은 열을 띠며 경고했다. 제이는 "네가 나디아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저녁식사에 초대했을 거야. 신문이나 잡지의 고십란을 읽으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가좋아하는 여자는 도회적이고 연애놀이를 즐길 줄 아는 플레이 걸이지. 영원한 사랑을 구하는 순정파 여자가 아니란 말이야. 말해두겠는데, 제이는 너를 상대하지 않아." 개빈은 냉정하게 못을 박았다. "만약 네가 누구인지 사실을 안다면, 그는 도망칠 거야. 그는 나디아를 쫓아다니고 있으니까." 오빠의 단정을 뒤집어놓고 싶었지만, 말이 목구멍에 막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제이는 나디아를 모르고 있으니까, 그가 바라고있는 것은 바넷사, 자기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만약 그가 사실을안다면, 그래도 자기를 바랄 것인가? 아니면 그는 사촌의 화려한이미지에 끌리고 있는 것뿐일까? 제이가 바라고 있는 것은 마음이아니라 육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아직 마음 속에 타오르는 그에 대한 그리움은 꺼버릴 수 없다. 이것은 사랑이아니다. 사랑에는 서로간의 이해와 공감이 따르는 법이니까. 이것은 단순한 육체적인 반응으로, 언젠가는 꺼져 버리고 말 불꽃같은 것이다. 바넷사의 마음 속의 정열이 모든 이성을 삼켜버리려 하고 있다. 이러한 정열은 사춘기에 이미 졸업해 버렸어야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한 번도 발산해 보지 못했던 바넷사의 에너지가 제이를 향해서 한꺼번에 내뿜기 시작한 것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이와의 영원한 관계를 바라는 것은 무리라 할지라도, 일시적인 애인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을 적절히 콘트롤만 한다면 위험은 없을 것 같다. 적어도 바넷사는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바넷사는 제이와의 외출을 위해서 개빈이 사준 새 드레스를 골랐다. 앞을 단추로 여미게 되어 있는 심플한 실크 셔츠드레스로, 눈빛과 똑같은 사파이어빛이다. 옆에 슬릿이 있는 우아한 스커트는 움직일 때마다 긴다리가 살짝 보였다. 허리에는 가는 금빛벨트를 하고 셔츠의 단추는 몇 개 풀자, 손목께에서 잘록해진 넉넉한 소매는 날씬하고 여자다운 몸의 곡선을 강조했다. 부모가 선물로 준 금 목걸이가 움직일 때마다 빛을 받아 반짝였고, 향긋하고 탐스러운 검은 머리는 어깨 근처까지 늘어져 있다. 마지막으로 금빛 하이힐을 신고 이브닝백을 든 다음, 그녀는 방을 나가기 전에 다시 한번 화장이 잘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오늘 밤은 화장하는데 다른 때보다 많은 시간을 들였는데, 그 성과는 훌륭했다. 반짝이는 사파이어빛 눈동자와 드레스 빛깔은 잘 어울리고, 미묘한 색조의 아이섀도우와 마스카라 때문에 여느 때보다 두 배나 크게 보이는 눈은 자기도 놀랄 만큼 매혹적이었다. 입술은 립그로스를 발라서 젖은 듯이 빛나고 있다. 층계를 내려오는 누이동생의 모습을 보고, 개빈은 눈을 치떴다. '꽃이 핀 것 같구나." 불안을 숨기지 못하는 바넷사에게 오빠는 말했다. "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면 좋겠는데, 제이는 지금까지 네가 데이트해 왔던 그런,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아이들과는 다르다. 아무래도 그의 태도로 보아 진심인 것 같고, 그는 너보다 몇 배나 단수가 높아. 말하자면 너는 아직도 걸음마를 배우는 갓난아이고, 제이는 대학을 졸업했다고 할 수 있어. 그와의 데이트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어." "이제 오빠도 보호자 노릇을 그만 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바넷사는 신랄하게 말했으나, 오빠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보고 후회했다. "저도 이제 슬슬 어른이 되어야겠어요." "그래도 좋겠지. 그러나 나디아의 대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입장을 이용해서 어른이 될 것까지야 없겠지? 그 밖에도 어른이 되는 방법은...." 차소리가 들리자 개빈은 말을 멈췄다. 제이의 차소리야." 차가 서고 도어가 닫히는 소리에 이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으면서 바넷사는 숨을 죽였다. 제이는 검은 진바지에 검정 실크셔츠를 입은 간편한 차림으로, 위쪽의 단추는 자연스럽게 열어놓고 있었다. 그는 바넷사를 본 순간, 갑자기 눈빛이 짙어진 것 같았고, 그 순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긴장이 방안에 가득했다. "준비는 됐겠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그의 앞을 지나 밖으로 나온 바넷사는 시원하고 상쾌한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마침 저녁놀이 주위를 감싸기 시작할 무렵이라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살결을 간질이고 장미꽃 향기가 그윽했다. "할레퀸에서 식사를 할까?" 제이는 바넷사를 조수석에 태우고나서 운전석으로 돌아와 핸들을 잡았다. "평판이 아주 좋은 레스토랑이지." 그곳은 새로 개업한 바 겸 레스토랑으로, 이야기는 들었으나 아직 가본 적은 없다. 자동차로 몇 킬로 가자 옛날의 물방아간을 개조한 건물로, 물레방아와 연못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연못에는 아름다운 비단 잉어가 헤엄치고 있고,밖 에서도 점심을 먹을 수 있도록 손질이 잘된 정원에도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자갈을 깐 앞뜰로 차를 타고 들어가자. 정원을 장식하고 있는 갖가지 빛깔의 등불이 바넷사의 눈길을 끌었다. 정원을 지나 레스토랑으로 이어지는 넝쿨이 엉킨 아치 밑을 걸어가자, 또다시 장미 향기가 감돌았고, 순간 그것은 바넷사의 향수 냄새와 섞였다. 너무나 흥분하고 있어서 바넷사는 요리의 선택을 제이에게 맡겼다. 그저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요리를 기다리는 동안 아페리티프를 마실까?" 제이는 미소를 띠며 물었다. 고개를 옆으로 흔든 바넷사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렇군. 오늘밤은 아페리티프로 식욕을 돋굴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당신 이야기를 해주지 않겠어? 기사에서 읽은 것 이상은 아직 아무 것도 모르니까." "이야기할 만한 것도 없어요. 그보다도 당신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정말로 듣고 싶어? 아니면 사나이는 자기 이야기를 하고싶어한다고 누군가로부터 들었나? 예를 든다면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지? 고아원 출신의 축구선수가 어떻게 실업계의 정상까지 올라왔나 하는 이야기? 물론 손쉽고 빠른 방법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야." 제이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만한 고생은 충분히 했지." 제이는 어두컴컴한 레스토랑에서 우아한 차림으로 식사를 즐기는 손님들을 둘러 보았다. 그들이 나누는 조용한 말소리가 아름다운 백뮤직과 어우러져 들려왔다. "15년전이었다면 난 이런 곳에 발을 들여 놓으리란 상상도 못했을 거야. 오늘 당신이 만난 팀의 녀석들은 그 나이 때의 나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세련되어 있어. 가정도 없고, 이렇다하게 이루어 놓은 일도 없고, 나이프와 포크를 어떻게 써야 좋을지도 몰라. 실수를 하지 않을까 해서 항상 겁을 먹고 있는 청년이었지. 그러나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하나하나 배웠어." "결혼은 아직 하지 않았어요?" 참으로 바보 같은 질문을 한다는 듯이 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디아라면 물론 이런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번, 결혼할 뻔한 적이 있었어. 그런데 그녀가 나를 '사람 앞에 내놓으려면 상당히 다듬어야 할 어린애.'라고 말했을 때, 생각을 바꾸었지." 바넷사의 눈에 떠오른 놀라움과 동정에 제이는 을씨년스럽게 웃었다. "아니, 나를 동정할 필요는 없어. 다행히 결혼 전에 도망칠 수 있었으니까, 도리어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 여자는 귀족의 딸로, 나는 어리석게도 두 사람이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했지. 그러나 그녀가 사랑한 것은 유명한 축구선수와 약혼했다는 사실뿐이었어. 처음 그 여자를 만난 것은 내가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직후, 기자회견 때였는데, 방금 말한 대로 나는 곧 진실을 알게 되었지. 그녀의 말은 옳았어, 그 무렵의 나는 몹시 거칠었으니까. 당시였다면 당신은 쳐다보지도 않았을 거야. 돈도 없고 세련된데도 없으며, 무엇 하나 가진 것이 없는 나에게는......" "그러나....." 요리가 나와서 바넷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사나이다움은 사람을 잡아끄는, 마치 여름 벌레를 유인하는 유아등(誘蛾燈) 같은 매력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한다면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의 사나이다움에 매혹당한 여자는 자기가 처음은 아닐 것이면, 물론최후도 아닐 것이다. "그 나이 때는 누구나 불안하고 상처받기 쉬운 법이예요." 웨이터가 테이블에서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바넷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춘기의 괴로움은 누구나 한번은 거쳐야 할 관문이 아닐까요?" "당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야, 그렇잖아? 14세 때미인 콘테스트에서 진(眞)으로 선발되었고, 꿀에 달라붙는 벌처럼, 사나이들이 당신 주위에 모여들었다고 개빈은 말했어. 그리고 4년 동안 계속해서 이 고장의 미의 여왕이었다고 하니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모를 리가 없어요." 바넷사는 신중하게 골라서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그건 그럴 테지. 당신의 경우는 그 아름다움과 매력이 오히려 재난의 씨앗이었다고 말하는지 모르지만, 수많은 여성의 가슴에 질투심을 불타게 했을 것이 틀림없어. 우리는 두 사람 다 어려움을 헤치고 살아온 셈이야.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한 사람치고 당신에겐 이상할 만큼 순진한 데가 있어. 일류 모델은 지금 당신이 보여주고 있는 청순함과는 거리가 멀지. 마치 두 사람의 여성을 보는 것 같아. 실제의 당신에게는 사진의 표정에서 느낄 수 있는 선정적인 요염함은 조금도 없거든." 바넷사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진실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다. 그녀는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가 늘게 뜨면서 입술을 약간 내밀었다. "여태껏 당신이 보아온 포즈예요?" 그가 호박빛 눈을 크게 뜨는 것을 보고, 바넷사는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약간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지, 그런 자세야." 그는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진보다 실물 쪽이 훨씬 더 매력적이지만, 그런 당신을 보면 유혹당하지 않을 남자는 없을 거야." 갑자기, 바넷사는 멍청하게도 이렇게 속삭였다. "유혹당하다니요?" 제이는 테이블 위에서 갸름한 손을 꼭 잡았다. "식사 같은 건 문제가 아니야.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먹는 것이 아니야......우리 집으로 가지, 나디아." 혓바닥이 저려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계속 기다리고있었던 유혹인데도 이렇게 마음이 동요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래도 바넷사는 얼굴이 붉어진 것을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태연하게 포도주를 마셨다. "서로 밀고 당기는 게임은 그만 하지. 얼마나 당신을 갖고 싶어하는 지는 잘 알고 있을 거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는 당신을, 그리고 당신은 나를 원했었어." 호박빛 눈동자는 상대방의 시선을 붙잡자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긴장과 흥분 때문에 현기증이 나 바넷사는 다시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곧 레스토랑을 나왔다. 서늘한 미풍이 뜨겁게 달아오른 볼에 닿자 상쾌했다. 제이는 곧바로 자동차로 돌아가지 않고,사람 눈에 띄지 않는 샛길로 돌아서서, 건물의 한쪽을 덮고 있는 등나무 덩굴 아래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바넷사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손가락을 머리 속에 쑤셔넣으면서 사파이어빛의눈 동자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이렇게 하고 싶었는지, 당신은 도저히 알지 못할 거야." 제이는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처럼 하얀 살결에 뜨거운 입김을 느낀 바넷사는 몸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바넷사는 몽유병자처럼 황홀하였다. 제이는 처음은 상냥하고 부드럽게 행동했으나 점점 거칠게 변했다. 바넷사는 소용돌이치는 상대의 열풍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갑자기 그가 포옹을 풀자, 그녀는 밀려오는 시원한 밤바람에 충격을 받았다. "당신하고 있으면 사랑에 빠진 어린 소년처럼 되어 버려." 제이는 중얼거리며 떨어져 있기가 싫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볼을 쓰다듬었다. 그의 자극적인 손놀림에 자기도 모르게 다가서는 바넷사를 제이는 미소로 제지했다. "안돼. 이 이상 계속하면 나는 못된 소년처럼 이 자리에서 당신을 정복하고 말걸." "안 돼다니요?" 자기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다는 것을 바넷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신을 굶주린 사나이가 분별도 없이 음식에 손을 대는 것 같은 방식으로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아. 우리의 사랑은 맛있는 요리를 처음 맛보듯이 천천히...." 그렇게 말하면서 제이는 자신의 자동차 쪽으로 걸어갔다. "자, 가지, 나디아." 그는 바넷사를 보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밤은 돌려보내지 않겠어." 나디아! 사랑해 버리고 만 남자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에 바넷사는 몸을 떨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안전한 길로 돌아갈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그러나 바넷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를 약속하는 위험한 길을 선택했다. 이성과 상식에는 자물통을 채우고, 생전 처음으로 느낀 사랑의 감격에 눈물을 글썽이며 바넷사는 중얼거렸다. "네, 당신 집으로 데려가 줘요." 교외의 빌딩 속에 있는 아파트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두서없는 대화를 계속하면서, 이 아파트는 매너하우스가 완성될 때까지의 임시 거처에 불과하다고 제이는 설명했다. 현대적인 빌딩 앞에서 차가 섰을 대 바넷사의 마음은 침울하였다. 타오르는 정열에만 정신이 팔려서, 두 사람의 가치관의 차이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는 굳이 그런 생각은 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것이나 전통을 사랑하는 바넷사와는 반대로, 제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아름다운 매너하우스를 개축하는 전형적인 현대인으로, 만약 그녀가 나디아가 아님을 안다면 인정사정없이 냉정하게 돌아설 것이 명백하다. 차에서 내리는 바넷사의 마음은 공포심으로 떨렸다. 그 망설임을 눈치챈 제이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빌딩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의 단추를 눌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하얀 벽에 둘러싸인 아담한 홀이 나왔다. 거울 앞에 관엽식물이 놓여 있었다. 바넷사는 긴장한 채 제이가 도어를 열고 불을 켜는 것을 기다렸다. 불이 들어오자 페르시아 융단이 깔린 좁은 현관으로 들어섰다. "약간 썰렁한 기분은 들지만," 제이는 그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도어를 열고 그녀가 들어가기를 기다리며 말했다. "몇 달동안만 살 집이니까." 벽면 가득히 책이 꽂혀 있고, 바닥에는 베이지색의 벽과 어울리는 적갈색의 카핏이 깔려 있다. 난로옆에는 가죽으로 씌운 소파, 그 곁에는 작은 테이블, 안쪽 선반에는 스테레오와 레코드가 놓여 있다. "뭔가 마실 것을 가지고 오겠어. 잠시만 기다려 줘." 벽에는 바넷사가 알지 못하는 화가의 판화 작품이 몇 장 걸려있었다. 그 정교한 솜씨로 미루어 꽤 비싼 작품임에 틀림없다. 책장 쪽으로 다가간, 그녀는 다양한 장서가 꽂혀 있는 것에놀 랐다. 세익스피어, 체홉, 디킨즈 등 종류도 아주 다양했다. 소설책 옆에 교과서가 꽂혀 있고, 그녀 자신도 어렸을 때 자주 읽었던 동화책이 꽂혀 있었다. 축구에 관한 책과 장기에 대한 책들도 갖춰져 있다. 발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호박빛의 액체가 든 글라스를두 개 들고 제이가 돌아와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바넷사는 농담조로 물었다. "마치 폐관한 도서관을 고스란히 사들인 것 같군요." 그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고 눈동자가 얼어붙었다. "그런 농담은 하지마. 전부 내가 읽은 책들이야. 가난하고 불우한 소년에게는 독서가 현실을 잊게 해 주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었나? 다행스럽게도 고아원에는 책이 많았지. 덕분에 나는 어렸을 때 독서의 즐거움을 알았고, 어른이 된 후로는 즐거움 이상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어." 제이 코틀랜드가 독서광이며, 이 방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굉장한 실내장식가기도 하다는 사실은 그녀를 크게 놀라게 했다. 그는 또 다시 날카로운 직관으로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본 듯 이렇게 말했다.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다이아몬드 원석도 긴 시간을 들여갈고 닦으면 제 빛을 발하는 법이야." "여기에 있는 것은 모두 당신이 손수 선택한 건가요?" 바넷사가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자 제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물론이지.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은 나니까. 기능적이고 너무 정돈이 잘 된 실내장식은 좋아하지 않아. 정이 든 물건들에 둘러싸여 사는 것이 좋아. 여기에 걸린 판화는 축구선수가 되어 처음 받은 돈으로 산 것이야. 주식을 처음 산 것은팀이 우승한 뒤였어. 사나이는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 주어진 재능을 최대한 이용하지. 스포츠 선수라고 해서 머리가 나쁜건 아니고, 사업가라고 예술에 관심이 없어라는 법은 없지." 자기가 그를 오해했다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했지만, 사과의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음악을 들을까?" 제이가 스테레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한순간, 웬일인지 그 날밤 자기를 사로잡고 있던 마술이 풀리는 듯했다. "아아뇨. 전, 돌아가는 것이....." 바넷사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마음이 달라졌나?" 그는 글라스를 건네 주면서 물었다. "억지로 당신을 붙들어 둘 생각은 없어. 어째서 갑자기 생각이 달라졌을까? 판에 박힌 방법은 불만인가? 당신은 좀 더 거친 방법을 좋아하나?" "아아뇨. 그렇지 않아요!" 바넷사는 충격을 받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위스키를 한모금 마셨다. 알콜이 목구멍을 태워, 금방이라도 기침이 나올 것 같았으나 바넷사는 감히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또 다시 한모금 마셨다. 두 눈동자는 분노를 담고 있다. 위험한 호랑이의 눈초리. 그리고 그 호랑이는 먹이를 빼앗긴 것 같은 태세다. "실례하겠어요, 제이." 글라스를 비우고, 도어 쪽을 힐끗 쳐다보면서 그녀는 말했다. "식사에 초대해 주셔서 고마와요. 그러나....." "나에게 감사를 하려면 이런 식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바넷사는 그의 팔에 안겨 있었다. 그의 포옹에는 예상했던 거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제이는 바넷사의 이성을 서서히 마비시켜 버렸다. "사실은 당신도 돌아가고 싶지 않지?" 그는 긴장하여 떨고있는 그녀를 더욱 세게 안았다. "그렇다고 말해, 나디아."그는 속삭였다. "사실은 여기에, 내 품 안에 있고 싶다고 말해." 바넷사는 눈을 감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5장 제이는 마치 자기가 맡은 일이 하기 싫어 일부러 질질 끌고 있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바넷사는 누워서, 지금 자기 마음속에 싹튼 감동을 그도 또한 느끼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 있는 것 같은 정열의 불꽃이 그의 마음속에서도 일고 있는 것일까? 두 사람은 제각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바넷사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마음으로 제이의 속삭임을 들었다. "조용히.......당신은 얌전한 처녀지, 나는 알고 있어. 그러나 조금만 기다리면 돼, 나디아 기쁨이 넘치는 시간을 가지게 될 거야."제이는 한 손으로 비단결같이 매끄러운 바넷사의 머리를 쓰다듬고, 또 한 손으로는 자기 머리를 받치며, 떨고 있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당신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우리의 일이 잘 되리라는 것은 그때부터 알고 있었어. 그러나 당신이 이처럼 민감하고 매혹적이라고는 도저히...." 그는 다정한 손놀림으로 바넷사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호박빛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바네사는 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금방에라도 그의 유혹에 빠져 버릴 것같이 되었으면서도 아직도 '사랑한다.'는 그의 고백을 마음속으로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그 말을 듣고 싶다. 아아, 나는 얼마나 바보일까? 처음부터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그저 덮어놓고 달려오고말다니! 그때 제이가 문득 몸을 굳히더니 얼굴을 들었다. "전화야." 그 말만을 하고서 그는 몸을 뗐다. 비로소 바넷사의 귀에도 벨소리가 들렸다. 거실 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바넷사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바로 돌아온 제이가 급히 서두르는 것을 보면서, 바넷사는 어리둥절했다. 엄숙해진 그의 눈에는 아까까지의 정열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매너하우스에 누군가 불법침입해 왔다는 군." 그는 계속 설명했다. "시의 불량배들인 모양인데 집에 불을 질렀대. 경찰에서 전화를 해왔는데 불길을 잡아 사태는 일단 수습되었지만 되도록 빨리 현장에 와달라고 했어." "저도 함께 가겠어요. 도중에 집 앞에서 내려 주시겠어요?" 바넷사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가만히 앉아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도저히 못할 노릇 같았다. 제이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재빨리 손목시계를 보니, 열 한 시를 조금 지나 있었다. 차가 좁은 길을 올라가자, 로지의 창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매너하우스는 모두 타 버렸을까? 사람 소리가 들리기는 했으나 불꽃이나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의 도어를 열자 차소리를 듣고 로지에서 나온 개빈이 두 사람을 보고 손을흔들었다. 그 얼굴은 검댕으로 더러웠고, 옷에서는 불내가 났다. "어떻게 됐지?" 제이가 말을 걸었다. "경찰로부터는 불법침입이있었다는 것과 불이 났다는 이야기밖에 못들었는데." "지금까지는 그렇게 큰 피해는 없는 것 같습니다. 범인은 곧 붙잡혔는데 불량소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들어가서 불을 지르고 있는것을 운좋게도 순찰 중이던 경관이 발견했답니다. 작은 화재로 끝났지만, 오래된 집이어서 소방대원들은 완전히 진화된 것이 확인될 때까지 경계를 하는 모양입니다. 지긋지긋하고 긴 밤이 될 것 같아요."개빈은 바넷사 쪽을 돌아보았다. "물을 좀 끓여주지 않겠니? 목이 몹시 마른 작업이어서 말이야." "자네도 현장으로 돌아갈 거라면 함께 가지." 제이는 개빈에게 말했다.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구나, 그는. 바넷사는 슬펐다. 비로소, 그것도 무서울 만큼 명확하게, 제이라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역할이 얼마나 허무하고 고독한 것인가를 안 것이다. 그는 연애 상대로서는 최고지만, 여자와 감정적인 연관을 갖는 것을 철저하게 피하고 있다. 고의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는 자기 입으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만약 진짜 바네사 ---- 곧 연애의 룰을 모르는 순진한 처녀 ----- 를 만났다면 절대로 접근하지는않 았을 것이라고, 그러나 현실적으로 제이는 자기를 요구하지 않았던가? 두 남자가 차를 타고 가 버리자, 바넷사는 집으로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아무리 어린 시절이 불우했다 할지라도, 결코 치료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상처를 받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을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여자의 사랑? 설마! 바넷사는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빈정대듯 미소지었다. 제이의 인생에 있어서 사랑만큼이나 관계가 없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날밤 시간은 느릿느릿 지나갔다. 이미 진화되었다고 하지만 소방관들은 거의 새벽까지 남아서 경계를 계속했다. 새벽녘, 바넷사는 불안한 생각으로 매너하우스를 보러 갔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았다. "집 안의 피해는 거의 연기에 의한 거야." 커피가 든 보온병을 건네 주자 개빈이 말했다. "제이는 서둘러 건축가를 불러서 보인 모양이야. 아마 내주부터 수리를 시작할 예정인가봐. 바넷사, 그런 얼굴을 하지 마." 오빠는 달랬다. "제이는 지금의 외양을 살리면서 손을 댈 작정인 모양이니까." "이제 알았어? 내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야만스런벼 락부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뒤에서 제이의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자, 그도 또한 오빠와 마찬가지로 검댕으로 새까맣게 더러워졌고, 그 눈은 피로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는데 그을은 얼굴에는 주름이 많았다. 바넷사는 문득 늙었을 때의 그의 얼굴을 상상했다. 그녀의 가슴은 사랑과 동정으로 아파오기 시작했고, 그를 포용하여 위로해 주고, 이마의 주름에 입맞추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제이에게 오늘 밤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권하고 있는 중이야, 조금이라도 잠을 자둬야 하니까 말이야. 괜찮겠지?" "물론이죠." 애써 제이로부터 눈을 돌린 채, 바넷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먼저 돌아가서 침대를 준비하겠어요." "그래, 부탁한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충분히 준비해 주면 좋겠어." 개빈은 바넷사의 뒤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들은 두 사람 다 먼지투성이니까."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나서, 제이의 자동차가 멎는 소리가 들렸다. 로지에는 침실이 다섯 개 있는데, 바넷사는 그중 전용 욕실이 붙은 손님용 침실을 제이를 위해서 준비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주방에서는 커피가 끓고 있어서 고소한 냄새가 집안에 가득했다. 개빈은 코를 벌름거리면서 반질반질 윤기가 나느 바닥에 아무렇게나 자켓을 벗어 던졌다. "오빠도 참, 진짜 어쩔 수 없군요." 바넷사는 그것을 집어들자, 밖에 나가 검댕을 턴 다음 방으로 돌아와 걸레를 집어들었다. 제이가 의아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주 가정적이군." 걸레로 바닥을 닦는 바넷사에게 제이는 불쑥 말했다. 개빈은 놀란 듯이 그를 쳐다봤다. "네, 바네....." 위험한 고비에서 입을 다물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나디아는 아주 가정적입니다. 그녀를 아내로 맞는 사나이는 최고로 행복할 겁니다. 요리솜씨도 뛰어나고....." 제이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오른 것을 보고 바넷사는 자기도 모르게 오빠 쪽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오빠는 그런 말을 한 것일까? 바넷사는 화가 났다. 마치 누이동생을 떠맡기려하고 있는 것 같다. "오빠도 참." 제이를 객실로 안내한 다음, 다시 주방으로 돌아온 바넷사는 오빠에게 불평을 했다. "그런 식으로 말할 건 없잖아요. 마치 내가 결혼 상대를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는 것 같이 들렸어요." "미안하다." 개빈은 풀이 죽어서 사과했다. "하마터면 네 이름을 말해 버릴 뻔해서, 당황한 나머지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고 말았단다. 어쨌든 제이는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을 거야." "그럴까요?" 오빠에게 제이와의 관계를 다 털어놓을까 생각했으나, 애써 잠자코 있었다. 이야기해 봤자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일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 거짓된 상황을 끝내 버리려고 애쓰고 있었으나 지금은 반대로, 거짓이 탄로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거짓이라는 것을 안다면 사랑의 꿈은 깨지고 말 테니까. "나는 그만 자야겠어." 개빈은 말했다. "너도 피로하겠지? 두세시간이라도 자는 것이 좋아." 그렇다, 확실히 지쳐 있다. 조금이라도 잠을 자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집 안에, 불과 몇 개의 도어를 사이에 둔 저쪽에 자기를 강렬히 잡아끄는 남자가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는 어려웠다. 그도 역시 나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넷사는 한숨을 쉬고 어떻게든 잠들려고 몸을 뒤척였다. 자기가 제이를 찾아갈 수도 없고, 그가 찾아올 기미도 없다. 뜨거운 포옹의 기억에 몹시 떨렸고, 간신히 들려던 잠도 그러한 생각으로 달아나 버렸다. 바넷사는 방향을 잃은 난파선 같은 기분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늘은 파랗게 개어 있고, 멀리 기적적으로 그 모습을 유지한 매너하우스의 지붕이 보였다. 어제 제이는 의심할 수 없이 격렬한 마음으로 자기를 요구했다. 그런데 왜 이런 불안을 느끼는 것일까? 도대체 어째서, 생각지도 못했던 타격을 주려고 복수의 여신이 그늘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지는 것일까? 양심의 가책 때문일까? 로브를 입고 침실에서 나와 보니, 제이의 방은 도어가 열러 있고 침대는 텅 비어 있다. 욕실에서 재빨리 샤워를 하고, 이를 닦으면서, 하얀 살결에 생긴 희미한 파란 멍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모든 것이 기대대로 되지는 않았다. 사실은 오늘 아침, 애인의 품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의 흡족한 마음으로 잠을 깨고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몹시 꺼림칙하고 착잡한 마음이었으며, 더구나 흡족한 기분이라고는 조금도 느낄수 없는 상태다. 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커피를 끓였던 모양으로, 아직도 커피가 반쯤 남아 있는 퍼콜레이터가 놓여 있다. 테이블 위에는 빵을 담았던 접시가 놓여 있다. 개빈과 제이는아 침식사를 마치고 나간 것일까? 밖을 보니 제이의 차가 보이지 않는다. 실망감에 가슴이 아팠다. 돌아가기 전에 인사 정도는 해줘도 좋을 법한데. 바넷사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자기의 어린애같은 생각을 나무랐다. 마치 혼자 남게 된 소녀처럼 삐칠 것은 없다. 제이에게는 볼일이 산더미같이 많을 것이고, 오빠도 누이동생을 깨우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주방에 돌아왔을 때, 제이가 어디를 갔는지 몰라도 혼자서 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커피, 다 끓었나?" 흐트러진 머리에 파자마 차림의 개빈이 졸리운 얼굴로 서 있었다. "커피를 마시고 정신을 차려야지. 그런데 제이는 아직도 자?" "벌써 없어졌어요. 나도 방금 일어났는데 언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은 모양이죠?" "그래, 그럴 테지. 그러고 보니 아까 도어를 노크하는 소리 듣지 못했니? 몇 시쯤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지금 몇 시지?" "열 한 시 반이예요." 바넷사는 대답했다. "노크 소리는 못들었지만, 어쩌면 우유 배달하는 사람인지도 몰라요. 지난 주 우유값을 아직 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오늘 매너하우스에 가서 사진을 찍을까 생각해. 어제 사진은 벌써 현상을 했는데 보겠니?" 바넷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촬영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컵에 커피를 따르고있을 때, 개빈이 돌아와 쾌활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것 봐." 그는 테이블 위를 치우고 인화한 사진을 펼쳐 놓았다. 바넷사는 할 수없이 테이블로 다가갔다. 사실 바넷사는 사진 찍는것을 아주 싫어했다. 미인이고 요염한 나디아와 얼굴은 닮았지만 이렇다 할 매력이 없는 자기가 사진으로 더욱 뚜렷하게 비교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봐라. 나쁘지 않지!" 오빠의 재촉을 받고 바싹 다가선 바넷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말이 맞지?"" 개빈은 방긋 웃었다. "지금까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나디아는 확실히 사진을 잘 받지.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애교를 부리니까 말이야. 그런데 너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어. 이 볼의 느낌이라든가 이 눈동자...." 개빈은 열심히 누이동생을 칭찬했다. 매일 얼굴을 맞대면서도지금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아름다움을 오빠는 사진작가의 입장에서 솔직이 찬양하고 손가락으로 사진을 쓰다듬기까지 했다. 사진속의 바넷사에게는 뭔가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기묘한 매력이 있었다. "좀 더 빨리 네 사진을 찍어야 했어." 개빈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너는 항상 안 찍겠다고 도망다니기만 했지. 나디아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진을 보고네게는 그녀에게 없는 뭔가가 풍기고 있다는 것을 납득하겠지? 나디아는 사나이로부터 모든 것을 짜내고, 그리고 간단히 버리는 타입이지만, 너는 모든 것을 주는 타입이야. 그것이 정확하게 사진에 나타나 있잖아. 잘 봐라, 이런 곳에......." 그는 흥분하며 입술을 가리켰다. "그리고 여기에도." 그렇게 말하면서 누이동생의 사피어어빛 눈동자를 보고 웃었다. "제이도 이 사진에는 틀림없이 만족할 거야.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저건 제이의 차소리 아냐?" 호화로운 스포츠카의 엔진 소리가 들리자, 바넷사는 불안과 기쁨으로 숨을 죽였다. 제이가 돌아왔다! 이건 마치 첫사랑에 몸달아하는 10대 소녀 같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이만 더 들었지, 첫사랑에 몸달아하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고,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몸달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엔진이 멈추고 덜커덕 도어를 닫는 소리가 났다. 바넷사는 가슴 설레면서 현관문을 열러 가는 오빠를 지켜보았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바넷사...." 도어를 연 개빈이 갑자기 신음하듯 소리를 질러 바넷사의 설레던 마음은 제트기를 타고 급강하하듯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오빠 곁으로 다가가 밖을 쳐다보니 제이가 조수석의 도어를 열고 누군가를 부축해서 내려 주고 있었따. 자세히 볼 필요도 없이 첫 눈에 그게 누구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차에서 내리고 있는 사람은 사촌언니인 나디아 마치였다! 함께 이쪽으로 오고 있는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바넷사는 사태의 중요성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나디아의 얼굴을 본 순간 뼛속까지 얼어붙었다. 교묘히 계속해 거짓말을 하면, 제이와의 관계가 위태롭게 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나디아의 표정에는 심술은 승리의 표정이 역력했고, 피를 연상시키는 새빨간 매니큐어를 한 손이 제이의 팔을 제 것인양 붙잡고 있다. 그는 흰 진바지에 짙은 청색의 셔츠로 갈아입고 있었다. 바넷사는 그의 침실에 있는 나디아를 상상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는 제이의 옷을 벗겨 주고 그에게 안겼을까? 구역과 함께 현기증이 나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금방 졸도라도 하지 않을까 하고, 개빈도 걱정을 하는 눈치였다. "꽤 오래간만이구나. 잘 있었니?" 나디아는 달콤하게 인사하고, 뭔가 속셈이 있을 때 쓰는 매혹적인 허스키 보이스로 말을 이었다. "주일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니? 어떠한 거짓말도 언젠가는 들통이 난다고 심하지 않니, 바넷사.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거짓말을 했지? 하기야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나디아의 웃음은사카린처럼 달콤했다. 바넷사는 제이의 눈을 피하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도저히 그 눈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호박빛의 눈동자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뚜렷이 말하고 있었다. 투명 인간이라도 보듯이 그는 바넷사를 꿰뚫어보고있다. 바넷사는 자신을 천천히 파멸로 이끄는 묘한 분위기를 아프게 감지했다. "나디아, 도대체 어떻게 여기에?" 개빈은 화난 듯이 말했다. 나디아는 곱게 그린 눈썹을 치켜올리고 도톰한 입술을 내밀었다. 여느 때와 같이 공들여 화장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어, 멋있게 균형잡힌 몸매가 더욱 돋보였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물론 알고 있겠죠? 아니면 오늘 아침신문을 아직도 보지 못했어요?" 개빈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신문을 집어들자, 이맛살을 찌푸리고 페이지를 넘기더니, 갑자기 어떤 기사를 찾아내고는 손을 멈췄다. 오빠가 내민 것은 고십란으로, 억만장자인 사업가 제이 코틀랜드가 새로 사귀고 있는 걸프렌드는 그의 고향 크레아웰에서 알게 된 아름다운 모델, 나디아 마치라는 기사였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당연하지 않니?" 나디아는 파랗게 질린 사촌동생의 얼굴을 차갑게 쳐다보았다. "왜 이런 거짓말을 했는지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내가 외국에 가 있으니까 들통나지 않을 줄 알았지? 그러나 미안하게 됐구나, 네가 주역인 무대가 생각보다 빨리 막을 내리게 되어." 그녀는 사촌동생의 얼굴에서 냉담한 제이의 표정으로 시선을 옮겼다. "당신에게도 한마디 불평을 하고 싶어요, 제이. 바넷사와 나를 착각하다니! 바넷사는 그런 방면에는 몹시 어두워 내 이름을 이용해서, 진짜 사나이의 사랑을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던 거예요." 이번에는 아름다운 사파이어빛의 눈동자를 바넷사에게로 돌리고 매정한 목소리로 계속했다. "기억하고 있지? 너에게 보이프렌드가 생길 때마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 열을 올리곤 했던 일." 그리고 다시 옆에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바넷사만을 책망하는 것은 부당한지도 모르죠. 나에 대해서 그녀는 항상 놀랄만큼 호전적이었어요. 질투 때문이죠. 그러나 내가 더 미인이라서 인기가있었다 해도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 얼굴 모습은 꼭 닮았지만,바넷사는 항상 내 그늘에 가려져 있었어요." 나디아는 일부러 입술을 내밀었다. "바넷사는 아마 당신을 놓친다면 짐스러운 처녀의 이미지를 버릴 기회가 없어진다고 생각했겠죠. 아니면 딴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독살스러운 눈초리로 바넷사를 노려 보았다. "제이를 침대로 유혹했다가, 강제로 강간당했다고 떠들어대서 결혼반지를 받아내려 했을까?" 주방의 무겁고 답답한 공기 속에 나디아의 높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바넷사는 멍하니 선 채, 너무나도 잔인한 말에 대꾸할 말을 잊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신랄하게 말하는 것일까? 특히 처음 대면하는 사람 앞에서?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녀는 지금까지 바넷사를 헐뜯을 수 있는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았었다. 어깨를 안아 주는 오빠의 존재를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바넷사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 나디아. 처음에 제이가 바넷사를 너로 착각했단다. 그리고 그가 축구팀의 PR사진에 바넷사를 ---- 너를 ----- 쓰고 싶다고 해서, 일부러 사실을 밝힐 필요는 없다고 내가 부탁했지. 바넷사의 잘못이 아니야...." "그래요? 오빠는 항상 이런 식으로 누이동생을 감싸왔어요. 그러나 이번만은 귀여운 누이동생이, 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순진하지 않았던 모양이죠, 그렇죠? 적어도 거짓말을 해서까지 남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하는 건 순진한 사람이 할 짓이 아니예요." 나디아는 제이 쪽으로 몸을 돌리고 아양을 떨었다. "달링, 진짜 나를 알았으니까 앞으로 다시는 평범한 사촌동생과 착각하지 않겠죠? 당신도 운이 나빴어요." 그 눈동자는 바넷사를 비웃고 있다. "오늘 아침 노크했을 때, 공교롭게도 제이가 문을 열어 주더군. 그의 인사하는 방법이 굉장했어.....우리가 단순한 관계 이상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지." 바넷사는 그 장면을 상상하니 속이 메스꺼워졌다. 나디아가 나타나자, 제이는 나로 착각하고 그녀를 꼭 껴안았던 것이다...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났다. 그동안, 제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이해해 달라고 간청하는 바넷사의 눈초리를 묵살하고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나디아, 그만 됐으니 돌아가지......" "제이?" 바넷사가 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러 나가려는 제이를 붙잡았다. "부탁이예요,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어."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나디아가 말한 대로 당신은 그녀에게 질투하고 있는 것 뿐이야. 질투 때문에 사촌언니 행세를 할 정도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도 자신이 없는가?" "당신이 그 팔로 안아 준 것은 바로 저예요!" 바넷사는 괴로운 나머지 생각지도 못했던 애원의 말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그건 그렇지. 그러나 나디아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에 불과해." 제이는 잔인하게 잘라 말했다. "내가 찾은 것은 나디아지 당신이 아니야. 나중에 이야기하겠어." 그는 갑자기 개빈에게 말했다. "촬영을 다시 하는 거야. 이번에는 진짜 모델로 말이야. 본인에게는 이미 말했어." 마지막으로 한 번 제이는 엄숙하고 딱딱한 호박빛의 눈초리를 바넷사에게 돌렸다. "내가 제일 싫아하는 것은 거짓말이야. 그리고 당신은 아마도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비열한 거짓말장이 같아. 이렇게 두 사람을 비교해 보면 어떻게 착각을 했는지 이상할 정도야. 나디아는 황금이고 당신은 형편없는 쓰레기야, 바넷사." 도어를 열고 나가면서 그는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 "진짜와는 비교도 안되는 모조품일 뿐이야." 엔진 소리가 멀어져 가고, 개빈이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가 오빠에게 안겨 이층으로 옮겨져 침대에 뉘어지는 것을 바넷사는 마치남의 일처럼 희미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자기에게 있다고 믿고, 나디아를 저주하면서 필사적으로 사과하는 오빠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제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녀는 지금, 아픈 감정도 미치지 않는 딱딱한 껍질 속에 틀어박혀 버렸다. 다만 제이의 마지막 말만이, 깊은 연못으로 떨어져 가는 돌맹이처럼 마음속 깊은 바닥으로 떨어져 가고 있었다. 6장 '휴가를 떠나 어디선가 느긋하게 지내는 것이 좋다'는 것이 의사의 권유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의 주치의로 모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쓸데없이 캐묻지는 않았다. 의사가 말하는 <정신적 긴장>에는 휴양이 제일이라는 오빠의 권유를 바넷사는 잠자코 받아들였다. 스페인에 사는 개빈의 친구 집에서 두 주일을 지낸다 -----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녀는 반대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주위에 대해서 완전히 무관심하게 되어 버렸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바넷사는 자신의 괴로움에 빠져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수와 데이비드는 10세와 8세 난 아들을 가진 30대 후반의 호감이가는 부부였다. 그들은 새로 개발된 고급 주택지의 쾌적한 집에 살고있었다. 바넷사를 가족과 같이 따뜻하게 받아들여 주었으며, 자신들과 함께 행동하도록 강요하지도 않았다. 바넷사는 처음 사흘 동안은 그 집에서 조금 떨어진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곳은 휴가차 찾아온 사람들도 없는 곳이어서 하얀 모래사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넷사는 그동안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을 생각해 보고 고뇌에 가득 찼던 모든 순간을 다시 느껴 보았다. 도피해서, 뭔가 다른 일에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다행히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녀는 조금씩 자신감을 되찾아갔고, 마침내는 최후의 장면까지 상기시킬 수 있게되었다. 물론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광경이 머리에 떠오르려 할 때 당황해서 다른 것을 생각하려고 하는 나약한 마음은 없어졌다. 다만 한 가지, 항상 생각하기를 거부해 온 것은 제이와 사랑을 나누었던 장면이다. 아직은 그것을 직시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얼마동안은 잔잔한 마음으로 그 광경을 상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바넷사는 제이와 나디아로부터 받았던 잔인하고도 냉정한 비난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생애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고 그 사랑에 마음과 정성을 온통 쏟았다. 제이를 사랑하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를 받아들이려 했다. 그 사실은 무시할 수도 지울 수도 없다. 그러나, 바넷사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이 비참한 상황을 얌전히 받아들이고만 있을 것인가, 괴로움을 발판으로 딛고 일어설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밖에 남겨지지 않은 것이다. 프라이드 --- 그것은 산산히 부서진 파편에 불과할 뿐, 동정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나디아는 이번일의 경위에 대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나발을 불고 돌아다닐 것이다. 집과 일이 있는 고향, 크레아웰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앞으로는 절대로 사촌언니의 대역은 하지 않겠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나디아의 대용품으로서의 바넷사가 아닌, 독립되고 성숙한 바넷사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여 달라고 요구하자. 이렇게 결심을 하자, 무감각적인 상태에서 조금은 해방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깊은 고뇌와의 싸움으로 창백하고 야위기는 했으나 적어도 현실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는 되었다. "당신이 몹시 괴로와하고 있는 건 알고 있어요." 바넷사가 온 날로부터 사흘째 되는 밤에 수는 조용한 말투로 말했다. '만약 그 괴로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줘요. 누구에게도 당신이 한 말은 말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고요, 설령 남편인 데이비드라 할지라도." 바네사는 수의 말을 믿었다. "오빠가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자기 때문에 당신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고만 했어요. 그는 당신 일을 몹시 걱정했어요." "네, 알고 있어요." 수에게 고백을 한 것은 그 주일이 끝날 무렵이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좌절에서 일어설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데이비드는 아이들과 함께 시내에 나가 없었고, 수와 단둘이 풀사이드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을 때, 바넷사는 되도록 간단하고 담담하게 경위를 설명했다. "어머나, 놀랍군요! 당신 사촌언니는 제 일급의 악녀예요."이야기를 다 듣고 난 수는 분통을 터뜨렸다. "사실은 그녀 쪽이 당신의 존재를 신경쓰고 있는 게 아닐까요?" 바넷사의 의아한 표정에그 녀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어릴 때부터 사촌언니의 그늘에 가려 부당한 대우를 받았었다는 것은 잘 알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온 것 같아요, 그녀는 아주 제멋대로의 사람이죠? 자기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하느 내 말 알겠죠? 그녀가 당신을 부러워했다고 해도 놀랄 것은 없어요." 바네사는 말의 뜻을 묻듯이 수를 쳐다보았다. "물론, 나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어요. 무엇이든지 가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 있잖아요? 예를 든다면 누군가가 자기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참지 못하는 사람 말이예요. 어쩌면 그녀가 당신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앙탈을 부리는 것은, 사실은 당신이 자기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하기야 이런 말을 한다고, 제이 코틀랜드에 관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수는 말을 끊고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나는 당신을 위안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게 아니예요. 당신 이야기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자기 인생에 짐이되는 것 같은 타인과의 관계를 바라지 않는 타입 같아요. 그리고 그러한 인생관을 뒤집어 놓을 것 같은 여자를 몹시도 경계하고 있어요. 틀림없이 약간 염세적인 독불장군이예요. 바넷사, 지금부터 하는 말은 당신이 듣기 거북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들어줘요." 수는 조용한 말투로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다운 사랑이나 정직의 귀중함과 영원한 행복을 소중히 하도록 배워왔어요. 만약 나에게 딸이 있다면 역시 진실을 가르쳐 줄 거예요. 바넷사, 헛된 꿈을 쫓으며 인생을 허송하지 말아요. 그는 당신에게 자기 속셈을 드러내고 말았어요. 그가 찾고 있던 것은 예를 들면 나디아같이 아무런 의무나 구속도 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상대란 것을 확실히 알았잖아요? 설령 당신이 바라는 감정적인 관계로부터는 뒷걸음질쳤을 거예요. 그러한 타입의 남성도 있는 거니까, 그것은 그것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는 잘 알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당신은 항상 나디아였으며 그리고 당신에 대해서 느꼈던 격렬한 감정을 나디아에게 쏟은 것이라는 것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이야기는 모두 바넷사 자신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설령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은 괴로움일지라도 적어도 결심을 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미련을 깨끗이 버려야 해요." 수는 바넷사의 손을 잡고 상냥하게 말했다. "헛된 꿈을 계속 갖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예요." 이튿날 아침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는 누이동생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간 주저하듯이, 제이가 계약을 해약하지 않았다는 것을 누이동생에게 알렸다. "아직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면 오지 않아도 좋아." 국제전화였기 때문에 오빠의 목소리는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도망다니고 있을 수는 없어요. 싫어도 언젠가는 현실생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그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이와 나디아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고, 개빈도 아무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수화기를 놓은 다음, 제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은 격렬하게 그녀의 가슴을 태웠다. 전화를 건 뒤, 바넷사는 집 근처에 있는 비교적 번화한 바닷가에서 오전을 보냈다.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꼭 찍어야 할 사진은 없었지만, 마음에 드는 광경이 보이면 셔터를 눌렀다. 물가에서 노는 스페인 계의 두 사내아이의 스냅 사진을 찍고 난 직후, 그 중의 한 아이가 기세좋게 바다로 뛰어들자 또 한 아이가 바로 뒤쫓아갔다. 순간 나이 어린아이가 넘어져서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수심은 얕았지만, 파도에 휩쓸린 아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엎어져 있었다. 바넷사는 반사적으로 달려가 그 아이를 안고 나와 등을 두드려 주었다. 울면서 콜록거리는 어린아이의 소리를 듣고, 검은 머리에 키가 큰사나이가 달려왔다. 당황한 듯이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걸었으나 스페인 말을 모르는 바넷사는 할 수없이 고개를 흔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 영국사람이예요." "그렇군요! 침착하기로 유명한? 아니,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니지. 세뇨리타, 카를로스를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일을 안다면 누님은 두번 다시 아이들을 나에게 맡기지 않을 겁니다."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간단히 위험 속에 휘말려 들어가는지 무서울 정도예요. 지금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면 다음에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두 아이는 모습을 숨기는 일에는 천재적이기도 해요." 매달려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카를로스를 안고, 바넷사는 자기의 카메라와 타월을 놓아 둔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어린아이들의 짐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로베르토 멘도사라고 합니다." 카를로스를 받아 안으면서 그는 자기 소개를 했다. "아이들은 제 조카 카를로스와 펠리페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오해하실지 모르지만, 어디선가 당신을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생각해 내려고 하는 것처럼, 로베르토는 이마에 주름을 지었다. "당신의 관심을 끌려고 적당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얼굴입니다만, 잘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산페리페엔 오늘 아침 도착했는데......" "모델을 하고 있는 제 사촌언니와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바넷사는 자신도 놀랄 만큼 냉정하게 말했다. "우리들은 얼굴이 빼쏜 것처럼 닮았거든요."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을 두 사람이나 창조해서 지상의 사나이들을 괴롭히다니, 하느님도 잔인하시군." 로베르토는 눈을 반짝이며 찬탄의 말을 했다. "그러나 당신의 사촌언니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여성만큼 아름답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그는 듣는 사람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열심히 바넷사를 칭찬하였고, 그녀는 갑자기 자기가 나디아가 아니라 바넷사라는 것을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그녀는 완전히 독립된 한 여성이었고, 사나이답고 매력있는 스페인 젊은이는 진심으로 바넷사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그녀와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마침내 카를로스는 기운을 되찾았고, 커피의 초대를 받은 바넷사는 쾌히 승락하고 어린아이들과 함께 근처의 까페로 들어갔다. 거기서족히 한 시간 이상이나 로베르토와 잡담을 나누었다. 그녀는 문득 생전 처음으로 자기가 상대를 지리하게 만들고 있지 않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생각이 덮여 오지 않을까 해서 불안해지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혀 왔던 열등감에서 완전히 해방이 된 것을 느꼈다. 로베르토가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었을 때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그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 사람은 이러한 별장을 짓는 회사의 경영자예요. 부자에다 독신이고, 나이도 아주 알맞으니까...." 바넷사가 바닷가에서 우연히 알게 된 로베르트에 관해서 이야기하자, 수는 반 놀림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당신도 그가 좋은 모양이군." "네, 순수하게 좋아해요." 바넷사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제이와의 일이 있은 뒤여서, 로베르토와의 만남은 도수가 높은 샴페인뒤에 마시는 레모네이드처럼 상쾌하였다. 양자의 유일한 공통점은, 어느 쪽이나 갈증을 풀어준다는 점이었다. 로베르토와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고, 로베르토도 그녀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가볍게 놀리는 것 같은 입맞춤은 한두번 했지만, 상대의 반응이 그다지 열심이 아닌 것을 알고, 그는 그 이상의 관계로 이끌지는 않았다. "당신은 구식 여자군? 미래의 남편을 위해 순결을 지키는 타입." 로베르토의 말은 가슴을 찔렀지만, 대답하는 목소리는 침착하였다. "그래요." "그러나 우리 친구로 사귈 수 있겠지?" 로베르토는 조용하게 말했다.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으면 아주 즐거워요. 머리도 좋고 마음씨도 곱고 상냥해서 이렇게 멋있는 숙녀를 차지할 사나이가 부럽군요. 실은 누님 집에 있는 잡지에서 나디아 마치의 사진을 보았지만, 당신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어요." 로베르토는 부러지게 단언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당신과 같은 순진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얼굴은 추한 것을 감추는 가면 같았어요. 그런데 바넷사, 당신의 아름다움은 속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오. 그녀를 당신과 비교하는 것은 소금물을 맑은 샘물과 비교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겉보기는 같지만, 느낌은 전혀 달라요. 안목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단번에 그것을 알아챌 거예요." 휴가가 끝날 무렵, 로베르토는 가능하다면 계속 여기에 남아있지 않겠느냐고 바넷사에게 권했다. 그에게 신상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사정을 알고 있어, 그의 회사에서 휴가용으로 빌려 주고있는 별장이나 팔기로 내놓은 주택의 사진을 찍는 일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하였다. "그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주지 않겠소?" 마지막으로 데이트한 날 밤, 로베르토는 말했다. "당신은 말하지 않았지만, 아주 불행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어요. 스페인에 있으면 밝은 태양이 당신의 얼어붙은 심장을 녹여 줄거요." "도피? 싫어요, 로베르토. 저는 돌아가지 않으면 안돼요." 헛된 희망을 안고 돌아가려는 것은 아니다. 제이와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으니까, 크레아웰로 돌아가기로 한 바넷사는, 두 주일 전 절망의 안개에 감싸여 스페인으로 왔던 바넷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공항까지 바래다준 수와 데이비드에게 따뜻한 대접에 감사를 하고, 이별을 고했다. "언제든지 다시 찾아와요." 수는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당신이라면 대환영이예요. 내 사촌 중에 검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여자라면 홀딱 반해 버리는 남자가 있는데, 그가 당신을 본다면 어던 반응을 보일까? 실은 20년 전에 내가 굉장히 열을 올렸던 상대예요, 이번에는 그가 괴로와하는 것을 보고싶군요." 그것은 바넷사를 위로하기 위한 농담이었지만, 이제 바넷사에게는 동정이나 위로는 필요없었다. 지금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두번 다시 나디아에게 희생 당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하고 있었다. 나디아와는 다른 독특한 개성을 가진 바넷사 마치를 발견한 것이다. 기차에서 내린 순간, 개빈은 누이동생에게 일어난 변화를 느낀 모양이었다. 세빌리아에서 산 고상한 고급 드레스로 몸을 감싼 모습에서, 진바지에 헐렁한 셔츠를 입은 옛날의 바넷사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웠다. 검은 머리는 얼굴형과 아주 잘 어울리는 헤어스타일로 바뀌어 있었고, 수와 로베르토의 누님을 본따, 나디아의 기교적인 화장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고 개성을 강조하는 화장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바넷사는 이제 그레이하운드를 연상시키는 나디아의 날씬한 몸매에 비해 약간 통통한 자신의 몸매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로베르토가 곧잘 자신의 아름다운 몸매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있었다. 바넷사는 또 스페인 여성의 멋 부리는 기술도 배워, 옷을 고를 때, 검은 머리와 하얀 살결을 충분히 돋보이게 하는 빛깔을 알게 되었다. 붉은 장미빛과 청색의 산뜻한 색의 배합, 우아한 실크나 부드러운 울 또는 마직이, 나디아가 좋아하는 선정적인 디자인보다는 약간 조심스러운 디자인이 자기에게 어울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주일 동안, 바넷사는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분석하여, 지금까지의 자기는 나디아를 닮았다는 말을 듣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기 때문에, 기본적인 여자다움조차도 부정해 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많이 달라졌구나. 어른이 되었다고 할까....뭔지 잘은 모르지만." 개빈은 감탄한 것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떠날 때보다 훨씬 안정된 인상이야. 이렇게 되면 나디아도 멍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겠어. 강력한 라이벌이 나타난 셈이지. 일단 그녀에게 승산은 없을 것 같구나. 나디아는 지금까지는 계속정상의 자리를 지켜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굴만 예쁜 것은 빈상자를 화려한 포장지로 싼 것과 다름없지. 포장을 뜯는 순간, 마술은 틀림없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 거야." "그렇게 많이 달라진 것도 없어요. 다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천천히 생각했을 뿐이예요. 그리고 어쨌든 이제 나는 나디아와 경쟁할 생각이 없어요." "너에겐 이제 제이가 필요없게 된 모양이지? 핸섬한 스페인 남성을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는 수로부터 들었어." 스튜디오 밖에 차를 세울 무렵, 두 사람은 쾌활하게 웃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어." 개빈이 말했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바넷사는 오빠의 뒤를 따라 층계를 올라갔다. "자, 이것 좀 봐라." 그는 한묶음의 사진을 내밀었다. "네가 떠난 뒤 제이가 시키는 대로 다시 찍은 사진이야." 그것이 무슨 사진일지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가슴을 찌르는 아픔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클럽의 욕탕에서 축구선수들과 그녀가 했던 것과 똑같은 포즈를 위하고 있는 나디아의 사진. 똑같다고는 하지만, 나디아는 상반신을 벗고 있고, 많은 남자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을 즐기며, 대담하고도 의기양양하게 포즈를 취하고있다. "그렇군요." 바넷사는 조용히 말했다. "제이는 자기가 바라던대로 사진을 찍은 셈이군요. 모든 일이 잘돼서 계약이 취소되지않은 것은 행운이었어요." "나는 틀림엇이 계약이 파기될 줄 알았지. 그런데 제이는 다른 사진사를 찾을 틈도 없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술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어. 이번 일은 나에게 책임이 있다고 그에게 설명했지, 바넷사." 개빈은 사진을 도로 가져가며 말했다. "설마 그에게 반해 버리리라고는.... 제이가 네가 좋아하는 타입이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까." "제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예요." 바넷사는 바로 대꾸했다. "나디아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나디아의 대역을 한다는 데 열중한 나머지, 너무 깊이 들어가고 말았던 거죠. 그러나 이젠 괜찮아요, 오빠." "그날 아침은 혼났지? 나디아는 기회는 왔구나 하고 그 상황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거야. 지금 그녀와 제이는 갖가지 소문을 뿌리고 다닌단다." "당연한 일이죠." 괴로움이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제이가 말했던 <쓰레기>란 말과 그의 말투만을 상기시키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 말은 바넷사에게 괴로움을 몰아다주는 주문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할일은?" 바넷사는 기분을 바꿔 명랑하게 물었다. 개빈은 누이동생의 기분에 맞춰 사진을 치우고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곧 두꺼운 홀더를 갖고 나왔다. "네가 할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있지. 축구 시즌이 시작되기 전과 시즌 동안, 팀의 모든 사진을 연속적으로 기록해 주기를 바라. 그뿐만이 아니야, 제이는 매너하우스를 수리하는 동안그 것을 사진으로 찍어 기록해두고 싶대. 너에게 팀의 일을 부탁하고 싶다고도 했어. 집안 일은 내가 맡겠어." 가슴이 덜커덕 내려앉으며 심장이 세게 뛰었다. <조심해야지>하고, 바넷사는 자기 자신에게 경고했다. 마음속에서 고개를 쳐든 나약한 부분이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고독한 긴 밤에 완전히 죽어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던 무언가를 기대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래요?" 마음의 동요를 표정으로 나타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바넷사는 말했다. "왜 그럴까요? 관대한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럴까요? 패자에 대한 연민?" 아니면 그보다 더 잔인한 목적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그의 성격은 알고 있다 --이제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것을 상대가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설령 그것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고 모욕을 준다 해도아랑곳하지 않고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타입인 것이다. "네가 재능있는 사진작가라는 것을 인정한 거겠지." 개빈은 그렇게 말하고 누이동생을 쳐다보았다. "싫다면 억지로 맡으라고는 하지 않겠어." "싫다고 말하지는 않았어요. 사실 나는 축구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라요. 앞으로 몇 달 동안, 틀림없이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바넷사는 자기의 능숙한 거짓말을 남의 일처럼 감탄하면서 웃는 얼굴로 오빠를 쳐다보았다. 그런 일이 즐거울 까닭이 없다. 제이 코틀랜드는 내가 괴로와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의 호의를 거절했다. 좋다! 동경하는 스타에게 열을 올리는10대 소녀처럼, 그의 발밑에 무릎을 꿇으리라 기대하고 있다면큰 잘못이다. "언제부터 시작하죠?" 바넷사는 물었다. "오늘밤 제이하고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으니 그때 물어볼께. 오늘 네가 돌아온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어." "그런데도 나를 초대하지 않았단 말이죠? 어차피 기대는 하지않았지만. 나는 언제라도 좋다고 전해 줘요. 오늘밤은 일찍 자야겠어요." 그런데 일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 개빈이 나가자 곧 전화가 울려 수화기를 들자, 처음 듣는 남자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네, 접니다만?" 도대체 누굴까,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바넷사는 대답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실지 모르지만," 그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만난 일이 있어요. 축구클럽에서, 팀의 선수인 제프 마스덴입니다." 제프 마스덴! 확실히는 말할 수 없지만 기억은 하고 있다. 팀의 최고참으로 그는 이 고장의 인기있는 선수다. 키가 크고 금발이며, 붙임성있는 파란 눈동자를 가진 핸섬한 남자. 열 살쯤 연상으로, 그쪽이 훨씬 선배기는 했으나 같은 학교의 졸업생이다. "제프, 네, 물론 기억하고 있어요." 스페인에서 터득한 자신감이 그 목소리에도 또렷이 나타났다. 제프가 깜짝 놀라 숨을 죽이는 것을 바넷사는 느낄 수 있었다. "그거 참 반갑군. 전화한 것은 만약 오늘밤 당신에게 다른 예정이 없다면 함께 식사를 하자고 부탁하기 위해서야. 최근여러 번 전화했었는데, 계속 집에 없더군. 어디 갔다왔어?" "이제 막 스페인에서 돌아왔어요. 식사라면 기꺼이 함께 하겠어요." 언젠가는 또 다시 옛날과 같은 생활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제프와의 외출은 제이에 대한 보복이 아니다. 그런 유치한 제스처가 아니다. 제이는 그녀를 거부했다. 그 사실을 겨우 자기에게 납득시킨 지금, 궤멸 상태에서 일어서서 새로운 생활을 쌓아올려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값싼 연애놀이 속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친구들을 만들고, 다가오는 인생을 도망치지 않고 받아들여. 마음속에 크게 뚫린 공동을 메울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잘 됐어! 당신은 어디로 가고 싶지?" "어디든지. 햇볕에 탄 살결을 자랑할 수 있는 곳이 좋겠어요." 바넷사는 농담을 했다. "오케이, 한 시간 후에 데리러 가겠어." 마침 화장을 끝냈을 무렵에 그의 자동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넷사는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도어를 열었다. "멋있군!"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제프는 휘파람을 불었다. "당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것은 나 한 사람만으로 충분해." 그는 아름답게 단장한 바넷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위로 말아올린 검은 머리에는 스페인을 떠나기 전 로베르토가 선물한 진주조개의 장식이 달린 핀을 꽂았고, 가는 어깨끈이 달린 진홍빛 언더드레스에 섹시하게 속이 비쳐 보이는 투명한 실크 가디건을 걸쳤다. 옆이 터진 항아리형의 스커트는 움직일때마다 날씬한 다리의 선을 드러냈다. 제프의 뒤를 따라 자동차 쪽으로 걸어가는, 바넷사의 몸에서 희미하게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과장이 느껴질 정도로 신사적인 행동을 하려는 제프의 태도가 약간 낯간지럽기는 했으나, 바넷사는 이내 마음을 터놓고 언제, 어떤 계기로 축구의 세계로 들어섰느냐는 등의 질문을 하여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했다. "내가 그 세계로 들어갔다기보다는 그 세계가 나를 선택한 셈이지." 옆에 앉아 있는 바넷사의 옆얼굴을 보고 그는 대답했다. 어째서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나디아의 그늘에 숨은 평범한 여자로 밖에 평가하지 않았던 것일까? 오늘밤의 바넷사는 너무도 멋있었다. "똑바로 앞을 보세요." 바넷사는 놀려대듯이 타일렀다. "그래서요?" "학교 축구팀에서 시합을 하고 있는데 시의 스카우트 담당자의 눈에 들었지. 대학으로는 진학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2군에서 뛰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을 때, 두말없이 승락하고 말았지. 코틀랜드는 언젠가는 나를 내쫓겠지. 지금의 나는 선수로서는 절정기가 지났으니까 말이야. 중견급의 예비선수는 될 수 있어도 톱 클라스의 스타선수는 아니니까." "그런데도 의외로 담담하시군요." 제프는 어깨를 움츠렸다. "언젠가는 닥쳐올 운명이지. 나는 지금까지 번 돈을 투자해서 작기는 하지만, 형과 공동으로 경영하는 원예센터를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은퇴한 뒤에도 일이 없어서 곤란할 것은 없고, 슬슬 후배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지금까지는 상당히 운이 좋은 선수 생활을 해왔으니까. 그렇지만, 물론, 올해의 마지막 시즌은 뛰고 싶어." "그래요....." 바넷사는 생각에 잠겼다. 어떤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으나, 그에 대해서는 먼저 오빠와 상의하고 싶었다. 선수들의 장래의 희망이나 야심은 어떤 것이며, 시합이나 연습 이외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그러한 개인적인 부분을 좀더 알려 준다면 팀의 PR이 폭넓은 관심을 끌 수 있지 않을까? 축구에는 그렇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선수들의 인간적인 면에는 친근감을 느낄 것이다. 자동차의 속력이 떨어지고, 눈앞에 우뚝 나타난 새까만 건물을 보고, 바넷사는 놀라 정신을 차렸다. 그 물방앗간! 심장이 한순간 멎는 것 같더니 격렬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제프가 이 레스토랑으로 초대하다니! "할레퀸에 와본 적이 있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아주 좋은레 스토랑이야." 차를 세우면서 제프가 말했다. "구릿빛으로 탄 살결을 자랑하고 싶다고 말했지? 목요일 밤에 이곳에서는 댄스를 할 수 있지. 그래서 많이 찾아오지." "금방 예약을 해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라면 손님이 많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바넷사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빈정댔다. 제프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그것은 세상에 알려져 있는 마스덴의 매력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지." "말해 두지만, 그 매력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통하지 않아요." 제프는 호감이 갔고, 함께 있는 것이 즐겁기는 했으나 처음부터 오해는 피하고 싶었다. "알고 있지? 나는 언제나 분별력이 있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어머나, 그래요?" 그녀는 눈에 다정한 웃음을 담고 물었다. "어째서 나를 분별력이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결국 당신은 나의 데이트 신청에 응했으니까 말이야. 곧 당신은, 내가 세상에 보여주고 있는 얼굴 뒤에 숨은, 강렬하면서도 겸허한 매력을 알게 될 거야." 두 사람은 즐겁게 웃음을 나누면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바넷사는 테이블로 안내 받으면서, 자기들을 쳐다보고 있는 찬탄의 눈초리를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웨이터가 의자를 끌어내 준 다음 공손하게 메뉴를 내밀었다. 제프는 이 도시의 어엿한 명사였고, 그의 상냥한 대접을 받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었다. 주문을 끝내고 의자에 고쳐 앉는 순간, 눈에 익은 모습이 보였다. 바넷사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몇개의 테이블을 사이에 둔 저쪽에 오빠가 앉아 의기양양한 얼굴을 한 나디아를 데리고 온 제이 코틀랜드와 뭔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것은 속이 메스꺼운 광경이었으나,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은 아니었다. 나디아는 눈을 들어, 웃음까지 띠고 냉정하게 쳐다보고 있는 바넷사를 보자, 그 얼굴에 떠올랐던 멸시의 표정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묘한 감정으로 약간 얼굴을 붉히고 먼저 눈을 떨군 것은 나디아 쪽이었다. 왜 저렇게 야위었을까 ---- 바넷사는 나디아를 쳐다보면서생 각했다. 어째서 지금까지 그녀가 불쾌한 안색으로 입술을한 일자로 다물고 눈 가장자리에 방사형(放射形)으로 불만스러운 듯한 잔주름을 지우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을까? 웨이터가 와서 샴페인의 마개를 땄다. 바넷사의 놀라는 표정을 보고 제프는 웃었다. "도대체 무슨 축하예요?" 바넷사가 물었다. "당신이 식사를 함께 해준 데 대한 축하지." 제프는 농담조로 대답했다. '물론, 약소하긴 하지만, 만약 당신이 이것을 마신다면 내가 초대해 준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겠어." 6주일 전의 자기였다면 무뚝뚝하게 입을 다물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웃으면서 그와 샴페인 글라스를 부딪히고, 즐겁게 한 모금 마셨다. 그때 제이가 두 사람을 보았고, 한때 연인 사이였던 눈길이 서로 마주쳤다. 호박빛의 눈동자에는 차가운 혐오의 표정이, 사파이어빛의 눈동자에는 초연한 묵살의 표정이 있었다. 제이의 쇼크가 여기까지 전달되는 것을 바넷사는 느꼈다. 이제 쨈?---- 상대를 쳐다본 채 그녀는 마음속에서 중얼거렸다. '당신은 나를 바라지 않았어요, 미스터 코틀랜드. 알고 있어요, 그것을 두번 다시 강조할 필요는 없어요." 7장 식사 후, 개빈은 누이동생이 있는 테이블로 인사하러 왔다. "바넷사!" 그는 당황한 듯 말했다. "오늘밤, 일찍 자겠다고 하더니......" 제이가 있는 테이블 쪽을 쳐다보지 않아도, 그가 자신으로부터 눈을 떼지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그의 거절을 슬퍼하면서 세상을 버린 사람처럼 살기를 바랐을까? 그러한 생각은 바넷사의 결심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제프에게 미소를 던지면서 필요이상의 상냥함을 담고 오빠에게 말했다. "이분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초대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에...." 오빠와 제프를 간단히 소개하고, 그 동안 계속 제이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그들이 인사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디아가 질투하고 있어." 개빈이 히죽 웃으며 속삭이는 바람에, 생각에 잠겨 있던 바넷사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너는 나디아를 물리쳤어." 바넷사가 어리둥절하여 올려다보자 개빈이 설명했다. "나디아는 모든 사람의 주목의 대상이 도리라 믿고 여기에 온 모양인데, 모두가 너만을 황홀하게 쳐다보고 있으니 말이야. 그 드레스, 아주 멋있는데. 새로샀니?" "스페인에서 샀어요." 바넷사는 빈정대듯이 덧붙였다. "한 집안 식구라고 그렇게 편들지 않아도 좋아요, 오빠. 나는 이제 어른이 되었고, 나디아와 경쟁하고 싶은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어요." "나도 한 마디 한다면 그것은 반대가 아닐까?" 제프가 말참견을 하였다. "믿을 수 없다면 사방을 둘러봐요. 우리가 여기에 들어선 순간부터 레스토랑 안의 모든 남성의 시선은 당신에게 쏠려 있어. 난 당신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 하기를 빌고 있었는데." 제프가 히죽 웃었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보자 그가 지나치게 공치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자기가 나디아를 앞질렀다는 사실은 어떠한 만족감도 주지 못했다. 거기에는 다만, 제이에게 거절당한 이후 계속 마음을 차지하고있던 허무감이 있을 뿐이었다. 개빈이 테이블로 돌아가자 제프는 댄스를 청했다. 템포가 느린 음악으로 바뀌어도 그는 애써 힘주어 포옹하려 하지 않았고, 바넷사는 그러한 그의 태도에 호감을 가졌다. 제프는 상대가 그어 놓은 선을 넘으려 하지 않았다. 유쾌하고 즐거운 파트너였다. 건성으로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제이가 레스토랑을 나간 순간만은 알고 있었다. 레스토랑을 나온 것은 밤도 꽤 늦은 시간이었다. 로지 앞에서 차가 서자, 매너하우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바넷사의눈 길을 끌었다. 제이는 지금쯤 나디아와 함께 있는 것일까? 단단히 무장한 갑옷의 빈틈으로 파고 든 괴로운 질투의 화살이 가슴을 꿰뚫었다. 제이의 품에 안겨 있는 나디아. 그녀를 껴안고 자기로부터 빼앗은 기쁨을 그녀에게 주고 있는 제이.... "바넷사?" 제프가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바넷사는 당황해서 웃음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죄송해요. 난, 돌아온지 얼마 안 돼서 멍해진 모양이죠?" "다음에 또 초대해도 좋은가를 물었어. 시즌 전의 연습이 시작되니까 금주는 외출할 수 없지만, 내주는 어떨까?" "좋아요." 바넷사는 대답했다. 그리고 제이와 배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제프의 조심스러운 초대를 승낙하고 차에서 내렸다. "이제 오니? 혼자야?" 주방에 들어가자 커피를 끓이고있던 개빈이 말을 걸어왔다. "거기서 만나게 되다니 놀랐어. 그러나 나보다도 나디아가 훨씬 더 놀랐을 거야. 그 드레스, 참으로 잘 어울리는데." "이것은 나의 갑옷 같은 거예요. 오빠와 일행을 보았을 때,이 것을 입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었어요?" "제이는 우리들에게 나디아의 사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싶다고 말했지. 네가 포즈를 취하고 찍었던 것과 같은 그 사진 말이야. 제이는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만 나디아의 사진은 별로 좋지 않았어. 일류 모델이라서 요령은 잘 알고 있었지만, 네 사진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없었지. 일종의 건강한 분위기라고나 할까?" "그러한 표현은 마치 아침식사용으로 먹는 시리얼(곡물가공품) 같잖아요?" 바넷사가 불평을 했다. "그러나 제이는 나의 건강한 이미지보다는 나디아의 이국적인 분위기 쪽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PR 사진으로서 어느쪽이 효과가 있느냐고 한다면 그 대답은 분명해. 그런데 기획에서는 나디아의 이름을 쓰기로 되어 있으니까, 네 사진은 당연히쓸 수 없단다. 제이도 말은 하지 않지만, 나디아가 이번의PR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야."이렇게 말한 다음 이번에는 개빈이 질문했다. "그건 그렇고 바넷사. 심경의 변화라도 일어났니? 남자에게 환멸을 느낀 줄 알았는데." "어떤 남자에게나 무조건 환멸을 느끼진 않아요." 바넷사는 대꾸했다. "환멸을 느낀 것은 한 사람 뿐이예요. 그러나 풀이 죽은 꼴을 보여서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짓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제프도 아주 좋은 분이예요." "그래, 그러나 또 다시 게임을 시작할 생각이라면 이번은 좀더 가벼운 마음으로 해야 해. 아참, 잊을 뻔했군." 개빈은 주방의 도어 앞에서 뒤돌아보았다. "내일 너더러 클럽으로 와달라고 하더라. 시즌 전의 연습에 들어가기 때문에 촬영을 시작하고 싶은 모양이야." 오빠의 말을 듣는 순간, 아까 머리에 떠올랐던 아이디어가 생각나, 바넷사는 간단히 내용을 설명하고 의견을 기다렸다. "나쁘지 않군. 그리고 당연하기도 하고." 개빈은 애매하게 웃었다. "제프 마스덴이 누구보다 적합한 대상이겠지. 그의 축구 경력은 10년이 넘고 국가대표팀에 참가한 일도 있을 정도니까. 그 제안에 대해서는 네가 직접 제이에게 이야기해 보려무나. 아니면 내가 말할까?" "이야기하기 전에 사전공작을 좀 해야겠어요. 그를 설득시키려면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하긴 그렇군. 팀의 일을 하는 한편, 그러한 사진도 찍을 수 있을 테니까. 한 달쯤 지나서 계속할 마음이 있으면 그때 제이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어." 개빈은 도어를 열다말고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나디아가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짐작컨대 미세스 제이 코틀랜드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 그는 누이동생의 표정을 보자 당황해서 사과했다. "미안 미안. 그러나 너도 알고 있지? 나디아는 무엇이나 욕심이 생기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손에 넣고 만다, 그 말이죠? 네, 알고 있어요. 이제 그만 자야겠어요. 굉장히 피로해요. 내일 아침부터 일을 시작하려면 기운을 차려 둬야 하니까요." 방에 혼자 있게 된 바넷사는 몸이 떨리는 것을 의식하고, 이렇게 나약한 자기 자신을 원망했다. 어쨌든 이렇게 되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 아닌가? 제이는 나디아가 바라고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재력과 명성과 남성적인 매력까지. 나디아는 항상 돈이 많은 남자와 결혼할 작정이라고 서슴없이 공언했었다. 만약 그들이 결혼해서 매너하우스에서 살게 된다면, 자기는 크레아웰에서 떠나야 할 것이다. 겁장이 ---- 바넷사는 슬펐다. 그것은 도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 남아서, 한때 자기가 사랑했던 남자가 사촌과 결혼했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의 한결 같은 사랑을 외면하고 타산적인 나디아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확인하면서 살아 갈 수는 없는 것이다. 바넷사는 필사적으로 제프의 일을, 그리고 즐거m던 오늘밤의 일들을 상기하고, 새로운 일에 대해서 생각하려 했다. 어쩌면 이번 일이 계기가 되어 새로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런던에서의 일, 어쩌면 해외에 나가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그래 이런 생각만 하면 되는 것이다!' 침대에 누우면서 바넷사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밝은 일만 생각하자. 그리하여, 아물지 않은 찍어진 마음의 상처에서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괴로움이 다른 모든 것을 집어삼킬 정도로 클지라도, 아직도 제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체해야 하는 것이다. "아주 멋장이 여류 사진작가로군!" 개빈은 진바지에 스웨드 셔츠를 받쳐 입은 누이동생을 보고 말했다. "클럽까지 데려다주겠어. 돌아올 때도 전화를 주면 데리러 가겠어. 오늘 오후는 나디아의 촬영이 있어서 나도 클럽에 가야 하니까." 운동장에서는 방금 연습이 시작되고 있었다. 바넷사는 당장 준비를 시작하여 전문가답게 사진을 찍을 각도를 조사하고 렌즈를 교환하면서, 진지하기 그지없는 선수들의 얼굴에 피로의 빛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30분쯤 지나자, 선수들에 대한동정심으로 바넷사 자신의 근육도 아프기 시작했다. 땀투성이가 된 몸에 셔츠가 달라붙을 정도인데 똑같은 훈련을 반복하라는 코치의 명령에 몇 명의 선수가 불만을 터뜨렸다. "오케이, 휴식이다!" 코치가 말했다. "그러나 5분뿐이다!" 새로 참가한 선수가 세 사람쯤 있어서, 훈련하는 대형(隊形)이 흐트러졌을 때, 그들이 다른 선수들에게서 떨어져 고립되는 것을 보고, 바넷사는 그 광경에 몇 번인가 셔터를 눌렀다. 앞으로 몇 달 동안, 그들이 어떻게 팀의 분위기에 휩쓸려 들어가는가를 추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지 모른다. 제프가 선수들에게서 떨어져 천천히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신참 선수들에게 다가가더니, 그 중에서도 가장 젊어 보이는 선수의 등을 상냥하게 두들기고 뭔가 이야기하는 것이 보였다. 젊은 선수들의 표정이 부드러워졌고, 이번에는 제프가 바넷사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잘 하시는군요. 보고만 있어도 내 몸이 아파지는 것 같아요."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 시즌이 끝난 뒤에도 연습은 계속해 왔으니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게 훈련하지 않으면 컨디션을 조절하기 힘들게 돼. 젊은 선수, 예를 들자면 해리스 같은 녀석은 시즌이 끝나면 모든 규칙을 잊어 버리거나 훈련을 하지 않아도 아무 지장이 없지만,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될 수가 엇어." 제프는 몸을 구부리고 장단지를 매만졌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마 이것이 나로서는 마지막 시즌이 될 거야. 경제적인 걱정은 없지만..." "그렇지만 축구를 단념한다는 것은 괴롭다, 그런 말이죠?" 바넷사는 그의 말꼬리를 받아서 말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익숙해진 생활을 그만두고 미지의 생활로 들어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까? 남자란 습관의 동물이지. 그러기 때문에 남자로서는 결혼을 결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야." 제프는 히죽 웃고 덧붙였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지." "어머나, 그래요?" 바넷사도 웃었지만 그의 말에서 한가닥의 진실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안전권(安全圈)을 버리고 해도(海圖)도 없는 미지의 바다로 항해하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드디어 두목이 나타나셨군." 제프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만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당신이 우리의 전속카메라맨이 되어서 매우 기뻐. 특히 원정을 갈 때는." "시합 전에는 철저하게 <여성금지>의 룰이 적용되겠죠? "바넷사는 제프를 놀렸다. 그는 쾌활하게 윙크를 보냈다. "그것을 적당히 속이는 방법을 모르고서, 나 같은 고참선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두 사람이 서로 웃고 있을 때 곁으로 걸어온 제이가 딱딱한 말투로 제프에게 말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연습이 끝난 다음에 하도록 해. 바넷사,여기 촬영은 다 끝났나?" 제프는 바넷사에게 빈정대듯 얼굴을 찡그려 보이고, 제이에게 등을 돌리더니 체육관 쪽으로 들어가는 선수들과 합류하였다. "네, 필요한 장면은 전부 촬영했다고 생각해요." 바넷사도 지지 않고 냉정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나, 체육관에 가서 좀더 찍고 싶은데요." 바넷사는 큼직한 남자용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빠가 데리러 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났다고 지금 개빈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나디아의 촬영을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다고 말하더군." "알았어요." 마음의 동요를 숨기고 애써 냉정하게 그녀는 말했다. "여기를 치우면 바로 찍겠어요." 렌즈나 삼각대를 치우는 손놀림은 조금도 허둥대지 않고 확실하여, 바로 가까이에 있는 제이에게 설레는 마음의 혼란을 드러내놓지 않았다. 지구상에 있는 바보 같은 여자를 모두 모아 놓는다 해도 자기만큼 얼빠진 여자는 없을 것이라고 바넷사는 생각했다. 제이는 아주 분명하게 자기를 거절했다. 그런데도 자기는 지금도 그가 곁에 있기만 하는데 다정다감한 소녀처럼 가슴 설레고 있는 것이다. 촬영 도구를 다 치우자, 제이는 손을 뻗어 카메라백을 들어 아무말 없이 성큼성큼 앞장서 갔기 때문에 바넷사는 그 뒤를 잰걸음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클럽에 들어서자, 선수들과 함께 있는 나디아의 사진을 다시 찍는 것이라고 제이가 설명했다. "지난번 사진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은 개빈에게 들어서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네, 들었어요." 조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바넷사는 그를 따라 욕실에 들어가 카메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만약이것이, 제이가 일부러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서 꾸민 아이디어였다고 한다면, 이 이상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자동차가 펑크가 난 것이 그의 책임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선수들이 모이자, 밑에만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일년 내내 엷은 구릿빛을 유지하고 있는 싱싱한 가슴을 드러내놓은 나디아가 갱의실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카메라를 조작하고 있는 바넷사는 보지 못하고 곧바로 제이에게 달려가더니, 양손을 그의 어깨에 감고 애교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달링, 여기에 있었군요... 기뻐요. 점심을 함께하고 그리고 당신 집으로 가요. 어제 당신 집에서 잤으면 좋았는데, 매너하우스를 구경한 뒤에... 틀림없이 멋있는 집이 될 거예요. 앞으로 얼마나 있으면 완성되죠? 한 달쯤?" 제이에게 매달린 반나체의 몸을 두 눈으로 똑똑이 본 바넷사는, 자기 심장을 쿡 찌른 칼을 뽑아내려는 듯이 두번 다시 그들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나디아의 목소리는 간신히 알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속삭임에 불과했으나, 어제의 추측이 들어맞았다는 것을 아는 데는 충분하였다. 바넷사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어젯밤,두 사람은 매너하우스에 있었던 것이다. 나디아가 제이에게서 떨어져 욕탕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광경이 보였다. "개빈, 이번은 실수를 하지 말아요." 어깨 너머로 그렇게 말하고, 대답이 없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뒤돌아 본 나디아는, 카메라 옆에 바넷사가 서 있는 것을 보자 화를 내고 눈을 치켜떴다. "제이,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이제 겨우 아마추어에서 벗어난 정도의 개빈에게 찍게 하는 것도 간신히 참았는데. 전부 당신을 위해서 그랬던 거예요. 그러나 이건 참을 수 없어요. 빨리 저 여자를 내쫓고 나에게 어울리는 일류 카메라맨을 데려와 주세요!" "개빈과의 계약은 유효해." 제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가 도저히 올 수 없어서 바넷사가....." "그녀에게 내 사진을 찍게 하다니. 싫어요." 사파이어빛 눈동자에, 옛날부터 여러 번 보아왔던 위험한 태풍의 징조가 나타났다. 예의 그 신경질이 난 모양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귀염만 받고 자라서 뭔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곧잘 히스테리 발작을 폭발시키는 나디아였다. 그리고 지금, 제이가 그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눈앞에 서 있는 여자와, 상냥하고 세련된 모델이 같은 여자라는 것이 이해하기 힘든 듯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다시 찍는 데 동의하지 않았나?" 제이가 냉정하게 말했다. "어제, 그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서로 이야기했어..." "개빈이 찍는다는 이야기였어요." 나디아가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면 참을 수 있지만." 위험한 태풍이 잔잔해지고, 그녀는 제이에게 다가가 새빨간 손톱이 보이는 손으로 그의 팔을 잡고, 달콤한 미소로 분노를 감추었다. "부탁이예요. 이해해 주세요. 전, 여자에게 사진 찍히는 것을 아주 싫어해요. 그리고," 증오심에 불타는 눈으로 바넷사를 쳐다보고 나디아는 입을 쫑긋 내밀었다. "저를 몹시 원망하고 있는 사람에게 사진을 찍히는 것은 좋은 기분이 아니예요. 충분히 이해해 주시겠죠. 달링?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 보상은 나중에 꼭..... 아셨죠?" 속이 메스꺼워져, 바넷사는 제이의 의견을 묻고 싶지도 않아,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장치해 놓은 촬영 도구를 치우기 시작했다. 제이가 나디아를 선택한 것을 질투하고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이 이처럼 경박한관 계에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에 속이 메스꺼워졌던 것이다. 제이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런 경박하고 가벼운 정사를 즐겨왔던 것일가? '다행히도 우리는 둘 다 사랑의 룰을 잘 알고 있는 어름이군.' 자기를 나디아라고 믿고 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갑자기 눈물이 솟구쳐서, 백을 들려고 몸을 구부린 바넷사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내가 들어 주지."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제프가 말했다. "차는 어디 있지?" "오빠가 데리러 온다고 했기 때문에, 자동차는 없어요. 택시를 부르겠어요." "그렇다면 내가 바래다주지." 제프는 부러지게 말하고 백을 집어들었다. 이제까지의 사건에 너무도 마음이 약해져 있던 바넷사는 그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의지할 사람이 피료했다. 제이나 나디아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늠름한 남자의 의지가... "처음 원정가는 기분은 어때?" 시즌이 시작된 지 벌써 4주가 지났다. 바넷사는 대부분의 선수들과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사이가 되어, 팀이 첫번째 원정을 위해 가는 대형 버스 속에서 함께 어울리고 있었다. "불안하기도 하지만 즐겁기도 해요." 지금까지는 결코 스포츠팬이라고 할 수 없는 자기가 이렇게 축구의 세계에 깊이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바넷사는 놀라고 있었다. 실은 선수들이 문학이나 음악, 장기, 예술 들, 폭넓은 취미를 가지고있는 것을 모르고, 그들의 인생에는 스포츠밖에 없다는 선입감에 사로잡혀 지금까지 운동 선수라는 직업에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즐거움으로 말한다면 나는 제이가 매너하우스에서 주최하는 파티가 무엇보다 큰 즐거움이야." 골키퍼인 스티브 리처드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수리는 거의 끝났다고 하더군. 당신은 옆 집에 살고 있지? 어떻게 생겼지?" "실은 저도 몰라요." 실제로 본 것은 아니지만, 제이는 집에 수리에 몹시 열심이고, 이층의 방 하나를 당구장으로, 아래층에는 실내 풀과 온실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조금 잠을 자두는 게 좋지 않을까?" 옆에서 제프가 말을 걸었다. 웃는 얼굴이기는 했으나 눈과 입 가장자리에는 긴장한 듯 주름이 잡혀 있다. 본인과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다른 선수들의 이야기로 미루어 볼 때, 또 바넷사 자신이 본 바로는 이번 시즌의 제프의 활약은 호조라고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오랫동안 프로 선수로서 닦아온 경험과 기술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반사신경이 약간 둔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었고, 확실히 그의 전성기는 끝나가고 있었다. 마지막 시즌에 훌륭한 성적을 남기는 일이 제프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바넷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제프와 제이 사이에서는 뚜렷한 적의(敵意)를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제프가 경험하고 있는 괴로움을 옛날 제이도 맛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바넷사는 그들의 대립을 이해할수 없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녀의 경우 <모든 생각은 제이에게로 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제이와 나디아는 거의 자타가 공인하는 관계로, 바넷사는 그들의 약혼 발표를 겁을 먹고 기다리고 있었다. 매너하우스의 파티에서 발표할 예정인가? 아니면 둘이서 남몰래 결혼할 작정인지도 모른다. 나디아는 화려한 약혼파티와 굉장히 비싼 반지를 자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것 같지않다. 파티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면 어떠한 댓가라도 치르고 싶었다. 그러나 이성은 그런 생각에 반대했다. 만약 불참한다면 어리석게도 아직까지 제이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게 될 뿐이다. 시합은 토요일 오후, 런던의 교외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선수들이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그 전날에 호텔에 도착할 예정이어서, 바넷사는 일이 없는 토요일 오전중에 파티에 어울리는 드레스를 사러 가려 생각하고 있었다. "자, 일어나. 곧 도착해." 제프가 팔에 손을 얹고 가만히 그녀를 깨웠다. 눈을 뜨고 미소를 보내면서 바넷사는 따가운 시선을 뒷좌석에서 느끼고 뒤돌아보았다. 통로 저쪽, 몇 개 뒤의 좌석에 제이가 앉아 차가운 호박빛 눈동자로 똑바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얼마 전 그가 한 경고가 생각 나 바넷사는 불안해졌다. 시합에 좋은 영향을 주지 않으니까. 제프가 지금 그녀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었다. "만약 팀에서의 포지션을 확보하고 싶으면 시합에 백퍼센트 집중해야 해." 제이는 완강하게 말했다. "제프는 지금 미묘한 입장에 놓여 있어. 내가 그의 입장이라면 감정적인 일에 매달려서 포지션을 차지하지 못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그 정도의 일은 제프 자신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화가 나서 얼굴을 붉히며 바넷사는 대꾸했다. 그때 나디아가 오지 않았더라면 제이는 또 뭐라고 반박했을 것이다. 나디아는 내일의 시합을 보는 것보다는 주말을 옛 친구들과 즐기는 쪽을 선택하여 이번 여행에는 동행하지 않았다. 팀의 일행들만으로 호텔의 한 층을 모두 차지해 버린 꼴이 되었다. 바넷사는 긴 자동차 여행에 지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거절하고 바와 텔레비젼, 번쩍번쩍하는 욕실, 정원을 향한 발코니가 달려 있는 호화로운 방으로 가벼운 식사를 갖다 달라고 부탁하고 일찍 자야겠다고 결심했다. 제프가 식사를 함께 하자고 청했지만, 바넷사는 오늘밤 대신시합이 끝난 뒤에 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쾌히 승낙하였다. "시합을 잘 했다고 축하해 주기 위해서? 아니면 형편없어서 위로해 주기 위해서?" 그는 농담을 했다. "오케이, 약속했어." 두 사람의 관계는 이렇다 할 진전도 없이,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는 우정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넷사가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우정 이상의 관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상대에게 전했고, 제프 쪽도 따지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토요일은 일찍 잠을 깨어 되도록 오전중에 쇼핑을 끝내리라 생각하고 룸서비스로 아침식사를 부탁했다. 프런트에 물었더니, 런던까지는 30분 정도면 갈 수 있다고 한다. 제프는 아침 연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혼자서 가기로 했다. 마음에 드는 드레스는 뜻밖에도 사우드 몰튼 거리의 끝에 있는 작은 양품점에서 간단히 찾아냈다. 공단으로 만든 장미빛의 드레스는 허리는 잘록하고 스커트의 품은 넉넉해 [바람과 함께사라지다]의 여주인공의 드레스 같았다. 바넷사는 이 드레스를 입어 보기도 전에 사기로 결심을 굳혔다. 또한 드레스에 어울리는 새틴으로 만든 구두도 샀다. 그리고 흡족한 기분으로 예전같았으면 깜짝 놀랄 정도의 비싼 금액의 수표에 대담하게 사인을 했다. 점심시간 전에 호텔로 돌아오자, 신경이 날카로와진 제프와는 인사만을 나누고, 바넷사는 재빨리 진바지와 셔츠로 갈아입고 촬영 도구를 든 다음, 시합 전의 긴장감이 감도는 팀의 사진을 찍으러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크레아웰팀이 2대1로 이기기는 했으나, 간신히 이긴 시합이었다. 그녀는 코치와 함께 벤치에 앉아서 제프의 공격을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았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그의 볼은 골포스트를 살짝 빗나갔다. 시합을 끝내고 운동장에서 나올 때의 제프의 표정은 흐렸고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바넷사는 선수들 뒤를 따라 갱의실로 들어가 시합이 끝난 뒤의 느긋한 분위기를 재빨리 촬영했다. 꾸밈이 없는 좁은 실내에는 명랑한 기분이 충만해 있었다. 바넷사는 혈기 왕성한 젊은 선수들이 장난삼아 물을 끼얹는 바람에 그곳에서 나왔다. 바넷사는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저녁식사를 위해 옷을 갈아입은 다음 제프를 기다렸다. 여덟 시 반이 되어도 그는 찾아오지 않았고, 방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두 사람의 가벼운 교제로 미루어볼 때, 만약 제프의 예정에 변화가 있다면 분명히 그렇다고 연락이 있을 것이다. 그는 아무 연락도 없이 약속을 어기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 있을까...? 그리고 보니 시합이 끝난 뒤 그는 몹시 침울해 보였다. 그리고 제이는 그를 방 한구석으로 끌고 가 뭔가 귓속말을 했었다. 바넷사는 불안으로 눈동자가 흐려졌다. 겉으로는 대범한 체하고 있었지만 시즌 도중에 해고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제프는 항상 두려워하고 있었다. 결심을 하고, 바넷사는 제프의 방을 향해 호텔의 복도를 급히 걸어갔다.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어, 손잡이를 돌리자 도어가 열렸기 때문에 그녀는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눈을 감고, 침대 위에 큰 대자로 누워 있었다. "제프?" 어깨를 흔들자, 그는 눈을 떴다. "바넷사....." 당황하여 손목시계를 보고 그는 자기 자신을 책망했다. "미안, 약속을 했었는데! 호텔에 돌아왔을 때 몹시 피로했기 때문에 술을 두세 잔 마셨지." 테이블 위에 있는 술병과 글라스를 몸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야. 오늘 시합, 당신도 보았지?"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바넷사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누구에게라도 있는 일이예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나에게 일어났단 말이야. 그 실책에 대해서는 제이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눴어. 그는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긴 했지만, 다음에 그런 실수를 또 한다면 틀림없이 팀에서 쫓겨나고 말 거야. 제이가 부러지게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야. 그러나 그런 말투 같았어." 제프는 지친 듯이 손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오늘밤은 유쾌하게 떠들고 있을 기분이 아니야. 식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지." "여기서 들지 않겠어요?" 괴로와하고 있는 제프를 혼자 두고 갈 수가 엇어, 바넷사는 명랑하게 제안했다. "오늘밤은 텔레비젼에서 좋은 영화가 방송되니까, 함께 구경하는 것도 좋을거예요." "당신은 참으로 다정한 여성이군, 바넷사." 제프의 표정은 약간 부드러워졌다. "만약 나에게 그럴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을 꼭 붙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야. 그러나 당신은 친구 이상의 교제를 바라지 않으니....누군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지?" "제프......" "미안하군." 그는 양손을 펼쳤다. "쓸데없는 말을 해 버렸군. 그럼 식사를 부탁할까? 왠지 갑자기 배가 고파졌어." 제프의 방을 나온 것은 열 한 시를 조금 지난 무렵이었을까?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누고 텔레비젼을 보는 등, 즐거운 시간을보 냈다. 생각에 잠겨서 복도로 나온 순간, 누군가에게 부딪쳤고, 크고 억센 손이 바넷사의 어깨를 붙잡았다. 차가운 호박빛 눈동자가 그녀를 쳐다보고는 지금 나온 도어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 "이거 누군가 했더니." 제이는 낮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처녀 레테르를 떼고 싶어하고 있나? 어떻게 된 일이야? 제프도 처녀는 필요없다고 하던가?" 바넷사는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쥐죽은 듯이 고요한 호텔의 복도에서 제이의 뺨을 후려치고 말았다. 제이의 반응은 재빨랐다. 그녀의 손을 재빨리 붙잡고, 그대로 햇볕에 탄 살결에 밀어붙였기 때문에, 바넷사는 그 살결 밑에서 맥박치는 뜨거운 열기를 손바닥에 느끼자 현기증이 났다. "이런 것을 욕구불만이라고 하지." 제이는 비웃으며 하얀 살결이 붉게 물드는 것을 쳐다보았다. "나도 그런 기분이니 함께 욕구불만을 해소시키지 않겠나.... 만약 앞으로 당신이 축구선수와 교제하려면 언젠가는 받아야 할 레슨이니까 말이야. 한번 빠져들면 그들은 어머니다운 애정을 요구해. 결코 당신이 생각하는 것 같은....." 너무나도 노골적인 멸시에 발끈 화가 난 바넷사는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세웠다. 손톱 끝이 그에게 상처를 준 모양인지, 제이는 신음 소리를 질렀다. 바넷사는 그 기회에 몸을 빼고, 자기 방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공격적인 그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설레임은 상대의 공격 본능을 진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부채질한 것 같았다. 도어 앞에서 바넷사를 붙잡은 제이는 그녀를 방안으로 밀어넣고 도어를 닫고 열쇠를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제이,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예요?" 바넷사는 뒷걸음질치면서 속삭였다. "사나이는 승리를 축하하는 걸 좋아하는 동물이야. 그리고 축하에 가장 어울리는 장소는 침대지....." "당신은 저를 필요로 하지 않았어요." 아직도 조금 남아있는 이성(理性)의 조각에 매달린 바넷사는 말했다. "당신은 저더러 쓰레기라고 했어요. 잊으셨어요? 오늘밤 당신이 바라고 있는 것은 제가 아니예요, 나디아예요." "그러나 그녀는 지금 여기에 없어. 있는 것은 당신 뿐이야."제이는 은근히 바넷사의 속마음을 떠보았다. "제프는 그렇 게했나?" "그렇게 하다니, 무슨 말이죠?" "결혼반지와 교환 조건으로 귀중한 순결을 차지했느냐고 물었어. 만약 제프가 아직까지 그러지 않았다면, 오늘밤이야말로 내가...... 당신도 그것을 바라고 있을 거야. 내 팔에 안겨서, 내 사람이 되는 것을." 8장 "싫어요!" 그 외마디 소리에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긴장되었다. 그러나 그 거절의 말이 입에서 나오는 데는 몇 초나 걸렸기 때문에, 제이는 바넷사의 마음속에서 이성과 욕망이 싸우고 있는 것을 확실히 알고 만 것 같다. 제이가 바라고 있는 것은 나디아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래도 그를 받아들인다면 영원히 자존심을 잃게 될 것이다. 호박빛 눈동자에 타오르는 작은 불꽃에 겁을 먹고, 바넷사는 더욱 뒤로 물러섰다. "당신의 본심은 그렇지 않을 거야." 제이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그것을 증명해 보일까?" 도대체 그는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나디아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겨우 하룻밤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가 말하는 <욕구불만>이 그 동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어쨌든 제이는 자신을 억제할 줄 아는 타입이다. 그런데, 눈앞에 우뚝 서 있는 그의 표정에는 억제하고 있는 것 같은 기미는 조금도 없다. 긴 속눈썹에 둘러싸인 짙은 호박빛 눈동자가 반짝이면서 바넷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그 시선은 불이 붙은 화살이 되어 그녀의 마음을 꿰뚫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하얀 셔츠의 앞가슴은 풀어헤쳐져서, 올리브빛으로 탄 살결이 들여다뵌다. 그러나 그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 바넷사는 필사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타일렀다. "당신은 나를 요구하고 있어, 바넷사." 제이는 말을 내뱉고 한순간 숨을 죽이더니 흐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스덴과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당신은 아직도 나를 바라고있어, 그렇지?" 제이는 양손으로 가는 허리를 붙잡더니, 대답을 억지로 강요하듯이 격렬하게 흔들었다. "나에게 숨길 수는 없어, 바넷사. 당신의 몸은 이렇게 떨고있지 않은가." 그 목소리는 약간 알아듣기 힘들었는데, 아마 그는 술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뜻하지 않은 그의 행동도 술 때문일까? "그것은 당신이 흔들고 있기 때문이예요. 부탁이예요, 놓아줘요. 여기서 나가요. 왜 제 방에......." "당신을 원하니까," 제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당신을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는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제이, 나는 나디아가 아니예요." 허리를 붙잡고 있는 손을 빼내려 하면서 바넷사는 말했다. 그를 방에서 내쫓지 않으면 안 된다 ------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알고 있어. 그러나 아주 닮은 것은 확실해." 몸을 구부린 제이의 숨결에 술 냄새가 섞여 있다. 지금까지 계속 마셨던 모양이다. 팀의 승리를 축하해서? 그러나 정신을 읽을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자제심과 경계심은 이슬처럼 사라지고, 바넷사는 겁에 질려 마치 처음 만나 남자를 보듯이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위험은 그녀 자신의 마음에 있었다. 마음속에서는 그에게 항복하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다. 제이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벗기려고 하다가 그것을 가로막으려는 그녀의 양쪽 손목을 한 손으로 꼭 붙잡았다. 바넷사는 제이의 눈동자를 보고 몸을 떨었다. "부탁이예요, 이러지 마세요." 괴로운 듯이 속삭였으나, 그의 손길은 여전히 거칠었다. 완전히 정신을 잃기 전에 어떻게든 수를 써야지...., 모든 의지력을 총동원해서 바넷사는 블라우스의 앞을 여몄다. "저는 나디아가 아니예요. 그녀의 대역을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고, 그녀만큼의 기술도 없어요." 바넷사는 무의식중에 그렇게 말해 버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당신의 정열은 아무도 당할 수 없을 거야. 내 기억으로는 당신과 같이 지냈던 마지막 날 밤, 당신은 굉장히 정열적이었어." 이제 와서 그때 일을 상기시키다니! 위험한 남자를 가까이 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현명한 속삭임도 사라지고 만다. 저 강렬한 추억.... 현명한 속삭임? 그러나 사랑에 빠진 여자가 현명했던 적이 있었던가? 바넷사는 떨었다. 그것을 패배의 징후라고 받아들인 것처럼 제이는 또 다시 다가와서 블라우스의 앞가슴을 붙잡았다. 앞가슴을 가리는 것보다 상대를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서, 바넷사는 블라우스의 앞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하얀 이빨을 번쩍이고 제이는 웃을 뿐이었다. 그의 가슴을 한사코 밀어내려 하면서도 바넷사는 자기가 패배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지 마세요!" 공포감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긴장감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고조되었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있던 그의 동작이 중도에서 멈췄을 때 바넷사가 느낀 것은 안도감이 아니라 실망감이었다. "이제 됐죠, 제이." 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여기서 어서 나가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큰 소리를 지르겠단 말인가?" 제이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니야, 나갈 수는 없어. 당신과 마스덴과의 관계에 대해서 확실히 이야기해 주기 전에는." 분노가 치밀어 가슴속을 태웠다. 내가 무엇을 하든 내 마음이 아닌가? 그야말로 술김에 제멋대로 남의 방에 들어오고서!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예요? 생각이 달라졌나요?" 바넷사는 대들었다. "잘하면 경험이 풍부한 나디아하고 나의....나의 순결을 둘 다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가하고 있나요?" 제이가 욕설을 퍼붓는 것이 들렸으나, 바넷사의 분노는 너무도 강렬하고 거칠었다. "어떤 사이야? 그와 밤을 함께 지냈나!" 제이는 난폭하게 그녀를 흔들었고, 바넷사는 그의 사나이다운 체취와 위스키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것이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어요? 당신은 나를 거절했지만, 제프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 주었어요." "그는 위안을 필요로 하고 있어. 그것 뿐이야. 그리고 만일당신이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내 스스로 그 대답을 알아낼 수밖에 없어." 무언가가 이상하다. 사실은 생각을 고쳐먹도록 그를 설득하고, 그가 술에 취해 있다는 것, 실제로는 나디아를 바라고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이 자리를 모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처럼 술에 취한 듯이 내 머리가 멍해지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제이!" 형식적인 반대는 매정하게 묵살되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그는 바넷사를 가볍게 안아올려 그녀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격렬한 정열을 유도하려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솟구치는 욕망뿐이었다. 몸이 떨어졌어도 뜨거운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괴로운 듯이 숨을 크게 쉬면서 마지막 저항을 하듯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녀의 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그의 눈은 분별을 잃고 정열에 불타고 있었다. "당신은 내 이성을 마비시키고 마는군. 그것을 자기 자신도 알고 있나?" 제이는 뜨거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아아,바넷사!" 그는 순간 몸을 일으켰다. 생각할 겨를이나 숨을 쉴 틈도 없이 바넷사는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제이의 행동을 견디고 있었다. "당신은 아직도 나를 요구하고 있어, 바넷사." 냉정한 마음이었다면, 거만한 그의 자신감을 굴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바넷사로서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여자는 첫사랑의 남자를 절대로 잊지 못한다고 하지만, 나는 오늘밤 당신 머릿속에서 마스덴을 내쫓고 말겠어." "제이?" 설레임같기도 하고 하소연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바넷사는 그의 눈에 떠오른 미친 사람같은 열정을 보자 몸을 떨었다. "자, 이리 와요." 제이는 눈을 감고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모르나? 나디아라면 말하지 않아도...." 그 한마디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가슴을 푹 찔렀다. "나는 나디아가 아니예요, 제이." 그녀의 말소리는 얼빠진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고, 모든 환희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말 았다. "그리고 그렇게 처녀 레테르를 떼고 싶어서 안달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예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녀는 조용히 그렇게 말했다. 갑자기 몸이 굳어진 제이의 태도로 미루어, 그는 그 말뜻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럼, 마스덴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이지? 당신은 아직도 나를 첫사랑의 애인으로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 바넷사는 또 다시 충격으로 몸을 떨었다. "이 방으로 억지로 들어온 것은 바로 당신이예요, 제이, 나는......" "나는 술에 취해 있었어." 그는 빈정대듯이 비웃었다. "물론,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황량한 사막을 연상시키는 조소는 제이가 방을 나간 뒤에도 오랫동안 귓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또 다시 제이 코플랜드에게 약점을 드러내고 말다니!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바넷사는 이번에야말로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 일에 고나해서는 자기 이외에 누구도 책망할 수 없다. 내 자존심은 도대체 어디로 가 버렸을까? 프라이드를 버리면서까지 제이의 사랑을 바랄 정도로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절대로! 바넷사는 허둥대며 주정하고, 욕실로 뛰어들어가 샤워를 틀었다. 30분 후, 정상을 벗어난 육체와 마음을 차가운 냉수로 식힌 바넷사는 방금 전까지 제이와 다투던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아침식사를 끝내고 크레아웰로 돌아가는 버스에 탔으나 제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장은 틀림없이 그녀에게로 갔을 거야." 선수 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바넷사는 명치 끝니 조여드는 불쾌하면서도 구역이 나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나디아의 그림자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달게 받아들이고, 그녀의 대용품으로 이용당했다는 데 대한 혐오감이었다. 다행히, 돌아가는 버스 속에서 제프는 계속 독서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에 애써 대화를 계속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제프도 역시 안색이 나쁘고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바넷사의 문제는.......앞으로 일생 동안 계속 따라다니면서 떨어지지 않는 문제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9장 "굉장히 좋지?" 사진을 몇 장 들어올리면서 개빈은 흥분해서 말했다. "선수들의 기분을 그야말로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어."사진을 내려놓고 그는 새삼스럽게 감탄한 것처럼 그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사진에서 시합 전의 긴장과 시합 후의 승리의 기쁨이 전달되어 오는 것 같아. 틀림없이 제이도 마음에 들어할 거야." 오빠는 일에 관한 한 절대로 공치사를 하지 않는 성품이었고, 바넷사도 선수들의 감정이 손에 잡히듯이 나타나 있는 일련의 사진들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이 사진으로 상을 탈 수 있을 지도 모르겠어." 개빈은 말을 계속했다. "단순한 PR용 사진으로 끝나기에는 아까울 정도야. 이 마스덴의 사진은 특히 좋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피로와 실망을 얼굴에 나타내고서 운동장에서 나오는 제프의 사진을 집어들고 말했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계획에 대해서 제이에게 이야기했니? 이 사진을 보여주면 그를 설득하기 쉽지 않을까?" "일요일에 이곳으로 돌아온 뒤, 그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어요." 그리고 오늘은 금요일. 바넷사는 오늘 아침 클럽에서, 제이가 나디아를 동반하고 토요일 시합을 관전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클럽에서 만날 때마다 제이는 항상 나디아와 함께였고, 신문의 고십란에는 여전히 그들의 사진이 실리고 있었다. 만약 그것이 제이 코틀랜드가 아니었다면, 유명한 패션 모델과 연인 관계라는 것을 보란 듯이 자랑하고 다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정복한 여자를 자랑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나이다. 제이는 그런 짓을 할 필요도 없는 두드러진 뛰어난 인물이다. 그런데 왜 그에게서 나디아와의 관계를 일부러 강조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 것일까? 바로 어제도 차에서 내리는 두 사람을 주차장에서 보았다. 거기서 불과 몇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자동차 쪽으로 다가가는 바넷사를 제이는 못 보았을 리가 없는데, 보란 듯이 나디아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얼굴을 들어 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나디아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질투! 바넷사는 그러한 감정에 뚜껑을 닫으려 했다. 제이에 대한 사랑은 여성이면 누구나가 한번은 치러야 할 홍역 같은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순간의 고통을 회상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면서도 이 병은 언젠가 나을 것 같은 자신은 전혀 없었다. 날이 갈수록 고통은 커지고 참을 수 없게 되었고, 제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미칠 것 같았다. 바넷사는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나무랐고, 우연히 나디아가 없을 때만 그녀의 대용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것을 스스로 상기시켰다. 제이는 철저하게 그녀를 모욕하고, 상처를 주고, 웃음거리로 삼았다. 그런데도 바넷사는 밤이 되면 그와 함께 지내는 꿈을 꾸고, 뜨거운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잠을 깨꼰하는 것이었다. 제이가 그녀에게 어떠한 반응을 기대하고 있는지 바넷사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클럽에서 만날 때는 항상 차가운 호박빛의 눈초리가 창백하게 야윈 바넷사의 얼굴을 도전하듯이 쏘아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바넷사 앞에서는 일부러 나디아와 다정하게 행동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물론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알고 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지는 않다. 그에게 있어서 자기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과 그가 바라고 있는 것은 나디아라는 것을 확실하게 일깨워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제이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바넷사가 좌절하고 울부짖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프라이드는 그와 나디아와의 관계에 전혀 무관심인 체하기를 요구하였다. 바넷사는 누구 한 사람, 오빠까지도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노력의 결과인가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이제는 간신히 어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모든 사랑의 게임은 룰에 따라서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그리고 바넷사의 경우, 그 상처가 아직도 크게 입을 벌리고 있다는 것을 절대로 상대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그로부터 몇 주일이 지났고, 바넷사는 그녀 나름대로 쾌적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었다. 팀의 선수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그녀가 찍은 사진에는 선수마다의 개성이 더욱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스포츠팬들이 바라고있는 사진이 되어 나왔다. 몇 장의 사진은 중앙신문에 거래되어, 다른 축구팀으로부터도 그와 같은 PR 사진을 찍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러나 제이와의 전속 계약 때문에 거절했고, 시간이 나는 대로 줄곧 생각해왔던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길 사전 준비에 몰두하였다. 제프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신을 되찾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바넷사는 마음이 놓였다. "이번 시즌을 당당히 싸운 뒤에 은퇴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어."그는 고백하였다. "작년에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는데, 금년에는 약간 힘이 들어 솔직한 고백이야. 이 사실에 대해서는 나 자신이나 팀의 동료, 제이까지도 잘 알고 있어." "그러나 젊은 선수들은 당신의 경험을 존중하고 있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은퇴해도 애석할 건 없다고 확신해. 코틀랜드는 엄격한 감독이고, 자기 뜻대로 팀을 잘 끌고 갈 거야. 그가 지방의 마이너팀을 정상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말했을 때, 모두가 웃었어. 그러나 지금은 누구 한 사람 웃는 사람이 없어. 만약 이대로만 나간다면 다음 시즌에 1부로 올라서는 것은 꿈이 아니야,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만." 물론 알고 있다. 바넷사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제이 코틀랜드가 이 고장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뭔가 수상쩍음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일이 그의 말대로 진행되고있는 것은 틀림없다. 새로운 스포츠의 전당은 곧 오픈될 예정이고, 매너하우스도 수리가 완료되어, 크리스마스의 대대적인 파티도 며칠 후로 다가와 있다. 새로운 스포츠 회관이 제이로부터 시에 정식으로 기증되는 날, 바넷사는 사진을 찍기 위해 제이와 나디아와 함께 식에 참석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지?" 시장이 치사를 한 뒤에 제이가 빈정대듯 속삭였다. "그는 정말 대단한 분이야." 나디아가 말참견을 했다. "누구든지 그의 입장이 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금년이나 내년에는무 리일지 모르지만, 그 다음 해에는 틀림없이..." 바넷사의 표정을 보고 그녀는 비웃음을 웃었다. "어머나, 아무것도 모르고있구나. 매년 훌륭한 공적을 남긴 사람에게 주는 상에 대해이야기하고 있어." 다음에는 제이를 올려다보고 달콤하게 속삭이더니, 거리낌없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당신은 아주 머리가 좋군요, 달링. 처음은 시(市)를 위해서 일하고, 점점 세력 범위를 넓혀 가는군요...." 바넷사는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제이의 눈동자에 떠오른 표정이 그러한 충동을 억제하게 했고, 그녀는 더 이상마음이 상할까봐 두려워서 급히 눈을 돌렸다. "토요일에 입을 드레스는 준비했나?" 개빈은 누이동생에게 이렇게 물었다. "굉장히 성대한 파티가 될 것 같아." "그럼 이 시에 사는 사람의 반은 초대를 받은 모양이죠?" 바넷사는 달갑지 않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트의 칭호를 얻기 위해서 표를 긁어모으려는 속셈일까요?" 개빈의 얼굴이 흐려졌다. "나디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설마 너까지 제이의 동기를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생각해봐라. 축구팀에 관한 PR은 별문제로 치고, 그는 모든 면에서 눈에 띄지 않도록 침착하게 일하고 있잖아." 오빠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나디아의 신랄한 말에는 마음이 아팠다. 제이가, 언젠가는 나이트의 칭호를 받게 될 것이라고 은근히 비쳤을 때, 아마 나디아는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을 상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인생에는 영속적인 관계는 있을 수 없다고 제이는 말했었다. 그때 그때를 즐기는 방법을 알고 있는 진보적인 여자들, 그것이 그가 좋아하는 타입이다. 마음이 달라졌을까? 아니면 나디아와는 결혼생활과 독신생활의 좋은 점만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아내. 남편의 여성관계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경험이 풍부한 여자. "아까 한 질문의 대답을 아직 듣지 못했어." "무슨 말을?" 바넷사는 제정신을 차리고 오빠를 쳐다보았다.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 이야기 말이야." "아아, 그거? 원정차 런던에 갔을 때 사 두었어요." "수리가 끝난 매너하우스를 아직 구경 못했지? 여하튼 멋있게 꾸며 놓았어. 모든 내장이나 가구의 선택은 모두 제이가 손수했지. 실내장식 잡지에 실린 화보를 모방한 것은 기호에 맞지않고, 따뜻하고 가정적인 집을 꾸미고 싶다고 말했어. 놀라운 것은, 옛날에는 어떻게 꾸며져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 옛날 자료를 다 찾아보았을 정도야." 개빈은 자주 가 보았지만 바넷사는 아직 매너하우스를 못보았다. 조수석에 나디아를 태운 스포츠카가 요란스런 엔진소리를 울리며 로지 앞을 달려가는 것은 여러 번 보았다. 이것은 마치 편집광(偏執狂) 환자 같구나, 하고 바넷사는 생각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때때로 제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자기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계획된 것이라고 믿고 싶어질 때가 있는 것이다. 파티가 있는 날 아침, 하늘은 밝게 개어 있었다. 매너마우스의 공사가 늦어졌기 때문에 파티의 날짜도 12월 중순까지 연기되어, 골덴 진바지에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있었지만, 로지에서 밖으로 나온 바넷사는 추워서 몸을 떨었다.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침대에서 나와 상쾌한 이른 아침의 산책을 즐기려고 나섰던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바넷사는 로지와 매너하우스의 경계를 이루고있는 작은 숲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셋길을 걸어가자, 토끼가 한 마리 튀어나왔고, 새들은 경계하는 울음소리를 재잘댔다. 살얼음이 언 연못은 하늘을 비추고 있었으며, 발 밑에서 마른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바스락바스락 났다.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매너하우스가 보였다. 제이와 함께 그 집에 있을 나디아를 상상하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바넷사의 가슴은 괴롭게 고동쳤다. 나디아가 파티의 호스테스역을 한다는 것은 지금 상황으로서는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놀라야 할 일은 그 생각을 하는 자기가 이렇게도 괴로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벌써 수 개월 전부터 알고 있었던 일인데 ..... 흙 위로 뻗어나온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뒤에서 말발굽 소리를 듣고 불안에 사로잡혀 일어선 그녀는 천천히 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보았다. 잘생긴 검은 색 아랍 말을 탄 제이가 다가왔다. 말은 눈앞에서 갑자기 화가 난 듯 한 바퀴 돌았으나 제이가 능숙한 솜씨로 고삐를 당기자 곧 얌전해졌다. "또 불법침입했군. 아마도 당신에게는 남의 땅에 허가없이 들어오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지?" 숱이 많은 검은 머리는 흐트러져 있고, 허벅지에 꼭 끼는 진바지는 싫어도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바넷사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것처럼, 두꺼운 크림빛 스웨터로부터 조소를 머금은 입술, 거리낌없이 내려다보는 호박빛 눈동자로 그 시선을 옮겼다. "그저 산책을 하고 있었을 뿐이예요." "남의 땅에서?" 말이 침착성을 잃고 뒷발로 뛰어오르자, 제이는 약간 몸을 움직여서 균형을 잡았다. "솔직이 말해서 당신은 산책을 하고 있지 않았지? 가만히 서서 집을 쳐다보고 있었지? 나디아로부터 들었지만, 당신은 몹시 상상력이 풍부하다더군. 어릴 때 당신은 자기가 이 집의 여주인이 되는 꿈을 꾸는 것을 좋아했다더군. 지금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매너하우스의 안주인이 될 생각으로 여기에 서서....?" "그만 돌아가겠어요." 계속 움직이고 있는 아랍 말을 피하며 바넷사는 말을 가로막았다. 이렇게 몸이 떨리는 것은 절망 때문이 아니다. 이른 아침의 찬 공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디아가 일어날 시간이니까." 제이는 매너하우스 쪽으로 시선을 던졌고, 바넷사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왜 그는 이처럼 잔인해졌을까? 나디아 쪽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왜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그렇군요, 기다리게 해서는 안 돼죠. 그녀의 시간은... 아주 귀중할 테니까요." 바넷사가 빈정대자 순간적으로 호박빛의 눈동자에 분노가 스쳤다. "그렇다면 당신은 남에게 공짜로 시간을 주나?" 제이가 되물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서도 이런 것을 배우지 못했나? 비싼 물건을 사는 것은 남자의 보람이라는 것을? 만약 나디아가 자기 자신에게 비싼 값을 매긴다면, 그녀는 내가 기꺼이 그것을 지불하리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야." "당신이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겠죠." 바넷사는 발끈 화를 내며 말했다. "당신은 어떤 것의....." "어떤 것의 값은 알고 있으면서도 참다운 가치는 모른다. 그 말인가?" 제이는 비웃었다. "그렇군. 그렇다면 당신의정직함에는 얼마의 값을 매기지? 꼭 알고 싶군." 말머리를 홱 돌리자, 제이는 대답도 듣지 않고 달려가 버렸다. 그는 바넷사가 나디아의 행세를 한 것을 지금도 용서치 않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속은 자기 자신을 용서치 못하는 것일까? 어쨌든 그가 바넷사를 골려 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영원히 아물 수 없는 작은 상처를 여기저기에 내어, 거기서 한방울씩 복수의 피를 짜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성대로 행동한다면 바넷사는 당장 크레아웰을 떠났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에 괴로와하고 있는 여성치고 이성을 잃지 않은 여성이 있을까? "어때요." 바넷사는 품이 넉넉한 스커트가 우아하게 퍼지는 것을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오빠?" 대답이 없어서 그녀는 불안스럽게 오빠를 쳐다보았다. 예복으로 몸을 감싸고 머리를 단정히 빗어 올린 오늘밤의 오빠는, 놀랄 만큼 매력적이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하튼 최고로 예쁜데. 요 몇 달 동안에 너는 많이 달라졌어. 여기가 갸름해지고." 그는 누이동생의 볼에서 턱 쪽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마치 약한 산들바람만 불어와도 날아 갈 것 같구나." "드레스는?" "굉장히 비싼 것이라는 걸 한눈에 알았지만, 아무리 비싸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군." 바넷사는 힐끗 거울을 들여다보고, 오빠의 말이 공치사가 아니란 것을 확인했다. 검은 머리는 느슨하게 위로 빗어 올려서 갸름한 목덜미가 돋보이게 하였고, 귀에는 21세 되는 생일에 나디아의 부모가 선물해 준 진주와 다이아몬드를 박은 이어링이 흔들리고 있다. 짙은 사파이어빛의 눈동자는 갸름한 얼굴을 다시없이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나디아하고 비교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화장은 최소한도에서 그쳤다. 드레스 빛깔과 맞춘 장미빛 계통의 입술연지,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아이새도우와 마스카라, 볼에는 희미하게 연지를 발랐을 뿐이다. 드레스의 분위기와 꼭 어울리는 로션과 향수는 걸을 때마다 향긋한 냄새를 풍기고, 장미빛 드레스에 감싸인 허리는 두 손아귀에 들어갈 정도로 가늘었다. "네가 파티의 꽃이 되는 것은 틀림없어." 개빈은 장담했다. "두고 봐." "그런 것, 기대하지 않아요. 그 역할은 나디아가 할 테니까." 자기가 최고로 아름답게 몸치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있었지만, 매너하우스의 홀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바넷사는 오빠의 에스코트를 무엇보다도 고맙게 생각하였다. 코트를 맡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오빠의 뒤를 따라 곧장 응접실로 들어가, 웨이터로부터 샴페인 글라스를 받아들자, 이미 많은 손님들이 모여 있는 실내를 둘러 보았다. "파티는 이층의 넓은 방에서 개최된단다." 개빈이 귀에 대고 말했다. "빨리 이층으로 올라가자." 바넷사는 이미, 이층에서 들려오는 왈츠의 선율을 듣고 있었다. 응접실 한쪽에 다른 선수들과 함께 제프가 있었고, 그는 바넷사의 모습을 보자 눈을 둥글게 뜨고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에 멍해져 있었다. "드디어, 사장이 나타났군." 오빠의 속삭임에 바넷사는 자기도 모르게 오빠의 팔을 꼭 붙잡았다. "야, 개빈." 제이는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여느 때와 같이 가슴이 깊게 팬 드레스를 입은 나디아가 그의 팔에 매달려있다. 진홍빛의 실크는 상상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몸의 곡선을 드러내고 있어, 바넷사는 이처럼 대담한 드레스를 입은 사촌언니의 용기에 감탄했다. 예상했던 대로 나디아는 짙은 화장을 했고, 미장원에서 방금 컬한 검은 머리는 모델다운 그 얼굴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어머나 바넷사, 꽤 구식 드레스구나." 차가운 사파이어빛의 눈동자가 장미빛의 공단 드레스를 찬찬히 살펴봤다. "처음으로 사교계에 데뷰하는 것 같은데, 약간 어린애 같은 옷이야." "어서 오세요, 바넷사." 제이는 개빈으로부터 바넷사에게로 시선을 옮겨 인사했으나, 그 눈동자는 따뜻하지 않았다. "지난주 당신이 찍은 팀의 사진을 보았는데, 아주 잘 된 사진이더군요." "팀의 PR에 관해서 바넷사가 생각하고 있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개빈이 옆에서 말참견을 하였다. "기대하고 계십시오. 틀림없이 마음에 드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요?" 냉담한 눈초리가 거만하게 바넷사를 쳐다보았다. "그럼, 언젠가 기회를 봐서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가요, 달링. 난 춤을 추고 싶어요." 나디아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카마이경 부처가 당신하고 이야기하고싶어하세요. 자, 빨리." "참으로 방자하군." 개빈은 바넷사의 팔을 잡고 못마땅하게 말했다. '매너하우스의 안주인 같은 얼굴을 하고, 정말로 나디아에게는 화가 나는군." "제이는 신경쓰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바넷사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으나, 오빠를 속일 수는 없었다. "제이는 훌륭한 인물이지만, 어째서 나디아 따위하고 사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모르세요?" 그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나디아는 그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어요." 마침 그때 제프가 다가온 게 다행이었다. 두 사람은 곧 부인이나 걸프랜드를 동반한 선수들과 어울렸다. 한 시쯤 되어, 바넷사는 폴카를 춘 뒤의 가쁜 숨을 진정시키려고 의자에 앉아 한 쪽 구두를 벗은 다음 댄스를 즐기고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제이는 나디아와 춤을 추고 있다. 그는 바넷사에 대한 혐오감을 새삼스럽게 강조하듯이, 그녀이외의 모든 여자와 춤을 추었다. 그의 그러한 방식에는 이제 슬슬 익숙해져도 좋을 텐데....,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발뿐만 아니라 머리도 지끈지끈 아팠다. 다른 사람들의 명랑함이 바넷사에게 비참함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했다. 개빈은 시장의 귀여운 따님과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어서, 누이동생의 존재를 잊고 있었고, 제프는 심한 연습 때문에 피로하다면서 사과하고 먼저 돌아갔기 때문에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바넷사는 아래층 홀의 서재 앞을 지나다가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아까 오빠가 새로운 PR의 아이디어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제이는 그것에 대해서 언젠가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체의 감정을 빼놓고 그를 만나, 자기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보다는 계획의 개요를 글로 적어, 이미 준비해 둔 사진과 함께 그에게 건네주는 편이 좋을 지도 모른다. 사진에는 촬영한 날짜, 시합의 상대, 선수들의 행동 기록 등의 데이터가 기입되어 있어서, 시즌 중에 그들의 마음의 움직임을 명백히 알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다. 로지에 돌아온 바넷사는, 다정한 제이와 나디아를 볼 때마다 느꼈던 비참함조차 잊고, 완전히 자기 계획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진을 골라내는 데 2,3분, 계획의 개요를 타이프치는데 30분밖에 걸리지 않아, 바넷사는 준비한 서류 뭉치를 들고 또다시 매너하우스로 향했다. 서재의 책상 위에 놓아 둔다면 내일 아침에는 제이의 눈에 띄게 될 것이다. 매너하우스로 가는 도중 언덕을 내려오는 자동차에 여러 번 길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어, 가까스로 도착하여 차를 세웠을 때는 불과 몇 대의 자동차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홀에서는 아직도 손님들이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서재에 들어가 책상 위에 자료를 두고 오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바넷사는 일을 끝내고 새로 들여놓은 것 같은 책장을 감탄의 눈으로 쳐다보면서, 언젠가 제이의 아파트에서 보았던 갖가지 책의 제목을 훑어보았다. 왕조(王朝)품의 벽난로는 공들여 복원되었고, 그 위에는 전에 매너하우스를 소유했던 사람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제이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것을 쳐다 보았을까? 가정을 가지고 자손을 남길 생각이 없다면, 여기에 자기의 초상화가 걸릴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면서 쓸쓸함을 느꼈을까? 한숨을 쉬면서 난로 곁을 떠나려 하는 순간, 서재의 도어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바넷사!" 제이는 그녀를 쳐다보고 가만히 등뒤로 도어를 닫았다. 자켓은 벗고 있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으며 셔츠의 앞가슴 단추가 몇 개 열려 있다. 그는 책상으로 다가가더니 거기에 있는 술병을 들어 글라스에 가득 브랜디를 따랐다. "당신은 벌써 돌아간 줄 알았지." "네, 일단 돌아갔다가 다시 왔어요." 바넷사는 그에게 들키기 전에 돌아갔어야 했다고 마음으로부터 후회하고있었다. "그 이유를 나에게 들려 줄 수 있나?" 제이의 목소리에는 무례한 암시가 들어 있어서 바넷사의 하얀 볼이 붉어졌다. "당신이 상상하고 있는 그런 이유로 돌아온 건 아니예요."그녀는 자기 혀를 깨물고 싶었다. 왜 이런 바보 같은 말을 했을까? "그게 아닌가?" 제이는 책상 한 모서리에 앉더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 상상은 접어두기로 하고 도대체 여기엔 무엇하러 왔지?" "이것을 놓아두려고요." 바넷사는 서류를 가리켰다. "개빈이 아까 얘기했던 PR 계획서예요." "그것이 그렇게도 급한 일인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말을 꺼내기 전에 이것을 먼저 보여드리고 싶었던 거예요. 그러면 이해하는데 좋으리라고 생각해서...., 그럼 실례하겠어요." 바넷사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주저하듯이 물었다. "저, 나디아는.....?" "돌아갔어." 제이는 벌떡 일어섰다. "돌아가다뇨?" "그래, 돌아갔어." "그러나........" "그러나, 당신은 여기 있어. 당신은 내가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어김없이 있지. 그리고 그 사파이어빛 눈동자가 항상 나를 유혹하고 있어. 그것을 자신도 깨닫고 있나?" "제이, 아아뇨... 저는... " 그가 다가왔기 때문에 겁에 질려, 바넷사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오늘밤의 제이에게서는 여느 때와는 다른 뭔가가 느껴졌다. 해방된 야수가 지니는 위험한 뭔가가..... 왜 나디아는 돌아갔을까? 싸움이라도 했을까? 아니면 제이에게 싫증이 났을까? 오늘밤 그녀는 금발의 키가 큰 남자와 여러 번 춤을 추었다. 그는 나디아의 허리를 안고있었고, 두 사람은 함께 즐겁게 웃고 있었다. "나디아의 대리 역할을 할 생각은 없어요, 제이." 바넷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때문에 여기에 왔다고는 생각지 마세요....."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는 알고 있어. 항복하러 왔지, 바넷사? 그렇지?" "아니예요, 틀려요!" "틀려? 그럼 왜 레테르를 달고 왔지?" 전혀 그를 바라고 있지 않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제멋대로 튀어나온 말은 <그래요>하는 희미한 속삭임이었다. "네, 그래요. 인정하겠어요." 바넷사는 몸을 떨었고, 몸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늠름한 팔이 안아올릴 때까지 그의 민첩한 행동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내려주세요, 제이...." 그녀는 몸부림쳤다. "쉬잇, 가만히 있어." 바넷사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얼굴을 든 제이의 눈동자는 마치 불꽃 같았다. "오늘밤에야말로 당신은 내사람이야."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바넷사는 눈을 감고 있었다. 천천히 마루바닥에 자기 발로 설 때까지 그녀는 눈을 뜨려하지 않았다. "당신이 바라던 것을 오늘밤 실현시키겠어." "제이......" "아무말도 하지 마, 바넷사. 아무 말도." 그는 눈을 감았고, 길고 짙은 속눈썹이 햇볕에 탄 볼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계속해서 속삭였다. "사랑해, 바넷사." 10장 그날밤, 바넷사는 정신을 잃었다. 그것은 절벽 위에서 곧장 밑으로 뛰어내리는 것과 같아서, 방금 전까지 발 밑을 받치고있던 대지가 다음 순간 무너져 버린 것 같았다. 상대가 강요하기도 전에 바넷사는 본능의 명령에 따라서 열에 달뜬 사람처럼 뜨거운 정열을 되돌려주고 있었다. 드레스의 옷깃이 스치는 소리는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을 매혹적인 음악으로 바꾸는, 아름다운 반주같이 느껴졌다. "바넷사, 당신의 사랑이 필요해..." 그 말의 뜻을 확실히 이해하면서도, 바넷사의 귀에는 그것이 소년시절의 제이, 고독한 제이의 간절한 외침으로 들리는 것이었다. 그 말은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지켜왔던 성채를 부셔 버리는 데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환희의 외침 소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제이의 목소리. 그 뒤로 두 사람은 흡족한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여느때와는 분명 뭔가가 다르다. 무엇일까? 이처럼 흡족한 행복감을 맛본 일이 여지껏 없는데, 뭔가가 머리 한쪽 구석을 괴롭히며 느긋한 잠을 방해했다. 바넷사는 몸을 뒤척이며, 감은 눈두덩이 위에 비친 춤추는 아침 햇살을 피하면서 겨우 생각해 냈다. 바로 이것이 여느때와는 다른 것이다 -------로지의 침실에는 아침 햇살이 비쳐 들지 않는다. 눈을 뜨고 그녀는 낯선 방안을 둘러보았다. "잘 잤나?" 홍차와 토스트를 놓은 쟁반을 들고, 제이가 도어 앞에서 말을 걸었다. "배가 고프리라고 생각해서." "저..." 일어나려 하다가 어제의 일을 생각하고 바넷사는 얼굴을 붉혔다. "기분이 어때?" 제이는 옆에 있는 테이블에 쟁반을 놓자,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이것은 정말 불공평하다고 바넷사는생 각했다. 그는 벌써 일어나 있었는데 자신은 아직도 잠자리에 들어 있다니, 그로서는 이러한 일들은 다반사겠지만, 자기는.... "일어나야겠어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서먹서먹하게 말헸다. "지금 몇 시죠?" 제이는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한 아무렇지도 않은 동작이 마음을 설레게 하다니,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열 시 조금 지났어. 로지에 가서 당신에게 당장 필요한 소지품을 가져오지. 무엇을 가져오면 좋지?" "전...." 억울하게도 또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일이 있은 뒤인데, 그는 어쩌면 이리도 태연한가. "후회하고 있나?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해도 이미 때는 늦었지만. 설령,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어제의 당신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어." "네... 그랬어요." "식사를 하고 있어. 나는 로지에 다녀올 테니까. 돌아온 뒤에 천천히 이야기하지." "그럴 필요 없어요. 어제 일은...." "어제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다고? 아니야, 그건 거짓말이야. 당신이 나를 최초의 애인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지. 여하튼 식사를 하고 있어." 자동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틀림없이 그는 걸어서간 것이다. 오빠는 도대체 어떻게 생각할까? 어젯밤의 일들이 되살아나자, 바넷사는 그 생각에 몸을 떨었고, 저절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의식했다. 어째서 그처럼 분방해질 수 있었던가! 그것도 그렇게 쉽게. 마음속에서 작은 소리가 그녀를 놀려댔다. 어떤 여성이라도 사랑하는 남성을 상대할 경우에는 아주 간단히 대담해질 수 있는 모양이다. 특히 사랑하는 상대가 제이 코틀랜드 정도의 매력적인 남성인 경우는! 두 잔째의 홍차를 컵에 따르고 있을 때 자동차 소리가 들려, 바넷사는 의아한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현관의 도어가 덜커덕 닫히는 소리에 이어 누군가의 발소리가 층계를 뛰어올라왔다고 생각하는데, 침실의 도어가 홱 열렸다. "제이, 나예요. 나디아예요." 사촌언니의 목소리였다. "어제는 미안했어요. 그러나....." 침대에 둥글게 몸을 도사리고 있는 바넷사의 모습을 보고, 나디아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우뚝 섰다. "바넷사, 도대체, ....... " 그녀는 심술궂게 말했다. "이 정도의 일은 능히 하고도 남을 여자라고 미리 예측했어야 했는데. 너도 참, 어쩌면 내 대역을 그렇게도 끈질기게 하고 있는 거니?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제이는 우리의 가치의 차이가 얼마나 있는지 틀림없이 알았을 걸. 그가 좋아하는 것은 경험을 쌓은 섹시한 여자인데, 너는 아무리 봐도 실격이야.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 물론 잘 알고 있지. 그가 질투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잠깐 말다툼을 했을 뿐이야. 그러나 내가 사과하러 온 것을 안다면 당장 너를 여기서 내쫓고 말 거야." 나디아는 몹시 못마땅한 듯 코를 킁킁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했지? 진심으로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사나운 동물처럼 분노로 두 눈을 번뜩였다. "제이는 내 사람이란 말이야, 바넷사. 어제는 재미 많이 봤니? 그렇다면 나도 기뻐. 왜냐하면 너로서는 어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의 즐거운 밤일 테니까." 나디아는 노기등등한 모습으로 침대로 다가왔다. "나하고 벤이 다정하게 춤을 추었다고, 제이가 바보처럼 질투를 했어. 나는 그를 어느 정도 골탕먹이려 했지, 그것 뿐이야. 내가 돌아왔는 데 대리역할을 한 너에게 그이가 만족할까? 지금까지 나보다 너를 좋아한 남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니?" 나디아의 눈동자는 분노에 불탔다. "나디아!" 두 사람 모두 제이의 발소리를 듣지 못하고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나디아는 당황해서 뒤돌아보았고, 바넷사는 제정신을 차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달링, 어떻게 이런 심한 짓을 할 수 있어요?" 나디아는 비난하듯 소리치고 도어 쪽으로 돌아가 그의 가슴에 몸을 던졌다. 바넷사는 그 이상 그들을 쳐다보고 있을 수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밑에 내려가서 이야기하지." 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넷사, 당신의 소지품을 가져왔어." 그 목소리가 냉담한 것도 수긍이 간다. 나디아가 돌아오기 전에 하룻밤 사랑의 상대를 빨리 내쫓고 싶었겠지. 그렇다. 그는 나디아와 말다툼을 했다. 그리고 자기를 그 대용품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용당한다는 것을 너는 처음부터 알고 있지 않았어?' 마음속의 속삭임이 따끔하게 가슴을 찔렀고 무엇 하나,참으로 무엇 하나도 그 아픔을 가시게 해주는 것은 없었다. 그와의 기억을 씻어내듯이, 바넷사는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면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차가운 냉수의 공격에 기진맥진하여 그녀는 스스로 자초한 괴로움과 비참함에 이빨을 덜덜 떨면서 샤워기를 잠그고 두꺼운 타월로 몸을 감쌌다.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 바넷사는 자기 자신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크레아웰에서도 아주 떠나버리자. 이제는 그렇게 하는 길밖에 없다. 욕실의 문을 열자, 엔진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함께 어디론가 외출한다면 이 이상 고마운 일은 없다. 그들은 틀림없이 화해하고 방해자가 더 이상 서먹서먹한 생각은하지 않고 집을 나갈 수 있도록, 잠시 시간을 주려는 것이겠지. 더 이상 바랄 수도 없는 일이다. 어젯밤 그처럼 정열적으로 자기를 안았던 그 팔에 나디아가 안겨 있는 광경을 본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바넷사는 침실의 융단을 밟고 나오다가, 제이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우뚝 서고 말았다. 그는 도어를 잠그고 있었다. "이 이상 누군가의 방해를 받는 것은 질색이야." 제이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이빨을 덜덜 떨고 있는 바넷사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물에 젖은 머리카락과 추위에 떨고 있는 바넷사의 몸을 보더니, 그는 두세 걸음 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어 야윈 볼을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깜짝 놀란 듯이 뒤로 물러서는 바넷사를 본 호박빛 눈동자가 어둡게 그늘졌다. "왜 그러지?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리라고 생각하나? 도대체 당신은 나를 어떤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어?" "어떤 여자를 손에 넣지 못하면 그 대용품이라도 소유하는 남자라고....." "당신은 그 일로 나를 책망하고 있나?" 바넷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당연하지 않아요?" "당신이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는 잘 알아. 그러나 내이야기도 들어 줘. 나는 처음부터 당신에게 성실하려고 노력해 왔어. 당신을 나디아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은 당신도 알고 있지?" "그래요. 당신은 나를 나디아라고 믿고 있었다 할지라도, 실제로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던 나디아가 아니라, 바로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지 않아요?" "특정의 여성과 영원히 결합하는 데 대해서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당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내가 그러한 관계를 철저히 피해왔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겠지? 나라는 사람을 그렇게도 이해하기 어려운가?" "아뇨, 어렵지는 않아요." 바넷사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당신은 자기 만족을 위해서는 한 여성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 속이 메스꺼워져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이 더욱 까다롭게 되었어." 제이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이해를 못하겠나, 바넷사? 내가 어떠한 마음이었는지? 당신이 나를 사랑하며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 자신도 당신을 바라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었어.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 바라고 있는 영원한 사랑을 줄 자신이 없었어. 나디아를 이용했다는 것은 인정해. 그러나 나디아도 똑같이 남자를 이용해왔고, 잠자리를 같이한 남자들을 모두 사랑했던 것도 아니야." 제이는 고개를 흔들며 계속했다. "만약 내가 나디아에 만족하고 있다면, 어젯밤처럼 당신을 격렬하게 요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확실히 그녀는 경험이 풍부하고 남자가 즐거워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 그러나 그녀의 테크닉이 어떻든 간에, 당신만큼 내마음을 설레게 하지는 못했어."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확실하게 말하겠어. 나디아를 안고 있을 때, 그녀를 당신이라고 생각하려 했었어. 그러나 어쨌든 어젯밤에 분명히 나와 그녀와의 관계는 끝났다고 나디아에게 확실히 말했어. 당신은 기뻐하리라 생각했는데, 반대로 이렇게 책망을 받다니....." 제이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갑자기 손을 뻗어 바넷사의 몸을 붙잡아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러나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운 살결에 남아 있는 물방울을 닦아주는 동안에 그 거친 느낌은 사라졌다. "오늘 아침처럼 날마다 당신과 함께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 그는 뜨겁게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제처럼 내손으로 당신을 잠재우고, 당신의 숨결을 느끼고 싶어. 그리고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고싶어. 나는 이처럼 당신에게 끌리고 있는 자신과 싸워왔어.... 그것이 단순한 남자의 욕심에 불과하다고 믿으려했지. 그러나 그러한 싸움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어...." "제이....." 사파이어빛 눈동자에 떠오른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고 그는 포옹을 풀었다. "나디아를 당신 대용으로 이용한 것을 이제 용서해 주겠지? 그리고 나는 후회하고 있어. 당신들 두 사람을 <황금과쓰레기>로 표현한 적이 있었지? 그날 당신이 황금이란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고 생각해. 그래도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어. 당신을 가까이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순간적으로 느꼈지. 나디아처럼 경박하고 자만심이 강한 여자라면 내 안전은 보장되어 있었어. 당신의 모든 것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나는 한 여성에게 정신적으로 빠져 들어가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어." "저는..... 사실 저는.... ?" 발이 덜덜 떨려, 바넷사는 침대 모서리에 앉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제 그렇게도 열렬히 사랑을 나누었는데, 또 그런 질문을 하나?" 뜻밖이란 듯이 말하는 제이를 바넷사는 약간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았다. "당신과 나디아는 연인 사이였고, 저에게는 무엇 하나.. 도저히 그녀를 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나디아가 여기에 와서, 당신과는 말다툼을 했을 뿐이고, 당신을 곯려 주기 위해 집을 나갔다는 말을 해서 나는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정반대야. 나디아는 우리들의 관계를 좀더 영구적인 것으로 하고 싶다고 해서 나는 반대했어. 그리고 내가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여자는 단 한 사람, 세상에 한사람밖에 없다고 말했지." 제이는 손을 뻗어 갸름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녀하고....?" "부정하지는 않겠어. 제멋대로고 차가운 나디아의 눈에서 너그럽고 상냥한 당신의 이미지를 찾는 것은 어려웠어. 그일 때문에 나에게 화를 내고 있나? 당신을 나디아의 대용품으로 이용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아요? 당신은 기회있을 때마다 나디아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과시했어요." "그럴까?" 제이는 생각에 잠겼다. "나디아는...." "나디아는 어제, 내가 사랑하고 있는 것은 당신이라는 것을 이해한 것 같았어. 나는 오늘 아침 당신을 만나러 갈 작정이었어. 어제 파티가 끝난 뒤, 서재에 있는 당신을 보고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단 말이야. 모든 문제의 해답이 주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어. 우리들의 사이는 헝클어진 실처럼 뒤범벅이 되어 있었으니까 말이야.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싸워왔었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디아 쪽이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라는 구실에 매달려 왔었지. 누가 되었건, 다른 사람에게 영원히 얽매이는 것이 두려웠어. 당신들 두 사람은 아주 닮았으니까, 당신에 대한 그리움을 나디아로 해소시킬 수 있다고 자신에게 타이르기도 했어. 그러나 처음으로 나디아를 안았을 때 당신들 두 사람은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지." 떨고 있는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제이는 말을 계속했다.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었지. 당신이 스페인에 가 있는 동안, 나는 미칠 것만 같았어. 스페인에서 애인이 생길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으니까,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에게 애인이 생기기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어. 왜냐고? 그렇게 되면 내 생각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는 셈이니까. 껍질 하나만 벗기면 여자는 모두 똑같다는 내 지론이. 그런데 당신은 그렇지......" 제이는 거기서 말을 끊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저 마스덴과의 관계!"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호텔 방에서 나온 당신을 보았던 밤,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최악의 밤이었어. 마스덴이 당신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나는 안심하면서도 진실을 인정할 수는 없었어." "진실?"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줄 때까지. 당신이 없는 인생은 참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더 심하게 말해서," 제이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내 프로포즈를 받아들일 때까지, 당신을 이 집에서 나가지 못하게 할 작정이야. 알았지? 집에 돌아온 방탕한 아들처럼 말이야. 마침내 나에게도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어. 당신은 나와 함께 그 불빛을 향해서 걸어가지 않겠나?" 제이는 뚫어지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에게 큰 상처를 주고 말았군, 바넷사.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고 변명할 수도 없지만, 여하튼 어떻게든지 당신을 멀리할 필요가 있었어. 나 혼자서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나를 피하도록 만들었어. 젊었을 때부터의 경험으로 나는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람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맹세해 왔지. 그러나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사랑의 상처를 받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사랑을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닐까? 사랑이 없는 밤, 비단처럼 매끄러운 당신의 살결을 꿈에 보고, 당신과 하나가 되기를 바랐던 고독한 밤. 지금까지 당신과 함께 나눌 흡족한 밤을 얼마나 바랐던가. 그리고 그것을 바라는 자신과 얼마나 필사적으로 싸웠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거야. 바넷사, 나를 용서해 주겠지?" 그것은 쉬운 일이었다. 바넷사는 이미 그가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가 계속자기를 찾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기의 그에 대한 사랑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리어 냉정한 체하여 멀리하여 했던 것을. 제이는 상냥하게 바넷사를 팔에 안고, 그녀의 확신을 더욱 요지부동하게 만들었다. "당신을 처음 안았을 때부터 사랑의 존재로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해. 그러나 나는 당신도 다른 여자들과 같다고 자신에게 타이르며 그 사랑을 묵살했지. 당신도 나와 똑같은 플레이보이, 아니 플레이걸이라고 믿고 있는 동안, 자신은 안전권에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지. 그후 당신이 나디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자신에게 부과했던 <사랑의 줄>을 스스로 깨뜨렸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어.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몹시 화가 나서 당신을 비난했고, 상처를 주었지. 나는 당신에게 속았다고 완고하게 자기에게 타일러 왔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었든 내가 원하는 사람은 당신이라는 것을...." "이름 같은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장본인이죠." 제이의 이마에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에 손을 뻗으면서 바넷사는 중얼거렸다. "춥지?" 제이는 떨고 있는 것을 느끼고 묻더니, 타월로 몸을 폭 감싸 안아 주었다. "네." 바넷사는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몸을 떨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줘, 바넷사." 그는 속삭이며 바넷사를 꼭 안았다. '만약 당신의 사랑이 없다면 내 인생은 헛되고 불모(不毛)로 끝나고 말 거야." 그것은 막다른 길에 들어선 간청이었고,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영혼의 부르짖음이기도 했다. 바넷사는 대답할 필요도 없이 늠름한 그의 몸을 안았다. 태어날 때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그로서는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당신의 사랑, 우리들의 결혼, 아이들, 모든 것을 갖고싶어." "무엇이든지 다 당신 거예요, 만약....." 제이는 갑자기 몸을 굳히더니 불안스런 눈으로 바넷사를 쳐다보았다. "만약?" "나를 다시 따뜻하게 해줘요. 이 방은 몹시 추워요." "센트럴히팅의 스위치가 끊어졌어." 제이는 애매하게 말했다. "내가 따뜻하게 해주지.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겠어? 아니면 폭신한 스웨터를 입을까? 그대신 답례는 해줘야 해." "답례라뇨?" 가볍게 키스를 받으면서 바넷사는 물었다. 두 사람은 새로운 게임을 생각해 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어린애들 같았다. "당신도 나를 따뜻하게 해 줄 것. 그리고 어제처럼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것. 약속할 수 있나?" "앞으로 남은 일생 내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겠어요." 이제 두 사람은 게임을 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 나누고있는 뜨겁고 격렬함 속에는 그녀가 오랫동안 바라고 있던 편안함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타오르는 호박빛 눈동자 속에는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확실한 사랑이 반짝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전에 결혼하지, 사랑하는 사람과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도록." "앞으로는 계속 함께 있게 될 텐데요." "쓸데없는 잡담은 그만 해, 달링. 당신을 따뜻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 바넷사는 행복하게 웃었다. "제이, 당신이 말한 대로 무엇이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