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도박 -미셀 레이드- -타이핑:가을바다 스페인 남자의 열정과 사랑! 캐롤린은 루이스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가 도 박꾼인데가 그녀아버지의 재산을 도박으로 갈취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와 헤어진다. 그러나 7년 후에도 캐롤린이 빚을 다 갚지못 하고 있자 루이스는 그녀에게 결혼을 청하는 데......... 1 캐롤린은 방안을 오가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점점 더 안절 부절 못했다. 창문 앞에서 다가선 그녀는 우아한 스위트룸에서 보이는 유명한 푸에르토 바누스의 아름다운 전망은 안중에도 없는 듯 다시 뒤돌아서 방안을 서성이며 초조하게 시계들 들여다봤다. 아홉시, 그녀의 아버지는 일곱 시라고 했다. 일곱 시까지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산책 갔다가 돌아와서 옷 갈아입고 저녁 먹으로 가자"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저번에 여기 왔던 후로 얼마나 변했는지 둘러보고 오마" 아버지는 마르벨라를 사랑하셨다. 예전엔 이곳에서 자주 여름을 보내곤 했기 때문에 이 휴양지를 둘러보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녀도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와의 동행을 거부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없었다. "괜한 수고 할 것 없다, 캐롤린" 그녀가 걱정하자 아버지는 꾸짖듯이 말했다. "네가 손잡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니까. 물론 감시자도 필요 없고, 제발 믿어주려무나. 점잖게 굴겠다고 내가 약속하지 않았니?" 그래서 그녀는 이번만큼은 아버지를 믿었다. 그런데 어떻게 됐지. 그녀는 자신을 비웃었다. 온몸으로 문제를 감지한 어미 닭처럼 방안을 서성이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거야, 안 그래? 그녀는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아버지는 강해지는 것이 두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으니 예전의 나약한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며 자신을 믿어달라고 아주 단호하고 간절히 그녀에게 부탁했었다. 그런데 이게 뭐지? 몹시 냉소적인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속에서 비웃었다. 몇 시간째 돌아오지 않고 계시잖아. 이렇게 연락이 없는 걸 보니 분명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오, 맙소사" 불안감이 갑자기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자 그녀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작은 검은 벨벳 이브닝 백을 집어들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버지가 그 몹쓸 옛날 버릇에 또 빠져들었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리라! 엘리베이터 단추를 손가락으로 힘차게 누른 뒤 초조하게 기다리고 서서 그녀는 맹세했다. 사태는 이미 충분히 안 좋았다. 안 좋은 게 뭐야. 그녀는 속으로 신음했다. 최악이었다. 그녀는 이곳을 싫어했다. 이곳에 오면 되살아나는 고통스런 감정이 너무도 싫었다. 아버지도 그걸 알고 계신다. 이곳을 떠난 지 7년만이군, 그녀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걸 보며 회상했다. 자존심이 구겨지는 수치와 가슴이 미어지는 상심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맹세하며 이곳을 떠나야만 했던 이후로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마르벨라에 돌아와 있을 뿐 아니라 같은 호텔에 묵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를 찾아 절대로 발을 들어놓고 싶지 않은 곳으로 가야만 했다. 카지노,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며 그녀는 침울하게 그 이름을 불러봤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아버지가 잃을 수 있는 손해에 대해 그녀가 너무도 잘 알고 잇는 가증스런 호텔 카지노. 아버지가 나가신 지 얼마나 됐지? 그녀는 1층을 누르며 생각해봤다 적어도 두시간은 됐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길 기다리며 검은 이브닝 백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 두시간 동안 아버지는 수천 파운드를 잃을 수 있었다. 밤새도록 놔두면 무일푼이 되고 말 것이다. 지난번처럼. 갑자기 속이 메슥거려 그녀는 엘리베이터 벽에 힘없이 기대섰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나무랄 데 없는 검정 색 야회복에 나비 넥타이를 맨 키가 큰 스페인계 남자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얼른 자세를 바로했다. 엘리베이터가 다시 내려가지 시작했다. 긴장된 자세로 벽에 붙어선 캐롤린은 남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잇는 것이 예리하게 의식됐지만 모르는 척했다. 캐롤린은 자연스런 금발에 긴 다리와 곡선미 잇는 날씬한 몸매를 갖추고 있지만 이런 시선은 그녀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게다가 그 낯선 남자는 굉장히 미남이었다. 그녀도 그 남자의 모습을 흘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남자와 얘기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남자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은 지 아주 오래됐다는 걸 씁쓸하게 자각했다. 사실, 이곳 마르벨라에서 루이스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안 돼. 그녀는 그때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기 전에 얼른 떨쳐버렸다. 루이스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 오기 전에 스스로에게 다짐한 약속이었다. 마르벨라가 그녀에게 주는 모든 쓰라린 기억들과 함께 루이스도 먼 과거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낯선 남자는 루이스와 너무도 외모가 비슷했기에 그녀는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애썼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추고 그의 강렬한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자 그녀는 안도했다. 그리고 남자에 대해선 완전히 잊어버리고 아버지를 찾기 위해 붐비는 로비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 호텔은 마르벨라의 푸에르토 바누스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수년 전 이 호텔은 특정한 부류의 - 한때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가 포함되었던 선택된 부류 - 손님들 취향에 맞게 고풍스런 위엄을 지닌 곳으로 정평이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새 주인에 의해 대대적인 공사를 마치고 다시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곳 휴양지에서 가장 고급스런 호텔 중 하나라는 옛 명성은 여전하지만 지금은 좀더 미묘한 격조를 지닌 별 다섯 개 짜리 특급 호텔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님들도 많이 달라져, 솔직히 터무니없는 숙박료를 감당할 수 있으니까 여기 머무는 것일 테지만, 전처럼 고급손님들로만 주류를 이루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지난 7년 동안 얼마나 많이 변했나 하는 걸 절실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7년 전에는 그녀 역시 어떤 호텔의 스위트룸 숙박료도 문제삼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최고로만 키워졌고, 그 최고에 따르는 엄청난 가격 또한 당연한 그녀의 생활이었다. 요즘 그녀는 가격을 문제삼지 않을 정도로 돈을 벌자면 얼마나 일을 해야 하는지를 계산하게 되었다. 사실 요즘 캐롤린은 돈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제는 애물단지가 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저택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감당하려면 얼마나 돈이 부족한지.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고 로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유난히 키가 크고 마른 체구의 아버지 모습을 찾아보았다. 2백 년 동안 뉴베리 가문은 하이브룩 영지에서 살아왔다. 뉴베리 가문이 그곳에서 계속 살 수 있는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지금 이 순간에 뭘 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확실히 안 계셔. 그녀는 결론을 내리고 긴장된 마음을 품위 있게 감춘 채 아버지가 호텔 접수 대에 혹시 메모를 남기지 않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 로비를 가로질러 갔다. 그런 것은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누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신 게 아닐까 싶어 호텔 라운지의 바로 갔다. 그곳에서도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한 군데 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은 더욱 느리고 둔탁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호텔 지하로 이어진 계단으로 침울하게 발을 내딛었다. 그 계단을 내려가는데 7년 전과 똑같은 용기가 필요했다. 맨 아래 계단에 이르자 그녀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언뜻 보기에 실내장식만 제외하곤 거의 변한 게 없는 것 같아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하엔 여전히 왼쪽으로 현대적인 휴게실과 완벽한 시설을 갖춘 채 체육관과 미용실, 실내 수영장을 알리는 표시가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늘 그랬던 것처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순진한 시선들이 못 보게 하기 위함인 듯 굳게 닫혀 있는 두 짝의 문이 있었다. 하지만 문 위에 걸린 표지판은 순진하지 않았다. 금색 글씨로 <카지노>라고 쓰여 있었다. 아버지가 즐겨 찾는 오랜 놀이터지, 그녀는 가볍게 몸을 떨며 생각했다. 흥분과 절망이 공존하는 곳, 굴러가는 주사위와 회전 기계, 돌아가는 카드가 부자로 만들어 주기도 하고 파멸시키기도 하는 곳이었다. 아버지가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이기지 못하고 흥분을 추구하기로 했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저 가증스러운 문 뒤에서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떼어 천천히 걸어갔다. "실망하실 겁니다" 차분한 목소리가 느릿하게 들려왔다. 깜짝 놀라 뒤돌아본 캐롤린은 아까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던 낯선 남자를 발견했다. 큰 키에 잘생긴 남자를.... 그녀는 다시 좋지 않은 느낌이 들자 속이 울렁거렸다. 그 남자는 정말이지 기분 나쁠 정도로 루이스와 닮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체격에 비슷한 나이로 보였고, 게다가 짙은 피부색의 스페인 계 남자라는 것까지 똑같았다. "뭐라고 하셨죠?" 루이스와 처음 만났던 곳도 바로 이곳 지하 휴게실로 그녀는 지금처럼 불안한 상태였고 그는 저렇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카지노 말입니다" 검은머리의 그가 닫힌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10시에 문을 열죠. 좀 일찍 오신 것 같습니다" 지극히 본능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봤고 9시 15분밖에 안됐음을 확인했다. 그녀는 안도감에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믿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화를 냈다는 것에 대해, 최악의 상황을 생각했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라운지 바에 가서 포도주나 한 잔 같이 들자고 해야 할 것 같군요. 카지노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낯선 남자가 제의했다. 캐롤린은 그가 자신의 미소를 오해했으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조심스럽게 피했던 우연한 만남이 다시 찾아온 걸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 "고맙습니다만 동행이 있어서요" 그녀는 뻣뻣하게 대꾸한 뒤 계단을 향해 곧장 돌아섰다. "당신 아버지가 에드워드 뉴베리 경이시죠?" 그가 가볍게 묻자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아버지를 아세요?" 그녀가 경계하며 물었다. "만나 뵌 적이 있죠" 그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그는 그녀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사실을 비웃고 있는 듯 했다. 아니면 그녀의 아버지를 비웃던가. "조금 전에 뵈었죠" 그가 덧붙였다. "몇 분전에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시더군요. 무척 급해 보이시던데...." 느긋하게 비웃는 미소가 다시 떠오르자 그녀는 몹시 불쾌해졌다. "고맙습니다, 알려주셔서...." 그녀는 예의바르게 인사하고는 다시 돌아섰다. 순간 그녀의 팔목을 남자의 손이 붙들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급할 것 없잖 습니까" 그가 중얼거렸다. "당신에 대해 좀더 알고 싶은데...." 그의 목소리는 아주 유쾌했지만 그녀의 팔목을 잡은 그의 손길은 강제적이었다. 만약 그 손을 떨치려고 하면 더 아프게 조여올 것 같은 섬뜩한 예감이 들자 그녀의 머리 속에서 경계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남자가 맘에 들지 않았다. 잘생기고 부드러운 외모, 여유 있는 자신감, 물리적인 힘을 행사해 그녀를 붙잡아두고 있는 느긋한 매력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살이 닿은 그의 감촉이 싫었고,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자신을 미행하고 인적이 드문 곳을 노려 접근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 더욱 싫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 약해지는 이런 불쾌한 감정이 싫었다. "놔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가 손에 더 힘을 가했다. 그녀는 맥박이 빠르게 띠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내드리며 제가 어떻게 당신 아버지를 알게 됐는지 모르실 텐 데요" 그가 지적했다. "사실 제가 어디서 당신 아버지를 알게 됐는지가 더 중요하지만...." "어디서죠?" 일부러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물었다. "저와 포도주 한잔 같이 하시죠" 그가 채근했다. "그럼 가르쳐드릴 테니" 순간 화가 발끈 났다. 그녀가 이런 위압에 무방비 상태라고 믿고 있다면 그가 단단히 오해한 것이기에! "제 생각엔" 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과의 만남이 기억할 만한 것이었다면 아버지가 직접 말씀해주시리라 생각되는데요. 그럼, 실례해도 될까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힘껏 팔을 잡아 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등을 꼿꼿이 세운 채 계단을 올라갔다. 하지만 가슴은 마구 떨리고 그가 어쩌면 뒤따라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계단을 올라가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때까지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남자는 보이지 않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그제서 야 그녀는 안도했다. 팔목이 아팠다. 내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여린 흰 피부 주위가 퍼렇게 변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누구지? 그녀는 궁금했다.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걸며 다가와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아버지와 무슨 관계가 정말 있는 것일까? 근심스런 얼굴로 방에 돌아온 그녀는 알아내야겠다는 완강한 생각에 곧장 아버지의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날카롭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어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이내 아버지가 방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나간 걸 알 수 있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아버지의 옷가지들이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녀를 피하기 위해? 오, 그래. 캐롤린은 침울하게 그런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는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한가지밖에 없었다. 다시 탈선하신 것이다. 화도 나서 좌절감에 아버지가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을 집어들어 침대 위로 내팽개치려는데 주머니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종이쪽지 같은 것이 떨어졌고 주워보니 영수증이었다. 그녀는 두려워서 떨리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펴봤다. 그녀는 한참동안 움직이지도, 숨을 쉬지도,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마음속과는 달리 차분하고 숙달된 솜씨로 아버지가 마르벨라로 가져온 옷마다 주머니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10분 뒤, 그녀는 돌로 변한 사람처럼 허공을 응시하며 멍하니 있었다. 이곳 마르벨라에 온지 24시간도 되지 않아 영수증에 적힌 금액에 의하면 아버지는 도박으로 십만 파운드를 잃은 것이다. 루이스 바스케스는 최첨단 통제실 창가에 서서 호텔 카지노 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호텔은 그가 가지고 있는 고급 호텔들 중 가장 최근에 취득한 것이었다. 아래 카지노 장에선 그를 볼 수 없었다. 안에서는 밖이 보여도 밖에서는 볼 수 없는 창문이었다. 이곳에서는 보안 직원들이 매서운 눈초리로 폐쇄 회로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카지노 장을 감시하고 있었다. 창문은 단지 카지노 장 전체를 관망하는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했다. 루이스는 카지노 장을 이렇게 직접 자기 눈으로 확인하는 걸 좋아했다. 한때 진짜 도박꾼이었던 그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믿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는 먹고살기 위해 도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지금 부유하고 권력도 가졌으며 만족스런 자존심도 지녔다. 그의 새카맣고 부드러운 양 눈썹 사이에 주름이 생겼다. 스스로를 존중한다고 자동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존경까지 받는 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힘들게 배운 유익한 교훈이었고, 이제 곧 수정할 교훈이었다. 이 호텔의 보안 책임자인 비토 마르티네스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여자가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노인네는 방금 카지노 장에 도착했고요" "긴장해 있던가?" 루이스가 물었다. "예" 비토가 대답했다. "눈에 띌 정도로 터지기 직전이더군요" 냉철하게 판단하는 습관이 몸에 밴 뉴욕 부랑아 출신다운 표현이었다. 알았다고 고개를 한번 끄덕한 뒤 루이스 바스케스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창가에서 돌아섰다. "노인네가 시작하면 알려주게" 그 말뿐이었다. 그리고는 가늘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통제실을 걸어나가 크림색과 검은 색의 멋진 대리석이 깔린, 보안이 철저한 밀실을 지나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가서는 문을 닫았다. 갑자기 침묵이 엄습했다. 통제실이 분주한 활동으로 생기가 있었다면, 이 방은 넓은 공간을 덮고 잇는 두꺼운 크림색 융단 위로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검은 옻칠과 가죽으로 된 현대적인 고급 가구들이 단순한 크림색 벽을 돋보이게 해주는 간소하면서도 극적인 분위기가 나는 방이었다. 그 자신처럼 이 방에서도 그의 진짜 성격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벽에 걸린 검은 액자 속의 그림만 빼곤. 전문적으로 볼 때 그 그림은 이 방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처럼 지극히 단순했다. 치명적으로 보이는 꼬리를 몸 위로 구부려 공격자세를 취하고 있는 전갈을 흰 바탕에 희미한 금색 윤곽선으로 그린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보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끼치는 그림이었다. 루이스 바스케스의 의자가 치명적인 꼬리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지만 전갈이 위협을 가하고 있는 인물은 그가 아니라 맞은 편에 놓인 의자에 앉게 되는 사람이었기에. 의미는 분명했다. 나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것은 그의 신조 같은 것이었고, 금색 전갈은 그의 로고 같은 것이었다. 예전엔 루이스 바스케스와 관련된 모든 것에 금색 전갈이 장식되었다. 그 후로 그는 훨씬 더 미묘한 인물이 되었다. 지금은 이 그림을 개인적인 이유로 걸어두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개인 전용공간에 불려오는 이에게 차분하고 부드럽게 마하는 루이스 바스케스가 여전히 꼬리에 독침을 갖고 있다는 걸 경고하는 의미로. 하지만 요즘 그는 새로운 로고로 더 알려져 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고급 호텔들과 지난 10년 동안 고품질의 서비스와 안락하다는 평판이 그의 새로운 로고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엔젤 호텔이니까. 선과 정직과 진실의 엔젤. 그리고 그의 모든 호텔에서는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카지노가 있기 때문에 훌륭한 마케팅의 위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유층 손님들이 게임을 하면서 즐기는 향락은 부가된 보너스에 불과했다. 전갈은 실제의 루이스 바스케스를 묘사해 주는 것보다 더 솔직한 상징일지도 모른다. 루이스는 바로 그 전갈 아래 푹신한 회전의자에 앉아 열쇠로 맨 위 책장 서랍을 열었다. 모든 것을 깔끔하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그의 비범한 자제력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는 서랍 안에 든 유일한 물건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가죽으로 장정된 서류철로 비싸 보이긴 해도 특별히 불길한 징조는 엿보이지 않았다. 그는 즉시 펼쳐보지 않았다. 대신 의자에 기대어 깔끔하게 다듬어진 손톱으로 생각 없이 책상을 두드리며 가볍게 의자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엔 평소처럼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민하고 빈틈없는 머리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여느 때처럼 검은 속눈썹 밑에 감춰져 알 길이 없었다. 아름다운 눈이었다.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잘생긴 얼굴.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짙은 갈색 눈. 미국에서 자라긴 했지만 완전 스페인 계 태생인 그는 확실히 따뜻한 금색 피부에 스페인 사람 특유의 이마와 높은 광대뼈와 코, 깎아 놓은 듯 단단한 턱 선과 희미한 윤곽의 멋진 입술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냉정한 투사의 얼굴이었다. 인정 없기로 소문난 남자의 얼굴, 어떤 압력을 받더라도 기민한 두뇌에 산소를 공급하는 데 필요한 차분하고 일정한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운동선수의 심장을 가진 남자의 얼굴이었다. 돌연 동작을 멈춘 손가락이 책상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 부드러운 가죽 위에 놓이더니 서류철을 열어 안에 쌓인 두꺼운 종이 다발을 드러냈다. 수년 전 연습을 통해 익힌 유연한 손놀림으로 그는 종이들을 뒤져 원하는 것을 찾았다. 그는 철에서 그걸 빼내 제일 위에 올려놓고는 꼼짝 않고 앉아 6,7센티미터 크기의 칼라 사진을 타오르는 눈빛으로 빤히 응시했다. 캐롤린은 의심할 여지없이 무척 아름다웠다.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33년 동안 세상을 겪은 루이스 바스케스 조차도 아직 본 적이 없는 잘 익은 밀 빛의 머리가 아주 섬세하고 완벽한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녀는 영국 백장미처럼 티 없이 흰 살결과 자수정색의 눈을 지니고 있었다. 작고 곧은 코는 고전적인 선을 이루었고 섬세하고 여린 턱 선도 그러했다. 특히 루이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녀의 입술이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핑크빛의 도톰한 입술, 남자를 흥분시키는 입술이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입술이지. 루이스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수도 없이 경험해본 입술이기에,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경험하게 될 것이고. 타오르던 눈빛이 알 수 없는 냉정한 눈빛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가히 인상적이었다. 참을 성, 그는 마음먹은 것이 있을 때 끝없이 견딜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 다음 목표는 캐롤린 이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캐롤린은 이미 자신의 것임을 확신했다. 그는 두툼한 나머지 서류들을 읽어보았다. 대부분의 청구서였다. 최후통첩, 은행 담보물을 찾을 수 있는 권리가 상실되었음을 알리는 경고문, 재산 저당권 증서,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불길한 미지급된 도박 빛의 긴 명단이었다. 그는 한 장씩 읽어보며 사진같이 정밀한 자신의 기억 속에 세세한 내용을 입력시켰다. 그때 책상 위에 인터폰에 불이 들어왔다. 그는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단추를 눌렀다. "왜?" "여자가 내려가고 있습니다" 비토 마르티네스가 그에게 알렸다. "노인네는 큰돈을 걸고 내기를 하고 있고요" "알았네" 그 말을 끝으로 방안이 다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앞에 놓인 서류로 시선을 돌린 그는 그것들을 모두 솜씨 좋게 다시 간추려 서류철 속에 끼워 서랍 속에 넣고 잠근 뒤 유연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책상을 돌아 성큼성큼 방을 걸어나갔다. 통제실로 들어가니 비토 마르티네스가 아직도 창가에 서 있었다. 루이스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비토가 고갯짓으로 가리키는 롤렛 테이블 쪽을 내려다보았다. 그 나이치고는 큰 키에 마르고 아주 잘생긴, 그리고 평소처럼 나무랄 데 없는 옷차림의 에드워드 뉴베리 경이 큰돈이 걸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병적으로 흥분한 사람 같았다. 루이스는 그 표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예의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에드워드 경은 너무 지나칠 정도로 저 악마에게 빠져 있었고, 영혼을 팔 준비까지 돼 있었다. 비토가 말한 대로 터지기 작전이었다. 루이스는 그런 장면에 놀라지도 않고 여느 때처럼 정확한 타이밍으로 에드워드 경에게서 캐롤린이 막 들어서고 있는 카지노 입구 쪽으로 냉혹한 눈길을 돌렸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후로 7년만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아름다운 눈과 머리, 멋진 피부, 여린 윗입술과 감미롭고 보드라운 아랫입술, 절묘하게 디자인된 검은 드레스 선을 따라 완벽하게 드러난 길고 마른 몸매까지도 탄력 있는 젊음을 조금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녀만이 달아오르게 할 수 있는 열기로 그의 아랫도리가 불끈거리면서 단단해 졌다. "나의 약점" 그는 그런 흥분감을 이렇게 덧붙였다. 기품과 교양의 초상인 저 여인에게서 금단의 것을 소유하려는 스페인 사생아의 욕망이었다. 그녀의 이름마저도 특별했다. 캐롤린 오로라 셀러다인 뉴베리. 루이스는 조용히 혀끝으로 그 이름을 음미해 보았다. 그녀는 역사책처럼 잘 알려진 계보를 지닌 집안 출신으로 엘리트들만을 위해 마련된 교육을 받고 왕도 부러워할 만한 대저택에서 살았다. 귀족의 권리는 마치 뉴베리 집안 사람들에게만 부여하는 자격 증명서 같았다고 루이스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그들에게 인정을 받자면 어쨌든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곤경의 처한 형편에도 그들이 상대를 가늠하는 척도는 상류사회의 교양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버지를 찾아 카지노늘 불안하게 헤매고 다니는 캐롤린의 창백한 얼굴을 지켜봤다. 그녀는 긴장해 있고 주위 환경에 몹시 불편해 보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이런 곳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롤렛 판이 돌아가기 시작할 때 에드워드 경을 찾았다. 루이스는 그녀의 몸이 굳어지더니 사랑스런 얼굴이 팽팽하게 긴장되고, 작고 흰 치아로 아름다운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앞으로 걸어가는 것을 계속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버지 뒤로 두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 멈춰 서더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평평한 배에 손가락을 깍지끼고 있었다. 정말이지 캐롤린은 지금 심정대로라면 아버지의 목덜미를 잡고 거기서 끌어내고 싶을 것이다. 그녀를 저지한 것은 교양이었다. 루이스도 알고 있었다. 상류사회 관례상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상황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이미 경제적으로 어렵고 아버지가 하고 있는 일이 아주 한심스런 짓이라는 걸 알고 있다하더라도. 검은색 짝수. 그들이 어제 오후 늦게 마르벨라의 이 호텔에 도착한 이래 계속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에드워드 경은 돈을 잃었다. 노인네가 짜증스런 몸짓을 하자 캐롤린은 눈에 띄게 풀죽어 있는 모습이었다. "아빠....." 정신을 차리도록 아버지의 턱시도 소매에 한 손을 얹을 때 조심스러워하는 그녀의 태도를 루이스는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지. 루이스는 판단했다. 노인네는 도박이라는 열병으로 반 미쳐 있었다. 일단 걸리면 치료 방법이 없었다. 에드워드 경은 돈을 다 잃고 그보다 더한 걸 잃는다 해도 지금은 그만둘 수 없었다. 루이스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보다 더한 것>이었다. 처음엔 깜짝 놀랐다가 이내 죄스러운 눈길로 어깨 너머의 딸을 바라보던 에드워드 뉴베리 경은 성난 표정으로 바뀌면서 쌀쌀맞게 뭐라고 하고는 테이블에 다시 칩을 쌓기 위해 딸의 손길을 떨쳤다. 캐롤린은 그 자리에 서서 공이 검은 색에 안착하느냐 빨간색에 안착하느냐에 따라 오천 파운드가 왔다 갔다 하는 걸 지켜볼 뿐이었다. 검은색. 에드워드 경이 또 잃었다. 다시 한번 캐롤린은 아버지를 저지하려 했다. 그리고 또 다시 그녀의 간청은 짜증스럽게 거부당했다. 이번엔 그 사랑스런 눈에 눈물이 맺히자 루이스의 손이 불끈 쥐어졌다. 그 눈은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는 듯 사람들로 붐 비는 카지노 장을 절망적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예고도 없이 그녀가 돌연 통제실을 올려다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아주 정확히 그녀의 눈빛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그는 숨이 멎는 듯했다. 비토 역시 그랬다. "이런" 그가 숨죽인 소리를 토했다. 루이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유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눈물이 글썽한 그 아름답고 맑은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는 순간적으로 망연해져 온몸이 가늘게 떨리면서 살이 따끔거렸다. 그리고 목이 잠기고 가슴이 죄였다. 완전히 절망했음을 보여주듯.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이 파르르 떨리자 그는 돌연 전신에 미세한 전기가 흐르는 듯했다. 저 입술, 저 조그맣고 도톰하고 감각적인 입술.... "이번엔 노인네가 이겼네요" 비토가 그의 곁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루이스는 에드워드 뉴베리 경이 의기양양하게 주먹을 들어 보이는 걸 봤다. 그리곤 이내 시선이 이기는 것은 지는 것만큼이나 좋지 않은 일이라는 듯 멍하게 지켜보고만 있는 캐롤린에게로 고정되었다. 그가 불쑥 돌아서서 비토에게 말했다. "내려가 보겠네. 그리고 여기를 떠날 때 차질 없게 준비하는 것 잊지 말게" 목소리나 몸짓에서 지금 겪고 있는 터질 듯한 쓰라린 기분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그 자리를 성큼성큼 떠났다. "좋았어!" 조용히 탄성을 지르며 에드워드 경은 돌아서서 딸을 품에 안았다. "내리 두 번을 이겼어! 연승을 했단다. 얘야! 이런 식으로 두 번만 더 이기면 희망이 보이겠어!" 아버지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흥분한 눈빛이 섬뜩할 정도였다. "제발, 아빠" 캐롤린이 간청했다. "이기고 있을 때 그만두세요. 이건....." 미친 짓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지만 아버지가 퉁명스럽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흥을 깨는 소리 마라, 캐롤린. 우리에게 운이 따르는 밤이야. 그걸 모르겠니?" 그는 그녀 쪽으로 돌아섰다. "그대로 둬요" 그가 지시했고 캐롤린은 아버지가 딴 모든 것이 즉시 무책임한 롤렛 한판에 걸리는 것을 절망적으로 보고 있어야 만 했다. 사람들이 테이블 주위로 차츰 모여들었고 판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들뜬 그들의 웅성거림이 조용히 잦아들었다. 캐롤린은 숨을 죽인 채 혀로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 작은 상아 공이 감질나게 운명을 갖고 노는 걸 지켜봤다. 그녀는 속으로 화가 났다. 격분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이 보는 곳에선 소란을 피우지 말라는 교육을 받아왔다. 진실한 약속들은 이것으로 끝이야. 그녀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서서히 속도가 줄어드는 판을 바라보며 그렇게 비웃었다. 아버지의 말을 믿는 다는 것은 재난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이제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며 이런 싸움을 하는데 그녀는 이제 지쳤다. 그리고 이번엔 아버지를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무서운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녀는 가장 지독한 악몽 속에 갇혀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곳, 이 호텔, 이 가증스런 카지노. 이제 그녀 앞에 루이스 바스케스만 나타나면 이 악몽은 완벽해졌다. 번개를 맞은 사람처럼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누군가 그녀 뒤로 바싹 다가와 희미하긴 하지만 목덜미에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온 신경을 작은 공이 검은색과 빨간색 칸칸 사이를 어지럽게 튀면서 율동적인 달가닥 소리를 내는 롤렛 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자 긴장감과 사실상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가슴 뛰는 기대감이 거역할 수 없는 독약처럼 그녀의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좋았어!" 아버지가 무모한 판돈을 두 배로 따면서 지른 의기양양한 소리가 수백 개의 심벌즈가 부딪치는 소리처럼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모여든 사람들은 아버지와 함께 그의 행운을 즐겼지만 캐롤린은 시들어 가는 꽃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몸 안 깊숙이 어디에선가 버둥거리고 있었다.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움을 느낀 그녀가 약간 휘청거렸다. 그때 팔 하나가 그녀의 허리를 감고 부축해 주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뒤에 서 있는 단단한 몸에 기대게 하는데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을 만큼 무력했다. 올 것이 온 거야. 그녀는 멍하게 생각했다. 이젠 아무것도 아버지를 막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번 것을 , 아니 그 이상을 다 잃을 때까지 아버지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돈을 따고 있다는 사실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돈을 땄다는 것은 운이 따른다는 얘기였고 그러니 그 운이 다할 때까지, 그리고 운이 다시 따를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온몸이 미세하게 떨렸고, 그 바람에 문득 자신이 낯선 사람에게 기대고 있다는 걸 깨 닫았다. 돌연 등이 뻣뻣해진 그녀는 간신히 돌아서 냉정하고 예의바르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맙습니다만....." 말이 뚝 끊기고 갑자기 숨이 멈추면서 그녀는 자신을 완전한 악몽의 세계로 가둬놓은 너무도 낯익은 새까만 눈을 빤히 쳐다봤다. "잘 있었소, 캐롤린" 루이스가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2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이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루이스...." 너무 무감각해서 움직이지 않는 입술 사이로 그렇게 속삭이는 동안에도 아니야, 그녀의 마음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환상을 보고 있었다. 가장 두려워하던... 이곳과 아버지의 미친 짓이 그렇게 만들은 것이다. "아니야" 부정의 말이 급기야는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맞소" 쓴웃음이 담긴 느릿한 말투로 그가 대답했다. 멍한 충격이 빠져나간 자리를 어지럽고 고통스런 당혹 감이 대신하면서 방안이 끝에서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놓아줘요" 일단 둘 사이에 거리를 둔 뒤, 이 사태를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순간 그녀는 당장에 응하는 그의 고분고분함과 똑같은 욕구를 했을 때 지하에서 만났던 낯선 남자가 보였던 철저한 무시를 비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당신 아버지에게 운이 따르는 것 같군" 그녀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시선을 던지며 그가 말했다. "그런가요?" 몹시 회의적인 응수에 그의 검은 눈이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그러나 캐롤린은 더 이상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고통스러웠다. 루이스는 그녀가 경멸하는 모든 것을 상징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도박, 강박관념, 책동, 사기, 배신. 갑자기 그녀를 집어삼킬 듯한 괴로움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그를 등지고 돌아섰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그녀를 밀치며 아버지를 축하해주기 위해 몰려들었다. 루이스는 팔을 뻗어 밀치며 달려드는 사람들에게서 밀착하게 된 캐롤린은 이 남자를 의지하지 않으려고 꼼짝 않고 있어야 했다. 그녀는 가슴이 마구 뛰고 호흡이 점점 빨라졌다. 머리 속으로 지난 기억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한때 연인이었다. 그들의 몸은 서로를 친밀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갇힌 채 이렇게 서 있는 것은 그녀에게 운명이 부과할 수 있는 최악의 벌이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그녀가 빈정거리며 물었다. "아직도 내기를 해서 먹고사나요, 루이스? 프로 도박꾼이 있다는 걸 알면 이곳 경영자 측에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요" 그의 검은 눈이 가늘어졌다. 위험에 처한 고양이가 털을 곤두세우듯이. "혹시 그건 당신 식의 은근한 협박이오?" 그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가? 경영자 측에 은밀히 한 마디만 해주면 아주 조용하면서도 확실하게 루이스를 이곳에서 쫓아낼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캐롤린은 그렇게 자문해 보았다. 하지만.... "그냥 생각해봤어요" 그녀의 아버지도 다를 게 없으니 루이스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닫고 그녀가 한숨 섞인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 생각에 대한 내 대답은 <아니오>요" 그가 말했다. "난 여기 도박을 하러 온 게 아니오" 하지만 캐롤린은 듣고 있지 않았다. 불현듯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루이스..." 그녀가 절박하게 속삭였다. "만약 이곳 경영자 측에 아버지에 대해 은밀히 말해주면 더 이상 아버지가 내기를 하지 못하게 막아줄까요?" "그들이 왜 그러겠 소?" 그의 입술이 비웃듯이 올라갔다. "당신 아버진 프로가 아니라 강박관념에 휩싸인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파멸로 이끄는 강박관념이죠" 캐롤린이 몸서리를 치며 덧붙였다. 그녀의 등에 놓인 손이 부드럽게 그녀를 위로했다. "난 너무 싫어요" 그냥 여기를 빠져나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나지막히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고 어떻게든 아버지가 완전히 두 사람을 파멸시키기 전에 이 미친 짓을 막아보도록 노력해야 했다. "내가 그만두게 해볼까?" 루이스가 제안했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럴 수 있겠어요?" 그녀가 초조하게 속삭였다. 대답 대신 루이스는 축하 인파 속에서 빠져나오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말을 건넸다. "에드워드 경" 그뿐이었다. 언성을 높이지도, 도전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냥 조용히 두 마디를 던진 것뿐이었다. 하지만 한창 고조된 흥분을 잠시 중단시킬 만큼 충분히 강력했다. 아버지가 돌아서는 게 느껴지자 캐롤린은 목덜미의 미세한 털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루이스가 자기 몸에 바싹 기대게 해서 아버지를 볼 수는 없었지만 이어지는 긴장된 긴 침묵 속에서 그녀는 아버지가 받은 충격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애써 느릿하게 말했다. "아니, 이거 루이스 아닌가? 뜻밖이 구만" 말속에 교묘히 배어 있는 빈정거림과 생색이 딸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7년 만에 이곳에서 다시 뵙는군요.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운명인가 보군" 그녀의 아버지가 냉담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밤엔 운이 따르시는 것 같습니다. 카지노 측을 빈털터리로 만드셨죠?" "아직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것 같네" 그녀의 아버지는 갑자기 말투가 달라졌다. 활기에 넘쳤다. 순간 캐롤린은 아버지의 눈에서 비칠 탐욕스런 광채를 직접보기 위해 루이스 품안에서 돌아섰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는 아버지의 시무룩한 표정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늘밤 그녀를 얼마나 실망시키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무시하려고 했다. 그런 모습에 그녀는 모든 걸 단념해 버리고 싶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따신 것 같습니까?" 루이스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에드워드 경은 자신이 딴 칩을 보지도 않았다. "딴 액수를 세면 재수가 없지,루이스. 자네도 알 잖나"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 질문을 일축했다. "정말 운이 따른다고 생각되시면 저와 개인적으로 내기를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따신 걸 모두 다음 판에 걸어보시죠" 루이스가 제안했다. 아니, 도전이었다. "경께서 이기시면 제가 그 두 배를 드리고 그걸로 저와 포커를 하는 겁니다. 모험을 건 도박을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어이없다는 듯 숨을 헉 몰아쉬는 캐롤린을 모른 체하며 그가 부추겼다. 호기심에 찬 관중들이 갑자기 술렁거리고, 캐롤린은 오싹해졌다. 루이스는 이것이 아버지를 막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나? 그녀는 평생 이렇게 심한 배신감은 처음이었다. 7년 전 루이스가 그녀의 믿음을 저버렸던 일까지. "안 돼요" 루이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아버지에게 눈으로 애원하며 그녀가 속삭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더 이상 그녀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도 이미 아버지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운이 따르는 오늘 하룻밤만에 자신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못할 것도 없지?" 도전을 받아들인 아버지는 낙담한 딸이 노려보자 돌아서서 기다리고 있는 딜러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냉담하게 지시했다. "전부 걸겠소" 그러자 판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캐롤린은 뒤에서 루이스가 이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 앞에서는 두 사람의 인생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음에도 겉으로는 침착하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그리고 주위엔 마치 카지노 장 전체가 숨을 죽이고 정지한 것처럼 사람들이 이번 판이 어떻게 풀릴지 지켜보고 있었다. 에드워드 경이 네 번씩이나 같은 색깔로 내기에서이길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캐롤린도 물론 믿지 않았다. "절대로 이번 일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루이스에게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을 떨쳤다. 그는 그녀 바로 뒤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둘은 다른 사람들처럼 판이 더디게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가증스런 공이 칸칸 사이를 통통 튀어 다니는 걸 지켜봤다. 최악의 고문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마르벨라가 그들에게 미칠 악영향을 누누이 경고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방법이 없잖니!" 자포자기 상태에서 그 말만하실 뿐이었다. "우리 빚을 모두 사들인 금융회사가 마르벨라에 있단 말이다. 우리하고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자는데 어쩌겠니. 거기 가봐야 한다 캐롤린" "아버지 도박 빚도 말이죠?" 그녀는 아버지에게 맹렬히 공격을 가했다. "그들이 거기에도 탐욕스런 손길을 뻗친 건가요" 아버지는 죄책감에 얼굴을 붉히고는 자신의 부족한 점이 도마에 오를 때는 늘 그렇듯이 그녀에게 오히려 역정을 냈다. "이 사태를 해결할 마음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아버지는 거칠게 반격했다. 그녀는 그럴 마음이 있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 어리석은 롤렛 판에 거는 방법은 아니었다. 천천히 계속 돌아가는 판을 보고 있자니 다시 현기증이 나고 머리 속에서 피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판이 멈췄다.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긴장감 도는 숨막힌 몇 초 동안 아무도 그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이긴 것 같군" 에드워드 경이 아주 침착하게 말하기 전까진. 캐롤린은 말없이 돌아서서 혼잡한 곳을 뒤로 한 채 그 자리를 떠났다. 아버지가 얼마를 따신 거지? 그녀는 몰랐다. 언제 루이스와 게임을 하실까? 상관없었다. 이제 이 괴로운 일은 다 끝이 났다. 그녀는 충분히. 아니 그 이상을 겪었고 다시는 이런 곳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에 온 자신이 정말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아버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어야했다. 카지노장의 문이 그녀 뒤로 휭 닫혔다. 눈을 빛내고 입은 굳게 다물고 몸은 긴장으로 꼿꼿이 세운 채 방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그녀는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방으로 돌아가 파멸을 향해 치닫는 아버지의 다음 여정을 기다리며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모든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충동적으로 지하 휴게실을 가로질러 카지노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밤늦은 시간이라 닫혀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수영장 문은 열려있었고 최소한의 조명만 제외하고 불이 꺼져 있긴 해도 수영장 안은 불빛이 비쳐 유리 표면처럼 매끄러운 서늘한 푸른 물이 보였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캐롤린은 무작정 신발을 벗고 드레스의 지퍼를 내리고 옷을 벗어 가까운 의자등받이에 걸쳐놓고는 물 속으로 그냥 뛰어 들었다. 브래지어와 팬티는 물론, 심지어 검은 스타킹까지도 벗지도 않고 마치 메달을 따려는 사람처럼 수영장을 힘차게 오갔다. 네 바퀴 째 돌고 있을 때 그녀는 드레스를 놓아둔 의자 옆에 루이스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싸늘히 그를 무시한 채 능숙하게 회전해 다시 반대편을 향해 나아갔다. 여섯 바퀴 째 돌 때도 그는 거기 앉아 있었고, 여덟 바퀴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 열 바퀴 째에 그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숨을 쉬기 위해 멈춰야 했다. 그녀는 타일 가장자리에 팔을 올리고 헐떡이는 숨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러니까 좀 낫소?"루이스가 침착하게 물었다. "아뇨"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마침내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당신은 훔쳐보니까 좀 나아요?" "당신은 보통 여자들이 수영장에서 입는 것보다 더 많이 입고 있소" 그가 별 생각 없이 지적했다. "하지만 신사라면 그 차이를 알아채는 순간 자리를 떠야한다는 예의 정도는 알죠" "우리 둘 다 내가 신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소" 그가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걸 인정하도록 내가 눈치를 줬던가? 캐롤린은 자신에게 물어봤다. 그래, 그녀는 시인했다. 루이스가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게 만드니 기분이 좋았다. "우리 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아마 오늘 딴 걸 계산하고 계실 거요"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이 전혀 관심 없다는 투였다. "거기서 나올 거요?" 그가 물었다. "아니면 나도 옷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거요?" "나갈 거예요" 그녀는 그의 제안이 허세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즉시 대답했다. 이 남자의 위험한 기질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그가 망설이지 않고 옷을 다 벗고 물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루이스 바스케스의 알몸을 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녀가 계단까지 잠수해 가서 몸을 일으켰을 때 루이스는 수영장 가장자리에 서서 큰 수건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수건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캐롤린으로 선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그녀는 계단을 올라가서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예의바르게 중얼거리며 조용히 수건을 받아들었다. 그가 그녀의 감정을 눈치챘다. "이번 사태에 대해 무척 침착하군" 캐롤린은 수건을 몸에 둘렀다. "당신을 증오하고 경멸해요. 됐어요?" 머리에서 물을 짜내기 위해 허리를 숙이며 그녀가 대들듯이 말했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작됐군. 머리를 말리게 수건을 더 갖다줄까?" 젖어 엉킨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던 그녀는 고개들 뒤로 젖혀 턱까지 오는 단발머리를 얼굴에서 떼 냈다. 수영을 해서 화장이 거의 지워져 버렸다. "당신에게선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요, 루이스" "아...." 그의 양손이 검은색 실크 야회복 바지 주머니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그녀는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 돌아섰다. 그녀는 의자에 걸어둔 드레스를 확인하고 그걸 집으로 걸어갔다. "내 방으로 가봐야 되겠어요" 그리고 탈의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잘 가요, 루이스" 그녀는 냉담하게 덧붙였다.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고 해야겠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 그만둘게요" "뭐 잊은 것 없소?" 그가 느긋하게 물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희미하게 반짝이는 푸른 물을 배경으로 어떤 여자라고 가슴을 조이게 만들 섹시한 모습으로 그녀가 떠나왔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캐롤린의 가슴도 약간 조였다. 그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그에게 쉽게 반응을 보이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당신 지갑과 신발" 그가 친절하게 가르쳐주자 그녀는 의자에 던져둔 지갑과 그 밑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구두를 보았다. 그 구두를 그가 손가락에 걸고 달랑거리며 그녀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입을 꾹 다물고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었지만 지갑을 집으려고 손을 내미는데 루이스가 그걸 자신의 크림색 턱시도 상의 주머니 속에 슬그머니 집어넣어 버렸다. "돌려줘요" 그녀가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느긋하게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말투가 그렇게 딱딱하다니, 학교 선생님을 해도 되겠소?" 그가 놀렸다.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그녀가 반격했다. "거의 학교를 다니 적도 없다면서" "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뻣뻣한 태도에 싸늘한 눈빛을 가진 여자들을 몇 명 알고 있거든" 그 말에 그녀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주립 시설이 떠올랐다. 그러자 그녀의 눈앞에 겨우 아홉 살 나이에 혼자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게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아버린 검은머리에 검은 눈의 외로운 스페인 계 꼬마가 보였다. 7년 전 길고 무더운 여름날 두 사람은 얼마나 많은 비밀들을 서로 털어놓았던가? 그리고 그가 한 말 중에 어느 정도나 진실이었을까? 그녀는 냉소적으로 계속 그런 의문들을 던졌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 약한 동정심을 얻기 위해 계산된 말은 얼마나 됐을 까. 조용히 계획적으로 녹색천이 덮인 테이블너머에서 아버지의 돈을 따면서. "그 찡그린 표정은 무슨 뜻이오?" 가까이에서 친근한 목소리로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녀는 살짝 자세를 바꾼 그가 문을 가로막고 서 있다는 걸 알았다. 분명한 저지 작전으로 캐롤린도 즉시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내 지갑 돌려줘요, 루이스" 그녀는 그의 질문은 무시한 채 손을 내밀며 재촉했다. 이번엔 그가 그녀의 요구와 내민 손을 모른 체 했다. "화를 내면 당신 눈동자가 회색으로 되는 거 알고 있소?" 그가 속삭였다. 그 말에 담긴 의미가 그녀를 들 쑤기 시작했다. 성적인 메시지였다. "내 지갑요" 그녀가 반복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입술은 아주 새침하게...." "그만해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유치해요!" "자극적이지...." 그가 응수했다. 그녀는 화가 났다는 표시로 한숨을 쉬었지만 결국 위험하게 들렸을 뿐이다. 게다가 내민 손이 떨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며 수건을 잡았다. "감기에 걸릴 것 같단 말이에요!" 그녀는 확실히 떨기 시작했다. 비록 그게 한기 때문인지 철저히 거부하려는 다른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원인이 뭐든 그런 모습은 느긋하게 놀리던 루이스의 태도를 바꿔놓았다. 그는 재빨리 양복 상의를 벗어서 그녀의 젖은 어깨에 둘러주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예의바른 행동이 그녀의 방어 벽을 허물어 놓았다. "아버지와 내기를 하지 말아요, 루이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며 쉰 목소리로 그녀가 간청했다. "이리 줘요" 그러면서 그가 그녀의 손에서 드레스와 구두를 가져갔다. "양복 상의를 제대로 입고 젖은 수건은 벗어요" 그의 말대로 따르니 절망감이 밀려왔다. 서늘하게 젖은 살에 실크 안감이 닿으니 따뜻했고, 갑자기 그의 체취가 엄습해 왔다. "난 당신이 도와주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잖아요!" "미친 짓은 미친 짓에만 반응하는 법이오"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오늘 밤 그분을 막을 수 잇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소. 한 시간 뒤에 호텔 밖에서 내기를 하기로 했소" 캐롤린은 두 손을 모아 그의 가슴에 대고 고통스럽게 호소했다. "제발 그러지 말아요!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을 다시 겪게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루이스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가슴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을 빤히 응시하고는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그의 손이 자신의 손을 덮자 그녀는 갑자기 뜨거운 살갗과 따끔거리는 남성의 체모, 단단히 뭉친 근육과 그 밑에서 줄기차게 뛰고 있는 심장박동을 민감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그가 열정에 사로잡혔을 때 걷잡을 수 없이 마구 뛰던 심장이었다. 그녀의 몸 위에서 움직이던 매끄러운 살결이었다. 그리고 그 곱슬곱슬한 두터운 가슴 털은 화살처럼 아래로 뻗어 내려가 곧장 그의... 그녀는 그와의 섹스를 생각하니 입안이 말랐다. 그녀의 감각을 일깨우는 뜨겁고 흥분되며 애를 태우는 아픔이었다. 그때 갑자기 그의 손이 양복 상의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고 수건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살과 살이 맞닿았다. 캐롤린은 숨을 헉 몰아쉬며 몸을 젖혔다. "안 돼요" 그녀는 이글거리는 그의 눈을 쳐다보며 신음했다. 루이스는 대답이 없었다. 이미 늦어버렸다. 그는 둘 사이의 간격을 좁히며 다가와 맹렬하고, 깊숙이, 그리고 연인처럼 아주 친밀하게 키스를 했다. 그녀는 그 멋진 입맞춤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가 보고 싶었어.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물이 고이는 걸 느꼈다. 서로에게 미치는 힘과 간단한 접촉만으로도 불붙는 열정이 그리웠어. 가장 소중한 소유물을 점자로 읽는 앞 못보는 여인처럼 그녀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맹렬히 하나하나 더듬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의 고동치는 쾌감의 실체를 느끼는 순간 정신이 아뜩해졌다. 그녀는 이게 미친 짓이라는 걸 알았지만 이 짧은 순간만큼은 루이스가 자신의 것이라는 걸 느끼고 싶었다. 그녀는 그를 소유했다. 그를 가졌다. 그녀가 만약 <날 위해 죽어줘요, 루이스>라고 말하면 그는 기꺼이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 또한 그를 위해 죽을 수 있었다. "루이스" 그녀는 그의 입술에 대고 속삭였다. 그 부드럽고 작은 소리가 그에겐 아주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낮게 신음 소리를 내며 그녀의 저항의지를 완전히 소멸시키고, 뜨겁고 굶주린 열기 속으로 그녀를 몰아넣었다. 저항할 의지라도 있었다면..... 그녀는 자신을 비웃었다. 도박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그렇듯이 루이스는 그녀의 약점이었다. 일단 빠져들면 평생동안 따라다녔다. 오랫동안 굶주렸다가 살짝 감질나게 한 모금만 맛을 봐도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그리고 분명 난 중독된 것을 맛보고 있는 거야. 키스 속으로 빠져들면서 굶주린 듯 절박하게 그를 음미하고, 만지고, 필요로 하고,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는 자신을 그녀는 인정했다.! 그녀는 애무하는 그의 손길도, 자신의 입술을 탐닉하는 그의 입술도 허락했다. 그의 숨결과 촉촉한 혀에서 민트향을 맛볼 수 있었고, 쉴새 없이 움직이는 손 밑으로 고동치는 그의 심장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가 둘 사이에 끼어 들었다. 젖가슴이 드러나고 루이스가 그걸 움켜잡을 때까지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아주 탐욕스런 향연을 즐겼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젖가슴을 찾아 안착하더니 핥고, 빨고, 살짝 깨물기 시작했다. 그녀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마냥 만족스럽게 우쭐해 있었다. 매끄러운 긴 다리를 들어 그의 가는 허리에 감고 그가 좀더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몸을 젖히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의 단단한 남성이 좀더 은밀하게 접근해 왔다. 그러자 그가 첫 남자였기에 그녀는 영혼 깊숙이 각인된 촉감과 느낌, 소리와 냄새 등으로 가득 찬 만화경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에게 느끼고 반응하고 갈구하도록 가르쳐준 남자였다! 그녀의 유일한 연인이었다. 루이스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그녀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유일한 남자이기에 그녀가 이렇게 열렬히, 무력하게 반응하고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다. 그리고 이 순간만큼은 그가 한때 그녀를 완전히 파멸시키고, 돌이킬 수 없는 지독한 배신감을 안겨줬다는 사실은 문제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도 문제되지 않았다. 도박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루이스가 다시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도 문제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완전히 빠져 수영장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아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루이스가 얼른 몸을 일으켜 그녀의 다리를 밀어 내리고 전율하고 있는 그녀를 자신의 고동치는 몸에 바싹 고정시킨 뒤 문을 조금 열었다. 그제서 야 그녀는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한 충격이 온몸으로 무섭게 엄습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지러운 머리로 생각했다. 7년 동안 전혀 연락이 없다가 마치 굶주린 한 쌍의 동물처럼 기회가 생기자마자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아주 지독히 부끄럽고 속된 행동이었기에 그녀는 루이스의 목덜미에 달아오른 얼굴을 묻고 부디 문을 두드린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들어본 적은 없지만 루이스처럼 미국 억양을 지닌 느릿한 남자 목소리였다. "모두 준비됐습니다. 30분 남았습니다" "알았네" 루이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한 뒤 얼른 문을 닫고는 단호하게 그녀를 떼어놓았다. 그녀는 사태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싸늘하게 굳은 그의 얼굴을 보자 좀 전까지 키스를 나누며 열정적으로 자제력을 잃었던 남자가 갑자기 돌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 준비요?" 그녀가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준비일 거라고 생각하오?" 그가 응수했다. 그녀는 아버지와의 내기를 말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방금 폭발적으로 분출했던 열정적인 일을 겪고도 그는 여전히 아버지와 내기를 할 생각이었다. "여기" 그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녀의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이걸 입어요. 이젠 몸이 다 말랐으니까. 같이 할 일이 있는데 이런 모습으로 나갈 순 없지" 이런 모습으로.... 흐리멍덩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본 캐롤린은 단단하게 팽창한 유두와 상기된 피부, 아직도 떨리고 있는 길고 하얀 허벅지를 봤다. 루이스의 양복 상의도 언제 떨어졌는지 발 밑에 있었다. 이렇게 알몸으로 그의 앞에 서 있자니 싸구려가 된 기분이었고 몹시 굴욕적이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민감한 자각을 냉담하게 외면한 채 넓은 어깨 위로 상의를 걸치고 있었다. 순수한 열정으로 타오르는 대신 그녀는 이제 낙담해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욕설이 목까지 치밀어 올라왔지만 억지로 힘겹게 삼킨 뒤에야 그녀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당신을 증오해요" 그녀가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바라는 만큼은 아닐 거요" 그가 대답했다. 그녀는 그 말에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지극히 사실이었기에.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타일 바닥에 떨어져 있는 브래지어가 보이자 그녀는 부끄러워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루이스가 얇은 실크 조각을 집어들어 자신의 옷주머니에 쑤셔넣더니 그녀를 돌려세워 드레스 지퍼를 올려주었다. 그녀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인형처럼 그가 구두를 신겨주는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그 사이를 흐르는 긴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마침내 준비됐다는 눈빛을 보내자 루이스는 문을 열고 그녀가 먼저 나가도록 했다. 위층 로비에 도착하자 뒤에서 루이스가 물었다. "어디 가는 거요?" 캐롤린은 멈춰 섰지만 뒤돌아보진 않았다. "우리 아버지를 다시 파멸시키고 싶다면 맘대로 해요" 그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을 막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당신을 내가 지켜볼 필요는 없죠" 그리고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오" 그가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로비를 지나 <개인전용>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문 쪽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고 검은 색과 크림색의 대리석 바닥을 또각 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루이스는 문을 열고 그녀 먼저 들어가게 한 뒤 조용히 문을 닫았다. 캐롤린이 보기엔 사무실이었다. 아주 기품 있는 검은색과 크림색으로 꾸며진 사무실이었다. "여기는 어디죠?" 그녀가 경계하며 물었다. 루이스는 그녀를 지나쳐 책상 쪽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내 사무실이오" 그리고 서랍 하나를 열쇠로 열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이 정말 여기서 일한다는 거예요?" "여기서 일하고, 여기서 살지" 그가 가죽 장정이 두툼한 서류철을 책상 위에 올려놨다. "여기는 내 호텔이오, 캐롤린" 3 그의 호텔? 캐롤린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여긴 엔젤호텔이잖아요. 엔젤그룹의 일부라고요!" 엔젤 그룹은 거대했다. 전 세계적으로 고급호텔들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국적으로 훨씬 더 강렬한 이해관계가 얽힌 다른 사업체들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머리를 들고 루이스는 그녀를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엔젤은 루이스 안젤레스 바스케스의 엔젤인 거야. 그녀는 문득 생각해냈다. 하지만 캐롤린을 서서히 새로운 당혹감 속으로 몰아넣은 것은 엔젤 그룹이 바로 뉴베리 가문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런던의 한 은행을 최근에 손에 넣은 그룹이기 때문이다. "오, 이럴 수가" 그녀는 마침내 모든 게 이해되기 시작하자 작게 소리를 질렀다. "빚 문제로 우리를 이곳 마르벨라로 불러들인 게 바로 당신이었군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뭇한 야윈 얼굴에 이미 그렇다고 쓰여 있는데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마음 속으로 그려왔던 루이스 바스케스에 대한 이미지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수만 파운드를 빼앗아간 사기꾼 루이스에 대한 이미지도. "원하는 게 뭐예요?" 그녀는 힘없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녀와 아버지가 끝없이 추락하는 동안 승승장구 성공한 냉혹한 경영자 루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 와서 앉아요" 그가 말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그리고 이제 여기 온 이유를 알았으니 곧바로 사업 얘기로 들어가는 게 좋겠소" 사업. 그 단어에 그녀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녀가 심하게 떨리는 다리로 책상 쪽으로 다가가는 동안 루이스는 그대로 앉아 서류철을 펼치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 맞은 편 의자에 앉는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거기 적힌 내용에 동의하는지 말해줘요" 그가 말했다. 초점을 맞추려고 눈을 깜박이며 캐롤린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들고 억지로 읽어봤다. 자잘하고 빽빽이 목록이 적힌 그것은 그녀가 이미 알고 있는 그들의 빚을 한 푼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기재해 놓은 명세서였다. 그리고 하단에 적힌 수치를 보자 그녀는 살이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물 좀 마실 수 있을 까요?" 그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무말없이 루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은 옻칠이 된 벽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차가운 물 한잔을 그녀 앞에 내려놓고는 그녀가 잔을 들어 조금씩 마시는 동안 역시 말없이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우린 갚을 수 없어요, 루이스" 기력을 되찾자 그녀가 말했다. "이 금액 전부는...." "알고 있소" 그가 대답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당신이 오늘밤 아버지와 내기를 안 한다면 아버지가 카지노에서 딴 돈에 내가 가진 것을 보태 적게나마 일부라도 갚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다는 갚을 수 없어요, 그녀는 속으로 쓸쓸히 덧붙였다. "오늘 밤 하는 카드놀이와 이건 별개 문제요" 그가 말했다. "그리고 난 절대로 사업과 오락을 결합시킨 적이 한 번도 없소, 캐롤린. 내 말 알겠소?" 알겠냐고? 아니 몰라요! "하지만 일, 일부를 갚을 방법은 있어요, 루이스!" 그녀는 불쾌한 빚 명세서를 그에게 던지며 외쳤다. "그리고 당신은 장난삼아 카드놀이를 하려는 것 아닌가요?"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앉은 그의 표정은 헤아릴 길이 없었고 태도는 느긋했다. "당신이 그런 돈을 어떻게 마련한다는 거요?" 실크처럼 부드럽게 그는 대화를 자신이 의도한 방향으로 이끌고 나갔다. 잔뜩 긴장해 그녀의 한숨이 떨려나왔다. "그건 당신이 상관 할 일이 아니라구요" 그녀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팽팽하게 긴장된 걸음으로 책상에서 떨어졌다. "만약 이쪽에서 빌려 저쪽에 갚는 식이라면" 그가 지적했다. "여기 적힌 수치를 더 늘릴 뿐이지 나을 게 없을 거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 있어요" 그녀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없을 텐데" "뭐라고요?" 그의 조용한 확신에 그녀는 휙 돌아서 그를 노려봤다. 순간 그녀는 습격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의 눈빛만으로 그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신 어머니 돈은 벌써 몇 년 전에 빚을 갚는데 다 썼잖소" 그가 설명했다. "그 후로도 계속 집안의 상속 동산을 하나씩 팔아치워 이젠 팔 만한 물건이 거의 안 남은 상태고. 얼마 전 당신은 변두리에 있는 집안 부동산 일부까지도 별장을 지으려는 부유한 사업가에게 팔았지. 하지만 시의회에서 지역 유산법에 위배된다고 그 거래를 중단시켰지." "그리고 팔게 또 남아 있소, 캐롤린" 그가 물었다. "이미 완전히 저당 잡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저택? 아니면 그나마 서류 상으로는 벌써 은행 소유로 넘어간 몇 개의 법정 상속 동산? 아니면 런던에 있는 인테리어 사무실에서 일해주고 받는 돈으로 갚을 생각인 거요. 부자 고객들 집을 장식할 미술품이나 골동품을 찾아내는 미학에 관한 당신의 해박한 지식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한 그 돈으로?" 아주 거대한 나무 망치로 연달아 맞은 기분이었다. 평생 이렇게 왜소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다음은 뭐요, 캐롤린?" 무정한 말투로 조용히 그가 다시 그녀를 무너뜨렸다. "당신 집안의 빚을 떠 안고 있는 은행을 달랠 만한 것으로 또 뭐가 남았소? 당신 자신?" 그가 은근히 제안했다. "어쩔 수 없이 중독된 아버지가 계속 도박에 탐닉할 수 있도록 최고가를 제시하는 사람에게 당신 자신을 팔 거요?" "그만해요!" 그녀는 숨막힌 소리로 외쳤다. "입 다물어요. 닥치란 말이에요!" 그녀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완전히 부서진 그녀는 그가 왜 이렇게 잔인하게 구는지 이해가 안 가 공허하게 그를 노려봤다. "그걸 어떻게 다 알죠?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요? 언제부터....." 그녀는 그의 앞에 놓여있는 두터운 서류철을 떨리는 손으로 가리켰다. "나에 대한 서류들을 모아온 거예요?' "정보는 언제, 어디서나 살 수 있소. 그만한 비용을 댈 돈만 있다면" "그래서 내 인생을 염탐해도 된다는 뜻인가요?" 그녀가 소리쳤다. "왜요, 루이스. 왜요?"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지, 지독한 방법으로 내 뒤를 캐는 거예요? 전에 날 이용했던 건 당신이었어요!' 그녀가 괴롭게 덧붙였다. "내 몸을 이용해 욕망을 해결하고 그 가증스런 밤이 지나자 우리 아버지와 카드놀이를 해서 당신의 또 다른 욕망을 풀었잖아요!"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소" 그가 이를 갈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긴장돼 있었다. 그녀처럼. 화가 나 있었다. 그녀처럼 원한이 가득했다. 그녀처럼. "오, 아주 재밌네요!" 캐롤린이 빈정거렸다. "자신의 허물에 대해선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시다! 그런데 내 허물과 실패에 대해선 목록까지 만들어서 아주 즐기시는군요. 뻔뻔스럽게도 날 매춘부라고 불러가면서!" "예를 들어 말한 것이지, 사실이 아니었소" 그가 바로잡았다. 하지만 그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무자비한 그의 마음속 어딘가 아픈곳을 건드렸다는 걸 알고 안색이 바뀐 캐롤린 만큼이나. "그리고 우리 둘다 큰돈을 보고 자신을 판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구요, 루이스" 캐롤린은 화가 나서 계속 밀고 나갔다. "날 잠자리로 끌어들인 이유가 아버지를 감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우리 둘 다 알고 있죠!" "좋소, 그 얘기는 이제 그만 합시다" 그가 결론을 짓고 책상을 돌아 그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크고 위협적인 모습으로 그가 그녀 앞에 섰다. "당신은 내가 7년 전에 돈 때문에 내 자신을 팔았다고 생각하는군" 내가 아픈 곳을 찌른 거야, 캐롤린은 확신했다. "그럼 이번엔 우리 둘 중 누가 그렇게 타락할 지 알아봐야 겠 군. 거래합시다. 캐롤린, 그대로 받아들이든지 말든지" 그가 선언했다. "오늘밤 나와 같이 자면 당신 아버지와 내기를 하지 않겠소" 같이 자자고? 그녀가 얼굴을 후려치지 않은 걸 그는 다행으로 여겨야 하리라! "글쎄요, 그게 사업과 오락을 혼동하는 게 아니라면 뭐죠?" 그녀가 넌더리를 내며 쏘아붙였다. "아니지, 아니지" 루이스가 반박했다. "그건 오락에 오락을 가미한 것이라고 봐야겠지" 그는 음흉한 미소까지 지었다. "지옥에나 떨어져요" 그녀는 그렇게 내뱉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발길을 돌렸다. "이 제안은 당신이 그 문을 열기 전까지만 유효하오" 루이스가 재빨리 그녀를 향해 통고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멈췄지만 심장은 그 문을 뛰쳐나가 단번에 이 끔찍한 건물을 벗어날 정도로 세차게 뛰었다!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루이스는 굳이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누구나 자격이 있는 법이오, 캐롤린" 그가 조용히 비웃었다. "난 단지 당신 가격을 확인해보고 있을 뿐이오" "절대로 이번 일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게 불쾌하다는 뜻이오?" 그가 은근하게 물었다. 싸늘하던 그녀는 갑자기 당황해서 화끈 달아올랐다. 수영장에서 그런 행동을 하고는 루이스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일이 전혀 즐겁지 않은 것처럼 거짓말을 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인터폰이 울려 생애 최악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캐롤린을 구해줬다. 루이스는 책상으로 돌아가 다시 의자에 앉아서 버튼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쳤다. "뭔가?" "출발해야 할 시간입니다" 캐롤린이 수영장 문틈으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생각에 잠긴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캐롤린을 쳐다봤다. 순간 캐롤린은 온몸이 심하게 떨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비틀거리면서 책상 맞은 편 의자에 앉자 루이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2분만 더, 비토" 그리고는 통화를 끊었다. 너무 많은 충격과 근심으로 그녀의 정신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힘없이 루이스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는 그가 자신의 항복을 말로 듣고 싶어한다는 걸 알았다. 찌르는 듯한 고통에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그를 바라보면서 항복할 수는 없었기에. 그녀가 그걸 본 건 바로 그때였다. "어머나" 그녀는 숨막힌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언뜻 그의 뒤로 전갈이 벽을 타고 내려오는 걸 봤다. 그림이 너무 생생해 그녀는 의자 깊숙이 몸을 곤추 세우며 본능적으로 피하는 동작을 실제로 취했다. "루이스, 너무 섬뜩해요" "하지만 효과적이지"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그가 처음 소유했던 사업체가 뉴욕에 있는 전갈이라는 이름의 작은 나이트클럽이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건강이 나빠져 쉬어야 하는 친구에게서 그걸 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루이스는 2년 만에 그 클럽을 대도시 저소득 지구 개발업자에게 그의 인생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을 받고 팔았다. <그 후로는 뒤로 돌아올 필요가 없었지> 그가 은근히 만족스럽게 말하던 게 기억났다. 그가 여전히 전갈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단순한 애착 이상의 의미가 있는 걸까? 이 날씬하고 부드럽고 세련된 남자에게 전갈의 꼬리처럼 치명적인 면이 있다는 걸 알리는 경고일까? 다시 그를 쳐다본 캐롤린은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그 사실이 재미있다는 듯 입 꼬리를 살짝 올리고 비웃듯 지켜보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전갈은 먹이를 아주 신속하고 철저하게 공격해요, 루이스" 그녀는 고르지 못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지금 제안하고 있는 건 철저하지도 신속하지도 않아요" "서로를 몹시 흥분시키는 두 사람의 섹스? 그래선 안 되지" 그가 미소를 지으며 서류철을 집어 다시 서랍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소" 그가 쾌활하게 말했다. "갑시다" 가자고? 캐롤린은 다시 살이 따끔거리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경계심이 전신을 휘감았다. "하지만 난 아직 아무것에도 동의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저항했다. "나중에 결정해요" 그러면서 그가 책상을 돌아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시간이 없소" 그 말과 함께 캐롤린은 자신의 몸이 단호히 일으켜지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다 된 듯했다. 루이스는 말없이 그녀를 데리고 방을 나가 미처 뭘 하는 건지 그녀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부드럽고 따뜻한 어둠이 깔린 밖으로 나와 있었다. 최고급 검은색 벤 한 대가 호텔 현관 앞에 시동이 걸린 채 서 있었다. 루이스는 차 뒷문을 열어 그녀를 타게 한 뒤 그는 반대편으로 돌아가 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는 순간 검은 유리 칸막이 너머에 잇는 남자가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가보면 알 거요" 몹시 정보 가치가 없는 대답이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차창 밖으로 보이는 휴양지는 마르벨라의 격조 높은 나이트클럽을 즐기거나, 요트들이 줄지어 늘어선 해안을 따라 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아직도 활기가 넘쳤다. 이런 시간을 갖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몇 년 동안 자제하면서 희망도 없이 몹시 울적하게 보냈다. 그녀가 돌보지 않으면 아무도 없기에 아버지의 도박을 감시하며 보낸 세월이었다. "아버지는 괜찮으시오" 이미 그의 것이 돼 버린 듯한 그녀의 마음을 읽고 그가 곁에서 목쉰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걱정은 그만해요" 캐롤린은 그 말에 조용히 비웃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언제 아버지 걱정을 안 했던 적이 있었나 싶었기에. 아버지는 젊었을 때 사람 좋은 구식 난봉꾼이었는데 결혼을 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어머니에게만은 성실했을 거라고 그녀는 믿고 싶었다. 그래, 그녀는 단호히 자신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여색을 밝히는 분이 아니었어. 도박꾼이긴 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셨다. 어느 정도 냐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오랜 약점이 다시 되살아났고, 너무 그리워 어머니를 잊어버릴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을 정도로. 시작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는 이미 알고 있기에 애써 그 답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차가 만을 벗어나 오르막길을 오르더니 개인 별장 지대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캐롤린은 이곳에 별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지내던 시절이 있었기에 안면이 있는 곳이었다. 긴 여름 방학 동안 기숙학교에서 벗어나 즐겁고 근심 없는 휴가를 보내던 그녀의 놀이터였다. 그때는 영국에서 만큼이나 이곳에 친구가 많았었다. 지금은 그들 중 한사람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고 마르벨라에 마지막으로 왔던 때를 떠올리면 몸서리가 쳐질 뿐이었다. 차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돌더니 열려있는 큰 대문을 통과해 어느 개인 별장이 차도로 들어섰다. 단층 건물로 석조 아치길이 중앙의 안뜰로 연결되어 있었다. 차가 현관 앞 넓은 뜰에 멈춰 서자 루이스가 차에서 내려 그녀 쪽으로 돌아와 내리는 걸 도와줬다. "여긴 어디 에요?" 두 사람을 에워싼 덩굴로 뒤덮인 담 장을 슬쩍 둘러보며 그녀가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주의를 사로잡은 건 이곳에 주차된 자동차 대열이었다. 차가 있으면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었고 사람들이 있다면.... "루이스!" 팔을 잡고 현관문 안으로 이끌기 시작하는 그에게 그녀가 당황해서 외쳤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파티지" 그가 말했다. 캐롤린은 자신이 지금 제정신인가 싶었다. 방금 그녀에게 평생 최악의 저녁을 겪게 만들어 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파티 장으로 끌고 들어가? "싫어요" 그녀가 거절하며 버티고 서 있었다. "파티에 참석하고 싶지 않아요 더구나 이런 모습으로는 요!" 그가 돌아서서 그녀를 쳐다봤고 갑자기 그의 눈 속에 아주 뜨거운 뭔가가 타올랐다. "무척 매력적으로 보이오"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매력적? 그녀는 하마터면 그의 면전에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나와 데이트하려고 한 말 중에 가장 지독한 거짓말이네요!" 그녀가 비웃었다. "수영을 해서 머리가 엉망이고 화장도 다 지워졌다 구요. 몸에서는 소독 내가 나고 심지어 브래지어도 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는 섹시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일 뿐이었다. "알고 있소. 나도 거기 있었잖소, 생각 안 나오?" 그 미소가 그녀를 멍하게 만들었다. 그는 두 사람이 정열적인 연인이었을 때 예전의 루이스로 돌아온 것 같았다. 서로 신뢰하고 사랑했던 그때의 루이스 미소였다. 그런 기억들이 이상하게 그녀의 방어 벽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경계를 풀고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옛날의 캐롤린으로 사랑에 빠지고 세상에 아무 근심도 없던 시절의 그녀로 돌아가고 싶게 만들었다. "루이스..." 그녀는 전에 알던 남자의 모습을 희미하게 감지하고 간청했다. "부탁하는 거라면 그만둬요" 그가 충고했다. "그럴 수 있었던 시점은 이미 지났으니까, 오래 전에" 그 시점이 정확히 언제였지? 아마 두 사람이 수영장에서 정신 없이 키스를 할 때였겠지? 그녀는 입 꼬리를 비틀며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아니면 그가 아까 사무실에서 잔인하고 효과적으로 말로 그녀를 죽였을 때였나? 거기서 애원의 여지가 없었어. 그녀는 침울하게 생각했다. 오직 괴로움과 분노와 고통과.... "협상은 끝났다는 말이군요" 그녀가 말했다.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제의를 받아들일 건지만 알려주면 되오" "당신의 협박 말이죠?" 그녀가 가늘게 반박했다. "좋소, 협박이라고 해두지" 그는 그녀의 말장난에 무심히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넓은 흰색 홀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녀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두 개의 좁다란 복도가 있었다. 두 개의 건물이 하나의 저택으로 이어져 있는 듯했다. 하지만 루이스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홀에서 곧장 나 있는 방들 중의 하나였다. "여긴 누구 집이에요?" 그녀가 가시 돋친 소리로 물었다. "이런 모습으로 파티에 나타났으니 내가 누구의 환대를 망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그 점에 대해선 걱정할 것 없소" 루이스가 독단적으로 대답했다. "당신이 망치고 있는 환대의 주인이 바로 나니까" 심한 충격이 연속되는 밤에 그녀를 더욱 안 좋은 상태로 몰아넣는데 일조 한 또 다른 충격이었다. 7년 전에는 이 호텔, 저 호텔을 전전하며 생활한다고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기 때문이다. "집에는 가족이 있어야 하는데 난 가족이 없거든" 아무렇지 않다는 투였지만 그녀는 쓸쓸한 그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또다시 그녀에게 냉정을 잃게 만들었다. "결혼 안 했죠?" 그녀가 숨막힌 소리로 물었다. 대답 대신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문안으로 들어서는 바람에 그녀는 자신의 직면하게 될 것에 대해 전혀 아무런 경고도 받지 못했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스페인 건축물 분위기가 나는 최고급 가구들로 장식된 아름다운 방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얼어붙게 만든 건방이 아니었다. 스물 다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들의 기품에 기가 죽은 그녀는 루이스 뒤로 반쯤 몸을 숨기고 엉킨 머리를 손가락으로 수줍게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녹색천이 깔린 테이블로 향했다. 거기엔 근엄한 표정의 딜러가 여러 가지 색깔의 도박 칩을 가지런히 쌓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계세요?" 루이스가 그녀를 속였다는 사실에 목이 잠겨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는 그 질문을 바로 알아들었다. "다른 방에 계시오" 그가 대답했다. "저녁이 시작되기 전에 쉬고 계시지" 시작된다... 그 말이 얼어붙은 의식 속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루이스가 그녀를 소개해주기를 기대하며 조용히 서 있었지만, 초점이 없고 흐리멍덩한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캐롤린은 이들에게 소개되고 싶지 않았다. 극도로 불쾌해진 그녀는 속이 몹시 메스껍기까지 했다. 저 테이블을 보니 가엾은 아버지처럼 저들도 모두 쓸모 없는 도박꾼들일 것이기에. 그녀 옆에 서 있는 남자처럼. 그리고 이제 결정할 시간이야. 그녀는 절실히 깨달았다. 당장, 이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녀는 천천히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좋아요" 그의 왼쪽 어깨에 대고 그녀가 소리 죽여 말했다. "좋다니, 뭐가 말이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좋아요, 당신과 자겠어요" 그녀가 속삭이며 차가운 손가락으로 그의 옷소매를 힘껏 움켜잡았다. "지금 요" 그녀가 긴장된 목소리로 덧붙였다. "가서 당장 해요" 4 그가 긴장하는 걸로 보아 그녀가 방금 충격을 주었나 보다. 캐롤린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이 방에서 나가고 싶었고, 아버지가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억센 손이 갑자기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는 바람에 여린 골격이 힘에 눌려 부러질 듯했다. "캐롤린" "안 돼요!" 그녀는 흐느낌에 가까운 숨막힌 소리로 그의 말을 막았다. 그녀는 입술이 떨리고 목이 화끈거리며 조였다. "협상은 끝났다고 했잖아요" 그녀가 그를 상기시켰다. "내 대답을 원했잖아요" 그녀가 그를 상기시켰다. "내 대답을 원했잖아요. 그게 내 대답이에요. 그러니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 그의 가슴이 숨을 쉬느라 부풀어올랐다. 그의 손아귀에 더욱 힘이 가해졌다. "이런, 멍청이!" 그가 투덜거리더니 이내 태도를 싹 바꿔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냉소적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주의해서 제 상대가 당황한 것 같습니다. 잠시 나가서 수습하고 오는 동안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시 길 바랍니다" 놀라고 당황해 웅성거리는 소리가 그녀에겐 매서운 회초리 끝처럼 다가왔다. 루이스는 몹시 이를 갈면서도 사람들을 향해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힘껏 둘러 안았다. 그리고 뻣뻣하게 떨고 있는 그녀를 데리고 몇 개의 문을 뒤로 닫으면서 방을 나갔다. 그는 소란을 일으킨 그녀에게 화가 나 있었다. 캐롤린은 그걸 알았지만 손을 써 볼 단계가 이미 지나 있었다. 그녀가 방금 동의한 사실이 쇠줄처럼 단단히 가슴을 조여오는 것 같아 한 마디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엄한 부모에게 끌려가는 아이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루이스는 완강히 그녀를 이끌고 현관 홀을 지나 반대편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는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 방은 카드 테이블 대신 대형 침대가 있다는 것이 다를 뿐, 좀 전의 방처럼 역시 품위 있게 꾸며진 큰방이었다. 그들이 들어서고 문이 닫혔다. 캐롤린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앞으로 닥칠 일을 기다리며 문 앞에 그냥 서 있었다. 그녀에게 옷을 다 벗고 침대에 오르라고 명령할까? 아니면 옷을 벗으라고 하기 전에 가슴속에 묻어두고 있던 것을 모두 발산할까? 그가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긴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루이스 바스케스의 흔들림 없는 자태를 자신이 뒤흔들어 놓은 것 같아 그녀는 상당히 흡족했다. 그가 마침내 짧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침묵을 깨고 움직이더니 한 손을 크림색 턱시도 상의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녀의 지갑을 꺼내 가까운 의자에 던졌다. 그녀는 그가 그걸 갖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이어서 그녀의 검은 실크 브래지어도 나왔다. 그것 역시 잊고 있었다. 그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수영장에서의 열정적인 장면이 고통스럽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양복 상의를 벗어 침대 위에 놓았다. 넓은 어깨, 햇볕에 그을은 목, 구리 빛 피부가 다 비칠 정도로 고운 리넨 소재의 눈부시게 흰 드레스 셔츠. 그녀는 가슴이 설레기 시작하고 목이 말랐다. 가슴에 잠긴 쇠줄이 조금 더 죄어왔다. 그때 그가 휙 돌아서서 평가하듯이 쳐다보자 그녀는 숨이 헉 막혔다. 그녀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긴장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마지막 카드는 던져졌고 남은 건 루이스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있다. "15분 줄 테니 긴장을 가라앉히고 손님들을 만날 준비를 해요" 그 지시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분노를, 유혹을, 심지어 두 가지가 맹렬히 결합된 것을 예상했다. 싸늘히 경멸 섞인 모욕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턱은 더 높이 올라갔고, 자수정색의 눈은 그녀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을 모두 담아 반항적으로 빛이 났다. "난 당신 손님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뻣뻣하게 말했다. "그렇더라도"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당신은 그들을 만나게 될 거요" "그 사람들은 우리 일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녀가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쇠줄을 끊으며 저항하자 루이스는 그냥 돌아서 벽장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날 두렵게 만든 건 당신 친구들이 아니에요" 발끈해 그를 따라가며 그녀가 덧붙였다. "당신이 우리 아버지를 섬뜩하게 파멸시킬 카드 테이블 때문이었다 구요!"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도 내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군" 그가 벽장문을 열며 말했다.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당신이 이기고 말고 할 일은 이제 없을 거예요!" 가늘게 떨리는 분노의 목소리에 불안이 깃들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과 자면 아버지와 내기를 하지 않겠다는 거래를 했어요! 당신이 제안했잖아요, 루이스!" 그녀는 그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내가 방금 동의 했구요!" 벽장에서 새 야회복 상의를 꺼내던 루이스는 그녀의 불안하고 반항적인 얼굴을 흘끗 돌아보더니 물살이 빠른 강물도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방금 판돈을 올렸소"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양복 상의를 걸치자 캐롤린은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무, 무슨 소리예요" 그녀가 더듬거렸다. "그, 그게 무슨 뜻, 뜻이에요?" 조용히 그가 반복했다. "방금 판돈을 올렸소" 그는 눈부신 흰색 소매를 솜씨 좋게 당겨 검은 색과 금색의 커프스 단추를 밖으로 보이게 했다. 그리고 다른 말로 설명했다. "거래가 방금 바뀌었소!" "그럴 순 없어요!" 그녀가 저항했다. 그가 그녀를 쳐다보며 비웃듯이 물었다. "어떻게 날 막을 생각이오?" "하지만 당신의 그 야비한 거래에 내가 이미 동의했잖아요" 몹시 당황해 그녀가 외쳤다. "나한테 더 이상 뭘 바란다는 거예요, 루이스?" "바로 그거요" 그가 설명했다. "야비하다는 것. 야비한 짓은 이제 하지 않기로 했소" 그가 몸을 돌려 매끈한 금색 테두리의 거울을 보며 나비 넥타이를 매만졌다. "사실 야비함은 전혀 내 계획에 맞지 않거든. 그래서 판돈을 올렸소" "도대체 어디까지요?"완전히 좌절해 그녀가 물었다. 나비 넥타이를 만지던 손이 멈췄다. 거울 속으로 그가 그녀를 쳐다봤다. 거울 속에서 속을 헤아릴 길 없는 싸늘하고 검은 눈이 그녀의 시선을 바로잡았다. 잠시 후 캐롤린은 산소가 부족할 정도로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걸 발견했다. 그가 아주 조용히 한 단어로 된 짧은 대답을 해 그녀가 냉 정을 잃을 때까지. "결혼" 그가 말했다. 몇 초인지, 몇 분인지 캐롤린은 얼마 동안인지 모르게 서로 다른 행성에 사는 사람처럼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떨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 말아요" 그녀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아주 온화하고, 침착하고, 진지한 그의 표정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말해줬다. 그는 진심이었다. 결혼. 루이스는 결혼을 원했다. 그녀와. 그녀는 말없이 돌아서 방문 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이건 너무 심해.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린 전에도 여기까지 왔었지, 캐롤린. 원한다면 그 상황을 다시 재연할 수 있소. " 루이스가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오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그 문을 나서면 난 오늘 밤 당신 아버지와 카드 게임을 할거요" 그녀의 손은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고 막 돌리려는 순간 그녀는 의지를 잃고 말았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서 힘없이 문에 기대고는 양손을 편안하게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는 루이스를 무력하게 빤히 쳐다봤다. 거무스름한 피부에 큰 키, 그녀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매력적인 남자, 루이스가 지극히 편안한 자태로 온몸으로 자신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런 제안을 할 때는 충분한 이유가 있겠죠?"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그렇소" 캐롤린의 입술이 팽팽해졌다. "그렇다면 내가 그 이유를 알아야겠죠?" "동의하면 알려주겠소. 동의하더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만" "내가 어떻게 동의하길 바라는데요?" 대답을 이끌어내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나 흥분하기 시작한 그녀는 지극히 상냥하게 물었다. 그녀의 빈정거림을 알아채고 그가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 우선은 결혼하겠다고 하면 될 거요"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 완벽하겠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기에 그녀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 "나와 끝내기 전에 판돈이 올라갈 가능성은 없나요?" 그녀는 대신 그렇게 물었다. "당신과 끝낸다고?" 이상하게 그는 그 말을 걸고넘어지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 경우에 당신과 끝낸다는 건 적용되지 않소. 내가 아주 자유로운 사고 방식을 지닌 미국 남자로 착각했나 본데, 내가 스페인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마시오. 그리고 스페인 사람으로서 난 평생 한 번 결혼하오. 그러니 결정을 내릴 때 그 점을 고려해요"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 "그리고 내가 판돈을 올렸기 때문에 당신 아버지와 오늘밤 내기를 하지 않을 뿐더러 그분의 부채를 모두 갚아주고 저당 잡혀 있는 당신 집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해 주겠소.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당신의 감시 임무도 내가 인수하겠소" 그는 할 말을 다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렇게 하면 이번 거래가 당신 맘에 좀 들겠소?" 맘에 드냐고? 아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군, 그녀는 패배가 눈앞에 보이자 낙담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누가 좀 알려줬으면..... "일생이 걸린 문제인데 왜 하필 나예요?" 루이스가 말하지 않은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왜 당신이 아니겠소?" 루이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반박했다. "아름답고 예절바르게 자란 여자라서 어떤 남자에게도 도움이 될텐데" "전리품이라는 뜻이군요" 그녀가 신랄하게 비유했다. "당신 좋을 대로" 그는 하찮은 표현을 두고 따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아직도 당신을 무척 좋아하고 있다는 건 솔직히 인정하겠소. 안 그랬으면 당신이 여기 있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오" 그의 냉담한 미소에 그녀는 움찔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충분히 파악했던가. 내가 아직도 당신을 좋아하고 있으니 기뻐해요, 캐롤린. 안 그러면 당신은 깊은 곤경에 빠질 테니까. "좋아요.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그녀는 아주 짧게 간단히 대답했다. "잘 생각했소" 그는 이긴 내색을 하지 않고 서랍장에서 제일 윗 서랍을 열었다. 그대로 서서 그를 지켜보던 그가 서랍을 열려고 할 때 손이 약간 떨리는 걸 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돌아섰을 때 손수건이 들린 그의 손은 지극히 한결같아 그녀는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10분을 줄 테니 손님들을 만나러 갈 준비를 해요" 그의 목소리에 깃 든 미묘한 변화를 캐롤린은 놓치지 않았다. "욕실은 저쪽이오, 옷은 벽장에 있고. 난 몇 군데 전화할 데가 있어서" 그는 냉정하고 침착하고 속을 알 수 없는 루이스 바스케스 본연의 모습으로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분명 중요한 전화를 걸려고 나가는 그를 막고 있는 셈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비켜서면 또다시 그에게 양보하는 것 같아 그러기 싫었다. 그가 그녀 앞에서 멈춰 섰다.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면에서 그녀보다 크고, 넓고 강한 그가 위협을 가해왔다. 그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 빠진 게 있소?" 그가 꿈쩍도 않으려는 그녀를 조용히 놀리며 물었다. 그녀는 지독한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켜야 했지만 마음먹은 걸 말해버리기로 했다. "우리 집안에 이런 복수를 하지 않아도 7년 전에 이미 내게 충분한 상처를 주지 않았던가요?" 그가 손으로 창백한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자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7년 전에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됐을 거요" 그가 속삭였다. "그때는 당신이 날 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그녀가 쉰 목소리로 응수했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었죠, 안 그래요. 루이스? 당신은 가벼운 위안거리를 찾았고 내가 단지 거기 있었기 때문에, 그것도 손에 넣기 쉬웠기 때문이었죠" 그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오?"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사실에 아직도 가슴이 쓰라렸다. 그때 검은머리가 내려오더니 그의 입술이 귓전에 닿자 그녀는 몸이 굳어지고 살이 따끔거렸다. "그렇다면 내가 만지는 걸 어떻게 참을 수 있는 거요?" 그가 부드럽고 촉촉하고 감각적으로 놀리듯 속삭이고는 뺨을 만지던 손을 젖가슴으로 내리자 얇은 드레스는 그녀의 즉각적인 반응을 감춰주지 못했다. 그녀는 얼른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비켜서며 자신을 증오하고 그를 경멸했다. 그가 문을 열고 그냥 나가버리자 그녀는 정말 굴욕적이었다. 혼자 남겨진 그녀는 가까운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을 뿐이었다. 순간 밑에 뭔가 깔린 게 느껴져 손을 넣어 꺼내보니 그녀의 지갑과 브래지어였다. 검은 색 얇은 실크조각이 조롱하듯 그녀의 떨리는 손에서 달랑거렸다. 아직도 약간 젖어 있었다. 생각나는 게 있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루이스가 양복을 벗어둔 침대로 걸어갔다. 그걸 집어 올리는 순간 그의 체취가 그녀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눈은 아직도 흐리멍덩했지만 다른 감각들은 징그러울 정도로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이 옷을 만지자니 루이스를 만지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냄새를 맡고, 그를 느끼고, 그를 원하면서.... 그녀의 브래지어처럼 그의 상의도 젖어 있었는데 루이스가 그래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게 분명했다. 새어나오는 한숨이 너무 절망적으로 들려 그녀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게 다행이라 싶었다. 7주 동안 그를 사랑했어, 그녀는 슬프게 회상했다. 7년 동안 그를 미워했소,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난 지 7초만에 그와 승산이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두려웠다. 자신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대면하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증오는 또 다른 일면이라고 낭만주의자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것으로 자신을 달랠 수 있을까? 그녀는 깊이 생각해 봤지만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벽장에 있다고 말한 옷들은 그녀의 옷이겠지. 이번 일에 얼마나 철저히 계산적이었는지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었다. 그는 아주 자신이 있었고, 그녀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여기까지 오게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그러자 폭발적인 자극제를 찾아 이 별장 안을 배회하고 있을 지도 모를 아버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 생각이 그녀를 서두르게 만들었다. 그녀는 멋진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서둘러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린 뒤 가볍게 화장을 사고 벽장을 열어 뭘 입을지 생각했다. 루이스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높은 에나멜 가죽 구두 속으로 발을 밀어 넣고 있었다. 턱까지 오는 그녀의 단발머리는 부드럽게 윤기가 흘렀고 화장은 가벼워 보였으며 짙은 자주색 실크 드레스는 부드럽게 솟아오른 가슴을 감싸주었고 몸의 곡선을 따라 스치듯 흘러내렸다. 디자인이 극적일 만큼 단순했지만 그의 눈이 숱 많고 긴 속눈썹 뒤에서 반짝일 정도로 그녀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드레스였다. "인상적이오" 그가 말했다. "짧은 시간에 이 정도로 해낼 줄은 몰랐소" 캐롤린은 싸늘히 무시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는 아직 안 일어나셨나요?" "거의 자정이 다 돼 가는 시간이오. 캐롤린" 루이스가 느릿하게 말했다. "보통은 일어날 시간이 아니라 잘 시간이지" "보통은 이렇게 늦은 시간에 파티를 열지도 않죠" 그녀가 지적했다. 그가 퉁명스런 비난에 싱긋 웃었다. "난 야행성이거든" "아버지도 그러세요" 그녀가 반격했다. "어디 계세요?" "주방장과 부엌에서 블랙잭을 하고 계시오" 그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러다 그녀의 기겁한 표정을 보고 화를 냈다. "제발" 그가 외쳤다. "농담이었소!" 루이스가 성큼성큼 걸어가 억센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분은 홀에서 편안히 손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시오!" 그가 성 마르게 다그쳤다. "기분 좀 풀 수 없소?" 기분을 풀라고? 그녀는 속으로 발끈해 되뇌었다. 그녀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 몹시 피곤했고, 평생 최악의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기분을 풀라니? "지금 내게 기력이 남아 있다면 아마 당신을 한 대 쳤을 거예요"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루이스가 그녀를 끌어당겨 안아 주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가만있는 걸 보면 얼마나 임이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에겐 아무 일도 없소" 그가 쉰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이제부터 내가 돌봐드릴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아버지는 중독자세요, 루이스" 그녀가 가슴 아플 만큼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 사람들은 하룻밤에 치유되지 않아요" "알고 있고" 그가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도 알고 계세요?" 이내 그녀가 날카롭게 물었다. "당신과 내가 방금 한 거래에 대해서?" "당신이 나와 이곳에 와 있다는 것만 아실 뿐이오" 그렇다면 아직 부딪쳐야 할 문제가 더 있는 셈이군, 그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루이스의 품에서 얼른 빠져나왔다. 그가 그녀의 지친 얼굴을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봤지만 그녀를 저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문을 열고 기다렸고 캐롤린은 말없이 그의 뜻대로 따랐다. 둘이 나란히 홀로 들어설 때 그녀는 신경이 곤두서는 지독한 긴장으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누군지 만나기 전에 알 수 없을까요?" 그가 무척 대답에 인색했기에 그녀는 큰 기대를 걸지 않고 물었다. "긴장되오?" "네" 그녀가 시인했다. "그럴 필요 없소" 그가 아주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 집안 사람들이니까. 사격 부대가 아니라" 그의 집안 사람들? "하지만 전에는 친척이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녀가 못 믿겠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묘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없지" 그렇게 말하고 갑자기 싸늘하게 번뜩이는 눈빛으로 변하자 그녀는 오싹해졌다. "역시 수수께끼네요" 그녀가 느릿하게 말했다. "내 비밀 무기지" 하지만 당신만 있는 게 아니죠. 그녀는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한 손으로는 문을 여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그의 감촉에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하며 등이 활처럼 휘어졌다. 그녀의 반응에 그가 굳은 표정으로 멈칫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당신이 내게 어떤 존재 인지만 기억해요" 그가 단호히 경고했다. "분노한 신부가 아니라 더없이 행복한 신부라는 인상을 주는 게 내게 아주 중요하니까" 캐롤린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턱은 역할에 맞게 올라갔고, 그가 문을 여는 순간 표정은 온화해졌다. 제일 처음 그녀의 눈에 띈 것은 아까 그 테이블에 하얀 리넨 보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 여러 개의 샴페인 술병이 얼음 통에 든 채 놓여 있어 그녀는 안도했다. 그리고 색색의 칩을 쌓고 있던 딜러는 웨이터가 되어 샴페인 잔을 닦으며 서 있었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방안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처음엔 스물 다섯 명 정도의 얼굴이 안개에 싸 인 것처럼 흐릿하게 보였는데 지금 자세히 보니 모두 스페인사람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들의 태도를 봐서 모두 좋은 가문에 도도한 사람들 같았다. 만약 이 사람들이 루이스 친척들이라면 그가 대단한 가문 출신이라는 뜻이 된다. 젊은 사람, 나이든 사람,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 아주 신중해 보이는 사람 등 다양했다. 하지만 그녀를 정말 놀라게 만든 건 모두 숨기려 애쓰고 있기는 하지만 반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루이스를 좋아하지 않아. 그녀는 날카롭게 그 점을 간파했다. 그의 집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접대를 받고 잇지만 이들은 그 사실을 불쾌해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어지러운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때 그녀는 전혀 즐겁지 않다는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과 약간 떨어져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들고 있는 위스키 술잔을 눈살을 찌푸리고 내려다보고 계셨다. 그녀의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카드 게임은 언제 벌어지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게신 게 틀림없다. 아버지는 요즘 온통 도박에만 정신이 쏠려 있으니까. 글쎄요, 아버지는 이제 불쾌한 소식을 접하게 되실 거예요! 아버지는 오늘밤 그녀를 실망시켰다. 이번에는 그녀가 용서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 잔인하게 실망시켰다. <이번엔, 이번엔> 지난 10년 동안 이 말을 몇 번이나 썼지?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하게 될까? 루이스의 당당한 장담에도 불구하고 수도 없겠지. "오, 루이스" 선명한 자홍색 드레스를 입은 굵은 골격의 부인이 거만하게 나무라는 투로 침묵을 깨고 나섰다. "난 밤늦은 파티를 즐기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 사람이야. 지금 몇 시인지 알고 있니? 우릴 이곳으로 불러놓고 볼 일을 보면서 이렇게 기다리게 하다니. 용서 못할 무례한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니?" "죄송합니다, 베아트리스 고모님" 부인의 경멸 섞인 말투를 모르는 척하며 루이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아시면 이 특별한 파티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으셨을 겁니다" "이유라니, 무슨 이유?"여전히 거슬리지만 궁금하다는 듯이 고모가 엄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축하죠" 루이스가 대답했다. 캐롤린이 보기에 그는 조심스럽게 선택한 단어로 사람들의 의식을 일부러 자극하고 있었다. "저의 믿을 수 없는 행운에 대해" 그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캐롤린은 긴장으로 다시 가슴이 죄었다. 루이스의 손이 그녀의 등에서 허리로 미끄러져 내려왔지만 그게 경고를 뜻하는 것인지, 지원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신이 안 갔다. 그리고 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자수정보다 더 어두운 눈빛으로 딸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바스케스 집안의 충실한 전통에 따라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께 캐롤린 뉴베리양을 소개합니다. 방금 제 신부가 될 것을 약속한 아가씨죠. 그리고 미래의 백작 부인이 될 것을" 그 선언이 끝나고 누가 더 어리둥절해하는지 판단하기는 힘들었다. 그의 친척들인지, 캐롤린 자신인지. 캐롤린은 너무 어찔해서 휘청거릴 정도였다. 미래의 백작부인이라는 말은... 그럼 루이스가 백작이란 말인가.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으면서 전신에 충격이 밀려나왔다.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저 바라보고만 있자니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끔찍했다. 이 모든 게 아주 끔찍했다. 그에게 축하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그의 발표에 적어도 기쁜 척이라고 해줄 수 없는 걸까? 그리고 그들 뒤로 아버지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이내 파악하신 거야. 캐롤린은 깨 닫았다. 아무리 도박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도 아버지는 바보가 아니었다. 딸이 아버지의 빚 대신 루이스에게 자신을 판 결혼이라는 걸 아버지도 알고 계신 것이다. "안 돼" 그녀는 아버지의 거부하는 입 모양을 보고 목이 메이기 시작했다. 그때 끔찍한 침묵을 깨고 한숨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축하하네" 나이 많은 어느 노부인이 앞으로 나왔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린 오늘밤 이 자리에서 자네가 권리를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으니!" 그렇게 되길 바랐겠지. 캐롤린은 방안 분위기가 적의에서 억지 기쁨으로 바뀌는 걸 느끼며 냉혹하게 지적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축하 인사에 파묻혀 그녀는 밀려드는 이름들과 포옹들을 접수하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샴페인 마개가 터지기 시작하고 웨이터가 건배를 위한 술잔을 모두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까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아버지를 캐롤린은 불안한 마음으로 의식했다. 아버지는 마치 눈앞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벗겨져 평생 처음으로 앞이 또렷이 보이는 사람처럼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잿빛이 되어가는 아버지의 얼굴이. "루이스, 우리 아버지가...." 뭔가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에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녀가 루이스를 부르는 순간 그녀는 아버지의 손가락이 풀어지면서 위스키 술잔이 융단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걸 봤다. "안 돼요, 아빠 안돼요!" 아버지가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고 주저앉는 걸보고 그녀가 외쳤다. 5 방안의 모든 것이 싸늘하고 어둡고 멍하게 흐릿해지는 순간 루이스가 뛰어가 바닥에 쓰러지기 직전의 아버지를 붙잡았다. 웨이터 역시 달려가 두 사람이 축 늘어진 아버지를 양쪽에서 부축하여 소파에 눕히는 동안 캐롤린은 지독한 충격에 빠져 넋을 잃고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나 때문이다. 그녀는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버지를 죽일 뻔했어. 그녀가 손 하나 까딱 못하고 서 있는 동안 누군가가 소파로 힘차게 걸어가 무릎을 끓고 앉더니 아버지를 이리저리 살폈다. 남자가 긴 손가락으로 아버지의 목에서 맥박을 재고 나비 넥타이를 푼 뒤 드레스 셔츠의 윗 단추를 몇 개 푸는 모습을 그녀는 가만히 지켜봤다. "비토, 내 차에서 가방 좀 갖다주게" 남자가 지시했다. 그러자 아버지를 부축했던 웨이터가 얼른 밖으로 나갔고, 그때 캐롤린의 어깨에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팔을 둘렀다. 자홍색 드레스를 입은 부인이었다. "진정해요" 그녀가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우리 남편은 의사예요, 그이가 알아서 할 거예요" "아, 아버지는 협, 협심증이 있어요" 그 말이 캐롤린의 마비된 목에서 떨려 나왔다. "주, 주머니에 있는 약, 약을 드셔야 해요. 아빠!" 마침내 마비상태에서 풀려나 아버지를 향해 달려나가며 그녀가 외쳤다. 그러나 루이스의 고모가 그녀를 붙잡았다. "피델이 하게 놔둬요, 아가씨" 부인이 충고했다. 그리고는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침착한 태도로 캐롤린이 말한 내용을 남편인 의사에게 알려줬다. 루이스가 고개를 휙 돌리더니 마치 일부러 꾸민 사악한 일이라는 듯이 캐롤린을 어두운 눈으로 노려봤다.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난하는 표정도 아니고 분노의 표정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백짓장처럼 창백했다. 무섭게 잿빛이 되어 가는 그녀의 아버지만큼이나! 약통이 발견되자 의사는 얼른 거기 적힌 처방전을 읽었다. 그리고 진찰 가방이 도착하자 의사는 루이스에게 아버지의 양복 상의를 벗기게 하고 셔츠소매를 걷어올려 혈압 측정 대를 팔에 두르게 했다. 루이스가 그러고 있는 동안 의사는 아버지의 심장박동을 재고 있었다. 그에겐 아주 일상적인 일로 보였다. 하지만 캐롤린에겐 최악이었다. 평생 최악의 일이었다. 나 때문이야. 그녀는 죄스럽게 생각했다. 루이스와의 거래를 다른 방법으로 알려드렸어야 했는데..... 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었다. 아버지의 표정을 보기 전까지는 화가 치밀고 참을 수가 없어서 아버지가 결국 딸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여드려서 실제로 충격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버지에게 한 짓은 아버지가 그녀에게 한 것 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잔인했다. "의식이 돌아오고 계세요" 루이스의 고모가 중얼거렸다. 의사가 아버지에게 조용히 말을 걸고 있었고 루이스는 몹시 굳은 표정으로 그들 곁에 서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무력한 모습으로 그 주위에 둘러서 있었고 아름다운 크림색 융단 한가운데에는 흥건히 고인 금색 액체와 아버지의 술잔이 놓여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한 손을 움직여 눈을 가리는 걸 봤다. 어느새 나이가 많이 들고 부서질 것처럼 애처롭고 약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그녀는 아버지에게로 다가갔다. "아빠" 그녀가 흐느꼈다. 그녀는 차갑게 떨리는 손을 내밀어 눈을 가리고 있는 아버지의 손을 감싸쥐었다. "죄송해요"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냥 뜻밖이라서 그런 거야" 아버지가 힘없이 대답했다. "예상 못했던 일이라서. 오늘 약 먹는 것도 잊어버렸고. 내 불찰이지. 몇 분 지나면 괜찮을 거다" 캐롤린이 불안하게 묻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며 의사를 쳐다보자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그녀의 눈에 안도의 눈물이 고였다. 아버지의 잿빛 얼굴이 지쳐 보였다. "나 때문에 울 것 없다. 캐롤린"아버지가 한숨을 지었다. "네가 울지 않아도 난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게 모두 제 잘못인걸요" 그녀가 숨막힌 소리로 말했다. "저와 루이스 일에 대해 미리 알려드렸어야 했는데" "아버님에게 뜻밖의 즐거운 소식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거죠" 루이스가 여전히 관중들을 의식해 자신의 거래가 폭로되지 않도록 냉혹하게 끼어 들었다는 걸 캐롤린은 씁쓸히 깨달았다. 아버지도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 그의 지친 눈이 루이스를 향했다. "얘기 좀 하세" 아버지가 냉혹하게 말했다. "오늘밤은 안됩니다" 의사가 선언했다. "오늘밤은 제 병원에서 환자로 지내셔야 될 겁니다" 그 말이 막 끝나자 사이렌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고, 캐롤린은 오싹해져 아버지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하지만 그녀를 정말로 불안하게 만든 건 아버지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아버지가 눈을 깜빡이며 떴다. "그렇게 괴로운 표정 짓지 말거라" 아버지가 그녀를 향해 지친 미소를 지었다. "아직 한참은 널 더 괴롭힐 거니까" "약속하시죠?" 그녀는 진지하게 다그쳤다. "약속하마" 아버지가 쓸쓸히 동의했다. 그리고는 캐롤린 뒤에 서 있는 루이스를 향해 느릿하게 말했다. "자네가 기대했던 대답은 아니겠지" "예" 루이스가 조용히 시인했다. "이 애도 알고 있나?" "뭘 요?" 캐롤린이 날카롭게 끼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움찔하며 다시 눈을 감았고 의사가 아버지의 혈압을 측정하는 바람에 대화는 중단되었다. 그때 의료요원 두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왔고 아버지를 들 것에 싣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고 방안의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고 싶지도 않았다. 병원까지 가는 길은 별다른 소란 없이 이루어졌다. 캐롤린은 아버지를 태운 구급차를 타고 갔고, 루이스는 자기 차로 뒤따라왔다. 그 후로 아버지가 몇 가지 검사를 더 받는 동안 캐롤린과 루이스는 자리를 뜨지 않고 기다렸다. 마침내 루이스의 고모부 피델이 심장마비는 아니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고 그들은 그제서 야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혈압이 아직 높으세요. 오늘밤은 이곳에 입원시켜 지켜보는 것이 좋겠어요" 안도감에 캐롤린은 힘없이 벽에 기대섰다. 루이스가 부축하려고 하자 그녀는 얼른 그 손길을 떨쳤다. "괜찮아요" "안색이 좋지 않소" 그가 퉁명스럽게 반박했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는 의사를 쳐다봤다. "아버지를 뵐 수 있을까요?" "잠시 동안만. 진정제를 투약한 상태라 주무시고 계실 겁니다" 그들은 의사가 지시대로 병실에 오래 있을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안색은 훨씬 좋아져 있었다. 캐롤린이 침대 옆에 서서 아버지의 손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동안 루이스는 침대 발치에서 아무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지금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 캐롤린은 루이스를 따라 병실을 나왔다. 병원을 걸어나오면서 그들은 아무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이 끔찍한 일이 벌어진 후로 거의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출구로 나오자 루이스의 고모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모부는 근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버님은 무사하실 겁니다" 그가 다정하게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냥 약간 놀라신 것뿐이에요" "네, 알아요" 캐롤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쓰다 충동적으로 고모부를 껴안았다. "그 자리에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그녀가 속삭였다. "별 말씀을 요" 그는 캐롤린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루이스에게 말했다. "집으로 모시고 가게. 잠을 좀 자게 하고 최소한 내일 점심때까지는 쉬게 하게" 검은 벤 이 주차장에 서 있었다. 캐롤린이 차에 오르고 루이스가 직접 운전석에 앉았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차의 시동을 걸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호텔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니 여전히 굳어있는 얼굴만 보일 뿐이었다. "루이스" 그녀가 재촉했다. 그는 기어를 바꾸고 운전대를 돌려 푸에르토 바누스로 향하는 도로를 벗어났다. 그녀는 또다시 열띤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 멍청하게 앞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그 사람들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 "다들 집으로 돌아갔소"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무뚝뚝하며 전혀 억양이 없었다. "당신도 알겠지만 파티는 이제 끝났소" "언제 시작이나 했던가요?" 그녀가 가시 돋친 말로 응수했다. 그리고 생각하고 있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들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마음을 정할 시간도 없었지" 그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캐롤린은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예요?" "내가 그 사람들 인생에 나타난 게 불과 몇 달 밖에 안됐다는 얘기요. 실은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만났으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재산과 돈과 직위를 그들이 모르고 있던 서자에게 남겼다는 사실이 밝혀졌지" 캐롤린은 지금까지 늘 수수께끼였던 루이스에 관한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그렇소" "하지만 아버지가 최근까지 당신을 인정하지 않았군요" 그녀가 결론을 내렸다. 루이스는 차를 돌려 별장의 대문을 통과해 안뜰의 아치 밑에 차를 주차시켰다. 시동이 꺼졌는데도 그들은 차에서 내릴 생각을 안 했다. 캐롤린은 얘기를 더 듣고 싶었고, 그도 하고 싶은 얘기가 더 있는 모양이었다. "한 번 그런 적이 있었지' 그가 고백했다. "정확히 7년 전에. 하지만 어떤 결과도 없었소" 7년 전. 캐롤린은 심장이 갑자기 멈추는 것 같았다. "왜요?" 그녀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루이스가 몹시 조심스런 눈빛으로 창백하고 지치고, 이젠 경계하는 듯한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7년 전이라면 그녀까지 포함된 일이 분명하다고 캐롤린은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분이 아니었고" 그가 그렇게 단언하고는 캐롤린을 남겨놓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이곳 마르벨라에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가 대신 영국아가씨와 도박에 빠진 그녀의 아버지와 인연을 맺게 된 일에 관해 말하고 있는 걸까? 그녀가 앉은 쪽의 차 문이 열렸다. 루이스가 허리를 숙여 그녀의 팔을 잡고는 차에서 내리게 도와주었다. 그녀는 충격적인 의문들에서 가장 논리적인 결론이 나올까봐 두려워 떨리는 몸으로 바싹 긴장하며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가 원했던 게 그녀였다는 뜻은 아닐거야. 그랬다면 도박판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무일푼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갑시다" 그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당신에게 너무 힘든 하루였소" 그래, 그 말이 맞아.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 그녀는 눈이 욱신거리는 걸 느끼며 시인했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곧장 침대 속으로 들어가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저택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루이스는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두 개의 스위치를 켜 복도에 잔잔한 빛이 들어오게 하고는 침실로 향했다. 방안에 들어선 그녀는 옷을 벗을 기력도 없었다. 루이스는 그녀가 침대 가에 털썩 주저앉아 욱신거리는 눈을 손으로 누르는 걸 지켜봤다. 그리곤 벽장으로 걸어가 부드러운 실크 잠옷을 꺼내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기진맥진한 그녀의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일으켜 세워 욕실로 향하게 했다. "씻고 갈아입어요" 그녀는 자동 조종 장치처럼 시키는 대로하고 방으로 돌아와 보니 루이스는 방에 없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깨끗이 잊고 망각 속으로 막 빠져들려는 순간 방문이 열리더니 그가 돌아왔다. 그는 침대 밑 탁자 위에 얼음이 든 물병과 두 개의 유리잔을 내려놓고 말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기회가 있을 때 달아나야 하는 건지,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하고 그의 다음 계획을 수용해야 하는 건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캐롤린은 그대로 누워있었다. 그녀는 달아나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달아날 수도 없었다. 잠시 후 그는 짧은 검정 색 속옷만 입은 채 구릿빛 피부를 다 드러내고 나타났다. 그는 산뜻한 비누 냄새를 풍기며 알몸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잠자리에 들 생각인지 성적으로 아주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당신과 자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벽장에 옷을 걸다가 그녀의 말에 그가 하던 일을 멈추고 흘끗 돌아봤다. "잔다는 의미오? 아니면 사랑을 나눈다는 의미 오?" "둘 다요. 그리고 어떻게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네 요" 그는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하던 일을 계속했고 캐롤린은 그런 그의 거동 하나하나를 가슴을 진정시키며 지켜봤다. 그러나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특히 그가 돌아서서 침대로 다가오자 더욱 그랬다. 그리고 그의 얼굴엔 단호하고 무자비한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가 허리를 숙여 한 손으로 그녀 옆에 놓인 베개를 짚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무릎을 짚었다. 그는 아주 어둡고 위험해 보였다. 그리고 무척이나 진지해 보였다. "몇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갑시다, 캐롤린" 그가 조용하고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아는 한 우리 거래는 아직 유효하오. 그걸 이행할 의향이 없다면 당신도 그 결과를 알 거요. 당신 아버지가 편찮으 시다고 해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소. 하지만 우리거래를 지킬 생각이 있다면 내가 당신 인생에서 가장 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당신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이 믿게끔 행동해야 할거요. 알겠소?" 네, 알았어요. 그녀는 멍하게 생각했다. 여전히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로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죠?' 그가 그 말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 점은 내가 이미 분명히 해든 걸로 알고 있는데" 그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만약 오늘 밤 당신이 내게 손을 대면 토할 지도 몰라요" 지친 한숨과 함께 그의 검은머리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얼굴을 간질일 정도로 가까이. "내가 만약 지금 당신에게 손을 대면 캐롤린 당신은 아마 울음을 터뜨릴 거요. 그리고는 당신 인생이 걸린 듯이 내게 찰싹 매달릴 거요" 그가 조용히 비웃었다. 그는 자신의 요지를 입증해 보이기 위해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입술을 떼자마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토하고 싶지는 않았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루이스가 불을 꺼 방안에 어둠이 잠기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부스덕 거리는 이불 소리가 나더니 맞은 편 침대가 눌리는 게 느껴졌다. 그는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고도, 침대 중앙에 가로놓인 보이지 않는 장벽을 넘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몹시 분노한 감정에서부터 지독한 자기 혐오감에 이르기까지 어지러운 감정들과 싸우면서 잠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 그에게 매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한밤중에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잠시 멍한 순간이 지나고 그녀는 자신이 루이스의 구역을 침범했을 뿐만 아니라 뺨을 그의 매끄러운 어깨에 대고 팔은 털이 무성한 그의 가슴에 얹고 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더 놀란 건 그가 깨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똑바로 누워 가슴에 놓인 그녀의 팔을 아주 가볍게 손가락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성적인 동작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그걸 알 수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어둠을 응시하며 누워있는 듯 생각 없이 움직이는 손길이었다. 좋았다. 사실 너무 좋아 이대로 가만히 있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맥박이 빠르게 뛰고 숨결도 변했는데 자는 척하며 누워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오랜만에 옆에 누워있는 남자의 따뜻한 몸을 느껴보는 것이었다. 사실 길고 외로운 7년이었다. 그리고 그때도 바로 이 남자였다. 너무도 낮 익은 산뜻하고 은은한 향의 체취를 지닌 성적으로 매력적인 이 거뭇한 남자였다.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루이스였다는 게 이런 상황에서 아이러니로 여겨졌다. 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캐롤린도 그러고 싶었지만 그러면 이 게임은 끝나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다시 그와의 싸움을 계속하기 위해 긴장해야 할 것이다. 자꾸 한숨이 나오자 그녀는 잠결에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루이스가 그녀의 손가락을 깍지 끼면서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녀는 그의 눈을 들어다보고 말았다. 그녀 자신의 음울한 기분이 투영된 걸보고 있는 듯했다. 그의 눈이 어둡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그들을 에워싼 밤처럼 어둡다는 것이. 그는 날 원해 그녀는 그 눈에 담긴 욕구를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루이스도 그녀가 그를 원한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모른 척하기엔 너무 늦었다. 달아나 숨기엔 너무 늦었다. 그녀만큼이나 그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아주 간단하고, 아주 결정적이었다. 그가 얽힌 손을 이용해 그녀를 끌어당기니 뜨거운 그의 몸이 부드럽게 와 닿는 게 느껴졌다. 그때 그의 입술이 맹렬히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오, 너무 좋은 느낌이었다. 그녀가 잃었다고 아주 오랫동안 애통해왔던 것을 찾은 듯했다. 그리고 그녀가 저항하지 않았기에 그럴 생각도 없었기에 그도 그 키스를 음미했다. 아니면 밤늦은 시간이기 때문이거나, 두 사람이 함께 편안하고 따뜻하게 졸린 상태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사방을 에워싼 어둠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게 뭐든 이 키스는 그들이 나눈 키스와는 달랐다. 느릿하고, 깊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 기막힌 맛에 흠뻑 취해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쌀 만큼 그가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키스를 허공에 뜬 기분이 들 때까지 하염없이 계속되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까칠하게 수염이 나기 시작하는 살에 닿았다. 그녀가 그의 광대뼈와 코와 그녀의 입술을 덮은 그의 입가를 만지자 그 손길에 흥분된 듯 그가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가 몸을 굴려 그녀를 부드럽게 눕히더니 그녀의 얼굴을 같은 식으로 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묘했던 키스가 이내 감각을 깨우는 짙은 관능을 띠었다. 그녀가 두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두르자 그의 손이 그녀의 목에서, 어깨로 마침내는 매끄러운 가슴까지 부드러운 탐험을 시작했다. 그가 팽팽히 솟아오른 유두를 스치듯 어루만지자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그의 손이 그녀의 갈비뼈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자 그녀는 너무도 가벼운 애무에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러자 이내 다른 손으로 그녀를 잡고 자기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행동에 호응하라는 명령이었다. 지난날의 경험을 통해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루이스는 그녀를 자극해 느끼게 하고 자신도 느끼고 싶어했다. 그녀는 만족스럽게 흥분시키고, 그것을 그녀가 똑같이 그에게 해주실 기대했다. 하지만 그건 7년 전의 일이었고, 7년이라는 금욕의 세월이 그녀를 자신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털이 무성한 그의 가슴을 더듬거리며 남자의 작은 젖꼭지를 두 손가락으로 애무하기시작하자 그가 거친 신음소리를 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뺨과 목을 따라 내려가며 뜨거운 키스를 퍼붓더니 마침내 단단한 유두를 찾아 놀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지독히 자극적이었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며 손을 아래로 내려 감각을 뜨겁게 깨우는가 싶더니 그녀의 잠옷을 능숙하게 밀어 올려서 머리 위로 벗겨냈다. 실크 잠옷이 사라지자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의 민감한 살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은 그의 어깨에 고정돼 있었다. 그녀는 그의 열기를 아랫도리에 닿아 고동치고 있는 뜨겁게 싹트기 시작한 그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손이 조금 위로 미끄러져 올라오기 시작했고 그녀는 그가 만지는 식대로 그녀가 그를 만져주길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이스" 그녀는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쉬 잇" 깊고, 굵고, 자극 받아 긴장된 목소리로 그가 명령했다. 그만두자고 할 줄 알았나 ?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곧 아무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아주 정확하게 그녀의 중심을 찾아내 그녀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녀를 뒤흔들어 놓고 말았다. 그녀는 헐떡임과 흐느낌의 경련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는 절정에 이르기 직전이었고 그것을 아는 듯 루이스는 낮게 투덜거리더니 맹렬하고 뜨겁고 절박한 키스를 다시 퍼부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 안으로 확실하고 매끄럽게 밀어붙이며 파고들었다. 익숙지 않은 민감한 조직이 그의 힘찬 요구에 순간적으로 저항해 팽팽히 조였다. 그러다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그를 좀 더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 서서히 허벅지의 긴장을 풀었다. 그가 거친 신음 소리를 내며 반응했다. 그 후로 두 사람의 행위는 아주 격렬해졌다. 입과 입이 맞닿고, 가슴과 가슴이, 아랫도리와 아랫도리가 맞닿은 채 그들은 하나가 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를 꼭 끌어안고 소유하고 있는 동안 그녀의 양손으로 매끄럽고 단단한 그의 등을 움켜잡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떨리는 숨결이 그의 숨결과 감각적으로 섞였다. 그녀의 눈이 타오르는 그의 운길에 사로잡히자 순간적으로 모든 게 잊혀졌다. 과거의 배신들, 현재의 불신들, 지금 그들이 느끼고 있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문제되지 않았다. 그리고 함께 하는 느낌이 너무 완벽해 그녀의 호흡이 점점 짧아지고 몸이 더욱 열망하게 되자 그는 그녀가 도약할 때를 정확히 알고 아뜩할 정도로 맹렬히 절정으로 몰아갔다. 마침내 모든 게 끝나고 루이스가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나른하게 눕자 둘 사이에 더욱 철저히 함께 공유하는 뭔가가 생겼다. 루이스가 움직일 기력을 되찾자 캐롤린은 어둠 속에 숨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으로 몸을 굴린 그는 빠져나갈 틈도 주지 않고 두 팔로 그녀를 꼭 끌어당겼다. "당신은 이제 내 거요" 그가 그렇게만 말했다. 캐롤린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나, 심지어 그를 못 보고 지낸 7년 동안에도 그녀는 늘 그의 것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녀가 깨어나 보니 주위에 햇살이 가득했다. 그녀는 구겨진 흰 리넨을 덮고 혼자 누워 있었다. 그에게 얼마나 쉽게 허락했는지 힘겹게 인정하며 눈을 꼭 감고 가만히 누워 지난 24시간 동안의 일을 떠올리자니 가슴이 극적으로 뛰었다. 무서웠다. 피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는 중에도 따뜻하고. 부드럽고, 무한히 감각적인 조용한 흥분을 몸 속 깊이 느꼈던 것이다. "루이스"그녀는 작게 속삭이고는 이내 후회했다. 그의 이름을 나직이 부르는 것조차 감각적인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미워해야 해.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내게 다시 이런 일을 한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싶어. 이 모든 게 아주 두렵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때 가볍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그녀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녀가 겨우 흰 시트로 벗은 몸을 가린 순간 문이 열리더니 어린 아가씨가 아침식사가 담긴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아가씨가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녀가 공손히 작은 소리로 인사했다. "주인님께서 정오에 병원에서 만날 수 있도록 아가씨를 깨우라고 하셨어요" 정오, 병원, 아버지! 오, 세상에, 어떻게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지? 그녀가 허겁지겁 침대에서 빠져나가는데 어린 하녀가 덧붙였다. "아가씨 아버님은 무사하시고 오늘 오후에 퇴원하실 거라는 얘기도 전해드리라고 하셨어요" 그 소식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어 캐롤린은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소녀는 쟁반을 작은 탁자에 내려놓고는 그녀에게 다른 시킬 일은 없는지 물었다. "아, 됐어요, 고마워요" 그녀가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어린 하녀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혹시 주인님이 병원 주소를 남기셨어요? 어젯밤에는 워낙 경향이 없어서 적어두지 못했는데" "마르티네스 씨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분이 모셔다 드릴 겁니다" 하녀가 방을 나가자 캐롤린은 마르티네스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하녀는 캐롤린이 그를 알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녀는 한 시간 뒤에 그 궁금증을 풀 게 되었다. 그녀가 온화한 색상의 바지와 연분홍색 상의로 가볍게 차려입고 별장안뜰로 나서니 딜러 겸 웨이터였던 남자가 이번엔 기사가 되어 검은 벤 옆에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뉴베리 양" 그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굵은 목소리와 차분한 말투와 루이스처럼 듣기 좋은 미국 억양이었다. 차 뒷문을 열어주는 그를 지켜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루이스 개인 경호원인가? 그의 팔방미인 비서? 아니면, 친구? 루이스에게 진정한 친구가 있다는 생각에 부드러운 가죽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루이스는 혼자 일을 처리하고 아무에게도 경계를 늦추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랑을 나눌 때조차도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몹시 조용했다. 그녀는 그게 싫어 몸서리를 쳤다. 자기는 감추면서 그녀는 다 드러내게 만드는 게 싫었다. 그래도 뭐, 그는 나와의 사랑행위를 즐겼잖아.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인정했다. 그가 안아줄 때 그 열정 뒤에 숨은 힘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용했다. 절정의 순간에도 감정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혼란스러울 만큼 조용했다. 그러니 마르티네스가 루이스의 친구일 리 없어. 루이스 같은 남자에게 친구는 약점으로 여겨질 뿐이야. 그녀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마르티네스도 누구의 친구가 될 인물로는 보이지 않아, 그녀는 운전석에 앉은 큰 체구의 남자를 지켜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냉정한 얼굴에 가차없는 터미네이터 같은 튼튼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야만적인 모습이 불길한 분위기를 더했다. 누구에게 보여 주지 않고 자신을 가둬버리는.... 어쩌면 두 사람은 형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병실은 2층에 있었다. 깨끗한 병원 바닥을 걸어가면서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그녀는 점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안 그런 척해도 소용없었다. 아버지는 너무 많이 알고 계셨다. 그녀를, 루이스를, 그리고 당신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버지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모든 얘기를 듣고 난 뒤에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초조하게 아버지가 계시는 병실로 향했다. 문은 열려있었고 모든 게 깨끗하고 깔끔했다. 먼저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루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주위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평소보다 더 크고,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간과할 수 없는 힘이지, 그렇게 비유하며 그녀는 살짝 몸서리를 쳤다. 그녀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들어서는 소리를 듣고 그가 돌아섰다. 침실이 텅 비어 있는 걸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를 그는 꼼짝도 않고 지켜봤다. 욕실 역시 비어 잇는 걸 확인한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루이스를 쳐다봤다. "어디 계세요?"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별일 없소. 다시 쓰러지신 건 아니니까" 안도감에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그럼 어디 계세요?" 그가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던 이유가 분명 있는 거야.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루이스?"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가 재촉했다 "아버님은 여기 안 계시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여기 안 계셔? 그럼 어디 계시다는 거야? 그녀의 찡그린 얼굴이 더 어리둥절해 졌다. "그러니까 뭐 검사 같은 걸 받으시러 갔다는 얘기 에요?" 검 머리를 저으며 그가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순간 캐롤린은 물러서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만 했다. 그의 표정을 가려주던 햇빛이 사라지고 갑자기 신체적으로 다가오는 그의 존재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그녀처럼 캐주얼 바지에 무닉 없는 티셔츠 차림이었다. 그녀가 방어자세를 취하게 만든 건 디자이너 상표나 그에게서 풍기는 부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루이스라는 남자 자체 앞에서 너무 약해졌다. 너무 쉽게 마음을 빼앗긴다. "집으로 가셨소. 영국으로" 마지못해 그가 대답했다. "집으로요? 영국으로?" 그녀가 멍청하게 되풀이했다. "말도 안 돼요! 아직 여행은 무리라 구요! 아버지를 만나야 해요!" 루이스가 그녀 쪽으로 더 다가오자 그녀는 휙 돌아서 아버지가 기적으로 나타나 루이스의 말이 틀렸음을 입증해주길 기대하듯 흐리멍덩한 눈으로 다시 한번 병실을 둘러봤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서 루이스를 쳐다보자 순간 아버지를 딸에게서 떼어놓은 것이 그의 계획의 일부라는 역겨운 의심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당신이 아버지를 보냈군요"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집 문제를 처리하신다고 떠나셨소" 루이스가 음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와 내가 우리 문제를 해결할 다른 대안을 찾아 당신 계획을 망칠 까봐 당신이 아버지를 보낸 거예요" "대안이 있소?" 조용하고 매끄러운 말투의 질문이 전갈의 꼬리에 치명적으로 찔린 것처럼 그녀를 꿰뚫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왜 떠나신 거죠?" 가슴이 심하게 뛰는 걸 느끼며 그녀가 따져 물었다. "죄책감이지"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신을 볼 면목이 없어 일부러 당신이 오기 전에 떠나신 거요" 날 버리셨다는 뜻이군. 달아났다는 뜻이야. 나 혼자 감당하게 남겨놓고 떠나셨다는 뜻이야! 너무해.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 병실을 나가려고 돌아섰지만 솟구치는 눈물이 루이스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해하려고 노력해봐요" 그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쩌면 그분은 어젯밤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봤는지도 모르겠소. 자신이 망쳐놓은 인생을 말이오. 당신을 불행하게 만든 걸 말이오!" "그래서 달아나셨군요" 그녀가 빈정거렸다. "용감하기도 하셔 라!" "최선의 방법이셨소, 캐롤린. 당신을 다시 대할 수 있도록 애쓰시는 그분을 탓하지 말아요" "그럼 그 끔찍한 빚을 혼자 힘으로 처리하시면 되겠네 요!" 그녀가 가시 돋친 말로 응수했다. "당신은 다른 여자를 찾아 결혼하구 요, 루이스! 난 이제 여기서 빠질 테니까!" 성난 몸짓으로 그녀는 잡힌 어깨를 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록 더 단단히 그녀를 붙잡았다. "그분이 집 문제를 처리하는데 비용은 내가 대고 있소" 루이스가 아주 홱 심을 찔렀다. 캐롤린은 숨을 들이마시고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참고 있다가 흐느낌처럼 격렬하게 터뜨렸다. "내 문제도 그렇죠" "우리가 합의를 본 일이니까" 루이스가 확실히 해뒀다. "져 본적이 있나 요, 루이스?" 그녀가 물었다. 그의 완강한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거의 없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그녀는 지금 루이스가 원하기 때문에 여기 이는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루이스가 떠나주길 바랐기 때문에 떠난 거고. "그래, 이제 어쩔 거예요?" "이제?"그가 어두운 눈으로 아름답지만 싸늘한 자수정색 눈을 빤히 쳐다보며 무슨 뜻이냐는 듯이 물었다.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거요" 그리고는 그녀의 턱을 잡고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아주 강렬하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전신을 엄습하는 갑작스런 열기에 그녀는 벗어나야 한다는 의지를 찾기도 전에 단단히 사로잡혀 버렸다. 잠시 후 루이스가 그녀를 놔줬다. 그리고는 방금 정신 없이 키스를 했던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놀리듯이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이제야 당신 몸이 좀 풀린 것 같군" 그가 은근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를 때리고 싶었다. 그도 그걸 알고 잇는 듯했다. 발끝과 발끝, 젖가슴과 단단한 근육질 가슴을 맞대고 서서 그는 몹시 비웃는 듯한 눈으로 때리고 싶으면 때려보라는 식으로 그녀의 성난 눈을 빤히 쳐다봤다. 살이 타는 듯한 순간이었다. 둘 다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숨도 안 쉬는 듯했다. 긴장이 신경을 갉아대고 반감이 솟구쳤다. 그녀를 더욱 격분시키는 다른 뭔가와 함께. 그것은 섹스였다. 뜨거운 섹스. 조율이 안된 바이올린처럼 소리날 때까지 두 사람의 성난 감각을 잡아당기는 섹스. 그때 갑자기 그녀는 그가 자신의 몸 안으로 파고들 때 일어나는 현상과 비슷한 잔물결이 전신으로 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감각이 그녀를 배신하다니! 젖가슴이 찌르는 듯 저리고 부드러운 유두가 그의 가슴에 닿아 간절히, 팽팽히 맹렬히 단단해지다니 말도 안 된다. "당신과의 결혼은 아주 대단한 모험이 될 것 같소"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현실로 쿵하고 떨어졌다. 그녀는 산산이 부서지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기분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계속 이렇게 서 있느니 차라리 정말 부서지고 싶었다. "당신은 증오해요"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하고는 그 자리를 떠날 생각으로 그를 등지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녀의 퇴장은 루이스의 고모부인 의사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저지되고 말았다. "오, 벌써 떠나셨나?" 그가 물었다. "마침 런던 행 항공편이 있었서요" 루이스가 설명했다. "다음주에 저희 결혼식에 참석하려면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시다면서" 다음주? 캐롤린은 긴장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이 살아있기를 기원해야겠군" 그의 고모부가 현자처럼 말했다. "루이스, 성에서 식사를 할 때는 음식의 독을 감별하는 사람을 잊지 말도록 하게. 콘수엘라는 인생이 뺏기는 걸 지켜보느니 자네가 땅에 묻히길 바랄지도 모르니까" 캐롤린은 무슨 말인지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와 루이스가 다음주에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말고는! "아버지는 걱정하지 말아요, 아가씨." 피델이 그녀의 표정을 보고 아버지가 염려스러워 그러는 줄 알았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는 괜찮으셨으니까 그리고 어젯밤에 그런 충격을 겪었으니 다시는 약을 잊고 안 드시는 일이 없을 거예요" 그때 의사의 호출기가 울려 대화가 중단되었고 의사는 한 걸음 다가와 캐롤린의 뺨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는 힘차게 돌아서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두 사람 다음주에 성당에서 봐요, 사정이 허락한다면" 그리고는 도착했을 때처럼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음식의 독을 감별하는 사람을 잊지 말라니? 그리고 성은 뭐고, 결혼식은 또 뭐예요?" "당신과 나의 결혼식이고, 내 빛나는 작위와 함께 물려받은 성을 말하는 거요. 그리고 음식 감별 얘기는 농담이오. 그다지 즐거운 농담은 아니지만" 캐롤린에겐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실은 아주 심각한 충고로 들렸다! "무슨 일인지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화가 나서 그녀가 딱딱거렸다. "불화와 재산 문제지" 루이스가 간결하게 대답하고는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기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오가는 복도로 내모는 바람에 얘기를 거기서 끊겼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자 비토 마르티네스가 차를 대기시키고 그 옆에 서 있었다. "다른 일은?" 그에게로 다가가며 루이스가 즉시 물었다. "급한 일은 없습니다" 그가 캐롤린을 의미 있게 흘끗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 시선이 그녀를 괴롭혔다. 많은 일들이 지금 그녀를 괴롭히고 있듯이. "두 사람 다 첩보 기관에 들어가지 그래요?" 그녀는 가시 돋친 말을 던지고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차 뒤 좌석에 올라탔다. 뒤따라 루이스도 차에 오르고 시동이 걸리더니 유리 칸막이 너머에서 비토 마르티네스가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비토는 다른 뜻이 없었소" 루이스가 조용하게 말했다. 캐롤린은 분노로 어두워진 자수정색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딜러인 비토를 말하나요. 웨이터인 비토를 말하나요, 아니면 운전기사인 비토를 말하나요?" 그녀가 비아냥거리며 물었다. "내 경호실장이자 내가 가장 신뢰하는 고용인인 비토를 말하는 거요" 그가 아주 침착하게 대답했지만 말조심하라는 점잖은 경고였다. 캐롤린은 지긋지긋한 사태에 너무 넌더리가 나 말조심을 할 수가 없었다. "오, 그래요. 그렇다면 팔방미인이라는 뜻이군요" 그녀가 비웃었다. "당신 일에 방해가 되는 노인네를 비행기에 태워 이 나라를 떠나게 만드는 일까지 포함해 당신 적을 물리쳐주는 사람이라는 뜻인가요?" "당신 아버지를 공항까지 태워준 사람은 비토가 아니오. 생각이 안나나 본데 그는 당신을 병원으로 데려 왔잖 소" "아, 그럼 저 사람에게도 비서가 있나보네요" 한결같던 눈빛이 조금씩 굳어졌다. "싸워보자는 뜻이군" 그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그러고 싶었다. "주의하도록 해요" 루이스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경고했다. "차 세워요"그녀가 요구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캐롤린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주저하지 않고 스위치를 눌러 유리칸막이를 아래로 내리고 지시했다. "차 세우게, 비토" 차가 매끄럽게 멈춰 섰다. 캐롤린은 차에서 내리고 나서 깨닫게 되었다. 미친 짓이다. 이 모든 게 다 미친 짓이다. 그녀는 마르벨라에서 지금 자신이 뭘 하고있는 건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루이스에게 맘대로 조종당하면서! 그녀는 루이스의 발소리가 다가오는 걸 들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뒤에 와 섰을 때 가까이 있는 그의 존재를 느꼈지만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이 욱신거리고 두통이 심하게 밀려왔다. 그리고 가슴이 죄어와 답답했다. "우리가 만난 지 몇 시간도 안 대서 당신은 날 속이고 협박하고, 납치하고, 유혹했어요" 그녀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날 도와 아버지를 병원으로 옮겨놓고는 감쪽같이 떠나 보냈어요. 당신은 그런 교묘한 일들을 계획해 내게 계속해서 충격을 주고 평정을 잃게 만들고 있어요. 그리고 그거 알아요, 루이스?' "뭘 말이오?" 루이스가 물었다. "당신이 왜 내게 이러는 지 전혀 모르겠다는 거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캐롤린은 쓸쓸히 돌아서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야위고 단호한 얼굴이 평소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설명을 기다리며 침묵을 지키고 서 있자니 그가 그녀에게 왜 이러는 지 알려고 애썼던 7년 전 7주간의 로맨스가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떠오른 건 그녀가 마르벨라를 아주 떠났던 날 밤의 추악한 장면뿐이었다. 그때도 루이스는 그녀가 비난에 비난을 거듭하는 동안 지금처럼 이렇게 긴장된 모습으로 우뚝 서 있기만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루이스?" 그녀는 흐느끼고 있었다.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걸 갖고도 어떻게 밤마다 우리 아버지 돈을 따낼 수 있었어요?" "당신 아버지가 내 돈을 따려했다는 생각은 못해봤소?" 그가 냉혹하게 응수했다. 그녀의 아버지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는 시도는 그녀를 더욱 격분시킬 뿐이었다. "당신은 프로잖아요!" 그녀가 외쳤다. "도박이 직업이라고 당신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요. 반면에 우리 아버지는 속기 쉬운 바보에 불과 했구 요!" "그분은 중독자요, 캐롤린" 루이스가 잔인하게 받아쳤다. "게임만 할 수 있다면 어떤 것도 상관하지 않는 도박꾼이오!" "글쎄요, 아버지는 당신이 내기를 걸어왔다고 하시던데요.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셨다는 거예요?" "아니오" 그가 침울하게 말했다. "거짓말하신 게 아니오" 이것이 멋진 연애사건의 끝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회상하며 서서히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를 떠났고 루이스는 붙잡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로 눈을 감을 때마다 그녀가 떠날 때 그가 짓던 냉혹한 표정을 하루도 떠올리지 않은 날이 없었고 떠난 걸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이건 과거가 아니라 미래와 관계되는 일이오" 루이스가 불쑥 그런 말을 하자 그녀는 몇 번 눈을 깜박이며 옛 기억 속에서 빠져나왔다. "난 유산 상속의 마지막 부분의 보증하기 위해 아내가 필요하오. 그리고 아내를 얻을 거라면 당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소, 이젠 됐소?" 아뇨, 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목적에 딱 맞는 편리한 수단이라는 뜻이군요" 그는 청혼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녀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을 뿐이다. "나도 당신에게 그런 존재잖소. 서로 아주 공평하다고 생각되지 않소?" 그가 냉정하게 지적했다. 그렇게 따지면 틀릴 말이 아니기에 그녀는 반박할 수 없었다. "이제 그만 가지 않겠소?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나기 전에 할 일이 많아서 말이오" 떠나.... 그는 또 뜻밖의 일로 그녀가 다시 평정을 잃게 만들고 있었다! "어디로 떠나요?" "코르도바" 그가 잛게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차를 향해 걸어갔다. 캐롤린도 따라갔다. 달리 방법이 없잖아? 그녀는 자신을 비웃었다. "코르도바엔 왜요?" 차에 올라타면서 물었다. "산간 지대에 발레 데 로스 안젤레스라고 하는 작은 마을이 있소" 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그가 설명했다. "그리고 그 마을에 카스틸로 데 로스 안젤레스가 있고, 발레 데 로스안젤레스의 백작인 루이스 안젤레스 데 바스케스 소유의......" 그가 여전히 주눅들게 하는 말투로 계속했다."발레 데 로스 안젤레스의 백작들이 그렇듯이 전통에 따라 그곳 성당에서 약혼녀와 결혼식을 올릴 거요.그런다음 신부를 자신의 성으로 데려가는 거지. 그곳에 사는 사악한 마녀를 내쫓는 대로 새 백작 부인을 황홀하게 만들기 위해" "사악한 마녀요?' "그렇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스케스 가의 콘수엘라 엔그라시아. 발레 데 로스 안젤레스의 현 백작부인이지" "당신 고모부가 좀 전에 언급했던 분이군요" "그렇소. 피델 고모부는 아주 기민한 분이시지" 그가 인정했다. "우리 친척 중에 당신이 맘놓고 믿을 수 있는 분이기도 하고" 그가 더욱 진지하게 덧붙였다. "내가 한 말을 유념해 두는 게 좋을 거요" 7 유념하라고? 하지만 캐롤린은 코로도바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초조해하는 그를 지켜보며 그 말을 유념하고 있는 사람은 다른 아닌 루이스 자신이라는 걸 알았다. 옆에 앉은 그녀는 창 밖으로 끊임없이 변하는 경치를 내다보며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게 뭘까 생각해봤다. 그는 행복해야 했다. 자신의 인생을 가져가는데도 한 마디 저항도 없이 순하게 말 잘 듣는 그녀를 확보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달리 저항할 기회조차 없었다는 점을 상기했다. 그녀를 별장에 내려주고 루이스는 이내 경호실장과 다시 나가더니 오늘 아침 이 여행을 떠날 때까지 아무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아침에 가벼운 검정 색 리넨 양복과 흰 셔츠 차림을 하고 초조해 보이는 표정으로 도착했다.! "준비됐소? 그게 짐이오? 그럼 가도 되겠소?" 그는 무례하다 싶을 만큼 간결하게 묻고는 그녀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몸에 딱 붙는 엷은 자주색 상의와 크림색 치마를 입은 그녀를 짧게 한 번 훑어보고는 시선을 돌린 뒤 눈도 한번 제대로 맞춘 적이 없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하고 싶은 말들을 늘어놓을 까봐 그런지도 모른다. 루이스가 확실히 원치 않는 일이었다. 차를 타고 달리는 내내 그 장벽을 유지하고 있는 걸로 보아 아직도 확실히 원치 않는 일이었다. 어젯밤 어디서 잤냐고 따질까봐 두려운 건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아주 신랄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잠을 제대로 못 잤다는 걸 눈치챘다. 난 잘 잤는데, 그녀는 새 침을 떨며 회상했다. 그녀는 푹 잘 잤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 옆자리가 어젯밤 그대로인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했다. 거짓말. 그녀의 가슴속에는 작은 목소리가 말했다. 몇 번이나 잠에서 깨 그가 옆에 없는 걸 걱정했잖아. 너도 그를 보고 싶어했잖아! 그것이 그녀를 더 애처롭게 만들었다.! "젠장" 루이스가 투덜거리며 갑자기 차를 세웠다. "샛길로 빠져야 하는데 그냥 지나친 것 같소" 그가 차를 후진시키자 로스 아미노스라는 도로 표지판이 보였다. 그는 다시 차를 세우더니 짜증난 한숨을 내쉬고는 지도를 꺼내 운전대 위에 펼쳐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캐롤린도 눈살을 찌푸렸다. "길을 몰라요?" "모르오" 그가 대답했다.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말투가 더 이상의 질문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그의 기억력은 사진을 찍어 놓은 것처럼 정확하기에 길을 잃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여긴 몇 번이나 가봤어요?' 겸손하게 그녀가 물었다. 그의 검지손가락이 마르벨라에서 코르도바를 지나는 굽어진 빨간 선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그 손가락이 자신의 배꼽 주위를 맴돌던 모습이 떠오르자 곧장 허벅지로 열기가 확 밀려들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혐오했다. "가본 적 없소" 루이스가 말했다. 그녀는 그 대답을 받아들이는데 한참이 걸렸다. "마르벨라에서는 가본 적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녀는 마침내 그런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손가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해 코르도바 외곽으로 빠지는 길을 따라가는 걸 황홀하게 지켜봤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뜻이오. 여기 있군" 그가 발레데 로스 안젤레스라는 이름이 적힌 지도상의 작은 섬에서 손가락을 멈추며 분명하게 말했다. 너무 뜻밖의 말에 그녀는 그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왜요?" 그녀가 따지듯이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지도를 다시 깔끔하게 접더니 방향감각을 잃기 전 까지 내내 차안을 감돌았던 긴장 가득한 침묵을 지켰다. "루이스?" 그녀가 다그쳤다. "날 반기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랬소, 됐소?" 그가 딱딱하게 반격했다. "하지만 당신 소유잖아요!" 그녀가 외쳤다. "그렇다고 꼭 반가운 존재라는 법은 없잖소?' "당신을 독살할지도 모른다는 사람"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현재성에 거주하는 사악한 마녀가 당신 아버지의 미망인인가요?" "그렇소" "그리고 그녀는 당신을 원망 하구요?" 그녀는 다정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루이스는 여전히 비웃음을 던졌다. "당신이라면 당신 자식의 지위를 강탈하는 자를 원망하지 않겠소?' 그의 아버지에게 또 아들이 있다고? 루이스에게 이복 형제가 있다고? 그녀가 마지막 사실을 받아들이며 앉아 있는 동안 루이스는 운전대를 돌려 왼쪽 길로 차를 몰았다. 길고 꼬불꼬불한 길이 그들 앞에 펼쳐졌다. 최고급으로 꾸며진 실내와 최적의 안 락을 위해 고품질의 맞춤 서비스가 제공되는 벤 도 그 안에 탄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물어보고 싶은 수많은 질문과 하기 싫은 대답들이 섞여 진동하기 시작했다. 결국 캐롤린이 가장 궁금한 질문을 불쑥 던졌다. "왜 그 사람이 아니고 당신이에요?" '난 서자인데 그 친구는 아니라서?" 루이스가 그 질문에 빈정거리며 되물었다. 캐롤린은 그의 무뚝뚝한 솔직함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루이스가 지금은 자기 사생활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은지 몰라도 7년 전에는 이러 지 않았다. 아비 없는 자식으로 먹고살려고 발버둥치는 어머니와 뉴욕 뒷골목의 다 쓰러져 가는 셋방에서 살아야 했던 인생에 대해 무척 솔직했었다. 그녀는 그의 어머니가 그의 나이 겨우 아홉 살 때 돌아가셨고 루이스가 그 후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주립 시설에서 살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부자이고 집안은 실질적으로 파산상태나 다름없어서 선택된 거요" 다시 말해 그의 아버지는 원해서가 아니라 편의상 그를 상속자로 선택했다는 뜻이었다. 루이스가 이번 일에 그렇게 신랄하고 냉소적이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당신 이복 형제와 그의 어머니는 요? 이번 일로 그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무시당하는 존재가 되는 거지. 그들이 지금까지 날 그렇게 만들었던 것처럼" 루이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어떤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 지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대답을 듣지 않고는 못 배기는 질문을 하나 던졌다. "우리 결혼은 요? 이번 일과 무슨 상관이에요?" 잠시 동안 그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고 전방에 펼쳐진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는 그의 눈에선 단호한 빛이 번득였다. "우리 결혼은 그들을 무시당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이오. 아버지의 유언에 의하면 그들은 내가 결혼할 때까지만 그 성에 살수 있으니까" 그의 잔인한 기질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자 캐롤린은 루이스의 친척들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오늘 만나게 될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알았다면 짐을 싸서 그가 도착하기 전에 그곳을 떠났을 것이다. "용서라는 말도 못 들어봤어요?" "용서는 보통 그것을 바라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법이오" 능란하고 기민한 대답이었지만 여전히 그녀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그 후로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로스 아미노스라는 한적한 작은 마을에 들어설 때까지 수마일 내내 둘은 아무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여기 들러 점심이나 먹읍시다." 루이스가 결정했다. 캐롤린은 반대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몸이 뻣뻣하고 목이 마르던 참이었고 점심을 먹으면서 잠깐 쉬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여정을 위해 바람직한 결정이었다. 루이스는 색 바랜 파란 천막 밑에 나무 식탁이 놓여져 있는 작은 카페를 하나 발견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 긴장된 근육을 풀며 캐롤린이 내리길 기다렸다. 카페는 세련된 멋은 없지만 바구니 가득한 빵과 아삭아삭한 샐러드가 신선하고 맛있었다. 그녀는 콜라를 주문했고 루이스도 같은 걸 시켜 두 사람은 마치 늘 그랬던 것처럼 앉아서 점심을 나눠 먹었다. 두꺼운 빵 조각을 하나 더 집으며 그녀가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 돼요?" "왔던 만큼 더 가야하오" 그도 빵을 하나 더 집으며 짧게 대답했다. 그녀는 하품 비슷한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날씨는 더웠고 습도가 높았으며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이룬 그녀는 느릿하게 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피곤하오?" 루이스가 물었다. "더위 때문에 요" 그녀가 날씨 탓을 했다. "여행 때문이기도 하구요 어젯밤에는 어디서 잤어요?" 그의 눈이 갑자기 반짝이는 걸보고 그녀는 아차 싶었다. "내가 보고 싶었군, 응?"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아뇨" 그녀가 부인했다. "푹 잘 잤어요" "난 보고 싶었는데"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놀리고 있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흘끗 쳐다보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러자 둘 사이의 분위기에 돌연 맹렬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마치 그녀가 알몸으로 앉아 있는 것처럼 위아래로 훑으며 쳐다봤다. 그녀는 다시 얼른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몸은 이미 그의 눈빛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어딘 가로 갈 수도 있소" 루이스가 제안했다. 캐롤린은 빵이 목에 걸릴 뻔했다. 그는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는 듯했다. 그녀는 콜라를 집어들어 빵을 넘기려고 벌컥벌컥 마셨다. "좋다고만 하면 되오" 오, 맙소사! "싫어요, 루이스!" 그녀가 거친 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그의 눈을 다시 쳐다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했다. 그것도 지금 당장! "그만해요" 그녀는 뺨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작은 소리로 말하고는 샐러드 그릇을 향해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가 그녀를 향해 내민 그의 손가락이 중간에서 만나고 말았다. 고압선에 닿은 듯했다. 캐롤린은 숨을 헉 몰아쉬며 얼른 손을 가져왔다. 그러자 루이스는 나직이 욕을 중얼거리더니 화가 난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그가 주머니에서 얼마의 돈을 꺼내 식탁에 던져놓고 그녀의 손을 붙잡는 걸 지켜봤다. 그는 말 안 듣는 아이를 혼내주려고 데려가는 것처럼 그녀를 끌고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거리를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항하고 싶었다. 차를 세워놓은 곳은 반대편인데 어디로 가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사나운 표정을 보니 말이 단단히 목에 걸리고 말았다. 갑자기 그가 멈춰 서더니 그녀의 손을 더 힘주어 잡고 작은 호텔의 로비로 들어갔다. "루이스, 안 돼요" 그녀가 마침내 숨막힌 소리를 질렀다. 그는 그녀를 완전히 무시했다. 그의 얼굴은 단호했고 턱은 완고했으며 이 호텔의 최고 스위트룸을 찾을 때 그녀는 창피해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끔찍하고도 그녀 평생 가장 당혹스런 순간이었다! 호텔 지배인이 그녀 쪽으로 짧지만 알만 하다는 듯한 눈길로 끊임없이 보내 그녀는 어쩔 줄 몰랐다. 결국 루이스는 카운터에서 숙박부에 서명한 다음 지배인이 내미는 방 열쇠를 받아들고 계단 쪽으로 돌아섰다.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어요!" 그가 그녀를 끌어당기며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캐롤린이 숨막힌 소리로 외쳤다. 그는 대꾸도 하지 않고 2층 복도를 지나 어느 방문을 열더니 그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호텔은 작고 아주 단순했다. 방은 좀 어두운 편이었고 침대 하나와 탁자 하나, 그리고 의자 두개가 전부였다. 숨막힐 듯한 열기를 가라앉혀 줄 냉방장치도 없었다. 그가 문을 닫자 그녀는 더 이상 방안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마침내 잡힌 손을 풀고 그녀가 따졌다. 그의 대답이 굳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된 건지 그녀도 알고 있었으니까. 사실 단단한 골격과 근육으로 뭉쳐진 그의 얼굴에 모두 쓰여 있었다! 그녀는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그가 상의를 벗고 머리위로 셔츠를 잡아당기는 걸 눈을 크게 뜨고 황홀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옷은 의자 위에 놓여졌다. 그의 구리 빛 상체가 부풀어올랐다가 이완 되었다. 불과 얼음이야. 그녀는 그렇게 비유하며 그가 다음에 어떻게 나올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불은 그의 열정 속에 있었고 얼음은 그의 열정을 억누를 때 사용하는 매개였다. 그는 역동적인 결합으로 그녀의 은밀한 곳을 가동시켰다. 그녀는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완전히 그녀를 사로잡아 살을 달구기 시작하는 뜨거운 열망만 남을 때까지 그녀는 불이 얼음을 녹이는 걸 지켜봤다. "루이스, 이건..." 재밌지 않아요.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지만 이미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당겨 자기 목에 팔을 두르게 했다. 그가 시선을 내리고 그녀의 상의에 있는 작은 단추들을 끄르기 시작하면서 이글거리는 눈이 긴 속눈썹 밑으로 가려졌다. 너무 강렬하고, 너무도 남자다웠다. 그녀는 그것 때문에 이렇게 흥분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두렵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게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두 손이 상의를 벗겨 얇은 실크 브래지어가 드러나자 그녀는 은근히 그를 초대하듯 등을 살짝 뒤로 젖혔다. 그는 그녀의 숨을 완전히 앗아가듯이 그녀를 만졌다. 그녀가 예상했던 감각적인 애무가 아니었다. "왜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녀는 이 남자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아주 냉혹하게, 아주 가차없이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이건 억누르기 힘든 욕망이었다. "당신이 필요하니까" 그 말뿐이었다. 이어 그의 입이 그녀의 입술을 벌렸고 이제 다른 건 아무것도 문제되지 않았다. 둘의 옷이 서둘러 연달아 벗겨졌고 그들의 육체는 굶주림과 열기와 땀으로 뒤섞이면서 황홀하게 화해했다. 침대가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은 부드러운 매트리스 위로 포옹한 채 쓰러지자 새로 풀을 먹인 리넨 냄새가 진하게 두 사람을 에워쌌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분위기를 아주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냄새였다. 어느새 시간이 오후를 홀딱 지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디로 가던 길이었는지도 잊었다. 덥고, 땀나고, 훨씬 더 매력적이고, 훨씬 더 자유로운 감각을 찾아 떠나는 이 여행이 더욱 좋았다. 이 세상에서 두 사람이 해야 할 절대적이고 유일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둘은 오후 내내 사랑을 나누고 친밀하게 뒤엉킨 채 시간을 보냈다. 잠시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면 또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왜죠, 루이스?" 문득 그녀가 물었다. "왜 우리가 여기 이렇게 잇는 거죠?' "당신은 늘 왜라고 묻는군" 그녀의 목에 입술을 디밀며 그가 불평했다. "당신이 뜻밖의 일로 날 늘 충격에 빠뜨리니까요" "글쎄, 이번엔 답이 뻔한 것 같은데. 당신이 못 견딜 정도로 아름다우니까" 그가 굵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잠시도 이러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너무 탐이 나서..." 그의 입이 더 이상 말은 모두 잊게 만드는 키스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의 대답이 그녀를 얼마나 우쭐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이렇게 침대에 누워 사랑을 나누는 진짜 이유는 아니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점심 식사 도중 그가 어젯밤 곁에 없어서 보고 싶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면서 그녀가 그의 뭔가를 자극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 뭔가를 알고 싶었다. 그러면 루이스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두워지기 전에 목적지에 닿으려면 이제 움직여야 한다. 캐롤린은 복도에 있는 작은 욕실로 샤워를 하러 갔다. 그녀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덥지만 신선한 공기가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작은 탁자 옆에 서 있었는데 놀랍게도 샌드위치 접시와 얼음물이 가득한 항아리가 놓인 나무 쟁반이 탁자 위에 있었다. "으 음, 호텔 지배인이 왔다 갔군요" 그녀가 가볍게 물었다. 그가 돌아보더니 싱긋 웃고는 두 개의 컵에 물을 따르기 시작했다. "점심을 제대로 못 먹 었잖소. 그리고 스페인 사람들은 저녁을 늦게 먹는 습관이 있어서 떠나기 전에 가볍게 먹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았지" 항아리에서 컵으로 얼음이 떨어지는 소리가 그녀를 그쪽으로 이끌었다. 그 저항할 수 없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 그녀는 얼마나 목이 타는 지도 깨닫지 못했다. '고마워요" 그에게서 컵을 받아들며 그녀가 말했다. "치즈와 햄 밖에 안든 샌드위치지만 맛있게 먹어요" 그가 그렇게 권하고는 샤워를 하러 방을 나가자 혼자 남은 캐롤린은 시원하게 물을 마시면서 다시 한 번 방안을 주의 깊게 둘러봤다. 아까는 아주 유혹적으로 신비롭게 어두웠던 방안이 지금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다소 흥미로운 모습을 띠었다. 연한 녹색으로 칠해진 벽은 세월 의 때가 묻어 있었고, 광택이 나는 바닥에는 손으로 짠 두꺼운 융단이 깔려 있었다. 침대는 앉으면 쑥 내려가는 크고 오래된 두툼한 것이었고, 침대 양쪽 조그만 장식장 위에는 전후 수집 품 시장에서 상당한 돈을 주고 샀을 한 쌍의 탁상용 램프가 놓여 있었다. 직업은 속일 수 없다고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작은 탁자 옆에 놓인 낮고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았다. 사실 그녀는 전반적으로 이 방이 맘에 들었고 그 이유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루이스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마침내 깨달은 곳이고 그와 화해한 곳이기에 영원히 그녀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과거에 그녀를 어떻게 이용했든지, 지금 현재 어떻게 이용하고 있든지 간에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 그를 원하고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루이스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 않더라도 적어도 열정적으로 원한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살 수 있었다. 그 사실에 의지하며 살 수 있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다시 옷을 입자 그녀는 그에 대한 감정으로 배가 가볍게 떨렸다. 샌드위치를 집어들며 그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다지 호화로운 곳은 아니군"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래도 좋은걸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난 이렇게 약간 특이한 게 좋아요" "냉방시설이 잘 된 별 다섯 개 짜리 고급 호텔과 정 반대되는 곳이 말이지?" 그가 놀렸다. 그녀는 여전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엔 혼이 깃들어 있어요" 그녀가 설명했다. "어두운 벽장 속에 비밀이 숨겨져 있어요" 내 비밀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녀는 쓸쓸히 생각했다. "오랜 전 일들을 대한 얘기가 담겨 있어요, 가령 이 의자들이 그렇죠" 그녀가 컵을 집으며 말했다. "처음에 여기 앉았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이 멋진 책상에 잉크를 엎지른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그녀는 애정이 깃 든 손길로 검은 얼룩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겨 말했다. "여자였을까요? 숨겨둔 애인에게 작별의 편지를 쓰다 눈물이 앞을 가려 잉크병을 엎지른 걸까요? 아니면 남자였을까요? 멋진 소설을 쓰는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방심해서 잉크를 쏟은 걸까요?" "그건 고급 호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루이스가 냉담하게 지적했다. 하지만 캐롤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호텔에서 탁자에 잉크를 엎지르며 눈 깜짝할 사이에 새것으로 교체해 놓을 거예요. 거기엔 혼이 없어요, 루이스" 그녀가 현자처럼 말했다. "전혀 혼이 없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오래된 걸 좋아하고, 특히 흠이 있는 걸 더 좋아한다는 말이로군" 그가 미소를 지었다.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요?" "때로는 오래되고 흠이 있는 걸 좋아하죠" 그녀가 바로잡았다. "사연이 있다면 새것도 좋아해요. 흥미로운 걸 좋아하죠" 그렇게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 같았다. "우리가 지금 가려는 곳이 흥미로운 곳이라는 건 장담할 수 있을 것 같군" 캐롤린은 충동적으로 탁자 너머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지 말아요, 루이스" 그녀가 애원했다. "망치지 말아요" 그가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는 그녀의 손을 흘끗 내려다봤다. 잠시 돌처럼 굳은 표정을 짓던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번엔 그가 그녀의 손을 감싸쥐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입술에 닿은 그의 입술이 사과한다는 듯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녀가 더 깊게 몰아붙이려 하자 그가 물러서며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젠 정말 가봐야 하오" 거의 완벽한 화합을 이루었던 오후가 끝났다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 8 로스 아미노스를 뒤로하고 그들은 또다시 20마일 가량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처음엔 불규칙적으로 뻗은 평야에서 구불구불한 산들로 바뀌나 싶더니 지금은 더욱 울퉁불퉁한 지형으로 변해 나무가 울창한 산악지대로 나타났다. 그들이 달리고 잇는 도로도 한 쪽은 산이고 반대편은 깊은 협곡으로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갈 때는 차 한대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이 좁아졌다. "얼마나 더 가야 돼요?" 끝없이 올라가는 기분이 들자 캐롤린이 물었다. "다음 골짜기요"루이스가 또다시 긴장이 되는지 턱에 힘이 들어가고 운전대를 꽉 움켜잡고 있는 손마디가 하얘졌다. 그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녀는 속으로 해석했다. 그를 증오하고 원망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산 공기가 갑자기 싸늘해지면서 불길한 분위기가 감돌아 그녀는 팔에 돋은 소름을 문지르며 작게 몸서리를 쳤다. 루이스가 차안에 난방 스위치를 누르며 말했다. "스웨터를 가져올 걸 그랬소" "이런 곳으로 가는 지 알았으면 챙겼을 거예요" 그녀가 쓸쓸히 미소를 지었다. "뒷좌석에 자동차 시트로" "괜찮아요" 하지만 루이스는 전혀 괜찮지 않아. 그녀는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높이 올라갈수록 그는 더 긴장했다. "아량을 베풀어 모든 걸 이복 형제에게 넘기고 그냥 떠날 수도 있잖아요" 그녀가 조용히 제안했다.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오" 그가 단언했다. "그가 모든 걸 가지고 누리는 동안 당신은 아무것도 없었던 세월에 대해 그에게 빚을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에서요?" "단지 그게 좋은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오" 지금 그녀가 지극히 위험한 동물을 자극하고 있다는 걸 경고하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그 암시를 받아들여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이제 산봉우리 사이를 지나고 있었는데 여전히 한 족으로 바싹 붙어 달리고 있었다. 정말 골짜기에 빨리 도착하지 않으면 산비탈로 떨어지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잖아? 그러더니 정말 갑자기 그렇게 됐다. 심한 커브 길을 달리는가 싶더니 드디어 그곳이 나타났다. 캐롤린이 지금까지 몬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오, 루이스" 그녀는 작은 소리로 탄성을 질렀지만 그는 긴장감 때문에 몇 초간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다가 차를 세웠다. 그리고 둘은 그대로 앉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압도당해 그저 바로 보기만 할 뿐이었다. 발레 데 로스 안젤레스..... 그곳이 틀림없어, 캐롤린은 확신했다. 늦은 오후 햇살이 녹음이 울창한 경사면으로 내리 쬐어 골짜기에 있는 모든 것을 마술의 손길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아주 완벽한 순간을 그들은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발그레한 흰색 건물들이 마을 광장 중앙에 있는 작은 성당 주위로 늘어서 있었다. 거기서부터 골짜기와 평행을 이루며 완만한 시내가 굽이 돌고 있었고 그 옆으로 폭이 좁은 흙 길에는 나란히 과일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동화에나 나오는 흰 담 장에 빨간 지붕의 성이 있었다. "완벽해요" 캐롤린이 속삭였다. 루이스는 그녀의 목소리에 멍한 상태에서 깨어난 듯 몹시 경직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기어를 넣어 다시 차를 출발시킬 뿐이었다. 여전히 그에게는 긴장감이 감돌아 캐롤린은 잠자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골짜기로 내려가는 건 올라갔던 것처럼 머리끝이 쭈뼛해지는 경험은 아니었다. 무척 울창하고 푸르고, 비옥하여 열매가 맺히는 모든 관목과 나무가 잘 자라고 있는 것이 놀랄 일도 아니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마을로 내려왔다. 마을을 통과하는 일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사람들이 산책을 하거나 이웃들과 한가로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놀고 잇는 아이들 주위로 개들이 돌아다니며 짓고 있었다. 다른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느낌이었다. 이곳의 모든 게 현실 같지 않았다. 검은 눈에 검은머리의 사람들과 그들의 순결한 흰색 집들이 그랬다. 그리고 두 사람이 지나가자 모두가 멈춰서 빤해 쳐다보는 것도 비 현실감을 더해주었다. 오, 이런, 이들은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어! 캐롤린은 깨달았다. 아니면 적어도 루이스가 누구인지. 햇빛이 내리쬐는 차창 안으로 루이스의 단호한 얼굴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을 지켜보자니 그녀는 목덜미의 솜털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당신을 백작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예요?" 그녀가 긴장된 분위기를 좀 풀어보기 위해 물었다. "바스케스 가의 서자라고 부르는 게 어떻겠소?" 루이스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루이스가 스스로를 바스케스가의 서자라고 생각하느라 바빠 저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자기를 보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야위고 거뭇하고 오만한 루이스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같은 동족임을 뚜렷이 나타내는 매끄러운 검은머리와 올리브빛 피부와 짙은 갈색 눈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비웃거나 적대시하거나 경멸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냥 호기심 어린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람들에게 그녀는 얼마나 낯설겠는가? 그녀도 흰 피부와 금발과 자수정색 눈을 지닌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그들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조금도 낯익은 구석이 없을 것이다. 차는 마을 광장을 지나 성당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성당 출구에 검소한 검은 의상의 신부가 보였다. 키가 무척 크고 몹시 마른 체구에 부스스 헝클어진 백발이 주름진 얼굴 주위를 덮고 있는 신부는 캐롤린이 속으로 뜨끔할 만큼 지나가는 그들을 엄숙하고 강렬하게 지켜봤다. "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나요?" 숨막히는 작은 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그렇소" 루이스가 대답했다. "그럼 잠시 차를 세워 신부님께 인사라도 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질문엔 질책과 걱정이 담겨져 있었다. 그녀로서는 이곳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루이스도 그를 짓누르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극복하고 나면 누구와 감정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완강히 광장을 가로질러 호기심 어린 표정의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시련 속을 뚫고 지나갔다. 마을을 벗어나 잘 손질된 과수원 길로 들어섰을 때도 그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오렌지 나무, 레몬 나무, 복숭아와 살구나무, "어떻게 이런 곳이 파산할 수 있어요?" 그녀는 새삼 감탄하며 의아해했다. 생명이 줄 수 잇는 모든 것을 풍부히 갖추고 있는 곳이었다. '전 주인의 사치 때문이지" 루이스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아버지 얘기를 하는 것이리라. "누구도 이런 것을 소유할 순 없어요" 그녀가 반박했다. "단지 이곳을 돌볼 책임이 있는 관리인일 뿐이에요. 그리고 명예와 특권의 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관리권을 잃어도 할 말이 없 구 요" "영지에서 태어난 진짜 마님처럼 얘기하는군" 루이스가 놀렸다. "아무래도 하찮은 손실을 줄이고 모두 당신에게 넘기든지 해야겠는걸" "맘대로 놀리세요, 백작님. 하지만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거 예요" "설교 끝났소?" 루이스가 딱딱 거 렸 다. "그래요" 왜 그와 이렇게 다투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힘없이 하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이 남자는 자기 관점에 맞지 않는 의견에는 어떤 것에도 무신경했다! "끝났어요" "다행이군. 이제 도착한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은데...." 뜻밖의 고백들 중에서도 가장 그녀의 급소를 공격한 말이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안면 근육이 굳어지는 걸보고 자동적으로 그가 보고 있는 곳을 쳐다봤다. 그러자 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떨리다가 딱 멈추는 걸 느꼈다. 두 사람이 실전을 벌이는 동안 과수원을 벗어나 비밀 장소인 듯 보이는 성을 에워싼 담과 이어진 넓은 아치 길을 지나고 있었다. 그녀는 한번도 이런 것을 본적이 없었다. 산 위에서 봤을 때도 무척 근사해 보였지만 이렇게 가까이서보니 성은 지는 햇살에 발그레해 보여 너무도 황홀했다. 극적으로 아름다웠다. 지금 통과하고 있는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정원마저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자갈이 깔린 넓은 안뜰에 원형 연못 안으로 물을 내뿜는 포세이돈 상이 성으로 들어가는 큰 아치 현관을 지키고 있었다. "큰돈을 들인 쓸모 없는 대 건축물이네요" 캐롤린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흐 음?" "성이 말예요. 보기와는 다르다 구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그의 얼굴에서 그 지독한 긴장이 다소 풀렸다. "주위를 둘러봐요. 이렇게 골짜기 밑에 요새를 세울 필요가 전혀 없잖아요. 산맥 자체가 유일한 보호책이에요. 그것을 지키고 싶었다면 저기다 세웠어야죠. 우리가 지나왔던 산에. 그녀는 성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이건 누군가의 괴상한 자존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지어진 거예요. 큰돈을 들인 쓸모 없는 대 건축물이죠"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그녀가 되풀이했다. "하지만 아름답긴 하네요"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사치와 낭비로 이곳을 파산시킨 책임이 있다해도 적어도 이 멋진 집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고 그녀는 속으로 덧붙였다. 이젠 루이스의 집이지. 너무 많은 문화가 결합된 아주 복잡한 인물이라 자신의 진짜 자아를 숨겼던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우린 지금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소" 루이스가 중얼거렸다. "으 음" 캐롤린이 대답했다. "알아요" 그녀는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살을 꿰뚫은 듯한 시선을 느꼈다. "이제 어쩔 거예요? 문을 두드리며 내가 여기 주인이라고 주장할거예요? 아니면 교양 있게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기다릴 건가요?" 그녀가 가벼운 농담을 하는 동안 포세이돈 상 뒤에 있는 큰문이 열려졌다. 그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곁으로 가서 섰다. 그러는 동안 작고 마른 체구의 나이든 남자가 그들을 만기는 건지, 아니면 성의 신성한 밀실로 마지못해 들여보내는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문에 나타났다. "때가 된 것 같네요" 캐롤린이 조용히 말했다. "그런 것 같군" 루이스가 동조하며 정신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듯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긴장하고 불편해하는 모습은 사라지고 무자비한 루이스 바스케스로 다시 돌아온 걸보고 안심이 되었다. 그들은 함께 분수를 돌아 문을 향해 걸어갔다. 검은머리를 살짝 숙여 남자가 중얼거렸다. "어서 오십시오, 세뇨르. 세노리타" 전혀 억양이 없는 목소리였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남자는 한쪽으로 물러서 두 사람을 먼저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뒤로 문이 조용히 닫히고 그들은 2미터가 넘는 넓은 계단이 버티고 있는 참나무와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현관 앞에 도착했다. 거친 회반죽 벽이 부드러운 복숭아 색으로 칠해져 자칫 황량해 보이기 쉬운 풍경에 그나마 온기를 주었다. 캐롤린이 살짝 파르르 떨자 곁에서 루이스가 그녀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그는 넓고 화려한 자리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주위 환경 속에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이건 그의 과거와 현재가 정면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루이스와 같은 입장에 처해 본적이 없는 그녀조차도 이 순간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예민하게 의식되었다. 하지만 노인에게 말을 걸 때 그의 목소리는 잔잔한 물결처럼 매끄럽고 차분했다. "당신은?" 한 마디 한마디 귀족 백작다운 말투로 그가 물었다. 지금 그의 기분을 아는 캐롤린으로 서는 그가 자랑스러웠다. "페드로입니다. 이곳의 집사죠" 노인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의 말투에는 경의가 담겨 있었다. 그 개인으로서는 바스케스가의 서자인 루이스를 비난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럼 절 따라오시죠" 집사가 앞장서서 광택 나는 석조 바닥을 걸어 계단을 지키고 있는 두 벌의 갑옷을 지나갔다. 현관 주위에 전문적 수준의 골동품들이 산재해 있어 캐롤린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루이스가 그걸 눈치챘나 보다 "당신이 좋아하는 혼이 많은 것 같지?" 그가 느릿하게 물었다. "흥미로운 것들이에요" 그녀가 생긋 웃으며 응수하고는 페드로가 거대한 나무문을 열어 그들에게 안으로 들어가라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루이스 곁으로 좀더 가까이 다가섰다. "세뇨르 루이스 바스케스와 세뇨리타 뉴베리입니다" 누군지 몰라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집사가 알렸다. 캐롤린은 그들이 도착한 후로 집사가 루이스를 한번도 백작으로 부른 적이 없다는 걸 눈치챘다. 루이스도 눈치챘겠지만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의 표정은 편안했고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손길은 확실했다. 안에는 거대한 석조 벽난로가 한쪽 벽면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고 옆에는 한 여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아름답게 장식된 응접실로 들어서는 그의 발걸음은 평소처럼 우아했다. 검은머리, 검은 눈에 마르고 작은 체구의 여인은 은회색 실크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루이스를 응시하며 짓고 있는 표면만큼이나 완고했고 루이스 역시 냉담하게 여인을 노려봤다. 페드로가 조용히 물러간 뒤로 두 주인공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살피고만 있었다. 끔찍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고 캐롤린은 숨도 제대로 못 쉬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여인이 말을 꺼냈다. "콘수엘라 이모" 루이스가 딱딱하게 말했다. 캐롤린은 얼굴이 찡그려지는 걸 겨우 참았다. 이모? 루이스는 왜 이 여인을 이모라고 부르는 거지? 굳이 따지자면 그에게 계모가 되는 것 아닌가? "아버지를 닮았구나" 여인이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우리 어머니를 닮았구요. 제가 마지막으로 봤던 제 어머니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온몸이 오싹해질 만큼 가시돋친 냉혹한 말이었지만 캐롤린의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말이기도 했다. 이 여인은 루이스의 어머니의 동생이었던 것이다. 그가 돌연 그녀의 손을 세게 움켜잡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 30여 년 전 이곳에서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 불화와 재산 문제,. 그가 말했던 게 문득 떠올랐다. 그러자 그녀는 그 옛날에 있었던 일이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두 자매와 한 남자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얽힌. 여인의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지만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세레나 언니는 공상을 쫓는 바보였어, 루이스" 그녀가 응수했다. "언니가 어리석게 외면한 걸 내가 잡았다고 해서 날 비난할 생각은 말거라" 그 순간 캐롤린은 손가락이 으스러지는 것 같아 움찔했다. 루이스나 난폭한 행동을 할까봐 두려워 그녀는 얼른 말을 꺼냈다. "절 소개 시켜줘요. 루이스" 그녀가 가볍게 재촉했다. 잠시 그가 무시하고 있더니 쌀쌀하게 응했다. "캐롤린, 이쪽은 우리어머니의 동생이자 내 아버지의 미망인인 콘수엘라데 바스케스요" "안녕하세요" 그녀는 굳은표정의 이모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곳에 오게 되어 정말 기뻐요. 성이 너무 아름다워요. 그렇죠? 하지만 그렇게 오래 되지 않은 건 같네요" 그녀는 자신이 멍청한 금발 아가씨처럼 떠벌리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싸늘한 적대감을 덮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11세기 건축물로 보였는데 대략 추정해보니 16세기 정도밖에 안 된 것 같네요" "17세기죠" 또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떤 여인을 두고 강력한 경쟁자가 저택으로 그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자 홧김에 우리 선조께서 이 골짜기로 와 인상적인 건물을 짓고는 그 여인의 여동생과 결혼해 버렸죠. 우리 집안에서는 역사가 반복되는 습관이 있죠. 곧 아시게 되겠지만" 그녀를 혼란에 빠뜨린 낯익은 음성에 이어 큰 키에 거뭇한 피부의 무척 매력적인 남자가 응접실 한쪽에서 나타나자 캐롤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는 놀란 표정의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더니 루이스를 완전히 무시한 채 처음 만났을 때 만큼이나 캐롤린을 불쾌하게 만드는 그 경쾌하고 자신있는태도로 다가왔다. "펠리페 데 바스케스입니다"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뭐든 분부만 하세요. 뉴베리양" 마르벨라에 있는 루이스의 호텔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남자였다. "서로를 소개할 시간은 없었죠?" 그가 느릿한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세뇨르" 그녀가아는 체를 했다. 그리고 몸에 밴 예절로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서늘하고 매끄럽고 몹시 은근하게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 "펠리페라고 불러주시죠. 조만간에 친척이 될텐데......" 본능적으로 루이스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손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었고 그녀는 그의 곁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섰다. 이상하기는 해도 그녀는 루이스의 으스러질듯한 손길과 그의 이복 형제의 가벼운 손길을 비교하면서 어느쪽이 더 안전하게 느껴지는지알았다. "펠리페" 그녀는 공손히 아는체를 ㅎ고는 그 순간을 이용해 그에게 잡힌 손을 빼 루이스 가슴에 갖다댔다. 누구도 루이스마저도 놓치지 않았을 만큼 친밀감을 과시하는 분명한 선언이었다. "루이스, 정말 우연이지않아요?"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저번에 당신 이복 동생을 호텔에서 만났는데 당신친척인 줄은 전혀 몰랐네요" "그렇군" 루이스가 느릿하게 말했다. "정말 우연이군" 너무 조용하고 매끄럽고 느릿한 말투여서 실감이 나지않았다. 그녀는 루이스를 그의 습성을 화가 날수록 그가 더 조용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펠리페가 그걸 알아챘나? 그의 검은 눈이 마침내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이복형의 눈과 마주치는걸 지켜보며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드디어 이렇게 만났군" 펠리페가 유감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그 말이 캐롤린의 명치를 가격했다. 분명 호텔에서 서로가 거기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소 예측할 수 없는 혼란한 감정이 세 사람을 에워싸자 방안 분위기가 돌연 아주 복잡해졌다. 짙은 냉랭함과 약간의 호기심이 있었다. 두 남자가 조심스럽게 상대의 가치를 가늠하는 형제간의 경쟁이 불붙으면서 서로데 대한 ㄱ적의가 있었다. 그녀는 짧은 침묵의 전투에서 누가 이길지는 장담할 수 없엇지만 누가 지배의 우치에 잇는지는확실이 알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 쓴웃음을 살짝 지으며 펠리페가 이복형의 우위를 인정했다. "앞으로의 20년이 지난 20년보다 더욱 예기치 않기를 빌겠소" 그런 말을 하다니 그의 어머니마저도 놀라 숨을 몰아쉴 만큼 노골적으로 잔인한 짓이었다. 캐롤린도 그렇게 느꼈으니 루이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의 셔츠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이 달려들려는 난폭한 야수를 달래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루이스는 소리내어 웃었다. "아무렴 그래야지" 그가 동의했다. "아니면 이곳은 큰 곤경에 처할지도 모르니까.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맞받아치는군. 칼로 베고 찌르고. 이번엔 루이스가 이겼어. 거물 사업가다운 힘차고 서늘한 말투로 그가 말을 이었다. "다음주에 있을 우리 결혼식 전에 이곳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말이지. 우선 성을 둘러보고 구식 결산을 좀 해보도록 할까?" 9 캐롤린의 방은 골짜기를 향해 있었다. 창가에 조용히 앉아 밖의 풍경을 즐기고 있는데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주 짧은 순간 그녀는 대답하지 말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다. 끔찍한 며칠이었다. 혹시라도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지 않을 까 불안한 듯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는 시선들로 가득한 경계와 긴장의 나날이었다! 게다가 루이스는 그의 다국적 그룹에서 인수한 새 사업이라도 되는 듯 이곳에서의 책무에 몰두했다. 그는 조용하고 침착하고 냉정하고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사람들, 특히 집안 고용인들은 그를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좋은 인상을 주려고 작은 토끼들처럼 부지런히 집안을 종종거리며 바삐 움직였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루이스가 이곳에 가한 변화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건 사업이 아니잖아? 이건 가정이었다. 비록 아주 색다른 가정이라는 건 인정해야겠지만. 그러나 내 존재조차도 잊고 일만 하는 남자에게 뭐라고 충고할 수 있겠어? 루이스는 그녀에게 며칠 동안 말을 걸지 않았다. 뭔지는 몰라도 그녀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가 성의 현관에 있는 감옥처럼 단단한 것으로 무장하고 있어 그걸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녀가 루이스보다 먼저 이복동생을 만났다는 사실 때문에 화가 났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우연히 만남에 대해 물어봤었다. 아니, 괴롭혔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이었다. "어디서 만났소? 어떻게 만났소? 그가 뭐라고 했소? 그가 어떤 식으로 행동했소?" 그녀가 결국 화를 내며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이냐고 따지자 그는 그냥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5분 뒤 그녀는 그가 휴대폰으로 통화하여 마당에 서 있는 걸 봤다. 상대방이 누군지 몰라도 그의 성난 비난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방에서도 어둠 속에서도 그걸 알 수 있었다. 그 후로 그녀는 모두 함께 식당에서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를 볼 수 없었다. 둘은 심지어 각자의 방에서 잤다. 그게 단순히 시간이 멈춘 듯한 이 골짜기에서 전해 내려오는 구식전통이라면 그녀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때에도 그가 냉랭한 태도로 그녀를 대하자 가슴이 아팠다.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렷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일어나 문을 열어주러 갔다. 사슴 같은 눈을 지닌 어린 하녀였다. "실례합니다, 세뇨리타"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콘수엘라 마님께서 신부님이 아가씨를 뵈러 왔다고 전하랍니다" 신부님, 그녀는 낙담했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아브릴. 몇 분 뒤에 내려간다고 전해줄래요?" 루이스는 어딨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침울하게 방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나 루이스가 어디 있는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니 루이스가 어디에 없는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이 골짜기에는 없었다. 오늘 아침 일찍 헬기를 타고 이곳을 떠난 후로 그를 보지 못했다. 헬기 착륙장은 루이스가 일으킨 변화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는 도착한 다음날 아침 캐롤린이 일어나기도 전에 마을사람 열 명을 시켜 정원 한 쪽 구석에 터를 고르게 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이뤄낸 또 다른 일은 꼭대기에 세운 통신 탑이었다. 좋은 통신시설 없이는 다국적 그룹을 운영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자신의 사생활에는 그런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게 유감이었다! 그래서 캐롤린은 다음주에 있을 결혼식에 대해 전혀 아는 것도 없이 신부를 만나러 가야 했다. 루이스가 그 점에 대해 전혀 상의가 없었기에! 결혼할 당사자보다 신부님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걸 알면 신부님 눈에 좋은 인상을 남기기도 하겠다! 당신을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야. 루이스 바스케스, 그녀는 크림색 치마와 옅은 자주색 상의를 매만지며 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요즘 입기엔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고 생각했다. 런던을 떠날 때 그녀는 호텔에서 사흘 동안 머물 짐만 꾸렸다. 별장에서의 파티와 장거리 여행은 전혀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흥미롭긴 하지만! 신부는 정원을 향하고 있어서 집안 사람들이 즐겨 이용하는 작은 거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콘수엘라가 신부와 같이 있었지만 캐롤린을 도밍고 신부에게 소개시켜주고 난 뒤 거실로 나갔다. 사실 캐롤린은 콘수엘라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 사이에 남편을 잃고 아들이 모든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지난 30년 동안 그녀 것이었던 집에서 살 권리마저도 잃게 된 것이다. 루이스가 가하는 충격을 감수하여 그녀가 이곳에 남아 있는 태도는 캐롤린이 보기에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인격을 생각하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존심대로라면 냉혹한 조카가 모습을 나타내기 전에 은신처로 피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늘 차갑고 멀게 느껴지긴 해도 콘수엘라는 성 운영에 관한 루이스의 맹렬하고 때로는 모질기까지 한 질문들에 모두 답을 해줬고, 나머지 동산의 운영에 관해서는 더 잘알 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넘기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처럼 여기 남아 잇기는 해도 어머니와는 달리 끓어오르는 원한을 전혀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런 기분을 탓할 수많은 없었다. 법적 권리가 루이스에게 있을지는 몰라도 펠리페는 아버지에 대해 분노와 심한 배신감을 느낄 만 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그를 좀더 좋아할 수 있었으면 싶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중재자 역할을 해 이복형제 사이를 좀더 가깝게 만드는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뇨리타 뉴베리" 도밍고 신부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았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신부가 내민 손을 잡으며 캐롤린도 미소를 지었다. "어제 찾아뵈려고 전화를 드렸더니 안 계시더군요" "이곳 골짜기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갔었죠"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신도를 자랑을 하거든요. 전화를 받지 못해 유감이군요"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자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그녀는 신부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며 어색함을 감췄다. "마실 것 좀 갖다드릴까요?" 그녀가 제의했다. "차나 커피, 아니면 시원한 걸 드시겠어요?" 그러나 신부는 백발의 머리를 젓고는 몹시 야윈 손을 가볍게 흔들어 그녀에게 앉으라고 한 다음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캐롤린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본 성당 중에서 가장 예쁜 곳이었습니다" 그녀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따지자면 이 골짜기 전체가 그렇지만 요" 그녀가 온화하게 눈을 반짝이며 덧붙였다. "하지만 무척 고립돼 있지요" 신부가 지적했다. "그게 매력이기도 해요" 캐롤린이 이번에도 짓궂게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리고 무척 카톨릭 분위기가 나 구 요" 아, 눈빛을 흐리며 그녀는 생각했다. "그게 문제가 될까요?" 루이스는 어디 잇지? 이런 문제가 생길 줄 예상했어야 했잖아! 둥근 흰 칼라가 달린 깔끔한 검은 옷차림의 신부는 마르고 현자 같은 얼굴이었다. "아가씨에겐 문제가 되나요?" 신부가 마침내 되물었다. "신부님이 제가 개종하길 원하시면요"그녀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의 희생은 바라지 않습니다. 인습에 구애받지 않거든요" 신부가 싱긋 웃었다. "나른한 작은 골짜기이지만 말이죠" "다른 문제가 있는 거죠?" 캐롤린이 빈틈없이 파고들었다. 생각에 잠긴 신부의 얼굴에 쓰여 있었다. "있다면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진실성이 문제가 있죠" 신부가 천천히 중얼거렸고 캐롤린이 혼란스러워 얼굴을 찡그리자 그는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뉴베리양, 당신과 루이스씨가 진실하지 않을 수도 있는 실은 다소 불길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신성한 서약을 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불길한? 캐롤린은 그 단어가 마음에 걸려 눈살을 찌푸리며 깊이 생각하다 갑자기 신부가 무슨 말을 할지 몹시 경계되었다. "신부님 성당에서 행해지는 모든 결혼이 완벽한 연애 결혼이었다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건가요?" 사랑 없는 결혼을 팽하는 문화로 알려진 곳이 바로 스페인이기에 그녀가 물었다. "이번 경우에 제가 염려하는 건 루이스씨와 아가씨의 결혼입니다"신부가 조용히 대답했다. "두 사람은 불과 닷새 전에 만났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만나서 몇 시간도 안 돼 루이스씨가 당신의 결혼의사를 발표했고 아가씨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쓰러지셨다고요. 게다가 아가씨 아버님은 루이스씨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고 그게 이 결혼의 동기라른 얘기도 있고요" "누가 그러던 가요?" 신부의 말이 강한 일격으로 다가오자 캐롤린은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그녀의 자수정색 눈이 돌연 번뜩이는 걸로 나타났다. "제가 그런 소식을 어디서 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신부가 야윈 손을 내저으며 일축했다. "제가 염려하는 건 당신입니다. 세뇨리타" 신부가 설명했다. "당신이 어쩔 수 없는 이유로 결혼을 강요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에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지금 루이스와 제가 결혼하는 걸 맏아들이지 않겠다는 말씀이신가 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가 따졌다. 그녀는 두 사람의 진실성을 이런 식으로 신문 당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예절이 몸에 밴 신부 또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닙니다" 그가 부인했다. "루이스씨는 이 골짜기의 새 백작이십니다. 그분이 묶어서 데려온 여인과 결혼시켜 달라고 해도 전 그렇게 해야겠죠"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도 옛날 풍습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죠?" 이번에는 신부가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캐롤린은 그에 응해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녀가 냉랭하게 말했다. "신부님이 알고 계신 얘기는 잘못된 것이니까요" 그녀가 단언했다. "루이스와 저는 7년 동안 알고 지내온 사이거든요. 우린 7년 간 연인이었어요"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아주 진실도 아니었지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 점을 분명히 해두려는 그녀의 의도에 닥 맞는 말이었다. 그녀의 말이 신부를 확실히 놀라게 만들긴 해도 그를 당황시키진 못했다. "하지만 루이스씨를 7년 동안 사랑했나요?" 그가 받아쳤다. 사랑? 캐롤린은 속으로 되뇌며 냉소가 아니라 애처로운 미소를 희미하게 지었다. "전 항상 루이스를 사랑했어요" 그녀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도 저에 대해 똑같은 감정인지 물어보실 생각이라면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렇다면 묻지 않겠습니다" 신부가 즉각 시인하고는 사과의 뜻이 담긴 온화한 눈빛을 건네며 캐롤린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개인적인 일을 여러 가지로 참견한 걸 용서하세요. 하지만 그분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드리기 전에 당신이 루이스씨를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마지막 소원? 그녀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지만 신부는 탁자 옆에 놓여 있던 서류 가방을 집어들었다. "이제 아가씨께서 갖고 계세요. 이걸 소중히 간직하시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 갑자기 두려워졌다. "루이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면 신부님이 갖고 계시죠?" "그분을 지키려는 아가씨는 마음이 갸득 하군요" 신부가 여러 권의 얇은 대장을 내밀었다. "루이스씨가 보시면 마음이 상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분에게는 보여드리세요. 스페인어를 말씀하시는 것만큼 읽을 수도 있으시죠?" 신부가 불쑥 물었다. 캐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릴 때 거의 매년 여름을 이곳 스페인에서 보내 스페인어는 그녀의 제2의 모국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이것들을 읽어보시고 그분이 여기 적힌 것들을 모두 알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선 직접 판단하세요" 신부가 그녀에게 주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받고 싶지 않았다. 신부도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멈칫했다. "이건 루이스씨의 아버님 일기입니다" 신부가 알려줬다. "카를로스씨가 편찮으시기 오래 전에 저한테 맡기셨지요. 이걸 읽어보시면 왜 루이스씨가 모든 걸 물려받고 펠리페씨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는지 이해가 가실 겁니다. 그리고 왜 루이스씨가 처음부터 유산의 수령인이었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러니 받으세요" 그가 재촉했다. "이걸 읽어보시고 이해하세요. 부디 루이스씨를 위해서, 세뇨리타" 침울하게 신부가 그것들을 그녀에게 건넸다. 어쩔 수 없이 캐롤린은 받아들였고 일기장을 감싸쥐는 그녀의 손이 싸늘해졌다. 마음은 돌로 변해버린 듯했다. 이 상황을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일기들이 비밀스럽고 두려운 물건이라는 건 확실히 알았다. "읽어보겠습니다" 그녀가 약속했다. 신부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말없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별인사도 없이 그냥 돌아섰다. 그러나 문 앞에서 멈춰 서더니 거실 한가운데 서서 긴장된 흰 손가락으로 일기장을 움켜잡고 있는 그녀를 돌아봤다. "세뇨리타" 그가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루이스씨를 아신 지 7년이 되었다니 참으로 기이한 우연입니다. 그분이 이곳으로 와서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나기로 했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도 바로 7년 전이었거든요. 마음을 바꾼 이유가 결혼할 여인을 만나서라고 하더군요. 그 여인에게 구혼하는 일이 아버지를 만나는 일보다 더 중요했던가 봅니다. 전통대로 이곳 발레 데 로스 안젤레스 성당에서 그 여인과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 약속을 이제야 지키시나 봅니다" 신부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충격적인 새로운 사실에 그녀가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신부가 다시 돌아섰다. "그 일기를 읽어보세요, 뉴베리양.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는 것만큼 당신을 사랑하는 남자에 대해 알고 계세요" 그녀를 남겨놓고 거실로 나가며 신부가 충고했다. 몇 시간 뒤 그녀는 정말이지 이 일기를 읽지 말았더라면 싶었다. 바스케스 집안 전체가 그들의 옛날 풍습을 지켜 루이스의 인생에 개입하지 말았더라면 싶었다. 그녀는 일기장들을 자신의 방에 있는 커다란 참나무 옷장 꼭대기에 숨겨뒀다. 그리고는 오후의 열기가 가득한 밖으로 나가 비탄과 배신과 침울한 생각에 빠져 정원을 거닐었다.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죠> 펠리페가 그렇게 말했다. 루이스는 불화와 재산 문제라고 했다. 캐롤린 자신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그녀가 방금 일기를 통해 발견한 사실의 반만이라도 루이스가 알게 된다면.... 이 집안 사람들은 독이었다. 그러자 그의 고모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음식의 독을 감별하는 사람을 데려가게> 그가 충고했었다. 그 역시 이 아름다운 곳에 독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기를 통해 그녀가 얻은 유일한 소득이 있다면 신부의 말대로 7년 전 그녀에 대한 루이스의 의도가 진실이었다는 것이다. 산 위로 헬기 소리가 다가오자 그녀는 루이스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너무 당황스럽고 너무 혼란스러웠다. 오늘 알게 된 일에 대해 그에게 어디까지 말해줘야 할지....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결정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헬기가 착륙하는 걸 지켜보면서 그녀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가 땅에 방을 내딛자 수많은 감정들로 그녀는 가슴이 벅차오기 시작했다. 짙은 잿빛 양복에 눈부신 흰색 셔츠와 푸른색이 도는 회색넥타이 차림의 그는 진짜 사업 계의 거물로, 진짜 귀족으로 보였다. 야위고, 거뭇하고, 당당하고 오만한 그의 얼굴을 보면 20여 년 동안 말 그대로 겨우 먹고 살 정도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세상 근심을 다 떠 안은 사람처럼 음울해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바로 그런 경험을 하고 있기에 그 감정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의 모습이 보이자 그녀는 그를 만나기 위해 잔디밭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가 다가오는 걸보고 멈춰 서더니 마치 꿈이 이루어진 것처럼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평소처럼 시선을 감췄다.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다급하게 입을 맞췄다. 몸이 팽팽해지는 걸로 보아 그가 놀란 게 분명해. 그녀는 그가 자신을 밀어낼 줄 알고 잠시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그가 두 팔로 그녀를 단단한 그의 가슴에 으스러질 정도로 꼭 끌어안더니 그녀 못지 않게 맹렬히 키스에 응하기 시작했다. 여칠 동안 계속 어두운 곳에서 길을 헤매다가 그녀를 찾은 듯했다. 지금 이순 간 두 사람 사이의 다른 일들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그가 입술을 떼었다. 그녀는 그와 이렇게 입을 맞추며 영원히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찌푸린 그의 짙은 눈이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며 키스로도 없애지 못한 창백한 안색을 살폈다. "왜 그러오? 누가 당신을 괴롭힌 거요?" 캐롤린은 고개를 저었다. "보고 싶었어요, 그뿐이에요"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동안 너무 보고 싶었는데 당신은 그것도 모르는 것 같았어요" "알고 있었소" 그가 굵고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에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랬소" <이 모든 것>에 해당하는 동화 같은 성이 캐롤린에게는 아주 고뇌에 찬 성이 되어버렸다. "시간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녀가 거절했다. 노력하고 있지만 목소리에 스며드는 긴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리 잠시 이곳을 벗어나 있으면 안될까요? 저걸 타고 몇 시간만 라도 나가 있을 수 없을까요? 네?" "이곳이 맘에 안 드는군" 그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에요, 좋아요"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이 골짜기와 이 모든 것이 너무 싫으면서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냥 잠시 여기서 벗어나 있고 싶을 뿐이에요, 너무 지나친 요구인가요?" "아니오" 그는 그녀의 말이 사실이 아닌 걸 알기에 여전히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한 손으로 헬기 조종사에게 시동을 끄지 말고 대기하라는 지시를 했다. "어디로 가고 싶소? 마르벨라로?" 그가 제안을 했다. "그곳으로 가겠다면..." 그러나 캐롤린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아담한 곳이 있어요. 비밀 장소죠" 자신 있게 속삭이는 그녀의 눈빛이 감각적인 기대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침대가 있는 곳 이구 요. 냉방 장치도 없고 욕실은 복도에 따로 있 구 요. 하지만 아주 기막히게 서늘하고 버스럭거리는 풀먹인 면 시트가 침대에 깔려있고 냉담한 얼굴은 보이지 않는 곳이죠" 그는 그녀를 빤히 내려다봤다. 기다리는 동안 캐롤린은 숨이 가슴에 걸린 듯 했다. 동의할까? 거부할까? 그는 불길처럼 타올랐다가 금세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달려들었다가 금방 물러나는 사람이었다. 그가 침묵하자 긴장감이 그녀의 피부를 스멀스멀 타고 올라왔다. 그때 매끄러운 눈썹이 올라가더니 그가 놀리는 눈빛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음란한 주말로 날 초대하는 당신의 정숙한 방법이오?" 그런 식으로 표현하자 그녀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의 얼굴에 느릿한 미소가 떠오르는 걸보고 그녀 역시 생긋 웃었다. "그래요" 그녀가 인정했다. "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잇는 게 더 좋다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으니까..." 그가 검은머리를 뒤로 젖히고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지난 며칠 동안 가장 듣기 좋은 소리였다. 그녀의 가슴은 기쁨으로 부풀어올랐고 그는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은 채 그녀의 손을 잡고 대기중인 헬기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 다 그의 이복동생이 관목 숲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걸 알지 못했다. 그들이 헬기를 타고 이륙하는 걸 지켜보는 그의 눈에 악의에 찬 광채가 번뜩이는 걸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로스 아미노스 외곽에 있는 넓은 개간지에서 헬기를 내려 마을까지 손을 잡고 걸어갔다. 호텔 지배인은 그들이 문안으로 들어서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둘을 쳐다봤다. 과다한 금액의 돈을 보고는 그 동그란 눈이 아부하는 눈으로 변해 같은 방의 열쇠를 건넸다. "난 옷도 그때와 같은 걸 입고 있어요" 손을 맞잡고 계단을 오를 때 캐롤린이 루이스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때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고" 그가 놀리듯이 덧붙였다. 그리고 방문을 닫고는 손을 그녀에게 뻗었다. 그들은 그 날 밤 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주 열광적이고 매혹적인 체험으로 캐롤린은 잃어버렸던 연인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둘은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사랑을 나눴다. 그들은 마지막이라도 되는 듯이 서로를 만지고, 키스하고, 애무했다. 아주 뜨겁고. 진지하고, 강렬했다. "당신은 진짜 내 첫사랑이에요" 어느 순간 그녀가 조용히 고백했다. 졸음이 담긴 그의 눈이 어둡게 변했다. "그리고 당신도, 믿거나 말거나, 내 첫사랑이오"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남자라면 가족들에게 마지막 한푼까지 그렇게 철저히 빼앗는 잔인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녀는 슬프게 생각했다. 그 슬픔을 감추기 위해 거뭇한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는 그의 입술을 힘껏 자신의 입술 위로 끌어당겼다. 그들은 새로운 열정 속으로 빠져들었다. 넋을 잃을 정도로 강렬해서 오랫동안 뼈가 녹아 내리는 듯한 상태로 붕 떠 있었다. 마침내 눈을 뜬 그녀는 뺨을 그의 어깨에 기댄 채 그의 품에 파고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밖은 이제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무 얘기도 안하고 왔어요" 그녀가 지적했다. 크게 신경 쓰이진 않겠지만. "조종사에게 알리도록 했소" 그가 대답했다. "우리가 갈 때까지 기다리라지, 뭐" 골짜기의 영주다운 아주 오만한 말투에 그녀가 작게 킥킥거렸다. "우리가 다시 만난 뒤로 처음 들어보는 진짜웃음 소리 군"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뭘 개대했어요?" 뾰로 퉁 해진 그녀가 말했다. "날 협박하고 위협한 거나 다름없는데" 놀리는 말이었지만 루이스는 웃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이 어둡게 뭔가를 찾았다. "오늘밤은 당신을 위협해서 여기 온 게 아니잖소" "그래요" 그녀가 인정했다. 이번엔 그녀가 위협한 거였다. "오늘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달아나고 싶었는지 이제 말해주겠소?" 그러니까 성에서 그녀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걸 그는 알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내리고 그의 가슴 털을 쓰다듬는 자신의 손가락을 쳐다봤다. "손님이 왔었어요" 그녀는 사실대로 자백하기로 하고 말을 꺼냈다. 아니면 부분적으로나마. "마을의 신부님이요" 루이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뺨 밑에 닿은 그의 심장도 천천히 뛰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아주 조용하게 재촉했다. "그분은 우리 결혼이 진실한 것인지 알고 싶어 하셨어요"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를 결혼시켜주지 않겠다고 협박했소?" 똑똑하고 눈치 빠른 루이스. "아뇨" 그녀가 부인했다. "그분은 백작님이 묶어서 데려온 여자와 결혼시켜달라고 해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했어요" "그렇다면 요점이 뭐요?" 그녀는 작게 슬픈 듯한 한숨을 짓고는 일어나 앉아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조심스럽게 단어를 선택하며 그녀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골짜기에 어떤 소문이 떠돌고 있어서 우리 결혼에 대한 진실성을 확인하고 싶었대요" "소문?" 그가 되물었다. "으 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붓감으로 이곳에 데려오기 불과 며칠 전에 우리가 처음 만났다는 얘기 말이에요" "그래서 뭐라고 했소?" 이 대화가 시작된 후로 그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고 캐롤린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돌아앉았다. 루이스의 가장 나쁜 점은 자신의 생각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 얄미운 능력이었다. "신부님에게 그건 틀린 얘기라고 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7년 동안 서로 알고 지냈다 구 요. 그리고 거짓말을 약간 했죠"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우리가 7년 동안 연인이었다고...." "그러니까?" "당신 정말 이런 일에 능숙하군요" 고개를 돌려 냉담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그녀가 말했다. 매끄러운 두 눈썹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올라갔다. 그녀는 복근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 섹시한 남자야. 그녀는 무력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당신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도꼭지를 연상시켜요. 자신이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한결같이 쉬지 않고 질문을 던지니까요" "그러니까 신부가 뭐라고 하지?" 그가 반복해 물었고 검은 눈빛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돌렸고 사실대로 다 말해줄 수 없었기에 작게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신부가 다녀간 후로 내내 걱정이 되는 문제가 또 있었다. "내 생각엔 누군가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경고해 주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누군가 우리에 대해 골짜기에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있어요. 우리가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 같아요. 또 다른 소문은 당신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나를 샀다는 것이었어요. 당신과 나 말고 그걸 아는 사람이 누가 있죠?" "내가 그런 얘기를 흘렸을 거라고 생각하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라서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돌에서 피가 날거라고 생각 하냐구 요?" 그녀가 놀리고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내가 걱정되는 건가요. 루이스. 분명 누군가 우리를 염탐하고 있다는 거예요.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요" 그녀는 실제로 몸서리까지 쳤다. 그가 손으로 그녀의 떨리는 몸을 어루만졌다. "염탐자가 누군지 우리도 이미 알고 있잖소"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가 우리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릴 만큼 모질게 구는 이유가 충분히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가 작은 비밀 정도는 누설해도 내버려두는 수밖에. 본인은 당장 살아남기 위해 그러는 그니까....." 그는 펠리페 얘기를 하고 있었다. 굳이 이름을 밝힐 필요도 없었다. "알았어요" 그녀는 동의하며 더 할말이 있지만 너무 많은 걸 털어놓을 까봐 두렵기도 해 다시 그의 곁으로 파고들었다. "알았다고?" 그가 놀리듯이 물었다. "그게 다요?" "으 음" 그녀는 따뜻한 근육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러고 있는 게 너무 좋아서 골치 아픈 얘기로 망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지금은 훨씬 더 절박한 걱정거리가 있다구 요" 그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고 그녀는 자신을 흥분시키는 그 눈 속에서 웃음을 읽을 수 있었다. "쇼핑!" 그녀가 짐짓 나무라는 투로 외쳤다. "새 옷이 필요하다 구요. 사흘 치 옷밖에 안 챙긴 상태로 당신이 날 납치해왔기 때문 이예요! 그리고 장식이 화려하게 달린 아주 비싼 웨딩드레스를 사고 싶어요. 당신과 결혼해야 한다면 제대로 해야하니까!"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그들은 다시 사랑을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얘기를 나누는 것보다 더 좋은. 그들은 덮고 어두운 구식 호텔 방에서 사랑을 나누고 호텔 지배인의 열성적인 아내가 특별히 만들어준 파엘라(쌀, 고기 어패류, 야채, 등에 향을 가미한 스페인 요리)를 먹고 서로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가 그 상태로 깨어났다. 다음날 루이스는 그녀를 데리고 코르도바로 날아갔고 그곳에서 캐롤린은 부유한 쇼핑을 했다. 그녀는 기분이 좋았고, 들떠 있었고, 매혹적이었다. 루이스가 이따금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행동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면 캐롤린은 그에게 미소를 짓고, 입을 맞추고, 더 많은 돈을 요구하면서 질문을 못하게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의 일기를 읽는 동안 진짜 루이스 바스케스와 대면하게 됐다는 걸 어떻게 이 남자에게 설명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이제 그를 이해했고,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욱 깊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루이스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그녀는 견딜 수 있었다. 정말로, 그 일기들을 읽으면서 또 하나 배운 게 있다면 사랑은 주는 만큼 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10 골짜기로 돌아온 두 사람은 그들이 없는 동안에 일어난 또 다른 변화를 발견했다. 정원에 꼬마 전구가 장식되어 있었고, 성은 아주 깨끗이 청소해 윤이 났으며, 문안으로 들어서자 현관에 긴 연회 식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최선을 다하고 계시군" 모습이 보이기도 전에 어두운 복도 구석에서 느릿한 펠리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러는 게 버릇인 가봐. 캐롤린은 루이스에게로 좀더 가까이 다가서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가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결혼을 하려면 사소한 것도 간과해선 안되겠지" 펠리페가 빈정거렸다. "즐거운 장난도 빠뜨려서는 안되고" 날카로운 빈정거림이었다. 캐롤린은 그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무난히 받아넘겼다. "나한테 호텔 경영자로서의 기질이 있기 때문 일거야" 그가 미소를 지었다. "성공하기 위해서 내가 배운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멋진 파티를 여는 거야" "당신을 축하해주려고 고분고분 모여든 친척들과 함께 말이지" 펠리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철마다 주는 수당이 그들에게 하기 싫은 것도 하게 만들다니 정말 대단하구만" "너도 그래서 여기 남아 있는 거냐, 펠리페?" 루이스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네 수당을 챙길 필요가 있어서?" "나한테는 돈은 있어" 루이스가 아픈 곳을 찔렀다. "아버지가 날 완전히 곤경에 빠뜨리지는 않았거든" "그래, 시에라네바다에 있는 농장과 그걸 꾸려갈 재산을 남기셨지. 그럴 생각은 있는지 모르겠지만" "반면 당신은 이 모든 걸 갖게 됐지" 펠리페의 미소가 불쾌했다. "좀 압시다" 갑자기 그가 캐롤린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이번엔 자신이 그의 가시 돋친 말을 받을 차례라는 걸 감지하고 그녀는 즉각 굳어졌다. "당신 아버지와 루이스와의 카드게임이 어떻게 끝났소? 그걸 알고 싶어 못 견디는 사람이 아주 많은데" 카지노에서 루이스가 아버지에게 내기를 제안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게 틀림없어. 캐롤린은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느끼며 깨달았다. 이 질문에 답해 주길 청하듯이 그녀는 루이스에게 잡혀 있는 손을 비틀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더 꼭 잡았지만 놀랍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손을 들어 날카롭게 손가락을 한 번 퉁겼다. 예고도 없이 비토 마르티네스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크고 넓고 단단한 체격의 그가 루이스의 명령을 기다리고있었다. "캐롤린을 방으로 데려다 주게, 비토" 펠리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그가 지시했다. "그리고 내가 갈 때까지 거기 있도록" 캐롤린은 루이스가 펠리페에게 무서운 경고를 하고 잇다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비토를 따라가요, 펠리페와 난 좀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으니까" 그가 그녀의 손을 놓으며 조용히 말했고 그녀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녀는 그 자리를 떠나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두 남자가 싸울 것처럼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될까요?" 그녀가 비토에게 속삭였다 "얘기를 나눌 겁니다" 그가 간단히 대답했다. "난 저 사람이 싫어요" 그녀는 이 덩치 큰 남자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솔직히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없죠" 비토가 대답했다. 그뿐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루이스와 비토는 펠리페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비토는 그녀가 욕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도 방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는 그는 문 옆에 서 있었다. "루이스와 알고 지낸 지 아주 오래되었나봐요?" 그녀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홉 살 때부터 알고 지냈죠" 비토가 대답했다. 둘이 고아원에서 만났다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럼 친구겠네 요" "그가 한 번 내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죠." 비토는 그렇게 만 말할 뿐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누군가 이 남자의 목숨을 구해줘야 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아 캐롤린이 못 믿겠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데도. 그는 너무 크고, 모든 면에서 너무 확실해서 그런 위험에 처할 것 같지 않았다. 그때 쇼핑한 물건들이 도착해 그녀의 주의가 그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분 뒤 루이스가 도착했다. 루이스의 조용한 귓속말에 비토는 단호히 검은머리를 끄덕이며 방을 나가자 캐롤린은 몸서리가 쳐졌다. "내게 경호원이 왜 필요하죠?" 다시 둘이 남게되자 그녀가 물었다. "내가 어떤 위험에 처해 있나요?" "아니오" 루이스가 부인했다. "내가 살아 숨쉬는 동안 그런 일은 없소" "그렇다면 당신이 위험에 처해 있군요" 그녀가 그런 질문을 내렸다. "아무도 그런 일은 없소!" 그가 부인했다. "그럼 왜 경호원을 붙인 거죠?" 그녀가 고집스럽게 물었다. "호위한 거요" 그가 바로잡았다. "단지 분명히 해두기 위해 당신을 여기까지 호위하게 한 거였소, 됐소?' 아뇨, 안됐어요. 그녀의 표정이 루이스에게 그렇게 말했다. "좋소" 그가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펠리페는 결혼식을 막으려고 하고 있소. 그건 명백한 사실이오. 그러기 위해 어떻게 나올지 나도 장담 할 수 없소. 그러니 내 약점들을 보호할 수밖에" "내가 그 약점 중에 하나 구요" 갑자기 그의 얼굴에 아주 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 아주 지독한 약점이지" 그가 유혹적으로 속삭이고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꿈도 꾸지 말아요!" 한 손을 내밀어 그를 저지하며 그녀가 저항했다. "이 집에서는 안 돼요!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는!" 고개를 치켜들고 자수정색 눈을 도전적으로 빛내며 그녀가 덧붙였다. "당신의 인격을 믿겠어요, 백작님!" 그가 다시 한발을 떼자 그녀가 강조했다. 그러자 그가 멈췄다. 그녀는 실망한 걸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하지만 루이스는 벌써 눈치챘는지 미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금 당신을 건드리면 당신은 연기처럼 사라지겠지" 그가 조용히 자극했다. "지금 날 건드리며 아마 그럴 거예요" 그녀가 서운하게 시인했다. "그렇다면 건들지 않으리다" 그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이번에는 실망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의례지" 그가 설명했다. "이 집에서는 혼례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걸 상기시켜줘서 고맙소" 지난 24시간 동안 그녀 자신도 많이 변했지만 루이스 또한 많이 변했다. 지금 이 골짜기로 몰고 왔던 뻣뻣한 긴장감이 많이 사라져 지금은 매력적이고, 나른하게 풀리고, 아주 감각적으로 자극 받는 남자였다. 그 생각이 그녀로 하여금 그의 품으로 다가가게 만들었다. "그럼 순결한 키스만 허락할게 요" 그녀는 유혹적으로 제안하며 미끄러지듯 좀더 가까이 그에게로 다가섰다. "순결한?" 그가 놀렸다. "으 음" "가봐야 하오" 루이스가 마지못해 신음하는 소리로 말했다. 간다고? "어디로 요" "일하러" 시계를 들여다보며 그가 대답했다. 그리고는 돌연 실망스러울 만큼 기운차고 사무적인 루이스로 돌아갔다. "결혼식 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좀 있소. 어둡기 전에 떠나야겠군" "하지만 방금 도착했잖아요!" "날 탓하지 말아요! 내 일정을 24시간이나 늦춘 건 당신이니까! 아주 기분 좋은 24시간이었다는 건 인정해야겠지만" 그가 아쉽다는 듯이 덧붙였다. "하지만 이젠 그걸 만회해야지. 그러니 성당에서 만날 때까지 날 다시는 못 볼 거 요" "루이스!" 그가 문으로 걸어가자 그녀가 외쳤다. "당, 당신의 약점은 어쩌 구 요?" 그녀가 걱정스럽게 그를 상기시켰다. "비토가 남아있을 거요" 그걸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처럼 말했다. "원하는 게 있거나 문제가 있으면 그 친구를 찾아요" "당신이 그의 생명을 구해줘서 당신을 위해서는 뭐든지 다하나요?" 그 말에 그가 멈춰 섰다. 그는 돌아서 놀란 얼굴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친구에게 그런 말까지 하게 만들었소?" 정말 충격을 받은 목소리였다. "그것 참 처음 있는 일이군"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어떻게 한 거예요?"그녀가 물었다. "위험한 싸움에서 구해줬나요?" "아니오" 그가 부인하고는 돌연 얼굴에서 미소를 거뒀다. "그 친구를 감옥에서 꺼내 새 삶을 살게 해줬소. 그리고 그건 인정 때문이 아니었소, 캐롤린" 그가 침울하게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아. 그런 게 아니었어. "미안해요" 그녀가 잘못을 뉘우치며 중얼거렸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요일에 봅시다" 그가 떠나려했고 그녀는 안 좋은 기분으로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실은 그 사람이 좋아요" 그녀가 고백했다. "그가 당신에게 무척 충실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지만. 펠리페가 당신 호텔에 묵고 있는 줄도 몰랐죠?" 완전히 화제를 돌려 그녀가 물었다. "다른 이름으로 등록했더군" 루이스가 설명했다. "그리고는 나와 우리 아버지를 뒤를 밟았 구요"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고. 우리 아버지도 알고 있었어요. 그 말은 당신 주위에 첩자가 있다는 뜻이에요, 루이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고 있소.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소" "그렇게 되면 우리 아버지도 당신의 약점이 되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그렇소"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초조한 얼굴이 되었다. "아버지도 보호해 줄 건가요?" "물론이오" 그가 야릇한 표정과 어울리는 낯선 말투로 장담했다. "당신 아버지는 우리 결혼식 날 이곳에 안전하게 도착해 당신을 내게 인도해주실 거요. 그 점은 염려 말아요" 그리고는 그가 방을 나갔고, 혼자 남은 캐롤린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말을 믿고 안심해야 되는데 왜 이렇게 오싹한 기분이 드는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노크 소리에 정신이 들어 문을 열어보니 어린 하녀 아브릴이 서 있었다. "주인님이 쇼핑하신 걸 풀어보는데 돌아드리라고 하셨어요" 캐롤린은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어 반가웠다. 그녀와 아브릴은 보통 때라면 살 엄두도 못낼 유명한 디자이너 이름이 써진 상자를 차례로 풀어봤다. 루이스와의 결혼식 때 입으려고 고른 웨딩드레스 차례가 되자 두 여자는 숨죽인 기대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드레스가 옷장 벽에 걸리자 숨막히는 즐거움으로 변했다. "정말 아름다워요, 세뇨리타" 아브릴이 부러움 가득한 눈빛으로 탄성을 질렀다. 그래, 정말 아름다워. 드레스만큼은 혼자 그르겠다며 루이스에게 어디 가서 커피나 마시고 있으라고 내몰았던 걸 떠 올리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 자리를 떠나면서 그가 놀리며 투덜댔었다. 하지만 오로지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혼자 드레스를 고르겠다는 발상에 속으로는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캐롤린이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어린 하녀가 얼굴을 붉혔다. "아뇨,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며 저도 이렇게 멋진 옷을 입고 결혼식을 하고 싶어요" 하녀가 고운 레이스를 가볍게 어루만지자 캐롤린은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들러리를 해줄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지금에서야 방법을 찾기엔 너무 늦어 버렸지만. 주도 면밀한 루이스 바스케스 마저도 그 작지만 중요한 점을 놓친 것 같았다. "아브릴" 얘기를 꺼내면서도 부탁할 말을 가다듬으며 그녀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날 위해 아주 특별한 일을 하나 해주겠어요?" "물론이죠, 세뇨리타" 하녀가 즉시 대답했다. "내가 만약 결혼식 전에 예쁜 드레스를 구할 수 있다면 내 들러리가 돼 주겠어요?" 잠시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없어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오, 세뇨리타" 하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이세요?" 사슴 같은 눈이 갑자기 기쁨으로 반짝거렸다. "그럼요, 진실이에요" 캐롤린 역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곳에 나 혼자뿐이라는 걸 아브릴 도 알 거예요. 우리 가족과 친구들은 모두 영국 에 있어서 아버지가 오시긴 하겠지만 그 외에는 없어요. 누군가 내 옆에서 들러리를 서 준다면 멋지지 않겠어요?" "저로선 영광이죠" 어린 하녀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확답을 드리기 전에 콘수엘라 마님의 허락을 받아야 해요. " 그녀가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그래 야죠" 캐롤린은 하녀가 정말 허락을 받아야 할 사람은 루이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어볼 것도 없이 그의 대답을 알기에 캐롤린은 그 점을 문제삼지 않았다. "내가 청해 볼게요" 캐롤린이 말하자 아브릴은 한시름 놓는 표정이었다. "지금 당장 가서 부탁드릴 테니까 이것들을 좀 정리해줘요" 하지만 막상 루이스의 이모를 보니 이런 일을 벌이지 않는 건데 싶은 비겁한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거실에서 콘수엘라 부인을 찾아냈다. 여인은 창 밖으로 잔디밭에서 벌어지는 공사를 지켜보며 서 있었다. 슬프고, 외롭고, 고립된 모습이 엿보여 저 여인이 루이스 어머니의 인생을 얼마나 철저하게 망쳤는지 알고 있는데도 조금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이모 님" 그녀가 여인을 불렀다. 그녀는 캐롤린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자기만의 쓸쓸한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평소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때로는 루이스와 그녀가 한 가족이라는 게 너무 확연히 드러난다고 캐롤린은 씁쓸히 생각했다. "이모 님 의견을 듣고 싶어서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왜 정중한 부탁에서 의견을 듣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순간 콘수엘라와 루이스가 닮았다는 생각은 확실했다. 상처를 숨길 때의 루이스와 닮았다고 그녀는 슬프게 생각했다. "그럼요" 나이든 여인이 허락했다. "내 의견이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캐롤린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과 그 이유를 설명했다. 콘수엘라는 표정 없이 그녀의 얘기를 듣고만 있더니 짧게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착한 분이네요, 세뇨리타. 이렇게 감성적인 분에게 이 골짜기를 맡기고 떠나게 되어 안심이네요" "루이스도 신경 많이 쓰고 있어요, 아시겠지만" 캐롤린은 이런 대답은 예상 못하고 숨겨진 냉소만 찾고 있었기에 놀랐다. 콘수엘라의 미소가 쓴웃음으로 변했다. "알아요. 그리고 아브릴을 신부 들러리로 세우면 아가씨를 위해 완벽한 마무리가 될 거예요. 그렇게 하면 마을 사람들도 좋아할 거예요. 그 아이에게 내가 허락한다고 전해주고 집안 일은 안 해도 되니까 새로 맡은 역할에 전념하라고 해요" 그 동안에 당신은 뭘 하실 거죠? 캐롤린은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당신 집이었던 이곳의 어두운 구석으로 점점 더 파고들 건가요? "뭘 하실 거예요?" 그녀가 충동적으로 물었다. "여길 떠나시면?" 여인의 얼굴에 다시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루이스는 날 여기서 쫓아낼 생각이군요. 궁금했는데....." 캐롤린은 관여하지 말아야 할 영역을 무심코 건드렸다는 걸 깨닫고 오싹했다. "모르겠어요" 그녀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루이스는 저한테 가족 얘기는 안 해요" "그래요,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백작 부인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창 쪽으로 다시 돌아섰다. 누가 봐도 그만 나가 보라는 몸짓이었다. 비열한 인간이 된 기분으로 캐롤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비토를 찾았다. 정원에서 나무로 무도회장을 짓고 잇는 공사를 지켜보며 서 있는 그를 발견했다. "비토" 그녀는 그의 팔에 손을 댔다가 단단한 바위를 만지는 것 같은 촉감에 즉시 손을 뗐다. "내가 헬기를 좀 사용해도 루이스가 뭐라고 안 할까요?" "왜요?"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헬기는 왜 쓰시게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무 일 없어요" 그를 안심시켰지만 그녀가 말을 하고 있는 중에도 그의 눈은 사방을 두리번거렸고 먹이를 덮치려는 곰처럼 더 커 보였다. 아니면 새끼를 보호하려든 듯이. "심부름을 좀 시키려고요. 특별한 심부름이죠" 그러면서 그녀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결혼식 날 아침 식사를 막 마치고 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루이스의 헬기를 타고 도착했다. 아버지가 내리는 걸 본 순간 그녀는 벌떡 일어나 복도를 달려 밖으로 나가 잔디밭을 걸어오는 아버지를 맞이했다. "오, 아빠" 그녀는 흐느끼며 아버지에게로 달려들었다. "왜 그렇게 떠나셨어요?" "야단법석 떨지 말아, 캐롤린. 난 괜찮다니까!" 그녀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자세히 살펴보자 아버지가 화를 내며 나무랐다. "괜찮아 보이지 않으세요" 아버지의 변한 모습을 발견하고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는 더 마르고, 더 나이 들어 보여 그녀는 근심스런 한숨을 지었다. "대단한 곳이구나" 아버지는 일부러 화제를 바꾸었다. "이런 곳은 처음 보는구나. 산꼭대기를 지나 올 때는 정말 아찔했지. 7년 전에도 루이스가 이런 곳을 상속받을 줄 알고 있었나?" "아뇨" 그녀는 아버지와 눈을 맞추려 했지만 아버지는 완강히 팔 하나 정도의 거리를 두었다. "알았다 해도 그에 대한 제 감정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가 멍하니 덧붙였다. "저 좀 쳐다보세요?" 그녀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버지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눈에서 죄책감과 수치심과 고통을 보자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사랑해요, 아빠" 그녀가 숨막힌 소리로 말했다. "걱정 많이 했단 말이에요!" 아버지의 방어 벽이 무너졌다. 아버지는 거친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친구도?" 아버지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를 사랑하니?" "제 자신 만큼이나요" 그녀가 대답했다. "늘 그랬어요, 아빠도 아시겠지만" "그래, 나도 알고 있었지" 아버지가 침울하게 인정했다. "그래도 널 이런 지독한 궁지에 몰아넣은 건 미안하구나" "궁지가 아니죠" 그녀가 부인했고 아버지의 못 미더운 표정을 보고는 되풀이 했다. "궁지가 아니에요. 아빠. 루이스는 제가 원하는 사람이에요. 제가 늘 원했던 사람이라 구요" 아버지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제물처럼 그에게 주는 게 아니었는데" "전 제물이 아니에요!" 그녀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지금 루이스가 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녀는 화를 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발길을 돌려 그냥 가세요" "난 아무 뜻도 없었다" 아버지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 친구는 널 오늘 이 자리에 오게 하려고 두 번이나 철저한 시도를 한 셈이구나" 두 번? 캐롤린은 다시 등골이 오싹했다. "두 번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가 캐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버지가 푸념하듯이 말했다. "세상에 저게 누구야?" 갑자기 아버지의 놀라는 목소리에 그녀도 성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나한테 루이스와 아는 사이라는 얘기는 안 했는데" 저한테도 안 했어요. 캐롤린은 펠리페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자 순간 많은 것들이, 아주 많은 것들이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루이스의 첩자였던 것이다. 비록 본의는 아니었지만. 오, 아빠, 그녀는 한탄했다. 그리고 펠리페 쪽으로 가는 아버지를 불렀다. "조심하세요, 아빠. 그와 나누는 얘기에 신경 쓰시고 주의하세요?" "왜?" 아버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친구가 누군데?" "루이스의 이복동생이에요. 이 모든 걸 자기가 물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죠" 아버지는 재빨리 사태를 파악했다. 그의 나직한 욕설이 그걸 입증했다. 그때 헬기가 이륙하자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더 이상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자" 아버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에게 할 말이 있으니....." 캐롤린은 루이스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마을에 있는 작은 성당에는 바스케스 가의 사람들이 모두 모였고, 루이스도 이미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세뇨리타" 아브릴의 온화한 목소리에 캐롤린의 근심 어린 시선이 앞에 놓인 거울로 고정되었다 발목까지 오는 아이보리색 드레스가 아주 단순하면서도 감각적이었다. 코르셋 같은 몸통 부분은 그녀의 야윈 허리에 꼭 맞고 우유 빛 가슴 위까지 둥글게 깊이 파인 목선이 아름다웠다. 어깨 밑까지 살짝 내려온 소매는 신랑을 향해 걸어갈 신부에게 연약한 매력을 한껏 더해줬다. 마지막 마무리로 전신 길이의 면사포는 정교하게 다이아몬드가 박힌 관으로 머리에 고정돼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단순미 그 자체였다. 그녀의 스타일이고, 그녀의 분위기였다. 루이스,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자수정색 눈을 향해 말했다. 넌 이제 루이스와 결혼하는 거야. 하지만 7년 전에 넌 루이스를 오해하고 심하게 대했잖아. 아마 그는 너와 결혼하고 싶지 않을 거야. 루이스가 너에게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잖아. 그냥 누군가와 결혼할 필요가 있다고만 했지. 그녀는 근심 어린 자수정색 눈을 바라보며 상기했다. 일단 그가 유언의 법적 요구 조건만 충족시키면 네 곁을 떠나버릴까? 그녀는 속이 메슥거려 욕실로 달려가 토하고 싶었다. 그녀는 루이스를 알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남자인지 알기 때문에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전갈이 생각났다. 지금 바로 그녀 앞에서 공격할 것처럼 거울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세뇨리타?" 아브릴의 근심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캐롤린이 지금 엄청난 죄책감에 모든 용기를 다 잃을 지경이라는 걸 그녀는 알까? "세뇨리타...." 다정한 손이 그녀의 창백한 피부를 감쌌다. "떨고 계시네요" 어린 하녀가 걱정스럽게 속삭였다. "두려우세요, 세뇨리타?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녀가 위로했다. "백작님은 좋은 분이세요. 마을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하죠. 그분의 할아버지 안젤레스 씨를 연상시킨 데요. 그분도 좋은 분이셨대요. 강한 분 이 셨 대요" "괜찮아요" 캐롤린이 작은 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난 단지....." 그녀는 뭔가 바늘 같은 것이 살을 스치고 지나간 듯 다시 온몸을 떨었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정신을 가다듬고는 순백의 단순한 드레스를 입고 곁에 서 있는 어린 신부 들러리를 바라보았다. 황홀한 모습이었다. 검은머리와 사슴 같은 검은 눈, 아름다운 올리브빛 피부가 완벽하게 돋보였다. "괜찮아요" 그녀는 다시 한번 하녀를 안심시키며 미소까지 지었다. 아브릴도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한 시간 전에 정원에서 따서 직접 만든 아이보리색 장미로 된 작은 부케를 캐롤린에게 건넸다. 그녀의 아버지는 현관을 쉴 새 없이 오다가 처음 딸을 봤다. 아버지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녀가 계단을 내려오는 걸 지켜봤다. "세상에, 캐롤린" 아버지가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고 그뿐이었다. 나머지 말들은 그의 눈에 쓰여 있었다. 그녀는 마을까지 운전해줄 기사가 비토가 아닌 걸 알고 조금 당황했다. 비토가 거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기에 루이스의 검은 벤 을 모는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성당으로 들어서자 왜 비토가 그녀의 길을 지키지 않았는지 알게되었다. 비토는 루이스 곁에 서 있었다. 검은 턱시도 차림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루이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안도의 눈물로 그녀의 가슴이 벅차 올랐다. 넓은 그의 어깨에 흐르는 긴장은 이 순간이 그에게 중요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까? 그녀가 중요하다는 걸 뜻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그녀를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장내가 술렁거렸다. 그런 분위기에 그도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것은 긴 예식동안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일생을 함께 할 유일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었다. 아버지에게서 그녀를 인도 받는 그의 손이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하객들이 숨도 쉬지 않는 동안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서약을 했다. 그리고 루이스가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줄 때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반지와 정교하게 조각된 금반지가 두 손가락에 끼워졌다. 보통 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 어머니의 반지였다. 그녀는 강렬한 그의 검은 눈을 바라보았고, 루이스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속삭였다. "울지 말아요" 그때 도밍고 신부가 말했다. "신부가 루이스씨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나면 식을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성당 밖에까지 마음 사람들이 두 사람을 축복해 주기 위해 모여 있었다. 캐롤린은 결혼 이상의 의미로 그와 결합되어 있다는 듯 루이스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미소를 지으며 비토가 작은 체구의 아브릴 옆에 산처럼 버티고 서 있는 것을, 아버지가 다소 음울하고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잇는 것을 보았다. 침착하고 꼿꼿하게 선택된 운명의 희생자처럼 모든 것이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을 지켜보며 서 있는 콘수엘리 부인도 보았다. 하지만 펠리페는 보이지 않았다. 흰 리넨이 깔려있고 도자기 그릇과 은 식기로 차려진 연회석 테이블에 도착해서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루이스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식탁에 앉은 지금도 둘은 식탁 밑으로 서로 깍지를 끼고 있어 한 손으로 식사를 해야 했다. "이거 고마워요" 프리즘처럼 반짝이는 어머니의 반지를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 어머니 반지라야 하는데" 그 역시 반지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 어머니 반지가 없어서 장인께 장모님 반지를 부탁했지. 당신 손가락에 맞춰서 마르벨라로 직접가지고 오셨더군" "고마워요"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이것으로 모든 게 완벽해졌어요" "아니지" 루이스가 정신을 아뜩하게 만드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당신으로 인해 모든 게 완벽해졌지" 그러면서 그가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위해 박수를 치지 시작했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자 정원은 반짝이는 불빛으로 환했다. 작은 악단이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임시로 만들어진 무도회장에서 루이스가 그녀를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결혼식을 올린 후로 손을 꼭 잡고 있었던 걸 빼고는 두 사람이 가장 가깝게 밀착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걸 둘 다 느끼고 있는 게 확실했다. 자극적이고, 감질나고, 완전히 최면에 걸린 듯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뺨에 스치더니 그대로 있었다. "오늘 정말 아름답소. 성당에서 내게로 걸어올 때 가슴이 저릴 정도였소" 그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를 보려고 고개를 젖히는 그녀의 눈 속에 별빛이 가득했다. "아버지와 얘기를 나눴어요"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7년 전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버지가 말씀해 주셨어요. 난...." 그때 그녀는 순간 놀라 말을 멈췄다. 그녀를 안고 있는 남자가 갑자기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경직된 그의 눈에서 노기의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루이스" "그만해요" 그가 말을 끊었다. "나하고 한 약속을 어기고 그런 얘기를 하신 그분에게 화가 나오. 하필 오늘밤에 그런 얘기를 꺼내는 당신에게도!" "하지만 당신은 아버지에게서 한 푼도 받지 않았잖아요!" 꼭 해야 할 말이었다! "매일 밤 잠든 나를 침대에 남겨놓고 다른 사람과 내기를 못하도록 아버지와 카드놀이를 했죠. 내가 아버지를 무척 걱정하는지 알고, 아버지를 위험에서 지키는 임무를 당신이 대신 맡은 거죠! 당신에게 너무 큰 빚을 졌어요, 루이스!"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빚진 게 없소" "당신에게 사과할 빚이 잇죠" 죄책감이 밀려들자 그의 품에서 떨기 시작하며 그녀가 말했다 "당신을 사랑했어요. 아버지 돈을 뺏으려는 그런 지독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그런데 당신 대신 아버지를 믿었으니.. 아버지가 거짓말쟁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예요! 당신이 날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해도 할 말이 없어요!" "내가 화내기 전에 그만해요. 캐롤린" 그가 경고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화가 나 있었다. "당신은 아버지가 수천 파운드를 따게 내버려뒀어요 전에 당신에게 잃었던 만큼의 돈이라고 하시더군요! 지난주에 당신과 게임을 하고 싶어 안달이셨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어요" 그녀가 씁쓸히 말했다. "아버지는 다시 한번 쉬운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하신 거죠" 그는 그녀에게 세게 한대 맞은 것처럼 울찔 했다. "난 그런 뜻이 아니에요!" 사과하는 의미에서 그의 팽팽한 뺨에 손을 갖다대며 그녀가 신음하는 소리고 말했다. "루이스" "그만해요" 그가 말했다. "이런 얘기는 하지 말아요. 지금도, 앞으로도, 알겠소?"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치우더니 뒤로 물러나 돌아서 그 자리를 떠났다! 다행히도 바로 그때 음악이 멈췄다. 루이스의 절묘한 타이밍 감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고모부 피델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그 후로 다른 친척들과 춤을 추는 동안 캐롤린은 그를 보지 못했다. 마침내 그녀가 무도회장에서 벗어나 그를 찾아 나섰다. 무도회장 주변은 꼬마 전구 불빛 때문에 환했지만 그 너머로는 아주 캄캄했다. 정원에 있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를 찾을 수가 없어 그녀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복도를 지나가는데 웨이터가 한 명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백작부인" 그가 공손히 인사했다. "어디 있어요?" 그녀가 다급하게 물었다. "담 바로 너머에 세워둔 차안에 계시겠다고 했습니다" 차안에? 지금 왜? 담 너머에 세워둔 차들 쪽으로 걸어가며 그녀는 생각했다. 또다시 그녀를 납치해 어디론가 데려가려는 것일까? 글쎄, 루이스가 그걸 벌로 생각했다면 깜짝 놀라게 될 걸, 그녀는 게임에 대한 흥분이 전신을 휘감기 시작하자 입술에서 불안감이 사라지고 대신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많은 차들 가운데 그의 차만 유일하게 시동이 걸려 있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루이스의 어둑한 형체를 보고 그녀는 조수석의 문을 열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주 스릴 있고 은밀하네요, 루이스" 그렇게 놀리며 그녀는 분주히 드레스와 면사포 자락을 차안으로 끌어 들였다. "하지만 더 이상은 필요 없어요" 문이 닫히자 엔진 소리와 함께 차를 출발했다. "저기요" 그러면서도 그녀는 반지 낀 손을 내저으며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말이 멈추고 그녀의 심장도 멈췄다가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그녀가 문 손잡이를 비틀자 중앙 잠금 장치가 소리를 내며 작동하더니 펠리페가 그녀를 돌아보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11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들을 보는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정신 없이 둘러봤다. 하지만 당장 이쪽으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펠리페가 마을 쪽으로 속력을 내자 이미 그녀의 머리 속에는 매끄럽게 조용히 질주하는 강력한 엔진소리만 가득했다. "이건 어리석은 짓이에요. 펠리페"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녀가 말했다. "이래서 뭘 얻겠다는 건지 모르겠네 요" "만족이지" 그가 그렇게 대답한 뒤 급히 우회전을 했다. 마을을 통과하는 길로 접어들지 않고 그는 과일나무를 사이 좁다란 길로 빠르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캐롤린은 머리가 쭈뼛해져 문손잡이를 꽉 움켜잡고 나뭇가지들이 차에 긋 힐 때마다 온몸이 움찔거렸다. 다시 급히 우회전을 해 비 포장길로 들어서더니 마을 외곽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계단 모양의 층이 심한 길을 오르고 있었다. 아르레날린이 솟구쳐 손이 떨리고 가슴이 세차게 뛰는 가운데 캐롤린은 안전벨트를 잡아당겨 단단히 둘러맸다. "미쳤군요"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펠리페는 그냥 어깨만 으쓱하고는 좁은 길에서 급커브를 돌자 잠시 뒤 골짜기 전체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극적인 검은 배경을 뒤로 불빛이 휘황찬란한 성이 보였다. 임시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거나, 그냥 무리를 지어 서 있는 사람들 까지 보였다. 그녀의 눈은 루이스의 모습을 애타게 찾아 헤맸으며 가슴이 고동치고 목이 잠기기 시작했다. 차가 다시 한번 급히 우회전을 하자 성은 그들 아래로 더 멀어졌고 또다시 두 개의 급커브를 돌아 그들은 도로가 산맥을 통과하는 위험한 산길 앞에 이르렀다. 그녀는 펠리페와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길 가장자리가 협곡 밑으로 수백 미터 낭떠러지인 이런 무서운 길을 이렇게 미친 속도로 운전하는 미친 남자의 차를 타고 가고 싶지 않았다. "차 세워요, 펠리페"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장난은 장난으로 끝나야 죠, 그래서 당신 기분이 좋아진다면 인정할게요. 하지만 이제 내리게 차를 세워줘요" "걸어서 내려가시게?" 그가 빈정거렸다. "그 드레스에 그 맥없는 하힐신을 신고?" "그래요, 필요하다면" 그녀는 그가 여기서 내려만 준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때 차가 갑자기 또 급커브를 돌았다. 바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겉돌았다. 필사적으로 꽉 붙들고 있던 캐롤린은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깜깜한 어둠이 장막뿐이자 울음이 터지려 했다. "지금쯤은 내가 없어진 걸 알 거 에요" 자포자기가 되어 그녀는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루이스의 차가 없어졌으니까요. 그가 우릴 쫓아올 거예요. 우리가 이 길을 오를 때 그가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해요? 당장 날 내려줘요, 펠리페. 그럼 빠져나갈 기회가 있어요! 계속 이렇게 나가면 그가 우릴 쫓아와서 당신을 죽일 거라 구요. 정말이에요!" "조금씩 겁이 나시나 보지?" 그가 씩 웃고는 다시 급커브를 돌았다. 그가 너무 거칠게 차를 몰아 그녀의 머리가 그의 어깨에 부딪쳤다. 다시 자세를 바로 했을 때 높게 치솟은 구 개의 검은 장막사이로 별들이 보이자 그녀는 이제 산길에 이르렀다는 걸 깨닫고 겁에 질렸다 "펠리페!" 그녀가 날카롭게 외쳤다. "차 세워요, 어서 요!"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멈추지 않았다. 차도, 거칠고 무모한 운전도,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든 이리 석 음 도. "협곡 아래로 굴러 떨어진 구겨진 차안에서 당신을 발견하게 될 루이스의 얼굴을 보는 것도 아주 재미있는 복수가 되겠지" 그가 비웃으며 중얼거렸다. 캐롤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자 그가 소리내어 웃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원래 계획이 내가 생각하는 복수에 훨씬 적합하지" "지금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요" 덜덜거리기 시작하는 이를 악물고 그녀가 더듬거렸다. "아니, 아실 텐데. 고대 부족의 관례에 대해 잘 아는 가문 출신이니까, 나를 우리가 방금 떠나온 곳의 정당한 소유자로 생각한다면 이번 경험이 아주 흥미로울 거요. 결혼 첫날밤에 신랑인 소작농 대신 성의 영주와 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신부라......" "루이스는 소작농이 아니에요" 캐롤린이 반박했다. "그리고 루이스 외에 다른 남자가 손을 대게 놔둘 거라고 생각했다면 단단히 잘못 아셨네요" "그러니까 그 서자 자식을 사랑하는 척하시겠다" 신기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며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왜지? 눈을 감고 뉴욕의 흉악범 대신 백작님을 떠올리면 그가 만지고 있어도 괜찮소?" "나는 그런 척할 필요가 없어요. 루이스를 사랑하니까요" 그녀가 선언했다. "그리고 앞을 보고 운전할 수 없어요?" 그가 막무가내로 또 커브 길을 돌자 그녀가 숨막힌 소리로 외쳤다. "걱정 말아요. 난 십대 때부터 이 길을 달려왔으니까. 여기서 코르도바까지 눈감고도 운전할 수 있을 정도지" 캐롤린은 그 말이 거짓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녀의 한 손은 문손잡이에 고정돼 있었고 다른 손은 안전벨트를 움켜잡고 있었다. 펠리페가 그녀의 긴장된 자세를 눈치채고는 다시 한번 무모하게 커브 길을 돌았다. 그녀는 더 이상 지켜 볼 수가 없어 눈을 감았다. "당신은 그가 당신 아버지의 빚을 청산해 주겠다고 해서 그와 결혼 한 거야" 그가 침착하게 화제를 돌렸다. "사랑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지" "아니에요, 난 루이스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결혼한 거예요" 캐롤린이 이를 악물고 반박했다. "거짓말" 그가 비웃었다. "당신은 돈에 팔린 거야! 그가 돈을 주고 산 거라고! 그가 이름을 내걸고 산 거야! 카를로스 바스케스 서자에게 팔린 거란 말이야" 그가 가차없이 내뱉었다. "그리고 당신은 그의 침대에 누워 비천한 그의 신분에 대해, 창녀인 그의 어머니에 대해, 그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의심스런 방법에 대해 모든 것을 눈감아 줄 준비가 돼 있었던 거지. 눈을 감고 그가 가족들의 것을 훔친 도둑이 아니라 루이스 바스케스 백작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나으니까!" "루이스는 당신한테서 훔친 게 없어요" "그는 내 권리를 훔쳤어!" 그가 거슬리는 소리로 외쳤다. "내 돈과 내 집을 훔쳤어! 그는 신이 내게 부여한 권리를 훔쳤단 말이야!" 몹시 격분해 그가 운전대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캐롤린은 움찔 놀라며 다음 커브 길을 무사히 돌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나도 이곳을 뜨기 전에 그 놈에게서 하나를 훔쳐낼 거야. 놈의 첫날밤을 훔치는 거지" 그가 단언했다. "그리고 녀석이 당신을 볼 때마다 아름다운 자기 아내를 처음 가진 사람이 나라는 걸 깨닫게 해줄 거야. 난 그것으로 보상을 받는 거지!" "루이스와 난 여러 해 동안 연인 관계였어요!" 그녀는 그가 말한 내용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당신은 그가 이미 가진 걸 훔칠 수 없어요" "그의 첫날밤을 훔칠 수 있지" 그가 냉혹하게 강조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이 남자는 미쳤어! "루이스가 당신의 권리를 훔친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에 요. 펠리페! 당신이 그의 권리를 훔친 거라고요! " 캐롤린이 날카롭게 주장했다. "당신은 그의 이복동생도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어머니는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에 요. 언니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모두를 속여 카를로스씨의 인생에서 언니를 쫓아낸 사람이라 구요! 음모를 꾸며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가차없이 그걸 이용했죠. 모두가 왜곡시켜 루이스 어머니가 자기의 유부남 애인과 잔 것처럼 보이게 했던 거예요! 그런 다음 당신 어머니는 언니가 남기고 떠난 자리를 고스란히 차지했죠. 언니 세레나가 아이를 가진 몸으로 안전하게 미국으로 사라지게 만든 다음에!" "거짓말이야!" 그가 으르렁거렸다. 차가 위험하게 길에서 벗어났다. 필사적으로 꽉 붙잡고 있는 동안 캐롤린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싸우지 말아야 해! 그녀는 정신 없이 자신에게 말했다. 그를 무시하고 무사히 이 지독한 산을 벗어나게 만들어야 해! 하지만 나오는 말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바스케스 집안에 대하여 무서운 진실들을 모두 읽은 후로 그녀가 감춰두었던 차갑고 어두운 곳에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몇 달 뒤, 당신 어머니는 카롤로스씨와 결혼했죠 뱃속에 이미 자기 애인의 씨가 뿌려진 몸으로. 그 아이가 바로 당신이에요, 펠리페" 루이스 아버지가 표현했던 야비한 말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며 그녀는 계속했다. "당신의 친아버지는 카를로스의 친구예요. 유부남 친구죠!" 그녀가 단언했다. "당신이 태어난 날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그는 그 속에서 친구의 모습을 보고 알게됐죠. 언니를 희생시켜 자기 미래를 보장하려는 당신 어머니에게 속았고, 이용당했고. 배신당했고, 배신당했다는 걸! 그 날 이후로 루이스는 늘 그의 아버지의 상속자였고 당신은 감히 그 자리를 넘볼 수도 없었어요!" "도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요?" 처음으로 자신의 비열한 거짓말이 막히기 시작하자 펠리페가 거슬리는 소리로 물었다. "카를로스씨가 알려줬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모든 일들을 자세히 일기에 써왔어요. 세레나의 진짜 자기 아들을 찾으려 애썼던 세월과 당신에게 이 일에 관해 결코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포함해서요" "난 그 영감을 증오했어" 펠리페가 이를 갈았다. "그 영감은 그저 사랑 받기를 원하며 기다리는 내가 있는데도 한 번도 본적 없는 아들만을 그리워했어. 내 인생을 완전히 망쳐 놨다 구!" "당신을 그런 식으로 대한 건 그분이 잘못 하신 거죠." 캐롤린이 인정했다. "그렇다고 당신이 이러는 건 옳지 못해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거라 구요. 그걸 모르겠어요?" 그녀는 자신이 그를 이해시키고 있기를 바랐다. 그를 정신 차리게 만들면 차를 돌려 그녀를 데려다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갑자기 으르렁거리며 지금 이 순간 괴물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것처럼 욕을 내뱉고는 휘청하며 다시 모퉁이를 돌아 전조등이 무서운 낭떠러지를 훑고 지나가자 캐롤린은 숨죽인 비명이 목에 걸렸다. 차가 길에 나 있는 깊은 구덩이에 부딪쳤다. 펠리페가 운전대와 씨름하기 시작하자. 그제서 야 비명이 제 소리를 찾았다. 그는 계속 욕을 해댔고, 그녀는 비명을 질렀고, 차는 제멋대로 돌진했다. 우린 이대로 죽게 될 거야. 그녀는 확신했다!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져 발견되지도 못할 거야! 지독한 두려움에 그녀는 핸드 브레이크를 움켜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달아오른 고무 타이어가 끽 소리를 내며 차가 기우뚱하더니 이내 옆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대로 앉아 공포에 질려 숨을 멈추고 지켜봤다. 그러다 차가 뭔가 단단한 것에 부딪쳤다. 길가에 박힌 바위인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다행이다. 그들은 기울어진 채 차를 후진시켰고 차가 안전하게 멈추는 가 싶더니 순간 뭔가 다른 것에 부딪쳐 끔찍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사뿐히 쓰러졌다. 충격 받고 어지럽게 방향감각을 잃은 캐롤린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고 쑤시는 관자놀이 부분을 만지려고 손을 들자 메스꺼운 통증이 확 밀려드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머리를 세게 부딪친 모양이었다. 그녀는 펠리페를 돌아보자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는 운전대 위로 웅크린 채 의식이 없는 듯 했다. 조심스럽게 겁에 질려 그녀는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그의 목을 만져봤다. 그녀는 살아있는 온기와 희미한 맥박을 느낄 수 있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다시 한번 말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제 어쩌지? 여기가 어딜까? 위험한 처지에 놓여있는 건 아닐까? 어떻게 해야 되지? 그제 서야 그녀는 차의 전조등이 아직도 켜져 있는 걸 발견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는 앞으로 천천히 몸을 움직여 유리창 밖을 내다봤다. 유리가 깨지지 않은 게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창 너머로 길이 보였고 그녀 오른쪽으로는 협곡 가장자리가 보였다. 아무래도 산 근처 도랑 같은 곳에 처박혔나 보다. 한시름 놓인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대앉아 잠시 숨을 고른 뒤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그때 펠리페가 문을 잠가 놓았다는 게 생각났다. 그녀는 중앙 잠금 장치를 풀기 위해 떨리는 손으로 검은 금속과 가죽을 더듬거리며 문 쪽에서 뭔가를 찾아내 잡아당기자 잠금 스프링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이제 안전벨트를 풀고, 그 다음에 문을 열고 기어나가야 한다. 드레스가 뭔가에 걸렸다. 버둥거리는 와중에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신발이 벗겨졌다. 하지만 마침내 땅 위로 내려서자 그녀는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너무 고요하고 섬뜩해서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갑자기 몸이 떨려오더니 진정이 되지 않고 멈춰지지가 않았다. 쇼크인가 봐. 쇼크를 받은 건지도 몰라. 이런 시련을 겪고 안 그럴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녀는 맨발로 힘겹게 일어서서는 상황을 조심스럽게 파악하기 시작했다. 펠리페는 분명 도움이 필요했다. 그 점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 하지만 도움을 받자면 5마일 정도 왔던 길을 걸어 내려가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무력하게 들었다. 이대로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지금쯤 그녀가 없어진 걸 누군가 분명 알아챘겠지? 누군가라고 돌려 말할 건 없잖아, 그녀는 자신을 나무랐다. 루이스가 알아챘을 거야! 그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였지만 산을 돌면서 들렸다 말았다 하는 차의 엔진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안도감에 그녀는 차 옆에 주저앉아 쑤시는 머리를 무릎 위에 얹고는 떨리는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았다. 루이스가 그녀를 찾으러 오는 것이리라. 그녀는 한 순간도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그 점이 펠리페의 납치 계획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그 점이 펠리페의 납치 계획에서 가장 어리석었던 부분이었다. 루이스를 따돌리고 그녀를 빼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정말 유혹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정신나간 바보. 그녀가 아는 루이스라면 아마 지금쯤 로스 아미노스로 향하는 산악 주변 도로를 모두 봉쇄해 버렸을 것이다. 펠리페는 시작도 못해보고 저지 당했을 게 뻔하다. 차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매끄럽게 커브 길과 모퉁이를 도는 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기어를 바꾸고 꾸준히 속도를 높이다가 다시 부드럽게 낮추는 소리까지 들렸다. 드디어 마지막 커브 길을 돌아 그녀에게서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그가 낯선 차를 몰고 나타났다. 그는 차를 세우고 즉시 내리지 않았다. 전조등을 그녀 쪽으로 비춘 채 그대로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차 문이 열리고 자갈 위를 밟는 그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가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두 발자국 정도 앞에서 멈춰 서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무 적막해 개미가 나뭇잎을 나르는 소리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하늘은 별이 박힌 짙은 남빛 천 같았고 산들은 망을 보는 거인들처럼 우뚝 속아 있었다. "어딨 소?" 그가 던진 첫 질문으로 억양 없이 아주 조용히 물었다. "의 식이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차안에 있어요"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이었고 다른 질문은 없었다. 펠리페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을 한번 퉁기자 그가 타고 온 차의 뒷문이 열렸다. 세 명의 남자가 차에서 내렸고 그 중 하나는 비토였다. "저 친구를 처리하게" 그가 지시했다. 캐롤린은 소름이 오싹 돋았다. "안 돼요, 루이스" 불쌍한 펠리페가 절벽 밑으로 던져지는 모습이 떠올라 그녀가 저항했다. "그는 다쳤어요. 도움이 필요해요" 그가 별안간 몸을 숙여 그녀를 두 팔로 일으켰다. 타고 온 차 쪽으로 그가 그녀를 데리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찢어진 웨딩드레스에, 길에 끌려 흙투성이 된 면사포를 하고 있는 우스꽝스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열려 있는 조수석 문 앞에 도달해서야 그녀는 루이스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그러지 말아요" 그녀가 고르지 못한 소리로 속삭였다. "날 소외시키지 말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차에 태운 뒤돌아서 그녀 옆자리 운전석에 올라탔다. 시동이 걸리고 차는 앞을 향해 계속 달렸는데 길이 너무 좁아 차를 돌릴 데가 없다는 걸 그녀도 알 수 있었다. 쓰러진 벤 옆을 지날 때 그녀는 비토가 야수 같은 힘을 발휘해 펠리페를 차에서 꺼내는 걸 봤다. 하지만 그를 길 위에 내려놓고 살펴볼 때는 부드러웠다. 그런 부드러움을 보니 희미하게나마 안심이 되었다. 비토 같은 남자들은 절벽 밑으로 던져버릴 남자를 저렇게 부드럽게 다루지는 않을 거라고 그녀는 자신을 달랬다. 반 마일 정도 달리다 길이 좀 넓어진 곳에서 루이스는 차를 세우고 왔던 길로 차를 돌렸다. 그들이 다시 벤 을 지나쳤을 때는 펠리페가 제 발로 서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차에 힘없이 기대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벤 을 안전한 곳으로 치우느라 씨름하고 있었다. "그를 해치진 않을 거죠?" 그녀는 루이스에게 불안하게 물었다. "그렇소" 그 말뿐이었다. 짧지만 안심이 되는 말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루이스가 즉시 차의 히터를 틀었지만 떨리는 건 계속되었다. 그녀는 추워서가 아니라 충격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루이스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바보 같은 웨이터가 내 행세를 하는 펠리페의 말을 믿고 당신을 내 차로 보낸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요" "당신이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면 모를까" 캐롤린이 느릿하게 받아쳤다. "그 전에는 말 안 해요" "좋소" 그가 운전대를 힘주어 잡았다. "우선 내 자제력에 관한 문제부터 해결해야겠군" 그가 딱딱거렸다. "저 녀석이 죽길 바라오?" 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저 녀석이 머리가 성벽에 걸리길 바라오? 지금 내가 이 산길을 저 녀석처럼 운전하길 바라오?" "아뇨" 그녀는 모든 질문에 한 번에 답을 했다. "그렇다면 그가 당신을 내 차에 태운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요" 그가 퉁명스럽게 반복했다. 조용하고 무뚝뚝하게 그녀는 모든 걸 얘기해주었다. 차가 그 지경이 된 건 그녀의 탓이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루이스의 아버지를 놓고 펠리페와 지독한 언쟁을 벌인 일이었다. 그들이 마을을 지날 때는 모두가 밖에 나와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그때는 낮이었고 호기심 어린 표정들이었다는 것이 다를 뿐. 지금 그들은 창백하고 근심스럽고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손을 흔들고 미소를 지으며 몹시 울고 싶은 심정이라는 걸 그들이 알아채지 못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들이 성으로 돌아갔을 때도 마찬가지 였다. 모두 포세이돈 상 옆에서 모여들어 걱정스런 눈으로 기다리고 있자 루이스는 차를 세우고 그녀에게 그대로 있으라고 완강히 지시했다. 그가 차에서 내리더니 사람들을 못 본체하고 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를 안아 내렸다. 아름다운 드레스가 망가지고 그녀의 안색이 창백한 걸보고 사람들이 놀란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앞으로 나와 딸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는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괜찮아요" 그녀는 다시 한번 안심시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보이지 않아" 아버지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그래도 내가 좀 봐야겠소" 루이스의 고모부 피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은 채 현관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그의 고모부도 곁에서 따라왔다. 집안으로 들어가 그녀가 처음 본 사람은 콘수엘라였다. 대리석처럼 하얀 얼굴로 거대한 연회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내려줘요, 루이스" 캐롤린이 요구했다. 그가 걸음을 멈췄지만 즉시 응하지는 않았다. "어서 요"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없이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캐롤린은 콘수엘라가 안됐다는 마음이 들어 두 팔로 나이든 여인을 안았다. 콘수엘라의 몸이 뻣뻣해지자 캐롤린은 자기를 거부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굳은 몸이 떨리기 시작하자 콘수엘라가 사람을 안는데 익숙하지 않아서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언니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 대가를 치렀다. 30여 년 동안 사랑과 애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메마른 분위기 속에서의 헛된 결혼생활로. "괜찮아요" 여인의 귀에만 들리게 그녀가 속삭였다. "그는 무사해요. 루이스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고 있어요"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콘수엘라는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려 있었다. "괴로웠던 거예요" 캐롤린이 설명했다. "그리고 괴로워할 이유가 충분하구요. 이모 님" 그녀가 조용히 덧붙였다. 나이든 여인이 캐롤린의 얼굴을 쳐다보며 알겠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신부님이 당신에게 일기를 줬군요" 캐롤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뿐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했다. 뉴욕 빈민가에서 성장한 루이스의 삶이 힘들었다면 스스로 만든 감정의 감옥에 갇혀 사는 어머니와 아들을 혐오하는 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했던 펠리페의 인생 역시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캐롤린은 그 일기를 읽고 모든 걸 이해했다. "우린 오늘밤 여길 떠날 거예요" 그 결정에 캐롤린은 여인을 걱정스레 쳐다봤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모 님 여긴 이모 님의 집이에요. 펠리페의 집이기도 하구요. 여기서 모두 함께 살도록 노력해 볼 수는 없을까요?" "아니에요" 콘수엘라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떠났으면 좋겠어요. 때가 된 거죠" 그녀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우리 힘으로 살아봐야 할 때가 된 건지도 모르죠" 많은 점에서 캐롤린은 여인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펠리페는 여기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의 괴로움을 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때 차 한대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캐롤린은 그의 친구들이 펠리페를 안으로 데려오기 전에 루이스를 다른 방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루이스를 향해 돌아서자 그가 아주 크고 험악해 보여 그녀는 가슴이 저려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루이스의 고모부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보다는 펠리페가 더 급해요" 잠시 그가 반박하려는 듯 하더니 이내 루이스를 흘끗 쳐다보고는 마음을 바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내일 봬요"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역시 이해했다. 그만 가보라는 뜻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뒤로 물러서서 딸이 루이스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는 걸 지켜봤다. 그들 뒤로 아무도 말이 없었다. 루이스는 자기 방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성에서 가장 큰방이었다. 넓고 호화스러웠다. 육중한 바로크 풍의 가구와 고풍스런 골동품들로 꾸며져 있었다. 그들 뒤로 문이 닫히는 순간 캐롤린의 온몸에 반응이 왔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져 그녀는 가까운 의자로 다가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루이스는 여전히 아무말없이 방을 걸어가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물소리가 들렸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루이스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그대로 앉아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는 그녀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여 면사포를 조심스럽게 벗겨내고는 그녀를 다시 안아들었다. "오, 늠름 하셔라" 그녀는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엄한 눈빛으로 입을 꾹 다물고 욕실로 들어가 그녀를 내려놓더니 웨딩드레스의 실크 끈을 풀기 시작했다. "말 안 하면 화낼 거예요" 그녀가 아주 조심스럽게 경고했다. 끈이 풀리자 옷이 미끄러져 내려 그녀는 가슴이 드러나지 않도록 손으로 붙잡았다. "루이스!" 그녀가 소리치며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눈이 불길에 휩싸였다. 지금까지 힘겹게 묻어두고 있던 분노가 뜨겁게 타오르는 검은 눈을 통해 터져 나와 그녀를 완전히 에워쌌다. 그리고는 그녀의 놀란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었다. 여느 때와는 다른 키스였다. 불태우는 게 아니라 완전히 소진시켰다. 그녀는 그의 맹렬한 입술과 입술의 감촉을 유지하기 위해 팔을 들어 그의 넓은 어깨에 올려놓았다. 이젠 드레스가 흘러내려도 상관없었다. 이미 드러난 가슴이 그의 몸에 밀착되어 있었다. 머리가 욱신거리고 맨발이 따끔거리며 그가 너무 꽉 끌어안고 있어 갈비뼈가 으스러질 것 같아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사랑해요" 그녀가 열에 들떠 숨을 헐떡이며 속삭였다. "당신을 많이 사랑해요. 그래서 당신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는 게 너무 싫어요!" "숨기지 않으면 당신을 삼켜버려야 하거든" 그가 거칠고 잠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말이긴 했지만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가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어 더 이상의 대화를 중단시켰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중요했기에. 캐롤린은 두 다리를 그의 엉덩이에 감고는 손을 그의 머리 속에 집어넣었다. 그가 억눌린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 침실로 향했다. "목욕물" 그녀가 상기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입술에 대고 쉿 하더니 뜨겁게 접촉된 입술을 풀지 않은 채 방향을 틀었다. 수도꼭지를 잠글 때도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조금 떨어져 그녀를 바라보더니 상기된 뺨과 몽롱한 눈빛, 그리고 코르셋이 받치고 있어 우윳빛 가슴이 부풀어 오른 모습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검은 속눈썹을 내리뜨고 그녀를 훑어보자 그녀는 기분 좋게 속되고 음탕해 보였다. 열정적인 스페인 남편에게 안길 준비가 되어 있는 신부였다. 그는 다시 시선을 들어 그녀의 부드럽고 도톰하고 유혹적인 입술을 빤히 쳐다보다 다시 한번 입을 맞춘 뒤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견고한 참나무 바닥에 값비싼 인도산 양탄자가 깔린 침실로 이끌었다. 그들 앞에는 영원히 보금자리로 보이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캐롤린은 확실히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눈처럼 흰 리넨 시트 속으로 옷을 벗고 파고들어 뜨거운 키스와 남자의 열정만을 먹으며 살고 싶었다. 루이스는 그녀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는 움직이지도 않고 자신의 옷을 벗지도 않았다. 그가 할 일이었다. 신부의 옷을 벗기는 건 그가 할 일이었다. 그가 옷을 벗는 동안 그녀의 유두는 단단하게 솟았으며 간절한 기대감에 키스로 부푼 입술을 촉촉한 혀로 끊임없이 핥았다. 마침내 그가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당신을 가둬놔야겠어" 그녀는 아주 짓궂은 미소만 짓고는 두 팔을 들어올려 그를 받아 들였다. 그녀의 드레스가 좀더 밑으로 흘러내렸다. 루이스는 신음하며 드레스와 그녀가 입고 있는 다른 옷가지들로 모두 벗겼다. "창문 너머의 정원에서는 그들이 빠진 파티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성 안 어딘가에 선 두 사람이 짐을 싸고 있었다. "루이스...." 한참 뒤 두 사람이 서로 끌어안고 누워있을 때 캐롤린이 주저하며 속삭였다. "할 얘기가 있어요. 펠리페에 대해서" 그 말이 아름다운 순간을 망쳤다. 그의 몸이 팽팽해지더니 턱이 굳어졌다. "꼭 해야 할 필요가 있소?" 그가 딱딱하게 말했다. 말할 엄두를 못내 게 하는 말투였다. 캐롤린은 어쨌거나 밀어붙이기로 했다. "당신이 그와 그의 어머니를 미워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인정했다. "그리고 그가 오늘밤 지독하게 굴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녀는 그의 싸늘한 눈을 마음 졸이며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당신 어머니에게 사악한 거짓말을 한 것이나, 당신 아버지를 속인 건 그의 탓이 아니에요! 당신이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낸 것도 펠리페 탓이 아니라 구 요! 그는 당신 사촌이에요. 그리고 그도 무척 힘들었어요!" 루이스가 얼굴을 찡그리고 쳐다보자 그녀가 주장했다. "그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어머니와 자신을 미워하고 어머니를 증오하는 아버지 때문에 늘 당신 그늘 밑에서 자라야 했다 구요. 아주 비극적이고 슬픈 일이죠. 그리고 그걸 쓰셨을 때 당신 아버지가 몹시 괴로웠을 거라는 것도 이해가 가요. 당신 어머니 대신 당신 이모의 말을 믿었던 자신에게 몹시 실망한 나머지 그런 자신을 응징하며 사셨죠. 하지만 펠리페에게 그런 벌을 받게 하는 게 아니었어요" "무슨 소리요. 우리 아버지가 뭘 어떻게 썼다는 거요?" 루이스가 끼어 들었다. "오!"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놀라 외쳤다. 하지만 긴 한숨을 조용히 내쉬며 어쩌면 이게 최선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음울한 눈을 들어 어둡게 번뜩이는 그의 눈을 쳐다봤다. "그분의 일기에 쓴 바에 의하면요" 그녀가 온화하게 말했다. 그녀는 조용히 조심스럽게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마침내 그 일기가 어디 있냐고 물었고 그녀가 알려주자 그는 말없이 침대에서 나가 실내복을 걸치고 그걸 보러갔다. 한참 뒤 캐롤린의 방에서 나오던 그는 성을 떠나는 펠리페와 이모의 뒷모습을 보았다. 위층 복도에 서서 그들의 수수한 모습을 지켜보자니 무정하기로 소문난 그의 가슴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펠리페" 루이스가 부르는 소리에 펠리페가 돌아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얘기 좀 하자" 펠리페는 한숨을 내쉬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그가 대답했다. 어쩌면 그도 루이스처럼 거짓말과 괴로움과 배신에 넌더리가 난 건지도 몰랐다. "언젠가는..." 그가 되풀이하며 다시 돌아섰다. 루이스는 이모가 파리한 얼굴을 들어 올려다보는 걸 침울하게 지켜봤다. "미안하다" 그 말뿐이었지만 루이스는 이해했다. 달리 무슨 말로 지난 일을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침실로 돌아와 보니 신부가 침대에 없었다. 그는 일기장을 헝클어진 침대 위에 던져놓고 그녀를 찾았다. 욕실 문을 열자 김이 나는 거품 욕조 속에 그녀가 있었다. 그는 타일 바닥으로 물이 넘쳐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뒤로 들어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방금 펠리페와 이모가 떠나는 걸 봤소"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캐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떠날 거라고 이모 님이 그러시더군요" "그럴 것까지는 없었는데"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들을 정말 여기서 내쫓을 생각은 없었소. 가족은 가족이니까..." "결점까지도 받아들이면서 말이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녀는 자신의 무책임한 아버지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 일기들을 모두 읽어봤어요?" "으 음" 그의 다른 손이 그녀의 매끄러운 살 위로 미끄러져 올라와 한쪽 젖가슴을 감싸쥐었다. "나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소" 그가 고백했다. "처음엔 우리 어머니에게서, 그리고 나중에 연락이 닿은 아버지에게서" "7년 전에 말이죠" 캐롤린은 두 사람이 잃어버린 세월을 생각하며 슬프게 한숨을 쉬었다. "7년 전에" 그가 시인했다. "그때 우리 가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려고 스페인으로 왔다가 나를 차지해버린 여자를 만났지" "미안해요" 그녀의 아버지가 루이스를 얼마나 가차없이 이용했던가를 생각하며 그녀가 말했다. "당신 아버지에게 당신을 사랑하니 결혼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지" 그가 침울하게 말했다. "그분은 공손히 내 갈 길을 알려주시더군. 당신 딸에게 내가 부족한 놈이라고, 그때 난 그분 말씀에 동의했소"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고" "하지만 어쨌든 이제 당신은 날 갖게 됐잖아요" 캐롤린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당신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의가 대단한 사람이에요" "우리 아버지의 인생을 이 성을 지은 조상의 인생과 비교한 펠리페의 말이 옳았소" 루이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역사가 반복되고 있는 거지" 욕조에서 몸을 틀어 그와 마주보고 앉은 캐롤린은 조용히 속삭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에요. 이번엔 백작이 그의 여자를 가졌으니까요. 행복한 결말이 될 거예요" 그의 깊은 눈 속에 만족이 가득했다. "아주 행복한 결말이지" 루이스가 동의하고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