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한 마음(The Marriage Surrender) 미셀 레이드 1 「알렉산드로 보네티와 토‥‥통화할 수 있을까요?」공중 전화 박스 안은 찌든 담배 냄새로 가득햇다. 하지만 창백한 얼굴과 전화를 해야 한다는 결심에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수화기를 꼭 붙들고 서 있는 조안나는 담배 냄새나 검은 부츠 아래 바닥에 난잡하게 적힌 글씨들을 거의 알아채지 못햇다. 「실례하지만‥‥누구시죠?」차가울 정도로 간결한 여성의 목소리가 물었다. 「전‥‥」그녀는 입을 열었다가 곧 다물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꼭 깨물엇다. 그녀는 말할 수가 없었다. 알렉산드로 외에 그 누구에게도 진짜 이름을 밝힐 수가 없었다. 「사‥‥사적인 전화예요」그녀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부디 이 말이 그 대단한 남자와 통화할 수 있는 충분한 대답이 되기를‥‥. 그녀는 두 눈을 감고 힘없이 기도했다. 「성함을 말씀하셔야 합니다」그 목소리가 주장했다.「그래야 회장님한테 통화를 하실지 여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 대답은 산드로가 이 나라에 있다는 뜻이야. 조안나는 얼굴을 찡그렸다.지금쯤 로마에 돌아가 그곳에서 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그럼 그의비서와 연결해 주세요. 나머지는 그녀와 말하겠어요」조안나가 요구했다. 한참 침묵이 깔린 뒤에 <기다리세요>라는 말이 이어지고 전화선이 조용해졌다. 초침이 똑딱 소리를내며 천천히 흘러가는 동안 또다시 절망감이 밀려왓다. 산드로와 관련 없이 이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으려 애쓰며 지난밤을 꼬박 세울 때 느낀 그 절망감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결론은 항상 두 가지로 귀결되었다. 아서 베이트, 아니면 산드로‥‥.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아서 베이트의 이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 전화에 매달리는 이유는 충분했다. 몸 안에 모든 자위 본능이 이 문제를 해결하느니 차라리 어딘가로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숨는 것에 신물이 났다. 혼자 힘으로 버텨야 하는 자신이, 남에게 손을 내미는 무능력한 자신으로 고립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난 여기 있어.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상기했다. 도움을 청하면 기꺼이 도와주리라는 믿음이 가는 유일한남자에게 손을 내밀려고. 만약 산드로가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에게 기회를 주어야 하고, 인생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자신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했다. 그녀는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초조한 의심과 맞서며 자신을 위로햇다. 난 그에게 영원히 매달릴 생각은 없어, 안 그래? 한 가지 제안을 하고 그의 대답을 들은 뒤 다시 그의 인생에서 깨끗이 사라질 거야.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번 한 번만날 도와주면 영원히 그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간단해. 그것뿐이야. 산드로는 아주 교양있는 남자야. 그가 아직도 나 때문에 괴로워할 리 없어, 이번에는 절대 아냐. 그 때 전화기에서 동전을 요구하는 신호음이 들리기 시작햇다. 순간 갑자기 격노한 홍수처럼 친근한 고통이 용솟음쳤다. 내가 뭘하고 잇는 거지?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왜 이 전화를 하고 있는 거야? 다른 선택이 없으니까! 몸을 펄쩍 뛰게 할 만큼 이성이 매섭게 맞받아졌다. 그녀는 작은 동전 투입구로 떨리는 손을 뻗었다. 동전을 너무 넣은 탓인지 나머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오, 맙소사‥‥」그녀가 고개를 숙여 동전을 줍기 시작한 순간 수화기에서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보네티 씨의 비서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그 목소리에 그녀는곧장 몸ㅇ르 일으켰다.「잠깐만요」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간신히 동전을 넣으며 중얼거렸다. 다시 통화음이 선명해지고 긴장한 신경이 가라앉을 때까지 몇 분이 흘럿다.「알렉산드로와 토‥‥통화하고 싶어요」그녀는 재빨리 전술을 바꾸었다. 사적인 접근으로 다음 장벽을 넘을 수 있길 바라면서.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유감스럽지만 성함을 알아야 합니다」산드로의 비서가 주장했다. 이름‥‥. 그녀는 이를 꽉 깨물며 두 눈을 감았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한 거지? 그녀는 비참해서 자신에게 물엇다. 진실을 말해? 이 여자가 내 전화를 거절하는 산드로의 증인이 되도록? 방금 전의 그 차가운 목소리의 여자 대신? 「보네티 부‥‥부인이에요」그녀는 중얼거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이름이 자신에게 낯설게 들린 것처럼 전화선 저쪽 여성에게도 그런 것이 분명했다. 날카로운 짧은 침묵 뒤에 말이 들렸다.「보네티 부인?」그 목소리가 반복했다.「알렉산드로 보네티 부인이요?」 「그래요」조안나가 대답했다. 깜짝 놀라고 있는 그 여성을 비난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조안나 본인이 그 특별한 남자와 통화하려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누군지 밝혔으니까 알렉산드로와 통화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에요」그의 비서가 즉시 대답했다. 그러더니 조용해졌다. 조안나는 수화기를 대고 불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기다렸다. 너무 긴장한 탓에 턱뼈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초조한 침묵 속에서 그녀는 손톱 금속 전화 박스를, 발끝으로 지저분한 콘크리트 바닥을 두드렸다.전화 박스 밖에 한 남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전화를 쓰려고 기다리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성난 시선을 받자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 들엇다. 「보네티 부인?」 「네?」그 한 마디가 긴장으로 잠긴 목에서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회장님께서는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갑자기 그 목소리가 놀라울 정도로 신중하게 들렸다.「하지만 전화 번호를 남겨 주시면 회의가 끝나는 대로 곧 연락하시겠답니다」 「그럴 수 없어요」조안나가 말했다. 안도감과 함께 절망의 물결이 온몸을 적셨다.「내 말은‥‥ 공중 전화로 걸고 있고‥‥」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초조하게 실크 같은 붉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딱딱하게 굳은 머리로생각하려 했다. 산드로는 나와 통화할 수 없고 난 이 전화를 다시 걸 용기가 없어.「다‥‥다시 전화해야겠군요」마침내 그녀는 지푸라기를 잡는 삼정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모든 자제심이 바닥나기 전에 전화를 끊으려는 소용없는 변명이었다.「그에게 다‥‥다음에 다시 걸겠다고 전해 주세요. 내가‥‥」변명이 바닥났다.「그럼‥‥」갑자기 결론을 내린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려 했다. 「안 돼요! 보네티 부인!」비서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날아왔다.「제발 기다리세요!」그녀가 다급하게 말했다.「회장님께서 전화 번호를 알고 싶어하세요‥‥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제발‥‥」 그것은 애원이었다. 걱정이 담긴 애원‥‥. 그리고 그 애원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려는 조안나의 걸음을 붙잡았다. 동시에 크림 맛을 보려는 비대한 고양이처럼 자신에게 미소짓고 있는 아서 베이트의 메스꺼운 얼굴이 떠올랐다. 온몸이 떨리면서 고통과 현기증이 밀려왔다. 이제 긴장과 혼란으로 그녀는 자신이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 하나님. 그녀는 눈을 감고 빠르게 무너져 가는 이유에 매달렸다. 산드로, 아니면 아서 베이트? 이성이 계속 반복했다. 아서 베이트, 아니면 산드로? 산드로‥‥. 산드로, 길고 불행햇던 지난 2년 동안 어떤 접촉도 허락하지 않은 남자‥‥. 불쌍한 몰리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떠오르면서 순간 볼에서 핏기가 가셨다. 몰리 때문에 산드로한테 전화했을 때 그는 도움을 청하는 내 전화를 무시했어.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상기했다. 이번에도 그럴지도 몰라. 왜 아니겠어? 그녀는 자신을 조롱했다.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것은 더 이상 없엇다. 아주 오랫동안 아무 것도‥‥. 전화기에서 다시 동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놀란 사슴처럼 몸을 펄쩍 뛰며 눈을 힘겹게 뜨고 동전을 찾았다. 바닥에 떨어진 동전이 보였다. 모든 이성이 마비된 그녀는 순전한 본능만으로 동전을 찾았다. 산드로와 마주할 때는 난 늘 이랬어. 쓰레기와 담배꽁초 사이를 더듬으면서 그녀는 화가 나서 인정했다. 「보네티 부인?」 「네」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지금 회장님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찰칵 소리에 조안나는 움찔했다. 떨리는 손가락이 잊어버린 동전 하나를 찾았다. 그녀는 동전을 움켜주며 몸을 바로 세웠다. 얼굴은 상기되고 숨결은 거칠었다. 손가락으로 더듬어 투입구에 동전을 넣었다. 산드로의 낮고 벨벳 같은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된다는 사실에 어리석은 고통이 밀려왔다. 과연 내가 견딜 수 잇을까? 밖에서 기다리던 남자가 화난 표정으로 유리창을 두드렸다. 조안나는 미친 여자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푸른 눈동자가 저항의 불꽃을 담아 번쩍였다. 「조안나?」 그 순간 몸 안에서 아우성치는 모든 불안과 고통은 사라지고 가슴을 조이는 고뇌도 생기를 잃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뚝뚝하게 들렸다. 하지만 오‥‥, 너무 친근한 나머지 그녀의 목소리는 그대로 목에 잠기고 말았다. 박에서 남자가 다시 유리창을 두드렷다. 그녀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산드로의 긴장이, 초조함이, 어쩔 수 없이 이 전화를 받는 그의 마음이 전화선을 타고 지글지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조안나?」그가 투명스럽게 반복했다.「젠장!」그녀는 그의 욕설을 들었다.「아직도 거기에 있는 거요?」 「그래요」숨을 죽이며 대답한 그녀는 이 한 마디가 인생에서 가장 크고 용기 잇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알앗다.「미, 미안해요」그녀는 침착해지려 애썼다.「저, 전화 박스 바닥에 도‥‥동전을 떨어뜨렸는데 찾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어‥‥어떤 남자가 밖에서 전화하려고 기다리며 계속 유리창을 두드리기 때문에 난‥‥」나머지 말은 끊어졌다. 바보처럼 횡설수설하는 자신에게 절망감을 느껴졌기 때문에 그녀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산드로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틀림없엇다. 입을 연 그의 어조는 딱딱한 걸로 보아 분명했다.「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미안해요」그녀는 다시 속삭였다. 「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오」그가 내뱉었다.「당신은 내가 이 전화를‥‥뜻밖의 영광으로 여기리라 생가가하는 거요?」 조롱, 완고, 분노‥‥.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가슴이 뛰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 각각의 분노 어린 단어는 그가 목적한 대로 정확히 그녀의 가슴을 때렷다. 「나‥‥난 필요해요‥‥」 뭐가 필요하단 말이야? 너무 머리 속이 복잡해서 그에게 전화한 이유가 들끓는 고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난 피, 필요해요‥‥」마른 입술을 적시며 그녀는 다시 시도했다.「당신의‥‥충고가 필요해요」그녀는 말을 돌렸다. 그에게 전화한 이유가 결국 돈 때문이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가 없었다.「마‥‥만나서 얘기할 수 없을까요?」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녀는 신경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쿡쿡 쑤시는 감각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온몸을 휘젓자 숨을 쉴 수도,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게다가 엉엉 울어 버리고 싶었다. 지금의 내 마음을 산드로가 안다면 아마 충격을 받아 의자에서 나가떨어질 거야. 그녀는 자기를 비웃었다. 「오늘 저녁 난 로마로 날아가오」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그리고 그 전까지 하루 일정은 꽉 차 있소. 당신은 내가 돌아올 다음 주까지 기다려야 할 거요」 「안 돼요!」그럴 수 없어!「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어요. 난‥‥」목소리가 꼬리를 물고 사라졌다. 뜻밖의 전개에 이성은 사라지고 절망만이 몰려왓다. 그녀는 곧이어 패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사‥‥상관없어요. 방해해서 미‥‥미안‥‥」 「끊지 마시오!」산드로가 으르렁거리며 경고했다. 이번에도 그는 펼쳐진 책처럼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이다. 그녀는 그가 이탈리아 어로 욕설에 가까운 말을 하는 걸 들엇다. 화가 나면 산드로는 언제나 모국어로 말했다. 그녀는 그럴 때의 그 모습을 그대로 그릴 수 있었다. 크고 마른 몸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생긴 라틴 계의 얼굴, 화가 나면 검게 변하는 짙은 갈색 눈과 선명하게 조각된 아름답고 관능적인 입술‥‥. 그 입술은 그녀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키스를 할 수 있었지만 또한 그녀가 알수 없는 잔인한 욕설을 퍼부을 수도 잇엇다. 오, 세상에, 지금이 바로 그랬다! 그 때 다시 전화기에서 동전을 요구하는 경고음이 들렸다. 「난 이제 돈이 없어요!」그녀는 걱정스럽게 더러운 바닥을 살피며 수화기에 대고 숨을 헐떡거렸다.「동전을 넣어야 하는데‥‥」 「번호를 말하시오!」산드로가 내뱉었다. 「하지만 전화를 쓰려고 밖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만 나가야‥‥」 「젠장!」그가 욕설을 터트렸다.「번호, 조안나!」 그녀가 겨우 번호를 말하고 나자 전화가 끊어졋다.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잠깐 그곳에 서 있었다. 전화가 끊어지기 전에 산드로가 번호를 제대로 들었을까? 만약 듣지 못했다면? 스트레스와 혼란으로 거의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다시 몸을 숙여 동전을 찾았다. 동전 몇 개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동전을 집어들고 기다리는 남자가 전화를 사용하도록 밖으로 나왔다. 그는 미친 여자 대하듯 흘끔거리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탓할 수도 없지. 전화 박스 안에서의 정신 나간 나의 행동을 쭉 지켜 보앗을 테니까 말이야. 산드로 때문이야. 내가 이렇게 이성을 잃는 건 늘 산드로 때문이엇어. 그 밖에는 아무도 나의이성을 흔들지 못했지. 평소에 그녀는 산드로 만큼 냉정했다. 하지만 그는 만난 지 몇 초도 안 되어 그녀를 무력한 생물처럼 떨게 만들엇다. 섹스. 그 한 마디가 단단하고 잔인한 진실로 그녀를 내리쳤다. 산드로는 유일하게 그녀를 성적으로 뒤흔들 수 있는 남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 온몸을 떨며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전화 박스에서 남자가 나왔다.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앗다. 그녀는그를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한 것에 죄책감이 일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말하지 않을 수 없엇다.「동전이 떨어져서‥‥」 그 때 공중 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갑작스런 절망에 휘청하며 수화기를 낚아챘다. 「대체 무슨 일이오?」산드로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흘러나왔다.「난 5분 동안 수도 없이 이 번호를 눌럿소. 그런데 계속 통화 중이더군. 내 전화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도 모를 만큼 바보가 되었소?」 드디어 그 말이 나왔어. 바보. 조안나는 쓰게 생각했다. 그는 날 바보라고 생각해.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고 햇잖아요」그녀가설명했다. 또다른 욕설이 귀청을 때렸다.「내게 원하는 게 뭐요, 조안나?」그가 물엇다.「언제부터 내게 원하는 게 생겼소?」 그것은 이성적인 순간조차 그녀를 괴롭힐 또 다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미엿다. 「전화로는 얘기할 수 없어요」그렇게 말하고 나자 갑자기 화가 치밀엇다.「그리고당신이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겠다면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알았소, 알았단 말이오」그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엇다.「사과하겠소. 하지만 난 지금 일로 정신이 없소. 게다가 오래 전에 잊혀진 아내가 전화할 줄은 상상도 못했소」 「맘껏 조롱해요」그녀가 내뱉었다.「어쨌든 그런 모습은 당신한테 어울리지 않으니까」 두 사람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한숨은, 과거에 늘 그런 것처럼 서로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좋겠소?」그가 적대감보다 더 무거운 어조로 물엇다. 조안나의 어조도 똑같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오늘 만날 시간이 없다면‥‥ 산드로, 당신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해요」 「5시」그가 말했다.「집에서」 「싫어요!」그녀는 즉각 저항했다.「그곳에 가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그 공포 어린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정확히 알기 때문이었다. <벨그라비아>에 있는 사랑스런 집은 그녀에게 끔찍한 기억만을 남겼다. 그녀는 그소에서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그 문지방을 넘기도 전에 난 수치심에 죽어 버릴 거야! 「그럼, 여기서」그가 내뱉었다. 이제 그는 정말 화가 나 있었다.「한 시간 뒤. 내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요. 늦지 마시오」그가 경고했다.「아주 빠듯한 일정이고, 두 모임 사이에 당신을 만나야 하니까」 「좋아요」그녀는 힘없이 동의했다. 정말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는 게 나은 걸까? 우리가 함께 사용하던 그 집보다? 솔직히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한 번도 그의 회사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어떻게‥‥무‥‥무엇을 해야 하죠? 내 말은 그곳에 도착하면 말예요」그녀가 물었다. 아랫입술을 하도 깨물어서 거의 찢어질 것 같았다.「내‥‥내가 누구인지 말해야 하나요? 난 그러고 싶지 않‥‥」 「비밀이 드러날까 봐?」그가 신랄하게 암시했다.「아니면 나와의 법적 관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요?」 「산드로‥‥」그녀는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내가 이 전화를 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 줄 수 없나요?」 「그럼 내가 당신 전화를 받기는 쉬웟을 거라고 생각하오?」그가 거칠게 받아쳤다.「2년 전 당신은 내 인생에서 걸어나갔고, 그 이후 한 번도 그 사랑스런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소!」 「당신이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요」그녀가 상기시켰다.「내가 떠날 때 당신은‥‥」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소!」그는 그렇게 내뱉고는 연달아 한숨을 내쉬었다.「그냥 여기로 와요, 조안나」그가 지친 듯 결론지었다.「마지막 순간에 꽁무니 뺄 생각은 말고. 난‥‥오, 빌어먹을‥‥」그가 중얼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조안나는 죽음을 느꼈다. 목 위에서부터 목 아래까지 내려오는 죽음. 산드로와의 접촉은 언제나 이런 감정으로 끝이 났다. 힘이 빠지고 저장해 둔 마지막 한 방울의 에너지까지 깨끗이 소모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전화 박스 벽에 털썩 기댔다. 왜 난 처음부터 이 모든 혼란에 뛰어든 것일까? 갑자기 최후 통첩을 알리며 책상 뒤에 앉은 아서 베이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불은‥‥조안나, 현금이나 물품이야」그가 실크 같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선언했다.「당신도 이런 곳의 특성을 잘 알고 있겠지?」 지불은 현물이나 물품으로‥‥. 그 말에 그녀는 고통을 느꼈다. 「언제까지 지불해야 하죠?」그녀는 두 번째 전제는 완전히 무시하며 냉정하게 물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놓치지 않고 걸고 넘어갔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그녀가 이런 입장에 처하길 기다렸고, 그것은 매 순간 즐기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뻐걱거리는 가죽 의자에 앉아 큼직한 반지를 낀 손가락을 벌어진 셔츠에 쑤셔 넣으며 흰 재킷과 검은 새틴 셔츠 아래로 완벽하게 드러난 그녀의 날씬한 몸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이제 좋아지겠는걸」그가 허스키하게 암시했다.「아주 좋아질 거야‥‥」 순간 그녀는 남극의 빙하처럼 얼어붙었다.「난 돈을 지불을 물었어요. 언제까지죠?」 「빚은 빚이지, 달링」그가 가볍게 그 질문을 무시했다.「게다가 이미 2주나 늦었어」 「감기 때문에 일을 못했으니까요」그녀가 상기시켰다.「이제 다시 시작했으니 빨리 갚을 수 있어요. 난‥‥」 「당신도 규칙을 알 텐데‥‥」그가 말을 잘랐다.「정확힌 날짜를 지키거나, 그렇지 않으면‥‥당신도 알다시피 난 재미로 이런 일을 하지 않아. 당신 같은 사람이 재정 문제로 날 찾아오면 난 이렇게 말하지. <좋아, 마음 좋은 늙은 아서가 현금을 빌려 주지> 이해하겠지만 기한 내에 돈을 못 갚으면 재미없어. 이건 당신을 위해서 경고하는 거야」그가 주장했다.「만약 그대로 내버려두면 결국 원금만갚다가 끔찍한혼란 속에 빠지게 되거든」 그 말은 원금의 높은 이자를 갚기 위해 계속 돈을 빌리게 되고 결국 더 많은 빚을지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교활한 함정이었다. 그러나 아서 베이트는 돈이 아니라 그녀의 육체를 원했다. 그녀는 지불 연기라는 달콤한 유혹 때문에 그의 계략에 말려 들었다. 그와 일하는 것으로 상황이 얼마나 최악으로 치달았던가! 그녀는 초라하고 작은 그의 나이트 클럽에서 일했고, 어리석게도 도박에 손을 대서 빚을 졌다. 그것은 곧 아서 베이트에게 묶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 때 아서 베이트는 내 결혼을 몰랐어. 막강한 보네티 가문과의 내 연관성을‥‥. 그 모든 고통스런 문제에서 벗어날 길이 잇다는 것을 몰랐어. 물론 내가 그것을 이용할 마음이 있다면 말이지만. 그녀는 아서 베이트가 자신에게 다가서지 못하게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몸 위를 달리는 그의 시선이 말할 수 없이 역겨웠지만 그녀는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강한 혐오감이드러나지 않도록 눈썹을 내리깔고 패배의 달콤한 향기를 흘렸다. 「좋아요」그녀는 허스키하게 중얼거렸다.「언제?」 「오늘밤 일이 끝난 뒤」그가 말했다.「우리는 15분 안에 내 아파트에 있게 될 거야‥‥」 「불가능해요」그녀가 대답했다.「어쨌든 오늘밤은 안 돼요‥‥」그녀는 가느린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암시했다.「호르몬 때문에‥‥」그녀는 그 의미를 알아채기를 바랐다. 더 이상 그의 시선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자들이란‥‥」그는 그렇게 불평하더니 의심스러운 듯 말했다.「당신은 거짓말을 할 수 잇어. 시간을 끌기 위한 변명으로 말야」 그녀는 턱을 치켜들고 푸른 눈으로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그녀는 거짓말했다.「정말이에요」 「얼마나 걸리지?」그가 물엇다. 「사흘」그녀가 대답했다. 그 정도라면 의심을 일으키지 않고 멀리 떠날 수 있으리라. 「그럼, 금요일에」그가 동의했다. 고통이 심해서 고개를 끄덕일 힘도 없었다. 그녀는 곧장 그의 방을 나와 닫힌 문 옆에 힘없이 몸을 기댔다. 산드로와 통화한 뒤로 반응한 그대로. 다만 두 남자 사이에서 그녀의 반응은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아서 베이트에게 강한 혐오감을 느끼는 반면 산드로에게는 무력한 절망감을 느꼈다. 그녀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간신히 몸을 움직여 공중 전화 박스 문을 밀고 나왔다. 그러고는 비가 온 뒤 더욱 쌀쌀해진 3월의 매서운 바람에 얇은 가죽 재킷 속으로 몸을 더욱 웅크리며 몇 십미터 떨어진 아파트로 향했다. 좁은 아파트에 들어선 그녀는 두 손을 꼭 마주잡고 서서 언제나 자신을 맞이하는 텅 빈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산드로가 정한 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그러나 그녀는 그 두려운 만남을 위해 서둘러 준비하는 대신 방을 가로질러 구식 찬장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마치 그것이 실제로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힘을 가진 것처럼 내려다보면서. 실제로 그래. 그녀는 인정했다. 아니면 특별한 서랍 하나가. 그녀는한숨을 크게 쉬며 손을 뻗어 서랍을 열엇다. 그 특별한 서랍‥‥. 곧장 판도라 상자처럼 모든 기억이 말려왔다. 그 기억은 끔찍한 조롱을 퍼부으며 그녀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목적한 물건을 꺼내기 위해 모든 의지력을 끌어 모았다. 그러고는 고통스런 폐에 공기를밀어 넣으며 서랍을 다시 쾅 닫았다. 떨리는 손에는 그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해 주는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금빛 문자가 새겨진 마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보석상의 이름-적어도 그 상자 안의 물건이 아주 가치 있는 것이라는 힌트를 주는-이었다. 그러나 조안나에게 그 물건은 돈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지난 2년 동안 감히 그 상자를 열 수 없었다. 유난히 쓸쓸하고 비참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무심히 고개를 숙여 여전히 결혼 반지와 약혼 반지를 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공포에몸서리 친 이후부터는 아니었다. 결혼에서 도망쳐 나온 뒤에도 반지를 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온 방을 뒤져 상자를 찾아내고는 그 안에 반지를 넣었다. 그리고 언젠가 산드로에게 돌려보내리라 맹세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사실 그녀는 매순간 산드로를 생각했고, 몸을 갈가리 찢는 거칠고 무력한 묵은 고통을 느꼈다. 그 고통은 바로 몇 분 전 전화 박스 안에서도 폭발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작은 반지 상자를 들고 서 있는 지금 다시 폭발하고 있었다. 그녀는이를 꽉 깨물면서 섬세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순간 배 위에 바위가 쿵 떨어지듯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두개의 반지가 보라색 새틴 쿠션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가느다란 순금의 링이고, 다른 하나는 고상하고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정교했다. 목에 잠긴 침을 삼키는 순간에도, 따끔거리는 눈물에도 그녀는 백금에 박힌 다이아몬드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산드로가 준 사랑의 정표‥‥. <사랑하오>그는 약혼 반지를 주며 그렇게 말했다. 심플하고 산뜻하고 특별한 반지. 그는 엄청난 돈을 주고 이 반지를 샀으리라. 그는 사랑을 담아 내게 주었고, 난 사랑으로 받았어. 과거가 떠오르자 눈물이 시야를 가리고 고통의 먹구름이 밀려오기시작했다. 이제 사랑은 사라지고 정말로 그 반지들을 돌려줘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반지를 팔 수 있었다. 그 돈이면 아서 베이트에서 진 빚을 쉽게 갚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반지를 파는 것은 이 세상에서 유일한 남자한테서 지금까지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그의 긍지를, 그의 자존심을 빼앗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음을 빼앗았다. <당신은 날 만신창이로 만들고 있소. 그걸 모르겠소?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오, 조안나. 난 더 이상 견딜 수 없소!> 길고 비참했던 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격렬한 외침이 다시 들려 왔다. 그의고통이 느껴져서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결국 그녀는 그를 떠났다. 스스로 걸어나와 여동생 몰리가 잇는 집으로 이사했다.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산드로와 접촉하길 거부했다. 그가 실패한 결혼을 극복하고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행복을 찾았는지도 몰라. 그는 내 마음을 돌려 어떻게든 돌아오게 하려고 처음 몇 달은 무진 애을 썼어. 하지만 그 이후는 더 이상 접촉하려 하지 않았어. 심지어 몰리 때문에 그에게 전화했을 때조차도‥‥. 몰리‥‥.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반지에서 시선을 떼고 테이블 램프 아래에 놓인 작은 사진 액자를 보았다. 여동생 몰리의 귀여운 얼굴이 미소짓고 있엇다. 좁은 침대 모서리로 걸어가는 동안 가슴은 고통스런 슬픔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테이블 한쪽에 조심스럽게 반지 상자를 놓고 몰리의 사진을 집어들엇다. 「오, 몰리‥‥」그녀가 속삭였다.「산드로에게 도움을 청한게 잘한 일일까?」 대답이 없었다. 당연했다. 몰리는 더 이상 이세상에 없으니까‥‥. 하지만 산드로는 분명히 살아 있어. 산드로, 너무 뜨겁게 사랑한 남자. 그녀는 그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을. 하지만 그 때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알렉산드로 보네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녀가 종업원으로 일하는 작은 이탈리아 식당으로 그가 걸어 들어온 그 밤에 그녀의 인생은 문자 그대로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알렉산드로!」그녀의 보스인 비토가 깜짝 놀란 듯 소리쳤다. 그녀는 흘끗 시선을 들엇다. 조안나는 지금도 작고 통통한 비토가 자기보다 두 배나 큰 남자에게 푹 잠겨 라틴 식으로 포옹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비토의 대머리 위로 산드로는 그녀의 미소를 보았고, 마치 그녀의 즐거움을 정확히 아는 것처럼 그도 미소를 보내왔다. 그가 숱 많은 갈색 눈썹을 아래위로 깜박이자 그녀는 푸른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바로 그 일이‥‥. 두 사람의 시선이 잠기고 둘만의 마슬이 그들 사이의 공기 속에서 불꽃을 튀기 시작했다. 그의 아름다운 눈은 더욱 짙어지고 미소는 사라졌다. 쭉 뻗은 몸은 딱딱하게 굳었고, 표정은 완전한 충격에 잠겼다. 마치 무엇인가 엄청난 힘으로 그의 얼굴을 내리친 것처럼. 그녀는 그곳에 서서 심장을 멈추게 하는 똑같은 감각에 휘말렸다. 그녀는 비토의 등을 가로지르는, 신비할 만큼 관능적인 동작을 주시햇다. 놀랍게도 어깨가 따끔거리는 흥분이 밀려왔다. 마치 그가 자신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누구죠?」그가 작은 레스토랑 주인에게 물었다. 비토가 조안나 쪽으로 몸을 돌리며 싱긋 웃엇다. 그는 즉시 자신의 방문객이 무엇에 매혹되었는지 알았다.「자네는 벌써 이 집의 특제품에 점을 찍었군. 조안나야」그가 말했다.「내 가게에 불을 지르진 말게!」두 남자의 눈이 밝은 머리칼과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 순전한 라틴 남자의 시선에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모습을 훑었다.「조안나, 이쪽은 알렉산드로 보네티‥‥」비토가 두 사람을 소개했다.「내 사촌의 조카이자 경계해야 할 남자야」그가 경고했다.「당신의 불씨에 위험한 불꽃을 일으킬 수 있거든!」 <당신의 불씨에 위험한 불꽃을 일으킬 수 있는‥‥> 그 농담에 세 사람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말은 진실이엇다. 완전한 진실‥‥. 산드로는 그 어떤 남자도 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녀에게 불꽃을 일으켰다. 그녀는 마른 부싯돌처럼 그를 향해 불꽃을 일으켰다. 산드로가 일으킨 불꽃은 정말 아름다웠다. 마치 꿈이 실현되는것 같았다. 그런데 그 꿈이 어떻게 되었지? 그녀는 그곳에 앉아 허공을 응시하며 자신에게 물었다. 문제가 일어났지. 인생은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나의 꿈을 완전히 앗아갔어. 하룻밤 새 나는 산드로를 완전히 매혹시킨 생기 있는 사랑스러운 창조물에서 지금이 순간 이 곳에 앉아 있는 이‥‥ 여위고 가련한 여인으로 바뀌었어. 이런 초라한 모습으로 정말 다시 산드로에게 다가가겠다는 거야?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내가 그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현금 아니면 물품. 갑자기 그녀는 온몸을 떨기 사작했다. 감기 몸살을 앓는 뒤 자주 이처럼 몸을 떨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몸을 떠는 진짜 이유를 알았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선택하려고 왔으니까. 어떤 선택도 없는 선택을 위해. 조안나는 몰리의 사진을 테이블 옆에 내려놓고 찬장으로 가서 서랍 안에 반지 상자를 넣은 뒤 굳은 마음으로 산드로와 만날 준비를 했다. 2 조안나는 산드로의 회사에 나타나기 위해 모든 용기를 끌어 모았다. 그녀는 아름답게 보이고 싶엇다. 그의 명예를 위해서. 왜냐하면 산드로는 이탈리아 남자니까. 고급스런 감각과 안목, 스타일은 그에게 호흡만큼 자연스럽게 우러났다. 언젠가 조안나는 배를 드러낸 쪼그라든 흰색 티셔츠와 꾸겨진 흰색 팬츠만 입고 집안을 걸어다니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런 차림이라 해도 그는 여전히 숨믹힐 정도로 멋있었다. 아니, 섹시? 오, 그래. 그는 섹시해 보였다. 거무스름한 갈색 피부를 덮은 짙은 가슴 털과 맨발에서 강한 근육질의 허벅지, 살짝 헝클어진 짧고 곧은검은 머리칼, 소파에서 졸고 잇을 때의 게슴츠레한 눈, 심지어 면도가 필요한 텁수룩한 모습 조차그가 섹시하다는 사실을 감소시키지 못햇다. 그는 언제나 섹시할 거야‥‥. 어떤 여성에게도. 마음의 문을 닫거나 완전히 미치는 것만이 유일한 반응이엇던 나에게도‥‥. 그는 그녀가 그렇게 반응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그녀도 자신이 그렇게 반응하는 이유를 그가 이해하길 바라지 않앗다. 그러나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와 첫눈에 사랑에 빠졌을 때, 그녀는 간절히 그를원했고 때때로 사랑을 나누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일로 바빴고, 그녀에게는 신경 써야 할 동생 몰리가 잇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다리기로 햇다. 결혼할 때까지, 그녀가 그의 집으로 이사할 때까지, 마침내 두 사람 사이에 뜨겁게 끓어오르는 욕망에 푹 잠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가질 때까지.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일은 그들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내 잘못이야‥‥. 어떻게 산드로는 그렇게 오랫동안 날 참을 수 있었을까? 고통‥‥. 그녀가 산드로에게 준 것은 고통뿐이엇다. 마침내 그는 사업까지 망칠 만큼 끔찍한 고통과 혼란 속에 빠졌다. 그는 은행가이자 믿음에 따라 대량으로 투자하는 투자가였다. 자신만의 적절한 판단력을 믿는, 무한한 자신감을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와의 결혼은 그 판단력을 흐리게 했고, 믿음을 좀먹었다.「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소」그가 그녀에게 말했다.「당신은 내가 버텨야 할 모든 힘을 빼앗고있소」 「알아요」그녀는 비극적으로 속삭였다.「정말 미안해요‥‥」 소위 결혼이라는 무대에서 시간을 보낸 뒤 그의 인생에서 걸어나오는 것은 그렇게어렵지 않앗다. 그를 위하고 자신을 위한 것이니까. 그리고 끔찍한 긴장이 사라지는일종의 평화를 찾았다. 그녀가 바라던 평화를‥‥. 산드로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왜냐하면 지난 2년 동안 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보았고, 현명한 투자의 무한한 능력을 찬탄하는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돌아가면 또 문제만 일어날 거야. 그녀는 산드로에게 바이러스 같은 존재였다. 평범하고 자신감에 찬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기능을 좀먹는 바이러스‥‥. 짧고 가벼운 만남이 될 거야. 유리문을 종해 보네티 왕국의 본부가 있는 건물 안으로 발을 내딛으며 그녀는 자신에게 단단히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설명하고 그의 대답을 들은 뒤 곧장 그의 인생에서 걸어나오는 거야. 그녀는허름한 가죽 재킷과 낡은 청바지 차림으로 그 앞에 나타날 수 없었다! 그래서 단 하나 잇는 정장을 입엇다. 정확히 일년 전에 분노와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산드로와 관련된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할 때 유일하게 남겨둔 옷이었다. 지난 2년 동안 살이 많이 빠진 탓에 옷이 헐렁했다. 하지만 아파트를 떠날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해 서둘러 레인코트를 걸쳤기 때문에 야윈 몸은 거의 감춰져 있었다. 그녀는 어색함 없이 그 문을 통과해 놀라울 만큼 부산한 로비에 서 있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그녀는 걱정스럽게 주변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한숨이 새어 나오고 긴장이 뼈에 스며들었다. 다음 행동을 생각하느라 너무 걱정한 나머지 남자들의 감상적인 시선을 의식하지 못햇다. 그녀는 희고 촉촉한 피부에 사파이어 빛 푸른 눈동자, 머리 위 불빛을 받아 살아 잇는 듯한 길고 곧은 붉은 머리칼을 한 채 불안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알렉산드로 보네티는 로비 너머의 승강기 옆에 서서 남성 직원의 반 이상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숭배하듯 바라보는 것을 목격햇다. 푸른 눈이 신경질적으로 그 남자들 위를 스쳐지날 때의 영향력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입술이 가늘어지면서 분노가 차갑게 제어된 표정 아래 넘실거렷다. 그녀는 어떤 것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지 않앗다. 그녀는 대단한 자제력과 어떤 상황도 받아들일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을 가졌다. 그는 아주 작은 위험의 표시에도 곧장 날아가려는 이국적인 새처럼 주저하며 서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가장 큰 위험은 물론, 그였다. 그 때 그녀가 그를 보았다. 2년 만에 처음으로‥‥. 푸른 눈과 마주친 순간 목뒤의 머리칼이 쭈뻣 서기 시작했다. 전기 충격‥‥. 두 사람의 시선이 처음으로 마주친 순간 일어난 그날과 똑같은 충격이었다. 조안나는 뜨거운 전류처럼 온몸을 휘젖는 파장을 느끼고는 호흡을 멈추었다. 심장이 순식간에 크게 부푼 것 같앗다. 오랫동안 기다린 태양의 첫 햇살에 활짝 핀 꽃처럼‥‥. 사실상 그것은 고통이었다. 어째서? 왜냐하면 난 그를 사랑하니까. 늘 사랑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문자 그대로 가슴을 찢는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너무 커. 그녀는 무력하게 그를 살폈다. 그는 마르고 거무스름하고 세련되고 특별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거만함이 묻어 잇었다. 그 모습은 그녀의 메마른 가슴 안에 활짝 핀 꽃을 더 크게 부풀렸다. 그녀의 시선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눈썹의 갈색 눈 아래로 이동했다. 당당한 로마인의 살짝 꺽인 가는 코, 귀족적인 골격, 거무스름한 피부, 그리고 그의 입술이 있었다. 연인을 위한 입술, 로마 정복자의 입술, 한때 너무나 친근했던 입술이‥‥.가슴속에서 뭔가가 타오르며 그녀의 호흡을 거칠게 만들고, 간절히 그 입술을 다시 맛보고 싶게 만들었다. 안 돼, 난 할 수 없어! 그녀는 거친 고통의 물결 속에서 그렇게 자신을 꾸짖엇다.그에게 다가갈 수 없어. 이런 식으로 그를 마주 보며 견딜 수 없는 매력에 무관심한척, 냉정한 척 가장할 수 없어! 가야 해. 난 가야 해‥‥. 그녀가 도망치려해! 산드로는 척추를 휘감는 갑작스런 긴장 속에서 그것을 깨달았다. 그 도피의 충동은 문자 그대로 그녀의 모든 근육을 단단히 조였다. 순간 그는 움직였다. 자신의 눈으로 그녀의 당황한 시선을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서. 그녀를 향해 로비를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어가는 동안 그는 탁월한 의지력을 이용해 그녀를 자신의 시선 안에 가두었다. 먹이를 덮치기 전에 체면을 걸어 다가서는 노련한 표범만큼 우아하게 말이다. 그 동작은 로비 안의 모든 사람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경애하는 보스가 방금 들어온 아름다운 이방인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동안 숨막히는 침묵이 깔렸다. 「조안나‥‥」그가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서서 조용히 인사했다. 「안녕, 산드로」그녀는 쉰 목소리로 답하며 그 매력적인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머리를 뒤로 젖혔다. 두 사람은 잠깐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서로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추억에 잠긴 채‥‥. 나쁜 추억만은 아니엇다. 사실 가슴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추억도 있었다. 예상대로 그 사실을 거부하듯 그녀의 근육이 단단히 굳어졌다. 산드로는 상처받기 쉬운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아주 단순한 표정까지 정확히 읽었다. 여전히 불타는 사랑을, 여전히 상처 받는 고통을, 여전히 달라붙는 욕망을,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거부를‥‥. 그의 눈이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에게 응답하는 고통을, 자신의 가슴 속에서도 여전히 불타는 욕망을, 오래 전에 잊혀졌다고 생각했는데도 선명히 기억하는, 어쩌면 가장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랑을 되돌려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그가 그런 일을 한 날 여전히 사랑할 수 있겠어? 그는 눈을 깜빡이며 긴 눈썹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그러자 차가운 냉정함만이 남았다. 그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나 조안나는 그의 턱선이 눈에 띌 만큼 단단히 조이는 것을 보았다. 그가 그렇게 긴장한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그의 손가락이 팔꿈치에 닿는 순간 그녀는 즉각적인 이성의 경고와 함께 팔을 따라 뜨거운 전류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눈에 갇힌 푸른 눈은 차분하고 침착했다. 긴장 어린 순간이 지나고 그녀가 보여 주는 희미한 냉정의 흔적을 조롱하듯 아름다운 입술이 비틀렸다. 「어서‥‥」그는 그 말을 하며 자신들을 향한 호기심 어린 시선을 거만하게 무시한 채 몸을 돌려 침묵 깔린 로비를 가로질렀다. 「너무해요」조안나는 냉정하게 속삭였다.「꼭 이렇게 공개적으로 날 만나야 했나요?」 「그럼 은밀할 만큼 신중해야 했소?」산드로가 메마르게 말했다.「당신은 내 아내요. 정부가 아니라」그가 지적했다.「정부를 만날 때는 신중하지만 아내를 만날 때는 공개적이지」 그가 정부라는 말을 하자 몸이 굳어지고 심장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질투가 공포심을 대신하며 걸음을 막았다.「싫어요. 산드로, 난 할 수 없‥‥」 「사적인 공간, 카라」그가 곧장 말을 잘랐다.「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거요」 사적인 공간. 조안나는 그 말을 반복하며 그에게 이끌려 다시 움직였다. 그는 대기하고 있던 승강기에 그녀를 태웠다. 문이 스르르 닫히자 갑자기 단둘이라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회색 벽과 도망치려 해도 달아날 구멍이 없는 한 평 정도의 작은 상자 속에 단둘이 있었다. 안 돼! 그녀는 깜짝 놀랐다. 승강기가 위로 움직이자 위가 비틀렸다. 너무해. 그녀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문 채 두 손을 마주잡았다. 요동치는 묵은 상처가 끝없은 공포의 세계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산드로는 대번에 그녀의 마음을 알아챘다. 긴장한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떨고 있는 그녀를 보면 누군들 알아채지 못하겠는가?「그만하시오!」그가 내뱉엇다.「더 이상 당신을 건드리지 않잖소!」 「미안해요」그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절망적으로 애쓰며 속삭였다.「하지만 당신이 아니라 승강기 때문이에요」 「승강기?」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따라 했다.「언제부터 승강기가 그 많은 당신의 공포증에 하나가 된 거요?」 그 말은 조롱이엇다. 난 그런 소리를 들어도 싸.「묻지 말아요」그녀는 반쯤 웃으며 농담으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산드로는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내가 꺼내선 안되는 또 다른 금기 사항을 말한 거요?」 「지옥에나 가요」그녀는 요동치는 공포와 싸우면서 속삭였다. 「거기서 당신을 만날 수 잇을까?」그가 조롱했다.「당연한 건가」 그들은 다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이전의 전화 통화에서처럼 모든 감정을 쏟아내지 않고는 서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 마음놓아도 되오」그가 더욱 조롱을 담아 느리게 말했다.「승강기가 멈추었으니까」 그녀가 깜박이면서 눈을 떴다. 정말 멈춘 걸까? 문이 열렸고, 산드로는 윤나는 회색 카펫이 깔린 복도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따라오리라 기대한 그녀가 아직도 승강기 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승강기 벽에서 힘겹게 몸을 떼고 발을 내딛었다. 마치 등으로 무거운 낡은 짐을 끌고 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과연 여기 찾아온 이유를 말할 수 있을까? 조안나는 간신히 몸을 이끌어 그를 향해 걸어가며 생각했다. 구리빛의 기다란 손이 문손잡이에 놓여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문을 열고는 곧장 커다란 사무실로 안내했다. 책상 뒤에는 아주 매력적인 금발 미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에게 환하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산드로는 그 미소를 무시했고, 그녀를 소개할 마음도 없는 것 같앗다. 조안나는 더 불편해졌다. 그가 또 다른 방의 문을 열고 다시 옆에 멈춰 섰다. 조안나가 먼저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가 바로 옆에 잇다는 사실에 몸을 떨며 그녀는 서둘러 그를 지나쳐 들어갔다. 그의 사무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녀가 기대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그녀에게 익숙한 산드로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녀는 방 한가운데 멈춰 서서 둘러보았다.회색 빛의 최첨단 현대 장식은 고풍스런 그의 집과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등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 조안나는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고 애써 긴장을 풀려고 했다. 「코트를 벗지」산드로가 차갑게 명령했다. 코트? 그녀는 그를 향해 몸을 홱 돌렸다. 척추를 타고 경고의 전율이 흘렀다. 난 코트를 벗고 싶지 않아. 난 필요 이상 오래 머물 생각은 없어! 「난‥‥」 「코트, 조안나」그가 말을 막았다. 그녀가 움직일 생각을 않자 그는 분명한 의도를 담아 그녀에게 걸어왔다. 그녀는 곧장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런 그녀를 조롱했다. 자신을 다시 건드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과거만큼 자신을 잘 아는 그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코트를벗어 가까운 의자 위에 걸쳤다. 고맙게도 그 동안 그는 윤이 나는 커다란 삼나무 책상으로 걸어가 거대한 유리 창문 앞에 서 잇었다. 곧 그녀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다. 몸을 돌린 그가 책상 앞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가슴에 팔짱을 끼더니 그녀를 천천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긴장으로 꼬인 발끝에서 반짝이는 머리 꼭대기까지. 얼굴을 붉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 위의 핸드백 끈을 꼭 움켜잡았다. 그는 언제나 표정만으로도 그녀를 압도할 수 있는 교묘한 기교의 소유자였다. 의도적이야, 그녀는 그렇게 추측했다. 「말랐군」마침내 그가 말했다.「그 옷이 마치 오래된 배낭처럼 당신 몸에 걸려 있소. 계속 그렇게 마르다간 그대로 사라져 버릴 거요. 왜 그렇게 살이 빠진 거요?」그가 물엇다. 「미안하군요」그녀가 내뱉었다. 그는 이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어! 내가 살아온 고통스런 지난 세월을 추측하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닐 테니까. 「또 <미안하다>?」그가 조롱했다.「과거에도 그 말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였지. 날 화나게 만든 말이기도 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요」그가 딱딱하게 덧붙였다. 그녀는 턱을 치켜들고 푸른 눈을 번쩍 빛내며 경고의 불꽃을 보냈다.「바쁘다고 하지 않았나요?」그녀가 투명스럽게 상기시켰다. 그는 짧은 분노와 함께 귀중한 시간을 상기했다. 무엇보다 그는 그녀의 냉정을 흔들 수 있는 유혹을 저항할 수 없엇다. 한때 그는 냉정이 그녀가 가진 유일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생각은 옳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짧고 비참했던 결혼 생활 동안 그 감정만을 보여 주었으니까 말이다.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렸고, 조안나는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산드로는 그녀의 신경 과민에 얼굴을 찌푸렸다. 비서가 커피를 든 쟁반을 들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방안의 긴장을 눈에 띌 만큼 확연했는지 비서는 알아듣기 힘든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며 서둘러 쟁반을 내려놓앗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산드로는 움직이지 않았고 조안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침묵이 그들을 둘러싼 공기를 조금씩 갉아먹었다. 조안나는 그 훼방꾼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산드로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빛나는 금발 끝에서 검은 하이힐을 신은 가는 발목을 치달렸다. 그런 식으로 여성을바라보는 것은 그의 천성이엇다. 그는 그 자신이 그렇다는 것도 알지 못할 거야. 맙소사, 그녀는 그것이 싫었다! 아름다운 여자야. 질 투어린 침묵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물론, 그 여자는 아름다워야 해! 아름답지 않다면 산드로는 자신의 비서로 고용하지 않았을 테니까! 「고맙소, 소니아」소니아가 막 문을 걸어나가려 할 때 그가 말했다. 소니아가 흘끗 시선을 던졌는데 그 시선이 왠지 의미 심장하게 느껴졌다. 그가 나를 소개해 주지 않아서 기분이 상한 것일까? 하지만 조안나는 오히려 안도했다. 도저히 그의 비서와 인사를 나눌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안나는 문자 그대로 피부아래 지글지글 타오르는 강렬한 질투심을 잠재우기에 너무 정신이 없었다. 소니아는 비서 이상의 의미일까? 은밀한 정부? 문이 닫히고 산드로의 관심이 다시 조안나에게 돌아왔다. 잠깐 그녀의 굳은 몸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맙소사, 후들거리는 다리가 풀리기 전에 앉으시오」그가 의자를 손짓하며 말햇다. 「내 다리는 떨리지 않아요」그녀가 부정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몸을 돌려 소파 모서리에 걸터앉앗다. 그가 바로 옆에 앉는 낡은 수법을 쓰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것은 그녀를 불편하게 만드는 또 다른 전술이엇고 예전의 그는 그녀를 항복시키기위해 종종 그런 치사한 방법을 쓰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는 그 방법을 쓰지 않고 잔에 커피를 따랐다. 조안나는 그의 모든 동작을, 커피를 따르는 갈색 손가락의 능숙한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는 커피에 뭘 넣겠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산드로의 기억력은 뛰어났다. 어렵지 않게 이름을, 지명을, 사건을, 숫자를 기억할 수 있었다. 그는 기억력은 사업상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빈틈없는 남자였다. 그를 속일 수 잇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비록 그녀가 간신히 그 소수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좋소」그가 간단히 말했다.「그럼 들어 볼까‥‥」 그녀는 손이 떨려 커피를 흘릴까 봐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돈이 필요해요」그녀가 중얼거렸다. 그 누구보다 그에게 그런 부탁을 해야 하는 자신을 혐오하면서. 「얼마나?」 그는 충격의 흔적도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그에게 뭔가를 부탁한 적은 한 번도없었다. 치약을 짜는 사소한 일조차. 그도 그것을 알앗다. 완벽한 기억력의 소유자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그녀의 긴급한 상황을 눈치채고 있는 것이다. 「5‥‥5‥‥」긴장으로 나머지 말이 목에 잠겼다. 그녀는 다시 말하기 위해 침을 삼켜야 했다.「5천 파운드요」 여전히 아무 말도,아무 반응도 없엇다. 당황한 조안나는 그의 생각을 알기 위해 강압적인 얼굴을 흘끗 올려다보앗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당신에겐 큰 돈이군, 조안나」 「알아요」그녀는 인정했다.「미‥‥」<미안해요>라고 하려다 멈추고 대신 곧장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단 한순간도 그 어두운 눈빛 아래 버티고 있을 자신이 없엇다. 숨막히는 불안 속에서 그녀는 그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뒤쫓고 있다는 것과 그의 두뇌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그리고 그는돈을 원하는 이유를 묻고 잇었다. 하지만 그는 직접 말할 때까지 묻지 않을 거야‥‥. 책상으로 다가가 모서리에 걸터앉은 그녀는 두 손을 엇갈려가는 팔을 꼭 감싸안았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고개를 홱 돌려 그와 마주했다. 그러고는 턱을 치켜들며 신중한 회색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난 정당한 권리가 있어요」그녀가 말했다.「난 돈‥‥돈이 필요해요. 당신은 내가 아는 유일한 부자예요. 일종의 정착자금이라고 생각하고 주면 될 거예요」 「무슨 정착?」 갑자기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이혼」 순간 모든 게 정지했다. 심지어 그 길고 풍성한 눈썹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무서울 만큼 냉정한 남자였다! 「당신도 이 결혼에 매달리고 싶진 않겟죠?」그녀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깨끗한 해결을 위해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5천 파운드로?」 그녀의 볼이 죄의식으로 붉게 물들엇다.「그래요」 「잠깐 정리 좀 해봅시다」그가 나열했다.「당신은 단 5천 파운드로 백만 장자와 이혼을 원하고 있소. 이런, 조안나‥‥ 당신은 내 자존심을 모욕하는군」그가 커피를 다 마시고 테이블에 잔을 놓으며 말햇다.「왜 변호사를 찾아가 내 재산의 반을 요구하지 않는 거요?」그가 제안했다.「결국 당신은 정당한 권리가 있잖소?」 아니, 그녀는 없었다. 그녀는 산드로에게 어떤 것도 받을 권리가 없었다. 지금 요구한 5천 파운드조차.「난 5천 파운드만 있으면 돼요」그녀는 회색 카펫을 응시하며반복했다. 차마 그를 볼 수가 없었다.「오늘 그 돈이 필요해요. 만약 가능하다면‥‥」 「현금으로?」 그녀는 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엿다.「부디‥‥」 또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주 작은 힌트라고 찾아내기 위해서 고개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의 자신을 반으로 쪼갤 듯한, 무서을 정도로 진지한 표정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불안한 손가락이 정장 재킷의 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그 돈이 필요한 이유를 말하는 게 좋을 거요」산드로가 조용하게 말했다. 「빚‥‥빚을 졌어요」그녀가 고백했다.「그리고 돈‥‥돈을 빌려준 사람이 갚으라고 재촉해요」 「누가? 정확히 누가 당신을 재촉하는 거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작은 턱은 수치심으로 거의 가슴에 달라붙다시피 했다. 또 다른 긴장 어린 침묵이 이어졌다. 이제 그녀는 그에게 모든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내게 무척 실망할 거야! 그녀는 산드로 같은 남자가 가치 있게 여기는 일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그녀가 일 주일에 엿새의 밤낮을 두 개의 다른 직장에서 일하는 것에 화를 내곤 했다. 그는 더 나은 인생을 위해 야망을 갖지 않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몰리와 함께 쓰는 작은 아파트를 혐오했고, 심지어 더 나은 장소로 옮기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더 나은 장소지? 그녀는 늘 산드로 같은 남자가 방문하기에 적당한 장소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도박을 혐오했다. 쉬운 방법을 찾는 의지 약한 패배자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런 생각을 가진 남자에게 내가뭐라고 하겠어? 작년 한 해 동안 하찮은 돈 몇 푼 때문에 카지노에서 일했노라고? 그리고 그 몇 푼마저 도박으로 다 잃었노라고? 그녀는 할 수 없었다. 그 편이 더 간단했다. 그녀는 말할 수 없었다. 5천 파운드를 갚아 줄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가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챌까? 그가 갑자기 화제를 바꿔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그의 또다른 수법 가운데 하나였다. 「요즘에는 어디서 살고 있소?」그가 물었다. 「이곳 런던에서요」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도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들고 있소?」 「그래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그의 실망이 분명히 드러났다.「당신은 그런 일을 다시 할 필요가 없었소, 조안나」그가 엄격하게 말했다.「우리가 헤어질 때 난 당신이그 일을 다시 해야 할 만큼 한 푼도 안 주고 내보낼 생각이 없었으니까」 「당신은 내게 빚이 없어요」그리고 두 사람 모두 그 말 속에 더 많은 진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은 내 아내요!」그가 초조하게 내뱉었다.「그리고 난 당신에게 빚이 있소!」 우리는 다시 돈으로 돌아왔어. 조안나는 쓰게 생각했다. 「내가 믿을 수 없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이 빚을 졌다는 거요!」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계속했다.「당신은 아주 하찮은 빚이라도 지길 꺼려한 여자요」 그녀는 수치심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그 몇 마디의 칭찬에 위로를 받앗다. 그가 옳아. 돈은 한 번도 중요한 적이 없었어. 「그래, 누구 때문이오, 조안나?」산드로가 엄하게 물엇다.「당신이 부탁한 5천 파운드를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요?」 그녀는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나 때문이에요. 이 모든 문제에 빠져든 것은 바로나 자신이에요」 그러나 그는 이미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몰리 때문이겠지」그가 단언했다.「틀림없소. 여동생이 재정적 어려움에 빠졋소, 조안나?」그가물엇다.「이 모든 게 그 때문이오?」 「오, 세상에‥‥. 너무해요」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숨을 헐떡였다. 마치 그에게 방금 10센티의 칼로 가슴을 찔린 것 같았다.「어떻게 몰리를 끌어들일 수 있죠?」그녀는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당신은 그녀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잖아요!」 3 산드로가 벌떡 일어났다.「뭐라고 했소?」그가 쉰 목소리로 쥐어짜듯 말했다.「제발, 다시 말해 봐요」갑자기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가 다시 물었다.「내가 잘못 들은 게 분명할 거요」 「하지만 당신은 알아요!」조안나가 외쳤다.「몰‥‥몰리는 일 년 전에 교통 사고로 죽었잖아요!」 「아니오!」그 분노의 부정은 문자 그대로 그 안에서 폭발했다.「당신 말을 믿을 수 없소!」 그러나 조안나는 아무 감동도 받지 못했다.「난 당신에게 전화했어요. 바로 여기,이 사무실로! 당신과 통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 비서에게 메세지를 남겼단 말이에요!」그 비서였을까? 갑자기 그녀는 궁금했다. 내 모든 인생이 산산조각 나던 그날 난 그 사랑스러운 소니아와 통화한 걸까? 「당신이 여기로 전화했다고?」마침내 그녀의 말이 마음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술 취한 것처럼 들렸고, 갑자기 정말 그렇게 보였다. 완전히 술 취한 사람 같았다.「몰리가 죽었다고?」 「내가 정말 그런 일을 거짓말하리라 생각해요?」 물론 아니지. 그런 걸 거짓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충격이 마르고 단단한 몸 전체로 내리쳤다. 순식간에 그 유명한 보네티의 자제력이 무너졌다. 그리고 분노의 충동을 보여주듯 그는 불끈 쥔 주먹으로 유리 깔린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조안나는 마비된 불신 속에 숨을 헐떡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힘의 여파로 섬세한 잔이 덜컹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이 나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테이블의 유리는 커피 잔처럼 박살 나지는 않았지만 반으로 금이 가 있었다. 곧 이어 이어진 침묵은 소름이 끼칠 정도엿다. 산드로가 천천히 몸을일으켜 세웠다. 일그러진 입술과 창백한 얼굴, 그리고 꽉 쥔주먹 관절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오, 안 돼」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앗다.「당신은 몰랐군요‥‥」 「아주 빠르시군」그는 말을 자르며 성한 손을 주머니에 넣어 손수건을 꺼냈다. 그가 피로 물든 관절 주변을 손수건으로 싸는 동안 그녀는 온몸을 떨며 서 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숨을 쉬려 했지만 쉴 수가없었다. 충격의 강철이 고통치는 심장을 그대로 움켜잡은 것 같았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소니아가 거의 넘어질 듯 안으로 들어왔다.「오, 맙소사!」사건의 잔해를 본 그녀의 눈이 공포로 휘둥그레졌다. 「나가!」산드로가 그녀에게 무자비한 표정으로 고함쳤다. 소니아는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를 낮게 중얼거리며 재빨리 방을 나갔다. 그녀의 등뒤로 문이 닫혔다. 「당‥‥당신 비서에게 화를 낼 필요는 없었어요」조안나는 비난 어린 어조로 중얼거렷다. 산드로는 그 비난을 무시했다.「난 당신 메시지를 받지 못했소」그가 내뱉엇다.「내가 알면서도 무시했으리라고 생각했소? 당신은 그렇게 생각했군」무방비 상태의 얼굴 속에서 메아리치는 대답을 보며 그는 깨달았다. 난 그를 모욕햇어. 간단히 그가 몰리의 죽음을 방관하리라 믿음으로써 말야. 아마도 그것이 내가 한 것 가운데 가장 큰 모욕일 거야. 그리고 난 몇 번이나 그를 모욕했어.「난‥‥」 「아무 말도 마시오」그가 매섭게 경고했다. 그녀가 떨리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처음엔 나도 당신이 몰리의 죽음을 무시햇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며‥‥며칠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난 당신이‥‥」그녀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머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난 제정신이 아니었죠」그녀는 쉰 목소리로 계속했다.「거의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장례식이 끝나고 아파트를 옮긴 뒤에야‥‥왜냐하면 난 더 이상 그곳에 살 수가 없엇으니까요. 그녀‥‥없이‥‥」몰리의 이름조차 말할 수 없엇다.「당신이 연‥‥연락하지 않았다는 걸 진심으로 깨닫기 시작한 것은 그 때엿어요‥‥」마침내 그녀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엇다. 산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 한 마디도. 그저 숱 많은 검은머리를 쓸어 넘기던 손을 떨어뜨렸을 뿐이다. 그러곤 갑자기 그녀의 얼굴을 외면했다. 마치 그녀의 표정이 그를 화나게 한 것처럼. <미안하다>는 말이 다시 혀 위에서 맴돌았지만 그녀는 간절히 억누렀다. 그녀는 그저 무력감과 죄의식 속에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언제요?」갑자기 그가 물엇다.「언제 그 일이 일어났소?」 그녀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에게 날짜를 말했다. 「맙소사!」산드로는 숨을 헐떡였다. 몰리는 일 년 전 바로 오늘 죽었다. 갑자기 그가 자신 쪽으로 움직이자 그녀는 예민한 시선으로 그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는 그녀를 지나쳐 책상을 돌아 거칠게 수화기를 낚아챘다.「일 년 전 오늘 날짜로이 사무실에 온 모든 전화 명단을 가져오시오」그는 전화선 너머의 누군가에게 소리쳤다.「작년 스케줄 기록도!」쾅 하며 수화기가 다시 제자리에 놓였다. 조안나는 여전히 그를 응시한 채 당황하여 눈을 깜빡였다. 자제력이 뛰어난 산드로가 보이는 이런 감정적인 분노의 표현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 원인의 하나가 된 것이 두려웠다. 그가 갑자기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몸을 앞으로 기대고 얼굴을 감쌌다.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 들었다. 그 당시 그녀는 그가 더 이상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진심으로 믿었고, 엄청나게 깊은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지금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몸에 팔을 두르고 꼭 안아 주고 싶었다. 방금 자신이 던진 충격에 어떤 식으로든위로 의 말을 속삭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할 수 없었다. 절름발이 감각이 그녀를 막았다. 대신 그녀는 몸을돌려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안앗다. 그리고 여전히 위로가 필요한 것 같은 산드로에게 다가가고 싶은 유혹을 이기려고 눈을 내리깔았다. 주저하는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열리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산드로는 그 자리에서 몸을 폈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과 일그러진 표정, 조안나의무력한 가슴을 비틀 만큼 너무 어두운 눈이엇다. 그는 조안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곧장 비서에게 관심을 돌렸다.「회장님께서부탁하신 명단입니다」그녀가 서둘러 다가와 책상에 내려놓았다.「또 작년 스케줄이적힌‥‥」 산드로가 내용을 자세히 살피는 동안 소니아는 조안나에게 은밀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기 전에 얼른 시선을 돌렸다. 「3월 한 달 내내 로마에 있었군」산드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소니아가 고개를 끄덕엇다.「네, 그러셨어요」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소니아가 왜 얼굴을 붉힐까? 죄의식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곳에서 연인으로지냈다는 것을 기억해요>라고 말하는 건가? 질투가 쿡쿡 쑤시는 고통을 남기며 등뼈를 따라 거친 사포를 문질러 댔다. 「그럼 여기 업무는 누가 인수햇지?」산드로가 물엇다. 「루카가 그의 비서를 데려왔어요」소니아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대담하게 물었다.「왜요? 뭔가 잘못된 것이 있었나요?」 「잘못된 것?」산드로는 그 말을 반복하며 짧은 분노의 웃음을 터뜨렸다.「당신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좋아, 소니아, 이제 나가도 좋소」 깔끔한 추방이군. 산드로는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남자니까. 소니아는 또 다른 침묵을 남기며 서둘러 방을 나갔다. 「이리 오시오, 조안나」산드로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이건 너무 잔인해. 고통스런 질투가 이제 온몸을 퍼져서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엇다. 그를 쳐다볼 수도 없었다. 만일 그를 본다면 입에서 상스러운 비난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당싱는 나와 결혼한 동안에도 그 여자와 잤어, 이 괴물! 「조안나‥‥」 오, 맙소사. 내가 왜 여기 온 거지? 왜 이런 상황에 빠져든 걸까? 그녀는 절망적으로 냉정의 파편을 움켜잡으며 책상을 향해 앞으로 걸어갔다. 「읽어 봐요」그가 종이에 한 줄로 나열된 문자를 긴 손가락으로 찌르며 명령했다. 그것은 일종의 명령이엇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제서야 글자에 집중할 수 있었다.「보네티 씨를 찾는 여성의 전화. 이름도, 메세지도 없음」 「이것은 그날 이 사무실에 온 모든 전화 내용을 컴퓨터로 뽑은 거요」그가 설명했다.「날짜와 시간을 보시오. 이것이 당신이 한 전화였소, 그렇지?」그가 부드럽게 물었다.「사고가 난 그 날 당신은 여기로 전화한 거요. 나와 통화할 수 없다는 사실과 충격과 혼란 때문에 당신은 이름과 긴급하게 전화한 이유를 남기지 않았소, 안 그렇소?」 내가? 정말 내가 그랬나?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기억하려 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산드로와 연락하려 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이걸 봐요」그가 일정표를 내밀며 말했다. 그 달은 대문자로 <로마>라고 표시되어 있었다.「난 이 나라에 없었소. 그 달 내내 나가 있었소」 「날 확신시키기 위해 이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어요」그녀는 불편하게 중얼거렸다.「이런 증거 없이도 난 당신을 믿으니까요」 「고맙소」그가 말했다. 「당신은 거짓말쟁이가 아니에요」그녀는 가는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여 말했다.「난 한 번도 당신의 정직과 성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어요」 「이런, 그것도 고맙소」그가 빈정거리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책상을 돌았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는 수법은 그녀를 당황하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갑시다」그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몸이 나무처럼 단단히 굳었다. 하지만 그는 오래 전에 익숙해진 그 경직을무시하고 그녀를 문쪽으로 이끌었다. 「어딜 가는 거예요?」그녀가 힘없이 물었다. 「손을 치료해야 하오」그의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커다래진 눈으로 올려다보는 아름다운 비서를 지나쳐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대기중인 승강기로 향했다. 그가 꼭 잡아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그 순간 그는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성한 손을 상의 안주머니에 넣어 신용 카드처럼 보이는 플라스틱을 꺼내 승강기 옆의 좁은 슬롯에 미끄러뜨리고 층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조안나는 그 끔찍한 문이 닫히는 동안 두려움을 진정시키기 위해 정신이 없어서 몇 층을 가는지도 몰랐다. 「저런, 불쌍하기도 하지. 당신도 그걸 알고 있소?」그가 빈정거렸다. 그래요. 그녀도 그것을 알앗다. 문이 닫히고 승강기가 움직이자 그녀는 벽에 몸을 바싹 기댔다. 아래층으로 내려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위로 올라간 승강기는 곧장 다시 멈춰 섰다.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산드로가 반은 찌푸린 얼굴로, 반은 경멸 어린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상처받기 쉬운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문이 스르르 열리자 산드로는 그녀의 얼굴을 외면하며 승강기에서 내렸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마지못해 벽에서 몸을 떼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앞으로 걸어갔다. 단 두 발자국을 걷다가 멈추어 선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앗다. 「여기가 어디죠?」그녀가 날카롭게 물었다. 「맨 위층」산드로가 대답했다.「정확히 말해서 내 개인 아파트요」 순간 모든 공포가 그대로 폭발했다. 그녀는 푸른 눈을 깜박이며 도망칠 곳을 찾는덫에 갇힌 동물처럼 새로운 환경을 살폈다.「당‥‥당신의 아파트요?」그녀가 불안하게 반복햇다.「여기가 말이에요?」 「그렇소」그가 날카로운 어조로 보장했다. 그는 그녀의 생각을, 느낌을, 개인 아파트가 그녀에게 의미하는 친밀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친밀함이 고통으로 변하는 것을 알앗다. 그녀가 그에게 쓴 시선을 던지자 그가 조롱의 시선으로 답했다. 그 시선은 그녀에게 저항해 보라고, 가슴속에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을 포기하라고, 등뒤의 의심스러운 도피처인 승강기를 향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 보라고 도전하고 있었다. 또다시 갈등이 일었다. 산드로를 택할 것인지, 아서 베이트를 택할 것인지‥‥.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엇다. 승강기 문이 부드러운 경고음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녀는 펄쩍 뛰며 몸을 홱 돌렸다. 유일한 의미의 탈출구가 눈앞에서 조용히 닫히고있었다. 「저런, 저런‥‥」너무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는 움찔했다.「완전히 덫에 걸린 생쥐 꼴이군. 가엾은 조안나. 하지만 부디‥‥」그는 그녀가 그 조롱에 반박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편안히 있어요. 난 다친 손을 치료해야 하니까」그는 그 말을 남기고는 어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실 한복판에서 멍하니 주변을 응시하며 머뭇거리는 그녀를 남겨 둔 채. 멋진 곳이군. 그녀는 혼란스런 머리 속에서 처음으로 그 생각을 했다. 엘리베이터는 웅장한 거실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고, 그곳은 현대적인 그의 사무실과는 달리 산드로의 고전적인 이탈리아 식 기호가 반영되어 있었다. 카펫 위에 놓인, 시간을 초월한 우아한 고가구와 현대적인 소파,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간편한 의자의 자연스런 조화로 옅은 파스텔 톤의 벽은 고상한 배경을 연출했다. 그가 주먹으로 내리칠 유리 테이블은 없엇다. 다른 사람이 아닌 산드로가 자제심을 잃는 모습을 떠올리자 숨이 막혓다. 그답지 않앗어. 산드로는 언제나 그 누구보다 강한 인내심과 자제력의 소유자였는데. 네가 옆에 있으면 그가 그렇게 되잖아. 머리 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조롱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가냘픈 어깨에 진실의 무게가 힘겹게 놓여 있었다. 몇 분 전에 사라졌던 그가 다시 돌아왔다. 그를 보자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눈부신 기쁨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 남자의 강렬한 매력에 취해 있었다. 재킷과 넥타이는 사라지고, 옅은 푸른색 셔츠의 맨 위 단추는 풀려 그을린 목을 돋보이게 했고 소매는 털이 덮인 팔 위로 올라가 있었다. 「자‥‥」그가 말했다.「이걸 좀 해 봐요」 그녀는 그가 걸고 있는 최면에서 벗어나려고 두 눈을 깜박엿다. 그리고 짙어진 눈으로 다친 손을 감싸고 있는 흰 수건을 내려다보았다. 「피가 멈출 때까지 감고 있어야 하오」그가 그녀에게 붕대를 내밀며 설명했다. 그가 너무 가까이에 있어. 그리고 그는 온몸에 전류가 흐를 정도로 너무 매력적이야. 그의 몸의 열기와 희미한 체취가 느껴지면서 기억들이 속절없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따뜻하고 단단한 근육질 육체에 안겼을 때의 수많은 추억‥‥. 그녀는 그를 원했다. 그녀는 거의 신음 소리를 낼 뻔했다. 얼마나 간절히 이 남자를 느끼길원했던가. 내 몸에 닿는, 내 몸을쓸어 내리는‥‥더 깊은 곳의 내 안에서! 「조안나!」그의 목소리는 딱딱하고 화가 나 있었다. 그 어조는 그녀가 이처럼 창백한 얼굴로 떨며 서 있는 이유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엇다.「난그저 붕대를 감아 달라고 말했을 뿐이오. 그 빌어먹을 옷을 벗으라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분노가 그의 내부에서 그대로 폭발했다.「내가 직접 하겠소」 「아니에요!」그녀가 외쳤다.「아니」그녀는 쉰 목소리로 반복했다.「내가 할게요」 뜨겁고 고통스런 침묵 속에서 그는 그녀가 수건을 풀어 상처를 살피고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세심하게 유리 파편을 점검하게 내버려두었다. 그녀는 긴장 어린 아랫입술을 꼭 깨물엇다.「지금도 아파요?」상처 부위를 살짝 누르면서 그녀가 물었다. 「아니오」 「생각만큼 그렇게 심하지는 않아요」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가볍게 말하려고 애썼다.「어리석은 짓이었어요, 산드로」 「내가 당신 여동생의 죽음을 무시할 거라고 믿는 것도 어리석지」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이야. 난 바보였어. 충격에 빠진 바보, 슬픔에 젖은바보, 수많은 상황 속의 바보‥‥. 「자, 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시오」그가 조용하게 요구했다. 붕대에 반창고를 붙이는 동안 떨림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산드로의 손가락은 길고강했다. 하지만 손톱은 깔끔하게 깍여 있고 손에 닿는 피부는 따뜻했다. 「그녀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어요」그녀가 감정이 결여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버수 정류장에 서 있었는데 차가 덮쳤죠. 브레이크 고장이었어요」그녀가 설명했다.「운전사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몰리만 죽은 게 아니에요」그녀가 딱 잘라 말했다.「세 명이 더 죽고 나머지 세 명은 심하게 다쳤어요. 사고 소식이 모든 신문에 실렸어요」그녀가 쉰 목소리로 덧붙였다.「이름과 주소가 나오고‥‥」그것이 산드로가 알았을 것이라고 그렇게 확신한 이유였다. 전화 연락을 받지 못했다 해도 신문에서 그 기사를 읽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갑자기 그녀는 거의 고통에 가까운 경련을 일으키며 떨기 시작했다. 산드로가 이탈리아 어로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고 느낀 순간 그녀는 단호한 팔에 감싸여 잇었다. 「울고 싶으면 맘껏 울도록 해요」그가 부드럽게 권했다.「솔직히 나까지 울고 싶을 지경이니까!」 농담일까? 아니, 농담이 아냐. 너무 고통스러워서 단지 농담으로 돌릴 수 잇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녀는 몇 년 동안 울지 않았다. 울 수없었다. 아니, 울지 않을 거야. 왜? 왜냐하면 만약 눈물을 한 방울이라도 흘린 다면그 뒤에는 눈물샘이 터져 버리고 말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그의 포옹이 전해 주는 작은 위로를 받으며 서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울어야만 했다. 그래야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괴물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미안하오, 카라. 내가 이곳에 있어야 했는데‥‥」그가 중얼거렸다. 「이제 상관없어요」그녀는 그의 따뜻한 갈색 목에 얼굴을 묻은 채 낮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그가 벌컥 화를 냈다.「아니, 빌어먹을 만큼 상관이 있소!」그녀를 밀어내며 그가 외쳤다. 그녀는 한기와 외로움 속에 다시 혼자 남겨진 채 그에게 다시 안기고 싶은 절망적인 충동과 싸워야 했다. 「빌어먹을 만큼 아주 많은 상관이 있지!」그가 거친 목소리로 반복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어. 조안나는 생각했다. 일 년 뒤 또다른 도움을 요청하며. 다만 이번에 원하는 것은 돈이지. 동정이 아니라. 엄청난 차이야. 그 생각은 다시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로 돌아오게 했다. 돈‥‥. 산드로가 풍족하게 가진 일종의 일용품. 전에 그녀는 그 일용품에 아주 작은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이 왜 간절히 결혼을 원했는지 그녀는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값싼 아파트에서 살았고, 생계를 위해 종업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산드로의 집들은 최고의 장소에 있었다. 이를테면 그의 런던 타운 하우스는 벨그라비아에, 우아한 이탈리아 아파트는 로마 콜로세움에서 고작 몇 블록떨어진 곳에 있었다. 심지어 오늘까지 몰랐던 이 집조차 그녀 같은 여자에게는 특별한 곳이었다. 회사 맨 꼭대기 층에 있는 이 편리한 아파트는 산드로의 풍족한 생활 방식을 반영했다. 간단히 말해 산드로는 이탈리아 최고의 상류층 출신으로 호화스러운 환경에서 살고 호화롭게 여행했다. 그리고 지위를 나타내는 값비싼 옷을 입었다. 그런데 이 특별한 남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는 작은 뒷골목 이탈리아 식당에서 일하는 보잘것없는 웨이트리스에게 한눈에 반했고, 그녀를 위해 그 대단한얼굴을 숙였다. 그녀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번도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녀는 너무 어렸고, 너무 순진했으며, 사랑에 빠지기를, 자신의 눈을 멀게한 이 남자에게 사랑받기를 간절히 열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사랑으로 그녀를 대했다. 꽃과 작은 선물, 부드러운 키스가담긴 구혼방법으로 말이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소. 당신이 순결한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내게 걸어오길 원하오. 내가 그 순결의 선물에 정당한 값을 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오, 맙소사. 이제 그 기억은 그녀에게 고통만 안겨 주었다. 아름다운 단어들, 따뜻하고 세삼하고‥‥믿을 수 없을 만큼 로맨틱한 말들, 그 말들은 감수성 여린 마음속에 우상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그들을 완전히 파멸시킨 것도 바로 그 아름다운단어들이었다. 갑자기 그가 몸을 홱 돌렸고,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도 나처럼 고통스러웠던 추억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녀는 그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했다. 「그녀가 뭘 느꼈소?」그가 물었다.「죽기 전에 어떤 고통이라도‥‥?」 그의 말은 몰리를 의미했다. 그는 천성이 따뜻학 사랑스러운 몰리를 생각하고 있었어, 내가 아니라.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했어요. 그녀는 거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다행이군」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이어서 두 사람 모두를 침묵케 하는 날카로운 정적이 깔렸다. 그 때 방 어딘가에서 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가 뭐라고 중얼거리며 전화기를 향해 걸어갔다.「시?」그가 수화기를 대고 내뱉었다. 모국어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평소의 그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초조하게 어두운 눈을 번쩍이며 듣고 있었다.「아니, 안 돼」그가 말했다.「취소해. 난 여기 일로 아주 바쁘니까」 취소? 무엇을 취소하지? 갑자기 이해할 수가 있었다.「오, 안 돼요, 산드로! 제발나 때문에 회의를 취소하지 말아요!」 그러나 그는 이미 수화기를 내려놓고 고통에 가득 찬 표정으로 다시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결의에 찬 남자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결의는 그녀와 가장 큰 관련이 있었다.「앉으시오」그가 권했다.「내가 마실 걸 준비하겠소」 「하지만 당‥‥당신은 오늘 아침에 아주 바쁘다고 했잖아요」그녀는 걱정스럽게 상기시켰다.「게다가 난 어차피 지금 떠나야 해요!」그녀는 닫힌 승강기 문에 시선을 던지며 거짓말을 했다. 그것이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5천 파운드를 안전하게 챙기지도 않고 떠날 거요?」그가 조롱했다.「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수고가 아까울 텐데‥‥」 조안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감정을 터뜨리던 그가 어느새 날카로운 눈과 냉정한 머리의 사업가로 완전히 돌아와 있었다. 나는 아직도‥‥. 어쨌든 난 다시 선택의 순간에 와 있어. 눈 앞에서 아서 베이트의 역겨운 모습이 위협적으로 점점 커져갔다. 어떤 선택도 없었다. 순식간에 자신이만든 덫에 걸리고만 느낌이 들었다. 자신만의 두려움과 좌절, 부적당한 미끼로 함정에 빠진 것이다.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본능으로 안 것처럼 산드로는 패배의 흔적이 깔린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외면한 채 캐비닛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가지런히 놓인 술병과 잔세트가 드러났다. 선택은 없어. 그 두 개의 짧은 단어가 그녀가 항복하고 자리에 앉을 때까지 아찔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머리 속을 휘저으며 속삭였다. 그녀는 부드러운 리넨 천이 덮인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아 떨리는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눌렀다. 감기 몸살의 후유증과 걱정, 수면 부족이 정말로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여기 찾아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녀는 자신을 비웃었다. 생존할 수 잇는 아주작은 에너지마저 완전히 바닥이 난 기분이었다. 눈에 덮인 손등에 차가운 유리잔이 닿자 그녀는 몸을 움찔하며 손을 떼었다. 「이걸 마셔 봐요」산드로가 충고했다. 그는 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진토닉이오」그녀가 내용물을 의심스러운 듯 응시하자 그가 알려주었다.「원기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거요. 당신은 금방 쓰러질 것 같소」 조롱, 조롱, 조롱. 그녀는 잔을 받아서 도전하듯 한 번에 반을 꿀꺽 삼켰다. 그는 그 도전을 무시한 채 그녀 앞의 소파에 앉아 자신의 술을 천천히 마셨다. 그가 놀라울 정도로 편안해 보이는 반면 그녀의 몸은 뼈가 삐걱거릴 정도로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이 화가 날 만큼 냉정한 반면 그녀의 눈은 너무 많은 생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 아파트가 있었죠?」그녀가 비겁하게 물었다. 그녀는 <돈>이야기를 피하려 하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그가 대답했다.「항상 이곳에 있었소」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하지만 난 몰랐어요」 「그건 내가 벨그라비아의 집을 아내와 함께 살 집으로 정했기 때문이오」그가 조롱 어린 어조로 대답했다.「이 아파트는 단순히 야근할 때만 이용하는 곳이니까」 그렇다면 벨그라비아의 집에 오지 않던 밤들을 그는 여기서 보낸 걸까? 이곳은 끔찍한 결혼의 압력에서 도망칠 수 있는 완벽한 도피처였다. 「지금은 정확히 어디 살고 있소?」그녀의 의식을 다시 끌어당기며 그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외면하고 대답했다. 그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만족스런 표정을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주소로 판단하건대, 5천 파운드는 상납금(폭력단에서 보호받기 위해 내는 돈)이오?」 그녀는 내심 몸을 떨었다. 때때로 그녀는 그가 미웠다. 그의 조롱과 거만한 태도가 싫었다.「난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어요!」그녀가 내뱉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체가 조롱이라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다시 진을 꿀꺽 삼키자 머리 속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빈 속이니 그럴 만도 했다.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게 언제였더라? 기억할 수가 없었다. 알코올이텅 빈 위장을 채우며 곧장 혈관 속으로 스며들었다. 「당시이 해야 할 일은‥‥조안나, 그걸 말하는 거요」산드로가 부드럽게 제안했다. 「뭘 말하라는 거예요?」그녀의 눈이 고통스런 빛으로 번쩍 빛났다. 「돈이 필요한 이유를 말한다면 당장 주겠소」 그게 전부야? 그 외엔 아무 조건도 없다는 말이야? 그녀는 자신의 행운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돈이 필요한 이유를 고백할 수가 없었다. 「난 지난 열두 달 동안 나이트 클럽 카지노 바에서 일했어요」그녀는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말하려고 노력했다.「몰리가 죽‥‥죽은 뒤에‥‥」그녀가 덧붙였다. 사실그것이 그녀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난‥‥」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잔을 들었다. 텅 비어 있었다. 「더 마시겠소?」산드로가 천천히 일어나면서 물었다. 「부탁해요」 그는 그녀가 내민 잔을 가지고 캐비닛으로 갔다.「그래서‥‥」그가 재촉했다.「몰리가 죽고 당신은 카지노에서 일했소. 자존심 강한 당신이 빚을 질 만한 일이라면‥‥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그는 알았을까? 아니면 추측일까? 그녀는 그의 등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알 수없었다. 그는 날카로운 지각을 지닌 빈틈없는 남자야. 그리고 십중팔구 나의 생각을읽어 냈어. 하지만‥‥? 아냐, 내가 도박을 했으리라고 예상했을 리가 없어. 도박‥‥. 그 단어만으로도 고통이 느껴진다! 진 때문일지도 모르지. 아니면 빈 속이라? 아니면 빚쟁이로서의 스트레스 때문에? 아니면 단지 진한 고통을 수반하는 그 모든 진실을 마지못해 고백해야 하는 탓일까? 그는 가득 찬 잔을 가지고 와서 내밀며 말했다.「계속해 봐요」 「몰‥‥몰리가 죽었을 때 난‥‥」<산산조각이 났다>는 표현이 그야말로 딱 어울리는 단어였다. 그녀는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돈을 빌려 준 남자가 그 일을 권했어요. 그 남자가 몰리의 장례식 비용을‥‥」 산드로의 기침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내 말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 깨달음은 고백을 쉽게 하게 만들었다. 「그는 내가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면 돈을 더 빨리 갚을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그녀가 설명했다.「왜‥‥왜냐하면 보수가 식당보다 높았으니까요. 그는 클럽 가까운 곳에 아파트까지 구해 주었어요. 교통비를 아‥‥아끼라면서‥‥」 「하지만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걸 이제야 알았단 말이오?」산드로가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붉은 머리를 흔들었다.「그는매주 돈을 갚으라고 했고, 돈을 갚을 수 없을때면 난 불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 말은‥‥결국 더 많은 돈을 빌리게 된다는 것을의미했으니까요. 난 그런 식으로 궁지에 몰린 여자들을 봤어요」그녀는 쉰 목소리로설명했다.「두‥‥두려운 일이었죠‥‥」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했소?」산드로가 물었다.「계속 갚기 위해‥‥?」 조안나는 마치 그것이 생명이 달린 것처럼 다시 잔을 한 모금 마셨다.「도박을 했어요」온몸으로 밀려오는 수치심을 느끼면서 그녀는 고백했다.「그에게 진 빚을 한 번에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이기지 못했죠. 한 번은 두 번을 만들고‥‥」그녀는 계속했다.「그렇게 해서 그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말았어요. 당신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말꼬리를 흐렸다. 이미 너무 많이 말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나 산드로는 그녀가 거기서 멈추게 내버려두지 않았다.「그 뒤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초점 없는 시선을 들었다.「날 도와줄 건가요?」 그러나 아무리 진으로 정신이 몽롱하다 해도 그녀는 산드로의 표정에 담긴 분노를볼 수 있었다.「난 당신이 그 남자에게 돈을 갚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소!」그가 무섭게 주장했다. 결국 그녀는 푸른 눈에 불꽃을 튀며 폭발했다.「오, 당신은 그 대답을 그 남자에게 직접 들어야 할 거에요, 산드로. 왜냐하면 당신도 바로 그 비슷한 수법을 썼으니까. 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기 위해서!」 「그게 대체 무슨 뜻이오?」그가 물었다. 「협박!」그녀는 조롱 어린 짧은 웃음을 던졌다.「아마 그것이 어마어마한 장애물을 넘기 위해 당신이 사용한 압력을 가장 정중하게 묘사한 말일걸요. 그걸 당신이 뭐라고 불렀죠?」그녀는 깊이 생각하는 척했다. 너무 화가 나서 경고의 뜻으로 딱딱하게 굳어진 그의 몸을 무시했다.「오, 생각나네요. <변덕스런 섹스 혐오감!>바로 그거엿어요! 당신은 수단으로 당신의 멋진 몸을 이용했을 뿐이고, 그 남자는 나를 얻기 위해 내 빚을 이용할 뿐이죠!」 4 「난 한 번도 당신에게 강요하지 않았소!」산드로가 부인했다. 하지만 <나와 사랑을 나누든지, 내 인생에서 떠나든지>라는 말은 충분한 강요였어요. 그녀는 침묵 속에 주장했다. 여전히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게 되자 마침내 그녀는 자신을 희생하여 그를 곤경에서 구했다! 「정리 좀 해봅시다」그는 화가 나서 계속했다.「어떤 남자가 당신이 빚진 5천 파운드의 대가로 섹스를 강요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거요?」 「그래요!」그것이 정확히 그녀가 하려는 말이엇다. 그녀는 순식간에 잔을 비우고 벌떡 일어나 산드로를 외면한 채 몸을 꼭 끌어안고 손으로 떨리는 입술을 눌럿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켯다. 그의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그녀가 싸우고 있는 감정의 명확한 인식이 남앗다. 결국 나도 전에 같은 처지였고 그 때 모든걸 봤지. 그는 잠깐 그녀를 바라본 뒤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엇다.「좋소, 조안나」그가 조용히 말했다.「진정해요. 여기선 아무도 그런 식으로 당신을 걷드리지 않을 거요」 그녀의 밝은 머리가 그의 분명한 보증에 고개를 끄덕였다.「미안해요」그녀가 등을 돌린 채 속삭였다. 이번에 산드로는 그 사과에 화내지 않았다. 그는 창문 옆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다시 자신을 추스를 마음의 여유를 주기 위해서. 하지만 그 작은 배려는 그녀를 깊이 상처 입히며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 그녀는 자신을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지만 자신의 감정이 지금 그가 창 밖을 보고 서 잇는 모습과 관련이 잇다는 것을 알았다. 크고 세련되고, 회색 실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어깨를 곧게 편, 귀족적인 검은머리를 치켜든 그의 모습과. 그리고 그는 혼자 있었다. 그것은 진정한 상처이자 그들 사이의 틈이었다.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거대한 심연이엇다. 그녀가 그 심연을 만들었고 그가 지속해 나갔다.하지만 그는 그 지속이 더 힘든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몇 번이나 그 비틀린 다리를 건너려 했어. 그런 그에게 난 어떻게 했지? 그녀는 두 손을 옆구리로 떨어뜨기며 고통스런 절망속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당하지 않았어. 조금도. 우린 서로에게 많은 아픔을 주었어. 우린 불행햇어. 차라리만나지 않았다면 행복햇을 텐데‥‥. 그가 그녀를 향해 반쯤 몸을 돌렸다. 길고 마른 날카로운 윤곽이 메마른 시야 속에 들어왓다.「내가 돈을 주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하지?」 「난 빚을 갚을 수 잇어요」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산드로에게 돈을 갚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받는 빈약한 보수로는어림도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그 보상으로 이혼을 제안한 이유엿다. 「그리고 그 가게를 그만둘 거요?」 「물론이에요」그녀가 단언했다. 당연한 듯이.「난 두 번 다시 그나 그 나이트 클럽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럴 수만 잇다면‥‥」 「그리고 도박은‥‥」그가 그렇게 선언햇는데도 그가 고집스럽게 물엇다.「그것도그만둘 거요?」 「물론이에요」그녀가 반복했다. 이번에는 거의 도전하듯이. 난 죽을 때까지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을 거야. 「거기에 <물론>이란 없소」그가 한숨을 쉬엇다.「도박은 병이오. 당신도 알 텐데‥‥. 재정적 어려움에 벗어나기 위한 변명으로 도박에 손을 댄 경험이 잇다면, 똑같은 상황이 닥치면 또 그러고 싶어질 테니까. 그런 다음은 뭐지?」그가 그녀 쪽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몸을 떨게 할 만큼 차가운 표정을 지으면서.「다시 날 찾아와 내게 계속 돈을 갚아 주길 기대할 거요? 당신은 정말로 정신차릴 때까지? 스스로 빠진 깊고 어두운 구멍에서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치면서?」 그가 그 구멍을 아는 걸까? 공포 어린 충격이 온몸을 강타했다. 산드로는 알아. 내가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낸 그 크고 어두운 구멍을 말이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커져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날 도와주지 않겠다는 건가요?」그녀가 여린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그 말이 그를 정말로 화나게 한 것 같앗다. 「젠장, 조안나! 도와주지 않겠다는 게 아니오!」그의 분노가 폭발했다.「하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당신의 약속을 믿을 만큼 난 멍청이가 아니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그녀가 즉각 약속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그녀는 그것을 알수 잇었다. 한일자로 꼭 다문 입술과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는 손길은 그가 말로 하는 자신의 약속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두령ㅁ이 떨리는 척추를 그대로 내리쳤다. 갑작스런 침묵이 무겁게 깔렸다. 그가 발치를 내려다보며 어둡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동안 그녀는 애원이 담긴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클럽과 그 남자의 이름을 말해 보시오」그가 내뱉엇다. 「왜요?」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어‥‥어떻게 하려고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든 시선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온몸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는 내가 그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리라 믿지 않아. 그래서 직접 처리하려는 거야! 나이트 클럽에 가서 내가 어떤 곳에서 일했는지, 어리석게 어떤 남자와 문제를 일으켰는지 보려는 거야. 그리고 나에 대한 그의 평가는 땅으로 곤두박칠칠 테지. 「어서, 조안나‥‥」그가 아주 엄하게 재촉햇다.「당신은 두 번 다시 그 남자나 그 가게를 보고 싶지 않다고 했잖소. 그럼 그걸 증명해 보시오」그가 도전하듯이 말했다.「그에 관련된 정보를 주면 내가 당신 대신 처리하겠소」그녀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서 있자 그가 아주 부드럽게 덧붙였다.「그렇지 않으면 당신에게 단한 푼도 주지 않겠소」 심장이 갈라지며 그 찢어진 틈으로 항복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단숨에 정보를 알려주었다. 가장 타락한 장소와 이름을 인식한 순간 그의 얼굴은 화강암처럼 굳어졌다. 무릎에 힘이 빠지자 그녀는 가장 가까운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다. 산드로가 딱딱한 눈과 굳은 입술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뼈가 비틀린 것 같은 혐오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왜 아니겠어? 그녀는 비참하게 생각했다. 나도 내 자신에게 바로 그걸 느끼는걸!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눌럿다. 그 많은 진을 다 마시지 말아야 했는데. 머리 속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루카?」산드로의 딱딱한 목소리가 숙인 머리 위로 내리쳤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수화기를 들고 있는 그를 보았다.「금고에서 5천 파운드를 꺼내 로비로 가져오게」그가 명령했다.「그리고 회사 리무진을 지킬 경호원 두 명이 필요하네. 뭐라고?」그가 내뱉엇다. 표정이 어두울 정도로 일그러졌다.「아니, 경호 때문이 아니라 위협 때문일세!」 조안나의 몸이 움찔했다. 산드로가 굳게 다문 입술로 몸을 홱 돌려 어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 문을 통해 사라져 버렸다. 5분 뒤에 그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믿을 수 없는 변화에 조안나는자리에서 벌떡 일어낫다. 모든 감정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저 그곳에 눈을 크게 뜬 채 서 있었다. 그는 소박한 흰 셔츠와 가는 붉은 실크 넥타이를 매고 아주 짙은 세로줄 무늬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아찔한 만큼 멋진 차림에도 그녀는 감동받지 못했다. 그가 그처럼 차려입고 하려는 일에 대한 공포 어린 판단만으로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산드로는 사명을 가진 남자엿다. 꼭 다문 입술을 열기도 전에 즉각 행동으로 움직이는 남자였다. 윤기가 흐르는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칼에서 흠 하나 없이 빛나는 검은 가죽 구두까지 그의 몸 구석구석에서 이탈리아 남자의 거만함이 아우성쳤다. 그리고 그의 내부에서는 악마가, 위험이 아우성쳤다. 「뭘‥‥, 뭘 하려는 거죠?」그녀가 숨을 죽이고 물었다. 처음에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과 입술이 강철처럼 딱딱했다. 너무도 무자비한 그의 표정을 보자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당신을 위해 돈을 갚을 거요」그가 내뱉었다. 설마 그를 죽이러 가는 건 아니겠지? 순간 자신이 너무 지나친 과장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그녀는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그러나 날카로운 신경의 대답은 복부를 끌어당기며 감각을 자극했다. 산드로의 모습과 표정은 안심할 수 없을 만큼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문‥‥문제를 일으키려 가는 건 아니겠죠, 산드로?」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는‥‥그는 늘 몇 명의 보디가드와 함께 다녀요. 말 대신 주먹을 날리는 우람한남자들과‥‥」 「내 몸 하나 돌보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거요?」그것은 날카로운 조롱이엇다. 그녀는 단정한 옷 안에 감추어진 마르고 단단한 몸 위를 스치며 혀로 마른 입술을축였다.「그‥‥그들은 당신을 금세 해치울 거예요」그녀가 딱 잘라 말했다. 그가 웃엇다.「그들은 나한테 손끝 하나 대지 못하오, 카라. 날 믿어요」 루카라는 남자와 경호원 두 명과 함께 가기 때문에? 만약 그걸 진심으로 믿는다면그는 미쳤거나 아주 건방진 거야. 「내가 함께 가겟어요」적어도 난 그 사람들을 알아. 그 가운데 몇 명은 친근하게 지냈으니까. 그들은 주먹을 쓰기 전에 내 말을 들을 거야. 하지만 지금같이 거의 폭력을 조장하는 차림의 산드로라면‥‥. 그녀는 몸을 떨며 핸드백을 찾아 방안을 미친 듯이 살폈다. 코트와 함께 산드로의 아래층 사무실에 남겨져 잇다는 것이 떠오른것은 바로 그때엿다.「내 핸드백과 코트가 당신 사‥‥」 「당신은 여기 남아 잇어요」얼음 같은 목소리였다. 조안나는 고개를 홱 돌려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강철같이 딱딱한 눈을 발견했다. 순간 가슴이 아찔한 공포로 가득 채울 만큼 강렬한 긴장이 타올랏다. 「산드로‥‥제발 이러지 말아요!」그녀는 손을 앞으로 내밀며 애원햇다.「나 그 사람들을 알아요! 그들을 다둘 수 있다고요. 난 당신이 다치길 원치 않아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승강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단추를 눌럿다. 문이 얌전히 열리고 그는 단호히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그 문을 바라보며 조안나는 분노와 좌절, 무력함과 고통 속에 서 잇었다.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차 올랐다. 그가 떠난 지 두 사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내내 그녀는 걱정으로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어 방안을 서성거렸다. 심지어 승강기를 타기 위해 공포와 마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 지금 당장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핸드백을 들고 그의 뒤를 따라 가는 거야. 하지만 버튼을 눌러도 승강기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앗다. 그 매정한 괴물이 내가나가지 못하도록 손을 써 놓은 거야!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 그녀는 걱정으로 깨지기 쉬운 석고상이 되어 있었다. 신발을 벗고 세운 무릎에 턱을 괴고 두 팔을 꼭 끌어안은 자세로 의자에 앉은 채 말이다. 그녀는 무릎을 내리고 상반신을 쭉 펴며 근심어린 눈으로 재빨리 그를 살폈다. 윤기 나는 머리 끝에서 반짝이는 구두 끝까지. 오버코트와 장갑, 목도리는 없었다. 하지만 어디를 다쳤는지 하는 흔적은 없어. 그녀는 안도햇다. 상처나 타박상은 없었다. 「자, 영수증이오」얇은 종이 한 장을 그녀의 무릎 위에 떨어뜨리며 그가 말했다. 그러고는 즉시 몸을 돌려 술병으로 가득 찬 캐비닛으로 향했다. 한동안 그에게 머물러 있던 시선이 종이 위로 천천히 떨어졌다. <조안나 프레스톤. 5천 파운드 완불>이라는 글 밑에 아서 베이트의 서명이 잇었다. 「당신은 내 성조차 쓰지 않았더군」산드로가 등을 돌린 채 말했다. 그녀는 그의 성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한 번도 자신에게 그런 권리가 있다고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잠재되어 있는 유쾌하지 못한문제를 더 크게 일으킬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눈을 낮게 깔고 떨리는 입술을 꼭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잔을 들고 몸을 돌리고는 영원처럼 긴 시간 동안 그녀를 응시했다. 「고마워요」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영수증을 건드리며 말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조각된 거무스름한 윤곽 속에는 어떤 표정도 없엇다. 그녀는 그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주 끔찍한 곳이더군」그가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그의 얼굴을 외면했다. 「적어도 식당에서 일할 때의 당신은 어느 정도 품위라도 있었는데‥‥」그가 잔인하게 계속했다.「하지만 그곳은 당신 자신에 대한 모욕이었소, 조안나. 왜 그곳에 간 거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거부했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설명한다 해도 그는 이해하지 못할 텐데. 알렉산드로 보네티 같은 남자가 가난에 대해, 자신이나 남에게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는 것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그는 그곳에 산뜻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아마도 그의 가장 비싼 옷은 방금 그녀를 위해 갚아 준 5천 파운드의 두배는 될 것이다. 그는 고전적인 코 아래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자신에게 가한 모욕이 그에게 옮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만일 그렇다면 그는 내가 보네티의 성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기뻐했을 거야! 「어쨌든 그곳에서의 당신 인생은 끝났소」갑자기 그가 판결을 내렷다.「우리가 두번 다시 그 얘기를 꺼내는 일은 없을 거요」 조안나는 고개를 들어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내가 정말 제대로 들은 걸까? 그녀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난 다시 당신과 살지 않아요, 산드로」그녀가 딱딱하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싫단 말이오?」그가 팔짱을 끼며 도전하듯 물었다.「그럼 이제 어디서 살 거요?」그녀 스스로 함정을 향해 걸어간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내 아파트가 있어요! 그리고 다른 직장을 찾으면 되고요!」 그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안나는 알앗다. 그가 팔짱을 풀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동안 자신의 세계가 산드로의 손아귀 안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한 손을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뺐다. 손놀림이 너무 부드럽고 자연스러워서 그녀는 그가 꺼낸 것을 못 볼 뻔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보았다. 아주 분명히. 모든 것이 머리 꼭대기에서 쿵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속삭이듯 말했다.「어, 어디서 났죠?」 「어디라고 생각하오?」그는 느리게 말하면서 작은 사진 액자를 그녀의 무릎에 떨어뜨렸다. 그녀는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여동생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당신 짐은 대부분 벨그라비아 집에 보관되어 있소」그가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하지만 난 아주 중요한 몇 가지를 가져왔지‥‥」그는 그 말을 한 뒤 승강기 안으로 들어갔다가 곧장 다시 나왔다. 그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내 가방 가운데 하나야. 그녀는 깨달앗다. 그는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다가 천천히 몸을 바로 폈다. 「당‥‥당신은 내 아파트에 갔군요!」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갔지. 그 방 한가운데 서 있자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거군. 어떻게 내 아내가‥‥내 아내가‥‥」그는 화가 나서 반복햇다.「이런 곳에서 살 수 있는지! 그곳은‥‥」그는 무서운 속도로 쑤셔 넣은 듯한 팽팽한 핸드백을가지고 다시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정말로 내 아파트에 가서 직접 내 물건들을 쌌단 말인가‥‥. 「당신이 그런 일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그녀는 떨면서 소리쳤다. 「했지」그가 보증하며 덧붙였다.「그리고 깨끗이 마쳤소. 장담하지만 끈 하나 남지 않았소. 당신 아파트는 텅 비었고, 임대는 끝이 났고, 당신 일자리는 사라졌소. 그리고 당신 빚은 청산되었소. 내가 놓친 게 있소?」그가 가혹할 만큼 순진하게 물었다. 그는 차분한 표정 아래 불타는 적대감을 감추지도 않았다. 그가 그녀를 향해 우아하게 걸어왔다. 그 동안 그녀는 그대로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머리 속이 마비된 느낌이었다. 바로 앞으로 다가온 그가 의자 팔걸이에 두 팔을 놓았다. 그것으로 그녀는 그 자리에 완전히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당신은‥‥」그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그는 거친 협박자의 역할에 푹 잠겨 잇었다. 정말로 그녀를 두렵게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당신, 세뇨라 보네티」그는 무서운 위협처럼 그 이름을 사용하며 중얼거렸다.「당신은 새 인생의 첫 날을 막 시작한 거요」 「당신이 무‥‥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그의 얼굴이 더욱 가깝게 다가오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의자를 뒤로 빼며 더듬거렸다. 「모른다고?」그가 물었다.「그럼 내가 설명해 주겠소. 이건 계약이거든, 카라. 교환 조건도, 흥정도 없는 계약이오. 난 당신을 위해 5천 파운드의 빚을 갚았고, 당신문제도 처리했소. 그 대가로 당신, 나의 사랑스러운 아내인 당신은 진짜 내 아내가 되는 거요」 「난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것조차 믿을 수 없어요!」그녀는 결의에 찬 얼굴을 향해 외쳣다.「그럼 당신이 아서 베이트보다 나을 게 뭐가 잇죠? 그걸 모르겠어요?」 그 말은 하지 말아야 했어. 아름답게 조각된 입술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그녀는후회했다. 「오, 확실히 나은 선택이지, 카라」그가 부드럽게 주장했다.「모든 남성에게 비틀린 시선을 가진 당신이라도 분명히 고마워할 수 있을 거요」 「당신이 미워요!」그녀가 속삭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사악한 거짓말로 흔들리고 잇었다.「당신 손길조차 참지 못하는 여자와 어떻게 함께 살길 바랄 수 있죠?」 그 말은 그를 뒤걸음치게 할 말이엇다. 그녀는 정확히 그렇게 의도하고 그 말을 했다. 그러나 산드로는 자신만의 영지에서 어떤 감춰진 비법을 가진 듯 뒤걸음질치는 대신 웃어 버렸다. 「싫다고?」그가 조롱했다.「내 손길조차 참을 수 없다고? 당신이 날 바라보는 눈길은 마치 내가 너무도 그리웠다고 말하고 있소. 이 빌딩에 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줄곧 그랬소!」 「거짓말이에요!」그녀는 부인했다. 「거짓말이라고?」그의 단호한 입술이 위를 향해 꼬엿다.「좋소, 그럼 어디 한 번 확인해 볼까?」그러고는 순식간에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고통이 그녀를 휘감으며 다시 찾아왔다. 그녀는 꽉 쥔 주먹으로 그를 치면서 그의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아주 거칠군」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자기 쪽으로 더욱 끌어당기는 것으로 그녀의 공격을 차단했다.「당신의 그 값싼 정절을 지키려 할 땐 한층 더 거칠어지지!」 머리 속이 텅 비었다. 빛이 사라진 완전한 공백이엇다. 그녀는 고통에 눈이 먼 채자유를 위해 더욱 열심히 싸웟다. 잡아당기고 밀치고 발로 차고 손으로 할퀴면서.「날 놔줘요!」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붙잡힌 손목을 비틀었다. 「안 되오!」그가 선언햇다.「이제 당신은 내게 돌아왔고, 이번엔 난 당신을 보내지 않을 거요!」 곧이어 그의 머리가 낮아지고 그의 입술이 긴장으로 벌어진 입술을 막았다. 그의 팔이 몸에 감기며 그녀를 감금햇다. 그는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방법으로 그녀를 가두엇다. 키스의 힘. 그녀는 마치 자신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으로 던져진 기분이엇다. 산드로‥‥ 산드로가 매 순간 그녀가 세워 둔 장벽을 부수며 머리를, 가슴을, 육체를 거칠고 무모한 욕구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키스는 멋지고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추방자로 암흑 속에서 몇 년을 보낸 뒤 맞이하는 하늘의 손길처럼, 혹한 뒤의햇살처럼 그렇게 멋졌다. 그녀는 긴긴 표류 끝에 단단한 육지에 발을 내딛고 영혼을치료하는 그의 따뜻하고 멋진 키스 속에서 다시 운명을 찾았다. 그녀는 신음하며 흐느꼈다. 그녀 안의 모든 감정이 가슴속에 꼭꼭 묻어둔 속박에서 폭발해 살아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노력 대신 입술을 꼭 밀착시키기 시작했다. 심장이 무섭게 뛰엇다. 가슴이 단단해지고, 끝없이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기지개를 켜며 맥박쳤다. 가슴 속 깊은 곳의 불꽃이, 묵은불꽃이, 날카로운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불꽃은 오직 이 남자에 의해서만 타오를 수 있었다. 그도 그것을 느꼈다. 그가 고개를 들며 떨리는 입술을 축였다.「카라‥‥」그 속삭임에 그녀는 멍한 푸른 눈을 들어 암흑처럼 짙어진 그의 눈과 만났다.「난 알고 있소」 「아뇨」그녀는 속박 속으로 다시 돌아가려 애쓰며 부인햇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어. 그녀는 그의 짙어진 눈 속에서, 높은 광대뼈 위를 스치는 열기 속에서, 욕망으로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는 그의 육체 속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잇었다. 그녀는 그의 입술에서 그것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갑자기 뜨거운 열정으로 다시 그녀를 덮쳣다. 더 이상 도망칠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산드로는 전에 그녀에게 여러 차례 키스했다.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때는 부드럽게 달래는 듯한, 심지어 놀리는 듯한 키스를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볼을 스치는 정중한 키스로 바뀌었다. 너무 쉽게 타오르는 욕망을 억누르려 애쓰면서. 결혼 뒤에는 좌절감이 모든 키스 속에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굶주린 듯이, 때때로 화가 나서 키스햇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녀의 가슴을 갈가리 찢는 고통스런 애원을 담아 키스했다. 그러나 이 키스는 완전히 달랐다. 이것은 놀림도, 분노도, 혹은 가슴을 찢던 고통스런 애원도 아니엇다. 이것은 서로의 욕구였다. 순수하고 단순한 욕구. 그리고 그 욕구가 어둡고 멍한 쾌락의 뜨겁고 열정적인 열기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 흘러 넘쳤다. 「안 돼요」그녀가 속삭였다.「난 할 수 없어요」그녀는 곧장 몸을 떼고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푸른 눈이 그녀의 항복으로 얻은 승리감 속에 낯선 표정을 짓고 잇는 그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왜 안 되는 거요?」그가 너무나 부드럽게 물었다. 눈물이 다시 눈가를 스치며 지나갔다.「난 할 수 없어요」그녀가 떨면서 반복했다.「그저 할 수 없을 뿐이에요!」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고통이 그가 곧장 숨기기도 전에 길고 풍성한 흔들엇다.「그렇다 해도‥‥」그가 분명하게 말했다.「지금이 시작이오, 카라. 끝이 아니란 말이오. 자, 이리 와요」그가 명령했다. 하나의 충격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그는 손을 단단히 움켜잡고 결연히 또 다른 세계로 그녀르 이끌었다. 그는 저항하는 손길을 무시하며 대기중인 승강기로 그녀를 이끌엇다.「늦었소」승강기 앞에 다가섰을 때 그가 말했다.「제 시간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하오」 「어디로 가는 거죠?」고통이 새 물결을 무시하려 애쓰면서 그녀가 물었다. 그것은승강기 때문이지 그녀를 승강기 안으로 끌어당긴 산드로의 단호한 행동 때문이 아니었다. 「곧 알게 될 거요」그는 손목을 잡은 채 몸을 돌려 승강기의 닫힘 버튼을 눌렀다.그리고 모든 관심을 다시 그녀에게 집중시켰다. 그는 승강기 벽에 그녀를 기대게 하고 두 손으로 가는 허리를 감쌌다. 승강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순식간에 급습한 강렬한 공포와 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적어도 바로 옆의 그의 존재나 방금 나눈 믿을 수없는 키스의 여운이 위협적인 결말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말해 봐요. 왜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두려워하는 거요?」산드로가 허스키하게 물었다. 그녀는 붉은 머리를 흔들었다. 눈을 꼭 감고 창백한 얼굴로 떨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당신 심장은 덫에 갇힌 나비처럼 뛰고 있소‥‥」 너무 가까이 있는 당신 때문에 난 숨을 쉴 수가 없어요. 게다가 스트레스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단 말이에요! 그녀는 히스테릭하게 생각했다. 그가 맥박치는 양쪽의 관자놀이에 키스했다. 그리고 떨리는 눈가와 입가에도 같은일을 하고 있었다. 「그만‥‥」그녀는 한쪽으로 머리를 돌리며 거부하듯 속삭였다. 하지만 반대로 두손은 그가 멀어지지 못하도록 재킷을 꼭 움켜잡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승강기 때문일까, 아니면 산드로 때문일까? 그녀는 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당신은 너무 아름답소. 그걸 알고 있소?」그가 애무하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렷다.「몇 년이 지났는데도 난 당신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소」 「난 당신에게 독약이에요」그녀가 내뱉었다. 「당신은 독약이 아니라‥‥」그가 말했다. 긴장한 턱 선을 따라 촉촉한 혀끝이 스쳤다.「바닐라 같소. 난 바닐라를 아주 좋아하오‥‥」 오, 맙소사!「산드로!」그녀가 애원했다.「난 이걸 견딜 수 없어요」 「나, 아니면 엘리베이터?」그가 쉰 목소리로 물엇다. 「둘 다!」그녀가 울부짖었다.「젠장, 둘 다요!」 「어쨌든 엘리베이터는 멈추었소」그가 나른하게 말했다.「단지 내가 궁금한 건 당신이 이렇게 꼭 매달려 있는 이유요. 마치 당신 목숨이 바로 내 존재에 달려 있는 것처럼‥‥」 멈추었다고? 눈을 번쩍 뜬 그녀는 곧장 그의 시선과 만났다. 미소, 조롱, 놀림이 담긴 눈이 자신에게 도전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눈빛은 재킷을 꼭 붙들고 있는 손가락의 또 다른 메시지로 인해 짙어졌다. 「아니에요」그녀가 저항했다. 「확실하오」그는 그렇게 주장하고는 다시 그녀에게 키스했다. 길고, 깊고, 아플 만큼 부드럽게.「바로 그거요, 조안나」다시 입술을 뗀 그는 그녀가 열정으로 몽롱해진 눈을 드러내며 눈썹을 파르르 떠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렇게 계속 날 보란 말이오」그가 자극했다.「왜냐하면 이것이 지금의 나니까. 지난번 우리가 함께 살 때 당신 주변을 슬금슬금 기어다니던 그 문제의 남자가 아니라‥‥지금 이 남자란 말이오. 이 남자는 기회가 있다면 언제라도 당신의 방어벽을 넘어 침범할 거요. 그 이유를 알겠소?」그가 흐려진 푸른 눈에게 물었다.「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할 때마다 당신은 점점 작아지는 공포와 점점 커지는 기쁨으로 몸을 떨 테니까. 흥미로운 사실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완벽한 공포이기 때문이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지난 2년 동안 난 그에게 다가가지 않기 위해 절망적으로 내 자신을 막았어.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자신과 싸울 수조차 없는 걸까? 「난 당신에게 좋은 아내가 될 수 없어요」그녀가 경고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 강렬하고 고통스런 욕구조차 그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오?」그는 깊이 생각하듯 물었다.「글쎄, 어디 두고 봅시다‥‥」 마침내 그가 그녀에게 공간을 주며 물러났다. 맥이 풀린 그녀가 낯선 환경에 적응할 기회를 주기 위한 배려였다. 지하 주차장 같앗다. 열린 문 너머로 쭉 늘어선 차들이 보였다. 특히 그들 앞에 길고 호화로운 검은색 리무진이 눈부신 부를 상징하듯 서 있었다. 산드로가 그녀의 팔을 잡아 리부진 쪽으로 이끌엇다.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신속히 뒷문을 열었다. 산드로는 조안나가 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그와 떨어져 앉기 위해 재빨리 좌석의 한쪽으로 움직였다. 손가락에 부드럽고 부피가 큰 뭔가가 닿았다. 홀끗 내려다보자 산드로의 오버코트와 목도리와 장갑이 또 다른 상징처럼 시트 위에 놓여 있었다. 사명을 가진 남자의 전투복이군. 그녀는 그 때를 상기하며 몸서리쳤다. 아서 베이트는 이미 그가 처리한일부분일 뿐이야. 산드로의 나머지 사명은 나와 관련되어 있어. 「어디로 가는 거죠?」그녀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차가 3월의 칙칙한 낮 시간을 부드럽게 달리고 있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감각은 이미 그가 하려는 말을 알고 있었다. <벨그라비아>의 집.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앗다. 대신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 그녀의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떨어뜨렸다.「오늘 아침에 당신은 이걸 끼는 걸 잊었더군」그가 느리게 말했다.「지금 끼도록 해요」 그것은 반지 상자였다. 상자를 건드리는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반지 상자는 오늘 아침 아파트를 떠날 때까지 추억의 서랍 안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추억의 서랍, 그 안을 산드로가 샅샅이 살펴본 것이 틀림없었다. 그곳에 숨겨 놓은 결혼 사진까지도. 그 사진 안에서 그녀는 흰 웨딩드레스를 펄럭이며 지금과는 전혀 다른 차림을 한 산드로 옆에 서 있었다. 그 사진은 몰리의 사진처럼 액자에 넣지않았다. 보이는 곳에 두기가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고통스런 추억들과 함께 서랍에 넣어 두었다. 그녀는 볼을 붉히며 상자를 응시했다. 뚫어져라 그 상자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산드로가 응시했다. 이것은 고통이야. 그는 이제 내가 그가 준 것이라면 아무리 작고 하찮은 것이라도계속 간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을 거야. 단순하지만 정교한 장식용 금단추, 두 줄로 된 순금 목걸이, 나의 이름이 수놓아진 예쁜 레이스 단의 손수건들, 그리고 한 묶음의 엽서‥‥. 결혼을 몇 달 앞두고 출장을 떠난 그가 보낸 엽서들. <당신이 그립소> 모든 엽서에는 그 말만이 쓰여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주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유치한 만화 주인공의 장난감 세트도 있었고, 가죽 표지의 책 안에는 그가 준 꽃으로 말린 꽃잎이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어리자 그녀는 얼른 눈을 깜박여서 지워 버렸다. 산드로가 길고 부드러운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모두 잘 보관되어 있으니까 걱정할 것 업소」그가 그녀에게 보장했다. 눈물이 어렸고, 그녀는 다시 깜박여 지우려 했다. 하지만 그가 보고 말았다.「산드로‥‥」그녀는 불안정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우린 히드로로 갈 거요」그 공표를 하고 그는 그녀의 턱과 시선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사명을 띤 남자의 모습으로 돌아갔다.「오후 늦게 로마 행 비행기를 타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우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될 거요」 처음부터‥‥. 그녀는 굳어진 채 그 차가운 한 마디에 담긴 모든 의미를 마음에 새겼다. 로마는 3년 전 그들이 결혼 생활을 시작한 곳이었다. 하지만 너무 아픈 고통을 남긴 곳이기도 했다. 콜로세움이 내려다보이는 그의 아름다운 아파트가 있는 곳, 로마‥‥. 로마. 우리는 로마로 가는 거야.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다만 이번에는 산드로가 그 성과를 확실히 얻을 의도라는 것이 지난번과 달랐다. 그가 큰소리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서 베이트를 만나고 돌아온 이후 그의 말과행동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난 할 수 없어요‥‥」그녀가 속삭였다. 「반지나 끼도록 해요」그것이 그의 대답의 전부였다. 5 그들은 쌀쌀한 런던의 회색 하늘에서 따뜻한 지중해의 푸른 하늘로 날라갔다. 조안나는 관심을 보이지도, 말을 하지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반응하지도 않앗다.그녀의 감정은 쇠로 만든 덫에 갇혀 잇었다. 산드로가 그녀 주변을 부드럽게 감고 있는 냉정의 소용돌이에서 돌아설 길도, 도망칠 희망도 없는 덫이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몇 시간 안에 처리했다. 그녀를 자신의 호화로운 펜트 하우스에 가둬 둔 채 아서 베이트를 처리하고, 그녀의 아파트로 가서 짐을 정리하고 임대 계약을 끝내고, 로마 행 여행 일정을 잡고 돌아온 것이다. 그게 유능한 건가? 그녀는 늘 그가 유능하다고 생각햇다. 그리고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성격이 아니라면 그렇게 유능한 남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단호했다. 일을 처리할 때 보면 확실히 나타났다. 그렇지만 그는 또다시 나와 두 번째 결혼생활을 시도할 만큼 제정신이 아닌것 같아‥‥. 그는 그녀가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두 좌석 공간 너머에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입가로 가져갔다. 숨결의 온기가 떨리는 피부에 닿는 동안 그는 신문을 읽으며 그녀가 다시 진정되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그는 그녀가 완전히 진정된 뒤에 손을 놓았다. 그를 찾아오는 게 아니었는데‥‥.그녀는 그 어떤 일보다 더욱 후회했다. 물론, 처음부터 후회한 그와의 결혼을 제외하고. 「산드로‥‥」그에게 또다시 손을 잡히기 전에 그녀는 간신히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지금은 아니오」그가 말했다. 그의 관심은 여전히 그 대단한 신문에 집중되어 있었다.「난 당신과 사적인 곳에서만 싸우고 싶소, 카라. 집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꾹 참아 주시오」 집‥‥. 짧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손을 비틀어 뺐다. 그제야 다시 진정할 수 있었다. 두 눈이 황량해지고 걱정이 긴장한 신경 끝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산드로를 위해 그런 초조한 모습은 드러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고통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공공 장소에서 그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로마 아파트는 그녀의 최악의 기억이 간직된 장소였다. 그곳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복부에서 통증이 일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에 준비된 검은색 페라리를 탔을 때쯤 그녀의 얼굴은 전보다훨씬 창백하게 일그러졌고, 눈은 거의 그녀를 집어삼킬 듯한 불길한 예감으로 어두워져 있었다. 산드로는 그것을 무시햇다. 물론, 무시할 테지! 그의 옆에 앉아 이 마지막 추억의여로를 달리면서 그녀는 화가 나서 생각했다. 그는 사명을 가진 남자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는 거야. 오로지 사명 완수에 온 생각이 집중되어 있을 테니까! 「당신이 미워요!」그녀가 외쳤다. 로마의 유명한 교통 체증 속에서 차는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그는 그 말을 무시한 채 카 스테레오의 스위치를 눌럿다. 오케스트라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비발디의 라퀴엠>으로 놀라울 만큼 지금의 분위기에 잘 맞는 곡이었다. 그가 재빨리 CD 버튼을 누르자 아주 잔잔한 <모짜르트의 콘셀토>가 차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우아한 아파트 단지 옆의 길 한쪽에 차를 세운 뒤 시동을 끄고 내렸다. 그러고는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조안나는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그의 손이 자신의안전 벨트를 풀고 손목을 단단히 붙잡은 뒤 차 밖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를 보지 않았지만 그의 완고함과 단호한 결의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그녀의 손목을 꼭 잡은 채 차 문을 닫고 열쇠로 잠갔다. 차에서 내리자 바로 보였다. 오래된 황토 벽으로 지어진 17세기의 건물이. 한때 아름다운 팔라조(궁전)였던 그곳은 이제 각층에 한 채씩 모두 세 채의 호화로운 아파트로 개조되었고, 그 맨 위층이 산드로의 아파트였다. 건물 전체가 그의 은행의 소유이기 때문에 맨 위층에 은행장이 사는 것은 당연했다. 그 말은 또 그곳에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의 손이 손목에서 허리 쪽으로 움직였다. 순간 따끔거리는 통증과 함께 척추가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약속한 대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녀를 만지고 있었다. 그의 손이 허리를 감쌋고, 그녀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자신을 느꼈다. 그가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정말로 뼈가 부러지지 않을까 의심스러웠다. 「짐은 어디에 있죠?」그녀가 긴장하며 물었다. 그 순간까지, 비행기를 타고 그의 차로 이곳에 올 때까지 그녀는 점점 커지는 자신만의 악몽에 푹 빠진 나머지 짐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짐은 없소」허리에 손을 감은 채 그가 차갑게 대꾸했다. 그 팔의 무게로 경직된 허리가 살짝 기울었다.「우린 짐이 필요 없을 거요」 어느 새 아파트 입구에 이른 그들은 호화로운 로비 안으로 발을 내딛뎠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가구들처럼 벽이 오리지넬 프레스코 벽화로 아름답게 복원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 쪽 구석에 단단한 오크 나무 문으로 교묘하게 꾸며진 승강기가 있었다. 점점 커지는 공포로 배가 비틀리기 시작하자 조안나는 손으로 떨리는 입을 막았다.「아파요」그녀가 속삭였다. 산드로는 그 말을 무시한 채 단호하게 <오름> 버튼을 누르고 안으로 이끌었다. 내부는 빨강과 금빛이 어우러진 궁전 같았다. 오크와 금박 입힌 거울이 벽 뒤쪽에 걸려 있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귀신에 홀린 듯한 영상에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산드로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박고 말았다. 그녀는 아기처럼 떨면서 그대로 서 있었다. 산드로는 맨 위층 버튼을 누린 뒤 두 팔로 그녀를 꼭 껴안았다. 「난 할 수 없어요!」규칙적인 그의 심장 고동을 느끼며 그녀가 속삭였다. 「쉬‥‥」그녀의 머리 위에 입술을 비비며 그가 다정히 달랬다.「당신은 할 수 있소」그가 주장했다.「아니, 당신은 할 거요」 사명을 가진 남자가 말했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는 없었다. 이렇게 바위처럼 단단하게 결의에 찬 그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엇으로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승강기가 멈추자 그는 거의 안 듯이 그녀가 내리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붉은 카펫을 가로질러 악몽의 진정한 시작을 알리는 두 개의 기둥이 세워진 이중문으로 향했다. 산드로는 한 손을 뻗어 간단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당기며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고통스런 문지방을 넘을 수 없었다. 모든 악몽이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이곳은‥‥ 이 아름다운 곳은 그 오랜 시간과 역사 속에서 너무 눈부시게 빛나고 있어. 3년 전 산드로는 가슴 설레는 기대 속에 넓은 공간과 높은 천장을 가진 이 특별한 장소에 그녀를 데리왔다. 결국 그 기대는 그의 불신의 다리 아래로 산산조각을내며 떨어져 버렸지만. 「난 견딜 수 없어요」그녀가 실처럼 가늘게 속삭였다. 그녀는 한 손으로 그의 셔츠를, 다른 한 손으로 등 쪽 재킷을 꼭 붙들고 있었다. 「쉬, 카라」그가 다시 그녀를 꼭 안았다.「당신은 날 믿는 법을 배워야 하오‥‥」 그를 믿는 법? 이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야! 완전히 자기 보존의 문제였다! 「호텔로 가게 해줘요」그녀가 애원했다.「오늘밤만! 제발, 산드로! 난 들어갈 수 없어요」 「당신도 당당히 전진하여 그 유령들과 맞서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걸 알고 있소」그가 냉혹하게 결정했다. 「우린 함께 맞서는 거요, 자, 어서‥‥」재촉하며 문지방 너머로 끌어당겼지만 그녀는 고집센 당나귀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안나, 이러지 말아요」그가 분노의 한숨을 쉬었다.「당신은 이 아파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 하지만 난 두려워, 난 이 두려움에서 도망쳐야 해! 「가게 해주지 않으면 소‥‥소리를 지르겠어요」그녀가 경고했다. 「그건 바보짓이오!」미침내 그의 인내가 바닥이 났다.「당신은 히스테릭해지고 있는 것뿐이오!」 히스테릭? 그래. 난 히스테릭해지고 있어. 난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악마들이 위협하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난 그저 떠나길 원할 뿐이야! 「난 알고 있소, 조안나!」갑자기 산드로가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외쳤다.「그런식으로 내게 숨길 것은 아무 것도 없소! 왜냐하면 난 알고 있으니까. 우리가 여기 함께 살 때 당신이 왜 그런 식으로 날 대했는지를 안단 말이오!」 알고 있다고? 짧은 충격의 순간 동안 그녀는 망연히 그를 응시햇다. 물론, 그는 몰라! 그녀는 완전히 그 선언을 부인했다. 그는 알 수 없어. 몰리 외에는 아무도 몰라. 그리고 몰리조차 아주 작은 파편의 진실만을 알 뿐이야!「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그녀가 떨면서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이 딱딱해지고 단호해졌다. 두려울 정도였다.「난 우리가 결혼하려던 그주에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있소. 당신이 폭행당한 그 밤에‥‥」그가 잔인하게 나열했다.「늦게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난 알고 있소, 카라」그가 부드러울 정도의 고통을 담아 반복했다.「난 알고 있소‥‥」 몸에 감긴 스프링이 갑자기 풀린 것처럼 그녀는 그의 품에서 사납게 몸부림쳤다.「아니에요!」주변이 다시 빙빙 돌기 시작한 순간 그녀가 외쳤다.「당신은 알 수 없어요!」그녀는 완전히 부인했다.「절대로!」 「내 말을 들어봐요‥‥」 「싫어요!」그녀는 다시 그에게서 물러나기 시작했다.「싫어요!」한 발짝 다가선 그에게 그녀가 다시 말했다.「당신은 몰라요」그녀가 주장했다.「난 당신이 모르길원해요!」 「하지만 조안나‥‥」 「당신은 아니에요, 산드로. 당신은 아니에요!」그녀는 가슴을 찢는 분노 속에 울부짖었다. 강한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치는 것 같은 절규였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문 맞은쪽의 벽을 따라 더듬으며 계속 움직였다. 산드로는 그 자리에서 동정을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죽고 싶었다. 그 자리에서 몸을 움추리고 싶엇다. 바닥이 갈라져서 나를 삼켜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식으로 날 보지 말아요」그녀는 덫에 걸린 무력감을 느끼며 말했다. 마치 알몸으로 서 잇는 기분이엇다. 열에 들뜬 머리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점점 커지면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 무시무시한 그림자는 그녀를 노려보고 비웃고 낄낄거리며 천천히 자신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산드로가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두려움에 떠는 동물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처럼.「그 유령을 꺼내야만 하오!」그가거칠고 매섭게, 심지어 애원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당신은‥‥ 난 더 이상 묻어 두지 않을 거요. 젠장!」그가 한숨을 내쉬었다.「그 악마가 당신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소?」 「몰라요」그녀는 듣기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머리를 흔들엇다.「당신은 몰라요」그녀가 반복했다.「난 당신이 영원히 모르길 원해요」 「왜요?」고통 어린 곤혹감을 느끼며 그가 물었다.「왜 그렇게 날 믿지 못하는 거요? 왜 내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거요!」 이유는 간단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더듬거리던 손가락 끝에 나무 기둥이 닿았다. 그녀는 얼굴을 한쪽으로 비틀어 열린 문을 통해 대기 중인 승강기를 응시했다. 머리 속 어딘가에서 낯선 경고음이 들리고 멀리서 산드로의 낮고 깊고 이상할 만큼 꽉 조인 목소리가 돌아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앗다. 여기, 이 장소에 잇고 싶지 않았다. 도망쳐야 해. 그녀는 도망쳐야 햇다. 그 모든 것이 밀어닥치기 전에! 「조안나‥‥」 그녀는 그 열린 승강기 문을 향해 뛰어들어갔다. 갑자기 크고 검은 구멍이 보였다. 그녀가 그 많은 시간 동안 그렇게 신중히 피하려 한 그 어두운 구멍이‥‥. 하지만 이번에 그것은 그녀를 원했고, 그녀는 그 구멍 속으로 곤두박질치며 떨어졌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긴 시간동안 그녀는 떨어지고 있었다. 완전히 무중력의 낯선 감각과 온몸을 휘감으며 마비시키는 끔찍한 암흑만이 존재하는 완전한 무(無)의 세계속으로‥‥. 현실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 험난했다. 영원히 머물게 될 거라고 생각이 들 때마다 그 어두운 구멍의 가장자리는 떨리는 손가락 아래 무너졌다. 그녀는 고통과 두려움 속에 흐느끼고 좌절 속에 이를 악물면서 다시 아래로 미끄러졌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붙잡기 위해 손을 위로 뻗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힘겨운 등반을 시작할 수 있었다. 때때로 그녀는 남은 인생 동안 평생 이 가프른 벽을 오르며 보내게 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고, 결국 다시 미끄러지곤 했다. 친근하고 무시무시한 얼굴이 가장자리 끝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비웃으며 헛된 노력을 조롱햇다. 그 얼굴은 어떤 때는 스킨헤드(장발족에 대항하여 까까머리를 한 보수파 청년)족의 청년이엇고, 어떤 때는 아서 베이트였다. 그 때, 그 끔찍한 얼굴을 밀어내면서 몰리가 다가왔다. 그녀를 안심키키듯 다정하게 미소지으며 손을 뻗어 위로 올라오라고, 자신의 손을 잡으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그 손은 언제나 몇 센티 떨어진 곳에 잇었다.「이건 공평하지 않아」그녀가 초조하게 흐느꼈다.「난 네 손을 잡을 수 없어」 「쉬쉬‥‥」달래는 목소리가 중얼거렸다.「난 여기 있소. 내가 당신을 잡아 주겠소」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 목소리는 몰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산드로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구멍 가장자리에 몸을 기댄 채 아래로 손을 뻗고 있는 그를 보았다. 그의 손은 몰리보다 길었다. 그가 간신히 그녀의 손목을 잡아 힘껏 위로끌어당겼다. 곧 그녀는 위로 돌아와 있었다. 안도감이‥‥ 너무나 멋진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미소지으며 그에게 고마워했다. 그가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푹 자도록 해요. 당신은 안전하니까」 마침내 그녀는 정말로 안전함을 느꼈다. 자신을 안고 있는 팔 속에서 온기와 보호받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평화스럽고 잔잔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조안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크림 빛과 옅은 푸른 색이 칠해진 방안으로 햇살이 천장부터 바닥까지 드리워진 예쁜 실크 커튼 사이로 내비치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방이야. 그녀는 졸면서 생각했다. 시원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의 방일까?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거지?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끔찍한 기억이 흐릿하게 밀려오고 있었지만 확실하게 생각나지 않았다. 그 때 나른한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물었다.「기분이 어떻소?」그 소리에 그녀는 베개에서 고개를 홱 돌렸다. 산드로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자신 쪽으로 검은머리를 향한 채 표정 없는 갈색 눈으로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강압적인 차림은 사라지고 그 대신 가벼운 검은 폴로 셔츠와 캐주얼한 리넨 바지를 입고 있었다. 강압적인 차림. 그녀는 다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밀려왓다. 이곳이 어디이며, 왜 산드로가 그곳에 앉아 있는지가 생각났다. 그는 마치 몇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녀만을 바라보면서‥‥. 「무슨 일이 잇었죠?」그녀는 절망적으로 시간을 끌며 물었다. 이전에 일어난 일들에 마주 할 용기가 필요했다. 「기억나지 않소?」 그녀는 면도날만큼 아주 자세하게 거의 모든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인정하는 순간 직면해야 할 현실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조금‥‥」그녀는 거짓말을 했다.「당신과 말다툼한 기억은 희미하게 나요. 우리가 심하게 싸웠나요?」 「당신은 그렇다고 할 수 있지」그가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그 뒤 당신은‥‥병이 났소」 병이 났다고? 그녀는 화가 나서 생각했다. 난 단순히 병이 난 게 아니었어. 산드로가 말하려는 사실과 직면하느니 차라리 지옥의 굴로 뛰어드는 편을 선택했으니까. 「여기가 어디죠?」 「로마의 내 아파트」그가 가늘게 뜬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당신이 기절한 곳이지. 깨어날 기미가 없어서 내가 의사를 불렀소」 의사를? 오, 맙소사. 내가 얼마나 오래 이렇게 누워 있었던 것일까?「그가 뭐라고‥‥했죠?」그녀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는 얇은 시트 아래 드러난 마른 몸의 윤곽에 비판적인 시선을 던졌다. 그 순간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티셔츠 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재빨리 눈썹을 내리깔아 당황함을 숨겼다. 옷을 벗기고 이렇게 침대에 눕힌 사람은 분명히 산드로일 것이다. 「지나친 스트레스와 영양 부족으로 온 합병증이라고 하더군」 산드로‥‥산드로가 내 옷을 벗겼을까? 「얼마 전에 감기 몸살을 앓았어요」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마를 눌렀다. 그것으로 그 열기를 숨길 수 없었다.「아마도 그 탓일 거예요」 그는 대답하지 않앗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생각을 알기 위해 감히 위험을 무릎쓰고 고개를 들 수는 없었다. 「목이 말라요」종이처럼 마른 입술을 마른 혀로 축이며 그녀가 말했다. 그가 곧장 일어나 침대 옆테이블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풍성한 햇살 속에 눈부시게 빛나는 얼음물로 가득 찬 크리스털 병과 잔이 놓여 있었다. 그가 물을 따르는 동안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으려 했다. 하지만 머리 속이 윙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하자 이마를 누르며 동작을 멈추엇다. 산드로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을 본 그녀는 몸이 굳어졌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있는 동안 그의 손은 잠깐 허공에 떠있었다. 방안의 침묵이 긴장으로 날카로워졌다. 곧이어 그 손은 뒤쪽의 베개로 움직여 그녀가 기댈 수 있도록 다시 놓았다. 그녀는 날카로운 긴장에서 벗어나 창백한 얼굴로 두 눈을 감았다. 마음이 너무 약해진 나머지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산드로는 침묵 속에서 기다렸다. 그녀는 더 이상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뜨고 그가 들고 있는 얼음이 든 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단지 컵만을 응시했다. 어떻게그의 손에 닿지 앟고 저 잔을 받을 수 있을까? 「난 괴물이 아니오」그가 무섭게 말했다. 그녀의 생각을 정확히 안 것이다. 「고마워요」그 말에 잔인함과 무정함을 느끼며 그녀는 간신히 잔을 받았다. 사과하고 싶었지만 그를 더욱 화나게 할까 봐 아무 말 없이 시원한 물을 홀짝이며 그가 다시 앉기를 바랐다. 그가서서 자신을내려다보고 잇는 것만으로도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가 멀리 가버리길 바랐다. 어제의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이마를 찡그렸다. 산드로의 영지에 내 발로 직접 들어온 것이 정말 어제였을까? 그녀는 날짜나 시간을 확신할 수 없었다. 햇살로 보아 새날이 밝았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끔찍한 어두운 구멍 밖으로 기어오르려고 발버둥치면서 난 얼마 동안이나 이렇게 누워 있었던 걸까? 그만.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신경이 더욱 조여들기 시작햇다. 이대로 계속 그 끔찍한 꿈을 생각한다면 난 다시 산산이 부서지고 말 거야. 「내가 얼마나 누워 잇었죠?」그녀가 산드로에게 물었다. 그가 자리에 앉아서 실크 같은 조롱을 담아 모든 사실을 그대로 상기시켰다.「오늘은 당신이 새롭게 맞이하는 두 번째 날이오, 카라. 당신이 첫날의 반을 혼수 상태로 보냈소. 당신도 알다시피‥‥」 알다시피? 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하마터면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난 그를 눈곱만큼도 속일 수 없어. 그는 내가 기억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리고 더 이상 거짓말을 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작정인 게 분명해! 「당신이 미워요」그녀는 비참하게 속삭였다. 「당신은 그 말만 하고 있군」그가 한숨을 쉬며 말하고는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테이블 한쪽에 놓고 그녀 위로 몸을 숙였다. 어제와 똑같은 방식으로.「하지만 오해는 하지 마시오‥‥」그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머리를 숙이며 경고했다. 그녀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지만 그가 턱을 들어 올리며 그를 보게 했다. 그녀는 빛나는 검은 눈에 담긴 단호한 결의를 볼 수 있었다.「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이 빌어먹을 침대에 당신을 눕혔다고 죄책감을 느끼든 말든, 어제의 일을 덮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난 모든 사실을 드러냈고, 당신은 받아들이게 될 거요!」그는 그 말을 하고는 몸을 홱 돌려 방을 나가 버렸다. 그녀는 분노에 몸을 떨며 그곳에 앉아 잇었다. 어떻게 그는 몇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날 이렇게 화나게 만들 수 있지? 오, 맙소사. 머리가 다시 빙빙 돌기 시작하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왜 난 스스로 이런 상황에 뛰어든 걸까?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산드로도 우리가 다시 이런 지옥을 맛보길 원할 리 없어! 그를 사랑하고, 필요로 하고, 간절히 원하면서도 난 그의 손길을 허락할 수 없었어. 내가 그처럼 반응하는 이유 때문에 그가 받은 상처와 좌절과 영혼의 찟어지는 혼란이란‥‥! 그가 왜 이해해야 하지? 결혼이 예정된 바로 그 전 주까지 우린 너무나 좋았어. 그 뒤 그가 여기 로마로 날아왔지. 사무실을 로마에서 런던으로 옮기는 모든 업무를마무리 짓기 위해서, 물리가 혼자서 살아 나갈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고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영국에 머물러야 하는 나를 위해서. 몰리‥‥. 옅은 푸른색으로 칠해진 천장이 뿌옇게 흐려졌다. 몰리는 자신과 완전히 다른 성격이엇다. 나보다 훨씬 단호하고 독립심이 강했어. 하지만 단호하고 독립심이 강해야 할 사람은 몰리가 아니라 나였어야 해.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열여덟 살의 나이에 열네살짜리 어린 여동생을 돌봐야 했으니까. 함께 살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오랜 병마 끝에 아무도 남기지 않고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함께 살때는 보호받는 느낌이 들엇는데‥‥. 조안나는 몰리를 그리워하는 만큼 할아버지와 켄트에 있는 작은 농가가 그리웠다. 사실 조안나와 몰리는의붓자매였다. 어머니가 많은 남자를 사랑햇지만 정착하길 바라지 않은 데 반해 조안나와 몰리는 늘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가정을 염원했다. 어머니만이 아니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아버지가 있는 가정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지‥‥. 작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런던의 서쪽에 있는 임대 아파트에서 엄마와 함께 살았다. 하지만 엄마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기 때문에 조안나가 몰리를 돌봐야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병이 들자 그녀는 몰리는 물론 어머니까지 돌봐야 했다. 그랬기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몰리를 돌보는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그들은 엄마와 함께 살던 아파트에 계속 살았다. 그리고 조안나는 몰리가 교육을 마칠 때까지 그 환경을 유지할 수 잇도록 하루 종일 일하기 시작했다. 몰리는 영리했다. 그녀는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에 똑똑하고 아주 사랑스러웠다. 조안나는 몰리가 대학에 가게 되는 날을, 언젠가 멋진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는 은밀한 꿈을 꾸었다. 그 때 산드로가 나타났다. 산드로는 마치 자신을 위해 나타난 것 같았다. 마술이 일어났던 거야.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를 처음 만난 날의 작은 뒷골목 이탈리아 식당을 떠올렷다. 그는 숨막힐 정도로 멋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알렉산드로 같은 남자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비토를 만나러 온 그는 그 밤 내내 조안나와 얘기하며 보냈다. 그는 붉은 머리의 작은 조안나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녀는 너무 밝고 명랑했다. 하지만 그가 카리스마적인 이탈리아 남자의 매력을 드러낼 때는 언제나 수줍어했다. 그 날 밤 그는 그녀의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그는 영원한 식구가 된 것처럼 느껴졋다. 조안나는 그를 향한 사랑에 눈이 먼 나머지 그가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비싼 차를 몰고 다니고, 맞춤 양복을 입고, 사업차 어딘가로 날아가는 것은 문제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거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낮에는 와인 바에서, 밤에는 식당에서 일한다는 사실에 비판적으로 말할 때도 그녀는 자신이 그와 함께 보낼 시간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청혼을 하며 자신이 있는 로마로 이사하라고 했을 때 문제가 시작되었다. 조안나는 여동생을 떠날 수가 없었다. 몰리는 고작 열일곱 살이었고, 학교를 마치려면 1년이란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놀라울 정도였다. 산드로는 내가 던진 모든 장애물을 어떻게 다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몰리에겐 내가 필요해요. 난 몰리를 버릴 수 없어요」 「좋소」그가 말했다.「그럼 다른 길을 찾아봐야겠군」 그는 결국 자신이 런던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우리가 함께할 수만 잇다면 난 하늘과 땅을 움직일 거요」그가 설명했다. 그 날 밤이었다. 그 밤에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처녀라고 수줍게 고백했다. 내가입을 열지만 않았다면‥‥. 나중에 그녀는 수없이 후회했다. 왜냐하면 마침내 그들이 완전한 사랑을 나누려는 순간이었으니까. 그 몇 주 동안 처음으로 그들은 단둘만의 밤을 보낼 수가 있었다. 몰리가 친구의 집에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반쯤옷을 벗은 채 서로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에게 경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불쑥 떠오른 것은그 때였다. 그는 그대로 몸을 굳히며 당황할 정도로 기뻐했다.「믿을 수 없소」그가 그녀에게싱긋 웃었다.「진짜 천사를 내 팔에 안다니!」 「난 천사가 아니에요!」그녀가 주장했다.「단지 깊은 관계로 빠질 만큼 시간이 없었던 너무 바쁜 여자일 뿐이에요!」 그가 갑자기 나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을 때 난 상황을 직시해야 했어. 그 말을 하기 전까지 그는 열정적인 태도로 기회가 잇을 때마다 그녀를 유혹하려 했다. 하지만그 뒤부터는 커다란 늑대한테서 보호하고 사랑해야 할 희귀한 대상인 양 그녀를 대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특별하오. 난 우리의 첫날밤이 특별해지길 원하오. 우리가 결혼할 때 당신은 흰 드레스를 입고 난 그 옆에 서서 <이 여자는 순결한 몸으로 내게 온 아주 특별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싶소!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소?」 그녀는 그 때부터 그가 자신보다 순결성을 더 사랑하고 잇다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신부 드레스를 자신이 직접 마련하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바람처럼 흘러갔고, 순결에 대한 그의 집착에 대해서는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의 많은 가족을 만나는 일이나 <벨그라비아>에 있는 그의 집으로 이사하는 것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처음 그 집의 문지방을 넘은 순간부터 그녀는 백조 둥지 속에 오리가 된 기분이엇다. 그리고 몰리가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대학을 가는 대신 직장을 구하겠다고, 심지어 친구들과 아파트를 함께 쓰겠노라고 고집을 부렸다. 조안나는 몰리가 걱정스러웠다. 몰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모두 자신과 산드로가 결혼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떠나야 한다는 것을 느낀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을 일 주일 앞둔 그날 밤, 일을 끝내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그녀는 걱정으로 제저신이 아니었다. 너무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전철 안의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야 그녀는 자신의 모든 세계가, 산드로의 모든 세계가 무너지고 잇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정말 진심으로 우리가 그 지옥 같은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잇으리라 생각하는 걸까? 그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걱정했다. 이번에는 모든 것이 다를 거라고? 내가그렇게 변한 이유를 알기 때문에? 아냐, 그는 틀렸어. 왜냐하면 아무도 그 밤에 일어난 일에 대한 진실을 모르니까.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몰리에게도. 그리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나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그 때 침실 문이 홱 열리며 산드로가 커피와 신선한 토스트가 담긴 쟁반을 가지고돌아왔다.그는 다시 흰 셔츠와 검은 실크 넥타이를 맨 회색 정장 차림이었다. 「난 잠깐 나가 봐야 하오」그녀의 무릎 위에 쟁반을 놓으며 그가 말했다.「무슨 일이든 나와 연락하고 싶으면 핸드폰으로 전화하시오. 번호는 전화기 옆 테이블 위에 놓여 있소」 「죄수가 전화는 걸 수 있는 건가요?」그녀가 신랄하게 말했다. 그는 입을 단단히 조이며 말했다.「한 시간쯤 걸릴 거요. 그동안 먹고 좀 쉬도록 해요.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얘기! 무슨 얘기? 그녀는 다시 떠나는 그를 지켜보면서 궁금해졌다. 어쨌든 난 어떤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아. 먹고 싶지도 쉬고 싶지도 않고. 단지 이곳에서 벗어나고싶을 뿐이야! 불현듯 묵은 고통이 덮쳐 왔다. 난 곳곳에 끔찍한 기억들이 잠재되어 잇는 이 아파트를 나가야 해! 나에겐 혼자만의 시간이, 이미 일어난 일을 극복하고 다음에 일어날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 일을 마쳐야 했다.산드로가 자신을 지켜보지 않는 동안에! 6 조안나는 무릎에서 아침 식사 쟁반을 밀어내고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발을 내딛은 순간 다리가 후들거리고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만큼이나 힘이 없엇다. 샤워가도움이 될 거야. 10분 뒤, 그녀는 욕실 문에 걸린 눈처럼 흰 가운을 걸치고 개운한 기분으로 침실로 돌아왔다. 가운에서 산드로의 체취가 희미하게 났다. 그만의 독특한 체취였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비누를 사용한 온몸에서 산드로의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산드로의 비누, 욕실, 침대‥‥. 내가 방금까지 누워 있던 침대는 산드로의 침대가 틀림없어! 이곳은 내가 지난 번에 왓을 때 머물던 방이 아냐. 그 방은 이곳보다 더 크고 화려했어. 그리고 50배는 더 두려움을 안겨 주었지. 그녀는 그 방을 그렇게 두려워한 이유를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하지만 단호히 그 기억을 한쪽으로 밀어내며 지금 당장 직면한 문제를 생각했다. 아, 어떤 옷을 입어야 하지? 그 때 가방이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짐은 필요없소>라고 산드로가 말했다. 그 말은 그가 진심으로 이곳에 날 죄수처럼 가둬 두겠다는 뜻일까? 이 결혼을 실제로 만들기 위해서? 경종이 몸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힘있게 손을 뻗어 옷장 문을 열었다. 산드로의 옷을 기대하고 잇던 그녀는 그렇지 않은 사실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 안에는 최신 스타일의 여자 옷으로 가득 차 잇엇다. 산드로와 살던 1년의 결혼 생활 동안에도 그녀는 이만큼 세련된 옷을 갖지 않았다. 그 당신 그녀는 언제나 고집스럽게 그의 호의를 거절하며 직접 옷을 고르겟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럴 가치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 산드로가 사다 주는 유명 디자이너의 옷-어제 입은 디오르의 정장 같은-을 받아야 했지만. 누구의 옷일까?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그 대답에 그대로 척추가 굳었다. 이 아름다운 옷들은 그의 은밀한 정부의 것일까? 갑자기 다시 아픔이 밀려왔다.너무 가슴이 아파서 이곳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데님 바지를 끌어 당겼다. 순간 옷 끝에 걸린 상표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 모든 게 새 옷이라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옷은 그녀의 날씬한 몸에 딱 맞았다. 마치 자신을 위해 산 것 같았다. 그의 정부의 것이 아니라면‥‥날 위해 이 모든 옷들을 산 것일까? 새 옷, 새 인생. 그 두 말은 맞아 떨어졌다. 거친 공포의 묵은 감각이 다시 온몸을 덮었다. 그녀는황급히 주변을 살피다가 가벼운 가죽 구두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신었다. 깨끗하게 샴푸한 머리가 얼굴 주변에 커튼처럼 흘러내렸다. 마침내 그녀는 방을 나가 아파트 현관 쪽으로 갔다. 승강기까지 도착하는 데는 고작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서서 그 빌어먹을 승강기에 타도록 자신을 설득하는 데 소중한 몇 분을 낭비했다. 타든지 여기 남든지 둘 중 하나야. 그녀는 자신에게 엄하게 말햇다. 북도 주변에 충계를 표시하는 어떤 안내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좌절감이 겁쟁이 같은 가슴을 때렸다. 그녀는 흰이로 도톰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오, 이제 그런 감상은 집어 치워!그녀는 화가 나서 자신에게 말했다. 한 번의 나쁜 경험만으로 모든 승강기를 악마의소굴로 만들어선 안 돼! 버튼을 누른 순간조차 그녀는 여전히 승강기가 올라오지 않기를 반쯤 바라고 잇었다. 하지만 윙 소리와 함께 철컥하며 승강기가 도착하고 문이 스스르 열렸다. 조안나는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며 힘겹게 안을 응시했다. 그 문은 다른 고통스런 승강기의 기억과 뒤섞이며 활짝 열린 채 서 있었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앞으로 걸어가서 버튼 쪽으로 몸을 돌려 굳은 손으로 <내림>버튼을 눌럿다. 문이 윙 소리를 내며 닫혔고, 그녀는 두 손을 꼭 감은 채 승강기가 움직이기를 바랐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하자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오, 왜 난 이래야만 하지? 그녀는 비극적으로 생각했다. 왜 승강기를이렇게 무서워해야 할까? 왜 이 남자에게서 도망쳐야 하는 거야? 그는 나한테 손 한 번 든적 없는데‥‥. 날 사랑하고 걱정해 주고 나와 함께하기 위해서라면 하늘과 땅도 옮기겠다는 남자한테서! 이건 공평하지 않아. 절대 공평하지 않다고! 승강기가 멈추었다는 것을느끼고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하지만 갑자기 도망칠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그에게서 도망칠 수 없었다! 그 때 문이 스르르 열렸다. <오름>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이런, 이런」조롱 깔린 목소리가 부드럽게 말했다.「왜 난 당신을 봐도 놀랍지 않을까?」 그는 승강기 밖 기둥에 기댄 채 미소짓고 있었다. 하지만 화가 난 표정이엇다. 그녀는 그 어두운 눈 속에서 불타는 두 개의 불꽃을 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여기로 내려올 줄 알았냐고 묻는 거요?」그가 정확하게말을 끊었다.「왜냐하면 승강기가 작동할 때마다 관리실로 경고음을 보내기 때문이오. 난 그곳에 앉아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말이오」그가 신랄한 조롱을 담아 설명했다. 「난‥‥」 「날 만나기 위해 내려오는 중이었다고?」그가 나른하게 제안했다.「그거 멋지군」 「아뇨」그녀는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부인했다.「난‥‥」 「내가 너무 그러운 나머지 단 일 초라도 떨어질 수 없엇겠지?」그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거 어깨가 우쭐해지는군」 「그런 식으로 내 대신 말하지 말세요」그녀가 내뱉었다.「그건 내가 하려던 말이 아니었어요!」 「당신 기분도 훨씬 나아진 것 같군」그가 느리게 말했다.「심술 사나운 여자로 다시 돌아와 있으니까」 「난 도망치려는 게 아니에요」그녀가 반격했다. 내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을까? 단 몇 초만에 날 화나게 만드는 이런 남자 때문에 말야! 「그저 승강기에 대한 당신의 공포를 없애려 했겠지‥‥」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정말 용감하오, 카라」 조안나는 한숨을 쉬며 늘어진 어깨를 승강기 벽에 기댓다.「난 그저 신선한 공기가 필요햇을 뿐이에요, 산드로」그녀가 무겁게 말했다. 「신선한 공기? 물론 그럴 테지. 왜 난 그 생각을 못했을까?」그는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승강기 밖으로 끌어냈다. 「어, 어디로 가는 거죠?」그가 아파트 건물 뒤쪽으로 가기 시작하자 그녀가 물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그가 짧게 대답했다.「당신이 요구한 대로 말이오」 그는 곧 햇살이 따뜻하게 드리워진 밖으로 나갔다. 자갈이 깔린 안마당 한가운데 잔물결이 이는 연못 속으로 작으물방울이 떨어지는 이탈리아 식 분수대가 놓여 잇었다. 그릭 돌벤치와 테이블 위로 길게 뻗어 잇는 무화과 나무 줄기 사이로 햇살이 내비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신선한 공기는 충분하겠지?」그는 가볍게 물으며 벤치 쪽으로 그녀를 끌어당겨 강제로 앉혔다. 산드로는 뒤쪽 테이블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팔짱을 낀 채 조롱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눈빛에 그녀는 움찔했다.「난 당신한테서 도망치려던 게 아니었어요!」그녀는 다시 시도햇다.「아니‥‥그러려고 했어요」그녀는 마지못해 인정했다.「하지만 곧 마음을 바꾸었어요」 「왜요?」 왜? 오, 맙소사.「달리 갈 곳이 없으니까요」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그저 밖으로 나오는 길을 익히려 했단 말이오?」 「그래요」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가 검은머리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단지 미소만 지었을 뿐인데도 그녀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 남자는 너무 카리스마적이야! 「당신은 사랑스럽소」그가 재킷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며 중얼거렸다.「그래서 난 당신을 좋아하지. 이제 이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봐요」고급 잡지처럼 보이는 것을 내밀면서 그가 상냥하게 물었다. 그의 어조가 순식간에 날카로운 조롱에서 상냥함으로 바뀌자 그녀는 당황했다. 그녀는 그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어서 잡지를 받으면서도 그의 잘생긴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잡지가 아닌 고급 칼라의 팜플렛을 내려다보았다. 빨간 지붕으로 된 빌라가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담겨 잇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집은 할아버지를 상기시켰다. 할아버지의 작은 구식 농가와 넓은 대지에 세워진 이 빌라의 공통점은 하나도 없는데도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름다운 환경 속에 세워진 마술 같은 집이야. 산드로는 왜 내게 이걸 보여 주었을까? 그녀는 당황하며 팜플렛 커버를 넘겼다. 사진이 더 많긴 햇지만 그 안의 내용은 이탈리아 어로 쓰여 있었다. 거대한 구식 오크 통이있는 포도주 저장실처럼 보이는 곳과 깔끔하게 손질된 마구간 사진이었다. 「포도원에 투자할 생각인가요?」그녀가 추측하며 물었다. 「와인 제조는 우리 가계의 관심사가 아니오」산드로가 곧장 대답했다.「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가문은 대대로은행가니까. 하지만 이 근처에서 머문 적이 잇는데, 정말 멋진 곳이더군. 어떻게 생각하오?」 「아름다워요」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푸른 하늘과 탁트인 공간, 평화, 고요함‥‥」 「버스도 기차도 없지」그가 심술궂게 말했다.「몇 백 미터 근방엔 가게도 없고‥‥」 「사람도?」그녀가 물었다. 「그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지역 주민들 뿐이오. 하지만 아니‥‥」그가 조용하게 말했다.「당신이 말하는 의미의 사람들은 없소」 「그럼 사실상 완벽하네요」그녀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그가 동의했다. 그 때 그의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의 관심이 전화에 쏠리자 조안나는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팜플렛을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다. 친근한 이탈리아 어가 밀려오고 곧이어 산드로가 말하는 어떤 이름이 들렸다. 「오, 기이도?」그가 인사했다.「차오, 차오‥‥!」 그 나머지는 놓치고 말았지만 <기이도>는 그녀에게 친근한 이름이었다. 아주 친근한‥‥. 그는 산드로의 사촌으로 보네티 은행의 변호사였다. 그는 또한 그들의 결혼식에서 산드로의 증인이기도 햇다. 기이도는 산드로만큼 매력적이거나 강력한 힘을 가지진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 멋진 남자였다. 기이도는 그의 친척 모두가 그 대단한 산드로가 인생의 반려자로 선택한 여자를 열렬히 환영한 것처럼 그녀를 열렬히 환영했다. 산드로의 어머니까지 나를 환영해 주었지. 검은머리의 날씬한 시어머니 모습을 떠올리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녀는 정말 따뜻하게 조안나를 가족의 일원으로 맞아 주었다. 남편을 잃은 그녀는 모든 사랑을 외아들에게 쏟았다. 산드로가 원하는 것 모두가 그녀가 원하는 것일 만큼.「넌 이제 나의 딸이란다」그녀가 상냥하게 말했다.「내 아들을 행복하게 해준다면 우린 영원한 친구가 될 거야」 하지만 나는 그녀의 아들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 「시,시‥‥」산드로의 목소리가 다시 현실로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이탈리아 어로 빠르게 말하며 싱긋 웃는 그를 보았다. 다시 그의 인생에 돌아온 이후 그렇게 편안해 보이는 그를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그녀는 씁쓸하게 깨달앗다. 그가 저렇게 매력적인 미소를 지은 적이 있었나? 감각적인 목소리를 낮게 깔고 행복하게 웃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나? 다시 떠오르는 미소를 보자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의 언어를 배울 시간이 있었다면 나도 가끔 저렇게 그를 미소짓게 만들 수 있을 텐데‥‥. 이 아름다운 시골집이 그를 즐겁게 하는 거야. 그녀는 다시 팜플렛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난 이것을 보며 즐거워하는 그의 얼굴을 보았어. 이런 곳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그의 욕심까지. 「이 집을 사면 좋겠소?」그가 어느새 전화를 끊고 물엇다. 「당신은 탁월한 투자가예요」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팜플렛을 건네며 말했다. 그 표정에 그가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마음에 들지 않소?」 「아름다운 집이라고 했잖아요」그녀는 그의 기쁨을 망치는 자신을 반쯤 증오하며 내뱉었다. 「다행이오」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팜플렛을 테이블 한쪽에 던졌다.「방금 기이도와 그 집 계약을 끝냈거든」그렇게 알리며 그는 다시 미소지었다.「그래서 당신 기분만 괜찮다면, 카라, 내일 그곳으로 가서 우리의 새 집을 둘러봅시다」 예상대로 조안나의 몸이 얼어붙었다. 산드로는 그 자리에 몸을 기댄 채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주시하고 잇었다. 「난 이해할 수 없어요」마침내 그녀가 속삭였다. 「그래, 당신은 그럴 거요」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받았다. 순간 척추를 타고 경고의 전율이 흘럿다.「하지만 내일은 당신 새 인생의 셋째날이 될 거요」그 안에 담긴 날카로운 어조는 그녀의 모든 관심을 그에게 집중시킬 만큼 커다란 효과를 일으켰다. 그는 상황을 완전히 제어하고 있었다.「로마를 벗어나 <올리에토>로 가는 것이 시작이고, 그 땅 위에서 당신과 내가 결혼을 지속하는 것이 끝이 될 거요」 「안 돼요」저도 모르게 그녀는 저항의 말을 내뱉엇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으면서 그에게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산드로가 팔을 움켜잡으며 멈춰 세웠다.「더 이상 당신은 도망칠 수 없소, 조안나」그가 경고했다.「그 단단한 문은 이제 완전히 열렸고, 난 계속 그렇게 만들 테니까」 「난 할 말이 없어요」그녀는 날카롭게 말하려 했다. 하지만 걱정스럽게 들렸을 뿐이다. 「나와 계속 싸울 동안은 아니오」그가 보장했다.「당신도 알다시피 난 이제 문제를 알고 잇고, 직접 처리할 거니까」 문제. 그녀는 속으로 반복했다. 그 문제란 섹스에 대한 조안나의 변덕을 말했다! 하지만 그는 진정한 문제를 알지 못해. 반도 몰라! 「난 가야 해요‥‥」그녀는 다시 한 번 움직이려 했다. 「안 되오」산드로는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자신의 앞에 멈춰 세웠다. 곧이어 두 손이 가는 허리를 움켜잡고 엄격한 눈으로 그녀의 얼굴에 새겨진 긴장을 살폈다. 분노가 아닌 단호함이엇다. 이 두 가지는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그의 분노는 그녀 안에 불꽃을 일으켰지만 그의 단호함은 그녀를 바닥에 주저앉고 울고 싶게 만들었다. 「당신이 날 만지게 내버려두지 않겎어요!」그녀는 눈을 번쩍 빛내며 될 수 있는 대로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그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앗다. 단지 그녀를 붙잡은 채 햇살이 비치는 그곳에 서서 자신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서둘러 입은 옷 위로 시선을 움직였을 뿐이다. 그녀는 숨막히는 몇 분동안 어쩔 수 없이 입은 옷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견디기보다 차라리 로마의 거리를 알몸으로 달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당신도 알겠지만‥‥」갑자기 그가 입을 열엇다.「당신은 내가 본 가운데서 가장 멋진 다리를 가진 여자요. 특별히 그 바지를 입은 모습은 성적 충동을 자극할 만큼‥‥」 너무 낮고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목소리였다. 과거에 늘 말하던 것처럼. 그녀는 그런 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을 때에야 겨우 깨달앗다. 「제발 그만해요」그녀가 애원했다. 절망과 혼란이 밀려왔다. 오, 그것은 그녀를 너무 쉽게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길고 강인한 근육질의허벅지가 그녀의 몸을 단단히 감쌌다. 그녀는 숨을 그대로 멈추었다. 그가 너무 가까이 있다는 자극에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은 너무 강렬했다. 너무 생생한 동물적 관능이 실크처럼 부드러운 작은 모공에서 스며 나오는 것 같았다.「당신은 날 느낄 수 잇소」그가 부드럽게 간파했다.「그 표정이 날 가장 유혹하지‥‥」 오, 제발. 그녀는 기도했다. 그를 이대로 내버려둬서는 안 돼!「이건 미친 짓이에요」그녀는 점차 커져 가는 공포 속에서 몸을 홱 비틀고 소리폈다.「왜 당신은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럼 말해 보시오. 왜 당신은 도박으로 돈을 전부 날린 거요?」 돈? 대체 이 일이 돈과 무슨 상관이 있지? 「그 이유를 말했잖아요」그녀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며 산란한 마음으로 대답했다.「산드로, 제발!」그녀는 완전한 절망 속에서 울부짖었다. 그는 그 절망을 무시했다.「아서 베이트가 말하더군. 당신이 눈에 빤히 보이는 결과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복수하듯 돈을 걸었다고 말이오」 「당신은 그 말을 믿나요?」그녀가 외쳣다. 베이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복부에 통증이 일엇다.「그런 사람 모두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쟁이란 걸 알아야죠!」 「당신 말이 맞을 거요」그가 동의했다.「하지만 난 간절히 원하는 여자를 위협해서 도망가게 만드는 남자를 만난 적이 없소‥‥」 그 말에 담긴 암시를 깨달은 순간 그녀의 눈이 강렬한 회의로 번쩍 빛났다.「당신 말은 내가 일부러 이 혼란 속에 뛰어 들었다는 건가요? 당신에게 애원하기 위한 변명으로?」 「그랬소?」그가 즉각 도전했다.「아니면 그보다 더 복잡한 거요?」그가 넌지시 말했다. 두 개의 뜨거운 레이저처럼 가늘게 뜬 두 눈이 그녀의 머리속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려 하고 있었다.「아서 베이트와 나 가운데서 누가 더 당신을 폭행한 그 남자와 닮은 거요?」 조안나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 곧이어 상처받은 영혼 깊은 곳에서 뜨겁고 거칠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날카로운 단어가 터져 나왔다.「두 남자‥‥」그녀가 정정했다.「날 폭행한 남자는 둘이에요!」그녀는 신랄한 조롱으로 그의 몸을 거의 반으로 잘랏다.「승강기에서! 그것이 당신이 그렇게 알고 싶어하는 모든 진실이라면 말이에요!」 그 말에 그는 모든 동작을 완전히 멈추고 테이블에 기댔다. 조안나는 그의 손을 홱 밀쳐내며 아파트를 향해 다시 걸어갔다. 메스꺼움이 밀려오고 당장 이 모든 것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사지가 무섭게 떨렷다. 산드로가 팔을 낚아채단 한 번에 멈춰 세운 것은 현관문에 이르렀을 때였다. 「건드리지 말아요!」그녀는 분노에 몸을 떨며 다시 그 손을 밀쳐냈다. 산드로는 창백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시 그녀의 팔을 잡고 승강기 쪽으로 이끌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안으로 이끌고 단호히 <오름>버튼을 눌렀다. 그녀는 그에게서 몸을 홱 돌려 승강기의 벽을 노려보았다. 문이 스르르 닫히고 그들을 둘러싼 사각형의 작은 공간 안에 날카로운 침묵이 깔렷다. 조안나는 두 눈을 꼭 감고숨을 멈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언제나 찾아오는 공포가 밀려오지 않았다! 승강기가 멈추었다. 그녀는 격렬한 분노를 담은 눈으로 머리칼을 휘날리며 몸을 홱 돌려 승강기에서 걸어나와 아파트로 들어갓다. 그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한 채. 「날 용서하시오」뒤쪽 어딘가에서 그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렷다. 「지옥에나 가요」그녀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마치 잠재 의식 속의 본능에 의해 이 우아한 집의 거실을 분명히 기억하는 것처럼 똑바로 걸어갔다. 예상대로 정확히 위스키 캐비닛을 찾아낼 그녀는 직접 진을 부어 꿀꺽 들이켯다. 「내가 아는 건 당신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행을 당했다는 것이 전부였소」산드로가 주장했다.「자세한 얘기는 조금도 몰랐소. 몰리는 그 얘기를 하려 하지 않앗고, 난 혼자 앞질러 결론을 내렸소. 사과하겠소. 그 두 가지 모두 잔인하고 생각이 모자란 짓이엇소」 몰리. 그녀는 분노에 몸을 떨며 속으로 반복했다. 약속을 깨고 그에게 말한 것은 몰리였어. 왜냐하면 몰리 외에는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심지어 몰리조차 방금 산드로가 들은 내용은 알지 못햇다. 「그녀는 당신을 무척 걱정했소, 조안나」몰리를 변호하듯 그가 설명했다.「당신이 누군가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병에 걸리고 말 거라고 걱정한 거요」 「아하! 그래서 몰리는 나와 대화가 안 되어 당신한테 얘기한 거군요」조안나는 입술에서 잔을 밀어냈지만 손이 너무 떨려서 다시 끌어당겨야 했다. 이가 잔에 부딪힐 정도였다. 「몰리에게 뭘 기대한 거요?」산드로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녀의 태도가 그의 분노에 불을 당긴 것 같았다.「당신은 몰리나 내게 마음의 문을 닫았소! 당신을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말이오!」 「난 내 자신에게도 그랬어요」그녀는 격렬하게 답하며 그를 향해 몸을 홱 돌렸다. 그러고는 위험스럽게 번쩍이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이건 내 문제예요. 그것을 어떻게 다루든 내가 선택한단 말이에요!」 「그건 우리의 문제요!」그가 거칠게 반격했다.「난 알 권리가 있소. 날 사랑한다고 믿은 여자가 왜 하루아침에 고통스러울 만큼 날 혐오하는 여자로 돌변했는지 말이오!」 「내가 무슨 말을 하길 바라는 거죠, 산드로?」그녀가 도전하듯 물었다.「오, 사실 난 지난주 직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폭행을 당했어요. 그러니 당신의 손길을 거부한다 해도 걱정 말아요. 별일 아니니까! 이렇게 말해야 했나요?」 「내게 사랑과 지지를 기대할 만큼 당신은 날 믿어야 했소. 적어도 난 그걸 당신에게 줄 수 잇었단 말이오」 「당신, 농담해요?」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잔이 부서질 만큼 세게 놓앗다.「산드로, 당신은 어떤 빌어먹을 단 위에 날 올려놓고 끊임없이 내가 처녀라는 사실에 감탄했죠! 당신은 진심으로 우리의 결혼 첫날밤이 얼룩 하나 없는 완벽한 날이 되길 원햇어요!」그녀는 목이 쉬었다. 그가 몸을 홱 돌렷다. 어깨 근육이 뭉치고 딱딱하게 굳은 등이 보였다. 그 편이 오히려 말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말하느니 그의 등에 대고 그 모든 추함을 쏟아내는 편이 훨씬 나앗다. 「난 우리의 완벽한 결혼식 일 주일 전에 폭행당했어요!」그녀가 외쳤다.「당신은 여기 로마에 잇었죠! 난 깊은 충격에 빠졌고, 그건 끔‥‥끔찍한 일이었어요!」그녀는 떨리는 몸을 두 팔로 꼭 감쌌다.「난 기억하고 싶지 않았어요. 말하기도 싫었죠!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당신이 우리를 위해 계획한 그 완벽하고 꿈 같은 결혼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싶엇어요」 「당신은 나와 결혼해서 내 침대로 걸어올 수 있다고 생각한 거요? 내가 기대하고 잇는 것을 정확히 줄 것처럼 가장한 채?」다시 몸을 홱 돌린 그의 얼굴에서 실망의 빛이 분명히 보였다. 그녀는 즉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래요」그녀는 한숨쉬엇다.「그 비슷한 거죠」 「하지만 막상 결혼하자 당신은 사랑을 나누는 건 고사하고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했소. 그러니 어쨌든 그 완벽함은 망쳐진 거요. 당신은 그 때 내게 말해야 햇소」그가 곧장 말을 이엇다.「당신의 갑작스런 감정 변화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해야 했소! 하지만 당신은 날 비참하게 만들었소」그가 탁하게 내뱉었다.「난 내가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했소. 당신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은‥‥조안나‥‥당신을 공격한 그 짐승들의 죄를 대신 내게 벌했소!」 오, 그가 옳아. 갑자기 그녀는 더 이상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엇다.「그 얘기는 그만하고 싶어요」그녀는 문쪽으로 몸을 홱 돌렷다. 「안 되오!」그 거부가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그대로 폭발한 것 같았고 그녀는 긴장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다.「우리는 지금 이 문제를 처리할 거요」그가 주장했다.「만약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 문제를 끌어내 함께 멀리 날려보낼 거요. 하지만 지금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하오, 조안나. 바로 지금!」 「내게 더 이상 뭘 원하는 거죠?」그녀가 격렬하게 반격햇다.「모든 죄에 대한 면제? 어쨌든 당신은 면제받았어요!」그녀는 떨리는 손을 흔들며 선언했다. 강렬한 분노로 눈이 번쩍이고 머리칼이 출렁이고 마른 몸이 흔들렸다.「모두 내 잘못이니까. 난 진실을 고백할 만큼 당신을 믿지 않았어요. 다른 남자들의 죄를 대신 당신에게 벌했고, 당신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었어요」 「당신은 내 심장을 박살내고 그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소」그가 묵뚝뚝하게 덧붙였다. 그 말은 조안나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유일한 중심축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산드로 같은 남자에게 솔직한 인정은 너무 힘들고 끔찍한 것일 테니까. 하지만 그의 어두운 얼굴에 더 이상 분노는 없었다. 그 끔찍한 고백을 할 때 들려 온 고통스런 후회도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생각을 대답하며 사실을 말하고 잇을 뿐이다. 진실. 완전한 모든 진실. 아무리 그것이 창자를 비트는 진실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당신은 그보다 더 심한 짓을 했소」그는 갑자기 감정이 결여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당신은 날 완전히 박살냈소, 카라. 그 남자들이 당신을 잔인하게 겁탈한 만큼 확실하게 당신은 그 강한 혐오감으로 날 만신창이로 만들었소. 남자로서의 내 자존심과 긍지를 갈가리 찢어버렸소! 당신은 연인으로서의 날 조롱하고 내 손길을 혐오했소. 그것이 어떤 효과를 일으켰는지 알고 있소? 당신에게 경고의 종을 울려 주었소?」 「오, 맙소사 ‥‥」그녀는 떨면서 속삭였다. 「이제 우리는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 말해야 하오. 당신만 괜찮다면‥‥」감정을 절제할 대면 언제나 그렇듯 거의 완벽한 영어 발음은 이탈리아 어 속에 잠기며 흐려졌다.「왜냐하면 난 정확히 무슨 일이 잇었는지 충분히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당신이 그처럼 날 대한 이유를 말이오!」 7 완전히 충격적인 말이군. 그녀는 깜짝 놀라며 생각했다. 어떻게 그는 이처럼 모든 사실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을까? 단지 그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최악의 취급을 받은 것에 대한 반발로? 그는 내가 그렇게 대하길 좋아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가 방금 묘사한 대로 내가 그 강한 혐오감을 가진 여자가 되기를 바랐나? 「좋아요!」그녀가 그를 똑바로 마주 보며 선언했다. 마치 코너에서 벗어나 싸우기로 결심한 권투 선수 같았다.「당신은 잔인할 만큼 자세한 모든 진실을 원하겠죠, 산드로? 좋아요. 모든 것을 말해 주겟어요」 그녀는 몸을 앞으로 내밀어 우아한 레몬 색 소파 등받이에 두 손을 지탱한 채 그에게 모든 것을 말햇다. 꽉 조인 스타카토의 목소리로 그 끔찍한 모든 고통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그 두 명의 남자와 함께 남겨진 것을 발견한 순간부터 그들이 걸어나간 순간까지. 모든 말을 마쳤을 때쯤 그녀의 얼굴은 전보다 더욱 창백했다. 산드로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 뒤 얼굴에서 그의 손이 천천히 미끄러졌다. 검은머리는 여전히 숙인 채였다. 완전한 진실이 드러난 지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는 것처럼. 그의 반응은 상처에 모욕을 덧붙이는 격이었다. 그 모든 걸 원한 사람은 바로 산드로야. 「미안하오. 당신을 이런 고통 속에 밀어넣다니‥‥. 하지만 난 필요했‥‥」 「알 필요가 있었겠죠」그가 침을 삼키기 위해 멈추엇을 때 그녀가 대신 말을 마무리졌다.「그들이 날 잔인하게 <겁탈>한 만큼 내가 당신을 만신창이로 만들엇나요? 어쨌든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어요. 그들은 날 상처조차 입히지 못했으니까」얼음처럼 차가운 팔을 아래위로 문지르며 그녀가 알렸다.「아무 상처도 없었죠. 실제로 일어난 그 끔찍한 사건을 말해 주는 어떤 흔적도 없엇어요. 그래서 난 집으로 가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그녀가 말했다.「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음날 일하러 갔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 그 다음날도‥‥」 「이제 그만, 조안나. 제발 그만해요」산드로가 날카롭게 막앗다. 하지만 그녀는 멈출 수 없엇다. 아니,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이 고통을 시작했어. 이제 그가 듣고 싶든 아니든 난 모든 이야기를 해. 「난 순결을 상징하는 흰 드레스를 입고 완벽한 순결의 신부처럼 당신과 함께 교회의 통로를 걸어갔죠. 카메라를 향해, 당신을 향해, 몰리를 향해, 당신 가족을 향해 미소지었어요. 날 둘러싼 희미한 안개가 걷힌 것은 여기 이 아파트에서 당신과 단둘이 남은 내 자신을 발견했을 때였어요. 난 당신을 보고 생각했죠. 오, 하나님! 이 남자는 신부가 처녀이길 기대하고 있어. 그리고‥‥」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그 나머지는 당신도 알아요」 오, 그래. 그녀는 침묵 속에 확신했다. 산드로는 그 나머지를 알아. 이미 그것을 생생하고 솔직하게 묘사했으니까. 그를 떠난 그 날 그녀는 그가 결혼이 만든 지옥에서 해방되어 무릎 꿇고 하늘에 감사하리라 예견했다. 나 역시 완전히 무너져 내린 자신에게 같은 식으로 느끼길 원했으니까! 그러나 산드로 없이 사는 인생은 그와 함께 사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그가 그리웠다. 아무리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른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녀는 궁금했다. 이 모든 고통스런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지금 우리가 어디 서 있는지 그는 알고 있을까? 그는 다시 시작하기로 한 결정을 후회하고 잇을지도 몰라. 이제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았을지도 몰라. 그가 오랫동안 찌푸린 얼굴로 앉아 있자 공포가 타올랐다. 새로운 형태의 공포였다. 그리고 그 공포가 양쪽에서 그녀를 내리쳤다. 그것은 산드로가 자신을 원하지 않을 거라는 공포였다. 난 이제 정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녀는 자신에게 고통스럽게 말했다.「미안해요」그녀는 간신히 말하고 몸을 홱 돌려 달렷다. 거실을 나와 홀을 지나 자신이 사용하던 방으로 들어갔다. 등뒤로 문을 닫으며 문손잡이를 꼭 붙잡은 채 몸을 기댔다. 자신을 완전히 집어삼키려 위협하는 감정과 싸우기 위해 그녀는 공기를 더 깊이 들이마셨다. 그를 잃는다는 두려움이 다시 밀려왔다. 지난번에 난 진실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잃엇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진실 때문에 그를 잃게 될 거야. 심장이 고통스럽게 조여들었다. 두 눈은 깊고 어두운 완전한 절망의 연못이엇다. 그녀는 무심히 침대에 시선을 던졌다. 오늘 아침 침대에서 내려올 때 구겨진 침대 시트가 보였다. 그 위에 아침 식사 쟁반이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채 그곳에 놓여 잇었다. 식은 커피와 차가운 토스트 조각이 담긴 쟁반을 내려다보는 동안 갑자기 상처와 슬픔, 추하고 비참한 감정이 아주 가깝게 다가왔다. 손잡이에서 손을 떼며 그녀는 불안정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침대 옆에 멈춰 서서 허리를 숙여 떨리는 손가락으로 쟁반에 놓인 것을 집어 올렸다. 눈의 초점이 뿌옇게 흐려졌다. 오늘 아침 산드로가 가져왔을 때는 알아채지 못했는데 장미가 있었다. 한 송이 빨간 장미. 짧게 잘린 줄기와 가시가 제거된 금방이라도 활짝 필 듯한 장미가. 그는 언제나 그렇게 했지. 그녀가 회상했다. 그는 못 말릴 만큼 로맨틱한 남자야. 그는 찔리지 않도록 가시를 떼어낸 짧은 줄기의 장미를 비토의 레스토랑 테이블 위에 놓아 두고 그 장미가 자신을 위해 그곳에 놓여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아챌 때까지 기다렸다. 짓궂은 눈빛으로 그녀를 놀리면서. 그들은 그렇게 둘만의 게임을 했다. 만지지 않고 사랑하는 것. 말없이 아는 것‥‥. 테이블 위에 놓인 짧은 줄기의 한 송이 장미는 붉은 머리칼의 발랄한 종업원과 믿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이탈리아 손님을 연결하는 특별한 선언이었다. 그녀는 장미를 떨리는 입가에 갖다 댔다. 섬세한 향기가 코속을 가득 채우자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았다. 황량하고 슬픈 기억으로 가슴이 저려 왔다. 그는 결혼한 뒤에도 같은 일을 했다. 심지어 그들을 둘러싼 긴장이 한창일 때도 빨간 장미는 나타났다. 아침 식다 때 그녀의 접시 옆에서, 그의 바로 옆방에서 외로운 침대에 들어야 했던 밤 베개 위에서. 그것은 산드로의 침묵의 선언이자 그녀를 사랑한다는 고백이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곳에 또 다른 장미가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선언은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아침 이 꽃을 놓을 때는 그 모든 사실을 몰랐으니까. 그는 알지 못했어. 수문이 예고 없이 그대로 터졌다. 몇 년 동안 울 수 없었던 눈물이었다. 불행과 고뇌와 고통, 슬픔, 그리고 괴로움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장미를 꼭 붙든 채 구겨진 침대 시트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아낌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밖에서, 홀 아래 반쯤 열린 거실 문을 통해 그 엄청난 폭우 소리를 듣는 동안 산드로는 창가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불끈 쥔 주먹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눈은 먼 하늘 저쪽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고, 턱은 단단히 잠긴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마침내 그 폭우가 잠잠해지자 그의 시선은 상처 난 관절 위에 덮인 붕대에서 성한 손 쪽으로 이동했다.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마치 그 성한 손으로 단단한 물체를 내리치려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앗다. 그는 곧 자신을 추스르고 홀 쪽으로 걸어갔다. 15분 뒤 그는 조안나의 침실 문을 열었다. 그에게선 토마토가 섞인 이탈리아 소스 냄새가 알싸하게 묻어 났다. 「점심」그가 알렸다.「5분 뒤 주방에서, 카라」 점심. 다시 물러나는 그의 모습 뒤로 문이 닫히는 것을 지켜보면서 조안나는 침묵 속에서 따라 했다. 감정의 태풍은 끝났으니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저 남자는 틀림없이 강철로 덮인 감정을 가졌을 거야. 그녀는 비통하게 생각했다. 그 때 자신이 아직도 장미를 꼭 잡고 있다는 것이 기억났다. 하짐나 그 비통함은 금방이라도 다시 눈물을 쏟을 것처럼 가슴 녹이는 부드러움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그의 말대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와 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산드로가 냉정한 어조로 말할 때 다음에 무엇이 오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보지 않았고, 주방에서의 그의 존재를 거의 무시했다. 식탁에 앉았을 때는 이미 맛있는 향의 소스가 얹힌 김 나는 뜨거운 파스타가 놓여 있었다. 「맘껏 먹어요」그가 맞은쪽에 앉으면서 권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접시에 파스타를 조금 덜고 따뜻한 빵을 떼어냈다. 그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충분히 비판적이었다. 그는 그녀가 파스타를 입안에 넣고 삼킬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만들어 내는 모든 동작과 완벽할 만큼 자연스러운 몸짓에 그녀는 신경 끝이 살아 있는 철사처럼 춤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내내 침묵과 긴장 속에서 앉아서 음식을 먹기 위해 힘겹게 싸웠다. 24시간이 더 지난 텅 빈 위장에 음식을 넣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 조롱 어린 비판을 할 것이다. 그녀는 그게 싫었다. 다행스럽게도 음식을 먹을 때마다 입맛이 나아졌다. 산드로는 훌륭한 요리사였다. 어느 날, 가정부가 쉬는 날 <벨그라비아>의 주방에서 함께 저녁을 준비하고 모처럼 평화를 만끽하면서 그가 자신은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짧고 아주 드물었다. 대부분 이 같은 긴장 속에서 그들은 살았다. 긴장, 긴장, 긴장‥‥. 「이제 어떻게 할 거죠?」마침내 식사가 끝났을 때 그녀가 허스키하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것처럼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자 그는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조안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 대단한 고백을 한 이후로 그는 한 번도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난 두 시간 정도 이곳 사무실에 나가 봐야 하오」손목 시계에 홀끗 시선을 던지며 그가 말했다.「좀 쉬도록 해요」그가 충고했다.「당신은‥‥무척 지친 것 같소」 지치고 메말라 보인다는 표현이 더 진실에 가까울 테지.「내 말은‥‥이 상황에 대해‥‥」그녀는 더 분명하게 말했다.「난 이제 당신이 어떻게 할 생각인지 알아야 해요」 그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 우아한 동작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졋어.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잘생긴 외모에다 멋진 몸, 부, 자신감. 그리고 그에겐 특벽한 섹시함이 있었다. 여자라면 저항하기 힘든 섹시함이. 그녀는 여러 차례 사람들로 가득 찬 방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마다 모든 여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몰리가 말하던 카리스마-수많은 별 가운데서 선택된 소수만이 가진 특별한 자질-를 가진 남자였다. 「알아야 하다니?」그가 따라 말했다.「무엇을 할 생각인지 방금 말했을 텐데‥‥」그가 차갑게 말했다.「난 오늘 남은 시간 동안 업무를 깨끗이 처리할 거요. 그래야 우리가 내일 올비에트로 자유롭게 떠날 수 있을 테니까」 내일‥‥. 내게 보여 준 팜플렛에 있던 그 아름다운 집으로? 그녀는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하지만 내 생각에‥‥」그녀는 말꼬리를 흐렸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소」그녀의 당황함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에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당신은 여전히 내 아내고 난 여전히 당신의 남편이오. 그리고 오늘은 당신의 새 인생의 두 번째 날이고.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신은 내 아내로, 난 당신의 남편으로 남아 있을 거요. 내 말 이해하겠소?」 그녀는 너무 잘 이해했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안도감이 자신의 온몸을 통해 퍼지는 이유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상기시키는 아주 작지만 중요한 사실을 깜빡 잊을 뻔했다는 것을 깨달앗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 믿음의 관례에 따라 신 앞에서 서로에게 맹세하고 결혼했다. 그것은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리 그 결혼이 고통스럽다 해도 이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그의 중심 안에, 그의 책임 안에 속해 있는 것이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건강하든, 병들든 간에‥‥. 바로 그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그녀는 결론지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일을 비밀로 한 채 그와 결혼했고, 그것은 그에게 정당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당‥‥, 당신은 결혼을 무효화시킬 수 있어요」그녀가 제안했다.「난 당신의 요청을 지지하니가요. 내가 교회에 가서 결혼 서약을 무효화시키도록 요청하길 원한다면 말이에요」 「어쨌든 고맙소」산드로가 벌떡 일어나면서 느리게 말했다. 그 어조에는 분노가 깔려 있었다.「정말 대단히 천절하신 걸, 카라. 내가 자신의 아내와 사랑도 못 나누는 한심한 남자라고 알림으로써 모든 사람 앞에서 웃음거리가 될 영광을 주시겠다니 말이오!」 조안나는 그의 조롱에 얼굴을 붉혔다.「난 다만 그 상황의 장애를 말하려 했을 뿐이에요」 「어쨌든 신경 쓰지 마시오」그렇게 충고한 그가 갑자기 그녀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한 손을 식탁에, 다른 한 손을 의자 등에 놓고 그녀를 효과적으로 가두고 있었다. 마침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검은 눈이 번쩍 빛났다.0「당신은 내게 빚을 졌소, 조안나」그가 무섭게 그녀에게 알렷다.「당신은 내 자존심을, 긍지를, 가장 기본적인 인간으로서의 내 자신에 대한 내 믿음을 빚졌소. 그것들을 간단히 회복시킬 수는 없소. 왜냐하면 난 이제 당신이 왜 그런 식으로 날 대했는지 알았으니까」 「당신은 복수를 원하는군요」오싹 소름이 돋았다. 「난 보상을 원하오」그가 정정했다. 「오, 아주 이탈리아 식이네요」그녀는 그의 얼굴을 외면하며 조롱했다. 그를 보는 것은 상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오」그가 낮게 말했다. 내가 외면해서 그가 더 화가 난 것일까? 아니면 나의 조롱 때문일까?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때 갑자기 그가 턱을 잡아 마주 보도록 끌어당겼다.「이게 이탈리아 식이지!」그가 거칠게 내뱉었다. 곧이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부딪쳤다. 선언하는 키스였다. 분노 어린 성적인 선언. 키스는 거칠고 무자비했다. 조금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는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더 깊게 키스했다. 그녀는 팔을 움켜쥔 그의 손안에서 몸을 굳힌 채 두 눈을 꼭 감고 몸 안에서 공포가 솟아오르길 기다렸다. 그러나 공포는 찾아오지 않고 기쁨이 느껴졌다. 어두운 기억의 아주 깊은 곳에 터져 나온, 너무 오랫동안 묻어 둔 고통스런 기쁨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벌리고 그의 입술과 함께 갈망 어린 리듬을 타고 있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녀는 흥분에 젖어 생각했다. 난 그와 미치광이처럼 싸워야 해. 그와 싸워야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와 싸우지 않았다. 대신 두 손을 들어 넓은 어깨를 단단히 붙잡다가 곧 목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목덜미 근육을 더듬는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그녀는 갈망 어린 그의 입술의 따뜻하고 촉촉한 계곡에서 발견한 그 강렬한 기쁨에 스스로 항복했다. 누군가 신음 소리를 냈다. 어느새 그녀는 의자를 뒤로 밀쳐내고 일어나 그에게 몸을 꼭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가 두 손으로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다급하고 감각적인 애무였다. 그녀는 불타고 있었다. 빠르고 격렬한 불꽃이 그를 향해 타오르고 있엇다. 그는 더욱 몸을 눌러 그녀가 자신의 욕망을 느끼도록, 그녀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가 갑자기 입술을 떼고 그녀의 팔을 붙잡아 두 사람 사이에 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노골적인 열정으로 뛰는 입술과 뜨거운 분노가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앗다. 「어쨌든 뜻밖의 경험이었소」그가 고상할 만큼 잔인하게 조롱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 큰 충격에 빠져서 그의 조롱을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멍한 눈과 떨리는 몸으로 그의 얼굴만을 응시했다. 그녀는 여전히 놀라울 만큼 뜨겁게 응답한 자신 속에 빠져 있었다. 벌로 시작해서 가장 에로틱한 키스로 끝난 그 열정에‥‥. 「계속 그렇게 날 바라봐요」그가 똑같은 조롱을 담아 계속 했다. 「그래야 내가 모든 것을 보상받기 위해 몇 년을기다린 보람이 있을 테니까」 그 잔인한 말에 몸을 움찔하며 그녀는 마침내 뿌연 안개 속에서 벗어났다.「난 이걸 참을 수 없어요」그녀가 완전히 혼란 속에 속삭였다. 「틀렸소」그가 내뱉었다.「당신은 아주 잘 참을 수 있소. 만약 내 감각이 내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면 말이오」 그리고 굴욕적인 지적을 강조하기 위해 그가 다시 키스를 했다. 하지만 그녀가 무력하게 매달릴 때까지 기다리다가 갑자기 입술을 떼어냈다.「내 말뜻을 알겠소?」그가 천천히 말했다.「당신은 더 이상 숨길 수도 없을 만큼 날 간절히 원하고 있소」 그는 팔을 놓으며 멍한 표정으로 휘청이는 그녀를 지켜보앗다. 짙어진 푸른 눈 위의 긴 눈썹이 팔랑거리며 흔들렷다. 곧이어 그가 메마르게 한마디했다.「오늘밤은 즐거운 시간이 될 거요」그러고는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어깨 너머로 자연스럽게 덧붙였다.「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말해 두는데 엘리베이터는 작동되지 않소.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러니 불조심하시오, 카라. 최소한 내가 없을 동안에는 말이오」 그는 가버렸다. 그 짧은 몇 마디에 깊이고 심하는 그녀를 남겨둔 채. 오늘밤.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일을 의미했다. 그녀는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잠깐 동안 최악의 일이 벌어진 거야. 나는 그에게 영혼까지 드러냈어. 그는 보상을 원하고, 그것을 얻을 작정이야. 그 보상은 오직 한 가지 형태로만 이루어 질 수 있어. 산드로는 오늘밤 우리의 결혼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 결심을 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그날 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절망을 잊기 위해 오후 내내 바쁘게 움직였다. 점심 식탁을 치우고 방을 청소했다. 하지만 지난번 이곳을 머물 때 산드로가 사용하던 침실 쪽으로는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냉장고 안을 살폈다. 히스테릭하게 몰고 가는 그 끔찍한 무력감을 멈추기 위해 정신을 집중할 일이 필요했다. 그것은 제대로 다룰 수도 없을 만큼 아주 친근한 감각이었다. 산드로가 절대 완력을 사용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 끔찍한 무력감은 신선한 파스타와 뇨키(gnocchi, 밀가루, 달걀, 치즈로 만든 일종의 경단)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녀의 신경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녀는 그 모든 요리를 비토의 식당에서 배웠다. 그녀는 여러 나라의 요리를 만들 수 있었다. 다양한 식당에서 일한 덕분이었다. 「음‥‥」가벼운 목소리가 말햇다.「아주 아내다운 냄새에 아내답게 보이는걸」 조안나는 힘있게 젓고 있던 소스에서 몸을 홱 돌리고 날카롭게 외쳤다.「오늘밤 난 당신과 자지 않아요, 산드로!」 그녀는 덥고 지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주방에 퍼져 있는 열기가 그녀를 질식시킬 것 같았다. 「뭘 만들고 있소?」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켜 앞으로 걸어왔다.「뇨키?」그가 어깨 너머로 흘끗 시선을 던졌다. 팬 위에서 소스가 지글거리며 끓고 있었다.「난 이탈리아 인의 가슴을 가진 영국 여인과 결혼했군!」 「난 당신과 자지 않을 거예요」그녀가 다시 소스로 관심을 돌리며 반복했다. 「이 요리에 곁들일 와인을 준비할까? 아니면 당신이 벌써 준비한 거요?」 「와인은 없어요」그녀가 내뱉었다.「난 와인을 원하지 않아요. 난 당신이 내 말을 듣길 원해요!」 「그 팬은 코팅된 거요, 카라」그가 부드럽게 지적했다.「그렇게 문지르다간 코팅이 벗겨지고 말 거요. 내가 가서 와인을 가져오겠소. 나중에 당신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니까‥‥」그는 그 말을 하고는 걸어가 버렸다. 「산드로!」그녀가 그의 등에 대고 외쳤다. 그것은 가슴에서 우러나는 고통의 외침이었다. 그 외침이 그를 붙잡았다. 하지만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난 당신 말을 듣지 않소, 조안나」그가 딱 잘라 말했다.「지금은 당신에게 일어난 일을 극복할 시간이오. 그 경험에 당신 인생의 3년을 헌신한 것도 충분히 길었소. 아니, 그 이상이오」 「당신은 너무 무정해요!」그녀는 분노에 몸을 떨며 그의 두에서 외쳤다.「당신이 미워요! 당신이 날 건드리면 내 피부는 그대로 말라 버릴 거예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엌에서 벗어나 와인 저장실로 연결된 방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무력감과 고뇌 어린 죄절을 느끼며 그곳에 서 있었다. 이건 공평하지 않아! 그녀는 비극적으로 생각했다. 난 지난 이틀 동안 충분히 겪었어. 아니, 충분한 이상이야. 한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거칠게 닦아냈다. 그는 와인 한 병과 얼음 한 통이 놓인 쟁반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녀는 그를 완전히 무시한 채 스토브 옆에서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열기로 가득 찬 주방으로 들어오자 몸 안의 모든 감각이 쭈뻣 섰다. 「얼마나 걸리오?」그가 물었다. 「20분쯤이요」 「그럼 재빨리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을 시간은 있겠군」그가 말했다.「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까 샤워하고 오시오」 「난‥‥」 「따지지 말아요, 조안나」그는 말을 자르고는 그녀 옆으로 다가와 주걱을 빼앗았다.「당신은 덥고 긴장해 있소」그는 마주 보도록 그녀의 몸을 돌렸다.「그리고 다시는 내게 마음의 문을 닫지 말아요」그가 단호하게 덧붙였다.「그러니까 자‥‥어서 식사하기 전에 샤워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도록 해요.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내가 당신을 상처 입히지 않을 걸 알고 있잖소」그가 부드럽게 마무리졌다.「적어도 당신 이성은 당신에게 그렇게 말해 줄 거요」 그녀는 몸을 굳히며 불행한 얼굴을 숙였다. 소매 커프스가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사소한 일에 주목했다. 커프스는 뜨거운 스토브 옆에서 위험하게 달려 있었다. 그녀는 자동으로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들어 올렷다. 그는 그녀의 손길을 막지 않앗다. 오히려 다른 한쪽 손까지 내밀었기 때문에 그녀는 양쪽 커프스를 떼어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당신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어요」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설명해 봐요」 하지만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날카롭게 떨리는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면서 몸을 돌려 곧장 주방을 나갔다. 오랜 시간 보지 못했던 하나의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영상은 과거에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여기 이 아파트, 그의 침실에서, 결혼 첫날밤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으라는 그의 의견은 옳앗다. 긴장은 여전했지만 훨씬 편안해졌다. 주방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그녀는 그가 주방 바로 옆의 작은 응접실에 음식을 차려 놓은 것을 발견했다. 그의 집들은 모두 이 아파트처럼 완전히 개인의 편안함을 제공하는 공간과 거대한 스타일의 연회를 위한 공간을 갖추고 있었다. 내가 있을 때 산드로는 사람을 한 번도 초대한 적이 없어. 그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기억했다. 그 당신 그녀는 그가 사람들 앞에서 신경 과민 아내 때문에 당황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부분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물론 몰리는 빼고. 몰리는 처음 여섯 달 동안 함께 살았다. 「자, 이걸 받아요」그녀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산드로가 말했다. 그는 리넨 타월을 감은 따뜻한 접시를 내밀고 있엇다.「난 와인을 따야 하거든‥‥ 」 아주 일상적이군. 마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그에게 접시를 받아 조그만 응접실로 가져갔다.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 빌어먹을 접시로 그의 머리를 내리치고 싶었다! 「드레스가 아주 귀엽소」그녀가 입은 단순하지만 고전적인 선을 그리는 푸른 실크 드레스 차림에 그가 눈을 내리깔며 감상을 말했다. 「당신이 산 옷이니까요」그녀가 곧장 받아쳣다. 「이제부터 당신은 내가 원하는 대로 입게 될 거요」그가 부드럽게 선언햇다.「당신의 아름다움을 높일 수 있는 차림도 치료의 한 방법이지」 대항할 말이 없엇기 때문에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그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늘 싸구려 옷을 입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사건의 영향이라고 할 수 없엇다. 그 전에도 늘 싸구려 옷만 입었으니까. 그녀는 미의 과시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 때문일 것이다. 병들기 전까지 그녀의 어머니는 스스로를 최고로 꾸미는 방법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조안나는 언제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신 가정부는 어떻게 된 거죠?」그녀가 분명하게 화제를 바꾸며 물엇다.「오늘은 그녀가 아예 보이지 않더군요」 「며칠 휴가를 주었소」크리스털 와인 잔에 칸티(chianti, 이탈리아 원산의 붉은 포도주)를 따르면서 그가 설명햇다.「난 우리가 서로에게 다시 익숙해질 동안 둘만의 생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소」 둘이 있어야 내게 압력을 가할 수 있을 테니까. 조안나는 침묵 속에서 정정했다. 신경 과민인지는 몰라도 난 바보가 아냐. 그녀는 그가 여전히 사명을 가진 남자라는 것을 알앗다. 그 사실은 평화로운 식사를 바라던 희망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식사가 끝날 때쯤 그녀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사드로가 일어나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난 그만 가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겠소. 당신만 괜찮다면‥‥」그녀의 반응을 무시하며 그가 차갑게 말햇다. 「좋아요」그녀 역시 일어났다.「난 여기를 치우고 침대에 들겠어요. 너무 피곤해서‥‥」그녀는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이 곳에 남아 있으라는 그의 명령을 기대하고 말했다. 그러나 완전히 예상 밖이엇다.「편히 쉬어요. 난 다른 방을 사용할 테니까」 조안나는 떨리는 안도감에 힘이 쭉 빠졌다. 하지만 그의 갑작스런 행동 변화를 생각한 순간 다시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그는 무슨 속셈일까? 테이블을 치우면서 그녀는 의심했다. 그 오랜 시간 꼭꼭 눌러 온 압력을 왜 풀어 주는 거지? 어쨌든 난 그 이유를 찾는 데 매달리지 않을 거야! 그래서 그녀는 안저낳게 침실 문을 닫았다. 그를 이해할 수 없엇다. 뿐만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 실망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감정 속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그를 몰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하지만 그 불청객은 꿈속에까지 따라왔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이며 어둠이 깔린 침실에서 깨어났다. 두려움과 혼란 속에 자신이 잇는 곳을 기억하는데 숨막히는 몇 초가 흘렀다. 그녀는 그곳에 가만히 누워 그 영상이 다시 깨끗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영상은 사라지지 않앗다. 그녀는 이 모든 공포를 극복할 시간을 갖기 위해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알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막 미끄러져 내려가려고 할 때였다. 그녀의 손에 아주 따뜻하고 생생한 뭔가가 닿았다. 그것은 그녀 옆에 누워 있었다. 순식간에 몸 안의 모든 공포가 미친 듯이 밀려왔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입을 크게 벌리고 귀청이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에 산드로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눈도 채 뜨지 않은 상태로.「대체 무슨 일이오‥‥?」 8 「오‥‥」조안나는 떨리는 안도감 속에 속삭였다.「당신이군요」 「나말고 누가 당신 옆에서 자겠소?」산드로가 무섭게 화를 냈다. 「악몽이었어요」그녀는 설명하려 애쓰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그가 말했다. 이번에는 당황한 것처럼 들렷다. 곧이어 더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당신, 괜찮소?」 그녀는 김빠진 맥주의 악취와 남자 몸의 체취에 질식하지 않기 위해 머리를 흔들엇다. 어떻게 잠재 의식은 그렇게 잔인할 만큼 생생하게 느끼게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충격이었다.「난 여기에 있을 수 없어요」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로브를 걸친 뒤 서둘러 방을 나갔다. 심지어 그에게 남의 침대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따지려 하지도 않았다. 머리 속에서 훨씬 더 끔찍한 공포가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 같지 않았다. 아파트의 나머지 부분은 어둠에 잠긴 채 고요했다. 그녀는 악몽의 여파로 몸을 떨면서 거실로 향했다. 그곳도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문 옆의 벽을 더듬어 전기 스위치를 찾았다. 은은한 불빛으로 방안이 다시 살아났다. 여전히 몸을 떨면서 그녀는 레몬 색 소파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고는 한쪽 구석에 몸을 말고 앉아서 피부 위를 기어다니는 벌레가 멈추길, 쿵쿵 뛰는 심장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 꿈은 예전만큼 그렇게 심하지는 않앗다. 산드로를 떠나 몰리와 함께 살면서 악몸을 꾸기 시작햇을 때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곤 했다. 그 모습에 몰리는 정말로 두려워했다. 방금 산드로에게 보여 준 것보다 훨씬 심했어.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깨달앗다. 그제야 그가 자신의 침대에 잇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갔다. 그 때 그가 성급히 걸친 짧은 검은 가운 차림으로 거실로 들어왔다.「어떻게 된 거요?」잠이 덜 깬 눈으로 그가 물엇다. 「말했잖아요. 악몽이었다고. 당신은 내 침대에서 뭘 하고 있었어요?」그녀가 반격했다. 그가 하품을 하면서 그녀의 앞쪽 의자에 몸을 던졌다.「당신이 자는 곳에서 나도 잤지」그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모든 남편과 부인이 하는 것처럼‥‥」 어쨌든 우리는 그 모든 남편과 아내가 아니야.「당신은 다른 방을 쓸 거라고 했잖아요」 「샤워만‥‥」그가 해명하며 다시 하품을 했다. 그릭 의자에 축 늘어져 기대더니 뻔뻔스럽게도 다시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저리 가요, 산드로」그녀는 그를 깨웠다.「여기 혼자 있고 싶어요. 그러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그 말을 하고 그녀는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갑자기 똑같은 말을 몰리에게 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리 가. 난 괜찮을 거야> 하지만 난 한 번도 괜찮지 않았어, 안 그래?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지금보다 훨씬 심하게. 그리고 가엾은 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오, 몰리‥‥. 그녀는 무섭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에 머리를 기대며 지친 눈을 감았다. 왜 이 모든 일이 일어나야 했지? 왜 넌 죽어야 했니? 왜 난 늘 이런 식으로 끝나야 할까? 「조안나‥‥」 「쉬‥‥」그녀가 말했다.「난 지금 몰리를 그리워하고 있어요」 그는 몸을 일으키고는 헝클어진 머리를 지친 손으로 쓸어넘기며 조요히 말했다.「따뜻한 음료 좀 마시겠소?」 「음‥‥」그녀가 받아들였다.「멋지게 들리네요」 그가 거실을 나가자 그녀는 다시 여동생을 떠올렸다. 가엾은 몰리는 날 너무 걱정햇어. 생명 없는 좀비처럼 사는 인생을, 몰리는 뭔가를 물으려 할 때마다 내뱉은 말들을, 두 사람 모두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곤 했던 그 악몽을 걱정햇지. 결국 몰리가 모든 것을 산드로의 탓으로 돌리기 시작하자 조안나는 동생에게 조금이라도 설명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 때 몰리는 런던 대학에서 가까운 곳에 그녀만의 작은 아파트가 있었다. 그것은 학교 근처에서 사는 게 공부에 도움이 될 거라는 조안나의 주장으로 함께 살던 몰리가 아파트를 구했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이 비참한 지경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몰리가 산드로의 집을 떠나자 조안나는 기뻤다. 몰리를 위해 아무 문제도 없는 척 가장하지 않고 두 사람의 모든 불안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결혼하고 처음 몇 달은 악몽 그 자체였다. 산드로는 침대 모서리에 매달려 자는 한이 있어도 함께 침대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녀는 반발하는 대신 그의 말에 순종햇다. 하지만 몰리가 떠났을 때 조안나 역시 떠났다. 그의 침실에서‥‥. 이제 그 상황은 완전히 반전된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산드로와 함께 살고 있고, 그는 다시 그녀와 침대를 함께 쓰고 있었다. 그는 코코아를 넣은 카푸치노 두잔을 가지고 돌아와서 그녀의 옆에 앉았다. 단단한 엉덩이가 부드러운 곡선의 배 주변을 눌렀다. 그가 미소지으며 한 손을 들어 볼에서 헝클어진 붉은 머리칼 쪽으로 부드럽게 움직이더니 키스를 햇다. 그녀는 주춤하지 않앗다. 너무 다정하고 부드러운 키스였기 때문이다. 「기분이 좀 나아졌소?」그가 물엇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엿다.「당신을 두렵게 했다면 미안해요」 「난 아무래도 상관없소」그가 중얼거렸다.「그 얘길 하고 싶소?」 「내가 싫다고 하면 날 못 살게 굴 건가요?」그녀가 심술궂게 반격했다. 「아니오」그가 나직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은 그녀의 마음을 아주 편안하게 달래 주었다.「난 그 정도로 무례한 남자가 아니오」그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인정했다. 「당신은 주제넘게 내 침대에서 잘 만큼 충분히 무례해요」조안나가 지적했다. 「그건 다르오」그가 말했다.「그리고 당신은 내가 들어갔을 때 알아채지도 못했으면서 무슨 불평을 하는 거요?」 「난 불평하는 게 아니라 항의하는 거예요」그녀가 따졌다. 「아니, 당신은 항의하는 게 아니오」그가 미소지었다. 여전히 손은 가지런히 빗겨진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다. 「당신은 변명 거리를 찾는 거요. 그래야 공연한 싸움 없이 날 그곳에 머물게 할 수 있을 테니까」 「말도 안 돼요!」그녀가 반대햇다. 「정말?」그가 물었다.「그럼 내가 만약 그 악몽을 멀리 몰아내 준다면 날 당신 침대에서 자게 해주겠소? 그렇게 할 수 있소?」 그녀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앗다. 하지만 그의 부드러운 놀림에 눈물이 고였다. 「오, 제발 그러지 말아요」산드로가 당황하며 애원했다.「오늘 아침 당신 울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은 충분히 찢어졌소」 「당신이 들었을 리 없어요」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간신히 말했다. 「이 주먹 보이오?」그가 붕대 감긴 손을 보여 주면서 물었다.「나머지 쪽도 거의 이렇게 될 뻔했소」 조안나가 두 손을 뻗어 그의 성한 주먹을 끌어당겨 보호하듯 볼에 댄 것은 순전한 충동이었다. 그것이 그를 움직였다. 그 단순한 동작 하나가 아주 깊이 그를 움직인 것 같았다. 그녀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차 올랐다. 왜? 왜냐하면 그녀 자신도 이처럼 스스로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진 게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이리 와요, 난 당신을 침대로 안고 갈 거요」그는 두 팔로 그녀를 안으며 일어섰다.「난 남은 밤 동안 그곳에서 당신을 꼭 안을 거요. 그리고 당신이 반대한다면 무조건 키스하겠소. 이건 계약이오, 카라」그가 분명하게 설명햇다. 그녀가 반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자겠소, 키스하겠소?」 「교환 조건이나 흥정도 하지 않고요?」그녀가 메마르게 물엇다. 그가 싱긋 웃엇다.「당신은 교환 조건을 원하오? 그럼 내가 뛰어난 흥정꾼이라는 것을 경고해야겠군. 난 은행가요. 최고의 흥정을 할 수 있지」 단어를 잘못 선택한 거야. 조안나는 그 말을 무시하기로 했다. 너무도 피곤하고 지쳐 있었다. 어쩌면 산드로가 맞을지도 몰라. 그에게 안겨 침실로 다시 들어갈 때는 그녀는 졸면서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몸에서 로브를 벗겨 내고 그녀를 침대에 뉘였다. 그러고는 자신도 로브를 벗고 그녀 옆에 누웠다. 남성다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흰색 사각 팬티만 입은 채. 하지만 그녀는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그가 끌어당길 때도 몸을 떼고 싶은 욕망도 일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옳을 지도 몰라. 그가 만지면 만질수록 난 점점 쉽게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어쩌면 오늘 아침 가장 은밀한 비밀을 드러낸 것이 악마를 몰아내버렸는지도 몰라. 마침내 우리는 정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건지도‥‥. 조안나는 창가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다시 잠이 몰려오기 전에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곧장 몸 안에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그가 여전히 잠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다시 사라져 버렸다. 그는 그녀의 머리 바로 위의 베개에 강인한 팔을 올려놓은 채 잠들어 있엇다. 그녀는 침대에 편안하게 누워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깨어있을 때만큼 자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자극적일 만큼 섹시햇다. 거무스름한 피부에 완벽한 골격‥‥. 이렇게 잘생기고 섹시하고 능력 있는남자가 왜 나처럼 보잘것없는 종업원을 원했을까? 그것은 그가 운이 없기 때문이야. 그녀는 슬프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가 이 침대에 나를 눕히고 안았다 해도 이 순간 우리들의 몸은 다 한 부분도 닿지 않은 채 떨어져 있어. 왜? 그녀는 죄의식에서 비롯된 고통스런 슬픔을 느끼며 자신에게 물었다. 그는 결혼 생활 동안 나에게 다가오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자제했어. 잠이 든 무의식 상태에서조차 그 금지령을 지킬 정도로.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한숨은 그녀에게 그가 깨어나기 전에, 또 다른 정신적 고통이 시작되기 전에 이 침대에서 빠져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사랑해요, 알렉산드로. 그녀는 슬픔 어린 부드러움을 담아 마음 속으로 속삭였다. 당신에게 정말 미안해요. 그 때 그가 갑자기 검은 눈썹을 번쩍 떴다. 그 눈에 그녀의 적나라하고 상처받기 쉬운 표정이 그대로 붙잡혔다. 도망치거나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두 사람은 움직이지도,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몸 안에서 고통스럽게 흘러 넘치기 전에 힘을 잃고 사라져 가는 그 긴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만났다. 「몇 시죠?」그녀는 무슨 말인가 해야 한다고 느끼고 그렇게 물었다. 그가 실크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으로 흘끗 시선을 던지자 길고 숱 많은 눈썹이 어둡고 졸음 섞인 눈을 더 많이 드러내며 높이 올라갔다. 커튼 사이로 황금빛 여명이 방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5시쯤 됐을 거요」그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어젯밤 당신은 악몽을 꾸었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기억해요」 또 다른 침묵이 깔렸다. 긴장이 아닌 신중함의 침묵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장벽의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일까? 그녀는 궁금햇다. 「아직 이른 시간이오. 다시 잠을 청해 봐요. 하루 일과를 생각하기 전까지 시간은 넉넉하게 남아 있으니까‥‥」 잠을 청하라고? 그녀는 그의 눈을, 진한 눈썹이 갈색 홍조를 가리며 새틴처럼 부드러운 광대뼈 위로 내려앉는 것을 바라보며 속으로 따라 했다. 잠을 청하라고? 두 손을 뻗어 그를 어루만지고 입술로 저 따뜻하고 거무스름한 피부를 맛보고 싶은 지금? 잠을 청하라고? 꿈속에서만이 아니라 이곳에 누워 그를 바라볼 수 있는 지금? 아니, 난 자고 싶지 않아.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이 순간을 간직하고 싶었다. 그와 함께하는 특별한 순간에 늘 그랬던 것처럼 더욱 꼭 감싸안고 더 가까이 끌어당기고 싶었다. 그 때 머리 위쪽의 강한 팔이 움직였다. 그 대답으로 그녀는 자신의 근육이 곧장 긴장하는 것을 알앗다. 그가 눈을 깜박이며 치켜 떴다. 마치 그 짧은 순간에 그녀 안에서 끓어오른 그 묵은 불안을 감지한 것처럼. 어두운 검은 눈 속에서 분노가 번쩍 빛낫다. 그녀는 그런 그를 비난할 수 없엇다. 심지어 그는 그녀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미안해요」그녀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너무 늦었소」그가 내뱉고는 갑자기 아주 분명하게 그녀를 만지기 시작했다. 뜨겁고 단단한 알몸을 그녀 몸 위로 굴렸다. 커다란 두 팔이 머리를 감싸고 두 손이 걱정 어린 얼굴을 감쌌다.「언젠가 곧‥‥」그가 중얼거렸다.「난 당신을 그 불안에서 끌어내 내 앞에서 알몸으로 눕게 할 거요! 그 뒤에 당신을 갖겠소」 「미안하다고 햇잖아요」그녀가 외쳤다.「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단지‥‥」당신을 보는 데 마음을 빼앗겨서‥‥. 그녀는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산드로가 날카로운 결론을 내렸다.「예견한 반응일 뿐일 테지!」 「아니에요」그녀가 부인했다.「난 깜짝 놀랏고, 그게 전부예요」 그는 그녀를 믿지 않았다.「그럼 증명해 봐요」그가 말했다.「만약 당시이 단순히 <깜짝 놀란 것>뿐이라면」그가 조롱하고는 팔꿈치에 힘을 실어 그녀의 몸 위로 움직였다. 그녀는 그의 존재로 완전히 압도되고 있었다.「증명해 봐요」그가 도전하듯 반복했다.「그리고 날 확신시켜 보시오. 당신이 방금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한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오」 심장이 쿵쿵 뛰며 모든 상황이 이성 밖으로 무섭게 달리고 있었다. 왜 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지 않았을까? 왜 기회를 잡지 않은 거지? 산드로가 눈을 뜨기 전에 왜 이 빌어먹을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은 거야? 「난 당신이 내게 무엇을 증명하길 바라는지 몰라요!」그녀가 초조하게 내뱉었다. 「좋소‥‥」그가 천천히 말했다. 갑자기 분노는 사라지고 그보다 더 위험한 나른한 조롱이 깔렸다. 그녀는 그의 아래에서 덫에 갇힌 것을 깨달앗다.「당신은 또 다른 반사 작용을 경험할 수 있을 거요. 내 팔에 목을 감고 날 끌어당겨 내게 키스한다면‥‥」 「난 당신에게 키스하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그 제안을 딱딱하게 거절했다. 「왜요?」그가 물엇다.「몇 분전만 해도 당신은 내게 키스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잖소」그가 자극하듯 놀렷다. 그녀의 눈이 이해로 번쩍 빛났다.「당신은 내가 보는 걸 지켜보고 있었군요!」 「음‥‥」그가 나른하게 점잔을 빼며 인정했다.「당신 눈이 그처럼 내 몸을 애무하는 건 정말 자극적이었소」 그녀는 어리석은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 백 킬로미터쯤 먼 곳에 있다면‥‥. 그녀는 그의 아래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쳣다. 하지만 그 행동은 그의 길고 마르고 따뜻한 알몸을 더욱 분명히 인색했을 뿐이다. 볼이 열기로 붉게 물들고, 열기가 혈관을 타고 온몸을 달리기 시작했다. 「나한테 키스할 거요?」 그녀는 계속 두 눈을 꼭 감은 채 머리를 흔들엇다. 가슴이 부풀어오르고 배가 긴장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가 알고 있을까? 「내가 당신에게 몸을 떼는 편이 더 좋겠소? 당신만의 공간을 다시 갖도록?」 그녀의 두 손이 제멋대로 위로 홱 올라가 그의 목을 단단히 감았다. 그러자 산드로는 거만하고 자신감에 찬 남자다운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이해할 거요」그가 같은 고문을 계속햇다.「내가 당신에게 키스하라고 우긴 건 단지 어떤 식으로든 내가 당신을 강요했다는 비난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오」 그럼 이건 강요가 아니고 뭐야? 벗은 몸으로 내 몸을 누르는 그 자체가 끔찍한 강요가 아니라는 거야? 곧이서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감쌌다. 그녀는 강렬한 감각 속에 빠져들며 저항의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휘며 손을 뻗어 그의 간절한입술을 끌어당겼다. 두 입술이 부딪친 순간 그녀의 감각은 거칠게 날뛰엇다. 그녀는 더 이상 감각을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두 손은 따뜻한 구릿빛 피부를 애무하고, 입술은 두 사람이 절망적으로 원하는 일을 개걸스럽게 그를 맛보았다. 굶주린 입술이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그를 맛보았다. 「조안나, 이건 너무 빠르오」그녀가 자신의 아래에서 불꽃을 일으켰을 때 산드로가 힘겹게 숨을 헐떡이며 속삭였다. 그는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더 이상 그녀를 압도하기 위해 위협하던 자신감에 찬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그 거친 폭풍을 막으려 하고 있었다.「조안나‥‥」 하지만 그녀는 그의 이성을 빼앗는 한 번의 키스로 그의 입술을 막앗다. 한 손으로 목덜미를 움켜잡고 다른 한 손으로 땀에 젖은 넓은 등을 달렸다. 그의 몸이 활처럼 휘며 고통스런 신음을 터뜨렸다. 곧 그는 그 모든 힘겨운 싸움을 포기하고 다시 뜨겁고 열정적인 연인이 되고 있었다. 전에는 결코 허락하지 않았던 곳을 그가 점점 대담하게 애무하자 그녀는 기뻤다. 난 사랑을 나눌 수 있어! 실제로 지금 그런 일을 받아들이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 모든 감각이 빙글빙글 도는 동전처럼 퉁겨 오르다가 잘못된 면 쪽으로 바닥에 떨어졌다. 갑자기 고통이 혈관을 따라 지글지글 타오르며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그 고통은 그의 손길을 즐기는 대신 싸우게 만들엇다. 그녀는 간헐적인 흐느낌을 내뱉으며 그를 난폭하게 밀어냈다. 그리고 몸을 굴려 침대에서 내려왔다. 다리가후들거리고 맥박이 미친 듯이 뛰었다. 산드로는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슬픈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보자 계속 사랑을 나눌 수 없었던 자신의 실패만큼 몸을 갈가리 찢는 것 같았다. 그가 화를 냈다면 마음이 더 편했을 텐데‥‥. 그는 그녀 혼자만의 혈전을 지켜보다가 등을 돌린 채 나른하게 천천히 말했다.「어쨌든 전보다는 나아졌소. 앞으로는 더 나아질 거요」 그녀는 고통에 숨을 헐떡이며 그방을 뛰쳐나왔다. 로마를 벗어나 국도를 따라 <올비에토>로 가는 긴 드라이브에 그녀는 숨이 막혔다. 하지만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편안해 보였다. 침실에서 뛰쳐나온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산드로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또 다른 새 날의 압력과 대면할 준비를 했다. 산드로는 작은 거실로 통하는 테라스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조간을 훑고 있는 그 모습은 말할 수 없이 편안해 보였다. 그 모습에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이 남자는 강철 같은 감정을 가졌어. 그는 샤워하고 면도하고 수수한 흰 셔츠를 헐렁한 허리에 끼워 넣고 갈색 가죽 벨트를 맨 오트밀 색깔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평소처럼 그의 스타일은 멋있었다. 「당신도 좀 들어요」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포트를 가리키면서 그가 권했다.「하지만 당신이 먹고 마실 시간은 충분하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앗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보았다. 자신의 접시 옆에 놓여 있는 것을‥‥. 순간 눈물이 가득 차오르며 고통스런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산드로‥‥」그녀는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쉬‥‥」그가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하고는 허리를 숙여 창백한 볼에 살짝 입맞춤했다.「아침을 들도록 해요. 난 떠나기 전에 몇 군데 전화를 해야 하니까」 집안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그를 지켜보는 동안 그녀는 고통과 가슴을 비트는 완전한 무력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위해 그곳에 놓아 둔 가시 없는 짧은 줄기의 빨간 장미를 어루만졌다. 난 그에게 이런 대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어.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장미를 휴지로 조심스럽게 싸서 지갑 안에 넣었다. 소중한 기억의 창고로 가득 찬 미래를 위해서. 「준비됐소?」그가 다시 돌아와서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서서 그를 향해 아주 조심스런 시선을 들었다. 하지만 산드로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차림을 점검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검은 눈이 크림빛 작은 코튼 상의와 같은 리넨 바지를 자세히 살폈다. 그녀는 화장하지 않은 얼굴에 긴 머리칼을 한 갈래로 땋아 어깨쭉지 근처에 내려놓았다. 화장을 할 걸 그랬나 봐‥‥. 적어도 화장은 창백한 안색을 감출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들은 함께 아파트를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주저하듯 멈춰 서서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비상 계단으로 내려갈 수도 있소. 당신이 원한다면 말이오」 그것은 연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쁘지도 고맙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연민은 단지 시간의 낭비를 강조할 뿐이니까. 「엘리베이터가 좋아요」그녀는 차갑게 말하고는 그 말을 증명하듯 앞으로 발을 내딛으며 직접 <내림>버튼을 눌렀다. 산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 입술에 댔다. 침묵 속의 칭찬이었다. 그 작은 몸짓은 그녀의 기분을 더욱 최악으로 몰고 갔다. 왜냐하면 몇 년 전에 맞서 싸워야 했던 어리석은 집착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녀를 긴장하고, 침묵하고, 손을 빼내고, 입을 다문 이유였다. 그녀는 자신이 언제 어디서 폭발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몹시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또다시 산드로에게 고통을 겪게 할 수 없었다. 다시 제자리에 놓으려는 그 노력이 전혀 가치가 없다는 것을 그에게 일깨워 주어야 했다. 그러기 위한 최선의 길은 다시 그에게 냉담해지는 것 뿐이었다. 난 할 수 있어.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전에도 그 일을 아주 성공적으로 마쳤잖아‥‥. 9 <올비에토>는 움부리아 터스커니(이탈리아 중부 지방)를 경계선으로 로마와 시에나 사이에 잇었다. 포도나무 덩굴과 빽빽한 삼림 지대로 뒤덮인 비옥하고 완만한 언덕이 잇는, 숨막힐 만큼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그곳은 아주 전형적인 농촌임에 틀림없다. 이곳의 무엇이 도시적인 취햐을 가진산드로의 관심을 끌었을까? 「그 집은 다음 언덕 너머에 있소」산드로가 옆에서 말했다.「저길 봐요」 그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그녀는 입을 벌린 채 외쳤다.「오, 산드로‥‥ 너무 아름다워요! 어디까지가 당신 땅이죠?」단호하게 결심을 햇는데도 숨김없는 기쁨이 드러났다. 「우리‥‥」그가 부드럽게 정정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정정에 반응하기도 전에 그가 질문에 대답했다.「당신이 볼 수 잇는 것보다 더 멀리까지」 그녀의 벌어진 입술에서 더 큰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차가 포도나무가 일렬로 쭉 늘어진 길로 들어섰다. 개인 전용 도로였다. 다른 한쪽 면에는 높은 삼나무가 팜플렛에서 본 그 아름다운 집까지 이어져 있었다. 집이 점점 가까워지는 동안 포도나무에 이어 풍성한 과수원이 이어지고 화사한 색채의 테라스를 가진 전형적인 이탈리아 식의 아름다운 정원이 나타났다. 그 집은 마치 영원의 시간 동안 그곳에 쭉 있었던 것처럼 보였고, 지금까지 본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웠다. 붉은 타일 지붕과 황금빛 햇살 속에 푹 잠긴 노란색 벽들‥‥. 산드로는 작은 자갈이 깔린 앞마당에 차를 세웠다. 좀 떨어진 고셍 마구간이 있었고, 그 뒤쪽에 심긴 키 크고 가는 삼나무들은 바람막이, 또는 개인 공간과 작업장을 나누는 경계선 같은 역활을 하고 잇었다. 조안나는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앗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숨을 쉴 수가 없엇다. 「어떻소?」산드로가 조용하게 물엇다. 어떠냐고? 그녀는 생각할 수 없었다.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매혹적인 곳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쁨, 호기심, 이렇게 사랑스런 장소에서 살고 싶은 간절한 욕망‥‥. 「전 주인은 제정신으로 이 집을 팔고 싶어햇나요?」그녀가 숨을 죽인 채 물었다. 「그들의 딸이 미국인 와인 제조업자와 결혼했거든」차를 돌아와 그녀 옆에 서며 산드로가 설명했다.「사실 이집은 그림처럼 완벽해 보일지는 몰라도, 많은 돈을 투자해야 하거든. 완벽한 와인을 만들려면 와인 제조와 생산 부분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하니까」 「그리고 당신은 그 도전을 즐겁게 받아들이겠죠?」마침내 조안나는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이 모습이 바로 산드로야. 훌륭한 투자가의 모습. 그러나 그의 말은 그녀를 완전한 충격에 빠뜨렷다.「난 도전을 위해 이 집을 산 게 아니오, 조안나. 난 당신을 위해 샀소」 날 위해?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하지만 왜죠?」 그는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조금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자, 이리 와요. 먼저 집안을 살펴보는 게 좋겠소」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를 천천히 따라가며 생각했다. 난 단 한 번도 그에게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어! 그는 교묘한 말장난으로 날 놀리는 걸까? 어두운 넓은 현관 홀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녀는 <보상>이란 단어를 떠올렷다. 산드로는 아주 분명한 사명을 가진 남자야. 그리고 그 사명에는 보상이 포함되어 잇지. 「이 집은 수리를 좀 해야 하오」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주저하듯 멈춰 서자 그가 설명했다.「그렇게 심한 손상은 없지만‥‥」 그는 이미 길고 좁은 창문에서 덧문을 떼어 내고 잇엇다. 햇살이 스며들자 수수한 흰색 벽과 거대한 구식의 벽난로 위에서 춤을 추는 묵은 먼지가 드러났다. 약간 떨어진 벽면의 홀 가운데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의 층계가 있고 또 다른 한쪽에 닫힌 문들이 몇 개 잇었다. 하지만 그곳도 모두 똑같은 상태일 거야.「텅 비었군요」그가 확신하듯 말했다. 「그렇소」그가 인정했다.「당신이 할 일이 바로 그거요. 이 집 전체를 다시 윤 나고 멋지게 꾸미는 일 말이오」 조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 속은 충격으로 펄쩍 뛰고 자연스러운 방어 시스템이 곧장 작동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 그는 이곳에서 결혼 생활을 제대로 시작할 거라고 말했다. 물론 그것은 섹스를 의미했다. 하지만 이곳 어디에도 침대는커녕 가구 비슷한 나무토막도 보이지 않았다. 혼란 속에서 그녀는 가장 가까운 문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나무 덧문이 덮인 또 다른 텅 빈 공간이 나왔다.「이곳은 뭐였죠?」옆으로 다가온 그에게 그녀가 물엇다. 그의 손이 허리 쪽으로 미끄러지며 간단히 그녀를 붙잡았다. 온몸을 감은 철사 코일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순식간에 오감이 작동했다. 그녀는 뜨거운 물에 덴 고양이처럼 펄쩍 뛰며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모든 자제력을 끌어 모았다. 「거실」그가 대답했다.「모두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현관 쪽에 있소」 그녀는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덧문을 떼어내는 게 좋겠소?」 「부탁해요」그의 손이 떨어지자 그녀는 안도감에 거의 주저앉을 뻔했다. 그 뒤 그녀는 신중하게 그와 거리를 유지했다. 방에서 방으로 이동하고, 덧문을 떼어 내고, 예전의 용도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텅 빈 공간을 둘러보는 동안 줄곧. 집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웅장했다. 연회를 할 수 잇는 커다란 홀이 네 개, 사무실이 딸린 두 개의 서재, 구식의 거대한 주방, 여섯 개의 커다란 방‥‥. 하지만 욕실은 단 두 개뿐이엇다. 집안을 다 둘러보고 다시 거실로 돌아왓을 때 그가 물었다.「어떻소? 맘에 드오?」 「아주 멋져요」그녀가 대답했다.「그런데 당신은 내가 이런 집에 살고 싶어하리란 걸 어떻게 알았죠?」 그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창가로 걸어가 잠깐 밖을 내다보앗다. 그는 우울해 보였다. 마치 확신하지 못하는 어떤 사실을 말해야 할지 어떨지 고심하는 사람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근육이 긴장으로 단단히 조여들엇다. 「몰리가 당신이 전에 농장에 살앗다고 가르쳐 주었소」그가 고백했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런던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당신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농장을 인수하길 원하지 않았소」 몰리가 산드로에게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조안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산드로와 여동생이 그런 말을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몰랐다. 「몰리가 당신이 그곳을 무척 좋아했다고 했소」그는 몸을 돌려 그녀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을 보았다.「당신은 신선한 공기와 탁 트인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이 주는 자유를 사랑했다고 했소. 말을 타고 어디든 달리면서 말이오. 몰리는 당신이 영국에 살면서 그 모든 것을 너무 간절히그리워 했다고 했소‥‥」 산드로가 자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잇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조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먼지 섞인 햇살 속에 가만히 서 잇었다. 「뭐라고 말 좀 해보시오」그가 재촉했다. 「몰리가 당신에게 아주 많은 말을 했군요」그것이 그녀가 생각해 낼 수 잇는 말의 전부였다.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우리는 가끔 만났소」그가 고백했다.「점심 시간에. 당신이 날 떠난 뒤 한 달에 한 번 정도. 난 당신이 잘 살고 있는지 알아야 했고, 몰리는 기꺼이 당신 얘길 들려 주었소」 눈가에 고였던 눈물이 볼을 타고 먼지 낀 갈색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가슴을 쥐어짜고 있었다. 몰리가 너무 그리워서? 몰리와 산드로가 나 모르게 몰래 만나고 잇었다는 사실에 상처를 받아서?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녀는 끔찍할 정도로 발가벗겨진 기분을 느꼈다. 「그 때‥‥」그의 목소리는 그녀를 불안하게 할 만큼 아주 신중햇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부드러운 크림 빛 상의 의 소매단을 꼭 잡았다.「어머니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예정된 며칠 전이었소. 그 당시 어머니는 많이 편찮으신 상태였고, 당신보다 날 더 필요로 하시는 것 같았소‥‥」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그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눈물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를 볼 수 없었다. 「몰리가 전화로 만나자고 하더군. 비탄에 잠긴 목소리엿지‥‥」그가 말했다.「우리는 점심 시간에 만났소. 그녀가 내게 말한 것은 그 때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왜 나와 살 수 없는지 당신이 그녀에게 말해 준 아주 피상적인 사실만을 말했소. 그러고는 그 일로 당신에 대한 감정이 바뀌었느냐고 물었소」굵고 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난 말했소. 물론 빌어먹을 만큼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번만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어머니가 회복하시는 모습을 내가 옆에서 지켜볼 때까지 몇 주 동안!」 도전. 조안나는 깨달았다. 오, 그 말들 속에는 너무 많은 분노의 도전이 있었다. 「내가 런던에서 돌아왔을 때‥‥」목소리가 갈라지자 그는 말을 멈추었다. 조안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다음에 무슨 말이 이어질지 알기 때문이엇다!「두 사람 무두 그 아파트를 떠났더군」그가 계속했다.「처음에 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엇소. 하지만 곧 몰리가 내게 사실을 말했다고 당신에게 말한 것이 틀림없다고 가정했소. 그래서 당신은 도망쳤을 거라고」그가 결론지었다.「사실 난 그 가정을 너무 확신했기 때문에 그 이상 당신을 추적할 마음이 없었소. 그것이 내가 몰리에게 일어난 일을 모른 이유요」 그는 나에 대해 최악을 가정했던 거야. 조안나는 텅 빈 가슴을 느끼며 생각했다. 내가 그에 대해 최악을 생각한 것처럼. 「난 지난 과거에 대한 보상을 원하오. 그 시간은 당신에게 끔찍한 지옥이었을 테니까. 그래서 이곳은‥‥」그가 아름답게 조각된 손을 천천히 흔들며 설명했다.「그 보상에 대한 내 방식이오. 난 당신에게 탁 트인 공간가 당신이 원하는 만큼 즐길 수 잇는 자유를 주겠소」 그의 보상이 아니라 나의 보상?「당‥‥당신 말은‥‥」그녀는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을 더듬었다.「당신 말은 날 위해 이 아름다운 집을 샀다는 건가요? 당신은 내게 뭔가를 빚졌다고 느끼기 때문에?」 「내가 아니오?」그가 받아쳤다. 「아뇨!」그녀가 외쳤다.「당신은 아니에요!」 「물론 난 다시 로마로 은행의 주요 시스템을 옮겨야 하오」그녀의 저항에 이어 그가 곧장 말했다. 마치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하지만 여기에도 모든 통신 시스템을 설치할 거요. 그 말은 내가 자주 출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오. 우리는 이곳에서 함께 지낼 수 있소」 조안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그는 내가 이 시골에서 행복하리라 믿었기 때문에 이 집을 샀어. 그리고 사업의 주요 업무를 로마로 옮기려고 해, 다시! 「그럼 당신이 원하는 건 뭐죠, 산드로?」그녀가 쉰 목소리로 물엇다.「이 모든 것에서 당신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게 뭐죠?」 그는 어깨를 으슥하며미소지엇다. 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든 완전한 조롱이 담긴 미소였다.「내게 적당한 아내가 될 여자‥‥」 그게 전부야? 고작 그런 것을 원하는 거야? 하지만 오, 맙소사. 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거대한 장벽이었다.「오, 산드로‥‥」그녀는 떨리는 한숨을 쉬었다. 결코 그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앗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난 그에게 적당한 아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확실히 증명했어.「이제 그만둬요」그녀는 고통 어린 강요를 담아 울부짖엇다.「내가 그럴 가치가 없다는 걸 모르겠어요? 심지어 난 그걸 원하지도 않아요!」 「그럼 당신이 원하는 게 뭐요?」그가 물엇다. 당신. 그녀는 무기력하게 생각하며 몸을 돌려 그에게서 떨어졌다. 「안 되오!」그가 반대했다. 그는 화가 나 있었다. 아주 무섭게. 그는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팔을 움켜잡고 자신을 마주 보도록 홱 돌려 세웠다.「진정한 진실에 가까워지는 순간에 당신은 내게서 도망칠 수 없소!」그가 내뱉었다. 「난 당신에게 받을 수도, 돌려 줄 것도 없어요!」그녀가 고통 어린 비탄 속에 외쳤다. 「그럼 당신 자신을 주면 되잖소」그가 간단하게 대답햇다. 「할 수 없어요!」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맙소사. 그는 내 말을 한 마디도 듣지 않았나 봐‥‥「난 할 수 없어요, 젠장! 할 수 없다고요!」 그가 한숨을 쉬며 몸을 쭉 펴더니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햇살이 내비치는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자, 어서‥‥」그가 어깨 너머로 말했다.「아직도 밖에는 볼 게 많소. 아마 마구간이 당신 맘에 들 거요」 조안나는 믿을 수 없엇다! 그는 자신에게 한 말을, 그의 고집스런 태도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엇다! 결국 그녀는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가 정원과 마구간을 보았다. 그는 완전히 이곳으로 옮겨오면 직접 말의 마구를 고르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그를 따라다녔다. 모든 사고를 산드로가 깨끗이 지워 버린 것 같앗다. 한 시간 뒤에 그들은 차 안으로 돌아왔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를 설득하려 했다.「산드로, 제발‥‥「」그녀가 애원했다.「내 말 좀 들어 봐요!」 「 만약 당신이 긍정적인 말을 한다면 듣겠소」그가 차갑게 대답했다. 「난 내가 당신과 사랑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이유가 뭐요?」그가 도전햇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꼭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나오지 않은 유령이 더 있소, 조안나?」그가 자극햇다. 당신이 내 유령이에요. 그녀는 침묵 속에 대답했다. 당신은 내가 숨쉬는 모든 순간에 늘 함게 있죠.「난 그 유령들과 마주 했어요. 하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아니, 그렇지 않소, 조안나」산드로가 말했다.「아직도 내가 꺼내지 못한 유령이 숨어 있소. 하지만 난 꺼낼 거요」그가 맹세햇다.「난 내가 사랑에 빠졌던 여자를 꼭 찾아낼 거요. 무슨 한이 있더라도 나와 똑같은 열정으로 날 사랑한 여자를 찾고 말 거요」그가 결론지엇다.「그것이 긍정적 사고라는 거요, 내게서 도망치려는 부정적 사고가 아니라」 「당신인 미쳤어요」그녀는 한숨을 쉬며 그에게 지친 좌절의 표정을 던졌다. 햇살 속에서 붉은 머리칼이 반짝였다.「만약 당신이 돼지 머리를 가진 게 아니라면‥‥」 「당신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오?」그가 웃엇다.「아니, 아니‥‥」그가 그 비난을 부인했다.「난 우리가 나눈 그 특별한 순간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소. 미친 남자라면 지나쳐 버리겠지. 하지만 난 절대 그러지 않을 거요!」 「당신은 한 번 날 보내 주었어요」그녀가 상기시켰다. 「그 때는 당신이 그런 식으로 날 대하는 이유를 몰랏소」그가 반격햇다.「당신은 그것이 내 잘못인 양 믿게 했소. 나한테 참을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그 당시 난 당신의 육체에 대한 혐오감을 극복할 수 없엇소, 조안나. 하지만 난 이제 할 수 잇소. 그리고 할 거요」그가 엄격하게 선언했다.「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로 우리 두 사람을 벌하는 당신의 그 슬픈 결심을 극복할 거요!」 그는 그 말을 하고 몸을 돌려 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그를 따라갔다. 그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엇다. 선택은 없어. 그는 이미 시동을 걸고 있었다. 그의 어두운 표정은 돌 같았고 공기는 아주 무거웠다. 두 사람은 아무도 그 분위기를 가라앉히려 시도하지 않앗다. 그들은 삼나무가 심긴 도로를 침묵 속에 달렸다. 그녀는 분노와 죄의식, 비참함, 초라함을 느꼈다. 지금의 난 불구가 되어 있어. 그녀는 자신에게 고통스럽게 말했다.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조금도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이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였다. 난 영원히 그를 이런 식으로 실망시킬 거야. 과거에 내가 그를 실망시킨 그대로.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산드로는 양해를 구하고 자신의 서재로 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 그녀는 더 큰 고통을 느꼈다. 조안나는 움찔했다. 난 3년 전부터 저 소리를 알앗어. 그래. 그녀는 힘없이 비유했다. 감정의 살육이 다시 비탈진 경사로 떨어지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것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엇다. 샤워를 한 뒤 시원한 선드레스로 갈아입고 침실을 막 나왔을 때 그녀는 거실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를 인식한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앗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거실로 걸어나갔다. 산드로와 그의 어머니가 부드러운 어조와 화난 말투로 아야기를 나누고 잇엇다. 이탈리아 어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안나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그곳에 서 잇는 자신을 본 순간 입을 꽉 다문 것으로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잇엇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로마에 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만나러 오셨소」산드로가 차가운 목소리로 알려 주었다. 그의 어머니가 몸을 움찔하고 조금 슬프게 인사했다.「안녕, 조안나」그녀는 작고 날씬했으며 아주 우아했다.「다시 만나서 기쁘구나, 얘야‥‥」 하지만 조안나는 시어머니의 말이 빈말이라는 것을 알았다.「고맙습니다」그녀는 그말을 하고 앞으로 발을 내딛으며 라틴 식으로 볼을 비비는 인사를 나누었다.「전‥‥방금 커피를 끓이려고 했어요」그녀는 절망적으로 이 상황을 빠져나갈 길을 찾았다.「제가 커피를 끓여 올 동안 잠깐 앉아 계세요‥‥」 그 때 산드로의 서재에서 전화 벨이 울렸다.「내가 꼭 받아야 할 전화요」산드로가 엄격하게 말했다.「그 동안 당신은 여기서 어머니와 얘길 나누도록 해요」 조안나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를 공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떻게 감히 당신이 내게 이럴 수 있죠! 푸른 눈이 분노로 타올랏다. 그는 그녀를 무시했고, 여전히 그녀에게 화가 나 있었다. 이것이 그의 앙갚음의 방식이야! 「조안나, 여기 앉아서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말해 다오」 오, 젠장! 모든 에너지가 바닥난 것처럼 조안나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녀는 무거운 운명의 공기 속으로 몸을 돌려 소파쪽으로 걸어가 산드로의 어머니 옆에 앉았다. 「얼굴이 좋아 보이는구나」그의 어머니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 「고맙습니다」그녀가 다시 대답했다.「어‥‥어머니도 그러시네요」그러고는 마지못해 덧붙였다.「산드로한테 어머니께서 편찮으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나이 든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작년에 심장 수술을 받았단다」그녀가 설명했다.「알렉산드로가 요양을 하라고 날 올비에토로 데려갔지. 정말 평화스러운 곳이더구나. 로마의 끝없는 인파와 소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네」조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곳에 다녀왔으니 잘 알겠지. 오늘 하루 종일 전화를 했는데 통화가 안 되어 걱정했는데, 거기 다녀오느라 그랬다면서? 난 정말 우연히 네가 내 아들과 함께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앗단다」 그래서 여기에 왔겠지. 조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허리를 살짝 폈다.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대체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니? 또다시 내 아들의 인생을 망칠 생각이니? 하지만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그 집이 마음에 들던?」산드로의 어머니가 물었다. 「아주 많이요. 누군들 그렇지 않겟어요?」조안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살짝 굳어지는 미소를 발견했다.「아주 아름다운 곳이잖아요」 나이든 여인이 고개를 끄덕엿다.「알렉산드로와 난 여러번 그 집을 방문했단다. 너도 알다시피, 그 시골집은 그 애가 찾은 훌륭한 미끼가 되었거든. 널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한 미끼 말이다」 조안나는 눈을 깜박였다. 산드로는 그 아름다운 집을 그렇게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야? 최근에 그가 충동적으로 결정한 것이라 믿었는데. 「하지만 물론‥‥」그의 어머니가 고른 어조로 계속했다.「최고의 계획을 세우다 보면 일이 어긋날 수도 잇지. 알렉산드로 같은 남자라도 말이다. 여동생의 비극적인 죽음은 정말 유감이구나, 조안나」그녀가 부드럽게 덧붙엿다.「넌 아주 힘든 시간을 겪었을 거야」 그것도 알아? 조안나는 허리를 조금 더 폈다.「그 당시에는요」그녀가 동의햇다.「하지만 이제는 괜찮아요」 「지금 생각해도‥‥」조안나의 굳은 어조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는 계속 말했다.「정말 끔찍한 운명 같아. 내 아들이 널 아내로서 다시 찾기 위해 이 계획을 진행하는 동안 넌 그런 끔찍한 고통 속에 잠겨 잇었다니‥‥. 넌 운명을 믿니, 조안나?」 「글쎄요」그녀는 힘겹게 대답했다.「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어요」 「그럼 사랑을 믿니?」나이 든 여인이 고집스럽게 물었다.「선과 정직과 진실한 사랑이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는 걸 믿어? 아니면 최고의 사랑조차 늘 운명 앞에 힘없이 무너진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두 연인이 쓰러지지 않으려 애쓴다 해도 말이다」 「전 어머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조안나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 동안 그녀는 산드로가 다시 나타나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진행되기 전에 멈춰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확실히 알고 싶은 것은‥‥ 카라」나이 든 여인이 조안나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너의 믿음이란다. 네가 이 결혼을 이번엔 진심으로 잘 될 수 있다고 믿는지 그걸 알고 싶단다. 아니면 단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알렉산드로의 슬픈 고집 때문인지‥‥」 「우리는 노력하고 있어요」조안나가 딱딱하게 말했다. 「육체적인 면에서?」 조안나는 벌떡 일어낫다. 산드로의 어머니도 일어낫다. 그녀는 그 작은 체구에 비해 놀랄 만한 힘으로 조안나의 손을 꽉 잡았다.「난 문제를 만들려는 게 아니란다, 조안나」그녀가 열정적으로 주장햇다.「하지만 제발, 조안나, 넌 이런 일들을 얘기할 어머니가 안 계시잖니! 신은 아실 게다」그녀가 불안정하게 중얼거렸다.「그런 일을 겪은 뒤에 넌 결코 편해질 수 없었을 거야. 하지만 난 알렉산드로가 지난번처럼 그렇게 심하게 상처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단다. 왜냐하면 넌‥‥」 시어머니가 말을 멈추고 침을 삼키자 조안나는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든 말은 조안나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난 돕고 싶단다. 할 수만 있다면‥‥」 「아무도 도울 수 없어요」조안나는 손목을 홱 잡아빼며 말했다.「이건 어머님의 문제가 아니에요」 「얘기는 잘 되고 있나요?」 조안나는 몸을 홱 돌려 유리 같은 눈으로 산드로를 보았다.「당신이 말했군요」그녀가 그를 비난햇다.「난 당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그를 지나 성큼성큼 걸어갔지만 그가 어깨를 음켜잡고 멈춰 세웠다.「가게 해줘요」그녀가 강렬한 혐오를 담아 내뱉었다. 「어머니는 아무 것도 모르고 계시오」그가 공언했다.「몰리가 나한테 말했을 뿐이오. 나도 인간이오, 카라」얼음 같은 표정이 변하지 않자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잇는 누군가에게 말해야 했소!」 그건 문제가 아니야.「그 일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어요, 산드로. 그 일은 내게 일어났어요」 「우리요, 조안나」그가 단호히 주장햇다.「그 짐승들이 당신에게 한 짓을 내게도 똑같이 했소. 그리고 당신처럼 나도 지난 세월동안 그들 행동에 대가를 지불해 왔소!」 「어쨌든 당신은 더 이상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어요」그녀가 말했다.「난 여길 떠날 거니까요. 영원히 로마 거리를 헤매야 한다 해도!」 「당신을 내가 보내리라 생각하오?」그가 조롱했다.「내가 비밀을 누설했다는 사실을 알고 당신이 화가 났기 때문에?」 그녀의 차가운 눈은 활기를 드러내며 분노로 번쩍 빛났다.「난 몰리가 내 비밀을 지켜 주리라 믿었는데 그녀는 다신에게 말했어요」그녀가 딱딱하게 지적했다.「그리고 몰리는 당신이 그 비밀을 지켜 주리라 믿었지만 당신은 어머니한테 말했죠. 당신 어머니는 누구에게 말했죠, 산드로?」그녀가 물었다.「지금쯤 얼마나 많은 그 대단한 보네티 사람들이 문 뒤에서 속삭이고 있죠? 망가진 여자와 결혼한 당신의 끔찍한 운명에 대해!」 「오, 아니야, 조안나!」그의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끼여들엇다.「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난 그러지 않았단다」 하지만 조안나는 듣고 있지 않앗다. 그녀는 이제 듣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난 또다시 더럽혀진 기분이에요. 그걸 알아요?」 산드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분노와 공포로 영혼을 찢는 자기 혐오의 떨림이자 무슨 일이 일어날 때면 늘 나타나는 격렬한 감정적 반응이엇다. 「조안나, 이러지 마시오」산드로가 외쳤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끌어당기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젠장!」그가 욕설을 내뱉엇다.「어머니, 왜 그냥 우리 둘만 남겨두지 않는 거죠!」 「어, 어쨌든 어머니는 옮아요, 안 그래요?」조안나가 말했다.「당신은 내게 이런 짓을 할 수 없어요. 늘 그렇게 말해 왔잖아요」 「당신이 내게 하고 있는 유일한 일은 날 상처 입히는 거요. 자신이 상처 입었기 때문에!」 「난 더 이상 당신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에요」 「그 말 좀 그만둘 수 없소!」그가 내뱉었다.「그 짐승들이 당신 의지를 꺽고 당신을 가지려 했는지 몰라도 그들은 당신을 눈곱만큼도 건드릴 수 없었소, 조안나!」 「하지만 그랬어요, 모르겠어요?」그녀가 울부짖었다. 뜨겁게 불타는 푸른 눈에 고통스런 상처가 있었다.「난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을 갖고 잇었어요, 산드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잇는 아주 작은 한 가지를요. 당신은 내게 세상을 줄 수 잇지만 난 당신에게 줄 것이 그것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가져갔어요!」그녀가 흐느꼈다. 목소리는 가슴을 비트는 날카로움으로 올라가고 있었다.「그들이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을 훔쳐 갔단 말이에요. 이‥‥이제 난 내 자신을 줄 수 없어요」그녀는 고통스럽게 말을 마쳤다.「그럴 수 없어요, 산드로. 미안해요. 그럴 수 없을 뿐이에요!」 「산타 마리아!」조안나의 무력한 고뇌 너머의 뿌연 어떤 곳에서 산드로의 어머니가 고통스런 이해를 담아 속삭엿다. 산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턱은 단단히 잠겨 있고 눈은 너무 검어서 어두워진 영혼으로 곧장 이끄는 두개의 터널 같았다. 게다가 그는 떨고 있었다. 마침내 그 끔찍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떠는 것인지, 아니면 말하기 어려운 격렬한 분노 때문에 떠는 것인지 알 수 없엇다. 하지만 조안나는 그 사실을 알기 위해 그곳에 머물 수 없었다. 그곳에서 나가야 했다. 이 아파트를 떠나야 했다. 완전히 지옥이 되어 버린 그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에게서 도망쳐야 했다. 그녀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 달리고 잇었다. 산드로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홀을 지나 아파트 밖으로 달려 대기중인 승강기로 들어갔다. 다급한 손가락으로 <내림>버튼을 누르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몸을 돌려 무섭게 화가 난 산드로가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 때 문이 단단히 닫혔다. 그녀는 그가 주먹으로 단단한 문을 내리치는 소리를 들었다. 더 이상 소리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벗어날 때까지 그의 욕설이 들렷다. 곧이어 문이 다시 스스로 열리고 그녀는 다시 달리고 있었다. 이제 막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거리는 화려한 붉은 빛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마치 두 다리에 날개를 단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계속 달렸다. 10 산드로가 완전히 따라잡기까지 아파트를 벗어나 얼마나 달렸는지 조안나는 알수 없엇다.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눈에 익은 검은 차가 홱 스쳐 지나며 몇 미터 앞에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멈춰 선 순간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달리기를 멈추었다. 차의 시동이 꺼지기도 전에 문이 홱 열리며 산드로가 무섭게 내렸다. 크고 마르고 심장을 녹일 만큼 잘생기고 고통스러울 만큼 특별한 그가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얼굴에는 아까처럼 진한 분노가 새겨져 잇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잡고 발길을 돌려 차를 향해 다시 걸어가기 시작햇다. 그의 자유로운 손이 조수석의 문을 열엇다. 그는 그녀를 차에 밀어 넣고 움찔할 만큼 세게 문을 닫은 뒤 빛나는 차체를 돌아 그녀 옆에 올라탔다. 운전석 문도 쾅 닫혔다. 그는 긴 손가락을 뻗어 자동 잠금 버튼을 누르고는 잠깐 그대로 앉아 잇엇다. 한 손은 허벅지 위에 주먹을 쥐고, 다른 한 손은 단단히 조인 입술을 누르고 있었다. 조안나는 숨을 헐떡이며 땀으로 젖은 몸으로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난‥‥」 「그만!」그가 이를 갈앗다.「단 한 마디도 하지 마시오!」 그 명령에 깔린 격렬한 감정에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완전히 침묵에 잠겼다. 그는 분노에 젖은 채 차의 시동을 걸고 기어을 넣은 뒤에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아파트로 돌아오는 여정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조안나는 자신이 왜 굳이 달리는 수고를 했는지 어리석게 느껴졌다! 차가 끽 소리를 내며 멈추고, 그가 차체를 돌아 조수석을 문을 열고 그녀를 끌어 내렷다. 그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길 한가운데 급정거한 이후 한번도 보지 않앗다. 그는그녀를 아파트 건물 안에 이어 대기 중인 승강기로 이끌었다. 승강기는 순식간에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그녀는 다음에 일어날 일을 걱정하느라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햇다. 그는 아파트 문을 열고 그녀를 다시 안으로 밀어넣은 뒤 문을 쾅 닫고 단단히 잠갔다. 조안나는 그가 내리게 될 결론이 무엇이든 가만히 서서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곧장 몸을 돌려 홀을 지나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서둘러 문을 쾅 닫고 침대 한쪽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이 방에 열쇠가 있다면 그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잠글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자물쇠는 없엇고 그녀는 이제 조금 전의 자신의 격렬하고 적나라한 고백에 몸을 떨면서 눈물을 흘렀다.「오, 하나님‥‥」그녀는 흐느끼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엇다. 하지만 곧 다시 벌떡 일어났다. 문 밖에서 산드로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와 마주할 수가 없엇다! 욕실 문에 열쇠가 잇어! 그녀는 기억햇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욕실을 향해 달렸다. 「어디 해보시지」단호한 목소리가 등뒤에서 말했다.「그리고 그 문이 부서지는 것을 지켜보라고. 꼭 그래야 한다면 말이오」 「난 샤워를 해‥‥해야 해요」그녀는 즉석에서 만든 말을 어깨 너머로 던졌다. 그래서 몸을 돌려 그와 마주하지 않을 수 있었다.「땀을 많이 흘린 데다‥‥」 「그건 말이지」산드로가 느리게 말했다.「당신이 다시 도망치기 때문이오.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난 당신을 보내지 않소. 그러니까 당신 스스로 몸을 돌려 나와 마주하는 편이 나을 거요. 내가 그렇게 만들기 전에」그는 그 위협을 그대로 실행하겠다는 의미를 담아 말했다. 「당‥‥, 당신 어머니는‥‥」 「당신이 나와 안전하게 돌아온 걸 알고 안심하셨소」그가 말을 끊었다.「그리고 당신이 던진 그 끔찍한 상황에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셨소!」 내가 던져! 조안나는 침묵 어린 조롱 속에 반복했다. 대체 누가 그 끔찍한 상황을 부추겼는데? 바로 그의 어머니야! 「이쪽으로 돌아와요, 조안나」 그녀는 다시 쑤셔오는 눈을 누르다가 곧장 손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주먹을 꽉 쥐고 결연히 어깨를 쭉 편 뒤 몸을 홱 돌렷다.「이제 행복해요?」그녀가 반항하듯 말을 던졌다. 「아니오」그가 대답했다.「당신은 끔찍해 보이오」 그도 좋아 보이진 않아. 그녀는 가슴 저리는 아픔 속에 인정햇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하게 일그러졌고, 눈은 너무 검고, 입술은 가늘게 단단한 분노의 선을 그렸다. 「미안해요」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녀가 속삭였다. 평소처럼 그는 그 사과에 깊은 감동을 받지 않앗다.「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 사람의 은행 잔고에 더 많은 관심이 있소, 카라?」 「난 한 번도 당신 돈을 원하지 않았어요!」그녀는 격렬하게 부인했다. 「확실히」그가 말했다. 그 말에 그녀는 머리 속이 마비되는 혼란에 잠겼다. 그는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난 한 번도 당신의 순결을 원하지 않앗던 것처럼‥‥」그가 그녀를 초연하게 지켜보며 선언했다. 그 단어의 언급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졋다.「물론 한때 그것을 얻는다는 사실을 영광으로 여겼다는 것은 인정하겟소. 난 경의를 담아 그 선물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소.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잇었으니까 말이오. 아니,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을 외면하지 마시오. 당신은 들어야 하오, 조안나. 조금 전에 내가 가슴 찢는 당신의 연설을 참고 들어야 했던 것처럼!」 「당신은 결코 내 감정을 이해할 수 없어요!」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가 뒷걸음질치며 울부짖었다. 「당신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당신의 순결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고 믿엇다는 걸 난 진심으로 이해하오」그가 내뱉었다.「그리고 당신은 그 생각으로 날 모욕했소. 그걸 알고 잇소? 당신은 우리가 나눈 모든 것을, 내가 당신을 사랑한 방식을 모욕했소!」 말은 쉬워. 조안나는 쓰게 생각햇다. 그녀는 지금도 그 당시 자신의 순결을 안 순간 그가 일으킨 혼란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달라진 그의 태도까지! 길고 열정적인 포옹 대신 볼을 스치는 작별 키스와 온몸을 애무하는대신 손만을 잡는 그의 태도를 기억햇다. 사실 그녀는 그가 실제로 그 소중한 순결을 가질 마음이 잇기나 한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햇다. 순에 쥐기만 하면 그의 것이 될 상황에 말이다! 「당신은 다시 모든 것을 당신만의 관점으로 바꾸고 잇어요」그녀는 화가 나서 반격햇다.「당신은 언제나 그런 식이에요, 산드로. 그 당시 내가 당신을 얼마나 실망시켰는지,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마치 내가 전혀 모르는것처럼!」 「그 순결 때문은 아니오」그가 부인햇다.「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상 피부의 얇은 껍질에 지나지 않으니까. 여성이 성장해 아기를 낳게 될 때까지 감염과 질병에서 자궁을 보호하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말이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오」그는 어깨를 으쓱했다.「만약 당신이 어떤 맹목적인 집착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물론 난그렇지 않소」그가 선언햇다. 「하지만 내가 간직하고 싶은 한 그것은 내 것이엇어요」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햇다.「그리고 난 당신에게 그것을 주고 싶엇어요!」그것은 가슴 깊은 곳에서의 절규였다.「그들이 내게서 그것을 빼앗았을 때 당신에게 줄 내 특별한 선물은 사라져 버린 거예요!」 「그것은 사라졌고, 이제 영원히 사라진 거요, 조안나」산드로는 엄격하게 지적했다.「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신이 한때 그 소중한 선물을 내게 주려 한 마음이오.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을 주려 했소!」 「그것이 진실을 바꾸진 못해요, 산드로! 심지어 난 가슴을 찢는 고통 없이는 당신과 사랑을 나눌 수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난 그 선물을 잃어버렸으니까요」 「내가 그리워하리라 생각하오? 잃어버린 것에 한탄하며 당신을 소원하게 대할 거라고?」그는 경멸 어린 웃음을 던졋다.「난 당신을 만지지도 못한 채 살아야 했던 그 비참한 인생보다 오히려 아내와 사랑을 나누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요!」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했잖아요」그녀는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 난 당신이 말한 이상을 이해하고 있소」그가 곧장 되받았다.「당신이 진심으로 두려워한 것은 바로 순결이었다는 것을 난 아주 잘 이해하지」 조안나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 두 짐승은 당신을 상처 입히지 못했소」그는 조롱하듯 손을 흔들며 판결했다.「그것은 당ㅅ니을 애처로울 만큼 깊은 시름에 잠기게 한 진정한 문제를 스치는 단순한 표면에 지나지 않지. 그럼 진정한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오?」그가 직접 대답했다.「당신은 자신을 내게 줄 용기가 없었던 거요. 당신 자신을‥‥조안나」그가 힘있게 반복했다.「당신 자신의 순결! 당신 자신을 내게 자유롭게 준다는 그 자체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선물이오. 오래 간직할 수 잇는 피부의 얇은 껍질이 아니라. 그리고 만약 당신이 계속 이렇게 나간다면‥‥」그가 다시 문쪽으로 움직이며 결론지었다. 그의 얼굴에 새겨진 너무 명백한 혐오감에 그녀는 죽음의 고통을 느꼈다.「당신은 우리 모두의 인생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거요」그가 경고했다.「왜냐하면 당신은 내 인생을 금욕의 좌절에 빠지게 만들 테고, 그런 식으로 과로워하는 날 지켜보며 당신 인생도 죄의식과 슬픔에 물들 테니까」 「무‥‥무슨 뜻이죠?」그녀가 속삭였다. 그 말의 의미를 추측하는 것이 두려웠다. 「당신의 이성이 정확히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 뜻이지」그가 대답했다.「이 결혼은인생을 위한 거요」그는 문을 열며 단호히 덧붙였다.「물론, 당신이 그 빌어먹을 가망 없는 주장에 매달리겠다면‥‥ 나도 이제 내 자신의 가망 없는 목표를 떠나보내는 편이 낫겠지」 조안나는 그 말속에 담긴 엄청난 효과에 숨을 쉴 수도 없어서 그의 등뒤로 문이 닫히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가망없는 사실? 그 모든 고통스런 상황이 정말 그‥‥ 가망없는 주장에서 비롯되었단 말인가? 다리에서 힘이 빠지자 그녀는 침대 위에 힘없이 주저앉앗다. 갑자기 산드로가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진 것은 확실히 사라진 거야! 아무리 매달린다 해도 다시 돌아오진 않아! 난 오랫동안 가망 없는 사실에 매달리고 있었어! 내가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은 순결이야. 그가 그 순결을 갖고 내 욕망을 깨닫게 될 경우 난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 내 자신을 자유롭게 주기가 두려웠던 거야! 그 두남자는 내게 아무 상처도 주지 못했어. 더 이상은 아니야. 그것은 상처가 될 수 없었어. 순간 그녀는 깨달앗다. 만약 그 때 내가 이 문제에서 어떤 시으로든 벗어나려 했다면 난 나만이 아니라 산드로의 인생을 구했을 거야! 그는 그 누구보다 그럴 권리가 잇어. 그가 무엇 때문에 가망 없는 목표에 그렇게 계속 매달려야 하겟어? 갑자기 그녀는 다시 벌떡 일어났다. 몸이 떨려 오고 한기가 일엇다. 진한 한기가 가슴 밑바닥을 내리쳤다. 두려움의 한기엿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익숙했던 전의 감정과는 달랐다. 그것은 주는 것에 대한 묵은 두려움이 아니라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엇으니까. 산드로는 날 가망 없는 목표로 보기 시작한 거야. 그는 날 포기하려 해! 그 순간 공포가 다시 타올랏다. 묵은 공포가 아닌 새로운 공포였다. 그녀는 확신을 가지고 신속히 욕실을 향해 움직엿다. 그녀는 재빨리 샤워를 하고 서둘러 긴 회색 로브를 끌어당겨 떨리는 손으로 걸쳤다. 그녀는 자신이 본능의 결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확실히 시도해야 했다! 아파트는 고요했다. 너무 고요해서 산드로가 이미 떠나버린 것이 아닌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절망적으로 힘겨운 시도를 하고 있었다. 홀로 내려가 3년의 긴 시간 동안 들어가지 않으려 했던 그 방으로 들어갔다. 떨리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면서 그녀는 문손잡이를 돌렸다. 방안으로 발을 내딛은 순간 그녀의 시선은 곧장 그에게로 날아가 꽂혔다. 그를 발견하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전에 한 번도 웅장한 높은 천장과 암녹색과 금박 무늬가 덮인 회색 벽을 의식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거대한 침대나 지난번 이 방에서 지내면서 산드로를 완전히 무너지게 한 그 끔찍한 공포의 마지막 시간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앗다.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창 밖을 바라보고 서 있는 그가 모든 문제였으니까. 그도 샤워를 햇는지 길고 마른 몸에 그녀의 것과 비슷한 흰색의 짧은 로브를 걸치고 잇었다. 그는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는 갑자기 몸을 홱 돌려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날카롭게 주시했다. 너무 늦은 걸까? 이 소중한 결혼을 되살리기는 너무 늦어 버린 걸까?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폐쇄적이고 엄격한 그의 얼굴에 시선을 멈춘 채 그녀는 두려움과 불확신 속에 다음에 할 일을 깨달았다. 로브 매듭으로 올라가는 손가락이 떨려왔다. 그의 몸이 살짝 굳어지며 그의 시선이 질문하듯 그녀의 눈으로 날아와 꽂혔다. 그녀의 볼이 뜨겁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히 결심한 일을 계속했다. 심장이 쿵쿵 뛰고 위가 조여드는 동안 로브 벨트를 풀고 천천히 벌려 가녀린 어깨 위로 미끄러뜨렸다. 로브가 발치로 떨어져 내렸다. 3년의 결혼과 그보다 오랫동안 미친 듯이 사랑에 빠졌으면서도 산드로 앞에 알몸으로 서 잇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엇다. 그것은 아주 극적인 동작이었다. 왜냐하면 조안나는 그 극적인 방법으로 인생 속의 사랑과 두려움, 기쁨과 상처가 담긴 모든 감정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특별한 몸짓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엇다. 이렇게 모든 감정을 드러내고 그 앞에 서 있는 것은 미친 짓이 아닐까? 그녀는 길고 풍성한 눈썹을 내리깔고 어둡게 불타는 그의 눈이 천천히 새틴처럼 부드러운 어깨에서 높게 솟은 가슴으로 훑어 내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방안에 날카로운 침묵이 깔렸다. 산드로의 시선이 더욱 아래로 미끄러지자 그녀의 육체가 부드럽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을까? 3년 전 바로 이 방에서 내가 그에게서 빼앗은 것을 돌려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잇을까? 그의 얼굴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앗고, 자세 역시 여전히 돌처럼 굳어 있었다. 「당신을 너무 사랑해요, 산드로」그녀가 걱정스럽게 외쳤다.「제발 아직은 날 포기하지 말아요. 적어도 내가 당신에게 적절한 아내가 될 수 있는지 시도할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되돌리지 않았다. 조안나는 점점 커져 가는 긴장 속에서 기다렸다. 알몸으로, 상처받기 쉬운 표정으로, 불확신에 고통받으며 숨을 죽인 채‥‥. 심장이 쿵쿵 뛰고 부드러운 입술은 떨리기 시작했다. 최후의 운명의 판결을 기다리며 그곳에 서 있는 가엾은 희생양처럼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위로 올라갔다가 낮아지고 다시 올라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녀의 시선과 만났다. 곧이어 그가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이리 와요, 당신은 정말 못 말릴 정도로 놀라운 여자요」그가 쉰 목소리로 명령했다. 안도감으로 막힌 목에서는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그녀는 방을 가로질러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격렬한 갈망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만낫다. 중간은 없었다. 그녀는 열정으로 묵은 편견을 모두 날려보냈다. 키스가 끝없이 이어지며 두 사람을 불태웠다.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마치 이 지구상에 오직 그녀와 산드로만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졋다. 그의 손이 온몸을 따라 달렸다. 만지고 쓸어 내리고 살피고‥‥ 그녀가 제공하는 것을 확인하고 마침내 그의 것이 된 것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열정적인 키스와 고통스러울 만큼 자극적인 각각의 애무에 응답했다. 넓은 어깨에서 로브가 벗겨진 순간 그들 사이의 마지막 장벽은 무너졌다. 마침내 두 사람 모두 알몸이 되었다. 그녀는 단단하고 뜨거운 몸을 향해 자신을 꼭 눌렀다.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엇다. 응답 속에 피부가 지글지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나누는 새롭고 놀라운 감각 속에 오감이 생기를 띠며 힘차게 살아나고 있었다. 실크 같은 검은 털이 덮인 단단한 가슴에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꼭 눌렀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녀의 허리가 휘었다.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에 대답하는 그의 응답의 힘을 느꼈다. 그의 가슴에서 들려오는 무거운 심장 고동을 느꼈다. 허리에 감긴 팔이 더욱 단단히 조이는 것을 느꼈다. 목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열정의 신음과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뜨거운 숨결을 느꼈다. 그는 그 모든 거친 경험 속에 온몸을 떨면서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렸다. 「벨리시마」그 말은 그렇게 들렸다.「벨리시마‥‥」 곧이어 그들의 입술이 불꽃 튀는 쾌락 속에서 다시 만났다. 그녀는 다급히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열정적인 포옹 안에 그를 가두었다. 너무 꼭 껴안았기 때문에 묵은 유령이 나타날 틈이 없엇다. 그는 그녀를 안고 침대로 걸어갔다. 그녀는 어떤 공간도 없을 만큼 그에게 꼭 매달렸고, 두 사람은 침대 위에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떨어졌다. 「천천히‥‥」그가 속삭였다.「우리는 아주 천천히 한 단계씩 사랑을 나눌 거요. 어떤 장애도 없어야 하오, 카라 미아」 「그래요」그녀는 열정적인 손가락으로 새틴같이 단단한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하지만 지난 번 그렇게 했을 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낫죠? 당신은 당신의 것을 잃었고, 나 역시 그렇게 됐어요」 「당신은 나의 것이오」그가 중얼거렸다.「그것이 내가 원하는 전부요, 카라」 그녀는 고개를 끄덕엿다.「당신을 이해해요. 하지만 날 놓지 말아요, 산드로. 난 너무 두려워요」그녀가 그에게 애원했다.「내 마음이 다시 변하지 않기 위해서는 당신이 필요해요. 난 아직도 마지막 순간에 당신을 실망시킬 거라는 끔찍한 두려움을 갖고 있어요」 그녀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흥분시켯다. 그녀는 그 어떤 순간보다 열 배는 더 사랑에 빠지게 만들엇다. 「당신은 그 생각을 버려야 하오」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놀라운 열정을 일으키고 있는 어깨에서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냈다. 「왜요?」그녀가 자극하듯 물었다. 「이것이 이유요」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아래쪽으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그는 옆에 누워 그녀가 자신을 향해 불꽃을 태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그녀에게 전해 주는 감각에 완전히 항복하며 응답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응답이 그를 움직였다. 그녀는 완전히 그에게 자신을 내주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가슴속에 억눌린 모든 감정의 상자를 연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그 감정은 자유롭게 날개를 펴며 날아갔다. 어떤 억제도 없는, 순전한 감각의 자유만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은 그를 향한 것이었다. 「산드로‥‥」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는 정확히 그녀의 마음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였다. 그녀를 실망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어쩌면 그녀는 벌써 느꼈는지도 몰라.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묵은 감정보다 더 높은 장벽이 내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도 몰라. 오랜 시간 동안의 그녀의 거부는 그의 자신감을 앗아갔다. 눈을 뜬 그녀가 두 손을 뻗어 상기된 검고 열정적인 얼굴을 감쌌다.「당신이 하지 않는다면 난 죽을 거예요」그녀가 부드럽게 경고했다. 또 다른 웃음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허스키하고 슬픈 웃음이엇다. 그는 몸을 움직여 그녀의 위에 무게를 실었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그녀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저 숨을 멈추고 그대로 몸을 굳혔다. 그 몸짓에 그는 동작을 멈추고 어두운 눈으로 걱정스럽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가 그처럼 반응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카라?」그가 탁한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당신을 상처입혔소?」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엇다. 그 모든 새로운 경험에 완전히 푹 잠겨 잇었기 때문이다. 그의 것은 너무 단단하고 강하고 완벽하게 그녀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의 열기는 마치 하나의 실체를 만들려는 것처럼 그녀 자신의 불타는 열기와 뒤섞이며 타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마침내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산드로와 함께하고 잇다는, 분명하고 날카롭고 불꽃 튀는 인식이었다. 「난 당신을 느껴요, 산드로」그녀가 실크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털어놓앗다.「난 내 깊은 곳에서 맥박치는 당신을 느낄 수 있어요」 그 말이 그를 움직엿다. 감정적으로, 떨리는 숨결을 타고 폐 안에 공기를 가득 집어넣으면서 그를 움직였다. 다음 순간 그는 그녀에게 길고 깊게 키스했다. 곧이어 그녀 내부에서 강렬한 햇살이 터졌다. 더 이상 승리감이 아닌 감각의 강렬한 햇살이엇다. 순진하고 관능적인 감각이었다. 그것은 마치 믿을 수 없는 쾌락에 젖은 잔잔한 바람 속에서 화관을 활짝 펼치는 꽃처럼 열렷다. 날카로운 숨을 들이마시며 그녀가 만개한 꽃 속에 푹 잠길 때까지, 그 섬세한 감각의 화관이 날카롭게 응답하는 피부의 구석구석을, 모든 신경 끝을 감싸면서 온몸을 떨 때까지‥‥. 그녀 위에서 산드로는 자신을 억제하며 떨고 잇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주는 그의 희생이엇다. 뜨거운 입술을 목에 묻은 채 그는 그녀 위에서, 그녀 안에서, 그녀의 모든 곳에서 움직였다. 그녀는 아주 완전한 감각의 불꽃 속에 타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애무를 하자 그는 고통스런 쾌락 때문에 전율했다. 그녀가 키스하자 그는 고통 속에 신음했지만 다급하게 키스를 되돌렸다. 하지만 그녀 안에서 꽃이 만개한 순간 그는 함께 동작을 멈추고 그녀 안에 일어나는 관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최후의 감각의 전율을 느끼며 부드럽게, 천천히, 세심하게, 시간을 들여 모든 것이 폭발하는 절정의 순간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곧이어 그는 점점 더 강해지는 자신의 강렬한 햇살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가 매달린 순간,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울부짖는 순간 그는 그 강렬한 햇살을 포기했다. 보상. 이 절정의 순간에 너무나 사랑하는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울부짖는 것을 듣는 것이 바로 보상이엇다. 그 뒤 모든 것은 순전한 감각의 날카롭고 거친 폭풍 속에 폭발했다. 두 사람은 아무도 실망하지 않앗다. 그들은 그곳에 누워 강력한 힘의 여파 속에 여전히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엇다. 두 개의 심장이 마치 하나처럼 쿵쿵 뛰고 있었다. 「괜찮소?」간신히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산드로가 속삭였다. 그는 가볍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땀에 젖은 상기된 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 대답으로 그녀는 그의 손에 키스했다. 마침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장애물을 뛰어 넘었고, 그녀는 더 이상 처녀가 아니었다. 마음으로, 정신으로, 확실히 육체로도 아니었다. 「그들은 꽤 서툴렀어요, 안 그래요?」마침내 그녀가 속삭였다. 「누구?」그가 물엇다. 어떤 면에서 거부를 감지했는지 이미 몸이 굳어지고 잇었다. 「그 짐승들‥‥」그렇게 설명하며 그녀는 사랑이 담긴 푸른 눈을 떠서 걱정스럽게 그를 보았다.「그들은 이런 멋진 감각을 만들어내지 못했으니까요」그녀는 그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특별한 순간에 그런 화제를 꺼낸 것은 충분히 화낼 만한 일이니까. 하지만 산드로는 이탈리아 남자였다. 그리고 이탈리아 남자는 천성이 남자다웠다. 그가 싱긋 웃었다. 나른한 만족이 깔린 웃음은 그가 그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아무리 그 안에 간접적인 의미가 담겨 잇다 해도 말이다. 「이제 당신이 그 많은 세월 동안 무엇을 잃고 있었는지 알겠소?」그가 거만하게 말했다.「이제 난 이 일에 어느 정도 존경을 받을 수 있겠군」 「아하‥‥」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밝고 생기에 넘쳤던 예전의 조안나로 돌아가 있었다.「하지만 과연 당신이 그 일을 다시 할 수 잇을까요?」그녀가 도전했다.「그걸 지금 당장 알고 싶어요」 그는 그것을 다시 했다. 길고 어둡고 안개가 깔린 밤 내내‥‥. 다음날 아침 눈을 뜬 그녀는 그의 몸을 감고 잇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팔은 갈비뼈 바로 아래의 허리 곡선 위에, 다른 한 손은 그녀의 머리 아래에서 실크 같은 머리칼을 감은 채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멋진 그를 한 번도 보지 못햇다. 그녀는 지난밤 나눈 완전하고 놀라운 아름다움 속에 푹 잠긴 채 오직 그만을 바라보았다. 그 때 다른 욕구가 아우성치기 시작햇다. 미친 듯이 배가 고팠다. 며칠 동안, 몇 주 동안, 몇 달 동안 아니, 몇 년 느껴 보지 못한 욕구였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자신이 쓰던 방으로 가서 옷을 입을 생각이었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그의 티셔츠가 눈에 띄엇다. 그 옷은 반은 의자 위에 반은 바닥에 걸쳐져 있었다. 지난밤 화가 나서 벗어 던진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충동으로 옷을 집어들고 방을 나갔다. 그녀는 머리 위로 옷을 뒤집어썼다. 너무 커서 허벅지까지 내려왔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시원한 모자이크 타일이 깔린 바닥을 맨발로 걸어 부엌으로 향했다. 자유. 그녀는 그것이 이 모든 만족의 이유라는 것을 알았다. 마치 영원한 구속에서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난 지난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어. 심지어 그녀는 아침 식사로 버터를 바른 토스트와 함께 신선한 오렌지 주스를 짜면서 행복하게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아주 즐겁게 들리는걸」나직한 목소리가 말했다. 그는 이미 샤워와 면도를 끝내고 낡은 팬츠만을 입은 채 문에 기대서 있었다. 탄력 있는 허리 밴드에 짧은 줄기의 붉은 장미를 꽂고. 감각이 지글지글 타오르고 지난밤의 기억이 집어삼킬 듯한 불꽃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 남자‥‥. 그녀는 숨을 죽이며 생각했다. 이 멋지고 섹시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이 남자가‥‥ 바로 나의 연인이야! 나의 연인. 소유욕이 가슴을 가득 채우는 날카로운 만족감을 더하면서 몸 안에서 용솟음쳤다. 지난밤 그가 자신에게 준 믿을 수 없는 감각이 무엇이든 간에 조안나는 산드로가 가슴 깊이 그 모든 것을 느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그것은 그가 그녀에게 받은 그 격렬한 응답이 가져온 똑같은 감각의 힘이엇다. 「멋진 다리네요」오렌지를 짜는 일로 자연스럽게 다시 시선을 돌리기 전에 그녀가 한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일부러 그 장미를 무시했다. 과거에 늘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그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맨발로 자신의 뒤에 서자 기대감이 온몸을 타고 달리기 시작햇다. 그가 두 손을 허리에 미끄러뜨리며 검은머리를 숙여 코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음, 이것이 인생이군」그가 중얼거렸다.「나의 섹시한 아내한테선 오렌지 냄새가 나고‥‥ 벗어 던지 내 셔츠를 입고 있어」 그녀는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며 그의 목을 꼭 감았다. 그는 아주 행복해 보였다. 그의 눈은 깊고 나른한 약속으로 가득 차 잇었다. 그녀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그의 팬츠 허리 밴드에서 장미를 꺼냈다. 「이 장미는 대체 어디서 나는 거죠?」그녀가 호기심 있게 물엇다. 「비밀」그가 말했다. 갑자기 그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다.「더 이상 유령은 없소?」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녀는 검붉은 장미를 입가에 스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털이 덮인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당신에게 끔찍한 지옥을 맛보게 한 나를‥‥용서해 주겠어요?」 「용서할 것은 하나도 없소」그가 말했다.「당신은 깊은 충격에 빠져 있었으니까. 그 충격이 당신을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벽 뒤에 가두었지. 난 시도했소. 몰리도 마찬가지였고. 우리가 당신이 그처럼 행동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해도 당신에게 끔찍한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소. 단 하룻밤에 당신을 바꿀 수 있을 만큼 아주 끔찍한 일이 말이오」 「당신은 그 진실을 짐작했나요?」 「난 가장 이성적인 전제로 그것을 다루었소」그가 말했다.「하지만 당신이 말한 대로 당신은 어떤 상처도,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한 아무런 증거도 없었소‥‥」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전율했다. 그러고는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몸을 더욱 꼭 껴안았다.「난 이제 잊고 싶어요」그녀가 슬프게 속삭였다. 「그래」그가 동의했다.「3년은 그 끔찍한 기억에 빠져 잇기에 너무 긴 시간이었소」 「그리고 오늘은‥‥새로운 내 인생의 네번째 날이죠」그녀가 말했다. 고개를 든 그녀는 그가 미소짓는 것을 보았다.「이제 우리는 뭘 하죠?」그의 눈이 빛나기 시작하자 그녀의 얼굴이 다시 물들엇다.「당신은 욕심 많은 남자군요」그녀가 놀렸다. 「당신과 함께라면 내 욕망은 끝이 없소」그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게다가 고통스러웠던 금욕의 3년을 빨리 따라잡아야 하니까!」 「오, 산드로‥‥!」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신음했다. 그는 그녀의 대답 속에 담긴 충격을 보았다.「당신은 내가 최고가 아닌 것을 받아들이리라 생각하오?」그가 물었다. 「하지만 당신은 정부가 있다고 했잖아요!」그녀가 외쳤다. 「내게 당신을 대신할 다른 여자가 잇다면 좋았겠소?」 「아뇨」그녀는 허스키하게 고백했다.「하지만 당신이 그랬다 해도 이해했을 거예요」 「내 자존심이 <정부>란 말을 하게 했을 분이오」그가 쓰게 고백했다.「난 심지어 다른 여자를 쳐다볼 수도 없었소. 생각조차도! 하지만‥‥ 맙소사」그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그것은 고통이엇소. 특별히 작년 한 해 당신이 사라져 버렸을 때는‥‥. 당신이 남자로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깨끗이 발가벗긴 기분이엇소, 아모르」그가 무겁게 털어놓았다.「장담하지만 그건 절대 멋진 기분이 아니오!」 「난 당신을 너무 사랑해요」조안나는 걱정스럽게 말했다.「난 결코 당신을 그렇게 대하고 싶지 않았어요. 단지 내 자신을 어쩔 수 없었을 뿐이에요!」 「실제로 당신이 전화했을 쯤 난 스스로 당신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다고 확신하기 시작하고 있었소」그가 인정했다. 조안나는 신음하며 그를 더욱 꼭 껴안았다. 그가 여전히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당신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마치 내 안에서 뭔가가 생생한 불꽃을 일으키며 타올랐소」그가 부드럽게 계속했다.「난 다시 살아 잇는 것을 느꼈소. 난 그 감각에 뜨겁게 불타올랐소. 그래서 당신이 회사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당신을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했소. 당신을 가두는 한이 잇더라도 놓치지 않겠다고. 내가 사랑에 빠졌던 그 여자를 찾아낼 때까지 당신 앞에 놓인 그 빌어먹을 벽을 깨끗이 부숴 버리겠노라고!」 「그녀가 여기 있어요」조안나가 재빨리 보장했다. 그는 물기 어린 푸른 눈을 내려다보았다.「그녀의 모든 것이?」 「그래요」 「그럼 침대로 돌아갈까?」그렇게 말하며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주방 밖으로 이끌엇다. 「하지만 아침은 어떡하죠?」그녀가 항의했다.「난 배고파 죽겠어요! 막 당신 아침을 만들려는 참이었는데‥‥」 「내 것은 따로 있소」그가 거만하게 끼여들었다.「난 당신의 손가락부터 먹어치울 거요」 다시 그들은 침실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어두운 눈이 날씬하고 아름답게 균형 잡힌 흰 피부의 몸 위를 달렷다. 「내 가슴이 시릴 만큼 당신은 너무 사랑스럽소」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그래요」조안나는 두 팔을 들어 그의 몸을 감싸며 말했다.「내 모든 꿈은 실현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