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실리안의 사랑 원제/A Savage Betrayal 작가/ 린 그레이엄 번역/ 도향희 = 신영미디어 할리퀸 북스'96 (I-93) ---------------------------------------------------------------------------- [아직도 상사와 놀아나고 있군] 미나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어떻게 그런...., 왜 나한테 그런말을 하죠?] 세자르가 싸늘하게 웃었다. [우! 순진한 처녀같은 표정이 로군. 노력은 가상하지만 난 매력넘치는 젊은 여자에게 홀린 늙은이가 아니오. 난 세자르 팰콘이지. 만일 당신이 4년전에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아마 내 손에 죽었을 거요. 그런 짓을 하고도 무사하길 바랫소?]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하지만 시실리안은 등뒤에서 자신을 찌른 사람을 절대 잊지 않지. 설사 시간이 흐른다 해도....복수하겠다는 집념 만 더욱 강해질 뿐이지] -------------------------------------------------------------------------------- 1 [그리고 이쪽은 제 보좌관인 미나 캐럴입니다.] 상사인 에드윈 해런드의 소개를 받은 미나는 미소를 지 으며 악수에 응했다. 우아한 아르마니 수트로 성장을 하고 긴 머리를 보기 좋게 틀어올린 그녀는 주최측이라기보다는 돈많은 후원자로 착각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성대한 파티 에 중요한 역할을 맡아 참석하기는 처음이라는 사실을, 그 것도 마지막 순간의 대타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만한 사람 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 끌었다. [아니 이옷은 대체 어디서 난거야?] 홍보담당인 진의 속삭임이 들렸다. [은행이라도 털었어?] [아니 우리 언니 옷장을 털었어.] [우와, 언니 좀 바꿔보자. 우리 언니는 양의 탈을 쓴 늑대라구! 그럴리도 없겟지만 혹시 언니 옷을 빌려입고 싶으면 난 별별 수를 다 동원해야해 너의 언니는 천 사가 틀림없어.] 미나는 킥킥 웃었다. [그 정도는 아냐] 그녀는 손도대 지 않은 뷔페 테이블과 어정거리고만 있는 웨이터들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왜 아무도 안 달려들지?] [귀빈께서 연착하신다나 봐]진이 픽 웃었다. [아, 참. 넌 휴가라서 몰랐겟구나. 새로운 후원자가 나타났는데!] [해런드 씨가 그 사람 없이 시작하지 않는 걸보면 엄청 난 귀빈인가보구나?]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인 지위로보나 굉장한 사람이지. 자선 사업에도 발벗고 나선다나봐]진이 빈정거리듯 토를 달았다.[하늘이 내린 선물이야. 우리 이사들은 그 사람 발등에 키스라도 할 태세더라. 그 아래 말단 들은 그저 보는 걸로 넋을 잃던걸. 남자라는 질겁을 하는 폴리까지 말야] [폴리? 설마] [ 폴 리가 나가서 그 사람한테 선물할 크림 케이크를 사왔다면 믿겠어?] [농담 마] [정말이야. 얼마나 근사하게 생겼는데. 난 같이 엘리베 이터를 탔는데 이게 그냥 서버렸으면 싶더라니까. 그 사람 심정이야 어쨋건 간에....] 진이 한숨을 쉬었다. [이탈리아 남자들은 풍만한 여자를 좋아한 다잖아. 이만하면 나도 합격 아니니?] [그 남자가 이탈리아 사람이야?] [어, 저기 오네.] [어디?] [나, 참 어딜보는 거야?] 미나는 고개를 틀었다. 키가 큰 흑발의 남자가 양 옆으로 <지구 환경 보호 모임>의 임원들을 거느리 고 막 들어서는 참이었다. 미나는 심장이 내려앉 았다. 갑자기 온몸이 싸늘해지면서 식은 땀이 났다. [세자르 팰콘이야]진이 소근거렸다. [팰콘 그룹알지? 베리 씨가 어떤 만찬에서 우리 사보를 보여줬는데 상당히 감동을 받았나봐. 그 주에 당장 만나자고 청하더라는 거야. 심지어는 자원 재활용에 관한 내 기사까지도 언급했다면서.....] [그랬어?] 세자르? 자원 재활용? 미나는 말없이 휴대품 보관실로 향했다. 다행히 아무 도 없었다. 그녀는 빈 박스를 붙들고 서서 엄습해오는 현기증과 씨름했다. 이런 곳에서 세자르를 다시 만나 리라고는 꿈엔들 생각이나 했을까. 아니 어디서건 그를 다시 만나리라고는 기대해본적도 없다. 맙소사 삶이 란 이토록 잔인한 것일까. 생각할수록 치가 떨렸다. 4년전 대학을 갓 졸업한 그녀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장에 당당히 들어 갔다. 세자르 팰콘이 그녀를 행정 보좌관으로 채용했 던 것이다. 그리고 석달 수 그녀는 한마디 예고도 없이 해고당했다.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팰콘 그룹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그 사건은 그녀의 경력에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았다. 미나가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데는 1년도 넘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나마 변변찮은 급료로 만족해야 하는 단순노동뿐이었다. 세자르 팰콘은 그녀가 발붙일 자리를 없애버렸던 것이다. 하긴 꼭 그 남자 책임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그런 수모 까지 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고 하지만 어찌 보면 자업 자득일수도 있었다. 단 한가지 그리고 단 한번의 실수…. 그녀는 자신의 상사를 사랑했던 것이다. 일반적인 상 식이란 적용될 수가 없었다. 세자르가 거래를 성공시켰다 고 샴페인을 터뜨렸던 어느 날 밤 그녀는 자신을 저녁 식 탁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면 그렇게도 천진하고 경 솔하고 어리석을 수 있었을까. 그날 밤의 일만 없었어도 그녀는 부당해고로 세자르를 고소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 땅히 목숨을 걸고 싸웠어야 할 상황에서 그녀는 침묵을 지 킬 수밖에 없었다. 명백한 부정행위, 그것이 그겨나 해고 당 한 이유였다.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연회장으로 발길을 돌렸 ㄷ. 에드윈 해런드가 막 개회 연설을 시작하고 있었다. 다 들 손에 손에 접시를 들고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진이 황급히 손짓을 했다. 미나는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진이 얼굴을 찌 푸렸다. [감기 기운이 있는거 아냐?] [그냥 좀 피곤해.] 진이 친절하게 날라다 놓은 자기 몫의 접시를 내려다 보며 미나는 이를 악물었다. 세자르는 상석에 자리를 잡았겠지 아마루 애를 써도 시 선이 자꾸 그쪽으로 쏠리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진 의 말마따나 그렇게 근사하게 생긴 남자라는 사실을 처음 면접에서는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세자르는 까다로운 질 문들을 계속 퍼부어댔고 결국 그녀의 머릿속에는 집요하게 빛나던 검은 눈동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경험이 없어서 곤란하다고 해놓고 자신을 채용한 게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근무를 시작한지 한달 도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짚을 지고 불속에 뛰어든 기분 이 들었다. 비서 이상의 직급에서 여자는 눈씻고 찾아봐 도 없었고 같은 직급의 남자들은 노골적으로 불만과 우려를 표시했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것만도 나날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멍하니 세자르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도 이렇게 눈에 익은 모습이라니 …. 불현듯 그녀는 눈시울 이 뜨거워졌다. 익숙한 게 당연하지. 저 모습의 축소판을 보면서 사는 걸. 저 또렷한 윤곽과 선명한 눈썹과 타오르는 듯한 검은 눈동자를 벌써 3년째 보는데… 그녀의 딸 수지는 아버지를 판에 박은 듯 닮은 아이였다. [내일 이사회 때문에 그래? ]진이 물었다. [나라면 걱 정 안 할거야. 승진은 따놓은 셈인걸.] 미나는 한숨을 쉬었다. [장다말 수는 없어. 진] [해런드 씨는 널 재정 담당에 앉히고 싶어서 안달이야. 다른 이사들도 그 양반 의견이라면 군소리 없을걸] [후보자들은 많아.] [너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드물어. 오늘 파티만 해도 사이먼 대신 널 초대했잖아.] 미나 역시 그러길 바랐지만 장담할 수는 없었다. 4년 전의 사건 이후로 그녀는 어떤 일에도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야심만만했던 총명한 여자는 많이 지치고 늙어 버 렸다. 언니네 집에서 휴가를 보낸 2주일 내내 그녀는 제 발 승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신분 상승이라든가 사회 적인 책임이라든가 하는 명분 때문이 아니었다. 절대 아니 었다. 단지 재정 담당으로 승진하면서 받게 되는 보수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에드윈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제의 귀빈을 연단으로 안내 했다. 조명을 받은 세자르의 검은 머리칼은 실크처럼 윤기 가 흘렀다. 그 순간 미나는 그 머리칼을 휘잡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았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미나는 황급히 고개를 떨구고 와인 잔을 집었다. 세자르가 무슨 말을 하 는지. 단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재기 넘치는 연설인 모양이었다. 간간히 폭소와 박수 갈채가 터졌다. 그러면서도 시종 진지한 분위기로 이 끌어 가는 그의 화술은 예전과 다름없이 능란했다. 미나의 머릿속은 자꾸만 실타래처럼 엉클어지고 있었다. [이사들이 오늘 밤엔 구름에 뜬 기분이겟어. ] 진이 중얼 거렸다. [세자르 팰콘이 이 모임을 적극 후원하겠다니 그 럴만도 하잖아? 저기 기자들 좀 봐라. 언제 이런 적이 있었나?]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에드윈이 그녀에 게 신호를 보냈다. 미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그나마 세자르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시야를 가 린게 다행이었다. 대부분의 후원자들은 이번 모임을 세자르 팰콘과 인사라 도 나눌 수 있는 기회로만 여길 것이다. 런던의 사교 모임 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을 골라 참석하는 세자르를 그냥 놓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대단한 연설이었지?]에드윈이 만족스러운 듯 말햇다. [감동적이었어요.] [그런데 아깐 왜 안보였나? 같이 앉았으면 했는데…] [미처 몰랐어요. 죄송합니다.]차라리 슬그머니 돌아가 버릴 것 그랫나? 조만간에 세자르와 맞닥뜨리지 않으면 안 되겟지만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할수 있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에드윈에게 세자르 밑에서 일 한적이 있다고 고백하자. 이력서에 한 줄 지웠다고 한들 에드윈이 굳이 다시 들춰볼 리는 없다. [내 잘못이었군.] 에드윈은 미나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 었다. [미리 말해 둘걸 그랬어.] [저, 에드윈…] [이런 어쩐 일로 내 이름을 다 부르지?] 에드윈이 껄걸 웃었다. 미나는 얼굴을 붉혔다.늘 격식을 차리곤 했던 것이다. [아니, 사과할 건 없어. 해런드 씨라고 부르는 걸 들으면 갑자기 할아버지가 된 기분이 들거든.] [할아버지라뇨. 그럴 리가요.] 미나는 정중히 대답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성과 같이 일할 정도로 운이 좋다는 점에서는 그렇게 늙은 기분은 안 들어. 솔직히 어깨가 으 쓱하지. ]의외의 말에 미나는 화들짝 놀랐다. [해런드 씨?] 그때 누군가가 그들을 불렀다. 에드윈으니 아쉬운 듯 돌아섰다. 미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 을 몰랐다. 지금껏 에드윈 해런드가 자신을 그저 얌전하고 성실한 부하 직원으로만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 었던 것이다. [저녁 내내 어디 숨어 있었나 아가씨?] 미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글거리는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세자르..] 그 동안 무뎌질 만큼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 아냐 이게 아니다. [맞아. 세자르지. 당신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는 세자르 …]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며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미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저 노인네한테 악어 소굴에 빠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를 해야 하나, 아니 면 입을 다물어야 하나?] [뭐라구요?] [다른 사람들 눈에는 당신이 내 결혼 반지를 기대하는 것처 럼 보일 지 몰라도 내 견해는 다르지. 당신 같은 마녀가 그 럴리가 있나. ]세자르는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듯 달콤하게 속삭였다. [아직도 상사와 놀아나고 있군.] 미나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감히 그런….] [해런드는 죽어가고 있는 백조가 짝을 찾는 것처럼 보여.] 세 자르가 싸늘하게 웃었다. [당신이 이런 시시한 단체에서 몇 푼 안되는 돈을 받고 일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안 그런가?]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나. 세자르 팰콘, 지금 제정 신인 걸까? [왜 그런…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죠?] [오호, 순진한 처녀 같은 표정이로군. 노력은 가상하지 만 난 매력넘치는 젊은 여자에게 홀린 늙은이가 아냐. 세자르 팰콘이지. 만일 당신이 4년전에 연기처럼 사라지 지 않았더라면 내 손에 죽었을걸. 그런 짓을 하고도 무사 하길 바랐나?] 미나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하지만 시실리안은 등뒤에서 자신을 찌른 사람은 절대 잊지 않아. 설사 시간이 흐른다해도 …. 복수하겠다는 집념 은 더욱 강해질 뿐이지. 난 당신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겠 어] 세자르가 무시무시하게 웃었다. [달아난 건 당신 일생 일대의 실수였어.] 숨이 막힐 듯한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벌써 캐럴 양을 만나셨군요,팰콘씨.] 에드윈의 목소리 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손님들에게 둘 러싸여 있었다. 잠에서 깬 몽유병자처럼 미나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도저히 정 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세자르의 폭언이 이미 그녀의 사고 기능을 빼앗아 가 버린 것이다. [미나와는 소개가 필요없는 사이입니다.]세자르가 자연 스럽게 대꾸했다. [아마 구면이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미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 다. [아직 기회가 마땅치 않아서…] [으흠, 정직하지 못한 짓인걸. 그렇다면 전에 우리 회사 에서 일했다는 말도 안했겠군요.] 세자르의 조용한 한마디가 미나에게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놀란 에드윈이 반사적으로 미나의 등에 손을 얹었다. [근무를 시작한 첫날부터 캐럴 양은 가장 출 중한 직원들 중 하나였소.] [그래요. 그 능력이야말로 가장 인상적인 특징들 중의 하나였죠.] 세자르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미나는 피가 거꾸 로 솟는 기분이었다. 이런 악몽이 어떻게 현실로 나타날 수 있을까. 더구나 세자르가 왜 자신에게 이토록 심한 모 욕을 가하는지 이유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하지만 불행 하게도 사무실에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죠] 미나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실례지만…] [좋을대로 하시오. 아가씨.] 세자르는 그녀의 존재 따위 는 염두에도 없다는 투였다 단지 시시각각으로 굳어지는 에드윈의 표정에만 주목하고 있었다. [우리 둘 다 실례해야겠소. 팰콘씨] 에드윈이 씨근거리 며 내뱉었다. 세자르가 비위를 거슬려서는 안 되는 막강한 후원자라는 사실조차 잠시 잊은 듯했다. [전 그만 가봐야겟어요.] [내가 데려다 주지.]에드윈이 나섰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세 사람 중에 유일 하게 침착한 세자르의 말이었다. [코너에 몰려 있으니까 지금 당장은 거북한 질문에 대답하기 싫을 거요.] [내 면전에서 그 따위 말을 해도 괜찮은거예요?] 미나 가 쏘아붙였다. [안 보는 새 많이 컸군. 안 그런가? 나쁜 습관이야] [팰콘씨…] 에드윈이 끼여 들었다. 미나는 휙 돌아서서 허겁지겁 걸음을 옮겼다. 출입구 근 처까지 갔을 때는 온몸이 땀에 젖어 부들 부들 떨리고 있었다. 세자르는 은밀하게 그녀를 찾고 있었던 게 아닐까. 마주 치고 나서도 태연자약했고 그녀의 고용주 앞에서도 폭언 을 서슴지 않았다. 왜 대중 앞에서 일방적으로 그녀를 몰 아붙였을까?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 그녀에게 창피를 줘야 할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에드윈과 놀아나고 있다는 억측이나 복수하겠다 는 말이나 4년 전에 달아났다는 터무니없는 비난…. 평소 에는 총명하기로 소문이 난 미나였지만 아무리 끼워 맞춰 보아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악몽. 그렇다. 꿈속에서나 일 어날 법한 사건들이었다. 세자르가 그녀가 왜 증오한단 말 인가. 미나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왜? 어째서? 증 오로 따진다면 세자르가 아니라 미나쪽이 강했다. 뚜렷한 동기도 없이 그녀를 해고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는 미나 의 사랑을 잔인하게 배신해버린 남자였다. 그날 밤 이후 그녀는 자신이 싸구려 매춘부나 다름없었다는 생각을 떨어 버릴 수가 없었다. 그의 냉대는 그 이상이 될 수가 없었다. [난 공과 사를 혼동하는 법이 없어.] 그날 밤 그가 속삭 였던 한마디였다. 그러나 설마 그 말이 그녀를 안으면서 머릿속으로는 해고할 계획을 짜고 있었던 증거일 줄이야… [그런 일이 있었는데 계속 그 사람 밑에서 일할 수 있 어?] 언니인 위노나의 꾸짖음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잇었다. 세자르의 입장에서 보면 그 날 밤의 일은 분명히 실수였고 그래서 그녀를 곁에 두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러나 그 단 한번의 실수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은 미나였다. 꼭 그렇게 쫓아내야만 했을까? 전근을 시킬 수도 있었 을 텐데…. 팰콘 그룹은 여러 곳에 지사들을 두고 있었다. 아니면 하다못해 다른 일자리를 구할 만한 여유라도 주든 가…. 그 대신 그녀는 명백한 부정 행위라는 날조된 죄목을 덮어쓰고 쫓겨나서 맨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내가 겪은 고통이 아직도 불충분한 걸까? 어째서 더 큰 상처를 입히려고 나타난 걸까? 설마 미친 건 아니겠지? 명석한 두뇌와 놀라운 사업수완으로 명성이 자자한 세자르 팰콘의 이면에 그런 광기가 숨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경험했을까? [코트를 드릴까요?] 미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부르퉁한 표정의 대기실 직원 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막 재킷을 걸치는데 얼굴이 시뻘개진 에드윈이 나타났다.[아…가려고?] [그게 최상의 해결책인 것 같아요.] [난 세자르 팰콘의 무례함에 몹시 놀랐어. 이유를 모르 겠더군.] 잠시 머뭇거리던 에드윈이 목소리를 낮췄다. [언 제 그 사람 밑에서 일했지?] [대학을 졸업한 직후예요. 석달 동안이었어요. 절 해고 했죠.] 미나는 얼굴을 똑바로 들었다. [그렇지만 제 근무 능력과는 무관한 일이었다고 자신할수 있어요. 그보다는 개인적인 이유가 더 컷을 거예요] 입술이 타들어갔다. 에드윈이 거북한 표정으로 멈칫거렸다. [유감이로군. 팰 콘이 다른 이사들앞에서는 입을 다물어 주기만 바랄 뿐이 야. 팰콘이 그렇게 나오면 다들 마음이 흔들릴 테니 말이 지. 팰콘은 가장 막강한 후원자로 떠오르고 있는데 그 사 람과 우리 직원들 중의 어느 누구와도 마찰이 생긴다는 건 곤란한 일이야.] 미나의 얼굴이 한층 창백해졌다.[알겟어요.] [내일 보지] 데려다 주겠다는 말은 쏙 들어갔군. 저 정중한 태도는 결국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다는 의미겠지 . 그녀가 대기실 에서 옷을 갈아 입는 동안에 이미 에드윈의 친근함은 자취 를 감춘 것이다. 놀랄 일도 아니다. 세자르 팰콘은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는 사람이다. 에드윈도 처음에는 몹시 놀랐겠지만 화를 가라앉힐 여 유가 생기자 오히려 그녀를 의심하게 된 것이다. 세자르 팰콘은 유럽 전역에 명성을 날리는 최고의 사업가였다. 에드 윈으로서는 그만한 교양과 학식을 지닌 사람이 왜 그토 록 야비하게 굴었는지 동기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젠 승진이고 뭐고 다 틀린 일이다. 내일 월례 이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거론될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에드윈이 세자르 팰콘의 거부 반응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녀를 추천한 이유는 없었다. 수위가 택시를 부르려고 했지만 미나는 거절했다. 택시라니, 그런 호사를 누릴 여유가 없다. 예배당 생쥐처럼 허덕 거리면서 사는데…언니가 입다 팽개친 옷으로 버티고 옷장만한 방에서 살면서도 그녀는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금요일 밤이면 언니가 사는 옥스포드셔 행 기차를 타기 위 해서였다. 기차 요금은 엄청났지만 미나는 단 한번도 거 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일요일 밤이 되면 가슴이 찢어지곤 했다. 아무리 되풀이해도 그 아픔은 가라앉을 줄 몰 랐다 이제는 벗어날 수 있나 싶었는데 그 일요일 밤의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위기에 몰리게 되다니…. 저만치 앞서가던 차가 멎으면서 문이 열렸다. 그녀가 주 춤거리는 사이에 세자르가 내리더니 차의 지붕에 팔을 걸 치고 기대섰다.[타지] [기사의 등장이로군요.]비명을 질러야 하나 웃어야 하나. 아니 어떤 행동도 그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아직 매듭짓지 못한 일이 남았어.] 미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타오르는 듯한 검은 눈동자와 맞설 기운이 없었다.[날 내버려 둬요.] [날 따돌리려고 해 봐야 소용없을걸. 차에 타] 좋아 그 매듭짓지 못한 일이 무언지 알아야 한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차라리 부딪히는게 낫다. 그녀가 기억 하는 세자르는 활화산 처럼 성미가 급하고 직선적이지만 비정상은 아니었다. [내가 대안을 제시하지.] 그녀가 차에 오르자 세자르는 시동을 걸었다. [대안?] [사표를 내.] [사표라뇨? 미쳤어요?] 미나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터뜨렸다. [당신이 거부한다면 나도 양심 선언을 하지 않을 수 없 어. 재정 담당? 당신이? 승진이 눈앞에 와 있다는 건 알지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 탐욕스런 손아귀에 기금을 움켜 쥐는걸 막을 방법이 없는 것도 아냐.] 미나는 말없이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벌써 머리가 아프 기 시작한다. [내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거 예요?]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한 것뿐이지.] 세자르가 그녀 를 흘겨 보았다. [그렇게 순진한 표정을 지어도 더는 놀라 지 않아. 당신은 4년전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어. 법망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난 아니지.] 세 자르의 음성이 음산하게 울렸다. [아직도 당신을 감옥으로 보낼수 있는 증거를 갖고 있으니까…] [감옥?] 갑자기 눈앞에서 뭔가 폭발하는 것 같았다. [내부 거래라는 말 들어봤나? 그런 혐의라면 검찰 측에 서도 구미가 당기겟지. 당신은 아직도 고소당할 수 있는 입장이고….]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내부거래라니! 내가 회사의 정보를 빼내 증권 시장에서 개인적인 수익을 챙기는 데 이용했단 말인가? 물론 불법이다. [미쳤군요. 난 그런 짓은 꿈도 꿔 본 적이 없어요.] 아 니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믿을수 있었다는 게 더 기가 막힌다.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계속 했을지로 모르지.] 세자르가 씹어뱉듯 응수했다. [하지만 내가 손을 쓰자마자 당신은 그 더러운 돈을 챙겨서 연기처럼 사라졌지.] [어떻게 그런 터무니 없는 말을… 난 그런 돈을 만져 본 적도 없어요. 그런 짓을 저지른 적이 없으니까.] 세자르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난…난 당신과 잤기 때문에 해고당한 거라고 알고 있 었다구요!} 그녀는 얼굴도 들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이런! 그 증언을 들으면 배심원들이 감동해서 엉엉 울 겟군 당신 서루에 기록된 사유가 명백한 부정 행위가 아니 었던가?] [알아요. 하지만 난….] [어떤 신문 기사를 보니 여자 교도소에선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난다더군.] 공포에 질린 미나는 조금씩 움츠러들고 있었다. [난 감옥에 갈 이유가 없어요.] [아직 그 단체 내에선 아무짓도 안했겟지. 하지만 그만 한 능력이라면 무슨 짓이건 저지를 수 있을 걸. 난 당신 이 당장..] [난 아무 짓도 안했어요. 난 결백해요.] [고집을 부리면 해런드에게 직접 말하겟어. 내 진술은 명확한 증거로 뒷바침이 되니까 말이지. 해런드처럼 원칙 에 충실하고 고지식한 사람이라면 자연히 당국에 보고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할 거야.] [그렇게 자신이 없으면 당신이 나서지 그랫어요?] [사체도 없이 살인이 났다고 신고하란 말인가? 당신은 야반도주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버렸어. ] 세자르는 느긋하 기만 했다. [한동안은 당신을 감옥에 쳐넣을 궁리만 했지 그렇지만 그걸로는 만족할 수 없었어. 죄에 합당한 벌은 …] [난 어떤 죄도 범한 적이 없어요. 왜 내 말은 듣지도 않는 거죠?] [당신은 은밀히 나눈 얘기를 이익을 챙기는데 썼어.] [은밀히 나눈 얘기?] [솜씨가 놀라웠지 날 바보로 만들었거든. 하마터면 당 신과 함께 진창으로 굴러떨어질 뻔했어. 당신이 만일 체포 되었다면 날 걸고 넘어가지 않으리란 보장은 거의 없었 자] 세자르는 한 음절씩 끊어서 또렷하게 발음했다. [멍청한 미인 역할을 고수하면서 그게 위법인 줄은 몰랐 다고 하소연 했을걸] [정말이지 미쳤군요.] [유혹을 당했다., 아니 이용을 당했다고 했겠지.] 세자르 의 무서운 눈빛이 미나를 그 자리에 못박히게 만들었다. [당신이 남자였다면 난 당신을 죽였을 거야. 하지만 여자 이기 때문에 내가 이용당한 것과 똑같이 당신에게 갚아줄 작정이지] 2 [뭐라구요?] 미나는 아직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세자르의 터무니없는 공격 때문에 머 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세자르의 말들은 하나씩 조합해 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 러나 그 와중에도 자신이 단지 그와 잠자리를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되었다고 생각하던 사실이 얼마나 기막힌 오해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 입장에서 보면 하늘 이 무너질 듯한 충격이었지만 이유야 어쨌건 세자르는 그 녀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게 틀림없었 다. 그의 태도도 그런 맥락에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 게 믿고 있다면 4년 전에나 지금이나 이성을 잃을 만도 하다 아주 천천히 그녀의 이성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세자르는 그녀가 내부자 거래라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믿고 있다. 그것도 자신이 그녀를 믿고 발설한 정보를 이용했다 고 생각한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였다. 게다가 혹시나 그 녀가 당국에 고발당하면 그녀 자신을 별호하기 위해 세자 르를 끌고 들어가리라고 지레짐작까지 하고 있었다. [당신이 한때 날 이용했던 것과 똑같이 당신을 이용하겠 어] [뭘 어떻게 하자는 거죠?] [어떻게 하길 바라?] 세자르는 악마 같은 미소를 흘렸 다. [시실리안과 또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미나는 떨리는 한숨을 내뱉았다. [당신이 증거도 불충분 한 누명을 뒤집어 씌우려 한다면 나도 법적인 도움을 청할 용의가 있어요.] [충분한 증거가 뒷바침 되는 진술이야.] [내가 하지도 않은 일에 무슨 증거를 댈 수 있다는 거 죠?] [아직 남아 있는 돈이 있으면 되돌려 받아야겠어. 먼저 당신과의 일을 마무리 지은 후에….] [뭘 시작이나 했던가요?] 미나는 당장이라도 차에서 뛰어 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시작한 일을 내가 추진하지 못할 것 같 나? 내가 순순히 당신을 놓아 주리라곤 생각해? 내가 당 신 사진을 보았을 때 드디어 복수의 날이 왔다 싶었는데. ….] [내 사진?] [당신이 속해 있는 단체의 회보 표지를 장식한 사진이었 지. 그런 면에서 당신은 운이 나빳어. 난 원래 자선 사업 따위엔 관심이 없었는데 내 아래 참모 하나가 만찬 석상 에 그런 회보를 들고 온거야. 바로 거기 당신이 있더군. 기금 모금을 위한 파티 석상에서 헤런드 옆에 서 있는 얌전하고 단정한 여자가 바로 당신이었어.] 아, 그게 진이 언급했던 바로 그 사보였구나. 그런데 세자르와 맞닥뜨릴 때까지도 오로지 우연이라고만 생각했 으니…. 그가 이미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는 새로운 충격이었다. [당신처럼 속임수에 능한 사기꾼이 그런 자선 모임에 관여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더군. 물론 그 모임의 관계자들은 사업적인 능력보다는 환경에 관한 진지한 염려 때문에 뭉 친 사람들이 대부분이겟지. 당신이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 는지 알게 되면 헤런드는 나자빠지고 말걸.] [날 감히 사기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미나는 숨이 막 혔다. [뭔가 터무니 없는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그건 당신 얘기고…] 세자르가 눈을 내리깔았다. [난 당신의 뒷조사를 했기 때문에 당신이 어떤 여자인지 똑똑히 알고 있지. 그게 아니라고 설교를 할 생각이라면 집어 치워. 헤런드 옆에서 수줍은 듯이 웃고 있는 걸 보고 있기 조차 역겹더군. 하긴 당신은 깜찍하고 귀여운 여자이긴 해.] 세자르의 입가가 흉하게 일그러졌다. [남자에게 보호 본능을 느끼게 만드는 여자지. 나역시 그 수에 넘어갓으 니 그 노인네더러 아둔하다고만 할 수도 없어. 안 그래?] 차안의 공기는 폭발 직전이엇다. 세자르의 한마디 한마디 는 화산같은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미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자르 난….] 그가 느닷없이 미나의 손목을 틀어쥐더니 자기 쪽으로 왈칵 잡아당겼다. [닥쳐! 두번 다시 그 수에 넘어가지 않 아. 당신이 얼마나 교활한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 당신 도 지울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는 걸 알아야지. 영리한 여우 같으니…. 그렇지만 날 배신한건 실수였어.] 미나는 덜덜 떨며 외쳤다. [난 당신을 배신한 적이 없 어요!] [무슨 소릴….. 철저히 배신했지. 연인으로나 고용인으로 나! 그것도 내가 품고 있던 모든 환상이 이루어졌다고 믿었던 그날 밤에! 내가 안았떤 여자는 순수한 처녀였지만 뒷모습은 매춘부였어.] 미나는 그의 뺨을 갈기고 말았다. 세자르의 뺨에 찍힌 선명한 손자국을 본 순간 그녀는 질겁을 했다. 내가 이런 식으로 폭력을 쓸 수 있다니….. [아, 진정해. 당신은 내가 상대한 여자들 중에서 최고 였어.] 미나는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세자르는 눈 하나 깜빡 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싸늘하게 미소까지 흘렸다. 죽어가는 먹이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맹수를 연상시키는 웃음이었다. 그녀가 이성을 잃은 것을 확인하고 못내 즐거 워하는 모습이었다. 미나는 다급하게 손잡이를 밀었지만 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자동으로 잠겼어.] [어디로 가는 거예요?] [당신의 보금자리로 가는 거지. 해런드가 그 굴속같은 집을 보면 마음이 찢어지겠군.순진한 남자니까…] [그나마 임대한 집이예요.]내가 왜 이런 변명까지 늘어 놓아야 한다지?] [아무렴 그렇겠지. 당신 사이즈에 꼭 맞는 키 작은 친구 를 구했나?] 미나는 이마를 짚었다. [내가 어디서 사는 지는 어떻게 알아냈어요?] [그냥 알아] [날 내리게 해줘요.] [달아나도록 내버려 두란 얘긴가? 그랬다가는 정말 평 생을 후회하며 살게될걸] [시시한 협박은 집어 치워요!] [폐소 공포증이라도 있어? 감옥에 갇힌 것처럼 숨이 막 히기 시작하나?] [하지도 않은 부정 행위 때문에 내가 감옥에까지 갈 일 은 절대 없을 거예요. 그런 건 신경쓸 필요도 없어요.] [그럴 리가…. 당신은 지금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어. 그나마 오늘 저녁 해런드 옆에 서 있는 건 꽤나 거북해 보이더군. 지금껏 해온 것처럼 겸손하고 건실하게 사는 척 하는 편이 나을까?] [당신이 한 말은 결코 용서할 수 없어요.] [난 진실 외엔 입에 담은 적이 없어. 차라리 해런드에게 죄다 폭로해 버릴까도 생각했지] [난 사표를 쓰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나도 기부를 보류하지. 지구 환경 보호 모임 에서 달가워할까?] [그런 짓을!] [그런 거액을 믿을 수도 없고 정직하지도 못한 여자가 관리하도록 맡길 수는 없다고 설명을 하겠어.] 미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파멸이 닥치고 있다. [당신을 보면 사무실에서는 한 여름에 서리가 내린 것 처럼 몸서리들을 치겠군.] [당신을 명예 훼손으로 고소하겠어요!] [그렇다면 난 즉시 내가 가지고 있는 증거를 제시하겠 어. 그럼 어떻게 될까? 이미 칼자루는 내 손에 있는데 왜 반항하지?] 무슨 증거가 있겠어! 그러나 팰콘 그룹내부에서 누군가 그런 짓을 저지른 것만은 명백 하다. 세자르는 그 증거 를 잡아내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장본인이 미나하고 오해 하게 된 모양이었다. 이게 단지 어처구니 없는 실수인지 누군가 그녀를 모함하려고 던져 놓은 함정인지는 알 수가 없다. 신경과민일까? 그녀는 불현듯 소름이 돋았다. 세자르가 차를 코너로 붙이더니 엔진을 껐다. [주말엔 어딜 그렇게 나다니나?] 미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세자르는 느긋하게 등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주말은 물론이고 휴가까지도 …어디 남편이라도 숨겨놓았어? 아니면 내세울수 없는 입장인 공범?] [그….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그렇다면 연인이로군. 안됐어. 이번 주엔 포기하지.] [대체 무슨 소리예요?] [다른 침대로 기어 들어갈 자유와도 이별을 하지. 하긴 그만한 힘이 남아 있게 될지도 의문이로군. 당신은 내 비 위를 맞추는 데만도 기진 맥진하게 될거야. 난 참을성도 없는데다…] [난 당신과 살 생각을 추호도 없어요.] [당신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침대에선 당신 능가할 여자가 아직 없었어.] 세자르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훑었다. [돌았어! 나한테 손끝 하나 댈수 있을 줄 알아요.? 차 라리 벼랑에서 뛰어내리는 편을 택하겠어요.] [오호, 그럴리가 있나] [아뇨, 확실해요!] [날 함구하게 만들 다른 방법이라도 있는거야?] 미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날 협박하려는 거군 요.] [내 보잘것없는 회사를 지키기 위해서야. 당신만큼 내 더러운 짓을 한 사람은 지금껏 없었어. 당신은 자기 몸 미끼로 정보와 돈을 챙겼지. 은화 서른 냥에 날 팔았어. 왜 그랬지? 날 이용하고…] [난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 적이 없어요.] [솔직해지지. 미나. 해런드 생각은 지워. 이미 끝난 일 이야. 내일 8시에 데리러 오지. 들어가서 푹 자라구.] 이때다 싶어 재빨리 빠져 나가려는 순간 세자르가 그녀 를 덮쳤다.[이리 와…] [놔요!] [잠깐 확인할 게 있어.] 세자르의 긴 손가락이 머리칼을 휘어잡는가 싶더니 바로 눈앞에 활활 타오르는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날 .. 이손…치워요.] [운동이라도 좀 하지 그래. 이래서야 쓰나?] 악센트가 독 특한 그의 말투는 미나의 신경을 바늘처럼 자극했다. [안 돼…] [내 앞에서 안된다는 말을 해?] 세자르가 나지막하게 소곤거렸다. [면접에서 문을 닫아건다 해도 소용없을걸] 오 맙소사 왜 잊고 있었을까. 아니 어떻게 잊고 살 수가 있었을까 이 남자가 날 어떻게 만드는지….. 귓가에 자신의 심장 박동소리가 쿵쿵 울렸다. [제발… 제발 그만둬요.] [하지만 난 아무 짓도 안했어. 아직은…] 반짝이는 검은 머리칼이 차츰 다가왔다. 그가 맥이 팔딱거리고 있는 그녀 의 목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앗하는 찰나에 그녀는 온 몸 으로 퍼져나가는 열기에 휘말리고 말았다. 무서운 파괴력 을 지닌 힘이었다. 어느 새 그녀는 한손으로는 그의 어깨 를 붙잡고 한손으로는 매끄러운 머리칼의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들었던 그가 난폭하게 그녀의 입술을 덮었 다. 폭풍우처럼 거센 공격 앞에서 미나의 저항은 무기력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오히려 뜨겁게 반응한 쪽은 그녀라 고 해야 옳았다. 세자르는 처음 덮쳐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몸 을 틀었다. 그는 양손으로 미나의 팔을 움켜쥐더니 조롱 하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타고난 능력이로 군. 아무래도 내가 벌칙의 종류를 잘못 고른 것 같아. 아 니면 당신이 날 교묘하게 유혹해 놓고 지금 자리에 안주할 꿈을 꾸는 건지도 모르지. 딱하군] 미나는 손드응로 부풀어 오른 입술을 마구 문질렀다. 구 역질이 일어났다. 자수정을 연상케 하는 두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간신히 차에서 빠져 나왔지만 창피 스럽게도 두 다리가 후둘거렸다. [날 그냥 두지 않으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일 이 벌어질 거예요.] [그것도 위협이라고 하나/] [아뇨, 아녜요. 당신은 그렇겠지만 난 쓸데없는 위협같은 건 취미없어요. 이건 경고예요. 당신은 4년 전에도 내 삶을 망쳐놓았어요.이제 간신히 자리를 잡나 싶으니까 무작정…] 그녀는 목이 메어서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하 지만 그런 정보를 빼돌린 게 누구건 간에 난 아녜요! 당 신이 잘못 짚으신 거라구요!] [헛소리!] [날 또다시 희생양으로 만들도록 내버려 두진 않겠어요. 난 일자리가 필요해요 절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예요.] [내일 저녁 8시야. ]세자르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문을 닫아 버렸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른다. 미나는 침대에 쭈그리고 앉 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부자 거래? 어떻게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믿는 단 말인가?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 두 살난 애송이의 머리에서 어떻게 그런 엄청난 흉계가 나올 수 있었을까 어디서 그런 엄청난 정보를 빼냈다고 생각하는 걸까? 4년이란 세월을 가까스로 견뎌왔는데 이제 와서 그런 엉뚱한 누명을 쓰게 되다니!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고? 그렇다면 그녀를 다시 찾았 다는 의미다. 미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가 해고 통지 서를 받은 것은 근무 시간중이었다. 그것도 홍콩에 가 있 는 세자르의 전언이라며 인편으로 전해진 것이었다. 며칠 안으로 새 아파트를 구해 이사를 할 예정이었던 그 녀는 졸지에 실직을 당하는 바람에 그대로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꾸준히 모아두었던 저축도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 했다 언니 내외가 시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프랑스에서 돌 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길바닥에 나앉고 말았을 것이 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미나는 더욱 냉혹한 현실과 부딪 히지 않으면 안되었다. 실연의 고통과 모멸감은 예상하지 못했던 임신으로 구체화 되었다. 세자르의 아이였다. 자신 이 미혼모가 된다는 사실은 미나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 았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입양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알아볼게] 위노나는 지극히 침착했다. 그러나 막상 아이가 태어나자 미나는 자신의 일부인 아이를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난 3년간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주기 위한 처절한 노력의 연속이었 다. 이미 2년동안 이나 평일에는 떨어져 있고 주말에만 만나 는 걸로 만족하고 있지 않은가. 오, 맙소사 물론 그녀는 세자르를 증오했다. 그러면서 도 그의 품에 안겨…. 그녀는 입술을 마구 문질렀다. 4년 전 그녀의 눈에는 세자르밖에 보이질 않았다. 잊을 수 없 는 그날 밤. 세자르가 불꽃을 당긴 열정은 늘 그녀의 일부 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타올랐다. 그러나 그 사건은 자신을 억제하지 못한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세자르가 자신의 미숙함을 이용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첫 키스는 나 누고 나서 가장 가까운 침대로 뛰어들기까지는 불과 5분 도 걸리지 않았다. 미나는 세자르도 자신처럼 격렬한 감정 에 도튀되어 있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살을 어느 정도 깨달은 지금은 그때의 상황을 정확히 되짚어 볼 수가 있다. 세자르는 자신에게 바쳐진 제물을 손에 넣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낭만적인 환 상에 스스로를 희생시킨 셈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 세자르는 그 모멸감을 증폭시켰다. 사 력을 다해 반항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세자르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그녀를 다시 한번 수치심으로 떨게 했 다. 세자르에게서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는 비난을 들어도 할말이 없다.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상태로 그녀는 침대에 누웠다. 내 일은 보란듯이 출근을 할 작정이었다. 세자르의 위협 따 위에 눌릴 그녀가 아니었다. 오늘 밤은 너무 얼결에 당한 일이라 고스란히 당하고만 있었지만 내일 저녁에 세자르가 또 나타나면 경찰이라도 부를 심산이었다. 감히 되지도 않는 누명을 씌운 걸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밥줄을 끊겟다고 협박을 해? 미나는 세자르의 기질을 누 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자존심에 관한 한은 대단히 예민한 남자였다. 아마 지난 4년 내내 이를 갈았을 것이 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수지 역시 아버지의 기질을 그대 로 물려받았던 것이다. 그녀는 세자르의 관점에서 상황을 보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는 세련되고 교양이 넘치는 신사지만 그에게 는 석기 시대의 원시인을 연상시키는 야만스러움이 숨어 있었다. 별것 아닌 여자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만으로 도 그의 자존심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남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위협에 못 이겨 또다시 무릎을 꿇으라고 생각한다면 그 만한 착각은 없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11시쯤 미나가 전화를 받고 있는데 그제 서야 에드윈이 들어왔다. 몹시 지친 표정으로 미나를 외면 한 채 자기 사무실로 직행한 그가 잠시 후 그녀를 호출했 다 [팰콘 그룹측과 약속이 있어서 늦었어.] 미나는 아연 긴장했다. [어제 그 일…. 아무래도 이유를 좀더 알아봐야 겠더군.] 미나는 창백하게 질렸다. [제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가 …] [이건 내 개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지. 나 역시도 당신이 세자르 팰콘 밑에서 정식 직원으로 일한 사실을 숨겼다는 데 실망하긴 햇지만…] 미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이력서를 정직하게 썼더라면 지금쯤 이자리에 있지도 못했을걸. [이런 머리 아픈 일을 질질 끌 필요가 없어.] 에드윈이 한숨을 쉬었다. [유감스럽지만 자금 관리의 부정은 우리 같은 단체에서는 간과할 수가 없는 문제지.] 미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세자르는 자신의 협박을 실행 에 옮긴 것이다. 단지 협박에 불과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순진함음….[하지만 전…] 에드윈이 손을 들었다. [시시콜콜한 변명은 듣고 싶지 않 아. 미나.] [유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무죄란 말도 모르세요?] 에드윈이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 고 조용히 사표를 제출해 주면 좋겠어, 미나. 여기서 일한 동안은 최고의 직원이었으니 추천서를 써줄 용의는 있어.] [세자르가 절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표를 받 으시려는 군요. 자기가 약속한 기부금을 철회할까 봐 두려 우신 거죠?]미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 어요. 당장 나가죠. 하지만 제 누명이 벗겨지면 제게 사죄 를 하셔야 될 거예요. 에드윈 전 당신이 제 진가를 알 았다고 믿어왔으니까요.] 승진은 고사하고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불과 24시간 만에 세자르는 다시 한번 그녀의 삶을 파괴해 버 린 것이다. 사무실을 나오면서도 그녀는 믿기지가 않았다. 물론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면 버틸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을 도둑이라고 생각하고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으려는 남자와 같이 일한다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 았다. 적어도 그녀가 떠난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는 발설하 지 않으리라는게 한가닥 위안이었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 다른 일자리를 찾으려면 얼마나 걸 릴까? 좀더 나은 거처를 구해서 수지를 데려오겠다는 계 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지금껏 그 희망으로 살았는데 … 순식간에 3년 전으로 돌아간 셈이었다. 어쩌다가 세자르 팰콘 같은 남자를 알게 되었을까? 그는 그녀에게 들러 붙어 맴도는 저주 같은 존재였다. 너무해. 내가 뭘 잘못했 길래. 집쪽으로 걸어 내려가던 그녀는 페라리를 발견했다. 그 녀가 사는 곳에서는 흔하게 볼수 있는 차종이 아니었다. 누구 차인지는 묻지 않아도 뻔하다. 그녀가 10m쯤 다가갔 을 때 세자르가 문을 열고 내렸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미나는 현기증이 일었다. 빈틈없 이 차려입은 매무새와 윤기가 흐르는 갈색피부조차도 그 녀에게는 괴물의 형상으로 보렸다. 길 건너편에 모여 있던 십대 소녀들이 휘파람을 불어댔다. 눈요기 감으로는 그만 이로군. [미나…] [속이 시원해요?] 이상하대 왜 웃지 않는 걸까? 아 니, 오히려 몹시 긴장한 표정이다. [해런드를 만난건 내가 아니었어. 난 그때 사무실을 비웠어.] 그래서? 변명할 이유가 없잖아? 세자르 팰콘이 변명을 한다? 하! 어림없지. [그는 샌드로를 만났어.] 샌드로 . 이름만 들어도 욕지기가 나온다. 만일 그녀가 뒤집어쓴 누명과 관련이 있을 법한 사람을 고르라면 샌드 로 밖에 없을 것이다. 세자르보다 한살 손아래인 샌드로는 게으르고 추잡하기 로 정평이 나 있었다. 형의 힘이 없으면 어떤 회사에도 붙 어 있지 못할 위인이었다. 그 샌드로가 해런드를 상대로 더러운 입을 놀렸다고? [누굴 만났거나 무슨 상관이예요? 당신이 자기가 한말 을 되돌리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미나는 히스테리컬한 웃음을 터뜨렸다. 세자르는 이상하게도 말이 없었다. 미나는 분노와 수치 심으로 떨며 그의 날카로운 눈길에 분연히 맞섰다. [아무래도 얘길 좀 해야겠어.] [지금 내가 얘길 해야 할 상대는 변호사밖에 없어요. 당 신의 그 잘난 동생까지 끼여들었다니 오히려 잘됐군요. 이 런 걸 일석이조라고 하나? 두고 봐요. 내가 어떻게 하는 지….. 썩 꺼져!] 그가 이를 악물었다. [변호사? 포기하시지] [그럴 줄 알았어요. 하지만 여긴 자유 국가예요. 당신이 나에 관해 되지도 않은 말을 떠벌리고 다녀서 또다시 내 삶의 터전을 무너뜨리는건 괜찮고 내가 내 자신을 지 키려고 노력하는건 안된다는 말인가요? 농담할 상대가 따로 있지!] 미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비켜요!] 세자르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녀를 멍하니 바라 보고만 있었다. 미나는 발끈해서 그의 가슴을 홱 떼다 밀었 다. 그러나 그녀가 손을 거두기도 전에 세자르의 손이 날렵 하게 그녀를 붙들었다. [아니, 감히….] 번갯불 같은 솜씨로 그는 거리 한복판에서 그녀를 번쩍 들어올리더니 다짜고짜로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가 비명을 터뜨리는 순간 세자르는 미나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미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올랐다.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워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또… 세자르가 나지막하게 내뱉았다. [난 당신을 원해. 지금 당장…] 3 어느 새 자신이 꼼짝 못하고 세자르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미나는 사력을 다해 몸부림을 쳤다. 휘청거리며 뒷걸음을 치던 그녀는 그를 밀치고 자기 집 현관을 향해 뛰었다.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찾아 문을 여는 데 바로 등뒤에서 세자르의 발소리가 들렸다. [가요!] 그러나 세자르는 눈깜짝할 사이에 문을 막아섰다. 혼자 있어도 숨이 막힐 듯 비좁은 공간이 더 답답해지기 시작 했다. [어딜 들어오는거야!] 세자르는 그녀를 안으로 밀어넣었다. 침대와 벽에 붙여 놓은 식탁, 커튼을 친 간이 수납공간이 전부인 방이었다. 그가 얼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렇게 살펴봐야 나올 것도 없어요.] 몹시 당혹스러웠 지만 미나는 침착하려고 애를 썼다. [수색이라도 하고 싶 었어요?] [당신은 25만 파운드를 삼켰어. 어딘가 다른 곳에 숨겼 겟지. 주말마다 찾아가는 전원인가?] 그녀는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25만 파운드? 그만한 돈이 있는데 내가 이런 곳에서 살아요?] [물론 보란듯이 쓰고 다닌다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지. 그렇지만 이건….] 세자르가 주위를 손가락질했다. [이건 너무 심하군 지구 환경 모임에서 받은 급료가 변변 치 않은건 사실이겟지만 이보다는 나은 곳에서 살 줄 알 았어.] [당신이 모르는 용도가 있을 수도 있죠.] 되는 대로 내뱉 고 나니 아차 싶었다. [25만 파운드?] 미나는 차라리 웃고 싶었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데…. [그걸로는 뭘했나?] [가져 본 적도 없어요!] 지겨웠다. 왜 내가 끝없이 결백 을 주장해야 하나.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을 상대로 …. [현찰로는 5만 파운드만 보유하고 있었지. 나머지는 어떻게 했어?] 5만 파운드.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게 있었다. 해고당 한지 한 달 후의 일이었다. 은행 잔고가 그녀가 계산하고 있던 것보다 돌연 5만 파운드나 늘어났던 것이다. 그녀는 즉시 은행으로 전화를 해서 뭔가 착오가 있다고 신고를 했 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은행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면서 귀담이 들을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세자르가 자기가 한 짓의 보상을 그런 식으로 한 게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말이 되질 않 았다. 결국 몇 주 동안이나 실랑이를 벌인 끝에야 5만 파 운드를 되돌려 줄 수 있었다. 그녀 말대로 실수였다면서 원래 주인에게 돌려 주었다는 짤막한 해명과 함께…. [내 예금 잔고를 어떻게 알았어요?] [방법이 있지. 그러니 아니라고 우기는건 소용없는 일 이야.] 우연의 일치라고만 하기엔 심하ㄷ. 누군가 교묘하게 세 자르의 뒤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게 분명했다. 하지만 누 굴까? 이렇게 되면 어떤 방법으로도 결백을 증명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은행에 문의를 하면 기록을 찾아볼수 있 지 않을까? 그렇다고 세자르에게 그런 설명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그녀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세탁을 한 정도로만 생각하고 말게 틀림없는 사람이었다. [그 단체에서는 겨우 2년동안 근무했을 뿐이야. 나머지 2년간은 뭘했지? 여행을 다녔나? 아니면 파티라도 즐 겼어?] 파티치고는 좀 험악했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는 수지를 키우리라 결정했다. 온갖 험한 일을 전전 했지만 결국에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포기하게 되는 악순환 이 거듭되었다. 남은 방법은 두가지였다. 자존심을 굽히고 가족들의 도 움을 받거나 아니면 사회사업 단체의 도움을 받아 세자 르에게 수지의 존재를 알리거나…. 그러나 세자르에게 수지 의 존재를 알리느니 차라리 구걸을 하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 었다. 하룻밤을 지내기가 무섭게 차버리는 남자가 아빠 구실을 제대로 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세자르는 그녀를 날아다니는 먼지만큼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 경험 만은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파티였군] 미나는 고개를 쳐들었다.[그럼 안되나요?] [상대는 누구였어?] 미나는 창가로 다가갔다. 웃긴다. 화를 낼 사람이 누군 데…. 어젯밤의 세자르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아직 도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왜 이렇게 충격적인 걸까? 단순히 서로 끌린다는 것만으로는 채워질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 에게 가까이 오는 것만으로도 가볍게 스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방어벽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남자였다. [상대가 누구였느냐고 물었어.] [당신이 간섭할 일이 아닐텐데요!] 그녀는 빙글 몸을 돌렸다. [난 알아야겟어. 그리고 당신이 주말이면 어딜 그렇게 찾아가는 지도!] [지난 4년동안 당신이 주말에 뭘 했는지 내가 물었던 가요?] 무심코 내뱉고 난 그녀는 제풀에 화들짝 놀랐다. 내가 이 남자를 이토록 증오하고 있었나? [먼저 물은 사람은 나야.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거쳤 지?] [그러는 당신은 몇 명이나 여자를 갈아치웠어요?] 세자르가 훅하고 숨을 들이켰다. [대답해, 누구야?] 미나의 머릿속에 로저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세살 때 부터 알고 지낸 어른이었다. 백스터 키팅은 인자한 성품의 노신사였다. 자신의 저택을 로저와 위노나 부부에게 물려 주고 지금은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당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요.] 약 좀 오라보라지. 적중했다. [기혼인가/] [부인과 사별했어요.] [당신과 결혼할 작정인가?] [천만에요.] 이건 사실이다. [그런데도 주말마다 들락거린다 이거지…] 세자르의 험 악한 표정을 보는 순간 미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공룡과 주말을 보낸다 했어도 이렇게 무서운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겠는걸. [진실을 원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묻지도 말았어야죠] 어쨋거나 거짓말은 한마디도 안했으니까 주눅이 들 이유 도 없다.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 세자르가 갑자기 휙 돌아섰다. [어제 저녁에 당신이 입었던 옷도 그 남자가 사 줬겟군.] [그래요.] 로저는 자기 할아버지의 영지를 관리하면서 살 고, 위노나의 옷을 사준 건 로저니까 결국 그돈이 그 돈 이겠지? [그 많은 돈을 탕진하다니 대단하군.] [초과 지출이 조금 있을 뿐이예요.] 은근히 고소한 생각 이 들어서 미나는 시치미를 떼고 대꾸했다. 세자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자기 입 으로…] [부도덕했다고 자인했다 이건가요?] [지금 당신이 고백한 행동이 사실이라면 매춘과 다를 것 없지.] 평소의 세자르 답지 않게 떨리는 음성이었다. 미나는 꺽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조금만 더 버티면 사라질거야. [해런드도?] 미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녜요!] 세자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앞으론 그 남자와 어울릴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아. 그 따위 너절한 고백으로 내 비위를 뒤집어 놓을 수도 없을 테 고!] 얘기가 뭔지 이상하게 진행되고 있는 느낌이다. [난…] [입 다물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당신은 거짓말도 할 줄 모르나?] 그의 입에서 갑자기 이탈리아 말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미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지 진실을 알게 되서 오히려 낫군] [됐으면 이제 가요.] [왜?] 세자르가 음험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당신 이 자기 입으로 가격까지 매겨 줬는데…] [뭐라구요? 가격이라뇨?] [가격만 적절하면 어떤 남자에게건 안길 수 있다고 암시 를 준건 당신이야. 값이 얼만가? 준비하지.] 불의의 일격에 미나는 말을 더듬었다. [그게 무슨…] [아주 교묘하게 암시를 주더군. 수치심이라곤 없이…] 세자르의 하얀 이가 섬뜩하게 반짝였다. [내가 얼마나 당 신을 원하는 지는 자기 자신이 더 잘 알겠지. 값을 매겨!] 미나는 머리가 아득해졌다. 왜 저렇게 버티는 걸까? 당 장에라도 죽여 버릴 듯 덤비던 사람이 이제 와서 몸값 운 운하면서 흥정을 하려고 해? 이런 혼란은 난생 처음이었다. 세자르가 날 원해? 어젯 밤만 해도 지극히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는데…. 오늘 오후 엔 어느 쪽도 아니다. 전에는 세자르가 평정을 잃는 모습 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무의식중에 그녀는 시시각각으 로 흔들리는 세자르의 표정을 보며 고소해 하고 있었던 것 이다. 그는 그녀를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의 증오와 그와는 정반대의 욕망을….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세자르의 눈길은 감당하기 괴로울 정도로 야릇해지고 있었다. [난 내가 당신 타입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글쎄 언젠가는 이 끔찍스런 욕정에 넌더리가 날 때가 오겠지. 날 이런 동물같은 상태로 만든 대가는 반드시 치 르게 될걸!] 실수였다. 어리석게도 그녀는 자신이 판 함정에 빠지 고 만것이다. 미나는 창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녀 자신조차 도 믿을 수가 없었다. [세자르 난…] [당신이 처음 내 사무실에 찾아왔던 날. 난 당신을 쓸수 가 없다고 결심했어. 보는 것만으로도 욕구를 일으키는 여자와 어떻게 일을하나!]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그래서 진저리가 나도록 괴롭혔는데도 당신은 시험을 잘 견뎌냈지.] 세자르는 지금도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혀 를 찼다. [그럼 일부러 내 기를 꺽으려고 했다는 말인가요?] [내가 어리석었어. 결국 당신을 쓰다니…] 미나는 다리가 후둘거렸다. 처음부터 그랬으면 잘도 속 였구나. 그는 게임을 즐긴거다. 결국엔 그녀가 순순히 항 복했을 때 얼마나 쾌감을 만끽했을까. 그녀는 제발로 도살장에 찾아간 양처럼 순진했던 것이 다. 그렇다면 왜 세자르 쪽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녀 와 관계를 가졌는지 묻고 싶었다. 단 한번의 키스로 그녀 는 세자르가 여자를 다루는데 능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무방비 상태였다는 게 아직도 이상했 다. 그러나 세자르의 어긋난 인연만 제외하면 그 결과에 는 후회가 없었다. 수지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 는 그녀였다. [적어도 지금은 내가 상대하는 여자가 어떤 족속인지 알아.] 정신을 차린 그녀는 세자르가 바로 코 앞에 와 있다는 것 을 알았다. 벌써 그녀의 등은 창틀에 닿아 있었다.[당신 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당신은 나를 흥분하게 만들어. 더 이상 뭘 알아야 하 지?] 세자르는 그녀의 머리 위에서 뜨거운 눈길을 퍼붓고 있었다. 맥이 풀렸다, 주인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미나이 신경은 조금씩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당신은 날 좋아하지도 않 잖아요. 날더러 도둑에다 사기꾼이라고 몰아 붙이면서 어떻 게….] [닥쳐!] 미나는 떨기 시작했다. 자력에 이끌리는 쇠붙 이처럼 그녀는 벌써 온몸으로 세자르를 느끼고 있었다. [만일 나에게 손이라도 대는 날엔…] [이게 두려운 거지?] 그는 집게 손가락을 서슴없이 그 녀의 목덜미에 댔다. 여름 원피스의 깊게 팬 목선을 따라 열기가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발견이 아닌 가? 당신한테도 약점은 있어. 그 강철같은 이성도 이런 느낌 앞에선 맥을 못 추지. 그게 두려운 거야.] [이러지 말아요….] 세자르는 들은 척도 않고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미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세자르가 불러 일으키는 공포와 맞섰다. 그러나 세자르는 그녀보다 훨씬 강하고 집요했다. 피하 려고 애를 쓰던 그녀는 매끄럽게 밀고 들어오는 세자르의 혀 를 의식하는 순간. 덫에 치인 짐승처럼 괴로운 신음 소리를 토했다. 아찔한 현기증이 엄습해 왔다.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떳을 때는 이미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해맑은 그녀의 피부와는 대조적으로 건강하게 그을린 갈색 손가락이 원피스의 단추 를 능숙하게 벗기고 있었다. 미나는 기겁을 하고 세자르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안돼요.] [당신은 내거야.] 세자르는 한쪽 팔로 그녀를 단단히 감 고 벌어진 가슴사이로 손을 밀어넣었다. 미나는 이를 악물었다. 무기력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하 는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이미 그녀의 두 손은 힘없이 축 늘 어져 있었다. 세자르의 손은 익숙하게 자신의 목적지를 더 듬어 갔다. 미나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안돼…안돼요.] [신기해… 그 탐욕스러운 마음은 날 원하지 않는데도 당 신 몸은 날 똑똑히 기억하는군.] 세자르의 숨결이 후끈 뺨을 스쳤다. 이미 그녀는 거칠게 고동치는 갈증의 리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의 이성은 버려진 사막처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전신을 훑어 내리는 날카로운 전율에만 집중 되어 있을 뿐이었다. 세자르의 손이 떨고 있는 자신의 몸 을 구석구석 더듬을 때마다 미나는 매번 새롭게 느껴지는 감각에 흐느껴야 했다. 원피스는 벌써 완전히 벗겨져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정신 없이 허공을 휘저으며 세자르를 찾고 있었다. 손끝에 매끄러운 살결의 감촉이 느껴지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세자 르가 몸을 일으켰다. 미나는 눈을 떴다. 그는 다급하게 셔츠를 벗어 던지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어. 그녀의 머릿속 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어지럽게 뒤섞이고 있었다. 검은 털 에 덮인 탄탄한 가슴의 근육이 눈앞에 드러났다. 그녀는 최면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세자르의 타오르는 눈빛 속으로 깊이 빨려들고 있었다.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 당신 역시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와 주질 않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 세자르의 가슴을 천천히 쓸어보 았다. 바로 이 느낌이었지. [세자르…] 미나는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세자르는 미나의 입이 기운없이 벌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그토록 원했던 세자르의 흐뜨러 진 머리칼 속으로 엉켜들어 갔다. 세자르는 견딜 수 없다 는 몸짓으로 미나의 몸을 가리고 있던 마지막 한겹의 옷감 을 벗겨냈다. 열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미나는 격렬하게 떨기 시작했 다. 세자르의 입술은 가슴과 허리를 지나 한없이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짧은 고통의 순간이 그녀에게 일격을 가했다. 세자르는 알아듣지 못할 이탈리아 말로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천천 히 자세를 고쳤다. 그토록 잊으려고 애를 썼던 아니 이제 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그녀는 양팔로 세자르를 힘껏 끌어안았다. 세자르가 가 르쳐 준 태초의 리듬이 그녀의 몸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었 다. 결정의 순간에 미나는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한줌의 활력마저 빼앗아 가 버린 세자르는 무너지듯 옆으로 누웠다. 미나의 뺨이 땀에 젖은 세자르의 어깨에 닿았다. 미나의 머릿속은 진공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녀의 배 언저리를 쓰다듬던 세자르의 손이 갑자기 멈 췄다. [이게 뭐지?] 세자르는 상체를 일으키더니 아예 얼굴을 들이대고 흉터 를 살피기 시작했다. 미나가 미처 몸을 가리고 말고 할 틈 도 없었다. 흉터가 수술자국이라는 걸 확인했는지 세자르는 안색이 돌변했다. [수술 자국이군.] 미나는 허겁지겁 옷을 끌어 당 겨 어설프게나마 몸을 가렸다. [대수술이었어…] [아녜요. 여자들한테는 흔한 수술이었어요.] 미나는 그를 외면하며 둘러댔다. [너무 흉하게 보일 뿐이죠.] [왜 그랬지?] [여자들한테는 흔한 수술이었다니까요, 별것 아녜요.] [보기엔 별 것 같지 않은데….] [사실이예요. 당신 눈에 거슬려도 할 수 없어요.] 그녀는 되는 대로 내뱉았다. [눈에 거슬린 게 아냐. 그저 신경이 쓰일 뿐이지.] 세자 르가 짜증스럽게 받았다. [별것 아닌 수술이었는데 흉터가 이렇게 남았다면 의사가 돌팔이었군!] 그는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도 않은 듯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 다. 수지를 낳던 날의 기억이 아프게 떠올랐다. 난산이었 다. 결국은 제왕절개 수술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퇴 원하기까지 겪었던 쓸쓸함은 다시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 다. 같은 병실에 있던 여자들은 한결같이 남편이나 남자 친구들이 꼬박꼬박 찾아왔다. 그녀가 만날 수 있었던 사람 은 언니 내외 뿐이었다. 동정 어린 눈초리를 의식하며 미나 는 세자르를 끝없이 증오했다. 그런 고통을 겪고 나서도 다시 세자르와 한 침대에 눕다 니….. 정신이 든 미나는 더 참을 수가 없어서 시트를 들치 고 침대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배신했던 것 이다. 자기 변명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4년 전 그녀는 자신의 사랑에 눈이 어두워 세자르가 단 순한 육체적 관계 이상을 원한다는 환상에 빠졌던 것이다. 그러나 눈 먼 열정은 종종 그런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 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이번에는 그런 오해가 있을 수 없다. 동물적인 본능에 이끌려 하나가 되었지만 두 사람은 이 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세자르는 그녀를 경멸했다. 주말 이면 연인과 지낸다는 그녀의 거짓말을 액면 그대도 받 아 들여 그녀를 아예 매춘부 취급하고 있다. 그의 이기심이 원하는 것은 무조건 항복뿐이었다. 과거에 그녀가 자신을 이용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이용하겟다는 남자를 또 받아들이다니! 내 안에 숨어 있는 광기는 그토록 걷잡을 수 없는 것일 까? 4년 전, 자기가 값싼 창녀처럼 몸을 던졌다는 자괴 감을 딛고 일어서는 데는 몇 달이나 걸렸다. 이번에는 얼 마나 걸릴까? 세자르가 생각하는 자신은 어리석고 수치심 을 모르는 싸구려 매춘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얼 굴을 들고 살 수 있을까? 자기가 세자르의 거만한 요구에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는 괴로운 기억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함께 지내려는 생각은 바꿔야겠군.]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이미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쉽 게 얻었다는 의미다. 어떤 바보가 그런데도 굳이 그녀를 한 지붕밑으로 끌고 갈까. 달콤한 유혹도 필요없다. 다른 여 자들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낭만적인 절차없이도 세자르는 그녀를 손에 넣었던 것이다. [호화로운 가구들이 즐비한 집안에서 언제나 하인들 수족처럼 떠받들어 주게 되면 당신은 자기가 원하는 건 무 엇이건 가질 수 있다는 것만 새삼 확인하게 되겠지. 돈 대 신 몸을 팔아서!] 세자르의 말투는 판사처럼 엄숙했다. [나가요.] 이러다가 울음이라도 터뜨리기도 전에 세자르가 사라져 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당신이 그 돈을 모조리 날렸다는 게 내 마음에 드니까 일단은 이 개집 같은 곳보다는 나은 장소로 옮길 수 있도 록 도와주지. 하지만 뒤까지 봐주지는 않겠어. 일자리를 구 해. 또 속임수를 써서 돈을 모을 기회를 노린다거나 할 위 험이 없는 건전한 직업을 말이지.] 미나는 고개를 들엇다. [뭘 해서요? 마루라도 닦을까 요?] [정직한 노동이라면 무엇이건 상관 안해.] [재활 프로그램이로군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히스테리 에 가까운 웃음이 폭발했다. 세자르가 미나의 어깨를 움켜 쥐었다. [그만해 둬!] [안 돼요!] 미나는 할딱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해 봐!] 그러자 이번에는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그녀에게 사기 꾼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일자리와 승진의 기회를 빼앗아 갔다. 그런데 그녀는 증오 대신 자신을 대가로 바쳤다. 내 가 왜 이럴까? 그가 다시 일어났다. [당신 역시 날 원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렇다고 날 다른 파트너들과 혼동하진 말아. 악어의 눈물이란 보기에도 역겹지. 난 당신의 껍데 기에 속을 사람이 아냐.] [당신은 눈이 멀었어요.] [당신보다 강할 뿐이야.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훨씬 잔 인하지. 똑똑히 기억해 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8시에 오지. 그때까지 진정이 되면 데리고 나가겠어.] [제멋대로….] [살을 좀 찌워도 좋을 것 같아 보이는 군.] [당신이 잔치에 쓸 칠면조를 잘 먹이는 것처럼 말이죠.] 이미 그녀는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는 원하는 만큼 그녀를 먹이고 그녀를 침대에 눕힐 수 있는 남자였다. 그 리고 싫증이 날때까지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남자였다. 그에게 있어서 미나는 장난감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기껏 저녁을 먹이겟다고 해도 아는 사람들을 만날 위험이 있는 장소는 절대 아닐 것이다. [대체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녜요.] [그렇다면 그 청승맞은 얼굴은 뭐야!]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무릎을 감쌌다. [피곤해요. 그저 그뿐이예요.] 그가 갑자기 상냥하게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처음 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어. 하지만 후회한다고 말은 못 하지. 당신도 공연한 방어벽은 치지 않는 것이 좋아.] [알아요.] 그는 이미 그녀의 모든 방어벽들을 산산조각 내지 않았는가. 그게 그녀에게 얼마나 큰 충격인지는 꿈에 도 모를 것이다. [좀 자라구… 하긴 이런데서 어떻게 자는 지 의문이지 만…] 그는 그녀의 손에 열쇠를 쥐어 주었다. [시내에 있는 내 아파트에서 지내. 단 며칠동안 만이야. 한시간 내로 차를 보내주지.] 그가 다시 문쪽으로 향하며 의미심장하게 속 삭였다.[ 내 퇴근 시간은 6시야.] 미나는 그의 본심을 들여다보고도 남았다. 문이 닫히자 참고 있던 울음이 한꺼번에 복받쳤다. 두번 다시 이런 모 욕은 허락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세자르 팰콘 앞에서는 지성이라든가 자존심은 쓰 레기에 불과 했다. 그녀가 실제로 다른 남자들과 어울렸거 나 말았거나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가 미나가 가장 두려워하는 약점을 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비참한 기분에 휩싸였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설 사 세자르 팰콘에게서 달아난다 해도 이 괴로움에서는 자 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그녀 스스로 자신을 배신했다는 자책은 세상 끝까지라도 그녀를 따라 다닐게 분명했다. 4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지?] 스티브 클레이턴이 상냥하게 물었 다. [당신만 좋다면 월요일도 가능해요] 미나는 초조하게 아랫입술 을 깨물었다. [정말 내가 여기서 일해도 괜찮겠어요?] [아이고, 미나, 내가 4년 전에도 같이 일하자고 했던 걸 벌써 잊 었어? 그땐 당신 자존심이 너무 셌지] 휴대폰이 울렸다. 미나는 창가로 다가갔다. 이게 현명한 판단 이어야 할 텐데... 하긴 4년 전에도 비서 자리를 거절하면서 은근 히 아쉬워하긴 했어. 시간이 흐르면 달라지는게 많지. 안 그래?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부모님들은 백스터 키팅의 영지 안에 있는 저택을 세내어 살았다. 스티브 역시 백스터의 손자인 동시에 로저와는 사촌지간이었다. 덕분에 두 소년들과 미나네 쌍둥이 자매들은 가까운 사이였다. 다들 로저와 위노나 가 언젠가는 결혼하게 될 거라고 믿었고, 스티브도 미나에게 그 와 비슷한 연정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춘기의 열정이 식고 나 자 미나는 용기를 내어 스티브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 놓았다. 당사자인 스티브는 말할 것도 없고, 그때 이미 결혼을 했던 로저 와 위노나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나는 스티브가 여 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게 너무 당혹스러웠다. 그녀가 수지를 가졌을 때 스티브는 결혼 신청을 했다. 그때의 죄책감은 말로 다 할 수도 없다. 그것도 거절하자 스티 브는 일자리를 주겠노라고 했지만 미나의 양심이 허락하질 않았 다. 물론 그녀에게는 생명줄인 일자리였지만 스티브가 아직도 과거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실은 스 티브 때문에라도 수지를 런던에서 기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것이 변했다. 스티브에게는 여자 친구가 생겼고, 둘 사이는 예전의 담담한 우정을 회복하게 된 것 같았다. 스티브가 기겁을 하는 바람에 미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수지, 거기서 나와!]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화분이 기우뚱거리고 있었다. 검은 머리 와 두려움을 모르고 반짝이는 까만 두 눈이 보였다. 수지의 입 에서 세 살짜리가 할 말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상스러운 말이 터졌다. [그냥 둬] 미나의 질린 얼굴을 보고 스티브가 웃음을 참으며 타 일렀다. [위노나 말이 모르는 척 하고 있으면 금방 잊어버린다 더군. 하지만 화를 내면 더 펄펄 뛴대. 로저가 유경험자지] 스티브는 정원을 한바퀴 돌아 자기 사무실로 그녀를 데리고 들 어갔다. [커피?] [간절하긴 하지만 오늘 오후엔 내가 애들을 볼 차례에요] [내가 아닌 게 다행이네. 수지는 대단한 아이야] 스티브는 모래 장난을 하고 있는 수지를 창밖으로 넘겨다 보며 중얼거렸다. [ 넌 나쁜 아이야] 수지를 집으로 데리고 가며 미나가 꾸짖었다. [난 착한 아이야!] 수지는 미나의 손을 뿌리치더니 마구 내달리 기 시작했다. 놀랍도록 세자르를 닮은 아이였다. 수지가 미나에게서 물려받 은 것이라고는 가냘픈 몸집뿐이었다. 아이는 만 세 살하고도 반 이 지났는데 아직도 인형처럼 작았다. 그러나 몸집과는 달리 누 구와 싸워도 지는 법이 없었다. 영리하고 고집이 세고..... 게다 가 종종 말썽을 부렸다. 그래도 로저와 위노나는 수지를 자기네 삼 남매와 똑같이 사랑 을 쏟았다. 하지만 얌전하고 순한 위노나 네 아이들과는 달리 수 지는 반항적인 기질이 다분했다. 엄한 꾸중 따위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누구를 탓할까... [잘됐어?] 미나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위노나가 다짜고짜 물었 다. [월요일부터 일하기로 했어] 위노나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어렸을 때는 꼭 닮았던 쌍둥이 자매였지만 크면서는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위노나에게는 그게 또 불만이었다. 아직도 그녀는 미나와 비슷 한 색이 될 때까지 염색을 하고 머리 모양도 똑같이 손질했다. [드디어 정신을 차려서 천만다행이다! 우리 넷이 축배라도 들 자] [정확히 말하면 다섯이야. 스티브 여자 친구는 뺄 거야?] 위노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제니는 지금 여기 없잖아. 게다가 이번 일이 제니와 무슨 상관이니? 내가 예약을 할 테니까...] [안 돼] [왜?] 벌서 위노나는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미나는 한숨을 쉬었다. 언니의 저의는 분명해졌다. 위노나는 아직도 미나와 스티브를 주인공으로 러브 스토리를 쓰고 싶은 것 이다.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너, 팰콘과 또 무슨 일이 있었니?] 미나의 얼굴이 당장 새빨개졌다. [그게...] 위노나가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너, 설마... 또....] 미나는 잠자코 식탁만 내려다보았다. 굳이 말할 생각은 아니었 지만 막상 질문을 받고 보니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이번엔 못 참아] 위노나가 벌벌 떨며 외쳤다. [할아버지 서재 에서 권총을 찾아서 런던으로 갈 거야. 그 짐승을 당장 쏴 죽이 겠어!] [위노나...] [시끄러워! 그래도 그 놈을 감싸는 거야? 그 놈을 법정으로 끌 고 갈 수만 있다면 로저와 난 전 재산이라도 털거야. 네가 아무 리 말려도...] [그 남자를 감싸려는 게 아냐. 수지를 지키고 싶을 뿐이지. 그 런 사건이 벌어지면 기자들이 법석을 떨 테고 그렇게 되면 수지 를 감출 수가 없어. 내가 미혼모라는 건 다들 아는데, 내 딸의 아버지를 법정에 세우란 말야?] [너.. 또 그 놈과 잤구나?] 미나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 일이라면 말하고 싶지 않아] [아직도 세자르를 사랑해?] [별소릴!] [아무리 내 동생이라지만 정말 이해가 안 가] 위노나가 투덜거 렸다. [스티브는 너라면 죽는 시늉도 하는데! 미남에다 인정도 많고 생활도 안정된 사람이잖아. 굳이 남자 때문에 인생을 망칠 거라 면 차라리 스티브를 택하는게 어때? 최소한 너랑 결혼은 했을 게 아니니?] 침묵이 흘렀다. [서두르지 않으면 늦겠다.] 위노나는 머쓱해진 표정으로 어물어 물 물러났다. 점심 설거지를 끝내고 나서 미나는 정원으로 나갔다. 백스터 노 인이 잔디밭의 의자에 길게 드러누워 졸고 있었다. [또 야단을 맞았나?] 미나는 깜짝 놀랐다. 자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위노나가 소리소리 지르더구나] 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가을에 뎀프시 네 별장으로 옮기는 게 좋겠네. 자네와 수지도 둘만 지낼 장소가 필요해] [옳으신 말씀이에요] 어디까지 들은 걸까? 아이들은 정원 한 구석에 지어 놓은 나무 집에서 놀고 있었다. 눈부시게 맑은 오후였지만 미나의 마음은 어둡기만 했다. 그녀 가 런던을 떠난 지도 벌써 2주일 이었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계속 잠을 설치기까지 했다. [난 자네 언니를 아주 좋아하지만 그녀는 너무 편하게만 살았 어. 소꼽친구와 일찍 결혼해서 세상 살기가 어렵다는 걸 몰랐 지. 원하는 건 뭐든 가졌잖나? 남편, 집, 아이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걸 염두에 두게나] [위노나는 늘 잘해 주는데요...] [아니, 그 어리숙한 내 손자를 억지로 자네한테 떠맡기려는 건 제외해야지, 자네가 열여섯 살일 때 벌써 난 스티브와는 어림도 없다는 걸 알았어] 맙소사, 가끔 이 노인은 너무 날카로운 구석이 있다. [하지만 위노나는 그걸 이해할 수가 없었겠지, 로저 만큼이나 좋은 조건인데 마다한다 는게 이상했을 거야] [전 스티브에게 못할 짓을 했어요] [억지로 결혼을 했으면 정말 못할 짓이었을 걸. 음, 저건 차 소 리가 아닌가?] 미나가 막 진입로로 눈을 돌리는 데 숲 사이로 차가 보였다. 은색 페라리! 미나는 질겁을 하고 튀어 일어났다. [저게 누구 차야?] 백스터 노인이 모자를 들어올리며 눈을 가 늘게 떴다. 세자르가 뛰어내렸다. 문도 닫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잔디밭 의자에 못박혀 있었다. 그는 성큼 성큼 걸어오며 선글라스를 벗 어 주머니에 처넣었다. [마피아의 등장일세] 백스터 노인이 재미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목이 졸린 느낌이었다. 미나는 너무 놀라서 비명조차 지를 수 가 없었다. [런던으로 데려 가려고 왔어] 세자르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짐 쌀 필요도 없으니 당장 차에 타! 벌은 나중에 주기로...] 백스터 노인은 상체를 천천히 일으키며 신기해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다가오는 세자르를 보자 미나는 공포에 질렸다. 런던에서 그에게 했던 거짓말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 다. 세자르는 백스터 노인을 노려 보았다. [그리고 당신...] 세자르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 무덤에 안 묻 혔다면 내가 묻어 주지!] [세자르!] 그가 미나를 밀쳐냈다. [미나는 당신 손녀 뻘이야!] 백스터 노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 청년이 늘 이런가?] 그는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미나에게 물었다. [예의 범절을 못 배웠군] [세자르, 난 거짓말을...] [무슨 거짓말?] 그때 부르릉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자르가 고개를 휙 돌렸 다. [하느님!] 유리창을 통해 운전석 위로 나풀거리는 수지의 머리칼 이 보였다. 세자르는 단숨에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미나도 황급 히 뒤를 쫓았다. 먼저 도착한 사람은 세자르였다. 그는 발버둥을 치며 반항하는 수지를 끌어 내렸다. 아이는 세자르가 오는 것도 모르고 열중해 있었던 것이다. 다음 순간 기절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수지가 눈깜짝할 사이에 세자르의 손을 물어 버린 것이다. [요 못된 꼬마 녀석!] 세자르는 수지를 내려 놓으며 기막힌 듯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수지가 상스런 욕을 내뱉았다. 그게 나쁘다는 걸 빤히 알면서 하는 짓이었다. 세자르는 더러운 짐승이라도 보는 듯한 눈초리 로 뒷걸음질을 쳤다. [원, 별 막돼먹은 꼬마를 다 보겠군] 그는 재킷에 묻은 먼지를 떨었다. [게다가 이렇게 지저분하다니...] [막돼먹은 게 뭐야?] 수지가 물었다. 미나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수지는 엄마도 같이 있다는 걸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사촌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여 섯 살 난 존이 점잖게 나서더니 사과를 하라고 했다. [수지도 절대로 미안하다고 안해] 리지가 투덜거렸다. [미안해요] 수지와 동갑내기인 피터가 대신 나섰다. 이젠 수지 대신 사과하는 게 아예 습관이 된 것처럼 보였다. [안 미안해] 수지는 세자르의 뒤를 쫓으며 소리쳤다. 세자르는 들은 척도 않고 미나를 노려 보았다. [왜 그렇게 서 있기만 하는 거지?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수지가 세자르의 바지 자락을 잡아 당겼다. [안 미안해] 반응 을 보려는 것이 . [비켜라!] 세자르가 아이의 손을 밀어냈다. 수지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아저씨는 나빠] [너한테는 잘 해줄 필요가 없다] 미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존, 수지를 나무 위의 오두막 (아이들의 놀이터) 으로 데리고 가렴] 존이 그녀를 끌고 가자 수지는 발버둥을 치며 울기 시작했다. 미나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거짓말이 뭔가?] [어떻게 여길 찾았어요?] [갖은 수를 다 썼지. 내 질문엔 대답 안 하나?] 수지의 울음 소리가 멀어지자 미나는 심호흡을 했다. 빨리 세 자르를 떼내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여기가 위노나네 집이 라는 건 알까? 아니, 그녀에게 언니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테 니 일단은 입을 다물기로 하자. [백스터는 나와 무관한 사이에요. 여기 온 손님일 뿐이죠. 난 친구 집에 와 있는 거에요] [그 친구들 중 누가 당신 애인인가?] [당장 가요, 세자르] [혼자서는 안가] 그때 다른 차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스티브의 레인지로버였 다. 그냥 달아날 수만 있다면.. 속도를 줄이던 스티브는 그녀 곁에 남자가 있는 것을 보자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제발 어서 가요!] [여기서 뭘 하는 건가, 팰콘?] 문을 열고 내린 스티브의 그을린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세자르는 막 가려던 참이에요] 미나가 끼어들었다. [소개나 하지] 세자르가 그를 훑어 보며 중얼거렸다. [클레이턴, 스티브 클레이턴이야] 스티브가 미나 옆으로 오며 내뱉았다. [내 땅에서 썩 꺼지지 않으면 그 요란한 양복이 걸레 가 될 줄 알아!] [아하, 그래?] 세자르가 묘한 미소를 흘렸다. [그래. 물찬 제비 같군] [스티브, 제발...] 미나는 애원을 했다. 세자르는 그녀가 말했던 연인의 존재를 확인하러 온 것이다. 백스터에게는 완력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겠지만, 상대가 스티브라면 얼마든지 난폭해질 수 있는 세자르였다. [이런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스티브가 외쳤다. [미나는 나와 함께 런던으로 돌아갈걸. 자, 차에 타서 눈을 감고 잠시 기다리지, 아가씨. 곧 끝날 테니까...] 세자르는 가망없다. 미나는 스티브에게로 돌아섰다. [당신하곤 관계가 없는 일이에요, 스티브] [나와 관계가 없어? 4년전에도 저 치는 내게서 당신을 빼앗아 갔어!] 스티브가 호령을 했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도 1년 반이나 지난 후에 세자르를 만난 것이다. 스티브가 그렇게 생각하다니... [그럼 또 그렇게 해주지] 세자르가 으르렁거렸다. [그만 둬요! 아이들이 보고 있는데... 둘 다 미쳤어요?] 세자르는 멈칫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스티브가 번개같이 덤벼들었다. 미나가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세자르는 잽싸게 몸을 비틀더니 스티브의 배에 일격을 가했다. 헉하는 소리와 함께 스티브의 허리가 푹 꺾이자 세자르는 다짜 고짜 덜덜 떨고 있는 미나의 팔을 잡아 끌었다. [타!] 그가 이를 악물었다. [저 치가 또 덤비면 그땐 끝장을 내 주겠어] [안 돼요. 아이들도 봐 줘야 하고...] [드라이브나 하고 와라, 미나. 좀 진정해야지] 백스터가 느긋 하게 충고했다. 오, 정말 남자들이란 하나같이! [전 저 남자와 드리이브하고 싶 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어요. 그리고 또 싸우겠다고 덤비면 그 땐 정원 호스를 틀어서 진정시켜 줄 거에요!] 세자르는 그녀를 번쩍 들더니 자동차 뒷좌석에 짐짝처럼 던져 넣었다. 그리고 당신도 날렵하게 뒤를 따랐다. [문 열어요, 당장!] [자업자득이야. 책임은 당신이 져야지] 당연히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세자르는 진입로의 대문 앞 에서 잠시 차를 세웠다. [클레이턴하고는 언제부터 아는 사이지?] [당신이 무슨 상관...] 세자르의 길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그 따위로 말하지 마! 이만큼 참는 것도 다행인 줄 알아] 폭발 직전의 분위기였다. 새하얗게 질린 미나는 와들와들 떨 면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꼭 두려움이라고만 할 수 없는 야릇한 흥분이 일고 있었 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여기까지 와요?] [내게 그럴 자격이 없다고?] 그의 엄지 손가락이 천천히 미나 의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난 당신이 쓸데없는 협박을 했다는 걸 알아요. 그 물증이라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군요] [오호, 천만에, 그건 극비리에 잘 보관되어 있어] [그럼 고소해요. 난 협박당하는 데도 신물이 나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악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럼 뭘까?]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걸 몰라?]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렸다. 그녀는 갑작스런 압박감에 숨을 들이켰다. 무의식중에 마주친 세자르의 두 눈은 뿌리칠 수 없는 힘으로 빛나고 있었다. [최선을 다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 같군] 세자르가 눈을 내리깔 았다. [그래도 당신이 보여 준 것 중에 가장 솔직한건... 왜 그럴까? 아마 자신을 억제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난 할 수 있 어] [당신은 할 수 있다고요?] 미나는 다른 세계를 헤매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면도 자국이 파르스름한 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가 머리를 슬쩍 뒤로 젖히더니 그녀의 손끝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말았다. 이미 주인의 통제권에서 벗어난 그녀의 몸은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 서 있는 것과 다름 없었다. [세자르...] 미나는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갑자기 눈물이 날 정도로 아찔한 통증이 엄습해 왔다. 세자르가 거칠게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젖혔던 것이다. [당신을 원해! 하지만 일이 끝나고 나면 당신이 과연 클레이턴도 이렇게 유혹했는지 궁금해지겠지. 틀림없이 그랬을 걸. 그래도 그 녀석 은 순진하게 결혼 반지를 내밀 것 같이 생겼어. 그랬으니 내가 찾아와도 달갑지 않았겠지] [그런 터무니없는 상상을..] [좋아. 골라 봐. 나와 즐기는 편이 낫겠어, 아니면 그 녀석과 의 안정이 낫겠어?] [스티브와는 그런 사이가 아네요!] [그저 줄을 달아놨을 뿐이야?] 세자르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 줄들이 얼마나 많지. 미나? 내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당신은 해런드와 자기 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제대로 간수하고 있었지. 그런데 여기 와 보니... 저게 그 녀석 집인가?] 미나는 정신이 들었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람. 어떻게 세자 르의 본심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차 안에서 낯뜨거운 일이 벌어 질 지경에까지 이르게 만들었을까. 이번에는 부끄러움으로 온몸 이 화끈거렸다. [아네요] [그럼 그다지 부자는 아닌 모양이로군. 착실하게 저축을 하고 있는 건실한 직장인인가? 저 집 주인은 누구야?] [상관없잖아요!] 그녀는 양팔로 자신의 몸을 그러안았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낼 수는 있어] [제발 날 좀 그냥 둬요. 왜 자기 갈 길로 가지 않는 거에요?] [내가 만족할 만큼 누린 다음에는 조르지 않아도 그렇게 하겠 지] [두 번 다시 허락하지 않을 거에요!] [그래도 내 앞에서 당신은 항상 불덩어리야. 자신을 억제할 수 없지!] 미나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세자르의 눈에 비친 그녀는 늘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였다. 돈이라면 앞 뒤 가리지 않는 탐 욕의 화신이었다. 그런 그녀를 경멸하면서도 세자르는 자기가 누릴 수 있는 만족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여자가 아네요. 그리고 당신이 왜 이 토록 날 증오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언젠가는 가르쳐 주지. 그럴 기분이 들 정도로 내가 잔인해지 면 말이야] 그가 갑자기 차를 후진시키기 시작했다. [왜 이래요?] [당신이 왜 이렇게 날 쫓지 못해 안달인지 이유를 알아야겠어] [안 왜요!] [안 돼? 내가 자업자득이라고 했지? 당신이 양 다리를 걸치고 있는 두 세계가 드디어 만날 때가 된 거야!] [그건 백스터 집이에요. 백스터 키팅 씨! 스티브는 그분 손자 에요] [아까는 백스터 더러 손님이라며? 거짓말도 습관인가?] [이번엔 아네요. 난 또 난처한 장면을 연출하고 싶지가 않아요] [아니면 클레이턴에게 못 볼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거나..] [돌아가지 말아요!] [그게 그렇게 당신에게 중요한 일이야?] [그건...] 그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미나는 빳빳 하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 떠올랐던 능글맞은 미소 도 어느 새 사라졌다. 그는 무릎을 감싸 쥐더니 앗 하는 사이에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전류가 통하는 듯한 강렬한 자극이 온몸으로 퍼졌다. 머리 위 부터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벌써 세자 르의 어깨를 힘껏 끌어당기고 있었다. 잠시 주춤거렸던 세자르가 거친 신음 소리를 내뱉았다. 미나의 반응이 의외로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녀는 모로 누워 있었다. 세자르의 손이 떨리는 두 다리 사이 로 파고들었다. 미나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 무엇이든 붙잡아야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공을 휘젓던 그녀의 손에 비단 같은 머리 칼이 감겼다. 그녀는 마구 사방을 더듬었다. 어디를 만져도 귀 찮은 옷자락들이 걸리적 거렸다. 미나는 다급해졌다. 그때 세자르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주위가 몹시 소란스러웠 다. 누군가 뒤에서 경적을 울려대고 있었다. 미나는 겨우 눈을 떴다. 이게 무슨 소릴까? 왜 이런 소리가 들리지? 세자르의 입에서 알아듣지 못할 욕설이 터졌다. 그는 자기 자 리로 되돌아갔다. [내가 이런 짓을 하도록 만들다니!] 미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이런 짓을 하게 만들어? 그때서야 미나는 옆으로 꺾어 들어오고 있는 빨간색 자동차를 보 았다. 저건... 위노나 차다! 이미 냉정을 회복한 세자르가 재빠른 솜씨로 차를 길 옆으로 붙 이는 동안 미나는 될 수 있는 한 조그맣게 몸을 움츠리려고 애썼 다. 화가 날 대로 난 위노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쨍쨍 울리 고 있었다. [여기가 호텔방인 줄 알아?] 저렇게 화가 나면 아무도 못 말린 다. [대체 누구길래 내 집 문 앞에서 이런 더러운 짓을 해? 정말 못 봐주겠네!] 5 미나는 딱 한가지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세자르에게 매달렸다. [그냥 가요! 빨리!]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꼴이 될 줄이야! 벌건 대낮에 누구든 들 여다 볼 수 있는 곳에 차를 세워놓은 채로! 차라리 순찰 경관에 게 들키는 편이 위노나에게 들키는 것보다 나았을 텐데... 미나는 단두대의 도끼 날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심정이었다. 세자르가 왜 꿈쩍도 않고 앉아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 세상에!] 차 안을 들여다본 위노나가 질겁을 했다. [너, 뭐하니? 당장 못 내려?] [기가 막힐 정도로 닮았군. 자매 지간인가?] 세자르는 침착하 게 물었다. 평소보다 다소 심한 듯한 이탈리아식 악센트만이 그 역시 정상은 아니라는 유일한 증거였다. [귀가 먹었어? 못 내리니?] 위노나가 비명을 질러댔다. [쌍둥이에요] [최소한 내 옆에 앉아 있는 쪽은 히스테리를 일으키진 않겠군] [누구더러 히스테리라는 거야!] 위노나가 유리창을 주먹으로 내 리쳤다. 세자르는 태연하게 차를 후진시켰다. [당신 언니도 여기 살고 있나?] [형부가 백스터 씨의 손자에요] [그런데 날 보고 왜 저렇게 펄펄 뛰어?] [날 내려주고 돌아가면 만사 해결일 거에요] 위노나의 차가 쏜살같이 그들 곁으로 달려오더니 끼익 소리를 내며 멎었다. 그 나마 스티브의 레인지 로버가 눈에 안 띄는게 천만다행이다. [천만에, 그냥 돌아갈 수야 없지.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절호 의 기회라고 생각해] 세자르는 씨근거리며 차에서 내려 다가오는 위노나를 재미있다 는 듯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눈에 띄는 얼굴이긴 하지만 당신처럼 미인은 아니군. 샘을 내 진 않아?] [손톱만큼도!] 위노나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그들을 지나쳐 집안으로 뛰어 들어 갔다. [제발 가요] 미나도 허겁지겁 차에서 내렸다. 세자르는 결연한 태도로 차에서 내려 문을 닫고 매무새를 다듬 기 시작했다. 흩어진 머리를 쓸어올리던 그가 갑자기 손을 멈추 고 물었다. [설마 클레이턴과 결혼한 건 아니겠지?] [물론이에요!] [물론이라? 당신이 어떤 소릴 한다 해도 난 놀라지 않아] 그래? 수지 얘길 들으면 어떨까? [들어가지] [당신은 안 돼요] [당신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라구?] 현관 문이 활짝 열렸다. 위노나가 누구에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세자르가 어깨를 치켜 올렸다. [누가 얼음물이라 도 뒤집어 씌워 줘야겠어] [언니는 당신을 미워해요. 뭘 바라는 거죠? 우리 가족들은 당 신이 내게 어떤 죄를 뒤집어 씌웠는지 다들 알아요. 내가 왜 또 실직을 당했는지도 알구요!] [괜찮은 연기로군] 세자르가 냉담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너무 과장하지만 말아 주길 바라] [대체 왜 안 가는 거에요?] 미나의 음성이 높아졌다. [처제까지 그러지 마] 미나는 얼른 돌아섰다. 로저가 서 있었다. 옷차림으로 봐서는 건초를 베다 온 게 틀림없었다. [왜들 이래? 스티브는 차를 세우다 트랙터를 들이받을 뻔했고, 위노나는 할아버지 서재에서 권총을 찾는다고 날리던데... 거의 히스테리 상태야] [그 단어는 안 쓰는게 좋은데...] 세자르가 중얼거렸다. 로저는 얼굴을 찌푸린 채 머리를 긁적이며 세자르와 미나를 번 갈아 바라보았다. [알겠군. 난 로저 키팅이고 미나의 형부요, 팰콘씨] [그 사람한테 예의차릴 필요없어요, 로저!] 위노나가 달려나오며 소리쳤다. [꺼지라고나 해!] [위노나, 최소한 체면은 잃지 말아야지...] [체면? 저 놈은 내 동생의 인생을 망쳤어요! 우릴 엉망으 로...] [제발..언니, 그만 좀 해] [당신만 아니었으면 스티브와 미나는 결혼했을 거야! 스티브는 당신자식까지 떠맡으려고 했지만 미나의 잘난 자존심이 망쳐 버 렸지. 그런데 겨우 살 만하니까 또 나타나?] 미나는 그대로 돌아서서 뒷문으로 향했다. 무서울 정도로 주위 가 조용해졌다. 목을 졸린 듯한 세자르의 음성이 정적을 깨뜨렸 다. [내 자식이라고?] 위노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집밖으로 나간 미나는 벽에 기대 놓은 벤치에 주저앉았다. 따 가운 오후의 햇살도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녀의 몸을 감싸주지는 못했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려고 했는데 이젠 틀려 버린 일이다. 세자르가 4년 전 자신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수지가 누구의 자 식이라는 것을 밝히느니 차라리 혀를 물고 죽는 편을 택했을 것 같았다. 아이의 출산은 세자르 때문에 그녀는 겪어야 했던 기나긴 고통 의 마지막이기도 했다. 도저히 입양을 시킬 수 없었던 그녀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단 한가지는, 세자르가 아이의 존재에 대 해서 절대로 알 수 없으리라는 것 뿐이었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아니라고 말해] 미나는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날 내버려 두라고 했을 텐데...] [끝까지 쫓아다니리라는 걸 알고 한 소리였겠지! 당신이 내 아 이를 가졌다는 걸 믿을 수 없어!] [상관없는 일이에요. 당신 차로 돌아가서 사라져 줘요] 미나는 건조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당신을 다시 만나던 순간 부터 바라던 일이었어요] [불가능한 일이야!]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천만에, 그녀에게 있어서 수지는 생 명과도 바꿀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늘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게다가 수지를 제대로 기르기 위해서 가족들 의 힘을 빌어야 한다는 것은, 미나처럼 독립심이 강한 사람에게 는 또 하나의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아이들이 넷이더군] 셋은 금발이고 하나만 검은 머리지... 미나는 세자르가 스스로 알아차리기를 기다렸다. 단 5분 사이에 수지는 자신의 모든 것 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잘 깨물고 욕을 한 계집앤가?] 미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지저분한 꼬마가 내 자식이라고?] 세자르는 미나의 어깨를 붙들더니 일으켜 세웠다. [내 말 안 들리나!] [하지만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죠?] 그는 미나를 홱 뿌리치더니 비칠비칠 뒷걸음질을 쳤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너무 어려] [12월이면 4살이 돼요. 제 나이보다 작을 뿐이죠] 세자르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제멋대로 자란 것 같더 군] [제멋대로라뇨?] [당신 말마따나 내 아이라면...] 세자르가 이를 악물었다. [당신 이 런던에서 지내는 동안은 누가 아이를 돌봤지?] [언니가..] [그 신경질적인 여자?] 이번에는 미나가 새파랗게 질릴 차례였다. [언니는 수지를 사 랑해요!] [그러나 날 증오하지!] 그는 허공에다 대고 주먹질을 했다. [만일 그 꼬마가 내 자식이라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만일 내 자식이라면? 아무도 당 신을 여기까지 끌고 오지 않았어요! 제 발로 찾아 와서 아 가겠 다고 버틴 사람은 당신이잖아요. 만일 언니가 그렇게 이성을 잃 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직도 고집을 부리고 있을 텐데...] [왜 그랬지? 내 아이까지 가졌으면서 왜 연락을 안했어?] 세 자르가 다그쳤다. [왜 이런 식으로 알게 만들었어?] 미나는 턱을 치켜 들었다. [당신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요. 당신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어요. 정확히 말하면 당신과 는 어떤 식으로 건 더 이상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어요. 두 번 다시 당신 그림자도 보고 싶지 않았죠. 날 그렇게 대접한 당신 에게 난 아무 것도 빚진 게 없어요] [하지만 아이에게 진 빚은 어떻게 하지?] 세자르는 미나의 일 그러진 얼굴을 보자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아이 생각은 안했군. 평소에도 그랬을 거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그앤 더럽고 욕까지 배운 데다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려고 안달이었어. 당신이 좋은 엄마라는 증거는 못 되지] [당신이 수지를 얼마나 알길래! 그 앤 말괄량이지만 매일 목욕 을 해요. 욕도 그 한가지밖에는 모른다구요] [ 첫인상이 별로 안 좋았다면 유감이야. 그러니까 수지는 내가 바라지도 않던 아이라는 얘긴데, 그러면서 당신은 왜 굳이 그애 를 낳았나? 혹시 고발당하게 되면 방패막이로 쓰고 싶었어? 이 미 그앨 방패막이로 쓸 준비는 끝났겠지. 그 애가 있다고 해서 당신이 방해를 받으면서 산 것 같지는 않군. 당신은 아이를 여 기 내던져 놓고 자기 멋대로 살았잖아!] 미나는 공포에 질렸다. [그런 터무니없는... 내가 수지를 여기 맡긴 건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기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나마 가족들의 보살핌이 있어서 수지가 안전하고 부족함없이..] [그앤 어디 있지?] 세자르가 주위를 둘러보는 척했다. [당신은 아이가 어디서 노는지도 모르지? 큰 길에 나갔다가 차 에 치인다 해도...] [수지는 축사 울타리도 못 넘어가는 애예요!] 미나는 떨리는 손 으로 이마를 짚었다. 악몽이다. 세자르가 어떻게 나올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이런 식의 비난은 정말 예상밖이다. [내 딸인데 당신은 날더러 알 권리도 없다고 한 거야. 당신이 야 말로 무슨 권리로 그런 결정을 해?] 미나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했다. [당신은 날 매춘부 처럼 취급하고...] [그런 대접을 받아도 싸! 그래도 난 그날 밤 이후로 당신을 다 시 만나려 했어. 내 경솔한 짓의 책임을 생각해서...] 미나는 얼굴을 돌렸다. [당신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난 내가 어리석었다고 생각했지. 당신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리라고 생각했으니 말이야. 내 침대 로 뛰어들기 전에 철저히 준비를 했을 거라고 추측했어. 당신이 내게 알리지도 않고 아이를 낳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왜 그런 짓을 했나? 당신은 물론 내게서 재정적인 도움을 받을 필 요가 없었어. 훌륭한 가족들이 기꺼이 책임을 떠맡아서 당신을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줬어] [그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미나의 외침은 흐느낌 속으로 잦아 들었다. [빌어먹을... 당신이 얼마나 큰 충격을 던졌는지나 알아? 난 지 금 발밑이 꺼지고 있는 기분이야!] 미나는 울고 있었다. 자기가 표적이 되어 서 있는 기분이었다. 세자르가 던지는 칼들은 정확히 표적의 중심부를 맞추고 있었다. 너무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그녀는 스스 로는 주체할 수 없는 폭풍에 휩쓸리고 있었다. 그러나 세자르의 고뇌에 찬 얼굴을 보자 그녀는 세자르 역시 자신과 같은 격랑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그 사실이 이렇게 괴로운 걸까. 미나는 어떤 것으로도 가릴 수 없는 자신의 본심을 보았다. 새 로운 아픔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아직도 세자르를 사랑했다. 세 자르가 아직도 그녀를 이토록 마음 아프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이 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도로 벤치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는 미나를 증오하는 데, 그녀는 세자르의 품에 안기기를 원했던 것이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아직도 모르지만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고 싶은 심정 이었던 것이다. 이런 감정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세자르는 그 한마디를 던지고 사라져 버렸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미나는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 리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저런 세자르의 모습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러나 단 하룻밤을 지낸 여자와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4년 만에 안다면 어떤 남자가 놀라지 않을까. 그는 자신의 딸아이의 어머니를 증오했다. 게다가 딸의 첫 인 상도 좋은 평이 못 되었다. 그러나 세자르는 가족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남자였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자식을 모르는 체할 사람이 아 니었다.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은 틀림없이 이행하는 사람이었다. 샌드로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는 샌드로에게 그럴싸한 직함을 주고 팰콘 그룹에 묶어 놓았 다. 물론 별다른 권한을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샌드로 는 형이 마련해 준 널찍한 사무실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시시콜콜 한 문제들을 잘도 만들어냈다. 늘 형이 처리해주긴 했지만... 이 유는 단 하나, 그가 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자르의 동생에 관한 미나의 마지막 기억은 몸서리가 처지는 것이었다. 세자르와 잔 다음날 아침, 혼자 눈을 뜬 미나는 반쯤 벌거벗은 상태로 별 생각없이 침실을 나섰다. 그런데 누군가 전화를 하는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세자르가 아닌 누군가가... 샌드로는 미나가 첫 출근한 그 날부터 데이트 신청을 했던 남자 였다. 물론 미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과 사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미나는 자기뿐 아니라 거의 모 든 부서의 여직원들이 샌드로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당시 남자들의 전유물과 다름없는 행정직에 들어간 유일한 여자 였던 미나는 동료들의 배타적인 태도에 몹시 충격을 받았다. 누 군가 다른 사람이 맡기로 했던 자리를, 미나가 세자르의 마음에 들어서 차지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소문이 잠잠해지나 싶자 이번에는 상사와 놀아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세자르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미나가 스스로 헤쳐나 가는 것을 지켜 보고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회의 석상에서까 지 지저분한 농담이 오가는 일은 없도록 만들었다. 남자 동료들 은 그녀를 심부름꾼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미나도 처음에 는 어떻게든 어울려 보려고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순종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어느날 세자르가 일침을 가했다. [커피나 서류 심부름은 내가 시키는 경우에만 하도록 해요] 글쎄, 언제부터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의 세련된 태도와 빼어난 용모는 접근하기 어려운 데가 있었다. 게다가 함께 일하 기 편한 상사도 아니었다. 처음으로 세자르가 그녀에게 고함을 지르던 날, 미나는 화장실로 달아나 눈물을 떨구었다. 그 다음번 엔 그녀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어안이 벙벙해졌던 세자르 는 곧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일에 있어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고 경쟁심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일에 중독된 사람은 아니 었다. 열심히 일하는 반면 즐기는 데도 열심이었다. 근무한 지 한달쯤 지났을 무렵, 미나는 세가지 문제들을 떠안게 되었다. 첫째로는 샌드로 팰콘이 도무지 물러설 줄을 모른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녀가 세자르에게 말할 수 없이 끌리고 있다 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일에 관련된 사건이었는데, 세자르가 유 럽 출장을 가면서 미나 대신 그녀의 하급 직원을 데리고 가 버린 점이었다. [내가 언제 당신을 동반한다고 했나?] 미나가 용기를 내어 이 유를 묻자 세자르가 대답한 말이었다. [그건 아니었지만, 저...] [이 일이 마음에 들지 않나 보지?] 두 달째로 접어들자 세자르는 점점 더 짜증을 내는 횟수가 잦아 졌다. 따지고 보면 미나가 야근을 하는 횟수와 정비례했던 것 같다. 밤늦도록 한 사무실에서 얼굴을 맞대고 지내는 경우가 점 점 많아지면서 미나는 자기가 상사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석 달째가 되자 그동안 심심찮게 출몰하던 세자르의 여자들이 깨끗이 사라졌다. 어쩌다 얼굴을 들면 찌를 듯한 황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운명의 날 밤, 두 사람은 팰콘 빌딩 꼭대기의 옥상 아파트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퇴근을 했고 미나 혼자 마지막 남 은 메모를 정리하고 있었다. 샴페인을 한잔 갖다 달라고 한 세 자르는 그녀가 다가가자 느닷없이 한마디했다. [항복이야] 그러더니 그는 미나를 끌어안고 숨이 막힐 정도로 뜨겁게 키스를 했다. 술잔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지만 세자르는 멈추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침실로 들어갔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 도 세자르는 미나가 처음이라는 것을 알고 대단히 조심스러워했 다. [난 공과 사를 혼동하지 않는데 이건 달라] 뭔가 의미가 담긴 대화가 있었다면 그게 전부였다. 그가 최근 에 성사시켰던 거래에 관한 얘기도 미나는 단 한마디도 기억할 수 없었다. 가물가물 졸다가 곯아 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늦잠을 자는 바람에 세자르는 그녀를 깨우지도 않고 나 가 버린 것이었다. 미나는 세자르가 자신을 위로하거나 쑥스러 움을 덜어줄 만한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되 살리며 괴로워했던 것이다. 허겁지겁 달려나간 미나를 보자 샌드로는 기겁을 했지만 이내 능글맞은 미소를 흘렸다. [형이 노다지를 발견했군. 안됐어, 미나. 차를 잘못 탔군. 형은 사무실 내에서는 골치 아픈 일을 안 만들지. 전체적인 분위기를 망친다고 생각하거든. 당신이 출근하기 전날, 다른 사람들에게 벌 써 단단히 주의를 주었어] [거짓말...] [이젠 다른 사람들에겐 허락하지 않았던 걸 가졌으니, 당신이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내던져 버릴걸] 어디선가 새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든 미나는 황혼이 깔리기 시작하는 정원을 돌아보았다. 아직까지도 샌드로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당신 미나는 자기가 더러운 짓을 했다는 기분이 들었 지만, 세자르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으리라고 믿었다. 그 리고 그가 그저 하룻밤 허기를 채울 상대로 자기를 골랐을 뿐이 라는 암시도 단호히 거부했다. [엄마]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수지가 벽에 손을 짚으며 주춤주춤 다 가오고 있었다. 미나는 목이 메어 팔을 벌렸다. 수지가 달려들 더니 그녀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미안해] 미나는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다시는 안 그럴게] [알아, 너도 늘 그런 건 아냐] [화가 났어] [안다니까... 하지만 누굴 물면 안 돼지] [엄마, 언제 기차 타러 가?] 미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제 밤에도 이젠 런던으로 돌아 가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는 여전 히 미심쩍어하고 있다. 미나의 부재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것 이다. 세자르가 옳았을까? 수지를 위해서는 자존심을 굽히고 세자르의 도움을 청해야 옳았을까? 그러나 수지를 가졌을 당시 에는 세자르에게 고백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세자르가 단순히 자기와 같이 잤다는 이유 때문 이 아니라 그녀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해고해 버 렸다는 것을 알았다. 세자르는 그녀더러 연인으로서나 고용인으 로서나 자신을 배신했다고 했다. 그랬으면서도 그녀를 찾으려고 했다는 사실은 뭘 의미하나... 복잡하기만 하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놓을 수만 있다면 과연 당시에 그가 진정으로 그녀를 찾으려고 했는지, 만일 찾아냈으면 어떻게 했을 지 알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 문제들이 풀렸다 해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과연 이보다 더 달라질 게 있었 을까? 그렇다. 세자르는 물질적인 지원을 했을지언정 그녀와 계속 만 난다거나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거나 하는 일은 바랄 수 없는 상 대였다. 세자르에게 있어서 그날 밤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실 수였다. 수지의 존재는 그 위에 얹혀진 더욱 큰 실수였을 따름이 었다. [안녕...] 미나는 온실로 들어서며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가격표를 들여다보고 있던 스티브가 시무룩한 얼굴로 그녀를 보 았다. [어제 저녁엔 왜 안 나왔어?] [미안해요. 외식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어요] 지난 이틀간이 미나에게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초인종이 울리 거나 전화가 울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그러나 세자르 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반쯤은 마음이 놓이고 반쯤은 더 답답 해지는 상태로 시간이 흘렀다. 세자르는 자기가 세 살 난 아이 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아니, 생각이 나 하고 있는 걸까? [그런 기분이야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나갔어] 스티브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어떻게 팰콘과 함께 나갈수가 있어? 날 바보로 만들어 놓고...] [저...] [그를 보자 속이 끓어올랐어. 만일 그 치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헤어진 건 세자르와 무관한 일이에요!] 불시에 찾아온 세자르 때문에 스티브의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던 앙금이 솟구치 고 만 것이다. [난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했지...] [하지만 이젠 제니가 있잖아요]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 스티브가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완벽하게...] [미나!] 두 사람은 동시에 얼굴을 돌렸다. 문간에 서 있는 세자르를 발 견한 순간 미나는 그만 얼어붙어 버렸다. 간편하지만 고급스러 운 옷차림의 세자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매력적이었다. 스티브의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미나는 황급히 손을 뺐다. 하필이면 이럴 때 나타날 께 뭐람! 어떻게 상상할 지는 뻔하다. 이젠 스티브와는 각별한 사이가 아니라는 그녀의 말도 속임수였 다고 할 것이다. [수지가 길을 가르쳐 줬어] 수지가 세자르의 등뒤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숨막힐 듯한 침묵 속에서 아이가 갑자기 안고 있던 곰 인형을 흔들었다. 눈 과 입이 움직이면서 천진스런 동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터 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세자르를 본 순간 미나는 도로 굳어 버렸다. [나중에 봐요] 그녀는 스티브에게 작별을 고했다. [난 이제 안 물거야!] 수지가 자랑스럽게 곰 인형르 들어 보였 다. [고맙다는 인사도 했어. 나한테도 아이를 좋아하는 할머니가 계 신대] [할머니는... 그러니?] 수지를 따라 밖으로 나오며 미나는 어물 어물 대답했다. 설마 세자르가 수지의 선물을 들고 오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수지의 입 에서 흘러 나온 할머니라는 단어의 여운이 었다. [가능하면 빨리 수지에게 내가 누군지 가르쳐 주는게 좋겠어] 세자르가 말했다. [좀 이른 것 같지 않아요?] [글세, 3년 반이나 걸렸는데 아직도 이르다고 할 수 있나?] 정원 한 가운데서 풀밭으로 통하는 계단을 넘어 서려던 미나는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싸늘한 세자르의 눈빛을 보자 가슴이 내려앉았다. 마치 세자르가 그녀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 버린 느 낌이었다. 수지라는 존재가 그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당신도 수지의 삶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싶다는 의미인가요?] 맙소사, 세자르가 심심할 때마다 들른다면 내 생활은 어떻게 될 까. [영구적으로 말이야] [그래요?] 침묵이 흘렀다. 아까 목격한 장면에 뭔가 토를 달 법도 한데 세자르는 말이 없었다. 스티브의 태도가 영 마음에 걸렸다. 아 직도 그런 마음이라면 어떻게 함께 일한단 말인가. 혹시 예전의 감정이 되살아 나기라도 한다면 미나는 그 죄책감을 견딜 수 없 을 것 같았다. 제니는를 볼 낯이 없어진다. [들어가서 얘기하지] 세자르는 바지 자락에 들러붙은 수지를 내려다보았다. [잠깐 기다려라] 미나에게는 들려 주지 않았던 온화한 음성이었다. 미나는 잘 쓰지 않는 응접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커피를 끓여 올게요] [그만 둬] 세자르가 문을 닫자 그녀는 창가로 향했다. 구석에 몰린 생쥐 같은 기분이 들었다. 틀림없이 양육비 어쩌고 할 것이다. 달리 할 말도 없을 테니... 그런 모욕적인 제안이 없다. 세자르에게 특별한 감정만 없어도 좀더 현실적인 사고가 가능할 텐데...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해결하지. 난 내 아이를 원해] 미나가 휙 돌아섰다. [그리고 조용히 해결하고 싶어] [그게 무슨...] [난 수지에게 당신이 해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걸 해줄 수 있어] 싸늘한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합법적으로 그 애를 입양할 의사가 있어] [농담 말아요] [수지는 내 딸이고 난 그 애를 원해] [마치 난 안 그렇다는 것 같군요. 우린 지금 망해 가는 회사 를 떠맡는 문제를 의논하는 게 아네요, 세자르! 내 딸에 관한 문제라구요!] [내 딸이기도 하지]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다. [당신은 3년 반 동안이나 내 권리를 무시했지. 그런데 당신 경우엔 특별히 관대하게 생각해 달라고 한다는 게 염치없지 않나?]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권리가 아니라 감정이에요] 이런 악몽이 없다. 그는 수지를 데려가려는 것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믿 고 싶지도 않다. [내 감정도 존중한다고 말하고 싶어?] 미나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당신에게도 감정이란 게 있는지나 모르겠군요. 자긴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아니, 확실해. 내 딸을 당신 혼자 독점하도록 내버려 둘 의향 은 전혀 없어] [이게 나한테 주는 벌인가요?]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난 내 아이에게 최선의 길을 찾아 주고 싶어. 당신 가족들의 동정이나 받으면서 이 집에 얹혀 사는 건 더 못보겠어] [백스터 씨가 가을이면 비는 집이 있다고 거기 살아도 좋다고 했어요. 그럼 당신도 원하면 찾아올 수 있고 내가 수지를 런던 으로 데리고 갈 수도 있어요!] 미나는 다급하게 주워섬겼다. [그렇게 빈약한 선심으론 만족할 수 없어] [그렇다면... 난 수지를 포기할 수 없어요!] 갑자기 화가 치밀었 다. [당신이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난 그 애를 사랑하고, 당신이 싫어하건 좋아하건 그 애도 날 사랑해요. 세상 의 돈을 전부 끌어다 준다 해도 수지에겐 엄마를 잃는 것과는 바 꿀 수 없을 거예요!] 세자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바로 그거야] 뭐? 뭐가 그거야? [당신이 그 앨 포기할 마음의 준비가 안 됐고, 수지도 그렇게 상처를 받을 거라고 확신한다면 당신에게도 집을 제공할 마음은 있어] [뭐... 뭐라구요?] [양육권 때문에 법정 싸움까지 벌인다면 양측 모두 불쾌해질 테 고 수지에게도 좋진 않겠지. 그리고 설사 내가 전 재산을 걸고 투쟁한다 해도 난 당신을 이길 수 없어. 영국 법정에 선 외국인 인데다가 아이의 생모를 생부가 고소한다고 생각해 봐. 내 변호 사들한테 물어보면 승소할 확률은 반반도 안 될 거라고 할걸] [당신... 당신 변호사들?] [나 정도 지위의 사업가들은 대개 법률 자문들을 두고 있지] 머릿속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세자르는 변함없이 침착하다 는 사실이 더욱 두려웠다. [그래서 당신과 수지를 함께 받아들이는 편이 아이를 위해서는 보다 현명한 대안이라는 결론을 내렸지]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만일 내가 당신과 결혼한다면 난 내 아이와 평생을 지낼 수 있 어] 세자르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리고 수지는 부모를 모두 얻게 되는 거지] 6 [만일 내가 당신과 결혼한다면?] 미나는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덧붙여서, 수지는 내 성을 따르게 되지. 나한테 그것도 중요한 문제야. 그리고 내 집에서 살게 돼. 그것 역시 중요한 문제고. 마지막으로 수지는 엄마를 갖게 돼] 그건 중요하다는 단서를 붙이지 안는구나. 오로지 수지를 위해 서라는 입장이 분명해. 미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렇지만...] 세자르는 틈을 주지 않았다. [나와 결혼하지 않고 수지만 데리 고 살 수는 없어. 그렇게 되면 수지는 사생아가 되는 셈인데 내 자식에게 그런 꼬리표를 붙일 수는 없지] 할 수만 있다면 세자르의 따귀를 올려붙이고 싶었다. 결혼 신 청을 마치 계약이라도 하듯 하다니... 게다가 수지라는 무형의 자산을 내걸고! 그녀는 세자르를 잘 알았다. 다른 조건 때문에 결혼을 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목을 맬 사람이다. 미나와의 결혼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방법 외엔 수지를 손에 넣을 수 없다고다고 판단한 다면 총알이라도 삼킬 것이다. [수지는 내게 최선의 것을 받을 자격이 있어. 내 부모님들이 나에게 그렇게 해 주셨으니 나도 내 자식에게 기꺼이 그래야지. 조금이라도 거리낌이 있다면 두고두고 양심의 가책이 될 거야.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리면 연락해] 멍하니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던 미나는 허겁지겁 그의 뒤 를 쫓았다. [세자르!] 그가 돌아섰다. [좀더 신중하게 의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은 처음이로군요] [무슨 할말이 또 있나? 법정이냐, 교회냐... 결정은 당신이 해] 순간적이었지만 미나는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무서운 분 노를 읽었다. 그는 다시 돌아서더니 차로 향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미나가 뒤를 쫓는데 그가 다시 돌아섰다. [어떻게 내 자식을 그렇게 숨겨 둘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미나는 걸음을 멈췄다. [난.... 난 당신이 알고 싶어하지도 않을 거라고...]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알아? 뭘 알아?] [아마 당신이 내게 보여 주고 싶었던 부분만을 알겠죠] [무슨 뜻이야?] 미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 않았어야 할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날 밤의 기억이 또렷이 되살아나는 것만은 막을 길이 없었다. 세자르는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니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는 결론도 가능하다. 그저 단순한 성관계 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 해야 할 일이었짐나, 끔찍스럽게도 그녀 자신은 분명 그에게 사 랑했다고 말한 기억이 있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하지만 당신이 결혼 운운하니까 중요 해진 거예요] [수지를 위해서라고 했어] 세자르가 강조했다. [난 나보다 그애 의 필요를 우선하는 거야. 개인적이 감정의 문제가 아니지. 내 자식을 책임지겠다는 본능이야. 그런데 뭐가 문제지? 당신이 늘 원하던 생활을 이루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 미나는 하얗게 질렸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요?] 세자르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차에 올랐다. [자신에게 물어 봐요, 세자르. 내가 그토록 돈에 욕심이 났다면 왜 수지의 존재를 당신에게 알리지 않았는지를요. 법적으론 당 신이 양육비를 댈 의무가 있으니 나도 넉넉하게 살았겠죠. 생각 해 봐요. 내가 왜 그랬을까요?] 침묵이 흘렀다.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나 는 건지도 모른다. 그가 이탈리아 말로 뭔가 중얼거렸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죠? 내가 우리 둘이 충분히 먹고 살 만 한 돈을 얻어 낼 수 있었는데도 왜 하루 종일 일을 하는 편을 택 했을까요?] [기다려! 대답해 줄테니까...] 세자르가 외쳤다. 그러나 미나는 자기가 정곡을 찔렀다는 것을 알았다. 세자르도 그런 점까지 짚 어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막대한 재산가의 딸을 낳고도 그녀 가 혹독하게 시달려야 했을 이유가 과연 있었을까? 수지는 그녀 가 마지막으로 붙들 수 있는 노다지였는데... [뭘 어쩌겠다는 거야?] 위노나의 음성이 등뒤에서 들렸다. 원, 여전히 저렇게 시무룩하다니... 위노나는 자기가 바보 짓을 했다는 미안함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세자르가.. 결혼하자고 했어] [뭐?] [수지를 위해서래] [물론 떳떳하게 널 갖겠다는 의도도 포함되겠지!] 말투는 사나웠 지만 기세는 한풀 꺾여 있었다. 천만의 말씀이다. 세자르는 미나와의 결혼을 원하는게 아니었 다. 수지가 없었다면 나오지도 않았을 얘기다. 물론 미나에게 욕심이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외의 모든 면에서 그는 그녀를 경멸하고 혐오했다. 그런데 결혼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 가? [그 사람이 너하고 결혼하고 싶어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위노나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지금쯤 눈앞에서 세자르의 재산이 왔다갔다 하겠구나. 핏줄로 서의 의무감에서인지는 몰라도 위노나는 미나가 미혼모가 된 사 실을 놓고 잔소리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보면 구미가 당기는 것도 사실이리라. 미나는 굳이 세자르가 들먹인 변호사에 법정 얘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녀 가 보기엔 그런 얘기는 세자르가 그저 압력을 행사하는 한 방법 일 분이었다. 그녀가 수지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자 그 대안으로 결혼을 제시한 것 뿐이다. 세자르와 일하면서 배운 게 있다면 어떤 위기에 몰리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었 다. 그 방법이 미나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그런 식의 접근은 질 색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세자르는 자기가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예상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수지를 위해서 라도 다른 대안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수지에게는 아버지와 집 과 안락한 생활이 필요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해 줄 수 없다는 게 미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괴로움이 아니었던가. 또 한가지, 세자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건 미나에게는 그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삶이 더 행복했다. 그러나 오로지 자식만을 위한 결혼이란 너무 가혹했다. 최근 들어 자신의 감정까지 생각 해 볼 여유가 없었던 미나지만, 세자르를 사랑한다는 것만은 아 침이면 해가 뜬다는 것처럼 엄연한 진실이었다. 그의 제안을 받 아들이는 어떤 이유보다도 분명한 이유였다. 어쩌면 그러다가 자기가 오해를 했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을까? 그가 주장하는 물증을 보자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든 실추된 명예는 되살려야 했다. 하지만... 거의 가능성이 없는 것 은 아닐까. [미나?] 장난감들을 정리하고 있던 미나는 위노나가 부르는 소 리에 허리를 폈다. [세자르가 왔어] [또?] 그가 문간에 나타났다. 미나는 눈부신 듯 그를 바라보았다. 몹 시 지친 듯한 모습인데도 여전히 넋을 잃게 만든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턱수염이 거뭇거뭇한데다가 윗도리도 보이질 않는다. [혹시 오늘 저녁을 같이 할 수 있을까?] 벌써 6시가 넘었는데... 하루에 두 번씩이나 찾아오다니 .... 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왔는지는 알만 하다. 그 사이를 못 참고 그녀의 결정을 알고 싶어서 온 것이다. 거실 쪽에서 아이 들이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수지 를 찾고 있는게 분명했다. 곰 인형의 노래 소리가 먼저 들리고 뒤를 이어 그들의 딸이 생글거리며 달려왔다. 세자르는 수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부끄럽게도 미나는 말 할 수 없는 질투를 느꼈다. 난 저런 미소를 끌어내지 못할 거야. 내가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둘만의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 어. 수지는 그런 식의 관심에 익숙하지 못한 아이였다. 자기가 이집 에서는 이방인 비슷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였다. 드디 어 자기만의 장난감이 생겼다는 기쁨으로 온종일 곰인형을 휘두 르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코끝이 찡했다. [넌 아주 예쁜 아이야] 세자르가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수지가 환하게 웃었다. [다시는 안 물어요] [옷을 갈아 입어야 겠어요] 불청객처럼 서 있느니 사라지는게 낫지. 문앞까지 간 그녀는 선 채로 입을 열었다. [결심했어요] [뭘?] [결혼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는 걸요] 한동안 잠잠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세자르?] [준비는 내가 하지] 2층으로 올라가는데 숨이 턱에 닿은 위노나가 나타났다. [운전 기사가 딸린 리무진을 끌고 왔어! 옷이 필요하니?] [아냐, 괜찮아] 그녀가 꽃무늬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갈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 왔을 때, 세자르는 이미 결혼 발표를 하고 있었다. 로저는 화해의 의미인지 축하한다며 샴페인을 따는 중이었고, 위노나는 수지에게 리지가 물려 준 하얀 레이스 원피스를 입혀 놓았다. 무슨 속셈인지... [수지고 데리고 가야지?] 세자르가 말했다. 미나의 마지막 희망은 덧없이 사라졌다. 하긴 단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할 세자르가 아니었다. 비록 무관심한 시선 앞에서 가 슴이 찢어진다 해도... 미나는 반짝거리는 결혼 반지를 흘끔 내려다 보았다. 리무진의 창밖으로는 시실리의 이국적인 전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섬의 중심부로 향하고 있는 모양이다. 세자르는 그저 자기 집에서 지낼 거라고만 했을 뿐, 상세한 설 명은 없었다. 그래서 미나도 입을 다물었다. 구릉을 이룬 농경 지가 이어지던 풍경은 소나무와 유칼리 나무가 빽빽이 우거진 수 풀로 바뀌었다.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유리창에 무늬를 만들었다. 참기 힘든 침묵이었다. 미나는 세자르의 저의를 짚어 보려고 했다. 나라는 존재를 더 이상 무시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런 여 행을 계획한 건 아닐까? 그날 아침 일찍 두 사람은 마을 교회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 다. 세자르 쪽의 친척이나 친구들은 단 한명도 없었다. 미나는 샌드로와 마주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겼다. 지난 3주일 동안 세자르는 줄기차게 위노나네 집을 드나들었 다. 그러나 수지에게만 온 정신이 쏠려 있었기 때문에 미나는 거의 둘만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곤 했다. 세자르의 결혼 신청 을 받아들였을 때만 해도, 수지가 있는 지리에서나 겨우 존재 가 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소품 같은 대접을 받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벌서 자기 딸한테 푹 빠진 것 같지 않니?] 위노나는 애써 명 랑한 척 했지만, 세자르가 자기 제안을 받아들여 여행 기간 중에 는 수지를 그냥 맡겨 두겠다고 하자 비로소 안심하는 눈치였다. 어쨌거나 그는 수지의 존재를 감춘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 같 았다. 수지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단이긴 하지만, 결혼 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가 미나 앞에 나타나서 4년 전의 배신을 되갚아 주겠다고 이를 간 게 불과 한달 반 전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수지가 끼여든 것이다. 그는 딸을 최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한 복수라는 것도 싫건 좋건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다 자기가 탐욕 스럽고 거짓 투성이라고 판단한 여자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복 수를 포기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양보와 희생까지 강요당한 것이 . [다 왔군] 미나는 흠칫 놀랐다. 세자르의 음성에는 지난 3주 동안 느끼지 못했던 힘이 실려 있었다. 3주 내내 그는 잘 다듬어 놓은 영화 속의 인물이 된 것처럼 냉담하고 건조했다. 정신을 차린 미나가 창밖을 내다보니 차는 돌로 지은 요새를 연 상케하는 저택을 향해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는 중이었다. [당신 집이... 저 성이에요?] [지난 3백년 동안 카스텔로 델 팰콘은 침입자들로부터 이 계곡 을 지켰어. 평소엔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다녀 가지만 차로 오려 면 얼마나 멀고 험한지 가르쳐 주려고 했지. 알만 해?] [경치가 무척 아름다워요] [하지만 무척 외진 곳이기도 하지. 겨울엔 아예 길이 막혀. 가 장 가까운 마을도 몇 마일은 가야 해. 우리 집에서 일하는 사람 들이 살지] 묻지도 않았는데 술술 잘도 풀어놓는다.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 만으로 이렇게 활력을 되찾다니... 그는 분명 자기 가문과 그 역 사를 대단히 자랑스러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 앞에서 저 회색 돌벽들이 너무 위압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차는 자갈을 깐 진입로로 들어섰다. [어쩌면...] 미나는 어스름 한 저녁빛을 받아 우아한 분위기를 빚어내는 정원에 발을 내딛으 며 탄성을 질렀다. [대도시와 같은 화려한 생활은 기대할 수 없는 게 유감이야] [그래요. 하지만...] 미나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긴장을 풀고 마음의 여유를 느낄수 있는 곳이라면... 정말 좋군요!] [그 느낌이 오래 가길 바랄 뿐이야] 미나는 그나마 그가 입을 열어 준 것만도 고마워서 무의식중에 미소를 지었다. 자존심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지 만... 세자르는 나름대로 화를 낼 이유가 충분한 상화이었다. 그 래도 미나는 며칠 만이라도 단둘이 지내는 동안 미래를 위한 희 망을 찾아 보고 싶은 절박한 소원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난 시골에서 지내는 게 좋아요] [겨울에도?] 겨울에는 여기 없을 텐데, 뭐... 미나가 막 그렇게 말하려는데 검 은 옷을 입은 통통한 중년 여인이 뛰어나와 그들을 맞았다. 세 자르가 가정부인 마리아라고 소개를 했다.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미소만은 따뜻하기 그 지없었다. [내가 이탈리아 말을 배워야겠군요!] 미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세자르의 태도에 긴장이 풀려 갑자기 붕 뜨는 기분을 억제할 수 가 없었다. [여가가 있으면 배울 수도 있겠지] 왜 저렇게 뚱할까? 내가 너무 서두르고 있는 걸까? 아냐, 바 보처럼 굴지 말자. 세자르는 이제 그녀의 남편이고 어느 때보다 부드러워져 있다. 그리고 수지가 부모들 사이가 어색하다는 걸 눈치채면 아이에게도 불행이다. [마리아에게 2층으로 데려다 주라고 하지. 저녁 식사는 9시야] 널찍한 홀 한가운데 대리석과 철제로 만든 계단이 보였다. 어 디를 둘러봐도 눈에 거슬리게 개조한 곳은 없었다. 미나는 마리아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활짝 열린 침실 문을 통과하자 그녀는 18세기의 궁전에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한쪽 구석에 난 문은 욕실로 통했다. 혼자 남은 미나는 찬찬히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세자르가 이 방을 같이 쓸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맙소사,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 도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수지에 관해 알게 된 이후로 세자르는 키스 한번 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냉담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지난 3주 동안 미나는 오랜만에 자신을 되돌아 볼 여유를 가졌다. 그리고 4년 전의 자신이 딸의 행복보다는 자 신의 자존심을 우위에 놓았다는 가슴 아픈 결론에 도달했다. 지 금의 세자르는 자기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일단 수지를 먼저 생각할 것이다. 뜨거운 물에 느긋하게 목욕을 하고 나자 긴장도 풀어졌다. 욕 실에서 나온 그녀는 침대 한가득 옷들을 늘어 놓고 기다리는 젊 은 하녀를 보자 눈이 둥그레졌다. [이건 내 옷들이 아닌데... ] 미나는 하늘거리는 레이스 속옷과 반짝거리는 검은색 이브닝 드레스를 보고 눈썹을 모았다. [내 옷들은 어디 있죠?] 마리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음에 안 드시나요, 시 뇨라?] 그녀는 황급히 옷장 앞으로 다가가더니 문을 활짝 열었 다. 미나는 기가 막혀서 다른 옷장을 열어 보았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거의 비슷했다. 형형 색색의 옷들과 서랍을 가득 채운 속옷들, 바닥에 줄지어 놓인 고급 구두들... 세자르가 마련해 준 것일까? 이따금 그녀가 갖고 온 옷들도 눈에 띄기는 했다. 목 욕을 하는 동안 정리해 놓은 모양이다. 어느 것 하나도 세자르 가 갖추어 놓은 고급 의상들과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검은 드레스는 어깨를 노출시키는 유혹적인 디자인이었다. 미 나는 하녀의 호의를 정중히 물리치고 손수 드레스를 입은 후 머 리를 틀어올렸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드레스를 살그머니 쓸어 보았다. 가냘픈 어깨가 유난히 희게 보였다. 갑자기 백만장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미나라고 해서 예쁜 옷을 싫어할 리가 없지만 그동안은 그런 사치를 허용할 여유가 없었 다. 그녀는 세자르가 한마디 언급도 없이 이런 제스처를 보였다 는 데 놀랐고 진심으로 감동했다. 자신이 지금껏 살아오던 세계 와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발을 내딛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소리 없이 일깨워 준 세자르가 고마울 뿐이었다. 준비를 마치자마자 미나는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하이힐이 또각또각 경쾌한 소리를 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 라 망설이는데 뒤따라 온 하인이 문을 열어 주었다. 방 끝에 난 여닫이가 달린 창문으로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창 가에 서 있는 세자르는 그 눈부신 빛 속에 둥둥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예상한 대로 상당히 만족스러운 모습이군] 미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정말 놀랐어요. 고마워요] [천만에. 명색이 내 아내인데 옷차림이 허술하다면 나한테도 곤 란한 일이지, 여기서 손님을 접대하는 일도 잦을 텐데 혹시 하 녀로 오인당하면 창피스러우니까...] 미나는 따귀라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세자르가 파올로라는 하인에게 뭔가 지시를 내렸다. 은쟁반에 받쳐진 샴페인 잔이 나 왔다. [뭘 위해서 건배할까? 결혼의 성립? 아니면 당신의 유배?] [뭐라구요?] 미나의 음성이 떨렸다. 단 몇 초 사이에 세자르는 그녀의 환상을 갈가리 찢어 놓고 있다.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옷차림은 그럴싸하지만 당신이 이제 엄격한 계율에 따라 움직이는 수녀처럼 살기 시작한 거야] [당신, 술마셨어요?] 세자르가 고개를 꺾고 웃어댔다. [당신은 자기가 어디서 살 건 지도 안 물어 봤지? 내가 가르쳐 주지. 여기가 당신이 살 곳이 야] [여기라면...] [난 당신을 런던으로 데려가지 않을 작정이야] [그렇지만 난 런던에서 살게 될 줄...] [틀렸어. 난 어디서든 일을 할 수 있어. 문명이란 참 좋은 거 지. 난 가끔 집을 비우겠지만, 당신은 여기 남아서 우리 딸의 충 실한 엄마 노릇을 하게 될 거야] 미나는 샴페인을 들이켰다. 목이 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 가 미쳤다는 고백을 들은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여기가 당신 말처럼 고립된 곳이라면 수지에게도 좋을 리가 없 어요!]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여기서 4마일 떨어진 곳에 내가 기부 금을 내서 세운 현대식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있어. 젊은 사람들 은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지만, 땅을 경작하려면 일손이 필요하고 노인들은 가족들과 함께 살기를 원 하지. 우린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공동체야] [맙소사, 수지는 이탈리아 말도 못해요!] [배우면 그만이지. 여긴 내 집이자 그애 집이야. 그 또래 아이 들은 외국어를 빨리 익히지. 수지는 두 나라 말을 동시에 하면 서 자라게 되는 거야.] 그제서야 미나는 세자르가 대도시처럼 화려하지 못하다고 한 말 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같았다. 그는 미나가 그런 화려함 을 그리워하리라고 예상하고 아예 싹을 잘라 버리겠다고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미나에겐 그런 시시한 것들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단지 감옥을 방불케하는 생활이라면 확실히 문제가 된 다. 미나에게서 가족과 친숙해진 모든 것들을 빼앗아 버린다는 생각 이 그렇게도 그의 흥미를 자극했을까? 딸을 얻기 위해 이런 방 법밖에 쓸 수 없도록 만든 그녀에 대한 벌일까? 오, 이 남자는 과연 결혼 생활을 불행하게 만들기로 작정을 한 걸까? [저녁 시간이야] 세자르가 미나의 등에 손을 얹고 문 쪽으로 가 볍게 밀었다. [놀란 모양이로군] [난 당신이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요!] 아니, 아니, 천만에. 난 속속들이 알 수 있어. [혹시 애인이라도 만드는 날엔 내 손으로 죽여 버리겠어] 세자 르가 그녀의 귓전에 대고 소근거렸다. [그런 유혹은 포기하는 게 현명한 처사겠지?] 그녀는 촛불이 흔들리는 만찬 테이블을 멍하니 바라보며 의자에 앉았다. 애인이라도 만드는 날엔 죽여 버리겠다고? 어떻게 결 혼 첫날에 애인이라는 단어가 거침없이 나오는 걸까! 아니, 그럴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미나는 인 형처럼 꼿꼿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지금 둘 중 누가 제정신이 아닌 걸까... 7 파올로가 멋진 손놀림으로 냅킨을 흔들어 펴더니 그녀의 무릎 위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샴페인의 병마개를 따서 양쪽 술잔 을 채워놓고 뒤로 물러서서 이탈리아 말로 일장 연설을 했다. 「당신이 관심을 가질지는 모르겠지만, 파올로는 고용인들을 대표해서 열렬한 환영과 축하 인사를 했어. 우리의 결합이 좋은 결실을 맺어서 이 집안에 다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기원한다는 군.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벌써 그 기원이 이루어졌다는 걸 알면 꽤나 좋아하겠어」 미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세자르, 왜 내가 그런…」 「내가 묶어 놓지 않으면 다른 남자의 침대를 기웃거릴 거라고 생각했느냐는 질문이겠지?」세자르는 태연했다. 「난 현장을 목격했어. 에드윈 해런드에다 클레이턴. 상당히 교육적이더군. 여기가 아라비아였다면 난 당신을 동굴 감방에 가둬 놓고 열쇠를 묻어 버렸을 거야!」 「난 한번도 다른 남자와 잔 적이 없어요! 당신은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만들 권리조차 없는 사람이에요」 「아니, 난 진실을 알 권리가 있어. 클레이턴은 당신 애인이 었지」 「그런 적은 한번도 없어요!」 「내가 당신을 혼자 둔지 겨우 48시간 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지? 난 당신을 주무르고 있는 클레이턴 봤어!」 미나는 그를 노려 보았다. 어쩜, 그때는 그토록 태연하게 자신의 본심을 감출 수 있었을까! 정원의 사무실에서 두 사람을 봤을 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그날은 내내 수지 얘기뿐이었다. 그 냉정하고 현실적인 태도 뒤에 저렇게 무서운 분노를 숨기고 있었다니? 미나는 몸서리를 쳤다. 대체 어디까지가 저 남자의 본심일까. 「그렇지만 당신들은 어려서부터 연인 사이였고 가족들 끼리도 그저 친한 이웃 이상이었지. 아마 당신은 스티브를 갖고 놀았을지 몰라도 그 친구는 여전히 당신이 밟고 다니는 땅조차 신성하다고 생각할걸. 그런 무조건적인 숭배가 사라진 게 허전하겠지만 어쩔 수 없어. 당신은 그 남자 없이 살아야 해」 「누가 스티브와 내가 어려서부터 연인이었다고 해요?」 「당신 쌍둥이 언니지. 설마 거짓말을 했다고 언니를 공격할 생각은 아니겠지?」 「스티브와 몇 차례 데이트를 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우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녀요!」 「그런데 그 남자는 당신한테 푹 빠져 있군」 「천만에요! 예전엔… 예전엔 그랬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구요!」미나는 조금씩 화가 치솟기 시작 했다.「위노나는 늘 내가 스티브와 결혼해서 다같이 행복 하게 살기를 원했어요. 아주 끈질겼죠. 하지만 내가 정말 스티브를 원했다면 그 사람의 구혼을 왜 거절했겠어요?」 「당신이 바라는 것만큼 갖질 못했으니까…. 결코 부자는 되지 못할 사람이야. 그렇지만 그 남자는 당신이 순진무구 하다고 믿음으로써 당신의 이기심을 만족시켜 줬어. 그런 헌신은 찾아보기 힘들지. 수지를 갖던 날만 해도 내가 당신에게 술이라도 먹이고 꾀었다고 생각할걸. 만일 내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당신은 그 남자에게 정착했을 거야」 미나는 냅킨을 내던지고 벌떡 일어났다.「차라리 그랬으면! 스티브는 부자가 될 수 없을 지는 몰라도 당신이 죽었다 깨나도 알 수 없는 내 자신을 아는 사람이니까요!」 「앉아서 식사나 해」 「난 당신과 함께 앉아 있을 생각이 없어요. 당신은 내 행동 하나하나를 의심하는데다가 제정신도 아녀요! 어떻게 내가 다른 남자를 유혹할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앉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미나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남들 앞에서 낯뜨거운 장면을 연출할 수는 없다. 부들부들 떨렸다. 잠시나마 세자르가 과거를 접어 두고 호의적인 출발을 한 거라고 착각한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난 좋은 뜻으로 이 결혼을 수락했어요」둘만 남게 되자 미나는 씁쓸하게 내뱉았다. 「수지를 위해서지」세자르의 지적이었다.「전원 생활은 아이 들에게도 좋아. 엄마가 24시간 돌봐 준다는 점은 둘째 치고라도, 맑은 공기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풀밭이 있으니…」 「어디서 살건 수지는 엄마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어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미나는 포크를 집어들었다. 이미 식욕은 깨끗이 사라진 후였다.「하지만 내가 어떤 행동을 하건 당신이 날 믿지 않으리라는 것도 분명하죠」 「신뢰란 노력으로 얻어지는 거야. 당신이 성실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내년 이맘 때도 이런 꼴로 않아 있게 될걸」 세자르가 냉소를 흘렸다.「당신이 내부자 거래에 대해 솔직히 털어 놓고 그 돈을 어디다 썼는지 정직하게 밝히기만 한다면…」 「난 그런 짓 한 적 없어요!」 세자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최소한 9개월 정도 다른 남자들이 얼씬도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면, 한번쯤은 내 감독 하에 런던으로 가서 내 돈을 쓸 수 있는…」 「그런 더러운 돈 얘기는 좀 그만 해요!」 「그럴 작정이야. 난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지독한 악당이 될 생각이야. 신용 카드라든가 돈이 될 만한 보석은 절대 주지 않을 생각이니까. 당신이 끼고 있는 반지는 백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은이야」 미나는 즉시 결혼 반지를 뽑아 내던져 버렸다. 반지가 데굴데굴 굴러서 바닥으로 떨어졌다.「자, 가져가요!」 「아무래도 여길 벗어나려면 시간이 걸리겠군」세자르가 여유 있게 중얼거렸다.「당신은 아내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노력해야 할 거야. 내가 집을 비울 때나 돌아왔을 때나 어김없이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해. 믿거나 말거나지만, 남자들에겐 그런 게 당연히 누려야 할 안정감 이라는 거지」 후식을 든 파올로가 들어왔다. 미나는 그 접시를 낚아채서 세자르의 얼굴에 던져 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파올로가 다시 나갈 때까지 분을 참느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은 언니한테 전화를 하는 것뿐이에요」 「당신 언니란 사람은 나만 보면 화분 뒤로 숨더군」 「위노나는 나 외의 사람에겐 수지를 내놓지 않아요. 그러니 수지는 절대 이곳으로 올 수 없죠!」 「제 애비한테는 내줄 거야」 참 유치한 협박을 했구나 싶었다. 미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가족들까지 말려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수지를 불안하게 만들 수도 없다. 아이는 이미 세자르와 상당히 친밀해져 있었다. 아이다운 호기심과 사촌들처럼 아버지라고 부를 남자가 생겼다는 사실이 세자르와 아이를 단단히 묶어 주었던 것이다. 「좋건 나쁘건 간에,」세자르가 타이르듯 말했다. 「하긴 아마도 자기가 무일푼이나 다름없다는데 당신 고민의 근원이 있겠지」 「지금 내 감정은 고민 정도가 아녀요. 당신을 벼랑 꼭대기 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싶을 정도의 분노라구요」 미나는 양손으로 식탁을 짚고 벌떡 일어났다. 「당신은 방금 일생 일대의 실수를 저지른 거예요. 세자르 팰콘」 「내가 바보처럼 당신과 결혼한 후에 제멋대로 런던 거리를 활보할 수 있도록 나줄 줄 알았어? 날 멍청이로 아나?」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당신이 최근에 단 한번이라도 스티브 라든가 돈 문제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어요?」 「물론 없지. 나 자신을 억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인정하겠어. 하지만 그 대가는 훌륭하군. 이제 난 내가 원하던 걸 손에 넣었어. 법적으로 당당한 아버지가 된거야. 그러나 당신을 갖게 된 것도 그만한 중요성이…」 「날 소유하진 못해요!」 세자르가 그녀를 아래 위로 훑어 보았다. 「난 당신을 가졌어. 늘 내가 꿈꾸던 자리에… 절대적으로 내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감히 그런!」 「아직 맨발이라든가 배가 불렀다든가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건 아니지만…」세자르는 태연자약 했다.「시간을 줘봐」 미나는 손을 쳐들었다.「당신이 만일 내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드렸다가는 이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어요!」 「혼인 서약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첫번째 부부 싸움이 벌어지는군」세자르가 쿡쿡 웃었다.「분별 있는 남편이라면 첫날밤을 위해서 화해를 서두르겠지. 하지만 난 그런 남편이 못 돼. 도전해 볼 기회를 갖는다는 건 좋은 일이지. 당신이 오늘 나와 같은 침대에서 자는 데 천 파운드 걸겠어」 「백만 파운드라도 상관없어요. 당신이 잃을 테니까!」미나는 씨근거리며 방을 나섰다. 커피 쟁반을 들고 오던 파올로가 입을 딱 벌렸다. 평생 이렇게 화가 나 보기는 처음이었다. 세자르와 함께 5분만 더 있었더라도 그녀는 접시를 집어 던지고 말았을 것이다. 처음 세자르를 만났을 때는 가장 매력적이었던 점이 지금은 최악의 장애물이었다. 그는 예측불가의 인물 이었다. 그녀는 퉁탕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음흉스럽고 고집세고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는 남자였다. 게다가 교활하고 영리하기까지 하다. 아직도 나무들을 보느라 숲 전체는 보지 못하면서!」 미나가 서랍들을 마구 잡아 빼고 있는데 눈이 휘둥그레진 ?은 하녀가 들어왔다.「저 도와드릴 일이라도…」 「아뇨. 괜찮아요」미나는 숨이 차서 헐떡거리며 흘러내린 드레스를 바로잡았다. 옷장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도움은 필요없어요」 하녀는 머뭇거리며 방을 나갔다. 마지막 서랍을 빼버린 미나는 욕을 퍼부으며 옷장을 어깨로 밀기 시작했다. 대체 왜 문에 잠금 장치도 없는 거야! 묵중한 옷장이 삐걱거리며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문을 막자 미나는 그대로 카펫 위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서랍들을 다시 끼우기 전에는 옷장이 바리케이드 구실을 제대로 못할 것 같았다. 미나는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서랍들을 제자리에 끼우고 창가에 놓여 있던 소파를 옷장 앞으로 옮겼다. 힘겨운 싸움을 끝낸 미나는 그대로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옷이고 뭐고 귀찮았다. 드레스의 지퍼를 내리고 스타킹을 끌어 내리는데, 매끄러운 공단 스타킹 벨트가 손에 잡혔다. 이런 물건은 한번도 입어 본 적이 없는데…. 세자르가 손수 골랐을까? 이런 물건들을 좋아하나 보지? 그녀는 거미줄처럼 섬세하게 짜인 속옷을 박박 찢어 버렸다. 이 시간 이후론 손수 가져오지 않은 옷은 단 한 벌도 입지 않겠어. 침대에 누워 열을 식히고 있노라니 분노가 가라앉으면서 차츰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예나 자금이나 미나가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는 세자르의 단정은 변하지 않았다. 자기 입으로 죄를 고백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반대의 경우를 예상해 보지는 않았을까? 그만 두자. 오늘 밤 그녀는 승리의 기쁨에 취한 남자와 저녁 식탁을 마주 했다. 세자르는 자신의 놀라운 솜씨에 백 퍼센트 만족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꾀어 낯선 이국 땅으로 끌고 와서는 무일푼으로 가두는 데 성공했다. 마치 중세의 성주가 내키지 않는 결혼을 한 신부를 가두는 것처럼…. 정말 돈을 탐내는 사람이었다면 세자르의 협박에 미친 듯이 날뛰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나는 오랫동안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생활을 꾸려왔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는 대범했다. 돈이 무슨 필요람. 어차피 지불해야 할 청구서가 날아오는 것도 아닐 텐데…. 하지만 스티브에 관한 폭언은… 스티브는 그녀가 세자르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그녀를 전염병 환자처럼 피해 다녔다. 미나는 용기를 내어 위노나에게 스티브의 반응이 어떻드냐고 물었다. 「어땠겠어?」위노나가 맥없이 반문했다.「 물어보나마나지, 뭐. 스티브는 네가 세자르를 증오하고 있다고만 생각 했거든」 결국 책임은 미나에게 있었던 셈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스무 살 때도 그녀는 스티브에게 결혼하고 싶을 만큼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똑똑히 밝혔고, 최근 들어서는 그 앙금이 사라지고 우정을 회복했다고만 믿었다. 그러나 세자르가 나타난 순간 스티브는 엄청난 착각을 일으켰다. 아니, 스무 살 때는 알지도 못했던 세자르였다. 그런 사람이 미나의 거절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사내들이란!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것은 그녀가 스티브의 침대로 뛰어들었다고 세자르가 믿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단 한번도 그렇게 스티브에게 끌리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녀는 스티브를 좋아했다. 함께 있으면 즐겁고 유쾌했다. 하지만 스티브가 평소와는 달리 친근한 감정을 표현하려 했을 때, 그녀는 자기가 스티브를 그만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던 것이다. 로저와 위노나가 아니었더라면 오히려 그보다 일찍 헤어졌을 수도 있는 사이였다. 세자르는 어떻게 그런 상상을 할 수가 있었을까? 적어도 미나에게 있어서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랑은 늘 예외를 낳기도 한다. 그녀에게 소중한 것이 세자르에게는 소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는 지난 4년 간을 혼자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여자를 안고 있는 세자르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아니, 인정해, 미나. 세자르의 입장에서 보면 널 행실 나쁜 매춘부에 불과해. 왜 그런 줄 알아? 4년 만에 나타났지만 그는 손쉽게 널 다시 가질 수 있었어. 그러니 존중해 줄 이유도 없고, 남자라면 혹하는 여자라고 생각하는게 당연할 수도 있지. 내가 그렇게 행동했을까? 세자르를 처음 만났을 때 미나는 스물 두 살이었다. 그는 자신과의 하룻밤이 그녀를 닳고 닳은 여자로 바꾸어 놓았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에 깃든 원시적인 본능에 불을 붙인 유일한 남자가 자기라는 걸 과연 알까? 미나는 옷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건 세자르를 막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내 자신을 유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일까. 어디선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서 미나는 황급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후다닥 일어나 앉은 그녀의 눈에 놀랍게도 한쪽 벽면이 스르르 열리는 게 보였다. 맙소사, 반 벌거숭인데! 그녀는 손에 잡히는 대로 끌어당겨 허겁지겁 몸을 가렸다. 세자르가 어두운 복도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저런 출입구가 있었나? 짧은 검은색 잠옷을 걸친 그는 형편없이 흐트러진 미나의 몰골을 물끄러미 살피고 있었다. 「비겁하게! 비밀 통로가 있다니…」 「비밀 통로?」세자르가 눈썹을 찌푸렸다. 「속임수를 쓴 거나 다름없어!」세상에, 이런 꼴로 땀을 뻘뻘 흘리며 옷장을 끌어다 놓는 사이에 그는 비밀 통로를 통해 들어 온 것이다. 「무슨 소리지?」세자르는 등뒤의 닫혀진 물을 돌아보았다. 그는 잘 보라는 듯 나무로 만든 손잡이를 가리켰다.「저게 무슨 비밀이야? 저건 우리 침실을 연결해 주는 문인데…」 「난 그런 문은 필요없어요. 당장 나가요!」 잠시 문을 막아놓은 옷장을 바라보던 세자르가 비로소 웃음을 터뜨렸다.「바리케이드를 쳤군!」 미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렇게 바보 같은 기분이 들기는 처음이다. 「대단한 바리케이드야」세자르는 미나와 옷장을 번갈아 흘끔거렸다.「얼마나 끙끙거렸을지 알만 해. 지치지나 않았으면 좋겠군」 「나가요!」 「하지만 오늘은 첫날밤이야」 미나는 이를 악물었다.「대답은 노예요!」 검은 눈썹이 아치를 그렸다.「내가 뭘 물었는데?」 「굳이 말로 할 필요나 있었겠어요? 좋아요. 난 날 돈이나 쫓아다니는 부정직한 사기꾼으로 보는 남자와는 한 침대를 쓸 수 없어요!」 「왜 안 되나? 내가 내 원칙을 희생할 용의가 있다면…」 「당신 원칙?」 「누가 또 있나? 내가 정말로 사기꾼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욕심이 있었다고 생각해?」 「어쩜, 감히 그런…」 「그 얘기를 먼저 꺼낸 쪽은 당신이야. 침실에서까지 그런 입장을 고수하고 싶다면 좋을 대로 해. 하지만 이젠 자기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지. 조만간에 거짓만을 하는 것도 지쳐서 자기 입으로 4년 전의 죄를 불게 될걸」 「난 아무 짓도 안했어요!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시인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뉘우치지 않는다면 용서받을 수도 없어. 내가 경고하지 않았다고는 말 못하겠지」 「당신은 제정신이 아녀요. 난 아무 짓도 안했는데…」 「당신은 내 믿음을 배신했어. 날 배신했어!」 갑자기 소름이 오싹 끼쳤다. 「거기다 근사한 장식까지 덧붙였어. 날 사랑한다고 했지」 미나는 새하얗게 질렸다. 자기가 그렇게 순진했다는 것을 지금 되살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난 그 말을 믿었지」 「적지 않게 흥분했겠군요」 「지금 당신을 여기다 가둬놓은 데 비한다면 절반도 안돼」 그가 여유 있게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검게 그들은 피부가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 미나는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이미 야릇하게 달라지고 있는 공기가 그녀에게 는 공포였다. 다시는 허락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침대가 가볍게 흔들렸다. 미나는 이를 악물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진 미나는 눈을 떴다. 세자르는 느긋하게 드러누워 그녀를 울려 다보고 있었다. 「내가 왜 당신에게 그 자리를 줬는지 알아? 당신은 지원자들 주에서 가장 뛰어났어. 난 단지 용모만을 고려한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타일렀지. 당신에게 매력을 느낀다 해도 당신의 능력을 평가하는 면에 있어서는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거라고 다짐했어. 그게 내 문제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 문제가 되고 말았지. 당신 역시 날 원했으니 말이야」 「내가 언제… 아니, 그렇게 즉각적인 건 아니었어요!」 세자르가 검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팔을 살그머니 건드렸다 .「그리고 당신은 숨기질 못했어.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더군」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그렇지 않아…」 「하지만 난 신사답게 참았지. 당신을 위해서!」미나를 올려다보는 세자르의 입매가 흉하게 일그러졌다. 「당신을 데리고 출장을 갈 수는 없었어. 그 수많은 날들을 단둘이 남을 시간들을…」 「수많은 다른 여자들도 있었겠죠」 「마음을 돌려 보려는 시도였지만 실패했어」 「당신은 내가 굴복하기를 원했던 거예요」 「당신은 날 혼란스럽게 만들었어. 난 온갖 상상을 했어. 내 가 당신을 안기 전까지 밤마다 혼란스런운 꿈에 시달렸지」 미나의 뺨은 불이라도 붙은 듯 화끈거렸다. 그는 미나에게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는 단지 표피 적인 관계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지. 그런 긴장은 고통이었어. 당신이 무심코 허리를 굽히는 바람에 다리만 슬쩍 보여 줘도 난 첫경험을 기다리며 안달을 하는 사춘기 애들처럼 끙끙거렸어. 언제 어디서건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했지. 그 날이 드디어 온 거야…」 「난 전혀 몰랐어요」 「뭘 몰라?」세자르가 침대를 짚었다.「그런 욕망이 흔하지 않은 것이라는 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느낌조차 경험하지 못하고 산다는 걸? 그건 채울 수 없는 허기같은 거야.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바뀌는…」 미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숨을 헐떡이며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황금색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녀의 귀에는 자신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가 천둥 소리처럼 울렸다. 길다란 손가락이 그녀가 감고 있는 시트를 벗겨 내렸다. 그가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자극적이었다. 그의 양손이 미나의 팔을 움켜 쥐었다. 그녀는 허리를 뒤로 젖혔다. 타는 듯한 입술이 이미 팽팽하게 일어선 가슴의 정상을 향해 다가왔다. 미나는 숨을 몰아쉬며 세자르의 어깨를 붙들었다. 오, 이런 일은 다시 없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그녀는 눈을 질근 감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세자르를 원하는 것만큼 무엇인가를 애타게 바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갈망과 사랑을 보여 주고 싶다는 안타까움으로 고통스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마치 몸이 둘로 찢기고 있는 느낌이었다. 세자르가 한쪽 손으로 그녀의 머리채를 거머쥐었다.「 4년 전에 난 이건 단순한 욕망이라고만 생각했어. 하지만 다른 어떤 여자도 이런 느낌을 주진 못했지」 「하지만 당신은…」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요. 날 좋아하지도 않아요. 날 존중해 주지도 않아요. 「아니, 그 이상이 필요해요. 내겐 그 이상의 뭔가가…」 그의 손이 익숙한 솜씨로 가슴을 헤집기 시작했다. 「당신도 나처럼 해야 할 거야.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걸로 만족해야지 나머지는 포기해」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이거야! 이게 바로 당신이 원하는 거야!」그는 무서운 속도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완력으로는 당해 낼 수도 없었다. 미나는 난폭한 기세로 자신을 끌어 당겨 자기 무릎 위에 앉히는 세자르에게 힘없이 몸을 맞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자르에게 밀착되는 순간 흑하고 숨을 들이켰지만 부끄러움도 모르는 신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세자르는 그녀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엉덩이를 끌어당겼다. 단 한번의 키스로 그는 그녀를 지옥의 불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가슴에 닿는 까실 거리는 털의 감촉이 더욱 자극적이었다. 그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미나는 흐느끼다시피 숨을 몰아쉬며 세자르에게 들러붙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건 이거야」세자르는 그녀의 머리를 뒤로 젖히며 얼굴을 들여다보았다.「이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할 셈인가? 3주일 동안 당신을 건드리지도 않았어! 내게도 형벌이었고 당신에게도 형벌이었겠지. 그런데도 만족할 수 없어?」 「안 돼요…」 그는 미나를 안아 올리더니 부풀어 오른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이미 미나는 더 참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더 기다릴 수 없어」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세자르는 뜸을 들이듯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녀를 공격했다. 미나는 눈을 감았다. 절망적인 갈증으로 허덕이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싶었다. 「날 봐」세자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오, 제발! 멈추지 말아요!」 「눈을 떠! 날 보란 말이야. 지금 당신을 갖고 있는 건 나야!」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세자르의 얼굴은 뜻밖에도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덜덜 떨면서도 미나는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세자르?」 「그래, 나야. 다른 어떤 남자도 아닌 세자르지. 두 번 다시 허락하지 않아!」 그는 이를 악물고 내뱉았다. 온몸이 벌써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미나를 거칠게 밀어 쓰러뜨리더니 꼼짝할 수 없이 양손을 침대에 밀어붙였다. 무섭다기보다는 아주 이색적인 자극이었다. 세자르는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하지 못했다. 미나는 격정의 폭풍에 휘 말린 세자르의 노예였다. 미나의 온몸은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열정에 의해 타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눈앞에서 불꽃이라고 터지는 듯 현란한 빛이 보였다. 그녀는 흐느낌 속에서 세자르의 이름 불렀다.「사랑해요! 사랑해요…」 서서히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미나는 이상하게 주위가 조용하다는 것을 느꼈다. 세자르는 몸을 굴려 자기 자리로 돌아간 후였다. 화끈거리는 살갗에 싸늘한 공기가 닿았다. 「다시는 그런 식으로 내 비위를 맞추려 들지 마」 미나는 더듬더듬 시트 자락을 끌어 올려 몸을 가리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세자르의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그 한마디로 온몸을 태우던 열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그 환희를 간절히 바랐던 자신의 욕망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이었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당신 입에서 나오는 사랑한다는 소릴 듣는 것보다 더 맥 빠지는 일은 없어」 그녀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제서야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물론 습관적으로 하는 얘기겠지만…」 「습관?」 「클레이턴은 그런 환상을 놓아야 하겠지만 난 아냐. 나한테는 당신에 대한 환상이 단 한가지도 남아 있지 않아. 그러니 당신도 기대하지 않는 편이 실망도 없을 거야」그가 피식 웃었다.「클레이턴도 당신이 말한 사랑이란게 어떤 건지 알고 실망했겠지」 미나는 주먹을 부르쥐었다. 처참했다. 그 처절한 괴로움 속에서도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솟아올랐다. 8 미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나도 들을 만큼 들었어요. 이젠 한마디도 더 용납할 수 없어요! 나와 스티브가 언니 부부의 면전에서 추잡스러운 정사라도 벌였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당신은 지금 평생을 알고 지낸 내 주변 사람들을 싸잡아서 바보로 만들고 있어요!」 세자르는 적지아니 놀란 표정이었다.「글쎄, 그 점만은 믿을 수도 있겠군」 「그런데 나머지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이죠? 스티브가 왜 그렇게 당신을 증오하는지 알기나 해요? 스티브와 난 4년 동안이나 데이트를 하면서도 가벼운 작별 키스조차 못 나눴어요! 그러나 당신은 만난 지 겨우 석달 만이었죠! 스티브는 정말 참기 어려웠다고 했어요! 그 시시한 남자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거죠!」 「미나…」 「그래도 내가 여기서 당장 스티브의 침대로 뛰어갈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요. 내가 스티브에게 전화를 해서 그렇게 말할까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스티브는 흐뭇해할 거예요. 그렇지만 감히 날 아무 남자나 건드릴 수 있는 여자 취급을 해요?」 세자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난 그렇게 말한 게 아냐」 「아니, 천만에! 표면적으로는 그러싸했지만 들치고 보면 그게 그거 아녀요? 당신은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방법조차 잊을 정도로 자기 욕심에만 눈이 멀어 있었어요!」 「당신을 흥분시키기 위해서 였지」 미나는 기가 막혔다.「지금 내 얘길 듣고나 있는 거예요?」 「듣고 있었지. 당신은 내가 믿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것만 말했고…」 마지막이었다. 여기서 계속 자기 입장을 변호하려 든다면 이번에는 또 어떤 오해를 할지 모른다. 미나는 맥이 풀려 버렸다.「그렇군요. 난 결국 시간 낭비만 한 거예요. 꼭 여기서 자야겠어요? 아니면 당신이 건 지저분한 내기에 이기게 해 준 상을 줄 건가요?」 「그건 농담이었어」 「농담이 아니라 모욕이었죠」 침묵이 흘렀다. 「모욕이었군」뜻밖에도 세자르는 순순히 시인했다. 「당신은 날 증오해요」 미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때로는 그래…」세자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상하리만치 침착한 태도였다.「하지만 4년 전에는 모든걸 가질 수도 있었지. 당신은 음모를 꾸미는 데 골몰하느라 실제 자기 코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몰랐어. 엄청난 소득을 올릴 수도 있었는데 보잘것 없는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했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알고 싶지도 않다. 이미 두사람 사이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진 후였다. 잊을 수 없는 결혼 첫날밤이었다. 이젠 그녀가 무슨 말을 하건, 어떤 행동을 하건 세자르는 믿지 않으리라는 게 확실해졌다. 「난 당신을 사랑했지」 미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아뇨… 아니었어요」 「홍콩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난 벼락을 맞은 것처럼 깨달았어」 미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아뇨. 당신은 날 사랑한 게 아녀요」 「미친 듯이 사랑했지. 결혼식, 신혼 여행, 축복 같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더군」 미나야말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복권에 당첨되었 는데 그 복권이 하룻밤 사이에 온 데 간 데 없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 동안 그녀는 세자르가 하룻밤의 노리 개로 자신을 이용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세자르의 고백은 그녀를 일시에 무너뜨렸다.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왜 이런 부당한 일이 벌어져야 하는 걸까.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요」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래, 그리 길지는 못했어」세자르도 동의했다.「하지만 그래도 당신의 내부자 거래에 관한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어」 「아니, 그럴 수 없어요! 절대로! 만일 당신이 결혼 전에 단 한번이라도 수지가 없는 자리를 만들었다면 난 당신이 갖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둘은 공범이야」 「뭐라구요?」 「내가 증거들을 없애 버렸으니까…」 「뭐라구요?」 「생각해 봐. 당신은 내 아이의 엄마이자 내 아내야. 당신의 범법 사실을 증명하는 기록을 보관한다는 건 미친 짓이지. 우연히 다른 사람 눈에 띈다고 생각해 봐. 그런 위험은 더 이상 감수 할 수 없었어. 당신이 내 아내인 이상은 보호해야 하니까…」 그녀는 할말을 잃었다. 세자르는 법이라든가 질서에 관한 한 엄격한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이었다. 물증을 없앴다고? 결코 편안한 마음으로는 하지 못했을 일이다. 그런 면에서 둘이 공범이라고 한 세자르의 말투에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른 자책이 숨어 있었다. 그녀가 수지의 엄마이기 때문에 세자르는 그녀를 보호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난 그 물증이라는 걸 봐야 해요」 「그래야 확실한 변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물증을 없애 버린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야!」 「더 이상의 거짓은 용납할 수 없어. 이미 지겨울 정도로 들었지. 돈에 관해서라면 당신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어디다 뭉칫돈을 숨겨 놓았을 것 같지도 않고…」 미나는 심호흡을 했다. 「난 그런 짓 한 적 없어요. 당신은 내 결백을 증명할 기회를 쥐야 했어요」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그런 헛소리를 하면 할수록 내 분노를 부채질할 뿐이야. 그 문제는 당신이 진실을 고백하기 전까지는 두 번 다시 언급하지 말아. 그만 뒤!」 만일 베개라도 손에 잡혔으면 그대로 집어 던졌을 것이다. 마지막 기회마저 잃은 미나는 부글거리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분명해졌다. 세자르는 여전히 그녀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결심인 것이다. 당국에 고소하지 않는 이유도 어쩌면 자기 손으로 벌을 주고 싶어서 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증거를 세자르에게 제공한 사람은 과연 누굴까? 너무 갑작스럽게 진행된 일이 었다. 그리고 문제의 5만 파운드는 그녀의 계좌에서 인출된 후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은행으로 문의를 해 볼까? 하지만 은행 측에서 순순히 자료를 공개할지도 의문이고, 그렇게 오랫동안 기록이 보존되어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 현금이 넘어간 계좌의 주인이야말로 범인 아니면 공범일 확률이 높다. 단순히 현금이 미나의 계좌에서 빠져나갔다는 사실만을 확인시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세자르는 그저 어딘가로 빼돌렸을 거라고만 생각할 게 뻔하다. 그녀는 튕기듯 침대에서 일어나 잠옷을 꺼내 입고 세자르의 침실로 달려갔다. 방안은 어두웠지만 욕실에서는 희미한 불빛과 함께 물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미나는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를 켰다. 잠시 후 세자르가 머리를 털며 나왔다. 그는 우뚝 서더니 그녀를 아래 위로 훑어보았다. 그제서야 미나는 상대방은 나체고 자신은 잠자리 날개 같은 잠옷밖에 입은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리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그녀의 귀에도 어설프게 들리는 음성이었다.「난 진지하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왔어요.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이 들어주는 일뿐이에요」 그가 수건을 던지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맥빠지는 행동이긴 하지만 미나는 참아보기로 했다. 그녀는 자기 계좌로 들어 왔다가 빠져나간 현금 얘기를 했다.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얘기를 끝내자 그는 어슬렁어슬렁 걸어가서 문을 닫았다. 「왜 아무 말도 안해요?」 「상당히 재빠르고 영리하군. 4년이나 지난 후에 입증하기란 어려운 일 아닐까?」 「그래서 당신이 도와주면 어떨까 싶어요」 「이런, 내가 그렇게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나?」 미나는 얼굴이 빨개졌다.「아뇨, 바보로 보여요! 어리석고 이기적인 고집쟁이로 보여요! 정말 지긋지긋하군요」 「그래서 그런 기절초풍할 옷차림으로 여기까지 왔어?」 「뭐라구요? 이런 자루 같은 잠옷이 유혹적이라는 거예요?」 「오호… 입은 사람이 당신이라면 문제가 다르지」그가 천천 히 다가왔다. 「저리 비켜요! 설마 내가 여기 온 이유가…」 「같이 자려고 온 줄 알았는데 아닌가?」그는 팔을 뻗어 그 녀의 허리를 감았다.「자기가 지어낸 동화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내며 나가도록 놔둘 줄 알았어?」 미나는 손을 뿌리치려고 애를 썼다.「지어낸 얘기가 아니란 말예요!」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다른 한 손까지 동원해서 그녀를 단단히 묶어놓았다. 「나요!」 「난 또 당신을 갖고 싶어」그가 숨을 할딱거리고 있는 미나의 입술을 덮쳤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무의식 중에 입을 벌렸지만 세자르는 장난이라도 치는 듯 입술을 뗐다. 안타까운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신이 애원하며 매달리게 만들 수도 있어」세자르가 목쉰 소리로 속삭였다.「그렇지만 나도 참을 수가 없는걸」 그가 한 손을 그녀의 엉덩이에 얹고 자기쪽으로 거칠게 끌어 당겼다. 그는 이미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얇은 잠옷은 쓸모 없는 방어벽에 불과했다. 그의 손이 어깨에 걸린 가느다란 끈을 벗겨 내렸다. 미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뜨거운 입김이 훅하고 볼에 닿았다. 그는 부풀어 오른 미나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천천히 가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비틀었다. 자신의 몸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들어 올리더니 마침내 격렬한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세자르가 동물 같은 신음을 토하며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숨이 차서 현기증을 일으킬 때까지도 세자르의 키스는 멈출 줄을 몰랐다. 「이번엔… 당신은 정말 내 거야」세자르는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글거리는 황금색 눈동자가 승리의 쾌감에 취한 야만인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만지고 있는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완벽하게 내 거야」세자르가 머리를 숙이는가 싶더니 짜릿한 전율이 가슴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쳐들었다. 매끄러운 세자르의 어깨가 느껴졌다. 그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미나는 벼랑에서 떨어지기 직전의 사람처럼 정신없이 그의 가슴에 매달렸다. 자신의 손이 닿을 때마다 세자르의 근육이 팽팽히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헤매 다니던 그녀의 손이 세자르의 허리 부근에서 멈췄다. 「아니, 계속해」세자르가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그는 고통에 찬 환자 같은 음성으로 자기가 원하는 일을 미나에게 요구했다. 미나는 어쩔 줄 모르고 얼굴만 붉혔다.「난… 저…」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세자르가 고개를 꺾으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야」그는 알아듣지 못할 이탈리아 말로 몇 마디 중얼거렸다.「당신도 가끔은 진실을 말하는군…」 그녀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세자르는 다급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를 도로 눕혔다. 세자르의 혀가 가슴사이의 굴곡을 타고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다시는 세자르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던 의지는 어디로 갔을까.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미나는 온몸을 한꺼번에 삼켜 버리는 듯한 파괴적인 열정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흐느끼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세자르…」 문이 열리는 소리에 미나는 화들짝 잠에서 깼다. 잠결에도 그녀는 허겁지접 시트를 끌어다가 몸을 가렸다. 어제 만났던 줄리아라는 젊은 하녀가 뭔가 잔뜩 올려놓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본조르노, 시뇨라」 「본조르노」미나는 주위를 힐끔 둘러보았다. 세자르의 침실, 세자르의 침대…. 줄리아가 커튼을 젖혔다.「목욕물을 틀어 드릴까요. 시뇨라?」 「아뇨, 괜찮아요」자신의 귀에도 어딘지 모르게 들뜬 듯한 음성으로 들렸다. 주위에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과일 주스를 마시다 말고 어제 밤의 기억이 되살아나 미나는 헛기침을 했다. 제발로 세자르의 침실을 찾아간 게 전혀 엉뚱한 결과를 낳고만 것이다. 그렇다고 세자르에게 왜 자신의 항의를 귀담아 듣지 않았느냐고 따진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침실은 세자르의 홈 그라운드였다. 번번이 무릎을 꿇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가 4년 전에는 그녀를 사랑했다고 말했을 때. 미나의 가슴속에는 갖가지 어리석은 희망들이 피어났다. 그러나 세자르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단점들까지 눈감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홍콩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깨달았다고? 스스로도 의미없는 쾌락에 식상한 나머지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거겠지. 그러면서도 닷새 동안 전화 한번 하지 않았잖아. 사실 그가 사무실을 비울 때는 늘 전화를 끊어놓긴 하지만…. 마치 온 세상이 정지한 것 같았다. 그리고 닷새째 되던 날 그녀에게 날아온 것은 해고 통지서였다. 그래. 자긴 날 사랑한다고 믿었을지 몰라도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 그는 이미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원했다고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석 달 동안 그 욕망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고, 그래서 다른 여자들과 어울려 허기를 달랬다 고까지….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자 그녀를 자기 침대로 끌어들인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이미 자제력을 잃은 상황이었다. 미나는 그가 사랑이라고 표현한 감정이 강렬한 육체적 욕구를 그럴 듯하게 미화한 것이라고밖에는 해석할 수 없었다. 혹시나 운명이 그들에게 그 이상의 시간을 허락했다 할지라도 그는 곧 싫증을 내고 말았을 것이다. 문이 열렸다. 세자르를 보자 손이 떨려서 찻잔조차 제대로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침대 발치로 걸어오더니 빙긋 웃어 보였다. 입을 열 필요조차 없다는 거겠지! 「저쪽 방의 바리케이드를 치웠어」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미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찻잔을 다시 집는 척했다. 딱 달라붙는 청바지와 흰 폴로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혼자 보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아주 볼 만한데…」그가 은근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볼 만하다고… 머리는 엉망이 되고 화장을 지우지도 못해서 눈가는 시커멓고 온몸이 엉망인데? 마음속으로 그녀는 자신의 약한 의지를 저주했다. 결혼 생활이 불행하다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기약 없는 사랑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였다. 흘끗 눈을 둔 그녀는 세자르가 몹시 들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러다가 샴페인이라도 들고 와서 터뜨리자고 하는 건 아닐까? 「왜 그렇게 싱글거려요?」 「솔직한 대답을 원해?」 「지하 감옥이나 쇠사슬이 준비됐어요?」 「역시 금욕이란 단어는 안 어울려」 미나는 할말을 잃고 싸늘하게 식어 버린 커피만 꿀꺽꿀꺽 삼켰다. 결혼은 했는데 도무지 결혼을 했다는 실감이 들질 않는다. 문득 자기가 집어 던졌던 반지가 생각났다. 무의미한 상징에 불과한 물건이다. 세자르가 결혼을 제안한 최초의 원인은 자기 딸을 얻기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그가 솔직하게 나왔다면 미나는 결혼은 상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 전의 그의 행동을 돌이켜 보면 충분히 경고를 한 셈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는 그저 미나를 이용한 것에 불과했다. 런던에서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대가는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 값이 결혼으로 치러진 것이다. 소름이 돋았다. 비록 결혼을 원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세자르는 지금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모두 손에 넣은 것이다. 수지를 가졌고, 수지에게 꼭 필요한 엄마를 가졌고,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분출시킬 수 있는 대상을 가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흡족할 수밖에…. 아내? 천만에, 그녀는 정부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이제 시실리의 촌구석에 처박아 놓았으니 그녀의 감정이나 요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돈에 혈안이된 사기꾼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남자에게 무릎을 꿇음으로써 자신의 자존심마저 배신한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클레이턴과 자지 않았다는 사실도 인정하 겠어」세자르가 여유만만하게 중얼거렸다.「어떤 게임을 즐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지는 않았군」 하, 적어도 한가지는 믿는 게 생겼군! 하지만 너무 늦었다. 자기가 유일한 남자라는 걸 알고 세자르가 얼마나 즐거워 했을지를 생각하면 미나는 경솔하게 쏟아놓은 자신이 원망 스러울 뿐이었다. 차라리 혼자 속이나 끓이도록 내버려 둘 걸. 진실을 알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미나의 담백한 성격이 그만 화를 자초한 것이다. 내가 이러다가 과연 어떻게 될까? 「오늘 하루는 뭘 하고 지낼 거지?」미나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태연하게 물었다. 「상복을 입고 벼랑에서 뛰어 내릴 거예요」 「별로 재미는 없겠군」 「재미? 재미 같은 걸 따지고 있을 기분인 줄 알아요?」 미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난 이용당한 기분이 들어요. 서글프고 비참할 뿐이라구요」 그녀는 쟁반을 밀어놓고 침대에서 뛰어내려 자기 방으로 향했다. 「미나!」 「제발, 날 좀 내버려 둬요!」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참는데도 한계가 있어. 미나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를 사랑한다고 해서 무조건 굴복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가 수지를 위해 결혼을 결심했다면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수지의 엄마인 그녀를 모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 때문에 고백을 강요당하는데도 신물이 났고,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당하는 것도 지겨웠다. 이건 결코 정상적인 결혼이 될 수 없었다. 어느날 기적이 일어나서 세자르가 그녀를 결백한 희생양이라고 생각하게 될 리도 없었다. 그녀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마저 없애 버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단 한번도, 단 1분도 그녀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가 그런 식으로 밀고 나온다면 미나도 자신을 방어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했다. 한시간쯤 후에, 그녀는 자기가 갖고 온 반바지와 블라우스를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미 그가 사 준 옷들은 단 한벌도 남기지 않고 세자르의 침실 바닥에 내던진 후였다. 그녀는 줄리아를 통역 삼아 부엌으로 가서는 집안을 구경 하고 싶다고 했다. 알고 보니 파올로는 마리아의 남편이었 다. 집안을 구경시키는 일 같은 것은 파올로의 몫인 모양이 었다. 영어와 이탈리아 말이 뒤죽박죽이었지만 다들 미나의 발음을 고쳐 주기도 하고 줄리아의 서툰 통역에 배를 쥐고 웃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여기 있었군」 주위가 조용해졌다. 문간에 나타난 세자르를 보자 미나의 얼굴은 일시에 굳어졌다.「공식적인 관광이었어요」 「내가 데리고 다닐 생각이었어」 「보시다시피 그럴 필요는 없겠군요」 다른 사람들은 눈치 빠르게 사라졌다. 세자르는 눈썹을 찡긋했다.「이번엔 또 뭐야?」 「더 이상은 당신 아내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미안하지만 24시간으로도 충분하고 넘치는 군요」 미나는 허리를 꼿꼿이 폈다. 세자르의 표정이 험악해진 다해도 두려울 게 없었다.「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 법이에요, 세자르. 당신의 편견을 바꿔놓을 수는 없다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죠. 더 이상은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건, 당신이 무슨 말을 하건, 당신이 어딜 가건 나와는 무관한 일이에요!」 「난 아무 데도 안 가」 「곧 마음이 변할 걸요. 개인적인 즐거움을 원한다면 말예요 . 그렇다면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거예요. 난 당신과 결혼한 게 아니니까요」 세자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별 우스운 소릴 다 듣겠군」 「당신을 웃기기나 하려고 하는 얘기가 아녀요. 사실은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어서 당신에게 두번 째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누가 누구한테 기회를 줘?」 「그런데 당신은 하룻밤 사이에 그걸 날려 버렸어요. 난 우리 결혼을 정상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결심이었어요. 온갖 협박과 당신의 오해가 빚어낸 복수의 환상 따위로 시달리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뭐?」 「난 당신이 혐오스러워요!」미나는 더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동굴 속에서 굻어 죽게 된다 해도 당신의 그 알량한 용서는 구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 당장 당신이 바닥에 꿇어 엎드려서 자기가 한 짓을 용서해 달라고 빈다해도 마찬가지예요! 당신하곤 끝났어요. 완전히 끝장이에요!」 무시무시한 침묵이 흘렀다. 짙은 눈썹 아래의 황금색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미나가 아직도 숨을 몰아 쉬고 있는데 세자르는 느닷없이 폭소를 터뜨렸다. 건초더미에 성냥을 그어 댄 꼴이었다. 미나는 따귀를 올려 붙이려고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날렵하게 몸을 피한 세자르는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그는 힘도 들이지 않고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내려 놓지 못해!」 세자르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빙글거릴 뿐이었다. 그 미소가 미나의 화를 더욱 부채질했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어느 틈에 세자르가 자신을 바싹 끌어 당겨 안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려… 놔요」 「정말이지 당장 키스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군」세자르의 속삭임에 미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무… 무슨, 어림도 없는…」 세자르는 강제로 그녀의 양손을 자기 어깨 위에 올려 놓더니 미나의 엉덩이를 슬며시 끌어 당겼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턱을 지나 입 언저리로 거슬러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과 싸웠다. 지금 질 수는 없다. 어찌된 셈인지 돌연 눈물이 솟구쳤다. 자신의 약한 의지가 원망스럽고 툭하면 이성을 잃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원한다는 게 이토록 큰 괴로움일까. 세자르는 바로 그걸 미나에게 가르친 것이다. 세자르가 그녀를 도로 내려놓았다.「마나?」몹시 놀란듯한 말투였다. 미나는 눈물을 훔쳐냈다.「난 당신이 미워요!」오, 이런 모순도 가능한 걸까…. 9 미나는 계곡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택 주위는 무성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시선을 돌려 보면 올리브와 오렌지, 레몬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과수원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철제 벤치는 늙은 너도밤나무 그늘아래 있었다. 멀리서 염소들이 우는 소리가 이따금 정적을 깨뜨렸다. 미나는 한숨을 쉬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렇지가 못했다. 세자르와는 어제부터 마주치질 않았다. 저녁 식사도 혼자 방에서 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면서, 그녀는 세자르에게 맞선다는 것은 곧 그를 잃는 것이라는 괴로운 결론에 도달했다. 발 소리가 나서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몇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세자르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 뒤를 밟은 걸까? 「여긴 증조 할머니께서 좋아하시던 장소지」그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내가 열세 살 때 돌아가셨어. 그후로도 난 여기 오면 그분과 가까이 있는 것 같은 착가에 빠지곤 했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색으로 치장한 모습이 보이곤 해. 아주 쾌활하고 기지에 넘치는 분이었는데」 「당신은 자기 가족 얘길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증조 할머니가 가장 중요한 분이셨어 세자르의 눈길이 계곡으로 향했다.「조부모님이 자동차 사고로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를 키우신 분이야. 잇달아 태어났어. 부모님들은 함께 살긴 했어도 결코 행복하진 않았지」 예상외의 고백이었다. 자기 부모님들이 그랬듯이 수지에게도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거라고 말했으면서…. 세자르가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돌아보았다.「믿거나 말거나지만 난 같은 일이 우리 사이엔 없기를 바라. 수지를 위해서 그런 희극은 필요하지 않아. 어린아이의 눈은 속일 수가 없지. 그앤 부모 사이가 냉랭하다는 걸 눈치챌 거야」 미나는 고개를 숙였다. 세자르의 말은 예기치 못했던 충격이 었다. 무슨 얘길 하고 싶어서 이런 말을 꺼내는 걸까? 서둘러 결혼은 했지만 천천히 생각해 보니 역시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말하고 싶은걸까? 「우리가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는군요」 「아냐…」세자르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실수를 저지른 건 나야」 그녀는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고개를 돌린 그의 입가에 잔잔한 격련이 이는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글쎄, 위로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당신 외엔 어느 누구에게도 이렇지 않아. 과거는 깨끗이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사보에서 당신을 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더군. 4년 전에 당신은 날 눈먼 사춘기 소년처럼 만들어 놓고 떠나 버렸어. 난 비참했지. 어쩌면 지금부터 우리의 역사를 다시 써보려고 했는지도 몰라…」 「그래요」미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말투나 표정으로 봐서는 당시 세자르의 감정이 단순히 상처입은 자존심 때문에 괴로워한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설사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몹시 상처를 받고 모욕을 당한 것처럼 느낀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그녀를 믿어 주지 않는다면 그녀로서도 그 참담한 기분을 어루만져 줄 방법은 없다. 둘 사이에 항상 존재하는 장애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이 문제였어. 당신과 마주치자마자 난 내가 변함없이 당신을 원한다는 걸 알았어. 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 라는 걸 알았디. 비록 내가 달갑지 않은 과거의 망령이긴 해도 말이야」 「난…」자존심이 고개를 쳐들었지만 부인할 수도 없는 문제 였다. 맞아, 그 타는 듯한 갈증은 일방적인 게 아니었어. 개와 고양이처럼 싸우면서도 그 갈증만은 어쩌지 못했지. 「당신이 자기가 한 짓을 인정하기만 했어도 난 그렇게 행동 하지 않았을 거야」미나가 막 입을 열려고 하자 그는 손을 들었다.「그 애기는 또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과거는 과거로 족해. 딱딱한 도덕률을 설교할 필요는 없겠지. 난 늘 풍족하게 살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지장이 없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몰라. 당신이 유혹을 느낀 건 이해해」 「그렇지만 난…」 「이봐,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어? 이렇게 자꾸만 과거를 들추는 게 우리 사이를 점점 더 갈라 놓는다는 걸 모르나?」 「우리에게 갈라질 관계라는 게 있는 지나 모르겠군요」 끝없이 지루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세자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수지 일로 난 무너지고 말았어…」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수지가 태어났을 때 알렸어야 하는 건데…」 「처음부터 내가 함께 있었어야 했어. 그렇지만 이젠 그애가 있어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 그날 오후에 내가 한말에 대해서 는 사과하지. 난 수지의 존재를 숨긴 당신을 두들겨 패 주고 싶은 심정이었어. 그날은 당신이 내 적처럼 느껴지더군」 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클레이턴이 덤벼들더니 그 다음엔 당신 언니가 날 호색한으로 몰아붙였지. 그런데 느닷없이 수지가 나타난 거야! 놀란 것도 놀란 거고 당신한테 겉잡을 수 없이 화가 났어. 그런 기분을 결혼 전까지 질질 끌고 가느니 차라리 당신을 무시하고 수지에게만 집중하는 편이 쉽더군」 자기가 그토록 비참하고 화가 났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 세자르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미나는 알고 있었다. 우습게도 견디다 못한 미나가 먼저 화를 폭발시킨 게 세자르의 고백을 끌어내는 게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수지를 생각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우울했던 유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수지의 생활을 그렇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언니네 집에서는 둘이서만 있을 시간도 없었잖아요」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미나는 둘 다 그런 기회를 만들지 않으려 고 애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나 입장에서 보면 자존심 탓이기도 했고, 세자르에게 충격을 가라않힐 여유를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여기선 그런 문제가 없어. 그렇지만 현실을 똑바로 봐야지. 우린 평범한 신혼 부부와는 거리가 멀어」세자르가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렸다.「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꼭 여기 머물 필요도 없어. 해안에 있는 별장을 써도 되지」 드디어 양보하는구나. 세자르는 그녀에게 내릴 형벌을 포기한 것이다. 미나를 다치게 하면 수지 역시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엄격한 원칙을 굽히고 딸을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안타깝지만 너무 늦었어…. 「미나?」 「당신 좋을 대로 해요」미나는 어떻든 상관없다는 토로 응수했다. 「정말… 아주 좋군요」가느다란 밧줄을 연상시키는 반지를 보자 미나는 현기증이 일었다. 이게 진짜 밧줄로 변해서 세자르의 목을 조를 수만 있다면…. 그녀는 얼른 상자의 뚜껑을 닫아 버렸다. 카르체…. 이번에는 모조품일 리가 없겠군. 그래 봐야 무의미한 상징일 뿐이야. 「끼어 봐」 「나중에요」그녀는 상자를 핸드백 속에 집어넣었다. 세자르가 준 다른 선물들과 함께 서랍 속으로 들어갈 물건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벌써 멋진 금 시계와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가 박힌 팔찌도 선물했다. 아, 참, 유리 상자에 든 기괴한 형상의 물고기 박제도! 프레디라고 이름을 붙인 그 물고기는 미나가 세자르를 한번 떠보려고 시도한 물건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걸 뭐든 사줄 용의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바로 어제 골동품 상점에 서 그의 생각을 시험해 본 것이다. 세자르는 안색이 변했지만 그래도 엄청난 값을 치르고 그 물고 기를 사 주었다. 게다가 미나의 비위를 맞출 생각이었는지 보기 드문 물건이라고까지 했다. 한 술 더 떠서 미나는 이런 물건들을 수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세자르가 우린 평범한 신혼 부부가 못된다고 한 후로도 열흘이 지났다. 맞아. 확실히 아냐. 단둘이 호젓하게 지내기 보다는 시시한 관광에나 열을 올리고… 꼭두새벽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세자르는 힘이 넘쳐서 돌아다녔고 미나는 관심도 없는 성곽과 사원들을 보느라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며칠 간은 해안에 있는 세자르의 별장에서 지내기도 했다. 저녁이 되면 으레 외식을 했다. 수지는 대화의 방향이 위험한 쪽으로 흐를 때마다 손을 내밀어 주는 구세주였다. 그리고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닌데 각자의 침대로 들어 가 따로따로 잠이 들곤 했다. 「난 당신이 결혼 반지를 끼고 다녔으면 좋겠어」 명령에 가까운 말투였다. 그나마 열흘 동안이나 참고 견뎠다는 게 기특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발톱을 숨긴 채 사슬에 묶여 있는 호랑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미나가 느끼는 부담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미나는 그가 자기에게 곧 싫증을 낼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수지를 위해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려 애쓴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미나」 「반지끼기 싫어요」 잠시 그의 눈이 번쩍 빛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나는 선글라스 속에서 안심하고 그를 관찰할 수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잘 생기고 관능적이고 그녀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 남자를…. 세자르는 자기 입으로 절대 충족시킬 수 없을 거라던 갈증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은 모양이었다. 세자르에게 있어서 그녀는 이제 물고기 프레디만큼이나 흥미없는 존재였다. 그가 손가락을 튕겨서 계산서를 청했다. 천천히 일어나서 옷을 추스르는 유연한 동작을 그녀는 빠뜨리지 않고 지켜 보았다. 완벽하게 재단이 된 고급 양복은 근육질의 미끈한 몸매를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다. 「왜 그래?」 「아, 아녀요!」 「내 친구들을 좀 만나 볼 때가 된 것 같군」예고 없는 선언이었다.「문 앞까지 와서 그냥 간다는 것도 섭섭하고…」 그는 휴대폰으로 어딘가 통화를 하더니 차에 올랐다. 그가 가슴이 철렁해질 정도로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프랭카 남매를 만나면 재미있을 거야. 프랭카는 배우고 오빠인 로베르토는 연출가지」 에치오 빌라는 마치 영화의 세트 속에 나오는 저택처럼 보였다. 궁전처럼 웅장한 저택 안은 인조 대리석과 화려한 금박을 두른 가구들로 눈부시게 꾸며져 있었다. 막 현관으로 발을 들여놓는데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기막힌 미인이 나타났다. 미나보다 목 하나쯤은 크고 검은 머리칼은 허리까지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다. 표범무늬의 하늘하늘한 미니 스커트를 보자 미나는 머리가 띵해졌다. 선글라스 덕분에 표정을 감출 수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자는 미나를 본 척도 않고 다가와서 세자르에게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음… 프랭카…」세자르는 조금도 어색해 않고 그 녀를 끌어 안은 채 움직이지도 않았다. 프랭카의 입에서 노랫소리 같은 이탈리아 말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세자르의 허리를 감고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세자르도 뭔가 열심히 대꾸를 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녀가 미나 쪽을 돌아보았다. 「티나는 옷을 갈아 입어야 하지 않을까요?」그녀는 미나의 소박한 노란 원피스를 훑어보며 딱하다는 듯 한마디 던졌다. 완벽한 영어였다. 「미나가 맞아요」 그러나 프랭카는 벌써 옆에서 기다리던 하녀에게 손짓을 하고 세자르를 향해 돌아선 후였다.「영국인들은 옷 고르는 솜씨가 형편없군요」짐짓 속삭이는 척 했지만 1 마일 밖에서도 들릴 음성이었다.「어디서 찾아낸 보물이 에요?」 미나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하녀가 휴게실로 그녀를 안내했다. 세자르가 자기 아내라고 소개조차 하지않고 프랭카를 따라 가버렸다는 사실이 믿어지질 않았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두 해나 묵은 원피스를 바라보았다. 아침에 입고 나설 때만 해도 다림질이 잘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주름 투성이다. 미나는 기가 죽었다. 처음으로 세자르가 사 준 옷들을 거부한 게 얼마나 치기어린 행동인지 실감한 것이다. 아내라고 하기에도 창피할 정도의 옷차림이 ?겠지…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웃고 떠드는 소리를 따라 옥외 수영장으로 향했다. 급사가 내미는 쟁반에서 술잔을 받아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젊은 여자들 셋이 가슴을 드러낸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맙소사, 난 저런 상태로는 남 앞에 나서 본 적도 없는데… 정말이지 시선을 어디다 뒤야 할지 모르겠네. 세자르는 몇몇 남자들과 프랭카를 거느리고 한쪽 구석의 테이블에 않아 있었다. 미나를 보자 프랭카가 벌떡 일어났다. 「티나…수영복을 골라 보죠」그녀는 끌다시피 미나를 탈의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내 이름은 미나에요」 「뭐든 간에…」프랭카는 옷장을 열 생각도 않고 그녀를 노려보았다.「세자르의 비서나, 뭐, 그런 여자죠?」 「아녀요」 「친척이에요?」 「아뇨, 우리…」 프랭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이가 설마…」 「네?」어리둥절한 쪽은 오히려 미나였다. 「내가 차를 불러줄게요. 댁은 지금 당장 가야 돼요」 프랭카가 이를 악물었다.「내가 촬영 때문에 여길 비우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세자르는 내 거예요!」 「내 생각은 그렇지가 않은 데요」 프랭카가 이탈리아 말로 뭔가 쏘아붙였다. 불룩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걸로 봐서는 보통 하가 난 기색이 아니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가지말고 내가 어떻게 하는지 구경이나 하시지」 「기다리고 싶지 않아요」 「이불 속에서의 세자르는 살아 있는 신화야. 침대에선 동물이라고 들었어요. 당신은 내 적수가 못 돼」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프랭카는 나가 버렸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미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기세가 등등했지만 프랭카는 아직 세자르와 한 침대를 써보지 못한 게 틀림 없었다. 샴페인 잔을 단숨에 비우고 그녀는 옷장을 열었다. 형형색색의 수영복들이 그득하다. 갑자기 노란색 원피스가 지긋지긋하게 싫어 졌다. 10분쯤 지나자 그녀는 아슬아슬한 검정색 비키니 차림으로 탈의실 문을 나섰다. 「이런, 이런!」난생 처음 보는 남자가 자기 테이블 앞을 지나치려는 미나의 손목을 낚아챘다. 미나는 말문이 막혀서 그를 내려다 보았다. 「내가 이집 주인인 로베르토 에치오요. 내 동생과는 정반대로 난 영국 여성을 좋아하지」그는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하고 당장에라도 그녀를 녹여 버릴 수 있다는 듯 기막혀 미소를 지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미나는 폭소를 떠트리고 말았다. 그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세자르를 사랑하시오?」 「별걸 다 묻네요」그녀의 시선은 프랭카와 세자르가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얘기를 나누는 테이블을 더듬고 있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저택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그녀라는 존재는 세자르의 머리 속에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에게 빠진다는 건 감정의 낭비요. 아가씨. 세자르는 한 여자에게 충실할 타입이 아녀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지. 당신은 결코 그를 붙잡을 수 없소. 세자르는 그 방면에는 프로야」 미나는 긴장했다.「그이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학교 다닐 띠부터 친구인 걸」로베르토가 껄껄 웃었다. 「세자르 때문에 나한테 하소연을 한 여자들이 줄줄이 있었지」 「난 그런 짓 안해요」 「하게 될 거요」로베르토가 세자르 자리를 곁눈질했다. 프랭카는 세자르의 턱을 쓰다듬으며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프랭카도 벌써부터 세자르를 쫓아 다니는데, 통 내 말을 안 들어요. 저러다가 뜨거운 맛을 봐야 알지」 「그렇겠군요」세자르를 떼어놓으려고 일부러 오빠를 동원했나? 「세자르는 결혼을 할 사람도 아니오」 「아뇨. 저와 결혼했어요」 로베르코 에치오가 정색을 했다. 「열흘 전에 결혼식을 했어요. 못 믿겠다면 직접 물어 보세요」 「아니, 그럼 대체 무슨 꿍꿍이속이지?」로베르토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 동생한테도 가르쳐 주셔야겠군요」 로베르토는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만나게 되서 대단히 반갑소, 시뇨라 팰콘. 하지만 그런 뉴스를 프랭카에게 알렸다가는 모두들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꼴을 구경하게 될 거요」 로베르토는 그녀의 손을 들어 올리더니 손가락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던 미나의 눈길과 세자르의 눈길이 부딪혔다. 세자르는 프랭카의 손을 뿌리치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는 걸리적거리는 테이블를 밀어 버리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미나만 놀란게 아니었다. 손님들의 시선은 일제히 세자르를 쫓고 있었다. 로베르토가 곁눈질을 하더니 재미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오호라, 질투에 눈이 먼 남편의 등장이로군」그는 느긋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날 치지는 않을 거요. 제일 친구니까…」 그이 예상은 적중했다. 세자르는 그를 때리지 않았다. 그저 물 속에 처박아 버렸을 뿐이지…. 어디선가 여자들의 비명이 들렸다. 로베르토는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허우적거리며 빠져 나오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집으로 가지」세자르가 미나를 일으켰다. 「오… 옷을 갖고 와야 하는데…」 그러나 세자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 었다. 그는 짐짝처럼 그녀를 들어 올리더니 한마디도 않고 걸음 을 재촉했다. 「세자르!」미나는 비명을 질렀지만 비키니의 끝이 풀어지는 바람에 가슴을 가리느라 어떻게 해 볼 여유가 없었다. 페라리는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미나는 슬그머니 그의 얼굴을 훔쳐 보았다. 질투에 사로잡혀 있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하기 세자르와 처음 다시 만났을 때도 그의 표정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세자르는 다른 남자가 그녀에게 눈길만 준다 싶어도 이성을 잃을 사람이었다. 에드윈 해런드, 스티브… 이번에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사람이 어리숙하게도 미끼를 던진 것이다. 스티브에게도 물론 무서운 질투를 품고 있었다. 단 한번도 그녀를 가져 보지 못했다는 말에 내심 얼마나 즐거워 했을까. 얼마나 질투에 불탔으면 이 시실리 시골 구석에 산 채로 묻어 놓고 영국으로 돌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드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을까. 우습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여태 그녀는 자신이 세자르에게 있어서는 전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세자르는 그녀를 잃는다는 걸 참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 그가 억누르려고 애쓰고 있는 격한 감정은 수지와는 상관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프랭카 에치오와는 대체 어떤 사이인 걸까? 어째서 문제를 일으킬 만한 행동을 한 걸까? 그녀를 무시하고 프랭카가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미나는 슬며시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녀의 육감은 세자르가 적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두번 다시 그녀를 무시하지 않을 거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여자가 꼬리를 치는 것도 허락하지 않게 될 거라고…. 다른 남자의 눈에도 얼마든지 매력적으로 비치는 아내를 지키느라 기를 쓰게 될 것이다. 그건 세련되고 교양 있는 태도 속에 감추어진 그의 본능 같은 것이었다. 차에서 내린 그는 그녀를 잡아 끌고 현관을 통과해 2층으로 향했다. 꽃을 꽂고 있던 줄리아가 입을 딱 벌리고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미나의 침실 문을 발로 차 버렸다. 그는 미나를 침대 위에 내동댕이치더니 시근거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미나는 무서워서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아」 그래도 예상보다 훨씬 부드러운 꾸짖음 이었다. 그는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앙목에서 방금 깬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그는 뒷걸음질을 쳐서 수화기를 들었다. 얼굴이 불그레하니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그가 피식 웃었다. 「차오, 로베르토」 그는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미나는 일어나 앉았다. 「오는 말에 가는 말이지」 「뭐라구요?」 「열흘 전에 날더러 다른 여자를 찾으라고 했잖아」 「내가 뭘 어떻게 했다구요?」 「그래서 시험해 본 거야. 당신 반응을 보려고…」 내가 그렇게 실없는 소리까지 했었나? 그래도 세자르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제서야 자기가 세자르에게 즐기고 싶으면 다른 상대를 찾아보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맙소사, 그래서 오늘 오후에 날 떠보려고 한 거야? 「그런데 별로 안 좋아하더군. 음, 전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어. 로베르토가 끼어들기 전까지는 말야…」 「그럴 수도 있죠. 프랭카는 자기 동생이잖아요?」 「내가 프랭카의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않을 거라는걸 누구보다도 잘 알지. 프랭카는 몇 년 전부터 나만 보면 수선을 떨거든. 우리 사이엔 공공연한 장난이야」 「공공연한 장난?」 「아니면 뭐겠어? 스무 살도 안 된 어린애를…」 「뭐라구요? 프랭카가 아직?」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알고 그만큼 유명하기도 하지만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이야」 열아홉 살! 「그렇지만 당신은 내가 그녀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어요! 일부러 날 끌고 간거죠? 그리고 내가 당신이 한눈을 팔도록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날 시험해 보려고? 그 건방진 계집애부터 물에 밀어 넣는 건데? 「그녀는 당신보다 20㎝는 더 크고 몸무게도 15㎏은 더 나갈 거야. 오히려 내가 당신을 꺼내러 뛰어들어야 했을걸」 세자르가 침대 발치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그런데 내가 한눈을 팔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면서 왜 그런 말을 했지?」 「난 당신이 날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날 비웃었 으니까!」 「키스를 하려는데 우는 여자를 비웃을 수 있다고 생각해? 당신도 알잖아!」 「몰랐어요」 「그 이후로는 당신을 건드리기도 두려웠어! 자기가 날 원하지 않는다는 걸 똑똑히 밝혔으니까!」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두 사람 다 자기 자존심만 세우느라 한발도 양보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세자르는 여러 모로 상당히 노력을 한 셈이었다. 「열흘 내내 당신은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단 한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 사실이었다. 성이 난 어린애처럼 그녀는 시종일관 시무룩하기만 했다. 자신의 아픔을 혼자 싸 안고 끙끙 앓고 있었던 것이다. 「난 한번도 당신을 즐겁게 해 줄 수가 없었어」 눈물이 떨어졌다.「난 당신을 원해요. 어떻게 그걸 참아야할지 도무지…」 미나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들었잖아요」 그가 쭈그리고 앉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세자르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미나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그녀는 혼자인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 4년 동안 쌓아 올린 방어벽이 너무 단단했다. 지금에서야 그녀는 자기가 자존심 때문에 마음을 열지 않은 게 아님을 깨달았다. 다시 상처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이다. 누구나 두려우면 쉽게 관대해 질수 없는 법이다. 그의 품에 안겨서 이성을 잃지만 않았어도 사랑한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즉각적인 거부 반응은 칼날처럼 그녀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당신은 내 말을 한마 디도 믿지 않아요」 「배우고 있어」미나가 곧 뿌리치기라도 할까 두려운 것처럼 세자르는 손에 힘을 주었다. 「로베르토가 당신을 용서할까요?」 「아르마니 양복을 빚졌어」 「그 사람은 그져 농담을 한 것뿐이에요」 「알아. 하지만 열흘 내내 긴장하다 보니… 퓨즈가 끊어졌나 봐」 그녀는 갈색으로 그을린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그를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육체적 만족이고,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 수지뿐이라 해도 괜찮았다. 흑과 백 사이에 회색이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자르가 없다는 것은 생의 의미를 잃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스티브에 대해서 할말이 있어요」 「아니, 옛날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안 돼」 그녀는 무심코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 순간 머리 속에서 맴돌던 말들이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오늘 밤은 나와 함께 지내」 그가 눈물에 젖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이제 겨우 네 신데…」 「내가 예약하는 거야」 「무릎을 꿇고 신청하는 거예요?」 「우리가 바른 자세로 앉아서 눈을 마주 보는 건 처음이야」 「수지한테 전화도 해야 하고…」 「내일이면 수지와 같이 있게 될 거야」 그가 부드럽게 그녀를 안았다. 미나는 손을 뻗어 세자르의 얼굴을 매만졌다. 세자르가 그녀를 천천히 침대 위로 내려놓는데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틀어서 부스럭거리 는 신문을 빼내 집어 던지려던 세자르의 얼굴이 갑자기 흙빛으로 변했다. 「왜 그래요?」 이미 세자르는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구겨진 신문을 든 손이 부들 부들 떨리고 있다. 미나는 얼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에요?」 아침에 미나가 읽다만 영국판 신문이었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졸지에 핏기가 싹 가신 얼굴이 새하얗다. 「이거 못 봤어?」 「뭘요?」 그가 신문을 바로 펼쳤다.「이 사진은 시번이야」 「누구라고요?」 「4년 전에 당신이 이용했던 브로커가 사기 혐의로 구속됐어!」 「시번이 브로커라고…」 세자르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왜 그래?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시번이 조사를 받고 있는 거라구! 경찰이 관련 서류를 모조리 압수해서 철저히 수사를 할 거야. 시번뿐 아니라 불법적인 거래에 가담한 공모자들을 기소하기에 충분한 증거를 찾기 위해서!」 「하지만 난 아무 것도…」 「미나!」그가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제발 정신 차려. 정신 차리란 말야. 이런 말은 난생 처음 해 보는 거지만… 정직이 최상의 방책이 아닐 수도 있어…」 10 「우린 아마 평생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야」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 세자르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하필이면 이런 때 당신이 런던으로 돌아온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미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제 밤새 그녀는 눈 한번 붙이지 못했다. 두려움의 근원은 세자르였다. 아무리 결백을 주장한다 해도 그렇지 않다고 믿는 세자르가 있는 이상은 맥이 빠지는 일이었다. 세자르는 갖가지 최악의 시나리오를 끌어다붙이며 그녀가 다시는 영국 땅을 밟아서는 안된다고 우겼다. 그나마 지루한 법정 투쟁을 벌이는 동안 곁에서 자신을 지켜줄 남편이 있다는 게 최소한의 위안이었다. 계속 세자르가 귀찮게 굴었다면 도망치고 싶었을 거야…. 세자르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사람 같았다. 그는 미나가 사실대로 자백했다가는 자신의 아내로 서는 공정한 법의 심판을 받을 길이 없다며 고민했다. 아쉬운 것 없이 사는 대 부호의 아내가 어떻게 동정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전에도 그런 여자들은 평범한 범법자들보다 훨씬 무거운 형벌을 받은 선례들이 있다면 끙끙거렸다. 비록 시일은 걸리겠지만 증거 수집이 끝나면 고소를 면할 길이 없을 거라고도 말했다. 미나는 이러다가 공항 활주로 에서 경찰에게 체포된다 해도 세자르는 놀라지 않겠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경우까지 고려했으니 수지를 데리러 혼자 가겠다고 우겼지…. 미나는 극도의 혼란 상태였다.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려는 찰나 폭풍이 휘몰아친 것이다. 4년 전 자신의 ?을 뒤죽박 죽으로 만들어 놓았던 악령이 되돌아왔다는 것은 더욱 크나 큰 두려움이었다. 일단 세자르가 그녀의 결백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경찰을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세자르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거리는데 그녀가 어떻게 침착할 수 있을까. 세자르는 반쯤 정신이 나가 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그 사실이 더욱 두려웠다. 그만큼 그녀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증거도 되는 것이다. 자기가 결백하다고 되풀이해 본들 무슨 소용일까. 진범이 어느 순간에 툭 튀어나와 내가 한 짓이라고 고백할 리도 없다. 그의 죄는 두 가지였다. 교묘하게 죄를 범하고 그 죄를 그녀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 그렇지만 왜? 왜 누군가 그렇게 귀찮은 짓을 벌였단 말인가? 진범이라 할지라도 4년이나 흐른 후에 자기가 이용했던 브로커가 검거되고 자신의 정체가 밝혀질 위기에 처하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리무진에 오르자마자 그녀는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세자르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난 당신이 이런 일을 겪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어」 「지금 무슨…」 「이렇게 불안한 상태로 지낼 수는 없어. 차라리 선수를 치는 게 낫지. 내가 경찰에 출두해서 내부 거래의 조정은 내가 했고, 당신은 내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하겠어」 「맙소사… 누가 그런 말을 믿겠어요!」 「왜? 가진 사람들이 더 탐욕스럽다는 말도 있어. 상사와 사랑에 빠진 직원이라…. 그만하면 당신이 날 위해서 부정 행위를 저지를 이유는 충분해. 당신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기만 하면 경찰을 설득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야. 자기가 하는 일이 불범이라는 것조차 몰랐다고, 내 명령을 거역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고…」 「그렇다고 당신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수는 없어요!」 세자르가 이를 악물었다.「감옥에 간다 해도 난 버틸 수 있어. 하지만 당신은 안 돼」 그녀는 목이 메었다. 세자르는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타입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설사 수백만 파운드가 긴다 해도 불법 행위를 저지를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에 의해 조종되었다고 믿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뿐인 것이다. 「당분간 수지는 내가 없어도 괜찮을 거야. 그렇지만 당신이 없으면 안 돼.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당신이 임신했다고…」 「임신은 또 뭐예요?」 「내가 당신이 임신했다고 하면 당신을 고소하는 사태까지는 안 갈지도 몰라」 눈물이 솟았다.「그렇게는 안 돼요. 그런 짓을 하게 내버려 두지 않겠어요. 이건 내 문제지 당신 문제가 아녀요!」 「당신은 내 아내야」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예요?」되는 대로 내뱉고 보니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그가 날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수지와 날 보호하는 게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이유에서일까? 「있는 정도가 아냐」그가 갑자기 그녀를 왈칵 잡아당겼다. 미나를 사로잡고 있던 공포는 스르르 녹아 버렸다. 그녀는 따스하고 든든한 남편의 품속으로 몸을 던졌다. 우리 삶은 이렇게 갈라지는 걸까.「그러지 말아요」진심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를 방패로 삼을 수는 없었다. 「미나… 제발 정신 차려」그의 엄지 손가락이 아랫입술을 가볍게 쓰다듬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이 벌어졌다. 「마지막 밤인데 그냥 보낼 수는 없어」세자르가 중얼거 렸다.「난 당신을 원해. 미칠 것 같아…」 그는 미나를 놓아 주고 운전사에게 뭐라고 명령을 내렸다. 「왜 그래요?」 「이 속도로 아파트까지 가려면 한 시간은 걸릴 거야」 5분도 못 되서 차는 어느 고급 호텔의 현관 앞에 멎었다. 어리둥절한 미나의 눈앞에 화려하게 꾸민 침실이 나타났다. 「이건 미친 짓이에요」 「당신과 함께 하는 일은 모두 그래」 세자르가 다급하게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녀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세자르의 재킷이 바닥 으로 떨어졌다. 그 짧은 시간도 견디지 못한 세자르가 자기 손으로 옷을 벗어 던졌다.「언젠가는 이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될거야」 「하지만 오늘은 아니죠」 「그래, 오늘은 아냐」그가 미나의 등뒤로 손을 돌려 지퍼를 내렸다. 원피스가 발치로 미끄러졌다. 하늘거리는 레이스가 달린 화사한 속옷을 보자 세자르가 흡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나도 이만하면 안목이 높은 편이군」 미나는 얼굴이 붉어졌다.「당신이 골랐다구요?」 「결혼식 전에는 쇼핑밖에 할 일이 없었어」 세자르는 미나를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미나의 몸은 세자르만이 줄 수 있는 완벽한 충만감을 향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무도 당신을 빼앗아 갈 수 없어. 아무도!」세자르의 절규가 가슴을 찔렀다. 미나는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벼랑끝에서 한없이 굴러 떨어지는 듯한 아득함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같았다. 「모든 게 엉망인데 이럴 수 있다니 우리도 제정신은 아냐」한참 만에야 나른하게 늘어진 그녀를 감싸 안으며 세자르가 중얼거린 말이었다.「그렇지만 단 몇 시간 동안 이라도 우리 사이를 방해하는 건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 미나는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차에 올랐다. 새로운 기운이 솟는 느낌이었다. 쉴 새 없이 엄습해 오던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았다.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세자르를 잃는 것보다는 경찰과 맞서는 게 훨씬 견디기 쉬울 것 같았다. 물론 그가 자신을 대신해서 경찰에 출두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설사 그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해도 미나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절박하게 그녀를 감싸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가 숨기려고 하는 감정들은 말로 할 필요가 없는 성질의 것들이었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은 깨끗이 사라진 후였다. 세자르는 그녀의 사람이었다. 그녀가 언제나 원해던 식으로… 미나는 이제 두려울 게 없었다. 「몇 군데 전화를 해보겠어」차에서 내리기 전에 그가 말했다. 「그리고 곧장 수지를 데리러 가는 거야. 당신은 내일 아침 첫 비행기로 시실리로 돌아가. 난 경찰에 출두해서…」 「안 돼요!」 「경찰에서 먼저 손을 쓰기 전에 내가 가 봐야 해. 그들은 이미 몇 달 전부터 시번의 뒤를 철저히 캐고 있었을 거야」 세자르가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미나는 손을 뿌리쳤다.「난 시실리로 돌아가지 않아요! 경찰에 출두하겠어요. 당신이 그런 짓을 하는 건 용납할 수…」 그때 운전사가 문을 열었다. 미나는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세자르가 뒤를 따랐다. 그녀가 막 거실로 들어서는데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부인이 나타났다. 우아한 옷차림과 깔끔하게 손질한 은발이 인상적이었다. 「어디 있다 이제 오니?」그녀가 질린 얼굴로 세자르를 다그쳤다.「공항에서 출발한 지가 벌써 5시간이나 지났는데!」 「왜 그러세요?」 노부인이 흐느끼기 시작했다.「네 동생이 체포된 줄도 모르고…」 세자르의 입에서 이탈리아 말이 튀어나왔다. 「세자르, 제발 영어로 해 다오」 「시, 마마, 영어로 말이죠…」세자르가 응접실로 통하는 문을 밀어 젖혔다.「샌드로가 또 뭘 어쨌어요? 자동차 사곤가요? 이번에는 제발 다친 사람이나 없었으면…」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야」 「미나, 소개하지. 우리 어머니이신 루이즈 팰콘 여사야」 「내 말 못 들었니?」새 며느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세자르가 문을 닫았다. 모자만 남겨 두고 자리를 피해줘야 하나 싶어 미나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나저나 어머니가 이탈리아 인이 아니라 영국인이라는 얘기는 왜 안 했을까? 「샌드로가 사기 혐의로 체포됐단다!」 「사기?」 「공범이 있었다는 거야. 그 공범은 어젯밤에 끌려갔고, 샌드로는 오늘 아침에 공항에서 붙들렸단다」 미나는 조각처럼 서 있었지만 머리는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세자르가 헛기침을 했다.「샌드로가 펠릭스 시번과 연관이 되었단 말씀이신가요?」 「단단히 얽힌 모양이더라」루이즈 팰콘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공항으로 떠나기 전에 날 찾아왔어. 겁에 질려서 모든 걸 고백했어」 「그게… 내부자 거래와도 관련이 된 문제던가요?」 세자르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그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야. 보험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부정한 거래에 연루되어 있어. 시번을 앞세우고 샌드로는 뒤에서 돈을 댄 모양이더구나. 하지만 넌 염려할 필요가 없어…」 「제가 염려할 필요가 없다구요? 어머니, 뭘 좀 알고 그런 말을 하세요!」 「샌드로는 팰콘 그룹을 끌어들이지는 않았어, 절대로!」 「벌써 3년 전에 이사회에서 제명을 시켰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네가 그앨 모욕한 거다」루이즈 팰콘이 뒤틀어진 표정으로 내뱉았다. 「그렇지만 샌드로는 그 당시에도 이미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아닙니까?」 「그래,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니? 어쨌거나 네가 여기 있으니 다행이다. 네 변호사가 경찰서에 가 있어. 네가 보석을 신청하기만 하면…」 「여긴 법체계가 틀려요. 공항에서 체포되었다면 당분간은 구치소 신세를 지겠죠. 샌드로는 기회만 있으면 달아날 테니까…」 「세자르… 너 왜 그러니?」 루이즈 팰콘은 장남을 노려 보았다.「우린 네 동생 얘길 하고있는 거야. 그앤 지금 네 도움이 필요해」 미나는 다리가 떨려서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시선을 떨구었다. 결국 4년 전에 그녀를 함정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은 샌드로였던 것이다. 하지만 왜?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고? 세자르에게 들킬 게 두려워서? 아니면 굳이 그녀를 희생 양으로 고른 건 개인적인 감정 에서였을까? 자신의 접근을 번번이 물리치는 그녀에게 화가 나기도 했을 것이다. 그녀가 자기 형과 밤을 지냈다는 것 을 확인한 순간 분노가 폭발한 것일까? 미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전에 샌드로는 한번도 법을 어긴 적이 없어」 「그렇지만 늘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죠」 「그앤 지금 우리 도움과 이해가 필요해? 네 동생이잖니! 그렇게 등을 돌릴 수 있니?」 세자르의 입에서 또 이탈리아 말 이 새나왔다. 「오, 제발 이탈리아 말은 쓰지 마라!」 「이건 라틴어에요」 「뭐든 마찬가지야. 너무 낯설구나, 세자르. 꼭 네 아버지 같아 . 난 널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런데 이젠 가엾은 샌드로가…」 루이즈는 히스테릭한 울음을 터뜨렸다. 미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세자르, 경찰서에 가 보는 게 좋겠어요」 그의 눈은 초점을 잃고 있었다.「내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미나는 세자르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받은 충격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자기 어머니가 왜 그의 충격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샌드로가 나한테 준 기록은 완벽한 증거였어」그가 공허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당신 서명에다가 당신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 은행 계좌의 기록… 문서 위조였군, 테이프도 조작했고 그 은행 계좌는 당신이 말한 것처럼…」 「지금은 아녀요」루이즈가 거세게 우는 바람에 미나는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나중에 얘기해요. 그건 중요한 게 아녀요」 「중요한 게 아니라구?」 「제발 당신이 뭘 먼저 해야 하는지 봐요. 어머니를 위해서…」 「수지가 우릴 기다리고 있어」 「내가 가서 이리로 데리고 오죠. 당신 어머니 곁에 잠깐 있다가…」미나는 한숨을 쉬었다.「저 지경인데 혼자 계시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지만…」 미나는 그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경찰서로 가서 자초 지종을 알아 봐요」 가슴이 뻐근해졌다. 저런 세자르의 모습은 본 적이 없다. 홈에 걸려 멈춰 버린 레코드처럼 그의 사고는 똑같은 궤도를 그리며 맴돌고 있었다.「당신은 아무 짓도 안했어! 그런데도 난…」 「지금은 경찰서로 가서 샌드로의 일부터 알아보는 게 급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미나는 과연 그가 제대로 물어볼 수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어머니를 위한 일이에요」 「시…」세자르의 입가에 비통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렇게 냉랭하고 몰인정하다니… 내가 어쩌다 저런 애를 낳았지?」미나가 돌아오자 루이즈 팰콘의 눈물 어린 호소가 이어졌다.「샌드로하고는 천지 차이야」 세자르 같은 아들이 있는데 샌드로를 편애한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었다. 미나는 커피를 끓이고 티슈 상자를 갖다 주었다. 그 동안에도 시어머니의 푸념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미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묵묵히 듣기만 했다. 한 자식 에게만 눈이 멀어서 다른 자식은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던 어머니를 가진 세자르가 딱하기만 했다. 시간이 흐르자 루이즈는 두통을 호소하며 좀 누워야겠다고 했다. 미나는 딸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난 늘 딸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지. 세자르는 내겐 실망만 안겨 줬어」 「제겐 안 그래요」참을 만큼 참은 미나의 입에서도 드디어 솔직한 한마디가 터졌다. 위노나의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미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저절로 웃음이 새나왔다.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세자르는 드디어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샌드로는 세자르에게 확실한 물증을 제시했고 그녀가 사라진 게 그 물증을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증거로 만들었던 것이다. 세자르가 샌드로를 믿었다고 해서 그를 나무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겨우 하룻밤을 함께 지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가족은 가족이었다. 그가 샌드로를 불신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녀를 본 수지가 총알처럼 뛰어나왔다.「아빠는 어디 있어?」 「곧 만나게 될 거야. 우리 런던으로 가나」 「잘됐구나」석간 신문에 실린 샌드로의 기사를 읽고 있던 위노나가 거들었다.「세자르는 어떻든?」 「말도 못하게 놀랐어」 「당연하지」위노나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해. 나만 해도 다른 사람보다 네 말이 옳다고 생각하거든. 그렇지만 세자르는 지금 지진이라도 만난 기분일 거다」 미나와 수지는 저녁 늦게야 세자르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수지는 반쯤 졸고 있었기 때문에 미나는 아이부터 침대에 눕히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루이즈가 잔뜩 화가 난 음성으로 전화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중이었다. 바들바들 떨며 수화기를 집어 던진 그녀는 문간에 서 있는 미나를 발견하자 고함을 질렀다.「난 여기 못 있겠어! 난 샌드로의 아파트로 가겠어!」 미나는 얼굴을 찌푸렸다.「왜요?」 「세자르는 제 동생을 도울 생각을 안해」루이즈는 씨근 거리며 사라졌다. 저래서야 다른 사람의 충고가 귀어 들릴 리도 없겠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것은 열한 시가 넘어서였다. 그녀가 후다닥 일어서는데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의 세자르 가 들어섰다. 「어머니가 가셨어요」 세자르는 어깨를 으쓱했다.「다행이라고 해야지, 난 샌드로를 위해서 기적을 행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협의는 명백해. 이번에는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없을 거야」 「그를 만났어요?」 「아니, 하지만 변호사에게 자기가 4년 전에 저지른 일을 고백했다는군. 그리고 나한테 전해 달라고 했어」미나가 깜짝 놀라자 세자르가 씁쓸하게 웃었다.「왜 그랬는지 알아? 우리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에 질린 거야. 내가 이미 자기가 날 속였다는 사실을 알아낸 걸로 추측했지. 그래서 내 동정과 도움을 구할 생각으로 미리 무릎을 꿇은 거야」세자르의 말투는 차가웠다. 「왜 그런 짓을 했어요?」미나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것뿐이었다. 「나와 같이 자고 난 다음날 아침에 당신이 샌드로가 전화를 하는 소릴 들었다면서?」 「그래요. 하지만…」 「시번과 뭔가 중요한 전화를 하는 중에 당신이 들어갔던 거야. 당신이 내용을 엿듣고 내가 홍콩에서 돌아오면 일러 바칠까 봐 두려웠던 거지. 그 순간에 주사위는 던져졌어. 내가 당신을 해고하기에 충분한 구실을 만들어야만 했지」 미나는 기가 막혀서 주저앉아 버렸다. 막상 장본인인 미나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던 내용인데…. 그녀는 단지 목소리의 주인공이 세자르가 아닌 그의 동생이라는 사실에 몹시 당황 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니 그날 샌드로의 표정이 그렇게 험악 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순진하게 잘못 해석했던 것이다. 「불과 48시간 만에 샌드로는 당신 서명을 위조하고 테이프 를 조작했어. 시번의 음성이야 쉽게 녹음할 수 있었고, 당신 목소리도 가능한 일이었지. 두 테이프를 편집해서 이은 거야. 돈에 눈이 먼 나머지 당신 계좌에는 간신히 5만 파운드만 넣었지. 그게 샌드로 손으로 도로 들어갔는지 어땠는지는 나도 몰라. 하여간 준비를 끝내자 자기가 직접 홍콩으로 와서 날 만난 거야」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벌써 난 이상하다는 기미를 느끼고 있었어. 샌드로가 전화를 해서 당신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했지. 그땐 당신 집에 전화가 없었으니까 연락해 볼 길도 없었어.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난 그저 당신이 몹시 당황했구나 싶어서 그날 아침에 당신을 깨우지 않고 그냥 나온 걸 후회했어」 「하지만 난 사무실에 있었어요. 자리를 비운 적도 없었는 걸요!」 「알아. 하지만 그 당시엔 전혀 몰랐지」 「그래서 전화를 안했군요」그 전화를 기다리기가 얼마나 지루했던가. 세자르의 침묵은 혹시 그가 그 짧았던 관계마저 후회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의구심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샌드로가 예언했던 것처럼…. 「샌드로가 미처 감지하지 못한 위험도 있었지. 만일 당신이 직접 내게 연락을 했더라면…」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미나는 그날 아침에 샌드로가 했던 말을 그대로 들려 주었다. 세자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홍콩에 와서는 자기가 며칠 전에 당신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내용을 들었는데, 뭐가 비밀스러운 정보를 유출시키는 것 같았다고 했어. 그러면서 자기가 조사한 자료라는 걸 내밀었지. 나와 당신의 관계를 아는 눈치는 전혀 아니었거든. 난 미칠 지경이었어」 침묵이 흘렀다. 「내게 있어서 당신은 신 같은 존재였어. 영리하고 용감하고 그러면서도 매력이 넘쳤어. 내가 한 여자에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갖췄는데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가 있었겠어?」 세자르가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하지만 난 늘 결혼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냉소적이었지. 어머니는 오로지 돈 때문에 아버지와 결혼했어. 아버진 어머니가 바라는 생활을 위해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일에만 매달렸는데, 어머니는 놀랍게도 이따금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곤 했지. 샌드로가 그 기록을 내밀었을 때, 난 나도 아버지처럼 사랑에 눈이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치민 거야」 「세자르, 난…」 「그래서 내가 그렇게 바보 같은 놈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로 당신을 해고했지. 당장에라도 나머지 일정을 취소하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어. 진정할 필요가 있었지. 그후에 당신에게 연락을 하려 했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었던 거야」 「그러니 내가 죄를 지은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겠죠」미나는 그 당시에 좀더 나은 아파트로 옮길 예정이었는데 그럴 여유가 없어서 런던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설명했다. 「잠시 동안이지만 그런 기록을 보여 준 샌드로를 미워했던 게 미안해질 지경이었어. 그래도 제법 쓸 만한 일을 하는구나 싶기도 했지. 하긴 늘 샌드로에게 미안해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세자르가 피식 웃었다.「겨우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쌍둥이처럼 가까울 수도 있었어. 그런데 우린 단 한가지도 공통되는 점이 없었지」 「어느 집에나 그런 일은 흔히 있어요」 「샌드로는 늘 어린애였고 어머니의 인형이었어. 어렸을 때도 난 늘 그앨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 자라면서 샌드로는 하는 일마다 망쳐놓곤 했어. 늘 나와 자신을 비교하 면서 날 증오했어. 지금도 그래. 숨기려고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그리고 솔직히 고백한다면 나 역시 그애에게 깊은 관심 을 보여 주진 못했지. 팰콘 그룹 안에서 샌드로는 늘 골칫거리 였지」 「이사회에서 제명을 당했다면서요」 「당신을 해고한 지 정확히 반 년 후였지. 비서들 중의 둘이 날 찾아와서 샌드로에게 성적인 추행을 당했다고 고백했어. 사실 샌드로 자신도 노골적으로 떠벌리면서 좋아하곤 했지. 그러면서도 사과를 하라는 명령은 받아 들이지 않았어. 할 수 없이 작은 회사를 차려서 내보냈지」 「다들 좋아했겠군요」지금은 자기도 샌드로의 표적이었 다는 말까지 할 시기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랬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달라졌을 정도였어. 당신을 다시 찾아냈을 때, 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어. 당신이 또 날 바보로 만들까 봐 두려웠지. 그래서…」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아무리 모질게 굴었다 해도 당신 동생처럼 악의에 찬 건 아니었어요」 「난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어! 당신을 도로 붙들고 싶은 마음뿐이었어. 방법 따윈 아무래도 좋았지」 세자르가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당신의 삶을 망쳐놓은 사람은 샌드로에요. 난 당신이 왜 그랬는지 이해 할 수 있어요」 「그럴 수 없었어! 아니, 같이 지낸 다음 날 아침에 해고를 당했으니 그 심정을 어떻게…」 「샌드로가 준 기록을 봤을 때 당신이 느꼈던 것과 똑 같은 기분이었을 거예요」 「게다가 임신을 했다는 것도 알았고…」 「그 충격의 열 배는 되더군요」 「농담이 나와?」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니까요. 그리고 비록 내가 당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은 날 찾았잖아요」 「이제야 당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것 같아」그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얘기해 봐」 그녀는 담담하게 지난 일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세자르가 요구하긴 했지만 말하기가 어려웠다. 지금 자기가 떠 안은 충격만도 상당할 텐데 이런 얘기까지 들으면…. 그녀가 입을 다물자 세자르가 헛기침을 했다.「그 흉터는… 그건 수지를 낳을 때…」 「맞아요」 「그때 얘길 해 줘」 「왜요?」 「내가 거기 있어야 했으니까! 당신은 죽을 뻔했잖아」 「세상에! 다들 그렇게 낳는 거예요. 난 말짱했다구요」 「그게 무슨 소리야?」 「수지가 태어나는 순간에 난 의식이 또렷했어요」 세자르가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의식이 있었다구?」그가 입술을 핥았다.「이런… 그런 야만적인…」 미나가 놀라서 일어서려는데 세자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기절을 하다니! 미나는 웃다가 울다가 하면서 세자르의 타이를 풀고 재킷 단추를 끌러 주었다. 내, 참. 낳는 순간에 같이 있었다해도 별 도움은 못 됐을 거야! 잠시 후 그는 눈을 껌벅거리며 일어났다. 「통증은 전혀 못 느꼈어요」 그래도 그는 여전히 믿을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정신이 말똥말똥한 사람한테 그런짓을 하다니…」 「침대에 누울 사람은 당신인 것 같아요」 그가 일어나 앉았다.「괜찮아」 「괜찮아 보이질 않는다구요」 「괜찮다니까. 아직 할 얘기가 태산 같아」미나가 계단쪽 으로 떠다미는데도 그는 고집을 부렸다. 「내일 해요」 「기다릴 수가 없어. 수지는 어디다 재웠지?」 그는 어두운 침실 안을 들여다보았다.「날 보고 싶어했어?」 「엄청나게요」 「저 애만 보면 가슴이 미어져」 「깨우지 말아요. 귀찮게 굴면 보통 심술을 부리는 게 아녀요」 그는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닫았다.「난 우리 결혼을 엉망 으로 만들었어」 「그렇게 만들려고 애를 썼을 뿐이죠. 당신도 프레디 때문에 한방 먹었어요」 「프레디라니?」 「당신이 어느 정도까지 인내심을 발휘하나 보고 싶어서 일부러 그 물고기 박제를 사고 싶어한 거예요」 「아니, 그럼…」 「난 프레디가 잡히자마자 토막이 났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쩜 내가 그런 이상한 동물을 좋아할 거라고 믿을 수가 있어요? 또 하나, 그 프랭카라는 희한한 아가씨…」 세자르가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난 정말 절망적이었거든…」 「하지만 당신이 펠릭스 시번의 사진이 실린 신문을 보고 놀라기 전까지는 당신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몰랐어요. 그때야말로 당신이 이성을 잃더군요」미나는 자기가 쓸 침실로 들어갔다.「자, 이리 들어오겠어요, 아니면?」 세자르는 문턱에 서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다음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에 당신은 위대한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 같았어요. 성벽 뒤에 둘러 친 바리케이드를 사수하는 당신 모습이 보이더라구오. 굶어 죽더라도 성을 지킬 태세로…」 「아니, 뭐, 좀 예민해지긴 했어도 그래도 신경을 쓰는게 당연하지」 「신경을 써요?」미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세자르, 우리가 런던에 내릴 무렵에 당신은 무법자나 다름없었어요. 날 위해서 위증을 하겠다고 나선 거라구요!」 「난 당신이 감옥에 가는 걸 원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자기가 나 대신 희생하겠다고 한 순간에 날 지키겠다는 결심을 확인했죠」그때까지 생글거리던 미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세자르, 얼마나 자상하고…」 「자상해?」세자르의 얼굴이 벌개졌다. 「난 정말 감동했어요. 그리고…」 「사랑에 빠진 남자나 저지를 수 있는 어리석은 짓이야! 젠장, 비웃지 않을 수가 없겠지?」 「비웃기는요」미나는 목이 메었다. 세자르는 그녀의 말을 오해한 것이다. 「난 언제나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부정하다고 생각하 면서도 그렇다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걸로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결혼 첫날밤에도 들었던 말이었다. 그 의미가 이렇게 큰 것이었을 줄이야…. 「그렇지만 난 불안했어. 그리고…」 「질투에 눈이 멀었죠」 세자르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미나는 떨리는 음성으로 속삭였다.「난 한번도 당신을 향한 사랑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클레이턴은… 내 생각엔…」 「그보다 몇 주일 전에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당신은 무시해 버렸죠」 「난 당신 진심이 아니라고만 생각했어」 「아이고, 혈서를 써서 액자에 끼울까요?」 「내가 그런 짓을 했는데도 어떻게 날 사랑할 수가 있어? 클레이턴은…」 「오, 제발 스티브 얘긴 그만 해요! 난 스티브를 사랑한 적도 열을 올려본 적도 없어요. 그게 우리가 헤어진 이유에요」 세자르가 다가왔다.「그는 아주 잘 생긴 남자야. 당신이 카우 보이 장화를 신은 시골 신사를 좋아한다면 말야」미나는 웃음 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열을 올려본 적도 없다고? 난 내가 둘 사이에 끼여들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당신에게 결혼하자 고 한 거야. 그 말을 하고서도 기다릴 수가 없어서 다시 찾아 간 거지. 당신은 수지 때문이라면서 허락했어」 「그야 당신도 같은 핑계를 댔잖아요?」 「난 내 재산만이 유일한 끈이라고 생각했어」 「천만에요.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날 가질 수 있었어요」 그가 갑자기 숨이 막힐 정도로 그녀를 거세게 끌어 안았다.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해. 또 다시 당신을 잃는다면 견딜 수 없을 거야」 「난 아무데도 안 가요」미나는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래놓고 침실은 이렇게 떨어진 방을 골라?」 「수지가 자다가 깰까 봐 바로 옆방을 고른 거예요. 집안구조를 잘 모르잖아요. 문도 열어놓을 생각이에요」 「깨면 어떻게 하는데?」 「내 침대로 기어 올라와서 뒹굴죠. 당신은 배울 게 한두 가지가 아녀요. 수지는 새벽녘에 깨서 내 침대로 오면 폭포가 쏟아지는 것처럼 수다를 떨어요. 귀를 기울이는 기색이 아니면 간지럽히고 꼬집고 난리죠」 「보모가 필요해」 「세상에, 그보다 엄마 아빠가 좋아요」 세자르는 말없이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한동안 그렇게 끌어안고만 있었다.「티 아모… 티 아모…」그의 입에서 떨리는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미나는 세자르의 품에 안겨 미소를 지었다. 「내 생각엔 프레디도 짝을 만나야 할 것 같은데…」 「뭐?」 「플로렌스라고 이름을 붙여서 나란히 놓는 거예요. 어디 어두운 구석에…」 「새끼를 낳을지도 모르겠군」그 순간 세자르의 표정이 멍해졌다. 「왜 그래요?」 「오늘 오후엔 무방비 상태였어!」 「그래서요?」 「만일 당신이… 아이를 갖는다면…」 「당신은 대기실에서 기다려요. 그 편이 안전할 거예요」 「아니, 같이 있을 거야!」 세자르는 약속을 지켰다. 좀 떨기는 했지만 또 기절을 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수지의 남동생은 별 탈없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미나보다 세자르가 더 마음을 놓는 눈치였다. 프레디는? 프레디는 대 가족을 거느리고 당당하게 서 있다. 아주 어둡지는 않은 장소에….♠ -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