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lequin Books HB34 (IPS) 어둠 저 너머에 레베카 윈터스 난 당신과 결혼했던 그 남자가 아니야 그러나 리비는 그가 비록 영영 앞을 못 보게 된다고 하더라도 남편 곁을 떠날 생각은 없다. 갑작스런 그 사고가 있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밴스는 케냐에서 광산왕국을 건설한 성공적인 사업가였고, 행복한 미래를 약속했던 믿음직스런 남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인생 어디에도 리비가 설 자리는 없다며 영국으로 돌아가기를 강요하는데, 그가 집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이면에는…. 1 「스틸맨 선생님, 그럼 제 남편이 영영 앞을 볼 수 없다는 말씀이세요?」 리비 앤슨은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런던에서 나이로비까지 밤새도록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도 그녀는 내내 남편의 증상은 일시적일 뿐이며 수술을 하면 곧 시력을 회복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런 것 같소」 지금껏 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 작은 희망의 불꽃마저 여지없이 날려 버리며 의사는 조용히 말했다. 그는 앞쪽으로 몸을 숙이며 말을 이었다. 「광산 천장이 무너졌을 때 극히 미세한 광석 부스러기가 남편의 뇌를 뚫고 들어갔소. 그 때문에 시신경이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고, 그래서 전혀 앞을 볼 수 없게 된거요. 정말 안됐소」 「믿을 수 없어요」 그녀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윤기나는 검은 머릿결이 어깨 위에서 찰랑거린다. 「밴스도 자기가 영영 앞을 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나요?」 「그래요, 의식을 되찾자마자 그는 사실대로 말해 달라고 했소」 「그 사고가 난 지는 2주일도 넘었어요. 왜 아무도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사고가 났다는 걸 누군가 알려 주기만 했으면 곧바로 비행기를 타고 올 수 있었는데 말예요. 그가 이렇게 계속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도 난 아무것도 몰랐다는 걸 생각하기만 하면…」 그녀의 목소리는 흐느낌을 지닌 채 점점 잦아들었다. 「난 그가 가족에게 연락을 한 줄 알고 있었소. 그런데 그저께 밤이 되어서야 앤슨 광산에서 일하는 몇몇 사람들만 빼고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또 전화조차 없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연고자의 전화번호를 물어보았소. 소장이 앤슨 씨의 가장 가까운 친지는 런던에 있는 그의 아버지라는 것을 말해 주었소. 그래서 곧바로 그리고 전화를 걸었던 거요」 리비는 얼굴을 찌푸렸다. 「밴스가 제 얘길 전혀 안했다는 말예요? 이해할 수 없어요.」 의사는 선이 고운 그녀의 타원형 얼굴을 쳐다보고, 그녀의 눈에 나타난 안타까운 표정에 마음이 쓰였다. 「조금 전 당신이 병동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가 결혼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소.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더」 그는 농담처럼 그렇게 덧붙였다. 「당신들의 결혼은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졌던 모양이오. 아무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까 말이요. 결혼한 지는 얼만 되었소?」 리비는 숨을 들이마셨다. 「3주요. 밴스는 결혼식이 끝난 후 곧 돌아가야만 했어요. 광산의 비상사태를 처리해야 했거든요. 며칠이면 다 끝날 걸로 생각했기 때문에 저는 그냥 머물러 있다가 그가 돌아오면 함께 신혼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렸다. 「그는 연락이 불가능한 고지대에 있을 거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빨리 제게 연락하겠다구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의 아버지에게 한 전화가 우리들이 받은 유일한 연락이었어요」 새로운 고통의 물결이 다시 한번 그녀를 휘감는다. 밴스가 자신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했다. 「이런 상황에 당신이 이곳에 와줘서 정말 너무나 다행입니다」 의사는 부드럽고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내게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 것 같소」 리비는 꼬고 있던 길고 날씬한 다리를 내려놓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수수께끼라뇨, 스틸맨 선생님?」 「당신의 남편은 긍지를 지닌 당당한 사람이오. 하지만 실명을 하게 된 처지에도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고 계속 자존심을 지키려는 그의 지나친 태도 때문에 걱정스러웠소. 그런데 이제 당신을 보니, 이해가 가오」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리비는 시선을 그에게 고정시킨 채 다그치듯 물었다. 그는 두 손을 깍지껴 머리 뒤에 갖다대며 말했다. 「내게 만일 나를 기다리고 있는 갓 결혼한 아름다운 신부가 있다면, 그리고 갑작스런 사고로 인해 내가 실명을 하게 되었다면, 솔직히 말해서 내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아마 자살이었을 거요」 「밴스에게 살려고 하는 의지가 없다는 말씀이신가요?」그녀는 소리치듯 말했다. 「그래서 그런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어도 내게 연락을 취하지 않은 거란 말인가요?」 「꼭 그런 건 아니오」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급히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특히 당신에게 기대어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소. 그는 회사를 책임지고 있는 매우 성공한 사람이외 이곳 케냐의 광산업계에서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성공한 사람이요. 회사 간부진들은 모두 그의 결정대로 움직이며 따르고 있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는 이제 막 아내를 얻었고, 자신이 그녀에게 그야말로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고 있소. 바로 당신에게 말이오. 갑작스런 실명으로 인해 그는 자기 자신에게, 남자로서의 자신에 대해 낙담하고 있소. 그는 당신의 보호자로서, 연인으로서, 그리고 가장으로서의 자신감을 상실한 거요」 「앞을 보건 그렇지 않건간에, 밴스는 제게 있어 모든 것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감정의 동요로 인해 제대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전… 전 당신이 제게 연락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밴스의 아버지에게 전화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전 정말 모르겠어요. 밴스가 그러지 않은 것이…. 그와 같은 경우를 당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식으로 반응을 보이나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달아나 멀어지려고 하나요?」 의사는 눈길을 돌리고는 책상에 놓인 파일의 가장자리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절망감은 언제나 이런 상실감을 수반하죠. 물론 각각의 경우마다 차이가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완벽한 남편이 되고 싶었던 거요. 그러나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알 수 없는 불안한 요인, 즉 그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그런 겁니다. 그는 두려운 거요」 눈물이 그녀의 두 눈에 그득하게 고였다. 「밴스가 뭔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리비는 의사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고 눈물을 멈추려고 눈을 깜박였다. 그렇다, 그에게는 언제나 밤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그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슬픔으로 짓뭉개진 그녀의 가슴이 다시금 그에 대한 연민으로 찢어질 듯 아파온다. 간신히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지금 고통을 겪고 있나요?」 「때때로 두통으로 시달리는 것만 빼고는 몸은 매우 좋은 상태에 있소. 하지만 그는 그 사고에 대해 자책하고 있고, 난 그것이 매우 염려스럽소. 그건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거나 진배없는 일이오」 리비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녀는 남편이 앞을 볼 수 없다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또 생각하지도 못했다. 「나는 그를 돌봐 줄 가까운 친구나, 혹은 가족이 있는지 어쩐지도 알지 못하고 그를 퇴원시키고 싶지는 않았어요. 지금까지 그는 모든 도움을 거절해 왔소. 그의 회사 사람들만 제외하고는 그 어떤 방문객도 모두 사절이었죠.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그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할지를 물어보았소. 당신이 와서 정말 안심이 돼요. 오늘 그가 퇴원하겠다고 우겨댔기 때문에 특히 더 그렇소. 그는 소동을 일으키겠지만 난 어쩔 수 없이 그가 당신을 필요로 하리라는 걸 믿어요. 잘 해낼 수 있겠죠?」 그는 염려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비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턱을 약간 들었다. 「그가 나를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전 그 사람을 필요로 해요. 전 그의 아내이고 그와 함께 삶의 한순간 한순간을 모두 공유하고 싶어요」 안도의 미소가 의사의 얼굴에 번졌다. 「참 잘된 일이오. 그는 매우 운이 좋은 사내군요, 당신 같은 아내가 있으니 말이오. 그가 그걸 곧 깨달았으면 좋겠소」 「이제 가서 그를 보고 싶군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틸맨 선생님. 밴스를 돌봐 주신 것에 대해 정말 깊은 감사를 드려요」 그는 일어서서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행운을 빌어요, 앤슨 부인. 나도 곧 그를 살펴보러 가겠소.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답해 드리죠. 자, 그럼 그의 점심식사 쟁반을 가지고 가보시겠소? 앤슨 씨는 식욕이 좋지가 않아요. 물론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못한 일이라도 당신은 잘 해낼 수 있을 거요」 리비의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해보겠어요」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되겠소?」 「물론이죠」 그녀는 그가 왜 그토록 열심일까 의아해하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남편을 안 지는 얼마나 되었죠?」 「3년 정도요. 제 의붓아버지가 그의 집안 소유지 옆에 있는 목장을 사들였을 때 그를 알게 되었죠. 그런데 왜 그러시죠?」 「당신들의 결혼이 일시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적어도 당신은 당신이 어떤 처지에 처해 있는지 알고 있어요」 리비는 그의 방을 나와 문을 닫고는 그 문에 힘겹게 기대섰다. 의사가 생각하듯 과연 자신은 밴스를 잘 알고 있는 걸까? 갑작스런 감정에 휩싸여 결혼을 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는 케냐에 있고 그녀는 제네바의 <인터내셔널 스쿨>에 있으면서, 극히 짧은 시간밖엔 함께 할 수 없었다. 밴스가 그녀를 만나러 비행기를 타고 집에 올 수 있었던 극히 드물었던 경우를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가 더 이상 그와 헤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을 때 그는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구혼을 했고, 그들이 결혼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언약했었다. 결혼식을 끝낸 후 공항에서 밴스가 그녀에게 속삭였던 말을 행각하자 전율이 온몸을 감쌌다. 「자, 이제 결혼식도 끝냈으니 우리에겐 오직 행복한 순간만이 있을 거요, 앤슨 부인」 빛나는 언약을 담은 그의 뜨거운 입맞춤은 지난 몇주 동안 리비를 지탱해 준 모든 것이었다. 그녀는 문에서 발걸음을 떼며 머릿속으로는 남편과 첫대면을 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어떤 말이 오고갈 것인지를 생각했다. 어쨌든 그녀는 그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결혼생활은 정말 아름답고 멋질 것이라는 것을 그에게 납득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그녀는 그의 눈이 되어 줄 것이다! 그들의 육체적인 사랑은 그 어느때보다도 그들을 더욱 굳건히 하나로 묶어 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곧바로 가정이라는 것을 이루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둘 다 어린아이를 원했다…, 밴스가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리비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왼손에 낀 반지를 불빛에 비워보았다. 그들의 결혼이 기정사실이란 확실한 증거인 결혼반지. 금반지의 중앙에는 물방울 만한 자수정이 박혀 있다. 금과 보석은 모두 앤슨 광산에서 나온 것들이다. 자수정의 빛깔은 언제나 그녀의 눈을 연상시킨다고 했던 밴스의 말을 그녀는 기억했다. 그의 품안에 안기고픈 갑작스런 충동으로 그녀는 복도를 마구 내달렸다. 리비는 밴스의 점심식사 쟁반을 들고 개인 병실로 들어섰다. 「그 쟁반은 원래 자리에 다시 갖다 놓아요」 귀에 익은 밴스의 굵은 목소리가 방 저편에서 울려나왔다. 「난 잠시 후에 떠날 거요.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차라리 그걸 옆방의 불쌍한 사내에게 갖다줘요. 다이어트로 볼썽사나운 꼴이 된 사내라니까」 그의 볼멘 외침에 리비는 자신을 밝힐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방을 천천히 가로질러 필요 이상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배고프지 않다고 말했잖소! 왜냐하면 그…」 그는 갑자기 말을 끊더니 턱을 들어올리며 놀란 어조로 말했다. 「그 향기는, 가만 있자…」 그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하게 잦아들었다. 이윽고 그는 몸을 휙 돌리고는 절망적인 손길로 자신의 검은 머리칼을 마구 쥐어뜯었다. 충격으로 리비의 두 손이 떨려와 그 바람에 찻잔이 흔들려 쟁반을 덮고 있던 커버가 흘러내렸다. 조심스럽게 침대곁의 테이블 위에다 쟁반을 내려놓은 다음,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그는 커피 빛깔의 실크 파자마와 실내복을 입고 있다. 친구나 아니면 직원이 농장에서 가져다 준 걸까? 그 옷들은 그의 취향에 맞는 걸로 구입한 걸까? 아니면 비서 중의 누군가가 사다 준 것일까? 이쪽 세계에 속해 살고 있는 밴스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또다시 자신감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편지나 전화를 통해 알고 있는 단편적인 지식만으로는 그의 매일매일의 생활이나 개인적 습관 등을 모두 다 알 수는 없었다. 그의 모습이 거의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입 주위가 조금 여위었고, 입술은 좀더 신랄하게 냉소적으로 비뚤어져 있었지만 그의 남성적인 아름다움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눈부셨고 마음을 사로잡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성미가 까다로운 편인 그는 고집스럽게 혼자 힘으로 면도를 계속한 것이 분명하다. 수염을 제대로 깎지 못해 여기저기 듬성듬성 수염이 그대로 나 있다. 머리칼은 이전보다 조금 더 길어 있고 체중은 좀 빠진 듯해서 31살의 나이보단 더 들어 보였지만, 그러나 그는 리비에게 있어 여전히 완벽하고 멋진 남성이었다. 그가 짐을 꾸리는 동안 그녀는 홀린 듯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러 가지 물건들이 수트케이스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넣어졌다. 카세트 몇 개가 침대 곁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지자 그는 화가 난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가 그것을 집어들려고 침대 주위를 손으로 더듬어 가서 바닥에 무릎을 끓고 그것을 찾는 것을 본 순간, 차가운 손길이 리비의 심장을 쥐어뜯는 듯했다. 앞 뒤 생각 없이 리비는 바닥에 떨어진 테이프를 찾는 것을 도와 주려고 막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 때 갑자기 화가 난 말처럼 그의 검은 머리가 뒤로 홱 젖혀졌다. 리비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숨을 죽였다. 그의 그 벨벳 같은 갈색의 아름다운 두 눈은 똑바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 눈 가득 분노의 빛이 이글거리며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뭘 원하는 거요? 당신은 분명 그레디 부인은 아닐 테고, 그녀는 내게 강제로 식사를 하게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녀를 오싹하게 하는 신랄한 어조로 그가 말했다. 리비의 두 눈은 그를 여기저기 살폈다. 그 어디에서고 상처입은 사람 같은 기색은 찾을 수가 없다. 스틸맨 박사는 아주 미세한 입자가 그의 뇌 속에 박혔다고 말했다. 여러 해에 걸쳐 햇볕에 그은 마호가니 빛 살갗은 그를 건강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지금 매우 심한 충격을 받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그만하면 충분히 보지 않았소. 대체 당신은 누구요?」 그는 그녀를 깜짝 놀래키며 빈정대듯 말했다. 「그렇게 앞 못 보는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은 실례라는 것을 알 텐데?」 리비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밴스의 육체 속에 자리잡고 있는 낯선 사내의 모습을 그녀는 생각조차 못했다. 축축한 땀방울이 그녀의 이마에서 배어져 나왔고 그녀는 온몸을 떨었다. 「밴스?」 그녀의 목소리는 애절함을 담은 채 떨려나왔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 터져나온 음성은 마치 부드러운 잔물결마냥 가볍게 흔들렸다. 「오 이런, 당신이었구려」 그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놀라움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담고 있었다. 「리비」 그것은 마치 신음소리와 흡사했고, 어딘가 저 깊고 은밀한 곳에서 새어나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그 소리에는 친밀함과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요, 밴스」 그녀는 병실을 날 듯이 가로질렀다. 「당신이 곧 런던으로 돌아오실 걸로 생각했었어요. 하지마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당신을 용서해 드리죠」 그녀는 성급하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뜨거운 열정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몸은 여전히 뻣뻣했다. 리비는 그것이 그의 첫반응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그녀를 밀어내며 침대 모서리를 향해 돌아섰다. 「여기에서 뭘하는 거지, 리비?」 그의 목소리에 담긴 차가운 적의가 그녀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당신 아내에게 대체 그게 무슨 질문이죠?」 그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그녀에게서 반쯤 돌아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돌처럼 냉랭했다. 「당신이 이곳에 오는 걸 내가 원치 않는다는 건 알잖소. 편지에 그 말을 했을 텐데」 그녀의 가슴은 소리라도 치듯 두근거렸다. 「무슨 편지요?」 「이곳 병원에서 내가 비서에게 받아쓰게 한 편지 말이오. 그녀는 그 편지를 붙였다고 했소」 「밴스, 난 당신의 편지를 받지 못했어요. 정말이에요」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그가 생각해 보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당신의 말이 진실이라고 해도 왜 당신이 이곳에 왔는지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소. 내가 당신에게 연락하기고 했었잖소」 그녀는 입술을 축였다. 「스틸맨 박사가 어제 아침 당신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사고에 대해 이야길 했대요. 그래서 아버님이 제게 전화하셨고, 난 짐을 챙겨 준비를 하자마자 곧 다음 비행기 편으로 이리 온 거예요」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손가락 관절이 불거지도록 침대 발치를 손으로 꽉 잡았다. 「밴스, 왜 제게 사고 얘길 안하신 거죠? 그토록 중요한 일을 왜 혼자만 끌어안고 있으려 하셨어요? 제가 즉시 이리로 올 수 있으리란 건 알고 계시잖아요?」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그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싸자, 그는 손을 빼내어 멀찍이 뒤로 달아났다. 그녀는 밴스에게서 이런 육체적인 저항을 받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고,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당신은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는 마치 뭔가를 내동댕이치고 싶기라도 한 듯 수트케이스 속의 물건을 되는 대로 이것저것 집었다. 「그 편지는 속달우편으로 부쳤어. 이건 확실히 스틸맨 박사의 간섭 때문임이 분명해. 당신이 그 편지를 받기 전에 이리로 오게 한 거야. 그 편지는 내가 왜 당신이 여기 오는 걸 원치 않는지, 그리고 왜 우리의 결혼이 무효인지를 설명해 주는 거였어」 그녀는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좋아요. 하지만 이제 전 이곳에 왔어요. 그러니 당신은 제게 직접 말해 주실 수 있어요」 그녀는 수트케이스 손잡이를 찾고 있는 그의 다른 쪽 손을 바라보았다. 관자놀이께의 정맥은 더욱 불거졌고, 입술 주위의 창백함은 더욱 빛이 바랬다. 「집으로 돌아가, 리비. 당신이 여기에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는 가방의 뚜껑을 닫았지만 면도기 세트가 걸려 잠가지지 않는다. 그녀는 이런 그의 행동 변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전에는 이렇게 거칠고 잔인한 면이 결코 없었기에 그녀는 가슴이 더욱 아팠다. 그는 험악하고 냉혹한 타인이 되어 버렸다. 「난 집에 온 거예요」 그녀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3주일 전에 우리는 결혼했고, 이 반지가 그걸 증명하고 있어요. 나는 결혼서약을 믿어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리고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슬플 때나, 그리고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우리는 언제까지 함께 있을 거예요」 「나는 눈이 멀었어, 리비. 상황이 변했어!」 「당신은 살아 있어요! 당신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다행스러워했던 것은 당신이 죽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당신의 실명이 아무리 끔찍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우리가 함께 잘 이겨 나갈 수 있는 그런 일이에요. 난 당신을 돕겠어요. 당신을 위해 뭐든 다 하겠어요」 「그만둬, 리비!」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침대 곁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 「이제부턴 <우리>가 아니야, 스틸맨 박사에게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는데」 「아내는 그 속에 포함되지 않아요. 스틸맨 박사에게 당신이 결혼했다는 걸 왜 말하지 않았죠? 당신 친구들과 동료들 앞에서 내가 당신을 당혹하게 할 거라고 생각할 만큼 그렇게 제게 대한 믿음이 없는 건가요?」 「그게 아니야, 당신도 알잖아!」 그는 절망에 차서 두손으로 그의 짙은 갈색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 리비」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게 해주세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밴스. 당신의 아내가 되게 해주세요. 제발요, 제발 저를 받아들여 주세요」 그녀는 애원하듯 그렇게 말하며 그가 있는 침대 쪽으로 가려고 했다. 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 리비. 사고가 모든 것을 바꿔 버렸어」 「제게 대한 당신의 사랑까지두요?」 고통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지만, 그것은 너무도 한순간의 일이어서 그녀는 하마터면 그것을 놓칠 뻔했다. 「난 당신이 결혼했던 그 사람이 아니야. 눈이 먼다는 것은 모든 면에 있어서 한 사람의 장래를 바꿔 놓는 거야. 그것은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아. 난 나의 길을 가야만 해, 나 홀로. 이렇게 불필요한 장면을 연출하지 않도록 제때에 편지가 당신에게 도착되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 「불필요하다구요?」 분노가 일시에 그녀의 전신을 휩쌌다.「당신은 우리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어요, 밴스. 나는 여기 있어요. 그리고 그 편지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난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하지만 포기하게 될 거야! 난 오늘 오후에 병원에서 퇴원할 거야. 택시를 잡아 당신을 공항으로 데려다 주겠어. 그럼 당신은 런던 행 비행기를 타고갈 수 있을 거야」 「당신은 전혀 진지하지 않군요」 그는 몸을 곧추세웠고, 그의 턱이 분노로 뻣뻣해졌다. 「내 일생 중에서 이보다 더 진지한 적은 한번도 없었어」 「내일 아침까진 런던 행 비행기가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절 몰아내고 싶어 안달이라면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겠어요」 「아니야, 리비」 뜻밖의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난 당신 혼자 호텔에 머물러 있게 히고 싶진 않아. 당신은 나이로비를 잘 모르잖소. 게다가 혼자 이곳에 있기엔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 나와 함께 내 아파트로 갔다가 내일 아침 택시로 공항에 바래다 주는 것이 좋겠어」 「밴스, 전 23살이나 된 여자예요. 당신이 이래라 저래라 해야 할 어린애가 아니란 말예요!」 미처 억제할 사이도 없이 그런 말이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검은 눈썹이 위험스럽게 위로 치켜졌다. 「그리고 당신이 결혼한 남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말이지!」 그는 욕실로 들어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당신 자신에 대한 연민은 이제 그만 느끼세요!」 그녀는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앤슨 부인?」 리비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녀의 두 뺨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스틸맨 선생님…」 「자, 잠깐 복도로 나가실까요. 얘기 좀 나누고 싶으니까요」 리비는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복도를 따라 걸으면서 그녀는 내내 벽에 몸을 지탱하다시피 했다. 밴스와의 격렬한 감정 대립으로 인해 정신적인 피로와 함께 육체적으로도 불편함을 느꼈다. 「우리들이 다투는 소릴 들으셨겠군요」 그녀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웅얼거리듯 말했다.「그런 식으로 이성을 일고 화를 내 것이 정말 부끄러워요. 하지만 그는 제가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했어요. 전 잠시 동안 그가 앞을 못 본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죠. 그는 제게 단 한 순간도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그런 일이 일어나리란 것은 예상했던 바요. 그는 아직 자신의 실명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해요. 자신이 두 번 다시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거요. 게다가 당신이 이곳에 왔다는 충격이 겹쳐져서 그런 식으로 반응을 보이는 거죠」 「하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이래야 하는 거죠? 전 그의 아내예요. 전 그를 너무도 사랑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당신을 위로해 주는 말을 해주고 싶소. 하지만 그럴 수가 없군요. 당분간 이런 상태를 참고 이겨내야만 할 겁니다」 「시간이 없어요, 선생님. 그는 내일 아침 제가 런던으로 돌아가길 원해요」 「아직 오늘이 다 지난 건 아니잖소. 당장 어떻게 할 생각이오?」 「그가 자신의 아파트로 함께 가자고 했어요. 저를 농장으로 데리고 가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우리들이 계획했던 일들을 생각하기만 하면…」 「그 계획들을 포기하지 말아요. 이제 겨우 첫날이잖소. 그리고 내가 있다는 걸 기억해요. 당신은 내게 밤이건 낮이건 언제나 전화할 수 있어요. 퇴원 서류하고 진통제와 함께 내 전화번호를 일러 드리죠. 그리고 수간호원인 그레디 부인을 잊지 말아요. 그녀는 시력 장애를 입은 사람을 간호하는 일에 풍부한 경험을 지니고 있어요. 당신 남편이 매일의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요. 그녀에게 전화해서 와달라고 하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스틸맨 선생님.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는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행운을 빌겠소」 리비는 방으로 들어서기 전에 멀어져 가는 그의 등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그녀가 스틸맨과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밴스는 히프에 꼭 끼는 리바이스 바지에다 사파리 셔츠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함께 승마할 때 그가 즐겨 입던 옷이었다. 살이 약간 빠진 때문인지 거무스름하고 잘생긴 그의 모습이 돋보였고 키도 조금 더 커보이는 듯하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무거운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멋져 보였다. 「밴스?」 「어디 갔었소?」 「스틸맨 선생님이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하셔서요, 우리들이 잘 지내길 빈다구요」 입술이 비뚤어지는 듯했지만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심은 어떻게 하실거죠? 떠나기 전에 뭘 좀 드셔야 하잖아요?」 「지금 당장은 음식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당신에게 납득시키지?」 「그럼 제가 먹어도 되겠어요? 전… 전 어제 오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갑자기 아까 복도에서 느꼈던 가벼운 어지럼증이 이번에는 더욱 심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벽장 근처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구역질이 그녀의 온몸을 뒤틀리게 했고, 금세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리비?」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 담긴 놀라움의 기색을 알아챘으나 너무도 괴로워 뭐라고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더듬더듬 그녀 곁으로 다가오더니, 머리칼 아래로 손을 넣어 그녀의 목덜미를 만졌다. 「피부가 축축하군 그래. 당신 다리 위에 머리를 올려놓아요」 그녀는 하라는 대로 했다. 너무도 힘이 없어서 달리 어떻게 할 바를 몰랐기 때문이다. 귓속이 윙윙 울리는 것이 사라지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때서야 그녀의 피부에 닿아 있는 그의 손의 촉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손은 그녀의 머리를 계속해서 쓸어내리고 있었다. 「좀 나아졌소?」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고, 그녀는 그의 입가에 어린 미소를 볼 수가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리고 곧 그가 자신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동안 그녀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네, 아주 좋아졌어요. 고마워요」 「움직이지 말아요」 그가 테이블 주위로 더듬거리며 다가가 그녀가 먹을 만한 것을 찾는 모습을 바라본 순간, 그녀의 가슴은 사랑의 물결로 가득 찼다. 잠시 동안 여기저기를 더듬고 나서 그는 겨우 주스 잔을 찾아들고 그녀에게로 왔다. 리비는 그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들고 단숨에 쭉 들이켰다. 오렌지 주스는 미지근했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힘을 되찾았다. 「맛이 좋군요」 「그런데 대체 왜 비행기 안에선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 그는 그녀 곁에 와 앉으며 물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팔을 더듬어 찾더니 손목을 쥐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맥을 짚어 본다. 그 몸짓이 그녀를 전율케 했다. 「당신이 먹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거예요」 그녀는 그의 검은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말했다. 「이젠 괜찮아요, 밴스」 그녀는 그가 깊은 한숨을 토하는 소리를 들었다. 「당신은 뭘 좀 먹어야 해. 음식을 가져오라고 해야겠어」 「아니에요. 당신 것을 먹으면 돼요.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지 말아요」 그녀는 아직도 힘이 없어 후들거리는 다리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못해 그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테이블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서 롤빵과 닭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밴스는 몸을 일으키더니, 멈칫거리며 여러 번 걸음을 멈추곤 하면서 간신히 벽에 걸린 전화기 쪽으로 다가갔다. 수화기가 바닥에 떨어지자 화가 나서 툴툴거리긴 했지만 마침내 구내 교환수를 통해 택시를 불렀다. 그리고 난 다음 어딘가로 다시 전화를 했다. 그가 영어로 말하지 않을 때는 그것이 스와힐리 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는 마치 원주민처럼 유창하게 말을 한다. 이윽고 그는 있던 자리에다 수화기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준비됐습니다, 앤슨 씨. 휠체어가 바로 뒤에 있습니다」 간병인이 와서 말했다. 「나는 내 두 다리로 걸어서 나갈 거요」 「기분이 어떠실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병원 규칙입니다」 「밴스」 더 이상 논쟁이 커지기 전에 리비가 중간에 끼어 들었다. 「공항에서 곧장 이리로 와서, 제 짐이 아직 그대로 접수구 쪽에 있어요. 가서 살펴본 다음 정문 쪽에서 만나기로해요」 「얼마나 많은데?」 「제 말 킹만 빼고는 몽땅 다예요. 아빠는 킹을 이번 주일 내로 몸바사까지 배로 보낼 준비를 하고 계실 거예요. 그곳까지 차를 타고 가서 검역절차를 마친 킹을 찾으면 아주 신날 거예요」 그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가 막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귓등으로 흘리며 방을 빠져나갔다. 현관 쪽으로 가는 도중 내내 그녀는 의붓아버지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밴스는 그의 눈보다 더 좋은 선물을 받았어. 그건 바로 너의 사랑이지」 의붓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리비의 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자식이 없는 홀아비와 재혼을 했다. 리비는 의붓아버지의 삶의 공허를 메워 주었고, 그는 리비를 끔찍이 사랑해 주었다. 그들은 지극한 애정 속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하지만 지금 밴스를 돕기 위해서는 그런 사랑 이상의 것이 필요하리라는 걸 리비는 잘 알고 있다. 2 「당신 이름이 앤슨인가요?」 사내는 리비에게 그렇게 물으면서 택시에서 내렸다. 「네. 제 남편은 잠시 후에 곧 나올 거예요」 운전수는 그녀 주위에 놓여 있는 짐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전부입니까?」 「아니에요. 제 남편의 수트케이스가 있어요」] 운전수는 자기 나라 말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1950년형 푸조 지붕 위 선반에다 짐들을 싣기 시작했다. 그곳에 짐을 다 싣지 못하자, 그는 운전석 옆 좌석에다 짐을 쌓아 놓았다. 「당신은 뒷좌석에 앉으세요. 그러면 짐가방 하나를 발치에 놓아 드릴 테니까요」 리비는 그렇게 하면 너무 좁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잠시 후, 휠체어에 탄 채 현관을 나서는 밴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낮의 햇살이 검은 그의 머리칼을 갈색으로 물들이며 부서져내렸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그는 아무 결함도 없는 정상인처럼 보였으나 그녀는 그를 감싸고 있는 긴장의 빛을 말쑥한 그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었다. 병원과 병원에서 제공하는 안전함을 뿌리치고 떠나는 데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은 밴스가 홀로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리비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그녀는 그의 실명으로 인해 친밀한 그들의 관계가 깨어져 버린 것에 다시금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이제 그만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녀는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또한 어떻게 해야 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할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여기 지팡이가 있어요, 앤슨 씨」 간병인이 그것을 밴스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으나, 밴스는 그것을 밀어낸다. 「난 이런 건 필요없소. 만일 지팡이에 의지해야 한다면 그건 마치 내가 눈먼 소경이라는 걸 확성기에 대고 떠들면서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거요」 리비는 밴스의 무례함에 아연했으나 간병인은 휠체어를 잡고 시종 아무렇지도 않은듯한 표정이다. 밴스는 열려진 자동차 문을 잡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무심코 그의 다른 쪽 손이 그녀의 엉덩이에 닿았다. 얇은 속옷을 통해 그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가 그녀를 만지고 싶어한다는 것을 무언으로 말해 주고 있기라도 한 듯했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손을 치우고는 그의 긴 다리가 그녀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뒷좌석에 앉았다. 리비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거무스름한 모습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고, 그를 가까이 끌어당기고 싶은 갈망은 점점 더해 갔다. 그녀의 몸은 아직도 그의 손이 남긴 감촉에 반응하고 있었고, 그가 아무리 그녀를 자신의 그 암흑의 세계 밖으로 밀어내려 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녀를 갈망하고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에 그녀의 가슴은 터질 듯했다. 운전수가 시동을 거는가 싶더니 그들이 탄 차는 이내 차량의 물결 속으로 묻혀 버렸다. 열려진 차창을 통해 온갖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밴스」 그녀는 무심코 손을 뻗어 그의 구릿빛 팔을 만졌다. 그녀의 따스한 손가락에 화상을 입기라도 한 듯 그는 흠칫했다. 그녀는 재빨리 손을 치웠다. 「모든 사람이 화가 난 듯 소리치고 있군요」 밴스는 앞을 똑바로 보고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스와힐리 어는 생기가 넘치는 언어지. 원주민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소리치듯 말하는 거야. 당신도 이제 곧 그런 것에 익숙해질 거요」 그리고 그는 아파트에 도착할 때까지 그대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운전수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차를 몰았고, 다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그녀가 그의 세계에서 익숙해져야 할 또 다른 일면이었다. 왜냐하면 런던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밴스의 억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떠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몇 분 후, 택시는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5층짜리 현대식 건물의 현관 앞에 멈췄다. 그의 사무실은 아파트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다고 했던 밴스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서 그의 아파트에 단둘이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가운데 그를 잘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운전수가 짐들을 로비에 옮겨다 놓으면 수위가 아파트 안까지 안내해 줄 거요」 「당신은 어딜 가시는데요?」 「난 사무실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리비. 오늘밤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기다리지 말고 자도록 해요. 수위에게 말해서 주방에 식료품을 갖다 놓도록 할 테니까 원할때는 언제고 먹을 수 있을 거요. 무료하더라도 밖에는 절대 나가지 말아요. 정 심심하면 TV를 보도록 해요. 어떤 일이 있어도 혼자 나이로비를 돌아다녀선 안돼, 알겠소?」 그는 언제나 그녀를 잘 보호해 주긴 했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너무 지나친 듯했다. 하지만 리비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말에 순종하기로 했다. 「곧장 잠자리에 들겠어요. 시차 때문에 몹시 피곤하거든요. 부모님께 전화해서 제가 잘 도착했다는 걸 말씀드려야겠어요. 당신 아버지께도 전화드려서 당신이 잘 있다는 걸 얘기해도 되겠어요?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그는 화가 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내일 밤 집에 도착할 거잖소. 그러니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비행장에서 당신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전화하는 것도 좋은 생각 같기는 하군 그래」 그 밉살스럽고 거만한 태도가 다시 한번 그녀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운전수가 아파트 건물 현관에 그녀의 짐을 옮겨 놓았다. 수위로 보이는 남자가 현관에 나타났고, 리비는 그를 따라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녀는 감정의 동요에도 불구하고 밴스가 염려스러워서 어깨 너머로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주의하라고 일러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의 엄격한 옆얼굴은 그녀를 두렵게 한다. 그것은 그가 지닌 새로운 면, 즉 사업과 전문직의 세계에 속한 그의 다른 일면이었다. 명령하고 지휘하는 사람으로서의 밴스, 강하고 예리한 사내, 그러한 지도자적인 자질이 없다면 그는 이 원시의 땅에서 결코 황제로 군림할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리비는 부드럽고 다정한 밴스의 다른 일면을 알고 있었다. 과연 그의 그런 부드러운 일면을 또다시 볼 수 있을지 어떨지를 생각하자 아픔이 그녀의 전신을 휩쌌다.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눈으로 뒤쫓으면서 그녀는 쓰라린 고통으로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수위 앞에서 감정이 허물어지는 것이 두려워 그녀는 급히 그를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이 건물은 안전 경보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앤슨 부인. 특수 열쇠가 없이는 아무도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지요. 이곳은 안전합니다」 리비는 낮은 소리로 고맙다고 말하고 나서 곧 문을 닫았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슬픔의 탄식으로 목이 메는 듯했다. 그녀는 일이 이렇게 된 데 대한 분노와 슬픔 때문에 손등으로 입을 막으며 가볍게 흐느꼈다. 그녀의 아픔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사랑에 대한 밴스의 완강한 저항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실명에 대한 연민은 그녀로 하여금 참기 어려운 마음의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밴스의 실명은 그에게서 모든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능력을 앗아간 듯했다. 특히 그의 아내에게.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며, 리비는 눈물을 닦고 나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침실 두 개짜리의 편리해 보이는 아파트는 지중해식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확실히 밴스의 개성을 드러내 주는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곳 나이로비에서 일하는 데는 별 불편함 없이 그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곳이었다. 샌들을 벗어던지고 리비는 주방으로 들어가, 또다시 어지럼증을 느끼지 않도록 수프를 데웠다. 하지만 반도 못먹어 그녀는 완전히 식욕을 잃었다. 리비는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서 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를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의 프랑스 제 레이스 나이트가운은 밴스 때문에 모두 소용없는 것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그녀는 시트를 들추고 잠자리에 들면서 자신이 신부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밴스는 신혼의 달콤한 꿈을 산산조각으로 부숴 버렸다. 리비는 자신이 밴스의 품에 안겨 그를 사랑하고 또 그의 사랑을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은 밴스를 더욱 그리워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애썼다. 마침내 그녀는 밴스의 체취가 아직도 희미하게 배어 있는 베개에 머리를 묻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지러운 꿈 속으로 녹아들었을 때 그녀의 두 눈 언저리에는 뜨거운 눈물 자국이 엉겨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그녀가 잠에서 깨었을 때 아파트는 칠흙 같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녀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밴스가 돌아온 걸까? 그녀는 귀를 기울였다.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뭐라고 툴툴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급히 홀로 달려가서 불을 켰다. 홀 한쪽의 문이 열려 있고 무언가 힐끗 보이는 듯했다. 밤새도록 밴스는 손님용 침실에 있었던 것이다. 헝클러진 그의 검은 머리가 베개 위에서 움직이며 보다 더 편안한 자세를 취하려고 몸을 뒤척였다. 그의 구릿빛 어깨가 시트위로 드러나 있다. 리비의 가슴은 그에 대한 사랑으로 녹아드는 듯했다. 그녀는 침대로 다가가 그의 다리 위에 손을 얹었다. 「밴스?」 밴스는 시트를 끌어당기며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지금 뭘하는 거요?」 리비는 몸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화난 그의 음성은 다시금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렸다. 「침대를 잘못 찾아오셨다는 걸 말씀드리려구요」 그녀는 메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당신은 약속했었잖아요. 우리가 함께 있게 되면 우리들만의 비밀스런 장소에서 당신의 품안에 나를 안고 영원히 놓치지 않겠다구요. 난 그 약속을 고대하며 지냈어요, 밴스. 난 당신 때문에 가슴이 아파요」 번개 같은 동작으로 침대에서 뛰쳐 일어난 그는 병원에서 입고 있었던 갈색 실내복을 걸쳤다. 「기왕에 당신이 잠이 깨었으니 그럼 얘기 좀 하지, 리비. 자 다른 방으로 갑시다」 자신에 대한 그의 반감은 아무리 억눌러 참으로 해도, 쓰라린 고통이 되어 그녀를 괴롭힌다. 그를 따라 거실로 가면서 그녀는 그를 돕고 싶다는 마음을 꾹 눌러 참고 있었다. 그는 거실로 가면서 가구의 이곳저곳에 마구 부딪쳤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보다도 그에게 더욱 신경이 쓰였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밴스?」 그의 가슴이 크게 부풀어올랐다. 「식사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마음이 괴로우시리란 건 알아요. 하지만 뭘 좀 드셔야해요」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제가 식사 준비를 할께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는 급히 주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곧 물을 끓이고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말했잖소, 난 배고프지 않아」 「그럴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 배가 고파요」 그녀는 식탁 위에 토마토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올려놓은 다음, 인스턴트 거피를 따랐다. 그녀가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를 한입 베먹을 때까지도 그는 주방 입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마치 그의 양어깨 위에 이 세상을 모두 올려놓고 그 무게를 참고 견디는 사람처럼 보였다. 또한 밴스의 절망 상태에 대한 스틸맨 박사의 말이 그녀를 걱정스럽게 했다. 「제가 식사하는 동안만이라도 앉지 않으시겠어요? 몹시 지쳐 보여요」 「내가 없는 사이에 누가 전화하지 않았소?」 「잘 모르겠는데요. 전 수위가 안내해 준 다음 곧 잠이 들었거든요. 무슨 중요한 전화를 기다리고 계신 건가요?」 그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으면서 애매한 몸짓으로 그녀의 질문을 일축했다. 「오늘 아침과 같은 그런 구토 증세는 없었소?」 일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그녀에 대한 그의 보호본능은 변함이 없어서,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더욱 불타오르게 했다. 「아뇨, 없었어요. 그건 단순한 영양부족과 수면부족 탓이었을 거예요. 제가 걱정하는 건 바로 당신이에요」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염려를 숨길 수가 없었다. 「당신은 퇴원을 해선 안되었는데…, 스틸맨 박사는 제 말에 동의했을 거예요」 「그만둬! 당신은 마치 의심이 많은 중년여자 같군 그래」 그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난 당신이 영국에서 알았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해야 당신에게 이해시키지? 당신은 마치 이 일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그녀는 턱을 치켜들었다. 「여러 해 전에 그와 똑간은 얘길 당신에게 했던 기억이 나요. 내가 말에서 떨어졌을 때, 내가 다시 킹을 타도록 당신이 저를 부추겼을 때 말예요. 전 그때 갈비뼈가 두 대나 부러졌고, 마치 죽을 것만 같이 느껴졌지요. 하지만 난 곧 나았고, 당신은 제 마음을 진정시켜서 다시 말 안장 위에 올라타도록 했어요. 모든 사람들이 절 응석받이처럼 대해 주었을 때, 당신은 저의 불안을 일축해 버리고 두려움을 이기도록 집요하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죠. 난 그때 너무도 두려웠고, 그래서 두 번 다시 킹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밴스는 저로 하여금 포기하지 못하도록 했었죠!」 근처의 의자를 손으로 더듬어 찾으면서 그는 주방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난 눈이 멀었어, 리비! 눈이 멀었단 말이야! 당신은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거야. 우리는 지금 갈비뼈가 몇 대 부러진 얘길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난 이제 다시는 청사진을 볼 수도, 공사장을 감독할 수도, 자동차를 몰 수도 없어…, 그 망할 놈의 지팡이가 없이는 계단 한 칸 올라갈 수 없단 말이야! 당신의 남편이란 사람이 당신의 머리카락 한올도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게 대체 어떤 건지나 알아?」 화가 난 분격한 몸짓에 그의 곁에 놓여 있던 커피 잔이 쓰러지면서 커피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리비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행주를 찾으러 싱크대 쪽으로 급히 갔다. 「오 이런, 데지 않았소?」 그는 더듬어서 싱크대 쪽으로 오더니 손으로 그녀의 팔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아뇨, 괜찮아요. 커피가 그리 뜨겁진 않았거든요」 그의 손이 그녀의 팔을 위아래로 쓸어내릴 때 그녀는 뭔가 알 수 없는 번민을 느꼈다. 그들은 이렇게 가까이 서 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향내와 그에게서 배어나오는 남성의 체취가 한데 어우러져 서로를 도취하게 하는 자극을 자아내고 있었다. 입술에 와닿는 그의 입김이 그녀의 온몸에 관능적인 열기를 불어넣었다. 「나이트 가운에 몇 방울 흘렀을 뿐이에요」 그녀는 그에게 녹아드는 자신을 느꼈다. 순간 그의 얼굴이 다가왔고, 그녀는 가슴을 두근대면서 그의 키스를 기대하며 입술을 그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숨을 들이쉬며 그녀를 밀어냈다. 그가 돌아서서 다시 의자가 있는 곳으로 더듬어가자 리비는 낮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함께 가까이 서 있던 그 친밀함의 순간은 흘러가 버린 것이다. 그녀가 바닥에 흘린 커피를 닦는 동안 그는 의자 곁에 뻣뻣이 서 있었다. 다행히도 컵은 깨지지 않았다. 「난 무기력해, 난 위험한 사람이야」 자학적인 그의 말에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밴스」 그녀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의 등뒤로 다가가 그의 팔을 감싸안았다. 그러나 그는 아까의 그 다정함과는 달리, 그녀의 손을 뿌리치면서 몸을 피했다. 「당신은 언제나 저를 보호해 주고 있어요. 당신이 앞을 못 보는 것은 하등의 관계도 없어요. 그걸 아셔야만 해요」 그는 그녀 쪽으로 홱 돌아서면서 격렬하게 외쳤다. 「난 당신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조차 없어!」 「단지 사고가 난 것뿐이에요. 시간을 좀 가지고 생각하기로 해요. 우리 시간을 좀더 두고 생각해요」 그녀는 애원하듯 말했다. 「시간이라구?」 잔인한 웃음이 그에게서 터져나왔다. 「당신은 이해를 못하는군, 리비. 난 앞으로 나아질 가망은 없어. 당신의 남편은 온전치가 못하단 말이야. 당신은 언제쯤이나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거지?」 「당신은 또 자신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있군요」 그녀는 그를 꼭 안고 그의 고통을 빨아들이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의 머리가 분노로 격렬하게 뒤로 젖혀졌지만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좋아요, 그래요. 당신은 시력을 잃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매력뿐만 아니라 용기마저도 잃어버린 것 같군요」 그의 뺨이 붉어졌다. 「누가 비열하게 그런 말을 하도록 가르쳤지? 당신이 그렇게 말하다니…」 리비는 격정에 떨며 두 팔로 자신의 가슴을 감쌌다. 「당신은 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요. 또한 불행하게도, 이번 사고로 인해 이전에 몰랐던 당신의 일면을 알게 되었어요. 저를 대하듯 그렇게 당신 직원들을 대하지 않기를 바래요. 스틸맨 박사 말에 의하면, 당신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명성을 지니고 있더군요. 당신은 매우 성공한 유능한 사람이라구요. 그리고 당신은 운명을 책임질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그는 제게 말했어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으니 당신은 참 좋겠군요! 염려하지 말아요, 당신이 이렇게 일찍 포기해 버렸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말예요!」 「그래, 옳은 말이야, 당신은 이곳에 있지 않을 테니까!」 그가 주먹으로 식탁을 거세게 쾅 치는 바람에 샌드위치 접시가 풀썩 움직였다. 그의 분노에 리비는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당신과는 정말 얘기가 되지 않는군요. 난 우리가 힘을 모으면 어떤 문제라도 잘 처리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군요」 「리비!」 그가 소리쳤지만 그녀는 번개같이 그의 앞을 지나 침실로 달려들어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그는 곧 그녀의 뒤를 쫓아왔다. 그녀가 숨을 돌리기도 전에 문이 다시 활짝 열렸다. 「두번 다시 그런 식으로 나를 내팽개치지마. 난 아직 당신과 끝난 게 아냐!」 그녀는 몸을 돌이키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는 생각지 않아요. 당신이 왜 저와 결혼했는지 그걸 알 수가 없군요. 우린 하느님 앞에서 맹세했어요. 그 맹세가 당신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건가요?」 「제단은 없었어, 리비」 너무도 놀라 말을 잊은 채 리비는 그에게로 한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결혼한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결혼식은 아무런 효력도 없다는 말인가요?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죠? 좋아요, 여기 있어요」 그녀는 결혼반지를 빼서 그의 호주머니에 넣었다. 두 사람의 몸이 거의 닿을 만큼 가까이 선 지금, 그녀는 그의 얼굴에 나타난 초조한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혼자 있으세요. 사랑하는 나의 남편, 당신의 암흑세계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마음껏 절망을 즐기도록 하세요. 위험을 무릎쓰지도 말고, 또 아무도 당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세요. 당신의 아내까지두요」 그녀는 그의 면전에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곧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을 후회했다. 그 반지는 그녀의 일부분이었다. 밴스가 약혼반지로 그녀를 놀래켜 주기 위해 스위스로 날아왔던 그 밤은 리비의 생애 중 가장 멋진 밤이었다. 그때까지 리비는 그가 얼마만큼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반지를 그에게 되돌려 주었다. 밤새도록, 리비는 자신들이 주고받았던 쓰라린 말들을 되새겨 보았다. 그들은 치유되기엔 너무도 가슴 아픈 말들을 서로 주고받았다. 마치 터진 둑처럼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 그녀는 이제 그것을 다시 주워담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밤새도록 눈을 붙여 보진 못했지만 그녀는 아침이 다가온 것이 고마웠다. 그녀는 밴스에게 다시 한번 말해 봐야한다는 절실한 필요를 느꼈다. 만일 그들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만일 새로운 출발이 있을 수 있다면….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머리가 지끈거리며 눈이 불타는 듯 아파오는 걸 느꼈다. 밴스 역시 자신을 영국으로 되돌려 보낼 양으로 아침이 오길 기다리며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을까? 침대에서 일어난 다음, 그녀는 연한 녹청색 면 반바지와 셔츠를 입고 같은 빛깔의 스카프로 머리를 묶었다. 간단히 화장을 마친 그녀는 남편을 찾아나섰다. 어떤 일이 일어났건간에, 그리고 어떤 말들이 오고갔든간에, 그녀는 그들의 결혼생활을 밀고나가기로 결심했다. 홀 쪽으로 걸어나온 순간 그녀는 거실 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었다.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방문객은 남성이다. 마치 조수가 밀려오듯 분노가 또다시 그녀의 내부를 가득 채웠다. 밴스는 또 한바탕의 입씨름을 하지 않고도 그녀를 비행기에 태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낸 것이다. 서로 대화해 볼 마지막 희망까지도 산산조각내버리면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너무 아파서 아파트를 나설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할까? 밴스는 결코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는 일뿐이다. 그녀는 비행장까지 갈 것이다. 하지만 비행기를 탄다는 건 아니다. 밴스가 이해 못하는 건 그녀에게 있어 그가 없는 삶이란 앞을 못 보는 것 이상의 고통스런 삶이라는 사실이었다. 「앤슨 부인」 그녀가 거실에 들어서자 럭비 선수 같은 몸집에 연갈색 머리칼을 지닌 남자가 일어난다. 그는 40대 후반으로 보인다. 「전 마틴 딘입니다. 지금은 사장님의 일을 제가 대신 하고 있습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녕하세요」 리비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남편 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그녀의 맥박이 빨라졌다. 밴스는 청바지에 진초록빛 풀오버를 입고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긴장이 풀린 편안한 그 모습에서 지난밤과 같은 냉혹한 일면은 찾을 수 없었다. 「신혼을 방해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밴스는 엉큼한 사람이에요. 어쨌든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여기 와서야 비로서 밴스에게 아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는 밴스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리비는 그 사이에 밴스의 대행자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그에게 모근 일을 맡길 만큼 그를 신뢰하면서도 어떻게 결혼사실은 숨길 수 있었을까? 「이봐, 친구. 자네 안목이 대단하군 그래」 그는 리비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자네가 계속 스위스를 들락거린 것도 놀랄 일은 아니군 그래」 「고맙게도 이제 리비는 이곳에 있네」 리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큼 정감 어린 목소리로 밴스가 중얼거렸다. 「여보?」 그는 그녀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리비는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손이 그녀를 감싸안았다. 「우리가 당신을 깨웠소?」 그렇게 속삭이며 그는 이전에 늘 하던 대로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리비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아뇨, 아파트는 아주 조용했는걸요. 전 당신이 외출하신 줄 알았어요」 가냘픈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그는 더욱 가까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입술을 그녀에게로 가져가 뜨겁게 오랫동안 키스했다. 그 황홀한 입맞춤은 그녀를 휘청거리게 했다. 그의 품에 안긴 그녀는 현기증과 함게 그가 다른 팔로 자신을 더욱 꼬옥 끌어안는 걸 느꼈다. 마틴은 껄걸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난 밖에 나가 랜드로버 속에서 기다리는 게 낫겠군. 아니, 현장에 갔다가 이따 오후에 두 사람을 데리러오는 게 낫지 않을까? 방해해선 안되니까 말이야」 밴스는 한참 후에 고개를 들고 말했다. 「사과할 것 없네, 마틴. 리비를 은밀히 차지하고 싶었던 내 마음을 자넨 몰랐을 테니까. 다행히도 나와 내 아름다운 아내는 농장에 닿으면 우리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을 거야」 그녀에게서 더욱 뜨거운 반응을 요구하며 그가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을 때 그녀는 다시 한번 놀라움으로 숨이 막히는 듯했다. 어떤 이유에선가, 밴스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남편으로서의 그의 애정을 목도하길 원하고 있다. 그는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 그녀를 가두었고, 그녀는 모든 것을 잊었다. 고통도 잔인함도 그의 거부반응도, 이윽고 마지못한 듯 그가 그녀를 놓아 주었다. 「그는 우릴 농장까지 데려다 줄 거야. 당신 짐을 다 꾸려놓으면, 그가 차 안으로 날라다 줄 거요」 「서두르겠어요」 그녀는 알 수 없는 의문으로 가득 찬 채 주방으로 향했다. 동기야 어찌되었건, 밴스는 그녀를 보낼 계획을 포기했음이 분명했다. 리비는 토스트를 굽고 우유를 따랐지만 생각은 온통 남편의 돌연한 변화에 쏠려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기의 입술을 쓸어 보았다. 그곳에는 아직도 그의 격렬한 입맞춤의 여운이 맴돌고 있다. 그 역시 지난밤의 얘기들을 후회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그의 굶주린 듯한 입맞춤은 감히 상상조차 못했다. 그는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길 원하는 걸까? 확실히 밴스는 그들의 결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길 원하고 있다. 농장은 새로운 보금자리와 새 출발을 의미한다. 리비가 식사를 마치고 주방을 깨끗이 정돈했을 때 모든 짐들은 집 밖으로 날라져 있었다. 마틴은 밴스를 부축해 랜드로버에 태웠다. 밴스는 뒷좌석에 탄 후, 리비의 손목을 붙잡아 그의 옆자리에 앉힌 다음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를 했다. 「자넨 옆에 있는 내 아내의 짐들이나 잘 보게. 난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 내 아내와 즐길 테니까」 「좋아, 알았네」 그는 짐꾸러미들을 정리하며 남자다운 웃음을 날렸다. 마틴이 열심히 짐을 차 안에 옮겨 나르는 사이를 이용해 밴스는 리비의 손묵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지난밤 당신과 하려고 했던 논쟁은 일단 보류요. 우린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소. 그래서 내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당신에게 이야기하기에 좋은 농장으로 가는 거요. 우리끼리만 있게 될 때까지 질문을 보류해 줬으면 고맙겠소」 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밴스의 말은 그녀의 희망을 여지없이 날려 버렸다. 그의 이 멋진 연기는 단지 마틴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 뿐이다. 밴스가 그녀의 손을 들어올려 손바닥에 키스했을 때 엄청난 고통이 그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교묘하게 계산된 이 잔인함이라니…. 고뇌를 혼자 가당하고 싶지가 않아서, 리비는 밴스에게 바싹 다가가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농장까지는 얼마나 가면 되죠?」 그의 널따란 가슴이 눈에 띄게 오르락거린다. 「나이로비에서 한시간 정도」 「당신을 사랑해요」 리비는 일부러 그의 입가에 대고 그렇게 소근거렸다. 「마틴…, 기왕 서비스를 해주려면 시내를 거쳐가는 길에 반투 상점까지 데려다 주겠나? 리비에게 그걸 꼭 보여 주고 싶어」 밴스는 이전에 그 상점에 대해 편지를 쓴 적이 있다. 그곳에는 원숭이의 두개골에서부터 튀긴 바늘두더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팔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이기기 위해 밴스가 엉뚱한 주문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녀는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리비는 여전히 그에게 몸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시내관광은 그녀가 이렇게 하고 있을 시간을 벌어 줄 것이다. 희망에 찬 젊은 신부인 척하고 있을 시간을…. 3 밴스의 농장은 2700m 높이로 솟아 있는 마우 산맥에서 공기가 좀 희박한 1800m 높이에 자리하고 있다. 흰구름이 머리 바로 위에 떠 있는, 따사롭고 신선한 6월의 아침이었다. 랜드로버가 목적지로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마을의 집들이 점점 드물어졌다. 리비는 밴스의 널찍한 어깨에서 고개를 들어올리고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는 시트에 고개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눈밑의 거무스름한 기색으로 보아 그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밤새도록 한잠도 못 잔 것이 분명했다. 지난밤의 그 쓰라림은 마치 옛일인 양 희미해졌지만, 그러나 이 잠시의 휴식은 단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밴스는 마틴의 랜드로버가 가파른 계곡을 돌아 털털거리며 거친 길을 달려내려갈 때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손을 꼭 쥔 채 리비는 차창 밖을 응시했다. 들마다 활짝 꽃 핀 과실수들이 그녀의 시야를 즐겁게 했다. 차가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새하얀 네덜란드식의 농장이 보였다. 전나무들이 마치 레이스마냥 농장주위를 감산 채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 집은 리비가 영국에서 보았던 매혹적인 햄프셔 식의 건물을 연상시켰다. 1800년대 후반에 어느 화란 인이 케냐에 이주해 와서 암스테르담 박공벽으로 된 단층짜리 농장 건물을 지었다고 밴스가 설명해 주었다.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워요」 마틴이 랜드로버를 멈췄을 때 리비는 그렇게 소리쳤다. 리비는 차에서 뛰어내리며 그녀의 왕국을 둘러보았다. 「오, 밴스…, 정말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끝없이 푸르렀고 기온은 기분좋은 봄날의 그것이었다. 푸르른 정원으로는 풍성한 햇빛이 쏟아져 내린다. 그녀는 눈길을 돌려 서쪽으로 면한 창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하얀 거품과 같은 레이스 커튼이 쳐져 있다. 그들이 계획했던 것 이상의 것을 밴스는 갖춰놓고 있었다. 뜨거운 사랑과 연정의 물결이 그녀를 휩쌌다. 리비는 눈으로 남편을 찾았지만 그는 마틴을 도와 짐을 챙기느라고 바빴다. 그녀는 꼼짝 않고 서서 권위와 힘을 지닌, 그러면서도 또한 한없이 부드러운 면을 지닌 키 크고 거무스름한 사내를 경탄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꼭 끼는 그의 옷과 탄탄한 근육에 머물러 있었다. 「전 빨리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요, 밴스」 리비는 소리치며 차 뒤에 놓인 물건들을 집어들었다. 그녀는 그의 팔짱을 끼고 싶었지만 감히 그러지는 못했다. 「리비?」 마틴이 짐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밴스는 현관에 멈춰서서 그녀를 불렀다. 「마틴이 나이로비로 돌아가기 전에 그와 얘기해도 되겠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요」 그녀는 밴스에게 다가가 다시 한번 완강해 보이는 그의 턱에 입을 맞추었다. 「제 걱정은 마세요. 전 집을 둘러보고 싶어 안달이 났으니까요」 밴스는 얼굴에 뭔가를 참느라 애쓰는 기색이 역력한 채 엉덩이에 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마틴이 문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밴스는 리비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그녀는 마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곳까지 데려다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딘 씨. 집에 도착하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자, 그러면 이제 두 분이 사업 얘기를 나누시도록 저는 이만 실례하겠어요」 딘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녀는 발 뒤꿈치를 들며 남편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마틴이라고 불러 주세요, 앤슨 부인.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으니까요. 저와 제 아내가 곧 부인을 저녁식사에 초대하도록 하죠, 밴스가 부인을 기꺼이 양보해 준다면요」 그는 싱긋 웃었다. 리비는 남편을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고대하겠어요, 당신도 좋죠, 밴스?」 「마지는 훌륭한 요리사지. 요리 솜씨가 아주 뛰어나거든」 그는 마지못한 듯 그렇게 대답했다. 리비는 밴스의 손을 꼬옥 쥐었다가 놓고는 집 안으로 앞장서서 들어갔다. 아프리카 원산의 천과 검은 색조의 재목들이 밝은 빛의 흰 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게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다. 그녀와 밴스가 계획했던 그대로였다. 아니, 그것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지고 훌륭했다. 중앙 홀 한쪽으로는 거실과 서재가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식당, 그리고 그 너머에는 주방이 있었다. 침실은 집 뒷편에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빨리 벽을 장식하고 칠을 하기 위해서 밴스는 그야말로 온 힘을 다 기울였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방들은 그들의 침실과 주방, 욕실, 그리고 서재였다. 그밖의 모든 것들은 덧칠을 해야했고, 바닥재도 깔고 창틀도 손을 보아야 했다. 토산품인 화려한 카펫과 가구로 장식된 실내를 상상하기만 해도 그녀는 커다란 기쁨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던가…. 그녀가 짐을 침실로 옮긴 순간 더할 수 없는 흥분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아까 창문으로 얼핏 엿보았던 그 레이스 커튼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방이었다. 그녀는 커다란 침대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큰 옷장과 붙박이 화장대, 그리고 아프리카 원산의 호려한 융단, 밴스는 사과빛의 초록색을 주조로 하여 강렬한 토착민 특유의 색채를 조화시켰다. 그녀는 그의 취향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화장대 위에 놓인 사진이 리비의 시선을 끌었다. 그가 로잔으로 그녀를 방문했을 때 찍었던 사진을 확대한 게 틀림없다. 실롱 성의 고딕 식 아치를 배경으로 그녀가 서 있다. 그가 이 사진을 간직해 왔다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 여행길에 밴스는 그녀에게 프로포즈했었지. 리비는 화장대 위에 올려놓을 밴스의 사진을 여러장 가지고 있었다. 이제 케냐를 떠난다는 생각은 당치도 않은 일이다. 더욱이 이렇게 아름다운 날에는 말이다. 주방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다른 두 개의 침실을 흘끗 들여다보았다. 북쪽의 방은 아기방으로 꾸미기에 제격일 듯싶다. 어쩌면 한두 해쯤 후엔 밴스와의 사이에 귀여운 이이를 낳을 수 있으리라. 그녀의 마음은 어느새 아기를 위해 이 방을 장식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른 도 하나의 방은 다시 수리해야 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언제쯤인지는 모르지만 불이 났던 흔적이 있다. 밴스는 케냐에 맨처음 왔을 때 이 농장을 구입했지만, 리비에게 결혼 신청을 하기까지는 집 수리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러 해 동안 빈 채로 방치되어 있었던 셈이다. 주방으로 들어선 순간, 리비는 이곳이 농장 중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되리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네덜란드 제 델프트 도기 타일로 된 커다란 벽난로가 한족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주방은 처음 지어진 그대로 보존된 것으로서, 마치 암스테르담의 옛집마냥 그렇게 고풍스런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밴스가 왜 그토록 이 집에 매혹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전 주인에게서 그는 오크 제의 고풍스런 테이블과 손으로 섬세하게 깎은 4개의 의자를 인수받았는데 가능한 한 본래의 농장 그대로를 보존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했다. 식탁에 앉자, 창문을 통해 끝간 데 없이 드넓게 펼쳐진 과실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전망에 한동안 리비는 넋을 잃었다. 밴스는 파라다이스를 발견한 것이다. 그녀는 밴스가 해놓은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밴스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효율적이고 매우 기능적인 방들을 만들었으면서도 이전 주인이 의도했던, 따스하고 매혹적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해 놓았다. 리비가 짐꾸러미들을 모두 풀었을 때는 정오였고, 배가 고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밴스의 식욕이 되살아나기를 기대하며 그녀는 점심식사를 준비한 다음, 두 사람을 찾으러 서재로 갔다. 마틴은 나이로비로 돌아가기 전에 뭘 좀 먹어두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중앙 현관 쪽으로 왔을 때 랜드로버의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밴스는 막 차의 문을 닫고 있었다. 「밴스, 점심식사가 준비되었는데요」 「그는 급히 돌아가야 했어. 이젠 우리뿐이야, 리비」 그의 목소리에 실린 그 무엇인가에 리비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침의 그 매혹적이던 연인의 모습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점심이 맛이 없을까 봐 걱정이 되는군요. 수프와 샌드위치예요. 하지만 저녁은 제대로 잘 준비하도록 할께요」 「난 먹는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 하지만 당신이 훌륭한 요리사라는 건 알고 있어. 그러니 염려는 이제 그만둬요」 밴스가 샌드위치를 집어들어 먹기 시작하는 바람에 리비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기 접시에 놓인 것을 다 먹어치우고 우유를 몇 모금 마셨다. 「마틴과 사업 얘기는 잘 하셨어요?」 그 말에 밴스는 아무 말 없이 잠잠했다. 그의 침묵이 불길한 전조가 되는 것 같아 그녀는 두려워졌다.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소. 그는 당신의 존재가 더 흥미로웠던 모양이야」 리비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왜 그에게 우리의 결혼 얘길 안하셨어요? 그는 아주 어색했을 거예요」 그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당신도 알겠지만, 결혼식은 너무도 빨리 결정된 일이어서 모든 사람에게 다 알리기가 매우 어려웠소. 게다가, 난 이곳 농장에서 정식으로 리셉션을 갖고 당신을 회사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었거든. 하지만 이제 그 얘긴 하고 싶지 않소」 리비는 그의 기분을 알 수가 없어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농장, 과수원, 모든 것이 너무도 아름다워요. 믿어지지가 않아요, 밴스」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얘긴 접어 둬요, 리비. 그런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해. 당신에게 할 얘기가 있는데, 내가 말을 다 끝낼 때까지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말씀해 보세요」 「당신이 어제 병원에 나타났을 때, 예고도 없이 멋대로 말이오, 나의 이 두손으로 당신을 목 졸라 죽일 수도 있었소」 그의 목소리에 어린 악의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녀는 말없이 빈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토록 자기를 사랑해 주던 남편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내 편지를 받지 못했다고 했을 때 난 그 말을 믿었어. 만일 편지가 도착했더라면, 당신이 내게 전화도 없이 불쑥 나타나진 않았을 테니까 말이오. 당신이 사고소식을 듣고 나서 하루만 더 런던에서 기다렸다면 그 편지를 받았을 텐데, 당신은 성급하게 내게로 온 거지」 그는 증오와 조롱기 어린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존재를 드러냈어. 특히 스틸맨 박사 앞에서 아내로서의 역할을 멋지게 해냄으로써, 당신은 당신 자신과 나와 그리고 내 회사를 위기에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왔어」 「뭐라구요?」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의 잘생긴 입술이 잔인하게 비뚤어졌다. 「말 참견 않겠다고 아까 약속했잖소」 리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밴스는 식탁을 밀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팔짱을 끼었다. 「나는 적을 가지고 있어, 리비. 회사 내의 누군가가 나를 파멸시키려고 하고 있어. 어쩌면 그들은 성공한 셈인지도 모르지. 광산 붕괴도 고의적인 사고였어. 엄청난 재난을 가져온 사고 말이야. 두 명이 죽고, 난 실명을 했어」 리비는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었지만, 그 놀라운 얘기엔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당신이 내 병실로 들어선 순간 모든 일이 더 복잡하게 되었어. 왜냐하면 당신 역시 표적이 될 수 있으니까. 마틴이 오늘 아침 내 아내의 등장을 안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거지. 이제 그 뉴스는 나이로비 전체에 퍼지게 될거야. 일은 이미 저질러지고 있는 중이지. 당신은 벌써 뒤쪽에 있는 침실을 보았을 거요. 우리가 결혼하기 전날 밤 누군가가 농장에 불을 질렀어. 그 때문에 난 신혼여행도 취소하고 이리로 온 거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조정했다. 「처음에 난 그 불은 어느 술 취한 떠돌이 불량배의 소행인 줄 알았어. 내가 당신을 이곳에 데려왔을 때 또 그런일이 일어나게 하고 싶지는 않았소. 난 집을 완전히 수리하고 범인이 잡히길 바랬지. 하지만 광산에 문제가 생겼고, 일이 더욱 나빠진 거요. 나머지는 당신이 아는 대로야」 그가 말한 모든 얘기는 리비에겐 정말 무시무시한 것들이었다. 「광산에 사고가 생기면 언제나 조사반이 나와 조사를 하지. 만일 과실이 발견되면 내 회사는 도산하게 되고, 난 케냐에서 다시는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하게 될 거요. 이런 소문은 빨리 퍼지지. 특히 두 사람이 죽은 사실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난 아마 아프리카에서는 그 어디에서고 광산 허가를 받지 못하게 될 거요」 그에게서는 비애감이 어린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제 눈이 먼 지금, 내가 표적이었다는 것은 보다 더 확실해졌소. 그 사고로 내가 눈이 먼 것에 대해 범인은 지금쯤 우쭐해하며 의기양양해할 거요. 하지만 그가-혹은 집단인지는 모르지만-모르고 있는 것은 내가 그들과 맞서 싸우려 한다는 사실이지. 나는 엄청난 임금을 지급해야 하는 커다란 회사를 가지고 있소. 수백의 가족이 그들의 생계를 내게 의지하고 있고, 난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돌보지 않으면 안돼. 이런 비극은 광산과 토목 산업계에 오명을 남기게 되지. 특히 광산업이 아직 초기 단계에 있는 케냐에서는」 리비는 모든 얘기를 홀린 듯 들으면서 남편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런 일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마치 실제로 그녀를 볼 수 있기라도 하듯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그랬어」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결연해서 리비는 그가 빈말을 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가능한한 빨리 결혼 무효선언을 하고 싶어. 불행하게도 난 먼저 당신에게 부탁을 하지 않을 수 없어」 침묵이 오랫동안 방안을 감돌았다. 그의 절망적인 상태는 그들이 함께 미래를 설계할 수 있으리란 그녀의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는 몸이 굳어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리비?」 「당신이 제게 중간에 끼어들지 말라고 했잖아요」 「난 병원에서 찰스 팬킨에게 전화를 했소. 그는 그곳의 일을 대강 정리해 놓고 나를 대리해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이곳으로 날아오겠다고 했소」 「정말 다행이군요!」 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렇게 소리쳤다. 만일 누군가가 밴스를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찰스 그 사람일 것이다. 밴스보다 20살 정도 연상인 그는 유능한 왕실 고문변호사로서, 그들의 조촐한 결혼식에서 신랑의 들러리를 서주었다. 「찰스를 변호사로 내세운다고 해서 뭔가 보장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는 내가 이 악몽을 해결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오. 우리는 전략을 세우기 위해 전화로 계속 이야기를 나눠 왔소. 하지만 장신이 이리로 오는 바람에 일이 뒤틀려 버렸지」 그는 마치 뭔가 적절한 말을 찾기라도 하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우리의 결혼 사실을 알지 못했소. 내가 말했듯이, 난 우리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에 공식적으로 결혼 사실을 발표하려고 했소. 하지만 사고로 모든 일이 끝장나 버렸지. 나는 그 누구도 내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소. 나를 망치려는 사람은 그 누구나 당신을 내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오. 이처럼 위험한 상황 하에선, 아내란 사내를 공격받기 쉬운 상태로 만드는 존재일 뿐이오. 그래서 난 당신과 나의 안전을 이해 더 이상 당신을 내 곁에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소」 리비는 이제 모든 것을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더 이상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당신은 이 모든 얘길 편지에 썼나요?」 「그렇소」 「그러니까, 내가 이곳에 온 것이 그들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바로 그거요. 그래서 당신이 잠든 사이에 찰스에게 전화해서 당신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소. 계획을 바꿔야만 할 것 같다고 그가 말하더군」 그는 대체 뭐라고 말했을까? 「만일 지금 당신이 런던으로 돌아간다면 일이 더욱 나빠질 거요. 이런 난국에 아내가 떠나 버린다면 사고 조사반의 관리들에게 내 이미지를 더 나쁘게 해주는 결과밖엔 안될 거요」 「난 당신의 일을 망치고 싶지 않아요」 그는 의자를 돌려 똑바로 앞을 응시했다. 「일은 이미 벌어진 거요. 하지만 우린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소. 찰스만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애가 이 배신행위를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든. 만약 찰스가 이 문제에 대해 조사를 할 동안만 적이 몸을 숨길 필요를 느낀다면 일은 내게 유리하게 작용하게 될 거요. 난 적이 방심한 틈을 노리는 거야」 그는 나이프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난 신혼의 단꿈에 젖은 척 가장할 거요. 모든 사람 앞에서 사랑에 정신이 빠진 사람처럼 행동하는 거지. 사람들은 내가 세상사에는 관심이 없다고 믿을 거요. 내 품에 안긴 아름다운 신부만 빼고는 말이오」 이제야 리비는 그가 마틴 딘 앞에서 했던 행동을 이해할 것 같다. 「우리의 결혼은 이름만의 결혼일 뿐이오, 리비. 하지만 우리만 빼고는 그 누구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어야 해. 물론 찰스도 말이오」 「물론이죠」 그녀는 마치 신음과 같은 쓰라린 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다음주에 찰스가 이리로 올 거요. 그는 우리 농장뿐 아니라 아파트의 손님이 되는 거요」 「알았어요」 「당신과 이곳에서 함께 지내느라고 내가 사무실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놀랄 거요. 마틴은 이곳에 우리 단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소. 그리고 그의 어투로 보아 당신이 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알 수 있어. 그는 평상시엔 그렇게 조용한 친구가 아니거든. 한 시간쯤 후면 사무실의 모든 사람들은 내가 이곳에서 신혼을 즐기고 있다는 얘길 듣게 될 거요. 하지만 결정은 당신이 할 일이오.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니오, 리비?」 그래요! 그녀는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밴스는 손이 닿을 만한 거리에 앉아 있다. 어떻게 그걸 참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 자신의 욕구는 희생해도 좋을 만큼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적당한 말을 찾느라 애쓰는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의 아내가 되길 원하지 않았던가? 운명의 신이 조롱하고 있는 것일까? 리비는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축였다. 「당신의 회사 상황은 이제 다 알았어요. 당신이 모든 것을 설명했으니까. 당연히 당신을 도와 드려야죠」 「고맙소, 리비. 당신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가능한 조처를 다 취해 놓겠소. 당신이 자유롭게 런던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면, 그때 곧 당신에게 이 신세를 갚을 수 있게 될거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이 이곳에 있는 동안 이 집은 당신 집이오. 하고 시은 것은 무엇이나 원하는 대로 해요. 내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소. 그리고…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한가지 더 있소」 그는 셔츠 주머니를 뒤적였다. 「우리의 결혼이 진실인 것처럼 보여야만 하오. 그러니 이 반지는 끼고 있는 게 좋겠소」 그는 반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만일 내가 필요하면 서재로 전화하도록 해요」 그는 벽을 더듬어 가며 주방에서 나갔다. 자수정은 햇살을 받아 마치 프리즘처럼 천장에 조그만 무지개를 걸쳐놓는다. 이제서야 그녀는 밴스가 농장으로 오는 동안 내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마틴에게 그들 사이의 일을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리비는 손가락을 펴고 반지를 다시 끼었다. 지난밤의 그 경솔한 행동에 대한 쓰라린 자책이 몰려온다. 접시들을 깨끗이 씻은 다음 그녀는 침실 곁에 붙은 욕실로 가서 재빨리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몸을 닦은 다음 진에다 면 스웨터를 입었다. 머리칼은 한족으로 빗어내린 다음 손가락으로 땋아내려 어깨 위로 늘어뜨렸다. 그녀는 수트케이스를 정리하고 옷들을 옷장과 욕실에 딸린 장에다 걸면서 오후 시간을 보냈다. 짐을 다 정리하고 나서 리비는 특별한 저녁식사를 마련하기 위해 주방으로 갔다. 몇 천 킬로 떨어진 또다른 대륙 저편이 아니라 바로 한 집안에 밴스가 있다고 생각하니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밴스와 닿을 만큼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고 싶었다. 그녀의 생각대로라면 찰스는 그렇게 빨리 이곳에 도착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 밴스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리라. 그가 마틴 딘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이 그녀는 기뻤지만, 왜 또다른 경영간부인 피터 프롬스의 얘길 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그들의 우정이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런던의 앤슨 네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리비는 피터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두 사람이 매우 절친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밴스는 가장 절친한 사람으로 찰스를 택해 도움을 청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밴스에게 물어 봤는데 그때 그는 피터가 일을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 대답은 매우 애매모호해서 만족할 만한 답은 못되었지만, 그녀는 다른 생각 때문에 더 이상 거기에 신경쓸 여지가 없었다. 이제 농장생활이 안정되면 그녀는 피터에 대해 물어 볼 적당한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와의 첫 번째 저녁식사를 좀더 특별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그녀는 연노랑빛의 면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어깨위로 늘어뜨렸다. 그리고 분위기를 좀더 내기 위해 작년에 밴스가 사다 준 금귀걸이를 달았다. 그가 비록 볼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좀더 예쁜 옷을 입고 얼굴에 가볍게 화장을 했다. 「밴스? 저녁 준비가 다 되었어요」 그는 커다란 책상 앞의 회전의자에 앉아 딕터폰(속기용 구술 녹음기)에 대고 말하고 있다가 그녀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난 별로 생각이 없으니까 당신 혼자 먹도록 해요」 「맛있게 구운 키시와 샐러드예요. 당신 좀 쉬셔야죠」 「난 중요한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오」 「주방에서도 받을 수 있잖아요. 이제 곧 오븐에서 키시를 꺼낼 거예요. 빨리 오세요」 그녀는 거실을 지나 주방으로 돌아오면서 행여나 하고 그의 발소리를 기다렸다. 비네그레트 소스를 뿌린 신선한 샐러드는 냉장고에 준비되어 있다. 그녀는 선반에서 수입품인 리슬링 포도주를 찾아내 차갑게 해두고 오븐에서 키시를 꺼낸 다음 밖으로 나가 야생화를 한다발 꺾어 들어와 푸른 색과 흰색이 아름답게 조화된 도자기에 꽂았다. 몇 분이 흘렀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 느꼈던 그녀의 쾌활한 기분은 식탁에 홀로 앉아 샐러드를 먹기 시작할 때에 사라져 버렸다. 그때 갑자기 주방 입구에 밴스의 모습이 나타났고, 그녀의 가슴은 마구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꽃을 꽂아 놓았군. 샐비아 같아」 점심식사 때에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앉으며 밴스가 말했다. 손으로 여러 번 쥐어뜯기라도 한 듯 머리칼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다. 「음, 그리고 달리아, 피튜니아, 스톡과 스위트 칸나예요. 오, 밴스. 주방의 창문 밖에 야채를 기르기에 꼭 알맞은 곳이 있어요. 정말 너무 좋아요」 「당신은 행복한가 보군, 리비」 그는 포크를 들며 웅얼거렸다. 그의 영민한 얼굴에 뭔가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면 안되나요? 당신은 농장을 정말 숨죽일 정도로 멋지게 만들어 놓으셨어요. 영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려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어요. 꽃에서 풍기는 향기들은 마치 천국에 온 듯한 느낌을 줘요. 전 어서 빨리 농장 전체를 돌아보고 싶어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에요. 아침이 되면 제일 먼저 말을 타고 한바퀴 돌아보기로 해요」 「그건 불가능해」 「왜 불가능한지 전 그 이유를 모르겠군요. 스틸맨 박사는 당신이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고, 늘 하던 대로 운동도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게다가 디아블로는 요 몇 주일 동안 당신이 몹시 그리웠을 거예요. 말도 운동이 필요해요」 「농장관리인이 잘 돌보고 있소, 리비. 당신이 정 그렇게 밖에 나가고 싶다면, 지프를 타고 오렌지 숲으로 난 길을 달리면 되잖소. 그 길은 정말 근사해」 「난 말이 더 좋아요. 만일 당신만 괜찮다면 전 디아블로를 탈 거예요」 「디아블로는 당신이 타기에 너무 거칠어」 「그렇다면 우리 둘이 함께 타요. 그전에도 여러 번 그렇게 했잖아요. 그냥 천천히 농장을 한바퀴 도는 거예요. 너무 무리한 요구는 아니겠죠?」 「포도주가 있는지 모르겠군」 그는 말을 타자는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그렇게 말했다. 「식료품을 뒤적이다가 그걸 찾아냈어요. 오늘 우리의 새 보금자리에서의 첫 번째 저녁식사를 위한 축하용으로요」 홍조가 그의 뺨에 번진다.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의 요리 솜씨는 일품이야. 모든 게 다 맛있군 그래, 언제나 그렇듯이 말이야」 「고마워요. 식사 후에 음악을 들으시겠어요? 제가 오면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레코드를 사왔어요. 난 당신이 그래프맨의 해석을 좋아하시리라 생각해요」 「오늘밤은 말고, 리비」 그녀는 핑계삼아 식탁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디저트로 뭘 드시겠어요, 무화과? 아니면 망고?」 「난 됐소」 그녀의 눈길은 그의 빈 커피 잔에 가 멎었다. 그녀는 커피 포트를 들어 그의 잔에 커피를 가득 따랐다. 무심코 그녀의 다리가 그의 팔을 스쳤고, 동시에 그녀의 머리칼이 그의 뺨 언저리에 가 닿았다. 그가 냅킨을 식탁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갑자기 숨을 들이마시며 흠칫 하는 것이 느껴졌다. 「잘 자요」 그녀를 피해 급히 나가느라고 그의 어깨가 문어귀에 부딪쳤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욕설 섞인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주방을 정돈하고 나서, 리비는 서재를 지나치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염려했던 대로 책상 맞은편에 놓인 소파 겸용 침대가 잘 정돈되어 있다. 농장관리인이 그를 도와 자리를 봐주었으리라. 밴스는 이미 담요 밑에 들어가 마치 잠든척 꼼짝도 않고 있다. 그녀는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서 침실로 돌아와 잠자리를 준비했다. 그는 대체 언제나 그녀를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될까? 언제쯤이면 그를 돕게 해줄까? 그에게 쏟아붓고 싶은 이 사랑을 언제나 받아들이게 될까…. 뜨거운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그의 아내가 되고자 거의 3년 동안을 기다려 왔는데, 이렇게 그의 침대에 홀로 누워 그 어느때보다도 지독한 공허와 상실감을 느껴야 하다니…. 4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리비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곁에 놓인 시계는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게 늦도록 잤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아서 리비는 머리칼을 추스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밴스?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깨워서 미안하오」 그는 약간 열린 문틈으로 말했다. 「조금 있다가 나가야 될 것 같아서. 당신이 일어났을 때 내가 어디 갔는지 궁금해하면 안되겠길래 깨웠소」 리비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급히 달려가 문을 활짝 열었다. 「당신은 사무실에 가시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요」 「나이로비로 가는 게 아니오」 「그럼 어디 가세요?」 「광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사망한 두 사람의 가족을 방문할 거요. 그들의 장례식에도 못 가봤거든. 그들은 반투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급경사가 진 지역에서 살고 있소」 「어떻게 가실 생각이세요?」 「물론 차로 가지」 「제 말은 누가 운전할 거냐는 말예요」 「제임스가, 농장관리인 말이오」 「제가 대신 운전하겠어요」 「안돼, 리비. 내가 말했잖소. 범인이 체포될 때까진 당신이 나서지 않기를 바란다고」 「당신과 함께 가는한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예요. 당신이 저와 함께 슬픔을 당한 가족을 방문한다면 더욱 그럴듯해 보이지 않겠어요? 그리고 당신 회사 사람들이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있다면, 당신 혼자 가는 것이 더 이상해 보일 거예요. 제발, 밴스. 전 밖에 나가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싶어요」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난 지금 곧 떠날 거요. 일기예보에 의하면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했소. 그리고 출발을 한다고 해도 마을로 가는 길은 늪지대가 많아 골치가 아플 거요」 「5분 내로 준비하겠어요」 「그럼 스웨터를 가져가는 것이 좋겠소. 높이 올라갈수록 기온이 낮아지거든. 특히 비가 내리는 날은 말이오」 「서두르겠어요」 「커피와 토스트를 준비해 뒀소. 먼저 뭘 좀 먹는 게 좋을 거요. 그동안 난 제임스에게 지프를 현관 앞으로 가져오도록 일러 두지」 그녀는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카키색 셔츠와 바지 차림을 한 늘씬한 구릿빛 몸이 그 어느때보다도 더욱 그녀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아마도 농장관리인이 그가 옷 입는 것을 도와 줄 것이다. 리비는 대체 언제쯤에나 그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게 될지 궁금했지만 사실 그건 다음에 생각해도 될 문제다. 재빨리 샤워를 한 그녀는 엷은 하늘색 블라우스에 진바지를 입고, 스칸디나비아 식 니트 스웨터를 망토처럼 등에 걸쳤다. 시간이 없었으므로 머리는 풀어 가볍게 빗질을 한 다음 어깨 위로 늘어뜨렸다. 20분쯤 뒤 농장을 따라 난 포장도로 위로 지프를 몰고 가는데 어제와 마찬가지로 푸른 하늘엔 하얀 뭉게구름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다행히도 밴스는 별로 신경이 날카로워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리비는 마음이 홀가분했다. 「왼쪽으로 꺾어져야 하나요, 밴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비는 어제 그들이 지나온 풍경과 거의 비슷한 풍경이 펼쳐져 있는 걸 보았다. 수마일씩 상록수림이 계속되면서 푸른 풀밭이 점점이 산재되어 있다. 지금껏 아무도 밟아 보지 못한 미지의 자연과도 같았다. 리비는 이렇게 남편과 단둘이 차 안에 타고 고즈넉한 길을 달리는 것이 기뻤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모험을 좋아한다지만 여긴 아프리카이다. 런던에서 해머스미스로 드라이브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녀가 문제에 부딪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밴스는 알 것이다. 마치 길 잃은 새끼를 찾아 풀숲을 헤매는 엄마 사자같이…. 그녀는 고지대를 방문했던 관광객들로부터 들은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밴스와 함께라면 그 어떤 문제도 잘 이겨낼 수 있다. 그가 앞을 못 본다는 사실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가 그것을 알기만 한다면…. 길을 따라 약16km쯤 달렸을 때 리비는 마치 천둥소리같은 큰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리자 깜짝 움츠렸다. 그녀의 행동을 눈치챈 듯 밴스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놀라지 말아, 영양 때들이 숲을 따라 달리는 소리니까. 가다 보면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동물이야」 「그밖에 제가 또 알아야 할 건 없나요?」 그녀는 가벼운 한숨을 토하며 물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 같은 것이 번졌다. 「이쪽으로는 사자나 치타 같은 것은 없을 테니까 염려 말아요. 그들은 마른 관목숲을 더 좋아하지. 그런 야생동물을 보기 위해선 나이로비에서 반대 방향으로 몇 시간 가는 마사이 암보세리 보호구역엘 가야 될 거야」 밴스가 일러 준 지점에 도착할 즈음, 리비는 목적지로 향하는 도로가 더욱 가팔아지는 것을 깨달았다. 나무가 점점 줄어들고 대나무들이 늘어났으며 그 너머로는 늪지가 펼쳐져 있다. 그녀는 공기가 희박해졌을 뿐만 아니라 기온도 급격히 떨어진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치 폭풍을 예고하듯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잘 봐요, 리비. 당신이 지금 달리고 있는 도로는 곧이어 오른쪽으로 돌게 되어 있소. 그러나 돌기 전에 또하나의 차길이 나 있을 거요. 그 길을 따라 숲까지 똑바로 가요. 8km쯤 가다 보면 오두막들이 들어찬 개간지가 보일거요」 리비는 풀들로 뒤덮여 거의 분간하기 힘든 길을 따라 지프를 달렸다 구름 뒤에 해가 가리워져 숲은 어둠침침했고, 그래서 마치 저녁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밴스의 말대로, 그 길은 약 20채 정도의 오두막이 들어선 개간지에 가 닿아 있었다. 밝은 빛의 면 셔츠와 드레스를 입은 남녀 아이들이 지프를 보고는 우르르 몰려왔다. 「잼보!」 열린 창을 통해 밴스는 아이들을 불렀고 그들은 스와힐리 어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뭐라고 하신 거예요?」 「내가 왜 왔는지를 말하고 여인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했어. 그들은 수줍음을 타서, 먼저 아이들에게 말하는 게 낫거든」 그들은 곧 돌아왔고,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12살쯤 된 소년이 대표로 나서서 말했다. 한참 동안 이야기가 오갔다. 밴스는 얼굴을 찌푸렸고, 리비는 뭔가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에요, 밴스?」 그는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난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하는군. 여인들은… 살인자와는 얘기하고 싶지 않대.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들은 나나 내 회사에 관계되는 것은 죽음을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들은 영어를 할 줄 알아요?」 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여인들은 저와는 얘기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들도 사고로 당신이 실명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그건 그들의 감정을 바꿔 놓을 거예요」 「그만둬, 리비」 「밴스, 혹시 알아요? 그들은 슬픔에 잠겨 있어요. 그러니까 나도 역시 고통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지도 몰라요. 우리는 같은 처지에 있어요. 만일 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신 말에 귀를 기울일 거예요. 한번 해볼 만하잖아요」 「당신을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 했어. 당신은 내 아내야. 그들은 당신 역시 재앙을 가져온다고 생각할 거야」 「밴스, 당신은 그들을 위로하려고 왔어요. 그러니까 모든 가능성을 다 타진해 봐야 하잖겠어요?」 갑자기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이봐, 리비. 이 여인들은 적대감을 느끼고 있어. 당신은 그들의 관습이나 생각을 전혀 모르잖아. 난 당신을 막 폭발할 것 같은 이런 상황 속에 처넣을 수는 없어!」 그는 더욱 세게 그녀의 손목을 죄었다. 「적어도 아이들에게 여인들이 저와 얘기해 볼 의사가 있는지는 알아봐야지 않겠어요?」 그녀는 다른 쪽 손으로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잠시 후 그는 아이들에게 뭔가를 말했고 아이들은 다시 우르르 달려갔다. 그들은 기다리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아이들은 다시 몰려왔다. 대변인 역할을 맡은 아이가 리비를 가리켰다. 「당신은 와도 돼요. 하지만 이 사람은 안돼요」 「이건 좋지 않아, 리비. 당신도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한번 해보겠어요. 나도 두렵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전 여인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문제가 생기면 그 표시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해요, 멈추지 말고」 「그러겠어요」 그녀는 밴스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지프에서 빠져나와 숲 어귀의 오두막 쪽으로 향하고 있는 아이들을 따라갔다. 오두막 입구에 이르렀을 때, 팔에는 아기를 안고 앞치마 자락에는 아장거리는 아이를 매단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 또다른 여인은 문 옆에 서 있다. 반가워하는 기색은 눈곱만큼도 없이 그들의 검은 눈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리비는 두려움은커녕 그들이 남편을 잃었다는 것에 대한 애절함이 가슴을 내리눌렀다. 그래도 밴스는 살아 있지 않는가…. 「전 리비 앤슨이에요」 그들은 아무 말이 없다. 「당신들 남편들이 돌아가셨다는 걸 알아요. 그 무엇으로도 그들을 다시 살려낼 수 없다는 것두요. 하지만 제 남편은 당신들이 살아 있을 때까지 회사에서 생계를 보장해 주겠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해요」 여인들은 말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그녀는 그들을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 남편이 살아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 사고로 제 남편 역시 큰 상처를 입었어요. 그는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사람 구실을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죠. 하지만 당신들이 남편을 사랑했듯이 저도 제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곁에 머물러 있고 싶어요」 문가에 서 있던 여인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리비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말을 계속했다. 「제 남편은 괴로워하고 있어요. 그가 당신들을 돕도록 해주신다면, 그것은 곧 그를 돕는 일이 될 겁니다. 그는 어제 병원에서 퇴원했기 때문에 이제서야 당신들을 보러 오게 된 거예요. 오늘 아침 맨 먼저 그는 당신들을 찾아와 당신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봐야겠다고 제게 말했어요. 경제적인 문제는 걱정 말라구요」 「어떤 사람들은 그 사고가 당신 남편 때문이라고 해요」 라비 견에 서 있던 여인이 느리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가 자신을 소경으로 만들 그런 사고를 일으켰다는 말이에요? 그는 누가 대체 그 사고를 일으켰는지 알아내려 애쓰고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은 곧 체포되어 벌을 받게 될 거예요」 「당신의 아이들은 어디 있죠?」 다른 여인이 수줍은 듯 물었다. 「제 남편이 당신들과 회사 일을 걱정하는 동안은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어요」 두 여인은 서로 마주보더니 다시 시선을 리비에게로 돌렸다. 「아기를 원하세요?」 「무척요」 리비는 진심 어린 말투로 대답했다. 「당신 아이들처럼 그렇게 예쁜 아들과 딸을요」 「당신 남편은 당신 눈을 볼 수 없나요?」 「못 봐요. 모든 것이 항상 밤과 같죠」 「아이를 갖기 위해 앞을 볼 필요는 없지요」 다른 여인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앤슨 씨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앞을 못 본다는 것이 그에게 무얼 뜻하는 건지 아시겠죠?」 두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앤슨 씨는 지금 차에 있어요. 그는 당신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어하죠. 만일 절 따라오신다면요」 그녀는 그들이 어찌하건 거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차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밴스는 가슴에 팔짱을 낀 채 차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잘 됐어요, 밴스」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팔을 감사며 말했다. 그녀가 그에게 손을 댔을 때 뭔가 뻣뻣한 느낌이 그의 몸에서 전해졌지만, 뜻밖에도 그는 한 팔을 그녀의 어깨 위에 얹어 놓는다. 두 여인은 곧 뒤따라왔다. 그들은 스와힐리 어로 가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그는 부드럽게 그들에게 대꾸했고, 그리하여 한동안 긴 대화가 오고갔다. 리비는 통역이 필요없었다. 그의 눈과 몸짓만 봐도 그가 느끼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밴스는 앞가슴 주머니에서 두 개의 봉투를 꺼내어 그들에게 급히 내밀었고, 그들은 잠시 망설이더니 그것을 받아들었다. 밴스의 손이 리비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들은 당신에게 매우 호의적인 것 같애. 우리를 식사에 초대했어. 거절할 수 없잖겠어」 그가 아주 낮은 소리로 말해서 그녀는 간신히 알아들을 정도였다. 「그들이 대접하는 것은 뭐든 맛봐야지」 그는 매우 즐거운 듯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그의 허리에 둘렀다. 「당신이 먹는 거라면 저도 다 먹을 거예요」 그들은 함께 오두막 앞의 공터로 걸어갔는데, 그곳은 공동의 식사 장소처럼 보였다. 옥외에 마련된 불 위에는 긴 꼬챙이가 가로 걸려 있고, 거기에 남비가 매달려 있다. 밴스는 단단히 다져진 땅 위에 자리를 잡더니 곁으로 리비를 이끌었다. 나무 식기들이 곧 그들 앞에 놓여졌고, 이어서 리비가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매우 먹음직스런 여러 가지 음식들이 담겨져 나온다. 모든 음식들은 다 뜨거웠고, 불꽃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하늘은 차가운 바람을 동반한 시커먼 구름으로 아가보다 더 위협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이들은 마치 아무런 추위도 공포도 느끼지 않는 듯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우린 이제 여길 떠나야겠어. 날씨로 봐서 비가 내릴 것같아. 비바람의 기미가 느껴져」 그녀와 밴스는 식사를 다 끝마친 다음 폭풍우가 몰아닥치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할 것 같다고 정중히 설명했다. 그런 다음 서둘러서 차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리비가 차의 엔진을 막 걸었을 때 첫 번째 빗방울이 차의 앞유리를 후두둑 때렸다. 그리고 채 2km도 못 가서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풀잎 밑에서는 미끈미끈한 진흙이 스며나와 흙탕물이 점점 흥건해졌다. 리비는 마치 미끄러운 스케이트 링크 위를 달리는 것처럼 느껴져 불안해졌다. 「차를 제대로 운전할 수가 없어요」 리비의 가느다란 목소리에는 두려움의 기색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러면 차를 한쪽으로 대고 엔진을 꺼요. 먹구름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립시다」 「한번 해보겠어요」 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대로 하려고 차를 움직이자 차는 반바퀴를 빙그르르 돌며 앞으로 미끄러졌다. 차를 똑바로 하려고 갖은 애를 쓰다가 그만 차길을 훨씬 벗어나고 말았다. 「밴스! 부딪칠 것 같아요!」 충돌 일보 직전에, 리비는 그의 팔이 어깨를 감사며 자신의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는 것을 느꼈다. 「괜찮아, 리비」 그는 그녀의 떨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녀를 꽉 끌어안고는 그녀의 목에 뜨거운 키스를 하면서 쉰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전나무 숲에 쑤셔박힌 것뿐이야」 전율이 그녀의 온몸을 휩쌌고, 그래서 그녀는 밴스에게 더욱 꼭 매달렸다. 「이렇게 놀란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바퀴가 제멋대로 돌아가요」 「쉬!」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눌러왔다. 「이젠 됐어. 생각하지 마」 그는 견딜 수 없다는 듯 굶주린 입술로 그녀에게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그 사고는 그들의 감정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그의 팔에 안겨 있다는 황홀감이 그녀의 전신을 뜨겁게 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리비는 그의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털로 뒤덮인 그의 따스한 살갗을 더듬었다. 「사랑해요」 리비는 그의 얼굴과 눈꺼풀에 온통 키스를 퍼부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갑자기 그가 긴 숨을 토하며,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그녀를 떼어 놓으며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다. 「당신은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군. 난 차에서 내려서 얼마나 깊이 진창에 빠졌는지 살펴봐야겠어」 리비는 그를 부축해 함께 차에서 내리느라고 몇 분 동안 씨름을 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현실로 되돌아온 것이 아까의 그 사고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다. 그는 단지 그녀를 달래 주려고 했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의 열정적인 키스는 그녀의 온몸을 불타오르게 했다. 그가 지니고 있는 강한 육체적 매력은 언제나와 다름 없었지만, 그러나 지금 그것은 마치 거대한 불길과도 같이 더욱 강렬해져 있었다. 한번만 더 그가 손을 댄다면 그녀는 곧장 연기로 화할 것만 같았다. 밴스가 다시 차 안으로 올라왔을 때도 비는 꾸준히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는 파카를 벗어 뒷자리에 던졌다. 그리고는 리비가 건네준 티슈로 손에 묻은 진흙을 닦았다. 「비가 그칠 때까지 이곳에 있어야겠어. 비가 그치면, 차를 후진시킬 수 있나 하번 살펴봐요. 내가 밀어 보겠소. 우린 큰 어려움 없이 길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애. 내 말은, 뭐가 부러지거나 크게 손상당한 것은 없는 것 같다는 말이오」 「비가 언제까지 올 것 같아요?」 「그리 오래 오지는 않을 거요.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 편안하게 있어야지. 점화장치를 돌려요, 내가 히터를 켤 테니까」 즉시 지프 안은 따스하고 안락한 장소로 변했다. 밴스는 그녀의 뒷자리로 손을 뻗어 바닥에 놓인 작은 가방을 더듬더니, 그것을 열고 브랜디 한 병을 꺼냈다. 「한 잔 하겠소?」 그는 몇 방울을 바닥에 흘리긴 했지만 조심스럽게 따라 그녀에게 주었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리비는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그와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잊기 위해서라도 뭔가가 필요했다. 「고마워요」 독한 술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갔고, 그 바람에 그녀는 기침을 했다. 잔을 그에게 건네주자 그는 술을 따라서는 단숨에 비웠다. 그런 다음 또다시 한 잔을 따랐다. 그가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취하려고 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잠시 후 리비는 비가 그친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남편의 행동을 지켜보는 데 골몰해서 비가 그친 것을 몰랐던 것이다. 「밴스?」 「음?」 「이제 차를 한번 빼보기로 할까요? 더 이상은 비가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조금 있다가」 「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이제 곧 어두워질 거예요」 「언제나 어두워」 그는 분명치는 않지만 그렇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아요」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당신과 함께라면 절대 두렵지 않아요」 「그렇다면 잘됐군 그래」 그렇게 말하더니, 그는 몸을 더욱 편안히 하고 창에 고개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리비는 자신도 시트에 고개를 대고 기댔다. 오늘은 남편의 또다른 일면을 경험한 것 같다. 그를 사랑하는 것이 이렇게 케냐의 고지대에서 진흙탕에 쑤셔박힌 채 밤을 지새우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렇다면 그렇게 하리라. 그는 내 존재를 언제까지고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거이다. 그가 자신의 장벽을 헐 때가 다가올 것이고, 나는 그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리비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씩 조금씩 눈꺼풀이 무겁게 감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밴스가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리비?」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그리고 자기가 밴스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커다란 달이 계곡 위에 걸려 있고, 구름은 이미 자취도 없다. 「내 시계 좀 봐, 몇 시지?」 그녀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10시 45분요」 그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입속으로 웅얼거렸다. 「당신을 이런 데서 잠들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아냐, 그렇지 않아. 오늘 그 여인들에게 했듯이, 당신의 마음을 달래 주기 위해서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야 할 지경이야」 그는 뒤로 손을 뻗어 파카를 집어들더니 문을 열었다. 「후진시켜 봐요. 내가 움직이라고 말할 때 액셀러레이터를 밟아요. 이젠 진흙이 좀 말랐으니까 우린 잘 해낼 수 있을 거요」 여러 번 노력한 끝에 밴스는 차를 차도 위로 밀어올렸다. 그는 곤경에서 헤어난 것이 기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차안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집으로 갑시다」 집으로. 그것이 우연히 나온 말이건 아니건, 리비는 기쁜 마음으로 그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했다. 5 리비가 농장에서의 일상생활 속에 정착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무언의 양해에 의해, 밴스는 나이로비의 사무실에는 가지 않았다. 그는 리비와 함께 아침식사를 했고 라디오를 통해 뉴스를 들었다. 그런 다음엔 하루 종일 농장관리인과 지내면서 식사 때에나 가끔씩 집으로 돌아왔다. 리비는 청소를 하고 세탁을 하고 그리고 식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밴스와 함께 지내는 저녁 시간이 그녀에겐 가장 소중했다. 밴스는 집에 돌아오면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그런 다음 그들은 베란다에서 함께 셰리 주를 마시고 식사를 한다. 때때로 그들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조용하게 저녁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또 어느 날 밤에는 논리적이고 비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들은 그들의 미래나 서로에 대한 느낌, 혹은 그들 자신의 얘기만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이 시작이란 걸 리비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그들이 지금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다고 생각할 거라는 것도 안다. 그들 사이에 부부의 다정함과 애정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하리라. 숲에서의 그날 밤 이후, 밴스는 그들 사이에 감정적인 거리감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접촉도 피하려고 무척 애썼다. 그래서 그가 다시 회사에서 하루 종일을 보내게 된다면, 함께 지내는 시간이 또다시 바뀌게 될 것이란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조사반에 대한 일뿐만 아니라, 일단 찰스가 도착하게 되면 밴스와 단둘이만 있을 시간이 과연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햇빛이 눈부신 아침, 그녀는 자리에서 눈을 뜨면서 오늘이 그가 사무실로 출근하기 전의 마지막 날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오늘만이라도 말을 타게 해달라고 그에게 졸랐지만, 함께 보냈으면 하는 그녀의 바람을 무시한 채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리비는 혼자 말을 타기로 작정하고 청바지에 면 니트의 윗도리를 입었다. 주스와 토스트로 가벼운 식사를 마친 리비는 축사를 향해 방을 나섰다. 날씨는 맑고 따사로웠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디아블로는 축사의 맨 끝 우리에 있었다. 그녀는 친근한 말 냄새와 건초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녀는 자신의 말인 킹이 불현듯 그리워졌지만, 밴스의 종마를 탄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그녀가 우리 속으로 들어섰을 때, 디아블로는 킁킁거리며 그녀의 냄새를 맡는다. 리비는 디아블로의 콧잔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자, 디아블로, 오랫동안 기다렸지, 요 귀염둥이야. 한번 신나게 달려 볼래? 밴스는 내가 널 잘 다루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린 잘할 수 있어, 그렇지?」 그녀는 벽에 걸린 굴레를 끌어내어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런 다음 디아블로를 끌고 축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디아블로는 햇살 아래로 걸어나왔을 때 어느때보다도 더 얌전해 보였다. 「혼자선 절대로 디아블로를 탈 수 없을걸, 리비!」 그 소리에 몸을 돌린 리비는 문에 손을 짚은 채 축사 입구에 서 있는 밴스를 보았다. 그는 니트 셔츠에 진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녀는 그밖에 달리 더 좋은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고전적인 몸매와 뼈대는 언제나처럼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완강해 보이는 강인한 턱의 선이 그 어느때보다도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당신이 함께 있었으면 했어요. 디아블로는 제게 거역하지 않는군요…, 제 목소리를 금방 알아들었나 봐요. 이 녀석이 뛰놀고 싶어서 못 견뎌 한다는 건 알고 계시죠? 저랑 잠깐만 타보겠어요?」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군」 디아블로는 주인의 냄새를 맡고는 그의 넓은 가슴에 코를 비벼댄다. 밴스는 말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몇 마디 하더니 리비가 거의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우아하게 말 위에 올라탔다. 그는 왼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올라타요, 리비」 그건 마치 세계가 정지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밴스의 앞자리에 올라탔을 때 전율이 그녀의 온몸을 휩쌌다. 그들은 이렇게 종종 함께 말을 탔었고, 그럴때면 밴스는 그녀와 떨어지기 싫다면서 더욱 가까이 끌어당기곤 했었다. 디아블로는 아침 산책에 신이 난 듯 껑충거렸다. 밴스의 힘센 두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리비는 그의 가슴의 박동이 느껴질 만큼 그의 널따란 가슴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야릇한 감정이 그녀를 휩쌌다. 흥분감과 유쾌함…, 그리고 포근함. 매일 매시간 자신의 용기를 시험당하고 있는 이 사람, 밴스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샘솟는다. 그녀는 두 누을 감았다. 그리고 디아블로의 등에 앉아서 앞을 못 본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느껴보려고 애썼다. 「먼저 어디로 갈 거죠?」 「햇빛 속을 질주하는 거야」 그는 디아블로의 등을 두드렸다. 마치 귀한 짐을 운반하고 있기라도 한 듯, 말은 부드럽게 움직인다. 농장은 오렌지 나무가 들어찬 계곡 한가운데 웅크리고 있었다. 끝없이 계속되는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이 리비의 마음을 매혹시켰다. 그들은 향기를 풍기는 꽃송이들을 그득 달고 있는 복숭아 밭과 배나무밭, 그리고 자두밭 가운데를 지났다. 과수원을 지나면서 뭔가 자유로운 기분을 느꼈는지 디아블로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그들은 풀밭 위를 리드미컬하고 빠른 말의 속도에 의해 흔들리며 지나갔다. 한참 후, 밴스는 디아블로에게 천천히 걸으라고 명령했다. 지금껏 그들 중 누구도 말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었다. 말을 타는 것이 너무도 상쾌하고 좋아서, 그녀는 남편이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사실은 말을 타고 달리는 동안은 남편이 불편하지 어쩐지도 생각지 못했다. 「바람을 뚫고 똑바로 질주하면 어떤 기분일까요?」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입술이 밴스의 턱에 가볍게 스쳤고, 그녀는 그가 몸을 떠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밴스?」 그녀는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고개를 돌려 앞을 응시했다. 「당신이 언제나처럼 똑같은 향수를 사용해서 정말 기뻐. 어떤 것이 언제나 한결같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좋은 일이야」 그는 그녀가 오랫동안 들어 보지 못했던 허스키한 소리로 말했다. 디아블로는 숲 근처에 서서 맛있게 풀을 뜯고 있었다. 밴스는 고개를 하늘로 향하더니 이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말했다. 「태양의 위치로 보아 우리가 상당히 오랜 시간을 보낸 것 같군. 돌아가는 게 좋겠어. 점심 때쯤 전화 올데가 있거든」 「아직 이른 시간이에요. 당신이 괜찮으시다면, 내려서 잠시 쉬어도 될까요? 편히 눕고 싶어요」 밴스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어디 아픈 것은 아니지, 응?」 그의 목소리엔 염려의 기색이 어려 있었고, 애써 가장하려고 했었던 그녀에 대한 무관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이 아침이 끝나지 않기를 바랬다. 집으로 돌아가면 그는 곧 서재에 틀어박힐 것이고, 그러면 그녀는 하루 종일 그를 못 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나아질 것 같지가 않아요. 한동안 말을 타지 않았더니 다리 근육이 약간 아파요」 그녀는 그의 숨결에서 초조한 기색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곧 말에서 내려섰다. 그녀는 순간 그 어느때보다도 더 큰 사랑을 그에게서 느끼며 남편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가 땅에 내려서도록 부축해 주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부드러운 갈색 눈빛 때문인지도 몰랐고, 아니면 그에게 빨리 안기고픈 다급함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급히 그의 품에 안기려고 다리를 디아블로에게서 너무 빨리 내리는 통에 밴스를 향해 곤두박질쳤다. 그 충격으로 밴스는 신음과도 같은 소리를 질렀고, 두 사람은 풀밭 위로 나가떨어졌다. 「밴스!」 그녀는 무릎을 일으키며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녀는 그에게로 다가가 몸을 굽히고 그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풀밭 위라 다행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무게가 가중되면서 그는 머리를 돌출된 바위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달링? 괜찮으세요?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리비는 손으로 그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을 헤쳐 보았다. 관자놀이께에는 이미 조그만 혹이 나 있었다. 그는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 듯했다. 「내 잘못이야」 그녀는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밴스」 그녀는 그의 얼굴에 온통 입을 맞추면서 소리쳤다. 「일어나세요, 밴스. 정신 좀 차리세요」 자신의 욕망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들은 사람의 흔적조차 없는 아주 외진 곳에 와 있었다. 「리비?」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맨팔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리비는 그의 목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의 목은 그녀의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밴스의 반쯤 떠진 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리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다쳤소?」 그가 급히 물었다. 「사실대로 말해요!」 리비는 밴스가 자신의 안전을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전 괜찮아요, 밴스. 다친 건 당신뿐이에요! 다친 곳이 크게 부풀었어요. 제 탓이에요. 너무 급히 내리려다가 그만…」 상황을 알아챈 순간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을 말해 봐, 리비. 조금 전만 해도 당신은 몸이 좋지 않았잖아. 안 그런 척하지 말고 어서 말해 봐!」 「속이는 게 아니에요, 밴스. 난 그저 디아블로를 쉬게 하고, 잠시 동안 뻣뻣해진 제 다리를 풀고 싶었을 뿐이에요」 밴스는 염려로 몹시 초조한 듯했다. 「당신이 내게 사실대로 말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만 있다면…」 그는 마치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듯 그녀의 다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당신이 입고 있는 게 뭐지?」 밴스의 손이 리비의 윗몸을 더듬었다. 그의 손은 이제 더 이상 의사와 같은 손길이 아니었다. 이 새로운 감각은 그것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어서 리비의 입술에서는 환희의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는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을 즐기는 듯 계속해서 리비의 목과 목덜미를 애무했다. 그의 손가락이 리비의 머리칼을 발작적으로 감아쥐었다.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정말 몰랐어」 밴스는 자멸적인 신음을 토해내면서, 그들의 숨결이 서로 엉킬 때까지 그녀의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리비…」 그의 입술이 굶주린 듯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는 그녀를 더욱 바싹 끌어당겼고 그들은 한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서로를 더욱 끌어안았다. 리비는 이 길고 숨막힐 듯한 열정에 자신을 맡긴 순간 대지가 온통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밴스는 그토록 뜨겁게 그녀의 입술에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뼈도, 무게도 없는 듯한 느낌이었고, 오로지 그의 사랑을 갈망하며 환희에 떨고 있는 자신을 느낄 뿐이었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내부에서 일고 있는 열정에 불을 붙였다. 오직 밴스만이 잠재우고 달래 줄 수 있는 뜨거운 갈망에 그녀는 몸부림쳤다. 리비는 너무도 도취해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디아블로가 끊임없이 땅을 차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말은 콧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울부짖었다. 바로 그 순간, 밴스는 리비가 숨을 죽일 만큼 초인적인 힘과 속도로 그녀와 함께 풀숲으로 몸을 굴렸다. 「움직이지 말아요.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그는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리비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가 고통스러울 만큼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기뻤다. 말을 늘 가까이 하며 살아온 리비는 디아블로가 어떤 적대적인 것, 어쩌면 치명적인 어떤 것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거칠고 원시적인 땅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위험으로부터 감싸주고 있는 단단한 그의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마침내 그녀가 더 이상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순간, 디아블로의 발작적인 발길질이 조용해졌다. 곧이어 리비는 말의 부드러운 울음과 콧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커다란 말을 괴롭힌 것이 무엇이었든간에 그녀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고, 밴스도 그녀를 안고 있던 팔의 힘을 풀었다. 「소리내지 말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봐, 리비. 그리고 내 어깨 너머로 살펴 봐. 디아블로는 뱀과 싸웠을 거야. 디아블로가 덤벼들기 전에 뱀이 쉭쉭거리는 소리를 들었어. 자, 본 대로 말해 줘」 그녀는 그가 하라는 대로 했다. 「당신 말이 옳아요. 뱀이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어떻게 생겼나 나한테 말해 줘」 리비는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 「잘은 모르겠어요. 길이는 약 1m정도구요. 머리에 관모 비슷한 것이 있어요. 죽은 것 같아요」 「빛깔은?」 「글쎄요. 회색빛이 도는 갈색이라고 할까요」 「내가 생각했던 대로야. 거기 그대로 있어요」 고양이처럼 가볍게 일어나 앉은 밴스는 휘파람을 불었다. 디아블로는 울음소리를 내며 주인을 향해 달려왔다. 서로간의 의사소통을 완벽히 해내는 인간과 말의 모습에 리비는 조금 전의 두려움 대신 경탄으로 입이 벌어졌다. 밴스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디아블로의 등을 두드리며 낮은 소리로 동물에게 뭐라고 말했다.「내가 디아블로를 달래는 동안 말 위에 올라타요. 디아블로는 매우 놀랐거든」 리비는 일어서서 조심스럽게 디아블로의 등에 올라탔다. 말은 몸을 떨었다. 리비는 눈으로 뱀을 찾았다. 그것은 어망으로 짓이겨진 채 풀밭 위에 축 늘어져 죽어 있다. 마치 엄청난 전류가 온몸을 흐르기라도 하는 듯 리비는 몸을 떨었다. 곧이어 밴스가 그녀 뒤로 재빨리 올라탔고, 그들은 다시 농장으로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갑시다」 밴스는 그녀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말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동안 두 사람은 말 고삐를 꽉잡고 있었고 과수원이 눈에 들어올 때에서야 비로소 그들은 말의 속도를 늦췄다. 「축사에 닿는 대로 제임스에게 뱀 이야길 해줘야겠어. 사람들을 보내 그것을 치우게 하고, 혹시 다른 뱀들이 또 있는지 살펴 보도록 말이야. 난 여러 해 동안 이곳에서 뱀을 본 적이 없거든. 이건 참 드문 일이야, 리비. 어쨌든 이런 일도 있었으니 안전하다고 판명될 때까진 절대로 혼자 말을 타지 않도록 해요. 내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 타액을 분비하는 코브라는 치명적인데 사람의 눈을 노리지. 코브라의 독액은 단 몇 분 만에 사람의 눈을 멀게 할 수 있어」 리비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당신 없이는 절대 말을 타지 않겠어요」 「다행히도 당신은 공포에 질리지는 않았군. 당신은 특별한 여인이야, 리비」 「당신은 내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거든요. 난 그때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했어요, 제 말은…」 만일 디아블로가 뱀에 놀래지만 않았다면, 밴스는 완전히 자신을 허물고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으리라. 「설명은 필요치 않아.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버려, 리비. 왜냐하면 그런 일은 이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의 잔인한 말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저 깊은 심연 속으로 던져넣는 듯했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아까의 일을 곰곰 되돌아보았다. 눈이 멀었건 그렇지 않건간에, 축사에서 그녀를 따라나선 순간부터 밴스는 자신의 책임을 훌륭히 해냈다. 시력을 잃었다는 것이 그에게서 남성다움과 보호능력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확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의 청각은 훨씬 더 예민해진 듯했다. 리비는 뱀이 쉿쉿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었다. 그것은 밴스가 그의 어두운 새 세계에서 얼마나 잘 대응해 나가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그의 머리에 난 혹을 빨리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녀는 주방의 찬장 문을 열고 구급약 죽에서 진통제와 얼음주머니를 꺼낸 다음, 얼음주머니에 얼음을 가득 채웠다. 「밴스?」 그녀는 서재의 문을 노크했다. 「당신 머리의 상처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뭘 좀 가져왔어요. 들어가도 돼요?」 「그럴 필요 없어, 리비」 「그건 제가 판단하겠어요」 그의 허락을 기다리지도 않고 리비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낸 듯, 타월로 된 실내복을 입고 소파 겸용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밴스의 한쪽 눈썹이 냉소적으로 치켜올라갔다. 「왜 나를 귀찮게 하는 거지?」 리비는 그가 반 시간 전의 바로 그 사람인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잔디 위에서 그녀와 사랑을 나누려고 했던 그 사람, 마치 그녀를 삼켜 버릴 듯이 격정에 사로잡혔던 바로 그 사람인지를…. 그녀의 몸은 아직도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분명히 일어났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쩌면 저렇게 냉랭하게 앉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조금 전 당신이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절 안고 뒹굴었을 때, 당신이 제게 허락을 청한 기억이 없는데요. 인간의 행동이란 상황에 따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가 정해지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관자놀이께가 부풀어오른 것을 좀 보세요. 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요. 밴스, 자리에 누워요. 그리고 이 얼음주머니를 머리에 올려놓아요. 스틸맨 박사가 조제해 준 진통제를 가져왔어요. 그리고 물도 가져올께요. 필요하면 드시도록 하세요. 여기 나이트 스탠드 위에 약을 올려놓겠어요」 그녀는 그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물을 가지러 나왔다.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뜻밖에도 밴스는 그녀가 하라는 대로 누워 있었다. 그는 관자놀이에 얼음주머니를 올려놓고 침대 이에 가만히 누워 있었는데, 그의 얼굴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여기 물이 있어요. 약을 드시도록 하세요. 고통이 가라앉을 테니까요」 놀랍게도 그는 아무런 이의도 없이 약에 손을 뻗어 그것을 입에 털어넣은 다음, 빈 물컵을 그녀의 도움 없이 다시 스탠드 위에 올려놓는다. 그녀는 그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감지했고, 그래서 걱정이 점점 커졌다. 방이 좀 추운 것 같았다. 침대 끝에 놓여 있는 가벼운 면 담요라도 덮어 주어야 할 것 같다. 「망설이고 있군, 리비. 자 어서 그걸 덮어 줘. 마치 충실하고 귀여운 아내처럼 이불도 덮어 주고 베개도 두툼하게 놓여 주고 말이야, 어서」 밴스는 마치 발톱을 날카롭게 세운 성난 호랑이와도 같았다. 이불을 덮어 주는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의 말은 너무도 그녀의 가슴을 쓰라리게 했다. 리비는 한숨을 삼킨 채 , 문이 부서져라 거세게 쾅 닫으며 방을 나섰다. 둘 다 뭘 좀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리비는 부지런히 점심을 준비했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을 때, 리비는 다시 그의 방으로 갔다. 그는 잠이 들어 있었는데 얼굴은 평온해 보였으나, 잠이 들기까지 편안치 못했던 게 분명하다. 담요는 그가 침대 위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인 듯 몸에 둘둘 말려 있고, 얼음주머니는 바닥에 떨어져 있다. 얼굴을 찌푸리며 리비는 그것을 집어들어 다시 그의 관자놀이에 올려놓으려 했다. 몸을 그에게로 숙였을 때, 그의 이마와 입술가에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손을 뻗어 이마를 만져보았다. 이마는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그녀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그는 깨지 않고 그대로 계속 잠들어 있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리비는 스틸맨 박사에게 전화를 하려고 급히 달려갔다. 침착하게 리비는 그날 있었던 일의 경위와 그의 이마에 부푼 혹과 그의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크게 염려할 일은 아닌 것 같군요, 앤슨 부인. 좀 충격을 받은 게 아닌가 싶어요. 구토를 일으키지는 않았으니까요. 설사 구토나 열이 있다 해도, 머리에 난 타박상은 본래 부풀어오르게 마련이랍니다. 조치는 제대로 잘 취하셨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과 부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12시간 동안 일정한 간격으로 그의 호흡이 정상인지 아닌지 체크해 보도록 하세요. 그가 너무 오래 잠을 자거나 혹은 호흡이 비정상적일 때는 제게 연락하도록 하세요, 언제든지. 그리고 아침에 병원에서 그를 진찰해 보고 싶군요, 됐습니까?」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를 병원에 데리고 가도록 하죠」 이런 상황에서는 밴스 이외의 그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리비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들고 그의 방으로 가 책장에서 추리소설을 꺼내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그의 상태를 지켜볼 생각이었다. 약 45분 정도 책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가 리비는 밴스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에 책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그는 잠이 완전히 깨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수염이 자란 턱을 손으로 문질렀다. 리비는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밴스의 안색은 좀 나아져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안심이 되었다. 혹도 좀 가라앉은 듯 보인다. 「좀 나아지셨어요?」 「리비? 당신 여기에서 뭘하고 있는 거지?」 그는 오만한 말투로 물었다. 「당신 체온이 계속 올라가서 제가 당신이 잠든 사이에 스틸맨 박사에게 전화했었어요. 그는…」 「뭐라구?」 그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큰소리를 질렀다. 「화내지 마세요, 밴스. 당신을 위해 제가 제대로 조처를 취한 건지 알아야만 했어요. 그는 내일 아침 병원에서 당신을 진찰해 보고 싶대요」 「어떻게 당신은 멋대로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거지?」 그의 짙은 갈색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당신은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저이기 때문이에요」 그는 침대에서 내려섰다. 「난 당신에게 이 집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했어. 하지만 당신이 내 삶을 방해하는 따위의 일을 하리라곤 생각지도 않았어. 리비, 이 방은 엄격하게 통제되어 있는 곳이야. 필요하다면 내가 의사와 약속할 수 있어, 안 그래?」 「그에게 다시 전화해서 취소할까요? 스틸맨 박사는 전화를 기다릴 거예요」 「당신이 알아서 해, 리비!」 분노에 휩싸인 그의 모습에, 리비는 말없이 주방으로 되돌아와 그의 점심식사를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아득한 이 절망감을 풀기 위해서 더러워진 행주를 집어들고 빨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짓이었다. 리비의 눈길이 우연히 주방 뒤쪽에 세워 둔 지프 차에 가 멎었고,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지 밖으로 나가 차에 올라탔다. 밴스는 그녀를 너무도 화나게 했고, 그래서 밤새도록 집에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작정했다. 하지만 나이로비로 향하는 길 외에는 달리 어디고 가야할지를 알 수 없었다. 결국 근처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 리비는 노점 이곳저곳에 차를 세우면서 한 시간쯤 물건을 샀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다시 차도로 들어섰을 때에야 비로서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퐁뒤(알프스 지방 요리)를 만들 기분이 생겼다. 그것은 밴스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중의 하나였다. 버찌 술과 그뤼예르 치즈(스위스의 지방산 치즈)는 집에 있다. 그녀가 할 일은 프렌치 빵을 따뜻하게 데우는 일뿐이다. 조금 전에 산 파인애플은 훌륭한 과일 샐러드 재료가 될 것이다. 「마치 상점 전체를 몽땅 사 가지고 온 것 같군 그래」 물건을 나르기 위해 뒤쪽 현관으로 세 번째 걸음을 했을 때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몸을 돌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까와 같은 분노의 기색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반가웠지만, 한편으론 그가 자신을 그리워했기를 바랐다. 그녀의 눈은 그의 관자놀이 부근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아직도 타박상의 흔적은 그대로 있었지만 부기는 좀 빠진 듯하다. 짧은 흰바지에 진홍색 폴로 셔츠를 입고 있어서 갈색 피부가 더욱 돋보였다. 「원주민 상점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일단 들어가면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올 수도 없구요」 리비는 웃음을 터뜨렸고 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도 그녀의 것에 섞여들었다. 「당신을 빈민가로 보내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죠. 하지만 제게 몇 년은 주셔야 해요」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잠시 거북스러운 침묵이 감돌았다. 「식사 준비를 해야겠어요」 그녀는 한손에는 파인애플을, 그리고 다른 한손에는 식료품을 잔뜩 들고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다 준비됐소」 주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리비는 맛 좋은 감자와 양파 취김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것을 깨달았다. 스테이크는 그릴위에 준비되어 있었고, 테이블까지도 잘 차려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불굴의 의지와 결단의 징표하고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리비는 물건들을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가서 좀 씻고 잠시 후에 오겠어요」 「당신이 올 때쯤 베란다에는 마티니가 당신을 기다릴 거요」 「정말 멋진데요. 서두르겠어요」 「리비?」 그의 목소리에 실린 망설임에 허를 찔린 듯한 리비는 뭔가 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네?」 「난 이곳에 온 이래로 당신이 얼마나 힘든 일을 감당하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소. 집안 일로 당신을 괴롭힐 생각은 전혀 없었소. 하지만 내가 약속했듯이, 당신에게 꼭 보상해 줄 거요」 「그런 걱정은 마세요, 밴스. 이건 으레 여자들이 하는 일이니까요」 식사는 말 없는 가운데 행해졌다. 밴스가 그녀에게 스테이크를 더 건네줌으로써 오랜 침묵을 깼다. 「전 이제 더 이상 못 먹겠어요. 벌써 두 접시째인걸료. 당신은 훌륭한 아내들보다 요리를 더 잘 하신 것 같아요, 밴스」 「앞 못 보는 사내도 쓸모가 있다는 걸 내게 이야기하려 했었다면 안됐는걸 그래. 이것은 다 제임스가 했으니까 말이오」 리비는 찻잔을 다시 받침접시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맛있는 점심을 대접해 주셔서 당신에게 감사하고 싶었던 거예요. 하지만 당신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악수를 청한다 해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으셨겠죠」 「아마 그랬을 거요」 리비는 의자를 조금 뒤로 밀치면서 말했다. 「내일은 나와 함께 일 좀 해주세요. 찰스가 우리와 함께 머물게 된다면, 침실을 준비해 놔야 하잖겠어요. 북향 침실에 어떤 가구를 놓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제임스에게 말해서 칠과 수리를 할 일꾼들을 불러오라고 하겠소. 하지만 가구는 당신이 알아서 해요. 콜더 상점과 거래를 하고 있으니까, 가서 당신 마음에 드는 걸 찾아봐요. 그러면 배달해 줄 거요」 「그 일을 끝마치고 나서 당신과 함께 점심을 할 수 있겠어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일은 계획이 꽉 차 있소. 당신이 다시 농장으로 돌아올 때쯤 되면 사무실 직원 중 한 사람이 내게 들를 예정이오. 그리고 당신도 알아 둘 일은, 난 로이드 보험자협회에 당신 이름으로 구좌를 개설해 놓았소. 당신이 필요한 대로 찾아 써요」 「당신은 내가 그 돈을 몽땅 찾아서 달아날까 두렵지 않으세요?」 그녀는 그들이 이전에 즐겨 나누었던 농담들을 다시금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아무런 표정도 띠고 있지 않았다.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결코 당신이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거요」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죠, 밴스? 당신은 벌써 이 거짓 결혼놀이에 지쳤다는 말인가요? 그럼 찰스에게 전화해서 또 회의를 하면 되겠군요. 그에게 말하세요. 신혼의 꿈에 젖은 새신랑 노릇도 이젠 지쳤다고 말예요, 어쩌면…」 「이제 그만해, 리비. 아무 말도 말았어야 하는 건데. 당신도 알겠지만 난 당신이 이런 좋지 않은 일에 개입되는 것을 원치 않을 뿐이야…. 특히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는 때는 말이야」 「다른 사람은 괜찮구요?」 「우린 지금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고 행할 그런 사람이나 집단에 관해 얘기하고있는 거야. 당신의 일상적인 집안 일이 아니라」 그녀는 식탁에서 일어서서 접시를 닦기 시작했다. 「당신은 제게 도움을 요청했고 전 그것에 기꺼이 응했어요. 당신이 제게 말했듯이 당신 회사는 당신 손에 달려 있어요. 전에 그 두 여인을 만나본 뒤로, 난 여기에서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어요. 난 이제 그저 말려든 게 아니라 뛰어든 거예요. 당신처럼 말예요」 밴스는 일어서며 말했다. 「그게 사실인지도 몰라. 하지만 난 당신을 물러서 있게 하고 싶어. 회사에 올 생각 같은 것은 하지도 마. 난 당신을 내 직원들의 눈에 띄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이로비에서 일을 보고 곧장 농장으로 돌아가도록 해. 내가 시내에 가 있는 동안 제임스가 당신을 잘 돌보도록 했어. 만일 내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전화 번호를 서재에 남겨 놓을 테니까 그리로 연락하도록 하구」 리비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의 염려를 더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밴스는 얼굴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마구 쓸어넘겼다. 「리비, 난 당신이 나이로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더 좋아. 때때로 사무실까지 나를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겠지만, 그러나 당신은 곧바로 농장으로 왔으면 해. 농장이 훨씬 더 안전하니까. 내가 밤새도록 집을 비울 경우에는 제임스가 앤거스를 불러 경비를 보도록 할 거야. 그와 앤거스는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병원과 농장을 지켰지」 리비는 그의 말대로 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주에는 그녀가 그를 나이로비까지 데려다 주고, 그때를 이용해서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자고 의견을 같이했다. 그런 다음 밴스는 다시 잠자리로 돌아갔고, 그녀는 접시를 닦기 시작했다. 조리대 이를 말끔히 치우면서 그녀는 자기에게 누군가 말 상대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녀는 지금 친구도 없고,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도 없다. 밴스를 사무실에 데려다 준 다음 그녀는 병원에 들르기로 했다. 스틸맨 박사는 눈먼 환자를 돌보아 온 그레디 부인에 대해 얘기했었다. 어쩌면 그녀는 리비가 밴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어떤 일을 해주거나 혹은 어떤 도움의 말을 해줄지도 모른다. 그녀의 참된 바람은, 그리고 그녀의 유일한 갈망은 바로 그의 진정한 아내가 되는 것이라는 점을 밴스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을…」 6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겨 주고 하는 일은 오히려 쉬운 일이죠. 하지만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그에게 얘기하기 위해선 가장 적당한 방법을 택해야 해요. 그가 당신을 무시한다거나 비난한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에게 시간을 주세요」 리비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나서 말했다. 「지팡이는 어떻게 하구요? 그는 여전히 여기저기 부딪치며 다니거든요, 그레디 부인」 「거기에 대해서도 아무 말씀 마세요. 때가 되면 지팡이가 필요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다리를 다친다거나 뭐 그렇게 된다면요」 그녀는 자신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렸지만 리비는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어떠세요?」 이 쾌활한 영국 부인은 부드럽게 리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나이 든 부인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당신이 나이로비에 다시 오실 때 들르세요. 만약 당신에게 이 상황을 기꺼이 견딜 자신이 있다면 저 역시 언제나 당신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고마워요, 그레디 부인. 그렇게 하도록 하겠어요. 이제 다음부터는 밴스를 매일 아침 출근시켜 준 다음에 잠깐씩 들르겠어요. 그는 내가 농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여기에 온다는 것을 전혀 모를 거예요」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래요. 그리고 한마디충고를 드리겠는데, 당신이 늘 그래 왔던 대로 그를 계속 사랑해 주세요. 그것이 최상의 치료책이에요」 그밖에 달리 또 그에게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리비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병원을 떠날 때쯤 그녀는 밝은 마음이 되었다. 그레디 부인에게 마음을 털어놓음으로써 짐이 좀 가벼워진 듯했다. 농장으로 돌아온 리비는 영국에서 가져온 사진을 정리하면서 침실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중에는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난 밴스의 어머니 사진과 엔지니어로서 케냐에서 댐 공사를 했던 젊은 시적의 밴스의 아버지 사진도 여러장 들어 있다. 그녀는 밴스의 부모님 사진과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한 의붓아버지 사진을 꺼내, 어떤 것은 액자에 끼우고 또 어떤 것은 사진첩에 정리해 놓았다. 리비는 그들의 새 보금자리에 아직은 부족한 사람의 체취와 기억들로 밴스와 자기 자신을 감싸고 싶었다. 다음날, 일꾼들이 와서 침실을 고치고 그들의 유쾌한 대화들이 오고가는 사이에, 리비는 집안을 장식할 생각에 골몰한 채 집 안팎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거실은 우아한 프랑스 식 문과 높은 천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보다 고전적인 실내로 꾸며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그림들도 그녀의 전체적인 실내장식 계획에 썩 잘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밴스의 의견도 들어야 한다. 수요일에 그녀는 콜더 상점에 가구를 주문했고, 그것은 이틀 후에 도착했다. 리비는 트윈 베드를 새로 단장한 침실에 들여놓았고, 그런 다음 따스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물건들을 이리저리 배치해 보면서 나머지 시간을 보냈다. 함께 아침식사를 하거나 나이로비로 가는 그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리비는 거의 남편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지냈다. 매일 밤 직원 중 한 사람이 그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고, 그러면 그는 저녁은 이미 먹었으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하면서 서재에 틀어박히곤 했다. 밴스는 그녀에게서 멀어지려고 그 어느때보다도 더욱 애쓰는 듯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리비는 그에게 꼭 필요나 존재가 되려고 더욱 애썼다. 그러나 그녀가 보여 주는 태도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반항은 그녀를 맥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레디 부인은 한결같이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변할 거라고 말하곤 했었다. 긍정적으로 마음을 돌린 리비는 그날 밤 식사 준비에 특별한 신경을 썼다. 빵 굽는 냄새와 구운 양고기 냄새는 남편을 유혹해 식탁으로 오게 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녀와의 대화를 시작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 동안을 이용해 남편과 더욱 친근해질 수 있을 것이다. 식사 준비는 30분쯤 걸려 다 끝났지만 남편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늦은 오후부터 폭풍이 일기 시작했고, 리비는 비록 그가 차를 타고 오는 것이긴 하지만 억수 같은 비 속을 뚫고 올 생각을 하니 언짢아졌다.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리비는 벽난로에 불을 지펴 실내를 따뜻하게 했다. 그때 전화 벨이 울렸다. 벨이 두 번 울렸을 때 그녀는 수화기를 들었다. 「네?」 그녀는 긴장된 어조로말했다. 「리비? 당신 괜찮소?」 밴스의 목소리에 그녀의 기분은 금세 밝아졌다. 「네, 그럼요. 당신은요?」 「오늘 오후에 사람을 시켜 나를 광산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었소. 불행히도 이곳은 비 때문에 차가 다릴 수가 없소. 오늘밤은 아무래도 이곳에서 지내야 될 것 같은데…」 리비는 낙담하여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리고는 깊은 침묵이 감돌았다. 「당신을 밤새 홀로 지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가 진정으로 염려하는 어투로 말했다. 「물론 그러실 거예요」 「혼자 지내기가 걱정되면 제임스를 불러요」 「난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당신이나 조심하세요. 그리고 속히 집으로 돌아오세요」 「리비, 내일 오전에도 돌아갈 수 없을 지 모르니까 저녁때까진 나를 기다리지 말아요. 찰스의 비행기가 6시에 도착할 예정이오. 그를 데리고 농장으로 가겠소」 그녀의 손이 수화기를 꽉 쥐었다. 그가 그 말을 할 때까지 그녀는 자신이 밴스와 단둘이만 지내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깨닫지 못했었다. 밴스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다. 찰스를 친구삼아 지내는 것도 좋지만, 그녀는 밴스를 다른 사람에게 조금도 빼앗기기가 싫었다. 리비는 속으로 자신을 꾸짖었다. 그건 네 자신이 너무도 이기적인 탓이라고. 밴스는 찰스를 필요로 하고 있고, 너무도 애타게 그의 도착을 기다려 왔지 않는가. 「리비?」 「전…전 벌써 그가 묵을 방을 마련해 놓았어요」 그녀는 급히 말했다. 「최고로 좋은 갈비로 저녁을 준비하려고 해요」 「찰스는 음식에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니까, 너무 무리할 필요 없어요. 자, 그럼 전화 끊겠소. 잘자요, 리비」 「안녕히 주무세요」 그녀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가 끊겼고, 그녀는 서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내일은 너무도 까마득해 보였다. 그녀는 어느새 그가 지독히도 그리워졌다. 그들이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누지 못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밴스는 이미 그녀의 일부분이어서, 일생 동안은 물론 하루 저녁도 그가 없이 홀로 지낸다는 생각은 하기조차 싫었다. 다음날 저녁, <앤슨 광산>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랜드로버가 먼지를 일으키며 도착했을 때, 리비는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녀의 눈은 재빨리 남편의 모습을 찾았다. 밴스는 언제나 깔끔한 편이었지만, 오늘밤은 사파리 셔츠는 구깃구깃하고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었으며 하룻동안 자란 턱수염이 그의 턱을 뒤덮고 있었다. 그는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이 분명했다. 그의 상태로 보아, 그가 지난 밤 얼마나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고 현장에 다시 가본다는 것은 불유쾌한 일임에 틀림없으리라. 그녀는 남편을 포옹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으며 손바닥을 엉덩이에다 비벼댔다. 「엘리자베스, 당신은 볼 때마다 더 아름다워지는군」 그녀의 눈길이 찰스에게 가 멎었다. 그는 랜드로버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서서 리비에게 다가와 발그레한 그녀의 뺨에 따뜻하게 입을 맞추었다. 「밴스, 자넨 운 좋은 친구야, 알고 있겠지?」 찰스의 그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손으로 더듬어 차 뒤쪽으로 가고 있는 밴스의 모습에 그녀의 마음은 몹시 아팠지만 찰스를 보며 짐짓 미소를 지었다. 「나를 태워가지고 올 때 머리가 아프다고 했소」 그는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낮은 소리로 말했다, 리비는 눈으로는 여전히 밴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그녀는 낮은 소리로 소근대듯 말하고 나서,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대리인으로 삼을 수 있으니 그는 운이 좋은 셈이에요, 찰스. 이곳에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 유명한 변호사는 은회색의 머리칼과 수염을 갖고 있었다. 밴스만큼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남의 시선을 끄는 건장하고 멋진 체격을 지닌 사람이다. 지적으로 빛나는 그의 눈은 사소한 것도 결코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얼마 전에 50번째 생일을 맞았지만, 10년은 더 젊은 사람처럼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밴스가 차 뒤쪽에서 찰스의 짐들을 꺼내 현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을 때, 리비와 찰스는 마치 무슨 신호나 받은 듯 동시에 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좋은 사내요. 그에게 시간을 줘요. 그럼 언젠가 당신에게 훌륭한 남편이 될 거요」 그 몇 마디 말로, 찰스는 그녀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그는 그들의 결혼생활이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것과 그 이유까지도 모두 이해하고 있다. 리비는 찰스의 손을 꼭 잡았다. 「그는 당신이 필요해요, 찰스」 나이 든 이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하지만 당신의 협조가 무엇보다도 중요하오. 당신을 믿어도 좋겠소?」 「만일 그래야 한다면, 밴스를 위해 목숨이라도 바치겠어요」 「설마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밴스가 당신에게 위험하다는 얘긴 해주었겠지?」 「네」 「됐소」 리비는 그를 거실로 안내했다. 그녀는 그에게 브랜디를 가져다 주었다. 밴스는 그곳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 샤워와 면도를 하러 욕실에 갔을 것이다. 리비는 찰스에게 잔을 건네주고 나서 그를 마주보며 자리에 앉았다. 「언젠가 당신을 다시 만나뵙게 되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찰스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삶이란 것이 다 그렇다는 것을 알잖소. 뭔가 다른 계획을 하고 있으면 생각지도 않은 일이 닥치곤 하죠」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래요. 밴스와 함께 지내기 위해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제가 여기 온 것이 그를 더 난처하게 만들 거라는 생각은 정말 꿈에도 못했어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지. 당신이 이곳에 있음으로 해서 우리에게 훨씬 더유리한 점이 많아요」 「그게 정말인가요?」 「사랑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기적이요. 그의 영혼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밴스는 당신이 쏟는 사랑의 힘을 느끼고 있고, 그것은 그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그를 강하게 만들어 주면서 그의 세계를 바꿔놓고 있소」 엷은 물기가 그녀의 눈에 어렸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고마워요, 찰스」 「내가 은밀한 대화를 방해한 건 아니오?」 리비는 밴스가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소스라치듯 놀라며 몸을 돌렸다. 그는 샤워를 하고 진바지에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어느때보다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지만, 여전히 접근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감돌고 있다. 그의 구릿빛 얼굴은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피로함 때문인지 그늘져 보인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가 몹시 불편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베란다 용 가구를 들여놓았어요, 밴스. 몇 걸음만 걸어 보세요. 그러면 날개 등받이 의자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셰리 주로 하시겠어요, 브랜디로 하시겠어요?」 「둘 다 싫소」 리비는 찰스와 눈짓을 교환했다. 「제가 저녁을 준비할 동안 두 분은 편히 쉬고 계세요. 조금 후에 주방에서 식사를 하기로 해요」 「이보게, 밴스. 내가 20년만 젊었어도 엘리자베스를 내 사람으로 만들었을 텐데 말이야」 밴스는 아무 대답도 없다. 리비는 재빨리 일어서서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늘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 분위기는 너무 우울하다. 그녀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두통이 더욱 심해진 걸까? 리비는 그것이 지난 일요일에 말에서 떨어진 일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졌다. 그레비 소스가 준비되자마자, 그녀는 두 가람에게 식사 준비다 다 되었다고 부르러 갔다. 밴스는 별 어려움 없이 자기 자기를 찾았고, 그 위를 찰스가 따라와 자리에 앉으며 식탁을 둘러보았다. 「아름답고 지적이고 게다가 가정적이기까지 하군」 찰스는 리비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그리워하는 대상을 볼 수는 없겠지만, 자넨 최상의 것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렇잖나?」 밴스는 다리를 앞으로 쭉 뻗은 채 의자에 기대어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얼음이 든 유리 컵을 꽉 잡고 있었다. 리비는 그의 손 안에서 컵이 깨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식사를 반쯤 했을 때, 찰스가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먹어 본 것 중 가장 훌륭한 요크셔 푸딩이로군. 리비, 당신 매리언에게 요리법을 가르쳐 줄 의향은 없소」 리비는 찰스의 시선이 밴스에게로 향해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밴스는 아무 말 없이 식사만 하고 있다. 「밴스, 자넨 집 안에 살아 움직이는 보물을 지니고 있는 셈일세 그려」 「너무 치켜세우지 마세요」 밴스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리비가 말했다. 「매리언이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당신과 떨어져 있기로 했는지 모르겠군요」 그는 웃음을 지었다. 「믿건 안 믿건간에, 그녀는 아주 즐거이 나를 전송했소. 다시 만날 때는 훨씬 더 행복할 거요」 「정말 부럽군요」 「당신은 광산 사고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소, 리비?」 리비는 먼저 찰스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밴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죽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찰스는 식탁에 팔꿈치를 괴며 말했다. 「밴스, 이제 그녀도 모든 사실을 알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도 말이야」 「당신 말이 옳아요」 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접시를 앞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조사반은 갱도가 무너졌던 터널내의 부산물들을 통해 진상을 가려내기 위해 전문가들을 파견했지. 하지만 그들은 받침대가 언제나 사용되었다는 내 주장을 뒷받침할 재목을 한 조각도 찾아내지못했소. 받침대는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데도 전혀 없더란 말이야」 리비는 얼굴을 찌푸렸다. 「청사진이 당신의 주장을 입증해 주지 않나요?」 「청사진은 문제가 안돼, 리비. 현장감독이 청사진의 지시대로 따르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엔지니어의 의무야. 이번 경우는 프롬스가 게리스와 모든 일을 진행했거든. 그는 게리스와 함께 전 통로를 다 점검했다고 맹세하고 있고, 게리스는 받침대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지. 하지만 사건 현장에선 어떤 받침대도 발견되지 않았어」 「그렇다면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고의로 발파 직전에 재목을 치운 거지. 내가 어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일부러 받침대를 치운 것이 분명해」 「그럼 살인을 계획했던 것이 분명하군요」 「그렇소」 찰스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건간에, 그리고 누구의 소행이든간에 범죄자들이 잡힐 때까진 그 책임이 밴스에게 돌아가는 거요」 「그건 너무 불공평해요」 그녀는 고통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소. 이젠 어느 정도 사건의 진상을 알았을 거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녀의 눈은 찰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밴스의 오명을 씻기 위해 제가 무슨 일이건 다 할 거라는 걸 알고 계시잖아요」 「좋아요. 그럼 당신들은 파티를 열도록 하세요. 아주 굉장한 파티 말이요. 흥청망청 노는 거요. 술과 음식과 음악, 모든 것을 다 동원해요. 당신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파티가 되는 거지. 초대된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들 두 사람은 그 누구도 당신들이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어려운 상황에 휘말려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사랑에 푹 빠진 듯이 보이는 거요. 샴페인도 터뜨려요」 그는 그 일을 진정으로 재밌어하는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이 손님을 맞고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난 사람들 사이를 둘러 보겠소. 내가 그 파티에 초대된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그 누구도 나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할 테니까 말이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내가 알아낸 사실에 대해 당신들은 놀라게 될 거요. 술이란 사람의 혀를 가볍게 하는 효능이 있으니까」 「그 파티는 언제쯤 열면 되겠어요?」 리비는 남편을 바라보며 찰스에게 물었다. 「빠를수록 좋소. 손님 명단엔 광산의 광부들로부터 호사내의 고위층 인사에 이르기까지 모든사람이 다 포함되어야하오. 안전을 기하기 위해 외부 인사들, 정부요인들, 사회 저명 인사들도 초대하는 거요」 「난 이런 식으로 리비를 사람들 앞에 내세우는 것은 싫어요, 찰스」 밴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리비의 신변에 대한 밴스의 배려는 너무도 자상해서 그녀는 이 자리에서 당장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나도 역시 그렇지만 이건 둘도 없는 좋은 기회요」 밴스는 손으로 머리칼을 마구 쓸며 말했다. 「글세, 모르겠어요」 「설마 집안에서 무슨 일이야 일어나겠어요, 밴스?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 있는다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엘리자베스 말이 맞아. 밴스, 파티 장소는 문제를 일으킬 적당한 장소가 아니야. 게다가 이번 사건은 아마추어적인 냄새가 나. 난 우리가 지금 교묘한 전문적인 범죄자와 대치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소. 그래서 경계심이 약간 풀어졌을 때의 범인, 혹은 범인들을 관찰해보고 싶소. 엄청난 비극 후에 열린 결혼 축하 파티는 범인으로 하여금 더욱 가눌길 없는 좌적을 느끼게 할 것이고, 어쩌면 어떤 형태로든 그 사실에 대해 발설하게 될지도 모르지. 나는 그 반작용, 그리고 그 갈등하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오」 밴스의 손이 뒷주머니로 갔다. 「그렇다면 한번 해보죠. 다음주 화요일이나 수요일에 파티를 열 수 있을 것 같은데. 리비, 내가 회사에서 파티를 열 때면 늘 이용하던 훌륭한 파티 서비스 업자들이 있어. 그들이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 거야. 그럼 전화를 해서 이 소식을 널리 알려야겠군」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바쁜 며칠이 흘렀다. 일단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이 정해지자, 찰스와 밴스는 서재에 틀어박혀 회사 직원들의 신상서류와 경력과 전과기록 같은 것들을 면밀히 조사했다. 많은 감독들과 엔지니어들은 앤슨 광산에서 일하기 전에 다른 나라에서 일했던 사람들이다. 리비가 파티 준비로 바쁜 동안, 두 사람은 밤 늦도록 서류를 점검하며 지냈다. 화요일 아침에 호텔의 파티 서비스 담당자들이 파티에 필요한 테이블과 의자와 그밖의 모든 것들을 가지고 도착했다. 리비는 식탁을 집 앞의 잔디 가운데 배치할 예정이었다. 야외 파티를 준비하기로 했던 것이다. 다음날 4시쯤에 농장과 잔디밭은 파티에 맞게 잘 단장되었다. 아직 손님들이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있어 리비는 주의를 기울여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는 밴스가 자기 아내를 자랑스러워하기를 바랐다. 언젠가 밴스는 그녀에게 검은 머리칼을 풀어 풍성하게 늘어뜨리는 것이 좋다고 말했었다. 리비는 머리를 풀어 부드럽게 빗질을 한 다음, 가족 파티를 위해 런던에서부터 마련해 온 드레스를 입었다. 연보라빛 시퐁으로 무릎까지 오는 길이에 팔목까지 단추가 달린 꼭 끼는 소매, 주름잡힌 보디스를 그 위에 입는 우아한 드레스다. 그녀는 약혼반지와 어울리도록 밴스가 결혼선물로 준 자수정 귀걸이를 달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레스 어깨에다 치자꽃 코사지를 달았다. 그것은 찰스가 준 선물이다. 리비는 찰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그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도중에 다른 침실에서 밴스의 모습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 방은 맨처음 그녀가 아기 방으로 정해 놓았던 곳이다. 그는 연갈색 실크의 새 양복을 입었다. 갈색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다. 그것은 마치 그의 부드러운 갈색 눈을 연상케 했는데, 게다가 흰 셔츠와 페이즐리 타이가 그의 마호가니 빛 피부와 썩 잘 어울린다. 샤워로 인해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그의 검은 머리칼은 앞이마와 귀뒤쪽으로 부드럽게 늘어져 있다. 뜨거운 욕망이 리비를 휩쌌다. 그는 그녀에게 언제나 육체적으로 완벽한 남성이기는 했지만, 오늘 오후엔 그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고 싶은 갈망이 그녀를 그 어느때보다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신음이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리비?」 「어떻게 아셨죠?」 「당신에게서 풍기는 치자꽃 향기로. 우리집 정원에는 그 꽃이 없으니까, 누군가가 당신에게 선물로 준 것 같군」 「찰스가 행운의 징표로 제게 준 거예요. 전 당신이 결혼 선물로 준 걸 달고 있어요, 밴스. 귀걸이 말예요. 제 드레스에 너무도 잘 어울려요. 하지만 찰스가 준 장식용 꽃이 당신 맘에 들지 않는다면 떼어 버리겠어요」 「난 그 꽃이 마음에 안 든다고는 하지 않았어. 오히려 그 반대야. 이 멋진 공대극에는 안성맞춤이지. 가까이 와요, 리비」 그는 그 어느때보다도 더 커보였고 위험스러워 보인다. 그녀는 가볍게 몸을 떨면서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일이에요?」 구릿빛으로 그은 그의 두 손이 그녀의 목을 감쌌다. 마치 함정에라도 빠진 듯, 리비는 그의 손이 우아한 자신의 목선을 따라 어깨로 내려올 때까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당신은 새신부다운 아름다운 향기를 풍겨. 그걸 알고 있소, 리비?」 그의 입이 잔인하게 비뚤어진다. 그는 지금 그녀와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싶은 게 틀림없다. 「당신이 눈 먼 남편…, 눈 먼 애인과 어떻게 미칠 듯한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 한번 알아볼까? 당신을 보호해 주기는커녕 앞에 놓인 종이봉지 하나 치울 수 없는 당신 남편과 말이야」 「그만해요, 밴스!」 밴스는 그녀의 가는 목을 두른 손에 약간 더 힘을 주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야. 그렇지 않아, 리비? 하지만 우린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서로 단 한순간도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인 것처럼 믿게 해야 돼. 먼저 나부터 그렇게 믿게 해봐요, 앤슨 부인」 그의 검은 머리가 가볍게 그녀의 얼굴을 막았고,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포개어졌다. 그는 그녀가 조금도 저항할 수 없도록 팔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리비는 그를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포옹을 너무도 갈망했다. 비록 그것이 쓰라림과 비통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는 으스러져라 리비를 자신의 단단한 가슴에 꽉 끌어안고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키스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거친 포옹에 기꺼운 마음으로 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밴스는 그녀를 밀어내며 짓궂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 명연기자로군. 자 그럼 찰스를 찾아서 이제 우리가 손님들을 맞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해야겠지?」 그는 눈을 빛내며 그녀의 손목을 아프도록 꽉 쥐었다. 「미녀와 야수!」 그는 잔인한 웃음을 터뜨리면서, 마치 그녀가 보채는 어린아이인 양 잡아끌며 앞서 걸었다. 그는 놀랍게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리비는 그를 쫓아가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했고, 가는 동안 내내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언제나 내 곁에 꼭 붙어 있어, 리비.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으면 내게 말해」 저녁 8시경, 리비는 3백 명 이상의 손님을 맞았다. 앤슨 광산의 근로자들은 소도시 전체의 주민들인 셈이었다. 그녀는 밴스가 모든 것을 주도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회사를 세워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모든 사람들은 극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대하는 듯했다. 밴스가 리비를 사람들 사이로 데리고 갔을 때, 그녀는 이 사람들 중의 그 누군가가 남편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거의 믿을 수가 없었다. 손님들이 한자리에 모여들었고, 이어서 누군가가 이 행복한 부부를 위해 건배를 하자고 제의했다. 모든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잔을 들어올렸다. 그 따사로운 축하는 애정이 넘치는 진실된 것이었다. 소란함이 가라앉자 밴스는 리비의 어깨를 손으로 꽉 잡았다. 그녀는 얇은 옷을 통해 그의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여러분들은 설마 호기심으로 기운이 다 빠지신 것은 아니겠죠」 밴스는 농담을 던졌다. 「전 지금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험한 폭풍우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은 평상시처럼 계속 진행될 것입니다」 그는 말을 계속 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해서 잠시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러분들도 지금은 아시겠지만 전 영국에 매우 자주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제 동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손이 다정스럽게 리비의 가는 허리를 꼭 껴안았다. 「제 아름다운 아내, 리비를 만난 겁니다. 이 세상에서 저를 가장 행복한 사내로 만들어 준 여인 말입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윤기나는 검은 머리칼을 쓸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몇 년 전 휴가차 영국으로 돌아갔을 때, 전 제 아버님 목장 곁에 새로 이사온 가족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아버님은 그들을 칵테일 파티에 초대했고, 전 잠시 아버님 얘기 상대를 해드리다가 그 자리를 뜰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리비가 응접실로 걸어들어왔고, 그때 전 숨이 막히는 듯했습니다. 첫눈에 반한 거죠」 리비 또한 그와 똑간은 느낌이었었기 때문에 그의 그 말을 듣자 너무도 놀라서 리비는 밴스에게 더욱 꼭 매달렸다. 밴스는 그녀를 다시금 꽉 껴안으며, 그녀의 입술에 오랫동안 뜨겁게 키스했다. 하지만 밴스가 그렇게 행동하는 의도를 너무도 잘 아는 까닭에 그녀는 그 순간의 황홀함이 사라지는 듯했다. 밴스가 사람들에게 오늘만은 사업 얘기를 꺼내지 말 것을 경고했지만, 그는 곧 정치문제와 기술적인 정보, 그리고 그만이 대답할 수 있는 개인적 문제들에 관한 질문 공세를 받았다. 이제 우두머리가 다시 돌아왔고, 그래서 모두들 안심하는 듯했다. 그가 앞을 못 본다는 사실은 그의 권위와 전문성에 그 어떤 장애도 일으킬 수 없었다. 파티가 진행됨에 따라 그녀는 이 리셉션이 남편의 상처를 다소라도 치유해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지도자로서 다시금 제 위치를 찾아 새로운 프로젝트에 관해 활발한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 그 누구도 결코 그의 목숨을 노리는 칼이 그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하리라. 그리고 그가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까지도. 밴스가 그녀를 그의 진실한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리비는 지금 이 순간을 언제나 즐겁게 회상하리라. 11시쯤 되어 사람의 수가 줄어들었지만, 리비는 찰스가 뭔가를 알아낸 기미는 찾을 수가 없었다. 「밴스? 샴페인은 더 가져와야겠어요. 여기 계세요. 곧 돌아올께요」 「정확히 2분간 여유를 주겠소」 그는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에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감미로운 떨림이 그녀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박스에 남아 있던 샴페인 3병을 꺼낸 다음 그것을 차갑게 하기 위해 급히 식당 쪽으로 향했다. 「앤슨 부인」 낯선 목소리가 그녀의 등뒤에서 들려왔다. 리비는 몸을 돌렸다. 「아마 저를 기억 못하실 겁니다」 그녀는 남편만큼이나 검게 그은 적갈색 머리의 사내를 응시했다. 「피터 프롬스 씨 아닌가요, 맞죠?」 그는 그녀를 한참 쳐다보더니 싱긋 웃음을 떠올렸다. 「저를 기억하고 계시군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부인은 그때도 지금처럼 남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셨지요」 「제가 정말 그랬었나요?」 리비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물었다. 「그럼요. 제 기억으로는, 아마 우린 수영장에서 만났었죠. 하지만 부인은 밴스가 수구를 하는 것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고, 그래서 전 본능적으로 당신의 마음이 딴곳에 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마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전 당신의 부인 낸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걸요. 그녀는 어디 있죠?」 잠시 동안 슬픔의 기색이 그의 눈에 어렸다. 「그녀는 친정인 퍼스에 가 있지요. 우리는 그때 이후로 헤어져 있어요」 「모르고 있었어요」 「그러셨을 테죠. 오늘밤은 당신을 위한 밤이에요. 저화 함께 춤을 추시겠어요. 아니면 혹시 남편이 반대할 것 같은가요?」 이전의 밴스였다면 상관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지금의 밴스는 어떨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피터 프롬스는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는 한때 밴스와 매우 절친한 사이가 아니었던가. 「저를 무례하다고 생각지는 말아 주세요. 하지만 밴스에게 곧 돌아가겠다고 했거든요. 그가 있는 곳까지 가면서 춤을 추면 어떨까요?」 그는 놀란 기색을 감추고는 홀의 중앙을 향해 그녀를 리드해 갔다. 「당신은 그 어느때보다도 더 아름답군요. 밴스는 사무실 책상 위에다 언제나 당신의 사진을 올려놓고 있지요. 그가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얼마나 가슴 아픈지 모르겠군요」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면 리비는 모욕적으로 들었을 수도 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피터의 말에서 진실에서 우러나오는 안타까움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에요」 리비는 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밴스와 저는 육체적인 것 이상의 것을 함께 나누고 있어요」 「프롬스, 자네만 괜찮다면 내 아내와 난 지금 당장 육체적인 즐거움을 맛볼까 하는데. 당신은 어떻겠소, 달링?」 밴스의 어투에 담긴 억제된 분노, 거친 말투와 태도에 그녀는 숨이 막힐 듯이 놀랐다. 이 두사람 사이에는 왜 이토록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것일까? 왠지 리비는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이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는 막연한 느낌을 받았다. 7 밴스가 마치 두 눈이 멀쩡한 사람처럼 리비를 데리고 갔을 때 피터는 고개를 숙여 말없이 인사를 건넸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리비는 밴스에게 더욱 꼭 매달렸다. 「피터가 당신에게 온 거였소?」 그녀는 춤을 멈추고 깜짝 놀라 밴스를 쳐다보았다. 「아뇨, 아니에요」 밴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술만 몇 잔 들어가면 늘상 저렇게 엉뚱한 행동을 하거든」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보듯 그런 식으로 그를 생각해선 안돼요. 제가 보기에 그는 술이라곤 입에도 안 댄 것 같은데요」 「거참 놀라운 일이군 그래」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목을 쓸었다. 그 가볍고 단순한 행동은 리비의 심장을 마구 두근거리게 했다. 「그 어떤 여자라도, 심지어는 마리 딘처럼 결혼한 여자라 할지라도 그에겐 멋진 먹이가 되지.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이 못돼」 「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는 당신의 좋은 친구잖아요. 그와 낸시는 함께 영국으로 당신을 방문하기까지 했었잖아요. 당신들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나요?」 「낸시에게 물어 보는 게 좋을걸. 그녀는 그를 떠났어」 「밴스, 당신 말이 믿기지가 않는군요. 두 사람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잖아요」 「낸시가 당신을 좋아했다는 것 날고 있어. 그녀가 런던에서 당신과 함께 쇼핑을 가자고 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 당신을 피터의 그 저항할 수 없는 매력에서 떼어놓기 위해서말야」 「뭐라구요?」 리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당신 두 사람이 소개받던 그날 밤, 그는 당신에게 지나친 관심을 기울였지」 어떤 이유에선가 밴스는 그때의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당신은 지나친 생각을 하고 있어요. 만일 그가 정말 그랬다면 저도 기억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는 입을 꽉 다물었다.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을 거야」 「밴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요?」 「내 말을 들어 봐. 피터는 그날 밤 마음이 몹시 들떠 있었어. 당신은 언제나 그랬지만 너무도 아름답고 사랑스런 여인이었거든. 하지만 당신을 손에 넣을 수가 없었지. 당신이 그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을 거야」 리비는 밴스에게 이런 질투심이 있다는 것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만일 당신이 피터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왜 아직도 그를 고용하고 있는 거죠?」 「그것 참 좋은 질문이군. 아마도 그가 한 대는 나와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또한 아주 훌륭한 엔지니어이기도 하구 말이야. 그는 회사를 맡기면 아주 훌륭히 이끌어나갈 그런 친구지. 한때 난 그와 함께 동업까지 하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의 못된 술버릇은 모두가 다 아는 일이야. 낸시가 그를 떠났을 때 그는 또다시 술독에 빠졌어. 난 여러 달 동안의 유예기간을 그에게 주어야 했어. 아직도…」 「아직도 뭐예요?」 리비는 고개를 들어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을 파리했고, 눈썹과 입술은 경련을 일으키며 바르르 떨렸다. 「밴스? 무슨 일이에요?」 그는 그녀에게 힘겹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리비. 계속 춤을 추면서 문 있는 쪽으로 가. 그저 두통이 났을 분이야. 별일 아니야」 「찰스를 데리고 왔던 밤처럼 그렇게 아픈 거예요?」 리비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그의 몸무게를 힘겹게 받치면서 침실 쪽으로 움직여갔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는 것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자, 누우세요. 스틸맨 박사를 불러오겠어요」 「대체 누굴 불러온다구?」 그는 침대 위에 몸을 뻗고는 팔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 「때때로 두통이 일어나는 것뿐이야」 「우리가 말을 타던 그날의 일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지난주에 스틸맨 박사를 방문했어야 했어요. 그때부터 계속 걱정하고 있었다구요」 「내가 의사에게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그땐 그렇게 하겠어. 자, 파티 장소로 되돌아가서 찰스와 함께 있어요. 몇 분 후에 곧 갈 테니까, 두통 얘긴 아무에게도 하지 말아요」 「당신이 그렇게 하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죠」 리비는 욕실로 들어가 물을 떠온 다음 처방된 그의 약을 가져왔다. 「여기 있어요」 리비는 밴스가 그것을 받아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매우 아파 보였다. 「밴스, 일어나지 말고 그냥 이대로 계세요. 사람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니까요」 「우린 그들을 전송해야 해」 「곧 돌아올께요」 리비가 베란다 쪽을 향해 갈 때 회사 간부들이 그녀의 앞으로 몰려와서 파티에 초대해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중 몇몇 사람들은 밴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잠시 자리를 비우셨는데요」 리비는 그들이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들 가운데 있던 찰스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곧 보러 가겠다고 밴스에게 말해요. 난 마틴 네 집으로 가겠소. 그가 우리를 술자리에 초대했거든」 「그래요」 마틴 딘이 맞장구를 쳤다. 「난 마리에게 너무 늦지 않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몸이 불편했어요」 리비는 그의 손을 잡았다. 「또 오세요, 마틴. 그리고 마리도 꼭 데리고 오세요. 그녀가 몸이 좋지 않다니 걱정이 되는군요. 다음주 중에 함께 저녁식사라도 하도록 하죠」 「마리도 아주 좋아할 거예요. 아침에 전화하겠다고 밴스에게 전해 주세요. 중요한 일이에요」 그는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은 피터 프롬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는데, 피터는 몇 발짝 건너편에서 엔지니어 중의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까는 밴스, 그리고 이번엔 마틴. 리비는 이런 상황하에서도 왜 피터가 계속 회사에 고용되어 있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겠어요. 안녕히 가세요」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하면서 현관에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리고 나서 약 30분 동안 리비는 남아 있는 사람들과 다시 어울렸다. 피터의 모습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파티가 진행되는 동안 너무도 긴장해 있었기에, 리비는 일단 손님들이 다 떠나자 그 어느때보다도 탈진해 있었다. 파티를 도와주던 사람들도 급히 짐을 꾸려 떠나고 마침내 집안에는 그녀와 밴스 두 사람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리비는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리비는 힐을 벗어던지고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밴스의 방으로 갔다. 불은 여전히 켜져 있다. 그는 팔을 눈 위에 얹은 채 깊이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숨소리가 고르지 않은 것 같았다. 리비는 그가 두통을 느끼지 않고 잠이 들었기를 바랐다. 그가 아픈 것은 더 이상 참고 견딜 수가 없으니까. 자기 방으로 돌아온 리비는 더블베드의 시트 사이로 몸을 눕혔다. 하지만 무척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그녀의 생각은 피터에서 밴스로, 그리고 다시 밴스에게서 피터에게로 오고갔다. 오늘밤 집에 초대된 사람들 중 누군가가,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 사람을 죽이려 한다거나 혹은 파산시키려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생각은 어쩔 수 없이 밴스에게로 되돌아갔다. 그는 오늘밤 행복한 새신랑처럼 행동했다. 그의 완벽한 연기는 모든 사람을 감쪽같이 속여넘겼다. 그녀는 침대에 몸을 엎드린 채 베개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리비는 다음날 아침 느지막히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밴스의 방을 슬쩍 들여다보자, 그의 방은 이미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제임스가 한 일이리라. 밴스가 자신의 일을 리비가 아닌 농장관리인에게 맡겼다는 사실에 그녀는 가슴이 아파왔다. 하지만 제임스는 언제나 소리없이 왔다가 가곤 해서, 그의 존재를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밴스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섭섭한 마음으로, 그녀는 주스를 한잔 마시려고 주방으로 갔다. 거기엔 밴스가 남긴 쪽지가 있었다. 제임스가 그를 나이로비까지 데려다 준다는 것이다. 그는 파티를 멋지게 치른 것에 대해 감사하며 언젠가 그녀에게 꼭 보답할 거라고 적었다. 쪽지는 그의 필체로 적혀져 있었지만 마치 어린 아이의 글씨처럼 비뚤비뚤했고, 한쪽으로 경사져 있었다. 리비는 그것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기 전에 다시 한번 읽었다. 쓰라린 마음을 뭔가 다른 일을 함으로써 잊고 싶어서 그녀는 집 안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그날 늦은 시간에 그녀는 부모님께 전화를 해서 리셉션에 관해 이야기를 했지만 밴스의 회사 문제는 입밖에도 내지 않도록 조심했다. 왜냐하면 그래봤자 부모님들의 염려만 더하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밴스와 찰스는 8시경에 농장으로 돌아왔다. 리비는 남편의 모습에서 한눈에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은 하던 일을 계속해요. 그리고 혼자 식사하도록 해요」 밴스는 찰스 쪽을 보며 그렇게 말한 뒤 손으로 더듬어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에겐 따스한 인사 한 마디 없었다. 그게 전부였다. 「당신 마치 죽은 사람 얼굴 같아요, 밴스. 두통이 점점 더 심해진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는 거실 문 곁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리 오는 동안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어. 약을 먹으면 곧 괜찮아지겠지. 곧 당신에게 가겠어」 마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온힘을 기울이고 있기라도 한 듯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힘겹게 들려서 리비는 너무나 놀랐다. 찰스가 리비 곁에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우린 아파트에서 거의 하루 종일 이야기를 했소. 그리고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두 번이나 두통에 시달렸어요」 리비는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그의 두통이 너무도 심해져서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쓰러질까 봐 겁이 나요」 「퇴원할 때 의사가 뭐라고 그랬소?」 그녀는 손으로 머리칼을 쓸며 말했다. 「어느 정도의 진통은 있을 거라고 했어요. 하지만 요즘 들어 자주 일어나는 두통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어요. 당신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몇 주일 전에 함께 말을 타다가 그가 넘어졌어요」 리비는 그때의 일을 소상하게 그에게 말해 주었다. 「밴스는 스틸맨 박사에게 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당신이 내일은 진단을 해보러 가자고 하면 혹 말을 들을지도 몰라요. 그는 제 말은 안 들으려고 하거든요」 「당신 남편은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 그리고 난 지금으로선 당신에게 아무런 얘기도 해줄 수가 없군요」 그는 측은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겠소」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볍게 저녁식사를 하고, 오늘밤은 일을 해야 돼요. 내일 아침 내가 지금까지 알아낸 것들을 당신에게 모두 이야기해 주겠소」 리비는 밴스가 너무도 고통스러워한다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집중시킬 수 없었기에, 찰스의 그 말이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뭔가가 자꾸 그녀의 마음을 괴롭혔다. 마음속 깊은 곳에 드리워져 있는 그 무엇, 그것이 무엇인지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마음속에 분명히 자리잡고 있다. 충동적으로 리비는 밴스의 방으로 되돌아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느리면서도 고른 그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복도 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불빛이 다소 웅크린 듯 침대에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왜 전등 스위치를 켰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가 불을 켰을 때 전날 밤과 같은 그런 반응이 일어났다. 그의 팔이 마치 불빛에서 눈을 가려 주는 방패이기라도 한 듯 그의 얼굴로 올라갔다! 리비는 목이 뻣뻣해지며 온몸이 오싹했다. 다시금 불을 끄자, 그의 팔이 다시 내려갔다. 그녀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소리를 삼키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는 지체없이 찰스의 방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찰스가 재빨리 문을 열었다. 리비는 그의 입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말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리비는 조그만 소리로 소근거렸다. 「나중에 설명해 드릴께요. 저를 믿으세요. 그리고 아무 소리도 내지 마세요」 「알겠소」 그는 그녀를 따라 옆방으로 갔다. 밴스는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있다. 찰스는 밴스를 쳐다보았고, 그리고 나서 묻는 듯한 눈길로 리비를 바라보았다. 「내가 불을 켰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보세요」 그리고 그녀는 스위치를 올렸다. 그녀가 불을 켜자마자 곧 그의 손이 눈으로 올라갔다. 「내가 불을 켤 때마다 언제나 저렇죠. 자, 잘 보세요!」 그리고 이번에는 불을 껐다. 곧 그의 팔이 다시 제자리로 갔다. 찰스는 놀라서 말을 잊은 듯했다. 그는 팔을 뻗어 스위치를 올렸다. 밴스는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뒤집어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찰스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언의 대화가 이어졌다. 찰스가 스위치를 내리자 밴스는 가벼운 한숨을 토했다. 찰스는 리비를 데리고 서재로 갔다. 「어서 의사를 불러야겠소」 「알겠어요」 「만일 내 눈으로 보지 못했다면, 난 도저히 당신 말을 믿지 못했을 거요」 그의 목소리는 감정의 동요로 인해 갈라져 나왔다. 리비는 의사의 집으로 전화를 했고, 벨이 3번쯤 울린 후에야 통화가 되었다. 「닥터 스틸맨입니다」 「의사 선생님이세요? 당신이 알고 계셔야 할 일이 생겨서요」 격한 목소리로 리비는 모든 것을 설명했다. 찰스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먼저 아침에 제 방에서 그를 진찰해보고 싶군요. 하지만 그에게는 당신이 본 일을 말하지 않도록 하세요. 하지만 뭐 별일은 아닐 것 같군요」 의사의 말은 리비의 희망을 앗아갔다. 「그동안 두통으로 시달렸습니까?」 「네. 그리고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도저히 더 이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만히 있을 수는 없군요」 「알겠어요. 내일 아침 그를 병원으로 데리고 오세요」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어요」 그녀는 안심한 듯 미소를 띠며 찰스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그러나 문 곁에 서 있는 밴스를 본 순간,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대체 누구에게 그처럼 단단히 약속을 하는 거지, 리비?」 갑자기 찰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방 안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스틸맨 박사예요」 「무엇 때문에?」 「그때 넘어진 이후로 당신은 계속 두통에 시달렸잖아요. 오늘밤 당신이 식사조차 안하려고 해서 걱정이 되었고, 그래서 그에게 전화를 한 거예요. 그게 별일 아닌 건지 어떤 지 알고 싶어서요. 그는 별일 아닐 거라고 했지만 내일 아침 당신을 진찰해 보고 싶다고 했어요」 「내가 리비에게 전화해 보라고 했네, 밴스」 찰스가 구원자처럼 변호하는 어투로 말했다. 「자네 몸 상태가 어떤지 제대로 알 수가 없어서 말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조사반이 월요일에 자네를 소환할 거고, 그들의 질문에 답하려면 무척 힘이 들 게 아닌가. 그래서 자네 마음뿐 아니라 몸도 괜찮은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걸세」 「난 그저 몇 번 머리가 아팠을 뿐이고, 달리 뭐 심각한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물론 그렇겠지」 찰스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난 자네가 몸 상태를 잘 유지하기를 바라네」 밴스는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알겠어요.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래야 안심이 되지」 찰스는 다정하게 밴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난 그만 자리를 떠야겠는걸」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요. 내 머리는 이제 더 이상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니까요」 찰스는 인사를 하고는 그들 두 사람을 서재에 남겨놓은 채 방을 나갔다. 밴스가 이처럼 그녀와 단둘이 있기를 원한다는 사실은 그리 좋은 징조가 못된다. 「난 눈은 멀었는지 모르지만, 뭔가가 잘못되었을 때는 재빨리 알 수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리비? 난 꼭 대답을 듣고 말겠어. 당신을 밤새도록 이곳에 세워 두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대체 당신이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찰스와 제가 벌써 얘기했잖아요. 당신의 건강이 염려되어서 의사에게 전화했다구요. 그게 전부예요」 「아냐. 당신은 다른 사람은 다 속일 수 있지만 난 아니야. 알겠어? 난 당신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모든 걸 다 알고 있어. 내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거지?」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 말아요」 「당신은 아까 깜짝 놀랐어. 찰스는 그런 당신을 두둔하고 나서고. 안 그래?」 리비는 너무도 놀라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내 말이 맞지?」 그는 위협적인 기세로 리비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뭐가 잘못된 거지, 리비? 난 알 권리가 있어! 왜 의사에게 전화를 했지? 누가 아픈 거야? 당신이 그에게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진다고 말하는 소릴 들었어. 당신이 아픈 건가?」 「제가요?」 「넘어졌을 때 당신이 다친 거야, 그렇지? 자, 숨기지 말고 얘기해요. 어디가 다친 거야? 얘기해, 어서!」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밴스」 「믿을 수 없어」 「그렇다면 확인해 보세요」 리비는 그에게 다가가서 언제나처럼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자, 그럼 당신이 직접 만져보세요」 그녀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전율이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갔지만 그는 여전히 뻣뻣하게 서 있었다. 「전 그 어느때보다도 더 좋아요」 그녀는 그의 완강한 턱에 입을 맞추고 나서 손으로 그의 팔과 넓은 어깨를 쓸었다. 그리고 발끝으로 서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보여 준 그 염려는 정말 가슴이 저릿할 정도였고, 그것은 그가 리비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가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었다. 밴스는 낮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손으로 그녀의 가냘픈 어깨와 등을 감싸안듯 쓸어내렸다. 그는 굶주린 듯 그녀를 그의 가슴에 꽉 끌어안았고, 그들은 마치 두 개의 반쪽이 온전한 하나로 합쳐지듯 그렇게 하나로 묶여졌다. 「제가 아무렇지도 않아서 이제 만족하세요?」 그녀는 나지막하게 소근거렸다. 「아니」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그녀의 부드러운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을 완전하게 사랑해 줄 때까지는」 그가 자신을 번쩍 안아들고 침실로 향하는 순간 리비는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듯했다. 문을 닫고 나서 그녀를 침대 위에 부드럽게 내려놓은 다음, 그도 그녀 곁에 누웠다. 「이리 가까이 와, 리비」 밴스는 성급한 몸짓으로 그녀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밤새도록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 그는 손가락으로 리비의 길고 검은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가 그녀의 두 뺨과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을 때, 그녀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난 너무도 오랫동안 이렇게 당신을 안아 보고 싶었어. 너무도 오랫동안…」 그의 목소리는 감정의 동요로 인해 떨리고 있었다. 「밴스」 리비는 부드럽게 소리치듯 그의 이름을 부르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그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 열렬한 갈망으로, 그녀는 그의 검은 머리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그의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절 사랑해 주세요…, 사랑해 주세요」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으면서, 그의 손길은 그녀의 머리칼 밑으로 흘러들어와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었다. 「당신의 살결은 마치 비단결같이 부드러워. 난 당신의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내 손을 조금만 움직여도 당신의 숨결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아. 얼마나 많은 밤들을 이렇게 당신을 내 팔에 안고 마음껏 사랑하고 싶었는지 몰라」 모든 입맞춤, 모든 애무가 리비의 온 감각을 일깨웠고, 그녀를 새로운 격정의 물결에 휩싸이게 했다. 그녀는 자신의 살갖에 와닿는 그의 피부의 감촉과 마치 포두주처럼 달콤한 그의 입술에 온몸을 떨었다. 그녀가 그의 몸을 어루만졌을 때, 모든 근육과 모든 세포가 그녀의 따스한 손끝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편, 하나밖에 없는 연인에게 온몸을 내맡기며 매달렸을 때, 밤은 새로운 계시를 담고 새롭게 펼쳐졌다. 그녀의 두 눈에서 떨어지는 기쁨의 눈물을 그의 입술이 닦아 주었고, 이 완전하고 성스럽고 아름다운 사랑은 또다시 되풀이되었다. 「밴스…」 리비는 뭔가 할말을 찾으며 더듬거렸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말을 삼키듯 막아 버렸고, 다시 한번 그녀는 황홀감을 가져다 준 새로운 자유를 맛보며 환희와 즐거움을 받아들였다. 리비는 귓가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밴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에 담긴 갈망이 그녀를 숨막힐 듯한 흥분에 휩싸이게 했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찾았고, 그의 손은 그녀의 머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의 몸이 아파올 정도로 거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서 달콤한 잠, 사랑하는 이의 꿈으로 가득 찬 잠 속으로 리비는 깊이 빠져들었다. 「밴스?」 그녀는 손으로 옆자리를 더듬어 보았다. 손끝에는 차가운 시트의 감촉만이 느껴진다.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났다. 그는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의 시계를 보았다. 거의 한낮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급히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농장을 한바퀴 빙 둘러보았다. 밴스와 찰스는 랜드로버를 타고 나이로비에 가고 없었다. 지난밤 그들이 나누었던 사랑은 그들의 결혼을 더욱 굳건하고 확실한 사실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밴스로부터, 그의 입으로 직접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그녀는 미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밤새 밴스는 그들 두 사람을 위한 달콤한 시간을 창조해 냈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그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았다. 리비는 자신이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만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침이 된 지금, 모든 것이 변한 듯했다. 그는 한 마디도 없이 잠자리를 빠져나갔다. 리비는 지금 그의 마음에 무슨 생각이 일고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그건 전화로 얘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정오가 좀 지나서 리비는 준비를 마치고 나이로비로 향했다. 어쩌면 밴스와 함께 호텔에 묵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옷과 세면도구를 챙겨 차에 실었다. 시의 경계선 약 5km 점에서 온도계가 <고온>을 가리켰다. 초조해진 리비는 입술을 깨물며 차를 서서히 세운 다음 엔진을 껐다. 라지에이터의 물이 콸콸 소리를 냈다. 그녀는 몇 주일 전에 일어났던 사고 때문에 차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차를 10분쯤 그대로 세워놓았다가 다시 시동을 걸면서, 가다가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정비소로 갈 생각을 했다. 속상하게도, 정비소의 종업원은 자동온도조절기를 갈아야 한다고 하면서 오후나 되어야 고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상황하에서는 택시를 불러 타고 밴스의 사무실까지 갈 수밖에 없다. 밴스의 회사는 새로 지은 종합광산건물의 두 개 층 전체를 사용하는 으리으리한 사무실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리비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잠시 올라가, 밴스의 사무실과 중역실들이 있는 층에 멈췄다. 비서들 중 한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리비를 보고 곧바로 그녀를 밴스의 방으로 안내했다. 「제 남편은 혼자 계신가요?」 리비는 조용히 물었다. 「네, 앤슨 부인」 「괜찮다면, 남편을 좀 놀래켜 주고 싶은데요」 「그럼요, 좋으실 대로 하세요」 비서는 미소를 지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호기심 어린 눈길로 리비를 바라보았다. 마구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리비는 소리내지 않고 조용히 방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그녀는 짐을 내려놓고 발끝으로 가만가만 걸어서 밴스에게로 가까이가, 그의 목에 매달리며 입을 맞추었다. 「오늘 아침엔 당신이 너무너무 그리웠어요. 기다릴 수 없을 만큼 말예요」 리비는 그의 무릎에 가 앉으려고 그의 앞으로 돌아가며 그렇게 소근거렸다. 순간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 앞에 있는, 고뇌로 몸부림치고 있는 이 사내는 지난 밤 그녀의 팔 안에서 욕망으로 몸을 떨던 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밴스는 가죽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는데,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두 눈은 꼭 감고 있었다. 리비는 지난 몇 주 동안 그의 이런 얼굴을 여러 번 보아왔다. 격렬한 고통으로 시달리는 표정을. 그녀의 조그만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그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밴스는 재빨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회사에는 오지 말라고 말했잖아!」 「지난번에 회사 사람들을 모두 만났기 때문에 이제 그럴 필요가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언제부터 이런 거죠? 당신이 아프다는 걸 누군가가 알고 있나요? 이대로 두어서는 안돼요, 밴스」 「되풀이해 말하지만, 내 건강은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당신의 동정심은 구역질이 날 정도야, 리비」 그녀는 마치 바위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동정심이라구요?」 「이제 연기는 집어치워도 돼. 당신의 헌신은 눈물겨웠어. 지난밤 당신은 앞 못 보는 사내를 위해 그야말로 열연을 했지. 하지만 이제 내가 또다시 그런 연기를 기대할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연민 때문에 지탱하는 결혼은 나도 바라는 바가 아니야」 「남편과 사랑을 나눈 것을 제스처라고 감히 부를 수 있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로 인해 심하게 떨려나왔다. 그의 차가운 미소가 그녀를 두렵게 했다. 「그러면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지? 어디 한번 이 불쌍한 장님을 위해 말슴 좀 해보시지 그래. 당신은 정말 멋진 배우야, 리비. 지난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시작했다. 「당신의 연기는 정말 놀라웠지. 나는 마치 천국에라도 간 기분이었어. 당신과 함께 말이야」 「그만해요, 밴스!」 「그렇게 하는 게 당신에게 만족을 준다면, 난 당신 팔에 기거이 내 머리를 내어맡길 거야. 난 잠시 동안 내 영혼을 팔아먹었지. 다행히도 아침이 왔고, 그리고 제정신이 돌아왔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죠?」 「왜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난 처음부터 당신이 이곳에 있는걸 원하지 않았어. 지난밤에 일어났던 일은 회사의 유익을 위해 쓴 속임수의 결과일 뿐이야.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목적을 훌륭히 수행했어. 찰스는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고, 그래서 우린 이제 더 이상 가면을 쓰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어. 우리의 결혼생활은 끝났어」 밴스는 책상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난 당신과 이혼하겠어. 찰스가 자세한 걸 모두 설명해 줄 거야. 지난밤 당신이 내게 보여 준 그 관대함에 대해서도 충분한 보상을 하겠어」 「보상이라구요?」 그녀의 외침은 방안을 진동시켰다. 「내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어떻게요? 난 절대로 당신과 이혼하지 않겠어요!」 가벼운 현기증이 이는 바람에 그녀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하게 될 거야」 밴스의 목소리에 실린 냉혹함이 그녀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내일 아침에 나이로비를 떠나는 비행기 편을 예약해 놓았어. 내일 밤쯤엔 화이트오크스에 돌아가게 될 거야. 지금 당장 필요한 짐들만 챙기면 내가 나머지 짐들을 꾸려서 가능한한 빨리 영국으로 부쳐 주겠어」 「그리고 만일 제가 당신의 아이를 임신한 채 케냐를 떠난다면요?」 그녀는 조롱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지난밤 그들은 둘 다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그의 관자놀이가 격렬하게 맥박쳤다. 「그렇다면 신탁자금을 주겠어. 난 내 책임을 회피하진 않을 거야」 「당신은 자신의 팔 안에 아이를 안아 보는 즐거움도 사양하겠단 말이군요. 아버지가 된다는 기쁨을 말예요?」 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장님 아버지 말이지. 어쨌든, 우린 단지 가능성만을 얘기하고 있는 것뿐이야, 사실이 아닌 가능성 말이야. 지금 얘기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군. 난 농장을 팔려고 내놓았어. 만일 팔게 된다면, 제일 먼저 마틴에게 선택권을 주겠다고 오래전에 약속했었지. 마틴과 마리는 농장을 둘러보러 일요일에 오기로 했어. 그는 벌서 보증금을 내게 주었어. 내가 아침 비행기 편으로 당신을 떠나게 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야」 리비는 너무도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농장은 당신의 자랑이자 기쁨이에요, 밴스. 당신은 그걸 포기살 수 없어요. 난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어요! 대체 왜 그렇게 하려는 거죠?」 「당신이 마음을 쓰지 않는다 해도 난 장님이야. 아파트가 내게는 더욱 편리하고 쓸모가 있어. 회사에서 가까운 것도 좋고. 간단히 말하면 난 더 이상 당신이 필요치 않고, 내 삶에 당신이 머무르는 걸 원치 않아」 「당신은 마치 내가 해고당한 쓸모없는 직원인 것처럼 말하는군요. 그런 식으로 나를 내몰 수는 없을 거예요」 「그렇게 할 수 있어」그의 조롱기 어린 미소가 그녀를 격분하게 했다. 「당신이 이혼에 동의할 때까지, 난 당신에게 동전 한푼 주지 않겠어. 게다가 살 집도 없으니 당신은 떠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지 않겠어? 자, 여기 비행기표가 있어. 찰스가 내일 공항까지 태워다 줄 거야. 이혼 문제는 그와 함께 얘기하도록 해. 이젠 모든 게 끝난 것 같군」 「찰스에게 시간 낭비는 말라고 말하세요」 리비는 뒤돌아서서 문 쪽을 향해 걸어가다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난 결코 케냐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밴스. 제정신이 돌아오면 내일 뉴스탠리 호텔로 연락하세요」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오만하고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사무실을 나섰다. 그녀는 그의 삶에서도 역시 이렇게 걸어나가고 있는 걸까? 8 「앤슨 부인?」 리비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 있다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피터 프롬스가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몹시 창백하군요」 「배가 몹시 고파서요. 지금껏 아무것도 먹질 못했거든요. 당신을 뵙게 되어 반갑군요. 당신은 어떠세요?」 문이 열렸고,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다. 「사실대로 말씀 드린다면, 정말 재미없고 따분한 하루였어요. 아직도 다 가지 않았군요」 그는 피곤하다는 듯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리비는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5시군요」 「전 회사일로 나이바사 광산까지 가야 해요」 「지금 곧 떠나야 하나요?」 「네. 그런데 왜 물으시죠?」 「시내를 벗어날 때까지 당신의 차를 타고 갈 수 있을까 해서요. 자동온도조절기를 갈아끼우기 위해 차를 정비소에 맡겨 두었거든요. 괜찮으시겠어요? 밴스는 아직 몇 시간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저 혼자 집으로 돌아가야 하거든요」 그녀의 청에 놀란 것이 분명했지만 그는 재빨리 그것을 감추었다. 「좋고말고요. 하지만 회사 트럭은 별로 탈 만한 것이 못된다는 걸 미리 말씀드려야겠군요. 좌석 용수철이 엉망으로 망가졌거든요. 게다가 트럭을 타시기엔 옷차림이 적합하지 않은걸요」 「모든 걸 감수해야겠죠」 중앙 현관 쪽을 향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여기에서 기다리시면 제가 정문 쪽으로 트럭을 가지고 오죠」 「고마워요, 프롬슨 씨」 그의 입가에 친근한 미소가 번졌다. 「너무 격식을 차리지 마세요. 그냥 피터라고 불러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럼 저에게도 리비라고 불러 주세요」 그는 유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돌아올께요」 피터가 막 문밖으로 나서는 순간 마틴 딘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피터와 리비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이것 참 놀랍군요, 앤슨 부인. 밴스를 보러 오셨나요?」 그가 말하는 동안 피터는 밖으로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에요」 그녀는 마틴 딘과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가 피터를 무시하는 태도도 싫었지만, 리비는 그가 왜 그렇게 다른 사람이 살던 집으로 이사를 오려고 그토록 열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만일 그가 밴스의 친구라면, 오히려 밴스를 설득해 그 집을 계속 지니고 있도록 해야 옳지 않을까? 「그런데 저와 마리가 일요일에 댁의 농장을 한바퀴 둘러보러 갈 거라고 밴스가 말하지 않던가요?」 「네, 그렇게 말했어요」 그는 귀에 거슬리도록 웃으며 귓불을 만졌다. 「그런 행운이 오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아요. 왜냐하면…」 「실례하겠어요, 딘 씨」그녀는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차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얘기를 더 나누지 못해 죄송하군요」 「아니에요. 다른 때 얘기하도록 하죠」 그는 쾌활하게 대꾸했지만 태도는 차가웠다. 「안녕히 가세요」 리비는 서둘러 문을 나서 차에 올랐지만, 자신이 관찰당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피터는 엔진을 걸었지만 곧바로 차량 속으로 휩쓸리지는 않았다. 그 대신 얼굴을 가볍게 찌푸리며 말했다. 「난 당신 남편이 탐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에요, 리비. 당신이 나와 함께 차를 타고 간다고 지금 당장 마틴이 남편에게 얘기할 거예요. 난 별로 걱정이 안되지만, 당신이 그런 사실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당신의 마음이 바뀌어도 전 이해할 수 있어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 밴스는 한때 당신이 가장 절친한 친구였고, 그래서 동업자로까지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고 말하더군요」 피터는 눈만 껌벅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게 사실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 「그런데 리비, 당신을 정비소까지 데려다 주는 것만으로도 난 얘깃거리가 될 거예요」 「당신의 이름이 더럽혀질까 봐 걱정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제 걱정을 하시는 건가요?」 「그야 물론 당신이 걱정되어서죠. 저야 뭐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으니까요. 사실 전 광산사고의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있답니다. 밴스는 비록 회사 트럭을 타고 잠깐 가는 것이긴 하지만, 나와 함께 있다는 걸 용납하지 않을 거예요」 리비는 좌석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면서, 순간적으로 짐가방을 밴스의 사무실에 두고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 당신이 말씀하시는 걸 모른 척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밴스는 지금까지 당신을 고용하고 있잖아요. 그건 뭔가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겠어요?」 피터는 차창을 통해 늦은 오후의 차량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트럭을 차도로 몰며 말했다. 「낸시가 떠났다고 제가 얘기했던가요?」 「네.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하게 됐다니 정말 안됐어요」 그는 두 손으로 운전대를 꽉 움켜잡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나도 마음이 아파요. 난 전에는 그 누구에게도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요」 놀랍게도 리비는 그의 말이 그대로 믿어졌다. 「정직하게 제게 대답해 주시겠어요?」 「당신은 나를 믿나요?」 「네」 리비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이 낸시와 런던에 왔을 때, 제게 관심을 많이 보였다고 밴스가 말하던데, 정말 그랬나요?」 그는 짧게 웃었다. 「네, 그래요. 정말 그랬어요」 그의 정직한 대답에 리비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왜 전 그걸 느끼지 못했을까요?」 「당신은 밴스에게 홀딱 빠져 있어서, 제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니까요」 「피터… 그런데 당신은 왜 제게 관심을 보인 거죠?」 「난 밴스가 왜 결혼해서 정착하지 않는지 늘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런던에서의 그날 밤, 나는 그가 수영장 곁에 있는 당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걸 알았어요. 나는 전에 그가 여성을 그렇게 쳐다보는 걸 본 적이 없었죠. 그래서 우스운 짓을 하나 생각해냈죠.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나 알기 위해서 난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기로 한 거예요. 내 이론을 한번 테스트해 보려구요. 난 낸시에게 내 생각을 얘기했고 그녀도 호기심 때문에 내 생각에 동의했죠. 하지만 불행히도 모든 게 역효과를 일으켰어요. 난 밴스가 그렇게까지 깊이 누군가에게 끌려 있으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전 대체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 일 이후로 밴스는 결코 나를 용서해 주지고, 또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어요」 밴스가 자신에 대해서 그토록 강렬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리비는 온몸이 떨려왔다. 한편 밴스의 태도로 인하여 피터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녀는 가슴이 저려서 눈을 감았다. 「이 일은 해명을 해야 돼요. 언젠가 적당한 때가 오면 제가 밴스에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하겠어요」 리비는 피터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낮게 웃었다. 「밴스는 결코 들으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특히 그건 당신이 내 입장을 두둔하는 게 되기 때문에요」 「피터, 난 밴스가 누군가를 영국에 있는 그의 집으로 초대하는 걸 거의 보지 못했어요. 그만큼 밴스는 당신과 낸시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어요」 「당신을 집적거린 사실은 그에 대한 엄청난 모욕이었어요. 그러니까 난 그의 신뢰를 배반한 셈이 된 겁니다」 「하지만 그는 당신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어야 해요. 만일 제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일이 더 이상 나빠지기 전에 사태를 되돌리려고 최선을 다했을 거예요. 피터, 제발 그가 당신의 우정을 완전히 내팽개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그는 지금 그걸 후회하고 있죠. 그는 요즘 마틴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어요. 마틴은 밴스에게 내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군요. 그런데 정비소는 어디 있죠?」 리비는 정비소의 방향을 그에게 일러 주었다. 차는 아직 완전히 고쳐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아직도 시간은 넉넉했기 때문이다. 「당신을 혼자 두고 갈 수는 없군요」 피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도 배가 고프다고 했고 또 나도 먹어야 할 것 같으니까, 호텔로 가서 차가 수리되는 동안에 뭐라도 좀 먹읍시다」 「더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나도 식사를 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당신을 혼자 두고 간 걸 알면 밴스가 무척 화를 내게 될 거예요」 그들은 근처에 있는 힐튼 호텔로 가서 구운 연어와 신선한 아스파라거스, 그리고 맛좋은 와인 소스를 뿌린 뜨거운 감자를 먹었다. 식사하는 동안 내내 리비는 피터의 얘기를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은 밴스와, 또 그들의 결혼을 끝장 내자고 한 그의 결정에만 맴돌고 있었다. 바로 그때 피터는 그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이야기를 입밖에 꺼내었다. 자세한 얘기를 들으면서 그녀는 숨가쁘게 말했다. 「그래서 아이는 사산했나요?」 피터는 갑자기 냅킨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런 얘기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식사 도중에는 말이오」 「아니, 아니에요. 정말 괴로우셨겠어요. 정말 안됐군요」 「하지만 당신과 밴스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만큼은 못할거요. 그는 잘 억제하고 있지만, 사실 앞을 못 본다는 건 그에게는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은 일일 겁니다!」 리비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아서 그걸 감추려고 애썼다. 「정말 미안해요.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피터가 리비의 그런 모습에 가슴 아픈 듯 말했다. 리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얘기를 나누어서 정말 기뻐요. 전 당신이 회사에서 일어난 불상사와는 무관하다는 걸 확실히 알았어요. 그런데 당신은 뭔가를 알아챈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그래요. 하지만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는 밴스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군요. 어쨌든, 그가 내게 시간을 줄지 의문이에요. 하지만 뭐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자 그럼 가 볼까요?」 리비는 정비소에 닿을 때까지 창유리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이 복잡했다. 피터 문제 외에도, 그녀는 밴스가 진정으로 그녀를 그의 집밖으로, 아니 그의 삶 밖으로 몰아내길 원하는지 알고 싶었다. 트럭이 정비소에 닿자 리비는 내리며 피터를 향해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피터. 밴스와 얘기를 해보겠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리비는 서둘러 수리비용을 지불하고는 농장을 향해 출발했다. 이제 곧 어둠이 몰려올 것이다. 지프가 먼지 이는 도로로 접어들자 오렌지 향기가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대체 밴스는 그렇듯 아름다운 농장을 어떻게 포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곳을 떠나면 자신은 또 어떻게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지난밤 그들이 나누었던 그 사랑을 생각하자, 이혼하자는 그의 말이 그녀의 심장을 도려내듯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몰고왔다. 리비가 현관 문의 손잡이에 손을 댄 순간 밴스가 안에서 문을 열었다. 그는 리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어딜 갔다 오는 거지?」 그의 표정으로 보아 그녀가 피터 프롬스의 차를 타고 갔다는 얘기를 마틴이 한 것이 틀림없다. 「나이로비에 있는 정비소에요. 지프 수리하는 걸 기다렸어요」 그녀는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재빨리 잡았다.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그는 닫혀진 문에 리비를 고정시키고는 꼼짝 못하도록 두팔을 꽉 잡았다. 「그동안 줄곧 혼자만 있었단 말이야?」 「마틴 딘이 그냥 있었을 리가 없겠죠, 안 그래요? 역시 피터 말이 맞았어요」 피터의 이름을 입밖에 내는 것이 남편의 비위를 거스린다는 건 알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일은 이제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었으니까. 그의 입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피터에 대한 혐의가 점점 짙어지고 있어. 집에 화재가 발생했던 날, 피터의 알리바이가 없다는 걸 알고나 있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와 함께 있다는 게 대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나 해?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잖아」 그의 입술이 위험적으로 뒤틀렸다. 「오, 이 사랑스럽고 어리석은 아내 같으니라구!」 갑작스런 감정의 분출로, 그는 그녀의 몸을 으스러져라 껴안으면서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마치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는 악마와 싸우기라도 하듯, 그는 자포자기한 절망에 허덕이는 듯했다. 그의 입맞춤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녀는 바로 이런 포옹을 얼마나 원했던가! 그만이 줄 수 있는 완전한 행복감을 갈구하며 그녀는 그에게 더욱 꼭 매달렸다. 하지만 그런 리비의 반응을 감지하기라도 한 듯, 그는 그녀를 재빨리 떼어놓고는 숨을 몇 번 들이마셨다. 리비는 문에 기대서며, 그의 이 돌연한 반응에 대한 절망감을 이기려고 애썼다. 밴스는 뒷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안전 따윈 안중에도 없군, 리비」 「당신이 정 그러시다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얘길 해야겠군요. 내가 당신 사무실을 나왔을 때, 피터는 엘리베이터 옆에 있었어요. 광산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정비소까지 태워다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는 당신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될 거라구요. 사실대로 말하면, 내가 그를 그렇게 하도록 한 거예요」 「당신은 지금 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걸 몰라? 그가 일부러 당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한 거란 말이야! 내가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했어. 그는 양심이 없는 사내야. 만일 당신이 지프 때문에 도움이 필요했다면, 내게 말했어야지」 「당신 사무실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나는 지프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어요. 피터는 내가 아픈 줄로 알았어요. 그는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지도 않았고, 또 나쁜 의도도 없었다구요」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금 그를 변호하는 거야, 리비?」 「그는 3년 전 영국의 당신 집에서 있었던 일을 내게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그건 당신이 꼭 알아야 할 얘기예요」 「그날 밤 피터가 당신을 유혹하려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거야/ 난 거기 있었고, 모든 걸 다 보았어. 그에 대해 잘못 안 건 조금도 없어」 「그래요. 당신은 모든 걸 다 보았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 그 이유는 모르고 있어요」 그의 얼굴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대체 당신은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장난으로 그렇게 한 거예요, 밴스. 낸시도 그걸 알고 있었어요. 그들은 당신과 내가 사랑에 빠졌는지 궁금했대요. 그래서 피터는 자신의 생각을 한번 실험해본 거에요. 그는 그 누구보다도 당신을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가 당신이 날 사랑하고 있는 게 진실이라는 걸 알고 놀란 거예요. 하지만 자신이 알고자 하는 것을 알아낸 순간, 그는 당신의 우정과 존경심을 잃어버린 거예요. 아시겠어요? 낸시는 그 때문에 나를 데리고 쇼핑하러 간 거였어요. 그녀는 설명하려고 했죠. 하지만 내가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자, 아무런 할말이 없었던 거죠」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뭐라고 웅얼거렸다. 「그가 정말 당신에게 진실을 말했을까?」 「그런 식으로 생각해선 안돼요, 밴스. 그날 밤의 일은 제가 물었어요. 그가 먼저 그 일을 얘기한 게 절대 아니에요. 돼 당신은 그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죠? 결국 당신은 당신과 그의 마음만 상하게 했을 뿐이에요. 그에게 그때 일을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말예요. 피터가 잘못한 일이란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킨 그 순진한 장난뿐이에요. 지금, 그의 결혼과 그가 쌓아올린 경력은 모두 무너져내렸어요」 밴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훌륭하고 완벽한 옹호자를 만난 셈이군 그래. 훌륭해」 그녀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그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해요. 당신에게 털어놓는다는 건 그야말로 쓸데없는 짓일 게 틀림없으니까요」 「마틴이 그 고상한 피터 프롬스에 대해 당신에게 잘 말해 줄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내 말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될 거야」 리비는 턱을 들어올렸다. 「당신에게 말해 주겠는데, 그는 아직도 자기 부인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는 가여운 사람이에요, 밴스. 그는 저녁식사를 하면서 그들의 결혼과 그리고…」 「저녁식사?」 「네, 지프가 수리될 동안 우린 함께 식사를 했어요. 그는 유산한 그들의 아기에 대해 말했어요. 그리고…」 「아기라구?」 「낸시는 6개월 만에 아기를 유산했고 그 일로 두 사람 사이가 벌어지게 된 거래요」 리비는 피터의 목소리에 어려 있던 슬픔의 기색을 생각하며 팔짱을 끼었다. 「난 정확히는 몰라요. 그가 2년 전이라고 말한 것 같아요. 하지만 내가 틀렸을 수도 있어요. 솔직히 말해, 난 그가 당신을 위해서 계속 일하고 있는 게 놀라워요. 그는 지금 광산 사고에 대한 혐의까지 받고 있잖아요」 「그가 당신을 완전히 녹여 놓았군, 그래. 그는 당신에게서 뭔가를 노리고 있는 거야, 리비. 그는 광산에서 돌아가는 길에 여길 들를지도 몰라. 당신이 잘 도착했나 알아보려구 말야」 「당신은 왜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거죠? 생각해 봐요, 밴스. 그는 당신과 가장 절친한 친구였어요!」 「지금은 그 반대야!」 그의 고집스러움에 리비는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바로 그 순간 현관문을 두드는 소리가 들려 리비는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그랬어, 리비?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이곳에 들를 거라구 했지, 자 어때? 그는 이곳에서 환영을 받으리라는 걸 알고 있거든」 분노에 찬 그는 문을 확 열어젖혔다. 「뭘 원하나, 프롬스?」 그곳에는 모자를 손에 든 농장관리인이 서 있었다. 「제임스입니다, 앤슨 씨.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만, 디아블로의 발목이 부어올라서요.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 드리러 왔습니다. 그리고 열이 계속 오르고 있습니다」 밴스는 자기의 억측이 빗나가자 침착하려고 애썼지만 리비는 그의 얼굴에 드러난 불그스름한 홍조를 놓치지 않았다. 「거 참 안됐군 그래, 제임스. 곧 축사로 가지」 제임스는 돌아서며 리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직 이른 저녁 시간이니까, 어쨌든 계속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야」 밴스는 날카롭게 말했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리비는 그가 돌아오기 전에 즉시 나이로비로 가기로 결심했다. 밴스는 그녀를 직접 비행기에 태우고 좌석 벨트를 매주기 전에는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곧장 지프에 올라타고 시내로 향했다. 9 리비는 오후 6시쯤 뉴스탤리 호텔의 로비로 들어서며 테스크에 가서 무슨 전언이 없었는지 물어보았다. 밴스의 아파트 경비원에게 찰스를 보거든 자기에게 전화하도록 부탁해 두었기 때문이다. 밴스가 의사에게 가도록 설득시킬 사람은 아무래도 찰스밖엔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제야 오시는군. 제임스가 나를 몇 시간 전에 이곳에 데려다 주었어!」 리비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밴스의 우람한 체격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녀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지난밤 농장을 떠날 거라고 내게 말했을 수도 있잖아!」 자제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그가 매우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호텔에 머물 거라고 이미 말했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어요. 좀더 솔직히 말하면, 곧장 떠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야 오늘 아침에 찰스 앞에서 꼴불견을 연출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요」 「하루 종일 어디 있었지? 호텔 지배인이 당신은 오늘 아침 8시 이전에 나갔다고 하던데」 리비의 가슴이 가볍게 떨렸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걱정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이로비를 관광할 결심이었어요」 「당신 혼자?」 「단체관광에 끼어서요. 케냐에 올 때부터 계획했던 거였어요」 「당신은 오늘 비행기를 놓쳤어. 하지만 내일 비행기를 예약해 놓았지」 그는 호주머니에서 비행기표를 꺼냈다. 「찰스가 잘 안내해 줄 거야. 이혼에 대해서도 당신에게 이야기할 거고」 「자, 이건 당신이 갖고 계세요. 난 필요없으니까요」 그녀는 비행기표를 그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금방 폭발하려는 폭탄과도 같았다. 「당신이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면, 그럼 어디 마음대로 해봐!」 「난 성숙한 여자예요, 밴스. 그리고 결혼도 했구요」 「나이로비는 당신같이 아름다운 여자가 혼자 나다닐 곳이 못돼. 당신은 이곳 지리를 전혀 모르잖아. 당신은 좋은 사냥감이 된단 말이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에요」 「이곳은 런던이 아니야, 리비…」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밴스는 말을 멈췄고, 리비는 고마워하며 문으로 급히 달려갔다. 「찰스! 들어오세요!」 그녀는 쾌활하게 말하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음, 둘 다 여기 있었군 그래」 그는 리비에게 친근한 미소를 던지며 밴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뉴스가 있네. 하지만 내가 두 사람을 방해했다면 다시 오지」 「아니, 아니에요. 자 앉으세요. 당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룸 서비스를 불러서,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요? 제가 식사를 주문할 동안 샤워라도 하시겠어요?」 「고맙소」 찰스는 리비가 전화기를 집어들고 주문을 하는 사이에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렀다. 「아직 우리 얘기가 끝나지 않았어, 리비. 그러니까 내가 찰스와 같이 떠날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마」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죠? 전 당신이 이곳에 머물기를 원해요」 「당신은 어제 내 사무실에 수트케이스를 두고 갔어. 여기 가져와서 옷장에 넣어 두었지. 당신이 나이로비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우겨댔기 때문에 난 왜 당신이 짐을 꾸려 가지고 왔을까 하고 의아해했지」 「당신 사무실에 갔을 때, 난 우리가 함께 호텔에 가서 식사하고, 얘기하고…, 밤새 함께 있기를 원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운을 끌며 점점 잦아들었다. 밴스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찰스가 방으로 들어섰다. 「자네 엘리자베스에게 우리가 알아낸 사실을 얘기해 주었나?」 잠시 방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니요, 아직」 「리비, 당신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훨씬 더 빨리 풀렸소. 밴스의 골치거리는 이제 모두 해결되었어」 리비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몸을 찰스에게로 기울였다. 「제 덕분이라구요? 제가 어떻게 했길래요?」 그녀는 특별히 그 좋은 뉴스를 위해 뭔가를 한 기억 같은 건 없었다. 「자네가 말해 주게, 밴스. 결국 리비가 제공해 준 정보가 아니었다면 사실을 밝혀내는 데 몇 주일은 더 걸렸을 게 아닌가?」 밴스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으로 보아 그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얘기해 주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마지못해 그가 입을 열었다. 「지난밤에 당신이 내게 피터에 관해 이야기 할 때, 그들 부부가 아기를 잃은 일을 말해 준 적이 있었지. 그 일이 2년 전쯤이었다고 말했을 때, 내 기억 속에 뭔가가 번개같이 떠올랐어. 그래서 난 퍼스에 있는 낸시에게 전화를 했지」 리비는 숨을 죽인 채 밴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신이 내게 피터에 관한 모든 것을 정확히 얘기해 주었고, 또 나도 왜 낸시가 그를 떠났는지를 알아냈어. 마틴 딘이 피터를 협박한 일로 인해 그들은 몹시 다투었다더군. 엎친 데 덮친격으로, 아기를 잃은 일 때문에 낸시는 당분간 나이로비를 떠나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했대」 「협박요?」 그녀의 두 눈은 놀라움으로 휘둥그래졌다. 「마틴이 피터를 협박했어요?」 「회사일에 관한한, 난 엄격한 규칙을 행사하고 있어, 리비. 근무중에는 절대로 술을 마셔서는 안돼.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지. 2년 전 어느 날 저녁, 피터는 낸시가 유산한 걸 알고 술을 약간 마셨어. 물론 그때 그는 근무중은 아니었지만, 광산에 비상사태가 일어나서 기술부장인 그가 그 사태를 수습해야 했거든. 그때 난 런던에 있었으니까. 피터는 사적인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 같애. 그런 와중에 그는 한밤중에 회사 사무실에서 마틴 딘을 보고 깜짝 놀랐지. 마틴은 그가 결코 볼 이유가 없는 청사진을 훑어보고 있었지. 그건 아이바샤 광산의 청사진이었어. 피터와 나 외에는 그 누구도 그 서류를 봐선 안되는 거였지,. 마틴 딘은 피터와 마주친 뒤,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속셈으로 내게 와서 피터가 술을 머셨다는 사실을 고자질했어. 그는 내가 그날로 피터를 해고할 줄로 생각한 거야」 리비는 모든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결국 피터는 내게 마틴의 얘길 하지 않고, 단지 낸시에게만 모든 사실을 말했던 거지. 그녀는 피터에게 내게 모든 걸 털어놓으라고 얘기했어」 「그래서 그가 그렇게 했나요?」 「아니, 그는 너무 두려워했어. 그리고 마틴에 대해 얘기하려고는 했지만 실패했어. 그날 밤 농장에 불이 났던 거야」 「피터에게는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을까요!」 「그래. 그일 이후로 마틴은 피터가 술주정꾼이라는 이야기를 퍼뜨리기 시작했어. 소문은 마치 불길같이 번져 나갔지」 「정말은 그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아요. 어제 나와 식사할 때도 맥주나 포도주 같은 건 주문하지도 않았어요」 밴스는 얼굴에 괴로운 빛을 띤 채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낸시는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깨닫고, 그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빨리 털어놓으라고 말했지.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길 거절했어. 그는 마틴을 주의깊게 관찰한다면, 현행범으로 그를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오, 밴스…」 그녀의 목소리에는 연민과 안타까움이 어려 있었다. 「가엾은 사람이로군요」 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틴은 피터가 그의 아내와 화해해서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고, 어리석게도 나는 그 말을 믿었지」 갑자기 밴스는 의자를 꽉 잡으며 말했다. 「승진 시기가 왔을 때 난 마틴을 기술부장으로 승진 시키고, 피터는 유예시켰지. 그가 자신을 다시 입증해 보이기까지 하위직으로 강등시킨 셈이야. 낸시는 그때 피터에 대해 몹시 격분해 있었어. 그가 자신을 위해 아무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녀는 사태가 좀 달라질 까하는 기대를 안고, 그를 떠나겠다고 위협했어. 하지만 그는 결국 진실이 승리하고야 만다는 희망을 품고 끝까지 견딘 거야」 「그리고 그렇게 되었잖아요!」 리비는 쾌활하게 소리쳤다. 밴스는 리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로 인한 여파도 컸지」 「어쩌면 피터는 사태가 너무 악화되어 있어서 차라리 낸시와 떨어져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낸시의 말대로군. 당신은 직관력이 있는 여자야, 리비」 그녀는 구슬픈 듯 웃었다. 「직관력이 아니에요, 밴스. 내가 살아오면서 관찰해 본 바에 의하면, 사람들은 일이 점점 어려워질 때는 포기해 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그녀는 찰스의 눈을 응시했다. 그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노크 소리에 밴스는 리비가 자리에서 채 일어서기도 전에 문으로 갔다. 웨이터가 식사를 날라왔다. 그녀는 밴스가 웨이터에게 팁을 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거의 두 눈이 멀쩡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이제 밴스는 어둠의 세계에 적응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단지 두통만 사라져 준다면….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군 그래」 리비가 밴스의 식사를 그의 앞에 갖다 놓았을 때, 찰스는 두 개의 잔에 포도주를 따르면 말했다. 「더욱 멋진 일은 낸시가 밴스로 하여금 두 사람의 대화를 녹음하도록 허락했다는 일이요, 리비. 그녀는 공청회에서 선서를 하고 증언을 하기 위해 나이로비로 오기로 했소」 「그것 참 잘됐군요. 피터도 알고 있나요?」 「알고 있어」 밴스가 말했다. 「밤새 이야기를 했지. 우리는 화해했어. 그점에 대해 당신에게 고맙게 생각해, 리비. 지난 여러 해 동안 마틴은 내게 대한 악감정을 키워온 것이 분명해. 당신이 피터를 옹호했을 때 모든 것이 바뀌었어. 난 비로서 마틴의 심한 질투심을 알게 되었지」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정말 기뻐요. 피터는 당신을 매우 염려했어요.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당신이 그의 편에 서 준 것에 대해선 정말 하느님께 감사해」 「아멘」 찰스가 따스한 어조로 말했다. 「낸시와 피터의 증언 때문에, 난 회사 내의 다른 사람들을 면직시킬 수가 있게 됐어요. 모든 일은 한 사람 때문에 일어났지만 말이오」 「마틴요」 리비는 조용하게 말했다. 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맨 먼저는 마틴, 그리고 역시 랠프와 포가티와 그리고 그밖의 여러 사람」 리비는 그들 사이에 감돌고 있던 적의도 잊고 밴스의 손을 감싸쥐었다. 「당신은 바로 지금 가장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어요, 밴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당신 농장을 마틴에게 팔지는 않을 거죠?」 잠시 가만히 있던 밴스는 포도주 잔을 잡는 척하며 손을 빼냈다. 「그래, 리비. 하지만 난 이제 눈이 멀었고, 더 이상 농장을 가지고 있을 하등의 이유도 없어. 농장을 관리할 수도, 또 이전처럼 즐겁게 지낼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마틴에게 제일 먼저 선택권을 주겠다고 했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해. 그와 다른 사람들이 소환되고 결과적으로 혐의가 밝혀지게 되면, 그때는 다시 시장에 내놓겠어. 그는 오랬동안 내 신임을 받아 왔어. 이 문제가 매듭지어질 때까지는 좀더 그를 두고 보겠어」 「그가 사고를 일으켰다는 확증은 있나요?」 「그래요」 찰스가 그녀에게로 연민의 눈길을 돌리며 대신 대답했다. 「맥퍼슨은 피터가 술을 마시던 그날 밤 근무중이었는데 마틴과 랠프가 허락도 받지 않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걸 목격했어요. 마틴은 맥퍼슨에게 만일 입을 열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위협했지요. 맥퍼슨은 또 마틴이 나이바샤 광산 붕괴사고 바로 전에 그곳에 들어가는 걸 보았어요. 하지만 두려워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피터는 지난밤에 광산으로 가서 맥퍼슨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라고 말했고, 그것을 녹음했소」 찰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조사반이 들이닥치기 전에 마틴이 재목들을 치운 거야. 그는 피터에게 혐의를 돌리려고 했지」 밴스가 성급한 어조로 말했다. 「마틴은 실수를 너무 많이 한 거요」 찰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도 기억할 거요, 리비. 파티가 있던 그날 밤 난 사람들과 함께 그의 집으로 갔었잖소. 그는 이미 술에 너무 취해 있었어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프롬스 얘길 꺼내기 시작했지. 프롬스에 대해서 좋은 말은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소. 그는 피터의 잘못과 그의 부인에 대한 태도 등을 입에 올렸어요. 그리고 당신 이름이 거론되었을 때, 엘리자베스, 난 그가 거짓말쟁이라는 걸 알았지요」 「그 사실은 여러 해 전에 알고 있었어야 했는데, 난 정말 어리석었어!」 밴스가 큰소리로 말했다. 「난 마틴을 처음 만난 순간에 그가 이상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는 당신과 나를 계속 응시하고 있었죠. 난 당신이 우리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이 상한 탓으로 생각했어요. 이제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는 당신을 질투하고 있었던 거예요. 당신이 성취해 놓은 일뿐만 아니라 그밖의 다른 이유들 때문에요. 당신이 받는 존경과 사랑, 그는 그런 점에서 도저히 당신을 따라갈 수가 없었으니까요. 당신이 앞을 못 보게 되었다는 사실은 당신의 직원들과 동료들에게, 그리고 당신의 부인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어요. 그것이 그에게는 충격이었으리란 생각이 들어요」 「그런 시기심 때문에 마틴과 그밖의 사람들이 살인죄를 저지르게 된 거지. 그들은 그에 상당한 벌을 받게 될 거야」 밴스는 리비가 온몸을 떨 정도로 격노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야겠지」 찰스는 외투와 손가방을 집어들면서 말했다. 「만일 두 사람만 괜찮다면 난 아파트로 가서 마리언에게 전화를 할까 하는데. 오늘밤 그녀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소. 모든 게 다 잘되었으니 말이오」 그는 밴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젠 자네에게 좋은 시간만 남았네」 「제가 배웅해 드리겠어요」 리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내일 아침에 만납시다. 7시까지 준비하고 있어요」 그는 리비의 볼에 입을 맞추고 나서 복도를 부지런히 걸어갔다. 그녀는 찰스가 밴스의 지시를 너무도 철저히 따를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리비는 문을 닫고 생각했다. 내일 아침 찰스가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밴스 역시 그를 탓하지 못하리라. 그녀는 돌아서며 남편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뭔가 새로운 방법을 써야 할 순간이었다. 「찰스는 갔어요」 「그래. 당신에게 이미 말했듯이, 당신은 이제 더 이상 내곁에 있을 필요가 없어. 난 당신과 이혼할 거야, 리비」 「더이상 반대하지 않겠어요. 이혼하세요. 전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드리겠어요」 그녀의 말에 밴스는 놀란 것이 분명했다.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정말이야?」 「하지만 약혼반지만은 돌려 달라고 요구하지 마세요. 그건 언제나 제 마음속에 남아 있을 추억을 되살려 줄 테니까요. 당신이 제게 결혼해 달라고 했던 그날 밤의 일을. 그런 기쁨의 순간은 일생에 단 한번밖에 오지 않아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결혼반지를 빼내어 밴스에게로 다가가서 그의 손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거의 발작적으로 그는 반지를 들어올려 셔츠의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 단순한 행동은 그가 마음을 돌이키고 그녀를 그의 아내로 받아들일 거라는 일말의 희망마저 송두리째 앗아가는 것이었다. 혼자만의 길을 가리라 고집하는 그의 생각에 그녀는 온몸이 휘청거렸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리비?」 그는 마침내 고통스런 침묵을 깨고 물었다. 리비는 턱을 들어올렸다. 「그건 이제 당신이 더 이상 관여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당신은 내게 비행기표를 끊어 주었으니, 할 일은 다한 셈이 아니겠어요? 나머지는 찰스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닌가요?」 그녀는 그의 손이 테이블 모서리를 꽉 잡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그날 밤의 일로 인해 아이가 생긴다면 당신에게 알려 주길 원해요, 아니면 원치 않나요?」 「리비!」 리비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의도했던 대로 그가 자제력을 잃는 모습을 보는 것이 통쾌했다. 「당신이 말했듯이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에요」 밴스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에 걸린 양복을 집어들었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30살은 더 먹은 노인 같았다. 「만일 아이가 생기면 찰스와 연락해. 그러면 신탁자금을 지급받게 될 테니까」 그녀는 용기를 내어 한술 더 떴다. 「그리고… 만일 내가 재혼하게 된다면 아이의 이름을 당신 이름대로 둘까요, 아니면 바꿔야 할까요?」 그의 입이 일그러졌다. 그는 옷을 아무렇게나 걸친 다음 넥타이를 주머니에 되는 대로 쑤셔넣었다. 「왜 그렇게 고의적으로 아이 얘기를 강조하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말이야」 리비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요. 난 모든 일을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뿐이에요, 밴스. 난 그런 문제 때문에 멀지 않은 장래에 불필요하게 나이로비까지 오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그의 창백한 얼굴이 분노로 뒤틀렸다. 「법적인 문제는 모두 찰스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그는 더듬어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 이제 더 이상 얘기할 게 없겠군요. 안녕히 가세요, 밴스」 밴스는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리비…」 그는 뭔가를 말하려고 애쓰는 듯했다. 「뭐 필요한 것은 없어?」 필요한 것이 없냐고? 리비는 기가 막힌 눈길로 남편을 응시했다. 「자유요」 그의 가슴이 위로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부모님들과 함께 런던에서 살 거요?」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앞으로의 제 계획과 당신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을 텐데요. 당신이 내게 떠나지 말라고 하지 않는한 이것으로 우린 마지막이 될 것 같군요」 갑자기 그가 문을 홱 열어젖혔다. 그는 벽을 손으로 더듬으면서,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갔다. 그녀는 문가에 서서 남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반 시간쯤 후, 리비는 짐을 꾸려서 뉴스탠리 호텔을 나섰다. 그녀는 전에 피터와 식사를 했던 힐튼 호텔로 숙소를 옮길 예정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밴스의 곁을 떠날 수는 없다. 밴스가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그에게는 리비 자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그녀는 그가 필요했다. 다음날 아침, 리비는 찰스에게 전화를 했다. 아파트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그녀는 잠시 후에 다시 전화를 걸기로했다. 지금쯤은 그도 그녀가 없어진 걸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전화를 해보았지만 여전히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오가 되어서 리비는 힐튼 호텔을 나서서 택시를 잡아타고 뉴스탠리 호텔로 갔다. 행여나 찰스가 그녀를 찾아 그곳에 왔거나 아니면 뭔가 메모를 남겨 두지 않았을까 해서였다. 「찰스!」 뒷모습만 보아도 그녀는 단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매우 안절부절못하며 호텔 종업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리비!」 그는 손가방을 내려놓고 그녀를 세게 껴안았다. 「대체 어디 있었소? 당신을 찾아 여기저기를 헤멨어요. 공항, 기차역, 렌터카 대여소 등 모두 가보았소. 지난밤에 당신이 호텔에서 나갔다는 걸 알았을 때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나 아닌가 생각했어요. 오, 리비. 당신은 내 일생 중 최악의 6시간을 겪게 했소!」 「죄송해요. 하지만 전 오늘 아침 비행기편으로 런던엘 갈 생각도, 또 이혼 얘길 들을 생각도 없어요. 밴스는 내가 떠났을 걸로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전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스의 곁을 떠나서 살 수는 없어요. 전 그를 사랑해요, 찰스. 그리고… 저, 저는 당신이 절 런던으로 데리고가지 않았다고 밴스가 당신을 비난하는 것도 원치 않아요. 그래서 당신이 절 찾지 못했다고 하면…」 「리비」 찰스는 팔로 그녀를 따스하게 감싸안았다. 그 포근함에 그녀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소리없이 흐느꼈다. 「그가 진정으로 당신을 떠나 보내려 한다고 생각하오?」 그 질문은 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에게 흰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자, 눈물을 닦아요」 「그가 절 사랑한다는 건 알고 있어요, 찰스. 그가 우리의 결혼생활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전 그의 두통이 너무도 걱정이 돼요,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요. 그는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 봐야 하는데, 그렇게 고집을 피우고 있어요. 그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전 그의 아버님을 오시게 해야 할 거예요. 밴스는 누군가의 말을 들어야만 해요!」 찰스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 주었다. 「자, 이리 와서 앉아요」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소파로 리비를 이끌었다. 「당신에게 얘기해 줄 게 있어요, 리비. 밴스와의 약속을 깨뜨리는 일이긴 하지만 당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소」 「밴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그녀의 심장은 마구 두근거렸다. 「내게 아무것도 숨기지 마세요, 찰스」 「리비」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밴스는 지난 밤 늦게 병원에 갔어요」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어요」 눈물이 다시금 그녀의 두 눈에서 흘러넘쳤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으나 찰스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요」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지난밤 아파트에서, 두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밴스는 잠시 의식을 잃었소. 그래서 내가 앰뷸런스를 불렀고, 그는 병원에 입원하게 된 거요. 새로 X레이를 찍어본 결과 그의 뇌에 박혀 있던 광석파편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걸 알게 되었소. 그게 바로 두통의 원인이었던 거지. 파편의 위치가 이동한 까닭에 그걸 제거하는 수술이 가증하게 되었다고 의사가 말했소. 밴스는 지금 수술중에 있어요」 「믿을 수가 없군요」 리비는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오. 밴스는 당신이 그 사실을 알기를 원하지 않았소. 지난밤 내가 호텔을 떠난 다음 당신 두 사람 사이에 모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어요」 리비는 눈을 감았다. 「밴스는 오늘 아침 당신이 영국으로 돌아간 것으로 믿고 있을 거요. 만일 당신이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의 회복에 영향을 미치게 될 거요. 내 말 이해하겠소?」 「그렇다면 그는 당신이 오늘 아침 나를 공항까지 배웅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이세요?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셨단 말이죠?」 「난 당신이 아까 말한 것과 똑같이 그에게 거짓말을 했소. 그는 당신이 그의 이혼제의를 받아들이고 그의 삶으로부터 영원히 떠난 것으로 믿고 있어요. 아침에 당신이 없어진 걸 알았을 때, 당신이 일부러 자취를 감추었다는 걸 깨달았소. 당신과 연락하려고 무척 애썼어요. 밴스에 관한 얘길 해주려고」 「이제 전 어떻게 하면 좋죠? 전 그를 떠날 수 없어요!」 그는 한숨을 지었다. 「나도 당신이 그럴 수 없으리란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분간 그에게 이 사실을 숨겨야 할 거요. 이곳에 머물면서 좀 참아 봐요. 결국은 당신이 승리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는 내가 이혼에 동의한 걸로 알고 있잖아요」 「난 밴스를 잘 알고 있소. 사고 직후 그가 내게 전화를 했을 때, 사실 난 당신들의 결혼을 계속 유지시켜 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았어요.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케냐에 올 것으로도 생각지 않고 있었소. 당신도 알다시피, 그가 당신에게 강경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내게 말했기 때문이오」 「전 그런 편지의 내용이야 어쨌든 이곳에 왔을 거예요」 「난 당신의 말을 믿어요. 그러나 밴스는 당신들의 결혼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소. 농장에서 당신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밴스는 당신의 도움을 받으며 마치 진정한 남편처럼 행동하고 있었으니 말이오」 「그는 단지 당신이 그에게 일러 준 대로 행동했을 따름인걸요. 사람들 앞에서 그럴 듯한 부부인 척 행세하느라구요」 「그건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거요, 리비. 난 그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그런 위험한 상황에 당신을 끌어 들인다면 당신의 신변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결국 밴스는 당신을 자기 옆에 묶어 두는 방법을 알아낸 거지, 아내를 원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말이오」 리비는 그의 말을 곰곰 생각해 보며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해요. 전 그런 말을 듣고 싶었어요」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밴스는 지금 무척 상심해 있을 거요」 「알고 있어요」 「당신이 알아야 할 얘기가 있지만, 그건 스틸맨 박사가 말해 줄 거요. 자, 어서 병원에 가봐요. 나도 곧 당신 뒤를 따라갈 테니까」 「고마워요, 찰스」 리비는 찰스의 뺨에 입을 맞춘 다음 급히 호텔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그녀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쿵쾅거렸다. 대체 알아야 할 이야기란 무엇일까? 만일 의사가 자신에게 직접 말해야 하는 거라면 그것은 필시 나쁜 뉴스일 것이다. 그녀는 너무도 두려워서 얼굴을 두 손에 푹 파묻었다. 이 일로 인해 밴스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리비는 그를 잃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10 「앤슨 부인!」 외과용 마스크를 쓴 키 큰 사람이 리비를 향해 걸어왔다. 그녀는 그가 앞에 와 설 때까지도 그의 존재를 거의 깨닫지 못했다. 「오, 스틸맨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전 당신이 영국으로 돌아가신 줄 알고 있었어요」 리비는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밴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의 상태가 어떤지 알아야만 할 것 같아서요. 찰스가 제게 수술 얘기를 해주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게 있다고 하던데, 그게 뭐죠, 선생님? 제발 말씀해 주세요, 밴스는 어떤가요? 전 알아야만 해요」 「수술은 아주 성공적이에요」 「오, 정말 다행이군요」 그녀는 거의 속삭이듯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하마터면 너무 늦을 뻔했어요」 리비는 현기증을 느꼈다. 「너무 늦을 뻔했다구요? 그러면 그가 죽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세요?」 「이리 와서 앉으세요」 그는 가까운 의자로 리비를 이끌었다. 「당신 남편은 당신이 그의 상태에 대해 아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그가 당신에게 뭐라고 얘기하던가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가 땅바닥에 나가 떨어진 뒤부터 두통이 점점 심해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잖아요」 「지난주 내게 와서 진찰받은 결과를 말하지 않던가요?」 「아뇨. 전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는걸요」 「그렇다면 찰스 랜킨 씨가 남편의 머릿속에 박힌 광석 조각이 이동했다는 얘기를 해주었겠군요. 그가 그토록 심한 고통을 겪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고요. 광석 조각이 원래의 위치에 그대로 있었다면 수술은 불가능했을 거요. 하지만 위치가 이동하면서, 시신경이 제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거지요. 그가 넘어진 이후로 신경을 통해 빛이 전달되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시신경이 완전히 회복될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리비는 그렇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앤슨 부인. 하지만 그건 수술을 해보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에요. 그래서 난 수술의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남편에게 설명했었고, 남편은 아무런 보장도 없는 수술을 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했지요. 아니면 평생을 지난밤과 같은 그런 지독한 고통을 느끼며 살 것인가를. 난 어젯밤 늦게 그의 전화를 받았어요. 마음이 바뀌었으니 가능한한 빨리 수술을 하자는 거였지요」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은가요?」 그녀는 아주 조그만 소리로 그렇게 물어 보았다. 「글세, 아직 확실히 말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이건 아주 드문 경우예요. 시신경이 꼬이기는 했지만 그중 단 하나도 끊어지지는 않았어요. 이건 정말 백만분의 일에 해당하는 일이에요」 「선생님!」 「손 좀 이리 내봐요, 앤슨 부인」 그녀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가 그녀의 손에 아주 조그마한, 다이아몬드처럼 생긴 광석 조각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그것을 응시했다. 이 너무나도 미세한 조각이 남편의 뇌에 박혀 눈을 멀게 했단 말인가! 「그의 시력이 회복될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그녀는 고개를 들며 그렇게 물었다. 「그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시신경은 한 달 이상이나 꼬여 있었어요. 난 그것을 똑바로 해야 했어요. 이제 다시 제기능을 발휘하려면 시간이 걸릴 겁니다」 「얼마나 오래요?」 「글쎄요, 그건 말하기 어렵군요. 일주일, 혹은 10일. 어쩌면 그보다 더 걸릴지도 모르죠.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기다리는 것밖엔 없어요. 하지만 잊지 마세요. 난 아무것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네, 알아요. 하지만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로도 제겐 기적과 같은 일이니까요」 「그리고 이 수술의 까다로운 성격과 회복기간 때문에 난 당신이 이곳에 머물러 있다는 게 그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면 해요. 그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당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시력상실로 인해 그가 포기해야 했던 많은 것들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는 그가 싸워서 이겨내야 할 현재의 상태를 극복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겁니다」 그는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물론 당신은 그의 병실에 있어도 됩니다. 하지만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당신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붕대를 풀고 최종 결과를 알게 되면, 그때는 부부싸움을 계속해도 좋아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찡긋했다. 리비는 눈물이 날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으며 말했다. 「정말 감사해요.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자, 이젠 뭘 좀 드시고 쉬도록 하세요. 지금부턴 그저 기다리는 일만 남았으니까요」 그는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거려 준 다음 복도를 걸어갔다. 갑자기 리비는 이 좋은 소식을 자기 혼자만 알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전화를 찾아 부리나케 달려갔다. 밴스는 지금 그를 사랑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기도가 필요했다. 그녀는먼저 밴스의 부모님께 전화를 한 다음, 이어서 그녀의 부모님께도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밴스에게 전화를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해 두었다. 밤 9시 30분쯤이 되어서, 리비는 그가 누워 있는 침대차가 굴러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비는 초조한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회복실에 있던 밴스가 병실로 돌아온 것이다. 죽은 듯 꼼짝 않고 누워 있는 밴스의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연만과 애정으로 가득 찼다. 만일 스틸맨 박사가 수술이 성공적이었다는 애기를 해주지 읺았더라면, 그녀는 그의 모습에 기겁을 할 만큼 놀랐을 것이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그는 비로서 깨어나 몸을 약간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비는 재빨리 벽의 벨을 눌렀고 곧 이어 하얀 유니폼을 입은 그레디 부인이 경쾌한 걸음으로 방안으로 들어왔다. 「자, 앤슨 씨. 상태는 아주 좋아요. 이제 곧 앞을 보게 되실 거예요」 그레디 부인은 두 손으로 밴스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 그의 말소리가 갸날프게 들렸고 이어서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리비는 그것을 보자 부러움과 함께 질투심이 솟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 붕대, 내 머리가 온통 붕대로 감겨 있군요. 리비, 리비?」 그는 급박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녀는 달려가 그에게 몸을 던지고,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사랑과 힘을 전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리비, 달링, 이 붕대…」 그는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그레디 부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녀는 침대 곁에 서 있는 리비를 향해 무언의 눈짓을 했다. 「수술은 끝났어요, 앤슨 씨. 그리고 아주 성공적이에요. 당신의 상태도 매우 좋구요. 이제 곧 앞을 보게 될 거예요」 그녀의 다정함과 부드러움이 마음을 진정시킨 듯, 밴스는 곧 잠이 들었다. 그가 깨어나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리비는 그후 3일 동안 자신을 지탱하기에 충분했다. 리비는 호텔에서 잠을 잤고, 깨어나면 곧 그의 병실로 달려갔다. 밴스는 점점 상태가 좋아지는 듯했다. 그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형태와 빛들에 관해 얘기했다. 스틸맨 박사는 그의 시력이 회복되고 있는 증거라고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그후 1주일쯤 지나서 의사는 붕대를 풀었다. 리비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의자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좋아요, 밴스. 자 이제 마지막 붕대를 풀겠소. 아직 뭔가가 보이리라고는 기대하지 말아요. 특별히 만들어진 안경을 줄 테니까 낮에는 그걸 쓰고 밤에 잠을 잘 때는 벗도록 해요. 뭐 질문할 것 없나요?」 「없습니다」 그 짤막한 한마디로 미루어, 그가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초조한 기다림의 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리비는 의사의 손이 남편의 머리를 감고 있는 붕대를 완전히 다 풀 때까지 꼼짝도 않고 지켜보았다. 스틸맨 박사는 밴스의 눈을 살펴본 다음, 그에게 안경을 건네주었다. 「어때요?」 「마치 무거운 것을 들고 있는 것 같군요」 「머리는 아주 적은 무게나 압력에도 민감해요. 앞으로 몇 시간 동안은 서서히 움직여서 가벼워진 머리의 느낌에 적응하도록 하세요」 「시력에 변화가 있으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앤슨 씨, 그건 자연의 법칙에 달려 있답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죠. 참기가 힘들겠지만 너무 초조해하지는 마세요. 지나친 생각도 말고요. 라디오를 듣거나 혹은 친구에게 책이라도 읽어 달라고 하세요」 이렇게 해서 단조로운 3일이 시작되었다. 스틸맨 박사는 아침 저녁으로 밴스의 상태를 점검했다. 하지만 아직 별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식욕은 별로 없었지만 간호원들이 뭐라고 나무라지 않을 정도로는 먹었다. 9일쯤 되자, 밴스는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거나 혹은 지팡이를 사용해서 복도를 걸어다녔다. 그는 약간 자신감을 되찾은 듯했지만, 리비는 그에게서 공포와 불안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9시쯤 해서 스틸맨 박사가 그를 검진하러 왔다. 그는 쿠션에 고개를 올려놓은 채 텔레비전 세트 앞에 놓인 의자에 웅크리고 있었다. 스틸맨 박사는 그를 가볍게 흔들었다. 「밴스, 자 침대에 가 누워요. 당신을 진찰해 봐야 하니까」 밴스는 서서히 일어나 아무 말 없이 의사가 하라는 대로 침대로 올라갔다. 의사는 그 어느때보다도 오랫동안 그를 살펴보는 듯했다. 「이제 완전히 치유되고 있는 중이에요, 밴스. 건강 상태도 매우 양호하군요. 뭐 별다른 변화는 없소?」 「없소」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지. 시신경은 지금 매우 잘 회복되고 있는 중이오. 지금 당신은 참기 힘든 상태를 그 누구보다도 잘 견디고 있어요. 아침에 다시 오겠소. 잠들기 전에 마사지할 간호원을 보내겠어요. 긴장을 풀고 편히 쉬게 해줄 거요」 잠시 후에 그레디 부인이 수건과 로션을 들고 병실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마사지할 시간이에요. 자, 안경을 벗고 엎드리세요」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안경을 벗어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나서 얼굴을 찡그리며 파자마 윗도리를 벗은 다음 침대 위에 몸을 쭉 펴고 엎드렸다. 그의 널따란 갈색빛 등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레디 부인은 그의 등과 팔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군요, 그레디 부인」 「그럴 거예요. 자, 이젠 잠을 좀 자도록 해보세요」 그녀는 마치 애정이 가득한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근육을 맛사지해 주었다. 리비는 손을 뻗어 뻣뻣해진 그의 목 뒷부분을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뺨을 그의 등에 대고 그를 두 팔로 감싸안고 싶은 충동을 그녀는 간신히 눌렀다. 리비는 손을 멈췄다. 결국 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좋지 않은 생각이다. 「멈추지 말아요. 계속하면 후한 보수를 줄 테니까. 30분에 하루의 일당, 어때요?」 그레디 부인은 병실이 떠나가라고 웃어 젖혔다. 그 바람에 리비의 입술에도 어렴풋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만두세요, 앤슨 씨. 난 돌봐야 할 환자가 많으니까요. 자, 갑시다. 간호원」 그레디 부인은 리비를 향해 눈짓을 한 다음 방을 나갔다. 한쪽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리비는 밴스가 파자마 윗도리를 입은 다음 잠을 자기 위해 시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잠이 들면 그녀는 언제나 호텔로 돌아왔다. 하지만 오늘밤을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밴스는 지금 당장이라도 시력이 완전히 회복될지도 모른다. 생각에 깊이 잠겨 있던 그녀는 그가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그가 지팡이를 찾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서 생각에서 깨어났다. 잠시 뒤에 그는 콜라가 든 캔을 들고 다시 돌아왔고, 그 뒤를 그레디 부인이 부라나케 뒤따라 들어왔다. 「앤슨 씨, 이 한밤중에 카페인이 든 음료수를 마시면 어떻게 잠이 들겠어요?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밴스는 키 작은 여인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는 리비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창백한 그의 안색이 그의 매력을 한층 더해 주고 있었다. 그는 이전과 똑같은 밴스였지만 그러나 뭔가가 달라 보였다. 그가 그녀 쪽으로 돌아설 적마다 리비는 그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누구도 그가 시력을 잃었다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레디 부인은 마치 매와 같은 눈으로 그를 지켜보더니, 마침내 그에게 어서 잠자리로 돌아가라고 타이르고 나서 방을 나갔다. 리비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약 30분쯤 지났을까, 그녀는 밴스의 고른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잠이 든 것이다. 신발을 한쪽 손에 벗어들고 리비는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서 침대로 갔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아주 평화로워 보인다. 그녀는 지금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지금 이 순간 그의 앞 이마에 흘러내린 갈색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보고 싶었다. 뜨거운 사랑과 애절함이 그녀의 두 눈에 촉촉한 눈물을 맺히게 했다. 「오, 하느님!」 그녀는 돌아서기 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말을 입밖에 내고 말았다. 「리비?」 그녀는 깜짝 놀라 믿을 수 없는 눈길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내가 당신 손길을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했나? 당신 몸에서 풍기는 향기를? 눈이 먼 사람은 다른 감각은 아주 발달해 있어 더욱 예민한 거야. 그걸 알고 있어?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었던 그날 밤, 나의 몸으로 당신을 숭배했던 그날 밤, 당신의 손길이 남긴 그 황홀감은 내 마음속에 지울 수 없이 선명하게 찍혀 있어. 난 다시 한번 당신의 손길을 원해. 자, 이리 와, 리비」 「밴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당신에게 알릴 생각은 절대로 아니었어요」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두 눈에 가득 괴었다. 「용서해 주세요. 고의로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난 당신 곁에 있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당신의 시중을 들어 줄 수 있었죠, 저만 빼고는요. 전 더 이상 그걸 견딜 수가 없었어요. 죄송해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힘겹게 말했다. 「가겠어요」 「그런 말은 하지 마, 리비」 그의 부드러운 어조에 그녀는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내가 이제 더 이상 내 소중한 아내를 잃을 그런 위험을 감수할 것 같애? 당신 없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당신에게 얘기해 줘야만 할까? 당신을 내 팔 안에 안고 있지 못한 단 1초가 내 두 눈을 잃고 지내는 수많은 날들보다 훨씬 더 괴롭다는 걸 알아?」 리비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얼마나 듣기를 바랐던 말들인가. 낮은 신음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당신을 사랑해, 리비. 난 내 생명보다 더 당신을 필요로 해. 당신이 내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난 당신의 진실한 남편이 되고 싶어.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계속될 거야. 시간이나 환경조차 우리의 사랑을 갈라 놓지 못할 거야…. 우리는 언제나 함께 있을 거야」 그는 떨리는 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대했던 태도에 대해 날 비난해도 좋아. 하지만 제발 날 떠나지 말아 줘」 그의 목소리는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었다. 「저도 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해요」 그녀는 그의 짙은 갈색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오, 밴스…, 설사 당신의 시력이 회복되지 않는다 해도, 제발, 제발, 그것을 문제삼지는 마세요. 전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어요. 당신을 열렬히 사랑해요」 그의 팔이 그녀의 가는 몸을 감싸안았고 그녀는 그에게 꼭 매달려 있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어, 리비. 우리의 결혼서약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쳤던 걸 용서해 줘. 당신을 이렇게 다시 되찾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해」 리비는 그에게 더욱 꼭 매달렸다. 넘칠 듯한 환희에 그녀는 끝없는 행복을 느꼈다. 「내가 원하는 건 오직 당신뿐이야」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쥐었다. 「당신이 런던으로 되돌아갔다는 생각에 나는 미칠 것만 같았어. 누군가 다른 사람이 당신의 사랑을 차지하고, 당신을 사랑할 것을 생각하면 정말 괴로웠어. 난 당신이 다시 내 곁으로 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어, 리비」 「전 결코 당신 곁을 떠나지 않았어요」 「당신이 이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을 때, 난 마치 막막한 어둠 속으로 내몰린 듯한 느낌이었어」 「거짓말로 그런 거예요.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이젠 다시는 당신을 속이지 않겠어요, 절대로요」 그는 그녀의 부드러운 목에 뜨거운 키스를 했다. 「다시는 내 곁을 떠나지 마.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야. 아까 당신의 손길을 느꼈을 때, 난 이게 꿈이 아닌가 했어. 내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지」 리비는 그의 무릎 위에 가볍게 앉아 그의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고 부드러운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는 지금도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절대로 당신을 떠날 수 없을 거예요, 밴스. 당신 없는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칼을 쓸면서 말했다. 「전 앞을 못 보는 것이 과연 어떤 느낌인지 아는 척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것이 당신없이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라고 말할 수는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아까 암흑 세계로 내몰린 듯한 느낌이었다고 말했죠. 제가 병원에 처음 도착했을 때, 당신은 제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어요. 전 그때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함과 괴로움을 느꼈죠…」 「나를 용서해 주겠소?」 그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용서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전 당신을 사랑해요」 그의 굶주린 듯한 입술이 고통스러울 만큼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눌러왔고, 그들은 곧 뜨거운 사랑의 깊이에 서로를 내맡겼다. 재빠른 손길로 밴스는 리비를 안아들고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그녀 곁으로 부드럽게 다가왔다. 「 스틸맨 박사가 퇴원시켜 주자마자 곧 신혼여행을 떠납시다. 몇 달이고 당신과 단둘이만 지내고 싶어. 이게 정말 꿈이 아닌지, 믿어지지가 않아. 하지만 당신은 정말 내 곁에 있어. 오, 내 사랑. 당신은 너무도 아름다워. 가슴이 저릴 만큼 너무도…」 작은 신음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그녀는 더 이상 가슴이 터질 듯한 이 환희를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병원이었다. 「밴스, 누군가가 이리로 올지도 몰라요」 그녀는 그의 턱에 대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 방에 대해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어. 내가 내 아내를 안고 싶어한다면 그건 다른 사람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야. 하지만 당신을 집으로 데리고갈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 앤슨 부인」 「당신이 절 그렇게 불러 주는 게 너무도 좋아요」 「오, 리비, 리비. 남은 내 일생 동안 당신을 계속 사랑하게 해줘…」 새벽의 라벤더 빛 광선이 병실 창문으로 스며들어 침대 위로 쏟아져내렸다. 리비는 이른 아침의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나 재빨리 남편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다는 걸 깨닫고 눈을 떴다. 그의 검은 갈색 눈이 그녀의 얼굴 윤곽을 하나하나 더듬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뭔가 전과는 달라 보여 리비는 숨을 죽였다. 「밴스?」 「움직이지 마」 그가 속삭였다. 「그대로 누워 있어. 당신을 바라보게 해줘, 리비.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당신은 연한 하늘색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입고 있고, 그 블라우스의 소매와 옷깃에는 하얀 테두리가 되어 있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의 목소리에는 기쁨과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는 리비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꿈이 아니에요, 밴스. 당신의 시력은, 이제 당신의 시력은 회복된 거예요. 어…언제부터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이것이 정녕 꿈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조금 전에 일어났을 때 모든 것이 어렴풋하게 보이기 시작했어. 난 무슨 일인지 몰라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지. 그러자 당신 얼굴이 분명히 보였어. 그러나 당신의 이미지가 내 마음속에 너무도 오랫동안, 너무도 선명히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난 그것이 실제의 일인지 믿을 수가 없었지. 하지만 분명하지, 리비? 난 정말 당신을 볼 수가 있는 거지?」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반짝였다. 「오, 아름답고 사랑스런 내 아내!」 그는 그녀의 두 손을 들어올려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가슴이 저릴 정도로 부드럽게…. 「당신이 나를 저버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당신이 도착하던 그날 다시 런던으로 가버렸다면 어땠을까?」 그는 두 팔로 그녀를 다시 한번 감싸안았다. 「이제 다시는 내 곁을 떠나지 마. 나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마」 밴스는 빨아들일 듯 강렬한 눈길로 리비를 내려다보았다. 「리비, 당신만이, 오직 당신만이 앞 못 보는 사람에게 빛을 가져다 줄 수 있어」 그의 목소리엔 눈물이 어려 있었다. 「난 당신에게 이 세상을 모두 주고 싶어」 「당신이 결혼하자고 말했을 때 당신은 이미 제게 이 세상의 모든 걸 준 거예요. 하지만 전 세상을 잊어버리고 오직 당신과 단둘이만 있고 싶어요. 내 안에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기를 생각하면서요, 밴스. 난 어서 빨리 아기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부드럽게 밴스를 침대 위로 밀면서 그의 입술에 오랫동안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 주길 원했어, 앤슨 부인. 당신을 내 팔에서, 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못하게 할 거야. 언제까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