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둘이서 / 린 터너 (A-17) / IPS (90/3) Impulsive Gamble 애비는 이 경주에서 꼭 이기고 싶었다 프리랜서인 애비는 인터뷰를 꺼려하는 엔진 발명가인 맬러키 개럿을 취재하려고 시도하지만 아무도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러던 중 우연히 그가 엔진을 시험하기 위한 내기 경주의 운전사를 구한다는 말을 엿듣고 그녀는 그에게 접근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지원한다. 내기의 상대는 몇 년 전 그를 배반하고 떠나 버린 록산이라는 여자. 맬은 록산을 의식해 애비에게 가짜 애인 역할을 부탁하는데.. 1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나?] 누군가가 느릿하고 탁한 남부 사투리로 물었다. 질문과는 대조적으로 대답은 훨씬 간결했고, 조금은 초조한 목소리였다. [아니, 사실 나 그다지 관심도 없어] 그 목소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부드러운 남부의 억양에 애비는 자기도 모르게 황금색의 샴페인 거품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어떻게 자네가 그 꽉 찬 서른 셋의 나이가 되도록 아무 일 없이 살아올 수 있었는지 그걸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태어날 때부터 뇌사 상태였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말이야] [의지력이지] 그가 딱 잘라 말했다. 두 사나이가 애비의 옆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15분 동안 줄곧 언쟁을 벌이고 있는데, 애비는 부끄러움도 없이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할 만한 일이 달리 없었을 뿐더러 솔직히 그녀에게는 상습적으로 남의 말을 엿듣는 버릇이 있다. 그것은 타고난 그녀의 성격이기도 하고, 또 직업상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열띤 논쟁은 아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흔히 벌어지곤 하는 사소한 말다툼 정도였다. 말하자면 둘 중 하나가 다른 한쪽이 생각하기에 지독히 경솔하거나, 무책임하거나, 아니면 어이없을 정도로 바보 같은 짓을 했을 때 생기는 일종의 의견 차이 같은 것이다. 이 경우에는 둘 중 더 단정치 못한 차림새의 사내가 그 세 경우 모두에 해당되는 어떤 내기를 한 모양이었다. 수년에 걸친 훈련 덕분에 애비는 주위의 일에 전혀 무관심한 듯 연기하는 것에 아주 능숙했다. 옆 테이블에서 오가는 대화를 엿듣는 동안 그녀는 두 사내가 부인할 수 없는 남성적인 매력의 소유자라는 결혼에 이르렀다. 하긴 여기는 오클라호마가 아니가. 남자들은 모두 서부의 사나이이며, 여자들 역시 자기의 남자가 그런 사내이기를 바라는 곳. 하지만 이 두 남자가 서부의 사나이라는 그 전형에 들 것인지는 그녀도 그다지 확신할 수가 없다. 우선 그들 중 누구도 카우보이 모자를 쓰거나 어깨에 수가 놓인 셔츠를 입지 않았고, 오클라호마 사투리로 얘기하고는 있지만, 둘 다 충분히 교육받은 엘리트라는 사실이 한눈에 봐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애비는 일주일 전 털사 남동부의 이 조그만 마을에 도착했다. 목적은 이곳으로 예정된 핵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시위대를 취재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시위 참가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었고, 그들은 부족의 공동묘지와 인접한 땅에 핵발전소를 세운다는 사실에 격분하고 있었다. 애초에 애비는 이 이야기를 인간적 관점에서 취재하면 두 세 군데의 지방 신문에 팔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이곳에 왔다. 그런데 시위가 있기 이틀 전 인디언 사무국에 있는 어떤 멍텅구리가 유해들을 적절한 다른 장소로 이장하자는 제안을 수락하는 바람에 그녀의 작은 휴먼 스토리가 본의 아니게 핵 시설을 다른 일면기사로 탈바꿈해 버렸던 것이다. 문제의 장소에 와 있던 유일한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애비는 동부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중요 신문사들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았다. 그들은 겨우 한 건 더 늘어났을 뿐인 반핵 시위 때문에 정규기자를 파견한다는 것은 인력낭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여러 제안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고를 수 있었다. 시위가 있기 전날 그녀는 워싱턴 포스트 지와 아주 유리한 계약을 맺었다. 여러 각도에서 취재한 기사가 이미 몇 시간 전에 파일이 끝난 상태로 호텔 방 책상 위에 놓여 있다. 하지만 가장 빠른 뉴욕 행 비행기라 해도 내일 오후에야 털사를 출발하기 때문에, 지금부터 그녀는 한참 남은 낮 시간과 긴 밤을 이리저리 빈둥거리며 때워야 했다. 애비는 음료 속에 떠 있는 체리를 집어 올리면서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이 오클라호마 미개척지까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온 것은 무산된 시위 때문만은 아니다. 기사를 다 쓰고 난 다음 이 마을의 가장 유명한 주민인 엔진 발명가의 뒤를 추적한다면, 특집기사 하나쯤은 어렵지 않게 건져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맬러키 개럿. 요 이틀 동안 애비는 그 이름을 입밖에 내기만 하면 보통 때는 친절하기가 수선스러울 정도인 마을 사람들이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고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녀를 살펴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가 지방 보안관에게 이 기묘한 반응에 대해 얘기하자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그리고는 이 마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존중한다는 것과, 신문기자에 대한 개럿의 혐오감과 지독히 고약해질 수도 있는 그의 성질을 모두 잘 알고 있는 까닭에, 그녀가 개럿에 대해 떠벌릴 만큼 용기 있는 다른 말로 하자면, 그 정도로 바보스러운 사람을 찾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던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말은 맬러키 개럿에 대한 기사는 결코 씌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애비는 방으로 올라가 실의에 찬 마음을 뜨거운 목욕으로나 달래 볼까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옆 테이블에서 들려온 어떤 말이 그녀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그 빌어먹을 엔진을 만든 건 바로 나라구! 장담하지만, 그녀가 이 내기에서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어!] 그 빌어먹을 엔진을 만든 건 바로 나라구... 애비는 한순간 몸속을 치닫는 전율에 스스로 어이없어하며 코웃음을 쳤다. 저 남자를 좀 보라구. 세상에..., 기름때가 묻어 잿빛으로 변해 버린 셔츠에 군데군데 찢어진 낡은 청바지하며 게다가 다 떨어진 조경 슈즈라니! 그는 몇 달 동안 이발소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 같아 보였다. 비록 수염만은 깨끗하게 깎여져 있었지만.... 그녀는 잔 속의 얼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곁눈질로 그를 계속 살펴보았다. 꽤 고집스러워 보이는 멋지게 생긴 턱, 인상적인 어깨, 그녀의 취향으로는 턱없이 긴 편이긴 하지만 반짝반짝 건강하게 빛나는 머리카락 - 어두운 밤색으로 탐스러울 정도로 숱이 많은 곧은 머리카락이다. 그는 머리를 그대로 뒤로 빗어 넘겼는데, 반항이라도 하려는 듯 양 관자놀이께에 굵은 웨이브가 져 있다. 그녀는 내리깐 속눈썹 아래로 그 웨이브를 감탄하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자네는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어, 맬] 그의 친구가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자네의 새 디자인의 대걸작임에는 틀림없겠지만, 엔진이란 노련한 운전사 없이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법이야. 누군가가 그 차를 몰아야 하는데, 우리 둘 다 그 주인공이 자네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 자네야말로 오클라호마에서 가장 솜씨 없는 운전사일테니까] 친구의 말을 들은 남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얼굴만 찌푸렸다. [운전사를 찾아낼 거야] 그가 중얼거렸다. [꼭 이 지방 사람일 필요는 없잖아] 그가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그건 내기에 들어 있지 않으니까. 전화를 몇 동 해봐야겠어. 서더필드나 페리스가 와줄지도 몰라] 그의 친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의 표정은 이제 거의 동정적이기까지 했다. [맬, 지금은 5월 중순이야. 그들은 인도에서 경주하기로 되어 있지 않나, 잊었어? 그들은 지금쯤 한창 바쁠 거야. 이 달 말까지는 얼굴도 볼 수 없을 걸] [빌어먹을!] 애비는 오클라호마의 한낱 정비공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어떤 남자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카 레이서인 데이브 서더필드와 토니 페리스의 이름을 마치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하찮은 내기에 이기기 위해 그들을 불러오겠다고 하지 않는가... 웨이터가 지나가자 그녀는 그에게 옆 테이블의 남자들을 알고 있는지 물어 보았다. 젊은이는 당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저기 디젤 엔진 바닥에서 막 빠져나온 것 같아 보이는 쪽이 맬러키 개럿이구요, 다른 쪽은, 덱 크레독 씨랍니다. 그들이 당신을 못 살게 굴던가요? 정말 그랬다면 그렇다고 말씀하세요. 이 마을에선 누구나가 저 맬 개럿이 여성 혐오증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이 웨이터는 애비가 무엇을 해서 먹고사는지 모르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녀가 사건을 찾아다니는 기자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개럿의 이야기가 나온 순간 다른 사람들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도 그런 남자들을 몇 명 알고 있어요] 그녀는 이해하겠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대개 그런 태도는 호된 경험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알아요. 하지만 맬이 여자에게 등을 돌리게 된 건 이혼 때문이 아니랍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결혼한 적이 없어요] 애비는 잔을 들어 진저에일을 한 모금 마셨다. [음, 그렇다면 불행한 연애 사건이 있었겠군요] [그렇게들 말하고 있어요. 여자가 동부의 어떤 큰 자동차회사 사장 때문에 그를 차버렸다더군요. 어느 날 갑자기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났대요. 듣기로는 그 남자가 그녀에게 자동차 공장을 하나 넘겨줬다던가? 그렇게 해서 맬이 가르쳐 준 것을 그의 고객을 훔치는 데 써먹은 거죠] 애비는 만난 적도 없는 그 여자의 초상화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보통 이상의 지능에 야심만만한, 아름답지만 교활한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머리뿐만 아니라 미모까지도 서슴없이 이용할 수 있는 여자... [개럿이 많이 상심했겠네요] 대답하려다 말고 웨이터가 옆 테이블로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흘 동안 온통 난리법석이었어요. 혼자서 저기 길 위쪽에 있는 술집인 래미 네 가게에 2,000달러 이상의 손해를 입혔답니다. 끝내는 콜리어 보안관이 맬을 가둬야만 했죠. 진짜로 누가 다치기 전에 말이에요. 그를 래미 네 가게에서 끌어내 유치장까지 데려가는 데는 건장한 남자가 세 사람이나 힘을 써야 했어요] [하지만 그 술집에서 보안관 사무실까지는 한 블록밖에 되지 않잖아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애비가 물었다. 청년이 싱긋 웃었다. [맞아요. 하지만 맬이 일단 마음을 먹으면 누구도 말릴 수가 없답니다. 사람들은 그저 그가 지쳐 떨어질 때까지 잠자코 있는 수 밖에요] 애비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개럿이 소리 높여 맥주를 한 병 더 청했다. 아주 성마른 소리였다. 얼굴을 약간 붉히면서 웨이터는 급히 바로 물러갔다. 애비는 잔 속의 진저에일을 들여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개럿이 기자라는 라벨이 붙은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소문은 이미 들어 알고 있다. 게다가 그는 야심만만한 연인에게 채는 바람에 지독한 여성 기피증에 빠진 모양인데..., 오, 프리랜서 여기자에 대한 그의 견해가 어떨는지 생각해 보고 싶지도 않다. 맬에게 맥주를 가져다 주러 온 웨이터가 그녀의 눈길을 피해 저쪽으로 가버렸다. 그 사고뭉치 장본인이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 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아무래도 현명한 생각이 못된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프레드 벤더의 아들은 어때?]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그의 친구가 제안했다. [항상 폐차 경주에 나가곤 했었잖아? 어쩌다 트로피도 탔었고] 개럿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이봐, 문제는 차와 나를 고이 워싱턴까지 모셔다 놓는 거야. 가능하다면 흠집 하나 내지 않고] 애비는 자세를 고쳐 앉아 그들의 말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두 눈은 동그래서 있었다. 차와 그를? [난 2년이라는 세월과 50만 달러에 가까운 돈을 이 엔진에 투자했어. 그런 판에 조이 벤더라고? 벤더는 이 마을 경계선을 벗어나기도 전에 범퍼를 세 번쯤은 박아 놓을 녀석이라구!] 그 비난의 몇 마디를 끝으로 그들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떤 계획이 애비의 머릿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맬러키 개럿이 언급한 곳이 워싱턴 주인지, 워싱턴 D.C. 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그들이 족히 며칠은 걸릴 자동차 여행에 관해 얘기를 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 며칠 동안 개럿과 그가 선택한 운전사는 단둘이서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서로에 대한 얘기가 오갈 것이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녀는 일어서서 옆 테이블로 건너갔다. [실례해도 될까요?]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가 들린 쪽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곁에 젊은 여자가 서 있다. 그녀는 이 지방 사람이 아니다. 그쯤은 첫눈에 알 수 있다. 헐렁한 흰 블라우스 셔츠는 실크인 것 같고, 허벅지에 꽉 끼는 블루 데님의 진이 흔한 기성복이 아니라는 데는 기꺼이 내기라도 할 수 있다. 금사슬의 펜던트가 가슴의 계곡이 시작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런 대로 세련된 편이군. 그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관능적인 향수 냄새가 그녀의 온기와 함께 그의 감각을 자극한다. 그는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여자의 가슴께를 지긋이 응시했다. 그의 한쪽 입가가 감상하는 듯한 미소를 띄우며 위로 치켜 올라갔다. 아무 말 없이 애비는 그의 값을 매기는 듯한 노골적인 시선을 견뎌냈다. 남자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맬러키 개럿처럼 이렇게 오랫동안 유심히 살피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가 여성 혐오증을 가졌다고는 좀처럼 믿기가 어려웠다. 마치 엑스레이 선으로 투시당하는 기분이다. 애비는 독점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팔로 가슴을 가리고 그를 되쏘아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눌렀다. 맬은 그녀가 자신의 시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등은 막대기처럼 꼿꼿하게 긴장되어 있고, 두 손은 손가락의 관절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틀어쥐고 있다. 전형적이군. 그는 경멸스럽게 생각했다. 그녀는 일부러 몸매를 드러내는 옷을 입고도 남자가 쳐다보기라도 할라치면 모욕당한 듯 화를 내는 그런 부류 중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지난 이틀 동안, 몇몇 마을 사람들이 어떤 여기자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그에 대해 정보를 캐내려 한다고 알려왔었다. 보랏빛 아이섀도를 진하게 칠한 인상적인 가슴의 이 여자가 그녀가 아닐까 하고 맬은 생각했다. 모두가 그 여기자가 대단한 미인이라는 말을 잊지 않고 덧붙였었다. 이 여자라면 그 설명에 딱 들어맞는다. 다만 저 헤어 스타일. 그녀가 온 곳에서는 최신 유행인지는 몰라도 맬은 그녀의 머리 모양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구리빛에 가까운 대단히 매혹적인 금발을 누가 그랬는지 귀밑에서 썽둥썽둥 잘라내 버려 말할 수 없이 허전해 보였다. 탐스럽게 웨이브진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서 물결칠 수 있을 정도로 길게 길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상상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그는 짙은 두 눈썹을 한껏 찌푸렸다. [뭘 원하는 거요?[ 인터뷰를 요청할 게 뻔하다고 생각한 그는 으르렁거리듯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만약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저 화살촉 모양의 귀걸이가 귀에 달라붙어 버릴 정도로 심한 말을 해줄 참이다. 그의 사나운 어조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인내심과 약간의 기교가 요구되는 일이라면 그녀는 이미 충분한 훈련이 되어 있었다. 애비는 퉁명스러운 그의 어조를 무시하고 미소를 띄운 얼굴로 대답했다. [실례가 되는 줄은 알지만, 당신들의 대화를 엿듣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의 눈썹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녀는 급히 말을 이었다. [운전사를 구하고 계신가 본데, 제가 그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애비는 자신이 그를 놀라게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동안 맬은 멍하니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비웃는 듯한 비틀린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대놓고 웃음을 터뜨리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홍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난 솜씨있는 운전사예요. 아버지가 군인이셨던 까닭에 13살이 채 되기도 전에 지프를 몰고다녔죠. 첫 운전 면허증을 땄을 무렵에는 기지에 있는 모든 차량을 다룰 수 있었어요. 독일제 셔먼 탱크를 모함해서요. 기어 박스와 방향 조절이 가능한 최소한의 핸들만 있다면 어떤 기계라도 몰 수 있답니다] 조이 벤더에 관해 그가 내뱉은 몇 마디를 기억해내고는 충동적으로 덧붙였다. [이제까지 사고는 내 본적이 없어요. 주차 위반 딱지를 떼어 본 적도 없구요] 보통의 유능한 신문기자들처럼 애비도 언제 용건을 말하고 언제 입을 다물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특히 상대가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더 적절한 시기에 침묵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라는 것도 역시 터득하고 있다. 갑작스런 침묵은 가끔씩 사람들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게 만들어 말을 함으로써 그것을 끝맺고 싶은 충동까지 느끼게 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 생각도 없이 튀어나온 말들이 끈기 있고 조리 있는 질문으로 유도해낼 수 있는 대답보다 훨씬 더 흥미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늘게 뜬 그의 두 눈과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그 입술을 보는 순간, 애비는 이 전술이 그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럿은 그녀가 차를 몰 수 있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는 것 같다. 그녀가 여자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는 이 제안을 거절할 모양이다. 솟구치는 분노의 감정을 애써 삭이고, 애비는 청록색의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자네에겐 행운의 날인 것 같군, 맬] 덱은 느긋한 어조로 말하며 그녀를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여 보였다. 맬은 화난 표정으로 친구를 한번 쏘아보고는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어디로 차를 몰고 가야 하는지조차 모르지 않소] 그가 무뚝뚝하게 잘라 말했다. 그녀는 조금 주저했지만, 곧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워싱턴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물론 워싱턴 D.C. 겠죠? 마침 잘됐다고 생각해요. 나도 다음주 월요일까지는 그곳으로 가야 하거든요.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맬은 팔장을 낀 채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늘게 뜬눈으로 한참 동안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그 일 말인데...] 마침내 그가 한껏 부드러움을 가장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시 신문사와 관계된 일이 아니오?} 순간 눈앞이 캄캄했지만, 애비는 가까스로 충격을 감추고 놀란 듯 순진하게 눈을 깜빡여 보였다. [신문사라구요? 어머..., 아니에요] 제발 뭐라도 좋으니 빨리 생각해 내라구! [병원 일이에요. 의료 관계의 사무를 보고 있죠] 그가 다시 입을 다물고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큰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였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거부의 울림이 느껴졌다. 그의 친구도 그것을 느꼈는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쑥 끼어 들었다. [그녀에게 트랙 몇 바퀴 정도 시험운전을 시켜 보는 게 어떨까? 말한 만큼 훌륭한 솜씨를 가졌는지 알아보자구]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맬이 친구를 노려보았다. 덱은 난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충돌할 만한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고작해야 진흙구덩이에 처박히는 정도겠지. 그렇게 된다 해도 트랙터로 끌어내면 그만일 테고...] 여전히 맬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빌어먹을! 덱, 상대는 여자라구!] 오, 하느님! 애비는 이를 갈면서 그와의 인터뷰를 자신이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속으로 수없이 되뇌어야 했다. [알긴 아는군. 난 자네가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했지] 덱이 말했다. 그리고는 맬이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봐, 기회를 주라구. 손해 볼 건 없잖아. 자네는 운전사가 필요하고, 그녀는 동부로 가는 차편이 필요해. 내게는 아주 완벽한 거래 같아 보이는데?] 맬이 친구의 말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그 뚱한 표정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제안을 반박할 적당한 이유가 생각하지 않는지 한동안 그는 눈앞의 맥주 잔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이윽고 그가 입맛이 쓴 듯 중얼거렸다. [좋아, 자네가 이겼어] 싱긋 미소 띈 얼굴로 덱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애비는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누르며 굵은 뼈마디가 드러난 그의 손을 힘껏 잡았다. 이제 난 맬러키 개럿에 관한 독점기사를 쓸 수 있게 된 거야. [덱 크레독이라고 하오] 애비의 손을 펌프의 손잡이처럼 아래위로 힘차게 흔들며 그가 말했다. [그리고 이 성질 고약한 녀석은 맬 개럿이오. 그의 말은 조금도 신경 쓸게 없어요. 좀 고약하게 짖어대긴 해도 별로 심하게 물진 않으니까] [그렇지 않아]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서면서 맬이 골이 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애비는 그가 좀더 체격이 클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친구인 덱과 엇비슷한 키였고, 몸무게는 5, 6 kg 쯤 덜 나가는 듯했다. 배가 약간 튀어나온 덱과는 달리 그의 체격은 늘씬했고, 피부는 멋있는 구릿빛으로 그을려 있었다. [이름이 뭐요?] 맬이 물었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풀네임을 댔다. [애비게일 프루던스 킹케이드] 그의 입술끝이 실룩거리며 위로 치켜 올라갔다. [애비게일 프루던스?] 어이없게도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래요] 그녀는 머쓱해져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모두 애비라고 불러요] 로비로 나가는 문을 손짓하는 그의 눈동자에 놀리는 빛이 가득했다. [자, 애비게일 프루던스?] 그의 깊고 께름칙한 목소리는 그녀가 뭐라고 반박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말한 것처럼 그렇게 훌륭한 운전사인지 어디 한번 알아보기로 합시다] 애비는 그의 도전에 응하지 않았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녀가 자신의 테이블에서 가방을 챙겨들었을 즈음에 그와 크레독은 이미 출구까지 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서 홀을 가로질러 건너갔다. 그들이 주차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만한 돼지 같으니라구! 맬러키 개럿의 다부진 등을 노려보면서 애비는 생각했다. 내 운전 실력을 보고 싶다고 했겠다? 그녀의 입술이 심술궂은 미소로 약간 팽팽해졌다. 두고 보라구. 깜짝 놀라게 해줄 테니까. 2 운전석의 덱과 오른쪽의 맬러키 개럿 사이에 끼어 앉은 애비는 지난 30 여분 동안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는 차에 정신 없이 시달리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트럭 속에서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자니 온몸의 관절이 끊어질 것 같이 아팠다. 다시 차바퀴가 깊게 팬 구멍에 걸리는 바람에 차체가 한바탕 크게 흔들렸다. 오른쪽으로 쏠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애비는 조금 필사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죠?] 덱이 길에서 눈을 떼더니 그녀 쪽을 향해 동정적인 미소를 던졌다. [길이 험하죠? 맬이 R&D 작업은 꼭 농장에서 해야 한다고 우기는 바람에 오갈 때는 언제나 이 모양입니다] [R&D 작업이라구요?] 눈을 깜빡이며 그녀가 물었다. [연구와 개발 계획이오] 맬이 좀 지겨운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렇게 잰 체하다니. 애비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연구라구요? 난 당신이 엔진의 부속품을 갈아 끼우는 정비공일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순간 맬이 불쾌한 듯 뻣뻣하게 몸을 경직시켰다. 덱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정비공이라! 그 말 한번 걸작이군] 맬은 친구의 폭소를 무시했다. [당신에게 말해 두지만, 애비게일 프루던스 킹케이드]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난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알려진 세 군데 대학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몸이오] 애비는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코를 살짝 찡그렸다. [농담이겠죠] [농담이 아니오] 그가 딱 잘라 말했다. [오, 날 놀릴 생각은 말아요] 그는 그녀를 사납게 노려볼 뿐 더 이상 말을 받아 주지 않았다. [저..., 그렇다면 좋아요, 사실이라고 쳐요. 하지만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닐 수가 있죠?] 그의 몸을 천천히 아래위로 흝어본 다음 애비는 한심하다는 투로 덧붙였다. [꼭 부랑아 같아요] [그건 그녀 말이 맞아, 맬] 덱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동의했다. 자존심에 상당한 타격을 받았음이 분명한데도, 맬러키 개럿은 자신의 복장에 대한 한마디의 변호도 없이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강인한 턱선에서 그녀의 말을 무시해 버리려는 오만함이 느껴졌다. 언뜻 그의 내리깐 속눈썹 아래로 놀란 표정을 본 것도 같다. 솔직한 여자에게는 익숙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입술이 익살맞게 비틀리며 그가 느릿한 어조로 한마디 내뱉었다. [고맙군] [뭐가요?] [그 부랑아라는 멋진 표현 말이오] 이런! 유머 감각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군. 그녀는 정보를 좀더 캐내기로 작정하고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지금까지 그 엔진에 대한 연구를 해온 건가요?] 맬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트럭이 또다시 돌에 걸려 튀어올랐고, 그녀의 몸은 그대로 그의 무릎 위로 내던져졌다. 다음 순간 맬이 그녀의 몸을 끌어당겨 단단히 껴안았다. 애비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시선을 잡았다. 왜 지금까지 그의 턱 한 가운데가 오목하게 패었다는 걸 몰랐을까. 그리고 어느 여자라도 부러워할 만한 저 기막힌 속눈썹도... [괜찮소?] 눈썹을 찌푸리며 그가 물었다. 게다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관능적인 저 목소리까지. 멈췄던 숨을 내쉬며 애비는 멍하게 생각했다. [네, 괜찮아요] 마치 숨이 찬 것처럼 속삭이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그녀는 당황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지? 그가 매럭적이라는 건 인정해. 하지만 그런 남자를 만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애비는 자신의 한 손이 그의 가슴 위에, 다른 손은 그의 허벅지 위에 놓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황급히 두 손을 거두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맬은 놓아 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대로 있는 게 좋을 거요.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테니까]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잠시 후 애비는 그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됐다. 덱이 자갈길에서 핸들을 꺾어 좁은 차도로 들어섰을 무렵에는 이빨이 다 흔들릴 정도였다. 곧바로 맬은 그녀의 허리에 두른 팔을 풀었고, 애비는 지체 없이 시트의 가운데 자리로 도망쳐 갔다. 10분 후 그들은 마침내 농장이라고 불린 장소에 도착했다. 바로 눈앞에 짙은 녹색의 덧문이 달린 하얀 이층 건물이 서 있었다. 건물의 왼쪽으로 붉은 칠을 한 커다란 헛간이 보였다. 헛간의 문들은 활짝 열려 있고 지붕 위에는 수탉 모양을 한 풍향계가 바람이 불 때마다 빙글빙글 돌고 있다. 오른쪽으로 헛간보다 큰 새 건물이 있는데 아마도 여러 장비를 보관해 두는 창고인 것 같다. 덱이 세 번째 건물 바로 옆으로 차를 세웠다. [자, 다 왔습니다] 덱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 곧 준비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한숨 돌리고 나서 시작할까요?] [그야 상황이 어떤지에 따라서 다르죠] 애비는 메마른 어조로 대답했다. [아까와 같은 그런 상태의 도로에서 차를 몰아야 하나요?] 맬이 차 문을 열고 내려서면서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니오. 뒤쪽에 시험용 트랙이 있소]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려서려고 트럭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적어도 포장이 된 땅이기를 바라겠어요] 하지만 다음 순간 맬이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허리를 붙잡아 그녀를 트럭에서 안아 내렸고, 애비는 그의 예기치 않은 행동에 당황했다. 불과 몇 센티 거리에서 그의 검은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지금이라도 돌아가겠소?] 도전하는 듯한 그의 어조에 그녀는 170cm의 키를 최대한으로 곧게 폈다. 애비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죠. 다음주 월요일까지는 워싱턴에 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알고 있고. 그곳에서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었지] 그 말투 속의 무엇인가가 그녀를 바싹 긴장하게 만들었다. [맞아요] [병원의 사무일이라구?]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아무런 억양도 없다. 그것이 그녀를 더욱 안절부절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요] 화제를 바꾸려고 그녀는 새 건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만든 차는 저 안에 있나요?] 그는 대답하기 전에 약간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렇소. 하지만 차체 전부를 만든 건 아니오. 난 차를 움직이게 하는 부분만 만들었을 뿐이지] 맬이 한쪽 벽을 다 차지하는 거대한 철문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애비가 뒤쫓았고, 바로 그녀의 뒤를 덱이 따라왔다.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절대로 지금 눈앞에 펼쳐진 거의 황량해 보이기까지 하는 초현대적인 기계들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머릿속으로 언뜻 병원의 수술실 모습이 스쳐갔다. 애비는 녹색 수술 가운을 걸친 누군가가 마스크와 외과용 고무 장갑을 내밀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명의 사람들이 작업에 열중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 흰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맬이 멈춰서서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뭔가 반응을 기대하는 듯 그의 한족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여기가 당신이 일하는 곳인가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숨김없는 놀람이 드러나 있다. [그렇소] 그는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들은 노련한 정비사들이오.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지, 나를 위해서] 그는 애비가 그 명백한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대단하군요] 그녀는 일부러 무관심한 듯 중얼거렸다. [알고 싶은 게 있어요. 설마 이걸 운전하라는 건 아니겠죠? 엔진이 완전히 분해된 것처럼 보이는데요?] [걱정하지 말아요. 난 항상 부품들을 적어도 세 벌씩은 갖춰 놓고 일을 시작하는 버릇이 있어서..., 지금 작업하고 있는 것은 다른 부품들이오. 차는 이미 저쪽에 준비돼 있소. 당신만 준비가 된다면 지금이라도...] 애비는 어깨를 펴고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됐어요. 앞장서시죠] 맬과 덱의 뒤를 따라 그녀는 다음 칸막이 안으로 들어섰다. 일을 쉬고 있던 몇 명의 정비사들이 호기심에 찬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차는 전자 부품 상자들을 쌓아올린 뒤편에 세워져 있었다. 차체가 시야에 들어오자 애비는 놀란 나머지 그만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다음 순간 그녀는 탄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셀비 코브라! 68년 형, 그렇죠?]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는 차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믿기지 않아 애비는 차체를 자꾸만 쓰다듬었다. [그렇소] 그녀가 차종과 그 모델이 나온 연도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맬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셀비 코브라를 운전해 본 적 있소?] 그가 차 지붕 너머로 그녀를 마주보며 물었다. 애비는 미소 띈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행운은 없었어요. 내가 꼬마였을 때 큰 오빠가 갖고 있었죠. 하지만 아버지가 내게 운전을 허락했을 무렵엔 오빠가 신형의 모델로 차를 바꿔 버린 뒤였어요] 맬이 차체로 바짝 다가서서 손가락으로 매끈한 지붕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짤막한 그녀의 가족사에 흥미가 생긴 모양이다. [정말이오? 무엇으로 바꿨는데?] [무스탕으로요] 차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윗몸을 구부리면서 그녀는 대답했다. [72년 형이었어요. 정신이 나간게 아니냐고 오빠에게 말했었죠. 셀비가 훨씬 멋있게 생겼으니까요. 속도도 배나 더 빠르기도 하구요. 기지에 있는 모든 차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정도로 빨랐어요. 기지 사령관의 코르벳까지 포함해서요] 맬의 눈이 즐거운 듯 빛을 발했다. [당신은 빠른 차를 좋아하는군] 애비는 한순간 그녀가 여자이며 따라서 적이라는 사실을 그가 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이 일시적인 친밀감을 이용해 보려고 마음먹었다. 어떻게 해서든 저 불신의 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물론이에요]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당신은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게는 엔진의 성능이 중요할 뿐이오.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나 역시 빠른 차가 좋소] [그렇지 않다면 낡아빠진 코브라를 이렇게 고이 모셔 둘리가 없죠] 덱이 말했다. [자네의 첫 차였지. 그렇지 않나, 맬?] 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을 회상하는 듯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감돌았다. 그의 긴 손가락이 왁스 칠을 한 차체의 매끈한 표면을 애무하듯 쓰다듬었다. [그 때가 몇 살이었죠?] 애비가 물었다. 맬이 깜짝 놀란 듯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잠시 동안 그는 그녀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같다. [17살이었소] 그의 어조가 갑자기 퉁명스러워졌다. [이건 정말 시간낭비요] 그가 차머리로 돌아와 애비의 뒤쪽 선반 위에 얹혀 있는 여러 개의 헬멧 중에서 하나를 골라 들었다. [이거면 맞을 것 같은데] 그가 손에 든 헬멧을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반짝거리는 흰 헬멧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애비는 우스운 듯 입을 삐죽거렸다. [내가 이걸 쓰는 게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맬의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겠소? 헬멧을 쓰지 않으면 시험 운전은 없는 거요. 시험 운전이 없으면 우리의 거래 역시 그만이지] 워싱턴으로 가는 동안 내내 헬멧을 쓰고 있어야 하느냐는 질문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그녀는 애써 충동을 누르고 몸을 돌려 헬멧을 머리에 단단히 눌러썼다. [일단 차를 트랙에 끌어다놓고 나면, 그 다음엔 정확히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죠?] 그의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선 차를 진흙구덩이에 처박지 않고 저 트랙을 두 바퀴 정도만이라도 돌 수 있나 봅시다] 맬은 트랙을 한 바퀴도 채 돌기 전에 그녀가 차를 제어 할 수 없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좋아요] 그녀는 약간 옆으로 몸을 돌리고, 헬멧의 턱끈을 조정하는 체했지만, 치밀어오른 화를 가라앉히느라 무진 애를 썼다. 숨을 들이마시기 위해 한껏 가슴을 펴면서 애비는 헬멧 선반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이 갑자기 크게 뜨였다가 심술궂게 가늘어졌다. 마침내 뒤로 돌아섰을 때 애비의 손에는 자신의 것보다 두 사이즈나 큰 헬멧이 들려져 있었다. 그녀가 그의 손에 헬멧을 밀어 넣자, 맬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치켜 올라갔다. [차고 문 앞에서 봐서는 남의 운전 실력을 판단할 수 없어요] 그녀는 도전적인 기색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와 함께 타는 거예요] 희미하게 주름이 져 있던 그의 미간이 이제는 험악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찌푸려졌다. 함께 차를 타자는 그녀의 제의를 거절할 만한 이유를 찾아내느라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는 모양이다. 애비는 그가 그럴 듯한 이유를 생각해내기 전에 재빨리 운전석의 문을 열고 핸들 뒤로 미끌어져 들어가 앉았다. [어때요?] 맬에게로 고개를 돌리면서 그녀는 약간 초조한 기색을 띄며 말했다. [안 탈 거예요? 조금 전까지 시간낭비하고 있다고 짜증 부린 사람은 당신인 것 같은 데요?] 그가 마지못해 헬멧을 눌러쓰고 옆 좌석으로 들어왔다. 그가 흘끗 던진 어두운 시선을 못 본 체하며 그녀는 재빨리 키를 돌렸다. 그 즉시 엔진이 부르릉거렸고 뒤이어 맬이 뭔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해요] 자신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이 사과하는 듯한 표정이기를 바라면서 애비는 그에게 얌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액셀러레이터에는 발도 대지 않았어요, 정말이라구요. 조금 손을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맬이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그녀를 노려보았다. [액셀러레이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소] 그가 차갑게 말했다. [이건 아주 잘 정비된 기계요, 미스 킹케이드. 물론 당신이 인정해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소만] [그리고 당신이 그 정비공이구요] 그 조롱섞인 한마디는 대단히 효과가 컸다. 그가 헉 하고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고, 턱선이 긴장해서 경련을 일으켰다. [오, 미안해요. 기계 공학 박사라고 했죠?] 그녀는 순진한 목소리로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미스터 개럿.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이 차를 운전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가 아니겠어요? 난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아요] 그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그건 내 쪽에서 판단할 문제요. 이제 뭔가를 보여 줄 때가 된 것도 같은데, 미스 킹케이드?] 그가 안전 벨트를 앞으로 잡아끌면서 건물 뒤쪽의 열려진 문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트랙은 바로 저 앞에 있소. 당신이 정말 운전을 할 수 있는지 어디 알아보기로 합시다. 아니면 잔뜩 허풍만 늘어놓은 것뿐인지...] 뭔가 보여 주기를 바란다고? 좋아요. 긴장한 근육을 이완시키려 노력하며 그녀는 말없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기억해 둬요. 이건 당신이 자초한 일이라는 사실을. 정신을 집중시키느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클러치가 약간 빡빡해요] 셀비의 뒤쪽 범퍼가 차고 문을 빠져나오자 애비가 말했다. [조립을 끝낸 지가 얼마 되지 않았나 보군요] [이틀 전에 완성된 거요] 애비는 그의 목소리에 깃든 시무룩한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지금 애비가 클러치에서 발을 떼는 순간 차가 성난 황소처럼 으르렁거리며 튀어나오거나 엔진이 꺼져 버리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트랙의 아스팔트 표면 위로 올라선 애비는 능숙한 솜씨로 매끄럽게 차를 세웠다. [처음 두 바퀴 정도는 천천히 몰아 보겠어요. 엔진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먼저 감각을 익혀야 하니까요] 그녀가 가볍게 말했다. 맬이 무관심하게 어깨를 으쓱했지만 그녀는 속지 않았다. [좋으실 대로. 운전사는 당신이니까] [맞아요] 애비는 딱 잘라 말했다. 약이 오른 맬이 사납게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애비는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미 그녀의 모든 의식과 주의력은 그들이 탄 차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만든 엔진의 리듬을 익히는 데 온통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그녀는 옆좌석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두 개의 검은 눈동자가 번쩍 하고 위험스럽게 빛을 발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트랙의 직선 코스에 이르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자신감에 찬 동작으로 기어를 4단으로 바꾸었다. 굴곡 있는 커브를 돌기 위해 그녀가 두 번째로 기어를 바꾸었을 때, 속도계의 바늘은 시속 90 km를 가리키고 있었다. 차는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커브를 돌았다. 그들은 정확히 시속 110 km의 속도로 한 바퀴째를 주파했다. [엔진을 새로 디자인했나요?] 부서지는 바람 소리에 묻히지 않기 위해 그녀는 목청껏 소리질렀다. 맬의 고함소리는 약간 퉁명스러웠다. [아니오, 오리지널에다 몇 가지 중요한 부분을 수정해 넣었을 뿐이오] 나는 듯이 커브를 돌아 두 바퀴째를 마쳤다. 속도계는 시속 130km를 가리키고 있었다. [최고 속도가 얼마죠?] [정확히는 나도 모르오] 애비는 믿을 수가 없었다. [엔진을 직접 만들었으면서도 그 차가 얼마나 달리는지를 모른단 말이에요?] 그가 초조한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실험해 보질 않았으니까. 호텔에서 덱이 내 운전 실력에 관해서 말하던 것을 기억하오?] 그 목소리에서 애비는 그가 상당한 자존심을 꺾고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대신에 차의 성능을 테스트해 줄 사람이 있었을 텐데요. 덱이나 저 정비사들 중의 한 사람이라도 말이에요] 그가 거칠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절대로 안되지. 이제껏 이녀석에게 투자한 게 얼만데 그렇게 아무한테 맡길 수야 있나] 그러면서도 그는 애비에게 시험운전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녀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미묘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맬이 깨닫고 있는지 애비는 궁금해졌다. 아직 친숙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젠 그 목소리에 마지못한 존경의 빛 정도는 담고 있었다. 5분 후, 애비는 트랙에서 차를 돌려 차고로 향했다. 옆에 앉은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 이후 두 사람은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 엔진을 끄고 차를 완전히 세운 뒤에도 애비는 여전히 눈앞의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증명한답시고 조금 지나치게 행동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애비가 본 것이 틀림없다면 마지막 커브를 돌아 직선 코스로 들어섰을 때 속도계의 바늘은 시속 180km의 눈금 주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그만 둬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때였다. 스스로도 깜짝 놀랐을 뿐더러 솔직히 말해 더 이상 계속할 용기가 없었다 그녀는 헬멧을 벗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차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다음 순간 차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차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애비는 서둘러 분을 열고 땅 위로 내려섰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기대했던 감탄사는 덱으로부터 날아왔다.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덱이 차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기가 막힌 차야, 맬. 운전사는 말할 나위도 없고!]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예고도 없이 그가 애비를 번쩍 들어올려 숨이 막힐 정도로 꽉 껴안았다. 잠시 후 겨우 두 발로 설 수 있게 된 그녀는 멍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고마워요] 하지만 덱이 그 말을 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의 주의는 이미 맬에게로 돌아가 있다. [자...] 그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 그녀가 멋지게 해냈다는 사실만큼은 자네도 부정할 수 없을걸?] [그래] 헬멧을 벗어 선반 위에 올려놓으며 그가 동의했다. 애비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마음을 바꿨다. 맬이 긴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체념인지 경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는 동안, 그녀는 잠자코 기다렸다. 갑자기 그가 몸을 돌려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의 불안에 찬 시선을 붙잡았다. [궁금하군] 그가 중얼거렸다. [워싱턴 D.C.에서 일하는 비서 아가씨가 무슨 일로 이 오클라호마의 촌구석까지 오게 됐는지 말이오] 애비는 그럴 듯한 얘기를 꾸며내기 위해 정신없이 머리를 굴렸다. 그가 그다지 의문을 갖지 않고 납득할 만한 얘기라야 한다. [저... 남자 친구랑 함께 왔었어요] 그녀는 헬멧을 있던 자리에 가져다놓으며 그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슬쩍 피했다. [남자 친구와 함께라] 맬이 그녀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셀비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요. 우리는 그의 누이를 방문하기 위해 서부로 왔어요] 그녀는 자신의 헬멧을 그가 썼던 헬멧 옆에 놓으며 재빨리 생각을 정리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뒤돌아선 그녀는 침착하게 그의 눈길을 맞받았다. [솔직히 말해 이번 여행은 완전히 엉망이었어요. 래리의 누이 집에 도착해 보니 부부 싸움이 크게 나 있더군요. 남편이 부인의 가장 가까운 친구와 바람을 피웠다나요? 우리 때문에 싸움은 이내 그치긴 했지만 어디 그걸로 끝날일인가요? 매우 불편한 상황이어서 우린 예정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죠. 그런데 이번엔 문제가 우리쪽에서 터진 거예요. 털사를 채 지나지 않은 곳에서 래리와 심하게 다투어 버렸지 뭐예요. 글쎄, 화를 참을 수 없었던지 그는 내가 잠든 틈을 타서 혼자 떠나 버렸어요... 벼룩이 득실거리는 호텔 방에 날 남겨 두고 말이에요. 난 다음날 아침까지 그가 떠난 줄도 몰랐어요] 어이가 없다는 듯 맬의 눈썹이 위로 치켜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당신을 내버려 두고 떠났단 말이오?] [그래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날 남겨 둔 채 가버렸죠] 애비는 침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것 참! 어지간히 싸웠나 보군 그래] 그녀는 고개를 으쓱했다. 미심쩍어하는 표정으로 보아 맬이 그녀의 얘기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하지는 않았다. [이곳까진 어떻게 오게 된 거요?] [차를 얻어 탔죠. 하지만 낯 모르는 사람의 차를 얻어탄다는 것이 사실 마음내키는 일은 아니잖아요? 그런 식으로 워싱컨까지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어요. 설상가상으로 래리는 이틀치의 호텔비밖에는 남겨 놓지 않았거든요. 그러고 있던 차에 당신들의 대화를 듣게 된 거예요. 워싱턴까지 차를 몰고 갈 운전사를 구한다고... 운명이나 뭐 그런 것 같은 생각이 들었죠] 억지로 미소짓느라 맬의 입술이 익살맞게 일그러졌다. 한순간 그들의 시선이 얽혔다. 애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꿨는지 그는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가다가 뉘늦게 생각난 것처럼 그가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추고 어깨너머로 한마디 던져다. [그녀를 호텔로 데려다 줘, 덱] 3 잠시동안 애비는 자신이 그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닌가 하고 그 자리에 멍청히 서 있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녀는 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이봐요! 기다려요!] 맬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차고를 반쯤 가로질러가서야 그녀는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왜 그가 날 호텔로 데려다 줘야 한다는 거죠?] 잰걸음으로 그를 쫓아가면서 그녀는 물었다. [도대체 내 운전 실력에 무슨 하자가 있다는 거예요?] 입구에 이르러 그가 갑작스럽게 멈춰섰다. [아무런 문제도 없소. 당신은 일자리를 얻은 거요, 미스 킹케이드]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내가 워싱턴까지 셀비를 운전하게 된다는 뜻인가요?] 그가 초조한 듯 이마를 약간 찡그렸다. [당신이 원하던게 아니었소?] [네, 맞아요!] 애비는 그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급히 말했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행운을 믿을 수가 없엇다. [하지만 그렇게 결정했다면 왜 당신은 덱에게...] [짐을 챙기러 가지 않을 거요? 출발은 내일 정오요. 그건 당신이 차에 익숙해질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지. 그래서 당신의 숙소를 여기로 옮겨 저녁식사 후에 연습시간을 좀 가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거요. 이제 됐소?] 그가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는 걸 보면서도 애비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기다려요!] 그녀는 맬을 뒤쫓아갔다.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하기 위해 애비는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들었다. 검은 눈동자가 팔을 움켜쥔 가느다란 손가락 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의 짙은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애비는 즉시 손을 떼고 어색하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당신은 그러니까 내가 오늘밤 여기서 묵기를 바란다는 거예요?] 다음 순간, 입밖으로 튀어나온 한마디에 그녀는 그만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당신과요?] [그렇게 흥분할 필요는 없소, 애비게일 프루던스] 그가 감상이라도 하듯 그녀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눈길을 미끄러뜨렸다. 그 눈길은 몇 초 동안인가 그녀의 봉긋 솟아오른 블라우스의 앞섶 위에 머물렀다. [당신의 정절은 지극히 안전하오. 날 믿어요] 조롱기가 가득한 그의 정절이라는 한마디에 순간 애비는 움찔했다. 그녀의 정조 관념이 희박하리라는 스스로의 견해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전달할 수는 없을 거라고 애비는 이를 갈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태연히 미소지었다. [오, 난 그 걱정을 한 게 아네요. 다른 사람들이..., 그러니까 친구나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염려되지 않으세요? 아니면 혹시 바에서 처음 만난 여자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습관이라도 있는 건가요?] 말이 떨어진 순간 그녀는 후회했다. 그의 관능적인 입술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어지고, 검은 눈동자 속에서 희미한 분노의 빛이 번뜩였다. [아무래도 긴 여행이 될 것 같군] 마침내 그가 지겨운 듯 중얼거렸다. 다급해진 그녀는 회유책을 썼다. [이봐요..., 당신을 모욕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미심쩍은 듯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애비는 눈을 깜빡이며 애교가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제나 생각을 하고 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 것 같군] 먼지만큼이나 메마른 어조였다. 호텔에 묵겠다고 고집하려던 것은 이제 포기해야겠어. 이 시점에서는 그가 계약을 취소하고 날 돌려보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지. 지금 필요한 건 겸손한 행동이야. [기분 나쁘게 했다면 정말 미안해요. 때때로 나 자신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를 때가 있는걸요. 형편없는 여자라고 생각하겠죠? 그런 식의 진부한 사고...] [그만해 둬요, 애비게일. 계약을 취소하거나 하진 않을테니 걱정 말아요. 당신을 내 운전사로 두게 되어 기쁘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지만, 내일 정오까지 수배할 수 있는 사람 중에서는 당신이 최고인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잖소.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애비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듯 그가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당신의 먼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겠소. 바에서 여자를 고르는 습관은 없소. 집으로 불러들이는 경우는 더욱 말할 것도 없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건 아니었어요] 애비는 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난 그저...] [날 놀리고 싶었겠지] 맬이 대신 말을 맺었다. [지난 두 시간 동안 줄곧 그랬던 것처럼 말이오] 애비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미안해요. 왠지 당신 앞에서는 쓸데없이 말이 많아지는군요] 그가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겨우 입가에서만 맴도는 싸늘한 미소였다. [그런 것 같더군] 문득 그가 말을 멈추고 갈색의 야윈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때 처음으로 그의 눈가에 그림자 져 있는 검은 테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차고 벽에 기대선 그의 어깨 역시 축 늘어져 있다. 이 남자는 지쳐 있어. 기진맥진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 같다. [이번 일은 내게 무척 중요한 거요]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것에나 귀찮게 참견하고 싶어하는 엉덩이 큰 페미니스트를 상대하는 것말고도 내가 생각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단 말이오] 애비는 <엉덩이 큰>이라는 한마디는 그냥 흘려 듣기로 했다. 어쨌든 당분간은... [왜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녀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엷은 미소가 그의 입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은 왜 첫눈에 날 남성 우월주의에 빠진 돼지라고 생각한 거요?] 그가 반박했다.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만은 의견이 일치하는군. 정말 지겹도록 긴 여행이 될 것 같아. [직감이죠] 그녀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싫건 좋건간에 앞으로 며칠 동안 둘이서 여행을 하게 됐소] [휴전을 하자는 말인가요?] [현재로선 그것이 우리의 최우선 과제라는 생각이 드는 군] 그가 천천히 말했다. [약속하겠소. 앞으로는 남성 우월론자의 흉내는 그만두겠다고. 만약 당신이 그렇게... 목에 걸린 가시처럼만 굴지 않는다면 말이오] 암캐라는 말이 거의 혀끝까지 올라왔었음이 틀림없어. 아무래도 그의 자제력을 인정해 줘야겠군. 애비는 웃음을 머금고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그렇게 하기로 하죠. 그럼, 미스터 개럿?] 단단하고 따뜻한 손바닥이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쥐었다. 덱은 그의 픽업 트럭으로 애비를 시내까지 데려다 주었다. 호텔에 도착한 그녀는 짐을 챙기는 동안 바에서 찬 맥주라도 마시고 있지 않겠느냐고 덱에게 제안했고, 그는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짐을 꾸린 뒤 애비는 <포스트> 지의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지갑에서 꺼나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팔목에 찬 시계를 흘끗 보고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쯤 덱은 이미 맥주 한 병을 끝내고 두 병째를 시작하고 있을 것이다. [로저 지켈바크 부탁합니다] 그녀는 딱딱한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로저가 수화기를 들었다. 애비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애비 킹케이드예요, 로저. 맬러키 개럿에 관한 독점기사 흥미있어요?] 몇 초 동안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거절당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로저가 흥분해서 입을 열었다. [물론 흥미있고말고! 그런데 그를 낚을 방법이 있긴 한거요? 개럿을 염세주의자라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애비는 다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그 사정 얘기를 다 늘어놓을 시간이 없어요. 어쨌든 짧게 말하자면 내 기사는 차 두 대의 대륙 횡단 경주에 관한 거예요. 그 중 한 대는 개럿이 직접 디자인한 엔진을 단 68년 형 셀비 코브라구요] 로저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소식통이 정말 있단 말이요?] [그 보다 낫죠. 내가 직접 개럿의 차를 운전하게 되니까요. 물론 개럿도 동승해요. 목적지는 워싱턴 D.C.예요. 상대는 아직 잘 몰라요. 우리가 워싱턴에 도착하고 몇 시간 안으로 당신은 기사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알았소. 그런데 그에게 당신이 기자라는 말은 했소?] 애비는 심술궂게 입가를 치켜올렸다. 그는 지금 직업 윤리에 관한 설교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아뇨, 병원에서 근무하는 비서라고만 했어요] 그녀는 로저의 말이 시작되기 전에 얼른 덧붙였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는 신문기자를 끔찍이 싫어해요. 솔직히 신분을 밝혔다면 그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거예요. 만약 내가...] 로저가 급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만,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메마른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쨌든..., 기가 막힌 기사가 될 것 같군. 사진기자를 준비시켜 두겠소. 당신이 해줄 일은 정확한 도착시간과 장소를 내게 알려주는 것뿐이오] 애비가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당신에게 연락하는 건 어려워요. 개럿이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하니까...] 그녀는 잠시 그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글쎄요. 어떻게 될 수 있을 것도 같군요. 집주인이나 내주부터 같이 일하기로 되어 있는 의사한테 연락해야 한다고 하면...] [그럼 되겠군] 로저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말인데, 이쪽으로 오는 동안 경주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려 줄 겸 나와 일정한 간격으로 연락을 취하는 게 어떻겠소?] [그건 안돼요!] 애비가 소리쳤다. [겨우 한 두 번쯤 연락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황인걸요. 정차할 때마다 전화를 해댄다면 개럿은 틀림없이 날 의심할 거예요] [당신 말이 맞군] 그가 마지못한 목소리로 인정했다. [그럼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내게 연락을 줘요.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혹시 밤에 연락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애비는 전화번호를 급하게 받아쓰고는 그가 뭔가 다른 요구를 해오기 전에 얼른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행스럽게도 프론트 데스크가 붐비지 않아 애비는 몇 분 만에 체크 아웃을 끝낼 수 있었다. 그녀는 수트케이스를 들고 급히 호텔 바로 향했다. 덱을 찾기 위해 애비는 서서 바 안을 한 바퀴 흝어보았다. 그를 발견한 순간, 애비는 충격으로 들고 있던 수트케이스를 놓칠 뻔했다. 덱은 방의 중간쯤에 앉아 어떤 남자와 열심히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 허물없는 태도와 연신 터져나오는 웃음소리로 미루어 판단하건대 그들은 친한 친구 사이임이 틀림없다. 덱과 함게 있는 남자는 다름아닌 콜리어 보안관이었다. 끝없이 길게 느껴지던 그 몇 초 당안, 애비는 얼어붙은 듯 자리에 멈춰서서 이제 어떻게 해아 할지를 열심히 생각했다. 이윽고 그녀는 어깨를 펴고 곧장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녀가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수트케이스를 내려놓자, 두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덱이 웃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보안관 역시 일어섰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애비의 맥박이 불안한 리듬을 타고 빨라지기 시작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덱] 보안관이 입을 열기 전에 그녀는 재빨리 선수를 쳤다. [콜리어 보안관 아니세요? 정말 반가와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말이에요] 어찌된 영문인지 보안관은 그녀에 대한 얘기를 덱에게 털어놓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의 녹색 눈이 아무런 표정없이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그가 예의바르게 모자를 슬쩍 들어올려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미스 킹케이드? 덱에게서 들었습니다만, 개럿의 집으로 옮겨가신다구요?]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오, 하느님! 시선을 돌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누르며 애비는 웃음 띄운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네, 하지만 오늘밤만이에요. 미스터 개럿이 초대해 주셨어요] 느닷없는 덱의 웃음소리게 애비는 잠시 보안관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네도 짐작하겠지만, 맬 그녀석은 초대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까운 말투였어] 콜리어 보안관에게 슬쩍 눈을 깜빡해 보이며 그가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의 맬러키도 이번엔 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단 말이야] 영문 모를 그 말에 어리둥절해진 애비는 한동안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보안관의 꽉 다문 입가가 느슨해지더니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눈치였다. 덱이 허리를 굽혀 그녀의 수트케이스를 집어들었다. [이제 가야 할 것 같아, 래크] 그가 보안관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와 덱이 출구를 향해 발을 옮겨놓으려는 순간, 보안관이 느긋한 어조로 한마디 던졌다. [행운을 빌겠소, 미스 킹케이드] 그녀가 뭔가 대답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콜리어 보안관은 바를 나가 순찰차가 있는 길 건너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그들이 농장에 도착했을 때 맬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덱은 그녀를 이층 침실로 안내하고 들고 온 그녀의 가방을 사각기둥의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그는 방에 붙은 욕실을 가리켜 보이고는 자기는 차고로 내려가 도울 일이 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여기저기 뒤져서 찾아내면 돼요] 씩 웃으며 그가 말했다. [맬은 개의치 않을 테니까] 그가 정말로 개의치 않을지는 의심스러웠지만, 애비는 아무런 내색도 않고 덱에게 웃으면서 데려다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가 나가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수트케이스를 열어 속기용 수첩을 꺼냈다. 침실이 층계 바로 위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그녀는 메모를 하는 동안 방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만약 누군가 집으로 돌아온다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수첩을 숨길 만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애비는 오후에 있었던 사건을 모두 기록하여 검토한 뒤 몇 줄을 띄워 M.G.의 이니셜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는 잠시 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언제나처럼 다음 순서는 주제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몇 마디로 요약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맬러키 개럿이란 남자에게 라벨을 붙이는 것이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애비는 놀랐다. 이윽고 노트를 두드리던 펜을 멈추고 그녀는 <자기 모순이 심한> 이라는 단어를 그의 이니셜 밑에 적어 넣었다. [그밖엔?]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런, 애비, 생각을 좀 해보라구! 대체 어떤 점이 사람들의 주목거리가 될 정도로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거지?] 맨 처음 떠오른 대답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부정하진 않아] 그녀는 초조해져서 투덜거렸다. [잘생긴 남자이긴 해] 잘생겼을뿐더러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라고 마음 한 구석에서 누군가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그를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독특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래, 한가지가 있군. 자신의 용모에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 <취미가 괴상한>이라는 단어가 <자기 모순이 심한>이라는 말 밑에 덧붙여 썼다. 결국 맬러키 개럿의 이니셜 밑에는 다음과 같은 리스트가 만들어졌다. 자기 모순이 심하고, 취미가 괴상한, 잘생긴 매력 만점의 남성 우월론자 애비는 노트를 내려다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직업 의식이 부족한 자신에게 말할 수없이 화가 났다. 그녀는 마지막 줄을 지워 버리기 위해 단호하게 펜을 움직였다. 펜 끝이 잘생긴이라는 단어의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현관문이 갑자기 꽝 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애비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마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가 노트와 펜을 수트케이스의 밑바닥에 채 찔러넣기도 전에 그 잘생기고 매력적인 남성 우월주의자의 전형인 그 사내가 문가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애비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더 지저분했고..., 그리고 마지못해 인정해야 했지만 더 매력적이었다. 그는 문설주에 어깨를 기대고 서서 그녀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잘못된 일이라도 있어요?] 계속되는 침묵과 그의 눈길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할 즈음에 그녀가 한마디했다. [차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맬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히 그의 눈길은 그녀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고 있따. [아무런 문제도 없소. 난 그저 조금 놀랐을 뿐이오] 당혹해서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놀랐다구요?] [당신이 덱과 함께 돌아온 것 말이오] 그녀는 잠시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당신이 그러라고 말했잖아요!] 그 목소리에는 절박함까지 깃들어 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목소리는 격분한 나머지 거의 비난조가 됐다. [아니, 차라리 명령했다는 편이 옳을 것 같은데요] 한순간 희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어리는 듯싶더니 곧 무관심한 표정 뒤로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그가 기지개를 켜듯이 두 팔을 머리 위로 뻗어 손가락으로 이마 위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셔츠의 아랫단이 5cm쯤 끌려올라가 그의 단단한 갈색 살갗이 눈앞에 드러났다. 그녀의 하복부 근육이 반응을 보이며 죄어들었다.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가 천천히 말했다. [아침에 고기와 야채 몇 조각을 냄비에 쓸어 넣어 두었소. 아마 지금쯤 스튜 비슷한 요리가 되어 있을 거요] 그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좀 씻어야 하니까 저녁은 15분 후에 먹기로 합시다] 그녀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는 몸을 돌려 홀로 내려가 버렸다. 애비는 몇 분 동안 텅빈 문가를 노려보고 앉아서 그와의 짧은 대화를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만약 개럿이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려는지를 알아냈다면 난 지금 당장이라도 이 집에서 도망쳐 호텔로 돌아가야 해. 아직 살아서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상태라는 걸 다행스럽게 여기며 말이야. 쟈신의 지나친 반응에 스스로도 어이없어하며 그녀는 화장 도구가 든 백을 챙겨들고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쉬고 싶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맬러키 개럿이 여자가 맵시를 부릴 동안을 참아낼 만한 인내심의 소유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화장을 깨끗이 지우고 세수를 한 후, 그녀는 헤어드라이어로 머리카락이 바삭거릴 때까지 머리를 말렸다. 블라우스를 다시 입은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비판적인 눈길로 쳐다보았다. 16살? 많아야 18살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가슴을 드러내면 나이가 더 들어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녀는 블라우스의 맨 윗단추를 두 개 풀어 보았다. 핑크 빛 레이스가 힐끔 엿보이는 것을 보고 그녀는 마음을 고쳐먹고 단추를 다시 끼웠다. [준비는 다 된 거요?] 애비는 놀란 나머지 숨이 막힐 뻔했다. 애써 가슴을 진정시키고 그녀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언제나 그런 식으로 불쑥 나타나는 거예요?] 분노로 날카롭게 터져나온 그 목소리는 마지막 두 마디를 채 끝내기도 전에 속삭임처럼 낮게 가라앉아 버렸다. 문가에 느긋하게 기대선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냉정은 어디론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애비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방금 샤워를 끝낸 젖은 머리카락이 완벽한 모양의 두개골을 보기좋게 감쌌고, 뚜렷한 음영이 진 얼굴은 차라리 아름답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자신이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분했지만, 애비는 좀처럼 그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노크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다행히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고 평상시처럼 침착하게 들렸다. [당신 때문에 수명이 적어도 1년은 줄었겠어요] 일시적인 최면 상태에서 이토록 빨리 회복됐다는 사실에 스스로 대견해하며 돌아서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그가 등 뒤로 바싹 다가서더니 상체를 기울이며 거울에 비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나 그의 가슴의 온기가 등을 압박해 왔고, 두려움인지 환희인지 모를 어지러운 감각에 사로잡혀 애비는 자기도 세면대의 모서리를 꽉 틀어쥐었다. [괜찮은 거요?] 그가 귓가에서 낮게 중얼거렸다. [조금 창백해 보이는 데 그래] 창백하다고?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화장을 지웠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딱딱하게 말했다. [아, 그랬었군. 잠깐 동안 이지만 당신은 날 걱정하게 만들었다구] 완벽하게 진지한 어조였지만, 애비는 희미하게 그의 눈가를 스치는 장난기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그 짙은 속눈썹을 반쯤 내리깔고 그녀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묵묵히 그의 시선을 견디고는 있지만, 피아노 줄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그녀의 신경은 당장이라도 툭 하고 소리내며 뚫어져 버릴 것만 같다. 마침내 그가 몸을 바로 세우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니까... 나이를 들어 보이게 하려고 그 페인트 칠을 하고 다니는 거로군] 그가 천천히 말했다. 애비는 그 목소리에서 어렴풋한 비난의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맬은 방을 가로질러 나가 버렸다. 그의 뒤를 따라 좁은 계단을 내려가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대답해 줄래요? 만약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내가 당신 앞에 나섰더라면, 당신은 내가 셀비를 운전하도록 허락했겠어요?] 계단을 다 내려가서야 맬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향해 뒤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라 있다. [아마 어림도 없었겠지] [차를 운전할 만큼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요?] 그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체하며 그가 그녀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내리기 시작했다. 부풀어오른 그녀의 가슴 위로 끌리듯 와닿은 시선이 몇 초 후 마지못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애비는 솟구치는 분노를 삭이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바보스런 화제를 꺼낸 자신을 원망하는 수밖에 없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글세..., 그건 내가 당신의 어느 부분을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그가 께름칙한 어조로 대답했다. [목 위로는 열일곱을 넘기기가 어렵겠지만, 그 아래로야...] [지금 이 순간의 화제는 화장인 걸로 아는데요] 그녀는 이를 갈 듯이 말을 뱉어냈다. [당신 눈에는 고작 페인트 칠로밖에는 안 보이겠지만...] 무엇 때문에 이 바보스런 대화를 계속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그는 마치 애비의 화를 돋우는 요령이라도 터득한 사람 같다. [별뜻은 아니었소] 그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단지 예쁜 얼굴을 그 따위 칠로 덮어 버린다는 것이 어리석게 여겨졌을 뿐이오. 게다가 공들여 값싼 여자처럼 보이게 한다는 게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이오]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애비가 얼이 빠져 서 있는 동안, 맬러키 개럿은 저만치 등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애비는 겨우 냉정을 되찾고 소리쳤다. [값싸다구요?] 그녀는 마지막 두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내렸다. [내 귀가 잘못된 건가요, 아니면 정말로 내가 값싸 보인다고 말한 건가요?] 그는 큰 걸음으로 좁은 홀을 지나 저택의 뒤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들은 그대로요] [어떻게 감히!] 애비는 그의 등뒤에다 대고 소리질렀다. [오! 이렇게 뻔뻔하고 무례할 수가!] 그의 지겨워하는 듯한 태도가 더욱 그녀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맬의 뒤로 다가간 그녀는 손을 뻗쳐 그의 셔츠 가락을 움켜쥐고 홱 잡아당겼다. [내가 말을 할 때는 날 똑바로 쳐다봐요, 개럿!] 맬이 천천히 돌아서서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순진함을 가장한 놀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때려 눕히고 싶어! [뭣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거요?] 여전히 놀란 체하면서 그가 물었다. [당신 개인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뭐라구요? 여자에게 값싸 보인다고 말해 놓고 그 말이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랐다니, 정말 당신은...]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이지 당신을 빗대서 한 말은 아니었소. 난 그저 짙은 화장을 한 여자는 누구라도 조금씩 값싸 보인다는 뜻으로 말한 것뿐이오] 애비는 그가 혹시라도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닌지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이윽고 그런 것 같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리려는 순간,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한마디 덧붙였다. [눈 두덩을 겹겹이 보라색으로 칠한 여자는 더욱 그렇지] 들이쉰 숨이 목에서 걸려 버려 눈물이 날 정도로 기침이 났다. 화를 참느라 안간힘을 쓴 나머지 그녀의 얼굴과 목은 온통 붉게 물들었다. 그의 입술이 심술궂은 미소를 띄우며 살짝 위로 치켜올라 갔다. [이럴 수가!] 애비가 소리질렀다. [아... 아, 이제 그만둡시다] 그가 끼어들었다. [부랑아 같아 보인다는 표현에 대해 되갚아 준 것뿐이니까] 애비는 잔뜩 그를 노려보았다. [정말 부랑아 같아 보였단 말이에요!] 짙은 눈썹이 위로 치켜올라가기만 했을 뿐,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가 셔츠 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그녀의 주먹 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애비는 마치 징그러운 곤충이라도 쥐고 있었다는 듯이 옷자락을 홱 뿌리쳤다. [알고 있겠지만, 이건 순전히 당신 탓이었소] 그가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는 왼쪽으로 나 있는 복도를 향해 그녀의 등을 밀었다. 애비는 불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맬러키 개럿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3분 동안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버린 것 같다. [뭐가 내 잘못이라는 거죠?] 애비가 메마른 소리로 물었다. [내가 당신을 놀린 것 말이오. 당신이 이렇게 격하기 쉬운 성격만 아니었다면, 나도 당신을 자극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요] [난 격한 성격이 아니에요] 애비는 그를 노려보며 대꾸했다. 몇 분 전이 당황한 정도였다면, 지금은 완전히 혼란스런 상태다. [부정하려 들지 말아요] 그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만 해도 당신은 마치 증기를 내뿜는 기관차같이 씩씩거리고 있었는걸] 애비는 그 마지막 한마디를 무시해 버리기로 했다. 하지만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농장으로 되돌아올 줄 몰랐다는 충격적인 환영 인사와 그녀의 화장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 사이에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쳐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작은 식당은 지나 모든 설비를 완벽하게 갖춘 거대한 부엌으로 들어갔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의 규모에 놀라 애비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그녀의 오른쪽 어깨가 맬의 가슴과 가볍게 부딪쳤다. 자연스럽게 그의 팔이 허리를 감아왔고, 따뜻한 손이 그녀의 엉덩이 위에 살짝 얹혀졌다. 헉 하고 애비는 숨을 삼켰다. 잠시 후,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두 팔을 거둬들였다. 여유있게 그녀의 옆을 스쳐지나간 맬이 국자를 꺼내들고 반짝거리는 놋쇠 레인지 위에 올려진 커다란 사기 냄새 안을 휘젓기 시작했다. [다 된 같은데]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정말 매력적인 목소리야.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며 그녀는 정신없이 생각했다. [접시와 볼은 저쪽 찬장 속에 들어 있소] 그가 부엌의 한쪽 끝에 있는 둥근 떡갈나무 테이블로 스튜 냄새를 옮기면서 오, 이런! 애비는 멍하니 서서 눈만 깜박였다. 저 남자에게 보조개가 있었다니... 직업적 객관성은 그만 포기해야겠어. 그녀는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저런 남자를 그저 단순한 기사거리로 취급한다는 건...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돌연 그의 미소가 약간 차가워졌다. 자신의 불안한 감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난 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 애비는 황급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워 미소라기보다는 차라리 냉소에 가까웠다. [냄새 만큼 맛이 있기를 바래요] 고맙게도 목소리는 훨씬 자연스럽게 나왔다.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 가시면서 그의 눈가에 다시 따스함이 번졌다. 애비는 소리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으면 좋겠군] 그가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대개는 아버지가 손수 요리를 하시지. 지금은 플로리다의 친구분을 방문하러 가시고 안 계시지만 말이오] 친구라는 한마디가 풍기는 씁쓸한 느낌에 애비는 아버지의 그 친구가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사나요?] [그렇소] 접시와 볼을 받아들면서 맬이 그녀에게 짓궂은 미소를 던졌다. [하긴 아버지가 없는 데 다행인지도 모르겠군, 한번 당신에게로 눈이 떨어졌다 하면 난 꼼짝없이 다른 운전사를 찾아야 할 테니까]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으신가 보군요] 애비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늘그막의 난잡한 호색한이라는 표현도 있을 테고, 그쪽이 훨씬 진실에 가깝긴 하지만, 맥주, 커피, 아이스 티가 있는데 뭘로 하겠소? [티를 주세요] 그녀는 아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에 대한 그의 몇 가지가 그녀의 호기심을 지극했다. 하지만 지금 개인적인 질문들을 시작한다면 말은 다시 저 불가해한 벽 뒤로 숨어 버릴 것이다. [당신 부모님은 이혼하셨나요? ]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한마디 던졌다. [아니오] 테이블을 향해 돌아서면서 그가 중얼거렸다. [애초에 결혼조차 하지 않았는걸] 얼굴을 돌리며 상대가 놀라기를 기대하고 한 말이란 것을 애비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당연히 놀랐고, 그것을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눈길을 돌렸다. [스튜가 식겠어] 평상시와 똑같은 어조로 그가 말했다. 다음 순간 생각지도 않았던 장난기 어린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앉아요. 잠들지 않는다고 약속만 해준다면 먹는 동안 내 인생 얘기를 해줄 테니까] 애비는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맬이 오른편 자리로 와서 앉았다. 이건 엄청난 행운이야. 그가 볼에 스튜를 퍼 담는 걸 바라보면서 그녀는 멍하니 생각했다. 맬러키 개럿이 자청해서 내게 자신의 얘기를 해주겠다고 하다니, 난 필기 도구 하나 없이 이렇게 앉아 있는데... 4 테이블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농담을 한 게 틀림없어. 냅킨을 무릎 위에 펼쳐놓으면서 애비는 생각했다. 그의 말을 정말로 믿었다니, 난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거야. 그녀는 눈앞의 스튜 그릇으로 주의를 돌렸다. [이건..., 아주 맛있군요!] 완벽하게 조미된 스튜를 입안 가득히 넘기면서 애비는 탄성을 터뜨렸다. 맬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한 스푼을 떠 입으로 가져갔다. 그 역시 놀란 것 같다. [그리 나쁘지 않군, 그렇지?] 그들은 침묵 속에서 식사를 계속했다. 시장기가 가시자 그녀의 직업 의식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볼에 스튜를 한 그릇 더 퍼담으면서 애비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럼..., 언제쯤이면 난 당신의 인생 얘기를 듣게 되는 거죠?] 그가 수수께끼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무 많이 먹지 말아요. 디저트가 있으니까] 화제를 바꾸고 싶은 걸까? [난 디저트는 잘 안 먹어요. 지금까지 쭉 여기서 살았나요?] 그가 손을 멈추고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지금 다이어트중이라는 그런 한심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경멸스럽다는 듯이 그가 말했다. [오늘 저녁 먹은 칼로리만 계산하더라도 300달러짜리 청바지에 엉덩이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살이 쪘을 거요] 대답하기 전에 그녀는 냅킨으로 살짝 입술을 두드렸다. [말해 두지만, 난 지금까지 한번도 다이어트를 해본 적이 없어요. 디저트를 먹지 않는 건 단 것을 싫어해서죠. 그리고 내가 얼마짜리 청바지를 입느냐 하는 문제는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개럿이 글라스를 들어올리며 그녀에게 찬사의 뜻을 표했다. [내가 졌소]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꺼냈다. [당신은 언제나 그렇게...] 적당한 형용사가 생각나지 않는 듯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솔직하다?] 그녀의 말에 맬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기 주장이 뚜렷하다?] [자기 주장이 뚜렷하다...] 천천히 단어를 반복하면서 그가 어감을 시험했다. 오른쪽 입끝이 약간 위로 당겨지는 듯싶더니, 살짝 보조개가 들어갔다. [비슷하군] 무엇과 비슷하다는 거지? 궁금했지만 애비는 묻지 않았다. [그래요, 난 어릴 적부터 그랬어요. 솔직하기도 하구요. 마음속에 있는 걸 숨기지 못해요. 그리고 원하는 게 있을 땐 절대로 물러서지 않아요] 애비는 맬이 뭐라고 한마디 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더니 그저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스튜를 입안에 퍼넣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당신은 자기 주장이 뚜렷한 여자가 싫은가요?] [난 자기 중심적이고 공격적인 여자가 싫소] 빵 한 조각을 집으며 맬이 그녀의 형용사를 정정했다. [<자기 주장이 뚜렷한>이란 단어와 <공격적>이란 단어의 정의는 어떻게 틀리죠?] 그녀가 물었다. 맬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 자신이 설명하지 않았소. 마음속에 있는 걸 그대로 말하고, 원하는 것을 발견하면 끝까지 쫓아간다고. 하지만 당신은 어떤 걸 희생해서라도 원한 것을 손에 넣고야 마는 그런 종류의 여자와는 틀리지. 예를 들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당신이 친구를 이용할 것 같지는 않거든... 아니면 뒤돌아서서 등을 찌른다거나] 한순간 머뭇거리다가 그가 낮은 소리로 덧붙였다. 죄의식이 애비의 가슴 한 귀퉁이를 콕콕 찔렀다. [당신에게 그런 짓을 한 여자가 있었나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그녀가 물었다. [당신을 이용하거나 뒤돌아 서서 등을 찌른 여자 말이에요] 어이가 없는 듯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솔직하고 주장이 뚜렷하다는 것 이외에 둔감하다는 말을 덧붙여도 될 것 같군] 그다지 화난 목소리도 아니었고, 상관할 바 아니라는 말로 그녀의 질문을 잘라 버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좀더 밀어붙여 보기로 했다. [그래서요?] [끈질기지도 하고] 맬이 천천히 말했다. 스푼을 내려놓고 그가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가 그 시선에 겁을 먹고 물러설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그의 오산이다. 애비는 흔들리지 않는 눈길로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믿었던 어떤 여자가 당신을 이용했고, 그래서 실망시켰기 때문에 당신은 여자를 믿지 않게 된 거죠?] 애비는 그가 마지못해 인정해 오기를 기다렸다. [디저트를 먹지 않겠다면, 스튜를 좀더 먹는 게 어떻겠소?] 맬이 상냥하게 제의했다. 그녀는 초조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순간, 내리깐 그의 속눈썹 아래로 웃음기가 반짝였다. 빌어먹을! 이 방법은 잘 들어먹히지 않는군. 밤이 새도록 물어 볼 수야 있지만 그가 대답하고 싶지 않다면 그만이니까. 좋아, 전술을 바꿔야겠어. 그녀는 일어서서 식탁 위의 접시와 스푼들을 모아 싱크대로 나르기 시작했다. 그냐가 무엇을 하려는지를 깨닫자, 그가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왔다. [당신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접시들을 싱크대 옆의 카운터에 올려놓으며 애비는 어깨 너머로 미소를 던졌다. [괜찮아요. 요리는 당신이 했으니까, 난 설거지라도 해야죠] 약간 놀란 것 같았지만 맬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카운터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그녀가 커프스의 단추를 풀고 소매를 걷어올리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세제는 어디 있죠] 그가 그쯤에서 시선을 돌려 주기를 바라며 애비는 물었다. 대답 대신 맬이 카운터에서 몸을 떼고, 유연한 움직임으로 한 걸음 그녀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몸을 긴장시켰다. 다음 순간 그의 두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대체 무슨...] 그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맬은 그녀를 번쩍 들어 왼쪽으로 옮겨놓고, 마루 위에 몸을 낮춰 웅크리고 않았다. 그가 싱크대 밑의 찬장을 열고 세제 병을 꺼내는 동안, 애비는 오른쪽 허벅지를 지긋이 누르고 있는 그의 어깨의 감촉을 가슴 아프게 느끼고 있었다. [여기 있소] 그가 구부린 몸을 일으키더니 바로 곁에 섰다. 서랍을 열고 그가 마른 수건 한 장을 꺼냈다. [난 접시를 닦아 올려놓겠어] 느닷없는 그의 제의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곧 애비는 맬과 그의 아버지가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접시 닦는 것 정도는 그에게 아무 일도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쌓아올린 접시로 손을 뻗쳤다. 아무 생각 없이 접시들을 쏟아지는 물줄기 속으로 쓸어넣으려는 순간, 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거머쥐었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카운터까지 이끌고간 그는 접시를 내려놓게 하고, 가만히 그녀의 두 손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하마터면 화상을 입을 뻔했잖아] 경악에 찬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설명했다. [온수기가 90도에 맞춰져 있었어] 숨죽여 헐떡이는 바람에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순간 자신이 얼마나 유혹적으로 보이는지 그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두 눈은 충격으로 동그래졌고, 입술 사이로 도발하듯 분홍색 혀끝이 살짝 내보였다. 애비는 점차로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황해서 손을 잡아당겼지만 그가 놓아 주질 않았다. 그녀는 좀더 마음을 굳게 먹고 힘껏 손을 끌어당겼다. 아직 놓아 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듯 그의 손가락에 힘이 가해졌다. [이제 그만 내 손을 돌려 주겠어요?] 숨찬 듯이 헐떡이는 목소리였다. [조금 있다가] 그녀와는 반대로 그의 목소리는 위험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다. 그의 손끝이 부드럽게 손목 안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에 반응하여 그녀의 맥박이 급격히 빨라졌다. [접시를...] [어디로 가진 않을 거야] 가슴속의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건 절망적이야. 그의 허스키한 속삭임이 관능적인 여운을 띠고 그녀를 유혹하고 있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온몸의 신경이 아찔한 흥분으로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맬이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미소지었다. 애비는 맬러키 개럿과의 사적인 관계는 파멸을 초래할 뿐임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며,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억제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가락이 갑자기 느슨해졌다. 순간 예기치 않은 실망감이 마음 한구석을 파고들어왔다. 애비가 안도감을 느끼지 않는 자신을 나무랄 사이도 없이, 그의 손이 미끄러지듯 팔을 타고 올라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전율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의 한 손이 애비의 목덜미를 쓸어올리더니 턱끝을 부드럽게 감싸쥐고 얼굴을 치켜올렸다. 혼란스러운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긴장하지 마] 그가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저 조그만 실험을 하려는 것 뿐이니까] 의심스러운 듯 애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실험요? 어떤 종류의 실...] 그녀는 질문을 끝내지 못했다. 그의 손가락이 턱선을 따라올라가 그녀의 귓불을 사랑스러운 듯이 애무하기 시작했다. 아찔한 현기증에 애비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다. 마침내 그 손가락이 예민한 그녀의 귓바퀴를 떠났다. 안도감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뒷덜미를 파고든 그의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죄어 안으며, 그가 관능적인 움직임으로 그녀의 몸을 카운터로 밀어붙이고 입을 맞추었다. 본능적으로 그녀의 두 손은 그의 셔츠를 열고 맨 살갗 위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건 미친 짓이야. 의식의 한 구석에서 작은 목소리가 그녀에게 경고했다. 넌 지금 스스로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어. 다음 순간 너무나 갑자기 키스가 끝나는 바람에, 그녀는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온 불만의 신음소리를 채 멈출 사이도 없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맬은 성킁성큼 저쪽으로 걸어가 마른 수건으로 손을 뻗쳤다. 그는 냉정하고 침착했으며, 너무나 완벽하게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린 애비는 황급히 싱크대로 몸을 돌렸다. 목소리가 의지를 배반할까 두려워, 그녀는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실험이 별로 대단치 않았나 보군] 이윽고 맬이 입을 열었다. 애비는 손을 멈추고, 서릿발 같은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곧 고개를 돌리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녀가 대꾸를 않자, 조금 당황한 듯 그가 얕은 숨을 내쉬었다. 애비는 기다리고 있는 그의 손안으로 볼을 밀어넣었다. [당신이 틀렸어] 그가 중얼거렸다. [뭐가요?] 그녀는 무뚝뚝하게 되물었다. [그 이후로 내가 여자를 믿지 않게 됐다는 것 말이야] 부모가 결혼한 적이 없다고 얘기하던 때와 똑같은 말투였다. 직감적으로 애비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그의 어조가 연막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게다가 불쑥 튀어나온 그 이후라는 단어는 과거의 여자에 대한 애비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흥미가 동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을 믿어, 애비.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에게 운전을 맡기지 않았을 거야] 바보스럽게도 애비는 그 한마디에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것을 숨기기 위해 그녀는 일부러 짓궂은 미소를 띄우며 그에게 대꾸했다. [당신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문제였잖아요? 이 내기에서 이기려면 날 믿는 수밖에요] 그녀의 손에서 두 번째 볼을 받아들면서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맞아] 그의 솔직함에 상쾌한 기쁨을 느끼며, 애비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그 여잔 누구죠?] 하지만 그녀는 다음 순간 맬의 암갈색 눈동자 속에 떠오른 재미있어하는 표정에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천천히 카운터에 등을 기대며 그가 여유있는 동작으로 한 발을 다른 발 위에 겹쳐 놓았다. [어느 여자 말이오?] 애비는 당황스러워졌다. [뭐라구요?] [어느 여자를 말하는 거냐고] 그가 과장된 한숨을 내쉬면서 설명했다. [당신에게 그런 고약한 여성관을 갖도록 만든 장본인 말이에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신의 어머니였나요?] 맬이 눈을 껌뻑이며 한순간 멍청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장난스런 표정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내 어머니? 도대체 어디서 그런 바보 같은..., 오 알겠어! 어머니가 갓난 애기인 날 버리고 갔기 때문에 내가 여자라면 모두 싫어하는 거라는 뭐 그런 종류의 얘기로군] 그 말이 남긴 생생한 이미지에 목이 칼칼해졌다. 그녀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행군 접시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맬이 접시를 받아들면서 우습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내 고약한 여성관은 어머니의 책임이 아니오. 사실을 말하자면 내 어머닌 아버지나 날 버린 적조차 없소] 수십 가지의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녀는 꾹 참고 입을 열지 않았다. [내 부모님은 둘 다 소위 말하는 자유인이지] 그가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그들은 결혼이란 개념이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소. 물론 둘 모두 일부일처의 관계를 한 달 이상 유지시켜 나갈 만한 감정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맬이 돌아서서 닦고 있던 스튜를 옮겨 담고 냉장고 쪽으로 가져갔다. [냄비는 씻을 필요없소. 그냥 물에 담궈만 둬요] 냄비에 더운물이 차기를 기다리면서 애비는 싱크대의 물기를 행주로 깨끗이 닦아냈다. [정말 디저트를 먹고 싶지 않은 거요?] 애비는 어깨너머로 흘끗 시선을 던졌다. 열린 냉장고 앞에 버티고 선 맬이 오른팔을 냉장고 문 위에 걸쳐 놓은 채 왼쪽 손바닥 위에 놓인 치즈 케이크를 자랑스러운 듯 치켜올려 보았다. 애비는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글쎄요...] 그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져나갔다. [애비게일 프루던스, 드디어 당신의 약점을 찾아낸 것 같은데?] 애비는 약간 얼굴을 붉히고 쑥스러운 듯 미소지었다. 그가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부드러운 울림에 맥박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가 케이크를 나르느라 시선을 돌리는 바람에 그녀는 곧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겠다?] 맬이 맛있어 보이는 치즈 케이크를 크게 두 조각으로 자르면서 놀리듯이 말했다. [치즈 케이크는 달지 않아요. 살이 찔 뿐이죠] 그가 한 조각을 그녀의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게다가 중독되기도 쉽지] 그가 비장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요, 지독히] 그녀도 동의했다. 애비는 잠자코 몇 분을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동안의 화기애애한 침묵이 그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기를 바라면서. [궁금한 게 있어요] 마지막 남은 케이크 부스러기까지 입안으로 털어넣으면서 그녀는 중얼거렸다. [당신 부모님 중 누구도 2,3달 이상 관계를 지속시키는 법이 없다고 했지만, 어쨌든 그들이 당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할 정도의 시간은 같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잖아요?] 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탐색에도 전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애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와 만났을 때 아버진 막 서른을 넘긴 참이었지] 그가 말했다. [서른이란 나이는 남자를 사나이로 만들기도 하지만 여지없이 부숴 버리기도 하는 나이오. 문득 자기 인생의 반을 날려 버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자신이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거요] 잠시 말을 멈추고 그가 의자의 등받이에 팔을 걸치면서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내뻗었다. [그래서 아버진 갑자기 후계자를, 되도록 아들을 갖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 거지. 리즈는 누구의 어머니가 될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래도 인생에 한번쯤은 임신과 출산을 경험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애비는 말문이 막힌 듯 한참 동안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애당초 그녀에겐 머무르면서 당신을 키울 생각도 없었고, 떠날 때 당신을 데리고 갈 생각도 없었단 말인가요?] [바로 그렇소. 임신하기 전에 모든 것을 합의해 놓았지. 어머닌 내가 태어날 때까지만 머무르기로 말이오. 그동안 아버지는 그녀를 부양하고 최상의 의료기관을 약속했지. 그리고 떠날 때 그녀가 가길 원하는 곳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일년간 돈을 대기로 하고 말이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믿을 수가 없군요. 9달 동안 몸속에 가지고 있던 아기를 그런 식으로 떠나 버리다니 정말 상상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어머닌 그러질 않았소] 애비는 혼란스러워져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방금 말했잖아요...] [그렇게 될 예정이었다고 말했을 뿐이오] 그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질 않았지. 리즈는 애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머물러 있었소. 그러다가 내가 14살이 되던 해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떠나 버렸지] [완전히라구요?] 애비는 놀란 목소리로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렇다면 그것이 처음이 아니었단 말인가요?] 맬의 부드러운 웃음소리는 즐겁다기보다는 체념한 듯한 웃음소리였다. [떠났다가는 돌아오고 다시 떠나고, 이런 일이 셀 수 없이 되풀이되는 바람에 마침내 아버지가 침실에 회전문을 설치해야겠다고 말할 정도였지] [그래도 두 분은 무척 사랑하셨던가 봐요. 그렇게 계속 돌아왔던 걸 보면] 애비는 중얼거렸다. [그랬다고 생각하오. 나름대로는 아직도 사랑하고 있을 거요. 항상 문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너무 닮은꼴이라는 거였소. 둘 모두 감정적으로 한 사람에게 얽매인다는 것이 불가능했고] 어렴풋한 냉소가 그의 입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금욕적인 생활을 해나간다는 것도 불가능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리즈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아버지가...] 그는 문득 말을 끊더니 헛기침을 했다. [한창 침대에서 여자 손님을 즐겁게 해주고 있는 장면을 목격해 버렸지] 애비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말을 고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 아음엔 어떻게 됐죠?] [어머닌 그대로 돌아서서 수트케이스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서는 현관을 나가 버리더군. 그 이후로는 이 농장에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으셨소] [어머니를 비난할 수만도 없겠군요] 맬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그렇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었소. 아버지는 여자없인 2,3일도 견디질 못했으니까. 수년 동안 아버지가 바꾼 여자친구가 몇 명인지, 이젠 셀 수조차 없소] 애비는 그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던졌다. [다는 아니라고 해도, 조금은 그들 때문에 당신이 자기 중심적이고, 공격적인 여자를 싫어하게 된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어요?] 갑자기 그의 속눈썹이 내리깔리더니 눈동자를 덮어 버렸다. [오, 물론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해요] 너무나 거침없는 그 대답에 애비는 그가 부모에 대한 화제는 전혀 꺼리지 않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을 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겨우 진전을 보기 시작했는데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호기심이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 자신에 관해 말해 주기로 했었죠? 만약 진심이 아니었거나, 생각이 바뀐 거라면 지금 그렇다고 말해 줘요. 입을 닫고 얌전히 사라질 테니까요] 그녀의 선포에 맬은 조금도 당황한 것 같지 않았다. 가늘게 내리뜬 눈으로 잠자코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그가 한쪽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은 화를 낼 때 눈동자의 색깔이 바뀐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그녀는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천천히 눈을 떴다. 이때까지 만난 사람 중에 나를 가장 화나게 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어. [눈동자가 어쩐다구요?] [색깔이 바뀐다구. 보통은 파란색인데, 화가 나면 비취빛 같은 녹색이 되거든] 또다시 감정을 도발시키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기며 애비는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디저트 접시와 포크들을 씻고 말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수천 번이나 해본 듯한 익숙한 솜씨다. 말리고 정리하는 작업을 끝낸 맬이 가슴 위로 팔짱을 낀 채 카운터에 기대서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그의 강렬한 눈길을 받으며 애비는 지금 그의 머릿속을 지나가고 있을 것에 대해 생각했다. 궁금하긴 하지만 물어 보지 않았다. 더 이상 개인적인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어쨌든 당분간은. 잠시 물러서서 그에게 숨쉴 공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맬의 목소리가 그녀의 사고를 중단시켰다. [정말 내 가족사에 관심이 있다면, 앞으로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거요. 그건 그렇고, 당신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애비는 즉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부탁이라구요?] 자신의 목소리가 약간 미심쩍은 듯이 들린다는 건 알고 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내일 당신은 상대방 엔지니어를 만나게 될 거요. 역시 연료 절약을 위해 실험 엔진을 설계한 사람이지. 물론, 난 내 엔진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당연하겠죠] 애비는 무의식중에 그의 말투를 흉내냈다. [이 내기로 당신은 상대방 엔지니어에게 그 사실을 증명하겠다는 거겠죠?] [맞소. 두 대의 차는 내일 정오에 법원 광장을 출발해요. 승자는 워싱턴까지의 여정중 연료를 덜 소모하고, 기계 고장을 적게 일으킨 엔진을 설계한 사람이오] 애비는 약간 얼굴을 찌푸렸다. [경주를 하는 줄 알았는데요] [물론, 이건 경주요. 워싱턴 D.C.에 먼저 도착해야 하오. 데드라인은 월요일 정오. 만약 그때까지 둘 다 도착하지 못한다면, 내기는 자동적으로 무효가 되는 거지] [내일이 토요일] 애비는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틀 동안 해내야 한단 말이죠? 시간은 넉넉한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아요} 순간 맬의 미소가 약간 일그러진 듯이 보였다. [그야 사정에 따라 다르지. 두 엔진 모두 실험적으로 제작된 거란 사실을 명심해요. 지금까지의 테스트는 모두 제한된 조건 아래서 이뤄진 것 뿐이오] 애비는 조금 불안을 느꼈다. 그건 둘 모두 중간에서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건가요?] 맬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론적으로는 어떤 일도 발생할 수 있지. 하지만 난 걱정하지 않소. 셀비와 내 엔진은 그 정도의 거리쯤이야 끄떡없이 해치울 수 있으니까] 그는 자신감에 차 보였다. [하지만 다른 차는요? 그 엔진을 디자인한 사람을 알고 있을 테죠? 그의 솜씨는 어때요?] [그녀야...] 그의 입에서 나직이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애비는 자신이 그의 말을 정확히 들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했죠?] [그녀라고 했소] 그가 중얼거렸다. [다른 엔진을 설계한 사람은 그 여자요] 순간 애비는 모든 상황을 확연히 깨달을 수가 있었다. 물론이야! 호텔에서 웨이터가 귀띔해 준 그 여자야. 맬을 머리고, 그에게 배운 것으로 그의 고객을 빼돌렸다는 그 여자.... [그녀는 내 애인이었소] 맬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가르쳐 주었다. 애비는 신중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쓴웃음으로 일그러졌다. [적어도 그녀가 좀더 비옥한 땅을 향해 돌아서기 전까진 말이오] 애비는 입술을 깨물며 잠시 주저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내기의 조건이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어요?] 그녀의 질문에 맬은 놀란 것 같았다. 아마도 좀더 개인적인 질문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내가 이기면, 그녀는 내게 2만 달러를 주기로 되어 있소] 놀란 나머지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만약 그녀가 이기면요?] 애비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상황은 생각하지조차 싫은 듯 맬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뉴욕으로 옮겨가 그녀의 파트너가 돼야 하지] 마치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듯한 목소리다. 그가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이겨야 한다는 집념으로 번뜩이고 있는 그의 눈빛에 애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난 이 내기에 대단히 많은 걸 걸었소]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애비, 당신을 믿소. 그러니 날 실망시키지 말아줘요]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 그 대답에 만족한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그 부탁에 관해선데...] 애비는 기대에 찬 얼굴로 그에게 다가 앉았다. [이 일이 끝날 때까지 내 애인 역할을 해줄 수 있겠소?] 오른쪽 앞바퀴가 깊게 팬 구멍에 걸리는 바람에 트럭이 또다시 요란스럽게 흔들렸다. 애비로서는 탁구공처럼 차내를 튀어다니지 않는 것만도 고맙게 여겨야 할 판이다. 하긴 맬의 왼팔이 마치 사슬로 채운 것마냥 꽉 허리를 죄어 안고 있어 옴쭉달싹도 할 수 없지만. 맬이 염려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자신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애비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들의 관계에 대한 덱의 추측을 보다 확실한 것으로 만들어 놓기 위해 작전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가끔씩 그녀 쪽으로 향하는 덱의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루어 그 작전은 거의 성공한 듯싶다. 맬의 얼굴에 희미하게 떠올라 있는 득의에찬 미소는 그 역시 그걸 확인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애비는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이 얼빠진 게임에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말려들어 버리다니. 어젯밤 그 부탁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애비가 잠시 할 말을 잃고 있는 사이에 맬은 그녀의 당황 어린 침묵을 승낙으로 받아들이는 척하며 그 순간을 어물쩍 넘겨 버렸다. 정신을 차린 애비가 항의하려하자 그는 미소 띄운 얼굴로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그녀가 설득력 있는 연기를 해줄 걸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둘러댔다. 그리고는 좀더 운전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셀비를 몰고 나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함으로써 그는 아주 간단히 그 화제를 끝내 버렸던 것이다. 맬과 함께 차고로 내려갔을 때 셀비는 이미 트럭의 뒷범퍼에 연결된 트레일러 위에 실려 있었다. 덱은 그 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이 트럭에 올라타자마자 덱이 운전석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족히 몇 킬로 달려서야 마침내 미끈하게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에 도착했다. 맬이 트레일러에 연결되어 있는 이동 트랩을 이용하여 셀비를 후진시켜 땅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엔진을 끄고 운전석에서 빠져나오자 애비는 셀비쪽으로 걸어갔다. [이번엔 헬멧을 쓰지 않아도 되겠어요?] 맬의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 그녀는 순진한 표정으로 한마디 던졌다. 저녁 내내 그가 그렸던 것처럼 애비도 그를 한번 놀려 주려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왼팔이 애비의 허리를 낚아채더니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너무나 거친 동작에 그녀는 순간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 음흉하기까지 한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맬이 그녀의 입술을 덥쳐왔다. [지금은 필요없어. 하지만 나중엔 모르지] 그가 입술 위에서 중얼거렸다. [침대로 돌아가서 말이야. 그땐 길이 험할 테니 조심하라구] 예기치 못한 그의 대답에 애비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충격으로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는 틈을 타 맬이 그녀를 운전석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여유있게 차머리를 돌아와서 옆좌석의 문을 열고 몸을 들이밀었다. 한순간의 충격이 가라앉자 격렬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어떻게 당신이 감히!]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로 사정없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가 채 감정을 폭발시키기도 전에 맬이 운전석과의 거리를 좁히면서 몸을 기울여 왔다.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그녀는 의자의 등받이에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밀어붙여젔다. 그의 손이 어깨로 올라왔다. 애비는 날카롭게 숨을 들이키고 그 손을 찰싹 소리나게 때렸다. [이런, 애비] 그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안전 벨트를 매주려고 한 것뿐이었소] [그 정도는 내 손으로도 할 수 있어요] 그녀가 매몰차게 내뱉었다. [그럼 어서 해요] 그가 으르렁거렸다. [덱이 눈에 불을 켜고 우릴 보고 있단 말이오] [그래서요?] 그가 물러나기 전까지는 벨트를 맬 생각이 추호도 없다. [당신이 연출해낸 그 혐오스러운 장면을 목격했으니 덱도 사랑 싸움하는 것 정도로밖에는 생각지 않을거예요. 걱정 말아요] 마음속으로 열까지 세고 있는지, 맬이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 빌어먹을 안전 벨트를 매고, 어서 엔진을 가동시키라구] 불길할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다. [그러죠] 그녀도 마찬가지로 낮게 말했다. [당신이 그쪽 자리로 돌아가기만 하면요] 순간 그의 입술이 한일자로 꽉 다물어지더니 마치 이를 갈고 있는 듯 턱 근육이 움직였다. 갑자기 그가 몸을 일으켜 돌아가 앉았다. 그가 시트를 다 매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분했지만, 그녀는 한참 동안 안전 벨트와 씨름한 뒤에야 겨우 차를 움직일 수 있었다. 속력이 나기 시작하자마자 그녀는 아주 분명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일부러 보란 듯이 그런..., 모욕적인 행동을 했어요] 그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이미 그 일에 찬성 했잖소, 제기랄] [틀렸어요!] 그녀가 정정했다. [난 어떤 일에도 동의한 적 없어요] [거절하지도 않았잖소] 맬이 재빨리 지적했다. [당신이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초조한 듯 그가 자세를 바꿔 앉았다. [사실..., 당신이 거절할까 봐 두려웠거든] 무뚝뚝한 그의 고백이 효과적으로 그녀의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애비는 45도 각도의 커브 길을 통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뜸 그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놀란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맬이 화난 듯 내뱉었다.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인지는 잘 알고 있잖아요] [젠장! 기껏 해야 당신한테 키스한 것뿐이잖소] 애비는 시선을 돌려 싸늘하게 그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약간 외설적인 발언을 한마디 한 것하고] 그가 마지못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약간 외설스럽다는 게 그 정도라면, 당신이 정말 저속해지려고 마음먹을 땐, 부디 내가 그 자리에 없길 바라겠어요] 맬이 너무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기에 그녀는 마침내 그의 말문을 막는 데 성공했다고 가슴 뿌듯하게 생각했다. 막 다시 한번 사과를 요구하려던 찰나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애비게일 프루던스 킹케이드, 당신이야말로 생김새가 얼마나 사람을 오도할 수 있는가를 말해 주는 완벽한 표본이오. 겉으로는 정말 따뜻하고, 유머를 즐길 줄 아는 여자처럼 보이는데 말이야] 애비는 손가락 관절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운전대를 꽉 틀어쥐었다. [금발에다가 적당히 굴곡 있는 여자라, 이 말씀이신가요? 생각한 대로 머리가 텅빈 탕녀가 아니어서 대단히 실망하셨겠어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 맬이 냅다 소리쳤다. [빌어먹을, 도대체 내가 뭣 때문에 당신과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군] 넌더리가 난다는 듯한 목소리다. [이제 충분히 달렸소. 차를 돌려 돌아갑시다] 애비는 약간 불안을 느꼈다. 도로는 U턴을 하기에는 너무 좁았다. 셀비를 온 방향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몇 번이나 차체를 뒤로 빼야만 한다. 곧바로 구멍 속으로 처박는 거나 아닌지 살피기 위해 오른쪽 어깨로 뒤돌아보면서 그녀는 맬의 옆모습을 힐끔 훔쳐보았다. 창백한 달빛 아래 그의 얼굴과 어깨의 윤곽선이 선명하게 두드러져 보았다. 시선은 정면으로 향해져 있는데,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자세가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쉽게 화가 풀리지 않는 듯 입을 한일자로 다물고는 턱은 앞으로 조금 내밀고 있다. [미안해요] 놀란 듯 맬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 말이 맞아요. 가끔씩 난 지나치게 여성해방론자의 기수같이 행동할 때가 있어요] 진지하면서도 마지못한 그녀의 말을 끝으로 차내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가 신기한 듯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애비는 느낄 수 있었다. 어이없게도 얼굴이 붉어졌지만 다행히 어둠이 그것을 가려 주었다. 셀비가 다시 트레일러 위에 놓일 때까지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덱이 끼어들어 대화는 다시 시작되었지만 화제는 셀비의 엔진에 국한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점검해 봐야 할 것들이 있소] 농장에 도착한 후 맬이 트럭에서 내리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난 잠시 여기 남아 있어야 하니 당신은 그만 집으로 돌아가요. 오늘밤은 푹 자둬야 할 테니까] [좋아요] 어쨌든 오늘 일을 다 노트해 두기 전까지는 잠이 들 수 없으리라 생각하면서 애비는 대답했다. 집을 향해 돌아서려는데, 무엇인가 그녀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지친 듯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서 있는 그의 모습 때문일까? 충동적으로 그녀는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도울 일이라도 있을까요?] 그가 희미하게 입술끝을 올리며 미소지었다. [제의는 고맙지만, 남은 대부분의 일이 정비사의 손을 거쳐야 하는 일이오. 앞으로 이틀간은 휴식을 취할 시간이 없을 테니 당신은 잘 수 있을 때 몇 시간이라도 더 자두는 게 좋을 거요] 기묘한 친밀감을 맛보면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등을 돌려 떠나려는 순간, 갑자기 맬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잠깐 기다려요] 애비는 조금은 희망에 찬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그는 그녀의 팔을 놓고, 다시 손을 진 바지의 주머니 속으로 찔러넣었다. 깊은 주름이 질 정도로 그가 미간을 찡그렸다. 불과 10초나 15초 정도 그가 머뭇거렸을 뿐인데도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녀는 최악의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저... 아까 일 말인데..., 헬멧에 관해 지껄인 것 말이오. 내가 지나쳤던 것 같소. 하지만 당신을 모욕하거나 불쾌하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는 걸 알아 줬으면 좋겠소] 그의 시선이 얼굴에 와닿았다. 뭔가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난... 사실, 그렇게 모욕당한 기분은 아니었어요] 그녀는 중얼거리다 한마디 덧붙였다. [불쾌한 것도 아니었구요. 솔직히 말하자면 지겨웠어요] 맬이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조롱하려는 내 태도 때문이었겠지] 애비가 그렇다고 말하려는 순간, 덱이 그를 불렀다. 엔진에 관해 의논할 일이 생긴 모양이다. [곧 갈게!] 맬이 소리쳤다. 대답을 하면서도 덱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세 명의 정비사가 차고에서 나와 셀비 주위에 모여서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지겨웠다는 건 이해하오]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는 듯 그가 말을 계속했다. [나 역시 남에게 조롱당하는 건 싫으니까. 내 부탁을 들어 주기 곤란하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쁜 감정은 없소. 그러니... 지금 그 대답을 해주면 정말 고맙겠소] 그의 진지한 태도에 애비는 잠시 말을 잊었다.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가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갈등시켰다. [좋아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하겠어요] 그의 놀란 표정에 그녀는 미소를 띄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거절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자신을 되찾고, 미소를 띄우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으려다 애비는 생각을 바꾸었다. [관객이 있어요]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덱과 당신의 정비사 세 명이요] [우릴 보고 있소?] [그래요, 아주 열심히] [대단하군] 그가 중얼거렸다. [덱 녀석, 벌써 뭐라고 지껄여댄 모양이오] 애비는 이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우스웠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그가 자신을 저 남자들 중의 하나쯤으로 여기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어느새 그의 애인이라도 된 것마냥 이렇게 바싹 그에게 다가서 있지 않은가. 애비는 두 손을 그의 가슴 위에다 얹고 암갈색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키스해 줘요] 뭔가 대단히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맬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한심스럽다는 듯이 길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만난다는 당신의 옛애인을 믿게 하려면, 미리 연습이라도 해두는 게 좋잖아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관객들이 있는 편이 더 효과적이겠지]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으면서 그가 동의했다. 그의 고개가 앞으로 기울어지자, 애비는 발끝을 들어 그를 맞았다. 그의 입술은 부드러웠고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이 남자에게 반한 듯이 행동한다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다음 순간, 부드럽게 입가를 더듬던 혀가 그녀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등을 쓰다듬던 그의 오른손이 잠시 허리 위에 머물렀다가 스스럼없이 다리 사이로 그녀의 엉덩이를 바싹 끌어당겨 안았다. 낮은 신음소리를 삼키며 그녀는 힘없이 그에게로 녹아들었다. 그의 왼손이 쓸어올린 머리카락을 한손에 가득 움켜쥐었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암갈색 눈동자엔 어둡게 가라앉은 정열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미친 듯이 뛰고 있는 맥박과 거의 헐떡임에 가까운 자신의 호흡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으로선 맬 역시 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위안이다. [연기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탁한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그녀는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뒤늦게서야 팔이 그의 목에 감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애비는 급히 팔을 내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건...] 말을 시작하다 말고 당황한 듯 그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그가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 애비의 턱이 약간 치켜올라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맬의 눈썹이 험상궂게 찌푸려졌다. [우리 사이의 이... 화학 반응이 경주에 방해가 돼선 안되오] [동의해요] 애비는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되진 않을 거예요] 그의 매력 때문에 기자로서의 직업적 자존심에 먹칠을 할 수는 없어, 절대로. [우린 어떻게 해서든지...] 맬이 말꼬리를 흐리며 초조하게 이마를 쓰다듬었다. [서로의 몸에 손을 대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대신 말을 맺었다. [당신 말이 맞소] [그리고 키스도 더 이상 안돼요] 그녀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맬이 그녀의 입술 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빌어먹을!] 그가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아, 어쩔 수 없지] 막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애초에 무엇 때문에 이 키스가 시작됐던가 하는 생각이 애비의 머리를 스쳤다. [그럼 내일 아침은 어떻게 하죠?] 초조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는 물었다. 맬이 눈을 감고 저주의 말을 뱉어냈다. [잊었었군. 할 수 없지. 우리의 그 협약은 공식적으로 경주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효력을 발생하는 걸로 합시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이마는 찌푸려진 채다. 정말로 그는 계속 연인인 것처럼 행동하다가 경주가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마치 스위치를 끄듯이 감정을 억제하고 서로에게 완벽하게 무감각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잘 모르겠어요...] 자신없는 어조로 그녀는 중얼거렸다. 속눈썹이 내리깔리며 그의 눈동자 속에 떠오른 표정을 덮어 버렸다. [해낼 자신이 없으면 그렇다고 말해요] 그 말이 애비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녀는 아무렇게나 손을 내저으며 마음속의 의혹을 모두 쓸어내 버렸다. [난 할 수 있어요. 문제 없어요] [좋아, 그럼 거래는 성립한 거요?] [그래요] 애비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려다 말고 그녀는 맬의 어깨너머를 힐끔 넘겨다 보았다. [아직도 있소?] 그가 물었다. [그래요. 이 무대가 막을 내리기 전까지는 꼼짝도 않을 것 같아요] [제기랄!] 그가 지겹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여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맬이 눈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키스를 한번 더 해야 할 것 같군] 차라리 알몸으로 면도날이 가득 찬 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편이 낫겠다는 말투다. [손대기 없기예요!] 맬이 몸을 기울여 오자 그녀는 경고했다. 순간 그의 몸이 움찔하더니 입술이 냉소로 일그러졌다. [손은 대지 않겠소] 그가 엄숙하게 약속했다. [가벼운 굿나잇 키스로 그칠 거요] 그의 눈동자 속에서 반짝이는 빛이 자못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 생각을 입밖에 내어 말하기도 전에 둘 사이의 간격을 허물며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따뜻한 그의 입술을 느낀 순간, 그녀는 이 입맞춤이 간단한 굿나잇 키스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직감했다. 맬이 굶주림인지 절망인지 모를 거친 소리로 낮게 신음했다. 애비의 몸에 전류가 흘렀다. 갑자기 그의 입술이 거친 열기를 띠고 입술을 짓눌렀다. 애비는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한낱 나약한 인간일 뿐... 드디어 가냘픈 저항의 신음소리와 함께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 위로 녹아들었다. 그의 혀가 입술을 헤집고 들어왔다. 순간 그녀는 충격으로 눈을 번쩍 떴다. [안돼요!] 애비의 목소리는 거의 헐떡임에 가까웠다. 그의 손이 애비의 왼쪽 가슴을 감싸쥐려는 찰나였다. 순간 자신의 행동을 알아차렸는지 쑥스러운 듯 그가 다시 바지주머니 속으로 손을 찔러넣었다. [가야겠어요] 애비는 태연한 척하려고 최대한 노력했지만, 불행히도 그녀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같이 떨리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야] 그의 표정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다. 방으로 돌아온 애비는 침대 위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지금까지는 상대방 여자가 누구인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애비를 안절부절 못하게 했다. 그 여자는 누구일까? 언제, 어떻게 맬을 만난 걸까? 맬은 그녀를 정말로 사랑했던 걸까? 가슴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에 한순간 애비는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건 동정심일 뿐이야. 무참하게 버려진 남자에 대한 동정심일 뿐이라고 애비는 자신의 반응을 합리화시켰다. 그녀는 주먹으로 침대를 두드리며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든 남자를 저주했다. 5 트럭이 비교적 평탄한 길로 들어서자 애비는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근육을 풀기 위해 조심스럽게 등을 폈다. 주의를 모으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니나다를까 맬이 그것을 눈치채 버렸다. 곧 맬의 왼손이 등을 타고 올라와 가볍게 그녀의 목덜미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근육이 당기나 보군, 그렇지?]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 목소리에 그녀는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 주고 싶은 기분이다. [약간요] 그녀는 일부러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만약 웃고 있다면 - 웃고 있을 게 뻔하지만. 그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훨씬 속이 편할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지금까지 그는 줄곧 그녀의 화를 부추기는 일만 하고 있다. 아침에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목까지 단추를 채운 단정한 셔츠와 화장기 없이 깨끗한 얼굴을 흘끗 쳐다보더니, 그가 당장 이층으로 올라가서 셔츠를 벗고, 화장 좀 하고 오라고 소리쳤다. [어제 입은 그 섹시한 블라우스를 입으라구!] 뒤이어 생각난 것처럼 그가 덧붙였다. 그녀는 아예 대꾸를 포기하고 이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채 층계를 올라가기도 전에 그의 고함소리가 뒤쫓아왔다. [그 보라색 아이섀도를 듬뿍 칠하도록 해요!] 그리고 20분 후, 그녀가 식당으로 들어서자 그는 식당한 가운데에 그녀를 세워 놓고 주위를 몇 번이고 돌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게 아니가.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겠군] 마침내 검사를 끝내고, 그가 한마디했다. [앉아요, 아침 준비는 다 됐으니까] 그 아침식사란 것이 산더미 같이 쌓아올린 팬케이크와 구운 소시지와 삶은 감자, 한 주전자나 되는 오렌지 주스와 갓 끓인 커피 한 주전자였다. [설마 이걸 다 먹으라는 건 아니겠죠?] 의자를 끌어내면서 애비가 말했다. 한꺼번에 팬케이크 열 장을 찍어 접시 위에 올려 놓으며 그가 초조하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경주가 시작되면 우선 세인트 루이스까지 쉬지 않고 달릴 생각이오. 그러니 지금 배를 채워 놓지 않으면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거요. 소시지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애비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소시지 네 개와 팬케이크 서너 장을 덜어 놓으며 그녀는 맬의 기색을 살폈다. 어젯밤 차고 앞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그는 필시 없었던 일로 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좋아. 더 이상 고심할 필요없이 잊을 수 있다면 잊는 게 좋으니까. 하지만 식당으로 들어오자마자 웃옷을 벗을 채 맨발로 스토브 옆에 서 있는 그를 본 순간부터 이미 애비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오른팔을 약간 들어올리고 팬케이크를 뒤집고 있었는데, 그 근육의 움직임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 속에서 침을 꼴까 심킬정도로 근사하게 보였었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이층으로 올라가 블라우스로 갈아입고 화장을 하고 내려오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덱은 그들이 아침식사를 끝낼 무렵에 도착했다. 옷을 제대로 걸치지 않는 맬을 본 순간, 알겠다는 듯 덱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애비는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그 순간 맬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기 때문에 그녀는 잠자코 입을 다물고 억지로 미소를 띄울 수밖에 없었다. 법원 광장에 도착한 애비는 이미 몰려든 인파가 상당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나들이 옷을 입은 노인들도 있고,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온 여자들도 있었다. 아마도 수업을 빼먹고 나온 듯한 십대들과 단정한 수트 차림의 사업가도 몇 명 눈에 띄었다, 그들은 모두 맬러키 개럿을 알고 있었고, 덱의 트럭에서 그가 내러서자 모두 격려의 환호성을 올리며 그이 행운을 빌어 주었다. 맬은 미소를 띄우고, 손을 흔들어 그들의 환홍 답했다. 몸을 돌려 트럭의 발판에 발을 올려놓으며 그가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시작이오] 두 손으로 애비의 허리를 잡으면서 그가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맬의 팔이 어깨에 둘러왔다. 애비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고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녀가 여기 있어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시선이 군중 속을 한번 훑고 지나갔다. [없소. 아마 화려한 등장을 위해 어디선가 때를 기다리고 있겠지] [확실해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가 물었다.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았잖아요] 맬이 트레일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날 믿어요. 만약 그녀가 여기 있다면, 난 광장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았을 거요] 애비는 그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가 저런 어조로 얘기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말투다. [셀비를 트레일러에서 내리도록 해요] 트랩을 내리고 있는 덱에게로 걸어가면서 그가 말했다. .[이 팀의 운전사는 당신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해두는 게 좋소] 폭이 좁은 트랩이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다. [좋아요] 목소리에서 불안감을 느꼈는지 그가 애비의 어깨를 꽉 껴안았다. 그리고는 팔을 풀더니 두 손으로 허리를 붙잡아 그녀를 트레일러 위로 올려놓았다. [너무 긴장하지 마요]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내 2년간의 노력을 헛되게 하지 않으리라 믿소] 애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믿어 줘서 고맙군요] 주머니에서 셀비의 열쇠를 꺼내 던져 주면서 맬이 싱긋 웃었다. 그는 등을 돌려 구경꾼들이 모여 서 있는 보도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는 별다른 문제없이 셀비를 트레일러에서 내릴 수 있었다. 네 개의 타이어가 안전하게 도로 위에 내려앉자, 그녀는 엔진을 끄고 차에서 내려 맬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군중들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다. 5분 전까지만 해도 찾아볼 수 없었던 긴장감이 나직하게 소곤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함께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조금 적대감이 섞인 그 술렁임 소리는 새로 도착한 두 사람이 셀비 쪽을 향해 다가올수록 더욱 높아졌다. 그녀는 서둘러 맬의 곁으로 걸어가 충동적으로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녀의 어깨 위로 팔을 올려놓으며 그가 의아한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새로 도착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탐지기가 예민하지 못한 게로군. 애비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어쨌든 그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도 주지 않고 자신을 차버린 옛애인과 얼굴을 맞대게 할 수는 없다. 그녀는 한쪽 손으로 다정하게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키스를 하기 위해 몸을 폈다. 거의 본능적으로 그의 팔이 목을 감아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에게 경고해 줄 기회로 삼으려 했던 가벼운 키스가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변해 버렸다. 온몸을 삼켜 버릴 듯한 아찔한 감각의 파도가 그녀를 덮쳐왔다. 그의 손가락이 움켜쥔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고, 거칠게 눌러대는 입술 사이로 그의 젖은 혀가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달콤함을 마음껏 음미했다. 마침내 그가 얼굴을 들었다. 눈동자는 초점없이 어둡게 불타올랐고, 뜨겁게 젖은 그의 숨결이 애비의 이마에 와닿았다. 딱딱하게 긴장하고 있는 그의 몸에서 애비는 그가 자제력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른 채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 감히 주위를 둘러볼 염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을 둘러싼 군중은 언제부터인가 쥐죽은 듯이 고요해져 있었다. 그의 팔은 여전히 그녀의 목을 감고 있다. [이 조그만 소동의 주인공이 당신이리라는 것쯤은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맬러키] 조금 웃음기가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의 팔이 죄어들었다. 애비는 그가 충격을 받았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의 반응을 눈치챈 사람이 달리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인공을 쳐다보았다. 약간 내리깐 짙은 속눈썹이 그의 눈에 떠오른 표정을 적절히 숨겨 주고 있다. [잘 있었어, 록시?] 긴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마치 여동생에게 인사하는 듯한 느긋한 목소리다. 하지만 그 이름..., 불길한 예감에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애비의 시선이 여자의 얼굴 위로 날아갔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맬의 팔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대뜸 몸을 돌려 셀비 아래로 기어들어가 몸을 감춰 버렸을 것이다. 2m 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 유명한 여류 엔지니어 록산 윈스턴이 서 있다. 2년 전 한 저명한 심장 전문의와 함께 새로운 인공 심장을 개발해냄으로써 하룻밤 사이에 일약 스타가 된 여자였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개발한 디자인은 대부분의 환자들에게는 적합지 않다는 판정이 내려졌지만,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26살의 록산 윈스턴은 국내에서 가장 유망한 여류 발명가로서 발판을 굳히게 되었다. 프리랜서 기자로서 애비가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처음으로 맡은 일거리가 바로 록산 윈스턴과의 인터뷰였다. 그녀는 센트럴 파크 이스트에 자리한 록산의 화려한 아파트에서의 그 3시간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불안으로 가슴이 죄어들었다. 나를 알아볼까? 그 유일한 만남 이후로 거의 2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록산은 이름도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수십 명의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을 것이다. 어떤 신출내기 여기자의 무례한 아침 방문을 그녀가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리는 없다. 애비는 신분이 노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쫓긴 나머지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느닷없이 그가 목덜미로 팔을 감아왔다. 순간 정신이 든 그녀는 맬의 몸이 긴장으로 온통 딱딱하게 굳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애비는 맬에게로 한 걸음 다가서서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오른손을 올려 가슴께에 내려뜨려진 그의 손을 꼭잡았다. 그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 속에 나타난 따뜻한 사랑의 빛이 록산 윈스턴 뿐만 아니라 주위에 둘러선 모든 사람들에게 의심할 여지없는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다. 그 메시지를 이해했는지 록산 윈스턴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지금 록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다. 맬이 다른 여자와 함께 무대에 등장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차츰 애비의 마음속에 분노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녀는 록산의 냉정한 조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저 여자는 어떻게 된 여자지? 소문이 사실이라면, 돈 때문에 맬을 차버리고 한마디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 버린 여자가 아닌가?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의 인생에 다시 끼어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렇게 쉽게? 록산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그녀의 사고를 중단시켰다. [당신의 친구를 소개시켜 주지 않겠어요, 맬?] 다소 무뚝뚝한 목소리로 서로를 소개시키는 동안에도 그의 팔은 그녀의 어깨위에서 떠나지 않았다. [애비게일 킹케이드, 이쪽은 록산 윈스턴이오. 상대 쪽 엔진을 제작한 엔지니어지] 그리고 그가 록산의 오른쪽에 서 있는 잘 빠진 체격의 미남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은 토니 페리스.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록시의 차를 워싱턴까지 운전하게 될 망나니요] 애비는 놀라 숨을 헐떡였다. 토니 페리스라면 어제 맬이 호텔에서 말한 일급 카레이서 중의 하나가 아닌가. [그래, 이 친구야] 싱긋 웃으며 토니가 말했다. [우리가 먼저 워싱턴에 도착하게 될 거라는 데 200달러 걸겠어. 지금 당장] [좋아] 아무런 주저없이 맬이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도대체 여기서 뭘하는 거야? 이번 달 내내 인도에서 바쁠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메마른 어조로 토니가 말했다. [그런데 그저껜가 시험 운전에서 그만 로터스가 굴러 버렸지 뭐야. 록시가 충돌사고 소식을 듣고 전화를 했더군. 아직 운전할 수 있는 상태라면 조그만 부탁이 하나 있다고] 그가 소년다운 장난기로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내기의 상대가 누군지 알고 난 다음에야, 이 토니 페리스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나?] [당연하겠지] 맬이 중얼거렸다. [정말 워싱턴까지 차를 몰수 있는 상태야?] 토니가 대답하기도 전에 록산이 끼어들었다. [안심해도 좋아요. 그는 완벽한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당신의 운전사는 언제 만나게 되는 거죠?] [방금 만났잖아] 록산과 토니가 마치 자동 조절장치가 된 로봇처럼 동시에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떠오른 경악의 표정으로 그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감히 짐작할 수 있다. 토니가 먼저 냉정을 되찾았다. 환하게 웃으면서 그가 앞으로 걸어나와 애비에게 악숙을 청했다. 그녀는 힘차게 토니와 악수를 나눈 다음, 다시 맬의 손을 찾았다. [이거 완전히 한방 먹었는걸] 토니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랑이라고밖에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군] 애비는 이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에게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는 너무나 다정한 맬의 눈빛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가 허스키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찔한 관능적인 울림에 애비는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천천히 그녀의 손바닥 위에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해, 애비] 애비는 주먹을 꽉 쥐어 그의 손장난을 멈추게 하고, 떨리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글쎄요, 뭐라고 말하기엔 아직 이르지 않을까요?] 거짓말이 쉽게 나왔다. 하긴 요즈음은 그 연습이 지나칠 정도로 충분했으니까. [아주... 다정하군요] 록산이 천천히 말했다. [좀 놀랐어요] 그녀는 오만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내가 예전에 셀비를 운전하게 해달라고 사정했을 땐 들은 척도 하지 않던 사람인데 말이에요. 경험 부족의 운전사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나 귀중한 물건이라고 했던가요?] [맞아] 맬이 짧게 대답했다. [그건 사실이야] [그런데도 당신의 ...그 친구에게...] [애비게일] 맬이 록산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어조에는 록산을 움찔하게 하는 단호한 울림이 있었다. 록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딱딱한 미소를 띄우며 말을 계속했다. [난 좀 놀랐다고 말하려던 것뿐이었어요. 당신이 애비게일...] 그녀는 우습다는 듯 일부러 말을 끊어 그 이름을 강조했다. [그녀에게 셀비를 운전하도록 허락했다니, 아마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죠?]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얘기를 주고받는 그들에게 화가 났지만 애비는 꾹 참았다. 이건 맬의 싸움이고, 난 그가 자기 방식대로 해나가도록 내버려둬야 한다. 그가 록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다분히 회의적이었던 그녀의 마지막 질문에 대답했다. [물론, 그녀는 일류야. 하지만 애비가 내 소중한 셀비를 몰게 된 건, 그 능력보다 훨씬 더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록산의 오른쪽 눈썹이 의아한 듯 치켜올라갔다. [궁금하군요, 그 자질이라는 것이 뭔지...] 차가운 그의 미소는 거의 냉소에 가까웠다. [나의 믿음이야] 순간 록산의 티 하나 없이 고운 두 뺨이 민망할 정도로 붉어졌다. 애비 역시 스스로의 당혹감을 숨기느라 안절부절했다. 나의 믿음이야... 애비는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리며 죄의식으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단지 록산에게 들려주기 위해 그가 둘러댄 말일 뿐이라고 생각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기엔 이미 늦은 일이야. 어쨌든 난 이 경주에도, <포스트> 지에 제공해 주기로 한 기사에도 책임이 있으니까. 다행히 그녀의 갈등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모처럼의 재회를 방해하긴 싫지만] 토니가 긴장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벌써 11시야. 경주를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더 체크해 봐야겠어] [맞아] 맬이 말했다. 그는 시선을 돌려 모여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글래디스의 가게로 자리를 옮기는 게 어때? 지금쯤이면 거긴 조용할 테니까] [좋아] 토니가 동의했다. [오랫만에 글래디스의 장군풀파이를 맛볼 수 있겠는 걸] 맬과의 마지막 대화 이후 마치 동상처럼 꼼짝없이 굳어 있던 록산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토니] 부탁이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까운 어조였다. 멈춰선 토니의 두 눈이 불쾌한 듯 가늘어졌다. [자리를 옮기기 전에 차를 가게 앞으로 옮겨다 놓는 게 좋겠어요] 한순간 애비는 토니의 입에서 직접 옮겨다넣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 나오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따. 사람좋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령받는 데만은 익숙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구경꾼들에게 이미 지나칠 정도로 충분한 얘깃거리를 제공한 듯싶은지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말했다. [좋아, 셀비 앞으로 옮겨다놓기로 하지. 그럼 글래디스의 집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을 테니까] 애비는 맬의 허리를 감은 팔을 풀었다. 입을 열면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두려워 그녀는 감히 대화를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양심의 소리가 여전히 가슴을 찌르며, 너무 늦기 전에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고 그녀를 질책하고 있다. 글래디스의 가게를 향해 거리를 반쯤 가로질러갔을 때였다. 맬이 낮은 목소리로 거칠게 중얼거렸다. [암캐 같으니라구!] 그 순간, 애비는 충격으로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뭐라고 했죠?] 애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맬이 초조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당신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했소?] 애비는 안도한 나머지 휴 하고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 록시!] 가게 앞에 다다르자, 맬이 출입문을 열기 위해 그녀의 어깨에서 팔을 내렸다. 가게 안으로 들어간 애비는 그와의 간격을 넓히기 위해 재빨리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잠시만이라도 그와의 육체적 접촉으로 인해 혹사당한 몸의 신경을 쉬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 자리가 괜찮겠어요?] 그녀는 검은 비닐을 씌운 긴 의자 위로 몸을 실었다. 맬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상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맞은편에 앉으리라 기대했던 그가 애비의 옆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의 엉덩이가 가볍게 부딪쳤다. 애비는 황급히 벽쪽으로 달아났다. [당장 이리로와요] 맬이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녀가 꼼짝도 하지 않자, 그는 대뜸 등뒤로 팔을 끼워넣어 허리를 껴안고는 그녀를 옆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몸이 미끄러지듯 끌려가는 것을 느끼며 애비는 소리없이 비닐 의자를 저주했다. 맬이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지만, 애비는 잠자코 그의 시선을 피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안색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머리가 아파요. 너무 긴장했나 봐요] 설명으로는 좀 부족한 듯싶지만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다. 록산 윈스턴을 만난 충격 하나만으로도 애비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오, 하느님! 만약 그녀가 날 알아 보았다면... 그녀가 채 생각을 마무리짓기도 전에 맬의 손이 허리에서 목덜미로 올라왔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목덜미의 우묵한 곳을 차지하고, 다른 손가락들은 목과 어깨를 연결시키는 매끈한 근육 위에 얹혀졌다. 그의 손이 리듬을 타고 딱딱하게 긴장된 목덜미의 근육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긴장을 풀어요] 그가 귓가에다 부드럽게 속삭였다. [당신에게 그다지 유쾌한 상황이 아니란 건 알고 있소. 지금부터 한 시간 정도면 끝날 거요, 걱정 마요] 애비는 미소지었다. 그가 약간 슬픈 듯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겠지, 그렇죠? 사실이 아닌 걸 그런 체하고 싶지는 않을 거요] 애비는 갑작스럽게 몰려온 갈비뼈 아래의 통증이 아침에 먹은 소시지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그래요] 눈을 내리깔며 그년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난...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뺨 위에 와닿는 따뜻한 숨결로 그가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애비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눈을 뜬다면, 자신이 죄의식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그의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가볍게 스쳤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헐떡이며 숨을 죽였다.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이 골칫거리가 될 거란 걸 알았었소] 그가 중얼거렸다. 화가 난 듯한 목소리다. [빌어먹을, 도대체 내가 어떻게 이 경주에 집중할 수 있겠소! 당신을 바라보고 손으로 만질 때마다 침대로 데려가고 싶은 생각뿐인걸] 약해져가던 그녀의 의지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 [그건 간단해요] 그녀는 눈을 뜨면서 잘라 말했다. [얼마든지 봐요. 하지만 더 이상 만지지는 말아요] 맬의 눈썹이 한심스럽다는 듯이 찌푸려졌다. [언제나 말하긴 쉬운 법이지]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가 몸을 기울여 왔다. [이러지 말아요] 잠긴 듯한 목소리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목 위에 머물러 있던 손이 약간 주저하는 듯하더니 곧 떨어졌다 일단 한숨을 돌렸지만 애비는 그 유예 기간이 일시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 사이의 화학 반응은 이렇듯 쉽게 재갈을 물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카운터 뒤에서 모습을 나타낸 웨이트리스가 두 잔의 얼음물을 담아 그들에게로 가져왔다. 그녀는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로 애비를 살펴보면서 앞치마의 커다란 주머니에서 주문 용지와 연필을 꺼내들었다. [안녕, 맬!] 그녀가 전형적인 남부 사투리로 인사했다. [뭘로 하겠어요?] 맬이 생긋 웃으며 모자의 챙을 뒤로 넘겼다. [커피 넉잔, 장군풀 파이 세 조각, 그리고 이 숙녀분을 위해 아스피린 몇 알. 고마워요, 돌리] 돌리가 용지 위에 주문을 받아쓰고는 연필을 귀뒤로 꽂으면서 애비에게 묻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머리가 아파요?] 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해할 만해요] 돌리가 간단히 말했다. [맬의 저 새까만 괴물을 틀일러에서 내리는 걸 봤어요. 당신이 운전을 할 건가 보죠?] 애비는 그녀의 직설적이 표현이 무척 마음에 들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돌리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리라고 생각했어요. 당신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뭘 좀 가져와야겠군요] 주방으로 통하는 뒷문으로 돌리의 모습이 사라지자 애비는 약간 심술궂은 미소를 띄고 맬을 쳐다보았다. [언제부터 아는 사이에요?] [내가 메뚜기보다 조금 더 컸을 때부터지]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돌리와 언니 글래디스는 이 마을의 정보국을 운영하고 있는 셈이오. 아마 그들은 최근 30년동안 이 마을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주소와 전화번호, 생년월일, 그리고 독신인지 아닌지의 여부까지 정확하게 당신에게 말해줄 수 있을 걸] 며칠 일찍 이 자매들을 알지 못한 것을 애비가 못내 유감스러워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토니와 록산이 들어왔다. 그들이 막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돌리가 다시 주방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네 사람 앞에 컵과 접시를 늘어놓은 다음 돌리가 커피를 따랐다. [오랫만이에요, 토니] 애비에게 아스피린을 건네주며 돌리가 말했다. [여전히 블랙으로 마시나요?] 이내 애비는 돌리가 보란 듯이 록산 윈스턴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록산의 표정이 싸늘해진 것으로 미루어 그녀 역시 그것을 느낀 모양이다. [그래요] 토니가 대답했다. [무엇 하나 잊는 법이 없군요, 돌리] 순간 돌리의 시선이 우아한 포즈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록산에게로 향했다. [그래요. 난 잘 잊어버리질 않아요] 돌리의 목소리에서 배어나오는 적의에 애비는 깜짝 놀랐다. 게다가 돌리가 컵 앞에 디저트 접시를 놓으며 자신에게 보낸 다정한 미소에는 정말 어안이벙벙할 따름이다. 접시 위에 놓은 쐐기 모양의 물체를 내려다보고 애비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미간을 찌푸렸다. [장군풀 파이야] 쾌활한 목소리로 맬이 말했다. [먹는 거지] 애비는 화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기 때문에, 애비는 그가 록산을 위해 파이를 주문한 걸로 생각했었다.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어서 먹어 봐요] 토니가 한마디 거들었다. [보기 보단 맛이 괜찮다구요. 정말입니다]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애비는 록산에게 고개를 돌렸다. [먹어 본 적 있어요?] [한번요]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냉소가 그 한번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사람을 깔보는 듯한 그 어조에 격분한 애비는 파이를 부스러기 하나 남김없이 먹어치우겠다는 각오로 포크를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토니 말대로 장군풀 파이는 보기 보단 훨씬 맛이 있었다. [나쁘진 않군요] 마지막 한 입의 파이를 커피 한 모금으로 끝내고 난 후 그녀는 인정했다. [하지만 내 치즈 케이크와 바꾸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어요] 맬의 한쪽 입술끝이 넋이 나갈 정도로 매력적인 곡선을 그리며 치켜올라갔다. 느닷없이 그가 한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천천히 쓸었다. 그가 훔친 손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크림이 묻었어]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혀가 손가락 끝에 묻은 크림을 핥기 시작했다. 신발 안에서 발가락이 저절로 오므라들었다. [다음에는 냅킨을 사용하도록 해] 그가 놀리는 듯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그녀의 입술 끝에 치중하여 같은 경로를 반복했다. 애비는 금방이라도 히스테리를 일으킬 것만 같다. 이런 상태로 앞으로의 이틀간을 제대로 버텨낼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구태여 그럴 필요 없겠어] 여전히 놀리는 듯한 어조로 그가 중얼거렸다. [이 방법이 훨씬 재미있는걸] 얼마나 더 연극을 계속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지 맬이 잠시 머뭇거렸다. 다음 순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어 버렸다. 그의 혀가 입술 바로 안의 부드러운 살갗을 스쳤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그가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그녀의 상체는 자석에 끌리듯 그에게로 바짝 기울어졌다.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너무 가까이 끌어당겨서 불규칙한 그의 심장 고동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제 그만 끝이 났으면...] 록산의 가시돋친 목소리에 애비는 꿈에서 깨어났다. [끝이 나다니?] 맬이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천만에. 아마 40년이나 50년쯤은 기다려야 할걸] 애비는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기 위해 커피로 손을 뻗쳤다. 40년이나, 50년? [자네, 되게 걸린 것 같군] 토니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맬이 애비를 쳐다보았다. 그의 다정한 미소에 그녀는 극도로 긴장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그가 중얼거렸다. [난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니까] 20분 후, 애비는 몇 가지 물건을 사러 간 덱과 맬을 기다리며 셀비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토니가 셀비 옆으로 주차시켜 놓은 스포츠카를 열심히 살펴보았다. 록산 윈스턴의 차. 반짜반짝 빛이 나는 신형의 머큐리 세이블이다. 유리창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진홍색의 커버와 순결할 정도로 흰 차체가 셀비의 검은색과 눈에 띄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세이블은 우아하고 세련되고 아주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그에 비해 맬의 셀비는 한마디로 말해 시대착오적 사고의 산물처럼 보였다. 우아한 선이나 효율적인 공기 역학의 이용보다 야만적인 힘이 훨씬 높이 평가받던 시대에 만들어진 것 같은 좀 둔해 보일 정도로 큰 기계다. 애비는 록산의 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라면 록산 역시 마찬가지다. 세이블과 그 주인 모두 흠집 하나 없이 너무나 매끄럽게 포장되어 있다. 너무나 완벽해, 빌어먹을! 도저히 셀비에게 기회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기막히게 연료가 많이 소모되는 그 원래의 엔진을 맬은 그래도 보존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엔진을 어떻게 수정했건간에, 셀비가 세이블보다 연료를 덜 소모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이 내기에서 지게 될거야. 둔탁한 통증이 애비의 가슴을 압박해 왔다. 그 까닭에 대해 거짓말할 생각은 없다. 맬이 내기에서 지게 되면, 그는 뉴욕으로 옮겨가 록산의 파느너가 돼야 한다. 록산이 직업적인 관계로만 만족하지 않으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녀는 자신의 방식대로 맬을 되찾을 생각인 것이다. 그것은 애비와 결혼할 것이라는 맬의 말에 대한 그녀의 반응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충격으로 멍청해져 버린 토니와는 달리 록산은 뭐라고 할까, 아주 격노한 표정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맬은 테이블의 긴장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가 테이블 위로 몸을 구부리고 앞의 두 사람의 주의를 모았다. 곧 세 사람은 경주에 관한 몇 가지 규칙을 세우기 시작했다. 첫째, 승부는 각 차량의 연료 소모를 측정하여 결정한다. 물론 경주 동안의 기계 고장과 그 원인의 기록도 포함한다. 둘째, 두 팀은 마음대로 루트를 선택할 수 있다. 셋째, 규정 속도의 준수 여부는 고속 도로의 상황에 따라 결정한다. 규칙을 정하는 동안 애비는 추측했던 것과는 달리 이 내기가 록산의 아이디어였음을 알아차렸다. 이 경주가 둘의 연구를 세상에 선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록산이 말했을 때, 맬의 반응은 끔찍할 정도였다. [그만둬] 그가 잘라 말했다. [<뉴스위크>의 표지를 장식할 사진을 얻고 싶은 거라면 지금부터라도 다른 광대 놀음을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록산이 초조하게 몸을 움직였다. [내가 한 일을 인정받고 싶다는 것뿐이에요. 당신과는 달리 난 좋은 선전의 가치를 알고 있다구요] [이 세상에 그런 건 없어!] 맬이 으르렁거렸다. [언론은 당신의 적이 아니에요, 맬러키. 당신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들이 당신을 필요로 하는 만큼 당신에게도 그들이 필요해요] 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완고했다. [누구에게도 신문기자는 필요없어] 애비는 몸을 움츠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눌렀다. [빌어먹을 그 작자들은 썩은 고기를 청소하는 하이에나보다 나을게 없어. 아니, 그보다 더 나빠. 기생충 같은 녀석들이라구] 록산의 표정이 눈에 띄게 딱딱해졌다. [난 기자가 이 경주를 취재하길 바래요, 맬러키] [난 아냐] 맬의 칼로 자른 듯한 한마디를 끝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록산의 표정이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걱정스러운 표정은 아니었지만 조금 자신감이 흔들리고 있는 듯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록산이 물었다. 맬이 2,3초 그녀를 기다리게 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지. 만약 당신이 벌써 그 신문기자 친구들을 초청해 놓았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모든 거래는 끝이야] 록산의 크림 빛 두 뺨이 선홍색으로 물들었다. 애비는 그녀가 그 일을 이미 해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쨌든 록산의 끈기와 빠른 머리회전은 감탄해야 할 만했다. 잠시 망설인 후에 록산은 취재를 약속한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어 경주가 취소되었다고 말하겠다고 제의했다. 단서는 워싱턴에 도착한 후 열릴 기자회견에 그가 동석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맬은 내키지 않아했지만, 끝내 록산은 그것이 꽤 공정한 거래라는 것을 설득시키고야 말았다. [하지만 이건 확실히 해줘]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만일 기자같이 생긴 작자가 주위에서 얼씬거리는게 한번이라도 눈에 띈다면, 당장에 집으로 돌아와 버릴거야. 명심해] 애비는 숄더백 안을 휘저으며 가게를 떠날 때 돌리가 건네준 아스피린 병을 찾았다. 아무리 애써 봐도 신문기자에 대한 그의 통렬한 비판을 잊을 수가 없다. 썩은 고기를 청소하는 하이에나라고? 게다가 기생충이라니, 세상에! 내가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셀비를 몰겠다고 지원했는지 그가 알기라도 하는 날엔... 애비는 병의 뚜껑을 열고 아스피린 두 알을 손바닥에 털어놓았다.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맬이 자신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어처구니없다는 것은 알지만, 애비는 그가 자신을 주길 원하고 있는 것이다. [가망없는 일이야] 아스피린을 입안에 털어넣으며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뭐라고?] 하마터면 아스피린이 목구멍에 걸릴 뻔했다. 그녀는 휙 돌아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정말 내가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꼴을 보고 싶어요? 운전사가 없으면 당신은 이 경주를 포기해야 할걸요] 그의 입가에 약간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조이 벤더는 언제든지 데려올 수 있으니까] 그 나른한 한마디에 그녀의 자제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요] 지갑에서 셀비의 키를 찾아낸 애비가 차의 트렁크를 열자, 그가 급히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뭐하는 거요?] 그가 어깨너머에서 으르렁거렸다. [뭐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녀가 자신의 가방 손잡이를 막 들어올리려는 찰나, 갑자기 그의 손이 덮쳐왔다. [우리의 약속을 취소할 생각이오?] 애비는 세이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다행스럽게도 록산과 토니는 차 지붕 위에 펼쳐 놓은 지도를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다. [뭐라고 말을 좀 해봐!] 맬이 성급하게 재촉했다. 그녀가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자 그가 한 손으로 턱을 받쳐들고 혼란스러운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 보았다. [이러지 마, 애비]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화가났다는 건 알고 있소. 물에 빠진 암탉보다 더 지독한 기분이겠지. 하지만 날 버려 두고 가진 말아요. 난 당신이 필요해] 그 솔직하고 조용한 탄원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언제든지 조이 벤더를 데려올 수 있다면서요?] 당황한 듯 그의 높은 광대뼈 위에 희미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가 시선을 피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건 허풍이었소] 그가 너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기 때문에 애비는 잘 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구요?] 그가 뚱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건 허풍이었다구] [어쩐지] 그녀가 중얼거렸다. [화를 낼 거요?] 그녀가 당장이라도 분통을 터뜨리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당연히 화가 나야 하는데도, 막상 이렇게 자신없이 쩔쩔매는 그를 보니 화를 낼 수가 없다. 쿠키를 훔쳐 먹다 들킨 아이처럼 눈치를 보고 있는 남자에게 차마 어찌 호를 낸단 말인가. [아뇨. 화를 내진 않을 거예요] 그의 조심스런 표정이 가시기를 기다렸다가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건 무슨 말이지?] [지금은 화를 내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저기 덱이 오는군요. 뭘 산 것 같은데요?] [레이다 탐지기를 사러 보냈었소] 트렁크의 뚜껑을 닫고 열쇠를 빼내면서 그가 말했다. 그녀에게 열쇠를 건네주면서도 그는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위협당한 느낌이 든단 말이야. 경고해 두겠는데 애비, 난 위협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뭘 던지고 싶은 기분이라면, 지금 당장 해버리라구] 애비는 경멸섞인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난 뭘 던지거나 하진 않아요. 레이다 탐지기는 좋은 생각이에요. 신형은 언덕 너머의 신호까지 포착해낸다면서요?] 맬이 허리 위에 두 손을 얹고 눌러쓴 모자 밑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화제를 바꾸지 마요. 당신은 지금 내 점수를 매기고 있소. 그렇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할 때마다 머릿속으론 붉은 줄을 하나씩 긋고 있겠지?] 애비는 미소지었다. [그런 것과 비슷해요] 그의 주름이 깊어졌다. 곧 덱이 도착했고, 콜리어 보안관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애비는 보안관의 인사를 불안한 미소로 답한 다음, 재빨리 글래디스 가게의 숙녀용 화장실로 몸을 피했다. 그녀가 돌아왔을 즈음에는 이미 경주를 시작할 시간이 되어 있었다. 6 [속도는?] 애비는 계기판을 체크했다. [150 km예요] 맬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눈썹이 한껏 치켜올라가 있다. [농담이에요]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 [110 km를 유지하고 있어요. 당신말대로] [우습지도 않군] 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몸을 기울여 직접 주행거리계를 살펴보고는 다시 계산을 시작했다. 방금과 같이 가끔씩 던지는 그런 질문을 제외하고는, 경주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그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뭘 하고 있어요? 연료 소모를 측정하고 있는 거예요?] 부드러운 그의 웅얼거림을 그녀는 긍정의 뜻으로 받아 들였다. 그는 이미 계산에 빠져들어간 듯했고, 더 이상 질문으로 그의 주의를 흐트려서는 안될 것 같다. 그녀는 낮게 한숨을 내쉬고 지겨운 침묵속으로 빠져들었다. 주 경계를 넘는 고속도로는 곧고 탄탄하게 뻗어 있었다. 차량의 왕래도 뜸했다. 그것은 운전하는 데 그리 대단한 집중력이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네 개의 바퀴를 지면에 붙이고 시속 100km의 유유자적한 속도를 유지하는 것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정말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경주람. 저만치 앞서가던 세이블은 이미 까마득한 흰 점이 되어 지평선 위로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쯤이면 토니와 록산은 세인트 루이스까지의 거의 반은 가 있을 것이다. 맬은 여전히 그의 계산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잘 돼가나요?] 차가 오클라호마의 경계선상에 들어서자 애비는 용기를 내어 물어 보았다. 맬이 흘끗 초조한 눈길을 던졌다. [뭐라구?] [어떻게 돼가는 지 물었어요. 연료 소모 말이에요. 주유소가 어디 있는지 눈여겨봐야 하나요?] 맬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기울여 그녀의 눈앞에 있는 연료 계기판을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애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도 계기판을 읽을 줄은 알아요. 하지만 바늘이 고장난 게 틀림없어요. 우리가 출발한 뒤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단 말이에요] [계기판에는 전혀 이상이 없소] 기울였던 몸을 일으키면서 그가 중얼거렸다. [틀림없어요? 바늘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데도요?] 맬이 계산에 집중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험상궂은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어젯밤 내가 직접 모든 계기와 전자 장치를 점검했소. 맹세하지만, 지금 계기판은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다구. 그러니 제발 입을 다물고 내가 이 계산을 마저 끝낼 수 있게 해주겠소?] 다음 12 km 동안 애비는 그의 말을 되새기며 차를 몰았다. 계기판의 바늘이 고장난 게 아니라면, 맬이 정말 바람을 타고 달리는 차를 만들어낸 게 틀림없어. 틈만 나면 계기판으로 시선을 떨구던 애비는 마침내 바늘이 오른쪽으로 0.1 cm 쯤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과연 고장난 건 아니었군. 가만있자, 그럼 얼마 만큼의 가솔린이 소모된 거지? 1갤런(액체 용적의 단위)? 틀림없이 그 이상은 아니야. 곧 지겹던 기분이 싹 가시고 온몸이 흥분으로 들끓기 시자했다. 승자는 경주 도중 연료를 덜 소모하고 기계 고장이 적은 차가 될거라고 했다. 만약 록산이 만든 엔진 역시 이 정도로 연료가 절약된다면... 그들이 조플린을 지나치는 첫 출구에 도착할 즈음에 이르자, 그녀의 호기심은 마침내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어쨌든 두 번째 출구를 지나는 순간까지는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다. [지금 조플린을 지나고 있어요] 그의 주의를 돌릴 만큼 큰소리로 말했다. 맬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벌써?] [출발한 지 1시간 30분이 넘었어요. 계산은 끝났나요?] [지금으로선] 계산기를 스포츠백 속에 집어넣으며 그가 말했다. 저리는 근육을 풀기 위해 그가 목뒤에서 손가락을 깍지껴 등을 쭉 폈다. 그의 가슴 위로 팽팽히 당겨지는 셔츠를 흘끗 훔쳐보던 애비는 안전을 위해서 눈앞의 도로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속도를 올려도 된다는 뜻인가요?] 기대에 찬 목소리로 애비는 물었다. [난 온전한 몸으로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소, 애비]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월요일 정오까지라면 더욱 좋겠죠] [좋아. 130 km 까지는 괜찮겠지. 하지만 레이다 탐지기가 신호를 보내면...] [알아요, 알아] 애비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경찰이 쫓아오기 전에 속도를 130 km로 늦추란 말이죠?] 속도계의 바늘이 130 km를 가리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가 그녀는 입을 열었다. [내 생각으론 우리가 갤런 당 100에서 110 km 사이를 가고 있는 것 같아요] 맬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물론 이건 어림 짐작에 지나지 않는 거지만요. 얼마나 가깝죠?] [충분히 가까워] 그가 왼팔을 시트의 등받이 뒤로 돌리며 그녀를 마주보았다. [얼마나 연료를 썼는지 알기 전까진 정확한 수치를 말하긴 어렵겠지만, 내 계획대로라면 갤런당 107 km는 달릴 수 있어야 하오] [대단하군요!] 애비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뭐 그렇지도 않아. 정비공이라면 누구라도 다할 수 있는 일이지] [이봐요, 너무 그러지 말아요. 그땐 정말 주유소에서 막 낮일을 끝내고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구요] [당신은 막 밤일을 시작하려는 여자처럼 보였었고] 그녀는 기겁하여 소리를 질렀다. [방금 뭐라고 한 거예요?] [눈꺼풀에 온통 보라색 칠을 한 여자가 속이 훤히 비치는 블라우스를 입고 술집 안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고 했을 뿐이오] [이 블라우스는 속이 비치지 않아요!] 그렇게 소리치며 애비는 확인하기 위해 재빨리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난 어슬렁거리지도 않았어요. 그저 술 한잔 마시면서 내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뿐이라구요] [남의 말을 엿들으면서 말이지] [글쎄요...] [그리고 내가 경주에 관해 얘기하는 걸 듣자마자 당신은 운전사역을 자청하며 곧장 내 자리로 건너온 거라구] [하지만 난 어슬렁거리지는 않았어요] [아니. 틀림없이 당신은 그랬소] 그가 우겼다. [당신에게 접근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왠지 그 사실을 분명히 해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언제 당신이 그랬다고 했지?] [글쎄요. 하지만 당신은 꼭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잖아요] [적어도 의식적인 건 아니었소] 그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담겨 있다. 애비는 입을 열려다 혀끝까지 나온 한마디를 꿀꺽 삼켜 버렸다. 갑자기 그가 질문을 피하기 위해 고의로 화제를 바꾼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당신의 메시지,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녀는 싸늘하게 말했다. [알겠다구?] 웃음 띈 목소리에 약간 당혹한 기색이 섞여 있다. [아주 확실히요] 맬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동안 말없이 그녀의 옆모습만 살피고 있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받았다는 그 메시지가 내가 보낸 것하곤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가 중얼거렸다. [당신을 화나게 하려던 건 아니었소] 애비는 일부러 놀란 체 했다. [오! 알겠어요. 내 옷이 어떠니, 내 화장이 어떠니, 이렇게 조롱하는 것이 당신의 칭찬하는 방법이었군요. 정말 감탄했어요, 당신 심술엔] [빌어먹을! 난 농담한 것뿐이오] 애비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제발 그만 좀 해둬요. 어쨌든 상관없는 일이에요] [뭐가 상관이 없다는 거요!] 맬이 고함쳤다. 그 격렬함에 애비는 적잖이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당신이 내 질문을 따돌리려 했다는 건 우리 둘 다 알고 있어요. 말한 대로, 당신의 뜻은 잘 알아들었어요. 당신의 소중한 일급 비밀인 엔진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죠] 긴장된 침묵 속에서 맬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내가 심술궂다고?] 그가 씁쓸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알려 주겠는데, 애비게일 프루던스, 또다시 당신은 너무 결론을 서둘렀소... 게다가 무척 잘못된 쪽으로] 순간적으로 애비는 자신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이라도 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녀는 흘끗 그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나를 믿지 않는 거겠지, 그렇잖소?] 그가 물었다. 물론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면전에다 대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일이라 대신 외교적인 전술을 택했다. [그만 잊어버리기로 하죠. 결국 당신은 나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만약 내가 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아마...] [뭘 알고 싶은 거요?] 느닷없이 그가 물었다. [당신이 내게 말하는 걸 모두 팔아 버릴지도...] [더이상 신경쓰지 마요. 내가 만든 부품과 그 용도를 설명해 버리는 게 훨씬 간단할 것 같으니까]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애비는 그 방대한 양의 정보를 소화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가끔씩 간단한 질문을 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의 설명을 다시 요구하면서 그녀는 나중에 타자기 앞에 앉았을 때 이 내용의 10분의 1이라도 기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가 애비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쳤을 즈음, 셀비는 이미 조플린과 세인트 루이스 사이의 거리를 반 이상이나 와 있었다. 맬이 계산기를 꺼내 계기판들을 체크해 보고는 현재 갤런 당 평균 110 km을 가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이해가 가지 않아 그녀는 맬에게 물었다. 현재 속도는 맬이 먼저 번 계산을 마쳤을 때보다 시속 20 km 가 더 빠르다. 그렇다면 갤런 당 수치는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낮아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방금 설명했잖소] 기가 찬 듯 그가 목소리의 통을 높였다. [내 목적은 연료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있다고. 우리가 빨리 달릴수록 엔진은 연료를 덜 소모하게 되는 거요] 한동안 들을 수 없었던 가시돋친 목소리였다. 애비는 그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과연 그 목소리와 어울리는 표정이다. [도로에서 눈을 떼지 마요, 제발!] 그가 으르렁거렸다. [당신 심통이 났군요]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투로 그녀가 물었다. 애비는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그를 쳐다보았다. 이런! 모자를 눈썹 아래까지 깊숙이 눌러쓰고 팔짱을 낀 채 그는 시트에 몸을 파묻고 있다. [질문을 조금 바꾸도록 하죠] 그녀는 중얼거렸다. [왜 토라진 거예요?] 그가 험악한 어조로 대꾸했다. [성숙한 남자는 토라지지 않소] [성숙한 남자라면 이웃 술집을 때려부술 정도로 술을 마시지도 않죠] 말이 입밖으로 튀어나온 순간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애비는 그가 화를 내며 래미의 술집에서 있었던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물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느 할 일 없는 작자요?] 원망스러운 어투긴 하지만 화난 것 같지는 않다. [사실이었군요, 그럼?] 그녀가 물었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 그가 중얼거렸다. [래미의 가게를 엉망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물건에 손을 대기 전에 그에게 백지 수표를 줬으니까] [대단히 성숙한 행동이었군요] 애비는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거울을 모두 내리고, 술병들을 뒷방으로 옮길 때까지 기다려 주기까지 했지. 그리고 소문과는 달리 난 취하지 않았었소] 그가 화난 어조로 덧붙였다. [빌어먹을, 겨우 맥주 두 잔 마신 것뿐이었는데. 그땐 어디 분을 풀 장소가 필요했고, 래미의 가게가 가장 마땅한 장소처럼 보였거든] 왜 분을 풀 장소가 필요했는지 그건 잠시 뒤에 물어 보기로 하고... [하지만 당신이 가게를 부수기 전에 값을 지불했고, 래미도 그걸 반대하지 않았다면, 왜 콜리어 보안관이 당신을 유치장으로 끌고간 거죠?] 그가 당혹스런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12살 때 나무에서 떨어져 팔뼈를 두 동강 냈다는 얘기도 들었소?] 애비는 급히 웃음을 삼켰다. [아뇨] [그럼, 메리 엘리스의 아버지가 닭장 뒤에서 그의 딸이 내게 섹스의 즐거움을 가르치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얘기는 어때?] 애비는 기가 차서 한동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것 역시 내가 놓쳐 버린 일화 중의 하나 같군요. 실례되지 않는다면 그 때 당신과 메리 엘리스가 몇 살이었는지 물어도 되겠어요?] [14살이었지. 그녀는 거의 18살이 되어 가고 있었고] 애비는 구태여 놀람을 숨기지 않았다. [조숙한 꼬마 악마였군요, 당신은!] [언제나 그랬지]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당신은 몇 살이었소?] 잠시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녀는 차라리 묻는게 낫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뭐가 몇 살이었냐는 거예요?] [당신이 처음으로 섹스를 경험한 게 몇 살이었느냐구?]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두 팔의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관능적인 울림을 띠며 가라앉았다. [약간 개인적인 질문 같군요. 그렇지 않나요?] [지극히 개인적이지. 몇 살이었소?] 대답하지 말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녀가 물었을 때 그가 솔직하게 대답해줬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스물 셋이요] [스물 셋이라구?]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믿지 못하겠다는 어투다. [날 놀리는 거요?] 애비는 뺨이 뜨거워진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가 자리에서 윗몸을 일으키며 모자를 뒤로 젖혔다. [이해할 수가 없군. 군기지에서 자랐다고 했잖소. 당신 부모님들은 당신을 다락에다 가둬 놓고 키웠단 말이요?] [물론 아니에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내 부모님들은 아주 훌륭한 분들이세요] 그가 몸을 가까이 기울이며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전투용 페인트 칠 아래의 피부는 아기 살갗만큼이나 부드럽다, 이말이지] [그래서 불만이에요?] 그녀는 불같이 쏘아붙였다. [미안하오] 자리로 되돌아가면서 그가 말했다. [칭찬으로 한 말이요] 하지만 그 정도에서 물러설 애비가 아니다. [아니, 잠깐. 내가 무슨 괴물이라도 되는 듯한 말투군요. 23살까지 처녀였다는 게 법에 걸리는 일이라도 되나요?]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을 거요. 당신이 22살이었을 때 내가 당신을 만났더라면 말이오]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애비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손으로 그의 목을 졸라 버렸을 것이다. [당신 질문에는 대답했어요] 애비는 가능한 한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화제를 바꿔도 되겠죠?] 그는 다시 모자를 눌러쓰며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감춰 버렸다. [난 이 화제를 위해 준비운동한 것뿐인걸] 애비는 백미러를 한번 살펴본 뒤, 매끄럽게 차선을 바꿔 트레일러를 달고 있는 스테이션 왜건을 앞질러갔다. [당신은 50만 달러짜리 셀비를 시속 130 km로 몰고 있는 라 이런 식으로 자꾸 약을 올리고도 안전할 거라고 생각해요?] 차가 오른쪽 차선으로 들어서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입을 열었다. [쯧쯧, 그건 당신이 받아들이기 나름이지] [무슨 뜻이에요, 그건?] [정확히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요. 당신은 내가 어떤 뜻으로 얘기를 하건간에 이미 화를 내기로 작정하고 있는 사람이잖소. 내가 만났던 여자들 중에 가장 심술궂고 싸우기를 좋아하는 여자요, 당신은] [그것도 맬 개럿 식의 칭찬인가요?] 애비가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그가 소리내어 웃었다. [예측 불허라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이제 그만... 휴전하겠소?]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제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당신의 휴전 상황ㅇ이 어떤 건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차라리 실전 태세로 있겠어요. 그럼 적어도 당신에게서 뭘 기대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거든요] 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는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세인트 루이스까지 70km 남았음을 알리는 교통 표지판이 차창 밖으로 지나쳐갔다. 그가 언제 어디서 차를 멈출 계획인지 애비는 알 수 없었다. 로저에게 전화할 기회가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지금쯤 그는 애비의 전화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세인트 루이스에 도착하기 전에 차를 멈출 생각인지, 아니면 미시시피를 지나 일리노이로 들어간 후에 멈출 생각인지 맬에게 막 물으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계기판 위에 올려놓은 레이다 탐지기가 야단스럽게 삑삑거리기 시작했다. 애비는 즉각 속도를 110km로 떨어뜨렸다. 맬이 앞으로 다가앉아, 앞서가는 차들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순찰차를 봤소?] [아뇨. 하지만 분명히 가까이 있을 거예요. 반대편 차선으로 지나간 트럭 하나가 전조등을 깜빡였어요. 그런데 미주리에선 탐지기 소지가 불법 아닌가요?] [나도 몰라요] 만약을 위해 맬이 막 네 번째 신호음을 보내기 시작한 탐지기를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속도는?] 탐지기의 소리를 죽이면서 그가 물었다. [제한 속도를 넘었어요, 이 속도계가 정확하다면요] [물론 정확하지]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순찰차의 계기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속도를 100km 정도로 줄이는 게 좋겠소. 만약 순찰차가 눈에 띄면... 이야! 이거 정말 믿을 수가 없군!] 갑작스런 그의 외침에 애비는 깜짝 놀랐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속도를 더 떨어뜨렸다. [뭐죠?] [저기 앞 좀 봐! 고가도로 저쪽 말이요!] 신이 나는 듯 그가 웃으며 주먹으로 계기판을 두드렸다. [정말 믿을 수가 없어!] 속도를 90km 까지 낮추고 주위를 둘러보던 애비는 드디어 맬을 그처럼 신나게 만든 주인공을 발견했다. 환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가득히 번졌다. 위협적으로 버티고 선 순찰차 두 대가 정차선 위에 흰색의 머큐리 세이블 한 대를 잡아놓고 있었다. 아마도 속도 위반으로 딱지를 떼고 있는 모양이다. 얼굴을 있는 대로 다 찌푸린 채 경찰이 어서 일을 끝내기만을 기다리고 서 있는 남자는 다름아닌 토니 페리스였다. 지나쳐가면서 맬은 요란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당신을 본 것 같아요?] 세이블을 뒤로 하면서 애비가 물었다. [오, 물론이지. 그녀석 공공연히 음란한 제스처를 했다는 이유로 딱지를 하나 더 떼일지도 몰라] 그녀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우리를 훨씬 앞질러 있을 줄 알았어요. 속도 위반으로 붙들린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닐지도 몰라요] [토니의 성격을 생각하면, 겨우 두 세 번째라는 게 더 놀랄 일이지. 그들을 따라잡은 이유가 그들이 어디선가 차를 멈췄기 때문이라면 좋겠소] [연료를 사야 했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엔진을 수리할 필요가 있었다든지] 그가 레이다 탐지기를 다시 계기판 위에 올려놓고 스위치를 켰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좋아, 이젠 130km 까지 속도를 올려도 안전할 거요] [140km는 어때요?] 애비가 제안했다. [세인트 루이스에 도착할 때까지 만이라두요] [그건 제한 속도에서 시속 40km나 빠른 거요, 애비] [그래서요? 뒤따라오는 토니가 제한 속도를 지킬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에게 여유가 있을 때 간격을 벌려 놓는게 좋아요] 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향해 흘끗 시선을 돌렸다. 그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다. [뭐가 잘못됐어요? 우리가 빨리 달릴수록 연료는 더 적게 든다고 당신이 말했잖아요. 그걸 이용하지 말란 법은 없을 텐데요] 겨우 선두를 차지한 지금 다시 뺏기고 싶지 않다. 결국, 이건 그의 인생이 걸린 내기가 아닌가. [당신 정말로 이기고 싶은 거로군, 그렇지?] 질문보다도 그 놀란 듯한 어조가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이겨야 하는 것 아닌가요?] [물론이오, 하지만...] 그는 여느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고 있는 듯했다. [내 말에 화내지는 말아요. 월요일까지 워싱턴에 도착할 수 만 있다면, 이 경주에서 누가 이기건 당신에겐 별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소] 바보스럽게도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셀비의 엔진을 어떻게 고쳤는지를 알게 된 후로 아마 천성적인 투쟁심이 고개를 들었나 봐요] [천성적인 투쟁심이라] 그가 근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요. 난 지고 싶지 않아요] 지난 24시간 동안 자신이 한 말 중에 가장 거짓이 없는 말이었다. 맬이 생각에 잠긴 눈으로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속도를 140km로 올리도록 해요. 당신은 패자가 되기엔 성질이 너무 고약한 것 같소] [맞아요. 5학년 때 철자 시험 결승에서 탈락하고 꼬박 이틀 동안을 울었어요.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않은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없이 화가 났었죠. 그래서 다음해엔 꼭 이겨야 한다고 다짐했었어요] [물론 해냈을 테지] [그럼요. 어젯밤에 말했잖아요. 원하는 것을 발견하면 끝까지 뒤쫓는다고.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이 이 내기에서 이기는 거예요] [왜지?] 난데없는 질문에 그녀는 순간 당황했다. 비록 아무렇지 않게 나온 한마디였지만, 그 대답이 그에겐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대로 말해요, 애비] 그는 진실을 원하고 있고, 진실을 들을 자격이 있다. 사실 그 대답은 힘들여 찾을 필요조차 없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맬러키 개럿의 유별난 엔진에 대한 독점기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대답이긴 하지만. [난 당신이 록산 윈스턴의 손아귀로 떨어지는 꼴만은 보고 싶지 않아요] 능글맞은 미소를 기대하며 애비는 오른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마음이 혼란해질 정도로 따뜻한 미소다. 애비는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 침을 삼키려 했지만 입안이 너무 말라 있다. [난 솔직한 여자가 좋소]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유혹하는 듯한 도발적인 울림이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 [다른 뜻으로 해석하지 말아요, 개럿] 그녀가 경고했다. [우리가 약속한 걸 벌써 잊었나요?] 숨죽인 그의 낮은 웃음소리에 발끝까지 전율이 흘렀다. [불안한 것처럼 들리는데, 애비. 내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봐 두려운 거요..., 아니면 지킬까 봐 두려운 거요?] [그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대답하지 않아도 좋소. 내가 당신에 관해 하나 배운 게 있다면, 달링. 당신에게선 전혀 예상 밖의 반응을 기대해야 한다는 거니까] 애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그녀는 그 달링이라는 한마디에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져 버린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7 그들은 세인트 루이스의 남서쪽에 위치한 웹스터 그로브의 한 주유소에서 차를 세웠다. 즉시 맬은 셀비의 트렁크에서 공구 상자를 꺼내 작업을 시작했고, 애비는 한쪽에 비켜 서서 몇 분 동안 그를 지켜보았다. [내가 도울 만한 일이 있어요?] 올려다보지도 않고 그가 대답했다. [아니... 어쨌든 고마워. 몇 가지 체크하기만 하면 돼. 얼른 끝내고 식당에서 뭘 좀 먹도록 하지] 주위를 둘러보니 멀지 않은 곳에 공중전화 박스가 보였다. [그럼 그동안에 난 전화 한 통만 할께요] 그제서야 맬이 고개를 들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미소로 그의 입술이 약간 일그러져 있다. 하지만 곧 그는 시선을 돌리고 작업을 계속했다. [래리에게 안부나 전해 줘] 애비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래리라뇨?] [당신 남자친구] 그가 친절하게 상기시켜 주었다. [당신을 남겨 두고 떠나 버린 그 남자. 벌써 잊었소?] [오, 래리!] 놀랍게도 그녀의 목소리는 비교적 침착하게 나왔다. [아뇨. 내 말은 전화를 걸려는 남자가 그가 아니란 뜻이에요. 내 고용주인 의사에게 전화를 해놓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애비는 그에게 다른 질문을 할 기회를 주지 않고, 가장 가까운 공중전화 박스를 향해 바삐 걸어갔다. 다행히 로저는 아직 사무실에 있었다. [애비! 도대체 어디 있는 거요? 경주가 계속되고 있긴 한 거요?] [그래요] 애비는 순순히 대답했다. [세인트 루이스에서 몇 킬로 떨어진 곳에 와 있어요. 뭐가 잘못된 거라도 있어요, 로저? 평소보다 더 흥분한 것 같군요] 그의 힘찬 웃음소리가 전화선을 진동시켰다. [아니, 아무 문제도 없어요. 오히려 그 반대지. 어제 전화를 끊고 나서야 국회에서 내주에 대체연료와 연료 절약형 엔진에 관한 청문회가 열린다는 사실이 기억나지 않았겠어?] 갑자기 싸늘한 기운이 애비의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뭐라구요?] 그녀는 힘없이 되물었다. 로저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다. [당신이 처음 경주 얘기를 꺼냈을 때 왜 그걸 기억해내지 못했는지, 참. 차 두 대 모두 실험 엔진을 달고 있다고 했지?] [그래요] 애비는 중얼거렸다. [연료 절약형 실험 엔진이죠. 이번이 그들의 첫 번째 주행 테스트예요] [아주 좋아!] 로저가 흡족한 듯이 소리쳤다 [누군가 청문회와 시기를 맞추려고 한 것 같군] 애비는 쓰러질 듯 전화대에 기대섰다. [그런 것 같아요] 그녀는 다른 엔진을 제작한 사람은 록산 윈스턴이며, 그녀가 어떤 식으로 경주에 관한 정보를 워싱턴의 편집자에게 넘기려 했었는가를 그에게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개럿이 지독하게 화를 내더군요] 그녀는 덧붙였다. [록산이 그 편집자에게 경주가 취소되었다고 전화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모든 걸 취소해 버렸을 거예요] [오, 이런!] 김이 빠진 듯 그가 중얼거렸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거지?] [프라이팬과 화덕 사이에 놓여 있는 거죠] 애비는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는 틀림없이 내가 청문회에 관해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의 귀중한 엔진에 관한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 말이에요. 날 죽이려 들지도 몰라요] [이 기사를 백지화할 생각은 하지 말아요, 애비] 로저가 경고했다. [당신은 약속했고, 난 그 약속을 지키게 할 작정이오. 지금 와서 물러선다면 그건 지독히 직업의식이 부족한 처사라고밖에 할 수가 없어. 만약 당신이...] [날 협박하는 거예요, 지금?] 그녀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 기사는 틀림없이 건네줄 테니까 걱정 말아요] 가능한 한 자주 연락하라는 그의 말에 노력해 보겠다고 대답하고 그녀는 꽝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뭘 한다고?] 놀란 그녀는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뒤돌아섰다. 맬이 낡은 티셔츠에 기름 묻은 손을 닦으며 전화 박스 입구를 가로막고 서 있다. [인디언 피가 섞이기라도 했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의사에겐 연락했어?] [저... 아뇨. 사무실 아니 병원에 없었어요. 다시 전화를 하겠다고 말해 놨어요. 체크는 끝났어요? 이제 뭘 좀 먹어도 되겠죠?} [배고파?] 맬이 기름때가 묻은 셔츠를 어깨에 걸치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레스토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침에 많이 먹어 두라고 했잖아] 주차장을 반쯤 벗어나서야 애비는 그가 평소의 큰 보폭을 줄이고, 그녀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 남자는 재미있고 매력적이며 소름 끼칠 정도로 섹시할 뿐만 아니라, 따뜻하고 자상한 성품까지 지닌 모양이다. 그녀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그때가 되면 경멸과 혐오에 찬 그의 시선을 견뎌낼 수 있을까? 만약 그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훨씬 견디기가 쉬울텐데. 30분 후 그들은 세인트 루이스로 가는 주 경계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허겁지겁 삼켰던 로스트 비프가 돌멩이처럼 단단하게 애비의 위장을 누르고 있다. [뭣 때문에 그렇게 빨리 식사를 끝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여유있는 식사를 즐기면 어디가 덧나나요?] [한 시간이면 일리노이를 반은 갈 수 있어. 이 경주에서 이기고 싶어하는 줄 알았는데?] [물론, 이기고 싶어요. 하지만 적어도 음식을 삼키기 전에 우선 제대로 씹고 싶다구요] 즐거운 듯이 그가 쿡쿡거렸다. 다음 순간 갑자기 그가 손을 뻗쳐 턱을 가볍게 쓰다듬는 바람에 애비는 기겁하여 하마터면 옆 차선을 달리고 있던 거대한 트럭의 옆구리에 셀비를 쑤셔박을 뻔했다. [개럿!] 그녀는 정신없이 소리쳤다. [미안해] 그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쉽게 흥분하는 체질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정말이겠죠?] [그래. 적어도... 당신이 운전할 동안은] 애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맬이 능청맞은 미소를 띄우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내 말을 잘 들어요, 개럿...] 언뜻 차창 밖을 스쳐지나가는 표지판을 보고 그녀는 말을 끊었다. [저게 무슨 표지판이죠?] [뭐가?] [방금 지나친 것 말예요] [글세, 난 못 봤어. 아마...<공항으로 가려면 72국도를 택하시오> 뭐 그런 거겠지. 그런 표지판이 수십 개나 지나갔어] 애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표지판은 초록색도, 사각형도 아니었어요. 다이아몬드 형의 오렌지 색이었다구요. 도로가 공사중이거나 전방에 우회차선이 있을 때 세워 놓는 것 말이에요. 지도를 보는 게 좋겠어요] 20분 후, 맬은 무릎에 펴놓은 지도 위로 몸을 구부리고, 거미줄처럼 얽히 고속도로와 간선도로의 연결을 해독하느라 오만상을 찌푸렸다. [어때요? 우리가 어디 있는 지 알아냈어요?] [잘 모르겠어. 아까 그 첫 번째 우회도로에서 북쪽으로 가야 했던 것 같아] [그건 20 km 전이잖아요! 왜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 땐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섰다는 걸 몰랐었잖아] 그가 머쓱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분명히 그 입으로 남쪽으로 가라고 말했어요!] [미안해! 미안하다구!] 그가 으르렁거렸다. 애비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뭐든지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아 그녀는 되는 대로 입을 열었다. [길에 차가 너무 많지 않아요?] 맬이 나직이 헛기침을 했다. [그건... 두 번째 우회차선에서 트럭 전용도로로 들어섰기 때문이야] [뭐라구요?]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 길은 곧장 멤피스로 향하고 있을 거야. 빌어먹을! 의지할 게 표지판들 밖에 없다니] 남자들의 융통성에 한계를 느끼며 그녀는 속도를 떨어뜨렸다. [틀렸어요, 아인슈타인. 누구에겐가 물어 보는 방법도 있죠] 애비는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진 틈을 타 주위를 둘러보았다. 운좋게도 채 반 블록이 떨어지지 않은 곳에 소방서가 눈에 띄었다. [왜 여기서 서는 거야?] 붉은 건물 앞에서 애비가 차를 멈추자 맬이 찌푸리며 물었다. [소방대원이라면 그 마을 주위의 도로 사정엔 누구보다도 훤할 거예요. 지도를 갖고 와요] 소방대원들은 모두가 친절했고, 특히 셀비를 보고 난 후에는 아주 열성적으로 그들을 도와 주었다. 몇 분 후, 그들은 세인트 루이스 시내를 가로질러 동부 155 도로로 나가고 있었다. 주 경계선을 벗어나 미시시피주로 들어선 다음에야 애비는 긴장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즈빌로 이어진 164 국도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오른쪽 차창 밖으로 지나갔다. [할렐루야! 다음번 생일을 세인트 루이스에서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던 참이야]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방서에 들른 건 꽤 괜찮은 생각이었어] 잠시 후 그가 말했다 [나라면 절대로 그런 생각을 못했을 거야] [그건 확실하죠] 애비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비아냥거릴 필요까진 없잖아] [미안해요] 그녀 자신에게도 전혀 진지하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우린 겨우 45분 정도 지연됐을 뿐이야! 그건 여기서 루이즈빌로 가는 동안에라도 보충할 수 있다구] 그가 신경질을 내자 당연히 그녀는 화가 났다. [그래요, 45분쯤은 쉽게 보충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천천히 저녁식사를 즐길 수도 있었을 거라구요] [좋아. 내가 엄청난 실수를 했어. 인정해. 이젠 됐어? 그게 당신이 듣고 싶었던 말이야?] [한 시간이면 일리노이 반은 갈 수 있어] 애비는 남부 사투리를 흉내내어 그의 말을 인용했다. [세상에! 무슨 여자 심보가 그렇게 고약해?] 분노로 애비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토니와 자리를 바꿔 앉고 싶다면 그렇다고 말만해요. 그것도 다시 그를 따라잡게 되는 경우에 한해서지만, 난 상관없어요] [전형적으로 속이 뒤틀린 여자가 할 만한 말이로군] 맬이 경멸스러운 듯이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록시 옆에 있는 걸 더 견디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 그래?] 애비는 놀란 체했다. [당신 말은 그녀가 나보다 더 심술 궂다는 뜻인가요?] [아니, 그 여자 옆에 있으면 당신은 마치 테레사 수녀처럼 보일정도라구] 그 말에 애비는 좀 머쓱해져서 말했다. [항상 그렇게 생각했던 것만은 아닐 텐데요, 그녀에 대해서?] [오, 언제나 난 록시에게 일급 암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었어. 잠시 정신이 나가면 날 물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던 것뿐이야] 그 목소리에는 씁쓸한 기색이 배어 있었다. [당신답지 않은 말이군요]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체하며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사실이야. 결국 그녀로 인해 난 충분한 교훈을 얻은 셈이지]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교훈이 뭐죠?] [바보같이 여자의 성실함을 믿는 남자는 반드시 그 응분의 대가를 받는다는 것. 당신네 여자들은 전부 똑같아... 언제나 최고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자신이 이용당하는 줄도 모를 바보 녀석을 골라 최대한으로 이용해 먹은 다음, 다시 다른 바보를 찾아나서는 거야] 잠시 동안 애비는 그의 짤막한 연설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내 평생 남성 우월주의에 젖은 말도 안되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지만, 방금 당신 입에서 나온 건 정말 완전히 새로운 본보기로군요] [이건 정말 즐거운 저녁시간이 될 것 같군] 그가 기가 찬 듯이 중얼거렸다. [무슨 교훈을 얻었는지 당신이 물었고, 그래서 난 대답했어. 만약 그 대답을 득고 싶지 않았다면 애초에 묻지 말았어야지] [당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애비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같이 똑똑한 사람이 바보스럽고 무책임한 그런 일반론을 믿을 리가 없어요] [고마워] 그가 고개를 돌리며 지나가는 말처럼 내뱉었다. [겨우 한 여자가 당신을 조금 이용했다는 것뿐이잖아요... 몇 년 전이었어요?] 그가 다시 애비를 쳐다보았다. [3년. 하지만 그 여자는 날 조금 이용한 정도가 아니야. 아예 날 점찍어 놓고 각본을 꾸며서는 완벽하게 이용한 거지. 당시에 난 인공심장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어. 어느 날 그녀는 나 몰래 자료를 빼내 재능은 있지만 턱없이 순진한 한 젊은 의사에게로 간거야. 그리고 인류를 위한 지대한 공헌이라는 말로 그를 유혹해서 그의 도움으로 마지막 손질이 덜 끝난 그 디자인을 완성시켜 보려고 했지. 그런데 운 나쁘게도 그녀석은 대단히 뛰어난 심장전문의긴 했지만, 생체공학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었거든] 충격적인 사실이다. 그가 여자에 대해 그렇게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좋아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록산이 한 짓이 지독했다는 건 인정하죠. 하지만 한번 끔찍한 경험을 했다고 해서 만나는 여자마다 편견을 갖고 대한다는 것은 대단히 비이성적인 사고방식이에요] [나도 내 행동이 이성적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그저 지극히 조심스러울 뿐이지] [믿지 않는다는 거겠죠] 그녀가 정정했다. [좋아, 좋아. 믿지 않는다고 하지] 그가 마지못해 인정했다. 어느새 하늘의 한쪽 귀퉁이가 어두워 오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서 얘기해 봐요] 애비는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누구? 록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가 소리쳤다. [그래요. 록시]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해야 해요. 알잖아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비는 말했다. [3년 동안이나 당신은 록시에 대한 분노를 그런 식으로 가슴속에 묵혀 두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그 상처가 곪아 터지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내겐 이상할 정도예요] [마치 내가 무슨 걸어다니는 종기처럼 얘기하는군] [내 말이 맞다는 건 당신도 알 거예요] 애비는 한사코 우겼다. [어디서 그녀를 만났어요?] {얘기학도 싶지 않다고 했잖아! 그리고 도대체 내가 그녀를 어디서 만났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애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거기가 얘기를 시작하기에 가장 적절한 대목처럼 보여서 말이에요] 일리노이 마운트 버넌에 가까워질 무렵, 애비는 그가 퍼듀 대학에서 기계공학 강의를 맡고 있을 때 록시가 그의 학생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록산 윈스턴은 똑똑했고, 누구보다도 야망이 큰 학생이었다고 그가 말했다. 독립심이 강하고, 공격적일 정도로 목적 지향주의적인 여자. 록시는 그의 아버지 주위를 맴돌던 수많은 여자들과는 완벽하게 다른 여자였고, 그 사실이 그에게 상당히 깊은 인상을 준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오클라호마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그녀와 함께였다. 그리고 록시는 거의 2년 동안을 그곳에서 머물렀다. [헤어지기 몇 달 전부터 록시가 왠지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어] 그가 덧붙여 말했다. [그녀가 떠난 후에야 난 그것이 일종의 경고 신호였다는 것을 알았지] 그가 말을 멈추고 크게 한 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날 떠났다는 것만으로 그녀를 탓하는 건 아냐. 내가 같이 살기 편한 인간도 아니었고, 게다가 그녀에겐 지독히 형편없는 말상대였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날 이용했다는 것만은 용서할 수가 없어] [그녀가 상황을 달리 해석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록산 윈스턴의 편을 들 생각은 없지만,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는 그가 일방적으로 이용만 당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지 않아, 애비. 하지만 방향이 완전히 틀렸어. 그녀가 인공심장에 관한 내 연구에 관여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공동 연구자로서가 아니라 단순한 개인 조수로서였어. 그녀에겐 몰래 디자인을 빼내 마치 자기의 연구 결과인 것처럼 발표할 권리가 없었어. 얼마 되지 않아 그녀가 윌 가의 어느 바보 녀석한테서 사업 자금을 긁어내고 있다는 소식을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어. 그로부터 채 일주일도 못돼서 그 작자와 동거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날아오더군. 그리고 그녀는 사무실을 세우고, 가능성 있는 고객들과 접촉을 시작했어... 대부분이 나로 인해 알게 된 사람들이었지. 처음부터 모든 것이 계산된 행동이었던 거야. 그녀는 내게 접근할 때부터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어] 애비는 갑자기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이다. [바로 그거였군요. 록시는 처음부터 당신을 이용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접근했는데, 당신은 끝까지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다, 당신이 괴로웠던 건 그 때문이었죠?] [당연하지] 그가 분한 듯이 말했다. [여자에게 바보처럼 당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울 남자가 어디 있겠어!] [그건 보통 남자들의 지적 수준이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거예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글세, 난 보통 여자들의 본성이 얼마나 믿을 만하지 못한가를 말해 주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결국 그녀가 당신의 그 위대한 자존심에 정통으로 한 방 먹였다는 것 때문에...] 애비는 자신이 그의 정곡을 찔렀음을 알았다. 그가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처음엔 더 털어놓으라고 박박 긁어대더니...] [난 그러지 않았어요] 애비는 잘라 말했다. [조금 용기를 북돋아 줬을 뿐이죠] 맬은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나로선 말하기 쉽지 않은 부분들까지 몽땅 얘기해 주니까, 고작 한 마디 한다는 게 <그녀가 당신의 그 위대한 자존심에 한 방 먹인 거예요>야? 당신의 깊은 이해력엔 정말 두 손들었어] [솔직해 봐요, 개럿] 메마른 어조로 애비가 말했다. [록산이 상처를 입힌 건 당신의...가슴인가요, 아니면 자존심인가요?] 그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의 몇 초가 흐른 후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책이라도 쓸 건가?]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대답해 줄 거예요?] [이때까지 만난 여자 중에서 가장 고집 세고, 까다롭고, 날 화나게 하는 여자야, 당신은... 말이 많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고] [<목구멍에 걸린 가시 같다>라는 표현을 빼먹었군요]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덧붙였다. 그가 피식 웃었다.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을 작정인가 보죠?] [이미 대답을 알고 있잖아]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가 가장 상처를 입힌 건 내 자존심이었어]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당신 말이 옳아. 얘기할 필요가 있었어. 고마워] [천만에요] 애비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이상의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진지하고 조용한 그의 <고마워>라는 한 마디에 가슴이 후끈해지고, 숨이 막혀와 말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맬이 스포츠백에서 계산기를 꺼내 레이다 탐지기 옆에 올려놓았다. 몇 킬로를 지날 때마다, 그는 계산기를 집어들고 숫자들을 한참 동안 눌러댄 다음 다시 되돌려놓곤 했다. [열량 당 주행거리를 계산하는 거예요?] 일리노이와 인디애나의 경계선을 넘어서면서 애비가 물었다. [응. 지금까지 8갤런 정도의 기름을 소비했다는 계산이 나왔어. 연료계기의 바늘이... 8분의 3정도를 가리키고 있을 거야] 애비는 계기판을 체크했다. [정확해요. 그런데 이 탱크는 앞으로 얼마를 더 달리고 쉴 작정이죠?] 잠시동안 그가 생각했다. [루이즈빌까지는 가야 해] [루이즈빌이라구요! 적어도 160km는 더 가야 하잖아요!] [정확히 190km야. 아직 4갤런 정도는 남아 있으니까 충분해. 이 정도면 상태가 꽤 괜찮은 편이야] [제대로 말해요, 당장. 당신과 차는 상태가 괜찮을지 몰라도 내 목은 이미 판자처럼 뻣뻣해졌고, 등과 어깨는 떨어져 나갈 것같이 아프단 말이에요. 어디 그뿐인 줄 알아요? 오른쪽 다리는 저리고, 엉덩이는 몇 시간 전부터 감각도 없어요] [왜 진작 애기하지 않았어?] 그의 염려스런 목소리가 온몸을 쑤시는 듯한 통증을 어느 정도 가라앉혀 주었다. 다음 순간 그의 왼손이 어깨를 넘어와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애비는 바싹 긴장했다. [도대체 무슨...!] [긴장을 풀어 주려는 것뿐이야] 그가 중얼거렸다. [미안해. 오랫동안 운전을 했으니 근육이 당길 거라는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이제 괜찮아?] [괜찮냐구요? 농담하는 거예요, 지금?] 고개를 똑바로 세우는 간단한 동작조차 힘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고개를 뒤로 젖혀 따뜻한 그의 손바닥에 피곤한 머리를 묻고 쉬고 싶다. [음, 개럿...] 목이 잔뜩 쉬어 있었다. 그녀는 나직이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쉰 목소리는 가라앉지 않았다. [응, 달링?] 애비의 호흡이 중간에서 멈춰 버렸다. 그의 입술이 귓가로 바싹 다가온 것이다. [그만두는 게 좋겠어요] 입술이 귓바퀴를 가볍게 쓸었고, 이윽고 그의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정말이오?] 그의 나직한 속삭임이 살갗을 파고들어와 발끝까지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래요] 애비는 헐떡였다. [당신의 보물을 전신주에다 박아 버려도 좋겠어요?] [고속도로 주변엔 전신주가 없어] 다음 순간 뜨겁게 젖은 그의 혀가 귓속을 더듬고 들어왔다. [개럿!] 애비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진정해] 그가 자리로 돌아가 앉으면서 말했다. [지금부턴 얌전하게 굴겠어.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하지] [죽기로 작정한 거예요?] [천만에] 그가 헛기침을 했다.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러겠어] [한번 직접 차를 몰아 보지 그래요? 시속 130km로 달리고 있는 차안에서 내가 당신 머리카락에다 손을 묻고, 혀로 장난해댄다면 당신 기분이 어떻겠어요?] 맬은 그녀의 반응에 조금 당황한 듯했다. [진정해, 애비. 당신, 잠시 차를 세우는 게 어때? 적어도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만이라도 말이야] [지금 차를 세운다면 루이즈빌까지 남은 길을 당신이 운전해야 할 거예요. 그러고 싶지 않다면 그만 입을 다물고,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잠자코 날 내버려 둬요. 손이나 입술, 아니 어느 부분이 됐건간에 조금도 움직이지 말고 그 쪽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어요. 알아들었어요?] 그로부터 1시간 30분 동안 그는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루이즈빌이 가까워지자 복잡하게 얽힌 인터체인지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2년 전, 친구들과 켄터키 경마를 관전하기 위해 이 부근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헤드라이트가 훑고 지나가는 게시판 중 할리데이 인이라는 호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인터체인지 부근이다. 맬에게 물어 볼까도 생각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녀는 차를 세울 작정이다. 만약 그가 마음 내켜 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그에게 차를 맡기고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 버리는 방법도 있다. [다음 교차로에 할리데이 인이 있어] 느닷없이 그가 말했다. 애비의 입술이 짓궂은 미소로 가볍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우회전 신호를 켰다. 맬이 방을 두 개 예약하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가고 난 뒤, 그녀는 굳은 근육을 푸느라고 주차장 주위를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다는 군] 그가 돌아와서 말했다. [하지만 더블 베드가 두 개 있는 방이래. 괜찮겠어?] 셀비를 사이에 두고 그가 차 지붕 너머로 말을 건넸다. 한참 동안 그녀는 수상쩍은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못 믿겠다면 직접 들어가 지배인에게 물어 보도록 해] 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해따. [나도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구!] [묵겠다고 말해요!] 애비가 쏘아붙였다. [좋아!] 그가 고함을 치고, 발걸음을 돌려 사무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빌딩을 돌아 할당된 곳에 셀비를 완전히 주차시켰을 때에야, 그들은 하얀 세이블이 바로 옆 건물의 주차 구역에 서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애비는 엔진을 끄고 맬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들이에요] 그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어요?] [몰라. 저 타이어에 구멍이라도 낼 생각이야?] [아뇨. 저들의 눈에 띄기 전에 차를 돌리는 거예요. 내일 아침쯤이면 저들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앞서 있을 수 있어요] 그의 입가가 미소로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당신은 9시간이나 운전을 했어. 쉬어야 해] [정말 필요한 건 뜨거운 목욕과 저녁식사뿐이에요. 그것만 끝나면 난 다시 달릴 수 있어요] 고개를 흔들며 그가 손을 뻗쳐 키를 빼냈다. [거기다 몇 시간의 수면도 덧붙여야 할 것 같은데] 문을 나서면서 그가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폭탄 같은 존재가 될거야] 그가 파란색 스포츠 백과 그녀의 옷가방, 자신을 위해 가져온 배낭 하나를 챙겨들고 문을 닫았다. 애비는 준비가 되는 대로 다시 운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확신시킬 방법을 궁리하면서 잰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문을 열자 기분 좋을 정도로 찬 공기가 애비를 반겨 주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작은 옷장 앞에 짐을 내려놓고 달아서는 맬의 눈에 때마침 침대 위로 무너져내리는 애비의 모습이 들어왔다. [음... 당신 말대로 잠깐 눈을 붙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반듯하게 펴진 조각 이불 위에 얼굴을 묻고 그녀가 웅얼거렸다. [죽어서 천국에라도 온 기분이에요] 매트리스가 꺼지는 듯하더니, 뒷목덜미에 와닿는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불쌍한 내 아기] 그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지 그녀가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그가 몸을 일으켜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심술궂다고 놀려서 미안해] 천천히 애비의 등으로 손을 미끄러뜨리면서 그가 말했다. 실크 블라우스가 그이 손가락 밑에서 바스락거렸다. 애비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1,2분쯤 후엔 맬에게 그 합의 사항을 상기시켜야지... 5분, 아니 20분쯤 후에. 그의 손이 허리에 이르러 살며시 블라우스 자락을 잡아당겼다. [뭘 하는 거예요?] 졸린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맬의 한 손이 매트리스와 그녀의 아랫배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옷을 입고 목욕을 할 수는 없잖아] 그건 그래. 틀린 말은 아냐. [아주 사려가 깊군요] 그녀는 톡 쏘아붙였다. [전형적인 남성 우월론자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매트리스가 흔들리더니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의 따뜻한 입김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돌아 누워. 내가 얼마나 사려깊은 남자가 될 수 있는지 보여 줄 테니까] 애비는 고개를 흔들었다. 맬의 왼손이 블라우스 자락 아래로 기어들어와 허리를 쓸어올리기 시작했다. [무서워?] 그가 나직이 물었다. 애비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요] 그의 집게손가락이 가슴의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천천히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래요. 아, 아뇨] 마비된 온몸의 감각이 갑자기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나 자신이 무서워요] 그의 손가락이 흥분으로 딱딱해진 그녀의 젖꼭지를 향해 거슬러올라오고 있다. [오, 맬, 당신 약속...] 그녀의 목소리는 중간에서 끊겨 버렸다. 어느 순간엔가 블라우스 자락 안으로 들어온 그의 두 손이 가슴을 감싸 쥐었던 것이다. 그가 몸을 겹치면서 육중한 무게로 그녀의 몸을 압박해 왔다. [내가 무서워?] 그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그래요] 애비는 숨을 헐떡였다. [거짓말쟁이] 그가 목선을 따라 키스를 퍼부으며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질책했다. 그의 이빨이 가볍게 귓불을 물었다. 곧 용서를 빌기라도 하듯 그의 혀가 상냥하게 귓바퀴를 쓸었다. [느낄 수 있겠어?] 그녀는 손가락으로 침대의 시트를 꽉 움켜쥐고, 그의 관능적인 움직임에 반응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하루종일 이런 상태였어] 그가 거친 목소리로 내뱉었다. [마지막 500 km 동안은 당신을 만지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지. 당신 쪽으로 손을 뻗지 않기 위해선 그 빌어먹을 계산기라도 두드려대는 수밖에] 그가 말을 멈추고 고르지 못한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이 목이 굳었다고 말했을 때... 난 그저 당신의 긴장이 풀릴 때까지 주물러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맹세해. 하지만 당신 몸에 손이 닿은 순간... 그때부턴 나 자신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애비는 완벽하게 그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을 갖고 싶어!] 그가 절망적으로 신음했다. [알아요] 그녀는 가라앉은 어조로 속삭였다. [나 역시 당신을 원해요] 순간 단단하게 팽창한 맬의 가슴이 그녀의 등을 압박해 왔다. [기분 괜찮은데] 여지없이 감각을 어지럽히는 그 따뜻하고 달콤한 어조로 그가 중얼거렸다. [내가 당신이 제일 혐오하는 10대 남성 우월론자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고 걱정했었어] 애비는 미소지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당신은 그중 첫 번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을 혐오한다고 쉴 새없이 떠들어대던 그때도 난 여전히 당신을 갖고 싶었어요] 그가 머리카락에 뺨을 비비면서 두 팔로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웃음섞인 낮은 소리로 그가 신음했다. [제발, 애비! 당신은 지금 남자가 도저히 점잖게 행동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구] [이게 점잖은 행동이란 거예요?] 그녀는 코웃음쳤다. [뜨거운 목욕과 편안한 휴식을 미끼로 호텔 방으로 유인해서는,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행동하는 게 말인가요?] 그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믿어, 애비. 실제로 내가 하고 싶은 무례한 행동을 생각해 보면... 난 지금 상당한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는 거라구] [날 안을 생각은 아니겠죠?] 그녀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그럴 생각이야] 코로 그녀의 귀를 비벼대며 그가 말했다. [하지만 오늘 밤은 아냐] [왜요?] [정신없는 단 한번의 사랑으로 끝내고 싶지 않아서지. 당신을 안을 땐 해가 져서 다시 뜰 때까지 사랑할 거야. 그리고 그때는 당신도 열정적인 파트너가 돼줘야 해] [당신과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군요] 맬이 그녀의 관자놀이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하지만 당신을 그러지 않을 거야, 유감스럽지만] [그래요] 그녀는 미소를 띄우며 동의했다. [틀림없이 근사할 거야. 약속하지] 그의 낮은 속삭임에 발끝까지 기대에 찬 떨림이 번져갔다. 그녀는 붙잡고 있던 시트를 놓고 손을 위로 올려 목덜미를 덮은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잠자코 있던 맬의 손가락이 조금씩 원을 그리며 밑으로 움직이다가 느닷없이 몸을 굴려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그가 명령했다. [적어도 15분 동안은 꼼짝도 하지마.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불러도 할 말은 없지만, 지금은 내 냉수 샤워가 당신의 뜨거운 목욕보다 더 시급해] 애비는 옆으로 가로누워 팔꿈치를 세우고 턱을 받쳤다. [음...] 그녀의 도발적인 포즈에 맬이 험상궂게 이마를 찌푸렸다. [그런 식으로 날 계속 쳐다보다가는 아마 목욕은 꿈속에서나 하게 될 거야] 그녀가 적절한 대꾸를 생각해내기도 전에 맬이 잡아채듯 배낭을 집어들고 욕실 안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찰칵하고 욕실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났다. 맬은 정확히 14분 후에 모습을 나타냈다. 깨끗한 진 바지를 걸쳤을 뿐 상반신은 벗은 채였다. 가까스로 침대에서 피곤한 모을 일으킨 애비는 욕실을 향해 힘들게 걸음을 옮겼다. [문은 잠그지마] 그녀가 문을 막 닫으려는 순간, 맬이 말했다. [왜요?] 그녀가 물었다. [당신은 잠갔잖아요] [얼음같이 차가운 물줄기를 맞으며 잠이 든다는 건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거든] 애비는 문을 잠그지 않았다. 맬이 그 문을 열어 제치고 욕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그녀가 뜨거운 욕조에 막 목을 담갔을 때였다. 애비가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그가 어느새 욕조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 막았다. [쉿, 그렇게 몸부림치지 마] 그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토니가 와 있어] 애비는 한 팔로 가슴을 가린 채 다른 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 그의 손을 밀어젖혔다. [우리 방에 말인가요?] 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적인 행동인지 여전히 그의 손가락이 손목을 움켜쥐고 있어 그녀는 두 팔로 몸을 가릴 수가 없었다. [지금 당신 침대 위에 앉아 있어. 맥주를 마시러 가자는 군] 갑자기 그가 아래로 시선을 떨구었다. 애비는 즉시 그의 손아귀에서 팔을 뽑아내 몸을 가렸다. [온몸이 홍당무처럼 빨갛다는 걸 알고 있어?] 그가 아주 일상적인 어조로 애비에게 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물이 뜨거워서 그래요. 제발 여기서 좀 나가 주지 않겠어요?] 맬은 그녀의 청을 무시했다. 악마 같은 미소를 띄고 그가 몸을 기울여 왔다. 애비는 불안하게 숨을 삼켰다. 맬이 귓전에 바싹 입술을 갖다대고 중얼거렸다. [물들인 금발이 아니란 걸 알게 돼서 정말 기뻐] [그걸 어떻게 알아...] 말을 하다 말고 그녀는 당황해서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그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그 틈을 타 그의 입술이 덮쳐 왔다. 키스는 거칠었고 열정적이었으며, 한순간에 끝나 버렸다. 애비가 눈을 떴을 대 그는 이미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겠어] 셔츠를 걸치면서 그가 말했다. [운이 좋다면, 몇 잔 마신 후에 토니가 스스로 털어놓기 시작하겠지] [차에 대해서요?] 그가 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달리 내가 뭘 듣고 싶어한다는 거야?] [록산이 있잖아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기가 차다는 듯이 그가 괴상한 신음소리를 내며 투덜거렸다. [천만에, 록시 윈스턴에 관해서라면 토니보다는 내가 전문가야. 그녀석이 내게 해줄 만한 새로운 얘기란 전혀 없어. 목욕한 후에 저녁식사를 하고 싶다면 라운지로 내려와. 거기 있을 테니까] 문을 열다 말고 맬이 멈춰서서 뒤돌아보았다. [아까 한 말은 농담이 아냐... 욕조 안에서 정말 잠이 들 수 있어. 그 속에 너무 오래 있지 않도록 해. 알았지?] 애비는 그를 향해 환하게 미소지었다 온몸을 감싸오는 이 기분좋은 따뜻함은 목욕물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염려 때문이리라. [알았어요] 그녀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가 나간 후, 애비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누워 그가 얼마나 복잡하며, 엉뚱하고,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인 남자인가에 대해 한참 동안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곧 착수해야 하는 기사에 대해서도. 욕조에서 몸을 일으켜 타월을 집어들 즈음에는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본 인물 기사가 그녀의 머릿속에 형태를 갖춰 가고 있었다. 아마 로저는 그리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애비는 그의 실망스런 기분을 다독일 만한 성공작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바지와 블라우스를 챙겨입고 침대에 걸터앉은 애비는 속기용 수첩의 3페이지를 빽빽이 메워 나갔다. 15분쯤 후, 일에 몰두하고 있는 그녀의 귓가에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시해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방 열쇠를 잊고 나간 맬이 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급히 수첩을 가방 속에 쑤셔넣고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방문객은 뜻밖에도 록산 윈스턴이다. 애비의 얼굴에 떠올랐던 최초의 놀람은 곧 짓궂은 의혹으로 바뀌었다. [맬은 지금 여기 없어요] [알아요] 록산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토니와 함께 나가는 걸 봤어요. 좀 들어가도 될까요?] 록산은 애비를 찾아온 것 같다. 그녀는 뒤로 물러 서서 문을 활짝 열었다. [좋으실 대로] 미끄러지듯 방안으로 걸어 들어온 록산은 시간을 들여 주위를 한번 훑어보더니 마침내 뒤돌아서서 애비를 마주쳐다보았다. [침대가 두 개로군요] 애비는 미소지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도착했을 때 남아 있던 방이 이것뿐이더군요] 그녀는 문에서 가까운 쪽의 침대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눈에 띄게 시트가 흐트러져 있는 침대였다. 록산의 눈길이 그녀의 어깨너머의 한 지점에 잠시 머무는가 싶더니, 그 얼음 같은 차가운 푸른 눈이 불쾌한 듯이 가늘어졌다. 심술궂은 기쁨을 맛보면서 애비는 애교 띤 목소리로 말했다. [앉지 않으시겠어요?] 애비는 테이블에 딸린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록산이 고개를 흔들었다. [오래 있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 맬에게서 우리 관계에 대한 얘기를 들었겠죠? 내가 그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그렇죠?] [당신이 그의 인공심장 계획을 훔쳐 직접 고안한 것처럼 행세한 걸 말하는 거라면, 들었어요] 록산은 그 사실을 부인하지도, 그렇다고 자신을 변명하지도 않았다. [그건 아주 바보 같은 행동이었어요] 그녀는 냉혹하리만큼 솔직했다. [조금만 더 참고 그가 디자인의 마지막 손질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더라면, 아마 그는 나와 함께 그 성공을 나눴을 거예요. 하지만 난 어렸고, 야망도 컸어요. 솔직히 말해 힉스빌에 사는 것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죠] 그녀의 목소리는 경멸감으로 가득 차 있다. [오클라호마 촌구석에서 즐길 수 있는 사교생활이 어떤 건지는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어쨌든 그 인공심장 계획은 뭐라고 할까, 수단에 지나지 않았어요] [부와 명성으로 가는 티켓이었겠죠] 애비는 냉랭하게 말했다. 애비의 냉소를 잘못 이해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무시해버리기도 한 것인지 록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요. 말했잖아요, 난 야망이 컸다고.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다행히 내겐 야망을 뒷받침해 줄 재능 역시 풍부하니까] [하지만 맬만큼 재능이 있는 건 아니죠. 만약 그랬다면 자신의 출세를 위해 그의 디자인을 훔칠 필요가 없었겠죠. 그리고 자신의 파트너가 돼야 한다는 따위의 조건이 붙은 내기에 그를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거구요] 순간 우아하게 냉정을 유지하고 있던 록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긴장된 침묵 속에서 한동안 애비는 눈앞의 여자를 지켜보았다. [이런, 이런] 마침내 록산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저 지나가는 골빈 금발은 아니었군요] 애비는 혀끝까지 올라온 신랄한 대꾸를 꾹 눌렀다. [이쯤에서 여기에 온 이유를 말하고 그만 가는 게 어때요?[ 록산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좋아요. 난 다시 맬을 가질 작정이에요. 물론 사업 파트너로서 그러겠다는 뜻만은 아니에요] 가소롭다는 듯 애비의 입술이 뒤틀렸다. [거기에 대해선 맬이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요] 록산이 검은 머리칼을 흔들면서 몸을 앞으로 조금 기울였다. [오, 물론 그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잘 알아요. 하지만 그는 상대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자신이 한 약속을 어길 사람은 아니죠. 일주이 후면 맬은 뉴욕에서 나와 일을 시작하게 돼요. 만약 당신이 그와 함께 온다고 하더라도 당신과 보낼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아요. 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공통점이 있는지, 내 주위의 사람들이 그의 출세에 얼마나 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그가 깨닫도록 만들겠어요. 3년 전 그를 떠난 내 행동을 깊이 반성하고, 그의 용서를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할 거예요. 한 달이 채 못돼 그는 내 침대로 다시 돌아오겠죠. 그리고 3달 후면 우린 결혼해 있을 거예요] 애비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이미 한번의 경험이 있는 만큼 맬이 이번만은 자신의 매력에 굴복하길 다소 꺼릴지도 모른다는 최소한의 염려조차 록산은 하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이런] 애비는 록산의 어투를 흉내냈다. [설마 결혼식 초대장을 벌써 띄운 건 아니겠죠? 당신 자신을 위해 그러지 않았기를 바래요] 조각과도 같이 매끈한 턱선이 흐트러지는 듯싶더니 록산의 표정이 갑자기 험악해졌다. [경고해 두겠어요, 미스 킹케이드. 날 방해하지 말아요. 내가 화가 나면 정말 암캐같이 변할 수도 있으니까] [알아요, 그건] 애비는 자리에서 우아하게 일어서며 말했다. [맬이 얘기해 주더군요. 요는 당신이 맬에게 다시 손을 뻗기 위해선 이 내기를 이겨야 한다는 얘긴데, 솔직히 말한다면, 미스 윈스턴, 당신에게 기회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애비는 침착하게 문까지 걸어갔다. [이제 그만 가주지 않겠어요?] 문을 열면서 그녀는 말했다. [애인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록산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쏘아보고 나간 뒤 애비는 침대 밑의 신발을 찾아 신고 맬이 기다리고 있을 라운지로 내려갔다. 8 라운지는 상당히 붐볐지만, 애비는 곧 그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애비가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놓는 순간, 우연인지 맬이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균형 잡힌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번지더니, 애비가 가까이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허리에 팔을 감아 그녀를 끌어당겨 안고는 지극히 상냥한 태도로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맬이 이마를 약간 찌푸렸다. [총각 파티는 끝난 것 같군] 옆 의자에 앉아 있던 토니가 투덜거렸다. [난 슬슬 일어나야겠어] 애비는 맬의 품속에서 몸을 돌렸다. [나 때문이라면 가지 마세요. 오래 있지 않을 거예요] 토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막 일어서려던 참이었습니다. 체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요.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누군가가 노예 감독처럼 절 찾으러 올 겁니다] 그가 손을 뻗쳐 그녀의 손을 쥐고 힘차게 몇 번 흔들었다. [행운을 빌어요, 둘 다. 워싱턴에서 만납니다] [좋은 남자로군요] 멀어져가는 토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맬이 그녀의 몸을 돌려 세웠다. [나도 좋은 남자라구] [그럴 때도 있죠] 힘없는 목소리로 그녀가 동의했다. [토니는 언제부터 알게 됐어요?] [평생을 알고 지낸 셈이지. 토니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사료와 곡물을 취급하는 가게를 하고 계셔. 우린 함께 자라났어] 허리 뒤로 돌아간 맬의 손이 그녀의 등을 타고 오르더니, 긴장된 근육을 찾아냈다. 그가 가까이 끌어당겼지만, 애비는 몸을 굳히고 응하지 않았다. [뭐가 잘못됐어?] 눈썹을 찌푸리며 그가 물었다. [당신 친구인 그 노예 감독이 날 찾아왔었어요] 맬이 낮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애비가 내려온 후 처음으로 맬은 그녀의 굳은 턱선과 일렁이고 있는 녹색의 눈동자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테이블로 옮기자구]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서면서 맬이 말했다. [당신에게 빚진 뜨거운 저녁식사를 주문해야지. 우선 마실 게 한잔 필요한 것 같긴 하지만] 구석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자, 웨이트리스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그녀가 가고 나자 맬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그녀의 어깨로 팔을 둘렀다. [이렇게 가까이 앉을 필요가 있어요?] 애비가 차가운 어조로 불평했다. [그래]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록산이 뭐라고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은 지금 그걸 구실로 내게 냉랭하게 굴고 있어. 하지만 이 정도로 내가 물러설 것으로 생각했다면... 애비게일 프루던스 킹케이드] 맬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지더니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그건 당신이 잘못 생각한 거야] 다행스럽게도 때마침 웨이트리스가 주문한 음료를 가지고 왔다. 애비는 마치 사막에서 막 돌아온 사람처럼 차가운 글라스를 움켜쥐었다. 그녀가 두 모금쯤 마시기를 기다렸다가 맬이 그녀의 손에서 글라스를 빼앗아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천천히 마셔. 그걸 다 마시기 전에 뭘 좀 먹어야 해. 당신을 녹이고 싶은 거지, 취하게 만들 생각은 없어] [뭣 때문에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녀가 심통난 어조로 대꾸했다. 그가 가까이 몸을 기울여 왔고,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왜냐하면 당신 역시 내가 바라는 걸 바라고 있기 때문이지] 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내기에서 이기는 것과 우리가 사랑은 나누는 것, 꼭 순서대로일 필요는 없지만.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해 봐] 애비는 자신이 그럴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고개를 돌려 원망 어린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따뜻한 검은 눈동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시선을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심장이 소리내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숨을 쉬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틀리지 않았어요] 그녀의 귀에 중얼거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맬의 두 눈 속에 욕망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의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어와 비스듬히 그녀의 머리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기대감으로 애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맬은 여기가 어딘지를 기억해 낸 모양이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 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 위로 돌아갔다. [어디까지 얘기했지?] 그가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방을 나서면서부터 애비를 잡고 놓아 주지 않던 분노의 감정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록산...]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대답했다. 맬이 얼굴을 찡그리며 맥주를 향해 손을 뻗쳤다. [맞아, 록산이었지. 대체 뭐라고 했길래 당신 기분이 이렇게 엉망이 된 거야?] [어디부터 시작할까요?] 그녀가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3달 안으로 미세스 개럿이 될 생각이래요] 맬이 꽝하고 맥주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 바람에 거품이 사방으로 튀었다. [빌어먹을!] [그리고 나더러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했어요. 성질이 나면 정말 암캐같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러던대요] 그의 입술이 냉소로 비틀어졌다. [꽤 솔직해졌군. 빌어먹을 여자 같으니라구. 미안해, 애비. 내가 토니와 같이 나오지만 않았더라도 록시가 그런 식으로 당신을 몰아붙일 기회는 없었을 텐데]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애비는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웨이트리스가 그녀가 주문한 스테이크를 가지고 왔다. 그녀는 웨이트리스가 돌아가길 기다렸다가 덧붙였다. [어쨌든 일방적으로 그녀의 게임이었던 건 아니에요. 나도 한방 먹였으니까요] [그럴 줄 알았어] 맬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 당신이 얘기할 차례예요. 이 스테이크를 먹는 동안, 당신은 토니에게서 알아낸 것들을 내게 얘기해 줘요] 그가 토니에게서 알아낸 소식은 대단히 고무적인 내용이었다. 록산의 엔진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만큼 완벽하게 작동하지는 않는 모양으로, 지금까지 엔진 조정을 위해 세 번이나 차를 세워야 했다는 것이다. [열량 당 주행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얘기했어요?] 애비가 포크를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갤런 당 평균 90km라고 했지만, 그건 꾸며낸 말일 테고 실제로는 100km 정도겠지] [우린 그들보다 연료를 더 적게 쓴 셈이군요] 그녀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서 워싱턴까지 가는 데 아무런 문제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내기에서 이길 거예요] [맞아] 맬이 말했다. 하지만 애비가 마음을 놓을 만큼 자신에 찬 목소리는 아니다. 구운 감자를 마지막으로 끝내고, 그녀는 의자등받이에 기대앉아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눈썹 사이에 주름이 다시 나타나 있었다. 신경 쓰이는 일이 생겼다는 표시다. [무슨 문제예요?] 걱정스러워져 그녀가 물었다. [나도 무슨 문제인지 알았으면 좋겠어] 그가 초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엔진은 내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작동하고 있어. 주행거리도 만족할 만해. 그리고 예정보다 앞서가고 있는 셈이고] [그런데요?] 그녀가 성급하게 물었다. 초조한 듯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내가 신경과민인가 봐.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거라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어. 일이 너무 잘돼 나가고 있거든] 애비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쳐 그의 손을 잡았다. [당신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당신이 잠든 사이에 빠져나가 록산의 차를 망가뜨려 놓을 수도 있어요. 난 어느 전선을 뽑아 놓아야 하는지 그런 기술적인 건 전혀 모르지만, 헤드라이트 정도는 켜놓을 수 있죠. 그럼 내일 아침쯤이면 배터리가 다 닳아 있을 거예요] 맬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정말 날 위해 그렇게 해주겠단 말이야? 감동하겠군]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에요] 애비는 자신 있게 말했다. 따뜻한 미소가 눈가에까지 번지더니 맬이 깍지낀 손가락에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디저트를 먹고 싶어?]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최면에 걸린 듯 애비가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동안, 그의 눈 속을 떠돌던 따뜻한 빛은 황금색이 되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니요] 거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가 그녀의 손을 들어올려 엄지손가락 끝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럼 뭘 원하지?] 한순간 애비는 숨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질끈 눈을 감았다. 그를 보지 않으면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그의 혀끝이 손바닥에 와 닿았다. 그녀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눈을 뜨고 날 쳐다봐. 그리고 당신이 뭘 원하고 있는지 말해 줘] 그녀는 마지못해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어린 열기 띤 갈망의 표정에 그나마 조금 있던 의지력까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당신을 원해요] 맬 역시 그 대답을 바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테이블이 들썩거릴 정도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호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액수를 확인해 볼 생각도 않고 테이블 위로 던져 놓았다. 그리고는 애비의 손을 잡고 서둘러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맬은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맬?] 급히 한 팔을 그의 목에다 두르며 애비는 숨찬 목소리로 외쳤다. [뭐라구?] 그들은 막 빌딩의 뒤쪽 코너를 돌고 있었다. 그가 낮은 울타리를 넘으며 대답했다. [웨이트리스에게 40달러의 팁을 준 걸 알고 있어요?] 그는 아무 대답 없이 그대로 제라늄 꽃밭을 가로질렀다. 꽃밭을 엉망으로 만드는 일이 있더라도 그는 방까지 가장 짧은 경로를 택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오늘밤은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애비가 그들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마음을 바꿨어] [오, 좋아요. 한밤중에 이렇게 안겨 운반되는 것도 아주 로맨틱하긴 하지만 방에 닿기 전에 키스라도 한번 해준다면 더욱 고마울 텐데요] 그가 엄숙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만약 지금 키스를 한다면, 우린 절대로 방까지 갈 수 없을 거야] 침을 삼키려 했지만 입안이 너무 바짝 말라 있다. [그럼 기다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방앞에 다다른 맬은 그녀를 내려놓고, 열쇠를 찾느라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그에게 손목을 잡혀 방으로 들어섰다.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한 그녀를 맬이 끌어당겨 안았다. 문이 꽝 하고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의 입술이 덮쳐오는 것을 느끼고, 애비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그의 어깨에 파묻었다. [제발... 날 무섭게 하지 말아요]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에 애비는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맬 역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가 천천히 한 손을 들어올려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눈물이 날 만큼 부드러운 손길이다. [내가 그랬어?] 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르지 않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처음 사랑을 했던 게 23살이었다고 한 것 정말이야?] 그녀는 쑥스러운 나머지 얼굴을 붉혔다. [그래요. 거짓말을 하고 싶었다면 아예 18살이나 19살이었다고 말했을 거예요] 맬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와 가볍게, 거의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몇 살이지?] [25살 이에요] 이마를 찌푸리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내 나이가 지금 무슨 상관이죠?] 맬은 그 질문을 무시해 버렸다. [그 이후로 몇 명의 남자가 있었어?] [지금 내 전기라도 쓰고 있는 거예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의 깊은 목소리에 나른한 웃음기가 배어 있다. [한 명요] 그녀는 마지못해 중얼거렸다. [그 두 사람 모두 완벽한 신사였겠지. 예절바르고, 깍듯하고...] [자상하구요]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기어들었다. [그리고 정중했어요] [게다가, 보나마나 판에 박은 듯이 예측이 가능했을 테지. 하지만 난 그 어느 쪽도 아니야, 애비. 누구보다도 자상할 수는 있겠지만 예측 가능한 데라곤 거의 없고, 예절 바른 것을 기대할 수조차 없어. 그리고 정중함에 대해선... 빌어먹을, 난 그게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어] 애비는 눈을 감고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 개럿...? 당신은 신사가 못된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요?] [만약 내가 신사라면 달빛 아래에서 거닐다가 몇 번쯤 입술을 훔친 다음 달콤한 말로 침대로 유혹했겠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내 방식이 아니야] 애비는 입술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맬이 난폭하게 그녀의 키스를 되돌렸다. 딱딱하게 긴장해 있는 그의 몸에서 애비는 맬이 자제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불규칙한 심장의 고통소리가 그녀의 가슴으로 전해져 왔고, 때때로 발작적인 떨림이 그의 몸을 희미하게 흔들고 지나갔다. 그의 입술 밑에서 그녀가 속삭였다. [난 당신을 원해요, 맬러키 개럿] [아직도 무서워?] 쉰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거칠게 한숨을 내쉬었고, 애비는 그의 몸에서 긴장감이 조금씩 엷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팔이 움직여 그녀를 바싹 끌어당겼다. [그럼, 달링. 당신을 더 이상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맬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묻었다. [..이게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들이야...] 그가 말해 준 것들 중의 몇 가지는 생각만으로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빨갛게 물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서로의 옷을 벗기고, 차가운 시트 위에 몸을 뉘었을 즈음, 그녀에게는 티끌만큼의 수줍음이나 금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가슴에서 그녀의 고문에 못 이긴 고통의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더이상은 안돼!] 평상시의 느긋함은 찾아볼 수 없는 절박한 목소리였다. [하느님! 애비, 도대체 당신은 남자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애비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땀이 밴 살갗을 살짝 깨물었다. [애비, 지금 당장 날 괴롭히는 걸 그만두지 않으면 내 입에서 당신 이름을 듣는 건 이게 마지막이 될 거야] 그가 고통스럽게 헐떡였다. 애비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을 찾았다.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녀는 속삭이며 손을 가슴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겹쳐진 입술의 틈새로 그가 울부짖듯이 신음했다. 그리곤 두 팔로 그녀를 죄어 안았다. 그들의 사랑은 폭발적이고 광적이었으며, 이루 말할 수 없이 만족스러웠다.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맬이 한 팔에 그녀를 안고 몸을 돌려 누었다. 그의 손이 땀이 밴 그녀의 이마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더니 곧 입술이 이마에 와닿았다. [괜찮아?] 그가 물었다. 격렬했던 사랑의 여운으로 그의 목소리는 고르지 못했다. [일주일 후에나 물어 줘요] 그녀 역시 숨찬 듯 목소리가 떨렸다. [내 심장이 회복되려면 적어도 그 정도는 걸릴 거예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그가 쉰 목소리로 웃었다. [미안하지만, 달링. 그때쯤이면 우리 둘 다 심장마비로 중환자실에 있을 거야] 희미하게 먼동이 틀 무렵, 맬은 달콤한 키스로 꿈도 꾸지 않고 단잠을 자던 그녀를 깨웠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부드러운 손길로 서로를 애무하며 여유있게 사랑은 나눴다. 황금색 햇살을 받으며 팔 다리로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이 든 그들은 거의 10시가 가까워서야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맬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거의 내던지다시피 해놓은 옷가지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쯤이면 세이블은 워싱턴까지 만은 가 있을 거라는 둥 불길한 말들만 잔뜩 늘어놓으며 그는 데스크에 깨워 달라고 부탁하지 않은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애비가 샤워를 하기 전에는 절대로 방을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맬은 한참 동안 투덜대더니 그녀가 시트에서 빠져나와 기지개를 켜며 욕실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마음이 변했다며 같이 샤워를 하겠다고 그녀를 뒤따라 들어왔다. 그들이 욕실을 나설 즈음에는 여전히 시간에 쫓겨 서둘러야 했지만 적어도 그의 기분만은 훨씬 나아져 있었다. 애비가 뭔가 빠뜨린 것이 없나 점검하는 사이에 맬은 짐을 챙겨들고 방을 나갔다. 잠시 후, 격노한 그의 고함소리에 애비는 정신없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한눈에 그녀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셀비의 운전석 쪽 타이어 두 개가 팬케이크처럼 납작해져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맬이 이를 갈았다. 애비는 서둘러 차머리를 돌아가 다른 쪽의 타이어들을 살폈다. [이쪽은 괜찮아요] 그녀가 보고했다. [당연하지] 그가 자르듯이 말했다. [그쪽으로 세이블이 주차해 있었어. 록시도 이런 야비한 짓거리를 토니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을 거야] 후드를 연 맬이 애비의 이마가 찌푸려질 정도의 심한 말을 내뱉었다. [또 뭐죠?] 불안에 찬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그가 덜렁거리는 긴 고무 벨트를 들어올렸다. [끊어졌어요?] [깨끗하게 잘렸어] 맬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후드 아래로 머리를 처박고 한동안 살피더니 퓨즈 역시 두 개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얼마나 나쁜 상태죠?] 애비는 다급하게 물었다. [내말은, 타이어에 바람을 넣고 벨트와 퓨즈를 갈아끼우는 데 얼마나 걸리겠냐구요?] [퓨즈는 몇 개 더 가져왔어. 이 주위에 압축 공기 탱크가 있는 주유소도 없진 않을 테고. 전화 몇 통화만 하면 팬벨트도 문제없이 배달시킬 수 있겠지.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이란 말이야. 지금 영업을 하고 있는 부속품 가게를 찾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게 뭐야] [어쨌든 당장 전화를 걸어 보는 게 좋겠어요] 애비가 제안했다. 맬이 후드를 닫았다. [그럼 당신은 지배인을 찾아봐 줘. 이 주위를 아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 줄 만한 정보를 갖고 있을 거야] 지배인은 젊은 여자였는데, 우연히 그녀의 사촌동생 남편이 주위의 포드 대리점에서 부품을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집에서 쉬고 있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짤막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수화기를 맬에게 넘겨 주었다. 한 시간 내로 팬벨트를 배달해 주겠다는 그의 말에 고맙다고 인사하며 맬이 전호를 끊었다. [휴대용 공기 탱크도 갖고 온다고 했어] 데스크를 떠나면서 그가 말했다. 맬이 퓨즈를 끼우러 간 동안, 그녀는 로비 옆의 레스토랑으로 가 2인분의 소시지와 팬케이크를 포장해 달라고 주문했다. 애비는 아침식사가 든 종이 백을 들고 다시 방으로 올라와 커피와 오렌지 주스, 그리고 두 개의 뜨끈뜨끈한 스티로폴 박스를 테이블 위에다 꺼내 놓았다. 그 일을 막 끝내자 마자 맬이 문가에 모습을 나타냈다. [어디로 사라졌나 했지. 그건 뭐야?] [아침식사예요. 빨리 와서 식기 전에 먹어요] 그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욕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지나쳐가면서 맬이 그녀의 입술 위에 가볍게 입술을 포갰다. [누군가 굉장한 아내를 얻게 되겠군] [글쎄요.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가 손을 씻을 동안, 그녀는 테이블 옆으로 자리를 하나 더 마련하기 위해 침대 옆의 거대한 안락의자와 씨름하고 있었다. 겨우 10cm쯤 옮겨놓았을 때 갑자기 맬의 한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더니 그녀를 한 쪽으로 비켜 세웠다. [뭣 때문에 결혼을 반대하는 거지?] 크리넥스 통을 다루듯이 그가 안락의자를 번쩍 들어올리며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결혼을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아내가 되고 싶지 않은 것뿐이죠] 맬은 옮겨놓은 안락의자에 그녀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그녀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예의바른 태도라고는 털끝만큼도 모르는 남자치고는 상당히 깍듯한 행동이다. [난 전문가는 아니지만 두 사람이 결혼을 하면, 한쪽은 남편이 되고 한쪽은 아내가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바로 많은 결혼이 이혼으로 끝나는 이유죠] 팬케이크 위에 메이플 시럽을 부으며 그녀는 말했다. [내가 만약 결혼을 하면, 난 내 대신 아내 역할을 할 수 있는 누군가를 고용할 거예요] 그가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니, 당신 남편과 자주는 대가로 여자에게 보수를 지불하겠다는 말이야?] [천만에요! 내 말은 그게 아니에요. 힘들고 보답 없는 가사일을 대신 할 사람을 고용하겠다는 거죠... 그런 종류의 일 말이에요] [다행이군] 그가 중얼거렸다. [난 또 무슨 얼빠진 여성 해방론자들의 대리모니 뭐니 하는 얘긴 줄 알았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죠?] 잠시 말을 끊었다가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내가 고되고 단조로운 가사일에 얽매여 있는 동안, 대부분의 남편들은 골프나 테니스를 치러 밖으로 나가요. 아주 당연한 것처럼요]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맬의 선선한 대답에 애비는 조금 놀랐다. [하지만 아내를 고용하는 것이 그 문제의 해답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이미 집안 일에 익숙한 남자와 결혼하면 그런 문제는 아예 생기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둘이 집안 일을 분담해서 한 다음, 같이 골프나 테니스를 치러 갈 수도 있잖아] [생각은 멋있군요] 그녀는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남자는 암탉의 이만큼이나 찾기가 힘들다구요. 당신이 아는 사람 중에 그런 남자가 있으면 어디 내 앞으로 데려와 봐요] 맬이 여유있게 종이 냅킨으로 입가를 훔치더니 뒤로 기대 앉아 손바닥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여기 있잖아] 그가 한쪽 입술 끝을 올리며 씩 웃었다. 순간 마시던 오렌지 주스가 목구멍에 걸리는 통에 애비는 눈물이 나올정도로 기침을 해댔다. 그가 벌떡 일어나서 그녀의 의자 뒤로 돌아왔다. [별로 기분좋은 반응이 아니군] 그녀의 어깨 뼈 사이를 세게 두드리며 맬이 풀죽은 어조로 말했다. 애비는 연방 기침을 하면서도 뭔가 적절한 대답을 찾기 위해 정신 없이 머리를 굴렸다. 쉽지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그녀는 몇 번 더 기침을 했다. 누군가 열려진 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실례합니다. 팬벨트가 고장난 셀비가 당신들 겁니까?] [그렇소] 맬이 대답했다. [잠깐 기다려 주겠소?] 그렇게 말하고, 맬이 몸을 구부려 눈물이 괸 애비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괜찮겠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맬이 남자를 따라 바깥을 나갔다. 애비는 그가 안겨 준 충격에서 회복될 만한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마웠다. 여기 있잖아... 대체 무슨 뜻일까. 설마 자신을 후보로 고려해 보라는 뜻은 아닐 텐데. 아니, 정말 그 뜻이었을까? [정신 차려, 애비게일] 남은 음식과 용기들을 봉지에 쓸어 넣으면서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는 또 널 놀린 거야. 그 뿐이야... 농담을 해서 한바탕 웃기려고 했던 거야. 다른 뜻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야. 연료 탱크를 채우기 위해 잠깐 차를 세웠을 뿐 그들은 계속 달려 정오가 지날 때쯤에는 이미 고속도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상당히 많은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에 애비는 시속 150km까지 속도를 올렸다. 웨스트 버지니아의 찰스턴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다. 다행스럽게도 420km에 달하는 거리를 가는 동안 레이다 탐지기는 한번도 울리지 않았다. 찰스턴에 도착할 즈음, 하얗던 구름들이 어느새 습기를 잔뜩 머금은 잿빛덩어리가 되어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가끔씩 천둥이 머리 위를 울리며 지나갔다. [한바탕 퍼붓겠군] 맬이 하늘을 살피며 투덜거렸다. 애비는 염려스런 시선으로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세워야 해요, 아니면 벗어날 수 있는 지 계속 달려 봐요?] [난 계속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당신은 어때? 몸은 괜찮아?] [난 좋아요] 그녀는 진심으로 말했다. [앞으로도 한 두 시간은 더 버틸 수 있어요. 곧 179번 도로로 나가는 인터체인지가 나와요. 북 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폭우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사태는 그런 식으로 진전되지 않았다. 5분 후에는 억수같이 퍼붓는 비 때문에 애비는 헤트라이트를 켜고 속도를 90km에서 다시 80km로 줄여야 했다. 거의 보이지도 않는 흰 차선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애비가 도로에 온통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는 동안, 맬은 전방에 화물을 싣거나 천천히 달리는 차가 있지는 않은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했다. 다음 200km 동안 그들의 평균 속도는 겨우 시속 50에서 60km 사이를 맴돌았다. 세찬 바람까지 가세한 탓에 장대 같은 빗줄기가 사방에서 휘몰아쳐 왔고, 도로의 곳곳에는 꽤 깊은 물웅덩이까지 생겼다. 습기 때문에 에어컨을 계속 켜놓았는데도, 맬이 2,3 분마다 뿌연 유리창을 티슈로 훔쳐내야만 했다. 그녀 쪽의 차창을 닦기 위해 몸을 기울이면서 맬이 물었다. [운전은 할 만 해?] [묻지 말아요]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의 이 괴물은 시속 80km 아래로 속력을 떨어뜨리기만 하면, 통나무를 실은 짐마차처럼 핸들이 무거워진다구요] 맬이 손을 뻗쳐 그녀의 뺨위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귀뒤로 넘겨주었다. [다음 번 여행에는 틀림없이 파워 핸들을 달아 줄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 말이다. 허지만 언제나 둘이서 여행을 하리란 걸 확신하고 있는 사람처럼 그의 어조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다. 애비는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목소리가 의지를 배반할까 봐 두려워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힘없는 미소만 지어 보였다. 몇 킬로를 더 달리자 눈앞에 휴게소가 나타났다.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애비는 가능한 한 건물 가까이에 셀비를 주차시켰다. 맬이 지도책을 말아 그녀의 숄더백 속에 찔러 넣었다. 차 문을 연 그들은 숨을 단단히 들이마시고 건물 앞에 생긴 호수를 가로질러 앞으로 돌진해 갔다. 건물의 지붕 밑으로 몸을 들이밀었을 때는 더 이상 젖을 수도 없을 정도로 흠뻑 젖어 버렸다. 애비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료와 스넥 푸드를 파는 자동 판매기 몇 개와 공공 화장실, 그리고 서너 개의 식수용 분수전이 전부다. [리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붕이 새지 않는 게 어디야] 한 쪽 벽에 걸린 커다란 지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그가 말했다. [48번 도로까진 30km도 안 남았어. 거기서 깡총 뛰면 170번 도로야] 애비는 백에서 지도책을 끄집어내어 웨스트 버지니아의 페이지를 펼쳤다. [당신에겐 깡총 뚜는 정도의 거리가 내겐 180km나 되어 보이는군요] 그녀가 메마른 어조로 대꾸했다. [게다가 줄곧 2차선인 걸 감안하면 지겹게 먼 거리예요] 그녀가 지도책과 씨름하고 있는 동안, 맬은 자동 판매기를 살펴보러 갔다. 잠시 후 그는 루트비어 캔 두 개와 프레첼 두 봉지를 가지고 돌아왔다. [점심 같이 들겠어?]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등을 기대면서 그가 초대했다. 뒤따라 그의 옆에 앉으면서 그녀는 내쏘았다. [모르고 있나 본데 지금 시간이 거의 6시 30분이에요] [그럼 이른 저녁식사라고 하지 뭐] 프레첼을 한 입 베어먹고서야 애비는 자신이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를 깨달았다. 짭짤한 부스러기까지 남김없이 해치웠을 즈음엔 폭우도 보통 정도의 빗줄기로 가늘어졌다. 애비가 숙녀용 화장실에서 돌아오니 맬은 음료 자동 판매기에 동전을 집어넣고 있다. 몇 봉지의 프레첼과 콘칩, 그리고 대여섯 개는 되어 보이는 초콜릿 바가 옆에 무더기로 쌓여 있다. [나보다 더 배가 고팠나 보군요] 그녀는 즐거운 듯이 말했다. 그가 그녀를 뒤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할 수 있을 때 챙겨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25센트짜리 동전 없어?] 애비는 백속에다 음료 캔과 초콜릿 바를 챙겨넣었다. 셀로판 종이는 모두 맬의 셔츠 속으로 들어갔다. 차로 뛰어갈 준비가 끝나자 그가 열쇠를 요구했다. [트렁크에서 꺼내야 할 물건이라도 있어요?[ 꽉 찬 숄더백 안으로 손을 밀어 넣으며 그녀가 물었다. [아냐. 얼마 동안은 내가 운전을 할까 해서] 애비는 그가 농담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찾은 열쇠를 그의 쪽으로 반쯤 가져가서야 그녀는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급히 손바닥의 열쇠를 움켜쥐었다. [당신이? 운전을요?] 맬은 모욕이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이다. [이건 내 차야] [당신 차란 것은 알아요. 하지만 분명히 떠나기 전에 미시시피 서쪽에서 가장 형편없는 운전사라고 스스로도 인정했잖아요] [그건 덱이 한 말이었지] 그가 초조하게 말했다. [열쇠를 이리 줘, 애비] 애비는 한순간 망설였다. 그의 눈동자 속에 반짝이는 결연한 빛은 만약 그녀가 주지 않는다면 빼앗아 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지못해 그녀는 열쇠를 건넸다. [자신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를 바래요] 그녀는 내쏘았다. [경고해 두겠는데, 맬. 만약 차를 굴려 버리기라도 하는 날엔 다시는 당신에게 말도 걸지 않겠어요] 그가 미소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너무 걱정하니 마, 달링. 위험스럽게 차를 몰긴 하지만, 그래도 몇 십 년 동안 차를 굴려 본 경험은 없으니까] 차창은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옇게 흐려져 있다. 엄청나게 큰 종이 타월꾸러미를 끄집어냈다. 맬이 프레첼과 콘칩 봉지들을 그녀가 쌓아올린 무더기 위로 던지면서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건 어디서 난 거야?] [숙녀용 화장실에서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의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번졌다. [아름답고, 머리 좋고, 게다가 실용적이기까지 하군... 아무래도, 애비, 당신을 내 여자로 해야겠어] 갑자기 거대한 주먹이 그녀의 심장을 움켜쥔 듯한 느낌이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에게로 타월 한줌을 내밀었다. [여기 있어요. 당신 쪽은 당신이 닦아요. 내 쪽은 내가 할 테니] 그 후 꽤 오랫동안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비참한 기분이어서 그녀는 대화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로저에게 약속한 기사를 취소시킬 수만 있다면 하고 그녀는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고민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몇 시간 동안 애비는 맬이 운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온종일 세이블의 그림자조차 구경하지 못하고, 그들은 170번 고속도로에 이르렀다. 맬의 지시에 따라 애비는 지도책을 뒤적여 현 위치가 1270도로와의 교차점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것은 곧바로 워싱턴으로 이어져 있는 마지막 고속도로였다. [83km 더 가야 해요] 지도 위로 몸을 구부리며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워싱턴의 외곽까지는 약 50km 정도 돼요] [교차로 부근에 호텔이 있을 거야. 오늘밤은 거기서 묵고 내일 아침 일찍 워싱턴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 인터체인지 부근에는 꽤 여러 개의 모텔이 있었다. 또다시 <할리데이 인>이라는 모텔 앞에 차를 세우며, 맬은 순전히 감상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피자를 좋아해?] 그가 방으로 짐을 나르면서 물었다. 어젯밤 그랬던 것처럼 그는 가방들을 옷장 안으로 던져 넣었다. [길 아래에서 노블 로먼즈라는 가게를 봤어. 피자를 사가지고 올테니, 여기서 먹는 게 어때?] [좋아요] 그녀는 하품을 애써 참으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야?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된 더운 식사를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어]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뇨. 너무 피곤해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피자가 좋겠어요. 정말이에요... 이탈리안 소시지와 버섯이 듬뿍 든 아주 큰 것으로요] [당장 대령하지] 맬이 아찔할 정도로 싱그러운 미소를 던지고는 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문 앞에서 갑자기 그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당신이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어] 그가 조용히 말했다. [오늘 꽤 분명한 힌트를 몇 번이나 던졌는데 말이야... 그때마다 당신은 멋있게 무시해 버렸지만] 애비는 더 이상 듣지 않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잘못된 방법을 썼기 때문에 바라는 대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그가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솔직한 사람이야, 애비. 그러니 나도 더 이상 말을 빙빙 돌리지 않겠어] 맬이 말을 멈추고, 진지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당신을 사랑해. 애비게일 프루던스 킹케이드. 내 생각엔 당신도 날 사랑하는 것 같아. 아니, 부디 그러길 바라고 있어] 애비는 저도 모르게 기쁨과 절망감이 뒤섞인 신음소리를 냈다. [내가 오클라호마로 돌아갈 때 당신이 나와 함께 가주기를 바래. 물론 둘 사이에 타협해야 할 문제도 생기겠지. 하지만 난 우리가 잘 해내리라고 믿어. 처음부터 무리한 걸 요구하고 싶지는 않아. 지금은 단지 생각만 해봐. 그게 내가 바라는 전부야. 그리고 내일 오후에 록시와의 거래가 끝나면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어] 그는 몸을 돌려 그대로 방을 걸어나갔다. 애비는 방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그가 닫고 간 문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9 그 다음의 30분간은 애비의 일생에 있어서 제일 긴 시간이었다. 그에게 남김없이 털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결심하는 것은 차라리 쉬었다. 하지만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에게서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지 괴로워하며 보낸 나머지 29분은 차라리 29시간보다도 더 길었다. 창밖으로 셀비의 유별난 엔진 소리가 들려올 무렵, 애비는 이미 아스피린을 6알이나 먹고, 손톱까지 물어뜯고 있었다. 당연히 그가 방 열쇠를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비는 느닷없이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깜짝 놀랐다. 급히 문을 연 다음에야 그가 왜 열쇠를 사용하지 못했는 지 그 이유를 알았다. 그는 커다란 피자 박스 외에도 2 리터 짜리 콜라 병과 일요일 판 신문꾸러미를 각각 두 손에 나눠 들고 있었다. 맬은 그녀의 코끝에 가볍게 입맞추고, 테이블 위로 손에 든 것들을 옮겨다 놓았다. 피자 박스의 뚜껑을 여는 그녀의 손을 보고 맬이 깜짝 놀랐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는 줄은 몰랐는걸] [그 외에도 당신이 모르는 것이 산더미같이 많아요] 문을 닫으면서 그녀는 말했다. 맬이 호주머니에서 한 움큼의 종이 냅킨을 꺼내어 피자박스 옆에다 놓았다. [사실이야]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나에 대해 당신이 모르는 게 있는 것처럼 말이지. 빌어먹을, 컵을 잊었어] [컵은 욕실에 있어요] 욕실로 들어간 애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핏기가 가신 창백한 안색에 그나마 생기가 있는 것이라고는 불안에 떨고 있는 푸른 두 눈뿐이다. 이런 모습이라면 어느 남자라도 곁에 오기가 무섭게 도망쳐 버릴 것 같다. 하지만 분명히 30분 전, 맬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사랑한다고, 함게 오클라호마로 가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여자는 믿을 수 없다고 단언한 바 있는 바로 그 남자가... 갑자기 그녀는 속임수까지 용서할 정도로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비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어깨를 바로 폈다. 2개의 플라스틱 컵을 들고 그녀는 맬에게 고백하기 위해 욕실을 나갔다. 그는 침대에 앉아 무릎 위에 신문을 펼쳐놓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표정이 아주 엄숙했다. [일면에 눈에 띄는 기사가 있어. 당신이 읽어 봐야 한다고 생각해] 부드럽게 말하긴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감정이 없는 목소리였다. 마치 리듬이 어긋나 버린 것처럼 그녀의 심장이 무겁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컵을 내려놓고 그의 손에서 신문을 받아들었다. 곧바로 그가 말한 기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실험 엔진, 테스트에 실패하다>라고 표제가 나와 있다. 애비는 무너지듯 맬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믿을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강렬한, 조금은 그늘진 눈길로 맬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가 있고, 윗입술에는 땀이 엷게 배어 있다. 그는 아주 불안해 보였다. [미안해] 느닷없이 그가 말했다. 애비는 혼란스러워져 고개를 흔들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죠? 이 기사에 따르면 록산은 엔진 고장으로 웨스트 버지니아의 어느 산중에서 경주를 포기했다잖아요? 당신이 이겼어요. 맬! 당연히 기뻐해야죠] 맬이 건성으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건 기분이 좋아] [하지만 그렇게 보이질 않아요. 꼭 소득 신고가 감사 대상에 들었다는 국세청의 경고장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보인다구요. 도대체 뭐죠? 내가 뭘 빠뜨리기라도 했나요?] 그녀는 다시 신문을 보며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화나지 않아?]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말투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이마를 찡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뭐가요?] [물론 그 신문기사 때문이지] 그가 초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쯤이면 워싱턴의 모든 신문들이 우리에 대해 냄새를 맡았을 거야. 내일 아침 시청 앞에 도착할 무렵이면, 아마 발붙일 틈도 없을 정도로 기자들이 몰려 있을 거라구] 갑자기 누군가가 거대한 망치로 가슴을 내리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자들에 대한 그의 적대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맬은 이 일이 신문으로 새어 나갔기 때문에 - 아마도 록산의 짓이겠지만 - 화가 나 있는 것이다. 애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에게 할 얘기가 있어요] 그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맬은 그 말을 들은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초조하게 세 걸음을 떼어놓더니, 느닷없이 뒤돌아서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빌어먹을, 록시가 모든 것을 망쳐 놓은 거야. 어떻게 당신이 태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 애비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다시 한번 시도해 보았다. [당신이 화가 났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유명해지지 못해 안달이 난 그 여자 덕분에 웬 이단짜리 신문기자 녀석이 당신의 기사를 가로채 버렸다구!] 그가 모자를 벗어 거칠게 허벅지를 내리쳤다. [뭐라구요?] 최초의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녀가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체한다고 생각했는지 맬이 얼굴을 찌푸리고 노려보았다. [웬 이단짜리 신문기자 녀석이 당신의 기사를 가로챘다고 말했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잖아. 그런데도 당신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으니!] 그가 엉덩이에 두 손을 얹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애비게일, 도대체 날 사랑하는 거야, 않는 거야?] 애비의 입이 조금 열렸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머리가 어지러웠다. 맬의 윤각이 희미해지더니 급기야는 그가 둘로 보이기 시작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는 속삭였다. [... 나 기절할 것 같아요] 이윽고 정신을 차리자, 잔뜩 긴장된 얼굴의 맬이 젖은 수건으로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고 있었다. [괜찮아?]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그녀가 일어나 앉으려고 하자 맬이 재빨리 그녀의 어깨로 팔을 둘러 받쳐 주었다. [정말이야?] 그녀의 등뒤로 베개를 받쳐 세우며 그가 물었다. 애비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맬은 그녀의 뺨에 혈색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테이블로 걸어가 플라스틱 컵 두 개에다 콜라를 따랐다. [그렇게 놀라 보긴 처음이야] 그가 조심스럽게 침대가에 걸터앉아 그녀에게 컵 하나를 건네주었다. [지금까진 기절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거든] 그러다가 갑자기 걱정스러운 일이라도 생각난 듯 그의 이마에 주름이 한 줄 갔다. [임신한 것 같아?] 사례가 들린 애비는 셔츠의 앞자락에다 콜라를 토해냈다. 맬이 튀듯이 일어나 테이블 위에 있던 냅킨을 한 줌 쥐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애비는 비난의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또 기절하는 꼴을 보고 싶어요?] [가능한 일이잖아] 그가 변명했다. [보아 하니 당신이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나도 별다른...] [그만해요!] 그녀가 말을 가로막았다. [우리가 사용하지도 않은 피임법들을 일일이 나열할 필요는 없어요] [그럼, 가능한 일이군] 맬이 말했다. 그 점잔빼는 듯한 어조에 애비는 이마를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허기와 피로에 강한 충격이 겹친 탓이라는 설명이 더 적절해요, 이 경우엔] [불쌍한 내 아기] 일어서서 테이블로 걸어가면서 맬이 수선스럽게 중얼거렸다. 피자와 콜라 병을 들고 그가 침대로 돌아왔다. [이걸 먹을 만한 기력은 있어?] 그의 입이 피자로 꽉 찰 때를 기다렸다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지옥으로나 가버려요, 맬] 맬이 싱긋 웃으며 피자를 다시 한 입 크게 배어 물었다. [알고 있었잖아요!] [당신이 가자란 것 말이야?] 컵을 입으로 가져가며 그가 말했다. [물론 알고 있었지]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예요] 성마른 목소리로 그녀는 그의 단어를 정정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알았어요?] [호텔 바에서 당신이 내게로 걸어오는 것을 본 순간, 사람들이 말하던 그 여기자가 아닌가 짐작했었어...] [처음부터 기자가 이 경주를 취재하길 바랐었단 말이에요, 그럼?] 묻기는 했지만, 지극히 미심쩍은 말투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맬이 셔츠를 벗어 던지고 바지의 지퍼를 내리면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웃었다. [봐, 할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 애비는 완전히 혼란스러워져 버렸다. [그럼 글래디스의 가게에서 한 말들은 다 뭐였어요? <기자들은 썩은 고기를 청소하는 하이에나 같은 족속들이야. 아냐, 더 나빠... 기생충 같은 작자들이지>] 그녀는 그의 말을 인용했다.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기나 해요?] [양심의 가책을 느꼈겠지] 청바지를 옆으로 던지며 그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애비는 냉정하게 손길을 피해 버렸다. [계획적이었군요] 그녀는 비난조로 말했다. [내게 죄책감을 느끼게 할 작정이었어요, 당신은] 맬이 다시 손을 뻗쳤다. 이번에는 그녀가 피할 여유를 주지 않은 채, 두 팔로 그녀의 몸을 감싸안고, 꼼짝하지 못하도록 긴 다리로 그녀의 다리를 눌러 버렸다. [저리 비켜요] 그녀가 명령했다. [안돼] 차분한 목소리로 그가 거절했다. [내 말을 다 들을 때까지는 안돼. 조금은 당신이 죄책감을 느끼길 바랐지.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건 아냐. 난 이 일이 당신의 기사가 되길 바랐어, 꼬마 아가씨. 내가 그 정도로 강하게 밀고 나가지 않았다면 아마 록시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을 거야. 그럼 그녀의 편집자 친구는 날마다 신문 일면에다 경주에 대한 보고를 착실히 실었을테고. 우리가 워싱턴에 도착할 때쯤이면 모든 게 옛날 얘기가 되어 있었을 거야] 놀라움으로 갑자기 키가 2cm 는 더 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 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를 냈다. [조금 부끄럽지 않아?]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묻고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소를 감추기 위해 그녀는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래요. 하지만 이미 부끄러워하고 있었는 걸요] 맬의 입술이 관자놀이를 스쳐 뺨으로 내려왔다. [알아. 사실을 말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만일 그랬다간 내가 경주를 그만둔다고 할까 봐 두려웠을 거야] [당신이 록산의 손아귀로 떨어질까 봐 걱정했던 거예요]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그녀는 속삭였다. [처음부터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 그가 약간 몸을 떼더니 한 손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록시가 경주를 제의한 그 순간부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 물론 그녀에게 승산이 없는 싸움이란 것도 알고 있었고. 그녀가 속임수를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셀비를 엉망으로 해놓을 정도로 필사적일 줄은 몰랐었어] 그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토니가 세이블을 몬다는 걸 알고, 안심해도 되겠구나 했었지. 그는 그 누굴 위해서라도 속임수를 쓸 인간이 못되거든. 토니만 록시 곁에 붙어 있으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록시를 너무 과소평가 했었나 봐] 그의 한 손이 청바지에서 셔츠 자락을 뽑아 올리는 동안, 다른 한 손은 셔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부드럽게 부푼 그녀의 가슴을 감쌌다. 애비는 달콤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록산 윈스턴에 관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의 입술이 허기진 듯 애비의 입술을 덮쳤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그가 뺨 위에서 중얼거리며 그녀의 귓불까지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그럼, 내 엔진에 관한 스토리를 연구하는 건 어때?] 애비의 눈꺼풀이 사르르 감겼다. 피부에 와 닿는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을 즐기며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지 말아요] 나른한 미소를 띄우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의 엔진이나 이 경주에 관한 기사라면 쓸 생각이 없어요] [뭐라구?]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 엔진에 관해 쓰지 않겠다니?] 그녀가 일부러 모욕적인 말을 골라 한 것처럼, 그는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있다. 애비는 미소지으며 한 손으로 주름이 간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엔진에 관해 쓰지 않을 거라고 했을 뿐이에요. 물론 언급은 하겠죠. 하지만 내 주제는 엔진이 아니라 그 엔진을 만든 남자가 될 거예요] 맬이 잠시 망설였다. 그 새로운 제안을 고려해 보는 듯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난 흥미 있는 인물이 못돼. 오히려 지겨운 인간이라구] [그 의견에는 찬성할 수가 없군요] 그녀는 유혹의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손을 그의 허리로 미끄러뜨렸다. [난 당신이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한쪽 눈썹이 미심쩍은 듯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갔다. [만약 그걸 쓰게 된다 하더라도 사는 사람이 없을지도 몰라] [그건 운에 맡기는 거죠] 그의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당신이 생가하고 있는 그 기사... 다 쓰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어?] [적어도 몇 달은 걸릴 거예요] 그녀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선 철저한 사전 조사를 해야 해요. 당신의 친구와 친척. 그리고 학교를 같이 다녔던 사람들과 인터뷰를 해야겠죠?] [난 수많은 학교를 다녔고, 친척이라고 불리 수 있는 사람들도 백사장의모래알만큼이나 많아. 그 사람들을 전부 찾아가 만나려면 수년은 걸릴 거야. 그런데 사전 조사를 하는 동안은 어디서 지낼 작정이지?] 애비는 거뭇거뭇해지기 시작한 그의 턱선을 따라 손가락으로 쓸었다. [비싸지 않은 아파트 하나 구할 정도의 재정 상태는 돼요. 하지만 비용을 함께 부담할 수 있는 룸메이트를 구할 수 있다면 훨씬 도움이 되겠죠] [그리고 집안 일도?] 마침내 그녀의 셔츠를 벗겨내는 데 성공한 맬이 제의했다. [그래요. 긴 팔다리를 가진 사람이면 더욱 좋겠죠] 맬이 싱긋 웃으며 셔츠를 어깨너머로 던져 버렸다.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낼 사람이 필요해서겠지?] [침대 밑의 이끼를 청소하는 데도 필요해요] 진 바지에서 다리를 뽑아내며 그녀는 덧붙였다. 맬이 그녀를 품안으로 끌어들였다. [운이 좋군, 애비게일 프루던스. 당신의 요구 사항에 꼭 들어맞는 그런 남자를 내가 알고 있는데, 마침 최근에 룸메이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녀석이야. 개심한 남성 우월론자인 셈이지] [잠깐만요, 내가 맞춰 볼께요] 온몸으로 그를 감싸 안으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요?] [그것보다 더 확실한 사람이야. 바로 나니까]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 그의 머리가 갑자기 기울어지더니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가슴을 덮었다. 작은 불꽃이 온몸의 혈관을 핥고 지나갔다. [장기 임대 계약을 해야겠는데, 문제가 되겠어?] 애비는 심각하게 생각하는 체했다. 실은 그의 손과 입술이 끊임없이 애무를 계속하는 바람에 제대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그야 상황에 따라 다르죠] 그녀는 숨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충 몇 년 정도의 계약이에요?] 맬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갈색의 눈동자가 사랑으로 빛나고 있다. [적어도 50년이나 60년] 그가 중얼거렸다. 말할 수 없이 진지한 어조였다. 목이 메어 애비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너무 길어?]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 듯 불안한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길지 않아요. 언제쯤이면 내가 옮겨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그의 눈가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워싱턴에서 오클라호마까지 며칠이나 걸릴 것 같아?] 그녀의 입술을 찾으면서 그가 쉰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틀이오] 애비는 행복에 잠겨 중얼거렸다. 사실, 그들이 오클라호마로 돌아가는 데는 그 3배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가는 도중에 수없이 차를 세워야 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