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번 호 : 1229/1333 ▶ 등록자 : VEGA64 │ │ ▶ 등록일 : 2001년 09월 19일 01:07 │ │ ▶ 제 목 : [드림/대경방] 열쇠 도둑 1장 - J.제프리즈 │ └───────────────────────────────────┘ 붐비는 주차장 안에 다른 차의 두 배나 되는 몸집 의 은빛 코르벳이 분할선을 밟으며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이만하면 일할 보람도 있겠어. 남자 이름을 가진 가냘픈 몸매의 보비는 자기 차 속에서 싱긋 만족의 웃음을 띠었다. 그녀는 차장을 열고 뒤따라온 레커 차에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케커 차를 운전하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악셀을 밟자 보비의 차를 앞질러 코르벳 앞으로 돌아 그 스포츠카를 자기 차 꽁무니에 달 수 있는 위치까지 백했다. 보비는 차에서 내리자 코르벳에 다가가 준비해 온 열쇠로 차의 문을 열고는 운전석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기아를 조절했다. 레커 차의 운전사가 작업을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보비는 자기 차로 돌아와 백 속에서 지갑을 꺼내어 그 남자에게 치를 팁을 챙겼다. "무척 일이 빠르군요, 마이크." 보비는 건장한 청년에게 정해진 보수를 건네면서 말했다. "차츰 일하는 솜씨가 나아지고 있어요." "하루 열 번이나 이런 일을 반복하니 나아질 수밖에요." 받 아든 돈을 때가 묻은 청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 마이크는 레커 차의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랐다. "그럴 만도 하군요." 눈 위에 손을 대고 오후의 눈부신 햇살 을 가리며 보비는 웃었다. "또 일이 있으면 전화하겠어요." 마이크는 한 눈을 찡긋해 보이고 차창 밖으로 교모하게 침을 탁 뱉었다. 그리고 "오우케이."하고 손을 흔들어 보이곤, 끌고 가는 고급 스포츠카의 엄청난 값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마구 스피드를 내며 캐피털 센터의 넓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로서는 날마다 되풀이되는 따분한 일의 하나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보비는 조그만 토요타 차로 돌아가 몸을 실었다. 그녀 역시 매일 반복되는 일에 지나지 않지만, 이번 일은 전혀 똑같다고 할수가 없었다. 보비는 차를 후진시켰다가 마이크가 달려 간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다른 경우에 비하여 이번 조사에는 무척 품이 많이 들었으나, 마침내 노력의 보람을 찾은 것이다. 더구나 이곳 워싱턴에서, 6개월 동안의 고생에 대해서 이보다 더 큰 보답이 있을까? 미스터 보레인 피어슨의 고급 장난감, 즉 부자들의 특권의 하나인 고급차를 자기 혼자힘으로 환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프로 농구 선수였으며 다른 어떤 스포츠맨보다 많은 보수를 받고 있 다는 것쯤은 보비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사실이 그렇지 않아도 열렬한 그녀의 조사 의욕을 더욱 부채질해 주었던 것이다. 브레인 피어슨 정도의 갑부가 차의 월부금을 떼어먹다니, 생각만 해도 얄미운 노릇이 아닌가? 그 같으면 일시불로 살 수도 있을 거야. 난 내 토요타의 월부금을 치러 나가는 것만으로도 허리가 될 지경인 데.... 그렇게 생각하면 더욱 화가 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보비가 가난한 것은 아니다. 훌륭하게 자립해 나가고 있었다. 다행히 AMAC 파이넌스의 근무가 좋은 열매를 맺어 가고 있으며, 이번에는 일에 대한 그녀의 끈덕진 끈기가 보답을 얻은 셈이다. 최근 일년 반 동안 크레딧 담당자로서의 그녀의 업무 내용은 자꾸 확대되고 갔고, 채무 자로서의 그녀의 업무 내용은 자꾸 확대되어 갔고, 채무자 조사원으 로서의 일까지 겸해서 보게 된 것이다. 보비는 이렇게 남의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것이 자기의 적성에 맞 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해온던 크레딧 담당자로서의 일이 너무나 단조롭고 재미가 없어서 월급과는 관계 없이 딴 데로 옮길까 하던 중 에 다행히 이런 일이 그녀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분야에 전력 투구하게 되었고 AMAC는 그녀의 우수한 업무 성적에 특별 보너스로 보답해 준 것이다. "일은 어땠소?" 그 소리에 파일을 들여다보던 얼굴을 들어 보비는 사무실 입구에 랠프 굿맨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의 곧은 갈색 머리 는 단정하게 빗겨 있고, 검은 테 안경이 얼굴 복판에 엄숙하게 자리잡 고 있었다. "마침내 그 우상적인 농구선수를 찾아냈소?" 보비는 웃으면서 손으로 오렌지색 스웨터 앞으로 늘어뜨려져 있는 숱많은 황갈색 머리를 홱 뒤로 쓸어넘겼다. 지불을 약속대로 하지 않 는 손님을 뒤쫓아다니는 보비의 일에 랠프가 요즘 적잖게 흥미를 나타 내는 것이 그녀는 반가왔다. 혹시 어쩌면 그는 판에 박은 듯한 경리 일 보다 변화가 많은 스킵 트에이서(채무자 조사원)의 업무를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 찾았어요. 마침 그 유명한 브레인 피어슨의 파일을 들추어보고 있는 중이에요. 이만큼 돈이 많은 사람이 낼 돈을 내지 않고 신용을 떨 어뜨리고도 태연하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요. 도대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랠프는 어깨를 추스르고 입을 꽉 다물어 보였다. "흔히 있는 일이오. 혹시 어쩌면 이혼한 부인이나 아이들에게 위자 료나 양육비 같은 것을 다달이 보내야 하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들리는 바에 의하면, 프로 선수가 매니저에게 상납하는 금액도 상당하다더군, 주변을 돌보는 것에만도 바쁘겠지요." "어머, 랠프. 우리는 그보다 휠씬 적은 급료를 받고도 경제적으로 파탄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 않아요?" 보비는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리렸다. "그리고 그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어요." "아, 그렇소?" 하더니 랠프는 결론을 내리듯이 말했다. "그런데 당 신은 인정 사정이라는 것이 없군. 타고 다니던 차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면 그 불쌍한 남자는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 본 일이 있소? 그런 그렇고, 그 차는 어디서 찾았소?" "캐피털 센터에서요. 브리츠 팀은 주말에 레이커즈팀과 시합이 있 어서 지금 이곳에 와 있어요." "아, 그랬었지." 랠프는 고개를 끄덕었다. "브리츠가 이길 거요." 보비는 어깨를 추슬렀다. "나로서는 어느 쪽이 이기든 알 바가 아니에요. 농구 따위는 구경 하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하지만......." 장난스럽게 웃고는 말했다. "이번 시합은 무척 기다렸어요. 피어슨이 시합이 열리는 자기 고향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이쪽에서는 그저 길목만 지키고 있으면 되었어요." "그렇군." 랠프는 감탄한 듯히 말했다. "분명 그의 집은 이 근처였 지? 메릴랜드나 버지니아가 아니오?" "버지니아의 페이팩스예요. 그곳이 그의 출생지예요. 하지만 내 조 사에 의하면, 그에겐 진정한 고향 같은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시합 때 문에 늘 여기저기로 떠돌아 다니며, 가족과 같이 지낼 시간도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겠군."랠프는 그렇게 말하고 팔목시계를 흘끗 보더니 일어섰 다. "아차, 서둘러야지." 그는 한 손을 관자놀이에 붙이고 경레를 하는 시늉을 했다. "그럼 이따가 또 봐요, 모로 탐정." 보비는 애매한 웃음을 띠어 보이고 다시 농구선수의 동향에 관한 지난 5개월 동안의 정보가 수집돼 있는 파일로 눈길을 돌렸다. 가까스 로 이 사건이 해결됐는데도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지금까지 해도언 어떤 일보다도 이번 조사는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브 레인 피어슨의 인새은 자기와는 무관한 것인만큼 그의 차를 환수해 버리 고 나면 일은 끝나는 것이다. 그는 재산 관리 면에서는 무능하지만 서민 의 볼 때는 부러운 팔자가 아닐 수 없었다. 인기 있는 농구선수...... 보비로서는 그 사실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보비는 크레딧 담당자에서 스킵 트레이서로 승격한 것이 만족스러웠으나, 이것도 다음 단계를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이튿날 오후, 보비는 점심을 먹고 돌아오면서 교환수의 데스크에 들러 밖에 나가 있는 동안에 걸려 온 전화의 메모를 받았다. 자기 사무실을 향 해 통로를 걸으면서 점심 시간에도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벼운 눈인사 를 보내고는 그 메모를 주욱 훑어보았다. 스킵 트레이서로 승격하면서 그녀에게는 특전으로서 개인 사무실이 주 어졌다.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 문들 닫자, 보비는 좀 피곤한 기색으로 의 자에 앉았다. 그녀가 돌아온 것을 안 교환수가 바로 외부로부터의 전화를 이어 주었는지 호출 신호가 까박거리고 있었다. "보비 모로입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반사적으로 메모 용지를 끌어당 기고 연필을 집어들었다. "일이 없는데 전화를 걸리가 있겠읍니까." 대뜸 귀에 들리는 알수 없는 말에 그녀는 한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러면서도 듣기에 거슬리지 않는 사내 다운 낮은 목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등을 꼿꼿이 세우고 연필을 물어쥔 보비는 겨우 대꾸했다. "실례지만 이름을 말씀해 주실까요." "브레인 피어슨입니다. 내 이름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요? 어제 다 짜고짜로 내 차를 끌고 가버렸으니까요.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남의 차를 그 렇게 함부로 가져가는지 모르지만, 미스.....지요?......모로." 꼿꼿이 세운 등줄기가 굳어지고 연필이 둔한 소리를 내며 책상 위에 떨 어졌다. 지금 말하고 있는 상대가 오랫동안 자가의 골머리를 썩여 왔던 장 본인이는 사실에 그녀는 놀라서 한순간 입을 뻥하니 벌리고 있었다. 비록 그가 유명한 선수가 아니라 해도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까지 자기 차를 환수당하고 나서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로운(loan)의 지불 계약을 깬 편에서 뻔뻔스럽게 전화를 걸어 오다 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야! "그렇습니다만,"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할까 경계하면서 보비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한데....한데, 어떻게 내 이름을?" 그 질문에 그 남자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 남자의 건장한 모습을 연상하 게 하는 거친 웃음소리였다. 파일에는 피어슨의 사진이 많이 담겨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워싱턴 브리츠팀의 선수로서 신문에 실린 스냅 사진이었다. 그 대부분이 땀에 젖은 농구 유니폼을 입고 팔다리가 긴 몸을 거침없이 드러낸 사진이었다. 갑자기 근육질의 긴 다리가 눈앞에 또올라 보비는 이상한 동요 를 느끼면서 목안이 뜨거워지고 이마에 땀이 배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깃들여 있었다. "주차장 사람이 내게 협조적이어서요, 내 차를 채 간 회사 이름을 가르쳐 주더군요." 보비는 헛기침을 하고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미스터 피어슨, 뭐 물을 말씀이 있으시면 크레딧과에 물어 보세요. 물론 그 건은 내가 다루었지만, 이젠 내 담당이 아니니까요." "아, 그래요." 그는 쌀쌀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지금은 누가 내 건을 다 루고 있읍니까?" "방금 말씀드린 대로 크레딧과의 미스터 찰즈 램버트한테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담당자니까요." "하지만 실제로 내 차의 환수를 지휘한 것은 미스 모로, 당신이란 것이 사 실이오?" "그렇습니다." 의심스럽게 눈을 가늘게 뜨고 보비는 간단하게 말했다. 도대 체 왜 그런 것을 물을까? "그렇다면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밝힐 책임자는 당신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데요." 그는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미스터 피어슨." 더욱 이상해져 가는 회화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보비는 딱 딱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되풀이해서 말씀드리는데, 그 건은 이제 내 담당이 아 니에요. 이미 크레딧과로 넘어갔으니, 의문이 있으면 그쪽으로 알아보십시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당신이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미스 모로, 만일 당신이 이 건에 관해서 내 변호사말고 본인인 나와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으면 말이오." 보비는 이런 으름장을 가볍게 생각하는 편도, 필요 이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 이는 편도 아니였다.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미스터 피어슨." 무관심한 체하면서 말했다. "만일 당신이 변호사를 내세우겠다면 기꺼이 그분과 이야기를 하겠어요." "그렇다면 미스 모로, 가까운 장래에 그렇게 될 것을 약속합니다. " "좋습니다." 보비는 아무지게 말했다. "그럼 실례합니다. 미스터 피어슨." 상대 방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수화기를 덜컥 놓으면서 손이 아직 떨리는 것을 느끼고 보비는 약간 당황했다. 아무리 허세를 부려 보아도 브레인 피어슨과의 신경전에서 상당히 얻어맞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이없는 일이야, 입만 살아 있는 사기꾼 같은 남자한테ㅔ 이렇게 쩔쩔맬 필요가 있을까? 그는 AMAC를 속여 자기의 재력에 맞지 않는 스포츠카의 로운을 계약했다가 이제 와서는 자기에게 하자가 없다고 큰소리치고 있어. 그 남자의 뻔뻔스런 오만함 에 보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었다. 그런 호전적인 태도 로 도대체 어쩌자는 것일까? 6개월도 더 전에 계약한 로운을 단 한번도 치르지 않은 사실을 변명할 무슨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대겠단 말인가? AMAC의 지사의 스킵 트 레이서로부터 그와 비슷한 사기꾼 이야기를 들어 본 일은 있지만 직접 당해 본일은 없었다. 보비는 파일 캐비닛에 다가가 브레인 피어슨의 파일이 들어 있는 서랍을 열었다. 자료를 주욱 흝어보고는 그대로 들고 데스크로 돌아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가장 중요한 서류인 로운 계약의 카피도 거기에 철해져 있었다. 미스터 피어슨에게 나간 수많은 독촉장---- 그 어느것에 대해서도 회답이 없었다 ---- 과 함께. 보비는 찬 찬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자기 변호를 위해서 무슨 핑계를 꾸며대든 방금 밑바닥 이 드러나고 말 것이다. 그때 밖에서 랠프가 노크했으나 보비는 전혀 듣지를 못했다. 할수없이 랠프는 그 냥 문을 열고 들어와 거기에 있는 단 한개의 의자 --- 데스크 맞은편에 있는 등나무 의자 --- 에 결터앉았다. 랠프가 의아스런 눈길로 자기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보비는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아아, 당신이었어요, 랠프?" 미간에 주름을 잡고 보비는 생각에 잠긴 웃음을 띠 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요? 내가 우습게 보여요?" "당신이 우습게 보일 턱이 있겠소? 그게 아니라 ..... 난 노크를 열 번이나 했단 말이오. 그런데 당신은 듣지를 못하니, 보통일이 아닌 것 같군." 보비는 일어서서 다시 한번 파일 캐비닛 앞으로 가서 서류를 집어넣었다. "난 무얼 좀 생각하고 있었어요. 복도에서 폭탄이 터져도 몰랐을 거예요." "아니, 그건 또 무슨 까닭이오?" 랠프는 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것은 호기심이 생길 때 그가 하는 버릇이었다. "브레인 피어슨이 전화를 해 왔어요." "설마. 믿을 수 없는 일이군." 다리를 포개고 팔짱을 끼며 랠프가 말했다. "하지만 사실인 걸 어떻게 해요." 보비는 말을 계속 하면서 지금까지 팽겨쳐 두었던 메모 뭉치를 집어들었다. "우리가 환수한 그의 자동차건 때문에 변호사를 내세우겠다고 겁을 주더군요." "어이구! 그런 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소." 랠프는 깜짝 놀란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 하지만 무서울 것은 없어요." 보비는 자신만만했다. "미스터 피어슨이 아 무리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해도 여기 이 파일을 보기만 하면 당장 머리를 숙이고 물러날 테니까요." "한데 그 전화로 당신이 상당히 흥분하고 있는 것같은데, 무슨 까닭이오?" 순간 보비는 흠짓했다. 이따금 랠프는 사람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소리를 잘했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보비가 입사한 뒤로 줄곧 어울려 왔고, 일 관계를 넘어선 데까지 사이가 발전하고 있으니까. "당신의 관찰은 정확해요." 그녀는 솔직이 인정했다. "하지만 모든 일은 끝났고, 내게서 떠난 문제에요. 저편에서 할말이 있으면 크레닛과에 가야 할 거예요." "그에게 그렇게 말했소?" "물론이지요. 하지만 그는 전혀 납득하는 것 같지 않았어요." 랠프는 알았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야 그럴 거요. 피어슨같은 자존심 강한 인간이 순순히 물려서겠소? 멋대로 생각하라지 뭐. 그런 그렇고..." 무릎 을 탁 치고 그는 일어섰다. "이번 주말에 무슨 예정은 없소?" 보비는 신음소리를 내고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리며 의자등에 기댔다. "없기는 왜 없어요. 잔뜩 쌓여 있는 허더렛일을 해치워야지요. 세탁, 청소, 그리고 또 세탁... 정말 진절머리가 나요." "그 눈부시게 빛나는 스케줄 속에 하나 더, 내일 저녁 나와 함께 영화를 보 러 가는 일을 끼워 넣을 수는 없겠소?"" 보비는 의미 있게 눈을 빛내며 미소지었다. 지금까지 랠프가 두 사람의 관 계를 진전시키려고 하는 것을 느낀 일일 몇 번인가 있었지만, 보비는 그때마다 거절해 온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는 것이 자연스런 일인줄은 알고 있으나, 뭔 지 설명을 할 수 없는 망설임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시간이 더 필요한지도 몰 랐다. 그녀의 말설임을 충분히 알고 있는 랠프는 지금도 언제나처럼 보비의 기 분을 존중해서 말했다. "영화만 보겠다고 약속하겠소, 정말." "그럼 좋아요. 내일 오후에 전화를 해주세요." 랠프는 기쁜 듯이 웃었다. "오우케이, 그럼 그때 봐요." 안녕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사무실을 나갔다. 돈을 아끼려고 보비는 매크린의 자기 아파트에서 버지니아주 아링턴에 있는 회사까지 이웃 동료들과 공동으로 차를 부리며 통근하고 있었다. 오늘도 여섯 명의 동료를 태운 차가 저녁의 교통 체중 속을 느릿느릿 빠져나가고 있을 때, 시계 바늘은 일곱 시를 가리키려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아무 예정도 없기 때문에 보비는 마음이 놓였다. 일주일 동안의 수면 부족의 필요가 쌓여 있어서 마음 편하게 혼자 저녁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가볍게 보아넘길 수 있는 텔레비 전 프로나 보면서 잠이 올 때까지 거실의 긴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있자. 아파트 층계를 올라 3층의 자기 방에 들어선 보비는 바로 부담없는 저녁을 보낼 준비를 했다. 퀼팅 안감의 트렌치 코우트를 몸을 흔들어 벗고는 구두를 차서 벗었다. 그러고는 침실로 가서 발목까지 내려오는 벨루어천의 포도주빛 로브로 갈아입고 같은 빛깔의 부드러운 슬리퍼를 신었다. 주방에 들어가 보비는 한가로운 기분으로 아이티초크를 만들고 버섯을 데 치고 프랑스빵을 구워 가벼운 식사를 준비했다. 다 된 것을 쟁반에 담아 거 실로 날라와 호두나무와 유리로 만든 커피 테이블 위에 놓았다. 리모큰을 집 어들어 긴의자에 몸을 파묻고 텔레비전을 켠 보비는 몸이 풀리는 것을 느끼 면서 식사를 시작했다. 퍼슬퍼슬한 프랑스빵에 버터를 발라 한입 베어 물었을 때 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뜻밖의 방문객에 약간 짜증스러워하며 보비는 텔레비전의 볼륨을 낮추고 아직 입을 우물거리며 현관으로 서둘러 갔다ㅏ. 빵을 꿀떡 삼키고 는 문을 열고 체인을 걸어 놓은 채, 이런 시각에 도대체 누가 왔나 하고 내다 보았다. 보비는 나중에 생각하기를, 문밖에 서 있는 무지무지하게 키가 큰 남자 를 보기 전에 빵을 삼키기를 잘했다 싶었다. 만일 거기에 사심이 와서 서 있었다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이럴 수가! 보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곳에 브레인 피어슨이 와서 우뚝 서 있다니. ┌───────────────────────────────────┐ │ ▶ 번 호 : 1234/1333 ▶ 등록자 : VEGA64 │ │ ▶ 등록일 : 2001년 09월 21일 00:27 │ │ ▶ 제 목 : [드림] 열쇠 도둑 2장 - J.제프리즈 │ └───────────────────────────────────┘ 자기가 뻥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보비는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혹시 어쩌면 이것은 환상일지 도 모른다. 그런데 그 환상이 말을 하는 것이었다. "미스 보비 모로를 찾아왔는데요." 그날 오후 전화를 통해 들었던, 울림이 깊은 목소리였다. 그는 이야기하 면서 다리 하나에 체중을 옮기고 놀랄 만큼 큰 키를 약 간 낮추었으나, 그래도 보비는 고개를 뒤로 한껏 젖혀야 그를 쳐다볼 수 있었다. 눈앞에 서 있는 거인을 그녀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 다보았다. 민첩하게 눈길을 달리며 그녀는 현실의 피어 슨과 파일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스냅 사진의 피어슨을 머릿속에서 비교하고 있었다. 흑백사진에서는 그의 멋 있게 커트된 머리가 검정색이나 암갈색으로 생각되었으 나, 실제로 보니 붉은기가 도는 짙은 갈색이었다. 건겅하게 구릿빛으로 탄 얼굴, 바다 같은 짙은 푸른 색 눈이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는 매력을 뿜고 있었다. 베이지색 모직 바지, 암갈색의 니트 셔츠, 트위드의 스포츠 자켓을 두른 건장한 몸은 사진에서보다 휠씬 매 력적이었다. 한군데도 나무랄 데 없는 체격이였으며, 더구나 엄청나게 큰 키에도 불구하고 브레인 피어슨은 놀란 만큼 핸섬했다. 그녀는 애써 자신을 찾았다. "내가 보비 모로예요." 될수록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이 아파트를 어떻게 알아냈을까? 일부러 이런 데까지 찾아온 목적은 무엇일까? "아아, 그러세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는 문과 벽 사이의 조그만 틈새로 인상적인 푸른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체인 로커의 뒤에 서 있는 조그만 몸매의 그녀가 뜻밖이었는지 그의 눈망울이 순간 번쩍 빛난 것 같았다. 문득 보비는, 그가 부츠를 신은 발로 한번 걷어 차기만 해도 쉽게 집안으로 침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 닫았다. 엉겁결에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가하며 문틈 을 더욱 좁혔다. "미스터 브레인 피어슨." 보비는 초록빛 눈을 빤히 상 대방에게 향하고 쌀쌀하게 말했다. "이런 데서 무엇을 하 고 계신지요?" "우리는 좀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읍니다. 안 그렇습 니까?" 그때 그의 아래턱이 좌우로 움직였고, 보비는 그 이상 한 움직임을 의아스럽게 지켜보았다. 도대체 무엇일까?... ... 담배로군! 씹는 담배가 틀림없어! 보비는 불쾌한 얼 굴이 되었다. 이 남자의 눈부신 육체적인 매력도 그것 하 나로 완전히 희미해져 버렸다. 남자가 가지는 여러 가지 습관 중에서 그녀가 제일 지겨워하는것이 바로 담배를 질 근질근 씹는 것이었다. 그저 생리적으로 몸서리가 쳐질 뿐 이지 그 이유를 분석한 일은 없었다. 과연... 보비는 빈정 거리며 생각했다. 전형적인 시골뜨기군, 교양이라곤 없는 덜렁쇠야. "실은," 보비는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지금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웬만하면 여 기서 그냥..... 예고도 없는 방문이 귀찮다는 내색을 하면 서 그녀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남자다운 턱을 다시 움직이더니 또 멎었다. "당신이 싫어해도 어쩔 수가 없읍니다, 미스 모로." 그 의 눈매는 엄격하고,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건 절대로 양 보하지 않겠다는 기색이 보였다. "오늘 오후 당신은 내 어 려움에 대해서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기를 거절했읍니다. 그러니 개인적인 방문이라면 받아 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 요." 보비의 인내력도 한계에 다달았다. 혼자 조용한 밤을 지 내는 즐거움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혼자 편 안하게 지내고 싶다면 담배를 질근질근 씹고 있는 이 짜증 나는 시골뜨기를 쫓아 버려야 한다. "보시다시피, 미스터 피어슨." 그녀는 안됐다는 듯이 말 했다. "난 지금 누구의 방문을 받을 형편이 못됩니다. 모르 는 사람은 더군다나 그렇지요." 서슴없는 푸른 시건이 보비의 얼굴에서 매끄러운 목으로 옮기가는가 싶더니 앞깃 사이로 드러난 골짜기에 잠깐 멎었 다. 목안에서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을 느끼고 보비는 로브 의 앞깃을 꼭 여몄다. "날 모른다고는 못하겠지요?" 억세게 생긴 턱의 선이 또 회전운동을 시작하고, 푸른 눈이 도전하듯이 번뜩였다. "나 는 다른 사람의 옷차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트집잡는 사람은 아닙니다." 목안에서 올라오던 뜨거운 것이 노여운 불길이 되어 보비 는 울컥하면서 쏘아붙였다. "오늘 오후 전화로 설명드린 일을 못 알아들으신 것 같으 니 다시 한번 되풀이하겠읍니다, 미스터 피어슨. 만일 환수 된 당신의 차에 대해서 알아볼 일이 있으면 크레딧과로 문 의해 주십시오." 그는 짙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형식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담당하는 일은 지불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을 추적하는 데 필요 한 모든 정보를 손에 넣는 거예요." "내 차도 그런 이유로 환수당한 겁니까?" "네, 그래요." "그렇다면 미스 모로, 당신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어요. 나는 차의 대금을 모두 지불했고 당신의 회사에 대해서는 아무 빛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반론하려고 보비가 입 을 열었으나 브레인은 그것을 막았다. "한마디 묻겠는데, 이 일에 관해서 크레딧과말고 누구하고 상의한 일이 있읍 니까?" "무엇 때문에 그럴 필요가 있지요?" 보비는 눈썹을 찌푸 렸다. 브레인은 자켓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흰 봉투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조금 치켜들고는 다른 손으로 탁 두르려 보 였다. "만일 당신이 소유권의 등록과에 조회를 했더라면 모든 사정을 알았을 텐데요." 그 봉투를 보자 보비는 미간에 더욱 깊은 주름을 잡았다. "이것이 무엇이지요?" 또 몇 번 턱이 좌우로 움직이더니 멈췄다. 진지한 얼굴 로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서 번뜩임이 사라졌다. "차의 권리증서요." "뭐, 뭐라구요?" 보비는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말씀드린 그대로요. 몇 달 전부터 내 수중에 있는 진 짜 권리증서입니다." 떨리는 숨을 삼키고 보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초록 빛 눈을 크게 뜨고 말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하지만, 그럴리가 없어요." "사실이 그런 걸 어쩝니까." 브레인은 분명하게 단언하 고 봉투를 자켓의 호주머니에 도로 집어넣고는 두손을 허 리에 댔다. "날 언제까지나 이렇게 밖에 세워둘 겁니까? 여기에 서 있으니 좀 춥군요." 보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슬어슬하게 추운 이른봄 저녁, 긴 로브 옷자락에서 스며드는 냉기에 오싹하니 소름 이 돋고 있었으니까. 보비는 상대방의 놀라운 주장에 대해 서 얼른 생각해 보았다. 그는 틀림없이 엉터리 이야기로 사람을 속여넘기려 들고 있어. 하지만 만일 그 주자에 한 조각의 진실이라도 있다면 그를 집안에 들여놓아야 할 것 이 아닌가? 전혀 믿을 수 없는 이 이야기이기는 하나 상대 방의 말도 들어 보는 것이 순서일지도 몰라. 그리고 그의 말처럼 전혀 모르는 사람을 집안에 들여 놓는 것은 아니니 까. "알았어요...." 약간 망설이면서 대답하고는 체인로커를 벗기고 문을 열었다. "자아, 들어오세요. 저어... 옷을 갈 아입고 오겠으니 거실에서 기다려줘요." 브레인이 현관에 들어오자, 별로 좁지도 않은 아파트가 갑자기 좁아진 것 같았다. 손짓으로 그에게 의자를 권하고 보비는 거실에서 복도롤 나와 침실로 서둘러 갔다. 급히 로브를 벗고 약간 빛이 바랜, 몸에 딱 맞는 청바지와, 초록 빛 폴로 스웨터를 머리에서 뒤집어 썼다. 조금 헝클어진 머 리에 브러싱을 하고 경대 위에 있는 입술연지를 집어들자 문득 손길이 허공에 멈추었다. 도대체 내가 지금 무엇을 하 고 있단 말인가? 겉차림을 꾸며 봐야 아무 의미도 없지 않 은가? 더구나 상대가 브레인 피어슨이라고 보면 전혀 무의 미하다. 지금 내가 할 일은, 그의 진실성이 없는 지어낸 이야기에 잠깐 귀를 기울이고 될수록 빨리 그를 이 집에서 몰아내는 일이다. 브레인은 보비가 권한 비닐 회전의자에 걸터앉았다. 흘끔 커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음식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다 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자들은 왜 이러는지 모르 겠어, 일년내 식이요법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저런 토끼밥 같은 것으로 지탱할 수 있는지. 그는 무릎 위에 한쪽 다리를 포겠다. 보비 모로가 자기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너무 동떨어져 몰래 미소지었다. 소녀처 럼 조그만 여자는, 낮에 전화로 잠깐 통화하면서 상상한 고 집세고 괄괄한 여결과는 도저히 일치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여자는 아무리 체구는 작아도 자기 직업에 긍지를 갖고 있는 만큼 이쪽은 진절머리나는 말썽에 휘말려들어 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코르벳이 도난당한 줄 알고 낙담했는데, 사실은 파이낸스 회사에 환수당한 것을 알자 격심한 노여움이 치밀 었다. 바로 그 회사의 지시로 몇달 전에 차값을 모두 지불했 는데, 아님 밤중에 홍두깨격이었다. 그 동안 크레딧과로부터 로운의 지불이 밀려 있다는 경고를 몇 번 받았으나, 그것은 상대방의 미스인만큼 일부러 신경쓸 일은 못 된다고 생각했 던 것이다. 그때도 그는 불쾌한 미스를 바로잡아 달라고 소 유권의 등록과에 편지를 냈고, 그곳 책임자로부터 사과의 회 신도 받았던 것이다. 그런고로 그 뒤의 경고장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으며, 늘 시합에 쫓기느라 편지 처리도 제 대로 못하는데 그런 조그만 문제에 일일이 매달릴 겨를이 없 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소한> 문제로 끝나지 않게 된 것이다. 넌더리가 날 만큼 복잡한 수속을 밟아 겨우 차의 소재를 밝 혀냈고, 이런 어리석은 사태를 불러일으킨 책임자의 이름을 가까스로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보비가 남자 이름인 줄만 알았는데, 전화를 받는 주인공이 여자라는 데 놀랐다. 더구 나 그녀는 이쪽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귀담아 들으려고도 하 지 않을분더라 방금 끝낸 복잡한 수속을 처음부터 다시 하라 는 것이었다! 지끔까지 그는 자신을 노여움이나 원망으로 귀 중한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 없는 매우 낙천적이고 온화한 인간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의 내부에서 무 언가가 치밀어 올라왔던 것이다. 아늑하게 차려진 아파트안에 느긋하게 앉아 방안을 둘러보 던 브레인은, 그녀가 혼자 사는 것을 알자 그 까닭을 생각해 보고 있었다. 매력 없는 여자도 아니니 금요일 저녁에 혼자 지낼 성싶지는 않은데? 그때 보비가 거실로 돌아왔고, 브레인은 좀전에 그녀에게 매겼던 점수를 좀 감점했다. 조금 전, 벨루어 로브에 싸인 몽실몽실한 몸매를 브레인은 놓치지 않고 보았던 것이다. 그 러나 지금 입고 있는 스웨터와 청바지 차림은 정말 보아줄 수 없어! 로브 차림 그대로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을! 브 레인이 좋아하는 타입은 키가 크고 늘씬한 몸매의 여성이다. 물론 자가의 큰 키를 계산에 넣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건 그렇고... 브레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의 조그만 몸 안에는 틀림없이 다아니마이트가 쟁여 있을 것 같군. 그게 틀림없어. 거실에 앉아 잇는 핸섬한 거인의 위압적인 존재 앞에서 보 비는 어떻게든 꿋꿋한 자세를 지키려고 애를 썼다. 앉아 있 는 그에세서도 그의 엄청나게 큰 키를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 을 것이다. 그의 언제나 주위에 있는 사람을 --- 지금은 재수 없게 보비 자신이지만 --- 힘없고 허약하게 보이게 만드는 것 이었다. 보비는 의젓한 태도로 방안에 들어와 커피 테이블에 다가가 썰렁하게 식어 버린 저녁 식사를 주방으로 물렸다. 여 기는 내 집이야, 하고 보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느 누구든 그 사실을 뒤엎을 수는 없는 거야. 하지만 자신을 격려하는 그 말은 어찌된 까닭인지 설득력이 없었다. 지금의 상태를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그는 구름에 머리가 닿은 만큼 키가 큰 남자 이고, 그 남자를 집안에 들여놓은 자기는 세계 제일 가는 바보 인 셈이야! "내가 식사를 방해한 것 같은데요." 브레인은 미안한 듯이 말했다. 15분 전에 문을 열고 그가 문밖에 서 있는 것을 본 순간부터 식욕은 달아나 버린 것이다. 이제부터 할일은 그가 차의 권리 증서를 가지고 있다는, 있을 수 없는 문제에 대화의 촛점을 맞 추어야 하는 것이다. "괜찮아요." 가볍게 받아넘기고 주방에서 음식과 그릇을 치우 고 나자 보비는 거실 입구에 멈추어 서서 팔짱을 끼고 문설주에 몸을 기댔다. "그러면 우리가 환수한 차의 소유권에 어떤 크레 임이 있는지 들려주실까요." 보비는 그가 하려는 말을 막듯이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미스터 피 어슨, 그런 미스가 일어날리가 없어요. 그러니 당신이 지어낸 이야기에 상당한 설득력이 없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거예요." 점 수가 나쁜 성적표를 앞에 놓고 아들의 서투른 핑곌르 들어주는 어머니처럼 보비는 마음에도 없는 인내력을 보이며 초록빛 눈으 로 흘끔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거실에 있는 브레인 피어슨의 압도적인 존재로 인해 더욱 긴장감이 더해져 가고 있 었다. 전화로 이야기하는 편이 휠씬 쉬웠을 것인데, 보비는 우울 한 마음으로 그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않았던 것을 후회했 다. 브레인은 재미있다는 듯이, 그리고 가소롭다는 듯이 조그만 몸 매의 거만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몸은 작지만 용기는 남다른 것 같았다. 입을 우물거리니까 상대방이 매우 싫어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브레인은 의아스럽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 불쾌한 일이라도 있읍니까, 내가 찾아온 일말고요?" 어깨에 힘을 주며 보비는 거실로 들어와 긴의자 끝에 걸터앉았 다. "네, 나는 이 아파트가 걱정이 되어서요." 보비는 방복판을 가 르키며 팔을 내저었다. "보시다시피 재떨이가 준비되어 있지 않 아서요." 그 말에 브레인은 턱의 움직임을 그치고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 것 같은 모습을 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요?" 푸른 눈이 놀란 듯이 여자를 쳐 다보았다. "담배를 씹는 분이 우리 집에 온 것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제발 방안에다 참을 뱉어 더럽히지 말아 달라는 말이지요." 브레인은 한동안 그녀의 진지한 표정을 쳐다보더니 우스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킬킬거렷다. 이런때 웃다니 어쩌자는것일까? 보비는 얼굴을 찌푸리고, 그가 일어서서 태연스럽게 주방으로 걸 어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가 이 집 사람인 줄 알겠어! 브레인은 고개를 저으며 타일에 깐 바닥에 부츠 소리 를 울리며 가더니 그릇장 밑에 달아 놓은 페이퍼 타월을 찢어 씹 고 있던 껌을 싸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카운 터를 짚고 몸을 기대면서 주방과 거실 사이에 있는 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무 태연하고 자연스럽기조차 한 그의 거동에 보비 의 짜증은 더해 갈 뿐이었다. 자켓은 이미 벗고 있었고, 몸에 딱 붙은 니트 셔츠에 싸인 떡벌 어진 어깨가 보비에게 약간 위압감을 주었다. 아무래도 상대방으 로부터 눈을 돌릴 수가 없어 그녀는 숨을 삼켰다. 예술적인 조각 품과도 같은 근육이 치솟은 팔뚝을 따라 보비의 초록빛 시선이 미 끄러져 갔으며, 날씬한 허리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굵은 목이며 모가 난 턱, 그리고 재미있어하는 표정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이쪽을 할긋할긋 바라보고 있는 푸른눈k지 올라갔다. 겨우 남은 자제심을 긁어모아 보비는 침착함을 꾸미며 말했다. "무엇이 그렇게 우습지요?" "당신이." 마치 지금까지 본 일도 없는 이상한 생물을 관찰하듯 이 브레인은 보비를 신기한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로 내가 담배를 씹고 있는 줄 알았소?" 보비는 불쾌한 얼굴로 희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인은 치밀어오르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는 듯했다. "이제 당신의 가구도 카펫도 무사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안심이 되겠군요. 난 그저 껌을 씹고 있었을 뿐이오. 그건 그렇고, 좀 우 습지 않아요?" "무엇이요?" 그의 웃음을 사게 된것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면서 보비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저녁 식사에 토끼 먹이 같은 것이나 먹는 사람이 담배 씹는 취 미를 탓한다는 것은 좀 웃기는 일이오." 그 비웃음에 기분이 나빠져 눈을 가늘게 뜨고 보비는 거만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토끼 먹이라니요?" 브레인은 카운터에서 몸을 일으키자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오더 니 아까의 의자에 앉아 긴 다리를 꼬았다. 그가 앉으니 쿠션이 슈 우하는 소리를 내어 보비는 이마를 찌푸렸다. 의자에 씌운 비닐이 벗겨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이티초크와 버섯으로 식사를 마치는 사람이 담배 씹는 습관 을 놓고 탓할 권리는 없다는 말이오." "당신이 여기에 온 것은 그런 쓸데업는 것을 따지기 우해선가 요?" 문득 이 대화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보비는 야무지게 말했다. 브레인은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그 눈에서 재미있어하는 번뜩임 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6개월에 걸친 AMAC 파이낸스와 의 트러블에 관해서 그가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을 듣는 동안 보비 가 처음 느꼈던 불안감은 완전한 공포로 바뀌었다. 자신만만하게 설명하는 말투에서 거부할 수 없는 진실성이 느껴졌다. 그때 문득 , 오랫동안 무시해 왔다기보다 무시하고자 했던 어떤 일이 생각나 보비는 명치끝에 찌르는 아픔을 느꼈다. 아니, 그럴리가 없어. 마음속에서 그렇게 부정해 보았다. 설마 그런 일이! 하지만 브레인 피어슨의 고집센 얼굴을 보면서 그녀는 이 자리 에서 거친 말이 오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겨우 보비는 아까보다 휠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표정도 많이 누그러지고 동정의 빛까지 떠올렸다. "우선 미스터 피어슨, AMAC가 당신에게 그토록 폐를 끼쳤다면 진심으로 사과하겠어요. 다만 당신의 거처를 알아내어 차를 환수 하라는 크레딧과의 요청에 따랐을 뿐이에요." 어쩔수가 없었다는 듯이 보비는 한쪽 어깨를 추슬러 보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나도 손을 쓸 길이 없어요. 회사는 일요일까지 쉬게 되고, 그 문 제를 조사하자면 아무리 서둘려도 월요일 아침이나 되어야 하니 까요." 브레인은, 보비의 섬세한 얼굴에서 고집스런 표정이 사라지고 대신 따뜻한 표정이 깃들이는 것을 흥미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 기분좋은 변화에 그는 몸 깊은곳에서 무언가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아마 그녀는 내 어려움을 걱정해 주고 있는 게지. 그는 자기와 마주 앉아 있는, 조그맣고 연약해 보이는 여자에게 끌리 는 자신을 느끼고 손을 뻗어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싶은 충동과 싸우고 있었다. 하려고만 하면 한손으로도 충분하겠지. 사실 그 녀는 그럴 수 있을만큼 작아 보였다. 문득 그는, 월요일까지 이 여자를 만날 수도 없고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할 강력한 수단이 없지도 않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AMAC에서 우연히들은 미스 모로의 <나무랄 데 없는> 근무 자세는 아마 충분한 이용거리가 될 수 있을것이다. 괜찮은 아이디어군.... 아니, 정말 좋았어. 그는 포갰던 다리를 내리고 앞으로 몸을 구부려 두 팔을 무릎위에 얹고는 두손을 깍지 끼었 다. "월요일까지는 기다릴 수가 없는데요." 브레인은 엄숙한 목소 리로 말했다. "당신 때문에 이번 주말에는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어요. 다리가 없어진 셈이니 달리 도리가 없군요." "렌트카의 비용은 AMAC가 지불할 거예요." 방금까지도 유머러 스하던 그의 태도가 갑자기 심술궂게 바뀌는 바람에 보비는 어리 둥절하며 말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일부러 렌트카의 대리점까지 가야 한단 말 이오?" 브레인은 되물었다. "찾아가고 수속을 하고 하는 귀찮은 일을 해야 할 까닭이 내게는 없는것 같은데요." 보비는 어쩔 줄 몰라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렇게밖에는 방법이 없지 않아요?" 브레인은 의자등에 몸을 기대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좋은 생각이 있는데." 그는 조용히 말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보비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의자에 태연스럽게 앉아 있는 이 핸섬한 남자가 무슨 복수를 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생각이지요?" 정말로 그의 대답을 듣고 싶은지 어떤지 도 모르면서 보비는 물었다. 찬찬히 그녀에게 돌아온 번뜩이는 푸른눈이 그의 결정은 재고 의 여지가 없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내가 주말에 이런 불편을 당한 원인은 당신에게 있으니까..." 자가의 말에 대해서 어떤 반론도 있을수가 없다는 듯이 브레인은 넓은 어깨에 힘을 주었다. "당신이 개인적으로 처리해 주어야 하지 않겠소?" "처리해 주다니,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에요?" "어떻게?" 브레인은 다시 한번 실내를 둘러보고는 겁에 질려 있는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돌렸다. "주말동안 날 여기에 묵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 │ ▶ 번 호 : 1237/1333 ▶ 등록자 : VEGA64 │ │ ▶ 등록일 : 2001년 09월 25일 00:49 │ │ ▶ 제 목 : [드림] 열쇠 도둑 3장 - J.제프리즈 │ └───────────────────────────────────┘ 너무나 놀라 보비는 기침이 나왔다. 아마 내가 그의 말을 잘못들은 게지. "뭐, 뭐라구요? 잘못들었는데요...." 초록빛 눈이 동그레 지며 보비는 말을 더듬거렸다. "아니, 들었을거요." 브레인은 차갑고 자신만만한 표정으 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의 집은 바로 이 근처가 아니에요?" 도대체 농담으로 그러는지 진담으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어 보비는 애가 달았다. "모르는 것이 없군. 내 타운하우스의 주소까지 알아냈소?" 잡아떼 봤자 소용없다고 체념한 보비는 저도 모르게 무릎 을 쓰다듬고 있는 자기의 두 손에 눈길을 떨구었다. 그렇지, 페이팩스에 그의 타운하우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하지 만 그것이 어쨌다는 말인가. 나의 업무의 일부가 아닌가! "내 말은, 내가 주말을 여기서 보내면 매우 편리할 거라는 거요. 내 타운하우스는 누구에게 세를 주어서 찾아갈 수가 없어요." 보비는 벌컥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그런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어요! 당신에겐 분명히 찾아 가 묵을 수 있는 집이 있을 텐데요!" "그야 그렇지요." 브레인은 태연하게 응수했다. "다른 때 는 부모의 집에 가거나 팀의 멤버와 함께 호텔에 묵었지요." "그러면 됐지 뭐가 문제란 말이에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여기서........?" "그것은," 브레인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여기에 있으면 편할테니 일부러 차로 --- 물론 택시말이지만 --- 페어팩스 까지 달리고 싶지 않다는 거지요." "당신으로서는 그게 편하겠지만, 그러면 내 입장은 어떻게 되지요?" 보비는 또 쏘아붙였다. 브레인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 찰르 환수할 때 당신은 내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봤었소? 그리고 미스터 제레미 샌드바의 경우에는요?" 사실 은 지난번에도 이와 비슷한 실수가 한번 있었던 것이다. 보비는 명치끝을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입술이 한순 간 꿈틀하고 일그러지면서,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브레인은 관대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지. 난 당신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업무 기록의 뒷면에 있는 약간의 오점에 대해서 알고 있소." "그, 그것을 어떻게...?" 보비는 쩔쩔매고 어쩔 줄 몰라했 다. "어떻게 알았느냐구요? 당신의 추측에 맡기겠소." 브레인 은 그 질문을 피하듯이 손을 저었다. "당신은 그 흥미있는 고십을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두고 싶지않소?" 보비는 험악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협박을 하다니! 그런데 난 멍청히 입만 벌리고 있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람! "미스 모로,." 브레인이 말도 못하고 있는 보비에게 다시 말했다. "이 일에 관해서 당신의 상사에게 보고하는 것은 쉬운 일이오. 그러나....." 그는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덧붙였다. "만일 당신이, 내게 끼친 손해를 메우기 위해서 내가 제시한 해결책을 받아들인다면 재고해 볼 가치가 있다 고 생각하오. 당신은 월요일 아침에 문제를 해결하고, 난 차 를 되찾고, 그러면...." 결론을 짓듯이 손가락을 세워 보였 다. "사건은 일단락이 나지요." "그러니까 미스터 피어슨." 보비의 비취색 눈이 분노로 이 글거렸다. "나를 협박하고 있는 거예요?" 브레인은 두손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말의 선택이 좀 잘못된 것 같군...." 노여움이 차츰 치밀어 올랐다. 히죽거리며 내려다보는 악 마 같은 핸섬한 얼굴을 한대 갈기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보비는 자기의 두손을 꼭 틀어쥐었다. 사람이 이토록 모질 수 있는 것일까! 자기를 너무나 바보스런 입장에 몰아넣으려 하고 있는 남 자에게 분노를 느끼면서 보비는 생각했다. 이 남자는 자기 손에 든 카드를 아주 잘 이용하면서 게임을 즐기고 있어. 그 가 슬쩍슬쩍 비치는 사실은 물론 그녀도 비밀로 덮어두고 싶 은 일이었다. 한데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주말에 이런 집에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겠다는 말일까? 그 생각은 머리에서 떠 나지 않았으나, 일일이 분석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보비 는 눈을 들어 재미있어하고 있는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꼼짝도 하지 않고 그녀는 브레인을 노려보았다. 그는 이 일을 가지고 나를 자기 뜻대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 어. 하지만 눈곱만틈이라도 내가 기꺼이 양보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서는 안되는 일이야. "알았어요." 내뱉듯이 보비는 말했다. 두 눈은 여전히 노여 움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당신이 말하는 어처구니없는 게 임에 상대해 드리지요, 미스터 피어슨.... 당분간은." 상대방의 내키지 않는 기분에는 아랑곳없이 브레인은 반가 운 듯이 미소했다. 서로를 좀더 잘 알게 되는것은 시간 문제 겠지. "주말에 이곳에서 열리는 시합 때문에 온 거지요?" 보비가 물었다. "그래요."브레인은 여전히 즐거운 듯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일요일에 레이커즈팀과 대전하기로 되어있어요." "캐피털 센터에서요?" 브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에 연습인가 무언가도 해야지요?" "물론이오." 그는 보비의 말투에 키들키들 웃었다. "우리는 언제나 시합전에는 그 <무언가>를 하고 있으며, 내일 오후에 도 연습이 있어요."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지요?" 그는 당연히 여기에 늘어붙어 있을 수는 없고 자기팀과 함 께 행동해야 할 것이다. 주말 내내 이 집에 틀어박혀 있어서 야 연습에 참가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다니요?" "내일 오후의 연습말이에요/" 곤혹을 숨기지 못하며 보비는 대답했다. 브레인은 가볍게 어께를 추슬렀다. "나도 물론 나가게 되어 있어요. 한데 왜요?" "즉..... 어떻게 거기에 가느냐 말이에요." 보비는 그렇게 말 하고 나서 자기의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어졌다. 대답은 하나밖 에 없지 않은가. "물론 당신 차로 가야죠." 뻔한 질문에 깜짝 놀란 듯이 브레 인이 말했다. "두시까지 도착해야 하니까 우리는 여기서 한시반 경에 떠나면 될 겁니다." "우리?" 보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이오, 우리지요." 브레인은 순진하게 눈을 까막거렸다. "내가 연습장에 어떻게 가리라 생각했소, 당신이 내 차를 빼앗 아 버렸는데? 잊었소?" 보비는 화가 나서 한숨을 쉬고 일어섰다. 마음이 심하게 동 요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래도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것 이다. 보비는 두 손을 청바지 뒷주머니에 찌르고 거실을 빠져나가 주방을 가자,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어 유리진 하나에다 철철 넘치도록 따랐다. 우유를 마시고 잠이 잘 오면 좋겠는데.., 보 비는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쉽게 잠이 들것 같지가 않았다. 급히 우유를 마시고 나서 수도꼭지를 틀어 유리잔을 헹구었다. 그때 보비는 펄쩍 뛸 만큼 놀랐다. 어느새 브레인이 주방 입구 에 와서 커다란 몸을 문설주에 기대고 먹이에 다가드는 호랑이 처럼 찬찬히 보비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몸 속 깊은 곳에서 이상하게 떨리는 동요를 느끼고 숨을 삼겼다. 어느새 여자의 조심성도 잊어버리고 자기에게 쏠려 있는 푸른 시 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보비는 남자답게 생긴 그의 입술을 정신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저어..." 방금 우유를 마셨는데도 갑자기 목이 바싹바싹 마르 는 것 같았다. "우리 집에는 침실이 하나밖에 없어요, 미스터 피 어슨." 그 말에 브레인은 히죽 웃었다. "미스터 피어슨이라니, 별로 등기 좋지 않군. 이젠 퍼스트네임 으로 불러도 좋지 않겠소?" 보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냉정을 되찾으려고 하면서 중얼거렸다. "알았어요." "나는 소파에서 자겠소." "하지만....." 보비는 불안스럽게 흘끔 그를 쳐다보았다. "당 신이 자기에는 너무 작지 않을까요?" "내 다리가 소파 밖으로 나오는 것은 예사지요 뭐." 브레인은 태평스럽게 말했다. "우유말고 뭐 마실 것은 없소?" "네? 네, 있어요." 그는 침실까지 침범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 다. 보비는 살아난 기분으로 뒤돌아서서 아까보다 기세좋게 냉 장고의 문을 열었다. "잠깐 기다려요... 콜라, 오렌지 주스, 그 리고 맥주가 두병." "맥주로 합시다." 브레인은 맥주병을 받아들고 마개를 따서 주방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에 휙 던져넣었다. 꿀꺽 한 모금을 마시면서 그는 거실로 돌아갔다. 갑자기 생각이 나 보비는 의아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갈아입을 옷은 어떻게 하지요? 아무것도 가져온 것 은 없나요?" 브레인은 소파에 걸터앉아 소기라 나지 않는 텔레비전의 화 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돌아보더니 빈정거리는 것처럼 얼 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것도 당신이 불러일으킨 골칫거리요. 의류가 든 슈트케 이스는 코르벳의 트렁크 속에 들어있소. 지금으로서는 난 매 니저한테 있는 연습복과 유니폼밖에는 아무것도 입을 것이 없 소." 보비는 야단을 맞는 아이처럼 눈길을 떨구었다. 생각 이상 으로 그에게 많은 폐를 끼친 모양이었다. 뭐라고 대답할까 망 설이고 있는데 브레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파자마가 없다고 걱정할 것은 없어요. 잘 때는 아 무것도 입지 않는 것이 내 습관이니까요>" 보비는 경계하면서 눈을 치떴으나, 그가 농담을 하고 있다 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농담이든 아니든, 입을 것이 실제로 아무것도 없었다. 보비는 속으로 신음 소리를 내며 주방을 나와, 이제는 아 주 제 입인양, 마음놓고 있는 브레인의 옆을 지나 침실로 들 어갔다. 그는 긴의자에 기분좋게 몸을 뻗고 텔레비전의 볼륨 을 올리기도 하고 채널을 바꾸기도 하며 리모콘을 만지작거리 고 있었다. 마치 게으르고 자신만만한 고양이 같은 모습이었 다. 침실에서 돌아온 보비는 그가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뗄 때까지 입구에 서 있었다. "그게 뭐요?" 브레인은 볼륨을 낮추고 버튼을 누르며 물었 다. 보비는 아까 자기가 입고 있던 포도주빛의 로브를 내밀었 다. "어떻게 이것이라도 입을 수 없을까요? 적어도 어깨를 덮 을 수는 있을 거예요.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 도.... 지금 입고 있는 차림으로 잘 수는 없지 않아요?" 브레인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보 비가 던져 준 로브를 받았다. "오우케이." 그는 그렇게 말하자 거의 누워 있는 몸위에 로브를 끌어올리고 다시 화면에 주의를 돌렸다. 그가 이 로브를 입는다면 어떻게 보일까? 상상만해도 우 스워서 보비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애먹었다. "전 목욕을 할 테니까, 상관없다면 당신도 제가 끝난 뒤 에 하세요." 브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대에 찬 표정으로 돌아 보았 다. "그러고는 어떻게 하지요?" 침실로 향하던 보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어떻게 하다니, 무슨 뜻이지요?" "함께 영화를 보지 않겠소, 재미있는 프로가 있는것 같은 데?" 보비는 볼에 스쳐내리는 황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잠시 망설였다. "아니.... 그만두겠어요. 전 자야 해요. 금주는 일이 바 빠서 수면이 부족했어요." 고맙게도 브레인은 더 이상은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 며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쩌면 저렇게 뻔뻔스런 사람도 있을까. 목욕에 필요한 것 을 가지러 침실로 서둘러 가면서 보비는 생각했다. 욕실에 들어갔으나, 언제나처럼 욕조에 더운물을 채우고 한가하게 들어앉아 있기는 글렀다 싶어 간단하게 샤워만으로 끝냈다. 오늘 저녁은 다른때와는 영달라. 보비는 약간 자조적인 기 분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파자마 위에 로브를 걸치고 서둘러 침실로 갔다. 그녀는 침대 곁의 테이블 위에 있는 램프 스 탠드를 켜고 방문을 잠갔다. 지금까지는 브레인도 신사적이 고 예의을 잃지 않고 있으나.... 그 속을 알게 뭐야, 하고 보비는 생각했다. 텔레비전 소리가 멎고 조금 지나 욕실로 가는 브레인의 커다란 발소리가 들렸다. 물 쏟아지는 소리가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다. 그렇게 큰 몸을 씻자면 물도 많이 필요할거야. 그런 뒤 얼마 후에 다시 텔레비전의 소리가 들렸지만, 이번에는 시끄럽지가 않았다. 적어도 약간의 조심성은 있 는 모양이야. 보비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불을 껐다. 몸 을 뒤치며 잠을 자려고 애썼으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아까 마신 우유도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이 순간 벽 저 쪽에 태평스럽게 누워 있는 매우 핸섬한 브레인 피어슨의 존재를 떨쳐 버릴 수만 있다면. 그는 도대체 어떤 모양으로 자고 있을까? 긴의자 위에 서는 몸을 다 뻗을 수도 없으니 아마 웅크리고 누워 있겠 지. 도대체 내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거지! 보비는 자기의 어리석음을 나무랐다. 우리 집에 밀고 들어 온 것은 그의 편이 아닌가. 그러니 그도 약간의 불편은 참아야지! 이번 주말에 예상치 못한 방문객을 재워 줌으로써 그의 복수를 비킬 수만 있다면! ┌───────────────────────────────────┐ │ ▶ 번 호 : 1286/1333 ▶ 등록자 : VEGA64 │ │ ▶ 등록일 : 2001년 11월 11일 22:43 │ │ ▶ 제 목 : [드림] 열쇠 도둑 4장 - J.제프리즈 │ └───────────────────────────────────┘ 잠이 덜 깬 멍한 머리로, 도대체 옆집에선 무엇을 하기에 저렇게 시끄러울까 하고 생각했다. 옆집인 프 래디네 집에 주말을 아버지와 함께 보내기 위해서 아 이들이 몰려운 것이 틀림없어. 토요일 새벽부터 아이 들을 떠들게 하다니, 프레디답지 않군.... 갑자기 보비는 번쩍 눈을 뜨고 귀를 가렸던 베개를 밀쳐내자 헝클어진 머리 그래도 몸을 일으컸다. 저것 은 프레디의 아이들이 아니야. 그는 주말에 여행을 떠 나니 집을 좀 보아 달라고 목요일에 말했지 않은가. 그러자 한꺼번에 모든 일이 되살아났다. 이 짜증나는 소리는 텔레비전에서 나는 소리임에 틀림없어. "아아, 정말 환장하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보비 는, 다시 한번 잠들었다 깨면 모든것이 꿈이었더라 하 는 일이 있을 수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침대 에 앉아 눈을 비비는 동안 차츰 머리가 맑아져 왔다. 힘없이 두 팔을 늘어뜨리고 그녀는 노여운 얼굴로 문 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혼잣말을 하면서 침대 밑에 있는 슬리퍼를 찾아 신고 천천히 옷장 쪽으 로 걸어갔다. 벽 저쪽에서 유별나게 꾸며댄 목소리와 금속성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기껏 토요일 아침에 만화영화라니! 정말 바보스러워. 하지만 그가 즐겨보 는 것이란 겨우 그런 정도겠지. 보비는 빈정거리며 천 장을 올려다보았다. 재빠른 동작으로 방문을 열고 욕실이 비어 있는 것을 혹인하자 흘끔 거실을 들여다보고는 보비는 잼싸게 욕 실로 들어갔다. 텔레비전에서는 로키와 윙클이 뛰어 다 니고 있었으며, 바보스런 그 만화는 그 시골뜨기를 꼭 붙잡고 있었다. 보비는 고개를 저으며 커다랗게 한숨을 쉬고는 욕실문을 잠그고 언제나처럼 아침의 의식을 시 작했다. 귀중한 휴일에 평일보다 더 일찍 깨어난데 대 해 화가 났고, 될수록 거실의 남자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로션의 뚜껑을 닫으려고 했을 때, 냅다 문을 두드리 는 소리가 났다. 보비는 흠칫하며 세면대에 병을 떨어 뜨렸다 "일어났소?' 몇 시간이나 전부터 깨어 있던 쾌활함 으로 브레인은 말을 걸었다. "아니, 아직 자고 있어요." 보비는 떨리는 손으로 병을 집어들며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난 언제나 욕실에서 자요." "당신이 끝나는 대로 나도 욕실을 쓰고 싶소," 그는 예의바르게 덧붙였다. "당신이 괜찮다면." "몰론 괜찮고 말고요." 보비는 일부러 부드러운 목 소리로 말했다. 오전 내내 기다리고 있으면 차례가 돌 아가겠지. 이곳을 누구의 집으로 아는지 모르겠어. 보 비는 화가 끓어올라 더욱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거실로 들어간 보비는, 브레인이 이쪽으로 등을 돌리 고 긴의자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자 어처구니없는 얼굴 이 되었다. 긴 다리는 의자의 팔걸이 밖으로 뻗어나와 있었고, 벨루어의 로브는 가까스로 무릎까지를 덮고 있 었다. 텔레비전에서 설탕과자를 버무린 시리얼의 상업 광고가 방영되고 있는 것을 브레인 피어슨은 마치 다섯 살 난 어린아이처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면 서 시리얼이 들어 있는 상자와 입 사이를 그의 손이 정 기적으로 오가며 바삭바삭 과자를 깨무는 소리가 텔레 비전의 시끄러운 코머셜과 뒤섞이고 있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식료품실을 뒤져 별로 남에게 알라고 싶지 않 은, 보비가 좋아하는 프루트루프의 박스를 찾아낸 모양 이었다. 화가 나는 한편 보비는 거실의 광경에 기묘한 웃음과 곤혹이 뒤섞인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보비가 무겁게 한숨을 쉬자, 그 소리가 브레인의 주의 를 텔레비전 화면에서 떼어놓았다. 그는 돌아보고 거기 에 서 있는 보비를 찬양하는 눈길로 훑어보고는 입에 가득한 시리얼을 야금거리면서 얼굴을 빛내고 밝게 웃 었다. 보비는 화가 난 듯이 손이 뻗어 텔레비전의 볼륨을 낮 추었다. "당신은 귀가 잘 안 들려요?"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 하고 돌아보니, 브레인은 히죽거리면서 즐거운 듯이 그 녀의 뒷모습을 감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실례, 시끄러웠소?" "시끄러워서 잠도 못 잤어요." 보비는 한순간 그를 노려보고 나서 주방으로 걸어갔다. 브레인은 뒤따라와서는 보비가 냉장고의 문을 열고 그레이프프루츠의 주스를 컵에 따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아침의 식사는 무엇이오?" 그는 기다리고 힘 들다는 듯이 물었다. "뭐라구요?" 저도 모르게 주스를 꿀꺽 마시고 글리 스를 카운터 위에 쾅 놓았다. 내가 잘못 들었나? "아침 식사를 못 먹어서 당신이 어떻게 되든 난 알 바가 아니에요, 미스터 피어슨." 보비는 야멸차게 말 했다. "여기는 호텔도 레스토랑도 아니란 걸 잊지 마 세요. 그러니 무엇을 먹고 싶으면 밖에 나가서 멋대로 들라구요!" 브레인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오우케이. 하지만 어디든 당신이 데려다 줘야지요. 난 차가 없소, 안 그렇소?" "세상에!" 보비는 화를 참을 수 없어 주먹을 쥐었 다. "내가 왜 이런 바보 같은 제의에 동의했을까?" "내 코르벳을 환수했을 때 자신에게 그렇게 물어 봤어야 하는 거요" 그에게 홱 등을 도릴고 보비는 안에 든 병들이 와 장창 깨어질 만큼 난폭하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여 기에서 새삼 떠져 봤자 그만 즐겁게 해줄 뿐이다. 찬찬히 열까지 속으로 센 보비는 얼굴에 웃음을 짓고 돌아보았다. "알았어요, 미스터 피어슨." "브레인." 그는 반가운 미소를 띠고 정정했다. 보비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이 천장을 쳐다보았다. "하여튼... 내가 하는 말은... 브레인, 만일 당신 이 무엇을 먹고 싶으면 자기 손으로 챙겨야 한다는 말이에요. 난 아침 식사를 들지 않으니까요." "당신은... 뭐라고요?" 그는 놀란 듯이 눈썹을 치 켜올렸다. "나는 아침 식사를 들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이 해력이 더딘 상대방을 납득시키려는 듯이 보비는 천천히 반복해서 말했다. 그러고는 자동 디쉬워셔( dishwasher)의 문을 열고 접시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침 식사는 세끼 중에서 제일 중요한 식 사인데요." 그의 진지한 모습이란 일요일 아침 텔레 비전에서 설교하는 목사와도 같았다. "몸뿐 아니라 당신의 머리도 연료를 필요로 하고 있소." 보비는 발뒤꿈치를 들고 레인지 옆의 그릇장 윗단 에 포갠 접시를 쟁여 넣았다. "아침을 먹지 않아도 난 기운이 좋아요. <연료>가 부족하지는 않아요." "아니, 그렇게 생각될 뿐이오." 브레인은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더니 텅 빈 속을 살펴보았다. "어디.. ... 음식이 별로 없군. 계란, 우유 약간. 아침을 그 럭저럭 때울 수는 있겠는데." 계란과 우유를 꺼내며 브레인은 보비를 돌아보았다. "빵은 있소?" 보비는 짜증이 나서 어쩔 줄 모라 한숨을 쉬었다. "네, 빵은 있어요, 식료품실에요. 왜요?" "그럼 됐소." 브레인은 그녀의 앞을 지나 식료품 실의 문을 열고 반덩이쯤 남은 빵을 꺼내어 계란과 우유와 함께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도대체 무엇을 할 작정이에요?" 그는 코메디물 요리 프로에 나오는 요리인을 생 각하게 하는 동작으로 일을 시작했고, 보비는 좁은 주방에서 밀려난 꼴이 되었다. "아침 식사를 2인분 준비하는 거요." 그릇장이며 서랍을 뒤져 주발이며 접시, 포크 따위를 꺼내면서 브레인은 대답하고 레인지의 버너에 불을 당겼다. "지금으로서는 당신은 필요 없으니 다른 일이나 하 고 있어요. 무엇을 만드는지 바로 알게 되어요. 다 되면 당신도 맛있게 먹게 될 거요." 보비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체념하고 거실로 돌아온 보비는 텔레비전을 꺼버 렸다. 왜 이런 일을 참고 있어야 하지? 그녀는 속 으로 자기를 탓했다. 이런 남자와 함께 어떻게 주 말을 보내야 좋단 말인가? 그는 마치 이 아파트가 자기 것이나 되는 양 큰소리를 치고 있다. 더구나 나는 식객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때 그녀의 마음속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가 보비에게 약간 기운을 복돋아 주었다. 이틀만 참으면 되지 않니? 만일 냉정을 잃지 않고 잘 참아 나가면 금 세 지나가 벌리 거야.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텔레비전을 끄고 나니 잠시 정적이 찾아왔으나, 금방 브레인의 쾌활한 휘파람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보비는 한순간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 쉬고 나더니 언제나 토요일 아침이면 하는 허드렛 일을 하려고 했다. 그때 방안에 떠도는 음식 냄새 가 코에 스몄고, 이상하게도 보비는 위가 꼭 죄는 것 같은 공복감을 느꼈다. 뱃속의 요구를 무시하 기가 힘이 들었지만 그럭저럭 참으면서 침실과 욕 실을 치우고 세탁물을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아 둘 레를 바드타월로 감쌌다. "다 됐으니 이리 오지 않겠소?" 빨래 바구니를 현관에 내놓았을 때 브레인이 말을 걸어 왔다. 거실로 돌아와 멈추어 서서 보비는 테이블 위 에 늘어놓인 음식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청소하 는 동안 갈아입었는지 브레인은 어제의 옷을 입 고 파랑과 흰색 체크 무늬의 손바닥만한 앞치마 를 두리고 있었다. "자아, 먹읍시다." 식료품실에서 찾아냈는지 페이서냅킨 위에 나이프ㅡ와 포크를 놓고 브레인 이 재촉했다. "난 배고프지 않아요." 보비는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프렌치 토우스트, 스크램블에그, 김이 나는 커피는 어떤 음식보다 도 강렬하게 그녀의 식욕을 돋우었다. 브레인은 다가오더니 보비의 팔을 잡고 깨끗 하게 차려진 테이블로 끌고 갔다. "아니, 분명히 배가 고플 겁니다." 그는 고집 스럽게 말하고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눌 러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하나 세워 보이며 브레인은 거실로 걸어가자 스 테레오의 스위치를 켜서 컨트리 뮤직 방송국에 다이얼을 맞추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자 김이 나는 커피 잔을 들고 "보비, 당신에게 ----- 나의 따뜻한 호스테스에게."하 고 말하고는 건배하는 시늉을 했다. 테이블 너머에서 웃음을 보내는 핸섬한 얼굴 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되돌리며 보비는 기가 질린 듯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눈앞에 늘어 놓여 있는 음식은 정말 먹음직스러워 군침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따뜻한>이라고 한 것은 의심스럽지만, 정 성껏 차려준 것이니 잘 먹겠어요. 생각해 보면 우리 집에 있는 것을 당신이 멋대로 요리한 거 니까요." 브레인은 크게 자른 프렌치 토우스트 한 조각 을 포크로 찌르자 과장된 몸짓을 해보이고는 눈 을 감고 찬찬히 씹으면서 맛을 보았다. 그의 익 살스런 모습에 웃음을 씹으면서 맛을 보았다. 그의 익살스런 모습에 웃음을 삼키며 보비는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들었다. 맛이 괜찮았다. 보비는 브레인의 요리 솜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최고였다. 그녀가 식욕이 당겨 식사를 즐기는 것을 보고 브레인은 좋아하는 것 같았다. 사실 접시 위의 음식을 깨끗이 먹어치우자 보비는 아까보다 휠 씬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일어서서 두 사람 의 커피잔에 두잔째의 커피를 따랐다. "여기선 얼마나 살았소?" 커피에 설탕과 프리 마를 넣어 휘저으면서 브레인이 물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계속예요." 보비는 대답하 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것이 언제의 일이오?" 보비는 커피잔 너머로 그를 쳐다보고 빈정거 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빙 돌려서 내 나이를 묻고 있는 거 군요?" 브레인은 고래를 한쪽으로 꼬고 어깨를 추슬렸다. "난 26세예요. 3년전에 버지니아 대 학을 졸업했어요. 전공은 경영학이고 부전공은 영문학이에요. AMAC에 입사한 지 일년 반이에 요." 보비는 빤히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론 유명한 농구팀에서 화려하게 활약하는 스타처럼 눈부신 직업은 못 돼요. 하지만 누구 나 그렇게 빛나는 존재가 되도록 태어난 것은 아니거든요." 브레인은 남은 커피를 다 마시자 커피잔을 테 이블 위에 놓았다. "정말 동감이오." 하고 그는 말했다. 보비는 그 목소리에 짓들여 있는 냉소적인 울림을 의 아스럽게 생각했다. "무슨 뜻이지요?" 보비는 일어서서 테이블 위 를 치우기 시작했다. 브레인은 냅킨을 집어 입을 닦자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 등을 기대더니 기분좋게 기지개를 켰 다. "말 그대로의 뜻이오." 그는 건성건성 대답했 다. 그러고는 현관 바닥에 놓여 있는 빨래 바구 니를 보자 물었다. "저건 무엇이오?" "뭐 말이에요?" 그의 시선을 더듬으며 보비가 물었다. "아아, 저거요? 보시다피시 빨래에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요?" "저걸 어떻게 할 거요?" 보비는 웃었다. "어쩜 그런 바보스런 질문을 다 하세요? 물론 빨아야지요." "언제?" "당신이 어지러 놓은 주방을 치우고 나서 바로 요." 브레인은 흘끔 팔목시계를 보더니 보비에게 시 선을 돌렸다. "그럴 시간이 있을까?" 그는 일어서서 테이블에 남아 있는 그릇을 챙겨 주방에 있는 보비에게 가 져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어요?" 보비는 딱딱 하게 말했다. "매주 토요일 아침에는 빨래를 해요. 오늘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될수록 빨리 끝내야 하겠소." 그는 보비의 손에서 마른 수건을 빼앗았다. "난 두시간 뒤에는 출발해야 하니까요." 한 손을 허리에 대고 보비는 혀를 찼다. "그럼 당신은 기어이 나한테 바래다 달라는 거 예요? 메릴랜드의 캐피털 센터까지?" 바지 뒷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브레인은 진지 한 얼굴로 끄덕였다. "물론이오. 자아, 그러니 설겆이고 빨래고 우리 같이 합시다." 보비는 이 구제 불능의 간섭꾼에 어처구니가 없 어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싫다고 해 봤자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무거운 바구 니를 끌고 계단을 내려가고 자동세탁장까지의 먼 길을 걸어가는 것도 힘이 들것 같았다. 만일 그가 그런 수고를 덜어 준다면 다행이지 않은가. "어느 쪽으로 가는 거요?" 방에서 나온 브레인이 물었다. "잠깐 기다려 줘요. 잔돈을 안 가지고 나왔어요." 보비는 서둘러 주방으로 돌아가 세탁용으로 모아 두 었던 잔돈을 가지고 나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브 레인과 다시 어울렸다. "이 지역은 A지구고 세탁장 은 저쪽 C지구예요." 앞서 계단을 내려가면서 보비 는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브레인은 무거운 세탁 바구니를 들고 보비를 따라 오면서 3층의 벽돌 아파트가 줄줄이 늘어서 있는 주 위의 풍경을 신기한 듯이 둘러 보았다. 토요일이면 언제나 붐비는 세탁장이었으나 다행히 도 오늘은 두 대의 세탁기가 비어 있었다. "거기에 놓아 줘요." 세탁기의 뚜껑을 열면서 보 비는 그에게 지시하고 투입구에 동전을 집어넣었다. 브레인이 시키는 대로 바구니를 내려놓고 빨래를 덮었던 타월을 걷는 것은 본 보비는 소스라치게 놀 랐다. 그는 바구니 속의 세탁감을 나누더니, 보비 앞의 세탁기에 넣을 것은 그래도 두는 것이었다. "무색 옷은 이쪽에, 흰 옷은 당신쪽에, 좋소?" 마치 함께 세탁하는 것에 익숙해 있는 사람처럼 브 레인은 자연스럽게 말했다. 브레인 피어슨의 커다란 손이 여자의 화려한 속 옷을 하나하나 세탁기 속에 집어넣는 것을 눈이 둥 그래져서 지켜보면서 보비는 얼굴에 뜨거움이 번지 는 것을 느꼈다. 그의 움직임을 곁눈으로 보면서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여 자기 세탁기에 넣을 것을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떨어뜨린 타월을 집어들고 얼어섰을때, 브레인이 브래지어를 손에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기한 듯이 이리저리 돌 려보고 있었다. 보비는 주위를 흘끔 돌아보고 아무도 없다는 것 을 알자 가슴을 쓸어내리고 냅다 손을 뻗어 그의 손에서 브래지어를 낚아챘다. "이리 줘요!" 그녀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도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요?" 브레인의 침착한 말이 더욱 그녀의 부아를 돋우 었다. "남의 브래지어를 이런 데서 펼쳐 볼게 뭐예요!" 브레인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이제야 알겠다는 듯 이 찬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것이 브래지어요?" 보비는 험악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며 허리에 주 먹을 대고 서서 쏘아붙였다. "그러지 마세요, 브레인 피어슨. 지금까지 셀 수 도 없을 정도로 많은 브래지어를 보아 온 주제에." 브레인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꼬고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색다른 것은 처음 보는데." 보비는 브래지어를 그의 눈앞에 들이댔다. "색다르기는 뭐가 색달라요. 이것은 뒤가 아니고 앞에서 따게 되어 있을 뿐이에요." 브레인은 다시 한번 납득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하, 그렇군. 괜찮은 아이디어인데." 봉곳한 그녀의 가슴께를 서슴없이 더듬는 푸른 눈이 놀리 듯이 빛났다. "정말 괜찮군." "사람이 왜 이래요!" 분개하여 소리치며 보비는 손에 든 브래지어를 브레인이 맡고 있는 세탁기 속에 던져 넣었다. "그보다 일이나 제대로 해줘요." "오우케이." 여전히 웃으면서 브레인은 말했다. 그 뒤의 일은 대체로 침묵 속에 끝났다. "당신은 언제나 이렇게 가정적이에요?" A 지구로 돌아오면서 보비가 물었다. 브레인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상한 말을 묻는다 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요? 빨래를 도와준다는 것으로 가정적인 사람 이 되는 거요?" "아침 식사도 준비했지 않아요?" "그것이 어쨌다는 거요?" 보비는 어깨를 추슬렀다. "아니요... 그저 유명한 농구 선수가 이런 일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스포츠 선수에 대해 보비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 가 대강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자 브레인은 킬킬 거렸다. "당신도 아다시피 난 결혼하지 않았소. 그리고 여기저기로 날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해주고 식 사를 지어 줄 풀타임의 메이드도 고용하지 않았소. 그러니 혼자 해나가는 데 필요한 초보적인 기술을 나 스스로 몸에 익힐 수밖에 없었던 거요. 이제 알았소?" "네, 알았어요!" 게단을 오르면서 브레인이 물었다. "이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소?" "있지만 너무 느려요." 보비는 빈정거리며 덧붙 였다. "건강에 대한 열의로 보아 당신은 계단이 몸 에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요?" "별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오. 나는 다만 당신이 그렇게 짐을 들고 오르기에 무척 힘이 들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오." 보비는 3층의 층계참에 이르자 홱 뒤돌아보았다. "믿건 말건 당신 자유지만 미스터 자이언트, 나 같은 꼬마도 매우 기분좋게 살아가고 있지요. 작은 것이 더 편리한 때가 얼마나 많다구요." "예를 들면?" 그녀가 열쇠 구멍에 열쇠를 끼워 넣 고 있는 동안 브레인이 바싹 옆에 붙어 서서 벽에 몸을 기대고 너무나 허물없이 물었다. 그녀는 그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방에 들어갈 때 문틀에 이마를 부딪힐까 걱정한 적 이 한번도 없었다고 말해 주려고 했을 때, 거실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려왔다. 문을 열고 전화로 서둘러 가다가 잘못하여 열쇠를 떨어뜨려 보비는 몸을 굽혀 그것을 주웠다. 뒤따라 들어온 브레인이 곧장 전화로 걸어가더니 다섯번째의 벨소리에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그는 바닥에 바구니를 내려놓고 비닐 회전의자에 걸터앉았다. 보비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 보며 속으로 욕을 했다 --- 이렇게 뻔뻔스런 사람이 또 있을까! "네, 여기 있읍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보비는 그를 야멸치게 노려보고 그의 손에서 수화 기를 잡아챘다. 브레인은 태연한 웃음을 띠고 그녀를 쳐다보고는 리모콘을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보비요? 난 또 번호를 잘못 돌렸는가 했지요." 보비는 당황했다. 랠프였다. ... 아, 이를 어쩌지. 어제 약속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랠프, 안녕." "방금 전화 받은 사람은 누구요? 만일 물어도 상관 없다면... " 랠프의 조심스런 말투에는 약간 씁쓸한 느낌이 깃들여 있었다. 보비는 한숨을 쉬고 코드가 허락하는 한 브레인으로 부터 멀찍이 떨어져 섰다. "랠프, 내 말 좀 들어줘요. 말해도 믿어 주지 않을 테지만요. 여러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어요. 하지만 월요일에 점심을 같이 들기로 해요. 그때 모두 설명해 드리겠어요." "오늘 저녁은?" "그것이.... " 보비는 숨을 삼켰다. "미안해요, 갈 수가 없게 되었어요. 설명하기 어렵지만 믿어 줘요. 랠프, 나도 사실은 가고 싶어요. 하지만... 하여튼 월요일에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어요." 침묵이 흘렸다. "알았소." 랠프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뭐라고 말해 봐야 당신은 마음을 바꿀 수는 없을 것 같군." "미안해요.' 텔레비전을 켜고 소리 없는 SF영화에 열중해 있는 브레인을 흘겨보면서 보비는 말했다. "그럼 월요일에 봐." 랠프는 정말 실망한 듯이 중 얼거렸다. "안녕." 딸깍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보비는 수화 기를 되돌려놓고 두 손을 허리에 대고 생각에 잠겼 다. 뻔뻔스런 미스터 피어슨의 반강제적인 요구에 굴복한 결과 이런 꼴이 된 것이다. 보비로서는 남 과의 약속을 깨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소중한 친구와의 약속은 더욱더 그랬다. 어쨌든 월 요일에 랠프가 언제나처럼 이해성 있게 들어 줬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큰 희생을 치르다니... 속에서부터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입술을 깨물고 잠시 브레인의 모 양좋은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보비는 홱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 │ ▶ 번 호 : 1287/1333 ▶ 등록자 : SHMJ0125 │ │ ▶ 등록일 : 2001년 11월 12일 22:02 │ │ ▶ 제 목 : [키쿠] 열쇠 도둑 5장 - J.제프리즈 │ └───────────────────────────────────┘ 무척 따분할 거라 싶어 준비해 왔던 책을 보비는 옆에 내려놓았다. 그 소설의 흔해빠진 줄 거리에 흥미가 사라지고 저 아래 코트에서 진행중인, 내용을 잘 알 수 없는 움직임을 무시하려고 애쓰며 그녀는 텅 빈 관람석을 둘러 보고 있었다. 마침내는 코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습 광경에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농구 따위는 구경한 일도 없었던 것이 다. 코트 안은 서로를 부르고 외치는 소리, 윤이 나는 마룻바닥에 농구화가 마찰하는 소리, 쉴새없이 뛰어다니는 소리들로 가득차 있었 다. 보비는 완전히 압도되어 바라보고 있었다. 스무개나 되는 볼이 한꺼번에 같은 바스켓을 향하여 날아가며 엇갈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공중에서 한번도 부딪히는 일이 없을까? 보비는 관람석에서 몸을 움직여 다시 눈앞에 책을 펴 들었다. 그러나 눈으로 글자를 쫓을 뿐이지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 다. 보비는 천천히 책을 아래로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은 어느새 맹렬한 기세로 이리저리 뛰 어다니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한 사람 의 선수를 쫓고 있었다. 모양좋은 머리를 감싼 다갈색의 머리카락이 격심한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팀 속 에서도 브레인의 존재는 사람의 눈길을 끌 고 있었다. 그보다 키 큰 선수는 몇 명 있었으나, 그룹 속에서도 한결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뭔가가 그에게는 있었다. 단지 키가 크다는 것 뿐 아니라 단련된 우람한 몸은 나무랄 데 없이 균형잡혀 있었다. 보비는 매혹된 듯이, 팽 팽해졌다 뒤틀렸다, 그리고 다음 동작을 위 해 수축했다 하는 근육을 눈으로 쫓았다. 눈으로 쫓을 수도 없게 빠른 반응을 하는 근육질 의 팔은 땀으로 번들거리고, 유니폼도 젖어서 거무스름하게 보였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햇볕에 그을은 긴 다리가 더욱 거세어져 가는 움 직임에 따라 부풀었다 팽팽해졌다 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더구나 결코 환영할 수 없는 어떤 이미지가 마음의 스크린에 비쳐져 보비는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바위 같은 남 성적인 몸에 끌어당겨지면서 연약한 힘으로 거스르려고 --아니, 전혀 그 반대일지도 몰라 -- 버둥거리는 자기의 모습.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보비는 바로 그런 이미지를 지워 버리고 의자에 몸을 고쳐 앉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책에 주의를 모으려고 결 심하고 눈앞에 책을 펼쳤다. 몇 번이나 애를 서보다가 보비는 이내 한숨을 쉬고 책을 백 속 에 집어넣고 일어섰다. 책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우선 여기에 앉아 있지 말고 무슨 일을 해야한다. 아아, 브레인은 나를 이런 곳으로 끌고 왔다! 정말 하릴없이 여기에 팽 개쳐지다니! 쇼핑이든 무엇이든, 하여튼 가까이 갈 만한 곳이 있으면 좋겠는데. 이 일에 대해서는 메리베스에게도 말하지 않는게 낫겠어. 보비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발밑 을 조심하며 통로를 내려갔다. 목이 말라서 자동판매기를 찾을 작정이었다. 마침 그때 코트에 있던 브레인이 이쪽을 쳐다보고 그녀를 향해 번쩍 손을 들어 저으며 윙크를 보내왔 다. 그 노골적인 동작에 동료 사이에서 휘파람이며 야유가 날라와 보비는 목덜미가 뜨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계단을 급히 내려오면서 보비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방금의 광경에 약이 올랐다. 그 런 짓을 하다니, 브레인은 상대방의 입장은 조금도 생각지 않는 것인가? 그의 팀 선수들이 날 이 지방의 걸프렌드나 아니면 그보다 더 열광적인 팬이라고 생각했을 테지. 하여튼 좋아. 좋을 대로 생각하라구.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찾아낸 자동판매기에서 캔 콜라를 산 보비는 천천히 관람석으로 돌아오면서 건성으로 콜라 를 입에 대었다. 메리베스가 이 일을 알면 뭐라고 할까를 생각하니 그녀의 얼굴에는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농구 선수를 자기 아파 트에 재웠다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랄 것이 다. 관람석으로 돌아와 마지못해 자리에 앉은 보비는 한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에 코트의 광경 이 바뀐 것을 알았다. 날씬한 많은 아가씨들 이 선정적인 유니폼 차림으로 코트 앞에 모여 서서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레코드를 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이내 플로어 복판에 미리 정해져 있는 듯한 위치로 들어섰다. 아까까지 힘차게 울리던 외침 소리나 볼이 튀는 소리가 약해진 것을 보면 이제 선수들이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무언가 무미건조한 디스코 비트의 음악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미간을 찌푸리고 바라보고 있는 보비 앞에서 그녀들은 -- 아니, 차라 리 소녀들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리겠다 -- 허리를 흔들고 몸을 비틀고 다리를 치켜올리고 하기 시작했다. 보비는 넌덜머리가 나서 높 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저것이 선정적인 댄스와 다를 게 뭔가! 저 팔다리가 다 드러나 보 이는 짧은 옷을 좀 보라구! 아마 천값이 굉장 히 절약되었겠지. 저 여자들은 도대체 누구와 어울려 다니는 것일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지만, 그녀들은 틀림없이 내일 시합의 중간 휴식의 여흥에 나올 아가씨들일 거야, 저 천박한 춤을 여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하여튼 저런 것이 있기 때문에 농구 경기를 보고 싶은 마 음이 나지 않는 거야. 정장을 하고 앉아 내용도 잘 알 수 없는 시합을 구경하는데다가 선정 적인 춤까지 가만히 참고 보고 있어야 하다 니, 도저히 내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분 뒤에 코치가 호각을 불자 선수들은 한동안의 휴식에 들어갔다. 그들의 대부분은 이 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춤을 구경하며 여자들 의 옆을 지나 하나둘씩 코트에서 나왔다. 남자의 시선을 의식하자 춤을 추던 아가씨들은 교 태를 부리듯이 키들키들 웃었다. 보비는 속 이 느글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데서 스트립 쇼우 따위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대부분의 선수들은 팀 트레이너가 준비해 놓은, 캔에 든 스포츠 드링크를 마시고 있었다. 2, 3분 뒤에 음악이 멎자 여자들도 테이블 주 위로 모여들었다. 그때, 농구 선수 중에서 유별나게 떠드는 선수가 하나 있어서 그가 계기를 만들어 선수와 응원단 아가씨들 사이에 금 방 교류가 시작되었다. 보비는 스포츠 드링크를 마시고 있는 브레인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 러자 금방 눈이 큼직하고 몸매가 날씬한 브 루네트의 소녀가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폼을 재면서 브레인에게 다가갔고, 그도 역시 즐거 운 친목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 들어가버렸 다. 남녀들이 과장된 동작을 주고받는 광경에 혐오감을 느낀 보비는 관람석에서 몸을 돌리며 다시 한번 책을 꺼냈다. 그러나 금방, 브레인 에게 공세를 펴고 있는 소녀에게 눈길을 빼앗겼다. 어쩌면 저렇게 뻔뻔스러울수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입술이 꿈틀하고 경련 하는 것을 느꼈다. 혹시 어쩌면 그녀는 그다지 뻔뻔스럽지 않은지도 모른다. 브레인과 그 소 녀는 구면일 수도 있어. 보비는 혼자 비웃 음을 띠었다. 그게 틀림없어. 물론 그는 저 브루네트를 알고 있는거야. 다른 많은 여자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비는 그런 여자들에 대 해선 멸시 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눈앞에 책을 펼치기 직전에 마침 브레인이 이쪽을 쳐다보고 보비의 시선을 잡았다. 내가 얼마나 속이 끓고 있는가를 눈치채여서는 안 돼, 하고 보비는 불쾌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다행히 연습은 예상보다 훨씬 일찍 끝났다. 보비는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브레인에게 신호 를 보내고. "어휴, 정말 못해 먹겠어." 하고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브레인과 나란히 주차장을 가로질러 토요타를 세워놓은 곳으로 걸어가면서 보비는 그가 샤 워를 하고 온 것을 알았다. 산뜻한 비누 내 음이 떠돌고, 다갈색의 머리카락은 젖어서 검은 빛을 더하고 있었다. "내가 운전할까요?" 브레인이 힘있게 말했다. "네, 부탁해요." 보비는 무관심한 듯이 어깨를 추슬렀다. 사실은 고마운 이야기였다. 그녀는 누가 운전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일 관계 로 늘 핸들을 잡지 않을수가 없었으므로 운전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언제나 대환영이었다. 브레인은 운전석에 올라앉아 몸을 좌석 등에 바싹 붙였으나 그래도 그의 긴 다리를 구부리 지 않을 수가 없었다. 텅 빈 넓은 주차장에 서 차를 몰고 나오면서 브레인은 쾌활하게 말을 걸어 왔다. "어땠어요?" "뭐가요?" "연습말이오." 브레인은 흘끔 곁눈으로 보비를 바라보았다. "아아, 연습 말이에요?" 그녀는 흥미없는 체 어깨를 추슬렀다. "그저 그런 것 같아요, 난 잘 모르지만." "예를 들면 뭐가요?" "글쎄요.... 당신네가 무슨 연습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겠어요. 한데 왜 당신은 한번도 볼을 바스켓에 슛하지 않았나요?" "그것은 내가 맡은 일이 아니니까요." "왜요?" "나의 포지션은 스코어링가드가 아니라 포인트가드요. 물론 시합때는 나도 상당히 득점을 하게 되지만, 주로 시합의 진행을 리드하고 코트에서 볼을 이동시키는 역할을 해요." "그래요?" 보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차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라디오의 스 위치를 켜고 다시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왜 그러죠?" 브레인은 여전히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상대하기가 피곤한 거요?" 보비는 팔짱을 끼고 몸을 움직였다. "아뇨. 피곤한 건 아니지만 정말 진절머리가 나요." "오늘은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군." 보비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그 이유를 모르겠지요, 아마."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지나가는 차창 밖의 풍경에 눈을 향했다. "완전히 따분한 것은 아니지만 그 미스 섹시들의 춤에는 소름이 끼쳤어요." " 뭐라구요, 미스.........?" 한 손을 흔들며 보비는 참 별 인간들도 다 있다는 듯이 말했다. "미스 무엇이든, 당신을 반한 듯이 쳐다보던 그 벗은 것이나 다름없던 계집아이 말이에요." 그 말에 브레인은 곁눈으로 보비를 흘끔 보더니 웃음을 삼켰다. "당신은 휴식 시간 동안의 여흥을 마음에 안 들어하는 것 같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시합을 보러 갔다가 사내아이들이 허리를 흔들고 비틀며 춤 을 추는 것을 보게 되면요?" 브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미소했다. "글쎄, 봐줄 수가 없겠지." "그렇지요? 나라고 라스베이가스의 무대에서 쫓겨난 것 같은 댄서들이 보기 좋은 줄 아세 요? 정말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어요." 정말 거세군----브레인은 생각하고 속으로 히죽 웃었다. 보비는 내가 그 응원단 전원과 침 대라도 같이 한줄로 아는 모양이지. 브레인 은 바로 화제를 바꾸었다. "오늘은 이제부터 무슨 예정이 있소?" 보비는 빈정거리는 웃음을 띠었다. "어마, 어쩌면 이렇게 감동적일까? 내 예정을 다 물어 주다니, 친절도 하셔라." 브레인은 한숨을 쉬고 찬찬히 눈을 까막거렸다. "알았소. 그렇게 벌컥벌컥하지 말아요. 내가 물으려는 것은, 타이손모르에 들러 무얼 좀 사 도 좋으냐는 거요. 나도 뭐 입을 게 있어야 하잖겠소." 브레인은 어제부터 입고 있는 자기의 바지를 흘끔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한순간 보비는 그의 아랫도리를 감싸고 있는 바지 를 바라보았다. 옷이 이보다 좀 큰 사이즈였으면 좋겠어. 그녀는 얼른 눈길을 돌려 차창 밖 을 내다보았다. "괜찮아요, 들러도." 보비는 조용히 말했다. 토요일의 쇼핑은 무척 오랜만의 일이었다. 다른 때는 사람이 붐비는 것이 싫어서 쇼핑 센터 는 될 수록 이용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자기의 주의를 이 남자로부터 딴 데로 돌리는 데 혼잡이나 소음이 도움이 될 것도 같았다. 그리고 심심풀이로 가보는 것도 괜찮 겠지. 보비는 다소 자학적으로 생각했다. 이번 주말에 사뭇 참고 지내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혼잡하건 말건 쇼핑은 긴장을 푸는 데 안 성마춤의 위안이 될 것 같았다. 거대한 쇼핑 센터에서 북적거리는 수많은 사람을 보고 보비는 그들이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고기떼처럼 생각되었다. 여러 가지 음 식물의 맛있는 냄새가 두 사람을 자극했다. 보비는 갑자기, 브레인이 지은 아침 식사를 먹은 지 시간이 무척 많이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 다. 신호라도 한 듯이 브레인이 물었다. "배 안 고파요?" "고파요....." 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갑자기 커다란 브레인의 손이 자연스럽게 보비 의 왼쪽 어깨에 얹혀졌기 때문에 그녀는 깜 짝 놀라 그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려 보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한 마디도 투 덜거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열기는 하였으나, 그보다 먼저 브레인이 말했다. "지금은 간단하게 요기나 하고 오늘 저녁 내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에 가서 같이 식사하지 않겠소? 아마 당신 마음에도 들 거요." "당신은 무엇이나 다 계산하고 있는 것 같군요." 보비는 조심스런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젠 키가 큰 이 남자를 쳐다보는 데도 조 금 익숙해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키 차이가 빚어내는 형상이 어떤 것인지도 눈치채게 되었 다. 지금까지 몇 번인가 재미있어하는 시선 이 자기네에게 향해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마치, 너무 크고, 그에 비해 한쪽은 너무 작은 두 사람이 이렇게 사람들 앞에 나다니는 것 이 무슨 부도덕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자 보비의 반골정신(反骨 精神)이 불쑥 머리를 들어, 도리어 보라는 듯 이 그에게 몸을 붙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짓을 해서 브레인의 오해라도 사 게 되면 그것도 고약한 노릇이었다. 결국 보 비는 자기네에게 향해진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묵살해 버리기로 했다. 두사람은 장신의 남자를 위한 옷가게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먼저 무엇을 좀 먹고 나서 다시 이리로 올까?" 보비는 바로 찬성했지만, 그 제안은 좀 미루어지게 되었다. 막 돌아서려고 하는데, 붐비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난 10대의 소년들이 그 들의 앞을 막았다. 모두 감탄하듯이 브레인을 쳐다보았고, 그중의 하나가 큰 소리를 질렀다. "브리츠 팀의 브레인 피어슨이 아닙니까?" 브레인은 가볍게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지요." 진즈와 티셔츠를 입은 소년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고 펄쩍펄쩍 뛰었다. "야아, 근사하다." 그들을 대표하는 대변자인 듯한 소년이 친구 하나를 끌어냈다. "야, 너 좀 이리 와라." 키가 조그만 얌전하게 생긴 소년이 앞으로 나오더니 친구들이 시키는 대로 브레인에게 등을 돌리고 섰다. "이 친구는 우리의 움직이는 사인 북이에요. 당신의 사인 을 부탁드릴 수 있겠습니까, 미스터 피어슨?" 브레인은 우습다는 듯이 껄껄거렸다. 그가 다른 소년으로부터 사인펜을 받아 그 소년의 등 에 사인하는 것을 그룹 전원이 주위를 에워 싸고 지켜보았다. 그 조그만 집단에 다른 팬까지 기어들기 시작하자, 보비는 사람이 붐비는 사이에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이런 장면에 적지않게 당황한 보비는 사람을 피하여 보석점 있는 데로 걸어가 진열되어 있 는 액세서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금 후 누구의 손이 팔굽을 잡는 것을 느끼고 쳐다보니, 브레인이 미안한 듯이 웃고 있었다. "일이 시끄럽게 되어 미안하군. 여기에서 빠져나가 뭐 스낵이나 삽시다." 다행히 이번에는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자주 있어요?" 콜라를 손에 들고 커다란 용기에 든 팝콘을 함께 집으면서 천천 히 걸어갈 때 보비가 물었다. 브레인은 어깨를 추스르고 한 손에 가득 움켜쥔 팝콘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이 근처에서는 가끔 있는 일이오, 이 지방 출신이라고 여기서는 인기가 있으니까." 다시 남자옷 전문점에 돌아와 브레인이 옷을 입어보는 동안 보비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녀는 약간 거리를 두고, 경의실에 서 나와 삼면경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브레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리저리 몸을 돌려 보고 뒤돌아보며 거울에 비치는 자기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허리에 서 엉덩이에 걸쳐 바지가 몸에 딱 맞는지 어 떤지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보다도 놀라운 것은, 자기가 그러한 그를 구경 하면서 매우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훌 륭한 체격이라고 보비는 새삼 감탄했다. 몸의 구석구석까지 꽉 짜이고 단련된 스포츠맨. 균 형잡힌 몸은 마치 기적처럼 그가 입는 옷에 생기를 주고 있었다. 마음을 빼앗기고 바라보면서 보비는 몸이 오싹 떨리는 것을 느꼈다. 부정할 수 없는 자신 의 육체적인 반응에 당황하며 그가 옷을 다 입고 나기까지 오랫동안 기다렸다. 토요타를 몰면서 브레인이 사과했다. "내가 물건을 사는 데 따라다니며 기다리느라 고생이 많았소." "아니, 괜찮아요." 보비는 어깨를 추슬러 보였다. "다행이군." 브레인은 미소하고 흘끔 그녀를 곁눈질하여 보았다. "당신의 아파트에 돌아가 기 전에 또 한곳에 들러도 괜찮겠소?" "어디요?" 보비는 대답을 피하며 궁금해했다. "이 도시에 들르면 난 언제나 타운하우스에 들러 이것저것 체크하고 있어요. 별로 멀지 않 으니까 당신만 괜찮다면......." 보비는 할수 없다는 듯이 웃고 일부러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반대해 봤자 별수 있겠어요--그리고 어차피 당신이 운전을 하고 있으니까요." 나중에 그녀는 왜 그 시점에서 그와 바꿔 앉아 핸들을 잡지 않았는지 후회하게 되었다. 타 운하우스에 들른 것은 그날 오후를 매듭짓는 최악의 일이었다.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떤 생활을 보내고 있을까! 그는 아무래도 보비가 바 라는 타입의 남자는 아닌 것 같았다. "타운하우스는 누구에게 세주고 있어요?" 3층의 근대적인 건물이 늘어선 타운하우스로 향 하는 차 안에서 보비가 물었다. "친구에게요." 친구라구! 문을 열고 나온 여자를 어처구니없는 눈길로 바라보면서 보비는 빈정거리며 생 각했다. 이 이상 더 천을 아낀 비키니를 만든 다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사실 비키니라는 말이 적당한지 어떤지도 의심스러운 몸차림이었 다. "어마, 브레인! 언제 왔어요? 전화를 해주지 않고." 블론드의 균형잡힌 여자가 과장된 표정 으로 소리를 지르고 보비에게는 시늉으로만 웃음을 지어보였다. "마리엘, 보비를 소개하겠소." 브레인은 현관에 들어서면서 말했다. 두 사람은 짐짓 미소를 꾸몄다. 뜻밖에도 블론드는 보비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이기조차 했 다. 그러나 그것도 브레인에 대한 예의로 마 지못해 그런 것이었다. 그 뒤로 30분 가량을 브레인과 마리엘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 으며--그중의 어는 하나도 타운하우스에 관한 말이 아니었다-- 그 동안 보비는 따분하게 앉았다 섰다 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여 러 가지를 체크한다구? 과연 페어팩스에 간 직해 둔 미녀를 체크하는 모양이군. 브레인이 이제 가자고 했을 때, 보비는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예의 없는 침입자 때문에 이토록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즉 타운하우스의 체크예요?" 브레인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 때 보비가 물었 다. 상대방의 불쾌한 표정에 브레인이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그녀의 화를 터뜨리지 않으려고 조 심하는 것 같았다. "네, 그렇소. 여기에 들른 것에 화가 났소?" "아니오, 그럴 리가 있겠어요." 브레인은 웃으면 가지런한 흰 이가 드러나 보여 핸섬한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었 다. 보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에게서 홱 눈길을 돌려 도로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브레인은 팔목시계를 보았다. "당신의 집에 들러 준비를 하고서 식 사하러 가면 되겠군요. 슬슬 배가 고파 오 기 시작하는군." 보비의 뱃속에서도 동감이라는 듯이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마음은 그다지 찬성하고 있지 않았다. 종일 이 남자와 붙어다닌 끝에 저녁 때도 같이 나가는 걸 내 신경이 견디어 낼 수 있을까? ┌───────────────────────────────────┐ │ ▶ 번 호 : 1291/1333 ▶ 등록자 : VEGA64 │ │ ▶ 등록일 : 2001년 11월 14일 01:15 │ │ ▶ 제 목 : [그니] 열쇠 도둑 6장 - J.제프리즈 │ └───────────────────────────────────┘ "당신은 왜 가족에 대해서 한마디도하지 않지요?" 보비는 아파트의 문을 열면서 물었다. 뒤따라 들어온 브레인은 그대로 주방에 걸어가서는 냉장고의 문을 열자 남아 있는 맥주병 하나를 꺼냈다. "예를 들면 어떤 일 말이오?" "당신의 가족은 이곳 페어팩스에 살고 있지 않나요? 고향에 돌아왔는데,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지 않나요?" "다른 때는 그렇게 하고있어요." 키 큰 몸을 긴 의자에 파묻고 맥주를 한모금 꿀 꺽 마신 그는 한 팔을 의자 등에 뻗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 없어요. 2주전에 일개월 예정으로 유럽여행을 떠났으니까." 보비는 후유하고 숨을 내쉬고 지친 듯이 위자에 앉았다. "근사하군요. 일개월의 유럽여행이라...... 타임 레코드도 없고, 차에 합승해서 출근할 필요도, 아침 다섯시 반에 일어날 필요도 없다니." 선망에 가득 찬 그 표정을 브레인은 놓치지 않았다.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소?" 그는 진심으로 묻는 것이었다. "왜요, 좋아해요." 보비는 몸을 사렸다. "지금의 지위를 손에 넣는데 내가 얼마나 기를 썼는지 아세요?" "그러나 당신은 그 일이 전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 말이지요?" 보비는 얼굴을 찌푸렸다. "남의 일이라고 멋대로 해석하지 마세요." "하지만 부정도 안 하는 것 같군." 그러자 그녀의 찌푸린 얼굴이 누그러지고, 보비는 대답하기 전의 생각에 잠긴 듯 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좋아하지 않는지도 몰라요." 지금까지는 너무나 일에 바빠서 자 기의 직업에 대해서 어떻다고 분석할 겨를도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난...... 난 그저......" 브레인은 나무로 된 받침접시 위에 맥주를 놓았다. "당신은 일을 너무 해서 지쳐 있는 거요."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하는 그의 말에 보비는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그를 노려 보았다. "어떻게 남의 속을 그렇게 잘 알아요?" "그것은...... 나 자신도 같은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오." 푸른 눈이 한순간 의 심스럽게 바라보는 보비의 시선을 잡더니 그녀의 어깨 너머 한 곳을 쳐다보았다. 그의 말에는 무시할 수 없는 진실이 깃들여 있었다. "농구 시압에 나가면 돈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 브레인은 대답도 없이 그저 눈만 까막거릴 뿐이었다. 방금 보비가 한 말을 들었는 지조차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프로 선수가 되기 전의 일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것 일까? 그의 개인적인 일에 관심을 나타내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호기심에 끌려 보 비는 물었다. "프로 선수가 된 지는 얼마나 되나요?" 브레인은 손가락으로 코를 TMfdjT다. "10년이오." "무척 오래 되었군요." "어떤 때는 10년이 열흘로 생각되기도 하고, 백년으로도......" 보비는 희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것은 좋은 일이에요, 아니면......?" 브레인은 밝게 큰소리로 웃었다. "난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농구는 나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어요." "당신에게 프로 선수가 되라고 권한 것은 부모님이신가요?" "아니오, 나의 부모는 언제나 내가 스포츠보다 학문에 힘쓰기를 바랐어요. 부모가 아니라 유별나게 열성적인 어떤 코치가 날 발견하고 고교에 갓 들어갔을 때부터 날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때부터 내 재능을 키워 나간 거지요." "대학은요?" "듀크 대학에 다녔소." 브레인의 눈망울은 옛날을 그리워하는 듯이 반짝였다. "대 학 시절에는 눈부셨지요. 내 인생에서 제일 좋은 시기였어요......" "무엇을 전공했어요?" "정치학." "그래요? 재미있는 분야군요." "당신의 말처럼 참 재미있었어요." 두 사람은 저마다의 생각에 잠기며 입을 다물었다. 보비는 지금보다 어리고 캠퍼 스의 스타였던 무렵의 브레인의 이미지를 그려 보았다. 아니, 이런 일은 생각하지 말자. 사실 이 남자에 대한 생각에 나는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 "식사하러 가기 전에 좀 쉬겠어요." 일어서면서 보비는 말했다. "좋아요. 여섯 시경에 떠납시다." "알았어요." 앞으로의 귀중한 두 시간 동안 아무래도 브레인으로부터 떠나 있어야 할 필요를 느끼면서 보비는 침실로 걸어갔다. 브레인은 베스토랑 앞의 넓고 커브진 차도를 따라 핸들을 꺾었다. 레스토랑이라고 하지만 그 건물은 18세기의 저택을 수복한 것으로, 거대한 흰 원주가 붉은 벽돌집 의 프론트의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입구로 오르는 보도 양쪽으로는 손질이 잘 된 정원이 있었다. 장미며 갖가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달콤하고 이국적인 향기가 산뜻한 밤공기 속에 넘치고 있었다. 건물의 내부는 아메리칸식의 내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식당도 저마다의 방과 잘 조화를 이루어 완전하다고 할 만큼 지난 날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래층의 안쪽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들이 앉은 자리에서는 유리창 너 머로 베란다와 그 너머에 펼쳐져 있는 잔디를 내다볼 수 있었다. "참 좋은 곳이군요." 훌륭한 정원을 둘러보고 보비는 감탄한 듯이 속삭였다. 멀리 보이는 산들이나 금빛으로 반짝이는 언덕이 급속히 짙어져 가는 어스름 속에서 검 은 실루엣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저것이 슈가로프 산이오." 보비의 시선을 더듬으며 브레인이 설명했다. "정말 곱군요. 먼데서는 본 일이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아름다워 요." "당신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소. 이 건물이 이 자리에 세워진 이유는 바로 뒤뜰에 서 저것을 바라볼 수가 있기 때문이오. 그것이 이 호텔의 성공의 원인이 되기도 한 것 같지만." 보비의 표정은 아이처럼 순진해지고, 깜짝 놀랄 만큼 매력적이었다. 부드러운 조 명이 섬세한 얼굴생김에 금빛의 반짝임을 던지고, 드레스의 연한 초록빛이 그 에메 랄드빛 눈의 깊이를 더해 주고 있었다. 오늘 저녁의 보비는 약간 헤어스타일을 바 꾸어, 이마에서 뒤로 브러싱된 황갈색의 머리는 어깨 위에서 가볍게 소용돌이치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브레인은 동요를 느끼고 두 손을 꼭 틀어쥐었다가 자기의 숱많 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볼과 목덜미를 만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살결은 틀림없이 그녀의 비단 드레스처럼 매끄럽겠지. 그때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보비가 입을 열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서 날 일부러 이런데 데려오실 것까지는 없었는데요." 브레인은 딱 벌어진 어깨를 추스르고 웃었다. "아니, 여기에 오며 어떻소.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오. 그야 당신으로서 는 이런 곳이 신기하지 않겠지. 당신 애인도 이렇게 해주겠지요?" 보비는 장난스런 눈매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게 어째서 애인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야 당신한테 애인이 없을 리가 있겠소?" 바로 부정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비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고 잠자코 있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나를 실제보다 분방한 여자로 알아도 상관없지 않은가. "그런데 당신은 어때요? 지금까지 몇 명의 애인이 있었어요? 물론 지금도 진행중 이겠지만." 브레인은 즐거운 듯이 웃었다. 마침 그때 메뉴와 와인 리스트를 가지고 온 웨이터 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브레인은 보비에게 메뉴를 받아 보라고 가볍게 몸 짓을 하면서 대답했다.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기억할 수가 없소." 보비는 미소지으면서, 거침없는 그의 대답 중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하고 생각하며 한순간 물끄러미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많은 애인...... 물론 그 같으면 있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을 생각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어차피 브레인 피어슨의 낭만적 인 생활은 그것이 과거의 일이든 현재의 일이든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그 레스토랑의 음식은 과연 맛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국물이 찐득찐득한 구운 오리, 와일드 라이스, 미묘한 풍미를 가진 여러 가지 소스..... 향기 좋은 부르고 뉴산의 붉은 포도주는 식사를 더욱 완벽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 라 차츰 마음이 들뜨고 주말의 침입자에 대한 경계심이 희미해져 가는 것을 보비는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손을 뻗어 보비의 손을 잡았을 때도, 자기의 가냘픈 손이 우악스런 커다란 손에 감싸인 것을 내려다볼 뿐, 왠지 손을 뽑는 것이 불가능 한 것 같았다. 사실이지 오랫동안 거기에 그대로 앉아 있어도 좋았을 것이다. 문득 브레인의 엄지손가락이 보비의 민감한 손목 안쪽을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을 때 누를 수 없는 떨림이 몸을 뚫고 지나갔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보비는 얼른 손을 빼었다. 푸른 눈에 의아스런 빛이 떠오른 것 을 보고 보비는 옆에 놓여 있는 핸드백을 집어들고 화장실에 갔다오겠다고 하며 얼 버무렸다. 화장실에 들어가 보비는 거울을 보며 자기의 상기된 얼굴이 희미한 레스토랑의 조 명 속에서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기를 빌 뿐이었다. 포도주를 좀 많이 마셨을 뿐이 야. 피를 술렁거리게 하는 이 관능적인 취기는 절대 브레인이 불러일으킨 것이 아 닐 거야. 브레인 피어슨은 나와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타입이 아닌가.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 공통점도 없어. 더구나 나는 스포츠...... 특히 농구에 대해서는 전 혀 흥미가 없어. 대학시절의 경험으로 보비는 스포츠맨에 대해서 별로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우연히 데이트한 일이 있는 몇 명의 남학생은 모두 성적은 엉 망이었으며, 향학심 같은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 그는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야. 그와 같이 지낸 지금까지 도대체 몇 번을 자기에게 그렇게 타일렀 던가! 보비는 짜증스럽게 생각했다. 월요일에는 브레인의 차에 대한 문제도 해결되 고, 그러면 그는 영원히 자기의 인생으로부터 떠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은 유감스럽게도 기대한 만큼 기분을 가라앉혀 주지는 않았다. 미 간을 찌푸리고 보비는 일부러 시간을 들여 머리를 빗고 혼란한 감정을 가라앉힌 뒤 에야 겨우 테이블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는 맛있는 식사와 포도주, 그리고 기분좋게 흔들리는 차의 동 요에 휩싸여 눈까풀이 무거워졌다. 졸음이 이끄는 대로 보비는 어느새 시트에 축 늘어져 있었다. 옆에 잠들어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고 브레인은 가슴이 꽉 죄는 것 같았다. 너무나 작고 가냘프고 힘없어 보였다. 그러나 브레인은 물론 이 연약한 몸 속에 다이나마 이트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약함과 힘이 뒤섞여 있는 점에 견딜 수 없이 끌리는 것이었다. 왼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오른손을 살며시 뻗어 브레인은 실크 천 위로 그녀의 어 깨를 쓰다듬었다. 희미한 난향의 내음은 지금까지 맡아 본 어떤 냄새보다도 자극적 이었고, 드라이브에 신경을 쏟기에 무척 힘이 들었다. 자가 아파트의 주차장에 들어서면서 가볍게 흔들렸을 때, 보비는 문득 눈을 떴다. 돌아오는 동안 계속 잠들어 있었던 것보다 자기의 자세에 깜짝 놀라 그녀는 번쩍 눈을 뜨고 숨을 들이마셨다. 브레인의 어깨에 기대었던 왼쪽 볼이 저렸고, 오른쪽 어깨는 우람한 팔에 안겨있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자기가 먼저 그에게 몸을 기댄 것인가? 더구나 시트와 시트 사이에 있는 스페이스를 넘어서! 아니면 브레인 이 그렇게 뉘어 준 것인가? 하여튼 이 자세는 매우 아늑하고 기분이 좋았다. 찬찬히 일으킨 보비의 몸에서 손을 뗀 브레인은 두 손으로 핸들을 다루어 그녀 전 용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자 브레인은 차문을 쾅 닫으면서 보비를 꼭 부축했다. 언제나의 냉정 한 판단력에 거스르고 주차장을 가로질러 아파트로 향하는 동안 보비는 그의 팔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고, 브레인이 열쇠를 넣어 문을 열자 보비는 앞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자기의 자켓을 옷걸이에 걸고 그의 것도 걸지 않겠느냐고 물으려고 돌아본 보비는 겨우 몇 센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브레인과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다. 와락 그의 품안에 꼭 안기는 바람에 보비의 입술에서 허덕이는 숨결이 새어나왔다. 조용한 웃음을 띠고 내려다보는 브레인을 바라보며 보비는 타는 것 같은 충격이 몸속을 전류처럼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의 냉정한 판단력은 아무 소용도 없 게 되어 보비는 몸이 굳어졌다. 그를 밀쳐내고 도망쳐야 한다고 머릿속으로는 생각 하면서도 우람한 그의 몸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는 마음이 그녀를 꼼짝도 못하게 했다. 보비는 입 밖으로 거부의 말을 뱉으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브레인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보비의 말을 막았다. "당신에게 고맙다고 해야겠소." 낮고 달콤한 그 목소리는 보비의 몸 속에 불러일 으켜진 욕망의 불꽃을 확 타오르게 했다. "왜, 왜요?" 보비는 숨을 삼키고 중얼거렸다. "이렇게 눈부신 저녁을 보낼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 나로서는 최고의 즐거운 한때 였소. 지금까지 난 오랫동안 이런 저녁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소." 한 팔로는 가 냘픈 등을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는 목덜미를 쓸며 황갈색의 숱많은 머리카락을 옆 으로 밀어냈다. 그의 손이 너무나 민감한 목덜미를 애무하는 바람에 보비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손의 움직임이 그녀의 저항력과 몸의 힘까지도 배앗아 버리는 바람에 보비는 어쩔 수 없이 브레인의 몸에 꼭 달라붙어 있었다. 한순간 보비는 내부의 있는 또 하나의 자기가 옆에 서서 육체의 유혹에 지고 있는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의 말에 대한 알맞은 대 답을 찾으려고 기를 썼고, 자기를 현실로 끌어내려 이 상황을 콘드롤할 수 있기를 원했다. "믿을 수 없어요." 가까스로 그렇게 말하고 보비는 숨을 삼켰다.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뜨거운 푸른 눈을 마주보는 것보다는 그의 턱께를 바라보 는 것이 훨씬 편했다. "이런 일은 당신으로서는 흔한 일이 아닐까요?"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는 천천히 그녀의 귓불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지작 거렸다. 보비는 떨리는 자신을 가라앉히려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글세, 당신이 여자와 인연이 없는 생활을 해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안 그런 가요, 미스터 피어슨?" 한껏 빈정거림을 담고 그녀는 말했다. "그럼 당신은," 브레인은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속삭였다. "백마를 타고 올 왕자 님을 기다리고 있는 티없이 순진한 처년가요?" 다른 때 같으면 이런 케케묵은 말은 시시하게 생각되었겠지만, 보비는 그 말에 얼 굴이 붉혔다. 그러자 브레인은 그녀가 말이 막힌 틈을 이용해서 선뜻 입술을 덮어 버리는 것이었다. 가늘게 떠는 귀여운 입술은, 브레인이 예상한 대로 먼저 고집스럽게 그를 뿌리치 려고 들더니 그래도 끈덕지게 달라붙자 약간 누그러져 저항을 그치고 마침내 그의 요구에 따라 벌어졌다. 팔에 안긴 그녀의 몸은 나긋나긋하고 연하고 그러면서도 날 렵하게 죄어있었다. 브레인은 그녀의 몸을 자기의 키 높이까지 안아올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브레인은 뜨거운 신음 소리를 내뱉고는 더욱 세게 보비를 끌어안았다. 입술을 꼭 댄 채 브레인은 아기라도 안아들 듯이 가볍게 보비를 두 팔에 안아 긴의자로 옮겨 갔다. 현관의 불만 하나 켜 있을 뿐, 방안은 어두웠다. 키스는 끝도 없이 계속되고, 애무의 손길이 등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갔다. 몸이 떨려 오는 그 전율에 보비는 더욱더 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보비 속의 뭔가가 민감하게 반응하더니 경고의 속삭임이 그녀를 깨웠다. 사 라져 가던 자제심이 번쩍 눈을 뜨고, 보비는 두 손으로 그의 우람한 가슴을 밀어냈 다. 갑자기 공포에 몰려서 몸을 버둥거리며 불타는 포옹에서 몸을 빼자 숨을 헐떡 이며 말했다. "부탁이에요, 브레인. 안돼요." "안된다니, 뭐가요?" 그녀의 매끄러운 이마에 입술을 댄 채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이러지 말아요...... 안된다니까요." 보비는 떨면서 숨을 삼키고 힘없이 거부했 다. "무엇이 안된다는 거지요?" 그의 목소리는 정열에 휩쓸려 흐릿했다. "그 이유를 일일이 말해야 해요?" 보비는 울컥 화가 치밀어 쏘아붙이고 그의 손을 홱 뿌리치고는 스커트를 매만졌다. 브레인은 마지못해 포옹의 손길을 풀었다. 보비는 어색한 동작으로 긴의자에서 벗 어나자 어두운 방안에서 그로부터 떨어져 섰다. 제대로 말이 나오지를 않았으나 갈라진 목소리로 보비는 말했다. "주말에 여기에 있어도 좋다고 했을 때 당신은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요. 잊었어요? 아무런 속셈도 없다고 했지요?" 긴의자 등에 두 팔을 뻗으며 브레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방금의 일이 당신이 말하는 속셈이란 말이오? 그럼 당신은 어땠소?" "방금의 일이라니,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요. 당신도 즐기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소?" 보비는 입을 꼭 다물었다. "모든 것이 당신이 계획한 일이죠? 나도 로봇이 아닌 살아 있는 인간이에요. 하지 만 미스터 피어슨, 이점만은 분명하게 해두겠어요. 우리 사이에 그것이 무엇이 되 었든 육체적인 것이 끼어드는 것은 절대로 용서 할 수 없어요.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보장하겠어요. 유감스럽게도 나는 당신이 숱하게 어울리 는 서비스 정신이 왕성한 여자들하고는 달라요."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불을 켜고 보비는 조금은 과장된 동작으로 팔을 저었다. "망설일 것 없이 전화를 쓰세요. 아 마 마음씨 따뜻한 블론드의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겠지요." 자기가 질투심 강한 여자처럼 보인다고 보비는 느꼈다. 게다가 방금 한 자기의 제 안을 브레인이 실행에 옮길 거라고 생각하면 더욱 이유를 알 수 없는 노여움이 치 미는 것이었다. 자신의 내심의 분노가 터져나갈까봐 보비는 서둘러 백을 집어들자 방에서 나왔다. "저, 저어...... 식사말인데...... 잘 먹었어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누를 수 없어서 보비는 딱딱한 소리로 말했다. "난 이제 쉬어야겠어요." 브레인은 전혀 무표정하게 아무말 없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홱 몸을 돌린 보비는 침실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보비?" 보비는 멈추어 서긴 했으나 돌아보려고는 하지 않았다. "뭐예요?" "잘 자요...... 편한히."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보비는 침실로 들어가자 문을 꼭 닫고 열쇠로 잠갔다. ┌───────────────────────────────────┐ │ ▶ 번 호 : 1292/1333 ▶ 등록자 : PANDIDO1 │ │ ▶ 등록일 : 2001년 11월 16일 17:22 │ │ ▶ 제 목 : [판디도]열쇠 도둑 7장-J.제프리즈 │ └───────────────────────────────────┘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보비를 이른 아침의 단잠에서 끌어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한 팔을 이마위에 대고 그녀는 졸린 듯이 대답했다. “뭐예요?” “그저 알리고 싶었소, 내가 차의 키를 가지고 간다는 것을, 바로 돌아올 거요.” 저것은 오래 전부터 깨어 있는 목소리군, 하고 보비는 짜증스럽게 생각했다. 아침마다 저 모양인가? 이곳에서는 좀 그러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어디 가세요?” 상반신을 일으켜 팔굽으로 받치고 보비는 하품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잊었는지 모르지만, 냉장고가 텅 비었소. 식료품실에도 남은 것이 별로 없어서 아 침거리를 좀 사와야겠소.” 보비는 저도 모르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을까, 꼭두새벽부터 배가 고파서 절쩔매다니! “알았어요.” 보비는 다시 몸을 누이고 그가 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이제 하루만 참으면 이 아파트를 독차지할 수 있어.보비는 자기를 차일렀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면서 그녀는 공허하게 벽을 바라보았다. 내가 왜 이럴까……왜 방금 갑자기 긴장에 사로잡힌 것일까? 상관없어, 앞으로 하루쯤은 그럭저럭 견디어 나갈 수 있어. 하지만 방금 느낀 긴장의 의미는 그것이 아닌 것 같다. 그렇지가 않다. 보비는 슬픈 마음으 로 인정했다. 문제는 브레인이 여기에서 나간다는 사실인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그의 존재는 그녀에게 차츰 기분좋은 것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문득 신호라도 한 것처 럼 공복감이 그녀를 덮쳤다. 브레인은 내 식욕에까지 큰 영향을 주고 말았어! 어젯저녁의 일이 한꺼번에 되살아나고,보비는 자기의 마음속에 브레인에 대한 특별한 감정 이 자라고 있는 것을 날카롭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호화로운 식사와 고급 와 인 탓이라고 자기를 타이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너무나 오랫동안 팽개쳐 둔 일이니 그의 키스에 응하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렇지만 자기가 적극적으로 그에 게 몸을 접근시켰고 자신을 드러냈다고 생각하니, 보비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보비는 짜쯩난다는 듯이 일어나 이불을 발치로 걷어내고는 두 다리를 세워 끌어안고 앉아 무릎에 턱을 기고 몸을 웅크렸다. 하여튼 이런 사태를 불러일으킨 것은 나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이야. 이번 주말에 그저 약간의 귀찮음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은 큰 잘못이었고, 결 과적으론 커다란 감정적 혼란 속에 휘말려 버리게 된 것이다. 그녀는 무섭기초차 했다.한데 난 도대체 무엇이 무섭단 말인가? 그가 떠나 버린 뒤에 다시 혼자가 될 것이? 아니야, 나는 지금까지도 혼자서 잘 해왔지 않아? 짧은 주말을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함께 지냈다고 해서 혼자 해나갈 자신을 잃어버리다니, 참으로 어리석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비는 그가(잘 알 지도 못하는 남자)로 느껴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그렇기는커녕 마치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남자 중 어느주구도 보비에게 이토록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없었다. 내가 오래 전에 마음에 다진 일이 무엇이었지? 보비는 스스로 물어 보았다. 그녀의 주위에 는 친구가 너무나 많았다., 사랑하는 줄 알고 경솔하게 결혼했다가 결국은 이혼을 하게 된 조혼의 커플들. 그들이 저지른 것 같은 잘못을 자기는 저지르지 말자는 것이 보비의 신념이 었다. 대학 시절에 사랑한 사람은 있었지만 다른 친구처럼 결혼식의 제단 앞에 서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해서 독신주의지라는 것은 아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과 일생을 같이할 참다 운 결혼을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상을 떠들어대 보았자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습 게 들릴 게 뻔해서 보비는 아예 입을 다물고 결혼에 대해선 무관심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었 다. 그 확고한 이상이 브레인 피어슨 앞에서는 도대체 왜 이런단 말인가? 보비는 정직하게 자기 가 육체적으로 브레인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만일 조금만 의지가 약했던들 돌 이킬 수 없는 데까지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브레인이 맥도날드 슈퍼마켓에서 돌아오자 일요일 하루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그는 어젯저녁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보비는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면서도 그 일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린 그에게 좀 화가 났다. 나에게는 그렇게도 중요한 일이 그에겐 별거 아니란 말인가. 브레인은 하루 종일 쾌활했다. 보비는 자기의 엇갈린 생각에 언제까지나 매달리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오전에 그들은 캐피탈 센터에 갔고,브레인은 보비를 위해서 특별석을 잡아 주었 다. 거기서 보비는 또 자기의 뜻밖의 행동에 놀라게 되었다. 그 지방 사람들의 열광적인 응 원에 휩싸이게 되어 처음에 느꼈던 외토리의 기분은 금방 사라지고 보비는 어느새 시합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번 관중과 일체가 되자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게임의 진행 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사람들과 함께 신이 나서 성원을 보냈다. 그러나 갑자기 농구에 열중한다고 해서 시합 그 자체에 특별한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보비의 눈길은 줄곧 코트위의 한 남자, 브레인 피어슨만을 쫓 고 있었다. 키가 크고 구릿빛으로 탄 근육질의 몸이 빼어난 기량과 집중력을 보이며 종횡무 진으로 코트 위를 질주하는 것을 그녀는 넋을 잃고 지켜보았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저 남 자가 주말을 함께 보낸 그 태평스럽고 가장적인 남자란 말인가. 브레인 피어슨에게는 아직 보비가 알지 못하는 면이 많이 있는 것 같았다. 시합이 끝나자 두 사람은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둘의 화제는 물론 농 구에 관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브레인의 팀이 뒤지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점수를 따내어 대 역전승을 거두어 관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이끌었던 것이다. 브레인은 승리로 기분이 좋았고, 올해는 어느 팀이건 자기 팀을 누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브리츠가 틀림없이 우승할 거라고 생각해요?”하고 보비가 물었다. 두 사람은 맛있는 식 사를 마치고 포도주를 즐기고 있었다. “틀림없지.” 브레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만일 컨디션이 이대로 나간다면 금년 경 기는 우리가 다 휩쓸게 될 거요.” 보비는 포도주에 입을 대고 글라스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글라스를 테이블 위 에 내려놓고 물었다. “우승하는 것이 당신에게는 그렇게도 중요해요?” 브레인은 바보 같은 질문도 다 한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물론 중요하죠. 언제든지 그래요.” 한순간 짙은 푸른 눈에 일종의 거센 힘이 불타는 듯했다. 보비는 거의 거침없는 대답 속에 뭔가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그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보비는 당황했다. 브레인 피어슨의 수수께끼에 싸인 한쪽이 떨어져 나간 듯했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연 순간 브레인의 눈길은 레스토랑의 입구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돌아보니, 브리츠 팀의 선수들이 자기네 부인이며 걸프렌드를 이끌 고 무리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이 나누어 가지던 친밀감은 금세 깨어져 버렸다. 브레인은 그들을 초대하고 전원이 같이 즐길 수 있는 커다란 테이블로 옮겼다. 그 뒤의 두 시간은 보비로서는 정말 인내의 연속이었다. 그들 중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라 곤 없었다……..소개를 받지도 못했으니. 아무 상의도 없이 자기를 이런 입장에 몰아넣은 브 레인에 대해 보비는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경험인지도 몰랐다. 왜냐면 늘 행동을 같이하는 자기 그룹 속 의 브레인을 관찰하는 다시없는 찬스였기 때문이다. 브레인은 자기의 팀 멤버와 원만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뭐니뭐니해도 그는 생활의 90퍼센트를 팀 속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 다. 두 사람은 상당히 피곤한 몸으로 아파트로 돌아왔다. 브레인은 텔레비전을 켯고, 둘은 긴의 자에서 좀 떨어져 않자 캐럴 로버트와 프레드 맥마레이 주연의 1930년대의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보비는 그가 두 사람 사이에 띄워 놓은 거리에 안심이 되는 반면 왠지 그의 예의바른 행동에 짜증이 났다. 많은 친구들과 떠들다가 돌아왔기 때문에 전날 밤 보인 거센 정열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 모양이었다.하긴 보비의 편에서도 정열을 받아들일 마음은 없었지만…… 월요일 아침, 보비는 피곤을 느끼며 일어나려다가 지친 듯이 한숨을 쉬고 욱신거리는 관자 놀이를 찬찬히 문질렀다. 그저께. 토요일 밤에 있었던 일은 브레인으로서는 대수롭지 않은, 있으나마나 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의 육체적 욕망을 채워 줄 상대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 다. 참 편리한 이야기군! 보비는 벌컥 화가 치밀어 신음소리를 내자 침실문을 쾅 열고 아예 조 용히 할 생각도 없이 퉁퉁거리며 복도로 나와 욕실로 들어갔다. 혼자 있을 때와 같이 거침 없이 서랍을 여닫고 샤워 물을 힘껏 틀어 놓았다. 어쩐지 얄미운 그의 잠을 방해함으로써 복수를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얼마 후에 욕실에서 나와 어떤 소리도 브레인 피어슨 의 잠을 방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보비는 놀랐다. 그는 여전히 긴의자 밖으로 맨다리를 내밀고 턱밑까지 모포를 끌어올려 마치 웃자란 소년처럼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보비는 입구에 서서 팔짱을 끼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 남자를 방해할 수 있 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의 인생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느긋함이 얄밉다고 생각하 면서도 보비는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일어날 시간이에요.” 커다란 소리로 말하고 보비는 주방에 커피를 끓이러 갔다. 너무나 쉽게 그의 페이스에 말려든 위장은 아침이면 공복을 호소하며 꼬르륵 소리를 내었다. 오늘 아침도 그것을 누를 길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그 때문에 아침마다 공복감을 해결해 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보비가 주방에서 분주하게 왔다갔다하고 있으니까 브레인은 기지개를 켜는 것 같더니 눈을 딱 감은 채 돌아 누웠다. 그녀는 유리제 코피포트에 물으 따르고 커피메이커 속에 알맞은 분량의 커피 가루를 넣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일찍 일어나는 체했을 뿐이지 사실은 별로 늦잠이 없는 것도 아니군 요.” “뭐……뭐라구?” 긴 의자 쪽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 왔다. 보비는 크림과 설탕을 꺼내고 캐비닛의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그가 알아듣건 말건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밤에도 늦게까지 일어나 있을 수 있겠지요. 유감스럽게도 우리 노동자들은 당신 네처럼 팔자가 좋지를 못해요.언제나 새벽같이 일어나야 한단 말이예요.” 브레인은 아직도 긴 의자 위에 몸을 길게 뻗은 채였다. 팔에 꼭 눌렸던 입술이 일그러져 있 었다. 그를 일으키려고 보비는 거실로 되돌아왔다. 그도 샤워를 해야 할 것이고, 식사도 해 야 한다. 그러나 보비는 출근하자면 별로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 거인을 일으킬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보비는 손을 허리에 대고 긴 의자 앞에 섰다, 브레인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보비는 모포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35센티나 될 것 같은 발을 보고 장난스 럽게 웃었다. 그리고 아무 망설임도 없이 손을 뻗어 커다란 발의 새끼 발가락을 잡고 홱 끌 어당겼다. “자아 일어나세요, 잠꾸러기 양반!” 그 작전은 예상 외로 효과가 컸다. 브레인이 벌떡 윗몸을 일으키고 팔굽으로 몸을 받쳤을 때, 보비는 얼른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아야!”그는 긴 다리를 구부리고 소리질렀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고, 느닷없이 어구나 난 폭하게 깨워졌기 때문에 마치 토라진 아이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보비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무슨 짓이야?” 그의 화가 난 표정에 보비는 도리어 기뻤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 오던 온화하고 한결 같은 모습이 처음으로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당신을 일으키려고 한 거예요.” 보비는 그의 손이 닿지 않는 복도 쪽으로 걸어갔다. “여 기를 나갈 시간이 되었어요!” “무엇 때문에?” 브레인은 눈을 비비고 그 손으로 조금 자란 수염을 쓰다듬었다.”지금 몇 시요?” “일곱 시가 다 되어가고 있어요.술술 교통 체중이 시작되고 있을 시간이니 아침의 러시 아 워에 붙들리고 싶지 않으면 어서 일어나 식사를 해야지요.” “어디에 가자는 거요?” 보비는 침실의 문을 반쯤 닫고 블라우스와 스커트로 갈아입으면서 거실에 들리도록 목청을 돋우었다. “난 직장에 나가야지요. 그리고 당신은 비행기 시간이 두세 시간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전 에 차를 보관하고 있는 주차장에 가서 당신의 차를 꺼내 와야 하지 않겠어요?” 코르벳 이야기가 효험을 나타낸 것 같았다. 이윽고 브레인은 주방에 가서 커피 잔을 찾았고, 캐비닛을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아침은 식사가 없어요.” 보비가 소리쳤다. “우리 집에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어요, 어차피 시간도 없지만.” 브레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는지 자기 눈으로 확인하려고 냉장고며 식료품실을 열어 보면서 투덜투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비가 침대를 정리하는 동안 브레인은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 간 것 같았다. 몃 분인가 후에 전기 면도기 소리가 들려 왔다. 욕실에서 나온 브레인이 바지와 양말만의 차림으로 머리를 타월로 닦고 있는 것을 보고 보 비는 화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어요?” 그녀는 짜쯩 섞인 어투로 물었다. 타월을 앞뒤로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브레인은 당연한 일처럼 대답했다. “머리를 말리고 있소.” “무엇 때문에 머리 같은 것을 감았어요?” 보비는 거의 울상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바 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서둘러 준비해 주지 않으면 난 회사에 늦어요.” “알았어요. 알았어.드라이어는 어디 있소?” 브레인은 타월을 욕실 안에 던져넣고는 옷걸이 에서 셔츠를 벗겨 구두를 신으면서 그것에 팔을 꿰었다. 안절부절 못하며 한숨을 쉬던 보비는 욕실로 들어가 타월장의 문을 열고 안에서 드라이어를 꺼냈다. 아직도 셔츠의 단추를 잠그고 있는 브레인 앞을 휙 지나 식당의 테이블 쪽으로 간 보비는 드라이어의 코드를 옆의 플러그에 꽂았다. “자아 이리 오세요.” “왜?” 브레인은 의아스럽게 물었다. 보비는 바쁘다는 듯이 팔목시계를 보며 재촉했다. “어서 이리 오세요!” 브레인은 놀란 얼굴을 하고 히죽 웃었다. “알았소. 지금 가요.” “자아 앉아요.” 브레인은 체념한 듯이 어깨를 추스르고 보비가 가르킨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렇게 태평하게 있다간 지각하기 꼭 좋겠어요.” 스위치가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드라이어는 따뜻한 바람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그것은 차 츰 뜨거워졌다. 보비는 브레인의 젖은 다갈색의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넣어 흔들었다. 브레인으로서는 이처럼 고마울 데가 없었다. 드라이어로 말리기가 힘이 들어서 그는 머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만두어 버리기가 일쑤였다. 가냘픈 손가락이 가볍게 머리를 마사지해 주는 쾌감에 비하면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를 아침의 산들바람에 말리는 경퇘감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뭐라고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아진 브레인은 그녀의 팔이 편하도록 윗 몸을 낮추어 머리를 숙이고는 두 눈을 딱 감고 있었다. 보비는 드라이어를 오른손에 들고 왼손으로 브레인의 귀 위와 목덜미에 내려오는 윤기 있는 머리를 들어 올렸다 잠아 당겼다 쓰다듬었다 했다. 왼손의 손가락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가 없고, 마치 그 자신의 마음을 가 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였다. 느닷없이 브레인이 손을 들어 드라이어의 스위치를 껐다. 규칙적인 모우터의 울림 소리가 끊어졌다. 왜 이런 짓을 ……그러나 재 저항도 하기 전에 브레인은 의자에서 홱 몸을 돌려 재빠르게 보비를 무릎 위에 앉히자 억지로 입술을 포개어 모든 외침 소리를 봉해 버렸다. 보비는 꼼짝도 못했고, 하물며 그의 팔에서 빠져나가기란 도저히 무리한 일이었다. 보비는 거저 거친 키스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약간 동요하고 있었던 그녀로서 그를 물리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혀는 보드라운 입술을 열고 들어와서 도전하듯이 더욱 깉게 돌진해 왔다. 브레 인은 한 손으로 그녀의 뒷멀미를 받치면서 긴 손가락에 그녀의 황갈색 머리를 감았고, 또 한 손으로는 천천히 리드미컬하게 어깨를 문질렀다. 보비는 가슴이 뛰고 숨이 답답해져 왔다. 그때 갑자기 그녀는 현실로, 자신으로 돌아왔다. 도대체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얼굴을 돌리고 그녀는 놀란 만한 힘으로 남자의 가슴을 밀어냈다. 비틀거리듯이 일어서자 보비는 얼른 그에게 등을 돌리고 드라이어의 손잡이에 코드를 감기 시작했다. “아직 안 끝났는데.” 브레인의 목소리에 놀리는 울림이 깃들여 있는 것을 느끼고 마음이 편치 못했으나 보비는 냉담하게 말했다. “끝났어요.” “아직 다 마르지 않았잖소.” “그냥 말릴 수밖에 없어요.이제 우린 떠나지 않으면 안돼요.” 방금 일어난 일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안타까울 정도였다. 보비는 화가 난 듯이 행동했고, 브레인의 얼굴에 나타 나 있는 만족스런 표정을 돌아보지 않고 욕실 쪽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거실로 돌아오자 브레인은 스포츠 자켓에 팔을 꿰고 있었다. “준비가 다 되었어요?” 주방과 식당에 불이 꺼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보비가 물었다,. “언제든지 나갈 수 있소.” “그래요?”보비는 대답하고 자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바다 같은 푸른 시선을 피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면 갈까요?” “베린다, 그게 정말이에요?” 소스라치게 놀란 보비는 외침을 억누른, 속삭임으로도 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지금, 아링턴에 있는 AMAC의 자회사에서 임대 업무를 다루고 있 는 베린다 로건의 사무실에 와 있었다. 브레인의 코르벳이 보관 주차장으로 옮겨진 뒤 거기 에서 다시 대여회사로 보내어졌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지금 막 이곳에 뛰어온 길이었다. 그런데, 베린다가 한 말이 너무나 뜻밖이어서 보비는 눈앞이 캄캄했다. 베린다는 어깨를 추스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보비의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보고 그녀는 동정하듯이 말했다. “방금 말한 대로 스포츠카를 빌리고 싶다는 전화가 들어왔어요.마침 크르벳이 있어서 바로 그것을 보내 준 거예요.” 보비는 정신이 혼란해진 모습으로 두 손을 비비며 베린다의 데스크 앞 의자에 찬찬히 걸터 앉아 눈을 감았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 브레인은 결코 믿어 주지 않을 거야, 그는 가만 있지 않을 거야. 그의 차는 부당하게 환수되었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지방을 도는 컴퓨터 세일즈맨을 태우고 지금쯤 아마 버지니아 주를 반쯤 가로지르며 달리고 있겠지. 그것도 언 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오늘 안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없어요? 내일이나 모레는?” 베린다는 한숨을 쉬었다. “그 세일즈맨이 기한이 없는 계약을 했으니 알 수 없어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그녀는 목을 긁었다. “지금 바로 수배를 해서 그의 행방을 밝혀 보겠으니 기다려 보겠어요? 그를 찾아내는 대로 차를 돌려 달라고 하겠어요. 지금으로서는 그의 행방을 밝혀 보겠으니 기다려 보겠어요? 그 를 찾아내는 대로 차를 돌려 달라고 하겠어요.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어요.” 보비는 힘없이 어깨를 떨구고 한동안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가까스로 “오우케이, 당 신의 방법이 가장 좋을지도 몰라요.” 하고 말하자 일어서서 방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 잡이를 잡더니 잠깐 멈칫거렸다. “저어 베린다……이 일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입을 다물어 줄 수 있겠어요? 꼭 좀 그렇게 해줘야겠는데.” 베린다는 웃음을 띠고 자기보다 나이 어린 여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았어요,안심해도 좋아요.” “고마워요.” 보비는 문을 열고 프론트 로비로 나왔다.이 저주스러운 순간,그녀는 굶주린 사자들이 기다리는 원형 투기장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그리스도교도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잘 알 것 같았다. 보비가 다가가자, 브레인은 읽고 있던 팜플렜에서 얼굴을 들었다. 어느때의 혈색이 좋은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셔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란 눈썹을 찌푸렸다. 무 슨 안 좋은 일이라도 았었나? “왜 그러지요?” 옆에 있는 테이블에 팜플렛을 놓고 브레인은 일어섰다. 그대로 앉아 있어 주면 좋겠는데……올려다보기보다 자기 눈의 위치와 같은 높이에 있는 그와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편할 것 같았다. 보비는 신경질적으로 주위를 둘러 보고는 다 시 눈길을 브레인에게 돌렸다. “차로 돌아갈까요?” 만일 한바탕 말다툼이 날 거라면 사람들 앞에서보다 차 속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브레인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하면 여기에 있는 것이 훨씬 위험성 이 적을 것도 같았다. 브레인은 어리둥절해 하면서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으나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은 밖으 로 나왔다. 차 속에서 보비는 그에게 설명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미루어 보려고 쓸데없이 백 속을 뒤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줘요.” 조수석에 앉아 몸을 이쪽으로 돌리고 우람한 가슴 앞에 팔짱을 낀 그의 팔은 정말 힘이 세 어 보였다. 보비는 흘끔 주위를 둘러보고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브레인의 차가 이미 여기에는 없다는 것, 그리고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단숨에 뱉어 놓았다. 금방이라도 화를 터뜨릴 줄 알고 보비는 두려워하며 눈을 들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재 미있어 하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웃음조차 띠고 있었다. “저런!” 브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런 일이 있을 줄 알았소. 그 차가 여기 가만히 있을 리 없지.” “저어……..”보비는 침을 삼켰다. “정말 미안해요.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던들……” “알았소,괜찮아요.” 브레인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고 헌 숨을 쉬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언제쯤 돌아올 것 같소?” 그의 조용한 태도에 용기가 나서 보비는 좀 기분이 밝아졌다. “글쎄요,틀림없이 일주일 안으로 돌아올 거예요. 이 문제의 처리에 최선을 다하겠어요.” 브레인은 이마를 긁었다. “당신이 날 공항까지 바래다 줄 수밖에 없겠군.” “그렇게 하겠어요. 하지만 그전에 오피스에 전화를 걸고 올께요.” 차의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을 때,브레인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 기다려요.” 그는 의미있는 웃음을 띠었다.그리고 그녀의 손에서 열쇠고리를 낚아채 어 그중에서 ------금빛과 은빛, 두 개의 열쇠 중에서------아파트의 열쇠를 찾아 고리에 서 빼기 시작했다. “브레인…….무얼 하는 거예요?” 은빛의 열쇠는 딸각 소리를 내며 고리에서 빠져나왔다. 브레인은 그것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싱긋 웃었다. “내게 이만한 권리는 있다고 생각하지 않소?” 보비는 입을 딱 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물론 농담이겠죠?” “아니, 농담이 아니오.” 브레인은 쾌활하게 말했다. 보비는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자 키를 되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브레인의 순발력은 언제 나처럼 초인적으로 뛰어나서 벌써 열솨는 그의 호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었다. “돌려줘요!” 보비는 노여움이 치미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소, 더구나 당신으로서는.” 보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를 갈듯이 말했다. “그건 무슨 뜻이예요?” 브레인은 창틀에 한 팔을 얹고 손가락으로 차의 지붕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더욱 약이 오른 보비는 그를 향해 손을 치켜들고 싶은 마음을 누르느라 힘이 들었다. “이 간단한 <실수>도 당신과 나만의 비밀로 해두고 싶지 않소?” 보비는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을 이렇게 놀리기예요?” 브레인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어깨를 추슬렀을 뿐이었다. 보비는 마지막으로 그를 한번 노려 보고 나서 문을 열었다. “당신이란 사람은 어쩌면 그 모양이에요,피어슨.” 그녀는 그렇게 쏟아부었지만, 브레인은 그저 즐거운 듯이 싱글거리고만 있었다. 이만한 일은 예상했어야 했어. 전화를 걸려고 자회사로 돌아가면서 보비는 속이 뒤틀리는 것을 누르고 생각했다. 브레인 피어슨 외 또 누가 하겠어. 아아, 왜 그런 남자하고 일이 이 렇게 얽혀 버렸을까? 앞으로 일생 동안 이 단 한 번의 과실을 메우며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지. ┌───────────────────────────────────┐ │ ▶ 번 호 : 1293/1333 ▶ 등록자 : GRANDMA │ │ ▶ 등록일 : 2001년 11월 21일 22:15 │ │ ▶ 제 목 : [내다]열쇠 도둑 8장 │ └───────────────────────────────────┘ 보비는 눈앞에 펼쳐진 파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차마 소리를 낼 수 없어 속으로 신 음하고는 두 팔 굽을 책상에 짚고 욱신거 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오늘 아침부터 시작된 두통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흘 끔 손목 시계를 보았다. 점심을 들면 좀 마 음이 편해질지도 몰라. 보비는 브레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말 동안에 그렇게 해온 것처럼 오늘 아침에도 식사를 들었더라면 좀 나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아침 식사를 들지 않아도 별 문 제가 없었는데……. "이런 일은 자꾸 생각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보비는 혼잣말을 하고 손에 든 연필을 책상 위에 내던졌다. "난 누구를 속이려고 하 는 것일까?" 책상 제일 밑의 서랍을 열고 늘 놓아둔 아스피린의 병을 꺼냈다. "물을 갖다 드릴까?" 고개를 드니, 랠프가 사무실 입구에 서 있었다. 아무리 안 그런 체해 야 랠프는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보비는 웃음을 지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네, 그래 주시면 고맙겠는데요." 랠프는 입구에서 사라지자 바로 찬물이 든 플라스틱 컵을 들고 돌아왔다. "자." 그는 컵을 건네주고는 보비가 알약 두 알을 삼키는 것을 지켜보았다. "고마와요, 랠프." 보비는 의자 등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천만에." 랠프는 걱정스런 듯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데스크 맞은편의 의자를 끌어 당겼다. "이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겠소?"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찬찬히 눈을 뜨고 보비는 애매하게 되물었다. "이 일이라니요?"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가 말이오. 정말 안돼 보이는군." "말이 심하군요, 랠프." "미안. 하지만 정말 그런 걸 어찌하오. 월요일은 별로 기분이 가벼운 날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오늘의 당신은 유별나게 피곤해 보이 는구료." 보비는 한 손을 들어 이마를 쓰다듬었다. "정말이에요." 랠프는 입을 꼭 다물고 손목 시계를 보았다. "이렇게 하지, 점심이라도 들며 그 일에 대해서 찬찬히 이야기하기로. 어때? 오늘은 내가 한턱 내겠소." 일어서는 것만도 짜증스러운데, 점심때의 혼잡을 헤치며 식당에 간다는 건 정말 내키지가 않았다. "고마와요, 랠프. 하지만 난……." "미셸에 갑시다." "미셸이라구요? 점심을 먹으러요?" 보비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랠프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여 내밀었다. "안 될 게 뭐요? 우리 같은 서민이라도 이따금 사치를 부려서 나쁠 게 뭐 있소?" "나도 찬성이에요. 하지만 오늘은 월요일이에요. 더구나 점심을 먹으러 거기까지 가요?" "상관없소." 랠프를 고집했다. "알았어요." 보비는 더 이상 거스르지 않고 동의했다. "그러죠." "좋아요, 그럼 로비에서 만납시다. 20분 뒤가 어떻겠소?" "좋아요." 보비는 의자에 앉은 채 몸을 꼿꼿이 세워 그의 권유에 감사의 미소를 지어 보였 다. 랠프는 언제나 필요할 때 손을 뻗어 주는 사람이었다. 미셸은 호화로운 요리뿐 아니라 차분한 분위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사치와 우아함이 넘쳐 있었다. 정장을 한 웨이터들이 칸막이 로 이리저리 갈라놓은 레스토랑 안을 소리도 없이 걸어다녔고, 은그릇이며 도자기가 스치는 소리, 손님들의 조심스런 말소리를 감싸며 고전음악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보비와 랠프는 앙트레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버섯을 곁들인 게지짐을 맛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숨김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현명하 리라 여겨 보비는 금요일 밤에 갑자기 브레인 피어슨이 아파트에 찾아온 데서부터 모든 경 위를 다 이야기했다. "브레인 피어슨이라!" 보비의 이야기가 끝나자 랠프는 놀란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나를 불 렀으면 좋았을 걸. 그 녀석의 협박에 굴복할 것까진 없었는데." 얼굴을 찌푸리고 그는 안경 너머로 물끄러미 보비를 바라보았다. "그렇 게 힘없이 물러서다니, 여느 때의 당신답지 않군." 보비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긴 듯 아이스 티를 마셨다. 그 점에 대해서는 자신의 솔직 한 심정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 았다. 랠프가 믿고 싶은 대로 믿게 하면 되는 거야. "하여튼 더 이상 그와 관계할 필요는 없소." 랠프는 딱딱하게 말하고 또 하나의 버섯을 먹 기 시작했다. 언제나 신사적인 그는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캐어묻지 않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다른 이야기로 들어갔다. 보비는 그의 따뜻한 마음 씨를 좋아했다. 그리고 레스토랑을 나올 무렵은 아까보다 훨씬 기운을 되찾고 있는 자기를 느꼈다. 랠프는 조수석의 문을 열어 보비를 먼저 태우고 차를 빙 돌아 운전석에 올랐다. 언제나처럼 보비는 그와 함께 있을 때의 아늑한 편안함을 느꼈고, 두통이 많이 나은 것에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 같으면 자진해서 이야기할 문제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에 마음이 켕기지 않을 수 없었다. 브레인이 아파트의 열쇠 하 나를 가져가 버린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사실을 랠프 에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비는 랠프를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랠프가 별다른 마음을 일으키지 않도록 늘 조심을 하고 두 사람의 관계가 더 이상 깊은 관계로 발전되지 않도록 브레이크를 걸어 온 것이다. 그러면서도 보비는 랠프의 솔직한 호의에 감사하지 않 을 수 없었다. 무심코 운전석을 바라보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보비는 그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분석해 보았다. 사실 랠프는 핸섬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매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중키에 보통 체격이었다. 이른바 전 형적인 미국인이었다. 너그럽고 따뜻한 표정 은 호감이 가는 그의 인간성에 상당히 좋은 이미지를 주고 있었다. 그는 야심이 있고 착실 하게 근무하여 만족할 만한 수입을 받고 있었 다. 혹시 어쩌면 자기가 이 헌신적인 구애자를 배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비는 느 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피해 온 영속적인 관계에 대해서 차츰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온 것이 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많은 친 구들이 체험하는 부당한 괴로움을 생각하면 보비는 몸이 움츠러드는 것이었다. 결혼, 출산, 그리고 5년 내지 7년 뒤의 피할 수 없는 파 국, 실랑이, 그리고 같은 일의 반복. 그들은 어째서 기껏 고통 속에서 빠져나왔다가는 또다 시 그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지지 않고는 못 배 기는 것일까? 물론 두 번째 결혼에서는 많은 남녀들이 행복을 찾고, 그 행복을 오랫동안 지 속시킨다고 하니, 그들을 덮어놓고 탓할 수 는 없지만.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은 그들의 성급함이었다. 왜 좀 더 자기에 대해 서, 즉 자기가 무엇을 찾으며 필요로 하는 가 를 알고 그것에 의해서 어떠한 반려자를 찾아야 하는가를 이해하게 되기까지 2,3년을 기다 리려고 하지 않는가? 실제주의, 그것이야말 로 대부분의 사람이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케케묵은 실제주의. 보비는 분명 실제적이었 다. 대학 시절에 만난 첫사랑의 상대와 결혼 하지 않은 것도 그 좋은 예였다. 그것이 그저 홍역 같은 첫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이었다. 대학을 나오고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상하게도 시간은 갈수록 자꾸 빨라지는 것 같았다. 앞으로 1개월도 안 있어 27세가 되는 것이 다. 27세! 보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27세가 늙은 나이는 아니지만……역시 상당한 나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날마다 위기감이 더해 가는 것을 보비는 어쩔 수가 없었다. 자꾸 멈칫거리지만 말고 자신의 인생 계획대로 밀고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다른 때보다도 더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랠프." 차에서 내려 오피스의 빌딩으로 향하면서 보비가 말했다. "정말 고마와요." "나야말로 고맙소." 빌딩의 유리문을 잡아 주며 랠프는 밝게 대답했다. "내가 이렇게 기분이 침울해졌을 때 만일 당신이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엘리베이터 로 걸어가면서 보비는 좀 슬픈 듯이 미소했 다. "언제든지 난 당신 옆에 있소." 랠프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그와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를 새삼 깨닫고 보비는 빙긋 웃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날 저녁 아파트로 돌아오니, 안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보비는 기대에 가슴을 두근 거리며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수화기를 집 어들었다. "이제야 통화가 됐군." 보비가 '여보세요' 하고 대답하자 바로 메리베스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아니, 너는, 메리베스? 언제 돌아왔니?"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드는 느낌이 들어 보비는 핸 드백을 긴 의자에 내려놓고 털썩 앉았다. 구두를 벗고 발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했다. "예정대로 어제 저녁 늦게." 메리베스는 잠깐 망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쩐 지 내 여행 이야기에 흥미가 없는 것 같구 나." "흥미가 없긴 왜 없어." 보비는 적당히 대답했다. "주말 여행 이야기를 좀 들려다오." 그녀가 열심히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보비는 한숨을 쉬고 좀더 편안하게 자세를 취 하고 눈을 감았다. 2,3일 전이라면 보비는 메리베스가 자기의 애인 디크와 주말 여행을 한 이야기를 기꺼이 즐겁게 들었을 것이다. 메 리베스는 말솜씨가 좋아서,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자기가 그곳에 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은 열의 를 보이기는커녕 주의를 기울이기도 힘이 들 었다. "참 즐거웠던 것 같구나." 메리베스가 이야기를 마치자 보비가 말했다. "그럼. 그리고 디크는 정말 최고였어!" 메리베스는 자신의 즐거움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 런데 넌 주말 동안에 무얼 했니?" 메리베스 는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자 보비는 당황하여 여느 때의 그녀답지 않게 말문이 막혔다. "왜 그러니?" 메리베스는 재촉했다. 친구인 만 큼 모든 일을, 그것이 아무리 비밀스런 부분이라 할지라도 서로 교환해야 한다고 메리베스 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로 보 아 기어이 대답을 듣고야 말 작정인 것 같았다. "저어……조금 색다른 주말이었어." "색다른 주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니?" "글쎄……메리베스, 전화로 간단히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 못 돼." "어째서?" "이야기가 너무 길어." "하지만 힌트 정도는 줄 수 있지 않니? 그의 이름이 뭐니?" 보비는 망설였다. "알았어." 메리베스는 놀리듯이 덧붙였다. "랠프구나?" "아니야." 보비는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랠프가 아니야." "왜 그러니, 보비? 나하고 수수께끼 놀이를 할 작정은 아니겠지?" 보비는 몸을 고쳐 앉고는 머리를 모아 찔렀던 핀을 뽑았다. 메리베스가 상대이고 보면 당 해낼 재간이 없다. 섣불리 입을 놀린 이상 자 세한 데까지 속속들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았어." 보비는 마침내 고백했다. "주말에 글쎄 브레인 피어슨이 내 아파트에 찾아왔지 뭐니." "뭐라구!" 메리베스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너 설마 그 브레인 피어슨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왜 있잖아, 네가 사뭇 뒤쫓아 다 니던 농구 선수 말이야." "바로 그 사람이야." "아니 그게 정말이니? 그래 거기서 그가 도대체 무엇을 했니?" "여기서 자고 갔지 뭐니. 주말 내내 함께 있었어." "거짓말이지? 믿을 수 없어." "거짓말이 아니야. 사실이야. 그는 내 아파트에서 주말을 보냈어." 그녀가 입에 올린 그 말 이 메리베스를 놀라게 함과 동시에 보비 자 신에게도 새삼 자극을 주어 피를 끓게 했다. 메리베슨 한순간 말을 잃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보비는 그녀가 갈색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머리를 젓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었다. "식사는 끝냈니?" 하고 메리베스는 엉뚱한 말을 물었다. '아니, 이제 막 돌아왔어. 한데 왜?" "그러면 옷이나 갈아입고 기다려 줄래? 30분 뒤에 내가 거기로 갈께." "하지만……." "너 피자 먹을래?" "물론이지. 한데 메리베스 난……." "오우케이, 피자 가게에 들러 사 가지고 갈께. 마실 것은 있지?" "아무 것도 없어." "그럼 내가 준비해 가지고 갈께. 조금 뒤에 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전화는 끊어졌다. 보비는 할 수 없이 수화기를 놓고 멍하니 허공을 바 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주면 좋 단 말인가, 호기심의 덩어리인 메리베스에게! 하여튼 좋아. 사실 냉장고와 식료품실은 텅 비어 있고, 피자라면 물론 반가운 음식이었다. ┌───────────────────────────────────┐ │ ▶ 번 호 : 1294/1333 ▶ 등록자 : GRANDMA │ │ ▶ 등록일 : 2001년 11월 21일 22:17 │ │ ▶ 제 목 : [내다]열쇠 도둑 9장 │ └───────────────────────────────────┘ 언제나 그러듯이 메리베스는 마치 자기 집인 양 자연스럽게 주방을 돌아다니며 접시며 포크 를 꺼내고 글라스에 물을 따르고 했다. 보 비는 먹으면서 뉴스 프로를 볼 수 있도록, 그리고 될수록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넘어갈 수 있도록 텔레비젼을 켜고 전기 스탠드의 위치 를 옮겼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대로는 잘 되지 않았다. 메리베스는 브라운관에 비쳐 나오는 국제 문제 의 위기니 경제 마찰이니 하는 따위는 거들 떠 보지도 않고 여기에 찾아온 제 1 목적에만 덤벼들었다. "얘."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이 말하고 피자를 한 조각 떼어 친구의 접시에 놓았다. "오늘 넌 좀 달라 보이는구나." "어마, 고마와." 보비는 농담 투로 말했다. "넌 정말 좋은 친구야, 일부러 저녁 식사까지 가 져다 주고.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피자를 말 이야. 게다가 내가 지독한 꼴을 하고 있다고 걱정까지 해주다니." "지독하다고는 하지 않았어, 얘. 어딘지 달라 보인다고 했을 뿐이야." 메리베스는 입술을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 어온 순간, 무슨 일인지 아직 잘은 모르지만, 이번 주말의 사건이 너에게 상당하 영향을 주 었다는 것을 알았어." "그렇겠지." 보비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고 겉이 퍼슬퍼슬한 피자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 다. 피자는 변함없이 맛이 있었지만, 메리베 스가 피자에 열중하고 다른 일은 잊어 주었으면 하는 희미한 바람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자아, 어서 이야기 좀 해봐." 하고 메리베스는 여전히 입을 움직이면서 재촉했다. "그 이야기를 꼭 들어야 하겠니?" "왜, 이야기하기 싫단 말이야? 네가 뭐라든 난 그 이야기를 다 들을 때까지는 돌아가지 않 을걸." 할 수 없이 보비는 주말에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오늘 이미 한번 랠프에게 설명했 고 메리베스는 허물없는 친구이기도 했기 때 문에 그 경위를 이야기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랠프에게 이야기할 때는 슬쩍 건너뛰었던 자 세한 부분까지 모두 들려주었다. 그런데 메 리베스의 반응은 랠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랠프는 걱정스런 듯이 동정해 주었는데 메 리베스는 큰 소리로 웃는 것이었다. "어머나, 이렇게 우스운 일은 생전 처음이야!" 메리베스는 무척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 그치가 글쎄 네 로브를 입고 있는 꼴을 상상 하니 웃지 않을 수 없구나. 옷이 어디께까지 오든, 배꼽까지?" 보비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달리 아무 일만 없었더라면 그 주말은 재미있는 희극으로 끝났을 것이다. 달리 아무 일만 없었더라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지?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 않은가. 메리베스는 언제나 자기가 날카로운 직감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녀는 보 비의 이야기에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도 브레 인 피어슨과 보비 사이에는 간단히 웃고 넘겨 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 다. 아까 보비를 보고 <어딘지 달라졌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친구의 초록빛 눈에는 지금까지 본 일이 없는 무언가가 깃들여 있었다. 자기의 경험에 의하면, 여자의 눈 에 그런 변화를 가져오는 원인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그것은 남자에 의한 것이다. 남자에 게 절대로 마음을 주지 않고 쌀쌀맞고 실제 적인 친구의 마음속에서 사랑의 징후를 눈치채고 메리베스는 속으로 좋아했다. 한차례 이야기를 마치고 난 보비는 메리베스의 끈덕진 시선을 느끼고 몸을 움찔움찔 움직 였다. "메리베스, 왜 사람을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니? 내가 정말 <달라진>것 같은 기분이 드 는구나." 메리베스는 변호사가 증인석의 참고인에게 끈덕지게 따지듯이 보비에게 손가락질했다. "넌 사랑을 하고 있는 거야." 자신있게 단정을 한 메리베스는 팔짱을 끼고 친구의 확 붉어 진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 얼토당토 않은 말이 어디 있니!" 입안의 피자로 목이 막힐 것 같아 기침을 하면서 보비는 말했다. 메리베스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야 나도 잘못 짚는 수가 있지만, 이번만은 절대로 자신이 있어." 메리베스는 들뜬 목소 리로 말하고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텔레비 젼 쪽으로 가더니 스위치를 탁 꺼버렸다. "난 지금 진지해, 보비. 난……뭐라고 할까, 뭔가 오는 것이 있어. 여기에 들어서서 너를 본 순 간 그것을 알았어. 아까도 말했지만, 넌 어딘가 달라졌어." 보비는 일어서서 아직 피자가 남아있는 박스의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접시들을 주방으로 날랐다. "이번에는 내가 이야기를 들을 입장인 것 같구나." 중얼거리듯이 말하고 냉장고의 문을 열 며 물었다. "콜라 더 마시겠니?" "응." 뒤따라 들어온 메리베스는 카운터 위에 빈 글라스를 놓았다. 보비가 그 글라스에 콜 라를 따르고 설겆이를 시작하자, 메리베스는 카운터에 기대어 친구가 좁은 주방 안을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주말에 그렇게 브레인 피어슨이 쳐들어온 데는 무 슨 이유가 있었을 거야, 착오로 환수당한 차에 관한 일 말고." "오늘 낮에 랠프와 같이 식사했어." 보비느 화제는 바꾸려고 애쓰며 말했다. "뭐라구?" "점심을 랠프와 함께 먹었단 말이야." 상대방의 말은 듣지 못한 것처럼 메리베스는 자기가 이야기하던 화제로 돌아갔다. "너 같은 타입에는 그 남자가 딱 들어맞을 거야." "랠프는 참 좋은 사람이야, 인간성으로 보아도……." 하고 보비는 말했다. "난 브레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야." 메리베스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그녀의 말을 막았 다. 보니는 한 손을 허리에 대고 친구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넌 브레인 피어슨을 만난 일도 없지 않니? 그가 내게 딱 맞는다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 게 하니?" "만나 볼 필요도 없어, 신문이나 잡지에서 그의 기사를 많이 읽었으니까." "스포츠 난이겠지, 그가 드리볼을 어떻게 한다는 것 밖에 씌어 있지 않은……." 메리베스는 손을 저었다. "브레인 피어슨과 그의 차를 추적하고 있을 때, 넌 그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들려주지 않 았니!" "별로 좋지 못한 이야기였지." "하지만 그가 나쁜 것이 아니야, 네 실수로 그렇게 됐으니까." 보비는 어깨를 추스렸다. "그러니까 어떻다는 거니?" 메리베스는 갑자기 호소하는 것 같은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네게는 브레인 피어슨 같은 남자가 필요해, 보비. 너를 잠에서 깨워 현실 세계로 데려올 그 누군가가 말이야." "이제 그쯤 해둬라, 얘. 나라고 뭐 어제 태어난 줄 아니? 사랑도 해봤고, 남 못지않게 사람 들과 어울려도 봤어. 난 지금 이대로의 인생 에 꽤 만족하고 있어." "정말?" 메리베스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이지." 하고, 말하고는 보비는 너무나 통찰력이 날카로운 친구에게 등을 돌리고 개수 대에 놓인 접시를 씻기 시작했다. 그 질문에 따라 일어난 동요를 메리베스에게 눈치채이기가 싫어서였다. 다른 때 같으면 메리베스는 상당한 확신이 없는 한 자기의 직감력을 함부로 들이대지는 않 는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에 넘쳐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너무나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지 거실로 가더니 텔레비젼을 다시 켰다. 메리베스는 긴 의자에 몸을 파묻고 테이블 위에 콜라를 놓았다. "뭐 보고 싶은 프로라도 있니?" 주방과 거실 사이의 창 너머에서 메리베스는 보비를 흘끔 쳐다보았다. 자동 디쉬워셔에 넣기 전에 접시를 물로 헹구면서 보비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메리베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말이야, 직장을 그만두려고 해." "언제?" 보비는 약간 딱딱하게 물었다. "될수록 속히. 그렇게 하지 않았다간 난 마든 행커를 죽이게 될 거야." 보비는 마음을 다소 누그러뜨리고 웃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 있었니?" 메리베스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직장에서의 불평불만을 보비에게 털어놓았다. 그것도 대 부분은 그녀의 상사인 마든 행커에 관한 일 이었다. 그래도 보비는 화제가 바뀌어서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 이후의 저녁 시간 동안엔 브레인 피어슨에 대해서는 다시 화제에 오르 지 않았다. 친구가 돌아가자마자 보비는 옷을 갈아입고 침대 위에 쓰러졌다.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려 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번쩍 눈 을 뜨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도대체 누구일까? 이런 때 제일 먼저 떠오르 는 것은, 가족이나 친구에게 급한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았나 하는 불안감이었다. 그러나 브레인의 목소리에 그 불안은 사라졌다. "보비? 자고 있었소?" "브레인, 당신이에요?" 갑자기 피로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심장이 무서운 기 세로 고동치기 시작했고,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누르는 데 무척 힘이 들었다. "그렇소, 나요. 목소리가 멀어요?" "아, 아니요. 잘 들려요, 좀 먼 느낌은 있지만." 보비는 망설엿다. "지금 어디에 있어요?" "오늘 오후 클리블랜드에 도착했소. 여기서 2,3일 있다가 휴스턴으로 가게 되어 있소." "그래요?" 그가 전화를 걸어 왔다고 이렇게 마음이 어수선해질 게 뭐야. 보비는 속으로 자 기를 나무랐다. "오늘 저녁 당신한테 전화를 건 이유를 말하지. 이번 주말에 바빠요?" "아, 아니오, 별로요." 뜻밖의 질문에 어쩔 줄을 몰라 엉겁결에 그렇게 말해 버렸다. "그렇다면 주말에 댈라스로 와 주지 않겠소?" 보비의 목에서 얼굴로 따끔따끔한 기운이 확 퍼졌다. 그녀는 갑작스레 받은 야릇한 초대에 대해서 정신없이 생각을 굴리면서 방안을 휘이 둘러보았다. 그 초대의 의미는 너무나 분명했다. 보비는 자신을 속이고 그 초대가 가져 온 은근한 설레임을 부정했다. 이렇게 불안 하고 금방이라도 <예스>라고 대답해 버릴 것 같으니, 내가 도대체 어찌 된 노릇인가? 이상 하게도 보비는 쌀쌀한 거절의 말을 입에 올 리는 대신 엉거주춤하게 대꾸했다. "나……저어, 이번 주말에 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 요즘 무척 바빠서요." "지금 바로 대답해 주지 않아도 좋소." 브레인은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이틀의 시간을 주 겠으니, 그 동안에 생각해 봐요. 다시 전화 하겠소." 보비는 갑자기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보기……." "뭐예요?" "내가 이리 온 뒤로 예전의 나쁜 습관으로 돌아가지는 않았겠지? 아침 식사를 거르진 않았 겠지?" 보비는 웃었다. "물론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고는 마음에도 없는 쾌활을 가장하며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가장 소중한 아침의 연료를 빠뜨릴 수가 있겠어요?" "착한 아이군." 브레인은 담담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웃었다. 보비는 마치 그가 손이라도 댄 것처럼 등줄기에 오싹오싹하는 느낌이 달 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잘 자요, 브레인." "잘 자요." 딸각 하는 소리와 함께 장거리 전화는 끊어졌다. 보비는 살며시 수화기르 내려놓자 침대에 누웠다. 베개 위에 머리를 대기 전에 오랫 동안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의 두근거림은 조금씩 가라앉았으나 머리속은 혼란과 더욱 부풀어만 오르는 유혹으로 뱅글뱅글 회전하고 있었다. 그 뒤의 2,3일은 마치 쏜살처럼 빨리 지나가 버렸다. 보비는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산 더미 같은 일에 정신없이 매달렸다. 그 까닭 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브레인에 대해서 너무나 생각하다가 일에 지장이라도 생기면 안 되 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적어도 하루에 몇 시간은 머리 속에서 브레인을 몰아내야겠다는 노력에서였다. 그런데 랠프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전번 주말을 같이 보내지 못했음을 상기시키며 이번 주말은 어떠냐고 물어 온 것이다. 그녀는, 브레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대답을 얼버무려 버렸다. 보비는 자신이 취한 태 도에 적지않게 화가 났다. 도대체 내가 어 떻게 된 것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브레인이 아니라 랠프와 데이트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요즘 자주 있는 일이지만, 이성이 어떤 일을 명령하면 유감스럽게도 감정이 나서서 그것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아침 아홉 시에서 저녁 다섯 시까지 일하는 오피스 레이디로서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댈라스로 날아가 거기서 주 말을 보내는 풀랜은 너무나 멋있고 마음 끌 리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홀가분하게 일에서 해방되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보 비는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번쯤은 이성의 속삭임을 무시하고 앞일도 생각지 않고 비행기에 올라 주말을 즐기고 싶 은 기분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브레인에게 끌리는 자기를 부정하기가 어려웠고,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동경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런만큼, 만일 그런 감정을 한껏 발산시켜 버리고 나면 도리어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러나 선수를 에워싸는 열광적인 팬처럼, 그가 부른다고 좋아라고 바로 뛰어간다는 것은 너무 자존심 없고 값싼 것처럼 생각되었다. 혹시 어쩌면 그는 여자를 자기의 세력 범위 안에서 유혹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하 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금방 행 동에 옮기려고 들 것이 틀림없어! 물론 내가 브레인을 사랑한다는 메리베스의 단언은 맞지 않아……다른 몇 백 명의 여자들 이 그에게 끌리는 것처럼 브레인에게 끌리고 있음엔 틀림없으나. 목요일 오전에 랠프는 그녀의 얼굴을 내밀고 보비를 난처한 궁지에서 구해 주었다. 그날 랠프는 어머니가 갑자스런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한다는 소식을 받았기 때문에 조퇴하게 되었다. 우선 부모가 사는 플로리다 주 오카라 로 떠나야 했다. 랠프는 침착해 보였다. 보비 는 그저 그의 어머니의 수술이 성공하기를 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아파트로 들어서자마자 메리베스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어떻게 하고 있니?" 쾌활한 인사가 수화기에서 들려 왔다. "여전하지 뭐.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쉴 겨를이 없어. 너는 어떠니?" "여러 가지 일이 있었어. 디크가 주말에 이리로 온대, 내일 저녁 도착한다나 봐." "기다려지겠구나." "당연해. 내가 전화한 것은, 토요일에 우리와 합류할 의사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야. 그 아 저씨……무슨 이름이었더라……랠프지? 그 도 같이 불러서." 보비는 한숨을 쉬었다. "랠프는 아저씨가 아니야, 메리베스. 그리고 주말에 그는 여기에 없어. 그의 어머니가 수술 을 받기 때문에 오늘 오후 플로리다로 떠났 어." "어마, 그래? 그렇다면 너 혼자 오면 어떠니? 아니면 디크의 친구 누구 하나를 오라고 할 까?" "그 누구는 삼가 다오." "어쨌든 디크는 최고야. 꼭 너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보비는 미소했다. 메리베스의 애인은 언제나 모두 최고니까. "분명한 약속은 할 수 없어. 혹시 어쩌면……." "혹시 어쩌면이라니……다른 데이트라도 있니?" 그 호기심의 덩어리에게 자기의 망설임을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다른 사람의 참 견에 내둘리지 말고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밀고 나가는 거야. "일이 많이 밀려 있어서 이번 주말에는 그거나 해치워야 할 것 같아." 그런 핑계는 너무나 뻔하다 싶었으나 다른 구실은 생각나지 않았 다. 다른 때 같으면 바로 거짓말을 눈치챘을 메리베스도 이번만은 완전히 디크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지 그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다. "오우케이. 그럼 내일 전화 걸어 줘, 토요일의 예정을 정하면." "좋아. 그럼 또……바이." "바이." 두 시간 가량 뒤에 보비가 욕실에서 나오자 마침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두꺼운 바드타월 을 몸에 감아붙이고 침실로 서둘러 갔다. 머 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그대로 보비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보비? 나요, 브레인." 또다시 예의 뜨거운 것이 가슴 속에서 솟아올랐다. "지금 어디에서 전화하시는 거예요? 아직 클리블랜드예요, 아니면 휴스턴?" 도저히 그의 현기증나는 스케줄을 다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휴스턴이오. 내일 댈라스로 떠날 거요. 당신의 일은 어때요? 이리 올 수 있소?" 브레인은 본제를 꺼내는 데 1초도 기다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직도 보비는 결심을 못하고 있었다. 그 주에는 다른 주보다 더 일 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은 다 마무리지어져 있어서 주말까지 가지고 갈 일은 아 무것도 없었다. 랠프는 플로리다에 가 있고, 메리베스의 로맨스에 주착없이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다. 또 아무리 친구라 한들 그녀의 주 선으로 낯선 남자와 어울린다는 것도 싫었 다. "네." 보비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 갈 수 있겠어요." 정말 이것이 내 목소리일까? "다행이군." 브레인은 기뻐하며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 줄지도 모른다 싶어서 댈라스 국제공항발의 이스턴 항공에 당신의 좌석 을 예약해 놓았소. 나는 그 편보다 조금 일찍 그곳에 도착할 거니까, 공항에서 만나기로 해 요." 브레인이 이미 거기까지 준비해 놓고 있다는 것을 알자 보비는 깜짝 놀랐다. 그는 자기의 제의가 거질될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편에 타야 하지요?" 보비는 가까이에 있는 봉투 뒷면에 브레인의 설명을 받아 적었다. "그 비행기표는 얼마나 하지요?" 그런 것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 좀 쑥스러웠지만 보비는 말했다. 그 같으면 국내 어디든 값을 생각하 지 않고 날아다닐 수 있겠지만, 그녀는 그런 좋은 팔자가 못되는 것이다. "그런 것은 신경쓰지 말아요, 다 치렀으니까." 보비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브레인이 비행기 삯까지 치르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던 것이다. "내가 설명한 대로 다 적었소?" "네……네, 다 적었어요." "그럼 내일 저녁에 만나요." "알았어요." "잘 자요." "안녕히 주무세요." 보비는 찬찬히 숨을 들이마셨다. 아, 어쩌다가 내가 이런 입장에 몰리게 되었을까? ┌───────────────────────────────────┐ │ ▶ 번 호 : 1295/1333 ▶ 등록자 : YIJIAN │ │ ▶ 등록일 : 2001년 11월 22일 22:19 │ │ ▶ 제 목 : [이지엔] 열쇠 도둑 10장 - J.제프리즈 │ └───────────────────────────────────┘ 댈라스 포트워드 공항에 내리니,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들과 마중 나온 사람들로 공항은 붐비고 있었다. 보비는 한 손에 대형 백을 들고 다른 쪽 어깨에 쇼울더백을 메고 이동식 연락 통로에서 막 나온 곳에 서 있었다. 버지니아 주와 달라 댈라스는 지금 상당히 일기가 더웠고, 공항 안은 온도 조절이 되어 있는데도 트위드의 자켓 차림이 덥게 느껴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으니 냉방도 별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혼잡 속에서 브레인의 모습을 찾으며 보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여기에서 만나자고 브레인은 말했다. 혹시 그의 비행기가 늦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어디로 갈까? 문득 보니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라운지에서 나와 이쪽으로 걸어오는 다갈색의 머리가 사람들 머리 위에서 눈에 띄는 것이었다.. 키가 크고 당당한 브레인이 걸어오니 군중은 쫙 좌우로 길을 비켜 주는 것 같았다. 마지 홍해를 건너는 모세와도 같았다. 전에 쇼핑을 하러 나갔을 때도 느낀 일이지만, 브레인이 조그만 몸매의 여자에게 다가가 그 손에서 짐을 받아 어깨에 걸머지는 것을 주위의 사람들이 호기심을 드러내고 지켜보고 있었다. "하이!"하고 보비는 말했다. 브레인을 만난 것만으로도 가슴 뿌듯한 지금, 이런 인사는 그녀의 감정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었다. 당장에라도 자기를 삼켜 버릴 것 같은 푸른눈과 부딪치자 보비는 금방이라도 몸이 녹아 버릴 것 같았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연 순간, 브레인도 동시에 말을 꺼냈다. 소리내어 웃고 나서 약간 어색한 기분으로 보비는 말했다. "당신이 먼저 말하세요." 브레인은 따뜻하고 달콤한 웃음을 띠었고, 보비의 가슴은 두방망이질 쳤다. "그저 만나서 반갑다는 말을 하려고 했소. 비행기 여행은 어땠소?" 보비는 한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그저 그랬어요. 이따금 흔들렸지만." "당신이 여기에 와 있다는 그것으로 충분해요." 브레인은 보비의 손을 잡고 좀전과 같이 양쪽으로 길을 비켜 주는 군중 사이를 누비며 걷기 시작했다. 몇 사람은 농구 선수 브레인 피어슨을 알아본 모양이었으나, 다행이 팬에 에워싸이지 않고 빠져나왔다. 보비의 보폭으로는 그를 따라가기도 바빴다. "그런데 당신의 여행은 어땠어요?" 보비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나도 무척 좋았소." 차차 마음이 누그러진 증기로 보비의 웃음은 즐겁게 울렸다. 짐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렌트카의 수속을 하는 카운터 옆에 줄을 서 있는 동안 두 사람은 계속 즐겁게 담소했다. 브레인은 이런 자리에 익숙해 있었고 여유만만해 보였다. 물론 그렇겠지, 하고 보비는 생각했다. 늘 되풀이 되는 일이며 , 주말을 함께 지낼 걸프렌드와 공항에서 만나는 것도 결코 드문 일이 아닐 테니까. 브레인은 스테몬즈 프리웨이를 나오자 렌트카의 스피드를 떨어뜨렸다. 전방 우측에 우뚝 서 있는 당당한 건물을 보비는 입을 딱 벌리고 쳐다보았다. "저것은 무엇이에요?" 브레인이 빙그레 웃었다. "우리가 묵을 곳이오. 아나톨 호텔." 그녀가 지금까지 보아 온 건물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빌딩이었다. 25층의 고전적인 빌딩은 꼭대기에 더 있는 것 같은 모양을 한 세 개의 거대한 피라밋형 유리지붕과 날카로운 콘트라스트를 이루고 있었다. "저것이 호텔이에요?" 보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 재차 물었다. 호텔 정면의 높이 6미터의 모자이크 패널은 어마어마했으며, 고대 이집트에 관련된 거대한 5체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고, 그것은 호텔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호텔뿐이 아니오." 브레인은 설명했다. "호텔, 회의장, 헬스클럽이 한데 어울러진 거나 같소." 차에서 내려 제복에 몸을 싼 보이에게 키를 맡기자 브레인은 조수석으로 돌아와 보비를 에스코트해서 내리게 했다. 바로 다가온 벨보이가 그들의 짐을 짐수레에 실어 금방 호텔안으로 옮겨갔다. 보비는 자기가 시골뜨기 처녀로 보이리라 의식하면서도 신기한 듯이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대리석을 깐 엄청나게 넓은 로비로 들어가면서 브레인은 그녀의 화사한 어깨에 팔을 돌렸고, 보비는 산뜻한 남자의 향기에 취한 것처럼 더욱 그에게 몸을 붙였다. 왜일까---보비는 멍하니 생각했다. 이성에 거스르는 짓을 하고 있으면서 이토록 자연스럽게 느껴지다니. 그러나 그런 생각도 머리에 떠오르자마자 금상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이제 결정은 내려진 것이다. 이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다음 언젠가는 후회나 의혹에 괴로워할지라도 지금 이순간만은 모든 걸 잊어버리기로 하자. 아나톨 호텔의 내장은 외곤 못지 않게 훌륭했다. 브레인은 프론트 데스크로 다가갔고, 보비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광대한 로비며 높은 천장을 둘러보았다. "이 건물은 언제쯤 세워졌어요?" "한 3,4년 전일 거요." "주무십니까?" 하고 예약계가 말했다. "예약이 되어 있는 피어슨이오, 브레인 피어슨." 컴퓨터 화면에 예약 정보가 비쳐 나오는 동안, 주위에 마음을 빼앗겨 눈을 반짝이고 있는 보비를 브레인은 슬쩍 내려보았다. "마음에 든건 같군." 그가 웃었다. "눈부셔요." 보비는 진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럴 필요가 있어요" 우린....이렇게 호화로운 호텔에 묵을 것 까진 없지 않아요?" 브레인은 어깨를 추스르고 "최고의 곳이어야지요."하고 쾌활하게 말하며 인지를 구부려 보비의 귀여운 코끝을 건드렸다. 보비는 얼굴이 빨개지며 그런 간단한 동작에 어리석을 만큼 당황하는 자신이 놀라와 홱 그에게 등을 돌렸다. 호화로운 스위트 리빙롬에 짐을 내려놓고 벨보이에게 브레인은 팁을 두둑이 주었다. 보비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어색하게 서 있었다. 이처럼 사치스럽고 아늑하게 꾸며진 방에 묵어 본 일은 없었다. 물론 아이가 아니니 자기가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브레인이 방문을 닫는 것을 지켜보면서 보비의 마음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브레인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그녀의 아파트에서처럼 스스럼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자아, 백을 내려놓지." 그는 재촉하고 천장의 불을 끄고 침실에 있는 라이트를 켰다. 그것은 호화롭게 내장이 된 스위트룸에 부드러운 빛을 던졌다. "이리 와 봐요."하고 브레인이 말했다. "당신에게 보여줄 게 있소." 보비는 긴의자 위에 백을 놓자 푹신푹신한 카펫을 밟으며 침실 쪽으로 갔다. 침실에는 유럽풍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액자들이 걸려 있고, 튼튼한 떡갈나무 가구가 놓여 있었다. 보비는 감탄하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욕실로 통하는 듯한 문의 맞은편에는 온몸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 달린 옷장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실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킹사이즈의 당당한 침대였다---적어도 보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녀는 숨을 삼키고 얼른 눈길을 딴 데로 돌렸다. 브레인이 천장에서 바닥까지 닿는 창 앞에서 커튼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려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자아, 이리 좀 와 봐요." 보비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창가에 다가가 눈 아래 펼쳐져 있는 댈라스의 광대한 광경에 자기를 잊었다. 밤은 도시의 더러움과 모순을 싹 뒤엎었고, 호화로운 라이트가 쏟아져 내리는 다이아몬드처럼 검은 망토의 어둠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두 사람은 명멸하는 불빛 한복판에 붕 떠 있는 착각에 사로 잡혔다. 보비는 문득 아까의 자유로운 기분이 강렬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밤은 언제나 도시에 화장을 해주지." 브레인은 살며시 보비의 어깨를 안고 끌여당겼다. 보비는 전처럼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생각되었고, 우람한 두 팔이 자기의 몸에 감겨졌을 때도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꼈을 뿐이다. 살짝 구부리며 보비를 꼭 감싸안은 브레인의 몸에 희미한 떨림이 스쳤다. 그의 사내다운 입술은 마치 펄펄 끊는 용암처럼 뜨거웠다. 보비는 도저히 그 키스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 꼭 끌어 안겨 키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도 놀랄 만큼 뜨겁게 그녀는 그를 찾았다. 두 사람의 입술은 열려졌고, 처음에는 멈칫거리면서, 그러다가 굶주린 듯이 더듬으며 맛보았다. 남자의 한 손이 여자의 가날픈 어깨를 따뜻하게 쓰다듬었다. 보비는 마치 전류에라도 감전된 것처럼 몸을 떨었다. 정열의 폭풍속에서 가까스로 머리를 든 희미한 이성이 계속해서 높아져만 가는 격정에 힘없는 저항을 시도했다. "브레인!" 입을 떼고 난 보비는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나...........배고파요." 만일 여기에 음식이 있으니 먹으라고 명령해도 뭐 하나 입에 넣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행동을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 브레인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나, 보비는 이렇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남자와의 주말여행은 해본 일도 없었고, 하물며 대뜸 사랑의 행위에서부터 시작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브레인은 불만스럽게 신음 소리를 내뱉더니 조금 몸을 떼었다. "그래?" "네." 보비는 그의 손을 목덜미에서 떼어냈다."식사를 하러 가기 전에 짐을 치우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브레인은 한순간 괴로운 듯이 보비를 쳐다보고는 두 손을 바지의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렇겠군." 하고 그는 말하고 다시 한번 창문너머로 댈라스의 야경을 내려다 보았다. 보비는 거실로 돌아와 슈트케이스를 열고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브레인이 클래식 음악을 틀었는지, 기분 바이올린 곡조가 흘러나왔다. 거칠게 뛰놀던 숨결도 가라앉고, 마지막 옷을 슈트케이스에서 꺼내 버리자 비록 잠깐 동안이나마 혼자가 되고 싶어 보비는 욕실로 들어갔다. 대리석 화장대 위에 끼워진 커다란 거울은 메이크업 라이트로 에워싸여 있었다. 보비는 부끄러운 듯이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여느 때는 해맑은 하얀 볼이 마음속의 동요때문인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 순간 거울만이 자기를 보는 것이 다행이었다. 보비는 불안정한 모습으로, 브레인이 헝클어 놓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리고 수도꼭지를 틀고 호텔에 비치된 향기로운 비누로 기운좋게 얼굴에 거품을 일구기 시작했다. 10분쯤 지나 욕실에서 나왔을 때, 그녀의 윤기 있는 머리엔 브러싱이 되었고, 메이크업은 산뜻함을 되찾고 있었다. 브레인이 욕실을 쓰는 동안 보비는 재빠르게 여행중에 입고 있던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벗고 마음에 드는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것은 초록빛 새시로 허리를 죈 암청색의 비단 시프트 드레스였다. 지금 달고 있는 귀걸이 이외에, 가지고 있는 악세서리 중에서 가장 값진 목걸이를 보비는 골랐다. 심플한 금사슬에 다이아몬드를 아로새긴 하트 모양의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금 리번을 틀어 놓은 것 같은 모양의 귀걸이는 조그마하기는 했지만 바람에 머리카락이 귀뒤로 나부낄 때마다 반짝이며 사람의 눈길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굽이 스트랩으로 된 하이힐에 발을 밀어넣었을 때, 브레인이 거실로 돌아왔다. 그도 역시 산뜻한 모습이었는데, 성장한 보비를 보는 순간 그의 눈에 번쩍인 빛은 어떤 찬양의 말 못지않은 것이었다. 두 사람은 짧은 순간, 똑같이 방심한 듯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보비는 대나무 무늬가 프린터 된 의자에서 일어서서 아름답게 조각이 새겨진 떡갈나무의 삼면경으로 걸어가 클러치 백을 집어 들었다. "그럼 식사하러 가실까요?" 브레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오늘 저녁은 어느 레스토랑으로 가겠소?" "어떤 레스토랑이 있어요?"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면서 보비는 물었다. 브레인의 설명에 의하면, 이 호텔에는 여섯 개의 레스토랑이 있다는 것이었다. 보비의 의견에 따라 오늘 저녁은 중국 요리로 정했고, 두 사람은 눈부신 호텔 안의 <매화 梅花>라는 중국요리점으로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 곳도 호텔 안의 다른 부분이나 마찬가지로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었다. 2미터나 되는 불상이 있는가 하면 커다란 족자가 걸려있고, 갖가지 조상(彫像) 이며 진주빛상안(象眼)이 아로새겨진 까만 칠의 중국식 캐비닛도 있었다. 음식 맛은 최고였으며,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요 일주일 동안 저마다 어떻게 지냈는가에 대해 서로 주고 받았다. 식사 후 남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보비가 물었다. "금주 시합은 언제예요, 브레인?" "금주엔 없소." 브레인은 대답하고, 상대방의 의아스런 얼굴을 보고 덧붙였다. "내주 월요일 밤에 있소." "그럼 왜...........?" 주말에 댈라스로 오라고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나와 같이 있고 싶어서였던가? 그렇게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월요일 아침 난 매니저와 만날 약속이 있소." "그래요?" 보비는 그 만나는 이유를 알고 싶었으나 더 이상 캐어묻기가 망설여졌다. "계약에 대해서 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브레인은 그녀의 생각을 꿰뚫은 것처럼 덧붙였다. 보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포도주를 입에 댔다. 기분 탓인지 한순간 그의 얼굴에 뭔가 먼 곳을 바라보는 표정이 떠올랐다. 무슨 까다로운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농구선수의 비즈니스면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무엇을 물어야 좋을지도 몰랐고, 엉뚱한 질문을 할까봐 말하기가 두려웠다. 그리고 자기와 관계가 없는 문제에 대해서 이것저것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머리가 멍멍해 있었다. ┌───────────────────────────────────┐ │ ▶ 번 호 : 1296/1333 ▶ 등록자 : YIJIAN │ │ ▶ 등록일 : 2001년 11월 23일 12:34 │ │ ▶ 제 목 : [이지엔] 열쇠 도둑 11장 - J.제프리즈 │ └───────────────────────────────────┘ 백을 경대 위에 놓고 보비는 무심코 그 파스너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가슴이 꽉 뒤틀리던 느낌은 이제 콱 메는 것 같은 불안으로 부풀어올랐다. 기분을 가라앉혀 주던 포도주의 효험도 이미 사라져 버리고, 그녀는 다시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브레인이 뭐라고 말했을 때, 보비는 펄쩍 튀어 오를 만큼 당황하여 평정을 되찾으려고 애를 썼다. "방금 뭐라고 했지요?" 자연스런 목소리로 보비는 되물었다. "텔레비젼 보겠느냐고 물었소." 브레인은 텔레비젼 위에 놓여 있는 팜플렛을 집었다. "보통 텔레비젼 프로, 케이블 텔레비젼, 블루 중에서 보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소." "블루라니요?" 보비는 의아스런 얼굴을 했다. "미성년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블루필름이오." 브레인은 의미 있게 눈썹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보다 나 지금 목욕이 하고 싶어요." "그것도 좋지." 브레인은 말하고 자켓을 벗어서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구두도 벗고는 침대가에 앉아 텔레비젼을 켰다. 보비는 세면에 필요한 것을 들고 다시 욕실로 피난했다. 큼직한 욕조에 더운물을 채우고 그 속에 집에서 가져온 향기 좋은 바드제리를 조금 탔다. 그러자 바로 자기 집을 생각나게 하는 향기가 욕실 안에 가득 차서 보비는 마음이 좀 가라 앉는 듯 했다. 브레인은 케이블 텔레비젼에 열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보비의 굳어진 몸은 거품이 이는 더운물 속에 담그고 있는 동안 차츰 풀어졌다. 머리에 떠오른 <피난소>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보비는 희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피난한다는 말인가? 브레인으로부터? 설마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은 아니겠지. 오늘 저녁은 참 즐거웠다. 이렇게 즐거운 저녁은 처음이다. 브레인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그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남다른 지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며, 보비는 모든 면에서 그의 생각을 이해하고 동조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그 의문이 끈덕지게 그녀를 괴롭히는 통에 보비는 마지못해 그것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조금도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메리베스의 분방한 생활방식을 납득하기 위해서, 그녀는 그저 대부분의 현대여성처럼 남성 체험을 쌓고 있을 뿐이라는 멋대로의 해석을 붙여왔다. 그 점에서 지금 자기는 매리베스와 같은 짓을 하려 하고 있으며, 같은 이유를 붙이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녀도 지금까지 여러 남자와 데이트도 해보았고, 대학 졸업후 빌과 헤어진 뒤 몇 명의 보이프렌드와 자주 어울려 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 들 중 어느 누구하고도 깊은 관계로까지 발전해 본 일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단 한순간이나마 그와 침대를 같이하겠다는 마음을 일으킨 것은 도대체 왜일까? 이 한번의 주말여행으로 두 사람 사이에 영속적인 관계가 성립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둘이 육체적으로서 서로 끌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냉엄한 현실이 두사람 사이를 막고 있었다. 각자의 생활환경이 현저히 다른만큼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깊은 이어짐은 생겨날 것 같지 않았다. 쾅쾅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보비는 현실로 돌아왔다. "네, 무슨 일이에요?" "물에 빠져 죽었는지 걱정이 돼서." 하고 브레인이 말했다. 보비는 그의 히죽거리는 웃음이 눈에 선했다. "빠지기는 왜 빠져요. 지금 나가요." 내가 얼마동안 여기에 누워 있었던가?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이 분명한 자기의 행동을 그가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 그녀는 당황했다. 브레인은 천천히 셔츠 단추를 따면서 욕실 안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잠시 후면 보비가 나에게로 걸어온다--그렇게 생각하기만 해도 뭐라고 말 할 수 없는 긴장이 몸에 가득 차는 것이었다. 이것이 꿈은 아닌 현실이라기에는 너무나 황홀했다. 사실은 브레인도 그녀가, 댈라스에 오라는 자기 권유를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특히 그녀의 아파트에서 묵은 주말에 있었던, 둘째 밤의 거절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처음 그는 그녀의 거절에 화가 나고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도 분명 자기와 똑같이 불타면서 포옹에 응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느닷없이 몸을 빼더니 지독하게.... 지독하게 심술궂은 말을 자기에게 퍼부었다. 그때 그는 너무나 화가 나서 주체를 못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화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성급하게 나가는 것이 아니었는데, 너무나 어리석었어. 오늘 저녁 그녀가 날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날 저녁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는 것쯤은 알았어야 하는데. 오늘 저녁도 그날 저녁과 같은 잘못을 저지를까봐 겁이 났다. 그녀가 와준 것만도 행복하다. 이 행운을 망칠 수는 없는 일이다. 브레인은 천장의 불 하나만을 남기고 다른 불은 모두 껐다. 보비가 욕실의 문을 열자, 욕실에서 빛살의 물결이 침실의 카핏과 벽 위로 확 흘러나왔다. 스위트롬안에 바드제리의 내음이 떠돌아 브레인은 즐거운 듯이 코를 씰룩거렸다. "으음, 무척 좋은 냄새군." 그는 드레스를 옷장에 거는 보비를 지켜보면서 말했다. 보비는 브레인을 곁눈으로 슬쩍 훔쳐보고 그가 이미 셔츠를 벗은 것을 알고 입술을 깨물었다. 보비는 저도 모르게 옷걸이를 떨어뜨려 더욱 어색해 하며 몸을 구부려 그것을 집어 들었다. 서랍 속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옷장에 구두를 집어 넣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잔일을 실행에 옮기며 방안을 왔다갔다하는 보비를 브레인의 푸른 눈은 끊임없이 뒤쫓고 있었다. 그녀는 몸속에 두 극단을 아울러 숨겨 가지고 있는 정말 눈부신 생물이었다. 연푸른 얇은 캐미솔을 입은 그녀는 매우 연약하게 보이는가 하면 정열이 넘쳐흐르기도 하고, 순진한가 하면 섹시하게도 보였다. 목욕으로 황갈색의 머리가 더 짙어졌고, 이마의 솜털이 젖어서 귀여운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브레인 서두르는 마음을 누르느라 두 손을 꼭 틀어쥐고 일어서서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벨트가 바지에서 벗겨지는 소리가 나자 서랍을 뒤적거리고 있던 보비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내심의 불안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으나, 커다랗게 뜬 초록빛 눈망울에 드러난 두려움의 빛을 브레인이 놓칠 리가 없었다. " 당신, 우디 알렌 좋아해?" 브레인은 보비의 기분을 돌리려고 말했다. "네, 싫어하진 않아요." 보비는 대답하고 다시 서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브레인은 채널을 바꾸고 볼륨을 높였다. "이제부터 우디 알렌이 나오는 영화가 시작돼요. 네가 좋아하는 거요." 보비는 그의 제안에 살아난 느낌이었다. 이러다간 그가 정말 얼간이라고 생각할까 싶었다. 브레인은 침대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녀는 브레인과 반대쪽의 침대가로 가서 모포를 들치고 그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자 베개를 세워 텔레비젼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저마다 딴 침대에 있다고 할 만큼 띄워져 있었으나 보비는 그를 아프리만큼 몸 가까이에 의식하고 있었다. 슬그머니 옆을 보니, 브레인은 다행이 아직 바지를 입은 채 우디 알렌의 조우크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 같았다. 보비도 어깨의 힘을 빼고 차츰 영화의 세계로 끌려 들어갔다. 그러나 이제 시간도 많이 늦었고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보비는 어느덧 졸음에 빠져들었다. 침대 속의 편안함 때문에, 아무리 잠들지 않을려 해도 이내 두 눈까플이 내리 덮이고 머리가 베개에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러한 보비를 내려다보며 브레인은 따뜻하게 미소했다. 어쩌면 저렇게 연약하게 보일까.....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겨 가슴에 안을 수 있다면..... 브레인은 그런 충동을 누르는데 너무나 힘이 들었다. 그는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텔레비젼을 껐다. 몇 분 동안 욕실에 들어갔다가 나와 바지를 벗어서 의자등에 걸쳤다. 옷장의 옷걸이에 걸려고 했으나 옷장문을 열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푹신푹신한 카핏이 그의 발소리를 지우고 있었다. 침대로 다가가 편안하게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고 브레인은 살며시 그녀의 화사한 손을 잡고 손바닥을 자기 볼에 댔다. 그리고 불을 끄고 그녀와 반대쪽에서 모포 밑으로 들어가 한동안 가만히 어둠을 응시하고 있다가 불안한 얕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침대 저쪽 끝에서 들리는 불분명한 소리에 브레인은 번쩍 눈을 떴다. 옆을 보니, 보비가 도움을 청하듯이 팔을 휘젓고 있었다. "보비?" 브레인은 속삭이듯이 불렀다. 보비는 다시 팔을 휘저으며 흐느낌과도 같은 신음소리를 냈다. "보니?" 이번에는 더 큰소리로 불렀다. 보비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브레인은 지체없이 보비 옆으로 다가갔지만 그녀를 더 공포에 떨게 할까봐 손대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물에 빠진 사람처럼 그녀가 손을 휘저었을 때, 브레인은 차마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엉겹결에 그 손을 잡았다. 예상과는 달리 그것은 보비의 불안감을 가라앉혀 주었다. 브레인은 마음이 놓여 조그만 손을 더 꼭 잡아주었다. "보비?" 대답이 없었다. 브레인은 갸날픈 팔을 문지르며 다시 불렀다. "브레인?" 가까스로, 그의 손이 자기를 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보비는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며 속삭였다. "나 여기 있소." 그는 더욱 몸을 가깝게 접근시키면서 차츰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보비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무슨 고약한 꿈이라도 꾸었소?" "네." 몸을 떨듯이 큰 숨을 들이마시고 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꿈이었소?" "나..잘 기억이 안나요. 하지만 참 무서웠어요." 뭔가 잘 모를 공포에 사로잡혔던 그녀는 숨을 삼켰다. "내가 당신을 깨게 했나요?" "응. 하지만 그런건 상관없소. 이제 괜찮소?" "네, 고마와요." 보비는, 브레인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안도감이 느껴지고 아까보다 기분이 편해지는 자신을 깨달았다. "다행이군." 브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아름다운 이마의 온기에 입술을 댔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받치고는 입술을 포개었다. 상대를 위로하듯이 오랫동안 그러고 가만히 있었다. 매우 자연스런 일처럼 보비는 입을 열었다. 서로의 정열이 차츰 높아져 감에 따라 키스는 강하고 거센것이 되어갔다. 보비의 손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우람한 목에 감겨 들어 숱많은 갈색 머리를 거세게 애무하고 있었다. 브레인은 두 손을 그녀의 등에 돌려 보비를 바싹 끌어당겼다. 그는 최면술이라도 거는 것처럼 원을 그리며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고, 다른 한손으로 가는 어깨끈을 벗겼다. 숨이 막히며 보비의 심장은 무서운 템포로 뛰기 시작했다. 그때 브레인은 망설이면서 억눌린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정말 괜찮아?"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서 보비가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당신에게 상처는 주지 않겠소, 보비. 약속해요." 살며시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보비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것은 고통과 갈망이 뒤섞인 소리였다. 두 사람의 몸이 하나로 녹아들자 그녀는 금방 불타는 환희에 실려갔다. 보비는 자기 자신 이제껏 보지 못했던 대담성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브레인도 그 자신 좀처럼 맛본 일이 없는 황홀감에 빠져 더욱 그녀의 불길을 부채질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누워 있었다. 귀에 들리는 것은 그들의 흐트러진 숨결 소리 뿐이었다. 보비는 나른하게 눈을 뜨고 브레인의 옆얼굴을 보았다. 잠들어 있는 것인가? 그러나 브레인도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비가 깨어 있는 것을 알고 그녀를 끌어당겨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한손으로 구석에 있던 모포를 끌어당겨 두 사람의 몸을 덮었다. 보비는 브레인의 아늑한 품안에 따뜻하게 안겨 그의 옆에 즐거움을 맛보고 있었다. 이제 평화로운 졸음 속으로 빠져 들 것이다. 향긋한 내음이 나는 매끄러운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브레인은 보비의 충족된 조용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 여자를 자기의 인생에 등장시킨 생각지 못한 사건이 떠올라 그의 입술은 가볍게 벙긋거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 그가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에겐 보비처럼 조그만 몸 속에 감추어져 있는 정열과 쾌활함과 강렬한 매력이 없었다. 문득 브레인은 아침마다 잠이 깼을 때 이 여자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요즘 부쩍 모든 것이 따분해지고 사는 보람을 잃고 있는 그였다. 이 여자와 잠시 이렇게 지냈다가 헤어져야 하는가 싶으니 자기의 인생이 어둘 황량하고 멋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냉정한 생각이 브레인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여튼 월요일에 매니저를 만나 이야기를 마쳐야지. 브레인은 부드러운 머리칼에 입술을 밀어붙이고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이 여자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지금의 기분이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내 눈을 감은 브레인은 지금까지 그가 기억하는 가장 평화로운 잠 속에 빠져들었다. 일요일 아침 브레인이 댈라스의 포트워드 공항에 차를 멈추었을 때, 보비는 자기가 겨우 2,3시간 전에 여기에 도착한 것 같은 기묘한 착각에 사로 잡혔다. 정말 그와 이틀 밤을 지낸 것일까, 충족된 꿈 같은 이틀 밤을? 금요일 밤은 토요일 밤에 맛 본 도취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누고 발견하고 서로 가르쳐 준 수많은 사랑의 행위를 생각해 내기만 해도 보비는 몸속이 떨려오는 것이었다. 토요일, 그 날은 부담없는 즐거움에 가득 찬 한가한 하루였다. 이처럼 태평스럽고 자유로운 기분으로 지낸 날은 별로 없었다. 정말 오랫동안 이런 시간을 보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문득 생각이 나서 텍사스의 아링턴 가까이에 있는 <식스 프래그스> 라는 유원지를 찾아갔으며, 아이들처럼 캔디나 팝콘을 사먹고 제일 무섭게 생긴 탈것을 탔던 것이다. 그날 밤도 역시 전날 밤처럼, 아니 훨씬 더 눈부신 밤이었다. 댈라스에 오기를 망설였던 보비는 브레인과 단둘이 지내는 시간이 너무나 짧다는 데 커다란 실망을 맛보았다.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브레인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인생을 밤낮으로 공유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떳떳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도 어느 정도의 호감을 그녀에게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즐거웠던 주말은 지났다. 오늘은 비행기를 타고 버지니아로 돌아가 월요일부터는 다시 언제나의 생활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녀의 인생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것, 즉 일에 대한 야심에까지도 브레인이 영향을 미친 것은 놀랍고도 우서운 일이었다. 날마다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을 생각하기만 해도 맹렬한 책임감이 불타올랐던 것이 바로 엊그제까지의 자신이 아닌가. 지금까지 고된 것도 모르고 몸이 부셔져라 일해 왔기 때문에 다른 동료들보다 훨씬 빨리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생활에 무언가가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느끼게 된 원인이 브레인의 말처럼 일을 너무 해서 지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브레인이 그녀의 머리나 에너지를 감정이나 마음의 문제로 향하게 만들었기 때문인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출발 게이트를 향해 걸어가는 브레인은 보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거의 입을 떼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 편에서 어떻게든 화제를 찾아내야 했다. 헤어진다는 것이 이토록 쓰라린 일인 줄은 미처 몰랐었다. 보비는 여느 때의 그녀답지 않게 버지니아의 날씨가 어떠네 하며 시시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좌석번호를 정하고 나서 브레인은 보비와 함께 활주로가 내다보이는 창가로 걸어가 섰다. 그는 그녀의 조그만 손을 자기 두손으로 쥐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긴듯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비는 그의 침묵과 동장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가까스로 손을 놓고 브레인은 입을 다문 채 묘한 웃음을 띠었다. "주말까지는 뭔가 알게 될까요, 코르벳에 대해서?" 그는 말했다. 보비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주말 내내 그런 화제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다니,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알게 될 거예요." "그럼 또 연락하겠소." 마침 그 때 승객들이 탑승을 시작했기 때문에 브레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가봐요." "그러겠어요." "조심해요." "네, 고마워요." "또 전화하겠소." 탑승을 위해 걸어가는 보비에게 브레인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보비는 뒤를 돌아보지 말자고 야멸차게 자신에게 말했다. 갑자기 저토록 냉정해지다니, 난들 가만 있을 줄 알고. <또 전화하겠소>라고? 좋아요. 하지만 누가 전화 옆에서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아요, 브레인 피어슨? ┌───────────────────────────────────┐ │ ▶ 번 호 : 1297/1333 ▶ 등록자 : SHINEK1882 │ │ ▶ 등록일 : 2001년 11월 27일 01:15 │ │ ▶ 제 목 : [초초] 열쇠도둑 12장 - J. 제프리즈 │ └───────────────────────────────────┘ 메리베스는 연갈색의 머리를 흔들며 깜짝 놀란 듯이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정말이니? 다시 한번 이야기해 줘. 정말로 브레인 피어슨과 주말을 지냈단 말 이니? 그가 티켓을 샀다니 그게 사실이야?" 보비는 한숨을 쉬었다 "네 말투로는 내가 법률이라도 위반한 것 같구나." "천만에. 우리의 오랜 교제중에서 최고로 멋진뉴스야" 하고 메리베스는 과장된 몸짓으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너는, 디크와의 주말은 어땠니?" 보비는 화제를 바꾸었다 "응, 그저 그랬어, 별일은 없었어. 디크는 무척 피곤하다며 밖에는 나가지 않았어." 커피를 저으며 메리베스는 인지를 세워 보였다. "보비, 좀더 자세히 이야기 해 줄 수 없어? 하지 먼저...... 제일 중요한 것부터 말이야." 그녀는 공범자처럼 히죽 웃었다. " 침대에서의 그는 어땠니?" 보비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메리베스의 얼굴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이 친구의 솔직성에는 익숙해져 있으나 그 질문에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메리베스!" "상관 있니, 보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손을 저었다. "주말 동안 같은 방에서 지내며 아무 일도 없을 수는 없지 않니? 당연히 뭔가 있었을 거야" 보비가 고개를 끄덕이 자 메리베스는 겨우 안심이 됐는지 말을 계속했다. "그럼 어서 제일 중요한 것부터 이야기 해 줘"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가 뜨거운 김이 나는 커피를 마시며 보비는 시간을 끌었다. "어땠니?" 메리베스는 여전히 재촉했다 "말해 줘. 침대에서 그는 어떤 느낌이었니?" 보비는 입술 양쪽 끝을 조금 치키며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눈부셨어 정말!" 이 표현으로 부족하다! 토요일 밤의 일은 눈이 아찔아찔할 만큼 귀중한 체험이 아니었던 가. 보비와 브레인은 뜨겁고 거센 헌신으로 서로 사랑하고는 금방 잠에 곯아떨어졌고, 다시 격심한 정열에 떼밀려서 잠이 깬 것이다. 지금도 그의 우람한 몸에 끌어안겼던 생생한 기억이 그녀의 몸속 깊은 곳에 관능의 욱신거림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환희도 공항에서의 브레인의 태도로 흐려졌던 것이다. 그의 그 쌀쌀한 거동은 도대체 어찌 된 것인가? 그의 행동은 갑자기 돌변하여 그때까지의 애정에 넘치던 따뜻함은 금새 사라지고 말았다. 보비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혹시 어쩌면 그는 다른 일, 더 중 요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시합이라든지 매니저와의 이야기, 동료 선수들과의 재회 같은, 보비와는 전혀 관 계가 없는 다른 일에. 메리베스는 커피 잔을 테이블에 탕 소리가 나게 놓고든 즐거운 듯이 키들키들 웃었다. "그런 줄 알았어. 여기에 들어선 순간 네가 보통 상태가 아니라고 한눈에 알았지 뭐니." 마음속에서는 불안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지만 보비는 웃었다. "넌 그 직감력인가 뭔가 하는 것을 남용한다고 생각하지 않니? 이번주에 두 번이나 그런 소리를 했어." 메리베스는 맹렬한 호기심을 발동시켜 마침내 보비로부터 주말에 있었던 일을 다 알아냈 다. 이야기하면서 보비는 브레인과 나누어 가졌던 기쁨, 즐거움, 행복감에 다시 싸이는 것을 느꼈다. 얘기하지 않은 것은 공항에서 헤어질 때 돌변한 그의 태도뿐이었다. 주말의 만남을 거듭할 생각은 없었지만 보비는 적어도 브레인이 재회의 플랜을 세워 줄 것 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저 얄미운 고급차에 대해서만 줄곧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긴 하지만...... 브레인도 둘이 지낸 주말을 즐긴 것은 분명했지만, 그것에 대해서 보비가 느끼는 중요성 따위는 도무지 인정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보비도 처음부터 자기는 그가 가는 곳마다 기다리고 있는 여자들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브레인을 탓 할 수는 없어, 하고 보비는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왜 나는 이 일을 이렇게 끈덕지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브레인과의 주말은 한때의 심심풀이 일 뿐, 평상시의 생활로 돌아가기만 하면 금방 잊을 수 있는 경험이라고 미리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뒤로 한시도 브레인이나, 그와 지낸 주말이 머리에서 떠난 일이 없었다. 그를 잊을 수 있는 것은 오피스에서 전화에 매달려 있 거나 일에 골몰할 때 뿐이었다. 그렇다고 날마다 종일 쉬지 않고 일만 할 수도 없었다. 내 가 계획한 인생을 착오 없이 걷기 위해서 브레인으로부터 마음을 돌릴 뭔가가 필요하다. 그 대답은 지금까지 생각을 못 했던 일이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분명했다. 브레인으로부 터 마음을 돌릴 뭔가가 아니라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내게 어울리지 않는 뭔가가 아니라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내게 어울리지 않는 줄 알면서 그 남자에게 감정적으로 말려든 것은 중대한 실수였다. 하지만 사람은 잘못을 수정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지 분명 못할 것이 없다. 눈을 감으니 랠프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언제나 나를 자기 몸처럼 걱정해 주고 상담에도 열심히 귀를 기울여 주는 따뜻한 랠프의 얼굴, 플로리다에서 언제 돌아온다고 했지? 그렇지, 모래라고 했어. 그것이 생각나자 조금 안심이 되어 보비는 편안하게 잠들 수가 있었다. 벽이 온통 유리로 된 어항 같은 오피스의 문을 보비는 가볍게 노크했다. 통화중이던 랠프 는 눈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좁은 간막이 오피스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달리 의자가 없었기 때문에 보비는 캐비넷에 몸을 기대고 서서 랠프의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거 희한한 일도 다 있군." 랠프는 수화기를 놓으면서 미소했다. "당신이 내 오피스를 찾아오다니,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요?" 보비도 웃음을 되돌렸다. "당신을 보러 왔어요 어머님의 용태는 어떠세요?" "괜찮소. 곧 좋아지실 거요. 검사를 위한 수술을 했는데 위험한 것은 찾지 못했다는군요. 다만 자각증상에 이어지는 몇가지 문제는 있는 것 같지만, 주말에는 퇴원하실 수 있대요, 한동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요." "나도 한시름 놓았소." "난 그저 당신한테 잘 다녀왔느냐는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정말 그것뿐인가? "주말은 어땠소?" "그저 그랬어요." 보비는 무관심한 체하며 어깨를 추슬렀다. "별다른 일도 없었어요. 요전에 계획한 주말이 떠내려가 버렸으니, 이번 주말에는 같이 어디 가보지 않겠어요?" 한순간 랠프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스친 이상한 그림자를 보비는 별뜻이 없는 것이라고 머리에서 떨어버렸다. "대찬성이오, 그렇게 합시다 이번에는 바람 맞히지 않겠지?" 보비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어요. 영화나 보러 갈까요? 무척 오랫동안 영화간에 가보지 못했어요." "정말 동감이군." 하고 랠프는 말했다. "오늘은 바빠서 안 되겠고, 내일 점심이라도 들면서 정합시다." "좋아요." 보비는 문을 열면서 말했다. "그럼 내일 만나요." 농구팀 매니저 버드 스탠필드는 마지막 한모금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담배를 테이블 위의 담배꽁초가 가득쌓인 재떨이에 비벼 껐다. "자네는 지금 카다란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고 있네, 브레인" 여러해 동안 가까이 지내면서 브레인이 수없이 보아 온 언제나의 버릇으로 버드는 생각에 잠긴듯한 아랫입술을 윗입술 위에 겹쳤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말이야." 브레인은 조용한 눈길로 머리숱이 적고 얼굴에 붉은기가 도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오던 브레인으로서 보비와 함께 지낸 주말은 결심을 굳히는 데 좋은 계기가 되었다. 농구의 프로선수가 된지 10년, 그동안 이곳저곳 돌 아 다니는 변화있는 생활을 즐기기는 했으나 한편 무척 초라해진 자기의 독신 생활에 진절 머리가 난 것이다. "난 결심했어요, 버드. 당신이 말하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생각해 왔어요. 그러나 나로서는 지금이야말로 은퇴할 찬스라고 생각해요." 버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담뱃갑 뚜껑을 뭉툭한 손으로 두드렸다. "글세 어떨까? 브레인. 자네는 지금 정상에 있네. 그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이야." 버드는 또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불을 당기고 코에서 연기를 내 뿜었다. "다시는 지금처럼 돈을 벌 수는 없을 걸세." 조그만 잿빛 눈은 엄격하게 브레인을 노려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브레인은 조용히 말했다. " 하지만 난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겁니다." "듀크 대학의 코치 이야기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려는건가?" 브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데서도 오라고 합니다. 어느 쪽으로 갈지는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겠지만 나는 그런 일이 좋아요, 버드." 매니저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자네가 이렇게 달라질 줄은 몰랐네. 아무래도 결심이 단단한 것 같군." 잿빛 눈을 가늘게 뜨고 그는 덧붙였다. "자네는 나한테 아직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고 있네. 하지만 나는 알겠네. 여자 때문이지?" 브레인은 스카치 위스키의 글라스를 집어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그 일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브레인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버드는 그 말을 듣고도 별로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과거 10년 동안 버드는 브레인의 사생활에 대해서 거의 샅샅이 알고 있었지만, 그는 여성 문제라면 언제나 꼭 입을 다물고 있었다. 버드는 결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위의 남자들은 대부분 기회만 있으면 자기가 여자와 어떻게 즐겼는가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털어놓는다. 한데 브레인은 그 누구에게도-매니저인 버드 스탠필드에게도-털어놓지 않는 것이었다. "자네의 생각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버드는 담배를 비벼 껐다. "이번 시즌의 나머 지 시합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겠지?" "물론이오, 오승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데 내가 그것을 포기할 줄 아시오?" 브레인은 망설이더니 신중하게 못을 박았다. "그러나 마지막 시합이 끝날 때까지는 이 일에 대해서 보도기관에 알리고 싶지 않아요. 그 점 이해해 주겠지요?" "알았네." 버드는 약속했다. 오랫동안 아무 말썽도 없이 지내 온 동료에 대해서 그만한 부탁쯤은 들어줘야만 했다. 버드는 테이블 위의 계산서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앞에서 브레인이 낚아채듯이 집어들었 다. "내가 한턱내지요." 브레인은 지갑을 꺼냈다. 버드는 상대하지 않고 맨해턴 남은 것을 들이 켰다. 브레인의 은퇴는 버드로서는 이해를 넘어선 의미가 있었다. 절친한 관계를 지켜 온 친구를 잃게 되는 일이었다 랠프가 제안한 영화를 보는 동안 보비는 그저 건성으로 좌석에 앉아 스크린에 눈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브레인과 같은 침대에서 본 영화가 무엇이었더라? 그렇지. 우디 알렌이 나오는 영화였어...... 보비는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떨어버리려 했다. 나중에 랠프와 적당한 비평을 할 수 있 을 정도는 영화에 마음을 모으려고 애썼다. 그런 뒤 두 사람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했다. 직장 이야기며 영화 이야기를 하는 동안 랠프는 좀 우울한 모습이었다. 보비는 그가 아마 자기 어머니에 대한 걱정을 하 고 있는 거라고 짐작했다. 랠프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속에서도 비교적 조용했다. 한동안 보비는 어색함을 느꼈다. 랠프와의 오늘의 나들이는 즐겁기는 했으나 무언가가 빠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 이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데이트한 남자들 중에서 랠프만이 결혼상대로서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27세의 생일을 눈앞에 둔 보비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잠깐 들어가겠어요?" 문 앞에 멈추어 서서 보비가 말했다. 랠프는 안경을 한번, 치켜올리더니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어색하게 서 있었다. "아니, 그만두겠소. 난....." 보비는 뜻밖이라는 듯이 그럴 쳐다보았다. "랠프, 왜 그러지요?" 그는 난처한 듯이 보비를 슬쩍 쳐다보았다.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 우리 어머니는 경과가 좋아요, 2,3주 후의 얘기지만," 랠프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안심하는 기색이 있었다. 보비는 그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어리둥절했다. "당신은...... 뭐라고 하면 좋을까, 무엇에 마음이 빼앗기고 있는 것 같아요." 랠프는 어깨를 추스르고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잔돈을 짤랑거렸다. 신사복의 저고리가 뒤로 당겨지고 안에 입은 조끼가 보였다. 위엄이 있고 매력적인 남자라고 보비는 생각했다. "아마 내가 좀 피곤하기 때문일 거요. 이번 주는 제대로 잠을 못 자거든요." 랠프의 말에 보비는 동정심이 일어나 희미하게 웃음을 띠고 말했다. "진작 그렇게 말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오늘 저녁 같이 외출하지 말 걸 그랬어요." "아니 즐거웠소. 정말이오. 랠프는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눈에 역시 무언가 보비가 이해 할 수 없는 이상한 번득임이 떠올라 있었다. 갑자기 그는 호주머니에서 두 손을 빼더니, 보비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너무나 갑작스런 동작에 놀라면서도 보비는 거스러지 않고 눈을 감아 그의 입술이 자기 입술에 꼭 밀어 붙여지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랠프는 키스의 테크닉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보비는 웬지 허전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멋있는 키스...... 그저 그것뿐이었다. 몸을 떼자 랠프는 안경 너머로 가만히 보비르 내려다보며 좀 신경질적인 미소를 띠었다. "또 언제 같이 외출하기로 하지?" 보비도 웃음을 띠고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꼭 그렇게 하고 싶어요, 랠프?"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 조심해서 운전하세요. 잘 가세요." "그럼 월요일에 만나요" 보비는 문을 닫고 거기에 기대어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거야. 하고 보비는 자기에게 말했다. 서로 마음에 통할 수 있는 남자와 의미 있는 한때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찬찬히 내쉬었다. 가슴속에 느껴지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이 공허감이 영원히 자리잡는 것은 아니겠지. 아마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그리고 랠프에 대 한 일도 틀림없이. 흐릿한 의식 속으로 어떤 소리가 조금씩 파고들어왔다.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보비는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는 눈을 번쩍 뜨고 더욱 분명해진 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딸각! 귀에 익은 문의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 그리고 다시 딸각 하는 소리. 가슴에 거세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보비는 옴쭉달짝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카핏을 밟는 소 리가 더욱 분명하게 들려서 그녀는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메리베스에게 전화를 걸려고 공포에 싸여 번호를 눌렀지만 통화중이었다. 이런 시각에! 귀에 익은 휘파람 소리가 들려서 보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서움은 금방 노여움으로 바뀌었다. 가벼운 노크 소리에 이어 "보비?" 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설마 이룰 수가...... 보비는 천천히 머리르 저었다. "보비 일어나 있소?" 문이 열리고, 브레인의 얼굴이 침실을 들여다보았다. 보비는 불을 켜고,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치고 있는데도 침착을 가장하고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자고 있어요. 그리고 난 지금 무슨 나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군요." 브레인은 조심스럽게 미소하고 문을 조금 밀어 열었다. 그는 머리를 꾸벅 숙이고 문설주에 몸을 기대며 히죽 웃어 보였다. "자고 있는 것 같지는 않군." 보비는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티셔츠밖에 입지 않았지만 정신없이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잠은 싹 달아나버렸고,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이다. 너무나 태연스런 침입자를 한 대 갈겨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 들어왔지요?" 그녀의 맨발로부터 찬찬히 흝어 올라오는 남자의 시선 을 무시하고 보비는 물었다. "응?" "내 말 듣고 있어요? 어떻게 여기에...... 아아, 이게 정말 무슨 꼴이야!" 그가 여기에 묵었던 주말에 열쇠 고리에서 문의 열쇠를 뽑아간 것이 이제 겨우 생각이 난 것이다. 브레인은 혀를 끌끌 찼다. "그런 꼴을 하고 사람을 야단칠 수 있소?" "당신은 너무도 엉뚱하군요." 거칠게 로브를 집어 몸에 걸치고는 보비는 다시 그를 돌아 보았다. "가택 침입의 방법에 대해서는 그만두고, 이제 침입한 까닭을 말해 줘야겠어요." 코르덴 바지 호주머니에 두 엄지손가락을 걸치고 브레인은 느긋한 몸짓으로 한쪽 다리를 다른 다리 앞에 엇걸었다. "2,3일 휴가를 얻어서 타운하우스를 둘러보러 온 거요." 보비는 알겠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빈정거리는 웃음을 띠엇다. "어마, 그래요? 고독한 이곳 여자를 돌봐주러 왔군요? 곳곳에 그런 걸프렌드를 많이 대기 시켜 놓고 있겠지요?" 브레인은 재미있다는 듯이 보비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지만 오해가 없도록 말하겠소. 난 남의 걸프렌드에 손을 내밀거나 하지는 않소. 더구나 그 남자가 소중한 친구라면 더욱 그렇지."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 헝크라는 사람은 누구예요, 혹시 물어 봐도 괜찮다면?" "우리 팀의 멤버요. 언제 당신한테도 소개하겠소. 마음에 들 거요. 실은 오늘 저녁 그도 나와 함께 여기에 오려고....." "뭐라구요! 설마 이런 시각에 그 사람을 남의 집에 데리고 온 것은....." 브레인은 눈을 돌려 위를 보았다. "그렇게 화부터 내지 말아요. 오려고 했는데 올 수가 없었다고 말하려던 참이오' 보비는 금방 안심이 된 표정을 떠올렸다. "다행이군요." 도대체 그들이 어쩌면 그런 생활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수 있을까. 한밤중에 남의 집을 기웃거리는 것이 보통인 줄 아는 모양이다. "당신은 시간에 관계없이 나돌아다 닐 수 있지만, 난 일하는 사람이에요. 아침 다섯 시 반이면 일어나야 하는데, 지금은 한 시 반이예요." "내가 기대한 것 같은 환영은 바랄 수가 없겠군. 브레인은 시트가 구겨진 침대를 홀끔 바 라보았다. "어떤 기대인지 모르지만 오늘 밤은 긴의자에서 주무셔야 할 것 같군요." 그의 실망하는 표정에 보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다. 커다란 남자가 저런 표정 을 하다니. 이런 시간에 멋대로 사람을 깨워 놓고 대환영을 받으리라 기대하다니 보비는 그의 앞을 지나 복도로 나왔다. 옷장을 열고 모포와 베개를 꺼내자 거실로 가서 긴의자 위에 털썩 내던졌다. 뒤따라온 브레인은 시선을 긴의자에 놓인 모포로부터 보비의 까다로 운 표정으로 옮겼다. "잘 곳이 필요하죠? 그렇다면 여기서 주무세요." 보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브레인은 어깨를 추스르고 유감스런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진심인 것 같군. 아까와...... 정말 낭비야. 보비는 복도에서 침실로 돌아와 한 손을 문을 손잡이에 얹어놓고 멈칫거렸다. "그런데 내일 아침 내가 일어날 때 같이 깨워 드릴까요?" "어차피 당신은 그렇게 하겠지?" 브레인은 불평하듯이 말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봐요." 보비는 야멸차게 말하고 문을 닫았다. 그 뒤 브레인의 귀에 들린 것은 열쇠를 돌리는 딸각 하는 소리뿐이었다 감은 눈까풀 속이 오렌지빛이었기 때문에 보비는 한순간 여느때와 다른 이 느낌이 무엇 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번쩍 눈을 뜨고 창에서 비쳐 들어오는 햇살을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빙 몸을 돌려 시계를 보았다. 여덟 시!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보비는 생각이 났다. 이 시계가 시끄럽게 울려대기 시작하자 잠결에 벨의 스톱 버튼을 눌러 버렸 던 것이다. 용수철을 장치한 인형처럼 보비는 침대에서 벌떡 튀듯이 일어나 욕실로 뛰어들었다. 바로 목욕할 수 있게 욕저의 수도꼭지를 틀어 더운물이 나오게 하고 복도로 뛰어나왔다. 그동안 커피 물을 끓이고...... 그때 긴의자 위에서 자고 있던 브레인의 모습이 눈에 띄어 보비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그랬었지! 이 침입자에 대해서 깡그리 잊어버리고 있었군. 이 남자 탓이야. 이 남 자 때문에 지각을 하는 것이 이것으로 벌써 두 번째다. 금주에, 합승하는 차를 운전하는 차 례가 자기가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브레인은 몸을 움직거리더니 하품을 하고 눈을 뜨고 거기에 서 있는 보비를 보자 미소를 지었다. "여어, 잘 잤소?" 보비는 발소리도 거칠게 긴의자에 다가가 험악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보비는 자기가 그를 미워할 수는 없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볼에는 베갯잇 의 자국이 나구, 머리는 헝클어져 이마에 흘러내리고, 아직 잠에서 덜 깬 듯한 푸른 눈은 매우 섹시하게 보였다. "잘 잤느냐구요? 너무 잘 잤어요, 브레인, 벌써 여덟 시란 말이에요. 한 시간이나 지각하게 생겼어요." "음 그거 야단났군." 그는 크게 입을 벌리며 길게 하품을 했다. "같이 걱정하는 체하지 마세요." 보비는 화가 나서 쌀쌀하게 말했다. "당신 때문에 난 두 번씩이다 지각하게 되었어요, 그것도 한 달에. 내 업무 성적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거예요." 브레인은 얼굴을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좋은 생각이 있소." 보비는 주방에 가서 커피포트에 물을 따랐다. "무슨 생각요?" "만일 당신이 몸이 불편하다면 지각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웃사람도 별로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 테고 따라서 당신의 실적에도 아무 지장이 없을 것 아니오?" 보비는 브레인의 말이 맞다고는 생각했지만 망설여졌다. "몸이 멀쩡한데 어떻게 쉴 수가 있어요! 더구나 일도 많이 싸여 있어요." 브레인은 긴의자에 일어나 앉더니 모포를 끌어당겼다. 윗몸은 벗은 채였다. 한 손을 머리 속에 찔러넣으며 브레인이 말했다. "여기도 할 일이 많이 밀려 있지 않소, 안 그렇소?" "도대체 무슨 이야기예요?" 브레인은 엄지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우선 목욕탕의 물을 나오는 대로 틀어 놓고 있잖소." 보비는 짜증난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주방에서 뛰어 나갔다. 그리고 다시 주방에 돌아와 그레이프 프루츠 주스를 글라스에 따랐다. "당신의 멋있는 주방에는 아직 아무것도 갖추어져 있지 않소. 이 집처럼 텅 빈 집은 처음 보았소." "우리 집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렇소." "그것과 회사를 쉬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어요?" "당신은 슈퍼마켓에 가서 식료품을 사들일 필요가 있다 그 말이오." 보비는 뾰로통한 얼굴로 그레이프 프루츠 주스를 마시고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간을 보니 갑자기 그의 말에 따르고 싶어졌다. 출근해 봐야 이런 혼란한 상태로는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거야. 브레인은 금방 그녀의 망설임을 눈치채고 사이를 두지 않고 설득을 계속했다. "아침 식사부터 하고 나서 식료품점에 들릅시다. 그런 뒤에 당신을 여기까지 바래다 주고 난 타운하우스로 가겠소. 저녁 식사는 당신이 좋아하는 레스토랑에서 하기로 하고." 보비는 슬픈 듯이 고개를 저으며 입술 위에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자기가 그 제안에 마음 이 끌리고 있다는 것을 브레인은 너무나 잘 아는 것이다. "좋아요 내가 졌어요. 이번만은 당신 말에 따르겠어요." 브레인은 기쁜 듯이 웃고는 코메디언 그루쵸 마르크스처럼 눈썹을 꿈틀거렸기 때문에 보비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팬케이크 하우스에 들러 든든한 아침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천천히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바꾸어 보며 제각기 흥미가 끌리는 뉴스며 유머러스한 기사를 골라 읽었다. 슈퍼마켓은 손님이 거의 없어서 물건 사기가 굉장히 편했다. 브레인은 선반에서 닥치는 대로 식료품을 집어내어 카운터로 향했다. 고맙게도 누구 하나 줄을 짓고 있는 손님이 없었다. 도저히 좋아질 수 없는 귀찮은 잔일들이 브레인의 손에 걸리면 즐거운 것이 된다는 것을 다시금 보비는 알게 되었다. 아파트로 돌아와서도 다른 때 같으면 주말까지 미루어 둘 집안 허드렛일을 부지런히 해치울 수 있었다. 브레인은 타운하우스에서 다섯 시에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은 뒤 두 사람은 처음 둘이서 같이 싯사를 한 메릴랜드의 레스토랑으로 갔다. 눈부신 저녁이었고, 하루가 끝나면서 보비는 회사에 대해서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있었다. 브레인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 해지는 것이었다. 그는 잘난 체하지도 않았으며, 말이나 행동도 자연스러워 그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늑해지는 것이었다. 그날밤 브레인은 전날보다 더 기분좋게 잘 수 있었다. 그는 긴의자에서가 아니라 보비와 나란히 한침대에 누워 평화로운 잠을 잤다. 브레인의 달콤한 손의 움직임은 보비의 몸에 불을 질러 놓았고, 드디어 두 사람은 하나로 녹아들어 달콤한 환희를 맛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브레인의 방문은 너무나 눈부신 것이었으며, 영원히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 까 하고 바랄 정도로 보비는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브레인은 떠났다. 나타날 때처럼 성급하게 그는 사라졌다. 결코 채워질 수 없 는 갈증을 그녀의 가슴에 남겨 놓고. 일이 이렇게 나가다니,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해야지...... 그것도 되도록 빨리. ┌───────────────────────────────────┐ │ ▶ 번 호 : 1298/1333 ▶ 등록자 : SHMJ0125 │ │ ▶ 등록일 : 2001년 11월 28일 20:13 │ │ ▶ 제 목 : [키쿠] 열쇠도둑 13장 - J. 제프리즈 │ └───────────────────────────────────┘ 다음주, 보비는 일에 파묻혀 자기를 녹초로 만듦으로써 그럭저럭 마음의 동요를 이길 수 있었다. 이번 토요일은 그녀의 생일이었으며, 그것이 생각날 때마다 더욱 기분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자기의 생활에 대해서 이 렇게 신경을 써 본일은 한번도 없었다. 바보스런 일이라고 생각 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가? 자기의 인생을 신중히 생각해 보고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나아 갈것인지 근본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막연한 압박감에 몰리고 있었다. 전시대적인 일중독-----브레인의 말이 옳았다. 분명 지금까지 편집 광이라고 할 만큼 그녀는 야심적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 인생에 무엇을 가져왔단 말인가? 지난 일년 반 동안 만족해 하며 해오던 일이 이제는 갑자기 색이 바래 보였다. 그러나 보비는 다시 일에 열중함으로써 마음의 회의를 묵살할 수밖에 없었다. 브레인 생각이 떠나지 않아, 그녀는 진실을 말해 주는 가슴의 아픔 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랠프의 얼굴이 떠오르며, 보비는 그 두 남자의 차이를 아프게 의식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어떤 여자는 동시에 두 남자와 데이트를 거듭함으로써 자기 중심적인 즐거 움을 찾는다지마, 보비는 그런 입장에 말려들기는 싫었다. 브레인에 게 끌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래도 엄연한 사실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두 사람은 전혀 다른 환경에 살고, 서로 맞는 상대 가 아니다. 게다가 오늘 대출 회사에서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더 이 상 브레인과 관계를 가질 필요도 없게 되었다. 브레인의 차가 이틀 뒤 에는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것을 브레인에게 알리면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으로 이어지는 영속적인 관계를 아끼는 것이 현명하지 않은가. 브레인은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더운물을 틀었다. 그의 생 각은 다시 온종일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문제로 돌아갔다. 조그맣고 섹 시하고 고집덩어리 보비 모로. 내가 그렇게 활발하고 딱총 같은 여자에 게 사랑을 느끼리라고 누가 생각했으랴? 그녀 역시 나를 싫어하지 않는 게 확실해. 나만큼 깊이 사랑하고 있지는 않을지 모르나 시간을 들이면 희망은 있어. 그동안 일이 묘하게 진행되긴 했지만 우리는 서로 상대방 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 틀림없어. 지금 필요한 것은 보비와 함께 지낼 시간이다. 장래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더욱 관계가 깊어지게 만들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마침 이런 때 브레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그 시간이었다. 앞으로 3주 안에 그는 어느 대학의 코치로 나 갈 것인지 마음을 결정해야 했고, 농구 시즌도 끝을 고하게 될 것이다. 은퇴한다고 생각하니 한가닥의 쓸쓸함이 느껴졌지만 그를 기다리는 장래, 그것도 보비와 같이 보낼 생활을 생각하니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전화가 울렸다. 급히 몸을 닦고 큰 타월을 허리에 감 았다. 브레인은 침실로 뛰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브레인, 어떤가? 기분이 좋은가?" 브레인은 이마에 주름을 잡더니, 문득 거의 잊고 있던 대학 시절의 친구 가 생각났다. "자네 존인가?" "그래, 나네! 자네가 우리 도시에 왔다는 것을 신문에서 보고 거처를 알 아냈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비밀이야. 하여튼 쉬운 일이 아니었어. 우선 자네한테 전화를 걸고 근황을 듣고 싶어서 말이야. 물론 신문기사 이외의 일에 대해서 말이지만." 브레인은 다른 타월 하나를 집어들어 머리를 닦으면서 침대가에 걸터 앉았다. "이거 놀랐는데. 우리 얼마 만인가. 처음엔 자네인줄 몰랐네." "난 옛날 그대로네. 별로 달라진 건 없어, 여기저기 군살이 좀 붙기는 했지만." "지금 어디에 살고있나?" "롱비치라네. 아내와 어린 것 둘이 있지. 일남 일녀라네." 존의 불그레한 얼굴에 떠오른 자랑스런 표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브 레인은 저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그래? 돈환도 자리를 잡은 셈이군." 브레인이 놀렸다. "정말 놀라와." 존은 키들키들 웃었다. "우리는 모두 자네 같은 떠돌이 로미오는 될 수가 없어." 브레인은, 나의 그런 생활도 곧 끝날 거라고 입에 내어 말할 뻔했지만 그만두었다. 어차피 알게 되겠지. "그런데 자네 이곳 로스앤젤레스에는 얼마나 머무를 예정인가?"하고 존이 물었다. "주말 내내야." "좋았어. 그럼 우리 가족을 만나 주지 않겠나? 스잔이 좋아할 거야, 물론 아이들도 좋아하고. 토요일 저녁이 어떤가?" 브레인은 웃었다. "여전하군. 무슨 일에나 어물거리는 법이 없어. 나도 자네 가족을 만 나고 싶네. 시간과 장소를 일러주면 내가 그리로 가지." "아니, 그러지 못할 까닭이 있네." "무슨 일인가?" 존은 한숨을 쉬었다. "스잔의 여동생이 2주 전부터 로스에 와서 묵고 있다네. 그러니 스잔은 만일 자네만 괜찮다면 우리가 로스에 나가 자네를 만나는 것이 어떠냐고 하는 거야. 그때 스잔의 동생도 함께 말이야. 로스에서 식사를 같이하고, 그리고 우리 집에 들러 한잔하지 않겠나? 괜찮다면 우리 집에서 묵어도 좋네." 브레인은 생각에 잠겨 턱을 긁었다. 이쪽 로스에서 그를 만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오우케이, 나는 셰라톤에 묵고 있으니 로비에서 만나자구. 몇 시로 하겠나?" "글세, 일곱 시경이 어떤가?" "좋아." "그럼 그때 만나세." 자기 오피스를 향해서 복도를 굽어돌다가 보비는 하마터면 랠프와 부딪 칠 뻔했다. "어마, 랠프! 미안해요. 앞을 잘 보고 걸었어야 했는데." 엉겁결에 붙잡은 보비의 팔을 놓고 랠프는 미소했다. "당신도 상당히 급한 모양이군." 보비는 어깨를 추스르고 가슴 앞에 끌어안고 있던 파일 뭉치를 고쳐 들었다. "별로 서두르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웃어 보였다. "내가 서둘러야 하는 것은 점심이에요. 오늘 아침은 글쎄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어서 건너뛰었더니 지금 굶어죽을 지경이에요." 랠프는 팔목시계를 보았다. "벌써 열 한 시 반이 되어가고 있군요. 오늘은 좀 일찌감치 나가 바비큐 하우스에라도 같이 갈까?" 보비는 얼굴을 빛냈다. "그거 좋군요." "2, 3분 뒤에 당신의 오피스로 가겠소." "알았어요." 랠프의 존재에 얼마나 큰 위안을 받는가. 보비는 자기 방으로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요즘의 견딜 수 없는 나날로부터 랠프만이 그녀를 건져 주고 있었다. 이번 주말은 그와 함께 지낼 수 있을거야. 메리베스는 주말에 디 크와 함께 친구들을 만나러 뉴욕으로 갈 거라고 좋아하고 있는데, 보비는 그러는 친구가 부러웠다. 식사중에 랠프는 다른 때보다 기분이 좋았으며 친절했다. 하지만 AMAC의 빌딩으로 돌아가면서 비로소 이번 금요일 아침에도 어머니를 만나러 플로 리다로 떠난다고 말했다. 보비는 그 소식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매우 실망이 되었고, 자기 멋 대로의 생각에 부끄러웠다. "어머니께 몸조심하시라고 전해줘요."하고 따뜻하게 랠프에게 말했다. 금요일 밤, 보비는 매우 비참한 기분에 빠졌다. 사실 이처럼 허전한 일 은 없었다. 그날 저녁 리치먼드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을 때는 치밀어오르는 흐느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그날 아침 어머니가 보냈다는 선물에 대해서 고맙다고 하고 아버지에게도 안부를 전해 달라 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보비는 긴의자에 몸을 파묻고 글라스에 따른 포도주를 마시면서, 시선을 한군데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오늘 저녁은 유별나게 브레인 생각이 났다. 그가 여기에서 나간 뒤로 사뭇 따라다니고 있던 어떤 느낌이 맹렬한 기 세로 덤벼드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여러해 동안 조금이라도 아늑하게 만들려고 애쓰던 아파트의 분위기도 서글프게 생각되었다. 겨우 며칠 사이에 브레인이 이곳에 침투시켜 놓은 가정적이 따뜻함에 비하면 아무것 도 아닌 것 같았다-----이 긴 의자에도, 욕실에도, 지금 입고 있는 로브 에도...... 보비는 브레인 덕분에 아침식사까지 하게 되었다. 혼자서 해야 하는 빨래는 지금가지보다 더 힘이 드는 것이었다. 댈라스에서의 주말, 그 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한밤중의 방문, 그런 추억이 모두 꼼짝 못하게 보비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아, 내가 왜 브레인만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와 입가에 짠맛을 남겼다. 어째서 랠프는 하필이면 이번 주말에 떠나 버렸는가? 그리고 메리베스도 내가 이렇게 친구를 필요로 할때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자기가 어린아이처럼 억지를 쓴다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보비는 짜증스럽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일은 모두 어떻든 차에 대해서 브레인한테 전화를 걸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 연락을 자꾸만 미루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그것조차 생각하기가 싫었다. 브레인은 요전에 이곳에 들렀을 때, 앞으로의 자기 스케줄과 로스에서 묵을 곳까지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 수화기를 들고 그의 호텔에 연락을 하지 않는가? 추억담의 꽃을 피웠고, 그동안의 세월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다. 존은 스잔이라는 좋은 반려자를 얻어 이제 완전히 안착이 되었다는 것말고는 옛날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스잔의 여동생 로리는 언니보다 미인이고 스타일이 좋았으며 몸가짐도 세련되어 있었다. 큰 키에 검은 머리, 그리고 약간 거무스름한 살갗의 그녀는 너무나 말랐다고 할 만큼 날씬하였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직업 모델로서 성공하는 것이 그녀의 꿈이라고 했다. 음식에도 그녀는 무척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브레인은 옛 친구와의 즐거운 대화와 추 억담에 마음이 뛰면서도 이 젊은 아가씨에게 처음 느꼈던 매력이 금방 사라져 가는 것을 의식했다. 자기의 얼굴이나 몸매에 너무나 마음을 빼 앗기고 있는 로리를 보니 브레인은 어느새 진절머리가 났다. 그녀는 접 시 위에 담긴 요리를 이리저리 깨지락거리기만 할 뿐, 뚱보가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브레인은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냄이 없이 그녀에게 계속 관심이 있는 체했다. 문득 어떤 얼굴이 뇌리에 떠올라 브레인은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황갈색의 머리를 바람에 나부끼던 장난스런 그 요정(妖精). 도대체 왜 우리 둘은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단 말인가. 갑자기 앞으로는 하룻밤도 호화로운 호텔방에 혼자 묵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처럼 생각 되었다. 보비와 함께가 아닌 한.......... "로리도 셰라톤에 묵고 있어요, 브레인."스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몰랐군요. 언제부터 거기에......?" "네, 사흘 전부터요."로리는 얼굴을 빛내며 웃었다. "오늘 저녁 호텔까지는 내가 바래다 드리지요."브레인은 누구나 사로 잡히고 마는 매력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존과 스잔이 의미 있는 눈길을 주고받는 것을 눈치챘으나 브레인은 모른 체하며 글라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알 게 뭐야-- ----혼자라는 기분을 어쩔 수 없이 의식하며 브레인은 생각했다. 어렴풋이 막 잠이 들려는 상태에서 보비는 짜증스럽게 모포를 걷어찼다. 오늘도 어제나 같이 축 쳐진 정신상태에서 무섭게 긴 하루를 그럭저럭 보냈 던 것이다. 보비는 무엇보다도 침울한 것이 싫었으며, 다른 때 같으면 모든 희망적 예측을 생각해 내며 비참한 상태에서 빠져나가려고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우울증과 싸울 기력도 없었다. 정말 생일을 혼자 보낸다는 것은 최악의 상태였다. 더구나 27세------마침내 초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나이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왠지 하늘이 무너져 내리지도 않았고, 거울 속의 자기 모습에 별다른 변화도 없었다. 나는 노이제로에 걸려 있는 가, 아니면 나뿐 아니라 누구나 27세의 생일은 이렇게 고민하며 지내는 것일까? 하여튼 피할 수 없는 사실은 그녀는 이제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며, 앞으로 3년만 있으면 30세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해왔단 말인가? 전같으면 직업상의 성공이 자랑스럽게 생각됐을지 모르나, 그것도 요즘은 짜증스럽기만 했다. 머리의 혼란은 도무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몸을 일으키고 앉아 머리칼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시계를 흘끔 보고는 그녀는 침대 옆의 라이트를 켰다. 하여튼 전화를 넣어 그의 차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게 낫겠어. 그 코르벳만 아니었던들 나의 인생은 잘 진행되어 나갔을 텐데. 번호 안내계가 셰라톤의 번호를 찾고 있는 동안 보비는 손을 뻗어 그 번 호를 메모에 적었다. 밤 열한시-------귀에 거슬리는 호출 신호를 들으며 전화가 브레인의 방에 이어지는 동안 보비는 신경질적으로 코드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 │ ▶ 번 호 : 1299/1333 ▶ 등록자 : SHINEK1882 │ │ ▶ 등록일 : 2001년 11월 30일 01:21 │ │ ▶ 제 목 : [초초] 열쇠도둑 14장 - J. 제프리즈 │ └───────────────────────────────────┘ 고급 의상점의 이름이 화려하게 인쇄된 쇼핑 백에 라벤더의 드레스가 포장되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방금 산 크레이프데신의 이 드레스는 지금까지 그녀가 산 어떤 옷 보다도 값 비쌌다. 하지만 보비는 감히 사기로 한 것이다. "고마와요." 쇼핑 백을 내미는 점원에게 방글그리며 사례하고 보비는 고급 데파트 안을 둘러보며 메리 베스를 찾았다. 그녀는 이웃 모피 매장에서, 요란스럽게 화장을 하고 블론드로 머리를 염색 한 여자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밍크코우트를 입어 보고 있는 것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 고 있는 중이었다. 보비는 그녀의 뒤로 다가가 짐짓 거드름 피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을 찾고 계시지요, 마담?" 메리베스는 깜짝 놀라 돌아보고는 보비인 줄 알자 역시 거만한 목소리를 지어 말했다. "아니, 좋아요. 이곳 물건들은 하나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보비는 키들키들 웃으며 재촉했다. "자아, 어서 나가자꾸나. 이곳의 으리으리한 분위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아." 메리베스는 보비가 들고 있는 꾸러미를 홀끔 보고 고개를 저엇다. "어마, 그렇게 비싼 것을 사다니, 믿을 수가 없어. 수표에 그런 숫자를 늘어놓아여 한다면 난 차라리 넝마를 입겠어." 보비는 떨리는 숨을 들이마셨다. "나도 좀 이상한 기분이지만 이젠 사 버렸고, 후회는 하지 않아. 돈을 모아 봤자 뭐하겠니. 이렇게 쓰고 나면 기분도 나아지겠지." 두 사람은 레스토랑에 마주 앉아 백포도주를 마시면서 샐러드를 들고 있었다. 그러자 메리 베스가 아까 하다 만 화제를 꺼냈다. "어서 나한테 이야기해 줘. 도대체 어찌 된 일이니? 2주 동안을 계속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더니 갑자기 밖에 나오는가 싶자 입고 갈 데도 없을 것 같은 값비싼 드레스며 구두에 재산을 탕진하다니." 보기가 건네 준 얇게 썬 프랑스빵에 버터를 바르며 메리베스는 눈치 를 보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빵을 한입 베어서 맛을 보고는 또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입에 들어 있는 샐러드를 먹고 나자 보비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 저녁 우리 집에 사람이 오게 되어 있어." "누가?" "누구겠어?" "브레인 피어슨일 테지 뭐. 그가 돌아와 있고, 넌 그를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거 지? 그래서 일부러 저런 요란스런 드레스며......." "브레인이 아니야." 목안에 뜨거운 것이 확 치미는 것을 느끼면서 보비는 쌀쌀하게 부정했 다. 메리베스는 실망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럼 누구니?" "랠프 굿맨을 위해 둘이서 축하의 만찬을 들기로 했어. 어제 그의 승진이 내정되었거등." 메리베스의 얼굴에 떠오르던 생생한 호기심은 금방 싫증난 표정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런 일 때문에 일부러?" "그리고 랠프고 오는 이유는 달리 또 있어." "그래? 그게 뭐니?" 거의 다 먹어가던 샐러드에서 얼굴을 들고 메리베스는 물었다. 보비는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쇼핑센터에 눈길을 보냈다. 망설이는 것 같은 그녀의 표정을 메리베스는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내용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나한테 무언가 중대한 이야기가 있대." "그게 무엇이지?" 하고 메리베스가 물었다. 보비는 시선을 돌려 친구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마 내게 결혼을 신청할것으로 생각해." 메리베스의 눈이 둥그래졌다. "농담이겠지?" "왜 내가 농담을 하겠니." "랠프 굿맨이 너한테 프러포우즈한다구?" "네 말투로는 뭐 안 좋은 일처럼 들리는구나." 보비는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 누가 안 좋은 일이랬니? 하지만 이처럼 걸맞지 않은 이야기도 들어 본 일이 없어." 서슴없이 말하는 엉뚱한 소리에 보비는 슬그머니 부아가 났다. 두 손을 들고 찬성해 주리 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처럼 쌀쌀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솔직한 것은 좋으나 이렇게 무 례하다면 얘기가 다르다. "그런 말이 어디 있니?" 보비가 딱딱하게 말했다. 메리베스는 표정을 좀 누그러뜨렸다. "널 화나게 할 생각은 없었어, 보비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게 되 지 않니?" "그에 대한 내 마음에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 알면서 그러니?" "그라니?" "물론 랠프지." 보비는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샐러드 접시를 가지러 온 웨이터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메리베스는 말했다. "네가 랠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난 모른다. 지금까지 그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해 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사실 난 방금 네가 한 말에 깜짝 놀랐어. 데이트도 거의 해보지 않은 남자하고 결혼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안 하긴 왜 안 해! 우리는 여러번 같이 다녔어. 하지만 그것은 별문제가 아니야. 내가 AM AC에 근무를 해온 2년 동안 랠프를 가까이에서 잘 봐 왔고, 그가 어떤 타입의 남자인지 어떤 인생을 살려고 하는지 난 잘 알고 있어." 메리베스는 뭔가를 기다리는 얼굴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니?" "할 이야기가 얼마든지 있지 않니. 이럴테면 그를 사랑하고 있다던지......" 보비는 숨을 삼키고 상대방의 시선을 피했다. "물론 난 그를 사랑하고 있어." 별로 설득력이 없는 자기의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정말?" 메리베스는 노골적인 불신을 드러내고 말했다. "언제부터?" 메리베스는 자기에게 향해진 보비의 초록빛 눈에 노여움이 깃들여 있는 것을 보았다. "언제부터라니, 그런 건 아무러면 어떠니? 사랑하고 있다고 했으면 그것으로 됐지. 그리고 잘 되어 나가는 결혼은 꼭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야." 이 마지막 말은 메리베스의 직감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지나지 않았다. 보비 모로는 우주인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랠프 굿맨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 다. 메리베스는 그런 친구를 바라보기가 안타까왔다. 보비는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속이 고 있는 것이다. 메리베스는 그런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걱정이었다. "그 일에 대해서 랠프의 생각은 어때, 결혼에 대해서 말이야?" "아직 프러포우즈를 받지 않았다면 그 일에 대해서 좀 생각할 시간이 있는 셈이구나." "난 이미 생각했어." 강한 어조로 보비는 말했다. 그때 웨이터가 주문한 음식이 날라왔다. 그러나 먹음직하게 조리된 시프트 그레이프조차 보비의 식욕을 돋우지는 못했다. 메리베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레이프를 먹기 시작 했다. "그리고 난 이미 마음을 정했어, 랠프 굿맨하고 결혼하겠다구." 메리베스는 조심스럽게 표정을 숨기고 친구를 쳐다보았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예상도 못 했다. 보비는 언제나 신중하기 이를 데 없는 성질이고, 성급하게 결론에 뛰어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문제의 뒷면에는 적어도 표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을거야. 잠시 둘은 말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메리베스는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다가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 다. 틀림없이 브레인 피어슨과 관계가 있는 거야! 보비가 입으로는 뭐라고 하든 지금도 그 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원인이 아닐까? 사랑이란 것은 뜻밖의 방향으로 사람을 몰아가는 수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사람에게 가장 어리석 은 짓을 시키기도 한다. 옷장의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알아내려고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보비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 라벤더의 드레스는 오늘 오전에 입어 보았을 때보다 왠지 달라 보였다. 그렇지. 생각하던 것보다 너무나 대담한 옷이다, 라고 보 비는 인정했다. 몸의 선이 너무 뚜렷이 드러나 조심스런 주름 장식의 네크라인도 가슴에 찰싹 달라붙는 천 때문에 조금도 점잖게 보이지가 않았다. 이 드레스로 결정한 것은 잘못이었다. 보비는 갑자기 깨달았다. 아무리 보아도 랠프의 마음 에 드는 디자인이 아니야. 만일 브래인이라면 좋아하겠지만, 랠프는 아무래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보비는 중얼거렸다, 브레인이 어떤 드레스를 좋아하든 내가 알 바 아니야." 그녀는 방에서 나와 이미 마쳤던 화장을 다시 고치려고 욕실로 들어갔다. 브레인 생각이 난 것은 메리베스 탓이야. 이 2주 동안 계속 머리에서 브레인을 몰아내고 있었는데...... 레 스토랑에서 메리베스가 그런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에 완전히 마음이 흔들려 버렸어. 그 뒤로는 마음이 무거워서 저녁 준비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힘이 들었던 것이다. 랠프는 지난주에도 토요일, 일요일에 걸쳐 플로리다로 날아갔었고, 그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에 보비도 매우 감탄했다. 일요일 저녁에 그를 공항으로 마중 나가, 둘이서 식사를 하 러 갔다. 그때 랠프는 요즘 볼 수 없었던 쾌활한 모습이었고, 부모의 용태며 플로리다의 쾌적한 기후에 대해서, 거의 혼자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끝에 보비는 랠프를 그의 타운 하우스까지 바래다 주었고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더 이상 거기 머무를 수가 없었다. 랠프 는 짐을 내린 후 차의 뒤쪽에 서서 브리프케이스 속을 더듬어 열쇠를 찾으면서 보비에게 따뜻한 웃음을 보냈다. 그는 한순간 그녀의 매끄러운 볼에 입술을 대며 사랑이 담긴 가벼운 키스르 했다. 보비는 그때, 둘의 관계를 더 깊이 발전시키는 데 이처럼 조심스럽고 인내성 있는 남자가 달리 또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보비는 마지막 준비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이 앞치마의 뭔가가 어떤 기억 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브레인이 둘렀던 앞치마가 아닌가! 불쾌한 얼굴러 그런 기억을 떨어내고 그녀는 하던 일에 주의를 돌렸다. 정각 일곱 시 반에 초인종이 울렸다. 보비는 큰 소리로 "잠깐요." 하고 말하며 급히 나갔다 갈색 바지, 연노랑의 셔츠에 받쳐 입은 암갈색의 스웨터, 튀어나지 않으면서 품위가 있는 옷차림을 한 랠프는 핸섬해 보였다. 플로리다에 가서 사뭇 어머니의 침대 곁에만 붙어 있 었던 것은 아닌 듯, 평상시는 혈색이 안 좋던 그의 얼굴이 지금은 건강한 밀빛으로 타 있 었다. 보비는 지금까지 이토록 핸섬하고 기운이 넘치는 랠프를 본 적이 없었다. "어서 오세요." 보비는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았다. "흐음!" 랠프는 코를 씰룩거렸다. "뭐지? 무척 맛있는 요리 같군." "여러 가지가 있어요." 거실로 들어가는 랠프의 뒤에서 보비는 문을 닫았다. "멋있군." 랠프는 두 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찌르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당신은 대단한 장식가로군." "고마와요. 포도주를 드시겠어요?" "그거 좋지." 식혀 놓은 포도주의 코르크 마개를 빼려고 하면서 보비는 자기의 손이 희미하게 떨고 있다 는 것을 알았다. 마개를 뽑아 병 옆에 놓고 와인글라스를 두 개 집어 들면서 '참 바보같 군.' 하고 자신을 나무랐다. 그러나 그 떨림은 손뿐 아니라 내부에까지 스며들었다. 두 개의 와인글라스를 채우자 보비는 거실로 시선을 돌려 긴의자 위에서 침착하게 잡지를 들추고 있는 랠프를 보았다. 그녀는 슬쩍 반잔쯤의 포도주를 목에 넘기고 다시 글라스를 채웠다. 이런 짓을 하는 자신이 뜻밖이었지만, 갑자기 덮쳐드는 신경 발작을 누르자면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빈 위장에 온기가 퍼져 나갔다. 거실로 들어가 커피테이블 위에 와인글라스를 내려놓을 무 렵에는 이미 알콜의 효험이 나타나 있었다. "자아, 한 잔 드세요." 보비는 긴의자 옆의 의자에 앉자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어 땠어요? 어제처럼 좋은 하루였어요?" 랠프는 쾌활하게 웃었다. "어제처럼 좋은 날이 어디 그리 흔하겠소? 물론 부사장이라도 된다면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예요." 랠프가 성급하지 않으면서도 장래를 노리는 야심가라는 것 이 기뻤다. 두 사람은 회사며 랠프의 승진에 얽힌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비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자기도 가끔 의견을 말했지만 머리 한구석에선 전혀 다른 일을 생 각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신경이 흥분되는 진짜 이유는, 랠프를 집으로 초대했을 때 그가 슬쩍 입에 올린(뭔가 중대한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랠프는 편안한 모습이었으나, 그래도 두 사람이 사귀어 온 것을 생각하면 약간 딱딱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당연한지 모른다고 보비는 생각했다. 아마 랠프도 그녀의 두 배는 신경이 곤두서 있겠지. 보비는 그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언젠가는 말하게 될 결혼신청을 랠프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될수록 일찌감치 매듭을 짓고 식사를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음식과 두 병의 포도주는 처음의 긴장을 푸는데 도움이 되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 렵에는 두사람 다 마음이 누그러져, 잘 구워진 캐롯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웃고 수다 를 떨었다. 그들이 그리고 있을 때 울린 초인종 소리는 뭔지 먼 세계의 소리 같았다. 보비는 랠프가 말할 때까지는 그 소리르 듣지 못했다. "이런 시각에 도대체 누가 왔을까?" 메리베스일 리는 없고. 틀림없이 이웃사람이겠지." "실례해요." 보비는 일어서서 거실을 나와 현관으로 갔다. 문을 열었을 때의 쇼크는 너무나 컸고, 근처에 벼락이 떨어졌다 해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몸에 꼭 끼는 빛바랜 청바지에 V네크의 풀오우버를 입어 곱슬거리는 가슴털이 드러나 보이는, 남을 압도할 만큼 섹시한 차림의 브레인이 거기 서 있었다. 바다같이 푸른 눈이 보비의 우아하면서도 놀랄 만큼 관능적인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몸에 찰싹 붙는 라벤더 천에 감싸인 그녀의 육체의 기억에 브레인의 내장은 뒤틀리는 것 같았다. 빙그레 웃고 그는 등에 돌리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어 싱싱한 데이지의 꽃다발을 내밀었다. "데이지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소. 장미를 구할 수 없어서." 보비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커다란 아름다운 눈으로 멍하니 그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전혀 예기치 못한 브레인의 출현은 바로 지금 이 집에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 이상 으로 보비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욱신거리는 것 같은 아픔이 되살아났고, 그와 함께 지냈던 밤의 강렬한 기억이 날카롭게 그녀의 가슴을 궤 뚫었다. 브레인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안에 들여보내 주지 않겠소?" 보비는 망설이더니 바깥 복도로 나와 문을 닫았다. "요전처럼 말없이 들어오지 않은 것이 놀랍군요."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물었다. "가지러 왔어요?" 그녀의 딱딱한 동작에 브레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갑자기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일까? "무엇을?" "차말이에요." 보비는 초조하게 대답했다. 그는 왜 이런 짓을 하는가? 그토록 여러번 의사 표시를 했는데...... 브레인이 전화를 걸어 올 때마다 그의 고막이 찢어지건 말건 큰 소리를 내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던 것이다. "그건 어제 찾아가서 돌려받았소." 브레인은 그녀가 물론 화를 쏟아놓을 것으로 각오하고 온 것이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설명할 기회라도 준다면..... "그래요? 그럼 무슨 일로 여기에 왔지요? 시합이 있어요?" 브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주 토요일에," 거기에서 말을 끊더니 조심스럽게 다시 이었다. "보스턴에서 시합을 해요 마지막 시합을요.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러 온 것은 아니오." "어마 그래요?" 어쩌면 이렇게 쌀쌀해질 수 있을까! 가까스로 감정을 누르고 브레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왕 여기까지 온 바에야 쉽게 물러날 수는 없다. "안에 들어가야 이야기하기가 쉬울 텐데." 브레인은 보비가 차려입은 라벤더의 드레스와 자기의 평상복을 견주어 보았다. "이런 꼴로 안 됐지만 난......" "미안하지만 우린 더 이상 이야기 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안으로 들어오랄 수도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보비는 씁쓸한 감정이 가슴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그가 눈앞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라면서도 깊은 절망에 가슴이 잡아찢기는 것 같았다. "왜?" 보비와 마찬가지로 브레인의 목소리도 딱딱했다. 초록빛 눈이 한순간 흔들리더니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손님이 와 있어요." 그때 브레인의 행동은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부츠를 신은 발로 냅다 문을 걷어찼고, 기세좋게 열린 문은 고무의 도어 스톱에 부딪쳐서 도로 확 튀겨왔다. 가구 그늘에 반쯤 가려져 있던 랠프가 홱 돌아보았으나, 이미 그 문은 거의 닫히고 있었다. 그러나 브레인은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는 데 충분했다. 브레인은 지금까지 2, 3주 동안 별의별 상상을 다 굴리고 있었으나 이 짧은 몇 초 동안에 목격한 것 같은 다정스런 장면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부드러운 음악, 아늑한 촛불,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 비어 있는 두 개의 포도주 병...... 낭만적인 밤을 한껏 즐기는 두 연인. 보비에게 향해진 매서운 눈초리에는 위험하고 거친 빛이 깃들여 있었다. 너무나 잘 아는 매흑적인 입이 일자로 꿈틀꿈틀 경련하며 그 핸섬한 얼굴에 험악한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왜 이런 것이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브레인은 아직도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에 불길이 이는 듯한 눈을 향했다. "브레인 나......"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보비는 더듬거렸다. "내가 방해를 한 것 같군." 브레인은 억양이 없는 목소리로 말하고 쓸쓸하게 웃었다. "하지 만 날 피에로로 만들 필요는 없었던 거야." "당신을요?" "아니, 좋아요" 브레인은 야멸차게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에 뒤따른 그의 동작에 당황하여 보비는 저도모르게 목에 손을 대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는 데이지의 꽃다발을 냅다 계단 손잡이를 향해 던졌던 것이다. 가련한 하얀 꽃잎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는 뒤를 홱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요" 부츠가 콘크리트 계단 위 에서 큰 소리를 울렸고, 계단을 두 단씩 내려가며 급히 멀어져 갔다. 보비의 온몸은 와들와들 떨렸고, 혼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를 쳤다. 랠프가 안에 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생각나 보비는 있는 힘을 다해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되찾으려고 했다. 이런 일은 바로 잊어버리자! 아니 , 아예 없었던 일로 생각하는 거야. 마음을 잡아뜯는 쓸쓸한 생각을- 방안에 랠프가 있는 것을 본 순간 브레인이 놀라며 짓던 깊게 상처받은 것 같던 표정을 한시바삐 지워 없애야 한다. 그것이 제일 좋은 일이야. 보비는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맺어짐도 있을 수 없다고 브레인이 납득해 준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닌가. 천천히 굳은 의지와는 관계없이 고뇌에 일그러진 브레인의 얼굴이 선명하게 마음에 되살아 났다. 브레인이 그렇게 괴로워 할 줄이야! 결코, 결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랠프는 몸을 돌려 들어오는 보비를 쳐다보았다. 더 이상은 불가능할 만큼 있는 힘을 다해 보비는 침착한 표정을 되찾았다. "무슨 일이 있었소?" 랠프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문이 냅다 열려서 왜 그러나 했 소" 보비는 손을 흔들고 웃음을 참는 시늉을 했다. "마침 문에 몸을 기댄 거예요. 방금 그는 옆집 사람이예요." 테이블을 끼고 마주 앉아 아무 렇지도 않은 듯이 거짓말을 했다. "내일부터 여행을 떠난대요. 언제나 집을 보아 달라는 부탁을 받아요." 랠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와인 글라스를 들어 잔을 비웠다. 그는 불편한 듯이 몸을 움직였 고,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거실로 갈까요?" 세 병째의 포도주를 따서 두 개의 글라스에 채우면서 보비가 제안했다. 그들은 글라스와 병을 거실로 날랐다. 랠프의 초초한 듯한 모습에 보비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그녀는 무엇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이 랠프를 쳐다보았다. "보비, 난......" 랠프는 말을 꺼내다가 중단하고 글라스를 집어들어 또 포도주를 다 들이켰 다. 보비는 바로 병을 들어 또 한 번 글라스를 채우려고 했으나, 랠프는 한 손을 들고 막았 다. "아니...... 이제 그만." 그는 굳어진 웃음을 띠었다. "정말 맛이 좋았소." "고마와요." 보비도 웃는 얼굴을 지으려고 애쓰면서 대답했다. 랠프는 기침을 하더니 갑자기 본제로 들어갔다. "보비, 내가 오늘 저녁 당신한테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 말 기억해?" 랠프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느끼며 이 문제가 어서 빨리 마쳐지기를 바라면서 보비 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랠프는 긴의자에 가볍게 걸터앉아 앞으로 몸을 구부리고 두 손바닥을 비볐다. "그 일말인데......"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보비를 쳐다보는 그의 입술에서 눈으로 웃음이 번져갔다. "제일 먼저 당신한테 알리고 싶었소...... 난 다음달에 결혼하게 되었소." 보비는 커다란 눈을 까막거리고 그 뜻밖의 고백을 이해하려고 얼굴의 표정을 굳히면서 멍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뭐라구요?" 랠프는 쑥스런 듯이 말했다. "당신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는 잘 알아요...... 왜 좀더 일찍 이야기해 주지 않았느냐는 거지?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소. 모든 일이 분명해질 때까지는." 몹시 쇼크를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보비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해지다니, 무엇이요?" "레베카, 즉 내 약혼자말인데......" 다시 손바닥을 비비고는 그 고백을 하고 났기 때문에 훨씬 마음이 편해진 모습으로 말을 계속했다. "그녀는 언제 일을 그만둘까 망설였고, 이 일을 결정지은 것도 바로 지난 목요일의 일이었소. 앞으로 3주가 지나면 그녀는 이쪽으로 오고, 다시 2주 뒤에는 식을 올리게 돼요." 거기서 입을 다물고 랠프는 기대를 가지고 보비를 쳐다보았다. 뭔가 의견이나 축하의 말을 기다리는 것이 분명했다. 보비는 대학의 이상심리학 강의에서 큰 쇼크에 일시적으로 대응 하려는 사람의 심리에 대해서 들은 일이 생각났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그녀의 두뇌는 본래의 자기를 봉해 넣어 버리고 지금까지 그 존재조차 몰랐던, 그러나 이 장면에 매우 도움이 되는 또 하나의 보비를 무대에 등장시켰다. 그 <또 하나의 보비>는 따뜻한 웃음-입술 위에 얼어붙은 것처럼 느껴졌으나-을 띠고 이 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참 반가운 일이군요, 랠프. 정말 축하해요. 하지만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지 요?" "사실을 말하자면, 둘이 알게 된 지는 오래 되었소. 레배카하고는 대학 시절에 어울렸는데, 졸업하고 바로 헤어졌지. 과거는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신한 테는 이야기하지 않았소. 그런데 어머니가 수술을 받게 되어 내가 플로리다로 갔을 때, 거 기서 7년 만에 그녀를 만났어요." 랠프는 웃었다. "그렇게까지는 안 됐지만, 금방 둘이는 예전의 관계를 되찾은 것은 사실이오 지금까지 아 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뭐 하나 분명하게 결정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오. 몇 번인가 플로 리다를 오가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일을 결정했어요. "당신은 언제나 시간을 낭비하는 법이 없지요." "정말 낭비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랠프는 긴의자 등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고 이제는 완전 히 마음이 누구러져서 태평스런 모습이었다. 그날 저녁, 그의 약혼자 레베카에 대해서 보비 는 실컷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빠졌다. 랠프를 현관까지 배웅했을 때, 보비의 다리는 마비된 것 같았다. 남은 포도주를 보비 혼자 다 마셨던 것이다. 이 곡예의 값은 내일 아침 듬뿍 치르게 되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덕분에 잠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게 되었으니까. 랠프는 입구에서 머뭇거렸다. 보비는, 그가 바로 돌아가 주지 않으면 자기는 이 자리에서 그대로 잠들어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보비, 우리가 데이트하던 일말인데......" 랠프는 멈칫멈칫하면서 보비의 눈을 외면하며 말 했다. "데이트라니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가까스로 하품을 누르며 보비는 시치미를 뗐다. 눈앞이 흔들리고, 랠프가 매우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보였다. 갈색의 귀여운 곰 같군. "함께 영화를 보거나 식사했던 일말이오." "아아! 그거요?" 내 귀에도 그렇게 들리니, 그도 내 혀가 꼬부라진 것을 눈치챘겠지? "그리고......" 랠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서 돌아가 주면 좋겠는데, 도데체 그는 무엇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는 것일까? "키스의 일말인데......" 보비는 자기의 몸이 비틀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가까스로 누르며 그를 쳐다보았다. 금방이 라도 그 자리에 쓰러져 잠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정신없이 취한 모양이다. "그때는 아직 레베카아 내가 어떻게 될지 몰랐던 거요. 언젠가는......즉, 난 사뭇 당신과 내 가......" 보비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속삭였다. "이제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알고 있어요." 랠프는 안심이 된 듯이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손잡이를 잡아 문을 당기려다가 손을 놓고 보비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당신은 최고로 훌륭한 친구요." 보비는 안정되지 못한 손을 들어 그의 턱을 잡았다. "당신도요." "잘 자요." 랠프는 문을 당겨 열었다. "맛있는 식사 고마웠소." 그는 멈추어 서서 몸을 구부리자 무언가를 집어들더니, 하품을 깨물고 있는 보비에게 무참 하게 시들어 버린 데이지 꽃다발을 내밀었다. 보비는 흠칫 얼어붙은 것처럼 서 버렸다. "왜 이런 것이 여기에 있을까?" 랠프는 말했다. 보비는 흥미없다는 듯이 어깨를 추슬렀다. "글쎄요, 왜일까요. 그럼 잘 가요, 랠프. 월요일에 또 봐요." 랠프는 손을 들어 보이고 걸어갔다. 천천히 문을 닫는 보비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고. 시 든 꽃다발이 노란색과 흰색으로 희미하게 흐려져 보였다. 그녀는 커피도 하지 않고 비틀비 틀 침실로 들어가면서 목에 매어오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 │ ▶ 번 호 : 1306/1333 ▶ 등록자 : GARAKJI │ │ ▶ 등록일 : 2001년 12월 16일 22:38 │ │ ▶ 제 목 : [마마]열쇠도둑 15~16장{완결} - J. 제프리즈 │ └───────────────────────────────────┘ 이튿날 아침 잠이 깬 보비는, 침대에서 내려오기가 이처럼 힘이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생각 했다. 지금까지 과음한 일은 몇 번 있었지만 오늘 같은 괴로움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웠다. 입 안은 석면에 뒤덮인 것 같은 느낌이고, 구토가 일어났다. 머리는 욱신욱신 아파서 마치 누군 가가 떨어뜨린 보울링 공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일 때 마다 결리는 것이 었 다. 어제 그 일이 현실로 일어난 일이었을까? 나의 인생은 정말 삐걱거리며 급정거해 버린 것 인 가? 아아, 생각하기만 해도 머리가 돌 것 같군! 눈을 감고 보비는 다시 한번 잠속으로 도망 치 려고 했으나 조금도 졸리지가 않았다. 떨리는 것 같은 불가해한 느낌이 몸에 스며들었다. 보 비는 이런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면 일어나서 뜨거운 물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몸을 움직이니 모든 증상이 더욱 악화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등을 후려치는 샤워의 찌르 는 것 같은 기세가 가슴 밑에 팔을 감고 서 있는 보비에게는 고마운 약이 되었다. 오늘이 일요 일이기가 다행이었다. 만일 월요일 아침에 이런 꼴이었다면 도저히 회사에 나갈 수가 없었 을 것이다. 그녀는 수도 계량기 미터가 오르건 말건 샤워 밑에 무작정 서 있었다. 그러자 일시 적 으로 뒷전으로 밀려났던 괴로운 일들이 후두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서서히 되살아났다. 나 에 대한 랠프의 감정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이런 얼간이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그 는 나보고 <좋은 친구>라고 말했다. 보비 자신도 랠프에 대해서는 얼마나 똑같은 생각을 했 던가. 사람은 준 것만큼 밖에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보비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생각했 다. 몸의 방향을 돌리고 그녀는 김이 나는 물줄기에 얼굴을 들이댔다. 모든 회한과 어리석음을 씻어내려고나 하는 것처럼. 쏟아지는 더운물을 눈을 감고 머리와 얼굴에 받으며 얽혀진 생 각 을 풀어 보려고 보비는 이성을 활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랠프이 행복을 기쁘 게 생각했다. 랠프는 틀림없이 레베카의 좋은 남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진정으로 그들의 행복한 결혼을 축하할 수 있다. 그 사실은 지금까지 그녀가 메리베스나 자신에게 나는 랠프를 사랑하고 있다고 거짓말해 온 것을 여지없이 폭로해 놓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우정말고는 다른 아무 감정도 자라날 수 없 다는 것을 보비는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랠프를 사랑할 수 있 다 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새삼 자신의 어 리석음에 놀라면서 보비는 랠프가 프로포즈해 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그런 것 은 그녀가 바라지도 않은 일이었다. 겨우 손에 넣은 조그만 냉정도 그때 머리에 떠오른 일-어젯저녁 계단에서 있었던 광경에 뒤 흔들려 버렸다. 랠프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보다 브레인의 출현이 훨씬 큰 아픔이었다. 브레 인 에게 끌리는 마음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고 있었다. 지금도 못 견디게 브레인을 찾고 싶었고, 그 갈망이 보비를 괴롭히고 있었다. 눈 앞에 가로놓여 있던 진실의 문이 열리기라도 한것처럼 그때 보비는 지금까지의 그녀의 생활철학으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더 깊은 진리에 생각이 미쳤다. 사람은 사랑하기에 <알맞은>사람도, 결혼상대로 <알맞은>사람도 주문해 올 수가 없는 것이다. 인생에는 뜻밖 의 해프닝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사랑>도 그 부류에 들어가는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은 마치 사는 세계가 서로 달라서 알맞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 한 것과 같았다. 그 남자는 직업상 늘 여기저기를 뛰어다녀야 했고, 남녀의 교제에 대해서는 극 단적으로 자유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자기는 그것을 인정했지 않은가. 보 비 모로는 브레인 피어슨을 사랑하고 있다고. 난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아아, 메리베스가 이 일을 들으면 얼마나 우쭐해 할 것인가? 자기의 인생을 하트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계획대로 살아갈 결심을 했을 때 는 <사랑>이 꼭 예정대로 가주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를 내려다보던 브레인의 일그러진 얼굴이 뇌리에 스쳐 보비는 부르르 몸을--마음까지 도--떨었다. 집안에 있는 랠프를 보았을 때의 브레인의 반응이 뜻밖에 너무나 거세었기 때 문 에 보비는 혹시 그는 진지한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제 와선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온 몸에 비누칠을 했다. 그렇게 하면 자기의 어리석음이 조금은 씻겨나가기라도 하 둣이. 다음주, 보비는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판에 박은 일을 날마다 해 나가고 있었다. 점심때에 회 사 동료들과 같이 나가는 것이 고통이었으나 외부의 자극에 비참한 느낌을 잊어버리려고 될 수록 평상시와 다름없는 태도를 간직했다. 그러나 다시 혼자가 되어 악몽에 시달릴 때는 그것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전에는 자립 의 심볼이었던 혼자 사는 아파트는 무서운 고독속에 그녀를 집어 삼켰다. 앞으로의 인생은 줄 곧 이렇게 보내야 한단 말인가? 보비는 도저히 버티어 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브레인을 생각나게 했다. 금요일이 되자, 월요일까지의 주말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하고 보비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이처럼 일을 고맙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일을 하고 있으면 미칠 것 같은 기분에선 헤어날 수 있었다. 토요일에 그녀는, 무엇이든 기분을 돌릴 수 있는 계획을 세워 둘걸, 하고 생각했다. 메리베스에게 전화를 걸어보자. 아마 나의 바보같은 행위에 화를 내고 있을테니, 나의 태도를 사과하고 화해하는 거야. 메리베스는 집에 없었고, 집보기 전화가 응답했다. 그런 기계하고 말하는게 싫었으나 하여 튼 메시지를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부모한테 전화를 걸어 따뜻한 어머니의 목소리로 좀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오랫동안 미루 어 오던 대청소를 하여 집안을 온통 뒤집어 놓았다. 점심때가 지나도 메리베스로부터는 전 화가 없었다. 보비는 혼자서 점심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메리베스가 있으면 그녀가 좋아하 는 피자를 사와 함께 먹자고 할 생각이었으나 자기 혼자 먹으려고 일부러 사러 나가기는 귀찮 았다. 요즘은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아침 식사를 걸렀기 때문에 이런 중노동을 하고 나면 배 가 무척 고팠다. 보비는 거실을 지나면서 텔레비전을 켜고는 무슨 프로가 나오는지 보려고도 하 지 않으며 주방으로 걸어갔다. 토스트에 치즈를 끼우고 우유를 따른 글라스와 함께 쟁반에 얹어 거실 테이블로 가져왔다. 의자에 앉아 먼저 우유로 목을 축이자 그제서야 텔레비전에 나오고 있는 스포츠 프로가 눈에 들어왔다. 토스트를 입으로 가져가던 그녀의 손이, 두 사람의 농구 해설자가 전반전의 시합에 대해서 주고받는 말을 듣고 얼어붙었다. 후반전이 곧 시작될 판이었으며, 우연히도 브레인의 이름이 자주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토스트를 접시에 올려놓고 몸을 꼿꼿이 하고 앉아 해 설자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피어슨은 시합 경험이 풍부하니까요." 해설자 한사람이 말했다. "그만한 재능과 우수한 기술을 가진 제 2의 피어슨을 찾아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런 점은 나도 동감입니다. 그 선수만한 경험을 가진 선수는 별로 없을 테니까요. 많은 팬 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한다는 피어슨의 발표에 놀랐습니다. 물 론 그는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지만, 우리 보도진으로서는 정말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양팀 다 불꽃 튀기는 시합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는 후반전이 어떻게 될 지 전혀 예상을 할 수가 없군요." "그렇습니다. 셀티크 팀이 6포인트 뒤지고는 있으나 분명한 것은…." 천천히 손을 뻗어 토스트를 집어 기계적으로 입에 넣었지만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브레인 이 은퇴해? 보비는 귀를 의심했다. 어째서 그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을까? 물론 그런 문제를 하룻밤 사이에 결정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브레인이 지금까 지 다른 사람에게도 비밀로 붙여 온 문제를 보비에게만 특별히 이야기할 까닭도 없었다. 혹시 어쩌면 요전에 갑자기 찾아온 것은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심장이 격심하게 방망이질 치기 시작하고, 우유를 마시려고 글라스를 잡 은 손이 떨렸다. 전화벨이 울렸다. 보비는 일어섰으나, 테레비전에 농구코트가 비쳐지고 다른 선수들 속에 섞 여 있는 브레인에게 렌즈의 초점이 맞추어졌기 때문에 다시 의자에 앉았다. 벨 소리도, 해설 자의 목소리도 희미해져 버렸다. 브레인을 클로즈업한 텔레비전 화면은 지금까지도 결코 잊 을 수가 없는 그리운 그의 모습을 리얼하게 비쳐내어 마치 그가 이 방안에 있는 것처럼 느 껴 졌다. 날카로운 푸른눈, 사내다운 모난 턱, 목께에서 물결치고 있는 숱많은 갈색 머리...... 저 도 모르게 브라운관에 손을 대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보비는 두 손을 꼭 틀어쥐고 있었다. 보비의 가슴은 무서운 템포로 고동쳤다. 그는 마치 또하나의 브레인 피어슨 같았다. 진짜 브 레인 피어슨! 환상 속에 끌려든 보비는 그때 마침 코트에서 정지한 브레인이 카메라 렌즈를 통하여 이 방안을 들여다 보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돌아와 달라고? 아아, 부탁이에요. 돌아와 줘요. 당신하고 이야기하고 다시 한번 당신의 품에 안겨 얼마나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는가를 말하고 싶어요...... 브레인의 모든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며 보비는 그 뒤의 시합을 계속 지켜보았다. 농구에 대 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몰랐지만 브레인이 남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를 건달이라고 단정한 것은 잘못이었다. 그에겐 깊은 인간성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몸을 딱딱하게 긴장시키고 앉아 보비는 볼륨을 높인 실황중계에 귀를 기울였다. 캐피털센 터 에 연습 광경을 보러 갔을때의 인상이 되살아나고, 그때처럼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코트 안 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질주하는 여러 개의 몸이 부디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고 브 레인에게 이야기 했었지...... 그때 공포로 굳어진 보비의 눈앞에 소음과 긴자잉 격심하게 소용돌이치고, 두려움이 현실 의 것이 되었다. 브리츠 팀의 맹렬한 공격중에 농구대 밑에 있던 한무리의 선수들이 서로 얽히 고 부딪쳤다. 뛰어오던 선수 하나가 발을 멈추지 못하고 1미터 가량 슬립하는가 싶자 뒤엉 킨 그룹에 충돌하여 플로어에 넘어졌다. 갈색 머리가 흔들리고, 괴로운 듯이 일그러진 브레인의 얼굴이 브라운관에 비쳤을 때 보비는 가슴이 콱 막혔다. 너무나 큰 쇼크에 목을 손으로 누르며 해설자의 말을 들으려고 했다. 그러나 공포에 몰린 보비에게는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브레인은 아직도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선 수들이며 의료반이 플로어에 넘어져 있는 브레인을 에워쌌기 때문에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 어나고 있는지 잘 볼 수가 없었다. 장면은 확 바뀌어 짜증스런 광고가 흘러나오고, 보비는 애 가 타서 긴의자를 손으로 두드렸다. 장장 일분 30초의 광고가 있은 뒤에 다시 시합이 시작 되 었지만 브레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보비는 귀를 세우고 가까스로, 그가 부상을 입고 - 아마 중상이겠지-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뉴스를 들었다. 해설자가, 프로선수로서 마지막 시 합 에서 이런 상태가 된 브레인의 불운에 대해서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보비는 안 절부절 못했다. 그가 무사하기를..... 보비는 일어서서 거세게 리모콘을 두드려 텔레비전을 껐다. 센티멘털한 뒷말 같은 것은 듣 고 싶지도 않았다. 거실에서 주방, 그리고 다시 거실로 정신없이 걸어 다니다가 거의 손을 대 지 않은 쟁반을 치우고 개수대에서 글라스를 헹구기 시작했다. 아니야, 이런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어! 수도꼭지를 잠그고 보비는 거실로 돌아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신경질 나는 녹음 테이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기를 빌면서 서둘러 메리베스의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메리베스니? 돌아와 있었구나." "응. 네 전갈은 들었어. 조금전에 너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아아, 메리베스. 나 지금 너무 걱정이 돼." 보비는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왜 그러니?" 메리베스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너 어디 아프니?" "아니야. 저어..... 난 괜찮아. 브레인말인데. 그가 부상을 입었어. 나 어쩌면 좋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겠니?" 메리베스는 방금 들은 친구의 말에 놀라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브레인이 다시 등 장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요 일주 동안 보비하고는 한번도 이야기를 한 일이 없었다. 틀 림없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새삼 물어볼 필요도 없어. 언제나의 직감이 번뜩여서 마침내 보비가 제정신이 난 것을 메리베스는 알아차렸다. "알았어. 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줘." 메리베스는 침착하게 말하고, 동요되고 있는 친구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더니 다른 말은 묻 지않고 그녀에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그녀가 곧장 달려오겠 다는 것이었다. 30분도 되지 않아서 문에 노크소리가 났다. "네가 할 일은 지금 바로 그에게 달려가는거야." 메리베스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의 말을 따르려고 하는 조그만 소녀 처럼 보비는 진지하게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세한 말은 묻지 말아 줘. 보스턴에 친구가 있는데, 그녀가 브레인이 입원한 병원을 알아 내 주었어. 서둘러 채비를 하면 로건행 비행기편을 잡을 수 있을거야. 3시 반에 떠나니까 이 제 한시간 반이 남았어. 공항에 내려 렌트카를 빌어 타고 병원까지 달려가는거야." "비행기편은 어떻게 알았니?" 메리베스는 어깨를 추스르고 말했다. "그야 쉽지. 전화로 묻고, 동시에 예약해 놓았어." 글썽이는 눈으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보비는 감동으로 가슴이 막혔다. 그녀는 두 손 을 뻗어 메리베스를 꼭 안았다. "아, 메리베스! 뭐라고 사례해야 할 지 모르겠어." 하고 중얼거리자 포옹을 풀고 상대방의 얼굴을 쑥스런 듯이 들여다 보았다. "지난주 토요일에 내가 그렇게 고집을 부려서 미안해." 메리베스는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말했다. "우린 누구든지 이따금 마음의 병에 걸리는 거야." 보비는 웃었다. "어마, 메리베스. 너한테는 당할 수가 없어!" "이제야 알았니? 자아 서둘러야지, 늦겠어." "응." 보비는 마음을 고쳐먹고 거실에서 뛰어나갔다. 너무나 세게 여는 바람에 침실의 문이 벽에 쾅 하고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짐을 챙겨 정신없이 나가는 친구를 배웅하면서 메리베스는 갈색 눈을 빛냈다. 내 첫 직감 이 딱 들어맞았어. 지금의 보비 모로처럼 완전히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은 본 일이 없어. 간호원 대기실 앞에서 보비는 안절부절 못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당번 교대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때 끼어들어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엘리베이터 옆의 벤치에 앉아 핸드 백 의 가죽끈을 틀어쥐고 기다리고 있던 보비는 간호원 대기실이 가까스로 안정된 것을 보고 일 어서서 유리간막이의 창구로 다가갔다. "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중년의 간호원이 뭘 적고 있던 챠트에서 얼굴을 들었다. "네, 무슨 일이지요?" 가벼운 기침을 한번하고 보비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어.......미스터 피어슨의 병실이 어딘지 말씀해 주실 수 있어요? 접수계에서는 3층이라고 하지만 룸넘버까지는 모르던데요." "미스터 피어슨은 지금 면회사절이에요." 보비는 너무나 실망했다. 멀리서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아니,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하지만 .....하지만 먼데서 면회를 왔는데요......" "유감스럽지만 난 어쩔수 없어요, 아가씨. 의사선생님 명령이니까요. 내일 아침이면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입술을 깨물고 보비는 더 이상 매달려야 소용이 없는 간호원에게 등을 돌렸다. 이제부터 어 떻게 하면 좋은가? 브레인의 방을 찾을때까지 닥치는 대로 문을 열어 보며 병원안을 돌아다 닐까. 결국은 간호원에게 쫒겨나겠지! 별로 좋은 아이디어라고 할 수 없군. 마침 그때 뱃속 에 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보비는 우선 커피숍에 가서 뭘 좀 먹으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은 대기실의 비닐을 씌운 의자에 기대어 잠을 자게 되었다. 정말 불편한 하룻밤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간호원 대기실에 나와 있던 간호원은 아침 이른 시간이지만 집안 사람 이 면 면회해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보비는 자신의 연기력에 스스로 놀라면서 애처러운 목소리 로 거짓말을 한 것이다. "미스터 피어슨은 밤낮으로 진통제를 먹고 있어요." 브레인의 병실을 향해 걸어가면서 간호원이 말했다. "하지만 말상대가 있으면 조금은 기분을 바꿀 수가 있을 거예요." 보비는 방긋 웃었다. "그렇고 말고요." 간호원이 문을 노크하자 신음소리 같은 대답이 들렸다. 간호원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 안 보비는 병실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스터 피어슨, 면회예요." 문을 열고 간호원은 따뜻하게 말했다. "당신 여동생이 찾아왔어 요." "내 여동생........." 하루사이에 자란 수염으로 그늘진 얼굴로 그는 요전에 아파트를 떠날 때 같은 눈매로 이쪽 을 노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브레인." 머뭇머뭇 병실에 발을 들여 놓은 보비는 살며시 인사했다. 그는 여전히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바다같이 새파란 눈 속에 어떤 빛이 번뜩인 것 같았다. 브레인은 빈정거리듯이 한 쪽 어깨를 치켰다. "누이 동생이라고?" 마음이 꽉 죄는 것을 숨기려고 애쓰면서 보비는 그럭저럭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가 나뭇 잎처럼 몸을 떨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이른 시간에 당신의 병실에 들어오자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브레인에게 걸어갔으나, 침대에서 좀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섰다. "어젯저녁의 일도 있어, 또 쫓겨날까 싶어서요." "어젯저녁? 그게 무슨 말이오?" 입술을 핥으며 보비는 자기의 볼이 확 물드는 것을 의식했다. 그녀는 기침을 하고 말했다. "어젯저녁 당신을 보러 왔는데, 당직 간호원이 면회시켜 주지 않았어요." "어젯저녁에도 여기에 있었다구? 병원에?" 보비는 고개를 숙이고 조금 끄덕였다. "어디서 묵었소? 어떻게 보스턴까지........그리고 왜 찾아왔지?" 마지막 질문은 보비의 가슴을 콱 찔렀다. 그러나 그 아픔을 누르고 그녀는 결심한 듯이 침 대옆의 의자에 가볍게 걸터앉아 핸드백을 무릎위에 놓았다. 잠깐 바닥에 눈길을 떨구더니 고 개를 들고 말했다. "당신이 얼마나 다쳤는지 알고 싶었어요. 당신이 무사한지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 왔 어요." "왜?" 브레인이 심술궂게 물었다. "왜라니요. 당신이 다친 것을 보고......그리고 걱정이 되어서......" "흠, 감동적이군." 브레인은 별로 반갑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고 돌아누우려고 다친 다리를 움직이다가 신음 소 리를 냈다. 보비는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 "괜찮아요?" "물론 괜찮지." 브레인은 빈정거리며 내뱉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줄 알아?" 당황하여 보비의 볼이 다시 뜨거워졌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저 간호원을 불러야 하는가 해서요." 브레인은 벽에 긴 코드로 이어진 조그만 장치를 가리켰다. "만일 간호원을 부르고 싶으면 이것을 누르면 금방 뛰어와요." 보비는 그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야 아무 해결도 나지 않을 것 같 았다. 말다툼을 하러 멀리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화기애애한 회화 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쌀쌀한 냉대를 받을 줄은 모랐다. "브레인, 내가 당신을 만나러 온 것은.........." "뭣 때문이오?" 푸른 눈이 날카롭게 쏘아보는 바람에 보비는 기가 꺾이고 말았다. 보비는 숨을 깊이 들이 마 셨다. "요전 주말에 있었던 일은 정말 유감으로 생각해요. 그것을 말하려고요." "왜?" 브레인은 무뚝뚝하게 물었다. "당신은 나에게 설명할 것이 하나도 없고, 유감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소." "그게 아니에요. 당신이 본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보비는 더금거렸다. "그만큼 보았으면 충분해요. 그런데 그치는 지금 어디에 있소?" "누구말이에요?" 브레인이 비웃음인지 빈정거림인지 모를 고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애인말이지 누구겠어!" 그의 말투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질투가 깃들여 있어서 보비는 당황했다. "랠프는 내 애인이 아니에요." "아하, 랠프라고 하는군. 참 낭만적인 이름이야." "그 이름이 무슨 상관 있어요!" 브레인이 쓸데없는 일에 바보같이 얽매이고 있는 것에 벌컥 화가 난 보비는 톡 쏟아 붙였 다. 자기에게 이런 반응이 나타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랠프는 회사의 동료 직원이에요. 토요일 밤에는 그의 승진을 축하해 주려고 우리 집에 초 대했을 뿐이에요." "무슨 축하인지 알게 뭐야." "보세요, 이런 말을 주고받아야 소용이 없다는 걸 모르세요?" 보비는 애가 타서 한숨이 나왔다. "내가 여기게 찾아 온 것은 어째서 그런 ....... 그때의 사정을 설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브레인은 팔짱을 끼고, 보비가 무슨 말을 하든 나완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추스렸다. "그래서?" 보비는 병실을 둘러보고 다시 험악한 브레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랠프가 우리집에 온 것은 승진말고 다른 일도 축하하기 위해서였어요. 그의 약혼 축하도 겸했지요. 대학시절 걸프렌드하고 결혼하게 된 거예요." "아하, 그래서 그는 독신생활의 마지막 즐거움을 가지러 당신한테 찾아왔단 말이지?" 노여움에 몰려 보비는 핸드백을 움켜잡더니 다시 옆의자에 내려놓았다. "그게 아니라니까요. 랠프는 좋은 친구예요. 그것뿐이에요. 우리는 오랫동안 교제해 왔기 때 문에 랠프는 다른 "난 놀림감이 되고 싶진 않소. 보비, 나를 동정하여 의무감에서 여기에 찾 아왔다면 그 다고 말해 줘요." "아아, 브레인, 결코 그렇지가 않아요..........." "만일 그렇다면 바로 여기에서 나가 달라는 거요." 보비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별로 오래 어울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둘이 나누어 가진 것은 눈부셨소, 난 한번 확 신을 가지게 되면 망설이지 않고 마음을 결정하는 사람이오. 그리고 결코 뒤돌아 보지 않소. 지금까지 그렇게 해오며 후회한 일은 없었소." 브레인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보비 는 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은 충동을 누르느라 힘이 들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즉 그날 저녁 당신한테 말할 생각으로 있었던 것은......우리 같 으 면 서로 잘해 나갈 수 있을 거라는 말이었소. 둘이 결혼하여 일생을 같이하는............" 그말을 들었을 때 보비는 가슴이 꽉 차 올랐다. 마치 자기가 현재로부터 빠져나가 다른 차 원에서 떠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큰 감동이었으며, 방에서 쫒겨날 걱 정만 없다면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었다. "아아, 브레인!" 보비는 속삭이며 그의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당신이 정말로 그런 말을 했는지 믿을 수가 없어요." "내 말은 진정이오." 브레인은 천천히 입술에 웃음을 띠고 자유로운 팔을 그녀의 목에 감고 살며시 끌어당겼다. "난 기다리고 있소." 브레인의 눈길은 보비의 눈에서 그녀의 조금 벌어진 입술로, 그리고 다시 그녀의 눈으로 돌 아왔다. "기다리다니, 무엇을요?" 너무나 오랫동안 동경하던 입술을 맛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보비는 물었다. 브레인은 그 녀 의 목덜미에 대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당신의 대답을. 내 아내가 되어 주겠소?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나를 사랑하 고 마음을 써주고 존경하고 땅끝까지 따라 오겠소?" 그의 눈에 떠오른 사랑의 반짝임은 태양처럼 보비의 마음을 들뜨게했다. 소리를 내어 웃고, 몸을 뱅글뱅글 돌리며 춤을 추고 브레인의 입술에 자기 입술으 밀어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보비는 조금 몸을 뒤로 당기고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날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아요, 브레인 피어슨?" "물론 사랑하고 있소." 귀여운 입술에 속삭이듯이 브레인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브레인!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만난 순간부터 사랑하고 있었어요," 입술과 입술이 가볍게 스쳤다. "네, 네, 당신의 아내가 되겠어요. 제가 어떻게 당신을 거절할 수 있겠어요!" 지금까지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의 어리석음을 몰랐던 것이다.--이제부터는 사뭇 이 남자를 독차지할 수 있다. 브레인의 달콤하고 황홀한 키스를 맛보면서 보비는 속으로 생각하고 있 었 다. 16 낡은 빅토리아 양식의 집 베란다에 서서 보비는 아쉬운 듯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손을 흔들 고 있었다. 차 위의 메리베스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손을 흔들고는 단풍나무가 늘어선 길 을 달려갔다. 두 사람 다 메리베스의 방문을 얼마나 환영했던가 하는 생각이 나서 보비는 미 소했다. 그때, 몸 내부에 언제나의 움직임을 느끼고 솟아오른 배에 손을 댔다. 멀지않아 또 메리베스를 만날 수 있을 거야. 이 조금나 난폭자가 세상에 나올 결심을 할 무렵이면. "온종일 여기게 서 있을 수도 없겠어." 보비는 중얼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하마터면 페인트 통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다행 히 페인트 칠은 브레인이 맡아서 해주었다. 보비로서는 페인트칠처럼 지겨운 일도 없으니까. 브레인은 참으로 페인트칠을 잘했다. 그는 이 넓고 약간 예스런 집안 손질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대학의 농구 코치로서 이곳 로스에서 지내는 안정된 생활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작년, 부상에서 금방 되살아난 브레인은 팀으로 돌아가 플레이오프에 참가하여 염원하던 우 승을 따냈던 것이다. 보비는 그의, 아니 그들 둘의 새로운 인생의 스타트에 가슴이 뛰었다. 결혼 일년동안은 즐거운 자극에 가득 찼고, 깨가 쏟아지는 나날이었다. 지금, 보비는 남편과 함께 피어슨 집안에 새로운 멤버가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 시간 가량 뒤에 보비가 앞뜰의 자작나무 밑에 웅크리고 화단 손질을 하고 있느라니까 브 레인이 잔디를 가로질러 다가왔다. 요즘 더욱 동작이 느려진 아내를 부추하여 일으킨 브레 인 은 몸을 구부려 그녀의 머리레 키스했다. "그녀석 기운이 좋소?" 아내의 배에 손을 대고 물었다. "그앤 뜰일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보비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제 싫증이 난다고 마구 배를 걷어차요." "저건 뭐지?" 브레인은 흙 속에서 내다보는 새싹을 가리키며 말했다. "물론 데이지예요." "그때의 꽃다발을 당신은 잊지 않고 있었군."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꽃을 어떻게 잊어요? 이제 얼마든지 이 꽃을 딸 수가 있게 되었 어요." 브레인은 미소하며 조금 벌어진 보비의 입술에 애정이 가득 찬 키스를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