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빛 / 캐롤 모티머 To be a Bridegroom 신영미디어 L-097 (1999년) 타이핑 : 송영아 방법은 단 하나, 그녀와 결혼하는 것…? 독신을 즐기는 매력적인 남자 조던. 결혼은 물론 여자에게조차 관심이 없던 그가 옆집으로 이사온 스테지를 만나면서 달라진다. 그는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그녀를 오직 자신만의 여자로 만들려고 하는데…. 1 내가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람? 스테지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자신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남자뿐이었고, 그나마도 어제 처음 제대로 인사를 나누었던,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그저 오다가다 마주치면 눈인사나 나누던 이웃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남자를 따라 결혼 피로연까지 오게 되다니! 모든 게 다 빌어먹을 권태로움 때문이었다. 권태로움이 아니면 외로움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어제는 그 두 가지 감정 모두에 젖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웃에 살고 있는 남자의 이름이 조던 헌터라는 사실을 우편함에 적혀 있는 명패를 보고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실은 유일하게 그것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 그 남자도 그녀처럼 겨우 그녀의 이름이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어제는 우연하게도 얘기를 나누게 된 것이다. 그녀는 오늘의 모임이 조던의 형인 조나단의 결혼 피로연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던은 식사 시간 내내 그녀의 곁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곁에 나란히 앉아 있던 조던의 삼촌이라는 남자의 끝없이 이어지는 얘기를 들어주느라 고역을 치러야만 했다. 식탁은 풍성했지만 그녀는 그 사람의 얘기에 장단을 맞춰주느라 미처 먹을 새도 없었다. 그 와중에 그럭저럭 식사시간은 끝이 았고, 다들 밴드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던은 아무 말 없이 그냥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스테지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빨리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어제 그의 질문에 냉큼 대답했떤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아파트는 마음에 들어요?" 엘리베이터 안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의 질문은 당연히 그녀를 향한 것이었고, 게다가 그는 최근 3개월 동안 그녀의 이웃에서 살고 있는 남자였다. 이웃 사촌이라는 말도 있는데 한 아파트에 살명서 서로 모른 척하고 지낼 수는 없지 않는가! "좋아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약간 거만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미국인이군요?" 그는 그녀와 함께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어나오며 물었다. 그는 175센티미터인 그녀보다 무려 20센티미터는 더 큰 키에 살짝 곱슬거리는 머리칼과 당당산 체격을 가진 미남형의 남자였다. 나이는 서른 중반 정도로 보였다. 그녀의 나이가 스물한살이니까 열살 이상 연상인 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에게는 자신에게서는 볼 수 없는 위엄과 안정감, 그리고 의젓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게다가 그는 언제나 유명 브랜드의 정장을 차려입고 단정한 실크 넥타이를 매고 다녔다. 그와 반대로 그녀는 항상 진바지에 너무 헐렁해서 몸매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큰 티셔츠 아니면 꼭 끼는 소매 없는 면 티셔츠 차림이었다. 그의 얼굴은 조각상 같았다. 단단하고 야무져 보이는 각진 턱, 다소 무표정해 보이는 입술, 게다가 콧대는 얼마나 높아 보이는지 함부로 말을 붙였다가는 무슨 봉변이라도 당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뭐니뭐니해도 눈이었다. 밝은 곳에서는 분명 갈색으로 빛나던 눈동자가 실내에서 보니 황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웃 사촌으로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는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그 정도밖에 없었다. 다소 추상적이긴 하지만 남자들이란 원래 알 수 없는 동물이 아닌가! 마치 다른 세계에서나 살았어야하는 인종들처럼 그들 남자는 애초부터 여자들과는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족속들이었다. "그래요. 난 미국인이에요" 그는 새삼스럽게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녀는 깨끗한 갈색 부츠를 신고 있었고 딱 달라붙는 청바지와 연푸른색 스웨터 차림이었다. 불타는 듯한 빨강머리를 엉덩이까지 찰랑이도록 풀어헤치고 있는 그녀는 파란 눈동자에 댜소 자그마해 보이는 코, 금가루를 살짝 뿌려놓은 듯한 주근깨와 웃을 땐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입, 그리고 완고해 보이는 턱을 가지고 있었다. "내일 저녁에 바빠요?" 그는 다소 거만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스테지는 아무 생각 없이 엉겁결에 <아뇨>라고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조던은 내일 파티에 자신의 파트너로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다. 아주 재미있는 파티이고, 게다가 그녀의 성격이 내성적이거나 수줍음을 많이 타는 편만 아니라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사귈 수 있을 거라고도 말했다. 당연히 그녀는 한껏 콧대를 세우며 싫다고 당당히 거절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뭔가 홀리기라도 한 듯,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한 파티는 바로 그의 형인 조나단의 결혼 피로연 파티였다. 게다가 여러 사람을 만나고 사귈 수 있을 거라던 그의 말과는 전혀 달리 그녀가 대화를 나눈 상대라고는 오로지 단 한 사람, 그의 삼촌이라는 말 많은 노인네밖에 없었다. 결혼식은 그날 오후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지금 파티는 여느 결혼 피로연과 마찬가지로 신랑 신부와 하객들을 위한 파티였다. 스테지가 이렇게 안전부절못하며 불편해하는 이유는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파티에 어울리는 감청색 드레스가 그녀의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옷에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신랑 동생의 파트너라는 사실 때문인지 유난히 다른 하객들의 눈길을 많이 받고 있었다. 그랬다. 그녀가 불편해하는 건 바로 그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이었다.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모르는 사람들의 적의인지 호의인지 모를 시선을 감내하고 앉아 있는 게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들은 그녀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던 것이다. 스테지는 조던이 왜 하필이면 자신을 파트너로 선택했는지 궁금해졌다. 왜 그의 청에 그렇게 생각 없이 <네>라고 대답했는지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조던 정도의 외모를 가진 남자라면 그녀보다 훨씬 예쁘고 잘 나가는 여자들이 주위에 얼마든지 널려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녀를 데려온 것일까? 아마도 그녀가 이곳에 온 하객들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이곳 하객들을 전혀 모른다는 것은 곧 해각들 역시 그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늘은 처음 본 얼굴이라 궁금해하겠지만, 오늘만 지나가면 모두들 그녀의 존재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릴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왜 조던은 오늘 이 자리에 꼭 파트너를 데리고 왔어야 하는 것일까?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ㄷ정하게 춤을 추고 있는 신랑 신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의 눈길이 무척이나 어둡게 느껴졌다. 특히 신부를 쳐다볼 때는 훨씬 더 경직되어 있었다. 혹시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삼각 관계라도 되는 걸까? 신부인 케이는 훤칠한 키에 풍성한 금발머리를 자랑하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자였다. 신랑인 조나단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길에는 사랑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만일 조던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면, 짝사랑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어하는 마음은 조던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스테지는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오히려 그가 정말 어떤 이유가 있어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왔다면, 차라리 파트너로서의 역할만이라도 충실히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춤을 추고 있는데 한 마디 말도 없이 어색하게 앉아 있는 그들을 향해 사람들이 점점 의아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한 탓이었다. "춤출까요?" 스테지는 조던을 돌아보며 물었다. 조던은 이상한 여자라도 보는 듯 멍하니 그녀를처댜보았다. "춤추자구요, 조던! 음악이 아주 좋잖아요. 이럴 때 춤도 안 추고 그냥 앉아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느데요. 춤이란 게 뭐 어려울 것도 없구요. 그냥 적당히몸만 흔들면 되잖아요" "나도 춤추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소, 스테지" 그가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춤추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다니, 그렇다면 방법은 알지만 춤추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그래, 재미있니?" 큰 키에 검게 드를린 얼굴이 눈길을 끄는 한 남자가 불쑥 그들 앞으로 다가섰다. 한눈에 또 다른 헌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이 사람이 이 집안의 장남인 모양이었다. 자렛, 조던이 파티장으로 들어오기 직전 스테지에게 일러준 이름이었다. 그의 곁엔 모델 출신의 어여쁜 아내, 애비가 서 있었다. 그들 사이엔 아이가 둘 있었다. 누나인 찰리, 그리고 아들인 코너였다. "별로" 조던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자렛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 잊고 있었구나. 넌 원래 결혼식을 아주 싫어하지" 자렛은 스테지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동생이 우리에게 당신을 소개시켜 주지도 않았군요. 용서하세요. 원래 매너가 좋은 아이인데 아마 오늘은 깜박 잊고 집에 두고 온 모양이에요. 전 자렛 헌터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내 아내 애비" 그가 아내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다정한 포즈를 취했다. "스테지 워커예요" 그녀 역시 환하게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한 곡 추지 않겠어요, 스테지 워커?" 자렛이 정중하게 청했다. "나와 한 곡 추려던 참이었엉" 조던이 스테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바로 1분 전만 해도 그녀가 춤추자는 제안을 하지 냉랭하게 반응했던 그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딴소리인가? 무슨 이유인지느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파트너가 형인 자렛과 춤을 춘다는 사실이 언짢은 모양이었다. "이미 늦었어.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어때?" 자렛이 스테지를 댄스 플로어로 정중히 안내하며 동생에게 놀리듯 말했다. "넌 내 집사람 좀 상대해 주렴" 스테지는 원래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게다가 자렛 헌터는 춤 상대로는 최고였다. 그는 어떤 일에나 능숙한 남자처럼 보였다. 그의 아내와 조던도 약간 떨어진 곳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애비의 미소 띤 환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조던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워 보였다. 조던은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누구의 말도 듣고 싶지 않은 것 같았고, 누구에게 말을 건넬 여유도 없어 보였다. "조던과 알고 지낸 지는 오래 됐습니다?" 이런! 자렛은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겠지만 그녀로서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가족의 결혼 피로연에 조던의 파트너로 불쑥 나타난 여자에 대해 모두들 호기심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어제 조던의 제안을 승낙한 순간, 이런 당혹스러운 질문들이 쏟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따라오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몇 달 정도 됐어요" 차마 어제까지만 해도 잘 알지 못했던 남자를 따라왔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진작 결혼 피로연이라는 말을 해주었다면 바쁘다는 핑계로 정중하게 거절했을 텐데. "조던은 지금 무척 힘들어하고 있어요" 자렛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왜요?"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모양입니다. 남도 아닌 형의 결혼 준비니만큼 좀 바쁘고 힘들었던 것 같아요" "짜증이 좀 났었나 보죠" 스테지는 자렛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냥 모르는 척했다. "캐나다인입니까, 아니면 미국인입니까?" 자렛이 물었다. 스테지는 미소를 지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영국에서 교육을받은 덕분에 미국식 악센트를 완전히 제거했다고 믿었더랬죠" 자렛은 이마를 찌푸리며 스테지를 쳐다보았다.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조던은 단번네 그녀가 미국인인 걸 알아보았ㅇㅆ다. 그러나 굳이 자렛에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영국에 있으면 다들 나더러 미국인이 아니냐고 묻죠. 하지만막상고향으로 돌아가면 혹시 영궁에서 오지 않았냐고들 해요" 그녀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자렛은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겠어요? 미국에도 좋은 교육 기관이 얼마든지 많은데 왜 영국에서 공부를 한 겁니까?" 당연히 물어볼 수 있는 말이었지만,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 얘기할 이유가 없었다. 스테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부모들은 자식 교육에 열성이잖아요, 안 그래요?" 그녀는 웅성거리는 사람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어느 분들이 댁의 부모님이세요?" 자렛의 입술이 약간 일그러졌다. "우리 부모님은 이혼하셨어요. 그리고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이곳 어딘가에 계실 겁니다" 새어머니라…. 흥미로웠다. 그러나 사귄 지 몇 달이나 지났다면서 부모가 이혼했다는 것도 모를 수 있냐는 듯한 자렛의 시선이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그랬군요" 스테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하지만 친어머니가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건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함께 살아서 행복할 수 없는 사이라면 일찌감치 헤어지는 게 낫다고 봐요. 공연히 아이들을 위해 참고 사느니 어쩌느니 하지만 결국은 아이들을 위하는 게 아니죠.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차라리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더 많은 상처를 가지게 돼요" "난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자렛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그가 이혼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남의 일에는 냉정하고 이성적일 수 있지만 그게 막상 자신의 일로 닥쳤을 땐 그렇지가 못한 법이 아닌가? 스테지는 문득 왜 헌터 가의 삼 형제가 모두 아버지와 살기로 했는지 궁금해졌다. 혹시 삼 형제 모두 어머니의 사랑보다는 헌터 가의 막대한 부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게 아닐까? 그만하자, 남의 일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조던이나 그의 가족들 모두 그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밤만 지나면 이제 그와는 만날 일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당신도 혹시…?" "내 차례야, 형" 자렛이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조던이 불쑥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애비 헌터가 스테지를 향해 미소를지었다. 자렛과 그녀가 한참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동안, 조던은 형수인 애비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테지는 잘 알고 있었다. 조던은 대체 두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자꾸만 그들을 흘끗거리곤 했었다. "발 밟히지 않게 조심해요, 스태지" 자렛이 짖궂게 주의를 주고는 아내 곁으로 걸어갔다. "빈정거리지 마, 형" 조던은 자렛에게 으름장을 놓더니 스테지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형이랑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더군요" "아주 멋진 분이세요" 조던이 고개를 흔들었다. "멋진 사람은 조나단이오. 자렛 형은 좀 거만한 편이고" 스테지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어느 쪽이죠?" 조던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천천히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얼굴에 웃음기가 돌자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정말 매혹적인 미소였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 그리고 얕은 곡선을 그리며 빙그레 미소 짓는 입술을 보자 그녀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대체 어디 갔다가 이제야 나타난 걸까? "어느 쪽도 아닌 것 같군. 그냥 오만 불손한 인간이라고 표현하면 어떻겠소?" 그의 목소리는 장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밤 제대로 파트너 노릇도 하지 않고 있었던 건 정말 미안하오. 이제부터는 우리 관계를 좀더 발전시켜 보는 것이 어떻겠소?" 발전시키다니! 그럴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냥 이 정도의 관계가 좋았다. 스스로도 오만 불손하다고 표현하는 삶과 더 이상 무슨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저 얼굴은! 스테지는 사람들 틈을 유유히 빠져나가고 있는 한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조던의 어깨에 얼굴을 숨기 채, 그 남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지금은 등을 돌리고 있어서 뒷모습밖에 볼 수가 없었지만 확실히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저 남자를 이런 자리에서 보게 되다니! "아봐요. 난 그저 당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한번 해본 말이오. 내가 지금 당장 당신을 어떻게 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오?" 차라리 그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어서 이곳을 떠나야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따라 낯선 곳에 와서 스스로 화를 자초하다니! "그만 가야겠어요, 조던" 스테지는 얼른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말했다. 조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스테지!" "오늘 즐거웠어요" 사실은 아니었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를 갖도록하죠" 그것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그녀는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도망가자! 빨리! 조던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이런 기회라니, 이번이 마지막 결혼 피로연이오. 형제가 더 있는 것도 아니고" 스테지는 조던을 쳐다볼 겨를도 없었다. 한시 바삐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가밖에 나지 않았다. "스테지, 대체 왜 그러는 거요?" 조던이 그녀의 팔을 낚아채며 말했다. "당신은 이곳에 나와 함께 왔소. 그러니 당연히 나와 같이 가야 하는 것 아니오?" 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런 공식석상에서 같이 온 여자가 허겁지겁 파티장을 빠져나간다는 게 그에겐 치명적인 모욕이 될 수도 있었다. "당신은 아직 남아 있어야 하잖아요. 하지만난 지금 가야 해요" "내가 집까지 바래다 주겠소" "아니에요!" 그녀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냥 날 좀 보내줘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꼬여 있는. "여자복이 많을 텐데 왜 그렇게 당하고 있는 거지?" 스테지를 자고 있던 조던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굳어졌다. 스테지 역시 낯선 여자를 돌아보았다. 자그마한 금발 여자였다. 마치 인형처럼 앙증맞은 얼굴에 커다란 갈색 눈이 인상적이었다. "여긴 웬일이죠, 스텔라?" 조던의 쌀쌀맞은 표정에 스테지도 주눅이 드는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빨리 이곳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발목을 꽉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조나단의 결혼식이니까" 여자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이 여자는 조나단도 아는 사람인 모양이군, 스테지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남의 일에 상관하 시간이 없었다. "난 정말 가야 해요, 조던" 스테지는 조던의 팔을 때어내려고 애쓰며 애원하듯 말했다. "나중에 꼭 연락할게요" "가는 길에 신발 한 짝을 떨구어 놓고 가는 것도 잊지 말아요, 아가씨" 여자가 비아냥거렸다. "그래야 일이 제대로 진행되는 법이거든" 스테지는 잠시 멈춰 서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누구이건, 조던이나 조나단과 어떤 사이이건 스테지는 남자 하나로 인생을 바꾼 신데렐라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미안하지만 내겐 그 따위 유리 구두 같은 건 없어요" 스테지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개구리한테 입맞춤을 해서 왕자로 변신시켜 주는 역할이 더 즐겁거든요. 그럼 재미있는 시간 보내세요"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씩씩하게 나가 버렸다. 2 조던은 스테지가 걸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바로 옆집에 산다는 사실을 왜 어제야 알아차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고혹적인 사파이어빛 눈동자, 곧게 뻗은 콧날 주위로 앙증맞게 뿌려진 주근깨, 그리고 환한 미소와 잘 어울릴 것 같은 도톰한 입술, 게다가 늘씬한 몸매와 길게 뻗어 내린 다리…. 스테지 워커를 결혼 피로연의 파트너로 삼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외관상으로만 보이는 아름다움 이상의 그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오늘 깨달을 수 있었다. "혹시 저 여자에게 흠뻑 빠진 건 아니겠지, 조던?"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헌터 가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빠지는 속도가 좀 빠른 펴이지" 조던은 스텔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라도 있나요?" "내 사랑…" "난 당산의 <사랑>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사랑은 커녕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군요" 그는 군데군데 성형 수술을 해서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버린 여자를 경멸에 가득 찬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기는 그 덕분에 조던보다 겨우 한 두살쯤 많아 보일 정도이니 수술은 성공적이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빨리 나가요" 조던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당신이 온 걸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어서요" 스텔라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조나단이 결혼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어. 물론 자렛도 보고 싶었고" "차라리 우리가 당신을 너무 보고 싶어해서 왔다고 말하지 그래요?" 자렛이었다. "우린 당신을 초대한 적이 없어요" 그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서 나가지 그래요. 끌어내기 전에 말이에요" 조던은 금방이라도 여자를 끌어낼 태세로 주먹을 불끈 쥐고 서 있는 자렛을 쳐다보았다. "설마 진짜로 그럴 생각은 아니겠지, 자렛?" 스텔라가 물었다. 자렛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어디 한 번 해볼까요?" "아직 조나단 얼굴도 못 봤어" 스텔라가 완강한 어조로 말했다. "게다가 신부 얼굴도 못 봤고" "앞으로도 보게 될 일은 없을 거예요" 자렛이 빈정거렸다. "몇 시간 안으로 조나단과 케이는 피로연장을 떠날 겁니다. 그들에게 오늘 하루는 참으로 의미 있고 좋은 날이에요. 공연히 당신이 끼어들어서 그들의 행복을 깨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아요" "참 잔인하게도 말하는구나. 하긴 넌 늘 그랬어" 스텔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던은 그녀의 눈물이 교묘하게 계산된 연극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스텔라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거나 남의 입장을 배려해 본 적이 없는 여자였다. 아무리 수술을 해서 젊어 보여도 그 정도 나이가 들면 타고난 성격이 갑자기 변하기는 어려웠다. 조던의 입술이 잔뜩 일그러졌다. "자렛 말이 옳아요"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나가세요. 여긴 당신이 올 데가 못 돼요" 스텔라가 조나단의 결혼식에 나타난 것은 한가로이 먹이를 먹고 있는 비둘기떼 사이에 고양이가 뛰어든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가든 내가 데려다 주겠어요" 조던이 말했다. "하지만 더 이상 여기에 있어서는 안 돼요" "오, 미안하지만 난 여기 있어야 해" 스텔라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4층에 방을 예약해 ㄷ었거든" 약삭빠른 것도 여전했다. 파티가 열리기 전날 미리 호텔에 방을 예약해 둔 것이 분명했다. "대체 원하는 게 뭐죠?" 자렛이 냉소적으로 물었다. "왜 내가 뭔가를 원해서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지?" 자렛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냐하면 당신 같은 사람들은 항상 뭔가를 바라니까요" "당신 같은 사람?" 그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감히 그렇게 심한 말을" "나라도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감히라니요? 누군들 그런 소리 안 할 것 같아요? 어서 나가요. 더 큰일 벌어지기 전에" 조던이 옆에서 거들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실랑이를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객들이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던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그녀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호텔 로비로 나갔다. 스텔라는 으르렁거리며 조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이러는 거지?" "내겐 충분히 이럴 권리가 있어요. 자렛 형도 마찬가지구요. 그리고 조나단 형도 당신이 여기 온 걸 알면 분명 이렇게 했을 거예요"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불쑥 나타나면 어서 오시라고 악수라도 청할 줄 알았어요?" "난 너희들 엄마야!" 그녀가 격렬하게 소리쳤다. 조던은 절망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래, 분명 이 여자가 우리 삼 형제를 낳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아니다. 낳아주었다고 해서 무조건 엄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녀가 남편과 세 아들을 버리고 떠났을 때 조던의 나이는 겨우 열네 살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들을 버리고 떠나기 오래 전부터도 그들 형제는 너무 자주 바뀌는 바람에 채 이름도 외우지 못한 어머니의 남자들을 보면서 자라야 했다. 조던은 어머니에게서 받아야 마땅한 따사로운 애정을 대신 형들에게서 받으며 자랐다. "엄마라구요? 마링야 그렇게 할 수 있겠죠, 스텔라" 조던은 얼어붙을 듯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늘씬하게 뻗어 내린 그녀의 몸매와 예쁘장한 얼굴, 그리고 잘 차려입은 옷가지를 훑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어머니라고 해봐야 두 번째 남편과 헤어지고 또 새로운 남편을 만나기 직전에 아주 잠깐 한 번 본 적이 있을 뿐이었다. 거의 20여 년에 이르는 세월 중 단 한 번 말이다. 그녀는 마친 한가한 틈을 타서 스물 다섯, 스물 일곱, 스물 아홉이 된 그들을 만나러 이곳 런던으로 왔던 것이다. "대체 어쩌자는 거예요, 스텔라?" 조던이 냉소적으로 물었다. "벌써 세 번째 남편에게 싫증이 안 건가요?" 스텔라의 뺨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아마 그의 짐작이 틀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스텔라는 조던을 노려보았다. "너도 자렛만큼이나 차가워지는구나!" "그럼요. 다 누구에게서 배웠겠어요?" 조던은 지겹다는 듯 말했다. 지금쯤 스테지는 아파트에 도착했을 것이다. 스텔라만 아니면 당장 조나단 형과 케이에게 양해를 구한 뒤 얼른 아파트로 돌아가서 그녀에게 전화를 할 수 있을 텐데. 최소한 그녀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전화라도 하고 싶었다. 붉은 머리칼을 풀어헤친 채 알몸으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말이다. 저녁 내내 바보짓을 한 것이 자꾸 후회스러웠다. 자기가 데려왔으면서도 그 여자에게 말 한 마디 제대로 걸지 않았고, 관심도 가져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스테지가 그렇게 서둘러 떠나고 싶었을 수밖에! 사실 결혼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여자들 모두에게 적대적일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세상에! 석 달이 지나도록 자신이 바로 옆집에 그토록 고혹적이고 아름다운 여자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너, 왜 그렇게 미소를 짓고 있니?" 스텔라가 히스테릭하게 말했다. "네겐 이 모든 게 다 우스운 모양이구나!" "물론 우스운 상황은 아니죠. 하지만 자꾸 웃음이 나오는군요. 당신은 지금 뭔가 바라는 게 있어요. 그것도 눈치 못 챌 우리가 아니죠. 자, 그러니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고 본론을 말하지 그래요. 하지만 한 가지, 미리 충고해 둘 게 있어요. 조나단의 결혼식을 이용할 생각은 말아요. 그런 치사한 짓을 했다간 분명히 후회하도록 해주겠어요" "협박하지 마, 조던" 스텔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조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협박이 아니라 출교예요. 그래요, 한 번 들어가 봐요. 아마 불청객이라고 입구에서부터 퇴짜를 맞을 걸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이러는 거예요? 내가 자렛처럼 차가원졌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그래요? 나도 이런데 형은 오죽하겠어요? 대체 얼마나 더 수모를 당해야 정신을 차리시겠냐구요" 스텔라는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래도 이번 게임은 이쯤에서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에겐 이 모든 것이 게임이었다. 조던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나마 어머니라는 역할을 하는 게임이 그녀가 치른 게임 중 가장 오래 지속된 것일 수도 있었다. 아이를 셋이나 낳았으니까. 물론 그건 아버지의 재산을 송두리째 박살내는 데 걸린 시간이 그만큼 길어서였을 수도 있었다. 그 게임을 끝내기가 무섭게 그녀는 다른 게임을 찾아 떠났다. 세 번째 결혼 생활마저 끝장나자 그녀는 <엄마>라는 역할을 하는 게임에 댜시 한 번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서는 그녀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제대로 감당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 그녀는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녀가 버린 세 명의 아들들은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녀가 군침을 흘릴 정도의 대단한 재력가로 변신해 있었다. "당신과 더 이상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그가 뒤돌아 서며 말했다. "그 신데렐라를 쫓아가려고?" 그녀가 그를 향해 외쳤다. 조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어머니라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이젠 미움조차 남아 있지 않을 만큼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다. 불쌍한 여자였다. 외면은 누가 봐도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속은 그 누구보다도 추한 여자였다. 아무리 성형 수술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찢어진 내면까지 바꾸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난 여자 따윈 쫒아다니지 않아요" 그는 피로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스테지를 쫓아가는 게 아니었다. 다만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그의 이웃에 그녀가 산다는 게 우연이라면 우연이랄까? 어쩌면 그녀의 입맞춤이라도 얻게 되어 그가 더 이상 개구리로 변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늘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초인종을 누른 지 한참이 지나고서야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감청색 바지에 연푸른색 소매 없는 티셔츠 차림으로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문을 열었다. "조던?"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샴페인도 미처 마시지 못했잖소?" 조던은 피로연장에서 가져온 샴페인 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유리잔 두 개도 들려 있었다. 스테지는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관심 없다는 듯 말했다. "왜 그 스텔라라는 여자와 함께 마시지 그랬어요?" 그녀는 현관문을 잡은 채 달갑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런 그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 조던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스텔라는… "아, 굳이 설명할 의무는 없어요" 그녀는 퉁명스레 그의 말을 잘랐다. "알고 있소" 그랬다. 조던은 여자들에게 무슨 의무 같은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난 그냥 당신하고 샴페인이나 같이 마셨으면 해서 하는 말이오" 그는 다소 부드러운 목소리로 ㅁ라했다. 공연히 처음부터 삐딱하게 나갈 필요는 없으니까. "좋아요" 그녀는 문을 활짝 열어제쳤다. 조던은 그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적잖이 당화했다. 그녀의 아파트는 그의 집과 구조가 똑같았디. 5년 전 그는 아파트를 보러 왔을 때 이 집과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집을 함께 보았었다. 결국 그는 전망이 더 좋다는 이유로 지금의 집을 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아파트는 놀랄 정도로 달라 보였다. 스테지는 아파트 내부를 크림색과 황금색, 그리고 환한 오렌지색으로 칠해서 훨씬 가볍고 따사로우면서도 상큼해 보이도록 했다. 우중충한 밤색 가구들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초록빛 벽지 등으로 꾸며진 그의 아파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거실에 깔려 있는 오렌지색의 카펫이 길게 늘어진 그의 붉은 머리칼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던은 그녀가 안내하는 대로 콩자루처럼 생긴 쿠션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정말 멋지군!" 그가 샴페인 병과 유리잔을 낮은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렇게 아름답게 집을 꾸며준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이름을 좀 가르쳐 줄 수 없겠소?" "스테지 워커요" 스테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당신 혼자서 이 집을 다 꾸몄단 말이오" 스테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직업이 인테리어 디자이너거든요" 그는 다시 한 번 거실을 둘러보았다. 훌륭했다. 정말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에 비해 그의 집은 이사온 뒤로 한 번도 손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내 집도 이렇게 바꾸어 줄 수만 있다면…. 그는 샴페인 병을 집어들었다. "일거리가 하나 있는데 관심 있소?" 스테지는 콩자루 쿠션 위에 앉아 병을 따고 있는 그를 쳐다보며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조던은 그녀가 더더욱 신비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겉 보기엔 무척이나 다정하고 스스럼없어 보였지만 여간해선 속을 내보이지 않는 그런 여자 같았다. 대체 이여자는 왜 이곳 영국에 와 있는 걸까? 가족들은 모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가족이 있긴 있는 걸까? "내 아파트를 인테리어하는 거요" 그가 샴페인을 잔에 따라 부은 뒤 그녀에게 건넸다. "어떻소, 내 제의가?" "내가 지난 3개월 동안 얼마나 그 <제의>라는 것에 당하고 살았는지 아마 모를걸요?" "어디 말해봐요" 그가 재미있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스테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의사 소통에 문제가 좀 있었어요. 영국과 미국은 둘 다 영어를 쓴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두 나라 사람들이 쓰는 말의 뉘앙스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사고 방식도 다를 수 있구요. 아무튼 이곳에 도착해서 처음 맡은 일이 시내에 있는 대형 가구점, 그 가게 이름은 말하지 않겠어요, 아무튼 그 가구점의 인테리어였는데, 매니저는 폐점 후에만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 매니저란 인간이 내가 일할 곳을 매장에 전시된 침대 위로 알고 있더라구요" 조던은 그녀가 당했을 일을 생각하며 언짢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아무래도 단순한 의사 소통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중요한 건 그녀가 아름답다는 사살이었다. 그녀가 곤경에 처하게 된 건 그녀의 아름다움 때문이지 결코 뉘앙스가 다른 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그가 생각하는 내 <일터>에서 무릎으로 그 자식의 급소를 한 방 세게 걷어차 주었죠"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바로 해고되었구요. 적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말이에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다음부터는 일반 가정집 인테리어를 하는 게 낫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상점 출입문 옆에다 가정집 인테리어를 한다는 광고 전단을 쌓아두었지요. 관심 있는 사람들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으려구요. 그러다가 마침내 한 어린 소년의 침실을 꾸미고 싶다는 전화를 받게 되었어요" "조금 전에 말한 일보다는 훨씬 안전해 보이는군" 조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스테지는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어린 소년>은 예순다섯 살이나 먹은 할어버지였고, 날보고 속에다 에어로빅 운동복 차림을 하고 오라는 거였어요" 조던은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거리는 웃음이 멈출 줄을 모르고 자꾸만 터져 나왔다. "대체 당신이 광고 전단을 쌓아두었다는 그 가게 어떤 곳이었소?" "확실히 나보다는 빠르군요" 그녀 역시 이젠 지나간 일이라 담담해진 듯 미소까지 띠며 말했다. "그 다음 <고객>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내가 광고지를 놓아둔 곳이 폰섹스를 원하는 삶들이 서로 명함과 광고지를 놓아두는 장소인 줄 미처 몰랐어요. 그 다음 <고객>은 어떤 전화를 했는지 알아요? 나보고 나이를 묻더니 붉은 색 속옷을 세트로 입고 오라는 거였어요" "저런, 난 크림색이 좋던데!" 조던이 짓궂게 말했다. "아무튼 난 쌓아놓았던 광고지를 부랴부랴 회수했죠" 그녀는 언짢은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들이 정말 그런 짓까지 하는 줄은 몰랐어요. 음란 전활 같은 걸로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추잡한 짓 말이에요. 그것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조던은 스테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요즘 여자 같지 않게 그녀가 너무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당신 몇 살이오, 스테지?" "스물하나요. 이제 곧 스물둘이 될거예요" 그녀가 천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렸다. 최근에 조던이 관계를 가져오던 여자들보다도 훨씬 어린 여자였다. 물론 스테지와는 그런 종류의 관계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 그저 호기심이 생길 뿐이었다. "신무도 안 읽었소? 요즘 세상에 얼마나 이상한 인간들이 많은데 그래요. 그리고 그렇게 이름과 전활 번호를 함부로 길에다 뿌렸다가는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단 말이오" 스테지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물론 그런 기사를 읽긴 했어요. 하지만 그런 인갈ㄴ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아파트는 어떻게 바꾸고 싶다는 거죠?" 그녀가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어느 방을요?" "몽땅!" 그는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듯,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할 수 있겠소?" 대가는 얼마나 지불하겠느냐고 묻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녀는 깊은 한숨만 내쉴 뿐,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조던은 그런 그녀가 오히려 이상해 보였다. 런던에 온 지 석 달이 지나도록 그럴듯한 일거리를 맡지 못했다면 지금쯤 생활비가 쪼들릴 게 뻔했다. 게다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월세는 무엇으로 낸단 말인가! 결코 집세가 싼 아파트도 아닌데 말이다. "하겠소?" "글쎄요. 일이 어느 정도인지 한 번 봐야지요" 그녀는 끝까지 대가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을 눈치였다. "그럼 아파트부터 둘러봅시다" "이 집과 똑같은 구조인가요?" 스테지는 샴페인을 홀짝이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 눈동자, 너무도 맑고 영롱한 푸른 눈동자. 언젠가 한 번 가본 캐나다의 푸른 호수 같은 눈동자…. 조던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왜 자꾸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드는 것일까? "그렇소. 이 집과 똑같은 구조요. 그럼 일은 언제 시작할 수 있겠소?" 그녀가 손을 쳐들며 좀 진정하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우선 어떻게 집을 꾸미고 싶은지 당신 생각을 들어봐야죠. 그래야 그것에 맞춰 여러 가지 준비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내 생각을 들어볼 게 뭐가 있소?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그런 생각까지 다 해주는 거 아니오? 내가 생각해 놓은게 있으면 곧장 건축업자에게 주문을 하면 그만이지 뭐하러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부르겠소? 당신이 먼저 구상을 해보고, 그 다음에 내 의견을 물어봐요"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조던, 난 당신이… 그냥 한 번 해본 말인 줄 알았어요" "장안 삼아 일에 대한 얘기를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소, 스테지" 조던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그가 막 말을 이어나가려던 순간 인터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파트의 주 출입문 앞에 설치되어 있는 인터폰 소리였다. "우선 인터폰부터 받아요. 그런 다음 계속합시다" 그녀는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아마 누가 잘못 누른 걸 거예요. 런던에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거든요" 그렇다면 어떻게 연고자도 없는 런던에 옮겨올 생각을 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조던은 입을 다물었다. "혹시 에어로빅 운동복을 좋아하는 그 <어린 소년> 아니오?" 그가 비아냥거렸다. "아무튼 인터폰을 받는 게 좋지 않겠소? 만약 잘못 걸려온 거라면 그렇게 말하고 끊으면 그만이니까" 그가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인터폰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아마 손가락을 버튼 위에 고정시킨 채 계속 누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런던에 아는 사람이라곤 없으니 아마 누군가가 잘못 찾아온 모양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아파트의 주 출입문 앞에 설치되어 있는 인터폰에는 아파트의 호수와 입주자 이름이 빽빽히 적혀 있기 때문에 누군가 실수로 벨을 잘못 누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동명 이인이라면 몰라도, 지금 벨을 누르고 있는 사람은 그 인터폰이 스테지 워커의 아파트와 연결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대신 받아도 되겠소?" "아니에요" 그녀는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 마지못한 듯 인터폰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인터폰이란 게 따지고 보면 무척이나 유용했다. 여자와 신나게 재미를 보고 있을 때 생각지도 않았던 다른 여자가 초인종을 누를 경우, 일단 인터폰 저쪽에서 말하는 소리가 집 안에 있는 여자에게는 들리지 않는다는 이점을 충분히 살려 어려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조던은 그런 일을 몇 번 겪은 터였다. 그는 스테지 역시 그런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인터폰과 멀찌감치 떨어진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를 등지고 서 있긴 했지만, 창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다소 화가 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네? 대체 왜 여길 온 거죠?" 스테지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안 돼요, 잭! 절대로 안 된단 말이에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떻게 여기를 찾아냈는지 묻기도 싫어요. 이제 그만 가요" 아마 그 잭이라는 사나이가 계속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인터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잭, 머물 곳이 있든 없든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 길거리에서 자든, 남의 집 지붕에서 자든 난 몰라요. 분명한 건 여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녀는 인터폰을 부숴 버릴 듯한 기세로 거칠게 내려놓았다. 조던은 아무 말 없이 창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런던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잭 이라는 남자는 분명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통화 내용으로 보아 분명히 그녀의 아파트에서 머루기까지 할 작정인 모양이었다. 누굴까? 대체 그녀와는 어떤 사이일까? 3 스테지는 조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가 인터폰을 하고, 또 여기서 묵을 것처럼 얘기하는 걸 죄다 들으면서 그는 도대체 날 어떤 여자라고 생각했을까? 하필이면 일거리를 주겠다며 한참 얘기를 하고 있는 중에 이게 무슨 꼴이람! 오, 잭! 대체 무슨 권리로 이렇게 불쑥 찾아왔단 말인가? 그때 현관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파트 주 출입문을 열어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온 것일까! 조던 역시 놀란 눈으로 돌아섰다. "내가 나가서 문을 열겠소" 조던이 부드럽게 말했다. "원한다면 집 아능로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하게 할 수도 있소" 저 남자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잭은 분명 반항할 테고. 한심한 일이었다. 여자의 아파트 앞에서 두 남자가 실랑이를 벌이고는 꼴이라니! 그런 꼴을 보자고 이곳 영국까지 왔단 말인가!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나가겠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이 아파트 경비 체계는 한 번 손을 봐야겠어요" 그녀가 언짢은 발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문을 열자 잭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큰 키, 그리고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는 그녀의 심경을 눈치채지 못하고 너무도 밝게 웃고 있었다. "스테지!" 그가 들고 있던 짐가방을내려놓으며 덥석 그녀를 안아들었다. 이렇게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반가워하는 사람에게 계속 화를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스테지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려놓아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녀는 그의 어깨를 두 팔로 치며 말했다. "대체 누가 현관 출입문을 열어준 거죠?" "아, 알았어" 잭은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별로 어렵지 않더군. 4호실 초인종을 우선 눌렀지. 어떤 여자가 인터폰을 받더라구. 그래서 7호실에 사는 J. 헌터인데 현관 출입문 열쇠를 집에 두고 나와서 들어갈 수가 없다고 했더니 아주 쉽게 문을 열어주던데? 현관 인터폰에 빽빽히 입주자 이름을 붙여놓는게 이럴 때 써먹으라는 건가 봐" 잭은 연신 싱글거리며 가방을 든 채 그녀를 따라 거실로 들어섰다. "아, 손님이 계셨군. 이런, 혹시 내가 방해가 된 건…" 잭은 창가에 서 있는 조던과 탁자 위의 샴페인 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비어 있는 두 개의 유리잔도 보았다. 잭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하긴, 조던이 무슨 상상을 하는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던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내가 바로 그 7호실에 산다는 J. 헌터라는 사람이오. 그리고 는 조던의 약자요" 두 사람은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키였다. 하지만 그것말고는 서로 닮은 점이 없었다. 잭은 쾌활하고 아무 일에나 웃음을 터뜨릴 듯한 소년 같은 모습이었고, 조던은 그와 반대로 남자 냄새가 물씬 풍기며 안정된 느낌을 주었다. "아, 미안하게 됐소, 조던!" 잭이 겸연쩍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테지의 고집이 여간 아니라서 말이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 거예요?" 스테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며 어색한 듯 조던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은 잭 프린스예요. 그리고 이쪽은 조던 헌터" 제발, 둘 다 이 집을 나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잭의 엄청나게 큰 짐가방은 그런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게다가 조던 역시 그녀에게 막 일거리를 주려는 무시무시한 고용주처럼 보일 뿐이었다. "프린스! 왕자라는 뜻이군!" 조던이 스테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왜 그녀를 쳐다보는 것일까? 무슨 이상한 상상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그럴 리가! 조던이 이번에는 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요즘은 이상하게도 왕자님 얘기가 자주 들리는군요!" 조던은 조롱기가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일은 일요일이고, 당장 월요일부터 일을 시작할 수 있겠소, 스테지?" 일이야 내일이면 어떻게 모레면 어떨랴. 어차피 일거리가 없어 거의 놀고 먹는 판에! 하지만… "여러 가지로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만들어 놓으시오. 월요일 저녁, 내가 퇴근하고 난 뒤에 함께 의논할 수 있게 말이오" 조던은 잭을 슬쩍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7시 30분쯤 내 아파트에서, 괜찮겠소?" 스테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까지 따라나섰다. "잭 때문에 미안해요. 난… 저 사람은…" "굳이 설명할 의무는 없소" 그랬다. 굳이 설명할 의무도, 필요도 없었다. 조던과 그녀는 엄연히 사업상의 관계일 뿐이다. "월요일 저녁 7시 30분에 봐요"스테지느 조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얼른 욕실에서 나오지 못해요!" 스테지는 욕실 문을 세게 두드리며 말했다. "벌써 한 시간도 넘게 디다렸어요. 나도 샤워 좀 하잔 말이에요!" "진정해, 스테지. 조던의 집에 가려면 아직 한 시간도 넘게 남았잖아" 잭이 조롱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쫓아내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잭 역시 어떻게 해서든 이 집에 머무르려고 할 것이다. 런던 시내에 널린 게 호텔이었다. 하지만 잭은 여간해서는 호텔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늘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집을 좋아했다. 물론 그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만을 기다리는 사람이어야 했다. 하지만 스테지는 결코 그의 <누군가>가 아니었다. 런던에 얼마나 머무르든, 그녀의 집에서 얼마나 무든 간에 그는 손님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머무는 만큼의 숙박 비를 내야 했고 식사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어제 그가 식사를 해결한 방법은 그녀를 데리고 나가 근처의 햄버거 가게에서 먹기 싫은 햄버거를 억지로 먹이는 일이었다. "빨리 나오란 말이에요!" 이러다간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으로 조던을 만나게 될지도 몰랐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분명 욕실은 그녀의 것인데! "빨리요!"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다.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는 집에서 세 명의 오빠들과 함께 살았을 때의 악몽이 다시 되살아난 듯한 느낌이었다. "다섯 셀 때까지 안 나오면 당장 다른 곳을 찾아 나서야 할 거예요" 마침내 잭이 문을 열고 나왔다. 욕실 안은 수증기로 가득 차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뜨거운 물을 다 써버린 거나 아니지 모르겠군요!" 스테지느 씩씩거리며 사우나탕 같은 욕실로 들어갔다. "이런, 잭!" "치우는 건 나중에 할게" 그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단 말이야!" "당장 꺼져요" 초인종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 때였다. "내가 가서 열어줄게" 위기의 순간을 간신히 모면할 좋은 기회라는 듯 잭이 서둘러 현관으 향해 달음박질쳤다. "걱정말고 샤워나 해" 초인종 소리가 현관에서 나는 걸로 보아 외부인이 찾아온 건 아니었다. 외부인이 들어오려면 아래층 출입문의 인터폰부터 먼저 울렸어야 하니까. 그렇다면 분명 조던이었다. 마음이 변해 일을 맡기기가 싫어진 걸까? 제기랄! 그녀로선 정말 절실하게 그 일을 맡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항복을 선언하고 집으로 기어 들어가야 할 판이었다. "조던이야" 잭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그래서요?" 잭은 순진하게 푸른 눈을 감빡거렸다. "샤워하는 줄 알고 내가 대신 말했어" "그래요? 그런데 조던은 뭐라던가요?" 세상에, 달랑 저 타월 하나만 걸치고 현관문을 얼다니! 조던은 아마 나를 고급 콜 걸 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 그거? 7시 30분이 아니라 7시 45분에 오래. 지금 막 돌아왔으니 샤워라도 좀 하고 싶다고" "알았어요" 그녀는 잽'싸게 문을 닫았다. 그렇다면 일단 일을 줄 마음이 변한 건 아니 모양이다. 시간은 넉넉해졌고, 그녀는 여유 있게 샤워를 할 수 있었다. 마침내 문을열고 나와보니 집 안은 조용해져 있었다. 그녀가 너무나도 원하고 있던 적막이었다. 이곳으로 이사오기 전만 하더라도 그녀는 늘 사람들이 들끓는 시끄러운 곳에서 사는 것 같지 않게 살아야만 했다. 이제 겨우 석 달 동안 누려온 이 평화를 잭에게 잠시나마 빼앗긴 셈이었다. 스테지가 조던의 현관문을 두드린 것은 정확히 7시 45분이었다. 그녀는 허리가 꼭 맞는 푸른색 블라우스에 줄무늬 긴 바지 차림이었다. 아무리 옆집이지만 오늘은 일 관계로 그를 만나는 만큼 그녀는 다소 점잖게 옷을 차려입었다. 조던의 안내로 집 안에 들어서자 촛불을 켜놓은 식탁이 눈에 띄었다. "우선 저녁 식사부터 해야 할 것 같았소" 그녀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흘끗 쳐다보며 그가 말했다. "혹시 벌써 식사를 한 거요?" 그렇지 않았다. 사실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냥 얘기를 먼저 끝낸 다음 집으로 돌아가 샌드위치나 만들어 먹을 생각이었다. 혼자 사는 게 좋은 이유 중의 하나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 너무 걱정 말아요!" 그가 빈정거렸다. "그 이상한 할어버지 <소년>이나, 붉은색 속옷을 좋아하는 남자처럼 딴마음을 먹은 건 아니니까. 게다가 당신도 붉은색 속옷을 입은 것은 아니잖소?" 스테지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옷매무새를 훑어보았다. 속이 훤히 비치는 옷차림은 분명 아니었다. 하긴 붉은색 브래지어를 했다면 현관 조명 아래에서 비쳐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가 그녀의 속옷에 관심을 갖고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는 말이 된다. 그녀는 다시 언짢은 마음으로 잘 차려진 식탁을 쳐다보았다. 왠지 그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이 불편했다. 게다가 촛불까지 켜놓고 말이다. 조던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라니까 그러는군. 이건 그냥 중국 음식점에서 배달된 음식이오. 그리고 정 마음이 불편하다면 촛불을 끄고 원래대로 전등을 켜놓겠소" 물론 배달시킨 음식이긴 했지만, 평범한 음식은 아니었다. 스테지도 중국 음식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면이 딸린 닭고기 수프에 뒤이어 나오는 세 가지 종류의 고기 요리, 볶음밥과 바나나와 사과 요리 등은 웬만한 날이 아니면 시켜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 조던은 백포도주 병을 따며 그녀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침내 식사는 끝났고 조던은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너무 배가 불러 일도 못할 것 같군요" "지난 토요일 저녁에는 결례가 많았소" "아뇨. 난 재미있었어요" "재미있었다는 사람이 그렇게 서둘러 떠났소?" 그건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는 그렇게 서둘러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도 그날 이후 조던에게 오해받을 짓을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렛이 그러는데 당신은 결혼이란 것에 대해 무척 부정적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말을 했소?" 혼잣말처럼 중얼대던 조던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그래, 집 보는 남자는 잘 있소?" 커피를 홀짝이던 스테지는 갑자기 목이 탁 막히는 것 같았다. "여간해선 나갈 기세가 아니에요!" "내가 보기에도 그렇더군" 조던의 황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반짝였다.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소?" "그런 셈이죠" 그녀는 더 이상 잭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화제를 돌렸다. "과자 속에 들어 있는 오늘의 운세를 아직 못 찾았나요? 내 것에는 <당신이 당신의 인생을 소중히 하면 그 인생도 당신을 소중히 한다>라고 적혀 있어요. 당신 거에는 뭐라고 적혀 있죠?" 조던은 중국 음식점에서 후식으로 주는 과자를 반으로 쪼갰다. "사랑은 풍선과 같은 것이니…" 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 가볍게 하라" 스테지느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또 하나 배웠겠군요" "자, 이제 일을 시작하는 게 어떻겠소?" "좋아요" 그로부터 30여 분간은 정말 빛이 반짝거릴 정도로 참신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다. 조던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경계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우물쭈물하지 않는 성격 덕분에 집을 어떻게 꾸밀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무척이나 신속한 편이었다. "아마 내 집 열쇠가 필요할 거요" 조던이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난 낮에는 일을 하느라 집을 비울 텐데, 당신에겐 그 시간이 일할 시간이잖소" 일반적으로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고객의 집 열쇠를 받은 적이 없었다. 미국에서 이런 식의 공사를 할 땐 그 집을 완전히 비운 다음에야 일을 시작하곤 했었다. 나중에 분실물이 생길 수도 있고, 가구에 흠집이 난다거나 하는 문제로 서로 얼굴 붉힐 일을 미리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왠지 조던과는 그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그녀가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토요일부터 당신이 말한 대로 모든 걸 전적으로 알아서 진행하도록 하겠어요" 조던이 미소를 지었다. "내 말을 잘 들어주는군. 붉은색 보다는 크림색 속옷이 좋다고 말했던 걸 기억해 준 것도 고맙소" "조던!" 그녀는 정말 크림색 속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그렇게 입은 것일 뿐 결코 그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스테지" 조던이 거친 어조로 말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당신은 정말 아름답소" 당신도 정말 매력적이에요,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난 뒤에는 그가 더더욱 편안하고 매력적인 남자로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편안하지가 않았다. "조던, 이건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달콤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뒤덮었다. 좋은 생각이든 아니든, 그녀의 입술은 정말이지 황홀했다. 조던은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음미했다. 그의 단단한 손이 그녀의 등을 가볍게 어루만지는 동안 두 사람의 몸은 개미 한 마리도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밀착되어 갔다. 그래, 좋은 생각이 아니야. 그러나 이 느낌만큼은 너무도 좋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숱많은 검은 머리칼을 두 손으로 움켜잡고 있었다. 조던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향해 천천히 내려왔다. "그만해요, 조던!" 스테지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밀쳐냈다. 그녀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애써 들뜬 가슴을 진정시킨 뒤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즐거움은 구분할 줄 알아야죠. 형이 둘이나 있는데 그런 얘기도 못 들었어요?" 그녀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 그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는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한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집에 두고 온 왕자님 때문인가?" 그녀는 그가 누구 얘기를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 키스를 한 거예요? 임자 있는 여자라도 충분히 마음을 바꿔놓을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대단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요?" 조던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 도전에 그렇게 쉽게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되지" 도전? 대체 누가 누구에게 무슨 도전을 한단 말인가? "우선 천부터 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어요" 그녀는 메모한 종이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왕자님 품으로 돌아가는군" 조던이 그녀의 뒷모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뒤돌아 서서 날카롭게 그를 노려보았다. 푸른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왕자라뇨? 그는 아직 누군가의 키스를 받지 못한 개구리일 뿐이에요" 조던의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 "왕자도 개구리도 아닌 그저 한 남자일 뿐이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그 말도 맞구요" 더 이상 왈가왈부할 얘기가 아니었다. 잭이 왕자든, 개구리든, 그저 한 남자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화가 나 있었다. 그에게, 그리고 그녀 자신에게. 조던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너무 남자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오?" 스테지는 조던을 노려 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함부로 키스를 한 것도, 그리고 그녀가 응다이라도 하듯 열정적으로 키스를 되돌린 것도 모두 화가 날 일이었다. "난 남자 따위에게 환상 같은 걸 품어본 적이 없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남자라는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지를 배워왔거든요" 조던은 그녀를 염려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당신 어머닐 버리고 떠났거나, 아니면 그 비슷한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군, 스테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버리고 떠난 적은 없었다. 처음부터 함께 산 적이 없는데, 버리고 떠날 일은 더더욱 없지 않은가! 조던은 그녀의 마음 속을 모두 꿰뚫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랬군. 스테지!"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 "내 어머니도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소" 그랬구나. 그래서 세 아들이 모두 아버지 곁에 남았던 거였구나. 그리고 조나단의 결혼식에도 아버지와 새어머니만 참석한 거였고….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여자기에 셋이나 되는 자식을 다 버리고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남자들에 대한 편견만큼이나 당신도 여자들에 대한 편견이 삼하겠군요" 그녀는 약간 냉정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럴 거라 생각하오" 그가 말했다. 그러면 그런 거지, 그럴 거라 생각하는 건 또 뭐람! 스테지는 조던이 왜 결혼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인식을 갖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조던뿐만 아니라 자렛과 조나단도 서른이 훨씬 넘도록 독신을 고집했다고 들었다. 두 형들 모두 최근 1, 2년 사이에 결혼을 했으니 조던으로서는 그런 형들에게 말로표현하기 힘든 배신감 같은 걸 느꼈을 수도 있었다. 스테지는 미소를 지었다. 화가 나긴 했지만 원래 화를 오래 품고 있지 못하는 성격일 뿐만 아니라 왠지 그가 그녀와 비슷하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누그러뜨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우리 두 사람에게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는 게 반갑군요.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하고 다음에 전화 드리겠어요" 스테지는 말을 마치고 서둘러 조던의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현관문을 열 때까지는 그래도 기분이 좋은 펴이었다. 그러나 막상 집 안으로 들어서자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음식 냄새가 진동하기 사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부엌으로 들어가자 잭만큼이나 불청객인 또 한명의 침입자가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저녁을 먹고 있었다. 계란과 베이컨인 듯 보였다. 집을 나올 때만 해도 냉장고가 텅 비어 있었는데, 아마 잭이 저녁거리를 사온 모양이었다. 고작 저 음식을 만들기 위해 부엌은 또 얼마나 이절러져 있는지! "릭! 여긴 또 웬일이야?" "걱정 마, 릭!" 잭이 나섰다. "반가운 사람한테는 늘 저렇잖아" 그는 스테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놀랐지, 스테지? 릭을 공항에서 데리고 오느라 그렇게 서둘러 나갔던 거야" 그의 목소리는 명랑하다 못해 들떠 있기까지 했다. 스테지는 미소 짓고 있는 릭을 노려보았다. "여긴 절대 안 돼. 잭도 마찬가지고" "<스테지>라니?" 릭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잭을 쳐다보았다. 막 서른을 넘긴 릭의 모습이 잭보다는 훨씬 젊고 풋풋해 보였다. "인터폰 밑에 적혀 있는 이름이 스테지였어" 잭이 설명했다. "내 이름이야!" 스테지는 이를 악물었다. "둘 다 아주 잘들 놀고 계시는데, 끝까지 보고만 있을 내가 아니지! 그래, 호텔 방은 예약 해 두셨나?" 뻔한 질문이었다. 아마 잭은 릭에게 이곳에 방이 충분하니 굳이 호텔 같은 것은 예약할 필요가 없다고 끄드겨 놓았을 것이다. 릭은 스테지의 화난 얼굴 따위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편안한 모습으로 돼지 우리처럼 지저분한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이떤 호화로운 궁전도 몇 시간이면 외양간으로 바꿀 수 있을 만큼, 두 남자는 어질러대는 데는 도사였다! "혼자 살기에는 아파트가 너무 크지 않아?" 릭이었다. "너무 커도 난 괜찮아" 스테지는 최대한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은 잭이랑 함께 방을 쓰고, 내일은 두 사람 다 짐을 챙겨 나가도록 해" 그녀는 서둘러 덧붙였다. "물론, 이렇게 잔뜩 어질러 놓은 것은 말끔히 청소한 후에 말이야. 절대로 잊지 말고" 스테지는 지저분해진 싱크대를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 계란 몇 개와 베이컨 몇 조각을 굽는 데 프라이팬을 몇 개나 꺼냈단 말인가!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니?" 잭이 눈치를살피며 물었다. "조던이 네게 아주 관심 있는 것 같은 눈치던데" "미안하지만 기분 나쁜 일은 전혀 없었어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조던이 누구야?" "그 사람은…" "내 고객 중 한 사람이야" 스테지는 얼른 잭의 말을 가로막았다. "난 먼지 씻고 자야겠어. 두 사람도 일단 여기부터 깨끗이 정리한 후에 씻고 자든 말든 해요.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할거야. 다른 숙소를 찾아야 할 테니까" 릭이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이렇게 다시 만나서 반갑다. 스테지" 그의 어두운 표정을 지켜보며 스테지는 가슴이 뭉클하는 것을 느꼈다. "나도 다시 만나서 반가워" 그녀는 그를 안으며 말했다. "겨우 사흘 동안에 두 사람이 차례로 들이닥치다니!" "이제 닉만 오면 돼. 그러면 다시 한 가족이 다 모이는 셈이잖아" 잭이 감개 무량한 어조로 말했다. 가족! 그랬다. 큰 키에 금발머리인 쾌활한 멋쟁이 잭은 둘재 오빠, 역시 훤칠한 키에 검은머리를 가진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릭은 막내오빠였다. 그리고닉은 주 사람의 맏형이자, 스테지의 큰오빠였고. 만약 니까지 온다면 그들 세 사람에게 집을 내주고 나오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스테지는 지난 3년간의 일들을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영국으로 되돌아올 생각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잭과 릭이 나타난 이상, 닉이 들이닥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아직도 닉은 네 일기장에서 널 괴롭히는 괴물로 묘사되는 모양이구나" 잭이 짖궂은 어조로 그녀의 상념을 깨뜨렸다. "그럼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녀는 새초롬하게 말했다. "난 그만 잘래. 내일 아침 떠나기 전에 인사나 해" 언제쯤이면 그들도 이젠 스테지가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까? 스테지는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그들에게 있어 자신은 영원히 하나밖에 없는 막내둥이 여동생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보호해 주고, 사사건건 간섭을 늘어놓고 싶은. 몇 년 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와 생활하던 기간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녀로선 그 유학기간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시절이었던 것이다. 공부를 끝내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자마자 그녀는 세 오빠들의 지나친 간섭에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특히나 닉은 정도가 좀 싷해서 그녀가 가는 곳이 어디든 세 명의 오빠 중 한 명은 꼭 따라다녀야 한다며 부산을 떨곤 했다. 문제는 세 오빠들 모두 그녀와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는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위의 오빠 릭이 서른 세 살로 그녀보다 무려 열두 살이나 위였고, 잭은 서른다섯, 그리고 닉은 서른여덟이었다. 큰오빠인 닉은 다른 오빠들보다 유난히 목에 힘을 주는 권위적인 오빠였다. 그런 그에게 그녀는 반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3개월 전, 그녀는 닉에게 다시는 자신의 인생에 관여하지 말라는 극단적인 말을 퍼부은 뒤 집을 떠나 버렸던 것이다. 그 후에야 비로소 그녀는 닉과 다른 오빠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녀를 옭아매던 보호라는 미명하의 독재에 대한 반란인 셈이었다. 지금도 닉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전적으로 그의 책임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당 부분이 그의 탁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잭과 릭이 나타난 이상 닉도 곧 그녀를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머지않아 그도 스테지 워커라는 이름의 여자가 바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스테지는 얼른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릭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오빠들과 함께 있을 땐 사생활을 좀처럼 누릴 수가 없었다. "왜?"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오빠를 쳐다보았다. 또다시 방해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의 눈엔 노여움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릭은 그나마 세 오빠들 중에서는 가장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였다. 아마 나이 차이가 제일 덜 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친 간섭이 지겨워 도망치듯 떠나 오기는 했지만, 어쨌든 사랑하는 오빠들이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이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기뻤다. 잭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릭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매닐었다. "조던이란 사람이 네가 이걸 두고 갔다면서 전해주라고 하더구나" "조던?" 그녀는 얼른 몸을 일으키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조던이 여기 왔었단 말이야?" 하지만 초인종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아마 너무 정신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자기 아파트에 들어오려면 이 열쇠를 가지고 있어야 할 거라던데. 여기다 놓으마" 그가 서럽장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알았어" 스테지는 언짢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그 사람이…" 그녀는 침을 삼키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 사람이 뭐 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 오빠보고 누구냐고 물어 본다든가, 뭐 그런 거" "그냥 잘 자라고 인사하던데?" 릭이 유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사람 참 괜찮아 보이더라" 웬일로 저렇게 다른 남자 칭찬을 하는 걸까! 아마 조던이 들었다면 기뻐서 펄쩍 뛰겠군. "닉 오빠 눈에도 그래 보일까?" 스테지가 결코 그럴 리는 없을 거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 그러까?" 릭이 미소를 지었다. "기대할 걸 해야지" 닉 오빠의 눈에 차는 남자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일찌감치 포기하고 수녀원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재키…" "내 이름은 스테지야"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지어준 이름은 닉이라고 불리는 니콜라스, 잭의 재클리, 릭의 리커드, 그리고 재키의 재클린 이었다. 가족들은 그녀를 그냥 재키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영국으로 떠나오면서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어머니의 처녀 적 이름은 스테지 워커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난 닉 오빠 얘긴 하고 싶지 않아" 스테지는 릭이 우물쭈물 자신의 이름을 부른 이유가 닉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테지…" "열쇠 가져다 줘서 고마워" 그녀는 자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릭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천천히 그녀의 방에서 나갔다. 스테지는 서랍장 위에 놓인 열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조던의 아파트 열쇠였다. 그는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가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들락거린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대체 나를 어떤 여자라고 생각할까? 어쩌면 아예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녀가 어떤 남자들과 어떻게 어울리든 그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4 "또 한 명이 더 있었군" 조던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아파트 문을 세게 닫았다. 빌어먹을, 대체 스테지라는 여자 주위에는 남자가 몇 명이나 있는 걸까? 하긴 무슨 상관이람! 그래, 내가 신경 쓸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자꾸 신경이 곤두섰다. 스테지 워커라는 존재는 그에게 있어서 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바람처럼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저 한 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입가에 미소를 짓게끔 만드는 요정 같은 여자였다. 그런데 낯선 남자들이 마술 같은 그녀의 입김을 들이마시고 있다니, 화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가! 그래, 하지만 한꺼번에 두 남자나 상대하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녀가 일전에 이상한 남자들로부터 받은 충격을 얘기하는 폼으로 봐선 그런 부류의 여자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조던은 반쯤 빈 위스키 병을 집어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밤은 무척 길게 느껴질 것 같았다. 도대체 스테지는 그렇게 잘생긴 두 남자와 뭘 하고 있는 걸까? "내 말 듣고 있는 거냐, 조던?" 자렛이 짜증 섞인 어조로 물었다. 조던은 널찍한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자렛의 뒤로 보이는 큰 창으로부터 날아온 햇살 때문에 눈이 부셨다. 어젯밤 잠이 들 무렵 반쯤 남아 있던 위스키는 동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형의 말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까지 남아 있는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늘 오후까지 결재해 주어야 할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중이었다. "두통이 좀 있어, 형" 조던이 중얼거렸다. "날달걀에 우스터 소스라도 좀 끼얹어 먹으렴" "그냥 머리가 아프다고 했지, 누가 술 때문에 그렇다고 했어?" 그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렛의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가 조던을 향했다. "그 두통 이름이 바로 스테지성 두통 아니냐?" 조던은 형의 농담을 받아들일 기분이 아니었다. "아니, 스테지 때문이 아니야. 그 여자는 내 평온한 마음을 어지럽히는 타입은 아니라구" 자렛은 코방귀를 뀌며 동생을 쳐다보았다. "그래, 그 평온한 마음이란 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자꾸 쓸데없는 추측하지 말라구. 형과 조나단 형, 둘다 삽시간에 결혼이란 족쇄에 스스로 묶이더니 많이들 달라졌어. 하지만 세상 남자들이 다 형들처럼 그렇게 어리석은 건 아니라구" 자렛은 미소를 지었다. "왜 갑자기 결혼 얘기가 나오는 거냐? 우린 스테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을 뿐이야" 그가 짖궂게 말했다. "우리라니? 스테지에 대한 얘기를 꺼낸 사람은 형이지 내가 아니야. 그리고 난 머리가 아프다고 했을 뿐이야" 조던이 투덜거렸다. "참, 두통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스텔라는 어떻게 되었지?" 자렛의 표정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사실 조던도 굳이 스텔라에 대한 얘기를 꺼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난처한 화제를 피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애쓰는구나, 조던. 하지만 스텔라에 대한 얘기가 끈타는 대로 다시 좀전의 화제로 돌아갈 테니 그리 알아!" 조던은 싱긋 웃었다. "그래, 스텔라는 어떻게 내보냈어?" 자렛의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녀가 원하는 돈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해찌. 조나단이 신혼 여행에서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 달라고 했어" "그랬더니? 그 말을 받아들였어?" "일시적이나마" 자렛이 어깨를 으쓱했다. "장사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이젠 스텔라도 세게 나올 때와 약하게 나올 때를 구분하는 것 같아"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10여 년 전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이 파경에 이르고 난 뒤 자렛이 그녀에게 엄청난 돈을 주었다는 사실을 조나단과 조던은 최근에야 알았다.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자렛은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요구하는 액수의 돈을 주었던 것이다. "손자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는 건 내가 일언지하에 거절했어" 자렛이 덧붙였다. "난 스텔라가 내 가족 누구와도 접촉하는 걸 참을 수가 없거든" 약점을 찾아라. 그리고 그걸 물고 늘어져라. 그러면 돈이 생긴다. 아마도 그것이 스텔라의 사업 전략일 것이다. 하루 빨리 그녀가 네 번째 남편을 만났으면 했다. 그래야 그 결혼 생활이 지속되는 동안만이라도 그녀가 그들 형제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테니까. 자렛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자, 그럼 다시 스테지 얘기로 돌아갈까?" "그만해, 형" 조던은 웃음을 터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테지는 그냥 내 이웃에 사는 여자일 뿐이야" "네가 몇 달 전에 말한, 그 이상하게 생겼다는 빨간머리 여자?" 자렛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세상에! 조던, 너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냐?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이상하게 생겼다고 말하다니! 대체 넌 어떻게 된 애기…" 사실 조던은 그녀를 지난 토요일에 처음 본 거나 다름없었다. 그 전에는 그냥 스치듯 멀리서만 몇 번 보얐을 뿐이기 때문에 그녀가 불타는 듯한 빨간머리라는 것 이외엔 특별한 인상을 가지지 못했던 터였다. "아마 미국 남자들 중 절반 이상이 형처럼 생각하나 봐. 벌써 그 얼빠진 미국 남자들 중 두 명이 그녀의 아파트를 들락거리는 걸 봤거든" 두 남자가 동시에 그녀의 아파트에 머물고 있다는 것까지는 차마 얘기할 수 없었다. 자렛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스테지의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 둘이 그녀의 아파트를 드나들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그녀와 이상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네 눈이 어떻게 된 거야" 자렛이 킬킬거렸다. "애비 형수에게는 절대 말하지 마" 조던이 사정했다. "아마 형수가 알게 되면 또 놀릴거야. 아니면 아예 스테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려 들걸" 조나단과 케이를 하나로 엮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애비였다. 그녀는 두 사람의 관계가 난항을 겪을 때 케이에게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초대했었다. "그래, 애비에겐 말하지 않을게" 자렛이 약올리듯 말을 이었다. "네가 어떻게 상황을 진전시킬 건지 말해주면 말이야" "형,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조던은 겁주듯 수화기를 집어드는 자렛의 손목을 낚아챘다. "알았어, 알았다구. 내 아파트의 인테리어를 바꾸기로 했어" "그래서?" 조던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다야!" "그럼 인테리어 공사를 한답시고 시끄럽게 굴어서 그녀를 네 집으로 찾아오게 만들 작정이니?" 자렛은 고개를 흔들었다. "조던, 여자의 관심을 끌려고 집깢지 뜯어 고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돈도 너무 많이 드는 일이고 말이야. 차라리 그녀에게 꽃다발이나 뭐 그런 걸 선물하는 게 어떻겠니?" "그럴 필요가 어디 있어? 그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여자가 바로 스테지인데" 조던은 형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자, 그럼 난 점심이나 먹으러 나가야겠어" 굳이 형이 권한 우스터 소스를 끼얹은 날달걀을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뭐든 먹어야만 쓸린 속이 좀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는 자렛의 잔소리를 뒤로 한 채 손을 흔들어 보이며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가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스테지가 그의 아파트에 다녀간 모양이었다. 그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스테지의 향기가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그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향기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아파트가 더더욱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의 아파트는 언제나 이렇게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텅 빈 느낌을 좋아했다. 그는 시끄러운 형들로부터, 그리고 복잡한 일들로부터 완전히 탈출할 수 있는 이 고즈넉한 아파트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그런데 왜 오늘따라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아파트 안에는 그녀의 향기만 남아 있는 게 아니었다. 맛있는 음식 냄새도 희미하게 풍겼다. 그는 서둘러 부엌으로 달려갔다. 냉장고 문에 쪽지가 하나 붙어 있었다. 활짝 웃는 얼굴의 스마일 자석 아래 그녀가 써놓은 메모가 달랑 매달려 있었다. 저녁에 드실 음식을 오븐 안에 따뜻하게 넣어 놓았어요. 어제 저녁 식사에 감사하는 뜻으로 준비한 거예요. 화인도 마개를 열어 잔에 따라두었으니 마시가만 하면 돼요. 스테지 어제 저녁 식사라고 해봐야 오는 길에 들른 중국 음식점에서 배달을 시킨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지는 그를 위해 이렇게 직접 요리까지 한 것이다. 칠리 소스를 얹은 밥이 오븐 안에 얌전하게 들어 있었다. 와인 잔 역시 그녀의 말대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위해 요리를 하다니! 한편으로는 기뼜지만 현편으로는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저 이웃 사촌의 정으로 이렇게까지 해놓은 걸까? 혹시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이러다가 그의 속옷까지 빨아놓는 건 아닐까? 사실 친구들 중에서는 이런 식으로 접근해 오는 여자에게 넘어간 녀석들이 여럿 있었다. 아니, 이런 생각 자체가 옳지 못했다. 남자가 이미 두 명이나 있는 여자가 무슨 이유로 그에게 추파를 던지겠는가? 음식은 그냥 음식일 뿐이다. 그녀의 말대로 어제 얻어먹은게 있으니 오늘 갚겠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갑자기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렛의 말이 옳았다. 3개월이나 같은 아파트, 같은 층에 살면서도 그녀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정말 눈이 멀어도 한참 멀어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조던은 와인 준을 다 비운 뒤 푸른색 티셔츠에 면바지로 갈아입고 그녀의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살짝 여는 그녀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젊어 보였다. 그녀는 빨간 머리칼을 뒤로 넘겨 리본으로 묶고 있었다. 이 여자를 <이상하게 생긴 빨간머리 여자>라고 표현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검정색 셔츠 차림의 그녀는 경쾌하고 산뜻해 보였다. 심지어 그녀의 발가락조차도 아름다워 보였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활짝 웃었다. "칠리가 맛이 없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죠? 내 실수일 수도 있어요. 난 가끔 사람들이 모두 나만큼이나 매운 음식을 좋아할 거라는 착강르 하거든요" 그녀느 그가 들어올 수 있도록 살짝 몸을 비켜서며 말했다. "난 지금 막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어요" 그는 식탁 위에 놓은 접시 하나와 포크를 쳐다보았다. 두 남자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조던은 그녀가 자신과 똑같은 음식을 저녁으로 먹는다는 사실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음식은 같은데, 먹는 곳은 각자의 집이라! "왜 그래요?" 접시와 포크를 쳐다보고 있는 그를 향해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던은 그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나도 칠리를 좋아하는 편이오. 하지만 식사하는 동안 그 음식을 요리한 주방장과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소. 자, 같이 갑시다. 함께 식사하게 말이오" 그녀는 우물쭈물했다. "혼자 먹는 게 낫지 않겠어요?" "아니, 당신만 괜찮다면 함께 먹고 싶소" 지난 2,3일간 그녀에겐 손님이 있었다. 어쩌면 오늘 저녁만큼은 조용히 혼자 지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테지는 이가 환히 드러날 정도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하면 잭과 릭에게 당장 나가라고 야단을 쳤거든요. 그런데 막상 두 사람이 떠나고 나니까 이렇게 허전할 수가 없어요" 그녀가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참 바보 같죠?"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향기만 떠돌고 있는 아파트는 너무도 허전해 보였던 것이다. "잭과 릭?" "아, 고향에서 온 친구들이에요" 그녀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이젠 호텔을 하난 잡아 나갔어요" 그랬군. 이젠 안심이다. 아직도 뭔가 이상한 구석이 남아 있긴 하지만…. "오늘 소파 천갈이에 필요한 천 샘플들을 많이 구해놓았어요. 거실에 잘 어울릴 만한 것들로요" 그녀는 식탁에 앉으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두 사람에게 가장 편한 화제는 바로 일에 대한 얘기였다. 하지만 어떤 얘기를 어떤 식으로 하든 그녀는 아름다웠다. 속살거리는 듯한 목소리, 인형처럼 도톰하고 정겨운 잆술, 그리고 빨려들 것같이 매혹적인 푸른 눈동자….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안겨 있을 때,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칠리가 뜨거운가요?" 스테지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의 얼굴을 외면하며 말했다. "아, 아니오" 그는 음식에 몰두하려고 애썼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게 너무도 위험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온몸이 아파왔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안고 뒹굴고 싶다는 주체 못할 욕망이 치밀어 올랐다. 두 형의 갑작스러운 결혼으로 얼마나 상처를 받았던가! 그런 그가 이렇게 짧은 순간, 한 여자에게 빠지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와인 그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 같소" 스테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오빠도 인정한 사실이요. 여자란 자고로 저녁 식사 때 마실 포도주나 잘 고르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오빨라…. 그녀에겐 오빠가 있다. 그런 말을 하는 걸로 봐서 나이 차이가 많이 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보수적인 오빠인 모양이다. "당신 가족은 미국에 있소?" 조던은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안색이 변했다. "아버지 얘기는 지난번에 했었죠?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3년 전에도"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런던으로 온 거예요. 미국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사귀는 남자 하난 없었단 말이오?" 조던이 놀리듯 말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여태껏 남자 친구 하나 없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거 없어요" "그럼 오빠는?" "오빠 얘기는 하고 싶지 않군요" 그녀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아마 스테지에게도 때론 피하고 싶고, 때론 벗어나고 싶은 형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셈이었다. "자, 그럼 이거나 치웁시다" 그가 빈 접시를 들고 일어섰다. "그러고 나서 당신이 구해온 샘플을 보도록 하죠" "아직도 당신이 정말 나에게 일을 주려는 건지 믿을 수가 없어요" 스테지는 식기 세척기에 빈 접시들을 넣으며 말했다. "스테지, 날 믿어요. 난 다른 건 몰라도 일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함부로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오" "구해온 샘플들을 보여드릴게요" 그녀가 다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라대로 천조각들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어느 것을 선택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였다. 그녀가 준비해 온 것들은 하나같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몇 번이고 생각한 끝에 그는 짙은 황갈색 톤의 천으로 결정했다. 이제 나머지 소소한 부분은 스테지가 고를 것이다. 그들은 거실 카펫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녀가 골라온 천 샘플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천을 고르고, 색깔을 선택하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는 일인 줄은 미처 몰랐소" "그럼요" 스테지는 밝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리고 나중에 집이 완전히 바귄 모습을 보면 또 얼마나 신이 나는데요! 난 벌써 이 집이 어떻게 바뀔지 환히 알 수 있어요. 확실히 당신도 마음에 들 거예요, 조던!" 조던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황금색과 황갈색 통으로 바뀐 이 집 안에 그녀가 앉아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쓸데없는 잡념으로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럴 거요. 내가 할 일은 더 이상 없는 거요?" 스테지는 갑자기 서두른 그를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그럼요.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당신이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색상을 선택했으니까요" 그녀 역시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루에 방 하나씩 진행할 생각이에요. 그래야 당신이 덜 피곤하죠" "좋소" 그는 긴 한숨을 내몰아 쉬었다. "자, 오늘은 이만하면 되겠소?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더 남아 있소" "아, 네" 그녀는 무안한 듯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눈치 없이 당신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모양이군요. 미안해요" "아, 그건 아니오" 그는 서둘러 말했다. "내일까지 끝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오. 저녁 식사는 정말 맛있었소. 고맙소. 그리고 주문할 물건들을 내게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은 걸로 알아서 구입하도록 해요. 집이 아주 근사하게 바뀔 거라고 나도 믿고 있소" 그래, 새로 꾸민 집은 분명 그녀의 저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과 기가 막히게 어울릴 테지! 집 안을 둘러볼 때마다 그녀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전화벨이 울린 건 바로 그때였다. "난 그냥 갈 테니 전화 받으세요" 스테지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오. 기다려요" 그가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녀를 그냥 이대로 보내고 싶진 않았다. 또다시 위스키를 반 병이나 들이켜면서 잠을 청하고 싶진 않았다. "여보세요!" 그가 수화기를 집어들며 다소 짜증스레 말했다. "그래, 일은 순조롭게 굴러가니?" 자렛이었다. 조던은 무안한 얼굴로 스테지를 흘끗 쳐다보았다. "무슨 일?" "인테리어 말이야" 자렛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야 해봐야 알지. 대체 뭘 알고 싶은 거야?" "오늘 애비에게 말했는데…" "세상에, 내가 그렇게 당부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조던이 소리쳤다. "아, 그냥 스테지가 인테리어 디자이너라고만 말했어" 자렛이 머뭇거리며 말으 이었다. "그랬더니 그렇지 않아도 찰리의 방을 다시 꾸몄으면 했대" "갑자기 왜 방을 다시 꾸며?" "여자들이 어떤지 너도 잘 알잖니?" "잘 알지. 특히 형수는 늘 남의 일에 신경 쓰느라 바쁜 사람이지"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형수가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너한테 신경 쓰고 있다는 건 너도 인정해야 할 거야" "이번엔 신경을 안 써주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말해줄 수 있겠어, 형?" "그래.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찰리 방을 다시 구미겠다는 뜻만큼은 나도 못 꺾을 것 같아" 자렛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코너가 태어난 뒤로 찰리가 소외감을 좀 느끼나 봐. 아무래도 동생이 태어나니까 자신에게 쏠렸던 애정이 분산되는 느낌이겠ㅈ. 그래서 찰리 방을 다시 꾸며 기분 전환을 좀 시켜주면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한 모양이야. 나도 찰리가 우울해하는 걸 그냥 두고 보긴 싫고" 자렛은 조던이 얼마나 찰리를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찰리는 애비가 데려온 자식이었다. 하지만 자렛에게 찰리라는 존재가 친자식 이상이듯, 조던에게도 그 아이는 친 조카 이상의 존재였다. 그런 찰리가 새로 태어난 동생 때문에 마음이 안 좋다니! 조던의 마음도 덩달아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이야, 조던. 애비가 그녀와 얘기를 좀 나누고 싶은 모양이야. 그게 다야, 더 이상은…" "좋아, 형수에게 지금 당장 얘기해 보라고 그래. 둘이서 말이야!" 조던은 스테지에게 불쑥 수화기를 내밀며 말했다. "당신 전화요, 스테지" 스테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내 전화요? 난…" "우리 형수님이 당신과 상의할 일이 있다는군" 조던은 스테지와 형수의 통활 내용을 듣지 않기 위해 일부러 부엌으로 자리를 피해 와인을 한 잔 따랐다. 애비 헌터가 나선 이상, 이제 일은 더더욱 복잡해질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해서든 스테지 워커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는 그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분명히 애비는 무슨 일을 터뜨리고 말 것이다. 조던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5 스테지는 애비 헌터와의 통화가 끝난 후 부엌으로 가서 조던을 찾았다. "정말 여러 가지로 친절하군요" 그는 그다지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뭐가 말이오?" 그는 별로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게 와인을 마셨다. "당신 형수에게 날 추천해 준 것 말이에요" 스테지는 최소한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할것 같았다. 런던에 도착하고부터 일이라고는 전혀 하지 못했던 그녀였다. 일단 일거리를 하나 잡게 되면 고객들이 입소문을 통해 추천해 주기 때문에 일이 계속 생길 수도 있었다. 물론 일을 제대로 했을 경우에나 그렇겠지만, 스테지는 자신 있었다. "아, 내가 추천을 했던가?" 애비 헌터의 얘기로 봐서는 분명 추천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조던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랬지, 참. 내가 추천했소" 조던은 조롱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별명이 원래 친절맨 아니오" 그녀는 조던의 태도가 조금 전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 이상했다. 이러면서도 여자들더러 변덕이 심하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럼 볼일 보세요. 난 이만 가보겠어요" 오늘은 그래도 일이 잘 풀리는 날이었다. 잭과 릭이 짐을 챙겨 그녀의 집을 떠나주었고 조던의 집을 인테리어하는 일이 잘 진행된 데다가 다른 일거리까지 생겼으니 말이다. 조던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할 생각이 없어져 버렸소. 나랑 같이 와인이나 한 잔 더 합시다" "고맙지만 난 해야 할 일이 좀 있어요" 그녀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언짢은 기분 때문에 자신의 좋은 기분을 마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내 접시는 신경 쓰지 말아요. 내일 내가 와서 가져갈게요" 몰론 그가 없을 때 말이다. 분명히 그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한 건 실수였다. 비록 옆집에 사는 사람이긴 하지만 자꾸 사적으로 얽히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러다 공연히 너무 가까워지기라도 하면…. 게다가 이미 입맞춤까지 나눈 사이가 되어 버렸다. 한 번 그런 사람이 다신 그러지 않는다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아니, 그 순간만큼은 아예 저할할 의사를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 어느 한순간에 싸늘하게 변해 버리다니….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조던이 그녀를 쳐다보며 씁쓸하게 물었다. "싫소?" 그녀는 희미하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난 당신이란 사람을 잘 모르겠어요" "이런, 나를 잘 모르겠다? 하늘이 도왔는지 여자들은 모두 날 잘 모르겠다고들 하더군" 그는 테이블 위에 마시던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나 역시 당신이란 여자를 잘 모르겠소. 하지만 분명한 건, 당신은 무척 매력적인 여자라는 거요"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남자였지만 정말 매력적이었다. 잘생긴 얼굴과 당당해 보이는 외모, 그리고 적당한 유머 감각을 가진 남자였다. "우리 둘 다 서로 사적인 관계를 가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봐요. 그러니 이제부터는 일 때문에 서로 만나는 사이라고 생각하겠어요" 그는황금빛이 감도는 갈색 눈동자를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일이라!" 그녀는 그가 너무나 쉽게 자신의 말에 동의하는 것이 은근히 실망스러웠다. '좋아요" 그녀는 대답과 동시에 얼른 현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스테지?" 조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이제 앞으로 다신 날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지 않겠다는 뜻도 되는 거요?" 스테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뜻이 아니라 다음엔 당신이 날 위해 저녁을 준비해야 할 차례라는 뜻이겠죠" "냉자고에서 계란을 꺼낼 때마다 계란이 울면서 <나 좀 살려줘요!>라고 애월한다오. 난 내 손에 잡히는 건 뭐든 떨어뜨리고, 뭐든 엉망으로 만들어 버려요. 한 마디로 부엌의 무법자지" 스테지는 이제 소리까지 내며 크게 웃고 있었다. "그럼 부엌의 무법자답게 계란을 막 야단치세요!" "이런!" 조던 역시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소, 항복이오. 다음엔 내가 식사를 준비하리다" 그는 그녀를 따라 현관문까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은 곤란하고, 며칠 있다가 하도록 해요. 아무래도 며칠간은 할 일이 좀 많을 것 같아요" 그보다는 당분간 그와 만나는 일을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물론 일을 빨리빨리 진행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오늘 저녁 식사 고마웠소, 스테지. 정말 즐거웠소" 스테지는 어리둥절해졌다. 또 농담을 하고 있는 건가? 그녀는 찬찬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런 기색은 아니었다. "천만에요" 그녀는 문 앞에 서 있는 조던을 쳐다보았다. 밖으로 나와서야 그녀는 자신이 맨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우 사무적인 차림이죠?" 그는 그녀가 아파트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킬킬 웃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와 거실 등을 켠 뒤 곰곰이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는 왜 한순간 너무나 가가운 사이인 듯 행동하다가, 다른 한순간엔 그렇게 차갑게 변하곤 하는 것일까? 만일 그 이유를 알 수 있다면 조던이란 남자를 알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하늘이 도와 어떤 여자도 자신을 알 수 없다고 중얼거렸었다. 글쎄,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지! "웬일이에요?" 그녀는 천조각들을 손에 든 채 의자 위에 서 있다가 깜짝 놀라 비틀거렸다. "조던, 놀랐잖아요. 하마터면…" 그제야 고개를 돌린 그녀는 조던 혼자만 온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말을 멈췄다. 그의 곁에는 금발에 조각같이 완벽한 얼굴을 가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고양이 같은 고혹적인 초록빛 눈으로 뚫어질 듯 스테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스테지는 공연히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듯 드레스를 입고 공들인 화장에 우아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녀에 비해 스테지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오빠들이 입던 커다란 티셔츠를 걸치고 있는 데다가 아무렇게나 뒤로 묶은 헤어 스타일까지 모든 게 엉망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오늘도 맨발이었다. 집말고는 달리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편한 대로 신발을 벗어 던져 놓고 있었던 것이다. "커튼을 대보고 있었어요. 당신이 집으로 돌아와서 직접 보고 마음에 든다고 하면 제대로 만들어서 달려고 했죠" "왜 가정부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죠, 조던?" 금발머리 여자는 스테지를 조던의 가정부쯤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당신은 나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잖소, 일레인?" 그는 일레인이라는 여자에게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함께 식사라도 하면서 서로에 대해 좀더 알아보지 않겠소?" "난…" 스테지는 당황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우선 옷이나 좀 갈아입고 나오겠소" 조던은 스테지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스테지는 그 금발머리 여자에게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는 조던이 불쾌하기만 했다. "뭐라도 마시고 있어요, 일레인" 조던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음료수 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도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그는 스테지를 흘끗 쳐다보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옷을 갈아입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이거 마시겠어요?" 스테지는 셰리주 병을 들어 보였다. "좋아요" 금발 여자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스테지보다 더 언짢아 보였다. 스테지는 두 잔을 따라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조던과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되었어요?" 스테지는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셰리주가 오늘따라 더 독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아뇨" 일레인이 쌀쌀맞게 대꾸했다. "당신은요? 당신 혹시 여기서 살아요?" 질문의 수위가 갑자기 높아지는 것을 느끼며 스테지는 천천히 대꾸했다. "네" 이곳에 사는 것은 사실이었다. 비록 옆집이지만 같은 아파트 아닌가! 일레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군요. 4개월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그런 말이 전혀 없었는데!" "아, 난 이사온 지 3개월밖에 안 됐어요" 여자는 조던과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닌 듯했다. 아무튼 이 여자의 이글거리는 초록빛 눈동자를 보니, 조던이 저녁 식사 내내 꽤 피곤해질 것 같았다. "3개월이라…" 일레인은 빈 잔을 내려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다른 여자가 이렇게 집에 버티고 앉아 있는데도 날 이곳으로 데려온 건 또 뭐람! 대체 무슨 남자가 저렇지" "아, 그는 매우 친절한 남자예요. 별명이 천절맨이거든요" 스테지가 말했다. "난 미국에서 이곳으로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조던은 고맙게도 내내 친절하게 대해 주었어요" "친절하게?" 일레인은 기가 막히다는 듯 스테지의 말을 반복했다. "이봐요" 그녀는 셰리주를 한 잔 더 따르며 말을 이었다. "실례지만 당신 몇 살이에요?" "스물 하나요" "조던에 비하면 아주 애송이군" 일레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긴 그녀는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나이였다. "집에 이런 애송이가 있는데도 나를 데리고 오다니, 참 친절도 하군" 스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집에 데리고 온 여자가 당신이 처음은 아니에요. 당연히 끝도 아닐 거구요" 어떻게 보면 사실일 수도 있었다. 조던은 결혼을 싫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까지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끔찍하군요" 일레인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격렬하게 소리쳤다. "대체 당신은 왜 이런 꼴을 그냥 보고만 있는 거죠? 이런 치급을 받으면서도 붙어 있는 이유가 뭐예요?" "달리 갈 곳이 없거든요" 스테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일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가 없군요. 난 정말이지… 혹시, 당신 임신이라도 한 건가요?" 일레인은 스테지의 헐렁한 티셔츠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정말 그렇게까지 생각하는걸까? 조던이라는 남자는 이런 오해를 받을 정도로 처신을 함부로 하고 다녔단 말인가? 아니면 이 금발 여자가 너무 통속적인 걸까? "그건 아니에요" 스테지가 가볍게 웃었다. "조던이 그렇게 부주의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럴 거예요" 일레인의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럴리가 없겠죠" 그녀는 셰리주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내가 충고 하난 해도 될까요? 아무래도 내가 한 살이라도 더 먹었으니까 하는 말인데…" "그러세요" 그녀는 사실 일레인을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정말 골려먹고 싶은 사람은 조던이었다. 그의 무례함에 대한 대가를 일레인을 통해 치르게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조던을 차버려요" 일레인이 적의가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당신은 아직 젊고 매력적이에요. 당신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남자 곁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어요" "하지만 조던은 너무 잘생기고…" "게다가 잠자리에서도 끝내줄 거예요" 일레인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의 셰리주를쳐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정말 좋은 남자를 찾아서 결혼하도록 해요. 난 결혼을 두 번이나 했어요. 하지만 잠자리 기술이 좋은 남자치고 가정에 충실한 남자는 보지 못했어요" 일레인은 분명히 조던이 잠자리에서도 끝내줄 거라고 말했다. 결론이 아니라 추측이었다. 그리고 그 추측은 스테지도 이미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결혼을 두 번이나 했다면서…?" 스테지는 일레인이 반지를 끼고 있지 않은 게 이상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럼 지금은 혼자란 말인가? "그래요. 결혼이란 것, 정말 따분하고 지겨운 형식에 불과하죠" 일레인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돈이 좀 많은 남자를 만나면 그런 대로 참을 만해요. 나중에 이혼을 하더라도 위자료가 많이 나오니까 좋구요" 그녀가 빈 잔을 내려놓은 뒤 몸을 일으켰다. "조던에게 고마웠다고 전해줘요. 아니, 고마울 게 하나도 없었지, 참!" 그녀가 비틀거리며 현관을 향해 걸어나갔다. 스테지는 얼른 따라 일어섰다. 그냥 조던에게 골탕이나 먹일 생각이었지, 결코 두 사람 사이를 이렇게 끝장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조금나 더 기다렸다가 조던에게 직접 인사라도 하고 떠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뇨" 일레인이 한 팔을 스테지의 어깨 위에 얹었다. "내 말 명심해요. 아무리 잠자리 기술이 좋은 남자라도 이렇게 함부로 살아선 안 돼요" 일레인은 서둘러 아파트를 나가 버렸다. 그녀가 뿌린 짙은 향수 냄새가 아직도 실내에 얼얼할 정도로 배어 있었다. 스테지는 일레인이 아무 인사도 없이 가버린것에 대해 조던이 혹시 화라도 낼까 봐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 "일레인은 어디 있소?" 너무 늦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킨 다음 천천히 조던을 향해 돌아섰다. 그는 참으로 멋져 보였다. 검은색 정장에 하얀색 와이셔츠, 그리고 넥타이가지 잘 갖춰 입은 차림이었다. 아마 일레인과 근사한 레스토랑에라도 갈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스테지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갔어요"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시선을 피하려 애쓰며 간신히 말했다. "고마웠다고… 하지만… 가야 한대요" 조던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아마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스테지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도 그만 가봐야겠어요. 내일까진 일을 다 끝낼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천조각을 집어들었다. "대체 일레인에게 뭐라고 말했기에 그렇게 가버린 거요?" "내가요?" 이상하게도 그의 목소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 당신이 말이오" 조던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하루 종일 그 여자를 떼어내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는데도 실패했소. 그런 그녀가 당신과 같이 있은 지 겨우 10분 만에 이렇게 가버렸단 말이오. 그것도 제 발로!" 그녀는 푸른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하루 종일 그녀를 떼어내려고 했다구요?" "그랬소" 조던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위스키를 잔에 따랐다. "일 때문에 자주 만나는여자요. 가끔 런던에 오는데…" "4개월마다" "그렇소. 4개월마다 한 번씩 만날 일이 있소. 오늘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저녁 식사 정도로 그녀를 떼어버릴 생각이었지"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골적으로 기분 나쁘게 대할 수도 없고 해서…" "그런 어려움이 있는 줄은 몰랐군요" "다른 상황이라면 몰라도 일이 얽혀 있을 땐 좀 그렇소. 내가 함부로 대하면 자렛도가만히 안 있을 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랑 잠자리까지 같이하라고 강요할 자렛은 아닌 것 같던데요" 조던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누가 잠자리 운운하는 얘기를 했소?" "그녀가요. 나도 했구요" 스테지는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당신과 내가 잠자리까지 같이하느 사이라고 단정하더군요" 조던은 그녀의 말에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그녀가 제 발로 걸어나간 이유가 정확히 뭐요?" "당신 때문이겠죠. 당신이 처음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가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을 바로잡아 주지 않았던 게 이유라면 이유일 거예요" 스테지는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마치 당신의 성적 노리개라도 되는 줄 알고 있더군요. 혹시 임신이라도 했을까 봐 걱정하기에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었죠. 당신에게서 이런저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당신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당신이 잠자리 하나만큼은 끝내주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어요" 그녀는 뻔뻔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조던을 향해 소리르 질렀다. "이봐요, 조던. 당신에겐 우스운 얘기일지 모르지만 난 정말 웃을 기분이 아니란 말이에요!" "하지만 너무 웃기는 얘기 아니오?" 조던은 마침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내 성적 노리개라니?" 스테지는 그가 웃는 모습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절대로 웃지 않을 것 같던 그의 황금빛 도는 갈색 눈동자가 마치 마술이라도 부린 듯 눈부신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웃음소리에 맞춰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스테지는 너무나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조던은 그녀의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서며 중얼거렸다. "내가 잠자리에선 끝내준다?" 스테지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 뒷걸음질쳤다. "말하자면 그럴 거라는 추측이죠" 조던의 팔이 스테지의 허리를 향해 오는가 싶더니 커다란 손이 가녀린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의 목소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 이론과 추측을 한 번 실험해 보는 게 어떻겠소?"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왜 내가 당신의 실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거죠?" 조던은 스테지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의 목소리는 의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신 혹시 아직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거 아니오?" 이번엔 스테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모욕하지 말아요. 그게 어때서요!"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쳐 버렸다. 하긴 조던 같은 남자는 일레인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남자를 능숙하게 다룰 줄아는 경험 많은 여자를 좋아할 거야. 그래, 실컷 좋아하라지. 신경 쓸 것 없잖아? 어차피 나랑 아무 상관없는 남잔데! "난 모욕하는 게 아니오, 스테지" "알았어요. 모욕을 하건 말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죠"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외출하려고 옷도 갈아입었고 식당 예약도 취소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나와 함께 가면 어때요? 어차피 내게 저녁 식사 한 번을 빚졌잖아요. 10분만 기다려요.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요" 스테지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쏜살같이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현관문이 쾅 닫히는 소시를 들으며 스테지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보처럼 보였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닉 오빠가 가르쳐 준 대로 선제 공격이 최선의 방어니까. 그와 함께 있으면서 느꼈던 그 야릇한 충동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오빠가 가르쳐 준 대로 오히려 저돌적으로 식사를 제의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제대로 공격을 하긴 한 것일까? 혹시 질것이 뻔한 싸움을 시작한 것은 아닐까? 6 일레인과 식사를 하느니 스테지와 함께하는것이 훨씬 좋았다. 게다가 10분 뒤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 그녀의 모습을 보자 그 생각이 더확실해졌다. 짧은 진홍색 스커트는 아마 그녀의 머리색을 염두에 두고 고른 옷인 듯했다. 길게 늘어뜨린 고혹적인 붉은 머리칼, 한 듯 만 듯한 가벼운 화장에 유난히 두드러지는 붉은 입술, 그리고 짧은 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긴 다리와 빨간색하이힐. 그녀는 마치 하늘을 나는 요정처럼 보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아직까지 남자를 전혀 알지 못한다니! 조던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 곁엔 분명 릭과 잭이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어째서 그냥 내버려 두었는지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 뭘 먹을지 결정은 내렸소?" 그는 밀려오는 잡념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애써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 "함께 식사하러 가는 게 그렇게 싫어요?" 싫다니! 그저 이 아름다운 여자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버릴 것 같아 두려울 뿐이었다.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그가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그녀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스테지, 난 내키지 않는 일은 안 하는 사람이오" "그래요? 일레인의 경우로 볼 때 항상그러는 것 같진 않던데요"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건 어디까지나 사업상의 식사였을 뿐이오. 일레인이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말이오" 스테지가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그럼 이것도 사업상 함께하는 식사라고 생각하지 그래요.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수고한다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식사를 대접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군요" "아직은 천조각이나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것밖에 별로 수고하느 일이 없어 보이던데!" "그 말은 앞으로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얘기잖아요. 따라서 식사 대접을 하기엔 오히려 일이 다 끝난 시점 보다는 지금이 적기 아니겠어요?"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방금 뭘먹을 거냐고 물었죠? 닭고기 요리를 풀 코스로 먹고 싶어요. 야채랑 샐러드, 그리고 수프까지 몽땅" 그녀는 신이 안 듯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가 살이라도 찌면 어떡하려고?" 조던이 중얼거렸다. 하긴 스테지 정도면 체중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은 거의 없을 것이다. "못 생기고 남자 다루는 법도 모르는 애송이 처녀가 살까지 찌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구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스테지, 당신은 왜 남자 경험이 없는 처녀란 사실을 창피해하는 거요? 물론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숨겨야 할 일은 절대 아니잖소" "하지만 가끔은 그 사실일 싫을 때가 있어요. 새 옷에 붙어 있는 상표 딱지처럼 거추장스러울 때가 있다구요" 그는 보통 여자들 같으면 꺼려할 내용의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이 여자가 신기했다. 조던은 스테지의 모든 것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누구일까, 이 특이한 여자는? 어디서 온 여자일까? 왜 여길 왔을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미국엔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없어서 런던으로 왔다고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이유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 그 오빠라는 남자는 어디 살고 있는 걸까? 그리고 어째서 여동생이 머나먼 타국 땅에서 혼자 살도록 내버려두는 걸까? 만약 자신이 그녀의 오빠였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여동생을 낯선곳에서 혼자 지내도록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아직 순결을 지키고 있는 여자가 있다는 건 무척 드문 일이긴 하오. 하지만 보통 남자들은…" "조던,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갑작스럽게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가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그 여자는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기는 두 팔로 조던을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는 그의 뺨에 열렬하게 입을 맞췄다. "메를린!" 조던도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녀를 마주 껴안았다. "혼자 오셨어요?" "그럴 리가!" 메를린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벤자민과 만나기로 했는데내가 먼저 온 모양이에요. 병원 일이 아직 덜 끝났나 봐요" "그럼 벤자민이 올 때까지 저희와 합석하시죠" 조던이 메를린에게 의자를 권하며 말했다. 메를린은 스테지를 쳐다보며 잠시 주춤하는 것 같았다. "우리 조던과 둘이서만 있고 싶은데 방해하는 건 아니겠죠, 아가씨?" "천만에요" 스테지의 얼굴이 환해졌다. "당신은… 아! 난… 당신을 이렇게 직접 만나다니, 정말 너무나 영광이에요, 미스 파머!" 스테지는 조던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조던, 이렇게 유명한 배우를 알고 있다는 말을 왜 진작 하지 않았어요?" 메를린 파머는 40여 년 이상의 연기 경력을 가진 세계적인 스타였다. "그야 당신이 내게 물은 적이 없으니까 그랬지" 조던이 짓궂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조던은 말이에요, 장난이 아주 심해요" 메를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메를린 파머와는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일 뿐만 아니라, 아주 가까운 친척이기도 하지" 조던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메를린의 푸른색 눈동자가 스테지를 응시했다. "우리 딸 케이가 조던의 형, 조나단과 결혼했거든요. 그러니까 조던과 난 사돈지간이에요" "그 결혼식엔 저도 갔었어요" 스테지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어요?" 메를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런데 왜 당신을 보지 못했을까?" 그녀의 시선이 조던을 향했다. "조던, 왜 진작 소개를 시켜주지 않았죠?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냥 이렇게 이름도 모르는 채 앉아 있으란 말인가요?" "이 아가씨는 스테지 워커라고 해요. 이쪽은 잘 알다시피 메를린 파머" 60대 붕반인 메를린은 누가 보아도 그 나이답지 않은 미모와 건강미가 넘쳐흘렀다. 여전히 균형 잡힌 날씬한 몸매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 그리고 지중해를 떠올리게 하는 깊고 푸른 눈동자는 뭇 남성들의 시선을 끌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최근에 벤자민 트레비스를 소개받아 사귀면서부터 메를린은 더욱더 활기차고 생기 있어 보였다. 두 사람은 가는 곳마다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녔다. 바로 그 때문에 혼자 오셨느냐고 조던이 짓궂게 물었던 것이다. "그래, 영국 생활은 어때요, 스테지?" 메를린이 친근한 어조로 물었다. "조던을 만나고 난 이후로 점 바빠지기 시작했어요" 조던은 자기를 만난 이후로 바빠졌다는 스테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일이 생겨서 바빠졌다는 단순한 뜻일까? 아니면 여러 가지로 신경 쓸 일이 생겨서 마음이 바쁘고 혼란스럽다는 뜻일까? "삼 형제가 다 괜찮은 남자들이에요" 메를린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딸은 정말 결혼을 잘했어요. 조나단처럼 성실하고 친절하고 사려 깊은 사위는 또 없을 거예요. 남편감으로나 사윗감으로나 조나단 같은 남자는 없죠" "게다가 거만하고 독선적인 면에서도 조나단 형을 따를 자가 없죠" 조던이 빈정거렸다. "남자가 약간 거만한 건 매력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 안하요, 스테지?" 스테지는 조던을 흘끗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약간>일 때는 괜찮겠죠. 하지만도를 지나치면 문제가 있어요" 조던은 그녀의 시선을 의식한 듯 고개를 돌렸다. 거만하다? 그녀는 날 거만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조던은 늘 큰형인 자렛이 가장 거만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다음은 조나단, 그리고 자신은 사실 거만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스테지는 그를 거만한 인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제 조나단의 전화를 받았어요" 메를린이 자랑스레 말했다. "둘 다 하와이에서 멋진 신혼 여행을 즐기고 있다는군요" "그렇겠죠" 조던이 짓궂게 말했다. "케이는 너무 피곤해서 수화기도 못 들 지경이라고 하던가요?" "이런, 조던. 또 시작이군요! 모녀 사이에 제일 건네기 거북한 농담이 바로 그런 거예요. 아무튼 케이도 아주 잘 지내고 있대요. 아주 행복한 듯했어요" 조던은 고개를 돌려 스테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조던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기와는 상관없는 얘기라서 무료함을 느끼는 걸까? 아니면 신혼 여행을 떠난 두 청춘 남녀의 행복을 상상해 보고 있는 걸까? "실레합니다, 파머 시" 웨이터였다. "전화가 왔습니다" "벤자민일 거예요. 여기 오는 도중이라거나, 아니면 병원일 때문에 조금 더 늦어질 거라거나, 둘 중 하나겠죠" 메를린이 몸을 일으켰다. "벤자민은 정말 자기 일에 열심인 남자예요" "벤에게 우리랑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전해주세요. 많이 늦어지면 커피라도 같이 하자구요. 오늘은 내가 낼게요" "그렇게 말해볼게요" 메를린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메를린과 합석하자고 해서 불편한 건 아니오?" "물론, 아니에요. 메를린은 정말 좋은 분 같아요" 조던은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듯 밝은 표정을 지어주는게 한편으로는 기뻣다. 사실 조던으로서도 메를린이 끼어들기 전에 스테지와 나누던 대화가 은근히 부담스러웠던 터였다. 아마 스테지와 결혼하는 남자는 첫날밤에 무척이나 놀라고 당황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조던 자신이 그 남자가 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우리 가족들도 모두 메를린을 좋아하오" "오늘은 벤이 내겠다는군요" 메를린이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무래도 늦게 도착할 것 같다고 먼저 식사를 하래요. 벤은 일 때문에 이만저만 바쁜게 아니거든요. 게다가 얼마나 자기 일을 사랑하는지 몰라요" "벤은 의사요" 조던이 스테지에게 설명했다. "자, 여러분!" 메를린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둘 다 공연히 나와 합석하기로 했다고 후회하는 건 아니겠죠? 나야 너무나 고맙지만 혹시라도 실례가 된다면…" "천만에요. 유명한 여배우와 이렇게 사적인 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 무척 영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스테지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스타들 얘기나 당신의 요즘 근황을 들으면 참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안 그래요, 조던?" "물론!" 그는 스테지의 순진한 미소가 무척이나 기분 좋게 느껴졌다. 식사 시간 내내 두 여자는 열심히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조던은 몇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화 촬영 때문에 미국을 수십 차례 다녀온 경험이 있는 메를린은 자연스레 스테지와 미국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고, 또 스테지가 궁금해 마지않는 스타들의 뒷얘기도 무궁무진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너무 짧다고 느껴질 정도로 둘은 신나게 대화를 나누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아온 사람들처럼 아니 다정한 모녀처럼 두 사람은 거리낌없이 서로를 대했고 시종일관 행복한 모습이었다. 조던 역시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게 무척이나 즐거웠다. "정말 멋있었어" 식사를 마치자 메를린이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 때맞춰 오는군!" 그녀가 레스토랑 입구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메를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벤에게 뺨을 내밀었다. 벤은 훤칠한 키에 은발의 신사였다. 두 사람은 비록 둘 다 예순을 넘긴 나이였지만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열정적인 포옹을 나눴다. 남자와 여자는 다 저렇게 되는 걸까? 나이가 어떻든 서로 전기가 통하는 상대를 만나게 되면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빠지면 함께 있고 싶어지고, 그리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조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들은 그 사랑이라는 덫에 쉽게 넘어갔지만, 그는결코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잠깐 실례하겠어요" 스테지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몸이 좀 좋지 않아서요" 그녀는 서둘러 테이블을 떠났다. 조던은 얼른 일어서서 그녀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이오, 스테지?" 그는 그녀의 팔을 잡은 채, 그녀가 가는 방향으로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아픈 거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요?" 그는 그녀의 눈동자에 깊이 드리워진 그림자를 근심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초롱초롱하던 눈빛이 저렇게 변하다니! "아마 먹은 게 잘못되었나 봐요.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면 괜찮아질 거예요, 조던" 그녀는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조던을 밀쳐냈다. "당신 친구들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긴 싫어요" "메를린을 부를까?" "아니에요" 그녀는 다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혼자 가도 돼요" 그는 하는 수 없이 그녀의 팔을 놓아주었다. "정말 혼자 갈 수 있겠소?"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는 듯 조던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럼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테지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조던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7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거울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본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 남자였다. 조나단의 결혼식에서 본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그의 이름은 벤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세상에 벤이란 이름을 가진 의사가 어디 한두 명이겠는가! 그냥 이름만 같은 사람이겠지. 세상이 그렇게 좁은 것은 아니잖은가! 스테지는 심호흡을 길게 했다. 어떻게든 스스로를 진정 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이렇게 계속 화장실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문제였다. 아무리 자리를 피하고 싶어도 일단은 테이블로 돌아가 작별 인사라도 하는 게 순서였다. 그가 정말 그 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그녀를 알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그녀는 이름도 틀리지 않은가! 영국으로 오면서 이름을 바꾸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닐 수도 있ㅇ. 동명이인일 거야" 그녀는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며 하얗게 질린 얼굴에 살짝 분을 바르고 붉은색 립스틱을 다시 칠했다. 머리를 다시 매만지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한층 생기 발랄해진 모습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세 사람 모두 테이블을 향해 다가오는 스테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테이블 가까이에 이르자 벤과 조던이 일어서서 그녀를 반겨주었다. 조던은 염려스러운 눈으로, 벤은 호기심이 잔뜩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마 벤은 조던의 파트너가 어떤 여자인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제 괜찮소?" 그녀를 위해 의자를 당겨주며 조던이 물었다. "네" 그녀는 조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례가 많았어요" 그녀는 애써 벤의 시선을 피하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벤, 스테지 워커라고 해요" 조던이 그녀를 소개했다. "스테지, 이쪽은 벤 트레비스요" 벤 트레비스! 그 사람이었다.! 그녀는 벤이 내미는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충격이었다. 혹시 그가 눈치 챌까 봐 그녀는 숨을 죽여야 했다. 새사 세상이 참으로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스로 오빠들의 지나친 간섭에서 도망쳐 런던으로 온지 3개월, 그동안 일거리가 없어 힘들긴 했지만 이제야 자유다운 자유를 누리며 살아간다고 기뻐했는데 이게 또 무슨 일인가! 벤자민 트레비스는 평범한 의사가 아니었다. 그는 정신과 의사였다. 오빠들이 가끔씩 그녀를 정신병자로 만들긴 했지만, 벤 트레비스만큼 그녀를 완벽하게 정신병자로 만들어 버린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그녀 앞에 앉아 있다니! "스테지?" 조던이 그녀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지 못해 유감이에요" 그녀는 여진히 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은 채 예의바르게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커피라도 함께 마실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군요" 벤은 메를린의 손을 잡으며 유쾌하게 웃었다. "늦게라도 나타나지 않으면 메를린이 가만있지 않았을 거예요" "메를린 파머를 화나게 해서는 안 되죠" 조던이 놀리듯 말했다. "메를린에게 잘해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그녀를 노리는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요!" 스테지는 아무 말 없이 커피를 홀짝거렸다.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이외에 아무것도 염두에 둘 수 없었다. "스테지느 인테리어 디자이너래요" 메를린이 벤에게 말했다. "아, 그래요?" 벤은 흥미롭다는 듯 스테지를 쳐다보았다. "메를린과 난 함께 집을 샀어요. 그런데 메를린이 그 집을 다시 수리하기 전까지는 결혼 날짜를 잡지 않겠다고 우기지 뭐예요. 당신에게 인테리어를 맡기면 되겠군요" 그가 점잖게 말했다. "오, 그래요. 스테지에게 맡기면 되겠군요" 메를린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참 좋은 생각이에요, 벤!"그녀는 벤의 손을 살짝 들었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집을 수리하고 아름답게 꾸밀 시간적, 정신적인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우린 모든 걸 잊고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에서 그 집을 완벽하게 다시 꾸미고 싶어요" 웃기는 일이었다. 물론 40여 년을 함께 살아오던 전 남편 테렌스 로얄과 몇 년 전 사별한 메를린으로서는 모든 걸 잊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일 수 있었다. 하지만 벤 트레비스는 어떨까?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어요" 스테지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인사 차원에서 그렇게 대꾸했다. "조던은 지금쯤 친구나 친척들에게 내 직업을 알려준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농담이었지만, 진담일 수도 있는 말이었다. 조던은 별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자신의 집을 다시 꾸미겠다고 결정했고, 또 스테지에게 그 일을 맡기기는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스테지가 자신의 집안 사람들과 줄줄이 연결되는 것을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애비와의 전화 통화를 곁에서 지켜본 그녀로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만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조던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애비와 자렛을 만나기로 한 날이 언제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전, 아니면 오후?" 그가 다시 물었다. 도대체 왜 만나는 시간까지 알려고 하는걸까? "오후에 만나기로 했어요" 그녀는 천천히 대꾸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데려다 주겠소. 월요일 오후엔 별일이 없으니까"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려고 해요, 조던?" 뜻밖의 제안에 스테지는 당혹스러워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애비의 일을 맡는 게 별로 내키지 않는 것 같더니, 갑자기 태도를 바꿔 직접 데려다 주겠다고 하는 이유가 뭐지? 두 여자가 만나 무슨 얘기를 하는지 감시라도 하겠다는 뜻인가? "집 찾기가 쉽지 않을 거요" 조던은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스테지 역시 단호하게 거절했다. 더 이상 아이 취급을 당할 이유가 없었다. 그게 싫어서 런던까지 도망쳤는데, 어째서 누군가의 보호를 받으며 일거리를 맡으러 간단 말인가! "게다가 덧붙이자면 그건 사서 고생하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소" 스테지는 그를 한껏 노려보았다. 벤이 웃음을 터뜨리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신경전은 폭발했을지도 모른다. "조던, 강적을 만났군" 조던의 안색이 바뀌었다. 아마 벤의 농담이 그를 더 언짢게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의 보호나 도움이 전혀 필요 없었다. 물론 자신이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인 경우에는 자진해서 도움을 청하겠지만 고객의 집을 찾아가는 것까지 남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스테지는 남자를 믿지 않아요. 다 개구리인 줄 알죠. 어떤 남자가 왕자가 될 개구리인지 모르는 모양이에요. 관심도 없구요" 조던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메를린 역시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그간 안 좋은 남자들을 많이 만났나 보군요" <많이>라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누구>라는 질적인 문제였다. 벤 트레비스가 그 모든 것의 결정판 아닌가! 게다가 그렇지 않아도 오빠들로부터 남자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엉큼한 동물인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터였다. "당신은 운이 좋아 좋은 사람들만 만난 거예요, 메를린" "그동안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조던을 만난 걸 보면 당신도 무척 운이 좋은 여자예요, 스테지" 그렇지는 않았다. 조던이 이렇게 그녀 곁에 있어준다는게 왠지 든든하고 또 얼떨결에 그와 나누었던 키스가 마음을 들뜨게 한 것은 사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에 대한 선입견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벤 트레비스가 앞에 버티고 앉아 있는 상황에선 더더욱 그랬다. "스테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한동안 그녀의 침묵을 지켜보던 조던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녀 탓 만은 아니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실이었다. 오늘 이렇게 그녀와 식사를 함께하게 된 것도 모두 일레인 덕분이 아닌가? 귀찮은 여자를 내쫓아 준 대가로, 그리고 어차피 저녁은 먹어야겠기에 스테지를 데리고 나온 것 뿐이다. 그런 남자를 두고 운이 좋았다는 말을 하다니 어불성설이다. "대체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어떻게 만났나?" 벤 트레비스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끼어들었다. "조던이 운이 좋아서겠죠" 스테지가 조던을 흘끗 쳐다보며 반격을 가했다. 그의 한쪽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당신이 내 옆집에 살고 있었다는 게 내 운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그가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그런가요? 그럼 내가 운이 나빠서 하고많은 아파트 중에 그 아파트를 고른 건가 보군요" 그녀는 커피를 더 마시겠냐는 웨이터의 권유를 정중히 거절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신경은 자꾸만 예민해져 갔고, 벤을 쳐다보고 있는 것도, 그리고 조던과 말도 안 되는 입씨름을 하는 것도 힘겹기만 했다. 만약 벤 트레비스가 뛰어난 정신과 의사라면, 이런 스테지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했다. "이제 그만 갈까요?" 스테지는 마침내 조던을 돌아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내일까지 커튼 설치를 끝내야 하거든요" 조던은 스테지를 마주보며 중얼거렸다. "일하는 여자들이란…" "당신 집 커튼이에요, 조던!" "거의 협박 수준인데?" 조던은 계산서를 집어들었다. "우린 먼저 일어나겠어요" 그가 메를린과 벤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테지가 커튼 만드는 일을 끝내야 한다는군요" 메를린이 킬킬거렸다. "원래 빨간머리는 고집이 세요, 조던. 고생 좀 하겠어요" "머리를 염색했는지도 모르잖아요?" 조던은 스테지를 쳐다보며 빈정거렸다. "자네 그러다가 들어온 복을 차는 수가 있어. 저렇게 예쁜 아가씨를 놓치면 어떡하려고 그러나?" 벤 역시 킬킬거리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내가 내기로 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두 명과 식사를 함께하는 영광을 누린 사람이 이 정도 답례가 없어서야 되겠어요" 조던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명랑하게 대꾸했다. 벤이 스테지를 다시 쳐다보았다. "자네 오늘 실수한 거야. 스테지의 머리는 절대로 염색한 머리가 아니라네. 염색한 머리는 저렇게 아름답고 자연스러울 수가 없어" "나도 알고 있어요" 조던은 스테지의 한쪽 손을 잡아당기며 대답했다. "그냥 화가 난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보고 싶어서 농담을 한 거예요" 앞으로도 화난 눈동자를 볼 일이 많을걸, 스테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 만나서 정말 즐거웠어요" 스테지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다음에 꼭 다시 만나요" 벤이 말했다. 다음이라니! 다음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정말 농담이었소"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조던이 말했다. "당신 머리색에 대해 말한 것 말이오" 스테지는 무표정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사실 그녀는 그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거의 듣지도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요?" 조던은 그녀의 엄한 표정을 알아차리고 물었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재미는 있었지만, 메를린 파머를 만난 거 말이에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괜찮소, 스테지" 조던이 말했다. "나와 함께 있어서가 아니라 메를린 파머를 만나 재미있었다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당신도 어차피 내가 좋아서 데려간 건 아니잖아요? 그 자린 분명히 일레인을 위한 자리였어요. 어쩌다 내가 간거지" 일레인에게 쓸데없는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벤을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조던은 뭐라 대꾸를 하려다가 말고 미소를 지었다. 억지 웃음이었다. "메를린을 좋아해서 나도 기쁘오. 그녀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오" 스테지는 그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케이가 자기 엄마를 무척 닮은 것 같더군요" 그녀는 케이와 조던의 사이에 혹시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슬쩍 떠 보았다. 조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케이 형수에 대해선 잘 모르오. 오히려 메를린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지. 하지만 조나단 형이 선택한 여자니까 분명히 좋은 사람일 거요. 난 형을 믿으니깐 말이오" 최소한 케이와 조던은 의심할 만한 사이가 아닌 셈이었다. 조던은 결혼 자체를 싫어했던 것이다. 결혼이라는 굴레, 결혼이라는 구속을. 스테지는 조던이 결혼 피로연 내내 우울해했던 것이 케이 때문은 아니었다는사실을 알고 은근히 기쁘기까지 했다. 그런데 왜 그 사실을 알고 기뻐하는 걸까? 바보 같은 일이었다. 바보 같기만 한 게 아니라 우스운 일이기도 했다. 요 며칠간 그녀가 배운 게 있다면 헌터 가의 남자들은 프린스 가의 남자들만큼이나 거만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이 남자는 아니다. 적어도 조던은 그녀의 입맞춤 하나로 단번에 왕자가 될 수 있는 개구리가 절대 아니었다. "무슨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소?" 조던이 물었다. "커튼에 대해 생각하느라구요" "겨우 커튼 하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다니, 다른 일까지 주면 큰일나겠군" "참, 생각난 김에 말하는 건데, 월요일엔 나 혼자서도 애비를 만나러 갈 수 있어요" "그 얘기는 벌써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스테지" 그가 달갑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끝나지 않았어요" 그녀가 고집스레 대꾸했다. "난 프로답게 나 혼자 가고 싶어요. 일하러 가면서 집을 못 찾을까 봐 애송이처럼 남의 차를 얻어 타고 가면 애비가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조던의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않은 거료. 애비는 어차피 당신이란 사람 자체에 대해 더 관심이 많으니까" "알았어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마음대로 하라구요" "난 원래 내 마음대로 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오" 그녀도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 싶었다. 독재자처럼 군림하는 오빠들에게서 벗어난 뒤로는 더더욱 그랬다. 조던과 그녀 사이의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조던은 그녀를 자기 주장이 강한 여자라고도 생각할지 모른다. 그녀로서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고 싶진 않았다. 조던 헌터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조던이 그녀를 원한적도 없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는 그런 남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이미 그런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침내 택시가 아파트 입구에 이르렀다. 스테지로서는 생각의 홍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녀는 얼른 차에서 내렸다. 조던이 택시 운전사에게 요금을 지불하는 것이 보였다. "내가 내려고 했는데…" 스테지는 조던과 택시 운전사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당신이 저녁을 샀잖아요" "그런 건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훨씬 여자답소" 조던이 말했다. "남자들은 여자가 좀 여자답게 굴기를 원한다는 것도 모르오?" "글쎄, 한두 번 그런 얘기를 한 것도 아닌데, 통 말을 듣지 않더군!" 익숙한 목소리였다. 스테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닉이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영원히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던 얼굴이었다. 8 조던은 스테지와 갑자기 나타난 낯선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당혹스러웠다. 또 다른 남자라니! 말하는 톤으로 보아 역시 미국인임에 틀림없었다. 스테지의 주위에는 도대체 남자가 몇 명이나 더 있는 것일까? 조던은 스테지가 몹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불쾌하고 언짢은 표정을 도저히 감출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누구기에? "닉…" 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조던은 그녀의 목소리가 저렇게 차가워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까지 했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묻지 않겠어요" 그녀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분명 누군가를 시켜 내 뒤를 밟았겠죠. 그 누군가 중엔 릭과 잭이 있을 거구요" '내가 왜 여기 왔는지 몰라서 묻니?" 닉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릭이나 잭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어" 닉의 말투나 표정은 놀랍게도 조던 자신을 무척 닮아 있었다. 조던은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아 전율을 느꼈다. 어찌 보면 애비와 사랑에 빠지기 전 자렛의 모습과도 흡사했다. 차갑고 거만한 인상, 그리고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당당한 몸과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딱딱하고 무표정한 얼굴까지. 저렇게 부드럽고 따사로운 스테지가 어떻게 저런 남자와 알고 지낸 걸까? 조던은 스테지의 허리를 한 팔로 감아 안았다. 왠지 그녀를 보호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당신이 누군지 알 바는 아니오만…" 조던은 닉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확실한 건, 스테지가 당신을 전혀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이오" 닉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조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야! 스테지? 스테지라고 했나? 좋아, 뭐라고 부르든 간에 그녀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지?" "남의 일에 상관 말아요" 스테지가 두 남자 사이에 끼어 들었다. "이건 남의 일이 아냐!" 닉이 소리쳤다. "날 찾느라고 애를 많이 쓴 모양이지만 내게 뭔가를 기대하지는 말아요" "이봐,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탔을 때부터 시작해 네 모든 행선지를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너에게 생각할 시간을 좀 주고 싶었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모든걸 정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싶었다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스테지가 미국을 떠난 이유 중의 하나는 이 남자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신 눈엔 스테지가 마음을 정리한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군" 조던이 다시 나섰다. 닉은 싸늘하고 위엄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언제나 형 앞에서 당당했던 그로서는 닉의 그런 표정이 전혀 겁나지 않았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야?" 닉이 미간을 찌푸리며 스테지에게 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남의 일에 상관 말아요" 조던의 존재가 그녀에겐 큰 힘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당당하고 야무져 보이는 표정으로 조던을 흘끗 쳐다보았다. 조던 역시 그녀의 그런 표정이 싫지 않았다. "스테지와 할 얘기가 있으면 다음에 다시 약속을 하고 으는 게 좋겠소" 조던은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 이렇게 계속 서 있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겠소?" "그렇게 짧은 옷을 입고 다니니 감기가 걸릴 수밖에!" 닉이 언짢은 눈길로 스테지의 짧은 스커트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거야, 그렇게 당하고도?" "조던은 스티브와는 다른 사림이에요. 그러니까 이상한 추측은 하지 말아요. 더 이상은 안 통하니까!" 그래, 조던은 그 스티브라는 남자와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다. 그는 그 자신일 뿐이니까. 하지만 스티브는 또 누구란 말인가? 대체 그녀 주위에 얼쩡대는 남자는 얼마나 더 있는 거지? "조던이라고?" 닉은 생각에 잠긴 듯 천천히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혹시 당신이 스테지의 옆집에 산다는 조던 헌터인가?" "그렇소만" 조던은 경계하는 듯한 눈초리로 대답했다. 닉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렛 헌터라고 아나?" "그런데요?" 조던은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닉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자렛과 아주 잘 아는 사이지. 우린 오래된 친구 사이라네" 조던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형이란 같은 학교에 다녔단 말인가요?" 닉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렛의 동생인가 보군. 좋아, 난 닉 프린스일세" 그가 손을 내밀었다. 또 프린스란 말인가? 대체 웬 프린스가 이렇게 많이 몰려다닌단 말인가? "조던 헌터입니다" 조던은 닉 프린스와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형의 친구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분고분하게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자렛의 막내동생이죠" "아주 재미있게 됐군요" 스테지는 자신의 허리를 꼭 잡고 있는 조던의 손을 뿌리쳤다. "둘이 함께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 잔 하지 그래요. 친구 동생이니, 형의 친구니 하면서 다정하게 말이에요" 그녀가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들었다. "난 가서 잠이나 자야겠어요. 지금 내가 바라는 게 있다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지금 이 일이 모두 꿈이었으면 하는 거예요" "그냥 가면 안 돼!" 닉이 그녀의 팔을 홱 낚아챘다. "이렇게 먼길을 달려 왔는데… 내가 반갑지도 않니?" "반갑지 않냐구요?" 스테지는 그의 팔을 뿌리치며 격력하게 소리쳤다. "반갑기는커녕 신물이 날 지경이에요. 일일이 내 친구들 뒷조사난 하고, 내 일을 도와준답시고 내 일거리까지 직접 채기려 들고, 내가 가느 곳마다 따라다니고… 난 그 모든 게 지긋지긋하단 말이에요. 난 나일 뿐이에요, 닉!" 닉의 표정은 침착했다. "스테지 워커? 그건 네 이름이 아니잖니?" "지금은 내 이름이에요" 그녀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발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줘요. 내 말 아직도 못 알아들었어요? 도대체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구요!"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조던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만에 하나 그녀가 똑같은 말을 자시에게 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하지만 닉은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강철로 된 심장을 달고 있는 사람인가?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로 절규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저런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뻔뻔하게 서 있을 수가 있을까?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난 언제나 나일 뿐이야. 그리고 그건 너도 인정하는 사실이잖니?" "그래요, 알아요. 언제나 그렇죠" 그녀는 포기했다는 듯 두 손을 치켜 들었다. "좋아요, 무슨 짓을 하건 무슨 생각을 하건 상관하지 않을 테니 내 앞에만 나타나지 말아줘요. 제발!" 그녀는 홱 돌아서서 아파트로 들어갔다. 찬바람이 쌩쌩 도는 모습이었다. 조던은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스티브는 또 누구란 말인가? 닉과 스테지는 어떤 사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녀가 스테지 워커가 아니라면, 그럼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조던은 닉에게 직접 묻고 싶지는 않앗따. 그건 스테지를 모욕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예의였다.333 "스테지의 말대로 술 한 잔 어때?" 닉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는스테지의 슬픔 따위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뇨,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조던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마 그녀는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을 그렇게 한 모양입니다" "나도 알고 있네" 닉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런데요?" 닉은 고개를 저었다. "난 저 애가 혼자 마음 내키는 대로 살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네. 난 저 애의 어머니에게 저 애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네" 스테지의 어머니와 약속했다고? 그럼 이 남자가 스테지의 아버지라도 된단 말인가? 그럴 리는 없었다. 자렛의 친구라면 기껏해야 마흔도 채 안 된 나이가 아닌가? 그렇다면 대체 누구기에 그녀의 어머니와 약속을 했다는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그녀의 진자 이름은 뭘까? 그리고 이름은 왜 바꾼 걸까?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잘 해결해 나가는 것 같던데요" 조던이 말했다. 닉 프린스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르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는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하지만 재… 아니, 저 애는 가끔 스스로를 곤경에 빠뜨리는 일에 겁도 없이 뛰어들곤 한다네. 난 그런 애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조던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분명 <재…> 뭐라고 말하려 했다. 재니스, 재닛, 아니면 재이드, 재스민… 뭘까? "그게 나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길 바랍니다" 조던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닉은 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자렛과 자네는 얼마나 닮았나?" "아주 많이 닮았습니다" 조던은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자넨 전혀 위험한 대상이 아닐세. 나처럼 말이야, 안 그런가?" 조던은 이 남자가 스테지와 관계가 없다면 무척 좋아질 것 같았다. "자렛에게 당신을 만났다고 얘기하겠어요" 조던은 형에게 닉 프린스가 어떤 인물인지도 물어볼 작정이었다. 닉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자네,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나?" "전혀 모르겠습니다" 조던은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흠, 자렛에게 내 안부를 전해주게. 그리고 아름다운 애비에게도" 그가 모처럼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죠" 조던은 짤막하게 대꾸했다. "자,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내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월도프 호텔로 연락하게나" 닉이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조던은 잠깐 고개를 돌렸다. "글쎄요. 당신에게 연락할 일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군요" 그는 집 열쇠를 꺼내들고 아파트로 들어갔다. 오늘 저녁은 유난히 일이 많았다. 일레인이 그랬고, 스테지와 식살르 하러 갔다가 우연히 메를린과 벤을 만난 것도 그랬으며, 그 다음엔 정체 모를 닉 프린스와 맞닥뜨린 것까지. 집에 들어서자마자 자렛에게 전화를 걸 생각이었지만 뜻밖에도 소파 위에 스테지가 곤히 잠든 채 누워 있었다. 두팔을 포개고 뺨을 파묻은 채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아이처럼 천진 난만해 보였다. 들어온 지 10분도 안 돼 이렇게 잠이 들다니! 아마 그녀에게도 오늘은 무척이나 길고 피곤한 하루였던모양이다. 조던은 살며시 그녀 곁으로 다가앉아 잠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댜보았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그녀의 모든 것이 다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렇게 불쑥 남의 집에 들어와 자기 집처럼 누워 잠들어 있는 모습조차 귀엽고 앙증맞게 느껴졌다. 아니, 그렇다고 그녀를 사랑하는 건 아니야! 그는 자신을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스테지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젠당, 스테지라는 이름도 그녀의 이름이 아니다. 도대체 이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녀가 누구이든, 조던은 자신의 마음이 이미 그녀에게로 많이 기울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 결코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9 스테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호랑이에게 쫓기는 꿈이었다. 아무리 도망쳐도 무서운 호랑이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마침내 호랑이가 그녀를 삼킬 듯 덤벼드는 찰나, 다른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호랑이는 이글거리는 황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더더욱 공포를 느꼈다. 안절부절못하며 두 호랑이 사이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두 호랑이가 서로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눈을 떴다. 그 호랑이의 황금빛 눈동자가 또다시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왜 그러오, 스테지?" 조던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를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그래, 두 번째로 나타난 호랑이는 분명히 조던이었다. 그렇다면 처음의 호랑이는? 닉이었다. "스테지?" 조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꿈을 꾼 모양이군" 그랬다. 꿈이었다. 하지만 그 꿈은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현실의 다른 모습이었다. "닉은요? 갔어요?" 그녀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정말 힘든 하루였다. 벤 트레비스를 만나 것도 그랬고, 닉을 만난 것도 그랬다. "아마 갔을 거요" 조던이 말했다. 스테지는 가만히 조던을 쳐다보았다. "당신에게 뭐라고 말하던가요?" 스테지는 닉과 조던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묻기 위해 조던의 집으로 들어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깜박 잠이 들어 버린 것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닉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빠를 사랑했다. 그랬기 때문에 오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잭, 릭, 그리고 닉 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따르고 존경했던 오빠는 닉이었다. 닉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지나 3년간 여동생 주위에서 얼쩡대는 남자들을 모두 쫓아내 버렸다. 그런 그가 왜 조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조던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닉이 아무도 하지 않기 했지만, 난 당신에게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스테지가 당신 이름이 아니라면, 도대체 당신의 본명이 뭐요? 그리고 나랑 다르다는 그 스티브라는 남자는 또 누구요? 무엇보다 닉 프린스와는 어떤 사이지?" 그의 질문에 대답한다는 것은 곧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얘기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제외한 모든 것…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물 한 잔만 마시면 안 될까요?" 잠깐이나마 숙면을 취한 덕분인지 머리는 맑았다. "브랜디나 한 잔씩 합시다" 조던이 제안했다. "당신이나 나나 둘 다 머릿속이 어수선할 테니 말이오. 난 사실 당신이 이름도 모르는 이웃이었을 때가 더 속이 편했던 것 같소" 하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저 옆집에 사는 여자를 우연히 만나 결혼 피로연에 파트너로 참석하고, 어쩌다 일거리를 준 것뿐인데, 스텔라니 일레인이니 숨기고 싶은 사생활을 그녀 앞에 고스란히 드러내 놓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분이 언짢겠는가! "날 아예 만난 적도 없는 셈치고 다 잊어버리면 되잖아요" 그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브랜디 잔을 건넸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오. 당신은 쉽게 잊기 어려운 사림이니까" 그는 브랜디를 한 모금 들이켰다. 스테지 역시 브랜디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제 대답해 보시오, 스테지" 그는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도망치듯 영국으로 왔어요" "그건 알고 있소. 그런데 그 도망친 대상이 여기까지 당신을 따라오지 않았소" "그랬죠" 그녀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스테지, 닉은 자렛을 알고 있소. 그 말은 곧 내가 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자렛에게 가서 이것저것 물어보면 그만이라는 거요. 하지만 난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소. 왜냐하면그 모든 것을 당신에게서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이오. 혹시 당신, 닉과 결혼한 사이요?" "결혼이라구요?" 그녀가 어이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미쳤어요, 그와 결혼을 하게? 누군지 모르지만 닉과 결혼하는 여자는 아마 제정신이 아인 여자일거예요" 그녀는 조던이 그런상상을 했다는사실이 우스웠다. "닉은 오빠예요, 조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잭과 릭도 마찬가지구요" 조던은 깜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빠들이라고? 모두?" 그는 그들이 모두 그녀와 관계를 맺고 있는 남자들인 줄 알았던것이다. 스테지가 마타하리라도 되는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 오빠들이에요" "맙소사"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닉, 잭, 그리고 릭이라고?" 그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신 이름은 뭐요? <재>로 시작하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닉이 뭐라고 했나요?" "아니, 그건 아니오. 닉이 당신을 <재> 뭐라고 부르는 걸 언뜻 들었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당신 이름을 추측해 내기가 힘들었소. 난 스테지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드는데!" "나도 마찬가지예요. 어머닌 60년대 사람이에요. 그러다보니 이름도 닉, 잭, 릭, 재키, 뭐 그런 식으로 지었나 봐요. 이름이 촌스러워 학교에서 놀림감이 되기도 했죠. 그런 이름은 사실 어렸을 땐 귀엽고 듣기 좋지만 어른이 돼서 쓰기엔 별로 좋은 이름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난 중간이름인 스테지를 사용하기로 한 거예요" "하지만 왜 닉이 그렇게 당신을 보호하려 드는지 알 수가 없군. 당신도 스스로 모든 것을 알아서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지 않았소"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제발 닉에게도 그 말을 좀 해주세요. 닉은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 내내 날 그런 식으로 대해왔어요" "아, 그랬군" 조던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스테지는 조던을 쳐다보았다. <아, 그랬군>이라니?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닉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스테지 자신을 이해한다는 말인가? "당신에게 와인 고르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도 닉이었군" 그랬다. 닉이 그녀에게 가르쳐 준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열입곱 살 위인 닉은 그녀의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곁에서 그녀를 돌보아 주었고, 커서는 학교 숙제를 도와주기도 했다. 대학 시절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할 때는 틈만 나면 찾아와 격려해 주고, 가족들의 사랑과 염려를 전해주곤했다. 그녀에게 고민이 있을 때에는 얘기를 들어주고, 충고도 해주었으며 그녀를 위해 대신 울어주기까지 한 그야말로 자상한 오빠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대답은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영원히 잊어버릴 수 없는 그날 이후로 모든 게 변해 버린 것이다. "스테지, 당신 울고 있소?" 조던은 그녀 곁으로 다가앉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마음이 아프다면 더 얘기할 필요 없소" 그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잔을 건네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마주잡았다. "당신을 슬프게 만들고 싶지는 않소, 스테지"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가득했다. "원하는 게 뭐예요?" 그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천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말보다는 직접 핻동으로 보여주고 싶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입술이 그녀를 찾아들었다. 처음엔 부드럽게, 그러다가 점점 격렬하게….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듯 그녀는 두 팔로 그의 목을 부둧켜안으며 격정적으로 키스를 되돌렸다. 너무나 좋았다. 천천히 소파 위로 두 사람의 몸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의 혀끝이 그녀의 아랫입술에 와닿는 느낌에 그녀는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조던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더니 젓가슴으로 와닿았다. 그녀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그의 헐떡이는 숨결이 그녀의 젖꼭지를간질였다. 그녀는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그의 손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스테지의 손이 그의 머리칼에서부터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넓은 등을 감싸안았다. 알몸으로 서로를 데우고 어루만져 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안 돼!" 조던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스테지는 당황스러운 듯 그를 쳐다보았다. "난 안 돼, 스테지" 왜 안 된다는 걸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난 안 돼" 그가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이 순결을 바칠 만한 남자가 아니오" 그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 말이라도 해보라고!" 조던이 화난 듯 소리쳤다. 지금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대체 무슨 말을 원하는 걸까? 그녀는 몸을 일으킨 다음 나지막이 말했다. "잘 자요, 조던" "뭐라고?" "잘 자라고 했어요, 조던" 그녀는 차분하게 되ㄱ었다. "그리고 저녁 고마웠어요. 메를린 파머를 소개시켜 주어서 고마웠구요. 참 좋은 분이더군요" "저녁! 메를린!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신을 슬프게 만들고 싶지는 않소" "그건 조금 전에도 했던 말이에요"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엔 이미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조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당신의 순결은 당신에게 감사할 줄 알고 정말 소중하게 대해줄사람에게 바쳐야 하오" "닉과 같은 말을 하는군요" "당신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이오" "알았어요. 명심하죠" 그녀는 현관 쪽으로 몸을 돌리며 쌀쌀맞게 대꾸했다. "어디 가는 거요?" "집으로요. 내 집으로, 내 침대로 가는 거예요" "그럼… 일은 어떻게 할 거요?" "일이라뇨? 설마 지금 이 시간에 커튼을 매달라는 말은 아니겠죠?" 그와의 사이가 어떻든 간에 맡은 일은 제대로 끝낼 생각이었다. 공은 고이고, 사는 사였다. 게다가 지금 그녀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일이 필요했다. "스테지, 설마 내 말뜻을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아니까 하는 말이에요. 나도 공적인 일과 사적인 문제는 혼돈하지 않아요. 일과 관련된 건 어떤 식으로든 책임지고 끝낼 테니까 염려 말라구요" "만일 내가 당신과 더 이상 일 관계로 연결되지 않길 바란다면?"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헌터 가 남자들은 약속을 잘 지키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스테지… 닉이 왜 그렇게 당신에게 화를 내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소" "글쎄요" 스테지는 조던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물어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조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헌터 가 남자들의 말은 곧 신용이오" 스테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이제 아무 문제도 없는 거로군요" 그랬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건 그녀의 몫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그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모할 정도로…. 10 "너 정말 닉 프린스가 누군지 모르는 거니?" 자렛은 한심하다는 듯 조던을 쳐다보았다. "날 바보 취급하는 이유도 모르겠어" 자렛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그런데 왜 갑자기 닉 프린스에 대해서 묻는 거야" 닉 프리스라는 사람이 스테지의 오빠라는 사실을 말하기는 싫었다. 안 그래도 자렛은 스테지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그냥 어쩌다 우연히 만났거든" "닉이 런던에 있어?" 자렛이 물었다. 조던은 형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아주 잠깐 만났어. 형이랑 애비 형수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던데? 그런데 그 사람과 어떻게 아는 사이야?" 조던은 도무지 그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주만 내내 스테지의 집은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아마 집에 있기가 갑갑해서 외출을 했거나, 아니면 아무도 만날 기분이 아니어서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감히 그녀의 아파트 초인종을 누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오빠가 뭘 하는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 캐묻고 싶지도 않았다. "한두 해 전에 파리에 있는 우리 호텔에서 영화를 찍었던 것 기억나니?" "음, 기억날 것 같아" 조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영화 말이야. 그 영화 감독이 바로 닉 프린스야" 자렛이 아직도 모르겠느냐는 듯 조던을 쳐다보았다. "넌 타임 머신을 타고 몇 세기 전에 살다가 지금 막 돌아오기라도 한 거니? 어떻게 같은 시대에 살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감독 중 한 사람을 모를 수 있어? 작년에는 오스카상까지 수상했는데" 조던은 사실 영화 쪽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그저 평이 좋은 영화가 있으면 집에서 비디오 테이프나 빌려보는 정도일 뿐, 직접 극장에 가서 영화 배우나 감독에 대한 평을 해가며 감상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별 관심 없이 그냥 즐기는 정도였던 것이다. "프린스 가의 형제는 모두 네 명이야. 닉이 제일 맏이고 가장 잘 알려져 있지. 바로 아랫동생인 잭은 영화 배우고" "그 사람도 오스카상을 받았어?" 스테지의 아파트에 들어서던 그 잘생기고 건장한 사나이를 떠올리며 조던은 다소 냉소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 역시 스테지의 오빠였다. "아직은 못 받았어. 하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역량은 있는 사람이지. 셋째는 릭인데…" "알 만해. 그 사람도 영화 배우지?" 릭 역시 훤칠한 키에 생기 발랄한 미남이었다. "아니, 시나리오 작가야" 자렛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막내는?" 조던은 형이 재키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릴지 궁금했다. "재키라고 하지" 자렛이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그 남자는 한 번도본 적이 없어.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고. 내가 알기로는 무대 감독인가 그럴걸?" 그 남자라고? 자렛은 재키 즉 스테지를 남자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주 재능이 많은 가족이군" 조던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데미안 프린스의 자식들이라면 그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조던은 자렛과 얘기를 나누는 내내 서 있었다. 하지만 데미안 프린스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두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가까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맙소사, 데미안 프린스라니? 영화에 대해선거의 문외한인 조던도 그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비록 세상을 떠난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의 명성은 아직도 여전했고, 할리우드 스타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배우 중의 배우였다. 오스카상을 몇 차례나 수상했을 정도로 그는 뛰어난 배우였다. 그런 그가 스테지의 아버지였다니! 세상에, 스테지는 메를린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아마 메를린은 스테지가 어렸을 때 데미안 프린스의 집을 제집 드나들 듯 방문했을 것이다. 메를린으로서야 성장한 스테지를, 게다가 이름까지 바뀌었으니 알아볼수 없었을 것이다. 조던은 유명 인사의 가족이 겪어야만 하는 여러 가지 정신적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테지가 미국을 떠나 영국으로 온 이유 중에는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 "그렇군" 조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보다 더 많은 의혹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리고 이젠 그 의혹들을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어졌다. 문제는 그녀에게 그와 얘기를 나눌 의사가 있는지였다. "그래, 닉은 아직 런던에 있니?" 자렛이 물었다. "파리에 신혼 여행을 갔을 때 길에서 우연히 만난 적은 있어. 그때는 애비를 그렇게 잘생긴 남자 앞에 내놓기 싫어서 서둘러 헤어졌지. 하지만 지금은 아이 키우느라 지친 애비에게 기분 전환이라도 시켜줄 겸, 닉처럼 유명한 감독과 저녁 식사라도 함께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형수가 스타들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는 사람은 아닐 텐데" 조던이 비아냥거렸다. "기분 전환을 하고 싶으면 둘이 여행이나 떠나지 그래" 자렛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우리 코너는네가 봐주겠다는 거냐?" 여섯 살인 찰리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겨우 생후 몇 개월 된 아기를 돌보는 일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완전히 공포에 질린 얼굴인데? 걱정하지 마, 조던" 자렛이 킬킬거렸다. "애비가 그렇게 어린 코너를 떼놓고 어디 갈 여자는 아니지" "잘됐네" 조던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안부를 전했으니까 형에게 볼일은 다 끝났고, 이젠 그만 가봐야겠어. 퇴근하기 전에 끝내야 할 일이 좀 있거든" "아직 시간 많은데?" "스테지가 오늘 찰리 방 인테리어 때문에 형수를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내가 데려다 주기로 했거든" 그녀가 그 제의를 받아들일지 어떨지는 아직 모르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알 만하군" 자렛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빨리 일을 끝내야겠는데. 나도 스테지를 만나고 싶으니까" "둘 다 사무실을 비우면 어떡해?" "그럼 네가 남아 있겠다는 거냐?" "됐어" 조던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30분 후에 출발할 거야" 좀 일찍 가야 그녀가 먼저 가버리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럭저럭 닉이 런던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스테지가 고마워해줄 리도 없지만 말이다. 한 시간 뒤, 그를 위해 현관문을 열어주는 그녀의 표정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들어오라는 소리도 없어서 문 밖에 서 있어야 할 정도였다. "내가 늦게 온 건 아니오?" 그는 주인의 허락도 없이 성큼 안으로 들어서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눈앞에 그의 집 거실에 달 커튼이 펼쳐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녀가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것은. 다소 조이는 듯한 검은색 바지에 역시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긴 머리는 묶지 않은 채 자연스레 풀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이 무척 창백해 보였다. 아마 지난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모양이었다. "커피를 한 잔 끓여주겠소" "내가 해도 돼요" "물론, 당신도 할 수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소"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렇소" 그는 자신이 한 말에 금방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그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은 걸까? "그래, 닉은 다시 만났소?" 함께 부엌으로 걸어 들어가며 그가 물었다. 그녀의 입술이 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막 떠났어요" 그녀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원히?" "불행히도 아니에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닉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요" "그래, 닉이 원하는 게 뭐였소?" 스테지는 부엌 카운터에 걸터앉았다. "나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는 거요" 조던은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했다. "당신도 그걸 원하고 있소?" 스테지가 떠난다고? 미국으로? 그건 이제 더 이상 그녀가 그의 이웃집 여자일 수 없다는 소리였다. 다시는 그녀를 못 본다는 말이다. 물론 미국이 지구 반대편에 있거나 입국이 금지된 나라는 아니지만, 아무튼 지금처럼 불쑥 들러 같이 커피를 마실 수는 없을 것이다. "아뇨" 그녀의 대답에 안심을 한 그는 다소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안 가면 그만 아니오" 그러나 스테지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에요" 조던은 그녀의 잔에 커피를 따라주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당신이 가기 싫으면 ㄱ걸로 그만 아니오?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오빠들한테 매여 있는 거요? 경제적인 문제요? 닉이 당신에게 금전적인 압박이라도 가하는 거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경제적으로는 완전히 독립한 상태예요" "프린스라는 성을 가진 만큼,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소" 사실 데미안 프린스의 딸이라면 평생을 쓰고도 남을 만큼의 돈은 충분히 있을 터였다. "난 프린스가 아니라 워커예요. 스테지 워커. 어머닌 여자도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난 오빠들의 도움이 없이도 충분히 살 정도는 돼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금전적인 압박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압박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겠죠. 내가 미국에 없으면 가족들이 모두 구심점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된다는 거예요. 사실 3년 전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만 해도 우린 정말 단란한 가족이었죠. 이제 난 우리집의 유일한 여자예요. 내가 돌아가신 어머니 역할을 해야 하는 거죠. 어느 집이나 그렇겠지만, 다들 성인이고 저마다의 일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 구심점이 되어주지 않으면 그 가족은 진정한 가족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려요" 틀린말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가족들을모두 버리고 가버렸을 때에도 헌터 가에는 아버지라는 든든한 구심점이 있었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그들 형제는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스테지가 한 집안의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니! 어린 그녀에겐 너무나 가혹한 형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빠들도 나름대로의 생활이 있을 거 아니오. 친구들도 있을 거고"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어린 여동생을 붙잡아 놓지 않아도 될 만큼 장성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당신에게 깜짝 놀랐던 건 어떻게 닉과 잭, 릭을 몰라보는가 하는 거였어요. 닉은 유명한 영화 배우였어요. 지금은 감독이고. 그리고 잭과 릭도 그 방면에서 일해요. 그들에게는 친구도 많고, 그리고 자기 일들을 하느라 다들 너무나 바쁘게 살고 있어요" 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은 영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나 보죠?" 사실 자렛에게서 다 들어 이미 알고 있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녀의 형제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 말대로 난 영화에 대해선 잘 모르오" 그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나로서는 더 이해가 안 가는군. 이제 당신도 여기서 할 일이 생기지 않았소. 그런데 왜 여길 떠나고 싶어하는 거요?" "떠나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좀더 생각해 보고 결정할 거예요" "그렇게 해요. 하지만 당신이 명심할 게 하나 있소. 왜 그래야 하는지를 잘 생각해야 한다는 거요. 오빠들 때문에 여길 떠날 필요는 없다는 얘기지. 중요한 건 당신 자신이오.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를 잘 생각하란 말이오" 스테지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조던, 내가 오해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당신의 말은 내가 떠나지 않기르 바라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사실이었다. 그는 그녀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짐짓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심심풀이 땅콩으로 누군가와 커피나 한 잔 나누고 싶을 때 찾아갈 수람이 없을까 봐 하는 말이오"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의 이면에는 허탈함과 공허함이 감돌았다. "심심풀이 땅콩이라구요? 그런 표현을 들으니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실감이 나는군요"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심심풀이 땅콩도 없으면 아쉬운 법이죠" "내 말뜻은 그게 아니오, 스테지"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니 것 같은데요, 조던" 그녀는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욕실로 향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당신 형수네 집에 가기 전에 화장이나 조금 고치려구요" 조던은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든 것이 좋았다. 그녀의 표정, 달콤한 목소리, 부드럽고 다정한 성격, 그리고 뛰어난 재능, 그 모든 것이 좋았다. 자신의 인생을 함부로 좌지우지하려는 오빠 닉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려는 착하디착한 심성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도 그는 본의 아니게 그녀를 모욕하기도 하고, 함부로 대하기도 했다. 게다가 냉소적인 표정하며 매사에 제멋대로인 모습만 그녀에게 보여준 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그런 그를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그녀의 관심을 받고 싶었다.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조던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11 스테지는 단순히 그를 사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닐, 그의 됨됨이까지도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 애비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차 안이었다. 그녀는 운전을 하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는 따사롭고 다정한 남자였다. 자신의 가족들 틈에서 다소 어핵해하는 그녀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그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돌보아주었다. 공사에 들어갈 찰리의 침실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그는 어린 코너를 돌보며 스테지와 형수가 충분히 의견을 교환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찰리는 조던을 보자 달음박질을 하다시피 그에게 꼭 안겨왔다. 그는 찰리를 번쩍 안아들고 몇 바퀴나 빙빙 돌더니 잔디에서 뒹굴었다. 결혼을 어리석은 짓이라 믿는다고 하지만 조던이야말로 누군가의 남편, 그리고 누군가의 아빠로서의 역할을 그 누구보다 잘해낼 수 있는 남자였다. 3개월 전, 그녀는 오빠로부터 몇 번이나 바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조던이라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이야말로 정말 바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는 길에 어디 들러서 피자나 뭐 다른 요리를 사 가지고 저녁을 먹는 게 어떻겠소?" 조던이 유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작정 좋아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오늘 저녁은 아무 데도 안 나가나요?" "그 말은 곧 <갈 곳이 없으면 우리집으로 오세요>라는 초대로 들리는데? 그런거라면 기꺼이 초대를 받아들이겠소" "일은 어떻게 하구요?" "그렇게 일이 신경 쓰인다면 저녁을 먹으면서 커튼 얘기나 합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분이 더 좋아진다면 말이오" 기분이 더 좋아진다? 사랑하는 남자와 밤새도록 사랑을 나누고, 그의 품에 안겨 잠드는 것 이상으로 기분이 더 좋아질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좋아요. 그럼, 뭘 먹을까요?" "글쎄, 우선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는 게 어떻겠소? 내가 좋은 곳을 예약할 테니" "정말 사람을 놀래키는 재주가 있군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난 생선 초밥 같은 일본 요리는 딱 질색이에요. 그리고 햄버거도 싫구요!" "세상에, 미국 사람이 햄버거를 싫다고 하면 누가 믿겠소!" 그가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생선 초밥이나 햄버거는 아니니까" 조던과의 저녁 식사라….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행복했다. 어디서 무얼 먹든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1분 1초라도 더 늘어난다는 게 즐거울 뿐이었다. 그녀는 지난 주말 내내 이 남자를 사랑해선 안 된다고, 이 남자와 거리를 두고 지내야 한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었다. 그러나 막상 그와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그 다짐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옷은 어떻게 입죠? 정장을 해야 하나요, 아니면…"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 그녀가 물었다. "당신은 뭘 입어도 멋있소" "남자들이야 늘 그런 식으로 말하죠" 어쨌든 그의 말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막상 청바지 차림으로 들어가면 레스토랑에 있던 사람들이 다들 수군대며 쳐다볼 거예요" "난 상관없소. 당신만 편하다면 뭘 어떻게 입든 상관하지 않겠소" 그래, 정장을 하자. 그녀는 속으로 결심했다. 옷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이젠 그도 그녀가 어는 정도 여유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터라 예전처럼 이것저것 신경 쓰고 가릴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그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어주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유난히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몸에 꼭 맞는 검은색 실크 드레스와 타오르는 듯한 그녀의 머리칼이 그의 눈을 어지럽힌 모양이었다. 조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얀색 셔츠에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다. "그렇게 차려입으니 너무 멋있군. 정말로 스테지 워커양이 맞소?" 그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황홀한 듯 말했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그녀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그녀의 팔을 살짝 잡아끌었다. "자, 갑자기 당신 오빠들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어서 갑시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이 좋았다. 그와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즐겁기만 했다. 그리고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그 기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조던이 예약한 곳은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영국에서 가장 맛있는 집, 가장 서비스가 좋은 집으로 칭송받는 레스토랑일 뿐만 아니라 그만큼 예약이 어렵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도대체 조던이 무슨 재주로 그렇게 짧은 시간에 예약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내 사촌이 언제 어느 때고 이 레스토랑을 에약할 수 있는 사람이오. 사촌 덕을 좀 봤지" 그녀의 궁금증을 알아차린 듯 조던이 사연을 설명해 주었다. "사촌이요?" 대체 뭘 하는 사람이기에 이렇게 비싼 레스토랑을 아무 때나 드나들 수 있을까? "내 사촌은…" 조던이 창가 자리로 그녀를 이끌며 말을 이었다. "오, 마침 저기 앉아 있군" 스테지는 조던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만큼은 단둘이서 식사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또 그의 가족과 어울리게 된 셈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얼굴을 돌렸다. 스테지는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녀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게이브!" 조던은 반가운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 조던! 만나서 반가워" 그 남자의 갈색 눈동자가 조던 곁에 서 있는 여자에게 향했다. "이쪽은?" "정중하게 잘 모셔요, 게이브. 내 친구 스테지 워커예요" 조던이 장난스럽게 소개했다. "스테지…" 게이브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내 사촌 가브리엘 헌터, 보통 게이브라고 부르지" 조던이 스테지에게 말했다. "악수는 이제 그만해도 돼요. 게이브는 바람둥이라 예쁜 여자만 보면 습관적으로 유혹을 하려고 들거든" 스테지는 게이브 역시 자신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 알아본 것은 아니었고 어디선가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는 표정이었다. 조던이 영화 평론가인 가브리엘 헌터의 친척이라니! 두 사람은 성이 같은 헌터라는 점만 빼고는 어느 한구석도 닮은 데가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당신과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게이브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스테지는 지난주에 나와 함께 조나단 형의 결혼 피로연에 갔었어요" 조던이 말했다. "아니, 그때는 아닌데… 그리고 스테지 워커라는 이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정말 이상한 말을 하는군요, 게이브" 조던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웬디는 어디 갔죠?" 조던은 얼른 화제를 바꿔 사촌 형수의 안부를 물었다. 올해 쉰세 살인 가브리엘 헌터는 신랄한 비평을 일삼는 영화계의 독설가였다. 그는 영국 공영 방송국의 주말 프로에 출연해 영화 평론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예술문화 행사에 대한 비평을 과감하게 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는 직업 의식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한 번 본 영화는 절대로 잊어 먹는 법이 없었고, 물론 배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만가 그녀가 누구인지를 기억해 낼 게 분명했다. "나갔어" 그는 씁쓰레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대체 뭐라고 했기에 저녁도 먹지 않고 나가 버린 거죠?" "식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히 떠나 버렸다는 말이야. 지난 주말에 떠났어. 이혼하자고 하더군" "이유가 뭐예요?" 조던은 깜짝 놀란 듯했다. 게이브는 어깨를 으쓱했다. "평론을 좀 나쁘게 했거든" "자기 아내에 대한 평론을 나쁘게 했단 말이에요?" "내 아내라고 무조건 칭찬할 수는 없는 거 아냐? <너무 지독한 여자다>라고 평한 것뿐이야" 영화 평론가와 영화 배우의 관계는 복잡 미묘할 수밖에 없었다. 평론가의 말 한 마디에 배우의 일생이 한순간에 좌지우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게 평론가의 본분이니까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그런 식으로 자신의 아내에 대해 평론할 수 있단 말인가? 조던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조던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식으로 10년간 세 번이나 이혼을 하셨잖아요" "10년이 아니라 8년이야" 게이브가 지겹다는 듯 말했다. "상관없어. 어차피 여자들이란 버스나 택시 같은 거니까. 기다리면 절대로 오지 않다가 포기할 때쯤 되면서너 대가 한꺼번에 오기도 하거든" "그렇죠. 버스나 택시처럼 한 대를 놓치고 나면 꼭 다른 게 나타나니까요" 스테지는 언짢은 기색을 억지로 감추어가며 말했다. 그녀는 이렇게 혐오감이 드는 사람과 억지로 식사를 하도록 만든 조던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아하!" 게이브는 예리한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미국인이시군" "눈치 한 번 빠르시군요" 스테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네 친구는 날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조던?" 그가 중얼거렸다. "그야 형이 자꾸 이상한 말을 하니깐 그런 거죠" 조던이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식사나 한 번같이하자고 했더니 그새를 못 참아 이혼이라뇨!" "재키!" 갑자기 게이브가 소리쳤다. "당신 이름은 스테지가 아니라 재키야. 맞아, 작년 오스카상 수상식에 젊은 영화 배우랑 같이 왔었지!" 그가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티브… 뭐라든가 하는사람이랑 말이야" "스티브 베이커" 그녀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맞아, 맞아! 최근 몇 년간 본 배우들 중 제일 형편없는 축에 속하는 인물이었지!" "또 시작이군요.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런 소릴 해대더니" 스테지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다. "내가 그랬었나?" 그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사실이건 아니건 가브리엘 헌터의 그 독살스러운 평가 때문에 스티브는 배우로서의 인생을 거의 끝내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영화를 감독했던 사람이 바로 닉이었다. "자, 샴페인이나 시키지" 게이브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왠지 축하라도 해야 할 것 같군" "난 그렇게 하기 싫군요. 미안하지만 전 이만 가보겠어요. 두통이 심하거든요" 스테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서 제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좀 쉬도록 하세요" 언짢은 목소리였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게이브는 웨이터를 불러 샴페인을 주문했다. 스테지는 잠시 머뭇거리며 그를 노려보다가 싸늘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던졌다. "세상 넓은 줄 모르고 그렇게 설치다간 언젠가 큰코다칠 때가 있을 거예요" "아, 그거라면 벌써 경헌함걸"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능청스레 대꾸했다. 스테지는 경멸어린 눈초리로 다시 한 번 노려본 뒤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자리를 떠났다. 찬바람이 쌩쌩 도는 듯했다. 조던은 붉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저 사람은 원래 좀 그렇소" 서둘러 뒤따라온 조던은 그녀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그녀는 그를 향해 몸을 홱 돌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나 말이오?" 그는 한순간 움찔했다. 내가 뭘 어쨌기에? "그런 인간과 같이 식사를 하자고 날 데려갔으니, 당신도 그 사람과 똑같은 인간이라구요!" "게이브의 아내인 웬디를 만나면 당신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소" "아, 게이브를 뻥 차버리고 간 웬디 말이에요? 누가 그녀를 탓하겠어요!" "그녀가 게이브를 떠났다는 건 나도 몰랐던 일이었소" "아내가 있으면 게이브 헌터가 좀 인간다워지는 모양이죠?" 스테지가 소리쳤다. "천만에요. 누가 있다고 나아질 인간이 아니죠"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그녀는 주위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람, 재미있는 면도 많소" "재미있죠. 고양이가 쥐를 갖고 놀 때처럼 말이에요! 그 사람이 함부로 내린 평가 때문에 얼마나 많은 배우들이 꿈을 잃고, 좌절하는지 알아요? 그 사람은 그런 걸 즐기는 사람이라구요" "독설적인 평가이긴 해도 결국은 그의 평가가 옳은 경우도 상당히 많이 있소" "결국에는 그의 평가가 옳다구요?" 그녀는 코방귀를 뀌며 그의 말을 반복했다. "웃기네요. 그 사람은 어떤 배우를 매장시키기 위해 온갖 독설을 다 퍼붓죠. 그리고 정작 사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대상을 즐겁다는 듯 쳐다보고 서 있어요. 자기 아내만 해도 그렇지 않아요? 남도 아닌 아내를 그런 식으로 나쁘게 평하는 사람은 없어요.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차라리 평론 자체를 피하든가 하는 방법도 있는데 결국은 그 세계에서 매장을 시키겠다는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은…" "너무 흥분한 것 같군, 스테지" 조던이 침착하게 말했다. "우리가 여기서 게이브와 웬디의 결혼 생활까지 들추어 낼 필요는 없잖소" "그가 얼마나 저질스러운 인간인지 말하다 보니 나온 얘기예요" 조던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이 타인에 대해 그런 식으로까지 말하는 건 처음 듣는군" "그런 소릴 들을 만한 사람이니까요" 스테지는 아직도 3개월 전에 겪었던 그 아픔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 스티브란 사람 말이오. 대체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사람이오?"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스티브는 한때 그녀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스티브가 단역으로 출연한 영화를 본 뒤 게이브 헌터가 스티브에 대한 온갖 악평을 써서 신문 매체에 돌렸고, 그 평론을 본 닉은 다음 영화에 그를 출연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일이 벌어진 후 스티브는 그녀의 곁을 영원히 떠나 버렸다. 영원히. 닉이 바라는 바대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그를 그녀의 인생에서 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닉이었지만, 닉은 바로 가브리엘 헌터의 독설에 힘을 얻은 셈이었다. "내 전부였어요" 그녀가 울먹였다. "그와 결혼하려고 했었죠" 조던의 표정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요?" "당신 사촌이 잘 알고 있을걸요. 그리고 자랑스러운 닉도 잘 알고 있구요. 어떻게 된 건지 몰라서 물어요? 보다시피 난 그와 결혼하지 못했어요" 그 상처를 잊기 위해 그녀는 미국을 떠났던 것이다. 그녀는 스티브를 사랑했다. 아니,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함께 이상적인 결혼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닉은 매정하게도 애원하다시피 매달리는 스티브를 캐스팅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물론 닉이 단지 게이브 헌터의 평론만 가지고 그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동생과 사귀고 있는 스티브를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두 사람 사이를 떼어놓고 싶어했던 닉의 의도가 게이브 헌터의 도움으로 마침내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부탁이에요, 조던!" 그녀가 비꼬듯 말했다. "다음에 나와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갈 때는 미리 스텔라나 일레인 등등에게 미리 전화해서 우리가 만나는 자리엔 나오지 말아 달라고 말해주세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꼭 만나게 되는군요!" 그녀는 마침 앞에 멈춰선 택시에 얼른 올라탔다. 기다리면 안 오던 택시가 그래도 오늘은 적절한 때에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12 문을 열자 조던이 서 있었다. 닉 프린스는 그다지 놀랍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언제쯤 날 만나러 올지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다네" 그는 조던에게 들어오라는 시늉을 해보이며 말했다. "마시겠나?" 그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위스키 병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고맙습니다" 조던은 어색한 몸짓으로 소파에 앉았다. 스테지가 그렇게 가버린 뒤, 밀려오는 의문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닉을 찾아온 것이다. 니키진 않았지만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스테지는 스티브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던 모양이었다.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그 말을 들었을 때 조던은 마치 누군가에게 세게 한 방 얻어맞은 듯한 기분을 느겼다. 그리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가 알 수 없는 또 한가지는 당신과 있을 때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말의 의미였다.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물론 스텔라나 일레인의 경우는 스테지가 충분히 싫어할 만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스테지가 스텔라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벤과 메를린의 경우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닉은 그에게 위스키 잔을 건넨 뒤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래, 무슨 일인가?" 조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무슨 일인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게이브하고 무슨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스테지는 간단하게 말했지만…" "게이브?" 닉은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스테지에게 가브리엘 헌터를 소개했단 말인가?" 조던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당신도 게이브를 알고 있단 말입니까?" "조금 아는 사이지. 게이브가 스테지와 맞닥뜨렸다고? 그럼 지금쯤 병원에 입원해 있을 텐데, 어느 병원인가? 나도 꽃이나 좀 보내야겠네"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재미있군요" 조던은 껄껄 웃었다. "우리와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몸은 가눌 수 있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술을 마시고 있었으니까요. 사실 여자 문제로 상태가 좀 안 좋았거든요" "항상 여자가 문제라니까!" 닉의 말투는 무척이나 냉소적이었다. "아, 물론 난 아닐세"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난 워낙 골치 아픈 걸 싫어해서 말이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래로 여자들은 못 말리는 골치 덩어리였네. 그래, 스테지와 사귄 지는 얼마나 되었나?" "잘 모르겠어요" 사실이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다?" 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있네. 스테지는 워낙 사랑스러운 아아니까 말이야. 난 그 애가 태어난 그날부터 그 애를 사랑했지. 빨강머리에 뽀오얀 살결, 게다가 이웃 사람들을 다 깨워놓던 그 요란한 울음소리라니!" 조던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그만큼 동생을 사랑하시나요?" 닉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항상 웃기만 한다면 모를까 소리를 질러댈 때는 영 아니라네. 재키는정말로 웃는 모습이 예쁘거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조던은 그녀가 지금도 오빠에게 미소를 지을지 의문이었다. "아직도 그녀가 스티브라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을까요?" 조던은 닉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로선느 여자 문제 때문에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게, 특히나 여자의 오빠를 찾아오기까지 했다는 게 스스로도 놀라울 뿐이었다. 하긴, 여자를 사랑해 본 적도 없었다. "난 그 애가 아직도 스티브를 사랑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네" 닉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재키는 아머니가 돌아가신 뒤 매우 상심한 상태였네.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지. 방황도 심했고, 조금씩 얘가 난폭해지더군. 그러다 스티브 베이커를 만난 걸세" 그는 언짢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난 스티브가 무슨 목적으로 우리 재키에게 접근했는지 너무나 잘알고 있었다네. 하지만 처음에는 동생이 행복해하니까 그냥 내버려두었지. 적어도 둘이 결혼하겠다고 공식적으로 통보를 해오기 전까지는 말일세. 하지만 결혼 얘기가 나오자 그를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무조건 결사 반대가 아니라, 스티브에게 확실하게 해둘건 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난 그에게 프린스 가 여자와 결혼한다고 해서 무슨 특혜 같은 걸 기대해선 안 된다는 점을 명백히 말해 줬지. 특히나 나한테선 더더욱 기대하지 말라고 말이야" 닉의 눈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는지 그는 돌연 재키 곁을 떠나 버리더군" "스테지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 그녀를 스테지라고 부르는 데 익숙해져 있거든요, 아무튼 그녀는 당신이 게이브 헌터의 악평을 근거로 그를 캐스팅에서 제외시켰다고 하더군요" "표면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닐세. 하지만 조던, 난 그 애의 오빠이기도 하고 또 누구보다도 그 애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일세. 그런 내가 뻔한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스티브 베이커에게 내 동생을 내줄 것 같은가?" "하지만 그녀는 당신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간 거라고 믿더군요" 조던이 씁쓸하게 말했다. 어쨌든 조던은 왜 그녀가 닉에게 그렇게 화를 내며 미국땅을 떠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좀 시간이 걸리는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그 애의 마음이 가라앉길 기다릴 뿐일세. 그 애는 바보가 아니야. 단지 고집이 좀 셀 뿐이지. 조만간 스스로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될 거라 믿고 있네" 조던은 그가 동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돌아올 비난의 화살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실을 알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이제 자네의 말을 좀 들어볼까?" 닉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렇다 치고, 자네는 어떻게 할 건가?" 조던은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보다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는 편이 좋겠군요" 닉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꽃 같은 걸 보내면 효과가 있는 모양이더군. 하긴 스테지처럼 고집이 센 녀석에겐 그 방법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 동생에게 사랑한다고 고백은 해보았나?" 조던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라고? 그럴 수는 없었다. 한 번도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본 적도 없었다. "그러다가 큰오빠에게 멱살이라도 잡히면 어쩌죠?" 닉은 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짓을 하지는 않을 걸세" "글쎄요. 어쩌면 그녀가 문제일 수도 있겠죠. 아마 문도 안 열어줄걸요" 그랬다. 지난 주말, 그는 그녀와 사랑을 나눌 뻔했다. 그의 격렬한 키스에 그녀 또한 열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가!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등을 돌린 건 바로 그였다.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그건 모욕이었다.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고 게이브 헌터에게 그녀를 데려가질 않았던가! 이제 오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고 해도…. "두 사람이 함께 밤을 보낸 적 있나?" 조던은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허둥대며 대답했다. "아, 아뇨.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적이 있든 없든 그건 당신이 상관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마침내 닉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스테지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녀에게 믿음을 주라고" 자네라면 할 수 있다고? 그녀에게 믿음을 주라고? 하지만 조던은 그 일이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하는 것만큼이나 멀고도 힘겹게 느껴졌다. 그는 스테지의 아파트 앞을 서성이다가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드디어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그녀가 한 번에 문을 열어줄 리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다고 물러설 조던도 아니었다. "어서 가버려요" 마침내 그녀가 문을 벌컥 열어제치며 소리쳤다. 그녀는 아직도 검은색 실크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눈물이 뺨을 적신 흔적이 역력했다. 오, 세상에! 그녀가 울고 있었다. "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 그녀가 소리쳤다. "아직도 당신 사촌하고 비웃을 거리가 남아 있나요? 좋아요, 실컷들 비웃어 봐요. 실컷. 하지만 이게 마지막인 줄 알아요. 난 닉이랑 미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구요"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을 비웃다니!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는 건 당신도 잘 알지 않소, 스테지" 그는 그녀를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제하며 말했다. "난 당신이 게이브를 알고 있는지조차 몰랐소. 난 그저 게이브와 만나게 되면, 나도 당신과 비슷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던 것뿐이오" "내 세계요?" "당신 가족들은 대부분 영화와 관련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잖소" "가족들은 가족들이고, 난 나예요. 내가 속한 이곳이 내 세계라구요"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왜 닉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는거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가 날 필요로 하니까요. 난 내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을 가지고 싶어요" 다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영국으로 온건 잘못이었어요. 난 여기에 속한 사람이 아니에요" "누가 그런 소릴 했소?" 그녀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내가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사랑하다고, 떠나지 말아달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아직도 그는 결혼이라는 구속이 두렵기만 했다. 게다가 그녀가 퇴짜라도 놓으면, 그때는…. "일은 어떻게 할 거요?" 고작 생각해 낸 말이 그것이었다. "내 아파트 인테리어 말이오. 그리고 애비와 함께 의논하던 찰리의 침실 인테리어는 또 어떻게 할 거요?" 조던은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걱정 말아요. 조던" 스테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장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요. 닉에게 말해서 내가 하던 일을 깨끗이 마무리 짓고 떠날 수 있도록 할 거예요" 그녀가 떠나지 않도록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감히 말을 꺼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말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보 같으니라고! 조던은 지금의 상황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아니, 멍청한 자신에게 더더욱 화가 나는 건지도 몰랐다. 그랬다. 그의 어머니는 몹쓸 바람둥이였다. 자식을 모두 버리고 정부와 함께 홀연히 집을 떠나 버린 여자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 모든 여자가 다 어머니와 똑같다는 생각만 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 어려웠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언제까지나 끌고 가겠단 말인가? 평생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스테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아, 참, 내일은 당신 거실에 놓여 있는 소파들을 들어낼 거예요" "내 소파를?" 조던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잔뜩 인상을 쓰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소파도 손질을 좀 해야겠더라구요. 아무 주말까지는 쓸 만하게 고칠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지금이 기회다. 할 말이 있으면 지금 당장 해야 한다. 어서, 조던! "그럼 난 그동안 어디에 앉아 있으란 말이오" 마침내 조던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우리집에 있는 콩자루처럼 생긴 커다란 쿠션을 빌려드릴게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난 그 콩자루에 갇힌 콩 신세는 되기 싫소" "닉하고 똑같은 말을 하는군요" "세상에, 내가 닉하고 비슷한 연배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난 아직 닉보다는 나이를 덜 먹었소, 스테지" 스티브는 몇 살이었을까? 아마 나보다는 젊었을 것이다. "닉은 원래부터 애늙은이였어요" 스테지는 순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스테지는 사귀는 남자와 나이 차이가 많이 아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내게 매력을 느끼고 있기는 한 걸까? "식사했소?" 또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아뇨. 아까 그런 식으로 당신과 헤어지고 나서 아직 아무것도 먹질 못했어요" 스테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당신 사촌, 참 외롭게 사는 것 같아요. 직접 만나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조던은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미 두 명의 여자를 떠냐보냈고, 이제는 세 번째 결혼 생활까지 파탄에 이르렀지만 게이브는 늘 새로워 보였고 늘 자신의 삶에 당당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스테지의 말을 듣고 보니, 그녀의 말이 옳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이브는 무척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아마 웬디가 그를 용서하고 다시 돌아올 거요. 내가 보기에 웬디만큼 너그럽고 좋은 여자는흔치 않으니까" "그건 두고 봐야 알겠죠" 스테지는 여전히 날카롭게 응수했다. "냉동실에 넣어둔 피자가 있는데 저녁으로 함께 먹는 게 어때요?" "이렇게 잘 차려입고 냉동 피자를 데워 먹다니, 참 웃기지 않소?" 그녀는 소리내어 웃으며 그를 안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 문을 닫았다. "피자는 원래 그렇게 먹는 거예요. 자, 당신은 촛불을 켜요. 난 오븐에다 피자를 데울 테니까" 정말 즐거운 저녁 식사였다. 그는 여태껏 이렇게 유쾌한 날은 처음인 듯했다. 그는 집 안 구석구석에 촛불을 켜놓았다. 스테지는 콩자루 쿠션에 몸을 파묻고 앉아 깔깔거리며 피자를 먹었다. 조던 역시 편안하게 거실 바닥에 앉아 그녀와 함께 웃고 뒹굴었다. 그녀와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즐거웠다. 무슨 일을 하든, 무엇을 먹든….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어떻게 말해야 할까? 13 그 사람이 온 모양이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스테지는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은 그녀의 전화를 매우 의아한 듯 받았고, 나중에는 어색해했다. 따라서 그는 정말로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조금 전 인터폰이 올려서 아래층 출입문을 열어주었으니, 이제 1분만 지나면 그는 현관 초인종을 누를 것이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어떻게 말을 꺼내지? 그런데 다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이제 와서 말해봤자 아무 소용동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슴속에 숨겨왔던 비밀들을 모두 쏟아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드디어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는 땀으로 축축해진 양손을 바지에 문지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스테지, 겁낼 필요 없어! 어차피 최악의 상태까지 예상하고 있으니까. 초인종 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한 다음 문을 열었다. 벤자민 트레비스였다. 큰 키에 잘생긴 얼굴을 가진 은발의 노신사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그녀가 왜 자신을 만나고 싶어했는지 궁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안녕, 스테지?"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날 만나고 싶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소" "벤, 어서 들어오세요" "집을 참 근사하게 꾸몄군요!" 그는 거실을 둘러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조던이 왜 당신에게 자기 집 인테리어를 맡겼는지 이유를 알겠소. 그래, 날 부른 이유가 메를린과 나의 새집을 인테리어하는 일 때문이오?" 그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런 일 때문이라면 당연히 내가 고객을 찾아가지, 고객이 날 찾아오도록 하지는 않아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우선 좀 앉으세요" 그녀가 의자를 가리켰다. "나중에라도 메를린에게 이곳에 왔었다는 얘기를 꼭 해야겠소" 그가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에게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의 입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큰 오해가 생기는 법이니까" 그는 그녀가 자신을 여기까지 부른 게 무척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긴 겨우 한 번, 그것도 잠깐 만났던 여자가 난데없이 전화를 걸어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했으니! 스테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아서 하세요. 메를린이 오해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조던은 우리가 만나는 걸 알고 있소?" 그는 조던과 그녀가 어떤 관계인지 무척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조던과의 관계는 그녀 자신도 어떤 관계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뇨, 꼭 말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벤이 중얼거렸다. "조던은 정말 능력 있는 젊은이요. 어떤 부모라도 사위로 삼고 싶어할 만한 그런 남자지. 그래, 당신 부모님은 지금 미국에 살고 계시오, 스테지?" 그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뇨"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아이가 있으세요, 벤?" "아니오" 그는 조금 언짢은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서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얘기를 해보자는 거요? 그렇다면 당신도 자리에 앉는 게 좋지 않겠소?" 그러나 그녀는 그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지 않고 딱딱하게 굳은 채 서 있었다. "내가 알리곤 당신에게 아들이 있다던데요" "그래요?"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틀린 말은 아니오. 아들이 있었지만 몇 년 전에 죽었소" 스테지는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려서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렇다면 샘이 죽었단 말인가? 언제? 왜? "스테지, 왜 날 만나자고 했는진 잘 모르겠소만, 얼른 요점부터 얘기하는 게 좋겠소" 이젠 무엇이 요점인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샘이 언제 죽었다는 거예요?" 그녀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벤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15년 전의 일이오. 교통 사고였소" 스테지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써야 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벤 트레비스에 대한 감정은 그렇다 치더라도 샘에 대한 감정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그런데 샘이 죽다니! "스테지" 벤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15년 전, 샘이 죽었을 때 당신은 기껏해야 예닐곱 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거요. 그런데 어떻게 샘을 알고 있는 거요?공연히 모르는 사람이라고 발뺌하지 말고 자세히 얘기해봐요.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신은 지금 그의 죽음을 무척이나 슬퍼하고 있소. 자, 스테지, 브랜디나 위스키라도 좀 마시겠소?"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아뇨, 난 괜찮아요" "스테지" 그가 천천히 말했다. "내 아들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소?" 그녀는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어떻게 아느냐고? 어떻게? "와인을 좀 주세요. 부엌에 와인이 있어요. 아무 거라도 괜찮아요" 그녀는 멍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내가 가서 가져오죠" "아니, 여기 그냥 있어요" 벤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가서 가져오겠소" 스테지는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쩌면 벤을 무조건 미워하던 때가 오히려 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샘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 버렸다는 사실을 안 이상 벤을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그에게도 아픔이 있었던 것이다. 그 어떤 슬픔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식을 잃어 버린 슬픔 말이다. "마셔요" 벤은 와인을 두 잔 가지고 돌아와 그녀에게 하나를 건넸다. "나도 좀 마셔야 할 것 같소" 그는 자기 몫의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자, 이제 어떻게 내 아들 샘을 알고 있는지 말해줄 수 있겠소?"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때가 온 것이다. 그녀는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는 벤을 쳐다보았다. "난 샘을 몰라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벤은 꼼짝도 않고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샘은 내 오빠예요" 그녀는 다소 강한 어조로 말했다. 벤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당신은 바브라의 딸인가?" 이번엔 스테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바브라는 또 누구예요?" "샘의 엄마요. 샘이 겨우 세 살 되던 해에 우릴 버리고 가버렸소. 혹시 그녀가 재혼해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바브라를 모른다면 그녀의 딸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누구의 딸이란 말이오?" "아마도 당신 딸이겠죠" 스테지는 자신의 눈동자 색과 똑같은 그의 푸른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머리가 하얗게 세기 전에는 무슨 색깔이었죠?" 그의 시선이 그녀의 너풀거리는 긴 머리칼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살짝 튀어나온 광대뼈와 큰 입, 다소 단호해 보이는 턱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대체 당신은 누구요?" "난 열여덟 살 때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이름이 정말 재클린 프린스인 줄 알았어요" 그녀는 벤이 혹시라도 프린스라는 성을 기억하는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으로 몹시 허약해진 어머니가 내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셨어요. 그리고 그 사실은 나만 모르고 있었을 뿐, 내 오빠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구요. 오빠들의 아버지 데미안 프린스는 내가 태어나기 2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따라서 난 그의 딸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거죠" 그녀는 재클린 프린스가 아니었다. 그녀의 친아버지는 영국 신사, 벤 트레비스였다. 어머니가 남편을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짧은 기간 동안 영국을 여행하던 중, 우연히 만난 한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벤자민 트레비스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제인에게 딸이 있었다고?" "당신 딸이 아니에요. 당신은 우리를 버렸어요!" 어머니는 병을 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그녀는 딸에게 친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자세하게 들려줄 정신적,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ㄷ. 그러나 어머니는 벤 트레비스라는 남자가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아이인 샘에게는 헌신적인 아빠였다는 것, 그리고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되었으며, 그의 존재가 남편을 잃은 상실감과 절망감을 떨쳐 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를 얘기해 주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지는 미처 말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 후 스테지는 어머니가 몰래 감추어 두었던 벤 트레비스의 사진을 통해 그의 얼굴을 익히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이 남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조나단의 결혼식에서 그 사진 속의 인물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나중에는 메를린과의 저녁 식사 때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를 만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물랐던 그녀였다. 그녀는 결코 아버지를 찾기 위해 영국으로 온 건 아니었다. 그저 스티브와 헤어진 뒤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미국에 사는 것이 싫었고, 교육 또한 영국에서 받은 터라 아무 생각 없이 영국 행을 택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왜 영국에서 그녀를 교육시켰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로서는 딸이 아버지의 나라에서 아버지 나라의 문화를 배우며 성장하길 바랐던 것이다. 아무튼 그를 미워하기는 했지만 그를 만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만나 이상, 그에게 따지고 싶은 것도, 궁금한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스테지…" 생각에 잠겨 있던 벤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우리 사이에 대해 어떻게 말했지? 나에 대해서?" "어머니느 돌아가시기 전에 무척 많이 아프셨어요" 그녀는 복받쳐 오르는 서러움을 참아내며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자신을 버린,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버린 이 남자를 줄곧 칭찬하다가 돌아가셨다. 스테지는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당신에 대해 좋게 말하려고 무척 노력하셨죠. 당신을 만나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했는지 말씀해 주셨어요" 스테지는 감정이 복받쳐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왜 함께 있지 않았어요?" 왜 나를 원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녀는 성장하는 내내 어머니와 오빠들의 헌신적인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 그리고 그 충만한 사랑으로 늘 행복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자신이 데미안의 자식이 아닌 벤 트레비스의 자식이라는 충격적인 얘기를 들은 뒤부터는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렸다.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를 초라하게 했다. 아무리 떨쳐 버리려 해도 그 모욕감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항상 자신의 의지대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니?" 아직도 어리둥절한 모습이었지만 벤은 담담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인생에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확실히 잘라 말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단다. 스테지, 네 어머니는 정말 좋은 여자였어. 아내가 내 곁을 떠난 뒤 처음으로 내가 마음을 연 여자가 바로 네 어머니였지. 난 그녀를 무척이나 아꼈고, 그녀 역시 그랬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때는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너무나 어려운 시기였어. 난 나대로 아니에게서 버림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제인 역시 남편을 잃은 상실감이 너무나 컸던 시기였지. 아무리 두 사람이 서로를 아끼고 서로에게 이끌린다 해도, 모든 걸 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는 없었단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니까. 나에게는 그것도 하나의 사랑이었지" 아니, 그건 벤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과, 서로를 아끼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조던과 자신의 관계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럼 나에 대해서는요?" 그녀는 힘없이 물었다. "날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생각이 바뀌질 않던가요?" "제인은 임신했다는 사실을 내게 말하지 않았어" 벤은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 없어요" 스테지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때마침 현관 초인종 소리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조던이 틀림없었다. 오늘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언제 약속하고 방문한 적이 있던가! 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한 번 만났을 뿐인 벤을 이렇게 집에까지 불러들인 것을 보면 말이다. "어서 열어주지 그러니?" 벤이 조용히 말했다. "조던이 온 모양인데"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 "일단 문을 열어주고 나서, 인테리어 문제 때문에 날 불렀다고 하는 게 좋겠다" "어머니는 늘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스테지가 쏘아붙였다. "그녀답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테지는 언짢은 눈으로 벤을 흘겨본 뒤 현관문을 열었다. "조던!" "안녕!" 그가 가벼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중국 음식을 좀 사왔소" 그가 성큼 집 안으로 들어서다가 다소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세 명도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거요" 스테지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조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온몸에서 노여움 비슷한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난 괜찮네, 조던" 벤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조금 후에 메를린과 식사 약속이 있거든. 두 사람은 어서 먹게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하지만 그 역시 조던의 싸늘한 눈초리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을 먹기에는 아직 좀 일러요" 스테지가 끼어들었다. "우선 당신 집 오븐에 좀 넣어두겠어요? 30분쯤 있다가 먹으러 갈게요 벤이 가고 나면 말이에요" 조던은 한숨을 내쉬었다. "30분이면 되겠소?" 차가운 목소리였다. "충분할 걸세" 스테지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벤이 대신 말했다. "좋아요" 조던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벌써 와인을 개봉하신 모양인데…" 그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와인 잔을 쳐다보았다. "나도 가서 와인이나 한 잔 마셔야겠군요. 스테지, 그럼 30분 뒤에 봅시다" 스테지를 쳐다보는 조던의 눈길엔 얼음장 같은 한기가 감돌았다. "벤, 나중에 봐요" 그는 벤을 다시 한 번 쳐다보더니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스테지는 그가 나가 버리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사람은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보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걸까요?" 벤은 어깨를 으쓱했다. "조던을 탓하지는 말거라. 그는 그냥 질투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건 너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다는 말이지"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럼 내게 감정이 있어서 그렇단 말이냐?" 그는 짓궂게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어떤 부모든 조던 같은 사윗감을 원할 게다" 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푸른 눈빛이 유난히도 그녀와 닮아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존재를 정말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저렇게 순진해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그런 엄청난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얘기를 서둘러야겠네요"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자,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시작은 언제나 처음부터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시곤 했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은 정말 현명하고 똑똑한 여자였단다" 스테지와 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의견 일치를 본 순간이었다. 14 벤은 도대체 무슨 일로 스테지의 아파트에 와 있는 걸까? 조던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계속 서성이고 있었다.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와인을 한 잔 가득 따라 벌컥벌컥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들이켰다. 시간은 더니게 흘렀다. 30분이 지나고, 40분이 지나고, 마침내 50분이 지났을 때는 벌써 와인을 세 잔이나 들이켠 뒤였다.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그는 벤의 차가 주차장에 세워진 것을 보았다. 처음엔 벤이 자신을 만나러 찾아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비에는 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그가 집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몇 시쯤에나 오는지 물어볼 겸 스테지의 아파트에 찾아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겸사겸사 그는 사들고 온 중국 음식을 같이 먹을 요량으로 그녀의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한참을 꾸물럭거리다가 문을 열어주었고 마지못한 듯 그를 들어오게 했다. 게다가 탁자 위에는 비어 있는 와인 잔이 두 개나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독신 생활을 해오던 벤은 메를린을 만난 순간, 그 자리에서 결혼을 결심한 아주 열정적인 남자였다. 그런 그가 자기보다 마흔 살이나 어린 스테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말인가? 부엌에 걸어둔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1분 1초가 그에게는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대체 예순 살이 넘은 남자와 이십대 초반의 여자가 무슨 얘기를 나누기에 이렇게 오래 시간을 끈다는 말인가? 조던은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것을 느끼며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스테지는 순결한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왜 허튼 짓을 하겠는가! 게다가 처음 벤과 만났을 떼도, 스테지는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했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이유로 함께 있는 걸까? 벌써 한 시간이 흘렀다. 조던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둘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다짜고짜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그녀의 침실로 뛰어 들어갈 작정을 했다. 그때였다. 초인종이 울린 것은! 스테지였다. 그녀는 대체 뭐라고 설명할까? 벤과 무슨 얘기르 나누었다고 말할까? 아마 그녀는 솔직하게 모든 걸얘기하겠지. 아무리 그게 상대방의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한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채 마르지 않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벤이 그녀를 울렸단 말인가? "미안해요. 생각보다 좀 길어졌어요" 그녀는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저, 그러니까…" 그녀는 터져나오는 울음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조던은 두 팔로 그녀를 끌어안고 문을 닫았다. "대체 무슨 일이오? 벤이 무슨 짓을 한 거요?그가 당신에게 무슨 몹쓸 짓이라도…"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흐느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래요, 마음껏 울어요" 그는 그녀를 보듬어 안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얘기는 실컷 울고 난 다음에 합시다" 얼마나 지났을까? 스테지는 마침내 울음을 그쳤다. 그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등만 토닥여 주던 그가 그녀에게 휴지를 건넸다. "나이아가라 폭포수가 이제야 멈췄나 보군!" 그녀는 그의 농담에 피식 실소를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젠 얘기할 수 있겠소?" 조던은 그녀의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자기 전에 꼭 옛날 얘기를 들었나 보죠?" "아직 잘 시간은 아닌데?" 그녀는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얘기를 듣고 나서 같이 잘 수도 있죠" 아니,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그는 그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슬픔에 젖어 있는 그녀의 감정 상태를 이용해서 함부로 그녀를 가지고 싶지는 않았다. "해피엔딩이오?" "잠자기 전에 듣는 얘기라고 늘 해피엔딩은 아니죠"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요" 그녀는 허공을 응시하며 얘기를 시작했다. "22년 전이었어요"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게 맞지 않소?" 그는 짐짓 짓궂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이기에 저토록 심각한 걸까? 22년 전이면 아직 그녀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가 아닌가! "이건 동화가 아니에요, 조던. 정말 일어난 얘기란 말이에요"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단단히 결심한 듯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내 어머니는 데미안 프린스와 결혼했죠. 그리고 닉, 잭, 릭, 삼 형제를 낳았어요" "그리고 재키라는 이름의 당신도 낳았고" 조던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들 사이엔 딸이 없었어요"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조던, 잘 생각하면서 들으세요. 데미안 프린스는 23년 전에 죽었어요" 그는 사실 데미안 프린스라는 유명한 배우가 언제 타게 했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23년이 지났다면 그는 스테지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인가? 그제야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 벤이…?" "그래요" 그녀는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죽은 뒤, 어머니는 남들과 똑같은 슬픔의 결로를 거쳤죠. 처음엔 믿을 수 없다고 몸부림치다가, 그 다음엔 화를 내고, 그러다 결국은 지치고, 나중엔 그의 죽음을 숙연히 받아들이게 되고….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깊은 외로움과 불면증이 남아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머리를 식힐 겸 영국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어요. 거기가지가 어머니에게서 들은 얘기에요.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벤이 자세히 얘기를 해주었죠" 스테지의 어머니가 영국을 여행하는 동안 벤을 만나게 되었으리라는 것,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하게 되었고 그 사랑의 결과로 스테지가 태어나게 되었으리라는 것쯤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당시 벤은 이혼 후 혼자서 샘을 양육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는 깊은 절망감과 고독에 빠져 있었다. 스테지의 어머니 역시 남편을 여읜 슬픔으로 무척이나 힘겨운 시기였던 모양이다. 대부분 그런 상황에서 만난 사람들은 충동적이기 쉽다. 그래서 그렇게 시작된 사랑은 늘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 스테지가 말을 이었다. "벤과 어머니는 7,8년 전 데미안이 영화에서 정신 분석학자 역할을 맡았을 때 만난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데미안은 정신 분석학자의 생활을 직접 관찰하기 위헤 벤을 자주 만났고, 어머니 역시 자연스레 그와 만나게 되었겠죠. 몇 년 후 남편을 여의고 나서 여행을 떠난 어머니는 벤을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당연히 벤은 어머니를 여러모로 잘 보샬펴 주었겠죠. 벤은 어머니와 데미안의 친구였으니까요" 벤의 심정은 어땠을까? 존재조차 몰랐던 딸이 이렇게 장성해서 불쑥 나타났을 때,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만약 자기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려고 했을 것이다. 조던은 벤이 됨됨이를 잘 알고 있었다. 스테지의 어머니는 정말 용감한 여자였던 모양이다. 만약 벤이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당연히 결혼식을 올리려고 했을 것이다. 짐작건대, 스테지의 어머니는 심사 숙고 끝에 결국은 자신을기다리고 있는 세 아들을 택했던 것 같았다. 게다가 뜻하지 않은 임신 때문에 한 남자를 옭아매어 결혼에까지 이르고 싶지는 않다는 자존심도 그 선택에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종종 그런 얘기를 하셨어요" 스테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간 사람이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구요. 어머니는 아마 벤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아요. 벤을 만난 후에야 어머니는 암울한 절망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모양이에요. 어머니는 벤 덕분에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으셨대요. 그래요. 어머닌 벤을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셨어요. 하지만 난… 난…"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난 나의 존재를 그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서 묻고 싶었어요. 정말 나의 존재를 몰랐었냐고. 혹시 나라는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 나와 어머니를 버린 게 아니냐고 묻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어떻소?"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내 생각과는 전혀 달랐어요. 벤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것 같았어요. 이렇게 다 큰딸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게 그러서는 쉽지 않을 거예요" "아마 충격이 꽤 오래 갈 거요" 조던은 벤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겨우 샘을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는가 했는데, 갑자기 다 큰딸이 나타났으니 말이오. 이렇게 아름답고 똑똑한 딸이 말이오"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한편으로는 참 자랑스럽고 뿌듯할 거요" "난… 난 좀더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어야 했어요. 샘이 그렇게 세상을 떠난 줄도 모르고, 내 위주로만 함부로 말했던 것 같아요. 샘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난… 난…! 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그녀는 말을 잇기조차 힘겨운 것 같았다. 조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벤이 얼마난 힘들어했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사람 중의 하나였다. "샘은 조나단의 대학 친구였소. 가장 친한 친구였지" 그가 설명했다. "그래서 우린 그들 부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소. 특히 조나단은 더 잘 알고 있고. 하지만, 세상에, 난 당신이 바로 그 샘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소"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자, 이제 당신 이름을 정확하게 말한다면 캐클린 스테지 워커 프린스 트레비스라고 할 수 있겠군. 이름 한 번 길어서 좋소!" 스테지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난 그냥 스테지 워커라고 하고 싶어요" "그보다는 스테지 헌터가 어떻소?" 그녀는 깜짝 놀란 듯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 지금 내게…" "청혼하는 거요, 스테지" 그는 벤과의 일로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그녀에게 불쑥 청혼을 한 자신이 다소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난 당신이 누구의 딸이든, 또 누구의 동생이든 아무 상관없소. 난, 난… 그냥 당신을 사랑하오. 당신이 내 아내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오. 내 청혼을 받아주겠소?" 그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스테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허공을 향하고 있는 동안 조던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서른다섯 살이 되도록 기다린 끝에 이제서야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 조던!" 그녀가 마침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도 나를 사랑한단 말이오?" 그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왠지 스테지의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뭐가 문제요?" 그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샘은 어릴 때부터 자주 심장 발작을 일으켰다고 벤이 말했어요. 그래서 만약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냐고 걱정하시더군요. 혹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쩌죠?"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스테지" 조던은 벌떡 일어나 그녀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운명이란 그렇게 가혹하기만 한 건 아니오. 난 내 인생을 걸고 당신 같은 여자를 기다려 왔소" 사실이었다. 결혼에 대해 늘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그였다. 결혼이란 변덕 심한 여자들에게 자신을 옭아매는 자실 행위라고 생각하던 그였다. 그런 그를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 여자는 단 한 사람, 스테지뿐이었다. "우린 만났고, 사랑하게 되었고, 그리고 결혼할 거요. 앞으로 남은 인생을 늘 함께하게 될 거라구!"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빙빙 돌리며 소리쳤다. 15 "<오케이 목장의 결투> 에 나오는 한 장면 같군요" "헌터와 프린스의 대결이라!" 조던은 스테지의 허리를 감사안은 채 각자 아내를 대동하고 들어서는 형들을 즐거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결혼 피로연만 아니면 그렇게들 생각하겠죠" 스테지가 속삭이듯 말했다. 결혼을 결심했을 때 스테지가 가정 먼저 떠올린 얼굴은 닉이었다. 다시 한 번 그와 충돌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뜻밖에도 닉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꼬 안아주었다. 사실 그녀는 시간이 흐르자 스티비에 대한 환상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따라서 오빠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존심이 상해 닉에게 화풀이를 했던 것이다. 이제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고, 이젠 더 이상 오빠에게 화를 낼 필요가 없었다. "어쩐지 애비의 눈초리가 예사롭지가 않아. 이제 헌터가 남자들을 모두 장가 보낸 셈이니까, 프린스 가 남자들을 어떻게 해보려고 궁리하는 것 같아" 조던은 형수를 쳐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스테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지난 수년간, 난 내게로 향하는 관심을 분산시키려는 일념에서 오빠들을 짝지어 주려고 무척 애를 썼어요. 하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대실패였죠" 스테지는 하나같이 잘생기고 늠름해 보이는 오빠들을 자랑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정말 아름다워요, 스테지" 뒤늦게 피로연장에 도착한 메를린이 스테지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벤과 메를린은 정확히 1주일 전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제 메를린은 그녀의 시엄마가 된 것이다. 그리고 다소 복잡한 관계이긴 했지만, 케이는 그녀의 손윗동서이자 언니가 된 셈이었다. "물론이지. 원래도 얼마나 아름다운데!" 벤이 스테지의 포옹을 받으며 말했다. "정말 잘 보살펴 주어야 한네!" 그는 조던과 악수를 나누며 당부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테니까"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고 새신랑에게로 발걸음을 맞추어 걸어가는 동안 내내 뿌듯함과 가슴 벅찬 감격으로 들떠있던 아버지, 벤의 모습을 떠올리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가 없는 동안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해 주었던 닉은 스테지와 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 주었고, 조던은 그 고마운 마음에 대한 대가로 그를 신랑 들러리로 세웠다. 모든 게 완벽했다. 짐을 꾸려 로스앤젤레스 공항을 떠날 때만 해도 영국에서 이렇게 값진 인생을 맞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어버지까지 찾게 될 줄은 더더욱 상상조차 못했다. 비록 얼굴조차 모르는 샘 오빠의 불행한 소식이 그녀를 가슴 아프게 했지만, 벤에게는 그나마 스테지의 존재가 큰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스테지는 따로 친자 확인 유전자 검사를 받아볼 필요도 없었다. 샘이 어릴 적부터 심장 질환을 알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스테지의 어머니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유전자 검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검사를 이미 받아둔 터였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두 벤의 자식이 확실하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았던 것이다. 그녀는 이제부터 헌터 부인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는 방 안을 가득 메운 헌터 가 사람들과 자신의 오빠들, 그리고 새로 찾은 아버지와 새엄마, 이 모든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스텔라는 세 번째 남편과 다시 재결합해서 오늘의 결혼식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렇게 커다란 행복이 찾아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던과 함게 있는 한, 앞으로 남은 인생에는 이보다 더 커다란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