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잔인한 운명 (Savage Destiny), H-28 작 가 : 아만다 브라우닝 타이핑 : VELVETY2 [퍼플]-천리안 로사모 그는 그녀를 이용했을 뿐이다. 5년 전 피어스는 앨릭스와 단 하루만에 결혼생활을 마쳤다. 할아버지대에 빼앗긴 선박회사를 되찾기 위해 그녀를 복수의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앨릭스는 지금까지도 악몽에 시달릴 만큼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 몸져누운 아버지 대신 그녀가 경영을 맡고 있던 회사가 도산할 위기가 닥치고, 피어스가 때맞춰 나타나서는 도와주겠다고 제안한다. 단 그녀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그것도 임시가 아니라 영원한 계약으로. 관연 이번에는 무슨 의도로 그가 접근하는 것일까? 1 앨릭스 페트라코스는 조심스럽게 택시에서 나와 어깨에 힘을 주고 호 텔로 들어가는 언덕길로 향했다. 오늘은 저녁식사 겸 댄스파티가 있는 날이지만 왠지 흥이 나지 않는다. 온몸이 욱신거릴 정도로 피곤했기 때문이다. 연이어 공허한 나날에 오늘은 특별히 더욱 길고 지루한 날 이어서 이런 요란스런 자선 파티에 참석하느니 차라리 집에서 쉬었으 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연회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방금 패션 잡 지에서 빠져나온 듯 키가 크고 늘씬한 몸매에 고급 의상과 값비싼 보 석을 걸치고 있긴 해도 그런 화려함은 이제 수명을 다했다는 걸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가족의 사업이 절박한 위기에 빠져 있지만 않아 도 아무 문제없을 텐데. 그녀는 문가 바로 안쪽에 멈춰 서서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훑어보았 다.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보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지난 몇 주간 책 상 너머 그들의 모습을 얼마나 많이 보아 왔던가. 이제 그녀의 등장을 눈치챈 사람들은 슬금슬금 피하며 그녀의 곤란한 집안 사정을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에 그녀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금백색 커트 머리에 가 녀린 목을 더욱 연약하게 보이는 표정이었다. 있는 용기와 침착을 가 다듬고 그녀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와인을 한잔 마시며 앨릭스가 느낀 건 대담하게 그녀를 쳐다보는 사 람들은 하나같이 냉소를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6개월 전만 해도 지금 과 같은 냉담함은 상상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코앞에 닥쳐, 이 젠 아버지의 판단 착오를 그녀가 모두 감당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난 여기서 그들에게 매달리며 소동을 부리진 않을 거야. "그렇게 놀랄 건 없잖아" 그녀의 옆에서 조롱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났다. "돌을 집어들었으면, 이젠 침몰하는 배에서 쥐를 쫓아내야 할 시 간이지." 저음의 목소리를 들은 앨릭스는 모든 신경이 마비되고 한순간 방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 피가 얼어붙고, 근육이 팽팽해졌다. 그녀 는 오로지 고개를 도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할 힘만 남아 있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군 지는 알고 있었다. "독수리에게 먹이를 양보하고 난 썩은 시체를 집으란 소린가요?" 그 녀는 차갑게 응수하며, 옆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스스로 놀랄 정도로 침착하게 바라보았다. "만나서 반갑다는 말은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 는군요. 상어는 멀리서도 피냄새를 맡는다고 하더니..." 그녀는 자기가 쓴 비유가 맞는지 틀리는지는 상관하지 않았다. 마음 속엔 오직 하나의 의문이 맴돌았기 때문이다. 이 남자가 여기서 뭘 하 고 있는 거야? 피어스 마르티노. 여전히 악마 같은 매력을 지닌 그가 예의 잔인한 마음을 드러내며 느린 미소를 지었다. "발톱을 더 길렀군, 앨릭스. 그 래봤자 내겐 고양이 발톱이지. 언제 할퀴는 게 적절한지 더 배우라고." 그의 얕잡아보는 말투에 앨릭스는 과거에 자신이 얼마나 힘이 없었던 가를 되새겼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와 함께 잠들었다. "내 기억으론 마 르티노에겐 언제나 공격 가능이죠!" 그녀는 그를 이 자리에서 눌러 버 리고 싶었다. "총을 쏘면서 옛친구를 반기는 법도 있나? 그것도 나름대로 쓰일 때 가 있지만 지금은 아니지, 앨릭스. 요즘은 적에게도 그런 대우는 안 해. 그러다 동료를 쏠 수도 있는 거라고."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부 드럽게 말했다. "동료라고!" 그녀는 강한 혐오가 밴 음성으로 외쳤다. "말도 안돼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피어스, 당신은 영원한 적이에요. 내가 당신에게 증오를 품고 있는 한." 앨릭스는 격렬하게 쏘아붙였다. 맙소 사,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그의 기억에 남은 과거는 대체 어 떤 것이기에? 난 아직도 생생한데. "이제 그만 실례하겠어요. 보다시피 난 당신 말고도 요즘 시달리는 사람이 많아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확실히 모른 채 그냥 걷다 보니 어느새 작은 방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어졌다. 그제야 멈춰선 앨릭스는 온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는 걸 알았다. 빌어먹을, 그 남자가 대체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야?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은 걸까? 과거의 상처를 굳이 끄집어낼 필요가 잇는 거냐고. 난 그를 증오해. 한때 사랑했던 것 만큼이나 증오해. 앨릭스는 찌르는 듯한 위통에 고개를 숙였다. 피어스 마르티노는 여 전히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고 여인의 마음을 잔인하게 흔들어 놓는 다. 한때 그녀도 그의 날갯짓에 휘말려 타격을 입었다. 그의 푸른빛 짙 은 검은머리와 푸른 눈동자, 그늘을 드리우는 광대뼈, 그 관능적인 입 술에 취했었고, 그의 자신감과 단단한 체구는 그녀의 마음에 불을 지 펴 아주 위험한 열기로 타올랐었다. 쓰디쓴 약이 입안 가득 퍼지는 느낌이 들어 그녀는 무의식중에 들고 있던 유리잔을 관절이 새하얘지도록 꼭 지었다. 결국 그의 사랑은 증 오를 가장한 속임수였다. 그 모든 것이 다 거짓이었어, 처음부터 끝까 지 전부 다! 분노의 기억에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감정이 격해졌다. 순간 유리가 박살나는 소리가 났고, 곧 그녀의 고통스런 비명이 이어 졌다. 그녀는 멍하니 자신의 손바닥에 흐르는 피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앨릭스는 자기가 혼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이오! 자해라도 할 생각인가? 손 이리 내봐요." 피어스 가 그녀를 따라왔던 것이다. 그는 날렵하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가 미처 손을 빼기고 전에 상처를 살펴보았다. 앨릭스는 고개를 숙인 그의 머리를 보는 순간 몸서리를 쳤다. 숱 많 은 검은머리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저 머리에 얼마나 편안히 기댔었던 가. 쓰다듬는 감촉의 느낌은 또 어땠던가. 그녀는 날카롭게 숨을 들이 쉬었다. 공교롭게도 그에게서 풍겨나는 향취와 온기가 오감을 자극했 다. 게다가 그녀의 팔에 닿은 그의 손길은 전기 충격이나 다름없었다. 이 예기치 못하고 바라지도 않았던 상황에 겁이 난 그녀는 소리를 지 르고 싶었다. 안돼! "목숨은 건졌소" 피어스의 한마디에 그녀는 마음의 충격에서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 러나 마음을 가다듬어 그를 올려다보기 까진 꽤 시간이 걸렸다. "조금 긁힌 정도고, 유리조각도 없는 것 같아." 그는 짓궂게 눈을 빛 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리가 뭐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소? 목이 라도 베이고 싶나?" 애는 썼지만 도저히 그의 시선을 견딜 수 없어 그녀는 황급히 냉소가 깃들인 그의 차디찬 눈동자를 피했다. 눈을 손으로 떨구고 보니 그의 손수건이 붕대가 되어 감겨 있고, 하얀 천에 선홍빛 피가 약간 물들어 있다. 피어스가 내 곁에 있을 땐 언제나 내가 피를 흘리게 돼! 황량하 고 차디찬 옛 기억의 바람이 그녀를 휘감았다. "목을 베어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이에요." 앨릭스는 차갑게 응수하 고는 감정의 동요가 드러나지 않은 자신 있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 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오직 가볍게 웃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시도 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지." 앨릭스는 그의 위풍당당한 말투에 날카롭게 미소지었다. "그 잘난 자 만심도 언젠가는 좌초되겠죠. 내 눈으로 그 장면을 지켜봤으면 좋겠군 요." 그의 눈 속에 한순간 후회의 빛이 아른거렸으나 그녀가 미처 확인하 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그건 가문의 유전이지. 어째 그리스 고전의 비극 같은 기분이 안 드나? 복수의 칼을 품은 아내가 남편의 몰락을 계획한다. 내 무덤 앞에서 춤이라도 출 건가, 앨릭스?" 날 갖고 노는 거야. 절대로 넘어가지 않겠어. "전 부인이에요." 그녀 는 재빨리 고쳐 말했다. 그 말이 왜 이렇게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지 모르겠다. 처음으로 입밖에 꺼낸 단어이기 때문일까? 피어스는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말하는군." 그녀는 턱을 치켜올렸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내 인생 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어요!" 그 말로 인해 그가 타격을 받기를 바랐다면 그건 그녀의 오산이었다. "묘하군. 우리 결혼식 날에도 당신에게서 그 말을 들었는데." 그가 나 지막이 말했다. 그의 매끄러운 목소리가 몹시도 유혹적으로 들렸다. 이런 순간에도 그에게 반응하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니 그녀는 자신이 한심스럽고 화 가 났다. 그에게도, 그녀 자신에게도 치욕스런 과거의 일이 아직도 생 생하다. "그땐 당신이 그렇게 악인인 줄 몰랐었죠." 그의 얼굴에서 장난기 어린 표정이 돌련 사라졌다. 경직된 얼굴에 턱 의 근육만이 실룩거릴 뿐이다. "그 일은 그렇게 돼야만 했던 일이오. 당신도 이해해야 해." 앨릭스의 회색 눈동자가 증오를 드러내며 어두워졌다. "난 절대로 이 해하지 않을 거예요. 용서하지도 않을 거구요! 내가 죽는 날까지 당신 을 증오해요!" 그가 새된 숨소리와 함께 코웃음 소리를 냈다. "절대로는 너무 오랜 시간인걸. 오히려 당신은 내게 고마워해야 할거요." 그에게 달려들어 손으로 할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데 그녀의 자 제력이 모두 동원됐다. 날 약올리고 있는 거야. 여기서 자제심을 잃으 면 난 지게 되는 거라고. "왜요? 우리 할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해줘서 고맙다고요?" 일격을 당한 피어스는 성난 발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오다가 우뚝 멈 춰 서서 화를 억눌렀다. "날 비난하진 마, 앨릭스. 그분은 노인이셨지 만 내가 마지막으로 뵌 후로 몇 년은 더 사셨잖소." 그녀는 비참함에 더한 분노로 입술이 떨렸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 만 당신이 그분의 모든 것을 빼앗아 죽음을 재촉한 거예요." 그녀는 비참함에 더한 분노로 입술이 떨렸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 만 당신이 그분의 모든 것을 빼앗아 죽음을 재촉한 거예요." "내 것이 아닌 걸 가로채 온 건 아무 것도 없소. 난 대신 그에게 당 신을 내주었지." 앨릭스는 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날 내줬다고? 빈 껍데기로 남은 날 버려 놓고선! "당신은 도둑에 살인자 에요. 난 당신을 경멸해요." 그의 얼굴이 돌로 새긴 조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날 경멸하는 건 자유지만, 난 당신이 흥미를 가질 만한 것을 갖고 있지." "당신에게서 뭘 받느니 차라리 내 손을 자르겠어요, 피어스 마르티 노!" 그의 얼굴에 다시 차가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여전히 극적이시군. 당 신이 얼마나 열정적인 여자였는지 잠시 잊고 있었어. 침대에서나 그 밖에서도." 뻔뻔스럽게도 어쩌면 저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난 철저하게 이용당한 거야. 그땐 내가 바보였을지 몰라도 이젠 아니야. "당신 말이 맞아요. 고마워해야 할 일이 있군요 귀중한 교훈을 가르쳐 줬으니. 죽 어도 잊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야멸차게 쏘아 말했다. "내가 훌륭한 선생이었다면 당신은 아주 적극적인 학생이었지." 그녀 의 말뜻을 거꾸로 해석한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영향 탓 인가. 내 기억보다 더 아름다워진 것 같군." 앨릭스는 모멸감에 이를 갈았다. 순결한 신부를 침대로 끌고 가서는 쾌락의 맛에 눈뜨게 하더니, 곧바로 견딜 수 없는 공동을 준 장본인이 내 눈앞에 있다. "당신의 칭찬에 고마워하리라는 기대는 말아요. 생각 만 해도 구역질이 나니까!" "그럴 리는 없을걸. 당신이 뇌졸중을 일으키기 전에 이만 해야겠지만, 왠지 그러기가 싫은데. 짧은 머리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 우아해 보이 기도 하고 연약해 보이기도 하거든. 언제 잘랐소?" 앨릭스는 어쩔 수 없이 분노를 삭여야 했다. 화를 내도 어차피 내게 도움도 안되고, 그의 재미만 돋우는 것 같아. 그래도 적의를 드러내는 눈빛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3년 전에 처음 잘랐죠!" 피어스는 금세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흐음,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맞이한다? 난 당신의 긴 금발에 곧잘 넋이 나가곤 했지. 당신과 사랑 을 나누며 내 손가락에 그것을 감는 꿈에 빠지기도 했고." 그녀는 목이 메었다. 결혼이 파경에 이르고 난 후에 그녀고 그와 같 은 꿈에 사로잡혀 살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 기억은 차가운 얼음으 로 변해 버렸다. "머리를 자른 이유가 있었죠. 당신 생각을 떠올릴 싹 은 모두 제거하고 싶었으니까." 피어스는 조롱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가슴에 팔짱을 끼었다. "아직도 날 잊지 못한 것 같군. 그래서 오늘밤도 혼자 나타난 거요?" "날 당장에라도 어떻게 해볼 심산이라면 꿈 깨요! 당신도 잘 알다시 피 난 아버지가 편찮으시기 때문에 혼자 왔죠. 이제 설명이 돼요?" "말도 안돼. 영국 남자들은 다 눈뜬 장남인가? 당신을 에스코트해 줄 남자가 하나도 없단 말이오? 당신이 마지막으로 사귄 남자가 누구요?" 그녀는 어깨를 곧게 펴고 그를 쳐다보았다. "정확히 알고 싶은 게 뭐 예요, 피어스? 내 연애 경력인가요?" 그녀는 어깨를 곧게 펴고 그를 쳐다보았다. "정확히 알고 싶은 게 뭐 예요, 피어스? 내 연애 경력인가요?" "그렇게 과민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아무도 없었군. 아니면 그의 기 술이 딸려 당신을 실망시켰든지." "어떻게 감히?" "내가 맞다는 소리요, 틀렸다는 소리요?" "당신 같은 저질이 물어 보는 말엔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죠." 그녀는 격분하여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으로써 이미 대답은 한 거요. 그렇다면 남자도 가까이 하지 않고 5년 동안 뭘 하고 지냈지?" "당신 없이 잘 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죠." "아, 그래." 그는 앨릭스의 옷과 보석을 쓱 훑어보았다. "아주 고상하 게 살고 있었던 것 같군. 누가 돈을 냈지? 아버지?" 그가 비아냥거리자, 그녀는 또 다른 분노가 일렁이는 걸 느꼈다. "틀 렸어요. 내 스스로 열심히 일해 얻은 대가로 산 거예요. 보석은 스물 한 번째 생일 때 선물 받은 거구요.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이 왜 내 치 장까지 간섭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원래 소리만 고래고래 지르는 사람이 알고 보면 어리숙하지." 그의 비아냥이 이어졌다. 더 이상의 조롱은 듣지 않겠어. "당신은 그런 사람을 누러 이기길 좋 아하잖아요? 자기 방어능력이 없는 사람 말이에요. 하지만 난 아니에 요. 난 그런 사람들과 말도 하기 싫어하니까. 이제 알았으면 난 가보겠 어요..." 앨릭스는 얼음장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를 지나치려 했지 만, 어느새 그의 손이 손목을 붙들어 세웠다. "지금은 안 돼. 우린 할 얘기가 있거든." 그녀는 그의 손을 떨쳐버리려고 애썼으나 어림도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를 맹렬히 쏘아보는 것뿐이었다. "이미 얘기는 충분히 한 것 같은데요?" 피어스는 고래를 가로 저었다. "달링, 우린 아직 아무 얘기도 꺼내지 않았어. 하지만 당신 말을 듣지. 장소도 시기도 안 좋으니까. 내가 내 일 아침 열 시에 당신 사무실로 가겠소." 내 인생에 다시 침범하는 게 그렇게 쉬울 줄 알았나? "당신이 오든 말든 난 상관 안 해요. 하루 종일 약속이 있어서 얼굴이나 마주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는 그녀의 손목을 풀어 주는 대신 그녀의 턱을 잡아 꼼짝없이 자신 을 바라보게 했다. "시간을 만들어요. 약속이래 봤자 빚 독촉을 막는 것일 테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 아닐 테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 지 말고 당신 직원들을 생각해 봐. 그들이 실직하지 않아도 되는 마지 막 기회요. 모두 당신에게 달렸소, 앨릭스. 자존심을 옆으로 치워 둘 수 없나?" 그는 한동안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내일이오." 그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까닥하고 먼저 떠났다. 화가 끓어오르는 마음으로 앨릭스는 멀리 사라지는 큰 키에 당당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지옥으로나 떨어지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그의 경고에 그만 막히고 말았다. 그가 모든 걸 알고 있었어. 난 회사 를 구하려고 온힘을 쏟았지만 결과는 신통치가 않았다. 실패를 인정하 는 건 비통하지만... 이제 내 앞에 피어스가 나타났다. 마치 해결책을 손에 쥐고 있는 듯한 암시를 던지며, 그를 아무리 증오해도 그에게 등 을 돌릴 수만은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앨릭스는 남은 저녁 시간 동안 참담함 마음을 떨어버릴 수 없었다. 일찍 파티 장을 떠났지만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스티븐 페트라코스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런던 병원으로 향했다. 3주 전 아버지는 중증의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그나마 이번 것은 지 난번보다 약한 것이었다. 아직까지 목숨이 붙어 있는 게 기적일 정도 다. 아버지가 힘겹게 생을 이어가고 있을 때, 그녀는 그의 출판 왕국이 쓰러져 가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의사들이 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싸 우는 동안, 그녀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싸웠던 것이다. 병실로 들어가자 뜨개질을 하던 어머니가 작고 연약한 모습 그대로 눈을 들어 딸을 반겼다. "안녕, 재미있게 보내고 왔니?" 앨릭스는 어머니의 뺨에 가볍게 입맞췄다. "엄마도 어떤 건지 잘 아 시잖아요. 시작은 좋지만 갈수록 영 아닌 거. 아버지는 어때요?" "잠드셨어. 아까만 해도 안절부절못하셨다. 뭐가 고민인지 말을 해줬 으면 좋겠어." 어머니는 입술을 깨물며 근심의 한숨을 내쉬었다. 앨릭스는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아버지 가 아픈 걸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알잖아요. 특히 일을 못하게 될 때는 더. 일시적이긴 해도 제가 수습을 하고 있으니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 을 거예요." 그녀는 속으로 행운을 빌었다. 그 말이 사실로 이어지기를 절실히 바라며. "네가 날 안심시키는구나, 앨릭스. 네가 없었으면 엄마는 못 살았을 거야." 에밀리 페트라코스는 미소 대신 얼굴에 주름을 잡았다. "그런데 너 피곤한 것 같다. 잠을 못 잤니?" 요즘은 제대로 잠을 자기가 힘들었고, 설사 잠이 어찌 들었다고는 해 도 악몽에 쫓기기 일쑤다. "괜찮아요. 오늘 좀 지쳐서 그래요. 집에 가 서 곧바로 자면 되요. 엄마나 좀 주무세요. 이런 모습을 아빠가 보시면 힘이 더 없어지실 거예요." "내가 무슨 강장제라도 된 느낌이다." 앨릭스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요, 엄마는 충분히 능력이 있어요." 그 녀는 하품을 하며 시계를 보았다. "가야겠어요. 내일이면 다시 쌩쌩해 질 거예요. 아버지께 다녀갔다고 전해 주시고,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그러세요." 그녀의 집은 첼시의 강 근처에 있다. 자그맣지만 그녀에겐 알맞았다. 짧은 결혼생활 전에 이곳을 세내어 살았고, 이혼 후 재정적인 위자료 는 아무 것도 받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서 상 처의 아픔을 달랬다. 실내에 불이 켜지자 그녀는 까닭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피어스 때문 이야. 그 남자가 날 쫓기는 사람 심정으로 만들어 버렸어. 앨릭스는 거 실로 들어서며 코트를 소파에 던지고 브랜디를 한잔 따랐다. 그와 재 회한 건 상당한 충격이었다. 이혼한 후로 그를 다시 만나리란 예상을 전혀 하지 않았었다. 한때는 세상이 다 내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피어스 의 치밀한 계획을 성공시키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달콤했던 속삭임과 사랑을 담았던 눈길이 하나부터 열까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 한 연극이었던 것이다. 내가 속고 있다고는 정말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고, 그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철썩 같이 믿었다. 그 모든 것이 믿음에 지나지 않았다니. 순진하기 짝없는 영혼을 그는 그렇게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경험 많은 스물 아홉 살의 그에 비해 나는 턱없이 어리기만 한 많은 스물 한 살이었다. 그는 어쩌면 내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앨릭스는 몸서리를 치며 의자에서 몸을 웅크렸다. 피어스는 한 가지 는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후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못했던 것. 그 게 놀랄 일인가?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두 번 다시 그런 불 장난은 두려워서라고 하고 싶지 않을 텐데. 앨릭스는 눈을 감았다. 질문은 그치게 할 수 있었어도 기억만큼은 멈 추게 할 수가 없었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영화처럼 한 장면씩 떠오른다. 5년이 지난 지금도 회수가 줄었을 뿐 그 기억은 자 나깨나 그녀를 괴롭히는 악몽으로 나타났다. 그를 생각하지 않은 지가 꽤 되었는데, 오늘밤 모든 것이 다시 생생하게 살아났다. 피어스의 교활함은 내게 그를 사랑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는 날 사랑한 적이 없어. 결혼식 다음날 아침 내가 자신과 결혼한 남 자가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알 때까지 그는 감쪽같이 연기 했다. 두 사람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날, 그녀는 피어스란 인물의 실체 를 알게 된 것이다. 2 그날은 힘든 하루였다. 그러나 앨릭스는 힘든 걸 느낄 새도 없었다. 자회사에서의 6개월 교환직이 거의 끝나가 영국으로 돌아가기 몇 주 남겨 놓지 않고 있었고, 이미 아버지의 출판 그룹에서는 그녀를 부이 사로 내정해 놓은 상태이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운 동료들은 낮에 일 한 것만큼이나 열심히 저녁에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이었고, 그녀는 매 일 파티에 참석하는 데 별로 익숙하지가 못해 몸이 피곤했다. 그래서 그날 밤 아버지 친구와 극장에 가기로 한 선약이 있는 것이 고맙게 느 껴질 정도였다. 연극은 재미있었다. 그녀는 첫 번째 휴식시간에 열띤 어조로 복도에 서 그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문득 그때 자신을 바라보는 강 렬한 시선을 느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돌아섰다. 순간 북적대는 군 중들 사이를 뚫고 영혼까지도 찌를 듯한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녀는 얼마 거리를 두지 않고 서 있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짧은 순간 묘한 기류가 두 사람을 감쌌다. 이윽고 누군가 남자의 주의 를 끌어 그 기류는 사라졌다. 앨릭스는 그 즉시 돌아섰지만 강렬한 충동에 이끌려 다시 어깨 너머 로 돌아보고 말았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그는 아직 대화를 나누고 있고 오로지 그의 모습만 보일 뿐이지만 그 정도로도 그녀의 위는 충 분히 움츠러들었다. 내가 본 중에 최고로 잘생긴 남자야. 그녀의 몸을 타고 전에 없던 열기가 확 피어올라 입술이 바짝 타버렸다. 당황한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상대방에게 실례를 구하고 그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지 만, 그가 바로 옆에 와 멈춘 순간 신경이 모두 그쪽으로 쏠렸다. 복잡 해진 머리를 수습하는 동안에 그녀의 동행이 그 남자와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앨릭스, 우리 친구를 소개하지, 피어스 마르티노야." 로버트 웰스가 쾌활하게 말했다. "여기 예쁜 아가씨는 영국인이고, 내 오랜 친구의 딸 인 앨릭스 페트라코스일세." 무의식중에 앨릭스는 손을 내밀며 그를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손을 감싸는 힘을 느꼈다. 고압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그 의 짧은 호흡으로 그도 같은 기분을 느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피어스 마르티노는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 다. 그러나 곧 미소를 되찾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무례함을 용서하십 시오. 너무 아름다우셔서 제가 그만 넋이 나갔나 봅니다. "조심해, 앨릭스. 이 남자 악명이 높다고!" 올리비아 웰스가 웃으며 경고했다. "알아주는 늑대거든." 피어스는 아쉬운 듯 앨릭스의 손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괜한 사람 모략하지 말아요, 리비. 내가 무서워서 도망가면 어떡해요?" 뺨이 붉어지는 걸 느낀 앨릭스는 입술을 축였고, 그의 눈동자가 자신 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얼굴을 더욱 붉혔다. "사람들에 대한 판단은 제 스스로 하는 게 가장 정확하죠." 그녀는 대담하게 말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다행이군요." 그가 나직한 말투로 말했다. "페트라코 스? 영국인이 아니라, 그리스 계통 같은데요." "아버지 쪽이 그리스 계예요. 세계대전 때 이민 오셨죠. 어머니가 영 국 분이시고, 난 거기서 태어났어요." 다소 급하게 말하는 도중에 2막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녀는 입술 을 깨물었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야. 이 남자를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는 사실이 왜 이렇게 유감으로 느껴지는 걸까.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연극이 끝난 후에 저녁식사를 함께 해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굉장히 기뻤다. 그러나 함께 온 웰스 부부를 생각해야 했다. "제의는 고맙지만, 전 이만 선약이 있어서요." "어차피 4인용 테이블인걸." 올리비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하 고 합석하지 않을래요, 피어스?" "그게 좋겠군요." 그는 기꺼이 받아들이며 시선을 줄곧 앨릭스에게 주었다. "그럼 나중에 봐요."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미소를 남기고 가버렸다. "우와!" 올리바아가 경이롭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피어스가 저라는 모습은 처음 보네. 앨릭스, 너한테 완전히 반했나 봐." 사실이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에는 그런 말에 코웃음을 쳤지만, 앨릭스는 자기가 첫눈에 그에게 반했다는 걸 알았다. 이미 연극은 마 음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 연극이 끝난 후 극장 부근 레스토랑에서의 저녁식사는 새로운 감정이 피어오른 그녀에게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자리였다. 후에 그가 그녀 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는 그녀가 사는 아파트의 문을 열어 주었 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열쇠를 건네주며 아직 혼란스러워 하는 그 녀를 찡그린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앨릭스 페트라코스" 그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당신이 내 마음을 이렇게 뒤흔들어 놓으리라고 누가 예견했겠소?" 그의 고백에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그랬어요?" 그의 입술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소, 이렇게 기습적으로 당 신을 만날 예상은 없었어."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도 그래요. 난 일을 하러 이곳에 온 거지..." "아마도." 피어스가 강한 눈빛으로 그녀의 눈길을 붙들었다. "첫 데이 트에서 키스하는 건 예의가 아닐지 모르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소." 그의 목소리에 담긴 정열을 읽고 그녀는 몸을 떨었다. "우리가 데이 트를 한 건가요?" "그렇다고 해둡시다." 그는 그녀를 살며시 끌어당겼다. 앨릭스는 거절할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안겼 다. 그가 고개를 입맞췄다. 처음엔 두려운 듯 망설이며 오래도록 그녀 의 입술을 애무했다. 모든 신경을 자극하는 쾌락의 전율에 그녀는 짧 은 호흡을 들이쉬었고, 그런 그녀의 반응에 자극 받은 피어스는 그녀 의 머리를 가까이 끌어안고 능숙하고도 거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멀어졌을 때, 두 사람은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더 이상은 안되겠소. 당신이 내 자제심을 모두 빼앗아 버리겠어. 게다가 리비가 말한 대로 난 성자 가 아니오." 그는 숨소리 섞인 말로 투덜거리며 그녀의 부어오른 입술 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당신이 성자이길 바란 적 없어요." 그녀는 모험을 택했다. 그의 번뜩 이는 눈빛에 몸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피어스를 만나기 전엔 그 어떤 남자도 원한 적이 없었다. "현명한 남자라면 당신에게 빠지기 전에 그만둬야겠지만 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소. 내일 나와 함께 저녁을 듭시다." 그녀로선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물론 승낙의 한 마디가 나중에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으리라 곤 상상도 못했다. 다음날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그가 집으로 데려다 주는 차안에서 앨 릭스는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대화를 나누기 에 더없이 편한 사람이고, 그녀의 일은 무엇이든 관심을 가져 주었다. 확실히 그는 전에 만나 본 남자들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잘생기고, 끊 임없이 유혹적인 모든 면이 그녀를 넋이 나가게 만들었다. 그녀의 지 위를 탐내거나 그녀를 자신의 전리품에 추가시키려는 남자들만 알았던 그녀로선 피어스가 너무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도 날 원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어젯밤 키스만 봐도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날 안 게 될 거야. 그를 만나는 매일매일이 새롭고 흥분되는 모험이었다. 어느 날은 오 페라 후에 값비싼 식사를 하고, 바로 다음 날은 해변에서 맨발로 산책 하기도 했다. 순간마다 흥미 가득한 날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열적이 었지만 항상 자제력을 발휘했다. 어느 날 그녀는 그런 그의 태도에 짜증을 견디지 못하고 불평을 늘어 놓았다. 피어스는 소파에 앉아 그녀를 끌어당겨 손으로 턱을 잡아 자 신을 보게 했다. "내가 당신을 침대로 데려가는 건 결혼한 후에나 가 능한 일이오." "나와 결혼하고 싶으세요?"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피어스가 자신을 한때의 관계로만 여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늘 그녀 를 괴롭혔었기 때문이다.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 자제력이 바닥 나기 전에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소." "그렇다고 결혼을 할 필요는 없어요, 피어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를 너무도 사랑하기에 형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뜨겁게 타올랐다. "결혼이 아니면 안 돼. 혹시 나 와 결혼하고 싶지 않은 것 아니오?" 앨릭스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천만에요! 당신과 결혼하고 싶 은 건 당연해요, 피어스.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해요." 그녀는 그의 목 에 팔을 두르고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가 더욱 가까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면 준비가 되는대로 결혼 식을 올립시다."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둘만 있어도 괜찮 은 거요? 당신 친구나 가족은?" 행복에 겨워 그녀는 뺨을 그에게 대고 비볐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행복하다면 다 좋아하실 거예요." 그리하여 그들은 며칠 후 로스앤젤레스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끝난 직후 쏜살같이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인 사업가라는 것 외에는 그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들은 서로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할 시간 따위는 없었 던 것이다. 그가 부자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부자가 아니라도 상관없 었다. 그들의 행복에는 사랑이라는 조건만 있으면 되었다. 그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꽤 늦은 저녁이었다. 앨릭스는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져 있음을 느꼈다. 함께 밤을 보내는 첫날에 대한 기대 에 벌써부터 몸이 떨렸다. 스물 한 살이 되도록 남자와 잠을 자보긴 처음이었고, 피어스가 경험이 많은 사람이리 만큼 그를 실망시키고 싶 지 않았다. 특히 그의 기분이 지금처럼 이상하게 느껴질 때는. 그는 기 내에서도 줄곧 침묵을 지켰고, 어쩌다 말을 하더라도 묘한 빈정이 섞 여 있어 마음이 불편했다. 그의 가정부가 식사를 차려주고 떠난 후, 둘만이 남은 정적을 참다 못한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피어스, 당신 괜찮아요?" 피어스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고기를 썰다가 문득 식욕을 잃은 듯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이윽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동자를 언제나 그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괜찮지가 않소. 내가 굶주린 건 음식이 아냐. 당신을 원해, 앨릭스. 기다릴 만큼 기다렸지만, 이젠 내 자제심이 바닥 난 것 같소." 그는 꽉 잠긴 목소리로 말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의 기분이 이상했던 이유는 바로 이거였어. 앨릭스는 그가 자신을 이끌고 침대로 데려갈 때에도, 거친 정열로 그녀를 안을 때에도 기꺼 이 따랐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일말의 두려움도 달아오른 열기로 모 두 사라졌고, 오로지 그가 일깨워 주는 감각에 취할 따름이었다. 때로 는 섬세한 손길로, 때로는 급한 열정으로 그들은 하나가 되었으며, 처 음 그가 들어올 때의 고통은 아찔한 쾌감으로 바뀌어 마침내 그녀의 귓가엔 자신과 피어스의 폭발적인 외침이 메아리로 울리고 있었다. 몸을 뒤척이며 깨어난 앨릭스는 피어스가 옆에 잇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내 남편이야. 속으로 되뇌인 그 말의 어감이 그녀의 마음을 온통 따듯하게 물들였다. 난 이제 더 이상 앨릭스 페트라코스가 아냐. 피어 스 마르티노 부인이 된 거야. 고개를 돌려 머리가 헝클어진 채 잠들어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니 입 가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젯밤의 기억은 그 어느 것과도 비 교할 수 없었다. 우린 완벽했어. 그녀는 어젯밤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 에 취해 그의 품안에서 잠들었다. 미소지으며 팔을 살며시 뻗어 그의 허리를 껴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닿는 순간 그는 그녀를 밀치며 벌떡 일어났다. "내게 손대지 마!" 마치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말하는 것 같은 투에 앨릭스는 충격을 받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도 일어나 앉아 침대 를 빠져나가는 남편의 알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상처를 받아 부들부들 떨이는 손으로 긴 금발을 뒤로 넘겼다. 아름다운 회색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졌다. "왜 그래요?" 그녀는 절반은 희망으로, 나머지는 공포로 불안에 떨며 속삭이듯 물었다. 남편의 훤칠한 검은머리의 형상이 그녀의 목소리에 움찔하는 듯했지 만, 욕실로 들어가는 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흩어진 이성을 수습한 앨 릭스는 침대를 빠져나와서는 시트로 알몸을 감고 열려 있는 문으로 남 편을 따라 들어갔다. 장난치곤 너무 심한 반응이었어. "피어스!" 앨릭스는 목소리를 밝게 내려고 했지만 충격을 받은 흔적 은 지워지지 않았다. "놀리지 말아요, 달링." 세면대에 기대어 있던 피어스는 물이 채워지기까지 기다리더니 물을 잠그고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아름다운 푸른 눈이 그녀의 머 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리며 차마 견뎌내기 힘든 경멸의 시선을 던졌 다. 그녀는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마치 옷을 벗겨 내리는 듯한 시선 이었다. 옷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위엄까지도 이런 굴욕감은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드디어 피어스가 말을 꺼냈을 때 그의 목소리엔 오만함이 가득 차 있 었다. "내 기대는 이게 아니었어." "피어스!" 그가 나에게 이토록 상처를 주는 발언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이건 농담이 아냐. 무언가 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틀림없어. 내 인생이 산산이 부서지기 전에 그걸 찾아내야 해. "무슨 일이에요? 뭐가 잘못됐나요?" 피어스는 면도 거품을 바르느라 분주한 가운데도 조롱하는 눈길로 그 녀를 흘긋 돌아보았다. "뭐가 잘못됐다고 느끼는 이유가 뭐요?" 앨릭스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날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이... 그녀는 속으로 다급하게 끌어낼 수 있는 해답을 찾 아 헤맸다. 심장을 조이는 고통의 매듭을 풀기 위해. "내가 뭘 잘못했 나요? 나와 결혼한 걸 후회하는 거예요?" 그가 기분 나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난 당신과 결혼해야 했지. 그게 내가 원하던 거였어." 그녀가 듣고 싶었던 대답이었지만, 그의 말엔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 다. 너무도 비정한 말투였다. "당신은 원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뭔가 가 잘못된 건 분명해요. 당신에겐 내가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난 그 렇게 멍청이는 아니에요. 문제가 있다면 나한테 알려 줘요. 우리가 함 께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어 요." 이성적으로 말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절박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 내 보였다. 그녀의 남편은 거리낌없이 면도를 계속했다. "누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했나?"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앨릭스는 꽉 죄어 아파 오는 목을 무리하여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해요, 피어스." "그건 우리가 동의한 사랑이 아냐." 그제야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 빛은 말투와 똑같이 냉랭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녀에겐 아무런 방어능력도 없 었다. "아니에요!" 파국으로 치닫는 고통이 절규가 되어 버렸다. 피어스는 침착하게 남아 있는 비눗기를 씻어내고는 수검으로 손을 뻗 었다. "아니, 맞아. 하룻밤 자고 났다가 변하는 사실이 아니지." 앨릭스는 몸안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넘어지지 않으려 고 한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가슴을 꼭 눌렀다.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목에서 새된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잘 생각해 보면, 내가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요."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더듬어 보니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내가 사 랑한다고 말한 날, 피어스의 대답한... 그녀의 눈동자가 분노를 띠고 그 에게로 향했다. 그가 말을 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 마음 속의 말을 내게 고백한 적이 없었어! 사랑이란 말은 없었어. 그저... 대답을 들으면 더욱 참담해지리란 걸 알면서도 그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나와 결혼한 거죠, 피어스?" "왜냐고" 멜로드라마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난 복수를 위해 결혼한 거요." 그때 그의 눈 속에 타오르는 분노는 어디서도 보지 못한 거센 폭풍이었다. "야니스 페트라코스의 손녀가 그걸 모른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군, 앨릭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자초지종을 알게 될 거야. 죽 어도 생각이 안 나면 언제든지 내게 물어봐." 그는 비아냥거림으로 화 를 눌렀다. "여덟시 30분에 출근하려면 이제 샤워를 해야 돼. 실례가 안 된다면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군. 아니만 알몸의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당신의 취미인가?" 그는 매정하게도 그녀의 면전에서 욕 실 문을 닫아버렸다. 앨릭스는 간신히 침대까지 걸어가 그 위에 풀썩 엎어져 버렸다. 온몸 이 병든 사람처럼 떨리고, 생각은 이리저리 뒤엉켜 버렸다. 오직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뚜렷하게 머리를 지배할 뿐이었 다. 그것은 레코드 바늘이 튀듯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그녀의 마음을 찔렀다. 잠시 후 피어스가 욕실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으러 걸어가다 그녀를 흘긋 보았을 때에도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 서였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젠 그의 모 든 면이 냉정하게 보였다. 어디에도 어제의 자상한 모습은 없었다. 그녀의 존재를 무시한 채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그가 떠나기 전에 잠 시 멈춰 섰다. "내 가정부 이름은 랜섬 부인이오. 필요한 게 있으면 그 녀에게 말하도록." 앨릭스는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그도 기다리지 않았다. 혼자 남겨진 그녀는 어이없는 배신의 쓰라림에 아픔을 곱씹었다. 얼마 후 핸섬 부인이 나타나 아침을 들겠느냐고 물을 때도 그녀는 손 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눈물 은 나오지 않았다. 감각이 마비되지도 않았다. 차라리 그렇게 라도 되 었으면 고통의 무게는 덜했을 것이다. 그녀는 겨우 미소를 자아내며 침착하게 음식을 사양했다. "생각이 없 어요, 랜섬 부인. 시차 탓인가 봐요. 그냥 좀더 쉬는 게 낫겠어요." 가정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마르티노부인. 제가 두분 의 앞날에 행복을 빌어도 될까요?"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행복이라고? 가정부가 미소를 지으며 나간 것을 보니 무의식중에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었나 보다. 그 순간 위장 의 가면이 벗겨지고 그녀의 고개가 푹 수그러들며 연약하기 그지없는 목선이 드러났다. 피어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 가 족은 그에게 한 일이 없어.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다. 하 지만 피어스는 너무도 완강했어. 복수를 하고자 했댔지. 그래서 날 미 끼로 삼았던 건가? 몇 주 동안 날 따라다니고, 구애하고, 온갖 매력을 발산해 결혼에 골인했던 목적이 바로 복수를 위해서였다니.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난 그를 너무도 사랑해! 어떻 게 날 이런 식으로 배신 할 수 있지? 인간도 아냐. 어떻게 날 이런 식 으로 배신할 수 있지? 인간도 아냐. 이렇게 무자비할 수가 없어... 하느 님, 이건 말도 안돼요! 그녀의 가슴은 갈가리 찢겨 피가 흐르고 있었 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상처의 아픔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변해 버렸다. 난 이런 대접을 받을 만큼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어! 그녀의 내부 깊 숙한 곳에서 울리는 절규였다. 문득 상처받은 만큼 되돌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결정짓고 나니 격분의 불꽃은 기름을 먹은 듯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남자에게 얼마나 애틋한 사랑과 열정을 쏟았던가..그녀는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랐지만 흘러내리는 걸 허락할 수 없었다. 그 는 날 경멸할 수는 잇겠지만, 내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진 못해. 앨릭스는 몸서리를 치며 과거에서 빠져나왔다. 브랜디는 한 모금도 대지 않은 채 유리잔에 남아 있었고, 그녀는 액체의 따뜻함을 손가락 끝으로 느끼며 그것을 옆으로 치웠다. 그때 품었던 복수는 실행되지 못했다. 그 고통은 시작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번째 입을 상 처가 가장 심해 흉터도 가장 크게 남았다. 그래, 피어스에게 말한 것처럼 그 짧은 결혼에서 배운 게 하나 있지. 아주 귀중한 것을. 두 번 다시 남자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가지 않을 것 이며, 어떤 남자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가지 않을 것이며, 어떤 남자에게 도 자제력을 잃어버려 상처 입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 또한 다시는 위험한 감정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오늘밤 그의 매력이 전과 다름없고, 여자로서의 나약함이 그에게 어 떻게 비쳤는지에 대한 경고를 충분히 받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해. 피어스가 왜 여기 나타났는지는 몰라도 머리를 깨끗이 비워 감정 에 의존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해. 그것만이 그를 이기는 길이야. 난 그를 믿지 않아.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그가 무슨 꿍꿍이속이 잇는지도 경계해야 한다. 이제는 마르티노 회 사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 그는 쓰러져 가는 회사를 사서 그것을 갈가리 쪼개어 다시 팔아 이윤을 남기는 악취미를 갖고 있다. 그로 인 해 적도 많고, 위협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가 페트라코 스 출판사를 노리고 있다면, 생각을 다시 해봐야 할 걸, 그럼에도 피어스의 개인적인 평판은 오점 하나 없었다. 마이더스의 손을 갖고 잇는 그를 어느 누구도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사업가와 한 인간은 엄연히 다르다. 그녀 자신이 뼈저리게 체험한 것 이다. 만약 페트라코스 그룹이 좌초될 위기에 처해있지만 않아도 그를 다시 마주칠 염려는 없었을 테지. 하지만 수천 명의 직원을 구하기 위 해서는 자존심을 꺾을 도리밖에 없다. 그것만 명심하면 피어스를 다루는 건 쉬울 거야. 5년이란 세월이 그 녀를 정신적으로 더욱 성숙시켰다. 겁쟁이처럼 달아나진 않을 거야. 이 번에야말로 그에게 정면으로 대결해 이겨야 해. 결심을 하고 침실로 향하는 그녀의 입술에 긴장된 미소가 떠올랐다. 드디어 복수가 시작되려나 보다. -------------------------------------------------------- 피어스 정말 얄밉지요? 처음 읽을 때 "이런 수악한 놈을 보았나.. 정말 나쁜 놈이야." 그러면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음.. 근데 다시 읽어보니 어쩐지 가여워요. 그래도 수악하다는 생각에 는 변함이 없지만.. 3 아침이 되자 앨릭스는 평소보다 신경을 써 옷을 입었다. 피어스와의 만남은 한바탕의 전쟁이 될 게 틀림없고, 이번에는 그녀도 양보할 수 없는 한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사무적인 검정 슈터에 귀에는 할머니가 물려주신 다이아몬드 브로치와 귀걸이를 달고, 묵에는 단순 한 금목걸이를 걸었다. 겨울 앞에 선 그녀는 스스로의 외모에 만족했다. 냉정한 사업가의 모 습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것이다. 열심히 일해 지금의 지위를 얻은 만 큼 싸움을 하는 한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사무실로 향하는 길은 전에도 짜증스러웠지만 오늘은 거기에 날카로 운 긴장이 더해졌다. 늦게 도착하면 안 되는데... 흘러 버린 시간을 보 상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아는 그녀였다. 피어스를 기다리게 하는 건 계획에 들어있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건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을 그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다행히 운명의 여신이 그녀의 편을 들어 늦 지 않게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비서는 벌써부터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앨릭스는 그녀의 책상 앞에 다가섰다. "안녕, 루스." 중년의 여인이 고개를 드리고 미소지었다. "안녕, 앨릭스. 아버님은 어때요?" "나아지고 계세요. 저, 지금부터 내 일정을 좀 봐줘요. 오늘 열 시에 누구를 만나기로 했거든요. 시간을 비워 놓았으면 좋겠어요." 루스가 일정표를 훑었다. "점심 전에는 노조 측의 존슨 씨를 만나는 일밖에는 없는데요." 앨릭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노조의 일이라면 며칠 전부터 골치를 앓 아온 터다. 좋은 소식이 있을 때까지 계속 만나기를 꺼렸던 때문이다. "짜증은 내겠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오후에 오도록 설득을 좀 해봐요. 아니면... 좋은 기미가 보이니 나중에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하든 지요." "기미가 보여요?" 앨릭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건 오늘 피어스 마르티노를 만나는 데 달렸어요."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선박업의 마르티노와 동일인물인가요?" 루스가 얼굴이 확 밝아지며 물었다. 불행히도 그 말은 앨릭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래요." 루스는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이제 진짜 구세주를 만난 것 같네요. 그는 이 방면에 천재적인 사람이잖아요? 손해를 이익으로 바 꾸는 기술 말이에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모든 게 확실해지기 전엔 소문을 퍼뜨리 면 안 돼요. 피어스 마르티노는 자선사업을 하는 게 아니니까." 앨릭스 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요." "안면은 있어요." 그녀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아버지 사무실에 가 있을 거예요."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간 앨릭스는 책상 위에 서류가방을 올려놓고 아 버지의 사무실과 연결된 문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앉아 있지 않은 자 리는 생기가 없어 보였다.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오시지 못한다는 상상 은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의사의 말 대로라면 스티븐 페트라코스는 생 활습관을 바꾸기 전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책상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푹신한 가죽 의자의 촉감을 손으로 느꼈다. 이 의자에 앉으면 그대로 먹힐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겐 너 무 큰 자리야. 또 다른 스티븐 페트라코스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이 의자의 임자는 없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피로해졌다. 그녀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가 예상한 대로 그녀는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 았다. 그러나 이제 그 모두는 기적을 바라고 있고, 그녀가 한 일이라곤 지난 몇 주 동안 도망 다닌 것뿐이었다. 앨릭스는 몸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자신이 그다지 몹쓸 자질을 가진 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러나 그녀는 출판 분야에서만 두각을 나 타냈을 뿐, 경영 전반에서는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최선을 다했지 만, 최선만으로 재정적인 손실이 감싸지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토 록 빚을 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처럼 강철같은 분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놀라운 것은 회사의 다른 경영 이사진과 만나 대화를 해보니, 그녀만큼 물정 을 몰랐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회사가 문어발식으로 확장되어 그어 따른 은행 대출 빚이 산더미처럼 불어나 있었다. 아버지가 심장마비를 일으키실 만도 했어. 이제 회사에 필요한 건 아주 튼튼한 돈줄이다. 그녀는 크게 탄식의 소리를 냈다. 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줄 사람 이 전남편뿐이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와는 어떤 만남 도 갖고 싶지 않다. 너무도 큰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까. 지난번에 그 녀의 할아버지가 고통을 당했다. 페트라코스 선박회사는 할아버지의 자존심이었다. 그것을 잃는다는 건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었다. 비록 시선은 창밖에 두고 있지만 그의 눈앞에는 마음속의 영상이 펼 쳐지고 있었다. 페트라코스 선박회사. 5년 전 그녀는 그런 회사가 존재 하고 잇는 줄도 몰랐지만, 피어스 마르티노의 입에서 그에 대한 언급 을 들은 순간부터 오늘까지 단 한 번도 그것을 잊은 적이 없다... 아파트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남편의 둔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앨릭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놀란 눈을 들어 시계를 보니 벌 써 저녁 일곱 시가 되어 있었다. 창가의 의자에 파묻혀 모든 감각이 마비된 채 앉아 잇는 동안 그렇게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녀는 피어스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존심이 재촉 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직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를 다시 한번 만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내 사랑을 말 살시켰다. 내 감정은 털끝만큼도 생각해 주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날 이용한 것이다. 그가 왜 그런 짓을 해야만 했는지 꼭 알고 싶다. 어 떤 고통이 따르더라도 꼭 진실을 알아야 한다. 앨릭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병에라도 걸린 듯 온몸이 아 팠고, 스웨터를 입고 있음에도 몹시 추웠다. 충격의 결과였다. 피어스 의 얼굴과 마주칠 때 이런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 이다. 그로 인해 그녀가 얼마나 상처를 입었는지 드러내는 건 수치다. 이제 그와 마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마 그녀가 여지껏 부딪친 일 중에 가장 힘들지도 모른다. 오직 끓어오르는 분노만이 그 녀에게 용기를 주고 있었다. 아파트는 널찍했지만, 그녀가 돌아본 곳이라곤 식당과 침실뿐이었다. 차분히 돌아보겠다는 생각을 한 지가 겨우 몇 시간 전이다. 그녀는 복 도에 멈춰 서서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왼쪽 문이 약간 열린 방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피어스가 집에 들어왔다면, 이곳부 터 일단 찾아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앨릭스는 어느새 넓은 거실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벨벳 커튼이 한쪽 벽을 모두 가리고 있었다. 낮은 커피 테이블 주위에 우아 한 소파와 팔걸이 의자가 놓여 있고, 카펫은 발자국이 팰 정도로 푹신 했으며,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은 진품이었다. 그 반대편에는 열기 없는 벽난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리잔의 얼음이 딸깍거리는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피 어스가 바 옆에 서서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 들기 전에 한잔하겠소?" 그의 물음은 그녀의 뺨을 한 대 치는 격이었다. 아침에 그런 일을 저 질러 놓고 어떻게 저토록 태연할 수가 있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투잖아! "아니, 필요 없어요." 그녀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오는 걸 보자 그녀는 화가 치밀어 몸이 떨렸다. 소파 앞 작은 탁자 위의 램프 불빛 안으로 들어온 그의 얼굴 표정에 는 조롱이 깃들여 있다. "초상집에 다녀온 사람 같군." 앨릭스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고는 온통 검은색으로 입었다는 걸 새 삼 깨달았다. 그녀는 힘겹게 목청을 가다듬고 쉰 목소리를 냈다. "오늘 내 마음속의 무엇인가 죽음을 당했어요, 피어스. 난 아직도 왜 그래야 했는지 모르고 있어요." 피어스가 한 발짝 다가와 벽난로 위에 손을 얹었다. "랜섬 부인이 그 러는데, 오늘 종일 침실에 쳐박혀 있었다고." 앨릭스는 그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참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왜 내게 이런 짓을 했는지 당신에게 묻고 있 어요. 할아버지에 대한 말은 대체 뭐죠?" 잠시 동안 그는 그녀가 진자 몰라서 묻는 것인지를 확인하듯 뚫어지 게 표정을 살폈다. 그러고는 냉정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신과 난 그리스 핏줄이 섞여 있소. 무엇이든 한다면 하는 게 우리의 전통이지." 그는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야니스 페트라코스가 내 앞에 나타나면, 그때 당신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겠소." 그녀는 그의 오만한 얼굴에 손을 대지 않으려면 주먹을 꼭 쥐고 잇는 수밖에 없었다. "난 지금 알아야겠어요." 그의 푸른 눈동자가 거드름을 피우며 그녀의 경직된 몸을 훑어 내렸 다. "저녁을 먹은 후에." "오, 난 당신을 증오해요!" 울음이 섞인 말이 튀어나오자, 그녀는 더 이상 나약하게 보일 수 없어 손으로 입을 꼭 틀어막았다. "그래? 어제만 해도 날 사랑했잖소." 잔인하기 그지없는 말에 그녀는 살기를 가득 띤 눈으로 그를 노려보 았다. "그렇게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면 왜 결혼하기 전에 날 건드리 지 않았죠?" "아직 그 이유를 모르나? 하루 종일 생각할 시간을 주었을 텐데? 난 내 아내로서 당신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지. 자유로운 몸이면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 그녀의 심장은 악마의 손에 비틀어지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갈가리 찢어 허공으로 날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그녀에게 남은 건 빼 앗길 수 없는 자존심이었다. "지금이라고 그렇게 못할 건 없죠. 내가 당신의 죄수라도 되요?" 냉랭한 미소가 그의 입술에 곡선을 그렸다. "갈 테면 언제든지 가라 고. 인질은 필요 없으니까." 그는 느긋하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아내요. 당신은 내 아내가 아닌 가, 앨릭스? 외형상으로도, 이불 속에 서도." 앨릭스는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시는 걸 느꼈다. "그럼 단지 결 혼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와 잤다는 소린가요?" 그가 한쪽 눈썹을 야비하게 치켜 떴다. "내가 작은 틈새 하나라도 놓 칠 줄 알았나? 바보 같은 생각이야."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래를 강하게 저었다. "내가 어쩌다 당신 을 사랑하고 있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군요." 피어스는 눈을 내리깔고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건드렸다. "이젠 그렇 지 않다고 확신해?" 그의 손길에 아직도 반응하는 자신이 너무도 구역질났다. 앨릭스는 경멸 적으로 외쳤다. "당신에게 사랑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아요. 증오일 뿐이죠." 그의 입술에서 조소가 흘러나왔다. "사랑은 그렇다 치고, 욕망은 어떻 지?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방금 전엔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복수를 위 해 잠을 잤다고 말해 놓고 이제는 자기가 원할 때면 언제나 날 가질 수 있다는 걸 시험하겠다니! "감히 내게 손끝 하나라도 댔단 봐요!" 갑자기 그의 눈에 이상한 표정이 깃들였다. "감히 날 거부할 수는 없 어, 앨릭스. 그건 당신이 할 일이 아냐."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경고하 고는 뒤돌아가려는 그녀를 돌려세워 강제로 품에 안아 그녀의 두 팔을 손으로 잡고 나머지 손으로는 머리채를 쥐었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얽혔을 때 앨릭스는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그의 표정을 보았고, 다음 순간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난폭한 공격을 생각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입술은 부드럽고 따뜻하게 이 곳저곳을 애무하며 더 이상 그녀가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 나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몸부림을 쳤지만, 그럴수록 그의 키스는 더 욱 대답해졌다. 그는 그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결국 저항 을 포기하고 속절없이 키스를 되돌릴 수밖에 없다는 것도 빤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마침내 피어스가 멀어지고 그녀의 잿빛 얼굴에는 커다란 눈동자가 덩 그러니 그늘을 드리웠다. 그의 눈빛은 너무도 반짝거려 아찔할 정도였 다. "어때, 쉽지 않지?" "여태껏 살면서 당신보다 더 구역질 나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래, 뭘 증명한 거죠? 아직도 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 가능하겠죠. 날 침대에 데려가 마음껏 조롱해봐요. 그래 봤자 당신 손만 닿아도 끔찍 스러운 날 안게 될 뿐이에요. 내 반응은 내가 느끼는 기분과는 아무상 관도 없어요. 오로지 날 이렇게 만든 당신을 증오할 뿐이죠!" 그녀가 돌아서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얼마나 옮기지 않았을 때, 그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어딜 가는 거요?" 앨릭스는 고개를 홱 돌려 혐오를 드러내며 그를 쏘아보았다. "당신이 얘기할 준비가 될 때까지 방에 가 있을 거예요." 그에게서 긴장감이 느껴지고, 곧 퉁명스런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진 실을 알고 싶다면, 나와 저녁을 들자고. 이건 명령이야." 그녀는 망설이다가 방향을 틀었다. 그와 다시는 마주보고 싶지 않아 도 진실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잇는 소파에 앉아 내키지 않는 심 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이젠 술이 마시고 싶군 요." "별로 우습지 않소." 피어스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평소 그녀가 마 시는 마티니를 갖다 주었다. 앨릭스는 그의 눈을 피한 채 최대한 손가락이 부딪치지 않게 잔을 받 아들었다. 침묵이 분위기를 짓눌렀지만 그녀는 의례적인 말조차도 꺼 내지 않았다. 더 이상 신혼여행을 온 것도, 수줍은 신부도 아니지 않은 가. 굳이 힘을 쓸 필요가 없다. 그래서 랜섬 부인이 문을 두드려 저녁식사를 알리러 온 것이 반갑기 까지 했다. 하지만 음식은 생각만 해도 욕지기가 났기 때문에 눈앞에 놓인 것에 손을 대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피어스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언짢은 표정을 지 었다. "맛이 아주 좋은데, 한번 먹어 보라고." 그녀의 적의에 찬 눈동자가 그에게 꽂혔다. "그것도 명령인가요?" "굶어죽을 작정인가?" "당신 때문에? 천만에요!" 그 말에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좀 들어요, 앨릭스. 랜섬 부인 말로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입에 안 댔다던데." 피어스의 말 투엔 강경함과 뒤섞여 초조해하는 근심도 섞여 있었다. "내가 옆으로 가서 먹여 줘야하나?" 앨릭스는 냉소적으로 맞섰다. "무슨 일이죠? 내가 기절하면 당신 일 에 지장이 있나 보죠?" 의자 뒤로 몸을 기댄 피어스는 비정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두려울 게 뭐 있겠어. 난 응당 할 일을 했을 뿐인걸. 다만 당신 이 병드는 건 내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소." "그렇다면 내 눈앞에서 사라지든지, 날 보내 줘요. 당신 얼굴만 봐도 병이 날 것 같으니까!" 그는 미소를 지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걱정 말라고. 일단 내 가 목적을 달성하면, 당신은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않게 될 테니." 앨릭스는 그 말에 얼굴 근육이 굳는 걸 느꼈다. "처음부터 당신을 만 나지 않았다면 좋았을걸!" 그녀가 이렇게 외칠 때 랜섬 부인이 들어와서 수프 그릇을 치우고 주 요리를 놓았다. 다시 단둘이 되자 피어스는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우린 어떻게 하 든 만나게 되어 있었어, 앨릭스. 그건 운명이었지." 그녀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젠 이 일에 신까지 개입되었다고 말 하고 싶은 건가? "그런 미신은 믿지 않아요. 당신이 처음부터 모든 걸 계획한 거예요. 내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교활한 악마! 만약 내가 약 혼이라도 한 몸이었다면 어떡하려고 했죠?" "물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깨뜨렸겠지." 피어스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았을 거야. 복수를 품은 사람이 무슨 짓 을 못하겠어. "충분히 그랬을 거예요. 난 그런 당신을 경멸하고요." 그녀의 감정 폭발이 그의 식욕까지 없애 버린 것 같았다. "이제 속이 좀 시원하면, 우리 둘 다 음식을 즐길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본론으 로 들어가자고." 갑작스런 제의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앨릭스는 벌떡 일어나서 그를 따라 어떤 문으로 걸어갔다. 그는 불을 켜고 먼저 그녀를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책이 가득하고 한 쪽에 낡은 책상이 있는 방이었다. 그 방 역시 벽난로가 의자들에 둘러싸여 있고, 그 옆에는 사진과 상패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피어스가 바로 그 사진을 가리켰다. 그는 손을 들어 책장 한 군데를 장식하고 있던 사진틀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누구 알아볼 수 잇 는 사람이 있나?"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빛 바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부두에서 찍 은 것으로, 두 남자가 어깨동무를 하고 서 있고 그 뒤에 배가 여러 척 정박해 있다. 처음엔 누군지 감이 안 잡혔으나 그 중 한 사람의 강인 한 얼굴 생김새가 낯익었다. "우리 할아버지예요!" 그녀는 놀라서 소리쳤다. "그리고 그 옆은 우리 할아버지요. 조지 안드레아스." "안드레아스? 그건 그리스 이름인데요. 그리고 당신은 마르티노잖아 요." "조부모님이 그리스인이셨지. 하지만 세계대전 이후로 미국으로 이민 해 오셨소. 우리 어머니는 미국인인 로렌스 마르티노와 결혼했고, 난 여기서 태어났지." 피어스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배경을 가리켰다. "이 게 모두 안드레아스의 선박이오." 그녀는 어리둥절함에 분노도 잊었다. "이해할 수 없군요. 그럼, 우리 들의 할아버지가 서로 아는 사이셨단 말인가요?" 그가 짧게 웃었다. "그들은 최고의 적수였다고 말하는 게 낫겠지. 그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야니스 페트라코스는 우리 할아버지의 배를 훔 치기까지 했소." "훔쳐요?" 앨릭스는 헉 하고 숨을 들이쉬고는 사진을 그에게 다시 돌 려주었다. "웃기는 소리하지 말아요! 할아버지에게 배 같은 건 없어 요!" 피어스의 입가에 피어오르는 미소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가 지고 있소. 페트라코스 선박회사로 버젓이 등록되어 있는 배가 북미 항구에 정박해 있지. 예전엔 안드레아스란 이름을 자랑스럽게 붙이고 잇던 것들이오. 야니스 페트라코스는 언제나 그 배들은 탐냈었소. 그 배를 소유한다는 건 부와 지위를 얻고 상류사회의 인정을 받는다는 의 미였으니까. 그 세 가지 모두 그가 갈망하던 것이지. 그는 그 배 주인 의 딸과 결혼하여 자연스럽게 배를 갖게 되기를 바랐소. 하지만 그녀 에겐 이미 남자가 있어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거요. 그 여인이 바 로 우리 할머니고, 그 배는 그 분과 결혼한 우리 할아버지의 것이 되 었지. 바로 그날부터 페트라코스는 두 분을 증오하여 어떤 방법으로든 파멸시키겠다고 맹세했소. 전쟁 후에 그는 완벽한 방법을 찾아냈지. 그 는 우리 할아버지가 나치에 협력했다는 증거가 있는 가짜 서류를 꾸몄 소. 그걸 내놓으며 관대하게도 그가 제의를 해왔지. 그 배를 주면 서류 를 없애 버리고, 아니면 가족이 모두 총살당할 거라는 협박이었소."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잠시 말을 멈췄다.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었지. 하지만 그걸 증명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소. 야니스 페트라코스는 검 은 손과 관계되어 있어 무슨 짓이든 할 수 잇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서 결국 그는 배를 갖게 되었지. 우리 할아버지는 가족을 더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셨으니까. 그는 모든 걸 잃었지만 언젠가 그 배를 다시 찾겠다고 다짐했소. 그러고는 미국으로 이민을 오셔서 다시 시작해 돈 을 벌었지만, 그 배는 결코 잊지 못하셨소. 배가 훼손되어 가는 걸 보 시고도 손을 쓰지 못하니 속만 타는 일이었지. 몇 번이고 그걸 다시 사겠다는 제의를 했지만, 페트라코스는 번번히 거절했소. 그리고 더 이 상 그것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후엔 그대로 썩어 버리게 내버려 둔 거요." 그는 다시 숨을 가다듬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내게 부탁하셨소.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을 꼭 성공시켜 달라고. 페트라코스는 내게도 팔기를 거절했지. 그래서 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민하다가 생각을 바꿔 당신을 생각하게 된 거 지. 당신이 바로 열쇠요, 앨릭스. 난 페트라코스 선박회사를 원해. 바로 당신이 내게 그걸 안겨 줄 수단이지!" 인터콤의 벨 소리가 앨릭스를 고통스런 기억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그녀를 돌아서서 버튼을 눌렀다. "왜요, 루스?" "마르티노 씨가 오셨습니다, 페트라코스 양." 갑자기 심장이 아프도록 쿵쾅거리고, 입술이 말라붙어 버렸다. "들어 오시라고 해요, 루스." 분주하게 머리를 매만지고 재킷 단추를 점검하는 사이에 그가 벌써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예의바르게 일어나며 그가 방안에 퍼 뜨리는 분위기를 똑똑히 의식했다. 모든 신경이 바짝 곤두서고 방 안 공기가 모두 사라져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오늘 그의 모습은 성공한 사업가의 그것이었다. 연회색 이탈리아제 슈터는 큰 키에 완벽하게 들어맞았소, 하얀 셔츠와 붉은 넥타이는 검 은머리를 강조하며 그의 피부는 푸른 눈을 두드러지게 했다. "안녕, 앨릭스." 그는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내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큼지막한 손에 파묻힌 자 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앨릭스는 그가 자기도 이렇게 삼켜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마르티노 씨" 그녀는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책상을 손으로 꼭 누 르며 차갑게 말했다. 그의 손길에 감전이라도 된 것 같다. "보시다시피 난 당신을 위해 시간을 비워 두었어요. 그러니 내 귀중한 시간을 낭비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요. 아직 만날 사람이 많아요." 피어스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맞은편 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앉았 다. "앉아요, 앨릭스. 바쁘다는 핑계는 그만 대고. 당신이 만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우리 둘 다 너무 잘 알지. 이미 도움을 줄 만한 사 람을 찾아다녔겠지만, 소용없었을 거요." 앨릭스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굳이 내 앞에서 그 말을 들춰낼 필요 는 없잖아? 내 스스로 실패를 자인하는 것과 그에게서 그런 얘기를 듣 는 건 문제가 다르다. "난 당신더러 와 달라고 한 적 없어요." 사족을 덧붙이며 그녀는 의자에 앉았다. "아버지 병세는 어떻소?" 그의 의외의 질문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예 요? 입에 발린 소린 꺼내지도 말아요." 피어스의 얼굴이 금세 굳었다. "5년 동안 뭘 배웠는지는 몰라도 예의 는 쏙 빼놓았나 보군. 지금 당신은 생명을 살릴 수 잇는 음식을 내버 리고 있는 거요. 내가 지금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있다 는 것을 명심해." 정곡을 찌르는 말에 앨릭스는 날카로운 숨을 들이쉬었다. 사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에게 절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미안해요." 그녀는 억지로 사과의 말을 꺼냈다. 그는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내게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걸로 알아들어도 좋은 거요?" 이 간교한 악마! 날 처참히 짓밟지 않는 한 만족할 수 없다는 건가? "그래요." 그의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그렇다면 커피를 좀 부탁해도 되겠소? 아무래도 당신에게 필요할 것 같은데." 그녀는 더 이상 대답할 필요를 못 느꼈다. 어차피 그의 장난에 한번 더 넘어가는 꼴인걸. 그래서 아무 말 없이 인터콤에 손을 뻗어 커피를 부탁하고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 번 심호흡을 했다. "어젯밤 날 도와주겠다는 암시를 한 것 같은데요." 앨릭스는 조금 누 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정확히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거죠?" "내가 알기로 페트라코스 출판 그룹은 빚더미에 올라 있는 것 같더 군. 그걸 다 갚으려면 엄청난 현금이 유입되어야 하지만,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도 있지. 쉽게 말해서, 당신은 사업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줄이고 싶을 거요. 내 말이 맞소?" 그는 얄미울 정도로 문제를 정확히 집어냈다. "잘 알고 있군요. 사지 만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어떤 종류의 양도도 해줄 수 없어요." 그를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근거로 내가 당신 사업을 가져 갈 거라 생각했소?" 그녀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눈을 흘겼다. "날 바보로 아는군요. 그게 당신 방식 아니던가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 회사를 사서 조 각으로 분해한 다음에 몰살시키는 거죠." 이제 그의 눈썹 두 개가 모두 곡선을 그렸다. "비판하는 거요? 이상 하군. 난 다른 사람에게서 불평을 들어보긴 처음이야. 난 항상 공정하 게 처리한다고, 사람들은 자기 회사의 시장가치를 얻고, 그에 대한 대 가는 모두 내 것이지. 하지만 당신에게 제안하려는 건 그게 아니오." 앨릭스는 신경이 팽팽히 긴장되어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 었다. "제발, 본론을 말하라고요!" "본론이라면, 앨릭스, 내가 당신 빚을 갚아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 요. 또한 회사가 다시 돌아가도록 자금을 대줄 준비도 되어 있고." 앨릭스는 그를 정신나간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어떻게요? 사업을 인 계할 생각도 없다면서요. 이윤이 돌아오지도 않는 회사에 돈을 쏟아 붓겠다니, 미친 거 아니에요?" 피어스는 두 손을 깍지 끼고 그 손끝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 신 말이 옳소. 하지만 내가 제공하려는 선물에 대한 대가는 분명 있 지." "선물이라고요?" 앨릭스는 어안이 벙벙하여 스르르 자리에 다시 주저 앉아 커다란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농담으로 듣기엔 너무도 생생한 현실이었다. "조건이 뭔데요? 분명 조건이 있겠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맞혔소. 조건은 이렇소. 당신 회사에 내가 필요한 만큼의 돈을 건네주고 경영진을 투입해 주는 날, 당신은 내 아내가 되는 거요, 앨릭스." 4 "아내라고!" 한순간 앨릭스는 아찔했다. 그러나 피가 머리로 솟구치자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정신나갔군요! 완전히 미쳤어!" 피어스의 얼굴은 신경 하나도 꿈틀거리지 않았다. "물론 이건 의견 문제요. 그건 당면한 문제와 관련이 없어." "내가 미친 사람과 결혼하는 걸 기대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이제 그의 표정은 냉담하게 변했다. "당신이 이성적으로 생각하길 바 라오. 당신 말대로 내가 미쳤다면 난 미친 부자고, 당신을 곤경에서 벗 어나게 해주려고 미친 돈을 제의하고 있소. 그걸 받아들이는 건 당신 선택이야." 앨릭스는 그런 일을 제의하면서도 그토록 뻔뻔스러울 수 있는 그의 태도에 속이 메슥거렸다. "우리의 거짓투성이 첫 결혼을 생각한다면, 내가 어떤 상황이 닥쳐도 당신과는 절대로 재혼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야죠. 당신은 미치지 않았다면 성격파탄자가 틀림없어요." "멜로드라마 같은 얘긴 집어치워, 당신은 사업가고, 이건 사업상 그래 야." 피어스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그 자리에 앉은 어떤 남자라도 그런 제의를 했을 거란 말이에 요? 융통성이 대단하시군요!" 그녀는 비아냥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빛났다. "날 계속 밀어내는 건 현 명한 짓이 아닐 텐데, 앨릭스. 내 제안이 유별나긴 하지만, 이것 역시 쉽게 철회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벌써 그 방법을 쓰지 않은 게 신기하군요, 당신의 활동 수법과 꼭 맞아요." 이런 말로 대꾸하는 것은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란 걸 잘 알 고 있었지만,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린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걸 깨달아야 하오. 같은 그리스 핏줄을 이어받았으니까." 그녀는 역겨움을 드러내는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았다. "핏줄 얘기라 면 당신을 그들 수 있겠군요. 5년 전 난 한 그리스인에게서 사람을 무 섭도록 증오하는 법을 배웠죠. 나도 한 가지 다짐한 게 있어요. 피어 스, 당신이 내게 한 그대로 나도 복수하겠어요." 그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페트라코스에게서 대 단한 걸 기대한 건 아니었지." "그런데도 나와 결혼하겠다고요? 우리 아버지를 도와요? 페트라코스 가 안드레아스의 말을 받아들일 줄 알았어요?" "내 돈과 함께 내 말을 받아들이란 소리요.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야." 피어스는 약간 화난 어조로 말했다. 앨릭스는 책상 너머 그에게로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내가 그 선물 을 넙죽 받아먹을 줄 알았나요? 트로이의 전쟁 얘기를 잊었나 보군요. 그리스 사람들이 선물을 품고 있을 땐 언제나 주의를 해야 한다고요! 이것 또한 페트라코스의 재산을 모조리 빼앗기 위한 계략 중 하나일 테니까!" 그의 턱 근육이 실룩거렸다. "당신에게서 기꺼이 감수할 수 잇는 모 욕은 한정되어 있소, 앨릭스. 그러니 이젠 내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내 의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면... " 그는 말을 멈추고 지극히 그리스 인다운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좋을 대로 해석해요. 내가 당신 생 각을 바꾸려고 하면 더욱 골이 깊게 팰 뿐이니까. 하지만 이것만은 말 해 두겠어. 나의 유일한 적은 야니스 페트라코스요. 그 빚은 내가 선박 회사를 갖게 되면서 다 받은 셈이지." 앨릭스는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수 없어 벌떡 일어나 주위를 서성거리 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결론 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신이 무 슨 말로 저항하고 있는지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잇는 힘껏 싸우고 있 긴 하지만 무기도 없는데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이다. 그러나 절 대로 잊을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었다. 쓰라린 고통의 기억. 그것은 다 시 그녀가 주먹을 쥘 수 있게 해주었다. 방어능력이 있건 없건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어. "그때도 날 이용하더니 이제 또 날 이용하고 싶어하는군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반대로 난 당신을 돕고 싶은 거요." 그녀는 큰 소리로 웃어댔다. "지금 나더러 당신이 날 도와주는 걸로 만족한다는 말을 믿으라는 거예요? 돈의 지불이 끝난 직후 날 보내 주 겠다는 말을 하는 거냐고요?" 그녀는 피어스가 의자에서 일어나 바로 등뒤에 다가와 있다는 걸 알 았다.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금세 느낄 정도였다. 그녀도 긴장했다. 그의 단단한 체구를 느끼고, 애프터 셰이브의 향기를 맡으며, 따뜻한 체온을 몸서리치도록 의식하며. "아니"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의 의심을 잠재웠다. "이 제안은 영원한 거요. 당신은 언제까지나 내 아내로 남아 있을 거요. 이번에는 이혼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고, 진짜 결혼하는 거야." 과거를 잠시 생각을 돌려 본 그녀는 숨을 멈추고 입술을 씁쓸히 일그 러뜨렸다. 피어스와의 잠자리는 좋은 것 이상이었지만, 그땐 그를 사랑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모든 게 변해 버렸다. "혹시 당신을 증오하 는 여자를 가져 만족을 얻는 게 당신 취미인가요?" 앨릭스는 피어스가 더욱 가까이 다가와 그의 옷이 자신이게 닿는 걸 느꼈다. 흡사 살과 살이 맞닿은 듯한 감촉이었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가만히 서서 그를 무시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어라는 걸 알았다. "날 증오할 수는 있겠지, 앨릭스. 하지만 날 원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선 확신할 수 없을걸?" 그는 완전히 달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내 품안에서 항상 불타올랐어." 그것은 앨릭스가 더욱 무시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분노에 눈이 먼 그녀는 홱 돌아서서 손이 아플 정도로 세게 그의 뺨을 때렸다. "비열 한 인간, 당신은 내가 얼마나 바보였는지를 다시 일깨워 줬어! 대답은 노예요, 피어스. 백 번을 물어도 노예요. 그러니 경비원을 부르기 전에 어서 여길 나가요!" 그녀는 두 손으로 그를 밀쳐내며 소리쳤다. 이제 그의 눈동자에는 노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재빨리 그녀의 두 손 을 잡아 등뒤로 돌리고는 그녀를 자신의 몸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건 안되지! 한 가지를 증명하기 전에는." 그는 잔인한 어조로 내뱉고는 격 렬하게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이를 악물고 그에게 저항하는 일을 차라리 고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항복할 때까지 언제까지고 계속할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런데 잠시 후, 그는 전략을 바꿨는지 힘을 늦추고 그녀의 입술에 스칠 정도로만 입술 을 맞댔다.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입술에 머무는 동안 그녀의 감각은 나른해져 그에게 저항하고픈 생각이 자꾸만 사라졌다. 피어스는 한 손 으로 그녀의 팔을 붙들고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 기 시작했다. 재킷을 통해서도 그의 손길이 낙인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앨릭스는 아찔한 기분에 빠져 날카로운 신음을 토했다. 피어스는 그에 만족한 듯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할 뜨거운 키스로 그녀를 공격했다. 오, 내가 얼마나 원했던 일인가! 어느 누구도 날 이렇게 불타오르게 하진 못해. 오직 피어스만이... 그의 이름이 머릿속에 맴돌자 그녀는 차 츰 현실로 돌아왔다. 갑자기 자기 자신에게 구역질이 났다. 순간 그녀 는 빳빳하게 굳었다. 피어스는 그녀를 놓아주며 혼란에 빠진 그녀의 눈동자를 조롱하듯 들 여다보았다. "그래도 날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건가?" 앨릭스는 열기로 달아오른 그이 뺨과 그녀와 마찬가지로 고르지 못한 숨소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놔 줘요." 그에게 힘없이 무너진 자제심에 충격을 받고 그녀는 짤막하게 내뱉었다. "이 일이 다 끝나기 전엔 안돼." 피어스는 정면 대결을 택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녀를 생각에 깊이 잠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 신은 내게 복수하고싶다고 했지. 그렇다면 나와 결혼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소?" 자신의 무기력을 깨달은 앨릭스는 쓴맛을 삼키며 관절이 하얘지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그 지옥에 다시 발을 들여놓을 것 같아요?" 잠시 후 피어스는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자신은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점점 그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말을 했다. "좋아, 그 럼 이걸 생각하라고. 당신은 아버지를 돕고 싶댔고, 난 당신에게 그 방 법을 제시하고 있어. 당신은 그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소? 가족들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나? 사랑하는 가족을 저버릴 셈 이오?" 앨릭스는 고통의 칼날이 심장을 긋는 걸 느끼며 짧게 숨을 들이쉬었 다. 어떻게 감히 저런 말을 꺼낼 수 있지? 내가 가족의 희생을 바라기 라도 한다는 말뜻이잖아!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그 말을 시인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을 깨닫고 또 한번 고통에 시달렸다. 내가 그의 제안은 거절하면 아버지에게도 기회가 사라지는 거야. 이제 남은 기회는 이것 뿐이다. 피어스는 언제나 완벽한 시간을 택하는군! 말을 꺼내는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당신은 사디스트예 요."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잡고 시선을 맞추었다. "난 현실주의자 일 뿐이오. 당신은 나와 결혼한다는 말만 하면 돼. 그러면 3일 후에 돈 이 은행에 입금될 거요. 당신 아버지의 근심이 끝나는 거지."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근심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싫어요!"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외쳤다. "게다가 아버지는 당신 돈을 절대로 받지 않을 거예요!" "어째서? 내 이름만 들으셔도 흔쾌히 승낙하실 텐데." 그는 갑자기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면 우리 결혼에 대해 아버지에 게 고백했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거요?" 차라리 다 털어놓았더라면 속이나 후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 와의 약속을 깨뜨릴 순 없었다. "그 사실은 아무도 몰라요." 앨릭스는 마지못해 시인했다. "그래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씀드리면 아버지 는 생각을 고치실 거예요!" 피어스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겠지. 하지만 불행히도 당신 아버지 역시 현실주의자요. 한번 물어보지 그래?" 그녀의 눈빛이 분노로 얼룩졌다. "내가 못할 줄 알아요?" 또다시 유 치한 발언이 튀어나왔다. 도대체 왜 이 남자 앞에만 서면 자제심이 어 디론가 달아나는 것일까? 질문조차 우습군. 바로 피어스의 오만함 때 문일 텐데. 예상대로 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더 이상 다른 말은 않겠소, 달 링. 하지만 한 가지는 명심해, 우리의 옛 결혼에 대해 아버지에겐 어떤 말도 하면 안 된다는 걸, 희망을 너무 높게 품지 말라고. 어쨌든 그분 도 그리스인이오. 정략결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당신의 행복이 어떤 것이라는 걸 잘 알고 계실 거요. 나와 결혼하면 당신의 인생이 보장된다는 것도."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벌써 별별 각도에서 이 일을 생각해 놓은 것 이다. 앨릭스는 점점 더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증오감이 더욱 깊 어지고 있었다. "당신은 자신이 매우 영리하다고 생각하겠죠?" 일어서서 옷매무새를 고치던 그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스쳤다. "내 가? 내 스스로를 바보라 부르는 걸 안다면 놀라겠군, 앨릭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것도 잃을 게 없소." 앨릭스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엄청난 돈만 빼고 말이죠!" 그가 손가락 하나를 뻗어 그녀의 떨리는 입술을 쓰다듬었다. "돈이 전부는 아니오. 난 오래 전에 그걸 배웠지. 이 일에 관한 한 당신에게 노란 대답을 듣고 싶진 않소. 잘 생각해요, 앨릭스. 필요하다면 아버지 에게도 말씀드리고. 24시간을 주겠소. 나에게 연락하고 싶으면 사보이 호텔로 와요." 앨릭스는 입이 얼어붙은 채로 멍하니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이 살짝 닫히는 소리에 그녀는 움찔 몸서리를 쳤다. 피어스 와 결혼? 말도 안돼. 내가 어떻게 그 제의를 받아들일 수 있어? 재고 의 여지도 없는 일이야. 그렇다면 난 이제 어떡하지? 아버지가 그토록 공들여 쌓은 탑이 서서히 무너지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나? 과연 내가 회사를 살릴 수도 있었다는 자책감을 품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뼛속까지 시린 느낌이었다. 피어스와 결혼한다고? 그녀는 책상에 팔 꿈치를 대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5년 전 그는 무자비하게 나를 짓 밟았다. 그런데 다시 그의 손아귀에 들어간다고? 내가 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거지? 오후 세 시, 앨릭스는 하고있던 모든 일을 중단했다. 아주 간단한 일 에서도 머리가 전혀 돌아가지 않았고, 노조 대표와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피어스가 방을 나갈 후에 그녀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그의 제안이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고,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마음이 편치 않으리란 걸 알았다. 그녀는 서류가방과 핸드백을 챙겨 사무실에서 나와 비서의 책상 앞에 섰다. "나 아버지를 만나러 가요, 루스. 상의를 드릴 게 있어서." 루스는 의기소침한 표정이었다. "마르티노 씨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을 하신 건 아닌가요?" 앨릭스는 정곡을 찌른 소리에 씁쓸히 미소를 지었다. "내가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거예요. 내일 봐요." 그녀는 루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계 속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걸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설명할 수 없어. 아니, 설명하지 않을 거야. 차가 질리도록 막혀 꼼짝할 수도 없었지만 오히려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시간이 있어 좋았다. 그러나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서도 혼 란한 마음은 여전했다. 아버지는 1인실을 쓰기 때문에 문병이 제한되 는 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머니가 언제나처럼 뜨개질을 하 고 앉아 계셨다. "밤새 여기 계셨어요?" 앨릭스는 어머니와 반가운 키스를 나누었다. "밤새는 아니야. 병원에서 내가 잘 수 있는 방을 하나 마련해 주었잖 니, 앨릭스." 앨릭스는 한숨을 지었다. "엄마, 내가 아버지를 잠깐 봐드릴게요. 나 가서 신선한 공기 좀 느껴보시는 게 어때요? 날씨가 너무 좋아요. 기 분이 훨씬 좋아지실 거예요." 글쎄다." 어머니는 머뭇거렸다. "바보 같은 소리인지는 안다면, 솔직 히 난 네 아빠 곁을 떠나기가 싫어. 내가 없을 때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서 두렵단다." 앨릭스는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이해해요, 엄마. 하지만 제가 있잖 아요. 안심하고 다녀오세요." 그녀는 뜨개질 감을 옆으로 치우고 어머 니가 재킷을 입으시는 걸 도와주었다. 그리고 미소로 어머니를 배웅한 후에야 비로소 침대에서 가장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말을 해야 하지만 아버지를 깨울 수가 없다. 스스로 일어나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불행히도 그녀에겐 생각할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5 년 전 할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과 똑같이 그분도 침대에서 누워 계셨고... 문제의 발단 역시 같은 사람, 피어스 마르티노 였다. 그녀는 피어스의 말을 믿을 수 없었고, 마지못해 그를 따라간 것 이다. 야니스 페트라코스는 맨해튼의 호화로운 아파트 침실에서 가운을 입 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잠을 방해한 데 대한 짜증스런 얼굴이 거실을 서성거리는 손녀를 보자마자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앨릭스, 무슨 일이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옆에 서있는 남자를 흘겨보았다. "이 남자는 누구지?" 앨릭스가 입을 열기 전에 피어스가 선수를 쳤다. "우선 제 소개부터 하죠." 그가 말뿐인 예의로 조소를 머금고 말했다. "제 이름은 피어스 마르티노고, 앨릭스의 남편입니다." 야니스 페트라코스는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 되었다. "남편이라고? 왜 나는 그 소식을 못 들었지?" 그가 자존심이 상한 듯 물었다. "지금 알려드리고 있잖습니까." 피어스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생각에 잠겨 피어스를 바라보는 노인의 양미간에 주금이 깊게 패었 다. "마르티노? 낯익은 이름인데. 우리가 만난 적이 있나?" "직접적으론 아니죠. 전 페트라코스 선박회사를 양도하라는 제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거절했죠." 그의 이죽거리는 말투에 할아버지의 주름이 더욱 싶어졌다. 그는 면 전에서 자신의 비꼬는 사람을 상대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아, 이제 기억이 나는군. 아주 설득적이었지만 그 회사는 절대로 미물로 내놓지 않을 거라네." 할아버지는 그 문제는 끝난 얘기라고 생각했는지 주름 대신 미소를 떠올리며 앨릭스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이 일이 네 결 혼과 무슨 관련이 있지? 할아버지한테는 얘기도 안 해 줘서 섭섭하다 만, 기쁜 날이니 만큼 화는 내지 않겠다. 이리 와서 키스해 주렴. 축배 를 들어야겠구나." 피어스는 망설이는 그녀를 앞으로 살짝 밀고는 그들의 포옹에 조롱의 미소를 지었다. "샴페인을 함부로 터뜨리면 안 되겠죠? 우린 이제 곧 이혼할 거니까요. 안 그렇소, 달링?" 야니스의 얼굴에 다시 그늘이 드리웠다. 그는 손녀에게서 한 발짝 물 러섰다. "이혼이라고? 대체 이게 무슨 해괴한 짓들이냐?" "해괴한 짓이라뇨. 전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 그녀에게 이혼을 허락할 준비를 했습니다." 피어스는 노인의 꾸짖음에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조용히 맞섰다. "제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의 논쟁은 없을 겁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몇 년간 당신은 소송에 묶 어 둘 수도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노여움에 고개를 번쩍 쳐들고 보호하듯 앨릭스를 자기 옆 으로 끌어당겼다. "자넨 대체 누구야? 단지 이혼하기 위해 내 손녀와 결혼했단 말인가?" 피어스는 험악하게 눈썹을 세우며 기다렸다는 듯 봇물을 터뜨렸다. "난 그리스인의 피를 이어받았죠. 그래서 우리 가문의 복수를 하러 왔 습니다. 야니스 페트라코스, 당신이 우리에게서 훔쳐간 걸 돌려 받으 러. 그 대가로 당신의 손녀를 돌려주겠어요!" 이 집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앨릭스는 간신히 말을 꺼낼 힘을 모았 다. "할아버지, 이 남자는 페트라코스 선박회사를 원해요, 그래서 나와 결혼한 거예요. 이 사람 말로는 할아버지가 그걸 훔쳤다고..." 그 말에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는 할아버지를 보고 앨릭스는 깜짝 놀 랐지만, 피어스는 기대했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조용히 해!" 야니스 페트라코스는 그녀가 움찔할 정도로 야멸차게 말을 잘랐다. 그의 시선은 맞은 편에 서 있는 젊은 남자를 향해 불타 올랐다. "자넨 대체 누구야?" "뭔가 짚이는 데가 없습니다?" 피어스는 냉랭하게 웃었다. "전 조지 안드레아스의 손자입니다. 원래 우리 것이었던 물건을 찾으러 왔죠." 노인은 그 말에 코방귀로 답했다. 그의 말투는 전보다 더욱 단호해졌 다. "자넨 바보로군. 정말 어리석어. 이 야니스 페트라코스가 그렇게 멍청이인 줄 아나? 그 배를 넘겨받은 서류는 적법한 거야. 그 배는 법 률상 내 것이고, 내 것은 내가 지켜!" 그 말과 동시에 그는 앨릭스를 품안으로 끌어들였다. "이 애가 내 품안에 있는 이상 절대로 네 녀석 에겐 못 준다. 안드레아스 따위가 감히 페트라코스를 넘보다니! 이 결 혼은 무효야. 그리고 자넨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어!" 앨릭스는 몸이 굳었다. 그 순간 피어스가 패를 잡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를 바라만 볼뿐이었다. 피어스는 그려는 오래도록 응시하더니 다시 그녀의 할아버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결혼은 무효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늦으신 것 같군요. 페트라코스 씨. 앨릭스와 전 어제 결혼했어요. 그녀는 이미 저와 잠자리를 같이 했죠. 즐거운 마음으로." 그는 감정이 배제된 목소 리로 말했다. 앨릭스는 오늘 자신이 뼈아픈 굴욕감을 느꼈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이 순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옆에 있는 할 아버지가 긴장하는 걸 느꼈다. 그가 비난의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 다. "그렇지 않다고 말해." 할아버지가 그녀를 추궁했다. "어서, 앨릭스, 안드레아스 따위에게 우리 가문이 모욕을 받을 짓은 하지 않았다고 말 해!" 언제나 할아버지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가문의 체면을 따지 며 그녀를 비난하리라 곤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피어스와 그녀의 관 계를 더러운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그녀로서는 결과를 예견하지 못할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피어스가 어떤 인물 인지 몰랐다는 걸 시인하는 건 이미 소용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결과 인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모든 비극의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 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리는 것뿐이었다. "그럴 수 없어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중에도 그녀의 노기 가득한 시선은 피 어스에게로 가 꽂혀 있었다. 그 다음은 그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리스어가 격렬하게 쏟아졌고, 피어스는 그 말을 알아들은 듯 격분하며 강한 어조로 무어라 대꾸했 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곧 말을 잃고 그녀에게 오싹하도록 냉정한 시 선을 보내기만 했다. 앨릭스는 피어스가 자신을 보호해 주고있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지 만, 그가 그래야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흘끗 쳐다보 았다. 그의 돌처럼 굳은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잘못 느낀 거겠지. 우습게도 실망스런 기분에 위가 뒤틀렸다. 그 가 그토록 잔인하게 날 대했는데도 이런 기분이 드는 건 정말 미친 짓 이야. 얼마 후, 그녀의 할아버지가 영어로 다시 말을 꺼냈다. "마르티노 군, 자넨 영리한 사람이로군. 내가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기가 막히게 파 악했어. 자네가 이기게 될지도 모르지만, 나도 조건이 있네. 내가 이혼 수속을 밟을 테니 이 결혼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걸로 해두자고. 자네나 내 손녀나 어느 누구에게도, 집안 식구들에게도 절대 말해선 안 돼. 만약 그것이 알려졌다는 소리가 내 귀에 들에 들리면, 자넨 아 주 큰 일을 당하게 될 거야." 피어스는 눈을 내리깔았다. "협박까진 필요 없습니다, 페트라코스씨. 내가 원하는 건 본래부터 내 소유였던 것이니까요. 모든 일은 여기서 정리되고 끝날 겁니다. 언제나 변호사를 동반하고 다니시는 걸로 아는 데요, 오늘밤 그에게 서류를 작성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내일 아침 난 당신들의 인생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습니다." 그날 밤 선박회사를 양도한다는 조건의 서류에 서명을 함으로써 그녀 의 짧은 결혼은 그렇게 끝났다. 피어스가 떠나기 전에 그녀를 찾아왔다.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보는 그의 얼굴은 긴장돼 있었다. "이런 식으로 끝난 걸 후회하오." 그녀의 눈동자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냉소로 가득했다. "그래서 밤새도록 잠도 못 잤다는 말을 꺼내고 싶어요? 아서요, 피어스. 그 종 잇조각을 가지고 기뻐하던 일이 가치가 있었기를 바라요. 만약 그 반 대라면 내가 환소성을 질러야 하겠죠!" 그녀는 말을 마치고 돌아섰고, 그는 가버렸다... 그후로 어제까지 한번 도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자존심을 완전히 무너뜨린 손녀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고, 몇 년 후에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녀는 그후로도 계속 약속을 지켜 피어스와의 결혼에 대해선 함구했다. 그녀 역시 잊고 싶은 인생 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잊어버리진 못했지만. 이제 피어스가 또 다른 조건을 들고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녀는 전과 다름없이 덫에 걸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5 앨릭스가 피어스의 갑작스런 출현에 대한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문득 침대 쪽에서 신음소리가 나 고개를 퍼뜩 들자 아버지가 그녀를 바라보 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었니, 앨릭스? 별로 유쾌한 생각은 아닌 가 보구나."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어 무척이나 나약하게 들렸다. 그녀는 자리에 서 일어나 아버지의 뺨에 키스하고는 그의 손을 잡고 침대에 걸터앉았 다. "병원에 있으니 자꾸 우울한 생각만 드나 봐요. 기분은 어떠세요? 솔직히 말해 보세요." 스티븐 페트라코스는 껄껄거리며 외동딸을 향해 미소지어 보였다. "널 보니 훨씬 나아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면 좋던 기분도 나빠지겠는걸."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가 저질러 놓은 난 장판에 널 혼자 내버려두다니! 제기랄, 왜 하필 이럴 때 병이 난 거 야? 난 병원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몸이 아닌데!" "진정하세요. 다시 건강이 나빠지면 하실 수 있는 일도 못하게 돼요. 게다가... " 그녀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며 입술을 깨 물었다. "게다가 뭐냐? 게다가 이젠 아무도 널 안 도와준다고 하더냐?" 아버 지는 화를 터뜨리며 외치다가 힘을 잃은 듯 머리를 털썩 기대었다. 깜짝 놀란 앨릭스는 그를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재빨리 꺼 냈다. "사실은 그 반대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앨릭스?" 이제 시작해야 해. 그녀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확실히 도와주려는 사람이 잇기는 한데... 그의 제안이 좀 유별나서요." 아버지는 그 즉시 기분이 고무되었다. "유별나다고 했니? 정확히 어 떤 식이냐? 사실 지금 곤경에 처해 있긴 해도 우리 회사는 본래 훌륭 한 회사였어. 내 실수를 보상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잇지. 자금을 대주려는 사람이 회사의 지분을 원하는구나? 어떤 식으 로든 개입하려는 거겠지." 그녀의 굳은 얼굴을 알아차린 그는 생각을 고쳤다. "그렇다면 회사를 완전히 넘겨달라는 조건이냐?" "아니에요, 사실은 그와 정반대죠. 그러니까... 그 남자는 나와 결혼하 고 싶어해요. 우리의 경영난을 잘 알고 있고, 재정적인 뒷받침을 해주 겠대요. 그런데 문제가... 그의 이름은 피어스 마르티노예요." 그녀는 그의 이름을 재빨리 덧붙이고는 폭탄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의외로 잠잠했다. 잠시 동안 아버지는 할말을 잊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내가 알고 있 는 억만장자 마르티노와 동일인물을 말하고 있는 거냐?" 그는 희색이 만면하여 물었다. "그걸 지금 문제라고 말했니?" 앨릭스는 속으로 숨을 헉 하고 들이쉬었다. 그가 그토록 부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걸 생가하지 못했다는 게 우습지. 원하 는 것은 무엇이든 살 수 있는 그가 한푼의 이득도 없는 아버지의 회사 를 돕겠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있어요 그의 할아버지는 조지 안드레아스예요." 스티븐 페트라코스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아, 아버지가 증오하던 사람 말이군. 네게 얘기해 준 적은 없다만, 네 할아버지에게서 내가 독 립한 것도 안드레아스 씨 때문이었어. 아버지는 선박에 관련된 가문끼 리의 싸움에 날 끼어 들게 하려고 했지만 난 거절했다. 그래서 난 영 국으로 오게 된 거야. 그러니 얘야, 난 안드레아스 가문에 아무런 적의 도 갖고 있지 않아. 그의 손자가 너와 결혼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니? 그걸로 날 곤경에서 구해 주겠다고?" 아버지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 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네가 가져온 소식 중에 가장 기쁜 거로 구나. 한데 도대체 왜 그걸 문제라고 생각했니? 네게 그보다 더한 신 랑감은 없을 거야. 그를 알고 지낸 지 오래됐니?" 아버지가 회사를 구하는 일보다는 먼저 딸의 행복을 염려해 준다는 사실이 그녀는 기뻤다. 앨릭스는 대답을 하기 전에 목구멍에 치밀어 오르는 무엇인가를 삼켜야 했다. 이건 그녀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 다. 내심 아버지가 정중히 거절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 결과로 그녀는 피어스에 대한 설명을 급작스럽게 해야 하는 곤경에 처했다. 사랑의 열기에 들뜬 연기를 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비슷하게라도 꾸며 내야 했다. "난... 처음 그를 만난 건 몇 년 전이었어요. 그때 잠시 사귀다가 흐지 부지 끝났었죠." 새빨간 거짓말을 지어내려니 목이 메어 그녀는 사이 를 두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어젯밤 자선 파티에서 그와 재회 했고, 그래서..." "그가 그 동안 널 잊지 못했다고 말하며 청혼을 했구나? 그래서 네 엄마가 네게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고 말을 한 거야!" 앨릭스는 고개를 숙이고 단단히 깍지 낀 손가락을 응시했다. "너무 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런 게 어딨어. 남자가 원하는 걸 발견했을 땐 얼른 잡아야 하는 거야! 기다릴 필요가 뭐 있냐? 넌 아름답고 똑똑하지. 어떤 남자가 봐 도 완벽하다고. 더할 나위가 없는 거야." 그녀의 마음은 아까보다 더욱 가라앉았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 었다. "제가 그를 사랑하느냐에 대해선 묻지도 않으시네요, 아버지." 그는 손을 저어 그녀의 말을 일축했다. "지금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점점 그렇게 될 거야. 널 항상 걱정했었다. 얘야. 내가 죽으면 넌 어떻게 될까? 그런 근심은 네가 결혼하면 모두 사라지게 되는 거야." 그는 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정략결혼이라고 해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란다, 앨릭스. 나와 네 엄마도 그렇게 결혼했지만, 우린 누구보다 도 행복했어. 넌 주고받는 일을 더 배워야겠다." 경험으로 미루어 받는 것에 비해 주는 것의 대가가 너무도 처참하 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소리를 입밖에 낼 수는 없다. 더욱이 아버지에겐 그녀가 아직 긍정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기뻐하는 모습을 본 이상 이젠 도리가 없었다. 앨릭스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덫이 몸부림칠수록 더욱 조여 오 는 걸 느꼈지만, 겉으로는 용감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어서 제 행복을 빌어 주세요. 그럼 이젠 걱정 같은 거 안 하실 거라고 약속하죠?" 아버지는 웃음으로 대답했고, 그녀의 어머니가 들어올 때까지 웃고 있었다. 물론 어머니에게도 즉각 그 소식이 알려졌고, 어머니는 남편에 대해 안도감을, 딸에 대해서는 기쁨을 표현했다. 앨릭스는 언젠가 피어스를 부모님께 소개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이상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30분 후 병실을 나설 때는 연기를 하는 데도 기력이 쇠했다. 아직 하루가 끝나려면 멀었다는 사실에 기운이 더욱 빠졌다. 피어스를 만날 일이 남은 것이다. 내일로 만남을 미뤄도 안될 건 없지만 경험으로 보아 쓴 약은 빨리 먹는 게 좋다. 더 나빠지기 전에. 앨릭스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사보이 호텔로 향했다. 이혼 과 동시에 다시는 피어스를 만나지 않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이 꼴이 뭔가, 남은 여생을 그에게 매여 지내야 한다니. 전혀 협상의 여지도 없 이. 게다가 그와 한평생 살아야 하는 교환의 수단이 바로 돈이라는 사 실에 그녀의 마음에는 비수가 꽂히는 듯했다. 이런 식으로 덫에 걸리는 건 정말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궁 금한 건 피어스가 그에 대한 내 감정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나와 결혼하려는 이유이다. 그의 제안이 자상한 마음에서 비롯됐다고 볼만 큼 난 머리가 나쁘지는 않아. 분명히 아버지를 곤경에서 구해 주는 일 외에 꿍꿍이속이 있을 거야. 그렇게 미남이고 부자인 남자라면 아낌없 이 몸을 내던질 여자가 부지기수일 텐데, 굳이 자기를 죽도록 싫어하 는 여자를 고른 이유가 있겠지. 호텔로 들어가 데스크 직원에게 피어스의 방에 연락해 달라고 할 때 까지도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없기를 바라던 마 지막 희망도 바로 올라가라는 말에 여지없이 깨어져 버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는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장은 아침에 입을 때의 말쑥함은 사라져 버렸고, 화장도 거의 지워져 피곤 한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재빨리 립스틱을 칠하고 손으로 머리를 매만지니 그나마 조금 나아졌다. 노크 소리에 피어스가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타이와 셔츠 단추를 몇 개 풀고 소매를 걷어올린 모습의 그는 매우 느긋해 보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뒤로 물러나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들의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둔탁하게 났다. 앨릭스에게는 그것 이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사라졌다는 의미로 느껴져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서 핸드백을 커피 테이 블에 던졌고, 그녀의 뒤를 피어스가 따랐다. 등뒤로 그의 시선이 따갑 게 느껴졌다. 분명 조롱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몸을 홱 돌렸으나 예상은 빗나갔다. 그의 눈동자는 아주 신중하고도 미묘했다. 당황스런 마음과 분노가 뒤섞인 앨릭스는 고개를 쳐들었다. "병원에 서 곧바로 오는 길이에요." "아버지는 어떻소?" 그녀는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짧은 머리가 헝클어지도록 손으로 거칠게 빗어 넘겼다. "기막히게 빠른 차도를 보 이시더군요. 아버지가 안드레아스 가문과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걸 알면 당신도 기쁘겠어요. "그의 딸과는 반대로군." 피어스는 냉랭하게 대꾸하고는 음료가 있는 방 한쪽 구석으로 다가갔다. "뭘 좀 마시겠어? 아무래도 필요할 것 같 은데." 술병과 잔을 집는 그의 팔 근육이 셔츠 안에서 팽창하는 것이 보였 다. 앨릭스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자신의 손으로 직접 느꼈던 그의 피 부 감촉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고 애썼다. 아직도 현실처럼 생생한 장 면이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 "스카치로 주세요." 그녀는 퉁명스레 말하고는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그를 향해 고개를 치켜올렸다. 그러고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마 취 효과가 있잖아요. 당신과 남은 시간을 보내려면 그게 필요할 것 같 아서요. 앞으로도 매일 알코올에 찌들어 살아야 할 거예요." 그는 전혀 재미있어하는 기색이 아니다. 그런데 왜 내가 그의 감정까 지 신경을 쓰는 거야? 그는 내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데. 그가 백포도주를 내민 건 예상했던 일이었다. 위스키는 그의 차지였 고, 그는 단숨에 반 컵을 들이켰다. 앨릭스는 그의 그은 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에게 그런 반응을 보 이는 자신이 싫었다. 그가 손가락 하나 대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거세 게 뛴다. 너무도 나약한 자제력에 그녀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걸음을 옮겨 창가로 갔지만, 다가오는 피어스의 그림자를 보고 다시 긴장했다. "당신 반응을 보니, 당신 아버지가 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군?" 그 가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은 아버지가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있었어요. 내가 아버지의 지지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모든 일이 뜻대로 돼서 기분 좋겠어요!" 그녀는 증오를 드러내며 그를 비웃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온기와 채 취를 느낄 수 없도록 그가 멀리 떨어져 주길 간절히 바랐다. 이런 거 리에선 도저히 그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이 정말로 그런 심정이라면 난 싸웠을 거야. 당신은 다만 내 제 의를 거절할 구실이 없어서 화를 내고 있는 것뿐이지." 그의 얄밉도록 정확한 말에 그녀는 더욱 화가 나서 그에게로 몸을 돌 렸다. "틀려요! 당신 제의를 거절할 구실은 얼마든지 있어요. 우리 아 버진 당신이 최고로 괜찮은 사람인 줄 아시지만, 나까지 그러리라고 생각하진 말아요. 다행히 아버진 정략결혼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시더군 요. 당연하겠죠. 그 점에 있어서 당신만큼 걸맞은 사람도 없을 테니 까!" 그녀는 그를 움츠러들게 할 양으로 한껏 독설을 퍼부었지만 계획 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피어스는 그녀의 노기 어린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은 정 말로 아름다워. 사실 내가 본 여자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지." "뭐라고요?" 그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당신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는 중이오." 앨릭스는 방어능력이 사라지는 걸 붙잡으려고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괜한 시간낭비는 하지 말아요. 그런 사탕발림으론 날 이길 수 없어요. 당신은 이미 내게 모든 걸 보여 줬어요. 난 내가 노라고 말할 걸 당신 이 기대했다곤 생각 안 해요. 아무리 그러고 싶어도 사랑하는 아버지 를 위해선 그럴 수 없다는 걸 알 테니." 피어스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우리 결혼을 전쟁터로 만들 생각은 없소, 앨릭스." 그는 더 이상의 인내심은 없다는 듯 무뚝뚝하게 내뱉었 다. "우리 결혼은 아무런 존재가치고 없어요." 그녀는 차갑게 응수했다. "설마 예전의 그 풋내기와 똑같은 사람하고 결혼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그 여자는 이제 사라졌어요. 당신이 그녀를 파멸시켰죠, 피 어스. 당신은 지금 보는 그대로의 나를 갖게 될 거예요. 마음에 안 들 더라고 그 책임은 순전히 당신 것이죠. 이제 확실히 알겠어요?" 피어스는 시간을 끌며 남은 스카치를 마시고 컵을 옆에 내려놓았다. 이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동자는 냉정하게 바뀌어 있었다. "상당히 독하게 마음먹었군. 하지만 당신이 날 싫어하든 말든, 이 결혼을 내 책 임으로 돌리든 말든 아무튼 당신은 내 아내가 되는 거요. 문자 그대로 의 의미로." 불행히도 그녀의 경고는 그의 눈빛을 번뜩이게만 했을 뿐이다. 게다 가 그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즐기지 않을 거라고? 새빨간 거짓 말도 유분수지. 난 아직도 사랑을 나눌 때의 격렬했던 당신을 생생하 게 기억해." 어쩌면 감히 저런 말을 지껄일 수가 있지? 그녀는 온 몸에 소름이 돋 았다. "그건 내가 당신을 증오하기 전의 일이죠." 그녀는 신랄하게 대 꾸했지만, 그가 손을 뻗어 어깨를 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길 때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서 놔줘요, 피어스. 제기랄, 어서 놓아 달라니까 요!" 그녀는 몸부림을 치며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역부족 이었다. 마침내 속절없이 나약한 자신을 절감하며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 속에 담긴 강렬한 빛에 그녀의 심장은 불규 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그러고 싶을 때." 그는 잇새로 말을 내뱉으며 한 손으로 그녀의 두 팔을 등뒤로 눌렀다.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당신 입으로 내가 당신을 샀다고 하니, 난 하고 싶 은 만큼 내 권리를 행사해야겠지?" 그는 비아냥거리며 그녀에게로 입 술을 떨구었다. 앨릭스는 반응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마법 같은 힘에 이끌려 온몸 이 자극적으로 그에게 끌리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 열렬히 키스 를 되돌릴 때는 두뇌의 한 구속에서 비난의 소리가 들리는 것도 무시 했다. 그녀는 피어스가 재킷을 벗겨 부드러운 가슴을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젖히고 폭발할 듯한 감정에 신음을 질렀다. 다음 순간,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피어스가 그녀를 찬찬히 바 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열기는 사라지고 그녀는 한기와 더불어 자기 혐오가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우리 결혼 첫날밤이 아주 흥미로울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그가 한껏 비꼬아 말했다. "당신의 증오는 그 과정의 조미료 정도가 되겠 어." 그는 한동안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더니 이내 놓아주고는 잔 을 채우러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앨릭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속옷이 눈에 띄었다. 다시 한번 나약한 자신을 절감하고 그녀는 재킷을 집어 입었 다. 단추를 채우는 손가락은 아직도 떨리고 있다. 옷을 다 입고 고개를 드니, 피어스가 들고 있는 유리컵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안색이 창백해졌다. "식사는 했어?" "아뇨."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가 더 이상의 공격을 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먹을 걸 가져오라고 하겠소." 피어스가 전화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아직 할 얘기가 많은데 남들 앞에서 하긴 싫거든. 당신도 동의하지?" "나한테 선택권이 있나요?" 앨릭스는 샐쭉하게 대꾸하며 과연 어떤 게 그의 참모습인지 찾으려고 애썼다. "선택권이 왜 없겠어. 난 괴물이 아니라고." 그는 짤막하게 말한 뒤 말투를 바꿔 룸서비스에 주문을 했다. 그가 무엇을 주문하는지는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같아서는 뭘 먹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녀는 가까운 의자로 다가가 털썩 주저 앉았다. 피로가 극에 달한 것 같았다. 특히 감정적으로 힘이 다 빠져 버려 고개를 쿠션에 받치고 눈을 감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피어스에게 끌리 지 않는 방법만 있다면 뭐든 주겠어. 이미 소멸된 감정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를 다시 본 순간 그것은 언제 사라졌었느냐는 듯 생생히 되 살아났다. 그와의 열정적인 사랑을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한 것도 오산 이었다. 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정열은 그녀의 마음을 한때만 차 지할 뿐이다. 그는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 걸로 기대했나? 순간의 열 정으로 그 기나긴 증오의 나날을 지울 수 있다고 자신했을까? 그런 생 각이 들자 그녀의 마음에 새로운 적개심이 솟아올랐다. 싸움 없이 양 보할 필요는 없는 거야. 그가 말했듯이 난 그와 결혼함으로써 복수할 방법을 찾는 거야. 이 결혼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지만, 그렇다고 온 순한 아내가 될 필요는 없는 거잖아! 그에게 싸움에서 이기려면 엄청 나게 힘을 빼야 한다는 걸 가르쳐 줘야지! 그런 결심을 하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르며 어느 정도 힘이 솟는 듯했다. 눈을 뜬 그녀는 피어스가 장난기 어린 눈빛을 빛내고 잇 는 걸 발견했다. "나의 파멸을 계획하고 있었나?"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꿰뚫어보는 그이 말에 앨릭스는 신경이 곤두서 고 뺨이 붉어졌다. 이럴 땐 정면대결이 최선이다. "그러지 못할 이유라 도 있어요? 난 첫 번 결혼에서 배운 게 있죠. 치밀한 계획 아래 모든 걸 얻을 수 있다는 것." 피어스는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발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그래서 날 당신 계획의 본보기로 삼겠다?" 앨릭스는 무심하게 어깨를 들먹였다. "그걸 가르쳐 준 선생이 눈앞에 잇는데 뭐 하러 다른 사람을 찾아요?" "예전의 당신은 이렇게 냉소적이지 않았어. 언제나 세상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사람이었지."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요, 결혼을 하면 현실에 눈을 뜬다는 말이 있죠. 그렇게 되는 데 내 경우에는 당신이 가장 큰 도움을 줬죠!" 피어스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약간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그 부분에 대해 날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지?" 그것은 질문 이 아닌 의견이었다. 앨릭스는 냉랭한 시선을 보냈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그렇게 되기까지는 상당히 오래 기다려야 할걸요. 솔직히 말해 내가 당신이라 면 그런 가능성은 넘보지 않겠어요. 내가 살아 있는 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우리 둘만 몇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는 조소를 담아 대꾸했다. 앨릭스는 짜증이 나서 손가락을 퉁겼다. "건방진 소리 그만 해요. 정 의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당신은 곤충으로 다시 태어나 내 발에 밟혀 죽을 거예요!" 그녀는 화가 나서 말했지만, 그 말에 피어스는 정말 재미있다는 듯 박장대소했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가슴이 미친 듯 울렁 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약간 냉혹한 면은 남아 있지만 지금의 모습은 처음 그를 만났을 때의 모습과 가장 흡사했다. 이젠 잃어버린 그의 표 정을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우울했다. 그러나 동시에 감상에 젖어 있 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피어스는 전혀 감상적이지 않아. 그러니 내가 그럴 이유가 없지. "당신에게 기쁨을 주다니 나도 기쁘군요." 그녀는 짐짓 쾌활한 어조 로 말했다. 그는 싱긋 웃었다. "아니, 그 이상이오, 달링." 그가 강렬한 눈빛에 담아 그녀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서로 에게 끌리는 감정은 같았던 것이다. 그가 일깨운 만큼 그녀도 그를 일 깨웠고. 그것을 깨달은 앨릭스는 강렬하게 꿈틀거리는 욕망을 느꼈다. 마땅히 거부해야 할 욕망을. "쓰잘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워요. 할말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는 고개를 숙여 두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들었다. "그렇긴 하지 만 너무 고상하게 말하지 말라고, 앨릭스. 우린 둘 다 당신이 내 쓰잘 데없는 생각에 속절없이 걸려든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당신의 정열은 내가 함께 나누기 전엔 조용히 간직하고 있으라고." 그의 매끄러운 말투에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지고 입술이 말라붙었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는 눈물로 반짝였다. "당신 같은 사람은..." "무자비한 돼지지. 나도 알고 있소. 그걸 기억하고 있는 게 좋을 거 야. 고귀한 자존심을 계속 지키고 싶으면." 앨릭스가 반박할 말을 찾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그들을 방해했다. "저녁식사가 당신을 구했군!" 피어스는 툴툴거리며 문으로 향했다. 앨릭스는 의자에 앉아 몸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하느님, 저 남자와 어떻게 살아가야 하죠? 그녀는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 쩔 거야? 내겐 선택권이 없어. 피어스 마르티노가 존재하는 한. 6 이틀 후, 앨릭스는 증기 롤러에 납작하게 짓눌린 기분으로 사무실에 나왔다. 그의 제안에 대한 승낙을 받아낸 이후 피어스는 모든 일을 굉 장히 빨리 진행시켰다. 그녀는 뜨거운 커피를 컵에 따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되도록 모든 일을 그녀 스스로 자제하기 힘들다고 느끼지 않으려고 애썼다. 오늘은 무슨 충격적인 일이 벌어질까. 어제 아침에 피어스는 그녀에게 부모님이 계시는 병원에 가자고 졸랐 다. 원통하게도 그는 처음부터 부모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분 노가 치밀어 오름에도 상황을 능숙하게 이끄는 그의 능력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어느새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 다. 심지어 사업을 구하려는 제안에 대한 의견을 내밀면서도 아버지에 대 한 그의 태도는 깍듯했다. 스티븐이 완쾌하여 일선에 복귀할 때까지 회사를 감독할 인력을 데려다 놓는 일과 그의 경영진을 투입하여 회사 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도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다. 그의 그런 태도는 자연히 스티븐 페트라코스의 호감을 사고도 남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 것은 오직 딸을 아낌 없이 사랑해 주어야 한다는 부분에서였다. 그러자 피어스는 대답 대신 몸소 증명하듯 그녀를 힘있게 한 팔로 끌어안아 보였다. 그리고 그곳 을 떠날 무렵, 앨릭스는 그가 모든 실권을 휘어잡았다는 불쾌한 사실 을 인정해야 했다. 아무리 그들이 가지고있던 무거운 짐이 덜어졌다 해도 그를 향한 분노는 삭지 않았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책상 앞의 우편물로 손을 뻗다가 단순히 그 녀의 이름만이 씌어 있는 맨 위의 봉투를 발견했다. 그녀는 얼굴을 찡 그리며 봉투를 열어 종이 한 장을 펼쳤다. 몇 마디 씌어 있진 않았지만, 그녀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그것은 피어스에게서 온 것으로, 결혼식 날짜와 시간, 장소가 적혀 있 었다. 편지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그가 메모 한 장만 달랑 남 긴 것이 화가 날 따름이다. 내 인생이 걸린 일을 사무 보듯 처리하다 니! 너무도 화가 난 그녀가 몸을 떨며 그의 호텔로 전화를 걸려고 수화기 를 드는 순간 아버지 사무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모든 전화는 그녀에 게 연결되는 것이 며칠 동안의 관례였기 때문에 당황한 그녀가 받으러 가려고 반쯤 일어선 순간 벨 소리가 멈추고 누군가의 말소리가 났다 방을 가로질러 가면서도 아무런 예상을 하지 못했지만 문을 열고 피 어스가 통화하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녀를 본 그가 앉으라는 손짓을 했지만 그녀는 그에 더욱 발끈하여 그 손짓 을 무시하고 한껏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피어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5분쯤 후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녀를 다시 보았을 때, 그녀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감히 아버지의 사무실에 앉아 서 일을 할 생각을 다 했죠?" 그녀는 차가운 분노를 터뜨렸다. 피어스가 가죽 의자에 몸을 파묻고는 그녀를 조롱하듯 바라보았다. "당신 말을 들으니 내가 죄라도 지은 사람 같군. 어젯밤에 스티븐을 찾아갔을 때, 그분이 일을 추진할 계획이라면 사무실을 쓰라고 직접 제안했소. 난 그걸 승낙했을 뿐이라고." 앨릭스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숨을 삼키고는 또 다른 의문에 화 를 표출했다. "왜 난 그 얘기를 못 들었죠?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나한 테 직접 말하기 싫으면 메모로라도 이 사실을 알려 줬어야죠!" 그 말에 피어스는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한 손 가락으로 코를 문질렀다. "아, 참!" 주의 한마디는 얻은 것보다 잃는 게 많다는 걸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목청을 날카롭게 가다듬고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난 이렇 게 뒷일 취급당하는 게 제일 싫어요!" "당신이 그런 취급을 당할 리 있나." 그는 장난기를 감추려고도 않고 대꾸했다. "하지만 난 당신이 사업기반을 튼튼히 하길 원한다고 생각 했다고. 내 말이 틀리다면 말해 봐요." 제기랄, 이 남자는 무슨 말이든 자신에게 유리하게 쓰는 방법을 터득 했어! 그녀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다시 돌아섰다. "내가 원하는 일 에 대해 무척이나 잘 알고 있군요, 피어스 마르티노. 모든 일을 사무적 인 것과 연관 짓는다면, 어제 날 무척이나 사랑하는 체했던 이유를 어 떻게 설명할 거예요? 그게 거짓말이라는 건 우리 둘 다 뻔히 알고 있 는 일이잖아요?" 피어스는 방안을 서성거리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당신 부모님은 그에 대해 한치의 의심도 없으셨어. 그럼, 내가 그분들 앞에 서 사실대로 말했어야 옳단 소릴 하고 있는 거요?" "모든 걸 구하는 대가로 내 몸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진 못하겠죠." 그녀가 코방귀를 뀌며 응수했다. 그 순간 그가 벌떡 일어나 씩씩거리며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 다. "당신 운의 한계가 어디까진지 시험하는 건가, 앨릭스? 내가 뭘 해 주길 바라고 이러는 거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당신을 강제로 갖길 바라? 그래서 당신은 언제까지나 선택권이 없다는 마을 외치고 싶은 건가? 정말로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거냐고?" (퍼플 : 피어스 말 정말 잘 하지요? 싸움 닭 같은 여자 정말 밥맛이 라니까요~~ ) 격정적인 감정에 휩쓸려 앨릭스는 폭풍 같은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 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토록 화가 난 그를 본 적이 없고, 그것 이 자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의 마음속 악마가 자꾸만 그녀를 밀어낸 것이다. 이젠 한 걸음 후퇴할 때다. "아뇨." 그녀는 퉁명스레 시인하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달링, 그렇다면 편한 마음으로 내 주위를 돌며 선을 긋는 법을 배워 요. 난 당신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데 이렇게 몰아세우면 나중에 어 떻게 될지 몰라." 그제서야 그녀에게서 돌아선 그년 손으로 머리를 쓸 어 넘기며 책상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 "당신 거 요." 흩어진 이성을 추스리며 앨릭스는 그에게로 다가가 그가 내민 봉투를 재빨리 받아들었다. 그 안에는 유명한 상점의 신용카드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의문의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혼숫감을 장만해야 하잖소. 오후에 나가 쇼핑을 하고 와요." 그는 무 뚝뚝하게 내뱉고는 더 이상의 할말없다는 듯 책상 위의 서류로 주의를 돌렸다. 당신이 참는 한도가 있다면, 나도 마찬가지야. 날 살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맘대로 하진 못해! "내 옷까지 사줄 필요는 없어요, 피어스. 나 도 받는 월급이 있으니까. 게다가 난 새옷을 사고 싶은 생각은 없어 요." 피어스는 고개를 흘끗 들고 천천히 가로 저었다. "들은 대로만 행동 하면 하나도 불쾌할 일이 없을 거요. 그런데 당신은 내 말이라면 사사 건건 트집을 잡으려 하는군. 안 됐지만 내 고집도 당신만큼 세. 당신 옷이 얼마나 많은지는 몰라도 내 경험상 여자들은 옷 넣을 공간은 구 역구역 잘 만들어대더군. 당신도 그렇게 해보라고." "그게 그렇게 당신한테 중요한 거라면, 같이 가자고 하지 않는 게 이 상하군요." 그녀는 도전적으로 말했지만, 약간은 움츠러든 감이 있었 다. 말해 놓고 보니 상당히 유치한 말인 듯해 부끄러움마저 들었다. 결 국 자제심을 잃은 꼴을 보여 준 셈이 됐다. 반면 피어스는 완벽한 침착을 유지했다. "내가 당신 아버지 회사 문 제만 떠맡지 않았어도 그렇게 했을 거요." 그의 직접적인 공격이 다시 그녀를 건드렸다. 그에게 고마워해야 한 다는 걸 알지만 일단 그와 관련된 일이면 무엇이든 감정적인 분노가 앞섰다. 그녀는 이성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그는 날 물가로 데려가려고 할 진 몰라도 강제로 물을 먹일 수는 없어. 그의 말을 따른다고 굴복 한다는 뜻은 아니잖아.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이길 생각을 하며 그녀 는 장난스럽게 이마에 손을 대며 절을 했다. "들은 대로 따르겠나이다, 주인님." 그녀의 비아냥거림은 그를 화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겁게 만든 것 같다. 그는 웃음을 띠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 잘 듣는 노예를 찾기 가 어디 쉬운 줄 아나? 어쨌든 난 당신의 모습 그대로가 좋아. 당신과 부딪치는 일 자체가 모험이니까." 앨릭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당신은 이미... " 그녀는 말끝을 잇지 못하고 뺨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이미 당신을 가졌는데?"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매끄러웠다. "그야 그렇지만, 그땐 당신이 날 사랑했을 때였지. 지금은 아니잖소." "내가 어떻게 당신을 사랑했는지 모르겠어요."그녀는 담담하게 말하 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피어스는 책상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날 사랑하지 않았었다면 이토 록 오랫동안 날 증오하지도 못했을 거요. 하지만 사랑이 끝나고 미움 이 시작되는 곳이 어딘지를 누가 말하겠소? 당신은 내가 그런 것처럼 날 잊지 않았어. 우리 사이의 감정은 당신 의자와는 상관없이 아직 살 아 있소." 앨릭스는 손잡이를 잡으며 맹렬한 눈빛을 그에게 보냈다. "섹스는 사 랑이 아니에요. 피어스, 당신이 가르쳐 준 사실이죠. 이젠 그 차이점을 알아요. 난 다시 진실과 거짓을 혼돈하지 않을 거예요." 그는 그 말에도 일말의 부끄러운 표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좋은 얘 기요." 냉랭하게 말하며 그는 시계를 흘끗 보았다. "이제 가봐요. 오후 에 슬쩍 사라져서 뭘 한 척하고 나타날 수작은 생각도 말고, 여덟 시 에 저녁식사를 하면 결과를 알 수 있겠지. 잘 알겠소?" 잠시 동안 앨릭스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을 했다. 그러고 나서 그의 야비 한 미소를 보니 얼굴에 쓰인 표정을 보고 생각을 읽어내는 건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닐 거란 확신을 더했다. 반발심이 생긴 그녀는 홱 돌아서서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일이라도 저지르는 게 속이 시원하 겠군요!" "즐거운 헌팅이 되기를!" 방을 나가는 그녀의 등뒤에 대고 그가 대꾸 했다. 앨릭스는 총이 있으면 단번에 원하는 목표를 쏘아 겹겹이 쌓아 놓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웃음이 피어올라 정말 기 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핸드백을 집어들고 루스에게 오늘은 이만 퇴근 이라고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요." 비서의 말에 앨릭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기분 좋아 봤자지. 루스, 그 우편물 정리 끝나면 마르티노 씨를 도와줘요. 앞으로 며칠 동안 아버 지 사무실을 쓸 거예요." 그녀는 방을 나서려다 문득 한 가지를 생각 해 냈다. "오, 그리고 날 찾아온 사람들도 그에게 보내도록 해요. 내일 봐요." 거리로 나온 그녀는 차를 놔두고 택시를 잡았다. 차고는 밤새 잠겨있 으니 안전할 거야. 택시 뒷좌석에 올라탄 그녀는 카드를 꺼내어 손톱 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 화가 났을 땐 모두 꺾어 버 릴 까도 생각했지만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자기 돈을 쓰길 바 란다면 그렇게 해주겠어. 난생 처음 가격을 무시하고 아무거나 한번 사보는 거야. 보통 그녀는 계속 쓸 수 있고 또 그 값에 합당한 물건을 사는 걸 원 칙으로 하지만 이번엔 심술궂은 마음으로 첫 가게에 들어간 후부터 택 시 안에 상자를 무더기로 쏟아 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을 하면서도 피어스의 강한 의지를 이길 수는 없다 는 걸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결코 꺾을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증명해 보여야 했다. 그러나 그 기회는 멀고도 험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집에 돌아와 거실에 철철 넘치는 짐 보따리들을 보자 자신 이 좀 지나쳤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냐, 여기서 움츠러들면 안돼. 그녀는 뻔뻔스러워지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일단 상자를 열어 내용물 을 여기저기 흩어 놓았다. 그런 다음 기분을 바꾸고 싶어 차와 토스트 를 만들 먹었다. 피어스가 여덟시에 데리러 올 걸 예상해 앨릭슨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화장대에 앉은 순간, 한 가지 계략이 떠올라 오늘 만남 을 위한 치장을 했다. 약속 시간 바로 직전, 현관 벨이 울리자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자신 의 회색 눈동자와 묘한 조화를 이루며 발목까지 내려오는 푸른빛 코트 를 입은 채 문으로 나갔다. 아르마니 정장을 입고 눈부시게 핸섬한 모습으로 나타난 피어스가 잠 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냉랭한 투로 말했다. "갈 준비가 됐다는 거요, 아니면 난방이 고장났단 소리요?" 그의 절대적인 매력에 주체 없이 날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앨릭스는 고개를 가로젓고 뒤로 물러서 그를 들어오게 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 에 대한 불안감이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 "둘 다 아니에요. 이건 당 신이 보고 싶다고 해서 산 물건 중 하나예요." 그녀는 그를 거실로 안 내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한 줄기 휘파람을 불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 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은행을 파산시키고 싶었나? 그랬다면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데." "천만에요. 당신이 한계선을 말해 주지 않아서 사고 싶은 대로 샀을 뿐이에요. 머리에서 발끝까지 치장하려고." 그녀는 극적인 몸짓으로 두 팔을 벌려 사들인 물건을 가리켰다. 그 바람에 그녀가 코트 안에 유일 하게 걸치고 있는 검붉은 레이스 코르셋이 약간 내비쳤다. "당신이 보 고 있는 전부가 당신 돈으로 산 거죠." 그의 경직된 몸짓을 똑똑히 읽은 그녀는 자신이 너무 심했다는 걸 깨 닫고 반은 공포감에, 반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침을 삼키며, 그의 뺨이 달아오르며 턱에 긴장감이 꿈틀대는 걸 지켜보았다. 그는 아주 천천히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고 몸을 곧게 폈다. "그 말에 당신 자신도 포함되어 있나?" 그는 사자처럼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 가오며 묘한 어조로 물었다. "내가 보는 모든 물건은 포장이 벗겨져 있는데, 당신만큼은 그렇지가 못하군. 그건 공정하지 못한 일이겠지? 어쨌든 난 내가 얻은 것을 볼 권리가 있으니까. 그러니 어서 그 코트 를 벗어 보시지 그래. 앨릭스?" 그녀는 이제까지 그를 너무나 얕잡아봤다는 걸 깨달았다. 그에게 충 격을 줄 생각으로 일을 저질렀지만 그것은 결과를 따지지 않은 실수였 다. 그러나 여기서 등을 돌려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턱을 치켜 들고 코트를 벗어 옆으로 떨구었다. 이제 잠아 있는 건 그녀가 샀던 속옷 중 가장 관능적인 천조각뿐이었다. 피어스의 천천히 탐독하는 눈길에 그녀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부끄러운 마음을 나타내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 했다. 그의 눈빛이 너무도 탐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도전을 했 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시작은 그녀가 한 것이기에 어떤 쓰라린 결말이 나도 그녀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한 번 돌아 봐."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짓고 그의 시선을 따갑게 느낀 채 몸을 재빨리 돌렸다. "아주 훌륭해... 똑똑히 보이는군. 추운가?" 그 마지막 말이 그녀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아뇨." "좋아, 당신이 입고 있는 마지막 조각마저 벗어도 춥지 않길 바라." 피어스가 조소를 머금고 말했다. 앨릭스는 공포로 숨도 쉬지 않은 채 어깨 너머로 믿을 수 없는 표정 을 지었다. "다, 당신, 장난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더듬거렸다. 피어스의 미소는 독사의 그것이었다. "그럼, 당신은 장난이었나? 내가 보고 싶다고 한 모든 물건을 보여 주기까지 해놓고서?" 앨릭스는 가까스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건 장난이라고요!" 그 녀의 말투는 절박했다. "그런가?" 피어스는 팔짱을 끼며 차갑게 대응했다. "당신은 웃고 있 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고. 내가 모욕당하는 걸 보고싶었겠지. 난 당신 의 장난에서 충분히 그걸 느꼈어. 이젠 내 차례야. 어서 뭐라도 입으라 고, 달링. 여덟시 30분으로 예약을 해놓았어. 늦으면 곤란해." 더 이상의 모욕은 없을 것이다. 앨릭스는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억누 르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먼저 심술궂은 생각을 한 건 그녀 였으나, 결국 비참하게 당한 쪽도 그녀였다. 그녀는 도망갈 구석을 찾아보았다. 침실이 아주 가까이 있었지만 성 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피어스가 문을 가로막고 서 있었기 때문 이다. 그가 날 그냥 보낼 리 없어. 피부로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사실이 야. 어서 이 우스꽝스런 해프닝을 마무리짓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녀는 흐느낌을 꿀꺽 삼키며 손을 등뒤로 돌려 지퍼를 내리기 시작 했지만, 반쯤 벗은 뒤론 더 이상 할 수 없어 멈춰 버렸다. 등뒤에서 피어스가 입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고, 그의 손가락이 스친다 싶더니 이윽고 지퍼가 올라갔다. 그가 강제로 그녀의 턱을 잡아 위험하게 번뜩이는 그의 눈을 마주보 게 했다. "어리석은 바보 같으니. 날 상대로 게임 하면 안 된다는 걸 아직도 모르나? 어서 가서 옷을 입어요! 식사는 잊어버리라고. 난 이미 식욕 을 잃었어. 여긴 당신 집이니 혼자 남아 마음대로 하나고. 당신이 얻은 승리가 그만큼 값있는 것이길 바라." 앨릭스는 입술을 깨물고 그가 돌아서 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몇 분 후, 현관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바보가 된 기분으로 그녀는 자신 이 꾸민 치욕스런 장면을 둘러보았다. 그의 말이 맞아. 난 그를 부끄럽 게 만들고 싶었어. 하지만 값싼 취급을 당한 쪽은 결국 나였어. 주위에 널려 있는 옷가지들이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두 번 다시 그것들 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검정과 빨강이 섞인 옷도 절대 입 지 않을 것이다. 심한 자기 혐오에 빠진 그녀는 몸을 씻으려고 샤워했으니 마음속의 치욕스런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자연히 잠자리도 편하지 못해 밤새 도록 뒤척이기만 했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그녀가 결심한 한 가지는 사과를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도저히 말리 떨어지지 않겠지만. 그렇기에 늦잠을 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고, 그래서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출근 시간에는 닿지 못할 테니 좀더 늦는다고 달라질 것 업다. 앨릭스는 쓸데없이 토스트를 먹는 데 시간을 소비하고, 치장하는 데 도 많은 시간을 기울였다. 냉정하게 자신감 있게 보이고 싶어 잠을 못 잔 티를 가리느라 화장도 평소보다 세심히 했고, 옷도 회색 실크 정장 에 붉은 색 블라우스를 골랐다. 그러고는 유죄 판결을 받은 여인의 심 정으로 집을 나섰다. 수많은 다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적대는 로비에 들어섰을 때 모두 가 멈춰 서서 그녀를 바라보자 태연하게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대체 왜 모두가 나를 보고 웃고 있는 거지? 그 의문은 사무실에 다다라서 그녀의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루스와 마주쳤을 때 더욱 커졌다. 루스는 신문을 손에 쥔 채 함박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우편물 꾸러 미를 건네주었다. "어쩜 그렇게 철저히 숨길 수 있어요, 앨릭스? 우린 진짜 꿈에도 생각 못했네. 축하해요. 행복하길 진심으로 빌겠어요." 갑작스런 축하인사에 어리둥절해진 앨릭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비서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예요?" "결혼 말이에요. 신문에 발표 기사가 났다고요." 루스가 신문을 건네 주며 설명했다. "모르고 있었어요? 마르티노 씨가 놀라게 주려고 말 안 하셨군요." 마침내 진위를 파악한 앨릭스는 가까스로 미소지으며 루스에게 신문 을 돌려줬다. "그랬나 봐요." 그녀는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그럴 의도였다면 성공했군.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와 여러 사람 의 전갈을 받아든 그녀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몇 명을 제외하고 편 지의 주인공들은 며칠 전만 해도 그녀를 거절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제 피어스가 나타나니 서로 먼저 만나려고 아우성들이군. 그녀는 씁쓸한 마음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무실로 들어가 피어스 의 얼굴을 대면하기가 더욱 힘겨웠다. 그는 검토하던 서류에서 눈을 들고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그 것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는 미소도 짓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앨 릭스?" 그의 태도는 그녀의 화를 돋우기에 충분했지만, 그녀는 신랄한 말을 퍼붓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신문 발표에 대해서 왜 내게 말해 주 지 않았어요?" 피어스는 한숨을 지었다. "아마도 당신과 말다툼하고 싶지 않아서였 겠지. 하지만 어떻게 해도 그냥 지나갈 기세는 아닌 것 같은데?" 앨릭스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지었다. 먼저 해결할 것부터 마무리지 어야지. "당신과 싸우려고 온 게 아니에요. 피어스, 난 사과를 하려고 왔어요." "이제야 고상하게 나오시는군!" 그의 야유 섞인 말에 그녀는 분노로 화끈 달아올랐다. "사과해요, 말 아요?" 그는 한 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무슨 선전포고 라도 하는 것 같군." "언제나 그런 식이니까 내가 폭발하는 거예요! 5분만 잠자코 있어줘 요. 빨리 말하고 가게!" 놀랍게도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같은 사람한테 협상을 맡겨다 간 큰일 나겠군. 좋아요, 시간을 줄 테니 맘대로 해요, 페트라코스 양." 망할 자식! 앨릭스는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올랐다. 그녀의 목소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며 무의식적으로 반항심에 턱을 치켜들었다. "내 가 어젯밤 해서는 안 될 몹쓸 일을 저질렀어요. 미안해요." 그가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그게 전부요? 좋소, 그 사과를 받아들이 겠소."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렸다. 앨릭스는 입을 약간 벌려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할말 다했어요?" 피어스의 눈빛이 즐거움 반, 냉소 반으로 빛났다. "그것 말고 뭘 예상 했지?" "내 생각은." 그녀는 이를 갈며 야멸차게 대꾸했다. "당신도 내게 사 과하고 싶어할 거라는 거였죠!" "무엇 때문에? 당신이 벌인 게임에 내가 넘어가지 않아서? 내가 등을 돌린 순간 당신은 또 다른 계략을 세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직도 하고 있어." 그가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기왕 모습을 드러내셨으니, 당신이 알아야 할 게 있소. 좀 앉아요." 정말 웃기는 사람이야!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전부 지껄여 놓고 내가 순순히 앉으리라 생각했나? "난 그냥 서 있겠어요." 피어스의 어조는 변함이 없었다. "앉아. 앨릭스, 안 그러면 내가 강제 로 앉힐 테니." 어젯밤 이후로 이성적으로 처신하는 것도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그녀는 그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지어 보이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 다. "편안히 앉아. 오래 붙잡지 않을 거요. 당신도 시간이 없다는 걸 아니까. 우리는 결혼식을 올리고 짧은 신혼여행을 갈 거요. 그리고 당 신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구해야 하니 광고를 내고 돌아온 직후에 바 로 면접을 볼 수 있도록 말이오." 앨릭스는 한순간 멍해져서 아무 말도 못하다가 이윽고 한꺼번에 쏟아 부었다. "광고는 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난 이 자리는 얻기 위해 엄청나게 열심히 일했어요. 이 자리는 당신에게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어요!" "당신이 뭐라고 해도 그 자리는 공석이 될 거야." 그는 냉혹한 눈빛 을 띠고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은 내 아내가 되는 거요. 앨릭스,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아무리 내 가 전 유럽에 집을 갖고 있다지만 내 고향은 미국이오. 당신은 내 아 내로서 나와 함께 그곳에서 살아야 해." 난 정말 바보야. 앨릭스는 자신을 나무랐다. 결혼하게 되면 이런 일이 생기리라는 걸 왜 진작에 깨닫지 못했을까? "그럼, 내 일은 어떡하고 요?" "그거야 이제 막차를 탄 거지." 피어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게 중요한 일인가? 내 기억으론 당신은 일하는 아내가 되고 싶진 않다고 했었는데." 의외로군. 순진했던 시절에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그건 과거의 일이지요. 지금 내겐 이 일이 아주 중요해요, 피어스." "당신이 가정을 갖게 되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을 거요. 혹시 우리 결혼이 진짜라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증오로 어두워졌다. "진짜 결혼은 서로 돕는다 는 가정 아래 시작되는 거예요! 서로를 존중해 주는 데서 시작되는 거 라고요. 우리 사이엔 그 어떤 것도 없어요. 난 오로지 당신이 하는 말 에 따라서만 행동할 뿐이라고요." "패를 쥔 사람 마음이란 소리 못 들었소? 여지껏 뭐든 준 쪽은 나였 다고." 피어스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움찔했다. "알겠어요. 당신은 사람을 증오하게 만드는 법을 확 실하게 가르쳐 주는군요. 안 그래요, 피어스? 그렇다면 신혼여행이 내 가 당신에게 지불할 1차 할부금이 되겠군요?" "우리 둘 다 운명을 외면할 수는 없소, 앨릭스." 그는 담담하게 말했 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마치 우리가 인생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투로 말하는군요. 그건 인생이 운명에 의해 이미 짜 맞춰진 거 라고 믿는 거예요. 하지만 난 그런 거 믿지 않아요. 그러니 당신의 믿 음에는 동조할 수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이미 믿고 있는 거요." 피어스는 씁쓸하게 말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당신과 철학적 운명론에 대해 대화를 나눌 시 간이 없군. 경영전략 팀이 오늘 도착할 거요. 결혼 전에 해놓을 일이 산더미야, 당신도 가서 책상정리를 깨끗이 하도록 해." 낙심한 앨릭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말이 뭐가 있겠는가. 말다 툼을 벌여봤자 아무 이득도 없는 것을. 그녀는 순순히 일어나 자기 사 무실로 향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헤어지게 될 사무실이다. 창가로 다가가 먹구름이 잔뜩 낀 런던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무엇인 가 박탈당한 느낌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그녀가 아는 앨릭스 페트라 코스는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그녀가 알 수 있는 일이라곤 오로지 평화적으로 양보하진 않겠다는 것, 절대로 피어스에게 승리의 도취감 을 확신시켜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 불쌍한 앨릭스가 제정신이 아니군요. 근데 왜 로맨스 소설에선 똑똑 하고 산뜻하게 미치는 애들이 없을까요. 솔직히 벌이는 일들 보면 큰 회사 중역이나 되는 사람 같지 않음. 말 그대로 낙하선 이어서인지... 7. 이틀 후에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식은 조촐하 게 그녀의 어머니와 피어스의 친구 한 명만이 참석했다. 결혼식은 항 상 신성한 것이라 믿어 온 그녀로선 이 결혼에서 진지한 구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방법 외의 다른 방법은 상상하지도 않았다. 끝까 지 식을 치를 수 있었던 건 아버지에 대한 생각에서였다. 혼인 사무실에서 치르는 식은 짤막했다. 앨릭스는 아이보리색 정장에 진주가 총총 박힌 베일이 달린 작은 모자를 썼다. 정말 내키진 않았지 만 어머니가 가지고 온 작은 꽃다발도 들었다. 식이 진행되는 동안 기 억나는 일은 피어스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그는 서로 결혼서약을 나눌 때 그것이 그에게 아주 의미가 있는 것처럼 말했는데, 그녀로서는 진 짜라고 믿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 말에 그녀의 등골이 오싹해진 건 신비스런 일이었다. 그들이 남편과 아내가 되어 태양 밖으로 나오자, 어디선가 사진기자 가 불쑥 튀어나왔다. 피어스가 이 일을 떠벌리지 않았을 리가 없지. 그 것이 거짓을 꾸며 주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의 마 음에 차가운 응어리가 맺혔다. "신부에게 키스하는 장면을 찍고 싶은데요." 사진기자가 두 사람 사 이의 냉랭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무시했는지 그렇게 말했다. 앨릭스는 그 청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보고 있었다. 그리고 결혼식을 참견하는 구경꾼 몇 명도.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남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쇼하는 물개가 된 기분이에요!" 피어스의 손이 그녀의 턱을 잡자 앨 릭스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아주 예쁜 물개로군." 그의 눈동자에 언뜻 비친 묘한 기류에 그녀는 일순간 숨을 멈췄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였을까를 생각해 보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포개졌고, 그녀는 무기력하게 눈을 감았다. 이제껏 그가 해준 키스와는 전혀 다 른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드는 키스였다. 정열이나 소유욕 같은 것은 배 제되어 있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려다볼 뿐이 었다. 그는 그런 표정을 보고 만족했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 를 풀어 주었다. "이만 됐소." 피어스는 자라 말해 사진기자를 저지하고, 장모가 된 여 인에게로 돌아섰다. "서두르지 않으면 비행기를 놓치겠는데요. 몸조심 하세요. 그리고 아버님에게 저희가 없는 동안 너무 걱정하시지 말라고 전해 주시고요. 회사는 잘 돌아가고 있으니 회복하시는 데에만 신경을 쏟으시라고 말씀드리세요." 에밀리 페트라코스는 애정을 담아 피어스의 뺨에 키스로 답례하고는 딸에게로 돌아서서 포옹했다. "정말 예쁘구나. 행복해야 한다. 피어스 는 좋은 남자야. 널 잘 지켜 줄 거다." 한때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목이 메어 왔다. 그러나 앨 릭스는 부모님까지 실망시킬 수는 없어 자신의 눈에 담긴 절망의 빛을 감추기 위해 어머니를 황급히 껴안았다. "저도 알아요. 최선을 다할게 요." 이제 그들에게 남은 일은 차에 올라타서 공항으로 향하며 손을 흔드 는 일뿐이었다. 앨릭스는 감정이 북받쳐 바보처럼 눈물이 흐르는 걸 막으려고 입술을 꼭 깨물며 자리에 몸을 기댔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연 기하는 게 이렇게 사람의 진을 다 빼는 일일 줄이야. 아직 손에 쥐어 져 있는 꽃다발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고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그들 사이의 공간에 그것을 홱 던져 버렸다. 놀랍게도 피어스가 옆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그 가 꽃다발을 줍고 있었다. "꽃아 당신의 적은 아니잖소, 앨릭스." 그가 상처 난 꽃잎을 어루만지 며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이 날 이렇게 짓눌러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 은 알고 있지만." 그녀의 생각은 그랬지만 현실에서는 언제나 입장이 뒤바뀌어 당하는 쪽은 그녀였다. "당신은 절대로 깨어지지 않을 사람이에요. 아주 단단 한 바윗덩어리죠." 그녀는 무뚝뚝하게 내뱉으며, 앞좌석에 꽃다발을 놓 고 언제나 피어스와 동행하는 그리스인 운전사에게 뭐라 빠르게 말하 는 그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는 중간에 가로놓인 쿠션을 치워 두 사람이 더욱 가까워지게 했다. "바위도 제대로만 치면 깨진다고." "그건 내가 계속 당신을 주시하면 약점을 찾을 수 있다는 소린가요?" 그녀는 반신반의하여 물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눈이 있으면 못 볼 리 없지. 누가 알 겠소? 일단 발견하고 나면 당신은 그걸 깨뜨리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 지." 그녀는 그 말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마치 그녀가 해독해 낼 수 없 는 부호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마음을 거북하게 만드는 것에 반발심이 생긴 그녀는 더욱 몸을 곧게 펴고 앉았다. 그녀는 그 말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마치 그녀가 해독해 낼 수 없 는 부호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마음을 거북하게 만드는 것에 반발심이 생긴 그녀는 더욱 몸을 곧게 펴고 앉았다. "내가 그런 상처를 내리라곤 생각 못하겠는데요." 그녀의 시선은 운 전사의 뒷머리에 꽂혔다. "그런데 왜 내 꽃을 그에게 줬어요? 당신은 뭐라고 말한 거죠?" "꽃을 잘 보관해 달라고 일렀소. 당신이 오늘의 기념으로 꽃다발을 침실에 놓아두고 싶어할 것 같아서." "우리 둘 다 머릿속에 생생히 기억할 텐데 굳이 기념으로 삼을 건 없 잖아요?"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해. 당신 마음이 바뀔지 알게 뭐요?" 피어스는 조리 있게 반박하고 그녀의 왼손을 들어올려 그녀의 가날픈 손가락에 서 빛나는 금반지를 응시했다. "잘 맞는군. 예전에 내가 준 반지는 어 떻게 했소?" 그녀의 신경이 두 가지 이유로 날카로워졌다. 과거에 대한 쓰라린 기 억과 그의 손길이 닿는 짜릿한 느낌이 전해졌던 것이다. 그녀는 헉 하 고 숨을 들이쉬며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그는 협조하지 않았다. "내 손길이 닿는 게 혐오스러운가, 앨릭스?" 그의 조롱하는 듯한 말 투와 입가의 미소는 그 반대라는 걸 알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 다. 그녀는 숨소리를 죽이고 방어태세를 취했다. "당신에 대한 모든 게 혐오스러워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당신 반지 말인데, 허드슨 강 에 내버릴까 하다가 어려운 사람이나 돕자가 자선회에 줘버렸어요." "가치 있게 쓰였다니 기분 좋군." 그가 빈정거렸다. 앨릭스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당신에게는 돈이 최고겠죠!"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글세, 오늘밤 당신이 내 품에 안겼을 때 알게 되겠지." 정곡을 찔린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 화제만큼은 정말로 피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다니, 그녀의 두뇌가 무어라 말을 하든, 그것을 의식한 순간부터 그녀의 몸은 절박하게 그를 원했 던 것이다. "자만으로 눈이 멀었군... 날 좀 놔주지 않을래요?" 피어스는 짓궂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편이 자기 아내 손 도 못 잡나? 게다가 우린 방금 결혼했다고." 앨릭스는 냉정을 유지하려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내 앞에서까지 위선 떨 건 없어요. 이젠 연극할 필요가 없다고요, 피어스. 우릴 보아 줄 관객도 없잖아요." 그녀는 한껏 비꼬아서 말했다. 그의 입가에 다시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난 연극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당신 말은 믿지 않아요." 피어스는 과장된 한숨을 지으며 다리를 꼬고 앉았으나 그녀의 손은 아직도 굳게 잡은 채였다. "우리 결혼이 어떻게 시작되었든 난 최선을 다해 성공적인 결혼으로 만들 거요, 앨릭스.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어." 그의 부드러운 제의에 그녀의 가슴은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얼 마나 그럴 싸하게 들리는 말인가. 그러나 그가 훌륭한 배우라는 걸 뼈 아픈 경험으로 터득한 그녀였다. "날 위해 그렇게까지 성가실 필요는 없어요!" 그녀는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손을 빼내었다. "저런, 성가시다고 생각한 적 없어, 달링. 내가 하고 싶을 뿐이지." 그의 대답은 놀라운 그 자체였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이 결혼을 정말로 원했다는 듯한 말투로군요." 앨릭스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이마에 깊은 주름을 잡았다. 피어스는 나와 결혼하길 원했던 걸까? 말도 안 돼. 난 버림받은 전 부 인이라고. 물론 나를 원하긴 하겠지. 하지만 성적인 욕망 때문에 결혼 까지 할 필요는 없는 거야. 그는 나와 관계를 맺기 위해 협박 따위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결혼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 을까? 단지 그 이유였나? 잠시 후, 그녀는 물어 봐야겠다는 결심으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체 나랑 결혼한 이유가 뭐예요? 그 방법 말고도 아버지를 도울 수 는 있었잖아요. 페트라코스 제국을 원했다면, 당신이 쓰는 방법으로 살 수도 있었을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와 다시 인연을 맺으려는 거죠?" 잠시 동안 피어스는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하더니 곧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소. 하지만 아직 당신은 들을 준비 가 되어 있지 않아." "오, 그렇군요, 잊고 있었어요. 당신은 극적인 순간을 포착하길 좋아 했죠. 특히 아침을 좋아하는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 난 내일 아침을 위해 갑옷을 준비해야 하나요?" 그녀의 비아냥거림엔 저도 모르게 쓰 라린 고통이 배어 나왔다. 그 말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깊은 후회가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편하게 생각해, 앨릭스. 이번엔 당신을 충격에 빠뜨릴 일 같은 건 없을 거요. 당신도 나처럼 적절한 시기를 깨닫게 될 거야." 앨릭스는 심장의 고동이 더욱 빨라지는 걸 느꼈다. 그가 날 혼란스럽 게 하고 있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어. "내가 왜 당신을 믿어야 하죠?"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내가 강제로 할 수 없는 부분이오. 믿거나 말거나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아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요." 피어스의 미소는 자조적으로 변했다. "당신은 날 이해한 적이 없었 어." 그의 난해한 대답에 그녀는 턱을 쳐들었다. "글쎄, 시간이 있었다면 그러고 싶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이해 못하겠어요." 너무도 많은 흉터와 아픔이 있었지. 그녀는 감정에 휩쓸려 목이 잠겼 다. 옆에 앉아 있는 남자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 다보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생각은 쉽게 선회하지 않았다. 피어스는 연 극을 하고 있는 거야. 날 은근히 골탕 먹이려는 계획이었지. 그 점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그녀의 주의를 끄는 미묘한 인상을 받은 건 며칠 전 그가 그녀와도 안면이 있는 영향력 있는 사업가들과 회의를 가질 때였다. 그들의 냉 담했던 태도를 기억하는 그녀를 굳이 참석시키려는 피어스를 보고 그 녀는 그가 자신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심산이라 단정지었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코가 납작해진 건 그녀가 아니라 피어스에게 아 부를 하려고 온 남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녀 앞에서 피어스에게 말하기를 꺼려했지만 솔직히 그녀는 그들이 거북해 하는 태도를 즐기 고 있었다. 바로 그때 피어스의 장난기 어린 눈과 마주쳤고, 그녀는 따 뜻한 물결이 마음에 밀려드는 걸 느꼈다, 그의 표정이 이 모든 만남은 그녀를 위해 꾸몄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 다. 하지만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물론 그 에게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그건 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선 기대 할 수 없었던 감정의 이입이었다. 그녀의 본능은 그 이상이라고 주장 했지만, 어쨌든 그 이유는 밝혀낼 수 없었다. 그녀가 확실히 아는 한 가지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위 험을 느꼈기 때문이다.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강렬한 감 정, 그토록 세차고 빠르게 심장이 고동치게 하는 감정을 느꼈기 때문 이다. 그것이 이렇게 밝은 낮 동안에도 그녀의 상념을 방해하고 있었 다. 신혼여행의 목적지인 섬이 이가 시리도록 푸른 바다의 한가운데에 길 게 놓여 있었다. 앨릭스는 그것이 지평선에 한 점으로 걸려 있을 때부 터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눈앞에는 그들의 최종 목적지가 드러났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평화롭고 푸르렀다. 다른 때 같으면 이곳에서 지내는 것에 한껏 마음이 부풀었겠지만, 이렇게 근사한 곳에 그와 단둘이 갇혀 있 어야 한다는 현실에 그녀의 마음은 나락으로 가라앉았다. 평상시엔 싫 어하는 곳이라도 차라리 북적거리는 대도시 휴양지로 가는 게 속편할 것 같았다. 피어스가 자신을 주시하는 걸 감지한 그녀는 그의 시선에 반응을 보 이지 않으려고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일찍이 그는 재킷과 타이를 벗 고 셔츠와 단추를 풀어 그은 목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아주 편안해 보였지만, 그가 편안해 할수록 그녀의 신경은 날카로워졌다. 표 현하지 않아도 자연히 드러나는 그의 남자다운 관능미가 그녀를 자극 했다. 그를 의식하지 않기란 정말 불가능한 일이어서 무관심한 체하기 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리란 것도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선 은은한 열기의 시선이 느껴지고 있다. 유럽 어 느 지점에서부터 그가 긴장을 푸는 걸 느꼈고, 다른 남자에게서라면 만족감이라 부를 그 무엇이 더해져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모든 감각 을 전부 그에게로 쏠리게 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앨릭스는 시선을 떨구고 화젯거리를 찾아낸 걸 내심 다행스럽게 여겼 다. "여기가 섬으로 가는 유일한 길인가요?" "아니, 제일 빠른 길이지. 왜 벌써 도망갈 길을 찾고 있소?" 그가 빈 정거리며 물었다. 그 놀림은 그가 지닌 또 다른 기묘한 분위기를 드러낸 것으로, 그녀 를 더욱 화끈 달아오르게 했다. 오래 전에 모자는 벗었지만, 재킷은 그 아래 슬립 하나만 달랑 입었기 때문에 벗을 수가 없었다. 제기랄, 이 남자 앞에서 공짜 스트립쇼를 보여 줄 수도 없고, 저 바다로 뛰어들어 뜨거운 몸을 식힐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내게 그것이 필요할까요?" 그녀는 지친 목소리로 응수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 속을 알게 뭐야? 하지만 걱정은 말라고 여기 섬 사람들은 낚싯배를 운영하고 있으니까, 당신이 부탁만 하면 아테네 섬으로 데려다 줄 거요. 여긴 감옥이 아니오, 앨릭스." 그녀의 마음속에 또다시 전에 느꼈던 혼란스런 감정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오늘 그들이 한 맹세가 감옥 그 자체라는 걸 상 기했다. 물론 그는 내가 도망가리란 걱정 따윈 안 하겠지. 내가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런 짓은 안 할 거라고 생각할 테니. 그는 날 샀잖아? 난 스스로 내 자신을 팔았고. 그는 값비싸게 주고 산 물건의 주인 행세를 하려고 들겠지. 왜 뻔히 알고 있는 사실에 이토록 마음이 우울해지는 건지 모르겠다. 섬이 눈에 띄기 전까지만 해도 기분은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왜 섬을 보자마자 예기치도 않았던 걸 원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지? 그렇다 면 내가 원하는 건 뭐고? 그 어떤 질문에도 그녀는 대답을 할 수 없었 다. 모든 일이 순리대로 흘러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일 거야. 이렇 게 쫓기는 심정은, 이렇게 두려운 마음은 처음이야. 이제 그만. 더 이상 바보 같은 생각은 하지 말자. 착륙에 신경을 집중 하는 게 좋겠어. 이미 헬리콥터가 섬 주위를 맴돌며 그녀에게 부산한 항구와 오후 햇살에 빛나는 벽돌색 지붕에 하얀 집 따위의 경치를 보 여 주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 집 뒤의 마당에 착륙했고, 피어스가 그녀를 내려 주는 동안 나무 주위에서 두 남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옛친구처럼 그를 맞 이했는데, 함박 웃음과 요란한 환영의 몸짓으로 보다 그가 신부를 데 려온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앨릭스는 외톨이처럼 느껴져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오래 전에 고향과 인연을 끊어, 그리스어를 하는 그의 핏줄을 하나도 없다. 그러다 보니 문득 여기에 어느 정도 머물러 있으면 모든 걸 빨리 배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어스가 그들을 이곳의 관리인인 코스타스와 스파로라고 소개했을 때, 그녀는 그들의 인사를 따뜻한 미소로 받아들였다. 피어스는 그녀의 팔을 잡고 두 남자가 그들의 짐을 챙겨드는 집으로 이끌었다. "집을 한번 둘러보겠소, 아니면 먼저 씻고 싶소?" 앨릭스는 지금 당장 입고 있는 옷을 벗어 던지지 않으면 비명을 질러 버릴 것 같았다. "집 구경은 나중에요. 우선 씻고 시원한 걸로 갈아입 고 싶어요." 그의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가볍게 훑어 내렸다. "좀 지쳐 보이는군, 침실은 이쪽에 있소." 그가 안내한 방은 크고 통풍이 잘되며, 복숭아나무 그늘 아래 있었다. 욕실과 드레스 룸은 방 한켠에 자리잡았고, 그 반대편에는 널찍한 유 리문이 바다의 경치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킹사이즈 침 대가 방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거대한 침대를 바라보자 앨 릭스는 등골이 오싹했다. 피어스가 그녀의 시선을 물끄러미 쫓았다. "한참 자겠어, 앨릭스> 피 곤했을 거요. 당신은 여기서 샤워해요. 난 이번에는 다른 쪽을 쓸 테 니. 서두를 건 없어. 식사는 늦게나 할거니까" 드레스 룸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를 바라보는 앨릭스의 걱정은 저녁식 사로 인한 게 아니었다. 옷을 갈아입는 걸 보니 여긴 그의 방이 틀림 없다. 그런데 그는 그녀를 위해 잠시 동안이긴 해도 공간을 남겨 준 것이다. 그러나 나중의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가 사라지자 앨릭스는 지친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신발을 걷어 차 벗어 던지고 땀에 젖은 옷을 재빨리 벗었다. 욕실로 들어가니 바닥 을 파고 설치한 욕조가 눈에 띄었다. 그곳에 거품기가 딸려 있는 걸 발견한 그녀는 샤워 대신 보글거리는 물 속에서 몸을 풀어야겠다고 마 음을 바꿨다. 얼마 후, 그녀의 몸을 지치게 했던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편안히 욕조에 기대에 눈을 감았다. 오늘밤의 일에 대한 걱정을 이제 까지는 다른 근심에 파묻혀 별로 크게 두각 되지 않았으나, 침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서는 그 문제가 아주 날카롭게 그녀를 괴롭 힌다. 그녀의 입술은 쓰디쓴 표정으로 일자를 그렸다. 한때 피어스와 함께 있고 싶은 갈망에 오늘 같은 밤을 간절히 기대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달랐다. 그녀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녀와 잠잘 권리를 산 것이다. 팽팽히 긴장된 그녀의 목에서 마음을 대변해 주는 신음이 새어나왔 다. 그 생각은 정말 떠올리고 싶지도 않아. 빚을 갚기 위해 몸을 주다 니! 그것은 나 자신과의 감정을 몰살시키는 짓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한순간 심장 박동이 멈추고 무엇인가 울컥 솟아올랐다. 대체 무슨 생 각을 하는 거야? 내 감정이라니? 내겐 아무런 감정도 없어! 날 철저하 게 이용하고 버린 남자에겐 증오심밖에 남아 있지 않아. 그리고 또 한 번의 신음소리.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 주는 것이었 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솔직해지라는 소리가 의식을 파고들며 점점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 다. 결국 그녀는 자신에게 정직하자고 결심했다. 빚을 갚는다는 생각이 그토록 싫었던 이유는 그녀가 이 결혼이 진짜이길 바란 마음 때문이었 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피어스의 사랑을 원했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 에. 난 바보도 보통 바보가 아닌 게 틀림없어! 절망감이 밀려오자 앨릭스는 그것을 발작적인 웃음으로 표현했다. 판 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그녀는 상자에서 튀어나온 것과 얼굴을 맞 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속이던 가면을 벗어 던졌다. 5 년 동안 그토록 고통스런 세월을 보내면서도 그녀는 언젠가 피어스가 돌아와 모든 건 자기 잘못이었다고, 사실은 그녀를 정말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정신나간 희망에 매달렸던 것이다! 그것은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를 사랑했었고, 언제까지나 그를 사랑할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를 사랑한다는 건 말도 안돼! 그가 내게 한 짓을, 지금도 하고 있는 짓을 봐서는. 그는 날 이용했고, 지금도 이용하고 있다. 그 런 짓을 하는 남자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모르겠어. 알 수 있는 건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뿐. 그에게 승리 의 기쁨을 안겨 줄 순 없어. 지금보다도 더 강하게 그와 싸워야 해. 그 것만이 내 자신을 이기는 길이야. 피어스에게 내 약점을 찾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에게 속박되어 그와 함께 잠을 잔다 해도 예전에 그 랬던 것처럼 내 마음과 영혼을 지배하진 못해. 내 진실은 무덤까지 비 밀로 가져갈 거야. "잠들면 안돼, 앨릭스. 당신을 그렇게 빨리 잃고 싶지는 않다고." 그녀의 귓가에 남자의 갈라진 목소리가 울리자 앨릭스는 눈을 번쩍 떴다. 피어스가 그녀의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었다. 세상에, 얼마 나 생각에 빠져 있었으면 그가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들었을까? 놀람과 화가 뒤섞여 앨릭스는 일어나 앉았지만 자기가 몸을 너무 드러냈다는 걸 깨닫고는 황급히 다시 물 속에 잠겼다. 그러나 이미 그는 모든 걸 목격하고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정말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야? 난 이미 전에 볼거 다 봤다고." "남자에게 공짜 쇼 보여 주는 게 내 직업은 아니에요!" 그녀는 전보 다 더 불리해진 기분으로 응수했다. 꼭 알몸이어서라기보다는 바로 전 그녀를 뒤흔든 자기 고백 때문이었다. "당신은 다른 욕실을 쓴다고 했 잖아요." 그녀는 퉁명스레 내쏘았다. "그랬지, 한 시간 전에." 그의 말에 앨릭스는 간편한 바지와 셔츠를 입고 있는 그의 모습에 시 선을 모았다. "당신이 날 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찾으러 다녔지.: 앨릭스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찾았군요. 날 혼자 있게 놔둬 요." 그의 푸른 눈이 찌푸려졌다. "내게 명령조로 말하지마, 앨릭스. 난 당 신 남편이지, 종이 아니라고. 그리고 난 당연히 여기 들어올 권리가 있 어." 그녀는 몇 마디를 보태 상황을 부드럽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입이 떨 어지지 않았다. 이미 그의 말로 반발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기 때문이 다. "당신의 권리라고요! 이제 알겠어요. 빚을 갚을 때가 됐다는 소리죠?" 그녀는 다시 일어나 앉으며 몸을 감쌌다. "나도 반칙을 했다는 소린 듣고 싶지 않다고요. 어디서 하면 좋겠어요? 여기서? 물에 빠지는 걸 개의치 않는다면 재미있긴 하겠군요. 물론 바닥도 괜찮고, 좀 편안하게 하고 싶다면 침실도 있으니까." 그녀는 신랄하게 말했다. 그렇게 자기방어를 열렬히 늘어놓는 동안 그녀는 남편의 얼굴이 노기 로 붉어진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문득 말을 멈췄을 땐 이미 그는 폭발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만 해! 어떻게 그런 창녀 같은 말을 감히 입에 담을 수 있지?" 앨릭스는 그 말에 약간 움찔했으나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여기서 물러날 순 없다고 작정했다. "남자가 여자를 살 땐 다 그런 걸 바라고 사는 거 아니에요? 난 당신에게 팔렸고, 그 빚을 갚을 준비도 다 됐어 요. 난 당신의 명령대로 따라야 하는 거 아니던가요?" 그녀가 원한 건 그에게 찬물을 끼얹어 주는 것이었고 어느 정도 성공 은 했지만, 그녀가 바라던 대로는 아니었다. 앨릭스는 눈을 휘둥그래 뜨고 그의 분노가 극에 달하는 걸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옷을 개의 치 않고 욕조로 성큼성큼 내려와 그녀를 일으켜 세웠을 땐 헉 하고 숨 을 멈춰 버렸다. 그는 그녀의 비명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를 한 팔에 안고 침실로 갔다. "이번엔 당신이 지나쳐도 심하게 지나쳤어, 앨릭스." 그가 으르렁거리 며 두 사람 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무시하고 그녀를 침대 위에 털썩 내던졌다. "빚을 갚고 싶다고? 제기랄, 그럼 어디 한번 해보라 고!"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피어스는 그녀의 몸 위로 몸을 던져 피가 날 정도로 난폭하게 입술을 겹쳤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지만, 이미 그를 저지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을 보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결과로 나 타나 이젠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을 기세였다. 그는 그녀가 숨을 쉬 지도 못할 정도로 입술을 막았다. 그의 키스에선 그녀의 정열을 일으 키는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 배 허벅지를 만지 는 그의 손길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욕적인 것이었다. 도저히 그 라고 상상할 수 없는 탐욕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를 이렇게 몰아 댄 장본인이, 그리고 이 모든 결과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남자의 쾌락을 위해 몸을 팔며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더러운 여자처럼 느껴졌다. 그가 이대로 멈추지 않는다면 그녀로서는 홧김에 강제로 관계를 갖는 다고 해도 아무런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같은 생각을 했는지 피어스는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아주 잠깐 동안 숨을 가쁘게 내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 마음속의 악과 싸우는 듯 고통스런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 부서져라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침대에 쓰러져 있던 앨릭스의 울음은 처음엔 훌쩍거리는 데서 시작하 여 뜨거운 한 줄기눈물이 흘러내릴 때까지 계속됐다. 그녀는 손을 들 어 눈을 가렸으나 눈물은 끝없이 흘렀고, 결국 그녀는 엎드려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눈물이 말라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됐을 때, 남은 것은 딸꾹질, 지쳐 버린 마음.... 그리고 부끄러움이었다. 모든 건 내 잘못이야. 난 과잉반응을 했어. 결과가 자기혐오에만 그칠 수 있었다는 건 행운이야. 나의 냉철한 이성은 다 어디로 가버렸지? 그건 내가 피어스에게 무관심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부터 사라졌 어. 그가 다시 내게 상처를 입힐 까 봐 두려웠던 거야. 하지만 난 다른 방법으로 상처를 입하라고 그를 부추기고 말았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침대 주위를 둘러보니 몸서리가 쳐졌다. 그 녀는 젖은 시트를 벗겨 욕실로 가져가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그 리고 아직도 욕조의 물이 부글거리는 걸 보니 구역질이 나 기계를 멈 추고 물을 뺐다. 그러고는 샤워를 틀어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씻어 버리려는 듯 몸을 세게 문질렀다. 그후 젖은 몸을 닦고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데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침실로 돌아와 보니 어느새 차가 담긴 쟁반이 탁자에 놓여 있고, 그 녀의 짐은 모두 풀어져 알맞은 자리에 놓여 있고, 침대도 깨끗하게 정 돈되어 있었다. 이걸 챙겨 놓은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필시 피어스 와 그녀가 열정을 참지 못하고 젖은 몸으로 침대에 뛰어들었다고 상상 할 걸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녀의 얼굴이 어느새 홍조를 띠었다. 갑자기 차가 몹시 마시고 싶어졌다. 이제 침착을 되찾으니 생각하기도 한결 수월해졌다. 난 바보 같은 일 을 저질렀다. 이제 이 소란을 수습하는 일은 전적으로 내게 달렸어. 이 걸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의 결혼생활은 사사건건 삐걱거리게 될 거야. 자존심이 대체 뭐길래 일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을까. 미안하다는 말해야겠지. 우린 무슨 운명으로 이렇게 엇갈리는 걸까... 그 답은 신만 이 아시겠지. 어둠은 금세 찾아들었다. 손목에 찬 시계를 읽지 못할 정도였다. 피어 스가 방을 나간 이후로 시간은 무정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스피로의 부인인 카티나가 한 시 간 전에 커피를 가져왔다. 그 여인은 외톨이가 된 신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혼자 저녁을 먹어야 하는지도 묻지 않은 채 묵묵히 상을 차리기만 했다. 그 기나긴 침묵 속에서 앨릭스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 이 드러날까 봐 화장이라도 할 걸 하고 후회했다. 누굴 위해서? 내 앞 에 나타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래 전에 품었던 분노는 근심으로 변해 버 렸다. 어딜 갔을까? 지금 뭘 하고있을까? 스스로 자책하고 있는 건 아 니겠지> 어디 구석에 누워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며 누군가에게 도움 을 빌고 있을까? 이런 걱정을 하는 건 우스운 거야. 그는 이 섬을 잘 알고 있어. 그럼에도 어둠이 점점 짙어질수록 그녀의 걱정도 심해졌다. 근심에 파묻혀 있던 앨릭스는 문득 온몸에 소름이 돋아 고개를 퍼뜩 들었다. 어둠 속에서 피어스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처 럼 그는 조용히 그녀의 앞에 나타났지만, 지금 그녀는 안도감을 느끼 고 있었다. 그가 계속 나타나지 않으면 그녀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빛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자 비로소 잔뜩 굳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한치의 빈틈도 없이 냉정했다. 앨 릭스는 그 눈을 바라보며 말을 꺼내기 전에 심호흡부터 해야 했다. 그녀는 초조하게 입술을 핥았다. "피어스, 난..." "안돼!" 날카로운 한마디가 그녀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안돼, 항상 당신이 먼저 말했었지. 이번엔 내 차례요." 피어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난 아까 일에 대해 사과하려는 게 아니오, 앨릭스. 당신은 내가 강제 로 당신을 가져 주기를 원했겠지. 그래야 계속 날 증오할 수 있을 테 니. 안 그런가? 미안하지만 난 당신 게임에 말려들 순 없어. 내 규칙에 따라야 해, 앨릭스. 당신이 내게 오는 거요. 난 당신을 원해. 하지만 난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오. 당신이 스스로 내게 올 때까지 기다릴 거 야. 물론 당신은 언젠가 오게 되겠지. 당신처럼 정열적인 여자가 언제 까지 참을 수만은 없으니까. 그때가 오면, 당신은 내게 부탁해야 할거 야. 아마 오늘 같은 일은 두 번 다시없을 테니까." 그는 더욱 위험이 번뜩이는 눈을 그녀에게 바짝 갖다댔다. "난 당신이 무릎을 꿇고 애원 할 때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요. 알아들었소?" 앨릭스는 목구멍이 메말라 달라붙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자신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사과하 려던 말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녀는 싸울 준비가 됐다는 표시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마 오래 기다려야 할 거예요." 그가 억양 없이 웃었다. "마음은 단단히 먹고 있소. 하지만 당신 생각 만큼 그렇게 오래 가진 않을 거야." 그의 마지막 말에 앨릭스는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감히 내가 애원할 거란 생각을 하지? 자신이 그토록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졌다는 건 가? 그럼, 아니니? 마음속 한구석에서 그녀를 조롱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움찔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난 이 남자 없이도 몇 년을 지내 왔어. 그러니 앞으로도 못할 건 없지. 한 가지는 확실해. 절 대로 그에게 애원하는 일은 없을 거야. 이제 우리 사이엔 한치도 양보 할 수 없는 전쟁만이 남았을 뿐이다. 8 앨릭스는 무거운 마음으로 욕실 안의 경쾌한 샤워 소리를 들었다. 고 개를 돌리니 어젯밤 피어스가 베고 잔 베개가 보였다. 그가 침대 속에 있었던 것부터 그들의 다툼은 시작되었다. 그녀가 잠 을 자러 침실에 들어와 보니 피어스가 이미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 가 우뚝 멈춰 서자 책을 읽고 있던 그는 벗은 상반신을 드러낸 채 고 개를 들었다. "불이 밝으면 얘기해요." 그는 침대를 같이 쓰는 일이 아주 일상적인 양 평범하게 말했다. 앨릭스는 그 말에 발끈했다. "난 당신하고 침대는 고사하고 같은 방 을 쓰고 싶지도 않아요!" "안됐지만 당신은 여기 아니고는 다른 데서 잘 수 없소." 그는 부드 럽게 말했지만 눈빛은 냉혹했다. 그녀는 도전적으로 팔짱을 끼었다. 내가 그 말에 순순히 넘어갈까 봐. "날 맘대로 하진 못해요." 그는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그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하지 않 고서는 당신을 가질 수 없지 않겠어? 난 언제고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 라고. 여긴 우리의 침대요. 당신이 잘 곳은 여기야." 앨릭스는 그가 물러설 기세가 아니라는 걸 알고 분노를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야. "무슨 일이지, 앨릭스? 설마 나와 함께 자는 걸 두려워하는 건 아니 겠지? 내게 무의식 중에라도 손을 댈까 봐 두려운가?" 그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그녀는 그만 미끼를 덥석 물어 버렸다. 그의 계략이 성공한 것이다. 그녀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잠옷을 챙겨 욕실 로 들어가서 갈아입었다. 게다가 정말로 치욕스러운 건 밖으로 나와 보니 그가 벌써 불을 끄고 등을 돌린 채 누워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자기 말을 거역하리라 곤 아 예 생각도 안 했어! 물론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 잠이 든 피어스의 평화로운 숨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몇 시 간이나 몸을 뒤척이다가 동이 트는 걸 보고서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 었다. 이제 그의 베개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녀의 의지보다 강한 욕구가 솟구친다. 앨릭스는 그에 못 이겨 몸을 굴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남 아 있는 그의 향취를 흠뻑 들이마셨다. 지난밤은 참을 수 없는 고문이 었다. 옆에 있는 그를 온몸으로 느끼며 몇 번이고 그에게 다가가 손을 댈까도 생각했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항복을 받 아들일 터였다. 그렇게 하고픈 유혹은 밤새도록 끝이 없었지만 그것은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들뿐이란 걸 자각했다. 자신의 이런 행동에 신물이 난 그녀는 혐오의 신음을 흘리며 벌떡 일 어나 앉았다. 무슨 심정으로 항복할 생각을 하는 거야? 넌 자존심도 없니? 하지만 너의 그 잘난 자존심은 외로운 밤을 위로해 주지 않아. 사랑의 열정을 대신해 주지도 못하고. 샤워 소리가 멈추자 그녀는 의식적으로 긴장했다. 침대에 아직 남아 잇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앨릭스는 침대 아래쪽 발걸이에 놓아 둔 실 크 가운을 집으려다가 우뚝 멈췄다. 그곳에 핑크빛 꽃봉오리의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미심쩍은 마음으로 그것을 집어드는 그녀의 가슴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자극적인 향기가 그녀의 마 음을 울렁이게 한다. 어디서 난 걸까? 이게 왜 내 가운 위에 놓여 있 는 거지? "한 송이 장미를 위한 장미요." 예기치 못한 피어스의 말소리에 앨릭스는 놀라서 펄쩍 뛰다가 엄지손 가락을 가시에 찔렀다.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만큼이 나 놀란 표정으로 피어스가 진심 어린 연민의 소리를 냈다. 그는 엉덩 이께에 수건을 두른 모습으로 푸른 눈동자를 촉촉이 빛내며 다가왔다. 그녀가 미쳐 저지하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피맺힌 손끝을 살폈다. "당신을 기쁘게 해주려고 한 일인데, 상처만 주었군." 그가 잠긴 목소 리로 중얼거리고는 그녀의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혀끝으로 피를 없 애 주었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와 관능적인 혀의 놀림에 앨릭스는 잠시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눈앞의 남자는 그녀가 어젯밤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5년 전 사랑에 빠졌었던 그 남자였다. 그후로 그녀는 그에게서 절망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에 문득 정신이 났 다. 그녀의 의구심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지금 이 남자가 또 무슨 계략 을 꾸미는 거지? 앨릭스는 날카롭게 심호흡을 하고 유혹으로부터 손을 빼냈다. "장미 라고요, 피어스?" 그녀는 신랄하게 말했다. "내가 왜 이런... 당신의 미 끼를 받아야 하죠?" "아무 것도 아니오. 아마도 이번에는 내 마음을 당신 발 밑에 놓아두 기로 했는지도 모르지."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며 소리 없는 비명이 새어나왔다. 설마 정말로 날 위해 하는 말을 아니겠지? 지금 내게 복수를 하라고 부추기는 건 가? 그 대답은 즉각 나왔다. 아니야, 피어스가 그런 의도를 가졌을 리 없어. 그는 날 그저 다시 갖고 놀려는 생각일 거야. 그녀는 고개를 쳐 들었다. 그러고는 휴지통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꽃을 던져 넣었다. 아름 다운 꽃송이가 이리저리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피어스와 마주치면 그 어떤 아름다운 것도 파멸해버리고 말아. 그녀는 돌아서서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되려면 당신은 마음부터 가져야 할 거예요." "그럼, 난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는 고린가?" 피어스는 안뜰로 향하 는 문으로 움직였다. 그로 인해 햇빛이 그의 그은 피부를 두드러지게 했다. 앨릭스는 그 모습에 자석처럼 끌렸다. 그러나 그것은 끔찍한 기억을 되살아나게 했다. "당신의 마음 같은 건 없어요. 내 스스로 그걸 경험 했죠." 이렇게 그와 얼굴을 맞대고 서 있던 또 다른 아침을 기억했다. 바로 그가 그녀와 결혼한 진짜 이유를 드러내던 날 아침. 그녀의 눈에 고통이 스며들었다. 피어스는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았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요, 앨릭스." 그는 여전히 갈라진 목소리 로 말했다. 그녀의 모든 신경이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나도 그렇게 되도록 내버 려두진 않을 거예요. 당신 앞에서 또 순진한 바보가 될 줄 알았어요, 피어스?"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것이 허풍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앞에 서면 언제나 어리석은 바보가 돼버리고 마는 자신을 알기 때문이 다. 피어스는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과거의 일에 대 해 얘기를 해야겠소." 앨릭스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할말을 아무 것도 없어요. 이 미 알 건 다 알고 있으니." 그의 입술이 씁쓸한 곡선을 그렸다. "당신은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만 기억하고 있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앨릭스?" 그는 말하며 조금씩 그녀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더욱 긴장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누군가 당신을 짓밟아 버렸 을 때, 당신은 눈앞에 보이는 것 외에 달리 뭘 생각하겠어요? 결과는 같을 거예요. 당신은 사람을 죽인 거나 다름없어요. 회개를 하고 싶으 면 나한테 올 게 아니라 목사에게로 가요!" 앨릭스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분노로 몸부림 쳤다. "회개라고? 내가 원하는 게 그것일진 모르지만 당신에게서 받고자 하 는 건 아냐. 난 내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 남을 용서하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는 걸 알았어." 앨릭스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잠긴 목에서 소리를 내기가 무척 고통 스러웠다. "이게 진짜로 전지전능한 피어스 마르티노의 입에서 나오는 뉘우침인가요? 지금 내게 당신이 한 짓을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는 거 예요?" 그의 근육이 약간 꿈틀거렸다. "그럼 안 되는 일인가?" 그녀는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그의 말에 마음 이 누그러지는 쪽으로 기울려다가 그가 훌륭한 배우라는 사실을 상기 했다. "ale을 수 없어요! 당신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확신을 갖 고 있는 사람이에요, 피어스. 내게 다른 상상을 유도하지 말아요." 그의 투명한 눈동자에 짜증과 조소가 물들기 시작했다. "그 말이 사 실이라면, 어젯밤엔 왜 내 품으로 웅크리고 들어온 거요?" 그의 도전적인 말에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난 그런 적 없어요! 잠을 깼을 때도 난 얌전히 내 자리에 있었다고요." "그거야 내가 그쪽으로 모셔다 놓았으니까. 내가 제자리로 갖다 놓느 라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당신이 날 안 놓으려고 해서 말이야. 고 양이처럼 내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고. 당신을 깨워서 그 상황을 직접 목격하게 하고 싶었지만 당신 스스로 일어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 지." 오, 이런. 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진실처럼 들리는 거지? 그녀는 얼 굴이 새빨갛게 돼버렸다. "그런 거짓말이에요!" "진짜라니까. 무의식적으론 아마 기억하고 있을 걸. 다만 당신 자존심 이 그걸 인정하지 않을 뿐이지." "그래서 당신은 승리를 뻐기고 있겠군요?" 피어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번에도 다를 거라고 내가 말한 걸로 아는데. 당신은 의심도 참 많군, 달링." "당신은 오래 전에 내 믿음을 몰살시켜 버렸어요. 그런데 내가 당신 말을 믿을 것 같아요? 이미 깨진 유리 조각은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 어요." 그 말은 쓰디쓴 맛을 남기고 그녀의 입을 빠져나갔다. 그를 아 직도 사랑하지만, 그를 다시 믿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피어스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그녀 의 뺨을 어루만졌다. "뿌린 대로 거두는 거겠지." 그는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고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옷을 갈 아입어요, 앨릭스. 아침 먹고 요트를 타러 나가게 준비해 뒀어." 문을 열고 반쯤 들어가던 그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려 일그러진 미 소를 지어 보였다. "전에 당신은 배타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었지. 설마 또 홧김에 마음에도 없는 말로 안 간다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의 빈정대는 투에 그녀는 똑같이 대꾸해 버릴까 생각하다가 푸른 물위를 가로지르는 요트를 상상하고는 마음을 고쳤다. "아뇨." "그럼 몸을 제대로 가릴 웃을 입어요. 햇빛이 뜨거운데 신혼 첫날부 터 화상 당하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그는 주의를 주고 방에서 나갔 다. 앨릭스는 한방 맞은 것 같은 거북한 기분이 들었다. 피어스는 밤새 전략을 바꾼 것 같다. 방어를 더욱 철저히 해야겠어. 그러나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그와 외출한다는 사실에 이 상하게도 마음이 들떴다. 기억의 한편에 남을 만큼 좋은 날이었다. 피어스는 짧은 청반바지만 을 입은 채 방향키를 바다로 향했다. 화려한 니트 반바지와 면셔츠 안 에 푸른 수영복을 입고 나선 앨릭스는 기꺼이 보조 선원을 맡았다. 배 를 타고 화가 잔뜩 나 있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유로운 마음으로 서로에게 웃음을 보이기까지 했다. 따사로운 태양과 물살을 가르는 소리, 귀를 간질이는 바람의 노랫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문득 앨릭스는 참으로 오랜만에 행복을 느꼈다. 그녀의 방어 벽이 무 너지고 있었다. 돛을 올리며 앨릭스는 뱃머리에 서 있는 피어스의 모습을 지켜볼 기 회를 갖게 되었다. 길고 곧은 다리와 유연한 몸매는 마치 그가 태어날 때 선택한 것처럼 완벽했다. 딱딱한 정장을 입은 것보다 지금의 반바 지 차림이 그에게 훨씬 어울렸다. 그에게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 었고, 그녀의 마음은 어느새 울렁이고 있었다. 그의 완벽함을 말로 표 현할 길이 없었다. 그저 아름답다고 말할 밖에는. 앨릭스의 눈동자는 갈망으로 채워졌다. 그의 말대로 이번에는 예전과 다르다면 좋으련만. 그러다가 곧 그녀는 그 생각을 떨어버렸다. 마음 아픈 고민을 하기엔 너무도 좋은 날이야. 그때 피어스가 그녀에게고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었고, 그녀는 벅찬 마음으로 미소를 되돌렸다. "한번 해볼 테요?" 그가 방향키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도전에 응했다. 그녀의 작은 몸의 움직임에 커다란 배가 따르는 일은 새로운 흥분이었지만, 피어스가 뒤에 서 있다는 걸 의식하는 짜릿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평화로운 분위기에 젖어든 그 녀는 고개를 젖히고 마음껏 기쁨을 드러냈다. "따라오길 잘했다는 걸로 알아도 되겠소?" 피어스가 물었다. 앨릭스는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을 그에게 맞췄다. "이걸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어." 그의 푸른 눈동자가 부드럽게 그녀의 모습을 따라 움직이더니 그는 재빠르게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흐음, 당신이 기뻐할 줄 알았지." 그는 손을 뻗어 키를 잡은 그녀의 손가락을 쓰다듬었다. "앞을 잘 보 라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앨릭스는 방향을 잡는 일에 정신을 집중하려 했 지만 상당히 힘들었다. 아주 짧은 키스였지만 마치 전류에 감전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놀란 건 그의 말이었다. "그럼 날 기쁘게 해주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요?" "그것 말고 더 좋은 생각이 있어?" 그가 부드럽게 대꾸했다. 앨릭스는 그의 따뜻한 말투에 전율을 느꼈다. "당신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거는요?" 아직 마음속 어디선가 도사리고 있던 경고가 그녀 의 주의를 끌었다. "당신이 기쁘면 나도 기뻐, 앨릭스." 피어스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 이고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저기 섬 보여? 저기에 닻을 내리고 점 심을 먹는 게 좋겠어. 수영도 할 수 있지. 어때?"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 된 느낌이었다. "좋아요." 그녀는 앞 뒤 가리지 않고 대답하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피어스, 왜 이런 일 을 하는 거예요? 왜 갑자기 내게 잘해 주는 거죠?" "당신이 대접받지 못할 이유라도 있소?" "이건 내가 예상했던 당신이 아니에요.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거라고 요." "있지." 그 한마디에 그녀는 갖고 있던 의심을 확고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와 싸우지 않고 침대에 끌어들일 속셈이군요." 그녀는 비 통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건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가능한 일이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가 가진 매력에는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어도. 그녀는 마음의 갈피를 잡 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원하는 건 뭐죠?" 그녀를 향한 피어스의 푸른 눈은 놀랍게도 자기 자신을 비웃고 있었 다. "기적이오. 불행히도 요즘은 그걸 바라기가 무척 어렵지. 그런 기 회는 얼마나 있다고 생각해?" 앨릭스는 숨을 멈췄다. 그는 내 마음속의 진실한 대답을 듣고 싶어하 는 거야. 그가 지금처럼 망설이며 불확실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도저히 그의 참모습이라고 믿기 어렵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 했다. "아주 희박하죠." 그가 장난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과 나는 매일 다르게 서로 마 음이 맞는 일이 많아지는군. 자, 그럼 선실로 내려가서 카티나가 뭘 싸 주었는지 펼쳐 보겠소?" 그녀가 그의 말대로 따른 것은 오로지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 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것도 확실한 게 없다. 그는 기적이라고 말 했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기적인지는 얘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원하기는 하지만 가지기는 힘든 무엇인가가 있다는 걸 암시했다. 그리 고 피어스는 그것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험으로 미루어, 그는 원하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갖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선박회사를 갖기 위해 날 이용했고, 날 다시 아내로 얻기 위해 아버지 의 회사를 이용하지 않았던가? 그에 대한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특히 결혼한 후에 그에게 나타난 변화에 대해서는, 한때 그도 진실로 사랑 하는 사람이었던 적이 있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기쁨을 주며, 결 혼이 가짜 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게 했던 적이. 그런데 왜 나는 자꾸만 과거의 환상을 더듬어 거기에 집착하려는 거지? "뭐가 그렇게 오래 걸리지?" 피어스의 목소리가 그녀를 상념에서 끌어냈다. 그녀는 퍼뜩 고개를 들고 배의 움직임이 멈췄다는 걸 알았다. "지금 가요!" 그녀는 큰 목소 리로 외치고 부리나테 음식을 찾고 테이블 아래 있는 아이스박스를 꺼 냈다. 꾸러미를 들고 갑판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계단에 두 개의 긴 다리 가 나타나더니 피어스가 그녀의 짐을 받아 주었다. 그들의 손가락이 가볍게 스쳤고, 서로의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속엔 따뜻함이 배어 있었 다. "일개 사단이 먹어도 될 만큼이군. 지금 먹을까, 아니면 수영하고 나 서 먹겠소?" 앨릭스는 그의 행동에서 비롯된 마음의 혼란과 싸우기를 포기했다. 게다가 솔직히 이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누가 바보라 해도 상관없었다. 오늘만큼은 한번에 한 걸음씩 전진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언제 수영을 할 수 있 나 여태껏 기다렸어요." "당신이 물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어. 한번 바다에 들어가면 나오기 를 기다리기가 무척 지루했지." 그가 눈동자를 굴리며 대꾸했다. 그녀는 샐쭉하여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좋아하니까 그렇죠! 당신은 물 속에서 별로 신통치 않았죠? 그러면서 다른 일은 잘해 내는 게 신 기해요." 피어스는 어느새 반바지를 벗어 짧은 수영복을 드러내며 그녀에게 심 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을 구경하느라 수영엔 신경도 안 썼었지. 바닷물보단 당신이 구경거리였으니까." 그 말에 그녀의 미소를 의구심으로 바뀌었다. "글쎄요. 못 믿겠는데 요. 아무리 당신이 그런 척을 해도." 그녀는 딱딱하게 대답하고는 그에 게서 등을 돌리고 옷을 벗었다. "당신을 향한 내 열정은 무조건 진실이오, 앨릭스. 그걸 위장할 수 잇 는 남자는 없을걸." 피어스가 잠시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그녀는 홱 돌아서서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에요. 모두 과거의 일이죠." 그러나 결코 잊을 수는 없는. "해변까지 누가 빨 리 가나 시합해 봐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물로 뛰어들어 거품이 이는 바닷속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내기를 걸었을 때부터 사실 경쟁할 생각은 없었다. 오로지 두사람 모 두에게 고통스러운 화제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피어스는 수영을 잘했으나 놀랍게도 앞서가지 않고 그녀와 보조를 맞추었다. 그들을 함께 해변에 다다랐고, 젖은 모래 위로 털썩 올랐다. 잔잔한 파도가 다리를 간질었다. "생각보다 꽤 먼데요." 그녀의 숨을 어느 정도 고른 후에 말을 꺼냈 다. "난 뻗기 일보직전이에요." 그녀의 옆에서 피어스가 몸을 굴려 엎드렸다. "그렇지 않아. 지금 얼 굴이 아주 좋은 걸." 피어스의 눈동자가 그녀의 몸의 곡선을 따라 움직이는 걸 알아챈 그 녀는 얼굴을 붉혔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특히나 이곳에 그들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의 방어벽이 오래 전에 무너졌기 때문에. "아첨할 필요는 없어요." 그의 시선이 찬찬히 그녀를 훑었다. "나도 알아. 하지만 난 그게 좋은 걸." 그녀는 신음소리를 냈다. "난 별로 안 좋아요." 피어스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당신이 그런 거짓말을 다 하다니." 아주 잠시 스친 손길에도 이렇게 반응하는 건 너무 불공평해. "당신 에 대해서도 그렇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녀는 그를 발끈하게 할 양으로 쏘아댔으나 그는 왠 일인지 고개만 끄덕였다. "나도 거짓말에 아주 능숙한 내 자신에게 놀랐소. 하지만 이런 말을 알고 있나? 죄를 지으면 그 빚은 두 배로 갚아야 한다는 것 말이오."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이 빚을 갚고 있단 소리예요?" 피어스는 한숨을 지으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내 입에서 첫 번째 거 짓말이 떨어진 이후로 난 그걸 톡톡히 치르고 있소. 그런 말을 들으면 당신은 기분 좋겠지, 앨릭스. 내가 고통받는 걸 보고 싶지 않소?"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도 단번에 대답을 내렸 다. 아니, 난 그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결국 몇 년의 세 월이 흐르고 그녀가 깨달은 건 자신이 아무런 복수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가 상처받길 바랄 수는 없다. 순간적으로는 어떤 생각이나 말을 할진 몰라도. 그럼에도 그녀는 솔직하게 그 마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연 약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건 싫어요. 그렇지 않아도 세상을 살아가며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많 은데." "고맙소."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그에게 주의를 돌렸다. "무엇 때문에요?" 씁쓸한 미소가 그의 입술에 떠올랐다. "날 포함시켜 줘서. 당신은 언 제나 너그럽고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었지. 아직도 너그러운 마음을 간 직하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좋군. 사랑 쪽은 어떻지?" 이 대답에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문득 일어나 앉아 고개를 저쪽으로 돌렸다. "내게 연인이 얼마나 잇었는지 알아본 심산 이라면, 일찌감치 집어치워요." "당신에겐 하나도 없었어." 피어스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가슴이 그 말에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는 아연실색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뭐, 뭐라고요?" 대체 어떻게 그가 그걸 알았을까? "설마 내 뒤를 캤다는 뜻은 아니겠죠?" 그녀는 손으로 모래를 힘껏 쥐며 격 분하여 말했다. "당신을 주시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게 더 친근한 표현이 아닐까?" 앨릭스는 격렬하게 화를 터뜨렸다. "당신이 내 친구라도 돼요? 피어 스, 어떻게 감히 날 감시할 수 있어요?" "그러지 않았으면 내가 어떻게 당신이 곤경에 처해 도움을 바란다는 사실을 알았겠소?" 그는 온화할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우정이라는 건 상대가 진정으로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도와주는 게 참된 의 미요. 그런 면에서 난 당신의 가장 좋은 친구지." 그것을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많이 상했지만 결국 그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하지만... "당신은 날 돕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의 회사를 돕고 있을 뿐이죠!" "내게 그 회사는 아무런 필요도 없소. 사실 내 재정고문은 그걸 떠맡 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까지 말했었지. 돈을 밑 빠진 독에 물 붓 듯 쏟아부어야 하니까. 그 누구가 아니었다면 난 그 회사가 흥하든 망 하든 신경도 안 썼을 거요." 그녀는 관자놀이에 손을 대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 았다. "지금 오로지 나 때문에 회사를 구한 거라 말하고 있는 거예 요?" "그 이유가 아니었다면 난 관심도 안 가졌을 거라니까." 그는 덤덤하 게 털어놓으며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감정의 기복을 세심히 살폈다. "하지만... 왜 그런 일을?" "왜냐고? <러블리스>를 읽어 본 적 있나?"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시 말인가요? 아뇨." 이건 또 무슨 수수께 끼야? "그렇다면 꼭 한번 읽어 봐요." 그는 이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 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앨릭스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나며 그의 눈빛을 살폈다. 그러나 피어스 는 난해한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돌아가자고. 배가 고파. 그리고 당신은 벌써 핑크빛이 되어 버렸다. 빨리 옷을 입지 않으면 화상당할 거요."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물로 뛰어들었고, 앨릭스는 머릿 속 가득 의문을 담으면서도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요트로 돌아 오면서도 피어스는 그녀와 보조를 맞추었고, 먼저 올라가 그녀를 끌어 올려 주었다. 그런 다음 그녀에게 수건을 던져 주고는 아이스박스로 주의를 돌려 그녀가 아무것도 물어 보지 못하게 기선을 제압했다. 신속하게 그들 앞에 음식이 놓이고, 와인까지 준비되었다. 음식을 보 니 갑자기 식욕이 솟아 한동안 그녀는 그의 엉뚱한 발언에 대해 의문 을 품는 걸 포기해 버렸다. 다양한 샐러드와 차가운 고기를 먹는 동안 그들은 대화도 벼로 나누 지 않았다. 앨릭스는 다시 긴장이 풀려 토마토 한 조각을 입에 넣다가 드레싱이 턱으로 흐르자 웃음을 터뜨렸다. "찌푸리지 않는 당신 얼굴을 보니 좋군." 피어스도 함께 웃으며 그녀 의 턱을 잡고 냅킨으로 닦아주었다. 그녀는 웃음을 멈추었다. "요즘은 별로 웃을 일이 없었어요." 피어스가 돌연 잠잠해졌다. "나도 그 기분을 알아." 또다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발견한 건 일말의 후회감이었다. 어떻 게 그를 이해해야 하나? 혼란이 앞선 그녀는 냉랭하게 그를 흘겨보았 다. "그래요? 난 당신이 은행에서 오는 내내 웃고 있었는 줄 알았는데 요! 우리 할아버지에게서 선박회사를 빼앗았을 때를 말하는 거예요. 돈 한푼 들이지 않고 벼락부자가 됐잖아요?" 그는 눈을 한번 깜박거리더니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어떤 말을 해도 언제나 이 화제로 돌아오는 게 참 신기해. 당신은 진실을 알고 있어, 앨릭스. 한데 그걸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군." 그녀의 눈동자에 폭풍이 일었다. "그건 그분의 자존심이었고 기쁨이 었어요!" 그의 눈에도 노기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왜 그걸 썩어들도록 내버려 뒀을까? 그건 그가 가장 큰 적으로 생각했던 우리 할아버지에 대한 증 오의 표현이었던 거요, 앨릭스. 수리를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는데도 그는 그걸 파느니 썩혀 버리는 쪽을 택했지. 난 내 것인 걸 정당하게 가져왔을 뿐이야." 그 말에 발끈하여 반박하려다가 그녀는 문득 멈췄다. 그가 진실을 말 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항상 그 배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었지만, 정 말 그렇다면 왜 그걸 썩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돈이 부족해서는 분명 아니다. 야니스 페트라코스에겐 그 정도 돈이야 새 발의 피였을 테니 까. 그 사실은 다시금 그녀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피어스가 주장한 증 오심은 그의 행동을 지배했다. 할아버지는 행동하면 관대하기 그지없 던 분이었다. 다만 그녀의 아버지는 그 뜻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스 스로 살길을 개척해 나가셨고, 그런 이유로 안드레아스 가문과는 아무 런 적대감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감정의 흐름을 지켜보던 피어스가 침묵이 길어 지자 그녀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젠 이해하겠소?" 그 부분은 이해되지만, 그 외에 많은 것들은 이해되지 않고 남아 있 다. "이해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아무 것도 설명이 안되잖아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해요. 그건 당신이 공짜로 배를 얻기 위해 날 이 용한 이유를 전혀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어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 로 반박했다. 피어스는 빈정거리는 얼굴로 일어났다. "천만에, 난 엄청난 대가를 치 렀소." 그의 간결한 한마디에 움찔한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그게 무슨 소 리예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잊었나요? 돈 같은 건 거래하지 않았어요." 그의 입술이 험악하게 뒤틀렸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그는 나직하게 말하고는 남은 음식을 치우기 시작했다. 앨릭스는 짜증이 극도에 달하여 그를 노려보았다. "그건 또 무슨 소 리예요? 젠장, 피어스! 뜻 모를 말만 하지 말고 설명을 해보라고요!" 그는 우울하게 웃었다. "내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알잖 아? 게다가 당신은 아직 내 설명을 들을 준비가 안돼 있어." 그는 어 깨 너머로 말하며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돌아가야겠어. 조금만 늦어져도 구조대가 출동할 거요." 그가 막아 놓은 벽에 부딪친 앨릭스는 분노를 삼켜야 했다. "그렇겐 안 될 거예요." "심술 부리지 마. 짜증을 내고 있다는 생각밖엔 안 든다고." 앨릭스는 이를 갈았다. "이럴 땐 당신이 정말 싫어요. 피어스 마르티 노!" 그가 아이스박스를 집어들고 다가와 그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러 나 그녀가 잡아도 놓지 않았다. "그러면 다른 때는 어떻지? 그땐 날 어떻게 느끼지, 앨릭스?" 그는 부드럽게 물었다. 이런, 이 남자는 정말 구제불능이야! "다른 때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 으려고 노력하죠!" 그녀는 아이스박스를 빼앗다시피 하여 톡 쏘았다. 그는 낮게 웃었다. "그렇다면 아직 나한테 희망은 있군. 노력중이라는 소리는 완전히 성공 못했다는 말이잖아." 그는 만족스러운 듯 말하고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순간 앨릭스는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내게 손끝 하나 대 지 않겠다고 말했잖아요!" 가쁜 숨을 들이쉬는 그녀를 보며 피어스는 더욱 크게 미소지었다. 그 리고 두 손을 허공에 펼쳤다. "봐요, 손을 전혀 안 댔어." 그는 이렇게 속삭이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벌어진 입술에 키스했다. 그녀는 숨이 멎는 듯했고, 촉촉한 열기에 모든 혈관이 들끓었다. 키스 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자 그녀는 몸을 떨며 짜릿 한 통증을 느꼈다. 아이스박스를 들고 있지만 않다면 그녀를 가로막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 연유로 앨릭스는 잠시 후 피어스가 뒤로 물러서자 더 이상 이성을 잃지 않은 자신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어김없이 정열을 드러냈다. "난 항상 약속을 지 키는 사람이지... 계속 해주길 바래?" 당연히 그래 주길 바랬고, 그도 그 사실을 알고있을 터였지만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뒷걸음질 쳤다. "돌아가야 한다면서요?" 그는 몸을 곧게 펴며 정열 대신 이제는 즐거움을 드러냈다. "당신이 라면 내 마음을 바꿀 수도 있지." 앨릭스는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요." "요즘은 당신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눈이 말하는 걸 믿는 게 낫다는 생각이오. 당신도 알고 있겠지, 앨릭스? 당신은 저항조차 하지 않았 어." 그는 뻐기듯이 말하고는 닻을 올리러 갔다.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실을 인정했다. 점점 더 대항하기 가 힘들어. 결국 가장 위험한 적은 나 자신인 거야. 그녀는 무거운 한 숨을 내쉬고 선실로 내려갔다. 9 항구에 요트를 내렸을 때는 거의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된 무렵이었다. 피어스는 다시 키를 잡아 보란 제의를 하지 않았고, 앨릭스는 상념에 너무나 깊게 빠져 있어 부탁을 해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생 각할게 너무도 많았다. 선박회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문이 없다. 현재 상황에서 객관적으 로 판단해 보면 피어스가 사실대로 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러나 그에게도 말했듯이, 그것은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진 못한다. 오히 려 그 부분은 전보다 더욱 미궁에 빠진 느낌이다. 게다가 나를 위해 아버지 회사를 도왔다는 말은... 그녀는 이제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녀의 분노는 이제 날이 무뎌져 버렸다. 그가 뭐라고든 말을 해주면 얼마나 속이 후련할까. 하지만 아직도 그 를 믿지 못하는 건 인정해야 한다. 그는 자기 말을 내가 아직 들을 준 비가 안돼 있다고 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그러나 지금 은 듣고 싶어... 그가 말해 주기만 한다면. 부두에 내리면서 그녀는 발을 헛디뎠고, 피어스가 잡아 주지 않았더 라면 그대로 콘크리트 바닥에 고꾸라질 뻔했다. 그 결과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게 되었다. 그녀는 땀과 소금기가 뒤섞인 그의 체취 를 맡으며 아찔한 감각에 그만 숨을 날카롭게 들이마셨다. "괜찮아?" 앨릭스는 잠긴 목으로 긴장된 웃음소리를 냈다. "내 다리가 어디 붙 어 있는지 모르겠네요." 농담을 하는 중에도 그녀의 마음속 작은 악마 가 어서 그에게 몸을 밀착시키고 입술을 대라고 유혹해댔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안아 옮겨야겠군?" 그는 앨릭스가 저항의 소 리를 내기도 전에 자신의 말을 실행에 옮겼다. 그녀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와 싸워야겠다는 마음은 오랜 항 해로 인해 닳아 없어져 버렸나 보다. 그래서 그가 차로 그녀를 옮기는 동안 앨릭스는 그저 그의 목에 팔을 두르기만 했고, 오히려 그렇게 안 겨 있는 감촉을 즐기기까지 했다. 그녀를 자리에 앉히고 나서도 피어스는 계속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수 있을까?" 그는 나직하니 물어 보며 그녀의 벌어진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앨릭스는 문득 생각에 집착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감정의 지배에 따라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머리를 가까이 끌어당긴 다음 입술을 가볍게 스쳤다. "이러면 됐어요?" 피어스는 신음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많이 쳐다보니, 이걸 로 만족할게." 그가 차를 돌아 운전석에 앉는 동안 앨릭스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제 같은 길을 왔을 때보다, 심지어는 오늘 아침보다 훨씬 짧았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잔뜩 불평만 늘어놓고 있었 는데, 섬의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피어스의 누그러진 태도 때문인 지, 아무튼 그녀는 더 이상 자존심에 연연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그것 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별장으로 들어가니 카티나가 눈에 띄게 근심스런 표정으로 달려나와 앨릭스가 못 알아듣는 그리스어로 빠르게 말했다. 그 말에 피어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문제가 있어요?" 앨릭스는 가정부가 부엌으로 돌아가자 그에게 물었다. "그러지 않길 바라야지." 그가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회사 에서 나한테 계속 연락을 하려고 했나봐.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 겠소." 그녀의 걱정스런 표정을 본 그는 미소지었다 "오래 걸리지 않 을 거요. 당신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거야." 앨릭스는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침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그녀는 그들이 전환점에 도달했다는 걸 새삼 인 식했다. 그런데 단지 하루만에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꿔 생각해도 되는 걸까?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가 날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알 필요가 있어. 여지껏 그런 뚜렷한 증거를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침실로 돌아오진 않았지만 피어스는 얼마 안 있어 거실에 모습을 나 타냈다. 그러나 식사하는 내내 그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앨릭스 는 그를 대화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으나 열의 없는 그의 대답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테라스로 나가 커피를 마실 때까지도 침묵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물 끄러미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피어스의 등을 응시했다. 이제 참을 만큼 참았어. "대체 무슨 일이에요, 피어스?" 그가 자기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던 듯 그녀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고는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 당신을 너무 심심하게 했 나?" "제발, 아무 일도 없다는 표정 좀 그만 지어요. 뭔가 잘못됐죠? 나한 테는 말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녀의 말에 눈썹을 꿈틀거리긴 했어도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옆 자리에 앉았다. "당신까지 신경 쓸 일은 아니오. 지금은 휴가중이잖 소." 나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의도였다면 잘못 짚었어. 그녀는 양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은 휴가가 아니라 신혼여행 중이에요. 난 당신 의 아내라고요." 그녀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야릇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아무 일도 없다면, 최소한 말이라도 해줘요. 그래야 나도 고민을 덜어 줄 노력이라도 하잖아요." 피어스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의 커피 잔을 내려다보았다. "시 간을 기막히게 맞춰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켜 주는군." 그의 빈정대는 말에 그녀는 등골에 전류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이미 놓쳐 버린 그 무엇에 대한 공허함이 가득 흐르는 말투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리고 벌떡 일어섰다. 그의 의도를 알아챈 그 녀는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날 일부러 화나게 만들려고요? 이 번엔 안 넘어가요, 피어스. 난 알고 싶다고요." "알았어, 알았다고. 언젠가 당신이 내 생각을 꿰뚫어볼 날이 올 거라 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는 자신을 비웃는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소, 정 알고 싶다면. 우리 건설회사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어. 내가 신경을 많이 쓰고 있던 사업이라 도움을 구하긴 어렵지 않을 거요." "무슨 문제인데요?" 피어스는 이마를 긁었다. "건설중인 땅주인이 말썽을 부려서..." 앨릭스는 그제야 긴장이 좀 누그러졌다. "그게 다예요?" 그녀는 미심 쩍은 듯 물었다. "당신 태도로 봐선 그보다 심각한 일인 줄 알았는데."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할까 봐?" 그 질문은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요, 당신은 해야 한다면 그 렇게 하죠. 필요하다면."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그것이 더 이상 사실이 아니란 걸 알았다. 언제나 진실만이 존재했더라면... 피어스는 여전히 침묵을 지킨 채 그녀를 응시했다. "그거 재미있는 말이군. 드디어 날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인가, 앨릭스?"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는 그럴 때도 되지 않았나요?" 피어스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겨 헝클어뜨렸다. "우리 사이에 벌어 진 일들은 너무나 많은 세월을 허비하게 했소. 당신은 어떤 결론을 내 리고 싶지?" 앨릭스는 자기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품고 있는 감정 은 한 가지였다. 순수한 여자의 본능. "당신은 정말 복잡한 사람이에 요." "중국 퍼즐만큼 복잡하지." 그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순수히 시인했 다. "나도 중국 퍼즐을 갖고 있었어요. 정말 풀기 힘들었죠.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난 실마리를 찾게 되었고, 그 다음부턴 그게 별로 어렵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젠 눈을 감고도 맞출 수 있죠."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하며 이상한 떨림을 느꼈는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피어스는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답을 알면 그 다음부턴 쉬 워진다는 건 만고의 진리요. 당신이 모르고 있는 해답은 단지 아주 어 려운 질문의 것일 뿐이오." "모든 것에는 논리적인 해답이 있다는 의미인가요?" 그는 두 손을 넓게 벌려 보였다. "나는 포함해서." 앨릭스는 메마른 입술을 축였다. 미로 게임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 가지 의문이 남는군요. 내가 과연 그 해답을 알고 싶어할 까요? 그렇다면 그걸 찾아내는 방법은요?" 이맛살을 찌푸린 채 그녀를 주시하는 그의 얼굴에서는 장난기가 사라 졌다. "글세, 첫 번 질문엔 도움을 줄 수 없지만, 두 번째라면... 단서를 얼마나 필요로 하지, 앨릭스?" 그의 날이 선 목소리에 그녀의 은근한 화가 났다. "당신이 사실을 절 반밖에 안 가르쳐 주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한 걸음 나아 가려는 단계에서 이런 말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이미 튀어나온 말은 어쩔 수 없었다. 피어스가 갑작스레 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사실을 알고 싶은 게 아 냐, 앨릭스. 확신을 원할 뿐이지." "그게 잘못인가요? 그럼 당신이 내게 원하는 건 뭐죠, 피어스?" 그것 은 마음에서 우러난 절규였다. "내게 당신이 원하는 건 뭐요, 앨릭스?" 그가 부드럽게 반문했다. 그 러나 그녀의 혼란스런 표정을 읽고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이 결심만 내리면, 어디서든 내 참모습을 찾을 수 있을 거요. 난 전화 걸 데가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소." 앨릭스는 주저앉고 싶은 심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거 의 가까이 왔는데! 분명히 그걸 알 수 있었어. 하지만... 무엇에 가까이 왔다는 거지? 그녀는 어깨가 축 처졌다. 그 해답은 알 도리가 없다. 왜 그는 모든 일을 이토록 복잡하게 만드는 걸까? 내 스스로 중국 퍼즐은 해답을 알기 전엔 무척이나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문득 왜 그녀를 도우려고 어려움을 감수했느냐는 물음에 간단한 해답이 생각났다. 굳 이 나와 결혼하지 않고도 일은 해결될 수 있었어. 그건 오로지 하나의 이유밖엔 없다. 그가 원했던 건 나와의 결혼이었던 거야! 갑작 머리가 둥둥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말도 안돼. 그건 내가 알고 있는 그와는 맞지 않아. 하지만 오늘만 해 도 그의 진정한 모습을 몰랐다는 걸 깨닫지 않았던가. 그 의미는... 대 체 무엇일까? 예나 지금이나 변한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예전에 그가 한 잔인한 행동은 지금의 자상한 그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리고 사 실 그가 아버지를 꼭 도와야 했던 상황은 아니었다.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생각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제 벌써 어머니 에게 도착했다는 전화를 했어야 했는데. 시계를 흘끗 보니 전화를 걸 기에 아직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피어스를 찾아 나섰 다. 전화기를 어디서도 보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그의 서재에 있을 거 야. 서재 앞에서 그녀는 방을 나오는 그와 마주쳤다. "날 찾고 있었소?" 그의 목소리엔 날카로운 긴장이 감돌았다. "결과적으로 그렇다고 해야 하나요? 엄마한테 전화하려고 전화기를 찾고 있었거든요. 어제 했어야 하는데." 대답을 하던 그녀는 원인 모를 무기력 감에 사로잡혔다. 아마도 그의 긴장된 얼굴 탓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녀의 대답을 들은 그의 얼굴엔 긴장이 사라지고 빈정거리는 눈빛이 되살아났다. "다른 건 없나?" 그는 당당한 몸짓으로 무거운 문 을 다시 열고 불을 켜주었다. "책상 위에 있으니 맘껏 쓰시오." "고마워요." 그가 짧게 웃었다. "고맙다니? 이건 당신의 전화이기도해. 여기 있는 모든 건 이제 당신 거요, 앨릭스. 어머니께 내 안부 전해 줘." 그는 이 렇게 덧붙이고 문을 닫았다. 다시 한번 그녀는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여기 있 는 모든 것이 내 거라고? 그 자신도 포함시킨 걸까? 만약 그랬다면,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녀는 그에게 조롱 당한 느낌이었다. 그가 쏟아 붓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난 해답을 전혀 찾을 수가 없어! 짜증스런 마음에 그녀는 생각을 포기하고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어머니는 아직 잠들지 않았고, 에밀리 페트라코스가 전화값 많이 나오 겠다는 말을 할 때까지 무려 한 시간이나 통화했다. 전화를 하고 나니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은 없지만 마음이 편해졌다. 아마도 아버지의 병 세가 시간이 다르게 나아지고 있어 이젠 걱정할 필요 없다는 소리를 들어서일 것이다. 그녀는 책상에 걸터앉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 어스의 성격을 드러내 주는 방이었다. - 기능적이면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 사방의 벽이 전부 책장으로, 책과 사진들이 정리되어 있 다. 한구석에 자리 잡은 가족 사진이 눈에 띄어 그녀는 무의식중에 일 어나 그곳으로 다가갔다. 피어스의 할아버지로 짐작되는 사진이 있었 으나, 예전의 뉴욕에서 봤던 것은 아니었다. 나머지는 그의 가족들인가 보다. 그리고 뒤편에 결혼사진이 눈에 띄어 들여다보았다가 그녀는 소 스라치게 놀랐다. 우리의 첫 번째 결혼사진이야! 그녀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피어스가 이걸 간직 하고 있다니! 대체 왜? 그건 회사를 돌려 받기 위한 계략 아니었나? 복수를 품었던 사람이... 설마? 그녀는 믿을 수 없어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그럴 수는 없어. 그건 말도 안 된다고! 그런데 바로 옆에 꽂혀 있는 한 권의 시집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그녀는 오늘 오후에 피어스가 말한 러블리스를 기억해 내고는 주저 없 이 책을 뽑아 목차를 찾았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페이지를 넘기려는데 책이 저절로 펴졌 기 때문이다. 그곳에 바로 그 시가, 마지막 부분에 붉은 선이 그어진 채 있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내 명예를 다 바쳐 그 사랑을 지키리. 사랑? 명예? 앨릭스는 별안간 다리에서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여지껏 그는 날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 건가? 그녀는 잠시 의심을 품었지만, 곧 그것이 모든 상황에 딱 들어맞는다는 걸 깨 달았다. 그 말을 믿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이미 그녀는 그를 사랑한 죄 로 대가를 톡톡히 치른 터였다.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번에는 더 이상 살아가기 힘들 거야. 하지만 날 사랑했다면 어째서 내게 말하 지 않은 거지? 그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던 거야.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 라도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마찬가지일 테니. 게다가 난 그가 사랑 고백을 할 여지를 전혀 남겨 주지 않았었다. 반대로 상처를 입을까 봐 먼저 선수를 쳤고, 그 결과 그에게서 아직 자기 말을 들을 준비가 안 돼 있다는 대답만 듣지 않았던가. 내게 장미를 선물한 것도, 내 발 밑에 마음을 놓아두기로 했다는 말도 모두 내 마음을 돌리기 위 한 진실이었어! 오, 피어스! 어쩌면 내가 억측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진실은 알아 야겠어. 어떤 방법으로든 그걸 알아야 한다. 내 미래가 달려 있는 일이 니까. 그녀는 서둘러 책을 덮고 불을 끄고 방을 나와 테라스로 향했다. 그 러나 피어스는 그곳에 없었고, 거실에도 없었다. 남은 곳은 그들의 침 실뿐이었다. 그녀는 램프 하나가 어둡게 드리운 침실 밖의 발코니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수건을 엉덩이에 두르고 있고 젖은 머리가 빛나는 걸 보니 방금 샤워를 마친 게 분명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으니 이내 신발을 벗어 던지고 카펫 위를 지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단단한 뒷모습이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앨릭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축였다. "피어스?" 그녀의 목소리는 자 신조차 듣기 힘들 정도로 낮게 갈라져 나왔다. 그는 긴장해 있지만 분 명 그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번에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에 대고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피어스?" 그는 전류에 감전된 듯한 반응을 보였다. 낮은 신음소리를 낸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그녀를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정말 지독한 여자야, 앨릭스. 당신이 영원히 오지 않을 줄 알았 어!" 그는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마음을 졸이고 있던 그녀는 그를 밀어낸 양으로 두 손으로 그의 어깨 를 잡았다. "아니에요, 피어스. 난... " 그러나 나머지 말을 그의 입술 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는 저항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격렬하게 그녀의 입술을 갈구했다. 그녀는 몸부림을 쳤으나 어쩌면 그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두 손은 마음을 배신하고 그 부드럽고도 뜨거운 피부에 매달려 그를 가까이 끌어당긴 것이다. 피어스의 만족한 듯한 신음소리에 반응 해 그녀는 그에게 키스를 되돌리고 있었고, 그녀의 귓가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입술을 떼었을 때, 그녀는 절박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남 아 있던 이성이 그녀는 자극했다. "피어스... 기다려요." 그는 고개를 들어 뜨거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미 기다릴 만큼 기다렸소, 앨릭스. 우리 둘 다 원하던 일 아니오?" 그가 꽉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도 목이 메었다. 그의 말이 맞아. 이렇게 우리가 한마음이 된 게 얼마 만인가. 그녀의 이성은 다급한 욕망에 그 힘을 잃었다. "그래요." 그녀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우리 둘 다 원하고 있어요." "당신을 원해, 앨릭스. 오늘밤 내가 당신을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모 를 거야!" 그는 그녀의 목에 대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앨릭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절박하게 그에게 매달렸다. 어느 사이엔가 그녀의 옷이 벗겨졌다. 그는 그녀를 안아들어 침대에 눕힌 후 수건을 벗어 던졌다. 그의 맨살에 닿는 흥분은 다른 아무런 생각도 떠올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뿜어내는 아찔한 열기에 몸을 밀착시키는 자체도 만족할 만큼 좋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곡선을 더 듬어 올라가다 가슴에서 멈추었고, 곧 그의 입술이 뒤따랐다.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온몸을 자극하는 쾌락에 그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성 같은 건 필요 없어. 난 이걸 원했던 거야. 그의 애무에 미친 듯 이 반응하며 갈망했던 감정을 분출하던 그녀는 결국 자신이 아직도 그 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의 단단한 피부에 닿는 느낌 으로 정신이 아득해진 그녀는 예전처럼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 다는 걸 알리듯 신음을 흘리며 그에게 몸을 가까이 움직였다. 그녀는 그를 향한 갈망을 불타올라 있었고, 그녀의 몸이 그것을 분명 하게 전달했다. 그가 두 손으로 그녀를 감싸안고 달래듯 어루만지기 시작하자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마지막 순간에 문득 불안감에 휩싸여 이건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니 라고 저항하려 했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긴장하고 있었고, 그가 몸안 으로 격렬하게 파고들자 그런 불안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녀는 가쁜 호흡으로 그의 깊고 강렬한 힘을 받아들였다. 너무도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그들의 격렬한 욕망은 순식간에 절정으 로 치달았다. 환희의 비명을 지르며 피어스가 그녀의 위로 털썩 엎드 렸고, 쾌락으로 충만한 그녀는 힘없는 팔을 들어 그의 어깨를 감싸안 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그렇게 안고 있고만 싶었다. 그들이 나눈 것은 너무도 격정적이고 경이로웠다. 생각은 나중으로 미루자. 피어스의 숨이 고르게 되자 앨릭스는 그가 잠이 들었는지 궁금했다.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자세가 거북하게 느껴져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아래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어느새 커다란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감싸안았다. "안돼!" 그가 다급하게 중얼거렸다. "이젠 아무 데도 보내지 않을 거 야." 앨릭스는 노골적으로 드러낸 그의 진심에 한순간 숨을 멈췄다. 갑자 기 마음속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눈물이 솟아올랐다. 언제나 확신에 차 있는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긴 어려웠다. 그는 날 무척 아끼 고 있어. 하지만 이게 사랑일까? 그건 모르지만 이걸로도 충분하다. 지 금까지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나왔다. "난 아무 데도 안 가요. 그냥 당신이 무거워서 그래요." 그는 몸을 굴리며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 그러 나 그는 그녀를 감싸안았다. 앨릭스는 더할 나위 없는 안락함을 느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든 아 니든 상관없이 그의 품안은 편안했다. 그러나 그녀는 하느님께 제발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더 이상 그를 향한 사랑을 숨 길 수 없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녀의 눈꺼풀이 무겁게 잠겼다. 내일이 면 알 수 있겠지. 내일이면. 그들은 귀에 익은 소음에 잠을 깼다. 피어스가 먼저 꿈틀거리는 바람 에 앨릭스도 어쩔 수 없이 살아 있는 아침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그 의 품에 안겨 있었지만, 그녀가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전에 피 어스는 그녀를 남겨 두고 참대에서 빠져나갔다. 그녀는 팔꿈치를 괴고 일어나 잠이 덜 깬 눈으로, 창가로 다가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 다. "뭐예요?" 소리의 정체를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그의 몸의 곡선과 단단한 근육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피어스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어깨를 반듯이 폈다. "헬리콥터요." 그의 우울한 목소리에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아 그를 주시했다. 그가 헬리콥터의 출현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는 걸 깨달은 그녀는 얼 굴을 찡그렸다. "당신은 알고 있던 일인가요?" 창가에서 돌아선 피어스는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가운으로 손을 뻗었다. "내가 어젯밤 불렀소. 늦잠을 자게 될 줄은 몰랐지." 알고 있었다면서 더 이상의 설명을 않는 그의 태도에 까닭 모를 불안 감이 들었다. 앨릭스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 "그런데 왜 부 른 거죠?" 피어스가 그녀를 흘끗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신혼여행은 끝난 것 같 소, 앨릭스." 감정이 배제된 그의 말투에 문득 그녀는 설명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 잡혔다. 5년 전 그날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의식의 가장자리를 맴돌며 괴롭히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려고 애썼다. 난 아직 어젯밤의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그건 무슨 의미죠?" 피어스의 턱이 긴장으로 단단히 굳었다. "그건 어서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짐을 챙기라는 의미요. 나머지는 나중에 도착할 거요." 나쁜 사람, 날 잔뜩 겁에 질리게 했어! 앨릭스는 안도하며 떨리는 웃 음을 지었다. "그럼 함께 간다는 소리군요? 어디로 가는지 알려줘요. 그래야 알맞게 짐을 싸죠." 그가 불쑥 고개를 들어 잇새로 소리를 내며 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영국으로 돌아가는 거요." 그에게 진자로 한 대 맞았다고 해도 이보다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 이다. 앨릭스는 시트를 꼭 움켜쥐었다. "날 보내려는 거예요?" 그녀는 믿을 수 없어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물었다. 그는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일어나요. 시간이 없어. 이미 너무 낭비했다고." 시간을 낭비해? 우리가 사랑을 나눈 걸 시간낭비라고 말하는 거야? 그 말에 한 대 더 얻어맞은 기분이었지만, 이번에는 충격에서 벗어났 다. 그 끔찍한 비극이 되풀이 되도록 내버려 둘 순 없어. 이번엔 절대 로 바보처럼 당하지만은 않을 거야. "왜죠?" "뭐가 왜야?" 그가 짜증을 내며 되물었다. 분노의 덩어리가 그녀의 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왜 날 보내려는 거 냐고요?" "할 일이 있어서. 당신이 여기 있으면 방해만 돼." 한순간 감정이 그녀를 지배할 뻔했으나, 이젠 나이도 더 들고 지혜도 생겼다. 머리를 울리는 종소리가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할 일이 있다고? 어젯밤까지만 해도 이곳은 단순한 신 혼여행지였어. 그런데 아침이 되니 날 떨쳐 버리려고 해? 대체 그 사 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신, 거짓말하고 있는 거죠? 어제 내게 말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 있는 거예요." 그녀를 밖으로 몰아내려는 그의 생각에 발끈한 앨 릭스는 도전적으로 말했다. "모든 게 다 그 전화 때문이에요. 그렇죠? 왜 나한테는 말을 안 하는 거예요? 난 알 권리가 없나요?" "당신이 필요 없다는 말을 해서 충격을 줘야겠소?" 그가 쌀쌀맞게 말 했다. "그럼, 짐을 싸서 내쫓는 일로는 충격을 덜 받을 거라 생각했나요?" 앨릭스는 격분하여 응수하며 침대에서 기어 나와 가운을 집어들었다. "이렇게 쓸데없는 말싸움은 정말 피하고 싶어." "쓸데없다고요?" 그녀는 조소를 띠며 말했다. "천만에, 그 반대예요. 당신이 날 이렇게 취급하는데, 어떻게 내가 당신을 믿을 수 있겠어요? 이 작은 문제에 대해 말을 안 해 주는 이유가 대체 뭐죠?" 피어스의 시선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당신이 알아야 할 건 다 말 해 줬어." 그의 고집스런 태도는 그녀의 화를 돋울 뿐이었다. "당신은 내가 알 게 되기를 바라는 말을 해줬겠지만,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요! 내 가 당신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난 나대로 갈 데가 있어. 사업상 일이라서 당신을 데려가고 싶지 않 아." "그건 뭔가 위험한 일을 한다는 뜻이겠죠." 그녀는 차가운 기운이 등 골로 타고 내려가는 것 같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주위를 제대로 보지 않으면 길을 건너는 일도 위험하지." 그의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는 그녀의 분노를 가중시킬 뿐이었다. 여 자를 얕잡아보는 듯한 그 말투 또한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었다. 난 그보다 나은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어. 앨릭스는 그에게로 성큼성 큼 다가가 그의 옷깃을 잡았다. "날 바보 아이로 취급하는 일은 그만 둬요, 피어스. 어디로 가는지 말해 달라고요!"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으나 그것을 떨쳐낼 생각은 없는 것 같 았다. "내가 당신에게 말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어." "좋아요, 말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난 당신 아내예요, 피어스 마르 티노. 난 여태껏 길을 건너며 살았어도 무사했어요. 당신이 가는 곳이 면 나도 갈 거예요!" 한순간 그들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결국 그는 참고 있던 화를 터뜨리며 그녀의 손목을 쥐고 흔들었다. "이 고집쟁이! 당신은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앨릭스는 호전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어디 한번 날 저지해 보시라 고요!" 피어스는 분노를 자제하며 빈정거리는 시선을 번뜩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그렇게 날 피하려고 애쓰더니 이젠 거머리처럼 내게 달 라붙어 있으려고 하다니. 무슨 심경의 변화요?" 그의 비아냥거림은 면전에서 충격을 주고자 하는 계산된 행동이었지 만, 그녀는 그 계략에 넘어가지 않았다. "혹시 어젯밤의 일을 잊어버린 건 아니겠죠?"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그는 소리나게 숨을 들이쉬었고, 그의 얼굴에는 깊을 주금 이 패었다. "그만 하라고, 앨릭스." 그는 험악하게 경고했다. "당신이 먼저 시작한 거예요. 당신이 먼저 명령했잖아요! 난 정당한 이유 없이는 명령에 따를 수 없어요. 결혼은 서로를 존중해 주는 거예 요. 난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에요. 사실대로 말해도 놀라 뒤로 넘어 지지 않는다고요. 당신이 내가 가지 못할 정당한 이유를 대지 않는 한 죽어도 쫓아갈 거예요!" 그녀는 단호하게 외쳤다. 그는 그녀의 손을 놓고 어깨를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이 바보야, 잘 들어. 이렇게 말다툼을 벌인다고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그럼, 다투지 않으면 될 거 아니에요." 피어스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그녀를 밀쳐내고 뒤로 물러났다. "이러 고 있을 시간이 없어. 당신은 나와 함께 가지 않아. 얘기 끝났어." 분노와 상처가 그녀를 파고들었다. 이런 식으로는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어.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무턱대고 명령만 내리다니. 내가 자기를 믿어 주길 바란다면 사실을 말해 줘야 하는 거야. 정말 너무해. 내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전혀 모르는 걸까? 그가 입을 다물수록 불안감만 쌓일 뿐이야!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다면, 어떻게든 돕고 싶어. 위험 이 도사리고 있는 일이라면 함께 나누고 싶어. 젠장, 난 그를 사랑해. 어떻게 그가 사자굴로 혼자 걸어 들어가는 걸 바라만 보고 있으라는 거야. "아무런 이유도 대지 않고 날 보내라고요, 피어스. 그럼 당신은 두 번 다시 날 보지 못할 거예요!" 그 말을 꺼낸 앨릭스 자신이 놀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피어스는 충격을 받고 동상처럼 굳었다. "날 위협하는 건가, 앨릭스?" 오싹할 만치 부드러운 어조였다. 앨릭스는 백짓장처럼 새하얘졌지만, 후회해도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기엔 늦었다. 그를 회유하는 방법으론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 저 말을 하게 하고 싶었을 뿐이다! 시작을 했으니 계속 밀고 나갈 수 밖에 없다. "맘대로 생각해요!" "그럼, 난 그 말에 까딱도 하지 않을 거요." 그녀는 숨을 삼켰다. "그야말로 협박이로군요?" 피어스의 미소는 차가웠다. "어쨌든 당신은 짐을 싸야해. 아테네 섬으 로 가면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거요." "그럼, 이제 끝인가요?" 그녀는 목 멘 소리로 말했다. "그건 당신이 결정할 일이오, 앨릭스."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도 눈치챘을 것이 다. 어젯밤 따뜻했던 사람의 약속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어떻게 이토록 갑자기 모든 게 끝날 수 있지? 그녀는 참담한 심정으로 시간을 되돌리고픈 생각에 매달렸지만, 실제로 말은 그렇게 나오지 않았다. "아뇨, 당신이 결정해요," "난 이미 결정했소."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으나 그녀는 단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억눌렀다. "그럼 어젯밤의 일은 당신에겐 아무 의미도 없었나요?" 한동안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천만에, 그걸 완전한 작별이라고 말 해도 좋소. 자, 더 할말이 없다면 난 가서 누가 왔는지 봐야겠어." 그 는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충격에 빠진 앨릭스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의 최 후통첩을 실제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진심으 로 한 말이 아니란 걸 설마 몰랐을까?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할 수 없어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이렇게 빨리 끝나 버리다니 말도 안 돼. 난 다만 그와 함께 가고 싶다고 했을 뿐인데. 이건 악몽이야. 주위의 모든 것이 일그러져 보였다. 어젯밤만 해도 모 든 걸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정말 너 무해! 도대체 왜 그토록 고집스럽게 행선지를 밝히지 않는 걸까? 그녀 의 충격은 금세 분노로 변했다.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무조건 못 가 게만 하는 건 말도 안돼. 어젯밤엔 두 번 다시 날 보내지 않겠다고 말 해 놓고선 아침에 일어나서 잘 가라고?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아. 그 순간 그녀는 해답을 찾아내고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맞아, 내 발끈하는 성질을 이용해서 아무 말도 못하게 꾸민 거야! 그걸 깨달은 그녀의 마음이 다시 희망으로 부풀어올랐다. 그녀는 이를 갈며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옷을 집어들고 욕실로 향했 다. 샤워를 하고 재빨리 청바지와 셔츠로 갈아입은 그녀는 빗질도 제 대로 하지 않았다. 피어스가 뭐라고 하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 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짐을 싸서 가방을 침대 위에 올려 놓았다. 저걸 갖고 간다 하더라도 영국으론 가지 않을 거야. 앨릭스는 한 바탕 전쟁을 치를 각오를 단단히 하고 거실로 들어갔다. 피어스는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흰머리의 키 큰 남자와 대화를 나누 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가자 둘 다 그녀에게 주목했다. "앨릭스, 이쪽은 내 오른팔인 팻 데닝이오." 피어스가 냉랭한 목소리 로 소개했다. "드디어 만났군요. 반갑습니다. 마르티노 부인." 팬 데닝은 친근한 텍 사스 사투리를 쓰며 악수를 건넸으나, 그의 미소에는 희미하게 긴장이 서렸다. "남편과 떨어지게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그녀 역시 긴장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난 아무 데도 안 갈 거 니까요." 그녀 옆에 서 있던 피어스가 날카롭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 문제는 이미 해결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앨릭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지만, 사실은 태연하려고 상당히 애를 썼다. "내가 거짓말했다는 거 알 텐데요." 그들의 눈동자가 침묵 속에서 치열하게 맞부딪쳤고, 그 누구도 물러 서지 않았다. 피어스의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난 거짓말한 게 아니었어." 그는 그 녀에게 돌아섰다. "제발, 앨릭스, 내가 후회할 일을 하지 않게 해줘!" 그가 차갑게 경고했다. 그녀의 표정은 고집스럽게 변했다. "당신이 뭘 후회하는지 몰라도 난 안 믿어요! 내게 정당한 이유를 설명하기 전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이 턱이 다시 꿈틀거렸다. "내가 뭘 말해 주길 바라는 거요, 앨릭 스? 당신에게서 원하는 건 다 가졌으니 이젠 떠나 달라는 말을 듣고 싶소?" 잔인하기 그지없는 말에 그녀는 분노로 피가 끓었다. 5년 전이라면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겠지만, 이번에는 그의 눈동자에 감도는 미 묘한 긴장의 빛을 분명 목격했기 때문에 이대로 물러설 수가 없다. "당신 말은 믿지 않아요." 그녀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날 이 섬에서 나가게 하려면 내 정신을 잃게 하는 수밖에 없을 거예요." 피어스는 거친 숨을 길게 내쉬었다. 팻 데닝의 느긋한 말투가 침묵을 깨뜨렸다. "시간이 없습니다, 보스." 그의 말에 앨릭스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동시에 피어스가 중얼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제기랄!" 그리고 그의 주먹이 날카롭게 얼굴에 닿았다고 느낀 순간 그녀의 의식이 잃었다. 피어스가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덜어지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괜찮 을 거야. 세게 치지는 않았으니까. 가방은 침실에 있을 테니, 내가 앨 릭스를 헬리콥터에 데려다 놓는 동안 자네가 대신 가져다주겠나?" 그 늘이 잔뜩 드리운 얼굴로 그는 그녀를 밖으로 옮겨 대기중인 헬리콥터 에 태우고는 그녀의 턱에 생긴 멍을 어루만졌다. "젠장, 앨릭스. 언제 까지 나와 싸우기만 할거요?"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헬기에 올라 타는 팻 데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팻 데닝은 확신이 안 서는 눈빛으로 피어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이 래도 괜찮겠어요, 보스?" "어서 그녀를 데리고 여길 빠져나가 주겠나, 팻. 꼭 안전하게 지켜 줘 야 하네." 팻은 파일럿에게 손짓을 보내고는 커지는 엔진 소리에 맞춰 목소리를 높였다. "걱정 마세요. 하지만 돌아오실 때까지 제발 무사해야 합니다. 나중에 뵙죠, 보스." 10 앨릭스는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정신을 차렸다. 턱이 몹시 아프고 머 리는 미친 듯이 둥둥 울려댔다. "괜찮으세요, 부인?" 옆에서 들리는 근심스런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돌아보 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로 알아낸 건 여기가 헬리콥터 안이라는 사실이 었다. 순간 모든 일이 기억에 되살아났다. 난 떠나기를 거부했고, 피어 스가 경고의 말을 했었다. 그리고 그가 날 한 대 쳤어. 턱의 통증이 심해지자 그녀는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는 주위 를 계속 둘러보았다. 그녀의 앞에 파일럿이 있고 옆에는 금발머리 거 인이 앉아 있었으며, 창밖으로는 섬이 보이고 푸른 바닷물이 출렁거리 고 있다. 게다가 떠나는 그들을 지켜보고 서 있는 피어스의 모습이 하 나의 점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문득 손을 더듬어 자신을 붙들 어 주고 있는 벨트를 만지며 그것을 풀려고 애썼다. 지금 물 속으로 뛰어들면 헤엄쳐 갈 수 있을 거야! 난... 강한 손이 그녀를 붙들어 제자리에 앉혔다. "가만히 계십시오, 부인. 피어스는 당신이 무사하길 바란다고요." 앨릭스는 화가 난 눈을 번뜩이며 경호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 은 도대체 누구예요?" 거인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펫 데닝이라니까요. 아까 인사도 했잖 습니까. 아마 턱에 계란 크기 만한 멍이 들 겁니다. 쯧쯧!" "그가 날 때렸어!" 그녀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내가 보기엔 큰 실수를 한 것 같지만, 그가 저보다 당신을 더 잘 아시니까요." "그를 죽여 버릴 거야!" 앨릭스는 화를 폭발시키며 소리쳤으나 곧 두 뇌회전이 가능해졌다. 그를 자극한 건 나야. 결국 그에게 선택의 여지 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 거라고! "정말 그러고 싶을 것 같군요." 팻 데닝이 짤막하게 거들었다. 화가 나는 와중에도 앨릭스는 그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충동 을 느꼈으나 이를 악물었다. "날 섬으로 돌려보내 줘요." "그건 안됩니다, 부인. 전 이미 명령을 받았거든요." 그녀는 그를 매섭게 흘겨보았다. "그 사람은 어딜 가는 거죠?" 어떻 게든 뒤를 쫓아갈 수 있겠지, 비행기를 타면. "죄송합니다만, 그것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 "정말 말 안해 줄 거예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안될 것 같은데요." 그녀의 입술이 조소로 일그러졌다. "당신에겐 뭐뭐 같을 것도 참 많 네요. 피어스가 그래서 당신을 고용했나요?" "그런 것 같아요." 그는 대답했다. "여자를 납치하는 일이 당신 임무예요?" 펫 데닝은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주시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부 인. 힘센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무슨 공격을 당할지 모른다고 요." 앨릭스는 점점 침착을 되찾으며 앞의 남자를 구워삶기로 작정했다. "명심하겠어요. 그런데 피어스가 어딜 간다고요?" 그는 못 당하겠다는 듯 그녀를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주 야 비한 게임을 하시는군요, 부인. 좋아요, 사실을 말하자면, 피어스는 어 디에도 가지 않아요." 그건 정말 예상도 못했던 대답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그럼 건설회 사 얘기는 뭐예요?" 팻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그 회사는 중앙 아프리카에 작 은 댐을 짓고 있죠. 하지만 그건 이 일과는 무관해요. 이탈리아에 있는 그의 형이 그저께 원한을 품은 웬 미치광이에게 총격을 당했어요. 그 러고 나서 그 녀석은 사라졌는데, 아무래도 피어스에게 접근하려는 것 같아요. 피어스의 계획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그가 나타나면 붙잡자는 거죠." 그녀의 날카로운 숨소리를 듣고 그는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부인도 알 권리가 있는 것 같아요." 앨릭스는 창밖을 내다보며 피어스가 혼자 위험한 곳에 내버려져 있다 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욕지기가 올라왔다. 그건 가만히 앉아서 죽기 를 바라는 거나 다름없어! "왜 내겐 말해 주지 않았을까요?"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답니다." "걱정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고?" 그녀는 결국 비명을 질렀다. 그 사 실을 알면 내가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정말 정신이 나갔나 봐! "나한테 말을 해줬어야 했어요!" "그렇게 생각해서 그에게 말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어요. 당신은 섬의 안전한 곳에 숨어 있으면 된다고 말했지만, 그는 안전하게 섬을 떠나 기를 바랐죠." "오, 하느님!" 피어스의 생각이 맞아. 난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떠나 지 않겠다고 우겼을 거야. 그래도 내겐 솔직히 말했어야 해. "너무 화내지 마세요, 부인. 불쌍한 피어스는 당신이 걱정하는 것 따 위는 아예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팻은 아저씨 같은 따뜻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 앨릭스는 얼굴을 찌푸리고 창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건 또 무슨 소 리예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그 선박회사 말입니다. 우린 그것이 한푼의 가치도 없다고 설득했지만, 그가 듣기나 했겠습니까? 그걸 보물단지라도 되는 양 제값을 다 주고 사더니 똑같은 돈을 들여 모두 수f;를 했지 뭡니까. 정신이 나갔지! 하 지만 그는 우리한테 말도 못 붙이게 했어요." 앨릭스는 어안이 벙벙하여 눈말 깜박거렸다. "지금 페트라코스 선박 회사를 말하는 건가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공짜로 그걸 가졌어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난 절대로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어. "숙녀분과 언쟁을 하기는 싫지만, 부인이 틀렸어요. 내가 직접 서류 작성을 도왔고, 판내 가격도 봤다고요." 그녀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머리가 온통 거꾸로 뒤집히는 기분 이었다. 피어스는 그 배를 산 거야. 다시 돌아가서 그걸 샀어! 하지만 왜? 이미 날 대가로 주고받지 않았던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었지만 한 가지 의미를 확실히 깨달았다. 큰 대가를 치르고 회사를 샀 다던 그의 말. 팻 데닝의 말대로라면, 엄청난 가격을 지불했을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내게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 일로 이용당하고 깊은 상처받았다는 걸 아시면서도 내 자존심보다 돈 이 더 중요했던 거야! 그동안 난 피어스가 나와 회사를 교환했다고 생 각했고, 할아버지는 내가 그대로 믿도록 내버려 두었어. 내가 안드레아 스 가문의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말해줘서 고마워요, 팻." "도움이 되기만 바랐을 뿐입니다. 피어스가 예전처럼 자신을 학대하 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거든요. 그는 뼈만 앙상하게 남도록 일만 해서 우릴 걱정하게 만들었죠. 당신이 떠난 건 모두 자기 잘못이었다 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그것만이 모든 걸 제자리에 돌려놓는 길이라고 하더군요. 그가 결국 당신과 결혼한다는 말을 했을 때, 그게 효과가 잇 었다는 걸 알았죠. 그러니 그가 가까스로 얻은 기회를 망쳐 버리고 싶 어하지 않으리라는 건 놀랄 일이 아니라고요." "그가 왜 그런 생각을 하죠?" "아무래도 아무개 여자는 자신을 때려눕힌 남자를 용서해 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장난기 어린 표 정을 지었다. 앨릭스는 그의 장난스런 표정을 보면서도 섬에 홀로 남아 있는 피어 스를 웬 미치광이가 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그가 만약 죽는다면 난 용서할 수도 없잖아요?" "너무 앞질러 생각하지 마세요. 피어스를 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아마 당신이 그를 죽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될걸요!" 앨릭스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제발, 하느님!" "그럼 나도 아멘." 다시 한번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이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 다. 불안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난 이제 어떡해야 하죠?" "피어스가 원하는 대로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에요. 그는 당신이 걱정 하지 않기를 원했어요. 영국으로 돌아가서 기다리세요." 앨릭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기다리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기다리며 기도하는 거란 말인가? 24시간이 흐른 후, 앨릭스는 서성거리다가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무래도 마르티노 건물 안의 피어스 사무실 위에 있는 그의 집 카펫 바닥이 그녀로 인해 다 닳아 버릴 것 같다.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영국으로 가지 않았다. 무론 팻은 그녀를 공항 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었지만, 그는 다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그 다 음에 그녀가 표를 바꿔 뉴욕으로 방향을 튼 사실은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말싸움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녀가 오로지 추측할 수 있는 건 피어스의 소식을 이곳 뉴욕의 그의 사무실에서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을 거란 사실이었다. 처음 계획은 그 의 아파트에 가서 - 그녀에겐 괴로운 추억이 있는 곳이지만 - 사무실 을 빈번하게 들락거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웃의 말에 따르면 그 아 파트는 아주 오래전부터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낙심한 그녀는 호텔을 알아보다가 문득 피어스가 그의 사무실 위에 자기 아파트가 있다는 말 한 걸 기억해 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땐 늦은 시각이었지만, 경비원은 그녀가 누군지 알고 난 후 기꺼이 안으로 들여다보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이 지루한 기다림이 시작된 것이다. 비행기 여행은 긴장 되긴 했지만 최소한 그 안에서는 할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가 만히 앉아서 손톱만 물어뜯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게 되면 자연히 소문만 무성하게 퍼질 터였으므로 결국 그녀는 그의 비서 에게 전화를 걸어 쇼핑여행을 온 척하고 피어스에게서 연락이 오면 아 파트로 곧장 알려 달라는 말을 전했다. 그러나 하루종일 아무런 소식 이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근심은 도를 더해 잔뜩 겁에 질리 게 만들었다. 그는 지금 어디 있을까? 어떻게 됐을까? 그의 얼굴이 보고 싶고, 또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침묵은 좀처럼 깨어지지 않았다. 팻 데닝이 한 말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듣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가 나를 어떻게 느끼는지 그의 진실 된 고백을 들을 수 없다고 해도 좋다. 제발, 살아만 있어 준다면! 어디서부터 그들의 엇갈림이 시작되었는지 그녀는 알 수없었다. 설명 을 요하는 일이 너무 많아 그녀로선 감히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도대 체 왜 그는 그런 일을 햇을까? 무슨의도로? 머릿 속에 수만 가지 의 문이 감돌았다. 앨릭스는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닫는 줄을 잡아당겼다. 위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자 자신이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 다. 그때까지 뭘 먹는 것에까지 신경을 쏟을 수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 자학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그녀는 이렇게 결심하고 부엌으로 들어 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만들어 먹었다. 하품을 하면서도 앨릭스는 걱정이 앞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특히나 두 사람 용인 널찍한 침대를 보니 외로움만 가중될 뿐이었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실크 가운을 두른 채 거실로 나왔다. 텔레비전에서는 오 래된 영화가 상영중이었다. 그녀는 볼륨을 높이고 소파 한구석에 웅크 리고 앉아 어둠 속에서 화면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로한 몸은 축 늘어져 눈꺼풀이 잠겼고, 어느 사이엔가 잠이 들어 버렸다. 몇시간이 지나서 아주 밝은 빛을 감지한 그녀는 실눈을 뜨고 눈을 깜 박이며 잠에서 깨어나, 눈앞에 유령처럼 서 있는 커다란 물체를 발견 했다. "앨릭스?" 피어스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의심을 가득 품은 목소리 로 갈라져 나왔다. 그 말에 그녀는 갑자기 잠이 확 깨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는 지친 모습이었다. 턱 주위에 수염이 거뭇거뭇하고, 옷차림은 며칠을 갈아입 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가 경이로워 보인 적은 없 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요?" 그를 바라보는 앨릭스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우두커니 서 있는 그 의 모습이 뭔가 경계를 불러 일으켰다. "아파트에 갔더니 비어 있었어 요. 당신이 이곳 얘기를 했던 게 기억나서 이곳으로 왔죠. 경비원이 들 여보내 줬어요." 그녀는 입술을 축이고 설명했다. 받을 가로질러 다가오며 피어스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예 전에 팔았어." 그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듣지 못한 미묘한 감정이 배어 있고, 그의 눈동자는 그녀를 다시 만나리라는 예상을 포기했었던 듯 휘둥그레져 있었다. 앨릭스는 두 사람이 서로의 감정을 전달하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연극을 하는 기분이었다. "왜죠?" "당신이 떠난 후에 거기서 도저히 살 수가 없었소. 들어갈 때마다 그 곳에서 일어났던 일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데 어떻게 지낼 수 있었겠 어." 피어스는 마치 기억하기 싫은 악몽을 떨어버리듯 어깨를 부르르 흔들었다. 그는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버리고 문을 닫더니 앞으로 다가왔다. "앨릭스, 젠장,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지?" 그녀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실크 가운 자락을 여몄 다. 이건 내가 기대하던 장면이 아니야. "말했잖아요. 아파트엔 들어갈 수가 없어서... " 그는 성큼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여긴 미국이잖아. 당신은 영국에 있었어야 했다고!"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눈을 깜박거리며 신경질 적으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나도 알아요. 하지만 거긴 너무 멀었다고 요! 여기 있으면 어떤 소식이든 가장 빨리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했어요. 당신이 괜찮은지 알고 싶었다고요." 그제서야 그는 그녀에게서 손을 떼었다. 그의 얼굴은 너무도 지쳐 보 였다. "정말 돌아 버리겠어. 당신이 영국에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내 심정이 어땠을지 생각해 봤어? 아무도 당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난 지옥에 빠져서 미친 듯이 당신을 찾아헤맸는데, 당신은 여기 앉아 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녀는 멍하니 얼어붙었다. "난... 몰랐어요." "당신을 한 대 치면서 내게로 돌아오게 할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난 어떻게든 노력하겠다고 작정했어." 그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사라졌을 때, 난 거의 정신이 나 가 버렸었다고!" 이제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현실의 그녀 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젠장, 앨릭스, 대체 언제쯤이나 돼야 내가 당 신을 사랑한다는 걸 깨달을 거요?" 잠시 방이 거꾸로 뒤집히는 기분이었으나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 렸다. 이런 순간에 기절을 해선 안돼. "당신이 내게 말했을 때는." 그 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꺼내다가 별안간 화를 냈다. "제기랄, 피어 스! 난 독심술사가 아니라고요. 내가 얼마나 그 말이 듣고 싶었는지 알기나 해요!" 그녀의 울음 섞인 외침에 피어스는 움찔하며 고개를 들고는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방금 말했잖소." "그래요, 들었어요." 그는 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간절히 그 말을 듣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시인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전에 받 은 상처 때문에. 그녀의 침묵에 피어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몸을 홱 돌려 이젠 조용해진 텔레비전 앞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난 이미 오래 전에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권리를 포기했 지. 안 그런가?"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젠장, 당신을 내게 보낸 건 신의 장난인 게 틀림없어!" 그의 말투에 담긴 고통과 자기혐오에 그녀의 가슴은 미어졌다. "그만 해요, 피어스!" 그녀는 괴로움에 소리를 지르다가 새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보고 날카롭게 숨을 들이쉬었다. "뭘 그만 하라는 거요? 내 자신을 증오하는 걸? 그렇다면 누가 날 비 난해 주지, 앨릭스? 당신의 마음에 비수를 꽂고 달아난 사람이 누구냐 고? 그건 모두 내 탓이오. 난 어떤 벌을 받아도 마땅해. 난 당신과 결 혼할 때도 당신을 사랑했소. 당신을 파멸시킬 때조차도 당신을 사랑했 어. 그리고 그 이후로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날은 없었어. 난 죽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할 거요." 자신도 모르는 새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적셨다. 앨릭스는 무기 력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어스, 그렇다면 왜...?"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피어스는 고통스러운 듯 눈을 질끈 감 았다 떴다. 그러고는 그녀에게로 다가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내렸다. "당신을 만났을 땐 모든 게 너무 늦었소." 그가 잠긴 목소리로 고백 했다. "내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 내게 야니스 페트라코스에게 복수를 해달라는 부탁을 하셨지. 그때는 회사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 슨 수라고 쓰겠다고 다짐했었소. 바로 당신이 존재한다는 걸 알기 전 의 일이지. 내 행동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소. 난 야니스에게 손 녀딸이 하나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지. 법적으로 회사는 사들이는 데 실패했던 난 그녀를 미끼로 삼기로 작정했소. 내 명예가 달린 일이라 고 생각했으니까. 이해하려고 노력해 줘요. 난 야니스가 우리 가문 사 람에 의해 그의 손녀가 치욕을 당했다는 걸 알게 되면 상당히 언짢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그렇게 되면 그는 그 일을 무마시키려고 내게 손을 뻗을 것이고, 난 회사를 차지하게 되는 거였지... 잔인하긴 하지만 간단했어... 하지만 그것도 당신을 만나기 전의 생각이었소..." 그는 숨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을 보자마자 첫눈에 사랑의 빠져 버렸소. 그렇게 순수하고 기품을 지닌 여자를 실제로 마주하게 되다니, 정말 내겐 충격이었소. 그때부터 난 고민하기 시작한거요. 내 상황을 바꿀 수만 있다면 내 모 든 걸 주고서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지. 이미 난 약속을 한 터였소. 찢어지는 고통을 무릅쓰고서라도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시켜야 했소.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이라곤 날 죽도록 미워하게 만드는 것뿐이었소. 그 증오가 평생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는 거 였어. 당신은 그날 이후로 당신 내부의 무엇인가가 죽음을 당했다고 말했지. 나도 마찬가지였소. 당신을 파멸시킨 내 죄를 용서받을 수 없 다는 걸 알면서도 난 당신을 보낼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난 스스로에게 약속했지. 언제까지나 당신을 지켜 보겠다고. 그래서 언젠가 당신이 곤 경에 처하게 되면 도움을 주고, 내 사랑을 되찾을 기회를 만들고야 말 겠다고." 그의 설명을 듣자 그동안 앨릭스를 괴롭혔던 수많은 질문들이 하나씩 풀려 나갔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나 만큼, 아니 나보다 더 고통 속 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건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는 자기의 죄를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희망은 의구심을 완전히 정 복하지 못했다. 나는 그 느낌을 확실히 알지 못해. 마침내 고개를 쳐든 그녀는 그의 푸른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나와 결혼한 건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원한다면 자유도 당신 선택이오." 이제 그녀가 말할 차례였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당신은 할아버지를 굉장히 사랑했나 봐요." 피어스는 말을 꺼내기 전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랬지. 하지만 당신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그분을 알았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부터 우리 형제를 키워 주셨지. 그러니 내가 그분에게 충성 하지 않을 수 었었던 거요." 앨릭스는 여지껏 살아오면서 그리스인 가족이 얼마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을 용서할 수 는 없지만 적어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피어스는 빚을 돌려받기 위해 그녀는 이용했지만, 그 결과 그는 그녀에게 신의를 바친 것이다. 이제 는 러블리스의 시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 그가 그렇게 명예를 지 키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날 이토록 사랑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녀는 눈을 들었다. "난 당신을 증오해야 해요." 그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대접을 받아도 싸." "그리고 당신을 절대로 용서 못한다고 말해야 해요." 그의 푸른 시선이 그녀에게 꽃혔다. "지금 그렇다고 말하는 거요, 앨 릭스?" 다시 한번 그녀는 완전히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는 자신과 마주쳤다.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믿죠?" "행여라도 당신에게 상처 주는 일이 또 일어난다면, 그땐 내 목숨을 내놓겠소." 피어스의 단호한 결의에 그녀의 마음에 안도감이 밀려 들었다. 앨릭 스는 생각을 더듬는 듯 턱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럼 날 때려눕힌 건 어떻게 설명할래요?" 피어스는 긴장하며 근심스런 눈으로 그녀의 턱을 바라보고는 손을 들 어 그녀의 손을 치우고 살며시 어루만졌다. "당신이 안전하길 바랐어, 앨릭스." "그래도 내게 귀띔은 해줬어야 했어요, 피어스." "당신이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겠 지. 당신이 어디든 위험한 곳에 간다면 나도 당신한테 붙어서 떨어지 지 않았을 테니까. 내 말을 틀린가?" 그가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의 얼 굴을 바라보았다. "아뇨." 그녀의 손을 뻗어 그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그 사람은 잡았 어요? 이젠 안전한 건가요?" "팻이 말해 줬소?" "그는 내가 알 권리가 있다고 했어요. 하지만 당신에게 직접 들었더 라면 더 좋았을 거예요." 그는 한숨을 지었다. "용서해 줘. 내겐 당신이 섬을 멀리 떠나는 일이 제일 중요했어." "그럼, 어디 다친 데가 없어요?" 그녀의 시선은 상처를 찾느라 정신 없이 움직였다. "그놈이 내게 다가오기도 전에 경찰이 먼저 잡았어. 더 일찍 이리로 올 수도 있었지만 경찰에 가서 질문을 받고, 또 형하고도 얘기를 하느 라고 좀 늦은 거요." "난 당신한테 형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이렇게 간단한 사실 도 모르면서 어떻게 서로 마음이 통하는지 의아했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피어스는 미소지었다. "당신과 단둘이 있으면 일상적인 대화조차 필요가 없어진다고. 당신에게 숨길 일은 아무것도 없소. 난 형이 하나, 여동생이 둘 있고, 모두가 당신을 만나기를 고대 하고 있지." 앨릭스는 깜짝 놀랐다. "그분들이 날 알고 있단 소리예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든 걸 알고 있지. 우린 아주 친하거든. 내 가 힘들어할 때도 어떻게든 도우려고들 애썼소. 여동생들은 당신이 더 이상 날 증오하지 않기를 바라고있지." 그 말은 또 하나의 의문을 낳았다. "선박회사를 가지며 날 이용할 때 내가 당신을 증오하게 만들려고 결심했다면, 왜 다시 돌아가서 그걸 산 거죠?" "팻이 그것도 말했군." 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를 꾸짖지 말아요. 날 도우려고 그런 거니까." 그녀는 황급히 말하 고는 덧붙였다. "내가 할아버지에게서 그 사실을 알아낼가 두렵지 않 던가요?" 피어스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키스했다. "오히려 당신이 그걸 알아내기를 바랐지. 하지만 그럴 수 없었을 거요. 페트라코스가 당신에 게 말해 주었을 리가 없지." "그럼, 왜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어요?" 그는 어깨를 들먹였다. "내게도 자존심은 있소, 앨릭스. 내 계략이 기 막히게 성공했다는 걸 알고 날 끊임없이 증오하고 있을 여자에게 마음 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지. 그래서 당신을 교환수단으로 삼았다는 죄책 감에 시달렸다는 말은 하지 않은 거요. 난 다시 당신 할아버지에게 돌 아가서 제 값대로 받으라고 종용했소. 그는 순순히 받아들였지. 내 태 도로 그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눈치채게 되었고, 그는 그 걸 이용하여 날 되도록 멀리 떨어뜨려 놓은 거요. 나도 순순히 받아들 였소, 내게 당신은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어." 그녀는 우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많은 돈 을 지불했겠군요." 놀랍게도 그는 그녀의 손을 세게 쥐었다. "돈이 아니오, 앨릭스. 내가 그 배의 대가로 준 건 당신이었지...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거였지. 난 언젠가 당신을 되찾지 않고서는 내 일생이 편안하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에 당신을 포기할 수 있었던 거야." 앨릭스는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걸 억누르고 자유로운 한 손을 그의 가슴에 얹었다. 그의 박동은 그녀가 손으로 느끼기에 벅찰 정도로 거 셌다. "피어스, 내게 당신 마음을 발 밑에 놓아 둘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던 말 기억나요? 당신이 한마디만 더 해줬어도, 난 기꺼이 당신을 따랐을 거예요." "당신은 그런 대접을 받은 자격이 있소. 난 내 인생과 마음을 당신에 게 바쳤어. 하지만 당신이 내 자존심까지 원한다면 그것도 모두 당신 거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마른 입술을 축였다. "내가... 아무리 당신을 용서 한다 해도 소용이 없겠어요. 당신 스스로 용서를 못하고 있잖아요, 그 래도 난 용서할 거예요.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순 간은 없어요. 그러니 달링, 당신이 정말 날 사랑한다면 당신도 자신을 용서해야 해요. 내가 바라는 일이에요." 갑자기 온 세상이 그대로 멈춘 듯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격렬하게 불타오르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앨릭스?" "그럼 당신이 그렇게 할 때까지 난 끊임없이 당신을 사랑해 줘야겠 죠." 그는 다시는 놓아 주지 않겠다는 듯 그녀를 꼭 껴안았다. 마침내 그 들은 오랜 방황의 종지부를 찍고 서로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이다. 그들 은 원치 않았던 운명의 장난을 고통스러웠지만 사랑으로 극복했고, 이 제 그들의 앞에는 기약된 미래가 있을 뿐이다. "당신 떨고 있군." 피어스가 그녀의 목에 입술을 대고 중얼거렸다. 그녀를 갈라진 목소리로 웃었다. "당신도요." 뒤로 물러선 피어스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번에는 영원히 당신을 잃어버리는 줄 알았어." 그는 고백하며 그녀의 눈과 뺨 에 입술을 눌렀고, 이윽고 입술을 찾아 숨막히는 키스를 퍼부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키스에 그녀는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당신이 코에 한방을 먹이기만 했어도 순순히 돌아갔을 거예요!" 피어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악동 같으니! 이거 생각을 좀 해봐야 겠는데. 하지만 우선 내게 키스부터 해줘." 그의 유혹에 그녀는 눈을 반짝였다."나한테 애걸하는 거예요, 지금?" "그럼, 당신은 아직도 날 원하고 있소?" 그녀는 속눈썹 너머로 그에게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아주 간절하게 요! 당신은 뭘 기다리고 있는 거죠?" "글세, 사실 난 당신에게 손을 대기가 두려워." 그녀는 도전적으로 눈썹을 깜박였다. "그래도 날 놓치는 것만큼 두렵 진 않겠죠?" 그 말에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안아 올렸다. "당신을 놓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요. 당신은 내 운명이야, 앨릭스. 이 말에 이의 있 소?" 그는 장난기 가득한 말로 대꾸하고는 그녀를 침실로 옮겨 침대 옆에 내려놓았으나 그의 품에서 떼어놓진 않았다. 그녀는 두 팔을 그의 목에 두르고는 손가락으로 그의 검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당신과 함께 있는 한, 문제 될 건 아무 것도 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는 그의 입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것은 정열이라기보다는 사랑의 키스였다. 무언의 약속이 서로의 감 정을 교차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결코 열정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곧 키스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옷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어느새 그들은 함께 침대에 누어 서로를 어 루만지며 뜨거운 피부를 느꼈다. 기쁨의 신음소리와 쾌락의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피어스의 어깨, 등, 평평한 배를 쓰다듬으며 앨 릭스는 전과는 다른 사랑의 환희를 맛보았다. 그녀는 가슴에서 고개를 든 피어스의 눈동자에는 자제력을 지키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이성을 잃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그 의 간질이는 듯한 손길에 녹아들며 고개를 젖히고 숨을 몰아쉬는 걸로 그의 손길에 대한 환영을 나타냈다. 그는 그녀에게 쾌락을 선사하기를 원했고, 그에 보답하듯 그녀는 그의 가슴을 자극했다. 그리고 곧 피어 스의 자제심이 산산이 흩어지며 격정적으로 그녀의 몸안으로 파고 들 었다. 앨릭스는 미친 듯이 그에게 보조를 맞추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쾌락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이윽고 세상이 뒤집어지는 듯한 순간 피어 스의 날카로운 신음이 귓가를 스치며 끝없이 하늘로 치옷던 격정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그들이 현실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피어 스가 먼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팔꿈치를 괴고 일어나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앨릭스는 권태로운 바다에서 헤엄을 치며 사랑으로 충만한 몸을 까딱 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손가락이 입술을 어루만질 때는 살며시 눈을 떴다. "내 품을 떠나겠다는 말을 자주 해줘. 그것이 진정으로 당신을 돌아 오게 하는 방법이라면." 그는 나직하게 농담을 건네며 땀에 젖어 뺨에 달라붙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흐려졌다. "이제 다시는 내게 그런 짓 하지 말 아요, 피어스."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잘못했소. 이젠 당신과 떨어져선 나도 살아갈 수 없어. 날 용서해 주겠어?" 그가 날 사랑한다는 걸 아는 이상 그 무엇이라도 용서할 수 있어. "그러지 않기는 힘들 것 같은데요." 그녀의 부드러운 말에 그는 신음소리를 냈다. "이거 내 행운을 믿기 가 어려운데. 아무래도 진자인지 날 한 대 쳐봐야겠어." 그는 잠긴 목 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행복하오?" "믿을 수 없을 만큼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피어스는 극심함 고 통을 준 것만큼 커다란 행복을 안겨 주었다. 피어스는 아직도 숨을 무겁게 몰아쉬며 뚫어지게 그녀의 눈동자를 들 여다보았다. "정말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믿어? 내가 당신에 게 한 짓이 있는데도?" 다시 한숨을 지으며 앨릭스는 그의 손을 잡아 자기의 뺨에 갖다댔다. "오, 물론이죠. 그것만이 유일하게 앞뒤가 맞는 설명이 되는걸요." 그 녀의 눈빛이 미소로 빛났다. "이제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도 되니 기뻐 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렇게 하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피어 스. 이제 정말로 다 끝난 거죠?"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되도록 빨리 잊고 싶소. 난 당신 가 족에게 아무런 원한도 없어. 그저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을 뿐이오. 이제부터 난 당신과 내 가족에게만 약속을 할 거요." 앨릭스는 그를 두 팔로 안아 끌어당겼다. "가족이라고요? 그거 듣기 좋은데요." 그는 따듯하게 미소지었다. "그럼, 이젠 당신 발 밑에 밟혀 죽을 걱정 없이 당신 품으로 돌아와도 되는 거요?"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어요?" "그럼, 그보다 더한 말도 얼마나 많았다고." 그는 짐짓 화를 내는 척 하며 으르렁거렸다. "글세, 그땐 그런 대접을 받아도 마땅했다고요." 그녀는 농담을 건네 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당신이 한 말이 기억나는군요. 우리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던 날 아침에 당신은 내게 직접적으로 사랑 한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고 말했었죠." 피어스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부러 그랬던 거야. 그래야 당신이 내 마음의 진실을 알지 못할 거 아니오. 당신은 자신의 복수에 버림받 은 여자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건 일차적인 거요. 내 진실은 오로 지 당신을 사랑했던 거요. 앨릭스, 다만 그렇지 않은 체했을 뿐이지." 그렇다면 내 추측이 전적으로 틀렸던 건 아니었어. 지금에라도 그 사 실을 알게 되어 기쁘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무 엇인가가 남아 있었다. "왜 결혼식 첫날밤 나를 안았죠? 미끼를 낚으려고 그렇게까지 할 필 요가 있었던 거예요?" 피어스는 고통스러운 듯 눈을 감았다. "그건 계획적인 게 아니었소. 당신을 안을 흉계를 꾸민 게 아니오. 내가 원했기 때문이었어. 난 너무 도 절박했었지, 내 사랑. 난 그때가 아니면 당신을 영영 가질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그때가 아니면 내가 당신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소. 나중에 우리 둘 다 상처 를 입는다는 걸 알면서도 내 자신을 저지할 수가 없었어. 난 잠깐 천 국을 맛보았지. 그 다음부터 내 인생은 지옥이었소." 앨릭스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괜한 질문으로 눈앞의 남자가 고통당하는 모습을 본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싫어졌다. 그녀는 손을 들 어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게도 천국이었어요, 피어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언제나 천국이에 요."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항상 천국은 아니었잖소. 내가 얼마나 당 신을 아프게 했는데. 내 평을 바쳐 당신의 상처를 감싸주고 싶어."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래요? 그럼 어떤 계획을 갖고 있죠? 그녀는 그의 가슴털을 만지작거리며 장난을 걸었다. "몇 분만 시간을 줘. 생각을 해봐야겠는데."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대 답했다. 그녀는 허벅지를 밀착시키며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몇 분이라 고요?" 그녀의 도전에 피어스는 소리를 지르며 몸을 굴려 그녀를 아래로 눕 혔다. "앨릭스 마르티노, 부끄러운 줄도 모르나?" 그는 심술궂게 놀렸으나 그의 눈빛을 그녀만이 아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나 여기가 아파요, 피어스." 앨릭스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당신이 키스해 주면 훨씬 나아질 텐데." 그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낙인을 찍었다. "이제 좀 괜찮소?" 그녀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쌌다. "다시 한 번 해봐요. 내가 멈추라 고 할 때까지." 그녀의 유혹에 피어스는 즐거운 듯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 ------------------------------------------------------- 처음 시작할 땐 하루에 한 장씩 올릴 계획이었는데 생각 외로 힘든 작업이군요. 지겨워지기 전에 빨리 끝내버리자는 일념으로다 9.10장 거의 3시간 걸려서 해치워버렸더니 손이랑 팔이랑 마구 지가 나네요. 후후.. 눈보라에 글 올리시는 분들 모두 존경해요~~ 잔인한 운명. 피어스는 수악하긴 하지만 터프하고 갖출 거 다 갖춘 남자지요. 그에 반해 앨릭스는 정말 멍청한 싸움닭이라고밖에... 사실 예쁘다는 것 외 엔 별 볼일 없지요. 아까운 남자이긴 하지만 짚신도 제 짝이 있다니, '인연'이라는 말 외 엔 설명할 길이 없군요. 또는 영혼이 짝~ 로사모 가족 여러분, 부디 재밌게 읽으셨기를... ps. 1. 할리퀸 최고의 싸움닭은 누구일까요? 아마 린 그레이엄의 '황태자 의 결혼'에 여주인공으로 나오는 '폴리'가 아닐지.. 울 언니는 그거 읽 고 걔 꿈에 나올까봐 무섭다더군요. 2. 그동안 제 오타 때문에 짜증 내면서 읽으셨던 분들 죄송해요. 제가 워낙에 게을러서요.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