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보상 린제이 스티븐스 1 「괜찮아?」 사장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쓰다듬는다. 안경이 코끝까지 내려 와 있었다. 케롤라인은 사장의 그런 얼굴을 보고 갑자기 웃음이 터지려고 하는 걸 간신히 참 았다. 일단 웃음이 터지면 그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 으켰다. 「미안해요. 사장님. 어쩌다 이리 되었는지...」 이때 조금 전에 보았던 얼굴이 다 가와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현실 이였다. 악몽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자가 크리스털로 된 술잔을 내밀 었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술잔을 입술에 까지 대주었다. 브랜디가 불처럼 뜨겁게 목구멍을 태우는 듯하여 캐롤라인은 기 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좀더 마셔요」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는 깊이가 있고 위엄 이 담겨 있었다. 야성적이고 남자다우며 핸섬하고..., 케롤라인은 충격 상태에 있 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술을 마셨다. 몸이 따뜻해지면서 얼굴에도 핏기가 돌아왔다. 「미안해요. 워낙 갑자기 일이라 놀라는 바람에...」 뭐라고 해야 좋을까? 당신과 다시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말해야 할까? 캐롤라인은 뒤를 단정하게 묶은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작고 뾰족한 턱을 강조하는 이 머리형은 그녀에게 새침한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어두운 잿빛 눈으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떤 반응을 기다렸다. 이 남자 도 나를 알아보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남자의 싸늘한 눈에선 그녀 를 알아보는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 이다. 하긴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지금의 나에게는 항상 불안과 두려움에 차 있고, 또 한 얼띠기만 했던 16살의 순진한 소녀의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으니 말이 다. 「정말 놀랐어. 그렇잖은가, 리스?」 사장인 크루거 씨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캐롤라인은 그가 몹시 지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사장의 건강상태는 좋지 않 았다. 그의 외아들이 좀더 사업에 관심을 보였더라면, 진작 사장자리를 물려주었 을 것이다. 존 크루거는 킬킬거리면서 계속 말했다. 「하지만 자네는 젊은 여자가 자네 발 밑에 쓰러지는 일에는 익숙하겠지, 리스?」 「아닙니다, 처음 경험하는 일인걸요. 여자가 내 얼굴을 보고 새파래지는 일도 좀처럼 없는 일입니다만...」 남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캐롤라인에게 기탄없이 웃어 보였다. 그의 그런 얼굴이 그의 인상을 완전히 바꾸었다. 웃을 때 생기는 입가의 잔주름이 엄격한 입모습을 부드럽게 하고, 빛나는 푸른 눈이 그를 훨씬 젊고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했다. 캐롤라인은 자신이 그 매력에 무감각할 수 없다는 것이 그와 재회한 사실만큼이 나 놀라웠다. 그녀는 지금까지 남자를 로맨틱한 의미에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것이 그녀의 소망이었고, 앞으로 도 그럴 작정이었다. 사람과 거리를 두고 산다 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보디는 예외다. 그 아이는 내게 인생의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쌓아올린 나의 세계를 순식간에 뒤덮어 버리려고 하고 있다. 다시는 경험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던 두려움과 고뇌가 되살아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캐롤라인의 불안을 눈치챘는지 남자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오, 아니에요, 그렇잖아요」그녀는 말을 더듬거렸다. 「문이 갑자기 열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게다가 당신이...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요즘 내가 매사에 조심성이 없어졌다는 증거야」 존 크루거가 웃으면서 말했 다. 「자, 소개하지 이쪽은 미세스 캐롤라인 앨러턴. 내가 지금까지 데리고 있던 비서 중에서 최고의 비서지. 캐롤라인, 이쪽은 리스 매케이브. 내트콘사의 사장이 야. 내트콘이 크루거를 흡수 합병하기로 되어있지」 리스 매케이브가 바로 트레버가 말하던 총독이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다. 왜 그가 몸소 찾아왔을까?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는 내트콘 사에 비한다면 크 루거 사 따위는 그야말로 하찮은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도 사장 자신이 나서다 니..., 「잘 부탁합니다, 미세스 앨러턴」리스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가 <미세스>라고 말 하기 전에 약간 망설인 것처럼 느껴진 것은 나의 과민반응 탓일까? 그가 반지를 끼지 않은 왼손을 힐끗 쳐다보았다고 생각한 것 또한 단순 한 상상에 불과한 것일까? 그래, 나는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 있는 거야. 크루거 씨의 책상 위에 인사 카드가 놓여 있는 것이 캐롤라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인사 카드의 맨 위에 그녀 자신의 신상서가 놓여 있었다. 캐롤라인은 침착 하라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공연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저 서류철을 보고 무엇을 알 수 있단 말인가? 8년 전 저 신상서를 쓸 때만 해도 죄 의식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었다. 캐롤라인 레이 앨러턴, 생년월일, 미망인, 보증 인은 백모인 조세핀 브라운. 이것만으로 무엇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거기에는 진실의 일부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리스는 당분간 나와 함께 일을 하면서 우리 회사의 전체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 지. 그런 다음에 나는 은퇴할 걸세」존이 말했다. 「은퇴라뇨? 하지만 사장님은 한번도 그런 말씀을...」 「그래, 분명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이야. 내트콘 사와 의 합병은 좋은 기회지. 리스라면 안심하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 몰리와 나는 이제 겨우 오랫동안 꿈꿔 왔던 해변의 별장 생활을 할 수 있게 도니 셈이지」 캐롤라인은 낙담과 곤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사장과 나는 정말 손발이 잘 맞는 콤비였잖은가. 개다가 그는 우리 집 사정도 잘 알고 있었고. 「언제쯤 물러나시나요?」 2 「2주일 후. 좀더 기일이 앞당겨질지도 모르지」 존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그만두는 것이 무척 섭섭한 모양이군」 「물론이에요, 정말 즐겁게 일해 왔는걸요」캐롤라인은 침을 삼켰다. 이것은 악몽 임에 틀림없다. 「캐롤라인은 우리 회사에서 8년간이나 일해 왔지. 그중 7년은 내 비서로 일해 왔고. 브리즈번 전체를 뒤져도 더 나은 비서는 찾을 수 없을걸」 캐롤라인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서 리스 매케이브 쪽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회사를 인계할 동안 리스에게는 강력한 오른팔이 필요해」존이 말을 이었다. 「리스는 당신이 회사에 대해선 나만큼이나 도통해 있으니까, 당신에게 협력을 부탁하고 싶다는군. 나도 그 점에 대해선 진심으로 동감이야」 캐롤라인은 입가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볼이 상기됐다. 내가 리스의 비서가 된 다고?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리스는 아직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바보가 아니다. 일찍 이 그처럼 미워했던 한 여자를 내게서 발견하는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언 젠가는 캐롤라인 앨러턴과 캐롤 버튼이 같은 인물임을 알게 될 것이다. 멜버른 재판소의 복도에서 나눈 대화는 14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리스 역시 그때 자신이 던진 무자비한 비난의 말을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캐롤 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리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당신 쪽에서 이의만 없다면...」존은 약간 빈정대듯 말했다. 캐롤라인은 서둘러 이성을 회복했다. 직장을 잃어서는 안된다. 적어도 다른 일자 리를 발견할 때까지는...「물론 이의는 없습니다.」 사장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사내 고지사항을 이미 녹음해 두 었으니 그것을 문서로 만들어 줘요. 새 회사의 조직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전 사원에게 알려주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캐롤라인은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한데 오늘 아침엔 차가 어떻게 된 거지?」 「펑크예요. 그래서 타이어를 갈아 끼우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 「저런, 도와 줄 만한 친절한 남자가 가까이 없었나?」 「유감스럽게도 이웃 사람들이 모두 직장에 나간 뒤였거든요」 「최근에 차의 고장이 잦군. 새차를 장만해야 할 때가 된 것 아냐?」 「네」자신도 알고 있었으나 차를 새로 살 만한 여유가 전혀 없다. 다시 문 쪽으로 향했을 때 리스가 문을 연 채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캐롤라인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그 앞을 지나갔다. 그녀가 긴장으 로 몸이 굳어져 있다는 것을 그가 알아챘을까? 「미세스 캐롤라인」 깊고 여운이 있는 목소리였다. 캐롤라인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보았다. 리스는 얼굴에 조롱하는 듯한 미 소를 띄우고 메모첩과 연필을 건네주었다. 캐롤라인은 그것을 받아들고 도망치듯 방을 나왔다. 그녀는 문을 닫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크게 쉬면서 문에 몸을 기댔다. 잠시 그 런 자세로 호흡을 가다듬은 뒤 비틀거리면서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손으로 얼굴 을 감쌌다. 어떻하면 좋을까? 어쩌자고 그 사람이 또 내 인생 속으로 뛰어들었을까? 나는 이미 충분한 보복을 받지 않았는가. 밤마다 죄의식에 시달리고 악몽으로 잠을 설 쳤었다. 만일 보디마저 없었더라면 나는 벌써 자멸의 길을 밟았을 것이다. 리스와의 뜻하지 않은 재회는 정말 큰 충격이었다. 멀고 험한 길을 지나 가까스 로 과거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만큼 충격은 더욱 컸다. 역시 완전히 도망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반항적인 소녀시절의 어리석었던 행동은 앞으로도 평생 동 안을 따라다닐 것이다. 보디는 어떻게 될까? 그 애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어제까지의 평화스러 웠던 나날이 새삼스럽게 귀중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서서히 자신을 회복해 갔다. 지금은 이렇게 꾸물대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각을 해서 새 사장에게 나쁜 인상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될 수 있는 한 그에게 비판의 꼬투리를 주고 싶지 않다. 캐롤 라인은 모든 것을 마음속 깊이 감추고 일에 착수했다. 사내고지사항의 문서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인터폰의 벨이 울렸다. 「트레버에게 곧 좀 와달라고 해줘, 캐롤라인」 「알겠습니다. 고지사항을 사내에 돌릴까요?」 「벌써 다 됐나? 역시 다르군! 그럼 돌려 줘요. 빠를수록 좋으니까」 캐롤라인은 트레 버와 급사에게 연락을 취했다. 먼저 온 것은 트레버였다. 「빠르군요. 달려왔죠?」 「빠른 걸음으로 왔죠. 사장님의 호출인걸요, 무슨 일입니까?」 「기동부대의 총독께서 도착하셨어요」 「음, 의욕이 넘치는군」트레버는 책상 끝에 걸터앉아 캐롤라인의 모습에 시선을 주었다. 167cm의 장신에 연한 푸른색 블라우스와 테일러 수트가 썩 잘 어울렸다. 길고 잘 생긴 다리, 히프의 아름다운 곡선, 풍만한 가슴 -트레버가 알고 있는 여자 가 운데 이처럼 균형이 잘 잡힌 여자는 없었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한, 이 여자 에 관한 이상한 소문은 전혀 없었다. 회사 안에서도 남자들의 유혹에 지극히 냉 담한 듯했다. 정말 아까운 여자였다. 「한데 총독이란 도대체 누구죠?」 「리스 매케이브예요」 캐롤라인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리스 매케이브? 내트콘의?」트레버는 휘파람 소리를 냈다.「총독 정도가 아니 라 육군원수군! 그런 인물이 올 줄을 몰랐는데」 「그 사람을 알고 있어요?」 「상대방은 나를 모르지만. 내가 크루거 사에 오기 전에 멜버른의 보험회사에서 일했었다는 것은 알고 있겠죠? 그 당시 친구가 매케이브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어 요. 일족이 전부 관련 회사를 갖고 있죠. 부친, 형제, 처남 할 것 없이 모두 관련 되어 있어요. 그 사람은 사업가로서는 천재라고 할 수 있죠. 손대는 것은 모두 돈 으로 바꿔 놓고 마는 능력이 있거든요」 캐롤라인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크루거를 위해서도 좋은 징조인 셈인가 요?」 「물론이죠. 리스 매케이브 같은 인물이야말로 크루거 사를 위해 필요하죠. 그렇 다고 해서 회사가 기운 것이 존 때문이라는 것은 아녜요. 시대의 변화라는 것도 있으니까. 그리고 피터 크루거도 회사의 재건에 공헌했다고는 할 수 없죠. 그 사 람은 부친의 도량을 절반도 갖고 있지 못했으니까」 「그래요, 부자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죠」 「맞아요. 그럼 난 이제 슬슬 사자 우리 안으로 들어가야지. 넥타이는 바로 매어 졌나요?」트레버는 타이의 매듭을 매만지면서 물었다. 캐롤라인은 트레버의 넥타이를 고쳐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난 그를 새삼스럽게 빤 히 바라보았다. 말쑥한 비즈니스 수트에 새하얀 셔츠, 그리고 넥타이의 빛깔도 은 은했다. 밝은 빛깔의 머리는 단정했고 애프터셰이브 로션의 냄새도 저속하지 않 고 부드러웠다. 캐롤라인은 무의식중에 그와 리스 매케이브를 비교하고는 그에게 서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느꼈다. 두 사람 모두 신장이 180cm가 넘었으나 리스 의 어깨가 트레버보다 넓었다. 「별로 못생기지는 않았죠?」 트레버는 농담 투로 말했으나 캐롤라인은 다소 뒤가 켕기는 듯한 웃음을 웃으면 서 대답했다.「아주 멋있어요」 「고마워요, 캐롤라인」트레버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행운을 빌어 줘 요」 3 리스가 들어온 것은 이때였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캐롤라인과 서둘러 그녀의 손을 놓으며 자세를 바로하는 트레버 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캐롤라인의 볼이 희미하게 물들었다. 실제로 두 남자를 함께 마주 대하고 보니, 조금 전에 마음속으로 비교하면서 가졌던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이 느껴졌 다. 두 사람 모두 키는 컸으나 공통점은 그것뿐이었다. 리스의 몸에선 힘이 넘쳐흐르고 있는 반면 그의 옆에 서 있는 트레버는 휘청휘청하여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트레버의 잘못은 아니다. 리스는 어디에 갖다 놓아도 다른 사람의 존재를 희미하게 만들어 놓을 테니까. 크레버는 순간적인 동요에서 회복되어 앞으로 나가 손을 내밀었다.「트레버 그린입니다. 오늘 아침 멜버른으로부터 이곳에 오셨다는 말을 캐롤라인한테서 들었습니다」 「그렇습니까?」리스는 트레버가 내민 손을 잡으면서 캐롤라인 쪽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의 싸늘한 푸른 눈과 마주친 캐롤라인은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의 고동이 멎는 듯했다. 그리고 마음의 베일 이 벗겨져 가슴속에 간직했던 비밀이 그의 앞에 완전히 드러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두려움이 가슴을 죄었다. 리스에게는 14년 전과 똑같은 자극과 폭력의 그림자가 있었다. 제발 다시는 내 가슴을 짓밟 지 말아요. 캐롤라인은 마음속으로 애원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앞으론 그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될 수 있는 한 그의 시야밖에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 다. 그렇잖으면 결국 그는 내 인생을 파괴하고 말 것이다. 14년 전에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리고 지금 나는 그때보다도 잃어야 할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먼저 들어가 있어요. 곧 들어갈 테니까」리스는 트레버에게 말하고 캐롤라인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되었다. 「지시를 내리면 즉각 지시대로 해줘요, 미세스 앨러턴. 그린을 불러 달라고 한 것은 지체없이 사장실로 보내 달라는 것이지, 잡담을 하거나 손을 잡고 노닥거리라는 얘기가 아니오. 내가 브리즈번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소. 따라서 그 시간은 매우 귀중해요. 그 점을 똑바로 인식해 주었으면 좋겠소. 당신이 사무실에 있는 시간에 대해서도 그 런 인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유감스럽군요」 캐롤라인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부당한 비난에 노여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트레버는... 아니, 그린 씨는 방금 도착해서 사장실로 막 들어가려고 하는데...」당신이 성큼성큼 들어왔다고 말하려다가 꾹 참고 예의바르게 덧붙였다.「사장님이 오셨던 거예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캐롤라인은 겁먹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압도적으로 불리했 다. 리스는 책상 앞에 가로막고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압적인 면에서는 완전한 패배였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그의 푸른 눈이 노여움으로 더욱 짙어졌음에도 결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얼마 동안이나 그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리스였다. 「내디와 에어리비치 프로젝트의 서류철을 갖다 줘요」그는 발길을 돌리고 어깨너머로「지금 당장」이라고 덧붙여 말한 다음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무슨 남자가 저렇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오만함으로 가득 하 있는 사람 같다. 다음번에 또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캐롤라인은 아차 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그가 사장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빨리 부탁해요!」그리고는 다시 문이 닫혔다. 캐롤라인은 입술을 깨물며 서류철이 있는 선반으로 다가갔다. 과거의 사연이 아니더라도 보디와의 생활이 걸려있지 만 않다면 당장에라도 사표를 내고 싶은 심정이다. 강압적이고 오만하고..., 서류철을 꺼내면서 리스 매케이브라는 인 물을 형용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을 찾고 있는데, 급사 아이가 들어왔다. 캐롤라인은 그에게 고지사항을 알리는 서류를 건네주고는 자세를 바로 하며 심호흡을 한 다음 사장실 문을 노크했다. 크루거 씨는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앉아 있고, 그 앞에 앉아 있는 트레버는 어딘지 긴장되어 있었다. 한편 리스는 뒷 짐을 지고 선 채 창밖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캐롤라인」존이 미소를 지으며 아는 척했다. 「탐에게 고지사항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매케이브 씨께서 필요로 하시는 서류철이고요」 「고마워요」조금 전 브랜디 잔을 든 그녀의 손을 받쳐 주었던 그 가무잡잡한 손이 서류철을 받는다. 빨리 그와의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서둘은 나머지 그가 미처 받기도 전에 서류철을 놓는 바람에 서류철의 홀더가 책상 에 떨어져 안에 들어 있던 서류가 카펫 위에 흩어졌다. 당황하며 얼른 주워 모으려고 몸을 구부린 캐롤라인과 역시 같 은 동작을 취한 리스의 어깨가 서로 닿았다. 그러자 이상한 충격이 캐롤라인의 전신을 치달았고 입술이 바싹 말라왔 다. 캐롤라인은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계속 흩어진 서류를 주워 모으려고 했다. 그러나 리스의 손도 역시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어 다시 서로의 손가락 끝이 닿았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캐롤라인은 몸이 돌 처럼 굳어져 옴을 느꼈다. 리스도 같은 느낌이었을까? 그는 내 심장의 고동소리가 갑자기 놓아진 것을 알아챘을까? 캐롤라인은 가까스로 시선을 딴데로 돌렸으나 그 순간 그의 눈에도 불꽃같은 것이 타오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한 그의 입술이 자조적으로 일그러지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리스는 나를 좋아하지 않고 있다. 비록 육체적인 매력을 느낄는지는 모르지만, 캐롤라인은 그 사실에 확신을 갖고 있 었으며 또 그 사실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왜 애석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내게 있어서는 오히려 잘 된 일 이 아닌가. 비록 마음속으로는 그가 나를 좋아하길 바라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를 좋아하기를 바란다고? 도대체 왜? 이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단 말인가? 키스라도? 아니면 포옹이라 도...? 정말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다. 나는 육체적인 욕망을 느끼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하고 단련해 왔다. 남성 따윈 나와 인연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물론 보디를 제외하고.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랐다. 아, 보디, 나 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자, 캐롤라인」트래버가 주운 서류를 건네주었다. 그의 다정한 눈에는 동정이 담겨있었다. 캐롤라인은 트레버가 자기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유혹을 물리치기는 간다냈다. 상대 가 리스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도 결국은 한 남자에 불과하니까. 캐롤라인은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숨을 헐떡이면서 주워 모은 서류를 다시 리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말을 더듬거 리면서 사죄했으나 곧 후회했다. 리스가 얼굴에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머금고 있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없이 서류를 받아들고는 책상으로 돌아가 곧 그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내디 쪽이 급하군요. 현지로 날아가서 직접 진행상황을 확인해 봐야겠어요. 보고서만을 읽어 가지고 는 실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요. 어떻게든 스케줄을 조정해서 피지 행을 포함시키도록 하죠」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긴 손가락으로 턱을 문지르면서 서류를 응시했다. 캐롤라인은 망연히 리스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는 변해 있었다. 그는 냉정하게-전보다 약간 냉정하게 관찰할 수 있 는 지금은 그가 변했다는 사실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22살 때의 시원스런 그의 태도는 젊은 처녀들의 동 경의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캐롤라인은 침을 삼켰다. 리스의 얼굴에는 엄격함과 완고함, 그리고 불굴의 정신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지금 36살로, 아직 젊다고 할 수 있으나 짙은 밤색의 머리에는 벌써 백발이 희끗희끗 섞여 있었다. 내트콘의 최고 책임자라 는 지위가 그의 어깨를 그만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이리라. 더구나 트레버의 말에 의하면, 내트콘은 매케이브 산 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오랜 세월에 걸친 리더십이 그에게 좀처럼 웃지 않는 이미지를 심어 놓은 듯했다. 날마다 몇 천 명의 사람과 몇 백만 달러의 돈을 움직이고 보면 그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조금 전 그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쌓아올린 내 평화의 아성을 무너뜨리 고, 나 스스로도 느끼지 못했던 갑옷 속의 균열을 통해 뜻하지 않은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캐롤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4 「애석한 일이지만, 내가 아들놈에게 내디의 프로젝트를 맡긴 것이 잘못이었던 모양이야」존이 말했다.「기회를 줘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인데, 아들놈은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어」 아들놈이라고? 피터 크루거는 이제 35살이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이 제 어엿한 어른 노릇을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캐롤라인은 이 크루거 사장의 외 아들에 대해 아무래도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그녀가 여러 차례에 걸친 그의 데 이트 신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피터는 상당히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 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들놈을 특별 취급하지 않아도 되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혀 두네, 리스」존이 괴로운 듯이 말했다. 「일단 자네에게 모든 것을 맡긴 이상, 앞으로 나는 전혀 참견하지 않을 걸세」 캐롤라인은 사장에게 깊은 동정을 느꼈다. 젖은 눈으로 리스 쪽을 바라보니 그는 냉소적으로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속에서 싸늘한 노여움이 치 밀어 올랐다. 이 사람에게는 인간적인 감정이 전혀 없는 것일까? 하지만 그에게 그런 것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른다. 22살 때 무자비했던 남자가 36살이 되었다고 해서 자비심이 많아졌을 리 없잖은가. 「이 서류를 멜버른에 가지고 가서 다시 한번 검토해 보고 싶은데, 복사해도 괜 찮겠습니까?」리스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괜찮고 말고. 캐롤라인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줄 걸세」 「오늘 오후까지. 가능하다면 말이오」리스의 빈정대는 듯한 말투가 그녀를 자극 했다. 「알았습니다, 메케이브 씨」 캐롤라인의 목소리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리스가 얼굴을 들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쳐다 보았다. 「그럼 이만....」캐롤라인이 눈을 아래로 깔고 중얼거린 다음 자기 방으로 도망치 듯 돌아왔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리스와 자기 자신에 대한 노여움을 삼켰다. 어깨에서 힘을 빼자. 화를 내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다. 냉정하게, 그리고 가능한 한 그의 눈에 띄지 않게 있어야 한다. 한 시간 반쯤 후에 남자들이 방에서 나왔다. 「리스와 나는 클럽에서 점심식사 모임이 있어. 두 시간쯤 후에 돌아올 거야」크 루거 씨가 말했다. 이때 캐롤라인은 리스가 푸른 셔츠의 소매 끝을 올리고 보기에고 무척 고급스러 운 팔목시계를 내려다보는 것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엔지니어를 데리고 진행중인 현장을 돌아보고 싶으니, 두 시에는 출발할 수 있 도록 준비해 주게」리스가 트레버를 돌아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트레버가 대답하자 캐롤라인과 단둘이 남게 되자 과장된 몸짓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매케이브란 사람은 그야말로 컴퓨터 로봇이야. 그렇게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래요」캐롤라인은 중얼거렸다. 「멜버른에 있는 친구가 그 사람을 인간 다이너마이트라고 했는데, 그 뜻을 이제 야 알 것 같군요. 오늘 오후에 그 사람을 수행해서 현장을 돌아보고 나면 저녁때 는 초죽음이 되겠군」 「안심해요, 트레버. 리스 매케이브에게 모든 걸 맡기면 돼요. 그 사람은 솔선해 서 움직이길 좋아하잖아요?」 「대단한 남자야. 가는 곳마다 여자들이 무더기로 그 사람의 발 밑에 무릎을 꿇 을 타입이죠. 안 그래요?」 불과 몇 시간 전에 실제로 내가 그의 발 밑에 쓰러졌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트레 버는 어떻게 생각할까? 「유일한 희망은 매케이브 정도의 거물이 어제까지나 크루거 씨를 상대하고 있을 리가 없다는 거죠. 이번 조사가 끝나면 좀더 격이 낮은 사람이 오지 않을까요? 물론 매케이브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겠지만」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캐롤라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얼마 동 안이나 있겠다는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었나요?」 「그런 얘기는 없었지만, 내 느낌으로 며칠 동안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것이 내 희망이기도 하고. 내트콘은 물론 우리의 구세주지만, 리스는 아무래도 어려운 상 대죠. 그 사람 앞에 있으면 내가 공부도 못하는 초등학생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앞으로 며칠 동안 대과 없이 지내기를 빌 뿐이죠」 「동감이에요. 고개를 숙이고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죠」캐롤라인은 새 용 지를 타이프라이터에 끼우면서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죠. 한데 지금부터 무슨 일을 한다는 거요? 이제 곧 점심시간이데. 식당에 내려가서 커피라도 마시면서 서로의 불운을 위로나 합시 다」 「고마워요. 하지만 전 여기서 점심을 하겠어요. 원수님께서 돌아왔을 때 일이 끝 나 있지 않으면 군법회의에 회부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럼 나는 오후의 싸움에 대비해서 배라도 든든히 채워 둬야 겠어요」트레버는 웃으면서 방에서 나갔다. 캐롤라인은 긴장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면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고 보 니 군법회의란 말이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되었다. 지난날에고 상황만 허락했다 면 그는 나를 형무소에 집어넣고도 남았을 기세였잖은가. 하지만 내게는 죄가 없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오래 전부터 익숙해 죄악감이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갑자기 구역질이 나고 가슴이 답답했다. 캐롤라인은 모든 것을 가슴속 깊이 숨겨 왔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 법이었다. 캐롤라인은 천천히 커피를 끓인 다음, 맛없는 샌드위치를 먹었다. 일이 산적해 있 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타이프를 치고 있을 때는 그 일에 몰두할 수가 있다. 생각하는 것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4시가 지나서 그녀는 복사한 서류철을 들고 크루거 씨의 방으로 갔다. 「고마워, 캐롤라인. 리스는 곧 돌아올 거야」존은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펜을 놓 았다. 「오늘은 크루거 사에 있어 대단한 하루였어. 회사가 우리 일족의 손에서 떨어져나갈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해 본 일도 없었지만, 이번 합병으로 해서 어깨 의 짐을 내려놓게 된 것도 사실이야. 이대로 끌고 가봐야 별로 신통한 수가 생기 지도 않을 테니까」 「요즘은 시대가 그런 시대인 것 같아요. 어느 회사나 위기감을 안고 있거든요」 「그뿐만이 아냐, 캐롤라인 회사가 하마터면 파산할 뻔했지. 만약 그렇게 되었다 면 사원 전부가 실직했을 거야. 사원들 중에는 30년 이상을 함께 일해 온 사람도 있는데 말야.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최악의 사태만은 피하고 싶었던 거야. 그 리고 내 은퇴는 전부터 예정했던 일이지. 이젠 은퇴할 나이도 되었으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쓸쓸해져요」캐롤라인은 진심으로 말했다. 「고맙군.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리스는 내 의사를 존중해서 한 사람의 실업자 도 내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어떤 의미에서 나는 행운아라고 할 수 있지. 앞으로 우리 회사가 내트콘이란 이름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하면 돼. 리스는 좋은 사람이 고 사업가로서도 천재야. 그 사람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회사를 놀랄 만한 규 모로 키워 놓았지. 내트콘은 그 일부에 불과해. 그것은 물론 그의 일족의 사업이 긴 하지만, 리스가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움직이고 있지. 그 사람은 그만한 책임 을 질 수 있을 만한 사람이거든」 「그렇겠죠」 캐롤라인이 마지못해 찬성하고 났을 때, 마침 문을 노크하고 당사자인 리스가 들 어왔다. 「여어, 리스, 어땠나?」 「순조롭습니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 되어 갑니다」 「다행이군. 커피 들겠나?」 「네, 그러죠」 「부탁해, 캐롤라인」 고개를 끄덕이고 걸어가는 그녀를 싸늘한 푸른 눈이 힐끗 쳐다보았다. 가벼운 전 율이 그녀의 전신을 치달았다. 캐롤라인이 커피 쟁반을 들고 돌아왔을 때, 리스는 복사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잘 정리되어 있군. 아주 알기 쉽게 되어 있어」다 읽고 나서 리스가 말했다. 무심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의 눈에는 조롱의 빛이 역력했다. 캐롤라인은 커 피를 그의 무릎 위에 끼얹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오만하고 건방지고 참을 수 없는 사람 같으니..... 「캐롤라인은 매사에 완벽하지. 최고의 비서라고 내가 말하지 않던가」존이 거들 었다. 캐롤라인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울화를 억누르며 회사 이름이 찍혀 있는 편지 지를 타이프라이터에 끼웠다. 저 남자 때문에 공연히 일만 지체되고 말았어. 밉살 스런 리스 매케이브! 캐롤라인은 일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장과 리스가 책상 옆에 와 있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린 이만 돌아가겠어. 그럼 내일 또 봐요, 캐롤라인」 「안녕히 가세요, 사장님」그녀는 리스 매케이브의 넥타이를 흘끗 쳐다보고는 덧 붙여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내일 봐요, 미세스 앨러턴. 시간 엄수를 부탁해요」리스는 이렇게 말하고 문 쪽 으로 사라졌다. 캐롤라인은 차들이 붐비는 거리를 짜증스런 마음으로 자 신의 낡은 자동차 제미니를 몰았다. 사장과 리스가 나간 뒤에도 두세 통의 편지를 다 치고 나니 시간이 꽤 늦고 말았다. 푸른 신호등이 켜졌는데도 고물차의 시동이 바로 걸리지 않아 식은땀을 흘렸으 나, 다행이 얼마 안 있어 그런대로 말을 들어주었다. 이웃에 사는 청년의 말에 의하면, 이 차는 완전히 뜯어 고쳐야 한다고 했다. 타이 어도 모두 바꾸어야 하고.... 그러고 보니 펑크난 타이어를 새것으로 갈아 끼우는 것을 깜빡 잊었다! 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내일 갈기로 하자. 한데 그때까 지 다른 타이어가 또 펑크나면 어쩌지? 아, 그런 것은 생각하기도 싫다. 찬드라 스포츠 센터의 밝은 불빛 아래에서 잡지를 읽으며 홀을 서성거리고 있는 키가 큰 남자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캐롤라인의 얼굴이 절로 누그러졌다. 늘씬하 고 어깨가 넓으며 다리가 길고 잘 생긴 남자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클랙슨을 울리자 짧게 커트한 금발의 머리가 뒤돌아보았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차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늦어서 미안해, 보디. 오래 기다렸니?」 「별로요. 틀림없이 와주실 거라고 생각했고, 읽을 책도 있어 지루한 줄 몰랐어 요」그는 책을 뒷좌석에 던져 놓고, 조수석에 않으며 캐롤라인의 뺨에 키스했다. 「오늘 하루별일 없었어요, 어머니?」안전 벨트를 매면서 보디가 말했다. 5 「그 말은 않기로 하자!」캐롤라인은 얼굴을 찌푸렸다.「너는 어때? 훈련은 잘되고 있니?」 「잘되어 가고 있어요. 오늘도 코치에게 칭찬 받았는걸요. 아 참, 브렛이 내일부 터 나온 대요. 의사선생님이 이제 훈련을 시작해도 괜찮다고 했대요. 잘되었죠?」 브렛 콜론은 보디의 친구로, 역시 장래가 촉망되는 수영선수다. 8년 전 5살 때 수 영을 함께 시작하면서 두 소년은 알게 되었다. 브렛의 양친과 캐롤라인은 아침저 녁으로 번갈아 가며 두 아이들을 집에서 수영장으로, 수영장에서 집으로 데려다 주는 일이 일과처럼 되어있다. 「관절만을 삐어서 불행 중 다행이라고 의사선생이 말했어요. 하마터면 금년 내 내 수영을 못할 뻔했다나 봐요.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걱 정돼요」 「연습을 못할까 봐 그러니?」 「네, 연방대회에다가 잘하면 2년 후의 올림픽까지 계획이 완전히 짜여 있는데,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모든 게 허사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걸 걱정할 필요는 없어. 인생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거야. 아무 리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 하더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 그것을 완전히 뒤엎어 버 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요, 지금부터 그런 것을 걱정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죠. 그래 서 코치도 항상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어머니에게 그렇게 나쁜 날이었나요?」 「첫째는 타이어의 펑크. 너희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는 차례가 아니어서 다행이 었지. 그래서 회사에 지각했지 뭐니. 게다가 오늘은.....」 「크루거 씨가 화를 냈나요? 어제 늦게까지 남아서 일했으니 화낼 이유가 없었을 텐데요」 「크루거 씨가 아냐..... 새로 온 상사 때문이야」 「새로 온 상사라뇨? 왜요? 크루거 씨가 어떻게 되었나요?」 「크루거 씨가 은퇴하기로 결심하고 회사를 딴사람에게 넘겼거든」 「그래요? 그럼 어머니는 해고당하지 않나요? 요즘은 실업자가 늘어나는 모양이 던데요」 「괜찮을 거야. 단순히 사장이 매케이브 씨로 바뀐 것뿐이니까」사실 거기에서 그쳐 준다면 얼마나 좋으랴! 「새로 온 상사는 어떤 사람인가요?」 캐롤라인은 앞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상상해 볼 테니까요」 모퉁이를 돌아 차를 집 앞에 대는 데 오늘은 무척 힘들었다. 그들의 집은 양쪽과 양옆에 베란다가 달린 오래되고 아름다운 옛 저택으로 4년 전 독신으로 평생을 보낸 백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캐롤라인에게 남겨 준 것이었 다. 보디가 태어나기 6개월 전에 퀸즐랜드에서 나온 캐롤라인을 맞아 이 집에 함 께 살게 한 것도 백모님이었다. 두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 넓은 집이어서, 백모님 이 죽고 난 뒤 캐롤라인은 자신의 저금과 백모님이 남긴 얼마 안돼는 유산을 합 쳐 집을 두 개의 독립된 가옥으로 분리시켰다. 왼쪽 집에 캐롤라인 모자가 살고, 다른 한쪽은 셋집으로 내놓았다. 다행히 세든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어서 현재 살고 있는 두 사람은 2년 전부터 계속 살고 있다. 직장에 나가면서 야간학교에 다니는 근면하고 모범적인 젊은이 들었다. 캐롤라인은 거실의 불을 켜고 백을 테이블 위에 놓은 뒤 낡았지만 쾌적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아, 여기가 천국이구나!」 「저녁은요?」 「준비해 놓았어. 아침에 전기 냄비에 올려놓았으니까, 5분만 기다려」 「좋아요!」보디는 씽긋 웃고 나서 커다란 가방 안에서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 다. 교과서, 도시락, 물통, 타월, 수영복.「어머니, 이번에 새로 온 상사는 어떤 사 람인가요?」 「별로 이렇다 할 만한 사람은 아냐」캐롤라인은 머리를 소파에 기댄 채 눈을 감 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제발 리스가 자기를 기억하지 못하기를 빌었다. 다시 눈을 떴 을 때, 눈을 감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보비가 눈썹을 치 켜올렸다. 금발에 비해서는 짙은 눈썹이었다. 보디의 얼굴은 언제나 쾌활하고 즐거운 얼굴이었다. 갓난아기였을 때도 잠에서 깨면 언제나 생글생글 웃곤 했다. 13살치고는 키가 큰 편이어서 캐롤라인과 엇비 슷했다. 수영으로 단련된 덕분에 근육도 탄탄하고 체격도 균형 잡혀 있었다. 그녀 보다 밝은 갈색의 머리는 하루에 4시간을 수영장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에 짧게 깎았다. 단단해 보이는 턱선 에는 아직 소년 티가 남아 있으면서도 이미 어엿한 성인 남자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보디를 볼 때마다 애정과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이 아이는 나도 저의 아버지도 닮지 않은 것이다. 이 아이는 나도 저의 아버지도 닮지 않은, 어디까지 나 보디 자신인 것이다. 「새로 온 상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군요. 어머니를 혹사하는 것 아녜 요?」 「그런 편이지」 「몇 살쯤이나 되었나요? 크루거 씨 정도?」 「아냐, 아직 30대일 거야」캐롤라인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보디의 호기심은 자꾸만 더해 가는 듯했다.「어떤 사람일까? 버트 레이놀즈? 로 버트 레드포드? 아니면 진 와일더 같은 타입?」 캐롤라인은 웃으면서 보디와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자리에서 일어났다.「너무 바빠서 자세히 볼 틈도 없었어. 자, 저녁식사나 하자구나」 「그 사람 결혼했어요?」보디는 주방까지 쫓아와 물었다. 캐롤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비틀거렸다.「아마 하지 않은 모양이더라. 부인에 대 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말야」캐롤라인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마 음 한구석으로는 그 사람이 결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 하니 왠지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왜 그런 것을 묻지?」 「별로」보디는 도시락을 공중에 던졌다가 받고 나서 씽긋 웃으며 윙크했다.「어 머니, 그 사람에 대해서 매력을 느껴요?」 캐롤라인은 입을 멍하니 벌렸다. 몸이 화끈 달아오르고 얼굴이 상기됐다.「매력 을 느끼냐구? 도대체 어째서 그런 생각이 떠오른 거지?」 「별로 특별한 뜻으로 여쭤 본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니까요」보디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엄마 얼굴이 빨개졌는데요」 「보디야!」 「하지만 어머니는 굉장한 미인인걸요. 남자 한두 명쯤은...」 「보디야, 나는 매케이브 씨를 오늘 처음 만났고,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어」캐 롤라인은 테이블 위에 접시 두 개를 놓았다.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접시 부딪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걱정할 것 없어요, 어머니. 어머니 쪽에서 그럴 마음만 있다면 만사가 잘될 거 예요. 친구들도 어머니를 지금까지 본 중에서 제일 멋있는 아줌마라고 말하는 걸 요」보디는 이렇게 말하고 뒤에서 캐롤라인을 껴안았다. 「보디야!」캐롤라인도 아들을 힘껏 포옹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배고프겠구나. 자, 저녁 먹을 준비를 하자」 「저도 거들겠어요」 보디는 테이블 위에 나이프와 포크를 놓고, 캐롤라인은 고기와 야채의 카세롤을 테이블로 가지고 왔다. 잠시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던 보디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 다.「전부터 말하려고 생각했는데요... 혹시, 혹시 말이에요, 데이트를 하고 싶으 면... 저에 대해선 조금도 신경쓸 것 없어요. 누구하고든 함께 외출하고 싶을 땐 저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는 지금 이 상 태에 만족하고 있어」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고 싶어요. 좋은 사람이 생기면 데이트하세요. 어머니는 행복할 자격이 있거든요」 「엄마는 지금도 행복해. 왜 내가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보디는 시선을 접시 위에 떨어뜨렸다.「어머니는 직장 과 제가 연습하는 수영장에 오가는 것 말고는 전혀 외출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최 근에 와서야 깨달았어요. 어머니는 아직 젊잖아요 29살이면 늙은이가 아닌걸요」 「고맙구나. 다음달에 30살이 되어도 너는 엄마를 아직 젊다고 말해 주겠니?」 「30살? 30살이라고 하니까 문제가 좀 달라지는데요. 하지만 29살은 젊어요. 그러 니까 아직 시간은 있어요」보디는 씽긋 웃었다. 캐롤라인은 아들을 꾸짖는 시늉을 해 보였다. 두 사람은 식사를 끝낸 다음 함께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보디가 숙제를 시작했을 때 그녀는 샤워를 하러 욕실로 갔다. 6 그녀는 온도를 조절해 뜨거운 물이 나오게 한 다음 욕실거울에 비친 자신의 나체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날씬한 다리, 잘록한 허리, 풍만한 가슴. 10대의 자식을 갖고 있는 어머니의 체격이 아니었다. 17살의 생일을 한두 달 앞두고 보디를 낳았을 때, 날씬한 몸의 곡선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닌가하고 걱정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니, 아기를 낳음으로써 오히려 성숙미가 더해졌다고도 할 수 있다. 보디를 처음 낳았을 때만 해도 육아서에 매달려 영양학과 심리학을 열심히 공부 했으나, 지금은 균형 잡힌 식사에만 신경을 쓰고 있을 뿐이다. 수영을 하고 있으 니 운동 면에서는 걱정할 게 없었다. 캐롤라인 자신도 함께 수영을 했고, 일주일 에 한 번쯤은 교외나 해변으로 나가 기분전환도 했다. 뜨거운 샤워가 피로와 긴장감을 풀어 주었다. 캐롤라인은 아들에게 말한 대로 자신이 지금 무척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항상 일에 바쁘고도 충실한 생활을 하고 있는 편이어서 남자 친구나 애인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매일 밤 지친 몸으로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남녀의 사랑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 었다. 그런데 지금 뜨거운 샤워를 하고 있자니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가슴을 설 레게 한다. 14년이라는 세월은 과거의 경험을 안개로 감싸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거의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다. 단지 생각나는 거라면 철부지끼리의 어색함, 최초의 행위에 수반되는 통증과 그 뒤의 실망감, <이것뿐인가> 하는 아쉬움 - 그때의 경험은 그것이 아니면 밤이나 낮이나 견디지 못하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애인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일까? 캐롤라인의 손은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남자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느 낌일까? 보디의 아빠가 내 몸을 애무하면서 에로틱한 반응을 찾으려고 했던 일이 있었을까? 아냐, 언제나 그럴 시간이 없었어. 우리의 관계는 성급했고, 그래서 항 상 충족되지 못한 느낌이 남곤 했었다. 캐롤라인은 양손으로 가슴을 감싸며 쏟아지는 뜨거운 물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도대체 왜 하필이면 리스 같은 사람을 생각하지? 트레버도 있지 않은가. 14년 전의 일이 아니더라도 나는 리스 같은 남자는 싫다. 더구나 그런 남자에게 매력 을 느낀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캐롤라인은 서둘러 샤워를 끝내고 불필요한 만큼 힘을 주어 타월로 몸을 문질렀 다. 그리고는 면으로 된 나이트 드레스를 머리로부터 뒤집어쓰듯 입고 그 위에 타월로 된 실내복을 걸쳤다. 보디가 숙제를 끝낼 때까지 책을 읽기로 했다. 일주일에 엿새는 보디의 훈련을 위해 일찍 일어났다. 몇 년 동안이나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의 습성처럼 되어 버렸다. 캐롤라인은 보디 와 브렛을 아침 5시에 수영장에 데려다 주고, 두 시간 동안의 훈련이 끝날 때까 지 그곳에서 기다렸다.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때로는 기록요원과 감독의 일을 거들기도 했다. 7시 반에 집으로 돌아와 아침식사와 몸단장에 한 시간쯤 소비하고, 보디와 브렛 을 학교까지 데려다 준 다음 9시에 사무실로 나갔다. 오후에는 브렛의 어머니가 학교로 마중 나가 수영장에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밤에는 캐롤라인이 퇴근길에 두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것이다. 이처럼 스케줄이 꽉 짜여 있었기 때문에 타이어 의 펑크나 차의 고장에 신경쓸 겨를이 거의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는 신기하게도 엔진이 말을 잘 들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타 이어를 교환한 다음 회사 주차장에 당도했을 때는 9 시 5분전이었다. 커피를 끓이려는데 커피포트의 스위치가 이미 꽂혀 있었다. 캐롤라인은 자신의 컵에 커피를 가득 따랐다. 아마 크루거 씨가 일찍 커피 생각이 났던 모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와 오전 중에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지만. 향긋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자신의 책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입구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캐롤라인은 놀라 하마터면 커피 잔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오늘 리스는 갈색 신사복에 크림 색 셔츠를 받쳐입고 있었다. 잘 닦인 구두 끝 으로부터 머리끝까지 한치의 빈틈도 없었으며, 온몸에선 힘과 활력이 넘쳐흘렀다. 캐롤라인은 그의 강렬한 매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방어 자세를 취했다. 「당신은 마음 내킬 때 회사에 출근하는 버릇이라도 있는 거요? 벌써 9시가 지났 소. 어제는 9시 반에 나왔으니까 오늘은 좀 개선될까 생각했는데. 또 차가 고장이 라도 난거요?」 「주유소에 들러 타이어를 교환했어요. 하지만...」 「미세스 앨리턴, 나는 이해심 있는 상사로 통하곤 있지만 사원들에게 시간만은 엄수할 것을 강조하고 있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8시 반까지는 자리에 앉아 있어 주었으면 좋겠소. 그러니까 밤의 외 출은 일찍 끝내야 할거요. 직장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오」 캐롤라인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방금 전에 자신이 들은 말이 믿어지 지 않았다. 「알겠소, 미세스 앨리턴?」 「잘 알았습니다, 매케이브 씨」캐롤라인은 이렇게 대답하고 턱을 치켜올렸다. 「좋아요, 편지를 구술녹음기에 취입해 두었으니 타이핑이 끝나는 대로 갖다 줘 요」 보디의 아침 훈련 때문에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을 각각 30분씩 늦추기로 크루거 씨에게서 허락을 받았다는 것을 왜 말하지 않았지? 그랬더라면 오늘 아침 지각한 구실도 되었을 텐데. 그러나 리스는 변명할 여유도 주지 않았다. 오만한 독재자 같으니라구! 자신이 무척 공평하고 사려 깊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에게는 인간다운 동정 심이란 눈곱만큼도 없다. 그에게 있어서는 자기 산하의 사원 한 사람 한사람이 톱니에 불과할 것이다. 저 오만한 인간의 콧대를 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속이 후 련할까. 하지 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잃게 될 것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 디를 생각해야 한다. 8시 반이라고? 좋아요, 당신이 8시 반이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8시 반까 지 출근해 보이겠어요! 캘롤라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면 아침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데 30분밖에 할애할 수 없었다.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 뻔하다. 오늘밤 브렛의 집에 들러 아이들을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일을 당분간 대신해 달라고 조이에게 부탁 해야겠다. 리스가 이곳에 머무는 것은 고작 며칠 동안에 불과할 테니까. 내일은 리스가 내게 잔소리할 구실을 절대로 주지 않으리라! 캐롤라인은 무서운 속도로 타이프라이터를 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는 사장실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크루거 씨의 자리에 앉 아있던 리스가 서류를 보고 있다가 얼굴을 들었다.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캐롤라인은 타이핑한 편지를 책상 위에 놓았다. 「수고했어요」리스는 맨 위에 있는 편지를 읽었다. 캐롤라인은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산적해 있지만, 그에게 는 그의 계획이 있을 테니까. 「사원들에 관해 알고 싶으니 인사과장을 불러 줘요. 그리고...」이때 전화벨이 울 렸다. 리스는 캐롤라인에게 그대로 있으라는 시늉을 손으로 해 보이면서 수화기 를 들었다.「매케이브요」 리스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캐롤라인은 그의 얼굴 표정이 갑자기 바뀐 사 실에 놀라 눈을 껌뻑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미소를 머금은 푸른 눈은 그를 몇 살 이나 더 젊어 보이게 했다. 그가 여자들에게 대단한 인기가 있다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캐롤라인은 침착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타일렀지만,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맞잡고 있는 자신의 손에 시선을 떨구고 전화의 내용-분명 히 개인적인-을 듣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헛수고였다. 「수지, 잘 있었어? 브리즈번에서는 무얼 했길래 내 거처를 어머니한테 들었 지?」 캐롤라인은 그의 어머니를 알고 있었다. 미세스 매케이브는 몸집이 작은 금발의 여자였다. 그 옛날 슬픔과 절망에 잠긴 그녀의 얼굴을 14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 하게 기억할 수 있다. 「점심식사는 어렵겠는걸. 저녁식사는 어때?」리스는 긴 손각락으로 펜대를 만지 작거리고 있었다.「아냐, 내일 밤까지는 돌아가지 않아. 좋아, 함께..... 비행기를 타자구. 자세한 것은 만나서 얘기하기로 하고. 7시 반에 마중 나가지. 그럼 그때 봐」 리스는 수화기를 놓고 아직도 입가에 미소를 남긴 채 캐롤라인을 올려다보았다.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인사과장을 오라고 했지. 이언 조던이라는 이름이었던 가. 그 사람을 불러 줘요」 캐롤라인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물러나기 전에 용기를 내어 물었다.「저..... 크루거 씨는 오늘 나오시지 않나요?」 리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푸른 눈이 싸늘한 빛을 발했다 .「아, 존은 오늘 과 내일 쉬기로 했어요. 월요일에는 나올 거요. 내가 내주에는 공교롭게도 호버트 에 가야 하니까」 그의 말투에서 빈정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내 상상에 불과한 것일까? 자기가 없으면 내가 안도하리라는 것을 저 사람은 알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것 은 사실이다. 저 사람은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그의 경제 왕국의 다른 노예들 처럼 나도 자기의 발 밑에 무릎을 꿇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다 르다. 리스도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당장 목을 날릴 것이다. 이언 조던이 새 사장과 면담을 한 뒤 인사이동이 곧 시작될 거라는 소문이 즉각 회사 안에 퍼졌다. 갖가지 억측이 나돌았다. 실직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크루거 씨가 내세운 조건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으나, 모 두들 그것은 단순한 이상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캐롤라인, 혹 무슨 말 듣지 못했어요? 많은 사람의 목이 잘린다는 말이 나돌던 데」타이피스트인 메기가 타이프실에 서류를 가지러 온 캐롤라인을 붙잡고 물었 다. 「못 들었어. 하지만 크루거 사장님의 약속이 있은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 을 거야」 「하지만 전 사장님은 어디 계시죠? 오늘은 회사에 나오시지 않았다는 말이 있던 데요」 「그래, 하지만 월요일에는 나오실 거야」 「그때까지라면 깨끗이 청소하고도 남겠는데요」 「정말 새 사장이란 사람, 만만치 않은 모양이야」케리 딘이 끼여들었다. 그녀는 남자에 대한 접근이 빠르고, 항상 대성공을 거둔다는 소문이었다.「그 사람, 최고 잖아? 더구나 독신이고, 남부지방 신문의 사교란 에서 보았으니까 틀림없어. 당신 은 하루종일 그 사람 곁에 있을 수 있어 좋겠어, 캐롤라인. 그렇게 매력적인 남 자, 근래에 본 적이 없어. 안 그래, 캐롤라인?」 6,7명의 눈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래, 제법 핸섬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해」캐롤라인은 마지못해 대꾸했다. 「제법 핸섬한 사람이라구? 캐롤라인, 혹 그 사람을 점찍고 있는 것 아냐? 아첨 꾼처럼 졸졸 따라 다니는 트레버 그린으로 만족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웬만큼 해둬, 케리. 너와는 상관없는 일 아냐?」매기가 말했다. 「하지만 사실인걸. 캐롤라인은 가끔 트레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귀여워하는 것 같더라고. 하지만 트레버로 결정하지 않길 잘했지. 좋은 기회가 왔거든」 「무슨 말이지?」캐롤라인이 조용히 물었다. 「시치미 떼지마. 새 사장에 비하면 트레버는 아무 것도 아냐. 새 사장은 돈도 많 고 핸섬한데다가 매력적이야. 여자라면 누구나 그런 남자를 붙잡고 싶어하지」 「여자가 모두 그런 남자를 찾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야」매기가 퉁명스럽 게 말했다. 「새 사장만큼 매력적인 남자는 아무 데나 굴러다니는 게 아니라구. 안 그래, 캐 롤라인?」 「새 사장이 여자들이 그리는 이상 적인 남성이라는 말에는 찬성해. 하지만 외모 따윈 아무래도 좋아. 인간적인 깊이, 상냥함, 상호간의 존경, 공통의 관심, 이런 것이 더 중요하니까. 난 흔히 말하는 잘생긴 얼굴에는 관심 없어」 「한번 경험이 있으면 두 번째의 결혼에 대해선 신중해지는 모양이지」케리가 빈 정대듯 말했다. 「그래」캐롤라인은 이렇게 대답하고 턱을 치켜올렸다. 「그럼 난 가겠어. 새 사장의 대단한 매력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있을 만큼 난 한가하지 않아」 그녀는 문 쪽으로 걸어가다 갑자기 발을 멈추었다. 성량이 풍부한 목소리가 자신 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7 「아, 여기 있었군, 미세스 앨러턴. 그것이 내가 부탁한 서류인가?」리스는 손을 내밀면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타이피스트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일제히 캐롤라인 쪽을 돌아보았다. 「네」캐롤라인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건네주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을까? 우리 한 말을 다 들었을까? 내가 말한 헌담도? 아, 절망적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의 표정에서는 아무 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서류를 흘 끗 본 다음 놀란 얼굴로 서 있는 아가씨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케리 딘조차 할말 을 잊은 듯 했다. 리스가 씽긋 웃자 방안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의 매력에 사로잡혔는지 타이피 스트들은 한결같이 황홀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을 나무랄 수 없다고 캐롤 라인은 생각했다. 리스는 내게도 같은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이끌렸다. 그리고 미소를 머금은 그의 얼굴 위에 붙박였다. 리스가 타이피스트들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고 그녀들은 즐거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는 잠시 후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입가에는 아직도 미소가 남아 있었으나 내리깐 속눈썹이 눈의 표정을 가렸다.「그럼 가볼까요, 미세스 앨러턴」그는 캐롤 라인에게 앞서 가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이르자 리스는 말없이 뒤에서 손을 뻗쳐 버튼을 눌렀다. 재킷의 소매 끝이 캐롤라인의 드러난 팔을 스치는 순간 그는 움찔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에 대해서 좋은 말을 듣지 못한다더 니, 정말 그렇군」리스가 빈정대듯 말을 꺼냈다.「아무튼 소문에 좌우되지 않는다 는 점은 감탄할 만하더군요. 미세스 앨러턴」 캐롤라인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아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이처럼 난처해 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단순히 잘생긴 얼굴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 현명함에 대해서도 칭찬해야 하겠죠. 물론 그런 말을 들은 당사자는 충격을 받았지만」 엘리베이터가 왔다. 리스는 그녀에게 먼저 타라는 시늉을 손으로 해 보였다. 캐롤 라인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자 두 사람 사이에는 더욱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 치 도화선에 불을 붙인 폭탄을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 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처럼 개성이 강한 남자 곁에 있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내가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 있는 걸까. 캐롤라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카펫의 복잡한 무늬에서 그의 구두로 옮아갔고, 다시 바지를 따라 위쪽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있었기 때 문에 그가 입고 있는 바지가 넓적다리 부분에서 팽팽하게 밀착되어 있는 것이 유 난히 눈에 띄었다.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고 이마에는 엷게 땀이 배었다. 상의 단추를 풀고 있어 크림 색 실크 셔츠가 탄력 있는 복부와 우람한 가슴을 두 드러지게 했다. 캐롤라인의 시선은 빨려들 듯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햇 볕에 그을 은 목, 윤곽이 뚜렷한 턱, 아랫입술이 탐스런 잘생긴 입. 저런 입술의 키스를 받 아 보았으면 하는 광란에 가까운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녀의 눈길은 마침내 그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리스는 아까부터 나를 지 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꽤나 무례한 여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캐롤라인은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이때 리스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로 옮아갔다. 두 사람 사이 의 긴장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이처럼 긴장된 분위기를 깨자면 무슨 말이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미안합니 다, 매케이브 씨. 저는....」 「미안하다니, 미세스 앨러턴?」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캐롤라인의 긴장된 신경 을 타고 몸의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내가 단순히 잘생긴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까?」 캐롤라인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리스는 내게 손을 내밀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 이 이 강렬한 욕망을 채워 줄 것이다.... 리스가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을 때 엘리베이터가 멈추 면서 조용히 문이 열렸다. 그들은 갑자기 바깥 세계와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사장님」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온 급사 아이는 주뼛주뼛하면서 인사했다.「미세스 앨러턴」 급사 아이는 귓불이 빨개진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새 사장과 함께 엘리베이 터에 타고 있는 것이 몹시 거북살스러운 듯했다. 캐롤라인은 자신도 마찬가지라 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의 바로 옆에 있는 현재의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사실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이 상태에서. 금요일 밤, 리스는 멜버른에서 태즈메니아로 떠났다. 일전에 그가 전화로 통화했 던 수지인가 하는 사람과 함께였다. 수고하세요! 수지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 지만 표창장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캐롤라인은 하루종일 새 사장에게 시달려 지칠 대로 지쳐 있었으나, 기분은 이상 하게 흥분되어 있었다. 인간으로서는 문제의 여지가 있겠지만, 사업가로서는 그와 비견할 만한 사람이 별로 없을 듯했다. 그는 사원들에게 요구하는 이상으로 자기 자신이 정력적으로 일했다. 그리고 하루종일 일을 하고 난 뒤에도 아침에 나왔을 때처럼 총명하고 활력에 넘쳤으며 매사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녀가 8시 반에 출근해 보면, 그는 벌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다. 접수계의 여직원 말에 의하면 7시면 벌써 사장실에서 인기척이 들린다고 했다. 엘리베이터에서의 일이 있은 뒤로 캐롤라인은 될 수 있는 대로 리스와 거리를 두 려고 했다. 그날은 그와 사장실문 앞에서 헤어진 뒤 퇴근할 때까지 얼굴을 마주 치지 않았으나 오전 내내 기분이 울적했고, 시간이 유난히 더디게 가는 것 같았 다. 오늘 아침의 리스는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을 까맣게 잊은 듯하여 캐롤라인은 남몰 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때 엘리베이터가 멈추지 않고, 급사 아이가 함께 타지 않았더라면? 캐롤 라인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리스가 나를 포옹하여 애무하 고 키스라도 했더라면? 뒤의 차가 클랙슨 을 울렸다. 신호가 푸른색으로 변했던 것이다. 캐롤라인은 마음 속으로 자신을 나무라면서 차를 출발시켰다. 리스는 내게 키스를 하지 않았다. 그 것이 현실이다. 그 이상은 상상이고 환상에 불과하다. 캐롤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스 매케이브를 생각하는 짓 따위 는 그만두기로 하자. 이번 주말에는 보디와 브렛이 골드코스트에서 열리는 경기 대회에 출전한다. 생각할 일은 이 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지금까지 그녀는 생각하기 싫은 문제는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마음속으로부터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만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막연한 불안과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끌리는 마음은 주말에도 계속 그녀를 괴롭혔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고 다시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다행히 오늘은 크루거 씨가 돌아오기 되어 있다. 리스는 호버트에서 화의에 참석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마치 예전과 같았다. 크루거 씨가 사장이고, 리스 매케이브의 이름을 듣기 이전의 한숨을 내쉬면서 어깨에서 힘을 뺐다. 리스가 있을 땐 그가 언제 나타날 지 몰라 잠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그가 태즈메니아에 가 있는 이상 나는 안전하다. 이튿날 점심식사를 하고 돌아왔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서둘러 수화기를 들었다.「사장실입니다」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공원에서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밝은 기분이 아직도 목소리에 남아 있었다. 「나, 매케이브인데」전화기를 통해서 들으니 그의 목소리는 더욱 나직하고 무게 가 있었다. 캐롤라인은 순간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녀는 현기증을 느끼면서 옆에 있는 의자 에 걸터앉았다.「아, 매케이브씨. 곧 크루거 씨에게 연결해 드리겠어요」 「아니, 괜찮소. 당신에게 용건이 있으니까」 캐롤라인은 수화기를 쥐고있는 손에 말없이 힘을 주었다. 「존의 퇴임식에 관한 얘긴데」리스가 말을 이었다.「송별회와 기념품 증정 계획 이 진행중이라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네, 전 직원이 꼭 하고 싶다고 해서....」 「존은 사원들의 사랑을 받고 있군. 나도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해요. 기념품의 내 용은 결정했나요?」 「아뇨, 아직 결정하지 않았는데요」 「그럼, 내가 내일까진 돌아갈 테니 그때까지 생각해둬요」 「내일이라고요?」 「그렇소, 내일이오」리스는 빈정대듯 말했다. 「존은 금요일까지 나오기로 했으 니까, 송별회는 금요일 밤이 좋겠군. 6층 회의실을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거 요. 전 사원과 주거래처에 연락을 취해 주겠소? 이언 조던도 거들어 줄 거요. 할 수 있겠죠?」 그 말에 캐롤라인은 허리를 폈다. 그에게 무능하다는 말은 듣고 싶진 않았다.「물 론이에요」그녀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미세스 앨러턴」리스의 목소리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기념품을 살 돈도 모을까요?」 「그것은 그린에게 부탁해요. 기념품은 당신에게 맡기겠소. 다소 비싸더라도.... 모 자라면 내가 충당할 테니까」 「정말 친절하시군요」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말투는 자신의 귀에도 빈정대는 듯 하게 들렸다. 「부탁해요. 그럼 내일 또, 미세스 앨러턴」 주말까지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호버트에서 돌아온 리스와 하루에 한두 번 얼굴을 마주칠 정도였고, 어쩌다함께 있어요 그는 딴 생각에 사로잡혀 그녀 쪽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브리즈번에는 크루거 사 외에도 그가 관계하고 잇는 업체가 여러 개여서 무척 바쁜 모양이었다. 캐롤라인도 평소의 일 외에 송별회의 준비까지 맡고 있어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요리의 주문도 하고, 크루거 부인이 달려와 남편을 깜짝 놀라게 할 계획도 짜놓 았다. 크루거 씨는 볼링의 명수였기 때문에 기념품은 볼링 도구 한 벌과 기념 문자가 새겨진 손목 시계로 정했다. 모든 준비가 거의 끝난 금요일 아침 시계방에서 일손이 부족하여 시계를 배달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전화연락이 왔다. 캐롤라인은 비명을 올렸다. 결국 이쪽에서 가 지러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시계방에서 돌아왔을 때는 정각 1시였다.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려다 캐롤라인은 하마터면 리스와 부딪칠 뻔했다. 그의 팔이 얼른 캐롤라인을 떠받쳐 주었다. 그녀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 에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상쾌한 애프터세이브 로션의 냄새와 그의 남자다운 체취가 콧구멍을 간질였다. 캐롤라인은 갑자기 그의 가무잡잡한 목에 입을 맞 추 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턱과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고 싶었다. 도대체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어리석어도 분수가 있지. 이 사람은 리스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캐롤라인은 뒤로 물러섰고, 리스의 손은 자 연스럽게 떨어졌다. 「실례했습니다. 거기 계신 줄 모르고 그만....」 리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극도로 흥분한 것은 그녀뿐이었던 모 양이다. 리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방금 시계를 찾아 가지고 오는 길예요. 이것으로 준비는 완전히 끝난 셈이죠」 「시계방에서 배달해 주지 않았나요?」 「네, 일손이 모자란다고....」 「점심식사는 했소?」 「시계방에 가는 길에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었어요」 리스는 그녀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버렸다. 8 캐롤라인이 6층 회의실에 내려왔을 때는 파티가 이미 시작된 뒤였다. 그러나 리스와 크루거 씨 가 아직 위층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 동안은 안심하고 있을 수 있었다. 그녀는 회색 스커트와 연한 핑크 색 블라우스를 비롯해, 좀처럼 입을 기회가 없 었던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이 드레스는 그녀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심플한 라인이 몸의 아름다운 곡선을 돋보이게 했고, 천이 가볍고 부드러워 착용감이 아 주 좋았다. 장신구는 백모 님이 물려주신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뿐이었다. 크루거 씨는 사원 일동의 정성에 무척 기뻐했다. 작별의 인사말은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오늘밤 아들이 오지 않은 사실에 몹시 실망한 듯했다. 피지에 있는 피터 크루거에게 전화를 했으나, 그는 온갖 핑계를 대면서 올 수 없 다고 했다. 피터에게 성의가 없다는 것은 리스도 알고 있었으나, 크루거 씨의 심 중을 생각해서 피지의 현장에서 떠날 수 없다는 피터의 대답에 약간의 충고를 한 모양이었다. 식사가 시작될 무렵 트레버가 캐롤라인의 곁에 와서 친근한 태도로 그녀의 허리 에 팔을 감았다.「정말 훌륭한 모임이 되었군요」그는 진심으로 칭찬하는 듯 눈 을 빛내며 그녀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맥주 덕분에 대담해진 듯했다. 캐롤라인은 냉담하게 몸을 빼려고 했으나 트레버는 놓아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 렇다고 소동을 일으킬 수도 없어 그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트레버와 이러쿵저 러쿵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가까운 시 일 안에 그에게 분명히 말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동료들의 호기심에 찬 시 선에 신경이 쓰였다. 캐롤라인은 날카로운 푸른 눈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그 쪽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리스의 시선은 얼음처럼 싸늘했고, 입가는 냉소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노여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가 무슨 권리를 갖고 있기에 나를 심판하려 한단 말인가? 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더구나 현재의 나에 대해서는. 하지만 그가 옛날의 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캐롤라인은 갑자기 다리 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주위의 대화에 정신을 집중했다. 캐롤라인은 음악과 사람들의 대화 소리 속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리스의 발소리 를 들었다. 그녀는 전신을 긴장시키며 기다렸다. 「식사가 시작되었어. 크루거 부처가 당신이 와주기를 바라고 있소」낮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트레버가 얼른 허리를 놓았다. 혹 사정이 달랐다면 나는 리스와 내가 서로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 떻게 대처했을까? 캐롤라인은 갑자기 불안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오늘밤부터 모 든 것이 변한다. 나는 리스와 단둘이 있게 되는 것이다. 크루거 씨는 오늘밤을 마 지막으로 회사를 떠나기 때문이다. 물론 리스가 나를 이 회사에 그대로 남아 있게 할는지는 알 수 없다. 이 회사의 다른 자리로 보내질 가능성도 있다. 내가 반드시 완전무결한 비서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일단 유능하다는 것은 자부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새 사장은 내 인간성을 의심하는 듯하다. 오늘 나를 보는 시선도 꽤나 싸늘했다. 비서로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해도 왠지 안도감은 들지 않고 오히려 실 망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나아 있는 몇 사람과 헤어진 것은 이미 한밤중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리스의 차 는 아직 주차장에 있었다. 캐롤라인은 피곤한 몸으로 자기 차에 올라 탄 뒤 키를 꽂았다. 엔진의 시동이 좀 이상했다. 헤드라이트를 켜고 기어를 백에 넣은 순간 엔진이 딱 멈추었다. 그녀는 라이트를 끄고 다시 한번 시동을 걸어 보았다. 제발 살려줘! 그러나 그녀의 그런 애원은 통하지 않았다. 캐롤라인은 키를 뽑고 자신 의 제미니에게 숙녀답지 않은 욕설을 퍼부었다. 이제 어떻게 한담? 보디는 콘론의 집에 있으니 걱정할 것은 없다 치고라도, 도대 체 지금 몇 시나 되었을까? 그녀는 시계를 불빛에 비춰 보았다. 12시 10분 전. 다 시 한번 엔진의 시동을 걸어 보았으나 역시 걸리지 않았다. 캐롤라인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나왔다. 이렇게 되면 사무실로 돌아가 택시를 부르 는 수밖에 없다. 차의 문을 잠그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이때서야 차의 문을 잠글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도둑인들 저 고물 차 를 훔쳐가려 하겠는가. 버튼을 다시 한번 누르니 엘리베이터가 곧 내려왔다. 앞도 잘 보지 않고 서둘러 타려고 했기 때문에 세 명의 남자가 내리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캐롤라 인은 갑자기 팔이 잡혔을 때에야 비명을 질렀다. 리스의 푸른 눈이 그녀를 내려 다보고 있었다. 「어머, 미안해요.....」다른 두 사람이 재미있다는 듯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캐롤라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웬일이오, 미세스 엘러턴?」 캐롤라인은 뒤로 물러섰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가 움직이지 않아요. 사무실로 돌아가소 택시를 부르려고요」 세 명의 남자가 일제히 그녀의 차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캐롤라인도 약간 의 거리를 두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처음에는 엔진이 걸렸었는데 곧 꺼져 버렸어요」캐롤라인은 자동차 키를 리스 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가솔린은?」 「오늘 아침에 나올 때 넣었어요」캐롤라인은 리스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감도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리스의 손이 닿으면 엔진이 움직이는 따위의 불명예스런 일 이 일어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역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 남자는 보닛을 올리고 의논하더니, 마침내 리스 가 몸을 일으켜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면서 말했다.「이런 불빛 아래에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같군. 월요일까지 여기다 그대로 놓아 둘 수밖에 없겠소」 캐롤라인은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미니의 수명이 다했다는 것은 알 고 있었지만, 하필이면 오늘밤 같은 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머리가 욱신거리 기 시작했다. 빨리 잠자리에 들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내가 집까지 바래다주겠소」 캐롤라인은 얼굴을 번쩍 들며 말했다.「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러실 필요는 없어 요. 택시를 부르면 되니까요. 저 때문에 일부러 먼길을 돌게 되면 미안해서 그러 는 거예요」 「마음쓸 것 없어요」리스는 캐롤라인의 당혹감을 무시하고는 다른 두 동행에게 말했다.「그럼 내주에....」두 남자는 인사를 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캐롤라인은 당황한 나머지 더 이상 말도 못하고 리스의 뒤를 따랐다. 리스의 차 는 어둠 속에서도 현란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그녀는 쾌적한 시트에 몸을 묻은 채 리스가 차에 타기를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런 상황에 나 자신을 맡기다니, 정말 정신나간 모양이로군, 캐롤라인 엘러턴! 이제부터 30분 동안 저 사람과 단둘이서 이 밀실 속에 있을 거야! 그런데 이 차 의 내부는 어쩌면 이렇게 호화로울까. 보디를 태워주면 무척 좋아할 것이다. 「크리블랜드의 옛길을 아세요?」차가 주차장에서 나왔을 때 캐롤라인은 주뼛주 뼛하면서 물었다. 「대강은 알고 있지만 자세하게는 모르오. 도중에 가르쳐 주는 것이 안전할 거 요」 길을 가르쳐 주는 동안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아요 되어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그 것도 차가 올바른 방향으로 무사히 빠져나갈 때까지의 일이었다. 그가 바로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입안이 바싹 말랐다. 모든 신경이 그를 의식 하고 떨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남성 중에서 왜 하필이면 이 사람이 내 마음의 평화를 흔들어 놓은 것일까. 리스 매케이브! 14년 전 그는 잔인하고 난폭하게 나의 팔을 잡았었 지. 내 몸은 잠재의식 속에서 그때의 두려운 순간을 변태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 일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다, 오직 그 일을 잊으려고...... 기억은 하릴없이 캐롤라인을 리스와 처음 만났던 14년 전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꿈이라도 꾸듯이 몽롱한 머리로 재판소의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창 백한 얼굴로 차를 돌리고 올 테니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마치 딸과 함께 있는 장면을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어머니가 자기를 성가신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때 비롯된 일이 아니었으니까. 어머니의 언짢은 듯한 뒷모습을 지켜보다 복도를 반쯤 걸어갔을 때 누군가에게 팔을 붙잡혔다. 「이제 만족해, 이 불량소녀 같으니! 어떤 판결이 나오든 너는 평생 동안 무거운 짐을 벗지 못하고 살게 될 거야. 알겠어?」남자의 푸른 눈에는 노여움과 절망이 가득 차 있었다. 두려움으로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이 사람은 미쳤다. 맨손으로 나를 죽일는지 도 모른다. 오랜 심리 기간동안 나는 그 사 람의 마음속에 서서히 커 가는 노여움 을 보았다. 「너는 형무소로 가야 마땅해. 너는 살인자야, 살인자란 말야. 듣고 있어?」그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팔을 잡고 있는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어디선가 나이 지긋한 남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리스의 아버지였다. 그는 아들의 손을 떼어놓았다. 「그만둬라. 이제 끝난 일이야」 그의 어머니도 왔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젊은 아가씨가 그녀를 지탱해 주고 있 었다. 크리스와 머리 빛깔이나 눈의 빛깔도 똑같으며, 얼굴 모습도 비슷했다. 크 리스의 누나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캐롤라인이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다시 팔을 잡혔다. 「네가 동생을.... 그 두 사람을 죽인 거야. 너도 괴로움을 당해야 해. 너는 자유로 울 권리가 없어」 「리스, 제발 이러지 말아라!」그의 어머니가 흐느끼면서 말했다.「이래 바야 아 무 소용없어. 크리스는 이제 돌아오지 않아...... 다시는」 「엄마 말이 옳아, 오빠」리스의 누이동생이 연민과 혐오감이 섞인 눈으로 캐롤 라인을 바라보았다.「그 여자를 놓아줘요. 모든 것이 끝났어요」 「제 말 좀 들어주세요. 맹세코 말씀 드리지만, 저는......」캐롤라인은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리스가 더욱 힘주어 팔을 잡는 바람에 그녀는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마침 내 울음을 터뜨렸다. 이때 리스의 아버지가 억지로 아들의 손을 떼어놓았고, 캐롤 라인은 비틀거리다가 벽에 등을 부딪쳤다. 리스의 얼음처럼 싸늘한 푸른 눈은 더 욱 날카롭게 그녀를 쏘아보았다. 「이제 가봐요」리스의 아버지가 조용히 말했다. 캐롤라인은 괴로운 표정으로 다시 한번 리스를 돌아보고는 그대로 달려 건물 밖 으로 나왔다. 어머니의 차를 보았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지옥에서 벗어난 것 같은 기분으로 차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리스 매케이브의 차안에 있는 것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 도로 그의 바로 가까이에. 9 리스에게 잡혔던 팔의 아픔을 생각한 캐롤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치며 자신의 팔을 쓰다듬 었다. 「추워요?」낮고 깊이 있는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데리고 왔다.「추우면 에어 컨을 끄겠소」 「아녜요, 괜찮아요」 캐롤라인은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핸들을 잡은 손, 낮고 깊이 있는 목소리, 고개를 갸우뚱할 때의 모습, 청결한 남자의 냄새 -이 모든 것 에 그녀의 모든 감각이 반응을 나타냈다. 만약 지금 도망칠 기회가 주어진다 하 더라도 그녀는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 산지 오래 되었소?」 캐롤라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13년쯤 되었어요. 백모님과 함께 살았었는데, 백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집을 물려 주었죠」 「브리즈번에서는 그전부터 살았었나요?」 「아니에요」불안이 더해 갔다. 캐롤라인은 화제를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 신에게 침착 하라고 타일렀다. 나는 지나치게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가벼 운 대화에 불과해. 혹시 그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이미 어떤 징조가 나타났을 것이다.「자라기는 남부에서 자랐죠. 하지만 브리즈번이 무척 좋아요. 이젠 고향 이나 다름없어요. 기후나 사람들의 성품도 온화하고 생활태도도 여유가 있어 자 연에 가까운 느낌이 들거든요」캐롤라인은 상대의 질문을 피하려고 정신없이 지 껄이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리스는 미소지었다.「완 전히 퀸즐랜드 사람이 된 것 같군요. 당신의 말은 이해할 만해요. 나도 <태양의 주>에 올 때마다 즐거움을 느끼니까」 「퀸즐랜드에는 자주 오시나요?」 「자주 왔죠. 앞으론 이곳에 올 기회가 더욱 많아질 거요. 크루거 사말고도 내가 관계하고 있는 회사가 세 개쯤 있거든요. 지금 까진 한 달에 한번 꼴로 브리즈번 에 왔었죠」 그렇게 자주! 그렇다면 길에서 우연히 만났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우리 가족은 휴가를 골드코스트에서 자주 보내죠. 부모님과 누이동생 내외, 그 리고 두 질녀는 금년 초에 레인보만에서 한달 동안 지냈는데, 어머니는 그때의 즐거움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당신은 그들과 함께 지내지 않았었나요?」 「그렇소, 그때 나는 동생과 함께 미국에 가 있었죠」 「어머!」 「그 <어머>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죠, 미세스 엘러턴?」리스가 웃으면서 물었다. 「별로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캐롤라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의 속삭이는 듯한 나직한 음성에 마음이 달떴다. 그 목소리는 과거를 잊게 하고 가슴 두근거 리는 현재만을 생각케 했다.「누구에게나 휴가는 필요해요. 가령....」 「가령 나 같은 사람도?」그는 또 웃었다. 캐롤라인도 어느새 미소짓고 있었다.「모두 마찬가지예요」그녀는 갑자기 멜버른 에서 열릴 보디의 선수권대회가 생각났다.「저도 곧 일주일간의 휴가를 얻기로 되어 있어요. 2개월 전에 크루거 씨의 허가를 받았었 는데, 괜찮을까요?」 「물론 괜찮소. 당신 말대로 누구에게나 휴가는 필요하니까. 한데 휴가 계획은 세 웠나요?」 「네, 멜버른에 갈 거예요」 「혼자서?」 「아녜요.... 친구들과 함께예요」조이와 빌 콘론도 아들의 팀을 따라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캐롤라인은 마음속으로 변명했다. 「당신은 최근에 휴가를 즐기셨나요?」그녀는 여행계획에 대한 질문을 더 이상 받고 싶지 않아 화제를 딴 데로 돌리려 했다. 리스는 어깨를 들썩했다.「아직 휴가를 갖지 못했소. 혼자 몸으로 여기 저기 뛰어 다니다 보니까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일하는 게 습관이 돼버리면 그 습관을 깬 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더군요」 「피지에 시찰하러 가실 때 조금 시간을 내어 쉬는 게 어때요? 피지는 휴가를 즐 기기에는 이상적인 장소로 알고 있는데요. 뭣하면 제가 몇 가지 계획을 세워 볼 까요?」 「그러고 보니 나를 쫓아 버릴 작정인 모양이군, 미세스 엘러턴」 「아니에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요? 저는 다만 제안을 했을 뿐.....」 「생각해 보겠소」리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에는 어딘가 수수께끼 같은 데가 있었다. 사무실을 벗어나 보다 자유롭 고 친밀한 공간에 있을 때 그의 매력은 더욱 돋보이는 것 같았다. 캐롤라인은 형 언할 수 없는 흥분을 느끼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머, 이를 어쩐담! 방금 전에 지난 길을 오른쪽으로 돌아야 하는데 깜박했어 요」 리스는 속력을 줄여 무난히 차를 돌렸다. 「여기예요. 그리고 두 번째 모퉁이를 왼쪽으로 돌아 주세요. 어쩌다가 그냥 지나 쳤는지 모르겠어요」 웃기지 말아요, 캐롤라인 앨러턴.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너는 리스 옆에 있으 면 오른쪽인지 왼쪽인지도 분간 못하게 되어 있지. 더구나 이렇게 가까이 있으 면...... 「왼쪽의 세 번째 집이에요」차가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녀는 서둘러 말했다. 낡은 집 앞에 초호화판 차가 멈추었다. 옆집의 현관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돌아보았으나 리스는 이미 차에서 내려 그녀가 앉아 있 는 쪽의 문을 열어 주기 위해 차를 돌아오고 있었다. 빨개진 얼굴을 어둠이 가려 주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캐롤라인은 차에서 내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커피라도 한잔 마시 고 가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다. 그것은 너무 위험하다. 「천만의 말씀」리스가 여유있게 대답했다. 「안녕히 가세요」 「문까지 바래다주죠」리스는 캐롤라인의 팔꿈치를 잡고 걸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시간이 많이 늦었는걸요」 「2,3분 더 늦었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죠」 리스가 대문을 열었기 때문에 캐롤라인은 별수 없이 콘크리트가 깔린 길을 앞서 걷기 시작했다. 리스는 이미 손을 놓았 으나 팔에는 아직도 그가 잡았던 손의 감 각이 남아 있었다. 캐롤라인은 내달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그녀는 너무 서두른 나머지 계단에서 넘어질 뻔했다. 이때 리스가 어른 손을 내 밀었고 캐롤라인은 그의 재킷 소맷자락을 잡았다. 그녀는 얼른 손을 거두고 정신 없이 문의 손잡이를 더듬었다. 「고맙습니다. 매케이브 씨」캐롤라인은 그가 들어오는 것을 가로막듯 입구에 서 서 말했다. 리스는 계단 아래 서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키가 더 컸다. 그녀는 눈 을 들어 그늘에 가린 그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이때 떨리는 손에서 열쇠가 떨어지면서 발 밑에서 소리를 냈다. 열쇠를 주우려고 두 사람이 동시에 엎드리는 바람에 손가락 끝이 맞닿았다. 잔물결 같은 것이 캐 롤라인의 팔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면서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욕망의 소용돌 이가 밀려왔다. 캐롤라인은 꼼짝도 못하고 몸을 긴장시킨 채 휘둥그래진 눈으로 리스의 눈을 응 시했다. 감미로운 밤의 장막이 두 사람을 감쌌다. 시간이 영원히 멈춘 듯했다. 움 직이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풀잎도 나무도 나뭇잎도. 리스가 숨을 멈추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손안에 든 열쇠가 살을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캐롤라인」리스가 쉰 목소리로 속삭이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캐롤라인은 그의 깊고 힘있는 목소리에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 당장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몸이 자연스럽게 앞쪽으로 기울 었다. 그의 팔에 안기고 싶다. 그 리고 입맞추고 싶다. 이때 느닷없이 베란다에 불이 켜졌다. 이 갑작스런 불빛이 싸늘한 샤워처럼 두 사람을 얼어붙게 했다. 옆 집 문이 열리고 덥수룩한 검은머리가 나타났다. 「아, 당신이었군요, 캐롤라인. 도둑인 줄 알았어요」옆집에 사는 그렉이 파자마 바람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나왔다. 캐롤라인은 다시 열쇠를 떨어뜨리고 튕겨나듯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리스도 천천히 몸을 바로 하면서 얼굴을 붉힌 캐롤라인으로부터 파자마 차림의 그렉에게 로 시선을 옮겼다. r의 눈은 아직도 빛나고 있었으나 얼음처럼 싸늘한 푸른 눈으 로 변해 있었다. 「열쇠 여기 있소」리스는 캐롤라인이 내민 손바닥에 서로의 살이 닿지 않도록 열쇠를 가볍게 떨어뜨렸다. 「고마워요」캐롤라인의 마음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혹시 리스가 나와 그렉 사 이를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잘 자요, 미세스 앨러턴」리스는 그렉에게 싸늘한 시선으로 눈인사를 하고 차 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캐롤라인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열쇠를 손에 쥔 채 망연히 서서 모퉁이를 돌아가는 리스의 차를 지켜보고 있었다. 리스를 되불러 사정을 해명하 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가 방해라도 하지 않았나요, 캐롤라인?」그렉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에요, 그렇잖아요」캐롤라인은 밝게 웃으면서 돌아보았다.「내 차가 고장이 나서 바래다 준 거예요」 「점잖고 아주 좋은 남자 같은데, 누구죠?」 「새로 온 사장이에요. 매케이브 씨라고 하죠」 「아, 보디가 말하던 바로 그 사람이군요. 크루거 씨 대신 왔다면서요?」그렉은 이렇게 말하면서 하품을 했다. 「당신을 위해 딱딱한 사람이 아니길 빌어요. 크루거 씨와는 달리 상대하기 어려 운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그래요, 하지만 새 사장은 크루거 사말고도 많은 회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 무실에 항상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겠죠, 거물이니까. 그런데 차가 어떻게 되었죠?」 캐롤라인은 화제가 바뀐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문의 자물쇠를 열었다. 「수명이 다했거든요. 하지만 월요일까지는 걱정하지 않기로 했어요」 「잘 생각했어요. 그럼 잘 쉬어요, 캐롤라인」 「잘 자요, 그렉」캐롤라인은 안으로 들어가 거실 불을 켰다. 그리고 피곤한 몸을 문에 기댔다. 혼자 남게 되자 조금 전에 계단에서 있었던 숨막힐 듯 했던 일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사람은 내 이름을 불렀다. 그것도 미세스 앨러턴이 아니라, 캐롤라 인이라고. 그의 목소리는 나의 자제심을 완전히 깨뜨려 버렸다. 어쩌면 그것은 단 순한 상상이었을까? 아냐, 그는 분명히 불렀어. 촉촉이 젖은 섹시한 목소리로 캐 롤라인이라 불렀다. 만약 그때 그렉이 베란다의 불을 켜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랬더라면 우리는 키스 를 했을 것이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고, 그의 몸이 나의 몸을..... 아, 나는 얼마나 그리 되길 바랐던가. 하지만 우리에겐 장래가 없다. 리스는 내가 범했다고 믿고 있는 죄를 결코 용서 하지 않을 테니까. 그렉이 방해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단 한 번뿐인 키스쯤이야..... 어쩌면 먼 훗날 어떤 추억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만 약...... 캐롤라인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침대를 향해 걸어가면서 마음속으로 몇 번이 나 뇌까렸다. 왜 하필이면 리스 매케이브인가, 왜 그사람이어야 했단 말인가..... 10 월요일 아침 로얄 오토모빌 클럽의 운반차가 캐롤라인의 제미니를 수리공장으로 운반해 갔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공장에서 차의 고장원인에 대한 전화연락이 왔 다. 오늘 아침에는 아이들을 조이 콘론에게 부탁하고 회사에는 버스로 왔다. 공장에 서 차가 수리돼 돌아올 때까지는 모든 스케줄이 엉망일 수밖에 없다. 캐롤라인은 수화기를 놓고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피할 수 없는 일을 뒤로 미루 고 있을 뿐이 아닐까. 부질없이 돈만 들이면서? 그녀는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관 자놀이를 문질렀다. 「골치라도 아픈 거요, 미세스 엘러턴?」 캐롤라인은 문지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 리스의 아침인사는 퉁명 스러웠고, 그는 지시를 내리자 곧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후 오전 내내 자 기 책상에서 계속 지시만 내려 사람들을 정신 못 차리게 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캐롤라인은 리스의 얼굴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리 스가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가슴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두근거렸다. 「차에 대해서 무얼 좀 알았소?」 「네, 조금 전에 전화가 왔어요. 수리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수요일에는 보내 주 겠다는 연락이었어요」대대적인 수리를 해야 한다는 권고가 있었고, 그러자면 최 소한 2주일이 걸리며 비용도 막대하다는 것은 생략하고 말했다. 응급처치만 하고 대대적인 수리는 크리스마스가 지내고 나서 해야겠다고 생각했 다. 「얼마 전부터 상태가 안 좋았어요. 옆집에 사는 그렉도 -금요일 밤 당신이 만난 그 사람 말이에요-한번 전면적인 수리를 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말하더군 요」 리스의 얼굴 표정이 조금도 변하지 않아 그렉에 대한 설명으로 뭔가의 반응을 기 대했던 캐롤라인은 마음속으로 적이 실망했다. 리스는 호주머니에서 차의 열쇠를 꺼내어 타이프라이터 옆에 놓았다.「주차장에 예비차가 있소. 황색 시그마인데, 당신의 차가 돌아올 때까지 사용하도록 해요」 「별말씀을! 차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요?」 「아무 일 없을 거요」리스는 이미 들을 돌린 뒤였다. 「내디의 피터 크루거에게 전화를 걸어 줘요」 「사무실에 안 계실 텐데요」캐롤라인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사장실의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캐롤라인은 차의 열 쇠를 손에 쥐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오전 내내 재가 이곳에 없는 것처럼 굴었고, 다만 이것저것 지시만 내렸을 뿐이다. 그의 오만한 태도에는 화가 치밀었다. 혹시 그런 태도가 금요일 밤에 있었던 일과 어떤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나를 심판할 까닭도 권리 도 없지 않는가. 아마 나와 그렉 사이를 친구 이상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 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근무시간 외에 무엇을 한들, 또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든 그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 역시 외모와 지위로 보아 여자에게 인 기가 없을 리 없다. 어느 면으로 보나 여자 없이 오랫동안 혼자 지낼 수 있는 남 자 같지는 않아. 수지인가 뭔가 하는 여자하고도 보통 관계인 것 같진 않았다. 캐롤라인은 몸을 가볍게 떨었다. 리스의 손이 자신의 몸을 애무하고 자신의 나체 와 그의 나체가 겹쳐지는 장면을 자신도 모르게 상상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경우의 감각도 상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음에는 리스가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장면이 역시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런 상상이 불러일으키는 고통 때문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나는 왜 이처럼 바보 같을까. 왜 이렇게 맹목적이고 철딱서니 없단 말인가! 어쩌 다 그를 사랑하게 되었단 말인가? 금요일 밤 이후로 내가 잠을 설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사실로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사람에 대한 호감부터 갖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하지만 내가 사랑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지? 남자와 여자에 대해서 무엇을 알 고 있단 말인가? 이 세상에서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랑은 보디와 나 사이의 강렬하고도 감미로운 모자간의 사랑뿐이다. 보디를 품에 안은 순간에 태어나 그 후 소중하게 키워 온 사랑이다. 캐롤라인 자신은 사랑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혼한 것은 그녀가 생긴 뒤였고, 두 사람 모두 결혼도 자식도 바라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머 니를 통해 여러 차례 들었다. 당시 처녀로 임신한 어머니는 가능한 한 빨리 결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부모의 끊임없는 싸움과 말다툼 속에서 자랐는데, 마침내 아버지는 집을 나 가 여비서와 결혼했다. 어머니와 단둘이 남게 되면서 그녀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으나, 어머니는 이혼 후 점점 비뚤어져만 갔다. 일년쯤 뒤에 어머니는 조 버튼이라는 사람을 만나 몇 달 후에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는 그런 대로 괜찮은 듯했으나, 조는 아내가 데리 고 온 자식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다. 13살의 캐롤라인은 그것을 피부로 느끼 고 있었다. 계부는 심술궂은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의붓딸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 했을 뿐이었다. 2년 동안에 차례로 남동생과 여자동생이 생겼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어머니가 모처럼 얻은 아기를 돌보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러나 당시는 전보다 더 버림받은 듯한 감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캐롤라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캐롤라인은 학교에서 사귄 십대 그룹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그 녀는 그룹의 리더격이고 가장 나이가 많은, 그리고 가장 키가 크고 인기가 있는 사내아이의 주목을 받아 그 아이의 애인이 되었다. 적어도 캐롤라인은 자신이 소 속된 세계를 발견한 셈이었다. 그룹의 지나친 행동이나 장난에 가끔 양심의 가책 을 느끼는 일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것을 마음속 깊이 숨겨 두기로 했다. 자신 이 그룹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정당화하기란 쉬웠다. 그룹은 그녀가 처음 갖는 가족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보디의 아버지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땐 어머니로부터 거절당한 슬픔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는 보디의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계속 사랑하리라고 믿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일종의 영웅숭배와도 같은 감정이었다. 그 가 많은 소녀들 중에서 자기를 택해 주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그는 나를 어둠 속으로부터 끌어내 주었고, 내 자신이 누군가에게 있어 특별한 인간이 라는 의식을 갖게 해주었다. 반들반들하게 닦은 오토바이의 뒷좌석에 오라 타 그 의 가는 허리에 팔을 감고 있을 때, 내 가슴은 풍선처럼 부풀어올랐었다. 리스의 남자답고 억센 몸을 양팔로 감은 것은 또 다근 느낌이겠지. 여기까지 생 각한 캐롤라인은 신음소리를 냈다. 내가 어떻게 된 것일까? 이것은 단순한 생리 적 반응이야. 리스에 대해서는 단지 육체적으로 끌리고 있을 뿐이야. 다른 어떤 남자에게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한편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소리 가 들렸다. 트레버처럼 호감이 가는 남자에 대해서조차 한번도 그런 생각을 품지 않았잖은가. 화요일 밤 리스는 캐롤라인에게 산더미 같은 일을 떠맡기고 멜버른으로 돌아갔 다. 덕분에 잡념에 빠질 겨를이 없어져 매일 밤 지칠 대로 지쳐 집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수요일 아침에 수리공장에서 전화가 왔는데, 부품을 다른 데서 가져와야 하기 때문에 차는 내주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보내 주겠다는 것이었다. 어찌 해야 좋을까? 리스는 회사 차를 수요일까지 사용해도 좋다고 말했는데, 며칠 더 빌어도 괜찮은 지 허가를 받으려 해도 그가 이곳에 없으니.... 그가 가르쳐 준 전화번호는 긴급용 이라 전화로 물어볼 수도 없다. 캐롤라인은 주차장 관리인에게 연락하여 당분간 차를 사용할 예정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부득불 수요일에도 시그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월요일에 처음으로 이 차를 운전하고 돌아왔을 때 보디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 래졌다. 「어머니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매케이브 씨가 빌려주었어요? 와, 보아 하니 나 쁜 사람은 아닌 모양이군요. 제 생각엔 친절한 사람 같아요」 친절하지만 사려 깊지는 않다. 내가 이 차를 사용하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 다. 어떤 소문이 회사 안에 나돌 것인가는 생각하기조차 두렵다. 목요일 5시 정각에 일의 일단락을 지었다. 리스가 오늘 오후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문이 열렸을 때는 긴장했으나, 들어온 사람은 트레버였다. 「여어, 캐롤라인, 돌아가기 전에 이야기를 나누고 실었어요. 사장은 언제 돌아오 죠?」 「오늘 오후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늦는 모양이군요」캐롤라인은 피로한 듯 목덜미를 주물렀다.「아, 빨리 집에 돌아가서 두 다리 쭉 뻗고 쉬었으면 좋겠 어요. 전화 받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해요!」 「오늘도 혹사당했나요?」트레버가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실컷 혹사당했죠」캐롤라인은 암홍색 수트의 상의를 같은 색 계통의 블라우스 위에 걸치고 선반에서 숄더백을 꺼냈다. 트레버를 쫓아낼 생각은 아니었으나, 피 곤해 말할 기력도 없는데다가 리스가 언제 들어올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일이 다 끝났나요?」 「아뇨, 아직도 두 시간쯤 남아서 일을 정리해야 해요. 내일 저녁식사나 함께 할 수 있을지 알아보려고 들렀죠」 「어머, 초대해 줘 고마워요. 하지만 내일 밤은 곤란해요. 예정이 있는데 변경할 수가 없어요」내일은 보디의 선수권대회가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입밖에 내지 는 않았다. 트레버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그래요?」즉각 그의 눈이 사장실 문 쪽으로 향 했다.「그럼, 다음 기회에.....」 「그렇게 해요」캐롤라인은 내심 심기가 불편했다. 회사 안에 풍문이 나돌고 있 어, 트레버가 그 풍문에서 어떤 결론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볼을 붉히면 서 치밀어 오르는 노여움을 애써 삼켰다. 「당신이 회사차를 이용한다고 누군가가 말하더군요」트레버가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캐롤라인은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내 차가 고장이라서, 리....」캐롤 라인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얼른 말을 도로 삼켰으나, 트레버는 놓치지 않고 들은 듯했다. 어쩌자고 그의 퍼스트 네임을 사용했지? 그 사람을 그렇게 친밀하게 여 기지도 않았는데.「매케이브 씨가 차의 수리가 끝날 때까지 회사 차를 사용해도 좋다고 했어요. 그럼 먼저 돌아가겠어요. 내일 또 봐요, 트레버」 「그럼 내일」트레버는 캐롤라인의 눈을 흘끗 쳐다보고는 입을 일그러뜨렸다. 「언제 시간이 있으면 얘기 좀 합시다」 금요일 아침, 캐롤라인은 리스와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오로 회사를 향해 서둘렀다. 오늘은 보디에게 있어 중요한 시합이 있다는 것도 그녀의 긴장을 더해 주었다. 어떤 대회를 앞두고도 냉정하던 보디가 오늘은 다소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옆에 서도 알 수 있었다. 보디는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 같은 것이라면서 웃었다. 문제 와 해답을 다 익혔다고 생각해도 항상 예기치 않은 사태가 일어나게 마련이라고 했다. 그래도 그는 아침식사로 오렌지 주스와 좋아하는 베이크드빈즈를 얹은 토 스트를 다 먹어치웠다. 캐롤라인은 사무실에 도착하자 구술녹음기의 스위치를 틀고 커피포트에 커피를 넣었다. 녹음기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등줄기에 전율 같은 것이 지나갔 다. 캐롤라인은 자리에 앉아 리스가 사무적인 어조로 오늘 하루는 노스코스트의 현장에 나가 있다가 저녁에 돌아온다고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점심식사 때의 연락처 전화번호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다음 말에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었다. 「.....일요일 아침에 마중 가겠소. 일주일 동안 있게 될 거요」 캐롤라인은 떨리는 손으로 구술녹음기를 멈추고 다시 한번 같은 부분을 틀어 보 았다. 설마! 그 사람과 함께 피지로 가다니, 말도 안 된다. 캐롤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서성거렸다. 테이프에서 들려오는 편지의 내 용 따위는 이제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내디의 프로젝트를 시찰하러 가는데 왜 내가 동행해야 한단 말인가? 비서라면 현지에서도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을 텐 데. 게다가...... 보디의 선수권대회가 있다. 이것은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일요일에 있을 예정인 800m자유형은. 이것은 좋은 핑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리스가 이해해 줄 까? 또 그 다음주에는 휴가를 얻어 멜버른에 가기로 되어 있는데...... 전화로 연락하여 함께 갈 수 없다고 말해야겠다고 결심했으나, 오전 중에는 정신 을 집중할 수 없어 애를 먹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섬의 백사장에서 리스와 나란히 야자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이 자꾸 만 떠올랐다. 점심시간은 빨리 돌아왔다. 전화가 리스에게 연결될 때까지는 잠시 시간이 걸렸 다. 기다리는 동안 가슴이 몹시 두근거리고 수화기를 잡은 손이 아플 정도로 긴 장되었다. 「매케이브 입니다」그의 목소리는 냉랭하고 접근하기 어려웠다. 「캐롤라인 엘러턴이에요. 방해해 죄송합니다. 저......」그녀는 침을 삼켰다.「피지 에 갈 수 없어요. 이번 주말에는 변경할 수 없는 예정이 있거든요」잠시 아무런 대꾸가 없어 캐롤라인은 전화가 끊기지 않았나 생각했다. 「예정이란 변경하기 위해 있는 거요」메마른 음성이 되 돌아왔다. 「죄송해요, 매케이브 씨. 이번 주말은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로맨스보다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설령 그것이 아무리 열렬한 로맨 스라도」 「로맨스가 아녜요! 약속이 있어서....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아주 중요한 일예요. 그리고 내주 휴가는 허가해 주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때 무슨 소리가 들리고 리스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나중에 얘기합시다. 회의가 5분전에 시작됐소. 당신이 퇴근하기 전에 회사에 들 르겠소」 전화가 끊기고, 캐롤라인은 하는 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얼른 샤워하고 올께」캐롤라인은 잰걸음으로 욕실로 달려가면서 보디에게 소리 쳤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머니.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까요」 5시가 되어도 리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기다려야 했겠지만, 7시면 보디의 선 수권대회가 시작되기 때문에 하는 수없이 빨리 돌아와야만 했다. 캐롤라인은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메모를 남겼고, 오늘밤 6시 15분까지, 또는 내일 아침에 집으로 전화를 해주면 사정을 설명하겠다고 덧붙였다. 물론 어떻게 설명 해야 할 지에 대해선 막막했지만. 샤워를 마치고 타월로 된 실내복을 걸치고 욕실에서 나왔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내가 나갈께요!」보디가 문을 향해 달려갔다.「무슨 일로 오셨나요?」 「캐롤라인 앨러턴 씨 댁이 여기죠?」깊고 저력 있는 목소리에 캐롤라인은 그 자 리에 붙박인 듯 섰다. 「네, 그런데요」보디가 이상하다는 듯 대답했다. 「만날 수 있겠습니까?」 「네, 물론..... 그런데 누구 신가요?」 「리스 매케이브요」 「아, 그러세요?」보디의 목소리가 갑자기 밝아졌다. 「새로 오신 사장님이시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곧 모셔오겠어요. 지금 샤워를 하 고 계세요」 캐롤라인은 튕겨나듯 현관 쪽으로 갔다. 홀에 나가자 두 사람이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캐롤라인은 비틀거리는 몸을 벽에 기댔다. 이것은 현실이다. 터무니 없는 상상이 아니다. 리스는 속눈썹을 아래로 뜨고 있어 푸른 눈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매케이브 씨예요, 어머니」보디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보고했다. 이때 리스가 놀라면서 얼굴을 들었다. 11 「매케이브 씨, 어서 오세요」캐롤라인은 떨리는 다리로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면서 보디의 어깨 를 잡았다. 너무나 세게 잡아 보디가 당황하며 자신의 어깨를 뺄 정도였다. 「저, 무슨 일로 오셨나요?」 리스는 캐롤라인과 보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보디의 존재가 그를 당황하게 만 든 모양이었다. 위대한 매케이브가 처음으로 자제심을 잃은 것이다. 「비행기가 늦게 도착해서 사무실로 가지 않고 직접 찾아왔소. 피지 행 문제로 상의 좀 할까 해서」 「그 문제라면, 죄송합니다만 도저히 함께 갈 수 없겠어요」 보디는 흥미롭다는 듯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에게 아들이 있는 줄은 몰랐소」리스는 캐롤라인의 대답과는 관계없이 말 했다. 「우리 어머니는 저 같은 자식을 둔 여자 같아 보이지 않죠. 다들 그렇게 말하는 걸요」 보디는 생글거리면서 캐롤라인을 쳐다보았다. 캐롤라인은 보디가 사랑스러워 힘 껏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저는 보디 앨러턴이라고 해요. 매케이브 씨, 당신에 대해선 어머니를 통해 많이 들었어요」 리스는 보디의 손을 잡으면서 캐롤라인에게 조롱하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이제 완전히 냉정을 회복한 듯했다. 「정말인가?」 그가 이렇게 묻자 보디는 킬킬거렸다.「안심하세요. 대개는 좋은 점에 대해서만 말하셨으니까요」 리스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절을 하는 시늉을 했다.「정말 고마운 일이군」 「죄송합니다만, 매케이브 씨. 우린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라서.....」 「오래 붙잡진 않겠소」리스의 눈은 캐롤라인의 얼굴에서 욕의로 감싸인 몸으로 옮아갔다. 캐롤라인은 V자로 팬 목깃을 여미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그의 푸른 눈이 자기 에게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그에게 알아 채이고 싶지 않았다. 「피지 행에 관한 얘긴데, 프로젝트 전반에 정통하고 있는 당신이 꼭 함께 가주 었으면 싶소. 내디에서 적당한 사람을 찾아낼 만한 시간이 없어서 그러는 거요」 「하지만 너무 급작스런 이야기라서」 「목요일 밤까지만 해도 내주에 간다는 것이 확실치 않았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당분간 못 갈 것 같아서 내주에 꼭 가려는 거요」캐롤라인은 자신의 결심이 꺾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꺾여서는 안 된다. 그와는 절대로 함께 가 서는 안 된다.「타이프 실에 있는 누구 한 사람을 데리고 가시면 어떻겠어요? 케 리 딘이라면 틀림없이.....」 「캐롤라인, 당신을 데리고 가고 싶소」리스가 어느새 퍼스트네임을 사용하고 있 다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내주에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 무엇이죠?」 「제 문제라면 브렛의 집에서 묵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보디가 끼여들었다. 「너는 마음쓸 것 없어. 가서 매케이브 씨를 위한 커피나 따라 오렴」 「알았어요, 하지만.....」 「부탁이다, 보디」캐롤라인은 가볍게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거실로 가시죠」캐롤라인은 사장을 좁은 현관 홀에 세워 둔 채 있었다는 사실 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거실로 들어서자 리스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편안해 보이는 커다란 의자, 교과서 를 쌓아 놓은 보디의 책상, 구석에는 보디의 트로피와 메달과 상장 등이 장식되 어 있다. 「일요일에 대한 이야긴데요」이렇게 말을 꺼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전호는 홀에 있었다. 캐롤라인은 양해를 구하고 전화기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여보세요」 「캐롤라인? 트레버요. 집에 있어 다행이군요」 「곧 떠날 거예요」캐롤라인은 짜증을 참으며 말했다. 당장 전화를 끊고 싶었으 나 그럴 수도 없었다. 「좋아요, 이야기는 곧 끝내겠어요. 실은 사장의 거처를 알고 있나 싶어 전화를 했어요」 수화기를 쥐고 있는 캐롤라인의 손에 힘이 주어졌다. 한순간 트레버의 말속에 어 떤 숨은 뜻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아니에요, 트레버 씨. 모 르겠어요」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사장이 지금 우리 집 거 실에 있다고 말한다면, 트레버는 어떻게 생각할까? 보디가 쟁반에 커피를 잔 두 개와 과일 주스 글라스를 담아들고 천천히 거실로 걸어갔다. 캐롤라인의 관심은 자연 그쪽으로 쏠렸다. 「긴급한 일인데, 내디의 계약서에 몇 가지 하자가 발견됐어요. 사장이 피지로 출 발하기 전에 연락을 취해야 해요. 사장은 일요일에 떠나죠?」 「잘 모르지만.....」캐롤라인은 거실에서의 대화 소리에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보디가 순진하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는 건 아닐까? 보디는 아무 것도 모른다 곤 하지만..... 「호텔에 연락해 보았어요?」캐롤라인은 뒤가 켕겼지만 이렇게 말했다. 「크레스트 호텔? 했어요. 하지만 거기에도 없었어요」 「호텔에 메시지라도 부탁하는 게 어떨는지요?」 「그러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방해해서 미안해요. 즐거운 주말을, 캐롤라인」 「고마워요, 트레버」캐롤라인은 전화를 끊고 욕의의 벨트를 고쳐 맨 다음 거실 로 갔다. 커피 잔은 테이블 위에 놓인 채 두 사람은 캐롤라인을 등지고 서 있었다. 보디는 트로피를 손에 들고 금년 초에 자유형에서 승리했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것을 보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를 길 이 없었다. 리스가 자기와 보디의 오붓한 생활을 위협하려고 하는 것 같아 불안 했다. 「죄송합니다, 매케이브 씨」캐롤라인이 들어서자 두 사람이 돌아보았다. 「피지 행에 대한 얘긴 데요....」 리스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일요일에 중요한 시합이 있다는 것은 보 디에게 들어 알고 있어요. 그래서 출발을 월요일로 미루었소」 캐롤라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그것은 무리예요! 그 다음주에는 휴가 를 얻기로 되어 있고, 그것은 크루거 씨가.....」 「멜버른에서 전 태평양 선수권대회 가 있다면서요. 보디는 퀸즐랜드 대표로 선발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더군요」 캐롤라인은 보디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할 것까 지는 없었는데.「네, 그래요. 그래서 피지에는 도저히.....」 「내주 중에 돌아오면 돼요. 금요일에 돌아오면 예정대로 토요일엔 멜버른으로 떠날 수 있을 거요」 「간단해요, 어머니. 매케이브 씨와 제가 다 상의해 놓았는걸요」 「하지만 보디, 목요일에는 유니폼을 가지러 가야잖아?」 「브렛과 아주머니가 갈 거예요.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요」 캐롤라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졌다. 어떻게 이 난처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 을까? 리스 매케이브와 함께 피지에 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편 가고 싶은 생각도 없진 않았다. 「그린 씨는 무슨 용건이었어요?」보디가 물었다. 리스가 미간을 찌푸리고 입으로 가지고 가던 커피 잔을 도중으로 멈추었다. 「매케이브 씨가 있는 곳을 모르냐고 물어 왔어」캐롤라인은 애써 태연한 목소리 로 말했다.「내디의 일로 급히 연락할 일이 있는 모양이에요. 호텔에 메시지를 부 탁하겠다고 했어요」 리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나중에 내가 연락하죠」 「매케이브 씨는 여기 계신데, 왜 말하지 않았어요?」 「그린 씨가 너무 서두는 바람에. 자, 준비하자, 늦겠어」 보디가 시계를 보았다.「정말이에요. 우린 10분 후에 집을 떠나야 해요, 매케이브 씨. 시합이 7시에 열리고, 저는 제 1레이스거든요. 괜찮으시다면 우리와 함께 가 실까요?」 「매케이브 씨는 다른 볼일이 있으셔」캐롤라인이 서둘러 말했다. 「볼일은 없소. 보디의 수영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군. 나도 젊었을 때 경영을 했기 때문에 수영에는 관심이 많지」 캐롤라인이 놀라 리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푸른 눈에서는 조롱하 는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말한 것이다. 「우와, 신난다!」보디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준비하고 와요, 미세스 앨러턴」캐롤라인은 리스의 독촉을 받고 대꾸도 못한 채 방을 나왔다. 이것은 엉터리 같은 꿈이다. 빨리 현실로 돌아가야지.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현 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바람도 있었다. 오늘밤만..... 오늘 하룻밤 정도는 무방하 지 않겠는가. 캐롤라인은 아침에 준비해 놓았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핑크와 흰색의 줄무늬가 있는 7부 길이의 짧은 바지에 흰 로프 식 벨트를 메고, 시원한 파스텔 핑크의 소매 없는 면 셔츠 차림에 하얀 샌들을 신었다. 그리고 간 단한 화장을 했다. 「멋있어요, 어머니」캐롤라인이 거실로 들어가자 보디가 쌩긋 웃고 동의를 구하 듯 리스를 돌아보았다.「그럼 가실까요?」 캐롤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보디에게는 한번쯤 단단히 주의를 해둘 필요가 있다고. 「내 차로 갑시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리스가 말했다. 캐롤라인은 사양하려 했으나, 보디는 벌써 리스의 차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우와, 멋있다. 진짜 재규어다! 이것 정말 당신 거예요, 매케이브 씨?」 「보디야!」 「응, 내 것이지」리스는 재미있다는 듯이 대답하고 문을 열었다. 「재규어를 타고 왔다고 하면 브렛은 아마 믿지 않을 거야. 거짓말이라 생각하겠 지」보디는 뒷좌석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고 계기와 장비 등에 대해서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그는 마침내 캐롤라인의 주의를 받고 마지못해 좌석에 바로 앉아 안전 벨트를 매었으나, 수영장에 도착할 때까지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우리 집 제미니와는 상당히 다르네요, 어머니」리스가 차를 주차장에 넣고 엔 진을 껐을 때, 보디가 말했다.「그 고물차로 정말 용케도 수영장으로, 학교로, 회 사로 몰고 다녔어요. 크루거 씨가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일찍 가야 하니 까.....」보디는 여기까지 말하다가 말고 입을 다물곤 헛기침을 한 다음 말을 맺었 다.「어쨌든 제미니의 활약도 대단해요」그리고 차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면 서 미안한 듯 씽긋 웃었다. 「좋은 곳이군」리스는 냇물 위에 걸려 있는 다리를 건너면서 주위에 심어져 있 는 미나리아재비와 유칼리 나무를 둘러보고 말했다. 「수영장 시설도 최고인 걸요」보디가 자랑했다. 수영장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보디는 붐비는 사람들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관람석으로 안내했다. 「저는 곧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어머니는 평소에 앉던 자리로 가시겠어요?」 캐롤라인은 옆에 서 있는 키가 큰 남자를 의식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해봐, 보디」리스가 말했다. 「그래, 힘내라. 사랑한다, 보디」캐롤라인은 아들의 어깨에 팔을 감고 힘껏 껴안 았다. 「고마워요, 어머니」보디는 어머니의 뺨에 소리가 나도록 키스를 하고는 손을 흔들면서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한 층 더 올라가죠. 그곳이 더 잘 보여요」 캐롤라인은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바로 뒤에 리스가 따라온다는 것을 생각하자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계단을 다 올라갔을 때 브렛의 어머니가 손을 흔들며 옆자리를 가리켰다. 캐롤라인은 다소 망설이면서 콘론 부부와 다른 선수 의 가족들이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이때 조이 콘론의 시선이 리스 쪽으로 가는 것을 본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나중에 질문공세를 받게 되리라는 걸 미리 각오해야만 할 것 같았다. 캐롤라인이 두 사람을 간단히 소개하고 나니, 다행히 조이는 누군가에게 불려 그쪽으로 갔다. 캐롤라인은 내심 안도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좁은 벤치식 의자여서 리스의 재킷 의 소매 끝이 팔에 닿고, 무릎과 무릎이 바싹 붙었다. 이처럼 서로 맞닿은 부분이 마치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린다. 이 사람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을까? 캐롤라인은 리스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도 역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깊고 푸른 눈이었다. 캐롤라인 은 서둘러 이곳 시설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는 설명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그는 그녀 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입술이 마르고 말이 자꾸 끊겼다. 이때 긴장된 분위기 를 깬 것은 리스였다. ┌───────────────────────────────────┐ │ ▶ 번 호 : 0/890 ▶ 등록자 : TITANIA2 │ │ ▶ 등록일 : 2000년 09월 07일 15:14 │ │ ▶ 제 목 : [연경/煙景] 젊음의 보상...12 │ └───────────────────────────────────┘ 「당신에게 아들이 있는 줄은 몰랐었소」 캐롤라인은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셨다. 「아들은 몇 살이오?」 「13살이에요」 「애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보디가 태어나기 전에요」 「아침 9시에 회사에 출근하기로 존 크루거 씨의 허락을 받았다는 말을 하지 않 았더군. 왜 말하지 않았소?」 「말씀 드릴 틈이 없었어요」 「내가 그처럼 막무가내였던가?」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그렇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우린..... 조이와 저는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데려 오는 일정을 고쳐 짰으니까.....」여기서 말이 막히고 그녀의 눈은 빨려 들어가듯 리스의 눈으로 행했다. 캐롤라인은 그의 눈에 붙들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리스는 그녀를 말없이 응시 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시선을 아래쪽 수영장의 수면으로 옮기면서 그녀를 해방시켜 주었다. 「혼자서 아이를 기르자면 꽤 힘들겠군」리스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생생한 감정 이 담겨있었다. 「아니에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보디가 어렸을 때는 백모님이 살아 계셔 여러 모로 도와 주셨거든요. 게다가..... 아이들이 모두 보디 같다면, 누구나 아이를 대 여섯쯤 갖고 싶어할 거예요」이렇게 말하는 캐롤라인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리스도 미소지었다. 「제 자식 이라고 해서 하는 말이 아녜요」 「물론 그렇겠지」 캐롤라인은 리스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윤곽이 뚜렷한 고전적인 얼굴이었다. 엄 격하고 단정한 얼굴에 섹시한 커브를 그리고 있는 입술이 따뜻함과 인간미를 곁 들이고 있었다. 캐롤라인의 가슴은 다시 두근거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처럼 막 연한 불안 때문이 아니라, 보다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욕망 때문이었다. 자신의 다 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탄탄한 넓적다리를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욕구에 사로 잡혔다. 리스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서도 한 순간 불꽃이 타오른 듯했다. 「그래, 그린과는 어떤 사이오?」 「트레버 씨 말인가요?」캐롤라인은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트레버 씨와는 단순한 동료관계일 뿐예요」 「그런데 왜 그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내게 넘겨주지 않았소?」캐롤라인이 곧바 로 대답하지 못하자 그는 계속해서 물었다.「당신은 언제나 자신의 사생활을 그 렇게 비밀에 부치고 있소?」 캐롤라인은 침을 삼켰다.「네, 그래요. 그렇게 하는 편이 당신에게도 좋을 것 같 고.....」 리스는 한참 동안 그녀를 지켜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이 캐롤라 인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어요, 리스. 우리 사이에는 아무 것도 일어날 수가 없어요. 「매케이브 씨, 저는.....」 「리스라고 불러 줘요, 캐롤라인」리스는 넥타이를 풀고 셔츠의 맨 위 단추를 푼 다음 의자에 등을 기댔다.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보디는 200m 배영에서 금메달을, 그리고 400m 개인 혼영 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보디의 코치가 올라와 언제나 그렇듯이 캐롤라인에게 과장된 몸짓으로 포옹하고 뺨에 키스했다. 「오늘밤 우리의 비장의 무기인 보디의 활약상이 어때요, 캐롤라인? 내가 말한 대로죠? 그 아이는 타고난 수영선수예요. 연방대회와 올림픽에서의 금메달도 꿈 이 아닙니다. 보디는 그런 영광을 누릴 만해요. 그 아이의 아름다운 어머니도!」 코치는 다시 한번 캐롤라인을 힘껏 포옹하고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저 사람은..... 보디의 코치는 대단한 정열가예요」 「그런 것 같군」리스는 쌀쌀하게 대답했다. 잠시 우 보디가 싱글거리면서 올라왔다. 「코치가 굉장히 칭찬해 주었어요. 특히 혼영에 대해서요. 접영은 잘 안되거든요. 이번에 저는 제 기록을 1초 갱신했죠. 정말 믿기지 않아요」 집에 도착했을 때 보디는 손을 밀며 말했다.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케이브 씨. 정말 훌륭한 차군요」 리스는 그의 손을 잡았다.「고맙다, 보디. 오늘밤은 정말 즐거웠어. 일요일에도 힘 내서 해」 「감사합니다, 매케이브 씨」 「어머니하고 잠깐 얘기해도 되겠나?」 「물론이죠」보디는 두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킬킬거리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보디는 우리에 관한 일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언제든 한번 단단히 주의를 주어야 겠다고 캐롤라인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피지에는 일요일 점심식사 후에 떠납시다. 그러니까 10시까지 회사에 나오면 될 거요」 「하지만 비행기의 예약을 다시 해야 하잖을까요?」 「회사 전용기를 이용하니까 괜찮아요」리스는 예사롭게 말했다. 「차 문제로 무슨 연락이 있었소?」 「아무 연락도 없어요. 출발 전에는 보내오지 않을 것 같아요. 트레버 씨에게 부 탁해서 가지고 오도록 해야겠어요」 「내가 처리하지」리스가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일까지.....」 「내게 맡겨요. 회사 주차장에 갖다 놓으라고 할 테니. 당신이 피지에서 돌아올 때까지 보관하라고 일러두겠소」 「감사합니다」캐롤라인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꽤 쉽게 양보하는군. 내가 알기로는 당신은 누구보다도 완고하고 독립심이 강 한 여자인 것 같은데」 캐롤라이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일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남에게 자신의 결단을 맡기는 기쁨도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알리 고 싶지 않아서였다. 지난 14년간 줄곧 매사에 스스로의 힘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다짐해 왔다. 그리고 자식을 낳은 여자는 자기 자신과 자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다짐했었다. 무겁게 짓누르는 침묵을 깨려는 듯이 캐롤라인이 말했다.「그렇게 하는 것이 가 장 간단한 해결방법이라고 생각되었으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보디를 콘론 씨 댁에 맡겨도 괜찮겠소?」 「네, 브렛도 흔히 우리 집에서 묵기도 하니까, 그건 상관없어요」 「잘됐군」리스는 피로한 듯 목덜미를 손으로 주물렀다. 「일요일의 시합에서도 행운을 빈다고 보디에게 전해 줘요」 「고마워요」 「보디는 좋은 아이더군」리스는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그럼 월 요일에. 회사에는 10시에 나와도 돼요」 「알겠어요」캐롤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떠날 때까지 서서 지켜보았다. 자 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저음이 지금도 그녀의 등줄기를 오싹하게 했다. 주방에 들어서니 보디는 그녀를 위해 끓인 홍차에 우유를 따르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니, 즐거우셨죠! 최고의 밤이었어요.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캐롤라인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잇는 2개의 메달을 들어올리며 아들에게 미소지었 다.「정말 훌륭했어. 그렇게 빨리 헤엄치는 너를 보기는 처음이야」 「그것만을 말하는 게 아녜요, 어머니. 매케이브 씨를 만나 그 멋있는 차를 타고, 그리고.....아무튼 전부가 즐거웠어요. 게다가 피지에 가다니, 행운이잖아요, 어머 니?」 「전 태평양 학생선수권 대회가 열리는 전주라면 더 좋을 텐데」캐롤라인은 찻잔 을 들고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건 상관없어요. 브렛의 집에서 잘 지낼 테니까요. 제 문제는 걱정하지 말 고 잘 즐기다 오세요」 「엄마는 일하러 가는 거야, 보디. 새벽부터 저녁가지 혹사당할 거야. 매케이브 씨는 그런 분이거든」 「전 그 사람이 좋은걸요」보디는 미소 지었다.「그 사람 정말 좋은 분이에요. 어 머니를 좋아하는 모양이죠?」 「보디야!」캐롤라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았어요,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그 사람, 틀림없이 어머니를 좋아해요」 보디는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가더니 앨범을 꺼내 앨범을 한 장씩 넘겼다. 그러다가 그는 진지한 얼굴로 어떤 페이지를 응시했다. 캐롤라인도 옆에서 별로 선명하지 않은 두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한 장은 제각기 다른 포즈로 세 대의 오토바이에 기대서 있는 7명의 십대들의 사 진이었다. 다른 한 장에는 오토바이 위에 올라타고 있는 키가 큰 젊은이가 찍혀 있었다. 캐롤라인은 그룹 가운데 마르고 도전적인 눈을 가진 소녀를 발견하고 가슴에 미 어지는 듯했다. 16살 때의 자기 자신인 것이다. 금발을 아무렇게나 어깨까지 늘어 뜨리고 다리에 찰싹 달라붙은 진바지를 입고 있으며, 티셔츠를 입은 가슴은 터질 듯 부풀어올라 있다. 그 모습이 지금의 캐롤라인에게는 너무나 싱싱하고 그리고 무방비 상태로 드러나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온갖 노여움과 두려움을 감추기 위 해 일부러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이 사진을 찍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임신중이 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캐롤라인의 눈은 다른 한 장의 사진으로 옮아갔다. 반항적인 포즈를 취하고있는 인상 좋은 검은머리의 소년. 다른 여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있었지. 캐롤라인은 보디의 아버지 사진 가운데 지금도 자신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 없나 하고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그것은 단순한 소년의 사진에 불과했다. 그 당시 그는 지 금의 보디보다 4살이 위였을 뿐이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언제나 즐겨 입는 데님 차림의 전형적인 십대의 모습이었다. 오토바이는 그가 다루기에는 너무 커 보였 다. 「우린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은 것 같아요」보디가 조용한 목소 리로 말했다. 「그래」캐롤라인의 목소리도 낮고 잠겨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무척 사랑했죠?」 캐롤라인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아, 보디, 그것이 내가 대답하기 가장 괴 로운 질문이라는 것을 네가 안다면! 그녀는 아들의 어깨를 안았다. 두 사람의 눈 이 마주쳤다. 「어머니가 그 동안 줄곧 다른 남자를 거들떠보지 않은 것을 보면, 틀림없이 아 버지를 무척 사랑하셨던 것 같아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까? 바로 지금이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할 때일까? 지금 까지 여러 번 되풀이하여 결국그녀 자신도 정말인 것처럼 믿게 괸 표면적인 사정 이 아니라, 가공할 모든 진실을 밝혀야 할까? 리스의 출현으로 인해 어둠 속에 영원히 묻어 버리려고 했던 과거가 이제 다시금 낱낱이 되살아나고 있다. 「워낙 오래 전의 일이니까, 보디」캐롤라인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나나 네 아 버지나 둘 다 너무 젊어서 인생에 대해 책임질 만한 나이가 아니었지. 솔직히 말 해서 난 너의 아버지에 대해서 별로 잘 알지 못했어. 물론 사귄 기간은 짧지 않 았지. 하지만.....」 보디는 생각에 잠신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좋은 분이었나요?」 「엄마에게는」캐롤라인은 조심스럽게 대다했다. 사실이 그랬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정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내 욕구를 이해해 준 점에서는.「무척 용 기 있고 믿음직한 분이었어. 그래서 그룹의 리더였고, 우리는 모두 그분을 존경했 었지」 보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 그분이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사정은 또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해. 만약 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그분도 나와 마찬가지로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을 거야」캐롤라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보디 를 끌어안았다. 보디는 얼굴을 붉혔다.「고마워요, 어머니」그는 앨범을 덮고 의자에 앉았다.「전 매케이브 씨를 정말 좋아해요. 어머니가 그분하고 결혼했으면 좋겠어요」 케롤라인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좋은 생각 같지 않으세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문제는 전부 해결되는 거예요」 「어떤 문제?」 「경제적인 문제요. 가령 차 문제 같은 것 말예요. 매케이브 씨라면 쉽게 마련해 줄 거예요. 그리고 연방대회와 올림픽과 제 훈련비 때문에 어머니가 열심히 절약 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매케이브 씨는 틀림없이 부자일 거예요. 그런 고급 차를 가질 정도라면 말예요」 「보디! 그렇게 돈에 걸신들린 사람 같은 소린 하지 말거라. 우린 잘 해나갈 수 있어. 크리스마스가 자나면 차도 깨끗이 수리할 수 있고」 「어머니가 좀더 편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가 원정을 가게 되면 -싱가폴이 나 캐나다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코치가 말했거든요- 어머니는 외톨이로 있어 야 하잖아요?」 「그런 때는 혼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아」캐롤라인은 화난 것처럼 자리에서 일 어섰다. 「화나셨어요, 어머니? 어머니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보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캐롤라인에게 바싹 다가섰다. 캐롤라인은 아들을 다시 껴안았다.「화나지 않았어. 하지만 매사를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는 게 아냐. 경제적으로 편해진다고 해서 아무하고나 결혼할 수는 없잖 니?」 「알아요. 그분을 사랑해야겠죠. 아버지를 사랑했던 것처럼 말예요」 「그래, 결혼을 하려면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해」캐롤라인은 보디 아버지의 얼 굴을 떠올리려고 했으나 그 얼굴이 어느새 리스의 남자답고 정력적인 얼굴로 변 해 있었다. 「그리고 내 결혼이 너를 위해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선 다음에나 결혼할 거야. 자, 얘긴 그만하고 늦었으니 어서 자 자. 내일은 또 두 종목의 경기가 있잖아」 두 사람은 전기를 끄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캐롤라인의 방 앞에 왔을 때 보디는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니」그는 몇 발짝 걸어가다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돌 아보며 말했다. 「매케이브 씨를 사랑한다고 생각되면, 그분과 결혼하시는 거 죠?」 「보디 제발 부탁이야!」 「알았어요. 하지만 저는 찬성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캐롤라인은 잠자리에 눕 자 떨리는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옛날 사진을 봄으로써 과거의 운명적인 사건 이 기억에서 되살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기억의 문을 꼭 닫아 두고 싶었다. 오늘밤에는 옛날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보디에게는 그가 태어나기 6개월 전에 사고로 죽었다는 것만을 말해 주었다. 그 는 이상하게도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그 이상의 사실을 캐물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보디는 벌써 13살이다. 앞으로도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그렇게 도면 보다 많은 사실을 알고 싶어할 날 이 틀림없이 올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발견할 수가 없다. 헛되이 죽은 젊은 목숨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 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리스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 보디,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 니? 보디는 내게 있어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다. 저 아니가 내 인생의 모든 것이 었다..... 리스가 다시 등장하기까지는. 캐롤라인이 잠들면서 생각한 것은 리스에 관한 것이었다. 피부에 닿았던 그의 손 가락의 촉감과 그의 눈 속에 타오르던 불길이었다. ┌───────────────────────────────────┐ │ ▶ 번 호 : 0/873 ▶ 등록자 : TITANIA2 │ │ ▶ 등록일 : 2000년 09월 08일 14:09 │ │ ▶ 제 목 : [연경/煙景] 젊음의 보상...13 │ └───────────────────────────────────┘ 리스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양팔을 치켜올리면 기지개를 켰다.「오늘은 이만 합 시다. 저녁 식사 전에 수영이나 한바탕 하고 와야겠소. 당신 생각은 어때요?」 캐롤라인의 눈이 타이프를 쳐야 할 메모지로 옮아갔다. 그것을 본 리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은 내일 아침에 해도 돼요」 「지금부터 시작하면 절반을 끝낼 수 있을 거예요」 리스는 그녀의 노트를 집어들어 덮더니 책상 위에 놓았다.「퇴근 시간이오. 사장 의 명령이오, 캐롤라인. 긴장을 좀 풀어요. 누구에게나 휴가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바로 당신이잖소? 함께 수영을 하거나 온천에 갑시다」 「네, 하지만 그림엽서를 두 장정도 써야만 해요」 「그림엽서? 내 유혹엔 도저히 응할 기분이 아닌 모양이군」 캐롤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와 함께 수영을 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고역이 아니다. 「알겠소. 그럼 7시에 다시 오지」리스는 이렇게 말하고 방에서 나갔다. 캐롤라인은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가 노트와 서류를 정리하여 책상 서랍 속에 넣고 자물쇠를 잠갔다. 피지에 도착한 다음날 점심을 먹고 돌아왔을 때 피터 크 루거가 서류철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후로 모든 서류는 자물쇠를 잠글 수 있는 곳에 치우기로 했다. 피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은 맨 위층의 스위트룸이었는데, 그 거실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밖에 욕실이 따로 있는 침실이 두 개 있었다. 매우 사치스럽고 그러면서도 세련된 취미의, 아늑한 느낌을 주는 호텔이었다. 이 튿날 아침 침실의 발코니에서 푸르게 우거진 열대 식물군과 눈이 부실 정도로 푸 른 바다를 바라보았을 때는 정말 숨이 막힐 듯한 감명을 받았다. 거실의 발코니에서는 지금 크루거 사가 건설중인 호텔과 쇼핑센터가 보였다. 위 치도 좋거니와 건축의 디자인도 특이한 것으로 할 모양이었다. 그런데 공사가 많 이 지연되고 있어 그 하루하루의 손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 리스는 식사를 끝내자 곧장 현장으로 차를 몰았다. 피터 크루거와 마주했을 때는 이미 대강의 조사를 마친 뒤여서, 리스는 분명히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피터는 현지의 노동자가 열심히 일해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으나, 그는 지금까지 어느 현장 감독과도 대화를 나눈 일 이 없는 모양이었다. 점심식사 때 호텔로 돌아온 리스는 금방이라도 분통이 터질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내 부하인 조 도슨을 이곳으로 불러서 일을 수습하도록 해야겠어. 그 사람은 피지와 태평양의 다른 섬에서 경험을 쌓은 사람이오. 크루거는 항상 저렇게 무능 한 거요?」 「지금까지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맡아 본 적이 없었어요. 항상 어드바이저를 붙 여 주었거든요」 「내가 보기에는 피터는 한낱 게으름뱅이야. 조와 함께 일하면서 일을 배우든지, 아니면 탈락하는 수밖에 없을 거야. 오늘 오후에 이곳에 노면 한번 따끔하게 일 러두어야겠어」 그날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피터가 어느새 사무실에 들어와 비밀서류 의 서류철을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죠?」캐롤라인은 서류철을 닫으면서 쌀쌀하게 물었다. 「메이드에게 부탁했었지」피터는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능글맞게 웃었다.」 「무슨 특별한 용건이라도 있으신가요?」 「여전히 충실한 비서 노릇을 하고 있군, 캐롤라인. 그래, 항상 우리 아버지를 호 위해 왔지. 하지만 새 사장처럼 젊고 정력적인 남자 밑에서 일하는 것은 각별할 걸?」 난처하게도 캐롤라인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피터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저런, 벌써 얼음이 녹기 시작했나? 화상을 입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걸, 캐롤라 인. 그 사람이 버린 여자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라던데」 「이상한 말씀일랑 그만두시죠」캐롤라인은 쌀쌀하게 대꾸했다. 처음 만났을 때 부터 이 남자가 싫었다. 그후 8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첫인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피터는 다가와서 캐롤라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당신의 그 냉정함은 겉보기일 뿐, 안에는 뜨겁게 불타고 있는 불꽃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때? 내 말이 틀렸나?」 캐롤라인은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그의 손에서 몸을 뺐다. 피터가 입술 을 일그러뜨렸다. 「우리 아버지가 당신을 며느리 삼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캐롤라인은 깜짝 놀라며 피터를 쳐다보았다. 「정말이야. 하지만 당시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지. 항상 경멸하듯이 나를 깔 보았거든. 그래서 나는 당신에겐 걸맞지 않은 남자라는 것을 뼈아프게 깨달았 지」 「피터, 전.....」 씁쓸한 피터의 웃음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에게 결여된 것을 내가 가 르쳐 주지」 도망칠 겨를도 없이 그는 캐롤라인의 입술을 덮쳤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피터의 팔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캐롤라인은 있는 힘을 다 하여 피터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찼다. 그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에 그녀는 그의 팔에서 빠져 나와 책상의 반대쪽으로 돌았다. 「지독하게 아픈데!」 「아픈 게 당연해요! 그러니까 다시는 날 건드리지 마세요」 「응, 다시는 그러지 않겠어.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알았으니까. 당신은 뼛속까지 얼음으로 되어 있군. 여자에게 키스했다가 동상에 걸릴 뻔했어. 당신은 불감증이 야, 캐롤라인. 지금 데리고 있는 당신의 아이도 진짜 당신의 아이인지 의심스러운 걸!」 캐롤라인은 피터의 따귀를 갈겨주고 싶어 손바닥이 근질근질했다.「매케이브 씨 가 오실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 주지 않겠어요?」그녀가 딱딱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자 피터는 쉰 목소리로 웃어댔다. 「매케이브의 관심을 끌려면 좀더 부드럽게 굴어야겠어. 그 사람 정도의 남자라 면, 발에 걸리는 것이 미녀니까. 딱딱한 껍질을 뚫고 들어갈 만큼 인내심이 강하 지 않지」 「나가 주세요」캐롤라인은 노여움에 목이 메었다. 「혹시 그 사람이 벌써 당신의 결점을 알고 있는 것 아냐?」피터는 이렇게 조롱 하면서 팔걸이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여기서 기다리지」 캐롤라인이 무어라고 말대꾸도 하기 전에 리스가 들어와, 그녀는 다행스럽게 생 각하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 │ ▶ 번 호 : 0/873 ▶ 등록자 : TITANIA2 │ │ ▶ 등록일 : 2000년 09월 08일 14:12 │ │ ▶ 제 목 : [연경/煙景] 젊음의 보상...14 │ └───────────────────────────────────┘ 리스가 수영장으로 가버리자 캐롤라인은 발코니의 라운지 의자에 앉아 신발을 벗고 다리를 마음 껏 뻗었다. 기분이 좋았다. 가끔 이렇게 충전하지 않는다면, 리스의 인력을 이겨낼 수 없다. 지난 사흘 동안 흥분과 절망이 교대로 반복되는 바람에 캐롤라인은 지칠 대로 지 쳐 있었다. 그의 곁에 있다는 것은 분명히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곳에까 지 따라오지는 말았어야 했다는 뉘우침이 그녀를 괴롭혔다. 캐롤라인은 리스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자신의 눈에 숨겨져 있는 그에 대한 그리움을 그에게 알아채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캐롤라인은 한숨을 내쉬고 보디에게 보낼 그림엽서를 쓰기 시작했다. 전화를 하 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지금은 한창 연습중일 것이다. 전화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걸어야겠다. 만찬이 너무 오래 끌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솔직히 디너 파티에 참석하고 싶진 않았으나, 이것도 업무에서 속하는 일이기 때 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녀와 리스 외에는 세 쌍의 커플밖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했다. 빨리 금주가 갔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리스 앞에서 냉정하고 무관 심한 태도를 꾸민다는 것은 이만저만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캐롤라인은 천천히 일어나 샤워를 한 다음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오늘밤에 고 른 옷은 심플한 검은 수트로 아무 때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유행가 관계없는 디 자인이기 때문에 벌써 몇 해를 입었는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입었다. 깊 이 팬 목선과 가는 어깨 끈이 그녀의 윤기 있는 피부를 드러냈고, 허리의 가는 벨트가 그녀의 완벽한 몸매를 두드러지게 했다. 주로 눈이 돋보이도록 가볍게 화장한 다음, 캐롤라인은 평소처럼 머리를 한데 모 으려고 하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부드럽게 웨이브진 머리칼이 드러난 어깨 위 에서 춤을 추듯 물결치고 있었다. 이렇게 하니 새침한 인상도 없어지고 평소보다 젊게 보였다. 한순간 그대로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번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눈의 표정이나 입가에 오늘 따라 덧없고 외 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고개를 젓고 나서 머리칼을 평소처럼 단정히 한데 모았다. 7시 정각에 방에서 나와 거실로 들어가니 리스는 스카치를 손에 들고 창가에 서 서 석양이 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생각 에 잠긴 채 글라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갑자기 달려가 뒤에서 그를 힘껏 껴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호박빛 액체를 내려다보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짜증스러움을 억제하 듯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는 무엇이 짜증스러운 것일까? 그녀는 망설이 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리스는 비로소 그녀가 들어왔음을 깨닫고 돌아섰다. 그의 시선이 캐롤라인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캐롤라인도 그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리스의 모습은 정말 매력적이어서 그저 보기만 해도 그에 대한 동 경으로 가슴이 설렜다. 넓은 어깨에 딱 들어맞는 밝은 잿빛 신사복에 푸른 눈을 돋보이게 하는 연 푸른색 셔츠. 그의 눈속 깊은 곳에서 불타고 있는 뜨거운 불길 은 당장에 라도 그녀를 불태우고 말 것만 같다. 「내려가기 전에 뭘 좀 마시겠소?」리스의 목소리는 몹시 냉랭하고 사무적이었 다. 캐롤라인은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기분으로 고개를 가로젓고 고통의 빛을 보이 지 않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럼 갑시다」리스는 글라스를 테이블 위에 놓은 다음 문을 열고 캐롤라인이 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두터운 카펫 위를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과 유연한 몸놀림을 의식하고있었 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더욱 강렬하게 그를 의식했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된 공기는 극에 이른 듯했다. 레스토랑은 열대풍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싱싱한 초록빛 양치식물과 야자 수 화분이 놓여 있고, 화려한 옷차림을 한 웨이터와 웨이트리스가 오가고 있었다. 전날 밤 멜버른에서 도착한 조 도슨과 그의 아내 팜이 바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에 나머지 두 쌍의 커플이 도착했다. 남자들은 피지 인 현장감독이고, 부 인들은 모두 젖은 듯한 갈색 눈과 윤기 있는 갈색 피부를 가진 미인들이었다. 만찬은 화기애애하게 끝났는데, 그것은 주로 리스의 능란한 화술 덕분이었다. 그 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기분을 편안하게 해주었으나, 캐롤라인만은 예외 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남자에 대해 서보다도 리스를 강렬하게 의식 하고 있었다. 만찬이 끝나자 세 쌍의 커플은 댄스플로어로 가고 캐롤라인과 리스만이 자리에 남았다. 「만찬은 성황리에 끝났군요」캐롤라인은 침묵을 견딜 수 없어 이렇게 말했다. 「그렇소」리스의 시선은 커피 잔에서 서서히 그녀에게 옮겨졌다. 「내일 아침 보고서를 타이핑할까요?」 「아니, 필요 없소. 이것은 단순한 사교행사니까」 「알겠습니다」캐롤라인은 살짝 손목 시계를 보았다. 이제 돌아가면 안될까? 지 금 전화하지 않으면 보디는 잠자리에 들 텐데. 「우리 춤출까?」리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재촉하듯 말했다. 캐롤라인도 따라 일어나면서 사양했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아니에요, 일부러 춤을 청하시지 않아도 전 상관없어요」 하지만 리스는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팔로 감고 댄스플로어로 데리고 나갔다. 그에게 한쪽 손을 잡히고 허리에 그의 팔이 감겼을 때는 캐롤라인은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녀는 겁먹은 듯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어색하게 스텝을 밟았다. 「긴장을 풀어요, 캐롤라인」리스가 쌀쌀하게 말했다. 그 자신도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턱에 힘을 주고 있었 다. 캐롤라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춤추자고 간청한 것도 아닌데..... 「뭣하면 자리로 돌아 가실까요, 매케이브 씨? 저는 일 때문에 이곳에 왔고, 혹시 마음이 내키지 않으시면.....」 「왜 내가 맘에 내키지 않는 짓을 하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지? 그리고 리스라 고 부르기로 약속한 것 같은데, 캐롤라인」 「그렇긴 하지만 오늘밤은 사업상의 모임이라서.....」 「모든 것을 비즈니스와 결부시키는군. 당신은 항상 그렇게 고지식한 거요?」 캐롤라인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긴장된 신경의 줄이 당장에 라도 끊어질 것 같 은 느낌이 들었다. 「당신은 지금까지.....」리스는 이렇게 말하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아냐, 아무 것도 아냐. 그럼 자리로 돌아갈까,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다면」 테이블에서는 나이가 좀 많은 피지인 부부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곳을 벗어나려고 생각했다. 「괜찮다면 전 이만 실례했으면 좋겠는데요. 좀 피곤해서.....」리스의 얼굴을 살피 자 그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라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피지 인 커플에게 인사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 말해 달라고 부탁한 다음 도망 치듯 문으로 향했다. 악마에게 쫓기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캐롤라인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만졌다. 그의 품에 영원히 안기고 싶었다. 그의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그의 검은 머리칼 을 쓰다듬으며, 몸을 찰싹 밀착시키고..... 캐롤라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떨리는 손을 꼭 쥐었다. 지금 나는 무슨 생각 을 하고 있지? 나와 리스 사이에는 무슨 일도 일어날 수 없지 않은가. 그는 애가 저질렀다고 믿고 잇는 죄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신을 벗고 타월로 된 짧은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리스는 얼마 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보디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전화가 연결되기까지는 잠시 시간이 걸렸으나 마침내 조이 콘론의 목소리가 들렸 다.「캐롤라인! 피지는 어때요?」 「멋있어요. 물론 하루종일 일만 하지만 말예요」 「그 사람이 당신을 그렇게 혹사시키나요? 보디는 잘 있어요. 지금 내 어깨에 매 달려 있다우. 바꿔 줄께요」 「어머니! 안녕하세요?」보디의 목소리에 캐롤라인은 금세 목이 메었다. 「잘 있니?」 「아무 일 없어요. 내일 유니폼을 가지러 가요」 「연습은?」 「잘하고 있어요. 내주에 있을 멜버른 경기에도 기대할 수 있다고 코치가 말했어 요.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이때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본 캐롤라인은 수화기를 꼭 움켜쥐었다. 리스가 문을 닫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재킷을 의자 위에 던지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시합 날과 어머니 돌아오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단 말예요. 피지에서는 즐거 워요?」캐롤라인은 보디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무척 아름다운 곳이야」 「다행이군요. 매케이브 씨도 안녕하신가요?」 「잘 계셔. 하지만 일 때문에 항상 바쁘시지」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쓸쓸해요」 보디의 진지한 목소리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엄마 역시 마찬가지야, 보디」 「하지만 금요일까지는 이틀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렇구나. 그때까지만 기다리자. 그럼 건강에 조심하고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 「알았어요. 매케이브 씨에게도 안부 전해 주세요. 안녕」 「안녕, 보디」캐롤라인은 수화기를 놓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손수건을 찾기 위해 호주머니를 뒤졌다. 이때 리스가 새하얀 손수건을 내밀었다. 캐롤라인은 눈물로 흐려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미안해요」눈물이 또 쏟아졌다.「보디가 안부 말씀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리스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 손가락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의 눈은 깊은 바다의 빛깔이었다. 시간은 정지하고, 두 사람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 은 듯했다. 모든 감정이 응축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리스가 낮 은 신음소리를 내며 캐롤라인을 껴안았다. 그의 가슴에서 묵직한 고동소리가 전 해져 왔다. ┌───────────────────────────────────┐ │ ▶ 번 호 : 0/873 ▶ 등록자 : TITANIA2 │ │ ▶ 등록일 : 2000년 09월 08일 14:14 │ │ ▶ 제 목 : [연경/煙景] 젊음의 보상...15 │ └───────────────────────────────────┘ 캐롤라인의 가슴도 마찬가지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미칠 것 같은 욕구가 커다란 소용돌이를 이 루며 밀려왔다. 그녀는 입술을 따뜻한 리스의 가슴에 대고 있었고, 손은 자연스럽게 그의 등에 돌려져 실크 셔츠 밑으로 그의 억센 근육의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은 황홀경 속에서 두 사람 모두 보다 강한 접촉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리스의 입술이 그녀의 관자놀이에서 눈꺼풀 위로, 그리고 턱을 더 듬어 내려갔다. 「캐롤라인..... 캐롤라인, 내가 당신을 얼마나 이렇게 안고 싶었는지 알아? 당신의 몸을 가까이서 느끼고, 당신을 애무하고, 키스를.....」마지막 말은 캐롤라인의 입 안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과거도 미래도 자취를 감추었다. 존재하는 것은 현재뿐, 서로 찰싹 달라붙은 두 사람의 몸과 서로 겹쳐진 입술뿐이었다. 두 사람의 정열은 마치 산불처럼 꺼질 줄을 몰랐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 모두 그 산불을 끄려고 하지도 않았다. 리스의 손이 캐롤라인의 머리를 더듬으면서 머리핀을 뽑아냈다. 탐스런 머리칼이 비단처럼 어깨 위로 떨어졌다. 리스는 그 머리칼의 향긋한 냄새를 즐겼다. 「머리를 한 대 묶지마. 그건 죄악이야.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나는 이 머리 를 풀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어」그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에 캐롤라인은 온몸을 떨었다. 리스가 그녀의 귓불에 가볍게 입맞춘 다음, 그녀의 목을 입술로 더듬었다. 그리고 그의 손은 그녀의 실내복을 헤치고 가슴의 불룩한 부분을 덮었다. 캐롤라인은 강 렬한 욕망의 물결에 떠밀려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리스가 브래지어를 벗기고 부드러운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캐롤라인은 목구멍 안에서 신음소리 를 냈다. 리스는 갑자기 몸을 뺀 다음 숨을 죽이고 그녀의 드러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워, 정말 아름다워. 저녁식사를 하러 내려가기 전에 당신을 이렇게 안아 보고 싶었지. 그 뒤로도 줄곧 당신과 단둘이 있고 싶었어」 리스의 눈은 열에 들뜬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장밋빛 꽃봉오리를 입술로 애무했다. 캐롤라인은 신음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고, 손가락에 그의 머리카락을 감아 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끌어당겼다. 리스의 뜨거운 입술은 가슴의 계곡을 타고 목 언저리로 올라갔다. 캐롤라인은 떨 리는 손으로 그의 셔츠 단추를 끄르고는 억센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서로의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형언할 수 없는 환희가 몸 속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리스가 다시 입술을 요구했다. 한번 고삐 풀린 욕망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아, 캐롤라인, 당신을 사랑해. 한 여자를 이렇게 사랑해 본 적은 없어. 당신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알아?」리스는 쉰 목소리로 잃게 말하고는 캐롤라인을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의 눈은 정열의 빛깔로 짙게 물들어 있다. 이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두 사람은 퍼뜩 현실로 돌아 왔으나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전화벨이 울리지 않았더라면, 한순간 뒤에는 리스뿐만 아니라 캐롤라인도 그토록 열망했던 사랑의 성취를 위해 무아지경에 돌입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전화벨이 한창 불타고 있는 정열 의 불길을 가라앉히고 말았다. 그녀는 하마터면 리스에게 모든 것을 맡길 뻔한 자신을 발견했다. 안돼! 절대로 안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잇단 말인가? 캐롤라인은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의 가슴을 밀쳐내면서 뜨겁게 불타고 있는 두 사람의 몸을 떼어놓았다. 리스는 다시 그녀를 끌어안으려다 그대로 놓아주었다. 그의 시선이 캐롤라인의 드러난 가슴에 붙박였고,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었다. 그 가슴은 그녀가 아직도 욕망으로 불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리스는 유연한 몸놀림으로 전화로 다가가서 수화기를 들었다.「매케이브요. 뉴욕 이라고? 응, 연결해 줘요」그의 눈은 떨리는 손으로 실내복의 옷자락을 여미는 캐롤라인을 주시하고 있었다.「퀸란인가? 어떻게 된 거야? 다음달에 내가 갈 때 까지 기다릴 수 없겠나? 알았어, 연락이 되는대로 데이브를 그쪽으로 보내지. 그 때까지 보류해 주게」 리스는 애써 자신을 억제하는 태도로 수화기를 놓고, 지금은 책상의 반대쪽으로 돌아와 있는 캐롤라인을 흐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런 전화는 타이밍이 나쁜 표본 같군」그는 빈정대듯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캐롤라인은 시선을 떨어뜨렸다.「네, 전..... 잠자리로 가겠어요」 「잠자리?」리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반문했다. 「네, 피곤해서도.....」 「잠자리라..... 혼자겠지, 물론?」 「네, 혼자가 제일 편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캐롤라인?」리스의 낮은 목소리가 캐롤라인의 등 줄기에 전율을 흐르게 했다. 「네, 반대되는 인상을 주었다면 용서하세요. 저는.....」 리스는 눈썹을 치켜올렸다.「반대되는 인상? 그 말은 설마 내가 당신을 쉽게 침 대로 데리고 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은 아니겠지?」 푸른 눈이 캐롤라인을 쏘아보았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부정하진 않아요. 당신은 확실히, 아니..... 저는..... 당신을 매력적이라 고 생각해요. 하지만 내일 아침 저는 제 얼굴을 대하기가 부끄러울 거예요. 구식 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어쩔 수 없어요」 리스는 노여움을 참느라고 굳어진 얼굴로 책상을 돌아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저 으면서 방어하듯 손을 앞으로 내미는 캐롤라인을 난폭하게 끌어안고 격렬하게 키 스했다. 캐롤라인은 저항하면서도 어느새 그의 키스에 반응을 보이고 있는 자신 을 느꼈다. 리스는 그 반응을 알아채고 자랑스러운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캐롤라인은 고 통으로 몸이 찢기는 듯했다.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고 애원했다. 「부탁이에요. 리스, 이러지 말아요」 리스는 한순간 팔에 힘을 주었으나 마침내 그녀를 밀어내고 갑자기 등을 돌렸다. 캐롤라인은 멈추었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리스가 단념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모순된 생각이 꿈틀거렸다. 자기 방으로 돌아가야 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다리로 다가가서 리 스의 팔을 건드렸다. 그는 멈칫하면서 물러났다. 「리스, 미안해요」캐롤라인의 목소리는 메어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 앉았다. 리스는 등을 돌린 채 머리를 쓸어 올렸다.「방으로 돌아가, 캐롤라인. 지금 당장 돌아가란 말야! 내가 나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는 동안에 어서!」 ┌───────────────────────────────────┐ │ ▶ 번 호 : 0/873 ▶ 등록자 : TITANIA2 │ │ ▶ 등록일 : 2000년 09월 08일 14:16 │ │ ▶ 제 목 : [연경/煙景] 젊음의 보상...16 │ └───────────────────────────────────┘ 리스는 이튿날 아침 일찍 조 도슨과 함께 현장으로 나가고, 캐롤라인은 많은 일거리와 함께 혼 자 남았다. 오늘 아침의 리스는 평소처럼 냉정하고 사무적이었으며, 간밤에 있었던 일은 깡그리 잊은 듯했다.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낸 듯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캐롤라인은 눈언저리에 생긴 피로의 그늘을 화장으로 감추어야 했다. 갑자기 넓고 쓸쓸하게 느껴진 침대에서 하룻밤을 뜬눈 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올바른 결단을 내렸다고 스스로를 타일렀으나, 그것이 위로가 되지는 않 았다. 일단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은 리스의 억센 몸이 아니고선 가라앉지 않는다 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방에서 빠져나가 리스 곁으로 가고 싶은 생 각은 간절했으나, 젊은 날의 리스의 싸늘한 노여움에 대한 기억이 그런 충동을 억제시켰다. 캐롤라인이 자기 방에서 혼자 점심식사를 끝내고 편지를 타이핑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구멍으로 내다 보내 피터가 서 있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조금만 열고 물었다. 「무슨 용건이죠?」 「용건을 말하면 문전 추방이나 당하지 않을까?」피터는 여유 있게 웃었다. 캐롤 라인이 입가에 힘을 주자 피터는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움칠했다.「매케이브는 있나?」 「안 계신데요, 외출했어요」 「언제쯤 돌아오지?」 「30분 안에는 돌아오시지 않을 거예요」 피터는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캐롤라인, 난 매케이브를 만나 사과하고 싶어.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사람을 진심으로 환영 했다고는 할 수 없지. 처음부터가 좋지 않았던 것 같아. 그래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은 거야.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려도 괜찮겠지?」 피터의 표정은 무척 진지해 보였다. 캐롤라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다. 「알았어요. 하지만 30분 후에 틀림없이 돌아오실 거라는 약속은 드릴 수 없어요. 그러니까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야 상관없지」 캐롤라인은 문을 닫고 다시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았다. 「술을 좀 마셔도 될까?」 「드시죠」 「당신도 한잔하지」 캐롤라인은 고개를 가로젓고 편지를 한 장 다 치고 난 다음 타이프라이터에서 빼 냈다. 「아버지의 송별회는 어떻게 했는지 언제 한번 물어 보고 싶었어」피터가 책상 앞에 섰다. 「성황리에 끝냈어요. 모두들 빠지지 않고 와주었으니까요」 「다행이군, 그때 못 가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당신은 이해하겠지?」 그는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글라스를 응시했다.「나는 아버지에겐 불효자 지. 아버지가 내게 기대를 걸고 크루거 사를 물려주려고 하셨다는 걸 잘 알고 있 어. 하지만 나는 도저히 매케이브를 따라갈 수 없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캐롤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타이프라이터에 커버를 씌웠다 그녀는 피터의 갑작 스런 태도 변화에 속으로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그 사람에게 대적할 만한 사람은 별로 없지. 그렇잖아, 캐롤라인?」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정열적으로 일하시거든요」 「공사를 본 궤도에 올리기 위해 어떤 방법을 취할 것인지, 매케이브가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어?」 「말하지 않았어요」 「정말 모르고 있는 거야,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은 거야?」 「정말 모르고 있어요」 「청부업자에 대해서는? 바꿀 생각일까?」 「전 모르겠어요. 직접 물어 보시는 게 어때요?」 「물어 본다고 해서 대답할 것 같아?」피터의 얼굴에는 노여움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성큼성큼 캐롤라인에게 다가왔다.「잘 들어, 캐롤라인. 조금쯤 이야기해 준 다고 해서 큰일 날 것 없잖아?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아버님과 어떤 관계가 있죠?」캐롤라인은 뒤로 물러서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 으면서 쌀쌀하게 말했다. 「여기서 내가 실패하면 아버지는 실망하실 거야」피터는 고개를 저으며 그 자리 에서 물러나려고 하는 캐롤라인의 팔을 끌어 당겼다.「도망치지마, 캐롤라인. 만 약 매케이브에게 그의 유능한 비서가 내게 비밀정보를 누설했다고 말한다면 어떻 게 생각할까? 그것도 개인적으로 아주 친밀한 사람을 통해서 말야」 캐롤라인은 구역질을 참았다.「나가 주세요, 그런 협박이 통할 줄 아세요?」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지 마. 나는 지난번에 본 서류철에서 충분한 정보를 얻 었으니까」피터는 이렇게 말하면서 능글맞게 웃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복수라고나 할 까. 당신한테 무시당한 데 대한 보복심리 같은 것이지」 「그런 짓을 한다고 해서 당신에게 돌아가는 것도 없잖아요?」 「그렇지도 않지. 내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면 매케이브도 기분 이 좋진 않을걸」 「물려받은 것?」 「그렇지, 한번 쓰다 버린 것 말야. 다시 말해서 바로 당신이지」 캐롤라인은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면서 그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피터 는 그녀의 팔을 잡고 있는 소의 힘을 늦추려 하지 않았다. 「물론 필요한 정보를 말해 준다면 복수를 중지할 수도 있지」 「내가 그런 협박에 넘어갈 줄 아세요? 정말 당신은 어떻게 된 모양이군요!」캐 롤라인은 그에 대한 경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말했다. 피터의 눈은 노여움 으로 불타올랐다. 「이대로는 두지 않을걸. 이 냉혈동물 같은 계집 같으니!」피터는 몸부림치는 캐 롤라인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이때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그의 입술이 덮쳐왔다. 캐롤라인은 그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양심의 가책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피터는 뒤로 물러나 손등으로 피를 닦아낸 다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면 서 덤벼들었다. 그러나 이때 마침 방에 들어온 리스에게 뒷덜미를 붙잡혔다. 「그만하면 됐어, 크루거」 리스에게 떠밀린 피터는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더니, 숨을 헐떡이면서 증오 에 찬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빨리 꺼져버려 , 크루거. 이젠 다시 돌아오지마!」 「흠, 그래? 그럼 내가 어떻게 건설업자와 배급업자가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캐롤라인에게 물어 보면 어때?」 캐롤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앞으로 나섰으나 리스가 손을 들어 말렸다. 「그런 것쯤은 누구나 조금만 신중하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어. 문까지 데려다 줄까?」 피터의 얼굴에서 잠시 핏기가 가셨으나 그래도 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려고 하 지 않았다.「명심해 두게, 매케이브.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안다면.....」 「아버지에게는 벌써 말해 두었어. 자, 빨리 나가 주게」 피터는 잠시 망설이면서 주먹을 쥐었으나 리스의 기에 눌렸는지 알아들을 수 없 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캐롤라인은 찢어진 옷을 여몄다.「리스, 저는 피터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화요일에 그 사람이 서류철을 보고 있는 것 을 발견했는데, 그래서.....」 리스는 캐롤라인을 다정하게 끌어안았다.「알고 있어. 나머지는 다 들었어」 「알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저런 사람과는.....」캐롤라인은 몸서리쳤다. 「물론 알고 있어」리스는 그녀의 코끝에 가볍게 키스했다.「수영복을 입어. 오후 는 휴식이야」 「하지만.....」 「하지만 이라는 말은 안 하기야. 가끔은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괜찮아. 자, 어 서」 인적 이 드문 해변을 푸른 야자수가 둘러싸고, 짙푸른 파도가 눈부신 백사장으로 조용히 밀려왔다가 밀려가곤 했다. 「어떻게 이런 곳을 발견했어요?」캐롤라인이 물었다. 발바닥에 닿는 따뜻한 모래의 촉감이 좋았다. 리스는 셔츠의 단추를 끄르면서 기분 좋은 듯 미소지었다.「탐과 그 사람의 부인 이 가르쳐 주었지. 그래서 이곳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곳이라고 생각한 거 야」 리스의 미소는 백사장에 내리쬐는 햇빛보다 눈부셨고, 그것이 미치는 효과는 대 단한 것이었다. 캐롤라인은 바지를 벗고 있는 리스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자신도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벗기 시작했다. 그녀의 푸른색 비키니는 일반적인 표준에서 볼 때는 점잖은 것이었음에도 불구하 고 리스의 시선 앞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그의 애무를 받 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물 속으로 가지」리스가 잠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캐롤라인은 서슴없이 그의 손을 맞잡고 바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싸늘한 물이 피부에 상쾌하게 와 닿았다. 두 사람은 해변에서 멀리 헤엄쳐 나갔 고 마침내 캐롤라인은 바닷물 위에 반듯이 누워 구름 한점 없는 푸른 하늘을 바 라보았다. 아, 이 얼마나 평화스러운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때 리스가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해변까지 누가 먼저 가나 해볼까?」그 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캐롤라인은 그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리스가 가까스로 이겼으나 그것은 불과 몇 미터 차였다. 「보디가 수영을 잘하는 것은 엄마를 닮아서군」 캐롤라인은 미소로 대답했으나, 이때 발바닥에 따끔한 통증을 느낀 그녀는 자신 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러지?」 「뭔가를 밟은 모양이에요. 하지만 피는 나지 않아요. 돌이나 조가비를 밟았겠 죠」캐롤라인은 발바닥을 만지면서 말했다. 「아파?」리스가 그녀의 발바닥을 손으로 누르면서 물었다. 「아뇨, 괜찮아요」 「걸을 수 있겠어?」 「걸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에게 안아 올려져 있었다. 리스는 성큼성큼 조금 전에 타월을 놓아 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마침내 그는 걸음을 멈추고 캐롤 라인을 살그머니 모래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모래밭 위에 정신없이 서로를 포옹하고 있었다. 리스는 캐 롤라인의 눈과 코와 이불에 뜨거운 키스 세례를 퍼부었고, 그의 입술은 다시 그 녀의 귓불을 스치다가 목으로 내려가 마침내 가슴의 골짜기에 뜨거운 흔적을 남 겼다. 그는 비키니의 톱을 끄르고는 한참동안 숨을 멈추었다. 그의 손가락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천천히 그녀의 가슴을 애무했다. 캐롤라인도 그의 등과 허리와 그리고 넓적다리를 떨리는 손으로 더듬었다. 그녀는 리스의 강 렬한 반응을 느끼면서 이성을 완전히 잃어 갔다 . 리스는 그녀의 영혼을 온통 뒤 흔들어 놓는 키스를 했다. 「캐롤라인,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 간밤부터 당신을 이렇게 안고 싶어 견딜 수 없었어. 간밤에 당신을 그대로 보내면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당신을 보내 놓고 나서 나는 수영장으로 내려가 미친 듯이 수영을 했지. 바로 옆 방에 당신이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방에 있을 수가 없었어」리스는 그녀의 가 슴에 얼굴을 묻고 뜨거운 키스를 했다. 「리스, 저는.....」모든 것을 불태울 것 같은 욕망의 불길에 휩쓸릴 것만 같아 더 이상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캐롤라인은 자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고 갈망하고 있는지 그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당장 모든 것을 그에게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는 안고 있던 그녀를 놓아주고 그녀의 얼굴을 다정하게 들여다보았다. 「알고있어. 당신은 그런 여자가 아냐. 나는 당신의 의사를 존중해. 그러니 강요 하진 않겠어. 비록 마음속으로는 미칠 것 같아도」리스는 말을 더듬으면서 시선 을 그녀의 얼굴로 옮기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결혼해 줘, 캐롤라인. 당신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아」 ┌───────────────────────────────────┐ │ ▶ 번 호 : 0/873 ▶ 등록자 : TITANIA2 │ │ ▶ 등록일 : 2000년 09월 08일 14:19 │ │ ▶ 제 목 : [연경/煙景] 젊음의 보상...17 │ └───────────────────────────────────┘ 「추우세요, 어머니?」전차를 타고 숙소로 가면서 보디가 물었다. 「조금, 하지만 곧 도착할 테니까 괜찮아」그러나 몸이 떨리는 것은 추위 때문만 은 아니었다. 이제 곧 리스를 만난다 는 생각 때문에서였다. 두 사람은 지난주 금 요일에 브리즈번의 공항에서 헤어졌고, 리스는 그대로 테즈메니아를 향해 떠났다. 토요일에 캐롤라인과 보디는 전 태평양 학생선수권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퀸즐랜 드 팀과 함께 멜버른으로 날아가 배트먼 애브뉴의 주립 수영 센터에서 얼마 떨어 지지 않은 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고급이라고는 할 수 없는 호텔이었으나 청결하 고,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 점이 다행스러웠다. 오늘은 월요일이고, 리스로부터 6시에 도착하겠다는 연락이 호텔로 왔다. 캐롤라 인은 또 한번 몸서리쳤다. 겨우 사흘 동안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이처럼 그를 그 리워하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매케이브 씨가 오늘밤 와주신다니, 정말 기쁘군요. 어머니, 이번엔 어떤 차를 타고 올까요?」 「글쎄?」캐롤라인은 건성으로 대꾸했다. 나는 정말 결혼을 승낙한 것일까?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 그 사람의 청혼을 받아들였을까. 만약 그 사람이 그 일을 기억하고 있으면? 그럴 리 없다고 그녀는 자신에게 수없이 다짐해 왔다. 그 일은 이미 아득한 옛날 의 일이 아닌가. 피지에 있는 동안은 매사가 모두 쉽게만 생각되었다. 리스의 얼굴을 보고 있기만 하면 모든 의심이 사라졌다. 그러나 잃게 그와 떨어져 있으면 두려움으로 가슴이 죄어든다. 리스가 알기 전에 스스로 모든 진실을 털어놓을까? 아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숨기고, 지금의 이 행복을 지켜야 한다. 캐롤라인은 이 두 가지 생 각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길을 택하든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캐롤라인은 몇 번이나 보디에게 리스와 결혼할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 말을 하면 보디가 크게 기뻐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나 나중에라도 자신의 결심이 바 뀌는 경우 그가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망설였다. 결심이 변한다고? 하지만 나의 리스에 대한 사랑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파멸로 치닫는 것만 같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빠 져나갈 수가 없다. 「빨리 매케이브 씨에게 이 메달을 보여주고 싶어요」보디가 말했다. 캐롤라인은 기분을 가다듬고 아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제는 동 한 개, 오 늘은 금 두 개에 은하나. 네 경기에서 네 개의 메달은 대단한 거야」 「코치와 같은 팀 동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매케이브 씨가 오 늘밤에 보러 올지 모르겠네요」 「표가 없잖니?」 캐롤라인이 이렇게 말하자 보디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호주머니를 뒤졌다.「카슨 씨로부터 갑자기 오지 못하게 된 사람의 표를 얻었거든요. 어차피 아무도 쓰지 않을 바에야 이걸 사용하면 돼요」 「하지만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아. 매케이브 씨는 볼일이 있을지도 모르잖 아」 「알았어요. 자, 다 왔어요」보디는 힘차게 일어섰다. 너무 긴장하여 손이 떨리는 바람에 머리 손질이 잘 되지 않았다. 캐롤라인은 한 숨을 내쉬고 머리를 그대로 어깨 위로 늘어뜨린 채 빗질을 했다. 거울 속에 비치는 그녀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입술은 고혹적으로 부드러운 곡선 을 그리고 있었다. 리스를 생각하기만 해도 이처럼 표정이 바뀌다니. 피지를 떠나기 전날 밤의 일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일을 마치고 두 사람은 수 영장에서 수영을 한 뒤 샤워를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자마자 리스는 캐롤라인을 품에 안고 오랫동안 키스를 했다. 그녀는 그의 키스와 뜨거운 애무에 빠져들었다. 「계속 이러고 싶어 견딜 수 없었어. 당신의 몸은 정말 감촉이 좋거든」리스가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실내복은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고, 뜨거운 손가락이 서로의 몸을 더 듬었다. 캐롤라인이 그의 어깨를 입술로 애무하면서 손가락으로 등줄기를 더듬어 내려가자 리스는 신음소리를 냈다. 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비키니의 톱을 벗기고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손으로 애무 했다. 캐롤라인은 숨을 죽이고 촉촉이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을 그에게 주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캐롤라인, 이쯤에서 그만두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아」리 스는 그녀의 애무하는 손을 누르며 말했다. 「당신이 참지 못했으면 좋겠어요」캐롤라인은 그의 턱에 키스 세례를 퍼부으면 서 속삭였다. 「캐롤라인, 그만 해둬. 나는 결혼식날 밤까지 기다릴 수 있어. 달링, 당신을 위해 서라면....」 「아, 리스, 괜찮아요. 전 당신을 원하고 있어요. 지금 당장. 당신은? 당신은 저를 원하지 않으세요?」 「캐롤라인, 정말 괜찮겠어?」 리스가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캐롤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선 채 약속으로 가득 찬 빛나는 푸른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리스의 몸이 겹쳐지자 캐롤라인은 한순간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캐롤라인, 사랑해. 당신을 사랑하도록 해줘」 「물론이에요. 하지만 전 그 뒤로 아무하고도 관계가 없었어요. 보디의 아빠와 제 가.....」 「아, 캐롤라인, 서두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리스는 부드럽게 키스하면서 속삭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지럽고 아찔한 환희의 물결에 휩쓸렸다. 두 사람이 숨을 헐 떡이며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자 리스는 한쪽 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캐롤라인, 정말 훌륭했어..... 혹시 당신에게 상처를 주진 않았어?」 캐롤라인은 고개를 가로젓고 그의 목에 다정하게 키스했다.「당신은 훌륭해요. 정 말 훌륭했어요!」 리스는 쿡쿡 거리며 웃었다. 그 사내다운 웃음소리가 그녀의 등줄기에 전율을 일 으키고 다시 욕망을 불태웠다. 캐롤라인은 그의 몸을 간지럽히듯 애무했다. 「이런, 숙녀께선 대단한 욕심쟁이로군」리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정지하고 끝없는 정열이 두 사람을 다시 덮었다. 그들은 함께 움직이고 함께 절정에 달했다. 캐롤라인은 나른한 황홀경 속에서 가벼운 신음소리를 내며 힘 빠진 손발을 나른하게 뻗었다. 「이젠 충분해?」리스가 한쪽 팔굽을 일으켜 세우고 캐롤라인을 내려다보며 물었 다. 「글쎄요, 뭐라고 할까요? 당신이 그저 얼굴만 잘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고 나 할까요?」 「합격도장을 받은 셈인가?」 「그래요, 이것이 그 도장이에요. 이것도, 또 이것도.....」 캐롤라인은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끼고 가볍게 키스하면서 속삭였다. 리스는 흐뭇한 듯 웃었다.「솔직히 말하면, 지난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던 급사 아이를 발로 차주고 싶었어. 내 계획을 망가뜨려 놓았거든」 「계획이오? 무슨 계획?」 「당신을 어떻게든 내 품에 안는 계획이었지. 일단 그렇게만 할 수 있게 된다면 당신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자만심이 강하군요!」 캐롤라인은 리스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치고 말았 다. 캐롤라인은 못 이기는 척 양팔로 그의 목을 감았다. 「어때? 내 계획이 대성공이었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노력은 계속하세요. 목표는 점점 더 높아질지 모르니까 요」캐롤라인은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두 사람은 함께 소리내어 웃고 나서 서로의 품안에 안 겨 편안하게 잠들었다. 지금 캐롤라인은 그때의 그의 품안에서 느꼈던 편안함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녀 는 그토록 믿음직스럽고 편안했던 그의 품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이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캐롤라인은 아마 보디가 무엇인가 잊은 것을 찾으러 왔겠거니 생각하고 문을 열러 갔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복도에 서 있는 것은 리스였고, 그는 평소보다 더 커 보였으 며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캐롤라인의 가슴은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리스는 방 에 들어오자마자 상의를 벗어 침대 위에 내던지고는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 두 사람의 입술이 뜨겁게 겹쳐졌다. 캐롤라인은 리스에게 매달렸다. 이 사람과는 어떤 일이 있어도 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캐롤라인 앨러턴, 당신은 이제 내게서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된 모양이야. 적 어도 하루에 한번은 당신을 포옹하고 키스하지 않으면 내가 아무 쓸모 없는 멍청 한 존재처럼 느껴지거든. 동생 데이브로부터 어디가 아프냐는 질문을 받았을 정 도야」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죠?」 「가까운 장래에 깜짝 놀랄 일이 있을 테니까, 마음의 준비를 해두라고 말했지. 그랬더니 동생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미국으로 떠나더군. 또 머지 않아 누이동생 으로부터 확인전화가 걸려 올 거야. 그런데 보디는 지금 어디 있지? 우리의 문제 는 얘기해 주었겠지? 그래, 보디는 뭐라고 말했어?」 「보디는..... 샤워를 하 러 아래층에 가 있어요. 실은 저..... 아직 얘기하지 않았어 요. 시합 전에 마음의 동요가 있어서는 안될 것 같아서.....」그리고 자신도 아직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은 생략했다. 「빨리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도 보디에게는 진작에 말했어야 했어. 그리고 나도 하루라도 빨리 결혼식을 올리고 싶고. 빨리 당신에게 반지를 끼워 주고 싶어」리 스는 잠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뒤에서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캐롤라인이 리스의 품에 안긴 채 돌아보니 타 월을 어깨에 걸친 보디가 서 있었다. 리스도 캐롤라인의 머리너머로 보디에게 미 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어떻게 할 것이니 궁금하겠지? 무책임한 기분에서 이러는 게 아냐.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네 어머니와 결혼할 작정이야. 물론 네 찬성을 얻어서 말 이야」리스의 표정은 어느새 진지해져 있었다.「어떻게 생각하지, 보디?」 「어떻게 생각하냐구요? 멋있죠! 최고예요!」 보디는 달려와 캐롤라인을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 리스에게 돌아서면서 역시 달 려가 포옹하려고 하다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밀었다. 리스는 그 손을 잡고 어 깨에 손을 돌려 껴안았다. 「진짜 멋있어요!」보디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듯 껑충껑충 뛰었다. 「그렇게 흥분하지 마, 보디. 오늘밤에도 경기가 있는데」 「걱정 마세요. 경기를 시작하면 냉정해져요. 하지만 어머니의 결혼을 생각하면 흥분되는 걸요. 빨리 브렛에게 말해 주고 싶어요」 「기뻐해 주니 고맙구나」리스가 조용히 말했다.「우리의 결혼은 내게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란다」 「제 친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를 가져 보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매케이브 씨」 「리스라고 불러 다오」 「리스, 그리고 저는..... 우리 어머니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을 택해 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해요」보디는 입을 다물고 침을 삼켰다. 캐롤라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아들을 껴안았다. 잠시 후 보디는 쉰 목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오늘은 정말 근사한 날이었어요. 오후에는 메달을 세 개나 탔고, 저녁에는 아버지가 생겼으니까요. 믿어지지 않아 요! 어머니, 오늘밤 경기에 함께 오시겠어요?」 「오늘밤 경기의 입장권이 한 장남아 있어요. 그래서 당신이 와주시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거든요」 「물론 갈 수 있지」 보디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 │ ▶ 번 호 : 0/873 ▶ 등록자 : TITANIA2 │ │ ▶ 등록일 : 2000년 09월 08일 14:21 │ │ ▶ 제 목 : [연경/煙景] 젊음의 보상...18 │ └───────────────────────────────────┘ 「어쩐지 오늘밤은 좋은 예감이 들어요. 출발선에 섰을 때부터 금메달을 딸 것 같은 느낌이 들 었거든요」그날 밤늦게 호텔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보디가 말했다. 리스는 희미한 불이 켜져 있는 호텔의 문 앞에 차를 세웠다. 세 사람이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리스가 낡은 건물을 올려다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짐을 꾸리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소?」 「짐을요? 짐은 뭣하러요?」 「여기는 당신이나 보디가 묵을 만한 곳이 못돼. 내 아파트로 가지. 무엇보다 그 쪽이 수영센터와도 가깝고.....」 「하지만....」 「사양할 것 없어. 자, 짐을 가지고 와, 보디」 리스의 방은 건물의 맨 위층에 있었고, 거실에서의 전망이 아주 훌륭했다. 마치 인테리어 잡지에 나오는 것 같은 방안을 돌아보면서 캐롤라인은 꿈을 꾸는 것 같 은 기분이었다. 모든 거시 꿈처럼 느껴졌다. 리스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도, 그 의 청혼도, 이 아파트도. 리스가 보디에게 방을 안내하겠다고 말했을 때, 캐롤라인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 다. 어디를 돌아보나 놀라움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것은 결코 독신 남자의 거처 라고 할 수 없었다. 사치스럽고 쾌적한 공간이었다. 보디를 방에 남겨 두고 리스는 다른 방의 문을 열었다. 「리스, 보디가 여기 있을 때는 전.....」캐롤라인이 말을 더듬었다. 「알고 있어, 달링. 나는 복도 건너편 방에서 자겠어. 아마 미칠 것 같겠지만. 이 렇게 가까이에 이처럼 아름다운 당신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찬물로 샤워를 20 번은 더해야 할걸」 리스는 캐롤라인을 껴안고 오랫동안 키스를 했다. 리스에 대한 애정이 고통스러 울 정도로 솟구쳐 올랐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한 가닥의 불안이 캐롤라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행복이 계속되는 동안만이라도 열심히 즐기자는 소리가 마음 한구석에서 들렸다. 그녀는 리스의 목을 감고 있는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 었다. 「왜 그러지?」리스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캐롤라인은 한순간 눈을 꼭 감고 있다가 다시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려웠 어요. 단지 그뿐이에요」 「두려워? 무엇이?」 「너무 행복하니까요」캐롤라인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 지금 당장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리스의 손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행복한 것이 왜 두렵지?」 「오, 리스, 당시는 저에 대해서..... 아직 모르는 것이 있어요. 우린 서로 알게 된 지 불과 몇 주일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리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 「저 도요. 당신을 깊이 사랑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말해야만 하는 거예요」 「캐롤라인, 나는 당신의 그 무서운 비밀을 이미 알고 있어」리스가 아무렇지 않 게 말했다. 캐롤라인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정말?」 「짐작하고 있었어. 보디를 임신했을 때 당신은 결혼하지 않았어. 그렇지?」 캐롤라인은 깜짝 놀라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리스는 그녀를 끌어안아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그런 일로 내 마음 이 변할 줄 알았어? 당신은 그때 어린애나 다름없었는걸」 캐롤라인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으로 바로 지금이 모든 것을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외쳤다. 「리스, 저를 안아 주세요」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힘껏 매달렸다. 리스는 그녀를 끌어안고 부드럽게 키스해 주었다. 이튿날은 보디가 출전하는 경기의 마지막 날이었고, 그는 금메달 두 개를 더 추 가했다. 그러나 보디는 금메달을 추가했다는 사실보다도 리스가 보호자로서 따라 와 주었다는 사실이 더 기쁜 모양이었다. 수요일은 대회의 마지막 날이어서 캐롤라인과 보디는 관중으로서 참가했다. 돌아 가기 전날인 목요일, 보디는 팀 동료들과 시내관광을 떠났고, 캐롤라인과 리스는 멜버른에서도 첫째가는 보석가게로 약혼반지를 사러갔다. 캐롤라인은 아파트로 돌아와 왼손의 무명지에 빛나는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것이 자신의 손가락에 끼어 있다는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이때 리스와 눈이 마주친 캐롤라인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정말 아름 다워요」 「당신만큼 아름답진 않아」리스는 그녀를 껴안고 천천히 넋을 빼앗는 것 같은 키스를 했다. 그의 애무와 키스가 그녀의 몸에 불을 질러 자제심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캐롤 라인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셔츠의 단추를 벗기고 손바닥으로 맨살을 더듬었다. 리스의 손도 그녀의 얇은 블라우스를 헤치고 그녀의 윤기 있는 피부를 어루만졌 다. 캐롤라인은 자신의 가슴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에 그의 입술이 닿자 그의 탐 스런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고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속삭 였다. 「사랑해 줘요」 「피지에서 헤어진 뒤, 당신의 이런 모습을 줄곧 생각해왔어. 지금 와서 생각하니 무척 오래 전의 일 같군」리스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 올려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갔다. 「이것이 모두 꿈은 아니지?」침대에 누워 캐롤라인을 팔에 안고 리스가 중얼거 렸다 「아녜요, 현실이에요」캐롤라인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리스의 손이 그녀의 뜨거운 맨살을 더듬었고 민감한 부분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숨을 죽였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 속에서 자신을 잃고 순수한 황홀경 속에 빠져 들었다. 잠시 후 캐롤라인은 흡족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제가 몰래 크림을 핥아먹은 고양이처럼 보여요?」 「만족한 고양이처럼 보이는군. 결혼식까지 기다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겠 어?」 「후회하지 않아요」캐롤라인은 솔직히 대답하고 입술을 내밀었다. 「아, 캐롤라인, 내가 지금까지 당신 없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어」 당신 없이- 그 말이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캐롤라인은 몸을 떨었다 . 이젠 자신도 이 사람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 이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고백하는 것은 그만두자. 끝까지 숨기는 수밖에 도리 없다. 「추운가?」리스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녜요, 하지만 옷을 입어야 해요. 보디가 들어올 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고 있어야 하거든요. 지금의 내 얼굴은 황홀한 사랑을 즐기고 난 여자 의 얼굴이잖아요」 「정말 그렇군」리스가 웃었다.「앞으로는 보디도 당신의 그런 얼굴에 익숙해져 야겠지」 그날 밤 보디가 다소 흥분한 어조로 그날 있었던 일을 지껄이고 있을 때 갑자기 현관 벨이 울렸다. 리스가 문을 여는 순간 금발의 여자가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리스! 역시 돌아와 있었군요」여자는 리스의 뺨에 열광적인 키스를 하고 뒤에 서 있는 키 큰 남자를 돌아보았다.「틀림없이 돌아와 있을 거라고 말했잖아요, 달 링」이때 그녀는 캐롤라인과 보디의 존재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머, 미안해요. 방해하지나 않았는지.....」 「이제 알아본 모양이군. 자, 들어와. 팀, 잘 있었나?」 리스는 남자 쪽을 돌아보았다. 「별일 없어요. 리스, 간밤에 데이브에게서 전화가 왔었어요」 캐롤라인은 여자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다. 금발의 매력적인 용모는 14년 전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리스를 많이 닮은 얼굴이었다. 「캐롤라인, 이쪽은 여동생인 수지와 동생 남편인 팀 블래 어. 그리고 이쪽은 캐롤 라인과 그녀의 아들 보디. 캐롤라인과 나는 결혼하기로 약속했지」 「정말이군요, 리스! 축하해요. 정말 잘 어울려요. 역시 리브의 말이 맞군요」수 지는 오빠와 캐롤라인을 포옹하고 보디에게 미소를 보냈다.「오빠가 마침내 결혼 을 결심했다니 반가워요. 평생을 홀아비로 지내지 않을까 걱정했거든요. 아빠와 엄마한텐 말씀 드렸나요?」 「떠들썩한 가족들 속에 캐롤라인을 내던지기 전에 좀더 시간을 벌려고 했는데, 할 수 없군. 낼일 전화하겠어」리스는 이렇게 말하고 캐롤라인에게 덧붙여 설명 했다.「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지금 미국여행을 하고 계셔」 눈물로 붉게 충혈된 눈을 손수건으로 닦고 있던 리스의 어머니와 아들을 겁먹은 16살의 소녀로부터 떼어놓던 키가 큰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새로운 회한과 두려움이 캐롤라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혼식은 언제죠?」수지가 캐롤라인에게 물었다. 「그건 아직.....」 「다음달이야」리스가 대신 대답했다.「브리즈번에서 가족만이 모여 조촐하게 올 릴 작정이지」 「오빠는 정말 시시하군요!」수지는 불만스러운 듯 입을 뾰족이 내밀었다.「당신 가족도 브리즈번에 계시나요, 캐롤라인?」 「아니에요」캐롤라인은 불안으로 가슴을 죄며 대답했다. 「부모님께선 내가 어렸을 때 이혼해서, 우린 뿔뿔이 흩어져 있어요. 그래서 가족 이라곤 나와 보디뿐이에요」 「오빠는 정말 철저한 비밀주의자로군요. 몇 주일 전에 브리즈번에서 만났을 때 는 결혼에 대해선 한마디도 안 했는데」수지가 오빠를 놀리듯 말했다. 「그 무렵의 캐롤라인은 내게 용기를 주지 않았거든」 「정말이에요? 그것 볼 만했겠는데요」 수지! 캐롤라인은 비로소 생각이 났다. 얼마 전에 전화를 걸어왔던 수수께끼의 여자가 바로 그의 누이동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엉뚱한 상상을 했잖은가! 「오빠가 결혼한다는 것을 아빠와 엄마가 아신다면 틀림없이 굉장히 기뻐하실 거 예요. 아들이 둘 다 결혼하지 않아서 손자를 못 보고 있는 것이 늘 불만이셨거든 요」 캐롤라인은 놀라 리스를 쳐다보았다. 리스가 눈을 빛내며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 다. 순간 오후에 있었던 일이 선명하게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리스의 아기를 낳는다. 그녀는 괴로움과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눈을 아래로 떴다. 이젠 어떤 일 이 있어도 이 사람을 잃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 │ ▶ 번 호 : 0/886 ▶ 등록자 : TITANIA2 │ │ ▶ 등록일 : 2000년 09월 14일 16:32 │ │ ▶ 제 목 : [연경/煙景] 젊음의 보상...19 │ └───────────────────────────────────┘ 몇 주일이 꿈결처럼 지나갔다. 무엇을 차분하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리스와의 결혼이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 손가락 에 끼어 있는 약혼반지를 만져 보거나 리스의 뜨거운 시선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캐롤라인의 가슴은 몹시 두근거렸다. 매기가 캐롤라인의 일을 인수하게 되어 두 사람은 당분간 함께 일했다. 사장과 여비서와의 약혼은 회사 안을 떠들썩하게 했다. 결혼식을 오리기 일주일 전, 사무실의 동료들이 송별회를 열어 주었다. 송별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피터가 작업기계를 부수려다가 잡혔다는 연락이 피지로 부터 날아왔다. 그래서 리스는 이튿날 아침 피지로 떠나게 되었고, 캐롤라인은 그 를 공항까지 차로 전송했다. 「수지가 화요일에 브리즈번에 도착해. 내가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목요일에 수지와 함께 공항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마중 나가 줘」 캐롤라인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가 타는 비행기의 안내방송이 나왔을 때 캐롤라인은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혀 리스에게 매달렸다. 「정말 구제불능의 피터란 놈 같으니!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수습하고 돌아올 게」 캐롤라인은 억지로 웃어 보이며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것을 삼켰다.「토요일 3시까 지는 꼭 돌아와야 해요」 「토요일 3시? 들은 기억이 있는데, 무슨 중요한 약속이라도 했었던가, 미세스 앨 러턴?」 「굉장히 중요한 약속이에요, 매케이브 씨」캐롤라인은 그의 턱에 가볍게 키스했 다. 「틀림없이 돌아올게. 태평양을 헤엄쳐서라도 말야」 마지막 주일은 그때까지보다도 더 빨리 지나갔다. 수지는 여러 가지로 캐롤라인 을 거들어 주었고, 살집도 알아보아 주었다. 그녀의 친구가 6개월 예정으로 캐나 다로 가게 되었는데, 그 동안 자기 집에서 살아 줄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마침 잘되었죠? 당신의 아파트는 세 사람이 살기에는 좁으니까, 우선 이 집에 살다가 천천히 좋은 집을 알아보면 돼요」 캐롤라인은 그 집이 마음에 들었다. 그 집은 농가 풍의 넓은 집인데 뜰에는 풀까 지 있고,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먼저 살던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밖에 되지 않았 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바로 살 수 있도록 필요한 짐을 운반하는데 꼬박 이틀이 걸 렸다. 신혼여행은 황금해안에 사흘 예정으로 가고, 새해가 되면 카리브 해에서 한 달 동안 지내기로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어 가고 있었다. 한데 데이브 매케이브로부터 전화가 걸려 와 어머니가 백화점에서 굴러 손목을 다치셨기 때문에 예정된 비행기에 탈 수 없 게 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는 결혼식 후에나 도착하게 될 것이 라고 했다. 「결혼식을 연기하는 게 어떨까요?」캐롤라인은 망설이면서 수지에게 말을 꺼냈 다. 「말도 안돼요1 어머니께서도 절대로 결혼 예정일을 바꾸지 말라고 말씀하셨는걸 요. 오빠가 큰맘 먹고 결혼하기로 결심했는데, 어떤 이유로도 날짜를 연기하는 것 을 우리 식구는 아무도 바라지 않아요」 금요일에 공항에서 리스로부터 전화가 왔다.「결혼식 전날에 신랑이 신부를 만나 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지금 당장 당신을 껴안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걸. 줄곧 당신의 아름다운 몸매만을 생각해 왔더니 머리가 좀 이 상해진 것 같군」 「저 도요」캐롤라인은 속삭였다.「우린 똑같은 꿈을 꾼 것이 아닐까요?」 「우리 평생에 가장 환상적이고 에로틱한 꿈 말이지? 내일 밤에 그 꿈을 실현하 자구, 총천연색으로!」 캐롤라인은 수화기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사랑해요, 리스」 「실제로 행동으로 보여 줄 때까지는 믿지 않겠어」리스가 놀렸다.「혼잡한 공항 은 이런 대화를 나누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데」 캐롤라인은 그의 낮은 웃음소리를 듣지 당장에 라도 그의 품에 안겨 설레는 가슴 을 진정시키고 싶었다.「피터 크루거의 문제는 잘 해결되었어요?」 「응, 그럭저럭. 크루거는 바보 같은 녀석이야. 그는 이 사실이 아버지의 귀에 들 어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 그건 그렇고, 보디는 잘 있어? 신문에 사진이 실렸으 니 이젠 유명인이 됐겠군」 캐롤라인은 미소지었다.「보디도 의기양양해요. 신문기사도 무척 호의적이더군요. 빨리 당신에게 그 기사를 보여주고 싶어 못 견디겠는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결혼 피로연 때 기사의 스크랩을 들고 나오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리스는 웃었다. 「우리가 결혼하는 것을 보디가 무척 기뻐하고 있어요」 캐롤라인은 여기서 잠시 말을 끊고 얼굴을 붉혔다.「기분은 변하지 않았어요?」 「물론이지,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어. 내일 밤이 말야」 「어머님의 용태는 어때요?」캐롤라인은 어색해하며 물었다. 「간밤에 전화로 연락했는데 건강하신 것 같아. 결혼식에 오시지 못하는 것을 몹 시 섭섭해하시더군. 우리가 황금해안에서 돌아올 무렵에는 오실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 리스는 목소리를 낮추어 덧붙여 말했다.「빨리 황금해안으로 가고 싶어 못 견디 겠어」 「거기 가서 뭘하려구요?」캐롤라인은 시치미를 뗐다. 「그걸 지금 말하라는 거야? 정말 몰라서 묻고 있어? 오, 사랑스런 악녀 같으니! 두고 보라고, 내일 밤 복수해 줄 테니」 「제발 빨리 그렇게 해주세요」 「전화라고 이렇게 대담히 나오기야? 운전사가 왔으니 이제 가야겠어, 내일은 늦 지 마」 「일분도 늦지 않을 거예요」 캐롤라인은 천천히 수화기를 놓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내일 오후면 나는 미세스 매케이브가 된다. 그녀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리스가 캐롤 버 튼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해주세요, 하느님! 「고백하세요, 리스 매케이브, 당신은 처음 2세트를 일부러 져주고 저를 방심케 했죠?」캐롤라인은 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말했다. 「글세, 그랬던가?」 「그래요, 하지만 명심하세요. 다음 번엔 그런 수에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요!」캐 롤라인은 암밴드에 이마의 땀을 닦았다.「땀을 흘렸으니까 점심식사 전에 샤워를 해야겠어요」 리스는 테니스 가방을 선반에 치우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캐롤라인 은 자신의 등줄기에 작은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간밤과 오늘 아침에 그와 함께 지냈던 즐거웠던 시간이 되살아났다. 그에게 달려가 얼싸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으나, 역시 망설임이 앞섰다. 캐롤라인은 욕실로 향했다. 스니커를 벗고 테니스 용 쇼트와 티셔츠도 벗었다. 샤워기 아래 맨발로 섰을 때, 누군가의 손가락이 등줄기를 가볍게 쓰다듬어 환희의 전율을 일으켰다. 숨을 죽이고 돌아보는 캐롤라인의 얼굴이 핑크 빛으로 물들었다. 리스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나도 샤워를 해야겠어. 그것도 오랫동안. 물의 절약은 도저히 못할 것 같은 예 감이 드는걸」 물줄기가 넓은 어깨에서 부드러운 가슴털을 타고 탄력 있는 아랫배로 내려갔다. 그 완벽한 남성미에 캐롤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아름다워!」 이 말은 자신이 했다고 생각했으나 리스가 자기의 생각을 말했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가슴을 바라보고 있었다 . 「당신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군, 미세스 매케이브」리스는 젖은 손 으로 그녀의 가슴을 감쌌다. 두 사람은 동시에 앞으로 나오면서 몸이 서로 얽혔다. 리스의 비누 묻은 손이 그 녀의 등을 더듬으면서 등뼈의 오목한 부분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허리에서 원을 그렸다. 캐롤라인은 입술로 그의 어깨와 목을 더듬었다. 그는 캐롤라인을 힘껏 끌어안고 입술을 겹쳤다. 따뜻한 물줄기가 향긋한 비누 거 품을 씻어 내렸다. 캐롤라인의 감각은 완전히 정상을 잃어버렸다. 리스는 그녀를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고, 두 사람은 열광적으로 서로를 갈구했다. 캐롤라인은 어딘가 높고 높은 곳에서 떠다니는 자신을 느꼈다. 그곳은 리스만이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이었고, 그녀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건 곳이었다. 그녀는 흡 족한 한숨을 토했고, 그 뜨거운 한숨은 리스의 어깨를 가볍게 스쳤다. 리스는 다 시 한번 캐롤라인의 가슴과 등을 사랑스러운 듯 애무했다. 캐롤라인은 얼굴을 들고 그의 깊고 푸른 눈을 들여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눈가 에 잡힌 잔주름과 희미하게 보이는 턱수염 자국, 그리고 웃으면 깊이 패는 입가 의 주름이 또렷이 보였다. 주름이 깊이 패면서 입술 양끝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그 입술을 쳐다보면서 그 입술이 자신의 몸 안에 일으키는 불꽃을 생각했 다. 두 사람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아, 나는 이 사람을 어쩌자고 이토록 사랑하 는 것일까!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 사람은 알고 있을까? 「당신은 정말 대단한 여자야, 미세스 매케이브. 당신 자신은 그걸 알고 있나?」 리스는 이렇게 속삭이며 손가락으로 캐롤라인의 눈썹과 자그마한 코와 그리고 열 렬한 키스로 부풀어 있는 입술의 곡선을 어루만졌다.「겉으로 보기에는 그처럼 냉정하고 침착하지만, 안에서 그렇게 무서운 불길이 타고 있는 줄은 아무도 상상 못할 거야」 캐롤라인의 볼이 장미 빛으로 물들었다.「저도 이럴 줄은 몰랐는걸요」그녀는 무 엇이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저「당신을 깊이 사랑하는가 봐요」라고만 말했 다. 리스는 손으로 턱을 괸 채 캐롤라인을 내려다보았다. 「보디의 아버지에 대해서 말해 줘」 너무나 갑작스런 말이어서 캐롤라인은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 을 받았다. 리스의 얼굴을 살펴보았으나 혐오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저는 그때 16살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저보다 몇 살 위였구요. 그 사람 은 그때까지 저를 알아준, 말하자면 특별히 생각해준 최초의 사람이었죠.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을 사랑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생각나지 않을 정도지만 마치 딴 세상에서 있었던 일만 같아요. 그 사람은 보디가 태어나 기 전에 죽었죠」 「보디를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나?」 캐롤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태어나기 전에는 양자로 보낼까 생각했죠. 내가 임 신한 것을 알고 곁에 두기를 꺼려한 양친께서는 저를 백모님 에게 보내더군요. 백 모님은 양식이 있고 현실적인 분이었는데, 그 백모님과 여러 차례에 걸쳐 상의한 끝에 양자로 보내는 것이 제일 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렸죠. 그런데 막상 보디가 태어나서 내 팔에 안기는 순간 이 아이와는 헤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백모님은 아이를 양자로 보내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아이를 기르는 데 따르는 책임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죠. 내가 단과대학에 다니는 동안 백모님이 보 디를 돌보아 주셨고, 크루거 사에 다니면서부터는 유치원과 학교에 데리고 다니 셨죠. 백모님이 안 계셨더라면 도저히 감당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백모님은 보디 에게 안정된 생활이 필요하다면서 제 남자친구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않으셨 고, 저도 공부에 바빠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그 이후에도 그랬고요」캐롤라 인은 어깨를 으쓱했다.「당신을 만날 때까지는 아무도 없었어요」 리스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손가락 하나하나에 키스를 하고 금빛으로 빛나는 결혼 반지를 쓰다듬었다. 캐롤라인의 꼭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리스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가슴에 사무쳤다. 하지만 우리의 장래는 얼마나 덧없는 것일까. 만 약 리스가 그 사실을 안다면..... 「이런, 왜 그러지?」리스는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에 흐르는 눈물 을 닦아주었다.「행복의 눈물이겠지, 캐롤라인? 당신은 내 평생에 처음 만난 최소 의 여자야」그는 진심으로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 껴안고 눈을 감았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도 그지없이 행복했다. 캐롤라인이 손으로 리스의 넓적다리를 더듬자 그는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참아 줘, 미세스 매케이브! 나도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아직 기운을 완전히 회 복하지 못했어」 「벌써 나이를 먹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매케이브 씨」캐롤라인은 그를 놀렸 다. 「지금부터는 빨리 나이를 먹을 것 같은걸」 캐롤라인은 웃고 나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당신이 젊거나 나이를 먹거나 저 는 당신만을 사랑할 거예요, 리스」 「나도 마찬가지야, 캐롤라인」 두 사람은 어느새 잠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캐롤라인은 전화 벨 소리에 잠 에서 깼다. 「내가 받을게. 그대로 누워 있어요, 미세스 매케이브」리스가 엎드려 캐롤라인의 가슴에 키스했다.「이젠 기운을 회복한 것 같은데」 캐롤라인은 미소 띤 얼굴로 알몸인 채 방을 나가는 리스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흡족한 기분으로 팔다리를 길게 뻗고 머리를 베개에 묻었다. 다시 잠에서 깨었을 때는 해가 이미 지기 시작하고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캐롤라인은 본능적 으로 손을 뻗어 보았으나 리스가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일어나 타월로 된 실내복을 걸치고 맨발로 거실로 나갔다. 처음에는 아무 도 없다고 생각했으나, 잠시 후 사람의 기척이 있는 듯싶어 발코니로 향했다. 리스는 난간에 턱을 괴고 눈 아래 펼쳐져 있는 레인보만의 조용한 해안선과 그린 마운트 언덕의 송림을 바라보 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살그머니 다가가 뒤에서 그 를 껴안고 따뜻한 그의 등에 뺨을 갖다댔다. 리스의 몸은 순간적으로 긴장하는 듯했으나 곧 편안한 자세로 돌아갔다. 캐롤라인은 입술로 그의 어깨를 애무하다 가 옆으로 돌아 뺨에 키스했다. 「깜빡 잠들었던 모양이에요. 왜 깨우지 않았어요?」 한순간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차마 깨울 수가 없었어. 너무 깊이 잠들어 있었으 니까」 캐롤라인은 그의 몸에 팔을 감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곳 전망은 정말 환상적이군요. 바닷물이 어쩌면 저렇게 푸르죠」그녀는 리스의 어깨에 코끝을 비 볐다.「전화, 누구한테서 왔어요?」 「아버지한테서 왔어. 오늘 돌아오신 모양이야. 주말에 브리즈번에 오신다고 하시 더군」 「그랬군요」수지는 나를 몰라보고 있다. 아마 양친께서도 몰라보실 것이다. 캐롤 라인이 리스의 어깨에 입술을 갖다댔을 때 실내복이 약간 벗겨지면서 흰 가슴의 한쪽이 드러났다. 리스의 눈이 거기에 빨려들었다. 리스가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깊고 푸른 눈 속에 가라앉은 그 무엇인가가 그녀 의 입술에서 미소를 가시게 했다. 「리스?」 리스는 눈을 깜박이며 무표정하게 대답했다.「이젠 충분히 회복되었어」그리곤 그녀를 카펫 위에 눕혔다. 리스는 벌이라도 주듯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고, 아플 정도로 세게 애무했다. 캐롤라인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그는 조금 전과 달랐다. 상냥한 애인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는 마치 노여움에 사로잡힌 사람 같았다. 그의 몸이 자신의 몸 위에 겹쳐졌을 때 캐롤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리스는 곧 속눈썹을 아래로 깔고 표정을 숨겼으나, 캐 롤라인은 그의 깊고 푸른 눈 속에서 고뇌의 빛을 본 듯했다. 그날 밤 리스가 잠든 뒤에도 캐롤라인은 오랫동안 눈을 뜨고 있었다. 이튿날 아 침잠에서 깨었을 때, 리스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있었다. 오전 중에 는 해안에서 지냈는데, 리스는 줄곧 혼자서 파도타기를 했다. 그와 함께 수영을 하고 싶었으나 어쩐지 그가 혼자 있고 싶어하는 것 같아 그녀는 비치 파라솔 밑 에서 일광욕을 했다. 점심식사를 하고 두 사람은 브리즈번으로 떠났다. 새 집은 예상했던 대로 아름다 웠으나, 리스와 함께 산다는 기쁨을 어쩐지 백 프로 맛볼 수 없었다. 리스는 무표 정한 얼굴로 집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말없이 수트케이스를 들고 집안으로 성큼성 큼 들어갔다. 캐롤라인은 주방으로 가서 밝은 라임그린 빛의 카운터에 컵을 두 개 나란히 놓고 퍼콜레이터의 스위치를 꽂았다. 리스는 샤워를 하고 있다. 함께 하고 싶었으나 어쩐지 망설여졌다. 어제 발코니에 서 있었던 일 이후로 캐롤라인은 자기가 결혼한 남자의 마음을 파악할 수 없었 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리스는 벌써 내게 싫증을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갑 자기 싸늘한 손으로 심장을 움켜잡힌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리스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일까?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결혼식 이후로 우리는 줄곧 단 둘이 있었잖은가. 아무도 그 사실을 말할 사람이 없었다. 리스는 넥타이를 매면서 주방으로 들어왔다.「난 커피 생각이 없어. 보디는 언제 돌아오지?」 「우리가 돌아왔다는 것을 조이에게 알리는 대로 곧 올 거예요」 「잠깐 사무실에 다녀오겠어」그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며 호주머니 위로 지갑을 확인했다. 「사무실에요? 하지만.....」 「두 시간쯤 후에 돌아올 꺼야」리스는 그녀의 팔을 잡고 잠시 망설이다가 갑자 기 그녀를 끌어당겨 짧지만 정열적인 키스를 했다. 그리고 주방에서 나갔다. 캐롤라인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리스는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 그리 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무서울 정도로 명확한 것이었다. 캐롤라인은 사치스럽게 꾸민 거실을 지나고 두꺼운 카펫이 깔린 홀을 빠져 나와 예비 침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당분간 이 집에서 불필요한 물건이 쌓여 있었다. 캐롤라인이 그 중 어떤 상자를 열 것인가는 뻔했다. 그녀는 불과 몇 주일 전에 보디와 함께 보았던 앨범을 꺼내 속을 들춰보았다. 세 명의 소녀와 네명의 소년이 찍혀 있었다. 캐시와 돈, 제니와 피터, 테리와 그 녀 자신, 그리고 크리스. 금발에 키가 크고 핸섬한 17살의 크리스 매케이브는 보 면 볼수록 누님인 수지를 닮았다. 그는 가장 큰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었고 돈 씀 씀이도 헤펐다. 크리스를 그룹으로 데리고 온 것은 피터였다. 두 사람이 어떤 경 로로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의 가정 환경은 너무나 달랐으니까. 첫날부터 크리스는 캐롤라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솔 직히 말해서 캐롤라인도 싫지는 않았다. 14년이 지난 지금은 그 사실을 냉정하게 인정할 수 있다. 후회와 죄의식이 고개를 쳐들었다. 캐롤라인은 크리스가 리스와 닮은 데가 없는지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으나, 닮은 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크리스는 금발이었으나 리스의 머리는 짙은 밤색이 고, 크리스에게서는 리스가 갖고 있는 야성미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신참자가 캐롤라인에게 노골적인 호의를 표시하는 것을 테리가 달갑게 생각할 리 없었다. 캐롤라인은 내 여자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하기도 했다. 이런 관계가 2주일쯤 계속된 어느 날 오후, 두 사람의 반목은 마침내 멜버른의 뒷골목 에서 폭발되고 말았다. 나는 정말 크리스의 마음을 부추겼을까? 아니다,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 만 크리스가 몹시 끈질겼고, 두 명의 싫지 않은 사내아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재미있고 즐거웠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날 오후 빈터에서 여럿이 모여 있을 때, 크리스가 새로 산 오토바이를 시승하 는데 뒤에 타지 않겠냐고 그녀를 꾀었다. 그러자 테리가 크리스의 멱살을 잡고 꺼지라고 고함쳤다. 「그 여자는 내 것이야. 너 같은 꼬마에게는 맞지가 않아. 도대체 넌 여기서 뭘 하겠다는 거지, 매케이브? 빨리 점잖으신 너의 아빠, 엄마에게 돌아가서 양갓집 아가씨나 상대하는 게 어때?」 순간 크리스가 테리를 힘껏 떠밀었고, 두 사람은 서로 얽혀 길바닥을 뒹굴었다. 캐롤라인은 두 사람의 싸움을 뜯어말리라고 절규했으나, 피터는 고개를 저으며 언젠가는 한번 일어날 싸움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싸우는 두 사람사이를 헤치고 들어가려고 했던 캐롤라인은 보기 좋게 나뒹굴고 말았다. 이때 테리가 턱에 한방 얻어맞고 몸의 균형을 잃으면서 길가의 시멘트 난간에 머 리를 부딪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테리는 쓰러졌으며,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 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숨이 멎었어, 죽었어」피터가 말했다. 「죽었다고? 바보 같은 소리!」크리스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죽었을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캐롤라인은 울부짖으면서 테리의 몸을 잡 아 흔들었다. 「죽었어, 캐롤. 틀림없어」피터는 새파랗게 질려서 서 있는 크리스를 돌아보았다 「도망치는 게 좋겠어. 넌 사람을 죽였어」 「이건 사고잖아!」크리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지만 네가 테리를 쳤어」 「그리고 테리는 죽었어」캐롤라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크리스는 테리의 꼼짝도 않는 몸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몸을 날려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10분쯤 후 크리스는 속력을 너무 내는 바람에 다른 차의 옆구리에 부딪쳐 그대로 가드레일에 처박혀 목을 부러뜨렸다. 즉사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캐롤라인은 벌떡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어머니예요? 돌아오셨군요!」 보디의 목소리를 듣자 캐롤라인은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보디, 잘 있 었니?」 「잘 있어요. 여행은 즐거웠어요?」 「응..... 하지만 돌아와서 더 즐겁단다」 「정말? 파도타기나 일광욕보다 시내가 더 좋아요? 믿을 수 없는데요. 지금부터 브렛과 함께 훈련받으러 가는데 돌아올 때 아주머니에게 그곳에 데려다 달라고 해도 괜찮아요?」 「물론이지, 네가 보고 싶어 못 견디겠는걸」 캐롤라인은 거실의 의자에 앉아 양팔로 보호하듯 자신의 몸을 감쌌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 것도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다. 냉정하고 매사에 침착하 던 평소의 캐롤라인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젠 앨러턴이 아니다. 미세스 매케 이브다. 하긴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 될지, 모르지만. 과연 결혼을 취소하는 것이 리스가 내릴 결론일까? 캐롤라인은 시간이 가는 것도 잊고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밖에서 차의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방안이 이미 어두워져 있음을 깨달았다. 베란다를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틀림없이 보디의 발소리라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리스의 발소리라 는 확신을 버릴 수 없었다. 거실로 들어오자마자 리스는 눈으로 캐롤라인을 찾았다. 창백하고 긴장된 그의 얼굴에는 푸른 눈만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리스는 성큼성큼 다가와 캐롤라인의 팔을 잡고 그녀와 정면으로 마주섰다. 손에 는 한 장의 종이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들어 올려 16살의 소녀의 얼굴과 캐롤라인의 얼굴을 비교하면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캐롤라인은 한마디의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줄곧 두려워했던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상하게 무감각해지고 거의 체념에 가까운 감정에 빠져 버렸다. 「왜 말하지 않았지?」리스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 │ ▶ 번 호 : 0/886 ▶ 등록자 : TITANIA2 │ │ ▶ 등록일 : 2000년 09월 14일 16:35 │ │ ▶ 제 목 : [연경/煙景] 젊음의 보상...20 │ └───────────────────────────────────┘ 「무엇을..... 무엇을 말하라는 거예요? 실은 말하려고 했었죠. 멜버른의 당신 아파 트에서. 하지만 말할 수 없었어요. 사랑하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리스의 손가락에 힘이 주어졌다. 캐롤라인은 꿈틀거렸다. 「아파요, 리스!」 「당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야!」그의 얼굴에 고뇌의 빛이 스쳤다.「내가 언젠가 는 알게 되리라고 생각지 않았나?」 「당신이 몰라주기만을 바랐어요. 아주 오래 된 일인데다가.....」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리스는 신음하듯 무어라고 중얼거리곤 갑자기 캐롤라인을 놓았다. 그녀는 비틀거 리며 의자의 등받이를 잡았다. 「용서하세요」그녀는 리스의 등에 대고 중얼거렸다. 「사과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냐」 「어떻게 알았어요?」 캐롤라인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리스는 그녀를 향해 홱 돌아서며 신문기 사를 복사한 것을 의자에 내던졌다.「수지가 찍은 결혼사진을 보고 아버지가 알 아채셨어」 「그럼 당신 가족이 모두 알고 있겠군요?」 「물론이지」 「아버님이 어제 전화로 그 말씀을 하셨겠군요. 그럼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으면 서 어제 오후에.....」 「당신을 안았을 때?」리스는 씁쓸하게 말했다.「나는 반신반의했지. 내가 그런 의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당신을 포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당신에겐 충격이 었겠지. 하지만 지금도 당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리스는 갑자기 뒤 로 돌아 책장에 손을 짚었다. 캐롤라인은 무감각해진 손으로 신문기사의 복사지를 집어들었다.「당신은 하루동 안에 이런 모든 것을 모았군요」 「돈을 충분히만 쓰면 그만한 효과는 얻을 수 있지. 나는 당신 어머니에게도 사 람을 보냈었어」 「저의 어머니 에게요?」캐롤라인은 숨을 죽였다. 「당신의 어머니는 모든 것을 얘기해 주었지. 당신의 계부가 당신을 양녀로 삼지 않으려고 했지 때문에 버튼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었다는 사실. 그리고 퀸즐랜 드로 옮긴 뒤로는 당신의 친아버지 성을 따서 앨러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사 실도.....」 「리스, 저는 당신 동생이 죽은 일에 대해선 책임이 없어요. 제발 믿어 주세요. 크리스가 저를 좋아한다는 것이 싫지 않았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지만, 그런 결과 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캐롤라인은 애원하듯 리스를 올려다보았으나 그의 노여움은 조금도 누그러지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얼음처럼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당신이 이만큼 변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저는 변하지 않았어요. 리스, 나이를 먹었을 뿐이에요. 당신처럼 말이에요. 그리 고 젊었을 때의 과실에서 무엇인가를 배운 것 같아요. 정신적인 고통에 있어서는 충분히 벌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지난 14년 동안 제가 죄의식으로 시달리지 않았 다고 생각하세요 ? 누군가가 보디에게 그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하는 것도 두 려웠어요. 그래서 보디가 수영 선수로 두각을 나타낼 때도 가능하면 매스컴에 나 지 않도록 고심했어요. 사진이 신문에 났던 것도 지난번이 두 번째예요」 이때 차가 문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캐롤라인은 깜짝 놀라며 얼굴을 들었다.「보 디예요」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부탁해요, 리스. 이 일은 보디와는 관계없는 일이니까.....」 「정말 관계가 없나. 캐롤라인?」 「물론이에요. 어떤 일이 있어도 보디에게 상처를 주고 싶진 않아요」캐롤라인은 쏟아지려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리스는 캐롤라인의 애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딱딱한 얼굴로 그 자리 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보디의 발소리가 베란다를 가로질러오고 있었다. 캐롤라 인이 신문기사의 복사지를 호주머니에 구겨 넣었을 때 문이 열렸다. 「안녕들 하세요!」보디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어머니에게 안겼다. 캐롤라인은 소금기 냄새가 아련하게 풍기는 젊은 아들의 몸을 힘껏 껴안았다. 보 디는 짐짓 엄살을 부리며 비명을 올렸다. 리스의 미소도 캐롤라인의 웃음처럼 역시 억지로 지어 보이는 웃음이었다.「물론 즐거웠지. 지금 저녁식사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 상의하던 참이야. 레스토랑과 피 자 핫 중 어느 쪽이 좋겠어?」 「피자 핫이 좋아요. 오랫동안 피자를 못 먹었거든요」 보디는 눈을 빛냈다. 「알았어, 가방을 놓고 와. 곧 출발할 테니」 「고마워요」보디가 방에서 뛰어나가자 캐롤라인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엇이 고마워? 보디가 당신에 대해서 품고 있는 완벽한 어머니의 이미지를 내 가 깨뜨릴 것 같아?」리스가 이렇게 말하고 문으로 향했다「차에서 기다리겠어」 그 뒤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캐롤라인과 리스는 보디 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보디가 한두 차례 이상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는 것을 알아챘다. 집으로 돌아와 보디가 숙제를 하기 위해 자기 방으로 돌아가자 캐롤라인은 용기 를 내어 말했다.「우리, 얘기 좀 해요」 그러나 리스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할 일이 있어. 먼저 자고 괜찮아」 캐롤라인은 무릎 위에 책을 펴놓은 채 몇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보디가 잠들자 커피를 끓여 가지고 서재의 문을 두들겼다. 리스는 얼굴을 들지 않고 커피 잔을 받았다. 「이젠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아직 멀었어요?」 캐롤라인을 올려다보는 리스의 눈에 순간적으로 불꽃이 타올랐으나 그는 곧 시선 을 떨어뜨렸다.「응, 아직도 일이 많이 남았어」 이튿날 아침 캐롤라인이 눈을 떠보니 옆에 있는 베개에 사람이 누웠던 자국이 전 혀 없다. 그녀는 머리가 무거웠으나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빨리 보디를 깨워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디의 방은 텅 비어 있었 고, 그는 주방에서 리스와 함 께 토스트와 홍차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더 주무실 걸 그랬어요. 어머니, 오늘 아침엔 리스가 데려다 주겠다고 하셨거든 요」보디는 마지막 토스트 조각을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저런, 그러면 안돼」캐롤라인은 리스의 얼굴을 보면서 아들에게 말했다. 「오늘 아침엔 일찍 사무실에 나갈 일이 있어」리스는 재킷의 소매에 팔을 넣으 면서 말했다.「당신의 새 차가 오늘 도착할 테니까, 저녁 때 보디를 마중갈 때 그 차를 사용해」 「새차라구요? 하지만 내 차는.....」 「새 차를 배달하고 실어 갈 거야」 「그 제미니는 훈장 감인데요!」보디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니에게 어떤 차를 사주었죠?」 「BMW야.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꿔도 괜찮아」리스가 캐롤라인의 머리 위쪽의 벽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다뇨! 틀림없이 마음에 들 거예요. 그렇죠, 어머니? 스피드도 좋 고 모양도 멋있고」 그는 감격한 눈으로 리스를 돌아보았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리스. 설마 이렇게...」 캐롤라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스는 벌써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차가 점심때까지 도착하지 않거든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매기에게 연락해 둬 요. 확인해볼 테니까」 말하자면 전화로도 나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아닌가. 캐롤라인은 가슴 이 미어지는 듯했다. 정말 어떻게 하면 당신이 전처럼 나를 사랑해 줄 것인가요? 보디를 마중 나가기 전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캐롤라인? 집에 있어 다행이군」 리스의 목소리는 갓 결혼했을 무렵의 목소리 와 같았다. 캐롤라인은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아 벽에 몸을 기댔다. 「저녁식사는 필요 없어. 습한 일이 생겨 오늘밤 호버트에 가야 해」 「오늘밤? 하지만 옷도 갈아입지 않고...」 「멜버른에 들를 테니까, 필요한 것은 아파트에서 갖추겠어」 「언제 돌아오세요?」 수화기를 쥐고 있는 캐롤라인의 손에 힘이 주어졌다. 「아마 목요일쯤에 돌아올 거야. 그럼...」 전화가 끊겼다. 캐롤라인은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천천히 수화기를 놓았다. 무슨 기척이 있는 것 같아 캐롤라인은 얕은 잠에서 깨어 어둠 속을 응시했다. 이번에는 문의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분명히 들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다. 누군가가 거실에 있다. 보디가 우유라도 마시고 있는 것일까? 침실 문을 살그머니 열자 홀안에 커다란 사람 그림자가 비쳤다. 하마터면 소리 를 지를 뻔했을 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캐롤라인. 놀라게 해서 미안해. 깨우지 않으려고 했는데」 「괜찮아요. 당신은 내일까지 돌아오시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도둑이 들었나 해 서...」 캐롤라인은 떨리는 다리로 침대로 돌아와 걸터앉았다. 갑작스럽게 일어나 실내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짧은 나이트 드레스가 스탠드의 불빛으로 속이 비 치는 것을 깨달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리스는 넥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몹시 지쳐 있는 듯했다. 시계를 보니 1시 반이 었다. 「호버트에서의 일은 정리됐어요?」 「그곳에 가던 첫날에 정리했지. 그리고 다시 에어리 해변으로 갔어」 「피곤하시겠군요」 그의 곁으로 가서 어깨라도 주물러 주고 싶었으나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샤워를 좀 해야겠어」 캐롤라인은 불과 며칠 전에 황금해안에서 그와 함께 샤워를 했던 일이 생각났 다. 갑자기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리스가 비록 속눈썹을 아래로 깔고는 있지만 뜨거운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셔츠의 단 추를 벗기던 손을 잠시 멈추고 있다가 셔츠 자락을 천천히 바지에서 빼냈다. 캐롤라인의 호흡이 빨라졌다. 「식사는 어떻게 했죠?」 「공항에서 먹었어」 「커피라도 드시겠어요?」 캐롤라인은 리스의 팔과 어깨의 근육이 어둠 속에 희미하게 비치는 것을 마치 꿈꾸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한잔 마실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욕실로 사라졌다. 캐롤라인은 실내복을 입고 주방으로 가서 재빨리 샌드위치를 만들고 두 사람 분 의 커피를 준비했다. 어느새 리스가 뒤에 와 있었다. 수염을 깎고 샤워를 한 끝이라 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다. 실내복의 호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는 그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리스는 카운터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고마워, 배가 고팠던 모양이야. 공황의 식사는 좋은 편이 못되거든」 「리스, 그 BMW 말인데요. 역시 받을 수 없어요. 너무 비싸요」 「그야 당연히 예상했던 일 아냐?」 리스의 입이 일그러졌다. 「나는 부자야. 그 러니까 아내도 신분에 맞는 차를 갖는 것이 당연한 거야. 그렇잖아, 캐롤라인?」 「저는 당신의 돈을 목적으로 결혼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그것도 결혼 이유의 일부이긴 했겠지?」 리스는 이렇게 말하고 무자비 하게 웃었다. 「그래요, 당신도 알고 있을 거예요」 캐롤라인은 터져나올 것 같은 울음을 참고 침실로 달려갔다. 그녀는 테이블에 엎드려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악물었다. 저 사람이 어떻게 그 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으나 캐롤라인은 얼굴 을 들지 않았다. 「이혼을 바래요?」 그녀는 무표정하게 물었다. 「이혼은 하지 않아, 적어도 지금은. 우리는 적당한 기간동안 부부로 있어야만 돼」 「적당한 기간이란 얼마 동안을 말하는 거죠?」 캐롤라인은 세상이 머리 위로 무 너져 내려앉은 것 같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글세, 내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라고나 할까」 리스는 오만한 태도로 그녀를 응시했다. 「리스, 제발 그러지 말아요!」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캐롤라인」 리스는 끝까지 딱딱한 표정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캐롤라인은 떨리는 손으로 눈을 눌렀다. 「피곤해요. 건너편 방에서 자겠어요. 짐은 내일 옮길께요」 「그건 찬성할 수 없어, 캐롤라인. 당신은 아직 내 아내야. 내가 상황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할 때까지 여기에 있어 줘.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처음부터 자진해서 주려고 했던 것 외에는 요구하지 않아」 리스의 냉소는 캐롤라인의 뼛속까지 얼 어붙게 하는 것이었다. 「그건 무슨 뜻이죠?」 「어떤 뜻이라고 생각해, 미세스 매케이브?」 리스는 오만한 태도로 캐롤라인의 몸을 훑어보면서 가슴의 곡선에 잠시 눈길을 멈추었다가 의미심장하게 더블베드 로 시선을 옮겼다. 「 안돼요」 그녀는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된다고? 하지만 본심은 그렇지 않을걸, 거짓말을 잘하는 마님」 리스는 이 렇게 말하고 문에서 떨어져 캐롤라인에게 다가왔다. 리스는 그녀의 반항을 무시하고 아내를 끌어안아 난폭하게 입술을 겹쳤다. 난폭 한 키스는 입안의 부드러운 피부에 상처를 입혔다. 캐롤라인은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입술이 떨어졌 을 때는 두 사람의 호흡이 마치 마라톤을 하고 난 뒤처럼 가빴다.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이 사람은 이 고통을 모르는 것일까? 리스 가 다시 입술을 가까이 하자 캐롤라인은 온몸을 긴장하고 방어태세를 취했다. 그 러나 이번의 키스는 부드럽고 마음을 녹이는 것 같아 반감은 삽시간에 격렬한 욕 구로 변해 갔다. 캐롤라인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탐스런 그의 머리를 더듬고 있 었다. 리스는 그녀의 실내복을 벗기고 얇은 나이트 드레스 위로 가슴을 애무했다. 그 리고 뒤로 젖힌 그녀의 목과 가슴의 골짜기에 뜨거운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꽤 오랜만이군」 리스가 중얼거렸다. 캐롤라인은 절망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현기증이 나는 황홀감 속에서 모든 것이 잊혀졌다. 두 사람은 몇 년 동안이나 헤어져 있었던 것처럼 서로가 열렬하게 상대를 요구 했다. 절정에 달했을 때 리스는 캐롤라인의 입술을 덮쳤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잠시 후 눈을 떠보니 스탠드의 불빛은 아직 그대로였고, 리스는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얹은 채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리스는 잠결인 듯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러나 곧 잠이 깬 듯 몸을 뒤척여 그녀로부 터 떨어졌다. 두려움과 고통으로 가슴이 죄는 듯했다. 캐롤라인은 쉰 목소리로 불러 보았다. 「리스?」 「자라구, 캐롤라인」 리스는 피곤한 듯 이렇게 말하고 스탠드의 불을 껐다. 캐롤라인은 어둠 속에서 시트를 턱까지 올리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눈물은 자꾸만 흘렀다. 리스는 그녀의 슬픔을 알아채고 있는지 모 르고 있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가 얼마 안 있어 깊은 잠에 빠져들 었다. 「아버님과 어머님께서는 예정대로 내일 도착하시나요?」 이튿날 아침 보디를 기다리는 동안의 어색한 침묵 속에서 캐롤라인이 물었다. 「그래, 내가 공항에 마중 나가겠어. 집에는 6시경에 도착할 거야」 「두분께서는 저... 알고 계신지... 보디가...」 「알고 계셔. 보디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야」 「고마워요」 캐롤라인은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우리가 과거의 일을 문제삼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고 알고 계셔. 부모님께는 그렇게 믿게 해드리고 싶어. 그러니까 그분들 앞에선 그렇게 보이도록 해줘야겠어」 오늘 아침의 리스는 냉담하고 서먹서먹하여 불과 몇 시간 전에 다정하게 보냈던 시간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캐롤라인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간밤에 제가 아내의 역할을 한 것처럼 말이죠?」 그녀는 씁쓸한 어조로 말했 다. 리스는 화난 사람처럼 입가에 힘을 주었다. 「간밤에는 서로가 충분히 즐겼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돼 그처럼 아름다운 것을 값싸고 비열한 행위로 끌어내리려고 하죠?」 「내가? 글세, 그럼 당신은 어떻지, 캐롤라인?」 캐롤라인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아무튼 부모님 앞에서는 행복한 것처럼 해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당한 각오를 해야 할걸」 리스가 흘끗 문 쪽을 바라보았다. 보디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많은 것을 잃게 돼. 그걸 명심해 두라구」 「보디에게 야기한단 말인가요? 그렇다면 완전한 협박이군요, 리스」 「무엇이라고 표현해도 상관없어. 아무튼 우리 결혼의 질에 대해서 비록 가족들 사이에서라도 문제가 되게 하고 싶진 않아」 문이 열렸다. 가방을 들고 나온 아들에게 캐롤라인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 다.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보디는 캐롤라인의 뺨에 키스하고 리스를 따라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보디가 차에 오르면서 즐거운 듯이 리스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보디가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캐롤라인이 토스트 치킨을 굽고 있을 때, 리스의 차가 집 앞에서는 소리가 들렸다. 캐롤라인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리스의 부모 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은 언제 알려질지 모른다는 불안만큼이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녀는 앞치마를 벗고 드레스를 매만졌다. 심플한 레몬빛 원피스에 화사한 흰 샌들을 신고, 머리는 얌전하게 빗어 넘겼다. 냉정하고 침착한 이미지 - 어딘지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인상이었다. 캐롤라인은 보디와 함께 베란다로 마중 나갔다. 리스의 어머니의 눈 모양은 아 들과 같은 모양이었으나, 빛깔은 보다 연했다. 캐롤라인의 가슴은 몹시 두근거렸 다. 리디아 매케이브는 손을 내밀면서 상냥한 웃음을 띄우고 다가왔다. 「캐롤라인, 반갑군!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정말 섭섭하지. 백화점에서 바보처럼 굴렀거든. 리스가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존과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 게다가 리스의 말을 들으니, 신부감으로는 최고라던걸」 「감사합니다, 미세스 매케이브」 캐롤라인은 멈추었던 숨을 살그머니 내쉬었다. 「리디아라고 불러요. 이 아이가 보디구먼. 수지가 네 사진이 실린 신문을 내게 보여 주었지. 정말 축하해요」 「감사합니다」보디는 씽긋 웃었다.「그때는 정말 좋은 일만 계속 있었죠. 경기에 서는 메달을 탔고, 어머니가 약혼하셨고,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정말 더 바랄 나위가 없었지. 하지만 이제 그것은 과거의 일 이란다, 보디. 캐롤라 인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뇌깔이면서 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보디의 말 을 귀담아 듣지도 않는 듯했다. 「캐롤라인, 보디, 이분이 아버지야」 「우리 가족을 잘 부탁해」존 매케이브가 앞으로 나오면서 캐롤라인의 뺨에 키스 했다.「좀 늦었지만 진심으로 환영한다, 캐롤라인, 그리고 보디」 보디는 존이 내민 손을 쥐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방으로 안내하겠어요」리스가 수트케이스를 들고 앞장섰다. 「어머니가 맛있는 것을 만들었어요. 토스트 치킨을 좋아하시나요?」보디가 수다 를 떨었다. 「아주 좋아하지」리스의 어머니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리스가 방으로 안내해 드리는 동안 저는 저녁식사 준비를 마저 하겠어요」캐롤 라인은 이렇게 말하고 주방으로 갔다. 나이프와 포크를 몇 번이나 고쳐 놓았는지 알 수 없다. 뒤에서 인기척이 있어 돌아다보니 리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아름답게 꾸며진 테이 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는데. 저녁식사는 밖에서 할까 생각했었어」 「수고라뇨, 요리 만들기는 제가 좋아하는 일이고, 아버님과 어머님께서도 여행으 로 피곤하실 테니까 집에서 식사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았어요」 「매우 가정적이군, 미세스 매케이브. 좋은 인상을 주겠는걸」 「저는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캐롤라인은 화를 내 면서 말했다. 「 하긴 그럴 필요도 없겠지.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당신에 대해서 옛날의 원한 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당신도 보아서 알았을 테니까」 「법정에서는 내게 책임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 겠군요, 리스?」캐롤라인은 피곤한 듯 말했다. 「분명히 알고 있지」리스는 이렇게 말하고 캐롤라인의 팔을 잡았다. 이때 문 밖에서 이쪽으로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리스는 여전히 싸느란 표정으로 캐롤라인을 끌어당겨 키스를 했다. 「이런 방해한 모양인데」리디아 매케이브가 웃으면서 들어왔다. 「키스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이 입술에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거든요」 리스가 맞장구를 쳤다. 캐롤라인은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돌렸다.「어서 앉으시죠. 리스, 와인을 좀 따 주세요」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주방으로 도망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리스는 어쩌 면 저렇게 냉혹한 위선자일 수 있을까? 「내가 좀 거들어 줄까, 캐롤라인?」리스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캐롤라인은 얼른 냉정을 회복하고 노부인 쪽을 돌아보았다.「준비는 다 끝났지만, 그럼 요리를 좀 날라주세요. 손목은 이제 괜찮으세요?」 「응, 그건 그렇고, 캐롤라인」리디아는 캐롤라인의 팔을 다정하게 잡았다.「보디 앞에서 옛날 이야기는 하지 말아달라는 네 부탁은 리스를 통해 들었어. 우린 네 부탁을 존중하마. 그 말을 네게 해주고 싶었어. 네가 누구라는 것을 알았을 때 충 격을 받지 않았다면 거 짓말이지만, 과거는 과거야」그녀의 얼굴에 한순간 고뇌의 빛이 스쳤다.「그때만 해도 우린 완전히 절망에 빠지고 말았지만, 역시 세월이 우 리의 상처를 아물게 해주었지. 아무튼 이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자. 나는 다만 리스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은 것을 존이나 내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 을 네게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왜냐면 그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거든」 「감사합니다, 미세스..... 리디아. 저도 리스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 사람을 행복하 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싶어요」 「너라면 틀림없이 내 아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야」리디아는 눈을 깜박 였다.「그럼 요리를 나를까? 다른 식구들이 기다릴 테니까」 「크리스 마스는 어떻게 하겠니?」멜버른으로 떠나기 전날 리디아가 물었다.「해 마다 가족들이 모두 집에 모이는 것이 관례거든. 너희들도 올 수 있겠니, 리스?」 크리스마스? 캐롤라인은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예년 같으면 이미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끝냈을 텐데. 「그렇군요. 이제 얼마 안 있어 크리스마스예요. 결혼식 때문에 미처 생각지 못했 어요. 아직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도 하지 못했는걸요, 어머니」보디가 말했다. 「크리스마스에 대해선 아직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했어요」리스가 입을 열었다. 「게다가 피지에서의 문제 때문에 예정이 완전히 뒤바뀌는 바람에.....」 「크리스마스를 지내고 신혼여행을 떠나기로 했잖니?」 그의 어머니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스케줄이 꽉 차 있어 카리브 해로 가기로한 것은 좀 미룰까 해 요」 「저런, 안됐구나」 「피지의 일은 데이브에게 맡기고 예정대로 떠나는 것이 어떻겠니? 일의 노예가 되어선 안돼. 더군다나 옆에 이렇게 귀여운 신부가 있는데」아버지가 한마디 거 들었다. 「보디의 시합도 있고.....」 「1월초에 퀸즐랜드 스테이트 오픈과 연령별 선수권대회가 있지만, 그 뒤로는 2 월말까지 시합이 없어요. 그러니까 마음놓고 여행을 다녀오세요」보디가 말했다. 「그래라, 리스」존 매케이브가 옆에서 거들며 말했다. 「네 어머니와 나 는 황금해안의 별장으로 갈 작정인데, 보디가 함께 가도 돼. 수 지도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로 했지. 일에 관한 것은 팀에게 맡겨 두렴」 「생각해 보겠어요」리스가 글라스의 술을 한꺼번에 들이켰다. 캐롤라인은 그가 안쓰러워졌다. 리스는 나와 단둘이 휴가를 보낼 생각이 없는데 도, 억지로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에는 멜버른에 올 수 있겠지?」 「물론이죠. 하지만 그 전날까지도 바쁠 테니까, 가족 전원이 모이는 셈이구나. 그야말로 완벽한 크리스마스가 되겠다」 완벽 - 캐롤라인은 씁쓸한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었으나 그런 자신의 마음을 곧 뉘우쳤다. 어머니라면 가족이 모두 모이는 것을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 와 리스의 부화는 그의 어머니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사실 그의 부모님은 내 게 더할 나위 없이 잘해 주고 있다. 설혹 그 반대라 해도 불평할 입장이 아니잖 은가. 그보다도 그의 부모님이 돌아간 뒤의 일이 걱정이었다. 그의 부모님이 함께 있 는 동안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나마 리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감정을 가질 수 있 었다. 그러나 단둘이 남게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날 밤 이후로 같은 침대에 자고는 있지만, 리스는 그녀의 몸에 손도 대지 않으려고 했다. 남편 곁에서 고독감에 시달리면서 잠 못 이루는 며칠 밤을 지내는 동안에 캐롤 라인의 눈 언저리에는 검은 그늘이 생겼다. 「우리가 너를 피곤하게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캐롤라인이 커피를 끓이기 위해 주방에 서 있을 때 리디아가 옆에 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와주셔서 얼마나 기쁜데요. 좀더 오래 계셨더라면 좋았을 텐 데」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수지의 맏딸 생일 파티에 참석하기로 약속했거든. 신 혼여행을 꼭 떠나도록 리스를 설득해 봐. 단둘이서 몇 주일 동안을 함께 지내는 것 자체가 대단한 효과를 가져 올 거야」 이튿날 캐롤라인이 리스의 부모님을 공항까지 전송하기 위해 집을 나서려고 할 때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필요한 서류를 집에 두고 왔으니, 공항에서 돌아오 는 길에 가져다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크루거 사의 주차장에 들어서자 아직도 이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 이 들었다 현재 자신이 걸치고 있는 값비싼 옷과 더없이 성능이 훌륭한 BMW를 제외한다면. 캐롤라인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흘끗 쳐다보았다. 흰 마직 수트의 스커트는 넓적다리의 중앙까지 터져 있어 스타킹을 신은 날씬하고 잘 생긴 다리가 보일락말락하였다. 반소매의 테일러 재킷은 은은한 푸른색 블라 우스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패션 잡지에서 빠져 나온 듯했다. 미용실에서 커트한 금발은 어깨에서 부드럽게 물결치고, 화장도 나무랄 데 없었다. 캐롤라인 은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여자>라는 잡지의 제목이 생각나서 씁쓸한 심정으로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렇다, 나는 모든 것 을 갖고 있다. 다만 한가지 진짜로 갖 고 싶은 것 - 리스의 사랑 -을 제외하고는. 사무실 문을 노크하고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인생은 장밋빛이라는 것을 매기에게 보여 주기 위해. 그러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매기의 방과 이어져 있는 리스의 집무실을 노크했으나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 다. 캐롤라인은 살그머니 문을 열고 남편의 방으로 들어갔다. 전과 마찬가지로 깨 끗하게 정돈되어 있어 접근하기 어려운 느낌을 주었다. 책상 위에 서류철을 놓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면서 매기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문이 열리면서 서류 뭉치를 한아름 안은 트레버가 들어왔다. 「캐롤라인! 오랜만이군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별일 없겠죠, 트레버?」 「잘 있어요. 사장에게 이걸 전하고 얘기 좀 합시다」 「리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래요?」 트레버는 가지고 온 서류를 매기의 책상 위에 놓고 커피포트를 가리 켰다. 「커피 마실 시간 있어요?」 「네, 내가 준비하겠어요」 「매기는 오늘 조퇴했죠」 트레버는 커피 잔을 받으면서 말했다. 「신혼생활이 깨가 쏟아지는 모양이군요. 전보다도 더 아름다운 걸 보니」 「고마워요」 캐롤라인은 트레버의 시선을 피한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브리즈번에 살 건가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트레버가 물었다. 「그 문제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요. 그 동안 줄곧 바빴거든요」 캐롤라인이 책 상에 기대는 바람에 트레버가 놓았던 서류 몇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엎드렸다. 「미안해요, 트레버」 「괜찮아요」 트레버는 캐롤라인에게서 서류를 받아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두 사 람은 서로 가까이 서 있었다. 트레버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내밀었다. 「캐롤라 인...」 트레버의 다음 말은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때 문이 열리면서 리스가 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트레버를 싸늘한 눈으로 번갈아 바라보며 안으로 들 어왔다. 「늦어서 미안해, 달링」 리스는 캐롤라인의 어깨에 손을 돌리며 그녀의 볼에 키 스를 했다.「오래 기다렸어?」 「아뇨, 별로」 그의 손이 그녀의 팔을 타고 내려와 손목을 힘주어 쥐는 바람에 캐롤라인은 움찔했다. 그녀는 리스에게서 떨어지려고 했으나, 그는 더욱 손에 힘 을 주었다. 「자네에게 부탁한 서류는, 트레버?」 「여기 있습니다」 「고맙네」 리스는 거의 무례하다고 할만큼 오만한 태도로 트레버에게 이제 나가 보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트레버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황망히 물러가자 캐롤라인은 치밀어 오르는 노여움을 참으면서 말했다. 「저도 돌아가겠어요. 물건을 살 일도 있고 해서」 그러나 리스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당신이 단 남자에게 추파를 던 지는 것을 내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추파라구요? 별 이상한 말씀을 다 하는군요. 우린 당신이 오기 전에 5분쯤 얘 기를 나눴을 뿐이에요」 「그래? 꽤 친밀하게 보이던데」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손을 놓아주세요. 이젠 돌아가겠어요」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을 보내고 싶지 않은걸」 리스는 억센 힘으로 캐롤라인을 끌어 당겨 입술을 맞추었다. 상냥함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키스였다. 「놓아주세요, 리스. 당신이 제 몸을 건드리는 게 싫어요!」 「그럴까? 당신의 몸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이러지 말아요. 놓아주세요! 완력을 썼다는 불명예가 싫으면 이걸 놓으세요!」 「완력이라고, 캐롤라인?」 리스는 쉰 목소리로 웃으면서 천천히 손을 놓았다. 「착각하면 곤란해. 나는 당신에게 완력을 쓸 필요가 없어. 우린 서로 그걸 잘 알 고 있지」 「집으로 돌아가서 짐을 꾸리겠어요. 이런 무의미한 연극은 이제 지긋지긋해요」 리스는 그녀의 팔을 잡아 돌려세웠다. 「당신은 내 아내야, 캐롤라인. 내가 생각을 바꿀 때까지 당신은 내 아내로 있어 야해」 리스는 그녀의 팔을 잡아 돌려세웠다. 이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잠시 얼어붙은 듯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으나, 마침내 리스는 그녀를 놓아주면서 「들어와요」라고 짧게 대답했다. 들어온 사람은 캐롤라인도 알고 있는 하청업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냉정을 회복하게 부드럽게 인사를 한 뒤 얼른 방에서 나왔다. 집으 로 돌아와 곧바로 자기 방으로 돌아간 캐롤라인은 새 수트케이스를 침대 위 에 내던졌다. 그러나 노여움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맥이 탁 풀렸다. 그녀는 침대에 털썩 걸터앉아 쏟아지는 눈물을 닦았다. 아, 리스, 왜 이처럼 종말이 빨리 왔나 요? 차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캐롤라인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고 문으 로 향했다. 보디에게는 이 집을 나가게 된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여기 있어, 보디」 이렇게 말하면서 문을 열었을 때 홀로 가로질러 이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은 보디가 아니었다. 리스는 침대 위에 있는 수트케이스를 보자 난폭하게 뚜껑을 닫아 옷장에 밀어 넣었다. 「당신은 여기 있어야 해. 방문을 잠가서라도 그렇게 하도록 하겠어!」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럴 수 없다고? 그럴 수 있는지 없는지 한번 해볼까?」 「리스, 제발 이러지 않기로 해요」 캐롤라인은 어깨를 축늘어뜨렸다. 「우리, 어 떻게 된 것 아닌가요?」 「그걸 네게 묻는 거야? 나는 당신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알았어. 그 뿐이야」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진 않았어요. 과거를 밝히지 안았다는 것은 미안하지만, 저는 당신을 잃는 것이 두려웠어요. 모든 것이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에요」 「보디의 아버지를 사랑한 것 이상으로?」 「그래요, 그 사람을 사랑한 것 이상으로... 」 리스의 노여움은 더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보디의 출생증명서는 어디 있지?」 「왜... 왜 그런 것이 필요하죠?」 「당신이 계속 사랑을 입에 담으니까 그러는 거야. 하지만 내가 당신과 결혼한 것은 사랑 때문이 아냐. 일종의 복수심 때문이야!」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는데, 보디가 정말 내 조카야? 그게 사실이야, 캐롤라인? 대답해봐! 크리스가 보디의 아버지냔 말야」 캐롤라인의 가슴속에 싸늘한 노여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 노여움이 그녀에게 리 스의 팔을 뿌리칠 힘을 주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알았어요, 위대한 리스 매케이브는 동생이 물려 준 것은 받을 수 없으시단 말씀이군요. 그렇죠?」 「캐롤라인!」 「당신은 이기적이고 오만하고...」 리스는 다시 그녀의 팔을 잡았다. 「내게는 알 권리가 있어. 그렇잖아?」 「권리? 무슨 권리요? 당신은 영원히 알 수 없어요, 리스. 출생증명서의 부친란은 공란으로 되어 있어요. 사인을 하러 해도 보디의 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었으니까 요」 「어머니, 어떻게 된 거예요? 왜 두 분이 소리치고 있는 거예요?」 보디가 어느 새 입구에 와 서 있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듯 다가왔으나 리스의 손이 어머니의 팔을 난폭하게 잡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갑자기 어른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 다. 「어머니를 놓아주세요」 보디는 조용히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말없이 응시하다가 잠시 후 리스가 캐롤라인의 손을 놓았다. 「미안하구나, 보디. 네가 돌아올 시간이라는 것을 깜박 잊었다」 캐롤라인은 이 렇게 말하며 아들의 어깨를 안았으나 그의 몸은 긴장돼 있었다. 「내 문제로 말다툼하셨죠?」 「그렇지 않아, 보디. 정말이야. 이건 너와 관계없는 일이야」 「어머니는 리스 씨를 전부터 알고 계셨나요? 리스 씨가 크루거 사에 오기 전부 터 말예요」 캐롤라인은 침을 삼켰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 것인가? 「어머니와 나는 14년 전, 그러니까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 리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보디는 그 대답을 잠시 음미하는 듯하다가 마침내 리스를 똑바로 바라보고 물었 다. 「당신이 제 아버진가요?」 ┌───────────────────────────────────┐ │ ▶ 번 호 : 0/886 ▶ 등록자 : TITANIA2 │ │ ▶ 등록일 : 2000년 09월 14일 16:41 │ │ ▶ 제 목 : [연경/煙景] 젊음의 보상...21 <結> │ └───────────────────────────────────┘ 캐롤라인은 숨을 죽이고, 리스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가셨다. 「리스 씨가 제 아버진가요?」 「아냐, 그렇지 않아, 보디. 전에 말한 대로 네 아버지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돌 아가셨어」 「그럼 왜...?」 「내가 리스 씨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어. 네가 태어나기 전의 일에 관한 것이 지만. 그리고...」 「그 일이 왜 중요하죠?」 보디가 눈을 빛내며 리스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전에 무엇을 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잖아요? 어머니는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아마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지 않았던 것 같 아요.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죠. 우리 어머니는 이 세상 에서 최고의 어머니예요. 저는 어머니를 사랑해요. 어머니를 나쁘다고는 말하는 사람은 가만 놔두지 않겠어요. 설령 리스 씨라도 말예요. 그러니까 어머니를 사랑 하지 않으신다면 여기서 나가 주세요. 우린 당신 없이도 잘 살 수 있으니까요」 보디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몸을 홱 돌렸다. 캐롤라인은 그의 뒤를 쫓으려고 했으나 리스가 그녀를 말렸다. 「그대로 둬요, 캐롤라인」 그러나 캐롤라인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보디의 말이 맞아요, 리스. 우린 당신 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오래 전에 법정에서도 제 무죄를 주장했지만, 당신에게까 지 다시 그것을 주장한다는 것은 이제 피곤한 일이에요. 제발 나가 주세요」 캐 롤라인은 이렇게 말하 고 보디의 방으로 향했다. 뒤에서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 렸다. 이튿날 아침 얕은 잠에서 깨어난 캐롤라인은 텅 빈 침대에서 시선을 거두고 보 디를 깨우러 갔다. 어제 리스가 집을 나간 뒤 그녀는 오랜 시간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모든 사정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설명해 주어다. 「오늘은 훈련을 쉬겠어요」 보디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린, 오늘 이 집에서 나가나요?」 「글세, 아파트는 지금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었으니까 계약기간이 끝나는 6개월 동안 우리가 살 만한 곳을 찾아야겠지 」 「리스 씨는 돌아올까요?」 「모르겠어, 보디」 「이렇게 돼서 안됐군요. 리스 씨가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 두 사람이 홍차를 마시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리스가 들어왔다. 캐롤라인은 테이블을 잡고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했다. 보디가 옆에 와 섰다. 리스의 얼굴은 초췌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했고, 수염도 깎지 않은 채였 다. 두 사람이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 고뇌의 빛이 스쳤다. 「오늘 아침엔 훈련받으러 가지 않니, 보디?」 「네... 오늘은 쉴까 해요」 「내가 데려다 줄까? 너하고 할 얘기가 있어. 그리고 네 어머니하고도 할말이 많 아. 물로 s조용하게 말할 거야. 약속하지」 캐롤라인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보디는 방에서 나갔다. 「그럼 가방을 가지고 오겠어요」 캐롤라인의 가슴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두근거렸다.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만져 보고 싶었다. 초췌한 볼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홍차 드시겠어요?」 「고마워」 홍차를 다 마셨을 때 보디가 돌아왔다. 리스와 보디가 함께 나가자 캐롤라인은 서둘러 샤워를 하고 초록빛 스커트와 푸 른 사과빛의 블라우스를 입었다. 떨리는 손으로 창백한 얼굴에 화장을 하고 머리 를 빗고 있을 때 리스가 돌아왔다. 그는 입구에 선 채 피곤한 듯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당신하고 이야기를 나누 고 싶은데, 그전에 샤워를 좀 해야겠어. 괜찮겠지?」 욕실에서 돌아온 리스는 진 바지에 타월지로 된 셔츠를 입었고, 머리는 물에 젖 은 채였다. 애프터로션과 비누 냄새가 섞인 냄새가 풍겼다. 캐롤라인은 그의 가슴 에 몸을 던지고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녀는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도 그 녀가 겪고 있는 고통의 빛이 어려 있었다. 「용서해 줘」 리스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질투에 눈이 어두워 정상적 인 사고를 하지 못했어. 머리가 좀 이상해졌던 것 같아. 당신과 크리스와의 관계 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어. 실은 당신이 과거를 밝히지 않았다는 게 문제는 아 니었어. 하지만 보디의 아버지가 크리스 - 바로 내 동생이었다는 사실은 참을 수 가 없었어. 어제 집을 나가 무작정 차를 몰면서도 당신과 크리스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더군. 그런데 그때 나는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의 과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보 디의 말이 생각났던 거야. 당신은 내 과거를 묻지 않았어. 나라고 해서 성인이라 고는 말할 수 없는데 말야. 나는 제한속도를 넘는 속력으로 돌아왔지. 어리석은 질투 때문에 목숨보다 귀중한 당신을 잃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거야. 정말 당신을 잃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캐롤라인? 」 캐롤라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에게 덥썩 안겼다. 「저를 잃을 수는 없어요. 억 지로 떼어 놓으려고 한다 해도!」 「아, 캐롤라인! 당신이 없는 동안은 마치 심장이 잘려 나간 것 같았어!」 두 사 람은 힘껏 껴안고 미친 듯이 상대의 입술을 갈구했다. 잠시 후 리스는 캐롤라인 을 소파로 데리고 가 무릎 위에 앉혔다. 「당신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것이 아 직도 믿어지지 않아」 캐롤라인은 그의 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제가 캐롤라인 버튼이라는 사실 을 숨긴 일 용서하세요. 처음에는 당신이 크루거 사에 오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나중에 당신을 사랑하면서부터는 당신을 잃는 것이 두려웠어요 」 「크리스의 죽음은 우리 가족에게는 대단한 타격이었지. 그때 당신에게 심하게 군 것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화가 났기 때문이었어. 나 자신이 죄의식에 시달렸 었지」 「왜죠? 당신에겐 아무런 책임도 없는데요」 「크리스에게 오토바이를 사주라고 부모님을 설득한 것은 바로 나였지. 나도 동 생과 같은 시기를 거쳤기 때문에 동생의 기분을 잘 알고 있었고, 사춘기의 그런 과정은 직접 체험하지 않곤 졸업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래서 반대하는 부 모님을 설득해서 교습소의 수속을 밟아 주었던 거야」 「그런 결과는 아무도 예상 못했던 일이에요」 「그렇겠지. 하지만 크리스는 막내였고, 어머니가 각별히 귀여워하셨어. 그래서 항상 죄의식이 따라다녔지. 법정 심리 때 내가 냉정을 잃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었어. 그렇게 할 일이 아니었는데 말야」 「저 역시 줄곧 죄악감에 시달려 왔어요.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리지 못했다는 죄 책감 때문이었죠. 하지만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에요. 제발 그것 만은 믿어 주세요. 제게는 테리만이... 테리만이 있었어요」 「그때 아버지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어. 아버지는 당신에게는 아무런 죄 가 없고, 다만 우연히 상황에 휩쓸렸을 뿐이라고 말씀하셨지. 당신을 <길 잃은 아이>라고 표현하시더군. 또 크리스의 수명이 그것뿐이라고, 운명이라고도 말씀 하셨지. 전화로 아버지에게 당신에 관한 것을 알았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내가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으로 믿고 계셨어. 너무나 충격을 받았기 때 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할 여유조차 없었지. 까닭 모를 분노와 질투에 사로잡혀 나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어」 리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 다. 「나를 용서해 주겠어, 캐롤라인? 과거는 돌 리고, 지금부터 새 출발할 수 있 을까?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 「저도 마찬가지예요. 사랑해요, 리스」 두 사람은 입술을 포갰다. 처음에는 부드 럽게, 점차 정열적으로. 「당신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알고 있어?」 리스가 신음하듯 말했다. 「찬물로 샤워를 하는 횟수가 많아지는 영향 말인가요?」 「찬물 샤워도 소용없었어. 부모님이 오시기 전날 밤도 그랬지. 당신의 몸을 건드 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군. 당신을 내 품에 안지 않고는 견 딜 수 없었어.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랬지. 당신이 내 앞에 스러졌을 때부 터」 「그때는 충격으로 서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정말 내 앞에서 쓰러지고 말았지. 그렇지 않아?」 캐롤라인은 웃었다. 「그래요. 그럼 당신은요? 처음부터 내게 끌렸다는 말, 정말 인가요?」 「마치 배에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지. 그런 일은 처음 겪는 일이었어. 그런데 당신은 내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지. 오히려 그 반대로 보였어. 더군다나 트레버는 당신 주위를 맴돌았고. 그 녀석을 혼내 주려고 생각했던 것이 한두 번 이 아냐. 질투에 의한 정신장애였다면, 내 죄가 좀 경감될까?」 리스는 그녀의 블 라우스 속으로 손을 넣어 보드라운 그녀의 맨살을 어루만졌다. 「그 동안 내가 어떻게 당신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 견딜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 「저는 당신을 만날 때까지, 저... 사랑의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도 없었어 요. 한데 지금은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요」 「지금도 그렇단 말이지?」 리스는 그녀의 귓불을 가볍게 애무했다. 「그럼 당신 은 또 그런 얼굴이 될 텐데.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런 얼굴?」 캐롤라인은 시치미를 뗐다. 「사랑을 나눈 뒤의 흡족한 여자의 얼굴 말야. 당신이 보디에게는 그런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지」 「리스, 보디가 곧 돌아오겠어요」 캐롤라인이 일어섰다. 「마중 가겠으니 좀 늦더라도 기다리라고 일렀어」 「모든 것이 다시 잘되었다는 것을 보디에게 알려 안심시키고 싶어요. 이젠 사랑 의 행위 뒤에 오는 그 얼굴 표정이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물론 도움이 되지. 그리고 안심한 것은 보디만이 아냐」 리스는 나직한 목소리 로 이렇게 속삭이고는 캐롤라인을 안아 올린 채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 完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