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들의 비밀 1 「자, 토머스 제발... 엄마는 네가 지각하는 게 싫단 말야.」 「지각 안할 거야.」 5살 난 토머스 섬머스가 세면대에 칫솔을 집어던졌다. 아이의 얼굴은 분노로 붉어졌 다. 팔짱을 끼고 입술을 삐죽이 내민 아이는 금방이라도 화를 터뜨리거나 눈물을 흘 릴 태세다. 이른 아침부터 화를 내고 싶진 않았으므로 메건 섬머스는 간신히 화를 억눌 렀 다. 「이를 닦고 나면 머리를 빗겨 줄게. 치약은 새걸 쓰도록 해.」 「엄마! 내 테니스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엄마!」 6살 난 록시의 고함소리가 모자의 대화를 방해하고 나섰다. 메건은 세면대에서 젖어 버린 칫솔을 건져내고 수도꼭지를 잠근 다음 고개를 돌려 딸에게 소리쳤다. 「록시, 현관을 살펴봐. 어젯밤에 거기 놓아둔 것 같구나. 그리고 신문도 함께 가지 고 들어오렴.」 그녀는 재빨리 토머스의 숱많은 금발을 빗겨주고 치약을 짰다. 「자, 어서.」 토머스는 몸을 돌려 욕실을 뛰어나가 버렸다. 「안 갈 거예요. 난 학교가 싫단 말예요!」 그녀는 칫솔을 들고서 달려나갔다. 「빨리 이를 닦아야 해.」 「오늘은 엄마에게 스티커를 주지 않을 거야.」 「토머스, 그건 네가 알아서 할 문제야.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이는 닦아야 해.」 토머스가 머리를 떨구었다. 아이의 통통한 뺨에 눈물이 쏟아졌다. 메건이 아이를 껴 안 아 주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있을 때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메건, 애들을 학교에 데려다 준 후에 우리 집에 좀 들러주겠어요? 오늘 메건의 도 움 이 필요해요.」 글래디스 그로코보스키의 고집스런 음성이 메건을 짜증스럽게 했다. 그래서 집주인이 자 그녀의 시간제 일거리의 감독관이기도 한 그녀에게 조금은 날카로운 어조로 대답 했 다. 「글래디스, 좀 늦게 가면 안될까요? 난 급히 우체국에 가야 할 일도 있고...」 「노마 슐츠가 죽었어. 우선 그녀 대신 일해 줄 새로운 조사원을 채용해야겠어. 오전 8시에 만나지.」 메건은 갑자기 텅 비어버린 허파 속으로 공기가 빨려들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글래디스! 어머나! 무슨 일이에요?」 「나 이 닦았어요.」 어느새 토머스가 달려와서 이를 드러내 보이며 씩 웃었다. 「착하구나.」 그녀는 멍한 상태로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으면서 말했다. 토머스의 옷을 입혀 주면서도 메건의 마음은 온통 노마 슐츠의 죽음으로 가득 차 있 었 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이 생생하게 커져갔다. 그들은 같은 날 텔레서브에서 함께 일했었다. 그 기업은 수백 명의 사람들을 고용해 서 각자 집에서 텔레비전 시청률의 통계를 내게 하고 있다. 메건이 셔츠의 단추를 잠그는 동안 토머스는 엄마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록시가 젖은 신문을 들고 달려 들어왔다. 「엄마! 또 살인사건이 났어요?」 메건은 몸을 휙 돌려서 도시락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최대한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 「이제 너 혼자서도 헤드라인을 읽을 수가 있구나! 정말 기특한 아가씨야.」 「난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더러운 살인마... 이게 무슨 뜻이에요?」 「엄마에게 신문을 주겠니?」 그녀는 록시의 손에서 젖은 신문을 받아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바닥에 올려놓았 다. 「자, 이제 손을 씻으렴. 빨리 가야 해.」 어린 소녀는 한동안 엄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 「아무 것도 아냐. 록시, 어서 가서 머리를 빗으렴.」 아이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의문을 잠시 접어둔 채 욕실로 달려갔다. 「엄마, 캐리를 데리고 와서 함께 놀아도 돼요?」 아이가 시끄러운 물소리 위로 소리쳤다. 메건은 바지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 다음 토머스에게 도시락을 건네주었다. 「십대의 돌연변이 닌자 거북이들이 살인자를 잡아요. 아마 그들이 이곳에 올지도 몰 라요.」 토머스가 엄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메건이 그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록시가 뺨에 치 약 거품을 잔뜩 묻힌 채 달려 들어왔다. 「캐리를 데려와도 돼요?」 「그래, 괜찮아.」 메건은 아이들이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게 다행스러웠다. 그녀는 딸의 뺨에 묻 은 치약거품을 닦아주었다. 「집에 와서 그 애의 엄마에게 전화해 줄게. 자, 이제 5분 안에 학교까지 가야겠어. 」 대서양으로 불고 있는 플로리다의 미풍은 아주 시원하고 활기에 넘쳐 있었다. 아이들 을 뒤따라 걸으면서 메건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다. 하지만 그 맑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메건은 몸을 떨면서 자신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는 건 엄청난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 문 에 묘사된 대로 더러운 살인마 같은 미치광이 때문에 걱정을 할 필요까진 없다. 「빨리 와요, 엄마. 우리가 엄마를 앞서가고 있잖아요?」 메건은 미소를 지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길모퉁이에서 아이들을 따라잡아 끌 어 안았다. 「안녕하세요, 핀치 씨.」 토머스가 길 건너편을 향해 소리질렀다. 「안녕하세요, 핀치 씨. 안녕하세요, 아담스 양.」 록시도 동생을 따라 소리쳤다. 메건은 이웃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폴러드 핀치는 작 은 키에 근육질의 체격, 그리고 빛나는 대머리의 사내다. 그는 룸메이트의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그와 에드나 아담스는 항상 이런 식으로 아침 산책을 즐기곤 한다. 그 들 이 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건은 다시 아이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록시는 항상 재잘대기를 좋아했다. 「엄마, 잊지마. 엄마는 텔레서브에 전화를 하거나 다른 일을 해선 안돼. 엄마는 캐 리 와 나, 그리고 토머스와 함께 놀아줘야 해.」 「록시, 몇 군데 전화를 할 데가 있어. 하지만 시간을 내서 너희들과 함께 놀아 줄게 . 」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노마의 죽음에 가 있었다. 가장 유능한 조사원이 사망했으니 이 제 메건이 해야 할 일은 더 많아질 것이다. 「난 텔레서브가 미워.」 토머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메건은 다시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으려고 애 썼 다. 「토머스, 그런 말을 하면 안돼. 텔레서브의 일거리 덕분에 엄마가 빨간 자전거를 사 줄 수 있었다는 걸 잊으면 안돼.」 초록색 신호등이 켜지자 그들은 모두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텔레서브 만세!」 토머스가 고함을 질러댔다. 「엄마, 우리 쿠키를 만들어도 돼요?」 록시가 물었다. 「물론이지...」 「쿠키 말고 아이스캔디는 어때?」 토머스가 끼여들었다. 「아무튼 재미있는 걸 만들자꾸나. 엄마에게 키스해 주렴.」 록시가 활짝 웃으며 키스를 한 다음 달려갔다. 토머스는 좀더 오랫동안 키스했다. 「아가야, 시간이 있으면 나에게 그림을 그려 줄래? 냉장고 위에 있는 건 좀 오래된 것 같아.」 「엄마, 오늘은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그럼 나중에 뭐든 그려 줘.」 「닌자 거북이?」 메건은 피자를 먹는 그 조그만 파충류를 싫어했지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어떤 걸로 그려 줄래?」 「미켈란젤로 말고 도나텔로를 그릴래요. 그가 가장 크거든요.」 「멋지겠구나. 나도 그가 좋단다.」 그녀는 아들에게 다시 키스했다. 「잘가, 토머스.」 「안녕, 엄마.」 메건은 뒤돌아 서서 걷기 시작했다. 토머스의 시선이 계속 자기에게 머물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모퉁이에 와서야 뒤를 돌 아보았다. 토머스는 벌써 학교의 현관을 들어서고 있는 중이다. 메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학기를 생각했다. 이제 통신에 관한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선 10주 동안의 수업과 두 번의 최종시험이 남아 있다. 집으로 향하는 모퉁이를 돌아서면서 메건은 중얼거렸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야. 곧 모든 게 끝날 텐데...」 그 동안 그녀는 수없이 그 말들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이들은 사랑하는 엄 마 를 갖고 있다. 그 애들은 무관심한 아빠를 두긴 했지만 엄마의 사랑으로 성장해 갈 것 이다. 아빠는 지난 번 방문 약속도 어기고 말았다. 오직 한 달에 400달러 정도의 돈 으 로써 부모의 애정을 표현하려 할뿐이다. 그들에겐 아주 어려운 시기였지만 결국 그녀는 그 시절을 견뎌냈다. 그녀는 기본적인 음식과 피난처 외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법을 스스로 익혔다. 지난 5년 동안 그녀 는 한 번도 새옷을 사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절실했던 건 좋은 상표의 화장품을 사서 쓰는 일이었다. 그녀는 달려서 계단을 올라갔다. 아래층의 여인이 텔레서브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지 도 모른다. 집안으로 들어서서 아이들의 방으로 가보았다. 그곳은 엉망으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메건은 침대 위의 덮개를 들어내서 그걸 똘똘 뭉쳐 놓았다. 그리고 오래된 난로 위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8시 6분이다. 학위 지도교수인 대런 박사와의 약속은 10시였다. 그녀는 커피 한 잔을 들고 간이식 탁 뒤로 다가가서 토머스의 침대 밑에 떨어져 있는 신문을 집어들었다. 더러운 살인마 사 건에 대해 강한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비록 록시가 미리 언급하긴 했지만 설마 그 사건이 집 가까이에서 일어나리라곤 상상 도 못했었다. 그 살인사건은 지난 5년 동안 동부 해안 마을에서 발생했는데 벌써 5번 이나 있었다. 「이럴 리가 없어.」 메건은 큰 소리로 말했다. <전에 미용실을 경영했던 59살의 노마 슐츠가 어젯밤 팜 코트 319에서 목이 졸린 채 로 살해되었다.> 기사의 첫줄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메건은 가슴이 뒤틀려오기 시작했다. 노마 슐 츠는 글래디스가 말했던 대로 죽은 게 아니라 살해되었던 것이다. 공포에 사로잡힌 채 메건은 나머지 기사를 모두 읽었다. 노마는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그녀를 만나러 온 여동생에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강제로 침입한 흔적은 없었으며 경찰은 살인마의 소행으로 보이는 증거가 있다고 말 했 을 뿐 다른 정보는 밝히지 않았다. 그 현장은 지금 메건이 앉아 있는 곳으로부터 불 과 5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메건은 겁에 질린 채 신문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금속성의 전화벨이 날카롭게 울려 댔 다. 그녀는 급히 달려가서 한밤중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전화벨 소리를 멈추게 했다. 「여보세요.」 「메건? 집에 들러 달라고 했잖아? 지금 당장 와줘.」 「왜...」 하지만 전화는 끊어지고 말았다. 다시 전화를 걸어서 10시에 약속이 있다고 말해 봐 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글래디스는 전화를 오직 자기가 필요한 말만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문명의 이기로 생 각 하고 있으니까. 메건은 아침식사 접시를 물 속에 담가 놓고 내려가서 울퉁불퉁한 잔 디 밭을 가로질러 갔다. 그녀는 거칠게 글래디스의 뒷문을 두드렸다. 「메건, 문이 열렸어.」 메건은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서 글래디스의 집안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커피와 팬 이 탄 냄새가 풍겨왔다. 언제나처럼 글래디스는 주방의 한구석을 몽땅 차지하고 있는 종려나무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치 밑엔 우편물이 쌓여 있다. 「노마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있어?」 글래디스가 물었다. 메건은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의자는 눈 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신문을 쌓아둔 긴 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알고 있어요. 정말 끔찍했어요.」 글래디스가 물기 젖은 파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필터 없는 카멜을 한동안 빨아들인 다음 커피 잔 속에 재를 떨었다.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그녀의 일거리를 맡길 조사원이 몇 명 더 있으니까. 메건이 일레인 존스를 해고했지?」 메건은 다섯까지 세고서야 대답했다. 「네, 지난주에 말씀 드렸잖아요?」 글래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반응은 어땠어?」 「기분이 나빠하는 것 같았어요.」 대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메건은 그걸 따져 볼 여유가 없었다. 「당신에게 보상금을 지불해 달라고 요청하겠다고 하더군요.」 「마음대로 하라지.」 글래디스는 앞에 놓인 우편물 더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이럴 때 노마가 죽을 게 뭐야.」 메건은 글래디스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의 태도엔 이미 익숙해져 있지만 남의 죽음을 그처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받아들이는 인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여기 2명의 지원서를 읽어 봐.」 글래디스가 명령했다. 「내가 면담을 주선할 테니까 메건이 둘 중에 한 사람을 고용하도록 해. 노마가 더이 상 일을 못하게 됐으니까 어쩌면 두 사람 다 채용해야 할지도 모르지.」 「글래디스, 노마는 더이상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녀가 메건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우린 남자를 채용해야 할 것 같아. 지난 봄에 채용했던 남자는 응답비율 이 아주 좋았어. 사람들은 남자의 전화를 받으면 감히 거절을 못하는 것 같아.」 메건은 손 안에 있는 봉투들을 바라보며 고함을 질러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눌렀다 . 첫 번째 지원서를 살펴봤다. 강하고 깨끗한 글씨체가 그녀의 시선을 끈다. 잭 갤래거 라는 남자는 <즉시 고용될 수 있는 일자리를 원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몇 가지 필 요한 증명서를 동봉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메건은 글래디스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적임자인 것 같군요. 언제 이걸 받으셨어요?」 「지난주에...」 「새로 광고를 내셨나요?」 「아니, 갑자기 그게 날아들어 온 거야. 아마 그 사람은 과거에 냈던 광고에서 주소 를 알아냈나 봐.」 「음...」 메건은 어깨죽지에 심한 한기 같은 걸 느꼈다. 「이 사람에게 전화를 해보셨어요?」 「응. 메건과 오늘 1시 30분에 만날 수 있도록 약속을 해뒀어. 멜버른 대학교 건너편 에 있는 맥도널드에서 만나면 돼. 메건에겐 무척 편리한 장소지?」 쥐가 고양이를 생각하시는군. 하지만 그 말을 입밖에 내진 않았다. 자신이 8주 동안 의 전화조사로 인해 벌어들이는 몇 백 달러의 돈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요. 그런데...」 그녀는 다음 편지를 살펴보았다. 「미셀 잭슨은 어때요? 이 여자와도 약속을 정하셨나요?」 「응. 그녀의 이력서는 지난 가을에 들어온 거야. 그녀는 아직도 이 일에 관심이 있 다 고 하더군. 그 여자는 2시에 만나면 돼. 하지만 난 남자를 고용했으면 좋겠어.」 글래디스는 옆에 있던 콜라잔을 들어 꿀꺽꿀꺽 마시고는 손등으로 입술을 쓱 문질렀 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는 5개나 되는 반지를 끼고 있다. 거대한 다이아몬드가 희미한 불빛 속에서 광채를 품어냈다. 그녀는 다시 콜라잔을 들으면서 메건이 아직도 거기 있는 걸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젠 가도 좋아.」 「괜찮으세요?」 하지만 메건은 곧 자신의 질문을 후회하고 말았다. 「메건, 난 아들을 잃은 후엔 한 번도 괜찮은 적이 없었어. 하지만 내 건강에 대해서 묻는 거라면 좋지 않다고 대답하겠어.」 글래디스가 메건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메건, 핏줄도 아닌 사람들 때문에 걱정할 건 없어.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은 누구 도 믿을 수가 없는 거야. 꼭 명심해 둬야 할 사실이지.」 메건은 당혹감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글래디스는 가끔 오래 전에 외아들을 잃 었던 비극에 대해 언급하고는 했지만 결코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다. 오늘 그녀는 평 상시보다 감상적이다. 메건은 얼른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와 뜨거운 여름 햇살 속 으 로 들어섰다. 집에 들어와서 그녀는 아침 설거지를 끝낸 다음 샤워와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 그리고 10분 동안 아이스캔디를 만들어서 냉동실에 넣었다. 흑설탕을 사야겠다는 생 각 을 하면서 그녀는 도보로 15분쯤 걸리는 멜버른 대학교를 향해 출발했다. 오늘은 지도교수로부터 견습생의 일자리를 주선 받게 될 것이다. 사실 오늘의 약속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계획대로만 되어간다면 그 견습생의 자격은 밀러 광고회사에 입 사할 수 있는 입장권이 되어 줄 것이다. 그 회사는 큰 일거리를 맡아서 9월에 2명의 직원을 더 채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메건은 바로 그 자리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녀는 인문과학 건물로 향하는 계단을 급히 올라갔다. 그녀의 얼굴엔 커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글래디스와 텔레서브, 그리고 가난을 몇 달만 더 견뎌내면 되는 거야! 상관을 향한 분노가 그 생각과 함께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글래디스, 당신의 말이 옳은 건지도 몰라요. 난 지금 내 가족에 관해서 걱정을 해야 돼요. 당신이 아니라. 그 남자의 손이 <멜버른 프레스>의 첫장 기사를 싹뚝 오려 냈다. 그는 무거운 금속 가 위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다음 게시판으로 다가가서 핀으로 그 기사를 그곳에 붙였 다. 그의 짙은 눈동자가 신문을 훑었다. 그는 지난 4번의 죽음의 신에 관한 사건을 상세히 알고 있다. 다섯 번째 사건은 드러 난 정보를 사용해서 교묘하게 조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 된 나라니까. 하지만 수사의 필요상 범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떤 확신이 있기 전까지 비밀에 부 쳐 둬야 할 필요가 있다. 플로리다 룸을 가로질러서 그 사내는 책장 옆에 무릎을 꿇 고 앉아 6권의 검은색 가죽 노트 중에서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 몇 가지 사실을 적어넣고는 다시 제자리에 놓은 다음 두 번째 바인더를 꺼냈 다. 그 바인더의 중간쯤을 펼치자 에바 메리트가 보낸 편지가 반으로 단정하게 접혀 있었다. 그는 그걸 꺼내서 읽은 다음 다시 접어서 <멜버른 팜 베이 텔레서브 사건>이 라고 적힌 페이지 안에 집어넣었다. 그곳에는 특정한 채널을 보는 가구수의 증감과 더불어 지난 가을 방송망의 시청률이 표기되어 있었다. WABR 방송국 옆엔 +3.4라고 적혀 있고, WMMB방송국 옆엔 -2.9라고 적혀 있다. 그 사내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얼굴에 굴욕감과 분노의 주름살이 졌다. 지난 2년 동안 그는 WMMB의 뉴스 연출자로 일했다. 그 동안 그는 자신의 모든 걸 그 일에만 바 쳤다. 그 뼈저린 시간들은 충분히 보상을 받을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프로그램이 시청률에서 제 1위를 기록했던 것이다. 그는 사장과 광고주에게 영웅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지난 가을 텔레서브의 조사결과가 나왔을 때 모든 사람들이 당혹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알아서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자존심은 고통과 굴욕으로 뒤 엉켰지만 그는 그것들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젠 잘못된 것을 찾아내야 할 시 기다. 그리고 죄값에 대한 벌도 받아야 한다. 그 사내는 서서히 두 번째 노트를 밀어 넣었다. 그 손에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가 있다. 책장 위에 있던 작은 쌍등이 조상이 흔들거렸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두 여자 조상의 목을 움켜쥐고 홀의 벽장으로 걸 어갔다. 그걸 맨 위의 선반 위에 올려놓고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리고 그는 오늘 약속이 있음을 상기했다. 운이 닿으면 어떤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 을지도 모른다. 텔레서브 조사에서 그 사건을 조작하고 있는 사람과 누가 끈이 닿아 있는지를... 다시 현관으로 나왔을 때 그의 시선은 죽음의 신에 관한 기사에 쏠려 있었다. 모든 진 실이 밝혀지면 그가 근무하던 방송국에선 다시 나와서 일을 해달라고 애걸할 테고 그 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신에 관한 이야기를 어느 누구도 상상하 지 못할 각도로 다룸으로써 당장 시청률 1위에 올라서게 될 것이다. 메건은 너무 당황해서 울음을 터뜨렸다. 거의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다. 어떤 일 이 든 조심스럽게 계획을 세워 왔다고 자부해 온 그녀로서는 현재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 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의 인생을 구출할 계획을 다시 세워야만 한다. 「메건, 괜찮아?」 대런 조지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 「이런 일로 걱정할 건 없어. 밀러 광고회사에서 견습을 하려면 내년 가을까지 기다 려 야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안돼. 당장 WABR에 견습생으로 보내 줄게. 두 군데서 견습을 하게 되면 메건의 경력에도 훨씬 도움이 될 거야.」 「밀러 회사를 기다릴 수가 없어요. 난 이번 학기말에 졸업이에요.」 「나도 알아, 하지만 아직도 8시간을 더 이수해야만 석사학위를...」 「교수님은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메건이 나직한 어조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난 3년 동안 계속 학교에 다니느라고 융자받은 돈을 모두 써버렸어요. 이제 더이상 강좌를 들을 돈이 없어요. 9월 1일까진 일자리를 찾아야 해요. 학교에 나올 수가 없 어 요.」 그가 눈을 깜빡이더니 활짝 웃었다. 「문제 없어. 그렇다면 내 방송국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면 되잖아? 메건은 광고분야에 서 일하고 싶어하는 걸로 알고 있어. 그럼 뉴스 요원이 아닌 영업과 마케팅 분야의 사 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해줄게.」 메건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WABR의 수석 앵커맨인 대런 조지를 지도교수로 모시게 된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고마워요.」 「메건은 이혼했지?」 「그래요.」 전남편의 얼굴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딘 섬머스는 한때 조지의 제자였다. 그래서 이 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아주 힘들겠군. 학교를 다니면서 엄마 노릇까지 해내려면...」 메건은 그의 질문 의도를 확실히 알 수 없어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일부터 시작할 수 있겠어?」 「네. 그런데 낮 동안에 일해도 될까요? 애들이 학교에 가 있는 시간에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물론이지. 우리는 견습생이 일하는 시간은 상관하지 않아.」 조지가 양복을 들고서 11시에 개최되는 세미나에 참석할 준비를 갖추자 그녀도 일어 서 서 손을 내밀었다. 「조지 박사님, 여러 가지로 고맙습니다.」 그가 양손으로 메건의 손을 붙잡았다. 「메건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어.」 40대 초반의 잘 생긴 조지 박사는 자신이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믿 고 있다. 키가 크고 금발에 검게 그은 피부를 가진 그는 연한 초록색 눈동자, 붉은 속눈 썹에 윗입술 근처에 조그만 사마귀가 있다. 그녀는 손을 빼면서 미소지었다. 그의 지나친 악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마워요. 그런데 언제 임용절차를 밟아야 할까요?」 「내일 9시에 방송국으로 나와. 난 죽음의 신 살인사건에 대해 특별 조사보고서를 작 성하게 돼. 그 일이 메건을 소개하는 데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거야.」 메건은 자기도 그 사건을 알고 있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 충동을 지그시 눌러 버렸다. 텔레서브에서 일하면서 지켜야 할 중요한 규칙 중의 하나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밝 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조사에 비밀이 유지돼야 하기 때문이며 특히 멜버른 같은 작은 시에선 그 결과에 관해서 뇌물이 작용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때 뵙겠어요.」 그곳을 떠나면서 새삼스럽게 노마의 죽음에 관한 충격과 슬픔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메건은 무거운 마음으로 <저널리즘의 윤리>라는 과목의 마지막 강의를 듣기 위해 강 의 실로 향했다. 그 슬픔은 불쌍한 노마의 죽음을 자신의 업무와 연관시켜 생각하려는 자 신에 대한 심한 질책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난 글래디스 그로코보스키와 닮아가고 있나 봐. 그녀의 등골에 한기가 들었다. 2 메건은 복잡한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을 가로질러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 았다. 단단한 근육에 햇빛에 그은 숱많은 머리칼, 그리고 짙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다. 그의 악수 역시 자신감에 넘쳐 있다. 「당신이 잭인가요?」 그녀가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며 인사를 건넸다. 「잭 갤래거요. 메건 섬머스죠?」 「맞아요. 날 어떻게 아셨어요?」 메건은 그의 손이 주는 충격을 억누르면서 자리에 앉았다. 잭이 잠깐 미소를 지어 보 였다. 「그로코보스키 부인이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진 붉은 머리 아가씨를 찾으라고 했소 . 」 그의 정직한 묘사에 메건의 미소가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오른 쪽 눈 밑을 만졌다. 「검은 그림자? 정말 그렇게 심한가요?」 잭은 맞은편의 여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글래디스 그로코보스키가 말했던 대로 그 녀 는 두 아이의 엄마라기엔 너무 젊어 보인다. 여자는 도톰한 입술 위에 짙은 푸른색의 눈동자를 갖고 있다. 평상시에 잭은 여자들이 립스틱을 바르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 이 다. 그러나 메건 섬머스의 경우엔 아주 잘 어울린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는 모양이군요?」 「아이들과 폭우, 그리고 새는 지붕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다음엔 공부와 일, 그리 고 독서를 해야 해요. 그러고 나면 거의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갑자기 메건의 얼굴이 붉어졌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낸 것 같다. 남자의 시선 때문 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자, 내 이야기는 그만 하기로 해요. 잭, 이제 업무에 관한 얘기를 해볼까요? 왜 당 신은 텔레서브 조사원 일에 관심을 갖게 됐죠?」 두 사람은 곧 일에 관한 화제로 빠져들어 갔다. 20분 정도 이야기를 한 다음 메건은 아직도 김이 나는 커피를 마셨다. 「자, 이제 텔레서브에 관한 이야기는 다 한 것 같군요. 그들은 텔레비전과 라디오, 그리고 광고회사에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팔아서 아주 많은 돈을 벌어들이죠. 하지만 우리들에겐 내가 말한 정도의 급료만을 지불해요. 유능한 조사원이 조사 한 건당 500 달러를 받아요.」 「처음 4주 동안 75가구에 일일이 전화를 걸고 500달러를 받는단 말입니까?」 「그래요. 그리고 다음 4주 동안엔 시청일기를 쓰고 질운에 답변해 주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들에게 정확한 날짜에 조사결과를 보내도록 독촉하는 거 예요.」 잭 갤래거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진짜 이름을 결코 쓸 수 없다는 겁니까?」 「그래요. 텔레서브를 위해서 당신은 존 마틴이 되어야 해요. 그리고 내 여성 호출인 들은 앤 데이비스죠.」 메건이 미소를 지었다. 남자가 보여 주는 심각한 반응이 우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 건 좋은 징조다. 만약 그가 텔레서브에 관심이 있다면 그는 비교적 완벽하게 일을 처 리해낼 것이다. 「다른 질문은 없으신가요?」 그는 메건에게서 받은 지원서를 유심히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지난 1년 동안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일 한 적이 있는지 여부를 기입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들은 태업에 대해서 신경과민이 되어 있어요.」 그가 메건을 똑바로 응시했다. 「농담을 하고 있군요.」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특정 방송국의 이해를 뒤에 업고 있는 조사원은 시청 자 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죠. 그들에게 돈을 줘서 어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라고 강요한다거나 하는...」 메건은 다시 지원서를 읽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일한 경험은 없겠죠?」 그가 여자의 시선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제 그가 시작하려는 위험한 게임에서 능력을 시험할 시기가 된 것이다. 이를 악물고 거짓말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아뇨. 이력서에 쓴 대로 난 잡지 기고가요. 지난 5년 동안 프리랜서로 일해 왔죠. 틈틈이 이 일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소.」 「그래요.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고 또 이 조사에 기꺼이 협력해 준답니다. 시카고나 뉴욕 같은 곳에선 훨씬 어렵대요. 그곳에선 조사책자를 마치 쓰레기처럼 던져 버린대 요.」 「당신은 이곳 출신인가요?」 그녀의 얼굴이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메건은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없 었다. 「그래요. 난 올랜도에서 태어났어요. 아직도 친척들은 그 곳에 계시죠. 하지만 언니 와 난 몇 년 전에 이곳에 와서 학교를 다녔어요. 언니는 학교를 마쳤지만 난 도중에 결혼하느라고 중퇴했어요. 이제 다시 학교에 다니고 있죠.」 메건은 두 번째로 자신의 사생활을 노출하고 있는 자신을 꾸짖었다. 이곳에서 매력적 인 남자와 함께 앉아 있는 게 좀 거북하다. 메건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가 벌써 4년 이 됐다. 그러나 그 4년 동안 단 한 번의 데이트도 하지 못했었다. 「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학교에 가려면 무척 힘이 들겠군요.」 「당신도 결혼했나요?」 「아뇨, 지금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원자에게 그런 질문도 해야 하는 겁니까?」 그가 약간 놀리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물론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이 아이들에 대해서 물었기 때문에 결혼했을지 도 모른다고...」 그녀는 말끝을 흐리고 얼굴을 붉혔다. 「미안해요. 당신의 사생활을 들춰내려 던 건 아니었어요.」 그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움켜쥐는 바람에 메건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재빨리 손을 치웠다. 「내 사생활을 들춰낸 게 아니오. 나에겐 13살 짜리 아들이 있소. 그 앤 지난 8년 동 안 나의 전처와 살았소. 전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친 상황에서도 근사한 일을 해 냈 지.」 메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음성에 아무 적대감도 묻어있지 않은 게 오히려 안심 이 된다. 「그들은 여기에서 살지 않나요?」 「그들은 캔자스 시티에서 살고 있소. 아주 먼 곳이죠.」 그가 똑바로 그녀를 응시했다. 「내 아들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게 나에겐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소.」 「그래요.」 그들은 한동안 침묵을 지킨 채 앉아 있었다. 「당신의 남편은 가족들을 성실하게 부양하는 모양이군요.」 「난 이혼했어요.」 그녀가 아주 빠른 어조로 말했다. 「자, 이제 다른 질문이 없으면 이만 헤어지는 게 좋겠군요. 난 달리 할 일이 있어요 . 사실은...」 메건은 말을 멈췄다. 노마에 관한 사실을 직설적으로 털어놓긴 싫었다. 하지만 그녀 는 어느새 진실을 털어놓고야 말았다. 「사실은 내 조사원 한 사람이 살해됐어요.」 「살해됐다고요?」 지원서에 사인을 하고 잭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요. 그녀는 죽음의 신에게 희생됐어요.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오늘 아침에야 그 소식을 들었어요.」 「노마 슐츠가 텔레서브에서 일했소?」 그가 놀란 듯한 어조로 물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노마를 아세요?」 메건이 당혹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오.」 잭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저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몇 분 전에 신문을 읽었죠. 나에겐 사소한 걸 기억하는 나쁜 습관이 있죠. 슐츠 부인이 당신과 친한 친구였소?」 그 대화를 끌어가는 동안 그의 가슴은 거칠게 뛰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폭력에 희생된 사람을 알고 있을 땐 누구든 놀라게 되죠 . 」 「그렇소. 애석하게도 경찰은 그런 범인을 잡을 확률이 매우 희박할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그가 천천히 오른손을 폈다. 그리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어조로 말했다. 「연쇄 살인사건이야말로 단서를 잡아내기가 가장 힘들죠. 그들의 행동에는 동기가 거 의 없으니까요.」 「이 시대의 한 증후군인 것 같아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결함으로 망가 지 고 있으면서도 정신과적인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해요. 지난 일요일 신문에 실린 사 설 을 보셨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틀림없이 그 신문의 논설 위원은 이번 주엔 경찰들에게 인기가 없을 겁니 다.」 메건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논설위원은 아주 훌륭한 의견을 제시했어요. 범죄에 관련된 한 경찰관에 대한 혐 의가 잘못된 것이길 바랄 뿐이에요.」 「그건 사실이오. 만약 그 죽음의 신이 권총과 경찰의 휘장을 달았다면 그는 희생자 들 을 눈치채지 않게 죽일 수 있었을 거요.」 잭이 메건의 불안한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증명할 수가 없으니까 아직은 경찰을 믿 을 수 있을 거요.」 「아무튼 우울한 소식이에요. 내일 당신에게 정밀검사 용지를 보내겠어요. 그러나 자 세히 읽어보시고 달리 의문점이 있는지 살펴보세요.」 「정밀검사 용지?」 「텔레서브 주소 조사양식을 말하는 거예요. 미안해요, 우린 그렇게 부르는 게 습관 이 돼서... 만약 그걸 우편으로 받지 못하면 글래디스나 나에게 연락을 해주세요.」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몇 주 전에 노마의 업무가 위험했죠. 우린 그녀의 양식을 다시 제출하게 했어요.」 죽은 여자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메건의 음성이 약간 갈라졌지만 그녀는 계속 말을 이 어갔다. 「노마는 정말 훌륭한 일꾼이지만... 아무튼 당신이 이 일을 하지 않겠다면 나에게 연 락을 해주세요.」 「관심을 쏟아 줘서 고맙소.」 잭이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인 채 미소지었다. 아마 신경이 예민해질 때의 버릇인 것 같다. 「그럼 난 채용된 겁니까?」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요. 당신은 채용됐어요. 일주일 후부터 전화업무를 시작하게 돼요.」 「고맙소, 메건.」 잭이 악수를 하고 그 칸막이 자리에서 나왔다. 「의문점이 있으면 당신에게 전화해도 될까요? 아니면 그로코보스키 부인에게 연락을 해야 하오?」 「내게 전화해 줘요. 그분은 자리에 없을 때가 많으니까.」 「좋소. 그런데 당신은 이 일을 한 지가 얼마나 됐소?」 「일 년이 조금 넘었어요. 그런데 왜 그걸 묻는 거죠?」 그가 어깨를 으쓱하고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저 당신이 너무 오랫동안 일을 해서 피로에 지쳐 있지 않은지 궁금했을 뿐이오. 그로코보스키 부인은 4년 동안 책임자로 일해 오면서 조사원들에게 몇 건 이상의 조 사 를 시킨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하더군요.」 글래디스가 한 말 치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조사원들은 그보다 훨 씬 많은 일을 해오고 있다. 잭 갤래거는 계속 그 일을 하지 못할까봐 불안해하는 것 일 까? 「피로 같은 건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일거리를 받는 문제에 대해서도 걱정할 게 없어요. 좋은 조사원은 항상 일거리가 있게 마련이니까요.」 입구 쪽을 흘끗 바라보니 2시에 약속을 해둔 아가씨가 들어서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전화해 줘요.」 「고맙소, 메건.」 그는 애써 그 여자의 가는 손가락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그녀를 만지고 싶다 는 욕망이 잠시 그를 흔들리게 했지만 그는 그 욕망을 극복했다. 왠지 이 여자는 믿 을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에게 이야기하겠소. 그는 그럴 기회가 오길 바랐다. 잭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한낮의 열기가 몰려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모자란다. 그는 가능하면 빨리 메건 섬머 스 로부터 정보를 알아내야 한다. 죽음의 신이 다시 덮쳐오기 전에... 메건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축축한 느낌이 절망감과 함께 몰려왔다. 아무래도 퍼 머 를 해야 할 텐데 그럴 여유가 없다. WABR에서 견습생활을 시작하는 첫날 그녀는 낙오된 개 같은 모습으로 도착했다. 성공 을 위한 옷차림은 고정수입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지금 가장 급한 건 주 홍색 립스틱이다. 메건이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모퉁이에 하얀 구식 플 리 머스가 멈춰 섰다. 「안녕, 메건. 우리가 태워다 줄까요?」 폴러드 핀치가 열려진 차창으로 소리쳤다. 그의 두꺼운 안경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 메건은에드나 애덤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커다란 흰 고양이를 안고 뒷자리 의 접혀진 휠체어에 앉아 있다. 「난 93시가지로 향하는 버스를 타러 가는 중이에요. 방향이 같은가요?」 「그래요, 메건. 어서 타요.」 차 안은 에어컨이 가동되어 아주 시원했다. 하지만 메건의 머리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고마워요, 핀치 씨.」 「천만에요. 그러잖아도 나무상자 일로 부인에게 보답하고 싶었어요.」 메건은 잠시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했다. 그러나 금방 그의 말뜻 을 알아차렸다. 1월 초에 그는 글래디스의 집 앞 길가에서 그녀에게 하소연을 해댔다. 글래디스가 나 무상자를 들여놓지 않아서 몹시 신경이 쓰인다는 거라서 시민들에게 종이와 금속 그 리 고 유리를 각기 다른 색의 상자에 넣게 되어 있다. 그런데 글래디스는 쓰레기가 수거된 후에도 나무상자를 집안에 들여놓지 않았던 것이 다. 메건은 글래디스가 거의 집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웃 들에게 변명하지 않고 그것들을 자기 것과 함께 집안으로 들여놓았다. 「핀치 씨, 나에게 감사하실 건 없어요. 핀치 씨 말대로 누가 봐도 눈에 거슬렸으니 까 요.」 「사람들은 자신들이 대기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핀치가 대답했다. 「이러다간 미국 전역이 쓰레기 더미가 되고 말 거요.」 「핀치 씨는 우체국에서 일하고 계시죠?」 「그래요. 월요일로 만 29년 8개월이 돼요. 29년이라면 이 구역예선 최고로 오랜 경 력 이오.」 「정말 자랑스러운 기록이죠.」 에드나 애덤스도 뒷자리에서 거들었다. 「그렇군요. 지금도 여기 멜버른에서 일하시나요?」 「지금은 아니오. 최근에 팜 베이 우체국으로 전근됐소. 그들은 날 퇴직시키려고 술 수 를 부리고 있지만 난 그만두지 않을 생각이오.」 폴러드가 건조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메건, 당신도 내일밤 집주인 회의에 나올 작정이에요? 방범표지를 구입하는 문제를 표결에 부칠 예정이거든요.」 에드나가 물었다. 「나갈 작정이에요, 애덤스 양. 죽음의 신이 멜버른을 기웃거리는 마당에 우리도 뭔 가 해야 할 것 같아요.」 「나도 동감이에요.」 에드나가 대답했다. 「메건, 어디서 내려 줄까요?」 차가 시내에 이르자 폴러드가 물었다. 메건은 다음 모퉁이에 있는 WABR건물을 가리켰 다. 「태워다 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그럼 내일 회의에서 두 분을 뵙겠어요.」 손을 흔들고서 메건은 그 차가 떠나는 동안 애써 웃음을 참았다. 그들은 이상한 한 쌍 이다. 글래디스는 그들의 관계가 떳떳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아주 터놓고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메건에겐 그게 오히려 매력적이다. 에드나 애덤스와 폴러드 핀치는 헌신적인 친구 사이처럼 보인다. 둘이 함께 살아감으 로써 많은 돈을 저축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메건의 아이들이 다니는 국민학교 건 너 편에 있는 에드나의 거대한 저택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폴러드는 항상 마당과 뜰을 차와 마찬가지로 말끔히 청소하는 습관이 있다. 방송국 안 으로 들어선 메건은 접수계의 안내를 받아 카펫이 깔려 있는 홀을 지나 뉴스실로 갔 다. 아침의 뉴스 쇼가 끝난 것 같다. 엄청나게 긴 손톱을 가진 예쁜 기상 통보관 아가씨가 키가 큰 젊은 남자와 재잘대고 있었다. 그는 샌디 로열이라는 방송인이다. 잘생긴 금발의 로열은 25살쯤 되어 보인 다. 그는 방송국 소유주의 아들이고, 5시 뉴스의 공동 앵커다. 강의시간에 대런 조지는 그가 그저 뉴스를 읽기 위해 고용된 잘생긴 모델에 지나지 않 는다고 비꼬았다. 뉴스를 보도할 수 있도록 훈련된 저널리스트와는 거리가 멀다는 얘 기였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메건을 무시했다. 그래서 메건은 스스로 의자를 끌어다 앉은 다음 그들의 대화를 듣지 않는 척하고 있었다. 「난 오늘밤 친구의 보트를 빌릴 거요.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소?」 「보트가 큰가요?」 「13m짜리요. 원한다면 당신의 룸메이트를 데려와도 좋소.」 「왜요? 두 쌍의 데이트를 주선할 셈인가요?」 「당신 친구도 당신처럼 예쁘다면 내 친구가 굉장히 기뻐할 거요.」 그때 대런 조지의 음성이 방안에 울려퍼지면서 그가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 여러분?」 메건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조지 박사님.」 「메건! 왜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거지?」 그는 샌디를 향해 빈정대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봐, 덩치 큰 소년, 자네 부친이 이 방송국의 소유주인 건 알고 있지만 죽음의 신 이 자네에게 발각되길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명심하게. 메건이 자네를 도와줄 거야.」 「대런, 그 일은 끝난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난 그 사내에 관해 시리즈를 내보내고 있다네. 게다가 미첼은 자네가 날 측면 지원 해 주라고 허락했지.」 그가 메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첼 코스토스는 우리 부서의 편집장이야. 자, 그를 만나러 가지. 그는 샌디가 연 구 분야에서 도와주면 아주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대런, 나도 스스로 연구를 할 수 있어요.」 「물론 그렇겠지, 착한 소년. 하지만 여기 이 아름다운 메건이 자네 옆에서 돕는다면 얼마나 근사할지를 생각해 보게.」 샌디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6년이나 된 메건의 낡은 드레스는 염두 에 두지도 않는 것 같다. 「도와준다고요? 하지만 학생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메건은 면담도 하고 기록도 할 거야. 그리고 자넬 돕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근 사한 일인가?」 「대런...」 「로열 씨.」 메건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지난 몇 달 동안 당신의 리포트를 지켜봤어요. 당신이 나에게 도울 기회를 준다면 정말 고맙겠어요.」 두 남자가 메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샌디의 눈동자가 빛났다. 「고맙소. 메건이라고 했죠? 좋아요. 내일 10시에 멜버른 경찰서로 와요. 거기서 수 사 반장을 소개해 주겠소.」 메건은 두 남자 사이에 예리한 적대감이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대런을 따라 대기실 을 나오는 동안 샌디의 얼굴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섬머스 부인, 텔레비전 대형 뉴스를 어떻게 생각하죠?」 「아주...」 「아주 지겹고 형편없는 프로지.」 대런이 그녀 대신 말을 맺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아주 멋진 경험이 될 거야.」 팔을 붙잡은 대런의 손에 힘이 가해질수록 메건의 척추는 더욱 굳어지는 느낌이다. 「조지 박사님, 이런 일자리를 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난 마케팅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조지가 갑자기 발을 멈추고 그녀의 팔을 놓았다. 「메건, 이건 인생에서 거절할 수 없는 기회야. 죽음의 신은 이제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되어 버렸어. 이번 기회가 메건의 경력을 쌓는 데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거야! 」 「하지만 난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진 않아요. 나의 논문은 광고에 관한 것인데...」 「메건, 날 믿어.」 대런이 다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나를 도와서 이번 사건에 관심을 가져 봐. 결국 메건은 원하던 일을 얻게 될 거야. 」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메건은 그가 관심을 갖는 건 사건 그 자체가 아 니 라 샌디 로열일 거라고 믿었다. 대런이 원하는 건 바로 그것이다. 8시 3O분에 메건은 아이들의 침실문을 닫았다. 오늘은 승강이를 하지 않고 잠들어 준 게 여간 기쁘지 않다. 그건 아마도 오늘이 어머니날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특별 배려 를 해 준 탓일 것이다. 간이식탁 앞에 앉아서 그녀는 여러 가지 청구서가 쌓인 우편물을 흘끗 바라보았다. 메 건은 그 청구서들을 주방의 서랍에 쑤셔넣고 여러 가지 광고지는 쓰레기통에 던져 버 렸다. 그리고 서류가방을 열어 대런 조지와 편집장이 준 자료를 꺼내 죽음의 신 사건 에 관해 검토하기 시작했다. <멜버른 프레스>의 신문기사를 복사한 것과 AP통신이 전국에 보낸 기사도 있었다. 그 리고 5명의 희생자에 대한 컴퓨터 출력자료도 있다. 그 곳엔 처음 2명의 희생자에 관 한 경찰기록과 함께 공통점이나 특별한 기호 같은 게 기록되어 있다. 나머지 사람들의 기록은 어디 있을까? 그녀는 수첩을 꺼내 죽음의 신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을 살펴보았다. 대런은 샌디 에게 희생자들의 인생에 나타난 공통분모를 찾아보라고 말했다. 경찰도 같은 일을 하 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런은 그 일을 직접 조사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아마도 그는 피살자들이 살 인 자와 아주 중요한 방법으로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다. 그들의 이름과 나이, 직업들을 살펴보면서 메건은 죽음의 신이 경찰로 위장했을 가능 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희생자의 집에 들어간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가 경찰관의 신 분으로 위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메건은 한숨을 내쉰 다음 자신의 목록에 그들의 주 소 를 추가해서 적었다. 레슬리 필더, 37살, 피자 가게 지배인, 팰메토 618. 조이 머더후드, 29살, 페인트 공, 센츄리 가 124 1/2. 모니크 패트릭, 51살, 모니크 선물가게 주인, 팜 베이 브르바드 가 333. 데이비드 던턴, 44살, 자동차 타이어 거래상, 베이 사이드 가 9. 노마 슐츠, 53살, 텔레서브 조사원, 팜 코트 319. 노마의 신상명세서에 있는 직업란에는 <전화 권유원>이라고 적혀 있다. 메건은 그 정보란을 유심히 바라보며 경찰에게 전화를 걸어 좀더 상세한 사실을 털어 놓아야 할까 하고 생각했으나 곧 포기해 버렸다. 텔레서브는 그 여인의 죽음과는 아 무 관련도 없을 것이다. 그 순간 전화벨 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깨뜨려 버렸다. 「여보세요?」 「메건, 이리 좀 와서 요원들의 업무할당 용지를 가져가. 아침 일찍 텔레서브에 우편 으로 보내야 해.」 「안녕하세요, 글래디스. 금방 가겠어요.」 전화기를 통해서 들리는 글래디스의 거친 호흡소리가 메건을 놀라게 했다. 그녀는 숨 을 쉬기가 몹시 힘든 것 같다. 「글래디스, 괜찮아요?」 「심장약 때문에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나 봐. 의사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 겠 어.」 메건은 혀를 지그시 물었다. 글래디스는 카페인을 복용하지 말라는 충고를 무시하고 있다. 「내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어요?」 「이 용지만 우편으로 부쳐 주면 돼요.」 전화가 끊기자 메건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 여자는 정말 구제불능이라니까. 「엄마?」 토머스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메건이 아이의 방으로 다가가서 문을 열고 안을 들 여 다보았다. 토머스가 일어나 앉아서 눈을 비비고 있다. 「무슨 일이지?」 「내 토끼가 없어요.」 그녀는 토머스의 침대 옆에서 토끼 인형을 찾아 건네주었다. 아이는 그걸 끌어안고 엄 지손가락을 빨면서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어갔다. 10분 후에 메건은 테니스를 소파 밑 에 꺼내 놓았다. 그리고 침대를 정돈하는 데 몇 분 정도가 걸렸다. 글래디스의 집에서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죽음의 신에 대해서 생각해 볼 참이다. 메 건 은 급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잔디를 가로질러갔다. 글래디스의 집엔 불이 모두 꺼 져 있었다.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글래디스는 전력회사가 국가기관 중에서 가장 타락했다고 불평을 해대곤 했다. 그래서 그 회사에겐 자기 돈을 내주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문 쪽으로 다가간 메건은 문이 열려 있는 걸 보고 놀랐다. 글래디스는 메건이 올 거 라 고 생각했을 땐 자물쇠를 열어 두긴 했지만 문까지 열어 놓진 않았다. 메건은 글래디 스가 가져갈 봉투를 놓아두었는지 바닥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건 보이지 않았다. 문 을 활짝 열고 어두운 주방을 바라보는 동안 등골에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 「글래디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다. 3 메건은 문안으로 한발을 들여놓았다. 「글래디스 업무 할당 용지를 가지러 왔어요.」 집안 어디선가 시계소리만이 뻐꾹뻐꾹 하고 희미하게 들려 올 뿐 아무 대답도 없다. 담배 냄새가 평상시보다 더 진하게 풍겨온다. 발바닥이 미끈했다. 바닥을 살펴보니 유 리잔이 깨져서 흩어져 있고 콜라가 쏟아진 상태다. 메건은 몸을 똑바로 세웠다. 「글래디스? 내가 왔어요.」 심장마비로 죽어 있는 글래디스의 환영이 떠올랐지만 재빨리 그걸 떨쳐 버렸다. 그 늙 은이는 아마도 침대 위에서 텔레비전을 보느라고 용지를 내놓는 걸 잊어버렸을 것이 다. 콜라로 수영장이 된 바닥을 한 걸음 디뎠을 때 뒤에서 부드러운 발소리가 들려왔 다. 주먹을 움켜쥐고 메건은 휙 뒤를 돌아보았다. 록시가 겁에 질린 채 푸른 눈동자 를 커다랗게 뜨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엄마, 엄마가 없어서 찾으러 온 거예요!」 「오, 얘야, 미안하구나.」 메건은 첨벙거리는 바닥에서 벗어나 신선한 밤의 공기 속으로 나왔다. 그리고 딸을 끌 어안았다. 「록시, 무슨 일이지? 토머스가 널 깨운 거니?」 「아니, 전화벨 때문이에요. 전화벨이 계속 울려댔어요.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길래 겁이 났어요. 그래서 엄마를 찾으러 나온 거예요.」 메건은 딸을 데리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누가 전화를 했니?」 「모르겠어요. 내가 전화를 받았을 때 아무 소리도 없었어요.」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록시는 품안에서 거의 잠들어 있었다. 메건은 록시가 직접 밖으 로 뛰쳐나온 게 놀라웠다. 평상시 같았으면 그냥 계단에서 그녀를 불렀을 것이다. 「얘야, 이제 다시 자도록 하렴.」 「엄마, 우리와 함께 있을 거죠?」 「그럼. 난 여기 있을 거야. 그러니 어서 잠이나 자.」 어떡하지? 그녀는 방충망으로 된 앞 창문을 내다보았다. 글래디스의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왔던 것이다. 메건은 수화기를 들고 글래디스의 전화번호를 돌렸다. 20번쯤 벨이 울렸을 때 메건은 화를 내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글래디스는 언제쯤이나 전화를 받는 법을 배울까? 메건은 문 쪽으로 다가갔다. 록시에게 집안에 있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집주인의 문 을 그렇게 열어 둘 수는 없다. 하지만 곧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는 그 자리에 멈 춰 서고 말았다. 두려움 때문에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9시가 넘은 시간에 그녀를 찾아올 방문객은 아무도 없다. 혹사 글래디스가 그녀가 오 는 소리를 듣고 들어선 것일까? 「누구세요?」 「메건?」 그 깊은 음성은 귀에 익은 것이다. 잭 갤래거? 그가 도대체 무슨 일로 찾아왔을까? 메건은 현관문을 열었다. 「잭, 안녕하세요!」 집에서 나오는 빛으로 그의 눈이 마치 검은 석탄처럼 반짝였다. 「안녕, 메건. 이런 시간에 당신을 찾아와서 정말 미안하오. 하지만 이 지원서를 돌 려 주고 싶었소.」 그는 메건에게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당신에겐 이게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난 바보처럼 그 레스토랑에서 이걸 갖고 나와 버렸소.」 「고마워요. 하지만 이렇게 가져올 필요까진 없는데...」 그녀가 문을 열고 서류를 받았다. 새삼스럽게 그의 큰 키가 눈에 들어온 메건은 뒤로 물러서며 그를 들어오게 했다. 「들어와서 레모네이드나 한 잔 하시겠어요?」 잭은 움직이지 않고 조그만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당신의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혹시 잠자리에 들려 고 했다면...」 「아니에요. 난 할 일이 아주 많아요. 잠깐 들어오세요.」 잭은 들어와서 문가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아이들은 어디 있소?」 「애들은 저쪽 방에 있어요 잠이 든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린 목소리를 낮춰야 할 거 예 요. 그렇잖으면 애들이 달려나올 거예요. 그 애들은 손님이라면 사족을 못 쓰거든요. 」 잭이 하얗고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 아들도 어렸을 땐 그랬소. 손님이 가기 전까진 절대로 잠을 자지 않았지.」 업무와는 상관없는 몇 가지 질문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갔지만 그녀는 결코 묻지 않았 다. 「이혼은 내 잘못 때문이었소.」 「안됐군요.」 그녀가 대답했다. 「하지만 내 경험상 어떤 일엔 항상 두 사람이 똑같이 잘못을 저지르더군요.」 「때론 그렇겠죠. 종종 난 그것이 단 한 사람의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해요. 당신의 결 혼생활은 어땠소?」 「80년대의 악습이었죠. 남편은 자신의 일을 하길 원했어요. 그는 대학을 중퇴한 아 내 와 코흘리개 아이들을 거기에 포함시키지 않았죠.」 자신의 음성에 깃들인 상처를 의식하고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후회했을 겁니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날카로운 어조로 대답했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생생하게 떠 오르는 감정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도저히 타인에게 드러내 보일 수 없는 것 이다. 드디어 잭이 입을 열었다. 「난 일에 미쳐서 다른 것엔 별로 관심을 쏟지 않았소. 아마 난 순수한 바보였을 거 요.」 메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팔을 잡아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충동을 누른 채 세 개의 알루미늄 의자 중에서 깨끗한 걸 가리켰다. 「좀 앉으세요. 커피를 드시겠어요?」 그가 늘씬한 몸을 의자에 앉히면서 말했다. 「레모네이드가 좋겠소.」 그녀는 레모네이드 두 잔을 따라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 근처에 사세요?」 「도로 두 개만 건너면 되지. 컨트리 클럽 도로 옆이오. 난 서류만 놓고 가려 했소. 당신이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소.」 「그래요?」 메건은 앉아서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시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다. 「전화를 했더니 받지 않더군요. 몇 분 전에...」 그녀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로코보스키 부인 집에 갔었어요. 6살 짜리 록시가 전화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하 지만 당신은 그때 전화를 끊었었나봐요.」 잭의 표정이 변했다. 「글래디스 그로코보스키가 근처에 산다고요? 저 앞집에?」 「그래요. 그런데 뭐가 잘못 됐나요?」 그가 눈을 깜빡였다. 턱의 한쪽 근육이 뒤틀렸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소?」 말도 안되는 질문에 메건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잭의 긴장된 표정에 그만 웃음 을 멈추고 말았다. 갑자기 메건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건 왜 묻는 거죠?」 잭이 일어서서 현관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어두운 글래디스의 집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 거리로 들어섰을 때 누군가가 그 집의 현관에 있는 걸 봤소. 남자였던 것 같더군. 그는 어둠 속에서 있었소. 내가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 았 지. 내가 당신의 집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와서 뒤를 돌아보았더니 아마 그 사람인 듯한 사내가 길을 건너고 있었소.」 잭이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티셔츠 밑 부분을 손가락으로 비틀고 있었다. 「잭, 정말 확실히 본 거예요? 글래디스에게 남자손님이 찾아온다는 건 금시초문이에 요. 그리고 그녀는 절대로 정문을 사용하지 않아요!」 갑자기 콜라가 엎질러지고 옆문이 열려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분명히 누군가가 현관에 있었소.」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요.」 그녀는 재빨리 그가 도착하기 직전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당신이 내려가서 문을 열고 글래디스를 불러 보시겠어요?」 잭이 재빨리 문 쪽으로 달려나갔다. 그는 문을 닫기 전에 뒤돌아보며 말했다. 「메건, 여기 있어요. 문을 잠그고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경찰을 불러요.」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는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문을 잠그고 초조하게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서 키스를 해준 다음 다시 작은 거실 쪽으로 돌아왔다 . 그리고 간이의자에서 책과 메모지들을 들어다가 소파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 기 도 했다. 하지만 공포심은 여전하다. 메건은 그때 집안에 있었고 그녀의 아이는 울면 서 서 있었다. 그때 그 집에 낮선 사람이 숨어 있었다면? 잭의 노크 소리에 그녀는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메건, 나요. 문을 열어 줘요.」 메건은 급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었을 때 잭의 표정이 약간 겸연쩍은 것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하얗게 질려 있고, 그의 옷엔 붉은 얼룩이 묻어 있다. 「메건, 경찰을 불러요. 글래디스 그로코보스키가 살해됐소.」 악몽 같은 저녁이 계속 이어졌다. 한 무리의 경찰관들이 사이렌 소리와 함께 몰려왔 을 때 아이들이 깨어나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록시와 토머스를 재우고 침실문을 닫고 나왔을 땐 소형 카메라와 정문을 통해 들어온 WABR의 야간 기자들이 비추는 거 친 라이트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경찰의 전화를 모니터하고 있다가 경찰차와 앰뷸 런 스가 도착하는 즉시 들이닥친 것이다. 메건도 전에 만난 적이 있는 미첼 코스토스가 큰 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섬머스 양, 이야기 좀 할까요? 당신이 시체를 발견했나요? 시체가 칼에 찔려 있었 는 지, 총상인지, 교사인지 말해 주겠어요?」 그녀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담당 형사인 듯한 피트 맥머피가 그들에게 계단에서 물러 나라고 명령했다. 잭이 그녀는 팔을 잡아서 앉힌 다음 위스키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넸 다. 「이걸 마셔요. 도움이 될 거요.」 메건은 그 액체를 입에 대고 타는 듯한 음료를 들이켰다. 하지만 그것이 목을 넘어갈 때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결국 소동이 조금은 가라앉고 메건과 잭, 그리고 맥머피 경사와 중년의 빛바랜 금발 을 한 주디 반스 경관만 남았다. 「자, 갤래거 씨, 당신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겠소. 그 다음에 당신과 섬머스 양이 하 던 일을 계속해도 좋아요.」 메건이 형사를 노려보았다.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가 아무래도 불쾌하게 느껴졌다. 「당신이 그로코보스키 부인을 발견한 건 몇 시입니까?」 「9시 경이었소.」 「섬머스 양이 전화한 시간이 9시 13분이었어요.」 반스 경관이 끼여들었다. 그녀의 음성은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다. 맥머피가 얼굴을 찌푸린 다음 메건을 바라보았다. 「잭이 시체를 발견하고 당신이 전화를 하기 전에 두 사람은 얼마나 지체했었소?」 메건의 목은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녀는 침을 삼킨 다음 숨을 들이 쉬 었다. 「잭이 들어오자마자 전화를 했어요.」 「금방 전화를 했습니까? 그에게 마실 걸 주거나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나요?」 「아뇨. 난 문을 열었어요. 잭이 글래디스가 살해됐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몸을 돌려 수화기를 집어들었어요.」 「알겠소.」 맥머피가 작은 수첩에 기록했다. 「오늘 밤 갤래거 씨가 이곳에 온 건 몇 시쯤이었습니까?」 그때 전화벨이 울리자 반스 경관이 수화기를 들었다. 「누구시죠?」 그녀가 송화구에 손을 댄 채 말했다. 「대런 조지라는 사람이 섬머스 양을 바꿔달라는군요.」 「그분은 개인적인 친구예요. 괜찮다면 지금 전화를 받겠어요.」 「좋소.」 맥머피가 대답했다. 메건이 일어서서 수화기를 받았다. 「여보세요?」 「메건! 괜찮아? 샌디가 방금 내게 전화를 걸어서 메건이 죽음의 신의 희생자를 발견 했다고 말하더군. 정말 믿을 수가 없어!」 그녀는 맥머피 형사가 오늘밤의 사건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느 낌 을 받았다. 「내 친구가 발견한 거예요. 조지 박사님, 미안하지만 지금은 말할 수가 없어요. 내 일 방송국에서 뵙기로 해요.」 「좋아. 될 수 있으면 빨리 들러. 우리에겐 아주 중요한 사건이니까.」 「내일 뵙겠어요.」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난 조지 박사님의 방송국에서 견습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우연히도 그분은...」 혀가 이에 달라붙었다. 「멜버른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맥머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두 사람을 위해선 행운이 깃들인 우연이었군요.」 그는 메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자, 어디서부터 시작했죠? 좋아요. 언제 갤래거가 오늘밤 여기 왔었나요?」 「그가 글래디스를 발견하기 10분 전쯤에...」 「그러니까 그가 도착하기 직전에 당신은 그로코보스키의 집에 내려가 있었군요.」 형사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갔다. 「딸을 2층으로 데려오면서 밖에서 갤래거 씨를 봤소?」 「아뇨. 하지만 난 거리에 등을 돌린 상태였기 때문에 보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뒤를 돌아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죠. 갤래거 씨는 길 건너의 현관 앞에 어떤 남자가 있는 걸 분명히 봤다고 했소.」 그런 질문에 대해서 일종의 두려움과 울화 같은 것이 치밀기 시작했다. 「난 거리에서 아무도 보지 못했어요.」 맥머피는 다시 메모를 했다. 「좋아요.」 그가 잭을 향해 미소지었다. 「그래서 당신은 9시경에 시체를 발견한 다음 살인자를 찾기 위해 둘러보고 섬머스 양 의 집으로 올라왔다고...」 「섬머스 부인이죠. 메건 섬머스 부인. 난 경찰의 교환원에게 그 사실을 알렸어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 쪽으로 다가가서 잔을 헹궜다. 맙소사, 이 사람들은 잭과 내가 글래디스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로코보스키 부인의 집에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갈 만큼 잘 아는 사이인가요?」 주디 경관이 물었다. 메건은 몸을 휙 돌렸다. 「그래요. 난 그녀가 아프다고 생각하고 들어갔어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섬머스 부인은 글래디스 그로코보스키가 집에 남자를 들어오게 한 건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소.」 잭이 덧붙였다. 「아마도 그게 죽음의 신의 행동에 관한 단서가 될 겁니다. 최근에 읽은 신문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그가 경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더군요.」 「그는 경찰이 아니에요.」 반스 경위가 발끈했다. 「언론의 일부 무책임한 사람들이 그가 경찰인 것 같다고 추정하고 있지만...」 「그만해, 주디.」 맥머피가 끼여들었다. 그는 주디를 피곤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의자에 기대 서 있는 잭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당신은 죽음의 신의 소행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요? 달리 개인적인 의견은 없 소?」 잭이 의자에 앉으면서 숱많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아뇨, 당신은 어떻소?」 메건은 맥머피의 목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걸 보았다. 갑자기 그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고양이와 쥐의 게임, 그리고 신경전이 너무나 피로하게 느껴졌다. 「미안해요 내일 하면 안될까요? 난 아이들을 돌본 다음 좀 쉬어야겠어요.」 맥머피가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막 메모를 하고 수첩을 덮었다. 「좋습니다. 갤래거 씨, 내일 오전 9시경에 경찰서에 와서 섬머스 부인과 함께 진술 을 마쳐 주시겠소?」 「그렇게 하겠소.」 잭이 메건을 응시했다. 「내가 와서 당신을 태워가도 되겠소?」 메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잭이 두 경찰관을 배웅하는 걸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가 곁 에 있어 줘서 다행이다. 잭이 문을 닫고 다시 다가와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메건, 괜찮소? 누굴 불러서 함께 있는 게 어떻겠소?」 「아뇨, 난 괜찮아요. 그런데 경찰은 이 사건을 죽음의 신이 저지른 거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순간 불안감과 충격의 표정이 잭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잘 모르겠소.」 「맥머피는 말하지 않았지만 난 앰뷸런스 요원과 검시관이 그로코보스키가 살해당한 방법에 관해 말하는 걸 들었어요.」 메건의 뺨에 눈물이 홀렀다. 「맙소사, 록시가 거기 있었어요!」 「메건, 이제 괜찮아질 거요.」 잭이 다가와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잠시 마비된 듯한 그의 상태가 그날밤 사건에 대 한 반감으로 변했고, 그 반사작용이 메건 섬머스에게까지 전해졌다. 글래디스 그로코보 스 키가 눈을 뜬 채 공포에 질려서 죽어 있는 모습이 그를 괴롭혔다. 잭은 메건의 목덜 미 를 어루만지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메건, 충격을 받은 모양이군, 이제 안심해요. 당신과 아이들은 안전하오.」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잭은 그녀를 놓아 준 다음 휴지를 집어들어 얼굴을 닦아주었다. 「내가 떠나거든 문을 잠그고 잠을 청해 봐요. 내일이면 훨씬 좋아질 거요.」 메건은 그가 내민 휴지를 받아들고 코를 풀었다. 잭 갤래거의 품안은 아주 따뜻하고 아늑하다. 하지만 그에게 더이상 부담을 주고 싶진 않다. 그는 타인이고 그녀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니까. 「고마워요, 잭. 내일 만나요. 8시 30분쯤이면 될까요?」 「그때가 좋겠소.」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젖은 뺨에 달라붙은 부드러운 붉은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 충동을 애써 눌렀다. 그녀는 더이상 그에게서 위안을 받지 않 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고마웠어요. 안녕히 가세요, 잭.」 「메건, 그 살인자는 결코 같은 장소에서 두 번의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소. 아이들 은 안전할 거요.」 그가 마음을 써주는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뵙기로 해요.」 문이 닫히고 그녀는 그의 말대로 모든 게 좋아지길 기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좋 아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살인자가 붙잡히기 전까지는... 4 「엄마, 왜 글래디스 부인이 죽었어요?」 록시가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난 언제 죽게 되는 거죠?」 메건은 딸을 끌어안았다. 「넌 125살까지 살 거야. 넌 항상 치리오스를 먹으니까. 자. 아가야, 서둘러야겠다. 학교종이 벌써 울렸어.」 「글래디스 부인은 치리오스를 안 먹었어요?」 토머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젯밤의 소동을 설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글 래 디스의 죽음을 아이들에게 알려야 했다. 아이들은 그녀가 그냥 죽은 걸로 알고 있다. 지금으로선 계속 그렇게 믿게 하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게 좋지 않은 방법일 수도 있지만 우선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일상적인 생 활을 유지하게 해줘야 한다. 아이들은 엄마를 평상시보다 더 세게 끌어안고 조용히 현 관문을 나섰다. 그녀는 잠시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아빠에게 연락을 취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본부 건물로 들어섰다. 교장인 버츠 씨는 다른 사람 과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그는 메건에게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방안을 훑어보 았 다. 버츠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비서가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왼쪽엔 아주 묵직해 보이는 10대 후반의 아가씨가 앉아 있다. 그녀의 이름은 모나 호킨스로서 학교에서 기술 프로그램에 채용한 정서 장애아다. 모나는 손 을 흔드는 메건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알파벳 놀이를 하고 있던 카드를 바라보았다 . 그녀는 카드를 쌓아올린 다음 다시 메건을 흘끗 바라보았다. 메건은 그녀를 격려하기 위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나 모나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휙 돌린 다음 다시 문자들을 바라보 았 다. 「섬머스 부인?」 그때 버츠가 그녀를 불렀다. 메건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버츠 씨.」 「안녕하세요? 내 사무실로 들어가실까요?」 밀턴 버츠의 사무실에서 메건은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가 동정적 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메건은 죽음의 신에 관해서 그가 과잉반응을 보이지 않는 게 고마웠다. 「버츠 씨,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건 토머스나 록시가 혹시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 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만약 그런 반응을 보이면 즉시 나에게 알려 주세요. 지금은 그 애들이 그렇게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지 않지만 혹시 다른 아이들 이 신문에 난 기 사에 대해 말하기라도 하면 그 애들이 견디기 힘들 거예요.」 「그 애들의 담임 선생님과 의논해 보죠. 부인의 두 아이들은 아주 훌륭하게 적응하 고 있어요. 따라서 이번 일도 잘 적응할 거라고 믿어요. 아이들이란 회복력이 아주 뛰어 나거든요.」 메건이 손을 내밀었다. 「버츠 씨,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눈 채 서 있었다. 「혹시 개인적인 질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부인께서 이 충격을 어떻게 견디는지 여 쭤봐도 되겠습니까? 살해된 사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 될 텐데요.」 「난 괜찮아요. 미친 사람이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건 이 도시의 거주민 모두에 게 무척 신경 쓰이는 일이 될 거예요. 하지만 난 조심을 할 겁니다.」 「경찰도 어젯밤의 사건이 죽음의 신이 한 짓이라고 믿고 있나요?」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난 공식적인 언급은 듣지 못했어요. 아마 증거를 모두 찾 아 내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그렇겠군요. 조심하십시오, 섬머스 부인.」 그가 그녀의 팔을 붙잡아 주었다. 「그러겠어요.」 그들은 아침 햇살이 부서지는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만 경찰이 범인을 붙잡아야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요.」 버츠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가 다시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경찰이 그를 잡았으면 좋겠어요.」 학교 주차장에서 힘차게 걸어나왔을 때 에드나 애덤스와 폴러드 핀치가 에드나의 집 앞 샛길에서 있는 걸 보았다. 메건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 메건. 괜찮아요? 우리가 도와줄 일이 없어요?」 에드나가 숨찬 어조로 물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난 괜찮아요, 애덤스 양.」 「정말 화가 나서 못 견디겠어요. 살인범이 날뛰고 있으니... 이 지역의 경찰들이 무 능한 바보라니까.」 에드나의 휠체어를 움켜쥔 폴러가 분통을 터뜨렸다. 「선량한 시민들이 범죄의 희생이 되고 있거든.」 「정말 엉망이에요. 그렇죠? 하지만 난 경찰이 최선을 다 하리라고 확신해요. 그들은 범인을 금방 잡을 거예요.」 「메건, 안전하다는 환상은 갖지 말아요.」 에드나가 대답했다. 「에드나의 말이 옳소.」 폴러드가 끼여들었다. 「미친 녀석이 글래디스를 죽였어요. 자물쇠와 경보경, 그리고 경찰의 감시망에도 불 구하고 우린 아무도 안전을 장담할 수가 없게 됐소.」 「두 분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아셨어요?」 「신문에서 봤어요. 1면에 나왔더군요.」 에드나가 대답했다. 「난 아직 신문을 보지 못했어요.」 「몇 분 전에 폴러드는 신문을 보고 거의 심장마비를 일으키려 했어요. 난 이 분을 앉 혀 놓고 주스를 마시게 했죠. 얼굴이 아주 창백했어요.」 「메건, 우린 힘을 합쳐야 해요. 오늘밤 방범회의에 나와 주겠어요?」 「그러겠어요.」 그때 차 한 대가 그들 곁에 멈춰 섰다. 운전석에 잭 갤래거의 모습이 보인다. 그의 머 리칼은 젖어 있고 성급하게 면도를 해서 두 군데나 상처가 나 있다. 아무튼 그의 얼 굴 을 보는 순간 메건은 안도감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잭? 벌써 8시 30분이 됐나요?」 「내가 좀 일찍 왔소.」 그가 차에서 내려 3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가 메건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오늘 아침엔 어떻소? 아이들은 괜찮은가요?」 「난 좋아요. 아이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퍼부어대긴 했지만 괜찮은 것 같았어요.」 그녀는 에드나와 폴러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분은 잭 갤래거예요. 어젯밤 글래디스를 발견했을 때 그는 나를 방문 중이었죠. 잭이 경찰에게 큰 도움이 되어줬어요.」 「메건을 도와줬다니 정말 다행이군요.」 에드나가 말했다. 「그런데 이 근처에 사시나요?」 「그렇습니다. 난 앰허스트에 집을 빌렸어요. 컨트리 클럽 옆에...」 「혼자 살아요?」 폴러드가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네...」 폴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이웃이 된 걸 환영합니다. 우린 방금 방범회의에 관한 얘기를 하던 참이오. 오늘 밤 로버츠의 집에서 열려요.」 그는 한 블록 떨어져 있는 집을 가리켰다. 「메건과 함께 참석하지 않겠소? 이웃 사람들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요.」 「나도 다른 이웃들을 알고 싶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메건 말고는 클로드 호 킨 스뿐입니다.」 에드나가 코웃음을 쳤다. 「그 권총 수집광 말인가요? 갤래거 씨, 우리를 그와 똑같은 부류의 인간으로 판단하 면 안 돼요. 우린 그 미치광이보다는 훨씬 좋은 사람들이에요.」 메건과 잭이 에드나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폴러드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휠 체어를 앞으로 밀고 가며 말했다. 「그럼 오늘밤에 봅시다.」 「안녕히 가세요.」 그녀는 잭의 의아한 표정을 향해 머리를 저었다. 「신경 쓰실 것 없어요. 저 두 분은 아주 좋은 분들이지만 좀 까다로운 경향이 있죠. 나도 호킨스 씨를 만난 적이 있는데 매우 좋은 분인 것 같더군요.」 「신경 쓰지 않소. 그런데 오늘밤 나와 그 회의에 가겠소?」 「난 아이들을 보모에게 데려다 줘야 해요. 하지만 그 집에서 만날 수는 있어요.」 「좋소.」 메건이 길모퉁이를 돌아 거리로 나갔을 때 잭이 입을 열었다. 「클로드 호킨스에 대해서 말해 줘요. 그는 권총을 수집하는 거요?」 「그래요. 하지만 골동품 권총이에요. 그가 주로 관심을 갖는 건 칼과 일본 단검이에 요. 그는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다리 하나를 잃었어요. 그래서 취미와 다리를 바꿨다 고 말하곤 하죠.」 그들은 금방 메건의 집에 도착했다. 그 동안 에드나와 폴러드, 그리고 클로드의 이야 기를 했다. 메건의 집 앞에 차가 멈춰 섰을 때 그녀는 눈에 띄게 긴장했다. 잭은 그 녀 가 순찰차에 기대고 있는 경찰관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는 걸 알아챘 다. 「옷을 갈아입고 오겠어요.」 아파트에 들어가자 그녀가 잭에게 중얼거렸다. 잠시 그녀의 좁은 주방에 앉아 있던 그 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탁 위에 있는 접시와 주스잔들을 치운다는 핑계로 주방에 들 어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집안을 훑어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다. 그는 싱크대 옆에 있는 두 개의 서랍을 열었다. 서랍 하나에는 은그릇이 있고, 다른 하나엔 쿠폰과 수표책이 있다. 그는 재빨리 수표 책을 펼쳐 보았다. 기입장은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수표엔 408달러의 잔고가 남 아 있다. 필요한 돈의 목록은 그 안에 접힌 채 끼워 있는데 앞으로 300여 달러에 달 하 는 돈이 필요함을 밝히고 있다. 또한 서랍에는 우유 값이라는 딱지가 붙은 접시가 있고 그 곳엔 4달러 가량의 돈이 있 다. 그는 잔돈 밑의 종이를 들어내어 그것이 멜버른 소아과협회에서 온 청구서임을 확 인했다. 청구서 록샌 R과 토머스 D. 섬머스의 정기검진과 록샌의 면역체에 관한 보조 주자에 관한 청구서였다. 그리고 맨 밑에 메건이 조심스럽게 연필로 써놓았다. <텔레서브 수표가 4월 1일에 오면 지불할 것> 자신의 저급한 행동에 죄의식을 느끼며 잭은 서랍을 닫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그가 자 리에 앉자마자 메건이 욕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핑크색 블라우스와 검은색의 짧은 면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스커트는 솔기를 따라 빛이 바랜 흔적이 있다. 아마 몇 년 동안 다리미질을 해서 그럴 것이다. 그녀는 밝은 색의 립스틱을 바른 채 다소 신경질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 잭은 그 여자가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메건, 아주 근사하오. 맥머피 경사를 만난 다음 학교에 갈 작정이오?」 그녀는 조리대 쪽으로 걸어가서 싱크대 안에 있는 접시들을 발견했다. 「고마워요, 잭. 식탁까지 청소해 주셨군요.」 그녀는 등을 돌리고 서서 재빨리 접시를 씻어냈다. 「아니에요, 난 앞으로 12주 동안 WABR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게 돼요. 그런 다음 학교 를 끝마칠 거예요.」 「아, 깜빡 잊었군. 당신은 대런 조지와 일하게 됐다고 했지?」 「맞아요.」 「그와 함께 일하는 게 어떻소?」 메건은 잭의 음성에서 경계심 같은 걸 느꼈다. 「좋아요. 아주 유능한 분이죠. 그런데 성질이 좀 급하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죄의식이 느껴져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에 아주 유능해요. 아마 그래서 그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것 같아요.」 「그런 것 같군요.」 「이제 나갈까요?」 그가 일어섰다. 메건은 힐을 신었지만 그가 훨씬 키가 크다. 그가 메건에게 열쇠를 받 아서 현관문을 잠근 다음 확인까지 해보았다. 그들은 말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접근을 불허함. 멜버른 경찰>이라고 적힌 노란색 테이프가 미풍에 흔들렸다. 메건은 자신의 모습이 경찰관의 선글라스에 반사된 걸 알고서 재빨리 고개를 돌려 버렸다. 찻 길에서 벗어났을 때 그녀는 계속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로코보스키 부인은 어떻게 죽어 있었죠?」 경찰서를 향해 차를 몰고 있는 그의 표정이 굳어지고, 기어 변속기를 붙잡은 손에 힘 이 가해졌다. 「칼을 사용한 것 같았소.」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신문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해됐는지 읽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당신은 알고 있나요?」 그는 즉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항로의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가 오른쪽으 로 방향을 틀었다. 그의 대답이 빨리 나오길 기다리면서 그녀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손으로 눈썹을 문질렀다. 「그들은 모두 면도날 같은 걸로 살해됐소. 피살자는 모두 목이 베인 상태였지.」 습기에 젖은 그녀의 손이 목으로 옮겨갔다. 폴러드 핀치의 말이 옳다. 그런 살인을 저 지르는 인간이 가까이에 있는 한 아무도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는 살인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메건은 공포심으로 몸서리를 쳤다. 메건은 딱딱한 의자에서 불편하게 몸을 틀었다. 그녀와 잭은 40분 동안 맥머피 경사 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지만 수사상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경찰서 안에 가동되는 에어컨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손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맥머피는 잭을 단순한 목격자로 보지 않았다. 「자, 갤래거 씨,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그로코보스키 부인을 개인적으로 만난 적 이 있습니까?」 「없소. 그녀와는 전화로만 두 번 얘기했을 뿐이오. 두 번째 통화는 1분도 걸리지 않 았소.」 맥머피가 메건에게 몸을 돌렸다. 「부인은 그로코보스키의 집에서 갤래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메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난 지금 4번째나 같은 질문을 받고 있어요. 그래서 더이상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없 군요. 이건 너무 무례한 행동이 아닐까요, 경사님?」 그녀의 말은 경찰관의 비위를 건드리는 결과가 되겠지만 그녀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잭을 앞에 앉혀 놓고 계속해서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 질문을 하는 건 서로에 게 거북한 짓이다. 「섬머스 부인, 무례하게 굴려던 건 아니었소.」 그가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좋습니다. 이제 두 분은 가셔도 좋아요.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메건은 재빨리 일어섰지만 잭은 그대로 앉아서 팔짱을 낀 채 경찰관을 응시했다. 「<멜버른 프레스>에서 죽음의 신이 경찰관일지도 모른다고 했던 기사에 관한 건 혹 시 당신이 그렇게 주장했던 게 아닙니까?」 「그 녀석은 경찰관이 아니오!」 맥머피가 책상 위의 서류를 집어들며 쏘아붙였다. 「그럼 그게 누군지 단서를 잡았소?」 「아니오. 당신은 어때요, 갤래거 씨?」 「다른 시민들처럼 나도 신문에서 읽은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오.」 「오, 그렇다면 선량한 시민께 한 마디 할까요? 형사 한 사람이 오늘 아침 글래디스 그로코보스키의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다른 5명의 희생자와 불과 5km 이내에 살고 있 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더군요.」 메건은 잭을 바라보았다. 경사의 말뜻을 알아차린 그가 의외로 조용한 표정이어서 그 녀는 다시 한번 놀랐다. 「아주 재미있는 단서로군요. 나도 죽음의 신이 이 지방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선 동 의합니다.」 「당신도 이 지방에서 살고 있죠?」 맥머피는 잭을 노려보며 물었다. 메건은 더이상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단서에 관한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글래디스와 노마 슐츠가 둘 다 텔레서브 조 사단에서 일했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으세요?」 두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아졌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요?」 맥머피가 소리쳤다. 「노마 슐츠의 직업에 대해선... 내 보고서엔 그녀의 고용주 이름이 명기되어 있지 않 소. 부인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요?」 「그녀가 내 밑에서 일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우린 둘 다 같은 회사에 고용됐어요. 메릴랜드에 있는 텔레서브 텔레비전 조사국이에요.」 「그리고 글래디스 그로코보스키도 거기서 일했단 말입니까?」 「그래요. 그녀는 우리의 감독관이었어요.」 잭은 불안한 듯 몸을 뒤척이며 헛기침을 했다. 메건은 그 역시 최근에 같은 회사에 고 용됐다는 사실을 밝혀야 할지에 대해서 망설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가 잡지사에서 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 일자리를 잃고 말 테니 까. 「맥머피 경사님, 내가 텔레서브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쳐줘야 합니다. 그게 내 고용조건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텔레서브의 정보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섬머스 부인, 그런 정보를 알려 줘서 감사하오. 어쩌면 단서를 얻기 위해선 부인에 게 더 많은 정보를 얻어야 할지도 모르겠소.」 「기꺼이 돕겠어요.」 「나도 그러겠습니다.」 잭이 끼여들면서 맥머피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체를 발견한 사내에게 더 물어볼 게 있으면 연락을 주십시오.」 맥머피는 뭔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듯 황망하게 악수를 했다. 그리고 메건에게 고 개 를 끄덕여 보인 다음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서장을 바꿔줘요.」 메건과 잭은 조용히 경찰서를 빠져나와 잭의 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잭, 괜찮아요?」 그가 차문을 열어 주었을 때 메건이 물었다. 「괜찮다니... 그게 무슨 뜻이오?」 「맥머피가 좀 노골적으로 질문을 던졌잖아요. 당신이 글래디스를 알고 있다는 사실 에 대해서 말예요.」 「그는 자신의 업무에 충실했을 뿐이오. 과잉반응을 보일 건 없소.」 그의 말이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다. 「미안해요.」 「왜 내가 텔레서브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소?」 「당신이 일자리를 잃게 될까봐 그랬어요. 그리고...」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맥머피에게 나를 의심할 다른 단서를 주고 싶지 않았소?」 「그래요. 그런데 왜 당신은 그에게 말하지 않았죠?」 「똑같은 이유 때문이오. 아무튼 고마웠소, 메건.」 그녀는 그의 미소에 응답을 보냈지만 그의 주의가 산만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난 지금 텔레비전 방송국에 가봐야 해요. 이 길을 따라가면 되니까 거기까지 태워 다 주시면 고맙겠어요.」 「대런 조지를 만나러 가는 겁니까?」 「그래요.」 메건은 갑자기 그가 혹시 대런 조지를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분은 지난 2년 간 내 지도교수님이었어요. 그리고 내가 원하던 자리를 잃게 됐을 때 날 방송국에 견습생으로 채용해 주셨죠.」 「텔레서브의 고용인은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일을 할 수가 없는 걸로 알고 있소.」 그의 말에 메건의 미소가 사라져 버렸다. 「난 방송국에서 일하는 게 아니에요. 견습생에겐 급료가 없으니까.」 「그래서 텔레서브가 괜찮다고 한 거로군.」 갑자기 그의 지나친 간섭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건 당신이 신경을 써야 할 일이 아닌 것 같군요.」 「그렇군. 그럼 오늘밤 회의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그녀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좋아요. 그럼 그때 당신의 텔레서브 자료를 갖다 주겠어요. 우편으로 보낼 필요가 없잖아요?」 「당신이 편할 대로 해요.」 잭은 메건이 자신의 행동에 당혹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기분이 상하는 자신에게도 놀랐다. 그는 엉뚱하게도 지금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 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글래디스에 대해서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과, 거짓말을 해 서 텔레서브에 지원해야 했던 이유가 그의 뇌리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 간 메건의 음성이 그런 상념을 깨뜨려 버렸다. 그건 따뜻함과 다정스러움이 모두 사 라 져 버린 음성이었다. 「안녕, 잭. 태워다 줘서 고마웠어요.」 「천만에요. 오늘밤에 만납시다.」 메건은 걸어가는 동안 배가 아파왔다. 그건 단순히 시장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려 했지 만 달아오른 뺨의 열기가 그걸 부인하고 있다. 잭 갤래거는 그녀로부터 멀어지려 하 고 있다. 또한 그는 그녀가 여러 가지로 미숙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잭의 차가 다른 방향으로 멀어져 가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더욱 발걸음을 재촉했다 . 이제 내게 닥친 일에 몰두해야 해. 록시와 토머스를 돌보고 학교를 마치는 거야. 그녀는 주어진 연구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죽음의 신은 우연히도 그녀의 삶과 아주 가 까운 곳에 와 있다. 그녀는 그걸 물리치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일 것이다. 그렇다면 잭 갤래거라는 남자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5 메건이 도착했을 때 대런의 사무실은 몹시 분주했다. 대런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타이 를 비스듬히 풀어헤친 채 수화기에 대고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부국 편집장은 게 시 판에 종이들을 핀으로 붙이고 있고 대런의 비서와 리포터인 듯한 아가씨가 바닥에 앉 아서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샌디 로열은 보이지 않는다. 메건은 들어가야 할지 기다려야 할지를 몰라서 사 무실 문 앞에서 잠시 서성거렸다. 「메건! 들어와! 어서!」 대런은 그녀를 바라보며 문을 닫으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리고 바닥에 앉아 있던 여 자들을 바라보았다. 「메건에게 화장을 시켜줘요. 난 C스튜디오에서 10분 동안 인터뷰가 있으니까.」 「화장이라뇨?」 메건은 그의 갑작스런 말에 당황하면서 되물었다. 두 여자 중 하나가 다가와서 메건 의 팔을 잡고 복도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분장실 앞에서 멈춰 섰다. 「잠깐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린, 제발...」 뒤에서 대런이 고함을 질러댔다. 「빨리 서둘러야 한다니까!」 그리고 메건의 팔을 잡고 활짝 웃었다. 「이봐, 조금도 걱정할 것 없어. 대답할 시간을 충분히 줄 테니까.」 린이라는 아가씨가 분장실의 문을 열고, 대런이 그녀를 안으로 밀어넣었다. 「눈물을 흘려도 상관없어. 눈물이란 아주 진한 감동을 주거든. 모두들 메건이 어젯 밤 에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는가에 공감하게 될 거야.」 2명의 청년이 메건에게 다가왔다. 한 사람은 화장 스폰지를,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브러쉬를 들고 있다. 바로 그때 린이 그녀의 뒤에서 문을 닫았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메건은 청년들에게 경고하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마침 열려진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린! 난 인터뷰 같은 건 하지 않아요!」 그 아가씨가 충격에 찬 표정으로 메건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분장실 옆의 문이 활짝 열리고 대런이 걸어나왔다. 그는 하얀 가루분을 얼굴 전체에 뒤집어써서 마치 귀신같은 형상이다. 「메건, 도대체 무슨 일이지?」 대런이 물었다. 「조지 박사님, 난 절대로 어젯밤의 불행한 사건에 대한 인터뷰는 하지 않겠어요. 그 리고 난 텔레비전에 나가고 싶지 않아요. 대중들에게 얼굴이 알려지는 게 싫어요. 엄 마가 뉴스에 얼굴을 내밀면 내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될 거예요.」 메건은 지지를 구하려는 듯 린 쪽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메건 의 시선이 대런에게 모아지고 그녀의 떨리는 음성은 더욱 격렬해졌다. 그의 표정이 분노 로 일그러졌다. 「메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경찰의 수사에 협력할 의무가 있는 거야.」 「난 충분히 협력했어요. 하지만 텔레비전에 얼굴을 비치는 게 경찰을 돕는 거라곤 생 각하지 않아요.」 「알겠어. 하지만 메건이 하는 일은 우리 방송국에 큰 도움이 돼. 그리고 메건의 경 력 에도 도움이 되지!」 그의 은근한 위협이 그녀의 가슴을 무겁게 내리쳤다. 「미안해요. 난 인터뷰는 하지 않겠어요.」 대런이 간단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무릎이 떨려서 견딜 수가 없 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뉴스 사무실 쪽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녀가 대런의 사무실로 향하는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샌디 로열과 정 면으로 마주쳤다. 「안녕.」 「안녕?」 샌디가 허리에 손을 댄 채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도대체 뭘 하는 거요? 난 귀중한 시간을 경찰서에서 낭비하고 있었는데 당신은 여 기 있었던 거요?」 그와 경찰서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걸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샌디, 미안해요. 난 깜빡...」 「깜빡 잊었어요?」 그가 분노에 찬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럼 잊지 않게 해줄까요? 내가 시키면 그대로 해요. 난 그러잖아도 할 일이 많은 몸이오. 대런의 여자에게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단 말이오!」 메건은 그의 말에 화가 나서 숨을 들이쉬었다. 너무 굴욕적이어서 대답할 말조차 잊 고 말았다. 그래서 그대로 몸을 돌려 대런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린과 비서 가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메건도 그들과 함께 앉아서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 시켰다. 특집 리포트의 자막과 함께 대런의 얼굴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멜버른 경찰은 어젯밤 살해된 글래디스 그로코보스키 부인이 죽음의 신 의 여섯 번째 희생자라고 오늘 아침 공식 발표했습니다.」 검시관의 차와 글래디스의 집의 어두운 창문, 담요에 덮인 시체가 화면에 나오는 동 안 메건은 두 손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빡인 다음 다시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모았다. 「그리고 경찰은 이 연쇄 살해범의 단서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트 맥머피 경사 는 내일 오후 4시에 기자회견을 열어서 수사상황을 밝힐 예정입니다.」 대런은 마지막으로 시청자들에게 그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보이고 사라졌다. 그리고 1 분도 되지 않아 대런이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의 험악한 표정을 의식한 아가씨들이 황 급히 그곳을 빠져나가서 그곳엔 성난 앵커맨과 메건만이 남게 됐다. 「뉴스를 봤겠지?」 「메건이 인터뷰를 했으면 훨씬 활기가 넘쳤을 거야.」 그가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들추려는 순간 인터폰이 울렸다. 「왜 그러지?」 「담당 변호사께서 6번 선으로 전화를 거셨어요.」 스피커에서 비서의 음성이 들려왔다. 「숙모님의 유산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세요. 지금 통화하시겠어요?」 대런이 재빨리 메건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니, 변호사에게 오후 2시까지 사무실로 찾아가겠다고 전해 줘.」 그는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메건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무 잘못도 없 이 일방적으로 화풀이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지 박사님, 이제 무슨 일을 할까요? 어제 얘기했던 대로 희생자들의 배경을 조사 해 볼까요?」 그가 따분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샌디에게 가보는 게 어때? 그의 지시를 받아. 아무래도 나의 충고는 별로 흥미가 없 는 것 같으니까...」 메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그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대런의 그런 일면 은 정말 충격적이다. 그토록 학생에게 친절했던 교수의 이기적인 일면을 보게 된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녀는 샌디의 사무실 문을 날카롭게 두드렸다. 대런이 다시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모 습을 드러낼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게 느껴졌다. 7시 10분 전에 메건은 보모네 집의 현관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갔다. 록시와 토머스는 땅콩 버터 쿠키에 정신이 팔려서 엄마가 가는 것도 몰랐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 각하면서 그녀는 로버츠의 집으로 향했다. 메건은 잭에게 줄 텔레서브의 자료뭉치를 다른 손으로 옮겨 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밤의 회의에서도 여러 가지 질문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신에 관 한 질문이라면 어느 것이든 반갑지가 않다. 로버츠의 집에 들어서자 몇몇 사람들이 호 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폴러드 핀치가 에드나와 함께 있는 자 리 로 그녀를 안내했다. 「우린 다른 사람들에게 오늘밤은 메건을 그냥 놓아두라고 말했어요.」 메건이 앉자 에드나가 속삭였다. 「당신이 무척 피곤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고마워요, 애덤스 양.」 20명 정도의 사람들을 훑어보았지만 잭 갤래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상한 실망 감 같은 걸 느꼈다. 클리블랜드 출신의 전직 공장장인 로버츠가 사회를 맡아 회의를 진행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방범 표지판을 구입하자는 데 쉽게 동의했다. 사설 안전회사에 순찰을 맡기자는 문제에 대해서 로즈 시슬러와 마이라 로젠버그 사 이 에 한창 토론이 진행중인데 클로드 호킨스와 그의 딸인 모나가 들어 왔다. 아무튼 안 전순찰에 관한 건 마이라가 필요한 정보를 모두 수집할 때까지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자, 이제 한숨 돌리기로 해요.」 에드나가 속삭였다. 「폴러드는 단풍나무로 몽둥이를 만들었지.」 메건은 에드나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클로드 호킨스의 신경 질 적인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나도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오.」 로버츠가 대답했다. 「오늘밤 당신이 오셔서 모두 기쁘게 생각하고 있소.」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족을 의지해서 일어섰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어요. 누구든 권총이 필요하시다면 싼 값에 제공해 드릴 용의 가 있습니다.」 사람들 틈에서 불안한 음성이 쏟아져나왔다. 집에 권총을 둔다는 생각에 메건은 몸서 리를 쳤다. 「미친 짓이야.」 폴러드가 에드나에게 중얼거렸다. 「클로드 호킨스는 제정신이 아니야. 난 권총을 갖고 있진 않겠어.」 「나도 마찬가지예요.」 메건이 말했다. 「무기를 사용하려다가 오히려 다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모두들 권총 문제로 웅성거리고 있을 때 메건은 잭을 위해 가져온 자료뭉치를 들고 일 어섰다. 「난 보모에게 전화를 걸고 이걸 잭 갤래거의 집에 갖다 줘야겠어요.」 그녀는 바지에서 5파운드를 꺼내서 그중 2파운드를 에드나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표지판 값으로 로버츠에게 전해 주시겠어요?」 「알았어요. 오늘밤엔 문을 잘 잠그고 자요.」 「그러겠어요, 애덤스 양.」 「뭘 좀 들지 않겠소, 메건?」 폴러드가 물었다. 「괜찮아요.」 「메건,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단풍나무로 된 몽둥이를 좀 남겨 놓겠어.」 에드나가 말했다. 로버츠의 집에서 가까스로 보모에게 전화를 걸어 5분쯤 늦겠다고 말 하고는 곧장 잭의 집으로 향했다. 로버츠의 집에서 앰허스트까지는 두 길이 있다. 메 건은 더 가깝다고 생각되는 길을 선택했다. 잭의 집은 길가에 있었다. 그의 차는 간 이 차고 밑의 차도에 서 있었다. 그녀는 현관문을 두드렸지만 거실의 불도 꺼져 있고, 창도 꼭꼭 잠겨 있다. 다시 문 을 두드렸지만 아무 반응이 없다. 메건은 몸을 돌리고 도로를 바라보았다. 혹시 잭은 걸 어서 로버츠의 집에 간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차 안에 자료를 놓고 가면 되겠군. 그녀는 간이차고로 쓰고 있는 샛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차는 잠겨 있었다. 메건 은 실망해서 집 옆을 들여다보았다. 짧은 체인 울타리가 열려진 상태다. 문 옆에 널 빤 지가 있긴 하지만 먼곳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가 곧 자료를 모두 적셔 버릴 거라고 경 고하고 있다. 메건은 손잡이를 가볍게 돌려보았다. 의외로 문이 열리고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플 로리다 사람들은 문단속을 할 줄 모른다니까.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잭?」 그녀는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어둠 속에 익숙해지자 조그맣고 깔끔한 실내의 모습 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반대편 벽에는 세 개의 게시판이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조 심 스럽게 텔레서브 자료를 금속 의자에 올려놓은 다음 뒤돌아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게시판에 붙은 종이의 글귀가 그녀의 뇌리를 치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얼어 붙 고 말았다. 미풍에 그 종이가 펄럭였다. 그 종이에는 큰 문자로 제목이 인쇄되어 있 었 다. <죽음의 신이 다시 살인을 저질렀다!> <세 번째 희생자가 멜버른의 살인마에게 살해 되 다> <경찰은 미친 사람을 추적중> 메건은 충격에 사로잡혀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도대체 잭 갤래거는 왜 이런 것들을 붙여 놓았을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기사마다 몇 개의 구절에 밑줄을 그어 놓았다. 그 중 하나는 글 래디스를 다룬 오늘 아침 조간신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거기엔 <죽음의 신이 6번째 살인을 저지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힘있 는 필치로 하나의 고유명사가 덧붙여 있었다. <메건>이라고... 그녀는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충격을 받았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이름을 만져 보려고 손을 뻗치는 순간, 어떤 소리 때문에 그녀의 주의는 그대로 분산 되어 버렸다. 발소리. 어둠 속을 바라본 순간 문가에 중간 정도의 키를 가진 사람이 말없이 서 있었다. 입과 눈은 음산한 보랏빛의 윤곽이다. 그건 정말 너무나 끔찍한 모습이었다. 메건은 비명을 질러대며 문을 향해 달려갔다. 뒤에서 남자가 그녀를 붙잡았다.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 목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메건은 비명을 질려대며 간신히 한쪽 무릎을 세 우 고 일어나서 문 쪽으로 다가갔다. 사내는 그녀를 붙잡아서 끌어당기려고 했지만 그녀 는 의자를 뒤집어서 그를 쓰러뜨렸다. 그 바람에 텔레서브의 자료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그가 일어서서 책상 쪽으로 다가가 뭔가 숨겨진 물건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메건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자 바닥에 나 뒹굴었다. 메건은 철망을 친 문으로 달려갔다. 빗장이 잠겨져 있어서 손으로 힘껏 내리쳤다. 드디어 문이 열렸다. 메건은 비명을 질 러대며 뒤뜰로 뛰쳐나와 모퉁이를 돌아서 도로 쪽으로 달렸다. 「도와줘요. 누가 나 좀 도와줘요」 한 남자가 거리에서 급히 달려왔다. 「메건?」 잭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오? 메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소?」 「어떤 남자가 당신 집안에 있어요.」 눈물 때문에 목이 막히고 다리는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떨렸다. 잭은 집 쪽으 로 가려다가 메건을 데리고 거기로 가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건, 이제 괜찮소.」 그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길을 건너갔다. 「괜찮아요.」 그는 시슬러라는 문패가 적힌 이웃집의 문을 두드렸다. 노인 한 사람이 나왔다. 「무슨 일이오?」 「시슬러 씨, 난 길 건너에 살고 있습니다. 이 여자분이 내 집에서 강도의 습격을 당 했어요. 경찰에 전화를 걸어주시고 이 분을 집안에 있게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좋아요. 어서 들어와요.」 잭의 그녀의 어깨에서 팔을 뗐다. 「메건, 안에 들어가 있어요. 난 금방 돌아오겠소.」 「안돼요...」 그녀가 잭의 팔을 움켜잡았다. 「거기 들어가면 안돼요, 잭. 그는 미친 사람이에요. 혹시...」 「괜찮소. 난 바보짓은 하지 않을 거요.」 그가 재빨리 그녀를 끌어안고 시슬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직도 그가 거기 있는지 살펴봐야 해요. 메건, 안으로 들어가요. 시슬러 씨, 당 장 경찰에 전화해 줘요.」 그는 메건을 놓아주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를 바라보며 메건은 어쩌면 잭 갤래거가 살아 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을 했 다. 잭은 집의 옆쪽으로 걸어가 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플로리다 룸의 철망문은 열린 상태였다. 마침 호스 밑에 있는 가래를 무기 삼아 집어들고 조심 스럽게 집안으로 들어섰다. 조심스럽게 집안을 살펴보다가 불을 켰다. 집안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집안의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는데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그의 시 전이 게시판에 머물렀다. 그곳엔 스크랩이 잔뜩 붙어 있다. 순간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 급히 가래를 내려놓고 신문 기사를 떼어 책상의 맨 밑서랍에 넣었다. 사이렌 소리 는 점점 크게 들려왔다. 서랍을 닫고 났을 때 그는 책상 옆 바닥에 놓여 있는 칼을 보았다. 그건 자신의 주방 에 있던 20cm정도의 날에 뭉툭한 나무 손잡이가 달린 칼이다. 오, 맙소사, 그 녀석은 메건을 죽일 뻔했어! 「문 열어요. 경찰이오.」 현관문에서 들리는 경찰의 고함소리에 재빨리 자신을 회복했다. 그는 칼을 떨어져 있 던 자리에 놓아두고 문을 열었다. 「당신이 잭 갤래거요?」 담당 경찰관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들어오십시오.」 문밖에는 3사람의 경찰관이 있고, 여자 경찰 한 사람이 시슬러의 집을 향해 걷고 있 었 다. 그녀는 주디 반스였다. 잭은 메건이 그 불친절한 경찰을 보고 흥분하지 않기를 바 랐다. 경찰들이 그의 집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가 바닥에 있는 칼을 가리키자 경찰 관이 그걸 비닐봉지에 집어넣었다. 잭은 두 사내를 따라 뒤뜰로 나왔다. 안에서는 다른 한 사람의 경찰관이 새로 현장에 도착한 경관들에게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 침입자는 뒤뜰의 체인 울타 리를 벗기고 도망친 게 분명 했다. 그 울타리는 포도덩굴로 덮여 있고, 다른 쪽은 나무가 무성한 공터다. 경찰관 한 사 람 이 울타리 위의 뾰족한 부분에 걸려 있는 군청색 천조각을 가리켰다. 「라일리, 저걸 수거하게!」 경찰관들이 울타리를 넘어가 공터를 조사하는 동안 잭은 그대로 마당에 서 있었다. 「갤래거 씨, 안으로 들어오겠소?」 뒷문에서 음성이 들려 왔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알겠소.」 잭은 천천히 뒷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지금 두 가지의 조사에 연루된 셈이다. 한 가지는 대런 조지와 그의 방송국 사람들이 잭의 일자리를 잃어버리게 만든 텔레서브 조사를 조작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 조사는 다시 일자리를 얻게 됐을 때 지체없이 직장으로 복귀할 수 있 도록 죽음의 신 사건에서 버텨내는 일이다. 하지만 벌써 두 명의 텔레서브 고용원이 살해됐고 세 번째로 메건이 습격을 받았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주디 반스 경찰관이 약간은 회의적인 미소를 보냈고, 메건은 멍한 상태로 그의 소파 구석에 웅크리고 앉 아 있었다. 「갤래거 씨, 요즘은 아주 불운하군요.」 주디가 도전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뜻이오?」 「항상 죽음의 신이 출동한 이후에 나타나니 말이에요.」 「우린 누가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오. 안 그렇소?」 잭이 빈정대는 어조로 반문했다. 「그래요. 하지만 우린 반드시 찾아낼 거예요.」 「메건, 괜찮소?」 잭이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잭에게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건 엄 청난 두려움으로 그를 휘감았다. 그는 메건에게 몸을 돌려 그녀의 시선을 똑바로 응 시 했다. 자신의 판단이 틀렸기를 기도하면서... 6 「이걸 마셔요, 메건.」 그녀는 말없이 잭이 내민 커피 잔을 받아들고 꿀꺽 마셨다. 「아주 강하군요. 뭘 넣은 거예요?」 「브랜디.」 잭을 그녀에게 닿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소파에 앉았다. 「괜찮다면 좀더 마셔 봐요.」 메건은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기운이 목에서 가슴으로 퍼진다. 「당신은 연 이틀 밤을 내게 강한 음료를 주는군요.」 「소란한 이틀 밤이었으니까요.」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앨런 부인을 불러 주셔서 고마워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는 8시 조금 넘어서 당신의 아이들이 잠들었다고 했소. 내가 집까지 태워다 주겠소.」 「잭, 당신은 그 남자가 죽음의 신이라고 생각해요?」 「잘 모르겠소.」 「사실 내 진술이 별로 도움이 되지도 못했을 거예요. 중간 키에 나보다는 체격이 크 지만 몸무게가 더 나가는 것 같진 않고, 힘이 센 사람...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전부 였 으니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안했어요. 난 비명을 질러댔고, 그는 날 붙잡았어요.」 그는 다시 두려움을 느꼈다. 범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메건이 그의 음성을 알 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잭은 뒷문으로 다가가서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걸었다. 「내가 바보처럼 문을 열어 놓지만 않았다면 그 녀석이 그리 쉽사리 집안에 들어오진 못했을 거요.」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나도 이 집에 침입했는 걸요. 그런데 당신은 어딜 갔 었 던 거예요?」 「난 걸어서 회의에 갔었소. 그런데 애덤스 양이 당신이 우리집으로 갔다고 하더군. 」 그는 글래디스 그로코보스키의 뒤뜰에 들어가서 집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는지 알 아보려 했던 자신을 저주했다. 그대로 회의에 참석하기만 했더라면 이런 소동은 벌어 지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괜찮소?」 「네, 약간 불안하긴 하지만 괜찮아요.」 「경찰이 말한 대로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건데 그랬소.」 메건이 머리를 저었다. 「그러면 내 아이들이 겁에 질릴 거예요.」 그녀는 몸을 돌려 그를 응시했다. 「당신이야말로 괜찮으세요? 누군가가 집에 침입했는데...」 「난 괜찮소.」 그가 씩씩하게 말했다. 「반스 경관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는데도?」 「그 여자의 신랄한 혀에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소. 아무튼 당신이 왔으니 양식에 대 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해야겠군.」 몇 분 동안 그는 자료를 훑어보면서 전화비용이라든가 요금기록에 관한 질문을 던졌 다. 그런 다음 시청률 조사 동안 집에 없는 사람들을 위한 <시청 불가 계획>에 관한 용지에 대해서 물었다. 그녀는 점차 긴장을 풀어갔다. 그리고 잭의 신경도 느긋해져 갔다. 오늘밤에 일어났 던 그 엄청난 사건에도 불구하고 메건은 잭과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기분이 좋 았다. 잭이 그녀의 빈 커피잔을 받아들었다. 「좀더 마시겠소?」 「아뇨. 그럼 오늘밤 잠을 이루지 못할 거예요.」 잭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짙은 눈동자엔 관심이 담겨 있 고, 입은 굳게 다물고 있다. 「잭,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말아요. 난 정말 괜찮아요.」 「정말 괜찮소?」 잭이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손을 덮었다. 그의 얼굴에 여자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럼요.」 잭이 혀로 입술을 적시며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턱을 움직였다. 메건은 온몸을 휘몰아 치는 현기증을 참고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다른 방 의 시계가 울리는 바람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두 사람은 함께 웃음을 터뜨리고 말 았다. 그 친근한 분위기를 깨버린 눈치없는 시계 때문에... 「이걸 주방에 갖다 두고 당신 아이들에게 가봅시다.」 그는 정말 매력적인 남자다. 그렇다고 그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 그녀는 방안을 훑어보다가 문득 게시판 쪽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런데 그곳에 붙어 있 던 기사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때 잭이 플로리다 룸으로 들어섰다. 순간 메건은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이제, 갈까요?」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신문기사는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기사?」 그건 정말 어리석은 답변이었다. 잭은 그 말이 튀어나온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 다. 메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그에게서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죽음의 신에 관한 기사 말예요. 경찰이 그걸 가져갔나요?」 그녀의 음성이 신경질적으로 들려왔다. 그건 합리적인 해명을 해달라는 애원처럼 들 린 다. 그리고 한 기사의 밑에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던 이유도 알고 싶어했다. 「메건.」 그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려 했지만 여태까지 그 여자를 속여왔던 게 떠올라서 더이상 의 거짓말은 할 수가 없었다. 「메건,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오.」 그는 메건이 자신을 믿어 주길 원했다. 하지만 지금은 신뢰를 얻을 수 없는 상황이라 는 걸 잘 안다. 「경찰이 오기 전에 내가 치웠소. 경찰이 그걸 보길 원치 않기 때문에...」 「왜?」 그녀가 한 발짝 더 뒤로 물러서며 겁에 질린 어조로 물었다. 「그 여자 경찰관과 맥머피 경사가 나와 이 사건이 관련이 있다고 단정할 것 같아서 였 소. 내가 그 기사를 쫓고 있다는 걸 알면 그들이 자기들의 실수를 알아차리는 데 시 간 이 더 걸릴 게 분명하잖소?」 「그들이 잘못 알고 있다는 건가요?」 「그렇소. 그들은 잘못 알고 있소. 난 직업적인 이유로 이 사건을 추적하고 있을 뿐 이 오. 사실 난 작가요.」 그들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 「알겠어요.」 「아니, 당신은 날 믿지 않는군. 메건, 여기엔 당신에게 밝힐 수 없는 사연이 있소. 」 「이유가 뭐죠?」 「당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개인적인 이유일 뿐이오. 자, 당신의 아이들에게 갑시 다.」 메건이 도전적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난 혼자서 갈 수 있어요. 고마워요.」 그녀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잭이 그녀를 붙잡았다. 「내가 당신을 아이들에게 데려다 주겠소. 더이상 입씨름하지 맙시다.」 잭의 표정도 그녀 못지 않게 피로에 지쳐 있다. 「좋아요.」 그들은 차에 올라타서 어둠 속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메건이 그를 바라보 았 다. 그도 메건을 응시했다. 「메건, 절대로 당신을 해칠 일은 하지 않겠소.」 혹시 그가 범죄에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우선 그의 말이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우린 같은 일을 하는 동료일 뿐이에요. 서로에게 상처 입힐 일은 없잖겠어요?」 잭이 공허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기어를 움직여 차를 후진시켰다. 그녀가 기 분이 상해 있는 게 그를 괴롭히진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그 여자가 상처받고 있 는 게 기뻤다. 오늘밤 그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텔레서브 근무자와 죽음의 신이 무언가 관련 이 있다는 사실이 그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리고 대런 조지가 살인자일지도 모른다는 사 실은 그를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사실이 그를 두려움으로 끌고 갔다. 그는 메건 섬머스에게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밝은 색의 립스틱을 칠하고, 낡은 옷을 입은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 여 자의 용기와 자존심 같은 것들이 그의 마음을 여지없이 끌어당겼다. 그는 과거에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며 고통이 다시 찾아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자신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그 애를 껴안았을 때 느꼈던 그런 생생한 감정 같은 것이다. 우연한 상황에서 메건 섬머스가 그의 인생에 들어왔다. 잭은 다시 도로에 시선을 돌렸다. 이 여자를 자신의 인생에 놓아두는 건 자신에게 달려 있다. 메건은 선 안으로 들어서며 애써 분노를 참았다. 4군데의 우체국 카운터에 8명의 사 람 들이 줄지어 있는데도 한 사람의 직원뿐이다. 사람들은 소포 꾸러미를 잔뜩 들고서 줄 지어 서 있었다. 이러다간 크리스마스 때까지 서 있어야 할 것 같군. 그녀는 흘끗 손목시계를 바라보고 다시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았다. 이제 5분 안에 방송국에 도착해야 한다. 그녀는 들고 있던 봉투를 꼭 움켜쥐었다. 오늘 전화요금을 내지 않으면 전화국에서 그녀의 전화를 차단해 버릴 것이다. 드디어 카운터 앞에 있던 여자가 걸어가고 두 명의 다른 남자직원이 교대를 했다. 직 원 하나가 메건에게 그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 1분 후에 메건은 햇빛이 쏟 아지는 거리에 있었다. 그녀는 10파운드와 5파운드를 접어서 지갑에 넣고 영수증은 지 퍼가 달린 주머니에 넣었다. 아이들의 하교길에 잭에게 가서 그의 돈을 돌려 줄 생각이다. 지난밤 그가 앨런 부인 에게 그녀 대신 돈을 지불했던 방법을 떠올리고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가 아주 부드 럽 게 까다로운 아이들을 잠자리에 들게 했던 방법도 떠올렸다. 방송국에 들어서서 그녀는 몇몇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샌디 로열의 사무실 로 갔다. 문 앞에서 노크를 한 다음 그의 책상 옆에 있는 좁은 유리문을 들여다보았 다. 그의 책상은 온통 어지럽혀져 있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다. 「메건? 날 찾는 거야?」 고개를 돌려보니 대런이 서 있었다. 「아니에요, 박사님. 여기서 샌디를 만나기로 했어요. 그를 보셨나요?」 「그는 내 사무실에 있어. 따라와. 코스토스가 몹시 흥분한 상태야.」 그가 메건의 팔짱을 끼고 넓은 회의실 쪽으로 데려갔다. 대런의 친절하고 우호적인 태 도가 놀랍다. 하지만 그의 기분이 변한 걸 원망할 필요는 없다. 회의실에 들어서서 그녀가 샌디의 곁에 앉아 있는 동안 대런은 그녀를 위해 커피까지 갖다 주는 친절을 보여 주었다. 대런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 다시 미 첼 코스토스가 필기하고 있는 칠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건 대런이 죽음의 신에 대 해 서 조사했던 특집 프로그램의 세부사항을 적은 것이었다. 「좋아요. 자, 샌디, 자네는 내일까지 맥머피의 인터뷰 테이프를 입수해야 하네. 우 린 희생자들의 집 모습을 모두 내보내야 하니까. 대런은 6명의 희생자 주변의 이웃들과 접촉해 보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내왔어.」 샌디가 메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기 있는 섬머스 부인이 기꺼이 그로코보스키 사건에 대해 카메라 앞에 서준다면 혹시 묻고 싶은 게 있나요?」 「우린 메건을 이용하지 않을 거야.」 대런이 선언했다. 메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대런이 그녀를 구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시 그 문제로 승강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샌디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로코보스키가 죽음의 신의 희생자라고 생각해야 합니까?」 「다른 증거가 없다면 그래야겠지. 하지만 어제도 말했듯이 난 희생자의 직업에 초점 을 맞추고 싶다네.」 대런이 말했다. 「경찰은 그녀의 살인자가 특정한 조건에 어긋나 있다고 생각한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 」 「어떤 점에서?」 대런이 즉시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다른 피살자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살해됐어요. 그리고 상처 부위도 달라요 . 하지만 구체적인 정보는 알지 못해요.」 「아마 범인은 증거를 남기고 싶지 않았을 거야.」 코스토스가 말했다. 「그 고백이 정통극이냐 아니냐가 밝혀진다면 그들의 능력을 의심받게 될 테니까.」 「괴상한 친구가 벌써 고백을 했나요?」 샌디가 약간은 희망적인 어조로 물었다. 「그래. 위성의 해변에서 온 전직 해병대원이 레이건을 저격하기 전에 찰리 맨슨과 함 께 살았다고 주장하고 있지.」 사람들은 코스토스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건 내 개인적인 의견인데...」 대런이 입을 열었다. 「그 연쇄살인범은 부모의 사랑을 결코 받아 보지 못한 것 같아. 내 생각엔 카메라 앞 에서 고백을 해서 자신의 이야기가 퍼져 가게 하진 않을 거야.」 「그렇다면 경찰이 범인을 체포하긴 더 힘들어지겠군.」 코스토스가 대답했다. 「그 리포트에 매달릴 셈이군요, 대런?」 샌디가 물었다. 「그런 건 아니야.」 대런이 활짝 웃었다. 「추적기사를 내보내면 시청률을 올릴 수 있을 거야. <죽음의 신에 관한 새로운 증거 > 라는 제목이라면 그럴 듯해 보이겠지?」 메건은 그의 말에 점차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재빨리 코스토스에게 시선을 돌 렸 다. 그녀는 가능한 인터뷰 대상자의 명단을 읽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인물이어야겠지.」 「그로코보스키의 시체를 발견한 잭 갤래거란 사내는 어때요?」 샌디가 앞에 있는 필기첩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가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의 말에 메건은 똑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경찰이 주지 못하는 정보를 그가 줄 수 있을 것 같은가?」 코스토스가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메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샌디가 물었다. 「그는 당신의 친구죠?」 「그래요. 그는 경찰에 협력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메건, 그가 살인현장에 대해서 말한 게 없었나?」 대런이 테이블 위로 손을 뻗쳐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의 표 정엔 예전의 적대감이 다시 떠올라 있다. 「아뇨.」 「미첼, 우린 그를 화면에 잡아야 해요.」 샌디가 말했다. 그들 모두가 코스토스를 응시했다. 코스토스가 메건을 손가락으로 가 리켰다. 「그런데 그 갤래거란 친구가 이 분야에서 일한 적이 없었나?」 「난 모르는 사실이에요.」 그녀는 텔레서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들에게 텔레서 브 에서 일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작가예요.」 「WMMB의 뉴스 연출가 중에 갤래거라는 친구가 있었지. 커다란 체구에 잘생긴 외모, 그리고 일밖에 모르는 친구였어. 베이지 색 폴크스바겐을 몰고다니는데 몇 달 전 방 송 국을 그만두었지. 우리 방송국이 그의 프로를 앞질렀기 때문일 거야.」 「해임을 당하기 전에 선수를 친 거죠.」 대런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작년에 그는 에이즈와 십대의 임신에 관한 연속물을 다뤘죠?」 「맞았어. 에미 상을 몇 번 수상하기도 했지.」 코스토스가 말했다. 대런의 몸이 굳어졌다. 「에미 상은 정치적인 뇌물에 지나지 않아요. 그렇게 감명 받으실 건 없어요.」 「대런이 상을 받기 전까진 그렇지 않았어요.」 샌디가 끼여들었다. 두 사내가 서로 적대적인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곧 코스토스 가 끼여들었다. 「아무튼 바로 그 사내가 아니라서 정말 유감이로군. 갤래거란 친구였다면 사실을 기 억해낼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코스토스는 다시 칠판 쪽으로 갔다. 「좋아요. 자, 내일 소형 카메라를 보내서...」 메건은 애써 관심을 회의에 집중시켰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 어 버렸다. 만약 잭 갤래거가 코스토스가 알고 있는 갤래거와 같은 인물이라면, 그는 자신의 과거를 속인 셈이다. 그녀는 땀에 젖은 손을 옷자락에 문질렀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그녀의 일뿐만 아 니 라 텔레서브의 일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갑자기 죽음의 신에 관 한 기사로 덮여 있는 게시판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메건은 잭의 현관문을 두드리고, 모퉁이에서 기다리는 아이를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너희들은 그대로 서 있어야 해. 길거리에 다가가선 안돼.」 「알겠어요, 엄마.」 록시와 토머스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늘이 불길하게 쿵쿵 울렸다. 그리고 아직 도 시장에 가야 할 일이 남아 있다. 곧 문이 열리고 잭의 놀란 얼굴이 그녀를 맞이했다. 「메건! 여기서 뭘 하는 거요?」 메건은 그에게 빚진 5달러 짜리 지폐를 불쑥 내밀었다. 여전히 잘생기고 매력적인 모 습이지만 애써 그를 외면해 버렸다. 「어젯밤에 당신에게 빌린 돈이에요.」 그는 팔짱을 낀 채 거리를 바라보았다. 「왜 아이들은 저기 있는 거요?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와요. 함께 뭘 좀 마시기로 합 시 다.」 「그럴 수가 없어요.」 그녀는 돈을 흔들어 보였다. 「이걸 받으세요.」 「아니, 난 그걸 받지 않겠소.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요.」 메건은 숨을 내쉬고 돈을 다시 상의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솔직하게 털어 놓는 게 좋을 것 같다. 「당신은 6개월 전에 팜 베이의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뉴스 연출자로 일한 적이 있나 요 ?」 그가 눈을 깜빡인 다음 몸을 돌렸다. 「메건,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그럼 그게 사실이었군요!」 그에 대한 실망감은 곧 분노로 변했다. 「나쁜 인간, 거짓말을 하다니... 당신은 해고예요! 당신은 나의 모든 조사와 나의 일 자리까지도 위태롭게 만들고 있어요. 난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려 드 는 인간은 믿을 수 없어요.」 그가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지만 휙 뿌리쳐 버렸다. 「이러지 말아요.」 「당신이 내게 기회를 준다면 난 해명을 하고 싶소.」 「난 이미 당신에게 기회를 줬었어요.」 바로 그때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으므로 그녀는 황급히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늘에서 번개가 치면서 엄청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전만한 빗방울이 쏟 아 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잭의 잔디 한가운데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록시, 토머스! 그만해!」 그녀는 몸을 돌려 세찬 빗방울 속을 달렸다. 그리고 아이들을 도로로 끌어내서 간이 차 고 밑에 세워 두었다. 아이들의 낄낄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녀의 분노는 조금 가 라 앉았다. 어느새 잭이 간이차고 쪽으로 와 있었다. 그는 아이스캔디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얘들아, 엄마와 내가 비를 어떻게 피할까를 의논하는 동안 이걸 먹고 있겠니?」 「우린 갈 거예요.」 메건이 냉정한 어조로 대꾸했다. 「이 빗속을 말이오?」 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가 아이스캔디를 록시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록시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커피를 들겠소?」 그가 록시에게 물었다. 「싫어요.」 「그럼 아이들이 아이스캔디를 먹는 동안 현관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소?」 「아직도 거짓말할 게 남아 있나요?」 잭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겠소.」 「좋아요. 하지만 당신을 해고시키겠다고 한 건 진심이에요. 그건 우리의 규정이에요 . 」 「이해하오. 그런 규칙이 있어야 텔레서브가 더욱 존경스럽고 괜찮은 회사로 보일 거 요.」 잭은 천천히 자신의 직업에 관해서 털어놓았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의 일을 상세 히 설명한 다음 작년에 있었던 일을 말하면서 말을 멈췄다. 「최종 결과는 내가 유능한 것으로 나타났소. 급료도 아주 좋았소. 하지만 난 바로 그 일을 우선 순위에 두는 바람에 아내와 아이를 잃고 말았소. 하지만 난 스스로에게 그 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했지. 난 일주일에 60, 70시간을 일했소. 내겐 다른 사람을 그리워할 여유가 없었소. 아무튼 모든 게 잘되어 갔소. 난 많은 프로그램을 맡았고, 방송국과 스폰서에게서 상도 받았지. 난 통계조사를 통해서 사람들이 뉴스에서 보다 깊이 있는 걸 원한다는 걸 알아냈소. 그래서 경영진 이 날 철저히 후원해 줄 거라고 확신했소.」 「그런데 왜 해고당한 거죠?」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9월의 텔레서브 시청률 조사 결과 우리 방송국이 예전의 조사보다 무려 9천여 명의 시청자를 잃어버렸음이 드러났소. 그건 방송국 역사상 가장 큰 폭의 시청률 하락이었 소.」 순간 메건은 분노를 떨쳐 버린 채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그들이 당신을 문책했군요?」 「그렇소. 난 어느 연출자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갖고 있었소. 그러니 내가 문책을 당 하 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 그녀는 유심히 그를 살펴보았다. 그건 정직하고 비참한 자의 모습이다. 그녀의 분노 는 훨씬 가라앉았다. 「그런데 왜 당신은 죽음의 신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거죠? 당신은 다시 방 송 국으로 돌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중인가요?」 「결국은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소. 죽음의 신은 아주 대단한 뉴스요. 내가 다시 뉴 스 프로그램을 맡게 됐을 때 그 뉴스에 대해서 환히 알고 싶기 때문이오.」 「그럼 이 일이 나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당신이 텔레서브의 일자리를 택한 건 복수를 하기 위해서인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거친 표현이긴 하지만 대강 맞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내가 복수를 하려던 건 텔레서브가 아니었소. 조사 결과를 조작한 텔레서브의 직원이 그 대상이지」 「조사 결과를 조작했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시 부아가 치밀었다. 아이들의 음성이 높아지고 있었으므로 그쪽으로 가봐야 했지 만 그녀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나도 누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소. 하지만 누군가 그런 짓을 했다는 증거를 갖고 있 소.」 「증거?」 그가 일어서서 에바 메리트에게서 온 편지를 말없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친애하는 갤래거 씨 내 이름은 에바 메리트예요. 지난달에 난 텔레서브 조사국에서 일 한다는 한 여자의 연락을 받았어요. 난 그녀의 조사에 참여하기로 동의했답니다. 내 가 이렇게 편지를 쓰는 건 불평을 하기 위해서예요. 조사일지를 받아 놓은 직후 한 남자 가 내게 전화를 했어요. 그는 자신의 이름이 마틴이라고 밝히고, 내게 대런 조지의 W A BR뉴스를 본다고 하라고 충동질을 했어요. 그는 멜버른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 고 있는 스폰서가 제공하는 보너스를 받게 될 거라고 말했어요. 그 마틴이라는 사람 이 야말로 멜버른이 성장하는 걸 돕고 싶어하는 사람 같더군요. 아무튼 당신의 방송국에 서 이 문제를 내 대신 캐내 주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읽는 동안 메건의 가슴이 들끓었다. 그 편지를 보낸 날짜는 5개월 전으로 되 어 있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텔레서브는 절대로 이런 식의 압력은 넣지 않아요.」 잭이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메릴랜드에 있는 감독관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려야겠어요. 당신은 이 편지 를 보고서 다른 조처를 취했나요?」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소. 미국 연방 통신위원회에 이 편지의 복사본을 보냈고, W A BR의 셔먼 로열에게도 보냈지. 그런 다음 메리트 부인을 만나기로 약속을 했소.」 잭의 턱이 분노로 인해 굳어졌다. 「그녀가 달리 한 말은 없나요?」 「그녀를 만나러 갔을 때 그녀는 이미 죽어 있었소. 며칠 전에 익사했다더군.」 「맙소사! 정말 끔찍한 일이군요.」 「끔찍하고도 의심스러운 일이지. 메리트 부인은 휠체어에 갇혀 있는 몸이었소. 그녀 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가 수영장 근처에 가는 걸 보지 못했다 고 했소.」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서 과잉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 같군요. 경찰은 뭐라고 했죠? 」 그가 매섭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들은 그것이 사고 때문이라고 했소. 미국 연방 통신위원회는 조사에서 손을 떼고 그 조사에 참여한 다른 시민들과 접촉하길 거부했소. 그리고 셔먼 로열은 아무런 편 지 도 받은 바가 없다고 했지. 결국 거기서 사건은 끝나 버린 거요.」 「아무튼 상관에게 그 편지의 사본을 보내겠어요.」 「고맙소. 누가 에바 메리트에게 전화를 걸었는지는 몰라도 아마 그 스캔들을 잠재 우 기 위해서 더 큰 범죄를 저지르게 된 걸지도 모르오.」 「어떤 범죄 말이죠?」 메건이 소리쳤다. 「누군가 늙은 부인을 수영장에 밀어넣었단 말인가요?」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대런 조지가 모든 걸 계획했다고 말할 참이군요!」 「그에겐 그런 의심을 살 여지가 아주 많소.」 메건은 잭의 검은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 놀라움은 곧 공포심으로 변했다. 「하지만 왜 그가 그런 짓을 하죠? 당신은 그가 죽음의 신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건가 요?」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난 대런 조지가 죽음의 신일 거라고 생각하오.」 7 잭이 대런 조지를 텔레서브 사기사건과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동안 메건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에바 메리트의 사건과 별도로 글래디스와 노마 슐츠가 둘 다 텔레서브의 고용인이 라 는 점이 정말 이상해. 그리고 당신마저 공격을 당했으니...」 「당신의 집에서 그랬었죠.」 「그 사실이 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소.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텔 레서브의 고용원이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이 주장한 대로 그 조사 결과가 조작돼서 그와 함께 일한 사람을 침묵 시 키려 했다면 왜 당신까지 공격했을까요? 그리고 죽음의 신이 관련되어 있다면 왜 텔 레 서브의 고용인이 아닌 사람까지 살해했죠?」 잭이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 점에 대해선 확실한 해명을 할 수 없소.」 갑자기 샌디 로열이 말했던 정보가 떠올랐다. 「오늘 방송국에서 경찰은 글래디스가 죽음의 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살해됐을지 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잠깐만.」 그가 아이들이 듣기를 원치 않는 듯 고개를 저으며 복도 쪽을 가리켰다. 「너희들 아이스캔디를 다 먹었니?」 메건이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하나 더 먹어도 돼요?」 토머스가 물었다. 「토머스...」 「엄마만 괜찮다면 나도 좋아.」 잭이 대답했다. 「이제 곧 저녁을 먹어야 해. 손씻고 가게에 가는 게 좋겠다.」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잭의 욕실로 가서 씻겨 주었다. 잭은 록시가 친구인 캐리에 대해 조잘대는 동안 아이의 코트와 장화를 신겨 주기도 했다. 토머스는 말없이 잭을 바라보았다. 메건은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어젯밤 그 애는 자 신을 침대에 데려다준 아저씨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었다. 「좋아, 얘들아. 아저씨에게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고마워요, 아저씨.」 「고마워요, 갤래거 씨.」 록시가 그를 잠깐 끌어안고 엄마를 따라 문 쪽으로 걸어갔다. 「메건.」 잭이 그녀를 불렀다. 「이 문제는 나중에 얘기하기로 해요.」 그녀는 두 아이의 어깨에 손을 댄 채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함께 가도 괜찮겠소? 난 할 일을 모두 끝냈소. 모두 함께 시장에 가지. 그 다 음엔 내가 맥도널드에 가서 저녁을 사겠소.」 아이들이 탄성을 질러댔지만 메건은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잭을 바라보았다. 「고맙긴 하지만...」 「엄마, 난 맥도널드에 가고 싶단 말예요.」 토머스가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엄만 한 번도 우릴 거기에 데려가 주지 않았어요?」 메건은 아이들의 성화 때문에 잭의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3사람과 데이트를 하려면 힘들겠군요.」 잭을 따라 밖으로 나오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그가 아이들의 안전띠 를 매어 주는 동안 메건은 차 옆에 서서 기다렸다. 그런데 뒤에서 계속 문 두드리는 소 리 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모나 호킨스가 옆문의 커다란 창가에 서 있었다. 메건이 손을 흔들었지만 그 소녀는 웃지 않았다. 소녀는 두드리는 걸 멈추고 메건을 바라보더니 그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메건은 무성한 잔디밭과 도로를 건너서 소 녀에게 다가갔다. 모나는 창가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있었다. 「안녕, 모나.」 모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메건이 읽을 수 있도록 창가에 종이 한 장을 들이댔다 .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린 순간 메건의 미소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건 텔레서 브 임원의 봄철용 리포트였다. 거기엔 텔레서브 고용인들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업무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낯익은 글씨체로 맨 꼭대기에 <메건>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건 글래디스 그로 코보스키가 살해되던 날 밤에 가져가라고 했던 바로 그 서류다. 「메건?」 그녀는 잭의 음성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리 오세요.」 그녀는 잭에게 손짓을 하고는 다시 모나에게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창은 이미 텅 비 어 있고, 무거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무슨 일이오?」 잭이 그녀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모나. 그 애가 글래디스가 내게 주려던 직원 보고서를 갖고 있어요.」 「그녀가 살해된 날 밤에 경찰이 찾아내지 못했던 것 말이오?」 「그래요.」 그녀는 다시 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커튼이 드리워진 상태다. 잭이 그녀의 팔을 꼭 잡았다. 「아이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문을 두드려 보겠소.」 「경찰을 불러야 할까요?」 「모르겠소. 우선 그 애가 어디서 그걸 찾아냈는지부터 알아봅시다.」 메건은 기다리다 지쳐서 화가 나 있는 아이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문을 두 드 리는 걸 바라보았다. 하지만 현관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다. 그때 길에서 차소리가 들리면서 클로드 호킨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낡은 트럭 위에 앉아서 그녀에게 고 개 를 끄덕여 보인 다음 차를 세웠다. 「안녕하세요, 섬머스 부인.」 그때 뒤에서 록시가 소리쳤다. 「엄마, 언제 맥도널드에 가는 거야? 」 이어서 토머스가 울음을 터뜨렸다. 「버니를 데리고 오는 걸 잊었어.」 「무척 바쁘시군요.」 클로드가 껄껄 웃으면서 다리를 절룩이며 차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얘야, 엄마는 클로드 할아버지와 얘기하게 내버려두려무나.」 그가 상의 호주머니를 뒤져서 박하사탕 몇 개와 확실히 알아볼 수 없는 얇고 빛나는 물체 두 개를 꺼내 창문 틈으로 아이들에게 건네주었다. 「호킨스 씨?」 클로드는 아이들에게서 몸을 돌려 잭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있었나, 갤래거?」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섬머스 부인과 내 부탁을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무슨 일이지?」 잭과 메건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모나에게 잠시만 밖으로 나와 달라고 부탁해 주시겠어요?」 메건이 말했다. 「그 애가 창문을 통해 보여줬던 종이를 보고 싶거든요.」 「어떤 종이 말이오?」 「타이핑한 목록이에요.」 「호킨스 씨, 우린 모나가 그걸 어디서 났는지 알아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건지도 모 르거든요.」 잭이 말했다. 클로드는 입에 물었던 파이프를 빼냈다. 「설마 장물 같은 건 아니겠지? 우리 아이가 못된 물건인지 모르고 갖고 있을지도 모 르잖아?」 「그런 게 아니에요.」 메건이 그를 안심시켰다. 「아마 모나는 그걸 길거리에서 주웠을지도 몰라요. 우린 단지 그게 어디서 났는지 알 고 싶을 뿐이에요.」 「모나는 나 없이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클로드가 다시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난 그 애가 뭘 줍는 걸 보지 못했어요.」 그의 음성엔 평상시의 다정함이 사라졌다. 잭은 그가 긴장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호킨스 씨, 아무도 그 애를 비난하지 않을 겁니다.」 「틀림없는 거지, 갤래거?」 클로드는 날카롭게 말하고 집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가서 알아보겠네.」 클로드를 바라보면서 메건은 잭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모나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어요. 언젠가 학교에서 모나가 이웃집에 예고도 없 이 침입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약간 문제가 있어서 경찰도 출동했다고 하더 군 요. 아마 클로드는 우리가 소동이라도 부릴까봐 걱정이 되나 봐요.」 「언젠가 그 애가 밤에 걷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소. 말을 시켰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 더군.」 「혼자서 걸어나왔다는 건가요?」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클로드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소.」 그때 클로드가 집에서 나와서 그의 트럭 곁에 섰다. 「섬머스 부인, 모나는 그 목록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소.」 「하지만 난 봤어요. 몇 분 전에 분명히 그 애가 그걸 들고 있었어요.」 「부인이 뭔가 착각한 것 같군요.」 그가 파이프로 잭을 가리켰다. 「내가 여기 없을 땐 우리집 근처에서 떠나 줬으면 좋겠군.」 그리고 그는 다시 그의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엄마! 정말 가는 거야?」 록시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정말 그걸 본 거요?」 잭이 물었다. 「틀림없어요. 그런데 그 앤 그걸 어디서 났을까요? 만약... 만약 살인자가 그걸 길 거 리에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과잉반응을 보이지 말아요. 앰뷸런스 운전사가 떨어뜨렸거나 경찰이 빠뜨렸을 가능 성도 있잖소?」 「난 과잉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에요. 어쩌면 그 앤 그걸 당신의 마당에서 주웠을지 도 몰라요.」 「나의 마당?」 「어젯밤에 침입자가 있었잖아요? 어쩌면 그가 갖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만약 그가.. . 」 메건은 입술을 핥으면서 말을 멈추고 말았다. 「만약 그가 글래디스의 집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그가 당신이 텔레서브의 고용인이라 는 걸 알게 된 이유가 해명이 되는 거예요.」 잭이 사나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훌륭한 추리요. 난 이 범죄가 텔레서브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를 찾아내고 싶 소.」 「몇 분 전에 당신은 그 사실을 확인했잖아요.」 「그렇소.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확실하지가 않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어요. 우린 맥머피 경사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해요.」 그는 무의식적으로 진한 한숨을 토해냈다. 「좋아. 하지만 우선 인디언들의 배를 채워 줍시다. 우리도 뭘 좀 먹고 나면 기분이 훨씬 좋아질 거요.」 메건도 그의 말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그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머피에게 전화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 경찰관은 잭의 차를 메건의 집 앞 도로에 세 웠을 때 거기서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들 하십니까?」 그들이 차에서 내리자 맥머피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메건은 두 남자를 집안으로 안내해서 자리에 앉게 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욕실에 보 내 씻게 한 다음 경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번엔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내 사무실에서 의논하던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이 있어서 온 겁니다.」 맥머피는 잭을 바라보다가 메건을 향해 미소지었다. 「내가 시간을 잘못 맞춰서 온 거라면...」 「지금이 몹시 바쁜 시간이긴 하지만 몇 분 정도는 여유가 있어요.」 맥머피가 시선을 잭에게 돌렸다. 「무례하게 굴려는 건 아니지만 이 대화는 살인사건의 수사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 「그래서 내가 자리를 비켜주길 원하신다는 거군요? 좋습니다.」 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잭, 잠깐만요.」 메건이 잭을 붙잡았다. 「경사님, 난 잭이 자리를 떠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사실 잭과 난 오늘 일어 난 일에 대해 경사님에게 할 말이 있어요.」 잭이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동안 메건은 모나 호킨스가 갖고 있던 목록에 관해 자세히 털어놓았다. 「분명히 그걸 봤소?」 맥머피가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봤어요.」 「당신도 그걸 봤소?」 그가 잭에게 물었다. 「아뇨.」 맥머피는 닳아빠진 수첩을 꺼냈다. 「텔레서브의 두 고용인이 죽음의 신에게 살해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 잘 알고 있겠 죠?」 「그렇소. 사실은 나 역시 텔레서브의 고용원이오.」 「뭐라고요?」 맥머피가 메건을 바라보았다. 「섬머스 부인은 나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데...」 메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은 경사님이 알아야 할 사실이 또 있어요. 잭, 이분에게 에바 메리트가 보낸 편 지에 대해서 말하세요.」 그는 메건에게 내키지 않은 듯한 시선을 보내고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뉴스 당담자였군요.」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맥머피가 말했다. 「그렇소. 앞으로 다시 그 일자리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오. 지금은 거기에 속해 있 지 않지만...」 「뉴스 담당자는 완전히 우연적인 사건에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하더군요.」 「그건 경찰관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맥머피가 껄껄 웃어댔다. 「그럴지도 모르죠. 아무튼 어젯밤 누군가가 침입해서 경찰이 출동했을 때 당신은 이 사실을 반스 경관에게 밝혀야 했소.」 그 좁은 공간에서 메건의 신경은 그대로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맥머피의 음성엔 의 심이, 그리고 잭의 음성엔 긴장이 담겨 있다. 메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그냥 두고 욕실로 갔다. 아이들의 몸을 닦아주고 잠옷을 입힌 다음 잭에게 밤인사를 하라고 보내고는 아이들 방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잭이 두 아이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아이들의 표정엔 기쁨의 미소가 서려 있다. 맥머 피가 두 사람의 관계를 오해할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아이들의 행복한 표정이 그 런 우려감을 말끔히 씻어냈다. 「메건, 아이들이 아주 묵직하군. 아무래도 이 녀석들은 다이어트를 해야 할 것 같소 . 더이상 치즈버거를 먹여선 안되겠어요.」 잭이 아이들을 차례로 침대 위에 떨어뜨리자 아이들은 기쁨의 탄성을 질러댔다. 「안녕, 얘들아. 나와 함께 놀아줘서 고마웠다.」 그는 두 아이들의 뺨에 차례로 키스했다. 그리고 메건의 무릎을 꼭 잡아 주었다. 「난 이만 가봐야겠소. 괜찮겠소?」 「물론이에요. 저녁식사는 정말 고마웠어요.」 「좀더 있다 갈까요? 좀더 얘기를 해도 좋소.」 메건은 가슴에 퍼져가는 그리움의 파장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오늘밤에 돌아가야만 한다. 「아니에요. 난 조사를 위해 전화를 걸어야 해요. 그리고 당신의 업무를 맡아줄 사람 을 고용해야 하고요. 그러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난 해고되는 거요?」 「그래요.」 「좋소. 하지만 내일 당신을 만나고 싶소.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면 경찰이 놓친 걸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오.」 그의 요구가 놀라웠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지금 실습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뭔가 겹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 르겠군요.」 아이들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게 거북해서 메건은 몸을 일으켰다. 아이들의 뺨에 키 스 해 준 다음 그 방을 나섰다. 방을 나오면서 팔이 잭의 가슴을 스쳤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재빨리 문가로 나왔다. 「경사님께 아무것도 대접하지 못했군요. 커피 좀 드시겠어요?」 메건은 허둥지둥 맥머피 경사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잭이 맥머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을 주십시오.」 두 사내는 악수를 교환했다. 「그러겠소. 그리고 메리트란 여자의 익사사건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겠소.」 「감사합니다.」 맥머피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어젯밤의 충격에선 회복이 됐소?」 잭은 손을 현관문 손잡이에 얹은 채 말했다. 「네. 경사님이 어제 내에 나타나지 않아서 놀랐소. 순찰 경관이 경사님은 어떤 강도 사건이든 보고를 받게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특히...」 잭은 아직도 깨어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고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그처럼 특별한 사건에는...」 「그렇소.」 맥머피는 잠시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어제 근무조가 아니었소.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가 그 얘길 전해 주지 않 았소. 그래서 오늘 아침 보고서를 읽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지. 하지만 그 일이 우 리의 수사와 관련이 있다고 확신하지 않아요」 「그래요?」 잭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우발적인 강도사건이라고 생각하신다는 건가요?」 메건이 나섰다. 「잭도 텔레서브의 고용인인데도요?」 「그렇소. 그 사건은 전혀 달랐어요. 죽음의 신은 아무도 살려 주지 않아요. 그리고 그 칼... 그 칼도 범인이 사용하던 게 아니오.」 메건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떤 칼 말인가요?」 잭이 맥머피와 시선을 교환한 다음 황급히 해명했다. 「메건, 내 부엌칼 하나가 책상 옆 바닥에 떨어져 있었소. 당신도 그걸 알고 있으리 라 고 생각했는데...」 「난 모르고 있었어요.」 맥머피가 다가와서 메건의 팔을 두드렸다. 「불안해하지 말아요. 자, 이제 좀더 세부적인 사항으로 들어가 봅시다.」 잭은 맥머피의 무신경에 화가 났다. 그리고 갑자기 맥머피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느 껴졌다. 하지만 이제 그가 할 일은 없다. 「잘 자요. 곧 연락하겠소.」 「고마워요, 잭.」 그는 곧 문을 닫고 사라져 버렸다. 「아주 좋은 친구 같군요.」 맥머피가 말했다. 「그래요. 자,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서장님은 이 사건을 텔레서브와의 관련성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고 있어요. 전날밤 그로코보스키의 집에서 가져온 자료들을 판별하는 데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자료?」 「모두 텔레서브의 물건이었소. 그건 그녀의 침실에 흩어져 있었고, 벽장에도 쌓여 있 었소. 아마 뭔가 관련이 있는 것 같소.」 다시 등골이 서늘해졌다. 「물론 돕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어요. 그 서류가 어떤 서류인지 밝혀 달라는 건가요? 」 「그렇소. 양식을 설명해 줘요. 그리고 아직도 고용되어 있는 사람들도 알려 줘요.」 「좋아요.」 메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걸 여기에 가져오셨나요?」 「아래에 두고 왔소. 시간만 괜찮다면 내가 가서 가져오겠소.」 메건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8시 25분이다. 지금 텔레서브 전화를 시작하지 않으 면 내일 오후까진 시간을 내지 못한 것이다. 「그걸 놓아두고 내일 오시면 안될까요? 오늘밤엔 전화할 곳이 많거든요.」 「그게 좋겠군요.」 멕머피가 일어서서 수첩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난 그 자료들을 금요일까진 다시 그녀의 집에 갖다 둬야 합니다. 그녀의 유언집행 자 가 그걸 가져가야 하거든요. 명백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걸 제외하곤 어느 것도 내가 갖고 있을 수가 없어요.」 「유언집행자라뇨? 그게 누군데요?」 「그의 이름은 모르겠는데 조카라고 하더군요. 그의 변호사가 오늘 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의 수사가 다 끝났는지 물어 봤소.」 「그렇다면 나도 인사를 해야겠군요. 새로운 집주인이 되는 셈이니까.」 맥머피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가 상자 두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악 수를 청했다. 「섬머스 부인, 우리의 수사에 협조해 줘서 정말 고맙소. 그리고 어젯밤에 일어난 일 은 정말 안됐어요. 서장이 밤에 이 지역에 두 대의 순찰차를 배치하라고 명령을 내렸 소. 그러니 경찰을 보더라도 겁먹지 말아요.」 「고마워요, 경사님.」 메건은 처음으로 맥머피의 눈동자가 이상한 색깔이라는 걸 알아챘다. 거의 노랑에 가 까운 연한 갈색의 눈동자는 마치 저녁 그림자에 비치는 유리 같다. 「문 잠그는 걸 잊지 말아요.」 「그러겠어요.」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오, 경사님?」 「네?」 「다른 사람들에게도 죽음의 신에 대해서 경고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에게 겁을 주자는 건 아니지만 조심하라고 말할 필요는 있잖아요?」 경관은 격렬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절대로 안됩니다. 그런 짓은 하지 말아요. 그러면 우리의 수사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도 위험에 처하게 돼요. 더구나 고용원들은 알리지 않게 되어 있다고 하잖았소? 그랬다간 당신의 기사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게 될 거요.」 「그리고 난 일자리를 잃게 되겠군요. 좋아요, 경사님의 말에도 일리가 있군요.」 「잘 자요, 섬머스 부인.」 그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된다는 걸 명심해요.」 「안녕히 가세요.」 그녀는 문을 잠그고 나서도 제대로 잠겨졌는지 다시 확인한 다음 한숨을 내쉬면서 간 이식탁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6명의 조사원에게 전화를 건 다음, 미셀 잭슨에게도 전화를 걸어 아직도 인터뷰 일에 관심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쪽 의 제의를 거부하고 말았다. 「맙소사!」 메건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잭이 하던 일까지 몽땅 그녀가 떠맡아야만 한다. 갑자기 더이상 일할 기력이 없어졌다. 그녀는 아이들의 잠자는 모습을 확인한 다음 욕 실로 들어가서 샤워를 했다. 그 차가운 물줄기가 그녀의 정신을 아찔하게 했다. 다시 뜨거운 물을 틀었지만 물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메건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신경질적인 자신의 음성을 들으며 깊은 한숨을 들이 쉬었다. 욕실에서 나와 잠옷을 입고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여보세요.」 세 번째 벨이 울리고 상대방이 나왔을 때 그녀는 애써 상냥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이름은 앤 데이비스예요. 텔레서브 조사국에서 근무하고 있죠. 당신의 가정은 전 112국 텔레비전 조사에서 임의로 선정된 대표자로서...」 「우린 텔레비전을 보지 않아요. 나쁜 소식투성이니까요. 살인, 마약... 이제 그런 것 들엔 진절머리가 나요.」 메건은 한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아주 지루한 한밤이 될 것 같다. 8 「메건, 뭐 쓸 만한 기삿거리라도 있어요?」 샌디 로열이 회전의자에 몸을 기댄 채 사무실 벽에 튀어 오르는 핸드볼을 받고 있다. 실내의 공기는 그가 피워댄 담배연기로 인해 무척 혼탁하다. 「난 몇 가지 기록을 했는데,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희생자들이 모두 소규모 사업 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거였어요. 어쩌면 죽음의 신은 불만을 품은 고객인지 도 몰라요. 영업기록을 입수할 수만 있다면 서로 비교를 해서...」 「하지만 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그리고 아무도 슐츠라는 여자가 텔레서브에 서 일하고 있다는 걸 몰랐잖아요?」 「그래요. 하지만 조지 박사님은...」 「메건, 당신은 지금 날 도와서 일을 하고 있는 거요. 그리고 그밖에 알아낸 건 없나 요?」 「희생자들은 모두 같은 우편번호를 쓰는 구역에 살고 있었어요. 그리고 모두 오후 늦 게 살해됐죠.」 「글래디스 그로코보스키만 예외로군요?」 「그래요. 당신 부서에선 글래디스가 죽음의 신의 희생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만한 정보를 알아냈나요?」 「아직...」 「그리고 첫 번째와 네 번째 희생자의 경우는 살인자가 나타난 시간에 초인종이 울렸 다고 했어요.」 「초인종?」 「그 두 희생자는 아파트에 살았어요. 따라서 이웃들이 초인종 소리를 들을 수 있었 던 거예요. 그렇다면 살인자는 공무원 등의 신분을 사칭해서 집안으로 들어갔을 가능성 이 높아요.」 「멋진 추리요.」 「그리고 무기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예요. 그 무기의 정체를 알려 줄 법의학 관 련자가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 상처는 아주 짧고 날카로운 연장에 의한 거 였 어요.」 「연장? 칼이 아니란 말이오?」 샌디는 공을 튀기는 걸 중지한 채 메건을 똑바로 응시했다. 「죽음의 신이 칼을 사용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에요. 그 보고서는 이 문제를 아주 특별히 다뤘어요.」 「그럼 법의학 관련자를 만나 볼 수 있도록 전화를 해야 할까요? 맥머피는 어때요?」 「글쎄요. 그가 선뜻 법의학자를 주선해 줄 것 같지가 않군요. 혹시 검시관의 사무실 에 가면 부검을 한 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때 메건의 등뒤에서 사무실 문이 열렸다. 「샌디? 너와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 샌디가 초조하게 머리칼을 뒤로 쓸어 올리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아버지. 메건, 나중에 얘기합시다.」 메건은 일어서서 셔먼 로열을 똑바로 응시했다. 대머리에 거구의 모습은 충분히 방송 국의 소유주가 될 만한 풍채다. 「안녕, 아가씨.」 셔먼이 재빨리 그녀를 훑어보며 말했다. 「샌디를 돕는 아가씨인 모양이군. 난 셔먼 로열이오.」 그녀는 그의 미소에 답례한 다음 샌디를 바라보았다. 「내가 검시관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요?」 「아뇨, 그럼 그들이 무척 놀랄 거요.」 그가 부친을 향해 미소지었다. 「경찰은 죽음의 신이 칼이 아닌 다른 무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답니다. 대런 조지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하지만 내 생각엔 그 문제가 범인의 신원을 파악 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부검을 했던 병리학자에게 정확한 사실 을 알아볼 작정입니다.」 「아주 훌륭하구나. 그런데 대런에게도 이 사실을 밝힐 작정이냐?」 「이건 내 보도예요. 대런에게 말할 필요가 없어요.」 「그 녀석이 몹시 상심하겠구나.」 셔먼이 큰 소리로 웃고서 교활한 시선으로 메건을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내 아들의 말만 잘 들으면 아주 많은 걸 배우게 될 거요. 일을 제대로 처 리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 방송국에서 그 예쁜 얼굴이 전파를 타게 될 지도 모르지.」 메건은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그 사무실에서 빠져나왔다.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으 려 고 안간힘을 쓰는 망나니들은 어디든지 널려 있다. 샌디는 밝고 명랑한 청년이다. 그 의 부친이 아들을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일에 끌어들이지만 않았다면 다른 분야에서 그 런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인물이다. 메건은 뉴스실로 향했다. 맥머피에게 전화를 걸어 어젯밤에 글래디스의 텔레서브 서 류 를 검토해 본 결과 밝혀진 두 가지 사실을 알려 줄 계획이다. 그건 지난 가을에 조사 한 직원명부와 업무원장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에바 메리트가 살고 있는 지역을 담당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내려 했지만 그건 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틀림없이 본부 사무실에는 복사본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본부 에 전화를 걸어서 경찰이 원한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그걸 부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4년 동안의 모든 것이 그 곳에 있는데도 글래디스가 그것들을 다른 사람 들에게 주지 않았다는 사실은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사라 진 건 전화영수증 묶음이다. 갑자기 가을의 조사가 조작됐을지도 모른다는 잭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글래디 스 가 뭔가를 숨기려 했다면 그녀는 서류를 폐기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잭의 다른 이론대로 글래디스의 살인이 텔레서브의 조작과 관계가 있다면 누가 그녀를 죽 였 든 간에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정보가 될 만한 것은 모두 가져가 버렸을 것이다. 순간 서늘한 냉기가 척추를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떨쳐 버리려고 안간 힘 을 썼다. 「메건!」 그녀는 뉴스실의 문에 손을 올려놓은 채 몸을 돌렸다. 대런이 얼굴을 붉히며 들어섰 다. 「안녕하세요, 조지 박사님.」 「안녕하지가 못해. 아침부터 모든 게 엉망이거든!」 그의 앙상한 손가락이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을 때 메건은 움찔하고 말았다. 「젊은 숙녀분께선 날 따라와요.」 그는 메건을 데리고 사무실을 나와 미첼 코스토스의 사무실로 가서 문을 열었다. 「코스토스! 난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마음에 들지가 않아요!」 국장이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잔을 건드려서 커피를 반쯤이나 책상 위에 쏟아 버렸다 . 「대런, 제발 진정하게.」 그가 휴지를 꺼내 책상 위를 닦으면서 메건을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 「나에게 진정하라고 하지 말아요!」 대런이 문을 쾅 닫은 다음 방 저쪽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메건, 거기 앉아서 기록을 해.」 메건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대런, 도대체 무슨 일인가?」 미첼이 푹 젖은 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물었다. 「모든 게 잘못되어 가고 있소. 난 방송국 요원들을 죽음의 신에 관한 특별 프로그램 에 투입하고 싶어요. 그리고 뉴욕의 시각도 <나이트라인>에 집어넣고 싶고 하지만 아 무도 협조하지 않는 겁니다. 카메라 기자들은 아무도 나와 함께 살인 현장에 나가려 하지 않아요. 어떤 바보가 그들을 미국 부통령의 연설을 취재하라고 보낸 겁니다.」 코스토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손은 의자 등받이를 꼭 움켜쥐고 있다. 「대런, 자네는 오늘 오후에 카메라 기자들을 배치받게 될 거야. 하지만 미국 부통령 이 멜버른에 왔기 때문에 그 바보는 그걸 취재하는 게 자신의 경력을 쌓는 것보다 훨 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국장님께선 기억해 두셔야 할 게 있습니다. 내 경력을 쌓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경력을 쌓는 일도 된다는 걸... 물론 내 경력에 먹칠을 하면 다 른 사람의 것도 그렇게 되겠죠.」 코스토스가 채 대답을 하기 전에 샌디가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는 책상 옆 에 있는 성난 두 남자를 무시하고 메건에게 손짓했다. 「아가씨, 어서 갑시다. 뉴스는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 「잠깐, 샌디.」 대런이 소리쳤다. 「난 메건의 도움이 필요하다네. 그녀가 필요한 전화를 걸어줘야 해.」 「미안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메건을 보내줬다는 걸 잊으셨나요?」 그가 다시 메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 어서 갑시다.」 「로열, 노크 좀 할 수 없나? 이건 개인적인 만남이야.」 미첼 코스토스가 말했다. 샌디가 장난스레 문을 똑똑 두드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메건은 벌떡 일어나서 방을 가로질러갔다. 성난 코스토스와 대런의 시선을 무시하며 그곳을 빠져나오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잘 훈련된 꼭두각시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조용히 지내는 거야. 6개월 후면 이런 일들이 한낱 기분 나쁜 꿈 정도로 여겨 질 테니까. 메건은 우편함에 있는 광고용지들을 쓰레기통에 던져넣은 다음 아이들 방으로 향했다 . 그 방에서 빨래감을 한아름 들어다가 욕실의 빨래 바구니에 쑤셔넣었다. 그녀의 마음은 굴욕감을 이기지 못하고 분노로 들끓었다. 검시관 사무실에서의 만남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들은 아무 것도 알아내 지 못했다. 샌디가 병리학 조수에게 퉁명스런 녀석이라고 소리치자 그는 그들을 쫓아 내 버리고 말았다. 그래, 6개월만 참고 견디는 거야. 그녀는 빨래 광주리를 주방으로 가져와서 비누와 표백제를 찾아들고 아래층으로 내려 갔다. 글래디스의 낡은 세탁기를 사용하는 건 고통스런 일이지만, 그 옆에 가스 드라 이어까지 부착되어 있어서 유혹을 물리치기가 힘들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세탁기가 있는 차고로 내려갔다. 차고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나니 안은 무척 어두웠다. 메건이 목이 막혀옴을 느꼈다. 정말 이런 곳엔 혼자 들어오고 싶지 않다. 한동안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데 머리 위의 지붕이 삐걱거 리 는 소리가 들렸다. 메건은 불안한 시선으로 지붕을 올려다 본 다음 세탁물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록시의 바지를 끌어내는데 뭔가 반짝이는 물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메건은 몸을 굽혀 그걸 집 었다. 그건 크롬으로 도금을 한 휘장이었다. 정면엔 소방감독관이라는 글귀와, 아래쪽에 플로리다 폼퍼노 해안이라는 글씨가 있다 . 록시는 이걸 어디서 났을까? 토머스의 청바지에서 잡혀지는 딱딱한 물체에 그녀는 다 시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두 번째 휘장을 끄집어냈다. 이번 것은 경찰의 신 분 증이었다. 경찰이라는 글귀와 마이애미 해안, 플로리다라는 어휘가 새겨져 있고, 밑 에 는 배지 619라고 쓰여 있다. 문득 어제 클로드 호킨스가 잭의 차창을 통해 아이들에게 캔디와 함께 뭔가를 건네주 던 게 생각났다. 클로드 호킨스가 이런 신분증을 갖고 다니다니... 신문에선 죽음의 신이 신분증을 제시하고 집에 침입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메건은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모나가 아버지의 목록을 갖고 있었다면... 그렇 다 면 그 애의 아버지가 글래디스를 살해했을지도 모른단 말인가? 경찰을 불러야 한다. 차고를 가로질러서 문을 열려는데 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그건 일부러 벽을 긁어대는 소리로, 언젠가 한번 들어 본 소리다. 누군가 현관문을 열 고 그녀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동안 엄청난 공포감이 그녀의 가슴을 에워쌌다. 하지만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 쉰 다음 조용히 차고를 나와 찻길을 바라보았다. 찻길은 텅 비어 있다. 길 건너에서 우 편 배달부가 이웃집에서 나와 재빨리 걷고 있다. 그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까?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들었던 소리가 의심스러워졌다. 어쩌면 아무 소리도 듣 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녀가 환청 증세를 보인다고 밝혀지면 경찰은 그녀가 미 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메건은 조심스럽게 차고 앞으로 걸어가서 자신의 집을 올려다 보았다. 창문에서 빛이 반짝이는 바람에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잠시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런 다음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부서진 의자 밑에 이웃집의 거대한 노란 고양이 샐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 순간 메건의 긴장된 목과 어깨의 근육이 이완 되고 그녀는 낄낄 웃어댔다. 그녀는 다시 차고로 돌아와서 빨래를 마친 다음 집안으로 들어왔다. 모든 것이 그녀 가 떠나던 때와 똑같다. 그곳엔 두려움의 흔적은 없었다. 잭을 불러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없어진 목록에 대해서 얘기하고, 경찰의 보고서에 적혀 있는 것과 그 휘장에 관 한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녀는 잭의 집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하지만 8번이나 신호가 울려도 응답이 없다 . 난로 위의 시계는 2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다. 메건은 시트를 걷어내기 위해 아이들 방 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시 인 3시 3O분까지는 집안일을 모두 마쳐 야 한다. 토머스의 베갯잇을 벗겨내는 동안 두 개의 침대 사이의 테이블 위에 있는 종 이 한 장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메건은 그걸 집어들었다. 베개를 끼고 있는 겨드랑이에 힘이 가해졌다. 이럴 리가 없어. 공포심이 그녀의 가슴속에 고여들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모나 호킨스가 어제 그 녀에게 보여 줬던 목록이 이제 아이들의 방안에 있다. 메건은 재빨리 몸을 돌려 침대 에 몸을 의지했다. 그리고 엄청난 공포가 몰려옴과 동시에 그녀의 발목을 움켜잡는 강 철같은 힘에 의해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져 버렸다. 「이거 놔요!」 그녀는 비명을 질러대며 침대 밑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침입자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침입자에게 붙잡힌 발목의 피부가 화끈거린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발 길이만한 금속 소방차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 장난감을 팔을 향해 집어던 졌 다. 그 순간 공격자는 그녀의 발을 거칠게 움직였다. 그 바람에 그녀는 바닥에 쓰러지며 그 장난감 트럭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그 순간 번쩍 하는 빛과 함께 그녀의 의 식 은 깜깜한 동공 속으로 침잠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모든 사고도 그대로 정지되었 다. 잭은 울타리에 몸을 기댄 채 엄마를 만나기 위해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 록시와 토머스도 함께 걸어나오고 있다. 그 금발의 소년은 유순하게 누나의 손을 잡 고 걷고 있다. 길의 끝까지 걸어온 아이들이 그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그가 손을 흔들자 록시가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토머스는 손을 놓고 고개를 돌려 버 렸다. 아이의 작은 얼굴이 진지하게 분주한 거리에서 엄마를 찾는다. 잭도 여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봤지만 메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메건을 만나기 위해서 좀 일찍 이곳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녀와 아이들을 집에 바래다주면서 가능하다면 저녁도 사고 싶었다. 우선 그녀가 이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 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 모나나 클로드와 이야기를 해보려던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어젯밤에 그가 늦게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이웃집은 문을 굳게 잠근 채 불을 꺼버린 상태였고 , 클로드의 트럭도 돌아오지 않았다. 잭은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어깨가 구부정한 양복 차림의 사내가 아이들에게 다가와서 함께 서 있다. 「안녕, 록시. 안녕, 토머스. 엄마는 어디 계시지?」 그 사내는 록시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희망에 찬 시선으로 잭을 바라보았다. 「난 교장인 버츠라고 해요. 선생은 이 애들의 친척 되십니까?」 「아니오. 난 잭 갤래거라고 합니다. 섬머스 부인과 아이들의 친구죠. 제가 메건 대 신 아이들을 집에 데리고 가겠습니다. 아마 그녀는 몹시 바쁜가 봅니다.」 버츠가 얼굴을 찌푸렸다. 「미안합니다만 섬머스 부인의 허락 없이는 토머스와 록시를 누구와도 함께 보낼 수 가 없습니다.」 「이분은 우리 친구예요. 이 아저씨가 우리를 맥도널드에 데리고 갔었어요.」 록시가 말했다. 「엄마는 어디 있는 거야?」 토머스가 눈물을 글썽이며 록시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잭이 록시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엄마에 대해선 걱정하지마. 곧 이곳으로 올 거야. 학교 사무실에 가서 전화를 걸자 꾸나. 엄마가 금방 너희들을 데리러 오실 거다.」 하지만 잭의 가슴은 거칠게 뛰었다. 메건 섬머스에 대해서 잘 알진 못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가 결코 아이들을 데리러 올 시간에 늦을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 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하다. 그는 몰려오는 공포를 꿀꺽 삼켜 버렸다. 「너희들은 잠시 여기 있으렴. 내가 길을 따라 달려가 보겠어, 아마 엄마가 지금 오 는 중인지도 몰라.」 그는 버츠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돌아오겠소.」 차를 타고 메건의 집 쪽을 향해 가봤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그녀의 집 앞 까지 왔을 때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구급차가 아파트 차고 앞에 세워져 있고, 메 건의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난 괜찮아요.」 메건이 머리 위에서 차가운 압박붕대를 치우며 말했다. 「제발 전화기를 좀 주세요. 버츠 씨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이들을 데려와야겠어요.」 그녀는 일어났지만 현기증 때문에 비틀거리고 말았다. 잭이 그녀를 다시 소파 위에 눕 혔다. 「이대로 있어요. 내가 전화기를 갖고 오겠소 내가 가서 아이들을 데려오지.」 「나도 갈 수 있어요.」 폴러드가 제안했다. 메건의 이웃들이 방범 스티커를 전해 주기 위해서 30분 전에 도 착 했다가, 그녀가 침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던 것이다. 「아무튼 모두들 정말 고마워요.」 메건이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잭이 전화기 쪽으로 가는 동안 구급차의 반장이 그 녀 에게 알약 몇 개를 전해 주며 내일 의사에게 찾아가 보라고 말했다. 「정말 X레이를 촬영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난 괜찮아요. 하지만 주치의에게 찾아가 보겠어요.」 「좋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조심하세요. 아이들의 장난감은 때론 아주 위험하니 까 요.」 「이제 부인은 괜찮을 겁니다.」 잭이 그녀에게 수화기를 건네주며 말했다. 메건이 전화를 하는 동안 잭이 문 쪽에 있 는 폴러드에게 걸어갔다. 「핀치 씨,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난 좋은 이웃이오. 그리고 섬머스 부인과 그녀의 아이들은 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시민이지.」 「정말 고마워요, 핀치 씨.」 메건이 소파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조심하도록 해요.」 그는 간이식탁 위에 있는 스티커를 가리켰다. 「저것들을 붙이는 걸 잊지 말아요. 하나는 우편함에, 그리고 하나는 현관 유리창에 붙여요. 문단속하는 것도 잊지 말아요.」 「내가 표지판을 다는 걸 도와드릴까요?」 잭이 현관 앞에 놓여 있는 금속 표지판 더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 일에 도움을 받을 만큼 늙진 않았소.」 「잭, 그 전에 할 말이 있어요.」 메건의 음성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서 얼굴을 살펴보 았 다. 「정말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겠소?」 「괜찮아요. 하지만 당신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싶어요.」 그녀는 그 침입자에 관해서 털어놓은 다음 텔레서브 요원의 목록을 찾아냈던 일도 털 어놓았다. 잭이 화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미쳤군! 그렇다면 핀치 씨에게 경찰을 부르게 해야 하잖소?」 그가 일어서서 침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메건은 그의 손을 잡았다. 「난 경찰을 원치 않아요. 난 침대 밑에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사람은 날 해치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아무래도 당신을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소. 머리를 다치면서 분별력이 사라 져 버린 것 같소. 미친 사람이 당신의 침대 밑에 숨어 있다가 당신을 움켜잡았는데 해치 려는 의사가 없었다는 거요?」 「우선 그 사람은 남자가 아니었어요. 아마 모나 호킨스 같아요. 내가 집안으로 들어 오자 그 애는 겁에 질려서 내가 경찰을 부르는 걸 막기 위해 다리를 붙잡았던 것 같 아 요.」 「모나 호킨스? 그 애를 분명히 봤소? 그런데 어떻게 그 애가 집안에 들어왔지?」 잭이 그 목록을 의심스런 시선으로 훑어본 다음 전화번호를 돌리기 시작했다. 「당신 말대로 그 앤 당혹해하고 있을 거요. 그 애가 정신이 이상하다고 하지만 절대 로 집안에 쳐들어올 권리는 없소.」 메건이 손가락을 전화기에 대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잭, 그 애에게 물어 봐요. 어쩌면 그 애가 전날 일어난 일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 을지도 몰라요.」 그가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메건, 당신이 생각하는 걸 정확히 말해봐요.」 「내 예감이 맞다면 모나 호킨스는 아버지가 글래디스 그로보스키를 죽였다는 걸 알 고 있을 거예요.」 9 「클로드 호킨스가 죽음의 신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오?」 잭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경찰은 글래디스를 죽인 건 죽음의 신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고 했어요.」 「하지만 왜 클로드 호킨스가 글래디스를 죽인단 말이오?」 「작년에도 모나가 다른 사람 집에 침입해서 경찰이 출동한 적이 있다고 했었죠? 오 늘 에야 그게 글래디스의 집이라는 게 생각났어요. 그때 그녀의 반응이 클로드의 비위를 거슬렸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모나가 다시 글래디스의 집에 침입했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랬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클로드가 딸을 미행했다가 그걸 알고서...」 「그가 글래디스와 싸우다가 그녀를 살해했단 말이군?」 「시나리오치고는 너무 빈약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모나가 어떻게 텔레서브 요원 명 단을 갖고 있었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그 휘장에 관한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가 휘장을 갖고 있다는 건 클로드가 죽음의 신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증 명하는 게 아니오?」 「난 클로드나 죽음의 신이 어떻게 텔레서브와 시청률 조작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 모 르겠어요. 우린 경찰이 아니에요. 하지만 모나에게 찾아가 그걸 어디서 어떻게 났는 지 는 물어볼 수 있잖아요?」 「우선 쉬고 있어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저녁을 먹이겠소. 그 다음에 클로드나 모 나에 관한 문제를 의논해 봅시다.」 「그렇게 하겠어요. 고마워요, 잭.」 「이대로 있어요. 난 30분 내에 돌아오겠소.」 잭이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녀는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너무나 좋 았 다. 그가 나간 후에 그녀는 깜빡 졸았다. 하지만 5분쯤 후에 발 밑의 전화벨이 울려 대 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메건? 난 텔리 제메키스요. 도대체 멜버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텔리? 전화를 걸어 주셔서 정말 반가워요.」 사실 그녀는 텔레서브 본사의 업무 감독관인 텔리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경찰이 오늘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었소.」 그의 음성에 분노가 서려 있다. 「맥머피 경사가 말인가요?」 「맞소. 그 바보가 혹시 그 살인자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면서 이스트 플로리다 요원들 모두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려고 했소.」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요!」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오. 그렇게 되면 텔레서브 요원들은 경찰과 기자들의 질문공 세에 시달리게 될 테고 난 새로운 요원을 선발해야 하오.」 메건은 입술을 깨물었다. 「텔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맥머피는 믿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텔레서브와 관련됐다는 걸 밝히지 않았어요.」 「메건, 당신에게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소. 난 내 요원 이 세상의 이목을 끄는 걸 원치 않소. 이건 30만 달러의 수입이 달려 있는 문제요. 내 말 이해하겠소?」 「알겠어요.」 「그리고 또 할 말이 있어요. 난 일레인 존스가 보내온 영수증을 갖고 있소. 글래디 스 가 전화 영수증과 함께 보냈었지. 당신이 서류정리를 할 수 있도록 내주겠소. 당신이 영원히 이 일을 하게 된다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다음에 누가 멜버른 조사를 떠맡든 그 사람을 위해 서류를 정리해 줘요. 알겠소, 메건?」 「알겠어요. 하지만 감독님께 부탁할 게 있어요. 내게 자료를 좀 보내 주세요.」 그녀는 재빨리 지난 가을의 요원명부를 보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텔리가 그 목록 이 필요한 이유를 캐묻기 전에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글래디스의 집에서 가져온 자료상자를 소파 위에 올려놓고 <직원서열>이라고 표기해 둔 서류를 찾았다. 그걸 펼쳐 보니 글래디스는 두 개의 이름에 별표를 해놓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은 노마 슐츠였다. 이제는 고인이 된 노마 슐츠... 그리 고 또 한 이름은 일레인 존스다. 메건은 그녀를 간신히 견습생으로 채용했지만 그녀는 두 번의 조사 후에 무능한 업무 처리 때문에 지난주에 해고당하고 말았다. 물론 글래디스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메 건의 결과는 그 집단에서 항상 최고였다. 하지만 지난 가을 자신이 2위로 밀려나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일레인이 그 조사 기간 동안 최고 점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조사일지를 작성하겠다고 동의한 비율이 99퍼센트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실제로 일지를 작성해 보낸 시청자도 8O퍼 센트나 됐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그게 사실이라면 왜 글래디스는 그녀를 해고하려고 했을까? 그런 결 과를 기록했다면 보너스를 배로 받게 될 텐데... 잭이 했던 이야기가 메건의 뇌리에 섬광처럼 스쳐갔다. 그녀는 다시 일어서서 우편번 호에 의해 분류해 둔 여름 조사의 할당 업무에 관한 서류를 찾았다. 그리고 잭이 돌 아 오자마자 에바 메리트의 주소를 묻기로 했다. 에바 메리트가 작성한 일지를 찾아낼 방 법은 없었다. 그것들은 몇 달 전에 폐기되었다. 하지만 응답자의 우편번호를 알아냄으로써 어떤 조사원이 그녀에게 전화를 했는지는 알아낼 수 있다. 그 여인은 에바에게 돈을 주겠다면서 대런 조지의 뉴스쇼를 즐겨 본 다고 말하라고 했었다. 이제 그녀는 전화를 걸었던 사람이 일레인 존스일 거라고 심 증 을 굳혔다. 「엄마, 우린 처치의 치킨을 샀어요!」 토머스가 문을 열고 달려와 메건의 품에 안겼다. 잭이 음식이 든 종이가방을 들고 들 어왔다. 「메건, 머리는 좀 나아졌소?」 「그래요.」 그녀는 아이들을 욕실로 몰아넣었다. 잭이 메건을 위해 금방 훌륭한 저녁을 차려 놓 았 다. 「아이들에겐 뭐라고 했어요?」 「넘어져서 머리를 좀 다쳤다고 했소. 그러니 엄마를 도와줘야 한다고 했지. 그렇잖 으 면 이번 여름에 디즈니 월드에 데려가지 않겠다고 겁을 줬소.」 「디즈니 월드? 두 아이를 데리고 거기서 하루를 놀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 알 기나 해요?」 「알고 있소. 하지만 실습이 끝나는 대로 그곳에 갈 거요. 비용은 내가 대겠소.」 「당신이?」 「이런 밤을 속절없이 놓치게 됐기 때문이오. 그리고 당신을 좀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것도 여간 억울한 게 아니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지고 입술이 그녀의 얼굴 쪽으로 움직였다. 「엄마, 나 콜라 더 마셔도 돼요?」 메건이 미소를 지으며 록시에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잭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함 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런 밤을 놓쳐서 자신이 그렇게 측은하단 말예요?」 「물론이오. 그래서 미래의 밤은 거의 놓치지 않을 계획이오.」 그가 그녀의 코 끝에 키스했다. 메건의 가슴이 자신의 가슴을 스치는 동안 잭의 몸은 긴장을 했다. 강한 열기와 긴장감이 그의 피부에 몰려왔다. 그는 재빨리 테이블 쪽으 로 다가갔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탐색중인 아이들 앞에서 바보가 되고 싶지 않기 때 문 이다. 「애플 파이를 먹을 사람 없니?」 잭은 잠기지 않은 뒷문을 돌려서 컴컴한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플 로 리다 룸으로 들어가서 에바 메리트의 편지를 보관해 둔 책꽂이에서 바인더를 꺼냈다. 그걸 펴서 주소를 살펴보았다. 어쩌면 메건은 중요한 단서를 잡았는지도 모른다. 만약 에바 메리트에게 뇌물을 주려고 했던 텔레서브의 조사원을 찾아낸다면 죽음의 신과 조사요원 사이에 가장 확실한 관련상태를 확인하는 셈이다. 잭은 일어서서 책상 구석의 전화기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뒤쪽 복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카펫 밑의 마 루가 삐걱거렸다. 그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경찰을 부를 시간은 없 다. 그는 에바 메리트에게서 온 편지를 조용히 내려놓고 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는 조 심스럽게 복도로 나섰다. 그러자 벽에 몸을 기댄 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땅에 고꾸 라졌다. 「모나?」 그는 급히 다가가 히스테리에 빠져 있는 소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모나, 이제 괜찮아. 울지 마. 널 해치지 않을 거야.」 「경찰을 부르지 마세요. 모나는 미안해요.」 어느덧 여자티가 나는 소녀가 몸을 떨며 격렬하게 울어댔다. 「걱정마지마. 경찰을 부르진 않을 거야.」 잭은 그녀 옆에 앉아 손을 꼭 쥐었다. 「모나, 왜 여기 왔는지 말해 줄 수 있겠니?」 그 소녀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모나, 울지마. 이제 날 만났으니까 됐어. 하지만 다음 번엔 내가 집에 돌아올 때까 지 기다려야 해.」 「모나는 나쁜 아이예요.」 잭은 그 애에게 메건의 집에도 간 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모나는 더 겁을 먹을 것 같다. 그리고 이 곳까지 오는 길을 어떻게 찾아냈는지도 묻고 싶다. 잭이 일어서서 아이의 손을 잡았다. 「자, 얘야, 나와 함께 너의 집까지 걸어가기로 하자. 너의 아빠가 집에 계신지 모르 겠구나.」 「아빠는 집에 없어요.」 「직장에 계시는 모양이구나.」 모나는 머리를 저었다. 「아빠가 집에 없으면 모나는 아빠가 그리워요.」 「그렇겠지. 그렇지만 집에는 가야 하잖니?」 모나는 뒷문을 나가서 집의 옆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갑자기 멈춰 서고 말았다. 클로 드 호킨스의 차가 주차장에 있고, 클로드가 그 옆에 서 있었다. 「모나?」 그가 소리쳤다. 「아빠, 모나 여기 있어요.」 딸과 동행인을 바라보는 그의 검은 눈이 빛났다. 「갤래거, 도대체 왜 내 딸과 함께 있는 거지?」 「모나는 내 집을 방문했어요. 아저씨가 하루종일 집에 없으니까 모나는 외로웠던 것 같아요.」 「얘야, 넌 집에 들어가 있거라.」 「아빠, 모나가 요리를 할게요. 땅콩 버터와 젤리 팬케이크는 어때요?」 「네가 좋은 걸로 만들려무나.」 모나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클로드가 잭 쪽으로 다가왔다. 「갤래거,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집과 딸을 멀리해 주게. 내 딸은 어린아이처럼 단 순 해. 그러니까 자네 같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다네. 내 말을 이해하겠 나 ?」 「딸을 보호하고 싶어하는 아저씨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난 모나에게 겁을 주 지 않으려고 데려왔을 뿐이에요. 그 앤 내가 없는 동안 내 집에 들어와 있었어요. 나 를 보자 울기 시작하더군요. 아저씨가 일이 없을 땐 함께 지내시는 게 좋을 것 같습 니 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경찰의 일이기도 하죠. 모나는 전에도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한 적이 있다고 알고 있 어요.」 「그로코보스키의 이야기를 하는 건가? 그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지?」 그의 음성이 더 탁해지고 눈은 가늘어졌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아저씨가 모나를 사랑한다면 좀더 관심을 가져 주세 요.」 「모나는 내가 돌볼 거야. 내 책임이니까.」 클로드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의 집으로 걸어가서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메건은 맥머피가 글래디스 그로코보스키의 집을 열고 들어가는 걸 현관의 창문을 통 해 바라보고 있다. 맥머피는 잠시 전 텔레서브의 자료를 가져가기 위해 들러서 수사가 진 전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용의자에 대해서 물었지만 그는 답변을 회피한 채 내려와 서 새로운 집주인을 만나 보라고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메건은 그 집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글래디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다 시 확인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한동안 무기력하게 앉아 있다가 잭이 전화를 하리라 는 걸 생각해내고서야 다시 움직였다. 그때 록시가 다가왔다. 「엄마, 아빠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예요?」 메건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숨을 들이쉬었다. 「물론이야. 몇 주 전에 아빠가 전화를 걸어서 토머스의 생일을 축하해 준 적이 있었 지? 그때 아빤 곧 너희들을 방문하겠다고 했잖아?」 「하지만 아빠는 그렇게 말해 놓고도 한 번도 오지 않았어요. 크리스마스에도 오지 않 았어요.」 「아마 아빠에게 바쁜 일이 있었나봐.」 그녀는 어린 딸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아빠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고통을 자신이 조 금 이나마 덜어 주길 기원하면서... 「아빠는 너와 토머스를 무척 사랑하신단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살다보면 사랑하는 사람도 자주 만나기가 쉽지 않은 법이야.」 「갤래거 씨가 나의 새 아빠가 되는 거예요?」 메건의 몸이 굳어졌다. 「아니, 그렇지 않단다. 너의 아빠가 항상 아빠인 거야. 갤래거 씨는 새 친구일 뿐이 야.」 그녀는 록시의 앞 머리칼을 헝클어 놓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자, 내일 학교에 가려면 이제 자야겠다.」 메건은 딸을 침대에 눕힌 다음 조용히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잭에게서 전화가 올 시간이 됐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메건? 잭이오. 괜찮소?」 「네. 전화 벨 소리에 놀랐을 뿐이에요.」 「내 노트에 에바 메리트의 주소를 적어 놓았소. 그녀는 팜 베이, 샴페인 239번지에 서 살았소.」 메건은 맥머피가 글래디스의 서류를 가져가기 전에 기록해 둔 수첩을 집어들었다. 팜 베이는 멜버른의 메트로 구역에 있다. 그녀는 재빨리 조사원 업무할당 페이지를 펼쳤 다. 지난 가을에 멜버른 메트로 구역은 일레인 존스가 맡았었다. 「맞아요! 일레인 존스라는 조사원이 메리트 부인에게 전화를 한 게 틀림없어요.」 「일레인 존스? 아직도 그녀는 당신 밑에서 일하고 있소?」 메건은 그 여자를 해고했던 사실과 그 납득하지 못할 결과에 대해서도 자세히 털어놓 았다. 「그렇다면 글래디스가 일레인을 해고하라고 지시할 합법적인 이유가 없어요.」 「글래디스가 그 조작사건에 대해서 몰랐다면 그렇겠지. 글래디스가 존스라는 여인을 고발하진 않았겠소? 텔레서브에게 자신의 고용인이 어떤 응답자에게 뇌물을 주었을지 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렸다면 그건 글래디스에게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겠소?」 「그럴 거예요. 텔레서브의 상관인 텔리 제메키스는 두 가지 사실로 악명이 높죠. 과 잉반응을 보이는 것과 금방 화를 낸다는 거죠. 글래디스는 텔리와 승강이를 하기가 싫 어서 일레인을 해고했을지도 몰라요. 일레인은 지은 죄가 있으니까 아무 항의도 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거겠죠.」 「메건,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어요. 내일 일레인이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우릴 만나자고 해봅시다.」 「좋아요. 그녀는 공항에서 조금 떨어진 공원의 트레일러 헤븐에 살고 있어요.」 「됐소. 그럼 문단속 잘하고 자요.」 「그럼 내일 만나요. 오늘은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아이들을 돌봐 주신 것과 모든 것에서 ...」 잭의 음성이 한 옥타브 낮아졌다. 「당신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소.」 가슴속에 잔잔한 기쁨이 넘쳤다. 「잘 자요, 잭.」 메건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미소지었다. 그리고 시선을 텔레비전 스크린으로 돌렸다. < 특별 속보>라는 자막과 함께 생방송 진행자로 대런 조지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제부터 현장에 나가 있는 샌디 로열을 연결해 보겠습니다. 샌디, 경찰이 그 사실 을 확인했습니까?」 화면이 바뀌고 샌디가 자신의 뒤에 있는 경찰본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런, 경찰에선 그 보도를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난 잠시 후 에 기자회견장으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거기서 경찰은 오늘밤 발견된 사내가 31살 난 브 래드 스티븐스라는 사실을 밝힐 것입니다. 그는 스티븐스 디스카운트 물침대 가게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죽음의 신에 의해 가장 최근에 희생된 셈입니다.」 「오, 안돼.」 메건이 큰 소리로 외쳤다. 「샌디, 희생자가 발견되기 직전 그 근처에서 제복을 입은 경찰을 봤다는 이웃의 증 언 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희생자의 맞은편 집에 살고 있는 율라 스미스 부인이 방금 전 우리에 게 사고현장의 찻길에서 파란 셔츠를 입은 땅딸막한 청년을 봤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스미스 부인은...」 메건은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서 멍한 시선으로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그 녀는 아이들이 잠자는 걸 확인한 다음 다시 문이 제대로 잠겨졌는지 확인했다. 그리 고 현관 쪽의 불을 끈 다음 맥머피 경사가 아직도 있는지 궁금해서 구멍으로 밖을 내다 보 았다. 그의 차는 보이지 않고, 글래디스의 집에 있는 불도 모두 꺼져 버렸다. 하지만 그곳 엔 다른 사람이 있었다. 메건은 푸른 셔츠에 짙은 색상의 모자를 쓴 사내를 잠시 보았다 . 그 사내는 금방 메건의 집 계단 밑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서 버렸다. 10 다시 수화기를 드는 메건의 손이 납처럼 굳어져 버렸다. 뇌리에선 계속 적당한 문구 가 떠올랐다. <911로 전화를 걸어요> <죽음의 신이에요> <무기... 무기를 가져와야 할 거예요> 하지만 구급 전화대는 계속 통화중이다! 그녀는 미친 듯이 다이얼을 돌려댔다. 그리고 다시 다이알을 돌리기 전에 현관문을 두 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려움으로 마비된 상태에서 메건은 바보처럼 현관문을 응시 했 다. 그러다가 수화기를 던지듯 내려놓고 주방으로 달려가서 가장 큰 칼을 집어들었다 . <넌 누구도 찌르지 못해> 내부의 음성이 냉정하게 말했다. 「아니, 난 할 수 있어.」 그녀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듯 큰소리로 말했다. 「메건? 괜찮소? 난 폴러드 핀치요.」 「오, 하느님.」 그녀는 조리대 위에 칼을 던져 놓고 다시 한번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분명히 이웃의 얼굴이 있었다. 그녀는 문을 활짝 열었다. 「핀치 씨!」 그제서야 그가 짙은 파랑색 유니폼 셔츠에 감색 모자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목이 탁 막혀왔다. 문을 열어 준 게 실수였을까? 만약 이웃사람이... 「메건?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난 이미 교대를 했지만 당신의 스티커를 떼고 이웃 방 범대의 비상 전화번호를 대신 붙여주려고 왔어요.」 그는 차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걸 저기 우편함과 차고의 옆 창문에 붙여 뒀어요.」 「고마워요. 핀치 씨. 잠시 들어오시겠어요? 난 텔레비전을 보는 중이었어요.」 갑자기 그 뉴스가 떠올랐다. 「죽음의 신에 관한 그 끔찍한 뉴스를 보셨어요?」 핀치의 턱이 경직되면서 그의 작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무슨 뉴스 말이오?」 그가 메건을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방금 텔레비전에 나왔어요. 오늘 오후 늦게 또 다른 희생자가 발견됐대요. 경찰은 그것이 죽음의 신이 저지른 짓이라더군요.」 텔레비전엔 샌디 로열의 모습이 나와 있고, 그의 옆에 피트 맥머피 경사가 서 있다. 「맙소사, 정말 안됐군요. 오늘 신문에선 경찰이 글래디스 그로코보스키는 모방범죄 의 살인자에게 샅해됐다고 확신한다고 밝히더군요. 그러니 문단속을 철저히 해요.」 메건은 그에게서 스티커를 받아든 다음 방금 전에 자신이 공포에 떨던 일을 떠올렸다 . 「그러겠어요. 이것들을 갖다 주셔서 고마워요.」 「천만에요.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럼 또 뵙겠어요.」 「잘 자요, 메건,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죽음의 신은 9시엔 일을 저지르지 않 으 니까.」 그가 문을 닫고 나갔다. 이어 그의 발소리가 계단에 울려 퍼졌다. 메건은 난로 위의 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9시다. 글래디스가 살해당한 시간이다. 「그만 해!」 메건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몸을 돌려 칼을 치워 버렸다. 갑자기 맹렬한 분노 가 솟구쳤다. 그녀는 그 분노가 반가웠다. 최소한 공포심은 떨쳐 버릴 수가 있었기 때문 이다. 「일레인 존스를 바꿔 주시겠습니까?」 「제가 일레인인데요. 누구시죠?」 순간 메건은 긴장했다. 그 여자가 자신의 전화를 반겨 줄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일레인, 나 메건 섬머스예요.」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상대방의 음성이 들렸다. 「무슨 일이죠?」 「오늘 잠시 당신 집에 들러도 괜찮을지 알아보려고 전화한 거예요. 가을의 텔레서브 조사결과에 대해 물어 보고 싶은 게 있거든요.」 갑자기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선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당신에게 보너스를 좀 지급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상대방 여인이 놀란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놀랍군요. 당신과 그 늙은 그로코보스키가 날 어떻게 해고했는지 생각 안 나 세 요?」 「일레인, 그 점에 대해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당신이 원한다면 다시 일자리를 줄 수도 있어요.」 「관심없어요. 난 이번 주에 버뮤다로 갈 거예요. 그리고 살 만한 장소를 구하게 되 면 거기서 눌러 살게 될지도 몰라요.」 「정말 재미있겠군요. 들러서 그 얘기도 듣고 싶어요. 몇 시가 좋겠어요?」 결국 일레인은 6시에 만나자고 했다. 일레인이 에바 메리트에게 뇌물을 준 사실을 인 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속임수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버뮤다에 갈 돈은 어 디 서 났을까? 메건은 고개를 저었다. 일레인은 예전보다 경제적인 궁핍을 겪지 않을 것 이다. 「엄마, 우린 준비가 됐어요.」 「좋아, 록시. 토머스, 책은 찾았니?」 토머스는 침실에서 동화책을 가져왔다. <잠꾸러기 그로버>는 아들이 좋아하는 책이다 . 메건은 물수건으로 아들의 얼굴을 닦아주다가 스티커들을 발견했다. 그 책 뒤에 금빛 의 동그란 스티커들이 나란히 붙어 있다. 「토머스, 이 스티커는 어디서 났지?」 「모르겠어요.」 아이는 재빨리 엄마의 시선을 피해 테니스화를 바라보았다. 「토머스, 정직하게 말해 봐, 학교에서 가져온 거니?」 「엄마, 그건 토머스의 우편물에 붙어 있었어요.」 록시가 화난 어조로 말했다. 「저 앤 돼지 같아요. 그렇게 많이 갖고 있으면서 나에겐 한 장도 안 준다니까요.」 「난 돼지가 아니야!」 「욕심꾸러기. 돼지... 돼지...」 「그만두지 못하겠니? 도시락을 갖고 현관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 아이들이 몰려나가자 그녀는 신을 신었다. 메건은 그 스티커들 때문에 불안해지기 시 작했다. 아무래도 선생님에게 알아봐야 하리라. 아이들이 광고 선전지에서 그렇게 많 은 스티커를 가져올 리가 없다. 아이들을 데려다 준 다음 우편함을 뒤져보았다.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아직 우편물은 도착하지 않았다. 전 남편의 수표는 오늘도 도 착하지 않았다. 벌써 집세가 밀려 있고, 수표계좌에는 27달러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 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집 계단에 앉아 있는 잭을 보았 다. 그래, 모든 게 그렇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 건 아냐. 저 기분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 으니까. 「안녕.」 그가 하얀 종이가방을 들어서 흔들어 보였다. 「단 음식을 좋아하오?」 「안녕하세요? 물론이죠.」 그녀는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오늘 아침 기분은 어떻소?」 「두통은 없어요. 하지만 몸이 약간 뺏뺏해요.」 「그 뉴스를 들었소?」 샌디와 오전 약속이 없기 때문에 머리를 감고, 그 주일의 전화조사를 마칠 예정이었 지 만 이 남자와 더불어 도너츠를 먹는 게 훨씬 달콤하고 유혹적이다. 「오늘밤에 우리 둘이서 일레인 존스를 만나기로 약속을 해뒀어요.」 「잘됐군. 아이들은 보모에게 맡길 작정이오?」 「그래요. 8시까지...」 잭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앨런 부인에게 10시까지 돌봐 달라고 하면 안되겠소? 둘이서 식사를 하고 싶은데.. . 」 「잘 모르겠어요...」 「이봐요, 메건. 오늘은 금요일이오. 진짜 데이트를 해봅시다.」 잭은 손을 뻗어 여자의 손을 잡았다. 메건은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자인가? 잭이 일어서서 그녀를 의자에서 끌어내 껴안았다. 「메건, 제발 오늘밤은 내게 기회를 줘요.」 그녀는 초조하게 입술에 묻은 설탕을 핥았다. 「좋아요.」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에게서 벗어나 잔에 다시 커피를 채웠다. 「죽음의 신에 관한 기사는 잘돼 가고 있나요? 뭔가 짐작이 가는 게 있어요?」 「난 형사가 아니오. 하지만 그 사건들엔 뭔가 일관성이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난 아 직 그걸 알아내지 못했소.」 「그들은 모두 이웃해서 살았어요. 그리고 모두 대중을 상대로 한 직장에서 일했죠. 그리고 일요일에 살해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일요일?」 잭의 이마에 주름살이 졌다. 「난 그들이 살해된 날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소. 그렇다면 어젯밤의 사건으로서 모든 요일이다 포함된 셈이군.」 「그래요. 하지만 순서대로는 아니에요. 처음 희생자는 화요일이었고, 그 다음엔 토 요 일,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그리고 어젯밤의 사건은 목요일이었어요. 그 다음 순서 는 일요일이 아닐까요?」 「맙소사, 그 다음은 없어야 해.」 「아무래도 희생자들의 직업이 어떤 요인이 됐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피 자 가게 지배인이나 페인트 공, 선물가게 주인, 타이어 상인, 그리고 텔레비전 조사요원 이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요? 마지막 피살자는 물침대 가게를 경영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조리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 가게에서 공짜 쿠폰과 함께 광고용지를 받았어요. 그 가게는 시어스 빌 딩 근처에 있어요.」 「그 사람들의 직업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군.」 「칭찬해 줘서 고마워요. 이런 사실을 샌디 로열에게 알리니까 그는 코웃음을 치더군 요.」 잭은 그녀의 손에 키스한 다음 일어서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 술 에 닿고, 그들은 격렬한 키스를 나누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답소.」 그가 여자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으며 말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진실이오. 당신을 원하오.」 「잭, 몇 분 후에 아래서 맥머피 경사를 만나기로 했어요.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 에 요. 잭, 나도 당신을 원해요. 하지만...」 「쉿... 변명하지 말아요. 우리에겐 시간이 충분히 있으니까.」 밖에서는 어김없이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음을 터 뜨렸다. 그녀는 급히 욕실로 가서 가벼운 화장을 하고 머리를 빗었다. 잭이 테이블에 앉아서 그런 메건을 지켜보았다. 「난 이만 가보겠소. 오늘밤이 되기 전까진 당신에게서 벗어나 있겠소.」 「아주 근사한 표현이에요 오늘밤이 되기 전까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메건이 문을 열자 맥머피 경사가 서 있었다. 그는 다소 초조 하 고 긴장된 모습이다. 「안녕하세요, 경사님, 오늘 아침엔 질문하실 게 아주 많은 것 같군요.」 메건의 아파트에 잭이 있는 걸 본 맥머피는 놀라는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잭은 메건의 뒤에서 그녀의 팔을 잡아 주었다. 「단서를 잡았소?」 잭이 물었다. 「아직 드러내 놓을 만한 단서는 없소. 섬머스 부인은 어때요?」 메건은 두 사내가 근심스런 표정을 교환하는 걸 보았다. 이제 경찰이 잭을 혐의자로 보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폴러드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 그녀는 긴장하고 말았다. 경 찰 이 글래디스가 죽음의 신에 의해서 살해되지 않았다고 단정하고 있다면 잭은 아직도 조사대상일 것이다. 「잭, 날 위해 문을 잠가 줘요.」 「좋아요. 난 5시 30분까지 이곳에 오겠소, 괜찮지?」 「좋아요.」 그는 맥머피의 존재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에게 키스했다. 메건도 그의 행동을 개 의치 않기로 했다. 그녀에게도 연인을 가질 권리는 있으니까. 맥머피가 자신을 바라 보 고 있음을 의식한 그녀가 황급히 말했다. 「그로코보스키의 조카가 이곳에 있나요?」 「그렇소.」 「그럼 그 사람을 소개해 주시면 고맙겠어요.」 맥머피는 문 앞에서 발을 멈추고 화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소개해 달라고요? 섬머스 부인, 수줍어할 것 없소. 그는 거실에 있어요.」 그녀는 맥머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죽은 여인의 집안에 들어와 있 음 을 깨달았다. 「누가 그로코보스키의 조카죠?」 「메건, 바로 나요. 들어와요, 아가씨. 할 말이 아주 많을 테니까.」 메건은 귀에 익은 그 음성에 놀란 표정으로 몸을 휙 돌렸다. 11 「조지 박사님! 도대체 웬일이세요?」 「친절한 경찰관께서 작성한 사랑하는 숙모의 재산목록에 사인을 하러 왔어.」 대런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활짝 웃었다. 「놀랍게도 숙모님댁의 세입자는 메건뿐이더군. 메건이 시체를 발견했을 때 그 사실 을 알아차렸어야 하는 건데...」 대런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왼쪽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 「난 머리가 무척 둔하단 말야.」 맥머피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섬머스 부인이 당신의 숙모집에 살면서 당신의 스튜디오에서 함께 일하면 서도 그 사실을 둘 다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까?」 「알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난 몇 년 동안이나 숙모와는 왕래가 없었으니까.」 그가 메건을 향해 미소지었다. 「그리고 숙모도 메건에게 결코 내 얘기를 하지 않았을 테지?」 「그래요. 한 번도 말씀이 없으셨어요.」 텔레서브의 고용인은 친척이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일을 하면 자격을 잃게 된 다. 어쩌면 글래디스가 조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 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잭의 의심이 좀더 논리적인 답변이 될지도 모른다. 맥머피가 코트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조지 씨, 여기다 서명을 해주시오. 붉은 선이 있는 곳 둘 다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대런이 메건을 바라보았다. 「메건과 숙모가 텔레서브 조사국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경사님에게서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굳이 밝힐 이유가 없었어요, 조지 박사님. 텔레서브 요원들은 자신의 직업을 비밀 로 하기로 되어 있거든요.」 「그건 이해해. 이제 숙모가 돌아가셨으니까 메건이 새로운 감독관이 되는 건가?」 「그래요.」 메건은 좀 불편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맥머피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메건을 보았다. 「그로코보스키 부인의 사건을 설명하면서 텔레서브가 어쩌면 죽음의 신 살인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인의 의견까지 말했소. 하지만 그건 보도하지 않는 걸 전 제로 한 거요. 그렇죠, 조지 씨?」 「물론이오. 메건, 난 메건의 추리에 관심이 많아. 메건은 좀 겁에 질려 있는 것 같 군. 다음 표적은 메건이 될까봐 두려운 거야?」 「아니에요. 하지만 텔레서브 사건은 경찰에게 의견을 밝혀야 할만큼 중요한 일이라 서...」 「물론입니다. 섬머스 부인.」 맥머피가 끼여들었다. 「때론 직업적인 경찰보다 시민의 제보가 문제 해결에 열쇠가 되는 수가 있죠. 조지 씨, 만약 부인이 텔레서브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게 되면 부인은 일자리를 잃 게 될 수도 있소. 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비밀을 지키셔야 합니다.」 「경사, 난 이 정보를 조심해서 다룰 거요. 하지만 훌륭한 멜버른의 경찰력이 이 사 건 의 수사에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건 극히 유감이오.」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대런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두 명이나 희생됐다는 건 분명히 중요한 단서가...」 「조지 씨, 어젯밤에 말했듯이 당신의 숙모는 죽음의 신에 의해 살해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죽음의 신에 의한 희생자는 한 사람이오.」 맥머피가 일어섰다. 「슐츠 부인이 그의 희생자죠. 그녀는 텔레서브에서 일했으니까. 하지만 이 사건에선 범죄와 희생자의 직업 간의 관련성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어요.」 「아무튼 앞으로도 이 사건의 수사 진전 사항을 계속 알려 주시겠죠?」 「물론이오.」 「경찰관이거나 경찰관의 제복을 입은 자가 범인이라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 사건엔 경찰이 개입되지 않았소.」 맥머피는 휑하니 그 곳을 나가 버렸다. 메건은 대런이 파란 종이에 인쇄된 서류를 읽 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난 이만 가봐야...」 「잠깐 기다려.」 그녀는 마른 입술에 침을 적셨다. 「박사님의 성이 그로코보스키인가요?」 대런이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 괴물은 몇 년 전에 법적으로 묻어 버린 셈이지. 라는 귀절을 상상해 봐. 얼마나 안 어울리는지...」 「글래디스가 왜 박사님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말할 이유가 없었겠지. 날 몹시 미워했으니까, 그 늙은이는 내가 이 소중한 유품들 을 모두 차지하게 됐다는 걸 알면 무덤에서도 펄펄 뛸 거야. 숙모의 변호사가 전화를 걸어서 알려 주더군. 숙모는 절대로 유언장을 바꾸려 하지 않았대.」 「정말 안됐어요, 조지 박사님.」 메건은 그의 솔직한 답변에 온몸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숙모와 조카 사이의 그 뿌리깊은 갈등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난 어렸을 때 10년 동안 숙모와 함께 살았지. 사촌인 태드와 함께 자랐어. 숙모는 나에게 엄마노릇을 하려고 무척 애를 썼어.」 대런은 굳어진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태드가 보트 사고로 죽었을 때부터 숙모는 분별력을 조금씩 잃어갔지. 당신의 아들 은 죽었는데 내가 살아 있다는 건 공평치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두 분 다 견디기 힘들었겠군요.」 「이제 모두 한줌의 과거가 되고 말았군. 그런데 메건은 텔레서브에서 일한 지 얼마 나 됐지?」 「3년 동안이에요. 그리 나쁘진 않았어요.」 「그렇다면 집세를 올려 볼 생각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그렇다고 그리 근사한 집도 아니었어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고 메건은 비로소 마음이 조금 편안해짐을 느꼈다. 「집세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좀더 큰 집에서 살면 메건이 좀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지금 당장은 큰 집으로 이사갈 여유가 없어요.」 「지금과 같은 집세로 여기로 이사와도 좋아.」 그가 집안을 훑어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누군가가 집안에 살면서 물건들을 지켜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물론 대부분 쓸모없 는 것들이긴 하지만...」 살인사건이 있었던 집에서 산다는 건 정말이지 내키지 않는다. 「글쎄, 그건 어려울 것 같군요.」 「그래, 이해할 수 있어. 죽음의 흔적은 아주 오랫동안 남아 있게 마련이지. 나도 이 집이 오싹하게 느껴지는 걸. 자, 이제 스튜디오로 돌아가자고.」 그녀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10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다. 「방송국까지 태워다 주시면 고맙겠어요.」 「좋아. 어젯밤에 NBC의 사장이 집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 왔어. 내 시리즈가 그처럼 짧은 시간에 시청률을 올리는 비법이 뭐냐고 묻는 거야. 그 녀석이 다시 일을 저질렀 다고 몹시 기뻐하더군.」 「기뻐했다고요? 한 인간이 또 살해됐는데? 때로 매스컴은 상식조차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대런이 껄껄 웃었다. 그들은 주방을 빠져나와 멜버른의 뜨거운 아침 속으로 나왔다. 「메건, 우리의 사업에선 나의 저널리즘 학장님이 말씀하시던 대로 <짐승을 배불리 먹 여 둘> 필요가 있지.」 「짐승이라고요?」 문을 쾅 닫고 대런이 돌아서서 문을 잠갔다. 「짐승이란 곧 시청자를 말하는 거지. 그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즐겁게 나눌 천박한 화젯거리, 그리고 차를 마시면서 지껄일 수 있는 폭력적이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전해 줘야 해. 그렇잖으면 그들은 금방 채널을 돌려버리고 말지. 그러지 못하게 하는 게 내 가 해야 할 일이야.」 「재미있는 철학이군요. 그건 당신 방송국의 신조인가요? 아니면 박사님이 개인적으 로 주문처럼 명심하고 있는 사실이에요?」 그때 이상한 예감이 들어 메건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잭이 대런의 차에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아직도 안 가신 거예요?」 그의 시선은 대런에게 머물러 있다. 「그렇소. 이 더위에 당신을 태워다 줘야 할 것 같아서...」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대런이 굳은 어조로 물었다.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 용서하시오.」 그가 잭에게 손을 내밀었다. 햇빛에 금시계가 번쩍였다. 잭이 그의 손을 잡았다. 「잭 갤래거요.」 「아, 메건의 친구로군요? 당신이 내 숙모의 시체를 발견했었군요?」 잭이 메건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의 숙모?」 메건이 그에게 다가가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래요. 글래디스 그로코보스키는 조지 박사님의 숙모예요.」 「메건, 그게 아주 중요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대런이 끼여들었다. 「혹시 숙모의 살해사건에 대해 어떤 심증이라고 갖고 있는 거야?」 「아니에요.」 마치 열대의 폭우처럼 무거운 긴장감이 몰려와 머리가 쑤시기 시작했다. 「잭과 난 박사님의 숙모의 죽음을 텔레서브에 각도를 맞춰서 생각했어요. 그리고... 」 「그리고 내가 텔레서브 결과에 죽고 사는 뉴스 진행자이기 때문에 나 역시 이 사건 과 관련이 있다는 거겠지? 그럴 듯 하군, 메건. 내가 시청률을 높이려고 그 노인을 쓰러 뜨렸다고 생각하나?」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어요!」 「메건을 함정에 끌어넣으려 하지 마시오. 그녀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소.」 「하지만 당신은 의심을 하고 있단 말이군요?」 「그렇소.」 「난 그 이유를 듣고 싶소. 하지만 이건 내게 좀 불리한 게임인 것 같군요. 당신은 내 가 누구인지, 또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고 있지만 난 당신에 대해선 아는 게 아 무것도 없소. 메건이 당신도 텔레서브의 고용인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니오. 난 그만뒀소.」 「그만뒀다고? 아, 그러니까 선생은 경찰이 돼서 죽음의 신에 관한 사건을 해결할 작 정이군요. 그래서 시장직이라도 도전해 보고 싶은 거요?」 「천만에! 나는 저널리스트요. 난 WMMB에서 뉴스 연출자로 일했소.」 대런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뒤틀렸다가 이내 노여움으로 변해 버렸다. 「오, 알겠소. 예전에 서로 만난 적이 없다니 유감이오. 왜 분위기가 적대적이었는지 이제야 알겠소. 우린 시청률에서 당신의 프로그램을 앞서갔소. 그렇죠?」 「어떤 점에선 우릴 앞서기도 했죠.」 「어떤 점? 우리에게 더 유능한 인재가 있다는 뜻이오?」 「조작하는 능력이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할 것 같군요.」 「조작?」 그가 재빨리 메건에게 몸을 돌렸다. 「메건, 경찰에게 텔레서브에 관한 얘기를 했던 게 그것 때문이었나? 애인의 신 포도 때문에 메건까지 그런 결론을 내린 거야?」 「절대로 그런 게 아니에요.」 「메건은 임원회의에서 친구인 잭 갤래거가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 어. 왜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한 거지? 내게 살인혐의를 씌우기 위해서인가? 뭘 노리 고 그런 짓을 한 거지? 방송국에서 일하기 위해서인가?」 「아니에요. 그 당시엔 모르고 있었어요.」 「대런, 내게 겨냥한 화살을 그녀에게 돌리지 말아요.」 한동안 세 사람은 차를 둘러싼 채 어색하게 서 있었다. 메건은 숨조차 쉴 수 없을 만 큼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다. 「메건, 그럼 방송국에서 만나지.」 대런은 차를 타고 떠나 버렸다. 잭이 그녀의 팔을 잡았을 때 메건은 화들짝 놀라고 말 았다. 「그런 식으로 이 일을 처리한 건 그리 현명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는 이 사건에 관련이 있소. 그는 조사 결과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소, 메건. 난 그 사실을 밝혀내야 해.」 「아무런 증거도 없잖아요? 그런데도 당신은 그가 살인을 저지른 것처럼 비난했어요. 」 「내가 집까지 걸어가서 차를 가져오겠소. 그런 다음 당신을 방송국까지 데려다 주겠 소.」 「고맙지만 난 버스를 타고 가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분노와 혼란에 사로잡힌 채 계단을 뛰어올라 갔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계 단을 다 올라온 메건은 몸을 돌려 잭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가와서 자신의 두려움을 씻어 버리라고 명령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 찻길은 텅 비어 있다. 잭은 한 마디 항의도 하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린 것 이 다. 태양은 그녀의 눈물을 모두 말려 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한 시간 후에 메건은 회의실의 맨 끝에 앉아서 대런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자 대런은 그녀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기자들과 작 가, 그리고 연구요원들이 그의 뒤를 따라 나가면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메건이 안도 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미첼이 그녀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와 샌디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샌디와 함께 나가서 최근의 희생자 이웃들과 인터뷰를 해줘야겠어.」 그가 멜버른 상가 근처의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건네주었다. 「샌디, 카메라 기자도 함께 데려가게.」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선 메건과 나는 살인무기에 관한 단서를 잡아야 할 것 같습 니 다.」 「미첼, 14번으로 전화가 와 있습니다.」 한 기자가 회의실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미첼이 전화를 받는 동안 샌디는 메건의 팔 을 끌고 회의장의 구석 쪽으로 데려갔다. 「난 우리가 살인무기를 판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했소! 그에게 병리학자의 보고서와 검시사진 등을 줬어요. 그는 몇 가지 실험을 해서 그 무 기의 유형을 재생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했어요.」 「정말 소름이 끼치는 얘기로군요. 그게 누구죠?」 「총이나 칼 등 무기에 관한 건 훤히 아는 사냥꾼이오. 오늘 아침 교환시장에서 가까 스로 그를 찾아내어 오늘 12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해왔소.」 「하지만 병리학자의 보고서는 어떻게 구했죠? 그리고 사진은? 아직도 경찰이 수사중 일 텐데...」 샌디가 활짝 웃었다. 「이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고 있었어요?」 「샌디!」 「순진한 척하지 말아요. 아버지 방송국의 이득을 위해서 수많은 돈이 이 도시에 흘 러 들어왔소. 그 노인네를 위해서 내가 못할 일은 없어요.」 그가 메건에게 윙크했다. 「대런이 이곳에 붙어 있는 것도 그가 돈줄을 잘 끌어오기 때문이죠.」 「두 사람, 이리로 와요.」 메건이 샌디를 따라 테이블 쪽으로 돌아갔을 때 미첼은 전화기를 쾅 하고 내려놓았다 . 「자네가 그토록 열을 올리는 단서란 게 도대체 뭔가?」 「우선 내가 5시 뉴스를 생중계로 진행하게 해주십시오.」 샌디가 말했다. 하지만 코스토스가 고개를 저었다. 「죽음의 신에 관한 뉴스는 오늘밤 11시 뉴스 이후에 특별방송을 통해서 방영될 거야 . 그러니 모두 녹화를 떠야 하네. 그건 대런에게 맡기게. 뉴욕의 거물들이 모두 이 뉴 스 를 쫓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다네.」 샌디의 음성이 도전적으로 높아졌다. 「이 방송국이 대런 조지가 원하는 대로 끌려갈 수는 없어요.」 그때 문이 열리고 대런과 함께 셔먼 로열이 들어섰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샌디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도움이라도 청하듯 메건을 흘끗 바라보았다. 「난 죽음의 신에 관해서 실마리를 잡았어요. 5시 뉴스에 생방송을 요구했지만 미첼 은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어요.」 「그게 사실인가?」 대런이 메건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셔먼, 이 일은 제대로 진행되는 중입니다. 샌디, 난 단지 시청자들에게 일관되게 보 도를 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밖에 난 이 범죄에 개인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네. 그리 고 그 사건에 관한 방송국의 관심도...」 「그 사건이 아니라 당신에 관한 관심이겠죠. 그리고 개인적인 관심이 있다고 거짓말 하진 마세요. 당신의 개인적인 관심은 오직 경력을 쌓는 일뿐이니까.」 「샌디!」 셔먼이 소리쳤다. 「샌디, 그건 사실이 아니라네.」 대런이 그 노인을 진정시키려는 듯 셔먼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재빨리 글래디 스 그로코보스키가 친척이 된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샌디는 여전히 화난 기색 이 역력하다. 「당신 숙모가 살해됐다고 해서 이 뉴스를 혼자서 독점할 권리는 없어요. 그리고 내 가 찾아낸 단서는 충분히 생방송을 할 가치가 있는 거예요.」 「이봐, 그건 뉴스 연출자가 판단할 문제야!」 다시 셔먼이 고함을 질러댔다. 「이제 모두 진정하기로 합시다.」 대런이 샌디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나와 함께 내 사무실로 가서 모든 걸 바로잡는 게 어때? 메건도 함께 가지. 샌디와 그의 아버지에게 이 사건 이 메건과 어떻게 관련이 됐는지 설명해야 할 것 같아.」 남자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모아졌다. 「조지 박사님, 난 죽음의 신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어요.」 「오, 하지만 난 메건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왜요? 내가 희생자 한 사람을 조금 알고 있기 때문인가요?」 「메건, <이해의 상충>이란 어휘가 적용되는 경우가 아닐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셔먼이 고함을 질러댔다. 대런이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건 내 실수입니다. 이 아가씨는 재미있는 부업을 하고 있었어요. 텔레서브에서 일 하고 있었는데 죽음의 신에게 4번째로 희생된 사람이 메건 밑에서 일했어요.」 「그런데 왜 그런 얘기를 하지 않은 거지?」 「다른 사람에겐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난 이 아가씨를 경리부에 배치시켜서 나머지 견습과정을 마치게 하려고 합니다. 그녀가 적과 내통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경찰은 적이 아니에요!」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의 경쟁 방송사의 전직 뉴스 연출자라면 충분히 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제기랄! 도대체 이게 무슨 소동이야?」 대런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문 쪽으로 갸웃했다. 「내 사무실로 가서 메건에게 사건 전모를 설명하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메건은 고개를 똑바로 쳐든 채 세 남자 를 따라서 복도를 걸어갔다. 메건은 문을 열고 아이들을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섰다. 정말 뼛속까지 피로가 스며들 어 있다. 집안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그녀의 시선을 끈 것은 테이블 위에 있는 반쯤 남은 커피와 도너츠 봉지였다. 잭의 팔에 안겨 있던 기억이 그녀의 피를 훈훈하게 데 워 주기 시작했다. 「엄마, 갤래거 아저씨와 오늘밤 데이트를 할 거야?」 록시가 물었다. 「안돼!」 토머스가 칭얼거렸다. 「난 보모와 함께 있고 싶지 않단 말야!」 잭과의 약속에 대한 기대감이 아침에 비해 많이 무너지긴 했지만 메건은 그 약속을 지 킬 작정이다. 「그래. 엄마는 외출을 해야 하니까 너희들은 앨런 부인과 함께 있으렴. 자, 이제 간 식을 마저 먹고 숙제를 마쳐야 해.」 그녀는 지나치면서 토머스의 머리를 톡톡 쳤다. 「불평하지 마, 아가야, 엄마도 하루 저녁쯤은 데이트할 자격이 있으니까. 앨런 부인 과 함께 놀면 재미있을 거야. 아줌마가 너희들에게 팝콘을 만들어 주신다고 했어.」 아이들이 잠잠해지자 메건은 밖으로 나와서 우편물을 수거했다. 우편함엔 나쁜 소식 만 가득 차 있었다. 첫 번째는 딘에게서 아직도 수표가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전화요금 청 구서가 그녀에게 다시 돌아와 있었다. <적정한 우편요금을 내지 않은 우편물은 배달하지 않습니다>라는 붉은 스탬프와 함께 . .. 「맙소사! 우표 붙이는 걸 깜빡 잊었군!」 그리고 또 한 통의 두툼한 봉투가 있었다. 그건 텔레서브에서 온 것으로, 텔리가 보 낸 전화요금 고지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그걸 살펴보았다. 일레인 존스는 작년 11월 2일 날짜로 된 호텔의 전화요금 고지서 사본 몇 개를 함께 재출했었다. 이건 좀 이상하군. 일레인은 전화를 걸 때 다른 곳에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건 불법은 아니지만 미리 허 락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일레인은 그녀에게 묻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글래디스에게 물어 봤을까? 첫 번째 요금 고지서는 마이애미 힐턴 호텔의 것이었다. 하지만 방 사용자의 이름은 펜으로 지워져 있다. 그녀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전 화는 불통이다. 고장난 게 아니라 선이 연결되지 않았다! 이제 아이들을 끌고 버스를 타고서 전화국이 문을 닫는 시간인 4시 30분까지 달려가 야 한다. 만약 텔리 제제키스가 텔레서브에서 전화를 걸어와서 전화가 연결되지 않는 걸 알면 그대로 해고당하고 말 것이다. 막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차소리가 들려왔다. 그 녀 는 뛰는 가슴으로 돌아보았다. 잭이 일찍 왔을까? 하얀 포드 무스탕이 계단 옆에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금발의 남자가 짙은 색의 안경 을 벗으면서 차에서 내렸다. 「안녕, 메건. 놀랐지?」 그냥 놀란 정도가 아니다. 경악과 분노가 함께 그녀의 뇌속을 파고들었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이곳엔 나의 두 아이가 있소.」 딘 섬머스가 대답했다. 「그리고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난 그 애들을 만나 보고 싶소.」 12 메건은 자신의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왼쪽 위에 조그만 구멍이 나 있는 초라한 구두 였 다. 「미리 전화를 했어야죠.」 「하려고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소.」 「오, 그래요. 나도 방금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냈어요.」 「전화요금이 연체된 모양이군.」 「아빠?」 록시가 그녀의 뒤에서 소리쳤다. 「토머스, 아빠가 왔어!」 록시가 아빠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뒤따라온 토머스는 그가 불렀을 때에야 다가 갔다. 「좋아, 얘들아, 2층으로 올라가자. 너의 엄마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딘 섬머스가 말했다. 집안으로 들어왔을 때 시계는 3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커피포트 를 올려놓고 간이식탁을 닦기 시작했다. 딘은 록시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소파에 앉아 있 었다. 토머스는 아빠 옆에 앉아서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순간 고통과 죄의식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금방 분노로 바뀌고 말았다. 그녀는 이혼에 책임이 없다. 이혼을 원한 쪽은 딘이었다. 그녀는 록시와 토머스에게 부서져 버린 가 정을 안겨 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난 4시 30분 이전에 전화국에 가봐야 해요. 저녁을 들고 가시겠어요?」 「사업상 수요일까지 멜버른에 있게 되오. 아이들을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데려가고 싶소.」 그가 록시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너, 수영할 줄 아니?」 「수영? 엄마, 우리도 가도 돼요?」 록시가 탄성을 질러댔다. 「사업이라고요? 당신은 캘리포니아에서 생명보험 모집인으로 일하고 있잖아요?」 「난 지역 담당소장이 됐소. 올랜도에 회의가 있어서 온 거요.」 그가 자랑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주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군요. 그런데 이번 달엔 양육비를 보내는 걸 잊었나요? 」 「천만에! 내 호주머니에 수표가 있소. 직접 가져오기로 마음먹었을 뿐이오.」 딘이 아들을 바라보았다. 「토머스, 너 피자 좋아하니?」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를 바라보다가 아빠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좋아해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당신은 일을 해야 할 텐데 어떻게 아이들과 놀아줄 수 있겠어요?」 「리바가 함께 왔어. 그리고 난 월요일 밤과 수요일 아침에만 일하면 돼. 리바가 아 이 들을 돌봐 줄 거야. 또 이번 기회를 통해서 서로 친해질 수도 있을 거야.」 메건은 얼굴의 근육이 땅기는 걸 느꼈다. 「리바?」 「내 약혼녀요. 당신만 괜찮다면 애들이랑 함께 전화국에 들릅시다. 다시 전화가 작 동 돼야만 아이들이 호텔에서 전화를 할 수 있지 않겠소?」 아이들의 짐을 꾸리는 동안 메건의 목엔 커다란 덩어리가 응어리져 있었다. 「아이들은 아침 8시에 학교에 가야 해요.」 「그리고 오후 3시에 하교한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 점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아요. 」 「딘, 물가에선 조심해야 해요. 그리고 매일 저녁 전화하게 해줘야 해요.」 「아이들이 원하면 언제라도 전화를 걸게 하겠소. 메건, 나도 아이들을 사랑하오. 그 점을 잊지 말아요. 자, 이제 전화국에 갑시다.」 잭은 차를 세우고 메건의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작은 창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불빛 이 갈라진 나무 계단 위를 비추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는 결코 그 여자와 애정을 나눌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진실로 그 여자를 소유하고 싶다. 갑자기 그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재빨 리 계단을 달려 올라가서 문을 두드린 다음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노란 고양이가 한 눈만 뜬 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하지만 안에선 아 무 반응도 없다. 록시와 토머스의 떠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 려 재빨리 돌아보니 폴러드 핀치가 에드나 애덤스를 휠체어에 태운 채 저녁산보를 나 서고 있었다. 그들에게 손을 흔든 다음 잭은 다시 메건의 문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공 포감이 그의 의식을 뒤흔들었다. 왜 메건은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일까? 아이들은 어디 있을까? 그가 다시 손잡이를 붙잡으려던 순간 문이 열렸다. 「안녕, 일찍 오셨군요.」 메건이 우울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그녀는 붉은 머리칼을 우아하게 틀어올리고 단순 한 감색 드레스 차림이다. 그 드레스가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를 더욱 깊어 보이게 해주 었 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뭔가 자제하는 듯 초연해 보인다. 「아주 멋져 보이는군. 별 일 없소?」 「고마워요.」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몸을 돌려 욕실 쪽으로 향했다. 「몇 년 전에 장례식에 참석할 때 입었던 낡은 드레스예요.」 「아이들은 어디 있소?」 메건은 잠시 멈춰 섰지만 몸을 돌리진 않았다.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곧 욕실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이들의 아버지? 비로소 메건의 행동이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정장을 하고 온 걸 다행스럽게 여기며 식탁 앞에 앉았다. 혹시라도 아이들의 아버지에게서 애들을 데 려오게 되기라도 하면 실업자처럼 보이지 않아야 할 테니까... 「난 준비됐어요.」 메건이 소파 뒤로 걸어가서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잭은 그녀를 따라 현관 쪽으로 걸 어 갔다. 메건의 눈동자가 약간 어두워 보였지만 아침의 열정이 사라진 건 아니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일레인 존스와 6시에 약속을 했거든요.」 잭은 그녀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았다. 그녀가 그토록 초연해 보이는 게 참을 수가 없 었다. 「오늘 아침에 바보같이 굴어서 미안하오. 대런이 내가 한 말에 대해서 당신에게 비 난 을 퍼붓기라도 한 거요?」 「비난? 그래요. 약간 비난을 받긴 했어요. 하지만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자, 이제 가실까요?」 「미안하오. 입을 꼭 다물고 있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어요.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우선 보모에게 들러서 아이들이 아 빠와 함께 있다고 알린 다음 일레인의 집으로 가요.」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요? 나와 단둘이 있는 게 싫소?」 그의 음성에 깃들인 고통이 그녀를 놀라게 했지만 그녀는 애써 그걸 무시해 버렸다. 「이러지 말아요, 잭. 말했잖아요? 우린 앨런 부인의 집에 들러야 해요.」 「도대체 오늘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록시와 토머스의 아빠는 언제 나타 난 거요?」 「내 아들이나 전남편에 대해 신경 쓰실 건 없어요! 그들은 당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 으니까!」 「당신과 관련이 있는 일이면 내게도 관련이 있소.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 르는 거요?」 그의 분노와 애정이 그녀의 신경을 느슨하게 풀어 버렸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 았다. 그리고 대런의 야비한 말과 법률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셔먼 로열의 위협, 그리 고 호텔을 떠날 때 록시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던 일들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메건은 그의 말을 막아 버렸다. 「그리고 돈 문제에 관해 잘난 척하는 딘과, 마치 날 죄인 취급하던 전화국 직원 말 고 도 또 다른 문제가 있었어요. 집에 돌아와 보니 아들의 시험지에 메모가 있더군요. 토 머스가 점심때 친구 몇 명과 학교를 빠져나갔다는 거예요. 교장 선생님이 아이들을 찾 아냈는데 그들의 호주머니엔 어느 우편함에서 꺼낸 스티커가 잔뜩 들어 있었대요. 아 무래도 FBI같은 곳에 의뢰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진정해요. 대런에게 가봅시다. 그가 당신에게서 견습생 자격을 빼앗으려 한다는 거 요?」 「그럴 거예요. 그는 남은 8주 동안 날 경리부에 배정했어요. 날 그의 곁에서 쫓아버 리려는 수작이죠. 그리고 내게 아무 권한도 주지 않을 거예요!」 「그럼 그만둬요!」 잭이 소리쳤다. 그의 기분도 메건에게서 전염되어 우울하게 변해 버렸다. 「그만둬요? 그럴 수는 없어요. 견습 수료증, 추천서, 졸업장, 아이들과 집에서 보내 는 마지막 여름, 그리고 9윌에 얻게 될 안정된 일자리... 내 계획은 이런 것들이에요 . 난 당신처럼 일자리를 찾으러 이 도시, 저 도시를 뛰어다닐 수 없어요.」 「난 뛰어다니는 게 아니오. 텔레서브와 관련된 조작사건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멜 버른에 왔을 뿐이오. 그리고 죽음의 신에 관한 뉴스를 캐내기 위한 거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난 나름대로 목표와 계획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트레일러 헤븐은 공항에 직면해서 몇 평방미터 가량 펼쳐져 있었다. 대부분의 거주민 들은 일년 내내 잘 가꿔진 잔디와 화단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곳이다 . 잭은 길모퉁이에 차를 세운 다음 차에서 내려 차문을 열어 주었다. 벌써 6시 20분이다. 누군가의 집에서 간과 양파를 요리하는 냄새가 메건의 후각을 자 극했다. 갑자기 아이들의 생각이 났지만 애써 그들을 의식 밖으로 몰아냈다. 지금은 이 만남에 대해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한다. 그리고 잭도 멀리해야 할 것 같다. 그가 동정과 애정을 보이긴 하지만, 그의 생활에 나와 아이들이 끼여들 여지는 없을 것 같다. 잭은 오로지 일에 모든 걸 걸고 살아갈 사내다. 대런과의 격렬한 논쟁이 그걸 증명해 주지 않았던가? 그는 결코 가족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그를 포함시키지 않은 삶을 계획해야만 한다. 「일레인 존스가 몇 번지에 살고 있소?」 잭이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움켜쥐며 물었다. 그녀는 재빨리 그의 손길을 피하고 말 았 다. 「D구역인 것 같아요. 바로 여기군요.」 메건이 손으로 가리켰다. 일레인 존스가 살고 있는 이동식 주택은 잡초에 둘러싸여 있 었다. 문밖엔 상자가 잔뜩 쌓여 있어서 더욱 어수선한 느낌이다. 잭이 문을 두드리는 동안 메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레인의 옆에 있는 이동식 주 택 에서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유리창 틈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메건에게 미 소 를 지어 보이며 손을 흔들다가 사라졌다. 잭이 문을 더 크게 두드렸다. 「집에 없는 모양이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문이 열리고 일레인 존스가 나타났다. 메건은 그녀의 외모 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과거에 잔뜩 부풀렸던 은빛 머리칼이 부드럽고 단정한 까만 머리칼로 변해 있다. 일레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안녕, 메건. 그런데 당신은 누구죠?」 일레인이 주홍색 매니큐어를 칠한 손을 잭에게 내밀었다. 「난 일레인 존스예요.」 「안녕, 일레인, 이분은 내 친구인 잭 갤래거예요.」 메건은 친구라고 발음하는 동안 자신의 음성이 굳어져 있음을 느꼈다. 「안녕하십니까, 일레인?」 잭이 말했다. 「자, 안으로 들어오세요. 내가 시원한 걸 만들 테니까.」 메건에게 해고당했을 때 그 여인은 몹시 적대적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녀는 마치 크 리 스마스 때 놀러 온 여동생과 남동생을 만난 것처럼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다. 잭이 그 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는 메건에게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메건은 눈을 크게 뜬 채 일레인의 친근한 태도에 대해 아무런 단서를 잡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자, 그런데 뭘로 하겠어요. 진토닉? 그레이하운드? 아, 난 <해변의 정사>를 잘 만 들 어요. 메건, 그걸 마셔 본 적 있어요?」 「뭐라고요? 해변의 정사?」 일레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술이에요.」 「난 물 한 잔이면 돼요.」 메건의 뺨이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그건 일레인의 말에 당황한 게 아니라 잭의 뜨거 운 시선 때문이다. 「잭, 당신은 어때요? 당신은 <해변의 정사>에 관심이 있나요?」 「난 용기가 있는 편이오. 당신이 함께 마시겠다면 나도 시도해 보겠소.」 「좋아요. 나만 따라 해요.」 메건은 일레인이 일하는 곳으로 시선을 던지다가 텔레비전으로 돌렸다. 텔레비전에선 저녁 뉴스가 진행되고 있었고, 대런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는 샌디 로열이 제작한 현장 장면에서 시선을 돌렸다. 이어 인터뷰 대상이 소개되는 순간 메건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플로리다 주의 악 어 모자를 비스듬히 눌러쓴 클로드 호킨스가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무슨 일이오, 메건?」 잭이 테이블 건너편에서 그녀의 손을 붙잡으면서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우리의 이웃 한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온 걸 보고 놀랐을 뿐이 에요.」 「그게 누구요?」 「클로드 호킨스... 당신의 옆집에 사는 사람 말예요. 그가 뉴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어요.」 「그 사람이?」 일레인이 소리쳤다. 「아는 사람이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다니 정말 재미있군요. 틀림없이 그 살인자에 관 한 일일 거예요!」 일레인이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텔레비전에 시선을 모았다. 「호킨스 씨, 당신의 생각으론 그 살인자가 날이 넓은 칼을 사용했단 말이군요?」 샌디가 영혼이 없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 것 같진 않소.」 클로드가 그의 뒤에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카메라가 그 위에 놓여 있는 물체를 비 추었다. 「병리학자의 보고서를 보면 상처가 2.5cm정도 깊이였다고 되어 있더군요. 하지만 그 상처엔 많은 힘이 가해졌어요.」 클로드의 손이 핑크색 고기 덩어리를 집어들었다. 보기에도 끔찍한 그건 껍질을 벗긴 다람쥐였다. 그리고 그는 칼로 여러 부위를 찔러 보이는 실험을 해보였다. 「오, 안돼!」 일레인이 비명을 질러댔다. 카메라가 미소를 짓고 있는 클로드의 얼굴을 비추었다. 「이거 보세요. 2.5cm정도의 상처라면 페인트 공의 긁기칼이나 정원사의 가래 같은 걸 사용했을 겁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대런의 모습이 나타났다. 「자, 신사 숙녀 여러분, 죽음의 신에 관한 퍼즐 게임은 연속 기획에 의해 생생하게 드러났습니다. 이 시간 이후에 피트 맥머피 경사와 함께 하는 생중계 인터뷰를 시청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 정말 멋져!」 일레인이 소리쳤다. 「대런 조지를 좋아하오?」 잭이 물었다. 「그는 승자예요. 그리고 저 긴 속눈썹과 긴 손가락이 아주 섹시해요.」 그리고 메건을 바라보았다. 「정말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메건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잘생겼어요.」 「텔레서브의 인터뷰어들은 시청자들에게 일지를 적게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겠군 요.」 메건의 몸이 굳어졌다. 지금이야말로 일레인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 「일레인, 조사는 아주 잘되어 가고 있어요. 첫 번째 주의 우리의 조사율은 아주 좋 았 어요. 물론 지난 가을 당신이 올린 성과에 비하면 어림도 없지만...」 「솔직히 말하면 난 그 조사를 아주 훌륭히 해냈어요. 사람들은 내 상냥한 음성을 아 주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잭, 당신 생각은 어때요?」 「틀림없이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시청자들이 일지를 보내게 하는 특별한 비법이라 도 있나요? 혹시 그들에게 <해변의 정사>를 대접하겠다고 약속한 건 아닌가요?」 일레인이 쉰 듯한 음성으로 웃으며 팔꿈치로 잭의 팔을 찔렀다. 「그 점은 메건에게 물어 보세요. 우리 인터뷰어들은 아주 엄격한 규정을 준수해야 해 요. 그렇지만 난 늙은 그로코보스키가 여기서 날 감시하는 것도 아니어서 시청자들에 게 항상 돈에 관한 얘기를 했죠.」 「돈이라고요?」 메건이 소리쳤다. 「그래요. 난 그들에게 텔레서브에 조사일지를 보내주면 빳빳한 2달러 지폐를 보내줄 거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놀랍군요, 일레인.」 잭이 말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2달러에 좀더 협조적이 될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군요?」 「사람들은 정직해요. 한 번 돈을 받으면 순종적이 되어야 한다고 느끼죠. 그런데 지 난 가을의 조사 결과를 봤더니, 당신은 그룹에서 1위를 했더군요. 그래서 메릴랜드에 있는 텔리 제메키스에게 전화를 걸어서 당신에게 50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해 달라고 부 탁할 작정이에요. 벌써 그 돈을 받진 않았겠죠?」 메건이 슬쩍 일레인의 마음을 떠봤다. 「그 박쥐 숙모가 돈을 줬겠어요?」 「그렇다면 월요일에 텔리에게 말하겠어요. 버뮤다엔 오래 머물게 되나요? 그쪽으로 돈을 보내 줄까요?」 일레인이 술잔을 비우고 일어나 다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리로 보내 줘요. 필요하면 우체국에서 찾아 쓰겠어요.」 「이동주택을 갖고 갈 건가요?」 「천만에! 이 집은 남자친구 거예요! 그가 집을 사냥 캠프나 다른 곳으로 옮겨 갈 거 예요.」 잭이 메건에게 윙크를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는 뭔가 가치있는 걸 알아낸 것 같다. 「잭, <해변의 정사>를 좀더 들겠어요?」 「이젠 됐소. 하지만 이처럼 환대해 줘서 정말 고마웠소 버뮤다에서 즐겁게 지내길 빌 겠소.」 일레인이 메건을 보며 미소지었다. 「일부러 들러줘서 고마워요. 이제 글래디스가 없으니까 당신이 텔레서브를 감독하겠 군요?」 「그래요.」 「그로코보스키 부인은 대단한 심술쟁이였다죠, 일레인?」 잭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녀를 잘 알고 있나요?」 「그 여자를 처음 본 순간 어떤 사람인지 알았어요. 그녀에 관한 소문은 한결같이 나 쁜 것뿐이었어요. 누가 죽였는지는 몰라도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잭과 메건이 항의를 하려고 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럼 전화를 받아요.」 잭이 메건을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웠어요. 그럼 즐거운 저녁을 보내요!」 일레인이 문을 닫고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오, 안녕하세요. 당신을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정말 잘했어요!」 하지만 상대방 사내가 날카롭게 쏘아대는 바람에 그녀의 미소는 사라졌다. 일레인은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알겠어요. 틀림없이 그걸 가지고 가겠어요. 걱정 말아요.」 그녀는 전화를 끊고서 마지막 남은 술을 들이킨 다음 다시 한 잔을 따랐다. 만약 그 가 죽은 박쥐 숙모와 텔레서브 목록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면 오늘밤은 아무 재 미도 없을 것이다. 「엄마에게나 가보시지.」 일레인은 중얼거리며 다시 칵테일용 혼합기를 집어들었다. 13 「도대체 일레인에게서 뭘 알아냈길래 그렇게 싱글벙글 웃는 거예요?」 잭이 차문을 열어 주었을 때 메건이 물었다. 「우선 타기나 해요. 저녁을 먹으러 가면서 말하겠소.」 「지금 듣고 싶어요. 내가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 뭐죠?」 「그녀는 글래디스를 <박쥐 숙모>라고 불렀소. 그리고 남자 친구가 그 이동식 주택을 갖고 있다고 했소. 그 사람은 틀림없이 대런 조지요!」 잭이 메건을 와락 끌어안고서 그녀를 땅에서 들어올리려고 했다. 「그렇다면 대런이 일레인을 유혹해서 조사결과를 조작했단 말인가요?」 「그렇소. 아주 단순하고 분명한 사실이오.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그는 일레인을 만났 고, 그 조작사건을 생각해낸 거요. 그리고 지금 열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녀를 버뮤 다로 보내려 하고 있소.」 「무슨 열기?」 그녀의 팔에 한기가 퍼져갔다. 「죽음의 신을 말하는 건가요? 노마 슐츠만이 죽음의 신에게 살해됐다면 그와 텔레서 브 사이엔 아무 관련도 없어요.」 「나도 인정하오. 하지만 맥머피 경사는 당신을 통해서 노마와 글래디스가 둘 다 텔 레 서브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내 예감으론 맥머피가 텔레서브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걸 알아내고 대런이 겁을 먹고 일레인을 경찰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내보내 려 는 것 같소.」 「그렇다면 당신은 그를 죽음의 신이라고 생각하진 않는군요?」 「잘 모르겠소. 하지만 그는 내 조사영역에서 맨 우위에 속하진 않소!」 메건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의 업무를 위해서는 살인마 정도는 경시하고 있다 . 「하지만 글래디스는 어때요? 경찰은 그녀를 살해한 건 죽음의 신이 아니라고 확신하 고 있는데...」 「맞아.」 「그렇다면 대런이 숙모가 자신의 행동을 눈치채자 그녀를 살해했단 말인가요?」 「모르겠소. 정말 모르겠어. 대런이 죽음의 신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그 가 그렇게 냉혹한 인물이라고 단정짓진 못하겠소 더구나 글래디스 그로코보스키는 그 의 숙모인데...」 「두 사람 사이엔 애정이 거의 없었어요. 그는 전혀 슬퍼하지도 않았어요.」 「메마른 감정 따윈 증거가 될 수 없소. 우선 그 이동주택이 대런의 것인지부터 알아 봅시다. 만약 그게 대런의 소유라면 텔레서브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봐야 할 거 요.」 「지금은 금요일 7시예요. 그걸 알아보려면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렇군. 하지만 임대 사무실 같은 데서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잭, 월요일까지 기다렸다가 맥머피에게 결과를 알아보도록 해요. 이건 경찰이 해결 해야 할 일이에요. 조지가 숙모의 죽음에 혐의점이 있다면 경찰에게 그를 체포하도록 해야 해요.」 「좋아요. 그럼 당신 뜻대로 합시다. 어서 타요. 어디 가서 저녁식사를 한 다음 술을 마시고 춤이라도 춥시다.」 「먼저 앨런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들이 가지 않을 거라고 알려 줘야겠어요.」 「그렇게 해요. 그 다음엔 저녁시간을 모두 나에게 줘야 하오. 그런데 록시와 토머스 를 언제쯤 태우러 가야 하지?」 「아이들은 수요일까지 딘과 함께 있을 거예요.」 「잘됐군! 그럼 수요일까지 당신은 온통 내 것이 될 테니까 말이오.」 그가 메건에게 재빨리 키스했다. 「인디알랜틱에 소풍을 가서 내일은 수영을 해도 좋겠군. <해변의 정사>를 마셔 보는 건 어때요? 일레인이 나에게 칵테일 방법을 알려 줬는데...」 그는 웃고 있지만, 그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메건, 괜찮소?」 갑자기 그녀의 상태를 눈치챈 잭이 물었다. 「괜찮아요. 하지만 데이트를 할 기분은 아니에요. 날 집에 그냥 데려다 주시겠어요? 」 「메건...」 「제발, 잭. 더이상 입씨름하고 싶지 않아요.」 그들은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섰다. 잭은 반대방향으로 차를 돌려 그녀의 집으로 향했 다. 「좋아요. 집으로 갑시다.」 그의 음성엔 혼란과 실망이 묻어 있다. 하지만 잭 갤래거는 충분히 그런 상처쯤은 극 복할 것이다. 메건은 눈을 감았다. 이번엔 자신이 상처를 극복해야 할 차례다. 지난 주말은 마치 석 달이나 되는 것처럼 지루했어. 월요일 아침에 잭은 옷을 입으면 서 그런 생각을 했다. 토요일에 무려 20번씩이나 메건의 집에 전화했지만 계속 통화 중 이었다. 그러나 일요일엔 다시 전화를 하지 못했다. 죽음의 신에 관한 그 나름대로의 조사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녀 를 만나기로 되어 있다. 금요일에 그녀는 들어오라고 권하지도 않고, 차갑게 작별의 키스를 받았을 뿐이다.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몰라도 단단히 틀어진 게 틀림없다. 집밖으로 나와서 문을 잠그고 호킨스의 집을 바라보았다. 클로드의 트럭은 찻길에 주 차되어 있지만 며칠 동안 모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애를 단둘이 만나서 텔레서브의 목록을 어떻게 구했는지 물어 보고 싶다. 하지만 클로드가 없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안녕하세요, 갤래거 씨!」 여자의 음성이 잭의 상념을 깨뜨렸다. 몸을 돌려보니 에드나 애덤스와 폴러드 핀치가 길 한 가운데에 서 있다. 「안녕들 하십니까? 별 일 없죠?」 「우린 아주 좋아요. 그런데 오늘밤에 또 회의가 열린다우.」 애덤스가 시슬러와 집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당신 집 건너편이에요. 당신도 참석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당신의 이웃도 올까요?」 폴러드가 클로드의 집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가 오려면 우선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보여줬던 그 추한 모습에 부끄러워할 줄 아 는 양심을 갖춰야 할 거요.」 잭이 웃음을 터뜨렸다. 「클로드가 오게 될지 모르겠군요. 그런데 무슨 회의입니까?」 「컨트리 클럽 찻길 끝에 게시판을 세우는 일을 돕기 위해 위원회를 설립할 예정이오 . 」 폴러드가 말했다. 차갑고 청명한 아침 햇살에 그의 대머리가 빛났다. 「당신도 가입을 할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그런데 무슨 게시판입니까?」 「폴러드는 멜버른을 아름답게 하는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어요. 환경 미화운동은 폴 러 드가 심혈을 기울이는 사업이에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생각 없이 환경을 오염시키 고 있어요.」 에드나가 설명했다. 「아주 좋은 일을 하시는군요. 그럼 오늘 저녁에 뵙기로 하겠습니다.」 「메건도 함께 데려와야 해요.」 에드나가 말했다. 그는 에드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들 내 연인을 사랑하고 있어. 무슨 일 때문에 메건이 그토록 괴로워했는지는 몰 라 도 주말 동안에 충분히 회복됐을 것이다. 이제 그 이동주택의 소유주를 알아본 다음 그녀의 집으로 가서 현관 앞에 앉아 그녀가 나타나길 기다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의 표정엔 미소가 번져 갔다. 그는 힘차게 거리를 달렸다. 그날 하루가 약속해 둔 모든 일에 희망을 걸면서... 「아가야, 안녕. 학교 갈 준비는 마쳤니?」 토머스가 신나는 주말을 재잘거리는 동안 메건은 목이 막혀 오는 것 같았다. 「네, 엄마, 그런데 아빠가 우리에게 진짜 낚싯대와 조그만 고기를 줘서 커다란 고기 를 낚게 했어요. 내 미끼는 먹히고 말았지만 상관없어요.」 「토머스, 정말 재미있었겠구나. 그럼 학교에 갈 때 레인코트도 챙겨가야 한다. 그리 고 이제 마음대로 학교를 떠나선 안돼. 교장 선생님이 내게 편지를 보냈는데 네가 금 요일에 다른 친구들과 학교를 떠나 우편함에서 뭘 꺼내왔다면서?」 「어, 엄마, 난 아무것도 꺼내지 않았어요. 모나가 준 거예요.」 「모나? 모나 호킨스가?」 메건의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모나와 함께 학교를 나간 거니?」 「아니에요. 나랑 로버트가 운동장에 모나가 있는 걸 봤어요. 우린 담장 주변을 걷고 있는데 모나가 남은 편지들을 우리에게 줬어요. 엄마, 정말이에요.」 아무래도 오늘 일정에 학교에 들르는 걸 포함시켜야 할 것 같다. 「좋아, 엄마는 널 믿는다. 하지만 이제 로버트와 마음대로 운동장에 나와선 안돼. 알 았지?」 토머스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데 딘이 전화를 바꿨다. 「메건, 무슨 일이오? 빨리 등교시키지 않으면 비 때문에 지각하겠소.」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런데 아이들이 당신을 괴롭히진 않아요?」 「아니, 리바와 난 무척 즐거웠소. 애들이 좀더 오랫동안 우릴 방문해 줬으면 좋겠소 . 」 「좀더 오랫동안?」 메건은 온몸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록시와 얘기 좀 해도 될까요?」 「기다려요. 리바가 그 애의 머리를 프랑스식으로 땋고 있소. 록시는 좋아서 난리요. 」 수화기 저편에서 낄낄거리는 음성을 들으면서 메건은 어느 때보다도 진한 고독감을 맛 보았다. 록시도 흥분을 가누지 못하고 소리쳤다. 「엄마? 머리를 프랑스식으로 땋고 있는 중이야. 그리고 새 핑크 리본도 달았어. 아 빠 가 수영복도 사줬는데 30달러나 줬대!」 「얘야, 어떠니? 네가 보고 싶어 못 견디겠구나.」 「엄마, 사랑해요. 그럼 나중에 만나요.」 메건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눈물을 흘리는 걸 거부했 다. 어떤 경우든 자기 연민에 빠져들고 싶진 않다. 멍한 상태에서 외출준비를 하는데 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재빨리 창가로 달려갔다. 「잭?」 하지만 그건 대런의 차다. 실망감이 너무 절실해서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다. 대런은 차에서 내려 글래디스의 문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는 메건의 집 쪽을 한번 쳐 다본 다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메건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숙모의 집에 오는 거야 나무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웬 일인지 그는 이곳에 와 있는 걸 초조하게 여기는 게 분명해 보인다. 그녀는 잭이 일 레 인 존스의 이동주택의 소유주를 알아냈는지 궁금해졌다. 만약 대런이 그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리고 일레인이 사람들에게 뇌물을 줬다 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지고 있다. 천둥소리가 불길하게 번져가 고 있다. 갑자기 기온도 뚝 떨어진 것만 같다. 메건은 팔짱을 낀 채 몸을 떨었다. 잠 시 후에 현관 아래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소리일까? 비명이라도 질러야 하나? 그녀는 문을 열고 계단 쪽으로 걸어나갔 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14개의 계단 중에서 6개를 내려간 다음 몸을 굽히고 차고문 위 의 창문 중의 하나를 들여다보았다. 「조지 박사님?」 그녀는 큰 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침묵만이 이어졌다. 이어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쓰 레기 트럭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지 박사님? 괜찮으세요?」 차고엔 불도 들어오지 않았다. 고장난 전구를 바꿔 끼우질 않았던 것이다. 메건은 아 무 생각 없이 나머지 계단을 달려 내려가서 옆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문은 닫혀져 있 다. 「조지, 박사님?」 손잡이의 감촉이 차갑기 그지없다. 「조지 박사님?」 다시 불러 봤지만 대답은 침묵뿐이다. 메건은 어깨로 힘껏 밀어서 문을 열었다. 차고 안은 도깨비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음산하고 무섭다. 하지만 그녀는 간신히 용기를 짜내서 안으로 들어갔다. 오른쪽에서 뭔가 움직이는 걸 느끼고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달 려 와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러운 시멘트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짙은 눈동자가 스키 마스크의 눈구멍을 통해 빛난다. 메건은 그 공격자의 밑에서 몸 을 비틀며 숨을 쉬려고 안간힘을 썼다. <네 손을 움직여서 그를 치는 거야> 마음의 저쪽 에서 방어의 본능이 그렇게 명령했다. 메건은 손가락으로 그 남자의 눈을 찔렀다. 그 가면은 그녀의 피부에 아주 부드럽게 와 닿았다. 하지만 승리의 순간은 금방 잔인하게 부서져 버렸다. 그 괴물은 비명을 질 러대며 그녀를 붙잡고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천을 코에 틀어막았다. 그 냄새가 코를 타고 흘러가는 동안 메건은 격렬하게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분노가 의식과 함께 사라져가는 동안 암흑이 그녀를 덮쳤다. 「메건, 메건, 눈을 떠봐요.」 잭이 병원 침대에 몸을 기대고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갤래거 씨, 그녀를 쉬게 내버려두세요.」 간호사가 무뚝뚝한 어조로 명령했다. 잭은 몸을 돌려 침대 저편에서 있는 의사를 바 라 보았다. 의사가 머리를 흔들자 피트 맥머피 경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전형적인 뇌진탕 증세요.」 의사가 말했다. 「탈수 증상이 없어야 할 텐데...」 「왜 깨어나지 않는 겁니까?」 잭이 물었다. 차고 바닥에서 그녀를 발견한 지가 몇 시간이나 지난 것 같다. 그녀를 보는 순간 그는 두려움으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녀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래 서 그녀의 목에서 맥박이 뛰고 있음을 확인했을 때 그는 안도감으로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갤래거 씨, 시간이 걸립니다. 날 믿어 줘요. 그녀는 좋아질 겁니다.」 의사가 나가자 맥머피 경사는 잭에게 나오라는 시늉을 해 보였고, 두 사람은 메건의 방에서 가까운 로비로 갔다. 맥머피의 얼굴에도 피로가 진하게 드리워져 있다. 「어떻게 그녀를 찾으러 차고에 내려갔는지 말해 봐요.」 「현관문 옆에 있던 세탁 바구니엔 깨끗한 옷이 잔뜩 쌓여 있었소. 아마도 메건은 뭔 가를 가지러 차고에 내려갔을 거라고 생각했소.」 「거기서 아무도 보지 못했소?」 「보지 못했소.」 「하지만 당신의 예감은 어때요? 당신은 뉴스 담당자잖소. 뭔가 직업적인 느낌이 있 을 텐데?」 잭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경찰관을 노려보았다. 틀림없이 그는 자신의 신상 을 알아봤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 중요한 건 메건뿐이다.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면 아 무리 격렬한 분노도 삼켜야만 한다. 그는 나직한 어조로 자신이 WMMB를 떠나야 했던 이유와 텔레서브 조작사건에 관한 자 신의 견해를 털어놓았다. 「난 메리트라는 여자의 죽음을 조사해 봤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소. 그녀의 편지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 조사가 조작됐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군요?」 「그렇소. 하지만 노력하고 있는 중이오.」 「누가 그로코보스키를 죽였든, 그 범인과 섬머스 부인을 공격한 자가 서로 관련이 있 다고 생각하고 있죠?」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그 조사를 조작한 이유가 뉴스 분야에서 앞서가기 위한 사람의 소행이라는 뜻이군 요 ? 그렇다면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도 있소?」 잭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대런 조지.」 그 이름을 듣고서도 경사는 전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럴 만한 증거가 있습니까?」 잭은 메건이 글래디스의 지시를 받고 일레인 존스를 해고시킨 이야기를 해주었다. 일 레인 존스는 에바 메리트에게 전화를 건 조사요원이며, 그녀의 집을 방문했던 일도 털 어놓았다. 「일레인이 무심결에 내뱉은 말로 봐서 그녀는 글래디스 그로코보스키가 대런의 숙모 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거요. 그리고 그녀가 살고 있는 이동주택이 남자친구의 소유라고 했소.」 그리고 그는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맥머피에게 주었다. 「이건 어디서 났소?」 「이동주택 관리소에서...」 맥머피는 그 종이를 자신의 호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당신은 조지라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습니까?」 「아뇨.」 「그가 도박에 빠져서 빚을 많이 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소?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 이 그가 현금이 필요해서 비싼 물건을 내놓았다고 하더군요.」 잭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몇 번 듣긴 한 것 같소.」 「혹시 오늘 섬머스 부인의 집에서 그를 보지 못했소?」 「아뇨. 경찰이 그녀의 아파트에서 지문을 채취하지 못했나요?」 「아주 많이 채취했소. 그런데 부인의 아이들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그 애들은 수요일까지 그들의 아버지와 함께 있을 겁니다. 메건은 의식이 들자마자 그 애들에게 직접 괜찮다고 전하고 싶어할 겁니다.」 「내가 그 사실을 알리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거군요?」 잭이 미소지었다. 「메건은 아이들에게 겁을 줬다는 걸 알면 몹시 화낼 거요.」 그때 간호사가 다가와서 잭을 불렀다. 「섬머스 부인이 깨어나서 당신을 찾고 있어요.」 잭은 재빨리 메건의 병실로 달려갔다. 「좀 어때요?」 그가 키스했을 때 메건의 눈동자엔 눈물이 가득했다. 그녀는 간신히 고통을 삼키고 쉰 듯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잭, 록시와 토머스에게 내 대신 전화를 걸어 주시겠어요? 난 괜찮다고 전해 주세요 . 그리고 수요일에 내가 학교로 데리러 가겠다고 해주세요.」 「알겠소. 애들이 수업이 끝나는 대로 전화하겠소.」 「섬머스 부인,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맥머피 경사가 수첩을 들고 다가왔다. 메건은 대런이 숙모의 집에서 나왔다가 차고 쪽으로 사라지는 걸 봤다고 말했다. 그 순간 두 남자의 표정이 변했다. 「부인은 차고 안에서 대런 조지를 봤습니까?」 메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띄엄띄엄 스키 마스크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건 잭의 집에서 날 공격했던 남자의 것과 똑같았어요. 체격도 비슷하고요. 아마 동일인물인 것 같아요.」 「옷도 같은 걸 입었던가요?」 「아뇨. 달랐어요.」 맥머피의 펜이 부지런히 종이 위를 움직였다. 「그 사내는 어떤 옷을 입고 있었습니까?」 「짙은 바지에 파란 셔츠를 입고 있었어요. 그리고 휘장도 달고 있더군요. 멜버른 경 찰의 제복 같아 보였어요.」 14 「경찰제복! 맙소사! 시청자들이 굉장히 재미있어하겠군!」 대런의 음성에 메건은 거친 숨을 헐떡였고, 잭이 재빨리 돌아보았다. 「조지, 도대체 여기까지 무슨 일이오?」 대런은 핑크 빛 진달래 화분을 든 채 뒤로 물러섰다. 「갤래거 씨, 가만 있어봐요!」 맥머피가 방의 저편에서 소리쳤다. 대런은 잭의 험악한 표정에 대고 고개를 까딱해 보 인 다음 경찰관을 향해 활짝 웃었다. 「경사님, 이 아가씨는 좀 어때요?」 「섬머스 부인의 얘기는 어디서 들었소?」 맥머피가 물었다. 「항상 경찰의 전화를 모니터하는 기자에게 들었죠.」 「조지, 여기서 꺼져 버려요!」 잭이 주먹을 불끈 쥐면서 소리쳤다. 「갤래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요? 람보 콤플렉스에라도 걸린 거요?」 대런이 메건의 침대 쪽으로 다가가며 빈정거렸다. 「조지 씨, 나와 잠깐 나가실까요? 당신에게 몇 가지 질문 할 게 있소.」 맥머피가 끼여들었다. 대런이 눈을 깜빡이며 부풀어오른 눈밑을 문질러댔다. 「잠깐만 기다려요. 메건이 괜찮은지 알고 싶소.」 잭은 그가 분장할 때 바르는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눈을 다친 거요?」 대런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오늘 아침에 쓰레기 상자를 들어내다가 협죽도 덤불에 넘어졌소.」 그는 화분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메건의 침대 끝에 앉았다. 「메건을 구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메건이 차고 안에 들어가는 걸 보지 못한 걸 내 평생 후회할 거야. 난 바로 문밖의 헛간 뒤에 있었어. 폭우만 쏟아지지 않았다면 메 건 의 음성을 들었을 텐데...」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단 말이군요?」 잭이 물었다. 「물론이오. 들었다면 메건을 구조해냈을 거요. 아무튼 정말 통탄할 일이군. 처음에 는 내 숙모님이, 그리고 두 번째는 메건이 이렇게 당하다니...」 대런은 메건을 바라보다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하얀 봉투를 꺼냈다. 「이걸 받아, 첫 번째 보수야. 얼마 안되지만 메건에겐 필요할 것 같아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메건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난 이 돈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 난 견습생이에요.」 「우린 견습생에게도 급료를 지불한다는 얘길 하지 않았던가? 이건 플로리다 동부의 제일가는 뉴스 방송국에서 일한 대가로 주는 보너스야.」 「난 받을 수 없어요...」 「왜 이러는 거야?」 대런이 메건의 팔을 두드려 주었다. 「지난주에 내가 좀 화를 낸 건 잊어버려. 이제부터는 메건이 랭킹 2위의 경쟁업체에 서 뉴스 연출자로 근무했던 남자와 데이트를 한다고 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 」 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문가에서 맥머피를 바라보 았 다. 「메건, 몸조심해, 그리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그가 나가자마자 메건은 대런이 담요 위에 떨어뜨린 봉투를 집어들었다. 「이 돈을 받으면 난 텔레서브의 일자리를 잃게 돼요! 난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일한 대가를 받을 수 없는 입장이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잭이 봉투를 옆으로 치운 다음 그녀의 침대 옆에 앉았다. 「이제 걱정하지 말아요. 이건 어쩌면 대런의 또 다른 술수인지도 몰라. 경찰에게 자 신이 텔레서브를 더럽히는 일에 몹시 흥미를 갖고 있다는 걸 과시하거나 자신의 속임 수를 은폐하려는 건지도 모르지. 그리고 당신을 위협하려 할지도...」 「하지만 잭...」 「면회시간이 끝났습니다.」 문에서 간호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섬머스 부인에겐 휴식이 필요합니다.」 「날 믿어요, 메건, 모든 게 잘될 거요. 염려 말고 푹 쉬어요.」 메건은 그가 떠나는 걸 지켜보다가 극도의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군요.」 혈압을 잰 간호사가 메건에게 물잔을 건네주었다. 「이제부터 마음놓고 마셔요. 충격을 받은 후엔 수분을 충분히 공급해 줘야 하거든요 . 」 「알겠어요.」 이제 다시 기운을 차려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달리 도와드릴 일은 없어요?」 간호사가 물었다. 메건은 조심스럽게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려놓은 다음 발끝을 쭉 펴 보 았다. 「고마워요. 그리고 날 원무과에 데려다 줘요. 계산을 치르고 여기서 나갈 수 있도록 . ..」 잭은 병원 주차장에서 맥머피를 찾아냈다. 그 경관은 세단 위에 앉아서 무전기로 보 고 를 하는 중이었다. 대런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서장님께 수색대가 집안은 물론, 차의 트렁크 내용물까지도 검산해 볼 필요 가 있다고 전해 주게. 그리고 난 한 시간 후에 경찰서에 돌아갈 거야. 반스에게 출동 할 준비를 갖추라고 일러주게.」 잭을 발견한 경관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무전기를 끄고서 잭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오?」 잭은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무전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가 메건을 공격하기 전에 뒤졌던 쓰레기 속엔 뭔가 재미있는 게 숨어 있을 겁 니 다.」 「당신은 그가 섬머스 부인을 쓰러뜨렸다고 생각하는 거요?」 맥머피는 좌석에 몸을 기댄 채 호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 엄지손가락 밑을 소제 했 다. 순간 잭의 몸이 굳어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에겐 수색영장 이상의 것이 필요할 겁니다. 그의 눈을 보셨습니 까? 뭔가 긁힌 것 같은 흔적이...」 「조지 박사는 덤불에 긁혔다고 했소.」 잭은 팔짱을 낀 채 차에 몸을 기댔다. 「그건 핑계요.」 「우린 섬머스 부인의 손톱 밑에서 피부 견본을 채취했소.」 맥머피가 아주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잭은 입을 열려다가 그대로 다물고 말았다. 경 찰이 대런 조지를 수사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는 맥머피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 그처럼 일찍 나타나줘서 고마웠소.」 맥머피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섬머스 부인은 괜찮아질 겁니다. 당신이 그녀를 돌봐줘요. 부인을 공격한 미친 녀 석 은 우리가 맡을 테니...」 「그게 죽음의 신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대런 조지가 죽음의 신이라고 생각하오?」 「잘 모르겠소.」 「나도 마찬가지요.」 「범인이 제복을 입은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순간 경관의 표정에 긴장감이 스쳤다. 「그게 어쨌다는 거요?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소. 갤래거, 난 이만 가봐 야 겠소.」 맥머피가 차문을 닫고 시동을 걸었다. 잭은 맥머피의 차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그 차는 트레일러 헤븐 쪽으로 향하고 있다. 호주머니칼로 손톱을 소제하던 맥머피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다. 하지만 그 형사가 연쇄 살인범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갤래거 씨.」 그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폴러드가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클로드 호킨스도 그 옆자리에서 노란 데이지 꽃을 한 묶음 들고 내렸다. 「안녕들 하십니까? 그런데 여기는 웬일로 오셨습니까?」 「섬머스 부인의 얘기를 들었어요.」 폴러드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도대체 경찰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메건의 이야기는 어떻게 들었습니까?」 「텔레비전에 나왔어요.」 클로드가 말했다. 그는 늘상 입고 다니는 작업용 바지 차림이지만 머리만은 말끔히 빗 질을 한 상태다. 「텔레비전? 뉴스에 나왔다는 겁니까?」 「그래요. 모나가 학교에 가서 난 집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었소. 그런데 갑자기 일 전 의 그 뉴스 담당자가 나타나서 섬머스 부인이 공격을 당했다고 했어요. 죽음의 신의 짓일 거라고 하더군요.」 잭은 토머스와 록시를 떠올렸다. 메건의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봤을지도 모른다. 「메건을 만나실 작정입니까?」 「그렇소. 에드나가 필요하면 아이들을 돌봐주겠다고 전해 달라고 했어요.」 「틀림없이 모나도 오려고 할 거예요.」 클로드가 말했다. 「그 앤 섬머스 부인을 몹시 좋아하거든요.」 「난 지금 가봐야겠습니다. 하지만 한 시간쯤 후에 돌아올 겁니다.」 잭은 재빨리 차에 올라타서 그 곳을 빠져나왔다. 이제 겨우 1시다. 일레인의 집에 들 렀다가 학교에 가도 될 것이다. 메건의 전남편을 만난다는 사실이 조금은 동요하게 만 들었지만 그는 개인적인 생각을 애써 밀쳐 버렸다. 지금은 일레인 존스가 무사한가를 확인하는 게 더 급한 일이다. 지난 몇 주 동안 죽 음 의 신 살인사건과 텔레서브 조작사건에 뛰어들면서 그의 우선 순위가 바뀌었다. 그의 마음을 점점 사로잡는 그 붉은 머리의 여인도 그 변화의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행위에 관한 근본적인 불안감은 뉴스 담당자로서의 그것이었을 것이다 . 뉴스를 쫓는 건 앰뷸런스를 쫓는 것과 흡사했으니까. 아무튼 이제 일레인 존스에게 모 든 진실을 털어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그녀에게 모든 걸 털어놓은 다음 대런 조지가 그녀를 그 조작사건에 끌어들였다는 사 실을 알고 있었는지 물어 볼 작정이다. 금속 문에 그의 노크 소리가 예민하게 들린다 . 잠시 후 다시 한번 노크를 했지만 아무 대답이 없다. 주변을 둘러보니 옆의 이동주택에서 80살쯤 되어 보이는 노파가 커튼 사이로 밖을 내 다보고 있었다. 잭은 그 노파를 향해 손을 흔든 다음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서 문을 두 드렸다. 노파가 즉시 나타났다. 「안녕, 뭘 도와줄까요, 젊은이?」 「안녕하세요? 내 이름은 잭 갤래거예요. 옆집에 사는 일레인 존스를 찾아왔어요. 오 늘 그녀를 못 보셨나요?」 「일레인은 떠났다우, 젊은이.」 노파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젯밤에 남자친구와 함께 커다란 붉은색 여행가방을 세 개나 꾸려서 떠났어요. 아 마 일레인은 긴 휴가를 떠나는 것 같았어요.」 잭은 그 노파의 관찰력에 미소지었다. 「혹시 그 남자친구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우린 아주 오랫동안 이곳에 살았어요. 하지만 일레인은 한 번도 남자친구 얘기를 하 지 않았지. 몇몇 사람들이 물었지만 한사코 밝히지 않았어. 그런데 우리 뒷집에 살고 있는 여자는 그 남자가 텔레비전의 뉴스 담당자라고 하더군요. 난 그를 자세히 본 적 은 한 번도 없지만 차는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뒤에 라디오 방송국이라고 적혀 있는 커다랗고 짙은 빛깔의 링컨이었어요.」 잭의 맥박이 뛰었다. 「그 부인은 지금 집에 계십니까?」 「아뇨. 그녀는 지금 모빌에 갔어요. 둘째 딸이 아이를 낳았거든요. 다음달에나 돌아 올 거예요.」 「고맙습니다. 부인.」 잭은 활짝 웃었다. 「그런데 일레인이 없는 동안 우편물을 받아 두거나 그녀의 집을 돌보는 사람은 누구 죠? 업무 때문에 가능하면 빨리 일레인과 연락을 취해야 하거든요.」 「사무실에 알아봐요. 뷸라 매키니가 알고 있을 거예요. 그녀가 임대 중개인이지. 그 녀에게 앤 바바가 보내서 왔다고 해요.」 「여기 내 명함이 있습니다. 옆집 주인에게서 연락이 오면 알려 주십시오. 고마웠습 니 다. 바바 부인...」 「난 부인이 아니라 아가씨라우.」 잭은 황급히 임대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어를 낚을 기 분 이다. 그건 정말이지 대단한 뉴스다! 폴러드 핀치는 국민학교 앞의 커브 길을 향하면서 안경 너머로 메건을 바라보았다. 「정말 집으로 곧장 가지 않아도 괜찮겠소? 내가 아이들을 데려다 줄 수도 있어요.」 「괜찮아요, 핀치 씨. 난 여기서 내려서 아이들을 기다려야겠어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니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부인의 꽃을 대신 집에다 갖다둔 후 다시 와서 태워다 주겠소.」 「아니에요. 아무튼 여기까지 태워다 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아주 긴요한 때에 나 타 나 주셨군요.」 의사는 병원에서 나가는 걸 만류했지만 메건은 고집을 피워서 병원을 나오고 말았다. 빨리 아이들을 만나서 자신이 무사하다는 걸 알려야만 한다. 「메건! 맙소사,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요?」 메건은 눈을 깜빡였다. 불과 1.5m쯤 떨어진 곳에 딘이 손을 허리에 얹은 채 서 있다. 그는 메건에게 일어난 사건의 내막을 환히 아는 것 같은 표정이다. 「난 괜찮아요. 아이들을 만나서 수요일에 데리러 오겠다고 말하러 왔을 뿐이에요.」 「병원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뉴스에 의하면 당신은 심각하게 다친 것 같던데... 」 「난 괜찮아요.」 그때 아이들이 교실에서 달려나왔다. 「제발 목소리 좀 낮추세요. 록시와 토머스가 들으면 겁을 먹겠어요!」 「아이들이 정말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아오? 아이들이 자기 집에서 엄마가 살인 자에게 심한 공격을 당했다는 걸 알면 어떻겠소? 메건, 아무래도 집을 옮기는 문제에 대해서 상의해 봐야 할. 것 같소. 난 도저히...」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에요. 지난 몇 년 동안 당신은 우리의 삶에서 철저히 벗 어 나 있었어요! 그러니 내게 강의할 생각일랑 말아요!」 「좋소. 여기서 아이들 얘기를 하기엔 적당하지 않은 것 같군. 하지만 난 가까운 시 일 내에 양육권 변경신청을 내기로 결심했다는 걸 명심해요.」 「결심했다고요?」 「메건, 난 아이들이 그립소. 그리고 리바도 가족을 원하고.」 「그렇다면 그녀에게 임신을 하라고 하지 그래요?」 「엄마!」 토머스가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아이의 얼굴은 미소로 뒤덮여 있다. 그녀는 몸을 굽 히고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눈물을 숨기기 위해 키스로 자신의 얼굴을 가려 버 렸 다. 「아가야, 잘 지냈어? 엄만 키스를 해주려고 들른 것뿐이야.」 「아빠!」 아이는 아빠를 바라본 다음 메건의 머리를 감싼 붕대를 만져 보았다. 「엄마, 머리를 다친 거야?」 「좀 부딪쳤을 뿐이란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 「엄마! 아빠!」 록시가 달려와서 엄마를 끌어안았다. 「엄마, 아빠와 함께 호텔에 가는 거야? 야, 신난다!」 딸의 행복한 얼굴을 바라보는 딘의 표정이 뒤틀렸다. 「얘야, 엄마는 집으로 갈 거란다.」 「엄마도 호텔에 갔으면 좋겠어!」 토머스가 칭얼거렸다. 「엄마가 가버리면 싫단 말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들의 포옹에서 벗어나 일부러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얘들아, 엄마는 오늘 무척 바쁘단다. 텔레서브 조사도 해야 하고, 숙제도 해야 하 거 든. 하지만 내일 밤에는 너희들을 만나러 갈 수 있을 것 같구나.」 「그게 좋겠소.」 딘이 끼여들었다. 「우리와 저녁을 함께 합시다. 리바가 이번 여름에 아이들과의 계획을 의논하고 싶어 하오.」 「뭐라고요?」 「신경쓸 것 없소. 그녀는 좋은 계모가 되고 싶어하니까.」 「아주 친절들 하시군요. 아무튼 기꺼이 내일밤 그곳에 가겠어요. 자, 너희들은 어서 가보렴. 엄마는 버츠 씨와 잠깐 할 얘기가 있단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돌려 교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교장 실 문을 열고 들어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버츠 씨?」 옆방에선 아무 대답도 없다. 하지만 바닥이 삐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그녀 는 전면 창 쪽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죽음의 신이 기다리고 있 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천천히 사무실 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안 계세요?」 뭔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메건은 얼른 불을 켰다. 모나가 바닥 구석에 웅 크 린 채 앉아 있었다. 그 애는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다. 「모나, 무슨 일이지?」 그녀는 소녀의 곁으로 다가가 아이를 끌어안았다. 「모나, 겁먹지 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 내가 도와줄게.」 「모나는 미안해요.」 소녀가 쉰 목소리로 말하고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이마를 반복해서 무 릎에 찧어댔다. 「이젠 괜찮아. 울지 마. 그런데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소녀가 머리를 쳐들고 메건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커다랗게 변 해 있다. 「모나가 그 여자를 죽였어요. 모나는 감옥에 갈 거예요!」 15 순간 메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어떤 여자를 말하는 거니, 모나?」 「모나는 그녀의 이름을 몰라요. 그 초라한 여자 말예요.」 「그로코보스키 부인?」 모나가 멍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글래디스? 우리 아파트 앞집에 사는 그 부인을 말하는 거니?」 모나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흐느껴 울었다. 「금방 돌아올 테니 여기 있어야 해.」 메건이 급히 바깥 사무실로 나왔을 때 잭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맙소사, 메건,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요?」 「아이들을 만나러 왔어요.」 「애들에게 당신이 괜찮다는 말을 전하러 왔는데 내가 좀 늦었던 것 같소. 일레인 존 스가...」 「다시 일레인 존스를 만나러 갔었어요?」 「그렇소. 이웃사람이 어젯밤 그녀가 떠나는 걸 봤다고 했소. 비행기 예약을 점검해 봤는데 그녀는 티켓을 예약하긴 했지만 비행기에 타진 않았어요.」 「그럼 일레인이 실종됐단 말인가요?」 「그렇게 단정하기엔 이르지만 예감이 아주 나빠요.」 「그렇다면 맥머피에게 알리는 게 좋겠군요.」 다시 모나의 흐느낌 소리가 새어나왔다. 메건의 의식은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전화 번 호부를 하나씩 훑어가면서 그녀는 클로드 호킨스가 제발 집에 있어 주기를 기원했다. 그의 딸은 아버지를 몹시 필요로 하고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오? 병원에 가서 당신이 퇴원수속을 하고 나갔다는 걸 알았소. 아무래도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소.」 「난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그녀는 클로드 호킨스의 전화번호를 찾아 번호를 돌렸다. 「호킨스 씨, 난 메건 섬머스예요. 지금 당장 국민학교로 와주시겠어요? 모나가 여기 있어요.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그녀가 수화기를 놓자 잭이 물었다. 「무슨 일이오?」 「당신은 맥머피에게 일레인에 관한 사실을 알리는 게 좋겠어요. 물론 그렇게 하면 특 종은 그대로 날아가 버리고 말 테지만... 그녀에게 나쁜 일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잖 아 요?」 잭은 메건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모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모나, 괜찮니?」 모나는 여전히 흐느끼면서도 잭에게 희미하게 미소지어 보였다. 메건은 다시 전화번 호 를 돌렸다. 「누구에게 전화를 거는 거요?」 「피트 맥머피.」 잭이 다가가 손을 전화기에 갖다댔다. 「잠깐, 모나가 이 문제에 관련되어 있는 거요? 무슨 일인지 말해 봐요. 그 다음에! 」 「이러지 말아요, 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이건 경찰이 알아서 할 문제예요.」 「메건!」 잭은 한숨을 내뿜었다. 그녀가 옳다는 건 안다. 자신은 지금 이 상황을 자신의 일에 이용하려 하고 있다. 그 렇다면 그건 비난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그건 대런 조지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행동이 니까. 「맥머피 경사님이세요? 메건 섬머스예요. 가능하면 빨리 멜버른 국민학교에서 날 만 나주실 수 있겠어요?」 그녀는 잠시 양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바쁘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이건 몹시 다급한 문제예요.」 메건은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튼 빨리 와주셔야겠어요. 모나 호킨스가 글래디스를 살해한 사람을 본 것 같아 요.」 결국 2시간 가량이 걸려 모나의 짧은 문장을 통해서 상황은 희미하게나마 윤곽이 드 러 났다. 그 동안 클로드 호킨스 씨는 엄청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모나는 자신 이 그 노인을 죽인 게 아니라는 걸 납득하고서야 진정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호킨스에 이어 달려온 맥머피는 모나를 경찰서에 데려가지 않고 버츠의 사무실에서 면 담했다. 교장과 잭은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메건은 클로드와 모나와 함께 있어 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주디 반스가 혀로 입술을 적셨다. 「우리가 동의한 대로 <모나> 대신 <나>라고 표기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녀는 목청을 가다듬고 감정 없는 어조로 읽어내려 갔다. 「나 모나 호킨스는 3윌 8일 밤에 노크를 하거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글래디스 그로 코보스키 부인 집에 들어갔다. 난 시계를 보고 싶었고 그 부인이 집에 없을 거라고 생 각했기 때문이다. 주방은 어두웠고 바닥엔 물이 쏟아져 있었다. 내가 그로코보스키 부 인의 거실에 들어갔을 때 침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와 여자가 다투고 있었다. 남자가 <우리의 계획을 바꿔야겠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고, 여자는 울고 있는 것 같 았다. 난 겁이 나서 파란 꽃무늬가 있는 소파 뒤에 숨었다. 잠시 후에 한 사람이 침 실 에서 나왔다. 난 그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 사람이 거실에 서 있을 때 메건 섬머스 가 뒷문에서 그로코보스키 부인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에 있던 사람은 다시 침실 로 들어갔다. 섬머스 부인이 떠나자 그 남자는 현관 쪽으로 걸어나와 나가버렸다. 그 남자가 현관문을 닫았을 때 난 그로코보스키 부인의 방에 들어갔다. 그녀는 옷에 피 를 묻힌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현관문으로 달려나와 덤불 안에 숨어 있었다. 그곳 엔 종이조각이 있었고 난 그걸 호주머니에 넣었다. 거기엔 메건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경찰이 오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난 집으로 달려갔다.」 반스 경관이 읽기를 멈추고 모나를 바라보았다. 「틀린 게 있니?」 모나는 경찰을 바라보다가 다시 아버지를 응시했다. 「얘야, 사실대로 말해, 아무것도 겁낼 게 없어, 아빠가 여기 있잖니?」 「없어요.」 모나가 대답했다. 「그리고 집으로 달려올 때 누군가를 만나지 않았니?」 피트 맥머피가 물었다. 모나가 메건을 바라보았다. 메건은 격려의 미소를 보냈다. 「모나, 괜찮아. 넌 아주 잘하고 있어.」 모나가 맥머피를 바라보았다. 「모나는 차를 봤어요. 그 차가 거의 모나를 칠 뻔했어요. 노란 머리의 남자가 그 차 를 운전하고 있었어요.」 「어떤 차였지? 그 차의 모양을 말해 줄 수 있겠니?」 맥머피가 물었다. 「검은색이었어요. 길고 검은 차...」 「모나, 혹시 파랑색은 아니었니?」 맥머피가 물었다. 「짙은 파랑색, 너의 아빠의 작업바지와 같은 색 말이다.」 모나는 아빠를 흘끗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모나는 잘 몰라요.」 메건은 모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라 그녀는 그대로 묻고 말았다. 「모나, 넌 전에도 검은 차를 운전한 남자를 본 적이 있니?」 모나는 잠시 바닥을 응시한 채 앉아 있었다. 아이는 시선을 떨구었지만 그 음성엔 비 밀을 털어놓은 데 대한 안도감이 묻어 있다. 「네, 모나는 차에 탄 남자를 본 적이 있어요.」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니?」 맥머피가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메건은 딱딱한 의자의 등받이를 꼭 움켜쥐었다. 초조한 몇 초가 흐른 다음 모나가 대 답했다. 「몰라요.」 「모른다고? 정말이니? 얘야, 잘 생각해 보렴.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란다.」 모나는 고개를 들어 경찰관을 쳐다보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모나는 그 사람은 알지 못해요. 하지만 모나는 그의 채널을 알고 있어요.」 메건이 숨을 헐떡였고, 주디 반스가 그녀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냈다. 클로드가 의 자 에서 불편한 듯 몸을 뒤척였다. 맥머피가 가까이 다가가서 모나 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의 채널? 모나, 텔레비전 채널을 말하는 거니? 그 사람을 텔레비전에서 봤니?」 모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졌다. 그 소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나는 아빠의 텔레비전에서 그 사람을 봤어요. 6시의 뉴스센타에서... 멜버른이 듣 고 싶어하는 모든 뉴스를 생방송하는...」 소녀가 셔먼 로열의 방송국에서 사용하는 캐치프레이즈를 되뇌는 걸 바라보며 메건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게 정말일까? 대런 조지가 정말 살인자란 말인가? 맥머피 경사가 활짝 웃으며 반스 경관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겠습니다.」 맥머피는 교장의 책상 뒤에 앉았다. 「모두들 고맙습니다. 호킨스 씨, 이제 모나를 집으로 데려가도 좋습니다. 며칠 후에 모나를 경찰서에 데리고 와서 이 진술서에 사인을 해달라고 부탁드려야 할지도 모르 겠 군요. 섬머스 부인, 고마웠소. 모나, 넌 아주 훌륭한 일을 했단다.」 그들은 모두 일어섰다. 문을 열었을 때 메건은 맥머피가 수화기에다 대고 말하는 소 리 를 들었다. 「그를 데려와! 난 30분 후에 들어가겠어.」 「경사님, 할 말이 있소.」 잭이 문에서 소리쳤다. 「일레인 존스에 관한 얘기요.」 맥머피가 의자를 가리켰다. 「그럽시다.」 잭은 미소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는 메건의 주방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대런이 메 건 의 집을 뒤지면서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들을 정돈하고 있었다. 수프를 데우고 커 피 를 끓이는 일도 즐거웠다. 메건은 소파에 누워서 멜버른을 들끓게 하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잭은 텔레비전을 흘 끗 바라보았다. 샌디 로열이 경찰본부에 나가서 생중계를 하고 있는 중이다. 대런은 몇 분 전에 글래디스 그로코보스키의 살인혐의로 체포되었다. 로열은 조지가 오늘밤 죽음의 신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수사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잭 의 직업적인 안목으로는 로열의 가족이 대런을 매장시키기 위해 커다란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죽음의 신에 의해 희생된 여섯 명의 사람들이 화면에 비치는 동안 메건은 끊임없이 음 식을 먹어댔다. 그런 메건을 지켜보는 잭의 시선은 따뜻하고도 사려 깊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잭, 정말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하지만 당신도 이제 집에 가서 휴식을 취하세요 . 난 샤워를 한 다음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어요. 잭, 이제 돌아가요. 그 정도면 충분 해요.」 잭이 굳은 어조로 말했다. 「내가 너무 지나쳤다는 뜻이오? 충분치 못했다는 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그가 메건의 곁에 앉았다. 「천만에! 당신은 내 말뜻을 분명히 알고 있을 거요. 금요일 밤 이후로 당신은 계속 날 밀어내려 하고 있소. 도대체 왜 그러는 거요? 당신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 인 지 모른단 말이오? 당신과 록시, 그리고 토머스를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고 있 었소?」 「당신에게 중요한 게 뭐죠?」 그가 움찔하는 것처럼 보였다. 「감정이오. 난 밤낮으로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과 함께 있기를 원해요.」 「언제까지 말인가요? 다음 살인이 있을 때까지?」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렀다.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일에 몰두하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해요. 지금 이 순간 날 보살펴 주면서도 당신의 마음은 뉴스에 가 있어요!」 「진정해요, 메건. 내가 대런 조지와 텔레서브 조작사건을 묶어서 생각해서 화가 난 거요?」 「아니에요. 난 당신의 편협한 마음에 화가 난 것뿐이에요. 잭, 당신은 그런 태도 때 문에 이미 결혼생활에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다시 그런 실수를 저지르 고 싶지 않은 거예요.」 잭은 그 말에 몹시 놀랐다. 「왜 당신은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들을 꺼내서 서로 저울질을 하는 거요? 난 당신을 좋아해! 당신과 사랑에 빠져 있소! 일 같은 건 다시 던져 버릴 수도 있다고!」 메건은 그의 선언에 잠시 멍해 있었다. 그 충격을 감추기 위해 그녀는 전화 영수증을 집어서 그것들을 잭에게 던졌다. 「이걸 가지세요! 이게 당신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하지 만 다시 일 중독자로 돌아가겠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가 그 종이들을 손에 쥐었다. 「이게 뭐요?」 「그것들은 샌디 로열의 기사보다 앞질러 특종할 수 있게 해 줄 거예요. 에바 메리트 에게 일레인 존스가 전화를 걸었다는 증거예요.」 그걸 바라보던 잭이 메건의 팔을 잡았다. 「날 밀어내지 말아요. 난 당신과 당신의 아이들을 좋아하오. 지난주에 난 모처럼 당 신 가족의 일원이 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맛봤소. 내가 다른 곳에 관심을 보인다 고 해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어떤 남자도 당신에게 100퍼센트의 관심과 시간을 부여할 수는 없소.」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난 좀더 많은 걸 원해요. 당신도 나에게서 더 많은 걸 요구하 고 있으면서 내게 그 이상을 줄 의도는 없는 것 같아요!」 「당신은 너무 많은 결정을 단번에 내리려 하고 있소.」 메건은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자, 이제 그만해요. 잭, 난...」 바로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메건은 재빨리 조리대 쪽으로 다가갔다. 「여보세요?」 그녀는 수화기에 대고 고함을 질러댔다. 「아, 여보세요. 난 WMMB 방송국의 개리 마틴입니다. 메건 섬머스이십니까?」 「네. 하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섬머스 부인, 난 잭 갤래거의 친구요. 그가 거기 있나요?」 메건은 몸을 돌려 잭에게 수화기를 내밀었다. 「당신 전화예요. 업무적인 전화... 난 목욕을 한 다음 한숨 자야겠어요.」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욕실로 달려들어가서 문을 쾅 닫아버렸다. 30분 후 메건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잭은 그곳에 없었다. 공허하고 고통스런 느낌이 몰려왔다. 그녀는 그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 청소를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샌디 로열 에게서 가져온 정보를 쌓아 두었다. 그리고 대런이 병원에서 그녀에게 남겨 두고 간 수표 봉투도 함께 올려 두었다. 그리 고 피트 멕머피에게 줄 영수증도 쌓아 두었다. 거기엔 일레인 존스로부터 온 전화고 지 서도 포함되어 있다. 메건은 카피를 한 보고서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일레인이 전화를 걸었던 방을 누가 예약했는지 궁금해졌다. 아울러 일레인이 지금 어디 있는지도 궁금해졌다. 갑자기 어 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 자료들을 오늘밤 텔레비전 방송국에 갖고 간다면, 지불 보고서를 담은 서류 캐비 닛 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 전화 영수증이 대런이 제출한 것과 일치한다 면 그건 그의 유죄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죌 것이다. 하지만 버스를 타고 방송국에 가는 게 내키지 않았다. 그녀는 폴러드 핀치를 생각했 다. 요즘 그는 부쩍 친절을 보이고 있다. 그에게 방송국까지 태워다 달라고 부탁을 하 면 기꺼이 들어 줄 것이다. 폴러드에게 전화를 걸자 그는 기꺼이 승낙해 주었다. 아무래도 대런이 숙모를 살해했다고는 믿을 수 없다. 그리고 두 번씩이나 그녀를 공 격 한 마스크의 사내가 대런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다. 밖에서 들려오는 차소리를 듣고 그녀는 창가로 달려갔다. 그녀는 핸드백과 자료 등을 집어들고 현관에 있는 폴 러 드에게 손을 흔들었다. 시계가 6시 26분을 가리키고 있다. 「곧 내려가겠어요.」 죽음의 신은 땅딸막한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른 다음 한숨을 내쉬었다. 6시 30 분 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은 할 일이 너무 많고 시간이 모자란다. 하지만 어떻게든 밀 고 나가야만 한다. 이 세상에 순수하고 좋은 것만이 남아 있으려면 밀고 나가야만 한다. 그의 두개골 안 의 음성이 명령했고, 그는 그 음성을 신뢰했다. 그건 결코 그를 배신하지도 않았고 그 의 주변 사람들처럼 그를 실망시키지도 않았다. 죽음의 신은 얼굴을 찌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약 그 음성이 그에게 좀더 일찍 경고했다면 그는 몇 주 전에 메건 섬머스를 해치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여자가 사 람들에게 유독한 쓰레기를 퍼뜨려서 그들의 사고와 마음을 오염시키는 걸 막았을 것 이 다.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편안한 자세로 고쳐앉았다. 그의 손가락은 항상 휴대하고 다 니는 호주머니 속의 휘장에 닿았다. 지난 6개월 동안 침입을 쉽게 도와주었던 소중한 휘장이다. 이 여자에 대해선 걱정할 것 없어. 그는 내일 메건을 해치울 것이다. 내일이면 그 암은 더이상 번져가는 걸 멈추게 된다 . 내일 메건 섬머스가 죽으면 그는 편히 쉴 것이다. 그리고 다음 범행자가 가면을 벗기 를 기다리면 된다. 「고마워요, 핀치 씨.」 폴러드가 차를 텔레비전 방송국 앞에 댔을 때 메건이 말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어 주셨어요.」 폴러드는 메건이 무릎 위에 올려놓은 커다란 종이봉투를 바라보았다.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부인을 집까지 데려다 줄까요?」 「안돼요. 얼마나 걸릴지 잘 몰라요. 그리고 아저씨는 방범 회의에도 참석하셔야 하 고, 그 옥외 표지판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셔야 하잖아요?」 「그렇군. 그럼 오늘밤 일찍 귀가해서 휴식을 취하도록 해요.」 「고마워요, 그렇게 하겠어요. 아저씬 정말 친절한 분이에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난 최선을 다할 거요.」 「아무튼 아저씨 같은 분을 이웃으로 두게 된 건 우리 모두의 행운이에요.」 그녀는 문을 닫고 손을 흔든 다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걸으면서 그녀는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건 자신과 어쩌면 대런 을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무죄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메건.」 낯익은 음성에 한기가 오싹해지면서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샌디 로열이 손에 열쇠 한 벌을 흔들어 보이면서 대런의 사무실 앞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샌디.」 대런의 문 옆에 자료가 든 종이 가방을 놓고서 그녀는 열쇠를 찾았다. 「자, 문을 좀 열어 주시겠어요?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불을 켜고 문을 닫았다. 「이게 뭐요?」 「죽음의 신에 대해서 수집했던 자료를 돌려주고 싶어요.」 「잘됐군! 그러잖아도 내일 이걸 가지러 당신 집에 가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내가 이 사건을 맡게 될 것 같아서 이것들이 필요했어요.」 「정말이에요?」 「물론이오. 아버지가 살인자를 방송국에서 어슬렁거리게 내버려 둘 것 같아요?」 「그렇겠죠. 하지만 조지 박사님은 다시 일자리로 돌아오게 될 거예요. 재판이 열리 기 전까진 말예요.」 다시 소름이 돋기 시작해서 그녀는 재빨리 팔을 문질렀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경 보등이 울려댔다. 「메건, 내 말을 듣고 있어요?」 「미안해요. 뭐라고 했죠?」 「아버지는 절대로 조지를 이곳에 들여놓지 못하게 할 거라고 말했소. 그 바보는 끝 장 이 난 거요. 그리고 난 경찰에게 그가 도박을 하고 있다는 걸 털어놓았죠. 나머지 것 들도 경찰이 밝혀낼 거요.」 「아무튼 난 이제 가봐야겠어요.」 「견습생 일을 계속하지 않겠소? 당신이 세부적인 것들을 알아봐 줬으면 좋겠는데... 」 메건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내가 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에요. 세부적인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지난 11월에 대런이 마이애미에서 열리는 방송인 회의에 참석했는지의 여부를 알고 있나요?」 샌디도 의자에 앉았다. 「그래요. 몇 사람이 참석했어요. 그런데 그건 왜 묻죠?」 실망감이 번져갔다. 샌디의 말은 일레인 존스가 텔레서브 전화를 조작했을 당시에 대 런도 같은 도시에 있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힐턴에 묵었나요?」 「잘 모르겠소.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요?」 「별 이유는 없어요.」 갑자기 어떤 기억이 떠오르고, 그 순간 그녀의 손이 굳어져 버렸다. 그녀를 공격하던 자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 이건 바로 그의 냄새다. 담배 냄새... 그녀는 사무실 밖 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다. 「샌디, 정말 대런이 그 일을 했다고 생각하세요?」 「그 일이란 게 뭡니까? 숙모를 죽였다는 것 말인가요? 그 노파는 돈이 많았어요. 하 지만 난 정말로 그가 죽음의 신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당신은 어때요?」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자, 이제 가봐야겠어요. 내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를 거세요 . 」 하지만 샌디는 그녀의 길을 막아섰다. 「앉아요, 메건.」 그는 몸을 기댄 채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서 천장을 응시했다. 그녀 옆에 있던 상 의가 바닥에 떨어졌다. 메건이 그걸 줍는데 불룩한 니트 모양의 것이 호주머니에서 떨 어졌다. 메건은 그걸 집어서 다시 호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번쩍이는 줄무늬가 있는 보 랏빛 천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그녀는 샌디를 바라보았다. 「그게 뭐요?」 샌디가 물었다. 그녀는 말없이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바깥 사무실은 불이 꺼져 있다 . 그녀는 두 번씩이나 자신을 죽일 뻔했던 남자와 단둘이 있는 것이다. 그가 몸을 앞으 로 기댄 채 무릎 위에 손을 올려 두었다. 그의 왼쪽 눈동자를 본 건 바로 그때였다. 눈꺼풀 위에 상처가 있고 눈에는 핏발이 서 있다. 「오, 하느님...」 샌디가 오른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손은 권총을 움켜쥐고 있다. 그 권총이 그녀의 복부를 향했다. 「그걸 내려놓으라고. 나에게 그 코트를 줘. 그리고 마스크도!」 「당신이...」 「그래, 나였어.」 샌디가 일어섰다. 「메건, 당신은 정말 시간을 잘못 골랐어. 그날 밤 글래디스의 집에서 당신을 거의 죽 일 뻔했지. 그 다음 다시 갤래거의 집에서도... 그리고 오늘은 차고에서도 그랬었지. 그런데 운이 나쁘게도 당신이 먼저 마스크를 발견하고 말았어.」 그가 테이블을 돌아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글래디스를 죽였나요? 왜?」 「그 여자는 바보였기 때문이지. 그 노파는 자기 이익을 위해 나를 고용해서 조사를 조작하게 했어. 난 내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 일을 했지. 하지만 그 노파는 우리의 거 래를 취소하려고 했어. 겁을 먹은 거지. 그래서 내가 그 대가를 치르게 해준 거야.」 「하지만 왜 글래디스가 대런에게 유리한 조사를 조작하려 했죠? 당신도 그녀가 대런 을 미워한다고 했잖아요?」 샌디가 일어서서 메건을 붙잡았다. 「그 노파는 이번 달의 조사를 반대로 조작해서 그의 방송국이 몇 천 명의 시청자를 잃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했지, 그러면 그는 해고당하고 말 테니까.」 「그러면 당신이 그 앵커 일을 맡게 되겠군요.」 「그건 노릴 만한 자리지. 하지만 글래디스는 메릴랜드의 상관이 모든 걸 알아차릴 까 봐 걱정을 했지. 그 바보 같은 에바 메리트가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거든. 하지만 행 운은 우리 편이어서 아버지가 출장을 떠났을 때 내가 그 편지를 받았지.」 「그래서 당신이 그녀도 죽였군요...」 「그 늙은이는 쓸데없는 일에 참견을 했어.」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그에게 말을 시켜야 한다. 누군가가 들러서 도와줄 때까지... 「하지만 당신은 왜 글래디스를 죽였죠?」 「그녀는 일레인을 해고했어. 그 일에서 손을 떼려고 했지.」 일레인 존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메건은 냉정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일레인도 죽였나요?」 「아직 죽이지 않았어.」 샌디가 잔인하게 웃었다. 「그녀는 지난달에 대런에게서 사들인 이동주택에서 날 기다리고 있어.」 그가 복도 쪽을 가리켰다. 「그녀를 보러 갈까?」 「당신은 빠져나갈 수 없어요. 경찰은 내 손톱 밑에서 조직을 채취했어요.」 순간 맥머피가 뉴스 담당자를 설명했던 모나의 진술을 사실과 다르게 결론내렸던 것 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갔다. 「그리고 경찰은 당신이 그로코보스키의 집을 빠져나가는 걸 본 사람을 알고 있어요. 그들은 금방 자신의 실수를 알아채고 대런을 석방할 거예요. 그리고 당신을 찾을 거 예 요.」 「그럴 가능성은 없어! 난 대런의 집에 당신의 핏자국이 묻은 경찰 제복을 놓아두었 지. 맥머피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너무 심해서 그는 절대로 대런을 놓아주지 못할 거 야. 결국 그 녀석을 처형하고 말 거야.」 그의 음성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세게 몰아치기로 했다. 「그렇게 되진 않아요. 대런은 영향력이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는 유능한 변호사를 선 임할 거예요. 당신은 날 놓아두고 도망치는 게 나아요. 샌디, 이게 당신에게 남겨진 유일한 기회예요.」 「닥쳐!」 그가 소리치며 권총을 휘둘러댔다. 「앞서 걷지 못해? 그렇잖으면 쏘아 버리겠어.」 16 샌디의 짙은 파란색 링컨이 방송국 뒷문 옆에 서 있었다. 그의 숨결이 목에 차갑게 부 딪친다. 「어서 타.」 「어디로 가려는 거예요?」 「일레인을 만나러 간다고 했잖아?」 「샌디,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좀더 얘기를 해봐요. 난 당신이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 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서 타라니까!」 메건은 차 안으로 들어가서 손을 핸들에 댔다. 자동문이 총알이 발사되는 듯한 소리 를 내며 닫혀 버렸다. 「안전띠를 매. 당신이 다치는 건 원치 않으니까.」 월요일의 교통상황은 아주 좋았다. 메건은 부지런히 다가오는 차량을 살펴보았다. 혹 시 경찰차라도 온다면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것이다. 메건은 다시 샌디 쪽을 바라보았 다. 그의 표정은 그런대로 느긋해 보인다. 하지만 핸들을 움켜쥐고 있는 그의 관절은 하얗게 변해 있다. 그는 공항가를 향해 좌회전했다. 차라리 뛰어내리고 싶지만 그건 죽음을 의미할 뿐이 다. 샌디는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다가 앞차의 방향 지시등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는 재빨리 트레일러 헤븐의 주차장 쪽으로 차를 꺾어 일레인 존스의 차 앞에서 급히 멈 춰 섰다. 「가!」 「일레인은 이곳에 없어요.」 그는 권총을 그녀의 옆구리에 들이댔다. 「내려! 그리고 비명을 지르거나 허튼 수작을 해서는 안돼. 이곳에 사는 늙은이들은 잘 듣지 못하거든!」 어쩔 수 없이 메건은 그가 지시하는 대로 문 쪽으로 걸어갔다. 샌디가 열쇠를 꺼내 문 을 열고 메건을 안으로 밀어넣었다. 「여기 앉아 있어. 내가 일레인을 데리고 올 테니.」 메건은 그가 권총으로 가리키는 대로 조그만 간이 식탁 앞에 앉아 멍한 시선으로 샌 디 를 지켜보았다. 그는 작은 세면실의 문을 열고 일레인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메건의 맞은편 의자에 앉혔다. 일레인의 눈화장이 얼굴과 목에 번져 서 얼룩져 있다. 그러나 타박상까지 숨기진 못했다. 「일레인!」 메건이 소리쳤다. 두 여인은 분노에 가득 찬 시선으로 샌디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잘 아는 사이로군! 자, 이제 우린 드라이브를 해야 해. 모두들 타는 거 지. 좀 불편하긴 하겠지만 말야.」 그는 캐비닛 쪽으로 다가가서 일레인을 묶은 밧줄과 같은 걸 꺼냈다. 그리고 넓은 테 이프도. 「제발 바보 같은 짓 하지 말아요.」 메건이 소리쳤다. 「닥쳐! 여기선 내 명령에 따라야 해!」 그는 메건의 입에 접착 테이프를 붙인 다음 팔을 뒤로 돌려 팔목을 묶어 버렸다. 그 리 고 승리에 찬 표정으로 급히 이동주택 밖으로 나갔다. 두 여자가 말없이 서로를 응시 하고 있는 동안 그는 밖에서 문을 잠가 버렸다. 엄청난 공포가 두 여인을 덮쳤다. 메건은 조심스럽게 테이블 뒤에서 나왔다. 다행히 도 샌디는 그녀의 발목을 묶는 걸 잊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날 일레인이 칼을 꺼내는 걸 봐둔 서랍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서랍을 열고 묶은 걸 풀어 줄 물건을 손가락으로 더 듬었다. 그걸 일레인에게 줘서 손목을 묶은 밧줄을 잘라낼 수만 있다면... 그러나 간신히 칼을 집었을 때 금속 자물쇠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샌디가 돌 아온 것이다! 메건은 급히 간이식탁 쪽으로 갔다. 하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칼을 바 닥 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잭은 그의 플로리다 룸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전화기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그 걸 노려보다가 다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메건의 집을 나와서 경찰서에 갔지만 피트 맥머피와는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대런 조지에 관한 생 각 을 적으려고 애쓰는 중이다. 그건 예전 상관인 개리 마틴이 내일 갖다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메건 이 외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녀를 실망시켰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심 한 당혹감에 빠져 있다. 그는 그 여자가 보여준 신뢰감을 배반해 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가장 중요한 걸 잃어버렸다는 걸 깨닫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오늘밤 떠나달 라 고 말했을 때에야 그 여자를 잃게 됐다는 걸 깨달았다. 전화벨이 날카롭게 울려댔다. 순간 그의 가슴엔 기쁨의 물결이 출렁였다. 메건이라면 어떻게 하지? 「여보세요?」 「여보세요, 갤래거 씨? 난 앤 바바예요 금요일에 트레일러 헤븐에서 만났는데 기억 하 시겠수?」 「아, 네. 안녕하십니까? 일레인 존스가 나타났나요?」 「아뇨. 하지만 난 당신의 여자친구를 봤다우. 그녀는 그 남자와 함께 왔는데 불쌍하 게도 몹시 긴장한 얼굴이더군요. 그리고 그들이 이동주택으로 들어간 후 결코 불이 켜 지지 않았어요.」 순간 공포심이 몰려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메건을 일레인의 이동주택에서 봤단 말입니까? 그 게 언제죠?」 「한 시간 전에 도착했어요. 그녀와 함께 온 청년이 지금 그의 차를 일레인의 이동주 택에 묶었어요. 그리고 그 이후로 당신의 친구는 보이지 않아요. 내가 뭘 염탐이나 하 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까 궁금해서요.」 「내가 곧 가겠습니다.」 차를 몰고 나오면서 바바에게 경찰을 부르라고 하지 않은 걸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 는 일이다. 그 링컨은 멜버른에서 인디언 강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펼쳐진 4차선 도로로 향하는 중이었다. 잭은 공원의 항구로 향하는 교차로에 접근하면서야 비로소 그 차를 따를 수 있었다. 차와 이동주택은 빨간 불에 멈춰 서 있고, 그 동안 잭은 지그재그로 다른 차를 벗어 났 다.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었을 때 그는 반 블록쯤 링컨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를 보았다. 이동주택의 뒤 창문으로 붉은 머리 여자의 창백한 모습이 드러났 다. 바로 메건이다! 가슴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속력을 내서 그 차를 향해 힘껏 달렸다. 그 차의 운전자는 잭과 충돌하는 걸 피하기 위해 거의 옹벽에 부딪칠 뻔했다. 잭은 메건을 향 해 손을 흔들었다. 「앉아요! 다치겠소!」 그는 차량이 늦게 움직이는 틈을 타서 맹렬하게 링컨 쪽으로 다가갔다. 어두운 차창 을 통해 운전자의 윤곽이 드러났지만 그게 대런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 운전자는 잭을 발 견하고 갑자기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인디언 강의 다리가 보이자 잭은 필사적으로 힘 을 모았다. 차의 타이어가 비명을 질러대며 우회전을 한 다음 링컨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그의 행동에 놀란 운전자는 콘크리트 길을 벗어나서 강 옆의 모래밭으로 내려갔다. 잭은 차를 돌려 그 차를 뒤쫓았다. 그 차를 멈추게 하기 위해 잭은 트레일러의 뒷부 분 을 힘껏 들이받았다. 트레일러가 충격으로 흔들리긴 했지만 오히려 잭의 차가 더 심 한 손상을 입고 말았다. 그는 힘을 모아 액셀러레이터를 밟아서 다시 한번 트레일러에 부 딪쳤다. 그 충격 때문에 차와 이동주택이 물 쪽으로 기울었다. 물 속으로 빠진 이동 주 택이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잭은 차에서 뛰어내려 그 쪽으로 달려갔다. 이동주택은 급류 때문에 강물 속으로 더 깊숙이 빨려들어 갔지만 차는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서 고정되었다. 잭이 다가갔을 때 여전히 링컨의 바퀴는 돌아가고 있었다. 잭은 물 속을 건넜다. 「메건! 괜찮아요. 내가 구해 주겠소!」 트레일러에 물이 차서 바닥으로 가라앉기 전에 메건을 구해내야 한다. 드디어 그는 문 까지 갔다. 「메건! 문을 열어요!」 그가 소리쳤다. 안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주변의 소음 때문에 분명치는 않았다. 대런 조지의 텔레비전 방송국의 문자가 새겨진 하얀 헬리콥터가 하늘에 떠 있 었다. 멀리서 다리 쪽으로 다가오는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바바에게 축복 있기를... 「메건!」 이동주택 안에는 물소리가 들끓었다. 그리고 이동주택과 차의 연결부분이 끊어지고 있 다는 걸 느낀 순간 잭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동주택은 강 바 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다. 갑자기 강한 고통이 어깨에 가해져서 재빨리 몸을 돌 렸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잭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대런 조지는 아직 감옥에 있다. 그리고 그의 앞에 권총을 겨눈 채 서 있는 건 바로 샌 디 로열이다. 잭이 몸을 피하자 그가 다시 권총을 발사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간신히 총알을 피할 수 있었다. 「모래사장으로 나와!」 커다란 스피커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기를 놓아라!」 샌디는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려 맹렬하게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이어 재 빠 른 응사와 더불어 샌디가 거꾸러졌다. 잭은 제방으로 내려오는 경찰에게서 시선을 돌 려 이동주택 위로 올라갔다. 「메건! 내 말이 들리면 문을 두드려요.」 이동주택은 이제 절반쯤 가라앉아 있다. 잭은 필사적으로 문을 열려고 했지만 문은 꼼 짝도 하지 않는다. 그는 모래사장에 있는 사내들을 향해 구조해 달라고 소리쳤다. 경 찰제복을 입은 사내가 그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잭은 그 소리를 들었다. 문을 두드려대는 소리를... 메건은 살아 있다! 경관이 다가오자 잭은 이동주택의 꼭대기에 솟아 있는 공기 배출기를 가리켰다. 문이 잠겨진 상태에선 그곳이 유일한 탈출구다. 그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메건!」 잭이 소리쳤다. 「여기로 올라올 수 있소?」 그녀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 두려웠지만 그는 그녀의 입에 가려진 테이프를 생각해냈 다. 그는 공기 배출구를 열려고 손을 뻗치면서 트레일러를 묶은 끈이 절단되지 않기 를 기도했다. 「해낼 수 있겠소?」 차의 저쪽 편에서 뛰어오른 경관이 소리쳤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람을 불러서 이걸 고정시켜 주겠소? 물살 때문에 줄이 끊 길 것 같아요.」 「예인 트럭을 갖고 오겠소.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재빨리 뛰어내려요. 그렇잖으 면 곤란해질 테니.」 「서둘러 줘요!」 잭은 사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걸 절대로 강물에 빼 앗 길 수는 없다. 메건은 이동주택 안에서 드디어 칼로 손에 묶인 밧줄을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그녀 는 입에 붙은 접착 테이프를 떼고서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잡동사니를 헤치고 조심스 럽게 일레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식을 잃고 있었다. 「일레인, 일레인, 정신차려요.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요.」 머리 위에서 잭의 음성이 들렸다. 「메건! 메건! 공기 배출구 쪽으로 와요.」 물은 점점 빨리 차오르고 있다. 메건은 몇 번 숨을 쉰 다음 다시 일레인에게 다가갔 다. 「잭!」 그녀는 손으로 상처난 목을 감싸안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서둘러 줘요. 물이 차오르고 있어요.」 하지만 그가 자신의 음성을 들었으리라는 확신을 갖기는 어렵다. 「메건! 기다려요. 구조대가 오고 있소.」 그가 공기 배출구를 비틀어서 열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메건은 미친 듯이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마침 손에 닿는 곳에 칼자루가 있다. 막대 모양의 날카로 운 손잡이가 멋대로 굴러다녔다. 메건은 두 발짝 다가가서 캐비닛 문을 열고 드디어 그 녀 가 찾던 연장을 손에 넣었다. 천천히 그녀는 싱크대 위로 올라가서 천장을 두드렸다. 「잭, 내려와서 이걸 잡아요. 팔을 최대한 길게 뻗어서 안으로 넣어요.」 배출구는 그녀에게서 60cm쯤 떨어진 곳에 있다. 만약 잭의 손에 그 연장이 닿을 수만 있다면. 그의 손이 안쪽으로 15cm쯤 들어왔다. 메건은 무릎을 쭉 펴보았지만 그의 팔 에 닿지 않는다. 물이 싱크대와 욕실의 배수구를 통해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다. 그녀는 힘껏 발을 뻗쳤다. 손가락 끝을 꿈틀거려 간신히 그에게 연장을 전해주긴 했 지 만 그녀는 균형을 잃고 차가운 물 속으로 빠져 버렸다. 메건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렸 지만 잠시 후 배출구가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일레인은 아직도 무의식 상태지만 메건은 그 여자가 죽었다고 믿고 싶진 않았다. 「일레인, 정신차려요.」 메건은 그 여인을 흔들었다. 일레인이 힘없이 눈을 떴다. 「메건?」 「일레인, 말하지 말고 그대로 있어요. 우린 사고를 당했어요. 사람들이 구해줄 때까 지 기다려야 해요.」 그때 차가운 물결이 몰려와 그녀의 입을 막아 버렸다. 「물이 우릴 덮치려고 해요. 서둘러요, 잭!」 그녀는 어둠을 향해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의 음성에 대답이라도 하듯 순식간에 이동 주택의 윗부분이 열리고 잭의 모습이 드러났다. 「메건?」 그녀가 양손을 흔들었다. 「여기, 여기 있어요.」 「맙소사! 일레인도 함께 있소?」 「네, 그녀는 다쳤어요.」 잭이 뒤를 향해 소리쳤다. 「여기 사람이 있소. 로프를 더 줘요!」 말을 마친 잭이 첨벙 소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고 이어 그의 팔이 메건을 끌 어안았다. 「잭! 우선 일레인을 끌어내야 해요. 그녀는 거의 무의식 상태예요.」 잠시 후 메건은 자신이 허공 중으로 예인되고 있음을 의식했다. 그녀는 그 악몽과 함 께 물 속에서 빠져나왔고, 누군가가 담요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녀는 잭의 모습이 드러날 때까지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일레인은 들것에 실린 채로 예인되어 모래사장에 놓여졌다. 잠시 후 메건은 잭이 자 신 을 끌어안고 육지 쪽으로 가는 것을 느꼈다. 잭이 그녀에게 키스한 다음 머리칼에 대 고 말했다. 「메건, 정말 미안하오. 당신을 사랑해. 정말 두려웠소.」 그가 몇 마디 다른 이야기를 했지만 그녀는 오직 그 남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을 의 식했을 뿐이다. 다음날 오후 2시 30분, 쓰레기 트럭이 오는 소리에 메건은 잠에서 깨어났다. 목은 아 프고 머리는 욱신거린다. 그리고 팔을 꿰맨 곳에도 통증이 몰려왔다. 잭이 곁에 있음 을 확인하고 그녀는 시트 밑에서 몸을 뒤척였다. 어제의 악몽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그녀는 그 악몽을 차단하듯 다시 눈을 감아 버렸 다. 샌디는 죽었다. 대런 조지는 석방돼서 경찰에게 5백만 달러를 청구하겠다고 발표 했다. 소문에 의하면 피트 맥머피는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았던 혐의로 곧 해고당할 거 라고 했다. 셔먼 로열은 죽은 자들보다 더 심한 고통 속에서 살아 갈 것이다. 「메건.」 잭이 걱정 어린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몸을 뒤척여서 그의 목을 끌어안았 다. 그의 어깨에 총알이 스친 곳에 꿰맨 흔적이 있지만 그는 그것을 의식조차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안녕. 어제 인사를 못했다면 이제라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요.」 그가 그녀의 머리에 키스하고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전화로 아이들을 불러야겠어요.」 「안돼. 지금은 당신을 사랑하게 해줘요.」 잭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몹시 피곤해 보이는군. 난 기다릴 수 있어, 그저 내가 당신을 몹시 필요로 하고 있 다는 것만 말해 주고 싶었소.」 어젯밤 그가 그녀의 옷을 벗긴 다음 샤워를 시키고 침대로 데려와서 그녀의 곁에서 단 한 번의 요구도 없이 잠을 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당신은 내가 벌거벗은 모습을 봤어요.」 그의 짙은 눈동자가 빛났다. 「그랬지.」 「불공평해요. 난 못 봤는데...」 「그럼 지금 보여 주겠소.」 그가 시트를 벗겼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지만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그의 모습 을 바라보았다. 곳곳에 타박상으로 멍이 들긴 했지만 그녀가 꿈꾸던 대로 황홀한 모 습 이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1시간 30분 후에 날카로운 노크 소리가 그녀를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맙소사!」 그녀는 잠에 취해 중얼거렸다. 황급히 옷을 입고 문 쪽으로 가서 감시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엔 맥머피 경사 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섬머스 부인. 들어가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그녀는 문을 활짝 열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우린 아직 어젯밤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 나지 못했어요.」 그녀는 잭이 깊이 잠들어 있는 방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잭을 깨워야 하나요?」 「아뇨. 내 질문에 답변만 해주시면 됩니다.」 두 사람은 간식식탁을 마주한 채 자리에 앉았다. 「일레인 존스가 제출한 전화 영수증을 추적해 봤어요. 그건 마이애미 힐턴 호텔의 샌 디의 방에서 건 전화였소. 그리고 그의 차 뒤에서 사냥용 칼과 핏자국을 찾아냈어요. 틀림없이 그 피는 그로코보스키 부인의 혈액형과 일치할 거요. 텔레서브가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당신의 추측이 옳았소.」 「샌디가 시청자들에게 돈을 줘서 WABR의 시청률을 조작한 증거를 찾았나요?」 「그렇소. 일레인 존스가 샌디의 콘도에 둔 서류가방을 뒤져보라고 했소. 그 안엔 협 력을 했던 사람들이 보내온 50달러 짜리 수표의 영수증이 가득했소. 그 망나니가 자 신 의 개인 구좌에서 돈을 지불했더군요. 무려 110명이나 됐소. 정말 믿어지지가 않더군 요.」 그는 몹시 피곤한 모습이다. 「경사님, 아주 훌륭한 일을 해내셨어요. 내가 공격을 당할 때마다 경사님은 즉시 출 동해서 날 도와주셨어요.」 맥머피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수첩을 덮고 호주머니에서 조그만 가죽 케이스를 꺼 내 테이블 위에 던져 놓았다. 그건 그의 멜버른 경찰 휘장과 신분증이었다. 「난 지난 25년 동안 이 도시를 위해 열심히 일했소. 단 한 번도 뇌물을 받지 않고, 선량한 시민으로부터 인간 쓰레기들을 격리시키려고 노력했죠.」 그가 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의 표정은 긴장돼 있다. 「하지만 그 대가가 뭔지 아십니까? 난 해고를 당하게 될 거요. 30년간의 퇴직금도 없 이...」 「당신을 해고하진 못할 거예요.」 「그들은 원하기만 하면 훌륭한 경찰을 해고시킬 수 있소.」 맥머피가 비감한 어조로 말했다. 「운이 좋다면 경호원 자리를 얻게 될지도 모르겠소.」 뒤에서 잭이 일어나는 소리를 듣고 그녀는 잭을 바라보았다. 「잭, 손님이 오셨어요.」 맥머피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때문에 일어나실 건 없습니다. 그저 부인이 궁금해서 들른 것뿐입니다. 난 부인 이 혼자 계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는 재빨리 문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나가고 잭이 모습을 나타냈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잭이 테이블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키스한 다음 의자에 앉았다. 「모르겠어요. 그 불쌍한 경찰관은 대런을 범인으로 착각했던 것에 대한 충격에서 아 직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요.」 다시 날카로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메건과 잭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맥머피 경사 가 뭘 잊고 갔다가 다시 찾아온 게 틀림없다.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딘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토머스가 여기 있소?」 메건의 눈앞에서 방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 앤 학교에 있어야 하잖아요?」 「무슨 일입니까?」 잭이 물었다.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갔는데 토머스가 거기 없었소. 지난 3시간 동안 아무도 그 를 보지 못했다는 거요!」 17 잭이 재빨리 전화를 집어들고 경찰을 불렀다. 메건은 딘에게 빨리 학교로 돌아가서 토 머스가 나타나면 즉시 연락을 취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토머스 친구들의 전화번호도 건네주었다. 딘이 떠나자 메건은 즉시 문을 열고 계단을 달려 내려왔다. 「토머스! 토머스!」 딘이 마지막으로 토머스를 본 건 점심시간이라고 했다. 지난주에 교장이 보냈던 편지 내용이 떠올랐다. 토머스가 다시 학교를 떠난 걸까? 혹시 교통사고라도? 아니면 낯선 사람에게 유괴를 당한 걸까? 메건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버츠 씨가 있는 교장실로 들어섰다. 며칠 전 모나 호킨 스를 달랬던 그 작은 사무실에 딘과 록시가 있었다. 「엄마?」 딸이 달려왔다. 「오, 아가야, 넌 괜찮니?」 메건은 딸을 끌어안았다. 록시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난 괜찮아요. 하지만 토머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죠?」 메건은 딸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버츠 씨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바라보았다. 「얘야, 동생을 잃어버린 게 아니란다. 토머스는 그저 말없이 학교를 나간 것뿐이야. 곧 그 앨 찾을 수 있을 거야.」 「경찰엔 알렸소?」 딘이 물었다. 「잭이 알렸어요. 난 집집마다 찾아다녀야겠어요. 다른 소식은 없나요?」 딘이 록시를 흘끗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없소. 아무도 점심시간 이후로 그 앨 보지 못했다고 하더군.」 「그럼 같은 반 아이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세요. 난 곧 다시 돌아오겠어요.」 그녀는 록시를 끌어안아 준 다음 그곳을 나왔다. 에드나 애덤스의 집을 제외하고 다 섯 집이나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아들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토머스의 이름을 외치며 컨트리 클럽 도로의 막다른 곳까지 왔을 때 차의 경적이 울렸다. 뒤를 돌아보니 클로 드 호킨스의 트럭이 모퉁이에 서 있다. 「섬머스 부인, 무슨 일입니까?」 클로드가 소리쳤다. 지난번에 토머스는 모나가 꾀어서 학교를 벗어났다고 했다. 「오늘 모나는 학교에 갔나요?」 클로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글쎄, 오늘은 학교에 안 가기로 했는데 갔는지도 모르겠군요. 난 9시부터 중고품 시 장에 있었어요. 함께 확인해 봅시다.」 그가 차문을 열었다. 「어서 타요. 우리 집에 가봅시다.」 메건은 약간 주저하다가 차에 올라탔다. 「괜찮아요? 어젯밤 뉴스에서 당신을 봤소. 상처가 많이 나 있더군요.」 「이제 괜찮아요.」 「로열이라는 청년, 정말 뻔뻔스럽더군요. 겉모습만 보고서야 어떻게 그런 잔인한 살 인자라는 걸 알아볼 수 있겠어요?」 클로드의 말에 한기가 스쳐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사내의 청바지에 짙은 갈색 얼 룩 이 있는 걸 알아차렸다. 클로드가 그의 집 쪽으로 차를 돌렸을 때 그녀는 숨을 거칠 게 들이쉬었다. 차가 멈추자 그녀는 문을 열고 차에서 뛰어내렸다. 「난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아저씨가 모나에게 물어 보세요.」 「부인도 함께 들어갑시다.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괜찮아요. 난 여기서 토머스를 계속 불러 봐야겠어요.」 클로드는 어깨를 으쓱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메건은 찻길의 막다른 곳까지 걸어갔 다. 바로 그때 잭의 차가 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왜 집을 떠나는 거예요? 경찰이 벌써 그 애를 수색중인가요?」 메건이 소리쳤다. 잭이 차에서 내려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진정해요. 맥머피가 전화를 하기로 했소. 그가 당신 집에 있어요. 순찰차가 막 행 동 을 개시했고 당신의 아파트를 수사본부로 사용하고 있소.」 「오, 잭. 그 애는 어디 있을까요?」 메건은 더이상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진정해요. 토머스를 찾아낼 수 있을 거요. 이제 집으로 돌아갑시다. 경찰이 이웃들 에게 보일 토머스의 사진을 원하고 있소. 그리고 텔레비전 방송국에도 전화를 했는데 사진이 필요하대요.」 「뭐라고요? 이번 일도 당신의 경력을 쌓는 데 이용할 건가요?」 「메건, 난 토머스를 찾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 방송국에 알렸을 뿐이오. 제발 오 해 는 하지 말아요.」 그의 음성에도 고통이 담겨 있다. 「미안해요, 잭. 내가 제정신이 아닌가 봐요.」 잭이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괜찮소. 날 믿어요. 그리고 함께 집으로 돌아갑시다. 당신은 무척 피로해 보여.」 「안돼요. 경찰에게 사진은 주방의 게시판 위에 있다고 전해 줘요. 난 계속 아이를 찾 아봐야겠어요. 가만히 있다가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아요.」 「좋아. 하지만 내가 다시 돌아와서 도와주겠소.」 그가 뒤돌아봤을 때 클로드 호킨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 다. 「섬머스 부인, 별로 도움을 드릴 수가 없겠군요. 아무리 찾아봐도 모나가 없어요. 난 일요일에 중고품 시장에 갈 때만 제외하곤 항상 3시경엔 집에 돌아오곤 하는데 아마 내가 늦으니까 모나는 화가 나서 뛰쳐나갔나 봐요. 하지만 그 애가 들어오면 부인의 아들에 대해 물어 보겠소.」 「고마워요.」 메건은 잭의 팔에 손톱을 세게 눌렀다. 일요일... 클로드 호킨스는 일요일을 제외하 곤 매일 집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갑자기 그의 집안으로 들어가서 토머스를 찾아보고 싶 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애써 그런 충동을 억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잭, 당신은 길을 건너세요. 그리고 30분 후에 국민학교에서 만나요.」 「좋소.」 잭이 그녀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우린 꼭 토머스를 찾을 수 있어요.」 「메건은 눈물을 숨기기 위해 몸을 돌렸다. 「토머스! 토머스!」 토머스는 봉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곳 뒤에 웅크리고 앉아서 조그만 주먹으로 눈 물을 훔쳤다. 그는 몇 분 전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소리를 질렀지만 엄마의 음 성 은 곧 사라져 버렸다. 엄마는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이다. 모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모나는 오래 전에 떠나면서 문을 잠가 버렸다. 그리고 그를 내보내 주겠다고 했지만 혹시 모나가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걱정이 된다. 일 전에 학교를 벗어났던 것에 대해서 토머스는 엄마에게 거짓말을 했었다. 그 생각을 하니까 울고 싶어진다. 다시는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 만 지금은 엄마가 화를 낼게 걱정스럽다. 그리고 차고 주인도 화를 낼 것이다. 그가 돌아오면 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엄마를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토머스는 머리 위의 더러운 창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가 다시 돌아와 줄까? 그리고 모나는 어디 있을까? 모나는 협죽도 뒤에 숨어서 메건 섬머스가 옆집 문 쪽으로 다가오는 걸 지켜보고 있 었 다. 그 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빠는 모나에게 화를 낼 거야. 모나는 어떻게 하지? 「토머스! 토머스!」 모나는 토머스를 찾는 외침소리를 들으며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리고 토머스를 생각했다. 그 앤 괜찮을 까? 그 앤 아주 어린데... 드디어 모나는 덤불을 헤치고 나왔다. 섬머스 부인에게 토머스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 애는 메건을 뒤쫓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본 메건은 자신을 뒤쫓던 모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모나, 무슨 일이지?」 소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메건은 급히 다가가서 소녀의 목을 끌어안아 주었다. 「아빠에게 데려다 줄까?」 모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모나는 나쁜 아이예요.」 「아니, 모나는 착한 아이야. 자, 나와 합께 집으로 가자. 그리고 아줌마가 너에게 묻 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서 정말 잘됐구나.」 모나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메건을 빤히 쳐다보았다. 「모나는 토머스가 있는 곳을 알아요.」 「그래? 어디 있니? 토머스가 어디 있는 거지?」 메건의 심장이 쿵쿵 울려댔다. 「모나가 안내할게요.」 모나는 메건의 팔을 잡고 에드나 애덤스의 집 옆에 있는 빈집의 뒤뜰로 들어갔다. 모 나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아빠가 화를 내는 것도 겁나지 않는다. 에 드나의 집과 빈집을 가르는 울타리에서 모나는 지하실 근처의 커다란 구멍을 가리켰 다. 「저게 길이에요.」 「하지만 들어갈 수가 없잖아? 저기 대문이 있구나.」 「저긴 커다란 자물쇠가 있어요. 이게 길이에요.」 소녀는 무릎을 꿇고 울타리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에드나의 차고 뒤쪽의 작은 문을 향해 모나를 따라가던 메건은 갑자기 어떤 위험스런 예감에 사로잡혔다. 「모나, 정말 여기 토머스가 있는 거니?」 「모나는 그 애가 고양이의 문으로 들어가는 걸 봤어요.」 모나는 문 밑에 조그만 짐승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을 가리켰다. 메건은 문을 두 드 리고 귀를 바싹 들이댔다. 「토머스! 토머스! 안에 있니?」 「엄마! 나 여기 있어. 날 내보내 줘!」 「아가야, 괜찮아. 울지 마. 엄마가 널 꺼내 줄게.」 메건은 모나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지만 그 소녀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아마 겁을 먹 었으리라. 「토머스, 다치진 않았니?」 「아니, 하지만 배가 고파.」 메건은 고양이 출입문을 봉쇄해 둔 플라스틱 판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건 단단 히 고정되어 있다. 「얘야, 좀 기다려. 엄마가 금방 돌아와서 널 꺼내줄게!」 뒷문으로 가서 손잡이를 비틀었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창문을 깨뜨 렸 다. 나중에 에드나와 폴러드에게 사과하면 그들은 기꺼이 이해해 줄 것이다. 문은 쉽 사리 열렸다. 맨 처음 드러난 현관은 곧장 다용도실과 연결되어 있고 그 옆벽에 문이 하나 있다. 그게 차고와 연결되는 문인 것 같다. 그녀는 손잡이를 돌렸다. 그 안의 모습이 드러 난 순간 그녀는 숨을 몰아쉬고 말았다. 거의 2층 정도 높이의 차고 안에는 하얀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우편물이 빽빽이 들어 차 있었다! 고무줄로 묶은 수천 개의 꾸러미가 열을 지어 쌓여 있었다. 그녀는 그 충격적인 광경에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곧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토머스! 아가야, 이리 오렴.」 잠시 후에 소년이 그녀의 발을 잡았다. 아이는 문 옆의 거대한 편지더미에 숨어 있었 던 것이다. 「엄마!」 그녀는 아이를 끌어안고 몇 번이나 키스해 주었다. 「아가야, 갇혀 있었구나! 괜찮니?」 토머스는 울기 시작했다. 「난 엄마 목소리를 들었어요. 하지만 엄마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어요!」 「이젠 괜찮아. 울지 마. 엄마가 있잖니? 이제 엄마가 널 집으로 데려갈 거야..」 「메건,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돼.」 어둠을 가르고 들려오는 남자의 음성이 마치 찬물처럼 메건을 후려쳤다. 뒤를 돌아보 니 문가에 폴러드가 서 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물론 그렇겠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이 세상의 온갖 쓰레기를 내버리는 인 간들은 그들의 죄를 이해하지 못하지. 그리고 그 행동을 어떻게 멈춰야 하는 건지도 모르고 있어.」 「멈춘다고요? 도대체 무슨 뜻이죠, 핀치 씨?」 「청소하는 거지. 그들의 죄로부터 해방되는 거야. 제거되는 거야. 나에 의해서...」 그는 거대한 날이 선 금속기구를 흔들어 보였다.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둬들여야 하는 거야. 그리고 지구에 잡동사니 우편물을 뿌려대는 인간은 내가 거두는 거지.」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폴러드 핀치가 죽음의 신이었던 것이다. 「오, 하느님...」 「그래, 내가 죽음의 신이야, 난 당신과 또 죄의 공모자들을 벌주는 사람이지. 당신 이 텔레서브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낸 건 정말 유감이었어. 노마 슐츠는 당신의 졸병 이 었지? 나 같은 불행한 정부 고용원이 산더미 같은 쓰레기 더미를 집집마다 나르게 하 는 사람이지.」 메건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든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핀치 씨, 당신을 그토록 힘들게 했다면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토머스는 이 일에 관 련이 없어요. 우선 아이를 돌려보낸 다음 우리끼리 좀더 얘기하기로 해요.」 「안돼. 내겐 청중이 있어야 해. 그래야 내가 그 피자맨과 일년에 4번씩이나 안내서 를 내보내는 타이어 가게 주인에게 어떻게 복수를 했는지 설명할 수 있지 않겠어? 그리 고 텔레서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 그들은 끊임없이 쓰레기를 솎아내서 우리를 굴욕 스럽게 만들었지!」 폴러드의 안경이 번쩍였다. 「그 소년도 내 말을 들어야 해.」 메건은 아들의 귀를 막고 모나가 와서 도와주길 기원했다. 「어떻게 노마가 텔레서브에서 일한다는 걸 알았죠?」 폴러드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차고 안을 훑다가 갑자기 문을 힘껏 닫고서 무서운 얼 굴 로 메건을 향해 달려들며 칼을 흔들어댔다. 메건은 비명을 지르며 토머스를 끌어안았 다. 「메건, 도망칠 수 없을 거야.」 그녀는 그 미치광이에게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그녀는 모든 힘을 모아 종이더미 위 로 그를 밀쳐 버렸다. 폴러드는 욕설을 퍼부어대며 넘어지고, 그 바람에 종이가 무너져 버렸다. 메건은 토머스를 안고서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어둠 속에서 문의 방향을 가늠하려고 애썼다. 아이의 무게 때문에 팔이 아파왔지만 멈출 수는 없다. 토머스는 큰 소리로 울 어댔다. 그녀는 아이를 끌고서 1m나 되는 종이뭉치 위를 기어올랐다. 먼 곳에서 사이 렌 소리 가 들려왔다. 「토머스 여기로 뛰어올라, 그 다음 뛰어내리는 거야. 빨리...」 토머스가 종이더미를 넘고 나서 그녀가 오르려는데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안돼! 저리 비켜.」 그녀는 거칠게 발로 찼지만 그대로 종이더미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종이더미 밑에서 폴러드의 머리가 나타났다. 그는 허공 중에 칼을 흔들어댔다. 「메건, 당신은 몇 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어. 당신에게 갖다 줄 소포가 있어. 내 희 생 자들에게 모두 그런 방법을 썼지. 그들에게 커다랗고 근사한 상자를 배달하는 거야. 그들이 문을 열고 제복을 입은 나를 보면 활짝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지. 그 선 물에 기분이 몹시 좋아진 거야. 정말 누워서 떡먹기였다니까.」 메건은 숨을 들이쉬고 발을 들어올려 그의 손에 있던 칼을 떨어뜨렸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목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녀는 편지를 한 줌 던지면서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 다. 「토머스, 도망쳐! 학교에 가 있어!」 메건은 문을 빠져나가는 토머스를 향해 소리쳤다. 폴러드가 일어서서 토머스를 뒤쫓 아 가려 했다. 하지만 메건이 달려들어 머리로 그의 턱을 들이받았다. 그들은 둘 다 편 지 더미 위로 쓰러졌다. 메건은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편지봉투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 메건은 필로 얼굴을 가렸지만 종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앞을 볼 수는 없지만 폴러드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뭔가를 긁는 소리 를 냈지만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메건!」 잭의 음성에 그녀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의 균형을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메건은 문 쪽을 향해 소리쳤다. 「토머스도 함께 있나요?」 「그 앤 여기 있소. 메건, 당신은 어디 있소?」 잭은 울고 있는 소년을 모나에게 건넸다. 「너의 집으로 가서 거기 있어야 해.」 그는 모나가 토머스를 데리고 재빨리 도망치는 걸 지켜보다가 달력 뭉치를 헤치고 차 고 쪽으로 다가갔다. 「메건, 들어갈 수가 없소. 입구가 잠겨 있어요. 폴러드는 어딨소?」 「잭, 조심하세요. 폴러드는 여기 있어요. 그는 제정신이 아니에요.」 뭔가를 긁는 소리가 계속 들리고 이어 금속성까지 동반하고 있다. 그 소리는 점점 커 져간다. 그 순간 메건은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라이터... 폴러드는 라이터를 갖고 있었다. 「잭, 나가요! 폴러드가 불을 지르려 하고 있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플라스틱이 타는 냄새가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그리고 종이가 타 들어가는 불길한 소리도 함께 들린다. 그녀는 맹렬히 종이를 밀치기 시작했다. 하지 만 그럴수록 종이는 머리 위로 더 많이 쏟아졌다. 폴러드가 종이더미 속에서 웃기 시작 했 다. 「난 오염자들을 모두 없애 버리겠어. 도망칠 수 없을 걸.」 메건은 기침을 하면서 숨을 헐떡였다. 열기가 오른쪽 어깨에서 느껴진다. 그래서 그 녀 는 왼쪽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팔을 타고 피가 흐르는 걸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거친 숨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점점 의식을 잃었다. 먼 곳에서 마치 호른의 소리 같은 것 이 들려왔다. 메건은 토머스와 록시를 생각했다. 그런 다음 사랑하는 잭의 모습도 떠올렸다. 의식 을 잃어가면서 그 여자는 사랑하는 세 사람의 안전을 기도했다. 메건은 몸을 떨며 깨어났다. 그리고 가슴을 움켜쥐려다가 팔에 정맥주사가 꽂혀 있다 는 걸 깨달았다. 「토머스!」 침대 옆에서 커다란 물체가 움직이더니 잭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메건, 괜찮소. 토머스는 앨런 부인과 함께 있어요. 그 애와 록시는 잘 있소. 아침 에 아이들을 만나면 돼요.」 잭의 조용한 음성에 공포감이 사라졌다. 「난 병원에 있는 건가요?」 「그렇소. 약간의 연기를 마셨고, 좀 타박상을 입긴 했지만 괜찮아요.」 잭이 그녀에게 부드럽게 키스했다. 「하지만 미리 경고해 두겠는데 당신은 유명인사가 됐소.」 「왜요?」 「당신은 죽음의 신을 붙잡았소. 신문에선 당신이 멜버른을 구했다고 야단이오. 하지 만 그들은 모나 호킨스의 역할을 특히 강조하고 있소. 그 앤 아주 신이 나 있지. 두 사람에게 상금을 나눠준다고 했소.」 「상금? 난 그 문제는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2만 5천 달러의 상금은 잊기엔 왜 많은 액수요. 그 액수의 절반이면 당신은 텔레서 브를 그만두고 직장을 얻기 전까지 휴식을 취할 수 있소.」 「정말 꿈같은 얘기로군요. 내가 일자리만 찾을 수 있다면...」 「당신에겐 이미 일자리가 들어와 있소. 밀러 광고회사의 사장이 어제 내가 당신 집 에 있을 때 전화를 했었소. 그리고 대런 조지도 전화를 걸어서 당신에게 방송국의 홍보 관 계 일을 주겠다고 했소. 아마 당신이 상을 받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고용 하 려 할 거요.」 「오, 하느님! 그런데 당신은 괜찮아요? 당신은 불 속에서 다치지 않았나요?」 연기와 냄새, 그리고 태산같은 종이 더미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렇소. 당신이 안전하다는 걸 확인하니 괜찮아졌어. 메건, 할 말이 아주 많긴 한 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소.」 「날 사랑한다는 말부터 시작하는 게 어때요?」 「그렇소. 정말 당신을 사랑하오. 당신, 그리고 당신의 아이들과 함께 가족을 이루고 싶소. 당신이 그 아이들을 기르는 걸 돕고 싶소. 난 전에 근무하던 방송국에서 다시 와달라는 전화를 받았소. 그리고 뉴욕의 방송국 관계자들에게서도 두 통의 전화를 받 았소.」 「뉴욕? 뉴욕으로 가실 건가요?」 「아니오. 지금은 안 갈 거요. 아니 영원히 가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뉴스 연출 자 자리도 거절했소. 난 프리랜서로 일하고 싶어. 당신도 일을 할 계획이고 아이들은 아직 어리니까 내가 아이들 곁에 좀더 많이 있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소.」 「잭, 고마워요. 하지만 우린 아이들 때문에 양육권 싸움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 딘 은...」 잭이 머리를 저었다. 「그 점은 걱정 말아요. 당신의 전 남편은 리바라는 여자와 함께 영국으로 갈 거라고 했소.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더군 토머스에 관한 불안감 때문에 데려다 기를 생각이 없 어진 것 같소.」 메건은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아픈 목을 쓸어내렸다. 「그 개구쟁이는 괜찮은가요? 아마 이번 일로 혼쭐이 났을 거예요.」 「그 앤 괜찮은 것 같소. 피곤한지 6시에 잠들었어요. 앨런 부인이 쿠키를 만들어 줬 지.」 메건은 눈물을 닦으며 내키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폴러드는 어때요?」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불에 타서 죽었소. 난 당신을 끌어냈지만 소방차는 그를 끌어내지 못했소. 그 광고지가 너무 빨리 타는 바람에...」 메건은 몸을 떨면서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는 미쳤어요. 불쌍한 애덤스 양.」 「에드나 애덤스는 오늘 아침에 죽었소. 그는 병원에서 돌아와서 당신과 토머스를 발 견한 거요. 그녀의 죽음이 그를 더 극단적으로 몰고 간 거요.」 메건은 그의 손을 입에다 갖다댔다. 「그럼 이제 모두 끝난 건가요?」 「모두 끝났소. 이제 당신과 나를 주연으로 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만 하면 되오. 」 그가 열렬하게 키스한 다음 웃었다. 「메건, 이제 잠을 자도록 해요. 내일 우리 가족들 모두 밖에 나가서 저녁식사를 합 시 다. 그리고 나중에 특별한 디저트를 기대해 보겠소.」 메건이 깔깔 웃어댔다. 「그렇다면 식사를 많이 해두셔야겠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