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죽음의 티켓(완결) 관련자료:없음 [183] 보낸이:장선희 (리알 ) 2000-07-17 12:39 조회:70 죽음의 티켓 1 이든 페인은 손지갑을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하품을 했다. 하루의 피로가 한꺼 번 에 몰려왔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죽 핸드백을 어깨에 걸쳤다. 이젠 퇴근이다. 일리노이 주의회 여행국 사무실을 나와서 유리로 만들어진 엘리베이 터 로 걸음을 옳기며 그녀는 자꾸만 아래로 쳐지려는 눈꺼풀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리 고는 9월의 하늘처럼 푸른 눈동자를 들어 다른 사무실을 살펴보았다. 사무실들은 모 두 텅 비어 있었다. 금요일인데다 벌써 9시 반을 넘긴 시각이니 그건 당연했다. 직원들 의 모습은 그만두고라도 경비원의 그림자조차도 얼씬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그녀는 하이힐 소리를 딸깍거리며 로비를 걸어갔다. 매번 이런 식으로 퇴근을 해왔기 때문에 텅빈 건물 안에 혼자 있다는 사실이 별로 두렵게 느껴 지지 않았는데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좀 이상했다. 어쩐지 이번주 내내 해온 일이 산뜻 하게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에 대해서 짜증 같 은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늦게까지 사무실에 혼자 남아서 일하고, 서류를 챙겨서 가 방에 쑤셔넣고 나와서 경비실에 사인을 하고 돌아가는 일까지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 다. 자신이 하는 일이 좀더 창의적이고, 그래서 그 자체에 어떤 보람을 느낄 수만 있 다면 더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책임과 권위를 수반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회의를 품 고 있었다. 기껏해야 서류 나부랑이나 정리하려고 자신의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고 싶 지는 않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이런 식으로는 이 직장에 계속 다닐 수가 없다 . 바깥의 공기는 싸늘하고 축축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재킷의 깃을 세웠다. 어깨까지 치 렁치렁하게 내려오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에 축축한 공기가 매달리는 느낌이었다. 가을비가 한차례 씻어 내려간 루프 스트리트의 밤거리는 음침한 느낌을 주었다. 헤드 라이트를 비치며 자동차가 간간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 살고 있는 리 버 노스 아파트를 향해서 하이힐을 딸깍거리며 걸어갔다. 이런 날 밤에는 택시의 그 림 자조차 발견하기가 어렵다. 아예 걷는 편이 속편하다. 머리 위로 전철이 요란한 굉음 을 울리며 지나갔다. 이든은 목을 자라처럼 움츠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위에서 시 커 먼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져서 그녀의 옷을 엉망으로 버려 놓았다. 게다가 재수없게도 발밑의 물구덩이를 보지 못해서 그녀의 이탈리아 제 가죽 구두까지 흙탕물에 빠져 버 리고 말았다. 그녀의 입에서 저절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엉망으로 망쳐 버린 기분으로 그녀는 다음 코너를 돌았다. 젖은 발에 한기가 전해져 왔 다. 건널목의 신호등이 파랗게 켜졌다. 그런데 그 순간, 사이렌 소리가 점점 커지며 가까워왔다. 그녀는 앰블런스가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곧 건널목을 건너서 시카고 강 쪽으로 향해 걸었는데 비가 온 뒤라 생선 비린내가 더욱 짙게 풍겨왔다. 그녀는 길 바 닥만 내려다보며 한참을 걷다가 문득 눈을 들어 다리 난간을 바라보았다. 강물 위에 안개가 자욱히 일고 있었다. 남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웨커 도로로 내려가 는 차량들이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꽁무니를 잇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서 있는 곳에서 직선으로 아래쪽인 북측 강둑에서 몸집이 호리호리한 한 사내가 뭐라고 소리치며 손 짓 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이든은 걸음을 늦추며 난간으로 다가 섰다. 어디선가 모터 소리 가 들려왔다. 그녀는 난간 위로 상체를 내밀며 사내 쪽을 살펴보았다. 하얀 요트 한 대 가 강가에 서 이름을 그녀는 읽을 수 있었다. 이런 날씨에 무슨 요트를 띄웠을까? 강둑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내들의 수상한 행동이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커다란 덩 치의 두 사내가 한 여자를 부축해서 요트로 옮기고 있었다. 여자는 검은 이브닝 드레 스를 입고 있었고 빨간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축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아마도 인사불 성 인 것 같았다. 취했을까? 두 사내가 여자를 요트에다 태웠다. 금발의 사내 쪽이 긴 벤치 위에 덮인 커버를 걷어찼다. 그보다 덩치가 큰 검은 머리의 사내가 마치 감자 자 루처럼 여자를 구석에다 처박았다. 여자는 구석에 놓여 있던 박스 속에 처박혔고, 그 위엔 커버가 씌워졌다. 검은 머리의 사내가 그 박스 위에 털썩 앉았다. 커버 밖으로 여자의 팔 하나가 비어져나온 것을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이든은 눈을 커 다랗게 뜨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오, 맙소사! 저 여자는 죽은 게 틀림없어." 이든은 공포에 사로잡혀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때 그들과 방금 합세한 세번째 사 내가 그녀를 정통으로 돌아보았다. 이든은 그가 자신의 말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 사내의 눈길과 그녀의 눈길이 바로 마주친 것이다. 이든은 그자리에 얼어붙는 느낌이 었다. 사내가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검은 머리의 중년 사내, 귀밑 머리카락이 희 끗희끗한 한 사내를 이든은 곧 알아보았다. 이럴 수가!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봐, 루..., 잭!" 그 사내가 소리치고 있었다. 이든은 다리 난간에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핸드백 이 난간에 걸려서 벗겨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당황해서 마구 잡아당겼지만 쉽게 벗겨지 지 가 않았다. 사내 두 명은 이미 그녀를 행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중년의 사내는 무어 라 고 소리 치며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데 그 사내는 텔레비 전을 통해서나 일리노이 주의회에서도 자주 얼굴을 대한 적이 있었다. 그의 이름이 스탠턴 번즈란 것 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일리노이 주의 검찰총장이며 다음 주지사를 위한 민주당 후 보 위치에 있는 남자였다. 이든은 자신의 몸에 위험이 닥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서 난간에 걸린 핸드백을 벗기려고 애썼지만 너무 당황해서 그런지 제대로 되질 않았고 신경이 산산조각날 만큼 사내들은 무서운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잡아! 잡아서 이리로 끌고와!" 번즈는 사내들에게 소리쳤다. 사내들이 콘크리트로 된 계단을 올라와서 그녀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불과 2분 정도의 거리였다. 이든의 손은 빗물과 땀으로 젖었다. 그녀는 죽을 힘을 다해 핸드백을 잡아당겼다. 마침내 핸드백의 고리부분이 뚝 떨어지고 말았 다. 사내들은 계단을 거의 다 올라와 있었다. 이든은 핸드백을 포기하고 도망치기 시 작했다. 사내들에게 붙잡히는 날에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것 같았다. 번즈가 자신 을 차나 한 잔 하자고 잡아오라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목격한 것이 더욱 단순한 사건 같지는 않았다. 금발의 사내가 먼저 다리 위로 뛰어올라왔다. 검은 머리의 사내도 그 뒤를 따라 올라 왔다. 이든은 달리면서 피신처를 찾았으나 이 거리는 특히 밤이 되면 인적마저 드문 곳이었다. 그녀는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그렇지, 술집은 문이 열려 있을 거야. 이든은 필사적으로 달리며 생각했다. 킨치 거 리 의 모퉁이에 있는 그 이름이 뭐 였더라...? 그 술집에는 모터 사이클 족속들이 언제 나 득실 거리는 곳이었다. 그곳이면 안전하겠지. 이든은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건널목을 뛰어 건넜다. 운전수가 경적을 요란하게 울 리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무시하고 뒤를 다시 돌아보았다. 검은 머 리의 사내는 덩치가 커서 그런지 발걸음이 느린 편이었다. 그 뒤로 금발의 사내가 쫓 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발로 자신도 놀랄 만큼 빨리 달리고 있었다. 킨치 거리를 서쪽으로 돌면서 그녀는 주위를 살폈다. <체인즈>란 네온 사인이 눈에 들 어왔다. 바로 저기야! 두어 명의 사내가 바 문앞의 차양 아래에 서 있었다. 이든은 그들과 오토바이 사이를 지나서 안으로 들어섰다. 바 안은 조명이 흐릿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바 안에 여자라 고는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희미한 조명 아래 사내들만이 득실 거 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내들은 긴 부츠를 신고 가슴에는 체인으로 장식한 가죽 조 끼 를 입고 있었으며, 모터 사이클 캡을 쓰고 있었다. 그 별난 모습들은 평소 같으면 이 든의 비위를 상하게 했겠지만, 지금 같은 화급한 상황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 었다. 그녀는 카운터 뒤에 서 있는 사내에게로 달려가서 숨을 헐떡이며 호소했다. "난 지금 괴한들에게 쫓기고 있어요! 도와줘요!" 사내는 흑발의 그녀를 바라보며 술내를 풍겼다. "오, 아름다운 아가씨로군. 여기에 그런 괴한은 없소. 자, 이리로 와요." "그런게 아니에요!" 이든은 질겁을 하며 그의 손을 뿌리 쳤다. "두 남자가 나를 쫓아와요. 아주 위험한 사람들이에요!" 그러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다른 사내가 다가오며 말했다. "흠, 그 친구들이 흑심을 품은 게로군. 아가씨가 너무 이뻐서 그래." 이든은 놀란 눈동자를 커다랗게 치뜨며 사내를 돌아보았다. 이건 아주 번지수를 잘못 찾아들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런 주정뱅이들에게 무슨 구원을 요청할 수 있단 말 인가? 이러다가 그자들에게 고스란히 끌려가기 알맞겠다. "전화는 어디 있죠?" 그녀는 바텐더를 붙들고 물었다. "저기요." 바텐더는 턱짓으로 코너를 가리켰다. 모두 미친놈들 뿐이야. 그녀는 전화통이 있는 곳으로 급히 걸어갔다. "고마워요, 경찰을 불러야겠어요." 그러자 그 바텐더는 그녀의 팔을 붙들면서 말했다. "경찰은 안돼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경찰을 싫어해요. 공연히 남의 장사를 망 치지 말아요." 이든은 낭패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것 봐요. 그들은 아주 위험한 사람들이에요. 어쩌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단 말이에 요." 그녀의 애원은 그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결국 체념하고 말았다. "뒷문은 없나요?" "화장실로 나가시오." 바텐더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골목으로 나가는 창문이 있소." "고마워요." "그 친구들이 오면 우리가 한 잔 먹여서 보내겠소." 카운터 뒤에 서 있던 사내가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요즘은 여기 친구들도 쾌나 지저분해졌단 말이야. 여자가 싫다 해도 추근거리거든." 사내들이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이든은 화장실로 달려들어 갔다. 바텐더의 말대로 창문은 쉽게 열렸다. 내다보니 뒷골목으로 통했다. "이봐요, 무얼 하는 거요?"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와서 그녀는 한쪽 다리를 창문틀에 걸친 채 돌아 보았다. 그가 자신을 쫓아온 사내가 아니란 것을 확인한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봐요, 못본 체 좀 해줘요. 나도 댁을 못본 걸로 해둘 테니까, 좋아요?" 그녀는 웃으며 사내에게 말했다. "좋아, 좋아." 사내는 손사래를 치며 껄껄 웃었다. 양쪽 다리를 창밖으로 늘어뜨린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길 아래로 풀쩍 뛰어내렸다. 발 아래 딱딱한 벽돌에 부딪치는 느낌이 오 며 하이힐의 뒷축이 하나 부러져 나갔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 다. 그러나 축축한 벽돌 바닥에 엉덩이를 찧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울어 버리 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도 없다고 생각하곤 벌떡 일 어났다. 그들의 손에 잡히면 울 기 회마저 영영 없게 될지도 모른다. 빨리 아파트로 돌아가서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그 래야만 살인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살인자. 이든은 그 말을 떠올리고는 몸서리를 쳤다. 그들이 정말 살인자들일까? 내 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빨간 머리의 그 여자는 죽은 걸까? 죽지 않았다면 그렇게 박스 속에다 생사람을 구겨넣을 리가 없지 않을까? 오, 정말 무섭다! 그들은 그 여자를 죽 여서 강에다 버리고 도망칠 참이 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나를 잡으면, 나도 그 여자처럼 죽일 것이다. 자신들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서. 이든은 한쪽 다리를 쩔뚝쩔뚝 절면서 자신의 아파트로 향한 길로 접어들었다. 뒤에서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아서, 그녀는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기 미 는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와 트럭들이 헤드라이트를 비치며 인도 옆으로 지나가고 거 지 한 사람이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동냥을 구하고 있다.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남자 의 품에 안겨서 그녀의 앞을 지나쳤다. 그 뒤를 이어 부인 셋이 무어라고 쉴 새없이 떠들며 이스트 뱅크 클럽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위험한 인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 았다. 그러나 이든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아파트가 멀찍이 보이는 지점에서 그녀는 모퉁 이에 몸을 숨기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앗! 하는 비명을 삼키며 자신의 몸을 담벼락 뒤로 숨겼다. 아파트 맞은편 건물 뒤에서 한 사내가 담배를 물고 그녀의 아파 트 쪽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든은 심장이 멎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두 다리가 얼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사내의 덩치를 보고, 그가 자신을 뒤쫓아온 사내 중에서 검은 머리를 한 뚱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이곳을 알았을까? 내 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어떻게 그들이... 그렇다. 내 핸드백!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핸드백을 뒤져서 신분을 알아낸 것이 분명하다. 그 핸드백 속에는 그녀의 신분증과 수 첩 따위가 들어 있었으니까. 이제 그들은 그녀의 신분에 대해서는 거의 다 알고 있는 셈이다. 그녀의 직장과 아파트까지, 그리고 친한 친구들의 전화번호까지. 이든은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든은 공중전화 박스 를 찾아서 다음 블럭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 없는 때는 그렇게 흔하던 공중전화 박스도 이런 때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법이다. 간신히 찾은 공중전화는 고장이었다. 그 녀는 다시 그 옆의 블럭으로 달려갔다. 경찰서의 교환양은 이든이 다급하게 요구하는 부서를 바꿔 주는 데 늑장을 부렸다. "이봐요, 사람 좀 살려줘요." 이든은 통사정을 했다. "범죄 현장에서 전화하시는 건가요?" 그제서야 나온 경찰은 한가하게 물었다. "아니에요." 이든은 치를 떨며 말했다. "범죄는 이미 이루어졌어요. 그리고 두 남자가 나를 죽이려고 따라오고 있어요." "그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요? 지금은 밤이에요. 그들에게 다가가서 무기를 가졌느냐고 물어 봐 야 하나요?" "그러면 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소?" 이건 완전히 절벽이다. 이든은 점점 더 화가 났다. 그녀는 신경질을 부려 봤자 자신 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여자 시체를 옳기는 걸 목격했어요. 스탠턴 번즈가 그들 과 함께 있었어요." 그녀는 체념조로 얘기했다. 전화기 저쪽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마도 이 여자가 미 쳤나 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번즈는 내가 자신을 알아본 것을 눈치챈 것 같아요. 그래서 두 사내를 시켜서 나를 뒤쫓게 했어요. 나는 그들을 바에서 따돌렸지만...." "후와! 잠깐만, 아가씨. 장난 전화를 하시는 건 아니죠?" "아니에요!" "좋아요, 아가씨. 당신은 지금 그랜드 웰스 코너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하고 있어요. 이름과 주소, 그리고 댁 전화번호를 말해 주겠소? 그리고 댁으로 가 계시면 순찰차를 보내 드리겠소." 이든은 경찰이 자신의 말을 신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은 내 말을 믿지 않는 모양이군요." "성함과 주소를 말해 주세요, 아가씨." 그는 되풀이했다. 이든은 주저했다. 경찰에게 자신의 아파트 주소를 말해 줘도 될까? 어쩌면 그들도 번 즈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번즈 정도라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최소한 경찰 내부에 자신의 심복들을 심어 놓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렇 다면 적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그녀는 그것이 두려웠다. 이건 안되겠어. 좀더 생각해 본 다음에 결정하자. 그녀는 전화기를 놓았다. 이젠 어떡한다? 그녀는 거리에 선 채 막막한 기분에 휩싸였다. 당장 갈 만한 곳이 없 다. 친구 태피는 새로 생긴 보이 프랜드와 함께 주말 여행을 떠났다. 그래서 아파트 는 지금 텅 비어 있다. 그런데도 들어갈 수가 없다. 태피가 지금 아파트에 없는 것은 참 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잡으러 온 사내들은 그녀 대신 태피를 잡아 갈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태피에게까지 그런 일을 당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 이 일은 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해. 다른 사람까지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아. 그런 데 나는 어쩌면 좋지? 이제까지는 도망만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었지만, 지금부터는 생 각을 좀 해봐야겠어. 이든은 주머니 속을 뒤져 보았다. 다행히 지갑은 그대로 있었다. 핸드백을 날치기당 할 경우를 대비해서 지갑을 늘 주머니 속에다 따로 넣고 다니는 버룻을 가진 것은 얼마 나 현명한 짓인가? 그녀는 우선 호텔 방이라도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로 샤 워 를 하고 브랜디라도 한 잔 하고 나면 마음이 좀 진정되어 생각도 맑아지겠지. 그러나 이든의 그 달콤한 생각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전화 박스를 나와 서 몇 발자국 가지도 않아 한 사내가 맞은편에서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든은 한눈에 그 사내를 알아보았다. 검은 머리의 사내, 뚱뚱한 몸집에다 우락부락 한 눈을 가진 사나이. 이든은 그를 발견하자 걸음을 딱 멈추었다. 어디로 도망갈까? 그 녀 는 화급하게 주위를 살펴보았는데 마침 버스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버스 운전수에게 손을 흔들며 달려갔다. 그러자 그 사내도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든은 가까스로 버스 위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버스 문은 그 사내의 코앞에서 닫혔 다. 버스가 출발하자 이든은 운전수에게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사 람들 사이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밖으로 힐끗 보니, 사내는 단거리 선수처럼 버스를 뒤쫓아오고 있었다. 아마도 다음 정류소에서 잡을 수 있으리라고 계산한 듯했 다. 그러나 곧 걸음을 멈추고 지나가던 택시를 미친 듯이 손짓해 부르기 시작했다. 택 시는 그를 지나쳐 가버렸다. 그러자 또 한 대의 버스가 정류장에 서는 것이 보였다. 사내는 그 버스를 향해 달려 갔다. 저런! 이든은 혀를 찼다. 하필이면 버스가 곧 뒤 따라 올게 뭐람! 버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손잡이를 잡고 이든은 초조하게 생각했다. 사내를 어떻게 따 돌리지? 그녀는 주위에서 재잘거리는 여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얘기하는 내용 으 로 미루어봐서 어디 파티 장에라도 가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따라 파티장 으 로 가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사 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파티가 있는 모양이구나?" 그녀는 상냥한 표정으로 여학생들에게 말을 걸었다. "부두에서 축제가 있어요." 빨간 머리의 여학생이 대답했다. "9월 잔치가 어제부터 열렸어요.블랙 풍구스가 자정에 공연을 할 예정이에요." "비가 더이상 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다른 여학생이 말했다. "블랙 풍구스라고? 그래, 그것 참 재미있겠는데? 나도 함께 어울릴까?" 이든은 그런 일이라면 흥미가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학생들은 자기들끼리 쳐다보며 멀뚱한 표장을 짓고 있었다. 축제라고는 하지만 게 임 이나 하고 음식들을 만들어 팔며 광대놀음 따위나 구경하는 정도라서 그렇게 대단한 것은 못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충분히 몰려올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비만 오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다. 이든이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 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는 자신의 몸을 숨기기도 좋고, 또 범인이 그녀를 마음대로 어 떻게 하기도 어려울 테니까. 그녀는 한 블럭쯤 뒤에서 따라오는 버스를 돌아보자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그녀가 어느 지점에서 내리면, 사내도 분명히 뒤따라 내릴 것이다. 그렇지만 축제가 벌어지 고 있는 부두에서 내리면 사람들 사이로 몸을 감추기가 용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칙 러빗은 유쾌한 표정으로 카니발에 몰려든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시끌시끌한 축제가 좋았다. 음식을 파는 사람들은 돈을 받아넣기에 바빴고, 온 갖 놀이 기구를 즐기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환성이 연신 터져나오고 있었다. 빙빙 돌 아 가는 회전목마와 세계 일주 비행기, 나는 양탄자, 각종 놀이 기구들 따위에 몰려든 사 람들이 저마다 떠들어대는 소리로 축제장은 온통 시장바닥 같았다. 칙 러빗은 자신이 펼쳐 놓은 야구놀이장으로 다가오는 세 아가씨에게 슬쩍 윙크를 던졌다. 그리고는 소 프트 볼을 공중으로 던졌다가 받았다. "헤이, 금발의 아가씨. 한번 던져 보시지? 동물인형을 상으로 받아 보이프랜드에게 선 물하면 좋아할 거야. 우유병 세 개만 쓰러뜨리면 돼." 그는 선반에 진열해 놓은 우유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에는 우유병 네 개가 가 지 런히 놓여 있었다. 금발의 아가씨는 깔깔 웃었다. "나는 스포츠엔 약해요." 말하면서도 그녀는 호기심을 나타냈다. "이런 귀여운 인형을 갖고 싶지 않아요?" 칙은 상품 진열장에서 아주 예쁘게 생긴 고양이 인형을 꺼내 금발에게 건네 주며 그 녀 를 유혹했다. "오, 정말 깜찍한 고양이로군요." 그녀는 고양이를 끌어안으며 옆에 와서 선 남자 친구에게 말했다. "어때, 브라이언? 나를 위해서 이 고양이를 타주지 않겠어? 한번 던져 봐." 보이프랜드는 팔을 휘두르며 큰소리를 쳤다. "좋아, 문제 없어, 세얼라. 얼마예요, 아저씨?" "한번 던지는데 1달러." 칙은 손가락 하나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에이, 그건 너무 비싼데." "그렇지만 저 고양이 인형은 15달러나 하는 것인데?" 칙은 브라이언의 옷차림을 살펴보고 그가 두 배의 요금이라도 치를 능력이 있다는 생 각을 했다. 물론 이미 가져온 돈을 다른 놀이에 다 날려 버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자넨 스포츠에 상당한 소질이 있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우유병 세 개를 쓰러뜨리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겠지." 칙은 그를 슬쩍 치켜올렸다. "게다가 푼돈 몇 달러로 애인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일이 그리 많겠어?" "해봐, 브라이." 금발은 옆에서 졸랐다. "알았어." 녀석은 주머니에서 5달러짜리 지폐를 꺼내들었다. 칙은 그것을 5개의 소프트 볼로 바 꿔 주었다. 그는 다섯 차례의 시도를 해보았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생각한 것보다 쉽지 않지, 친구?" 칙은 웃으며 그를 위로했다. "다음엔 행운을 얻도록." "잠간만요." 브라이언은 주머니를 뒤지며 말했다. "몇 달러가 더 있을 텐데." 칙은 이마를 찌푸렸다. 녀석을 아주 빈털터리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 나 거절하면 녀석이 펄쩍 뛸 것이고 그러면 사람들이 몰려와서 무슨 야료나 부린 줄 알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녀석이 내민 잔돈을 받았다. 동전 부스러기까지 합쳐서 4달러였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녀석이 쉽게 우유병을 맞힐 수 있도록 특별 배려를 해 서 우유병을 진열했다. 그러나 브라이언의 첫번째 시도는 또 실패하고 말았다. "이런, 제기랄 ! 더이상은 어렵겠는데." 브라이언은 투덜거리며 금발을 돌아보았다. "다시 해봐. 이번엔 행운이 돌아오겠지." 칙은 녀석을 부추겼다. "그래, 다시 해봐, 브라이언. 넌 꼭 해낼 수 있을 거야." 금발도 옆에서 응원을 보냈다. 다음번 시도는 성공했다. 우유병 세 개가 한꺼번에 쓰러졌던 것이다. 세일라는 브라 이 먼의 목에 매달리며 환성을 질렀다. 칙은 금발에게 고양이를 안겨 주고는 2달러를 브 라이언에게 돌려주었다. "왜 그래요?" 녀석이 물었다. "난 두 번을 더 던질 텐데. 또 인형을 타게 될지 모르잖아요?" "이미 상품은 탔잖아. 그걸로 만족하라구." 칙은 그를 달랬다. "자, 이 돈을 받아. 그리고 돌아가." 브라이언은 웃으며 그 돈을 받았다. "고마워요." 그는 금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카니발의 가운데를 향해 걸어갔다. 칙이 군중들 사이에서 다른 손님을 찾고 있을 때 메이시 워싱턴이 갑자기 눈앞에 나 타 나서 그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녀의 귀끝에 매달려 있는 검은 귀걸이가 반짝이며 흔 들렸다. "흠, 난 봤어요. 그런 식으로 장사하다가는 곧 파산하고 말걸요." 그녀는 웃으며 칙을 바라보았다. "즐겁잖아요. 녀석을 빈털터리로 만들 수야 없지. 그리고 금발 머리의 귀여운 아가씨 에게 인형을 선사하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야." 칙은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사귄 지 며칠 되지도 않은 그 흑인 여자가 자신 의 장사를 걱정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메이시와 그녀의 남편 펠릭스는 칙의 가게 옆에 서 오락기를 운영하고 있었다. 행키 팽크라는 이름의 기구로서, 엄마와 아이가 함께 할 수 있는 오락이다. "오늘 잃은 것은 내일 보충해야죠. 난 금발의 아가씨에겐 항상 약하단 말이야."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람들을 살피던 그의 눈길이 여학생들과 함께 걸어오 는 한 여자에게 멈추었다. 여자의 옷은 엉망으로 구겨지고 흙이 묻어 있었으나 늘씬 한 키에다 우아한 선이 돋보이는 몸매였다. 칙은 검은 머리의 그 여자가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메이시가 그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말했다. "멋있는 여잔데요. 그런데 옷차림이 좀 이상하군요." 칙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은 계속 그 여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베고프지 않으세요." 메이시가 물었다. "핫도그를 사러 갈 참인데 필요하다면 당신 몫도 사다 드리죠." "난 괜찮소. 저녁을 늦게 먹어서." "그래요? 그렇다면." 메이시는 핫도그 판매대로 걸아가며 자신의 풍만한 엉덩이를 마음껏 흔들어댔다. 짙 은 핑크빛 스커트 속의 그녀의 히프는 정말 탐스러울 정도였다. 뒤에서 사내들이 휘파람 을 불어댔다. 메이시는 그들을 돌아보며 요염하게 웃었다. 칙은 다시 조금 전에 보았던 그 여자를 찾았다. 그러나 여학생들과 함께 걸어오던 그 녀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축제장 전체를 꼼꼼하게 살펴나갔다. 마침내 그녀가 틸 터월 앞에서 티켓을 사려고 줄을 선 꽁무니에 서 있는 것을 찾아냈다. 아 무 래도 축제에 놀러 나온 여자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몹시 겁먹은 표정으로 그녀는 연 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눈길이 한 곳에서 딱 멈추었다, 칙은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이 고깔모자를 쓰고 울고 있는 한 어린애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린애는 함께 온 엄마를 잃어버린 모양으 로, 얼굴이 눈물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그녀는 옆에서 나와서 그 어린애에게로 다 가 갔다. 어린애에게 무어라고 말하더니 그녀는 손수건으로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는 아이의 손을 잡고 칙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실례합니다." 그녀는 칙의 카운터로 다가와서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지미라는 이 아이가 함께 온 누나를 잃어버린 모양이에요."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칙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그늘이 진 그런 눈동자라고 칙은 생 각 했다.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그녀의 목소리는 나지막하지만 분명했다. 첫눈에 교양 있는 여자란 걸 알았다. 그리고 좀 엉망이 되긴 했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비싼 것이라는 것을 칙은 알았다. 돈도 있는 여자야. 그런데 왜 이런 모습으로 이곳에 나 타 났을까? "당신 괜찮아요?" 칙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네." 여자는 재빨리 대답하고는 또 주위를 돌아보았다. "나는 괜찮아요. 그렇지만 지미가 문제예요. 이 아이의 누나를 좀 찾아주시겠어요?" "이곳에는 경찰들이 여러 명 있을 텐데요." "경찰은 안돼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칙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공포의 빛을 발견했다 .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확성기 같은 게 있지 않을까요?" "입구에 미아보호소가 있어요." "아직 어린애예요! 그런 곳에서 마냥 기다리지 못해요." "로라를 찾아줘! 집에 가고 싶어!" 지미가 다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무릎을 꿇고 아이를 달랬다. "쉿, 울지 마. 이제 곧 누나를 찾게 될 거야. 착하지." 그녀는 칙을 올려다 보며 화난 표정을 지었다. 칙은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눈길을 돌 려 광장 쪽을 바라 보니 에이브가 젤다를 데리고 중앙로를 가로질리 걸어오고 있는 것 이 보였다. 그들은 틸터월 앞에서 멈춰서더니 주인과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칙 은 그들을 향해 소리치며 손짓했다. "에이브와 젤다 헐리는 헐리 걸리 카니발의 소유주예요. 그들에게 이 아이를 부탁하 면 별 문제가 없을 거요." 칙은 이든에게 설명했다. 이든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마워요." 에이브와 젤다가 칙의 상점 앞으로 다가왔다. 젤다는 아이를 보고 회색 눈을 치뜨며 물었다. "너 왜 그러니? 엄마를 잃어버렸니?" 지미는 다시 울상을 지었다. "누나를 잃어버린 모양이오." 칙이 대신 대답했다. 그는 젤다가 마음이 아주 상냥한 여자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 에 지미의 누나를 기꺼이 찾아주리라고 생각했다. "젤다 아줌마야." 그는 울먹이는 지미를 향해 달래듯이 말했다. "아주 훌륭한 예언가란다. 네가 누나를 금새 찾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실 거야." "그럼, 찾을 수 있고말고. 이제 곧 누나가 나타날 거야." 젤다는 쭈글쭈글한 손으로 지미를 안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보석이 박힌 반지들이 여러 개 끼워져 있었고 팔찌에서 나는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아주 맑게 울려퍼졌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얘기 듣기를 좋아 하지." "아줌마를 따라가렴, 무서워할 것 없단다." 에이브가 지미에게 말했다. 지미는 별로 망설이는 기색 없이 젤다의 품에 안겨들었다 . 칙은 그들이 출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 려서 아이를 데려온 여자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니 여인의 자취는 이미 어디론가 사 리 지고 없었다. "사라졌어!" 그는 주위를 획 살펴보고 틸터월 근방을 찾아보았으나 여인은 보이지 않았다. "사라지다니, 뭐가?" 에이브가 그에게 물었다. "그 아이를 데려온 여자 말이에요." "제 갈 길로 갔겠지, 뭐." 에이브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렇겠죠." 칙도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어딘가 좀 이상했어. 무언가에 쫓기는 듯 한 얼굴이었어. 칙은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했다. "장사는 좀 어때?" 에이브가 물었다. "뭐 그저 그래요." "자넨 우리 카니발 단체에 오래 머물 생각은 아니지?" "모르겠어요. 얼마나 버틸지." 칙은 싱긋 웃어 보였다. "자넨 타고난 한량 같지는 않아." 사내 셋이 카운터로 다가오자, 에이브는 자리를 떴다. 세 사내는 6달러씩 내놓고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모 두 허탕을 쳤다. 술내 를 약간씩 풍기던 그들은 칙이 속으로 걱정한 것과는 달리 돈을 잃고도 별 말썽을 부 리지 않고 가 버렸다. 다음 손님은 늙은 부부였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10대 소녀들이 한 떼거리 몰려왔다. 그들은 게임보다는 칙에게 더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그들의 얘기를 적당히 받아주며 즐겁게 한때를 보냈다. 그렇지만 카니발이 끝난 뒤에 파티에 참석해 달라는 그들의 부 탁은 완곡히 거절했다. 장사를 하면서도 칙은 군중들 사이에서 아까 그 여자의 모습 을 찾으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 여자가 분명히 어떤 곤경에 처해 있다는 생각 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 그 여자의 일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고 치렁치렁찬 그녀의 검은 머릿결과 푸른 눈동자가 자꾸만 눈앞에서 아물거리는 것이었다. 이든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내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는 기겁을 하며 근처에 세워져 있는 트럭 뒤에다 몸을 숨겼다. 검은 머리의 그 뚱보 사내는 아직 이쪽을 발견하지 못 한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정말 지독한 놈인데.... 그녀는 가슴이 오그라 붙는 기분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니 달이 구름 사이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비는 이제 그만 올 모 양이다. 호수를 배경으로 서 있는 쌍둥이 빌딩에 축제의 모닥불이 비춰서 벌건 빛을 반사하고 있었고 가까운 무대에서 음악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블랙 풍구스라고? 이든은 가볍게 웃음소리를 냈다. 내 피난처가 블랙 풍구스라니, 그 사내가 돌아가기 전에는 축제장을 돌아다닐 수가 없다. 이젠 기력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디 서 쉴 곳을 찾아야 하지? 그녀는 트럭을 쳐다보았다. 트럭의 운전석으로 기어들까? 문 을 잠가 두지는 않았겠지. 그녀는 손잡이를 살며시 돌려보았다. 역시 잠겨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운전석으로 기 어들었다. 다행이다. 아쉬운 대로 여기서 좀 쉬어야겠다. 축제가 끝나서 광장이 좀 조 용해지면 나가야지. 그녀는 운전석에 쭈그리고 누웠다. 사람들의 소리가 끊임없이 들 려왔는데 발자국 소리가 트럭 근처로 접근할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오그 라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소리들도 어느새 희미해지기 시작했고, 그녀는 깜박 잠이 들고 말았 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와서 당장에라도 가슴이 터 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악당들이 그녀의 뒤를 쫓고 있었다. 스탠턴 번즈를 포함하여 3명 의 사내들이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그녀를 따라왔다. 그녀는 다리가 마비되어 왔다. 발목 에서는 불이 붙는 것 같았고 이젠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그런데 그녀 앞에 문이 하나 나타났다. 저곳이다! 저곳으로 숨어야 한다. 그녀는 정신없이 문안으로 뛰어들 었 다. 그리고는 안에서 문을 걸어잠갔다. 그러자 천장에서 무언가가 아래로 축 쳐졌다. 빨간 머리였다. 그리고 그 위로 여인의 시체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아악!" 이든은 벌떡 일어나다가 머리를 무언가에 부딪쳤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주위를 살폈는데 눈앞에 운전대가 있었다. 그리고 창 너머로 회색 하늘이 보였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 러자 공중에 얼굴이 하나 나타났다. 밤색 머리카락의 사내가 잠이 덜 깬 눈망울로 그 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게임 상점에서 만났던 사내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하, 난 또 누군가 했지. 아이를 맡기곤 감쪽같이 사라졌던 바로 그 여자로군? 경찰 을 부르기 전에 내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해 봐요.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지?" 2 "깜박 잠이 들었었나 봐요." 이든은 일어나서 곧 밖으로 나갈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칙이 그녀를 막아서며 말했 다. "후와, 그렇게는 안되지. 먼저 여기에 들어온 이유를 말해야지." 그녀는 무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 피곤해서 쉬고 싶었을 뿐이에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다른 이유가 없다구?" 칙은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바라 보며 이 여자는 쾌나 고상한 족속인 모양이라고 생 각 했다. "그렇다니까요. 난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아요." 그녀는 조금도 흥분하지 않은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칙은 이 여자가 좀체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것 같지 않다고 판단했다. 무슨 이유로 이 카니발에 뛰어들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그녀는 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좀더 부드러운 말 투 로 달래듯이 물어보았다. "당신이 무엇을 훔치러 이곳엘 들어왔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렇게 피곤하 다면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소?" "그럴 수가 없어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리고는 자신의 태도가 상대방에게 이상하게 비칠 것 이라는 생각에 금세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내 말은 돌아갈 집이 없다는 뜻이에요." 어떤 이유에서든, 이 여자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이제 분명해진 셈이다. 칙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흐트 러져 있었고 옷도 흙탕물투성이였다. 그러나 입고 있는 옷에서는 돈 냄새가 풍겼다. 연한 푸른색 제복과 하이힐에서 그녀가 직장인이라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가 있었다 . "그렇다면 집을 뛰쳐나왔다는 말인가요?" 칙은 미소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다시 물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처지가 되어 버린 셈이에요." "비슷한 처지라... 그래, 당신 이름은?" 그러자 그녀는 칙의 질문을 무시하고 또 나가려고 했다. 그가 몸으로 다시 막아서자 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칙은 어쩐지 이 여자를 그대로 보내고 싶 지가 않았다. 그것은 여자의 외모에 특별히 호감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쭉 빠 진 몸매와 얼굴의 우아한 선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녀에게는 사람의 호기 심을 자극하는 어떤 비밀스러움 같은 것이 숨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 자 의 얼굴에 경계심이 나타났다. "비켜 주세요, 제발..." 여자는 애원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당당한 요구도 숨어 있는 것 같이 느껴 졌 다. 그래도 칙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둘 필요가 있소?" "내가 당신을 방해하고 있어요. 당신은 할 일이 있을 게 아니에요?" 그녀는 방어 태세를 취하며 말했다. "그렇지도 않아요. 아직 이른 시각인걸." 칙은 여자를 잡아 두고 싶은 마음에서 말했다. "일이라니까 말인데, 카니발에서 장사를 할 생각은 없겠죠?" "뭐라구요?" "취직 말이오. 어려울 때를 당해서 당신의 운을 시험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말이지. 어떻소?" "나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뜻이에요?" "보조원이 한 명 필요해요." 이든은 이마를 찡그렸다. "카니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걸요." "배우면 돼요. 원볼 게임은 아주 쉬운 장사요. 그리고 카니발에서 일하는 단원들은 남의 과거지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자신을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지." 그는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여자는 생각하는 듯한 눈치였다. 그렇지만 이만한 여자 가 무엇이 아쉬워서 이런 난장판에서 일하려 하겠는가? 밤 늦게까지 일하고 받는 보수란 것은 기껏해야 쥐꼬리만한 것에 불과하다. "나는 아침식사를 하러 갈 참이오." 여자가 대답을 않자 칙은 그렇게 말했다. "나와 함깨 가지 않겠소?" 그는 여자가 지금 몹시 배고픈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 니 까 직장과 음식을 한꺼번에 제공하겠다는 제안인 셈이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얼른 승 락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주 다정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여자의 경계 심 을 풀어 주었다. "나도 아직 메이시의 요리를 먹어 보진 않았지만, 그녀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요리 를 남편이 한 번도 타박한 적이 없다고 하니까 같이 가서 먹어 봅시다." "그렇지만 그 여자가 나를 초대하지도 않았잖아요." "당신은 나의 새로운 조수요. 말하자면 한식구인 셈이지." "아직 같이 일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승낙하면 되지. 그러면 식사와 오늘밤 잠자리를 제공받을 것 아니오? 내 생각엔 달리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는 문을 열고 그녀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었다. "내 말이 틀렸소?" 이든은 고개를 숙이며 힘없이 말했다. "나는 머물 곳이 필요해요." 칙은 그녀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확신했다. "내 이름은 칙 러빗이오." 그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손을 잡았고 그는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하지?" "이든." "이름이오, 아니면 성이오?" 그녀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트럭을 내려왔다. "식사는 어디서 하죠?" 칙은 트럭의 문을 닫고는 은색 트레일러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쪽이오, 이든 이든. 메이시와 펠릭스는 이 트레일러를 자신들의 집이라고 부르지. " 그녀는 처음으로 그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자신을 이든 이든이라고 부 르는 것이 우스웠다. 그녀는 칙이 가리킨 그 트레일러를 향해서 앞장서서 걷기 시작 했 다. 그녀의 갈라진 스커트 사이로 길게 뻗은 다리가 늘씬해 보였다. 칙은 자신도 모르게 휘파람이 나올 뻔했다. 그녀는 정말 멋진 몸매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칙은 그녀의 뒤를 따라가면서 자신이 왜 이 여자의 일에 골치아프게 뛰어들려고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겠다고 했을 때 그냥 보내 버렸으면 그만 아닌가? 그런 데 이 여자는 묘하게도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가 있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일 까 ? 그녀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일까? 칙 러빗은 그것이 궁금했다. 이든은 어쩌다가 자신이 칙 러빗이란 사내의 말에 말려들어 그의조수가 되겠다고 승 락 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숨어다니는 처지이긴 하지만, 결코 무일푼의 처지 도 아니다. 그렇지만 당장 어디로 가지? 카니발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좋은 생각이 날 거라고 그녀는 거의 체념해 버렸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새로운 보스가 된 사내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일이 당면 문제였다 . 그가 일부러 바짝 접근해 오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그녀는 그와 너무 가까워지지 않 도 록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바로 곁에 찰싹 달라붙듯 이 앉아 있다. 물론 그것은 장소가 너무 협소한 탓이기는 했다. "자, 맛있게 먹어요, 아가씨." 메이시는 이든 앞에다가 잘 구워진 팬 케이크를 담은 접시를 놓으면서 상냥하게 말했 다. "이걸 먹고 나면 기분이 좀 좋아질 거예요." 이든은 입에서 군침이 도는 걸 느꼈다. "고마워요, 냄새가 아주 기막히군요." 펠릭스가 건너편 테이블에서 그녀에게 윙크를 보냈다. "한 번 맛보세요.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마누라 요리 솜씨는 그 런대로 괜찮은 편이 니 까." 메이시가 그에게 손을 훼훼 저으며 말했다. "마누라 자랑을 하면 좀 모자란다는 소리를 들어요." 이든은 자신들의 식사를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 이렇게 나눠 주는 친절한 그들에게 고 마움을 느꼈다. 그들은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처한 환경이 비록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트레일러 속을 방으로 꾸민 탓에 협소하고 갑갑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 비좁은 공간 을 메이시는 솜씨 있게 꾸며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칙이 접시를 자기 앞으로 당겨 놓으며 이든에게 말했다. "당신의 옷을 갈아입도록 하는 일이야." 이든은 더럽혀진 자신의 옷을 돌아보며 얼굴을 붉혔다. 급한 대로 세수를 하고 머리 를 매만지긴 했지만 옷은 아직 그대로였다. "샤워는 여기서 하면 돼요." 메이시는 친절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당장 갈아입을 옷이 준비되지 않았으면 내 옷을 빌려 드리죠." "아니에요,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이든은 사양했다. "실과 바늘을 빌려 주시면 이 옷을 빨아서 손질하겠어요." "그러면 옷이 마를 동안은 어떡하시겠소?" 펠릭스가 말했다. "메이시는 몸이 불어서 이제는 입을 수가 없게 된 옷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소. 이 비 좁은 공간에 그런 것들을 더이상 보관할 수도 없으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이용하도 록 해요." "나는 언젠가는 내 몸이 다시 날씬해져서 그 옷들을 입게 될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있 었지. 그렇지만 이젠 체념했다오." 메이시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이든은 부인에게 감사했다. 그녀는 차라리 메이시에게 그 옷값을 치를 수 있으면 마 음 이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지갑에는 지금 돈이 충분히 들어 있다. 그렇지만 돈을 지불하겠다고 하면 이들 부부가 받으려고 하지 않을 것은 뻔했다. 나중에 자유 롭 게 이곳을 떠날 때가 되면, 그때 지불하면 되겠지. 그때가 되면 내가 왜 이런 곳에 뛰 어들게 되었는지도 그들에게 마음놓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문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이든은 깜짝 놀랐다. "괜찮아요." 메이시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문은 열려 있어요." 그녀는 문 쪽으로 소리를 질렀다. "들어와요."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신문을 한아름 안고 있 었는데, 금발에다 초록빛 눈동자를 가진 그 사내는 이든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신 문 을 펠릭스에게 건네주었다. 펠릭스가 <시카고 트리윤> 지를 펼치며 이든에게 말했다. "이든, 이 분은 주드 니스트롬이란 사람이오. 주드, 이든은 칙의 조수로 새로 채용된 아가씨야." "칙은 행운아군요." 주드 니스르롬이란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팬 케이크를 좀 드시겠어요?" 메이시가 사내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부인. 방금 식사를 했어요." 그는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다시 이든에게 던지며 말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저 사람도 카니발 단원인가요?" 이든은 옆에 앉은 칙을 돌아보며 물었다. "주드는 해결사요. 손님과 시비가 생겼을 경우, 경찰이 개입하기 전에 주드가 재빨리 해결해 버리지요. 그는 그 방면에는 아주 전문가니까." "최고지." 펠릭스가 음식을 입에 가득 문 채 맞장구를 쳤다. "그는 타고난 피스메이커야." "그런 시비거리가 자주 발생하나요?" 이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펠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오. 에이브는 비교적 깨끗하게 운영하는 편이니까. 그래서 단원들은 그를 정직한 에이브라고 부르지." 이든이 웃자 그는 말을 계속했다. "단원들 대부분은 별명이 있지." "어떤 별명 말이에요?" "나는 검은 고양이로 알려져 있어요." "포겔은 엽전이란 별명이 붙어 있어요." 메이시가 거들었다. "수문장이란 별명을 가진 요스트는 팔에 악어 문신이 있죠. 그리고 방금 전에 왔던 주 드는 종마란 별명이 붙어 있어요. 또 여자에게 인기가 좋은 야코니는 시트란 별명을 갖고 있어요. 그러한 별명에 대한 설명은 상상에 맡기겠어요." 이든은 재미있다는 듯이 칙을 돌아보며 웃었다. "당신은 어때요? 칙이 당신의 별명인가요?" 그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치키 러브스 잇의 준말이지." "무슨 뜻이에요?" 그러자 식탁에 앉은 다른 사람들이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든은 영문도 모르 고 얼굴을 붉혔다. 그들은 왜 웃는 걸까? 치키 러브스 잇이란 말이 무슨 기괴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녀는 그 말이 여자와 무슨 관련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 했 다. 칙은 확실히 미남에 속했다. 밤색 머리카락 아래로 쪽 곧은 옷마루, 그리고 짙 은 눈썹 아래로 깊숙한 눈동자, 두툼하고 관능적인 입술, 단단해 보이는 체격, 별로 나 무 랄데 없는 사내다. 그만하면 어떤 여자라도 좋아할 그런 타입이다. 우습게도 그의 턱 에 나 있는 작은 흉터까지도 매력적으로 보일 정도다. 펠릭스가 신문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스탠턴 번즈란 이 사나이, 주지사가 될 가능성이 많지?" 그 말에 이든은 먹고 있던 팬 케이크가 목구멍을 콱 틀어 막는 기분이었다. "왜 그래요, 이든?" 메이시가 이든을 바라보며 걱정스럽 물었다. "괜찮아요. 너무 급하게 삼켰나 봐요." 그녀는 황급히 변명을 하고는 펠릭스에게 물었다. "번즈에 대한 기사가 실렸나요?" "1면에 실렸군. 공화당이 너무 오랫동안 그자리를 차지해 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민주 당을 지지할 확률이 높다는 거야." 어쩌면 그가 바로 살인자일지도 모르는데. 이든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빨간 머리의 여자가 죽은 게 확실하다면, 그에게 책임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여자가 죽었는지는 이든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다만 자신을 필사적으로 뒤쫓아온 사내들의 태도로 미루어봐서 그 빨간 머리의 여자가 살해당한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 다. 이든은 갑자기 식욕이 뚝 떨어져서 포크를 내려놓고 말았다. "왜 그래요?" 칙이 그녀가 밀어내 놓은 접시를 바라보며 물었다. "많이 먹었어요. 샤워나 해야겠어요." "그러세요." 메이시가 트레일러 뒤쪽에 있는 욕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누와 샴푸는 그곳에 있어요. 내가 깨끗한 옷을 가져다 드리겠어요." "미안해요, 귀찮게 해드릴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런 소리 말아요. 어서 가기나 하세요." 이든은 비좁은 공간을 빠져나와서 조그마한 욕실로 갔다. 정말 작은 욕실이었다. 이 좁은 공간이 자신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목덜미와 등에 쏟아지는 뜨거운 물은 그녀의 긴장을 어느 정도 풀어 주었다. 이든은 다시 경찰에 신고하는 문제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공포에 질 려 있는지도 모른다. 경찰에 신고하면 그들이 잘 보호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는 일리노이즈 주정부의 검찰총장이다. 경찰은 곧 그의 부하들인 셈이다. 그런 상대를 고발한다고 해서 경찰이 곧이곧대로 믿어줄까? 어쩌면 엉뚱한 누명을 쓰 고 감옥에 처박힐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살인을 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 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경찰에 신고하는 것은 아무래도 모험으로만 여겨졌다. 그렇다면 누구와 조용히 상의해서 일을 해결해 나갈 수밖에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데 누구와 그런 일을 상의 할 것인가? 데니스는 어쩌면 적당한 대상을 추천해 줄 지도 모른다. 이든은 한때 약혼자였던 그를 생각해냈다. 그는 지금 변호사로서 정계에 몸을 담고 있 었다. 그에게 연락하면 틀림없이 도와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신문에 난 번즈 의 기사를 읽고 나서 곧 그에게 전화를 걸어야지. 우선 적을 알아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 했다. 메이시가 노크를 하며 말했다. "옷을 가져왔어요." "고마워요. 곧 나갈께요." "서두룰 건 없어요 칙은 에이브와 젤다에게 당신 문제를 상의하러 갔으니까. 펠릭스 와 나는 호숫가로 산책을 나설 참이에요. 우린 한 시간 내로 돌아올 테니까 그 전에 나가시려면 그냥 문만 닫아 놔요." "고마워요, 메이시. 너무 친절하시군요." "뭘요, 서로 도와야죠. 타월은 싱크대 아래에 있고 화장품과 드라이어는 서랍에 있 어 요." 그리고는 메이시는 그자리를 떠났다. 메이시의 화장품으로 대강 화장을 마친 이든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자신이 모습이 영 달라진 느 낌 이 들었다. 마치 공연을 앞두고 분장을 한 배우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말끔히 치워진 주방으로 돌아와서 펠릭스가 읽다가 던져둔 신문을 집어들었다 . 신문을 펼쳐든 그녀는 1면에 실려 있는 사진을 보자 가슴이 철렁했다. 번즈의 사진이 우선 눈에 들어왔고, 그 아래에 죽은 여자의 사진과 기사가 실려 있었 다. 오늘 아침 시카고 강에 떠 있었다는 그 여자를 알아보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 었 다. 어젯밤 보트에 실렸던 그 빨간 머리의 여자는 킴 퀸런이라는 이름의 모델임이 밝 혀졌다. 목에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으나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기사다. 이든은 번즈의 사진 아래에 실린 기사를 읽어내려갔다. 전날 밤에 있었던 그의 정치 모금에 관한 기사였다. 리버 뷰 호텔에서 벌어진 그 캠페인에 나온 사람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번즈와 그의 아내 론다가 3명의 민주당원과 함께 어깨 동무를 하고 있 었는데, 이든은 그 3명의 당원 중 한 사람이 어젯밤 강둑에 서 있었던 사내란 걸 알 아 보았다. 그리고 사진 아래에 적힌 설명에서 그 사내의 이름은 월리 덱커이며 번즈의 선거 참 모 란 사실도 확인했다. 다른 두 사내는 번즈의 충실한 지지자인 시장과 경찰국장이란 인 물들이었다. 이든은 까마득한 절벽과 맞닥들인 암담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암담한 기분으로 의자 에 털썩 주저앉았다. 샤워를 하면서 그녀가 세웠던 계획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느낌이 었 다. 번즈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찰과 법조계를 한 손에 휘 어잡고 있는 것이다. 그가 어젯밤 리버 뷰 호텔에서 모금 캠페인에 참석하고 있었다 는 사실을 증명해 줄 사람은 100명도 더 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든의 말을 믿어 줄 사람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으로 돌 아 갈 수도 없고 경찰에 신고하기도 두렵다. 신문사로 찾아가서 목격한 대로 얘기할까? 그러나 아무 증거도 없이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정신병자로 몰리기 십상일 것이다. 그 렇다. 무엇보다도 먼저 확실한 증거를 손에 넣어야 한다. 살해된 여자와 번즈와의 관 계를 알아내고, 살인 동기를 밝혀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스탠턴 번즈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골드 코스트에 위치한 자신의 집안에서 그는 아 내 와 선거 참모를 앉혀 놓고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순간에 여자가 나타 나서 그런 장면을 목격당하고 말았단 말인가? 그리고 사내 두 녀석이 그까짓 여자 하 나를 못 잡고 되돌아오다니. 그는 쉴새없이 방안을 오락가락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제발 좀 앉아요." 보다 못한 그의 아내 론다가 그에게 소리쳤다. "당신이 그러고 있으니까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단 말이에요." 그는 힘껏 그녀를 노려보고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소파에 앉았다. 벽시계를 보니 벌 써 9시가 지나고 있었다. 밤새 한 숨도 못 자고 이 모양이다. 아침식사는 할 생각도 못하고 있다. 밤새 먹은 거라곤 겨우 커피 한 잔뿐이다. "정말 미치겠군." 번즈는 주먹으로 소파를 내리치며 소리 쳤다. "침착해요!" 론다는 탁자 위에 놓인 초코렛을 입안에다 집어 넣으며 말했다. 그녀의 팔목에서 팔찌가 반짝거렸다. "도대체 당신이 하는 일들은 왜 모두 그 모양인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남편을 나무랐다. "아니, 그래 그게 내 탓이란 말이오?" 번즈가 화를 냈다. "두 분 다 진정하세요." 월리 덱커가 긴 다리를 접어돌리며 몸을 소파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리고는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면서 계속 입맛 다시는 소리를 냈다. 그는 차라리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참모의 그러한 여유만만함과 아내의 빈정거림이 번즈의 신경을 더욱 긁어 놓았다. "내 장래가 이 일에 달려 있단 말이야!" 그는 으르렁거렸다. "우리 모두의 장래지요. 우린 한배를 타고 있으니까." 윌리가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거실 문이 열리며 잭 태너가 들어 섰다. "그 여자를 잡았나?" 번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에게 물었다. 잭은 면목없다는 표정으로 금발머리 를 저었다. "그 페인이란 여자는 밤새 자신의 아파트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루는 아직 그곳을 지키고 있어요." 번즈는 그가 부두까지 여자를 뒤쫓아갔다가 결국 카니발 인파 속에서 그녀를 놓쳐 버 리고 말았다는 보고를 들어 알고 있었다. "바보 같은 놈들! 그래, 전문가 두 녀석이 풋나기 여자 하나를 못 잡아 온단 말인가? 그 여자가 누구에게 나발을 불고 다닐지 모르는 일이야. 정말 한심하군." "그 여자가 경찰에 연락이라도 하는 날엔 우린 끝장이에요!" 론다가 초콜렛을 씹던 입으로 소리쳤다. 번즈는 아내를 돌아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닥쳐!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아. 그 여자는 증거가 없어." 초콜렛 따위나 즐겨 먹고 값비싼 보석이나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아내이기는 하지만, 번즈는 그녀를 괄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출세에 상당한 역 할 을 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주지사가 되려는 마당에 있어서도 그는 아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형편이었다. "설사 그 여자가 경찰에 출두해서 그런 말을 한다고 해도 증거가 없으니 정신병자 취 급을 당하기 십상이야. 친구들을 동원해서 그 여자를 미치광이로 몰아 버리면 돼. 그 리고 그 여자가 나를 알아봤다는 확신도 없잖아?" "당신 얼굴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데다 오늘 아침 신문에도 커다랗게 실렸어요. 죽은 여자의 기사가 실린 바로 그 옆에 말이에요. 그렇게 태평스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그 페인이라는 여자가 소문을 퍼뜨리기 전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 해요. 일이 커지기 전에 말이에요." 론다가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왔다. 그녀는 보기보다는 쾌나 철저 했다. "알아, 알아. 나도 그냥 내버려 두겠다는 말은 아나야." 번즈는 아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찾아야지." 덱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두 분은 이제 좀 쉬시지 그래요? 오늘 오후에 기자회견이 있으니까. 그 문제는 내가 생각해 보겠어요." "부탁하네." 번즈도 그만 쉬고 싶은 눈치였다. 침실로 돌아가며 번즈는 우울한 기분을 털어 버리려고 애썼다. 그는 아내 론다가 뒤 따 라 오는지 확인할 기분도 들지 않았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지 치리될 것이다. 그 여 자가 설사 어떤 말썽을 일으키더라도, 덱커는 전문가답게 뒷처리를 해낼 것이 틀림없 다. 덱커는 어떤 일이라도 해치운다. 그는 그것을 어젯밤에 증명하지 않았던가? 번즈는 계단을 다 올라가서 복도로 발을 옮겨놓았다. 경찰과 검찰에는 믿을 만한 부 하 들과 친구들도 있다. 킴 퀸런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없어져 줘야 했 다. 아무도 내가 정상에 오르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다. 칙을 기다리고 있기가 지루한 생각이 들어, 이든은 맑은 공기도 마실 겸 트레일러를 나왔다. 카니발 광장은 시끌벅쩍 했던 어제와는 달리 조용했다. 고용된 카니발 단원 들 은 장사 준비를 하느라고 저마다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상품을 진열하는 사람도 있 었 고 각종 탈것의 기계를 점검하는 사람도 보였다. 가끔 즐거운 웃음소리가 아침 공기 를 가르며 광장에 울려퍼졌다. "그래, 그 도둑은 얼마나 홈쳐갔나?" 부근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든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 름아닌 칙이었기 때문이다. 이든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글쎄, 500달러나 600달러쯤 되는 모양이야. 프랭키는 미칠 지경이지. 그는 아마 임 대 료를 물 돈이 없을걸." 다른 사내가 칙에게 하는 말이었다. "에이브는 그래도 영업을 하게 할 거예요. 프랭키가 임대료를 떼먹을 사람은 아니라 는 것을 그도 알고 있으니까요. 안 그래요, 게이터?" 여자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그야 그렇지." 사내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건 적은 돈이 아니니까 프랭키가 가여워. 올해처럼 불경기에 그런 일까 지 당하다니 말이야. 더군다나 그는 이번이 벌써 두 번째가 아닌가. 겨울이 닥치기 전에 그에게 운이 트여야 할 텐데." 이든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기껏해야 기백 달러에 지나지 않는 돈이 그들에겐 대 단 한 금액인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 정도의 돈은 단 한 차례의 쇼핑에 날려 버릴 수도 있는 금액인데... "우리는 그런 일을 당하지 말아야 할 텐데." 진저라고 불리 우는 부인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지었다. "우린 어린 애들을 먹여 살리기도 힘든 처지니까." 이든이 다가가자 칙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의 드러난 다리를 홀린 듯한 표 정 으로 바라보았다. "저 아가씨는 누구지?" 게이터가 칙에게 물었다. 진저 부인과 마찬가지로 마른 몸집에 갈색 머리를 하고 있 었 고 얼굴에는 수염이 엉망으로 자라 있었다. 머리카락도 흐트러진 대로 내버려 두고 있 었는데 그는 다소 무례할 정도로 이든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사람을 쳐다보지 말아요." 진저 부인이 핀잔을 주었다. 그녀는 기침을 하고 나서는 담배를 꺼내들었다. "그에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 까." 그녀는 이든에게 그렇게 말했다. "푸아...!" 게이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입 다물어요, 그러지 않으면 재떨이로 사용할 거야!" 진저는 소리쳤다. 이든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칙이 구원의 손길을 뻗 쳐왔다. 그는 이든을 다투고 있는 그들 부부에게 소개했다. "새로 온 내 보조원 이든 양이오." "아, 그랬었군." "이쪽은 진저와 게이터 요스트야, 이든." 칙은 소개를 마치자 곧 그자리를 떠날 차비를 했다. "자, 다음에 또 만나요." "재미있는 커플이군요." 이든은 돌아서며 칙에게 속삭였다. "마치 서로를 미워하고 있는 것처럼 으르렁거려요." "실제로 서로 미워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왜 같이 살아요? 결혼한 사이가 아닌가요?" "그건 나도 모르겠어." 칙은 그녀를 살펴보며 말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모양이군." 이든은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상점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곳을 보자 지미 가 생각났다. "칙, 그 지미라는 어린애 말이에요." "곧 누나를 찾았어. 당신이 사라진 그 직후에 말이지." "다행이군요." 칙은 다시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자란 표정이다. 이든은 그 의 눈초리가 거북스럽게 느껴졌다. 그녀가 그의 눈길을 피하려하자. 그가 손을 그녀 의 어깨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당신은 무엇을 피해서 이곳으로 뛰어들었지?" 이든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카니발 단원들은 남의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서요." "나는 아직 그런 지경에 도달하지 못한 모양이지." 이든은 그가 언젠가는 이런 질문을 던져오리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보고, 그녀는 끝까지 감추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이 곳 을 떠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하지? 갈 곳이 없다. 우연 히 정치적 범죄에 휘말려들어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화 가 났다. 어쩌면 직장마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내 개인적인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이든은 칙에게 딱 잘라 말했다. 칙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당신이 보기에 딱해서 그래. 어떤 무서운 일에 쫓기고 있는 것 같아서 말 이 야." 이든이 무어라고 대꾸를 하려고 하자, 그는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말을 계 속했다. "당신이 그처럼 싫어 한다면 나도 상관하지는 않겠어. 그렇지만 언제라도 내가 필요 할 때는 말해 줘요. 당신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몰라. 이래 뵈도 난 괜찮은 놈이라구." "말씀만이라도 고마워요." 이든은 칙이 상점 문을 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도와주겠다 고 한 말을 고맙게 생각했다. 그의 말은 진심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뜨내기 카 니발 단원에 불과한 그가 거물급 정치가인 스탠턴 번즈를 상대로 무슨 일을 할 수 있 겠는가? 공연히 그를 희생시키는 일은 말아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일은 오로 지 그녀 자신밖에 해낼 사람이 없다. 잠시 후, 칙은 도난 사건을 의논하기 위해서 에이브의 사무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는 이든이 별 저항 없이 일을 시작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놀랐다. 그녀는 청소부터 시 작해서 상품의 진열 따위를 거리낌없이 해치우고 있었는데 그런 식으로 한다면 그녀 의 손톱에 칠해져 있는 매니큐어는 곧 지워져 버리고 말 것이다. 칙은 그녀가 이곳으로 뛰어든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서 다시 곰곰히 생각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칙." 메이시가 그를 불러세웠다. 그녀는 자신의 트레일러에서 내려와서 칙에게로 다가왔다 . "무슨 일이에요?" "이든이 옷을 갈아입다가 지갑을 떨어뜨렸어요. 당신은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 아서." 메이시는 지갑을 그에게 내밀었다. 칙은 그녀가 내민 지갑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 주 고급스러운 가죽 지갑이었다. "내 상점에 있어요. 내가 전해 주죠." "좋아요. 이든은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면 쾌나 당황할 거예요. 그럼 나중에 봐 요." "고마워요." 칙은 메이시가 트레일러 속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지갑을 열어보았다. 운전 면허증이 이든 페인의 신분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그녀의 주소를 살펴보았 다. 불과 몇 킬로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그녀의 아파트가 있었다. 고급 아파트 지대 였 다. 지갑 속에는 크레디트 카드들도 들어 있었다. 마샬 필드, 블루밍 데일즈, 니먼 마 커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따위였다. 그리고 100달러 정도의 현찰이 빳빳한 상태로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든은 돈이 궁해서 이런 곳으로 기어든 여자는 아닌 것이다. 칙은 그녀가 남편의 폭력에 못 이겨서 집을 뛰쳐나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그 녀 는 경제적으로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런 여자는 아닌 것 같다. 칙은 은근히 화가 났다. 에이브를 만나는 일은 뒤로 미루고, 칙은 다시 발걸음을 돌 렸 다. 이든 페인의 신분을 확인한 이상 이제 그녀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 그 이유를 알 아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녀의 우아하고 하얀 목덜미를 생각하며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3 "이제 말씀해 보시지. 왜 이곳으로 왔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말이야." 칙은 그녀의 지갑을 코앞에다 갖다 대며 화난 투로 말했다. "내 지갑을 어디서 손에 넣었죠" 이든은 지갑을 빼앗으려고 하며 그에게 물었다. 칙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메이시가 욕실에서 발견했어." "그래요? 내 것이에요. 돌려줘요." 이든은 카운터 위로 손을 뻗치며 말했다. 하지만 칙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먼저 얘기하라니까.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해." "무슨 말을 하라는 거예요." "나는 당신이 어떤 여자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동정하는 기분이었어." 그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그런 동정 따위가 필요없는 여자야." "당신은 지갑 속을 뒤져봤군요! 그건 무례한 짓이에요!" "그렇게 소리치지 말아요. 마치 내가 당신의 속옷 서랍을 뒤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든은 얼굴을 붉히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목소리를 좀 낮출 수 없어요?" "왜지? 메이시와 펠릭스가 당신의 속임수를 눈치라도 챌까봐?" "난 아무도 속이지 않 았어요." 그녀는 화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왜 어려운 사람들의 음식과 옷을 축내는 거야? 당신은 부자면서 말이야. 그 들의 동정을 사려는 이유가 뭐냐구?" "나는 돈을 지불하려고 했어요." "언제?"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길게 내려뜨린 검은 머리카락과 옅은 화장이 그녀의 얼 굴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지금이라도 지불할 수 있어요. 그래서 당신 속이 후련해진다면 말이에요." 그녀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자면 난 그 지갑이 필요해요. 이리 돌려줘요." 칙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는 돌려줄 수 없어." "대답해도 당신은 믿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대답해 봐." 이든은 얼굴을 시벌겋게 붉히며 화를 냈다. 그렇지만 칙이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곧 이성을 되찾고 그에게 말했다. "좋아요. 그렇지만 이런 장소에선 안돼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여긴 귀가 너무 많아요." 칙은 그녀가 마침내 진실을 얘기하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호기심이 이는 마음을 진 정시켰다. "좋아, 그러면 가게를 닫아걸고 좀 걷기로 하지." 두 사람은 부두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갈매기가 무리지어 나는 것 외에 인적이라 곤 찾아볼 수 없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조용하지 않을까?" 칙이 걸으며 말했다. "그런 것 같군요." 그녀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칙은 문득 그녀가 겁을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 었 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보이도록 꾸미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겁먹은 표정만 짓지 말고 사실을 얘기해 봐요. 나도 웬만한 것쯤은 이해할 수 있으니까." "글쎄,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렇지만 이건 영화 같은 것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에요. 사실 나 자신도 믿기가 어려울 지경이니까요." "무슨 얘긴데 그래요?" "얘기하죠." 그녀는 호수 연안으로 눈길을 돌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젯밤 회사에서 늦게까지 일했어요. 퇴근길에 택시를 잡으려고 했지만 날씨가 나빠서 잡히질 않았죠. 그래서 걷기로 했어요. 아파트가 그리 멀지 않거든요." "계속해." 칙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리를 건너다가 강둑에서 사내들을 발견했어요. 그들은 요트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 어요." "그런 날씨에 요트를 타려고?" "그러니끼 이상하죠.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보고 있노라니까 그들은 여자 시체를 요트 로 옮겨가고 있었어요." "뭐라고? 시체를? 그 여자가 시체란 걸 어떻게 알았지?" 칙은 놀랍다는 듯이 이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체가 아니라면 왜 강물에다 처넣었을까요?" 칙이 눈을 가느다랗게 치뜨자, 이돈은 말을 계속했다. "오늘 아침 조간에 사진과 기사가 실렸어요." "뭐라구? 그건 정말 굉장한 사건이군. 그런데 그 사건과 당신은 무슨 관계가 있지? 왜 쫓겨다니게 됐소?"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니까 그렇죠. 그 사내들 중 한 사람은 나도 아는 사람이었어요 . 그가 두 사내를 시켜서 나를 뒤쫓게 했어요." 그제서야 칙은 그녀가 엉망이 된 모습으로 자신의 가게에 나타났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그 사내가 누구였지?" "스탠턴 번즈라면 믿으시겠어요?" 칙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민주당 주지사 후보 말이오?" "바로 그였어요. 나는 확신해요. 조간에 보면 그는 전날밤 밤새 정치 모금 캠페인에 참석한 걸로 되어 있어요. 리버 뷰 호텔에서 말이죠. 알리바이를 확실하게 해두려는 생각에서 였을 거예요." "리버 뷰 호텔과 시체를 싣던 요트와의 거리는 어느 정도였지?" "한 블럭 정도." "그렇다면 그가 잠시 빠져나와서 그 짓을 하고 돌아가더라도 다른 사람이 눈치채진 못 했을 거야." "그럼 내 말을 믿는 건가요?" 칙은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는 그녀가 공포에 사로잡혀서 떨고 있는 것이 가 엾게 여겨졌다. 다른 사람이 그녀의 말을 들으면 아마도 그녀를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왜 경찰로 달려가지 않았지?" "경찰에 전화를 걸었죠. 그렇지만 전화를 받은 경찰은 내가 허위 신고를 한다고 생 각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이렇게 피해다닐 필요는 없잖아?" "아파트로 돌아가려고 했지요. 그렇지만 나를 쫓아온 사내 중 하나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들은 내 핸드백을 손에 넣었기 때문에 내 신분을 알아낼 수 있 었던 거예요. 아파트 주소와 일리노이 여행 사무국 직원이란 사실까지도 말이에요. 나 는 죽은 여자와 번즈와의 관계를 알아낼 때까지는, 그래서 살인의 동기를 찾을 때까 지 는 내 몸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일 텐데. 그런 정보를 어디서 수집할 계획이오?" "그야 나도 모르죠." 이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아예 이 도시를 떠나 어디 먼 곳으로 잠적 하지 않으면 안돼요. 이름도 바꾸고 아주 딴사람이 되어야 하겠죠. 어쩌면 그래도 안전하지 못할지도 몰라 요." "도피가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는 없지." 칙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든은 더욱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스탠턴 번즈 때문에 지금의 생활을 포기할 순 없어요. 그의 두번째 희생물이 될 수는 없다구요. 그에게 정의가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칙, 나를 도와줘요. 내가 당신에게 한 말을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돼요, 아셨죠?" "물론이오." 칙은 그녀에게 약속했다. 나는 정말 미친 놈이야. 칙은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 다. 사건의 전말을 듣고보니 이건 매우 위험한 성질의 것이었다. 이런 일에 뛰어든다 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어쩌면 나 자신마저 번즈의 목표물이 될지도 모른다 .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이 여자를 도와주고 싶다. 누나를 잃어버리고 울고 있는 어 린 지미에게 보인 그녀의 착한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이 여자를 외면해 버리고 싶지가 않다고 칙은 생각했다. "스탠턴 번즈를 당신 혼자서 상대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소." 론다 번즈는 화장을 마치고 갈색 머리칼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마흔 다섯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아직 싱싱했다. 체중이 약간 불어난 것 외에는 그녀의 피부는 주름살도 없이 팽팽했다. 고급 의상과 값비싼 보석이 그녀의 나이를 숨 겨 주고 있었다. 그녀는 스탠턴의 가장 큰 재산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남편이 잠 시 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늘 주의를 환기시켜 왔다. 시계를 보고 그녀는 약간 늦었다고 생각했다. 기자들은 이미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다. 오늘 스탠턴 번즈는 강력범에 대 한 가중처벌에 대해서 발표할 계획인데 킴 퀸런에 대한 일을 생각하면 론다는 이 기 자 회견이 영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스탠턴은 의외로 태연한 표정이다. "준비 다 됐어요, 여보." "문제 없어." 그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며 대답했다. "서둘러요. 기자들을 너무 기다리게 하면 좋지 않아요." "일일이 그렇게 잔소리를 해야 속이 시원한가?" "내가 하는 잔소리는 당신에게 보탬이 되는 거예요." 스탠턴은 아직 법률 회사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의 정치적 출세에 있어 주지사 정도 로 만족할 수는 없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가..., 론다는 언젠나 백 악관에서 살게 되기를 원해 왔다. 권력에 관한 한 그녀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그녀 는 자신이 그것을 무한정으로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자면 자신의 남편을 최 고의 자리에 올려놓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스탠턴의 그릇으로는 아무래도 미흡한 것 같아서 그녀는 항상 불만이었다. "자, 내려가지." 스탠턴이 거울에서 돌아서며 그녀에게 말했다. 순간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텍타이는 매지 말랬잖아요?" "난 당신관 달라." "그 푸르고 은색 나는 넥타이가 잘 어울린다고 매라고 그랬잖아요?" "그건 싫어." "왜요? 내가 골라준 것이라서?" 문에서 난 노크 소리 때문에 두 사람은 말다툼을 그쳤다. 남편을 흘겨보며 론다가 문 을 열자 월리 덱커가 들어왔다. "다투는 소리가 아래층까지 들려요. 이런 상황에서 다투다니, 돌지 않았어요?" "내 마누라는 입이 근질거려서 잠시도 그냥 있지 못해. 계속 지껄이거나 계속 먹거나 해야지." 론다는 남편의 그 말을 무시해 버렸다. 그녀는 덱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전에 알아야겠어요. 루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어요?" 덱커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나도 그걸 걱정하고 있소. 이든 페인이란 여자를 아직 못 찾은 모양입니다. 그 문제는 나중에 의논하기로 해요. 기자들을 더 기다리게 해서는 안돼요." 남편과 팔짱을 끼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론다는 그 이든 페인이란 여자 때문에 속을 쾌 나 썩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 대가를 단단히 치러 주겠지만, 지금까 지 그 여자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도대체 여자의 몸으로 어디로 숨어들었길래 그 방면의 전문가 두 사람이 여자 하나를 찾아내지 못한 단 말인가? "한번 던져 보세요. 제대로 맞히기만 하면 이 귀여운 동물 인형을 드려요. 한번 던지 는데 1달러씩, 행운을 시험해 보세요. 저기 신사분, 당신은 아주 유능한 피처처럼 보 여요. 그 튼튼한 팔로 한번 던져 보세요." 이든은 원볼 게임 룸에서 몰려드는 고객들을 상대로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처음에 는 쑥스러워서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몇 번 반복하는 동안에 이젠 적당한 가락까지 붙여서 흥겹기까지 하다. 사내가 어깨만 으쓱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자, 이 든은 실망한 표정으로 뒤에 앉은 칙을 돌아보았다. 칙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호소가 통하지 않는 모양이죠?" "아니, 아니. 그 정도면 아주 훌륭해. 나보다 한결 난데 그래." "그렇지만 그냥 가버리잖아요?" "오는 사람마다 다 하지는 않지. 할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어. 그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야." "관상학이나 심리학을 전공했더라면 좋을 뻔했군요." "많은 도움이 되겠지. 그렇지만 이딴 장사를 하겠다고 그런 연구를 하는 사람은 없어 . 이런 게임을 하는 사람은 대개 그 동기가 단순하니까. 친구나 가족에게 자랑하고 싶 어 서 하는 사람, 아니면 자신이 꼭 명중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는 사 람, 그저 재미로 하는 사람, 뭐 그 정도지. 그런 사람을 다수 속에서 찾아내서 하게 만드는 일이 우리가 하는 일이야."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일이에요. 돈을 잃은 사람은 반발하고... 그럴 경우 미 안 한 느낌은 들지 않아요?" "왜?" 칙은 정말 알 수 없는 소리란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오락이야, 손님은 즐거움을 누린 대가로 요금을 지불하는 거구. 그렇다면 클럽 에 가서 돈내고 춤추는 사람들은 왜 그러지? 입장료를 내고, 술값은 또 얼마나 비싸? 그것에 비하면 이건 싼 편이야. 즐겁게 놀고, 잘만 하면 예쁜 인형도 타가고, 얼마나 좋아? 에이브와 젤다는 불건전한 노름 따위는 일절 하지 않아." 그렇지만 인형을 상으로 타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우유병을 공으로 모두 떨어뜨 린 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기를 쓰고 도전하니 그 것이 바로 요행을 바라는 인간의 심성이리라. "바빠지기 전에 에이브를 만나보고 오겠어." 칙이 이든에게 말했다. "진저와 게인터가 얘기한 도난 사건에 대해서 의논할 일이 있어. 잠시 혼자서 할 수 있겠지?" "돈을 벌라고만 않는다면야." 이든은 웃으며 대답했다. "최선을 다해 봐." 칙도 웃으며 말했다. 이든은 칙이 떠난 지 15분 정도를 가게에서 호객행위를 하며 보 냈다. 두 사람이 게임을 했지만 성공한 사람은 없었고, 돈을 잃은 그들은 더이상 흥 미 를 보이지 않고 가버렸다. 스탠턴 번즈가 빨간 머리의 여자를 죽인 동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칙의 도움이 없이는 그런 것을 밝혀낼 수가 없을 것 만 같다. 그러나 그를 이런 일에 끌어들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그녀는 판단하 기 가 어려웠다. 그녀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카니발 단원 두 사람이 다가왔다. 한 사내는 마른 체구에 헝클어진 머리와 약삭 빠른 눈초리를 하고 있었고, 또 한 사내는 턱수염을 기 르고 핸섬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턱수염의 사내가 담배를 꺼내어 이든에게 권했다. "고맙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아요." 그녀는 사양했다. "새로 오신 모양이군."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칙은 벌써 그만둔 겁니까?" "아니에요. 나는 그의 보조원이에요." "오, 그래요?" 그는 제법 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이든은 별로 감동하지 않았다. "무얼 보조합니까?" 이든이 아무 말도 않자, 이번에는 약삭 빠른 눈초리를 한 사내가 울타리에다 팔굽을 괴며 무례하게 말했다. "이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시트란 친구요." 이든은 사내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막돼먹은 인간 냄새를 풍긴다. "무슨 뜻이에요?" 그녀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아니, 니켈. 점잔케 굴어. 이분은 진짜 숙녀야." 턱수염은 뜨거운 눈초리로 이든을 바라보며 깡마른 사내를 울타리에서 떼냈다. "내 이름은 이든이에요." 그녀는 턱수염의 사내에게 말했다. 깡마른 사내보다는 그래도 턱수염 쪽이 좀 나았 다. "치키 러빗과는 어떤 사이죠?" 니켈이라고 불리운 깡마른 사내가 물었다. "내 개인적인 일에 대해서 당신이 신경쓸 건 없어요." 사내는 코를 훌쩍거리고는 소매로 쓱 닦았다. "그렇겠지. 우리 상상에 맡기겠다는 말씀이군." "숙녀께서는 자네의 그 상상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시트란 이름의 턱 수 염이 니켈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니켈의 말을 염두에 두지 말아요. 당신이 칙과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면, 오늘밤 나 와 한 잔 하는 게 어떻소?" "숙녀께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모양이야." 칙이 카운터로 다가오며 시트에게 말했다. 이든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러나 칙이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았을 때는 경계의 눈초리를 그에게 보냈다. 칙은 그 런 그녀의 눈초리를 미소로 바라보았다. 어이없게도 이든은 그의 눈길에 숨이 막히는 기 분을 느겼다. "흠, 알만해. 그런 제스처를 하지 않아도 알만하다구." 니켈이 칙의 행동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는 시트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그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들이 떠나자 이든은 칙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다시는 이런 태도를 취하지 말아요." "무슨 소리야? 물에서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란 격이군. 저치들이 어떤 치들인지 알 기나 해? 여자가 혼자라는 걸 알면 무슨 짓이든 가리지 않는 놈들이야." "나도 나 자신만큼은 지킬줄 알아요." "그래서 이곳으로 뛰어들었군." "그건 얘기가 달라요." 두 사람의 말다툼은 손님 때문에 중단되었다. 칙은 뒤로 물러나서 이든이 그 손님을 처리하도록 맡겨 두었다. 10살 가량의 사내 아이와 12살 정도 먹어 보이는 계집아이 였 다. 그들을 데려온 부모는 돈은 얼마든지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아이들이 하는 짓 을 보고 있었다. 아이들이 7번이나 실패를 하자, 이든은 칙이 뭐라고 하든 우유병을 공이 닿기만 하면 떨어지도록 놓아 주었다. 사내 아이가 8번째의 공으로 마침내 우유 병 모두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든은 아이에게 커다란 기린 인형을 상품으로 주 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며 떠나자 이든은 칙이 상품을 쓸데없이 주었다고 한마디할 것 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잘했어." 그는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말인데, 다른 사람들에게 내 여자인 것처럼 행 동 하지 않으면 안돼. 임자 없는 여자란 것이 모두에게 알려지면 당신은 위험을 당하게 될 테니까 말이오." 이든은 아무리 사실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면 당신이 그렇게 행동하세요." "나에게 달콤하게 대해야지." 그는 능글맞게 웃었다. "내가 당신을 끌어안더라도 내 팔을 부러뜨리려고 해서는 안돼. 다른 단원들이 볼 때 는 나에게 홀딱 빠진 표정을 짓고 있으란 말이야." "오, 제발 그만해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되는데." 칙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에게 사랑하는 표정을 지어 줄 여자는 이곳에 얼마든지 있잖아요." "그렇지만 그들은 보호가 필요없어." 그의 말은 옳았다. 이든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요. 사랑하는 표정을 짓고,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죠?" "내 트럭 뒤에서 나와 함께 잠을 자야 해." "그건 억지예요." "단원 중에는 여자 혼자서 잠을 자는 경우도 많을 텐데요." "있지. 그렇지만 그들도 다 사귀는 남자가 있어요. 즉 임자가 있다는 얘기지." 이든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 혼자만 호텔 방을 빌려서 쓸 수는 없다. 그렇 다고 칙의 말대로 그의 트럭에서 그와 함께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자겠어요." 이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진열대를 잠자리로 사용하면 되잖아요." 칙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결정할 일이야. 그렇지만 시트 같은 친구들이 항상, 당신을 노릴 거야, 그들 이 침입해 오면 누가 당신을 지켜주지?" 치키 러빗이란 이름의 사내가 공격해 오면 그때는 누가 지켜줄 것인가? 이든은 그의 턱에 난 조그마한 흉터를 바라보며 그렇게 속으로 반문했다.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칙, 당신은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그처럼 나를 도와주려는 이유가 뭐죠?" "나를 의심하는 거요?" "그렇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위험을 무릇쓰고 나를 도우려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 을 게 아니겠어요?"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면 그렇다고 말해. 그러면 즉시 물러날 테니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럼 무엇이 문제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예요.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이런..." "이런 곳에서 손님들에게 협잡이나 하는 주제에 왜 남의 일에 끼어드느냐, 이 말인가 ?" 그의 표정이 흐려졌다. "당신은 사람의 본성에 대해서 좀더 공부해야 되겠군. 너무 성 급한 결론을 내리는 버 릇이 있는 것 같아." "미안해요. 당신이 나를 도와주겠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난 다만 당신에 대해서 좀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든은 당황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여기서 좀더 생활해보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이든은 그가 기분이 상한 것을 알았다. 화제를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파트를 같이 쓰고 있는 친구 태피가 내일 돌아와요. 친구에게 알려서 내가 입을 옷 을 가져오라고 부탁 해야겠어요." "그건 위험한 일인데?" 칙이 눈을 번쩍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번즈의 부하들이 태피에게까지 손을 댈까요?" 이든은 가슴이 싸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그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나를 찾아내 기 위해서 태피를 납치할지도 모른다. "안돼요. 태피에게 조심하라고 알려야 해요. 그애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어디로 알리지? 그녀가 있는 곳을 알고 있어?" "아뇨, 태피는 보이프렌드인 행크와 함께 위스콘신으로 캠핑을 갔어요. 전화도 되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연락하지?" 칙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아파트의 전화기에다 메시지를 남겨둘 수밖에 없죠. 녹음기가 부착되어 있으니 까요. 문제가 있어서 돌아갈 수가 없으니 일요일에 전화하겠다고만 말해 두죠. 태피 가 아파트로 돌아오면 전화기에 녹음된 것을 듣고 나를 기다려 줄 거예요." "우선은 그 방법밖에 없겠군." "지금 당장 전화해야겠어요. 몇 분간만 당신 혼자 계셔도 되겠죠?" "돈을 벌어 놔야 한다고만 않는다면." 칙은 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흉내내며 씨익 웃었다. "아주 인상적인 기자 회견이었소." 월리 덱커는 기자가 다 돌아가자 번즈 부부에게 칭찬을 했다. "끝나서 기분이 후련하군." 스탠턴은 소파에 푹 잠기며 이마를 문질러댔다. "골치가 지끈거리는군." "아스피린을 드세요." 론다가 말했다. "당신이 좀 갖다줘." "착하고 귀여운 아내처럼 말인가요?" "그만해요." 덱커는 짜증스러운 듯이 말했다. 언젠가는 이들 부부의 성질도 세상 사람들에게 그대 로 알려질 것이다. 덱커는 이들 부부가 매일 다투는 것을 지겹게 보아 오면서 파탄이 멀지 않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성격이 물과 불 같지만 다만 서로의 이용 가치 때문에 그날그날을 유지하는 부부이다. "우린 지금 모두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예요." "그 페인이라는 여자 때문에? 그 여자를 찾아낼 방법은 있나요?" 론다가 덱커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루와 잭이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루는 페인의 아파트를 수색할 생각이오." 루가 이든의 아파트에서 무언가를 찾아낸다면, 그들은 지금보다 편한 마음으로 그녀 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덱커는 킴 퀸런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부터, 그녀가 번즈의 앞날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단정했었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 니, 이제 그녀는 그들 모두에게 엄청난 위협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 4 카니발은 새벽녘이나 되어 간신히 끝났다. 이든은 녹초가 되도록 지친 몸으로 칙의 뒤 를 따라 그의 트럭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장소에서 잠을 잘 수는 없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와는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도와주지." 그는 이든이 트럭의 뒤로 올라오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나 혼자서도 올라갈 수 있어요."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녀는 트럭의 뒤에 매달려서 상체를 솟구치려고 점프를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칙은 그러는 그녀의 행동을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 고 있었다. 몇 번이나 애를 쓴 끝에 간신히 트럭에 오르는 데 성공한 그녀를 향해 그 는 손벽을 치며 환영했다. "대단한 영웅이군." 그는 램프를 들고 올라와서 그 좁은 공간을 비추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을씨년스 런 공간이었다. 한쪽 구석에 그가 침구로 사용하는 수제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트럭 뒤의 공간은 두 사람이 누우면 빼곡하게 찰 그 정도였다.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잠을 잔단 말딘가? 이든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여긴 너무 좁아요." 그녀는 불평하듯 말했다. "당신은 그렇게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는 않을걸."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당신의 키가 아무리 커도 나보다는 크지 않을 테니까." 이든은 그가 밑바닥에 두 사람이 누울 만한 잠자리를 만드는 것을 한심하다는 듯 지 켜 보고 있었다. "마치 캠핑을 하는 것 같군요." "그런 것은 해본 적이 없어서 내겐 어렵게 느껴져." "캠핑도 해본 적이 없다구요? 그러면 여태것 무슨 재미로 살았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만 부지런히 놀렸다. 그는 정말 캠핑을 해본 적이 없을 까 ? 그와 같은 스타일은 평생을 방랑자처럼 떠돌아다닐 타입이다. 이든은 그가 깔아 놓 은 매트리스를 될 수 있는 한 그의 자리에서 멀리 떼어놓았다. 그래봤자 두어 뼘 정 도 의 거리에 불과했지만. "그러면 추을 텐데." 그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모포가 한 장뿐이거든. 거기까지 미치지 않을 거야." "당신이 신사라면..." 그녀는 뒷말은 그가 판단하도록 남겨 두었다. "계속해." "그만둬요." 이든은 빌려 입은 스커트를 내려다보며 후회했다. 길이가 짧아서 다리가 온통 차가운 트럭의 쇠바닥에 닿아 있었다. 그녀는 뭐든 가릴 것이 없나 하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벽에 달아맨 조그만 선반에 그녀가 벗어 던졌던 옷가지가 둘둘 말린 채 얹혀 있었다. "내 옷이..." 그녀는 그 뭉치를 끌어내렸다. "담요를 구할 때까지 이걸로 다리나 가려야겠군요." "정말 그걸로 추위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걱정이 되면 담요를 나한테 양보하시지 그래요?" 그녀는 비꼬듯이 말했다. "그럴 것 없이 이리 바짝 붙으면 두 사람이 함께 따뜻하게 잘 수 있잖아?" "관둬요." 그녀는 구두를 벗고 다리를 바짝 오그린 다음 옷가지로 하체를 대강 덮었다. 그런 다 음 재킷으로 어깨와 가슴 부분을 덮었다. 칙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혀를 차고는 입 고 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팬티 한장만 입은 그의 잘 발달된 몸둥아리가 그녀의 눈앞 에 드러났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얼굴을 붉히며 외면하고 말았다. "번즈와 퀸런이라는 여자와의 관계는 어떤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칙이 갑자기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녀가 돌아보자 그는 길게 누운 자세로 담요를 덮고 있었다. 그녀에 비해서 너무 편 하고 따뜻해 보였다. "나도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월요일 아침에는 주 정부 청사에 있 는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 나도 그 건물 안에서 근무하고 있으니까 그의 사무실에 들어가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왜 월요일이지? 내일은 어때?" "먼저 지방 항만청에 들를 일이 있어요. 앰비션 호가 어디에 정박해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요." 그 요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카니발이 일요일 밤에 끝나니까, 그 시간이면 그 요트를 조사하기에 아주 적합한 기회일 거예요." "요행히 그 요트를 찾는다면, 그리고 경비원들의 눈을 피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칙은 소극적으로 말했다. "틀림없이 찾아낼 거예요." 이든은 자신에게 다짐을 주는 기분으로 말했다. 처음부터 어려움은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명탐정이 한 분 탄생하셨군. 그래, 그 요트를 찾아서 어쩌겠다는 거지?" "퀸런의 시체를 그 요트에서 강물로 던져넣었다는 증거를 찾아내야죠." "점입가경이군. 번즈가 그런 것을 남겨 뒀을 것 같아?"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죠. 밤중에 일어난 일이라 그들도 실수를 할 수가 있어요. 증 거 가 없더라도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 정도로 해두고 잠이나 잡시다." 칙은 불을 끄면서 말했다. 좁은 공간이 캄캄해지자 이든은 바짝 긴장이 되었다. 그 러 나 그는 잘 자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칙을 한 뼘 거리에 놓아두고 과연 잠을 이를 수 있을 것인지 그녀는 의심스러웠다. 게 다가 눈을 감으면 킴 퀸런의 죽은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그녀는 왜 죽어야만 했 을까? 그녀와 번즈와는 어떤 사이일까? 그녀를 죽인 자는 정말 번즈 그 자신일까? 끝 없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든은 좀더 편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 몸을 틀 었다. 그러자 다리 위에 덮어 두었던 옷가지가 미끄러져 내렸다. 그녀는 상체를 일으 켜서 옷가지를 다시 끌어덮었다. "왜 그래?" 칙이 조그마한 소리로 물어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유감이군. 난 당신이 추워서 내 모포 안으로 들어올 결심을 한 줄 알았지." "꿈 깨세요. 얼어죽는 한이 있어도 그 안에는 안 들어가요." "고집 부려 봐야 추우면 자기만 손해지 뭐." 칙은 일부러 얄밉게 하품을 했다. "워싱턴 네가 어젯밤에 당했어." 일요일 아침에 에이브 헐리가 칙에게 맨 먼저 한 말이었다. 그렇찮아도 칙은 최근에 부쩍 잦아지고 있는 도난 사건에 대해서 의논하려고 헐리 걸리의 주인인 그를 찾아간 참이었다. "이번엔 무얼 도둑맞았어요?" 에이브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흰 머리를 흔들었다. "지독하게 당했어. 진저가 상점 앞을 지날 때 펠릭스는 문을 잠그고 있었다. 그때 부 인이 발을 헛디뎌서 넘어졌고 안고 있던 상품이 바닥에 온통 쏟아지고 펠릭스는 그녀 의 비명에 놀라서 달려갔지. 펠릭스 말에 의하면 상점에서 등을 돌린 것은 1분도 채 안된다는 거였어." "그렇지만 그 사이에 현금 박스가 사라졌군요." 칙은 젤다의 탄식 소리에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그녀는 칙에겐 마치 어머니 같은 존재여서 그녀가 괴로워하는 것을 본다는 것 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헐리 걸리 카니발 단체는 세월이 갈수록 서서히 붕괴해 가고 있었다. 10여년 전에 비 해서 이제 그 규모는 반으로 줄어 들어 있었다. 장소를 임대하는 것도 차츰 세금이나 임대료가 싼 곳만 골라다니게 됐고 도난 사건이 잦아지고 있는 것도 장사가 너무 안 되 고 있기 때문이었다. 각 상점마다 임대료를 제때에 못내서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다. 단체를 영영 떠난 가족들도 많았다. 게다가 시즌도 서서히 마감되어 가고 있어서 도 난 사건이 더욱 기승을 부릴 만도 했다. 이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헐리 걸리는 앞으 로 자리잡을 곳을 잃고 말 것이다. 경찰은 귀찮은 단체가 자신들의 관할지역에 들어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경찰 에 서 영업허가를 내주지 않으면 단체는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이미 나이가 들었고, 단체를 떠나서는 마땅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형편들이었다. 칙이 이곳에 뛰어든 것도 어떻게든 그들을 도와주려는 생각에서 였던 것이다. "두 건의 도난 사고가 연달아 일어났군요." 칙은 씁쓸하게 말했다. "누군가가 월동준비를 하는 모양이에요. 당신은 게이터와 진저의 짓이라고 생각하시 죠 ?" "모르겠네." 에이브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들이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싫어. 그들은 나와 2년 이상을 함께 일 해 왔어." "당신의 마음을 이해해요." 젤다가 남편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나도 그들이 그런 짓을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아요. 전에 그런 짓을 한 적이 있는 사 람들도 아니구요." "앞날이 너무 암담해져서 그런지도 무르죠." 칙이 만했다. "그래서 초조해겼을까?" 에이브가 고개를 저었다. 젤다가 남편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게이터는 모르지만... 그렇지만 진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칙은 젤다의 말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미래를 예언한다는 그녀가 이런 일에는 도무지 자신이 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우스웠다. "펠릭스는 경찰에 고발할 생각인가요?" "물론 아니야. 그는 우리 가족이니까 경찰을 개입시켜서 모두에게 지장을 초래하는 따 위의 짓은 하지 않아." 칙은 맥이 탁 풀렸다. 단체를 위해서 개인을 기꺼이 희생해야 하는 것이다. "달리 방법이 없군요. 우리 스스로가 해결해야지. 그 도둑을 찾아내는 일에 좀더 신 경 을 곤두세워야 겠어요." 젤다가 그에게 다가와서 가볍게 포옹하며 말했다. "당신은 항상 좋은 사람이야. 우리들의 이 어려운 일을 당신은 꼭 해결해 줄 거야." 칙은 겔다를 가만히 안았다. 그녀의 몸이 곧 부스러질 듯이 연약하게 느껴졌다. 이 착 한 노부부를 위해서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젤다와 에이브가 망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순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헐리 네를 떠나서 칙은 자신의 트럭으로 돌아왔다. 이든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녀의 미끈하게 빠진 다리를 감상하며 기다릴 셈이었다. 칙은 그녀에게서 최근 수년 동안 느껴 보지 못했던 묘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것은 헐리 걸리 단원들에게 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매우 실속없는 감정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한 여자의 목숨이 달린 일에 자신의 노력을 쏟는 일이 그렇 게 헛된 일일까? 이든은 어쩌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리고 그녀는 너무 아름답다. 장사가 끝나서 이든이 상품을 박스에 담고 있을 때, 주드 니스트롬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소?" 이든은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그러잖아도 이 박스를 트럭으로 옮길 힘센 팔이 필요해요. 그런데 칙은 도 대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군요. 정말 바쁘지 않으세요?" "지금은 할 일이 없어요. 조금 있다가 단원들 몇 명이 바에서 한잔 하자고 하는데, 같 이 어울리지 않겠소?" "귀에 솔깃한데요.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오래 서 있는 일에 익숙하지 못해서 지금도 쓰러질 지경이에요." 이든은 그렇게 변명했다. "나중에 또 기회가 있겠죠." 주드는 더이상 조르지 않았다.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이든이 쌓아 놓은 박스를 들 어 올렸다. 이든은 다시 칙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하루종일 칙은 그녀에게 가게를 맡겨 두고 다른 단원들을 찾아다니며 무언가를 캐묻고 다녔다. 이든은 그가 무엇을 하고 다 니든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전화를 이용하여 앰비션 호가 어디에 정박하고 있는 지 를 알아냈다. 그 요트는 링컨 공원에서 불과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벨몬트 항에 정박 해 있었다. 이든은 친구 태피에게 연락해서 링컨 공원으로 자신의 옷을 가지고 나오 라 고 부탁했다. 태피에게는 사전에 충분히 주의를 주었다. 이제 칙이 돌아오기만 하면 계획한 대로 행동에 옳길 참이었다. 그런데 칙은 좀처럼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다 됐소?" 주드가 그녀에게 물었다. "현금 박스만 가져오면 돼요." "그건 조심해야 합니다." "알아요, 메이시가 어젯밤 도난을 당했다고 말해 줬어요.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그 녀 와 펠릭스는 정말 좋은 사람들인데 그런 일을 당하다니 안됐어요." "도둑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죠." "정말이에요." 이든은 돌아서서 진열대를 가리고 있는 커튼을 걷었다. 칙은 그곳에다 현금 박스를 감 춰 두고 있었던 것이다. 도난의 위험도 있는데, 그 속에다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넣어 두고 있느냐고 이든이 걱정했으나 칙은 듣지 않았다. 임대료와 세금을 매주 내야 하 기 때문에 일일이 은행에 다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임대료와 세금을 내고 나 면 실제 남는 돈이 별로 없었다. 이든은 손금고를 꺼내 카운터 위에다 올려놓고 서랍 안에서 잔돈을 꺼내 금고에다 담았다. "오늘은 장사를 잘한 모양이군요." 주드가 말했다. "그런대로 괜찮았죠. 당신은 어땠어요?" "별로였소. 일요일은 항상 시원찮아요. 아마 교회에 나가느라고 손님이 줄어들기 때 문 이겠지." 이든은 금고를 잠그고 나서 말했다. "다 됐어요. 이젠 상점만 잠그면 돼요." "그 상자들을 이리 줘요." 이든은 그에게 상자를 넘겨주었다. 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그녀는 금 고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일을 거들어 주기 위해서 일부러 들른 사람에게, 그 것도 우정으로 같이 한 잔 하자고 청해온 사람을 마치 도둑처럼 의심한다는 것은 미 안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를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직접적으로 돕고 있는 칙의 돈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너무 죄스러운 일이 될 것 같아 서 그녀는 금고를 옆구리에 끼고 문을 잠갔다. 가게 문을 안전하게 채운 이든은 금고를 다른 상자 위에 올려놓고 같이 들었다. 주위 를 돌아봐도 칙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는 참고 있었다. 칙이 앞으로의 계획을 잊고 있을 리는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마 그의 발목을 잡 고 있는 무슨 일이 있겠지. "갈까요?" 주드는 박스 두 개를 안아올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네, 그래요." 두 사람은 카니발 광장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부지런히 가게를 닫 아걸고 있었다. 페리스 휠이라는 회전 보트 앞에서 시트 야코니가 다른 단원들과 함 께 잡담을 하고 있다가 이든을 발견하고는 표정을 굳혔다. 그의 눈초리는 사람을 불안하 게 만드는 악마적인 데가 있다. 이든은 가슴이 싸늘해졌다. 그가 지금 노려보는 것 은 이 금고일까? "이곳에 오기 전에는 무얼 했소?" 주드의 질문에 이든은 깜짝 놀랐다. "오, 여러 가지 사무를 봤죠." 그녀는 트럭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여비서?" "그와 비슷한 일이에요. 서류를 정리하는 따위의 아주 따분한 일이에요." 두 사람은 칙의 트럭 앞에 멈춰섰다. 주드는 상자를 내려 놓으면서 그녀에게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을 타입이 아니오." 이든은 그가 부려 놓은 상자 위에다 자신의 짐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당신도요. 왜 이런 곳에서 어물거리고 있죠?" "한 잔 하면서 그런 얘기나 하는 게 어때요? 일찍 보내드릴 테니까." 그녀가 적당한 구실을 다시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칙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그는 대뜸 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이 숙녀님은 친구가 필요치 않아. 그녀가 한 잔 하고 싶다면, 내가 모시고 가지." 주드는 두 손을 쳐들며 뒷걸음질쳤다. "자네 영역을 침범 할 생각은 아니었네." 이든은 칙의 웃는 표정이 결코 유쾌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비웃음 은 일종의 싸늘한 적의 같은 것을 담고 있었다. "잘 생각했네, 니스트롬. 다시 만나자주." "알았어." 주드의 얼굴에 분노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이든을 바라보며 미안한 표 정 을 지었다. "그럼 안녕. 당신에게 문제를 만들어 줄 생각은 아니었소. 다음에 또 봅시다." "오, 염려 말아요. 주드,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요." 이든은 그의 그림자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칙의 손을 뿌리치면서 화를 냈다. "그에게 그런 무례한 말을 할 필요가 있었어요? 내게 관한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 요. 게다가 주드는 좋은 사람이에요. 시트와는 다르잖아요?" 칙은 어깨를 들썩이고는 트럭의 뒷문을 열었다. "만약 내가 제때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주드는 당신을 어떻게 해보려고 시도했을 게 틀림없어." "생각하는 거라고는... 당신의 머릿속에는 쓰레기만 들어 있어요." 그녀는 그를 밀치고 트럭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어디에 있다가 이제서야 나타났죠?" "뭐 이리저리." "하루종일 다른 단원들과 무슨 얘기를 그리 하고 다녔죠?" "도난 사건에 관한 거야. 모두들 걱정하고 있어.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지. 이러다간 정말 큰 곤경에 처할 것 같다구." 그러나 그가 하는 말 속에는 어딘지 정곡을 벗어난 느낌이 있었다. 이든은 그것이 무 엇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두 손 을 그녀의 양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한 잔 하러 가자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었어?" 그는 부드럽게 물었다. 너무 가까이서 말하는 바람에 이든은 그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을 정도였다. "그건 당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아니에요. 당신과 나는 오늘 할 일 이 있잖아요, 잊었어요?" 그의 손이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올려 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목 덜미에 살짝 스치고 지나갔을 때 이든은 피부의 신경이 바짝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동자가 녹일 듯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머리를 앞으로 숙였을 때, 이 든은 그가 키스를 하려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그는 키스를 하진 않았다. "난 준비됐어." 그는 짤막하게 말했다. "뭘 준비해야 하죠?" 이든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 키스를 받고 싶었는지 그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키스를 받으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생각했던 것만은 틀림없었던 것 같다. "태피를 만나기 전에는 갈아입을 옷도 없어요. 이런 차림으로는 플래시를 넣을 주머 니 도 없어요."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는 짧은 스커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요트를 수색할 셈이야? 들키면 당신은 체포당할지도 몰라." "좀 적극적으로 생 각할 수 없나요? 그렇게 두려우면 지금이라도 손을 떼시든지." 이든은 매몰차게 말했다. 그가 아무 말도 않고 있자 그녀는 오히려 미안한 생각이 들 었다. 어쨌든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돕기 위해서 그 계획에 동의한 남자였다 . 그녀는 트럭에서 먼저 내려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미안해요." 그녀는 그가 트럭을 잠그는 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같이 가실 생각이세요? 이건 당신 일이 아니에요." "내 일로 결정했어. 한번 마음먹은 이상 취소할 순 없어." 그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이든은 어쩐지 그 손마저 뿌리 치 고 싶지는 않았다. 위험한 곳에 전투를 하러 가는 길이다. 그리고 그의 주장대로 그 것 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비록 다른 남자들이 다 흩어지고 카니발 광장 은 텅 비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요트에 누가 타고 있으면 어떡하지?" 광장을 가로지르며 칙이 말했다. "임기응변, 당신은 그런 일에는 능숙하잖아요?" "종이 비행기를 태우는군." 그는 그녀의 허리를 더욱 바짝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든은 부근에서 들려오는 사람들 의 소리에 귀를 집종했다. 매표소 뒤에 시트와 니켈이 마주서서 무언가 소근거리고 있 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칙에게 바짝 매달렸다. 칙은 기쁜 듯이 그녀를 더욱 힘 주 어 안았다.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려왔다. 카니발 광장을 벗어나자 호수의 등대 쪽에 서 택시가 왔다. 칙이 택시를 세웠고 그곳에서 5분쯤 달려서, 두 사람은 벨몬트 항의 입 구에서 내렸다. 그곳에서부터는 걸어야만 하는 것이다. 달빛이 훤한 밤길을 두 사람 은 말없이 걸었다. "이런 일을 결심하다니, 당신은 보통이 아니야." "왜요? 여자라서 그러는 거예요?" "남자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남의 요트에 침입하는 일은 쾌 위험한 일이죠. 게다가 상대는 악당이에요." "주 정부 여행국에서 당신이 하던 일은 무엇이었지?" "주로 정부 관리들의 여행에 관한 일이에요. 서류 수속과 기타 그에 부수되는 일들이 죠." "나는 당신이 주 정부에서 근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랐어." "그게 왜 놀랄 일이죠?" "그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헐리 걸리에 뛰어들 이유란 별로 없으니까. 이제까지 누 려 오던 안락한 환경을 팽개치고 그런 살벌한 곳에서 살기란 어려운 법이거든." 이든은 칙의 얼굴을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은 어때요? 당신도 카니발 시장판에서 살아갈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나야 17살 때부터 집을 뛰쳐나와 헐리 걸리에 몸담아 온 사람이니까."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어느새 항구지기의 사무실을 지나치고 있었다. 이든은 칙 의 과거에 대해서 좀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었으나 현장에 가까워옴에 따라 더이상 이 야기를 나눌 수가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항만청 직원은 앰비션 호가 부두의 북쪽 끝에 정박해 있다고 말했어요." 그녀는 그쪽 방향을 바라보며 칙에게 속삭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기겁을 하며 목을 움 츠렸다. 경비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한 명의 경비원이 요트가 있는 곳을 돌아서 막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겁먹지 마." 칙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껴안으며 말했다. "달밤에 산책 나온 연인들처럼 행동해." 이든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고 마치 사랑에 취한 여인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경 비 원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가슴은 자꾸만 죄어들었다. 유니폼을 입은 그 경비원은 아무 말 없이 그들 곁을 지나쳐갔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가만히 내 쉬었다. 칙이 그녀 를 힘주어 안았다. 그들은 그런 자세로 앰비션 호가 서 있는 지점 가까이까지 걸어갔다. 돌아보자 그 경비원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아마 사무실로 돌아간 모양이다. "몇 분 간격으로 순찰을 돌까요?" "알 수 없지." 칙은 앰비션 호에 잽싸게 뛰어올라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하이힐을 신은 발 을 갑판에 올려놓을 때 앰비션 호는 약간 출렁거렸다. "선실을 먼저 살펴봐요." 그녀는 칙에게 말했다. "나는 갑판 쪽을 조사해 보겠어요." "혼자서 할 수 있겠어?" "문제없어요." "경비원 쪽에 항상 신경을 써야 해." 이든은 주머니에서 플래시를 꺼내들었다. 칙은 선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 나 잠겨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창문을 이리저리 밀어보았다. 다행히 창문 하나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열었다. 이든은 불빛이 멀 리 비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갑판을 샅샅히 살펴보고 있었다. 빈 맥주 깡통들이 갑 판 한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녀는 여자의 시체를 담았을 만한 박스를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날 저녁 그녀가 보았던 것은 분명히 벤치처럼 생긴 것이었다. 마침내 그것을 갑판 구석에서 찾아낸 이든은 가슴이 사뭇 떨려왔다. 분명히 퀸런의 시 체가 담겨 있었던 벤치 모양의 박스였다. 뚜껑이 덮여 있었다. 그 뚜껑은 그날 한 사 내가 덮어서 그 위에 깔고 앉았던 것이었다. 킴 퀸런의 한쪽 팔이 비어져 나와 있는 장면이 떠올라서 이든은 이를 악물었다.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실망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 무엇을 찾 길 기대했단 말인가? 킴 퀸런의 지갑이나 구두, 혹은 찢어진 옷자락이라도? 불빛 아 래 드러난 벤치의 바닥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서 바닥을 손으로 샅샅히 훑었다. 그러다가 발자국 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았다 . 칙이 그녀를 덮치며 엎드렸다. 그녀의 손에서 프래시가 떨어지며 불이 나갔다. "쉿!" 칙은 그녀의 입에다 손을 대며 숨을 죽였다. 이든은 경비원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 다. 그녀는 겁에 질려서 숨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칙의 어두운 색깔의 옷이 그녀를 완 전히 덮었다. 그의 동작은 민첩했다. 그러나 그의 체중에 눌려 이든은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그때 사람들의 말소리가 지척에서처럼 들려왔다. 그녀는 가슴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5 "분명히 이 부근에서 불빛이 보였는데..."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헛개비를 본 게지." 다른 사내가 대꾸를 했다. "아니야, 분명히 불빛이 어른거렸어." 사내는 플래시를 앰비션 호의 갑판에 비춰보며 계속 우겼다. 이든은 그들이 항만청에 서 파견 나온 경비원이라고 짐작했다. 아무래도 번즈의 부하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설사 들키더라도 일단은 경찰로 넘겨질 테니까 당장 위험하지는 않 을 것이다.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가늘게 내쉬자 칙의 손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자네도 이젠 늙어가나 보네, 토비. 헛개비를 보고 말이야." 한 사내가 다른 쪽을 놀렸다. "눈에 헛것이 보이기 시작하면 인생도 끝장이 가까웠다는 말이지." "에끼, 이 사람. 그런 소리 말게. 내 분명히 불빛을 봤다니까." 사내의 발자국 소 리가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만 돌아가자니까. 날씨가 싸늘한데 감기들면 나만 손해야." "잠시만 기다리게. 아까 아베크 한 쌍이 지나갔는데, 아무래도 고것들이 여기 어디서 장난질을 치고 있는 것 같아." "이 사람아, 그만두게. 자넨 그런 때가 없었나? 설사 그들이 여기 어디에 숨어 있다 고 하더라도 모른 체해 주면 안 되는 일인가? 그만 돌아가세." "그러세." 사내는 마침내 포기한 모양이다. 경비원이 멀리 사라지는 기미를 확인하자 이든은 몸 을 꿈쩍거려서 칙을 내려오게 했다. 그러나 칙은 무거운 몸을 그녀 위에 올려놓은 채 꼼짝도 않는다. "그만 내려가요. 무거워 죽겠어요." 이든은 숨을 헐떡이며 그의 몸을 흔들었다. 그제서야 칙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위 에 서 슬그머니 미끄러져 내려왔다. "심장이 온통 내려앉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스릴 있고 좋던데 그래, 그 친구들 좀더 있다 가지 않고..." 칙은 아쉬운 듯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 농담할 기분이 나세요?" 이든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발각됐으면 경찰에 넘겨졌을 거예요." "반드시라고는 말할 수 없지." 그는 능글맞게 대꾸했다. "어쨌든 우린 안 들켰잖아?" "그래요. 다행이에요. 그런데 안에서 뭘 좀 찾아냈어요?" "선박 등록증뿐이야." 칙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앰비션 호의 선주는 론다 번즈로 되어 있더군."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세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유권자들에게 자신이 너무 호화생활을 한다는 인상을 주기 싫어서겠지. 뇌물 이 라도 먹지 않는 한 그의 봉급으로는 이런 요트를 가질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라면 뇌물도 사양할 위인이 아닐 거예요. 스탠턴 번즈는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인 간 이니까요." "이 정도에서 여기를 나가는 게 좋겠어." 칙은 돌아서며 말했다. "아직 살펴볼 것이 있어요." "무얼 말이야?" "잘 모르겠어요. 나는 저 박스의 안을 손으로 훑고 있었어요. 당신이 나를 덮치기 전 까지 말이에요. 내 플래시가 고장난 것 같으니까 당신 것을 이리 좀 주세요." 칙은 그녀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플래시를 넘겨주었다. 이든은 벤치처럼 생긴 박스 의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불을 켰다. 아까는 죽은 여자가 담겨 있던 박스라고 생각해 서 겁을 먹었지만, 이젠 칙이 옆에 있으니까 간이 커졌다. 그렇지만 박스 속은 어쩐 지 기분이 나빴다. "빨리 해." 칙이 재촉했다. 오금이 쑤시는 모양이다. 그의 재촉이 그녀의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벤치의 바닥에서 축축한 느낌이 그녀의 손바닥에 전해왔다. 어쩐지 기분이 나쁘다. 마치 시체의 몸에서 흘러나온 액체 같은 것이 바닥에 괴어 있는 느낌이다. 바 닥의 모서리를 지나던 그녀의 손가락 끝에 무언가 날카로운 금속성의 물질이 닿았다. 그녀는 그것을 들어올려 불빛에다 비추어보았다. 금으로 만든 작은 고리였다! "목걸이에서 떨어져 나온 고리예요." 그녀는 불빛 아래서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다. "이건 매우 희귀한 물건 같군요. 그리고 진짜 금 같구요." "어떻게 알아?" "틀림없어오. 이건 아주 정교하게 세공된 목걸이에요. 그리고 이걸 보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빨간 머리카락이 몇 가닥 고리에 걸려 있어요. 신문에서는 퀸런이라는 여자의 목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고만 게재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칙이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목걸이를 낚아챈 거예요. 목걸이가 끊어지면서 그녀의 목에 상처를 낸 거죠. 이 머리카락은 퀸런의 것이 틀림없어요. 퀸런은 바로 이 요트에 실려 있었 구 요." 이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흥분해 있었다. 칙은 이든이 그처럼 애써서 찾아낸 그 소중한 증거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설사 경찰에 가져가더라도 그것이 앰비션 호에서 찾아낸 것이라는 증거는 또 없었다. 머리카락이 퀸런의 것임을 밝혀낸다 하더라도 번즈와 그녀와의 관계를 밝혀내지 않는 한 설명은 어려웠다. 그러 나 칙은 이든이 실망할 말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기를 꺾어 놓고 싶지는 않 았던 것이다. 그녀는 모처럼 찾아낸 증거물로 몹시 용기를 얻고 있는 것 같았다. 이든이 요트의 식당에서 조그마한 플라스틱 가방을 찾아냈을 때, 칙은 경비실 방향을 주시하며 가슴을 죄고 있었다. 경비원들은 또 올 수도 있다. 그리고 이번엔 틀림없이 들킬 것 같았다. "빨리 서둘러야 해. 당신 친구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이든은 주워온 플라스틱 가방을 블라우스 속으로 쑤셔넣으며 갑판으로 나왔다. "마지막으로 한번 둘러본 거예요." 그녀는 칙의 손을 잡고 요트에서 내렸다. "우리가 왔던 길은 피하는 게 좋겠어. 그러자면 호수 연안의 도로를 따라 빠져나가는 것이 안전해." 칙은 그녀에게 속삭이며 앞장섰다. 두 사람은 언덕진 풀밭을 지나서 고가도로로 나섰 다. 서로의 손을 잡고 남쪽으로 부지런히 걸어 링컨 공원을 향해 갔다. 일요일 밤이 라 서 지나다니는 차량도 별로 없었다. 15분 가량 계속 걸어서 공원의 언덕에 닿았을 무 렵에야, 칙은 비로소 안심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재수가 없어 서 경비원들에 게 붙들리기라도 했더라면, 사정을 설명하느라고 고생을 쾌나 했을 것이었다. 그는 이든 과 함께 경찰서 대기실에 갇히는 장면을 여러 차례 머릿속에 그렸다. 생각만 해도 아 찔하다. 이든이 그의 어깨를 치고는 한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태피와 행크가 저기에 있군요.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가 그들에게 달려가려 하자, 칙은 팔을 잡으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그는 그녀를 근처에 있는 덤불 사이로 데려가서 허리를 껴안았다. 누가 봐도 두 사람 은 연인 사이였다. 그는 그런 자세로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호수 근처에 한 쌍의 남녀가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외투를 머리까지 푹 뒤집어쓰고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한 젊은 여인이 까만 애견을 데리고 산책로에서 들어왔 다. 여자는 태피와 행크가 앉아 있는 정자 쪽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갔다. 강아 지 는 길 건너편에 세워 둔 자동차에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에 있는 벤 치에는 깡마른 사내 한 사람이 벌렁 드러누워 있었다. 특별히 위험이 느껴지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저 태피란 당신 친구, 믿을 수 있겠지?" "물론이에요. 태피와 나는 여고시절부터 친한 친구였어요. 그리고 행크라는 남자는 태 피에게 미쳐 있어요. 태피가 하자는 일은 무엇이든 할 정도예요." "당신 말이 맞겠지." "당신은 사람을 믿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렇지 않아. 다만 조심을 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당신의 그 편집광적인 성격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의심할 순 없어요." 이든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덤불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당신은 가여운 사람이군요?" 그녀는 언덕을 걸어내려오며 칙에게 그렇게 말했다. 내가 가여운 놈이라고? 칙은 그녀의 뒤를 따라 내려오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닥치지 않기를 기대할 뿐이었다. 정자가 가까워오자 이든은 태피와 행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칙은 같이 달리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잠시 동안의 외유를 끝내고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 아가는 듯한 서운한느낌이 들었다. 태피라고 불리는 여자는 이든에 비해서 키가 작지 만 다부져 보였는데 두 여자는 함께 껴안고 재회를 기뻐하고 있었다. "이게 모두 어찌된 일이야?" 태피는 거리낌없는 목소리로 이든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너는 비밀이 많아야 해? 아파트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가 뭐야?" 칙은 그들에게 다가가면서 대화 내용을 듣고 있었다. 칙이 미처 어쩔 사이도 없이, 이 든은 그 얘기를 입에 올리고 말았다. "어제 아침에 여자의 시체가 강에서 발견되었어. 그 여자가 보트에 실리는 것을 나는 우연히 목격했던 거야. 스탠턴 번즈가 그 현장에 있었어. 나는 그가 그 여자를 살해 했다고 믿고 있어." 칙은 이든의 곁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허리를 손으로 감았다. "당신 친구가 너무 자세히 아는 것은 그녀 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아." "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아요." 태피의 까만 눈동자가 칙과 이든을 번갈아가며 살펴보았다. "이 남자는 누구지?" 태피의 애인이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이 남자를 쫓아 버릴까?" 그러나 행크라는 그 친구는 파리 한 마리도 쫓아버릴 위인이 못되는 것 같았다. 최신 유행의 양복을 쪽 빼입기는 했으나 가벼워보이는 몸무게에 연약한 팔다리를 보니 기 운 을 쓸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에요, 행크." 이든이 재빨리 말했다. "이분은 칙 러빗이라고 나를 도와주고 있어요." "무얼 돕는다는 거지?" 태피가 물었다. "살아 있도록 돕는 거죠." 칙이 대답했다. "당신은 친구에게 사실을 모조리 알게 할 참이야?" 그는 이든에게 물었다. 태피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사람을 정말 믿을 수 있니?" "그도 너에 대해서 똑같은 질문을 했어." 이든이 웃으며 말했다. 태피는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칙 앞으로 나와 서 야무지게 말했다. "당신이 누군진 모르지만, 나는 이든을 해롭게 하거나 위험하게 만들지는 않아요." "나도 그렇소." "그만해요." 이든이 두 사람을 말렸다. "그러면 남김없이 얘기를 해 봐." 태피가 강하게 요구했다. 이든은 지난 이틀간에 있었던 일을 태피에게 들려주었다. 그 녀의 얘기가 앰비션 호의 수색에까지 이어졌을 때, 태피는 무엇을 찾았느냐고 물었다 . 칙은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이든이 목걸이에 관한 얘기를 꺼내기 전에,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리는 그 요트가 스탠턴 번즈의 것이 아니라 론다 번츠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냈죠 . " "론다 번즈라구요?" 태피는 이마를 찡그렸다. "그렇다면 그녀는 원래 론다 로렌스가 아니었나요? 미시건 호숫가에 있는 대저택에서 살고 있는 케닐워드 가의...." "바로 그 여자요." "당신이 어떻게 아세요?" 이든은 믿기 어렵다는 듯이 물었다. "당신은 그 사람들과는 아무 면식도 없잖아요?" 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란 항상 가까운 데를 잘못 보는 특징이 있다. 항상 자신과는 동떨어진 먼 곳에다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와 그만큼 지내 봤 으면, 내가 단순히 원볼 게임 장사나 하자고 헐리 걸리에 기어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쯤은 눈치를 챘어야 할 텐데, 이건 영 뿌옇기만 하다. 하기야 그녀가 지금 온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은 살인 사건뿐이니가 이해를 못할 바는 아니지만. "카니발 단원도 신문은 읽으니까." 칙은 그렇게 대꾸했다. "당신은 카니발에서 일하고 있습니까?" 행크가 물었다. 상대방을 멸시하는 듯한, 그리고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려는 듯한 그 런 말투였다. 이든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재빨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헐리 걸리라는 카니발 단체가 부두 근처에 와 있어요.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나 에게 친절히 대해 줬어요. 특히 칙은 나를 자신의 조수로 채용해 주고 그의 트럭에서 머물도록 했어요." "그의 트럭에?" 태피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그런 곳에서 고생을 하고 있어? 아파트로 돌아와서 우리와 함께 의논하며..." "난 돌아갈 수 없어. 너도 마찬가지고. 너도 안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조심하라고 했던 거야." 그녀는 갑자기 주위를 돌아보았다. 혹시나 태피와 행크의 뒤를 미행해 온 사람이 있 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 옷은 가져왔니?" "물론이지." 태피는 이든을 정자로 데려갔다. 칙은 주위를 계속 살피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누군 가 태피의 뒤를 미행한 자가 있었다면, 이든의 목숨은 아주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그 녀는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위험이라는 것이 얼마나 졸지에, 그리고 예 고 없이 다가오는 것인지를.... 루 파렌티노는 자신의 올드모빌 운전석에 느긋하게 기대 앉아서 금발의 바람둥이 아 가 씨가 친구인 페인이라는 여자에게 지껄이는 말을 듣고 있었다. "자, 여기 봐." 그녀는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셔츠와 블라우스, 드레스, 속옷과 진, 스웨터, 그리고 액세서리까지." "난 그저 갈아입을 옷만 가져오라고 했는데, 태피. 정말 누가 미행하진 않았니?" "그렇다니깐. 우린 이것을 뒷문으로 내놓고 행크가 먼저 집으로 돌아가는 체하며 앞 문 으로 나온 뒤 나를 뒷문으로 살짝 데리러 왔단 말이야. 아파트 앞에서 우리를 감시하 고 있었다 하더라도,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우리를 눈치채진 못했을 거야." 파렌티노는 웃으며 눈앞에 블론드의 아가씨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가씨의 전화기에다 도청장치를 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일거수 일투 족을 모두 알고 있었단 말이야. 이 귀여운 아가씨야." 정자에다 도청장치를 하는 일은 아파트에서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너희들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이렇게 듣고 있어, 알아?" 그는 망원경을 꺼내어 태피의 얼굴에다 조정했다. 이제 페인의 움직임을 알아내는 일 은 문제될 것이 없다. 태피를 통해서 언제라도 그녀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넌 당분간 행크와 함께 지내는 편이 안전할 거야." 페인이라는 여자가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듯이 말했다. 파렌티노는 이마를 찡그렸다 . 그렇다면 별수없이 저 약골 사내가 거처하는 곳을 알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태피가 친구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우리와 함께 가자." 파렌티로는 그녀를 돕고 있다는 사내의 얼굴을 보려고 망원경을 조정했다. 그렇지만 칙 아무개라는 사내의 얼굴은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안돼." 페인이라는 여자가 말했다. "너까지 그런 위험한 일에 끌어넣을 수는 없어. 곧 연락할께." "너를 그렇게 두기는 싫은데, 그렇지만 너를 찾아낼 수 있겠지." "그러지 마, 태피 . 나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돼. 부탁이야." 블론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렌티노는 안타까웠다. 페인의 거처를 아직 확인 하 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차에 설치되어 있는 무선 전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 렸다. 두 번 신호가 가는 소리가 울리고 상대방이 나왔다. "여보세요?" 기다렸다는 듯이 상대방이 물었다. "페인이라는 여자를 찾아냈나?" "그렇습니다. 그녀는 지금 카니발 무리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아요. 아직 정확한 장소 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곧 알아 내겠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페인이라는 여자를 처치하면 보수를 충분하게 받게 되겠지만, 파렌티노는 그녀를 죽 이 는 일에 직접 나서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아무리 완벽을 기한다고 해 도 꺼림칙한 부분이 항상 남는 법이다. "자네가 직접 손대지는 말게." 예상 외의 명령에 그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럼 누구에게?" "그 여자는 우리의 손으로 처치하면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우려가 있어. 카니발 패거리들은 별로 넉넉하지 못한 하류 인생들이니까 돈으로 매수하면 될 거야. 적당한 사내 하나를 찾아서 그 일을 시키고 우리는 뒤로 빠지는 거지." 그것 참 괜찮은 방법이라고 파렌티노는 생각했다. 청부살인을 하고 우리는 꼬리를 감 추는 것이다. "알았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골치 아픈 일이 자기에게 떨어지지 않아서 그는 기분이 좋았다. 이제 페인이라는 여자의 거처만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카니발 단원들 중에서 그녀를 처치해 줄 사람을 찾아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이라면 그는 본 능적으로 자신이 있다. 월요일 아침, 이든은 칙을 데리고 일리노이즈 주정부 청사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 의 시선이 모두 자신들에게만 쏠리는 것 같아, 그녀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무척 애쓰 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실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저마다 바쁜 사 람들이니까. "이쪽이에요." 이든은 칙에게 나지막하게 말하면서 중앙 홀의 왼쪽으로 그를 안내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엘리베이터는 저쪽인데." "그쪽에 있는 안내 데스크는 우리 사무실 아가씨들이 담당하고 있거든요. 메릴에게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그녀는 칙이 입고 있는 양복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저 양복이 갑자기 어디서 났을 까?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태피가 갖다준 것이지만 칙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처음 보 는 것이었다. 트럭에는 그런 옷이라곤 없었던 것이다. 그곳에 걸려 있던 것이라고는 낡은 진과 셔츠뿐이었던 것을 그녀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실크 브랜드처럼 보였고, 신고 있는 구두도 이탈리아 제 수제화였다. 그는 거기 다가 바나나 리퍼블릭 스토아에서나 발견함직한 고급스런 서류가방까지 들고 있었다. 칙은 아침 일찍 사라졌다가 그런 모습을 해가지고 다시 나타났던 것이다. 이든은 메 이 시에게서 갈색 가발을 빌려서 자신의 머리를 변장하고 있었다. 그에게, 입고 있는 옷 이 어디서 난 거냐고 물어도 그는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로 다가갔다. 칙이 버튼을 누르는 동안, 이든은 혹시나 아는 사람이 주위에 있지 않 나 살펴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갔을 때 번즈가 자리에 없어야 할 텐데 말이에요." 이든이 조그마한 소리로 칙에게 속삭였다. "그는 지금 모금 운동을 하느라고 무척 바쁠 거야." 이든은 그의 말이 전과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를 아무래도 다시 쳐다보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모습도 전 같지 않다. 고급 양복에다 머리 손질까지 깨끗하게 하고 있어서 그런지 전보다 한결 미남으로 보인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그 녀 를 돌아보며 왜 그러느냐고 묻고 있었다. 이든은 눈길을 돌려 버렸다. 엘리베이터가 소리를 내며 멈춰섰다. 이든은 칙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그의 넥타이 핀을 살펴보았다.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발하며 박혀 있는 것은 실은 지르콘이라는 것 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향긋한 아프터 세이브 로션 냄새가 났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 리며 점심식사를 하러 나가는 듯한 사람 들이 우루루 쏟아져나왔다. 칙은 텅빈 엘리베이터 안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여기까진 무사하군." 그는 긴장된 소리로 말했다. 이든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 "경비원 아저씨가 내 신분증을 보자고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왜 보자고 하겠어?" "이 머리 때문에." 그녀는 가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진짜 내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렇다고 가발을 하지 않으면 동료 직원들의 눈에 띄어 일이 이상하게 전개될 우려가 있었다. "여자들이야 항상 헤어 스타일을 바꾸는 법인데 뭐. 게다가 신분증에 붙어 있는 사진 으로는 본인인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지." "정말이에요." 이든은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엘리베이터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이용하여 칙에게 말했다. "그 목걸이 고리를 낮에 햇빛 아래에서 살펴 보았어요." "그래서?" "아주 오래된 것이었어요." "골동품이란 뜻인가?" "그런 뜻이 아니라 그 고리는 구식이라는 말이에요. 우리 어머니와 비슷찬 세대가 사 용하던 목걸이에요." "킴 퀸런은 모델이야. 특별한 분장을 위해서 목걸이와 옷을 중고품으로 구입했는지도 모르지." 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금요일 밤에 그녀가 입고 있었던 옷은 중고품이 아니었어요. 누군가가 그녀에게 희 귀 하고 값비싼 선물을 사주었던 게 분명해요." "누군가라고? 스탠턴 번즈가 아닌?" 엘리베이터가 서려고 속도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것을 알려면 그녀의 아파트에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자면 그녀가 어디 에 살았는지 먼저 알아야죠." "그건 그렇고, 그 증거물은 어디에다 보관하고 있지?" 칙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주 안전한 곳에 두었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은 경비원 사무실을 지나쳐서 번즈의 사무실로 걸어갔다 . 경비원은 그들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만 일이 순조롭게 풀 린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이든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아침 일찍 번즈의 사 무실로 전화를 걸어서 번즈의 여비서가 점심을 몇 시에 먹으러 가는지 확인해 둔 터 였 다. 그 여비서에게 특별한 일이 없다면, 지금쯤은 자리를 비우고 없을 것이다. 아니, 없 어 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든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 었 다. 무슨 일로 찾아 왔다고 설명해야 하나? 이든은 암담한 기분으로 사무실 문을 열 고 들어갔다. 데스크 뒤에서 갈색 머리의 아가씨가 컴퓨터를 만지며 콧 노래를 하고 있 었 다. 이든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갈색 머리는 고개를 돌려 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길은 곧 이든의 뒤에 서 있는 칙에게로 옮겨갔다. "도와 드릴까요?" "크레이머 부인이신가요?" 이든은 그녀가 번즈의 비서가 아닌 줄 짐작하면서도 그렇게 물었다. "아니에요, 미세스 크레이머는 점심을 먹으러 나갔는데요." 아가씨는 컴퓨터를 짜증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컴퓨터가 말썽이에요. 이 서류를 빨리 끝내야 하는데 속을 썩이는군요." "그럼 기다리겠소." 칙은 건너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세요." 두 사람의 존재는 갈색 머리의 일을 더욱 방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타이핑을 하면 서도 두 사람의 태도를 슬쩍슬쩍 살펴보곤 했다. 이든은 칙이 태연한 것과는 반대로 가슴이 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크레이머 부인이 돌아오기 전에 안쪽에 있는 번 즈의 사무실을 조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예상하지도 않았던 방해물이 나타난 것이다, 갈색 머리는 여간해서는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지가 않다. 이러는 사이에 크 레이머가 돌아오면 정말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때 갈색 머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들에게 물었다. "커피를 드릴까요?" 그녀는 칙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칙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아뇨. 그보다도 우리 때문에 점심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칙은 싱긋 웃으며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야 저 갈색 머리를 내쫓을 수가 없지, 하고 이든은 속으로 말했다. 저 갈색 머리는 칙에게 벌써 홀딱 반해 버렸다. 그 녀는 시계를 얼른 보았다. 점심 시간이 끝날 때가 거의 되어 가고 있다. 앞으로 10여 분 정도만 지나면 크레이머는 돌아올 것이다. 마침내 갈색 머리가 서류를 챙겨들고 자 기 사무실로 돌아갈 태세를 취하더니 칙에게 생글 웃어 보이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운수가 좋으면 저 아가씨 당신과 점심을 같이 하자고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겠군요." 이든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빈정거리는 투로 칙에게 말했다. "질투하는 것 같군." "웃기지 말아요. 난 잡힐까 봐 걱정이에요."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지키고 있지. 그 여비서가 나타나면 임기웅변으로 어떻게 해 볼 께." 이든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다시 말했다. "아주 곤란한 일이기는 하지만 누구라도 그 일을 해야만 해." 그러면 번즈의 사무실을 조사하는 일은 그녀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할 수 없지. 이 일은 내가 하자고 한 것이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번즈의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콩튀듯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먼저 번즈의 개인 파일을 뒤 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특별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데스크 서랍 을 뒤졌다. 가운데 서랍에서 번즈의 아내가 밍크를 걸치고 찍은 사진이 나왔다. 론다 번즈는 아직 나이에 비해서 젊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사진은 수년 전에 찍은 것으로 보였다. 늘씬한 허리가 그대로 있었다. 최근엔 그녀의 허리에 살이 올라서 아름다운 곡선을 잃었다. 그녀에 대해서는 이든도 텔레비전이나 잡지 따 위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남편 번즈와 킴 퀸런과의 관계에 대해서 그녀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이든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녀의 사진을 서랍 속에다 다시 넣어 두 고, 이든은 이제 물러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라도 번즈의 여비서인 크레이 머 부인이 돌아오면 큰일이다. 그러나 데스크 위에 놓여 있는 번즈의 다이어리가 눈에 띄 었다. 그녀는 다이어리를 넘기며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주일쯤 전의 날짜에 K. Q.라는 이니셜과 함께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K. Q.라면 킴 퀸런의 앞머리 글짜가 틀림없다. 이든의 가슴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전화번호를 옮 겨 적을 종이를 찾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칙이 들어왔다. "서둘러야 해." "알았어요." 이든은 급한 김에 그 다이어리를 찢어서 칙에게 넘겨주었다. 옮겨 적을 시간이 없었 던 것이다.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그 찰나에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들어섰다. 중년의 그 여자는 두 사람을 보자 질겁 을 하며 놀랐다. 이든은 그녀가 바로 번즈의 여비서라는 미세스 크레이머란 걸 알았다. "당신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죠?" 크레이머는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경비원을 부르기 전에 빨리 대답해 봐요!" 6 이든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크레이머를 바라보았다. 무어라고 변명을 하려고 했으나 입이 붙어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칙이 그녀에게 침착하라는 눈치를 보냈다. 그는 이 든 이 넘겨준 다이어리 쪽지를 바지 주머니에다 슬쩍 집어넣고는 크레이머에게 말했다. "아, 당신이 바로 검찰총장 번즈 씨의 비서시군요." "그래요." "처음 뵙겠습니다." 칙은 세련된 웃음을 띄며 크레이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찰스 러빗이라고 합니다. 러빗 프로모션의 대표죠.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 " 그는 여비서에게 다가서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든은 크레이머가 칙이 내민 손을 무시 하고 아직 의심스런 눈초리를 풀지 않고 있는 것을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지켜 보고 있 었다. 칙은 태연하게 자신의 손을 거둬들여서 바지 주머니 속에다 넣었다. "모르겠어요, 나는... 러빗 프로모션이라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여비서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쨌든 그건 당신들이 이곳에 들어온 이유를 설명해 주진 못해요. 여기서 무엇을 하 고 있었죠?" "나는 당신의 고용주를 만나려고 했던 겁니다." 칙이 설명했다. "우리 회사는 지난 수년간 정치 캠페인을 전문으로 해왔습니다. 우리는 번즈 씨를 주 지사에 올려놓을 치밀한 캠페인 작전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분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곳까지 마구 들어와서 제집처럼 여기서 있었다는 말씀 이에요?" "에디와 나는 번즈 씨가 사무실 안에 계신 줄 알았습니다. 들어와 보니 안 계시기에 막 나가려던 참인데 댁이 들어오셔서... 아, 소개를 드리죠. 내 여비서인 에디 양입 니 다." 그는 이든의 손을 끌어당겨 크레이머 앞으로 데려오며 말했다. 에디라구? 그의 여비 서 ? 이든은 크레이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칙의 너스레를 방해하 고 싶지 않았다. 곧잘 하고 있으니까. 그녀가 바라고 있는 것은 어서 이 사무실을 무사 히 나가는 일이었다. "번즈 씨는 오늘 돌아오시지 않아요. 그리고 이 사무실 안에는 그의 허락이 없이는 아 무도 들어올 수 없게 되어 있어요. 나가 주세요." 크레이머는 처음보다 많이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 "번즈 씨를 꼭 만나야 합니다. 오늘 시간이 없다면 내일이라도 약속을..." 칙이 사무실에서 나오며 크레이머에게 말했다. "약속이라구요?" 크레이머는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좋아요, 그렇라면 내주중에 그가 시간을 낼 수 있겠는지 봅시 다." "금주 내라야 해요." 칙이 우겼다. "빨리 만날수록 번즈 씨가 좋아할 겁니다." 이든은 그가 너무 밀어붙이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가슴이 죄어들었다. 그는 그녀의 마 음을 눈치채고는 슬쩍 윙크를 했다. 넉살좋은 사내 같으니라구! 크레이머 부인은 수 요 일로 날짜를 정해 주었다. 칙이 워낙 자신만만하게 나오니까 정말 중요한 일인가 보 다 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든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위기는 이제 벗어난 것 같았다 . 얼마 후 두 사람은 랜톨프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든은 칙을 돌아보며 웃었다. "당신 넉살은 알아줘야겠더군요. 머리가 제법 빨리 돌아갔어요. 솔직히 당신의 그 임 기웅변에는 놀랐어요." "그랬겠지." 칙은 걸음을 멈추며 그녀에게 말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크레이머 같은 인텔리 여성을 설득시킬 수 있겠나 하고 생각 했겠지!" 이든은 그의 냉소적인 말투에 깜짝 놀라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가 한 말 가운 데서 그를 모욕한 부분이 있었더란 말인가?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이든은 그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말 뜻은 잘 알아." 칙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디 좀 둘러볼 데가 있어. 나중에 헐리 걸리에서 만나? "몇 시에요?" 이든은 그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칙은 어깨를 들썩하고는 말했다. "모르겠어." 그리고는 이든을 사람들 속에 남겨 두고는 사라져갔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든은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간 그를 생각하며 그자리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까지 잘 하다가 왜 갑자기 우울한 낯짝을 짓는 거지? 맘대로 하라지! 그가 그러는 이유를 이든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젠 무엇을 해야 하지? 그녀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데니스 카메론 을 찾아가는 일이다. 이든은 칙이 자신의 일을 돕겠다고 나서기 전에 데니스를 생각했었 다. 한 때는 그녀의 약혼자였던 데니스는 그녀가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할 사 람이 아니었다. 이든은 러셀 스트리트로 발걸음을 돌리며 어쩐지 내키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데니스는 좋은 남자다. 그만하면 별로 나무랄 데라곤 없는 남자였다. 이든도 그와 결혼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포기했다. 하지만 그를 포기한 것이 남자와의 결혼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그 의 액세서리가 되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다른 숱한 여자들처럼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았다. 자기나름대로의 의미를 찾고 싶었고, 결혼을 하더라도 남 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인생을 추구해 나가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었다. 데니스는 그녀를 이해했다. 그래서 약혼이 깨어진 다음에도 계속해서 그녀의 친구로 남았다. 벌써 2년 전의 일이었다. 그에게 지금 그녀가 당면하고 있는 일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는 어떻게 말할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야지." 그녀의 얘기를 듣고 난 데니스 카메론은 그렇게 말했다. 지드란 사내와 함께 운영하 고 있는 그의 법률 사무소는 그런대로 인기가 있었다. "귀찮게 해서 미안해." 이든은 그가 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밝은 얼굴이 되었다. "스탠턴 번즈에 대해서 정보를 제공해 주면 고맙겠어." 데니스는 이마를 약간 찡그렸다. 그는 민주당 위원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이미 민 주당 정치 조직에 발을 들어놓은 지 오래된 일이었다. 잘생긴 이목구비에다 정치적 감 각도 예민해서 곧 워싱턴에도 사무실을 낸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말 골치 아픈 일에 얽혀들었군. 그래, 알고 싶은 게 뭐야?" "번즈에 대한 모든 것. 그의 생활이나 취미, 기타 당신이 알고 있는 사항은 모두 참 고 가 되겠어." "개인의 사생활까지도 말이야?"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되면 그것까지도 부탁해."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겠는데?" "미안해, 그 이상은 설명할 수가 없어." "또 그 소리로군." 어색한 기운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든은 그를 찾아온 것이 실수라고 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변해 있었다. 그는 이미 이전의 데니스가 아니었다. 그 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아직 가지 마." 데니스가 말했다. "이대로 가면 나는 뭐야? 이든은 이제까지 잘 해온 것 같애." "정말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동안 말없이 그녀는 바라보았다. 이든은 그에게 미 안한 생각이 들었다. 한때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다. "스탠턴 번즈는 아주 야심적인 사내지." 데니스가 말했다. "그런데 그의 아내인 론다는 그보다 훨씬 더 심한 권력추구형이야. 번즈를 뒤에서 몰 아붙이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여자야.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백악관으로 밀어올리려 는 야심을 가지고 있어." 살인자가 대통령으로? 이든은 소름이 끼쳐왔다. "그래서 그처럼 요란하게 결혼을 했군요? 그런데 그들의 사생활은 어때요?" "사실은 나도 잘 몰라. 그렇지만 소문에 의하며 두 사람은 별로 행복하지 못한가 봐. 심한 마찰이 있다고들 하더군." 혹시 죽은 그 여자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이든은 그 소리를 데니스에게 할 수는 없 었 다. "마찰의 원인이 혹시 여자 때문은 아닌가요?"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월리 덱커라는 사내가 그들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데, 아주 전 문가라고 하더군." "무슨 전문가라는 말이야?" 이든은 데니스를 이용한다는 생각이 죄스럽기는 하지만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번즈의 캠페인 매니저야. 아주 유능한 사내인 모양이야. 그렇지만 나라면 그런 사내를 참모로 기용하지는 않아. 그의 전략은 좀 의심스러운 데가 있어." 그 캠페인 매니저라는 사내가 강변의 현장에서 처음 보았던 자이며 신문에 번즈와 함 께 실렸던 바로 그 사내라는 것을 이든은 이제야 깨달았다. "그의 작전이 어떤 점에서 의심스러워?" 데니스는 그녀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 여기서 무얼 하자는 거지? 갑자기 신문사 기자라도 되었나?" 이든은 그만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아니아, 데너스. 나는 기자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두 사람은 한동안 더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데니스는 번즈나 그의 스탭들에 대해 서 그 이상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든은 그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데니스는 엘리 베 이터까지 따라나가겠다고 우겼다. "또 다른 정보가 입수되면 전화해 줄께." 데니스는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녀에게 만족할 만큼 정보를 주지 못해서 미안하 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다가, 이든은 말을 돌렸다. "고마워." 그가 전화로 한 말은 녹음기에라도 담길 것이다.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엘리베이터가 와서 멈추었다. "안녕." 데니스는 그녀에게 다가와서 볼에다 가볍게 키스했다. 이든은 그 순간 이상한 거부감 을 느꼈다. 자신은 이미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순 간 왜 치키 러빗의 얼굴이 떠올랐을까? 미시건 호수가 마주보이는 창문 앞에서 칙은 거친 몸을 가죽의자에 부려놓았다. 그는 두 발을 창틀 위에 걸쳐 놓고 등받이에 깊숙히 기대었다. 확실히 트럭 뒤에 쭈그리고 앉은 것보다는 편하다. 서른 여섯의 나이가 늙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자신의 몸이 이렇게 편한 것을 민감하게 알아 채는 것을 보니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쾌나 성가시게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여자다. 높은 코에 걸맛게 오만한 여자. 자신을 카니 발에 따라다니는 놈팽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여자. 그런 여자가 무슨 일을 당하건 상관할 이유가 뭐람?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녀의 일에 신경이 쓰인다. 이제 와서 슬그 머니 꼬리를 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녀의 일에 너무 깊이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그 는 한 사내가 호수가를 강아지와 함께 달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전화기를 끌어당겼다. 다이얼을 누르자 곧 전화국이 나왔다. 그는 주머니에서 꺼낸 종이쪽지에서 번호를 읽 어나갔다. 잠시 후에 교환양이 그에게 주소를 둘러주었다. 킴 퀸런의 주소였다. 그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안락의자에서 잠시 더 쉬었다. 그리고 마침내 구두를 신고 의 자에서 일어났다. 거실을 거쳐서 현관으로 나온 그는 계단을 내려와서 저택의 바깥으 로 나왔다. 회색돌로 지머진 맨션을 빠져나온 그는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세웠다. "어디로 모실까요, 손님?" 운전대 뒤에 앉은 기사는 바짝 마른 파키스탄 인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칙은 그에 게 말했다. "레이크 포인트 타워로 갑시다." 이든은 카니발 광장의 뒷길로 해서 트럭으로 돌아왔다. 가급적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 고 싶지 않아서였다. 대부분의 여자단원들은 유니폼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옷차 림은 눈에 띄기가 쉬웠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칙의 트럭으로 다가오던 그녀는 이상한 소리에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마치 트럭 뒤의 잠을쇠가 덜거덕거리는 듯한 소 리였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트럭 사이로 숨어 들 었다, 그런데 왜? 그녀는 어쨌든 누군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트 럭을 돌아가기도 전에 그 사람은 다른 두 개의 트럭 사이로 몸을 감추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사내의 팔뚝에 새겨진 문신을 얼핏 보았다. 게이터 요스트다! 이든은 그 를 따라잡으려고 달려갔지만 허사였다. 그는 마치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신에 광장 쪽에서 시트 야코니가 어슬렁거리며 걸어왔다. 그와 늘 붙어 다 니 던 친구는 처음으로 보이지 않았다. "헤이, 아가씨. 뭐가 그리 급하지?" 그는 검은 눈을 번득이며 말을 걸어왔다. "당신의 귀여운 친구는 어디 갔지?" 이든은 위험을 느꼈다. 그렇다면 무서워하거나 도망을 치면 더욱 위험을 부르는 꼴이 된다. 그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일거리를 찾고 있어요. 어디 적당한 자리가 없을까요?" "오, 그래? 당신의 그 친구도 알고 있나?" "아마 그렇겠죠." "그런 줄은 몰랐는데." 그는 가까이 다가와서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재미있는 일이라야 되겠지, 안 그래?" 그는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며 말했다. "시즌이 끝나가잖아요? 한몫 챙겨 두지 않으면 겨울을 나기 어렵죠. 당신은 겨울을 어 떻게 보낼 계획이세요?" 시트는 씨익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가씨를 돈으로 행복하게 해주면서 즐겁게 보내지." 사내에게서 위험을 느끼면서도 이든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뒷걸음질치지 않았다. 그 렇 지만 유사시에는 기습을 가할 생각이었다. "오, 그래요? 누구와?" "금년엔 아직 그 행운의 여인을 결정하지 않았어." 그는 이든을 튼럭으로 밀어붙이며 그녀의 블라우스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렇지만 당신이 그 돈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면, 당신으로 결정할 수도 있지. 내 말을 믿어요, 아가씨. 나는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어. 이 시 트 야코니는 결코 여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남자야." "그건 확인할 길이 없겠군요. 왜냐하면 나는 당신의 제의에 관심이 없으니까." 그녀는 트럭의 문을 열고 안으로 피신할 생각으로 돌아섰다. 그 순간 그가 덤벼들었 다. 그의 완력에 의해서 이든은 그의 가슴속으로 쓰러졌다. "놔요!" 이든은 소리를 질렀다. "못 놓겠다면?" 그가 위험스럽게 나왔다. "이 손을 놓으면 이 일은 없었던 걸로 하겠어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설사 너의 그 친구가 와도 그렇게 만들지는 못할걸. 그래, 어 떻 게 하겠어? 나와 잘 해보는 게 어때?" 이든은 위기를 느꼈다. 하이힐을 신은 발로 여차하면 그의 정갱이라도 걷어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가 싫다고 하지 않나?" 이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스 라이얀을 만나러 왔는데요." 칙은 레이크 포인트 타워의 로비에서 경비원을 붙들고 그렇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라이얀 씨가 안에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경비원은 명단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가 라이얀을 열심히 찾고 있는 동안에, 칙은 킴 퀸런의 아파트 호수를 찾고 있었다. 명부에 나와 있는 Q란에는 퀸런 한 사람밖에 는 없었다. 칙은 그녀의 아파트 번호를 머릿속으로 암기했다. 경비원이 헛수고를 하 고 있다는 것은 칙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라이얀이란 사람은 낮에는 집에 있지 도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칙은 경비실의 세부 장치를 대충 살펴보았다. 홀 복도와 차고, 그리고 하역장을 비추고 있는 카메라가 잡고 있는 영상이 모니터에 나타나고 있 었다. 이런 정도라면 라이얀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래도 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러자면 이든을 먼저 라이얀에게 소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이든은 결국 칙의 정체에 대해서 눈치를 채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가 차라리 바랐던 일인지도 몰 랐다. 그녀에게 직접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알게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안 계신데요." 경비원은 머리를 흔들며 칙에게 말했다. "라이얀 씨는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칙은 그렇게 말하고 건물에서 나왔다. 버스 정류장에 있는 가판대에서 신문을 한 장 산 그는 곧바로 도로를 가로질러서 카니발 광장을 향했다. 트레일러와 트럭들을 세워 놓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그는 나무와 철사 따위로 대강 엮어 놓은 울타리를 훌쩍 타 넘었다. 그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에 그는 몸이 굳어졌다. 시트 야코니는 적의에 찬 표징으로 트럭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며 돌아서고 있었고, 이든은 미소 띄운 표정으로 그를 떠나보내며 한 손을 주드 니스트롬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거리가 멀러서 그들이 하는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칙은 묘한 질투심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이빨을 지긋이 깨물었다. 주먹이 저절로 불끈 쥐 어졌다. 니스트롬의 날카로운 턱을 멋지게 한 방 먹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는 감 정을 억눌렀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 내가 왜 주드에게 질투를 느껴야 하지? 이 든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녀에 대해서 무슨 우선권이 있는 건 아니 다. 그렇지만 주드에게는 일전에 미리 경고해 둘 것이 있다. "니스트롬!" 그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기분 좋게도, 이든은 주드의 어깨에 올려놓고 있던 손을 얼른 내렸다. 두 사람은 칙의 출현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여자에게는 손대지 말라고 경고했지?" "그게 아니야, 칙..." "닥쳐! 당장 꺼지라구. 이든은 자네 같은 건달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 이 여자는 내 여자라구, 알겠나?" "칙!" 이든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주드는 단지..."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아. 당신은 트려에 들어가 있어. 이 자를 보내고 나서 곧 들어 갈 테니까." 이든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며 트럭 안으로 들어갔다. "이든, 당신은 이 사내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없소." 주드 니스트롬이 화가 난다는 듯이 그녀의 등에다 대고 소리쳤다. 그러나 이든의 대 답 은 칙이 생각하기에도 놀랄 만한 것이었다. "아니에요, 주드. 나는 그의 말에 따르 기 로 했어요. 그렇지만 아까 일은 정말 고마웠어요." 그리고는 트럭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가 그렇게 대답하는 데는 어지간히 속이 뒤틀렸을 것이라고 칙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게임의 룰을 존중하는 뜻에서 그 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녀의 말을 들었나, 주드? 이제 알았으면 가라구. 그리고 다시는 그녀를 넘볼 생각 은 말아." 칙은 부드럽게 타일렀다. 어쨌든 이든이 그렇게 말해 줘서 그는 기분이 좋았다. 주드 니스트롬은 어깨가 축 쳐져서 그를 노려보았다. 무어라고 할말이 있는 듯했으나 그 는 입을 다물고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주드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트럭에 올라가던 칙은 커다란 북극곰 인형에 얼 굴을 얻어맞고 말았다. 그는 멍한 얼굴로 인형을 던진 이든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왜 이러는 거야?" 그는 화가 나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이러는 거냐구요? 당신이야말로 왜 그러는 거예요?" 이든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주드는 나를 만나러 온 게 아니란 말이에요. 우연히 지나다가 시트가 나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을 보고 도와주고 있었단 말이에 요. 그런데 당신은 그에게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어요. 당신은 혼자서 제멋대로 결론을 내리고는 그에게 무례하게 굴었어요. 그에게 사과하세요!" 칙은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그녀가 던진 곰 인형을 집어 서 상품 박스에다 담았다. 그리고는 그녀를 트럭의 벽쪽으로 밀고 나서 두 발로 울타리 를 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그렇지만 그게 바로 나야. 그러 니 어쩌겠어?" 이든은 이를 앙다물고 그를 외면했다. 칙은 굳게 다문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키스 로 부드럽게 해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이것 봐, 그건 구애야." 그는 은근한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다 속삭였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며 그 녀의 얼굴을 자기 앞으로 돌렸다. "말하자면 자신의 심중을 왜곡되게 표현하는 거지.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방법은 버리고 당신에게 진짜 남자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겠어." "그런 구애 방법은 어디서 배운 거예요?" 이든은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배우긴 어디서 배워? 나 스스로 개발한 거지." 그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이든은 픽 웃으며 말했다. "아주 괴상한 구애 방법도 다 있군요. 방법이 참 나빠요. 치졸하기도 하고." "그렇다면 이제부턴 본격적인 걸 보여줄께." "웃기지 말아요." "왜 그래? 갑자기 두려워졌어?" 그는 그녀의 허리를 힘 주어 안으며 말했다. "남자와 관계를 갖는 것이 두려워?" 이든은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마음 을 다잡으면서도 몸이 이미 말을 듣지 않았다. 몸속의 피가 끓는 것처럼 온몸이 뜨거워 져 왔고, 숨결이 거칠어져 가고 있었다. 그의 가슴과 맞닿는 부분은 이미 녹아들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그가 빨리 자신의 입술에 뜨겁게 키쓰해 주기를 바랬다. 그 러한 욕망은 이제 그녀의 의지로는 막을 수 없는 강렬한 것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 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리고 힘껏 그녀를 가슴에 안 았 다. "당신은 아름다워." 그는 신음하듯 속삭였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처 음엔 부드럽게, 그리고 차츰 격렬하게 변해갔다. 그녀의 입술에서 빰으로, 귓불로, 그 리고 목덜미로 마치 폭풍이 몰아치듯 한차례 격렬한 키스가 지나갔다. "왜 나를 길거리에다 남겨 두고 혼자 가버렸죠?" 칙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그녀가 물었다. "음, 일이 좀 있었지.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그는 그녀를 의자에다 조심스럽게 앉히고 신문을 펼쳐들며 말했다. "우리의 여주인공이 계속 뉴스의 촛점이 되고 있군, 그래." "어디 좀 봐요." 이든은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칙은 기사를 손으로 가리켰다. "검시관은 그녀가 목 이 부러져서 죽었다고 말하는군. 흠, 그리고 그녀의 팔은 세 곳이나 부러져 있대." 이든은 기겁을 하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목걸이에 대한 얘기는 없어요?" 칙은 신문 기사를 읽었다. "퀸런의 목에는 두 개의 상채기가 나 있었는데, 아마도 목걸이에 의한 것 같다고 검 시 관은 말하고 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이든은 소리쳤다. "문제의 목걸이는 피살자가 죽기 전에 범인이 사납게 잡아챈 것으로 보이며, 피살자 의 목과 팔은 현재로선 확인되지 않은 둔기에 의해서 얻어맞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 찰에서는 아직 혐의점을 가질 만한 주변의 인물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번즈는 그 목걸이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 것을 염려하여 강제로 그것을 빼앗 았을 거예요. 퀸런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대항했을 거구요." "그래서 그가 주먹으로 그녀의 목을 쳐서 부러뜨렸다?" "그건 모르죠. 다른 무엇으로 쳤는지도. 어쨌든 그는 그녀가 죽기 전에 목걸이를 채 갔 어요. 서로 다투다가 그가 갑자기 이성을 잃었는지도 모르죠." "가능성 있는 얘기야. 나는 그가 자신의 정치 캠페인에 그녀가 방해물이 되지 않았을 까 의심하고 있어." "아니면 아내와의 불화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몰라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 "정확한 것을 알려면 그녀의 집을 뒤져 보면 될 거예요." "뒤져볼 수 있지." "그녀의 주소를 알아냈군요? 그 전화번호를 이용했나요?" "당신은 쾌나 센스가 빠르군. 필요한 때에는 말이야." 이든은 그게 무슨 뜻인가 하고 이마를 찡그렸으나 그에게 묻지는 않았다. "그래, 그녀는 어디서 살고 있었죠?" "길 건너편 콘도미니엄에서." "그렇다면... 레이크 포인트 타워에서 말인가요?"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치뜨며 칙을 바라보았다. "거기는 경비원들이 많아서 들어가기가 어려운데." "정문으로 들어가기는 어렵지." "그러면 어디로 들어가죠?" "건물 뒤에 있는 차고를 통해서 들어가는 수가 있지." "그렇지만 그녀의 아파트엔 어떻게 들어가죠?" "그야 문의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지." "그런 기술을 어디서 배웠죠? 말해 봐요." "떠돌이 생활에 이골이 나면 그 정도 기술은 저절로 몸에 붙게 되어 있어. 우리 같은 떠돌이들은 가끔 잠자리를 구해서 빈 아파트를 열고 들어가는 일이 흔히 있으니까 말 이야. 주인이 휴가를 떠나고 없는 빈 아파트나 집은 모두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될 수 있거든." 이든은 마치 머리가 둘 달린 괴물을 바라보듯이 그를 쳐다 보았다. "왜 그래? 그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무래도 우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아요. 남의 아파트를 마구 부수고 들어간다는 건 좀..." "퀸런의 아파트에 들어가자는 아이디어는 당신이 낸 거잖아?" 칙은 조금 짜증스런 듯이 말했다. 이든은 할말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그러한 행위는 엄연한 범죄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는 왜 마다 않고 하려는 것일까? 이든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칙은 이든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 에게 끌리고는 있지만, 신분이 너무 하찮아서 적극적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고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는 그런 그를 좋아한다는 그 자체를 부끄럽게 생각하 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를 외양 그대로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든, 이건 당신 맘에 달렸어. 싫다면 킴 퀸런의 아파트에 들어가는 일은 잊어버리 자 구." 정말 잊어버리고 싶은 표정을 그녀는 지었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죠?" 레이크 포인트 타워 뒷모퉁이에서 이든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칙에게 물었다. 그곳에 서 서성거린 것이 벌써 한 시간이 경과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들의 모습이 누군가의 주 의를 끌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날이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두 워질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으나, 칙은 러시아워가 잠입하기에는 더 좋다고 우겼었다. "좀 참아요, 아가씨. 이런 일에는 참을성이 필요한 법이니까." 그의 핀잔에 이든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그는 모르는 것일 까 ? 그녀는 잠목들 뒤에서 도둑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이 싫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그 에게 얘기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칙은 이런 아파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편리한 진과 셔츠만 고집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모니터에 우연히 비칠 경우를 생각해서라도 그런 아파트 생활자에게 걸맞는 고급 의상을 걸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카니발 이 나 따라다니는 떠돌이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해내는지 이든은 이상하 기 만 했다. "이제야 오는가 보군." 그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자동차 소리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둘은 담 모서리에 몸을 바짝 붙이며 긴장했다. 칙이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 "차가 지나갈 때까지 꼼짝 말고 기다려야 해. 그리고 저 차고 문이 닫히기 전에 재빨 리 뛰어드는 거야, 알겠지?"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너무 빨리 뛰어들면 차를 탄 사람의 눈에 뜨 일 우려가 있고, 어물거리다간 문이 닫쳐 버릴 판이었다. 그리고 재수가 없으면 비디 오 카메라에 자신들의 모습이 잡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차고의 문이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올라가기 시작하자, 칙은 그녀의 손을 꼭 쥐어 주 었다. 이든은 그의 그런 배려가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시켜 줌을 느꼈 다. 문은 차가 통과하자 곧 내려오기 시작했다. 칙이 그녀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 문은 이미 절반 쯤 내려오고 있었다. 그가 안으로 뛰어들며 굴렀다. 그녀도 그를 따 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내려오는 철문 아래로 간신히 굴러들어갔다. "해냈어요!" 이든은 철문이 시멘트 바닥에 닿는 소리를 들으며 칙에게 속삭였다. 그가 그녀를 끌 어 당겨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등뒤에서 끌어안고 움직이지 못 하 게 했다. "저기에 카메라가 장치되어 있어." 그가 조그만 소리로 말하며 눈짓으로 건너편 천장을 가리킨다." "움직이지 마. 카메라에 잡히면 끝이야." 이든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가 등뒤에서 자신을 힘껏 껴안고 있는데다가 카메라 까 지 의식하니 진땀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카메라는 천천히 돌고 있었다. "저기에 잡혔을까요?" 그녀는 그의 단단한 근육을 의식하며 그렇게 물었다. "안 그러기를 바라야지." 칙은 그녀를 뒤로 당겨서 모퉁이를 돌며 말했다. 차고에서 홀로 빠지는 문을 통해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나왔다. 이든은 경비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자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엘리베이터를 타려 면 그 경비실을 지나야만 하는데, 그 경비실의 사면 벽이란 것이 모두 투명한 유리라 서 피할 재주가 없었다. 그러나 칙은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 는 태연하게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걷기 시작했다. 이든은 그와 함께 걸으며 그 가 속삭이는 말을 들었다. 경비원들도 이 아파트에서 사는 수백 명의 입주자들을 다 기억 하지는 못한다는 말이 었다. 그 말은 그녀를 약간은 안심시켜 주었다. 경비실을 지나치던 이든은 낯익은 여 자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그 여자는 경비실의 모니터를 담당하고 있는 경 비원과 무슨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젤다 헐리. 저 점쟁이 여자가 저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든은 속이 타들어오는 느낌 이 었다. 우리들 쪽을 쳐다보면 어떡하나? 불쑥 말이라도 던져오면 어쩐다지? 칙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이든은 쫓기는 기분으로 엘리베 이터 안으로 뛰어들었다. 젤다 쪽을 흘끔 보았는데 그제서야 이든은 젤다가 이미 자 신 들을 보고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그들을 바 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이 닫히자 이든은 칙을 쳐다보며 물었다. "젤다 부인은 저기서 무얼 하고 있죠?" "우리를 위해서 경비원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고 있지." "무슨 소리예요? 그러면 우리가 이곳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그녀에게도 얘기했단 말이 에요?" "그녀의 협조를 얻으려면 달리 방법이 없잖아?" 이든은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자연히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무슨 얘기를 했어요? 나에 관한 것을 모조리 얘기했나요?" "당신이 곤란을 당하고 있어서 내가 도와주고 있다고만 했어."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당신만 알고 있으라고 했는데." "젤다는 믿어도 돼." 그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이든은 더이상 따질 겨를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 기 때문이다. 그녀는 화가 나서 무조건 앞에서 걸어갔다. 한참을 가다가 보니, 자신은 킴 퀸런의 아파트 호수를 모른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고 칙이 따라오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복도의 맨 마지막 문 앞에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칙은 가슴 주머니에서 가죽으로 만들어진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그 케이스 안에서 두 가지 공구가 나왔는데, 하나는 자형의 금속이었고 또 하나는 끝이 묘하게 꼬부라진 철 사였다. 아무리 봐도 그것은 프로들이나 사용하는 그런 것이 분명했다. 이든이 그에게 물어 보려고 하는데, 옆에 있는 아파트의 문이 열리며 처녀들의 목소 리 가 들려왔다. 칙은 재빨리 도구를 손안에 감추었다. "내일 만나, 비비안." "안녕, 주디." 칙은 얼른 이든을 껴안았다. 그러자 문을 열고 나오던 아가씨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다 시 문을 닫고는 말했다. "저기에 이상한 커플이 서 있어." "어디에?" 다른 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든은 더럭 겁이 났다. 저 아가씨가 부모에게 나가 보라고 하면 어쩌지? 아니면 아래층의 경비원들에게 연락이라도 하면, 비상 벨이라도 누르는 날엔 정말 난리가 날 것이다. 그녀가 그런 생각으로 새파랗게 질려 있는데, 칙 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눌러왔다. 그리고는 귀에다 대고 조그맣게 속삭이 는 것이었다. "애인들처럼 행동해. 저들이 믿을 수 있도록 연기를 잘하란 말이야." 7 이든은 얼떨결에 칙이 하자는 대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키스하는 대로 자신도 열심히 그에 응하는 척했다. 그의 애무는 차츰 강렬해져 갔다. "걱정할 것 없어, 주디. 사랑을 나누는 한 쌍의 새일 뿐이야." 그러자 까르르 웃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엘리베이터까지 나가더라도 괜찮을 거야." "재미도 있을 거구." 다시 젊은 아가씨들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칙의 입술이 그녀의 턱선을 따라 흘러갔다 . 그의 숨결은 그녀를 온통 찌릿찌릿하게 만들었다. "저애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지?" 칙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를 보고 재미있어하고 싶대. 그러니까 좀더 멋지게 달라붙으라구." 이든은 자신이 너무 뻣뻣하게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다가오 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감고 더 멋지게 매달렸다. 그녀 는 칙에게 단지 입맞춤만 하려고 했는데, 그는 그녀의 입술을 자꾸만 열려고 했다. 그의 혀끝이 자신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오자, 그녀는 차츰 흥분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감 촉 이 희열로 동화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나지막하게 신음을 흘리며 그에게 밀착되어 갔다. 아가씨들의 웃음소리에 이든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이건 단지 연극일 뿐이라고 그녀는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그를 밀쳐낼 수가 없었다. 엘리때이터가 문이 열리고, 그 아가씨가 타고 다시 문이 닫힐 때까지도 그녀는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녀를 밀어낸 쪽은 오히려 칙이었다. 무안하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해서 그녀는 두 다리로 몸을 가누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녀가 떨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침묵을 지키고 서 있는 동안, 칙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능숙한 솜씨로 아파트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도구를 놀리는 그의 손은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어 보였다. 그가 손을 멈추고 갑자기 그녀를 조용히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녀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이든은 얼굴이 시뻘개지고 말았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 다.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마침내 칙은 아파트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든을 앞세우고 안으로 들어갔고 그가 스위치를 올리자 거실이 환해졌다. "불을 꺼요. 바깥에서 누가 보면 어떡해요?" 이든이 걱정했다. "걱정할 필요 없을 거야. 누가 킴 퀸런의 아파트 창문만 쳐다보고 있겠어? 그리고 바 깥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칙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멋진 아파트군요." 이든은 거실을 지나서 식당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감탄했다. "이런 아파트에서 생활하려면 주급이 천 달러는 넘어야겠군요."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걸." 칙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구들은 어쩐지 제자리를 잡지 못한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지만 모두가 고급이었다. 유럽풍의 가구와 동양적인 가구들이 적당하게 섞여 있 는 것 같았다. 방안은 돈으로 처바른 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모두가 새롭게 치장하고 새 로 들여놓은 것이긴 했지만 대체로 천박한 취향이 잘 드러나고 있었다. "뭔가 보이는 것이 있어?" 칙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모르겠어요. 다만 이 방은 여러 사람이 단 한가지에도 합의를 못하고 꾸민 듯한 그 런 난잡한 느낌을 줘요." "내 눈에도 그렇게 보여." "킴 퀸런은 미인이긴 했겠지만, 생긴 만큼 똑똑한 여자는 아니였던 것 같아요." "그 여자의 모델 경력을 보면 대단해." "그거야 그녀는 디자이너들이 만들어 준 옷을 입기만 했지, 직접 디자인하지는 않았 을 테니까 가능한 얘기죠. 이런 이야기는 우리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아요. 이제 뭔가 를 찾아내야죠." "아무래도 헛일하는 것 같아." 칙이 말했다. 하기야 킴 퀸 런이 죽은 후 이 아파트는 번즈의 부하들이 먼저 한차례 다녀갔을 거고, 그 다음은 경찰이 또 한번 뒤졌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 다르니까, 혹시 무슨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게 될지 누가 알아? 칙이 넓게 범위를 잡고 수색을 해나가는 동안, 이든은 주로 퀸런의 방을 세밀하게 조사했다. 그 녀는 장속의 서랍과 옷장, 욕실 따위를 하나씩 조사해 나갔다. 가구에 대한 그녀의 몰 취미는 그녀의 옷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프리 벤, 노마 카말리, 크리스천 디올, 클 라 우디 몬타나 등의 유명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옷들이 아무런 특색이나 취향도 없이 옷장에 잔뜩 걸려 있었다. 이든이 옷들의 상표를 살펴보고 있는데 칙이 안으로 들어 왔 다. "뭔가 좀 찾았어?" "많이. 그렇지만 확실한 건 없어요. 킴 퀸런은 개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돈을 마구 낭비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녀의 옷장에는 아직 한번도 입지 않아서 가격료가 그대로 붙어 있는 옷들이 수도 없이 많아요." "그녀는 모델로서 아주 잘 해나갔는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그녀가 그처럼 유명했다면, 나도 그녀를 보그나 엘레, 혹 은 코스모폴리탄에서 여러 번 보았을 거예요. 그녀가 지니고 있는 이 옷이나 물건들 은 대부분 선물로 받은 게 분명해요. 그리고 스탠턴 번즈는 이 모든 것을 사줄 수 있 을 만큼 부자예요." "그렇다 치더라도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래요, 우리는 킴 퀸런을 스탠턴 번즈의 정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뒤져 봐도 이 아파트에는 남자의 흔적이라고는 없어요. 남자의 옷이나, 아프터 쉐이브 로 션 같은 것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아요." "정말 그렇군. 확실히 이 아파트는 여자 혼자서만 사는 곳이야. 그래, 전혀 소득이 없 나?" "그렇진 않아요.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특히 그녀의 보석은 모두가 현대적인 것뿐이 에요. 내가 발견했던 목걸이의 고리와 같은 형태의 것은 없었어요. 당신은 어때요? 아 무런 행운도 발견하지 못했나요?" "내가 찾는 것은 그녀의 사진을 넣고 다니는 포트폴리오야. 커다란 것이라서 숨기기 도 어려울 텐데 보이지가 않는군. 모델이란 직업을 가진 여자라면 응당 그게 있을 텐데. 킴 퀸런은 아마 예외인 모양이지." 칙은 그녀의 옷장을 열고 들여다보며 말했다. "여기도 없군.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가 그것을 치웠다는 얘기가 되지." "정말 이상하군요. 어쩌면 퀸런은 그것을 에이전시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그건 말이 안돼. 그녀는 일이 생길 때마다 그것을 가지고 나가야 하거든." "찾아볼 만한 곳은 다 찾아봤어요?" "철저히. 그녀의 직업적인 사진 한 장도 찾을 수가 없었어. 누군가가 말끔히 치워버 린 것 같아." 칙은 이제 그녀의 서랍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사진뿐만 아니라 앨범이나 전화 번호부 같은 것도 전혀 보이지 않아. 마치 그 녀가 이 지상에서 갑자기 증발이라도 해버린 것 같아." "정말 그렇군요." 이든도 생각에 잠기면서 말했다. "나도 그녀의 개인적인 존재를 증명할 만한 물건은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난 이런 것을 발견했지." 칙은 주머니에서 잘 접혀진 종이를 꺼내 이든 앞에서 펼쳐보였다. 그것은 계약서였다 . "이 콘도미니엄의 임차 계약서군요. 5월 1일부로 계약이 되어 있어요." "임차인의 이름을 좀 보라구." 그러자 이든의 눈이 동그래졌다. "월리 덱커. 번즈의 캠패인 매니저 아니에요? 바로 이거예요, 우리가 알고 싶었던 것 은!" "단정을 내릴 수는 없지만, 차츰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이야." 이든은 비로소 어둡고 긴 터널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이젠 번즈에 관한 모든 것을 밝힐 때가 가까웠어요. 경찰이 이것을 어떻게 빠뜨렸을 까요? 다른 것은 모조리 다 쓸어가고서도 말이에요." "그들도 커피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패션 잡지 따위에는 별로 신경을 쓰 지 않았던 게지." 칙은 재약서를 다시 접어서 소중하게 안주머니에다 넣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난 이것을 보그 지의 갈피 속에서 찾아냈어." "어떻게 그 속을 찾아볼 생각을 했죠?" "패션예 대해서 워낙 무식해서 그냥 한번 들춰본 거지. 맨손으로 돌아가기도 뭣해서 말이야." 이든은 옷장 문을 닫으며 한숨을 쉬었다. "난 지친 것 같아요." 칙은 그녀의 어깨를 팔로 감싸 안고는 거실로 나왔다. "한 잔 하고 나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창가에 있는 진열장에 는 온갖 종류의 술 이 구비되어 있더군." "여기서 꾸물거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세요?" "어차피 주인 없는 집에 마음대로 들어온 처진대 뭐. 경찰이 오늘밤 다시 이곳엘 올 것 같지는 앉아. 번즈는 이곳엘 절대로 오지 않을 거구. 그는 이미 이곳에서 자신과 관련되는 것은 모조리 치워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이 푹신한 소파에서 잠시 쉬 어 간다고 해서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이든은 갑자기 피곤을 느꼈다. 그와 더이상 다투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그녀는 소 파에 깊숙히 기대면서 그가 꼬냑을 따는 것을 바라보았다. 눈꺼풀이 자꾸만 아래로 쳐지려고 하고 몸이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카니발 단원이 아닐 거라고 이든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가 말하는 내용이나, 행동하는 걸로 미루어볼 때 여느 카니발 단원과는 달라. 어쩌면 그는 다른 특별한 이 유 때문에 카니발에 잠시 몸을 숨기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지. 그의 정체가 뭘까? 참 으 로 묘한 사내야. 카니발에서 원볼 게임 가게를 운영하고는 있지만, 장사는 언제나 뒷 전이었다. 그녀가 칙에 관해서 구태여 깊게 알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데니스 와 의 파혼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칙에 비해서 데니스의 사회적 위치는 확고한 편이 다. 그런데도 칙이 그녀의 마음을 잡고 놓아 주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 닐 수 없었다. 칙이 그녀에게 꼬냑 잔을 넘겨주고 맞은편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앞 에 앉아서 느긋하게 미소짓고 있는 그를 바 라보았다. 어떤 여자라도 그에게 호감을 느낄 것이다. 그녀는 그가 준 꼬냑을 한 모금 마셨다. 목구멍에서 불이 이는 것 같았 다. 온몸이 짜릿해졌다. 그는 그동안 속에만 담고 있었던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당신은 왜 집에서 뛰쳐나와서 카니발 같은 데서 헤매고 있죠?" "그걸 나도 아직까지 모르겠어, 이유없는 반항 같을 걸까?" 칙은 씨익 웃고는 꼬냑을 한 모금 마셨다.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어, 나는 항상 최고 점수를 받아와야 했 고, 운동도 최고로 잘해야 했고, 인기 투표에서도 최고가 아니면 안되었지."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좀 지나치셨지. 아버지는 나를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 는 듯했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나의 미래를 당신이 스스로 설계해 주셨어 , 당신의 뒤를 이어 가업을 계승한다는 것이었지. 나의 반론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 으셨지." "어떤 내용의 가업인가요?" "내용은 중요치 않아. 문제는 아버지의 생각이지." 이든은 그가 더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가 소위 복에 겨워서 집을 뛰쳐나온 불행한 행운아라는 사실 을 알게 된 셈이다. "카니발 단원들과는 이제 정이 들어서 못 헤어지는 건가요?" "정이란 더러운 거야." 그는 농담조로 말하며 웃었다. "집으로 가끔 연락을 하나요?" "가끔 어머니께 잘 있다는 편지를 띄우지." "집을 나온 이래 부호님을 한번도 뵙지 않았단 말이에요?" "물론 뵌 적도 있지. 그렇지만 알게 모르게 아버지와의 사이엔 담이 쌓이고 있었어." 칙은 술잔 속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더니 남은 액체를 단숨에 홀짝 마셔 버렸다. "당신은 어때? 당신은 왜 부모 슬하에서 도망쳤지?" "도망쳤다니, 좀 이상하군요. 난 우리 엄마와 같은 직업을 택하기가 싫어서 나왔어요 . " "어떤 직업?" "아기 낳고 살림하는 직업 말이에요. 나는 아버지가 가업에 종사하도록만 해줬어도 집 을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아버진 여자가 너무 야심을 크게 가지면 안된다고 하셨죠. 적당한 남편감을 골라서 빨리 시집이나 가라는 것이었죠." 그녀는 집을 나올 때의 그 어려움에 비해서는 너무 쉽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취 직을 했다고 말했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딸에게 주던 모든 용돈을 중단했다. 그리고 그것을 딸이 조금도 벌 로 생각지 않자, 그는 딸 앞으로 신탁을 설정하고 모든 관계 를 끊어 버렸다. 그녀는 아직도 그 신탁으로부터 단 한푼의 돈도 찾아쓰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 거로군?" 칙이 결론은 그거냐는 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 셈이에요." "왜 결혼을 안하려는 거지?" "안 하려는 게 아니었어요. 아버지가 그때 마음에 두고 있었던 남자가 내 마음에는 들 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그 남자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든은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 남자는 사고방식이 우리 아빠와 흡사했어요. 나는 그와 약혼을 하고도 2년이란 세 월을 보냈죠. 결혼식을 뒤로 미룬 것만도 세 차례나 되었죠." "아버지께서 화를 내실 만하군." "화를 내실 만했어요." 이든은 웃으며 대꾸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호수와 시가지 위로 땅거미가 내리 고 있었다. 빌딩마다 불이 들어오고, 호수를 따라 줄이은 가로등에도 불이 켜졌다. 피 살된 여자의 생각만 떨쳐버릴 수 있다면, 그러한 정경이 아주 낭만적으로 느껴질 수 도 있을 그런 상황이었다. 이 아파트가 바로 죽은 그 여자의 보금자리였다고 생각하니 갑 자기 등골이 써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든은 들고 있던 꼬냑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 고 는 칙을 돌아보았다. "당신의 약혼자였다는 그 남자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하고 있지?" 칙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눈빛이 이상한 호기심으로 빛났다. "오늘 그를 만났어요. 그는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놓고 있죠. 민주당과도 연결되어 있 어요." "그를 왜 만났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죠. 그는 정치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요." 칙은 심하게 이마를 찌푸렸다. "그에게 어느 정도나 얘기 해 줬지?" "단지 내가 좀 곤란에 처해 있다고만 말했어요. 그래서 스탠턴 번즈에 대한 정보가 필 요하다구요. 그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스탠턴과 론다 사이에 불화가 있다는 정보만 알고 있더군요." "그 친구에게 당신의 거처를 말해 주진 않았겠지?" "물론이에요." 이든은 칙이 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데니스의 간여가 우리에게 어떤 위험을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염려 말아요. 그는 위험하지 않아요." "그를 확실히 신용할 수 있어?" "나도 사람을 볼 줄 알아요. 당신을 믿었잖아요, 안 그래요?" 칙은 말없이 잔에다 꼬냑을 다시 따랐다. 그녀가 옛날 약혼자를 다시 찾아갔다는 사 실이 별로 기분좋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이제부터는 무얼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든은 막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칙에게 물었다. "내일 아침엔 요키 에이전시를 조사해봤야겠어. 신문에는 킴 퀸런이 그곳에서 주로 일 해왔다고 나와 있으니까." "나도 같이 가겠어요." "안돼. 당신은 가게를 지켜야지. 두 사람이 그곳으로 가는 것은 시간 낭비야." "내가 가고 당신이 가게를 지키면 왜 안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건 내 아이디어니까." "내 문제예요." "내 도움이 필요없다는 말이야?" 칙은 위협조로 나왔다. "혼자서 다 하겠다면 지금이라도 말해. 난 손을 뗄 테니까. 그렇지 않다면 내 말대로 하든지. 당신보다는 내가 레베카 요키에게 더 잘해낼 수 있다니까."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이든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여자들은 나를 아주 매력 있는 남자라고 생각할 거야. 틀림없어." 그가 매력있는 남자라는 사실에는 그녀도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동조함으 로써 그에게 만족감을 주기는 싫었다. 이든은 이제 그의 도움이 없이는 자신의 이 어 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떻게 할 거야?" 그는 짓궂은 미소를 입술 끝에 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생각중이에요." 그녀도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도와주지." 그가 그녀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녀는 그가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지 직감적으 로 알았다. 그러나 묘한 기대감이 그녀를 물러서지 않고 그자리에 버티도록 충동질했다. 아니, 그의 강한 마력이 그녀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았다. 칙은 조금도 서둘지 않고 그녀에게 키스했다. 이든은 자신의 팔이 그의 목을 끌어안 는 것을 중지시킬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술도 저절로 벌어졌다. 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 다 꽃이 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근육질 육체가 그녀를 벽에 밀어붙였다. 그 의 손은 그녀의 가슴을 더듬으며 유두를 자극했다. 그녀는 숨이 막혀왔다. 그는 꼬냑 보다도 훨씬 더 그녀를 취하게 만들었다. 꼬냑, 이든은 그의 숨결에서 그 비싼 프랑 스 브랜디 냄새를 맡았고, 그의 혀에서 그 맛을 느꼈다. 우린 죽은 여자의 술을 나누어 마셨다. 그리고 그 죽은 여자의 아파트에서 함께 엉켜 있다. 그 생각은 이든의 가슴 을 써늘하게 만들었고, 활활 타오르던 관능의 불길에 차가운 물을 퍼부었다. 그녀는 칙의 가슴을 힘껏 밀치며 소리쳤다. "여기서 이런 짓을 할 순 없어요!" "그러면 여기서 나가자." 칙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우린 보다 로맨틱한 장소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든은 그의 갈색 눈동자가 밤하늘처럼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다. 자신을 뚫어지게 응 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마음을 마구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턱에 나 있는 조그마한 흉터를 바라보며 왜 그런 것이 생겼을가 하고 생각했다. 그와의 사 이에서 작용하고 있는 강력한 자력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그녀는 다시 그를 떠밀었 다. "이 술잔들을 깨끗이 치워 두고 여기를 나가요." "항상 이런 식으로 끝나는군." 그가 투덜대듯이 말했다. 나는 그를 거부하지는 않았다고 이든은 생각했다. 다만 장소가 나빴을 뿐이야. 이런 곳에서 마음이 편하지가 못한 건 당연하지. 시간적으로도 좋지 않았어. 그런 로맨틱 한 기분에 젖어들기에는 너무 악조건이었지.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사실이야 . 그녀는 마치 자신을 납득시키는 마음으로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킴 퀸런의 아파트를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그들은 말없 이 트럭으로 돌아왔다. 칙이 트럭의 문을 열려고 하다가 깜짝 놀라며 이든을 돌아보았다 . "왜 그래요?" "트럭의 문이 열려 있어!" "그럴 리가! 당신이 잠그는 것을 나도 분명히 봤어요." 칙이 트럭으로 올라가자 그녀도 곧 뒤따라 올라갔다. 칙이 플래시로 트럭의 공간을 한 바퀴 획 비추어보았다. 아무도 없다. 그는 손금고를 감추어 둔 선반 아래로 갔다, 금 고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가 금고문을 재빨리 열어보았는데 안은 텅 비어 있다! 그 가 금고문을 탕 닫으며 소리쳤다. "도둑맞았어!" 8 루파렌티노는 셰리던과 다이버시 건물을 멀찌감치 바라볼 수 있는 지점에다 차를 세 웠 다. 이제 전화만 한 통화해주고 나면 저녁 시간은 온통 그만의 것이 된다. 그는 전화 기를 들고 다이얼을 누르면서 흡족한 기분이었다. 금발의 바람둥이 여자를 필요하다 면 언제라도 지켜볼 수가 있다. 서둘 이유란 도무지 없는 것이다. 희생물을 사전에 느긋 하게 지켜보는 일처럼 기분좋은 일은 없다. "왜?" 상대방이 나왔다. "다 됐습니다. 이제 페인이라는 여자에 대해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삐끗하는 일은 없을 테지?" "돈이 말하는 거죠 뭐." 파렌티노는 자리를 편하게 돌려앉으며 대답했다. "페인이라는 여자는 아마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녀도 황천행 티켓을 손에 쥔 셈이죠." "찰스, 당신을 다시 만나다니요." 레베카 요키는 매력적인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일부러 이렇게 찾아주시니 정말 영광이에요. 아주 중요한 일인가 보죠?" 그녀는 데스크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그를 앉혔다. "마실 걸 드릴까요?" "아니, 괜찮소." 칙은 편한 자세로 앉으며 주위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레베카는 우아한 가구와 파스텔 화, 그리고 여러 가지 장식물에 취미가 있는 여자다. 그것도 비싼 것이어야 한다. "사실 무슨 사업 문제로 온 것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부탁할 일이 좀 있어서 왔소." "흠, 어쩐지 기대가 되는데요." 여자는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 레베카는 고급 매춘부인 동시에 유능한 사업가였다. 칙은 그녀가 모델 시절에 알게 되었다. 그녀의 나이가 칙보다도 몇 살 위인데도 불구 하고, 그녀의 은빛 나는 블론드는 그녀를 조금도 나이들어 보이게 하지 않았다. 그녀 는 그 미모와 경험을 살려서 요키 에이전시를 아주 성공적으로 키워 오고 있었는데 칙 은 요키의 모델들과 함께 지난 수년간 일해왔다. 그래서 그는 이든을 이곳으로 데려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킴 퀸런에 대해서 좀 알고 싶소." "또 그 여자로군." 레베카는 칙을 살펴보며 말했다. "경찰에서도 다녀가더니 이번엔 당신이군요. 그 이유는 설명해 줄 수가 없겠죠?" "해줄 수는 있지만 지금은 안돼요. 아주 위험한 일이라서." "그 여자의 피살과 관련되는 문제인 모양이군요." "그렇게 마음대로 상상하지 말고. 난 킴 퀸런이라는 여자를 알지도 못해요." "당신은 항상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찰스, 또 쓸데없는 일에 끌려들었군요." 그녀는 핑크 색 매니큐어를 칠한 기다란 손톱으로 데스크를 톡톡 치며 말했다. "나는 데리고 있던 아이들에 대한 정보는 아무에게도 제공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킴 퀸런은 이미 그렇게 갔으니 별로 문제될 것은 없겠죠. 그래, 무엇을 알고 싶으세요, 찰스?" "그 여자에 대해서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 처음부터 시작합시다. 그 여자는 당신 과 일한 지 얼마나 되나요?" "지난 3월부터였어요." 그런데 아파트 계약은 5월부터로 되어 있었다. 칙은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지 않았 을까 하고 생각했다. "누가 추천했나요?" "사진작가가 데려왔어요. 당신도 들은 적이 있을지도 몰라요, 파코 존스라고." "그 이름을 기억해요. 킴 퀸런은 그를 위해서도 일했나요?" "내가 알기로는 그녀가 파코를 사교장에서 처음 만나기 전에는 모델이 되겠다는 생각 도 않고 있었어요. 파코는 그녀의 재기가 번뜩이는 모습에 너무 감명을 받아서 내게 로 직접 데려왔어요.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킴 퀸런은 청순함과 섹시함을 동시 에 지닌 여자였죠." "그래서 대성을 했군." "비교적 그런 셈이었죠. 그런데 그녀는 이 직업에 뛰어든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나 이 가 많았어요. 자기 말로는 21살이라고 우겼지만, 나는 믿지 않아요. 적어도 24살은 넘 었을 거예요. 그래도 그녀는 아주 잘 해냈어요." "레이크 포인트 타워에서 생활한 것을 보면, 원래 재산이 좀 있었던 모양이지?" "천만에." 레베카는 웃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은 하도 싸구려여서 봐줄 수가 없을 정 도였어요. 그러던 그녀가 재빨리 변신하기 시작한 거죠. 두어 달도 지나지 않아 그녀 는 일류 디아지어들이 지은 옷을 입고 다녔고, 주문한 요트가 곧 들어온다는 말을 지 껄일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때까지는, 그녀는 아직 유명하지도 못한 존재였어요. 나 는 그녀에게 남자가 생겼다는 것을 확신했어요." "그런데 그게 누군지 당신은 짐작도 못하겠소?" "퀸런은 아주 비밀이 많은 여자였어요." 하기야 아내 있는 정치가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남에게 떠벌일 만한 일은 못될 거라고 칙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번즈가 주지사에 당선된 다 음에는 아내를 버리고 그녀 자신과 결혼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녀의 가족은 어때요, 그리고 친구 관계는?" 레베카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그애는 비밀이 많은 편이었어요. 자신의 배경이나 과거에 대해 서 는 좀체로 얘기하는 법이 없었어요. 한번은 내가 농담으로 그애에게 넌 하늘에서 어 느 날 뚝 떨여져 내려온 것 같다고 했더니, 그애는 웃으며 그와 별로 다를 바 없다고 대 답했어요." 웃기는 얘기로군. 보아하니 레베카는 퀸런에 대해서 그 이상으로 아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결국 킴 퀸런은 미스테리 속에 남게 되었다. 파코 존스가 무언가를 알고 있 을 지도 모르지만, 그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내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것도 아니었 다. "레베카, 킴 퀸런의 사진을 가지고 있겠지?" "몇 장 가지고는 있지만, 그 대신 나에게 뭘 주겠어요?" "다음에 모델을 쓸 경우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죠." "됐어요." 레베카는 킴 퀸런의 사진 뿐만 아니라, 파코 존스와의 연결도 조처해 주었다. 그녀가 건네준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칙은 사무실을 나와서 택시를 잡았다. 시의 외곽에 자 라 잡고 있다는 파코의 스튜디오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그의 스튜디오는 회색의 낡은 이층 건물 안에 있었다. 삐걱거리는 의자를 내주면서 그는 칙에게 침울한 표정으로 말 했다. "그녀에 관해서 내가 말할 만한 것은 별로 없소. 그렇지만 그녀를 죽인 놈은 나도 알 고 싶소." 그는 검은 눈으로 칙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당신은 얘기를 안하겠지. 레베카가 나에게 경고하더군."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오." 파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물어보시오." "레베카가 그러던데, 당신은 킴 퀸런을 사교장에서 만났다고 했어요." "모금 운동을 하는 곳에서 만났죠." 칙은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는 느낌이었다. "누구를 위한 모금이었습니까?" "스텐턴 번즈." "그녀를 데려온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아무도 없었소. 그녀는 혼자 왔다고 했소. 부유층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고 싶어서라 고 했소." "그래서 당신은 그녀를 레베카에게 소개했군요. 그녀는 모델이 됐고. 그녀가 돈을 어 디서 구하는지 알고 있소?" "나는 그녀를 몇 번 촬영에 써먹었을 뿐입니다.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 화려한 상류층 생활을 동경하다가 불쌍하게 희생된 여자죠." 파코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그 여자의 출생지나 기타 그녀가 성장해 온 곳이 어딘지에 대해서는 전혀 말한 적이 없었습니까?" 파코는 이마를 찡그리며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내 기억에 남은 거라곤, 그녀가 목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말뿐입니다. 그녀가 그처럼 고운 피부를 가지게 된 것도 그런 곳에서 자라났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 사진 쟁이들은 그런 모델을 찾는 것이 꿈이죠." 그와 반 시간 가까이 더 얘기를 했지만, 더이상 참고될 만한 내용은 없었다. 칙은 그 와 작별하고 카니발로 돌아왔다. 최소한 킴 퀸런이 모금회장에서 파코뿐만 아니라, 번즈도 만났다는 사실은 확인한 셈 이었다. 그것과 아파트의 계약서, 목걸이의 고리를 연결시키면 이든의 스토리를 어느 정도 완성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실이 하나씩 확인되어감에 따 라서, 이든에게 위험이 자꾸만 가까워오는 느낌을 칙은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 를 잘 보호해야 한다고 그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빌린 가발을 손에 들고 이든은 메이시의 트레일러 문을 두드렸다. 한 시간쯤 후면 카 니발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메이시, 저예요." "들어와요." 쾌활한 틈성이 안에서 들려왔다. 이든은 안으로 들어갔다. 메이시는 스토브 옆에 웅 크 리고 있었다. 오븐에서 무엇이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고 있었다. "음, 냄새가 좋군요." "크렌베리 오렌지 머핀이에요. 커피와 곁들이면 기막히죠." "군침이 절로 도는데요. 그러고 보니 점심 먹는 걸 잊었어요." 이든은 가발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커피 잔과 접시들을 식탁 위에 배열하기 시작했다 . "그런데 그 가발은 어디에 사용한 거야?" 메이시가 머핀을 뒤집으며 물었다. 이든은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새로운 일자리 를 찾아보느라구요." 그녀는 자신에게 그처럼 친절하게 대해 주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기가 정말 힘들었 다. "음흠." 메이시는 검은 눈동자를 굴리며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이든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든은 화제를 바꾸었다. "어젯밤 도둑맞은 얘기를 들으셨어요?" "그럼." 메이시는 커피 잔에 커피를 부었다. "칙이 오늘 아침 들러서 펠릭스에게 그 얘기를 하더군. 나는 도둑이 그의 돈까지 홈 쳐 갈 줄은 정말 몰랐어. 벌써 이번주 들어 세번째야. 이래서는 아무도 안심할 수 없지. " 왜 자꾸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이든은 우울한 마음으로 머핀을 베어 먹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살인 사건에 연루된 것만으로도 그녀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전날밤 게이터가 트럭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목격했다고 칙 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자 칙은 그 말을 벌써 에이브와 젤다에게 한 모양이었다. 그 들 은 모두 게이터를 경계하는 일에 의견을 모았다. "그 도둑이 우리 헐리의 사업을 망치지나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 머핀은 정말 맛있는데요." "많이 먹어요." 메이시는 이미 한 개를 다 먹어 치우고 두 개째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번 범죄는 여러 사람을 괴롭히는 거야. 세 명이나 되는 단원이 이미 여기를 떠났 어. 그나마 칙이 원볼 게임 가게를 맡아 줬기에 망정이었지." 이든은 씹던 동작을 중지하고 메이시를 놀란 눈으로 바라 보았다. "칙아 그것을 맡았다구요? 최근에 말이에요?" 메이시는 이상한 눈으로 이든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 가게를 시작한 것은 지난주의 일이었어. 이든이 여기에 나타나기 며칠 전이 야. 그가 말하지 않았어?" "아뇨." 이든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칙은 마치 자신이 10대 시절에 집을 나온 이후부터 줄 곧 헐리 걸리를 따라다닌 것처럼 그녀에게 말했었다. 그렇다면 그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말이 된다. 치키 러빗의 정체가 무얼까? 이든은 혼란한 머리를 쳐들고 시계를 보았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군요. 칙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으니, 내가 가게를 열아야겠어요." "내가 도와주지." "아니에요. 언제나 먹여주고 도와주시니, 내가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하죠?" "무슨 쓸데없는 소릴. 다들 그렇게 도우며 살아가는 거야." 이든은 더이상 말리지 않았다. 메이시의 관대함은 끝이 없어 보였다. 언젠가는 그녀 의 신세를 갚을 날이 있기를 고대할 뿐이다. 식탁을 치우고, 두 여인은 상품을 담은 박 스 를 안고 원볼 게임 가게로 향했다. 이든은 우유병과 공이 든 박스를 가져 가기 위해 서 는 한차례 더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광장 가운데로 난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사내들 이 여럿 둘러서서 웃고 떠들어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대부분이 탈 것들을 관리 하 는 단원들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 봐요." 이든은 뒤따라오는 메이시에게 말했다. "신경 쓸 것 없어." 메이시는 그녀에게 무시하라는 투로 말했다. 호기심이 많은 편인 이든은 부스에 도착 하자 박스를 내려 놓고 사내들이 모여 있는 쪽을 다시 살펴보았다. 웃음소리가 연신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 무리 속에서 니켈 포겔이 걸어 나오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갑 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 니켈은 그녀를 바라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메이시와 함께 문을 열고 상품을 진열하고 있을 때, 니켈이 다가왔다. 여전히 불량기가 가득한 눈으로 그는 메이시와 이든을 번갈아가며 훑어보았다. "당신을 초대하려고." 그는 이든에게 웃으며 말했다. "씨트는 당신에게 저지른 실수를 사과하는 뜻에서 당신을 에스트로 로켓에 태워 드리 겠다고 합니다." 그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이든은 눈치채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의 사과는 받아들이겠다고 전해 주세요." "그렇지만 그는 당신에게 무료로 태워 주겠다고 했어요." 니켈은 고양이 같은 눈을 반짝이며 그녀에게 재촉했다. "타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왜죠? 그의 호의를 무시하겠다는 말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런 공중 회전 열차를 타면 나는 어지러워 견디지 못해요. 호 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누구나 타는 거예요. 너무 그렇게 뻐기지 마시오." 니켈은 끈질기게 나왔다. 뒤에서 상품을 진열하던 메이시가 이든의 소매를 끌어당기 며 속삭였다. "가서 타고 와. 저들은 포기하지 않을 거야. 당신이 탈 때까지 귀찮게 굴거야." 이든은 메이시까지 그렇게 말하는 데는 기가 꺾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머뭇거 리 자 메이시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어. 이건 카니발 단원으로 새로 온 사람이면 누구나 겪어야 하 는 신고식 같은 거야. 눈을 질끈 감고 몇 분만 견디면 돼." 할 수 없다고 이든은 생각했다. 시트는 착각을 한 거야. 에스트로 로켓이 어느 정도 로 공중 회전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까짓 것을 두려워할 내가 아니야. 그는 내가 어지 러워서 비명이라도 지르면 그걸 보고 즐길 모양이지만, 나는 오히려 회전이 빠르면 빠 를수록 좋다구. 그녀는 결심했다. "좋아요. 그 초대에 응하겠어요." 니켈은 빙긋이 웃었다.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소매로 코를 슬쩍 닦았다. 메이시는 이든의 어깨를 두드리며 겁먹지 말라고 했다. 이든은 가게를 잠그고 니켈의 뒤를 따 라 갔다.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철탑 구조물인 에스트로 로켓이 그들의 앞에 위용을 떨치고 서 있었다, 사다리처럼 생긴 기다란 철탑 양쪽에 사람이 올라타는 로켓 모양의 캡슐 이 매달려 있다. 그런 캡슐은 풍차처럼 동그랗게 원을 이루며 수십 개가 한꺼번에 돌아 가는 것이다. 그냥 돌아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상하로 오르내리며 돌아간다. 그리고 속도도 점점 빨라지는 것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눈이 핑핑 돌며 머리가 어 지 럽고 속이 뒤집어지는 듯한 느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아찔한 맛에 사 람들은 돈을 내고 그것을 탄다. 이든은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 다. 여자가, 그것도 성인 여자가 이런 것을 타는 모습을 밑에서 지켜보는 재미란 더 할 수 없이 좋은 것이리라. 어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마구 울기까지 하는데 더 심한 여 자는 먹은 것을 토하며 기절하는 경우도 있다. 시트는 관중들 맨 앞에 있는 플랫폼에서 득의양양하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너 한번 당해 봐라 하는 듯한 표정이다. 에이브와 젤다는 자신들이 고용하고 있는 단원들의 이 악습에 대해서 몹시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다른 단원들은 이든이 캡슐로 다 가가는 것을 흥미있게 지켜보고 있다. "흥, 오히려 멋진 찬스야." 이든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이런 놀이 기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들에게 알려주겠어. 아무리 돌려 봐라, 내가 끄떡이나 하나, 그렇지만 그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으니 적당히 소리를 질러 줘야지. "힘내." 메이시가 그녀에게 말하고는 펠릭스에게로 돌아갔다. "고마워요." 이든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관중들을 향해서 말했다. "이 죽음의 트랩에 함께 오르실 용기 있는 분은 안 계세요?" "무서운 모양이야." 게이터가 말하며 앞으로 나왔다. "내가 당신의 손을 잡아 주지." 그는 길고 깡마른 손을 내밀며 이든에게 말했다. "그랬다간 당신의 손목을 부러뜨려 놓겠어요." 진저가 소리쳤다. 오렌지 색 머리의 그녀는 게이터의 어깨를 잡아당겨 못 가게 했다. 사내는 물러섰다. "내가 자원하겠소. 나는 항상 여자와 빠른 놀이기구를 좋아하니까." 주드가 이든에게 미소를 보내며 앞으로 나왔다. "그만둬요, 주드!" 중년의 뚱뚱한 여자가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이건 저 여자 혼자서 해내야 한다는 걸 잘 아시면서 그래요?" 주드가 그 여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나서려 하자 남자 단원들이 여럿 그를 붙들고 무어라고 떠들어대며 말렸다. 주드는 미안한 웃음을 이든에게 지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이든. 이건 규칙에 위배된다고들 하는군. 당신 혼자서만 타야 한대." 이든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트가 그녀 옆으로 다가 와 서 캡슐의 문을 열었다. "마차를 대령했습니다, 마님." 그가 징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든은 캡슐에 올라 좌석의 중간에 앉았다. 시트는 안 전 벨트를 매주었다. 사악한 눈빛으로 그는 이든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신날 거요." "신나게 해주시겠다니 고맙군요." 시트가 캡슐의 문을 닫고 사라지자, 잠시 후 에스트로 로켓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 했 다. 이든은 머리를 푹신한 쿠션에 묻고 심호흡을 했다. 캡슬이 공중으로 떠오르자 그 녀는 금속으로 된 손잡이를 양손으로 꽉 붙들었다. 캡슬이 갑자기 아래로 내려가며 속 력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회전이 빨라지자 머릿속이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축을 중 심 으로 양쪽에 있는 캡슐들이 상하로 움직이며 회전의 속도를 더해갔다. 눈 앞이 노래 지 며 머릿속이 엉망으로 어지러웠다. 이든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아래에서 구경하 던 군중들이 환성을 터뜨리며 좋아했다. 에스트로 로켓은 이제 최고의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든은 사람들의 환성이 까 마 득히 멀게 느껴졌다. 머릿속이 어지러운 것은 그만두고라도, 이제는 속이 뒤집힐 것 만 같았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처럼 눈앞이 온통 샛노랬 다. 회전의 원심력에 의해서 그녀의 오른쪽 어깨가 심한 압박으로 통증을 전해왔다. 그녀는 아까보더 더 큰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 기대한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든이 비명을 지를 때마다 그들은 손벽을 치고 발을 구르며 좋아했다. 어떤 친구는 손으로 휘파람을 불기도 했 다. 시트에게 내려 달라고 소리쳐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 그러면 그는 더 오래 시간을 끌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그때, 이든은 자신의 허리를 죄고 있던 안전 벨트가 느슨해진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양손으로 잡고 있는 금속 손잡이도 삐걱거리며 빠지려고 했다. 어딘지 죈 부분이 풀 려 있는 것이다. "정지시켜요!" 그녀는 아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안전 장치가 고장이에요!"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요란한 기계 소리와 함 성에 묻혀서 그녀의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다만 공포로 비명을 지 르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척이나 재미있는 모양이다. "스톱! 스톱! 스톱시켜요."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쳤으나 기계는 계속 돌아가기만 했다. 손잡이는 이제 곧 빠져 나 갈 것처럼 생각되었다. 안전 벨트도 거의 풀린 상태였다. 이 상태로 더 올아가다가는 캡술에서 퉁겨져나가 버릴지도 모른다. 이든은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된다. 당황하면 정말 끝장인 것이다. 캡슐이 아래로 내려갈 때, 그때 신호를 보내자. 그가 알아 들을 수 있도록, 그녀는 기다렸다 가 캡슐이 지상에 바짝 접근했을 때 다시 소리를 질렀다. "시트! 세워요! 고장이에요." 그는 분명이 들었으련만, 말없이 손만 흔들었다. 캡슐이 다시 최고의 정점에 올라가서 일시 정지했을 때, 이든은 그 충격으로 오른쪽 어깨를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안전 벨트가 느슨해져서 몸이 캡슬 안에서 제멋대로 놀 고 있었다. 에스트로 로켓이 반대 방향으로 회전을 다시 시작하 자, 그녀의 몸둥아리 는 반대편 금속벽에 부딪치며 공중으로 붕뜨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이제 죽음의 공포 를 느꼈다. 비명을 지르며 좌석의 가장자리를 붙들고 몸의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썼 다. 자칫하면 몸둥아리가 인형처럼 공중으로 퉁겨져나갈 판이었다. 그 다음 요동으로 그녀는 캡슐의 문 쪽으로 떠밀려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벽에다 손을 짚어서 몸이 문 에 부딪치지 않도록 했다. 문고리가 벗겨지면 정말 큰일이다. "사람 살려요...!" 캡슐이 하강을 시작했을 때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좌석에 매달렸다. 급강하의 충격으 로 그녀의 다리가 공중으로 쳐들렸다. "저것 봐!" 그녀의 다리가 허공에서 달랑거리자 밑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시트, 기계를 세워!" 좌석의 가장자리를 잡고 있는 이든의 손가락은 끊어질 듯이 아팠다. 땅이 그녀의 눈 앞 으로 어지럽게 다가왔다. 회전은 차츰 느려지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 캄 해져왔다. 그때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손가락이 힘을 잃고 펴지고 있었다.... 9 골드 코스트 타운에 있는 저택에서 윌리 덱커는 스탠턴 번즈와 마주앉아 있었다. 그 는 눈앞에 앉아 있는 사내가 주지사가 된다면,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를 주지사로 만들어 놓고 볼 일이다. 돈과 명예 를 그가 차지하는 만큼, 자신에게도 많은 이익이 돌아올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론다가 방안으로 들어오며 그에게 대뜸 물었다. "페인이라는 여자가 돈으로 매수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돈을 주 면 받을까요?" 덱커는 매사를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그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식상해 있었다. "그야 액수에 따라서 다르겠지요.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엄청난 돈을 요구해 올지도 모르지. 상대는 내 지위를 알고 있으니까...." 번즈가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킴 퀸런은 선거 운동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존재였어요." 덱커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지만 이든 페인은 아니죠." "아무도 그녀와 킴을 연결시켜 생각할 사람은 없습니다. 킴의 아파트는 깨끗이 치웠 고, 아파트의 주인인 사내는 최소한 1년 간은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든 페인을 찾으면 그녀를 잘 구슬러야 해. 킴 퀸런의 죽음은 우연한 사 고 였다, 당신은 아무런 증거도 없다, 그렇게 숨어다니는 것도 괴로운 일일 터이니 우리 와 잘 타협하자. 당신이 입만 다물어 준다면 우리도 상당한 보상을 해줄 의사가 있다 고 말하는 거야." 번즈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안일한 생각이에요, 여보." 론다는 경멸하듯이 남편에게 말했다. "이건 심각한 사태예요. 페인이라는 여자도 여간내기가 아닌 것 같아요. 보통 여자 같 으면 벌써 경찰에 신고를 했거나, 우리 앞에 나타났을 거예요. 우리를 따돌리고 꼬리 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여자가 보통이 아니란 걸 증명하고 있다구요. 가 볍 게 생각했다가는 큰 낭패를 당할 거예요." 덱커는 론다야말로 무서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의 얘기가 옳아요, 론다. 그렇지만 곧 해결이 나겠지요." 칙은 트럭에서 진과 셔츠로 갈아입고는 곧 카니발 광장으로 나왔다. 그가 광장 중앙 로 로 막 들어섰을 때, 에스트로 로켓이 있는 곳에서 요란한 비명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캡슐을 쳐다보며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고 그는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 그는 공중에 매달려 있는 진과 셔츠를 보고 깜짝 놀라며 달리기 시작했다. "이든!" 그는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그녀가 자신에게 주의를 빼앗겨서 자칫 방심할까 두려워 서 였다. 무언가가 가슴을 옥죄어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 면... 안돼! 그는 도리질을 쳤다. 그가 프랫폼에 도착했을 때는 에스트로 로켓은 회전을 멈추고 이든을 천천히 지상으 로 내려놓고 있었다. 그가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그녀는 갑자기 3미터 쯤 되는 공 중 에서 뚝 떨어치며 비명을 내질렀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비명을 질렀다. "이든!" 그는 그녀에게 달려가며 소리를 질렀다. "이든! 눈을 떠 봐!" 그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으며 흔들었다. 이든은 눈을 뜨고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 주 드가 옆에 와서 도우려고 했다. 메이시도 달려왔다. "나는 괜찮아요." 이든은 가냘픈 소리로 말했다. "가만히 있어." 칙이 그녀의 머리를 받쳐 주며 말했다. 그는 주위의 얼굴을 돌아보다가 시트를 발견 하 고는 눈을 번쩍 빛냈다. "자, 말해 봐. 무슨 일이지?" "잘 모르겠어." 시트는 발뺌을 하려고 했다. "우린 그저 잠시 즐기려고 했을 뿐이야. 그녀를 어떻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어." "정말이야. 그건 우리 모두가 겪은 신고식이었을 뿐이었어." 진저가 시트를 옆에서 거들었다. 게이터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안전장치가 고장이 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든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어." "안전 벨트가 풀어졌어요. 손잡이도 빠지려 했구요." 이든은 시트를 돌아보며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다친 곳은 없어?" 칙이 그녀의 몸을 살펴보며 물었다. 이건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고 그는 속으로 생각 했 다. 안전 벨트와 손잡이가 동시에 고장나는 경우란 거의 없다. 시트는 그런 것들을 매 일 점검하고 있다는 것을 칙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고의로 그렇게 만들었다는 증 거 도 없었다. 이든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고는 말했다. "그런 것 같아요. 엉덩이가 얼얼한 것밖엔." 그녀는 칙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시트가 캡슐의 손잡이를 뽑아들고 와서는 고개 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 볼트가 빠져나가고 없어." "마지막으로 점검한 것이 언제였나?" 칙이 따지듯이 물었다. "내가 관리를 소흘히 했다고 말한 참인가?" "사람이 죽을 뻔하지 않았나?" 칙이 발끈하며 대들었다. "그만해 두게." 주드가 두 사람 사이에 기어들며 시트의 손에서 손잡이를 낚아채 버렸다. 자칫하며 무 기로 둔갑할 소지가 있는 물건이다. "싸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네. 사고는 항상 일어날 수 있어." 칙은 더이상 따져 봤자 소용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보다도 이든을 돌봐야만 한다. 그 녀는 몹시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에게 약하게 보이는 것이 싫어서 괜찮 은 것처럼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녀의 안색은 매우 창백했다. "걸을 수 있겠어?" 메이시가 이든에게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네." 그녀는 절룩거리며 발걸음을 떼놓았다. 그러나 통증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저절로 일 그러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어." 젤다가 그녀를 붙들면서 칙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이든은 말했다. "난 괜찮아요." 칙은 그녀의 고집에 이마를 찡그렸다. "속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니 병원에 가서 진찰이라도 해보자구." 그는 달래듯이 말했다. "속은 괜찮아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푹 쉬고 나면 좋아질 거예요." 이든은 고집을 부렸다. "좋아, 그러면 한 가지 약속을 해줘. 몸이 조금이라도 이상해지면, 그때는 이유없이 병원으로 가는 거야, 알았지?" "알았어요." 칙이 그녀를 데리고 메이시의 트레일러로 가려고 할 때, 젤다가 그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할말이 있어. 중요한 일이야." 그녀의 말투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펠릭스가 칙에게 말했다. "이든은 나와 메이시가 우리 트레일러로 데려갈 테니 자넨 젤다 부인과 얘기를 나누 고 오게." 펠릭스와 메이시의 부축을 받으며 걸아가는 이든을 바라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 는 칙의 어깨를 두드리며 젤다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괜찮을 거야, 이번에는 말이야." 칙은 이마를 찡그리며 그 작은 체구의 부인을 바라보았다. "이번이라구요? 그러면 이런 일이 또 일어날 거란 말입니까?" 예언가라고 소문나 있는 그녀에게서 칙은 이든의 불길한 앞날을 듣는 것 같아 불안했 다. "이든은 아주 불길한 징조에 싸여 있어.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기운이 아주 어지러워 요." "무슨 뜻이죠?" "젤다는 나에게 이든의 그 신고식을 중지시키라고 말했었네. 그런 사고가 생길 줄 미 리 알았던 게야." 에이브가 옆에서 설명했다. "그래요? 그러면 누군가가 이든을 죽일 목적으로?" 칙은 놀란 표정으로 나이 많은 부인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침부터 불안한 기운에 가슴을 떨고 있었어." 노부인은 어슴프레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든은 이곳 단원 들 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여자예요." 칙이 말했다. "그렇지만 기운이 불길해. 그리고 태로 카드의 점괘가 나빠. 이든은 위험에 처해 있 어 요. 오늘 이곳에는 사악한 기운이 돌고 있어." "그게 누구예요?" "그건 몰라. 그 많은 악령을 구분하기는 어렵거든." 에이브가 아내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젤다는 영감을 받고 있다네." "그렇겠죠." 칙은 노부인의 미신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태로 카 드 의 점쾌라니? 사악한 기운? 그는 달리 할말이 없었다. "지금부터 신경을 곤두 세우고 이든을 보살피겠어요." 젤다는 눈을 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노부부와 작별한 칙은 트럭으로 돌아와서 레베 카가 준 사진 봉투를 들고 메이시의 트레일러로 향했다. 마침 펠릭스가 나오고 있었 다. "이든은 지금 샤워를 하고 있는 중이네." "고마워요, 펠릭스." 그는 트레일러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 소리가 들렸다. 이든은 지금 알몸으로 샤워를 하고 있다. 아마 아까의 사고로 몸 어딘가에는 멍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 녀 의 길고 쭉 빠진 몸매를 연상했다. 기다란 육체, 늘씬한 허리, 멋진 가슴, 풍만한 히 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샤워 소리가 뚝 그쳤 다. 그녀는 이제 커다란 타월로 자신의 몸을 닦고 있을 것이다. 머리카락과 흰 목덜 미, 그리고 가슴, 그리고... 욕실의 문이 열리는 바람에 그의 환상은 깨어지고 말았다. 이든이 무릎까지 오는 가 운 을 걸치고 타월을 머리에 감은 채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기분이 좀 나아졌어?" 그는 안도하며 물었다. "그럼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맨발은 선이 곱고 아름다웠다. 샤워를 하고 나 온 그녀에게서 싱그러운 내음이 나는 듯했다. 그녀의 왼쪽 종아리 부분이 부풀어올라 있었다. 떨어질 때 바닥에 부딪친 부분이었다. 상채기에서 피가 나고 있는 것이 보였 다. "소독약이라도 찾아봐야겠군." 칙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제 멎었는데요 뭐." 그녀는 또 고집을 피웠다. 칙은 이번에는 들은 척고 않고 약을 찾아들고 그녀 앞에 앉 았다. 그는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다리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상처는 별 것이 아니었 다. 그보다도 그녀의 다리가 너무 아름다웠다. 그녀의 어느 부분도 그를 자극하지 않 는 곳이 없지만, 특히 그녀의 다리는 일품이었다. 시원스럽게 쭉 뻗어내린 부드러운 각선미와 예쁘게 생긴 발, 그녀의 발목은 그녀의 허리처럼 가늘었다. 칙은 이곳의 분 위기가 너무 초라한 것이 유감이었다. 언젠가 보다 더 멋진 곳에서 이 여자를 대하리 라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상채기에 약을 바르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아프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 지 않았다. 그는 아쉬운 마음으로 그녀의 발을 놓았다. "다른 데는?"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주저했다. "괜찮아요." "어디야?"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젖은 속눈썹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깨요, 오른쪽." 칙은 그녀의 오른쪽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 부분의 옷을 내렸다. 그곳의 상 채기는 아주 작았다. 그러나 상채기 주위에 푸릇푸릇한 멍이 들어 있었다. 그녀의 어 깨는 아름다웠다. 그는 상처의 통증을 키스로 날려 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녀를 더 아프게 할 뿐이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커다란 푸른 눈이 상 처를 입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을, 자신이 원하고 있는 것 을 감출 능력이 전혀 없어 보였다. 칙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렸고 그녀의 푸른 눈동자엔 파르르 물결이 있었 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녀의 맥박이 그의 손을 통 해 서 전해져 왔다. 그는 그녀를 뜨겁게 사랑해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의 키스 가 차츰 강렬해져갔다.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칙은 그녀에게 거부당한 것 같아서 무안하고 한편으론 화도 났다. 왜 그럴까? 아무래도 나와 같은 남자와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 어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 보며 그는 스스로에게 분노를 느꼈다. 지금 이 상태로는 그녀에게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 없단 말인가? 그가 이든에게 돌아왔을 때, 그녀는 기분이 다시 진정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를 경계하는 듯한 표정은 여전했다. "젤다 아줌마가 무슨 얘기를 했어요?" 그녀는 약간 부자연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도난사건에 관한 거야." 그는 거짓말을 했다. "오늘 일어났던 일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세요?" "달리 생각할 길이 없지. 정비부실로 볼 수밖에." 그는 그것이 사전에 계획된 것으로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이든에게 젤다의 불 길 한 예언에 대해 얘기해서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기가 싫었다. "당신은 시트가 고의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해?"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그는 그것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에요. 사고가 나 면 그 자신도 끝장이죠." "그렇지만 그런 일로 감옥에 간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 그의 묵인하에 다른 사람이 그 런 짓을 꾸몄는지도 모르고." 이든은 이마를 찌푸렸다. "처음에 니켈이 나에게 그런 요구를 해왔을 때는 단지 나를 골탕 먹이려는 줄로만 알 았어요." 그러고 보니 니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고 칙은 생각했다. 그런 법썩을 떠는 동안 에 그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말았던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앞으로 주의를 기울여 살 펴볼 필요가 있겠다고 칙은 마음속으로 다짐해 두었다. "자신의 몸을 그렇게 망가뜨린 것 외에 오늘 한 일이 뭐지?" 그는 놀리듯이 말했다. 이든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전화를 했죠. 이번주 내내 출근을 못할 것 같다고 보스에게 말했더니, 그는 아예 시 집이나 가버리라고 하더군요." "훌륭한 상사군. 존경할 만해." 칙은 웃었다. "그리고 데니스가 메시지를 남겼어요." "그러니까 그자에게 또 전화를 걸었단 말이지?" 칙은 자신의 이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옛날의 약혼자에게 전화하는 것 이 그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데니스에게 전화하면 왜 안되죠?" 이든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스탠턴 번즈가 금요일에 자신의 집에서 정치적인 모임을 갖는다는 사실을 나에 게 알려 주려고 했어요. 그래서 번즈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면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렇겠군." 칙은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그래요. 그래서 스탠턴 번즈에게 전화해서 우리를 초대해 달라고 하면 어떨까 하고 나는 생각했어요. 그는 나를 만나고 싶을 거예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칙의 머릿속에는 이미 어떤 계획이 세워지고 있었다. "태피는 어때?" 이든의 표정이 흐려졌다. "태피와는 여러번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안됐어요. 행크의 집에도 아무도 없었어요. 태피는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그녀의 직장에도 연락을 취해 봤어?" "그앤 직장이라고는 가진 적이 없는 애예요. 신탁에서 나오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거 든 요.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 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전화를 했지만 그곳에도 없었 어 요." "그래서 걱정이 되는 모양이군?" 이든은 찌푸린 눈으로 칙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걱정이 안되겠어요? 번즈가 그녀를 납치했을지도 몰라요. 나를 찾아내기 위 해서 말이에요." "너무 그렇게 극단적으로만 생각하지 말아." "그렇지만 오늘 그런 일을 당하고 보니 그런 생각을 안할 수가 없어요." 이든의 말에는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이따가 다시 전화를 해보지. 설마 무슨 일이야 있을라구." 칙은 우선 그녀를 안심시켰다. "요키 에이전시에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성과가 있었지. 킴 퀸런은 작년에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여자였어. 번즈의 모금 운 동 현장에서 파코 존스란 사진 작가의 눈에 띄어 레베카에게 소개되었지. 레베카 요 키 는 킴의 주변에 틀림없이 남자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어. 그리고 킴의 요트가 곧 부두 에 들어온다는 소리를 그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는 거야." "감동적이에요." 칙은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사진 봉투를 집어 이든에게 주었다. "킴의 사진이야." 이든은 봉투에서 사진을 꺼내어 무릎 위에 펼쳤다. 칙은 그 사진들을 내려다보고 있 었 다, 가까이서 찍은 얼굴 사진 몇 장, 상반신 사진, 전신 사진 등이었다. 정말 사진을 기막히게 잘 받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든은 사진을 살펴보다가 얼굴을 뻔쩍 쳐 들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사진을 제대로 보시지 않았군요?" "무슨 소리야?" "이걸 보세요." 이든은 사진들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킴 퀸런은 그 목걸이를 늘 걸고 있었어요. 나는 이 목걸이가 피살되던 날 걸고 있었 던 바로 그 목걸이라고 확신해요!" "다녀올께.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칙은 어디에서 갈아입었는지 말쑥한 양복차림이었다. 그는 서류가방을 손에 들고 아 직 도 매트에 누워 있는 이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은 말썽 피우지 말고 조용히 있어, 알겠지?" "내가 할 소리예요." 그녀는 웃으며 대꾸했다. 그녀가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칙은 번즈와의 약속을 지키겠 다고 고집했다. "당신은 항상 그렇게 무모하세요?" "번즈를 기다리게 한다는 건 무례한 짓이지." "그를 만나서 무얼 얻겠다는 거죠? 그는 눈치를 챌지도 몰라요." "내가 걱정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칙은 이든을 흘끔 보면서 말했다. "그래요, 걱정돼요." 이든은 그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은 내게 매우 친절하셔요." 칙은 말없이 트럭을 내려갔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퀸런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죽어서 이 지상에서 사라져 버린 여인이 웃고 있었다. 비밀을 담은 목걸이를 걸 고, 작지만 완벽한 노란 다이어몬드가 박혀 있는 목걸이였다. 금으로 된 체인의 끝에 달려 있는 고리가 이든이 요트의 박스에서 손에 넣은 그 고리와 똑같았다. 이든이 맑은 공기나 쐬려고 트럭에서 내려오자 메이시가 그녀를 불렀다. "이든, 손님이 오셨어."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람이 찾아왔다면 겁부터 먼저 났다. 그러나 눈에 익은 금발머리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환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태피! 널 찾고 있었어.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아야지." 태피는 이든이 입고 있는 옷을 보며 눈이 동그래겼다. "무슨 옷이 이래? 무슨 일이 있었니? 다리는 왜 그래?" "응, 어제 조그만 사고를 당했어. 그래서 이 옷을 빌려 입었지." "맙소사!" 태피의 눈이 더욱 더 커다래졌다. "그들이 널 찾아냈다는 맡이니?" "아니야, 에스트로 로켓을 타다가 사고가 났어." "그렇다면 불행중 다행이구나. 난 그들이 한 짓인 줄 알고 깜짝 놀랬어." "그래, 어디에 있었니? 어제 아침부터 행크의 집으로 계속 전화를 했었어." "행크는 출장중이야. 나는 어디 좀 다녀왔지. 너에게 도움을 주려고 말이야." 이든은 불안한 표징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태피, 내 일에 너무 깊이 끼어들지 마. 너까지 위험에 빠져들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 . " "걱정하지 말아. 너 우리 이모 베트리스 흘링스워드를 기억하니?" "기억하고말구. 아름다운 은발의 고상한 부인 말이지?" "맞았어. 캐닐위드에서 살고 계셔. 그 이모가 론다 번즈와 여고 동창이란 사실을 알 아 냈어." 태피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이든은 깜짝 놀랐다. "그 이모에게 물어보면 론다에 대한 것은 훤히 알 수 있을 거야." "정말 그렇겠구나. 어쩌면 스탠턴 번즈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들은 서 로 연락이 있었을 테니까." "바로 그거야. 여기서 한 시간쯤 달리면 그곳에 도착할 수 있어." "벌써 약속을 한 거니?" 이든은 놀라며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베트리스 부인에게 무슨 얘기를 했니?" "아, 걱정 마. 네가 요즘 프리렌서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어. 그래서 사랑하는 커플에 대한 숨은 이야기를 찾고 있는 데, 협조해 달라고 했지." "제법이구나. 알았어. 옷이나 갈아입고 나가자. 베트리스 흘링스워드 아줌마가 이 꼴 을 보면 무슨 리포터가 이러냐고 웃겠다." 태피는 트럭 안으로 따라들어 와서 이든의 옷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든은 다리가 좀 아팠지만 참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15분쯤 뒤에 두 여자는 카니발 광장으로 나왔다. 에이브와 펠릭스가 젤다의 예언 가게를 허물고 있었다. 그 예언자 노파는 장사를 그 만 둘 모양이다. 태피가 몰고온 스포츠 카의 윈도에는 주차 위반 딱지가 붙어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그 딱지를 떼어 휴지통에다 버렸다. 그딴 것은 무시해 버리겠다는 태 도 였다. 태피가 시동을 걸고 있을 때, 이든은 그 검은 머리의 사내를 발견했다. 사내 는 건너편에 세워 둔 회색빛 올드스모빌에 앉아서 이쪽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든은 등골 이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 저자가 어떻게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인가? 태퍼의 뒤를 미 행해 왔을까? 태피가 차를 출발시켰다. 이든은 자신이 착각을 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번즈가 이곳을 알고 있을 리 없을 텐데.... 그녀는 백미러를 통해서 그 사내가 뒤따라 오는 지 살펴 보았다. 그러나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10 "러빗 프로모션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소." "그렇게 알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업에 임해서는 겸손이 필요없다는 것을 칙은 알고 있었다. 오직 눈앞의 이익이 있 을 뿐이다. "구차한 이야기로 총장님을 번거롭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번즈는 그에게 의자를 권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의자에 앉으며 상대를 관찰하는 듯한 눈빛을 번뜩였다. 이건 가시방석이군. 칙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용무가 뭐요, 찰스 씨?" "캠페인 건입니다, 번즈 씨. 당신을 주지사로 만들기 위한." 번즈는 하얗게 센 털이 섞인 눈썹을 치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도움이 없이는 내가 그자리에 올라갈 수 없다고 생각하시오?" "가능한 모든 경우에 대비하자는 것이죠. 여론조사에 의하면 당신은 확실히 유력합니 다. 그렇지만 당신은 완벽주의자가 아니십니까?" "이제 와서 당신들을 내 선거운동에 늦은 감이 있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의 당선을 보장하는 일인데." 칙은 우겼다. 번즈는 독수리 부리처럼 생긴 코를 만지작거리며 칙을 노려보았다. "어떤 구상을 가지고 있소." "당신의 현재 전략을 검토한 뒤에 확고한 전략을 세워서 올리겠습니다. 그것을 보시 고 마음에 드시면 우리 회사에 일을 맡겨 주십시오." "흥미를 끄는군. 그럼 언제까지 그 구상을 가져오겠소?" "금요일 밤까지만 시간을 주시면 됩니다." "좋소, 금요일 저녁 8시로 합시다." 태피의 스포츠 카가 호반의 드리이브 도로로 진입하고 있을 때, 이든은 다시 백미러 를 살펴보았다. 회색의 올드스모 빌은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 태피가 그녀를 돌아보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모양이야. 카니발 광장에서 번즈의 부하를 본 것 같았거든. 현장에서 나를 쫓아왔던 사내였어." "오, 맙소사! 그가 우리를 미행하고 있다는 말이니?" "글쎄, 잘못 본 거겠지." 이든은 입맛을 다셨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안전벨트를 매." 태피는 자동차의 속력을 높이면서 말했다. 차가 갑자기 붕 소리를 내며 돌진하기 시 작 했다. "태피! 넌 벌써 엄청나게 과속하고 있어." "글쎄, 염려 말라니까." 그녀는 액셀러레이터를 계속 밟으며 말했다. 차가 커브를 돌 때마다 이든의 몸은 좌 우 로 거칠게 쏠렸고, 몸에 입은 타박상 때문에 통증이 느껴졌다. "태피, 아무도 뒤따라오지 않아. 이 몸은 편찮으셔, 속도를 줄이라니까." "알았어." 그제서야 그녀는 속도를 줄이며 웃음소리를 날렸다. 호숫가를 따라 조깅을 하는 사람 들이 눈에 띄었다. 평화로운 모습들이었다. 이든은 그들의 평화로운 일상이 부러웠다 . "그 칙이란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니?" 태피가 불쑥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다니? 나를 도와줘서 고맙지 뭐." 이든은 태피의 눈길이 자신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앞에다 신경을 써, 태피." "그게 전부란 말이지?" "그럼 뭐가 또 있어?" "좋아, 그렇다고 해두고. 그러면 그 칙이란 사내는 널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태피는 여전히 힐문조다. "그에게 물어보렴." "좋아, 직접 물어보겠어." "태피! 너 미쳤니? 그런 짓을 하면 그냥두지 않을거야." 태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으로 열심히 도로 위를 바라 보 고 있었다. 이든은 그녀가 더이상 물고늘어지지 말았으면 싶었다. 나에게 맞지 않는 남자에 대해서 아무리 생각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이든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키 스를 해왔을 때 자시의 몸은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했던가. 어쩌면 자신의 마음까지 도 그랬었던 것 같다. 태피의 이모 베트리스 부인이 살고 있는 저택은 이든이 가장 싫어하는 타입의 집이었 다, 어쩐지 써늘한 기분이 들 만큼 커다란 맨션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 갖추 어 져 있었지만, 사람이 사는 가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무슨 전시장 같은 기분을 풍겼다 . 그런 곳에서 사느니 차라리 메이시의 그 좁지만 아기자기한 트레일러에서 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즈 씨의 캠페인을 취재하고 있다고?" 은빛 머리카락에 어울리게 은색 라운지 파자마를 입은 베트리스 부인은 이든의 손을 잡으며 고상한 미소를 지었다. "후보자와 그 아내의 개인적인 생활을 취재하고 있어요." 이든은 태피가 시키는 대로 그렇게 대답했다. "론다 로렌스는 이 나라의 퍼스트 래이디가 될지도 모르지." 베트리스는 졸업 앨범을 펼치며 이든에게 웃어 보였다. 사진 속의 론다는 커다란 눈 에 다 블론드 머리를 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를 싫어하세요." "한번도 좋아한 적이 없어." "그 이유를 말해 주시겠어요?" 이든은 차를 한모금 마시며 부인을 바라보았다. "한때의 창녀는 영원한 창녀야." 이든은 깜짝 놀랐다. 그 바람에 그만 들고 있던 차를 약간 엎지르고 말았다. 태피가 종이 냅킨으로 얼른 닦았다. "쾌나 충격을 받은 모양이군." 베트리스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이든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조금도 과장이 아니야. 론다처럼 바람을 많이 피운 여자도 드물 거야. 그 녀 의 주변에 있는 남자라면 웬만큼 그녀를 거치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어." 베트리스 부인은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든은 그녀가 론다에게 자신 의 보이프랜드를 빼앗긴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태피로부터 들었다. 론다에 대한 그녀 의 반감은 그것에서 연유한 바가 클 것이다. "그렇게나 심했나요?" "심한 정도가 아니었어. 마음에 드는 것이면 사람이고 물건이고 가리지 않았지. 그리 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고 손에 넣었어. 그녀에게는 그것이 가능했어. 너무 나 아름다웠고, 그에 반해서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후안무치였거든."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했나요?" 태피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주위에 있는 모든 남자들은 그녀의 엉덩이 뒤를 킁킁거리며 따라다녔지. 그렇지만 여 자들은 반대로 모두가 그녀를 미워해." "그런 얘기 외에 기억에 남아 있는 사건 같은 것은 없나요?" 이든은 조금 식상한 기분이 들어서 그렇게 물었다. "론다에게서 그런 얘기를 빼면 남는 것이 없지. 나이가 들어서부터는 권력에 무서운 집착을 보이고 있지. 살이 찌고 주름살이 늘어나니까 이제 남자는 마음대로 되지 않 는 모양이더군. 그래서 남편을 출세시키기 위해서 요즈음은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있다 는 소문이야!" 이든은 베트리스 부인의 얘기가 대충 끝났다는 느낌을 가졌다. 부인이 머뭇머뭇하다 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점심 약속이 있어서 실례해야겠네. 모처럼 찾아왔는데, 미안해서 어쩌지?" 그만 가보라는 얘기였다. 두 사람은 아주 교양 있게 쫓겨났다. 셰리던 도로를 달리면 서 태피가 미안하다는 듯이 이든에게 말했다. "베트리스 이모는 가끔 정나미 떨어질 때가 있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해." "천만에. 그렇지만 참 묘한 일이지 않니?" "뭐가?" "론다 로렌스라는 여자 말이야. 젊은 시절엔 그처럼 많은 남자를 사로잡았던 그녀가 이제는 자신의 남편 하나도 지키지 못한다니 말이야." 이든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론다도 여자로서의 순수한 감정은 있었을 것이었다. 친구들의 외면이나 질투가 그녀 로 하여금 남자들을 낚는 일에 더욱 열을 올리도록 몰아세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든 페인이 아직 살아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나?" 노기 서린 힐난에도 불구하고, 루 파렌티노는 어깨만 으쓱했다. "안전 벨트와 손잡이를 느슨하게 풀어 놓았는데도 운좋게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는 조금도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적의에 찬 눈이 가느다랗게 찢어 졌 다. "이제 그녀는 경계를 할걸?" "그렇게 생각지는 않습니다. 다들 우연한 사고로 여기고 있으니까요." 파렌티노는 물고 있던 담배를 부벼끄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제기랄! 내 잘못은 아니에요. 나더러 손을 떼라고 하지 않았소?" "그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파렌티노를 손떼게 한 것은 실수였어. 이 녀석은 벌써 건 방 져지고 있어. 누가 명령을 내리고 있는지 잊어비린 모양이군. 이든 페인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목격자야, 루. 우리는 그녀를 처리하는 임무와 함께 엄청난 돈을 받았어. 거기엔 네 몫도 있어. 그녀가 일을 만들기 전에 손을 써야 해." "이번엔 내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그건 안돼. 그런 방법은 쓰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어. 약속대로 해야 해. 그녀석에게 돈을 배로 올려 주겠다고 해. 그 대신 금요일까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일을 끝내라 고 해. 그날 밤엔 중요한 손님들이 모두 모이는데 사고가 터지면 안돼." "알았습니다, 보스." 파렌티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골드 코스트 타운 저택을 나왔다. 또 다시 헐리 걸리 로 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얼굴을 자꾸 노출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고 그의 본능 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 다. 정체가 드러나는 날이면 끝장이다. 이번엔 알라바마나 택사스 쪽으로 쫓겨다니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보스는 그까짓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하고 있었다. 루 파렌티노 는 하나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으니까.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일 듯한 표정이로군." 펠릭스는 원볼 게임 룸에게 초조하게 이든을 기다리고 있는 칙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자란 정말 골치 아픈 존재예요." 칙은 화가 난 투로 말했다. 메이시의 말에 의하면, 이든은 태피와 함께 어디론가 나 갔 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태껏 돌아올 생각도 않는다. 성치도 않은 몸으로 어디 갔을 까? "여자란 항상 그렇게 예측 불가하고 흥미로운 존재라네. 그래서 인생은 즐거운 거야. " 펠릭스는 칙이 이든 때문에 속 태우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속편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자네의 그 여자는 돌아올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게." 펠릭스는 트레일러로 돌아가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나의 여자라구? 이든 페인이 ? 그렇지만 이든은 그렇게 생각지 않고 있다, 그런데 왜 그 여자에 대해서 이렇게 걱정 하고 있지? 그녀가 어디로 갔던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를 혼자 남겨 둔 일을 왜 이렇게 자책하고 있는 거지? 왜냐하면 바보이기 때문이지. 그녀를 사랑하고 있기 때 문 이야. "도대체 어딜 갔었지?" 이든이 돌아왔을 때 냅다 소리를 지른 것은 그동안 그녀 때문에 너무 속을 태웠기 때 문이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이든도 지지 않을 만큼 당당하게 소리치며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속 좀 썩이지 마, 이든.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잖아?" "친구랑 같이 차 한잔 했어요. 그게 잘못이에요?" "차를 마셨다구?" 칙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점심도 같이 했죠. 마늘 소스를 뿌린 샐러드와 구운 메기를 먹었죠. 더 알고 싶으세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나는 당신을 위해서 애쓰고 다니는데."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나를 어린애처럼 취급하지는 말아요." 그녀는 한마디도 지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 다. 칙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은 그의 방식이 아니다. "미안해, 걱정했었어." 그는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녀의 목소리도 부드러워졌다. "나도 미안해요." "그러니까 차를 마시러 나갔단 말이지?" 칙은 감정을 가라앉히며 다시 물었다. "태피의 이모를 만나러 갔어요. 그녀는 론다 번즈와 여고 동창생이에요. 무슨 정보라 도 있을까 하고 기대했었는데, 시간만 낭비했죠." "금요일이면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야." "번즈가 모임에 당신을 초대했나요?" "우리를 초대했어. 여자와 함께 오라고 했으니까." 이든은 불안한 얼굴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알아 볼 텐데요?" "변장을 해야겠지. 어차피 나 혼자서는 해내기가 어려워. 한 사람이 행동을 할 동안 다른 사람은 바람잡이 역할을 해 줘야 하거든." 그는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만지며 말을 계속했다. "다른 색깔로 염색을 하고 스타일을 완전히 바꾼 다음 화장을 짙게 하면 알아채지 못 할 거야. 더군다나 당신이 설마 그런 곳에 나타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거야." "당신의 생각에 맡기겠어요." "마지막 시도야, 이든. 이 이상은 더 끌고갈 수도 없어. 당국에다 우리가 조사한 것 을 제출하는 수밖에." 이든은 경찰에 신고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안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칙의 말대로 더이상 끌고가다가는 어떤 위험에 직면하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번즈의 초대는 어떻게 얻어냈죠?" 이든은 그 점이 궁금했다. "그의 선거 운동을 지원하겠다고 했지. 그의 선거 참모들을 모아 놓고 내 계획을 들 려 주기로 한 거야." "그 말을 그가 곧이들어요?" 이든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이야. 초대를 받았잖아?" "얼른 납득하기가 어렵군요." 이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번즈는 영리한 인간이에요. 아무런 의심 없이 당신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는 게 이상 해 요." 칙은 이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내 정체를 모르니까 . "내가 번즈보다 더 영리해서 그런지도 모르지." 그는 웃으며 대꾸했다. "호호. 그런지도 모르죠." 이든 역시 웃으며 말했다. 이든에게 가게를 맡겨 놓고 나간 칙은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야 돌아왔다. 메이 시 가 그와 함께 와서 이든에게 말했다. "내가 가게를 지켜 줄 테니까 두 사람은 저녁이나 함께 하고 와요." "그러자구." 칙이 싱글벙글 웃으며 이든을 바라보았다. "매번 신세를 져서 미안한데요." 이든은 메이시를 보며 안쓰런 얼굴을 했다. "또 그런 소릴!" 메이시는 웃으며 그녀를 나무랐다. 두 사람은 음식을 파는 텐트로 갔다. 칙은 핫도그 와 튀김, 맥주 따위를 테이블로 날라왔는데 다른 테이블에는 에이브와 주드가 다른 단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든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당신은 왜 내게 17살 때부터 헐리 걸리에 몸담고 있었던 것처럼 말했죠? 메이시 말 로 는 당신이 원볼 게임 룸을 시작한 것은 지난주였다고 하던데요." "우리 카니발 단원들은 이리저리 옳겨다니니까." "당신도 많이 옮겨다녔다는 말씀이세요?" "턱에 겨자가 묻었어." 그는 냅킨으로 그녀의 턱을 닦아주며 말했다. 이든은 그의 손길이 자신의 얼굴에 닿 자 갑자기 그리움 같은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라옴을 느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그 에 게 물었다. "당신은 자신에 관한 얘기는 늘 꺼리는군요. 왜죠?" "다른 얘기가 더 재미있으니까." 칙은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어떤 얘기 말이에요?" "당신에 관한 이야기." "화제를 나한테 돌리시는군요." 이든은 눈을 흘겼다. 그들의 눈길은 서로를 녹일 듯이 잠시 타올랐다. 이든은 목구멍으로 뜨거운 덩어리가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얼른 핫도그를 한 입 베어물었다. 이 악몽 같은 시 간 이 끝난 후에라도, 그와는 헤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 각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은 아파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함께 페리 휠이나 타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을 때, 그녀는 반대하지 않았 다. 그와 함께라면 에스트로 로켓을 다시 탄들 두려울 게 없었다. 칙은 자판기에서 커 다란 솜사탕을 사서 이든의 손에 쥐어 주었다. "캡슐에 타기 전에는 먹지 마." 단원이라는 특권으로 두 사람은 티켓을 사지도 않고, 줄을 서지도 않았다. 캡슐에 앉 자, 이든은 칙이 옆에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날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안전 벨트와 손잡이를 떨리는 손으로 만져 보았다. 칙이 그녀의 마음을 읽고 그녀의 어깨를 팔로 감싸안았다. "겁먹은 표정이군. 그 솜사탕이나 한입 베어 먹어." 칙은 그녀를 안심시키며 웃어 보였다. 다른 커플을 태우기 위해서 페리 휠이 한 칸 움 직였다. 이든은 불안을 떨쳐 버리려고 솜사탕을 얼른 또 한입 베어 물었다. 솜사탕은 금새 혀에 녹아 버렸다. "친절을 베풀어 나에게도 한입 주지 않겠어?" 칙이 그녀에게 말했다. "한입에 다 먹어 버리면 어떡해요?" 그녀는 그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러다간 얼굴이 온통 솜사탕투성이가 될걸." 그는 웃으며 농담을 했다. "당신이 그것을 다 핥아먹겠다면 싫지는 않은 데." 이든은 눈을 흘기며 손으로 솜사탕을 떼서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는 금세 삼키고 나서 또 아 하고 입을 벌렸다. 그녀의 손이 두 사람의 입 사이를 오가는 사이에 솜사 탕은 금새 없어졌고 그는 그녀의 손가락에 묻어 있는 것까지도 깨끗이 핥아먹었다. 이 든은 그의 입술이 자신의 손가락을 빨 때, 온몸이 짜릿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입술은 매우 유혹적이었다. 그에게 자꾸만 가까이 가고 싶다는 욕망이 그녀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마침내 페리 휠이 천천히 회전을 시작했다. 발 아래서 도시의 불빛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며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칙이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자신의 눈 을 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녀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이 밤과 이 남자만 있으면 된 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고 싶은 추억의 순간이었다. 칙이 키스를 해왔을 때, 그녀는 이미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의 입술을 기 쁘고 반갑게 맞아들였다. 말할 수 없는 행복과 만족감을 주는 키스였다. 이제까지 갖 지 못 했던 것을 그녀는 비로소 가지게 된 느낌이었다. 단 한번의 키스로 끝나는 건 너무하다고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무언가를 물을 것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든은 그의 눈길에 자신의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 았 다. 말해요, 빨리. 무엇이든 말해요, 칙.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차츰 크게 들려왔 다. 이든은 페리 휠의 회전이 차츰 느려지는 것을 느꼈고 꿈 같은 순간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칙의 팔에 안겨서 캡슐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이대로 게임 룸으 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어디서든 혼자 있고 싶었다. 칙과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조용 히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동안 사건에 쫓기느라고 그와의 문제를 한번도 심 각 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칙, 나 도니커에 좀 다녀오겠어요." "같이 가겠어." 그는 광장 한쪽에 설치된 이동식 화장실로 발길을 돌리며 그녀에게 따라오라는 손짓 을 했다. "아니에요." 이든은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은 먼저 가세요. 곧 뒤따라갈 테니까요." "기다릴 수 있어." "싫어요." 그녀는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메이시가 기다리고 있어요." 칙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곧 돌아와." 그가 게임 룸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이든은 뒤쪽으로 나갔다. 화장실에 볼 일 은 있지만,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광장을 가로질러 맞 은편을 보니, 니켈이 다른 단원들과 잡담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도 이 쪽을 본 모양이었다. 슬그머니 상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를 에스트로 로켓에 다 억지로 태운 데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이든은 트럭과 트레일러가 서 있는 뒷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나무들과 덤불들이 우거진 가운데에 카니발 단원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두 개의 이 동식 화장실은 비교적 깨끗하고 조용하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문의 손잡이를 돌리려는 순간, 그녀는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옷이 스치는 듯 한 소리와 가벼운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돌려 어두운 주위를 살펴 보았다. 달이 구름 속으로 숨어서 주위는 캄캄하기만 할 뿐, 아무것도 눈에 띄는 것 이 라곤 없었다. 잘못 들은 것일까? 그녀는 도니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번즈의 부하가 아닐까? 그녀는 와락 겁이 났다. 설마 여기까지 쫓아왔을라구. 그래도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때 문에서 핸들을 돌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질겁을 하 며 소리를 질렀다. "누구예요?" 아무 대답도 없다. "누구 예요? 장난치지 말아요!" 가벼운 발소리가 도니커 주위에서 났지만, 상대는 말이 없었다. 누군가가 있다. 누굴 까? 단원 중에서 누군가가 나를 겁주려고 그러는 걸까? 이건 또 다른 신고식일까? 그 렇다면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일어나서 손잡이를 돌렸다. 그러나 핸들은 꼼 짝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 손으로 다시 힘껏 비틀어 봤 지 만, 문은 잠겨 있었다. 이든은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누군가가 밖에서 문의 손잡이 를 고정시켜 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장방형의 쇠방 속에 갇힌 것이다. "문 열어요! 장난치지 말아요!" 그녀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상대는 말이 없었다. "도와줘요! 도니커 속에 갇혔어요!" 그녀는 계속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차츰 호흡이 거칠어져 갔다. 천장에서 물 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것을 손바닥에 받아서 냄새를 맡아 보았다. 독한 향내가 그녀의 머리를 때렸다. 최음액이다. 그녀는 숨을 쉬지 않으려고 코를 막 았다. 짙은 약품 냄새가 좁은 공간을 점점더 진하게 채워왔다. 그녀는 정신이 아물아 물해지는 느낌이었다. "사람 살려요!" 그녀는 한번 더 비명을 지르고는 독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아뜩 해지는 가운데 그녀는 비로소 사태를 깨달았다. 이건 또 다른 신고식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11 칙은 자신의 게임 룸으로 돌아가다 말고 니켈을 만나러 그의 가게로 걸음을 돌렸다. 이든을 에스트로 로켓에 태워서 자칫 죽일 뻔한 그를 만나서 좀 따질 참이었다. 단순 한 사고라고 보기엔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다고 그는 생각 했다. 그러나 니켈은 그 의 가게에 없었다. 그는 옆의 가게에 있는 프랭크에게 니켈의 행방을 물었다. "모 르 겠어. 무슨 중요한 일이 있다면서 조금전에 나갔네." "어느 쪽으로 가던가?" 프랭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쪽 뒤쪽으로 가는 것 같던데?" 칙은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뒤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니켈은 도망을 친 것이다.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칙은 생각했다. 그가 떳떳하다면 영업시간에 가게를 비 워 놓고 몸을 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트럭과 트레일러를 돌아 그쪽으로 뛰어든 칙 은 큰소리로 니켈의 이름을 불렀다. "니켈! 나 칙이야. 있으면 대답을 해!" 그는 캄캄한 곳을 향해 소리쳤다. 아무 대답도 없다. 그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 는지도 모른다고 칙은 생각했다. "비겁하게 피하지만 말고 이리로 나와, 니켈." 칙은 어둠 속을 향해서 소리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바지 주머니에 플래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낸 그는 그것을 끄집어내 어둠 속을 비추었다. 플래시 불빛에 두 개의 하얀 도니커가 떠올랐다. 그는 다가가서 남성용 도니커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 그러나 그 곳에도 니켈은 없었다. 그러나 칙은 그 순간 옆에 있는 도니커에서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 건 또 무슨 냄새란 말인가? "안에 누가 있어요?" 그는 문을 노크하면서 소리쳤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지독한 약풍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그는 문의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플래시로 비춰 보 니 망가져 있었다. 누군가가 열지 못하도록 망가뜨려 놓은 게 분명했다. 칙은 불길한 예감이 번쩍 들었다. 이든이 도니커에 다녀오겠다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든!" 그는 문을 막대기로 재껴서 열었다. 그의 발 아래로 쏟아지는 물체가 있었다. 이든이 었다. "이든! 내 말이 들려?" 그는 무릎을 꿇고 그녀를 안아올렸다. 가슴에 손을 대니 심장은 약하게 뛰고 있었다. 누가 그녀를 죽이려고 했단 말인가? "헤이, 무슨 일이야?" 칙은 플래시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비춰보았다. 시트가 달려오고 있었다. "도와주게, 시트! 이든이 기절했어." "뭐라고! 웬일이야?" 시트와 함께 이든을 에이브의 트레일러 옆 잔디밭으로 옮겨놓았고 칙은 손수건을 물 에 적셔서 그녀의 얼굴을 훔쳐 주었다. 주드가 에이브와 함께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칙 은 니켈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도니커의 문을 망가뜨리고 최음 액 을 천장을 통해 부어 넣은 자가 니켈일까? 그렇다면 그가 왜 이든을 죽이려고 했을까 ? 칙의 머릿 속은 복잡했다. "도대체 그 자가 사용한 약품이 무엇이었지?" 주드가 칙에게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아주 지독한 냄새가 나는 거였어." 칙이 고개를 저었다. "어디 가서 확인해 보세." 주드가 시트를 이끌고 도니커 쪽으로 걸어갔다. "이건 심각한 일일세." 에이브가 우울한 얼굴로 칙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제의 그 사고도 결코 우연이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됐어." 에이브와 칙은 이든을 차에 싣고 병원으로 갔다. 이든은 온몸에 땀을 흘리며 숨을 거 칠게 몰아쉬었다. 그녀를 진찰한 의사는 도니커 속에 조금만 더 두었더라면 질식사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행히 일찍 발견해서 별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설명 해 주었다. 이든이 안정을 취하는 동안 칙은 에이브와 휴게실에서 얘기를 주고받았다. "누가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나?" 에이브가 칙에게 물었다. "누군가가..., 그러니까 우리 내부의 사람이 한 짓이 분명해요. 외부의 사람이라면 지 금쯤은 우리 눈에 띄었을 거예요." "그렇다면 왜? 그리고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누군가 돈이 몹시 필요한 사람이죠." "이든을 죽여서 돈이 나온단 말인가?" 에이브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근래에 일어난 도난 사건과도 상관이 있나?" "없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참 알 수 없는 일이로군. 나를 망하게 하려고 그러는 지 원." 노인은 혀를 차고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잠시 후 의사가 나와서 칙에게 말했다. "환자는 내일 아침까지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들어가 보시죠." 칙은 에이브에게 잠시 들어가보고 오겠다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의사의 뒤를 따라 이든이 누워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그를 안내한 뒤 곧 나가 버렸 다. 칙이 다가가자 이든은 눈을 뜨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분이 어때?" 그는 이든의 머리맡에 앉으며 물었다. "머리가 아파요." 눈을 약간 찌푸리며 대답했다. "당신이었군요. 나를 그 도니커에서 꺼내 준 사람이... 생명의 은인이에요." "지금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나중에 이곳을 나가면 그때 하라구." 이든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겠어요."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전혀 짐작되지 않아?" "모르겠어요. 인기척은 들었지만, 그게 누군지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이마를 찡그렸다. "그렇지만 광장을 지나을 때 니켈이 나를 지켜보는 것을 보았어요. 그는 나와 눈이 마 주치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어요." "나도 니켈을 의심하고 있어." "칙, 또 한가지 있어요. 오늘 아침 태피와 나갈 때 번즈의 부하를 보았어요." "그 얘기를 왜 인제서야 하는 거야?" 칙은 나무라듯 말했다. "나는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다음에는 잊어버렸구요." 칙의 머릿속에는 이미 사태가 정리되고 있었다. 번즈가 카니발 단원 중 어느 한 명을 매수한 것이 분명하다. 이든이 보았다는 그 사내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니켈? 바로 그일까? "여기는 안전할 거야.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 테니라 잠이나 푹 자둬." 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뺨에 키스를 하려고 하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그의 입술에다 키스를 했다. 그건 칙이 경험한 가장 달콤한 키스였다. 그는 그녀의 침대에 서 자신을 떼어놓기 위해서 대단한 의지를 발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칙이 에이브와 함게 그의 트레일러로 돌아와 보니 젤다와 주드, 그리고 몇 명의 단원 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칙은 그들에게 이든은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니켈은 어디 있지? 난 그와 할말이 있는데." "그는 사라졌어." 주드가 칙에게 말했다. "자네가 이든을 찾기 이전에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어." 칙은 그가 범인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숙소도 찾아봤나?" "그곳에도 없어." 젤다가 말했다. 그는 달아난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한 짓이 탄로나게 되자 어디론가 도주를 한 것이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찾아보자구." 칙이 주드와 문이란 사내에게 말하며 앞으로 나섰다. 짐작한 대로 니켈은 그곳에 없 었 다. 그러나 칙은 그의 소지품을 모조리 뒤져보자고 하며 트럭으로 올라갔다. 박스와 침대 따위를 모조리 둬지던 칙은 헝겊으로 싼 뭉치 속에서 돈다발을 찾아냈다. 액수 를 새어 보니 자그마치 8만 달러됐다. "니켈이 이렇게 큰 돈을 만들 재주는 없어." 문이 말했다. "맞았머. 이건 우리가 그동안 도적맞은 돈들이 분명해. 일단 에이브에게 맡겨 뒀다가 처리하지." 칙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두 사내도 찬성했다. 니켈은 돌아오지 않았다. 칙은 다음날 아침 병원으로 이든을 만나러 갔다. 그녀에게 전날밤 일을 얘기하고 니켈이 증발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라면 있을 법한 일이에요." 이든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 앉아 그에게 말했다. "나에게 에스트로 로켓을 타라고 끈질기게 조른 사람도 바로 그였어요. 니켈은 시트 와 아주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에스트로 로켓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었을 거구요. 안 전 벨트와 손잡이를 적당히 풀어놓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놈을 잡으면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칙은 니켈이 그녀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그녀를 잃을 뻔 한 것이다. 그것도 두 차례나 그런 일을 당했으니, 그녀가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옷을 갈아입어야 퇴원을 하죠." 이든은 병상에서 내려오며 생긋 웃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어. 현기증이 날지도 모르니까 조심해." 칙은 그녀를 부축하려고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이젠 다 나았어요. 그리고 서둘러야 해요." 그녀는 그가 보는 앞에서 환자복을 훌훌 벗어 버리고 칙이 준비해 온 옷으로 갈아입 었 다. "서둘러야 한다고?" 칙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침 내내 생각해 둔 것이 있어요. 시내의 유명 의상실을 뒤지는 거예요. 킴 퀸런의 단골 의상실을 찾는 일이죠. 그녀의 아파트에서 보셨죠? 그만한 유명 디자이너들의 의 상을 취급하는 점포는 시내에도 몇 군데 없어요." "미쳤어? 나는 당신을 이제 경찰서로 데려가려는 참이야. 이제 이 일은 더이상 우리 손으로 끌고나갈 수가 없어." 칙은 펄쩍 뛰었다. "아직은 안돼요. 우린 내일밤 번즈의 집엘 가기로 되어 있잖아요? 그곳엘 가려면 나 도 옷을 어차피 한벌 사야 해요." 이든은 생긋 웃었다. "그녀석의 초대는 잊어버려. 옷을 사는 것도 그만둬." "어디 한번 말려 보세요." 이든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당신의 말대로 머리를 염색하고 헤어스타일을 바꾸면 그들도 몰라볼 거예요." 칙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달래듯이 말했다. "이든, 제발 진정해. 우린 이제 너무 위험한 곳까지 왔어. 어젯밤 일만 해도 목숨을 잃을 뻔했잖아?" "나도 알아요, 칙. 그렇지만 이대로 경찰에 가보세요. 그들은 내 말을 믿어 주지 않 을 거예요. 아직 증거다운 증거물이 없잖아요? 니켈도 못 잡았구요. 번즈는 무죄가 될 뿐 만 아니라, 오히려 무고죄로 나를 고소할 거예요. 그러면 이제까지 고생한 우리는 뭐 가 되죠?" 얼마 후, 두 사람은 미시건 에브뉴의 모퉁이를 돌아 말없이 걷고 있었다. 이든은 칙 이 아무 불평 없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이 놀라웠다. 정오가 가깝도록 그들은 유명 의 상실을 뒤지고 다녔다. 삭스, 니만 마커스, 아이, 메그닌과 블루밍대일 따위였다. 그 러나 이든은 자신이 금요일 밤에 입을 옷도 찾지 못했고. 죽은 여자에 대한 정보도 얻 지 못했다. 그들이 기진맥진한 상태로 마지막 들른 의상실이 오크 스트리트에 자리잡 고 있는 <맥시>란 곳이었다. 이든은 쇼 윈도에 걸려 있는 의상들에서 퀸런의 아파트 에 서 본 의상과 비슷 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점포 안으로 들어가서 이 옷 저 옷을 몸 에 걸쳐 보며 여점원의 눈치를 살폈다. "그 옷은 아가씨를 위해서 만든 것 같군요." 여점원은 재빨리 그녀의 비위를 맞추려들었다. "정말 좋은데요." 그녀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킴이 그러는데 맥시는 아주 훌륭한 디자이너를 고용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킴이라구요?" 여점원은 머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킴 퀸런이라고 모르세요? 모텔이죠. 빨갈 머리에다 항상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고 다니죠." 여점원의 얼굴빛이 환해졌다. "아, 그 손님. 누군지 알겠어요. 두 주일 전에도 다녀가셨죠. 친구 사이시군요." "아주 운이 좋은 아가씨죠." 이든은 부러워하는 듯한 제스처를 하며 거울 속으로 여점원을 관찰했다. "킴이 스탠턴과 함께 내일쯤 여기를 들겠다고 하더군요." "아, 그 여자분과 함께 오시는 신사분 말이군요." "그래요. 검은 머리에 귀밑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분이죠." 여점원은 이마를 찡그리며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이상하군요." 그녀는 고개를 갸룻거렸다. 이든은 잽싸게 해치뭐야겠다고 생각하고 신문에서 오려낸 사진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이 안에서 그 남자를 찾아낼 순 있어요?" 여점원은 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바로 이분이죠." 이든의 눈은 커다랗게 변하고 말았다. 여점원이 가지킨 것는 스땐턴 번즈가 아니라, 윌러 덱커였기 때문이다. 12 이든은 미시건 에브뉴로 나가서야 칙에게 여점원이 윌리 덱커를 가리켰다는 얘기를 했 다. 칙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덱커의 이름이 킴 퀸런의 아파트 계약서에 서명되어 있는 것을 봤잖아?" "그녀가 만약 덱커의 정부라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덱커가 자신의 보스를 위해서 그런 일들을 대신 처리했 다고 보는 편이 논리적이지. 퀸런이 덱커의 여자라면 그녀의 시체를 치우는 일에 번 즈 가 왜 끼어들었겠어?" "그렇군요. 하지만 그녀가 번즈의 선거운동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칠 비밀을 발견했 다면 또 문제가 달라져요." 교차로에서 두 사람은 택시를 잡았다. "부두로 가요." "뭐라구?" 칙이 깜짝 놀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든, 그곳은 이제 위험해." 그는 기사에게 목적지를 바꾸어 말했다. "매리어트 호텔로 갑시다." "아니에요, 아저씨. 부두로 가요. 카니발이 열리는 곳이에요." 이든은 고집을 피웠다. "니켈이 도망쳤으니 당분간 위험은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근처에 숨어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스탠턴이 또 다른 녀석 을 보냈는지도 모르고. 아무래도 위험해. 매리어트 호텔로 가세요, 아저씨." 칙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니켈이 돌아왔으면 더욱 가야만 한다. 그를 잡으면 문제 가 쉽게 풀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싫든 좋든 그를 만날 필요가 있다고 이든은 생각 했다. "부두로 가세요." 이든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단 그곳으로 가서 상의해요." 택시가 요란스럽게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멎었다. 운전수가 돌아보며 짜증을 냈다. "두 사람이 합의하기 전에는 가지 않겠소. 도대체 어디로 가자는 거요?" 칙이 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고집에 또 지고 말았다 는 표정이었지만 심히 못마땅한 모양이다. "부두로 가요." 결국 그렇게 말했다. 운전수는 무어라고 투덜대면서 차를 출발시켰다. 얼마 후 두 사 람은 카니발 광장에 닿았다. 단원들이 두 사 람을 에워싸며 반가워했다. 칙은 이든이 무사히 회복했다고 그들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이든은 약간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 면 서 그녀를 자신의 트럭으로 데려갔다. "정말 좀 쉬어야겠어요." 이든은 트럭에 들어오자 옷을 갈아입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호텔로 가자고 했잖아. 여기는 니무 불편해서 마음 놓고 쉴 수가 없어요." 칙이 안쓰런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여기가 좋아요." 이든은 미소를 지었다. "호텔 방에 혼자 있기는 싫어요. 이곳에는 친절한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누가 당신을 호텔 방에 혼자 두겠다고 했어? 내가 같이 있어 줄지도 모르잖아?" 웃으며 하는 말이었지만, 이든은 그 말에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가슴이 울렁거려 그 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농담 말아요, 칙. 당신도 살아야죠. 나 때문에 돈을 다 써버리고 빈털터리가 되는 것 을 보고 싶지 않아요." "이유는 그게 아니겠지. 당신은 니켈이 이곳에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거야." "그것도 사실이에요." "제발 위험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어떤 짓 말이에요?" 그녀의 허리에서 드레스가 발치로 떨어졌다. "밤에 혼자 돌아다니는 짓 따위를 말하는 거야. 내가 당신을 일일이 따라다니지 못할 경우엔 다른 사람을 보디가드로 붙일거야." "나를 굉장히 걱정하는 것 같군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이제 옷을 거의 다 벗고 있었다. 칙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그의 눈동자가 소리없이 타오르고 있 었다. "물론 걱정하고 있지." 그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굉장해."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손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가까이로 다가왔지만 브래 지어와 팬티 차림의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든은 자신이 보다 더 그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눈치채기 전에 스커트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길에 얼어붙어 버린 것처럼 그녀는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 원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녀는 그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의 뜨거운 키스를 원했다. 자신을 위해서 그처럼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자신의 목숨까지 도 구해 준 그와 언제 사랑을 나눌 기회가 찾아올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은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이든은 생각했다. 칙은 말보다 행동으로 표현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올리 고 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댔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 다 듬으며 가슴으로 옮겨갔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브래지어를 헤집고 가슴을 살짝 만 지자 그녀의 온몸이 진저리를 치며 활짝 문을 열었다. 칙은 이든의 이마에 키스를 했 다. 말없는 존경의 표시였다. "괜찮아?" 그가 속삭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까칠까칠한 턱에 자신의 뺨을 부벼댔다 . 그 까칠까칠한 감촉은 그녀의 신경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입술이 열기를 뿜으 며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머릿속이 아뜩해져 왔다. 그가 그녀를 두 팔로 번쩍 안아올렸다. 그리고는 귀한 보물처럼 조심스럽게 매 트리스 위에다 눕혔다. 그녀의 가슴이 터질듯이 고동쳤다. 그가 진을 벗어 옆으로 차 던지는 것을 그녀는 눈을 감고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몸무게가 느 껴졌다. 카니발 트럭의 뒷칸은 사랑을 나누기엔 그리 적합힌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든은 까 마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의식 속에서 위치를 잊어버렸다. 황흘함만이 있는 그 의식 속에서 그녀는 이제까지 자신을 괴롭혀 온 모든 일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오 직 칙의 사랑만을 온몸으로 절실하게 느낄 뿐이었다. 칙은 이든이 잠든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나 귀여운 여인인가? 그는 몸 속에서 환희의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소유했다는 행복감이 그의 가슴 을 벅차게 만들었다. 그는 이든이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 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그는 옷을 입고 트럭에서 나왔다. 그는 먼저 에이브의 트레일러로 걸음을 옮겼다. 젤다가 의자를 밖에다 내놓고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녀는 칙을 보자 미소를 지었다. 알 만하다는 웃음이었다. 에이브가 트 레일러 안에서 나왔다.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요." 칙이 젤다에게 말했다. "이든 말이로군?" 젤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모르시는 게 없군요." "우주 속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얼마든지 있지." 예언가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당신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어. 더군다나 여자에 대한 당 신의 감정은 손바닥처럼 훤해." 칙은 이 할머니에게 이든과의 정사 장면을 그대로 보여준 것만 같아서 얼굴이 달아올 랐다. 이 노파는 무슨 천리안이라도 가졌단 말인가? 에이브가 껄껄 웃으며 아내의 손을 잡았다. "젤다는 너무 지나치게 로맨틱해. 그래, 부탁할 것이란 게 무언가?" "이든을 좀 주의 깊게 살펴봐 주십사는 겁니다. 아무래도 불안해서...." 에이브는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일이 또 있을 거란 얘긴가?" "모르겠어요. 이든은 지금 자고 있는데, 나는 전화걸 일도 있고, 또 가게도 열어야 하기 때문에...." "그건 너무 신경 쓸 것 없네. 자넨 이미 몫을 다하지 않았나? 잃어버린 돈을 다 찾았 으니 자네한테 감사할 따름일세." "정말이야. 당신은 우리 모두의 은인이야." 젤다도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우리 가족인 동시에 우리가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아들이지." 칙은 젤다를 살짝 포옹하며 말했다. "나는 행운아예요. 자식처럼 사랑해 주시는 분들을 여기서도 만났으니까요. 이든이 트 럭에서 나가는 것을 지켜봐 주시겠죠?" "물론이지."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교대로 지킬 테니까 아무 걱정 말아요. 이든을 혼자 내버려 두지는 않겠어. " 노부부에게 단단히 부탁을 한 다음, 칙은 전화를 걸기 위해서 버스 정류장 부근으로 나갔다. 러빗 프로모션의 여비서는 곧 그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연결시켜 주었다. "네가 웬 일이냐? 월요일 아침에 전화하겠다고 하더니?" 사무엘 러빗은 반가운 어투로 물었다. "도움이 필요해요." 칙은 대뜸 그렇게 말했다. "문제가 생겼냐? 매튜가 나서야 하니?" "변호사는 필요없어요. 월리 덱커의 정보를 아시는 대로 알려줘요. 그자는 스탠턴 번 즈의 선거 참모로 일하고 있는 자예요." "윌리 덱커라면 들은 적이 있지. 그래, 그자와 무슨 관계가 있니?" "지금은 설명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사람의 목숨이 걸린 중요한 일이에요." "알겠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시간이 걸릴 텐데." "우선 노출되어 있는 정보만이라도 모아 주세요. 오늘밤에 전화드리겠어요." "그렇게나 급하냐? 넌 여전히 그 버릇을 못 버렸구나." "죄송해요. 그리고..." 칙은 목구멍이 막혀왔다. "아버지를 사랑해요." 사무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항상 몸조심해라. 밤 10시에 집으로 전화하렴. 엄마를 놀라게 하지 말고." "알겠어요. 그럼..."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도니커 속에 갇혀 있었다. 문을 아무리 두들겨도 꿈쩍도 않는다. 독한 약품 냄 새가 그녀의 숨통을 막는 것만 같았고 의식이 자꾸만 희미해져 가고 있다. 누군가가 밖에 있다. 그가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 여기서 나가야 해! 살려줘요! 그녀는 몸 부 림치며 문에 매달렸다... 이든은 악몽에서 깨어나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온몸 은 땀투성이였다. 주위는 캄캄하다. 칙은 어디로 갔을까? 나를 혼자 내버려 두고 어 디 로 갔을까? 그녀는 상체를 일으키다가 자신이 알몸인 것을 깨달았다. 칙과 사랑을 나 눈 일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녀는 조용히 그 순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감미로운 추억은 악몽의 후유증을 씻어가 버렸고 그녀는 사랑의 순간순간을 미세한 부분까지 되 새기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그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초조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밖으 로 나와 보니 트레일러 아래 의자를 놓고 젤다가 감시병 처럼 앉아 있었다. "아니, 거기서 뭘하고 계세요?" 이든은 그렇게 물으며 트럭의 문을 잠갔다. "칙의 부탁으로 보초를 서고 있지. 누가 이든을 잡아가기라도 할까 봐서." 젤다는 웃으며 말했다. "원, 세상에, 황송하기도 해라. 고마워요. 그렇게 신경을 써주셔서." 이든은 할머니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는 칙을 찾아봐야겠다고 말했다. "잠간 기다려!" 젤다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가겠어. 나도 가게에 나갈 일이 있으니까." 그러나 이든은 젤다가 자신을 혼자 밤길에 내보내는 것이 안심이 안되어서 그러는 것 을 훤히 알고 있었다. 엄마처럼 고마운 분이라고 이든은 생각했다. "이든, 당신은 아직 위험에 둘러싸여 있어." 광장을 비추는 희미한 불빛 사이를 걸으며 젤다는 조그마한 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 다. "니켈을 보셨어요?" 이든은 불만한 얼굴로 젤다를 돌아보았다. "니켈을 보지는 못했지만, 난 느끼고 있지." 예언가 할머니는 중얼거리며 손으로 악귀를 쫓는 시늉을 했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돼." "조심하고 있어요." 이든은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이 노파는 또 다른 나의 위험을 예언하고 있 는 걸까? 젤다는 고개를 절레절제 저으며 중얼거렸다. "내 말을 곧이듣지 않고 있군. 칙을 만나려는 생각에만 골몰해 있어." 칙은 게임 룸 앞에 나와 있었다. 그를 보자 이든은 마음속의 어두운 그림자가 일시에 걷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남자, 그러나 뜨 거 운 사랑을 같이 나누는 순간에도, 그는 사랑한다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든 은 그것이 못내 서운하면서도 그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다시 그의 가슴에 안기고 싶 은 강한 충동을 견디기 어려웠다. "기분이 어때?" 칙이 그녀에게 물었다. "아주 좋아요." 두 사람은 돌아가는 젤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메이시가 놀러와서 반가운 표정 을 지었다. "좋아보이는데, 이든. 정말 다행이야. 얼마나 놀랐는지." "미안해요. 걱정을 끼쳐 드려서." 이든은 진심으로 말했다. 막 손님이 손을 털고 가버리자, 칙은 시계를 보았다. "마침 잘 왔어요, 메이시, 중요한 전화를 걸 일이 있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든 과 함께 있어 주시겠어요?" "물론이죠. 다녀오세요." "지금 시간에 누구에게 전화하시려구요?" 이든은 그에게 물었다. "아버지에게." 칙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가게를 떠났다. 이든은 화난 얼굴로 그의 등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남자는 좀 묘한 데가 있어요." 메이시가 그녀를 위로하듯 말했다. "두 사람이 싸우기라도 한 건 아니죠?" "싸웠다면, 나는 그게 언제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이든은 눈살을 찌부리며 대답했다. 칙의 속을 알 길이 없었다. 구멍에다 동전을 밀어 넣은 칙은 다이얼을 돌렸다. 그의 아버지가 바로 나왔다. "저예요." 칙이 성급하게 물었다. "뭘 좀 알아냈어요?" "애비한테 하는 인사가 고작 그거냐? 인사라도 좀 하면 안돼?" "죄송해요." 그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너무 급해서요, 아버지." "흠, 이유는 아직 말할 수 없다는 거니?" "지금은 그래요. 그렇지만 나중에 다 말씀드리죠, 월리 덱커는 어떤 인물이죠?" "덱커는 슬럼가 출신이야. 성질이 급하고 학급에서도 말썽을 자주 피워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세 번이나 퇴학을 당했지. 친구의 팔을 부러뜨린 적도 있고, 이빨을 부 러뜨린 경우도 있었어. 그렇지만 어떻게 졸업을 하고 대학엘 들어갔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10대 시절에 싸움꾼이었다, 그 말이군요. 그게 다예요?" "전과가 있어. 그런데 자세한 내용은 아직 모르겠고, 어떤 사기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것만 확인했다. 미안하다,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해서." "그만하면 됐어요. 고마워요, 아버지." 칙은 전화를 끊었다. 그 정도면 덱커라는 인물이 어떤 유형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는 말하자면 사기꾼인 것이다. 칙은 카니발 광장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멀리서 프랭크와 몇 명의 단원들이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 터졌구나 하고 그는 직감했다. "칙, 큰일났어!" 프랭크가 그의 팔을 잡아끌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 "글쎄, 가보면 알아. 빨리 가자니까." 프랭크는 벌써 달리고 있었다. 칙은 그가 트럭과 트레일러를 세워 놓은 뒤쪽으로 달 리 는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든이 갇혔던 도니커가 있는 곳이다! 그는 정신없이 달렸다. 이든이 또 당했단 말인가? 이번엔 남성용 도니커였다. 도니커 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시트가 플래시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안을 들여다 보게." 시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칙은 그 좁은 공간을 플래시로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그러 나 불빛에 잡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 그는 시트를 돌아보았다. 시트가 플래시를 든 그의 손을 아래로 숙이게 했다. "저 탱크 안을 보게." 플래시로 탱크 속을 비춰 본 칙은 표정을 심하게 일그러뜨렀다. 이럴 수가...,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 일을 이든에게 어떻게 얘기해야 하지? 그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13 "전화 한 통화 하는데 무슨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지?" 이든은 메이시에게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칙과 사랑을 나눈 뒤로 는 그에게 더 많은 친절을 기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더 소원 하게 대하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당신을 이렇게 붙들어 두기는 미안해요." 이든이 메이시에게 말했다. "난 괜찮아요. 내가 없어도 펠릭스는 잘 해나가니까." 메이시는 그러나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돼요." 이든은 게임 룸을 닫을 생각을 했다. 어차피 장사는 파장이었다. "문을 닫아야겠어 요."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칙 러빗은 어쨌든 내 기분을 알아야 해요." 이든은 우유병을 박스에 쓸어담으며 말했다. "더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 "오, 증세가 몹시 심해진 것 아녜요?" 메이시가 웃으며 말했다. "무슨 증세?" "상사병 증세."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이든은 웃으며 우유병을 박스에다 채웠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오호, 솔직한 고백이 마음에 들어요. 누구라도 그런 병에 걸리면 방법이 없죠. 하지 만 칙도 똑같은 병을 앓고 있는 것 같던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이든은 메이시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그런 것은 원래 제 3자의 눈에만 보이는 법이거든요." 메이시는 생긋 웃었다. "그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고말고요, 이든. 당신만 빼놓고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인걸요." 이든은 인형들을 박스에다 담아 스탠드에 올려놓으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난 믿을 수가 없어요. 그만 문을 잠그고 돌아가야겠어요. 칙이 돌아오면 짐은 그가 올리겠죠, 뭐." 이든이 가게의 문을 잠그고 메이시와 작별하려는 순간 진저가 그들 앞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이든, 칙의 전갈이야." 오렌지 색 머리의 그녀는 늘상 피우는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 "칙이 뭐라고 했어요?" 이든은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곧 부두 북쪽 끝으로 나오래요. 당신 혼자만. 중요한 일이라고 하던대요." 진저의 눈에는 적의 같은 것이 번쩍였다. "나는 단지 말만 전할 뿐이니까." "알겠어요. 고마워요."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러 간 사람이 부두엔 왜 갔을까?" 이든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중요한 일이라니 빨리 가봐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 사건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잡았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없는 조 용한 곳에서 의논을 하려고 그러는 모양이다. "메이시, 고마웠어요." 그녀는 인사를 하고 부두 쪽으로 향했다. "같이 가면 좋겠는데." 메이시가 걱정을 했다. "혼자 오라고 했어요. 나중에 또 만나요." 이든은 메이시가 뭐라고 우기기 전에 얼른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녀는 광장을 지나 부 두로 나가는 길로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그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할까? 자동차가 라 이트를 환하게 밝히며 드문드문 지나갔다. 부두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은 그녀 한사람 뿐이었다. 카니발도 이제 막을 내릴 시간이었다. 상점들의 불빛이 하나씩 줄어들고 있 었다.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확성기의 음악 소리도 그친 지 오래 되었다. 부두 입구에서 갈라지는 곳에서 이든은 북쪽 길로 들어섰다.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보 이지 않는 어두운 길이었다. 달도 없는 칠혹 같은 이곳에, 칙은 무슨 일로 나를 불 러 낸 것 일까? 방벽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만 썰렁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아스팔트 위로 하이힐 뒤축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었다. 불안에 가슴이 옥죄어 왔다. 메이시의 말을 들을걸 그랬다고 그녀는 후회했다. 그렇지만 칙은 혼자 와야 한다고 말 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건 뭔가 좀 이상하다. 그는 언제나 내 곁에 한 사람을 붙여 두 겠다고 말했는데... 이든은 부두 끝을 향해서 200미터 가량 걸어들어갔다. 그러나 칙의 모습은 보이지 않 았다.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왜 이렇게 무서운 곳으로 나오라고 했을까. "칙?" 그녀는 캄캄한 어둠을 향하여 떨리는 소리로 불러보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녀 는 걸음을 멈추고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했다. 입술이 바싹 타들어왔다. 젤다 할머니 의 불길한 예언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돌아가 버릴까? 그러면 칙은...? 그녀는 방파제를 따라 둘러쳐진 가드 레일을 손으로 만지며 계속 발소리를 죽여가며 걸었다. 전방을 주시하며 신경을 한 곳으로 모았다. 도무지 인기척이라곤 없다. 도대체 칙은 어디쫌에 있는 거야? 혹시 니켈이 덫을 놓 고 기다리는 건 아닐까? 니젤? 그녀는 낮에 꾼 악몽을 되살리곤 몸을 떨었다. 그때 무 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사람의 발자국 소리 같은 걸.... 그녀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 "칙?" 역시 대답이 없다. "칙이에요? 칙, 어디 있어요." 그녀는 더 큰소리로 불렀다. 그래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든은 겁이 더럭 났다. 이 건 함정이라고 생각한 순간 그녀는 돌아서서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주 위 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고 비명을 지르는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 일어났 다. 진저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그녀는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칙은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에이브에게 사실을 알려야 했다. 도니커의 탱크 안에 들 어 있는 시체는 경찰에서 처리할 것이다. 이제 이든도 별 수 없이 경찰에 출두해서 그간 의 사정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경찰에서 그녀의 얘기를 믿어 줄지는 차후 의 문제라고 그는 생각했다. 앞으로 닥쳐올 일에 대해서 걱정하며 가게로 돌아온 그는 문이 닫히고 이든이 보이지 않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는 메이시의 트레일러로 갔겠 거 니 생각하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모순은 보 이지 않았다. "이든은 어디 갔죠?" 그가 다급하게 매이시에게 물었다. "누가 물을 소릴? 당신을 만나러 부두 북쪽으로 가잖았어요?" 메이시의 얼굴도 하얗게 굳어졌다. "당신이 그리로 오란다고 해서 갔어요." "누가 그런 소리를 했어요?" "진저가 그렇게 전했어요." 칙은 이미 부두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의 마음이 다리 보다 먼저 앞서고 있었다. 왜 진저가 그런 소리를 했을까? 그녀도 게이터와 함께 번즈에게 매수당했을까? 그러 나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였다. 이든이 위험하다. 사랑 지금 사랑하는 여 자가 생명을 위협받고 있다. 부두의 입구로 막 뛰러들었을 때, 칙은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그는 소리가 들 려 온 쪽으로 미친 듯이 달렸다.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덩치로 미루어 봐서 이든은 자신을 공격해 온 사내가 게이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번즈의 부하일까? 그러나 등을 돌린 채 사내에게 잡힌 상태로는 그가 누군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상대는 그녀의 목을 졸라 왔다. 그녀가 단 한번 내지른 비명은 짤막하게 끊기고 말았다. 숨이 막혀왔다. 그녀는 의식이 가물가 물해지는 가운데서도 마지막 힘을 모아 사내의 얼굴을 손톱으로 할켰다. 앗! 하고 사 내가 팔의 힘을 늦추는 사이에 그녀는 하이힐로 사내의 발등을 힘것 찍어 버렸다. "아이쿠!" 사내는 마침내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던 팔을 풀었다. 이든은 그를 힘껏 뿌리치고 부 두의 입구 쪽을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지독한 년!" 사내가 뒤에서 쫓아오며 소리쳤다. 두 사람의 어지러운 발소리가 고요하던 부두의 아 스팔트 위로 요란하게 흩어졌다. 이든은 달아나며 방파제의 가드 레일을 타넘고 호수 속으로 다이빙을 할 생각을 했다. 사내와 간격이 자꾸만 좁혀지고 있었다. 그에게 다 시 잡힌다면 두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호수로 뛰어드는 수밖엔 없다. 그 녀 는 가드 레일을 잡고 타넘기 시작했다. "오, 안되지." 뒤쫓아온 사내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이든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 고 도로 쪽에서 비쳐오는 희미한 불빛으로 사내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드러 났다. 그리 고 사내의 말소리를 그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번즈의 부하가 아니었고, 니켈도 물론 아니었다. 그녀가 친구로 생각하고 믿고 있었던 인룰이었다. "주드 니스트롬!" 그녀는 입을 딱 벌렸다. 그가 바로 그녀를 죽이려는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일을 어렵게 만들지, 이든? 난 당신을 좋아해. 당신이 고통스러워하는 것 을 보고 싶지 않아. 그만 버둥거리라구." "닥쳐요." 그녀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녀가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손목의 통증만 더해왔다. "당신이 에스트로 로켓의 안전 벨트를 고장내고 도니커에서 나를 죽이려 했던 사람 이 군요? 니켈은 어디 있죠? 당신은 그를 죽였죠? 그렇죠?" "그 친구는 코가 너무 예민한 게 화근이었지." 이든이 그를 떨쳐내려고 다시 몸부림을 치자 그는 그녀의 두 팔을 꺾으며 소리쳤다. "자꾸 그러면 손목을 아예 분질러 놓을 테다! 어차피 죽어 줘야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쉽게 당할 줄 아세요? 어림도 없어요?" "그녀의 말이 옳아. 그녀는 쉽게 당할 여자가 아니지." 어둠 속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깜짝 놀랐다. "칙! 당신이군요?" 이든이 소리쳤다. 주드는 이든을 뒤에서 끌어안고 칙을 향해 돌아섰다. "가까이 오지 마, 칙!" "오, 왜 그러지? 자네는 이미 이든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내가 더이상 잃 을 것이 뭐지? 우리 두 사람을 한꺼번에 죽이지는 못할걸." 주드가 머뭇거리는 틈을 이용해서 이든은 그의 주의력을 분산시켰다. "당신은 이제 틀렸어요, 주드." 그녀는 다시 남아 있는 힘을 다해서 그에게 반항했다. "자넨 이미 니켈을 죽였어. 이제 이든과 나를 죽일 텐가?" 그 순간 주드는 이든을 바닥에다 팽개쳐 버리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추 격 전이 벌어졌다. 이든은 두 사내의 뒤를 쫓아갔다. 칙이 자신보다 덩치가 큰 주드의 다 리를 잡고 쓰러졌다. 그러자 둘은 함께 엉켜서 뒹굴기 시작했는데 주드의 큰 덩치가 칙을 깔고 앉아 난타질을 해댔다. 이든은 급하게 하이힐을 벗어들고 달려들었다. 주 드 가 주먹을 치켜들고 칙을 때리려고 하는 순간 그녀는 주드의 머리를 하이힐 뒷축으로 힘껏 갈겼다. 하이힐 뒷축이 그의 머리를 파고드는 느낌을 그녀는 느꼈다. "아악! 이게 뭐야?" 주드가 한 팔을 휘둘러 그녀를 후려치려고 했오나, 이든은 가볍게 뒤로 물러나며 그 의 주먹을 피했다. "포기해, 주드. 당신은 우리 두 사람을 당할 수 없어." 주드는 그녀를 무시하고 계속 칙과 주먹질을 주고받았다. 두 사내가 길가의 경사진 곳 으로 굴러내리며 난투극을 벌이자 이든은 부두의 입구를 향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 했 다. "사람 살려! 불이야! 불이야! 살려줘요!" 그녀는 목청이 터져라고 소리쳤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라. 그녀 는 계속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소리치는 사이에 싸움이 끝났는지 잠시 조용해졌다. 길 위로 시커먼 사람의 그 림자가 올라왔다. 주드다! 그녀는 기슴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주드는 지친 숨을 몰 아쉬며 부두 입구를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든, 괜찮아?" 어둠 속에서 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칙, 괜찮으세요?" 그녀는 왈칵 반가운 생각이 들어 소리 쳤다. "괜찮아, 주드는 어디로 갔어?" "저쪽이에요. 뒤쫓아요. 나도 뒤따라 가겠어요. 빨리 가요!" 칙은 주드의 뒤를 따라 카니발 광장까지 왔다. 상점들은 한산했으나 아직도 문을 열 어 놓고 있었다. 주드의 금발은 사람들 틈에서도 눈에 잘 띄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지 나 상점 사이로 몸을 감추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시트가 헐떡거리며 뛰어오며 칙에게 물었다. "니켈을 죽인 놈은 주드야. 그는 또 이든을 죽이려 했어." 칙은 재빠르게 설명하고는 주드가 사라진 쪽으로 달려갔다. 칙이 페리 휠 가까이에 도 달했을 때, 주드는 줄을 선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가려고 버둥대고 있었다. 칙이 달 려 가서 두 주먹으로 그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덩치가 큰 그는 무릎을 꺾고 털썩 주저앉 았다. "아니, 왜 그래요?" 십대 아가씨가 놀라며 소리쳤다. 청년 하나도 놀라며 칙에게 물었으나 대답할 겨를이 없었 주드가 반격을 가해왔기 때 문이다. 주드는 그의 발을 낚아채서 바닥에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 어나서 재빨리 페리 휠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칙은 결사적 으 로 주드의 뒤를 따라갔다. 시트가 다른 단원 들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주 드의 앞을 막아 섰고 독안에 든 쥐 꼴이 된 주드는 오도가도 못하고 잔뜩 웅크리고 있 었다. 칙이 다가서자 그는 최후의 발악을 하며 덤벼들었다. 칙의 주먹이 그의 턱을 후 려치자, 주드는 페리 휠에 등을 부딪치며 나가떨어졌다. "포기해, 이 바보같은 자식!" 칙은 그에게 소리쳤다. "이젠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어. 네 놈이 니켈을 죽이고 이든 까지도 죽이려 했던 사 실을 말이야." "닥쳐!" 주드는 벌떡 일어나서 칙에게 다시 덤비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옷이 페리 휠의 캡슐 에 걸려서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 표정이 오히려 코믹하게 보였 다. 그때 페리 휠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주드는 옷이 캡슐에 걸린 상태로 캡슐과 함 께 공중으로 매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는 당황하며 캡슐의 손잡이를 잡고 몸을 버 둥거렸다. 칙이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그가 발로 걷어찼다. 칙은 뒤로 나가 떨어져 서 공중으로 매달려 올라가는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몰려들 었 다. 그들은 주드의 그 위험한 곡예를 지켜보며 손에 땀을 쥐었다. "저녀석을 꼭대기로 올려서 공중에다 패대기를 쳐버릴까?" 페리 휠의 조종석에 앉은 단원이 칙에게 소리쳤다. "그렇게 해버려! 니켈을 죽인 놈이야!" 게이터가 중간에서 대답했다. "저녀석은 그렇게 해도 싸! 이든을 내 에스트로 로켓에 태워서 죽이려고도 했어." 시트가 거들었다. 기분 같아서는 칙도 그들이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두고 싶었지만 주 드 를 죽이는 것은 곤란하다. 그런 일은 법이 할 일이다. "그를 아래로 내려. 이젠 도망치지 못해." 칙은 그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주드가 죽어 버리면 킴 퀸런을 죽인 살해범을 찾아 낼 수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캡슐이 꼭대기에서 정지하자, 주드는 발로 캡슐의 모서 리 를 딛고 걸린 옷을 벗 기려고 기를 썼다. 그는 옆 칸에 타고 있는 어린아이 두 명에 게 손을 뻗쳐서 잡으려고 했다. 사람들이 아래에서 비명을 질렀다. "아이들이 위험해요!" "저녀석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아이를 인질로 잡으려는 거예요!" 그러자 조종석에 앉은 다원이 기계를 움직이며 소리쳤다. "나쁜 놈! 이젠 죄없는 어린애까지 해치려고 하는구나. 어림도 없다." 그는 기계를 빠르게 움직였다가는 급정거를 시켰다. 주드는 다시 몸의 균형을 잃고 허 공에서 대롱거렸다. 조종자가 다시 한번 그런 동작을 가하자, 주드는 마침내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떨러졌다. 14 이든은 주드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캡슐에서 떨어져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커다 란 체구는 티켓을 파는 매표소의 천장에 떨어져서 그곳을 박살내며 바닥에 떨어져 뒹 굴었다. 거구가 사지를 뒤틀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사람들은 끔찍하다는 듯이 바라보 았 다. 이든은 그 끔찍한 광경을 보지 않으려고 손으로 눈을 가렸으나 머릿속에 새겨진 그 광경은 지워지지 않았다. 세 사람이 죽은 것이다. 킴 퀸런, 니켈 포겔, 그리고 이제 주드 니스트롬.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에 이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경찰에 끌려가서는 안된 다. 주드가 죽었으니, 경찰은 나의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주드는 죽지 않았어, 이든." 칙이 옆으로 다가오며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이에요?" "맥박이 뛰고 있어. 숨도 쉬고 있고." 이든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칙이 그녀에게 말한 대로 주드는 가슴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숨을 쉬고 있었다. "나를 구해 줘서 고마워요." 이든은 그제서야 칙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도대체 그곳까지는 왜 갔었어?" "진저가 당신이 그곳에서 나를 만나자고 했다고 말했어요." 두 사람은 동시에 오렌지 색 머리를 한 그 여자를 돌아보았다. 진저는 손을 쳐들어 변 명을 했다. "주드가 그렇게 말했어요. 당신의 부탁이라고 하면서.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내가 어 떻게 알았겠어요?" "당신 말을 믿어요." 이든이 말했다. "내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달려갔어요." 이든은 칙의 팔을 끌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요." "안돼... 경찰이 오고 있어." "그래서 빠져나가자는 거예요. 그들에게 끌려가면 우리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맡 아요." 칙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으며 조용히 타일렀다. "여기선 도망가면 안돼. 니켈의 시체가 발견됐어. 도니커의 탱크 속에서 나왔지." 이든은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갇혔던 도니커에서 니켈의 시체가 나왔다 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이었다. 칙은 이제 경찰의 손에 사건을 맡 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주드가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그들의 말을 경찰이 믿어줄지 이든은 그것이 걱정이었다. "경찰이 개입하게 되면 당신과의 관계가 여기에서 끝나게 되는 것이 나는 서운해." 칙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의 눈동자가 우울한 빛을 담고 있 었 다. "나는 아무래도 당신한테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니까 말이야." 그는 이든이 가장 두려워하던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든과는 어차피 어울리지 않 는 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든은 가슴이 미어져옴을 느렸다. "나는...." 그러나 이든의 말은 경찰이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옴으로써 중단되고 말았다. 칙 이 경찰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니켈의 죽음과 이든에 대한 세 차례의 암살기도 를 경찰에게 설명했다. 아이작 잭슨이란 이름의 경감은 주드를 병원으로 싣고 가는 차에 이든과 칙도 함께 타 도록 지시했다. 주드가 응급실에서 아직도 의식불명 상태에서 헤매고 있을 때 잭슨 경 감은 칙과 이든을 휴게실로 데려갔다. "자, 이제 자초지종을 말해 보시지." 경감은 자리에 앉자 말을 꺼냈다. 칙은 이든의 손을 꼭 쥐어 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 "먼저 우리들의 이야기가 당분간은 비밀이 유지될 수 있도록 약속해 주셔야겠습니다. " "당신은 그런 걸 요구할 권리가 없소." 경감은 강압적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들을 공무 방해죄로 체포할 수도 있어." "우리가 입을 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이든은 경감을 노려보며 야무지게 말했다. "나는 주드가 단지 나를 죽이려고 했으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하면 그만 이에요. 어떤 법관이라도 내가 알고 있는 소문이나 단지 추측에 불과한 사실을 얘기 하 지 않았다고 해서 나를 처벌하지는 못할 테니까요." "소문이나 추측? 그럼 나를 데리고 그런 허황한 얘기를 하자는 거요?" "사실은 허황하지 않을지도 모르죠." "소문이나 추측이라... 좋소, 손해날 것은 없으니까 들어 봅시다." 이든은 이젠 더이상 물러설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이 발생하기 일주일쯤 전에 어떤 사람이 퇴근을 하다가 시 시카고 리버에서 시체가 보트로 옮겨지는 광경을 목격했어요." "그 어떤 사람은 여잡니까?" "글쎄요, 아무래도 좋겠죠. 이건 가정이니까." "아, 그렇지, 참. 계속하시오." "그 목격자는 시체를 옮기는 남자들 중 한 사람의 신원을 알아봤어요. 동시에 그 남 자 도 목격자를 알아보는 눈치였죠." 이든의 가슴은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런 경우 그 목격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죠?" "그야 물론 현명한 시민이라면 경찰에 신고를 해야죠." 경감이 말했다. "그렇지만 3명의 살인범이 그녀를 노리고 있고, 그녀가 알아본 그 남자는 강력한 유 명 인사라서 경찰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자라면 어떻게 되죠?" "그렇다면 그건 아주 중대한 사건이오, 페인 양. 그들의 이름을 밝혀주시오." "이건 추측 내지는 가설입니다, 경감님. 잊으셨어요?" 경감은 뚫어질 듯이 이든을 쏘아보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범했던 말인가? 나 는 피해자일 뿐이다. "좋소, 가설이야." 다시 경감은 말했다. "가설 속에 죽은 그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게 좋겠소." "킴 퀸런이라고 해요." 경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곧 웃으면서 말했다. "가설이니까, 그리고 목격자가 알아보았다는 그 유명 인사의 이름도 붙여 봅시다." 이든은 주저하면서 칙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그녀의 두 손을 잡아주며 용기를 북돋 웠다. "스탠턴 번즈." 그녀의 입술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잭슨 경감은 펄쩍 뛸 듯이 놀랐다. "돌았소? 검찰 총장이 살인을 했단 말이오?"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요. 현장에서 그를 봤다고만 했지. 그는 부하 두 사람을 시 켜 서 나를 뒤쫓게 했어요." 이든은 아무래도 말을 잘못했나 보다고 후회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말을 믿을 경 찰 이란 없다. 경감은 도저히 믿기가 어렵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증거가 있소? 믿을 만한 물증이 있느냔 말이오." 이든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모조리 털어내 놓을 수밖에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동안에 수집한 증거물과 심증을 모두 경감에게 얘기해 버 렸다. 칙도 옆에서 그녀를 거들었다. 그들의 얘기가 끝나자 잭슨 경감은 무거운 표정 을 지었다. "나는 당신들을 체포해야겠소. 주거 침입죄와 증거물 은폐, 공무집행 방해죄로 말이 오." "스탠턴 번즈 같은 자를 주지사로 당선시켜서는 안돼요." 칙이 소리쳤다. "설사 퀸런을 그가 죽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시체를 유기했소. 그가 지시한 살 인 인지도 모르오. 자신의 선거 운동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한 거요." "우리는 진상에 아주 가깝게 갔어요." 이든도 거들었다. 경감은 우리들의 말을 믿고 있을까? "틀림없이 죽은 여자와 번즈와의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내 일 밤 번즈의 집으로 가기로 한 거예요. 칙은 그들의 초대를 받아놓고 있거든요." "그건 내가 상관할 바 아니오, 페인 양.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으로서 나는 이러한 사 실을 묵인할 수 없소." "그렇지만 그런 사실을 모두 알고 나서 우리를 체포할 순 없소." 칙이 강경하게 말했다. 잭슨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졌다.그는 당차게 노려 보 고 있는 칙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슬쩍 웃었다. "이제까지의 가설은 잘 들었소. 그렇지 만 난 안 들은 걸로 하겠소. 아무리 가설이지만, 그런 얘기를 입에 함부로 담았다가 는 내 목이 10개라고 남아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러면 우리는 이제 돌아가도 좋다는 말씀이세요?" 이든이 물었다. 경감은 어깨를 들썩였다. "당신들을 체포할 이유가 내겐 없소. 난 아무 말도 안 들었으니까. 그렇지만 우린 다 시 만나게 될 것 같소." 내일 밤에 말이지? 이든은 속으로 생각했다. "고마워요." 경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렇게 고맙다고 하지만, 나중에 나를 원망하지나 않을지 모르지." 칙은 경감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당신은 우리를 보내 준 걸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요." "글쎄요, 러빗 씨." 다음날 오후, 이든은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염색을 했다. 빨간 색으로 머리를 물 들이고 헤어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고 나니 정말 딴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겼다. 퍼머 를 하여 빰까지 가리고 화장을 짙게 한 다음 그녀는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의 모습을 세 심 히 들여다보았다. 그녀 자신도 얼른 알아 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만하면 번즈 도 알아보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녀는 미용사에게 미소를 지으며 만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칙의 말을 생각하면 금세 마음이 우울해졌다. 나는 아 무래도 이든에겐 어울리지 않는 남자니까 말이야... 그 말은 꺼꾸로 그녀가 그에겐 어 울리지 않는다는 말도 된다. 그렇다면 그와는 이제 헤어져야 하는 건가? 이든은 그 사 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우울한 기분으로 미용실을 나온 이든은 칙과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거리를 배회하고 다녔다. 쇼 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부모님도 자 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칙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늘밤 파티가 끝나면 그는 내 곁을 떠나갈 것이다, 사건의 결말이 어떻든 간에 그는 내 곁을 떠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가 나에게 베풀어 준 수고에 대해서 아직 아무런 보답도 한 것이 없다. 이대로 그를 떠나 보 낼 수는 없 어. 그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야. 이 사건의 해결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존재야. 그 를 붙잡아야 해. "난 당신을 사랑해요, 칙. 우리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 왔다고 하더라도 그건 아 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이 사건이 끝난 뒤에도 당신은 나를 당신 곁에서 쫓아 버리 지 못할 거예요." 스탠턴 번즈의 저택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든은 칙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결전에 들어 서는 순간이 그런 고백을 하기에는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칙은 그 말에 좀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놀란 눈초리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그런 말을 하지?"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녀는 생끗 웃었다. "흠." 그는 미소를 지었다. 스탠턴 번즈가 두 사람을 맞았다. 칙은 그에게 이든을 자신의 여 비서 에디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이어서 론다와 덱커에게도 그녀를 소개했다. "남편의 선거 운동을 도와주시겠다고 하셨다면서요?" 론다가 칙에게 다정한 척하며 말했다. 그녀는 가슴이 깊게 팬 갈색 드레스를 입고 있 었는데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목걸이가 그녀의 젖가슴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기막힌 전략이 많아요." 블론드 머리의 론다는 아직도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군요. 기대가 되는데요." "정말이야. 나도 기대가 커." 번즈가 맞장구를 치면서 이든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 "자, 들어갈까요?" 칙은 론다 역시 이든을 세심하게 살펴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남편의 호색 을 염두에 둔 때문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이든의 어깨를 가볍게 안으며 주인을 따라 들어갔다. 커다란 홀에는 파티 장이 마련되어 있었고, 테이블에는 뷔페가 준비 되 어 있었다. 칙은 이든을 데리고 테이블의 한쪽에 앉았다. "론다가 나를 바라보는 그 눈길을 보셨어요?" 이든은 캐비어를 크랙커에 바르며 칙에게 귓속말로 얘기했다. "그리고 번즈의 그 눈길은 소름끼치는 것이었어요." "한잔하겠어? 마음이 좀 안정될 거야." "난 하루종일 굶었어요. 알코올이 들어가면 몸이 녹아 버릴 거예요." "그러면 혀만 적셔. 촉진제라고 생각하고 말이야." 칙은 글라스에다 샴페인을 따라 그녀에게 내밀었다. "오늘밤을 위하여." "글쎄요." 이든도 잔을 쳐들었다. 샴페인을 마시면서 작은 파티 장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중 에 낯익은 인물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잭슨 경감이 부하를 이곳에다 침투시켰다면 그 는 쾌 유능한 경찰 간부라고 봐줄 텐데... 10시가 되자 파티장은 사람들로 술렁거렸 다. 이제 슬슬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사전에 계 획한 대로 칙이 번즈와 론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사이에 이든은 방마다 수색을 벌일 참이었다. "이제 슬슬 시작해야죠?" 이든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물론이지. 나도 그럴 참이야." 칙은 그녀를 떼놓고 번즈와 참모들이 서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는 이든에게 무슨 위험이 닥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약간의 소동이 일어나더라도 경찰에 넘겨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잭슨 경 감을 부르면 되는 것이다. 이쪽으로서는 잃을 것이 별로 없다. 그가 이든을 흘끔 돌 아 보았을 때 그녀는 테이블 위에서 음료수를 한잔 들이마신 다음 친구라도 찾는 듯이 주 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아무도 그녀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스탠턴 씨." 칙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큼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제 나의 묘안을 들어보시지 않겠습니까?" "좋소." 번즈가 대답했다. "당신의 생각에 대해서 내 참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들어 봅시다." 칙은 그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어젯밤 내내 구상한 선거 운동 작전에 대해서 설명하 기 시작했다. 전문성이 가해진 구상인 만큼 참모들 대부분이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 러나 단 한 사람, 월리 덱커만은 칙을 시종 미심쩍은 눈초리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 는 침묵만 지키다가 화장실에 가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칙은 이든이 서 있는 계단 쪽 을 흘끔 살펴 보았는데 이든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들킬 경우엔 화장실을 찾고 있다고 변명하겠다고 생각하며 이든은 조심스럽게 이 층 방들을 뒤지고 있었다. 가슴이 펄떡거리며 숨이 가빠왔다. 3개의 방을 조사한 다 음 이든은 침실로 보이는 방의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방은 또 2개의 방 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마다 침대가 있었다. 그러면 이들 부부는 각방에서 따로 잠 을 잔단 말인가? 남편의 관심을 잃어버린 론다의 위상을 발견한 듯 해서 이든을 측은 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 방은 무슨 증거물이라도 있을 것 같은 예감이 이든의 마음을 강하게 시 로 잡았다. 그녀는 먼저 스탠턴 번즈의 방을 뒤지기로 했다. 모든 서랍과 옷장, 후미진 구석 따위를 샅샅히 뒤져 나갔다. 그러나 킴 퀸런과 연관될 만한 물건이라고는 하나 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욕실 안까지도 철저하게 뒤졌다. 그러나 역시 행운은 잡히 지 않았다. 이든은 론다의 방으로 옮겨갔다. 아무래도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다는 느 낌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론다의 방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그 화려함만큼 어 딘지 서글픈 느낌을 이든에게 주었다. 그녀는 곧 조사에 들어갔다. 론다의 옷장과 서람을 하나씩 뒤지는 동안, 이든은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옷장에는 아직 한번도 입지 않은 내의 들이 수십 벌씩 들어 있었고, 최신 의상들이 수도 없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론다의 보석들이 단 한 점도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보석들을 금 고에다 보관하고 있을까? 그러나 방안 어디에도 금고처럼 보이는 것은 없다. 도대체 어디에 감추어 두었을까? 이든은 비늘처럼 무늬진 벽장문을 열었다. 속에는 비닐백으 로 싼 옷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한쪽으로는 수십 켤레의 구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깨끗하다. 아무것도 이상한 것은 없다. 이든은 실망하며 손을 들어 옷들을 만져보았 다. 그때 무언가 묵직한 것이 그녀의 손에 느껴져 왔다. 이든의 가슴이 갑자기 격렬 하 게 요동쳤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 묵직한 물체를 꺼내었다. 크림 색깔의 사각 케 이스였다. 부드러운 벨벳으로 싸인 그 케니스 뚜껑을 열자 노란 다이아먼드가 번쩍 빛 났다. 금줄은 끊어져 있었고, 걸쇠 고리는 떨어져나가고 없었다. 킴 퀸런이 걸고 있었던 바로 그 목걸이였다. "굉장히 예쁘죠, 에디? 아니면 이든이라고 부를까요?" 이든은 놀라면서 벽장에서 물러섰다. 론다가 침실 문을 닫고 미소를 지었다. "네, 정말 아름다워요." 이든은 케이스를 쳐들어 보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이 이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는 모습을 여고 졸업 앨범에서 보았어요. 그런데 킴 퀸런은 자신의 모델용 사진에서 이 목걸이를 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그러니 까 당신은 킴 퀸런을 모른다고 말하진 않겠죠?" 론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냉정을 되찾고는 말했다. "모른다고 말하면 믿지 않겠지." "나는 처음엔 킴 퀸런이 당신 남편의 정부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최근에야 그 생 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죠. 월리 덱커가 그녀의 정부임이 밝혀졌거든요. 그런데 왜 당 신의 목걸이가 그녀에게 갔을까?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죠." 이든은 말을 중단하고 론다의 표정을 조용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당신과 퀸런과는 남이 아니라는 증거예요." "괜히 넘겨짚지 말아요.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그럴까요?" 이든은 케이스에서 목걸이를 꺼내 보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왜 이 목걸이를 퀸런에게 줬는지 설명해 보시겠어요? 론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목걸이를 노려보았다. "킴 퀸런은 당신의 딸이었어요, 그렇죠?" 론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바들바들 떨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더이상 감출 필요도 없겠군. 그래요. 킴은 내 딸이에요. 그 아이의 아버지가 그 목 걸 이를 내 16번째 생일에 선물로 줬어요." 그녀는 이마를 찡그리고 잠시 목걸이를 보고 있더니, 말을 계속했다. "우린 서로 사랑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도 육체관계를 맺고 있었죠. 그는 나와의 결 혼을 결코 원치 않았어요." "그런데 당신은 그리 아이를 임신했군요?" "그래요. 그래서 아기를 낳기 위해서 나는 위스콘신으로 보내졌어요." 론다의 눈동자는 슬픔으로 빛났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킴을 키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하인으로 있던 퀸런 부부 에게 아기를 줘서 집에서 내보냈죠. 물론 많은 돈과 함께, 그 일은 비밀 속에 묻히고 말았어요." "그러나 킴은 그 비밀을 용케도 알아냈군요." "그 목걸이를 준 것이 화근이었어요." "그래서 킴은 시카고로 올라왔군요. 당신을 찾으러." "어리석게도 나는 그애에 대해 동정심을 품게 되었죠." "킴이 당신을 협박했나요?" "아니, 아니에요. 그렇지만 내가 죄책감을 느끼도록 만들었어요. 자신은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며, 그래서 정당한 자신의 권리를 빼앗겼고 불행하게 살아왔다는 거였 죠. 그래서 이제부턴 내 곁에서 함께 살겠다는 거였어요." "그것이 킴을 죽이게 된 이유였어요?" 론다의 눈에 눈물이 가득 괴었다. "그건 사고였어요." 그녀는 눈물 방물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킴은 번즈의 선거 자금 모금 운동을 하는 자리에 고집스럽게 참석하려고 했어요. 사 람들은 이미 그 아이에 대해서 이상한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죠. 그렇지만 킴은 아랑 곳 하지 않았어요. 자신의 불행을 보상받아야 한다는 거였죠. 나는 그동안 그 아이에게 잘해준 것을 후회했어요. 그 목걸이를 준 것부터가 잘못이었다고 생각 했죠." "그래서 그 목걸이를 다시 빼앗았군요?" 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킴은 그 순간 몸의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어요. 내가 달려내려갔을 때에 는 목이 부러진 채로 죽어 있었죠. 스탠턴과 덱커가 뒷처리를 해줬어요. 선거 운동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니까..." "그게 사고사였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요?" 론다는 전기 스탠드를 바라보았다. 이든은 그녀가 눈물과 콧물을 닦을 티슈를 찾고 있 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스탠드의 서랍을 여는 순간 이든은 아차 하며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조금 늦었다. 론다의 손에는 싸늘한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꼼짝 말아요, 이든. 그 사실이 신문에 발표되는 날이면, 우리의 모든 것이 끝나고 말 아요. 스탠턴은 주지사가 되고, 나중에는 백악관 주인이 될 사람이야. 아무도 그걸 막 을 자는 없어. 이제 당신만 없어져 준다면 말이야." 그녀는 어느새 탐욕스러운 권력의 화신으로 돌아가 있었다. "스탠턴과 덱커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내 눈은 어림도 없지. 아까운 여자를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내 마음도 괴로워, 그렇지만 이렇게 철없이 날뛴 건 당신 잘못이 니 까." "주드 니스트롬을 매수해서 나를 죽이려 한 것도 당신이었죠?" 이든은 그녀의 권총과 간격을 유지하면서 설마 이곳에 총소리를 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럴 필요는 없었지. 루 파렌티노가 그런 일은 알아서 다 처리하니까." 그녀의 총구가 위태롭게 아래위로 흔들렸다. 여기서 쏠까? 그러지는 않겠지. 총소리 를 듣고 사람들이 몰려올 테니까. "목걸이는 왜 보관하고 있었죠? 결정적인 증거물이 될 줄 알았을 텐데." "내 어리석음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나 할까? 역시 어리석은 짓이었어. 진작 버렸어 야 하는 건데. 그렇지만 여자들은 추억이 엉켜 있는 물건을 버리기가 어려운 법이야." 론다가 문을 열며 총구로 나가자는 시늉을 했다. "자, 이제 나는 내가 어질러 놓은 것을 말끔히 치워야겠지?" 그녀는 여유 있는 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이든은 들고 있는 목걸이 케이스를 침대 위 에 던지며 그녀에게 물었다. "나를 어디로 끌고가려는 거죠?" "다락방이 좋겠지. 아주 조용한 곳이야. 아래층까지는 총소리도 들리지 않아. 더군다 나 파티가 한창이니까 방음효과도 되어 줄 거구. 당신의 그 멋진 친구도 불러다 줄께 . 혼자는 아무래도 외로울 테니까. 황천길도 친구가 있어야 덜 외롭지." 론다는 사악하게 웃었다. 복도를 지날 때 이든은 누군가가 그들을 보아 주기를 기대 했으나 허사였다. 이층 복도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론다의 권총은 그녀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고, 금세라도 방아쇠를 당겨 버릴 것처럼 느껴져 오금이 저려왔다. 이든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기회를 노리며 천천히 론다가 이끄는 대 로 걸었다. 아무도 접근해 오는 사람이 없었다. 자신이 이런 위험한 처지에 빠져 있 는 것을 칙은 알까?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그의 도움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 이 섰다. 이대로 다락방으로 끌려가는 날엔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황천행 열차를 타게 될 것이다. 그녀는 식은땀이 흘렀다. 다락으로 올라가는 층계 아래서 이든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싸늘한 쇠붙이의 감각이 옆구리를 찔러왔다. 총구는 층계를 오르라고 재촉했고 그녀의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다락으로 오르는 계단을 거의 다 올라왔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다락이었 다. 그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끝장이다. 이든은 필사적인 기분으로 발을 헛디딘 척 하며 옆으로 쓰러졌고 일부러 비명을 크게 질렀다. "수작 부리지 마!" 론다가 명령했다. "빨리 올라가!" "내 발이... 발이..." "발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어. 곧 사용할 일이 없게 될 테니까." 론다는 그녀의 등을 떼밀며 말했다. 이든은 일어나며 론다의 총이 자신의 몸에서 떨 어 진 것을 확인했다. 기회는 이번밖에 없다고 생각한 이든은 총을 든 그녀의 오른손을 잡으며 달려들었다. 사생결단의 순간이었다. 총은 공중으로 쳐들렸으나 론다도 대항 했 다. 탕! 오발탄이 발사되었다. 이든은 그 순간 자신의 몸이 중심을 잃고 허공에 붕 뜨 는 느낌을 받았다.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집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론다는 권총을 쥔 채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또 한 방의 오발탄이 탕! 하고 터졌다. 론다는 떨어진 자리에서 사지를 비틀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그 몸부림도 길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조용해졌다. 떨림을 멈춘 그녀의 몸둥아리는 마치 한 무더기의 오물처럼 보였다. 이든은 후둘후둘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가누어 계 단을 하나하나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하얗게 굳은 얼굴로 계단 아래로 몰려드는 사 람들의 얼굴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스탠턴 번즈가 가장 먼저 자신의 부인 곁으로 달 려왔다. 그 뒤를 이어 칙이 달려왔다. 칙이 이든을 껴안고 남은 계단을 내려오는 동 안, 낯선 사내가 론다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는 죽었소. 목이 부러졌어." 다음날 아침, 이든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짐을 꾸리고 있었다. 진과 셔츠, 스웨터, 기 타 필요한 물품 따위를 트렁크에 잔뜩 채우고 그녀는 떠날 준비를 했다. 태피가 그녀 를 자신의 차에 태워 주면서 말했다. "네가 미치는 이유를 알 만해." 차가 그랜드 에브뉴를 달릴 때, 태피는 동정 어린 목소리로 또다시 이든에게 말했다. "정작 네가 필요한 순간에 그 사내는 사라져 버렸단 말이지? 그를 만나면 키스하기 전 에 물어 뜯어 버려." "나도 고려중이야." 그러나 이든은 칙이 경찰서에서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 일을 가지고 그를 탓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는 전날 내가 한 말에 겁을 먹은 거야. 살인사건이 해결된 후에라도 그를 놓치지 않겠다고 한 나의 말에 그는 놀라서 도망을 친 거야. 어쩔 수 없지 뭐, 산이 오지 않으면 내가 산으로 갈 수밖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 이번에 쾌나 혼났지?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다니 말이야." 태피가 돌아보며 웃었다. "이미 끝난 일이야." 그랬다. 그건 이미 끝난 일이었고, 그녀로서는 다시 돌아 보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 론다뿐만 아니라 번즈도 죽었고, 덱커와 두 하수인은 경찰에 연행되었다. 주드도 의 식 을 회복하여 그동안의 범죄 사실에 대해서 자백을 했다. 사건은 일단락됐고, 칙과 그 녀는 참고진술만 하고 경찰서에서 나왔다. 신문과 방송은 온통 그 사건으로 시끌벅쩍 했다. 태피는 카니발 광장의 뒤켠에 있는 주차장에다 차를 세웠다. 트럭과 트레일러들이 빼 곡하게 세워져 있는 곳이다. 그녀는 이든을 안으며 물었다. "얼마나 있을 거니?" "글쎄... 카니발이 동면을 시작하는 겨울까지는..." 이든은 말을 얼버무렸다. "쯧쯧, 사서 고생을 하는구나. 사랑도 좋다마는..." 태피는 혀를 찼다. "그럼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전화해." "걱정 마." 이든은 친구를 다시 살짝 안고는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뒷좌석에서 트렁크를 끌어내렸고 주위를 한 번 휘둘러보고는 똑바로 에이브의 트레일러로 걸어갔다. 그곳 에 는 칙이 다른 단원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든은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그 남자를 향해 똑바로 걸어 갔는데 그의 표정을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태피의 말처 럼 그를 물어뜯어 주는 대신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뜨겁게 키스하고 말았다. 그 는 순간 좀 놀란 것 같았다. 그러나 곧 그도 그녀의 키스에 호응하여 열정적인 키스 를 해왔다. 둘러선 단원들이 왁작하니 웃으며 박수을 쳐댔다. 칙이 머리를 들고 말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 "잘됐군요. 난 이제 당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트렁크를 가리키며 로에게 말했다. "나도 카니발에 합류하려고 아파트에서 나왔어요." "맙소사, 이든! 그렇다면 우린 또 갈라서야겠군. 난 방금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 고 있었는데."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든은 당황한 얼굴로 주위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단원들의 표정으로 봐서 그의 말 이 사실이란 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월급쟁이 생활에 당신이 만족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 짓도 쉽지만은 않지." "그래요." 이든은 매우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당신은 이미 월급쟁이를 하고 있었어요. 그렇죠? 그것도 이곳으로 오기 전인 지난주 이전부터 하고 있었어요. 아닌가요?" "말하자면 그랬던 셈이지." 칙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무슨 회사죠? 당신이 다니는 회사 말이에요." 칙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브가 그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말해 주게나, 칙. 지금 말해 버리는 편이 한결 쉬울 거야." "러빗 프로모션이야. 아버지와 동업이지." 칙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뭐라구요?" 이든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랐다. "그럼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 회사란 말이에요?" "물론이지. 우리집 가업으로 10년째 이어오고 있는 회사야." "나를 감쪽같이 속였군요." 이든은 화를 내며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어쩌면 그럴 수가 있는가? 그녀는 분한 생 각 이 들었다. 칙은 그녀를 놓아 주지 않았다. "이든을 속인 적은 없어." "그럼 왜 말해 주지 않았죠? 내가 물을 때마다 빙빙 돌려서 피하기만 했잖아요? 한번 도 자신에 대해서 얘기해 준 적이 없었어요. 그렇게 가깝게 지내면서도 당신은 늘 나 로부터 도망칠 궁리만 하신 거예요!" "잠깐, 이든. 칙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 젤다가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칙은 나와 젤다를 위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거야." 에이브가 알아듣도록 설명해 주겠다는 듯이 앞으로 나섰다. "잇따른 도난사고로 우리 헐리 걸리가 파경에 이르렀거든. 칙은 그 도적을 찾아내기 위해서 여기에 왔던 거야.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카니발 단원 노릇을 하게 된 거지." "이제 알겠지?" 칙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써 웃었다. "그 도둑을 잡기 전에는 내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어." "그건 변명이에요." 이든은 화가 좀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빴다. "나한테 얘기해 줬더라고 비밀은 지켰을 거예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지. 나는 내 직업이나 신분이 아닌 나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 를 찾고 있었어." 칙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이든은 샐쭉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남자를 찾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당신은 분명히 찾았어. 그리고 나도 내가 원하던 여자를 찾았고." 칙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유들유들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이든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 를 노려보았다. "진정해요, 이든. 그를 사랑한다고 솔직히 고백해." 메이시가 펠릭스의 품안에서 나오며 놀리듯이 말했다. "그 편이 유리하지. 어젯밤에 나에게 한 것처럼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여기 있는 친 구들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말이야." 이든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칙의 소행이 얄밉기는 하지만 대세가 어쩔 수 없이 돌 아가고 있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칙." 그녀는 그의 셔츠 깃을 잡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그의 귀에다 조그마한 소리로 속삭 였다. "나의 약혼자가 되어 주시겠죠?" "물론이야, 이든." 이번엔 칙이 그녀에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단원들이 또 다시 와 하고 웃으며 박수 를 쳤다. 이든은 아른한 기분 속에서 젤다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늙 은 예언가는 두 사람에게 상서로운 기운이 뻗치고 있어서 행운이 찾아들 것이라고 예언 하 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