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죽음의 행렬(완결) 관련자료:없음 [182] 보낸이:장선희 (리알 ) 2000-07-17 12:35 조회:65 죽음의 행렬 1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해요. 제발... 구해 주세요. 살려 줘요!" 새벽 6시에 걸려온 전화는 손을 뻗치기도 귀찮았다. 그러나 상대방의 절박한 목소리 에 애비게일 프랭클린은 잠이 홱 달아났다. 마치 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것처럼 정신 이 번쩍 드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예요?" 수화기를 통해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진정해요." 애비게일은 상대방을 달랬다. "무슨 일인지 어서 말해 봐요." "머리가.... 아아.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상대방은 여자였다. 고통과 두려움으로 짓눌려 있는 목소리다. "어디가 아파요? 사고를 당하셨나요?" "머리가 둘로 쪼개지는 느낌이에요." 그녀는 다시 신음을 토해 냈다. "아아악.... " 애비게일은 상대방의 통증이 전화선을 따라서 자신에게 전해져 오는 느낌이다. 심리 학 자인 그녀가 이런 경우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위로밖에 없다. 그런데 자신의 목소 리마저 침착하게 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 말씀을 하셔야죠?" "오, 하느님. 독거미가, 무서운 독거미가 기어 나오고 있어요." 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애비게일은 머리맡의 전등불을 켰다. 불빛에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근심스럽게 빛났다. 목소리로 미뤄 봐서 상대방은 정신 분열증을 일으키고 있는 환자거나 아니면 마약에 취한 중독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대체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전화를 걸고 있는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최근에 그녀가 다루고 있는 환자 중에는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없다. "오. 제발... 멈춰 줘요." 상대방은 다급하게 소리치고 있다. 애비게일은 자신에게 타일렀다. 한마디만 잘못하 면 상대방은 전화를 끊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차분히 달래듯이 말했다. "이봐요. 그 거미는 징그럽게 보일지는 몰라도 환각일 뿐 이에요. 내 말을 믿어요." "아니에요..." "도와드릴게요." 애비게일은 상대방의 마음을 붙잡으려고 애를 썼다.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줘요." "누구긴 누구겠어요?" "말해 봐요, 제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애비게일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전화기를 붙잡은 그녀의 손가락이 하얗게 바랬다. "샤론이에요." 여자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듯한 것이 어서 애비게일이 기억하고 있는 샤론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의 것 처럼 들렸다 . "샤론 클레이본?" "그래요." 애비게일이 뭐라고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여자는 급하게 말했다. "오, 하느님. 머리 가.... 깨질 것 같아요. 독거미가..." "샤론, 거기가 어디예요?" 순간 전화가 뚝 끊어지며 붕...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샤론..., 샤론....." 애비게일은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소용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샤론은 전화를 끊은 것이다. 애비게일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서재로 이용하고 있는 방으로 건너 갔다. 그 방에 있는 티크 책상 위에 전화번호부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전화번호부 속에서 샤론 클레이본이라는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샤론의 전화 번 호를 돌린 다음에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워 귀를 기울여 봤지만. 전화국에서 미리 녹 음 해 둔 메시지가 흘러나을 뿐이다. "죄송합니다. 이 번호는 불통입니다." 번호를 잘못 돌렸을까? 그녀는 다시 번호부에 적힌 대로 다이얼을 돌렸지만 결과는 마 찬가지였다. "죄송합니다. 이 번호는 불통입니다." 그녀는 맥이 탁 풀려서 의자에 등을 기대며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어올렸다. 샤론의 전 화는 그녀의 온 마음을 마구 뒤흔들어 놓았다. 샤론이 어디에선가 위험을 당하고 있 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일까? 임상 의사는 자신의 환자들과 감정적으로 깊숙히 관여하지 않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샤론과는 특별한 관계를 맺었었다. 그녀가 3년쯤 전에 애비게일에게 처음으로 카운셀링을 의뢰해 왔을 때 그녀는 무척 실의에 빠진 모습이었다. 이혼을 한 그녀는 자신의 판단에 대해서 심하게 회의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녀의 심리적 갈등과 고뇌를 돕는 일에 애비게일은 자신이 그다지 큰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어쨌든 자신의 도움으로 그녀가 어느 정도의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고 생각 해 왔고 그것은 조그마한 성공이었다고 자부해 오던 터였다. 그러나 방금 샤론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걸려온 것처럼 애비게일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애비게일은 갑자기 이른 아침의 추위에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솜털이 일어난 팔을 손으로 문질렀다. 면으로 된 가운 위에 기다 란 벨벳 외투를 걸쳤는데도 추위는 등골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창밖에는 이제 희뿌옇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태양의 붉은 기운이 창문을 온통 벌겋게 물들이고 있다. 창밖 으로 바라보이는 항구의 모습과 물위에 반사하는 햇빛의 찬란함이 그녀의 사고를 혼 란 스럽게 했다.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을 모으려고 애를 썼다. 경찰에다 연락을 해야 할까. 그러나 그들에게 뭐라고 얘기를 한담? 고작해야 샤론이 라 는 이름을 댈 수 있는 것뿐이다. 그녀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그들 이 믿어 줄 것인가? 어딘지 장소도 댈 수 없다. 단지 그녀에게서 전화를 받은 것뿐이다. 그 내용도 사실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샤론에 대한 것이라면. 그녀의 기록이 남아 있 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무실에 있다. 애비게일은 눈을 감고 콧등을 손으로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샤론에 대한 기록들을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샤론은 볼티모어 출신이다. 그녀는 이혼을 한 후 자신의 처녀 명을 되찾았다. 그녀의 부모에게 연락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들은 이미 죽었다. 그러자 차츰 샤론에 대한 데이터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샤론에겐 2명의 오 빠가 있다. 그중 하나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가족 기업에서 손을 떼 고 극동 어디엔가로 가버렸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또 한 오빠는 그의 아내와 함께 이 지역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벌써 2년도 더 된 얘기기는 하지만 그녀는 전화번호 부 를 뒤져서 클레이본 일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 성을 가진 사람들은 많이 있으나 샤 론의 오빠가 살고 있다던 그린스프링에는 단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데릭 클레이본. 그래, 이 사내인 것 같다. 샤론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가 아니라면 어떡하나? 아침 6시라는 시각에 잘못 걸린 전화를 받은 사람은 꽤나 신경질을 낼 것이다. 그러나 그 녀 는 샤론의 다급하고 고통에 찬 목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해요. 제발.... 살려 줘요) 전화를 건 것은 또 다른 좌절감만 안겨 주었다. 데릭 클레이본이란 사내는 거기에 없 었던 것이다. 그 대신에 그가 해 놓은 녹음이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데릭 클레이본입니다. 나는 지금 자리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댁의 이름 과 전화번호를 남겨 주시면. 제가 돌아오는 즉시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하는 수 없이 사무실과 집 전화번호를 녹음해 두었다. 그리고 는 끝에다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의 누이동생 샤론의 일로 급히 연락할 일이 있습니다. 샤 론은 지금 모종의 위 험 에 처해 있는 것 같습니다." 애비게일은 아무래도 다시 잠자리로 돌아가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는 샤워를 하러 욕 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오전 내내 환자를 맞아야 하고 오후엔 대학에 강의가 있다. 그 렇지만 일찍 사무실에 나간다면 샤론의 기록을 들춰볼 시간은 있을 것이다. 어쩌면 거 기에서 무슨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도의 잠세드푸르에 있는 저택에서 스티브 클레이본은 사리를 입은 하인에게 손님을 넓은 베란다로 모시라고 지시 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이방인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상담에 들어갔다. 클리브 존슨이라 는 그 사내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스티브. 자네가 흥미를 느낄 만한 일거리를 하나 가지고 왔네." 스티브는 기다란 두 다리를 편안하게 앞으로 쭉 내밀고 안락 의자에 앉아 있다. 엉덩 이가 위로 착 달라붙은 그는 키가 Im 80cm가 넘어 보이고, 잘 발달된 상체의 근육이 마치 날렵한 벵골 호랑이를 연상케 한다. 햇볕에 바랜 듯한 머리카락에 살짝 가리워진 이마의 상처는 그가 얼마나 무모하고 거 친 사내인가를 증명해 주는 징표처럼 보인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포커꾼의 눈처럼 반 짝이며 클리브 존슨을 관찰하고 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찔끔해진 통통하고 작달 막한 사내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어색한 손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 속에다 쑤셔넣 었다. "일거리라고?" 스티브가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자네가 맡긴 지난번 일 때문에 생긴 비행기 안유리의 총구멍도 아직 다 떼우지 못했 네." "맹세하네, 클레이본. 이번 것은 달라. 아프간 반군들의 총격을 당하는 그런 일은 절 대로 아니야." 스티브는 프랑스식 창문을 통해서 시원하게 장식된 식민지풍 장원 저택의 내부를 돌 아 보았다. 안에서는 미라가 하얀 리넨을 씌운 식탁 위에다 반짝이는 크리스털 그릇들을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부엌으로부터는 버터 소스로 양념을 한 새끼양 요리 냄새가 풍겨나왔다. 그는 이곳으로 오기 위해서 볼티모어의 사치스런 생활을 포기했다. 그리고 비록 위험스러 운 직업이기는 하지만 그 스스로의 힘으로 잘해 나가고 있다. 그것은 그가 오래전부터 선 택했던 일이기도 하다.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은 그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이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직하게 말하면 위험은 그의 흥미를 끄는 유일한 것이다. 위 험의 가장자리에서 행동하는 한 방심은 금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긴장된 순간의 연 속이 그를 살맛 나게 하는 것이다. "좋아. 들어 보지." 마침내 스티브는 말했다. "이번 일은 케이크의 한 조각을 옮기는 일이야. 흥콩에 있는 것을 이슬라마바드에 옮 겨 놓는 일이지." "그건 꽤나 먼 여행이로군. 당신의 고객은 얼마나 지불하겠다는 건가?" "자그마치 6,000불이야. 물론 경비는 따로 지불하고 말이네." 스티브는 이 사이로 날카로운 휘파람을 내어 보냈다. "도대체 그 케이크가 뭐지? 파키스탄 반군들에게 넘어갈 플루토늄이라도 되는 건가?" 존슨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일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자네가 믿건 말건 이건 자비로운 일이야. 어느 사업 가 의 아들이 신장 이식을 해야 할 형편이라네. 국제 의학 협회에 근무하는 그의 아버지 가 홍콩에서 간신히 콩팥 기증자를 한 사람 찾아냈는데 그걸 이슬라마바드로 옮기는 일이 문제라네." "그게 왜 문젠가? 그런 협회에서 근무하는 자라면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프리랜서 파 일럿을 찾지?" "사정이 그만큼 급하다는 얘기야.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가지고 나오려다가는 아이 를 죽이게 생겼단 말일세." 그제서야 스티브 클레이본의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법을 어기 기로 결심한 아버지, 그런 부모를 가진 아이라면 무엇이 부러울까?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그 아버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거래 조건은?" "선수금으로 약속의 절반을 주겠대. 그리고 오늘밤에 출발해야 하네." "너무 급하군. 오늘밤까지 비행기 점검이 끝날지 모르겠는걸." 스티브는 한숨을 쉬었다. 오늘 아침 늦게까지 잠을 푹 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좋아. 자네의 고객에게 파일럿을 구했다고 말하게." 한 시간 후, 스티브는 자신의 비행기를 세워 둔 조그마한 비행장에서 기체를 점검하 기 에 바빴다. 이것이 그날 저녁에 도착한 그의 누이동생 샤론이 보낸 편지를 그가 받아 보지 못한 이유다. 애비게일의 사무실이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은 100년도 더 된 것으로서, 라이트 스트리 트 4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생명 없는 물체도 개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 건물은 지 난날의 화려하고 우아했던 자태를 감추고 있는 듯한 늙은 귀부인을 연상케 하는 건물 이다. 건물의 내부는 흑백의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고 편리한 벽장이 방마다 있는 것 까 지는 좋지만 연관 시스템이 노아 홍수 전의 것이라 기분이 내켜야만 온수가 나온다. 낡은 보일러를 돌보는 일과 바닥을 훔치는 일은 루 로시니라는 사내가 맡아 보고 있 다. 애비게일이 무거 운 놋쇠문을 밀치고 들어가자 마침 그가 바닥을 닦고 있는 중이 었다. "헤이, 방금 그곳을 물걸레로 훔쳤는데 온통 발자국을 남기겠군 그래." 그는 소리치고는 애비게일에게 인사를 건냈다. "당신은 이렇게 일찍 온 적이 이제까지 없었는데?" 그는 구정물 양동이 안에다 걸레를 담그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통은 좀 어떠세요?" 그녀는 애교있게 그에게 물었다. "여전하지 뭘!" "홉킨스 병원에서 요통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논문을 읽었어요. 어쩌면 아저씨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흡킨스라... 정말 고맙소. 의사 선생." "천만에요." 루에게 자신은 의사가 아니라 심리학자라고 다시 설명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그는 그 차이를 도무지 구분하지 못했다. 그녀의 사무실은 건 물 뒤쪽의 5층에 있다. 실내는 골동품 상에서 구해다 놓은 오크로 만든 가구와 조명 기 구로 꾸며져 있다. 그녀는 언제나 벽에 붙어 있는 볼티모어의 거리 풍경을 가볍게 지나치곤 했다. 그 그 림은 월터즈 아트 갤러리와 거리의 행상인들이 수레 위에다 야채와 과일 따위를 팔고 있는 풍경이다. 애비게일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붉은 벽돌집들이 나란히 서 있는 그림의 한 부분을 유 심히 바라보았다. 번쩍이는 계단이 있는 그 붉은 벽돌집 중의 한 곳으로 샤론은 이혼 한 뒤에 이사를 갔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그 집을 포기 했단 말인가? 왜 그녀의 집 으 로 전화가 되지 않는 것일까? 매일 마시는 차를 홀짝거리며 애비게일은 다시 샤론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샤론의 파일을 찾아내어 기록들을 살펴 보 기 시작했다. 파일들을 커다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읽 어 보았다. 그러나 자신이 꼼꼼하게 적어 놓은 그 기록으로부터도 어젯밤 샤론에게 일 어났던 일에 대한 단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다. 8시 50분이 되도록 데릭 클레이본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다. 애비게일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의 비서 아가씨가 상냥하게 그는 지금 중요한 회의 중 이니 통화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겨 주면 회의가 끝난 뒤에 통화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 애비게일은 급한 일이라고 몇 번이나 되 풀 이 강조한 다음에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더이상 어떤 조처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황량하게 했다. 그러나 이제 곧 오늘의 첫번째 환자인 플레처 씨가 도착할 시간이고 그는 예정된 시간에서 조금만 지체되어도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지는 사람이다. 정각 9시가 되자. 긴 머리카락을 귀까지 늘어뜨린 슬픈 눈의 사나이가 문을 열고 들 어 왔다. 사회 안전 관리국의 보험 계리사로 일하는 플레처 씨는 그의 직업에 꼭 맞는 꼼 꼼한 성격의 사나이였다. 그러나 그는 차츰 아주 작은 일에도 신경질적이 되는 괴팍 한 성격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병균이 자신의 몸에 침 투 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에 소비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의 상사는 그에게 정신 감정을 받아 보도록 권하기에 이르렀다. 애비게일은 그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뒤에는 미리 마련한 젖은 타월로 손을 닦아야 하며 문 의 손잡이를 잡을 때에는 손수건을 감싸고서야 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대기실로 들어오자. 그녀는 쾌활한 표정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플레처 씨?" "안녕하십니까."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항상 준비해 가지고 다니는 항공형 좌석 보호대를 가방에 서 꺼내어 소파와 팔걸이에 조심스럽게 펴고는 그 위에 앉았다. 애비게일은 그가 자 신 의 승용차가 고장나서 택시를 타거나 버스를 탈 때는 어떻게 행동할까 하고 의아심을 품었다. 그와의 대화시간인 50분 동안 그녀는 그의 증세를 호전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이따금씩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샤론 클레이본의 파일로 신경이 자꾸만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10시에 온 환자 슈루즈베리 부인과의 대화중에도 그랬다. 성장한 아들의 무관심에 대 해서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는 그 부인의 끝없는 불평도 새벽에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 온 샤론의 공포에 젖은 목소리를 밀어내지 못했다. 오전 일과가 끝나자. 애비게일은 자동웅답기를 재빨리 체크해 보았다. 샤론으로부터 의 전화는 없었다. 그녀의 오빠로부터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는 나의 메시지를 전달받지 못했단 말인가? 아니면 자신의 누이동생 따위는 신경쓰 고 싶지 않다는 것일까? 입술을 꼭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데릭의 사무실 주소를 확인해 보았다. 그 의 사무실은 헌트 밸리에 있다. 그녀가 가는 대학의 길목은 아니지만 점심식사를 요 구 르트로 떼운다면 그의 사무실에 들를 만큼의 시간은 낼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온다. 대학의 강의는 정확하게 1시 30분에 있을 예정이고, 세미나의 주제는 현대 사회의 정 신적 질환에 대해서다. 그녀는 요크 로드를 따라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헌트 밸리로 들어서자. 주위의 풍경 이 갑자기 주거지역에서 공업단지로 변했다. 클레이본 계열회사는 크롬과 유리 구조 물 로 된 건물 안에 있다. 같은 건물 안에는 주식 중개상들과 컴퓨터 서비스 회사들도 함 께 자리하고 있었다. 클레이본 중역실로 들어가니 마치 돈에 둘둘 말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카펫의 두 께 가 3cm는 되는 것 같았다. 집기 들은 장미목으로 만든 것들이고 접수 데스크 뒤의 인 조잔디 벽에는 벤 샨 오리지널이 걸려 있다. 애비게일은 자신도 모르게 복장을 다시 다듬었다. "약속이 되어 있습니까?" 데스크에 앉아 있는 멋진 아가씨의 가슴에 달린 이름표에는 바넷 양이라고 씌어 있다 . "아니에요." "오, 그렇다면 정말 죄송하군요. 약속이 없으면... " 애비게일은 좀처럼 자신의 신분을 과장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오늘만큼은 보 다 우아하고 권위가 있어 보이는 복장을 입고 나올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아 무렇게나 걸쳐입고 나온 면 스웨터와 스커트가 어쩐지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는 Im 70cm에 가까운 자신의 키를 최대한으로 쭉 펴며 단호한 표정으로 비서 아 가 씨를 바라보았다. "나는 프랭클린 박사예요. 아침에 클레이본 씨에게 급한 전화를 드렸는데 연락이 없 어 서 찾아왔죠. 그분의 여동생이 아주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 같아서 알려 주려는 것입니다. 클레이본 씨와 얘기를 할 수 없다면. 나는 별수없이 경찰에다 이 일을 신 고 할 수밖에 없는 처지랍니다." 바넷 양의 태도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잠시 앉아서 기다리신다면 클레이본 씨가 시간을 낼 수 있는지 알아보겠어요." "고마워요." 그녀가 회색 소파에 앉아서 기다린 지 1분도 되지 않아 여비서는 돌아와서 그녀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내실은 바깥 사무실보다 훨씬 더 호화스러웠다. 데릭 클레이본의 책상 위에는 한 장 으 로 된 문석판이 깔려 있다. 그가 앉아 있는 의자는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가죽 제품이 다. 그리고 실내에는 풀장 크기만한 회의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내의 모습은 가장 전형적인 출세의 타입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모습에선 샤론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느껴진다. 그와 샤론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 같아 보인다. 애비게일이 들어오자 그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훤칠하게 큰 키와 단단한 몸 매는 스포츠로 단련된 것이라는 인상을 느끼게 했다. 일류 디자이너가 만든 양복이 그 의 넓은 어깨에 걸쳐져 있다. 그의 반백의 머리카락은 정수리 부분의 대머리를 절묘 하 게 가리고 있다. 그녀의 심리적 분석으로는 클레이본 그룹의 회장인 이 사내는 강력 한 에너지와 잔인할 정도의 추진력을 지닌 인간으 로 판단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프랭클린 박사님. 나는 귀하의 메시지를 보고 약간 당황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전화를 해주시라고 기대했는데요." "정말 죄송합니다.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그만 급한 일이 터지고 말았죠. 내가 아니 면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화급한 상황이라 그만..." 그가 앉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렇지만 당신 여동생의 건강과 안전도..." "물론 가장 중요한 일이죠." "뭐라고 하셨죠?" 그러자 클레이본의 표정이 약간 불편한 기색을 띠었다. "프랭클린 박사, 이 문제는 개인적인 겁니다. 내가 알기로는 당신은 샤론이 마일즈와 이혼한 후에 찾아간 심리학자인 것 같은데요." "바로 맞히셨어요. 당신의 여동생이 오늘 아침 6시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아 주 심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애비게일은 데릭의 이마가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는 하던 말을 중단했다. 그는 그녀의 말을 곧이듣지 않는 표정이다.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 하든 간에 사태의 심각성을 그 에 게 납득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샤론은 심한 환각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어디냐고 내가 물었지만 그녀는 자 신이 있는 곳을 대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죠.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봤지만 그 전화는 불통이었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당신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죠." "아, 그랬군요.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에..." 그는 손을 쳐 들며 진정하라는 듯한 제스처를 해보였다. "프랭클린 박사. 내 동생은 병원에서 당신에게 전화를 한 겁니다. 샤론은 최근에 심 한 정신 분열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애비게일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나는 샤론이 도무지 그런..." "우리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잔기침을 하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샤론은 최근 몇 주 동안 정신 치료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녀는 무척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아마 내가 도울 수 있을 겁니다. 그녀가 치료받고 있는 곳이 어디죠?" "당신의 호의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우리 가족 들 끼리만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잇다는 것도 이해해 주시겠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지 면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클레이본 씨, 정신 질환을 한때 앓았다는 것이 무슨 오욕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야 그렇죠. 그렇지만 샤론 자신도 그런 것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고 있으 니 어찌합니까?" "그렇지만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데릭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마 잠시 현실을 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치료진에 서 어떻게 그런 전화를 하도록 허용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매달 지불하는 돈이라면 샤론을 세계 여행을 보내고도 남을 만한 금액인데 말입니다." 그는 불평하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이재 그만 말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근본 적 으로 건전한 정신을 가진 한 여자가 그처럼 막바지 상황에 처해 있다고는 믿기가 어 렵 다. "마약과 관계가 있습니까?" 애비게일은 그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누이동생의 일이지만 그 아이의 사생활까지 폭로하고 싶지는 않군요." 그녀는 더이상 어찌해 볼 수 없겠다는 좌절감 같은 것을 느꼈다. 돌아서는 자는 신도 어쩔 수 없다고 했던가? 이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악몽 속으로 발을 들여 놓은 듯한 기분이다. "알겠어요. 그렇지만 만약 내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안심하십시오. 샤론은 지금 최상의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까요." 그의 말은 이제 이 인터뷰가 끝난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몇 분 뒤에 애비 게 일은 차를 세워 놓은 주차장으로 돌아 와 있었다. 데릭 클레이주은 샤론을 위한 모든 조처가 다 취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누이동생을 맡기기 전에 병 원 의 추천장을 체크해 보았을까? 애비게일은 샤론의 그러한 상태를 클레이본 그룹의 회장인 데릭에게 그대로 맡겨 둔 다 는 것부터가 마음에 걸렸다. 다른 사람의 얘기에 그처럼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내라 면 그의 판단력도 그 다지 믿을 바가 못된다는 느낄이 들기 때문이다. 애비게일은 논리적이고 조직적인 사고를 지닌 여성이다. 샤론의 전화에 대한 미스테 리 가 데릭에 의해서 말끔하게 풀렸다면 이처럼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동차에 오르면서도 그녀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 거야, 샤론? 그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샤론은 고통과 공 포에 사로잡혀서 이 도시를 배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매우 외로운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느꼈졌어. 그리고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었어. 요크 로드로 돌아오는 그녀의 두 손은 운전대를 너무 꽉 잡고 있어서 쥐가 날 지경이 었다.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어, 그렇잖아? 그녀는 자신에게 그렇게 자문하며 위 로해 봤지만 이른 아침에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온 샤론의 절규는 마치 고통받는 영혼 의 비명처럼 그녀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2 애비게일은 샤론에 대한 걱정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바쁜 일과에 몰두했다. 이제 그 녀 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데릭은 그녀의 도움이 전혀 필요치 않으며, 원 치도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리고 샤론도 그뒤로는 전화하지 않았다. 잠시 나쁜 꿈을 꾼 것과도 같이 모든 것은 이제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고 있다. 애비게일은 바쁘게 일에 쫓김으로써 샤론에 대한 생각을 더이상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루의 일이 끝나면 그려는 일부러 렉싱턴이나 이스턴 마켓으로 걸어가서 식료품과 수 산물 따위를 구입하여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느 날 저녁엔가는 흰돌고래의 묘기를 구경하기 위하여 수족관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오래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자꾸만 갉고 있는 듯한 느낌을 뿌리칠 수가 없다. 샤론의 절규하는 목소리 가 자동 테이프처럼 계속해서 돌아가며 그녀를 괴롭혔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샤론의 소리를 마음속에서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온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샤론은 의지가 강한 여자였다. 이혼의 충격에서 벗어나서 용기있게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리라 생각했었다. 그러한 샤론이 어쩌다가 최악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는지 애비게일로서는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수요일 저녁, 사무실을 잠그고 나오는 그녀를 조 오멀리가 불러세웠다. "헤이. 그렇게 서둘러 도망가지 말라구. 넌 나에게 50센트 빚졌어." "내가?" "아무렴." 조 오멀리는 애비게일에게 손짓으로 오라는 신호했다. 애비게일은 그녀의 사무실로 걸어갔다. 문 위에 부착되어 있는 스텐 명판에는 '오멀 리 와 오멀리 사립 탐정 사무실'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이 3년 전에 업 무 수행 중 피살을 당한 이후로 그녀는 혼자서 이 사무실을 운영해 오고 있다. 이 빨간 머리의 말괄량이는 애비게일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의를 보였다. 그녀는 남 편의 죽음에 대해서 애비게일에게 얘기하면서 아직도 명판을 바꾸지 않는 이유는 그 래 도 남자 이름이 있음으로 해서 고객들의 신임을 얻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 다. "지난주에 너에게 소포가 왔었어." 그녀는 벽장을 뒤지며 애비게일에게 말했다. "바로 전달한다는 것이 그만 깜빡했지 뭐야. 그런데 내가 그것을 어디에 뒀더라?" "콜롬비아 강의 연어가 아니면 좋겠는데." "볼티모어에서 부쳐온 거야." 애비게일은 작달막한 여자가 한아름이나 되는 전화번호부를 한쪽으로 옳기고는 내가 이렇게 기운이 센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문제의 소 포는 창가에 놓인 열대 식물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 여기에 있었네." "도무지 정신이 없군." 애비게일은 이처럼 엉망으로 흐트러진 사무실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조에게까지 자신의 방법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식물에 물을 줄 때 저절로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그렇게 됐어. 문제는 네가 최근에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데에 있는 거야." "아이구 죄송합니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지. 문제가 좀 생겼었거든." 애비게일은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조 오멀리가 들어올리는 네모진 소포 뭉치를 바라 보았다. 그것은 평범한 갈색 종이로 포장되어 있고, 회송용 주소가 아예 적혀 있지 않 았다. 그 점이 애비게일로 하여금 야릇한 예감이 들게 했다. 그것을 보낸 사람은 수 취 인이 수 취 거부를 할 수 없도록 사전에 봉쇄해 버린 셈이다.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겠군." "네 생일 선물은 아니겠지?" "물론 아니야. 이런 물품을 주문한 일도 없고." "주문을 했다면 상점 스티커라도 붙어 있어야겠지." 애비게일은 포장지를 뜯었다. 안에는 마분지로 만든 박스가 테이프로 둘둘 말려진 상 태로 나왔다. 테이프는 아주 조잡한 상태로 여러 겹 둘러서 붙여진 것이다. "이게 도대체 뭐람?" 애비게일은 곤흑스러운 얼굴을 했다. "프랑켄슈타인이 보낸 선물인가?" 조가 맞장구를 쳤다. 애비게일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으나. 그 제스처는 곧 으스스한 떨림으로 변했다. 조도 기분 나쁜 모양이다. "그런 것을 보랠 만한 사람이 주위에 없어." "도망친 정신병 환자 같은 친구 말이야?" "뭐 꼭 그런 말은 아니고..." "내가 취급한 환자 중에는 나에게 비밀스런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되 지 않는데." 애비게일은 상자를 들고 좌우로 흔들어 보았다. 상자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 오 지 않는다. "가위 있어?" "있고말고." 조는 곧 가위를 찾아 왔다. 애비게일은 단호한 태도로 박스의 테이프를 가위로 잘라 내 기 시작했다. 테이프를 다 자른 다음. 그녀는 박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 고 두 여자는 숨을 죽이고 마분지 박스의 뚜겅을 열어 젖혔다. "어머나!" 박스 속에서 애비게일이 섬세한 동양적 무늬의 상자를 꺼내들자 조는 놀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상자의 위예는 상아로 새겨넣은 용이 꿈틀거리고 있고, 그 주위에는 꽃과 공작이 장식되어 있다. 상자의 손잡이는 번쩍이는 놋쇠로 만들어져 있다. "정말 예쁜 상잔데 그래!" 애비게일은 카드라도 들어 있나 하고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누가 이런 것을 보냈을까?" 조는 상자의 세공술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건 홍콩 수입상을 통해서 들어온 것은 아닌 것 같아. 혹시 너와 데이트를 한 그 회 계사가 보낸 것은 아닐까?" "잭과는 만난 지가 한참 됐어." "미안." "천만에." 애비게일은 관심을 다시 상자로 돌렸다. "게다가 이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야. 포장한 솜씨라든가, 선물을 보낸다는 것 자체도 말이지. 이런 물건이라면 돈도 꽤 들었을 텐데." "어쩌면 널 비밀리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지." "놀리지 마. 남은 심란해 죽겠는데." 애비게일은 상자를 쳐들고 뚜껑 손잡이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뚜겅을 열 수 있는 손잡이는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뚜겅을 열 수가 없다. "넌 이것을 수수께끼 상자라고 생각지 않니? 어린 아이였을 때 이런 것을 선물받은 적 이 있었지. 그렇지만 이렇게 환상적인 수수께끼 상자는 처음 봤어." "어디 한번 열어 봐." "애쓰고 있어." 애비게일은 흥미를 느끼며 의문의 상자를 흔들어 보았다. 그녀는 상자 안에서 헝겊 같 은 것으로 감싼 무엇이 소리 없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정교하게 짜 여진 상자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더듬어 나갔다. 그리고 나무 사이에 머리 카락보다도 더 가느다란 이음새가 있는 것을 발견해냈다. "이런. 이건 아주 정교하게 맞물려 있는 것 같군. 어딘가에 착점이 있을 텐데 말이야 . 그곳을 찾아서 밀면 뚜껑이 열리게 되어 있을 거야. 그런데 찾을 수가 없어."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여는 일에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소비할 수야 없지." 조가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설마 쇠지레로 열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애비게일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물건을 파괴한다는 것은 죄악이 될 것 같다. "아니야.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좋겠어." 최신식 나이트 클럽과 황폐한 술집이 상존하는 볼티모어 거리에서 여피 족과 노동자 들 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는 펠즈 포인트와 같은 장소는 그리 흔치 않다. 그런 장소에서 간흑 이상한 커플이 서로 마주앉아 있다고 해서 남의 눈을 끌지는 못한다. 조명까지 회미한데다가 실내에는 항상 연기가 자욱하다. 이런 곳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면 자기만 손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마련이다. 그들은 실로 좀 이상한 커플이다. 한 사람은 물빠진 진을 입고 있으며, 머리칼은 짤 막 하고 수세미처럼 헝클어져 있다. 그러나 마주앉은 사람은 말쑥한 신사복 차림이다. 둘 다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운 채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다. "컴퓨터는 당신이 말한 게 옳았어요. 여기 디스켓을 가져왔죠." 도둑은 소나무를 잘 라서 만든 탁자 위에다 플라스틱 박스를 올려놓았다. 양복을 입은 쪽은 상자를 집어 뚜겅을 열고 안을 검사해 보더니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5OO불을 주셔야죠." "이건 일의 한 부분일 뿐이야. 그 퍼즐 박스는 어떻게 됐지?" "그건 지난주까지 그녀의 집에 있었어요. 그런데 없어졌어요." 마주앉은 사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없어지다니?" "그곳을 이 잡듯이 뒤졌는데도 찾을 수가 없었다니까요." "이런 바보 같으니...나는 경찰에 연루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도둑을 당 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돼." 젊은 건달은 맥주를 한 모금 꿀꺽 삼켰다. "안심해요. 진짜 조심했으니까. 아무것도 건드린 흔적은 남기지 않았어요. 부엌의 스 푼 한 개도 옮겨 놓지 않았다고요.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 어요." "그 상자가 없어졌다는 것은 확실한가?" "그렇다니까요." 탁자 건너편의 두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네가 만약 나를 속이려 든다면 너는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질 거야." "당신에게 사기칠 생각은 없어요. 그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정 말이에요." 퍼즐 전문가로 애비게일이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올해 9살 난 소녀 밀리사 웩슬러였다. 소녀는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한 층 위에서 살고 있다. 3살 적부터 신동이라고 이름이 난 밀리사는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아이다. 애비 게 일은 그 아이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메릴랜드 과학 센터의 특수 프로그램 에 넣어 준 적이 있다. "프랭클린 박사님!" 그녀를 보자 소녀는 환성을 터뜨렸다. "마침 때맞춰 오셨어요. 내가 만든 새 차를 보여 드릴게요. 발을 조금 더 벌려 보시 겠 어요?" 애비게일은 밀리사의 엉뚱한 요구엔 이젠 익숙해져 있다. 그녀는 소녀가 요구한 대로 발을 양쪽으로 약간 벌리고 기다렸다. 그러자 금세 반짝이는 빨간 레이서카가 그녀의 다리 사이를 통과하여 홀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서 난 거니?" 밀리사는 금발의 고수머리를 흔들며 생긋 웃었다. "몸체는 장난감일 뿐이에요. 그렇지만 무선 컨트롤 장치를 내가 내장시켰죠." "아주 기가 막히는구나." 소녀는 자신이 조립한 과정을 자랑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애비게일이 들 고 들어온 상자를 발견하고는 호기심의 눈빛을 반짝였다. "아주 예쁜 상자군요. 뭐예요?" 애비게일은 상자를 거실 테이블 위에다 올려놓았다. "수수께끼 상자야. 난 도무지 열 수가 없어서 가져왔단다." "퍼즐이라면 자신 있어요." "그래서 가져왔다니까 열게 되면 나에게 전화를 해라. 포기했을 때에도." "난 포기하지 않아요." 소녀와 몇 분간 잡담을 나누다가 애비게일은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파트 로 돌아왔다. 그녀는 혼자 사는 많은 여성들이 냉장고에서 인스턴트 음식을 꺼내어 그냥 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는 법이 없다. 요리는 그녀의 또 다른 한 취미이기도 하다. 오늘 저녁은 게 요리와 패스타 샐러드를 만들 참이다. 요리가 익는 동안에 '이브닝 선' 지를 들고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그녀는 헤드라인을 대충 훑어본 다음 문화면을 펼쳤다. 재미있는 연극이라도 공연한 다 면 조 오멀리와 함께 이번 주말을 즐겁게 보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연극이나 영화 는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다. 게다가 조 오멀리가 즐겨 가는 곳은 극장이 아니면 미스 테리 소설을 파는 서점이다. 특히 그녀는 우스팡스러운 여탐정이 나오는 미스테리를 편애하여 읽는다. 조를 생각하면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녀의 눈길이 신문의 사망 기사란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듯한 어느 이름에 딱 멈친다. 그녀의 손이 갑자기 굳어지며 호흡까지 거 칠 어졌다. 샤론 클레이본. 사망자의 사진은 실려 있지 않았다. 어처면 동명이인인지도 모른다. 맙소사. 제발 다른 사람이기를 기사를 읽어 내려 가는 동안 그녀의 맥박은 점 점 더 빨라졌다. "금년 27살... 데릭 클레이본과 스티브 클레이본의 누이동생..." 갑자기 두 무릎의 힘이 쑥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이럴 리가 없어! 애비게일은 기사의 내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망 기사의 내용은 정확하 게 그녀가 치료한 적이 있었던 샤론 클레이본에 관한 것이다. 데릭에게 다녀온 이후로 그녀는 샤론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컨트롤되고 있 다 는 그외 말만을 믿고 있었다. 샤론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며, 의료진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런 그녀에게 무슨 나쁜 일이 생겼더란 말인가? 스토브 위에서는 패스타 샐러드가 끓어 넘치고 있지만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 에 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둘러니 계곡 묘지로 들어가는 입구의 좁은 길은 메르세데스나 벤츠와 같은 고급 승용 차들로 온통 메워져 있다. 볼티모어 사회단체의 유명인사들이 샤론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라도 고하러 왔단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 그들은 샤론의 오빠인 데릭 클레이본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 그곳에 몰려든 것이다. 마지막 남은 진달래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안개 같은 세우가 문상객들의 어깨를 촉 촉 히 적셔왔다. 가족들의 프라이버시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애비게일은 무덤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지점에서 검은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 있었다. 그녀의 심정으로 는 관 앞으로 달려가서 고인을 위해 한두 방울의 뜨거운 눈물이라도 떨어뜨리고 싶다 . 서로의 환 경이 다르지만 않았다면 샤론과 그녀는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것 이다. 그러나 친구가 되는 대신에 샤론은 그 녀의 첫번째 환자가 되어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샤론 에 대한 치료 결과는 그녀에게 자신이 올바른 길로 들어섰다는 확신을 심 어 준 것이기도 했다. 그때의 그 흐믓한 감동은 샤론을 영원히 잊지 못할 친구로 가 슴 에 새기게 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이제 샤론은 죽었다. 애비게일은 어깨를 누르는 검은 코트의 무게와 함께 샤 론 에 대한 상실감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정말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처럼 순진 하 고 아름다운 여인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 하느님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지 애 비게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사물이 흐릿해졌다. 애비게일은 가방 속에서 티슈를 꺼내어 얼른 눈물을 찍어내며 자신의 감정을 수습하려고 애썼다.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또 다른 슬픈 감정이 밀려오는 것이 두 려워서. 그녀는 서둘러 문상객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데릭과 그의 아내는 검은 상 복 을 입고 관 옆에 서 있다. 데릭의 오른쪽에는 회색 바지에다가 구겨진 남빛 셔츠를 입 고 구두를 신은 차림으로 세계를 반 바퀴 정도는 걸어서 온 듯한 사내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서 있다. 그가 만약 가족들과 함께 서 있지 않았다면 샤론의 또 다른 오빠 인 스티브라는 사실을 눈치채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그의 얼굴은 충격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목사님의 조사가 이어지는 동안 애비게일은 혈색이 좋은 문상객들의 얼굴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상 원 의원 몇 명의 얼굴이 눈에 띄고 정부에서 나온 사람들도 더러 자리를 같이하고 있다. 볼티모어에서 가장 명성 높은 개인 병원인 스털링 클리닉의 원장 조너던 와인드험의 얼굴도 보인다. 이들 중 누가 개인적인 샤론을 안단 말인가? 이들 중 누구를 샤론이 보고 싶어했단 말인가? 애비게일의 시선은 다시 두 형제의 얼굴로 돌아왔다. 둘은 확실히 닳았다. 강한 턱과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코 역시 형제일 것이다. 다만 데릭이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일 뿐 이다. 그의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하다. 그에 비해서 스티브의 머리 카락은 짙은 갈색 에 끝부분이 햇빛에 바랜 듯한 색깔을 하고 있다. 애도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두 사람은 차이가 있다. 데릭의 태도는 무척 세련되고 확신에 찬 것인 데 반해, 스티브는 있으 나 마나한 존재로 비친다. 문상복 차림의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입은 복장은 특별히 눈 에 띄는 것이었으나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애비게일이 그를 처음 본 인상은 세련되지 못하고, 공격적이며 위험하기까지 한 것이 다. 야생동물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사냥꾼의 냄새를 맡은 것처럼 그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샤론의 무덤을 가로 질러서 그의 시선은 곧바로 애비게일의 눈동자를 꿰뚫 었다. 잠시 무방비한 상태에서 애비게일은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속 에서 고통과 함께 분노 같은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저런 타입의 인간과는 가까이 하고 싶 지 않아.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목사는 설교를 마치고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 다. "고인의 가족들은 여러분들이 오늘 저녁 모두 자리를 함께 해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 다.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문상객들은 서너 명씩 그룹을 지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재빠르게 내려 가서 자동차에 오르고 있는 사람도 있고, 아직도 무덤 주위에서 얘기를 나누며 내려 갈 생각도 않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회색 머리카락을 핑거컬로 단단히 잡아맨 작달막한 노부인이 애비게일 곁으로 다가와서 그녀의 팔을 건드리며 말했다. "젊은 사람들은 별로 오지 않았구려. 댁은 샤론의 친구겠지?" 애비게일은 주름살투성이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노부인의 눈동자는 슬픔과 고통으 로 붉게 충혈되어 있다. "샤론은 나의 환자였어요. 그리고 나의 친구이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당신은 프랭클린 박사구려. 그렇죠?" "아, 네.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샤론의 고모인 소피아예요. 샤론은 2년 전 이혼을 한 직후에 시카고의 내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죠. 그때 당신에 관해서 아주 좋게 얘기하더군요." "나는 샤론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녀의 의지력은 정말 존경할 만했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점이 이상하기도 하고. 그 아이가 이렇게 죽었다는 것이 나는 믿어지지 않아요." "나도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어요." "그애는 자살을 했다는군." 애비게일은 깜짝 놀라며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약을 먹었답니다. 약을 먹고 있는 그애를 그들이..." 노부인이 갑자기 비틀거렸다. 애비게일이 그녀의 팔을 부축하려 는 찰나에 뒤에서 다 른 젊은이가 그녀의 팔을 부축하며 말했다. "차로 모실게요. 소퍼아 고모님." "난 괜찮다. 프레디. 나는 이 멋진 숙녀분과 같이 내려가겠다." 노부인은 애비게일을 돌아보며 양해를 구했다. "내가 댁을 너무 귀찮게 하는 것은 아닌가요?"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애비게일은 문상객들과 함께 초상집으로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렇잖아도 고민을 하고 있던 차였다. 샤론과의 정을 생각하면 당연히 참석 해야겠지만. 데릭의 달갑잖 게 생각하는 듯한 눈초리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마침 좋은 구실이 생긴 셈이 다. "난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요." 소피아는 자갈길을 천천히 내려오면서 푸념처럼 그 말을 되풀이했다. 애비게일은 샤 론 이 먹었다는 약이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정신착란으로 죽었다면 믿 지 않겠지만 약으로 죽었다면 이건 문제가 다르다. 애비게일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샤론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멀찌 감 치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에즈라 혼비는 샤론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키가 작달막하고 머리에다 소금과 후추가루를 뿌려 놓은 듯 한 사내다. 코는 주먹코고, 독단은 투견에서 진 개 의 주인처럼 심한 편이다. 그는 오늘 아침 무릎의 관절염에도 불구하고 꿇어앉아 기도를 올렸다. 불쌍한 샤론 클레이본. 그녀의 선은 자신의 육체를 초월한 것이었다. 그녀의 영혼을 떠나보냄에 대해서 그는 슬프게 생각한다. 그 일을 위해서 희생된 어떤 영혼에 대해 서 도 그는 애도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지만 가끔 하느님은 보통 인간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이한 방법으로 행하신다. 영혼은 그가 맡은 일이다. 그는 이스턴 애버 뉴의 나자로 구호 자선단체가 있는 하이랜드타운의 뒷골목에서 그렇게 주장하곤 한다 . 인간에게 충분한 음식을 주고, 잠잘 곳을 제공하고, 영혼의 양식을 원하는 만큼 주라 . 그러면 그는 아마 일자리를 구해서,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사회의 일원이 될 것 이다 . 그러나 그런 일을 하는 데에는 엄청난 돈이 든다. 사회 봉사 단체에서 모아 주는 돈 만 으로는 어림도 없다. 지난 30년 동안, 그는 나름대로 모금운동에 자신의 최선을 다해 왔다. 돈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래서 그는 이미 오래 전에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돈이란 것은 어디에서 나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썼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기도하던 조그마한 교회를 나와서, 다리를 절뚝거리며 사무실로 내려갔 다. 그의 초라한 책상이 놓여 있는 뒤쪽 벽에는 온통 사진 액자들이 걸려 있다. 그 자 신과 함께 찍은 프랭크 시내트라, 루실 볼, 베티 포드, 그리고 한때는 혜성처럼 나타 났다가 사라져 버린 전 볼티모어 출신의 정치가 스파이로 에그뉴의 사진도 걸려 있다 . 문 가까이에 있는 액자에는 감사의 글귀가 적혀 있다. 샤론에 대한 것은 없다. 아직 까 지는. 그렇지만 그녀도 충분한 봉사를 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봉사가 얼마나 큰 것이 었는지 그녀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 좀 유감일 뿐이다. 이제 몇 달 안으 로 그는 샤론을 위해서 적합한 추모 행사를 올릴 생각이다. 클레이본 저택은 자동차로 30분 거리였다. 그린스프링 밸리의 8만 평방미터쯤 되는 땅 위에 남부 스타일로 지은 맨션이다. 애비게일은 이 지역을 잘 알고 있다. 그녀 역시 그곳에서 3km정도 떨어진 곳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클레이본 저택만큼 비싼 집이었 지만 그렇게 허세를 부리는 저택은 아니었다. 그녀의 부모가 플로리다로 옮겨 간 이 후 로 그녀는 더 이상 그 집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니. 널찍한 흘에 2, 30명 정도의 손님들이 술과 음식을 들며 대화 를 나누고 있었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은식기에 샌드위치와 페이스트리를 비롯한 각종 음식들이 담겨 있다. "뭘 좀 드시겠어요?" 애비게일은 소피아에게 물어 보았다. "친절하기도 하시지." 노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노부인을 벨벳 의자에 앉히고, 애비게일은 그녀를 위해 접시에 음식물을 담으러 갔다. 테이블을 한 바퀴 돌아나오는 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니 스털링 클리닉의 원장인 조너던 와인 드험이 그녀 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당신을 본 지가 쾌 오래됐군. 부모님이 열사병에 걸렸을 때 만난 후로는 통 보지 못 했지."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좋았지. 토요일 골프 모임에서 아버님을 만나뵐 수 없는 것이 좀 섭섭하지만. 부친 에 서는 나보다 핸디가 높으신 유일한 분이었거든." 애비게일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 그 늙은 고집쟁이는 여전하신가?" "여전하세요. 요즈음은 보커 래턴으로 나가고 계시죠. 어머니도 그 코스를 좋아하시 는 모양이에요." "당신이 샤론과 친교가 있는 줄은 몰랐는걸." "사실은 샤론은 나의 환자였어요." 조너던은 놀란 표정이다. "그런데도 당신 이름은 진찰자 명단에 올라 있지 않던데?" "샤론이 스털링 클리닉에 입원해 있었어요?" "몰랐어? 비극이군." 그는 탄식하듯 투덜거렸다. "나는 그런 식으로 환자를 잃어버리는 것은 질색이야." "그러시겠죠. 자세한 얘기를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우린 아직도 조사중이야." 그와 몇 마디 더 나눈 뒤 애비게일은 소피아에게 음식물을 가지고 갔다. 그 노부인은 데릭의 아내인 세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그 여주인은 검은 재킷과 장갑을 벗고 있었다. 일류 디자 이너가 만든 드레스가 그녀의 늘씬한 몸매를 최대한으로 살 려 주고 있다. 그녀의 목에 매달려 있는 목걸이에는 굵은 다이아몬드가 현란하게 반짝이 고 있다. "여기까지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소피아 고모님을 친절하게 보살펴 주신 것 도 감사하고요." 비록 말은 부드럽게 했지만 어쩐지 껄끄러운 느낌이 서려 있는 기색이다. 그렇지만 가 족 중에서 자살한 사람이 있다면 그 정도의 느낌은 누구에겐가 다 있는 것이 아니겠 는 가. 애비게일은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별 말씀을. 당연한 일이에요." "당신은 굉장히 바쁘신 분이라는 걸 알아요. 소피아 고모님은 이제 괜찮으니 너무 신 경쓰지 마세요." "그러겠어요. 그러잖아도 곧 가볼까 하던 참이에요. 샤론의 일로 당신에게 애도의 표 시를 하고 싶었죠." "많은 분들이 걱정해 주신 덕분에 견디고 있어요." 세실이 다른 사람들 쪽으로 물러가자 소피아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세실은 샤론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어." "그래서 더 괴로워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그런 기특한 여자가 아니야. 세실은." "오. 그래요?" "샤론이 죽음으로써 가족 신탁 기금을 나누어 가질 사람이 한 사람 줄어든 셈이지."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애비게일의 말 도중에 마치 모래를 씹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소피아 고모님. 가족의 비밀을 온통 퍼뜨리고 계시는 것 은 아니시겠죠?" 애비게일은 그가 바로 스티브 클레이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소피아에게 말을 하고 있지만 눈길은 애비게일을 노려보고 있다. 그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고 푸르 게 느껴졌다. 노부인이 얼굴을 붉히며 조카를 나무랐다. "스티브. 예의를 지켜라. 프랭클린 박사를 뵌 적이 있니?" 그러자 눈을 가느다랗게 치켜뜨며 애비게일을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에 난 흉터가 머 리카락 사이로 드러나 보인다. 그의 말투나 태도로 보아 말보다는 완력이나 무기로 해 결하는 것이 습성이 되어 버런 듯한 인상을 풍긴다. "프랭클린 박사라고요?" "프랭클린 박사는 샤론의 정신의였단다." "그렇다면 돌팔이가 분명하군요." 그의 말은 홀 안이 쩌렁 할 정도로 울렸다. 애비게일은 머리카락이 쭈뼛하고 일어서 는 느낌이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그들을 돌아 보았다. 그의 무식할 발언 에 그녀는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그의 비난은 실로 부당하기 짝이 없다. 앞뒤 생각 없 이 그럴 수가 있는가? "내가 샤론을 돌본 것은 2년도 더 전의 일이었어요. 이번 사건과는 관계가 없어요." 애비게일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면서도 지난주 아침에 걸려왔던 전화가 마음에 걸렸다 . 과연 그럴까? 과연 나는 샤론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일까? "너하고는 무슨 말을 못하겠구나, 스티브." 소피아가 그를 나무랐다. "네가 지난 8년 동안 극동에서 무슨 짓을 하며 지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는 고모의 꾸지람에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뚫을 듯한 눈길로 애비게일을 노 려 보고 있는 그에게 또 다른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방을 겁주는 일이라. 그녀는 필사적인 의지로 그의 눈초리를 견뎌냈다. "당신은 결백한 척하고 있지만 프랭클린 박사. 그렇지만 나는 당신이 무언가를 감추 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리고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밑바 닥까지 들여다보고야 말겠소." 난 세실 쪽을 힐끗 돌아보고 나서 다시 애비게일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도 저 여자와 함께 일하고 있소?" "그게 무슨 말씀이죠?"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의 손은 거칠고 강했다. 그것은 서류 나 만지작거리며 사는 사람의 손이 아니다. 애비게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슨 짓이에요, 이게?" 그녀는 저항을 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저절로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거짓말을 하면 맥박이 빨라지는 법이거든." 그의 목소리도 낮아졌다. 애비게일의 태도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고 해서 쉽사리 달 라지지 않도록 훈련이 되어 있다. 아무리 유별난 환자가 저지르는 이상한 행동 앞에 서 도 그녀의 태도는 언제나 침착 했다. 그러나 그에게 손목을 잡힌 지금은 호흡이 빨라 지며 맥박도 빨라지는 것을 그녀 스스로도 느낄 수가 있다. "상대방에게서 위험을 느낄 때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요." 그녀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는 아프지 않게 그녀의 손목을 잡는 방법을 알고 있 다. 아프지는 않지만 그의 손은 수갑보다도 더 확고한 느낌을 주었다. 그의 손아귀에 서 자신의 손목을 빼내려면 어차피 소동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런 방법은 이런 사 내를 다루는 방법으로는 가장 치졸한 것이다. 애비게일은 사내가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닫도록 해주기 위해서 조용히 그의 눈을 들여 다보았다. "그래. 진단이 나왔나요? 당신이야말로 돌팔이는 아닌가요?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샤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겠죠, 박사." 그에게 샤론에게서 걸려왔던 전화에 대한 얘기를 해줄까? 그녀는 속으로 망설였다. 그 렇지만 이런 얄팍한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 사내에게 내가 왜 그런 얘기를 해줘야 한 단 말인가? 그리고 그 얘기는 이미 데릭에게 해주지 않았던가? 그가 원한다면 형에게 물 어 보면 될 것이다. "네가 아주 집안 망신을 톡톡히 시키는구나. 조문객으로 오신 분에게 이게 무슨 망발 이냐, 망발이?" 옆에서 보다 못 한 소피아가 그를 야단쳤다. 애비게일은 순간 노부인과 주위의 사람 들 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스티브는 그녀의 손목을 천천히 풀었다. 그는 자신이 너무 충동적으로 행동한 것을 후 회라도 하는 양 눈길을 아래로 떨구었다. 애비게일은 그가 잡았던 손목 부위를 다른 손으로 문지르면서 씁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애비게일은 노부인과 잠시 더 얘기 를 나누다가 스티브 를 레이본 쪽으로는 끝까지 눈길을 주지 않고 밖으로 나와 버렸 다. 아침에 내리던 세우는 어느새 부슬비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차문을 열고 운전 석에 앉았다. 클레이본 가족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샤론, 데릭, 세실, 스티브, 그들은 마치 유질 오닐의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 같다. 처음에는 서로가 전혀 상대 방 에 대한 적의감을 보이지 않고 있다가 연극이 진행되어감에 따라서 차츰 증오심을 드 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애비게일은 뺨에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며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문 제 는 이것이 연극이 아니란 점이다. 이것은 현실이다. 샤론은 정말 죽었다. 그리고 나 는 과거에 치료한 적이 있었던 샤론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진심으로 알고 싶다. 3 애비게일은 곧바로 사무실로 돌아가서 샤론의 테이프를 검토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것은 스티브가 샤론에 대해서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고 그녀는 비난했기 때문만은 아 니다. 그녀 자신이 샤론이 왜 자살을 해야만 했는지, 그 원인이 샤론을 치료할 때부 터 있어 왔던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차를 물고 시내로 들어오자 그녀는 온몸의 기력이 다 빠져나가고 없는 것 처럼 느껴겼다. 장례식의 분위기에 너무 신경을 소진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차를 아파트 주차장에다 댔고,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곧 침대에 엎어져 잠 이 들고 말았다. 더욱 놀랄 일은 다음날 아침 7시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는 사 실 이다. 그녀는 샤론의 장례 식날의 나머지 시간을 잠으로 모두 보내 버린 것에 대해서 가책을 느꼈다. 그렇지만 최소한 몸은 가뿐해진 셈이다. 월요일은 언제나 바쁜 날이다. 그래서 오후 5시가 되도록 그녀는 샤론의 기록에 대해 서는 신경쓸 틈이 없었다. 마지막 환자를 내보내고 나서 사무실 바깥문을 잠그고는 녹 음기와 샤론의 테이프들을 꺼냈다. 테이프는 모두 6 개고, 파일도 3 개나 된다. 이들 테이프나 파일 중에서 자신이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샤론의 비밀이 어디 엔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것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왜 샤론 에 대해서 실패를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샤론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짐작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자신에 대한 스티브의 생각이 터무니없는 것이 라 는 증명을 해보일 수도 있다. 그녀는 구두를 벗어던지고 재킷도 벗어 버렸다. 저녁식사 시간이 거의 되었기 때문인 지 시장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조그마한 냉장고 속에서 요구르트를 하나 꺼내들었다. 이거면 당분간 허기를 막을 수는 있을 테지. 요구르트를 한모금 마시고, 그녀는 시트 깊숙히 편안한 자세로 앉아 테이프를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샤론의 목소리가 흘 러나오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 들고 있던 요구르트를 테이블 위에 내려 놓았다. 샤론의 목소리를 들으니 어쩐지 식욕이 사라져 버리는 느낄이다. "수업을 시작할까요? 우리들의 수업 내용을 녹음해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러자 샤론은 약간 망설이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아무도 이것을 듣는 일은 없겠죠?" "물론이에요. 이건 엄격한 비밀이니까." "정신 분석 의사 앞에 서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누구나 처음에는 긴장을 해요.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편하게 가져요. 그리 고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지를 말해 봐요." 처음에는 다소 말을 더듬다가 샤론은 차츰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의 불행했던 결혼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수업은 그 얘기만으로 끝났다. "이렇게 모두 얘기하고 나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요." 샤론은 50분쯤 지난 후에 애비게일에게 말했다. "그러면 다음 시간을 약속할까요?" "좋아요." 귀에 익은 샤론의 다정다감한 목소리는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을 세부적으로 기억나게 해주었다. 치료 과정에서 잘못되거나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샤론은 이혼의 충 격을 딛고 일어나서 새로운 삶의 의지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가 어쩌다가 약물 복용으로 빠져들었을까? 왜 자살까지 해야만 했을까?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테이블 위에 놓아 둔 샤론의 파일을 뒤적거리면서 그녀는 자신이 쓴 샤론에 대한 기 록 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두 번째 테이프를 녹음기에 끼워 넣었다. 파일을 무릎 위 에 펼쳐 놓고 그녀는 샤론의 가정생활에 대해서 녹음해 놓은 부분에 귀를 기울였다. 클레이본 집안의 엄청난 부에도 불구하고 샤론의 환경은 참담한 것이었다. 그것은 정 서적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샤론과 스티브가 그들의 아버지가 취한 두 번째 아 내의 소생이었다는 사실 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릭은 그의 첫번째 부인 이 낳은 아들이고 샤론과 스티브가 자라는 동안에는 대학을 다니느라고 집을 나가 있었 기 때문에 배다른 동생들에 대해 형제애 같은 것을 느껴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아마 스티브는 가족 회사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을 거예요." 샤론은 자신의 추측을 얘기했다. "스티브가 하버드 대학을 나올 무렵에 아버지는 은퇴를 하시며 회사를 데릭에게 맡기 셨어요." "스티브와 당신은 가깝게 지냈나요?" "스티브 오빠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엄마는 골프 레슨과 가든 파 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늘 바빴고, 아버지는 돈 버는 일에 너무 바빠서 우리가 잠 자리에 들기 전에는 돌아오시는 법이 없었죠. 두 분 사이에도 서로 연결되는 것이 거 의 없었어요. 그것은 결흔생활이라기보다는 별거나 다름없었어요." 애비게일은 스톱 버튼을 누르고 눈을 감았다. 녹음하던 당시에 자신이 내렸던 결론들 을 기억해내기 위해서였다. 샤론은 자신이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다른 대상으 로부터 찾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 물정을 모르는 그녀의 미숙한 판단은 남 편을 선택하는 일에서부터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애비게일은 다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샤론은 자신이 가장 괴로웠던 순간은 스티브 가 어디론가 떠난다는 얘기를 했을 때였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그때 코널 대학 1학년이었어요. 뒤처진 공부를 따라잡느라고 무척 고생을 하고 있는데, 스티브 오빠가 전화로 만나자고 했어 요. 그를 만나는 기쁨에 나는 들떠 있 었 죠. 그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캠퍼스 내의 아지트로 데려갔어요. 우리는 서로 공부의 어려움에 대해서 한동안 얘기를 주고받았어요.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죠. 그런데 그 가 갑자기 이 나라를 떠나겠다는 폭탄 선언을 한 거예요. 나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 도 할 수가 없었어요.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물었죠. 그는 자신의 인생을 남의 기대에 맞 추어 사는 일에는 이제 지쳤다고 말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당신의 기분은 어땠어요?" "역겨웠어요. 황폐한 기분이었죠. 나는 그만은 언제나 내가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 에 있어 줄 거라고 생각해 왔죠. 그것이 착각이었어요. 그도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아버지와 나까지도 버릴 결심을 한 거예요."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나는 그를 대신할 대상을 찾아야만 했어요. 이 천지 간에 나 혼자라는 생각은 너무 괴롭고 무서웠으니까요. 나를 위해 관심을 쏟아 줄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그런대 불 행 하게도 내가 만난 사람은 그 바보 같은 마일즈 스키너였죠." "그러니까 그 비극적인 결혼의 원인은 냉정한 오빠에게 있었군." 저주와 경멸이 섞인 듯한 그 말은 녹음기에서 흘러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애비게일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사무실 문을 팍 채우고 서 있다. 스티브 클레이본, 그녀는 입속이 바짝 말라드는 느낌이다. 누이동생의 장례 식에서는 그런 대로 문화인답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던 셈이다. 그러나 오늘 그가 입고 있는 복장은 누더기 같은 진에다가, 흰 셔츠에 아이젠하워 재킷을 걸치고 있다. 이마 의 흉터와 불량기가 돋보이는 얼굴, 떡 벌어진 어깨는 영락 없는 거리의 건달의 모습 이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침착하려고 애를 썼다. 이런 순간에도 그녀의 직업의식은 어 김없이 작용했다. 샤론의 녹음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 들어왔어요?" "사무실 문의 잠금 장치는 너무 허술해서 못 쓰겠더군. 다른 걸로 갈아야겠소." "주인의 허락도 없이 그렇게 마음대로 열고 들어와도 되는 거예요? 정말 뻔뻔스런 사 람이군요." 그는 어깨를 으쓱할 뿐, 사과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스타킹을 신은 그녀 의 다리를 쓱 훑어보고는 그녀의 불룩한 가슴에 가서 멎었다. 그녀는 갑자기 불안한 느 낌 이 들었다. 스티브는 더이상 위협적인 표정은 짓지 않았으나, 애비게일은 그가 가로막고 있는 유 일한 출입구가 자신을 감금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이런 시간에 다른 사람이 찾아올 리도 없고, 건물 안에 사람이 남아 있을 리도 없다. 더군 다나 이 사내는 다른 사람의 존재 따위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이곳은 나의 사무실이야.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머리가 살짝 돈 사람이라도 이곳에 들 어오면 나의 컨트롤을 받아야만 해. 그러나 이 사내는 아무래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스티브 클제이본에게는 어떤 원칙도 통하지 않을 것 같다. 그녀의 경험은 자신을 가만히 두라고 지시하고 있다. 그녀는 전화기를 힐끗 바라보았 다. 하지만 가망이 없다. 그가 내버려 둘 리가 없는 것이다. "꿈도 꾸지 마." 그가 경고했다. "도대체 무엇을 원하세요?" 그녀는 한숨 섞인 말투로 물었다. "저 테이프들 처음부터 끝까지." "그건 개인의 비밀이에요." "샤론은 이제 신경쓰지 않을 거요."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얼마만름 들었죠?" "조금밖에 듣지 못했소. 그렇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듣겠소." 그는 무례한 태도로 말하고는 녹음기 속에서 테이프를 뽑아내어 테이블 위의 테이프 와 함께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무릎 위에 펼쳐 놓은 파일과 테이블 위 의 파일도 모아쥐었다. 그녀의 저항은 로보캅에 저항하는 거나 다를 바 없는 무력한 것 이 었다. "내게 대항해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 머리도 체크해 봐야 할 거요 , 프랭클린 박사." 샤론의 파일을 옆구리에 끼고, 그는 문 쪽으로 걸어나갔다. 애비게일은 그에게 테이 프 내용을 듣는 것이 그 자신을 위해서 좋을 것이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으나 그만두었 다. 그에겐 지금 어떤 충고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을 여기서 가져나갈 순 없어요." 그녀는 대신에 그렇게 말했다. "누가 나를 막을 건가?" "경찰에 알리겠어요." 애비게일은 위협했다. "이것 봐요, 숙녀님. 나는 프놈펜이나 다낭에서 경찰보다도 몇십 배나 더 지독한 친 구 들을 상대했어. 이런 도시의 경찰들이야 그저 예쁘게만 보인다구." "볼티모어에서는 당신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예요."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지." 그는 웃으며 문으로 나갔다. 애비게일은 분노와 놀람으로 몸을 떨며 소파에 털썩 주 저 앉았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심호흡을 몇 차례 반복했다. 이 일을 어떡하나? 경 찰에 연락을 할까? 하지만 스티브는 경찰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경찰이 그를 체포 한 다 하 더라도, 그는 적당히 꾸며댈 것이 뻔하다. 테이프와 파일을 강제로 빼앗아가는 것을 지켜본 사람도 없다. 그리고 경찰이 여기에 도착할 때쯤이면 그는 어디론가 행 방 을 감춰 버린 후 일 테니, 찾아내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경찰은 애써 찾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스티브 클레이본은 자신의 코르시카 문을 세차게 닫았다. 운전석에 앉은 다음, 테이 프 와 파일을 옆자리에 던졌다. 그의 눈이 내장된 스테레오에 멎더니 카세트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끼워 넣었다. 샤론과 프랭클린 박사가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았는지는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코르시카를 주차장에서 끄집어낸 다음에도 그는 플레이 버튼을 얼른 누르지 못했다. 프랭클린 박사가 환자의 치료 과정은 개인적인 비밀이라고 한 말이 마음에 걸린다. 아 니, 그 보다는 누이동생의 사생활에 대해서 깊숙히 침범한다는 것이 어쩐지 망설여졌 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그런 생각을 떨어버리려고 했다. 자신이 지적한 것처럼. 샤론은 이미 죽은 것이다. 만약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질 사람이 있다면 , 그는 그자의 목을 졸라 버릴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샤론과 프랭클린이 주고받은 이야기 속에서 어떤 단서를 찾아내야만 한다. 빨간 신호등 앞에서 차를 세우고는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샤론의 말소리가 흘러나오 기 시작했다. 처음엔 샤론의 목소리에 너무 마음이 흔들려서 그 내용에 대해서는 얼 른 알아 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 고양이를 집으로 안고 와서 침대 밑에다 감췄어요. 스티브와 나는 그 고양이에게 음식을 갖다 주곤 했죠. 그런데 가정부가 그것을 눈치채고 말았어요. 엄 마 는 야단을 치면서 사람을 불러 태피를 밖으로 내가게 하고는 나를 방에다 가둬 버렸 어 요."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차가 클랙슨을 울리는 바람에 그는 급히 차를 출발시켜야만 했 다. 샤론의 얘기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파란 불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 잠시 동안 샤론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탄 코르시카는 총알같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가 테이프 소리에 다시 정신을 집중할 때쯤에는 차는 이미 찰스 스트 리 트로 들어서고 있었다. . ".....내가 다락에서 시트로 만든 로프를 타고 아래로 내 려 가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는 나를 안으로 끌어들이고는 내가 태피 때문에 우는 것을 한동안 지켜보고 있었죠. 내가 울음을 그치자 그는 나를 배스킨로빈스로 데리고 나가 서 록키 로드를 사줬어요." 스티브는 헉! 하고 날카로운 숨을 내쉬었다. 시트로 만든 로프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동생을 머릿속에 떠올리고는 아찔한 기분을 느쪘던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잊 고 있었다. 아니, 잊고 있었다기보다는 다른 모든 기억들과 함께 차단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샤론은 그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 깊이 새겨 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로 차를 돌렸다. 이미 차를 돌려야 할 지점을 지나와 버 렸 다. 테이프는 계속 돌아가면서 샤론의 말을 이어갔다. 심리학자와 나눈 샤론의 모든 어린 시절 얘기는 그의 기억을 자극했다. 어떤 얘기들은 그를 미소짓게 했으며, 다른 어떤 얘기는 얼굴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그는 몇 번이고 스톱 버튼을 누르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내막을 알 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가던 손을 멈추곤 했다. 이야기가 최근의 일로 옮겨올수록 그의 심장은 철조망으로 조여오는 듯한 통증을 그에게 전해 왔다. 그는 샤론이 강한 여자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가죽처럼 질기고 냉소적인 그의 성격에 비해서 샤론은 너무 약하고 부드러웠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남편이었던 마일즈 스키너는 치명적인 상처를 준 것이 분명하다. "만약 가족 중의 누구라도 내가 곤경에 처해있는 것을 이해하고 도와주려고만 했다면 , 나는 이렇게 박사님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거예요." 샤론은 말하고 있다. "데릭은 사업에 정신이 없고, 스티브는 다른 세계에 가 있어요." "데릭에게 말을 건네 보기는 했나요?" 프랭클린 박사가 묻고 있다. "생각은 있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요. 그보다는 스티브 오빠가 원망스러웠죠 . 내가 자기를 얼마나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는 왜 모를까요?" "난 몰랐어요."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이겐 너무 늦어 버린 것이다. 그는 눈물이 괴어나는 바 람 에 앞에서 급정거하는 트럭을 미처 보지 못했다.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코르 시 카는 트럭의 바로 뒤에 아슬아슬하게 멈춰섰다. 그는 차를 길가로 세우고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거리의 표지판을 살피며 자신이 와 있는 지점을 확인하려 했다. 또 지나와 버린 모양이다. 그는 한숨을 쉬고는 차를 돌렸다. 시내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녹음기를 한 대 사서 테 이프의 마지막 부분까지 듣는 일이다. 그리고 누이동생의 고통을 함께 괴로워하는 일 이다. 마일즈 스키너의 영업 시간은 보통 정오부터 밤 9 시까지다. 점심시간을 이용하는 봉 급쟁이들과 저녁시간 후에 무슨 취득물이라도 있나 하고 들러 보는 여피족들을 잡기 위해서다. 하워드 스트리트의 아래쪽에 있는 그의 상점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바쁘게 문에 걸려 있는 종이 뎅그랑 하고 소리를 냈다. 그는 작업대로 사용하고 있는 조그마한 테이블에서 고개를 쳐들며 손님에게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도와드릴까요?" "아마 그래야 할걸세." 그제서야 마일즈는 출입구를 꽉 채우며 그에게 걸어오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챘 다. 골동품상 주인의 얼굴이 순간 잿빛으로 변했다. 그는 닦고 있던 은제 커피 포트 를 테이블 위에 덜컥 내려놓았다. 그는 뒷문으로 튀어 버릴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판단한 그는 오리발을 내밀 결심을 굳혔다. 샤론이 이미 죽어 버린 이상, 그녀의 오빠가 그것을 증명해낼 길은 없는 것이다. "스티브." 그는 반가운 체했다. 스티브는 그의 그런 태도를 무시해 버렸다. "스키너!" 스티브는 선반 위에 진열된 유리 제품과 청동제, 은제 장식품들을 찌푸린 눈으로 둘 러 보았다. "웬일로 여기까지?" 골동품상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스티브는 억제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샤론에 대해서 자네와 얘기하고 싶은 것이 좀 있어서 장례식에 자네가 나올 줄 알았 지." "정말 면목이 없네. 샤론의 일은 정말 유감스런 일이었어. 장례식장엔 나가 볼 생각 이 었네만, 여러분들 뵙기가 너무 죄스러워서 용기가 나지 않았네." "자네가 왔더라도 난 말리진 않았을 걸세." 단지 테이프를 듣고 샤론의 주변 인물들에 관해서 몰랐다는 가정하에서 말이야. "샤론과 나와의 관계는 끝난 지가 오랠세." "그랬었나?" "본론을 얘기하게나." 스티브는 잠시 망설였다. 이자를 어떻게 다뤄야 바른 말을 할까? "샤론의 죽음에 이 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자네에게 말하려는 걸세. 만약 자네가 그것과 무슨 관련이 있 다는 것이 밝혀지면, 내 누이를 속여서 결혼했던 자네의 목을 비틀어 줄 생각이네." 골동품상의 이마에 식은 땀이 배어났다. "이러지 말게. 맹세코 이흔 서류에 서명한 뒤로는 샤론에게 곁눈 한번 주지 않았네." 스티브는 말없이 그의 눈을 노려보았다. 더이상 헙박하지도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지 도 않고 단지 노려보기만 했다. 마일즈는 타들어가는 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좋아. 한 달쯤 전에 그녀의 집에 잠시 들른 적이 있네." "자넨 샤론의 이웃 사람을 자칫하면 차로 받을 뻔했어." "샤론에게 돈을 좀 구하러 갔었네. 그게 전부야." "샤론의 집 전화선을 뽑아 버린 것이 자네였나?" "내가 아니야. 정말일세." 스티브가 계속 노려보자. 마일즈의 손이 떨리고 있다. "여보게, 그녀는 어떤 사내와 데이트 중이라는 소문을 들었네." "누구?" "보험업자라고 하더군." "그자는 이름도 없나?" "애덤, 아. 굳인가 뭔가 하는 이름일세." "그를 어디서 찾을 수 있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친굴세. 어디에 있는지는 결코 밝히지 않아. 그렇지만 내가 알 아보지. 자네의 연락처를 알려 주면, 알아내는 즉시 전화를 하겠네." 스티브는 자신의 은신처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아무도 그의 은신처를 아는 사람이 없다. 그의 친애하는 형이나 형수까지도. 그는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필 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샤론의 주변 인물들을 알아내는 일에 더이상 시간을 끌 수만은 없다. 어쨌든 이런 일은 서둘러야만 하는 것이다. 코브라 앞에서 알짱거리 다가는 언젠가는 물리기 십상이다. 물러기 전에 이쪽에서 재빨리 조처를 취하지 않으 면 안된다. 그는 주머니에서 불펜을 꺼내어 마일즈의 비즈니스 카드에다 전화번화를 적어 주었다. "나는 햄프턴 호텔에 묵고 있네." "무슨 소리를 들으면 즉시 연락하지." "그래 주면 고맙겠네." 스티브는 돌아서서 상점을 나왔다. 마일즈는 그가 혹시나 돌아올까 봐 잠시 동안 기 다 렸다가 떨리는 손으로 전화번호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일석이조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는 다이얼을 돌렸다. "여보시오." "마일즈 스키너입니다." "무슨 일인가?" "스티브가 이곳을 다녀갔습니다." "그 친구, 어지간히 쑤시고 다니는 것 같더군. 그래서?" "그가 있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어딘가?" "나는 당신의 서재에 걸려 있는 것과 같은 웨지우드 시계를 구해 달라는 손님의 부탁 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제기랄." 상대방은 뭐라고 투덜댔다.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하는 수 없지. 자넨 악덕 상인이야." "이따가 상점 문을 닫고 찾아가 뵙겠습니다." "뒷문을 이용하게." 애비게일은 통 잠을 이를 수가 없다. 스티브의 거칠고 위험스러운 얼굴이 그녀의 마 음 을 거머쥐고 놓아 주지를 않는다. 그는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것일까? 동생 샤론의 죽 음 에 대해서 그는 무슨 의혹을 품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가 그렇게 설치고 다니는 일 면 에는 동정의 여지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하나뿐인 여동생을 잃여버린 그의 심정 을 이해할 만도 하다. '샤론은 정말 자살한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서 죽음을 당한 것일까?' 애비게일은 유복하고 인정이 넘치는 가정에서 성장했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 고, 자신의 재능을 키우는 데 부모님의 도움도 충분히 받았다. 자기 자신의 인생만 아 는 부모를 만난 아이들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그녀는 겪어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샤론과 스티브의 처지에 동정이 가는지도 모른다. 샤론이 따스한 인정을 그리워한 것 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스티브가 동생의 그러한 마음을 헤아려 줄 만큼 다정다감하지 못했던 것이 그녀 의 불행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멀리 이국에 가 있는 등안에 일어난 샤론의 죽음 은 그로 하여금 잊고 있었던 동기애를 되살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그녀가 죽 어 버린 뒤이기는 하지만, 이제 그는 지난날의 무심했던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자책 하 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것은 동생을 죽게 만든 주변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 으 로 변하고 있다. 그 와중에 애비게일 자신도 걸려든 것이다. 아주 위험한 위치에 자 신 이 들어와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의 여동생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는 일에 내가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자신이 내 도움을 원하고 있지 않다 . 그런데 왜 그를 도와야만 한단 말인가? 한밤중에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스털링 클리닉의 스 텝 진을 이용하는 일이다. 거기라면 샤론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특히 최근의 샤론의 증세에 대해서 소상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핑계로 죽은 자 의 기록을 보자고 할 것인가? 자신의 옛날 환자였던 그녀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은 것 이 있다고 말한다면 들어줄 것인가? 아무튼 일단 부딪쳐 볼 일이다. 오후 1시에 오기로 했던 환자가 갑자기 취소를 통보해 왔다. 그렇다면 3시까지는 약 속 이 없다. 그녀는 아파트로 돌아 와서 차고에서 차를 꺼내어 타고는 마운트 워싱턴 지 역으로 달려갔다. 20분쯤 후에 그녀는 회색돌로 된 정문을 통과하여 스털링 클리닉의 잘 손질된 마당으 로 들어섰다. 병원은 석조 건물로서 양쪽에 엄청나게 큰 병동을 날개로 달고 있고, 중 앙에 있는 건물에는 관리 부서가 들어차 있다. 그녀가 차를 계단 건너편 주차장에 세워 두고 나오자 앰블런스 한 대가 사이렌 소리 를 요란하게 울리며 모퉁이를 돌아나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깜짝 놀라며 한걸음 뒤로 물러 섰다. 앰블런스는 응급실 입구로 빨려들어갔다. 관리 부서 현관에서는 수위가 그녀의 신분증을 확인한 뒤에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 다. 중역실 쪽에서 한 사내가 나오다가 그녀와 얼굴이 마주쳤다. 애비게일은 그를 즉 각 알아 보았다. 그는 도널드 켈로그 박사로 국내 제일의 외과의사다. 그는 걸음을 멈 추고 애비게일을 눈여겨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을 알고 있는 것 아니오?" 그는 어설프게 물었다. "애비게일 프랭클린이에요, 박사님. 제 졸업논문 문제로 친절하게 조언해 주신 적이 계셨죠.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오라, 그랬었지.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제가 취급한 한 환자의 기록을 좀 보고 싶어서요 샤론 클레이본이라고." "클레이본. 아, 있었지. 알고 있어요. 비극이었지, 그렇다면..." 그가 말을 채 마 치 기도 전에 스피커에서 급하게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켈로그 박사님, 응급실로 와주십시오. 켈로그 박사님, 응급실로 급히 와주십시오." "이런. 미안하오." "이해합니다. 박사님." 그녀는 그의 등에다 대고 말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홀을 가로질러 갔다. 그가 엘 리 베이터 안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본 다음에 그녀는 코너에 있는 자료실을 향해 걸어갔 다. 문을 밀고 들어가면서 병원의 시스템에 대해서 생각했다. 환자에 대한 기록은 엄 격히 통제되고 있는 것이다. 열람 카드를 제출해 놓고 계원이 부를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만 한다. 애비게알은 카드에다 샤론의 이름을 적고 신청인 난에 자신의 이름을 적은 뒤 초록색 유니폼을 입은 뚱뚱한 부인에게 내밀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계원은 카드를 들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꽤나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더니, 결 국 은 빈손으로 나왔다. 그리고 애비게일을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 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샤론 클레이본의 파일은 열람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왜죠?" "저는 모르겠는데요. 다만 빨간 딱지가 붙어 있는 것은 건드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 다." 애비게일은 실망한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환자를 2년 전에 치료한 사람이에요. 그것을 볼 수 있는 다른 방 법 은 없나요? 제가 잠깐 안으로 들어가서 보고 나오면 안될까요?" "안됩니다. 아무튼 허가 없이는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허가 신청을 하시면 통보해 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죄송합니다. 저는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니까요." 속이 상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병원측의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잠시 보기만 하겠다는데도 안된다고 거절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따지고 보 면 동업자 간의 협조사항이 아닌가? 애비게일은 와인드험 박사를 찾아가서 사정하면 특별히 허락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 자료실을 나왔다. 그녀는 자신이 홀을 지나갈 때, 문 뒤에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는 두 개의 눈동자를 보지 못했다. 사태는 지난주부터 이미 꼬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마지막 기 회 다. 이 위기를 잘 넘기지 않으면 안된다. 스티브 클레이본은 피 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시내의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닌다. 이 제는 프랭클린이 의혹늘 품고 찾아온 것이다. 감시자는 한숨을 쉬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프랭클린 박사가 2년 전에 샤론을 치료한 것이 불운이다. 그녀는 지금 명백 히 자신의 영역 밖의 일에 참견을 하고 있다. 한 마디로 건방진 것이다.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두면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녀가 위험인물로 일찌감 치 부각된 것은 오히려 다행이랄 수도 있다. 그들이 알아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테 니 까. 그리고 다른 쪽은 오히려 선수를 치게 되었다고 기뻐하겠지. "헬로우, 달링." "헬로우." 세실 클레이본의 목소리는 뻣뻣하고 심드렁하다. 한때는 정부의 목소리를 수화기로 듣 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마구 콩콩 뛰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흥분 대신에 겁 이 덜컥 나는 것이다. 그 일이 있은 것은 6개월쯤 전 컨트리 클럽에서였다. 처음은 매우 순수한 마음에서 시 작됐다. 그녀는 테니스를 친 다음 가까운 바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데릭의 친구가 그 녀와 합석해 왔다. 그는 지위가 있는 남자라면 다 그러하듯, 매력 있고 섹시하게 생 긴 타입이다. 마치 그녀가 15년 전 데릭에게서 느꼈던 그런 감정이 솟아나게 하는 사내 였 던 것이다. 문제는 데릭에게도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일단 자기 손에 넣기만 하면 , 데릭은 쉽사리 그것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리는 버릇이 있다. 그녀도 일단 자신의 손 아 귀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자, 그는 침실보다는 중역실에 더 신경을 썼다. 그의 그런 버 릇을 치유해 보려고 안 써본 수법이 별로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데릭에게 있어서 섹 스는 사업으로 인한 스트레스 해소의 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운이 좋은 날 은 그저 한 10분쯤 걸렸고, 그나마 그가 회의가 있는 날이면 5분도 되지 않아 끝나 버 리곤 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그녀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의 흥미를 끌 어 보려고 야한 나이트가운도 입어 봤고, 포르노 테이프를 빌려다가 돌려 보이기도 했 다. 포르노 영화에는 그도 약간 관심을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하이라이트는 언 제나 그녀의 욕구에 턱도 없이 모자라곤 했다. 그래서 다른 남자들의 친절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그녀는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사실 6개훨 전만 하더라도, 그녀가 선택한 파트너들은 모두가 세실 클 레이본의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해서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정부와 만난 이 후부터는 모든 것이 일시에 변해 버린 느낌이다. 사람들이 그녀를 보는 눈도 어느새 달라져 버렸던 것이다. "이번엔 또 뭐죠?" 그녀는 저쪽편에 있는 사내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당신에게 조그마한 프로젝트를 맡기려고 그래." "당신의 프로젝트에 대해선 이제 관심없어요." "서두르지 마." 사내의 위협적인 말투에 세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겉봉에 당신 남편의 이름이 기재된 멋진 소포 꾸러미를 나는 갖고 있지. 당신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아마 내일 아침이면 그것이 당신 남편 책상 위에 올려놓아 있을 걸." "그 따위 짓은 못할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정을 잃었다. 한때에 저지른 실수가 갈수록 악마의 새끼들을 불려 가고 있다. 그녀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그녀의 인생은 악몽 그것이었다. "내가 못한다고? 천만에." 그녀는 장미빛 커버를 씌운 대형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는 당신에 대해서도 똑같이 분노할 거예요." "그는 나를 필요로 해."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데릭이 세실을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클레이 본 부인의 역할이라면 다른 여자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나에게 원하는 것이 뭐예요?" "그렇게 나오셔야지." 사내는 한동안 침묵을 지킴으로써 세실이 충분히 식은땀을 흘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마침내 말했다. "애덤 구드원과 데이트를 해. 당신이 좋아하는 장소를 정해서 점심도 같이 먹고 말이 야." "왜죠?" "시키는 대로만 해." 전화가 끊어졌다. 세실은 황금빛 전화통 위에다 수화기를 힘껏 내동댕이쳐 버렸다. 그 래도 화는 풀리지 않는다.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4 조너던 와인드험은 너무 바빠서 애비게일를 만날 시간이 없었다. 애비게일은 결국 그 를 만나지 못하고 라이트 스트리트 43번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샤론의 기 록에 대해서 너무 골몰한 나머지, 조 오멀리와 로라 로즈웰과 부딪칠 뻔했다. 그 두 친구는 현관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생각하고 있지?" 조가 물었다. 애비게일은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미안." "뭐 잊어버린 것 없어?" 같은 빌딩 안에 변호사 사무실을 차려 놓고 있는 로라가 물었다. 세 여자는 각자의 일 을 하면서 서로 협조하고 있다. 애비게일는 가끔 로라를 위해서 아주 전문적인 증인 노릇을 해주고 있고, 조는 그녀를 위해서 조사활동을 대신 해주기도 한다. 로라는 조 와 애비게일을 위해서 법률적인 문제를 조언해 준다. "잊어버린 것?" "디너 말이야." 로라가 지적했다. 그녀는 클래식한 금발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눈동자는 하늘빛처럼 푸른 미인이다. "스탠스필드 사건을 마무리한 축하연을 열어야 하지 않겠어?" 애비게일은 절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 이런! 빠지기는 억울한데." "중요한 일이라도 있어?" 조가 물었다. "지난주에 얘기한 샤론 클레이본 말이야. 오늘 그녀의 기록을 보려고 스털링 클리닉 에 갔다가 거절당했어." 애비게일은 재빨리 상세한 얘기를 로라에게 했다. "내가 샤론을 치료한 전임자인데도 그들이 거절할 권리가 있어?" "아마 있을걸. 네가 법원의 영장을 소지하지 않는 한 말이야. 그런 것을 요구하려면, 그곳에 명백한 비행이 있다는 증거를 들이대야만 할 거야." 애비게일은 한숨을 쉬었다. "어렵게 나오시는군." "법이란 게 그런 거지 뭐." 조가 거들었다. "다 해먹어라." 로라가 웃으며 말했다. 그때 건물 관리인인 루 로시니가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그는 평소에 입고 있던 회색 바지와 셔츠 대신에 초록색 폴리에스터 바지와 운동복 상의를 입고 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요." 애비게일이 인사를 건넸다. "핌리코로 내려가시는 중이에요?" 조가 물었다. "팁이 생겨서요. 5층의 베이비스 브레스가 줬어요. 당신들도 원하신다면 제가 대신에 신청해 드리죠." 애비게일과 로라는 고개를 저었으나 조는 2달러를 꺼내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루가 사 라지자 애비게일은 의아한 눈으로 조를 바라보았다. "쥐약이지 뭐. 복권보다는 저 사내와 연관을 맺어 두기 위해서지." "역시 주도면밀하셔." 애비게일은 맞장구를 쳤다. "스털링 클리닉에 대해서는 내가 좀 알아봐 줄까?" 조가 애비게일에게 물었다. "좋지." 애비게일은 그녀가 한번 마음먹은 일은 끝장을 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너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서 빌리도 축하연에 참석할 거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면서 애비게일은 로라에게 물었다. 빌은 로라가 법학부에 있 을 때 결흔했던 내과의사 월리엄 에버리 박사를 가리키는 애칭이다. "아마 안 올걸. 그는 요즘 내 일에는 관심이 없어." "왜 그래?" 조가 물었다. "자기 일에 너무 바빠서겠지 뭐." 로라의 얼굴에 그림자가 스쳤다. 애비게일은 로라의 표정에서 무언가 심각한 것이 있 다는 예감을 가졌다. 그러나 아무 때나 직업의식을 나타내서는 안 된다. 사무실로 돌아온 지 15분쯤 되자 환자가 찾아왔다. 17살 난 소녀로서 부모가 이혼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성적이 우수한 아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학업에 대해서는 흥 미를 완전히 잃어버렸고, 그 대신 온갖 말썽을 피워대고 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자기에게로 돌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다 했다. 신디라는 이 소녀에 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게 하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애비게일은 몇 차례 그녀와 만나는 동안, 조금씩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신디를 보내고 그녀의 파일에 기록을 하고 있을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애비게 일은 시계를 힐끗 보았다. 이 시간에는 약속된 환자가 없다. 그렇다면 새 손님인 것 이 다. 조지 내이퍼어란 환자는5시에 오기로 되어 있으니까 벌써 왔을 리가 없다. 그녀가 대기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 유리창을 통해 커다란 그림자가 어른거리 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자의 손이 다시 문을 노크하려 하고 있다. 그녀는 문을 열 었 다. 그리고 문을 꽉 채울 듯이 서 있는 그 사내가 스티브 클레이본이라는 것을 알았 다. 잠긴 문도 따고 들어왔던 그가 어쩐 일로 노크를 다 할까 의아한 눈으로 그녀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키는 그녀보다 25센티 정도는 더 커보인다. 그의 어깨가 그녀 의 눈높이에 있다. 그의 눈빛이 지난번과는 사뭇 달라져 있다. 뜨거운 적의 대신에 말로는 설명할 수 없 는 묘한 감정이 그의 푸른 눈동자에 담겨 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 러섰다. "들어가도 됩니까?" 그가 물었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달렸어요." 애비게일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그녀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탓할 마음이 없다. 지난번에 너무 깡패처럼 굴었던 자신의 행동 때문이다. "나로선 여기에 오는 것이 쉽지 않았소." 애비게일의 눈썹이 위로 치켜졌다. "당신에게 무례하게 행동한 것을 사과하고 싶소." 그가 오른손에 든 쇼굉백을 쳐들어 보이며 다시 말했다. "당신에게 테이프와 파일을 돌려주러 왔소." "오." 그녀는 그를 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와서 주위를 한번 돌아보았 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싱긋 웃고는 말했다. "나는 잘못을 인정하는 데는 익숙지 못해요. 그렇지만 당신과 샤론은 좋은 관계였다 는 것을 말할 수는 있소. 당신은 샤론을 도와주고 있었소." "당신은 내 말을 곧이듣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세상을 꼭 그런 식으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고 애비게일은 속으로 대꾸했다. 그의 부 정 적인 시각은 그 자신의 인격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사내는 아마도 상당히 외 로을 것이다. 이런 사내와 어떤 이해의 영역을 공유하려는 노력은 시간 낭비일 뿐이 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러 왔잖은가. "앉으시지 그래요." "고맙소." "차 드시겠어요?" "커퍼도 있소?" "인스턴트예요" "블랙으로 주시오." 그녀가 커퍼포트와 잔 두 개를 들고 나왔을 때. 스티브는 소파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긴장 이 풀리지 않은 듯한 표정이다. 애비게일은 그가 앉아 있는 바로 앞의 탁자 위에다 커퍼 잔을 놓아 주었다. 그는 한모금을 마신 다음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서 샤론과 얘기했소?" "그래요." 잠시 동안 그는 말이 없다. "스티브." 그녀는 커피 잔을 손바닥으로 감싸쥐며 말문을 열었다. "샤론의 죽음으로 충격이 크다는 것을 알아요."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당신이 행동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당신은 이제 내 정신 상태를 분석하기 시작했소?" "그냥 얘기를 하고 있을 뿐이에요. 샤론의 죽음은 나에게도 충격을 안겨 주었으니까 요." 애비게일은 조용하게 말했다. "그녀는 나의 첫번째 손님이었어요. 그리고 무척 친했어요." 스티브의 어깨는 처져 있다. "그애의 죽음에는 나도 책임이 있소. 나에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내왔을때 나는 다 른 일로 나가 있었소. 내가 돌아왔을 때에는 그애는 이미 죽은 후였어요."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애는 내 동생이오!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가족이란 말이오." 애비게일은 샤론의 전화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나는 그녀의 전화 에 대해서 적절한 조처를 취했는가? 최선을 다했는가? 아무리 자신을 변호하려고 해도 일 말의 죄책감은 남아 있다. "샤론이 구원의 손길을 찾은 사람은 당신 혼자만은 아니었어요. 그녀가 죽기 직전에 나에게 전화를 했다는 사실을 데릭이 얘기하던가요?" 스티브의 표정이 하얗게 굳어졌다. "아니오! 그게 언제였소?" "샤른은 죽기 일주일 전에 나에게 전화를 했어요 매우 흥분한 상태였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애비게일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의 강한 손가락이 자신 의 살을 파고들자. 애비게일은 기겁을 하며 움츠러들었다. "미안하오." 그가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힘없이 말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주먹으로 변하여 부들부들 떨고 있다. "내가 아무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샤론은 환각 상태에 빠져 있었어요. 무슨 일이냐고. 그곳이 어디냐고 내가 아무리 사정해도 그녀는 말해 주지 않고 전화 를 끊어 버렀어요." 스티브는 뭐라고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샤론의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불통이었어요. 그래서 데릭에게 전화를 걸었죠. 자동 응 답기가 대신하더군요. 오후에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죠. 그의 말이 샤론은 병원에서 잘 보호 받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며칠 뒤, 신문에서 그녀의 사망기사 를 봤어요. 나는..." 그녀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스티브는 주먹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치며 소리쳤다. "나는 데릭에게 몇 번이나 다그쳐 물었어! 그런데 그는 얘기를 안 해 줬어. 샤론이 병 원에서 죽었다고만 했지, 정신병동에서 말이오. 그러니까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던 거요. 그런 그애가 어떻게 전화를 할 수 있었겠소? 더군다나 어떻게 자살을 할 수 있 었겠느냔 말이오?" "스티브,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원인을 알아보려고 스털링 클리닉에 갔었어요. 샤론의 병상기록을 살펴보려고 했더니 열람을 거절하더군요." "이유가 뭡니까? 그들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모르죠. 그건 간호사가 샤론의 병실을 잠그는 걸 잊었다 든가 아니면 샤론을 두어서 는 안되는 곳에 두었는지도 모르죠. 그들 주장으로는 샤론에 대해서 세부적인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했어요." "그건 이쪽의 조사를 방해하려는 의도요." "아니면 관심을 딴 데로 돌리려는 의도인지도 모르죠." 스티브는 소파 밑으로 깊숙히 가라앉았다. 애비게일은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이제 까 지와는 전혀 다른 어떤 인상을 받았다. 스티브 클레이본이라는 인간의 다른 일면을 발 견한 것 같았다.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그의 표정은 좌절과 분노 그리고 외로움 같은 것의 혼합이다. 그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그의 깊은 푸른 눈동자와 황폐한 느낌을 주는 얼굴 표정에서 그녀는 동정심을 느꼈다. 그의 이 마 에 새겨진 흉터를 바라보던 그녀는 하마터면 손가락으로 그곳을 만질 뻔했다. 샤론의 무덤 건너 편에서 그 흉터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그가 영위하고 있는 생활이 얼마 나 거칠고 격렬한 것일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마음은 사뭇 동정적인 것 으로 기울어져서 그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거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마의 그 흉터는 그가 당한 고통의 상징인 지도 모른다. "몇 가지 물어 봐도 좋겠습니까? 샤론에 관해서 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 나지막해서 애비게일은 청각을 바짝 곤두세워야 했다. "내가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대답하겠어요." 그녀는 그의 강력한 손이 자신의 무릎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 "이 테이프들 말입니다. 샤론의 초기 증세에서 만든 겁니까?" "네." "꽤나 심했던 것 같은데요." "그랬어요. 마일즈와의 이혼이 그녀에게 큰 충격을 줬던 것 같아요." "그후로는 좀 어땠습니까?" "많이 좋아졌어요. 자신감도 되찾고요." "당신이 샤론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줬나요?" "내가 해결해 준 게 아니었어요. 그녀 스스로가 해결했죠." 애비게일은 커퍼를 한모금 마신 뒤 생각에 잠겼다. "샤론이 죽지 않았다면 지금 그와 이런 얘기를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샤 론 은 죽었다. 샤론은 그때까지도 사랑할 대상을 찾고 있었어요. 그녀에겐 그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어요 나는 그녀에게 사랑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 려 고 애썼죠. 그것은 자연스럽게 찾아오고, 저절로 무르익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녀 가 내 말을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는 모르죠." "알 만하오. 그렇지만 샤론은 어쨌든 절망에서 일어났던 것만은 확실하오." "몰론이죠." "어쩌면 나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나는 샤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 는지를 알고 싶소. 샤론이 정말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는지. 그래서 자신을 스스로 죽일 만큼 심했는지 말이오." 애비게일은 그의 목소리에서 고통에 가까운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 르게 그의 커다란 손을 자신의 조그마한 손으로 덮으며 위로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 다. 그는 홈칫 놀랐으나 손을 빼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그런 상태 로 앉아 있었다. 스티브는 자신이 손을 뒤집어서 그녀의 손과 깍지끼고 싶 다는 충동을 느끼고 있는 것에 스스로 놀랐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는 않았다. 그녀가 마음을 열어 놓고 대화를 해주는 것에 감동하여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 감추고 있는 고통을 그녀에 게 쏟아내고 싶다는 충동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그것도 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그는 자신의 고통을 가슴속에만 쌓아올리며 살아왔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그것을 쏟아낼 이 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 그는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조그마한 금 펜던트를 바 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정말 보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의 목의 옴폭하게 팬 부분과 부드러운 크림빛 피부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눈길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약간 벌어져 있으며, 아랫입술 이 윗입술보다 약간 더 도톰하다. 매혹적인 입술이다. 그는 얼른 그녀의 입술로부터 눈 길 을 거두었으나 그녀의 얼굴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길은 약간 아래로 향하고 있고 눈썹이 길고 부드럽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손을 덮고 있는 그녀의 손이 너무 따스하고 부드럽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지? 스티브는 어쩔 수 없이 애비게일 프랭클린이라는 여자가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가? 이 여자에 대 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거의 없다. 이 여자가 청색 신호를 보 낸 다고 해서 믿을 수 있다고 단정한다는 깃은 어리석다. "스티브, 당신의 느낌을 말해 줄 수 있으세요?" 그녀는 내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걸까? 그는 그녀의 손 밑에 깔려 있는 자신의 손을 빼냈다. 잠시 동안 그녀의 손이 그의 무릎 위에 놓였다. 그녀가 얼른 자신의 손을 거 두어들였다. "나는 자신의 느낌에 대해 말하는 데는 별로 익숙하지 못하오." "가끔 그런 분도 있 어요." 애비게일은 마음의 평정을 되찾으려고 애쓰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와 이렇게 같이 앉 아 있으니까 묘한 설렘이 인다. "그렇지만 당신의 느낌이 나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샤론이 병원에 입원해 있 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깜짝 놀랐어요. 그러나 그녀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샤론이 자살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라?" "나는 샤론을 2년 동안 만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확신할 수 없죠." "나는 당신이 내게 어떤 해답을 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 했소."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녀는 그와 함께 사무실에서 벌써 한 시간이나 넘게 있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제 곧 환자를 맞아야 해요. 그렇지만 당신과는 또 얘기할 기회가 있겠죠." "아마 그렇겠죠." 그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커피 고마웠소."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가서 사라졌다. 스티브는 건물 밖으로 걸어나와 차를 세워 둔 주 차장 쪽으로 향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방향을 돌려 라이트 스트리트를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샤론에게서 받은 몇 통의 편지에서 그는 그녀가 가끔 들 르는 클제이턴 화원이라는 상점명을 본 기억이 있다. 샤론은 그 화원에서 꽃 을 자주 사곤 했던 모양인데, 화원의 주인인 샘 시걸이라는 노인에 대해서 상당히 호 감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샤론의 장례식에도 그 노인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틀립 과 수선화로 만든 거대한 화환을 보내왔었다. 그 화원은 이 거리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꼭 무슨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화환에 대한 인사도 할 겸 찾아 나섰다. 라이트 스트리트의 모퉁이에 있는 법원 앞에서 스티브는 방향을 틀었다. 그가 신고 있 는 구두 뒤축이 인도의 시멘트 바닥에 부딪쳐서 찌걱찌걱 소리를 내고 있다. 버스 터 미널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며, 그는 그제서야 줄곧 자신이 애비게일 프 랭클린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샤론의 무덤 앞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그때는 단지 샤론의 친구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서 그녀가 샤론을 담 당했던 정신과 의사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녀에 대해서 강한 증오감을 느꼈던 것이다. 아마 그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던 것 같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그의 머릿속에는 샤론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프랭클린 박사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있는 것이다 . 그는 다시 모퉁이를 돌아 하워드 스트리트로 걸어 올라갔다. 거리의 낡은 건물들이 눈 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러한 풍경들은 곧 눈앞에서 지워지고 다시 애비게일 프랭클린 의 긴 속눈썹과 그 아래에 함초롬히 빛나고 있는 초록색 눈동자가 아물거린다. 그리 고 자신의 손등을 누르고 있던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과 하얀 손바닥의 열기가 새삼 느 껴졌다. '스티브, 정신차려. 그 여자와는 어디까지나 직업적인 입장에서만 상대해야 해.' 그는 자신에게 충고했다. 너는 뜨겁고도 달콤한 여인이면서도 너에게 아무런 문제도 안겨 주지 않는 여자를 원하고 있어. 복잡한 여자, 골치 아픈 여자는 안 돼. 그녀에 대한 생각을 의도적으로 뿌리치면서 그는 클레이턴 스트리트에 도달했다. 여기서 렉 싱 턴 시장까지는 두 블록의 거리다. 문제의 그 화원은 다음 주차장 부근에 있다. 화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달콤한 꽃향기가 코끝에 감겨왔다. "어서 오십시오." 등이 약간 굽은 대머리의 사내가 그를 맞았다. "샘 시걸이라는 분이십니까?" "바로 맞혔소." "스티브 클레이본이라고 합니다. 샤론의 오빠죠." 노인의 주름살투성이인 얼굴에 슬픔이 떠올랐다. "그녀는 정말 상냥한 분이었죠. 여기엔 자주 들렀어요. 이 늙은 것의 얘기를 싫다하 지 않고 들어주었죠. 내가 보낸 화환은 가족들 이 좋아했습니까?" "그럼요. 아주 아름다운 화환이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죠." "샤론도 아주 기뻐했을 겁니다. 샤론은 이곳에 와서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고민을 얘 기 하기도 했습니까?" 노인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나에게 얘기한 적은 없어요. 그렇지만 마지막 얼마간은 상당 히 흥분해 있었던 것 같아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요." 스티브의 표정이 긴장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확실히는 잘 모르겠소. 무슨 일엔가 자원을 했다고 하던... " "어디에서 일한다고 했습니까?" "어디라고 하더라...? 늙어서 기억이 통..." 그들은 얼마 동안 더 얘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스티브는 그 이상의 아무 정보도 얻 어낼 수 없었다. 시걸 노인은 그에게 억지로 카테이션 꽃다발을 선물하겠다고 우겼다 . 그런데 이것을 도대체 어디다 써먹는단 말인가? 스티브가 떠난 뒤 애비게일은 혼자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와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어쨌든 기분이 묘하다. 그녀는 자신이 이제까지 만났던 다른 남성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모두가 안정감이 있고 ,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타입들이었다. 그런데 스티브는 그렇지가 못했다. 그는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러면서도 그녀의 마음을 묘하게 뒤흔들어 놓는 데가 있 다. 그와 대화를 나누노라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거꾸로 처박히는 기분이 든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응접실 문이 열리며 조지 내이피어가 들어왔다. 그녀는 일어나서 그를 맞았다. 그의 아내가 이틀 전에 전화로 그를 진찰해 줄 것을 부탁해 왔다. "나는 환자에게 질문서를 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내이피어는 그녀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그는 청하지도 않았 는 데 마음대로 그녀의 사무실로 들어가서 의자에 털써 앉더니, 구두 사업에 대해서 열 심 히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나는 가지고 있는 유가증권을 모조리 처분하고 퇴직금을 보태서 구두 체인점을 개설 할 생각이오. 아주 다이나믹한 발상이지. 틀림없이 대성공을 거둘 거요. 밴을 이용하 여 제화 업체에서 직접 구두를 실어내겠어. 그래서 소비자에게 싼 값으로 공급하는 거 야." 전형적인 조울증 증세라고 애비게일은 생각했다. 교과서적인 케이스다. "내이피어 씨." 그녀가 제지하려 했으나 그는 계속 풀어냈다. "구두가 필요없는 사람은 없지. 앉은뱅이가 아니라면 말야.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바 빠서 구두를 바꿔 신을 틈도 없거든. 당신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발에 맞지도 않는 구두를 신고 다니는지 알기나 해? 그들의 발은 또 얼마나 상하고?" "그렇지만 퇴직금까지 털어넣는다는 것은 좀 재고해 봐야 할 일이 아닐까요?" 애비게일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펄쩍 뛰며 말했다. "무슨 소리! 당신은 도무지 아는 것이 없구먼. 나는 마누라에게 떠밀려서 여기에 왔 소. 당신이 여잔 줄 알았으면 아예 오지도 않았어." 그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이컬러지 투데이'를 집어 바닥에 팽개쳤다. "나는 당신을 도와주려는 거예요. 그렇지만 당신이 싫다면. 다른 남자 의사에게 당신 을 보내 드릴 수도 있어요." 그는 덩치가 크고 이마가 벗겨진 사내였다. 이빨도 들쑥 날쑥하여 치과의사가 보면 치 열교정을 하려고 들 정도다. 그가 일어나서 험상궂은 얼굴을 했을 때, 그녀는 위축되 지 않으려고 자세를 꼿꼿하게 치켜세웠다. "만약에 당신이 내 아이디어를 도용해서 돈을 벌었다는 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줄 거요." 그는 이렇게 위협하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애비게일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소파에 푹 파묻혔다. 저 정도의 증세라면 정신 병동에 빨리 입원시키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애비게일은 그의 아내가 부탁한 대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소리가 두어 차례 들리더니 마침내 상대방이 나왔다. "내이퍼어 부인?" "누구요?" 잔뜩 경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독터 프랭클린이에요." 그러자 부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다정스러워졌다. "오, 독터 프랭클린. 조지가 오후에 분명히 들렀겠죠?" "네. 방금 나가셨어요. 제가 판단하기로는 증세가 좀 심각합니다. 심한 조울증 증세 로 보이는군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자신의 생각에 쉽게 흥분하고 과장하는 경향이 있죠.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에체는 심 하게 화를 내고 반발하는 증상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요. 내가 알고 싶은 건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입원시키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부인은 잔기침을 한 뒤 말했다. "우리들의 건강보험은 최근에 스털링 클리닉에 가입했어요. 그들도 정신병을 취급하 겠 죠?" 애비게일은 잠시 망설였다. 직업상의 윤리와 자신의 편견은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스털링 클리닉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좋지 않다. 다만 조너던 와인드험 박사에 대한 존경심과 또 그녀가 보낸 다른 환자들은 대부분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는 것 때 문 에 그녀는 그 병원을 나쁘게 말할 수만은 없다. "물론이에요. 그런데 담당 의사는 남자가 좋겠어요." 내이피어 부인은 충고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쩐지 애비게일은 그녀가 자 신의 충고대로 따르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애덤 구드윈은 자신을 카멜레온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아나폴리스의 요트 그 룹에 있을 때나, 볼티모어의 어두 컴컴한 싸구려 술집에 있을 때나 똑같이 마음이 편 안하다. 그의 복장 또한 어느 장소에서나 잘 어울리는 것을 선택해서 입을 줄 안다. 그는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귀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화제에도 밑천이 달리지 않 을 만한 얘깃거리를 갖고 있다. 그가 샤론 클레이본의 집에 전화를 빌리러 간 날 저녁에도, 그는 자신을 이웃에 새로 이사온 사람이라고 소개하고는 마치 친한 친구처럼 그녀와 한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기까지는 한 달여 동안 뜸을 들였던 것이다. 그것은 보험을 팔아먹기 위해서 그가 사용하는 수법이다. 우선 상대방과 친해진다. 그 리고 상대방의 신임을 얻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그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이 무엇 을 해줄 수 있는지를 설득하는 것이다. 간혹 그 과정은 바람결에 흐르는 향기처럼 미묘 한 차이가 있다. 드러누워서 다만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되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을 선 택 하느냐는 것도 그의 경우는 게임이다. 에즈라 혼비의 경우도 그랬다. 나자로 구호 자 선단체의 일이 어떤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인가를 일단 알아낸 후에는 그 늙은이를 구 워 삶는 데는 그리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았다. 오늘 저녁 애덤은 마냥 기분이 좋다. 무한한 가능성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여우 같 은 여자를 낚아서 재미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즐기는 데에 쓰지 못한다면 돈이 무슨 소 용 이 있겠는가? "애덤." 크레이지 에이트의 바텐더가 그를 오랜 친구처럼 반겼다. "그래. 어떻게 지내나? 나에겐 밀러 라이트를 주게." 거품이 넘치는 잔을 손에 들고 그는 안쪽에 있는 기다란 룸으로 들어갔다. 패거리들 이 그곳에 모여서 소동을 벌이고 있었다. 두어 명이 그를 욕지거리로 맞았다. 다른 패거 리는 손짓으로, 혹은 눈짓으로 아는 체했다. "어이, 애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그럭저럭." 그는 의자를 빼내어 앉으며 대꾸했다. "어떤 친구가 자넬 찾던데 그래?" "뭐라고?" 애덤은 입에 묻은 거품을 손등으로 훔치며 상대방 사내를 쳐다보았다. "키가 큰 친구였어. 머리 색깔은 바래고, 건장한 녀석인데 이마에 흉터가 있었어." 보험업자는 자신의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또 자네가 여기에 몇 번 데려왔던 그 병아리에 대해서도 묻더군. 그 샤론인가 뭔가 하는 계집 말이야." 사내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애덤은 조용히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자의 이름이 뭐라던가?" "물어 보지 않았네." 그렇지만 그가 스티브 클레이본이라는 것쯤은 애덤도 알 수 있다. 샤론의 오빠, 회사 의 사장이라는 상냥하고 멋진 오빠가 아니라 다른 녀석, 주먹부터 날린 다음에 묻는 다 는 고약한 녀석이다. 그러니까 스티브 클레이본이라는 녀석이 나를 찾고 있다, 이거지. 지금이라도 그가 저 문을 박차고 들어올 것만 같다. 애덤은 두려운 눈으로 현관문 쪽을 살폈다. 그리고는 뒷문을 돌아보았다. 전에도 그 뒷문으로 튄 적이 한 번 있다. 그때는 샤론 때문이었 다. 애덤은 맥주를 벌컥벌컥 삼키고는 사태를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스티브는 단지 투망질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무엇을 알 것인가? 그의 여동생에게 어떤 일 이 있었는지 그가 알 리가 없다. 절대로. 그에게 그런 얘기를 해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 가 ? 사내는 뒤를 돌아보았다. 라이트 스트리트 43번지의 곰팡내 나는 지하실에 다른 사람 이 있을 리 없다. 루 로시니는 베이비스 브레스라는 이름으로 두둑한 팁을 주어 내보 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 사내는 특수열쇠로 기계 조종실의 문을 열었다. 실내는 캄캄하다. 그는 플래시 라이트를 켜고 기계를 살펴보았다. 이건 구식 기계다. 요즈음 새로 나온 기계들은 조작하기가 거의 어렵다. 그렇지만 이건 훨씬 수월하게 해 낼 수 있겠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회로를 다시 감기 시작했다. 원격 조종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서 다. 한 시간쯤 뒤. 작업을 끝낸 사내는 회로를 원래 위치에다 고정시켰다. 이만하면 완벽하다. 아무도 이곳에서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이젠 가서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애비게일은 사무실에서 환자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전 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왜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는 거야?" 조 오멀리였다. "웬일이야?" 조지 내이피어 때문에 한바탕 곤경을 치른 뒤라, 친구의 목소리가 유난히 반갑게 느 껴 진다. "집으로 전화했더니 안 받길래 사무실로 한 거지 뭐. 오늘 오후 위생국엘 들렀어. 고 객의 부탁도 있고. 또 스털링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보려고." "빠르군." "그럼. 내 성질을 알잖아. 그런데 재미있는 것을 발견해냈어." "스털링이 법규 위반으로 위생국에 소환이라도 당했어?" "그런 게 아니야. 위생국의 복리 후생비 예산이 병원의 정신병동에 많이 투입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그런데 이쪽 지역에선 스털링 클리닉에 그 예산이 가장 많이 쓰 여졌다는 사실을 알아냈어. 다른 병원과는 비교가 안된다고." "그만큼 가난한 정신병 환자들을 많이 수용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스털링 클리닉의 경우 사망율은 오히려 가장 높아. 그 이유가 뭐지?" 애비게일은 등골이 써늘해져 옴을 느꼈다. 그것은 전혀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스털 링 의 정신병동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곳의 환자들이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아니면 아예 가망이 없는 환자들이 많이 몰린다는 얘기거나."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면 스털링이 정부의 예산을 빼내어 다른 목적에 쓰고 있다는 얘기도 되겠지." "조 오멀리, 넌 너무 비뚤어진 생각을 하고 있어. 설마 그런 명성있는 병원이 정부의 돈으로 장난을 치기야 하겠어?" "넌 '볼티모어 선'을 읽어 보지 않았군. 그보다 더 쟁쟁한 단체들도 정부의 예산을 뒷 구멍으로 빼내어 엉뚱한 짓들을 하고 있단 말이야. 비뚤어진 쪽은 내가 아니라 그들 이 야." "그밖에 또 뭐가 있어?" "있지. 사망한 대부분의 정신질환자는 외래환자들이었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애비게일은 입을 딱 벌렸다. "그래. 하며간 고마워. 너한테 빛을 졌군." "나중에 갚을 기회를 주지. 맛이 살짝 가버린 사내가 하나 있거든 불원간 네게 보내 줄게. 기대하시라." 애비게일은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곧 어두운 그림자로 지 워 지고 말았다. 스털링에서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 지만 그녀로서는 그것을 알아낼 길이 없다. 애비게일이 수화기를 내려놓은 지 3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 벨이 울렸다. 수화 기 를 들자 상대방은 아무 말도 없다.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여보세요?" 그녀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누구세요?" 상대방은 말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마 잘못 걸려온 전화겠지. 그러나 꺼림칙한 기분은 그대로 남았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녀는 사무실을 나와서 문을 잠갔다. 다른 사무실들도 모두 불이 꺼져 있다. 지금 이 시각엔 건물 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모양이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는 그녀의 구 두 뒤축 소리만이 팅빈 공간을 울렸다. 그녀는 자신이 텅빈 건물 안에 혼자 있다는 사실 이 어쩐지 두렵게 느쪄졌다.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복도 끝에 있는 비상구의 표시등도 꺼져 있다. 누군가가 숨어 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아 애비게일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조심스럽게 뒤를 돌 아봤지만 아무도 없다. 누가 있을 리가 없다. 그녀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구두 소리가 따각따각 불길하게 울려퍼졌다. 북쪽 비상구 문이 벌컥 열리며 조지 내이피어가 뛰어나오는 상상을 했다 . 그가 자신에게 덤벼들어 구두짝으로 마구 때릴 것만 같다. 이건 웃기는 생각이야. 그 녀는 자신을 비웃었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필요 이상으로 힘껏 눌렀다. 아래쪽에서 부웅! 하는 기계 움직 이 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좀 가라앉는다. 그때, 건너편에 있는 비상문이 열리며 커다란 사내의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주위가 어 두컴컴하여 사내의 얼굴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내 가 자신을 향해서 달려오고 있다는 것뿐이다. 사내가 거의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녀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었 다. 그러나 그녀의 발은 허공을 딛고 아래로 떨어졌다. 엘리베이터는 거기에 없었던 것이 다. "기다려요. 안돼!" 사내가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몸의 균형을 잃고 말았다. 손을 뻗쳐서 입구의 가장자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대로 미끄러져서 엘리베이터의 통로로 떨어지고 말았다. 5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딱딱하고 차가운 철판 위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충격에 그녀는 자신의 머리가 거대한 종소리의 울림처럼 띵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애비게일!" 위쪽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몽롱한 눈길로 위쪽을 바 라 보았다. 그리고는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썼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스티브와, 엘리베이터 문과,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어째서 지하실 밑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았는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머 리가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옆구리도 결린다. 그녀는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아마도 엘리베이터의 꼭대기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캄캄해서 도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다. "애비게일! 내 말이 들립니까?" 스티브가 위쪽에서 내려다보며 소리치고 있다. 뚫린 구멍으로 그의 머리만 시커멓게 보인다. 그가 마치 고양이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내려왔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으며 일으켰다. "어디 다친 데는 없소?" "머리가 아파요."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다른 생각이 그 통증을 잠시 밀어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요?" 스티브는 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놈을 놓쳐 버렸소. 계단 아래에서 당신을 살피고 있던 녀석 말이오. 당신을 만나려 고 오다가 우연히 놈을 발견했지. 나는 그자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거든, 갑 자기 이상한 예감이 들어 뛰어올라 온 거요." "그자가 누구죠?" "모르겠소.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우선 여기에서 올라갑시다." 그가 그녀의 겨드랑이를 껴안고 일으켜세우려 하자 그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옆구리가 결려요." "그럼, 천천히 합시다.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 것은 위험해요. 우리는 지금 엘리베이 터 천장 위에 있소. 그나마 다행이지. 까딱했다간 그대로 죽을 뻔했소." "어지러워요." 그는 그녀를 안다시피 하며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애비게일은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 고 머리와 옆구리의 통증을 참았다. 정말 어물대다가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급강하하 기 라도 하는 날엔 큰일날 판이다.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 을 그녀는 느졌다. 손가락이 뒤통수 부근에 닿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혹이 하나 생겼을 뿐이군. 당신은 명이 길제 생겼소. 이만 하길 정말 다행이지." 남은 아파 죽겠는데 그는 천연덕스럽게 농담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바로 아래에 엘 리 베이터가 와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정말 아찔한 기분이다. "여길 어떻게 올라가죠?" 그녀는 옆구리를 만지며 걱정스레 물었다. "내가 밑에서 받쳐 줄 테니 올라가 봐요." 그가 그녀의 히프 아래로 손을 넣으며 말했다. 그녀는 기겁을 하며 그의 손을 뿌리쳤 다. "어디다 손을 대요." "쳇, 죽고 사는 판에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있소?" "그래도 싫단 말이에요!" "칫, 그렇담 내 어깨를 딛고 올라서 봐요." 그가 등을 돌려대며 앉았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구두를 벗고 그의 어깨를 밟 고 올라섰다. 그러나 곧 아래로 미끄러져 내리고 말았다. 두 무릎에 도통 힘이 없다. 극 도의 두려움과 긴장이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탓이다. 그가 그녀를 안고 잠시 서 있 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처럼 느껴졌던 그가 이제는 자신을 보호해 주는 정의의 기사처럼 생각되는 것은 무슨 조화 일까? "나는 헝겊으로 만든 인형 같아요."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자꾸만 무릎이 떨려오고, 몸이 아래로 처졌다. "당신은 강한 여자야. 그리고 박사잖소." 스티브는 용기를 가지라는 듯이 그녀를 한번 힘껏 안아 주고는 말했다. "자, 준비됐소?" "해보겠어요." 그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히프를 두 팔로 안아올렸다. 그녀는 자신의 아랫배에 그의 숨결이 와닿는 것을 느꼈다. 그가 그녀를 위쪽 네모진 구멍으로 밀어올렸다. 그녀는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팬티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여 유가 없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쳐서 구멍의 가장자리를 잡았다. 스티브는 강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힘을 주어 그녀의 장딴지를 밀어올렸다. 그녀의 몸 이 구멍 위로 불쑥 올라갔다. 그녀는 몸을 굴려 복도의 바닥에 안착했다. "오케이?" 아래에서 그가 소리쳤다. "됐어요." "나도 곧 올라가겠소." "잠깐 기다려요. 내 지갑을 잃어버리지 말아요." 어두운 공간 속에서 그가 낄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죽다 살아난 여자가 그래도 지갑은 안 잊는군. 그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줬더 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 아냐." "이왕이면 보따리도 찾아 달라는 얘기죠, 뭐." 그녀가 대꾸 했다. 잠시 후에 그가 올라왔다. 마치 간단한 체조를 한 것처럼 그는 숨 도 헐떡거리지 않는다. 그는 그녀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멀쩡해요. 옆구리가 좀 결리긴 하지만 걸을 수는 있어요." 두 사람은 그녀의 사무실로 갔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허리를 감고 부축하는 것을 뿌 리치지 않았다. 그녀의 사무실에 도착하자 그는 그녀의 지갑에서 열쇠 뭉치를 꺼냈다. 주인이 보는 앞 에서 그녀를 한 손으로 끌어안고 쇠꼬챙이로 문을 연다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매너 같 지는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끝에 있는 놋쇠 열쇠예요." 그녀가 가르쳐 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무 심한 충격을 받았음인지 그녀 의 몸도 사뭇 떨리고 있다. 그녀를 소파에 앉히고 난 다음 스티브는 문을 잠갔다. "구급 약품이 있소?" "화장실에 있어요." 스티브는 화장실에서 구급 상자를 찾아왔다. 아마도 그는 냉장고까지 찾아낸 모양이 다. 얼음팩을 그녀의 뒤통수에다 대어 주고, 그는 타월로 그녀의 손을 닦기 시작했다 . 애비게일은 그제서야 자신의 손등이 긁혀서 피가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시커먼 기름도 온몸에 묻어 있다. 그녀는 다른 한 손으로 얼룩을 만지려고 했다. "그건 염려 말아요, 애비." "누구도 나를 그렇게 부르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예쁜 이름이오. 당신에게 잘 어울리기도 하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내 의견을 듣고 싶소? 그렇다면 상담료를 내셔야지." "나에게서 정보비를 받아내겠다는 말인가요?" "왜 못 받지?" 이 사내는 슬슬 농담을 하면서 따가운 소독액을 내 손의 상처에다 바르고 있다. 나의 신경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함이다. 그러고 보면 꽤나 세심한 데가 있는 사내야. 해비게일은 눈을 감고 사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는 손에 난 상처를 소독한 다음 옥도정기를 정성스레 발라 주었다. 상처가 쓰려왔다. "다른 곳은 아픈 데가 없소?" "잘 모르겠어요. 내일 아침에 일어나 봐야 알게 되겠죠." 다리와 어깨 부근을 체크해 본 다음, 그는 그녀의 얼굴에 묻은 검은 기름을 타월로 닦 아 주었다. 그녀는 속눈썹을 쳐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스티브 클레이본 같은 사내가 이런 형동을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묘한 기분을 안겨 준다. 차라리 비웃거나 무 시하는 행동을 취하는 편이 그에겐 더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그녀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것을 안 그는 잔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이젠 좀 보기가 낫군. 창백한 얼굴은 당신에게 허울리지 않아." "고마워요. 다음번에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질 땐 화장이 지워지지 않도록 유념할게요. " 그는 쿡쿡 웃었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이제 기분도 좀 나아졌나 보군." 애비게일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가 미소를 지어 주길 기대했는데, 그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졌다. "왜 그래요?" "쉿!" 그는 조용히 일어나서 문으로 다가가더니 갑자기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복도에는 아 무도 없다. "문을 잠그고 기다리고 있어요. 금방 돌아올 테니까." 스티브는 3분쯤 뒤에 돌아왔다. 그녀의 의아한 눈초리에 그는 머리를 조용히 저어 보 였다. "분명히 인기척을 들은 것 같았는데, 나도 이젠 둔해졌나 보군." "이 건물이 너무 낡은 탓이에요. 가끔 이상하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거든요." "당신 말이 옳은 것 같군." 그의 손에는 약간 망가진 카네이션 꽃다발이 들려 있다. "웬 꽃이에요?" 그는 꽃을 얻게 된 경위를 간단히 얘기했다. "아까는 너무 흥분해서 꽃을 팽개쳤던 모양이오. 계단 입구에 떨어져 있더군." "부엌에 화병이 있어요." 그는 화병을 찾아서 카네이션을 꽃아 놓고는 그녀에게 다시 돌아왔다. "자. 이젠 당신 사무실 미화작업도 끝냈으니 당신 머리를 한번 살펴봐야지. 충격을 받 아서 뇌진탕 증세가 있는지도 모르니까." "괜찮은 것 같은데요." "잠깐이면 돼요." 그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서 앉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턱을 손으로 들어올리고 눈동 자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애비게일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때요?" "초록빛은 변함없군. 눈동자의 크기도 그대로고, 이상이 없는 것 같소." "오, 내 기분도 그래요." 그녀는 그가 너무 가까이서 자신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 "눈을 깜박여 봐요." 그녀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좋아요. 부딪칠 때 정신을 잃지는 않았소?" "그런 것 같아요." "지금 졸리지는 않소?" "아뇨." 다만 좀 헛갈리기는 하지만, 그건 충격 때문이 아니라 바로 당신 때문이야. 그녀는 속 으로 말했다. 그는 아직도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다. "뇌진탕 증세에 대해서 어떻게 그처럼 잘 아세요?" "내가 하고 있는 일에는 여러 방면의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흠." 그녀는 더이상 이런 황홀경 속에 빠져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또 변을 당하기 전에 엘리베이터 고장을 신고해야겠어요." "옳은 말이오." 그러나 전화를 해보니, 이미 루 로시니가 수리를 하고 있다. "빠르군. 누가 신고했을까?" "입주자 중의 한 사람이겠죠, 뭐." "당신을 집에 데려다 주겠소."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그런 몸으로 운전을 할 수는 없잖소?" "걸어가면 돼요. 아파트까지는 두어 블록밖에 안되니까." "내 차가 길 건너편에 있소. 내가 태워다 드리지." 밖으로 나오자. 사방은 이미 캄캄했다. 애비게일은 갑자기 등골이 으스스해지며 무서 운 생각이 들었다. "당신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할까 봐요." "그렇지. 고집도 부릴 때 부려야지." 그는 그녀를 부축하고 자신의 코르시카를 세워 둔 곳으로 길을 가로질러 갔다. 애비 게 일 프랭클린은 자신이 얼마만큼 진실에 가까이 다가서 있는지 모르고 있다. 라이트 스 트리트 건너편 골목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시커먼 그림자는 그녀와 스티브가 건 물 에서 나오자 재빨리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일은 실패로 끝난 것이다. 어디가 잘못되었을까? 그는 마땅히 앰블런스가 요란한 소 리 를 내며 라이트 스트리트 43번지 건물 앞에 들이닥쳐야 한다고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 었다. 그러나 막상 들이닥친 것은 엘리베이터 수리 센터에서 보낸 트럭이었다. 최소 한 그들은 어디가 고장인지 찾아낼 수 없어야만 한다. 그는 그곳에서 나올 때 과적 순간 제어기를 틀림 없이 제거했던 것이다. 사내는 저주 의 말을 내뱉었다. 애비게일 프랭클린이 멀쩡하게 제 발로 건물 바깥으로 걸어나온 것 이다. 다리 하나도 부러지지 않은 채, 그리고 그녀의 기사 양반은 아직도 그녀의 옆 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이거야 원, 이래서야 어찌해 볼 수가 있나. 놈만 아니었다면 모 든 일은 차질없이 끝났을 것이다. 저녁의 제법 싸늘한 기온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손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바지에다 문질러 닦았다. 제기랄,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몇 분 뒤에 스티브와 애비게일은 아파트 건물 아래에 도착했다. 그녀가 아파트 입구 를 향해서 걸음을 옳겨 놓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 다. 스티브도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앞으로 밀리사 웩슬러가 달려왔다. "프랭클린 박사님." "밀리사. 웬일이니?" 그러자 밀리사의 어머니인 웩슬러 부인이 그녀 앞으로 다가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프랭클린 박사님! 얼굴 빛이 왜 그래요?" "어디에서 떨어졌어요. 그래서 제가 모시고 왔죠." 스티브가 설명했다. "괜찮아요?" 밀리사와 웩슬러 부인이 동시에 애비게일에게 물었다. "약간 놀랐을 뿐이에요." 밀리사는 미안한 듯이 말했다. "이 로켓을 조립하느라고 아직 전화를 못했어요. 이제 다시 그 퍼즐 박스를 풀 거예 요. 실마리는 찾았지만, 굉장히 어려워요." 애비게일은 미소를 지으며 소녀에게 말했다. "넌 꼭 풀 수 있을 거야. 난 너를 믿어." 엘리베이터가 내려오자 그들은 함께 올라탔다. 스티브는 그녀의 팔을 잡아 주었다. 엘 리베이터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자. 그녀는 목이 옥죄이는 기분을 느꼈다. 이것이 다 시 떨어지면 어떡하나? 그렇지만 그럴 리가 없어. "괜찮아. 안심해요." 스티브가 조용한 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밀리사가 스티브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애비게일은 최근에 애인을 차버렸어요. 아저씨는 새 애인인가요?" "밀리사!" 웩슬러 부인이 기겁을 하며 딸을 나무랐다. 스티브는 애비게일의 옆 얼굴을 힐끗 돌 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우리는 단순한 친구 사이란다." 그는 소녀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엘리베이터가 8층에서 멎자, 애비게일은 소리 없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엘리베이 터 에서 내리며 그녀는 스티브를 돌아보았다. 그도 따라서 내리고 있다. "웩슬러 양은 10살쯤 되어 보이는데, 말은 15살 먹은 처녀처럼 하는군." "틀렸어요, 스티브. 그애는 9살이지만, 정신 연령은 어떤 점에선 35살쯤 된다고 봐야 해요." 애비게일은 그의 말을 수정해 주었다. 아파트 문을 열면서, 그녀는 스티브가 이제 돌 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안으로 따라 들어 왔 다. "스티브, 난 이제 괜찮아요." "안돼요. 내일 아침이 되어 봐야 상태를 알 수 있을 테니까. 다행히 머리가 가뿐해지 면 괜찮겠지만, 악화될지도 모르는 일이오." 평소 같으면 화를 낼 일이지만, 애비게일은 그와 다툴 기운이 남아 있지 알았다. 스 티 브는 그녀를 부축해서 침실로 갔다. "옷을 벗을 수는 있겠소?" "물론이에요." "나는 거실에 있겠소.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라도 불러요." 애비게일은 기름과 먼지투성이인 옷들을 욕실 바닥에 벗어 두고 슬립만 입은 채 침대 위로 기어올라갔다. 스티브가 거실에 있다는 생각 때문에 좀체로 잠이 오지 않을 것 이 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베개에 머리를 얹자마자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스티브는 애비게일에게 거실에 있겠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침실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방안에서 그녀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마침내 그녀의 숨소리가 규 칙 적으로 들려왔다. 그녀는 잠이 든 것이다. 그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거실에서 비치 는 불빛이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드러나게 했다. 그는 방안으로 소리없이 들어섰다 .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은 심리학자도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아름답고 섹시한 여자 일 뿐이다. 육감적인 도톰한 입술을 앞으로 약간 내밀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베개 를 뒤덮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자 그는 마음의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욕 망이 속에서 꿈틀거리고 일어났다. 그것은 위험한 충동이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는 자신을 설득했다. 애비게일 프랭클 린이 내 삶의 영역에 뛰어들게 해선 안돼. 이 여자는 내 인생에 아무 의미도 없어. 그는 조용히 방을 나와서 거실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할 일이 있다. 거실 왼쪽에 있 는 방이 그녀의 서재인 것 같다. 그는 그 방으로 들어가서 불을 켰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다.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행위는 좀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목적을 달성하 자 니 별 수 없다. 그녀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녀는 오늘 자신이 왜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졌는지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층계참에서 얼씬 거리 고 있던 그 괴한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샤론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그대로 묻어 두기 위 해서 누군가가 프랭클린 박사를 죽이려 하고 있다. 그것은 애비게일이 무언가 그 비 밀 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아니면 그녀도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그 일에 관여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이를 깨물었다. 그녀가 그런 일에 관여했다는 것은 정말 원치 않는 일이다. 그 러 나 알아내야만 한다. 그는 그녀의 모든 기록을 하나하나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업무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것까지도 샅샅이 뒤져나갔다. 은행거래장, 수 표 책, 다이어리 수첩, 거래처, 세금 관계철, 일기장, 그녀는 매우 조직적이고 합리적인 여자다. 그는 그녀가 모아 놓은 콘서트 프로그램이나 극장표 무더기까지 뒤져보았다. 뒤져본 것은 모두 원래의 상태대로 해두었다. 조사를 끝낸 그는 그녀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한 결 편해졌다. 그녀에 대해서 그가 발견할 수 있었던 결점이 있다면 그녀의 크레디트 정산서가 보여 준 대로 충동구매가 너무 심하다는 것뿐이다. 여자의 그런 결점을 두 고 너무 나무랄 수야 없는 노룻이 아닌가? 어떤 점에서 그는 그녀가 부럽기도 했다. 그 녀 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듯이 보였으며, 자신의 부모 와 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해서 뚜렷한 소신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자신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인생 이 걸어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는 그저 되는 대로 살아간 다 는 식의 생활방식을 견지해 왔다. 이제 그는 자신과 샤론으로 인해서, 그녀가 전혀 준 비한 바 없는 어두운 세계로 그녀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생각에 일 말의 불안감을 느 꼈 다. 그가 다시 그녀를 체크하러 간 것은 자정이 조금 지나서였다. 애비게일은 여전히 숨 소 리도 고르게 잠자고 있다.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은 순진하고 유순해 보인다. 그 모 습에는 남자의 마음을 강하게 이끄는 부드러움이 엿보인다. 특히 그녀의 모든 것을 알 고 난 지금에 있어서 그녀의 그런 모습은 그에게 더 큰 기쁨을 안겨 주고 있다. 그가 문간에서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녀는 잠시 몸을 뒤척이더니 그를 향해 돌아누 었 다. 순간 그는 그녀가 섹시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저항하기 힘 든 어떤 충동을 느끼는 가운데 그녀의 하얀 피부가 뿌옇게 떠올랐다. 그는 그녀의 가 느다란 두 팔이 자신의 목을 껴안고 당기는 환상에 젖었다.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가 그를 향해 웃고 있다. 스티브, 이리 와요. 사랑해 줘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 그는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그녀를 이대로 남겨 둔 채 가버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마 음에 걸린다. 그렇지만 그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침대 모서리에 앉아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애비게일." 그녀가 눈을 떴다. 잠시 멍한 표정이더니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가 재 빨리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놀라지 말아요, 애비. 괜찮아요."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며 묻고 있다. "당신이 괜찮은 것 같아서 깨우는 거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손을 땠다. "당신에게 몇 가지 멍청한 질문을 하겠소. 당신 이름이 뭐죠?" "애비게일 프랭클린." "애비." "그 이름은 쓰지 말라고 했잖아요." "사무실 주소는?" "라이트 스트리트 43번지." 스티브는 그녀의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뇌진탕 증세는 없는 게 분명하다. 두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 끌리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리 고 지금은 자정이 지난 한밤중이고, 이곳은 그녀의 침실이다. 밀리사 웩슬러의 말이 옳았을까? "당신은 지금 누구와 심각한 데이트를 하고 있는 중입니까?" 이것은 원래 물으려고 했던 질문이 아니다. 그녀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건 개인적인 질문인데요." "나는 지금 개인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소, 프랭클린 박사." "나는 언제나 프랭클린 박사인 것은 아니에요." "알고 있소." 그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이건 단순히 나의 호기심을 충 족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야. 그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대며 속으로 생 각 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거부한다면, 나도 미련없이 돌아서겠어. 그러나 그녀는 그의 키스에 유연하게 응해 왔다. 이건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야. 애비게일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입술을 맞은 자신 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지고 있음을 그녀는 느꼈다. 그의 키스가 깊어짐에 따라 몸속의 피 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그의 키스를 뿌리칠 수 없었다. 뿌리치기느커녕, 그녀는 두 팔로 그의 목을 얼싸안으며 힘껏 그에게 매달렸 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북소리를 내는 듯했고, 혈관에서는 피가 미친 듯이 질주하는 느낌이다. 그것은 너무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다. 6 그만, 이런 정신나간 행동은 그만둬야 해. 애비게일은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썼 다. 스티브는 그녀의 변화를 감지했다. 그는 자신이 범해서는 안되는 것을 범하고 있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머리를 쳐들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정상이오." "다행이군요. 그렇지만 체크가 너무 심했군요." "상황을 악용한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오." "그러나 당신이 아니었어요. 나였는지도 모르죠." 그는 싱긋 웃고는 몸을 일으켜세웠다. "아침에 만납시다. 계속 자요." "그러도록 애써 보죠." 그가 문 쪽으로 갔을 때,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스티브." "뭐죠?" "신사처럼 행동해 줘서 고마워요." "나는 신사가 아니오." 그는 문을 닫고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기다란 체구를 옹색하게 소파 위에 뉘었다. 어둠 속에서 애비게일은 천장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스티브 클레이본은 처음 만 난 그 순간부터 그녀의 마음을 이상하게 사로잡고 있다. 그의 어디가 좋단 말인가? 그 녀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심리학자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어떤 점이 매력적 이지? 그에게 장래가 있는가? 그와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있는가? 그에게 성적 매력 이외의 매력이 있는가? 있다면 또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애비게일은 자신이 스티브 클레이본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그는 성적인 매력과 함께 황폐한 감 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를 인도로 도피하게 만들었지만, 그곳에서도 치 유되지 않았다. 그리고 애비게일 프랭클린과의 관계로서도 치유될 성질의 것이 아니 다. 몇 시간을 더 잤을까? 그녀는 부엌에서 풍겨오는 커피 향기에 눈을 떴다. 묘한 경험 이 다.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기지개를 켰다. 뒤통수는 여전히 뻐끈 했 으나 기분은 그다지 나쁜 편이 아니다. 그녀는 간밤의 일을 생각하고는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거울 앞에 서니 슬림을 입 은 자신의 모습이 너무 노골적으로 보인다. 자신의 이런 꼴을 본 남자는 지금 부엌에 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녀는 그를 만나기가 민망스러워졌다. 샤워를 한 다음 면바지과 캠프 셔츠로 갈아입었다. 부엌으로 가보니, 스티브는 창가의 식탁에 앉아 항구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 그의 유연한 모습은 오히려 그녀를 놀라게 했다. 어젯밤의 일은 말짱하게 잊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이 지역도 정말 무섭게 변하고 있어. 우리가 자랄 때만 해도 아주 황폐한 어촌에 불 과했는데 말이야." 그는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모든 게 변하고 있어요. 항구도, 거리도, 사람들까지도." "내가 만든 롤 빵을 한번 먹어 봐요. 그다지 나쁘진 않을 테니까."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바구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애비게일은 좀처럼 단 음식은 먹 지 않는다. 그러나 바구니에 담긴 롤 빵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그녀는 식탁에 앉 자 커피부터 한 잔 따랐다. "기분은 어떻소?" "좋아졌어요." 그녀는 롤을 한 조각 떼어 입에 넣었다. "다행이군. 얘기할 것이 있소." "무슨 얘기예요?" "샤론에 대해서요. 어제는 과연 이 말을 해야 할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소. 그렇지 만 이젠 말해 주지 않을 수가 없소.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애비게일은 마시던 커피 잔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잘 생각해 봐요. 스털링 클리닉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애비게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어제 조 오멀리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스 털링 클리닉에서 샤론의 파일 열람을 거절했던 일도 떠올랐다. "내 친구가 위생국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그게 뭐요?" 그녀는 조 오멀리가 한 얘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그건 아주 흥미로운 얘기군. 그러니까 샤론 혼자만 그런 장소에 방기된 것이 아니었 다는 뜻이로군." "그렇지만 샤론이 그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증거가 없잖아요. 더군다나 병원이란 곳은 언제나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정신병 환자는 그렇게 많이 죽지는 않소."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샤론이 어떻게 해서 병원에 입원까지 해야 했는 지부터 말해 봅시다." "데릭의 말로는 샤론이 마약에 중독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병원에 입원시키지 않 으면 안되었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샤론처럼 마약을 싫어하는 애도 없었소. 샤론의 친구들이 코카인을 복용할 때에도 그애만은 하지 않았으니까. 친구들은 코카인을 복용하고 파티에 참석하기 위 해 서 차를 몰고 달리다가 트럭과 충돌해서 즉사했소. 샤론만 같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무사했던 겁니다. 샤론은 그런 애였어요." "나한테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아마 중요한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단언하건대, 만약 샤론이 마약에 중독되 었 다면 그건 다른 사람이 강제로 주입한 것이 틀림없소." 애비게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경험한 환자들 중에서도 자신이 미처 모 르는 사이에 중독되었다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러나 샤론이 반드시 그런 경우라고 확신 할 수 있을까? "내 말을 곧이듣지 않는 모양이군." 스티브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누가 그랬을까요? 그리고 왜?" "내가 의심하고 있는 사람은 샤론의 전 남편인 마일즈가 아니면, 새 애인이었던 애덤 구드윈이오." "샤론은 마일즈를 그렇게 가까이 하지 않았어요. 그와 헤어진 다음에는 말이죠." "그랬겠지. 과렇지만 애덤과는 매우 가깝게 지냈소." "그가 왜 샤론에게 마약을 투입했을까요?" "돈 때문이오. 그는 신탁 기금을 노리고 그런 짓을 많이 한 놈으로 드러났소." 애비게일은 스티브가 이미 상당히 깊숙한 것까지 조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애덤 구드윈에 대해서는 계속 추적할 셈이에요?" "그렇소." "나에게 도움을 청할 것은 없나요?" "있소. 몸조심하라는 거요. 누군가가 당신을 노리고 있소. 당신이 샤론의 죽음에 대 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 같소." "내가 그 비밀을 알고 있다고요?" 애비게일은 등골이 써늘해져 오는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몰라요!"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요. 그렇지 않다면 왜 당신을 엘리베이터에서 떨 어 뜨려 죽이려 했겠소?" "그것은 우연일 수도 있어요." "층계참에서 한 사내를 봤소. 당신을 감시하고 있었지." 애비게일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비상구의 문이 약간 움직이는 것을 본 것 같아요. 그래서 급히 엘리베 이 터를 타려고 했던 것인데..." "그 사내는 나 때문에 방해를 받았던 거요. 엘리베이터를 미처 다 위로 끌어올리지 못 했던 거죠. 당신 사무실이 있는 층계보다 한 층계 더 끌어올리려고 했는데, 마침 내 가 나타나는 바람에 한 계단 아래에서 멈추고 만 겁니다. 내가 3초 만 늦게 나타났어도, 당신은 지하실까지 떨어져서 목이 부러졌을 거요." 애비게일은 몸서리가 쳐졌다. 누군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파 랗게 질린 표정으로 바들바들 떨었다. 스티브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 감싸 주었다. "자, 자. 이젠 끝난 일이오. 그렇지만 앞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될 거요."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인 셈이군요." 그녀는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그의 존재가 이제 위안으로 느껴지기 시작 했 다. "아침에 라이트 스트리트 43번지에 갔었소. 하마터면 루로시니에게 발가락을 잘릴 뻔 했지." 스티브는 웃었다. "그가 왜요?" "어젯밤 사고 때문에 그는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 있더군. 나를 보자마 자 대뜸 권총을 빼드는 거야. 자기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 사고가 일어난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소."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줘야겠어요." "간신히 그의 권총을 치우게 하고 사정을 설명했더니, 그제서야 당신 걱정을 몹시 하 더군. 나와는 금세 친구가 됐소." "아주 단순하고 착한 사람이에요. 마권에 너무 열중하는 버릇이 있어서 탈이지만." "지하실에 있는 엘리베이터 컨트를 박스를 살펴봤소." "거긴 왜요?" 애비게일은 그렇게 묻고 나서 아차 했다. "놈은 아주 세심한 프로였지만, 먼지가 흐트러진 것을 보고 곧 알아차렸지. 녀석은 회 로를 원격 조종할 수 있도록 바꾸어 놓았더군. 그래서 층계참에서 당신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당신이 누르면 리모콘으로 승강기를 한 계단 더 올려 버릴 생각이었지. 무슨 말인지 알겠소?" 애비게일은 놀란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 순간에 나와 마주친 거요." "하지만 그가 꼭 샤론의 문제로 그런 짓을 했다는 증거는 없잖아요. 내게 오는 환자 들 중에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도 있어요. 당신이 다녀간 뒤에 온 사람도 그런 환자였죠. 어쩌면 그가 주위에서 서성거리다가..." "그래요? 나는 심리학자라는 직업이 그렇게 위험한 줄은 몰랐는데..." "항상 그런 건 아니에요." "그 환자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소?" 애비게일은 조지 내이피어의 인상착의를 말해 주었다. 스티브는 머리를 저었다. "놈은 덩치가 컸소. 하여간 나와 마주치자 놈은 계단 아래로 뛰어내려갔소.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당신을 본 거요." 애비게일은 그제서야 사건의 전후를 대강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이 자신의 어깨를 부 드럽게 감싸고 있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조심해야 하오. 밤길을 혼자 걸어서 돌아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나라면 당분간 사 무실에도 안 나가겠소. 며칠 동안 해안에나 다녀오는 것이 어떻소?"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스티브. 그렇지만 환자들 때문에 안돼요. 그리고 내가 그들 의 음모에 걸려들었다는 증거는 없잖아요?" "그렇다면 이런 말을 하는 내가 돌았다는 뜻이오?" 그는 그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 얘기는 아니지만, 당신은 여동생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사람을 찾고 있 는 거예요."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심리학적인 충고, 고맙소." 애비게일은 자신이 너무 심한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변명할 기회 도 주지 않고 벌떡 일어나서 혈관으로 향했다. "스티브, 기다려요." "왜지? 당신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잖소?" "연락처를 말해 줘요."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돌아보았다. "무엇 때문이오?" "무엇이건 알게 되면 전화하겠어요." "좋아요. 나는 햄프턴 호텔에서 묵고 있소. 전화번호는 책에 나와 있소." 그는 그 말을 남기고 그녀의 아파트를 나갔다. 그 컴퓨터 망은 전 세계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런던, 리 우 데 자네이루, 홍콩, 시 드니, 리야드 등, 어디에고 고가품을 사겠다는 돈이 넘치는 곳이면 모두 연결되어 있 는 것이다. 바이어들은 한결같이 돈이 썩어나는 인간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익명으로 거래하고 있으며, 그들의 에이전트들도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 진짜 물건은 소개책자에 함부로 나오지도 않는다. 그런 것들은 매우 소중한 취급을 받으며 , 손에서 손으로만 거래된다. 그런 물건을 손에 넣은 사람은 존경과 찬사를 받으며, 파 워가 막강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는다. 이 세계에서 돈의 축적은 불멸의 존재와도 통 한 다. 그것은 미래를 보장해 주며, 무한한 쾌락을 안겨 주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프랜시스 배크먼은 컴퓨터 망의 핵심부께 앉아 있다. 그녀가 근무하는 데이터 프로세 싱 센터는 지하실이지만 완벽한 에어컨 시설이 되어 있어 쾌적하다. 이곳은 시간의 개 념이 무의미하다.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고객에게 봉사를 하려 면, 시간에 구애받 을 수가 없다. 그녀는 600달러 짜리 인체공학 의자에 앉아서 4대의 컨트롤 패널에 들어오는 자료를 체크하고 있다. 컬러 스크린에는 오늘 그녀가 접수한 12군데의 에이전트에서 들어오 는 주문이 숫자로 새겨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75만 불을 가리킨다. 손가락으로 정보를 입력시키면서도 그녀의 마음은 바쁘기만 하다. 75만 달러라고? 정 말 웃기는군. 그 정도 금액으로는 손도 댈 수 없을 것이다. 지난주엔 그보다 훨씬 낡 은 것도 이 금액의 2배는 됐다. 스크린의 아래쪽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그녀는 작업 을 계속하면서도 가장 화급을 다투는 것을 먼저 처리한다. 그녀는 자신이 거래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 그렇치만 경매를 컨트롤 하는 일은 그녀로 하여금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캠던 출신의 한 보잘것없는 아가씨가 메 릴랜드 대학을 거쳐서 여기까지 오는 데는 그야말로 머나먼 여로였다. 왼쪽에 있는 스크린에 다른 입찰이 들어왔다. 100만 달러.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이 금액의 1퍼센트만 커미션으로 받아도 꽤 괜찮다. 그녀는 등뒤로 키가 큰 사내가 다가 와 서는 것을 느낀다. 그녀의 사장이다. 동시에 그녀의 정부이기도 하다. 그와의 그 런 관계는 여러 가지 편리한 점이 많다. "오늘밤에는 이 정도로 끝내야겠는데." 사내가 말했다. "그들에게 한 바퀴 더 돌리겠다고 통보해. 최대한으로 주문을 넣지 않으면 넘겨 줄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줘야지." 프랜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키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멋진 축하연을 여는 거야. 샴페인과 달팽이 요리로 말이야. 그 다음에는 온 천에 가서 푹 담그는 거지." 사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기대에 부풀게 한다. 그는 연회와 정사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푸짐한 선물도 기대해 봄직하다. 미리 힌트를 줬지만, 비취 목걸이와 러 시아 산 담비 목도리를 동시에 사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내는 항상 쾌락보다는 사 업이 우선이다. 먼저 그가 원하는 것을 달성시켜 줘야만 그 보답을 받을 수 있는 것 이 다. 스티브는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의 문 앞에 멈춰섰다. 문에 보이지 않게 붙여 놓은 머 리카락은 그대로 있다. 어제 오후부터 룸을 비워 둔 이래, 아무도 방에 들어간 사람 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방에 들어간 그는 자신이 장치해 놓은 또 하나의 부비트랩 을 검사해 보았다. 역시 그대로다. 아무도 그의 짐을 뒤진 사람은 없다. 만족한 기분으 로 그는 진과 셔츠를 벗고 샤워실로 향했다. 애비게일 프랭클린의 소파는 그가 잠을 자 기 에는 너무 짧고 좁았다. 그는 일을 보러 나가기 전에 두어 시간 자야겠다는 생각을 했 다. 그는 애비게일에 대해서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욕실에서 향긋한 비누로 자신의 근육을 문지르기 시작하자. 그런 생각은 모두 허사가 되고 말 았 다. 그는 한순간 밀려오는 그녀의 달콤한 체취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정말 기 막힌 미와 명석한 두뇌를 한꺼번에 지닌 여자다. 그녀와 같은 여자를 그는 별로 만나 보지 못했다. 생각할 수록 그녀는 그가 좋아하는 요소들만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가끔 그녀가 초록빛 눈으로 그를 바라볼 때면, 그는 과거에 묻어 놓았 던 자신의 모든 비밀까지 그녀가 알아차리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그 눈길 이 볼록렌즈처럼 햇빛을 모아서 그의 피부를 그을리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 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나지 않으면, 그 뜨거운 빛에 타버릴 것만 같다. 그는 갑자기 생겨난 이 주체하기 힘든 감정을 씻어 버리기 라도 할 듯 뜨거운 물에 자 신의 얼굴을 내밀었다. 제기랄, 어쩌다가 이런 기분이 되어 버렸단 말인가? 그녀와 보낸 지난밤은 그가 그동 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떤 감정을 일깨워 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따스함과 밀착감 같은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커 뮤니케이션이다. 그것은 섹스보다도 더 강한 어떤 감정이다. 그가 타월로 머리를 문지르며 욕실에서 나왔을 때, 전화 벨이 울렸다. 그는 깜짝 놀 라 며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애비 게 일일까? 그는 물방울을 융단 위에 흘리며 전화기로 다가갔다. "여보시오." "스티브 클레이본 씨?" 애비게일은 아니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약간 쉰 듯하다. "그렇소." "샤론에게서 당신의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당신은 누구요?" "미셀, 샤론의 친구예요."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소?" 여자는 가볍게 쿡쿡 웃었다. "다 방법이 있죠. 그건 중요하지 않잖아요. 당신이 애덤 구드윈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렇소." "블루 스타에서 나와 30분 후에 만나기로 되어 있어요. 그곳이 어딘지 아세요?" "어디요?" "머린 터미널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이에요." "왜 만나기로 했소?" "그건 당신이 직접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전화가 끊어졌다. 이런 제기랄. 그는 수화기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잠자는 것을 포기 할 수밖에 없다. 그는 몸의 물기를 마저 닦기가 바쁘게 옷을 갈아입었다. 갑자기 새 기운이 솟아나는 기분을 느꼈다. 스티브가 상점을 다녀간 이래, 마일즈 스키너는 갈등을 느꼈다. 그의 아이다호 같은 넓은 어깨와 더티 해리 같은 위험스런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심사숙고한 끝에 마일즈는 일단 그의 환심을 좀 사둬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에게 애덤 구드 윈 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악감정을 누그러뜨려 보자는 생각이다. 그는 햄프턴 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스티브 클레이본 씨 룸을 좀 대주시오." 신호가 가는 소리가 열 번쯤 울리고 나서, 교환이 다시 나왔다. "죄송합니다만, 클레이본 씨는 외출중이십니다. 전할 말씀이라도?" "알겠소." 마일즈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실망과 안도의 감정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 자식은 운 도 없는 놈이군. 스티브는 예정된 시간보다 5분 전에 블루스타에 도착했다. 그는 길 건너편에 차를 세 워 두고, 문제의 술집을 바라보았다. 토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사람들은 별로 많은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문으로 다가가니 시끄러운 록 뮤직이 바깥까지 새어나왔다. 어두컴컴한 내부에 들어서자. 그는 손님들을 죽 훑어보았다. 금발을 위로 치켜세워 묶 은 검은 블라우스의 여자가 그를 향해 고개를 갸웃하더니 미소를 던져왔다. 스티브는 그녀의 앞으로 가서 앉았다. "당신이 미셀이오?" "틀림없어요." "애덤은 어디에 있소?"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교통이 복잡한가 보죠. 하지만 곧 올 거예요." 스티브는 여자의 태도에서 약간 이상하다는 느김을 받았다. 그는 조심해야겠다고 생 각 했다. 여급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미셀은 네이블을 주문했고, 스티브는 일본 맥주를 한 병 주문했다. "샤론의 친구라고 했소?" "맞아요. 당신 얘기는 하도 많이 들어서 친구 같은 기분이 드네요." 음료가 왔다. 미셀은 스티브를 살펴보면서 네이블을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스티브 는 맥주를 컵에다 가득 따랐다. 미셀은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리 고는 성냥을 찾기 시작했다. "오, 이런. 성냥이 없네. 라이터 가졌어요?" "난 담배를 피우지 않소." "카운터에 성냥이 있을 텐데.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그녀는 애교있게 웃었다. "그러죠." 그는 일어나서 카운터로 걸어갔다. 그냥 이대로 나가 버릴까? 아무래도 미셀이 속이 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애덤 구드윈은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 나 그는 성냥을 가지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이 여자에게서 무슨 얘기든 들어 보지 않 고는 좀이 쑤실 것만 같다. "애덤은 어떻게 된 거요?" "그는 항상 늦어요." 스티브가 맥주를 몇 모금 더 마시자, 그녀는 표나게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스 티브가 떠나 버릴 것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애덤은 샤론에게 잘해 주지 않았어요 . " 미셀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랬소?" "애덤이 샤론을 유혹한 것은 그녀의 돈 때문이었어요. 신탁금 말이죠." 실내 공기가 갑자기 더워진 것 같다. 스티브는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 래도 시원해지지 않는다. 그는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음악 소리가 머릿속에서 웅웅 울려왔다. 신탁금, 그렇지. 바로 그것 때문이었어. 나도 그 렇 게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데 점점 생각하기가 어려워졌다. 미셀의 얼굴을 바라 보았 을 때, 그는 그녀의 얼굴이 뿌옇게 흐려진 것을 알았다 고 순간, 그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이런 푼내기한테 속아넘어가다니.... 성냥을 가지 러 간 사이에 이 계집이 내 맥주에다 약을 넣었구나...... 갑자기 모든 소리들이 번뜩이며 춤추는 바늘처럼 그의 피부를 찔러왔다. 머릿속이 풍 선처럼 부풀어오르는 느낌이다. 모든 생각들은 안개처럼 뿌옇게 떠오를 뿐이다. 그는 테이블 가장자리를 붙잡고 자신 의 몸을 지탱하려고 애를 썼다. 여기서 나가야만 한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지만. 곧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안심해요, 여보." 미셀이 옆으로 와서 그를 부축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다. 그는 그녀를 밀어내 려 고 했지만, 근육이 마치 시럽처럼 녹아 버린 느낌이다. "남편이 너무 취했어요. 누가 좀 도와줘요." 그녀는 소리치고 있다. 아니야! 아니라니까! 스티브는 그렇게 소리쳤으나 말소리는 거품을 잔뜩 물은 것처럼 입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건장한 사내가 스티브의 옆으로 붙어서 그를 겨드랑이 사 이로 안았다. 미셀이 다른 한 팔을 부축했다. 안돼! 두 사람은 스티브를 질질 끌다시퍼 하며 바에서 데리고 나갔다. 그들은 길가에 세워 둔 차에다 그를 밀어넣었다. "아주 잘했어." 뒷좌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미셀에게 말했다. "식은 죽 먹기죠, 뭐." 스티브의 옆구리에 날카로운 일격이 가해졌다. 그의 흐릿한 의식은 곧 캄캄한 나락 속 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7 문에서 날카로운 노크 소리가 들리자. 애비게일은 펄쩍 뛸 듯이 놀랐다. 스티브의 경 고를 무시하려고 마음먹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의 말이 가시처럼 박혀 있다. 발 끝으로 소리없이 걸어가서 구멍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거기엔 로라 로즈웰이 서 있 다. "사무실에 들렀다가 루 로시니로부터 엘리베이터 사고 얘기를 듣고 달려오는 길이야. 루는 안절부절 못하더군. 다시는 경마장에 가지 않겠다고 나에게 말했어." "그에게 전화를 해줄 걸 그랬군." 애비개일은 웃으며 말했다. "한 덩어리로 남아 있는 걸 하느님께 감사해야겠어. 정말 괜찮아?" "그러면 내가 두 덩어리로 나뉘어졌을 줄 알았어?" "설마 그 정도는 아니길 빌었지. 관리사무소 측을 고소할 거야?" "100만 달러쯤 생긴다면 해야지." 로라는 웃었다. "그걸 감당해내려면 그들은 우리에게 월세를 2.00O달러 이상은 올려야 할 거야." "그렇다면 별로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잖아?" "그렇긴 해도 경종을 울리는 의미는 있는 거지. 정말 어디가 부러졌다면 어쩔 뻔했어 ?" "심사숙고해 보지." 애비게일은 무심코 거실로 친구를 안내하다가 소파를 보고는 우뚝 멈춰섰다. 그러나 로라는 이미 그것을 보고 말았다. "누가 이 소파에서 잤구나?" "스티브 클레이본이야. 샤론의 오빠지." "오. 그래?"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렇게 홍미로울 건 없으니까." 애비게일은 소파 위에 헝클어진 상태로 놓여 있는 담요를 개어 한쪽으로 치우며 말했 다. "과연 그 말을 믿어도 될가?" 로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비게일을 바라보았다. 애비게일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미 소지었다. "이상한 생각은 말라니까." "그는 어떻게 생긴 사내야?" "섹시하고, 거칠고, 위험스럽기도 하지." "맙소사. 아주 기막힌 조화군 그래." "그런 타입의 사내와는 가까이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도무지 안전하지가 못 하거든. 게다가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나의 분석을 좋게 생각하지 않아." "사내들이란 대개 그렇지. 빌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어. 아무래도 그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 "걱정되니?" "한때는 서로 끔찍히 사랑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자꾸만 타인이 되어가는 느낌이야." 애비게일은 친구를 위해 차를 내왔다. 그녀와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스티브에 대 한 감정을 희석시키는 데에는 좋은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빌과 함께 어디 로맨틱한 곳으로 여행이나 다녀올까 해." "그거 괜찮은 생각이지." "그런데 문제는 빌이 그 제안에 응하느냐 하는 거야." "믿져야 본전이지 뭐. 어차피 프로포즈에는 모험이 따르게 마련이니까." 애비게일은 그렇게 말해 놓고 그러면 나는 어떤가 하고 자문해 보았다. 그녀는 남자 란 언제나 여자가 원하는 타입은 나타나지 않는 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원하는 남자가 나타난들 그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어젯밤 자신의 침대에서 본 스티 브 는 그녀의 가슴속에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는 아주 박력있는 연인이 될 수 있 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내에게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든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노룻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위험을 수용할 수 없을 만큼 난 보수적인 여자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로라가 물었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이번 주말에 그리스 인들이 페스티벌 홀에 모인다니까 그곳으 로 가서 자이로 샌드위치나 찾아 보자고." 30분쯤 뒤에 두 여자는 복도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애비게일의 표정은 딱딱 하 게 굳어졌다. 어제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앞으로는 승강기를 탈 때마다 이 런 기분을 떨쳐 버리기 힘들 것이다. "샤론의 유언장에 누가 입회를 했는지 알아낼 수 있을까?" 애비게일은 로라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보험증서에도 말이야." "일단 검인이 끝난 유언장은 공적인 기록이 돼. 보험증서에 대해서도 체크해 볼 수 있 을 거야." 로라는 미심쩍은 눈으로 애비게일을 돌아보았다. "그렇지만 넌 클레이본 집안의 일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겠다면서?" 애비게일은 고개를 저었다. "샤른의 일은 그대로 버려 둘 수 없어." 페스티벌에는 지난해 이후로 참석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떠들썩한 음악과 흥미진진 한 행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좀 편안해지지 않을까? 그런데 왜 이렇게 온몸의 신 경 이 용수철처럼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일까? 애비게일은 그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머리가 아프다, 어디가 뚫린 것 같다. 몸뚱아리는 상의가 벗겨진 채 결박되어 있다. 이건 악몽이다. "그가 깨어나고 있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스티브는 눈을 뜨고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보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만 보이지가 않는다. 사물이 모두 뿌옇게만 보인다. 온몸이 땀에 홍건히 젖어 있다. 누가 곁으로 다가와서 어깨를 누르며 말한다. "안심해요." 여자다. "시력장애가 일어난 것은 약물을 과다복용했기 때문이에요." 과다복용? "안돼....나는..." 그는 헐떡이며 말했다. 하지만 말을 하려고 해도 도무지 혀가 움직이려 하질 않는다. 그는 흐릿한 기억의 가닥을 붙잡으려고 기를 썼다. 블루스타... 미셀... 그리고 성냥... 맥주... 혼미... "일으켜... 줘..." "미안하네." 다른 목소리. 이번에는 사내다. 그의 머리맡에서 울리는 듯이 들려오는 목소리다. "그렇지만 자네는 다른 사람까지 위험하게 만드는 존재야." "당신이 어떤 착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 주면 도와줄게요." 여자가 달래듯이 하는 말이다. "당신 여동생이 어떻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나요?" 몽롱한 상태 속에서도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스티브는 자신의 몸을 묶고 있는 밧줄에 다 불끈 힘을 줘보았다. 꿈쩍도 않는다. 손목과 발목에 통증이 올 뿐이다. 그러나 그 통증은 그의 의식을 조금 더 맑게 해주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지옥에나 가라구. 나는 너희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 "그건 실수하는 거야, 스티브 씨. 당신은 모든 것을 말하게 될걸." 여자의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엉덩이 상처 부분을 긁었다. 그의 피부가 마치 전갈에 게 쏘인 것처럼 오그라들었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눈에 기름이 잔뜩 낀 것처럼 흐릿하다. 차가운 솜뭉치가 그의 팔에 와닿았다. 그는 팔을 움츠렸지 만 소용없었다. 바늘이 그의 팔을 뚫고 들어왔다. 페스티벌에서 돌아온 애비게일은 자동응답기를 점검해 보았다. 세실 클레인본이 통화 를 원하고 있다. 세실이라고? 장례식 리셉션에서 그녀를 만나본 이래, 그녀를 다시 볼 기회가 없었다. 애비게일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클레이본 저택에 전화를 걸었다. "클레이본 부인 부탁합니다." "아. 프랭클린 박사. 전화해 주셔서 고마워요." 세실의 목소리는 그전에 비해서 한결 포근하고 부드러웠다.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먼저 지난번에 여러 가지 실례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 사과하고 싶어요. 그땐 아마 내 가 좀 어떻게 됐던 것 같아요." "이해합니다, 부인. 누구나 그런 일을 당하면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법이죠." 애비개일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 여자가 왜 이럴까 생각하는 중이다. 세실 같은 여 자 가 남에게 사과를 한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임에 틀림없다. "이해해 주시니 고맙군요. 사실 샤론 때문에 심신이 좀 피곤했죠. 그녀는 클레이본 가 문의 내림병을 갖고 있었어요. 일종의 정신 불안정 증세죠." "그래요?" "그렇답니다. 그런 중세는 스티브에게도 있어요.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는 아무도 예 측을 못해요." 애비게일은 그녀의 말이 어디로 흘러갈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스티브는 오늘 아침에도 여기에 와서 나를 협박했답니다. 그리고 당신에 대해서 화 를 내더군요." 세실은 심리학자를 계몽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당신도 조심하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가장 안전한 방법은 그를 만나지 않 는 거죠." "그가 흥분을 잘하는 것은 나도 알아요." 애비게일은 맞장구를 쳐주었다. 스티브는 아침에 이곳을 나가서 곧바로 세실에게 갔 을 까? "데릭은 나와 결혼하기 전에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별로 얘기해 주지 않았어요. 에 드워드 할아버지가 자살하신 것도 결혼 후에야 알았답니다." 샤론의 할아버지도 샤론처럼 자살을 했다? 샤론은 그런 얘기를 전혀 비치지 않았는데 ? 그렇다면 샤론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아니면 이 얘기가 몽땅 꾸며낸 얘길까? 그리고 그것이 스티브의 행동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전화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인." "만약 스티브가 박사님을 괴롭히면 전화해 주세요. 데릭과 의논해서 조처를 취해 드 리 겠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비게일은 재빨리 전화를 끊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스티브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의 어느 부분은 그녀도 좋아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이 직업적인 판단을 흐 리 게 한 탓일까? 부엌으로 들어가서 저녁식사를 만들까 생각했으나 배가 조금도 고프지 않았다. 그녀 는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햄프턴 호텔을 찾기 시작했다. "스티브 클레이본 씨의 룸을 부탁합니다." 그녀는 데스크 직원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클레이본 씨는 오늘 오후에 체크아웃하셨습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분이 직접 오시지는 않았습니다만, 사람을 보내어 정산하시고 짐도 찾 아갔습니다." "친구라고요?" "그분의 걸프랜드 같았습니다." 도대체 그는 몇 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있단 말인가? "행선지를 남겨 두지는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인도에 있는 그분의 집 주소만 있을 뿐입니다." "그분의 걸프랜드라는 여잔 어떻게 생겼던가요?" "어렸어요. 예쁘고, 금발을 위로 묶어올린 아가씨였어요. 실례합니다. 다른 전화가 걸 려와서 전화를 끊지 않고 기다리실 건가요?" "아뇨, 됐어요. 대단히 고맙습니다." 애비게일은 전화를 끊었다. 스티브는 어디로 숨어 버렸는가? 시내에 있기는 할까? 애 비게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또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빨라서 좋군." 조 오멀리였다. "물어 볼 게 있어서. 스털링 클리닉의 컴퓨터 터미널을 이용해 본 적 있어?" "몇 번인가 있지." "그러면 내일 아침 시간을 비워 둬." "왜 그래?" "너의 행운이야. 스털링 클리닉은 이번 주말에 시스템의 소프트웨어를 대용량으로 교 환하는 작업을 한대." "그래서?" "컴퓨터 담당자 말로는 내일 밤까지는 그 보안 절차가 지켜지지 않을 거라는 거야. 따 라서 네가 만약 환자의 파일을 보고 싶다면 내일 아침에 그곳으로 가서 '프라임 유저 ' 로 자료를 뽑아 볼 수 있을 거라는 거지."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울까?" "이 정보는 믿을 만한 거야." "알았어. 네 제안대로 해봐야겠군." "샤론 클레이본에 관해서 조사하려는 거겠지?" "맞아." "그렇다면 기왕 그곳에 간 김에 정신병 환자들 몇 명의 자료도 뽑아 보는 게 어때?" "좋은 생각이야." 애비게일은 그녀가 불러 주는 명단을 메모지에 받아적었다. "행동을 빨리해야 할 거야." 조가 주의를 주었다. "다른 부탁은 없어?" "아, 오래전에 죽은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메릴랜드에서?" "그래." "먼저 죽은 사람의 이름과 사망 장소를 알아야 해." "사망자의 이름은 에드워드 클레이본이고 볼티모어에서 살았어." "내가 알아보지. 그렇지만 월요일까지는 기다려야 해." 두터운 카펫이 깔려 있는 방 안에서 두 사내는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현재 처해 있는 입장이 상당히 미묘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잘만 이용하면 사 태를 오히려 호전시킬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모든 게 드러날 판이다. "이런 상태를 언제까지 끌고 갈 셈인가?" 한 사내가 화를 내며 말했다. "우린 서로 각자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기로 했던 것 같은 데?" 마주앉은 사내가 지지 않고 대꾸를 했다. 먼저 소리친 사내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좋아. 그렇지만 어설프게 처리하다가는 모든 일을 한꺼번에 망칠 수도 있어." "프랭클린 박사를 제거하는 것은 좋은 생각인 것 같아. 그 여자는 아무데나 코를 처 박 고 다녀서 위험해." "그 여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래두. 다 손을 써뒀어. 애비게일은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을 거야." "그렇지만..." "여보게.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일을 진행하고 있어." "스티브 말인가?" "그렇지.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 없애 버릴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 어." "그가 애비게일 프랭클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도 알아낼 수 있겠나?" "물론이지." "그가 얘기를 할까?" "펜토탈 나트륨을 쓰면 고등학교 성적까지 불게 만들 수 있어" "그가 애비게일까지 끌어들인 것이 확인되면 그녀도 없앨 건가?" "그렇지. 지난번처럼 그런 엉성한 엘리베이터 트릭은 쓰지 않을 걸세.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내야지." 스털링 클리닉을 이리저리 살피고 다니는 데에는 일요일이 좋을지도 모른다. 애비게 일 은 차를 스텝진 전용 주차장에다 세워 두었다. 관리병동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으나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가슴이 조여왔다. 만약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질문을 해오면 어떻게 하나? 그런 장면을 상상만 해도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컴퓨터 터미널 은 간호사 대기실마다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중의 하나를 사용한 다 는 것은 들킬 우려가 있다. 보다 안전한 것은 연구실의 위크스테이션을 찾아 내는 일 이다. 생물공학 연구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애비게일은 살며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문을 잠가 버릴까 생각했지만 그럴 경우 들키면 변명의 여지가 없어진다. 터 미 널 앞에 앉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자는 그런 대로 무사한 셈이다. 그녀 는 '프라임 유저'를 입력하면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녀가 메디컬 레코드를 요청하자. 환자의 성을 타이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클레이본. 두 건의 기록이 있음. 1027242 클레이본, 샤론. 1027885 클레이본. 스티브. 애비게일은 스크린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스티브도 스털링의 환자였던 가 ? 그렇다면 어제 갑자기 악화되어 입원했다는 얘길까? 그녀는 재빨리 기록을 살펴보 았 다. 스티브는 어제 그녀의 아파트를 나간 지 두어 시간 후에 입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는 세실의 집에 들러서 그녀와 다투기까지 했다고 하지 알았는가? 입원을 허락한 의사의 의견에 의하면 그는 심한 발작 증세를 보여서 특별 병동에 수용시켰다고 되어 있다. 심한 발작 증세? 그 남자는 신경질적인 성격은 있지만, 그것이 정신적 결함이나 이상 에서 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애비게일의 손이 몹시 떨렸다. 그녀는 다음 명령을 입 력 시킬 수가 없었다. 우선 스티브의 기록부터 카피를 했다. 그 다음, 그녀는 샤론의 기 록도 카피했다. 프린터가 갑자기 웅! 하는 소리를 내자. 그녀는 마치 금고를 열다 들 킨 도둑처럼 간이 콩알만하게 졸아드는 느낌이었다. 프린터가 카피를 토해내자. 그녀 는 다시 스크린을 살펴봤다. 도대체 이 병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스티브는 샤론에 대한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무모하게 이 병원에 입원한 것은 아니겠 지. 그건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기록부 양식의 우측 상단에 기재되어 있 는 담당자의 이름은 루이스 텔 박사다.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이 병원의 정 신과 의사라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녀로서는 그것도 이상하다. 이 의사는 새 로 들어온 사람일까? 이 정도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고 애비게일은 생각했다. 더이상 어물거리다가는 발 각되어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카피를 접어서 핸드백에 집어넣다가 그녀는 조 오멀 리 에게서 받아적은 환자들의 명단을 발견했다. 이 사람들에 대한 자료를 뽑아 보는 것 은 어떤 실마리를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어쩐지 터미널 앞에 다시 앉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다시 터미널 앞에 앉아서 명단에 적 힌 환자들의 이름을 입력시키기 시작했다. 그것을 다 끝낼 무렵에는 그녀의 얼굴에서 흘 러내린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프린터는 첫장을 토해내고는 삐익! 소리를 내며 작동하지 않았다. 오. 맙소사. 어찌 된 걸까? 애비게일은 벌떡 일어나서 기계를 살펴보았다. 종이가 끼었다. 그녀는 종이를 꺼내고 기계를 다시 매만지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도와드릴까요?"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그녀는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돌아보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그녀는 캐티 마틴이었다. 유전병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는 그녀와 만난 것은 몇 달 전 파티장에서였다. 그 이후로 둘은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애비게일은 목소리를 침착하게 내려고 애썼다.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몇 가지 기록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에요." 그녀는 자신이 그처럼 미끈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캐티가 프린터를 들여다보며 용지 삽입 부분을 고쳐 주는 동안. 애비게일의 가슴은 졸아드는 듯했다. "이 프린터는 변덕 많은 여편네 같아요. 꽤나 애를 먹이죠." 그녀는 온 라인 버튼을 눌러서 기계가 다시 작동하는 것을 보고는 애비게일을 돌아보 았다. "기계가 또 말썽을 피우면, 간호사실에 있는 것을 이용해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캐티는 문 쪽으로 나가다가 돌아보며 말했다. "일 끝나면 지하 식당에서 커피 한잔 어때요? 그리고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 해서도 얘기 좀 해주시고요." "오, 유감이에요. 밖에서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일이 끝나면 급히 가볼 데가 있거 든 요. 미안해요." 캐티는 웃었다. "다음에 하죠. 뭐" "그렇게 해요." 문밖으로 사라지는 캐티의 등을 바라보며 애비게일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캐티가 연구실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그녀를 이곳에서 만났다는 얘기를 하면 어떡하 나 하는 걱정이 생겼다. 빨꼴 몸을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 프린터가 작동을 멈추자 애비게일은 재발리 용지를 찢어내어 핸드백에 쑤셔넣고는 연 구실을 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 급하게 서둔 나머지 입력한 것이 미처 다 나오기 도 전에 나와 버렸던 것이다. 그녀의 발소리가 홀에서 멀어갈 즈음에 프린터는 다시 작동하여 카피를 토해냈다. 그 카피는 페이퍼 트레이에 담겨서 누군가가 손대면 안될 사람이 터미널을 만졌다고 항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8 스티브는 핑크 빛 카네이션 구름 속을 두둥실 떠다니고 있다. 꽃잎은 그의 피부에 뭉 개져서 짙은 향기로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다. "스티브." 눈을 뜨기는 무척 어려웠으나 그래도 보람은 있었다. 애비게일 프랭클린이 꽃 사이를 뚫고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맨발에 하얀 사리 차림이다. 하얀 비 단 천을 통해서 그녀의 몸의 굴곡이 선명하게 들여다보인다. "애비게일, 나를 여기서 끌어내 줘!" "그럴 수가 없어요." 그는 실망해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대신 당신과 함께 있을게요. 좋아요?" "오. 하느님. 좋고말고." 그녀가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두 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입 고 있던 사리가 사라졌다. 그녀는 그와 마찬가지로 알몸이 되었다. 그들은 꽃 속에서 뒹굴며 깔깔 웃고 키스했다. 카네 이션 꽃봉오리가 터지며 짙은 향기를 토해냈다. 그녀의 향기와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 이 그를 황흘하게 했다. "애비게일. 당신을 사랑해." "오, 스티브. 사랑해요, 스티브." 그녀는 웃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그는 혼자였다. 애비게일은 뒤에서 누가 자신의 목덜미를 잡아챌 것만 같은 공포심을 누르며 주차장 으 로 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다. 차 속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급하게 시동을 걸고는 차를 후진시켰다. 차가 주차장에서 빠져나오자, 그녀는 스털링 클리닉의 건물을 돌아보았 다. 저 안에 지금 스티브가 갇혀 있는 것이다. 그것도 난폭한 환자를 수용하는 특수 병실에 그는 갇혀 있다. 그들은 그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스티브가 정신 병동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하니 애비게일은 숨이 콱 막힐 것만 같았 다. 운전대를 틀어쥔 그녀의 손가락들이 하얗게 바랬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차를 다 시 주차장에 처박고, 그들에게 달려가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항의를 할까? 하지만 그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 뻔하다. 그런 주장을 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지 않 은 가? 그보다는 스티브에 대한 기록을 읽어 보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 순서라는 생각이 든다. 스티브의 가슴속에 공포가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기를 쓰고 앉으려고 했지 만 팔다리가 영 움직여 주질 않는다.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 짐작조차 할 길이 없다. 날카로운 금속성 목소리가 족집게로 뽑아내듯이 그의 머릿 속에 든 정보 를 빼내고 있다. 스티브는 그것을 거부하려고 애썼다. 잠이 억수로 밀려왔다. 애비게일 은 어디로 갔는가? 그는 다시 그녀를 생각하려고 했다. 그러나 금속성의 목소리가 그를 놓아 두지 않는다. "너의 여동생을 마지막 본 것이 언제지?" "장례식 날." 스티브의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마치 깨진 그릇에서 당밀이 흘러나오듯이 그는 반 사적으로 흘러나오는 말을 컨트롤 할 수가 없었다. 옆에서 다른 사내가 아는 체하며 말했다. "제대로 묻지 않으면. 제대로 된 대답을 얻을 수가 없다니까." "샤존이 살아 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지?" "2년 전." "그 이후로는 연락한 적이 없었나?" "샤론의 생일에 전화를 했다" "샤론이 너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나?" 스티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보낸 적이 있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나?" "나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질문은 계속되었다. 스티브는 대답을 억제할 힘이 없었다. 30분쯤 뒤에, 애비게일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스티브와 샤론의 메디컬 리포트를 살펴 보 고 있었다. 그녀는 어제 아침에 스티브와 함께 앉아서 식사를 했던 생각을 되살리며 부엌을 돌아보았다. 그 몇 시간 전에는 그와 침실에서 미친 듯이 키스를 주고받지 않 았던가? 그런 그가 갑자기 정신 분열증을 나타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애비게일은 독터 루이스가 작성한 스티브의 기록을 세심하게 읽어 나갔다. 그리고는 역시 루이스가 작성한 샤론의 기록도 검토했다. 순간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확대되었 다. 스티브의 보고서는 샤론의 기록 첫페이지를 그대로 복사한 것 같았다. "가계에 전해져 내려오는 유전적 증세. 비이성적인 사고, 이유 없는 적대감, 앞뒤가 맞지 않는 언행.... 초진시에 환자는 의사에게 폭력을 휘둘렀음. 의사의 질문에 대답 하기를 거부. 심한 발작 증세를 보여 특수 병실에 입실시켰음..." 기록은 환자를 입원시킨 이후부터 12시간 동안의 진찰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입 원 에 대해서는 비밀로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까지 샤론의 기록과 한 자도 틀리지 않는다. 다만 샤론의 이름이 들어 있는 자리에 스티브란 이름을 기재해 넣었을 뿐이 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아무리 유전적인 증세고, 샤론과 그는 남매지간 이 라 하더라도 이렇게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환자는 각자의 특징이 반드시 있게 마련 이다. 증세도 각기 차이가 있으며, 행동도 어디가 달라도 다른 법이다. 그들은 스티 브 를 어떻게 했을가? 동생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든 그를 정신 병자로 몰아넣기는 쉬울 것이다. 격분하며 길길이 날뛰는 일 이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스티브는 그들의 그물에 걸려 든 것이 분명하다. 오. 하느님, 안돼요! 애비게일은 파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었다. 에즈라 혼비는 나자로 구호 자선단체의 초라한 자기 사무실에서 컴퓨터 스크린에 나 타 난 숫자들을 살펴보고 있다. 한 동안 내용을 살펴보던 그는 손등으로 피로한 눈을 문 질렀다. 그처럼 열심히 오랫동안 기도를 했건만, 상태는 날로 나빠지고만 있다. 구호용 식량만 해도 그렇다. 3시간 동안이나 이 궁리 저 궁리를 해봤지만, 400달러의 예산으로 550명의 식단을 제대로 만들어낼 방법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정부에서 이제까지 보조해 주던 치즈를 중지하지만 않았어도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을 텐데. 그 렇다고 식단에서 신선한 야채를 빼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별수없이 테이블 뒤의 벽에 걸린 사진 들에게로 눈길이 갔다. 그러나 오늘은 웃음짓고 있는 정치가들이나 유명인사들도 그 에 게 전혀 도움을 줄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에즈라 혼비 앞에서는 으레 입에 발린 소리 로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를 강조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러나 막상 이쪽에서 손을 내밀면, 그들의 대부분은 땡감 씹은 얼굴을 하곤 했다. 인생의 맨 밑바닥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는 그것을 맛보았다. 30년 전 알코올 중독자로 거리를 헤맸던 그는 신에 대해서 눈을 뜨 지 못했다면 오늘날 이렇게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신의 손길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그는 자신의 남은 여생을 가난한 자, 핍박받는 자에게 빛을 주는 일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의 책상 서랍 속에는 버번 주 한 병이 들어 있다. 가끔 그는 그것을 꺼내어 과거에 그것의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곤 한다. 지금 그는 다시 그 술병을 꺼내어 햇빛에 비춰 보았다. 호박빛의 액체가 유리를 통해서 유혹의 손짓을 하 고 있다. 그것은 지옥의 불꽃이다. 아담의 사과다. 그는 그것을 벨벳이 깔린 케이스 속에다 다시 넣고 서랍을 닫았다. 그의 생각은 다시 나자로 구호 문제로 돌아왔다. 현상황은 울고 싶을 정도로 어렵다. 연방 구호 기금은 바짝 말랐다. 각종 자선단체들의 형편도 마찬가지다. 부자들은 자 신 들만을 위해서 돈을 쌓아가곤 있으며, 가난한 자들은 거리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제방의 구멍을 주먹으로 막았다는 네덜란드의 어느 소년처럼 느 껴 졌다. 지금 그 자신이 포기한다면 그를 의지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떠내려 가버 리 고 말 것이다. 어쨌든 해내야만 한다. 그러나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번달에 는 샤론 클레이본이 그에게 남겨 준 돈을 계산에 넣었었다. 그런데 예상대로 돈이 들 어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험업자들이 아직 만족할 만한 이유를 찾 아 내지 못한 것이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가급적이면 비상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사정 이 급하게 돌아가면 그만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먼저 컴퓨터 파일을 검색한다. 리스트 를 살펴본 다음에 그는 자신의 전화번호부에 적혀 있지 않은 번호를 찾아 다이얼을 돌 렸다. "도와드릴까요?" 아주 교양있는 목소리가 물어왔다. "여기는 자비의 천사입니다. 다른 배달을 의뢰하고 싶은데요." "죄송합니다. 지금은 다른 상품이 없군요." "그렇지만..." "다음주에나 연락하십시오." 전화가 끊어졌다. 에즈라는 수화기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름 있는 병원은 악의로 사람을 입원시키지는 않아. 애비게일은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래도 공포심은 가셔지지 않는다. 그녀는 소름이 기친 팔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러나 뼛속 깊이 스며든 써늘한 기분을 문질러 없앨 수는 없었다. 스티브 는 샤론의 죽음이 음모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 사건도 우 연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음모라고 주장했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 의 냉정한 이성으로도 그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말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을 뿐이다. 그에 대한 보고서는, 그의 가족이 그를 입원시킨 것으 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데릭이 그를 입원시킨 것일까? 그녀는 세실의 전화를 생각해 내고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세실은 스티브가 정신 분열 증세를 일 으켰다고 전화했던 것이다. 스티브를 병원에 입원시키기 위해서 세실이 그런 전화를 했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병원으로 찾아가 보면 어떨까? 그러나 그것 은 좋은 방법이 못될 것 같다. 그들은 이미 샤론의 기록을 열람하겠다는 그녀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던가? 공연히 그들의 의심을 더할 뿐인 행동은 피해야만 한다. 애비게일은 초조한 마음으로 거실을 왔다갔다했다. 샤론의 전화를 받고 났을 때처럼 그녀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때와는 또 다 른 상황이다. 샤론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스티브는 스털링 클리닉의 정신병동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두 사람의 보고서를 다시 살펴보았다. 스티브는 어제 날짜로 입원되었다. 그 런 데 샤론은... 애비게일은 날짜를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주는 의미를 깨달은 것은 잠 시 후의 일이다. 샤론의 입원 날짜는 5월 15일이다. 그 날짜는 샤론이 새벽에 그녀에게 전화를 했던 날 이다. 그런데도 데릭은 샤론이 벌써 몇 주일 전부터 입원해 있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애비 게일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다. 데릭이 거짓말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것 은 또한 샤론이 전화를 한 장소가 병원이 아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도대체 샤론은 그 시간에 어디에서 무슨 일을 당하고 있었을까? 스티브는 지금 무슨 일을 당 하고 있는 것일까? 애비게일은 조 오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믿고 의논할 사람은 친구밖에 없다. "컴퓨터에서 뭔가를 알아낸 모양이구나?" 조가 대뜸 물었다. "응.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거야." 애비게일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당장 스털링으로 쳐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네가 보다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줄 것이라고 믿고 있어." 조는 웃었다. "알았어. 좀 기다려 봐. 내가 여기저기 좀 알아볼 테니까. 그리고 네 사이즈를 좀 말 해 줘?" "사이즈는 왜?" "우정의 표시로 옷이나 한 벌 사주려고." "새삼스럽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글쎄, 말해 보라니까?" 두 시간쯤 후에 조 오멀리는 애비게일의 아파트로 찾아왔다. 그녀가 들고 온 수트 케 이스 속에서 나온 것은 두 벌의 하얀 간호사 유니폼과 스타킹, 구두였다. "이게 뭐지?" 애비게일은 눈을 휘등그렇게 떴다. "옷이 마음에 안 들어?" 조 오멀리는 웃으며 애비게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계확을 설명했다. "시내의 어느 병원이나 마찬가지로 스털링에서도 간호사가 부족해서 임시 간호사들을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그래서 임시 간호사로 취직을 하자는 거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어렵지." 애비게일은 마른침을 삼키며 친구를 바라보았다. "임시 간호사 조합인 메드템프즈에 물어 조사해 봤지. 여러 분야의 간호사들이 부족 한 상태라고 하더군. 정신과도 마찬가지고." "그렇지만?" "글쎄.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까. 이미 신분증까지 만들었어." 조는 임시 간호사 신분증까지 보이면서 말했다. 글래디스 웰즈와 셜리 브리스번이라 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그 신분증은 조와 애비게일의 사진이 각각 붙어 있다. "이걸로 통과가 될까?" 애비게일은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조를 바라보았다. "재수없어서 그들이 조회를 해보는 일이 생긴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별일은 없겠지 뭐." 그의 생각은 조각조각난 바랜 사진 같았다. 그는 기를 쓰고 흩어진 영상을 한 곳에 모 으려 했으나, 언제나 실패만 했다. 누군가가 와서 그의 마른 입술에 시원한 물을 부 어 주었다. 그는 허겁지겁 그 물을 들이키고는 다시 시트 위로 고꾸라졌다. 그는 이제 침 대 위에 뉘어져 있다. 이전까지는 딱딱한 바닥에 누워 있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 는 애비게일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손길이 그립다. 그녀의 위로를 받고 싶다. 그 녀 의 키스를 받고 싶다. "좀 거들어 줘."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하시게요?" 여자와 목소리. "이 친구의 가슴털을 깎아야 해. 내일 아침 수술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어. 그러면 일 단 한시름 덜게 되는 거지." 그는 가슴에 차가운 물기가 닿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곧 면도칼이 가슴의 털을 밀어 내고 있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조 오멀리는 야간 교대가 자정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 냈다. 애비게일은 그동안에 조에게 병원 내부의 사정이나 위치 따위를 가능한 한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 나 조의 계획을 설명듣고는 아무래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을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낯선 간호사가 한꺼번에 두 명이나 나타나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몰라." 조는 위험성을 지적했다. "따로 들어가지 뭐. 한 사람은 정식 교대를 하기 위해서 간 것으로 하고, 다른 한 사 람은 연구실에 잔무를 하기 위해서 간 것으로 하지." 애비게일이 말했다. "리포트에는 스티브의 병실이 기재되어 있었어?" "315호실이야." 작전은 다 짜졌으나, 묘한 불안감이 두 여자를 짓눌러왔다. 그들은 커피 한 포트를 다 마시고 콘칩 한 봉지를 다 먹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간호사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거울을 살펴보았다. "어때?" 조가 애비게일에게 물었다. "너나 나나 모두 좀 모자라는 간호사 같아." "정 내키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그만둘 수 있어." 조는 애비게일이 염려되는 모양이다. "끼왕 시작한 일이야. 호랑이 굴 속으로 들어가 보자구."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고 있는 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그의 의식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 것은 빨리 이 지옥으로부터 빠져나가야 한 다 는 것이다. 무언가 끔찍한 일이 자신에게 지금 닥쳐오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 낄 수 있다. 그는 자는 척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기운을 차려야만 한 다. 그들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그들의 적의에 찬 눈길과 거친 호흡 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다 . "한 방만 더 찌르면 밤새 녀석을 감시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렇긴 해. 어쨌든 이제 우리의 책임은 여기서 끝났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는 조심스럽게 한 눈을 떠보았다. 도무지 초점을 잡을 수 가 없다. 놈들이 내 눈을 아주 멀게 만들어 버렸나? 한참 애쓴 끝에 그는 방안에 아 무 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일어나 앉는 데도 죽을 힘을 다 써야만 했다. 무릎 이 휘청거리며 자꾸만 무너지려고 했다. 사력을 다해서 문까지 갔을 때 문이 밖으로 부 터 열렸다. 그는 문 손잡이에 매달렸다. "도와줘요! 환자가 일어났어요!" 스티브는 놀라 소리치는 간호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간호사의 어깨를 손으로 움 켜쥐었으나. 그녀의 완강한 뿌리침에 힘없이 픽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그녀를 향해 서 기어 갔다. 그러나 그녀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사내들에 의해서 제지당하고 말았다. 그가 몸부림을 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의 팔에 다시 주사바늘을 찔러넣었다. "내가 뭐랬어. 일찌감치 한 방 더 찌르자니까." 사내의 말은 스티브의 아물거리는 의식 속으로 사라져갔다. 스털링 클리닉의 수위는 애비게일과 조 오멀리가 내민 신분증을 제대로 확인할 겨를 이 없었다. 지금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그가 가장 즐겨 보는 토크 쇼가 한창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임시로 고용되어 들어온 간호사들은 대개가 낮이 설었고, 그들이 교대 시 간 보다 다소 일찍 오는 것은 탓할 바가 못 된다. 현관을 무사히 통과한 애비게일과 조 는 모퉁이를 돌자 서로 웃으며 바라보았다. "거봐. 식은 죽 먹기지." 여탐정은 애비게일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애비게일은 3층으로 올라가고, 조는 연 구 실로 숨어들기로 했다. "연구실은 바로 위층이지?" 조가 확인했다. "그래." "그러면 잠시 후에 만나자." 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린 애비게일을 겨드랑이가 땀으로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태연하게 행동하려고 애썼다. 간호사은 오른쪽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그녀가 다가가자, 당직 수간호사가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가슴에 매달려 있는 명찰에는 '미세스 쇼'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당신은 누구예요?" 애비게일은 속으로 찔끔했으나 침착한 소리로 대답했다. "셜리 브리스번인데요. 메드템프즈에서 왔어요." "오늘밤에는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휴가에서 일찍 돌아왔어요." 거짓말도 할수록 점점 느는 법이다. "고마운 일이로군. 덕분에 내가 살았어요." 미세스 쇼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 병동은 야간엔 동물원이나 다름없어요. 아까 저녁에만 해도 한 환자가 간호사를 습격하는 난리가 벌어졌으니까." 애비게일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젠 겁낼 필요 없어요, 진정제로 잠재워 놓았으니까. 그 환자는 어떻게 하려고 그 러 는지 모르겠어. 하여간 지시는 아래층에서 직접 떨어지고 있어요." "나는 무엇을 해야 하죠?" 애비게일이 물었다. "이 병동에서 근무해 본 적이 없어요?" 애비게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심자로 처신하는 편이 안전할 것 같아 서였다. "정신병동은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병실은 모두 문이 잠겨 있어요. 그리고 허가된 사 람 이외에는 복도를 지나다닐 수 없게 되어 있고, 알겠어요?" "알았어요." 애비게일은 벽에 걸려 있는 병실의 열쇠 꾸러미를 힐끗 보면서 대답했다. 저 열쇠 꾸 러미를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세스 쇼가 보고 있는 앞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좋아요. 그러면 병실을 한 번 점검해 봐요. 문은 열지 말고 구멍으로 들여다만 봐요 . " "그러죠." 간호사 대기실을 물러나오는 것은 마치 암흑 속에서 햇빛 아래로 나오는 듯한 기분이 다. 애비게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자들의 병실을 살펴보았다. 문마다 조그마한 구멍이 있어서, 병실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진 정제를 투입당했는지 조용하게 잠들어 있다. 비어 있는 병실도 더러 있다. 조는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혹시 신분이 드러나 잡힌 것은 아닐까? 그녀는 가슴 속 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한쪽 병동을 다 점검하고 돌아서려고 했을 때 , 조 오멀리가 모퉁이에서 나타났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그녀는 초조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사립탐정에게 물었다. "미세스 쇼를 꼬시느라고. 그녀에게 휴게실에 가서 담배나 피우며 푹 쉬라고 해줬지. 그동안은 내가 일을 대신 봐주겠다고 말이야." 조는 열쇠 뭉치를 애비게일의 코앞에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미세스 쇼가 돌아와서 열쇠가 없어진 것을 알면 난리가 날 텐데." "그럴 염려는 없어. 그녀는 휴게실에서 아예 잠들어 버렸을 테니까. 내가 수고하는 그 녀를 위해서 커피까지 한 잔 뽑아 대령했잖았겠니?" 조는 여유만만했다. "그녀에게 수면제를?" "그녀는 푹 쉬어야 해, 자신과 우리들을 위해서도 말이야. 자, 지금부터 10분간이 중 요해. 빨리 스티브를 찾아!" 두 사람은 난폭한 환자들을 수용하는 특수 병실로 달려갔다. 야간이라 복도에는 아무 도 없었다. 315호실은 맨 오른쪽에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애비게일은 무 언 가 잘못되었다는 예감이 확 들었다. 병실 안은 악취로 가득했고, 침상 위에 누워 있 는 사람 위로는 하얀 천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여 있다. "오. 하느님! 스티브!" 애비게일은 절규했다. 하지만 누워 있는 사람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것은 시체였 다. 9 애비게일은 침상으로 달려가서 하얀 천을 벗겼다. 그녀가 본 것은 죽은 남자의 얼굴 이 다. 악취가 그녀의 숨통을 콱 틀어막는 것 같았다. 조 오멀리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 으며 물었다. "스티브 야?" "아니야." 애비게일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사자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 어 있다. 조가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 말했다. "이미 죽은 지 여러 시간이 지났어, 빨리 여기서 나가자." 애비게일은 사내의 얼굴을 다시 하얀 천으로 덮었다. 이 사내는 누굴까? 왜 죽었을까 ? 그리고 왜 여기에 누워 있을까? 스티브의 리포트에 기재되어 있던 315호실은 속임수 에 불과했단 말인가? 아니면 사론이 죽어간 병실을 수정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스티브는 어디에 있을까? "스티브를 빨리 찾아야만 해." 조가 그녀의 팔을 이끌었다. 두 사람은 복도 양쪽에 있는 병실을 각각 조사하기 시작 했다. 마침내 조가 건너편 병실에서 애비게일을 불렀다. "여기 있어!" 애비게일이 급히 달려갔다. "스티브가 틀림없지?" 애비게일은 병상에 누워 있는 사내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틀림없이 스티브다. 그녀는 스티브의 초췌한 얼굴을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스티브야." 그녀는 그의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았다. 심장이 조용히 뛰고 있다. "그는 살아 있어." 그녀는 기쁨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의 피부는 싸늘하게 식어 있지만, 그는 분 명히 숨을 쉬고 있다. 그의 팔뚝에는 여러 개의 주사 바늘 자국이 나 있다. 시트를 걷 어내니, 그의 가슴털이 깨끗하게 밀려서 파릇한 면도 자국이 나 있다. "명성 있는 병원에서 이런 식으로 정신병 환자를 다루는 것을 본 적이 있어?" 조 오멀리가 분개하듯 물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응급실 환자가 아닌 다음에야 진정제를 과다하게 투입했 어. 그렇지만 아직 중독되지는 않은 것 같아. 주사 바늘 자국은 최근에 생긴 것들이 야." 조는 가슴의 면도 자국을 보며 말했다. "이런 얘기를 하기는 끔찍하지만, 그들은 스티브에게 모종의 수술을 가하려고 했던 것 같아. 건너편 방에 죽어 있는 사내와 같은 형태의 수술을 말이야." "맞아. 그래서 스티브를 깊이 잠재운 거야. 그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어." "빨리 여기서 끌어내자." "어떻게?" "그를 깨을 수는 없을까? 주사를 놔서라도 말이야." "무슨 약물에 중독이 되어 있는지 알아야지 아무 해독제나 투입할 수는 없어." "그렇겠지. 여기서 혈액검사를 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애비게일은 갑자기 건너편 방에 누워 있는 시체가 생각났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누군가가 저 방의 시체를 영안실로 옮기게 되어 있을 거야. 우 리가 그 일을 맡은 것처럼 행동하면 어떨까? 스티브를 시체처럼 싸가지고 옮기는 거 야. 그 대신 그 시체는 이 방으로 옳겨 놓고 말이야." 조 오멀리는 감탄의 눈초리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네가 탐정해라. 나보다 나으니까 말이야. 원한다면 면허를 얻도록 주선해 주지." "지금 그런 농담할 때야?" 애비게일이 서둘렀다. 조가 스티브 옆에서 기다리는 동안 애비게일은 밀차를 가지러 나갔다. 간호사 대기실을 지나치면서 그녀는 새삼 조 오멀리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 다. 미세스 쇼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잠에 푹 빠진 모양이다. 잠시 후 애비게일은 시체 처리 용구와 밀차를 가지고 병실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힘 을 합쳐서 스티브를 시트로 싸고 시체 넣는 가방 속에다 그를 넣은 다음 밀차 위로 끌 어올렸다. 조가 시간이 없으니 건넌방 시체를 옳겨 오는 일은 그만 두자고 말했다. 1 초라도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는 일이 급하 다는 것이다. 애비게일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도중에 스티브가 깨어나면 어떡하지?" 애비게일이 걱정스레 친구에게 물었다. "끝장이지 뭐?" 조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조가 카터를 밀자, 끼익 하는 금속음이 났다. 두 사람은 소름이 끼치는 표정을 지었다. "침착해. 천천히 밀라구." "잠깐만 기다려." 애비게일이 주사기와 플라스크를 집으며 말했다. "그걸 어디에 쓰려구?" "스티브가 어떤 약물에 중독되었는지 알아보려고 해."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간다면 말이야. 애비게일은 속으로 덧붙였 다. "급해 죽겠는데도 챙길 것은 다 챙기는군." 조가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카터를 복도로 밀어내고 병실 문을 잠가 버렸다. 열 쇠 뭉치는 복도에 있는 쓰레기통에다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카터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끌고 갔다. 엘리베이터가 아래층에 도착하자. 두 여자는 밀차를 홀 안으로 밀어냈다. 순간, 애비게일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오는 사내를 보고는 그자리에 얼어붙었다. 앞 이마가 약간 벗겨지고 키가 큰 그 사내는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그녀는 그를 곧 기억해냈다. 양복을 입고 있던 그 사내는 분명 조지 내이퍼어였다. 그러나 그는 지 금 초록색 병원 유니폼을 입고 있지 않은가? 애비게일은 옆으로 돌아서며 조에게 말 했 다. "네가 이쪽에 서 밀어." 그녀는 머리카락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도록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조지에게 걸리면 위험하다. 그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더군다나 병원의 유니폼을 입고, 유니폼은 환 자용도 아니다. 병원의 직원들이 입는 옷이다. 그렇다면 그는 스털링 클리닉의 직원 이 었단 말인가? 그런 그가 정신병 환자인 양 내 사무실을 찾아왔던 이유가 무엇일까? 애비게일이 혼이 반쯤은 나간 상태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는 사이에 사내는 엘리베이 터 안으로 사라졌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녀는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아는 남자?" 조가 긴장하며 물었다. "환자로 내 사무실에 왔던 사내야. 엘리베이터 추락 사고가 있었던 금요일에 말이야. " "오. 맙소사." "그가 나를 기억해내면 스티브는 끝장이야." 애비게일이 다급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그때쯤이면 우리는 여기에 없을 테니까." 두 여자가 환자를 훔쳐서 달아났다는 실내 방송이 곧 터져 나올 것만 같아 아슬아슬 했 다. 그들은 밀차를 병원 뒷문으로 끌고 갔다. 조가 차를 뒤로 갖다댔다. 행운은 그들 편이었다. 두 여자는 젖먹은 힘까지 다 내어 스티브를 뒷좌석으로 끌어 넣는 데 성공 했다. 자신을 가끔 조지 내이피어라고 부르는 그 사내는 야간 근무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 의 본명은 조지 내스빗이다. 병원의 인사기록부에는 조지 내쉬라고 기재되어 있다. 야간 엔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근무 시간이 끝날 때까지 하고 싶은 일이나 하면 서 시간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친구들과 당직실에서 포커나 하며 월급과 부수입을 올릴 수 있는 일자리가 어디 그리 흔하단 말인가? 그런데 조금 전의 그 간호사들은 누구의 명령으로 시체를 옮기고 있을까? 그 일에 관 계하고 있는 사람은 이 병원 내에서는 많지 않다. 더군다나 야간에 시체를 옳기는 일 은 이제까지 없던 일이다. 그런 일을 하면서 당직자인 그에게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 았다는 것은 그를 무시하는 처사다. 그는 320호실에 있는 환자를 생각했다. 그 사내 에 게는 물소라도 떨어질 만한 안정제를 찔러넣었으니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날 리는 없다 . 조지는 스티브의 병실을 들여다보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병상이 비어 있는 것이다 . 그는 수간호사의 이름을 온 병원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부르면서 대기실로 달려갔 다. 그러나 미세스 쇼의 모습은 그곳에 보이지 않는다. 벽에 걸려 있던 열쇠도 어디 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머리가 돌아 버릴 지경이다. 병원에서 3Km쯤 떨어진 사무실 건물 주차장에서 조 오멀리는 자동차의 엔진을 껐다. 해드라이트도 껐다. 어둠 속에서 실내등만 켜놓고 그들은 스티브를 감싸고 있는 시체 처리용 가방과 시트를 벗겨냈다. 그는 아직도 인사불성이다. 자신이 어디로 실려왔는 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애비게일은 그의 목에 손을 대보았다. 맥박이 천천히, 그 러 나 힘차게 뛰고 있다. 그녀는 가방과 시트를 쓰레기통에다 던져 버렸다. "자, 이제는 어떻게 하지?" 조가 애비게일에 물었다. "환자를 치료해야잖아?" 애비게일도 난감한 기분이다. 스티브가 어떤 약물에 중독되었는지 알아내어 거기에 상 응하는 치료를 받으려면 당연히 의사에게 보여야만 한다. 그러나 스티브는 그럴 처지 가 아니다. 그들이 곧 그를 찾아나설 것이다. 스티브를 다시 그들 손에 넘겨 줄 순 없 다. "일단 그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고 싶어. 그들이 그를 수술하려고 한 것을 보면, 치 명적인 약물을 투입하지는 않았을 거야. 당분간 옆에서 그를 지켜봐야겠어." "너 혼자서는 안돼. 실제로 그가 깨어나면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조, 난 이미 이 일에 널 너무 깊이 개입시켰어." "그렇다면 조금 더 깊이 들어간들 어때서?" "가장 시급한 것은 스티브를 그들이 찾아내지 못할 곳으로 데려가는 일이야. 하지만 그전에 스티브의 혈액검사를 의뢰해야 해. 어디 비밀을 지켜 줄 만한 연구소가 없을 까 ?" "물론 있지. 그런데 그를 숨겨 둘 만한 장소는 있는 거야?" "아버지의 친구분이 성 미가엘 근방에 별장을 갖고 계셔, 그 별장을 이용할 수 있어. 웨인즈 씨 일가는 플로리다에서 지내고 있으니까, 여름까지는 그 별장을 사용하지 않 을 거야. 그곳이라면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거야." "애비게일. 정말 혼자의 힘으로 스티브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해? 만약 그가 깨어나 서 발광이라도 하면 어떻게 감당하지?" "그런 상황에 대처하는 훈련을 나도 받았어." 그러나 조는 안심하는 표정이 아니다. "별장에 도착하면 전화를 걸게. 그리고 급한 일이 생기면 즉시 연락을 할게." 애비게일은 다 결정되었다는 듯이 뒷좌석으로 가서 스티브의 팔에 소독약을 발랐다. 혈액을 체취하려는 것이다. "나를 데려가지 않겠다면. 스털링 클리닉에 대해서 조사를 해봐야겠어. 여러 가지 흥 미로운 일이 많을 것 같거든." 애비게일이 피를 담은 용기를 마개로 단단히 막은 다음 조에게 건네주며 당부했다. "보안을 철저히 해줘, 스티브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니까." "염려 붙들어 매. 나는 바보가 아니니까." "냉장고 속에 보관했다가 아침에 즉시 연구소로 가져가. 그리고 또 한 가지 부탁이 있 어." "얼마든지." "내 사무실의 전화번호부를 찾아서 환자들에게 연락을 좀 취해 줘. 급한 환자 때문에 출장을 떠났다고 해. 돌아오는 즉시 시간 약속을 다시 하겠다고." "오케이, 문제없어. 그렇지만 이 사내와 단둘이 있게 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이 놓 이지 않는데. 도착한 즉시 전화를 하고. 조심해." "알았어." 조를 어둠 속에 남겨 두고 애비게일은 그곳을 떠났다. 조시 내쉬는 어둠 속을 응시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성질대로라면 그 멍청한 미세 스 쇼를 스티브 대신에 병실에다 콱 쑤셔박고 싶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병원 전체가 다 알도록 떠벌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는 불과 10분 전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던 그 간호사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지나쳐 보낸 자신이 바보스럽게 느꼈졌다. 그 시각 에 시체를 실어 내가던 그 빨간 머리와 암갈색 머리의 간호사를 왜 의심하지 못했을까? 빨간 머리 여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다. 그러나 암갈색 머리의 여자는 어디 서 본 듯한 여자가 아니었던가? 그 여자를 어디서 봤을까? 이제서야 생각난 것이긴 하지 만, 그 암갈색 여자는 나를 보자 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여자도 나를 알고 있는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여 자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기어이 생각해 내고야 말겠다. 애비게일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도시를 벗어나서 동쪽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지금쯤 병원이 발칵 뒤 집혔을 지도 모른다. 병원측에서 연락을 받은 경찰이 도시 전체에 비상 연락을 취하 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친 환자 한 명이 병원을 탈출한 것이다. 두 명의 여자가 미치광 이 남자 하나를 납치했다. 시민들은 위험하니 발견하는 즉시 경찰이나 병원 당국에 신고 를 해달라. 이런 연락을 받은 경찰들이 요소요소에 진을 치고 검문을 벌이고 있을지 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액셀레이터를 점점 더 세게 밟고 있다는 것을 깨달 았 다. 밤길을 이런 속도로 달리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그들은 범죄를 행하고 있는 무 리들이다.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날까 봐 두려워서도 경찰에 연락하지는 못할 것이다. 애비게일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경찰만도 아니다. 스티브도 문제다. 미세스 쇼의 말대로 그가 간호사를 습격했다면 그가 깨어났을 때의 행동을 예측할 수 가 없다. 그가 깨어나서 만약 그녀를 몰라 보고 덤벼들기라도 한다면? 조 오멀리가 걱 정하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그렇지만 그가 간호사에게 그런 행동을 보인 것은 탈출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애비게일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일단 의식을 회복한다면 그는 내가 누 군 지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비로소 악의 구렁팅이에서 구조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녀는 뒷좌석을 힐끗 돌아보았다. 형편없이 무력한 몰골로 웅크리고 누워 있 는 그를 보자. 그녀는 가슴이 아파왔다. 그렇지만 이제 그는 안전하다. 내가 그를 구 한 것이다. 그 악마들의 소굴에서 끄집어낸 것이다. 이젠 그를 절대로 그들에게 내주 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웨인즈 씨의 여름 별장까지는 2시간 반이 걸렸다. 그것은 체서피크 만을 사이에 끼고 있는 메릴랜드 동쪽 해안 기다란 반도 위에 있는 별장이다. 만을 건너지르는 다리 앞 에 도착했을 때. 애비게일은 바짝 긴장되었다. 톨게이트를 통과할 때 필요한 동전은 다행히 있다. 우물거리다가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질문을 해올지도 모른다. 그녀는 스티브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는 천천히 톨게이트를 향해 차를 몰았다. 그때 트랙터 트 레일러가 왼쪽에서 끼어들며 클랙슨을 요란하게 울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핸들을 오 른쪽으로 꺾었다. 그 바람에 오른쪽 콘크리트 가드레일에 차의 범퍼가 긁히고 말았지 만, 트레일러가 지나가면서 일으킨 바람이 그녀의 차체를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그 녀 는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꽉 붙잡았다. 클랙슨 소리에 스티브가 놀란 모양이다. 그가 처음으로 나지막한 신음을 뱉어냈다. 애 비게일은 서둘러서 차를 출발시켰다. 스티브가 운전석 위를 발로 차는 바람에 그녀는 펄쩍 뛸 듯이 놀랐다. "뭐라고!" 스티브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안돼! 그러지 마! 그만두란 말이야!" 애비게일은 차를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스티브는 반쯤 상체를 일으키고 있다. 그 의 강한 팔이 그녀를 향해 쑥 뻗어 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그녀의 몸을 감고 있는 좌석 벨트를 잡아쥐고 당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슴과 목부분이 그의 강한 힘에 의 해 서 사정없이 조여졌다. "스티브, 안돼요!" 그녀는 헐떡이며 소리쳤다. "놔요, 숨이 막혀요." 그녀는 마른 기침을 토해냈다. 다른 트럭이 지나가며 그들의 차를 흔들어 놓았다. 스 티브는 벨트를 계속해서 당길 힘이 없었다. 그는 벨트를 놓고는 다시 스르르 드러눕 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 다시 신음이 새어나왔다. 애비게일은 기침을 하며 목을 문질렀 다. "괜찮아요?" 스티브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움직이지도 않는다. 어떻게 된 노릇 일까? 애비게일의 마음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스티브. 당신은 이제 안전해요. 내가 당신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겠어요." 그녀는 혹시나 그가 말을 알아들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렇게 말했다. 자 신의 상의로 그의 어깨를 덮어 주고 다시 운전대를 잡으려던 그녀는 비상등을 반짝이 며 달려오는 경찰차를 발견하고는 그만 가슴이 오그라붙었다. 경찰차는 그녀의 차 옆 에 와서 멈춰섰다. 병원에서 신고를 한 것일까? 여기까지 와서 경찰에 체포되어야 하 나?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카키복을 입은 경찰이 그녀의 차 곁으로 다가와 경례를 척 붙였다. 그녀는 일부러 윈 도를 조금만 열었다. "문제가 생겼습니까, 부인?" "아니에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남편이 갑자기 어지럽다고 해서요. 가끔 있는 일이에요. 집에 가서 약을 먹여야만 해 요." 경찰은 뒷좌석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러나 주위가 어두운데다 차 안도 어두워서 그의 눈에 스티브의 모습이 보일 리가 없다. "환자이신 모양이군요. 당신은 간호사이신가요?" 간호사?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간호사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그렇답니다." "그럼 출발하십시오. 다리 중간에 차를 세워 두시면 안됩니다." 경찰은 경례를 붙이고 물러갔다. 애비게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찰은 그녀가 차를 멀찌감치 빼는 동안 그자리에 서서 주시하고 있다. 그녀는 성미가엘로 가 는 방향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길을 돌아오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더 지체되어 그녀는 45분쯤 후에 웨인즈 템플턴의 별장에 닿았다. 소녀 시절에는 부모님과 함께 자주 왔던 곳이다. 웨인즈 씨는 아버지 의 절친한 친구고, 그래서 언제든지 필요한 때면 이 별장을 이용해도 좋다고 허락을 하셨다. 별장은 중앙에 굴뚝이 높이 솟은 단층집이다. 새벽 4시가 지난 희뿌연 밤하늘을 배경 으로 그 단층집은 시커먼 실루엣을 던지고 있다. 애비게일은 시골이 이처럼 어둡고 조 용하다는 사실을 그동안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 운전으로 몸은 피 곤 했지만, 시골의 밤공기는 써늘하면서도 상쾌했다. 그녀는 허리를 쭉 펴며 기지개를 켠 다음 스티브를 돌아보았다. 마침내 해낸 것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일은 그를 끌어내 어 집 안으로 데려가는 일이다. 그녀는 열쇠를 숨겨 두는 곳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 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거실과 현관의 불을 켰다. 갑자기 눈이 부셨 다. 스티브를 계단으로 끌어올릴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힌다. 아까는 조가 있었지만, 이 제는 혼자서 저 덩치를 감당해야 할 판이다. 희망을 걸 것이 있다면 스티브가 절반이 라도 의식을 되찾아 주는 일이다. 그러면 풀린 다리나마 조금은 움직여 주지 않겠는 가. 최악의 경우에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밤을 지샐 수밖에 없다. 자동차 뒷문을 열자. 스티브의 긴 다리가 밖으로 툭 떨어졌다. 기다란 다리를 장시간 오그리고 있었으니 그가 의식이 있었다면 꽤나 불평이 많았을 것이다. 그의 입에서 가 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스티브!" 애비게일은 그의 어깨를 흔들며 불렀다. 그의 몸을 덮었던 그녀의 외투가 미끄러져 땅 위에 떨어졌다. 그가 갑자기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잡았다. 비록 힘을 잃은 상태 지 만 그는 강한 남자였다. "이 나쁜 여자. 나에게 또 그 짓을 하려고...." "스티브, 나 애비게일이에요. 제발 놔줘요. 아프단 말이에요." "애비게일?"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려고 눈을 껌벅거렸다. "애비게일." 그의 손이 느슨해졌다. "스티브, 당신은 이제 안전해요." 그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는 이제 자신의 앞에 있는 여자가 누구란 것을 확 실 히 알아보는 듯했다. "핑크 빛 카네이션." 그는 중얼거렸다. "핑크 빛 카네이션이 무슨 뜻이에요?" "당신이 정말 나를 구하러 왔군." 그의 목소리는 감정에 북 받쳐 있는 것 같았다. "그래요. 당신을 돕기 위해서 왔어요."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아주며 울먹였다. "우린 집안으로 들어가야 해요. 일어설 수 있어요?" 그녀는 땅에 떨어진 자신의 외투를 주워 그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를 뒷좌석에서 끌어내는 일부터가 어려웠다. 그의 어깨를 부축하여 차 밖으로 끌어내니 어깨에 걸쳤 던 외투가 또 땅바닥에 떨어졌다. 거의 알몸인 그를 부축하여 현관 계단으로 끌고 갔 다. 차에서 두어 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를 가는 데도, 그녀는 숨이 찼다. 그의 몸뚱 이 가 바위덩어리처럼 그녀의 등을 눌러왔다. "스티브, 조금만 더 힘을 내요. 거의 다 왔어요." 위태롭게 비틀거리며 그녀는 그를 한 계단씩 위로 밀어올렸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 졌다. 그도 진땀을 흘리고 있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노력으로 그녀는 스티브를 침대 까지 데려다가 눌혔다. 그를 침대 위에 눕힌 다음, 그녀는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한 동안 말도 못하고 헐떡거리고만 있었다. "이젠 편히 주무세요, 스티브. 그들은 당신을 찾아내지 못할 거예요." "잠들면 안돼. 놈들이 오면..." 스티브는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다시 잠들어 버렸다. 그녀는 타월로 그의 몸에 흥 건한 땀을 닦아 주었다. 그는 팬티만 걸친 채 알몸이다. 그 팬티가 병원용인 것을 본 그녀는 그것마저 벗겨서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 병원 냄새가 나는 것은 보기도 싫 었 고, 그도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알몸인 그의 위로 모포를 덮 어 주었다. "스티브 당신은 극복해낼 거예요. 내가 옆에서 도와드리겠어요."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올리며 그의 귀에다 속삭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 반응이 없다. 10 작전회의는 중역실에서 오후 4시에 열렸다. 타원형의 커다란 테이블에 네 명의 남자 와 한 명의 여자가 둘러앉아 있다. 여자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볼 생각이다. 만약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갈 징 조가 보이면.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않게 멀찌감치 홍콩으로 달아나 버릴 계획을 세 워 놓고 있다. 그녀가 스털링에서 돈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그것 은 끝장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최후의 순간까지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결과는 두고 봐야 하는 것이다. 미리 겁을 먹고 이런 노다지판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사내 중의 하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다. 아주 신중한 타입의 사내로서, 불필요한 모험은 절대로 허용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이번 제의도 여러 각도에서 검토한 끝에 안전요원이 믿을 만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고용된 한 녀석 이 만사를 엉망으로 만들려고 작정을 한 것이다. 두 번째의 사내는 화를 내거나 두려워할 여유도 없는 듯이 보인다. 그는 이 일로 말 미 암아 입게 될 손상에 대해서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할 지경이다. 세 번째의 사내는 이 일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그리고 네 번째의 사내는 온몸에 비지땀을 흘리 고 있다. 그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나온 돼지 같은 형국이다. "그래, 조지." 화가 난 첫번째 사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예상 외로 너무 조용하여 , 돼지 같은 사내는 화들짝 놀랐다. "처음부터 다시 자세히 말해 봐.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빠뜨리지 말고 말이야. 그 팀은 스티브에 대한 질문을 8시에 끝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의 탈출은 밤 11시에 이루어졌다?" "그렇습니다." "8시 이후에 왜 그를 혼자 내러려 두었나?" "그는 심한 마취 상태에 있었습니다. 누가 옆에서 불이 났다고 외쳐도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어요." "그렇지만 넌 그의 옆에 지키고 있기로 되어 있었잖아?" "네. 하지만..." "자네가 그를 옆에서 제대로 지키고만 있었다면 아무도 그를 빼돌릴 수 없었을 거란 말이야. 내 말이 틀렸나?" 조지는 부들부들 떨고 있다. 테이블 아래에 모아쥔 그의 주먹 안에서 진땀이 배어났 다. 여자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지금 조지를 족친다고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급한 것은 스티브 클레이본이 이곳에서 자신이 당한 일을 떠벌리고 다니기 전에 그를 빨리 찾아 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대 말이 옳아." 상석에 앉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차분하게 조지에게 물었다. "당신은 그 간호사의 생김새를 말할 수 있겠어요? 머리카락이나 눈의 색깔 같은 것.. . " 어쩌면 박살나지 않고 온전하게 이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조지는 자신이 본 간호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 여자는 빨간 머리였어요. 말을 잘하게 생겼고, 눈빛은 푸른 편이었어요. 그리고 다른 한 여자는.... 그 여자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생각이 잘 나 지 않아요. 분명히 내가 아는 여자야." 그는 한참 머리를 쥐어짜는 표정이더니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소리쳤다. "프랭클린 박사였어! 애비게일 프랭클린이 틀림없어요!" "뭐라고!" 상석에 앉은 사내가 펄쩍 뛰었다. "틀림없어요." "나는 언제나 옳았어. 진작부터 그 여자를 처치해 버리자고 내가 말했었지." 다른 사내가 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좀 낫군요. 최소한 누가 스티브를 데리고 있는지는 알았으니까요." 여자가 다시 끼어들었다. "이제부턴 그 애비게일이란 여자를 찾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해요." 이렇게 않아서 밤을 지새울 수야 없지. 스티브는 아직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 고 있다. 그를 혼자 내버려 둔다는 것은 위험하다. 애비게일은 짙은 피로감을 느꼈다. 조 오멀리에게 전화를 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언뜻 생각났다. 전화는 부엌의 벽에 걸 려 있다. 첫번째 신호가 떨어지기도 바쁘게 친구가 받았다. "애비게일?" "그래." "아무 일 없어?" "별 일 없어." "스티브는 어때?" "침대에서 계속 자고만 있어. 나는 피곤해서 앞이 안 보일 지경이야." "그렇겠지. 너마저 정신이 나가기 전에 그곳 전화번호라도 알려 줘." "모르는 편이 네게도 안전할 거야." "하긴 그렇지." "내일 또 전화할게." 애비게일은 간호사 유니폼의 단추를 풀며 말했다. 전화를 끊고 침실로 간 그녀는 벗 은 옷을 의자 위에 던져 놓고 슬립 차림으로 시트 아래로 기어들었다. 피로가 그녀틀 금 세 깊은 수면 속으로 몰아넣었다. 애덤 구드윈은 패드럴 힐에 있는 자신의 저택 현관을 비틀거리며 올라갔다. 계단을 다 올라온 그는 숨이 차서 씩씩거렸다. 알코올과 각성제가 혼합되어 그의 정신을 몽롱하 게 만들고 있다. 골치가 마구 지끈거려 왔다. 교회당 뽀족탑 위로 내미는 아침해가 포 커의 하트처럼 그의 눈에 비쳐들었다. 그는 열쇠 구멍으로 키를 밀어넣는 데도 애를 먹었다. 간신히 성공하여 문을 열고 들 어가려던 그의 발에 마닐라 봉투가 채었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비틀거리는 몸을 가 누었다. 빌어먹을 봉투 때문에 엉덩방아를 찧을 뻔한 것이다. 그는 벽에 손을 짚은 자세로 마닐라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술기운 때문에 도무지 숨 도 쉬기 어렵다. 그런데 이 따위가 뭐냔 말이다. 그는 제법 두툼한 그 봉투를 주워서 부 엌의 쓰레기통에 쑤셔박아 버렸다. 집안의 공기는 그가 부재중에 누군가가 죽은 것처 럼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그는 부엌 식탁 위에 자신이 먹고 내버려 둔 찌꺼기들이 그 대로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냄새는 거기에서 나는 것이다. 쓰레기통을 끌어당겨 놓고, 그는 식탁 위의 것들을 모조리 쓸어넣었다. 그리고는 바 로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래도 머리는 터질 듯이 아 프 다. 이럴 경우의 약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독한 위스키를 한 잔 마시고 침대 위에 엎어지는 것이다. 술 진열장으로 향하던 그의 눈에 자동응답기의 램프가 깜박이는 것 이 들어왔다. "제기랄." 그는 버튼을 눌렀다. "컨코드 보험회사의 프레드 에지워터라네. 지금 시각이 금요일 오전 10시, 급히 전화 를 해주게. 샤론 클레이본의 보험금에 대해서 급히 상의할 일이 있네." 좋았어. 마침내 지불하겠다는 얘기로군. 주말 내내 집을 비워 둔 것은 실수였어. 응 답 기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프레드 에지워터가 다시 전화하네. 금요일 오후 1실세. 자네와 즉시 연락하지 않으 면 안되네. 우리 집으로 전화해 주게. 번호는 666-5021." 세 번째 메시지는 에즈라 혼비로부터였다. "컨코드 보험에서 나에게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왔소. 대체 무슨 일이오? " "걱정 마, 늙은이. 당신은 틀림없이 당신 몫을 받게 될 테니까." 애덤은 술내음나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프레드 에지워터의 목소리가 또 흘러나왔다. "구드윈 씨. 일요일 오후 2시야. 당신이 서명해야 할 급한 서류가 있네. 하는 수 없 이 메신저 서비스를 통해서 자네 집으로 보냈네. 서류를 검토한 즉시 전화를 해주게." 긴급 서류? 메신저 서비스라고?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부엌의 쓰레기통으로 걸어 갔다. 뚜껑을 열고 쓰레기 속에서 마닐라 봉투를 집어올렸다. 봉투의 발신인을 보니 컨코드 보험회사였다. 겉봉을 뜯어서 싱크대에 던져 버리고 그는 알맹이만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눈앞이 몽 롱하여 글씨를 읽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클레임이 거부되었다'라는 글씨가 그웠 눈 에 뛰어 들자. 그는 술기운이 확 달아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테이불 위에다 펴놓고 자세히 살펴 보기 시작했다. 자살은 예외조항의 하나였다. 빌어먹을. 그는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한 던 터다. 왜냐하면 샤론이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실이 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그 사실을 클레임 담당자에게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 병원측은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그녀가 약을 과용한 결과로 빚어진 사고사라는 것 을 끝까지 주장하지 못하는 것 일까? 그 바람에 이제 그는 배당을 찾아먹지 못하게 되 고 말았다. 그리고 에즈라 혼비도 자신의 몫 50,000달러를 날려 버린 셈이다. 그 늙 은 너구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아마 길길이 날뛸 것이다. 그렇지만 혼비가 어쩌겠는가? 경찰에 고발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며 애덤은 침대 위에 코를 처박았다. 애비게일은 따뜻한 쪽으로 자꾸 파고들었다. 의식이 꿈과 현실 사이를 넘나들면서도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따뜻한 숨결이 자신의 뺨에 규칙적으로 와닿았 다. 묵직한 것이 그녀의 가슴을 누르고 있다.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털이 부 숭부숭한 건장한 팔이 놓여 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보았다. 떡 벌어진 어깨와 금발이 눈이 들어왔다. 스 티브,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안도하게도 하고, 또 불안하게도 했다 . 쌀쌀한 아침 기온 때문에 아마 두 사람은 연인처럼 서로를 껴안게 된 것 같다. 그렇 지 만 우린 연인 사이가 아니야. 그녀는 속으로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스티브의 얼굴을 조용히 살펴보았다. 그의 눈 주위에 푸르스름한 원이 그려져 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혈색이 좋다. 그는 입술을 약간 벌리고 편안한 표정 을 짓고 있다.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녀의 눈길이 그의 이 마 에 나 있는 흉터에 멎었다. 그러자 그는 위험한 남자라는 생각이 다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금이라도 깨어난다면, 그는 어떤 행동을 취할까? 애비게일은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치우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녀가 움직이자 그의 팔이 그녀를 더 힘껏 안았다. 그녀는 그의 팔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댔다. 와락 무서 운 생각이 덮쳐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그의 눈이 불을 내뿜듯 그녀를 쏘아보고 있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가 소리쳤다. 그녀는 침착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서워서 버둥대면 안 된다. 그 를 더 자극하게 될 것이다. "스티브, 안심하세요. 이젠 괜찮아요."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는 다시 소리쳤다. "스티브, 정신차려요. 나를 알아보시겠어요? 애비게일이에요." "애비게일? 온 제기랄!" 그는 머리를 싸안고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드세요? 당신은 납치되어 마취 상태에 있었어요. 생각나세요? 생각 나 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 보세요." "미셸." 그가 힘없이 말했다. "블루 스타 카페에서 그 미셸이란 여자가 내 맥주에다 약을 넣었어." "그 다음엔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애비게일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좋아요, 스티브."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감싸쥐며 굴렀다. "칼로 머리를 찔러서 비트는 것 같아. 아, 제기랄..." 한참 후에 통증이 가라앉자. 그는 애비게일에게 물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월요일이에요."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동쪽에서 막 떠오르고 있다. "월요일 아침이라.... 블루스타에 간 것은 토요일 아침이었어. 그러니까 거의 48시간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얘기로군." 그는 일어나 앉으려다가 다시 얼굴을 찡그리며 모로 쓰러졌다. "다시 두통이?" "괜찮아." 그는 자신의 팔뚝에 난 주사 자국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동안 멍청히 생각에 잠 겨들었다. "스티브, 이젠 괜찮아질 거예요." 애비게일은 그를 위로하면서도 제발 그렇게 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나를 위로하려 들지 말아요. 누군가가 내 정신을 돌려 놓으려고 약물을 투입했지?" "그들은 당신을 마취시켰을 뿐이에요." "무슨 약을 사용했지?" "지금 조사중이에요. 당신은 우선 충분한 휴식이 필요해요." 그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당신은 또 슬립 차림이군. 그건 습관인가?" 그의 입술이 예상 외로 미소를 그리고 있다. 애비게일도 미소를 지었다. "그런 농담을 하시는 걸 보니 이젠 좀 괜찮아진 것 같군요."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자,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왔다. "내가 스털링 클리닉에 입원해 있었나?" "그래요." "지금 이곳은 어디지?" "안전한 곳이에요. 우리 아버지 친구분의 별장이죠. 동해안이에요." "그렇다면 병원 당국으로부터 숨어 있다는 뜻인가?" "맞아요." 스티브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리고는 금세 번쩍 뜨며 물었다. "당신이 나를 그곳으로부터 구해냈군, 그렇지?" 애비게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얘기하자면 길어요." "그러다가 당신까지 그들의 손에 걸려들면 어쩔 뻔했어?" "안 걸려들었잖아요."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이 스르르 플리더니, 그는 그녀의 두 뺨을 손으로 만졌다 . "정말 고마워." 그는 속삭이듯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는 그런 말은 좀처럼 사용하지 않을 텐데. 애 비게일은 왠지 가슴이 벅차옴을 느꼈다. "일어나야겠어." 그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모포를 걷어내려다 말고 그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알몸이잖아! 내 옷은 어떻게 했지?" 애비게일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신은 병원에서부터 알몸이었어요." 그녀의 말은 변명처럼 들린다. "그리고 어젯밤 상태로는 당신을 혼자 둘 수가 없었어요." 그는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마침내 말했다. "문제는 내가 당신을 그대로 두었느냐는 거지." "당신은 밤새 의식이 없었는걸요." "이런! 기회를 잃었군." 그는 짓궂게 웃었다. "이젠 살 만하신 모양이군요. 그런 농담을 하는 걸 보니." 애비게일도 웃었다. "내가 입을 만한 옷이 있겠소?"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빨리 찾아오는 편이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좋을 거야." 스티브는 오전중에는 아무런 후유증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의 통증도 차츰 가라앉고 있는 듯이 보였다. 웨인즈 씨의 옷은 그에게 턱도 없이 짧아서. 그는 껑충한 모습으 로 비치 체어에 앉아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발작 증세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 는 마치 머릿속이 팅빈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다. 지난 48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를 위해서, 애비게일은 부드러운 수프를 끓 여 다 주었다. 수프를 먹고 난 그는 그녀가 도와주겠다는 말을 뿌득뿌득 뿌리치며, 그동 안 자라난 수염을 밀었다. 면도를 하고 난 그의 모습은 한결 생기가 돌아 보였다. 그 가 면도를 하는 동안 애비게일은 그가 자신의 가슴털이 깎여 버린 이유를 묻지 않을 까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그는 묻지 않았다. 묻기가 두려워서일까? 오후가 되자 스티브는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까지 통나무처럼 이러고 있어야 하지? 지금의 내 기분이 아마 샤론이 느꼈던 기 분과 똑같을 거야."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스티브. 당신은 워낙 건강하니까 곧 기력을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꾸물대고 있는 사이에 놈들은 깊숙히 숨어 버리거나, 증거를 완전히 없애 버 릴 거야." "우리도 지금 당장 할 일이 있어요." "그게 뭐지?" 그는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난 48시간 동안의 당신의 기억을 되찾는 일이죠. 우리는 당신을 정신병동 특별실 에 서 찾아냈어요. 그곳의 상황을 내가 설명하면 무슨 기억이 떠오를지도 모르잖아요?" "좋아, 해보지." 그도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애비게일은 정신병동의 위치와 분위기, 특별실의 모양 등 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모든 문은 잠겨 있었어요. 문마 밖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구멍이 나 있었죠. 특별 실 은 병동의 안쪽에 따로 있었어요. 그곳은 허락된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 갈 수 없게 되어 있다더군요." 그녀는 스티브가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 표정을 감지했다. 그의 이마와 코끝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다. "초록색 벽의 방이었어." 그가 불쑥 말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누인 채 묶여 있었지. 사내가 한 사람, 그리고 여자가 하나 있었 어." "그들의 얼굴이 생각나요?"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게 흐릿했어. 눈에 기름이 잔뜩 낀 것처럼." "뻐드렁니가 엉망으로 나고 앞머리가 벗겨진 사내가 아니 었어요?" 스티브는 머리를 번쩍 쳐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맞았어." "그를 어떻게 알지?" "당신을 병원에서 싣고 나올 때 그자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어요. 그는 금요일 오후에 조지 내이퍼어란 이름으로 내 사무실을 방문했던 자예요." "그렇다면 내 생각이 맞았군." "미안해요. 그때는 당신 말이 믿어지지 않았어요." "나는 샤론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부터 누군가가 샤론의 돈을 노리고 살해했을 것이 라는 생각을 했어. 마일즈 스키너 같은 자가. 그러나 이렇게 되면 그보다 더 큰 음모 가 도사리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군." 애비게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당신은 나를 구해냈어. 내 말을 믿게 되었다는 증거지." 그는 조용한 눈길로 애비게일을 바라보았다. 11 저녁 무렵이 되자. 스티브는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다. 그는 베란다를 왔다갔다하며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요?" 애비게일은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다. "모든 걸 포기해 버릴까? 인도로 돌아가서 하던 일이나 계속할까? 볼티모어는 썩는 냄 새가 나. 정말 지겨워!" 애비게일은 그가 지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포기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이다. 악의의 실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여기까지 와서 포기란 있을 수 없 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적당한 자극제가 필요하다. "이봐요." 그녀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누워 있던 병실 건넌방에는 한 사내가 죽어 있었어요. 가슴에 수술 자국이 선 명하게 남아 있었죠." 그가 그녀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스티브. 당신 가슴에 있던 털을 밀어 버린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나요?" 그의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수술에 대해서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어!" "뭐라고 하던가요?" "수술은 아침에 하기로 되어 있다고 하더군. 그리고 수술을 하고 나면, 문제 하나가 해결된다는 말도 했어." "뭐라고요?" "내 가슴의 털을 깎기 전에 그들이 한 말이야." 애비게일은 그가 휘청거리는 것을 보았다. 자신이 기억해 낸 사실에 너문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했다. 그는 그녀를 뿌리치 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자신의 뺨을 갖다댔다. 잘린 털이 그녀 의 뺨을 따끔거리게 했지만, 그녀는 그의 심장인 뛰는 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싶었다. 그 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다. 그의 팔이 자신의 허 리를 조여오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헤치고 있다. 그 녀는 뜨거운 감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애비게일, 나를 좀 봐." 그의 무거운 목소리에 그녀는 무너지는 모래 위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고 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두 눈동자가 횃불처럼 그녀의 얼굴을 비치 고 있다. "당신이 나를 그곳에서 끌어내면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나는 조금전까지만 해도 상 상도 못했어." "당신을 그곳에다 버려 둘 수는 없었어요." "당신은 이제까지 내가 만난 여자 중에서 가장 고집 세고 용감한 여자야." "나는 단지..." 그러나 그녀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아 버렸기 때문 이다. 그의 키스는 부드러운 맛이나 세련된 맛이 전혀 없이 거칠기만 했다. 그것은 거 의 야만적이었고, 마치 활화산이 토해내는 용암처럼 뜨겁기만 했다. 그는 죽음에서 깨 어났으며, 자신을 죽음에서 건져내어 자유로운 삶을 되돌려 준 여자에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몰라하는 것 같았다. 그것을 표현하는 길은 오로지 키스밖에 없다는 듯이 그는 뜨겁고 거칠게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애비게일은 떨리는 몸을 가누지 못해서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는 48시간 동안이나 의 식을 잃고 있었던 남자답지 않게 강하고 뜨거웠다. 그의 키스는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축배였고, 의욕이었으며, 기쁨이었다. 망치로 두들기는 듯한 그 소리는 골이 흔들리게 만들었다. 애덤 구드윈은 절반쯤 잠 이 깬 상태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베개로 머리를 푹 눌렀다. 노크 소리는 끈질기 게 들려왔다. 아마도 세일즈맨이 진공 청소기나 잡동사니를 들고 찾아온 것일 것이다 . 그런데 왜 꺼져 버리지 않는 걸까? 노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듯하다. 중지시키려면 나가서 쫓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애덤은 욕설을 내뱉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손등으로 충혈된 눈을 문지르며 그는 현 관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그는 에즈라 혼비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문을 닫 아 버리기도 전에, 그 작달막한 늙은이는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당신이 여기에 올 이유는 없소." 애덤은 투덜거렸다. "또 질탕하게 마셔댔군. 마치 지옥에라도 다녀온 몰골이야. 알코올은 악마의 음료라 는 걸 모르나?" "뭣 때문에 여기까지 왔소?" "돈 때문이지. 거래한 사실을 잊었나? 한꺼번에 줄 수가 없다면 주말까지 20,000달러 만이라도 해주게." "정신이 나갔소?" 애덤은 두통이 다시 일어났다. "당신은 오늘까지 수표를 건네주겠다고 했잖나?" "회사에서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소." 애덤은 노인이 펄펄 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클레임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나중 에 적당히 둘러댈 셈이다. 혼비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빛났다. "컨코드에서 어떤 친구가 나에게 귀찮은 질문들을 해왔어." "그들은 잘 처리할 거요." 애덤은 노인을 안심시켰다. "나는 기다릴 수 없어. 당장 먹여 살려야 할 식구들이 있단 말일세. 하느님의 일이 당 신 때문에 지장을 받아서는 안되지. 주말에 다시 오겠네. 돈을 준비해 두는 것이 좋 을 걸세." 애덤은 노인이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한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샤론의 보 험증서에서 보험금 수혜자 이름을 바꾼다는 생각을 해냈을 때에는 일이 틀림없이 성 공 하리라는 확신이 섰던 것이다. 샤론은 에이전트인 그에게 수혜자를 그녀의 남편에서 스티브로 바꿔 달라고 의뢰했었다. 그는 모든 절차를 끝내 놓고, 이름만 적지 않은 증 서를 보관하고 있다가, 한 달 전에 수혜자를 나자로 자선단체로 기입해 버렸다. 보험 증서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누구도 의심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일이 묘 하게 꼬이고 만 것이다. 동지로서의 혼비는 아주 쓸모가 있다. 그러나 적으로 돌린다 면,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 있는 늙은이다. 애덤은 진땀이 났다. 이 골치 아픈 일에서 헤어날 길은 없을까? 어쩌면 그 빌어먹을 조너던 와인드험 녀석에게서 그 돈을 받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 길밖에 없 어. 그렇지만 그녀석과 어떻게 접선을 한담? 스티브가 잠시 잠든 틈을 이용하여 애비게일은 자신의 아파트로 전화를 걸었다. 자동 응답기에는 몇 사람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첫번째 것은 밀리사 웩슬러였다. 퍼즐 박스를 맡긴 꼬마 숙녀님이 무언가를 발견해낸 모양이다. 시내로 돌아가면 찾아가 봐 야지. 다음 두 건의 메시지는 그녀의 가슴을 써늘하게 만들었다. 둘 다 스털링 클리닉에서 만났던 도널드 켈로그 박사에게서 온 것이다. 그는 긴급히 얘기할 것이 있다면서 전 화 번호를 남겨 두었다. 애비게일은 그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다. 스티브와 상의하기 전에는 함부로 전화하는 것도 위험하다. 그녀는 조 오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까지는 잘 돼가는 모양이지?" 친구는 물었다. "기본적으로는." "애비게일, 널 체포하라는 영장이 떨어졌어."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다. "정확한 사유가 뭐래?" "불법 침입이야. 환자를 납치했다는 얘기는 없어. 나에 관한 얘기도 일체 없고." "흠. 스티브에 관해서는?" 애비게일은 침착하게 말하려고 애를 썼다. "그에 관한 얘기도 없어. 널 찾으면 스티브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겠지. 크레디트 카드를 사용하지 마. 그들이 추적할지도 모르니까."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돈은 충분히 가지고 있어? 내가 좀 보내 줄까?" "당분간은 충분해." "참, 에드워드 클레이본의 사망 원인을 알아냈어. 그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더군." "그럴 줄 알았지. 세실이 거짓말을 한 거야. 아니면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속였든가. " "스티브의 혈액 검사도 결과가 나왔어." "무척 바빴겠군." 여탐정은 혈액에서 체취된 성분에 대해서 늘어놓았다. 두 종류는 아주 강력한 마취제 였고, 한 가지는 법으로 금하고 있는 환각제였으며, 또 다른 하나는 군대에서 사용하 는 죄수 신문용 약품이었다. 조의 설명을 듣고 난 애비게일은 정신이 아찔했다. 결 과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마구 약물을 투입했다는 얘기다. 스티브가 저만 하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주 지독하지?" 조 오멀리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정말 악독한 인간들이야." "다른 부탁은 없어?" 그때 스티브가 누워 있는 방에서 무언가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내일 또 전화할게. 스티브에게 가봐야겠어." 그녀는 재빨리 전화를 끊고 스티브의 방으로 달려갔다. 스티브는 문간에 휘청거리며 서 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고, 눈알에는 핏발이 선 채 초점이 흐려 있다. 그 의 가슴은 격하게 오르내렸다. "스티브?" 그는 대답이 없다. "스티브?" 그러자 그는 그녀를 처음 본 것처럼 바라보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거야?" 애비게일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다시 정신이 빙글 돌아간 것이다. 피 곤 할 것 같아서 한숨 재운 것이 역효과를 나타낸 모양이다. "당신은 안전해요. 여긴 당신 친구의 집이에요." 그는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그제서야 눈빛이 제대로 돌아왔다. "당신은 오늘 아침에도 그런 말을 했었지. 안 그래?" 그는 느릿한 말투로 물었다. "맞아요." 그러자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린 하루종일 여기에 함께 있었어. 정말 내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모양이로군." "이젠 차츰 좋아질 거예요. 당신 몸에 투입된 약물의 내용을 알아냈으니까요." 애비게일은 조와의 얘기 내용을 그에게 설명했다. 그는 약물의 내용에 충격을 받은 표 정을 지었다. "환각제라고? 그래서 그런 꿈속을 헤매고 다녔구나." "뭐라고요?" "어떤 꿈 말인가요?" "핑크 색 카네이션 구름 위를 둥둥 떠다녔지. 당신의 키스를 받으며." "당신의 꿈에 내가 나타났단 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래, 가끔." 그는 수줍은 듯이 말했다. 애비게일은 그가 대화 내용을 바꾸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 았다. "당신이 기억을 잘못하는 원인은 펜토탈 나트륨 때문이란 걸 알아냈어요. 그 약품은 기억을 상실케 하는 효과가 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그 약을 내게 주사한 거지. 그들은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어. 그들 이 나에게 주사한 약물은 나로 하여금 대답을 하도록 만들었지. 내가 그들에게 무슨 얘기를 한 것 같아?"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요. 다행인 것은 당신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 이 에요. 우리는 아직도 그들이 한 짓을 모르고 있잖아요." 그는 웃으려다가 말았다. "당신 말이 맞아. 우린 아직도 그들의 음모에 대해서 모르고 있어. 정말 기분 나쁘게 도." 애덤 구드윈은 에즈라 혼비가 아무래도 말썽을 일으킬 것 같아서 뒤가 켕겼다. 급한 대로 몇 군데 친구에게 전화를 거니, 5,000달러 정도는 유통이 될 것 같다. 그만한 돈 이면 우선 늙은이의 입을 당분간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돈을 구해서 나 자로 구호 단체로 찾아갔는데 노인은 만날 수 없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지고의 선이라고 믿고 있는 노인을 다룬다는 것은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샤론 클레 이 본이 아니었다면 혼비 따위는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자선 단체에 뛰어드는 통에 그 자 신도 에즈라 혼비와 교분을 트게 되었던 것이다. 샤론은 정말 다정다감하고 정열적인 여자였다. 그런 여자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은 남 자로서는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샤론은 그의 능력으로 는 좀 힘에 부치는 여자였다. 그녀의 요구와 수준에 그 자신을 맞춘다는 것은 너무 무리 였던 것이다. 샤론이 나자로 구호 단체에서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에 대 해서 걱정스 런 표정으로 그에게 얘기했을 때, 그는 무언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에즈라 혼비의 행 적과 단체의 예산을 추적해 가며 조사하던 그는 나자로 구호 단체와 스털링 클리닉과 의 사이에 비밀 거래가 있다는 증거를 포착해냈고, 그것이 나자로 구호 단체에서 행 방 불명된 사람들과 관계되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이용하여 스털링 클리닉에 접근했다. 그들에게 플러스 알 파를 줄 수 있는 위치에 자신이 있음을 은근히 암시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제 대로 먹혀들었다. 그리하여 그와 스털링 클리닉, 그리고 나자로 구호 단체와의 삼각 관 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는 그 거래가 언제까지나 이루어질 걸로 생각했었다. 그 런 데 이제 그것이 뜨거운 화로가 되어 그의 얼굴에 쏟아질 판이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냉장고에서 아이스 버킷을 꺼내어 버번 한 병과 함께 들고 침대 위로 기어올라갔다. 골치 아픈데 술이나 마시자고 그는 마음먹었다. 리모콘으로 텔레 비전을 켜고는 볼륨을 최대한으로 올렸다. 제기랄,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구먼.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버번을 병째 들이켰다. 만약 그가 텔레비전을 켜지만 않았다면, 뒷문을 여는 쇠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 른다. 그리고 그가 버번에 취해 정신이 얼떨떨하게 되지만 않았어도, 홀의 판자 바닥 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놀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침실 문을 막아서는 침입자의 얼굴을 보고도 처음에는 멍청한 표 정을 지었을 뿐이다. "뭐야?" 그는 술취한 소리로 침입자에게 소리쳤다. "아, 당신은 내가 왜 왔는지 알아맞힐 수 있을 거야." "이젠 좀 쉬도록 해요." 애비게일은 저녁식사를 끝내고 접시들을 치우면서 말했다. 스티브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야겠어. 머리가 벽에 부딪친 것처럼 띵하군." "그래도 많이 좋아진 거예요. 이제 시간이 흐르면 그동안 잊어버렸던 일들이 하나씩 떠오를 거예요. 가서 텔레비전이나 보시지 그래요.?" "오케이."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로 돌아오니. 스티브는 볼티모어 지역의 뉴스를 보고 있다. "우리들에 관한 얘기는 없어." 그는 애비게일에게 말했다. 애비게일은 들고 온 쟁반과 컵을 탁자 위에 놓았다. "이게 뭐지?" "핫초콜릿이에요." "핫초콜릿이라고? 먹어 본 지가 여러 해 됐군." 그는 애비게일이 건네주는 컵을 받아 한 모금 맛보고는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좋은데." 애비게일은 그가 눈에 띄게 느긋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도에 대해서 얘기 좀 해보세요. 그들은 아직도 코끼리를 타고 다니나요?" 스티브는 웃었다. "쇼를 할 때나 타지." "그곳에서 사는 것이 좋아요?" "좋았지. 하지만 이렇게 잠시 떠나 있는 것도 좋군. 그곳은 지금 한창 더운 계절이니 까. 몬순 시기도 다가오고 말이야." "인도 말 잘하세요?" "그 나라는 상용어만도 14가지나 돼. 게다가 사투리까지 지독하지." "당신이 살고 있는 집은 어때요?" "벵골 만 근처의 잠셰드푸르란 곳에 있어. 대지만 4만 평방미터쯤 되지." "정원이 굉장하겠군요. 보고 싶어요." "보면 좋아할 거야."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곳을 가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비게일은 속으로 생각했다. 인도는 여러 가지 신비에 둘러싸인 나라로 그녀에게는 인식되어 있다. "나에 대해서 또 알고 싶은 것이 있소?" "그 이마의 흉터는 왜 생겼어요?" 그 질문은 생각도 없이 불쑥 튀어나왔다. "술집에서 싸우다가 얻어맞았지." "당신은 정말 못 말릴 남자로군요." 그는 피식 웃었다. "친구와 함께 홍콩에서 팬틴 도박을 했어. 종지 밑에다 동전을 넣고 그 수를 4로 나 눈 나머지가 얼마인가를 알아맞히는 중국 도박이지." "지루할 것 같은데요." "그래도 홍콩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게임이야. 그런데 우리와 놀던 상대방 녀석들이 스 코어를 속였던 거야." "그런데도 그냥 일어서서 나와 버리지 않았군요?" "1,500달러나 되는 내 돈을 두고 물러설 수야 없었지." "그 통에 이마에 상처만 입었잖아요." "당신은 그녀석들을 보지 않아서 몰라. 중요한 것은 그 난장판 속에서도 우리는 돈을 챙겨서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그곳을 떴다는 얘기야." "장하군요." 애비게일은 눈을 흘겨 주었다. 스티브는 모처럼 껄껄 웃었다. 두 사람은 얘기를 좀더 하다가 일어났다. 애비게일은 그를 좀 일찍 재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밤엔 혼자서도 주무실 수 있겠죠? 가서 주무세요." "당신은 어디서 자려고?" "저 소파에서 자겠어요." 스티브는 잠시 머뭇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는 표정이었다. "핫초콜릿 고마워." 하지만 그 한마디만 내뱉고는 침실로 향했다. 소파에 누워 모포를 목 아래까지 덮고 눈을 감았지만, 애비게일은 쉽게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스티브는 괜찮을까? 혼자서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에 대한 나의 감 정 은 또 뭐람?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냉철하게 판단한다면 그는 나와 맞는 남자가 아니야. 그런데도 왜 그에게 자꾸만 끌리는 걸까? 그런 잡다한 생각에 골몰하다가 어느새 깜박 잠이 든 모양이다. 무언가 쿵! 하고 부 딪 치는 소리에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스티브가 자는 침실문이 쾅! 소리를 내며 밖으 로 열렸다. 그녀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서 스위치를 올렸다. 땀으로 범벅이 된 스티브가 눈에 불 을 키고는 거실로 뛰어 나왔다. "다시 내 몸에 손을 대면 죽여 버릴 테야! 주사기를 치우지 못해!" 그는 미친 사자처럼 포효했다. "스티브!" "치우라니까! 저리 치우라구!" 스티브는 다시 스털링 클리닉으로 돌아가 있었다. "스티브, 정신차려요! 난 애비게일이에요." 그녀는 그의 팔을 잡으려다가 사납게 뿌리치는 힘에 의해서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는 비호처럼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그가 문을 활짝 열어 젖히자 한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칼날처럼 때리며 들어왔다. "스티브! 나가지 말아요!" 그러나 그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바람소리에 묻혀 그녀가 부르는 소리 는 그에게 들리지도 않는 것 같다. 그녀는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희뿌연 달빛 아래 서 그녀는 그의 그림자가 서둘러 해변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숨을 헐떡 이며 그의 뒤를 쫓아갔다. 차가운 바람이 슬립만 입은 그녀의 온몸에 사 정없이 파고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스티브, 멈춰요!" 그녀는 소리를 질렀지만 어둠이 그녀의 소리를 삼켜버렸다." 그의 기다란 두 다리는 이제 휘청대지 않았다. 그는 마라톤 선수처럼 힘차게 바다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 그의 기다란 몸뚱이가 시커먼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애 비게일의 눈에 들어왔다. 12 "스티브!" 애비게일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시커먼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스티브의 팔이 수면 위 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를 구해야 해. 그녀는 발밑의 검은 바위를 걷어차면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그녀를 삼켜 버렸다. 그녀는 차가운 바다 속으로 자신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수면 위로 솟아오르며 숨을 들이켰다. 파도가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그녀의 미숙한 수영 솜씨로는 거친 파도를 이겨낼 수가 없다. 그녀는 정신없이 버둥거리며 다 시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스티브를 구할 수가 없다. 어쩌면 그녀 자신도 구할 수 없 을지도 모를 지경이다. "애비게일!" 그녀는 허우적거리는 가운데서도 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녀는 다시 물위로 자신의 몸을 솟구쳐 올렸다. 그러자 강력한 손이 그녀의 겨드랑이 를 잡는 것을 느꼈다. "애비게일!" 그녀는 기침과 함께 짠물을 뱉어내며 그의 강한 어깨에 매달렸다. "안심해! 내가 당신을 잡고 있어." 그녀는 그의 말에 복종했다. 스티브, 그가 자신을 잡고 있는 것이다. 스티브는 능란한 수영 솜씨로 그녀를 해변의 모래사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이를 사정없이 부딪치면서 덜덜 떨었다.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다. 스티브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며 말했다. "빨리 집안으로 들어가야겠어. 이러고 있다간 얼어죽겠다." 그녀는 그의 목에 매달려서 뺨을 그의 차가운 가슴에 갖다 댔다. 집안으로 들어오 자 따뜻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스티브는 그녀를 소파 위에 눕히고는 욕실에서 타월을 가져와서 그녀의 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수영도 할 줄 모르잖아?" 그가 나무라듯 말했다. "약간, 약간은 할 줄 알아요." "그런데도 뛰어들었어?" "당신을 구하려고..." "어느 쪽이 미쳤는지 모르겠군. 맙소사! 당신은 죽을 뻔했어." "스티브, 당신이 빠져 죽도록 버려 둘 순 없었어요." 스티브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타월로 그녀의 몸을 계속 문지르기만 했다. 언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는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차 츰차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어느 순간에 내려왔는지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에 와닿았다. 키스가 차츰 격렬해져 왔다. 그가 타월을 걷어내고 물에 흠뻑 젖은 그녀의 슬립을 벗겨 냈다. 거실의 불빛 아래 그 녀의 백옥 같은 육체가 하얗게 드러났다. "오, 맙소사. 애비게일." "알아요, 스티브." "나는 당신과 사랑을 나누는 꿈을 수도 없이 많이 꿨어. 내 정신이 아주 나가 버린 상 태에서도 말이야." 그의 키스는 그의 말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알아요. 스티브 알고 있어요." 조지 내쉬는 조그마한 방안에서 초조하게 왔다갔다하고 있다. 그 방은 정신병 환자들 이 사용하는 방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를 냉대하지는 않았다. 그 러 나 애비게일 프랭클린이 스티브 클레이본을 홈쳐가 버린 뒤로는, 그들은 그를 병원 밖 으로 내보내지 않고 있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겁내는 것일까? 그는 이 감옥 같은 곳에 갇혀서 경찰에 밀고할 수도 없다. 어쩌면 그 방법이 가장 안전할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경찰에 가서 사건의 전말을 모조히 불어 버리면, 그만은 죄를 면제받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문이 열리자 그는 기대감을 갖고 돌아보았다. 보스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는 프랜시스 배크먼이란 여자다. "어떻게 지내세요?" 그녀는 물었다. "아. 좋아요....당신은?" 그는 자신의 말에 비꼬는 기미가 느껴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사장님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아서.... 하기야 실수를 인정하셔야죠." 조지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째서 자꾸만 으스스한 생각이 드는 걸가? "그렇지만 난 당신을 좋아해요. 조지, 그래서 사장님께 좋은 말을 많이 해주고 있어 요." "고맙소."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래서 당신을 당분간 이 도시 바깥으로 내보내는 편이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렸죠. 브라질쯤으로 가서 얼마간 휴가를 즐기시면 어때요?" 그건 너무 후한 조처로 여겨진다. "무슨 계략이지?" "우린 당신에게 시킬 일이 있어서 그러는 거예요." "무슨 일?" "경찰에 있는 우리 끄나풀에게 돈을 지불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애비게일 프 랭클린이 동해안에서 목격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왔어요. 그녀를 찾아내는 즉시 누군가 가 그녀를 데려와야만 해요." "그래서 나에게 어쩌란 거요?" "계획이 확정되는 대로 당신에게 연락하겠어요." 갈매기 울음소리에 애비게일은 잠이 깼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잠들어 있 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의 어깨로 손을 가져가다가 멈친다. 그와의 사랑은 정말 멋진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그와의 사이에 어떤 확고한 것이 형성 되 었다고는 그녀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열이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어젯밤의 수영이 좀 무 리 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실에서 핸드백출 찾아 아스피린이 있는지 살펴 보 다가 컴퓨터 용지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그것이 스털링에서 빼 낸 정신질환자들의 자료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조 오멀리가 부탁한 것이다. 스티브와 의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그것을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그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스티브가 거실로 나오다가 의아한 눈길을 던지 며 물었다. "그게 뭐지?" "스털링에서 빼낸 컴퓨터 자료예요." "어떻게 빼냈어?" "그날 나는 스털링에 두 번이나 갔었어요. 조와 내가 당신을 데려나온 것은 두 번째 였 죠. 그 이전에 나는 연구실로 숨어들어 자료들을 빼냈어요. 그래서 당신이 그곳에 있 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나에 관한 자료도 빼냈단 말이야?" "그렇다니까요." "좀 보여 줘. 그녀석들이 뭐라고 기록했는지 보게." "당신 것은 샤론의 기록을 그대로 복사한 것 같았어요. 이름과 입원 날짜만 달랐죠." 그는 그녀의 손에서 서류를 받아들었다. "이건 아니에요. 당신과 샤론의 것은 내 아파트에 두고 왔어요. 여기에 적혀 있는 환 자들은 최근 몇 달 사이에 스털링에서 죽은 사람들이에요. 모두가 가난한 정신병자들 이죠." 스티브가 테이블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는 동안 애비게일은 부엌으로 가서 커피를 끓였다. 그녀가 커피를 가져와서 테이블에 놓자, 그는 서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 었다. "이 열여섯째 줄에 표기한 것은 무슨 뜻이지?" 애비게일은 서류를 들고 살펴보았다. "잘 모르겠어요. 내 생각엔 조직 이식 적합검사에 관한 설명 같아요." "환자들에겐 으레 실시하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녀는 다른 양식도 모두 살펴보았다. 어디에나 그 표기가 되어 있다. "사망 원인은 또 어때?" "여기엔 심장마비부터 시작해서 악성 빈혈, 간경변증 등 없는 것이 없군. 어떤 패턴 이 없는 것 같아." 애비게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군요." 그러자 또 다른 생각이 떠올라. 그녀는 서류의 우측 상단을 모조리 살펴보았다. 그것 들은 모두 루이스 텔 박사의 서명이 되어 있다. 스티브의 입원을 결정하는 서류를 작 성한 의사가 아닌가? "정말 이상해요." 그녀는 말했다. "뭐가?" "이 루이스 텔이라는 사람 말이에요. 그가 당신의 입원을 결정했어요. 그래서 나는 정 신과 스탭진인 줄 알고 있었는 데, 여기엔 온갖 경우에 다 서명되어 있잖아요?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스티브는 손으로 가슴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 있다. "수술. 조직 이식. 환자의 시체."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이 모종의 불법적인 인체 실험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스티브는 그녀를 응시했다. "가능한 얘기지." "그런데 샤론이 왜 거기에 끼어들었을까요?" "형 데릭은 병원 이사진의 한 사람이야. 혹시 그가 무슨 짓을 하는 것을 샤론이 눈치 챈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자기 동생을 약 먹여서 죽여요?" 스티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데릭은 우리 아버지와 아주 홉사해.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 외에는 돈 밖 에 없어." 애비게일은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투에서 그녀는 증오심보다는 차라리 짙은 고독감 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녀는 무안한 눈길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정오 뉴스 시간이에요. 11번 채널을 돌려 봐요. 무슨 얘기가 있을지도 몰라요." 스티브는 채널을 돌리고는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오늘 정오 뉴스의 초점은..." 로컬 앵커 우먼인 자네트 쿡의 음성이다. "경찰은 패드럴 힐 저택의 애덤 구드윈의 살해자를 수사하고 있습니다." "애덤 구드윈이라구!" 스티브는 펄쩍 뛸 듯이 놀라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컨코드 생명 보험회사의 에이전트인 구드윈 씨가 이웃 주민에 의해서 시체로 발견되 었습니다. 목격자인 이웃 주민의 말에 의하면, 자정이 넘은 시각에 텔레비전을 너무 크게 틀어서 항의하러 올라가 보니, 구드윈 씨는 그의 욕실에서 시체로 쓰러져 있었 다 는 것입니다." 뉴스는 계속되었다.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로 하이랜드타운의 이스턴 애버뉴에 있는 나자로 자선 단체의 창설자인 에즈라 혼비를 체포했습니다." "애덤 구드윈. 내가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죠?" 애비게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말했었지. 그자는 샤론의 애인이었어." "맞았어요. 그가 죽었군요."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우중충한 건물을 비추고 있다. 헝클어진 머 리카락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건물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서 있다. 기자가 그중 한 사람에게 마이크를 들이 밀었다. "혼비 씨가 체포되었으니, 이 자선 단체는 어떻게 될까요?" "글쎄요. 정말 큰일입니다." "그가 정말 살인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리가 없어요. 그는 천사 같은 분이십니다. 언제나 착한 일만 하셨으니까요." 사내는 더러운 손톱을 보이며 손으로 입가를 훔쳤다. "그분은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잘 곳을 주셨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셨어요. 그 자신도 한때는 우리와 같은 처지였다고 늘 말씀하시곤 하셨죠." 애비게일은 화면을 보며 말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체포할 수가 있죠?" "무슨 증거가 있었겠지." "조에게 전화를 해봐야겠어요." 애비게일은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오멀리 앤 오멀리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나야. 애비게일." "애비게일! 그러잖아도 기다리고 있었어." "방금 텔레비전에서 애덤 구드윈이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어. 넌 자세한 걸 알고 있겠 지?" "당연하지. 컨코드 보험회사의 일을 내가 한두 가지 처리했나. 샤론은 그들과 보험 계 약을 맺고 있었어. 애덤 구드윈 씨는 그녀의 에이전트였지.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왜 보험 증서를 회사에 즉시 제출하지 않았나, 하는 문제야. 샤론은 자살을 했다는 이 유로 그 보험금은 지급되지 않았다고 하더군." "매우 흥미로운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보험금 수령인이 나자로 구호 자선단체로 되어 있다는 거야." "저런. 어째서 그렇게 됐지?" 스티브가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애비게일은 침실에 있는 전화기를 가리키며 그에게 말했다. "저쪽 전화로 받아요." 잠시 후 스티브가 전화로 말했다. "스티브 클레이본이오. 내게도 좀 말해 주시오." "많이 좋아진 것 같아서 기뻐요." 조가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고맙소. 이 일이 끝나면 만나서 회포를 풉시다." 조는 깔깔 웃었다. "좋고말고요." 그녀는 애비게일에게 한 말을 그에게 다시 설명해 주었다. "그렇다면 혼비와 구드윈이 공모해서 샤론의 보험금을 가로채려 했다는 얘기가 됩니 까 ? 그런데 샤론의 죽음이 자살로 판명되는 바람에 일이 틀려 버린 거죠. 그래서 혼비 는 구드윈을 살해했고." "에즈라 혼비가요?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그는 볼티모어에서 가장 존경받는 박 애주의자예요." 조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그 자선사업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구하러 다녔는지도 모르죠." 스티브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애비게일은 흑, 하고 숨을 들이쉬며 스티브를 바라보았 다. "조, 고마워.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잠깐만 기다려..." 애비게일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스티브가 거실로 걸어나오며 물었다. "왜 그래?" "그 사람 말이에요. 스털링 클리닉의 병실에 죽어 있던 남자, 방금 생각났는데, 그 남 자도 방금 텔레비전 화면에서 본 나자로 자선단체의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었어요." "뭐라고?" 스티브는 테이블 위에 아직도 펼쳐져 있는 빈민 환자들의 서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 덕였다. "대충 짐작이 가는군. 혼비는 가망 없는 환자들을 스털링 클리닉으로 보내 버린 거라 고." 애비게일은 소파에 털색 주저앉았다. "그는 돈이 필요했던 거예요. 아마 병원측에서는 그가 보내 준 머릿수 만큼 돈을 지 불 했겠죠. 그리고 그 사람들을 불법적인 생체실험에 사용했을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떨리고 있다. "이제야 내 생각과 근접했군. 이미 집도 가족도 없는 거리의 부랑자들, 몸도 병들고 굶주려서 더이상 가망 없는 인간들, 그들이 없어진다고 해도 누가 찾을 리가 없지." 애비게일은 온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스털링 클리닉에 대해서 한 가지씩 알아감에 따 라, 그것의 모습은 점점 악마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스티브가 그녀의 손을 잡아 주며 말했다. "뉴스를 보고 생각난 것이 있어." "뭐죠?" "그 애덤 구드윈이란 자 말이야. 난 그자를 만나러 블루 스타엘 갔었어." "오, 스티브. 그밖에 기억나는 건 없어요?" 그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쥐고 있던 그녀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리고 그자식..." "누구 말이에요. 애덤?" "나는 이제야 확실히 기억할 수 있게 됐어. 미셸과 어떤 건달이 나를 블루 스타에서 끌어내어 차에 실었을 때, 뒷좌석에 또한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어. 바로 나의 형, 데 릭이었어." 13 "데릭이 이 일에 관여하고 있음이 분명해." 스티브는 분개했다. "나를 차의 뒷좌석에 구겨넣자. 여자가 주사를 찔렀지." 그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애비게일은 그가 수술을 당할 뻔했다는 생각 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죽음의 직전에서 살아난 것이다. "이젠 좀더 자세한 것까지 기억나는군." 그는 이마를 찡그리며 생각을 모으고 있다. 애비게일은 그의 손을 잡으며 말없는 격 려 를 보냈다. 그의 기억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 자신이나 그녀를 위해서도. "그 간호사는 정신병동에 있었어. 그리고 나에게 몇 차례 더 주사를 찔렀지. 그 여자 와 조지 내이피어란 사내 같았어. 그리고 또 한 사내가 있었지." "데릭을 다시 봤어요?" "아니. 그렇지만 나는 많은 시간을 정신이 없는 가운데 보냈으니까." 그는 애비게일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내가 이런 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 당신은 알 수 있을 거야." "그래서 기뻐요." 애비게일은 속삭이듯 그에게 말했다. "아참 깜박 잊고 있었어요. 데릭은 나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샤 론의 입원 날짜에 대 해서죠. 샤론은 나에게 전화한 바로 그 날 입원했어요. 그래서 나는 데릭을 오전에 만 나지 못했는지도 몰라요." "그들이 납치한 바로 그날 당신에게 도와 달라는 전화를 했단 말이지?" "오, 스티브. 나는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도 몰랐어요. 경찰에다 전 화를 할 걸 그랬죠." "애비게일. 그건 당신 잘못이 아냐. 경찰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어!"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하지 마. 문제는 데릭이 거짓말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거야. 그는 당 신이 잘못 알아들었다고 할 거야." "그래요. 경찰은 오히려 그의 말을 믿을 거예요." "불행하게도 경찰은 내 말도 믿으려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도망친 정신병자니까." 그는 치를 떨었다. "우리가 지금 경찰에 출두하면. 그들은 스털링 클리닉에 바로 연락할 거야. 그러면 병 원에서는 나를 잡아다가 다시 정신병동에 처넣고, 조용히 만들기 위해서 또 주사를 찌 르겠지." "우리가 사건을 해결하기 전에는 그들이 당신 곁에 오지 못할 거예요." 애비게일은 다짐하듯 말했다. 스티브는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쥐며 말했다. "우린 해낼 수 있을 거야." "데릭이 이 모든 일을 지휘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는 자신의 사업만으로도 무척 바쁘거든. 비록 그 사업의 내 용 이 파렴치하고, 또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유업을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지만 말이야 . " "그렇지만 데릭은 내가 샤론을 돕고 싶다고 말하자, 나에게 적의를 드러내 보였어요. " "그가 관여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야. 그가 주도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얘기지." "이런 모의가 와인드험의 지시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세요?그는 명실공히 스털링 클리닉의 원장이에요." "일단 혐의는 둬야겠지. 또 누가 있을까?" 애비게일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켈로그라는 사내도 있어요." "그는 누구지?" "논문 관계로 만난 적이 있는 의사예요. 샤론의 기록을 열람하러 갔을 때 홀에서 그 를 만났죠. 어제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뭐라고?" "아파트 자동응답기에다 메시지를 남겨 왔더군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지도 몰라요." 스티브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위험한 일이야. 그는 사건의 중심부에 있다고 봐야 하니까. 그렇지만 하기에 따라서 는 유익한 정보를 그로부터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곳에서 나가서 다른 지점에서 전화를 하면 되죠, 뭐." "그러더라도 나는 아직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걸로 그가 알게 해야 해." 두 사람은 웨인즈 별장으로 숨어든 이후 처음으로 외출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애 비게일이 경관을 만났던 성 미가엘 방향은 피했다. 그들은 차를 몰고 이스턴 동쪽에 있는 마을로 가서 주유소 옆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를 이용했다. 애비게일이 전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리는 동안, 스티브는 종이와 연필을 들고 그녀 의 옆에서 대기했다. 동전을 밀어넣고 다이얼을 돌리는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 을 본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꼭 안아 주었다. 그녀는 살그머니 그의 가슴에 머 리 를 기댔다. "켈로그 박사님 좀 부탁할까요?" 그러자 금세 켈로그가 나왔다. "전화를 해줘서 정말 고맙소. 기다리고 있었소." "메시지를 들었어요.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그렇소, 프랭클린 박사. 이건 좀 미친 소리처럼 들리긴 하오만. 당신과 나는 지금 아 주 위험에 처해 있소." 스티브는 옆에서 듣고 있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무슨 말씀이죠?" 애비게일이 물었다. "지금 병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나도 조금전에 알았소." "그래요?" "이건 전화로 의논할 일이 아닌 것 같소. 하지만 몇 달 전부터 나도 이상하다는 생각 은 해왔었소." "나자로에서 온 사람들 말씀인가요?" "중고 부품을 공급받는 방법으로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소?" 중고 부품? 애비게일과 스티브는 서로 의미심장한 눈길을 교환했다. "그렇지만 샤론과 스티브의 경우는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들은 신분 이 확실할 뿐만 아니라, 병상 기록도 마구 바꿀 수 없는 것이었소. 그래서 나는 꼬치 꼬치 따지기 시작했지." "데릭이 샤론의 입원 날짜를 내게 속인 이유를 당신은 아세요?" 켈로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와인드험과 데릭이 하는 얘기를 들었소. 당신이 자꾸 캐물으니까 데릭은 겁을 집어 먹고 샤론이 몇 주일 전에 입원한 것으로 해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 거요." "그리고 샤론이 자신들의 일을 눈치채자, 그녀를 죽게 했군요?" "그렇소. 그들은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자신들의 사업을 위태롭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요. 그들은 무자비한 인간들이오. 이제 당신과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란 함께 힘 을 합쳐서 경찰에 알리는 거요. 우리 두 사람이 증언을 하면 그들도 수사를 피할 길이 없 을 거요. 하지만 우린 먼저 만나서 사태를 올바로 인식해야 해요. 우린 둘 다 체포되 어서는 안되오." 애비게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다. 켈로그의 말은 진지했고, 그는 또 명성 도 있는 남자다. 애비게일은 당혹한 눈길로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스티브가 종이 에다 글씨를 썼다. "왜 당신이 협조할 것이라고 생각했느냐고 그에게 물어 봐." "재미있군요. 그런데 왜 내가 협조할 것이라고 생각하셨죠?" "스티브를 병원에서 빼돌린 사람이 당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는 지금 상태가 어떻소? 괜찮소?" 애비게일은 미리 준비했던 대답을 해주었다. "형편없어요. 두뇌에 심한 손상을 입은 듯해요. 그에게 투입한 약이 어떤 거죠?"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를 위해서도 우리는 빨리 만나는 것이 좋겠소." "어떻게 만나죠?" "당신이 있는 곳을 말해 줘요. 차를 가지고 나가겠소." "켈로그 박사님. 당신을 믿고 싶지만, 지금의 내 입장을 이해하실 줄 믿어요." "옳은 말이오." "그러니 우린 서로 외통수를 만난 셈이군요." 켈로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공공장소에서 만나자면 응하겠소?" "가능하겠죠." "나는 와인드험이 하는 얘기를 듣고 당신이 동해안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 침착하려고 애썼지만 애비게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체서피크 만을 건너는 육교 위에서 한 경관에게 목격당했소. 그것은 와인드 험 이 당신을 찾는 것도 시간 문제라는 뜻이 되오." 애비게일은 스티브를 돌아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신을 만나겠어요." "올바른 판단이오." "당신이 말한 공공장소란 어디를 가리키죠?" "옥스퍼드 벨리브의 페리 호를 생각하고 있었소." "왜 하필이면 거기죠?" "트레드 에이번 강의 중심부까지 우리를 미행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애비게일은 이런 일에는 도무지 경험이 없다. "그럴 듯하군요." 그녀는 켈로그에게 말했다. "오늘 오후 6시까지 옥스퍼드로 가겠소." 기황 만나기로 한 바에야, 애비게일은 곤혹스러운 시간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고 싶지 않았다. "5시로 해요." "좋소. 그렇다면 지금 당장 나서야겠군요." "박사님의 차는 어떤 거예요?" "은색 메르세데스, 당신 차는?" 애비게일이 대답하려 하자, 스티브가 재빨리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고개 를 세차게 저었다. "프랭클린 박사? 듣고 있소?" 상대방이 물었다. "오, 미안해요. 내 차를 그대로 몰고 나갈 순 없겠군요. 경찰이 내 차를 찾고 있을 테 니까요." 그녀는 얼른 둘러댔다. "애비게일. 나를 못 믿겠소?" "물론 믿어요. 그렇지 않다면야 박사님을 만날 수가 없죠. 5시에 뵙겠어요." 그녀는 전화를 끊고 한시름 놓은 듯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자동차 모양을 그들에게 말해 주면 위험해. 계선장에서 페리 호를 기다리는 저격수 가 당신을 망원렌즈로 잡아 한 방에 날려 버릴 수도 있으니까." "저격수가요?" 애비게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을 결코 믿어서는 안돼. 우리를 끌어내기 위한 계략인지도 알 수 없어." "그를 믿지는 않아요. 다만 그가...." "잘 생각해야 해. 당신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애비게일은 마뜩찮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좋아요. 그와의 비밀 회의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하면 되죠?" "안 가는 것이 가장 좋아." "다른 대안이 없잖아요? 무슨 조처를 강구해야죠. 더군다나 와인드험은 우리가 이곳 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대요. 병원에서 탐색조가 벌써 이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그 정도는 나도 상상할 수 있어. 그렇지만 애비게일, 그 자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우린 모르고 있잖아. 그리고 텔레비전 뉴스에서도 아직 우리에 관한 얘기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어. 어쩌면 그자는 와인드험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렇지만 내가 다리 위에서 경찰을 만난 것은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가 선택한 장소 는 여기서 50km나 떨어진 곳이고요." "좋아. 그는 이미 우리가 어디쯤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랑데부 장소를 우리가 먼저 지켜보기만 한다면 승산은 우리에게 있어." "맞아요. 이런 상황에서는 나는 오래 생각하지 못해요." 스티브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기야 그렇지. 당신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시체가 되었을 거야." "무슨 그런 흉칙한 소릴!"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애비게일이 운전석에 앉았다. 스티브가 옆자리에 앉으며 물 었다. "켈로그가 한 말 중에서 짚히는 게 없어?" "중고 부품이라는 말과 수백만 달러짜리 사업이라는 말?" "그렇지." "글쎄요. 그들이 지금 벌어들이고 있는 돈을 의미하는 것 같기는 한데." "바로 그거야." 애비게일이 이마를 찡그리며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스털링에 갔을 때 앰블런스가 응급실로 요란하게 달려들어갔어요. 켈로그는 홀 에서 나를 만나자마자 곧 수술실로 불려갔죠." "그가 무슨 일을 했을 거라고 생각해?" 애비게일은 머릿속으로 열심히 생각하면서 떠오르는 느낌을 그대로 말로 뱉어냈다. "중고 부품을 수거하고 있었겠죠." 스티브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식용 장기를 말이지?" "말이 들어맞아요. 모르겠어요? 정신병자나 가난한 구호 환자들은 스털링에 들어왔다 가 자신들의 장기만 남기고 죽어 가는 거예요." 애비게일은 그 말을 내뱉으면서 심한 역겨움을 느꼈다. 그녀는 힘껏 백페달을 밟았다 . "그렇지만 내가 아는 한 그 장기들은 스털링에서 이식되지는 않아요." "볼티모어에서도 아닐 거야. 사용은 다른 곳에서 하겠지." "맞아요. 스털링은 국제 병원 네트워크에 가입되어 있어요." "뭐라고?" 스티브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왜 그래요?" "맙소사 6개월쯤 전에 나는 위험 지역에다 인간의 장기를 운반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 어. 특수 조건으로 말이야.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합법적인 절차를 거칠 시 간이 없다고 그들은 말하더군." "그런데 왜 당신에게 그런 의뢰가?" "아마 데릭이 추천했겠지. 그는 내가 하는 운수사업에 대해서 잘 아니까." "당신은 스털링에서 하는 일에 대해 알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이번 사건과 꼭 연관이 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고요." 애비게일은 차를 돌려 놓고 출발하려다 말고 말했다. "집에 돌아가기 전에 조 오멀리에게 전화를 해야겠어요." "왜?"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여러 가지를 좀 알아보라고 해야 죠." "독터 루이스에 대해서도 좀 알아보라고 해. 입원 서류에 서명한 친구 말이야." "좋은 생각이에요." 애비게일이 전화를 걸고 돌아왔을 때, 스티브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 는 웨인즈 별장에 당도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작전이 섰어." 그는 애비게일에게 말했다. "우선 당신이 옥스퍼드에 먼저 도착해야만 해. 그런데 그 페리는 어떻게 생겼지?" "그렇게 좋은 배는 아니에요. 보통 화물선처럼 생긴 것이죠. 자동차를 대여섯 정도 실 을 수 있을 정도예요." "선실도 없고?" "없어요." "좋았어. 그렇다면 자동차 외에는 숨어들 자리가 없겠군." 독터 도널드 켈로그의 전화를 도청하고 있던 사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애 비 게일이 걸어온 전화의 번호를 추적해 보았다. 그러나 그 번호는 이스턴의 외곽에 있 는 공중전화임이 확인되었다. 역시 그녀는 주의가 깊은 여자다. 아마 그녀의 은신처는 이 스턴이나 옥스퍼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옥 스퍼드 벨리브 페리에서 켈로그와 만날 약속을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여러 가지 골 치 아픈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해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라건대 그녀가 스티 브 를 데리고 나오기를, 그렇지만 설사 데리고 나오지 않더라도 두뇌에 손상을 입은 정 신 병 환자가 뛰어 봤자 벼룩이지. 그녀가 약속 시간을 5시로 당긴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준비해야 할 것은 많은데 시 간 은 너무 촉박하다.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켈로그의 메르세데스다. 그는 그 차 를 정비소에 서비스 의뢰를 해놓았다. 그렇지만 그 차를 실제로 사용한다는 확신이 서기 전에는 거기에다 특별한 장치를 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이제 그는 기술자에게 전화를 걸어 솜씨를 발휘해 보라고 할 판이다. 그리고 조지 내쉬가 기다리고 있다. 그는 벌써 며칠째 대기중이다. 이제 그 순간이 온 것이다. 그에게 사전 설명을 해 주기만 하면 된다. "경찰이 당신의 차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니, 웨인즈 씨의 픽업을 타고 가는 게 좋겠 어." 스티브가 아무래도 조심하는 것이 상책이란 듯이 말했다. "주인이 열쇠를 남겨 두지 않았어요." "염려 마. 내가 어떻게 해볼 테니까." 그들은 차고에다 차를 넣은 다음 픽업을 살펴보러 갔다. 옆쪽에 하얀 줄무의가 처진 픽업이다. "됐어." 스티브가 자세히 살펴본 다음 말했다. "그곳까지 가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반 시간쯤?" 스티브는 차고를 뒤져서 연장통에 들어 있던 사냥용 칼을 찾아냈다. "맨주먹으로 덤벼드는 것보다는 낫겠군." 그가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애비게일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두 사람은 집안으로 들 어 갔다. 스티브는 그녀에게 있을 수 있는 모든 위험에 대해서 한 시간도 넘게 설명했다 . 그녀는 그가 설명하는 대처 방법을 진지하게 들었다. 그것이 끝난 다음, 그는 캐비닛 안에서 사냥용 라이플을 찾아내어 실험해 보았다. "이것을 당신 핸드백 속에 넣어갈 수 없는 것이 유감이군. 이 집안에는 피스톨도 한 자루 없나?" "잊어 주세요. 그런 건 있어도 난 사용할 줄 물라요." 두 사람은 거실에서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자, 테스트를 해볼까?" 스티브가 말했다. "누군가가 당신 뒤를 미행하고 있다고 느껴졌을 때에는 어떻게 하라고 했지?" "유턴을 해서 시내로 들어가요. 그래서 모퉁이에서 따돌려야죠." "좋아, 켈로그가 혼자가 아니란 걸 알았을 전, 차를 세우지 말 것, 페리에 승선하지 말 것." 질문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마침내 출발할 시간이 됐다. 차고 앞에서 스티브는 그녀 의 손을 꼭 쥐어 줬다. 그녀는 돌아서서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가 그녀의 몸을 힘껏 안아 주었다. "당신을 그런 자에게 보내고 싶지가 않아." 스티브는 불평하듯 중얼거렸다. "잘할 수 있어요." "나도 알아, 애비." 스티브가 운전석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좌석 벨트를 매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는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려 보이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하이웨이로 들어서면서 애비게일은 스티브가 준비해 준 모든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 기 를 고대했다. 켈로그는 예상 외로 착한 남자인지도 모른다. 그와의 대화가 잘 진행되 어 함께 경찰서로 가서 증언을 하면, 경찰은 두 사람의 안전을 지켜 줄 것이다. 그리 고 스털링 클리닉의 악당들이 모두 체포되고 나면, 그러면.... 스티브와 행복한 생활 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멋진 동화에 지나지 않아. 그녀는 픽 웃었다. 그녀의 가 슴 깊숙한 곳에서는 일이 그처럼 쉽지는 않을 거라는 불안이 자꾸만 커져가고 있다. 밀리사 웩슬러는 학교 수업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기 때 문이다. 그녀는 선생님에게 배가 아파서 양호실에 간다고 말하고는 로커룸으로 갔다. 자신의 사물함 속에서 아침에 넣어 둔 퍼즐 박스를 꺼낸 그녀는 도서관 구석 자리로 갔다. 그곳은 수업시간중에는 항상 조용하다. 밀리사는 퍼즐 박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다시 매달렸다. 이미 여덟 단계의 일련 의 움직임을 그녀는 풀어냈다. 아홉 번째의 실마리를 풀어내자, 그녀는 하마터면 환성을 지를 뻔했다. 흥분과 만족감으로 아홉 번째의 나무토막을 밀어내자, 박스의 바닥에 있 는 서랍이 열렸던 것이다. 그 안에는 신문쪽지와 립스틱 자국이 묻은 티슈, 은화 한 닢, 3인치짜리 컴퓨터 디스크, 4개의 도토리 깍정이가 들어 있었다. 밀리사는 조심스럽게 티슈를 테이블 위에 펴놓고 그 위에다 내용물들을 쏟아부었다. 그리고는 신문쪽지를 펴보았다. 그것은 6개윌쯤 전의 기사로, 덴버에서 스털링 클러 닉 으로 온 도널드 켈로그라는 이름의 외과의사에 관한 내용이다. 누군가가 기사의 군데 군데에 빨간 볼펜으로 줄을 쳐놓았다. 소녀는 도토리 깍정이를 하나 집어서 살펴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이게 뭐람? 디스크 에 무슨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면, 별수없이 집에 돌아가서 컴퓨터에 넣어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프랭클린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알려 줘야지. 은화를 가질 수 있도록 프랭클린 박사가 허락해 주면 좋으련만. 333번가를 돌아, 애비게일은 이제 옥스퍼드로 향하고 있다. 5분 간격으로 그녀는 백 미 러를 살펴보았지만, 어떤 차도 그녀의 픽업을 뒤쫓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을의 경계에 접어들자 그녀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혹시 경관이 픽업을 세우기자도 하면 어떡하나? 켈로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 경찰들은 그녀의 인상착의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픽업이 시내의 중심부를 통과할 때에는 차량이 차츰 밀렸다. 입속이 바짝바짝 말라드 는 느낌 속에서도 그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교차로를 몇 차례나 지나서 그녀는 웨스트 디비전 스트리트와 하이 스트리트, 시청, 옥스퍼드 교회를 통과했다. 목표 지점에 가까워오자. 그녀는 침착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페리 슬립이 있는 아래 쪽에 있는 로버트 모리스 호텔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18세기에 세워진 건물로 독 립 선언의 상징물이었던 그곳은 이제는 조그마한 호텔로 개조되어 있다. 화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페리 호를 기다리는 차량은 없었다. 배는 트레드 에이번 강 건너편에서 벨리브 쪽으로 오고 있는 중이다. 배가 이쪽 강변에 닿으려면 최소한 20 분 이상은 걸릴 것이다. 픽업을 페리 슬립에다 갖다대지 않고, 그녀는 회색 색조 건물인 호텔 옆에 있는 주차장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시내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코너에 다 차를 세웠다. 그녀는 머리를 뒤로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잠시 쉬었다. 여기까지는 그런 대로 잘된 셈 이다. 그런데 운전대를 잡은 팔이 마냥 떨리고 있다. 그녀는 운전대를 놓고, 두 손을 자신의 히프 밑에 깔고 앉았다. 조금 있으니 떨림이 차츰 멈춰졌다. 그녀는 지금부터 의 몇 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 될 것 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조 오멀리는 위에 펼쳐 놓은 서류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다. 생 각 같아서는 스털링 클리닉에 쳐 들어가서 이것저것 조사해 보고 싶지만, 그것은 너 무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전화를 걸어 루이스 박사를 좀 바꿔 달라 고 부탁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교환양은 그런 외과의사는 없다고 대답했다. 조는 다시 후생국 으로 전화를 걸었다. 루이스 박사가 그 많은 기록 서류에다 서명을 했다면, 최소한 그 곳에는 그에 관한 신상 명세가 나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 에 도 역시 볼티모어 시내의 어디에서도 빈민 환자들을 치료했다는 기록은 나와 있지 않 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친구로군. 조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주립 매디컬 보드에 알 아 보면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다시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애비게일은 강 쪽을 주시하고 있다. 페리는 천천히 부두에 접근하고 있다. 마침내 배 가 부두에 닿자, 차들이 내리고 오르는 것이 보인다. 애비게일은 너무 가슴을 졸인 나 머지 옆구리가 결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빼고 거리 쪽을 바라보았다. 켈로그는 도대 체 어디에 있는가? 이제 그가 나타날 시간이 되었다. 그가 만약 강 건너편에 페리를 타 고 왔다면 어떻게 되는가? 스티브도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 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녀는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은빛 메르세데스가 방금 미끄러지듯 페리 슬림으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운전석에 앉은 사내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사내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다. 그는 내가 자신 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것 이 싫어서 그러는 걸까? "어쨌든, 그는 왔어." 그녀는 큰소리로 말하고는 시동을 걸었다. 은색 메르세데스와 또 한 대의 차가 페리 에 오르는 것이 보였다. 애비게일은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하고 속력을 내어 주차장 출구 로 나갔다. 그녀가 오토바이를 지나보내기 위해서 잠시 멈추었을 때, 검은 세단이 강변 저쪽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그녀는 운전수를 살펴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무언가 햇빛에 반짝하고 반사되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그녀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길을 누르며 소리쳤다. "어떤 녀석이 망원경으로 페리를 살펴보고 있어." 픽업의 뒤쪽에 있는 금속 커버 아래에서 스티브가 소리치는 말이 들 려왔다. "빨리 이곳에서 빠져나가." 14 스티브가 뒷문을 통해서 운전석 옆으로 기어들어왔다. 애비게일은 차를 주차장 반대 편 으로 돌렸다. 그녀는 속력을 최대한으로 내려고 했으나 스티브가 옆에서 천천히 달리 라고 주의를 주었다. "무슨 일이죠?" 애비게일이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켈로그가 우리를 속인 것 같아. 아니면 그가 미행을 당했거나. 어쨌든 우리는 이곳 에 서 빨리 빠져나가야 해." 애비게일은 시내 쪽으로 차를 돌리며 백미러를 살펴보았다. 페리가 부두를 떠나고 있 다. 지금쯤 켈로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함께 오른 자동차 속에 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몹시 실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배에서 내리기는 이미 늦 었다. 배는 강심을 향해서 서서히 선수를 돌리고 있다. 배 위에 정차하고 있는 은빛 메르세데스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다. 하늘을 찢어 놓는 듯한 폭음과 섬광이 픽업을 뒤흔들어 놓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 다. 스티브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애비게일은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 를 길 한 쪽으로 세웠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뭐예요?" "페리가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어." 두 사람은 얼이 나간 표정으로 불바다가 된 강상을 바라보았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 기름 탱크가 폭발하며 또 한 차례의 폭음이 천지를 진동했다. 지방 검사인 대니얼 캐시디는 회전의자에 등을 기대고 조 오멀리를 바라보았다. 사립 탐정이란 통상 법 체계 안에 들어와 있지 않다. 그리고 이런 오후 시간에 방문해 오 는 경우도 좀처럼 드문 일이다. "나와 은밀하게 의논하고 싶다는 그 가설적인 추리라는 게 뭐요?" 그는 조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그는 그녀의 남편이었던 스킵이 죽은 이후로 이 여자를 통 만 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빨강 머리의 여탐정은 아마 지난밤에 잠을 제 대로 자지 못했는지, 눈꺼풀 주위가 거무스름하게 그늘이 져 있다. "그래요. 어디까지나 가설적인 상황이에요." 조는 말했다. 그녀는 어제부터 갑자기 발전하기 시작한 상황을 놓고 심사 숙고한 끝 에, 아무래도 그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스털링 클리닉의 음모를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신이 맡고 있는 사건에 관한 거요?" 대니얼이 물었다.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조, 나의 협조를 받으려면 사건의 현황을 자세히 얘기해야 할 것 아니오? 혹시 당신 이 늘 쓰겠다고 얘기하던 그 추리소설에 관한 것 아니오?" "그래요.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고 들어 주시면 돼요." 조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입술을 눌렀다. "얘기의 발단은 한 심리학자의 환자였던 여자가 정신병동에 갇히는 것에서부터 비롯 돼 요. 그 여자는 죽었는데, 병원측에서는 자살이라고 주장했어요. 그러나 그 심리학자 와 그녀의 친구인 탐정이 조사한 바로는 그 병원에서 아주 사악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죽은 여자의 오빠도 납치를 당해서, 그 병원의 정신병동에 강금을 당했으며, 마취제와 환각제를 주사당하고 가슴에 수술까지 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았죠." 대니얼은 이마를 찌푸리며 의자를 당겨앉았다. "납치를 당해서 환각제를 주사당했다? 그리고 수술까지? 볼티모어에 있는 병원에 대 해 서 말하고 있는 거요?" "대니얼, 추리소설이라고 했잖아요." "이 얘기를 왜 나한테 하는 거요?" "왜냐하면 음모가 차츰 추악해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조는 의자 모서리를 손으로 꽉 잡았다. "그 심리학자와 탐정 친구는 한밤중에 납치당한 사내를 병원에서 빼냈어요. 다만 탐 정 이 그 일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죠. 그 심리 학자와 사내는 도피중에 있어요.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만약 병원측에서 보낸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낸 다 면 먼 저 쏴죽이고 설명은 뒤에 하려고 할 거예요." "맙소사! 당신은 내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는 게 좋겠소." "그럴 수는 없어요. 공식적으로는 안돼요." "그래. 그 환자의 상태는 어떻소?" "심리학자의 말로는 차츰 회복되어 가고 있대요." "이 얘기는 혼비·구드윈 사건과 관계가 있소?" 조는 얼굴색이 변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에즈라 혼비의 서류에서 아주 묘한 내용을 발견했소." "하느님, 맙소사!" 스티브는 불길이 치솟는 강상을 바라 보며 아연했다. "독터 켈로그란 자도..." 애비게일은 말문이 막히는 모양이다. "오, 스티브 당신 말이 옳았군요. 우린 자칫했으면..." 애비게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도 의심은 했지만, 이건 정말 놀랐는데. 놈들은 예상 외로 거친 친구들이야."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해." 스티브가 서둘렀다. 두 사람은 옥스퍼드로 향하면서도 충격 때문인지 할 말을 잃었다 . 애비게일이 백미러를 자주 돌아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스티브가 물었다. "검은 세단이 뒤쫓아오고 있어요. 따돌려야겠어요." 애비게일은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급회전했다. 검은 세단도 곧 좌회전해서 그들을 뒤 쫓 아왔다. 운전대를 잡은 그녀의 손가락이 하얗게 바랬다. 애비게일은 에드워드 맨션을 전속력으로 지나쳐서 빅토리언 마을로 접어들었다. "더 빨리." 스티브가 채근했다. "이보다 더 속력를 내면 위험하단 말이에요."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그녀는 하마터먼 강아지를 안고 지나가던 노부인을 칠 뻔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이를 꽉 물고 골목길을 요리조리 돌아서 다시 상업지역의 거리로 나갔다. 333번 도로로 나온 그녀는 교차로를 통과하면서 백미러를 살펴보았다. 검은 세단이 중앙로를 따라 내려가는 것이 언뜻 보인다. "따돌렸어. 아주 잘했어." 스티브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살았어요." "다시 뒤쫓아올지 모르니 계속 전속력으로 달려." 애비게일은 주거지역을 몇 블록 더 통과한 다음, 판자로 지은 방갈로 앞에다 차를 세 우고는 운전대 위에다 머리를 처 박았다. 스티브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며 말 했 다. "아주 잘 했어, 애비게일." "자칫하면 노부인과 강아지를 깔아 버릴 뻔했어요."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렇지만 잘 피했잖아?" 애비게일은 머리를 저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운전할까?" "그래요."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고속도로를 통파하지 않고 별장으로 가는 길은 없나?" 스티브가 시동을 걸며 물었다. "돌아서 가야 해요." "그렇다면 그냥 질주하지. 꾸물거리다간 그 세단과 또 마주칠지도 모르니까." "다음 교차로에서 좌회전하면 고속도로 진입로예요." 애비게일은 머리를 뒤로 기대어 눈을 감았다. 갑자기 맥이 탁 풀 리는 기분이다. "불쌍한 켈로그 박사. 그들은 그마저 죽여 버렸어요." "걱정했던 대로야." "내 생각엔 켈로그 자신은 그 추악한 거래에 관여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는 조심성이 부족했어. 자신에게 닥쳐올 일에 대해서 예상치도 못했던 거야. 와인 드험은 그에 대해서 위험을 느꼈겠지." "스티브, 당신이 같이 와줘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이런 위험한 일에 당신을 혼자 가게 할 수는 없지." "나는 풋내기에 불과해요." "그렇지 않아. 애비게일, 당신처럼 간 큰 여자는 처음 봤어."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다시 말했다. "그리고 충실하고, 가끔 나는 당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웃었다. "그건 틀려요. 나는 브레드와 헤어진 이후로는 어떤 남자에게도 이용당한 적이 없어 요." 차가 고속도로로 진입하자, 스티브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애비게일, 난 오랜 세월을 나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 마음을 줘본 적이 없어." "알아요." "그런데 당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나의 그런 신념을 흔들리게 만들었단 말이야. 말하자면, 나는 지금 혼돈의 와중에 있다는 거지. 게다가 환각제까지 내 머리를 휘젓 고 있어. 난 아무래도 돌 것 같아." "이해해요. 그렇지만 아주 돌아 버리지는 마세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걱정돼서 그래. 나처럼 아무 계획도 없는 놈은..." "계획은 두 사람이 짜야죠." 그는 도로만 응시하며 말을 계속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이 미친 짓에서 당신을 빼내주고 싶어." "내 생각엔 이 사건의 주인공은 나인 것 같은데요? 당신은 조역이에요." "제기랄, 그러게 말이야. 당신 없이는 해결될 것 같지도 않고 말이지." 그도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픽업을 차고에 넣은 다음 스티브는 애비게일을 끌어안았 다. "생각난 것이 있어. 그들은 당신에 대해서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어." "누가 말이에요?" 애비게일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루이스 텔이라는 의사 말이야. 그리고 간호사가 하나 있었지. 그들은 당신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어했어." "별로 할 말이 없었을 텐데요?" "기억에 남을 만한 키스가 있었지. 엘리베이터 사고가 있었던 날 밤에 말이야. 나는 그 얘기를 그들에게 자세히 했던 갓 같아." "오." 애비게일은 얼굴을 붉혔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는 병원에서 있 었던 일을 하나하나 기억해 내고 있다. "샤론에 대해서는 묻지 않던가요?" "물었어. 내가 샤론을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는가, 샤론에게 어떤 선물을 보냈는가, 하 는 질문이었어." 그녀는 애비게일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어떤 선물을 보냈나요?" "퍼즐 박스를 하나 선물한 적이 있었지." 애비게일의 눈이 동그래졌다. "퍼즐 박스라고요! 누군가 나에게 동양적인 퍼즐 박스 하나를 소포로 보내온 적이 있 었어요. 샤론이 나에게 전화한 직후였죠." 스티브의 눈동자도 번쩍 빛났다. "용과 공작이 상아로 수놓아진 나무 박스였어?" "맞아요." "내가 샤론에게 생일 선물로 보내 준 거야. 밑바닥에 비밀 서랍이 만들어져 있는 거 지." "그렇다면 샤론이 그것을 나에게 보냈군요. 회송용 주소가 적혀 있지 않았어요. 나는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밀 리 사에게 그것을 열어 달라고 부탁했죠." "당신 아파트 현관에서 만났던 그 여자 아이?" "그래요." 스티브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어린애의 힘으로는 그 박스를 열지 못해. 샤론도 그것을 못 열어서 내가 일련의 동 작 을 자세히 설명한 답안지를 보내 준 뒤에야 열 수 있었다고 하던걸." "그건 당신이 밀리사를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그 아이는 천재예요." 그래도 스티브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렇다면 그 아이에게 전화를 해보자구. 아직 못 열고 있다면 내가 그 방법을 설명 해 줄 수도 있어. 그러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알 수 있겠지." "그래요, 스비브. 아마도 샤론은 그 안에 증거품을 넣어 두었는지도 몰라요. 스털링 클리닉에 대한 증거 말이에요." 15 애비게일이 전화를 하는 동안, 스티브는 거실을 왔다갔다하며 초조한 얼굴을 했다. 전 화는 신호가 세 번 간 후에 밀리사가 바로 받았다. "여보세요?" 소녀는 참을성 없는 말투로 말했다. "밀리사, 나 애비게일이야." "프랭클린 박사님! 지금 어디 계세요? 이틀 동안이나 전화를 수도 없이 걸었어요." 애비게일은 밀리사가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먼 해안에 있단다. 무슨 일이 있으면 조 오멀리 아줌마에게 연 락하렴." "퍼즐 박스가 열렸어요." 소녀는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그 안에서 나온 디스크를 조사하고 있어요." "무슨 디스크?" 그러자 스티브가 곁으로 다가왔다. "내가 통화하고 싶은 데." "밀리사, 이분께 설명을 좀 해주겠니?" 그녀는 스티브에게 수화기를 건넸다. "기억해요. 아저씬 전날밤 애비게일의 아파트에서 잤죠? 아침에 보니. 아저씨 차가 주 차장에 그대로 있었어요." "소파에서 잤단다, 밀리사. 소파에서 밤을 세웠어." 꼬마는 낄낄 웃었다. "그건 참 낭만적인 것 같아요." "그 얘긴 그만하고 퍼즐 박스에 대해서 얘기하자꾸나." "애비게일이 그 말을 했어요?" "그 퍼즐 박스는 내가 홍콩에서 동생에게 보내 준 것이란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 에 대해서 말해 주겠니?" "좋아요. 먼저 1938년도에 찍어낼 은화 한 닢, 동전에 대해서 아시는지는 모르지만. 이 은화는 디자이너의 이름이 빠지고 뒷면에 별들이 추가된 것이에요. 현재 시가로 일 만 달 러쯤 되니, 나한테 주실 리는 없을 테고..." "그 문제는 다음에 상의해 보도록 하자. 그리고 다른 것은?" "컴퓨터 디스크예요. 이상한 환자들의 병상 기록 같아요. 나자로에서 온..." 두 사람은 전화에 너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현관문이 열리며 두 사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수화기를 내려놔, 스티부. 말을 듣지 않으면 너의 여자를 날려 버리겠어." 애비게일은 기겁을 하며 돌아보았다. 스티브가 매서운 눈으로 침입자들을 노려보았다 . 한 사내는 그의 형 데릭이고, 그 옆의 사내는 도널드 켈로그 박사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라니까." 데릭이 권총을 애비게일의 가슴에 겨누며 다시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왜 그래요..." 밀리사가 소리치고 있다. 스티브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애비게일은 스티브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그녀를 보호하듯 한 팔로 안았다. "경치가 좋군." 데릭이 조소하며 말했다. "개 같은 자식!" 스티브의 입에서 욕이 터져나왔다. "어떻게 자기 여동생을 죽여?" 데릭은 어깨를 으쓱했다. 애비게일은 켈로그를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스티브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를 알고 있어. 네가 바로 루이스 텔이지?" "백 퍼센트 틀린 판단인걸. 독터 루이스란 존재하지도 않아. 다만 서류상 존재할 뿐 이 지." "나를 심문한 놈은 바로 너였어." 스티브의 얼굴은 지난 고통을 떠올리며 일그러져 있다. "맞았어. 그런데 당신은 페리에서 차와 함께..." 애비게일이 끼어들었다. 외과의사는 싱긋 웃었다. "나는 세단을 좋아해. 그 차에는 조지 내이피어가 타고 있었지. 불쌍하게도." "악랄하군요." 애비게일은 기어드는 소리로 말했다. "죄송하오, 프랭클린 박사. 자, 벽 쪽으로 붙어. 서툰 짓을 하면 용서없어." 그는 두 사람을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애비게일은 스티브의 표정에 신경을 곤두세웠 다. "빨리 움직여!" 이젠 정말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애비게일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휘 청거리는 걸음걸이로 스티브에게 기댔다. 스티브의 몸이 뻣뺏하게 굳어 있는 것을 그 녀는 느낄 수 있었다. "우리를 어떻게 찾아냈어요?" 그녀는 켈로그에게 물었다. 데릭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런 촌구석에서 그런 괴상한 픽업을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닥쳐, 데릭!" 켈로그가 소리쳤다. "지금은 그 따위 객설을 늘어놓을 때가 아니야." 데릭의 표정이 일순 분노로 일그러졌으나, 그는 꾹 눌러 참는 것 같았다. 그는 권총 을 스티브에게 겨누면서 말했다. "움직이지 마." 데릭이 권총으로 두 사람을 겨누고 있는 동안 켈로그는 전화를 걸었다. "이봐, 나 켈로그야. 응급환자 수송용 헬리콥터는 대기하고 있겠지? 좋아, 빨리 이곳 으로 보내. 이곳의 위치는..." 전화를 끝내고 그는 스티브와 애비게일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다 잘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라구. 당신들 두 사람은 결국 좋은 일을 하게 될 테 니까." 애비게일은 켈로그가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너무 끔찍한 일이기 때 문이다. 중고 부품, 나자로 구호 단체에서 스털링 클리닉으로 간 사람들처럼, 그런 운 명이 그녀와 스티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러면 헬리콥터가 도착할 때까지 우리 모두 앉아서 편안하게 기다리지." 켈로그가 소파로 가며 말했다. 애비게일은 고맙다고 말할 뻔했다. 다리가 떨려서 도 저 히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소파에 앉으면서 돌아보니 스티브의 행동이 이상해지고 있다. 그의 얼굴이 백 지장처럼 하얗게 변했고 두 눈에는 불을 담은 듯 벌겋게 핏발이 서 있다. 그는 벽과 소파 사이를 불안한 표정으로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이리 와서 앉아, 스티브!" 켈로그가 소리쳤다. 스티브의 벌건 눈이 켈로그와 애비게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물!" 그는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물을 줘! 난 바다로 갈 거야! 난 바다에 뛰어들 거야!" 그는 발작하기 시작했다. "스티브, 정신차려요!" 애비게일이 소파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저 친구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데릭이 물었다. "난 바다로 갈 거라구." 스티브는 그녀를 사납게 뿌리치며 소리쳤다. 켈로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왜 저러는 거야?" "당신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애비게일이 그에게 반박했다. 그러나 그녀는 데릭이나 켈로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다. 마음속의 희망이 자신의 눈에 나타날까 봐 겁이 나는 것이다. 스티브가 바다로 가고 싶다고 소리치는 것은 의식이 말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 했 다. 그가 정말 돌아 버렸다면, 바다로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 은 그가 연극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는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혹시 진정제를 가져오지는 않았어요?" 애비게일은 이제 켈로그가 유일한 희망이란 듯이 물었다. "있지." "그렇다면 빨리 그에게 한 방 놔주세요." 켈로그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안돼! 이젠 그런 주사를 맞지는 않겠어." 스티브는 악을 쓰며 애비게일을 노려보았다. 그 눈에서 그녀는 묘한 빛이 스치는 것 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도 그와 비슷한 빛을 그에게 반사했다. "스티브, 진정하세요!" 애비게일은 그를 안쪽으로 밀어붙였다. 이제 소파가 그들과 총을 든 사내들 사이에 오 게 되었다. 멀리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안돼, 조금만 더 늦게 도착해 다오. 그녀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스티브도 그 소리 를 들은 것이 분명하다. 그의 얼굴이 공포로 어두워졌다. 그가 갑자기 그녀를 누르며 소 리를 질렀다. "애비게일, 엎드려!" 애비게일이 바닥에 납짝 엎드리자, 켈로그의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그러나 총알은 소 파의 쿠션에 박혔다. 그와 거의 동시에 스티브는 발목에 차고 있던 웨인즈 씨의 사냥 용 칼을 뽑아 번개 같은 동작으로 데릭에게 던졌다. 칼은 데릭의 가슴에 가서 꽃혔고 . 그는 쓰러졌다. 켈로그는 데릭이 칼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잠시 넋나간 듯 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더니 곧 총을 들고 스티브를 향해 달려왔다. 애비게일은 정신이 하나도 없 었다. 내가 도울 일은 없을까? 그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램프를 들어 켈로그를 향해 던졌다. 램프는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켈로그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스티 브에게는 충분한 것이었다. 표범처럼 몸을 튕겨 일어낱 그가 바로 작은 소파 하나를 힘껏 걷어찼다. 소파는 바닥을 미끄러져 나가 켈로그의 발목을 후려쳤다. 켈로그가 비명을 지르 며 나자빠졌다. 스티브가 총알처럼 달려가서 그의 총 쥔 손을 비틀어 권총을 빼앗아 버렸다. 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일련의 행동을 생각하 는 시간만으로도 너무 길게 느껴 질 정도다. 데릭의 권총은 그의 앞에 떨어져 있다. 애비게일이 소파 밑에서 기어나와 그 권총을 집어들고 데릭을 향해 겨누었다. 데릭은 가슴에 꽃힌 칼을 비명을 지르며 자기 손으 로 빼냈다. 상처에선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살려 줘. 아, 살려 줘." 데릭은 신음했다. 스티브는 바닥에 뒹구는 데릭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악인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형에게 칼을 꽃은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한 표정이다. 그래도 그는 샤 론을 죽인 장본인이다. 그리고 그는 애비게일과 나도 죽이려고 했다. 데릭이 애원의 눈길을 보내자, 스티브는 켈로그에게 명령했다. "응급조치를 해줘. 하지만 서툰 수작은 마." "경찰을 불러야겠어요." 애비게일은 마침내 때가 되었다는 듯이 스티브에게 말했다. 두 대의 경찰차가 별장에 도착했을 때, 애비게일과 스티브는 4명의 포로를 잡아 놓고 있었다. 데릭과 켈로그 그 리고 나머니 2명은 스털링에서 헬리콥터로 날아온 사내들이다. 대니얼 캐시디 검사가 스털링 클리닉의 흑막을 완전히 걷어내는 데는 일주일이 꼬박 걸렸다. 대부분의 진실은 데릭의 진술에 의해서 밝혀졌다. 데릭은 아내 세실이 자신 을 배신하고 증언을 자청하고 나서자, 모든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다. 세실은 켈로그의 정 부 노릇을 하면서, 남편인 데릭의 행동을 감시하는 역할을 해왔음이 밝혀졌다. 에즈 라 혼비에게서도 많은 증거품이 나왔고, 켈로그의 또 다른 정부인 프랜시스 배크먼의 증 언도 그들의 범죄 사실을 뒷받침했다. 미스 배크먼은 볼티모어 워싱턴 국제공항에서 스위스 경유 홍콩행 티켓을 소지한 채 체포되었다. 그녀는 스털링 클리닉 메디컬 레코드와 켈로그가 부정축재하여 스위스 은 행에 예치 해 놓은 엄청난 금액의 예금 구좌를 소유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대니얼 검사의 사무실 소파에 앉아서 그에게 따지고 들었다. 애비게일은 그 의 손을 잡고 흥분한 그를 달래고 있다. "이젠 우리도 사실을 알아야겠소. 내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으면, 나는 지금 당장 인도로 돌아가겠소. 당신은 나의 증언을 위해서 잠세드푸르까지 소환장을 보내 지 않으면 안될 거요." 대니얼 검사는 스티브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이 사내는 지옥을 통과해 온 셈이다. 그 는 사건의 진상을 알 권리가 있다. "아직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소. 그들의 조직망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도 아 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요. 켈로그는 스털링에서 수집한 '중고 부품'을 세계 각 지로 실어내고 있었소." "나도 그 일을 몇 번 맡았던 것 같소." 스티브가 말했다. "나는 국제 건강기구를 위해서 그 일을 한다고 생각했었죠. 그렇지만 나는 그런 일보 다도, 내 누이동생에 대한 진상을 알고 싶을 뿐이오." "좋소. 내가 아는 대로 말해 드리지. 이건 세실의 증언이오. 샤론은 나자로 자선단체 의 부엌일에 자원했던 모양이오. 그런데 그녀가 그곳에서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자 꾸 만 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그래서 그 얘기를 애덤 구드윈이란 자에게 했던 모 양인데....." "그게 결정적인 실수였군요..." 스티브가 말했다. "그렇소. 애덤은 혼비의 돈구멍을 알아내고는 병원측에다 흥정을 하기 시작한 거요. 그러면서 샤론이 방해물이 되고 있다고 말해 줬소." "그래서 와인드험이 샤론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군요?" 대니얼 검사는 머리를 저었다. "우리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 그렇지만 와인드험은 이 범행에 가담하지 않았소. 켈로그와 데릭이 그를 속였던 거요. 특히 켈로그가 우두머리 역할을 했소." "그렇다면 왜 에즈라 혼비가 애덤을 죽였습니까?" 애비게일이 검사에게 물었다. "그가 죽이지 않았어요. 그날 일찍 그가 애덤의 집에 돈을 받으러 갔었기 때문에 그 렇 게 보였을 뿐이지, 켈로그가 샤론의 보험금 문제로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긴 것을 알고는 애덤을 죽였던 건요." "스털링 같은 저명한 병원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건 정말 믿어지지 않아요." 애비게일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켈로그는 당신들 두 사람이 샤론의 죽음에 대해서 파고들지만 않았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요." 검사가 말했다. 스티브와 애비게일은 눈길을 교환했다. 스티브가 다시 물었다. "조지 내이피어는 정말 페리에서 폭사했습니까?" "그렇소. 그의 본명은 조지 내스빗이고, 병원에서 임시로 고용한 경비원이었소. 그는 켈로그의 지시로 엘리베이터를 조작하여 프랭클린 박사를 죽이려 했소." 애비게일은 다시 진저리를 쳤다. 그 친구 때문에 앞으로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공 포심을 떨쳐 버리지 못할 것이다. "내가 페리에 승선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 텐데. 왜 배를 폭파시켰죠 ?" 애비게일은 그 점이 궁금했다. "아마 조지 내쉬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는 자 신이 몰고 간 차에 시한폭탄 장치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을 거요." "실컷 이용해 먹고 죽여 버린 셈이군요." 애비게일이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검사의 사무실을 나온 것은 오후 늦 은 시각이었다. 대니얼의 설명에서 그들은 켈로그가 미셸이라는 여자를 고용해서 샤 론 의 집을 수색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증거물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미셸은 스티 브를 블루 스타에서 기절시킨 바로 그 여자다. "그 여자는 아직도 잡히지 않았어." 스티브는 말했다. "반드시 찾아낼 테야."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애비게일은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피곤하긴 하지만 해방된 느낌이야." 스티브는 차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차에 올랐다. "당신도 집에 가서 푹 쉬고 싶을 테지?" "배고프지 않으세요?" "약간." "그럼 우리 하버플레이스로 가서 먹을 걸 좀 사들고 들어 가요. 아파트에는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글쎄, 그럴까?" "우린 할 얘기도 있을 것 같은데요?" "좋아." 두 사람은 쇼핑을 하면서도 서로 각자의 생각에 침잠해 있었다. 애비게일은 게와 야 채 와 푸르트세이크를 샀지만, 그 어느 것도 식욕이 당기지는 않았다. 스티브는 프렌치 프라이와 비프 샌드위치 따위를 샀다. 차로 돌아오면서 애비게일이 먼저 말을 꺼냈다 . "그 퍼즐 박스 안에서 나온 것들 말이에요. 컴퓨터 디스크는 혼비가 입력한 환자들의 기록이니까 아주 중요한 증거물이 될 수 있 겠지만 나머지는 뭐죠?" "샤론은 그 당시 구드윈이 먹이는 환각제 때문에 제대로 생각할 수도 없었을 거야." 스티브는 표정이 굳어지며 말했다. "티슈에 묻은 입술 연지는 아마 세실의 것이겠지. 그녀가 음모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 을 알리기 위해서 머리를 짜냈을 거야. 그런데 도토리 껍질은 나도 모르겠어." "스털링 클리닉의 정원에는 도토리 나무가 많아요." 애비게일이 지적했다. "그렇다면 그것도 말이 돼. 은화는 데릭을 의미하는 거야. 그는 은화 수집광이거든, 그러니까 샤론은 데릭도 함께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 거지." 대화는 거기서 다시 끊어졌다. 무언가 서먹한 감정이 대니 얼의 사무실을 나오던 순 간 부터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아파트로 돌아와서 사온 식료 품을 테이블 위에다 올려놓았다. 스티브는 의자에 앉아서 샌드위치 포장지를 뜯었다. 병원에서 나온 이래 그의 식욕은 왕성했다. 그런데 지금은 샌드위치를 먹을 생각은 않 고 바라보기만 하고 있다. 애비게일 역시 프루트세이크가 도무지 목구멍 안으로 삼켜 지지 않는다. 이제 두 사람은 각자의 감정에서 떠나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지난 며 칠 동안, 애비게일은 자신이 스티브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고백을 해야 할 것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가 없다. "당신은 이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내 인생 밖으로 걸어나가실 건가요?" 그녀는 마침내 벼르고 있던 질문을 그에게 던지고 말았다. 스티브는 마시던 음료수 잔 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애비게일, 나도 마음이 심란해. 그동안의 일이 한바탕의 꿈 같기도 하고 말이야. 한 바탕 휘몰아치고 간 돌풍 같기도 하고 우린 너무 빨리 가까워졌어." "동감이에요." "나는 항상 굴레벗은 말처럼 자유롭게 내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생각해 왔지. 결혼과 행복한 가정에 대해서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어." "떠나실 생각이군요?" 그는 손가락으로 바랜 듯한 금발을 빗어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군. 당신의 생활은 여기에 있고, 내 생활은 잠세 드 푸르에 있어." "나 때문에 망설이지는 마세요. 당신이 원한다면 잠세드푸르로 돌아가세요. 당신의 말 대로 우리는 너무 빨리 가까워졌어요. 서로 차분하게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 각해요.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고 나면, 지금의 감정이 일시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알 게 되겠죠. 인도로 돌아가더라도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만 마세 요." "애비게일,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남자야." "그것은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사랑을 배워야 할 것 인가에 대해서도 잘 생각 해 보세요." 스터브는 애비게일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에게서 떠나 간다는 생각은 그를 못 견디게 괴롭히고 있다. 그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똑바로 현 관으로 걸어갔다.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걸었다간, 아무래도 애비게일이 울음을 터뜨 릴 것 같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8월의 어느 무더운 오후, 애비게일 프랭클린, 조 오멀리, 로라 로즈웰은 작은 이탈리아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막 돌아온 참이다. 라이트스트리트 43번지 건물로 들어서자 시원한 공기가 그들을 감 쌌다. "에이컨이 사람을 살려 주는군." 조가 말했다. "지난주처럼 더우면 아예 보따리를 싸들고 도망갈 작정이었어." "넌 그래도 정장을 안 입어도 되니까 그것만도 어디야?" 로라는 금발을 쳐들어 목덜미를 식히며 대꾸했다. "넌 아예 입을 봉하고 살기로 작정한 거야, 애비게일? 그러면 더 더울 텐데." 조가 농담을 했다. "그냥 피곤해서." 애비게일은 짤막하게 말했다. 조와 로라는 서로 동정어린 눈길을 교환했다. 그들은 애 비게일에게 스티브에 대한 얘기를 시켜 보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그녀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나하고 같이 메릴랜드나 가는 게 어때?" 조가 제안했다. "딥 크리크 호수에서 보트도 타고, 하이킹도 하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좋겠지." 그러나 애비게일은 별로 열성을 보이지는 않았다. 세 사람은 각자의 사무실을 향해 헤 어졌다. 오후의 첫 환자는 산후의 후유증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젊은 여자였다. 최 소 한 나는 아직도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는 거야. 애비게일은 스스로를 위 로했다. 그녀의 환자는 차츰 좋아지고 있다. 환자를 내보낸 그녀는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젖 혔다. 스티브가 떠나간 지도 벌써 8개월이 지나고 있다. 그는 이제 완전히 포기한 걸 까? 그냥 그대로 굴레벗은 말처럼 살기로 작정한 걸까? 어쩌면 나 같은 여자는 벌써 까맣게 잊어버렸는지도 모르지. 그에 대한 그리움이 미칠 듯이 가슴속에서 끓어올랐 다. 그러다가 잠시 깜박 졸았던 모양이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커다란 그림자가 문을 가로막고 있다. 구 겨진 카키 셔츠를 입고, 바랜 바지 위로 부츠를 신은 사내가 세계를 반 바퀴쯤 날아 서 온 듯한 모습으로 거기에 서 있다. "문을 잘 잠그고 있으라고 했는데." 사내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잠갔어요." "그래도 너무 쉽게 열리는걸." 애비게일은 스티브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생각보다는 얼굴이 많이 야위었고, 노란 수염이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야성적이고, 위험하고 공격적 인 인상을 풍기고 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내의 공기는 마치 사막의 열풍이 휘 몰아쳐 온 것처럼 뜨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애비게일은 목구멍에서 치밀어오르는 뜨 거운 덩어리를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어떠세요?" "지쳤어. 당신에 대한 그리움으로 반쯤 미쳤고 당신은 어때?" "저도 지쳤어요. 당신에 대한 그리움으로 반쯤 미쳤고." 두 사람은 마주보며 웃었다. 그가 큰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와서 그녀를 포옹했다. 그 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코에 익은 그의 체취를 흠뻑 들이켰다. 그가 돌아왔다 는 사실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 오래 걸렸군요. 돌아오시는 데 말이에요." 그녀는 원망조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돌아와서 기쁜 모양이로군." "그럼 슬퍼할 줄 알았어요?" "자신이 없었어." 그가 안도하듯 말했다. "당신의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야." "맞아요. 내 생각은 달라졌어요. 보따리를 싸들고 잠셰드 푸르로 가기로 결심했어요. " "애비게일,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 난 볼티모어로 돌아왔으니까." "당신 같은 남자가 볼티모어에서 무슨 일을 하겠어요?" "비비는 거지, 뭐." 그는 씩 웃었다. "애비게일, 나 같은 사내와 영원한 약속 같은 것을 할 수 있겠어? 결혼 같은 것 말이 야." "영원한 것이라면요. 오, 스티브. 물론이에요." 그녀는 그의 목에 매달리며 소리쳤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정신없이 상대방을 확인하는 일에만 열중했다. 마침내 고개를 쳐든 그가 말했 다. "애비게일, 당신을 사랑해. 이젠 당신을 절대 혼자 두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