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로맨스] 천 년의 약속 1-10 <끝> / 이본 휘틀 관련자료:없음 [143] 보낸이:로맨스 (k2roman ) 2000-06-24 17:15 조회:174 천 년의 약속 1 황갈색 봉투에는 대학 마크가 찍혀 있었다. 그 봉투를 든 크리스티 올슨의 손이 가 늘게 떨렸다. 빨리 속을 보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다소 두려운 느낌도 든다. 다른 응모자들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고고학과 학생들 과 함께 한 달 동안 조사여행을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다. 요한네스버그의 경리사무실에서 하고 있는 지금의 지겨운 일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 이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크리스티가 이 일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맨 처음 눈치챈 사람은 새미 피터슨 이었다. 며칠 전, 그는 크리스티를 데리고 나가 저녁식사를 하며 말했었다. "고집도 어지간하군. 아직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나? 3년씩이나 타이 프를 두들겼으면 웬만큼 깨달을 만도 할 텐데.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스테이지와 스 튜디오야. 무대에는 감격이 있고, 레코드 취입은 힘들지만 그만한 보답이 따르거든." 크리스티의 도톰한 입술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나 체구는 작지만 야무지게 생긴 대머리 사나이는 크리스티의 표정에는 아랑곳없이 여송연을 맛있게 피우고 있었다. 새미는 자기와 계약하고 있는 연예인들은 모두 <스테이지 광(狂)>이라고 믿고 있다. 크리스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계약이 이미 3년 전에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크리스티를 아직도 자신의 독점상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단념하지 못하겠어요?" 크리스티는 긴 속눈썹을 들어 히아신스 꽃 색깔의 남보랏빛 눈으로 새미를 원망스럽 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태연한 얼굴로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잿빛 눈으로 크리스티를 빤히 쳐다 본다. "잊진 않았겠지? 커피 바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던 당신을 스타로 만든 사람은 바로 나야. 그런데 당신은 내가 준 것을 모두 팽개쳐 버렸어.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으란 말야?" "내게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새미." "일을 그만두었을 때의 당신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했었어. 라일 베니커 때문이었지." "라일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크리스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5년 동안의 괴로운 기억들을 떠올리지 않으려 고 애썼다. 새미 피터슨은 공연한 얘기를 꺼냈다고 느꼈을 거다. 그러나 그는 무슨 일이든 한번 마음먹으면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다. "계약서는 이미 작성돼 있어. 사인만 하면 돼." 아파트까지 데려다 준 그는 다시 한번 되풀이해서 말했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사무실로 찾아와서 사인해 줘." 크리스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인터뷰하러 학교로 나갔었다. 그러나 새미의 말이 마음에 걸려 불쾌했다. 고아원을 나왔을 때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벌이를 할 길이 없던 차에 겨우 발견한 것이 커피 바의 일이었다. 그곳에서 낮에는 웨이트리스로 일했고, 밤에는 노래를 불러 생활비를 마련했다. 하긴 무대에 서거나 레코드 취입을 하는 일에 가슴 설레던 때가 있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따르는 희생 이 너무나 커서 계약이 끝났을 때는 두번 다시 그 생활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스스로 에게 맹세했던 것이다. 손에 든 봉투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과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마음을 다지고 봉 투를 뜯었다. 그리고 재빨리 처음 두세 줄을 읽었다― 합격! 잠시 정신이 멍해 더 이 상 읽을 수가 없다. 채용되다니 정말 꿈만 같다. 고고학 조사여행에는 다른 응모자들 이 훨씬 더 적합한 인물로 보였었다. 그들은 유경험자임을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았던 가. 크리스티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편지의 다음 부분을 읽어나갔다. "교수와 학생들은 2월 17일 요한네스버그를 출발한 예정입니다. 조속히 의논하고자 하오니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상이란 정말 얄궂은 것이다. 일찍이 라일은 이탈리아의 폼페이로 유적발굴 여행을 떠날 때 크리스티를 데리고 가려 했었으나 일에 묶여 있던 그녀는 함께 갈 수가 없었 다. 그런데 지금은 고고학 교수와 몇 명의 학생들 틈에 끼어 북부 트란스발로 조사여 행을 떠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라일 베니커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기억은 본의 아니게도 폭풍 처럼 격렬하게 되살아났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친구 집에서였다. 크리스티는 첫눈 에 키가 훤칠한 검은 눈동자의 고고학자에게 마음이 끌리고 말았다. 그도 크리스티에게 관심을 보였다. 적어도 그 당시는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너무 이르다는 새미 피터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한 달 후에 결혼했던 것이다. 20살이었던 크리스티는 자신의 일로 성공한데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을 하게 되 어, 마치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라일은 독점욕이 몹시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크리??뵈섟?일에 지나치게 묶여 있는 데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이탈리아로 갈 때도 한사코 함께 가자고 우기는 바람에, 크리스티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자신을 출세시켜 준 새미 피터슨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었다. 하지만 라일은 아내의 이 런 고민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결혼생활을 택하든가 가수로서의 직업을 택하라고 막무가내로 강요했다. 그가 선택을 강요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새미 피터슨과의 계약이 아직 2 년이나 남아 있었고, 레코드 취입과 연주여행 일정도 꽉 짜여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결국 직업을 버릴 수 없어 반 년 후에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파 국을 맞게 되었다. 결혼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혼도 지극히 빨리 이루어졌다. 라일은 혼자서 이탈리아로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젠 떠올리지 말자. 생각하면 할수록 라일이 아파트를 나갔을 때의 5년 전과 똑같 이 가슴이 아프다. 크리스티는 슬픔으로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면서 편지를 봉투 에 넣고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땅거미가 짙어 불을 켜자 고아하게 꾸며진 넓은 방이 밝게 떠올랐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다소 사치스런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란한 가구는 하나도 없고, 흰색과 부드러운 색이 조화되어 아늑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는 정도였다. 식사 후 크리스티는 좋은 향내가 나는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난 뒤 잠시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딴 곳을 헤매고 있었다. 오늘밤은 일찍 자기로 하자. 내일 아 침엔 대학에 가서 의논을 해야 하니까. 그리고 앞으로 며칠 동안 입어야 할 옷도 사 야만 한다. 아마 이번 여행에서는 인가로부터 떨어진 곳에서 텐트 생활을 하게 될 것 이다. 지금 옷장 속에 있는 것들은 그런 여행에는 어울리지 않는 옷뿐이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크리스티의 날씬한 몸이 침실의 거울에 비치고 있다. 그러나 크 리스티는 좀처럼 거울 앞에 오래 서 있는 법이 없다. 자신의 얼굴은 입도 눈도 너무 커서 볼품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고전적인 우아함이 풍기는 몸 매에 쉽게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움까지 갖추고 있어 남자들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 으나 본인 자신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남성과의 교제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라일과 헤어진 후로는 항상 쌀쌀한 여자 로 통해 왔다. 새미 피터슨에게는 자신을 속일 수 없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가운 여자로 보이는 편이 낫다. 다시는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까. 택시 운전사는 포도(鋪道)에 내려선 크리스티의 발 앞에 커다란 숄더백을 내려놓았 다. 아침부터 대단한 더위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여행준비를 하느라 바쁘게 지내왔 던 까닭에 더위가 한층 더 느껴졌다. 저만큼 앞쪽에 마이크로버스 l대와 대형 트럭 2대, 그리고 지프가 1대 서 있다. 이 곳이 집합장소임에 틀림없다. 떡갈나무 그늘에서는 한 떼의 학생들이 앉아 이번 조사 여행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다. 그들의 들떠 있는 모습을 보고 크리스티 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무거운 숄더백을 들어올렸다. 이때 검은 머리의 젊은 남자가 학생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곧바로 크리스티 쪽으 로 다가왔다. 그의 초록빛 눈은 데님 바지와 무명 셔츠를 입은 그녀의 날씬한 몸매를 황홀한 듯 훑어본다. "올슨 양인가요?" 그의 얼굴에 정겨운 미소가 떠올랐다. "네." 크리스티도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데니스 드 빌리어스입니다." 그는 크리스티의 손을 잡고는 크게 환영한다는 양으로 열심히 아래위로 흔들었다. "가방을 트럭에 싣죠. 교수님도 곧 나올 겁니다." 사양하는데도 가방은 이미 그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수고를 끼쳐 미안해요." 크리스티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데니스의 뒤를 따라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천만의 말씀." 그는 가볍게 받아넘기고 가방을 트럭의 짐칸에 실었다. 그런 다음 턱으로 다른 학생 들 쪽을 가리켰다. 모두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들을 소개하죠." 학생들은 모두 l5명이었고, 그중에는 여자도 3명 끼어 있었다. 특히 눈을 끈 사람은 에리카라고 하는 금발에 밤색 눈을 한 여학생이었다. 격렬하게 불타는 그 눈빛은 요 주의 인물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알고 있겠지만 모두가 서로 이름을 부르고 딱딱한 말씨는 전혀 쓰지 않아요." 데니스는 돌아보면서 싱긋 웃었다. "당신 이름은?" "크리스티." 이때 에리카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몇 해 전에 크리스티라는 포크싱어가 있었어요. 우리 오빠는 그 여자를 무척 좋아 해서 그녀의 레코드는 전부 사들였죠." "어머, 그래요?" 크리스티는 별로 흥미없다는 듯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으나, 에리카는 계속 말했다. "그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어느 사이엔가 사라졌거든요." ?"인기가 없어졌기 때문이겠죠." 크리스티는 서둘러 이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설마!" 에리카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고, 크리스티의 짧은 갈색 곱슬머리에서 부터 편안해 보이는 운동화에 이르기까지 재빨리 훑어보았다. "오빠는 그 여자를 남아프리카에서 제일 가는 포크싱어라고 말했어요. 오빠가 그렇 게 말했으니까 틀림없어요. 오빠는 그 여자의 레코드를 낸 회사에 근무하고 있거든 요." 싸늘한 것이 크리스티의 등줄기를 훑어내렸다. 그러나 얘기는 거기서 끝났다. 데니 스가 큰소리로 말했기 때문이다. "교수님이 오신다!" 데니스의 시선을 따라간 크리스티는 순간 전신이 돌처럼 굳어져 꼼짝도 할 수 없었 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이쪽으로 오고 있는 사람은 바로 라일 베니커였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무서운 힘으로 크리스티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5년에 걸쳐 겨우 마음 의 안정을 회복했는데… 학생들은 일제히 그에게로 몰려갔으나, 크리스티는 창백한 얼굴로 조각처럼 그 자리 에 서 있을 뿐이다. 학생들의 머리 너머로 그의 검고 날카로운 눈과 마주칠 때까지는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재빨리 학생들에게 뭔가를 지 시했고, 학생들은 앞을 다투어 차가 있는 쪽으로 몰려갔다. 혼자 남은 크리스티를 보고 라일이 다가왔다. 도망치고 싶다. 지금까지 이처럼 누군 가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다. 그가 바로 앞에서 내려다보고 있어도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늘씬하게 뻗은 몸매와 햇볕에 그을은 피부, 관자놀이 언저리에 흰머리가 약간 섞여 있어 38살이라는 실제 나이보다 다소 나이 들어 보이는 것 외에는 5년 전의 그와 달 라진 점이 전혀 없다. 그러나 마음의 충격이 조금 가라앉자 역시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굴곡이 깊 은 얼굴 표정은 한층 날카로와졌고, 눈이나 입도 전보다 엄격한 인상을 주었다. 그런 인상이 이상하게도 그에게 남성적 매력을 보태어, 그의 시선을 받기만 해도 마음이 흔들렸다. 때마침 그는 크리스티의 머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5년 전에는 머리카락이 허리 근처까지 내려와 있었다. "다시 만나다니 운명의 장난인가? 그렇다면 짓궂은 운명이군. 어제쯤만 알았더라도 다른 사람으로 바꿨을 텐데." 귀에 익은 굵은 목소리가 칼로 찌르듯 가슴을 찔렀다. 크리스티는 오랜만에 발끈했 다. "나도 당신이 이 여행의 인솔자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응모하지도 않 았을 거예요." "서로가 그런 감정이라면, 출발 전에 미리 말해 둘 게 있어." 그의 태도는 위압적이고 협박적이기조차 했다. "앞으로 4주일 동안은 전원이 힘든 생활을 해야 해. 다른 사람의 도움은 기대하지 말아 줘. 당신은 통계를 내거나 타이프를 치는 일 외에,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허드 렛일도 해줘야겠어. 다시 말해, 저들은 당번제로 요리 솜씨를 발휘하게 돼 있으니까 당신도 예외는 아니야. 특별대우란 없어." 크리스티는 발끈했으나 노여움을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 "다른 할 말은 없나요?" "있지!" 꽉 죄는 푸른 셔츠 속에서 그의 가슴의 윤곽이 또렷이 드러났다. "당신은 일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 있더군. 그러니까 그 소문대로이길 바래." 내가 일을 못한다고 생각하는군? 좋아, 그렇다면 지금부터 두고 보라지. "어떤 차에 타야죠?" "데니스와 함께 앞 차에 타도록 해." "알았어요." 한순간 서로 쳐다보는 두 사람 사이에는 험악한 공기가 감돌았다. "이젠 가도 되나요?" 라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발을 돌려 지프로 향했다. 크리스티는 그의 뒷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카키 색 바지에 싸인 길고 탄력있는 다리와 가는 허리 그리고 넓은 어깨. 그와 한동안이나마 부부 사이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 제 그는 완전한 타인. 하지만 마음은 그와 함께 나누었던 사랑의 추억으로 가득 찼다. 물론 그때의 일을 생각하고 싶진 않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 5년 전에 잊었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다시 만난 순간, 반 년 동안의 결혼생활이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 과 웃음소리로 가득 찬 반 년이었다. 그러나 직업의 차이가 두 사람 사이에 깊은 도 랑을 파놓았기 때문에 도저히 그 도랑을 메워 주는 기적은 바랄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는 마음속에서 과거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고, 데니스가 운전석에 앉아 있는 트럭 쪽으로 발을 옮겼다. 라일로부터 받은 모욕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던 탓 인지 데니스의 옆자리로 올라앉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차의 문을 난폭하게 닫았다. "이런!" 데니스는 크리스티를 보자 깜짝 놀라면서 외쳤다. "여자는 마이크로버스에 타게 돼 있는데요." "이 차에 타라더군요. 걱정 말아요." "교수님은 좀 이상하군요. 이런 고물차에 여자는 태울 수 없는데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 라일에게 가려고 했다. "괜찮아요! 당신과 함께 타???가겠어요." 아무래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트럭에 태워진 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 더 어려 운 문제들이 잇따르지 않을까? 크리스티는 억지로 웃어 보였으나 데니스의 걱정스런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당신이 괜찮다면 모르지만…" 이때 붉은 트라이엄프 차가 타이어 끌리는 소리를 내면서 라일의 지프 앞에 서는 바 람에 두 사람은 동시에 돌아다보았다. "잠시 기다려야겠는걸." 이렇게 말하는 데니스의 목소리에는 약간 짜증이 섞여 있었다. 트라이엄프에서 내린 사람은 키가 훤칠한 금발의 여자였다. 멀리서 보아도 대단한 미인이다. 빠른 걸음으로 지프로 다가오는 그녀를 보는 라일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 가 번졌다. 지금까지의 엄한 표정과는 딴판이다. 그녀는 라일의 목에 팔을 감고 볼에 키스를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크리스티는 뭔가가 가슴을 찌르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저 여자도 함께 가나요?" 왠지 숨이 막혔다. "천만에!" 데니스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저 여자는 뱅어와 같은 손을 더럽히길 싫어하죠. 자길 위해서도 그런데, 하물며 남 을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죠!" 크리스티의 눈은 우아하게 차려입은 그 여자에게 못박혀 있었다. 그녀는 라일에게 무엇인가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저 여자 누구예요?" "소냐 디콘이라는 여자죠. 아버지는 광업계의 거물이구요. 교수님이 반 년 전에 귀 국한 뒤로 줄곧 붙어다니고 있어요." 아무 것도 모르는 데니스는 크리스티가 묻지도 않은 일까지 들려 주었다. 그러나 지 금 크리스티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소냐 디콘의 태도였다. 그 녀는 라일에게 무엇인가 열심히 부탁하고 있는 듯했으나, 라일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 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저 여자 난처한 것 같군요." 크리스티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소냐는 독점욕이 강한 여자니까, 아마 교수님이 자기만 혼자 두고 떠나는 게 못마 땅할 거예요." 크리스티는 라일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얘기는 듣고 있는 듯했으나 그의 생각은 딴 곳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소냐는 발길을 홱 돌리더니 자기 차 가 있는 쪽으로 총총히 돌아갔다. 엔진 소리가 나고, 한 바퀴 돌아 원래 왔던 길로 사라져 갔다. 크리스티와 데니스는 말없이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때 라일이 트럭으로 다가와 검은 눈썹을 찌푸리며 데니스를 올려다보고 외쳤다. "출발해! 많이 지체됐어!" 몇 분 후 일행은 프리토리아를 향하는 고속도로로 차를 몰았다. 데니스가 '고물차'라고 말한 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의자는 딱딱하고, 도로의 울퉁불퉁한 부분을 지날 때마다 몸이 튀어올랐다. 더구나 서쪽으로 갈수록 더위는 참 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그러나 조사단을 선도하는 라일 차의 속도는 변하지 않 았다. 점심을 먹으려고 포트기에터스러스에서 차를 세웠을 때는 며칠 동안이나 차에서 흔 들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트럭에서 내린 크리스티는 라일을 피하기 위해 여자들 틈 에 끼었다. 다행스럽게도 에리카에 대해 불안감을 품었던 것은 공연한 신경과민이었 음을 알았다. 그녀는 머리도 영리하고 성품도 좋은 학생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샌 드라나 발레리도 마찬가지였다. 뙤약볕 아래를 한참 달린 뒤에 들어간 레스토랑은 마치 천국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출발시간은 빨리 돌아왔고, 크리스티는 마지못해 햇볕이 내리쬐는 바깥으로 발을 옮 겼다. "마이크와 자리를 바꾸는 게 좋겠어요." 발레리가 붉은 머리를 흔들면서 크리스티에게 말해 왔다. "마이크는 이제부터 트럭으로 간다니까, 우리들 차에 자리가 하나 비거든요." 크리스티가 발레리의 권고에 따르려고 하는 순간 우연히 라일과 눈이 마주쳤다. 발 레리가 한 말을 전부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입가에는 빈정대는 듯한 웃음을 띠우고, 눈은 도전적으로 빛나고 있다. 크리스티는 다시 한번 분노를 참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고마와요. 하지만 맘대로 차를 바꿔 타지 않는 게 좋겠어요. 베니커 선생의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으니까 벼락이 떨어질지도 모르거든요." 여학생 3명 중에서 가장 마음이 약한 샌드라는 크리스티의 뒤쪽을 흘깃 쳐다보고는 겁먹은 듯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방금 한 말, 교수님이 들으셨어요." 그래서 어떻단 말야?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크리스티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저 "어 머, 그래요?"라고만 대꾸하고 말았다. 샌드라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바로 뒤에서 라일의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전원 차에 타! 출발이야!" 크리스티가 트럭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강철같이 억센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물론 라일의 손이었다. 그는 화난 얼굴로 크디스티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 다. "다시 한번 학생들 앞에서 나를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하면 당장 짐을 꾸려 요한네스 버그로 돌아가게 할 거야." 두 사람 사이에는 증오심???엇갈렸고, 크리스티는 한순간 이런 기회에 도망쳐 버릴 까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어드는 목소리로 사과하고 말았 다. 눈에 익은 검은 눈이 노여움으로 불타며 내려다보고 있다. 그러나 라일은 곧 발길을 돌려 지프 쪽으로 향했다. 크리스티도 남의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아 서둘러 데니스의 옆자리로 가서 얌전하게 앉았다. 그러나 아직도 부아가 가라앉지 않아 지프에 올라타는 라일의 늘씬한 몸을 무의식중에 노려보았다. 데니스는 키를 꽂아 시동을 걸고 지프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뒤를 따랐다. "알고 보면 교수님도 그렇게 나쁜 분은 아녜요." 그는 곧바로 앞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조금 전의 얘기를 들은 모양이다. "당신 말대로일 거라고 생각해요." 전부터 라일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학생들이 알게 되면 곤란하다. "아직 여행에 익숙하지 않고 날씨까지 워낙 더워 그만 짜증이 났던 거예요…" 이것은 단순히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알고 있어요, 오늘은 힘들었을 거예요." 다행히 얘기는 거기서 끝나고 그후 두 사람은 말없이 차에 흔들렸다. 일행은 국도를 벗어나 북서쪽으로 달렸다. 지금까지 이만큼 북쪽까지 와본 적이 없 는 크리스티는 주위의 식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평소 보아왔던 초목과는 전혀 달랐 다. 여러 개의 산을 넘었으나, 길은 여전히 고개를 올라갔다가는 다시 골짜기로 내려 갔다. 커다란 강과 그 지류를 따라 있는 둑에는 푸릇푸릇한 초목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기온은 자꾸만 올라가고 숨이 막힐 듯했다. 목구멍은 컬컬하고 얼굴과 목에서는 땀 이 비오듯 쏟아진다. 옷이 살갗에 달라붙어 기분이 나쁘다. 데니스를 힐끗 쳐다보니 그도 역시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그의 셔츠에도 땀이 배어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해요?" 크리스티는 선글라스를 머리로 밀어올리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50km쯤 될걸요." 크리스티는 한숨을 쉬었다. 등이 아팠다. 선두를 달리는 지프가 일으키는 흙먼지 때 문에 앞이 부옇게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니 자신이 타고 있는 트럭은 더 지독한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다. 뒤따라오는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절로 동 정이 갔다. 다이알스드리프에 도착했을 때는 한 시가 넘었다. 작은 마을로 가게는 여남은 집밖 에 없었으며, 인동덩굴로 덮인 담장과 수목 사이로 고풍스럽고 아담한 집들이 옹기종 기 모여 있었다. 시내로 들어서자 지프는 속력을 떨어뜨렸다. 데니스도 여기에 맞추어 브레이크를 밟 고 속력을 줄였다. 이 도시를 그대로 통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을 때 라일은 가게 앞에서 모두 차를 멈추라는 신호를 했다. 학생들은 차에서 내리라는 지시를 기다릴 것도 없이 우르르 내렸다. 먼지투성이인 차에서 빨리 벗어나 몸을 펴고 싶는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힘든 여행 도 좀처럼 드물 거다. 모두가 길바닥에 내려 축 늘어졌다. 그러나 라일만은 달랐다. 그의 뛰어난 정력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탄복해 왔지만, 오늘 같은 날은 특히 감탄스 러울 정도다. 몇 시간 전부터 탈진상태에 빠져 있는 학생들에 비해, 지프에서 가볍게 내려선 라일 에게서는 아침에 출발할 때와 다름없는 생기 찬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여기가 마지막 도시야. 이제부터는 인가가 없어. 앞으로는 누군가가 일주일에 한번 씩 이 다이알스드리프에 와서 일용품을 보급하거나 필요한 물건을 사야 해." 라일의 검은 눈은 학생들을 둘러보다가 한순간 쌀쌀하게 크리스티를 쳐다보았다. 그 러나 그는 곧 시선을 돌렸다. "잊고 온 물건이 있는 사람이나 물건을 사고 싶은 사람은 지금 사도록 해. 30분간 시간을 줄 테니 절대로 늦지 않도록." 그는 이렇게 말하고 힐끗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찬 게 마시고 싶은데." 옆에서 데니스가 말했다. "당신은요?" "아까부터 목구멍이 칼칼해서 죽겠어요." 크리스티는 돌아다보며 이렇게 대답하고는 가게 쪽으로 향했다. "크리스티나!" 갑자기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 감정을 가라앉힌 다음 라일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가 '크리스티나'라고 부른 것은 처음이 다. 화를 냈을 때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세례명은 왠 지 기분 나쁘게 울려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불타는 듯한 더위 속임에도 전율을 느끼면서 그의 날카로운 눈을 바라보았다. "모자를 갖고 왔나?" 상내가 무슨 말을 할지 분명하게 예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라일의 질문은 뜻 밖이었다. "아뇨, 나는…" "하나 사가지고 가는 게 좋을 거야." 그는 크리스티의 말을 가로막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 부근은 햇살이 강해서 모자를 쓰지 않으면 위험할 때가 있지." 라일은 크리스티의 등에 손을 대며 가게 쪽으로 밀었다. 겨우 한순간 등에 닿은 그 의 손이 옷을 통해 살을 짓누르는 듯했다. 마치 길바닥의 먼지가 목구멍?을 메운 듯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줄곧 그가 곁에 있게 되면 어쩌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는 혼자서 냉장고로 다가가더니 과일 주스 통조림을 꺼냈다. 많은 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기 때문에 가게는 갑자기 좁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크리스티의 눈에는 라일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고, 느끼는 거라고는 등에 남 은 그의 손의 감촉뿐이다. 그는 진정으로 일사병을 염려해 주는 걸까? 아니면 귀찮은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해서 한 말일까? 생각해 봤자 부질없는 일이다. 크리스티는 가볍게 어깨를 움츠리곤 가까이에 있는 차양 넓은 밀짚모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과일 주스를 들고 카운터 뒤에 서 있는 깡 마르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에게 값을 치렀다. 무엇을 하고 있어도 라일의 시선이 쫓아왔다.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는 그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녀는 가게를 나와 나무그늘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무에 기대고 얼마 안 있어 그가 곁으로 다가왔다. 크리스티는 모른 척하고 주스 깡통을 열어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라일 은 무시당하고 가만히 있을 남자가 아니다. 자기를 보란 듯이 눈앞을 가로막아 서며 가늘고 탄력있는 허리에 태연히 손을 얹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눈 빛은 아무렇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걸치고 있는 것을 모조리 벗겨 버리려는 듯한 모 욕과 경멸에 찬 눈… 그리고 그가 노린 대로 크리스티는 심한 치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목구멍과 얼굴이 화끈해지면서 왜 그런지 갑자기 큰소리로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분노가 치밀 어올라 눈물을 억제해 주었다. 몇 해 동안을 라일로 인해 울어왔지 않는가. 다시는 울지 않으리라! 이런 식의 모욕을 받고 눈물을 보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당신의 그 훌륭한 일은 어떻게 됐지?" 이죽거리는 말투도 싫었으나 그의 비웃는 듯한 엷은 미소는 더욱 불쾌했다. 크리스 티도 이에 지지 않고 비웃어 주려고 했으나, 마침 학생들이 가게에서 나왔다. "3년 전에 계약이 끝나고 그만두었어요." 무심결에 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젠 가수라는 직업에 흥미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비서 양성소에 들어가 비서 공부 를 했죠. 그 동안 했던 일은 평범한 비서 일이었어요." "당신은 남들의 주목을 끌거나 관심의 대상이 되길 좋아했잖아? 내 기억으로는 그랬 던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당신은 나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두 사람의 증오심 어린 시선이 다시 얽혔다. 라일의 턱이 경련을 일으키는 듯했다. 몹시 화가 난 모양이다. "어쩌자고 이번 일에 응모했지?" 그는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다그쳤다. 크리스티는 짐짓 가벼운 기분으로 대답하는 척했다.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일이고, 탐험여행 같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 죠." "학생들은 탐험여행을 하러 온 게 아냐." 라일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크리스티는 그에게서 좀더 떨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곁에 서 있으면 그의 몸 에서 풍기는 그리운 콜로뉴 냄새가 코를 간지럽히고 정신을 몽롱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번 조사여행은 그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탐사연구야. 당신도 그 점 을 잘 명심해야 해." 라일이 등을 돌려 가버렸을 때, 크리스티는 떨고 있는 자신에 스스로 놀랐다. 지금 까지 한번도 두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라일이 지금은 무척 두렵다. 그의 속에서 격렬한 노여움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짧은 결혼생활 동 안에 한번도 느껴 본 일이 없는 감정이었다. 앞으로 4주 동안이나 라일의 비서노릇을 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암담해졌다. 그의 곁에서 일한다는 건 용이한 일이 아닐 거다.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이제부터 하루하 루 깨닫게 되겠지… 2 캠프의 위치는 깎아지른 듯한 산과 모길라퀘나 강의 중간쯤이었다. 산등성이는 바위 투성이어서 울퉁불퉁했다. 산이나 강이나 모두 5분 거리여서 우선 이상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도착한 그날은 모두 지리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부근을 답사하고 다녔 다. 에리카, 샌드라, 발레리는 하나의 텐트에, 남자들은 세 개의 텐트로 나뉘었고, 크리 스티에게는 l인용 텐트가 배당되었다. 특별히 우대를 받은 건지 따돌림을 받은 건지 는 알 길이 없었다. 라일도 혼자서 커다란 텐트를 차지했는데, 그의 텐트는 사무실로 도 사용되어 칸막이의 한쪽이 침실로 되어 있었다. 모갈라퀘나 강의 중간에는 커다랗게 굴곡진 부분이 있고 바위가 물길을 막고 있어 천연의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물이 얕아 멱을 감는 곳으로도 안전하고 좋았다. 일 행은 일 주일분의 음료수를 길어 캠프로 운반했다. 상하기 쉬운 음식은 저장 텐트의 가스 냉장고에 보관하고, 가스 스토브와 장작불을 사용해서 저녁식사 준비를 시작했 다. 모든 것이 잘 갖추어져 있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문화적인 생활이었다. 그러나 별 을 바라보?며 옥외에서 식사를 할 때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낯선 소리 가 들리고, 원시적인 세계를 방불케 했다. 모두가 지칠 대로 지쳐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크리스티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파트의 편안한 침대에 비해 침낭과 조립식 침대는 너무나 불편했다. 게다 가 좁은 텐트 안에서 정적과 어둠에 싸여 있으니, 지구상에 자기만 혼자 살아남아 있 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상태로 아침까지 밤을 꼬박 새우는 건 아닌가 걱정 했으나, 어느 새 잠이 들어 새벽빛이 비쳐들 땔까지 꿈도 꾸지 않고 잤다. 이틀째 되는 날부터 곧 발굴이 시작되었다. 울퉁불퉁한 산비탈에는 천연의 동굴이 있는데 고대 아프리카인이 생활하던 장소인 듯했다. 비탈이 워낙 험해 도구를 운반하 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무엇인가가 발견될 경우를 대비해 조사지점에는 네모 표시를 하고, 정확한 도면을 작성해서 출토지점을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했다. 과연 무엇이 나올까…? 크리스티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데님 바지와 무명 셔츠, 발에는 다니기에 편한 작업화, 손에 는 노트와 연필. 그런 대로 대충 준비를 갖추고 일행을 따라갔으나, 일은 단순히 노 트에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라일은 전원에게 크리스티가 알아들을 수 없는 지시 를 했고, 크리스티 혼자만이 그의 곁에서 장비점검을 도왔다. 해가 점점 머리 위로 높아지면서 불쾌한 더위와 습기가 밀어닥쳤다. 라일은 역시 경 험자답게 쇼트팬츠와 티셔츠 차림을 하고 있다. 마침내 그도 셔츠를 벗어던지고는 터 질 듯 단력있는 상반신을 태양 아래 드러냈다. 남학생들은 그를 따라 차례로 셔츠를 벗었으나 여자들은 그럴 수 없었다. "나도 내일은 비키니 위에 쇼트팬츠만 걸치고 가겠어." 점심식사를 하러 캠프로 돌아왔을 때 에리카가 말했다. 크리스티를 비롯해 다른 여 학생들도 대찬성이었다. 오후에는 발굴현장에 가지 않고 나무그늘에서 아침의 실습에 대해 토의를 했다. 이 것도 훌륭한 수업이어서 학생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노트를 하기도 했다. 그러 나 토의가 끝나자 상삼오오 흩어져 크리스티와 라일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크리스티는 불안한 마음으로 노트와 연필을 만지작거리며 라일 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눈은 결국 그를 향했다. 검은 털로 덮인 넓은 가 슴, 그의 남성적인 매력은 5년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속 에서 전율을 느끼며 손바닥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의 가슴에 볼을 갖다댄 적도 한두 번이 아닌데… 그 당시의 생각이 한꺼번에 되살 아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라일도 그 무렵의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은 두려울 정도의 불쾌감뿐이었다. 크리 스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딜 가지?"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자신의 텐트로 가려던 크리스티는 전신을 긴장시키며 돌아 보았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나요?" 천을 씌운 낮은 의자에 앉아 있던 라일은 천천히 일어나 크리스티의 앞을 막아섰다. "부탁할 일이 있어." 라일은 앞장서서 그의 텐트로 걸음을 옮겼다. 크리스티는 다소 두려워하며 뒤를 따 랐다. 무슨 일을 시킬지는 알 수 없었으나 우선 노트와 연필을 집어들었다. 오전중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미 모두 기록했다. 어디를 읽으라고 해도 자신이 있었 다. 텐트 안으로 들어서자 라일은 의자를 권하더니 대단한 속도로 구술을 시작했다. 더 구나 전문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따라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왔다. 그러나 크리스 티는 전혀 곤란한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읽어봐." 잠시 후 라일은 명령조로 말했다. 크리스티는 곤 줄줄 읽어내려가다가 어느 부분에 서 입을 다물었다. 오늘 아침 기록한 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당신은 틀림없이 남아프리카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대는 17세기라고 말했 어요. 그런데 지금 얘기는 100만 년 전이라고 하고 있어요." "맞아." 그는 천을 씌운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남아프리카에 대해서 쓴 문헌이 남아 있는 것은 17세기부터야. 탐험가가 찾아오고 문자를 아는 사람들이 살게 된 것이 그 무렵부터거든. 하지만 유사 이전의 일이나 인 간에 대해서 조사하는 것이 고고학자의 일이지." "그렇군요." 어리석은 질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워졌으나, 크리스티는 기분을 바꾸어 얘 기를 딴 데로 돌렸다. "재미있는 자료가 발견될 것 같아요?"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 하지만 이 땅의 임자는 찾아봐도 헛수고라는 거야." 불과 한순간이긴 했지만 그의 경직된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고, 크리스티의 마음을 덮고 있던 두꺼운 얼음이 한꺼풀 녹아 없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방심해서는 안 된다. 자칫하면 다시는 열지 않기로 결심한 마음의 문을 여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 다. 그렇게 되면 과거의 그 고통이 다시 반복되는 것??甄? "고생한 보람이 없으면 학생들이 실망하지 않을까요?" 크리스티는 당면해 있는 일로 화제를 돌렸다. 사실 현재 하고 있는 일은 점점 재미 있어지고 있다. "실망할 리가 있나?" 그의 눈이 비웃듯이 담배연기를 동해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해도 귀중한 체험이라는 점에는 변함없지. 이 조사여행의 가 장 중요한 점이 바로 그 점이거든." "알았어요." 또 한번 어리석은 말을 했다 싶었다. 거북살스러워진 그녀는 시선을 노트 위로 떨어 뜨렸다. "다른 질문은?" "없어요." 크리스티는 고개를 저었다. 한 줄기 햇살이 흘러들어 얼굴 주위에 흔들리고 있는 금 발을 따뜻한 벌꿀빛으로 물들인다. "그럼, 다음을 계속해 줘." "미안해요." 꾸짖는 듯한 라일의 말투에 깜짝 놀란 크리스티는 그후 5분 동안 한눈도 팔지 않고 속기한 노트를 읽어내려갔다. 마침내 노트를 다 읽고 나자 텐트 안은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새들의 지저귀는 소 리와 학생들의 웃음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린다. 모두가 오늘의 경험으로 들떠 있는 것 이다. 극도로 긴장되어 있는 나와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라일을 올려다 본 크리스티는 히아신스 빛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가 몹시 화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 얼굴로 보죠?" 평소에는 윤기있는 목소리가 긴장감 때문에 쉬어 있었다. 라일은 쇠로 된 재떨이에 담뱃불을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동작에서도 화가 나 있음을 엿볼 수 있었으나, 크리스티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보다 분명한 노여움이 불타고 있다. "함께 조사여행을 떠나 준다면 어떤 희생을 치러도 좋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 "이제 와서 불쑥 따라와 방해가 되나요?" 크리스티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가슴이 답답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죽거리는 말투로 대꾸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죠?" "잘 알고 있군." 순간 무거운 것이 크리스티의 가슴을 짓눌렀고, 어떤 이상한 덩어리 같은 것으로 목 이 콱 막히는 듯했다. "그토록 내가 싫은가요?" "당신에 대해서는 싫다고도 좋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완전히 무관심할 뿐이야. 내가 무엇보다 싫어하는 것은 묻혀 있는 과거를 파내는 일이지." 완전한 무관심, 묻힌 과거. 어쩌면 저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물었다고 생 각한 상처가 다시 입을 벌려 아파왔으나 크리스티는 간신히 마음의 고통을 감추었다. "고고학자치고는 이상한 말을 하는군요." "지금 한 말은 개인적인 얘기야. 직업과는 상관없어. 새삼스럽게 말할 것까지도 없 잖아?" 라일은 이제 완전한 타인이 된 것이다. 그의 화난 얼굴을 보고 있자니 텐트 안의 열 기로 숨이 막힐 듯하다.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불쾌해요. 느끼지 못했나요?" "그러리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해 두는 것도 해롭진 않겠지. 어차피 우리는 앞으로 4주일 동안 참아야 하니까." 라일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 오만한 태도로 명령했다. 셔츠를 입지 않아도 그의 위 엄에는 변함이 없다. "용지류는 책상 밑에 있는 상자에 들어 있어. 지금 속기한 것을 타이핑해 줘. 사본 은 2통이 필요해. 다 치거든 책상 위에 있는 초록색 서류철에 넣어 두도록 해." "네, 알았습니다, 교수님." 크리스티는 상대를 무시하듯―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다소 겁먹은 태도로― 대답했 다. 라일은 무서운 얼굴로 힐끗 쳐다보고 천막을 나갔다. 완전한 무관심, 묻힌 과거.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점점 크게 메아리쳤다. 앞으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상처를 받지 않겠다고 몇 년간 마음을 다져 왔건만, 그의 말 한마 디가 자신의 그런 정신적 무장을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뜨리고 말았다. 크리스티는 눈앞에 다시 나타난 라일 베니커가 증오스러웠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가장 아픈 곳에 회초리를 휘두른 것이다. 불쾌하다거나 하다는 말을 들었다면 그런 대로 참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관심하다는 말은 정말 견디기 힘든 말이다. 크리스티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일어나 소형 타이프라이터의 커버를 벗겼다. 조립식 책상 밑에는 타이프 용지와 먹지 등이 들어 있는 상자가 놓여 있었다. 다행히 타이프 라이터에는 곧 익숙해져 라일의 구술을 타자하는 데 몰두할 수 있었다. 텐트 입구가 열려 있는데도 안은 몹시 더웠다. 때로는 초원을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 주기도 했으나 지금은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다. 땀이 흐르고 면 셔츠가 살에 달 라붙었다. 한 시간 후, 크리스티는 마지막 용지를 타이프라이터에서 꺼냈다. 밖에서 는 여전히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린다. 발소리가 들려 돌아다보니 데니스가 안 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우린 강으로 헤엄치러 가는데." 초록빛 눈이 크리스티의 더워 보이는 얼굴과 땀에 젖은 셔츠를 번갈아 쳐다본다. "함께 가지 않겠어요?" 아! 당장 시원한 물속으로 뛰어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타이프한 서?류를 다시 읽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미안하지만, 아직도 일이 많이 남아 있어요." "상관없잖아요? 함께 가요, 크리스티. 이렇게 더운데 좀 쉬었다고 해서 교수님도 뭐 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 "자네의 판단은 틀렸는걸, 데니스." 라일의 목소리! 뒤를 돌아다본 크리스티는 그를 발견하자 온몸이 움츠러드는 느낌이 들었다. 25살의 여인이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어린 소녀가 된 기분이다. "올슨 양은 일을 하러 와 있어. 유급휴가를 얻어 놀러온 게 아냐. 그 점을 잊지 말 아 주게." "하지만 교수님…" "더더구나 자네의 놀이 상대가 되기 위해 온 건 아냐." 라일은 날카롭게 말했다. "아니, 교수님, 저는…" "얘기는 끝났어." 라일은 다시 데니스의 말을 막았다. 놀람과 불만스런 표정이 데니스의 얼굴을 스쳤다. 그러나 그는 곧 감정을 억제하고 발길을 돌려 강으로 가는 학생들과 섞였다. 크리스티는 데니스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니스가 야단맞을 이유가 없는 것이 다. 그녀는 갑자기 데니스를 비호하고 나섰다. "그 사람에게 화풀이하지 마세요. 데니스는 다만…" "학생들 다루는 문제를 당신이 가르쳐 줄 필요는 없어." 라일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언성을 높였다. "쓸데없는 간섭을 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싶으면 내게 화풀이를 해요. 데니스가 내게 약간 친절히 굴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나무라는 건 옳 지 않아요." "이곳은 자선단체가 아냐. 근무시간 중에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돼. 그 대신 자유시간에는 무슨 짓을 하든 당신 맘대로야." "어머, 그렇다면 자유시간을 얻을 수 있겠군요. 그것 참 반가운 일이네요!" 반사적으로 이죽거리자, 라일은 화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다소 말이 지나쳤던 모양이다. "말 조심해, 올슨 양." 그는 위협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한쪽 손을 크리스티가 앉아 있는 의자의 등받이에 대고 다른 한 손은 책상 위에 놓았다. 크리스티는 꼼짝할 수조차 없었다. "학생들 앞에서 나를 업신여기는 말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본능적으로 말을 삼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작은 악마의 충동질을 받은 크리 스티는 대담하게도 그를 올려다보며 쌩긋 웃었다. "가만두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려구요, 베니커 교수님? 매로 때려 주기라도 할 셈인 가요?" 그의 검은 눈동자가 격렬하게 불탄다. "함부로 굴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 "이상하군요, 당신에게 이런 난폭한 면이 있다는 걸 왜 진작에 알지 못했는지 모르 겠어요." 크리스티는 악마가 충동질하는 대로 거리낌없이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라일은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었고 의자의 등받이를 잡은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의 손에서 의자로 분노의 파동이 전해 오는 듯하다. 이러다가 의자의 등받이가 부 스러지는 게 아닐까? "나를 화나게 하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걸, 크리스티." 그의 얼굴이 바로 곁에 있어 피부의 세밀한 부분까지 자세히 보인다. 그러나 크리스 티의 마음을 불태우는 것은 그의 외관이 아니라 격렬한 분노였다. 이때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강 쪽으로 가버렸다. 웬일일까? 라일은 남이 아니다. 그런데도 마치 처음 대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헤 어진 아내가 이 여행에 동행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나도 그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충격을 받았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에게서 끊임없이 발산되는 뿌리 깊은 분노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로 인해 5년 동안 고통을 참아온 나야말로 화를 내야 마땅 하지 않은가.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더운데도 한기가 든다. 뭔가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이 직감이 틀림없다. 우 선,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라일이 까닭없이 화를 내고 있을 리가 없다. 네가 모르 는 어떤 사연이 분명히 있을 거다. 그 사연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라일에 게 물어본다는 것은 무리일 테고, 또 물어보고 싶지도 않다. 새미 피터슨에게 물어보 면 어떨까? 그렇다, 요한네스버그로 돌아가면 곧 새미에게 물어보자. 이런 상태로 라 일과 함께 한 달 동안을 지낸 후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다시 일에 정신을 집중시킨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으나 타이핑한 서류를 가까스로 다시 읽었다. 시간은 빨리 흘러갔다. 근무시간이 끝나면 당장 헤엄치러 가 야지. 학생들은 들뜬 기분으로 캠프로 돌아왔다. 라일도 함께 돌아왔다. 젖은 머리가 약간 이마에 흐트러져 내려왔고,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그 부드러운 미소가 엄한 얼굴을 누그러뜨리고 있다. 분했지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죄어드는 듯 아팠다. 그러나 그의 시선과 마주친 순간 전신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의 얼굴에 조금 전 의 그 미소가 사라지고 다시 증오의 표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칼?날이 가슴을 찌르는 듯하다. 크리스티는 등을 홱 돌려 책상 위에 있는 서류철에 서류를 끼워 넣었다. 뒤에서 라 일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의 얼굴과 마주치고 싶지 않다. 마음의 상처는 생생하게 되 살아나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파온다. 결국 라일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텐 트로 도망치듯 돌아오고 말았다. 라일은 아직도 누구보다 크리스티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으 나 그 까닭은 알고 있다. 그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변함없이 그를 사랑해 왔던 것이다. 그를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은 데서 오는 위장에 불과했다. 설혹 이성은 그를 몰아내려 한다 하 더라도 마음은 결코 그를 놓아 주려 하지 않는다. 한숨을 쉬고 걸터앉자 조립식 침대가 삐거덕 소리를 냈다. 발밑에는 밤의 습기를 막 기 위한 방수포가 깔려 있다. 그러나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어도 눈앞에 떠오르는 것 은 라일의 화난 얼굴뿐이다. 크리스티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죽여 울기 시 작했다. 몇 분 동안을 그렇게 하고 있으니 눈물이 마르고 마음도 가라앉았다. 강으로 가자. 이젠 물에 몸을 좀 담글 수 있겠지. 그러나 비누와 타월을 들고 강으로 가려고 했을 때,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 다. "어딜 가려고 하지?" 크리스티는 짐짓 평소의 냉정하고 조용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보시는 대로예요. 이 손에 들려 있는 걸 보면 뻔하잖아요?" "동시에 당신이 당번표를 보지 않았다는 것도 뻔하군." 라일은 멍청하게 서 있는 크리스티를 경멸하듯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오늘 저녁식사 당번이아." 더위에 시달린데다가 그의 태도에 자극을 받은 크리스티는 발끈했다. "다른 할 일이 있다 해도 강에 가서 발을 담글 시간쯤은 있겠죠? 아니면, 당신은 시 간에 대해 까다로우니까 2, 3분 늦어도 용서할 수 없단 말인가요?" 그의 얼굴도 붉어졌다. "이곳에 올 때 분명히 말해 두었잖아? 일상생활의 잡무를 절대로 소홀히 하지 말라 고." "알고 있어요. 우린 모두 번갈아가며 취사당번을 하고 있잖아요? 거기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지만 나만이 심한 대우를 받는 건 납득할 수 없어요. 모두가 강에 갔는데 왜 나만 못 가게 하는 거예요? 난 노예가 아니니까 당신이 매를 휘두른다고 해서 움 찔하진 않아요." "당신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군. 정말 모르겠어? 나는 매를 휘둘러서 돈 을 받고, 당신은 움찔해서 급료를 받는다는 사실을 말야." 라일은 성큼성큼 걸어 자기의 텐트로 들어갔다. 또 그의 승리… 그런 느낌이 들었다. 크리스티는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비누와 타월을 제자리에 놓기 위해 텐트로 돌아왔다. 이때 샌드라가 뒤가 켕기는 듯 얼굴을 붉힌 채 입구에 서 있었다. "미안해요, 크리스티. 일부러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당신과 교수님의 얘기를 듣 고 말았어요." 그녀는 주뼛주뼛하면서 말했다. "난 당신과 얘기나 하려고 나왔을 뿐인데 그만…" "괜찮아, 들어도 상관없어요." 크리스티는 샌드라의 앞을 지나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이상해요. 당신에 관한 일이면 교수님은 왜 갑자기 벽창호가 되는지 모르겠어 요. 어때요, 취사당번을 교대할까요? 멱을 감으러 가고 싶으면 오늘밤은 내가 당번할 게요." 샌드라의 제의는 고마왔으나 크리스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고마와요, 하지만 멱은 내일로 미루겠어요." 샌드라의 잿빛 눈에는 잠시 망설이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으나 말없이 다른 학생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크리스티는 텐트 안에서 얼굴과 손을 씻고 저녁식사 준비를 하러 나갔다. 취사당번의 파트너는 마이크였다. 몸이 탄탄해 보이는 갈색 머리의 청년이었다. 그 는 나무를 잘라 불을 피웠고, 크리스티가 익숙하지 않은 취사에 당황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재빨리 거들어 주었다. 라일은 저녁식사 시간을 알린 후에야 텐트 안에서 나왔다. 셔츠를 입고 머리를 단정 하게 빗은 것 외에는 낮에 보았던 모습과 다름없다. 문득 지난날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나 가슴이 죄어들며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한 다. 라일은 전부터 무슨 옷을 입든지 눈에 띄게 멋있었다. 그런 점은 지금도 마찬가 지다. 그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라일이 자기의 접시를 들고 좁은 테이블의 건너쪽에 섰을 때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다리가 부들부들 흔들리 고, 요리를 담는 손이 떨렸다. 제발 라일이 눈치채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남몰래 빌 뿐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접시를 내밀고 있는 라일의 입가에는 경멸하는 듯한 미소가 어려 있 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은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존재가 내 마음을 얼마나 어지럽게 하고 있는지 빤히 알고 있다. 그런 그에 대해 그 사실을 숨길 수 없 다는 것은 얼마나 한심스런 일인가! 무력한 자신에 대해 화가 났다. 식사가 끝나자 곧 중요한 일과가 시?작되었다. 초원에 있는 동안 이것은 줄곧 계속 될 것이다. 식기와 조리기구를 씻어 저장 텐트 안에 치우고 나자 전원이 캠프파이어 주위에 모였다. 모두가 편안한 마음으로 쉬면서 오늘 하루의 일에 대해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 마침내 주근깨가 있는 붉은 머리 청년이 꽤나 낡은 기타를 꺼내어 귀에 익은 멜로디 를 치기 시작했다. 틀리고 이상한 부분이 많아 귀에 거슬렸으나 그것은 음에 예민한 크리스티 혼자만이 느낄 뿐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듣고 있는 듯했다. "이봐 앨런, 모두가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을 치라구." 잠시 후 데니스가 이렇게 소리치자, 앨런은 한층 음량을 높여 모나리자를 치기 시작 했다. 크리스티는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깜짝 놀랐다. <신비한 미소>라는 가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전에 라일은 "정식으로 소개받을 때까지는 당신의 이름을 몰라 모나리자라 고 불렀지. 당신의 미소는 신비해서 모나리자의 미소 같거든"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기억하고 있을까? 용기를 내어 시선을 돌려보았으나 라일은 엉뚱한 곳을 바라 보며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아마 지금 모두가 함께 부르고 있는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런 멍청한 사람이 다 있담! 모두가 별로 잘 알지 못하는 곡이 나오자 노랫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자주 끊어지게 되었다. 크리스티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이렇게 몇 곡인가 계속되다가 전에 크리 스티가 즐겨 부르던 노래가 나왔다. 무심코 눈을 들었을 때, 라일의 검은 눈이 무엇 인가 묻고 싶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곡이 끝났을 때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전에 활약하던 가수라는 사실이 모두에 게 폭로되는 게 아닌가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한순간 이해할 수 없는 표 정을 보이다가 갑자기 일어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짐작컨대 그는 과거가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는 크리스티의 심정을 알아차린 듯했다. 아니면 그녀의 눈에 담긴 무언의 부탁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라일이 혼자 돌아가 주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크리스티는 밤이 깊기 전에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텐트로 돌아와 몸을 씻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노랫소리가 들렸다. 때로는 곡조가 빗나가기도 했으나 잠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잠을 이룰 수 없는 것은 라일에 대한 생각과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그의 분노가 마음에 걸린 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라일이 이탈리아를 떠나기 전 몇 주일 동안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두 사람 은 크리스티의 직업에 대해서 말다툼을 했었다. 일시적이지만 그 직업 때문에 행동을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나와 직업 중에 어느 쪽을 택 하겠어?"라고 다그쳤다. 크리스티로서는 직업을 팽개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그는 짐을 꾸렸고, "나는 돌아오지 않겠어. 이혼수속을 밟도록 해"라는 말을 남기고 아파 트를 나갔던 것이다. 그뿐이었다. 그밖에 다른 일은 생각나지 않았다. 틀림없이 라일은 생각을 고치고 돌 아올 거다, 집을 나갔을 때는 약간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었을 뿐일 것이다― 그런 헛된 기대를 품고 기다리기를 석 달. 넉 달째에 들어서 새미 피터슨에게 설득당했다. 돌아올 리 없는 남자를 기다려 봐야 부질없는 일이 아니냐고. 그래서 이혼수속을 밟 았다. 라일은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고, 평생 계속되리라 믿었던 결혼생활은 깨끗이 끝 나고 말았다. 그후 이름은 원래의 성인 올슨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라일 베니커라는 인물을 완전히 잊기 위한 노력과 고뇌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 동안 새미는 언제나 강력한 힘이 되어 주었다. 무엇 때문에 라일은 저토록 화를 내고 있을까? 이혼을 바란 것은 그 사람 자신이었 고, 모든 것이 자기의 소원대로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왜 증오심을 품고 있는 걸 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는 증오심 따위는 품고 있지 않다. 그 자신이 말한 대로 '완전히 무관심'한 것이다. 하지만 무관심하다면 화를 낼 까닭이 없지 않을까? 한 시간쯤 지나자 사람의 소리도 끊이고 캠프는 조용해졌다. 그러나 크리스티는 여 전히 잠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밤새도록 뜬눈으로 침낭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이튿날 아침, 크리스티는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강으로 향했다. 길이 자연스럽게 나 있었고, 군데군데 잎이 뾰족한 풀들이 우거져 있다. 이른 아침이라고 하지만 기온 이 따뜻해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맑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의 차가움 을 맨살에 느끼면서 헤엄치는 일은 정말 상쾌하다. 밤새도록 불쾌감으로 후덥지근하 던 몸이 상쾌해졌다. 조금 지나자 이슬에 젖은 대지 저편에서 태양이 황금빛 햇살을 던졌다. 헤엄치기를 멈추고 바위 위에 놓아 둔 비누로 몸을 씻은 다음 머리를 감았다. 정말 살 것만 같 다. 다시 한번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비누를 씻어내고 타월로 몸을 닦은? 다음 옷을 입기 시작했다. 크리스티의 몸은 가냘프고 유연했으며 고운 살결이 햇볕에 적당히 태워져 비키니 자 국이 남아 있다. 가슴은 작지만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다리는 길고 보기 좋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자신의 자태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 베이지 색 쇼트팬츠를 입고, 초록빛 줄무늬 블라우스를 집어들며 그 사이에 생각하고 있는 것은 라일에 대한 일뿐. 이제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와 다시 만나게 되니 태연할 수가 없었다. 전에는 그를 사랑함으로써 무척 행복했다. 그러나 지금은 고통스러울 뿐이다. 라일 자신이 분명하게 말한 것처럼 그는 나에 대해서 전혀 관심 이 없다. 이에 반해 나는 어리석게도 옛사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서 그 를 만났다는 것은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얼마나 고통을 받을 지 예상조차 할 수 없다. 소매없는 블라우스를 걸치던 크리스티는 갑자기 뒤를 돌아다보았다. 육감은 빗나가 지 않았다. 지금까지 끊임없이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있던 그 인물이 바로 곁에 있었 던 것이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무에 기대 있었다. 카키 색 쇼트팬츠가 탄력있는 허 리를 감싸고 있어 긴 다리가 더욱 야성적으로 보인다. 그의 검은 눈은 거리낌없이 크리스티의 몸을 훑어보다가 마침내 미처 가리지 못한 가슴에 와서 갑자기 멈추었다. 크리스티는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황급히 블라우스 자 락을 여몄다. 라일의 입술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일그러진다. 그에게 이런 장면을 목 격당하다니, 약점을 잡힌 것만 같아 불쾌하기 짝이 없다. 3 "언제부터 거시 있었죠?" 크리스티는 라일에게 등을 돌리고 떨리는 손으로 블라우스의 단추를 잠그면서 쌀쌀 하게 말했다. "한참 되지." 샌들을 신고 젖은 머리를 쓸어올리고 있을 때 밉살스런 대답이 들렸다. 크리스티는 화끈거리는 얼굴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쪽은 여성전용이고, 남성 출입금지구역이라는 것을 걸 알고 있을 텐데요." 라일은 씽긋 웃고 나서 크리스티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발가숭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신과 나 사이에 그런 규칙은 없어, 크리스티나." "그렇지 않아요, 교수님! 나도 다른 여자와 마찬가지로 프라이버시를 지킬 권리는 있는걸요." "그렇게 정숙한 말을 하다니 당신답지 않은걸. 어떻게 된 거지?" "말씀하시는 뜻을 모르겠군요." 크리스티는 냉정을 가장하며 소지품을 집어들고 도망칠 자세를 취했다. "시치미 떼지 마, 크리스티." 라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조금도 재미있어하는 표정은 아니다. "당신의 육체를 본 사람이 나뿐이란 말인가? 설마 그런 말을 믿으리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크리스티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이런 무례한 말을 한담! 뭐라고 쏘아 주고 싶다. 그러나 혀가 목구멍을 막고 있는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다. "몇 명의 남자가 당신의 아름다운 몸을 침대에서 바라보았지?" 그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운 채 나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다가오는 그 의 눈에는 불길 같은 것이 타고 있다. "그 디룩디룩한 새미 피터슨도 당신을 놓아 둘 수 없었던 모양이군. 그 녀석도 애인 중 한 놈이었겠지?" 크리스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부모가 없는 크리스티에게 있어 새미 피터슨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항상 자신을 귀여워해 주었지만 이상한 감정은 품지 않았고, 대하는 데 있어서도 결코 업무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라일의 말투 는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더러운 관계라도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속이 메스꺼워졌다. "당신은 정말 비열한 사람이군요!" 겨우 할 수 있는 말은 이 말뿐이었다. "그래?" 라일의 입이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얼마나 비열할 수 있는지 보여 주지." 도망칠 사이도 없이 크리스티는 그의 늘씬하고 탄력있는 몸에 짓눌리고 말았다. 느 닷없이 그의 몸에 닿은 충격으로 손발에서는 갑자기 힘이 빠져나갔다. 그의 억센 손 이 그녀의 뒷머리를 잡아 얼굴을 뒤로 젖혔다. 그의 입술이 다가오고… 격렬한 키스 … 거부하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입술이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눈앞이 캄캄 해지고 타월과 비누가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러나 그가 몸을 더듬기 시작하자 힘껏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심한 모욕을 당한 것 같아 반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일은 처음에 껴안았을 때처럼 갑자기 손을 놓았다. 크리스티는 비틀거리며 물러나 아픈 입술에 손등을 대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여전 히 비웃듯 싸늘한 웃음을 띠우고 있다. "사람 깔보지 말아요!" 크리스티가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외치자 라일은 큰소리를 내며 웃었다. 더 이상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 크리스티는 타월과 비누를 집어들고 캠프로 ?도망 쳐 돌아왔다. 텐트에서 타월을 널고 있는 동안에도 크리스티는 자신을 제대로 수습 못하고 있었 다. 라일의 손이 남긴 감촉을 씻어내고 싶다. 나를 만만한 여자로 상대하는 것 같은 그의 태도! 심한 모욕을 당한 것 같아 생각만 해도 또다시 구역질이 났다. "무슨 일이 있어요?" 언제 왔는지 입구에 발레리가 서 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다갈색 머리가 붉게 빛난 다. "안색이 나빠요. 돌아왔을 때도 충격을 받은 것 같았어…" "머리가 좀 아파서." 라일로부터 모욕당한 분함 때문에 정말 머리가 욱신거린다. "하지만 대단치는 않아요." 이번만은 웃으려고 했으나 웃어지지가 않는다. "약은 갖고 있어요?" 발레리는 걱정스러운 듯 개암나무 빛깔의 눈을 흐렸다. "교수님에게 구급상자가 있으니까 갖고 올게요." 맙소사! 조금 전에 있었던 일로 내가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라일이 알게 되면 그 야말로 큰일이다. "배낭에 아스피린이 있으니까 그걸 먹겠어. 아무튼 고마와요." "정말 괜찮아요?" 발레리는 단순한 두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든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요." 발레리는 그래도 망설이고 있다가 이윽고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 줘요"라며 돌아갔 다. 아스피린 두 알을 먹고 벌써 마르기 시작한 머리를 솔질하고 있는 동안에 캠프는 다 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 누군가가 아침식사를 위해 소시지와 계란을 지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크리스티는 텐트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화장을 하려고 거울을 들여다보니 안색은 거의 회복된 듯하다. 그러나 마음은 아직도 욱신거린다. 가까이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라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다시 얼굴을 마주 대할 것을 생각 하니 몸이 움츠러드는 듯하다. 그런 모욕을 당하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라일이 암시한 것과 같은 파렴치한 짓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그 사실은 누구보다도 그 자신 이 잘 알고 있을 것 아닌가. 그런데도 그는 웬일인지 나를 공격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또다시 그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결혼생활보다 직업을 중히 여긴 아 내에 대한 복수심 때문일까? 하지만 무관심하다는 그가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다는 것 은 어찌된 일일까? 어쩌면 말처럼 무관심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 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이때 아침식사 당번이 국자로 프라이팬을 두둘기면서 아침 식사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렸다. 할 수 없다, 라일을 만날 것을 각오하고 나가자. 그런데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라일은 오전 내내 거의 크리스티를 쳐 다보지도 않았고, 무뚝뚝한 얼굴로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학생들은 파낸 흙을 체 로 치기도 하고 면밀하게 조사하기도 했다. 마침내 소나기 구름이 해를 가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로 변했다. 점심시간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았으나 그대로 캠프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소 이른 점심를 먹고 있는 사이에 날씨는 기분 나쁠 정도로 어두워졌고 천둥 소리 가 점점 가까와졌다. 그리고 식기류를 치우자마자 커다란 빗방울이 대지를 두들기기 시작하더니, 번개가 캄캄한 하늘을 찢으면서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천둥 소리가 울렸 다. 이어 대단한 기세로 비가 쏟아졌다.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천막으로 도 망치듯 돌아갔다. 그후 한 시간 남짓 동안 크리스티는 조립식 침대 위에서 웅크린 자 세로 베개 밑에 얼굴을 묻은 채 천둥 소리를 막았다. 얼마 안 있어 천둥 소리는 가라앉고 거짓말처럼 밝은 태양이 황금빛 햇살을 던졌다. 크리스티는 텐트 밖으로 나와 비가 개고 난 뒤의 맑은 공기를 가슴 가득히 들이쉬고 라일의 숙소로 향했다. 저녁때까지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아 있는다는 것은 결코 즐거 운 일이 아니었으나, 라일의 말처럼 유급휴가를 온 건 아니지 않은가. 이곳에서는 참 을 수밖에 없다. 라일은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책을 펼쳐 놓고 있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온 크리스 티를 쌀쌀한 눈으로 힐끗 쳐다본 다음 손으로 저쪽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크리스 티는 멍청하게 서 있다. 자유시간을 달라는 요구가 통한 걸까…? "왜 그러지?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일을 시킬 거야. 일부러 쉬게 해주려고 하는데." 당황하고 있던 크리스티는 황급히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발길을 돌려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순간 데니스와 부딪칠 뻔했다. "마치 도망치는 사람 같군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죠?" 그는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놀리듯이 말했다. "일에서 도망치는 거예요. 오후는 쉬게 됐거든요." "그거 잘됐군요!" 데니스는 씽긋 웃었다. "난 이 근처를 탐사하러 가려고 하는데 함께 가겠어요?" "초대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가겠어요." 크리스티는 오랜만에 밝은 기분이 되어 데니스의 팔을 잡고 캠프를 나왔다. 그가 가 고 있는 곳은 일행이 계속 발굴하고 있는 장소의 아래쪽이었다. 크리스티는 하??쳄?바라보면서 걷고 있는데, 웬일인지 데니스는 아래를 보고 걸었 다. 그녀는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뭘 찾고 있어요? 아니면 시골길에 익숙해지기 위해선가요?" "나는 원래 호기심이 많은 편이죠." 그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탐사할 땐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것보다 혼자 하는 편이 좋거든요." "그렇다면 뭔가 발견할 것 같은 기분이 드나요?" 재미있다는 듯이 묻는 크리스티를 보고 데니스는 씽긋 웃었다. "조금 전에 내렸던 것과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고 나면 지면의 흙이 흘러가 버리죠. 어쩌면 무엇인가 나올지도 몰라요." "이 농지의 임자는 아무리 찾아봤자 헛수고라고 했다던데요." 크리스티는 라일에게서 들은 정보를 전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죠." 데니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농지의 임자가 한 말이 반드시 옳다고만은 할 수 없죠." "당신은 언제나 그렇게 낙관적인가요?" 놀리듯이 말하는 크리스티를 보고 데니스는 다시 미소를 띠우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 자신은 별로 낙천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정열가?" "그쪽에 가깝죠." 데니스는 소리내어 웃었으나 곧 정색을 하며 크리스티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교수님은 고고학자로서 최고의 인물이죠. 나 같은 건 그 천분의 일 정도라도 되면 만족하겠어요." 크리스티는 놀라움을 감추고 눈을 들어 데니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를 무척 존경하고 있군요." "모두가 그렇죠." 조용한, 그러나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교수님은 대부분의 다른 학자들보다 훨씬 뛰어난 지식을 갖고 계시죠. 하지만 결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아요. 교수님이 어떤 일을 했는지, 우린 모두 고고학 연보 를 보고 알았죠. 선생님은 훌륭한 논문을 많이 발표했고, 그것을 읽으면 많은 공부가 되거든요." 일찍이 남편이었던 사람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었다는 느낌이 들어 은근히 가슴이 아 팠다. 그 무렵에는 자신의 일에만 열중해서, 때로는 부당하게 상대의 시간을 빼앗았 으며 남편의 얘기는 들을 여유가 없었다. 그가 꽤 유명한 고고학자라는 것은 알고 있 었지만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그 연구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었다. 갑자기 슬픔이 밀려왔다. 그것나 지금은 과거의 일로 지금은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가 아니다. 데니스는 협곡의 벼랑 위에 서서 열심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침식으로 생긴 협곡이다. 마침내 무엇을 발견했는지, 그는 몸을 날리듯 골짜기로 내려갔다. "크리스티! 빨리 와요!" 데니스의 들뜬 목소리에 멍청하게 서 있던 크리스티는 정신을 차렸다. "아무래도 우린 엉뚱한 곳을 파고 있었나 봐." 크리스티는 비에 젖은 풀을 밟고 벼랑 바로 위에까지 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벼랑 의 일부가 조금 전에 내린 비로 깎이어 유물의 보고(寶庫)이기나 한 것처럼 여러 가 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저 근처는." 데니스는 턱으로 가리켰다. "좀더 신중하게 파야 되겠어요. 그런데 여길 좀 봐요." 그는 쭈그리고 앉아 발밑의 흙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파기 시작했다. 적갈색 의 흙 속에서 기묘한 모양의 것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게 뭐죠?"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철제의 창끝이에요." 데니스의 목소리가 생기를 띠었다. "자, 잡아 줄 테니까 내려와요." 크리스티는 옷차림에 개의치 않고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가 데니스의 곁에 무릎을 꿇 었다. 그리고 얼마 동안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땅을 팠다. 땅에서 나온 발굴품이 데 니스의 손에 들려졌다. 크리스티는 쭈그리고 앉아 그를 바라보면서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의 얼굴은 만족 감과 자부심으로 빛나고 있어 잔뜩 흥분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라일도 어떤 흥미있 는 것을 발견하면 이렇게 될까? 그의 엄한 얼굴에도 데니스처럼 소년다운 웃음이 번 질까? 크리스티와 데니스는 발굴한 것을 주의깊게 살펴봤다. 싸움에 사용한 무기일까, 아니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남자들이 사용한 수렵도구일 까… 호기심이 고개를 들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언제쯤의 것이라고 생각해요?" "l천 년 전… 아니, 그렇게 오래 되진 않았을지도 모르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철기시대의 것일지도 모르지만, 교수님께 물어보지 않으면 모르겠어요." 데니스는 창끝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치우고 다시 그곳을 천천히 파기 시작했다. 크 리스티도 그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을 파내려갔다. 무엇이 나오리라고 기대하고 있었 던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단단하고 미끈미끈한 것이 손에 닿았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 렸다. "뭔가 있어요." 그녀는 그 단단한 것을 살며시 만지작거리면서 속삭였다. "사기 항아리 같아요." "조심해요." 데니스는 자신의 작업을 팽개치고 크리스티의 곁으로 왔다. "어떤 것이라도 억지로 잡아당겨서는 안 돼요. 자칫 잘?못하면 고고학상 가치있는 물건이 부서질지도 모르거든요." "베니커 교수를 불러오는 게 좋지 않겠어요?" 크리스티는 흙을 파내는 일을 데니스에게 맡겼다. "네, 그렇게 하는 편이 좋겠어요. 기왕이면 모두 데리고 와요." 협곡을 오르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샌들을 신은 발이 자꾸만 미끄러졌 다. 손가락이 흙투성이가 된 채 바위에 매달리며 간신히 기어올랐다. 벼랑 위에 서서 데니스를 내려다볼 때는 자신도 모르게 웃는 얼굴로 소리쳤다. "당신은 오늘 운이 좋군요!" "당신이 함께 와준 덕분입니다." "어머나, 고마와라." 크리스티는 웃으면서 농담을 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낯뜨거워지는걸요." 그러나 캠프로 돌아왔을 때는 농담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데니스가 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혹시 그가 우정 이상의 것을 기대한다면, 언젠 가는 상처받는 결과가 올 것이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건 우정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을 제발 데니스가 알아 주기를! 라일은 한 시간 전과 마찬가지로 텐트 안에서 책을 펼치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아 까와는 달리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길고 짙은 속눈썹이 두 뺨에 아름다운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어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끌린다. "라일." 나직하게 부르자 그는 곧 눈을 떴다. 무슨 꼴이냐는 듯이 그의 눈은 크리스티의 몸 을 천천히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 순간 자신의 꼴이 말이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치 자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억지로 말을 꺼냈다. "데니스가 골짜기에서 뭔가를 발견했어요. 그 동안 발굴하던 장소의 아래예요. 당신 에게 보이고 싶대요. 그리고 일행을 모두 부르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더군요." 마침내 라일의 눈에서 경멸하는 듯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책을 옆에 놓고 벌떡 일어섰다. "좋아, 함께 가자구." 곧 집합명령이 내려지고 학생들이 모이자, 크리스티를 선두로 일행은 협곡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절벽 아래에서는 마침 데니스가 항아리 모양 의 토기를 파낸 참이었다. 협곡의 벼랑 위에 모인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라일의 행동 을 지켜보았다. 데니스는 자랑스러운 듯 라일을 올려다보고, 발굴품을 보이라고 명령하기를 기다리 고 있었다. 그리고 라일이 몸짓으로 그렇게 말하자 그는 얼른 창끝과 항아리를 내밀 었다. 라일은 창끝을 한참 동안 주의깊게 쳐다보다가 돌려볼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건네주었다. 이어 크리스티도 토기 항아리를 손에 들었다. 애석하게도 주둥이 부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라일은 이 항아리에 관심이 끌리는 듯했다. "철기시대의 것이 아닐까요, 교수님?" 데니스가 모든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속에서 물었다. "아마 그럴 거야. 하지만 철저히 조사하기 전엔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 라일은 미간을 찌푸리고 항아리를 덮고 있는 흙을 손가락 끝으로 떨어냈다. 항아리 표면에는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데니스에게 지시했다. "이것들을 발견한 곳에 표시를 해두게. 오늘은 우선 덮개로 덮 어 두고 내일 아침 도구를 가지고 오자구. 그리고 본격적으로 발굴개시야." 크리스티는 학생들과 약간 떨어져 서 있었으나 눈은 어쩔 수 없이 라일에게로 끌리 고 있었다. 긴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항아리를 만지는 그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 지고 있다. 가슴 두근거리는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데니스는 라일이 지시한 대로 처리하고 올라왔다. 라일은 한층 더 상냥하게 젊은이 를 대했다. "대단한 공훈이야, 데니스." "항아리를 발견한 사람은 크리스티인걸요." 데니스는 즐거운 듯 웃으며 대답하고, 크리스티의 곁으로 와 힘껏 그녀를 껴안았다. "앞으로는 크리스티를 고고학자로 대접해야겠는걸." 라일은 크리스티의 가는 허리를 껴안고 있는 데니스의 손에 시선을 주었다. 그 순간 전기가 통하는 듯한 긴장된 공기가 흘렀다. 그러나 그는 곧 데니스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자, 캠프로 돌아가지. 자네는 덮개를 가지고 다시 한번 이곳에 와줘. 다른 두세 명 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네." "알았습니다." 데니스는 상냥하게 대답하고 크리스티의 허리를 놓았다. 크리스티가 거북한 듯 몸을 꼼지락거렸기 때문이다. 무심코 나온 산책이 뜻하지 않은 큰 소동을 일으킨 셈이다. 천 년 전의 유물로 보이 는 물건이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번 조사여행은 헛수고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 던 학생들도 데니스의 발견으로 갑자기 활기를 띠었다. 캠프 전체가 눈에 띄게 활기 차고 옆에서 보기에도 들뜬 분위기였다. 크리스티는 자신의 일처럼 기뻤고, 번거로운 문제를 전부 잊은 채 가벼운 마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면서 강으로 내려갔다. 라일의 텐트 앞을 지나치며 안을 들여다보니 그는 사무실에서 토기의 흙을 떨어내고 있었다. 부드러운 솔?을 손에 들고 몹시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호기심에 끌 려 안으로 들어가보았으나 그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어깨 너머로 항 아리를 들여다보고, 그가 왜 그처럼 열중하고 있는지 납득이 갔다. 자세히 보니 항아 리의 표면에 그려져 있는 것은 단순한 무늬가 아니었다. 한 마리의 당당한 코끼리와 그 코끼리가 지나가는 길에 엎드려 있는 남자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상한 무늬군요." 크리스티가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그제서야 라일은 눈을 들고, 크리스티가 있음을 알았다. 그의 검은 눈은 여전히 싸 늘하고 냉랭하다. "인들로부카치의 전설은 사실인지도 모르겠어. 일반적으로 가공적인 얘기라고 여겨 진 모양이지만." "어떤 전설인데요?" 크리스티는 진기한 도안에 시선을 준 채 물었다. "흥미가 있어선가, 아니면 그저 해보는 말인가?" "흥미가 있어요." 크리스티는 그의 빈정대는 말을 한쪽 귀로 흘려 버리고 그의 곁에 의자를 당겨 앉았 다. 이 항아리를 발견한 당사자니까 흥미를 갖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인들로부카치는 코끼리와 관계가 있는 말 아녜요?" 토착민의 언어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었으나, 빈약한 지 식을 긁어모아 물었 다. "그대로 번역하면 '위대한 암코끼리'라는 뜻이야. 하지만 보통은 여왕을 가리키는 말이지. 옛날의 여자 추장이 부족 사람들에게 코끼리처럼 강하고 용감하게 보였다 해 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코끼리의 크기와는 상관없는 여자라니 안심했어요." 이상한 상상을 한 자신이 우스워져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인들로부카치는 오히려 몸집이 작은 편인 여자였던 모양이야." 라일은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우면서 항아리를 놓고 담배를 집었다. "몸집이 크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 건 아냐." "그 여왕이 실재했을지도 모른다는 근거는 항아리의 무늬 때문인가요?" 점점 흥미가 일었다. "그 무늬도 그렇고, 몇 년 동안 모은 정보를 종합해 봐도 훌륭한 근거가 되지." 라일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천장을 향해 연기를 뿜었다. "실은 몇백 년 전부터 이 근처에 살고 있는 일족의 후손이 있어. 마론이라는 흑인 할아버지인데, 그 사람은 인들로부카치의 주거가 우리들이 지금 파고 있는 장소의 바 로 옆에 있는 동굴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물론 단순한 억측일 뿐 증거는 없어. 하지 만 만약 사실이라면 당신은 오래 전부터 여왕의 소지품을 갖고 있는 셈이지." 틀림없이 그 상아 세공품을 말하고 있다! 크리스티는 심장이 방망이질하듯 두근거리 기 시작했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크리스티는 라일로부터 작은 원반형의 상 아 세공품을 받은 일이 있다. 둘레에는 나뭇가지가 서로 얽혀 있는 것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남성상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언젠가 당신이 나한테 준 상아 세공품 말인가요?" 그때는 그의 선물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크리스티는 그 일을 생각 하고 다소 창백해진 얼굴로 망설이면서 물었다. "그래, 그 상아 세공품은 아론의 증조부가 동굴에서 발견한 거야. 그것이 인들로부 카치의 전설과 함께 대대로 장남에게 전해져 아론이 물려받았지. 옛날 부족민은 여왕 을 신처럼 생각해서 초인적인 힘을 갖고 있다고 믿었어. 그래서 여왕은 결혼하지 않 는 거라고 생각했지. 여왕이 보통의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를 사랑한다고는 생각 하지 않았거든. 그들은 여왕을 맹목적으로 숭상하고 아꼈던 거야. 인들로부카치는 몇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것은 초자연적인 힘으로 얻은 아이라고 생각했지." "물론 사실은 그렇지 않겠죠?" "물론이야." 라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인들로부카치는 사람이거든. 그렇지만 그녀는 부족민의 신앙을 배반하고 싶지 않았 던 거지. 그래서 결혼을 하지 않고 애인의 존 재는 비밀에 부쳤어. 두 사람 모두 열 렬하게 상대를 사랑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 인들로부카치는 어느 날 명공을 불러 둥글고 편편한 상아 세공품 두 개를 만들게 했는데, 한가운데의 무늬를 제외하면 두 개의 조각품은 완전히 같았어. 한가운데의 무늬는 하나는 남자, 다른 하나는 여자였 지. 인들로부카치는 애인의 심볼로 남성상이 새겨진 상아 세공품을 갖고, 애인에게는 자기의 상징으로 여성상이 새겨진 것을 주었어. 이렇게 함으로써 두 사람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함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인들로부카치는 그 상아 세공품에 특별한 힘을 불어넣었다고도 전해지고 있지. 그것을 지니고 있는 한 두 사람은 언제까지고 애인으로 있을 수 있는 힘을 말야." "정말로 두 사람은 언제까지고 애인으로 있었나요?" 라일의 드라마틱한 얘기에 완전히 빠져든 크리스티는 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불행하게도 그렇게는 되지 않았지." 라일은 담배연기를 들이켰다가 푸우 하고 뿜어냈다. "마침내 어느 날 부족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화가 나서 인들로부 카치의 애인을 사형???처해 버렸던 거야." "그래서 인들로부카치는?" 왠지 답답했다. 까닭없이 긴장하여 얘기의 결말을 기다리는 크리스티의 귀에 라일의 굵은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렸다. "부족의 여왕으로서의 권위를 잃은데다가 애인까지 잃어, 인들로부카치는 사나운 코 끼리의 발밑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상처받은 마음으로 코끼리에게 밟혀죽은 인들로부카치! 그 영상이 선명하게 뇌리에 떠올라 크리스티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불쌍해라!" "그렇게 불쌍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사후의 세계에는 아무런 속박 없이 자유롭게 애 인과 함께 살 수 있을 테니까." 라일의 목소리가 가슴에 와닿았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크리스티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잠시 후에야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그 할아버진 왜 당신에게 상아 세공품을 주었나요?" "아론에게는 자식이 없어. 그래서 인들로부카치의 전설과 상아 세공품에 관심을 갖 고 있는 내게 준 거야." 이렇게 말하는 라일의 얼굴에 쓴웃음이 스쳤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와 내가 결혼하는 사람에게 준 거지." 결혼하는 사람? 정말 싱거운 말이다. 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결혼할 당시도 라일은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 지 않았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애당초 사랑 따위는 있지 않았던 게 아닐까? "진작에 말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상아 세공품을 받았을 때는 아무 것도 몰랐거 든요."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서 솟아나는 서글픔을 떨쳐 버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그때, 그 상아 세공품은 한 쌍으로 되어 있는데 또 하나의 같은 것이 있을 거라면서 언젠가는 발견될 거라고만 했잖아요?" "5년 전에 당신이 이런 얘기에 흥미를 가졌었나? 당신이 다소라도 관심을 보였더라 면 나도 얘기해 줬겠지." 라일의 역습에 크리스티는 움찔했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그러나 당시를 돌이켜 생각하니 역시 마음의 가책을 느꼈다. "물론 다른 일로 머리가 꽉 차 있었지만…" 그녀는 라일의 날카로운 눈과 마주치자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래, 새미 피터슨과의 새 앨범 취입 때문에 머리가 꽉 차 있었지." "용서하세요, 미안해요." 크리스티는 불안한 표정으로 양손을 맞잡았다. "사과를 받고 싶은 게 아냐. 나는 다만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런 말을 듣고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어떻게든 변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저녁식사 시간을 알리는 소리 다. 크리스티는 라일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일어섰다. 기가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들고 입구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등에 느꼈다. 비난하 는 듯한, 칼로 찌르는 듯한 눈! 자신의 텐트로 돌아온 크리스티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엉엉 울고 싶은 심정… 라일이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때는 그의 선물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일 때문이었다고 말한다는 건 변명이 될 수 없 다. 상아 세공품은 벌써 5년 이상이나 보석상자에서 잠자고 있다. 선물로 받은 후 새삼 스럽게 생각해 본 일도 없고, 기억해 본 적도 없었다. 이제야 겨우 그 의미를 알았다 … 그것은 바로 사랑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아 세공품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라일에게 있어 내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4 이 주일째 되는 날 학생들은 라일의 자상한 지도 아래 몇 가지 재미있는 물건을 발 굴했다. 그중에서도 하나의 출토품이 모든 학생들의 판심을 끌었다. 그것은 아무렇게 나 깎은 황금 방울을 길게 연결한 것이었다. 천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 단한 지층에 묻혀 있었던만큼, 황금 방울을 연결한 끈은 이미 썩어 너덜너덜하게 되 어 있었다. 일행은 납을 녹인 그릇에 부어 출토품을 처음 나왔을 때의 모양대로 납 속에 넣고 굳혔다. 인들로부카치의 소지품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고고학에 대 한 관심이 한층 더해졌다. 크리스티는 라일의 허가도 받지 않고 오전중에는 항상 학 생들과 함께 발굴에 열중했다. 그러나 오후에는 라일의 구술을 받아쓴 다음 타이프를 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타이프를 치고 있는 동안 라일은 학생들과 함께 그날의 출도 품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2주일째도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토요일 아침, 라일은 학생 한 명과 함께 지프로 다이알스드리프를 향해 떠났다. 다음 일 주일분의 식료품을 사들이기 위해서였다. 주 말에 할 일은 그것이 전부여서 남은 시간은 강에서 세탁을 하거나 일주일 동안의 피 로를 풀면서 지냈다. 일요일 아침에는 나이 든 흑인이 갑자기 찾아와 라일과 잠시 얘기를 나누고 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가 바로 상아 세공품을 준 아론이었다. 캠프 가까이서 뱀을 발 견했으나 놓쳤기 때문에 경고를 하러 왔다는 것이??? 찌는 듯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오싹해졌다. 가까이에 뱀이 있다니! 남자들은 곧 각자의 천막을 살폈다. 그러나 뱀은 발견되지 않아, 결국 뱀이 캠프 안으로는 들 어오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점심식사 후 크리스티는 천막 안에 누워 있었다. 더위로 지친 때문인지 눈을 붙이자 마자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졌다. 꽤 오랜 시간을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문득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져 있었 다. 무엇인가 몸에 닿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살며시 눈을 떠 보니 라일이 서 있었다. 처음에는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왠지 그의 얼굴 은 창백했고 심상치 않아 보였다. 무엇 하러 왔을까? 일어나기 위해 무심코 아래를 본 순간, 이게 웬일인가! 전신의 피가 당장 얼어붙는 듯했다. "움직이지 마!" 라일의 굵은 목소리가 엄하지만 온화하게 명령했다. "절대로 움직이지 마." 움직이라고 해도 움직일 수 없었다. 공포로 전신이 마비되어 마치 감각이 없어진 듯 했다. 다만 눈만이 다리 위에 얹혀 있는 불길한 동물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 다. 짙은 회색에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긴 몸뚱이… 그 싸늘한 물 체가 천천히 넓적다리 쪽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라일, 라일, 어떻게 좀 해줘요!" 크리스티는 이를 악물었다. "섣불리 자극해서 화나게 하면 큰일이야. 당신에게 덤벼들지도 몰라." 라일은 목소리를 죽여 궁지에 몰린 크리스티를 위로했다. "이건 검은 맘바야. 맹독이 있어 위험해." 그 말을 들으니 더욱 무서워졌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심하게 뛰고 기절할 것만 같 다. 차라리 이대로 기절해 버리고 싶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흐 른다. 그러나 기절은커녕 정신이 말똥말똥하고, 더구나 뱀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 다. 뱀은 끝이 가라진 혀를 끊임없이 날름거리고 있다. 넓적다리를 기어오르는 싸늘한 맘바의 몸뚱이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나빴 다. 하다못해 바지라도 입었더라면 싶었다. 견딜 수 없는 공포감 때문에 전신이 떨렸 다. 라일은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만, 만약 맘바가 얼굴 근처까지 기어오른다면 도저 히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소리를 지르게 될 것이며, 결국 맘바에게 물려… 라일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해주고 있는 거겠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격려가 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꼼 짝도 않고 누워 있을 순 없을 거다. 1초 1초가 끝없이 길게 느껴진다. 순간마다 자신 이 바싹바싹 늙어가는 것만 같다.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몸속 깊은 곳에서 번져 나오 는 전율은 전신을 떨리게 한다. 고개를 쳐들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맘바에게도 그 떨림이 전달되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래, 그런 상태로 있어." 라일의 말소리가 간신히 들렸다. "조금만 참으면 돼." 인간이 갖고 있는 인내력을 셀 수 있다면, 한계점은 이제 불과 얼마 남지 않았으리 라. 열심히 그 힘을 모아 마지막 순간을 버텨야 한다. 독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팔 로 기어 올랐다. 누울 때 베개 위에 얹어놓은 팔 위를 뱀의 싸늘한 몸뚱이가 미끄러 져간다. 크리스티는 눈을 꼭 감았다. 이젠 틀렸다! 견딜 수가 없다! 이때 기적처럼 악몽은 사라졌다. 맘바가 슬며시 바닥으로 내려간 것이다. 그 순간 번갯불처럼 라일의 손이 움직이고, 긴 자루가 달린 괭이가 맘바의 대가리를 잘라냈 다. 남은 몸뚱이만이 꿈틀거리고 있다. 어느 새 크리스티는 천막의 한구석에 서 있었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전혀 기억할 수가 없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린다. 라일은 맘바의 꼬리를 잡고 들어올렸다. 그의 키와 거의 맞먹는 길이였다. 그는 그대로 크리스티의 앞을 지나 텐트의 입구까 지 나가 밖으로 뱀을 내팽개쳤다. 그리고 돌아다보는 라일의 얼굴은 창백했고, 검은 눈은 어느 때보다도 커 보였다. 크리스티는 자신이 움직인 기억도 없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라일의 팔에 안겨 그 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손을 그의 등으로 돌린 채 힘껏 매답려 있었다. 안도감 이 전신에 퍼지면서 온몸의 떨림이 가라앉고, 안도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라일의 손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다. 조금 전까지의 악몽에 비해, 달래는 듯한 그의 손길은 얼마나 따뜻하고 기꺼운 것인가! 크리스티는 단단하고 탄력있는 라일의 몸에 기대어, 옛날을 생각케 하는 상쾌한 체취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자칫 잘못됐 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다시 무서워져 더욱 힘껏 그를 껴안았다. 그렇다고 애무를 바란 건 아니다. 다만 안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라일은 갑자기 몸을 긴장하며 크리스티의 머리를 손으로 받치고 얼굴을 쳐들게 했다. "크리스티!" 속삭이는 목소리에 이어 그의 입술이 힘껏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반항할 겨를도 없이 크리스티는 입술을 벌리고 분노와 정열이 뒤섞인 라일의 키스를 ? 받아들였다. 가슴속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그를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 이 말을 듣지 않는다. 눈앞이 어지러워 그에게 매달리지 않으면 쓰러진 것만 같다. 마음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쪽은 마음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를 하고, 다른 한쪽은 증오의 키스보다 낫다고 속삭이고 있다. 이때 갑자기 라일이 입술을 뗐다. 크리스티는 반사적으로 그를 붙잡으려고 하다가 아차 하고 정신을 차렸다. 밖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곧이어 데니스와 앨런이 들어왔다. 그리고 입구에는 에리카와 발레리가 서 있었다. 크리스티는 자기와 라일을 쳐다보고 있는 네 사람의 눈앞에서 망연히 서 있었다. 라 일은 이미 침착을 회복해서 어디를 보아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러한 그의 냉 정함이 얄미웠다. 자신의 입술에는 아직도 그의 키스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저게 오늘 아침 아론이 말한 뱀인가요?" 데니스가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키며 침묵을 깼다. "그러기를 바라고 있네." 라일은 무겁게 대답했다. "하지만 모두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짝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천막 앞에는 몇 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어디에 있었죠?" 여학생들은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앨런이 뱀을 집어들어 모두에게 보이자 꽥 하고 소 리질렀다. 크리스티는 회색의 긴 뱀을 보고 다시 몸서리쳤다. 라일의 날카로운 눈이 그것을 놓 칠 리가 없었다. "올슨 양의 천막 안에 있었어." 라일은 조금 전의 무서운 상황에 대해서는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을 어디로 치워 주게, 앨런. 올슨 양은 보기만 해도 징그러울 테니까." 라일은 앨런이 지시대로 하는 것을 확인한 후 나갔다. 뒤에 남은 크리스티는 이상하 게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요?" 데니스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으면서 크리스티의 어깨를 감쌌다. "안색도 나쁘고, 떨고 있잖아요?" "괘, 괜찮아요." 사실은 괜찮은 정도가 아니다. 그 무서운 장면과 피부 위를 미끄러지는 뱀의 싸늘한 감촉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지. "몸을 씻고 싶을 뿐예요." "함께 가겠어요." 에리카와 발레리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다소 낙심한 듯한 데니스를 남겨 두고 세 사람은 타월을 들고 서둘러 강으로 향했 다. 어두워지기 전에 끝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동행이 있다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마음 든든한 일이다. 텐트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 도 즐거운 일이다. 그 텐트로 돌아간다는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오늘밤은 아마 잠을 이루지 못할 거다. 혼자 있기가 두려웠다. 그녀의 그런 심정을 알아차렸는지 여학생들은 텐트까지 따라와 크리스티가 바지로 갈아입고 엷은 스웨터를 입는 동안 옆에 있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애써 명랑한 얘기 를 하면서 웃겨 주었다. 그들의 마음씀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에는 역시 관례에 따라 모닥불을 에워싸고 앨런의 기타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크리스티는 평소보다도 늦게까지 처져 있었다. 혼자서 깜깜한 텐트 안으로 돌아간다 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또 한 마리의 뱀이 있으면 어떻게 한다지? 게다가 이 번엔 라일이 때를 맞추어 와주지 않는다면… 생각만 해도 오싹해진다. 함께 가자고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싶었으나 라일에게 비웃음을 살 것 같아 그럴 수도 없다. 학생들은 한 사람씩 각자의 텐트로 돌아갔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으면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 크리스티는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자기의 숙 소로 향했다. 텐트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소름이 끼치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성냥불을 켜고 양초에 불을 붙이려고 했으나 손이 떨려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간신히 불을 불이고 반사적으로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늘진 곳과 어두운 구석 이 있어 무엇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다. 무서운 것이 나오기 전에 일찍 잠드는 게 상책이겠다 싶어 잽싸게 옷을 벗고 침대로 기어들었다. 촛불은 켰으나 역시 잠이 오지 않는다. 노래도 끝나고 모두가 각자의 텐트로 돌아갔 다. 꼼짝 않고 누워 있으니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자신도 모르게 귀 를 기울이곤 했다. 잔뜩 긴장하고 있어선지 몸의 여기저기가 아파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무리 잠을 이루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성냥불을 켜고 시계를 보니 한 시간 이상이나 지났다. 낮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 다시 오싹해졌 다. 라일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리석긴! 이젠 그만 생각하자." 크리스티는 자신을 나무랐다. 그리고 얇은 파자마 위에 바지와 스웨터를 걸치고 침 대에서 내려 샌들을 신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뱀은 어쩌다가 도망갈 곳을 찾아 내 천막에 들어왔을 뿐이야. 하지만 하필이면 그 때 내가 천막 안에 있었다니…" 또다시 등골이 오싹해졌다. 좀더 냉정해야지. 밖에 나가 신선한 공기라도 마시자. 텐트에서 나온 크리스티는 라일이 ?뱀을 팽개친 곳을 보지 않으려고 외면하면서 서 늘한 밤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별이 빛나는 하늘에는 둥근 달이 걸려 있고, 온 세상이 은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 고 있다. 풀잎과 바람 한 점 없어 까딱도 하지 않는 나뭇잎 하나하나까지 분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갑자기 오른쪽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라일이 텐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텐트는 어두웠고, 달빛만이 입구에 서 있는 그를 비추고 있었다. 라일은 담배를 손에 낀 채 긴장된 눈으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 한순간 두 려움에 사로잡힌 크리스티는 안으로 도망칠까 생각했으나, 용기를 내어 그 자리에 선 채 말없이 마주보았다. 갑자기 사람이 그리워졌다. 그에게 달려가고 싶다. 위로받고 싶다. 그러나 그런 심 정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말없이 길게 느껴진 몇 초가 지난 뒤, 마침내 라일 이 먼저 움직었다. 담배를 내던지고 구두 뒤축으로 담뱃불을 비벼 끈 다음 어슬렁어 슬렁 다가왔다. "잠이 오지 않아?" 그는 바로 눈앞에까지 와서 물었다. "네." 크리스티는 어색한 웃음을 띠웠다. "야무지지 못해서 그렇겠지만, 저 텐트에서 잠이 든다는 생각만 해도 온몸이 떨리는 걸요." "당연하지." 라일의 목소리에서는 비웃음도 경멸도 느낄 수 없었다. 이 무슨 뜻밖의 일인가! 그 가 이런 심정을 이해해 주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점점 마음이 누그러졌 다.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아직 인사도 못했군요. 고마왔어요." "인사 같은 건 안해도 괜찮아. 마음쓸 것 없어." 라일은 갑자기 크리스티의 팔을 잡았다. "당신이나 나나 술을 좀 마시는 게 좋을 것 같군." 라일은 그의 텐트로 향했다. 웬일인지 크리스티는 반대하지 않고 얌전하게 뒤를 따 랐다. 천막에 들어가 그가 의자를 권했을 때도 순순히 앉아 양손을 무릎 위에 포갠 채 불을 켜기를 기다렸다. 라일은 촛불을 켜고, 어디선지 두 개의 글라스와 술병을 가지고 와 호박빛의 술을 따랐다. 무심코 그의 모습을 훔쳐보았을 때 단추도 잠그지 않고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셔츠 가 눈에 띄었다. 회색 바지는 가는 허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고 검은 머리는 이마에 내려와 있다. 아마 여러 번 손으로 쓸어올린 듯했다. 그도 마음의 동요를 금할 순 없 었으리라. 어쩐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응석을 부리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로 걱정을 끼쳐서…" 라일은 술잔을 손에 든 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 담겨 있 었다. "자, 마시지." "이게 뭐예요?" 크리스티는 그의 손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글라스를 받아들었다. "브랜디야." "난, 브랜디 같은 건…" "괜찮으니까 암말 말고 마셔!" 라일은 크리스티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명령하듯 말했다. 그의 딱딱한 표정으 로 보아 거역하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하다. 한 모금 마시자 목구멍에 불이 붙는 듯하고 숨이 막혔다. 고통스러웠다. 눈물이 쏟 아져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텐트 안의 모든 것이 흔들려 보인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 사이에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못 마시겠어요." "전부 마셔." 라일은 자신의 글라스를 기울여, 브랜디를 꿀꺽 삼켰다. "기분이 가라앉을 거야." "취하면 어떡하구요." 눈물로 흐려졌던 주위가 서서히 정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취해 보는 것도 괜찮아. 그것도 일종의 모험이거든. 모험이 하고 싶어 이번 일에 응모했잖아?" 라일은 장난기 섞인 눈으로 말했다. "어머, 놀리는 거예요?" 몸속이 따뜻해지고 이상하게도 자신이 생겨 대담해졌다. "당신은 별난 것을, 말하자면 모험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잖아?" 그는 더욱 장난기 섞인 눈으로 크리스티의 홍조 띤 뺨을 쳐다보았다. "그래요… 일종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기만 뱀을 만나거나 밤중에 술에 취 하는… 그런 것을 기대했던 건 아니예요."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니까 모험이라고 할 수 있지." 라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지 않아? 지금까지 몰랐었나?" "그렇게 말하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죠." 크리스티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라일은 크리스티의 글라스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눈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 았다. 마시라는 무언의 명령이다. 크리스티는 다시 한 모금 들이켰다. 이번에는 처음보다는 덜해 남은 것을 다 마실 수 있었다. 뱃속이 화끈해지고 그 따뜻함이 전신으로 번지면서 이상하게 나른해졌다. 머리는 솜으로 채운 듯 가볍고 어지러웠다. 자기 몸이 아닌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빈 잔을 놓고 테이블에 기대어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더 마시겠어?" "아뇨, 이젠 그만 하겠어요. " 그녀는 황급히 거절했다. "기분은 좀 가라앉았지만 머리가 어수선해요." "당신은 원래 알콜에 강한 편은 아니었지." 라일은 이렇게 말하고 남은 브랜디를 마저 기울였다. "그래요." 크리스티는 웃으며 대답했??? 의식은 말짱한데 자기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린다. 평 소보다 반 옥타브쯤 높은 것 같다. "샴페인 한 잔 마시고도 웃음이 헤퍼질 정도니까요." "그렇군." 라일의 이 한마디에 잊고 싶은 과거가 되살아났다. 그것은 결혼식이 열리던 날이었 다. 라일을 몹시 사랑하고 있는데도 마치 낯선 사람 곁에 서 있는 것처럼 긴장되어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었다. 그날 밤 호텔에서 그는 샴페인을 방으로 가지고 오게 했 다. 그 샴페인을 한 잔 마신 크리스티는 갑자기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라일은 불쾌한 표정도 짓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듯했다. 결국 웃음은 가라앉았으나 크 리스티는 평소와 달리 대담해졌다. 그래서 라일이 이끄는 대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뜨거운 사랑의 하룻밤을 지냈던 것이다. 감미로운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래서는 안 된다. 빨 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일어섰으나 그것이 오히려 잘못이었다. 라 일에게 몸이 기우뚱하면서 아련한 콜로뉴의 향기를 맡자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그 러나 아무리 알콜 기운으로 대담해졌다 하더라도 더 이상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만한 의식은 남아 있었다. "난, 그만…" "왜 머리를 잘랐지?" 라일의 조용한 목소리가 가슴에 와 닿는다.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억제하고 잘 자라 는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긴 머리는 새미가 나를 팔기 위해 만들어낸 이미지의 하나였어요." 크리스티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고 있었다. "계약이 끝났을 때, 나는 그 이미지와 함께 머리도 잘라 버렸 죠." 남자로서의 라일의 매력은 지금도 옛날이나 다름없이 마음을 끈다. 무사히 돌아가려 면 빨리 그의 앞에서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브랜디 고마와요, 이젠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요." 크리스티는 의자에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 그로부터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곧 쫓아 왔다. "당신의 텐트까지 데려다 주겠어." "괜찮아요,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 이처럼 라일의 가까이에 있고 보니 신경이 곤두선다. "보름달이라 밝은걸요." 발을 내디디려고 했을 때 그의 팔이 따뜻하고 힘차게 허리에 감겨 왔다. "떨고 있잖아?" 당연하다. 위험하다는 예감 때문에 전신이 떨리고 있는 것이다. 시치미를 떼봐야 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크리스티는 더듬거렸다. "왜,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구?" 라일은 크리스티의 턱에 손을 받치고 얼굴을 젖혔다. 그의 눈 속에 타고 있는 불길 이 크리스티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두 사람 모두 이렇게 된다는 것쯤 알고 있었을 거야.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저항해도 소용없어." 그게 무슨 말이죠? 알 수 없어요. 크리스티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도 육체적으로 끌리는 면이 있다. 적어도 나는 5년 전보다 훨씬 강하게 그에게 끌리고 있다. 저항도 해보고 부정도 해봤으나 이젠 도저 히 물리칠 수 없다. 지금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5년 전, 자신을 버린 야속한 남자를. 허리를 잡고 있는 그의 팔에 힘이 주어지고 그의 탄력있는 단단한 몸이 다가왔다. 위험한 빛을 띠고 빛나는 눈… 살며시 볼에 닿는 손가락…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몸은 그의 팔에 안긴 채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는다. 가슴만이 세차게 뛸 뿐이 다. 무중력 상태에 놓인 것처럼 몸이 가볍다. 라일은 뭐라고 속삭이고는 그녀의 몸을 자 기 쪽으로 돌려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그에게서 떨어져야지… 이성의 소리를 따라 그의 가슴을 밀어낼 때 손바닥에 그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 왔다. 그러나 당장 몸속에서 반응이 일어났다. 라일의 가슴도 세차게 뛰고 있다. 힐끗 그를 올려다보니 그는 머리를 들어 촛불을 끄고 있다. 달빛만이 비치는 어두컴컴한 천막 안, 몸을 감싸듯 끌어안는 라일의 팔. 크리스티는 황홀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도망치려면 지금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허리를 감고 있 는 라일의 팔에 힘이 더해진다. 크리스티는 그의 품에 안긴 채 그의 심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잊고 있던 정 열이 다시 솟구치면서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크리스티는 어느 새 정열이 치닫는 대로 라일의 키스를 받아들이면서 그의 목에 팔을 감은 채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었 다. 갑자기 라일은 살며시 몸을 뺐다. 나를 거부하는 몸짓일까?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크리스티를 안아올려 칸막이 안쪽에 있는 침대로 옮겨갔다. 어두운 방 한구석에 선 그는 그녀를 내려놓고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크리스티는 여전히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있었다. "라일!" 옛날에도 여러 번 경험했던 그의 애무에 몽롱해진 머릿속을 한순간 맑은 정신이 스 쳐갔다. "이런… 이런 짓을 하면 안 돼요." "당신을 원하고 있어. 어쩔 수 없어!" "아침이 되면 후회할 거예요."?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곳에 오고 나서 라일이 취한 태도를 잊을 수 없다. "아마 그렇겠지." 그는 크리스티의 목에 입술을 대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아." 이어 그녀의 스웨터를 머리 위로 끌어올렸다. "안 돼요…" 숨을 죽이는 크리스티를 모르는 체하고 그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천막 속은 침묵으 로 가득 차 있었다. 라일은 크리스티를 살며시 매트리스 위에 눕히고는 자신도 그녀 곁에 함께 누웠다. 라일의 팔이 다소 초조한 듯 크리스티를 끌어안았다. 그의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자 크리스티는 전신을 떨었다. 몇 년 동안이나 억눌러 두었던 정열이 이제 무섭게 솟구 치며 전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고달픈 긴 여행을 마치고 겨우 내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녀는 희열에 넘져 그의 머릿속에 손가락을 넣고 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그의 손이 그녀의 뜨거운 피부에 황홀한 무늬를 그려 나갔다. 크리스티는 5년 전의 아름디운 추억 속을 날기 시작했다. 라일의 입술이 푸근하고 행복했던 기억들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뜨겁게 반복되는 그의 키스를 느끼며 그녀는 황홀 속에 젖어들고 있었 다. 이때 다시 양식의 빛이 그녀의 마음속을 스친다.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틀림없 이 후회하게 될 거다. 빨리 그만두어야 한다. 그러나 라일의 손이 부드럽게 허리를 애무하면서 양식의 빛을 쫓아 버렸다. 오랫동안 굶주렸던 이 몸을 뜨거운 사랑의 행 위로 충족시키고 싶다. 이젠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어. "라일…" 크리스티의 목소리는 떨렸다. 가슴이 메어 분명하게 말을 할 수 없다.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줄곧…" "나를 원해?" 라일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묻는다.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 있으랴? 이렇게 몸이 불타고 있는데. "알고 있잖아요?" "분명하게 말해 봐. 말해 주지 않으면 모르겠어." "당신을 원해요." 그녀는 명령받은 대로 로보트처럼 대답하고 그의 목과 어깨에 열심히 키스했다. "당신을 원해요." "지난 5년 동안 몇 명의 남자와 사귀었지?" "한 사람도… 교제한 남자는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라일의 입술과 손이 정열을 부채질했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을 정도로.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라일은 더욱 감미롭게 공격한다.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 "하지만… 하지만 정말인걸요." 그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고 어두컴컴한 속에서 눈이 이상하게 번쩍인다. "그렇다면 우선 믿어 두기로 하지." "믿어 줘요, 라일! 거짓말이 아니예요." 크리스티는 몸을 긴장하고 그의 어깨를 힘껏 잡았다. "그만 애태워요!" 라일은 목 안에서 나는 듯한 소리로 웃었다. 의기양양한, 그리고 노여움이 섞인 듯 한 웃음이다. 어떤 심정으로 웃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여유 가 없다. 그는 쇠사슬에서 풀린 것처럼 갑자기 크리스티를 힘껏 껴안으며 몸을 얹었 다. 크리스티는 충격과 환희로 낮게 소리질렀다. 라일의 피부가 주는 감촉, 그와 하나가 된다는 기쁨…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 이어 환희의 물결이 덮쳐 오고, 일찍이 맛보았던 그 긴장된 행복감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라일의 체중을 받아 크리스티의 몸은 매트리스에 깊숙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환성이 즐거웠다. 그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전해 왔 고, 두 사람이 하나의 심장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5년 동안 그와 헤어져 있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믿기지 않는다. 그 악몽은 단순한 상상의 산물이 아 니었는지? 라일은 크리스티의 귀 뒤쪽의 민감한 부분에 입술을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의 몸은 정말 근사해. 당신을 안는다는 게 이렇게 좋다는 걸 잊고 있었어." 이렇게 좋다는 걸 잊고 있었다고? 할 말은 그뿐인가? 실망과 환멸에 사로잡혀 더없 는 기쁨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남은 것은 씁쓸한 현실뿐. 라일이 뒤척이면서 옆에 누웠을 때는 충족된 감정 대신 한 가닥의 의문이 가슴속에 싹텄다. "당신은 여자에 굶주리진 않았겠죠, 라일?" "여자와의 교제는 다소 있었지만, 별일은 없었어." 일어나 등을 돌린 채 말하는 라일에게 크리스티는 이유 모를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 감정이 무언중에 전해졌는지, 크리스티가 몸을 일으켜 그를 보지 않으려고 하면서 옷 을 입기 시작했을 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남자야, 크리스티. 정상적인 남자란 말야." 그의 말투에는 짜증이 섞여 있다. "당신과 헤어진 뒤 여자와는 완전히 인연을 끊은 생활을 했으리라고 생각했어?" 크리스티는 대답이 궁했다. 그러나 잠시 후 되물었다. "소냐 디콘도 그중 한 사람인가요?" 그녀는 바지를 입으면서 라일을 돌아보았다. 텐트 안이 어두워 서로의 얼굴이 보이 지 않는다. 오히려 다행한 일이다. 그에게서 돌아온 것은 싸늘하게 내뱉는 말이었으 니까.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야." 칼로 가슴???찔렸다 하더라도 이처럼 아픈 상처는 받지 않았으리라. 크리스티는 눈 시울이 뜨거워졌으나 안간힘을 쓰면서 고개를 쳐들고 라일의 천막을 나왔다. 라일이 증오스럽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더욱 미웠다. 5 월요일 아침 눈을 떴을 때, 크리스티의 가슴은 불안한 게 마치 납덩이처럼 무거웠 다. 왜 이렇게 울적한가를 생각한 순간 간밤에 라일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이 모두 생 생하게 되살아났다. 욕망에 지고 말다니, 정말 어리석은 일이었다. 새삼스럽게 후회 해 봐야 부질없는 짓이지만 자기자신이 무척 값싸고 시시한 인간으로 보였다. 앞으로 2주일 동안, 이 초원에서 라일을 어떻게 대하면서 지내야 좋을까? 학생들이 캠프 안을 돌아다니는 기척이 들리고, 가스 스토브에서는 무엇인가 조리하 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크리스티는 침낭에서 빠져 나와 텐트 구석에 있는 받침대 위에 플라스틱 대야를 놓고 물을 부었다. 자신의 값싼 감정을 씻어내고 싶어 부지런히 얼굴을 씻고 이를 닦았으나, 그 불쾌한 감각은 집요 하게 달라붙어 자신의 어리석음을 되씹게 했다. 아무리 라일을 저주해 봐야 결국 책 임은 감정의 노예가 되었던 자기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사실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던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나는 많은 여자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당신을 안는다는 게 이렇게 좋다는 걸 잊고 있었어." 라고 그는 말했다. 물론 그 말은 좋은 뜻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아 무래도 라일에게 정복당해 기뻐하는 시시한 여자로 전락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견딜 수 없다. 지난밤의 일로 어떤 이로운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맘바를 잊을 수 있었던 일뿐이 다. 덕분에 불안으로 떨 겨를이 없었으니까. 누군가 프라이팬을 두들겼다. 아침식사를 알리는 소리다. 라일을 만날 각오를 하고 텐트 밖으로 나갔을 때, 그는 등을 돌리고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앞에 앉아 요리를 기다리고 있는 데니스와 라이크에게 무엇인가 말하고 있다. 망설이면서 그를 바라보았을 때 푸른 셔츠에 덮인 넓은 어깨, 카키 색 쇼트팬츠에 감싸인 가늘고 탄력있는 허리, 햇볕에 그을은 긴 다리, 편안해 보이는 양가죽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단단한 몸의 감촉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크리스티는 두 사람이 나눈 뜨거운 한때를 생각하고 볼을 물들이면서 라일 곁을 지나 긴 테이블의 끝으로 가 앉았다. 그때 그가 던진 쌀쌀한 시선에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 면서. 흔들리면 안 돼. 침착해야 해, 라고 자신을 타이르면서 크리스티는 라일이 지난밤에 캐묻던 말을 생각했다. 냉정을 잃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했는데 오히려 실수였던 것 같다. 자신에게 있어 그가 처음이자 유일한 남자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만 것이다. 그는 꽤나 우쭐한 기분일 테지. 하지만 그는 여자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당신과는 상관없어"라고 내뱉듯이 말했다. 화산에서 용암이 솟구쳐오르듯 노여움이 치밀어오른다. 라일에게 앙갚음당하 는 건 상관없으나 그의 침대에 기꺼이 들어가는 손쉬운 여자로 보인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분한 마음 때문에 심한 더위와 먼지도 별로 느끼지 못하고 크리스티는 학생들과 함 께 탐사에 열중했다. 솔과 작은 흙손을 사용하여 천 년 전 사람들의 생활을 보다 확 실히 밝히는 작업이었다. 가장 괴로운 시간은 라일의 텐트에서 오늘 발견한 것에 대한 기록의 구술을 받아쓰 고 있을 때였다. 자꾸만 전날 밤의 일이 생각나며 달콤한 환영이 어른거렸다. 라일이 천막 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앉아 있기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 었다. 오전중에도 그는 묘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는데 한참 구술하고 있는 중에도 마찬 가지였다. 그의 검은 눈이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눈을 들어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러나 크리스티는 여전히 노트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혼자 남아 타이프를 치기 시작할 무렵에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어디다가 호되게 머리를 부딪친 것처럼 두통이 왔고, 매미 울음소리 는 두통을 더욱 심하게 했다. 변함없는 더위가 계속되었다. 소나기라도 한 줄기 쏟아 지려는 걸까? 그러나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바람도 전혀 불지 않는다. 타이프라이터에서 마지막 용지를 빼낼 무렵에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빨리 강으로 가서 한바탕 헤엄치고 싶다. 그러나 막 나가려 하는데 라일이 들어와 일 부러 앞을 가로막았다. 그를 만나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는데. "어디 가지?" 그는 예의 날카로운 눈으로 크리스티를 내려다본다. "타이핑을 마치고 헤엄치러 가려던 참이에요." 크리스티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른 용건이라도 있나요, 교수님?"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하지만 당신은 실제로 교수님이잖아요?" "그만둬!" 라일은 그녀의 비꼬는 말투에 언성?을 높였으나 애써 노여움을 참는 것 같다. "어젯밤 일인데…"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크리스티는 황급히 말하면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힘껏 주먹을 쥐었다.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평생 후회할 거예요." 라일은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후회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그렇겠죠." 그녀는 푸른 눈을 불태우며 내뱉었다. "당신은 복수를 했으니까요. 이젠 직성이 풀렸겠죠?" "그건 복수가 아냐. 복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 "그렇다면 뭔가요? 자존심을 만족시키고 싶었을 뿐인가요? 아니면 자기도취?"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천막을 나가려는 크리스티의 어깨를 잡고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어젯밤 당신은 내게 이것저것 캐물어서 사실을 고백받았죠. 무척 만족하시겠군요. 자존심이 부풀어서 떠다닐 것 같지 않으세요?" 라일은 입을 한일자로 다물었다. "크리스티, 제발 냉정해 줘. 좀더 분별력을 가지고 얘기하자구."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으나 크리스티는 뒤로 물러섰다.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일절 안하겠어요." 라일은 쌀쌀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말하자면, 간밤의 일은 우발적인 일이고 가벼운 장난에 불과했단 말이군?" "좋도록 해석하세요." 크리스티는 괴로운 심정을 감추고 쌀쌀하게 말했다. "나는 지난밤의 일이 당신에게 있어 그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곤 생각하지 않았어. 좀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지. 그런데 그렇지 않았단 말이군. 내가 바보였 어." 크리스티는 눈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어 다행 이다. 그의 말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자신을 보이고 싶지 않다. 빨리 이곳에서 벗 어나고 싶다. 이렇게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간밤에 있었던 사랑의 행위는 복수심에 서 이루어진 게 아니라고 자위하고 싶어질 것만 같다. 아냐, 마음이 약해져선 안 돼. 일찍이 그의 애정을 믿었다가 실패하지 않았는가. 그때만 해도 그가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어린애처럼 순 진하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첫 번째 위기가 닥치자 그는 훌쩍 떠나 버렸던 것이다. 크리스티는 자신의 텐트에서 아스피린 두 알을 먹은 뒤, 타월을 어깨에 걸치고 모갈 라퀘나 강으로 향했다. 망치로 두들겨맞은 것처럼 머리가 욱신욱신 울리고, 발을 옮 길 때마다 관자놀이가 쑤시듯 아팠다. 물가에서 옷을 벗고 쓰러지듯 강물 속으로 뛰 어들어 머리를 적시자 싸늘한 물이 점차 두통을 가라앉혀 주었다. 물에서 나와 옷을 입을 때는 몹시 피로했으나 다행히 두통은 가라앉아 있었다. 크리 스티는 그대로 바위에 걸터앉아 얼마 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느 끼지 않고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에서는 라일의 말이 메아리치 고 있어 전혀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없다. "나는 당신에게 있어 지난밤의 일이 그 정도의 것밖에 없다곤 생각하지 않았어. 좀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지. 그렇지만 그렇지 않았단 말이군. 내가 바보였 어." 어떤 의미일까? 라일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어떻게든 그의 진의를 알고 싶 다. 라일이 또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자고 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하게 생 각했으나, 그것은 아무래도 부질없는 걱정이었던 것 같다. 그는 부득이한 경우 외에 는 말도 하지 않았고 완전히 모르는 척했다. 당연히 안도의 숨을 쉬어야 했으나 웬일인지 몹시 쓸쓸하고 허전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데니스의 호의가 의외로 반가왔다. 그는 처음부터 매사에 친절했다. 그의 덕분 에 라일과의 사이에 감돌았던 어색한 분위기가 누그러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웃을 힘조차 없을 때도 자주 웃겨 주었다. 발굴작업은 더욱 진척되어 크리스티는 일행이 발굴한 물건의 목록을 작성하기에 바 빠 개인적인 문제로 골치를 썩을 겨를도 없었다. 발굴작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학 생들과 함께 유물발견의 기쁨에 잠기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를 지경이었다. "교수님은 이곳에 온 뒤 줄곧 무엇인가 찾고 있는 것 같아요." 탐사여행이 종반에 가까와진 어느 날 밤 데니스가 말했다. 일행은 모닥불을 둘러싸 고 있고, 두 사람은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그저 그런 느낌이 들어요." 데니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그와 비슷한 얘기 못 들었어요?" "아무 것도 못 들었는데요." 크리스티는 힐끗 라일을 쳐다보았다. 그는 나무에 기대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난 별로 교수의 신뢰를 받는 비서가 아닌걸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떠올랐다. "알고 있어요." 얘기가 상당히 개인적인 문제로 돌아가고 말았다. 크리스티는 서둘러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교수님이 찾고 있는 게 뭔지 짐작이 가요?" "아뇨." 데니스는 얼굴???찌푸렸다. "어쨌든 교수님의 학설을 뒷받침할 만한 물건일 거예요. 이곳이 전설의 여왕 인들로 부카치의 영지였다는 설 말이에요." "그거라면 이제 충분하잖아요? 뒷받침할 만한 걸 많이 발굴했으니까요." "확실히 그래요. 하지만 교수님은 아직 만족해하고 있지 않는 것 갈아요. 무언가 중 요한 물건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일 거예요." 데니스는 중대한 밀담이라도 하듯 목소리를 죽이고 크리스티의 몸에 기대며 소근댔 다. "여러 가지 물건을 체로 치고 있을 때의 교수님의 모습은 무척 진지하잖아요? 알고 있었어요?" "네, 알고 있어요." 그의 얘기에 비로소 열중하며 그녀는 대답했다. "교수님이 찾고 있는 물건은 틀림없이 작은 것일 거예요." "원래 작은 것일지 모르지만, 어쩜 큰 물건의 파편일지도 몰라요." "물어보지 그래요,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물어봤죠. 하지만 소용없었어요." "뭐라고 말씀하시던가요?" "날더러 상상력이 왕성하다면서 웃으시더군요. 그게 전부예요." 크리스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장난기섞인 웃음을 띠웠다. "그 말이 옳잖아요? 당신은 정말 상상력이 풍부하거든요." 데니스는 장난으로 크리스티의 팔을 손가락으로 튀겼다. 이때 앨런이 기타를 들고 조용히 치기 시작하자, 크리스티는 얘기를 그치고 일행이 있는 모닥불 옆으로 느릿느 릿 걸어갔다. 이때 한순간 라일과 눈이 마주쳤다. 노여움이 담긴 무서운 눈빛! 왜 저 렇게 화를 내고 있을까? 그날 밤은 밤새도록 팔이 아팠다. 며칠 후 솔과 흙손으로 조심스럽게 협곡의 벽을 깎아내고 있을 때 작은 항아리가 모 습을 나타냈다. 평소 같으면 일에 익숙한 학생들에게 파내 달라고 부탁했겠지만, 이 번에는 왠지 스스로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파기 시작했다. 약간의 방심도 해서는 안 된다. 자칫 잘못하면 항아리를 깰 염려가 있다. 뜨거운 햇 볕을 받으며 고생한 끝에 간신히 항아리를 꺼낼 수 있었다. 야릇한 감격으로 손이 떨 렸다. 항아리를 옮겨 들 때 안에서 소리가 났다. 뚜껑을 열어보려고 했으나, 내용물 을 보존하기 위한 장치 때문인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주머니칼과 솔로 봉한 곳을 자르지 않으면 안 돼요." 데니스가 손가락 끝으로 뚜껑과 동체 사이에 나 있는 가는 홈을 더듬었다. 그처럼 정교한 작업을 할 자신은 없으나 남에게 맡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요?" "하긴 당신이 발견했으니까." 그는 씽긋 웃으며 자신의 주머니칼을 건네주었다. "열 권리도 당신에게 있어요." 마치 큰일이나 되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 그렇게 들리는 게 아니라 사실 큰일이었 다. 크리스티는 작은 항아리를 단단히 옆에 끼고 언덕을 올랐다. 무심코 바라보니 라 일은 나무그늘에 덮개를 깔고 몇 명의 학생들과 열심히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항아 리가 상하지 않도록 봉을 뜯는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었으나 어떻게든 해보기로 했 다. 크리스티는 주머니칼과 솔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천천히 일을 해나갔다. 무리를 하면 항아리가 깨지기 쉽다. 빨리 뚜껑을 열어보고 싶지만 여기서 서둘러서는 안 된다. 그 런데 이 검은 항아리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형언할 수 없는 흥분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 전신에 퍼진다. 주머니칼로 조금씩 뚜껑과 주둥이 사이를 몇 분 동안이나 긁었을까? 그동안이 몇 시 간, 아니 며칠처럼 느껴졌다. 이젠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포기하려고 하는 순간 뚜껑 이 약간 움직였다. 갑자기 심장이 방망이질하듯 뛰기 시작하고 솔을 잡은 손이 떨렸 다. 항아리의 주둥에 주위에 묻은 진흙을 떨어내고, 아직도 믿기지 않는 기분으로 다 시 한번 칼을 뚜껑과 주둥이 사이에 찔러 넣었다. 정말 열린 걸까? 그렇다. 뚜껑은 삐걱 소리를 내면서 돌아갔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주위를 살펴보니, 점심때가 가까와져 학생들은 연장을 치우기 시작하고 있다. 라일은 체에 남아 있는 흙과 작은 돌을 조사하고 있었다. 서둘러야 지. 이젠 시간이 별로 없다. 크리스티는 당장 칼끝으로 살며시 뚜껑을 들어올리고, 항아리를 기울여 작은 천 위에 내용물을 쏟았다. 그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하고 전신이 오싹해졌다. 녹색 천 위에 쏟아져 나온 것은 사 자의 어금니 네 개와 작은 창날, 그리고 지름 5cm 정도의 상아 세공품이었다! 라일로 부터 받은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중앙의 무늬만은 달랐다. 이 상아 세공품에 있는 무늬는 여성상이었다. 인들로부카치가 자신의 사랑의 증표로써 애인에게 선물한 것임에 틀림없다. 라일이 찾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크리스티는 조심스럽게 상아 세공품을 들어올렸다. 오랜 세월이 흘러 누런 빛을 띠 고 있으나, 그 아름다움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다시 흥분에 사로잡혀 상아 세공품을 들고 있는 손이 떨렸다. "자, 돌아가자구." 라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티는 깜짝 놀라면서 엉겁결에 상아 세공품을 쇼트팬 츠 호주머니에 숨겨 넣었다. 아?무도 보지 않은 게 분명하다. 다소 뒤가 켕기기는 했으나 서둘러 다른 것들만을 긁어모아 항아리에 도로 넣고 뚜껑을 닫았다. 라일은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었고,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그러다 크리스티의 발소리를 듣고 돌아다본 그는 뚫어지게 항아리를 쳐다보았다. "어디서 발견했지?" "골짜기에서요." 지금까지 느껴 본 적이 없는 심한 불안이 가슴 가득히 번졌다. "발굴한 장소에는 표시를 해두고 번호를 붙여 놓았어요." 라일은 항아리를 받아들고 빤히 쳐다보다가, 마침내 화난 표정으로 눈을 들었다. "누가 겉봉을 뜯으라고 했지?" "제가 했어요." 데니스가 크리스티의 뒤에서 대답했다. "크리스티는 정말 능숙하게 했어요. 아무 데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라일은 못마땅한 표정이면서도 더 이상 개의치 않고 크리스티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내용물을 봤나?" "네." 라일이 내용물을 꺼내 보라는 시늉을 하자 크리스티는 천을 펼치고 그 위에 내용물 을 쏟았다. "이 항아리의 임자는 감상적인 남자였던 모양이군. 아마 이것은 처음 확인된 사자의 어금니고, 이건 그 당시 사용한 창날일 거야." 라일은 무뚝뚝하게 말하면서 내용물을 차례로 살피다가 갑자기 눈을 들었다. "이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이것뿐인가?" 호주머니에 든 상아 세공품에 신경이 쓰였다. 이건 그의 것이 아닌걸. 마음 한구석 에서는 돌려 주라고 속삭였으나, 웬일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것뿐예요." 라일의 검은 눈이 지켜보고 있다. 얼굴이 달아오르며 죄를 지었다고 고백해 버릴 것 만 같다. 원래 거짓말에는 서투른데다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이 몹시 두려웠다. "이상한걸." 라일의 목소리가 긴장된 정적을 깼다. "천 년 전의 사람은 무엇인가 숨기고 싶은 게 없으면 항아리에 봉인 따위는 하지 않 았을 거야. 이것들은 무용(武勇)의 표시니까 숨길 필요가 없었을 것 같은데…" 들켜 버렸구나! 라일은 알고 있다.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할까? 그러나 도저히 결 심이 서지 않는다. "틀림없이 겸허한 남자였을 겁니다." 데니스가 때마침 한 마디 거들었다. "원시인이 겸허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어. 힘과 용기를 과시하지 않고는 부족에서 어 엿한 남자로서 인정받을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교수님 말씀대로 감상적인 남자였겠군요." "글쎄,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라일은 희미한 미소를 띠우고 발굴품을 모은 뒤 일어섰다. "캠프로 돌아가지." 돌아가는 길에 세 사람은 모두 말이 없었다. 크리스티는 곧장 자기의 천막으로 들어 가 얼굴과 손을 씻고 살그머니 쇼트팬츠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상아 세공품은 그대로 들어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걸 호주머니에 몰래 넣었을까? 그리고 왜 라일에게 그 사실을 숨겼을 까?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꼼작도 않고 서 있는 동안 대답을 얻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마음속으로 꿈과 같은 행운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자신의 사랑의 증표로써 라일에게 이 상아 세공을 선물로 줄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티는 불안한 걸음으로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 점심식사 자리에 앉았다. 그런 기회가 찾아오리라 기대한다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우선 천 년 전의 인들로 부카치의 전설을 재현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라일이 사랑해 주지도 않는데 어떻 게 이 마음을 전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두 개의 상아 세공품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것,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인들로부카치가 라일을 돌려 주지 않을까? 이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이람! 아무리 초인적인 신통력이 있는 여왕이라 하더라도 20 세기인 현대에까지 그 힘이 미칠 리는 없다. 크리스티는 논리적으로 자신을 타일렀 다. 그러나 또 하나의 비논리적인 자기는 여전히 그것을 기대하고 있다. 어리석게도 라일을 사랑하고 있는 이상 아무리 작은 희망에라도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손은 끊임없이 호주머니로 갔다. 어딘가 안전한 곳에 숨 겨 두고 싶었으나 당장은 몸에 지니고 있는 편이 가장 틀림없는 방법일 것 같았다. 마지막 이틀은 정말 바쁘게 지냈다. 마지막날 밤 모닥불을 둘러싸고 있을 때는 모두 가 자연히 쓸쓸한 노래만 불렀다. 앨런은 언제나처럼 기타를 치고, 라일은 담배를 한 손에 든 채 쓸쓸한 얼굴로 나무에 기대고 있다. 모닥불 너머로 크리스티의 시선과 마 주치자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쩍였다. "앨런, 한 가지 제안이 있어. 기분전환을 위해 크리스티에게 기타를 주고 노래를 시 켜 보지 않겠나?" 주위는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지고 15명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자 크리스티는 완 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라일! 내 과거를 폭로하는 게 재미있 나요? 라일을 노려보고 도망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기타는 어느 새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렇게 되면 순순히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역시!" ?에리카가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오빠가 좋아하던 가수 같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앨범의 사진과는 상당히 달라요. 게다가 머리까지 짧아 몰라봤어요." "수다는 그만 떨어! 크리스티의 노래를 들어보자구." 누군가가 옆에서 웃으면서 말했다. 주위는 다시 조용해지고 크리스티는 당황한 눈으로 기타를 내려다보았다. "노래를 부르라고 하지만, 저는…" "좋잖아요, 오늘밤이 마지막 밤인데." 에리카가 말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봐요." 라일의 눈이 부르라고 명령하듯 쳐다보고 있다. 이렇게 된 바에는 당당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를 처음 만난 직후에 작곡한 노래를 부르자. 당시 이 노래는 두 사람 의 감정을 그대로 나타낸, 특별한 의미가 있는 노래였다. 크리스티의 익숙한 손가락이 최초의 멜로디를 울리자 모두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라일이 굳게 입을 다문다. 무슨 노래인지 곧 알아챈 것이다. 전주에 이어, 옛날과 디 름없이 허스키하고 감미로운 노랫노리가 흘러나왔다. 만났을 때부터 알았었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나를 보고 있는 당신의 눈. 그 눈을 보면 믿을 수 있네, 이 사랑의 순간은 영원히 계속되리란 것을. 사랑을 몰랐던 내게 당신은 너무나 많은 사랑을 주었네. 나에게 닿은 당신의 손, 와인과 같은 키스, 이 순간은 나의 것. 멀리 있어도 나의 마음은 당신의 것. 나를 감싸는 당신의 가슴 믿어 주세요, 이 사랑의 순간은 영원히 계속되리란 것을. 얼마 되지 않아 청중은 황홀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마지막을 드리마틱하게 부른 크리스티의 목소리가 가늘게 여운을 남기며 사라졌을 때, 조용하던 학생들 사이에서 환성이 터졌다. "앙코르! 앙코르!" 놀랍게도 눈물이 앞을 가렸다. 라일을 찾았으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느 새 없어졌을까? 틀림없이 노래를 듣고 싶지도 않았을 거다. "앙코르! 한 곡만 더!" 모두들 아우성이었으나 목이 메어 노래를 부를 형편이 아니었다. "이제 그만 하지." 데니스가 도와 주었다. 크리스티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챘던 것이다. 그 는 기타를 받아 앨런에게 돌려 주었다. "좋은 노래를 들은 것으로 막을 내리지. 내일 아침은 일찍 일어나야 하고, 갈 길도 머니까." 학생들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고, 데니스가 천막까지 바래다 주었다. 라일은 어디 있을까? 캠프 안을 둘러보아도 여전히 눈에 띄지 않는다. 점점 궁금해지고 가슴 이 답답하다. "그 노래…" 텐트 앞에서 데니스가 말했다. "특정한 사람을 위해 만든 거죠?" "그래요." 억지로 대답하면서도 눈은 여전히 라일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교수님 같은 사람 아녜요?" 크리스티는 가슴이 철렁하면서 몸이 굳어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는 잠시 크리스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당황하면서 조약돌을 발로 차는 척했 다. "골짜기에서 유물을 발견하던 날, 교수님의 텐트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들었어요. 교수님은 5년 전 당신에게 무엇인가 주었다고 말하던데." 상아 세공품을 말하는 것이다! 크리스티의 손은 무의식중에 바지 주머니로 갔다. 그 러나 그것은 거기에 들어 있지 않았다. 화장품과 함께 은밀하게 숨겨 둔 것이다. "그럼, 베니커 교수와 내가 이곳에서 처음 만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나요?" "그 이상이겠죠?" 데니스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미 눈치챈 듯했다. 크리스티가 놀라 대답도 못하고 있 을 때 그는 그녀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좋지 않은 짓일지 모르지만, 그후 당신과 교수님의 동태를 유심히 살폈어요. 당신 이 교수님을 보는 눈은 예사롭지 않았어요. 하긴, 이번 여행을 떠날 때부터 당신과 교수님은 서로 미워하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하나? 내가 그 정도로 감정을 밖으로 나타냈을까? 모두가 알 정도로? "아까 당신의 노래를 듣고 있는 교수님을 보고 퍼뜩 느꼈어요. 당신과 교수님은 예 사로운 사이가 아니라는 걸." "그가 어떤 얼굴로 듣고 있던가요?" "처음에는 몹시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어요. 마치 누군가가 잘못해서 귀중한 발굴 품을 떨어뜨린 것처럼. 그런데 노래가 끝날 무렵엔 갑자기 일어나 강 쪽으로 가버리 더군." 풀숲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 그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지 않겠어요?" 크리스티는 무거운 담요라도 둘러쓴 것처럼 갑자기 피로감에 사로잡히면서 한숨을 쉬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사연이 있어요. 얘기하자면 길어요. 언젠가… 멀지 않아 얘기하 게 되겠죠." "그렇다면 요한네스버그에 가서도 만나 주겠단 말예요?" 만나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다. 크리스티는 손가락 끝을 데니스의 뺨에 가볍게 대었 다. "이곳에 있는 동안 당신은 정말 친절하게 대해 주었어요. 고마와요, 데니스. 그럼 편히 쉬어요." 크리스티는 그를 텐트 입구에 혼자 남겨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좀처럼 잠 을 이룰 수 없어 몇 시간을 뒤척이다가 간신히 마지막 밤의 잠을 이루었다. 6 텐트는 걷혔고 기구들은 트럭에, 귀중한 발굴품은 마이크로 버스에 실었다. 일행의 발자국과 지난밤에 피운 모닥불이 타고 남은 재 말고는 이곳에 캠프를 친 흔적은 전 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는 크리스티의 가슴은 감개무량했다. 내일이면 이것도 모두 추억이 되겠지.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데니스와 함께 트럭에 타려고 할 때 라일이 큰소리로 불렀다. "크리스티, 내 차에 타요." 크리스티는 부질없는 충돌은 하고 싶지 않아 얌전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지프는 햇 볕이 들지 않는 나무그늘에 세워져 있었다. 라일은 가볍게 핸들 앞에 올라앉아 크리 스티가 백을 뒷좌석에 놓고 문을 닫자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 소리는 다른 차에 대 한 출발신호이기도 했다. 이것으로 작별이다… 텅 빈 캠프 자리를 보자 눈물이 나오 려고 했다. 그러나 라일이 보는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다. 요한네스버그까지는 길고 더운 여정이다. 라일은 가슴 부분까지 셔츠를 벌렸고, 늘 씬한 다리는 회색 바지에 감싸여 있다.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은 힘차고, 힐끗 훔쳐본 옆얼굴은 차가운 빛이 감돌아 가까이하기 어려웠다. 이처럼 같이 있으면서도 이렇게 멀리 느껴지다니,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쓸쓸하다. 그 반대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젯밤에는 미안했어요." 크리스티는 아무래도 전날 밤의 일이 마음에 걸려, 울퉁불퉁한 길에서 평탄한 길로 나왔을 때 입을 열었다. "그런 노래를 불러서 미안해요. 옛날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겠죠?" "이젠 됐어!" 라일은 뱉듯이 말하고는 기어를 바꾸고 액셀을 밟았다. "이 차에 타라고 한 건 데니스에 대해서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야." "데니스에 대해서라니… 무슨 얘기예요?" "그에게는 아직 몇 년 동안의 학창생활이 남아 있어. 그리고 당신은 너무 젊고 너무 순진해." "그게 무슨 뜻이죠?"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마음속에서는 화가 치밀어오른다. "데니스를 건드리지 말아 줘. 그는 틀림없이 훌륭한 학자가 될 거야. 당신 같은 여 자 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장래를 망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청년이지." "잠깐만!" 크리스티는 남보랏빛 눈에 노여움의 불길을 태우면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마치 내가 데니스를 유혹한다는 말인가요? 나는 남자를 파멸시키는 데릴 라가 아니예요." 핸들을 쥔 라일의 손에 힘이 주어졌다.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하군. 하지만 데니스는 남아프리카를 대표할 고고학자가 될 청년이야. 한 사람의 중요한 기회를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 어." "그 사람은 어엿한 어른이에요. 남이 불필요한 걱정까지 해줄 필요는 없어요." 크리스티는 씁쓸한 어조로 응수했다. "무엇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해 신경을 쓰죠?" "데니스의 아버지는 내 친구이고, 가장 존경하는 고고학자이기 때문이기도 해." "그래서, 그 사람이 아들의 걸프렌드가 당신의 전부인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곤란하 단 말이군요. 우정에 금이 가게 될 테니까." "바보 같은 소리 하는 게 아냐!" 라일의 격한 어조에 크리스티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사렸다. "그런 것과는 관계없다구!" "그렇다면 내가 데니스와 가깝게 지낸다 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그런데 왜 죄나 지 은 사람처럼 취급하죠?" 라일은 화난 눈으로 크리스티를 힐끗 쳐다보았다. "데니스는 당신에게 친구 이상의 교제를 기대하고 있어.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당신도 보통 둔한 게 아니로군." 분노는 싹 가셨다. 라일이 말한 대로다. 크리스티는 이미 데니스의 감정을 알고 있 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감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어떤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 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라일에게 직접 그 사실을 지적당하고 보니 불쾌하다. "일부러 말해 줄 필요는 없어요. 데니스가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건 알고 있으 니까요. 하지만 그런 감정은 곧 식게 마련이니까 걱정할 것도 없고, 또 애써 친절하 게 대해 주는 걸 뿌리치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지금 뿌리치는 게 좋아. 그대로 두었다가 정말 심각해지면 더 가엾게 될 테 니까." "충고는 고마와요. 하지만 뿌리칠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뿌리칠 필요가 있 다면 언제 그렇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내게 맡겨 둬요." "좋아, 잘되겠지. 하지만 그의 학업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가 이처럼 단호하게 나오자 크리스티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 "알았습니다, 베니커 교수님!" 용기를 내어 비꼬는 투로 대답했으나, 라일의 눈을 보자 온몸이 움츠러드는 듯했다. 힐끗 돌아본 그의 눈에는 격렬한 분노가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두 사람은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서로 말을 건네지 않았다. 크리스티는 등 받??結?기대어 선글라스를 끼었다. 덥고 피곤했으나 좀처럼 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라일과의 대화는 의외로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제발 데니스의 감정이 빨리 수습되기 를… 그의 학업을 방해하거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으나, 아무래도 쉽지 않을 듯싶다. 또 한 가지 마음을 사로잡는 불안은 앞으로 라일과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의 문제였 다. 갈색 머리의 미인인 소냐 디콘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온다. 소냐는 라일을 기 다리고 있을 테고, 라일도 그녀 곁으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당연하다. 소냐는 직 업을 갖고 있지 않으니 언제든지 라일 곁에 있을 수 있다. 직업은 우리 두 사람의 불 화의 원인이었고,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에도 그는 그 문제로 비난을 퍼부었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어 준 적이 없어!" 크리스티도 지지 않고 응수했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나 같은 직업여성하고 결혼하면 어떤 생활을 해 야 한다는 것쯤 알고 있었을 것 아녜요?" 과거를 돌이켜 생각하면 괴로운 기억만 되살아난다. 라일을 잃은 건 만 5년 전. 하 지만 지금 헤어지기는 더욱 가슴 아프다. 가끔 훔쳐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냉랭하 고 쌀쌀하다. 부드러운 대화는 물론 말을 걸기조차 두렵다. 결국 침묵을 지키고 있는 동안에 차는 많은 거리를 달렸다. 일행은 닐스트룸에서 휴식을 취했다. 모두가 탐사여행을 끝낸 허전함 때문인지 햄버 거와 찬 음료수를 묵묵히 입으로 가지고 갔다. 데니스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크리스 티는 세 명의 여학생들과 섞여 그와 단둘이 있는 걸 피했다. 여행이 끝날 때가 가까와지면서 시간의 흐름은 훨씬 더 빨라졌다. 어느 사이엔가 요 한네스버그의 빌딩 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작별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슬 픔으로 가슴이 메는 듯하다. 작별인사도 하고 싶지 않다. "집까지 바래다 줄까?" 대학 건물에 가까와졌을 때 라일이 답답한 침묵을 깨면서 물었다. 크리스티는 고개를 젓고 기분을 가라앉힌 다음 대답했다. "이 근처의 버스 정거장에서 세워 주세요." 얼마 안 있어 라일은 "여기가 버스 정거장이야"라고 말하고 지프를 길가에 대며 브 레이크를 밟았다. 다른 차들도 차례로 섰다. "고마와요." 크리스티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 다음 가방을 들고 지프에서 내렸다. "기다려요, 크리스티!" 뒤의 트럭에서 데니스가 뛰어내려 총총히 다가왔다. "당신의 주소를 아직 물어보지 못했어요." 이때 지프의 뒤로 돌아온 라일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대답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나 그런 그를 무시하고 말했다. "전화번호부에 나와 있어요. 나중에 전화하세요." 크리스티는 가방을 길바닥에 놓고 학생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녔다. 마지막에 라일 앞으로 돌아왔을 때 버스가 오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말하려고 했던 것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것으로… 작별이군요."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버스는 다이어 끌리는 소리를 내며 지프 앞에 섰다. "당신이 와주어 다행이었어." 한순간 그가 작업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날 밤의 일을 말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 었다. 크리스티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황급히 가방을 집어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승객들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창가에 앉아 손을 흔들자, 학생들도 열심히 손을 흔들 어 답해 주었다. 그러나 라일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언짢은 듯한 얼굴로 서 있다. 그 표정에 가슴이 메어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 밤 크리스티는 집에서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을 맘껏 맞으며 오 랜만에 상쾌한 기분을 맛보았다. 게다가 캠프에서 입던 허술한 무명 파자마에 비해 실크 네글리제의 감촉은 정말 부드러웠다. 감미로운 향내가 풍기는 피부를 편안하게 감싸주었다. 마지막에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린 뒤 보석상자를 들고 침대로 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다가왔다. 마음놓고 자세히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이 즐 거움을 아껴 두었던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작은 열쇠를 돌려 뚜껑을 열고 손을 넣자 손가락 끝에 납작하고 둥근 것이 닿았다. 살그머니 꺼내어 손바닥에 올려놓았 다. 5년 전 라일이 준 상아 세공품. 다른 한 손은 기계적으로 베개 밑에 있는 스카프 로 갔다. 초록빛 스카프에 싸여 있는 것은 캠프에서 발견한 상아 세공품이었다. 두 개를 나란히 손바닥에 올려놓았을 때, 또다시 이상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중앙의 무늬 말고는 두 개가 완전히 같았다. 천 년 전에 이토록 정교한 물건을 조각할 수 있 었던 장인은 얼마나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을까. 상아 세공품은 어느 것이나 모두 보존상태가 좋아 다소 누렇게 변한 것 외에는 전혀 손상이 없었다. 원래 한 쌍의 세공품으로 만들어진 이상 각각 흩어져 있어서는 안 되 겠다고 생각됐다. 인들로부카치와 그 애인처럼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갖고 있지는 못하 더라도? 박물관에서는 두 개를 함께 보관하는 게 타당할 거다. 크리스티는 푸른 벨벳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를 꺼내어 상아 세공품을 조심스럽게 넣 었다. 그리고 주머니 주둥이에 달려 있는 새틴으로 된 끈을 단단히 잡아맸다. 언젠가 는 이 귀중한 상아 세공품을 한 개만, 어쩌면 둘 다 내놓기로 결심하게 될지도 모른 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의 것으로, 자기 혼자만의 것으로 두고 싶다. 그동안 활동적인 일을 해온 때문인지 크리스티는 좀처럼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었다. 다른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는 한편, 휴가를 얻어 모든 일로부터 벗어나 장래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보고 싶기도 했다. 라일이 요한네스버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마음은 전보다도 더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만나고 싶다 해서 만날 수 있는 그가 아니다. 그에게 안겼던 그날 밤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몸이 맞닿고 있는 동안만은 그의 마음을 끌 수 있었지 만,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중에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정상적인 남 자"라고. 뿐만 아니라 마지막날 밤에는 노래를 듣다 말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 따 위는 안중에도 없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다. 묵은 상처가 입을 벌리고, 사랑하는 오직 한 사람을 잃은 아픔과 참담한 심정이 그 녀를 괴롭혔다. 기적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리석은 마음은 여전히 헛된 희망에 매달리는 것이다. 라일은 언젠가 돌아온다는 부질없는 꿈을 버릴 수 없 는 것이다. 캠프에서 돌아온 지 사흘 후, 대학에서 그 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는 짧은 편지와 수 표가 왔다. 수표를 받아들자 이제는 라일과 이어진 마지막 끈마저 끊어졌다는 느낌이 들어 그날은 몇 시간 동안이나 울었다. 새미 피터슨으로부터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는 전화가 걸려왔으나 크리스티는 거절했 다. 그가 점심식사에 초대한다고 말할 때는 언제나 윗호주머니에 새로운 계약서를 숨 겨 가지고 있을 때다. 새미는 기회를 엿보아 대단한 일이나 되는 것처럼 그것을 꺼내어 지금까지 없었던 유리한 계약이라고 떠들어댄다. 거절해도 집요하게 계약내용의 이점을 내세우고, 마 지막에는 '애써 기회를 만들어 주는데' 하면서 볼멘 얼굴을 한다. 일 주일쯤 지난 어느 날 저녁, 6시가 막 지났을 때 현관 벨이 울렸다. 안전 체인을 건 채로 살며시 문을 열고 보니 데니스가 겸연쩍은 얼굴로 서 있었다. "전화를 하기보다 직접 보고 싶어서… 방해가 되지 않았는지요?" "아뇨, 전혀." 크리스티는 체인을 벗기고 문을 열었다. "자, 들어와요." 장신에 늘씬한 데니스가 성큼 들어와 초록빛 눈으로 아늑한 방안을 둘러보았다. 크 리스티는 문을 닫고 의자를 권했다. 젊고 활기 넘치는 데니스를 다시 만나자 무척 반 가왔다. 크림 색 바지와 진곤색 상의를 입은 그는 진흙투성이가 되어 발굴에 열중하 던 학생과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아마 크리스티 자신도 방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지금은, 지난 번 교수 비서로 일하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달라 보일 것이다. 데니스는 실크 옷을 입고 있는 크리스티를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역시 상대의 새로운 이미지에 마음이 끌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밤, 무슨 계획이 있어요?" 데니스는 크리스티의 맞은편 의자에 편안하게 앉은 뒤 물었다. "별로." 크리스티는 아무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잘됐군, 그럼 함께 식사하러 나가자구요. 최고로 맛있는 피자를 만드는 집을 알고 있거든요." 눈을 빛내면서 이렇게 말한 데니스는 갑자기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당신은 피자를 싫어한다고 했던가?" 크리스티는 그의 진지한 얼굴이 귀엽다고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씽긋 웃었다. "무척 좋아하는걸요." "그럼, 함께 가주겠죠?" 어떻게 한다? 라일의 충고가 아직도 귓가에서 메아리친다. 그러나 그의 청을 거절하 기도 곤란하다. 데니스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좋아요, 곧 준비하고 올 테니 기다려요." 크리스티는 데니스를 거실에 남겨 두고, 방에서 화장을 고친 다음 백과 숄을 들었 다. 은회색 콜트 차는 데니스의 능숙한 운전으로 다른 차들 사이를 미끄러지듯 누비고 지나갔다. 피자 가게에 도착하자 마침 주차장에서 나오는 차가 한 대 있어 주차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게는 꽤 붐볐으나 데니스는 다행히 빈 테이블을 발견하고는 크리스티를 데리고 안 쪽으로 들어갔다. 시장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는데 맛있는 피자 냄새와 커피 향기에 자 극을 받아 식욕이 솟았다. 낮게 매달린 전등이 테이블에 부드러운 빛을 던지고, 그 어스름한 빛 속에서 푸른 체크 무늬의 식탁보가 시원스럽게 떠올라 보인다. 왠지 전혀 낯선 사람과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상하게 긴장되었다.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 그래, 연구에 관한 얘기나, 가지고 돌아온 발굴품의 조사 결과를 물어보는 편이 좋겠다. 질문을 하자 예상했던 대로 데니스는 열심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발굴품은 역시 철기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었고, 그런 의미에서도 지난번 탐사여행은 귀한 경험이었다고 했다. 얘기는 라일이 매일 쓴 기록에도 미쳤다. "교수님은 당신이 타이프한 기록을 복사해서 모두에게 돌렸어요. 시간이 있을 때 스 스로 공부해 보라면서." 피자와 커피가 나왔을 때 데니스가 말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피자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아무래도 데니스의 태도가 수상하다. 무슨 어려운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서로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웃어 보였으나, 그렇 지 않을 때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다. 가게 안에 있던 사람 들은 하나씩 자리를 떴다. 마침내 데니스가 눈을 들며 불쑥 물었다. "커피 한 잔 더 할까요?" "아뇨, 아직 남았는걸요." 크리스티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으나, 그의 얼굴은 갑자기 어두워지며 다시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의 눈이 진지한 표정으로 크리스티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원망하는 말투로 물었다. "왜 교수님에 대해서 묻지 않죠?" "교수님에 대해서라니… 무슨 말을?" 크리스티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교수님은 줄곧 기분이 안 좋아요." 데니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짐짓 무서운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 과장된 표정이 우스 웠으나, 아무래도 웃을 일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당신, 교수님과 특별한 관계였던 때가 있었죠?" 가혹한 질문이었지만 사실을 모르는 데니스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건 아주 오래 된 얘기예요." "그때의 얘기 좀 들려 줄 수 없어요?" 데니스는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졸랐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말할 수 없어요." 라일과 결혼했던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다. 더구나 데니스에게 그런 이 야기를 하다니… 그것은 공표할 얘기도 아니거니와 괴로와서 밝히기조차 싫다. "교수님과 당신이 전처럼 될 가능성은 없어요? 말하자면 원래의 관계로 돌아가고 싶 진 않은지?" 데니스의 목소리가 망연히 커피를 마시고 있는 크리스티의 귀에 들렸다. "없어요, 전혀." 겨우 생각에서 깨어나 컵을 놓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상대에게 자신의 괴로운 심정 을 눈치채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신과 내가…" "안 돼요!" 크리스티는 그의 말을 단호히 막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전부터 두려워했고, 라일이 경고한 사태이기도 하다. 해결하는 길은 단 호하게 거절하는 방법밖에 없다. "안 된다고?" 데니스는 기분이 상했는지 초록빛 눈이 어두워지며 테이블 너머로 몸을 내밀었다. "그 말뿐이고…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깁니까? 납득할 수 없는걸요." 크리스티는 자기혐오와 자책감에 사로잡혀 데니스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겹쳤 다. "당신은 정말 멋있는 사람이고 좋은 친구예요. 언제나 친절하게 대해 주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게는 그 이상의 감정은 없어요." "아직도 베니커 교수를 좋아해요?" "그건 당신관 상관없는 일이에요." 크리스티는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데니스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도저히 쌀쌀하게 대할 수가 없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데니스.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게 가장 괴로와 요." "한 가지만 대답해 줘요. 그러면 다시는 캐묻지 않겠어요." 그의 눈빛은 진지하다. "어떤 원인으로 교수님과 원만하게 되지 않았죠?" 모든 게 원인이었다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말하면 그는 또 여러 가지를 물을 것이다. 여기서 과거의 실수를 늘어놓는다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직업상의 문제예요." 크리스티는 신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분은 그분의 일이 있는 곳으로 갔고, 나는 내 일이 있는 다른 곳으로 갔던 거예 요." 직업이 원인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던만큼, 그 설명에 대해서는 데니스도 납득했을 것 이다. 크리스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피자 집을 나왔다. 그 당시 라일은 일 때문에 이탈리로 떠났고, 자신은 공연 때문에 국내여행을 떠났었다. 그 결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서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 화가 되어 화해는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헛된 희망에 매달려 기다리는 사람에게 있어 5년의 세월이란 너무 길었다. 마지막에 는 체념하고 운명에 순종하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우연히 라일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도,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단순히 시간적인 공백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뱀의 습격을 받았던 그날 밤 라일은 몸을 요구했으나, 서로 포옹하고 있을 때도 그 와의 사이에 마음의 거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리적인 거리는 곧 메울 수 있 다. 그러나 정신적인 거리는 그리 간단하게 메울 수 없는 것이다. 그에게 접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멀어지는 거리감을 절실하게 느꼈다. 마치 꼼짝도 않는 바위를 치우려고 하는 것과 같?아 자신이 어리석고 참담하게만 느껴져 견딜 수 없다. "다시 만나 주겠죠?"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데니스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크리스티는 미안한 듯 엷은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저었다. "만나지 않는 게 좋잖아요?" "나하고 사귀고 싶지 않다는 뜻이에요?"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자신의 구두 위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당신이 학문에만 열중하기를 바라는 거예요." 크리스티는 어머니 같은 기분이 들어 그의 뺨을 손으로 부드럽게 만졌다. "혹시 정말로 할 일이 없어 지루할 때는 집으로 놀러와 얘기라도 하고 가요. 커피 정도는 대접할 테니까요. 그런 교제라면 대환영이에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반드시 현명한 대답이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러 나 그때만 해도 데니스를 실망시킬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다소 쓸쓸해하 면서도 웃는 얼굴을 보였을 때는 안도의 한숨이라도 내쉬고 싶었다. "데니스를 건드리지 말아 줘"라고 라일은 말했었다. 그리고 "그의 학업에 지장을 초 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어"라고도 했다. 그때만 해도 그의 말을 불필요한 참견 이라고 생각했으나, 결국은 그의 충고를 따랐다. 데니스와의 사이에는 우정밖에 없다 는 것을 본인에게 분명히 말했고, 그도 그것을 납득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납 득하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데니스에게는 미안한 일을 하고 말았다. 그의 관심을 끌려는 태도를 취한 기억은 없 었지만, 현재의 상황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데니스를 만나고 며칠 동안은 라일 이 찾아와 호통을 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으나, 다행히도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 다. 데니스에 관한 문제를 잊어가던 어느 날 밤, 전화 벨이 울렸다. 올 것이 왔구나 하 고 각오하고 수화기를 들었으나, 상대는 라일이 아니었다. "여보세요, 저는 소냐 디콘이에요." 달착지근한 여자의 목소리다. "라일에게서 저에 대한 말을 들었겠죠?" "아뇨, 아무 것도." 크리스티는 갑자기 소냐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우리가 트란스발로 떠나던 날 아침, 학교로 찾아오셨던 건 알고 있어요. 당 신의 이름은 학생들로부터 들었구요." "어머, 그래요? 영리한 학생도 있군요." "네, 그래요." 크리스티는 막힘없이 대답하면서도 의심스러웠다. 도대체 소냐가 무엇 때문에 전화 를 걸었을까? "아참, 왜 전화를 걸었는지 말씀드려야겠군요." 소냐는 크리스티의 마음을 읽은 듯이 말했다. "무슨 용건인지 알겠어요?" "아뇨." "라일에 관한 문제예요." 무슨 일일까? 나쁜 일일까? 라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불길한 상상이 꼬리 를 물고 스친다. "라일이 어떻게 됐나요?" 크리스티는 억지로 불안감을 숨기고 냉정하게 물었다. "전화로는 얘기하기가 좀 어려워요." 그녀의 달착지근한 목소리는 불안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내일 아침에 시간이 날까요?" "네, 시간 있어요." 아무리 약속이 많더라도 취소하고 달려가겠어! "페오도라 찻집을 아나요? 브리 가에 있죠." 물론 알고 있다. 그 찻집이 일 년 전에 문을 열었을 때는 온통 시내의 화젯거리였 다. 그곳은 유복한 마나님들이 모여 비싼 차와 핫케이크를 즐기며 이런저런 소문들로 얘기꽃을 피우는 곳으로 유명하다. "갈릭스 부근이잖아요?" 사실은 물어볼 것도 없었으나 크리스티는 그저 건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래요, 내일 l1시에 거기서 기다리겠어요." 갑자기 전화가 끊겼다. 크리스티는 잠시 그 자리에서 생각에 잠겼다. 소냐 디콘은 라일에 관한 문제라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일부러 차를 마시자고 청하는 걸 보면 중요한 일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안심할 수 있다. 라일에게 긴급 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가 죽음에 직면하기라도 했다면 소냐 는 내일 만나자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을 거다. 잠자리에 들려고 했을 때 문득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소냐 디콘이 어떻게 내 존재를 알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였다. 라일에게서 들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과연 그가 현재의 걸프렌드에게 헤어진 아내에 관한 얘기 같은 걸 했을까? 호기심과 불안이 뒤섞여 그날 밤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잠자리에서 뒤척이 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으나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했다. 지칠 대로 지쳐 잠이 든 것은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덕분에 아침 7시 반에 눈을 떴을 때는 언제나처럼 머 리가 욱신욱신했다. 진동제를 많이 먹었어도 두통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7 페오도라 찻집은 이곳을 자주 출입하는 숙녀들에 걸맞게 실로 우아하게 꾸며져 있었 다. 와인 색깔의 붉은 색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어 발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크리스티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한 달 전에 보았던 그 얼굴이 어디에 있는지 실내의 손님들을 둘러보았다. 설마 약속을 어긴 건 아닐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을 때, 청색 웃도리를 입은 흑인 남자가 카운터에서 나왔다. "손님을 찾고 계십니까, 부인?" "소냐 디콘 양과 약속을 했는데요…" 웨이터는 퍼뜩 생각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소냐의 부탁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는 은근한 태도로 안쪽을 가리키고 칸막이로 둘러싸인 테이블 사이를 앞서 갔다. 안내된 곳은 가장 안쪽에 있는 자리였다. 그곳에서 소냐를 보자, 웨이터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입구에 있는 카운터로 돌아갔다. "시간에 맞춰 오셨군요." 소냐는 이렇게 말하면서 쌩긋 웃었으나 웃음을 띠우고 있는 것은 입 언저리뿐, 싸늘 한 잿빛 눈에서는 웃음을 찾아볼 수 없다.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소냐의 눈이 크리스티를 평가하 는 동안 크리스티도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금발에 아름다운 용모, 우아한 옷차림. "취향도 미리 물어보지 않아 미안하지만, 짐작으로 주문해 두었어요. 차와… 어머, 왔군요." 소냐가 말하고 있을 때, 하얀 에이프런을 걸친 웨이트리스가 홍차와 핫케이크를 가 지고 왔다. 쟁반에는 고급스런 컵과 접시가 놓여 있다. "핫케이크 괜찮겠죠?" 웨이트리스가 돌아가자 소냐가 물었다. "혹시 다이어트 중이라 안 되나요?" 일부러 비꼬는 듯한 말투다. "저는 무엇을 먹어도 체중에는 변함이 없어요." 소냐는 다시 씽긋 웃고 차를 따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눈은 웃고 있지 않다. "밀크는?" "넣어 주세요, 고마와요." 크리스티는 컵을 받아들고 우선 핫케이크를 먹어보았다. 가볍고 부드럽게 구워져 있 으며 위에 얹힌 크림도 신선하고 고급이다. 그러나 모처럼 만의 맛있는 핫케이크도 수면부족으로 그 맛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무슨 얘긴지 빨리 듣고 싶어 초 조하다. "저는 이 집이 참 좋아요." 핫케이크를 다 먹고 차를 마실 때 소냐가 흡족한 듯 말했다. "분위기가 참 좋죠?" "유감스럽게도, 저는 찻집들에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크리스티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빈 컵을 한쪽으로 밀었다. "그보다도 용건을 들려 주시지 않겠어요?" "좋아요." 소냐는 아름다운 입술에 엷은 비웃음을 띠우고 싸늘한 눈으로 크리스티의 눈을 바라 보았다. "당신은 라일과 결혼했었죠?" "네?" "지난번 조사여행 중에 그의 비서노릇을 한 것도 당신이죠? 전부터 그러리라고 생각 했었지만, 지난밤에 전화를 걸었을 때 확실히 알았죠." "맞아요." 틀림없이 어젯밤에는 여행을 떠나던 날 아침 얘기를 했다. "전화로는 라일의 문제로 할 얘기가 있다고 했잖아요?" "그래요, 저는 라일 대신 나왔어요. 그 사람은 앞으로 일절 당신에게 시달리고 싶지 않다고 하더군요." 크리스티는 뜻하지 않은 소냐의 말에 아연실색했다. "뭐라구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렇담 다시 한번 말하죠." 그녀의 달큰한 목소리는 독을 품고 있다. "라일에게 접근하지 말아 주세요. 아무리 옛날의 부인이라 하더라도, 이젠 그 사람 을 방해할 권리는 없어요." 소냐의 말은 틀림없이 지난번의 조사여행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자기가 함께 가 서 방해가 되었다고 라일이 말한 모양이다. 그가 소냐에게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생 각조차 못했었다. 의외인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남을 내세워 말하는 것도 뜻밖 이다. "마치 내가 억지로 그에게 접근한 것처럼 말하는군요." "그럴 생각이 있었으니까 그의 비서에 응모하지 않았겠어요?" "난 라일의 비서라는 걸 모르고 응모했어요. 비서를 모집한다는 건 광고에서 봤을 뿐이니까요. 그가 귀국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었는걸요." "흥, 그런 말을 내가 믿을 줄 알아요? 라일도 그것이 우연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 어요." "믿고 안 믿고는 자유예요. 마음대로 생각해요." "아직도 라일을 사랑하고 있나요?" 이처럼 노골적인 질문을 받으면, 보통 여자들은 충격을 받고 본심을 실토하게 마련 이다. 그러나 크리스티는 태연하게 소냐의 싸늘한 눈을 마주보았다. "나는 고고학자로서의 그를 존경해요. 그밖에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서는 다른 사람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소냐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적의에 찬 웃음을 입술에 띠웠다. "말하자면 지금도 그를 사랑하고 있군요." 소냐는 멋있게 공격하여 고백케 하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으나, 분개하고 있는 크리 스티는 그녀에 대한 증오심 외에는 아무 것도 느끼지 않았다. 겉은 아름다와도 마음 은 얼마나 추악한 여자인가! "무슨 얘긴지 알겠어요." 크리스티는 테이블 밑에서 핸드백을 힘껏 쥐었다. "라일을 독차지하고 싶으면, 제발 그렇게 하세요. 나는 앞으로도 전혀 그에게 접근 하지 않을 테니까요." "라일이 그 말을 듣는다면 안심할 거예요." 소냐는 비로소 승리의 기쁨으로 눈을 빛냈다. "그렇겠죠." 크리스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들었어요. 그럼, 실례하겠어요." 찻집에서 나오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호기심에 찬 눈으로 쳐다보았다. 실은 당장이라 도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으나 결코 그런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깨에 힘을 주며 가슴을 펴고 걸었다. 어디를 어떻게 지나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어느 새 차를 몰고 아파트에 돌아와 있었 던 것이다. 돌아오다가 교통위반에 걸리지 않은 게 신기했다. 전신이 마비된 듯하고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걸린 것처럼 가슴이 싸늘했다. 눈물이 쏟아져 볼을 적셨다. 지 금까지 그처럼 울어왔으면 지금쯤은 눈물도 말랐으련만, 이렇게 끊임없이 흐르는 것 은 웬일일까? 크리스티는 눈물을 억제할 기력도 잃은 채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엎드 렸다. 실컷 울고는 헛된 꿈에 작별을 고했다. 이틀 후, 아직 밤의 장막이 내리기 전인데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소냐 디콘을 만났 을 때 받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아 좀처럼 손님을 대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가보지 않을 수 없어 체인을 건 채 문을 빠끔히 열어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눈앞 에 라일이 우뚝 서 있지 않은가. 무엇 때문에 찾아왔을까? 데니스와 교제하지 말라고 다시 한번 경고하기 위해서? 아 니면, 그저 어떻게 지내나 보려고? 소냐 디콘의 말에 의하면 그는 나에게 시달림받고 싶지 않다고 했잖은가. 그렇다면 단순히 얼굴만을 보려고 찾아온 건 아닐 게다. 하지 만 데니스의 문제로 찾아온 것 같지도 않았다. 얼굴 한쪽이 그늘에 가려 있기는 했지 만 그의 표정으로 보아 화를 내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웬일이죠?" 크리스티가 싸늘하게 묻자 라일은 경멸하듯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 부드러운 목 소리는 상처받은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우선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겠어?" "무슨 일로요?" "할 얘기가 있어." 크리스티의 가슴은 그의 귀에 들릴 정도로 심하게 뛰었다. "할 얘기 같은 게 있을 리 없을 텐데요?" "나는 당신에게 할 말이 많아." 그의 시선을 견딜 수 없어 눈을 돌렸다. "듣고 싶지 않아요." 뒤로 물러서며 문을 닫으려고 했으나 웬일인지 닫히지가 않는다. 무심코 아래쪽을 내려다보고서야 그 까닭을 알았다. "그 발을 치우세요."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고 할 때까지는 치울 수 없어." 라일은 크리스티가 응할 것 같지 않자 협박조로 말했다.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큰소리 지를 거야. 당신이 이곳에서 못 살게 되더라도 난 모 르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하세요!" 화가 났으나 정말로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침내 한숨 을 쉬면서 체인을 벗겼다. "좋아요, 들어오세요." "그러는 편이 현명하지." 안으로 들어온 라일은 재빠르게 방안을 둘러보았다. "아주 아늑한 방인걸. 둘이 같이 샀던 가구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군."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 "재산목록을 작성하러 오신 건 아니겠죠? 빨리 용건이나 말하고 돌아가 줘요." "당신은 언제나 손님에게 이렇게 무례한가?" "오늘은 손님을 맞을 기분이 못돼요. 특히 당신을 환영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크리스티는 입으로만 이렇게 야멸차게 말할 뿐 라일의 모습을 황홀한 눈으로 쳐다보 았다. 값진 베이지 색 상의를 입은 넓은 어깨, 갈색 바지에 감싸인 가는 허리, 언제 나 변함없이 남성다운 매력이 풍기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방심해서는 안 된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뭘 하러 왔죠, 라일?"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왔어." 그는 거리낌없이 의자에 앉아 긴 다리를 뻗었다. "당신에게 달라붙지 말라는 얘기라면 굳이 반복할 필욘 없어요!" 크리스티의 몸은 굳어지고 눈은 노여움으로 불타고 있다. "전갈을 들었어요, 분명히 들었죠." 라일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무슨 말이지?" "시치미떼지 마세요, 알고 있으면서." 크리스티는 주먹을 쥐고 라일을 노려보았다. "내가 혹시라도 당신에게 매달릴까 봐 소냐에게 부탁했죠? 앞으로는 당신에게 접근 하지 말라고 말예요. 그렇게 내가 싫은가요? 내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매달리는 여 자라고 생각했나요? 소냐에게 뭐라고 말했죠? 탐사여행이 끝나서 후련하다, 이젠 그 여자가 나 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했나요? 그래서 소냐는 나를 페오도라 로 불러냈나요? 대단히 충성스런 분이군요! 당신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말하러 왔 더군요. 그나저나 당신이 그처럼 겁쟁이라는 데는 정말 놀랐어요. 당신이 직접 내게 말할 만한 용기도 없었나요?" 라일의 얼굴이 충격으로 창백해졌다. "내가 그런 말을 하고 싶은 상대는 바로 소냐야. 사실 2, 3일 전에 분명하게 말했 지, 이젠 다른 남자를 사귀라고." 크리스티는 발밑이 흔들리는 것 같은 심한 충격을 받으면서 갑자기 무엇인가 붙잡고 싶었다. "그 여자와의 교제를 그만두었다는 말인가요?" "그만뒀지." 크리스티는 라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딱딱한 얼굴의 그늘 밑엔 무슨 생각 이 들어 있을?까? "믿을 수 없어요." "귀찮으니까 앞으로는 나를 찾아오지 말라고 했지. 그리고 내게는 더욱 중요한 일이 있다고도 말했어. 당신을 두고 한 말이지." 라일은 뒤통수에 깍지를 낀 채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띠우고 크리스티를 올려다보았 다. "누구의 말을 믿든 그건 당신 자유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 것 같다. "커피를 가져오겠어요." 크리스티는 주방으로 도망쳤다. 물을 끓이려고 레인지의 스위치를 올리고 컵을 꺼내는 동안에도 마음은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소냐는 라일을 독차지하고 싶어하고, 날더러는 그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했다. 한편 라일은 그녀와 관계를 끊었다고 하지 않는가. 도 대체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쟁반을 들고 돌아오자, 웃도리를 벗고 앉아 있던 라일은 담뱃불을 비벼 끄고 컵을 받아들었다. 크리스티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으나 입은 열지 않았다. 의문투성이여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여행중에는 정말 열심히 일해 주었어." 라일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뜻밖에도 칭찬이었다. "나 자신도 물론 감사하고 있지만, 학생들을 위해서도 감사하고 싶어." "이미 고맙다고 말했었잖아요? 그리고 인사를 받을 필요는 없어요. 나는 당연한 일 을 했을 뿐인걸요. 급료도 받았고요." "아냐, 당신은 그 이상으로 잘해 주었어." 라일의 눈이 번쩍였다.. 둘이 포옹했던 날 밤을 두고 하는 말일까…?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을 때 그가 말 을 이었다. "예를 들면 발굴이야. 발굴을 도울 의무는 없었는데, 당신은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 었거든." 크리스티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마음은 아직도 동요하고 있다. "왜 불필요한 일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죠?" "좀 흥미가 있었지.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돕겠지만, 다른 사람 아닌 당신이고 보면 얼마 안 있어 진흙과 더위에 비명을 올리고 말 것 같아 얼마나 견디나 두고 보자고 생각했던 거야." 라일의 얼굴에서 장난기 섞인 웃음이 사라졌다. 이 진지한 표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진정으로 발굴에 열을 낼 줄은 몰랐어. 미안해." "무척 재미있었어요." 크리스티는 마음이 약간 누그러지면서 무심코 스커트를 만지작거렸다. 지금 입고 있 는 건 초록빛 꽃무늬가 있는 옷이다. "어쩐지 보물 찾기를 하는 어린애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뿐만 아니라 사실이 밝혀 져 간다는 게 정말 재미있더군요. 오후에 당신의 구술을 필기하는 일이 기다려질 정 도였으니까요." "내 얘기가 재미있었나?" 라일은 눈을 가늘게 뜨고 크리스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무척 재미있었고 유익했어요." 그의 검은 눈에 다시 조롱하는 듯한 빛이 스쳤다. "고고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셈인가?" 크리스티는 가볍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보다도 지금까지 죽은 학문이라고만 생각했던 고고학이 갑자기 살아 있는 학문으 로 보이기 시작한 거예요." 보물 찾기… 크리스티는 커피를 마시면서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나는 보물을 발견 했다. 그 상아 세공품은 또 하나의 것과 함께 내 손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 하니 뒤가 켕겼다. 라일이 눈치챈 건 아닐까. 한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그는 내 가 인들로부카치의 사랑의 증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걸까? 갑자기 찾아온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그때 라일이 몸을 움직여 크리스티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는 의자의 등받이에 기 대 담뱃불을 붙였을 뿐이었다. "새로운 일은 찾았나?" 담배연기를 통해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며 묻는다. "몇 군데 응모했지만, 아직 면접통보는 없어요." 크리스티는 조용히 컵을 쟁반에 담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별로 급하지 않으니까 괜찮아요." 마음의 안정을 회복하려면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겠 냐고 묻자 라일이 고개를 끄덕여 얼른 주방으로 들어갔다. 무엇 하러 왔을까?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일까? 도저히 대답을 얻을 수가 없다. 크리스티가 작은 테이블에 컵을 놓았을 때, 라일은 담뱃불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 긴 듯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새 학기에 다시 탐사여행을 떠날 작정이야." 그는 이렇게 말하고 힐끗 크리스티를 올려다보았다. "다시 비서로서 함께 갈 생각은 없어?" "천만의 말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그녀는 의자에 앉아 고쳐 말했다. "미안하지만 갈 생각 없어요." "고고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 같아 즉석에서 가겠다는 대답을 할 줄 알았는 데." 그는 비꼬듯 말하면서 커피를 저은 다음 컵을 집어들었다. "가고 싶은 생각은 굴뚝 같아요." 크리스티도 지지 않고 비꼬는 말투로 응수했다. "하지만, 우린 될 수 있으면 만나지 않는 편이 좋잖아요?" "나는 종종 만나고 싶은걸."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라일의 태도에 더욱 화가 났다. "왜 갑자기 그처럼 호의적이죠? 6?주일 전에 캠퍼스에서 만났을 때는 여행중에 내 가 비서로 일한다는 걸 알고 화를 벌컥 냈잖아요? 그뒤에도 내 얼굴을 보고 싶지 않 다고 말했고." "그런 말을 했던가?" "기억에 없다고 하지 말아요. 그 말이 단순한 농담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그 때 당신은 꼭 필요한 말만을 했으니까요." "생각하면 꽤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었지." "네! 나는 사정없이 모욕당했죠! 그때는 내게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된 거죠?" "홧김에 한 말이야. 결코 무관심하지 않다는 건 곧 알았을 것 아냐?" 이번에는 틀림없다. 그는 그날 밤의 일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가장 생각하기 싫은 밤의 일을. 불안한 마음에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던 그날… 그는 그런 틈을 이용해서 … 아니다, 그렇지 않다. 양심의 소리가 속삭인다. 그 사람 혼자만 나쁜 건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자진해서 그에게 응하지 않았던가. "그때는 우리 둘 다 정상이 아니었어요. 맘바 때문에 놀란 뒤였으니까요." 크리스티는 독사 생각을 하면서 몸이 오싹해졌으나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새삼스럽게 다시 꺼낼 얘기도 아니예요." "그래?" 라일은 담뱃불을 비벼 끈 다음 그녀를 반히 응시했다. "나는 무척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아마 한 가지는 증명된 셈일 거예요. 우린 아직 육체적으로는 서로 끌리고 있다는 증거 말예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그의 입이 싸늘한 웃음으로 일그러졌다. "그 정도면 다시 교제할 만하잖아?" "말하자면, 당신의 애인노릇을 하란 말인가요?" 무례하기도 하지! 노여움으로 볼이 달아올랐다. "이번 신청은 마음에 드시지 않는 모양이군." "당연하죠." 크리스티는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가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사람의 왕래가 많은 거 리에는 네온 등이 유혹하듯 반짝이고 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지?" 라일은 여전히 경멸하는 듯한 말투로 계속했다. 이제는 더 이상 얌전하게만 있을 수 없다. 인내에도 한계가 있는 거다. "빨리 커피나 마시고 돌아가 줘요!" 당장 폭발할 것 같은 침묵이 흐르다가 마침내 라일이 의자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들 린다. 이어 문을 여는 소리…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그의 발소리가 다가왔 다. 신경이 극도로 곤두서고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한다. 그와 창 사이에 끼여서 궁지에 몰린 거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당장 돌아볼 수가 없다. 얼굴을 보이면 고 통과 절망감이 들통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티…" 낮고 떨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면서 라일의 손이 애무하듯 부드럽게 어깨에 와 닿 는다. 그 손의 따스함이 실크 옷을 통해 살로 스며든다. "이제 싸움은 그만 하고 좀더 냉정하고 조용하게 얘기하자구." 라일에게서 풍기는 시원한 콜로류의 향기에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노여움은 거짓말처 럼 사라져 간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서로 호의적으로는 얘기할 수 없게 되었군요." "서로 조금씩만 노력하면 잘될 거야." 라일은 속삭이듯 말하고 크리스티를 끌어안았다. 등에 닿는 그의 넓고 억센 가슴, 목덜미의 솜털을 떨리게 하는 그의 숨결… 언제나 그렇듯이 뜨거운 기운이 온몸을 치닫는다. "그럴까요? 잘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렇게 무의식중에 되묻는 목소리도 자신의 목소리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들떠 있다. "우선 두 사람 모두 솔직해지지 않으면 안 돼." 라일의 손이 부드럽게 어깨를 쓰다듬으며 팔로 내려온다. 우리는 과연 솔직해질 수 있을까? 크리스티는 의심스러웠다. 서로가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데, 솔직해진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어요." 망설이면서 올려다본 때문인지 라일은 평소보다 더욱 커 보였다. "캠프에 있을 때 당신은 내 얼굴을 보기조차 싫다고 했는데, 왜 그랬죠?" "당신을 만나자 몇 해 전의 불쾌했던 일이 생각나서 화가 났던 거지." 라일은 씽긋 웃으며 옛날처럼 손등을 크리스티의 뺨에 가볍게 댔다. 그러나 눈은 감 은 채다.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그런데, 만나고 보니 지금도 당신을 원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 더욱 부드럽게 웃는 그의 얼굴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그의 말 속에 아직도 사랑이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 옛날부터 그랬다. 처음 만났을 무렵에는 맹목적으로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을 원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결혼신청… 나를 침대로 데리고 가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다. 그러나 이번에는 결혼 얘기는 꺼낼 필요가 없다. 그는 자신의 몸을 요구하고 있고, 자기도 그날 밤 캠프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 지 않고 몸을 맡겼다. 그러니 유혹하면 따 라온다고 판단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가슴이 메는 듯하고 눈물이 넘친다. 크리스티는 열심히 눈을 깜박이면서 라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말이었는지는 잠시 후?에 야 알았다. "2주일 전 여행에서 돌아온 뒤부터 줄곧 당신과 얘기하고 싶었어. 그런데 캠프에서 가지고 돌아온 자료의 분석이다, 강의다, 회의다,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좀처럼 만 나러 올 수 없었어." 라일은 여기서 말을 중단하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크리스티, 내 말 듣고 있어?" 크리스티는 할 수 없이 눈을 들었다. "듣고 있어요." 억지로 눈물을 참으려고 했기 때문에 입술이 떨렸다. 라일의 눈이 크리스티의 얼굴을 날카롭게 살피다가 도톰한 그녀의 입술 위에 멈추었 다. 그리고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엄지손가락으로 뺨을 어루만지면서 금빛 도 는 갈색 머리를 뒤로 가볍게 쓸어넘겼다. 그녀의 머리는 이제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 로 자라 있다. "이젠 머리를 자르지 마." 라일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한편 크리스티는 부드럽게 머리를 만지는 그의 손 길에 마음이 들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라일은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뜨거워지는지, 그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빨리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의 가슴을 떼밀었다. 그러나 그녀의 팔엔 그를 밀어낼 힘이 남 이 있지 않다. 점점 더 깊이 그에게 끌려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어쩔 수가 없다. 정신 이 아뜩해지며 저항할 의지가 사라겨 간다. 다가오는 라일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보이고 입술에 그의 뜨거운 입술이 와 닿는다. 일부러 애태우는 듯한 그의 키스는 그녀의 의지를 천천히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어렴 풋이 그의 손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러다가는 자기 몸 쪽으로 그녀를 힘껏 끌어당 긴다. 그러나, 그 순간 아득히 먼 곳 어디에선가 갑자기 이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 상 꾸물대고 있다가는 이제 정말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게 된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들어보지 못하고, 장래에 대한 약속도 없이 당장의 즐거움만을 위해 그에 게 몸을 맡긴다는 건 너무나 한심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러지 말아요, 라일!" 크리스티는 쉰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자신도 놀랄 정도의 힘으로 그의 가슴을 떠 밀었다. "만일… 만일 다시 연인 사이가 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라일은 한순간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반쯤 웃으면서 눈썹을 치켜올렸 다.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지?" 크리스티는 감정과 이성의 틈바구니에 끼고 말았다. 이성은 맑은 정신으로 침착하게 생각하라고 충고하고 있으나, 감정은 이성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몸 은 그 자체가 의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감정을 따르려고 한다. 감정이 시키는 대로 라일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인 것처럼. 그러나 결국 이성이 이기고 말았다. "서로가 충분히 생각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결론이 날 때까지예요." 크리스티는 눈을 아래로 뜬 채 가까스로 대답했다.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를 알고 있어. 결론은 이미 난 셈이야. 당신이 결론을 내릴 때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그, 글쎄요, 아직 뭐라고…" 머릿속이 또다시 혼란해지고 적절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시간을 줘요, 라일. 내 감정을 좀 정리해야겠요." 라일은 바지의 밸트에 엄지손가락을 끼고 크리스티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지겨워하 고 있는 건 아닐까? 기다려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지? 화를 내고 돌아간다면, 그리 고 다시는 찾아와 주지 않는다면…? "알았어, 시간이 필요하다면 무리하게 서두르진 않겠어." 라일의 말에 크리스티의 불안은 싹 가셨다. 다행이다…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때 그의 따뜻한 손이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말아 줘."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내리겠어요." 목이 메고 눈물이 쏟아져 볼을 타고 내렸다. 틀림없이 또 비웃음을 당할 거라고 각 오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는 입술로 가볍게 눈물을 닦아 주고는 달콤한 입맞춤을 해주었다. "내일 밤에 만나지." 웃도리를 어깨에 걸치고 방을 나서는 라일의 등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8 라일과 얘기를 나눈 뒤 크리스티에게는 새로운 인생이 열렸다. 그녀는 가끔 인들로 부카치가 몇 세기라는 시간을 초월한 영향력을 미쳐, 라일을 데리고 돌아온 것이 아 닌가 생각했다. 틀림없이 두 개의 상아 세공품을 함께 가지고 있기를 잘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온 것만은 틀림 없다. 나머지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일뿐이다. 라일은 틈만 있으면 언제든지 만나 주었다. 몇 번이나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갔고, 극 장에도 갔으며, 주말에는 시골로 드라이브도 했다. 그는 현재 요한네스버그의 교외에 있는 고급 주택가에 집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지는 않았 다. 그것은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암암리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사람 모두 단둘 이 있게 되는 장소에는 가지 않으려고 했다. 단둘이 있게 되면 감정에 치우쳐 깊은 관계에 빠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라일은 초조해하면서도 약속을 지켜, 성 급히 결론을 내리고 다그치는 일은 없었다. 두 사람에게 있어 지금은 서로를 새로운 눈으로 보아야 할 때인 것이다. 크리스티는 라일이 변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전부터 세상에 대해 뒤틀린 데가 있었 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경향은 더욱 심해진 듯했다. 그와 과거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서로가 솔직하자고 약속은 했지만 결혼생활의 실패원인 을 건드리는 일은 두 사람 모두 피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은 라일이 자신을 책망하고 있다는 인상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것이다. 이유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가끔 책망하는 듯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는 것은 분명했다.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느냐고 물어보았으나, 그는 다만 쓴웃음만 짓고 화제를 딴 데로 돌렸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아니면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기라도 했단 말인 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을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 것도 짚이는 것이 없었다. 석연치 않은 마음에 때로는 짜증이 날 적도 있었다. 한편 불안한 생각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이다. 이런 예감이 극도에 달한 건 어느 날 밤 현관 벨이 울렸을 때였 다. "새미!" 야무지게 생긴 대머리의 남자를 보고 크리스티는 소리쳤다. "당신이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그래?" 그는 씽긋 웃으면서 들어왔으나 그 웃음은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마호메트가 산에 가지 않으면 산이 마호메트를 찾아가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 크리스티는 그런 말을 듣고 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요즘은 바빠서…" "옛날의 동료를 찾아볼 시간은 없어도, 옛날의 낭군과 식사를 하고 극장에 갈 시간 은 있는 모양이지?" "어떻게 라일에 대해서 알고 있죠?" 크리스티는 놀라는 한편 뾰로통해졌다. "그야 정보수집이 내 특기니까." 새미는 의기양양하게 말하고는 항상 즐겨 피우는 여송연을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나는 시내 전체에 정보망을 쳐놓고 있거든." 라일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숨긴 건 아니었지만 소문이 새미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는 사실은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다. "정말 한가한 사람들도 많군요!" "그렇게 화낼 건 없어." 그는 여전히 의기양양했다. "예의 탐사여행인가 하는 여행 책임자도 라일 베니커였다면서?" "그래요." "그걸 알고 응모했었나?" 그는 담배의 연기를 천장을 향해 뿜었다. 그 연기에 끌려올라간 건 아니지만 크리스 티의 혈압도 갑자기 올랐다. "아뇨, 몰랐어요."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그는 다시 한번 담배연기를 훅 하고 내뿜었다. "믿기 어려운걸." 소냐가 믿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미가 의심한다는 건 참을 수 없다. "내가 언제 거짓말을 한 적이 있어요, 새미?" "아냐, 당신이 거짓말을 한 적은 없지." 그는 입에 물고 있던 여송연을 손에 들고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았다. "하지만 매사에는 시작이 있는 법이야. 이게 첫 번째 거짓말일지도 모르지." "학교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쳤을 때까지 라일은 외국에 가 있는 줄로만 알았어요. 믿기지 않으면 믿지 않아도 괜찮아요. 맘대로 하세요." "저런! 또 무서운 얼굴을 하는군." 새미는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눈이 반짝이는 모습은 보기 좋군. 무대에 섰을 때의 모습을 연상시키는걸." 크리스티가 그만 하라는 듯 손을 흔들어도 그는 모른 척하고 말을 계속했다.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의 당신은 정말 활기에 차 있거든. 한데 보통 여자로 있는 당신을 보고 있으면 정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단 말야." 어쩌자고 저렇게 과장된 말을 하는 걸까? 웃음이 터지려고 한다. "저는 이런 생활에 만족하고 있어요." "그렇겠지, 라일 베니커가 돌아왔으니까." 크리스티의 몸이 굳어졌다. 사생활에 참견하는 짓은 하지 말아 주었으면 싶다.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어리석은 짓은 되풀이하지 말아, 크리스티. 그 사람은 당신이 상대할 만한 남자가 못돼. 당신을 예사로 또 짓밟을 건 뻔해." "상대하든 말든 그건 내 자유예요." 새미가 멍청하게 입을 벌렸으므로 여송연이 곧 떨어질 것 같았다. "설마 진심으로 옛날 관계로 돌아가려는 건 아니겠지?" 아직도 라일을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새미의 당황한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다. 크리스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냉정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뭐라구!" 그는 그 특유의 버릇으로 이마에 손을 댔다. "내 앞에서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 "그게 무슨 뜻이죠?" 크리스티는 얼굴?을 약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녀석은 자기 표현의 예술을 이해 못하는 남자야. 당신은 천부적으로 위대한 재 능을 타고났는데, 그 녀석은 그것을 망가뜨릴 뻔했어. 그런데 당신은 또 그런 남자에 게 사로잡혔단 말야?" 화를 내서는 안 된다! 크리스티는 자신에게 이렇게 타일렀으나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새미의 말투는 너무나 일방적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전부터 라일 에 대해서 좋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처럼 노골적으로 험담을 하지는 않았다. 불 안감이 점점 가슴속에 번지고 생각하기 싫은 기억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새미와 라일 은 입밖에 낸 적은 없지만 분명히 항상 적대하고 있었다. "오해가 없도록 분명히 말씀드리겠는데, 제가 노래를 그만둔 것은 라일 때문이 아니 예요." 크리스티는 사랑하는 사람의 비호에 나섰다. "그건 제 뜻이었어요. 그 사람이 부추긴 게 아니예요." "노래를 그만둔 건 잘못이야."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럴까요?" 크리스티는 잠시 얘기를 중단하고 커피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혼자 있게 되자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새미란 사람은 항상 일방적이어서, 만나서 얘기를 하고 있으면 언제나 정신적으로 피로해진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나머지 얘기에 대비하기로 하자. 그가 어떻게 나올지는 뻔하 다. 언제나 그렇듯이 윗주머니에 계약서를 가지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슬며시 꺼낼 것이다. 크리스티는 쟁반을 가지고 거실로 돌아와 일부러 일과는 관계없는 얘기를 열심히 하 면서 커피를 따랐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새미의 입에서 크리스티가 두려워하는 얘기 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뿐이었다. "크리스티, 좋은 일이 있어." 새미는 빈 컵을 놓고 둥그스름한 얼굴에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은 전처럼 간단하게 거절할 일이 아냐." "새로운 계약이라면, 전 이제…" "맞아, 새로운 계약이야." 그는 크리스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기 말부터 하면서 여송연을 재떨이에 놓 고 윗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짙은 회색 웃도리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언제나 보던 서 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지하게 생각해 줘야겠어." "새미, 저는…" "거절을 하더라도 내 얘기를 듣고 나서 해줘." 새미는 다시 말을 가로챘다. "얘기를 듣는 것까지 거절하진 않겠지?" 이 고집스런 사나이는 상대가 좋아하건 싫어하건 상관하지 않는 듯하다. 크리스티는 체념하고 한숨 섞인 말로 대답했다. "그래요, 말해 보세요." 새미는 흡족한 표정으로 의자에 깊숙이 눌러앉으면서 손에 든 서류를 펼쳤다. "레코드 계약이야. 앞으로 3년간, 일 년에 넉 장의 앨범을 내는 거야. 일 년에 넉 장이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어? 불과 얼마 안 되는 시간이야." 그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띠우면서 손가락 끝으로 계약서를 톡톡 쳐 보인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그의 얘기에는 언제나 함정이 있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간 큰일난다. 확실히 일 년에 넉 장의 앨범을 내는 정도라면 시간은 별로 빼앗기지 않겠 지. 하지만 일단 어떤 일을 맡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빠져들어 결국은 꼼짝도 못하게 되고 만다. "무대출연은요?" "무대출연이나 공연여행이나 하고 싶지 않으면 안해도 괜찮아. 보장하지." 새빨간 거짓말! "전에도 그랬어요. 그런데 제가 라일의 여행에 따라가야 되니 연주여행을 취소해 달 라고 부탁했을 때 당신은 안 된다고 했잖아요? 계약서를 내밀고 이 부분을 읽어보라 면서… 사인을 했을 때는 그 속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 몰랐었거든요." "이번에는 그런 일은 없어." "어머, 그래요?" 크리스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물론이지." 새미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서류를 억지로 크리스티의 손에 쥐어 준다. "잘 읽어보고 변호사하고 상의해 봐. 그런 다음에 결정하면 되잖아? 하지만 잊지 말 아 줘, 천재일우의 귀중한 기회야." 크리스티는 독극물이라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계약서를 집어들었다. 사실은 계약서 를 새미에게 내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계약서를 읽겠다고 말하 지 않는 한 그는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새미 피터슨이라는 사나이는 그처럼 집 요한 사람이다. 지난번과 똑같은 대답이 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읽어보겠어요. 하지만 받아들일지 어떨지는 몰라요." "좋아, 좋아." 그는 마치 크리스티가 계약서에 사인이라도 한 것처럼 기뻐하면서 손을 비볐다. "당신은 무턱대고 거절하진 않지. 알고 있었어." 이때 다시 현관 벨이 울렸다. 누구일까? 가슴이 두근거려 숨이 막힐 듯했다. "잠깐 실례." 크리스티는 계약서를 옆에 있는 테이블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물이 위험사태 를 직감할 때처럼 좋지 않은 예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역시… 라일이다!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런 때 찾아오다니! 라일과 새미를 한 방에 있게 하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게 뻔하 다. 그러나 당황하여 문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일의 늘씬한 모습을 보자 반가움으로 가슴이 울렁거린다. "오늘밤은 바쁘지 않았어요?" 크리스티는 이렇게 말하면서 쌩긋 웃어 보였으나, 자신도 부자연스런 웃음이라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라일은 거실 안쪽을 힐끗 쳐다보더니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좋지 않은 때 찾아온 것 아냐? 돌아갈까?" "어머, 천만에요. 들어오세요." 크리스티는 그의 팔을 잡고 집안으로 들였다. "와주시길 잘했어요." 사실 라일이 와주어 다행이다. 새미도 그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내가 정말 가수 생활에 흥미가 없다는 것을 납득하고 얼른 돌아갈 거다. "여어, 베니커 선생." 새미는 다시 여송연을 물고 반갑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귀국했다는 말을 듣고 언젠가는 싫어도 만나게 될 줄 알았지." 두 사람의 반목은 옆에서 봐도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은 두 사람 모두 크리스티를 생각해서인지 서로 정중하게 대했으나, 이제는 그런 생각도 없어진 듯했다. "나는 두번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못 생각했군.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인걸." 라일은 거리낌없이 응수했다. "기억해 두지. 스타로서 활약할 수 있는 동안은 크리스티에게 노래를 시켜 돈을 벌 려고 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크리스티는 어떻게든 이 자리를 원만하게 수습해 보려고 라일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 다. "라일, 너무…" "옳은 말씀이야, 베니커 선생." 새미가 당장 대꾸한다. "하지만 한 가지 잊은 게 있어. 노래를 시켜서 돈을 벌려고 하는 인간이 없으면 크 리스티와 같은 예술가는 싹도 트기 전에 시들어 버리지. 크리스티의 가치를 모르는 녀석들 속에 섞여 평범하게 살게 되면 귀한 재능도 무용지물일 뿐이야.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가수로서의 그녀의 가치를 모르는 불행한 인간 중의 하나거든." "새미!" 크리스티는 그의 폭언에 충격을 받는 한편 분노를 느꼈다. "나는 크리스티의 재능을 인정하고 있고 가치도 알고 있어." 라일은 감정을 억누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재능을 이용해서 단물을 빨아먹는 진드기 같은 녀석까지 인정하고 싶진 않아. 연예인들의 자유를 빼앗고 사생활을 파괴하는 짓은 용서할 수 없어!" "내가 진드기란 말인가?" 새미는 여송년을 입에서 빼고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고함쳤다. "이 새미 피터슨이?" "그만 하세요! 두 분 모두 그만 하세요." 크리스티는 두 남자 사이를 막아서려고 했다. 그러나 라일의 손이 어깨를 잡아 옆으 로 밀었다. "그래, 진드기란 말을 들어 마땅하지." 귀에 익은 라일의 싸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크리스티에게서 짜낼 만큼 짜내고 나중에는 모르는 척하겠지. 크리스티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도 아무런 가책도 못 느낄 거야." "크리스티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든다고?" 새미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새미, 화를 내면 몸에 해로와요." 새미는 불필요한 걱정은 하지 말라는 듯 더욱 크게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크리스티를 지저분한 커피 바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어. 매일 밤 노래 부르고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크리스티를 이 나라 제일의 포크싱어로 키웠단 말야. 아무 렴, 크리스티는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 그런데 당신이 그걸 망가뜨려 놨어." "새미… 라일." 크리스티는 어떻게든 두 사람의 싸움을 말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정신없이 외쳤다. "그만 하세요, 제발 그만 하세요!" "남자가 아내를 곁에 두고 싶어하는 건 당연하잖아? 객관적으로 보아 나는 그래도 최고로 관대한 남편이었어." 라일은 크리스티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위협하듯 새미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결혼생활은 반 년 동안이었지. 하지만 함께 있었던 날은 불과 석 달도 되지 않았어." 크리스티는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지만, 말을 듣고 보 니 사실이 그랬다. 6개월간 결혼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함께 있었던 시간은 3개월도 못된다. 새삼스럽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일이 바빴던 건 나 때문이었나?"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크리스티의 귀에 새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그렇지 않지." 라일이 옆에서 싸늘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좀더 편한 일정을 짤 수도 있었어." 두 사나이는 어금니를 드러낸 야수처럼 서로 노려보았다. "나도 최선을 다했어." 새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는 그런 게 아냐." 크리스티는 멍하니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고, 위험한 분위기는 점점 짙어갔다. 어느 사이엔가 의자의 등받이를 잡고 있던 손이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나는 항상 크리스티를 위해 생각해 왔어. 크리스티와 그녀의 일을 위?해 무엇이 가장 좋은가를 생각해 왔단 말야." "대단하시군." 새미는 라일의 비꼬는 말을 못 들은 척하고 크리스티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을 아껴 왔어. 그렇잖아? 오늘도 최고로 좋은 일자리를 가지고 왔 어. 방금 계약서를 받았잖아." "계약서?" 라일은 계약서라는 말에 당장 신경을 곤두세웠다. "라일…" 크리스티는 사실을 설명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 긴장해서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읽어보라구!" 새미는 계약서를 집어들어 라일에게 보였다. "이걸 거절할 방법은 없어. 크리스티는 그걸 잘 알고 있지. 이번 일이 성립되면 전 에 없는 성공은 틀림없어." 어쩌자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마치 계약을 끝내기라도 한 것 같이 들리지 않는가! 라일도 책망하는 듯한 눈으로 크리스티를 바라보았다. 새미의 의도대로 착각하고 있 는 것이다. "읽고 싶지 않아!" 라일은 새미의 손을 뿌리쳤다. "라일, 저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라일이 손을 들어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의 일과는 관계없어. 불필요한 참견은 하지 않겠어." 그는 홱 돌아서서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그럼 편히 쉬라구." 망연히 서 있던 크리스티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라일의 팔을 잡았다. "잠깐 기다려요, 당신은 잘 모르고 있어요. 저는…" "이젠 됐어!" 그는 거칠게 내뱉으며 크리스티의 손을 뿌리쳤다. 눈에는 격렬한 노여움이 넘치고 있어, 그런 눈으로 노려보는 라일 앞에서 크리스티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전에는 내가 당신의 일을 존중해서 엑스트라 역할을 감수했어. 이제 와서까지 그런 나날을 다시 되풀이하고 싶진 않아." 라일은 방을 나서며 쾅 하고 문을 닫았다. 크리스티는 창백한 얼굴로 잠시 멍하니 문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한숨을 쉬고 돌아보았다. 5년 전과 똑같은 일이 재현되고 있 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때보다도 더욱 큰 불안감 때문에 두렵기까지 했다. 이 번에야말로 라일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라일에게 일부러 계약서를 보일 필요는 없잖아요!" 크리스티는 둥그스름한 얼굴에 만족한 미소를 띠우고 서 있는 새미를 힘없이 올려다 보았다. "왜 계약하기로 결정한 것처럼 말했죠?" "라일의 본심을 떠보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거든. 진정으로 당신을 생각한다 면 기뻐했을 거야. 하지만 보다시피 녀석은 자기 생각밖엔 몰라." 당신을 생각한다면… 새미의 말이 가슴에 메아리친다. 조금 전의 격렬한 말다툼으로 몇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라일은 결코 자기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았다. 새미의 희생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전부터 걱정하고 있었던 것 이다. 이번 말다툼에서 라일은 분명히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새미는 마 지막 카드로 계약서를 보임으로써 마치 계약이 끝난 것처럼 해보였다. 라일은 그의 이런 잔꾀에 넘어가 지레짐작을 해버린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아요!" 크리스티는 의자에 주저앉아 핏기 잃은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최소한 라일에게 사 정이라도 설명하고 싶었다. "라일에게 설명이라도…" "그 녀석은 자기중심적인 사내야." 새미가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듣고 싶지도 않다. 라일에게도 결점은 있으나 자기중심적이 아니 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최소한 내 설명이라도 들어주기를 바랐는데…" "무엇을 설명하지?" 새미를 올려다본 크리스티는 비로소 그의 웃음 뒤에 숨어 있는 몰인정함을 알아차렸 다. 지금까지 새미는 자기를 진심으로 보살펴 주는 사람으로 생각해 왔는데, 아무래 도 라일의 말이 정말인 듯했다. 라일은 새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의 본성을 꿰뚫어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새미를 보는 크리스티의 눈은 너무나 안이했다. 하긴 이제 와서 깨달아 봤자 이미 늦었다. 크리스티는 갑자기 분노가 폭발해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계약서를 집어들어 새미 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 계약은 거절하겠어요, 새미! 읽고 싶지도 않으니까 가지고 돌아가세요." "성급하게 굴지 마. 잘 생각한 다음에 결론을 들려 줘." "결론은 이미 났어요." 이런 건 꼴보기도 싫다고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크리스티는 말없이 그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그가 처음으로 당황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새미 피터슨 과 같은 사나이가 이 정도로 깨끗이 항복할 리가 없다. "계약서는 두고 가겠어." 그는 서류를 테이블 위에 놓고 총총히 문 쪽으로 향했다. "필요없어요!" 크리스티는 발끈하면서 계약서를 새미를 향해 내던졌다. 계약서는 그의 머리를 스쳐 문에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홱 돌아다보는 새미의 눈이 휘둥그래져 있다. 크리스티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는 사 실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의 눈에 비치는 크리스티는 언제나 순종하고 뜻대로 되는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그런 이미지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그러지 말아." 그는 발밑에 떨어진 계약서를 주워들며 말했다. "아무튼 한번 읽어나 보라구. 2, 3일 내에 전화할 테니까." 새미는 문 옆에 있는 전화대에 계약서를 올려놓고는 아무 말 없이 가버렸다. 크리스티는 갑자기 몸이 와들와들 떨려 체인을 제대로 걸 수도 없었다. 이처럼 화가 난 적은 없었다. 새미는 라일을 모욕해서 나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한편 라일은 새미 의 계략에 넘어가 지레짐작으로 판단을 내리고 내 해명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새미가 밉다. 그리고 라일도! 좀더 믿어 줘도 되는 일이 아닌가! 그들에게는 똑같은 잘못이 있다. 그 두 사람이 내 인생을 그르친 것이다. 이제는 모두 관계를 끊자.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을 때도 분노는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불을 끄 자 노여움은 사라지고 대신 울적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쓸쓸하고 참담한 심정… 그러 나 자신을 연민하고 싶지는 않았다. 보다 밝게 앞날을 생각해야지. 앞으로의 처신방 법을, 감정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그러나 새벽녘까지는 생각만 복잡할 뿐 뚜렷한 결심이 서지 않았다. 9 일 주일 후 데니스가 아파트로 찾아왔다. 창백한 얼굴에 눈이 푹 들어간 크리스티를 보고 유령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 없이 안내하는 대로 주방으로 들어왔다. 데니스가 찾아와 준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그와 함께 얘기하고 함께 웃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 금은 울고 싶을 뿐이다. 좁은 주방에서 커피를 따르고 있는 크리스티의 모습을 데니스가 유심히 지켜본다. 크리스티는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정성들여 화장을 했어도 수면부족에서 오는 피로한 기색을 감출 수 없는 거다. 더구나 데니스는 눈치 빠르고 날카로운 청년 이다. "어디 아팠어요?" 마침내 그는 옆으로 다가와 장식장에 기댄 채 크리스티를 빤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별로." 크리스티는 어떻게든 질문을 피하려고 했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어요. 하지만 불면증은 요즘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닌걸요." "무슨 걱정거리라도…?" "내가 뭘 걱정하는 것 같아요?" 반대로 자기 쪽에서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의 심정을 숨기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 대답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걱정거리가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털 어놓으면 개운해지는 수도 있죠." 데니스가 이렇게 말하면서 몸을 기대는 바람에 커피에 밀크를 넣던 크리스티는 할 수 없이 얼굴을 들었다. "나를 믿어 주겠죠, 크리스티?" "네, 믿어요." 그녀는 미소지으며 그의 볼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찔렀다. 그러나 마음은 곧 얼굴로 나타나 어두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사실은 누군가에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아요." "커피를 들고 거실로 가죠. 거기서 편한 마음으로 전부 얘기해 줘요." 크리스티는 얌전히 그를 따라 주방을 나왔다. 개인적인 문제로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데니스에게는. 그러나 심신이 너무 지쳐 기력이 없는데다가 데 니스는 능숙하게 크리스티에게서 얘기를 끌어냈다. 띄엄띄엄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 새 라일을 처음 만났을 때의 얘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젠 어쩔 수 없 다. 얘기는 봇물이 터진 것처럼 술술 나왔다. 라일과 결혼했었다는 사실을 알면 데니 스가 충격을 받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일 주 일 전의 일에 이르기까지 냉정하게, 그리고 열심히 듣고 있었다. 얘기가 전부 끝나자 데니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마침내 눈을 들며 아무렇지 않 은 듯 물었다. "교수님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해요? 가령 당신이 계약서에 서명한 것으로 오해를 한 일이라든지…" "그건 라일이 잘못한 건 아니지만 내 해명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건 심하다고 생각돼요." "선생님도 틀림없이 당신과 마찬가지 심정일 거예요. 말하자면 다시 상처를 받기 싫 은 거죠."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러기를 바랐다. 그러나 역시 낙관적일 수만은 없었다. "머릿속이 혼란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크리스티는 손가락으로 피로한 눈두덩을 눌렀다. "만나서 설명을 하는 게 어때요?" "그렇게 하려고 세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외출중이거나 손님이 와 있어 못하고 말았어요."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이 쓴웃음으로 일그러졌다. "일단 전갈은 해놨어요, 연락해 달라고요. 하지만 전화가 온다든가 아니면 그가 직 접 만나러 온다든가 하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겠죠. 그 사람은 자신이 오해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거든요." "교수님에게는 교수님 나름의 자존심이 있지요. 당신도 자존심이 강한 편이 아닐까 요? 그렇다면 어느 한쪽이 굽히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어요. 물론 굽혀야 하는 쪽은 당신이고." "나는 굽히려고 했어요!" 크?리스티는 뾰로통해지면서 말했다.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을까요?" 데니스는 그녀의 아픈 곳을 사정없이 찔렀다. "당신과 교수님은 둘 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교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자존심 따위는 버리고 솔직한 심정을 보여야 할 것 아닌가요?" "여기서 더 자존심을 버리고 그 사람 앞에 무릎이라도 꿇으란 말인가요?" 데니스의 초록빛 눈이 크리스티의 눈을 응시한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교수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어 주는 게 당연하죠." 매일 밤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몇 번이나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부 질없는 자존심과 불안감이 그런 생각을 쫓고 말았다. "거절당할지도 몰라요." "거절당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확인도 해보지 않고 생각만 한다는 건 무의미해 요." "그야 그렇지만… 역시 두려워요." "사람이란 자기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무엇이든 하게 마련이죠. 당신은 교수님 을 얼마나 생각해요?" 크리스티는 대답이 궁했다. 지난 일 주일 동안 일부러 피해 왔던 질문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이렇게 되고 보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3년 전에 가수생활을 그만둔 게 라일에 대한 내 감정의 증거예요. 라일이 없다면 일 같은 건 무의미하고… 언젠가는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크리스티의 히야신스 빛 눈은 억제할 수 없는 눈물로 젖어 있다. "일을 그만둘 만한 용기만 있다면, 만나러 가는 게 두렵지 않을 거예요. 자존심에 굴복해선 안 돼요." 눈물에 가려 데니스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인다. 마치 멀리서 객관적으로 자기를 쳐 다보는 듯했다. 생각하면 지금까지는 자기중심적으로밖에 살아오지 않았던 것 같다. 라일에게도 그 나름대로 존중해 주어야 할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이 다. 그가 지레짐작을 했다고 해서 그를 원망할 일이 아니었다. 일찍이 그는 일만을 앞세우는 아내로부터 상처를 받았었다. 이번에는 자기가 먼저 그를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비록 거절당한다 하더라도 그것 이 어떻단 말인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나면 최소한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떳떳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어쩌면 라일은 얘기를 들어줄지도 모른다. 아직 희망은 있다. 데니스가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크리스티는 벌떡 일어나 그의 볼에 키 스했다. 젊은 데니스가 이처럼 힘이 되어 주다니! "고마와요!" 그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뭐가요?" "모든 게 고마와요. 무엇보다 고마운 건 좋은 친구가 돼 주었다는 거예요." 자기자신의 감정을 분석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으나, 크리스티는 데니스가 돌아 간 뒤 혼자서 진지하게 생각했다. 5년 전 라일이 이별의 말을 던졌을 때는 그를 어떻 게 말려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를 찾아가 계약서에 서명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라고 말하면 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랑을 진 심으로 털어놓는 것이다. 결심이 선 이상 빨리 실행으로 옮기자. 시간이 지나는 동안 용기가 꺾이면 큰일이 다. 주방의 벽시계가 8시 l5분을 가리키고 있다. 라일의 집으로 찾아가기에는 아직 늦은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여러 가지 그럴 듯한 구실을 내세우며 가지 못 하게 하려고 했다. 잠시 자존심과 본심이 갈등을 계속했으나, 컵을 다 닦고 났을 때 는 결심이 섰다. 어떻게든 라일을 만나자. 두 사람 사이에 연기처럼 가득 찬 불투명 한 공기를 말끔히 제거해야만 한다. 크리스티는 침실로 달려가서 두꺼운 재킷을 걸치고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가슴속에 불안감이 번졌다. 계약에 관한 얘기를 꺼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 만, 사랑을 고백하자면 큰 용기가 필요할 것 같았다. 지금의 자기로서는 도저히 불가 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할까? 손은 가슴에 늘어뜨린 펜던트를 막연히 만지작거리고, 눈은 거울 속에 비치는 손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다음 순간 뜻하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 다. 상아 세공품! 여성상이 새겨져 있는 상아 세공품을 그에게 건네주면 라일은 그것 이 사랑의 고백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거다. 뿐만 아니라 캠프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된 경위를 얘기할 수 있는 계기도 된다. 용기를 얻은 크리스티는 두 개의 상아 세공품이 들어 있는 푸른 주머니를 호주머니 에 넣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거리는 밝고 교통량도 많았다. 라일의 주소는 알 고 있었지만 밤이라서 집을 찾는 데 정신이 쏠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 것인가 생각 할 여유도 없었다. 라일의 집은 튜더 왕조풍의 건물이었다. 집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 티는 일부러 대문 옆에 차를 세우고 구부러진 골목길을 걸었다. 담 너머로 정원 왼쪽 으로 난 길에 세워져 있는 차가 보였다. 라일의 차는 아니다. 방문객이 있음이 틀림 없다. 갑자기 찾아온 게 잘못이었을까? 미리 전화라도 할 걸 그랬다. 현관으로 이어지는 계단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고 스테인드글??澯?창문을 올려다보았 다. 그대로 돌아갈까? 하지만 일부러 여기까지 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가다니 … 그리고 일단 돌아가면 다시 찾아올 용기가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많은 시간 을 허비했다. 더 이상 우물쭈물하고 있을 수는 없다. 계단을 다섯 층쯤 올라가 네모난 타일을 방고 문 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구두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벨을 누르는 손이 떨린다. 얼마 안 있어 흰 웃옷을 입은 흑인 남자가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베니커 교수님을 뵈려고 하는데요." 문이 활짝 열리면서 넓은 홀이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고 한쪽 구석 에는 장미나무로 만든 전화대가 놓여 있다. 남자는 홀을 지나 넓은 계단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방문을 노크했다. 문이 약간 열려 있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만 들릴 뿐 라일의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남자는 크 리스티에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몸짓을 해보이고 물러갔다. 마지막 용기를 짜내어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 순간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눈앞에 보이는 벽난로 선반에 기대고 있는 사람은 소냐 디콘이었던 것이다. 그곳은 서재로 주위에는 책들이 꽉 차 있었으며, 그녀의 옆에는 라일이 언짢은 얼굴로 서 있 었다. 방해를 받아 화를 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얼음 속에 내던져진 것 같은 심정 … 당장 비명이라도 터져나올 것만 같다! "달링, 아무래도 당신이 바라는 조용한 밤은 글러 버린 것 같군요." 소냐의 끈끈한 목소리가 어색한 침묵을 깨고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가는 손가락이 보란 듯이 라일의 팔을 잡는다. 그녀의 그런 태도는 말보다 훨씬 더 분명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이 사람은 내 것이에요, 명심해요! "무슨 용건이지?" 라일의 표정은 딱딱하고 목소리는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쌀쌀했다. 크리스티는 창백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으나 입술이 굳어져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크리스티를 본 라일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남의 집에 찾아와서 밤새도록 말 한 마디 없이 서 있을 작정이야?" 악몽에 사로잡힌 느낌으로 망연히 서 있을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 가 들렸다. 이제 출구가 막혀 버린 것이다. "저어… 실은… 중요한 얘기가 있어 찾아왔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요." 소냐는 아름다운 얼굴에 짐짓 상냥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내가 있어 방해가 된다면 다른 방에 가 있을까요?" "아녜요, 괜찮아요!" "그래요? 사양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소냐는 동정심이 잔뜩 담긴 어조로 말했으나, 그것은 그녀의 속눈썹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가짜였다. 지금의 소망은 이 집에서 당장 나가는 일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우선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녀의 손은 절로 재킷 호주머니를 더듬어 푸른 주머니를 꺼냈다. 한순간 질투심에 사로잡혔으나, 이어 자조적인 웃음이 치밀어올랐다. "이거 당신 거예요, 라일." 크리스티는 눈물 섞인 목소리로 말하면서 책상 위에 푸른 주머니를 놓았다. 이것으 로 어리석은 꿈도 모두 끝났다. "안녕… 행복하세요." 이렇게 말하고 발길을 돌리는 크리스티의 목소리는 몹시 잠겨 있어 안으로 잦아드는 듯했다. 도망치듯 홀을 지나 문을 열고 어두운 정원으로 뛰어나왔을 때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손이 얼음처럼 싸늘했고, 자동차에 키를 꽂으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잠 시 후 간신히 키가 돌아 시동이 걸렸다. 힘껏 액셀을 밟자 차는 타이어 끌리는 소리 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라일은 거짓말을 했다. 소냐와의 관계는 끊었다고 말해 놓고 아직껏 교제하고 있지 않은가! 핸들을 잡고 앞쪽을 보면서도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그 생각뿐이었다. 그의 말을 믿었던 자신이 몹시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옛날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잔뜩 가슴 부풀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빨간 신호등에 걸려 네거리에서 차를 세우고 있는 동안 크리스티는 짜증스러운 듯 손가락 끝으로 핸들을 두들겼다. 고통 대신 노여움이 점차 가슴속에 번진다. 더 이상 라일에게 모욕당할 수는 없다. 절대로! 액셀을 힘껏 밟고 정지선을 넘는 순간, 왼쪽으로부터 강렬한 빛이 비쳤다. 헤드라이 트! 빨리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딴 생각을 하고 있던 머리는 기민하게 움직여 주 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옆으로 다가온 차는 그녀가 타고 있는 자동차를 들이받 았다. 빨리 라일의 집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서둘렀던 크리스티는 미처 안전벨트도 매지 않 았다. 그래서 충돌의 충격으로 몸은 인형처럼 힘없이 앞으로 내던져졌다. 머리가 핸 들에 부딪쳐 격동이 오고… 한순간 불빛이 밝아지며 클랙슨이 울린 뒤 완전히 암흑 속에 잠겨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고, 의식이 있는 것인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인 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라일이 옆에 있어 손을 꼭 잡아 주고 있는 것 같은 느 낌이 들었다. 이것이 단순한 상상이라도 좋다. 라일의 손에 매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힘이 솟는다. 제대로 의식이 돌아온 것은 다음날 새벽녘이었다. 방안의 분위기로 보아 병원인 듯 했다. 처음에는 왜 이런 곳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자신이 당한 사고와 그후의 일이 한꺼번에 생각났다. 그렇다면 라일이 침대 옆에 있었던 것 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던가? 그의 창백하고 심각하던 얼굴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 러나 병실에는 아무도 없고 침대 옆에는 의자도 없었다. 역시 잠재의식 속에 있는 그 에 대한 그리움이 환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베니커 부인?" 밝은 목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흰 가운을 걸친 간호원이 다가오고 있다. "베니커 부인?" "기분은 어떠세요?" 간호원은 아직 영문을 모르고 있는 크리스티에게 물었다. "몸의 여기저기가 아프고 골치가 쑤셔요." "그러시겠죠, 하지만 곧 가라앉을 거예요." 그녀는 크리스티의 혈압을 재고 쌩긋 웃으며 팔에 감은 기구를 벗겼다. "골절은 아니겠죠?" 몸을 약간 움직이자 역시 통증이 와 얼굴을 찡그렸다. "이마 언저리에 가벼운 찰과상이 있을 뿐예요. 나머지는 타박상이니까 2, 3일 동안 은 괴로우실지 모르지만 걱정할 건 없어요." 이때 체온계를 입에 넣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싸늘한 손이 손목을 잡고 맥박을 쟀 다. 간호원은 정상이라는 듯이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아래쪽에 걸려 있는 표에 혈압과 맥박수를 기록했다. "언제 돌아갈 수 있어요?" 체온계를 입에서 떼자 크리스티가 물었다. "글쎄요, 하루 이틀 안에는 어려울 것 같군요." 간호원은 체온을 확인하고 차트에 기록했다. "선생님은 절대로 안심할 수 있을 때까지는 퇴원을 허락하시지 않을 테니까요." 크리스티는 조심스럽게 이마를 만져 보았다. 과연 몇 바늘인가 꿰매어져 있다. 머리 는 여전히 욱신욱신했으나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사고에 대해서였다. "상대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은 어떻게 됐나요?" "남자 한 사람이 타고 있었지만,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어요." 간호원은 웃으면서 시트를 바로 해준다. "남편께서 차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전부 자기에게 맡기라고 하시더군요." "남편…이요?" 크리스티는 간호원의 시원시원한 동작을 지켜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밤새도록 침대 옆에 계셨는걸요. 더 계시겠다는 걸 댁에 돌아가서 좀 쉬시라고 억지로 보냈죠." "남편?" 크리스티는 다시 한번 물었다. 두통은 더욱 심해지고 도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래요." 간호원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베니커 교수님 말예요." 꿈도 환각도 아니다. 창백하고 심각한 얼굴로 침대 옆에 앉아 있었던 것은 역시 라 일이었다. 하지만 왜? 왜, 그 사람이? "설마 기억상실증에 걸리신 건 아니겠죠?" 간호원은 농담으로 물었지만, 크리스티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가슴속에 서 폭발하고 당장이라도 히스테리를 일으킬 것만 같다. "다음에는 남편이 와도 만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처럼…" "만나기 싫어요!" 크리스티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머리가 빠 개질 듯 아팠다. "싫어요, 절대로 만나지 않을 거예요!" "어머나, 침착하세요." 간호원은 크리스티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베개에 기대게 했다. "흥분하면 안 돼요." "싫어요, 만나기 싫어요!" 크리스티는 다시 일어나려고 하면서 정신없이 되풀이했다. 그동안 라일로부터는 상 처를 받을 만큼 받았다. 더 이상의 굴욕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정히 싫으시다면 면회는 사절하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부드러운 간호원의 목소리에 못 이겨 크리스티는 맥없이 베개에 몸을 맡겼다. "죽어 버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번에는 발작적으로 울음이 터져 눈물이 하염없이 볼을 타고 흘렀다.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았지만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다.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면서 보고 싶지 않은 영상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린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일그러져 보여 기절할 것만 같은데 불쾌한 영상만은 뚜렷이 눈 에 비친다. 라일과 소냐, 다가오는 자동차의 라이트에 비치는 두 사람의 얼굴… 웃음소리… 두 사람의 웃음소리… 먼 옛날의 여왕… 웃음소리… 모두가 웃고 있다! 언제까지고… 언 제까지고 웃고 있다! 혹시 이것은 나의 목소리일까? 고개를 쳐든 검은 맘바! 독을 지 닌 그 어금니가 가슴을 파고든다… 여기서 웃음소리는 멀어지기 시작하고, 깜깜한 터 널이 입을 벌려 크리스티를 삼켰다. 다시 의식이 돌아온 것은 몇 시간 후였다. 두통은 다소 가라앉았으나, 몸???여전히 뻐근하고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그때 간호원이 들어와 라일의 면회를 사절 했다고 알려 주었다. 그 말을 듣고 겨우 마음이 누그러져 비로소 깊은 잠이 들었다. 잠을 깼을 때는 저녁때여서 음식을 담은 쟁반이 들어왔다. 마음이 놓인 때문인지 식 사를 조금 하고 나자 어느 새 다시 졸음이 왔다. 이튿날 아침에는 눈을 뜨자 간호원의 생기 넘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병원에서 이틀째의 아침을 맞은 것이다. "좀 괜찮으세요, 베니커 부인?" 베니커 부인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생각해 보니, 그런 말을 하고 나면 번거로운 사 정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할 수 없이 "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라고 대답해 두 었다. "어제 아침에는 신경이 몹시 날카로와지셨던 것 같아요. 진정제가 필요할지도 모른 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간호원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혈압과 맥박, 체온을 쟀다. "이제 곧 선생님이 오실 거예요."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크리스티는 어린애처럼 떼를 썼다. "의사 선생님이 돌아가도 좋다고 하실까요?"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하룻밤 더 이곳에 계시라고 말씀 하실 것 같군요." 간호원의 말대로였다. 이런 상태라면 집에 돌아가도 걱정없다고 크리스티가 우겼지 만, 의사는 다음날까지는 퇴원을 허락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일어나 앉아 있어도 무방하지만, 앞으로 만 하루 동안은 상태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된 다는 것이다. 크리스티는 고집 부려 봐야 별수 없을 것 같아 잡지를 뒤적이며 나머지 시간은 멍청 하게 지냈다. 지루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병실은 2인용이었으나 옆 침대는 비어 있 었다. 우연이지만 다행한 일이다. 지금은 혼자서 조용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불쾌한 일은 아무 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그날 밤 베개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을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괜찮아요?" "데니스!" 크리스티는 눈을 번쩍 떴다. 반가왔다. 얼마나 때맞춰 잘 와주었는가! 몹시 지루하 던 참이었다. "그 의자를 가지고 와 앉아요." 데니스는 등뒤에 숨기고 있던 흰 장미꽃을 내밀며 초록빛 눈을 장난스럽게 빛냈다. "상처와 멍이 있는 것도 괜찮은데요. 드라마틱한 분위기가 있거든요." "어머, 미워요. 놀리지 말아요." 크리스티는 장미꽃을 받아들고 부드러운 꽃잎에 입술을 대며 얼굴을 가렸다. "정말은 보기 흉하죠?" "천만의 말씀, 아주 멋있어!" 정색을 하며 말하는 데니스의 모습이 우스워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 기분을 북돋아 주려고 공연한 말을 하는 것 아녜요?" "그야 힘을 내게 하려는 건 당연하죠." 데니스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고 의자를 침대 곁으로 끌어당겨 걸터앉았다. "입구에 있는 게시판에 면회자는 환자의 기분을 밝게 하도록 마음을 써달라고 써 있 던데요." "네? 정말?" "내 말을 믿지 않는 겁니까?" 짐짓 기분이 상한 척하는 데니스를 보고 크리스티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 다. "믿지 않아요, 절대로." "쳇, 허탕쳤는걸." 데니스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약간 진지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농담은 그만 하기로 하고, 병원의 초라한 환자복을 입고 있는 당신은 정말 아름다 운데요." 확실히 입에 발린 말로라도 멋있는 옷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몸에 걸치고 있는 잠 옷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을 때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입원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교수님한테서 사고 얘기를 들었어요." 그가 몸을 앞으로 내미는 바람에 의자가 삐걱거린다. "무척 걱정했죠." "그래요?" 크리스티는 데니스의 시선을 피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고 침대 옆 테이블에 있는 컵에 장미꽃을 꽂았다. "왜 교수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죠, 크리스티?" 그녀는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데니스는 집요하게 물고늘어진다. "왜 그래요?" "소냐 문제로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에요."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라일은 그 여자와 관계를 끊었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그저께 밤 그 사람 집에 찾아 갔을 때, 소냐가 와 있지 않겠어요? 아무리 봐도 일방적으로 찾아온 것 같지는 않았 어요." "당신의 오해일지도 모르지요." "설마, 그럴 리가 없어요." 그때 라일은 분명히 자신을 방해자처럼 대하지 않았던가. "소냐가 왜 교수님 댁에 있었는지 당신은 모르죠?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 어요. 최소한 교수님에게도 사정을 설명할 기회쯤은 줘야죠." "변명을 하면 마음이 편해질 테니까?" "아무튼 얘기는 들어봐야 해요." "미안하지만 그럴 순 없어요." 크리스티는 쌀쌀하게 대답했다. "라일을 찾아가서 설득했지만 소용없더라고 보고하세요." "교수님은 내가 이곳에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는걸요." 그랬던가? 공연한 말을 했다 싶었다. "미안해요, 나는 당신이 틀림없이 라일의 부탁을 받고 ?찾아왔다고만 생각했거든요 … 지레짐작을 할 일이 아니군요." "교수님이 자기 일을 남에게 부탁할 분 같아요?" 데니스는 날카롭게 추궁한다. 이런 점은 라일을 꼭 닮았다. 아마도 그의 영향을 받 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데니스는 곧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내가 교수님께 도움이 되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 점만은 부인하 지 않겠어요." 크리스티는 잠시 데니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같이 좋은 제자가 곁에 있어 라일은 행복하겠군요." "나는 당신 곁에도 있어요." 데니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의 볼에 키스했다. "명심하라구요." 사고를 당한 뒤 처음으로 따뜻한 것이 가슴을 채웠다. 크리스티는 혼자 있게 되자 눈물이 곧 쏟아지려고 해서 얼른 눈을 깜박였다. 이제는 결코 라일 때문에 눈물을 흘 리지는 않으리라! 다시 싸늘한 마음의 무장을 되찾았다. 한 사람 때문에 두 번씩이나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정말 바보짓이다. 이번에야말로 절대로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하자. 10 뭐니뭐니해도 집이 제일 좋다. 그러나 아파트는 텅 비어 쓸쓸함이 감돌았다. 마음속 도 마찬가지여서 공허하고 쓸쓸했다. 오늘 아침에 택시로 병원에서 돌아왔다. 아파트 열쇠는 소지품 속에 그대로 들어 있 었으나, 자동차 키는 없었다. 그것도 함께 열쇠고리에 달려 있었는데, 틀림없이 라일 이 빼놓았을 거다. 몸의 통증은 완전히 가셨다. 그러나 멍은 아직도 남아 있고 이마의 상처도 약간 쑤 셨다. 오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책을 읽으면서 지냈으나, 멍하니 글자만 쳐다보고 있을 뿐 내용은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내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다. 시장기는 들지 않았으나 조금은 먹어 두는 편이 좋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치즈오믈렛과 토스트 한 조각으로 간단히 식사를 끝내 고 텔레비전을 켰다. 그러나 전혀 재미가 없었다. 샤워나 하고 자는 편이 현명할 듯 했다. 물줄기를 맞고 있자니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머리를 감고 났을 때는 정말 기분 이 개운했다. 실크 네글리제는 병원의 환자복과는 달리 피부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고, 소매가 넉 넉한 가운은 얇지만 따뜻했다. 타월로 머리를 닦고 드라이어로 물기를 말렸다. 이제 는 병원생활도 완전히 과거의 것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잠자리에 들고 싶지만 과연 잠을 잘 수 있을까? 혹시 잠이 오지 않으면 병원에 서 준 수면제를 먹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져 크리스티는 붉은 빛이 도는 윤 기가 날 때까지 거울 앞에서 열심히 머리에 솔질을 했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 은 창백하고, 그 동안의 심리적 고통 때문인지 눈 언저리가 그늘져 있다. 그러나 걱 정할 것 없다. 지난번에도 어엿하게 재기했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어떻게든 이 고통 을 이겨낼 것이다. 그때 현관의 벨이 울렸다. 깜짝 놀라는 바람에 손에 들었던 브러시를 떨어뜨릴 뻔했 다. 새미일까? 그렇다면 사태는 최악이다. 계약을 거절하려고 해도 적당한 구실이 생 각나지 않고, 또 현재의 상태로는 그의 끈질긴 설득을 이겨낼 것 같지 않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 있는 사람은 새미가 아니었다. 라일이다! 그늘에 가려 있어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으나, 무슨 일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다. "열어 줘, 크리스티. 할 얘기가 있어." "돌아가세요!" 심장이 방망이질하듯 두근거린다. 화가 난 때문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크리스티는 문을 힘껏 닫고 자물쇠를 잠갔다. 그러나 벨이 울리기 시작하더니 그치 지 않는다. 그 소리가 유난히 신경을 건드려 소리치고 싶었다. 마침내 견딜 수 없어 다시 문을 열고 말했다. "돌아가세요!"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밤새도록 여기 서서 벨을 누를 거야." 진지한 표정으로 보아 단순한 협박은 아닌 듯하다. "당신은…" 크리스티는 심한 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체인을 벗기자 문이 활짝 열리고, 들어오라 고 하기도 전에 라일은 이미 집안에 들어와 있었다. "우린 서로 해명해야 할 일이 많아. 사실은 좀더 일찍 얘기를 나누었어야 했는데." 그녀는 문의 자물쇠를 잠그고 고개를 돌려 날카로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래요!" 지난 며칠 동안 속에서 부글거리던 노여움이 폭발하려고 했다. "우선, 왜 내가 베니커라는 성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왜 당신이 뻔뻔스럽게 도 내 남편이라고 말했는지부터 설명해 보시죠." "하룻밤 동안 당신 곁에서 지키고 있자면 남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지." 라일은 웃도리를 벗어 의자의 등받이에 걸쳤다. "내 곁에서 지키고 있으면 죄의식이 가벼워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인가요?" "좋아, 사실을 말하지. 내가 이처럼 고집쟁이가 아니었더라면 당신이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야." 라일은 양쪽 주먹에 힘을 주고 창백한 얼굴로 크?리스티를 내려 다보았다. "그날 밤 당신이 무서운 기세로 집을 나갔기 때문에 걱정이 되어 뒤를 쫓았지. 사고 가 났을 때는 바로 당신 뒤에 있었어. 정말 충격이었어…" 그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당신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어!" "죽어 버리고 싶었어요!" 크리스티는 이렇게 소리치며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래요! 죽어 버렸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제발 그런 소리 말아!" 라일은 평소와는 달리 당황한 어조로 말하고 크리스티의 등뒤로 조용히 다가왔다. "소냐에 관해서 말인데…"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 크리스티는 소리내어 웃으면서 그로부터 떨어졌다. "거짓말도 잘하는군요! 변명 따윈 듣기 싫다구요!" "그 여자가 와 있었던 것은 내가 불러서 온 게 아냐." 억센 손이 크리스티의 어깨를 잡더니 거세게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소냐는 극장 표를 두 장 구했으니 함께 가자고 말하러 왔던 거야. 나는 거절했지. 그래서 그 여자가 돌아가려고 하던 참인데 당신이 온 거야." 그럴 듯한 설명이었고 그의 말투에도 진실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섣불리 믿을 순 없다. "당신이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저는 정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걸요." "나로서는 믿어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 조금이라도 나와의 관계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당신은 믿어 줄 거야." 라일은 이렇게 말하고 허리를 쭉 폈다. "이번에는 당신 차례야." "내 차례라구요?" "새미 피터슨이 의기양양하게 보여 주던 계약서는 어떻게 됐지?" 라일은 벨트에 엄지손가락을 꽂고 대답을 기다린다. 크리스티는 설명해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아직도 분노와 마음의 상처에 시달리고 있어 냉정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더 이상 상처를 받기가 두렵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계속 속삭이는 소리가 있다. 이렇게 자포자기하면 안 돼! 이번이 마지막 기회란 말야! "사인하지 않았어요." 자기 아닌 딴사람이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것만으로는 대답이 되지 않아." "사인하지 않은 건 노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크리스티는 쓰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아 무릎 위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다리가 후들 거리고 손이 떨린다. "새미는 지난 3년 동안 몇 차례나 계약서를 디밀었어요. 그가 기분 나쁘게 생각할까 봐 읽어보는 척은 했지만 한 번도 사인은 하지 않았어요." "왜?" 라일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물었다. "이젠 가수생활을 원치 않기 때문이에요." 크리스티는 거북살스러워 고쳐앉았다. 라일도 자리에 앉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아 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데 그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더욱 말이 나오지 않는 다. "다음 질문은 어디서 그 상아 세공품을 발견했고 왜 좀더 일찍 당신에게 주지 않았 느냐는 거겠죠?" 입밖에 내기를 두려워하던 화제를 마침내 꺼냈다. "그건 당신이 발굴한 항아리에 들어 있었지." 크리스티는 고개를 번쩍 들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떻게 알고 있죠?" "그 상아 세공품에 얽힌 전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 나는 여성상이 새겨 져 있는 상아 세공품을 찾고 있었고, 당신이 그것을 눈치채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 어. 그런데 그런 물건을 담아 두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면 역시 항아리거든. 그래서 머리에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지." 그는 옆에 있는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아 딱딱하던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운다. "게다가 당신은 거짓말이 서투르거든. 나이를 먹어도 그 점은 마찬가지더군." "알고 있었으면…" 그녀는 적당한 말을 찾으면서 무의식중에 손바닥으로 무릎을 두들겼다. "왜 말을 하지 않았죠?"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져간 건 당신 나름대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의 눈이 깜박이지도 않고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자, 이젠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겠어?" 얘기 안하면 안 되나요?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두렵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지 난날 그처럼 나를 괴롭혔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람 앞에 자존심이고 뭐고 모두 버 리고 무릎을 꿇으란 말인가? 안 된다!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말한다. 자기자신에게 솔직해야 해. 그밖에 네가 취할 길은 없 어! 라일의 얼굴을 보면서 말할 수는 없었다. 크리스티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어색 하게 걸어갔다. 커튼을 당기자 밝은 거리가 어렴풋이 눈에 비친다. "정말…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두 개의 상아 세공품을 함께 놓아 두면 기적 이 일어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기적이 일어났나?" "일어나지 않았어요." 크리스티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뭘 기대했지?" 라일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자 온몸이 떨렸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영영 못하고 만다. "당신에게 그 상아 세공품을 주고 싶었어요. 인들로부카치가 비밀의 애인??“?선물 로 준 것처럼 말이에요." 불길한 침묵이 방안을 감싼다. 두려운 생각으로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이때 라일의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그날 밤 집에 찾아왔었나?" "그래요." 그녀는 웃으면서 과장된 몸짓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정말 바보 같죠?" "크리스티…" 목구멍에서 쥐어짜내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서 라일의 손이 허리 양쪽을 눌렀다. "나를 사랑하고 있어?" 이처럼 자존심을 버리고 솔직하게 말했는데도 라일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다시 화가 부글부글 치밀어오른다. "지금 말했잖아요. 모르셨나요?" "분명하게 말하진 않았어." "나더러 어떡하라는 거예요, 라일?" 크리스티는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손을 풀고 노여움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돌 아다보았다. "서약서라도 쓰란 말인가요? 그래서 그걸 벽에다 붙이면 모두의 웃음거리가 될 수 있을 테니까?" "크리스티." 라일의 손이 다가오자 크리스티는 몸을 빼어 도망쳤다. 그로부터, 그리고 그의 주위 에 감도는 자석과 같은 힘으로부터도 멀어지고 싶다. "옆에 오지 마세요. 돌아가 줘요." "돌아가긴!" 라일은 도리어 고함을 치고 의자와 테이블을 젖히며 다가왔다. 그의 검은 눈에는 심상치 않은 빛이 번득이고 있다. 크리스티는 엉겁결에 침실로 도 망쳤다. 그러나 문을 닫으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어 그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의 강 철 같은 팔이 허리를 낚아채어 그의 탄력있는 몸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그의 억센 손이 살을 파고드는 듯하다. 자신도 모르게 지른 비명이 그의 입술에 막혀 사라졌다. 어떻게 된 걸까? 머리도 몸도 점점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처럼 분개하고 있었는데 어느 새 사랑의 포로가 된 것이다. 팔은 저절로 라일의 목에 감겼고 몸은 찰싹 그에 게 달라붙어 있다. 마치 그밖에는 기댈 곳이 없는 것처럼. 저항해야겠다는 생각은 완 전히 없어지고 그의 격렬한 키스에 온몸이 불붙듯 달아올랐다. 라일이 얼굴을 들었을 때는 몸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그에게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일…" 크리스티는 목이 메어 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내게는 이제 자존심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어요. 당신이 나를 버리든 말든, 이 심 정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사랑해요, 전부터 줄곧 사랑해 왔어요." "정말? 이해할 수 없는걸. 사랑하고 있다면 5년 전에 왜 그처럼 강경하게 이혼하자 고 주장했지?" 라일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크리스티는 당황하여 비틀거리듯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나는 한번도 이혼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이혼하고 싶어했던 건 당신이 잖아요? 이젠 돌아올 생각이었으니 이혼수속을 밟으라면서 아파트를 나간 게 누구 죠?" 라일은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귀에 거슬리는 그의 웃음소리가 크리스티의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어떻게 그처럼 천연덕스러울 수가 있지?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은 전부 잊은 거야? 내가 보낸 편지는 어떻게 했어? 기억하지 못한다고는 말하지 못할걸. 당신은 그 편지 에 대해서 결국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어." "편지?" 크리스티는 멍청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편지 말예요?" "이탈리아로 가서 일 주일 후에 보낸 편지 말야." 여전히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라일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시치미떼지 마. 그리고 당신이 새미 피터슨의 비서를 통해 보낸 편지는 또 뭐야? <더 이상 결혼생활은 계속하고 싶지 않아요. 제발 이혼에 동의해 주세요.>라고 쓴 편 지 말야. 그것까지 잊었다는 건가?" "무슨 얘기예요? 난 전혀 모르는 일이에요." 그래도 라일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난 당신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당신은 이혼하겠다고 집을 나갔지만, 사살은 믿어지지 않았거든요. 매일 기다리다가 넉 달이 지났을 때… 이렇게 기다려도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역시 당신의 이혼 결심은 진심이었던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 죠." 라일이 싸늘한 웃음을 띠우는 것을 본 크리스티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외쳤다. "라일! 정말이에요! 그래도 믿지 못하겠어요?" "믿고 싶어. 당신이 하는 말을 전부 믿고 싶어. 하지만 5년 동안이나 악몽만 꾸다 보면 의심이 많아지게 마련이지. 당신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 군." 노여움이 깃든 라일의 눈이 크리스티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마침 내 그의 험악한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애원하듯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크리스티의 창백한 얼굴에서 진실의 빛을 발견했으리라. 잠시 후 입을 열었을 때는 그의 눈에도 역시 분노의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다고 따스함이 깃든 것도 아니다. "좋아, 당신의 말을 믿고 내 편지를 못 받았다고 치지. 그렇다면 그 편지는 어디로 갔지?" "그런… 그런 건 모르겠어요." 어떤 단서가 없을까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으나 짚이는 데가 전혀 없다. "내?가 이탈리아로 떠난 뒤의 일을 정확하게 말해 봐." 그 어둡고 참담했던 나날에 있었던 일을 모조리 얘기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이 고통 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당신이 떠나고 난 뒤 나는 무척 참담한 기분이었죠. 공연여행도 하기 싫었어요. 그 6주일 동안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죠. 하지만 공연을 간신히 끝냈을 때는 당신에게서 편지가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돌아왔어요. 하지만 편지 같은 건 없 더군요." "집을 비운 동안 우편물은 어떻게 했지? 누가 받았어?" "관리인에게 부탁하고 갔어요. 모아 두었다가…" "새미 피터슨의 사무실에 보내 달라고 했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크리스티 대신 라일이 말했다. "설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새미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예요!" "그렇게 말하기 전에 좀더 잘 생각해 보는 게 어때? 새미는 원래 내게 반감을 품고 있었고, 당신이 나와 결혼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어. 결혼 후에도 그 사람은 모든 수단을 써서 우릴 떼어 놓으려고 했거든. 그런 걸 생각한다면 내 편지를 가로채 는 일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 그런 다음에 비서를 시켜 내게 편지를 쓰게 한 거야. 당신의 부탁을 받았다고 당당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말야. 새미 피터슨이 함직 한 짓이잖아?" 과연 그럴 듯한 얘기였으나 그런 무서운 사실을 믿고 싶지가 않았다. "새미를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취급하기 말아요. 그 사람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 랑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걸요. 게다가 내가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 고 있었구요. 처음 넉 달 동안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새미가 항상 격려해 주었 기 때문이에요. 그뒤에도 그 사람이 좋은 조언을 해준 덕분에 어려운 고비를 이겨낼 수 있었어요. 당신은 이제 돌아오지 않을 테니, 정식으로 이혼하고 깨끗이 잊어버리 라고 충고해 주더군요." 라일은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새미가 그렇게 말했어? 나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 헤어지는 게 좋다고?" "그래요, 그 사람은 여러 가지 상황을 볼 때 당신이 한 말은 모두 진심이라고 했어 요. 그러니까 부질없는 희망에 매달려서…" 그 이상은 말을 할 수 없었다. 문득 어떤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공연여행에서 돌 아왔을 때 새미의 비서가 보이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됐느냐고 새미에 게 묻자, 그는 의견 차이가 있어 함께 일할 수 없게 되었다고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 답했다. 그러나 나중에 새미의 부하직원으로부터 들은 얘기에 의하면, 새미가 비서에게 억지 로 부정한 편지를 쓰게 한 일로 대판 싸움을 하고 그만두었다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 도 대수롭지 않게 듣고 넘겼으나, 라일이 추측하고 있는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새미가 계속 이혼을 하라고 권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 다. 마음도 약해진 탓도 있고 해서 결국 체념하고 이혼수속을 밟았던 것이다. 이로써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크리스티는 다리가 떨려 쓰러지듯 침대에 걸터앉았다. "라일, 그 동안 나는 항상 당신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견딜 수 없었는데, 이제 겨우 그 까닭을 알았어요. 당신으로서는 나를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당신을 미워한 적은 없어." 라일은 크리스티와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아 손을 그녀의 턱에 받치고 얼굴을 젖혔 다. 그의 검은 눈은 마음속까지 꿰뚫어보는 듯 날카롭다. "당신을 다시 만났을 때는 충격을 받았지. 도저히 믿을 수 없었어. 그러다가 옛날을 생각했지. 당신에게 배반당했을 때의 일 말야. 그러자 울컥 화가 치밀어… 하지만 당 신을 미워하진 않았어." "알아요, 당신 심정…" 크리스티는 눈물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도 없었어요." 라일의 손가락이 크리스티의 볼을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려가 입술 언저리를 더듬었 다. "내가 좀 어떻게 되었던 모양이야.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면 당신이 내 편지 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을 텐데. 만약 내 편지를 읽었더라면 남을 시켜 그처럼 심한 답장을 쓰게 했을 리가 없지. 당신은 그렇게 몰인정하고 무신경한 여자가 아니거든." "그럼, 내가 편지를 받지 않았다는 걸 믿어 주시는 거죠?" 크리스티는 그의 몸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믿구말구." 가볍게 애태우듯 라일의 입술이 와 닿는다. 크리스티는 꿈꾸는 듯한 심정으로 입술 을 벌리고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따스한 입술… 굶주린 듯한 입맞춤… 관능적인 환희가 전신으로 번지면서 기분 좋은 전율이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그녀는 정열에 몸을 싣고 이대로 모든 것을 그에게 바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물어볼 말이 있다. "당신 편지에 무슨 말이 써 있었죠?" 크리스티는 달아오르는 볼을 그의 어깨에 묻었다. ? 라일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소리는 내지 않지만 웃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아직 당신을 의심하고 있다 하더라도, 당신이 방금 한 말을 들으면 믿지 않고 못 배기겠는걸. 정말 재미있군." "미워요, 놀리지 말아요. 응? 뭐라고 썼는지 말해 봐요." "바보 같은 짓을 한 남자가 썼음직한 말뿐이야." 라일은 크리스티의 머리에 볼을 갖다댔다. "이렇게 썼었지― 그때 화를 내서 미안해. 당신이 함께 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고 발끈했던 거야. 결혼생활과 직업 중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고 한 것도 어리석은 짓 이었어. 나는 결코 이혼하고 싶지 않아. 제발 지난번의 폭언을 용서해 줘. 만약 공연 여행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와주겠다면 당장 비행기 표를 예약하겠어." "라일!" 크리스티는 복잡한 생각으로 가슴이 메어 라일에게 안겼다. 이처럼 자신을 믿어 주 는 그에게 감사하는 한편 새미의 소행이 증오스럽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아요?" "우선 이걸 주지." 라일은 상아 세공품을 꺼내서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집어 가볍게 입술에 갖 다댔다. 그리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크리스티에게 상아 세공품을 쥐어 주고 작은 푸른 주머니를 코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이번에는 당신 차례야." 주머니를 받아드는 손이 떨려 새틴으로 된 끈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가까스로 주 머니 안에 있는 상아 세공품에 손가락 끝이 닿았을 때 이상한 환희가 전신에 번졌다. 캠프에서 발견한 상아 세공품… 크리스티는 라일이 한 대로 그 상아 세공품에 입을 맞춘 다음 그의 손바닥에 놓았다. "이젠 됐어요? 말하자면…" "말하자면,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지. 당신만을…" 크리스티의 눈에는 행복의 눈물이 빛나고 있다. "진작부터 그 말을 듣고 싶었어요. 당신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거 든요." "사랑의 고백을 술술 하는 건 내 장기가 아니지. 그리고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당 신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거든." 라일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고 손가락으로 크리스티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처럼 따뜻한 그의 눈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나는 완전히…" 크리스티는 괴로왔던 추억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하죠?" "이 두 개를 함께 보관해 두면 되지." 라일은 더욱 상냥하게 웃으면서 주머니를 집어 한 쌍의 상아 세공품을 그 안에 넣고 침대 옆의 선반에 얹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크리스티를 끌어안았다. "자, 이젠 당신의 대답만 들으면 돼. 준비가 되는 대로 결혼해 주겠어?" 크리스티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당신, 정말 결혼하고 싶으세요?" "같은 상대와 다시 결혼하면 잘 산다던데?" 라일은 크리스티를 가볍게 침대에 눕히고 자신의 몸을 얹었다. "결혼해 주겠어, 크리스티?" "네… 네, 물론이에요." 크리스티는 꿈이 아닌가 싶어 라일의 뺨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기쁨의 눈물이 쏟아 지려고 하여 목이 메었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얼굴을 갖다댔을 때 눈물 젖은 볼에 그의 목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기뻐요, 당신을 사랑해요." 두 사람은 힘껏 껴안고 뜨거운 입술을 겹쳤다. 라일은 크리스티를 안아올려 침대 한 가운데 눕히고 자신도 옆에 누웠다. 그의 손은 초조한 듯 가운과 네글리제의 가슴 부 분을 여는 한편, 뜨거운 입술은 가벼운 키스를 반복하면서 그녀의 목에서 가슴으로 옮아갔다. "당신을 원해. 결혼신고를 할 때까지 도저히 못 기다리겠어." 라일은 감미로운 향내가 나는 크리스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안아도 괜찮겠어?" "지난번에도 그런 말을 물었던가요? 들은 기억이 없는데요?" 그녀는 장난기 섞인 말로 숨을 할딱이며 이렇게 속삭였다. 라일은 그녀의 가운을 벗기고 네글리제의 리본을 풀려고 했다. "그때는 낮에 있었던 사건 때문에 마음이 미처 가라앉지 않았어. 맘바가 당신의 몸 위를 기고 있는 것을 봤으니 그렇지 않았겠어? 그리고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이 원망스러웠지. 당신의 육체를 잊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화가 났었고. 그때 당신을 안았던 건 결코 당신을 학대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냐.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렇게 되었지. 나중에 후회했어." "라일…" 그의 손이 네글리제 속으로 파고들어가 그녀의 몸과 마음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한 다. "지난 일은 생각지 않기로 해요. 우리만의 사랑의 순간을 다시 한번 재현하는 거예 요." "사랑의 순간이라?" 라일은 셔츠의 단추를 벗기고 그 속으로 크리스티의 손을 밀어넣었다. "캠프에서의 마지막날 밤, 당신은 그 노래를 불렀지. 나는 그때 나 자신이 갈갈이 찢기는 것만 같아 끝까지 듣고 있을 수 없었어. 그대로 듣고 있었더라면 내가 이상하 다는 걸 학생들이 눈치챘을 거야." 이처럼 괴로와하는 라일을 보기는 처음이다. 그의 아픔이 자신의 것처럼 전달되어 왔다. "달링…" "그뒤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한 끝에 하나의 결론?을 얻었지. 앞으로 어떤 일이 있 어도 다시는 당신을 놓치지 않겠다는 결론을." "라일…" 크리스티는 그에게 입술을 갖다대며 초조한 듯 속삭였다. "안아 줘요." 라일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굵고 환희에 찬 그의 웃음소리는 승리의 기쁨을 노 래하는 음악처럼 기분 좋게 울렸다. 그 목소리는 틀림없이 먼 미래의 사랑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크리스티의 귀에 메아리칠 것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