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까기 왕자님 (주) 신영미디어 G-98 리베카 윈터스 지음 이 영욱 옮김 추운 나라에서 온 남자 메그 로버츠-메그는 아이의 아빠와 떨어져 지낸 칠년 동안, 한시도 그를 잊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 잘생긴 KGB요원이 정치적인 이유로 그녀를 희롱하고 아기까지 생기게 만들었다고 믿고 있었음에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여섯 살짜리 애나는 그녀의 인생에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었으며, 메그에게 가장 커다란 두려움은 콘이 아이를 데리고 멀리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애나 로버츠-애나는 아빠가 너무 먼 러시아에 살고 있어서 자신을 만나러 올 수 없다는 엄마의 말을 믿으며 살았다. 그러나 애나가 가장 좋아하는 <호두까기 인형>에 나오는 멋진 왕자처럼 생긴 아빠는 바로 그곳에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애나는 아빠와 함께 살기를, 완전한 가정을 이루며 살기를 원하고 있다. 콘스탄틴 루덴코-전직 KGB의 고위급 요원. 사랑하는 여자와, 한번도 만나지 못한 자신의 딸인 애나를 위해서 미국으로 탈출한다. 숨어 살면서 새로운 이름으로 새생활을 시작했으나, 그는 칠년 전 러시아를 방문한 젊은 여선생과 사랑에 빠졌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는 그녀를 메기라고 불렀다. 독자에게 내가 어렸을 때, 일년중 가장 좋아하는 기간은 바로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산타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가족 파티, 벨벳 드레스와 리본들, 생강을 넣은 과자의 독특한 향기,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펼쳐지는 <호두까기 인형>의 발레공연을 관람하던 저녁…나는 그 모든 것을 사랑했다. <호두까기 인형>에서 나오는 클라라처럼, 캔디의 요정이나 호두까기 왕자님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내가 일곱 살 때 어머니는 내게 <호두까기 인형> 발레공연을 대사와 함께 녹음한 아이들용 레코드를 주었으며, 나는 그것을 수년동안 들었다. 지금 난 엄마가 되었고 내 아이들도 그것을 듣고 있으며, 아마 내 딸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렇게 해줄 것이다. 그 이야기와 음악에는 마술 같은 그 무엇이 있다. 최근에 나는 호두까기 인형에서 나오는 왕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일단 러시아 사람이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빠의 포옹과 키스를 갈망하는 귀여운 작은 소녀를 상상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느날 나의 딸이 집안으로 뛰어들어와 그애가 좋아하는 한 선생님이 소련에서 겪었던 경험에 대해 말해주기 전까지는. 「엄마, 재키 선생님은 가르치는 일이 끝나면 KGB요원과 함께 있었대요. 엄마의 소설 소재로 괜찮지 않을까요?」 고백하건대, 그것은 정확히 내가 바라던 바였다. 나를 사랑하는 딸 도미니크와 친구 재키에게 모든 사랑을 함께 담아 이 책을 바치고자 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이 책을 즐겁게 읽어주기를! 리베카 윈터스 1 「쉬잇, 애나. 노래는 집에서 부르는 거야. 발레 공연을 볼 때는 조용히 해야지」 메그 로버츠는 자신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불안정한 음정으로 <꽃들의 왈츠>를 흥얼거리고 있는 여섯 살 난 딸의 귀에 대고 주의를 주었다. 지금 공연중인 세인트 루이스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은 어린이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토요일 낮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공연장은 어린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로 꽉 메워져 있었다. 따라서 아이들 못지않게 어른 관객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미안해요, 엄마. 근데 왕자님은 언제 나올까?」 애나의 목소리가 조금 컸던지 앞에 앉아 있던 노부인이 고개를 돌려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메그가 다시 주의를 주려는 순간, 애나는 자신의 손가락을 조그만 입에 갖다대고 쉬이 소리를 내며 항상 메그의 마음을 사랑과 자랑으로 가득 채워 주던 예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서 아이는 이내 무대 위의 무용수들에게 빠져들었다. 어둠 속에서 메그는 딸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애나의 뺨은 난생 처음 보는 발레 공연에 대한 흥분으로 발그레하다. 앞으로 여드레만 지나면 크리스마스가 돌아오는데도 애나의 관심은 한 달 전부터 온통 발레공연에 쏠려 있었다. 지금도 <호두까기 인형> 책을 양팔로 꼭 안은 채 공연을 보고 있다. 애나는 러시아로부터 가져온 작은 보물인 그 책을 어디든지 들고 다녔다. 비록 러시아 어를 읽지 못하므로 그림만 보는 수준이었으나, 꼬마숙녀의 마음은 책 속으로 흠뻑 빨려들어 갔다. 특히 생쥐의 왕과 싸우는 잘생긴 호두과자 왕자를 무척 좋아했는데, 처음부터 왕자의 검은 머리칼과 푸른눈이 자신의 것과 닮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메그의 입장에서 더욱 마음이 쓰이는 것은 그 왕자의 모습이 아이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빠와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책을 발견했을 때부터 메그는 주인공과 그의 모습이 놀랄 만큼 닮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지난날의 쓰라린 기억들을 떨쳐버릴 수 없게 만들었다. 너무 쉽게 빠져들어 사랑을 나누었던 그 남자. 그는 메그에게 자신과 꼭 닮은 아기를 남겨 놓았다. 물론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고 해도 그녀는 콘스탄틴 루덴코를 잊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딸의 모습에서 그의 그림자가 짙어져갔으며 그것을 깨달을 때마다 희미해질 줄 모르는 기억들은 사정없이 밀려들어 그녀를 괴롭혔다. 날이 갈수록 똑똑히 드러나는 얼굴의 특징들과 무엇인가 열심히 들을 때 고개를 돌리는 버릇들…. 그 모든 것이 부끄러움과 분노와 후회를 불러일으켰다. 「저거 봐요, 엄마!」 러시아의 코자크 인 무용수들의 멋진 동작에 빠져 있던 애나는 주의도 잊고 발랄라이커(기타와 비슷한 삼각형 모양의 러시아 현악기)를 따라 노래를 흥얼거리며 발을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조용히!」 앞의 노부인이 고개를 홱 돌리며 주의를 주었다. 이번에는 다른 몇몇 사람들도 눈총을 주었다. 메그는 딸을 꼭 껴안았다. 「말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면 안돼. 그건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는 거란다. 만약 또 그런 소리를 내면 넌 여기서 나가야 할지도 몰라」 「싫어요, 엄마」 애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직 왕자님도 보지 못한걸요. 얌전히 있을게요」 「항상 말로만 약속하고 금세 잊어버리지!」 「잊지 않을게요」 애나의 진지한 얼굴을 대하나 메그는 웃음이 나왔다. 사실 공연 내내 딸에게 조용히 있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엄마 무릎에 앉아 있어야 해」 「알았어요」 애나는 메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뺨에 뽀뽀를 했다. 두 모녀는 다시 무대 위로 눈길을 돌렸다. 교향악단의 금관악기들이 장난감 병정들의 등장을 알리자 애나는 슬그머니 메그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엄마, 호두과자 왕자님이에요! 보여요?」 애나는 병정들의 앞에 선 남자 무용수를 가리켰다. 아이는 주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메그는 앞좌석 노부인의 따가운 눈총을 또 한번 받아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잔뜩 흥분한 다른 아이들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뼉을 치는 등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어냈다. 거기에 비하면 애나의 외침은 양호한 편이었다. 메그는 왕자가 생쥐의 왕을 이기고 무대에서 퇴장하는 모습을 숨을 죽인 채 지켜보는 애나를 보며, 지금의 순간이 딸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왕자가 사라지자 애나는 메그의 무릎 위에 다시 앉았다. 「엄마, 나 목말라」 애나가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메그는 아이가 공연이 끝날 때까지 참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았어. 책 가져가는 것을 잊지 마」 그녀는 한 팔에 코트를 걸치고 다른 손으로 애나의 손을 잡고서 옆좌석 사람들의 양해를 구해가며 복도로 나왔다. 「천천히 내려오렴」 메그는 빈 로비 옆에 있는 여성전용 휴게실을 향해 빠른 걸음을 옮기는 애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걷는 도중에도 애나는 잠시도 쉬지 않고 왕자에 대해 재잘거렸다. 「공연이 끝나고 그를 만날 수 있을까요?」 애나는 공연장으로 다시 들어가다가 그 옆에 있는 식수대에서 물을 마시기 위해 줄을 서면서 불쑥 말을 꺼냈다. 「아마 그럴 수 없을 거야」 「비즐리 선생님은 주인공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글쎄, 이따가 보자」 메그는 일학년인 애나의 담임이 불가능한 생각들을 아이의 머릿 속에 집어넣지 말아 주기를 바랐다. 아이들이란 때로 선생님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법이니까. 「우리 딸이 이젠 다 커서 이런 곳에도 오는구나」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뒤쪽에서부터 들려왔다. 메그는 가족을 데리고 공연을 보러 온 남자가 자신의 아내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애나가 물을 먹고 식수대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나지막한 오두막집을 기억하오, 메이야 러보프(러시아 어로 내 사랑이라는 뜻)」 그 말을 듣는 순간 메그는 세상이 일시에 정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콘스탄틴. 그럴 리가. 아냐, 그럴 수 없어. 그러나 메그는 영혼까지 울리던 깊고 조용한 그의 음성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식은땀이 솟으며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고, 적지 않은 충격을 참지 못하고 그녀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는 분명 지구의 반대편 땅에서 그녀가 결코 원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생활을 이끌며 살아가리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심하게 요동치는 심장은 그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게 아니고, 바로 이곳에, 이 극장 안에서 그녀를 내 사랑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서 돌아보면 손에 닿을 거리에 있다는 뜻이다. 맙소사. 그러나 그의 존재를 확인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분노와 두려움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나약함에 화가 나면서도 그녀는 7년 전에 있었던 손에 잡힐 듯한 기억들을 떨칠 수 없었다. 그 당시 그녀의 머리는 그가 <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그를 사랑하는 그녀의 심장은 그녀의 경계심을 지워 버렸다. 그가 애나에 대해 알고 있다니! 하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그가 애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의 직업이 바로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일을 알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두 모녀의 행적을 뒤쫓아 왔다는 말이 되며, 어쩌면 애나를 빼앗아갈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는 메그가 애나에게 경고의 말을 할 수도, 숨길 수 없는 공공장소를 택하여 접근하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다. 두려움이 가득 밀려오면서 메그의 심장은 통제력을 상실해 갔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모스크바의 차가운 감옥에서 홀로 보낸 끔찍했던 시간들이었다. 「메그?」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지 못한다. 단지 몇 초 동안이라고 생각되었으나 골치아픈 기억들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했다. 머뭇거리며 차마 몸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아이에게 아빠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난 지금 이곳에 있소. 이젠 사실대로 말해 줘야 할 때요. 나에게서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그렇지 않으면 볼 만한 구경거리가 연출될 테니까. 당신은 애나를 자극하고 싶지 않을 거요. 그러니 협조해 주시오」 KGB에서 받은 철저한 훈련 덕분에 그는 점잖고 수준 높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남들이 얼핏 보면 동부 출신의 미국인쯤으로 보일 것이다. 때마침 물을 먹고 내려온 애나는 엄마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 메그는 양손을 꼭 쥔 채 움직일 수도,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싶은 본능을 참는 일이었다. 사실 다른 사람의 신경을 살살 건드리는 일보다 더 효과적인 덫은 없는 법이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자, 안으로 들어가자」 메그는 애나의 손을 꼭 쥐고 거의 끌다시피하면서 공연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메그는 그의 손길을 피할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마비된 동물처럼 먹히기만을 기다리긴 싫었다. 「엄마, 너무 빨라요. 천천히 가요」 애나는 불평을 했다. 그러나 공포에 질린 메그는 더욱더 걸음을 빨리했다. 국제시대의 긴장이 완화된 이래로 러시아에 대단한 변화가 있다는 사실도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마 그는 더 이상 KGB에서 일하지 않고 현 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 소련 내부에는 비밀경찰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도 모르게 미국에 건너와서 그들에게 접근하고 그녀에게 여러 해 전의 끔찍했던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남자. 그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위험한 인물이며, 자신이 노린 목표를 절대 놓치지 않는 훈련이 잘된 정보요원이었다. 이번 목적은 애나일 거야.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이제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스물세 살의 느슨한 여자가 아니다. 시간의 흐름과 그동안 쌓인 경험으로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갔고, 어리숙한 젊은 아가씨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남은 것은 짧았던 그들의 열정이 만들어낸 그녀의 딸 애나뿐이었다. 만약 그가 다가서기 전에 그녀와 애나가 공연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메그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메그! 애나!」 애나는 누군가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메그의 손을 뿌리친 채 뒤를 돌아보았다. 「아저씨는 누구에요?」 아이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하다. 어쩔 도리 없이 메그는 걸음을 멈추고, 짧았던 기간이었으나 사랑했고 애나를 남기고 간 그의 얼굴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를 보거나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애나는 흥미 가득한 눈길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가 애나에게 손을 내밀어 아이를 놀라게할까 걱정이 되었다. 마침내 짙은 눈썹사이로 반짝이는 푸른 눈을 대하지 메그는 심한 동요를 느꼈다. 그의 모습은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약간 다를 뿐이었다. 처음 그녀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검은 갈색 머리카락에 회색 양복과 트렌치 코트를 걸친 전형적인 KGB요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머리카락을 짧게 깎고 진한 청색 양복에 엷은 푸른색 셔츠를 받쳐입은 성공한 미국인 사업가의 차림으로 크고 마르면서 건장한 체격이 돋보였다. 하지만 포착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매력은 여전했다. 메그가 지금 비서 겸 경리사원으로 일하는 유럽산 자동차 판매소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혼남들과 다르게 그의 외모는 여전히 출중했다. 마치 7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는 너와 네 엄마를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란다」 그가 자신의 딸에게 말을 건 첫마디였다. 애나는 그와 많이 닮았다. 메그는 자신의 딸이 그 사실을 알아차릴 것 같아 두려웠다. 「아저씨가요?」 애나는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메그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는 지금 일종의 사업을 하고 있는 거야, 자신의 희생물을 일단 사로잡는 능력을 사용하는 거라구. 언제나처럼 그는 완력을 사용하지 않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직까지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가 이렇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이름이 뭐예요?」 애나가 물었다. 「콘스탄틴 루텐코」 「코, 콘스타… 뭐라고 했죠?」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 엄마는 나를 콘이라고 불렀단다」 뻔뻔하고 무례한 사람 같으니. 메그의 가슴에 분노가 가득했다. 「러시아식 이름이지. 네 이름처럼」 「제 이름이 러시아식 이름이라고요?」 「그래」 러시아식 악센트가 들어간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런 다음 그의 눈이 메그에게 향했다. 「당신은 날 잊지 못했을 거요」 「아니에요!」 강하게 부인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감정의 떨림이 그대로 드러났으나 숨기기엔 너무 늦었다. 그녀는 팔로 딸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다. 어린 애나는 방금 들은 이야기에 신기함을 감추지 못하면서 그가 부른 자신의 이름을 곰곰 되새겨보는 눈치였다. 그리고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섰다. 「엄마는 우리 아빠가 러시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만나러 오지 못한다고 그랬어요」 애나는 그것이 둘만의 비밀이며, 다른 사람이 알면 안된다는 엄마의 다짐도 잊고 큰소리로 말했다. 「애나!」 메그가 화가 나서 소리쳤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글쎄다, 네 엄마가 틀렸단다, 애노슈카」 그는 아이의 애칭을 불렀다. 그러자 애나는 그에게 더욱 바싹 다가섰다. 「아저씨는 호두까기 왕자와 꼭 닮았어요!」 애나는 고개를 돌려 메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이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엄마! 왕자님처럼 생긴 아저씨예요!」 그리고는 들고 있던 책을 펼쳐들었다. 「이것 보세요」 그녀는 그림책 속의 주인공을 가리켰다. 그는 날랜 동작으로 무릎을 접고 앉아 애나가 펼쳐든 책을 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지면서 애나의 곱슬거리는 앞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다. 「이 책은 네 엄마가 러시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 내가 선물한 것이란다. 그러니까 12년 전 일이지」 메그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애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이에요?」 「그럼. 나도 그 책을 좋아하지. 왠 줄 아니? 넌 내 딸이야. 그러니까 생각하는 것이 비슷한 것도 당연한 일이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메그를 보았다. 「네 엄마가 러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너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엄마는 무척 슬퍼했단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 내가 그 책을 선물했지. 그걸 보면서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로 삼으라는 뜻이었단다. 네 엄마 역시 그것을 좋아했거든」 메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거짓말이야. 그녀의 마음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 책을 모스크바의 서점에서 보고 몹시 사고 싶어했으나 워낙 가격이 비싸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했다. 그런데 그녀를 유치장에서부터 공항까지 데려다 주던 한 매력적인 KGB요원이 그것을 그녀의 가방에 몰래 넣어 주었다. 열일곱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메그는 버스에서 잡혀 감금되었었다. 죄목은 그녀의 청바지와 티셔츠 그리고 다른 개인 소지품들을 팔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녀는 아무 생각없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친구에게 그녀의 게스 청바지를 주었고 여자애에게 선글라스를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유치장이라니.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몸이 떨려온다. 그녀가 잡혀 있는 동안, 간수 중의 하나가 멀리 미국에 있는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러나 법을 어기고 암시장과 거래를 한 메그의 현명치 못한 행동 때문에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을지도 모르며, 어쩌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할지 모른다고 했다. 그는 메그에게 전혀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하여 <반성>하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 버렸다. 절망감에 빠진 메그는 차가운 마룻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녀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일 년 전에 먼저 간 어머니를 생각하며 몇 시간을 흐느꼈다. 수천 킬로나 떨어진 곳에서 아버지 윌리엄 로버츠는 세상을 하직했으며, 그녀는 이제 아버지의 얼굴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아침이 되기 전 콘은 그녀에게로 와서 뒷문에 대기중인 차에 태우고 공항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 덕에 함께 여행하던 동료들 없이 그녀 혼자 아버지의 장례식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콘의 지위와 중재로 인해 그녀는 더 이상의 문제 없이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준 책이 유일한 추억거리였다. 6년이 지난 후 그녀는 문화교류 차원에서 교사의 자격으로 러시아를 다시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메그는 그를 만나 그때 고마웠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물론, 그녀는 그를 만났다. 천진스럽게도 그녀는 그들의 재회를 우연한 것이라고 단정 지었으며, 그가 자신의 행적을 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몰랐다. 병약했던 그녀의 아주머니가 타계한 다음 이루어진 그녀의 두 번째 러시아 여행에서 그녀는 그의 목표물이 되었다. CIA에서 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콘의 치밀한 계획하에 그녀는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것은 여행중인 젊은 미국인 남녀에게 흔히 발생하는 사건이었다. 즉 콘의 사랑은 정치적인 이유로 이루어진 것으로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정말 우리 아빠예요?」 애나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메그는 어린 가슴에 담긴 작은 소망을 알아차리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래. 나는 네 아빠야. 난 너를 나의 작은 꼬마라고 부를 수 있단다. 우리는 똑같이 푸른 눈에 검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코의 모양도 비슷하잖니? 하지만 네 미소는 엄마와 똑같구나」 그가 코를 살짝 간지럽히자 애나는 키들거렸다. 그는 양복 주머니에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여기에 네 엄마와 내가 함께 아이스크림과 샴페인을 먹는 사진이 있단다. 그때 난 네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지. 여기 입 좀 봐, 너랑 똑같구나」 그는 애나의 아랫입술을 톡 건드렸다. 애나는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가 내민 흑백사진을 받아들었다. 지금까지의 어떤 것보다 놀라운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순간이다. 메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만져 주던 그의 손길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 이어지는 그의 키스는…. 그녀는 즐거움에 겨워 누군가 자신들의 사진을 찍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담은 사진들이 KGB의 파일에 묻혀 있다니 그것은 비극이었다. 「엄마! 이것 봐요, 엄마 사진이에요!」 「그래, 맞아. 그리고 여기 엄마가 묵었던 호텔과 근처 박물관 앞에서 찍은 사진들이 더 있단다」 딸에게 접근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엄마와의 다정했던 증거물을 제시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 메그의 러시아 여행에서, 그네들의 자랑인 붉은 광장에서의 촬영만 허락되었으므로 그녀는 사진을 많이 남길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 그는 애나가 다 보기를 기다려 다른 사진을 내밀었다. 「이것은 공항에서 찍은 사진이야. 난 네 엄마에게 러시아를 떠나지 말고 나와 결혼해 주기를 바랐지만 결국은 떠나 버렸지」 외로움이 배인 그의 목소리를 듣자 메그는 속으로 비밀 경찰답게 거짓말에 능숙한 모양이라고 비웃었다. 이제 애나는 그의 가슴에 편히 기대어 정신없이 사진들을 보고 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면서 메그는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애나는 고개를 들고 메그를 보았다. 「왜 그랬어요, 엄마? 왜 아빠를 혼자 두고 떠났죠?」 아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더이상 그곳에 있으면 나는 영원히 미국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단다. 난 이곳에서 할 일이 있었지. 학생들을 가르쳤거든」 「엄마가 선생님이었어요?」 잠시 숨을 돌린 뒤 메그가 대답했다. 「한때는 그랬지. 지금은 아니지만」 「비즐리 선생님처럼 말인가요?」 애나는 믿기지 않은 표정이다. 「그래. 고등학교 선생님이었어」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러시아에 있을 때 임신을 한 사실을 알고 교직을 떠나 버렸다. 러시아 어를 가르치던 그녀는 모든 러시아와 관련 된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애나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으므로 메그는 딸에게 자신의 일을 말하지 않고 지내왔다. 그런데 불행히도 애나는 창고에 처박아 둔 <호두까기 인형> 책을 발견하고 나서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선언해 버렸다. 메그는 그 책을 빼앗지 못했으나 어디서 났는지에 대해선 말해 주지 않았다. 「정말이에요, 아빠?」 딸의 입에서 나온 단 한마디의 물음에 메그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애나는 콘을 자신의 아빠로 받아 들였을 뿐 아니라 메그의 답변까지도 그에게 확인을 하는 중이었다. 엄마는 아이를 낳아 6년 동안이나 모든 것을 쏟아 길렀는데,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생기게만 한 남자는 단숨에 아이로부터 한치 의심없는 믿음을 받아내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래, 사실이야. 엄마는 러시아 어를 거의 완벽하게 말한단다. 그리고 엄마가 러시아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치지 않는 시간 동안 우리는 함께 시간을 보냈지」 메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애나… 아빠에게 그때 왜 미국으로 오지 않았는지 물어보렴」 「그렇지만 지금 왔잖니. 얘야, 내 나라를 떠나기 전에 정리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단다. 그러나 나는 너에 관해 모두 알고 있었고,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널 항상 사랑했단다. 이제 너와 함께 살기 위해 이곳으로 왔단다」 애나를 차지할 때까지 말이죠. 그런 다음 다시 사라질 거예요. 메그는 확신했다. 「아빠는 내 방에서 자면 돼요」 애나가 천진난만하게 제의했다. 「그래, 그러고 싶구나」 그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나는 너와 네 엄마와 함께 살기 위해 온 거야. 네 엄마 차로 집에 데려다 줄까? 나는 오늘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단다」 「우리 것은 빨간색 도요다예요. 엄마가 운전을 하는 동안 뒷자리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어요」 「한줄씩 번갈아 읽기를 하면 좋겠구나. 그런데 넌 집이 좋으니?」 「네. 하지만 개를 한 마리 키우고 싶어요. 그런데 못된 아파트 관리인이 못 키우게 해요」 「그럼 넌 간디와 토르를 좋아해 주면 될 거야」 「간디와 토… 뭐라고 그랬죠?」 「토르. 내가 키우는 독일산 셰퍼드들이란다. 너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지. 아무나 사귈수 없지만 네게는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거다」 메그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때마침 공연이 끝나 사람들이 로비로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애나를 위해서라도 그녀는 혼자 있게 될 때까지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했다. 콘스탄틴 루덴코가 자신의 나라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을지라도 이곳에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메그는 애나를 끌어당겼다. 「가자, 애나」 그러나 애나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에 놓아 두었던 책을 집어들면서 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함께 가겠니, 애노슈카? 오랫동안 나는 널 안아 주는 꿈을 꾸어 왔단다」 지금까지 애나는 메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그가 자기를 안을 수 있도록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런데 <노슈카>란 무슨 뜻이에요?」 「나의 작은 아가라는 뜻이란다. 러시아에서는 귀여운 딸들을 그렇게 부르지」 「난 아가가 아니에요」 애나는 그의 뺨에 뽀뽀를 했다. 「참 예쁘구나. 마치 네 엄마처럼 말이야」 그는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을 꼭 주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메그는 애나의 즐거운 모습을 보며 그녀의 영혼에 구멍이 뚫리는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2 「당신 차는 어디에 있소? 애나와 나는 갈 준비가 끝났소」 콘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의 계산된 친절은 그녀의 감정을 건드렸으나 참아야했다. 분명히 그는 그녀의 차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메그는 아까 그가 따라올 때부터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로 보나 완벽한 부녀관계로 보였다. 완전한 믿음 아래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안겨 있는 애나의 모습을 보자, 메그는 목이 메어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애나는 가장 친한 친구인 멜라니가 아빠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자신도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애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비록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만남이었으나 그 무엇으로도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을 끊을 수 없었다. 극장을 나서는 사람들은 그들을 아버지와 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꽤 여럿 되는 여자들의 눈이 콘의 출중한 외모로 쏠리는 것을 보면서, 메그는 사람들이 되레 콘의 팔에 안겨 있는검은 갈색 머리칼의 소녀와 그녀의 관계에 의문을 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메그의 옅은 금발과 잿빛 눈동자는 아이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메그는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일이 또 있을까라고 중얼거리며 코트를 걸쳐입고 차가 주차되어 있는 길 건너편을 향해 걸었다. 그녀는 갑작스레 다가올 수 있는 콘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그로부터 몇 발자국 거리를 유지하며 걸어갔다. 그가 애나와 함께 뒷좌석에 올라타자 일단 안심이 되었다. 지금 그는 자신이 한수 위라고 자부하겠지. 특히 애나가 그에게 매달려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붓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믿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일단 집에 도착하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메그는 가자마자 해야 할 일의 순서를 마음속으로 정했다. 일단 저녁을 먹은 다음 애나를 재워야 한다. 그리고 나서 아이가 일어나기 전에 그를 집에서 내쫓아야지.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숙모님의 일을 도와주던 변호사와 연락을 취할 것이다. 아마 그는 법적으로 콘이 그녀와 애나에게 다가서지 못하도록 해줄 것이다. 정식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으므로 그는 딸에 대한 면접권을 가지고 있지 못할 것이다. 더욱이 그가 KGB요원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녀의 변호사는 그녀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다. 이럴 때 로이드 숙부가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던 그녀의 숙부는 아마 가장 좋은 방법을 알려주었을 텐데. 메그는 콘이 KGB에서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전혀 모르지만, 그가 자신의 생활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곳에서 은퇴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함께 있을 때 한번도 정치적인 토론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목말라 있었으므로 언제나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만났으며, 그들의 대화는 글자 그대로 연인들의 대화였다. 마침내 그녀와 결혼하려는 그의 전술이 실패로 끝나고 그녀가 러시아를 떠나게 되자 그는 아마 애나를 공략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아이가 커서 아빠를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그가 딸을 보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그는 그가 자신의 조국을 무척 사랑하며 그 이데올로기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방법은 단 한, 애나를 데리고 러시아로 돌아가려 할 것이 분명했다. 「우리 셰퍼드들은 어디에 있나요, 아빠?」 「너와 네 엄마를 위해 사둔 집에 있단다」 「와! 엄마! 아빠가 우릴 위해 집을 샀대요. 어디예요, 아빠? 지금 갈 수 있나요?」 애나는 신이 나서 떠들며 손뼉을 쳤다. 「오늘밤에는 엄마의 계획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콘이 타일렀다. 메그는 아무 말 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그녀는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길목 바로 옆에 서 있던 밴을 들이박을 뻔했다. 아빠의 사랑에 굶주린 아이가 잔뜩 이끌릴 수밖에 없은 화제를 끄집어내다니! 그러나 애나 앞에서 그와 다툰다면 이상해지는 것은 오히려 메그 쪽일 것이며, 애나가 슬퍼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한번은 겪어야 할 슬픔이다. 내일 애나가 일어났을 때, 아이는 아빠가 영원히 떠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메그는 콘에게 대항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일단 아파트에 들어간 다음 이웃집으로 가서 핑계를 꾸며대고 전화를 빌려 벤 에버리 변호사와 통화를 할 참이다. 하룻밤을 꼬박 새우는 일이 발생해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메그는 자신의 주차 장소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애나는 차에서 내리면서 여전히 재잘거렸다. 「빨리요, 아빠! 내 수족관을 보여 줄게요.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어도 좋아요」 「그래. 하지만 먼저 엄마를 도와주자꾸나」 그는 뒷문을 닫고 메그를 위해 운전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메그는 그의 배려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무엇이든 계산되지 않는 행위란 그에게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눈길을 피하며 그녀는 차에서 내려 팔짱을 낀 채 앞장서서 3층짜리 현대식 아파트를 향해 걸었다. 애나는 한 손에 책을, 다른 한 손으로 아빠의 손을 잡고 종종걸음을 옮겼다. 아이는 자신의 세계를 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다. 「멜라니는 바로 여기에 살아요!」 그들이 이층으로 올라섰을 때 애나가 큰 소리로 말했다. 「네 친구니?」 「네. 나하고 제일 친해요. 가끔 싸우기는 하지만요. 그애가 나더러… 아빠 없는 애라고 그랬어요」 「나중에 날 소개시켜 주면 그애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될 거다」 애나는 깡충깡충 뛰며 좋아했다. 「걔가 그러는데, 우리 엄마에게 애인이 있었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애인이 뭐예요, 아빠?」 이건 메그도 처음 듣는 소리다.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콘은 애나를 안아올렸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아주 중요한 거란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사랑해서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이가 되면 그들은 결혼을 하고 애인이 되는 거야. 그래서 네가 태어난 것이고.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도 널 더 사랑하고 있지」 「그렇지만 엄마와 아빠는 결혼하지 않았잖아요?」 「그것은 우리가 다른 나라에 살고 있어서 그렇게 된 거지. 아주 복잡한 문제가 있었거든. 그렇지만 결혼을 하려고 내가 이곳에 왔잖니?」 메그는 숨쉬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그럼 내일 결혼하면 안돼요?」 콘이 껄껄 웃었다. 「다음주에 아빠 집에서 하면 어떻겠니? 우선 엄마를 도와 짐을 싸서 이사를 먼저 해야 할거야」 이웃사람들은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에 놀라 그들을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들은 대부분 크리스마스 쇼핑을 마치고 선물꾸러미를 한아름 안은 채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메그는 걸음을 빨리 했다. 문앞에 매달아 놓은 빨간색 리본이 달린 둥그런 크리스마스 장식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콘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 때문인지 열쇠를 다루는 메그의 손이 떨렸다. 「내 방으로 가요, 아빠. 수족관이 거기에 있거든요」 애나가 자신의 방이 있는 곳을 가리키자 콘은 그녀를 안고 아담하면서도 깨끗이 정리된 거실을 가로질렀다. 불이 켜져 있지 않은 크리스마스 트리가 구석에 서 있었다. 약간 기울어졌으나, 그래도 고르고 고른 나무였다. 애나가 그의 팔에 안긴 채 벽 스위치를 올리자 여러 가지 색깔의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메그는 승리에 젖은 그의 눈길을 무시하면서 현관문을 닫았다. 콘과 애나는 거실 저쪽으로 사라지고, 그녀는 코트를 벗어 의자 위에 걸쳐놓았다. 지금이야말로 변호사와 조용히 통화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로슨 부인은 거실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곳에 사는 은퇴한 음악가로 바이올린 레슨을 하기 위해 저녁 시간에는 대개 집에 있었다. 애나는 그녀의 가장 어린 제자로 지난 해 연주솜씨가 놀랄 만큼 향상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메그는 로슨 부인이 전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고, 전화를 거는 동안 메그의 아파트 문을 살펴 달라는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게 되기를 빌며 아파트를 나섰다. 「로버츠 양?」 메그는 캐주얼한 옷에 점퍼 차림을 한 남자와 여자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간이 떨어질 뻔했다. 그들은 그녀 앞을 가로막고 섰다. 갑자기 그녀가 들어오는 길목에 주차되어 있던 낯선 밴이 떠오르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콘은 항상 동행자들을 데리고 다녔다. 그렇다면 다른 KGB 요원이란 말인가? 냉전시대가 와해된 이후 그들은 MB 라고 불렸으나 극심한 혼란상태의 러시아에서 그들은 아직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정보를 빼내기 위해 미국에서 활동중일 가능성도 있다. 그런 메그의 마음을 일고 있기라도 하듯 그들은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CIA. 순간 메그는 비틀거렸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십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메그를 부축했다. 「우리는 당신이 갑자기 나타난 루덴코 씨 때문에 몹시 놀라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으니 안으로 들어갈까요?」 메그는 화가 치솟았다. 그녀는 여자의 손을 뿌리쳤다. 「나더러 당신네들이 CIA에서 나왔다는 소리를 믿으라는 말인가요? 난 MB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알아요. KGB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죠! 필요하다면 자신의 가족들도 이용하는 사람들이에요」 뿔테안경을 쓴 그 남자는 50세 전후로 보였다. 그는 마치 선심을 쓰는 듯한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로버츠 양, 제발 협조해 주십시오. 우리가 하는 말을 들으시면 기분이 훨씬 나아질 겁니다」 메그는 코웃음을 쳤다. 「물론 내가 거절하면 당신은 총으로 날 위협하겠죠. 하지만 내 딸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그녀는 돌아서서 아파트로 다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콘이 웃는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안쪽 욕실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애나는 지금 샤워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메그는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날 미치게 만드는군요. 바로 당신네들 말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콘을 가리켰다. 「…만약 당신이 조국을 저버렸다면 당신은 매국노에요. 그리고 아무 죄 없는 사람들과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고 어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가서 당신이 좋아하는 전쟁놀음이나 즐기는 게 어떤가요? 물론 나중엔 다 죽어 버리고 말겠지만」 콘은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킷과 넥타이를 풀어 벗어 놓은 코트 위에 올려놓았다. 마치 자기 집인 양 몸놀림이 자연스러웠다. 「애나는 샤워를 하고 나서 우리와 저녁을 먹는 것으로 기대하고 있소. 만약 당신이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아이가 놀랄 거요. 그러니 여기 있는 월트와 레이시 보면은 당신이 일하고 있는 자동차 판매상에서 돈 것으로 해둡시다. 어떻소?」 그는 이미 유리한 고지를 확보했다. 「그렇지 않으면 애나에게 당신이 급한 일로 사무실에 갔다고 말할 거요. 여기에 방이 비어 있는 아파트 열쇠가 있소. 어디서 말을 할 것인지는 당신에게 달렸소」 「엄마? 아빠?」 애나가 캥거루가 그려진 파자마 차림으로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러나 낯선 사람들을 보자 얼굴의 미소가 사라지면서 메그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메그는 애나를 꼭 껴안았다. 「얘야, 이분들은 엄마가 일하는 사무실에서 오신 분이란다」 메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나이 든 여자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애나. 우린 널 처음 보지만 월트와 나는 얘기는 많이 들었단다」 「정말 귀여운 아이구나. 엄마와 아빠를 많이 닮았군」 남자가 말했다. 「우리 아빠는 호두과자 왕자를 닮았어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호두까기 인형> 발레 공연을 보러 갔다며? 나도 그걸 무척 좋아한단다. 재미 있었니?」 「네. 특히 왕자님이 멋있어요!」 사랑스런 딸의 모습을 바라보는 콘의 눈이 조금씩 젖어들었다. 메그는 그의 그런 모습 역시 위선이라고 단정짓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우린 잠시 동안 엄마와 할 얘기가 있단다. 괜찮겠지?」 남자가 말했다. 「네. 아빠와 내가 저녁을 차릴 거예요. 우린 마카로니를 먹기로 했어요. 아빠가 그러는데 러시아에서는 마카로니를 먹지 못한대요」 「그래 맞아, 애노슈카」 콘이 즐거운 듯 쾌활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빨리 먹고 싶구나. 자, 나하고 가자」 그는 메그에게서 아이를 받아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여자가 미소를 지었다. 「좀 앉아도 될까요?」 「아니오. 할말만 하고 나가 주세요」 메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신경질적이었다. 아까 극장에서 콘을 만난 다음부터 짓눌러오는 공포가 시시각각 정도를 더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히스테리 발작이 일어나기 일보직전인 셈이다. 솔직히 말해 그녀는 아파트 전체가 다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모두들 서 있는 상태에서 남자가 말을 꺼냈다. 「루덴코씨는 소련에서부터 탈출한 지 이미 5년이 지났습니다, 로버츠 양」 메그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KGB예요. 그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아요」 그의 눈썹이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그랬소」 「만약 그랬다면 애나를 데려가기 위해서겠죠. 그는 다시 돌아갈 거예요!」 「아니에요」 여자가 말을 받았다. 「그는 오는 10월에 미국 시민이 됩니다. 그는 돌아갈 수 없어요」 「당신들 말을 어떻게 믿죠?」 그녀는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퍼지는 느낌을 받았다. 서 있기가 힘이 들었다. 「게다가 이제 우리 정부는 정보를 얻기 위해 러시아 망명자들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잖아요? 난 당신이 여기서 나가 주었으면 좋겠어요. 나와 애나의 인생에서 사라져 달란 말이에요!」 「망명자가 KGB 고급관리의 경우에는 얘기가 다릅니다」 남자가 말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납치된 미국인의 행방에 대해 알려주니까요」 여자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야비한 전술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죠. 그것이 소련을 탈출한 이유 중의 하나예요」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만약 콘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아직까지 모스크바 감옥에서 못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 정부가 전혀 풀지 못했던 새로운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주었습니다」 여자가 말을 이었다. 「행방을 알지 못해 애태우던 가족들을 도와주었죠」 「당신은 수년 전에 사라진 공군조종사를 기억하나요? 그의 늙은 어머니는 네브라스카에 살고 있었죠. 그는 15년 전에 러시아에서 행방불명되었어요」 남자가 말했다. 메그는 한때 온 언론에서 떠들어대던 그 가슴 아픈 사건을 기억한다. 미 국방부로부터 그녀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흐느끼면서도 이제야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노라고 말하던 그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 조종사가 루블리안카 감옥에 있다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루덴코 씨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메그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루덴코에 관한 일이면 무엇이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유 없는 행동은 하지 않는 인물로 그녀에게 <호두까기 인형> 책을 선물한 것도 따지고 보면 전략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메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당신들도 그와 한패죠? 난 거기에 말려들지 않을 거예요. 이젠 내 집에서 나가요.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요」 「그는 탈출한 다음 신변안전을 위해 숨어 있어야 했어요」 여자는 메그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과 당신 딸의 안전을 위해서 지난 5년간 외부접촉을 모두 끊고…」 「그리고 그는 피할 수 없는 공공장소에서 감히 내 딸에게 접근을 해서 아이의 마음을 들뜨게 했죠. 그는 아이가 커서 아빠를 그리워할 때까지 기다린 거예요」 메그가 비꼬았다. 남자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위험이 가시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던 거죠. 루덴코 씨는 KGB와 그들의 전략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썼고 그 중 한 권이 다음해 봄에 출간될 예정이오. 물론 가명으로 말이오. 아마 베스트셀러가 되겠죠. 그러면 그는 재정적으로도 당신과 애나를 부양할 수 있게 되는 거요」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당장 나가요!」 「진정이 되면 상원의원인 스트릭랜드 씨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그에게 물어보세요. 그러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스트릭랜드 상원의원이라고? 순간 미주리 출신의 나이가 많은 상원의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메그가 알고 있는 한 누구도 그의 인격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깨끗한 사람이었다. 「당신은 아마 그가 1988년 이래로 상원에서 국제관계를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겁니다. 그는 당신이 소련에 머무는 동안 루덴코 씨와 사랑에 빠져 아기를 가진 일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의 상황에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두세요. 그는 당신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어요」 메그는 피가 얼굴로 확 몰리는 것을 느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KGB뿐 아니라 CIA까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녀는 소름이 돋았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도 없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여자는 메그를 찬찬히 살폈다. 「로버츠 양, 당신이 느끼는 공포심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루덴코 씨는 우리에게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부탁을 한 거예요. 그는 이제 미국 시민이며 자기 딸과의 관계를 되찾고 싶어합니다」 「그 정도면 당신들 의무는 다한 거예요」 메그는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 확 열어젖혔다. 두 사람을 한시 바삐 내보내고 콘의 영향력이 더 미치기 전에 애나를 자도록 해야 한다. 집안 쪽에서 들려오는 애나의 깔깔거림과 콘의 낮은 웃음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더욱 성급하게 만들었다. 메그는 CIA에서 나왔다는 두 사람이 멀어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문을 닫고 살금살금 걸어서 로슨 부인의 벨을 눌렀다. 제발 콘이 나와 보지 말아야 할 텐데. 아무런 응답이 없자 메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었다. 아래층 개럿의 집에 갈까도 생각했으나 문을 열어 둔 채 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갑자기 애나가 울먹이는 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막았다. 문을 닫고 자신의 아파트로 다시 들어서는데, 애나가 콘에게 그 사람들 때문에 엄마가 다시 일을 하러 가야 하느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메그는 얼른 애나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엄마!」 애나는 그녀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어디에 있었어요? 저녁준비가 다 되었어요」 「엄마는 손님들을 배웅하고 오셨을 거야. 그렇지 않소?」 콘이 그럴싸한 이유를 둘러댔다. 그의 깊고 푸른 눈동자는 메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고 말하는 듯했다. 「빨리요, 엄마. 우리 배고파요」 애나는 메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콘은 느긋한 얼굴로 그녀들 뒤를 따라왔다. 변호사와 연락을 취하는 일은 아무래도 저녁식사 후로 미루어야 할 것 같았다. 콘은 애나가 의자에 앉는 것을 도와주었다. 식탁에는 치즈가 얹힌 마카로니와 브로컬리 그리고 우유가 놓여 있었다. 「먼저 기도를 해요. 아빠 차례예요」 애나가 주장했다. 「그거 영광인데?」 그는 애나의 고사리손을 꼭 쥐었다. 기도를 하는 도중에도 메그는 똑같이 닮은 아버지와 딸을 지켜보느라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는 아름다운 러시아어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 사랑하는 여자와 아이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데 대한 감사와, 러시아를 비롯해서 세계 여러 곳에서 가질 수 없는 양식을 주신 데 대한 감사기도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 크리스마스를 세 가족이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드렸다. 아멘. 「뭐라고 말한 거예요?」 애나는 마카로니를 한 숟가락 가득 떴다. 그는 고개를 들고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와 네 엄마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단다」 「멜라니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 바보 같은 짓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나는 그애에게 하느님이 아빠를 우리와 함께 살도록 미국으로 보내 주셨다고 말할 거예요. 사랑해요, 아빠」 콘에게 향하는 애나의 달콤한 미소. 메그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의 기도내용을 들을 때, 메그는 콘의 모든 행동이 계획적이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오랜 기간 동안 그런 생활을 하면 그것도 제 2의 천성이 되는 모양이다. 「우리가 마카로니를 제대로 만든 거요? 애나가 많이 도와주었소. 우리 딸은 일류 요리사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피곤할 거예요」 메그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디저트는 생략할 테니 바로 침대에 들거라. 오늘 피곤했지?」 애나는 놀랍게도 아무런 반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야 놀러갈 수 있다고 말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지? 하느님 맙소사! 메그의 화난 눈길이 콘에게 쏠렸다. 「내일은 일요일이니 당신과 애나에게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보여 주기에 안성맞춤이오. 여기서 두 시간 정도 가면 되오」 메그는 숨을 들이마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더 이상 유혹의 손길이 뻗치기 전에 애나를 그에게서 떨어뜨려 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애나, 저녁을 다 먹었으면 세수하고 이를 닦으렴」 「난 아빠가 도와주었으면 해요. 그리고 나를 침대로 데려다 주기로 약속했는걸요? 내게 러시아 어로 쓰여진 <호두까기 인형> 책을 어떻게 읽는지 가르쳐 주기로 했어요. 또 나는 내 책을 읽어드릴 거예요」 「.그렇다면 난 식탁을 치워야겠구나」 메그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는 그의 눈길을 무시한 채 애나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접시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부녀는 부엌을 나갔다. 그녀는 자동세척기에 식기들을 넣고는 그녀의 상사가 선물로 준 빨간색 포인세티아의 물을 갈아 주었다. 집안은 조용했다. 그녀는 신고 있던 구두를 벗고 부엌의 전등을 껐다. 그리고 발소리를 죽인 채 거실을 지나 애나의 방으로 다가갔다. 책을 읽는 애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콘은 간간이 애나가 읽고 있는 단어와 뜻이 같은 러시아 말을 가르쳐 주었고, 애나의 서툰 발음에 둘 다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는 애나를 사랑스런 애노슈카라고 불렀다, 그러기를 한참.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메그는 자신이 그의 팔을 베개삼아 누워 있었던 때를 기억하고 몸을 떨었다. 그때 그는 나를 내 사랑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모드 거짓말이었다니…. 그녀는 지독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는 살금살금 애나의 방안으로 들어가 수족관과 서랍장을 지나 침대로 다가갔다. 애나는 귀여운 곰 푸우가 수놓아진 이불 아래에 잠이 들어 있었고 그 옆에 콘이 누워 있었다. 주위에는 <호두까기 인형>을 비롯해서 여러권의 책이 흩어져 있었다. 아직 불이 켜진 스탠드에서 흘러나온 빛 속에 콘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눈과 입 주의에 생긴 잔주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하던 중 그녀는 아직도 그에 대해 연민의 정이 남아 있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부인했다. 그의 얼굴은 마지막 보았을 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세월의 흔적마저 연륜으로 쌓여 그의 모습은 전보다 더 매력적으로 다. 그러나 그런 것에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는 애나를 훔쳐가기 위해 온 사람이니까. 잠시 잊은 게 있었다. 바로 지금, 콘이 잠든 이때가 변호사 벤 애버리에게 전화를 걸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물론 애나가 매우 실망할 테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콘이 자신의 딸을 데리고 아파트에서 한발자국이라도 나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메그는 조심스럽게 걸어나와 부엌으로 다시 들어가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때 뒤쪽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돌아보던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문가에 콘이 서 있었다. 잠들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그가 애나의 방에서 자신의 모습을 모두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자, 메그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침대에 누워 있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살피던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애나에게는 그가 호두과자 왕자처럼 보일지 몰라도 매그에게는 아름답지만 위험스러운 악마일 뿐이다. 「당신이 누구에게 전화를 걸려는지 몰라도 나를 여기서 끌어내려면 먼저 날 죽여야 할 거요. 난 내 딸과 함께 있기 위해 왔소. 물론 당신은 나보다 더 권리가 있는 그애의 엄마지만 말이오」 매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래요. 그런데 당신은 오늘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아이에게 접근했어요. 어떻게 그런 짓을…? 당신이 애나에게 다정한 아빠처럼 굴며 말한 것들…. 그것은 우리의 생활을 완전히 뒤집어놓을 거라구요!」 「난 그러기를 바라오」 그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메그는 주먹을 꼭 쥐었다. 「그애를 러시아로 데려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을 거라구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울부짖었다. 「당신의 상상은 완전히 과대망상이오. 난 그애를 납치할 생각이 전혀 없소. 만약 그런 짓을 하면 애나는 평생 나를 미워할 거요. 그리고 예전의 콘스탄틴 루덴코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오. 만약 내가 러시아와 손톱끝만큼이라도 접촉을 하면 난 영원히 자유로운 몸이 되지 못하오」 그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떠올랐다. 「난 이 모든 것을 계획하느라고 6년이라는 세월을 고립된 채 지내왔소. 우리가 다시 함께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이오, 메기」 3 메기. 그는 처음으로 키스를 하면서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갑자기 그녀는 철없던 스물세 살로 돌아가 모스크바 공항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호텔로 향하는 그의 검정색 메르세데스 벤츠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러시아에 도착하기 전부터 콘스탄틴 루덴코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자신이 사랑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얼음장같이 차가우면서도 매력적인 그 KGB 요원은 그녀를 학교에서 숙소까지 매일 데리고 다녔다. 사실 그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첫 번째 여행에서 그녀를 구해 주고 좋아하는 책을 남몰래 넣어 주던 그 순간부터 자라오던 것이었다. 콘의 말은 곧 법이었고, 그의 작은 움직임에도 모두들 꼼짝하지 못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편안하게 진행되었다. 게다가 그가 매일 새벽 서너 시쯤 호텔로 전화를 걸어 그녀가 안전하게 있는지 확인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더욱 기뻤다. 러시아에서 외국인이 긴장을 풀고 있다가는 곧 범죄에 휘말리게 되고 끝내는 감옥에 가는 일이 허다했다. 그녀는 이미 끔찍한 경험을 한번 했으므로 다시는 그런 일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메그는 밤에 걸려오는 그의 전화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그녀의 방을 함께 사용하는 프록터 부인은 일리노이 주 한 대학에서 러시아 어로 석사학위를 받은 중년부인이었다. 메그는 자신과 루덴코의 전화내용을 그녀가 모두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했다. 그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아는지 전화를 걸어 매우 사무적인 내용만을 물어보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메그는 그런 식으로 전화를 끝내기가 싫었으므로 그에게 자신들의 학생들이 낸 숙제에 대해 물어보고 토론을 하면서 가능한 오랫동안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며칠이 지난 후 그와의 통화시간이 15분에서 20분 사이로 늘어났다. 가끔 사적인 이야기를 꺼냈으며, 그때 그녀는 그의 이름이 콘스탄틴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메그는 그를 콘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에 대해 좀더 많이 알고 싶었다. 밤에 하는 통화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으나 같이 있는 프록터 부인 때문에 방법이 없었다. 나이 든 프록터 부인은 메그의 행동에 분개해서 그녀가 난잡한 성격을 가졌다고 단정짓고는 불쾌한 심사를 표현했다. 메그는 그런 부인의 불친절한 행동을 오래지 않아 쉽게 알아차렸다. 콘은 매일 그녀를 호텔로 데려다 주었으나 별로 말이 없었다. 메그는 그것 역시 견딜 수 없었다. 두 주일이 지나자, 메그는 그와 좀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싶어졌다. 마침내 금요일, 그가 호텔 앞에 차를 세웠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를 바라보았다. 눈에 들어온 그의 머리칼이 약간 길다고 느꼈다. 그리고 나서 결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시다면 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호텔 측에서는 내가 늦게 저녁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으면 거기로 갔으면 해요. 조용히 말할 수 있는 데로요. 지금까지 항상 호텔에서만 먹었는데, 나는 이곳에 있는 동안 이 도시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요」 그가 약간 이마를 찡그렸다. 「무슨 문제가 있소?」 그는 아무런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제 숙소 때문이에요」 「당신네들 미국인의 취향에 맞지 않아서인가요?」 「아뇨,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난 한번도 다른 사람과 방을 같이 써본 일이 없어요. 왠지 프록터 부인이 무섭고… 대하기가 힘들어요. 우린 나이 차이도 많이 나거든요. 그러니까 혼자 방을 사용할 수는 없을까요? 작아도 상관 없어요. 그리고 방세의 차액은 지불하겠어요. 그저 나만의 공간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당신과 하룻밤 내내 전화통화도 가능할 거예요…. 그는 고개를 갸우뚱한 채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알았소. 안으로 들어갑시다. 당신이 저녁을 먹는 동안 내가 알아보겠소」 메그는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적어도 그는 안된다고 잘라 말하지 않았다. 기대 이상의 성과에 흥분한 채 그녀는 차에서 내려 그와 함께 호텔로 들어갔다. 그가 프런트 데스크의 직원과 말을 나누는 동안 그녀는 얼른 이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립스틱을 덧바르고 향수를 조금 뿌렸다. 그런 다음 우아한 갈색 드레스를 입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머리에 브러시를 했다. 그녀의 오직 소망은 처음으로 그와 함께하는 저녁식사에서 자신이 매력적으로 보였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실망스럽게도 매그를 맞은 것은 호텔 직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3층에 있는 방을 사용할 수 있으며 저녁을 들고 난 후 짐을 옮기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콘의 즉각적인 도움이 무척 고마웠으나 인사도 않고 그냥 떠나 버린 그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얼굴에 드러난 실망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녀는 식사를 하지 않은 채 다시 방으로 올라왔다. 프록터 부인은 식탁에 앉아 영국에서 온 다른 선생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주제는 메그에 관한 소문들이었다. 메그는 프록터 부인이 모든 사태를 알아차리고 질문을 퍼붓기 전에 자신의 짐을 모두 싸서 방을 나왔다. 그녀가 옮겨간 방은 먼저 것보다 더 컸다. 램프가 달린 커다란 책상이 있어서 학교 일을 하기에 좋았다. 다시 한번 콘의 배려에 감동이 되었다. 밤에 전화가 오면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기가 지루할 것 같았다.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메그는 호텔 직원이겠거니 생각하며 문 쪽으로 가는데 문이 저절로 열렸다.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콘이었다. 그는 한번도 그녀의 방에 들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매우 놀랐다. 서로 눈길이 마주쳤을 때 메그는 뜨거운 무언가가 자신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방이 마음에 드오?」 그가 물었다. 메그는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네… 정말 근사하군요. 고마워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클럽이 하나 있는데 함께 가지 않겠소? 이곳의 밤을 볼 수 있을 거요. 당신만 좋다면 나는 한 시간쯤 시간을 낼 수 있소」 「좋아요」 「밤에는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도록 해요」 메그는 레인코트를 입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벽장으로 다가섰다. 「차에서 기다리겠소」 메그는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클럽이라…. 아마 그의 팔에 안겨서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얼른 준비를 마치고 두 층이나 되는 계단을 나는 듯이 뛰어내려와 로비로 들어섰다. 단 일 초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굳은 자세로 차 옆에 서 있다가 그녀가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보자 즉시 문을 열어 주었다. 아무 말 없이 그는 시동을 걸고 자전거와 시내전차들이 어지럽게 달리는 길로 차를 몰았다. 메그는 수로와 다리가 많아 <북구의 베니스>라고 불리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좋아한데다가 바로 옆에 마음을 설레게 하는 남자가 앉아 있으니 도시의 밤풍경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와 단둘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콘은 도시의 길을 훤히 알고 있는 듯했다. 몇 개인가 좁은 골목을 통과한 다음 오래된 빌딩들이 밀집해 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그곳에는 이미 고급차들이 여러 대 주차되어 있었다. 메그는 그가 차에서 내려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 주러 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항상 그래왔던 일이었으나 이번에는 조금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허리에 그의 팔이 가볍게 얹히는 것을 느꼈다. 문으로 들어서자 60년대풍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에 약간 미소가 감돌았다. 딱딱한 자세의 전형적인 KGB 요원에서 그녀의 마음을 앗아간 매력적인 남자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놀랐소?」 「그래요」 그녀가 미소로 답했다. 「우리는 당신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재미없는 사람들은 아니오」 메그는 그의 도움을 받아 코트를 벗어들고 화려하게 장식된 홀을 지나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여러 쌍의 남녀가 밴드의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마치 뉴욕의 나이트클럽에 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들은 그곳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콘은 웨이터의 귀에 대고 무엇인가 지시를 내린 다음 그녀를 의자에 앉도록 하고 자신은 그 반대편에 앉았다. 「당신이 날 믿는다면 당신 대신 내가 주문을 하겠소」 메그가 눈웃음을 쳤다. 「물론 당신을 믿죠. 당신은 날 끔찍한 유치장에서 빼내 준 사람이고, 덕분에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마웠어요」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순간 그녀는 그를 단단히 싸고 있는 KGB의 껍데기 아래 내재된 인간적인 모습을 보았다. 비록 잠깐이었으나 그의 차가운 푸른 눈에 동요가 일었던 것이다. 「춤추지 않겠소?」 그는 메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메그는 그를 따라 일어서서 무대 위로 나갔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순간이었으나 막상 그의 손길이 닿고, 그의 강한 체취가 느껴지자 그녀는 두려워졌다. 그는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이상 끌어당기거나 하지 않았다. 방안에 있는 대부분의 남자들처럼 그의 춤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세곡을 연이어 춘 다음 테이블로 돌아와 보니 샴페인 칵테일과 아이스크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맛이 잘 어울리는데요?」 그녀는 탄성을 질렀다. 목이 말랐던 메그는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그가 어떻게 저런 냉정한 태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지 감탄했다. 그녀는 그의 딱딱한 자세를 누그러트리고 싶었다. 「우리 또 춤출 수 있나요?」 「시간이 없소. 당신이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동안 코트를 가지고 오겠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얼음같이 차가웠다. 메그는 그런 식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으나 별 도리가 없었다. 그는 의무에 매인 몸으로 꽉 짜여진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이나 빼낸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가겠소?」 메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입구를 꽉 메운 사람들을 헤치며 밖으로 나섰다. 아까와는 달리 그는 그녀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았으며,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이 KGB요원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가 다시 깨달아서 그런 것일까? 어쩌면 그녀에게 이것은 한순간의 착각이며 다시 그런 것을 바라지 말라는 뜻의 경고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차에 올랐다. 메그의 호텔로 가는 동안 차 안에는 무겁고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어서 호텔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거의 목적지에 다다랐을 무렵, 그는 갑자기 핸들을 꺽어 도시 외곽을 향해 질주했다. 「콘? 어… 어디로 가는 거죠? 이건 호텔로 가는 길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메그는 긴장이 되었다. 「돌…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그는 들은 척도 않고 계속 차를 몰았다. 마침내 그는 도로를 벗어나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고요함 속에서 들리는 것은 그녀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뿐이었다. 바깥을 내다보니 도로 옆으로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밤의 아름다운 풍경을 무척 좋아하는 그녀였으나,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올 상황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 앉아 운전대를 꼭 쥐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메그는 그런 숨막히는 침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자동차 계기판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 속에 그의 윤곽이 드러났다. 「내가 두렵소?」 「아니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으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마 두려울 거요. 지난 6년 동안 당신은 사랑스럽고 천진난만한 소녀에서 매력적인 여자로 완전히 바뀌었소. 내 동료들은 당신을 돌보는 나를 매우 부러워하오」 메그는 당황했다. 「나… 나도 당신이 옆에 있어서 좋아요. 당신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 걱정했거든요」 「무슨 말이오?」 메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보여 준 친절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요. 당신을 찾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죠. 그리고… 당신을 더… 잘 알고 싶었어요」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은 여전히 정직하군요」 메그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을 화나게 한 건가요?」 「그 반대요. 만약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고백하고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한다면 어떻겠소? 당신을 놀라게 한 거요?」 메그는 떨리는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아니오」 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후 내가 원하던 것이 바로 그거예요」 그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내게로 와요」 콘은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매기…」 그는 그녀의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는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열정적인 키스는 그에 대한 그녀의 두려움을 없애 주었다. 깊게 울리는 희열 속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그들 옆으로 다른 차가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 그들은 서로에게 열중해 있었다. 콘은 마침내 고개를 들고 그녀를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또 한 대의 차가 그들 곁을 지나갈 때 그는 차에 시동을 걸고 도로로 들어섰다. 「콘, 나…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렇게 헤어지는 것은 싫어요. 제발 지금 돌아가지 말아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소, 메기」 「당신 직업 때문인가요?」 「그렇소」 「그럼 언제 다시 함께 있을 수 있죠?」 「내가 어떻게 해보겠소」 「빨리 그런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오늘밤에는 날 건드리지 마시오. 제발 부탁이오」 콘의 감정도 그녀 못지않게 격렬했다. 그의 침묵은 평상시와 달리 그들의 관계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호텔에 도착하자 콘은 전처럼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메그는 혼자서 차에서 내려 호텔 안으로 들어갔고, 그는 그녀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차를 출발시켰다. 메그는 계단을 오르면서 혼자 지낼 수 있는 방이 생긴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적어도 그날 밤의 행복했던 시간을 혼자 되새길 수 있으니 말이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침대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아드레날린이 그녀의 혈관 속에 확 퍼져 있는 듯했다. 침대 옆에 놓인 전화기를 바라보며 그에게서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전화 벨이 울리자 그녀는 얼른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콘?」 그녀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전화를 받으면 안되오」 그가 주의를 주었다. 「미안해요. 미처 생각을 못했어요」 「내일은 토요일이오. 주말을 보낼 수 있도록 따뜻한 옷가지 몇 개 챙기고 기다리시오. 10시에 가겠소」 그리고 전화는 끊겼다. 메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이제 잠들기는 다 글렀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시계만 쳐다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다음주에 있을 수업지도안과 숙제를 검토했다. 그 일이 모두 끝나자 학생들이 낸 시를 읽고 각각 등급을 매겼다. 그나마 할 일이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녀는 아침 9시까지 일을 마치고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다. 그리고 9시 반에 방을 나와 아침을 먹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당에 와 있는 몇몇 아는 선생들에게 눈인사를 하면서 그들 중에 프록터 부인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각 10시에 콘이 나타났다. 메그는 거대한 자석에 이끌리듯이 그를 향해 빠른 걸음을 옮겼다. 그의 태도는 메그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이래 그녀를 돌보아 주던 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KGB요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메그는 달랐다. 콘의 시선 아래에서 그녀는 즐거운 감정을 숨기거나 그에게 빨려 들어가는 마음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콘 역시 잠을 잘 이루지 못했는지 약간 지친 얼굴이었으나,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였다. 메그는 짐을 트렁크에 싣고 차에 올랐다. 그들은 어젯밤에 갔던 도로를 따라 교외로 향했다. 한적한 도로 덕분에 차는 금방 숲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메그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같이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흰 와이셔츠와 짙은 색 양복을 입지 않은 그의 모습을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메그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난 한번도 남자와 이렇게 멀리 나와 본 적이 없어요. 당… 당신은 어떤가요? 여자와 이런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있어요?」 콘은 그녀에게 일별을 던지더니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렇소」 「괜히 물어보았군요. 그렇지만 이것은 내게 새로운 경험이에요」 그의 나이는 이미 30대였으므로 여자를 사귄 경험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지만 당신이 상상하는 것만큼 많은 여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내 직업상 여자들과 조금 알고 지냈을 뿐이오. 외국 여자에게 마음이 끌린 것은 이번에 처음이오. 사실 당신에 대한 내 감정을 알고… 당신과 단둘이 있기를 원하는 내 마음을 알고서 나도 무척 당황했소」 메그는 매우 기뻤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다른 것은 물어보지 않을게요」 운전대를 잡은 콘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당신은 남자와 사랑을 나누어 본 적이 없을 거요」 그의 말은 물어보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모두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그래요. 그것이 당신에게 중요한 일인가요?」 「그렇소」 메그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콘이 러시아 말로 무엇인가 중얼거렸으나 알아듣지 못했다. 「자, 다 왔소, 메기」 메그는 대화에 열중해 있느라고 주변을 살필 경황이 없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 차창 밖을 바라보니 그들은 짙게 우거진 나무숲 사이에 들어와 있었고, 보이는 것은 작고 나지막한 통나무집뿐이었다. 비록 그를 원하고 있었으나,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메그는 겁이 났다. 그러나 그런 기색을 보이면 콘은 곧 차를 돌려 버릴 것이다. 메그는 그렇게 되기 싫었다. 그녀는 갑자기 차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메기? 뭘 하고 있소?」 놀란 그의 목소리가 날아와 그녀의 뒤통수를 때렸다. 「곧… 곧 돌아올게요」 「멀리 가지 마시오. 길을 잃을 수 있소」 「그러지 않을 거예요」 잠깐 동안이나마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요.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소리치며 숨이 찰 때까지 뛰었다. 메그는 커다란 나무 그루터기 위에 앉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금 행동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짓인지 깨달았다. 어쩌면 그가 자신을 싫어하게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찾는 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화가 난 듯한 목소리였다. 아마도 자신이 보호 내지 감시해야 할 여자가 몰래 빠져나가려 하고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에게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준다면…. 그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음정이 조금 올라간 상태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미안해요」 메그는 그의 가슴이 심하게 뛰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빨려들어 가듯이 그의 품에 안겼다. 「메기…」 콘의 입술에서 토해져 나오는 열정이 가득한 숨결은 그녀가 원하는 답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들고 오두막으로 들어가 발로 문을 닫았다. 그와의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서로에 대한 욕망에 취한 채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돌아가 세상의 모든 일들을 잊고 즐거움에 모든 것을 던져 버렸다. 그 순간이 지난 다음 외국인과 KGB요원이라는 관계가 떠올랐으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뿐이었다. 메그는 기억들을 떨쳐 버리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녀의 고통을 지워 버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는데, 콘이 다시 나타나 이제는 애나까지 아픈 상처 속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그녀는 성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변명이라도 해봐요. 당신은 내게 아내가 되어 달라고 말할 때도 무척 차가웠어요」 「언제 말이오, 메기?」 그가 조용히 대꾸했다. 「나는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항상 나와 결혼해 달라고 애걸했소. 그러니 그것은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이오」 그의 목소리는 메그가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그랬던 것처럼 간절하게 들렸다. 지금 그는 연극을 하고 있는 거야! 직업적이라구! 「날 놀리지 말아요, 콘! 당신은 러시아를 위해 일했던 사람이에요. 아마 나 같은 여자 여행객들을 많이 유혹했겠죠. 어쩌면 당신은 이미 많은 아이들의 아버지인지도 몰라요」 그녀는 숨이 차서 말을 잇지 못했다. 「러시아에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하며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할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왜 애나를 찾으러 온 거죠? 내가 알기로는 그곳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다고 들었어요. 원하기만 하면 여자를 골라 결혼을 하고…」 콘이 조용히 가로막았다. 「내가 선택한 여자는 바로 지금 내 앞에 있소. 그리고 아까 내 팔에서 잠든 아이가 바로 나의 딸이오」 메그는 이를 악물었다. 「당신이 날 골랐다고요? 감사라도 드려야겠군요. 내 숙부님은 중앙정보국에서 일했어요. 기억나요? 그가 돌아가신 뒤, 숙모님은 내게 KGB가 어떤 곳이며, 여행객을 선별할 때도 나처럼 미국 공무원의 친척들을 고른다고 하더군요. 당신은 책을 썼다죠? 똑똑한 남자니까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먼저 나와 가까워진 다음에, 날 희롱하고 내 나라의 배신자로 만들려고 했어요. 그러나 그게 실패로 끝나고 나는 다시 돌아왔죠. 당신은 아마 징계를 받았을 거예요. 그리고 나서도 당신은 내 뒤를 밟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아냈고, 아이를 데려갈 때를 엿보고 있었던 거예요」 메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미 통제력을 상실했다.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리겠어요! 우리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만약 내 아이를 데려간다고 사면 난 당신을 유괴범으로…」 「엄마!」 애나의 외침소리에 메그는 입을 다물었다. 애나는 인형을 꼭 껴안은 채 크리스마스 트리 옆에 서서 떨고 있었다. 창백한 아이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아빠한테 그렇게 화를 내요?」 아무 말 못하고 서 있는 메그 대신 콘이 애나에게 다가가 아이를 팔에 안고 코 끝에 키스를 했다 「엄마가 내게 화가 났단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엄마는 내가 널 데리고 러시아로 다시 돌아갈까 봐 두려운 거야」 「엄마 없이 말이에요?」 애나는 그런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메그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아무도 엄마를 떼어놓지 않을 거야」 콘이 자신있게 말하며 메그를 바라보았다. 「자, 이젠 침대로 돌아가야지. 내일 근사한 일이 생길 테니 말이다. 그리고 엄마와 나는 아직 할말이 남아 있단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잖아? 이해할 수 있겠지? 자, 혼자서 침대에 올라가서 이불을 덮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네」 애나는 앞이마에 늘어진 곱슬머리가 찰랑거리도록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간절한 소망을 가득담은 눈으로 메그를 바라보았다. 「아빠는 우릴 사랑해요, 엄마. 내일 아빠가 사는 집에 갈 수 있죠? 개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메그는 애나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쩌면 저 아이는 그렇게 간단히 그의 말을 믿는 것일까? 메그는 배신감을 느꼈다. 「나는 하니발에 살고 있단다. 미주리 주에 있지. 그곳은 마크 트웨인의 고향으로 유명한 곳이야」 그가 조용히 말했다. 메그는 화가 치솟았다. 「그럼 다음에는 마크 트웨인이 아직 살아서 그가 살고 있는 힐스트리트의 집에 친구들을 매일 초대한다고 말할 차례군요」 그녀가 비꼬았다. 콘은 애나를 다시 한번 껴안았다. 「난 그가 살았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어」 우스운 일이었다. 전 KGB 요원과 허클베리 핀의 만남이라…. 메그는 애나를 그에게서 떼어냈다. 「애나, 잘 시간이 훨씬 넘었다」 「엄마 말이 맞아」 콘이 동의했다. 「잘자라는 키스를 해주겠니, 애노슈카?」 메그는 그들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애나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이럴 수가. 불과 여덟 시간 전에는 자기 아버지의 이름조차 몰랐는데…. 메그는 침대 옆에 서서 애나가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아빠를 보내 주셨어요. 행복하지 않아요, 엄마?」 애나의 눈은 티 없이 맑았다. 메그는 침대 옆 매트리스에 무릎을 꿇고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오, 얘야. 일이 그렇게 간단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녀는 딸을 끌어안았다. 「간단한 일이오」 문 쪽에서 그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우리 모두는 곧 행복하게 될 거요」 4 콘의 손이 다가와 메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에 떨리는 몸을 애써 추스리며 그녀는 애나를 놓고 일어나 방을 나섰다. 콘은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왔다. 「당신은 지금 피곤하오, 메기. 가서 자도록 해요. 난 소파에서 자겠소. 만약 밤에 애나가 일어나면 내가 돌보아 주겠소」 메그는 그를 향해 휙 돌아섰다. 억제된 감정이 일시에 쏟아져나올 것 같았으나 막상 그의 모습을 보자 잠시 주춤했다. 그의 앞에 서면 왠지 약해지고 정신적으로도 위축되는 것을 느낀다. 거대하게 보이는 그가 예전보다도 더 위험스러워 보였다. 「왜 그러는 거죠, 콘?」 매그는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감정의 찌꺼기들을 억지로 밀어냈다. 「왜 왔죠? 나를 사랑해서 온 거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우리 둘 다 잘 알아요. 당신은 날 이용했어요! 물론 내가 허점을 보인 것은 인정해요. 당신에게 나 자신을 그대로 던져 버렸으니 당신의 계획을 도운 셈이 되었죠. 그리고 나는 내 삶의 나머지 동안 그 값을 치르며 살게 될 거구요 」 그녀는 이제껏 억제해온 말들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그렇지만 왜 나의 어린 딸을 가슴 아프게 만들려고 하죠? 당신 말대로라면 당신은 일년에 절반을 아이와 살려고 하겠죠. 난 그것을 용납할 수 없어요. 내 말 알아듣겠어요?」 콘은 아무 대답이 없다. 그는 소파에 앉아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예전에 수없이 보았던 그의 몸짓…. 그녀의 눈길이 한 때 그토록 가까웠고, 지금도 여전히 매끈하게 뻗은 그의 몸매로 향했다. 그는 이제 적이야. 메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순간적으로 떠오른 옛기억들을 털어 버렸다. 콘은 주머니에서 작은 카세트를 꺼내 대리석으로 만든 둥글고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그녀의 부모님이 남겨주신 몇 개 안되는 유품 중에서 그래도 제일 값이 나가는 물건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학교 교사였으며, 적은 수입으로 생활은 언제나 빠듯했다. 따라서 그녀가 장학금을 받지 못했더라면 메그는 러시아에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히스테릭하게 우는 소리가 거실을 메웠다.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챈 메그는 놀라서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카세트 스위치를 누른 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모스크바의 감옥이 떠올랐다. 그녀는 절망에 빠져 주먹으로 돌바닥을 치며 울부짖던 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느꼈던 분노가 다시 몰려와 그녀를 에워싸면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 아버지. 돌아가시다니요. 내 아버지가…. 난 집으로 돌아가야 해. 저들은 날 잡아둘 수 없단 말이야. 아버지…! 콘이 카세트를 껐다. 「왜 그 테이프를 가지고 있나요?」 그녀는 그의 팔을 붙들고 마구 흔들어댔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느냐구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콘은 그녀를 끌어당겨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었다. 「간수가 녹음해 온 그 테이프를 들었을 때, 그 순간까지 묻어 두었던 기억의 한자락이 나를 붙잡았소」 「무슨 기억 말인가요?」 「어느 추운 겨울날 남자 둘이 시베리아에 있던 우리 학교로 찾아왔소. 그리고 엄마가 집에서 나를 찾고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하더군. 그날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소. 그날은 내 생일이었고 아버지가 내게 썰매를 만들어 주었으니까 말이오. 나는 썰매를 학교에 가지고 갔었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소」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 덧붙였다. 「교실 바깥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그들에게 썰매를 가지러 안에 들어갔다 오겠다고 하니까 그들은 시간이 없다면서 내일 가지러 오면 된다고 그랬소. 나는 그러기 싫었지만 어머니에게 무슨 나쁜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이 되어 그대로 따라 나섰던 거요」 「그들은 나를 말이 끄는 커다란 썰매에 태우고 달렸는데, 방향이 집이 아닌 그 반대라는 것을 알았소. 내가 길이 다르다고 말하자 그들 중의 하나가 나를 움켜잡으며 국가가 곧 나의 가족이라고 말했소. 그러면서 다시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입밖에 꺼내면 내 부모님과 누이동생을 죽이겠다고 했소」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만약 얌전히 있으면 가족들에게 내가 썰매를 타고 호수를 건너다가 그만 빠져서 구할 길이 없었다고 말하겠다고 그랬소」 메그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그러나 그녀는 그의 두 눈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이 깃들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썰매를 몰고 더욱 멀리 나가는 동안 나는 내 자신에게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참아야 했소. 밤이 되자 그들은 나를 헛간에서 자도록 했소. 난 짚더미에 얼굴을 박으며 만약 울음소리를 내면 그들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소. 내가 강한 남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그들이 내게 줄 영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소. 내 조국을 위해서 말이오」 「오, 콘!」 그녀는 지금 그가 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녀는 결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고 자라온 그의 어린 시절을 위해 그의 엄마가, 누이가, 그리고 연인이 되어 그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다. 「나도 그런 일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지만 믿기지 않아요」 「나는 당신이 잡힐 때까지 그 모든 것을 잊고 있었소. 그런데 당신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아팠소. 당신의 슬픔만 무시한다면 내 힘으로 당신을 얼마든지 잡아둘 수 있었소. 당신은 법을 어겼기 때문에 벌을 받는 일은 당연했으니 말이오. 그런데 당신이 아버지를 부르고 우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내 안에서 무엇인가 무너지며 당신을 보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소」 공허하게 떠돌던 그의 눈동자가 그녀와 마주쳤다. 「그때 그 헛간에서 나는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소. 다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고, 아버지가 나를 위해 만들어 준 썰매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소.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금지되었으니까 말이오」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메그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목구멍에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그 끔찍했던 밤, 그는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어했고,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의 가방 안에 책을 몰래 넣어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방문했을 때 그녀가 인사를 하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선물이었다고 대답했다. 「저번에 물어보았을 때는 내게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이젠 이해가 되네요. 외로웠군요」 「그렇소. 난 당신이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선물하고 싶었소. 내 나라를 기억사고, 나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좋은 것을 말이오」 메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뉴욕에 도착해 세관 검사대에서 가방을 열었을 때 책이 맨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내가 그것을 가지고 싶어했다는 것을 당신이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죠」 「당신이 머물던 호텔의 직원들은 모두 KGB요원이오. 미국에서 온 모든 선생들과 학생들을 그곳에 투숙시키는 이유도 바로 그거요. 당신네들의 행동은 모두 내게 보고가 되었소. 또한 방문객들 중에서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해 동의를 표명하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도 요원들의 임무요」 메그는 그들 일행이 모스크바에 도착하던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 누군가가 자신들의 행동을 현미경을 놓고 보듯이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그럼 나를 관찰하던 사람은 내가 관심있게 보던 책이 <호두까기 인형>이란 사실을 알고 꽤 실망했겠군요. 난 정말 가지고 싶었지만 살 수 없었어요」 「그 사람이 놀란 것은 다른 것이었소. 대개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집은 것은 닥치는 대로 사고, 젊은이들은 부모의 돈을 물쓰듯이 쓰는데 당신은 달랐기 때문이었소」 「뭐가 달랐죠?」 「당신은 여느 젊은이들처럼 사랑스럽고 경계심이 없었지만 용감하고 자유로웠으며 결코 위축되는 일이 없었소. 난 그런 당신에게 호기심이 발동한 거요」 메그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고백은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은 악몽이었을 것이며 여덟 살 때부터 그는 KGB로 자라났다. 오늘밤 그가 여기서 말한 것 중의 일부는 진실일 것이다. 그러면 과연 어느 부분이 거짓일까? 순간 그녀는 자신이 어느새 그에게 몸을 기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그에 대한 연민의 감정과 항상 그녀를 지배해오던 그의 영향력을 애써 부인하며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당신의 새로운 가족은 당신을 기가 막히게 훈련시켰군요」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아까 극장에서 나와 애나를 따라오는 수법은 전형적인 KGB의 방법이더군요. 당신에게 썩 잘 어울리던데요. 안 그런가요, 콘?」 메그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냉정하게 덧붙였다. 「그렇지만 당신이 모르는 것이 있어요. 만약 당신이 애나를 빼앗아가려 들면 나는 법정에서 싸울 거예요. 나는 그애를 낳고 길렀으며, 그앤 나밖에 몰라요. 우리를 갈라놓지 못할 거예요. 절대로!」 「내가 이미 말했잖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오. 나는 우리 셋이 함께 살기를 바라오. 또 어찌되었건 그런 최후통첩을 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소, 메기? 애나는 날 믿고 있고 난 그애에게 옆에 있겠다고 약속했소. 당신은 나와 넉 달 동안 함께 보냈으니 내가 약속은 절대로 깨뜨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아뇨, 당신은 한 가지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매그는 그를 쏘아보았다. 「날 임신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난 바보스럽게 당신을 믿었어요」 「당신이나 나나 그 문제에는 조심하지 않았소? 그렇지만 우리 꼬마는 아마 어떻게 해서든지 태어나려고 했을 거요」 「아니에요, 콘. 나는 그 문제를 우연으로 돌리는 당신의 수법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예요」 콘은 답답하다는 표정이다. 「그럼 처음부터 짚고 넘어가 봅시다. 당신에게 아기를 가지게 하는 것이 내 목적이었다면, 나는 당신이 러시아 땅을 밟자마자 당신을 내 침대로 끌어들였을 거요」 메그는 그의 말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당신의 경호를 맡겠다고 자청하자 내 동료들은 그런 일을 왜 하느냐고 의아해했소. 그것은 낮은 계급의 요원들이나 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나는 요원들이 목표대상의 인물에게 접근해 침대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소. 사실 내가 당신 경호를 자청한 것은 당신을 그런 위험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소」 「왜 그랬죠?」 콘은 소파 쿠션에 몸을 기대었다. 「당신이 러시아를 첫 번째 방문했을 때 내게 남기고 간 순수한 모습 때문이었소. 6년이 지난 후 우연히 일시 체류하는 외국선생들의 명단에서 당신의 이름을 보았고, 난 그때 그 순수한 모습이 아직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소」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숨을 돌렸다. 「당신에게 변한 것은 어린 소녀에서 아름다운 여자로 성장했다는 것뿐이었소. 나는 당신이 머무는 동안 어떤 남자고 접근시키고 싶지 않았소」 「당신의 말은 믿을 수 없어요, 콘」 그러나 메그의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콘을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없다. 물론 사춘기 시절에 가까이 지냈던 남자친구들은 몇몇 있었으나 애나의 아버지가 된 남자가 주었던 감정적, 육체적인 느낌들을 주기에는 너무 어렸다. 메그는 마흔 줄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외동딸로 늦게 아이를 본 부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그들은 독실한 기독교인들로 비록 빠듯한 살림이었으나 외동딸의 학업에는 누구보다도 열심이어서 여러 가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이해하는 것만이 세계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 평화주의자들이었다. 그러한 믿음 아래 부모님은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는 그 사이에 러시아로 틀별연수를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제공한 기회 때문에, 지금 그녀가 위급한 상황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난 내 시민권과 내 생활을 포기할 수 없어요!」 「나를 위해서는 그럴 거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날 기만하고… 희롱했어요. 그리고 당신은 성공했어요」 콘의 눈길이 그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순간 우습게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모스크바 공항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신 말이 맞소. 난 당신을 얻었지. 그러나 아까 이미 말했듯이 그것은 완전하지 못했소. 데탕뜨 이전, 내 임무 중의 하나는 외국인 방문객들을 감시하는 일이었소. 만약 두 번째 방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포섭 대상으로 지목되고 특별관리를 하면서 가능한 우리 쪽으로 넘어오게 했소. 그리고 만약 세 번째로 방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남자든 여자든 반드시 억류시키고야 말았지」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감옥에 간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찾아왔고, 그것은 당신의 의지력이 대단하다는 내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해주었소. 그래서 나는 당신을 나의 보호 아래 두게 된 거요」 메그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우리의 만남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고 믿을 만큼 멍청했죠」 그녀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행운인 줄 알았어요. 당신을 다시 만나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해주고, 또 책을 선물해 주어서 고마웠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당신이 있었어요. 바로 모스크바 공항에 말이죠!」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이 나를 보호해 준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당신은 나를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데려다 주었죠. 난 그때 기사의 보호를 받는 공주가 된 느낌이었다구요. 경외심을 가지고 당신을 바라보았죠. 세상에, KGB요원에게 경외심이라니!」 그녀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콘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계속합시다. 나는 지쳤소. 잘자요, 메기」 메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는 구두를 벗고 소파에 누워 돌아누웠다. 그녀는 그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지금 뭘 하는 거예요?」 「쉬잇! 애나가 깨겠소. 난 내가 뭘 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오. 난 지금 자려고 하고 있소」 메그의 화가 폭발했다. 「여기서 잘 수 없어요! 나가란 말예요!」 콘은 몸을 조금 돌려 어깨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침대에서 함께 자고 싶다고 하면 나도 거절하지 않겠소」 「내 변호사를 부르겠어요, 콘」 「이렇게 늦게 말이오? 하지만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그는 소파가 불편한 듯 몇 번 몸을 뒤척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메그는 몸을 휙 돌려 부엌으로 향했다. 그런데 수화기가 행방불명이었다. 아까 애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가 치운 것이 분명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정해요. 당신은 안전하오. 변호사에게 전화를 하려거든 내일 아침에 하시오. 기왕이면 먼저 스트릭랜드 상원의원과 통화를 하는 것이 좋을 거요. 잘자요, 메기」 메그는 분에 못이겨 씩씩거리면서 거실로 나와 콘의 등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의 숨소리가 깊어졌음을 깨달았다. 그새 잠이 든 모양이다. 메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아이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데, 철없이 행동하는 애나를 그녀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난감했다. 만난 지 얼마되지 않는 아빠로부터 아이를 떼어놓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대체 아이를 어디에 숨겨야 하지?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지쳐 있던 그녀의 머릿속에 이혼한 한 친구의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셰릴은 아직도 한가족인 양 구는 전남편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그녀는 항상 공포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메그는 이제야 셰릴이 말한 뜻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나 메그의 경우, 만약 그녀가 사람들에게 콘과의 지난일을 털어놓고 극장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실 메그 자신도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리고 가장 두려운 사실은, 콘은 이미 애나의 마음을 앗아갔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애나에게 일년 중 한 기간을 같이 살자고 요구할 것이다. KGB요원으로 발탁되어 강제적인 방법으로 끌려갔다는 그의 고백은 메그의 두려움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는 가족들을 빼앗기고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되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오늘 극장에서의 일은, 앞으로 그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완벽한 증거물이었다. 그는 애나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콘은 속임수와 음모의 전문가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변호사나, 상원의원이나 심지어 CIA도 그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선 그녀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다음 일을 전개할 테고, 결국 그들은 법정에서 마주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가만히 있으면서 공격할 방법을 찾는 것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그녀가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을 끄자 콘의 모습은 어둠 속에 묻혔다. 이건 정말 기묘한 일이었다. 한때 메그는 그가 그녀의 소파에 누워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자신이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그가 현관문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야.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숙모님이 하신 말씀을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후회를 했다. 메그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관절염과 심장병으로 고생하던 마가렛 숙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그녀는 모스크바 감옥에 있었다는 메그의 고백을 듣고 매우 놀라워했다. 마가렛은 메그 아버지의 형인 로이드의 미망인으로 로이드 숙부는 중앙정보국에서 일했다. 그는 메그가 20대 초반이었을 때 얼음에서 미끄러져 세상을 떠났다. 로이드는 러시아 어를 공부하고 소련으로 여행을 떠나는 메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녀의 아버지와 로이드 숙부는 러시아에 대한 의견을 달리했다. 메그의 아버지는 평화주의자이며 정치과학자로서 사람들을 이해하는 기본은 바로 언어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갈라져 있는 두 세계가 언젠가는 평화적으로 협력할 시기가 올 것이라고 역설하면서, 그때가 되면 미국은 메그처럼 러시아 어를 말할 수 있는 선생들이나 대사들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로이드 숙부의 견해는 달랐다. 동생의 생각은 몽상가들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조금은 믿기 어려운 사례들을 열거하곤 했다. 메그가 숙모에게 그녀가 겪은 일들을 털어놓자, 그녀는 로이드 숙부가 살아있을 때 한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그리고 만약 숙부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국제적인 문제로 삼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 당시 메그는 숙모가 왜 그렇게 펄펄 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숙모에게 멋진 KGB요원이 그녀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으며 책을 선물했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메그가 그를 두둔하면 할수록 숙모의 분노는 깊어갔다. 마가렛은 일반인들이 알지 못했던 사례들을 그녀의 남편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그는 숙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그녀는 마가렛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냥 흘려 버렸던 것이다. 이제 늙은 부인의 헛된 망상이라도 여겼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 그녀의 주위를 맴돌게 되었다. 애나가 태어날 무렵 메그의 숙모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나서 바로 국제적인 화해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소련 내부, 특히 KGB에 관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마가렛 숙모의 말은 거의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콘은 이곳에 나타났고, 그녀의 평화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그녀는 침실로 들어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베개를 들고는 애나의 방으로 향했다. 메그는 애나 옆에 누워 아이를 팔로 감싸안았다. 애나의 뺨과 머리카락에서 콘의 체취가 묻어나왔다. 갑자기 그들이 마지막 함께 보냈던 순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사랑을 나누기 전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푸른 두눈과 자신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갈망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대 그는 메그에게 아내가 되어 함께 머물러 달라고 간청했다. 메그는 만약 그들이 결혼해서 일년의 절반은 러시아에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미국에서 보낼 수 있다면 기꺼이 결혼하겠노라고 대답했다. 미국방성과 통하는 그의 아저씨의 영향력과 러시아 내에서 콘의 지위를 이용하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메기.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길은 당신이 국적을 포기하고 나와 이곳에서 사는 방법뿐이오. 당신은 지금 가족도 없지 않소? 만약 날 사랑한다면 그렇게 해요」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알잖아요. 만에 하나 당신이 나에게 싫증을 내면 어쩌지요?」 그녀는 그의 품안에 파고들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이혼을 하자고 하면 어떻게 해요? 난 혼자가 되고, 미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요」 콘은 화를 내면서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의 반응에 놀란 메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 것 같소. 내 품에 안겨서 어떻게 결혼과 이혼을 동시에 말할 수 있는 거요? 그것이 바로 미국인들이 가진 문제점…」 「단지 내 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죠, 콘」 그녀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둘이서 나누던 마지막 밤은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메그는 샤워를 하고 공항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는 그녀의 짐을 차에 싣고 그녀를 태우고 가면서도 그녀의 모든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차가운 침묵은 그녀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가 짐을 부친 뒤 두 사람은 그녀가 탈 비행기를 향해 걸어갔다. 그것은 그가 가진 특권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거대한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승객들은 아직 탑승하지 않아 비행기 안에는 단둘뿐이었다. 「메기…」 그녀는 아직도 고통스러운 그의 목소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가지 마시오. 나와 함께 있어요. 당신을 사랑하오. 우린 당장 결혼할 수 있고 난 재산이 많소. 당신을 위해 근사한 좋은 집을 사주겠소. 함께 삽시다. 언제까지나 당신을 돌보아 주겠소」 그가 간절히 말했다. 메그는 그러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미국인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둘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당신으로부터 왜 떠나고 싶어하는지 알잖아요? 당신없이 나도 잘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 그녀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콘,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참을 수가 없단 말이에요. 돈을 모아서 내년에 다시 오겠어요」 「아니오」 그는 그녀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선 모습으로 돌변했다. 「오지 마시오. 알아듣겠소?」 그는 그녀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다시는 오지 마시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끝난 거요」 「당신과 함께하면 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이 날 버리면 난 갈 곳이 없어요」 콘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잘 가시오, 메기」 그는 그녀를 남겨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인생으로부터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으나 모두 끝난 일이었다. 이제 그는 영원히 가버렸다. 5 「엄마! 엄마!」 누군가 메그의 얼굴을 만졌다. 「왜 울고 있어요?」 아직 잠이 덜 깬 메그의 흐릿한 눈에 딸의 얼굴이 들어왔다. 벌서 아침이 되었나 보다. 「무… 무서운 꿈을 꾸었나 봐」 「그래서 내 옆에서 잔 거예요?」 메그는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그냥 대답했다. 「그래」 「엄마는 아빠와 함께 자야 해요. 그러면 무섭지 않을 거예요. 멜라니가 그러는데, 걔네 아빠 엄마는 싸울 때만 빼놓고 함께 잔대요. 엄마도 아빠하고 싸웠어요?」 애나와 멜라니의 화제는 실로 다양하다고 생각하며, 메그는 아무 대답 없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애나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분홍색 하트가 달린 파란 벨루어 윗도리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다른 생각에 젖어 있던 메그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는 아침에 팬케이크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내가 아빠한테 엄마는 토스트를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아빠는 그것도 만들었어요. 그리고 나서 엄마를 깨우러 온 거예요」 메그는 그제서야 커피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콘이 벌서 일어나 그녀의 공간을 점령한 모양이다. 하긴, 여덟 살 때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돼 국가에 의해 기관원으로 자랐으니 그런 식으로밖에 행동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메그는 은근히 그의 변명을 해주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녀는 그와 마주치는 시간을 한시라도 늦추기 위해 꾸물거리며 침대를 정리했다. 「빨리요, 엄마. 우리 집하고 개들을 보러 가야 한다구요」 「그렇지만 넌 주일학교를 빼먹겠구나」 메그는 슬쩍 떠보며 애나의 반응을 살폈다. 「아빠가 우리집 옆에 교회가 있다고 했어요. 주일학교에 내 또래의 아이들이 여섯 명이나 있다고 그랬으니까 거기에 가면 돼요」 메그가 이불을 홱 잡아채는 바람에 끝이 침대의 금속 가장자리에 걸렸다. 애나가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엄마, 그러다가 찢어지겠어요」 「알았다」 메그는 중얼거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빠에게 가서 엄마가 곧 온다고 말할게요」 애나가 방을 나가자 메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창백하고 수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녀는 로션만 간단히 바르고 머리카락을 뒤로 빗어 고무줄로 질끈 동여맸다. 그리고 화장이나 향수 같은 것은 사용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콘을 위해 아름답게 꾸미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던 생기발랄한 젊은 여성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엄마! 전화왔어요!」 「간다」 그녀는 방을 나서며 외쳤다. 콘은 한 손에 수화기를 , 다른 한 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서 있었다. 메그는 그의 눈길을 무시한 채 수화기를 받아들고 그에게 등을 돌리고 섰다. 그러나 그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여자로서의 원죄인지 메그의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여보세요?」 메그는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메그 로버츠 양과 통화할 수 있습니까?」 사무적인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데요」 「잠깐 기다려 주세요. 스트릭랜드 상원의원님 전화입니다」 메그는 문설주에 몸을 기대며 애나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지금 자신이 먹고 난 테이블 위를 치우느라 정신이 없다. 「로버츠 양? 스트릭랜드요」 「네, 상원의원님」 「나는 당신의 연인과 당신의 재결합에 대해 지지를 한다는 것과 당신의 불안을 덜어 주기 위해 전화를 했소」 재결합이라고? 연인? 「그런 종류의 고통과 위험을 감내했다면 그것은 분명 사랑 때문이오. 당신은 그 남자가 소련의 고위공무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요. 그런 그가 사랑하는 미국 여자와 아이를 위해 6년간이란 외로운 싸움을 했소. 물론 당신이 그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소. 나는 이제 루덴코 씨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당신이 그에게 사랑이라는 상을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바요」 메그는 어제 왔던 두 명의 CIA요원들이 벌써 그에게 보고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와 내 아내는 가능하면 빨리 당신들 두 사람과 저녁을 함께 하고 싶소.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 비서에게 스케줄을 잡아놓으라고 하겠소.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도 하고 새로운 계획도 세워 보시오. 나는 당신들이 부럽소」 메그는 숨이 막혔다. 「고… 고맙습니다, 상원의원님」 「만약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사무실에 연락해 비서에게 말해 두시오. 그러면 내가 전화하리다. 당신들이 이번 크리스마스를 행복하게 지낼 것이라고 믿소」 그리고 나서 전화는 끊어졌다. 메그가 수화기를 올려놓는 순간 다시 전화 벨이 울렸다. 그녀는 콘의 날카로운 눈길을 받으며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메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안녕하세요, 테드」 「무슨 일이 있는 거요?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은데요?」 메그는 한 손으로 뻗뻗하게 굳어오는 목 뒤를 연신 주무르면서 전화선이 닿는 한 거실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안쪽으로 걸어갔다. 「몸… 몸이 조금 안 좋아서요」 그러나 콘이 나타나 그녀의 세상을 뒤집어놓지 않았더라도 이 남자와 데이트를 할 생각은 없다. 가끔 점심은 같이 먹었지만 그걸로 끝이었고,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안됐군요. 오늘 오후에 애나와 함께 공원으로 썰매를 타러 가자고 말하려고 했는데요. 그런 다음 저녁을 함께 먹으면 어떻겠소?」 그는 이제 애나에게 다가서려고 하고 있다. 「말은 고맙지만 다음에 하면 어떨까요. 몸이 좀 나아진 다음에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알았소」 그의 목소리에는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사무실에서 봅시다」 「내일 뵐게요. 아마 잠을 자면 나을 거예요. 전화해 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긴장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은 다음 거실로 나왔다. 「테드 젠킨스. 스트롱모터스 사의 세일즈맨. 서른 살. 이혼경력 있고, 당신과 사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음. 자, 내가 애나에게 두꺼운 옷을 입히는 동안 아침을 먹도록 해요. 그런다음 떠납시다」 「어떻게 알아냈죠?」 「사랑에 빠진 다른 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나도 경쟁자가 있는지 조사를 해보았을 뿐이오. 월터가 스포츠카를 사려는 손님으로 가장해 그를 만났소. 테드 젠킨스는 그와 함께 시험주행을 했고 그것이 끝날 무렵 내가 필요한 정보는 완전히 수집되었소」 보통 상황의 대부분의 여자라면 남자의 세심함에 감동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달랐다. 메그는 접시 위에 준비된 토스트를 본 척도 않고 질기도록 따라오는 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거실을 나왔다. 그의 방법은 전혀 공정하지 않았다. 또한 메그는 자신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 아직도 막강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겁에 질렸다. 지금 상태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은 애나를 위해 말 없이 따라가는 일이었다. 애나는 자신의 아빠가 사는 곳을 보고 싶어했다. 일단 아이의 호기심을 채워 준 다음 그녀는 자신의 변호사를 동원해서, 만약 오늘 이후로 아이를 만나고 싶다면 메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통보할 것이다. 그가 스트릭랜드 상원의원의 신임을 얼마나 받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찌되었건 법을 뛰어넘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녀의 행동은 치밀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거칠어졌다. 덕분에 매고 있던 신발끈까지 끊어져 버렸다. 더욱 화가 나 혼자서 끙끙대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간편한 신발을 찾아 신었다., 「여기 엄마 코트 있어요. 아빠는 우리를 위해 차에 히터를 틀러 갔어요」 「그래, 고맙기도 하지」 그녀가 빈정댔다. 그러면서 그가 허락도 없이 탁자 위에 놓아둔 차 열쇠를 가지고 나간 사실에 또다시 화가 났다. 「아빠가 그러는데, 엄마는 좀 쉬어야 한 대요. 그래서 아빠가 운전을 하겠다고 그랬어요. 지금까지 엄마는 힘들게 살아왔는데 이제부터는 아빠가 돌봐주겠대요」 메그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코트 단추를 잠그고 인형을 꼭 쥐고 있는 애나를 불러세웠다. 「얘야…」 그녀는 애나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난 네가 아빠를 만나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그렇지만 우리는 함께 살 수 없단다」 「아니에요. 같이 살 거예요」 애나는 자신있게 말했다. 「난 아빠에게 나도 멜라니처럼 동생을 가지고 싶다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요?」 아이의 눈이 커졌다. 「다음주에 엄마하고 결혼식을 올리면 곧 동생이 생긴다고 그랬어요. 곧 식구가 많아 질 거예요」 메그는 그만 애나의 좁은 어깨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애나! 엄마는 네 아빠와 결혼하지 않아」 「아니야, 할 거예요」 애나는 울상이 되었다. 「아빠가 그런다고 그랬어요. 우리와 함께 살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엄마」 애나는 메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른들도 가끔은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단다, 애나」 「아빠는 지킬 거예요. 우리를 사랑하니까요」 애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항의를 했다. 「빨리 가요. 아빠가 기다리실 거예요」 그녀는 메그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메그는 식탁 위에 있던 지갑을 집어들고 문을 잠궜다. 다행스럽게도 겨울인데다가 일요일 아침이라 아파트 주위는 한산했다. 만약 이웃들이 그녀를 보았으면 수많은 질문들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얼굴이 창백하죠, 메그? 지난밤 당신의 아파트에서 지낸 저 매력적인 남자는 누구에요? 왜 그가 당신의 차를 몰며, 애나의 안전의자를 그의 옆좌석에 매어 놓았나요?> 등등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콘은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속으로 화장을 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는 속으로 피곤에 지치고 화가 난 애엄마와 정열적이고 사랑에 넘치는 보송보송한 젊은 아가씨를 비교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운전하고 싶다면 내가 뒤에 타겠소」 그가 말을 걸었다. 「나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다니 웬일이요?」 메그는 그가 문을 열어 주기 전에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들의 차는 곧 출발했다. 콘이 라디오를 틀자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왔다. 애나가 노래를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메그는 백미러를 통해 그가 애나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이 그녀의 차를 운전한 적이 없었던 터라 수다쟁이 딸의 끊임없는 재잘거림을 들으며 뒷좌석에 앉아 편히 가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그 사실을 인정했으며, 지금처럼 도로가 얼어붙고 바람이 휘몰아칠 때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물론 콘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오늘처럼 바람이 불고 추운 날 애나를 데리고 운전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요일에는 보통 몇 블록 떨어진 교회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 점심을 만들어 먹었다. 그 다음에는 애나에게 바이올린 연습을 시키고, 그것이 끝나면 애나는 멜라니의 아파트로 놀러가거나 멜라니가 왔다. 그동안에 메그는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했다. 근래에는 애나가 멜라니의 집에 놀러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왜냐면 멜라니의 갓 태어난 동생에게 흠뻑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콘에게 동생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한 이유였다. 지금까지 콘은 애나의 청은 모두 들어주었다. 그래서 애나가 그에게 경외심을 갖게 된 것은 아닌지? 마치 전에 메그가 그랬던 것처럼. 메그는 자신이 검은 머리카락으로 덮힌 그의 뒤통수와 넓은 어깨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법으로 해결해야 해! 그녀는 속으로 부르짖고 이내 눈길을 차창 밖으로 돌렸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자책에 빠져 있던 그녀는 차가 멈춘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난 화장실에 가고 싶지 않아요, 아빠」 콘의 낮은 웃음소리를 듣자 메그는 긴장이 되면서도 왜 멈춰섰는지 궁금했다. 그는 엄마와 딸의 얼굴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의자에서 몸을 돌렸다. 「하니발에 거의 다 왔소. 그런데 도착하기 전에 말해두어야 할 것이 있소」 그의 쓸쓸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안스럽게 했다. 「애나, 엄마는 내 비밀을 지켜 줄 수 있을테지만, 넌 어떠니? 나는 지금 아주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말하려고 한단다. 이것은 우리 가족만 알고 있어야 해. 다른 사람이 알면 절대로 안된단다」 우리 가족. 메그는 숨이 찼다. 「러시아를 떠날 때 나는 이름을 바꾸었단다」 「왜요, 아빠?」 메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어두움의 한 단면이 느껴졌다. 「내가 내 나라에서 떠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리고 미국인들 중의 일부는 내가 이 나라로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지. 그들은 나의 러시아식 이름을 좋아하지 않아」 「우리는 아빠를 사랑해요」 애나가 급히 소리쳤다. 「우린 아빠가 좋아요, 그렇지 엄마?」 「그리고 나도 너와 엄마를 사랑한단다. 그래서 안전을 위해 나는 이름을 바꾸었지」 「무슨 이름인데요?」 「게리 존슨」 게리 존슨이라고? 메그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 누구도 게리 존슨이라는 이름을 가진 KGB 요원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이건 정말 희극이야. 「우리반 남자애의 이름하고 똑같아요!」 애나가 소리쳤다. 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미국에는 게리 존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수천 명은 될 거야. 사실 내가 그 이름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거란다」 「그럼 이젠 다른 사람들이 아빠를 싫어하지 않나요?」 「그래. 나는 새로운 친구들과 이웃들을 많이 사귀었어. 그들은 나를 게리, 혹은 존슨 씨라고 부르지」 「난 아빠라고 부르면 안돼요?」 콘은 애나의 안전 벨트를 풀고 그녀를 안아 무릎 위에 올렸다. 「세상에서 나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너 하나란다」 「앞으로 태어날 동생을 제외하고는요」 「그래, 맞아」 그는 애나를 꼭 껴안았다. 애나는 고개를 들고 메그를 바라보았다. 「엄마, 아빠를 게리라고 불러야 해요. 잊지 말아요」 그를 게리라고 부르라니 차마 입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번 방문만 끝나면 사람들 앞에서 그를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 콘이 메그의 대답을 가로챘다. 「네 엄마는 나를 내 사랑이라고 부를 테니까 별 문제 없을 거야」 메그는 그런 어리석은 익살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내 생각에 곧 폭풍우가 몰아칠 것 같군요, 게리. 이젠 가야 하지 않을까요?」 「빨리 가보고 싶은 모양이지?」 그의 환한 미소는 메그의 심사를 뒤틀어 놓았다. 콘은 애나를 그녀의 좌석에 앉히고 벨트를 매어 주었다. 그리고 시동을 걸고 다시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하니발은 이제 7마일밖에 남지 않았다. 「빨리 집에 가고 싶구나」 그는 애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예쁜 딸과 함께 갈 수 있다니…」 「난 여기 있어요, 아빠. 그리고 아빠는 이제 외롭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 클라라?」 애나는 <호두가기 인형>의 공연을 보고 난 다음 자신의 인형을 그렇게 불렀다. 「클라라도 아빠를 사랑해요」 「그거 반갑구나」 메그는 그의 깊고 매력적인 목소리를 듣는 일이나, 딸아이와 교환하는 사랑에 가득 찬 시선들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가 러시아 어로 중얼거리면서 아이의 손을 꼭 쥐는 것을 보니, 무엇인가 목구멍까지 울컥 치밀어올랐다. 그는 아이를 빼앗아갈 거야. 이제 애나는 완전히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메그는 마치 고통을 머물게 하려는 듯 가슴에 손을 얹고 꼬옥 눌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들은 고속도로에서 나와 하니발로 이어지는 작은 길로 접어들었다. 그곳은 19세기 중반쯤 샘 클레멘스가 미시시피 강을 배경으로 이어지는 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써내어 유명해진 곳이었다. 메그는 그가 애나를 위해 마크 트웨인의 집과 박물관이 있는 시내 쪽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크리스마스를 위해 근사하게 치장해 놓은 유서깊은 집들을 지나 유명한 록클리프 맨션이 있는 곳까지 가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한 블록쯤 더 가서 모퉁이를 돌아 집안 뜰로 들어섰다. 「집에 다 왔다, 애나」 그는 차고 앞에 차를 세우고 애나의 벨트를 풀어 주었다. 애나는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개들은 어디에 있죠?」 「뒷베란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메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집을 바라본 다음 콘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는 애나를 차에서 내려주고 있었다. 메그는 한때 소련 사람들과 외국인들을 공포로 몰아넣던 KGB 요원과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그를 동일선 위에 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문을 열 동안 메그는 차에서 내려 주문에 홀린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애나는 멋진 독일 산 셰퍼드 한 놈이 계단을 뛰어 내려와 꼬리를 흔들고 손등을 핥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콘이 개들을 완벽하게 훈련시켜 놓았는지 애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거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았고 뛰어 오르지도 않았다. 콘이 명령을 하자 개는 그 자리에 섰고, 애나는 개를 쓰다듬어 주었다. 메그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애나는 이웃사람이 기르는 커다란 리트리버(사냥개의 일종)와 이미 친하게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메기, 와서 토르와 인사를 해요」 생기가 넘쳐흐르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메그의 머릿속은 자신이 그 남자만을 위해 살았던 그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그들이 헤어져 셀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을 보내던 기억들이 달려들어 혼란스러웠다. 애나는 핥고 킁킁대고 짖어대는 토르를 보며 까르르 웃어댔고 콘도 따라 웃었다. 메그는 그렇게 즐거운 듯이 웃는 콘의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 역시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마리는 어디에 있죠」 애나가 물었다. 「간디는 바쁘단다. 자, 뭘 하고 있는지 가 볼까?」 「날 따라와, 토르」 애나는 개를 데리고 콘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곧 애나의 탄성이 울려퍼졌다. 호기심이 난 메그가 문이 닫혀 있는 작은 베란다 안으로 들어가니 그곳에슨 셰퍼드 암놈이 세 마리의 새끼 강아지들을 데리고 바닥에 깔린 매트 위에 누워 있었다. 토르는 콘 옆에 앉아 납작하게 엎드렸다. 「이건 미리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란다, 애노슈카」 콘이 말했다. 「근사해요. 저기 저 조그만 녀석을 보세요. 내 손바닥 크기만해요」 「그래, 수놈이지」 그의 목소리는 미풍처럼 부드러웠다. 「안아 봐도 돼요?」 「지금 젖을 먹고 있으니까 방해하지 말자구나」 「이름이 뭐예요?」 애나가 큰소리로 물었다. 「그건 네 것이니까 네가 지으렴. 다른 두 마리는 젖을 떼면 다른 사람에게 줄 생각이지만 그건 네거란다」 애나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메그를 돌아보았다. 「엄마! 이 강아지를 호두과자 왕자 존슨이라고 부를 거예요」 메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콘도 함께 웃었다. 「그럼 줄여서 <프린스>라고 부를까?」 콘이 제안하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간디가 피곤할 거야. 토르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 네 방을 봐야지」 「내 방이 있어요? 가자, 토르」 애나는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메그는 두 사람 중 누가 더 흥분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메그는 곧 현실을 깨닫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콘…」 그녀가 불렀다. 「잠시만, 메기. 샤워를 먼저 해야겠소」 메그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지금 막 자신의 새끼에게로 주의를 돌린 간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애나가 그녀를 다급하게 부를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콘의 집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그 집은 그가 비밀정보를 판 대가로 얻어낸 것임이 분명했으므로. 6 메그는 두려웠다. 자신이 그의 집을 좋아하게 될 것 같아 두려웠고, 그가 그녀의 마음속으로 파고들까 두려워했다. 그녀는 어떤 것이 진짜고, 어떤 것이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쉽게 받아들이고 쉽게 상처를 입는 애나처럼 될 것 같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비록 그가 탈출했다고 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러시아 인이다. 특히 지금처럼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때에, 만약 그가 자신이 태어난 어린시절 가족들과 즐겁게 지내던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에 가보고 싶다고 해도 그건 놀랄 일이 아니다. 그에게는 돈이 있고 미국 여권도 있었으며, 애나를 데리고 갈 수 있다. 자신의 어린 딸을 통해 잃어버렸던 어린 시절을 되찾아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의 힘이라면 애나를 데리고 메그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갈 수도 있었다. 수년 전, 그녀는 러시아에서 영원히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콘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애나를 그녀의 인생으로부터 빼앗아갈 때, 그는 아무런 경고 없이 일을 해치울 것이 확실했다. 메그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부엌을 통해 들어가면서 그녀는 천장까지 닿는 영국 고전풍의 캐비닛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마룻바닥은 고급스런 광택이 나는 체리목(벚나무재목)이 깔려 있었다. 그것은 연노랑색 벽이나 흰색 몰딩과 잘 어울려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집은 중간 정도의 크기로, 작고 편편한 창문들은 고전적인 느낌을 주었다. 거실과 식당의 가구들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사용하기 편리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선명한 녹색 무명 천으로 덮여 통일감을 주었다. 메그의 눈이 손으로 섬세하게 조각한 것이 틀림없는 층계 난간으로 향했다가 다시 프랑스 문양을 넣어 짜여진 문을 바라보았다. 벽난로 옆으로 돌출된 두 개의 벽기둥 사이에 책을 꽂아놓으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는데, 여러 나라 말로 쓰여진 고전문학서가 눈에 띄었다. 물론 러시아 어 책도 있었다. 램프를 갖춘 책상과 파일함 역시 고전풍이었으며, 컴퓨터가 유일한 현대적인 물건이었다. 이것이 콘의 개인적이 취향일까? 아니면 그가 이렇게 꾸며진 집을 산 것일까? 메그는 그의 차 안에서나 호텔, 레스토랑에서 만난 KGB 요원이 그의 본래 모습인지 아니면 그대의 오두막집에서 본그가 정말 그의 모습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월트와 레이시의 말에 의하면 콘은 하니발에서 5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미국 정부가 러시아 망명자에게 미리 만들어진 신분증을 주고 그에게 이런 집까지 주었다는 말인가? 콘이라는 남자는 정말 누구일까? 콘스탄틴 루텐코라는 이름은 그의 부모가 태어났을 때 지어 준 것일까, 아니면 그를 납치해서 요원으로 양성한 소련 정부가 준 것일까? 머릿속을 울리는 수많은 의문들을 견디지 못해 메그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억센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따뜻한 그 감촉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메그는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그녀의 의지보다 더 강한 힘이 그것을 막고 있었다. 낮은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지금은 복잡한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마오」 그는 그녀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메그는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을 느꼈다. 「지금까지 당신과 나는 단둘만의 시간을 갖지 못했소. 지난 6년간 기다림이 어떠했는지 당신은 아오? 정말 끝없이 지루한 나날들이었소」 그의 몸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메그에게 전달되었다. 오래전부터 익숙한 친숙한 느낌, 그의 입술이 그녀의 뺨을 맴돌았다. 그에게서 방금 전에 샤워할 때 사용한 신선한 비누 향기가 풍겨왔다. 「당신이 떠난 뒤 나에겐 아무도 없었소. 그리고 당신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지. 나를 도와주시오」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메그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으나,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린 마약을 사용한 것처럼 그가 적이라는 사실을 잊고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자기도 모르게 받아들였다. 넘쳐오르는 그녀의 열전은 점점 통제력을 상실해갔다. 그 일은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사라진 줄 알았던 지난날 그에게 느꼈던 감각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그녀의 코트 단추를 열고 그녀의 몸을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힘없는 신음소리와 함께 그녀는 그의 목을 휘감았다. 불행히도 그녀는 토르와 함께 재잘대며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애나의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애나. 메그는 딸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콘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으나 진한 키스에 정신이 없던 콘은 애나를 보지 못했고, 오랫동안 억눌렀던 열정을 간직한채 그의 입술은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그녀는 더욱 세게 그를 밀쳐내고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서 있는 딸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마치 남자친구와 포옹을 하다가 부모님께 들킨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애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와 아빠는 아기를 만든건가요?」 예상 밖의 질문이다. 메그는 자신의 어깨에 얹히는 콘의 손길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아직 아니란다, 애노슈카」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우선 엄마가 나와 결혼하는 데 동의를 해야 한단다. 지금 물어볼까?」 「아니오! 지금은 제발…」 메그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 있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같이 어지러웠다. 「메기…」 콘은 자신의 뺨을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갖다 대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스트릭랜드 상원의원의 도움으로 우리는 오는 수요일에 이 집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게 되었소. 내가 아는 대법원판사가 주례를 서고 월트와 레이시가 증인이 되어 줄 것이오. 이제 당신의 동의를 받는 일만 남았소」 어제 그는 그녀의 목에 올가미를 던지더니 이젠 그것을 바싹 조이고 있다. 「난 우리가 한가족이 되었으면 좋겠소. 난 애나가 나처럼 아버지 없이 자라기를 원하지 않소. 더욱이 다른 사람이 애나의 아빠가 되는 것도 싫소. 당신도 그건 마찬가지일 거요. 그렇지 않았으면 당신은 벌써 다른 사람과 결혼했겠지」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메그는 죽어도 인정하기 싫었다. 「당신은 일을 그만두고 애나를 돌볼 수 있소. 이 집에는 엄마와 아빠가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필요하오. 난 아직 크리스마스 트리를 준비하지 않았소. 우리가 함께 그것을 장식할 수 없다면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오」 긴 침묵이 흘렀다. 「애나」 마침내 메그가 입을 열었다. 「네 아빠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단다. 토르와 함께 베란다에 가서 강아지들을 보고 있지 않을래? 만지지는 말고 보기만 해야 한다」 그러나 애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메그를 바라보았다. 「난 아빠하고 살고 싶어요. 난 침대와 작은 책상과 거울이 있는 분홍색 방에서 살고 싶단 말이에요」 「애노슈카…」 콘이 조용한 목소리로 달랬다. 그러자 놀랍게도 애나는 토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메그는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과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굳이 애나를 만나기 위해 나와 결혼할 필요도 없구요」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단숨에 쏟아냈다. 「아이를 만나고 싶을 때 내게 전화를 하면 내가 데려다 주겠어요. 그리고 다시 당신이 아이를 내 집까지 데려다 줘요」 「여기가 이제 당신 집이오. 난 당신과 애나와 함께 살고 싶소」 「그건 불가능해요, 콘. 하지만 아이를 만나게 해준다고 약속해요」 「난 싫소」 정말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면 관둬요. 그리고 이젠 애나를 데리고 돌아가겠어요. 내 차 열쇠를 돌려줘요」 뜻밖에도 그는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토르와 함께 서서 그녀가 애나를 데리고 차 있는 데로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빠! 아빠!」 애나가 소리쳤다. 그러나 콘은 그대로 집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모스크바 감옥에서 울던 메그의 목소리를 연상시켰다. 「날 엄마와 함께 보내지 말아요, 아빠!」 애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계속 울어댔다. 메그가 아무리 이유를 설명해도, 그리고 다시 아빠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해도 효과가 없었다. 애나는 내내 울고 있었다. 「엄마가 미워요!」 애나는 집에 도착했을 때 울어서 쉬어 버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클라라도 엄마가 밉대요. 우린 엄마를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아이의 얼굴은 열에 들뜬 것처럼 불그스름했다. 메그 역시 하니발을 출발할 때부터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당신을 저주해요, 콘.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그녀는 중얼거렸다. 애나가 그런 태도를 보인 적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는데, 정말 잘났군요. 당신은 일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명수라니까요! 정말 당신을 저주해요! 빌어먹을, 빌어먹을! 「메그? 애나의 학교에서 온 전화야. 2번이야」 메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필시 애나가 병이 났다는 연락일 것이다. 어제 하니발에서 돌아온 이후 아이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알았어, 셰릴」 메그는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고 2번 버튼을 눌렀다. 아까부터 괴롭히던 두통이 더욱 심각해졌다. 아스피린도 소용이 없는지 이런 식이라면 조퇴를 하고 집에 가야 할 것 같았다. 「네, 메그 로버츠입니다」 「안녕하세요. 칼라 몰리예요. 힉슨 부인이 감기로 못 나와서 오늘 학교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애나의 아빠에게 아이를 데려가도록 해도 좋은지 물어보고 싶어서요. 아침에 학교에 왔을 때부터 애나의 기분이 좋지 않더니, 나에게 하니발의 아빠에게 전화해 달라고 하더군요. 점심때 사무실로 전화드렸는데 안 계셔서 지금 물어 보는 거예요. 아마 그가 곧 도착할 거예요」 어떻게 애나가 그의 전화번호를 알았을까? 그녀가 보지 않는 사이에 그가 아이에게 준 것일까? 「그런데 문제는 당신이 비상연락망에 존슨 씨의 이름을 올려놓지 않아서요. 그의 말이 오랫동안 외국에 나가 있어서 그렇다던데, 그래도 엄마의 동의 없이 아이를 데려가게 할 수가 없어서요」 오, 하느님! 「애나를 데리고 계세요. 내가 곧 가겠어요. 전화해 줘서 고마워요」 메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칼라 몰리의 말대로라면 지금 메그에게 잔뜩 화가 나 있는 애나는 아빠를 따라갈 것이 분명했으므로 서둘어야 했다. 셰릴은 메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애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얼굴이 백지장 같아」 「으…응, 애가 아프대」 메그는 지금 어느 누구에게라도, 심지어 셰릴에게도 콘의 존재에 대해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애를 데리고 집에 가야겠어. 오늘 나 대신 일을 봐줄 수 있니?」 「물론이지. 그리고 오늘 네가 할 일은 별로 없을 거야. 집에 가서 두 모녀가 푹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고마워, 셰릴. 다음에는 내가 도와줄게」 메그는 밖으로 나오다가 테드와 마주쳤다. 그는 그녀를 불러세웠으나, 애나가 아프다고 말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그는 주차장까지 따라와 그녀에게 문을 열어 주고 나중에 전화하겠다는 말을 했다. 메그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그곳으로부터 10 킬로 정도 떨어진 애나의 학교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도로의 문이 모두 녹아 있었다. 그녀는 제한속도를 넘어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심하게 뛰고 있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학교 사무실로 들어가자, 콘의 무릎 위에 앉아 그에게 기대로 있는 애나의 모습이 보였다. 메그는 재차 아버지와 딸이 닮아도 너무 닮았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애나, 네가 아프다고 몰리 선생님이 전화했더구나」 「기분이 좋지 않아요」 애나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메그가 다가가 손을 내밀자 <엄마가 미워요>라고 말하던 것도 잊었는지 금세 품에 안겨왔다. 메그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요즘 독감이 유행하고 있답니다. 오늘도 꽤 많은 아이들이 결석했어요」 몰리가 말했다. 「그런가요」 메그가 어물거리며 대꾸했다. 「다행히도 내일부터는 크리스마스 휴가니까 집에서 쉴 수 있을 거예요」 몰리가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고마워요」 「아무것도 아닌걸요. 존슨 씨가 와서 아이를 잘 달래 주었어요. 아빠가 와서 기분이 나아졌지. 그렇지, 애나?」 몰리는 애나에게 미소를 보냈다.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내라」 메그는 아무것도 캐묻지 않는 몰리에게 감사했다. 아마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이혼한 부모들을 많이 만나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하는 애나의 목소리에 약간 생기가 도는 듯했다. 「아빠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니?」 메그는 사무실을 나오면서 아이에게 물었다. 「몰리 선생님에게 아빠가 하니발에 살고 있고 이름은 게리 존슨이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전화안내에서 찾을 수 있었죠」 콘은 메그에게 의기양양한 시선을 보냈다. 「우리 딸 아주 똑똑한걸?」 그리고 다시 러시아어로 덧붙였다. 「만약 조심하지 않으면 당신의 결벽증 때문에 아이와 사이가 멀어질 거요」 메그는 갑자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죄어오는 죄책감. 또 한편으로 전화번호부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다는 것은 그가 오랜 기간 미국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우리 지금 집에 가는 건가요? 난 어제 프린스를 안아주지 못했어요. 프린스가 날 보고 싶어할 거예요」 「내가 잘 돌보고 있단다, 애노슈카」 메그는 절망했다. 이제 애나는 그들이 살던 아파트를 우리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콘은 메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는 애나를 위해 차문을 열어 주었다. 「너와 네 엄마 모두 잠이 필요한 것 같구나」 애나는 메그를 바라보았다. 「엄마, 아파요?」 「아니. 조금 피곤할 뿐이야」 「아빠도 우리와 함께 가나요?」 「그것은 엄마가 결정할 문제야」 콘은 메그에게 부드러운 시선을 던졌다. 「가지 말아요, 아빠!」 애나가 다시 울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양볼은 금세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메그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콘과 자신의 딸, 이 두 사람 모두와 싸울 힘이 없었다. 「네 아빠는 우리 뒤를 따라올 거야. 만약 아빠가 원한다면 말이지」 마치 거짓말처럼 애나의 눈물은 사라졌다. 메그는 콘의 승리감에 도취된 얼굴을 기대했으나,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 주기 위해 운적석으로 걸어가던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것은 오히려 그녀의 감정을 흩어놓았다. 한편으로는 그가일부러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뒤따라 갈 거야, 애노슈타」 「약… 약속… 할 수 있어요?」 애나는 딸꾹질을 하면서 다짐을 했다. 메그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애나는 아빠가 사라질까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있다. 아이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한번도 보지 못했던 메그는 새로운 사실을 접하고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다. 콘 역시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아이를 안심시키는 일이 먼저라고 판단한 그는 뒷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내 차는 나중에 가져가도록 하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애나는 자신의 안전 벨트를 풀르고 뒷좌석에 앉은 콘의 무릎 위로 기어올라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메그는 백미러를 통해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콘이 애나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아이의 신경을 가라앉혀 주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는 애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 감정은 거짓으로 꾸밀 수 없는 법이다. 메그는 본능적으로 이젠 그녀만의 애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메그는 차고 앞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애나는 콘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지난밤 아이는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몇 시간을 울었던 것이다. 아파트 주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메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애나의 방문에 기대어 콘이 애나의 파카와 신발을 조심스레 벗기고 침대에 눕혀 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애나의 뺨을 살짝 만져 주고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메그는 참을 수 없어 거실로 나와 버렸다. 그가 주는 거대한 영향력을 메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모레 결혼을 한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요. 그러나 만약 당신이 애나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면 내게도 생각이 있소」 「그럼 난 뭐죠?」 그녀가 항의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 않소」 그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건 이 문제와 상관없어요」 「그렇지 않소, 메기. 만약 당신이 러시아에 머물렀다면 우리는 결혼을 하고 애나에겐 동생이 생겼을 거요」 「당신은 지금 다 지나간 일들을 말하고있어요. 내가 그때와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모르겠어요? 그리고 당신이 러시아에 있을 때 이미 결혼을 했는지 어떻게 알아요?」 메그의 감정이 격렬해졌다. 「나는 탈출했소」 「왜요?」 그녀가 외쳤다. 「왜 탈출했죠? 당신과 같은 지위를 가진 남자가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날 사랑해서라는 말 따위는 늘어놓지 말아요!」 그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나는 정부용원이기 이전에 한 남자요, 메기. 나는 젊은 미국인 여성 때문에 그 위험과 어려웠던 시간들을 참아냈소. 당신이 떠난 뒤 나는… 몹시 아팠소」 7 아팠다고? 메그의 눈이 그에게 쏠렸다. 「그… 그렇다면 병을 앓았다는 말인가요?」 그녀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올려 굳어진 목덜밀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요원들이 보통 완전소모되었다고 부르는 시기가 있소. 내 평생 아파 본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갑자기 몇 달 동안이나 기운을 차리지 못하면서 체중이 줄고 불면증과 불안에 시달렸소」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전에도 말했듯이 사귀던 여자들이 몇몇 있었고, 그들은 거의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여자들이었소. 딱 한번인가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는 했으나 헤어지고 나서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못했소」 메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래라면 어느 정도의 시간을 말하는 것일까? 그 여자에게도 결혼하자고 말했을까? 심한 질투심에 현기증이 일었다. 그가 덧붙였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나는 당신을 떨쳐버릴 수 없었소. 동료들은 내게 휴가를 권했소. 그래서 나는 2주 동안 시간을 얻어 우랄 지방으로 낚시를 하러 갔소. 그러나 이틀을 지낸 뒤 나는 돌아오고 말았지」 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후 나는 동료들도 멀어질 만큼 무섭게 일만 했소. 몸은 계속 아팠으나 상관하지 않았지. 내 유일한 낙은 미국에서 활동중인 동료의 도움으로 당신의 행방을 추적하고 어떻게 사는 지에 대해 듣는 일이었소」 아파트의 공기가 따뜻했음에도 불구하고 메그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몹시도 추웠던 어느 날에, 나는 아름다운 메그 로버츠가 아기를 가졌다는 동료의 전화를 받았소」 한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소. 왜냐면 당신에게 아기가 안 생기도록 철저하게 배려했기 때문이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러시아에 있을 때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없도록 항상 곁에 있었고 당신이 미국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터라 당신이 가진 아이가 내 아이라고 확신했소」 메그는 그의 눈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의 아이가 당신 몸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한없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소. 마치 당신이 내 옆에 있어서 그 신기한 체험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암흑 같던 생활에서 서서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요」 그는 굳어진 얼굴을 창밖으로 돌렸다. 「나는 애나의 사진을 받아보았소. 막 티어나 병원에 있을 때의 모습이었는데, 그것을 보고 난 거의 좋아 미칠 지경이었소. 비록 아이를 안을 수 없었지만 애나의 부드러운 살결과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당신 품에 안겨서 오물거리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탈출을 결심한 거요」 「콘…」 「그 즈음 정국이 혼란스러워지면서 국제적인 화해의 시기가 현실로 다가오려는 조짐들이 보였소. 그러한 변화를 보면서 그때까지 KGB를 위해 일하는 것밖에 몰랐던 나는 개인적인 생활과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소. 또 애나의 탄생은 나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소. 내가 당신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메기. 러시아가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소. 나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가장 좋은 집과 보수 그리고 내가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가질 수 있었소. 그렇지만 결국 내가 완전히 속해 있으며, 또 나에게 속하는 누군가가 그리워진 거요」 콘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그녀의 가족사진을 집어들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난 내 부모님과 누이가 살아있는지조차 모르오. 살아 있다고 해도 그들은 내가 30년 전에 죽었다고 믿고 있을 거요」 그는 사진들을 다시 내려놓았다. 「난 내 딸을 원하오. 함께 지낸 지 겨우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젠 떨어질 수 없소」 메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만약 그랬다면 왜 미국에 오자마자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죠? 그럼 바로 만날 수 있었잖아요?」 홀로 지내던 몇 년 동안의 시간들을 생각하면…. 「러시아에서 나왔을 때, 나는 당신네 나라 정부에게 몇 가지 정보를 제공했소.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얼마 동안 숨어 살아야 했소. 그 이후로 국제적인 변화가 생기면서 점점 위험은 사라져갔소. 그러나 나는 아직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당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위험이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판단했소. 당신과 애나를 위험 속으로 빠뜨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거요」 콘은 메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물론 내가 그러고 있는 사이 당신이 다른 남자를 만난다거나 결혼을 할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으나 나는 우리 두 사람이 끝내 만나고 말 것이라고 믿고 있었소」 갑자기 그녀의 가슴 한구석에서 찡한 감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날은 이제 왔소」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러나 선택은 당신이 하는 거요. 아이를 이집 저집으로 보내면서 정신적인 충격을 줄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결혼해서 아이에게 정식 엄마와 아빠가 되어 줄 것인지 결정하시오」 콘의 눈빛이 부드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상에는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집이 많지 않소. 그렇다고 우리 아이도 다른 수천 수만의 아이들이 그래왔고, 나 역시도 당한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한 채 살아가도록 할 참이오?」 메그는 어쩌면 잘 속아넘어가는 바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난 그러고 싶지 않소. 그리고 나와 결혼하는 것이 내가 애나를 데리고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당신의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오」 「하지만 당신은 러시아를 사랑해요. 난 알 수 있어요」 「그렇소. 그러나 나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요. 내 삶은 여기 당신과 함께 있소. 내 아내로서, 당신은 따로 존을 벌기 위해 원하지 않는 일을 할 필요가 없소. 당신이 러시아를 떠나기 전에 항상 원해왔던 것처럼 우리는 하루 24시간을 함께 있을 수 있소」 그는 말소리를 더욱 낮추어 덧붙였다. 「나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안 하고도 당신에게 달린 문제요. 그건 어떻소?」 그건 어떻다니? 메그의 심장은 절망에 싸여 울부짖었다. 그토록 원하던 한 남자와 같은 집에서 살면서 그가 자신의 조국과 옛생활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어떻게 참아 낼 수 있을까? 「그것은 믿음이라는 문제요, 메기.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 딸은 당신을 닮지 않은 것 같소」 메그는 그의 비꼬는 말에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그는 부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누구에게 전화를 할 건가요?」 메그는 어리둥절했다. 「택시를 부르려고 하오. 내 차가 있는 곳까지 가야 하니 말이오. 집에 돌아가 개들에게 먹이와 물을 주어야 하오」 「하지만 애나가 깨어났을 때 당신이 없으면…」 「내가 말했듯이」 그의 목소리는 마치 KGB 시절을 연상시킬 만큼 차가웠다. 「서로 갈라져 사는 부모 밑에서 자라려면 별 수 없는 노릇이오」 메그의 머릿속에 애나가 보일 반응들이 확실하게 떠오르며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기다려요!」 긴장된 순간이었다. 「나를 애나의 학교까지 데려다 준다는 말을 하려 했다면, 그럴 필요 없소」 그는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저주받을 사람 같으니!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잖아요?」 메그가 소리쳤다.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약간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 만족의 빛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당신이 극장에서 우리를 붙잡았을 때부터 당신은 자신이 이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것은 시간 문제였죠. KGB요원이 목표를 놓칠 리가 없죠」 그가 이맛살을 찡그렸다. 「이것은 정보요원이나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니오. 이것은 게임이 아니란 말이오, 메기. 난 당신과 애나를 위해서 내 생명을 던졌소. 나에게 당신 없는 미래는 없는 거요」 그의 목소리의 떨림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메그는 그녀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장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이름으로 여기 두 사람은 합법적인 남편과 아내가 되었음을 선언하며, 신이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못할지니라. 자, 신부에게 키스를 하십시오」 메그가 결혼에 동의한 지 이틀 후의 일이었다. 콘은 메그의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 준 순간부터 그녀의 손을 꼭 쥔 채 놓지 않았으며, 예식이 끝나고 축하연이 베풀어진다는 말을 듣고서도 놓지 않았다. 연한 핑크 빛의 하늘거리는 시폰드레스를 입은 메그는 가벼운 옷감 속에 겨우 가리워진 자신의 두근거림을 그가 알아차릴 것이 걱정스러워 그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웠다. 그녀는 그의 키스를 받기 위해 눈을 감은 채 몸을 돌렸다. 갑자기 입술이 아닌 손바닥에 따스한 그의 입김이 느껴졌다. 메그는 놀라 눈을 떴다. 러시아의 고유풍습이 아니라면 신랑이 신부의 손바닥에 키스를 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콘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푸른 눈은 메그의 어리둥절한 눈망울을 맞아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자, 드디어!」 그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메그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의 진한 키스를 받자 메그의 머릿속은 빙글거리며 돌기 시작했다. 「이젠 나에게 뽀뽀할 차례예요, 아빠」 애나가 옆에서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 모습을 본 주위사람들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메그는 콘이 입술을 떼었을 때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콘은 애나를 안아올려 두 사람을 한꺼번에 포옹하더니 먼저 애나의 뺨에 키스를 하고, 두 번째는 메그의 입술에 다시 키스를 했다. 월터는 그들의 모습을 캠코더(비디오카메라와 비디오 카세트레코더를 한데 합친 소형 전자기기)에 모두 담기 바빴다. 그때 전화 벨이 울렸다. 레이시가 스트릭랜드 상원의원의 축하전화라고 알렸다. 메그는 애나의 가슴에 다는 꽃다발이 눌린 모양을 보고 그것을 고쳐 주는 척 몸을 굽히면서 숨을 돌렸다. 콘은 전화를 받는 동안에도 메그의 허리에 팔을 둘러 끌어당기면서 놓지 않았다. 저쪽에서 엄마를 부르는 애나의 목소리가 나자 메그는 콘의 양해를 구한 뒤 그에게서 떨어질 수 있었다. 「무슨 일이니?」 메그는 급히 거실로 들어갔다. 「봐요!」 애나가 기쁨에 넘쳐 큰소리를 질렀다. 「호두과자 왕자님이에요!」 처음에는 애나가 강아지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다. 그런 다음 다시 보니 그녀의 딸은 커피테이블 위에 놓은 커다란 상자에서 거의 70cm 가까이 되는 호두까기 인형을 꺼내올리고 있었다. 「그건 월트와 내가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란다」 레이시가 옆에 서서 말했다. 「저번에 보았던 발레 공연에 대한 좋은 추억거리가 될 거야」 「이것 보여요, 엄마?」 애나는 인형을 들어 메그에게 보였다. 「아빠와 닮았어요! 그리고 입이 벌어지고 닫혀요! 이것 봐요! 」 아이는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진 인형의 손잡이를 잡고 움직이며 환호성을 올렸다. 인형은 코자크 인 병사의 제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메그는 그것이 러시아에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콘이 거실로 들어와 아이 곁으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메그는 그와 애나가 들고 있는 인형이 놀랄 만큼 닮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콘이 그런 제복을 입고 서 있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메그는 바싹 말라가는 입 안으로 힘들게 침을 삼키면서 이번 결혼의 주례인 대법원판사를 향해 마치 행복한 한 가족인 척 미소를 띄워 보냈다. 레이시가 그들을 위해 샴페인을 따라 전넸고, 콘은 자신의 잔을 들어 크랜베리 주스가 든 애나의 잔에 장난스럽게 부딪히며 건배를 했다. 메그는 콘에게 마음을 열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딸에 대한 그의 헌신적인 사랑과 애나가 무척 행복해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두 모녀의 삶에 있어서 콘의 출현은 커다란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 물론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애나에게 확고한 믿음을 얻어내었으며 애나는 그를 완전히 믿고 있었다. 월요일 저녁, 애나는 오랜 시간의 낮잠에서 깨어나 메그에게서 아빠와 결혼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때부터 아이의 히스테릭한 행동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애나는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고 짐을 싸는 일들을 기꺼이 도와주었다. 메그는 그것이 모두 자신과 콘의 결혼 결정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애나가 자신의 아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보았다. 월트는 그녀의 모습을 캠코더에 담기 바빴다. 지금 애나는 콘에게 선물받은 호두까기 인형이 얼마나 근사한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는데, 둘 다 캠코더를 향해 익살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레이시는 월트에게 그만 찍고 파티를 즐기라고 권했다. 예식이 시작되기 전, 메그는 월트와 레이시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약간 겁을 집어먹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떠날 준비를 하자 섭섭해졌다. 오히려 그들이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애나에게 친절하게 해주었다는 이유도 있었으나 그 저변에는 콘과 단둘이 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그녀의 남편… 그는 전보다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애나는 레이시를 껴안고 호두까기 인형을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집을 나섰다. 콘은 문을 닫고 돌아서서 메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은 그녀에게 러시아에서의 추억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는 그녀를 단둘이 만날 수 있을 때를 기다리기가 너무 힘들다고 고백을 할 때 그런 눈길을 보내 주었으며 그럴 때마다 그녀는 몸이 저절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애나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결혼식도 모두 끝났고 우린 공식적으로 완전히 가족이 되었단다. 그러니 축하를 해야지?」 애나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로 갈 건가요, 아빠?」 「엄마만 괜찮다면 몰리 브라운 극장에 가서 저녁을 먹으면서 크리스마스쇼를 관람하는 것이 어떻겠니? 아마 마크 트웨인의 소설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이 나와 노래하고 춤을 출거야. 어때?」 애나는 메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쇼는 가족을 위한 것으로 어린아이들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그다지 흥미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나머지 시간들을 보낼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았다. 「그… 그래요. 그거 괜찮겠네요」 콘은 그녀의 대답에 만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지금 떠나야 시간에 댈 수 있겠소」 「그럼 내 코트를 가져올게요」 애나는 방을 향해 뛰어갔다. 콘과 함께 단둘이 있고 싶지 않은 메그는 그 뒤를 급히 따라나섰다. 지난 이틀 동안 메그는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그다지 인식하지 못했다. 결혼식에 필요한 옷들과 이사를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물건들을 사기에 바빴고 애나와 멜라니가 마치 보호자처럼 그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애나는 아파트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결혼식에 대해 떠들고 다녔다. 그 덕에 멜라니의 보모인 가레트 부부와 로슨 부인을 포함한 꽤 많은 사람들이 축하의 말을 전하기 위해 과일 케이크나 쿠키 등을 사들고 방문했다. 애나가 바이올린 연습을 할 때만다 자랑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던 콘은 애나의 선생님과 금세 친해졌다. 그는 로슨 부인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있는 바이올린 레슨을 위해 애나를 데리고 오겠다고 했으며, 애나에게는 그때 멜라니와 충분히 놀 수 있도록 일찍 도착하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멜라니에게도 점수를 듬뿍 딸 수 있었다. 화요일에 멜라니는 콘의 뒤를 따라다니며 쉴 새 없이 질문들을 늘어놓았다. 그는 애나의 수족관을 하니발의 집으로 옮기기 위해 물고기들을 병에 넣는 일을 하면서 아이들의 질문에 끝없는 인내심을 가지고 대답을 해주었다. 이사는 크리스마스 휴가가 끝난 다음에야 완전히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메그는 애나와 멜라니가 서로 그리워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돌아오는 주말에 멜라니를 집으로 초대해 잠을 자고 갈 수 있도록 했다. 콘과 애나의 성화에 못 이겨 메그는 직장을 그만두기 이주일 전에 사표를 내는 보통의 관례를 깨고 일찍 그만두었다. 마침 크리스마스 휴가가 돌아오는 터라 일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고용주인 테드는 메그가 애나의 친아빠와 결혼을 한다는 말을 듣고 확인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으나 불행히도 콘이 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테드에게 메그가 매우 바빠 전화를 받을 수 없으며 신혼여행을 다녀온 다음 적당한 때에 전화를 걸 것이라고 대답했다. 메그는 콘과 신혼여행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며칠 안으로 테드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사태를 설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괜찮은 사람이었고, 콘은 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춥소?」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낮게 울렸다. 그녀는 순간 깊은 생각에서 깨어나며 콘이 바로 뒤에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걸 입으면 따뜻할 거요」 메그가 뒤를 돌아보자 콘은 가장자리에 새틴이 둘러진 검정색 캐시미어 코트를 들고 서 있었다. 「입어 보시오」 메그는 옷을 입고 벨트를 맸다. 「엄마, 근사해요!」 「정말 그렇구나, 애노슈카」 콘의 시선이 검정 코트 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그녀의 연한 금발에 머물렀다. 「미리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생각하시오」 「고마워요」 메그가 중얼거렸다. 고개를 들고 콘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망울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깃들여 있었다. 이 남자는 애나 때문에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한 것이고 아이를 위해 나까지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분명해…. 메그는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콘이 아직도 자신을 사랑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그들은 너무 오랜 시간을 떨어져 지냈다. 따라서 그녀에게 선물공세를 하고 사랑하는 척하는 그의 본심은 오직 하나, 그녀가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애나가 바로 열쇠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혼을 위해 그녀를 찾아 이 먼 곳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한번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으므로, 콘이 그녀에 대한 사랑은 결코 죽지 않았으며 다른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고 주장하기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 불쾌한 사실은 그의 아이의 엄마라는 타이틀을 달면 어떤 여자도 그의 친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까지 6년이라는 세월을 혼자 지냈다. 그리고 확실한 안전이 보장될 때까지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기다려야 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를 깊게 사랑하는 사람의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메그는 과거에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그의 고백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주로 같은 일을 하는 정보요원이었다고 했다. 메그는 그녀들 중에 아기를 가진 여자는 아무도 없었으며, 그 이유 때문에 돌아서면 금세 잊어버릴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 그것이 아마도 그가 KGB시절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메그는 7년 전 통나무집에서 그와 처음으로 잠자리를 같이 했을 때 자신의 삶이 이렇게 바뀌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사랑했듯이 보통의 미국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이제 지나가 버린 셈이다. 「애나를 위해서라도 즐거운 표정을 지어 보시오. 오늘은 우리의 결혼식날이오」 콘은 뒷문으로 나서면서 메그의 귀에 대고 낮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메그는 돌변한 그의 태도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으면서도 애나에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차문을 열어 줄 때도 여전히 화를 겨우 참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숨막힐 듯한 침묵을 깨뜨려 준 것은 뒷좌석에 앉은 애나의 천진한 재잘거림이었다. 다행히도 애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차는 게리 존슨이라는 이름의 미국인이 가질 만한 뷰익이었다. 차는 눈이 말끔히 치워진 도로 위를 빠르게 달려 보트 선착장 근처에 자리잡은 극장에 도착했다. 콘은 정문에서 먼저 메그와 애나를 내려놓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바깥 공기가 차서 그런지 안으로 들어서자 밀려오는 따스한 공기가 반갑게 느껴졌다. 1850년대 차림을 한 안내원이 다가와 그들을 예약된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맨 앞 좌석이라서 조그만 애나가 무대를 보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 다음 두어 시간 동안, 그들은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서 무대공연을 지켜보았다. 배우들은 마크 트웨인 시대의 사람들로 분장을 하고 나와 20년대부터 50년대의 노래를 불렀는데 미시시피 강을 주제로 한 음악이 연주되어 애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메그는 지금 콘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왔더라면-그 누구라도 상관없이- 훨씬 재미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긋이 앉아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무대 위에 막이 내리고 전등이 들어왔다. 메그는 콘의 얼굴을 살짝 훔쳐보았다. 멀고 낯설게 느껴지는 그의 모습에서 그녀는 그가 다른 장소, 다른 시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메그는 그가 얼마나 자신의 나라를 그리워하며, 딸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려야 했는지 알고 있었다. 러시아의 아름다운 언어와 문화에 젖어 있던 한 남자에게 6년이라는 세월은 영원보다도 더 길고 지루했을 것이다. 자신과 동료와 비슷한 사람들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자르시대부터 발달해 온 문학, 예술, 무용 등의 찬란한 역사 속에서 살아온 그가 이곳에서의 생활을 견뎌낼 수 있을까? 메그는 한때 그의 나라를 사랑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가 러시아의 산과 나무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알고 있다. 7년 전, 그는 메그를 차에 태우고 산길과 시골길을 달리곤 했다. 사실, 특별히 카페나 박물관에 가지 않는 날이면 항상 교외로 나갔다. 겨울이면 얼어붙은 툰드라 숲을 이루고 여름이면 야생화들로 뒤덮히는 시베리아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해 처음으로 털어놓았을 때, 그녀는 그가 한적한 곳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의 옛집은 그들이 처음 사랑을 나누던 그런 곳과 비슷했을 테니까. 「울고 있는 거요, 메기?」 콘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게 완전히 묶여 버렸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기라도 했소? 아니면 당신이 앞으로 살아갈 집의 담장을 보니 모스크바 감옥의 벽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요?」 메그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애나가 눈치채기 전에 눈주위를 닦으려고 냅킨을 찾았다. 「게리?」 활달한 여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메그와 애나가 뒤를 돌아보자 아직 무대의상 차림의 갈색 피부를 가진 매력적인 여자가 콘의 어깨 위로 팔을 두르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난 당신이 왔다는 걸 알았어요. 관람석에 앉아 있는 모습만 봐도 금세 눈에 띄거든요」 「새미!」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그는 콘의 입에서 그 여자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것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은 분명히 가까운 사이였다. 「새미 레인, 여기는 내 아내인 메그, 그리고 우린 딸 애나요」 메그는 어떻게 콘이 그 정도 나이의 딸을 두었을까라고 가늠해 보는 새미의 시선을 느꼈다. 「그럼 내가 여행을 간 사이에 결혼을 했다는 말인가요? 정말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군요」 그녀는 메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남자는 내가 여행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말했는데, 정말 빠르군요」 「사실은 코…, 아니 게리와 나는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메그는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여자의 눈길이 다시 콘에게 향했다. 「정말 속을 모를 사람이군요.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알긴 아나요?」 새미라는 여자는 메그보다 콘의 나이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녀는 콘에게 단순 이상의 관심이 있는 것이 분명했으며 짙은 화장 아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콘은 저 여자와 함께 잤을까? 그렇다면 얼마 동안이나? 메그는 그때까지 자신에 관한 생각에 빠져 있느라고 콘이 러시아를 탈출한 이후 만났을지도 모르는 여자들에 대해 미처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그렇다면 메그 이외의 어떤 여자도 없었다는 그의 주장은 허위가 아닌가? 하긴 그의 모습에 끌리지 않는 여성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라는 것은 메그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오, 맙소사, 저 여자는 그를 사랑하고 있어. 새미라는 여자는 애나 곁으로 다가왔다. 「공연은 재미있게 보았니?」 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우리 엄마 아빠가 결혼한 날이에요」 「오늘? 그래서 그렇게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있구나?」 그녀의 눈길이 콘에게 쏠렸다. 「그렇소」 그가 인정했다. 「그렇다면 축하드려요.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내가 알았더라면 공개적으로 축하드렸을 텐데요」 그녀는 다시 애나를 보았다. 「자, 여기 사탕과자 줄게」 그녀는 주머니에서 막대기에 달린 사탕을 하나 꺼내 애나에게 건넸다. 그 여자를 바라보는 콘의 눈길이 따스하다. 메그는 속에서 무엇인가가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단둘이 있을 때에도 메그에게 그런 눈길을 보내 준 적이 없었다. 「고맙소, 새미」 콘이 인사를 했다. 새미는 메그는 바라보았다. 「당신은 운이 좋은 여자군요. 저 남자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녀의 말은 맞았다. 메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메그의 고통은 깊어만 갔다. 새미는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콘은 메그도 알지 못했던 부분까지 그 여자에게 보여 준 것일까? 그렇다면 얼만큼이나? 「언제 한번 우리집에 와요. 저녁을 함께 들도록 합시다」 콘이 말했다. 「내 강아지를 안을 수 있게 허락해 줄게요」 애나는 사탕과자를 입에 문 채 옆에서 거들었다. 「강아지가 태어난 모양이구나, 응? 그 집에 경사가 겹쳤는걸. 나 같으면 잔뜩 흥분해서 밤에 잠이 오지 않을 거야」 애나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메그 역시 속마음을 감춘 채 새미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냈다. 「오늘 공연을 재미있게 보았어요, 레인 양. 정말 잘하시더군요」 새미는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콘은 그녀와 몇 걸음 함께 걸어가며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메그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애나에게 코트를 입힌 다음 자신도 옷을 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메그는 콘의 시선을 느꼈으나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콘은 애나를 안아들고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갔다. 「지금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러 가나요?」 애나가 물었다. 「하루에 너무 많은 일을 할 수 없지 않겠니? 오늘은 집에 가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가는 것이 어때?」 「좋아요. 그런데 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 난 아빠가 그 여자에게 키스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녀는 친구란다」 「그 여자를 사랑해요?」 메그는 자신도 모르게 콘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기다렸다. 「너와 네 엄마를 사랑하듯이 그녀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라면 대답은 <아니오>란다」 「그럼 그녀는 아빠를 사랑해요?」 콘은 애나를 꼭 껴안았다. 「그건 좋다는 감정이지. 나는 그녀를 여러 해 전에 만났는데, 그때 그녀는 가족 피크닉을 갔다가 어린 아들을 잃어버렸단다. 온 동네 사람들이 그애를 찾으러 갔지. 그때 내가 숲속에서 자고 있던 그 아이를 발견했지」 메그의 심장이 심하게 뛰었다. 「그애 이름이 뭔데요?」 애나가 물었다. 「브래드」 「몇 살이죠?」 「여덟 살이란다」 「그애는 아빠가 있나요?」 「응. 그렇지만 아빠는 함께 살지 않아」 「어떻게 그애를 발견했는데요?」 「운이 좋았지」 애나는 콘의 목을 꼭 껴안았다. 「난 아빠가 우리 아빠라는 것이 기뻐요」 「나도 그렇단다」 콘이 중얼거렸다. 나도 그래, 메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8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애나는 강아지를 한번 꼬옥 껴안아 준 다음 방으로 올라갔다. 콘은 아이에게 개들을 보살펴 주고 문단속을 해야겠다고 말하면서 잘자라는 키스를 해주었다. 애나는 팔에 호두까기 인형을 안은 채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메그는 아이의 예쁜 드레스를 벽장에 걸어주고 방을 정돈했다. 애나가 조심스럽게 인형을 꺼내어 하얀색 프랑스식 서랍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레이스가 드리워진 침대, 탁자와 함께 구입한 것으로 방안의 모든 것은 작은 소녀가 꿈속에서 그리던 동화의 나라처럼 꾸며져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후, 그녀가 살던 아파트로부터 물건들이 들어오면 이 방은 여러 개의 인형들을 포함한 애나의 물건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지금 가져온 것은 애나의 수족관뿐이며, 옮겨오자마자 콘은 애나의 부탁대로 그것을 설치해 주었다. 메그는 수족관 안의 물고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녀가 그것을 처음 샀을 때를 생각했다. 그녀는 애나에게 애완동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아파트에서 마땅히 기를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관상용 물고기였다. 이제 애나에게는 사랑스러운 세 마리의 개가 생겼고 콘은 모든 정성을 딸에게 쏟았다. 메그는 처음에 그가 애나를 멋대로 만들 것이라고 걱정했으나, 그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아이에게 책임감을 길러 주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는 중이다. 혹시 그 모든 것이 허위가 아닐까? 어찌어찌하여 결혼은 했지만 그가 애나를 데리고 멀리 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완전히 믿기 어려웠다. 「메기?」 그녀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문가에 그의 검은 윤곽이 보였다. 「왜요?」 「나 좀 봅시다」 메그는 떨리는 손으로 수족관 모서리를 움켜잡았다. 「곧 가요」 애나의 방문을 닫고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메그는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청색과 검정색 줄무늬가 들어 있는 가운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이 그녀의 두려움을 가중시켰다. 그가 바로 7년 전 그녀와 사랑을 나누던 남자라는 사실조차 아무런 위안이 되어 주지 못했다. 그는 아직 적이고 완전한 타인이며 그를 믿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나는 당신에게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소」 메그의 주먹진 손바닥 안으로 손톱이 파고들었다. 「그런데 결혼을 했으니까 당신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말인가요?」 「사실대로 말한다면, 그렇소. 난 당신과 함께 있고 싶소, 메기. 그저 옆에 누워 있는 것만으로 족하오. 당신은 내 전부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아니오. 그건 사실이오」 「더이상 거짓말하지 말아요, 콘. 제발 부탁이에요」 메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당신은 애나와의 관계를 요구했고, 이젠 충분하잖아요?」 「나도 충분하다고 말했으면 좋겠소. 그런데 그렇지 않아」 그가 풀이 죽은 채 대답했다.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요?」 「그러지 마시오. 난 너무 오래 기다렸소」 「그럼 이제 가면을 벗어 버린 거로군요」 「처음부터 그런 것은 없었소」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난 당신이 러시아를 떠나기 전에 결혼해 달라고 애원했소. 그리고 발레 공연에서 다시 만나던 날도 그랬지. 당신은 이제 내 아내요. 아무것도 우리 사이를 갈라놓진 못하오」 「당신이 정말 누구인지조차 모른다는 사실만 빼고는요. 나는 당신에 대해 하나도 몰라요. 물론 가족도 만난 적이 없죠. 러시아에서 당신은 공포의 대상인 KGB 요원이었고, 그것도 꽤나 높은 자리였어요. 그리고 나는 우리의 사랑이 계획된 것인지 아닌지도 몰라요. 당신은 자신을 콘스탄틴 루덴코라고 했어요. 그럼 그 이름은 당신의 부모님이 지어 주신 건가요? 아니면 KGB에서 준 건가요?」 그녀의 입에서 한번 말이 쏟아지자 걷잡을 수 없었다. 「이 나라에서 당신은 게리 존슨이라는 평범한 미국인 행세를 하며 살고 있어요. 그는 멋진 집에서 살고 뷰익을 몰고 다니며 이웃들 사이에서는 괜찮은 남자로 통하죠. 도대체 진짜 당신이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알죠? 당신의 아이가 또 있는지, 벌써 십대인지 아니면 거의 성년이 되었는지 누가 알아요?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요?」 콘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도 모르오, 메기. 그래서 당신에게 온 거요. 바로 나를 찾기 위해서 말이오」 그런 대답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말은 그녀를 헤어나기 힘든 혼란 속으로 밀어놓는 것으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어젯밤 묵었던 손님방으로 달려갔다. 콘이 뒤쫓아와 문가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면 안되겠소? 그저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말이오. 당신 몸에는 손 대지 않겠소. 약속하리다, 메기. 그저 옆에 있어 주면 좋겠소. 우리가 떨어져 지낸 수년 동안…」 갑자기 그가 러시아 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을 한번만이라도 만났으면, 당신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내와 당신의 체취를 단 한번만이라도 맡았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모르오. 제발 내 소원을 들어주시오」 그의 자연스러운 러시아어는 메그에게 꿈결같이 지나간 과거의 기억들을 되살려 주었다. 메그는 옛감정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서랍장에서 잠옷을 꺼내들고 욕실로 가서 갈아입고 다시 방으로 왔다. 그때까지도 방문가에 서 있던 그가 방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메기?」 「나… 난…」 「만약 당신이 오늘밤 나와 함께 지낸다면…」그가 말을 가로챘다. 「…당신은 내가 애나를 데리고 떠날까 겁내지 않아도 될 거요」 아뇨, 그녀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내가 겁내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난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 겁내는 거죠. 콘은 서로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녀의 침대 속으로 들어왔다. 매트리스의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의 따스한 온기와 상쾌한 비누향내가 그녀의 감각을 자극했다. 「무슨 말이든지 해봐요, 내 사랑」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저녁에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 같았다. 「당신이 러시아 땅을 떠난 뒤 얼마 동안이나 나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말해 주시오」 오, 콘…. 그녀는 터져나오는 한숨을 베개 속에 묻으며 침대 가장자리를 움켜잡았다. 「나는 당신이 탄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소. 그리고 그때의 오두막집으로 달려가 망각의 힘이 나를 건져내 줄 때까지 보드카를 마셔댔소. 그렇지만 그 어떤 것도 침대와 베개에 남아 있는 당신의 체취를 없애 주지 못했소. 모든 것을 나눈 뒤 당신이 떠나가고 남은 그 공허함이란… 난 내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도 모를 지경이었소」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지금 그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의 고백은 그녀가 간직하고 있던 기억의 끈을 풀어 버렸다. 「난 내가 탄 비행기가 그대로 추락한다 할지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나에게는 돌아갈 집도 없었고, 내 마음은 러시아에 있었으니까요. 당신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을 상상을 하면서 그저 죽고만 싶었어요. 함께 외출할 때마다 당신에게 쏟아지는 여자들의 눈길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요」 「메기!」 「그래요, 그랬어요. 당신도 알고 있을 거예요. 난 질투가 그렇게 가슴 아픈 것인 줄 몰랐으니까요」 그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나 역시 모스크바에 막 도착한 아름다운 금발머리 여자에게 쏠리는 눈들을 의식해야 했소. 어떤 요원들은 내게 6개월치 월급 정도되는 돈을 주겠다고까지 했소. 당신 때문에 나는 적이 많이 생겼지」 만약 다른 남자가 메그에게 그런 말을 했더라면 그녀는 기분이 매우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분명 과장임에 틀림없다. 「당신의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아 천만다행이오. 당신이 미국에 도착했을 때의 일을 말해 주시오. 뭘 했으며 어떤 기분이었나 말이오」 왜 그런 것을 물어볼까? 모두 알고 있으면서 말이야. 메그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세관과 CIA에서의 조사가 끝났을 때 그녀는 자신의 몸으로부터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뉴욕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 다른 곳으로 갔어요. 그곳에서 이틀 동안 녹초가 되도록 조사를 받았죠」 「나 때문이겠군. 그들은 우리 사이를 알았을 테니 말이오」 「그래요」 「그리고 여러 가지 경고를 받았을 거요」 「네」 마침내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적셨다. 「나는 있는 힘껏 돈을 모아 다음해에 다시 모스크바로 떠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말하길 내가 당신의 목표였다고 했어요」 「당신이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말한 이유를 알았을 거요」 「어… 어쨌거나 그들이 날 놓아 준 다음 난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했어요. 오히려 잘된 일이었죠. 아니면 미쳐 버렸을 테니까요. 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입맛도 잃었어요. 겨우 아파트를 구했소 돈이 바닥나기 전에 일자리를 구해야 했죠」 「더이상 러시아 어를 가르치지 않은 거요?」 「네. 난 당신을 기억나게 하는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보수가 괜찮은 자리를 구했죠」 「스트롱모터스에 말이오?」 「그래요」 「아기를 가졌을 때 일을 말해 주시오. 언제 그 사실을 알았소?」 메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입맛을 잃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어요. 한달이 지나도록 건강은 더욱 나빠져서 항상 피곤해했죠. 그것을 본 한 친구가 의사에게 가보라고 하더군요」 「난 괜찮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뱃속이 영 거북하더군요.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고,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어 증세를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그가 산부인과 의사를 추천해 주었어요」 「그가 내게 아기를 가진 것 같다고 말했을 때 나는 믿을 수 없었죠. 그렇지만 검사결과 임신이 확실했죠. 의사의 진단도 믿고 싶지 않았어요」 무거운 침묵이 어둠 속에 깔렸다. 「혹시 당신…」 「아니오, 콘. 난 한번도 낙태를 생각한 적이 없어요. 당신이 원했어도 들어주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건 간에 아기를 희생시킬 수는 없었죠. 게다가 난 아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았고, 오히려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생긴 거예요. 그리고 난 건강하고 튼튼한 아이를 낳았어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소. 그로 인해 나의 삶 역시 당신과 함께 있게 된 거요」 이렇게 진지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메그는 더 이상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아기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탈출계획을 세웠소. 아주 세밀하게 준비해야 했소. 단 하나의 허점도 남기지 말아야 했으니까」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나요?」 그녀는 정말 알고 싶었다. 「말할 수 없소」 메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서 당신을 믿으라는 건가요?」 콘은 팔꿈치로 지탱하면서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나 역시 어떻게 당신과 애나를 찾아올 수 있었는지 말해 주고 싶소…. 그러나 그럴 수 없는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거요?」 그는 조금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왜 말을 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안돼요. 부부라면 모든 것을 나누어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물론 그렇소. 하지만 나의 탈출에 관한 것은 다른 문제이며, 나를 도와준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그래야만 하오」 「러시아 정부가 아직도 당신을 찾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찾아나서지는 않았을 거요. 그러나 리스트에는 올라가 있소」 「그렇다면 아직 위험하다는 뜻인가요?」 「어느 정부로부터의 위험을 말하는 거요?」 매그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날 놀리지 말아요, 콘」 「오늘밤 그런 얘기는 하지 맙시다」 「왜 당신은 미국정부로부터의 위험을 생각하고 있죠?」 「아마 그들은 당신보다도 더 나를 믿지 않을 거요」 그는 괴로운 듯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메그는 그의 약한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신이 정보를 제공했는데도 말이죠?」 그가 얼굴을 들었다. 「자신의 조국에 등을 돌린 사람은 어찌되었건 배신자라는 딱지가 붙게 마련이오」 그것은 정말 끔찍한 얘기였다. 아무도 그를 믿어 주지 않았다니. 지난 6년 동안 무척 외로웠을 것이다. 그 외로움은 그의 나머지 여생을 지배할는지도 모른다. 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희망이 너무 컸나 보오. 하지만 노력을 해보겠소. 잘자요, 메기」 그는 문을 나서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다시는 당신에게 함께 자고 싶다고 부탁하지 않을 테니 안심해요」 「크리스마스 트리는 어디에 놓을 건가요, 아빠?」 「엄마가 제일 괜찮다고 생각하는 곳이 좋겠구나」 그들은 아침 일찍부터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장식품들을 샀다. 먼저 살던 아파트에 놓았던 작은 나무에서 나온 작은 전구들과 장식품들이 있었으나 그것으로 2m가 넘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집에 돌아오자 메그는 거실 유리창 앞에 나무를 놓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고, 모두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테이블과 램프 등을 다른 장소로 옮겼다. 그런 다음 콘은 나무를 세웠고, 메그는 전구 꾸러미를 끄르고, 토르와 함께 서 있던 애나는 나무에 매달 수 있도록 그것을 콘에게 전달해 주었다. 세 사람의 손발이 척척 맞아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만약 누군가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세상에서 가장 단란한 가족이라고 말할 것이며 그 누구도 콘의 어두움이나 지난밤에 일어났던 일들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위기의 미묘함을 느낄 수 있다. 그저 옆에만 있어 달라고 애걸하던 남자는 이제 다시 그런 부탁을 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할 만큼 정신적으로 황폐해 있었다. 그날 밤 메그는 다시 한번 해보려는 시도조차 무색하게 할 만큼 차가운 콘의 얼굴이 아른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생각과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그녀 자신도 혼란스러웠다. 몇 년 전 그녀는 CIA로부터 자기 나라에서 탈출한 사람들에 관한 글을 받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아무데도 소속하지 못하고 허공에 뜬 채 생의 나머지를 보내야 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바로 그것 때문에 콘이 모범적인 아버지가 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픔을 잊기 위해서, 그렇다면 지난밤 메그의 침대 안으로 들어오려고 한 이유도 고통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키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솔직히 인간답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만약 두 사람의 처지가 바뀌고 그녀가 미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면 그녀는 아마 그가 사는 대로 따라갔을 것이다. 「엄마, 상자가 하나 남았어요」 그대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마지막 상자의 테이프를 뜯고 전구들을 꺼내 애나에게 건넸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콘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생각은 딴 곳에 쏠려 있는 듯했다. 차가운 기운이 그녀를 훑고 지나갔다. 그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불행과 처절함을 견딜 수 없어 저녁을 준비해야겠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그 다음 며칠 동안, 적어도 겉으로는 평온한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메그에 대한 그의 열띤 감정은 이제 사라졌다. 그녀는 견디기 어려웠다. 메기는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긴장감을 풀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애나와 함께 전에 살던 아파트로 와서 청소를 마무리짓고 그녀 앞으로 온 크리스카스 카드 뭉치를 훑어보았다. 그중 하나는 그녀의 옛 러시아 어 선생인 타티아나 스미르노브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메그는 콘에게 조금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자신이 그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콘이 그들을 데리러 왔을 때, 그녀는 그에게 살 물건들이 있다고 말했다. 콘은 그들을 쇼핑몰 앞에 내려 주었으며 2시간쯤 후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메그는 애나에게 그녀의 계획을 말하고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들은 택시를 타고 타티아나가 경영하고 있는 화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러시아로부터 들어온 예술품들을 살 수 있었다. 메그와 애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림과 성상들, 인형, 모자, 스카프 등등을 구경했다. 마침내 메그의 시선이 한 유화그림으로 쏠렸다. 야생관목들이 우거져 있는 산을 그린 그림으로 제목은 <우랄 지방의 봄>이었다. 애나는 여러 가지 성화들을 놓고 고심하다가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림을 골랐다. 유화와 성화를 싸고 있는 동안, 메그는 진열장에 놓여 있는 인형을 보았다. 러시아 여자의모습을 하고 있는 인형은 하나씩 벗겨갈 때마다 크기는 먼저 것보다 조금 작으면서 표정이 다른 인형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아마 애나가 보면 신기해할 것이다. 메그는 애나가 보지 않는 틈을 타 그 인형을 포장해 달라고 점원에게 살짝 귀띔을 했다. 물건값은 천 달러가 넘었으므로 메그의 빈약한 저축액은 바닥이 났다. 그러나 콘과 그녀의 관계가 위험수위에 다다른 지금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다시 택시를 타고 콘과 약속한 쇼핑몰로 돌아왔다. 선물포장 상점에 들러 크리스마스 선물용 포장지로 선물들을 근사하게 포장하고 콘이 오기를 기다렸다. 다행스럽게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많은 눈이 내려 애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녀는 개들과 함께 콘이 눈을 치우는 것을 보면서 눈사람을 만들었다. 메그는 부엌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애나 또래의 아이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아이들은 콘의 주변을 맴돌며 즐거운 듯 웃어댔고 거기에 개들이 짓는 소리가 어우러져 한층 재미있어 보였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메그는 생각에 잠겼다. 만약 저 모습이 그의 본래 모습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한 남자. 사랑스런 아빠. 선택한 땅을 포옹할 줄 아는 새로운 미국 시민. 7년이라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직 그때의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면? 메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메그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한밤중에 일어나 아래층에 놓여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에 선물을 놓았다. 그리고 커다란 침대에 누워 어둠을 응시하면 또다시 눈물로 베개를 적셨다. 크리스마스 아침, 잔뜩 흥분한 애나는 개들을 데리고 메그의 방으로 뛰어들어와 아빠가 벌써 아침을 준비해 놓았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산타할아버지가 다녀갔으며, 아침을 먹은 다음 거실로 가서 그가 가져온 선물들을 푸르기로 했다고 떠들어댔다. 메그는 욕실로 갔다. 밤새 내내 훌쩍여서 아직도 눈물이 남았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녀는 콘의 얼굴을 마주 보기가 괴로웠으나 애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했다. 샤워를 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머리를 빗고 약간 화장을 한 다음 두 해 전에 산 체리 색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자, 어서 와요」 콘은 계단을 내려오는 메그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기」 「메리 크리스마스」 메그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짜내어야 했다. 그의 멋진 모습과 세련된 몸놀림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애나는 새로 산 드레스를 입고 콘의 옆에 서 있었다. 「아빠에게 키스해야 해요, 엄마. 아빠가 그러는데 그건 풍습이래요」 「엄마가 원한다면 말이지, 애노슈카」 메그는 그에게 다가가 뺨에 스치듯 가벼운 키스를 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을 원하는 그녀의 마음을 모를 것이다.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얼마나 참고 있는지 말이다. 그와 함께 지내던 아름다운 날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척해도 소용없었다. 그때의 그 즐거움을, 그녀는 다시 한번 그런 기쁨을 누리고 싶었다. 하늘이 돕는다면…. 9 「지금 가도 되나요, 아빠? 난 달걀도 먹고 우유도 모두 마셨어요」 「어떻소, 메기. 준비됐소?」 메그는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먼저들 가세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는 콘과 애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애나와 바로 곁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개들은 콘이 인형의 집과 찻잔 세트를 조립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또한 메그의 선물인 여러 가지로 변형되는 러시아 인형과 캔디 그리고 아이들용으로 나온 인어공주 시계는 애나를 매혹시켰다. 애나는 이상하게 생긴 러시아 인형을 먼저 집어들었다. 「이게 뭐에요? 할머닌가?」 메그는 어리둥절해 있는 애나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콘도 따라 웃으며 어디서 그런 인형을 구했는지 궁금해하는 눈길을 보냈다. 「이걸 봐라, 애노슈카」 콘이 날랜 손놀림으로 인형을 두 쪽으로 나누자 크기가 작은 인형이 나타났다. 애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한 것처럼 다시 열어 보렴」 콘이 인형을 건네주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14개의 작은 조각들이 거실 카펫 위에 흩어졌다. 애나는 다시 조각들을 맞추어 놓으려고 했으나 잘 안되는지 얼굴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메그는 콘에게 선물을 줄 차례라고 생각했다. 「당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포장지에 싼 선물을 건넸다.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는 선물을 풀었다. 애나는 인형조각들을 원래의 모양대로 맞추는 데 정신이 팔려 거실 안은 조용했다. 메그는 불안했다. 그녀는 콘이 캔버스의 그림을 지그시 바라보는 동안 숨을 멈춘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그건 우랄 지방의 풍경이에요. 당신이 러시아를 그리워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 그곳에서 하이킹을 하기도 했다고 그래서…」 「메기…」 그는 손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캔버스를 꽉 움켜잡았다. 「나도 선물이 있어요, 아빠」 애나는 아직 다 맞추지 못한 인형을 바닥에 내려놓고 선물 꾸러미를 들고와 그에게 건넸다. 콘이 귀에 대고 상자를 흔들자 애나가 재밌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애나는 더 이상 비밀을 참지 못했다. 「그건요… 성모의 초상이에요」 콘은 포장지를 뜯고 나무 액자를 조심스럽게 꺼내들었다. 그런 다음 가슴에 대고 십자가를 그렸다. 「그것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 예수 그림이에요」 애나는 그림을 가리켰다. 「난 이 그림이 제일 좋아요. 엄마가 그러는데 이것은 러시아에서 온 거래요. 이쁘지 않아요, 아빠?」 콘은 애나를 끌어당겨 품안에 꼭 껴안았다. 「사랑한단다. 네가 날 사랑하듯이 나도 널 사랑해」 메그는 그들의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려고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테드가 보낸 캔디 상자를 풀렀다. 「엄마 선물을 어디에 있나요?」 애나가 물었다. 「네 아빠는 이미 내게 선물을 했단다. 결혼식날 저녁에 입었던 그 검정 코트를 기억하지?」 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엄마에게 줄 선물을 주문했는데, 아직 배달이 되지 않았구나」 콘이 말했다. 「아니에요. 됐어요」 메그는 로슨 부인이 보내온 과일바구니를 팔에 안고 오븐에 굽고 있는 칠면조를 보기 위해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많은 선물을 받았으니 더 이상 하지 마세요」 음식들을 준비하고 있는 사이 애나가 인형과 집을 가지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아이는 인형들을 가가 다른 방에 넣고 해야 할 일을 일러주면서 만약 제대로 하지 않으면 저쪽에 앉아 있는 호두까기 병정인형이 그녀들을 벌주게 될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창문 너머로 길 건너편에 사는 아이들이 기웃거렸다. 새로 사귄 애나의 친구들은 애나가 선물로 받은 인형을 부러운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또 발코니의 강아지에게 관심을 보였다. 콘이 다가서자 아이들은 와 하며 여러 방향으로 흩어졌다. 아이들은 곧 그런 장난에 싫증을 내고 콘이 제의한 대로 함께 밖에서 놀기로 했다. 메그는 부엌에 홀로 남아 음식을 만들었다. 음식이 준비되자 청소를 하기 이해 거실로 나와 보니 콘의 손길이 이미 닿아 거실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메그와 애나가 선물한 그림들은 막 타오르기 시작한 벽난로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메그는 서재를 향해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프린스나 토르, 간디와 다른 두 마리의 강아지들도 보이지 않았다. 메그는 돌아서서 집 뒤쪽으로 나가 보았으나 차고에 차 두 대만 있을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모두들 앞뜰에 있는지 몰라. 메그는 뛰어나가면서 애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소복이 쌓여 있는 눈위에 콘의 넥타이가 둘러진 눈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유괴? 바싹바싹 죄여오는 공포 속에서 메그는 코트도 입지 않은 채 거리로 뛰어나갔다. 혹시 이웃집에서 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웃 아이들은 애나가 아빠와 개들과 함께 어디론가 갔다고 말했다. 메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차를 몰고 얼어붙은 길을 미친 듯이 달라며 애나를 찾아헤멨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작은 소녀와 어른 남자 한 명 그리고 독일산 셰퍼드가족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으나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녀가 할 일은 가능한 빨리 집으로 돌아가 경찰에 전화를 걸어 콘과 애나가 미국을 떠나기 전에 막아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다. 그는 지금 다시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눈물이 흘러 양볼을 적셨다. 메그는 수화기를 들고 위급신고 번호인 911을 누르고 자신의 딸이 실종되었다고 말했다. 안내원은 그녀의 주소를 물은 뒤 몇 분 후 경찰관들이 방문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메그에게는 그 몇 분이 마치 백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소용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그녀는 밖으로 나가 애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기 시작했다. 곧 몇몇 이웃집 사람들과 아이들이 애나를 찾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나섰고, 그들은 먼저 이웃집들을 한집 한집 방문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경찰차가 도착해 경찰관 두 명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우선 진정하십시오, 부인. 그리고 왜 가족들이 행방불명되었다고 생각하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들이 없어진 지 얼마나 되었죠?」 「나도 모르겠어요, 한 시간쯤이나, 좀더 되었을 거예요. 부엌에서 바쁘게 일을 하느라고 그들의 소리를 듣지 못했어요. 그리고 개들도 없어졌어요」 「아마 산책을 나갔을 겁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 근방을 모두 찾아보았지만 아무도 그들을 본 사람이 없어요. 차는 차고에 그대로 있고요」 「그럼 이웃집을 방문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크리스마스니까요」 메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내 남편은…」 「…여기 있소」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프레드의 집에 들러서 강아지를 보여 줬어요. 그에게는 배가 들어 있는 병과 예쁜 고양이가 있었어요」 애나가 큰소리로 떠들었다. 메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애나를 꼭 껴안았다. 경찰관들 중 한 명이 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댁의 부인께서는 당신과 따님이 실종된 줄 알고 무척 걱정을 했습니다」 메그는 콘의 눈에서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는 괴로움이 일렁거리는 것을 보았다. 완전히 소진되어 금장이라도 죽어 버릴 사람 같았다. 도 다른 공포가 몰려왔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그러나 그의 태도는 의연했다. 콘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가까이 끌어당겨 따뜻한 키스를 해주었다. 「프레드 딕스트라의 집앞을 지나는데 그가 우리를 불렀소. 그는 철도청에서 근무하다 퇴직을 한 남자로 혼자서 살고 있소. 애나를 보고 부르더니 초콜릿으로 만든 산타를 주었소」 「미안해요. 난 그것도 모르고…」 메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그는 내가 쏟아놓는 당신과 애나의 이야기를 무던히 참고 들어주었소. 이제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당신에게 의사를 물어보겠노라고 말하고 있는데 던롭 부인이 뛰어와 당신이 나와 애나를 찾고 있다고 말해 주더군. 당신을 놀라게 해서 미안하오」 그는 다시 메그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해주겠소, 존슨 부인」 메그는 부드러운 말투에 숨겨져 있는 그의 속뜻을 읽을 수 있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우리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경찰관이 미소지었다. 「공연히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콘이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애나, 베란다로 가서 부츠를 벗으렴. 바닥이 물투성이야」 「알았어요, 엄마. 토르, 간디, 날 따라와」 메그는 자신을 따라오는 콘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이제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침실로 들어와 조용히 문을 닫고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 미안해요. 난…」 그녀가 겨우 말을 꺼냈다. 「한 가지만 말해 주오」 그의 목소리는 얼음같이 차가웠다. 「나에 대해 고발을 한 거요?」 메그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에요」 「사실대로 말해요, 메기. 만약 당신이 내가 애나를 유괴하려고 했다는 식으로 말했다면 나는 이사를 하고 이름도 바꾸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이 일을 공개할지 모르오」 메그는 두려웠다. 「아녜요, 콘. 911에 전화를 걸어 단지 애나가 행방불명이라는 말을 했을 뿐이에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했구요」 「하지만 내가 집안으로 들어왔을 때 당신은 나에 관한 말을 하고 있었소. 그것을 부인하지 마시오」 메그는 무슨 변명을 해야 한다고 느꼈으나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에요」 그녀는 겨우 그렇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기회를 잃었소, 메기」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눈에 들어오는 차가운 그의 표정에 몸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오늘 당신은 내게 러시아의 영혼을 선물로 주었소, 나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었소. 그런데…」 분노 때문인지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메그는 콘이 여러 해 걸려 겨우 마련한 새로운 발판을 일시에 무너뜨릴 뻔했던 자신의 행동을 되새겨보며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엄마?」 메그는 자신을 부르며 이층으로 올라오는 애나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눈물을 닦아내기 위해 얼른 욕실로 갔다. 「오늘 저녁에 프레드를 초대해도 되나요? 그는 좋은 사람이에요」 차라리 손님이 있으면 더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콘이 이미 절반 약속을 해놓은 터라 초대를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의 집에 가서 함께 오렴. 저녁때까지 함께 말동무를 하면 좋지 않겠니? 넌 그에게 네 장난감도 보여 주고 말이야」 「지금 가도 돼요?」 「그래. 모자 쓰고 부츠를 신고 가야 한다」 「그럴게요」 메그는 콘에게 프레드가 온다는 말을 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의 서재로 들어갔다. 「애나는 어디에 있소?」 「내가 딕스트라 씨 댁에 가서 그분을 모셔오라고 그랬어요」 그는 의자 뒤로 몸을 젖히면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동안이나마 그애가 집안에 없어서 다행이오. 그애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오」 「무… 무슨…」 「이유를 묻지 마시오. 당신은 그저 듣고만 있으면 되오」 「난 당신의 아내예요!」 그녀가 소리쳤다. 「당신은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할 권리가 없어요」 「아, 그 사실을 깜박했군」 그가 음산한 미소를 띄웠다. 「그렇소, 당신은 내 아내요. 불과 닷새 전에 이 집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맹세를 했지」 「그만해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콘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걱정말아요. 내가 떠날 테니까」 「뭐라고요?」 「당신의 이름이 내 은행구좌에 올라 있으니 필요한 돈은 거기서 꺼내 쓰시오. 아마 돈은 충분할 거요. 그리고 이 집도 당신 이름으로 되어 있소」 「무슨 뜻이죠?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다신은 어디로 가는 건가요?」 「당신에게 말을 해보았자 믿지 않을 테니 관둡시다」 「얼마나 걸리나요?」 「당신은 내가 영원히 사라져 주기를 바라지 않았소?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그건 중요한 문제예요. 애나에게 그럴 수 없어요」 「아이는 곧 잊어버릴 거요. 나도 어렸을 때 가족들과 떨어졌지만 곧 괜찮아졌소. 당은 나에게 여러 가지 할 일을 주었지. 그리고 애나에겐 당신이 있지 않소」 「콘… 제발 그러지 말아요」 메그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내가 당신을 곤경에 빠뜨린 건가요?」 그러나 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날 더 이상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거예요? 정말 그런가요?」 메그가 다시 물었다. 「오늘밤 애나가 잠이 들면 떠나겠소. 일단 그애에게는 내가 사업 때문에 뉴욕에 갔다고 말하시오」 「무슨 사업?」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이제야 내가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관심이 생긴 거요?」 그의 비꼬는 말투에 메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은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이 당신 나라 정부에 비밀을 판 대가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오?」 메그는 그렇게 믿어왔다. 진실을 알기엔 이미 늦은 것은 아닌지…. 「무슨 글을 썼나요? 전에 월트가 말하길 당신이 KGB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하더군요」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내가 나가면 내 서재를 뒤져 보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요. 그리고 비디오테이프가 몇 개 있소. 아마 애나에게 아빠에 대한 작은 추억거리가 되어 줄거요」 메그는 그가 그가 그녀에게서 스르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해야 그를 붙잡을 수 있을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신은 애나를 사랑해요. 나는 당신이 아이 때문에 탈출했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너무 늦게 왔나 보오」 그의 눈은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토르와 간디의 짖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애나와 프레드가 도착한 게 틀림없소. 함께 손님을 맞으러 나가야 하지 않겟소?」 「존슨 부인? 스트릭랜드 상원의원이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메그는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을 꽉 주면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제발 애나가 이 전화벨 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오늘-크리스마스 다음날-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날이었다. 「전화를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다음주까지 사무실에 나오시지 않는다길래 거의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메그가 인사를 했다. 「급한 전호를 알려주는 비서가 있습니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 이름을 불러 주는데 거기에 당신 이름이 있더군요」 「이런 늦은 시간에 방해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의원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심각한 문제인가요? 이상한 우연의 일치입니다만 지금 연주회를 보고 돌아오면서 내 아내와 당신 가족을 언제 초대할지 의논을 하고 있었거든요」 메그는 가슴이 아팠다. 「의원님… 제 남편이 떠났어요」 수화기 속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부부 싸움인가요?」 「아니오, 좀더 심각한 문제예요.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저와 제 딸은 거의 절망에 빠져 있어요. 그를 찾아 제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메그는 숨이 차올랐다. 「그는 우리에게 돌아와야 해요, 꼭이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 주시겠습니까?」 메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 신경과민이 그를 떠나게 한 거예요. 애나를 데리고 러시아로 돌아가려고 한다고 몰아붙였거든요」 그리고 그녀는 경찰을 부른 일에 대해 설명했다. 「전 계속해서 그의 진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했어요. 그를 찾아 용서를 구해야 해요」 「그가 자신의 차를 가지고 떠났습니까?」 「네」 「곧 조사를 시작하도록 하지요. 무슨 단서가 잡히면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의원님만 믿고 있겠어요」 「어떻게든 해볼 테니 포기하지 마십시오」 「네, 알았어요. 전 열일곱 살 때부터 그를 사랑했죠. 항상 그이 생각뿐이었어요」 「원래 첫사랑이란 가슴이 아픈 법이지요」 그가 친절하게 위로했다. 「당신의 남편도 나와 처음 만났을 때 그런 비슷한 말을 했어요」 메그는 가슴이 저려왔다. 「콘이 그런 말을요?」 「그랬죠. 성경에 나오는 야곱과 라헬의 사랑이야기를 아시나요? 그는 자신이 야곱과 같다고 그랬어요」 메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네」 「야곱은 라헬을 7년 동안이나 짝사랑했지요. 규율 때문에 레아와 결혼하게 되자 그는 라헬을 위해 다시 7년 동안 일했어요. 남자에게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여자는 몇 명 되지 않을 겁니다」 잠시 숨을 돌린 후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부인의 남편은 부인을 위해 7년 동안 고생을 감수했을 뿐 아니라 죽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그랬는데 그렇게 쉽게 떠날 리가 없습니다. 순간의 고비라고 생각하세요」 「고맙습니다. 말씀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요, 의원님.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메그는 전화를 끊고 콘의 서재로 내려가 성경을 찾았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종이 뭉치를 찾아냈다. 원래 컴퓨터로 작업을 했는데, 종이에 적힌 것도 남아 있었다. 거기에는 KGB 에 관한 글도 있었으나 러시아 문화와 자연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 더 많았다. 마침내 성경을 찾아냈다. 그의 책상에 앉아 창세기 29장 20절을 펼치니 까만색 잉크로 밑줄 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數日)같이 여겼더라> 갑자기 글씨들이 흐릿해졌다. 그녀는 책상 위에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10 「난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요, 엄마. 프린스가 울 거에요. 그리고 아빠가 집에 돌아와 나를 찾으면 어떡해요?」 크리스마스 이후로 3주일이 지났다. 메그는 그동안 지루한 설교처럼 되풀이되는 애나의 칭얼거림을 참고 견디어야 했다. 만약 메그가 매일 애나의 학교에 가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 아이로 하여금 엄마가 가까이에 있다는 안도감을 심어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애나는 학교에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메그를 봐서도 아이의 학교에서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 더 나았다. 콘이 없는 집에서 느끼는 공허함은 더욱 참기 힘들 테니 말이다. 그의 부재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간디와 토르는 심각한 상태였다. 콘의 서재에 들어가 마치 우는 듯한 소리를 내곤 했다. 콘이 사라진 이래로 애나는 메그의 침대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팔에 안은 채 잠을 잤다. 아이는 잠시도 혼자 있으려 들지 않았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콘의 그림자는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모양이다. 메그는 스트릭랜드 상원의원이 자신의 힘을 다해 콘을 찾고 있을 거라는 사실에 추호도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레이시 보면은 상원의원과 통화를 한 다음날 전화를 걸어와 CIA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콘이 미국 내에 없다는 사실뿐이라고 전했다. 애나 때문에 메그는 마음 놓고 고통을 느낄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그가 출판업자를 만나기 위해 동부에 가서 곧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애나는 전화가 울릴 때마다 얼른 달려가 수화기를 들고 <아빠야?>라고 물었고, 그 모습을 보는 메그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그녀는 딸에게 전호를 받으면 먼저 <누구세요>라고 불어보아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화를 받지 못하게 하겠다고 타일렀다. 그대까지 멜라니는 집에 와서 이틀 밤을 자고 갔다. 그런데 그녀는 애나의 강아지 프린스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떼를 썼고, 애나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했다. 약간의 다툼 끝에 멜라니는 떠났으며, 애나는 더 이상 그녀를 자기 집에 초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지금은 길 건너편에 사는 제이슨과 애비가 애나의 친구이다. 메그는 그런 애나를 잠시 내버려두고 멜라니와는 몇 달 후에 다시 연락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바이올린 레슨도 그만두었다. 애나는 레슨을 위해 세인트루이스로 가는 도중 내내 울고 있었다. 이유는 그 사이에 아빠가 돌아오면 어떡하냐는 것이었다. 1월 말이 되었으나 콘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으며 메그는 그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물론 러시아로 돌아갔다고는 믿지 않았으나 다른 나라에 정착을 할 가능성도 있었다. 콘은 유럽에 있는 나라에서 사용하는 몇 가지 외국어에 유창했다. 따라서 미국 정부가 그를 위해 몇 가지 서류만 준비해 준다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랑스 같은 곳에서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다. 이 모둔 것이 다 내 잘못이야. 메그는 죽고 싶었다. 애나는 점점 다루기가 힘들어졌다. 주치의는 유명한 어린이 정신과 의사를 추천하면서 상담을 권유했다. 메그는 자신과 아이, 둘 다 상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음주 토요일 11시에 첫 번째 진료약속을 했다. 더 이상의 다른 대안은 없었다. 그 의사가 자신들을 도와줄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었다. 금요일 저녁식사 후, 메그는 애나에게 의사와 약속을 했다는 사실과 그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현관 벨이 울렸다. 「아빠다!」애나는 소리치며 의자에서 뛰어내려 문으로 달려갔다. 개들도 평소보다 더 크게 짖으며 뛰어나갔다. 메그는 아드레날린이 몸속으로 확 퍼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속으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으나, 콘이라면 차고에서 바로 올라올 것이며 현관 벨을 울리지 않을 것이므로 그일 리가 만무했다. 어쩌면 제이슨과 애비일지 몰랐다. 그들은 콘이 길들여 놓은 프린스와 함께 부엌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아니면 프레드가 올 수도 있다. 요즘 그는 애나와 함께 놀아주는 누구보다도 환영받는 방문객이었다. 메그는 부엌을 나서다가 러시아 어로 <내 귀여운 새앙쥐>라고 되풀이하여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럴 수가? 거실로 들어섰을 때 메그는 뚱뚱하고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애나를 팔에 안고 잇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긴 회색 머리를 쪽을 지어 올리고 호박으로 만든 목걸이와 팔찌를 하고 있었다.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애나를 꼭 껴안고 있었다. 「애노슈카」 깊고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할머니란다. 애나 할머니라고 부르렴」 「나하고 이름이 똑같네요!」 「그래, 애노슈카. 할머니는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시베리아에서부터 오셨단다」 메그는 집안으로 막 들어선 훤칠한 몸매와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는 그의 푸른 눈에는 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소박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메기, 이분이 내 마찌(러시아 어로 어머니)요」 그의 어머니. 「조금 늦었지만 당신에게 주는 내 크리스마스 선물이오. 아직 영어를 모르시니까 우리가 도와드려야 할 것 같소」 벅차 오르는 감격을 억제하느라고 말을 할 수 없던 그녀는 콘의 강한 팔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그에 대한 사랑을 쏟아놓으면서 몸과 마음이 모두 그의 것임을 확인시키며 그의 용서를 구했다. 깊숙히 다가오는 그의 키스는 오래전에 지나갔던 러시아에서의 나날들을 기억나게 해주었다. 서로의 대한 애정이 변함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엄마하고 아빠하고 지금 아기를 만들고 있나요?」 콘은 고개를 들었다. 「내일 엄마와 함께 앉아서 아기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지금 엄마는 나의 엄마를 만나야 하거든」 콘은 가볍게 몸을 둘려 메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어머니, 메기예요. 제 집사람입니다」 그가 러시아 어로 소개를 했다. 콘의 어머니는 아직까지도 애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과 머리카락은 콘을 연상시켰다. 천천히 노부인은 애나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메그의 얼굴을 감쌌다. 「메이야 도찌! (내 딸아)」 그녀는 축복을 내리는 사람처럼 경건하게 부르짖었다. 메그는 감격에 겨워 대답했다. 「어머니!」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포옹했다. 시어머니의 양볼에 정중하게 키스를 하는 메그의 가슴은 사랑과 행복에 겨워 터질 것 같았다. 콘에게 생명을 주셨으나 오래전에 아들이 죽은 줄만 알았던 가엾은 분. 언제나 만나고 싶었던 분이었다. 메그는 이 어머니와 아들의 재회를 지켜볼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여겼다. 궁금한 것들이 수없이 떠올랐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일단 감정을 가라앉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들은 콘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면서 반가워했다. 「아빠가 집에 오셔서 행복해요. 난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요」 「나도 그랬단다」 애나는 콘의 품에 안겼다. 콘은 그들의 안전이며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바위이며 삶의 등불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었다. 메그는 시어머니와 애나의 머리 위로 자신을 바라보는 콘의 뜨거운 눈길이 뜻하는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그녀처럼 그 역시 단둘만의 시간을 애타게 기다리며 참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일단 시어머니와 애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일이 먼저였다. 남편과 나눌 둘만의 시간은 나중으로 미루어야 한다. 야곱과 라헬처럼 그들은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따라서 조금 더 기다리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물론 아주 조금밖에 양보할 수 없지만 말이다. 「어머니를 당신이 떠나기 전까지 내가 쓰던 방으로 모시도록 해요. 모두 치워 놓았으니 지금 당장 쓸 수 있어요. 아마 당신만의 공간을 좋아하실 테고, 애나도 바로 옆이 할머니 방이어서 좋아할 거예요」 콘은 애나를 내려놓았다. 격한 감정에 휘말려 그의 가슴 역시 두근거리고 있었다. 「당신 물건들은 어디에 있소?」 「어디라고 생각하는데요?」 메그가 장난스레 되물었다. 「모두 아빠 방에 있죠. 바보같이 그런 것도 몰라요?」 애나가 키들거렸다. 콘은 애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꼬마는 귀가 아주 밝구나」 그는 러시아 어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우리 드미트리는 그의 아버지를 닮았어」 어머니가 말했다. 콘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당신의 본명이 드리트리예요?」 메그가 물었다. 「그래」 어머니가 대답했다. 「드미트리 레도노비치」 「그 이름이 마음에 드오?」 「그럼요. 우리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그 이름으로 해야 겠어요」 두 사람 사이에 타는 듯한 눈길이 오갔다. 「이제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받을 만한 계획을 세워야겠어요」 메그가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가 메그의 팔을 다독거렸다. 「넌 우리 드리트리에게 어울리는 여자구나. 그에겐 바로 너 같은 여자가 필요하단다. 열정이 넘치는 여자 말이다」 메그의 뺨이 불게 물들었다. 조금 당황한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당신의 아들인 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나요?」 「그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랑스러운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슈리슈카리에서 내 작은 드미트리처럼 빛나는 푸른 눈을 가진 아이는 없었단다. 그리고 머리카락하며 귀를 봐라. 꼭 소라 껍데기 같지 않니?」 그러면서 그녀는 투박한 손으로 콘의 왼쪽 눈썹을 만졌다. 「여기 눈썹에 덮인 작은 상처가 보이니? 왼쪽 어깨에도 나무 위에서 떨어졌을 때 생긴 상처가 하나 있지. 아마 네 살 때였을 거야. 이 아이는 항상 나무에 오르기를 좋아해서 아버지에게 우리집이 내려다보일 만큼 높은 산에 데려다 달라고 조르곤 했단다」 그는 아직도 산을 좋아하는걸요. 메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녀는 왼쪽 어깨의 상처를 포함해서 그의 몸 구석구석의 특징들을 잘 알고 있었는데, 그는 그 상처가 언제 생겼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와 사랑을 나눌 때 그 흉터 위에 열렬한 키스를 퍼붓곤 했다. 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그의 푸른 눈은 메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두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메그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영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슈리슈카리가 어디죠?」 「시베리아 북쪽의 작은 마을이오. 우랄 산맥의 발치에 있소」 「대강 짐작이 가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애나가 끼어들었다. 「슈어… 스케어리가 뭐예요?」 콘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대답했다. 「아빠가 태어난 마을 이름이란다」 메그는 그녀의 호기심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어떻게 당신 어머니를 찾아냈죠?」 「내가 처음 탈출할 때 다른 요원의 도움을 얻어 나에 관한 신상명세철을 빼내었소. 그리고 내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미국 정부에 어머니의 탈출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소. 그러나 당신이나 애나와 마찬가지로 위험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소. 사실은 크리스마스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문제가 생겨 지연되었던 거요」 「오, 콘…」 메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이제야 그가 사라져 버린 이유가 확실히 드러난 셈이다. 그녀는 애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용서…」 「모두 지나간 일이오. 메기」 그가 말을 가로막았다. 「오늘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요」 「그래요」 메그는 시어머니의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다시 러시아 어로 물었다. 「피곤하신가요? 이층으로 올라가시겠어요? 아니면 저녁을 드시고 집구경을 하시겠어요?」 「우리는 오늘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루종일 비행기를 타고 왔단다. 비행기에서 저녁을 잘 먹었지. 그러니 이젠 내 손녀딸과 함께 잠을 자야겠구나」 그들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애나와 개들은 신이 나서 먼저 뛰어올라갔고 콘은 짐을 들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애나는 드리트리의 누이인 나디아를 많이 닮았구나. 명랑하고 활기 찬 모습이 똑같아」 어머니가 말했다. 「나디아는 열네 살 생일을 얼마 안 남기고 폐렴으로 죽었소」 콘이 영어로 설명했다. 메그는 가슴이 아팠다. 「당신 아버지는요?」 「5년 전 산에 나무를 하러 가셔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소」 「그럼 어머니는 지금까지 어떻게 사셨죠?」 「관공서에서 청소 일을 하셨소」 「연세는 어떻게 되시나요?」 「예순다섯이오」 「아주 좋은 분이세요, 콘」 「그렇소. 그리고 당신도 좋은 사람이오」 밤이 깊은 뒤 집안은 조용해졌다. 콘은 메그가 애타게 기다리는 침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아가 어머니가 애나에게 호두까기 인형 책을 읽어 주는 걸 보았는데, 벌써 몇몇 단어는 익힌 것 같아 보였소」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메그는 가운을 벗고 침대로 들어온 콘의 팔에 안겼다. 「애나의 담임이었던 비즐리 선생님이 애나가 또래에 비해 영리하다고 그랬어요. 로슨 부인도 애나가 바이올린에 소질이 있다고 그랬구요. 아마 당신을 닮았나 봐요」 「그리고 엄마도 닮았지. 당신의 부드러운 영혼을 닮았소」 그는 중얼거리면서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할머니와 손녀는 아주 재미있는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소」 메그는 복받쳐오르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 책은 우리 모두를 기적처럼 이어 주고 있군요」 「그것이 바로 후두까기 인형의 마술이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이 바로 호두까기 인형이었고. 당신이 그 책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내 가슴을 찌른 이유가 바로 그것이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그 책을 선물했소. 내 사랑을 전하기 위한 정표로 말이오」 그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당신을 그리워했소.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오」 「나는 당신을 잃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겠소. 크리스마스 때, 나는 집을 나서면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소. 그렇지만 다시 한번 노력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지」 「정말 다행이에요. 당신을 사랑해요, 콘! 이게 모두 꿈은 아니겠죠?」 「우리는 마침내 함께 있게 된 거요. 다른 것은 모두 접어둡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 나와 함께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오」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이제 자신을 지켜 주던 남자, 친구, 연인, 남편 그리고 아이의 아빠인 그에게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처럼 오랜 기간을 낯선 길로 멀리 돌아서 행복을 찾은 여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메그는 사랑하는 콘스탄틴 루덴코를 위해서라면 다시 한번 그 험한 길을 감내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