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lldom series part 2. acid trip "맙소사. 지겹지도 않냐?" "그럼 달리 갈 데라도 있냐, 넌?" "...없지." "그러면 닥쳐."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5월 초순, 멋드러진 날씨에, 얼굴도 재력도 빵빵한 20세의 청년이 갈 곳이 없다는 것은. 그래서 고작 간다는 곳이 매일 나이트인 것이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대학의 다른 녀석들을 보면 이제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해서 졸업후의 진로를 걱정하는 선배라든가 입학 후유증이 이제 막 가시고 얼기설기 학교 앞 호프 따위나 전전하며 다니는 것에 비해 우리들은 얼굴도 재력도 빵빵하기 때문에 졸업후의 일 같은 것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아도 좋단 말이다. 게다가 비싼 양주를 맘껏 들이부을 수도 있고 아무튼 보통의 20살이 하고 노는 이상의 돈으로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넘치게 할 수 있다. 또 군대에 가는 것도 전혀~ 걱정이 안 된다. 우리들은 분명히 입대를 하는 순간 심장병이 발병하고 폐결핵이 도지고 척추가 나가게 되 있는 것이다. 놀고 싶은 대로 원껏 놀고, 졸업장을 따기만 하면 돈 많은 부모님이 알아서 취직 같은 것은 얼마든지 시켜줄 거니까. 그전에 가볍게 유학을 다녀오는 것은 필수 코스. 하지만 유학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겉보기만의 것으로 역시 졸업장을 따오기 위한 것이 전부다. 그냥 남들 보기에, 외국의 이름 모를 대학의 괴상한 학과의 졸업장을 가졌다는 것이 빽으로 입사를 하는 것을 뻔히 알아도 조금이나마 그럴 듯 해 보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야! 한재준! 빨리 와!" 나이트에 가는 것은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니만큼 우리 아버지들이나 어머니들처럼 룸 같은 곳에서 호스트나 호스테스를 상대로 구하기에는 껄끄럽기 때문이다. 나이트에 가면, 특히 우리가 가는 닉스는 특급 호텔의 나이트로 물이 좋다. 그런 만큼 얼굴을 반반하고 몸매도 좋고 단, 돈은 없는 여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여자들을 건지는 것이 언제나의 목적인 것이다. 그래서 하루 밤을 지내고 모른 척 해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특기다. 어쩌다 간혹은 두세번을 만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간혹의 사태. 아마도 그런 이유로 우리들은 자칭 왕자 클럽, 타칭- 주?학교에서지만- 졸부클럽이다. 우리 집 같은 경우 시골에서 순박하게 농사를 지었었다. 농사라곤 해도 규모가 제법 크기는 했다. 그 인근의 만평 가량이 전부 우리 땅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땅은 한 평에 몇 천원이 고작인 말 그래도 농사를 짓지 않으면 전혀 쓸모 없는 땅이었다. 그러던 것이 그 땅의 한쪽 위로는 고속도로가 지나고 다른 한쪽으로는 각종 관공서가 이전해 오게 된 거다. 또 다른 쪽에는 아파트 단지가 크게 들어서고. 원래에도 제법 부농이던 우리 집은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도시로 나온 순박한 시골 사람은 너무나 우수한 학습능력으로 단숨에 도시의 모든 것을 배워들였고 그게 좀 더러운 방향이었다는 것만 빼면, 정말로 나쁘지 않다. 그래도 우리 집은 그나마 농사짓던 출신이지만, 나 말고 나머지 두 녀석의 집은 정말로 질이 나쁘다. 사채업자에 폭력단 2인자의 아들. 연해건은 1억을 빌려준 후 기한이 딱 2일 지났을 때 담보로 잡은 5억 부동산을 차압해서 그걸 밑천으로 사채놀이를 시작해 돈을 모은 집의 아들이고 장수혁은 원래 2인자이던 사람의 아주 신임 받던 부하였는데 술 먹여서 암습으로 없애버리고는 범인으로 딴 사람을 몰아 역시 없애버린 다음 두목의 신임을 얻어 새로운 2인자가 되었다는, 그야말로 영화나 만화에서나 보던 비겁하고 의리 없는 전형적인 악당의 아들이었다. 악당인 만큼 꿍치는 돈이 상당히 많아 그 돈으로 사채놀이, 그러니까 그 돈으로 대신 놀아주는 게 해건이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수혁이 아버지가 운영하는 술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다 맘이 맞아 함께 놀다 이제는 절친해져 버린 것이 또 우리 아버지고. 덕분에 우리들 셋도 사이좋게 놀거라- 의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 세 집 모두 아들만 달랑 하나씩이라는 것. 시작이야 어떻든 10년이 지난 지금은 다 똑같은, 말 그대로 유유상종이다. "좀 괜찮은 애들 있어?" 우리를 보자마자 얼굴에 화색이 도는 1번 웨이터 카이가 말한다. "물론이죠. 물 좋은 애들이야 여기 다 오니까요." 나는 여자친구가 있다. 사귄 지 벌써 2년째다. 내가 희연이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군대라도 가게 되면 지 멋대로 놀 것쯤은 잘 알고 있다. 류머티즘이라든가 편두통 같은 걸로 분명히 1년 안에 제대해 버릴 군대지만 아무튼 희연이는 절대로 조신하게 기다릴 리 없는 인물이신 거다. 뭐, 크게 상관은 없다. 나라고 안 논 것도 아니고, 어차피 결혼을 한다면 희연이랑 하게 될 거니까 서로서로 터치 안 하고 편한 것이 좋다. 이제 20살, 결혼 운운하기에는 빠르다 싶을 지도 모르지만 졸부들일수록 상류층 비스꾸리하게 행동하고 싶어하는 거라서. 따라서 해건이도 수혁이도 희연이와 같은 용도의 여자친구가 각각 있다. 희연이가 아마 나만 바라봐족이었으면 벌써 헤어져도 골백번은 헤어졌을 거다. 니가 논다면 나도 놀아주지, 나도 노니까 너도 놀아. 그러니까 우리들은 엄밀히 말해 사귄다고 할 수도 없다. 희연이가 나와 사귄다고 말하는 것은, 나라는 방패가 필요해서. 우리 아버지가 겉보기에는 아주 번듯한 사업가라서. 내가 희연이와 사귄다고 하는 것은, 역시 희연이라는 방패가 필요해서. 유명 대학 교수의 딸인 희연이는 어른들이 보기에 몹시 반듯한 집안의 착하고 예쁜 처자여서. 즉, 우리들은 결혼을 전제로 한 사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우리들이 노는 것에 지장을 준 적은 한번도 없다. 희연이를 사귈 처음에만 해도 나이트가 다 뭐냐. 매일 붙어 다니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딱 두 달만에 시큰둥해졌을 때. 희연이도 나도 알아서 자연스럽게 딴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때는 어쩐지 찔린다는 것이 있어서 입밖에 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나도 잘 아는 얼굴인 남자와 호텔에서 나오던 희연이와 마주친 후부터 우리들은 프리했다. 내 쪽도 그때 희연이 친구랑 호텔을 나오고 있었으니까 뭐. "이게 다 모인 좋은 물이냐." 해건이가 과일을 씹으며 말했다. "야, 저기." 씹던 과일을 뱉으며 수혁이가 말했다. "어디?" 뭐랄까. 나는 이제 나이트에서 여자를 주워서 섹스 한다는 것에 지겨워졌지만. 해건이와 수혁이는 갈수록 더 따지는 것도 많아지고 까다로워지고 있었다. 요컨대 이제는 여자 보는 눈이 높아져서 더 괜찮은 여자를 찾기 위해서 엄청나게 공을 들인다는 기분. 하지만 더 좋은 여자는 있을 수 있지만 더 괜찮은 여자란 것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야, 남자가 있잖아." "그래도 여자가 2명이잖아." "하긴 같은 남자로서 거들어주는 것이 도리겠군." "지랄은." "재준이 넌 찌그러져 있어. 이 형님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수혁이 손을 든다. 수혁이는 어느 편이냐면 남자답다는 느낌이 팍 드는 녀석이다. 조폭의 아들답게 행동거지도 터프하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우락부락형은 결코 아니다. 조금은 샤프한 생김새임에도 어울리는 과격함, 믿을 수 없게도 불공평한 녀석. 그리고 해건이는 조금은 곱상하게 잘 생겼다. 소위 미소년 타입. 게다가 싹싹하다. 그에 비하면 내 쪽은 특징 없음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어디에나 널린 보통의 20세 청년답게 생겼다. 좀 더 좋게 말하자면 단정하면서도 차가운 듯 여겨지는 눈매라서 지적이게 보인다는 것. 일단은 키가 크고 몸매가 나쁘지 않은데다 스타일이 되니까. 이건 희연이 말이니까, 아마도 진실. 희연이는 입이 찢어져도 안 생긴 걸 생겼다고는 안 한다. 흥청망청 졸부라도 돈 많은 집 아들이라 꾸미기도 잘 꾸미고 다니니까 여자들은 수혁이에게는 너무 남자답다, 해건이에게는 너무 잘 생겼다, 내게는 너무 준수하다- 라는 말을 해준다. 하지만 나는 내 얼굴이 어떻든지 간에 조금도 관심 없다. 생긴 들 어떻고 안 생긴 들 또 어때. 결국 돈이 있는 이상에는 내가 노틀담의 곱추라 해도 지장이 없는 것이다. 아마도 크게는-. 아무튼 그 남자다운 수혁이와 아리따운 해건이와는 예전에야 똑같이 여자들 줍고 노는 재미에 함께 다녔다지만 이제는 여자도 시큰둥, 노는 것도 시큰둥. 그런데 왜 함께 다니느냐. 내키지 않는다면 함께 노닥거릴 일이 아니라 공부를 하든가 운동을 하든가 좀 더 건설적인 일에 시간을 보내지 않고 말이다. 요컨대 나는 게으른 것이다. 공부에는 애초에 뜻이 없었고 운동도 한 3일 다니다 대개 때려치우고 만다. 외모 단정, 성격 게으름. 이게 바로 한재준을 대표하는 두 마디인 것이다. 아마 나는 집에 돈이 없었다면, 정말로 비전 없는 사회의 검은 버섯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버섯도 하려면 이런저런 수고가 많으니까 버섯도 못했을 거다. 제비정도는 어때? 라고 해건이는 말하지만 나이트에 와도 스테이지에는 10분도 올라가지 않는 나다. 그런 내가 춤은 무슨. 그래서 나는 돈이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수혁이가 손을 들자 바로 1번 카이가 다가온다. "저기 말야. 뭐야?" "원래 일행이었습니다. 저 쪽 숙녀분들이 맘에 드시는 모양이지요?" "숙녀는 개뿔이. 아무튼 데려와." "잠깐만 기다려 주십쇼." 카이도 참 고생이 많다. 그러니까 나는 돈이 많아 다행인 거다. 나는 저렇게 못할 거니까. 하긴 뭐, 정말로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란 것이 닥쳐본 적이 없으니까 또 모르는 거지만. 그리고 곧 그 쪽에서 일어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호오, 꽤 귀엽다. 이 생머리는 약간, 내 타입. "아, 반가워요." 해건이가 특유의 사람 홀리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권했고 이내 수혁이 옆에 한 명이, 해건이 옆에 나머지 한 명이 앉는다. 뭐, 문제는 생머리가 해건이 옆에 앉았다는 것, 처음에 그녀를 향해 아, 반가워요- 라고 말해준 탓이랄까. 왜일까. 해건이와 나의 여자 취향이 참으로 재수 없게도 비슷하다는 것은. 그런 결과로 주로 내 쪽이 튕기고 만다는 것은. 그리고 멀뚱히 우리를, 정확히는 나를 바라본 남자가 내 맞은 편에 앉는다. 내 옆자리도 비긴 했지만, 솔직히 나라도 사내 놈 옆자리 같은 것은 싫다. "그런데 어떤 사이십니까?" 정중하면서도 나긋나긋하게 묻는 해건이가 몹시도 맘에 든 듯 옆자리에 앉았던 긴 생머리의 여자가 손을 가볍게 흔들어 가며 대답한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냥 오늘 요 앞에서 만난 사이니까요." "아, 그래요? 잘 됐네요. 우리도 오늘 만났으니까 공평하다는 거, 맞죠?" 역시 분위기를 후리는데는 해건이만한 말발이 없다. 수혁이는 후까시 잡는 것 말고는 그다지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녀석이니까. 여기서 또 우리들의 특징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섹스에 대해서 말하자면. 해건이는 테크니션. 몸이 약한 편인 해건이는 여자와의 섹스를 섹스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맘 편하고 기왕이면 재밌게 할 수 있는 운동 정도의 취급이다. 다른 운동에 비해 노력의 정도가 더욱 많아지니까- 꼬시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능력이라든가 자신감을 더욱 잘, 그리고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답이고. 수혁이는 정말로 넘치는 정력이- 정확히는 정액이- 주체가 안 되서 여자와 자지 않으면 곤란하니까란 것이다. 딱 한 번, 우리 세 명이 세 명의 여자와 집단 난교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본 수혁이는 정말로, 박아서 쏜다는 것의 원 패턴이다. 그 패턴이란 것이 어찌나 강한지 수혁이 주위에는 언제나 유혹하지 않아도 여자가 넘친다. 수고스럽게도 그런 여자들을 마다하고 꼬시러 함께 다녀 주는 진한 우정에 감동하라는 것이 수혁이의 코멘트. 실은 지겨워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리고 당연하게 나는 아주 보통의 평범한 섹스를 한다. 잠깐의 전희와 그리고 삽입, 사정에 이은 후희. 걸리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30분을 넘지 못하는, 수혁이와 해건이의 말에 의하면 지극히 50대스런 섹스라고 표현되어진다. 내가 아는 50대인 우리 아버지의 경우 안 그러니까 인정하기에는 떨떠름하지만. "일어나자." 후까시를 팍팍 잡으며 수혁이가 먼저 일어선다. 오렌지 색 길다란 파마머리의 아가씨가 머뭇거리며 생머리의 친구 쪽을 한번 보았다 수혁이를 보더니 이내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따라 나간다. 그러고 보면 이 남자와는 정말로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지도 모르겠다. 곧 해건이도 생머리 여자의 팔을 자신의 팔뚝에 가볍게 걸치고는 일어난다. "재준이 넌?" "뭐. 그냥 마시다 들어갈래." "그럴래? 그럼 오늘은 내가 계산할 테니까." "됐어. 아가씨나 즐겁게 해 주라고." "나중에 전화할게." "됐다니까." "멀리 가지 말고 기다려. 부르던가 할 테니까." 저렇게 걱정하는 척 하는 건 어디까지나 아가씨가 있기 때문에. 물론 앞에 말한 내가 계산할게는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 우리들 중 누구도 오늘은 니가 내, 임마라든가 좀 사줘라-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들은 질 떨어지는 졸부의 망나니 아들들인 것이다. 생머리 그녀는 혼자서 여자도 못 건지고 친구들이 방 잡아 놀 때 혼자 술이나 마시며 기다려야 하는 친구를 걱정하는 해건의 그 마음씀이 아주 멋져 보이는 듯 해건의 팔을 잡은 손이 아주 기어다닌다. 게다가 그 혼자 남은 친구란 게 하필이면 셋 중 제일 아니게 보였던 나라서 더 그런 건가. 잘난 두 친구들 덕에 어떻게 하나 건져보려 용쓰는 놈으로 보이는 건가, 나? 내 쪽은 설마 돈도 없어 보인다는 그런 얘기는 아니겠지. 하지만 말야, 아가씨. 부르던가 한다잖아? 아가씨, 3P 좋아해? 난 말야, 19살 겪은 난교 사건 이후로 질색이라서. 그리고 내 앞에 역시 혼자 남은 남자가 스트레이트 잔을 한 번에 비워낸다. 나야 뭐, 이런 일 익숙하지만 그 쪽은 좀 심기가 상할 상황이긴 하겠네. 그러면서 자세히 살펴본 남자는 근사했다. 싸구려인 것이 분명한 헤진 청바지에 청색의 셔츠, 그리고 흰색의 캔버스 슈즈가 적당히 어울린 모습은 어질러진 듯 하면서도 묘하게 세련된 느낌을 풍긴다. 딱히 꾸민 구석이라곤 없지만 어딘지 기본이 있다는 것. 몸도 좋아 보이고 길게 째진 눈이라든가 경사가 상당히 큰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라든가. 해건이나 수혁이에 비해 외모에서는 일단 꿀리지 않아 보이는데 데려온 여자 다 띄우고도 크게 기분 상해 보이지 않는 것이 또 의외. 단지 머니가 뭐니 싶게 본 적 없이 궁한 거야? 하긴 그 쪽 정도면 현장 조달도 충분하겠잖아. "그럼." 모르는 사람이랑 앉아 마시는 것도 머쓱하고 어째 좀 뜨악하게 여겨지는 상황이라 일어서려는데 남자가 정말로 놀라며 묻는다. "그 쪽이, 내 파트너 아냐?" 입이 쩌억, 벌어졌다. "파, 파트너?" "둘 다 가버렸잖아. 그 쪽하고 나만 남았으니까." 멀쩡하게 생겨서는, 실은 미친놈인 건가? 손을 들자 카이가 잽싸게 다가온다. "이 사람한테 여자 하나 붙여 줘." "혼자, 말입니까?" "난 갈 거야." "알겠습니다." 멀어지는 카이쪽으로는 눈길도 안 주고 남자는 내 쪽만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하긴 이렇게 맘 좋은 사람은 당신도 처음일 거야. 계산도 해주고 갈 생각이니까. 그리고 카운터로 걸어가자 언제나 앉아 있는 아가씨가 말한다. "어머, 벌써 가시게요?" "저쪽 건 내가 낼 거니까." 매너가 해건이만큼 간드러지지는 못해도 기본 이상은 하는 나는 카운터의 아가씨에게 현금으로 팁을 건네고 아가씨를 데려다 놓았다고 다가와 말하는 카이에게도 팁을 건네고 돌아서는데 팔을 잡혔다. "잠깐만." 아까의 남자였다. "유라. 내 이름이야. 채유라. 그 쪽은?" 여자 같은 이름이다.... 라고 멍하니 생각하다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한재준." 얼굴 전체로 환하게 웃으며 채유라가 말했다. "이름, 좋은데?" "응. 그러는 넌 여자 이름 같아." "그렇지? 그래도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이래봬도 태몽이 엄청났다구." "뭐였는데?" "양귀비였대." 최소한 185센티는 넘어 보이는, 호리호리하긴 하지만 건장하다는 말이 어울릴 듯한 남자가 태몽이 양귀비였다는 것이 만족스럽다는 건가? 채유라가 팔을 잡아당긴다. "같이 마시지 않겠어?" 이제 시간은 9시였다. 혼자 사는 집 가 봐야 할 일도 없는 데다 같이 마시지 않겠어? 라고 말한 채유라의 얼굴이 뭐랄까. 굉장히 기뻐 보였다. "어디가 좋을까?" 나이트를 나와 주차장까지 함께 온 나를 내려다보며 채유라가 물었다. "아무거나 좋아?" 차키를 꺼내 꽂으며 물었다. "응. 아무거나 좋아해. 근데 차 되게 좋다. 이거 무슨 차야?" "폰티악. 하이레벨은 아냐. 값도 에쿠스 정도니까." "나는 티코도 없다구. 역시 멋지네. 하지만 운전할 수 있어? 술 마셨잖아?" 운전할 수야 있지. 당연히. 질문도 운전해도 되느냐가 아니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어." "그렇구나아-." 그러면서 요란한 차체를 둘러보는 채유라는 역시, 기뻐 보이는 얼굴이다. 이상한 놈이 아닐 수 없다. 기쁠 일 같은 것, 어디에도 없잖아? 맘이 맞는 사이 좋은 친구 사이도 아니다. 함께 온 여자를 모두 잃고 그 남은 패거리와 함께 한잔하는 것뿐이란 말이다. 나라면, 즐거울 이유 같은 것 조금도 없겠는데 말야. 더구나 상대가 멋진 여자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눈이나마 즐거운 미남인 것도 아니다. 그저 눈매가 조금 날카로운 것으로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저보다 키가 조금 작은 사내놈일 뿐인데. 어째서 저렇게 정말로 기뻐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웃는 걸까. 물론, 조금 작다라는 것은 일단은 내 키도 181센티라는 뜻이다. "...저기 혹시 말야." "응?" "지금, 기분 좋아?" "응. 굉장히 기분 좋아." 다시금 활짝 웃는 얼굴을 보며 약간은 허탈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순순히 대답해버리는 일 같은 것은 바보 취급받는단 말야. 그래서 언제나 나는 끝까지 우기거나 어거지를 부린다. 그 편도 '바보'라는 말을 듣지만 실제로는 그 어거지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내가 어울리는 녀석들이니까. 하지만 채유라를 바보 취급할 맘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다.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채유라는 정직하게 기뻐하고 있단 말이다. 도착한 곳은 해건이나 재혁이 모르게 가끔 들리곤 하던 재즈바로 소란스럽지 않은 조용한 분위기로 조금은 누락한 느낌의 실내장식들이 정말로 천연덕스럽게 어울리는, 한 마디로 허름한 이름만 바인 곳이다. 조용하다는 것 말고는 장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간판이나마 재즈바이면서 틀어주는 것은 재즈가 아니라는. 그나마 조용한 것도 워낙에 오래되고 낡은 곳이라 이제는 단골마저 찾지 않는다는 기분. "이런 곳, 좋아해?" 그렇게 묻는 채유라에게 비웃는 기색은 없다. 그저 순전히 궁금해하는 것 뿐. 뭐, 내가 독심술 같은 것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 채유라는 그런 것 같다- 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기분의 문제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니까 아마도 채유라를 이 곳에 데리고 올 생각이 들었을 거다. 해건이나 재혁이었다면 절대로 함께 올 수 없는 곳. "궁금해?" "응." 이번에도 역시 순순히 대답하는 채유라를 지나쳐 문을 밀고 들어가며 말했다. "조용해서." 아마도 작년의 이맘때의 나였다면 절대로 이런 곳을 다닐 생각은 않았을 거다. 그러니까 이 곳을 어쩌다 알게 되어서 따로 찾는 일까지 생기게 된 것은, 근래의 일로 섹스에 지루해지고 나에 대해 조금쯤은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 이다. 그렇다고 해도 커피가 2000원인 집이라니, 스스로가 놀랍지만. 사람도 없고 있어도 지쳐 보이는 아저씨들이 전부인 이 가게가 그냥, 좋은 것과는 다르게 끌렸다. 끌렸다곤 해도 맘에 든다는 것과는 또 다르다. 그냥 만만하다는 기분? 사실 만만하지 않는 곳을 찾기가 더 어려운 나지만 여기를 다니는 내가 어딘지 대견하게 느껴진다는 같잖은 우월감이 80% 정도일거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 생각 없이 생긴 주인이자 직원인 아저씨가 메뉴판과 물잔을 내려놓고 그대로 선 채 빤히 내려다본다. 하긴. 고르고 자시고 할 게 없긴 하지. 메뉴판이라고 할만한 것도 아닌 게 16절지를 반으로 자른 크기의 종이에 메뉴라곤 샌드위치-무슨 치즈 샌드위치, 햄 샌드위치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샌드위치다-, 5가지의 비알콜성 음료 - 커피와 녹차, 콜라, 오렌지 주스, 홍차-, 칵테일 4가지- 마티니, 진토닉, 김릿, 톰 칼린스, 결국 진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정말로 쉬운 칵테일만- 이상의 10가지가 전부이니까. 천천히 읽어줘도 30초면 부담스런 것을 누군들 오래 고를 수나 있느냔 말이다. 언제나 최고급 원두에 맛들여진 입은 이 집의 커피를 마시는 순간 역류했고 물 맑은 곳에서 자란 최고급의 잎녹차만 마시던 입도 그랬고 언제나 신선한 오렌지를 바로 갈아 마시던 입도 마찬가지였고 홍차는 싫어하는 것이고. 나이트엘 가도 최소한 발렌타인 30년산은 마시는데 이 집의 칵테일에 쓰는 12000원 하는 진은, 정말로 싫어서. 나는 언제나 콜라다. 그래도 캔을 준단 말이다. "콜라요." 하지만 그 10가지의 메뉴를 두고 채유라는 정말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저기, 조금 있다 주문할게요." 채유라의 그 말에 아저씨는 너무나 놀란다. 그리고 나도 놀랬다. "뭐야? 그냥 해." "고르지도 않았다고." "고르긴 뭘 골라?" "마티니가 나을까, 진토닉이 나을까?" "...진토닉." "김릿 주세요." 대체, 왜 마티니가 나을까, 진토닉이 나을까, 라고 물었던 거야. 삼각의 칵테일 글라스에 담긴 김릿을 앞에 두고 채유라는 열심히 바라본다. "이거, 맛있을까?" "글세. 난 칵테일은 별로라서." "어째서?" "스트레이트가 좋아. 담백한 맛이거든. 칵테일은 이것저것 뒤섞여서 어쩐지 맛을 알 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 맛, 저 맛 한번에 느낄 수 있잖아?" "...무슨 소리하는 거야? 칵테일이란 건 말야. 최상의 맛을 위해서 가장 어울리는 배합으로 만든 술이야. 그렇게 섞어야만 완성된 맛이 나는 거. 들어간 술맛을 따로따로 보면 안 되는 거라구." "별로라더니. 잘 아는데?" "...친구가 좋아해서. 얻어들은 풍월." 정확히는 해건이가 좋아한다. 여자를 꼬시기에 유리하다나. 심각하게, 지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고 싶을 때의 선택은 위스키라든가 브랜디의 스트레이트. 부드럽게, 상냥한 이미지는 칵테일을. 그런 게 통하나 싶었지만, 해건이를 보면 분명히 통하고 있었다. 얇은 스니후터를 들고 호박색의 브랜디를 마시며 말없이 응시한다든가 브라운의 위스키가 든 온더락잔을 들고 지그시 바라보는 해건이의 모습은, 다 아는 내가 봐도 감탄하게 되는 거다. 이 녀석, 뭔가 분위기가 잡힌 것이 걱정이라도 있는 걸까- 라고. 칵테일 글라스를 손가락에 걸치고 화려한 색의 칵테일을 마시며 살짝 눈웃음을 건넬 때는 정말로, 다정해 보인다.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며 김릿을 한 모금 마신 채유라가 고개를 갸웃한다. "음... 역시 난 맥주 정도가 딱 좋은 것 같아. 이런 맛은, 어려워. 무슨 맛이라고 한번에 설명할 수 없는 게." "맥주는 어떤데?" 잔을 내리고 미소짓는다. "나한테 맥주맛은 감자맛이야. 샤워맛이고, 차가운 맛." "...설명 좀 해주지 않을래?" 차가운 맛이란 건 이해가 되지만 나머지 것은 대체 뭐야. "맥주를 마실 때면 항상 감자를 먹거든. 튀긴 감자든 삶은 감자든. 그러니까 맥주만 마시면 곧장 감자의 맛이 기억나는 거야. 혀에 그렇게 익어버린 거지. 그리고 대개 혼자 마시는 맥주는 집에서 샤워를 끝내고서 마시니까 맥주를 마시면 몸이 물에 젖었다는 감각을 되새기거든, 또 항상 차가운 맥주만 마시구. 캔이든 병이든 표면에 냉기가 피어올라서 얇게 물방울이 맺히는 거, 좋아해. 그 물방울에 손을 대면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생기잖아. 그게 몸서리쳐지게 좋아. 차갑고, 부드러워." 맥주에 관한 철학 강의라도 들은 기분이다. 맥주를 마시는데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며 마시는 사람을, 나는 처음 봤다. "뭔가... 대단하네." "사람들마다 뭔가에 대한 잔상이랄까. 그 기억 같은 게 있잖아. 내 경우는 그게 좀 세밀한 거야. 몸에도 그렇지만 머릿속의 감각의 정보라는 것에 고스란히 남아 있거든." 그렇게 말하는 채유라는 즐거워 보였다. 그다지 즐거울 것 없다라고 생각할만한 상황이 전부인데도, 채유라는 즐거워 보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심드렁하게 시간만 때우고, 할 일없는 와중임에도 시간 때우기에도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없는 내게 채유라의 모습은, 뭐랄까. 신선, 아니 신기해 보였다. "즐거워?" "응. 즐거워. 그런데 아까도 기분 좋냐고 물었잖아? 왜 물었던 거야?" "궁금해서." "왜?" "기분 좋을 일없었으니까. 즐거울 일도 없었고." "그럼, 지금 기분 나빠? 즐겁지 않아?" 나 참. 애도 아닌데. 그렇게 곧장 물어버리면 대답하기 곤란하잖아. 분명히 기분 나쁘지 않고 즐겁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즐겁다거나 기분이 좋다라고 딱 잘라 말할 것도 없는 걸. "근데 이거, 맛없다." "그래?" 콜라를 홀짝이며 대충 대답했다. "콜라 한 입만 줄래?" "응? 하나 더 시키지 뭐." 손을 들어 주인을 부르려는 내 손을 채유라가 잡아 내린다. "그거 먹고 싶어." "먹던 거잖아. 더럽게." "양치 안 하고 살아?" "...그런 얘기가 아닌데." "그럼 나 주기 싫어?" 애처롭게 바라본다. 이게 그렇게나 먹고 싶을까. 그냥 펩시 캔일 뿐인데. 파카글라스를 내밀자 내가 입을 댄 빨대에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는 쭈욱 뿜어 올린다. "...맛있어?" "응. 콜라맛." "콜라잖아?" "하지만, 조금 달아." "펩시거든." "그게 아니고 여기에, 닿았거든." 자신의 입술을 가리키는 채유라에게 물었다. "뭐가?" "네 타액." "...뭐?" "니 침. 잠자면 질 흐르는 거." 입에 물었던 빨대가 툭- 떨어졌다. "어-. 싫어?" "싫어. 아주 싫어." "왜?" "몰라서 물어? 그런 거, 싫어한다구." "하지만 너 내 파트너잖아? 오늘 되게 궁해서 나왔단 말야." "내가 아까 거기서 여자 불러줬잖아!" "하지만 네가 더 맘에 들었는 걸. 어라. 남자랑은 처음?" "처음이 아닌 게 이상해!" "와아!" "뭐!" "좋다. 되게 좋아." "...뭐가 좋아." "남자랑 하면 뭐랄까. 아무튼 여자랑 하는 거랑은 달라서 온리 여자만 아니면 해봐도 좋다구. 잘 아는 사이잖아? 그러니까 좀 더 상냥해지고 좀 더 세심해지거든." "난 전혀 안 그러고 싶어." "흐응. 그러지 말고." "싫다잖아!" 계산서를 들고 일어서는 나를 채유라가 말끄라니 보고 있다. "그럼, 잘 가."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뒤에서 달려나온 채유라에게 팔을 붙잡혔다. "미안. 잘못했어. 이젠 안 그럴게." "늦었어. 가야한다구." "사과, 받아주지 않을 거야? 정말로 미안해하고 있어. 싫은 사람에겐 정말로 기분 나쁜 일이란 거 아니까 미안해하고 있다구. 난 다만 처음에 니가 여자들 빠지고도 상대해 주길래 혹시나 싶었을 뿐이야. 기분 나빴다면 정말 사과할 테니까." 너무나 열심히 사과하는 채유라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해건이나 수혁이에 비하면 얼마나 진솔한 태도인가. 나도 저렇게는 사과 못 할 거야. 오해라는 건 분명해졌고 굳이 사과 받아주지 못할 이유도 없으니까. "그래, 알았어." 채유라가 눈을 동글동글 나를 본다. "그럼, 한잔하러 가자. 이번엔 내가 살게. 너무 미안하니까." 무슨 꿍꿍이일까를 가늠하며 봤지만 별다른 것은 느낄 수 없었다. 커다란 강아지가 꼬리를 있는 대로 흔들어대고 있다는 느낌. 나이트에서도 서너잔 마신 것이 전부이고 그나마 걷고 콜라 마시고 하는 통에 취기는 깨끗이 가셔 있었다. 내 주량에 닿으려면 아직 양주로 반병은 더 남아 있었다. 맥주나 적당히 두어병 마시다 일어서면 되겠지. "그래. 가자. 어디야?" "헤헤. 좋다. 너 역시 되게 멋있어." 픽 웃으며 살랑살랑 걷는 채유라를 보았다. 바이라는 것만 아니면, 하필 나한테 그런 말하지 않았다고만 한다면. 꽤나 노는 것이 즐거울 상대인데. 뭐, 그런 일만 없었다면 빌라로 데려가서 지겹지 않을 만큼 놀아도 좋고. 해건이나 수혁이와는 전혀 다른 타입이라 늘상 지겨운 요즘 같은 때면 색다른 재미가 있었을 텐데 말야. 하지만 뭐. 오늘로 끝내야 할 것 같다. 남자 쪽은 정말로 취미가 아니라서. "여기, 오늘 개업했다. 여기 가자. 혹시 수건 같은 거 줄지도 몰라. 아니 볼펜 줄지도 모르겠구. 아님 안주 서비스으~~~?" 앞서 걷던 채유라가 화환이 늘어선 어느 집 앞에서 내 팔을 잡아끈다. "....먹고 싶은 건 내가 사줄 테니까." "진짜?" "그래." 나무문을 밀어 열며 채유라가 탄성을 내지른다. "역시 오늘 나, 너무 기분 좋아. 너무 즐겁다구." 그냥 웃으며 뒤를 따랐다. 나도 조금은 유쾌한 기분이 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며. 둥그런 원탁을 사이에 두고 1인용의 소파가 3개 놓인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동네마다 한 두 개쯤은 있을 법한 체인점인 생맥주집이었다. 3일이면 해치울 내장에 간단한 안주 몇 가지. "생맥주?" 가볍게 묻자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 난 흑맥주. 조금 진하긴 한데 맛있어. 너도 먹어 봐. 그 뭐더라... 이름이 알았는데. 배우 이름이야. 여자배우. 몰라? 외국 여잔데." "뭐가." "맥주 이름 말야." "...기네스?" "아, 맞다. 기네스, 그거야." 반바지에 운동화를 구겨 신은 고등학생 정도의 사내녀석이 다가온다. "흑맥주 있어요?" "없는데요." 채유라쪽을 보며 말했다. "없다는데?" "그럼... 1000 2개 주세요. 안주는 돈까스랑 화채랑 감자튀김 하구요." 아르바이트생이 가고 난 후 말했다. "그런 게 마시고 싶었으면 맥주전문점 많잖아." "하지만 여기 새로 개업한 집이잖아. 누군가는 와서 축하해줘야지." 그 누군가가 나를 포함한 채유라일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만. 먼저 날라져온 맥주잔을 들고 채유라가 목소리를 높인다. "건배!" 촌스럽긴. 쨍하니 잔만 마주치자 숨도 쉬지 않고 절반 정도를 단숨에 비우고 배시시 웃는다. "맛있다. 시원해." 1/5 정도 빈 내 잔을 보고 평을 한다. "실례잖아." "어디가." "아껴 마시는 거야?" "내가 왜." "앗!" 뭔가 굉장한 것을 깨달았다는 외침에 바라보았다. "혹시, 돈 없어서 그래? 나도 있으니까 맘껏 마셔!" ...바보가 아닐까? 8천만원짜리 외제차를 끌고 다닐 수 있는 20살이 4000원하는 맥주값이 없어 뵈냐. 풋- 하고 웃자 또 헤헤거리며 웃는다. "나의 멋진 조크였어. 그치?" "웃긴 녀석이잖아." 탁-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말한다. "운전해야 하는 구나아-." 일단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흐응- 맞장구치며 남은 잔을 비워버리곤 크게 손을 든다. "1700 하나요!" 이거 참, 재밌는 녀석이다.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운전해야한다는 것이 신경 쓰여 채유라가 1000에, 1700에, 다시 1700을 하나 더 마실 때까지 1000 하나도 마시지 않았다. 띠리리. "응? 무슨 소리야?" "핸드폰." 대답을 하며 플립을 열었다. 채유라는 벽시계를 쳐다본다. 따라서 쳐다보니 새벽 1시다. "예." [어디야? 아까 전화도 안 받고.] 해건이었다. "그랬나?" [지금 니 집 앞이야. 빨리 와.] "기다리는 거냐?" [빨리 오라구.] "그냥 가. 언제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희연이 부른 거야?] "아니." [그럼 누구.] "아까 닉스에서 봤던 녀석." [그런 놈이랑 뭐하는 거야! 빨리 오라구!] "뭐야, 너. 왜 그래? 놀다갈 테니까 열쇠 받아서 들어가 있든지. 끊는다." 전화를 끊자 채유라가 빤히 쳐다본다. "왜?" "몇 살이야?" "20살." "헤헤. 동갑이네? 친구야, 친구." 그러면서 싱글거리며 웃고 있다. 먹고 싶은 맘이 들지 않는 화채를 보고 있자 불쑥 입을 연다. "폰 좀 건드려도 돼?" "응?" "폰 좀 만져도 되냐구." "그래." 보고 싶다고들 하는데 건드린다느니 만진다느니 남들 잘 안 쓰는 말을 하는 채유라에게 폰을 건네자 정말로 이것저것 눌러보고 있다. 잠깐 만지던 채유라가 다시 폰을 내민다. "뭐한 거야?" "비밀, 나중에 알려줄게." "일어나자." "전화 온 사람이 기다려서?" "그것보다는 잠이 와서." "우... 안 믿기지만." 따라서 자리를 일어선 채유라가 앉았던 원탁을 돌아다본다. "왜?" "저기... 아깝다. 반도 못 먹었는데. 싸가지고 가면 안 되려나?" "...맘대로 하세요." 화채는 포기하고 돈까스와 감자 튀김을 가리키며 정말로 싸달라고 말하는 채유라를 보다 먼저 계산을 하고 나왔다. 손에 봉지를 들고 뒤따라 나온 채유라가 사각의 철제 쟁반 같은 것을 내민다. "뭐야, 이게?" "개업선물." 군말 않고 받아들었다. "고맙다. 잘 쓰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채유라가 물었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어?" "잘 모르겠는데." "연락처 가르쳐줄래?" "싫은데." "왜?" "가끔이라 재밌는 거야. 자주 하면 지겨워진다구." "그럼 가끔 연락하면 되잖아." 그럴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재미있긴 했지만 그뿐이다. 처음 만난 녀석에게 연락처를 가르쳐주고 싶은 맘은 들지 않는다. 엉터리 번호를 가르쳐줘도 상관없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또 않다. "오늘, 즐거웠어." 하루 밤 여자처럼 말하며 채유라가 손을 흔들며 돌아선다. "데..." 데려다 줄까? 라고 물으려다 말았다. 손에 남은 쟁반이 흔들린다. 채유라가 눈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양쪽에 차가 늘어선 좁은 도로를 나아가다 어느 순간 채유라의 모습이 사이드 미러를 지나친다. 앞을 보며 6차선의 넓은 도로로 접어들어 속력을 높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올라가자 문이 열린다. "늦었네?" "어, 있었어?" 집안으로 들어서자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듯 연기가 자욱하다. "내 집에서 담배 피지 말랬잖아." "어때서 그래. 너도 피라니까?" "됐어." "뭐야, 그 자식은? 들러붙었던 거야?"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며 받아온 쟁반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물을 꺼내 마시는데 어느 새 다가온 해건이 쟁반을 들어보고 있다. "이건 뭐야? 설마, 샀어? 그 자식, 잡상인이냐?" "말도 안돼는 소리마." "뭐했는데?"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자 맞은 편에 앉으며 해건이 묻는다. "그러는 넌? 그 아가씨랑 벌써 땡이냐?" "대답이나 해." "술 마셨어." "어딜 갔던 거냐구. 연락한다고 있으랬잖아." "아무튼 연락 받았고 지금 보고 있잖아. 그럼 됐지 뭘 그래." "너, 편든다? 뭐야." "니 놈들이 여자를 다 데리고 가서 내가 놀아준 거 아냐. 다 누구 탓인데 이래?" "무슨 상관이야. 아무거나 하나 붙여주고 넌 오면 되지." 수혁이나 내가 떼쓴다거나 하는 것에 전혀 소질이 없는 것에 비해서 해건이는 아주 도사였다. 맘에 안 들면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없다. 기분 풀릴 때까지 하루 종일이고 사람을 들들 볶는 거다. 이런 걸 여자가 봐야하는데. 뭐가 상냥하고 사려 깊은 섬세한 남자냐. 4살짜리나 해댈법한 떼를 쓰는 해건이는 남자가 아니고 애다. "그만 좀 해라. 내가 어디 있었는지가 뭐가 중요하냐? 근데 수혁이는 간 거냐?" "말 돌리지 말고. 어디 갔었냐구." "그게 왜 중요한데?" "안 중요하면 왜 말 안하는 건데." "안 중요하니까 귀찮아서 그러지." "나한테 이러구 들들 볶이느니 말하고 말겠다. 너, 말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지?" "이름도 기억 안 나. 이상한 호프 갔었다구. 개업했다고 저 쟁반 받아온 거야. 전화 번호 있을 거니까 전화라도 하든가." 해건이가 빤히 쳐다보는 것을 무시하고 리모컨을 들고 텔레비전을 켰다. 띠리리. "예." [재준이냐?] "어디야?" [지금 거기 가고 있어. 빌라에 있지?] "응. 근데 왜 이렇게 빨리? 답지 않다, 장수혁?" [해건이도 있냐?] "있어." [해건이는 놔두고 너부터 죽을 줄 알아.] "왜." [암튼.] 전화가 끊긴다. 폴더를 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해건이를 보았다. "수혁이가 왜 나한테 화를 내냐?"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지 말고. 왜 그래? 내가 얻어맞았으면 좋겠냐?" "얻어맞든 굴러 떨어지던 난 몰라." "너! 또 무슨 짓 한 거야!" "아, 모른다잖아!" 실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이번에는 해건이가 리모컨을 들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댄다. 이걸로, 조금 전 건 넘어가려나. 나는 수혁이가 해건이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건 나한테 화를 내든 말든 별 상관없다. 단지 이런 식으로 실랑이하는 것이 취미인- 아마도- 해건이는 금세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나도 해건이가 계속 어디 갔었느냐 줄줄 따지고 드는 것보단 재미없어도 뭐냐, 어쩌구저쩌구 따지는 척 하는 게 그나마 낫다. 탕- 딩동을 이상하게 하기 싫어하는 장수혁군. "문 열렸어." 문을 더 걷어 차단 전처럼 찌그러진다. "야, 한재준. 너 어디 갔었던 거야!" "오늘따라 왜들 그게 궁금할까나." "니가 연락이 안 되니까 나한테 연락하잖아! 지금이 몇 신데 내가 지금 여기 있어야하냔 말이다!" "내가, 해건이 보모냐?" "뭐야! 내가 애야?" 그렇다. 이것이 우리 세 명의 역학관계인 것이다. 어른스러운 척 상냥한 척 구는 연해건은 실은 아주 고집 센 떼쟁이로 장수혁에게 대책 없이 강하다. 아, 몰라! 빨리 오기나 하라고- 이 한 마디면 땡. 터프한 척 강한 척 구는 장수혁은 실은 단지 투박할 뿐으로 연해건에게 대책 없이 약하다. 그 좋아하는 섹스를 하다가도 뛰어나올 만큼. 무특징의 나는 장수혁에게 강하지도, 연해건에게 강하지도, 둘에게 특별히 약하지도 않다. 그냥 만구 내 맘대로. 다시 한번 공식화하자면 장수혁<연해건<한재준.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 공식을 정립한 것이 15살 되던 해. 나도 놀랐다. 연해건이 내 말을 대부분 들어주고 있었다거나, 장수혁이 연해건의 말을 대개 다 들어주고 있었다거나 장수혁은 내게 화풀이를 하지만 별로 데미지는 없다거나. "알았으니까 이만들 가라. 자야겠어." 휘휘 손을 내저으며 방문을 열었다. "야! 한재준! 너, 결국엔 하나도 얘기 안 했잖아." "그래, 어떻게 된 거냐?" 방안으로 몸을 반쯤 들이고 말했다. "닉스에서 만난 녀석이랑 같이 맥주 한 잔 했어, 됐냐?" "그러니까 왜 그 녀석이랑 한 잔을 했냐고 묻는 거잖아!" "니 녀석들이 여자 둘 다 데리고 가서 그런 거잖아. 그래서 남은 놈들끼리 한 잔 했다구." "이상해! 절대적으로 이상하다구!" "난 니들이 더 이상해. 그러니까 나 좀 자자." 방문을 닫았다. 벌써 8년째다. 사이좋게 놀거라- 이후로. 그래서 나는 내가 지금 이렇게 침대로 파고들어 누우면 녀석들이 더 건드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든가 해건이가 깽깽대는 걸 들어주며 내 집의 거실에서 한잔하든가 둘 중의 하나임을 안다. 돌아간다면 다음 날 안부전화를 올려야한다는 것도 알고 한잔한다면 다음 날 아침 즉석국이라도 사와 끓여줘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그저 자고 싶다. 슬슬 눈이 감겨 오고 반쯤은 잠 속으로 빠져드는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응. 굉장히 기분 좋아.] 아아―, 채유라였나. 으응. 그러고 보니 말야. 나도 기분이 좋았던 듯 해. 으응, 정말로. 새벽 2시부터 씻지도 않고서 오후 3시까지 11시간을 푹 잔 후 방을 나왔을 때 내가 본 것은 연해건과 장수혁이라는 주량이 엄청 센 두 녀석들이 양주병 5개를 바닥에 굴려놓고 자신들도 함께 바닥을 구르고 있는 참상이었다. 내버려두고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씻지 않고 그대로 잠든 덕분에 조금 여기저기가 당기는 느낌이었다. 사각 트렁크를 벗어 걸쳐놓고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늘 맞춰놓는 대로 파란색의 레버 끝까지 돌려진 차가운 물이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다. 지금이 5월이긴 하지만 역시 샤워는 찬물이 기분 좋다. 보통 4월이 되면 나는 차가운 샤워를 시작한다. 그것이 10월까지 계속. 4월이나 10월은 경계에 있는 달답게 차가운 물은 얼음처럼 차갑게 여겨질 때가 많았고 그럴 때는 미지근한 물로 몸의 온도를 조금 높여주면 충분하다. 지금은 5월이니까 찬물만으로도 시원하고. 청색의 스트라이프가 쳐진 샤워 커튼에 물방울이 튀며 타다닥 소리가 난다. 샤워기 아래에 서서 쏟아지는 물줄기에 멍하니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보고 서 있었다. 머리 뒤꼭지부터 닿아서 어깨를 지나 허벅지를 거쳐 바닥의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물을 보고 있으면 항상 드는 생각이 있다. 결국 하수도로 가는 거겠지?- 라는 것.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두 번 생각할 만큼의 이유도 뭣도 없는데 샤워를 할 때 이렇게 물줄기를 맞고 있기만 해도 그 생각은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찰칵- 욕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물을 맞으며 서 있었다. "벌써 찬물 샤워냐. 여기까지 냉기가 온다, 임마." 변기 뚜껑을 걷어올리며 수혁이가 말했다. "시원하잖아." "5월은 찬물로 씻기엔 아직 추운 계절이라구." "새삼스레 뭘 그래." 5월에는 얄짤없는 찬물이라는 것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의 일이다. "어제의 계속이긴 한데. 그래서 너, 그 새끼가 뭐라 그런 거야?" "아니래도 그러네. 그냥 한잔한 게 다야."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흐음- 하는 기색의 수혁이가 말했다. "해건이는 아닌 것 같지만. 나는 조금 걱정하는 거야. 알지?" "알다마다. 인정하긴 싫지만 싸움에 내가 좀 약하잖냐? 장수혁군은 어디까지나 얻어 맞았을까봐 걱정해주는 거지. 뭐, 터지다 왔다고 해도 내가 말 안 할 걸 아니까 다시 묻는 거겠고." "안다니 됐다." "그나저나 해건이 말야. 확실히 해뒀겠지? 일어나자마자 들들 볶이고 싶지는 않다구." "뭐. 해건이 녀석이야 워낙에 니 일이면 흥분이 심하잖냐."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니 일에 더 그래줘야 하는 거 아냐?" "나야 뒤가 당기는 느낌이 없으니까." "그럼 난 있다는 거냐?" "있어." 잠깐 침묵하고 문지르자 거품이 부글부글 생겨나는 스펀지를 팔뚝부터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뭐야, 그게." "어딘지 묘하게 달관했다거나 방심한 듯이 보인단 말야, 너는." "흐응. 몰랐네, 그건." "이런 데서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원. 그런 게 궁금하면 제대로 옷을 입고 술이라도 한 잔 사면서 물으라고." "물어봐 달라는 분위기였는데 말이지." "까불지 마." 수혁이가 나간 후 손을 멈추었다. 이상하네. 나한테 그런 게 있었나? 처음 알았는데. 나보다는 말야, 장수혁군 자네 쪽이 좀 더 의외란 걸 생각해주지 그래. 자네, 실은 굉장히 상냥한데다 또 예리하기까지 하다구. 아아, 남자답기도 하지. 하긴, 정말로 강한 남자-, 아니 여자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정말로 강한 사람만이 타인에게 상냥하고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정말로 강한 사람만이 내가 아닌 타인을 더욱 잘 알게 된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강하지 않은데도 타인에 대해 알게 된다는 건 말야. 나는 그러니까 수혁이에 대해서도, 해건이에 대해서도 보여주는 것 이상을 알고 싶지가 않다. 그건 누구라도 마찬가지. 알리지 않은 것을 알아버리면 달라질 게 분명하니까.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도, 어울리게 되는 것도 지금과는 달라질 테지. 그런 건, 싫다. 그냥 지금처럼 조금은 익숙해진 것이 지겨운 듯이, 다소는 귀찮은 듯이 구는 게 좋아. 아니, 아닌가? 어쩌면 수혁이는 내게 자신의 그런 의외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그렇든 아니든 상관없지만. 나는 알아챘다는 내색은 전혀 하지 않을 거니까. 두 번째로 욕실문이 벌컥 열린다. "해건아, 부탁인데 안방 욕실 좀 써주지 않을래? 샤워도 느긋하게 못 하냐, 나는. 두 녀석이 사이좋게 들락날락 이니." "무슨 소리하는 거야! 당장 나와. 한 시간째잖아. 5월에 한 시간 동안 찬물 줄줄 맞고 서선 뭐라는 거야." 어, 벌써 그렇게 됐나. 아닌 게 아니라 몸이 으슬으슬 차가워진 것 같기도 하다. 샤워기 레버를 눌러 물을 잠그고 수건으로 대충 머리칼의 물기를 털고 욕실의 작은 사각의 벽장에서 새 트렁크를 꺼내 입었다. "넌 안 나가냐?" 옆을 지나치며 묻자 퉁퉁거린다. "나갈 거야." 방으로 들어가 반바지를 꺼내 입은 다음 주방으로 곧장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먹을만한 것은 이미 싹쓸이하고 없었다. 정수기가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생수병 같은 것으로 물을 마시는 거였으면 이미 그 생수병도 하나도 안 남아 있을 상황. 둘 다 못 말리는 엄청난 주량들인 주제에 안주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으니까 취하는 건 더 어렵고 안 취하니까 술은 계속 더 마시게 된다. 따라서 쓰이는 안주라든가 그 외의 먹을 것은 금세 바닥이 나고 만다. 마치 메뚜기나 하이에나 같은 녀석들이 아닐 수 없다. 이 녀석들만 왔다 가면 남은 것 없이 황량해지는 내 냉장고. 물을 들이키고 싱크대 위의 찬장을 열었다. 몇 가지 사다둔 인스턴트 음식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흔적은 개수대 안의 빈 냄비라는 형태로 남아 있지만, 처음과는 전혀 다른 모습. "싹쓸었구나, 아예." 뒤에 서 있는 해건이를 향해 말했다. "집에 먹을 게 너무 없더라. 맛있는 것 좀 많이 사다 놔." 내가 왜? 라는 생각이 들지만 소리내 말하지는 않는다. "아, 예. 그러십니까." 주방을 미련 없이 벗어나 거실로 오자 수혁이가 길다란 소파를 차지하고 누워 야구 중계를 보고 있다. "밥 먹자, 밥." "니들이 어제 작살낸 건 기억도 안 나지?" "그럼 배달이라도 시켜." 우리들 셋은 모두 집이 서울에 있다. 그러나 우리 집은 부모님이 별거중이라서 현재 집에는 아버지의 애인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소유인 여기저기 널린 집 중 하나인 이 빌라에서 따로 살고 있는 것이다. 해건이네 어머니도, 수혁이네 어머니도. 이리저리 적당히 노시는 것이 사실이지만 부부금슬만은 우리 집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은 수치. 게다가 자식이란 것에 대한 생각도 보통의 기준에 근접해 있다. 노닐다 늦은 날이면 다음 날 아침 얼굴을 맞대고 잔소리를 듣는다는 것. 얼마나 뿌듯할까. 아아, 이리저리 잔소리 듣고 싶어라. 그러나 정작 잔소리를 하는 해건이를 보면 슬슬 피하고 싶어지는 것은 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아무튼 덕분에 학교와는 차로 30분 거리이자 이래저래 편리한 내 빌라는 녀석들의 쉼터 같은 곳이 되고 말았다. "뭐가 좋아? 아니면 그냥 나가서 먹을까? 어차피 둘 다 저녁엔 집에 가야 할 것 아냐." "아, 엄마가 너 좀 데리고 오라던데? 저녁이나 먹자더라." 이것은 상당히 가정적인 연해건군의 어머니의 발언. 그래서일까. 해건이도 잔소리라는 엄마들 전용의 것-이라 믿어지는-을 잘 할 수 있다는 건. "아아, 그래. 조만간에 한번 들리마." "우리 엄만 정말 재준이만 너무 편애한다니까. 단정하다느니 성실하다느니 나만 보면 그런다구." "우리 마나님은 해건이 니 놈보고 그러시지. 가당치도 않게." 이건 뭐야. 엄마들이 약한 순서가 그 아들간의 역학관계라는 거야? 이 두 녀석은 고사하고 아들에게마저 무심한 어머니라 그렇다는 것? 어쩐지, 상당히 기분이 나빠지는데 그래. "...짜장면이다, 니들은 오늘." "누가 그딴 거 먹는대." 수혁이의 썰렁한 대꾸에 해건이도 거든다. "회덮밥 먹고 싶어. 그러고 보니까 회 먹고 싶네. 광어랑 돔도 좋고." "중국집 시킬 거면 삭스핀하고 고량주나 시켜. 짬뽕 국물에다." 머리를 설래설래 저었다. "그냥... 슈퍼나 갔다 오마." 방으로 다시 들어가 청바지와 티셔츠를 대충 걸치고 나왔다. "그럼 술 좀 사와." "또 마시고 싶냐, 니들은." "해장술." 산뜻하게 대답하는 해건이를 보다 현관문을 밀었다. 대단지 아파트가 아닌 지라 자체 상가가 없었고 거기다 이 인근 일대에는 슈퍼가 없었다. 언덕배기에 위치해 시내를 내려다보는 전경은 몹시 멋있지만 실상 생활하기에는 힘겨운 곳이었다. 차가 없으면 다니기도 불편할 정도다. 슈퍼에 가기 위해서 차를 몰고 나가는 이 거창함. 게다가 평소에는 눈에 띄어서 좋아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슈퍼 가는 데에는 곤란한 차, 폰티악. 폰티악 옆에 주차되어 있는 것은 해건이의 옵티마다. 이게 그래도 낫겠지. 차키 받으러 다시 올라가야겠구나. 띠리리. "어, 전화다. 재준이 폰 두고 갔네." 말하는 것과 동시에 망설임 없이 태연하게 전화를 받아드는 해건을 수혁은 그저 보고만 있었다. "누구야?" 해건의 전화 받는 매너라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느끼는 수혁이었다. 자신의 전화는 '예, 연해건입니다.' 라는 것에 비해 재준이 전화를 행여나 받게 되면 당장 누구야-다. 그나마 자신의 전화는 잘 받지도 않는다. [저기, 한재준 폰 아니에요?] "너, 누구야?" [채유라라고 하는 데요. 재준이 없어요?] "몰라. 다신 전화 걸지마!" [재준이, 없어서 못 받는 거예요? 있으면 바꿔주세요.] "몰라!" 그러면서 탁 폴더를 접어버리는 해건을 수혁은 재밌다는 듯이 쳐다본다. "뭐!" "아니, 그냥." 싱글거리며 웃는 수혁을 향해 해건은 있는 힘껏 인상을 썼다. "너, 말야." 해건의 '떼'가 시작되려는 눈치를 채자마자 수혁은 뒹굴 소파 위를 굴러 등받이 쪽으로 얼굴을 댄다. 그리고 다시 현관문이 열렸다. "해건아, 차 키 좀." 해건이가 내 폰을 들고 있었다. 폰, 놔두고 갔었지. "전화 왔었냐?" "아니."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해건이가 차키를 던진다. 수혁이 쪽을 흘깃 보았지만 얼굴을 돌리고 엎드린 그대로이다. 그때 다시 벨소리가 울렸다. 띠리리. "폰 내 놔." 해건이가 폰을 등뒤로 숨긴다. "싫어." "뭐야? 내 놔." "싫대두." 성큼성큼 다가서 손을 내밀었다. "어서." "...바보!" 폰를 내던지듯이 내 손으로 건네고는 방으로 쾅 들어가 버린다. "저 녀석, 왜 저래?" 폴더를 열었다. "예." [어? 너야?] "누구야?" [채유라.] "번호 어떻게 안 거야?" [그때 폰 건드릴 때 자기번호 확인 했지롱.] "너 말야, 내가 안 가르쳐줬을 때는 연락하지 말라는 뜻이라고는 생각 안 했냐?" [하지만, 아깝잖아. 가끔 할 건데.] "전혀 안 아까운데." [너무하네. 그러지 말고 연락한 이유 좀 물어봐 줄래?] "왜 연락했어?"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그럼 들었으니 됐겠네. 안녕." [내 생각이 났었어?] 굳이 부정할 필요까지는 못 느낀다. "...그래." [헤헤. 기쁘다. 그럼, 진짜 안녕.] 뚜뚜- 하고 전화가 끊겼다. "어제의 그 한잔한 녀석?" 수혁이의 물음에 고개만 끄덕였다. "너 말야. 재밌는 얼굴을 하고 있다?" "뭐?" "처음 보는 얼굴이야. 활기차 보여." "잘못 본 거야." 딱 잘라 대답하자 빙긋 웃는다. "별로 상관없지 않아? 니가 우리와 노는 것에 시큰둥하다는 정도는 진작에 알던 거니까." 말없이 수혁이의 얼굴을 보았다. 다... 알고 있어? "해건이는 더 잘 알고 있을 걸. 나보다 훨씬 더 니 눈치 살피는 데에 용한 녀석이잖아?" 바보- 취급이란 건가. 이 녀석들과 어울리는 것에 시큰둥하게 가볍게, 가볍게 하는 동안 이 녀석들은 모두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미안하게 됐군." "야, 이상한 생각하지마. 한심하게 논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나는 실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상관 있는 건 저쪽이지. 안 그러냐, 연해건?" 방문이 빼꼼 열리며 불퉁한 해건이 얼굴을 내민다. "왜 나까지 끌어들이는 거야." "니가 나를 끌어들인 거겠지." "입싼 녀석." "말해달라는 거 아니었나?" 이 녀석들, 대체 뭐하는 거야. 니들이 언제부터 이런 끝내주는 콤비였냐. "미안하게 됐어. 내 멋대로 생각한 거 말야." "안 미안한 얼굴로 사과하지마." "그런가." 얼굴을 문지르며 대꾸하자 해건이가 어느새 쥐었는지 알 수 없는 쿠션을 얼굴로 내던진다. "뭐가 그런가냐! 뭐가! 너 말야, 우리가 바본 줄 알아?" "우리가 아냐. 너야, 너." "넌 닥치고 있어!" "아, 예. 예." 누운 채 다리를 꼬고 수혁이 건들건들 대답한다. "기다리라고 했는데, 처음 보는 녀석을 훌렁 따라가 버릴 만큼 우리가 못 마땅했잖아. 진작 얘기해줘도 되는 거였어. 니가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넌 뭐야. 그런가아~~~?!! 웃기지 마!" "화 많이 났네." "그럼 안 나냐!" "어쩌지?" 웃으면서 수혁이 쪽을 보며 말하자 여전히 뒹굴 거리며 대꾸한다. "같이 놀러라도 가 줘." "그럴까? 같이 슈퍼 안 갈래?" "....놀리냐. 내가 애냐, 애야!" "같이 가자. 무거워서 혼자 다 못 들고 온다고. 도와줘." 팩 고개를 돌리고는 먼저 신발에 발을 꿴다. 수혁이를 보자 돌아누운 채 큭큭 어깨를 떨며 웃고 있다. "안 가?!" "아, 간다. 가야지." 지금 당장 바뀔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하던 가락이란 게 무시할 게 절대로 아니라서. 단지, 8년이나 알아온 녀석들이니 만큼. 내 부모란 사람들보다 나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녀석들이니 만큼. 지겹게 이어지는 매일의 일상과 마찬가지인 녀석들. 지겹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일상이라는 매일이라는 것은. "갔다오마." 손만 들어 휘휘 내젓고 있다. "운동이라도 좀 할까?" "싫어. 힘들다구." "그렇다고 매일을 이렇게 보낼 거냐?" "영화나 만화도 아니고 매일 매일이 특별할 거라는 기대는 좀 심하지 않냐?" 수혁이가 그렇게 비꼬지만 그래도 이왕 지겨워하는 것을 들킨 이상 조금이나마 지겹지 않고 싶다. "좀 더 건설적인 생각은 못 하겠냐." "공부라도 할까, 그럼?" "싫어. 머리 아파." 정말로, 이럴 때는 공부해서 들어온 그런 대로 봐줄 만한 대학의 간판이 부끄러워진다. 죽도록- 까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애써 들어온 곳인데 이 해건이란 놈은 그야말로 탱자탱자 놀다 막판에 과외 좀 해서는 성적 쬐끔 올리고 그러다 보결로 붙은 다음에 돈을 먹였다. 그래도 잘났다고 보결로 붙었다고 우겨댄다. 세상에, 보결도 87번까지 모조리 빠진다는 게 어디 쉬운 얘긴가. 누구라도 가기 싫어 기분에 원서만 넣을 만한 데도 아니다. 어떤 녀석에겐 갈 수도 없는 오르지 못할 나무였을지도 모르는 곳인데 그런 데의 그럭저럭 쓸만한 과에서 보결 88번이 들어온다는 게 있을 법한 일이냐고. 그나마 많이 빠진 것도 아니다. 정원 60명중 등록을 하지 않은 것은 딱 한 명이었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실은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지만. 근소한 차로 보결 1번이었던 녀석은 얼마나 억울할까. "새삼스레 설친다고 바뀔 게 있겠냐." "장사라도 할까..." 낙담해서 간신히 말한 것에 해건이가 코웃음친다. "니가? 우리가?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돈을 가지고 노는 것이 특기인 집안의 아들답게 돈이 되는 일, 아닌 일에 대해서만은 거의 동물적인 감을 가진 해건이기도 하고 사실 장사의 장자도 모르는 나니까 그냥 남들처럼 말해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수혁이의 반응은 긍정이었다. "나쁘지 않지.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재준이 니네 아버지 건물 하나 올렸다며?" "니가 그런 걸 어째 그래 잘 아냐. 나도 오늘 안 걸." "누구랑 틀려서 나는 아주 관심이 많거든. 먼일이 아니라구. 결국 내가 하게 될 일이기도 하니까. 미리미리 관심 가져두는 거지. 별로 싫지도 않고." "맞아. 재준이 너 되게 얍실한 거 알기나 하냐? 이래저래 잘 쓰고 있는 주제에 말야. 더러워서 싫다는 거 상당한 비겁자나 하는 거라구." "그래서 니들은 아무 불만이 없다는 거네?" "있지, 왜 없어. 기왕이면 이 안에 들어줬으면 싶거든." 척- 하고 다섯 손가락을 펼치는 해건이가 어떤 면으로는 대단해서 쳐다보았다. "기왕 할거면 말이지." "돈에는 이름 없는 거야. 알겠냐? 사람이나 이름 달고 살지. 더러워서 싫으면 니가 바꾸면 될 거 아냐. 이것도 저것도 싫어서 애초에 손뗀 니가 할 말 같은 건 조금도 없다는 거지." 수혁이의 말은 한 군데도 틀리지 않았다. 쓰고 싶은 대로, 원껏 그 더럽다고 생각한 돈으로 매일 같이 놀아댄 주제에 정말은 더러운 돈이라며 비웃고 있다라니.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 내 얘기라도 웃긴데, 아마 남의 얘기라고 했으면 더 웃었을 거다. 그 놈, 묻어 버려! 하며 열을 냈겠지. "땅 파라고 한 얘기 아냐." 해건이가 위로해주지만 사실이니까. "틀린 말 아닌데 뭐. 그나마 솔직하지도 못하니 이거야말로 할 말 없다구." "너도 솔직해, 임마. 그렇게 딱 잘라 인정하고 있잖냐." 수혁이도 위로를 해주지만, 글세. 아아, 한심해. 이렇게나 이 녀석들이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던가. "장사 말야. 해 볼 생각 있어?" "종목은?" "뭐라도 상관없어. 한번 경험이나 쌓아보자는 거니까." "그냥 장난이었어. 수혁이, 니가 정말로 해보겠다면 거들기는 해도 나서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긴, 너처럼 장사 안 어울리는 녀석은 없을 거라고 봐." "나도 인정한다." 시원하게 대답을 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스테이크 먹고 싶다. 그거 먹으러 가자. 어제는 누구네 집에서 말야, 당치도 않은 전골을 먹는 바람에 얹혀서." "그게 4접시나 먹은 인간이 할 말이냐?" 투닥거리면서 웃는 낯으로 서든 스테이크 하우스로 향하고는 있지만 사실 속에서는 조금 씁쓸했다. 난 단지 그냥 배가 불러서 넘치는 불만을 주체못하는 가벼운 불평불만분자일 뿐인 걸까. 가볍다고 속으로 비웃던 녀석들이 실은 더욱 진지하게 자신의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충격을 받고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려는 옹졸한 녀석일 뿐인 걸까. 나에 대해 무언가 대단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전혀 없다. 단지 조금쯤은 자각을 가졌다고 생각해왔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건가. 불쑥 채유라의 생각이 났다. 채유라라면, 어땠을까. 가볍고 명쾌하게 인정을 할까. 자신에 대해서도 아마 채유라라면... 속이지 않겠지. 그렇게 밝은 녀석은. 단 한번 만났을 뿐인데, 실제로는 이렇게 그 녀석은 이런 녀석이다- 라도 단언할 만큼 잘 아는 것도 아닌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직하다는 것은, 참 어렵다. 타인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저 말하지 않아도 충분하지만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워서,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녀석이다-, 그것이 나다, 혹은 내가 아니다. 조금만 거짓이 섞여도 금세 알아채 버리는 것.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만화주제가가 이렇게 심금을 울릴 줄이야. 비웃음 사면서 들여다봤던 보람이 다 느껴진다. 띠리리. "예." 집에서 비디오를 벽처럼 높다랗게 쌓아놓고 오늘 오전부터 돌파를 시작한 지 9시간이 지났을 때 울린 전화였다. [한재준? 나야, 채유라.] "어... 어." 조금 당황했다. [잘 지내지? 음. 9일만에 연락한 거니까 오랜만이지, 그치?] "아, 뭐... 넌 잘 지내?" [응. 그래서 말인데 만나지 않을래?] 그래서 말인데-와 이어지는 구석이 하나도 없잖아? "어디서?" 그러나 순순히 물었다. 아직 반도 내리지 못한 벽에 머리가 멍해오는 중이었다. [음... 어디가 좋아?] "네가 편할 대로." [그럼 닉스에서 보자. 둘 다 아는 곳이 좋으니까.] "닉스?" 시간은 오후 11시였다. 해건이랑 수혁이가 지금 닉스에 있으려나. 뭐, 만나도 할 수 없긴 하지만. "그래, 그럼. 닉스에서 12시." [안에서? 밖에서?] "닉스 들어가지 말고 가는 길에 보면 모리스라고 레스토랑 있는 건물 있어. 그 앞에서." 그래도 조금 걸려서 그렇게 말했다. [아, 차 가져오지마.] "응?" [술 마시자구.] "쿡."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좀 있다 보자구." 전화를 끊고 욕실로 향했다. 드러누워서 뒹굴었더니 몸이 찌뿌둥했다. 게다가 중간에 밥은 안 먹고 물만 좀 마셨더니 배도 고프고. 모리스 앞에서 보기로 했으니까 거기서 밥이나 먹을까. 차를 가져오지 말라고 했지만 번거로운 건 질색이다. 이 동네란 곳이 말했듯이 택시를 잡기 쉬운 동네도 아니고 콜택시도 내키지 않는다. 일단은 나가서 마신 다음 주차장에라도 세워놓고 오면 되겠지. 대리운전을 즐기는 해건이와는 달리 나는 절대로 싫다. 내 차에 누군가 탄다는 자체가 싫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핸들을 꺾어 좌회전했다. 모리스 앞에 정확히 차를 세우고 내리자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채유라가 보자마자 말한다. "에에! 차 가져오지 말라니깐." "대중교통의 시간은 지나간 후라구." 웃으며 차에서 내려 채유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뒷머리를 슥슥 문지르며 마주본다. "택시 타면 되지. 나도 그렇게 왔단 말이야." "니네 집 앞에는 택시가 많이 다니나 보지. 일단 타라. 어디든 가야지." 말하며 조수석의 문을 열고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하고는 곧 올라탄다. 조수석의 문을 닫아주고 반대편으로 돌아와 운전석에 올라타자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왜?" "아니... 그냥." 차를 출발시키며 백미러를 통해 비치는 채유라를 보았다. 입술을 손끝으로 퉁기며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모리스로 가려던 생각은 금방 바꿔 먹었다. 처음 가진 장난감을 들키고 싶지 않은 기분...일까, 이런 게. 수혁이라면 별로 들켜도 상관없지만 해건이는 조금 걸린다. 워낙에 같은 걸 고른 적이 많았으니까. 같은 걸 고른 것으로 끝나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언제나 내가 양보를 했던 것이 대개. 채유라는 오늘 붉은 빛의 셔츠와 흰색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길다란 다리가 달라붙는 바지로 인해서 더욱 길어 보였다. 그런데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저 셔츠와 바지는 분명 DKNY. 언젠가 옷을 사러 갔을 때 괜찮다고 생각했었지만 핏빛같은 붉은 색이 조금 부담스러워 놓았던 기억이 나기 때문에 틀림없다. 한 벌로 하려면 제법 돈이 들텐데 돈, 없는 것 아니었나? "옷, 좋은데?" "그래? 좋은 건가? 예뻐서 입었는데." "어디서 샀어?" "몰라. 전에 사귀던 여자가 줬거든." "...그래?" 이 녀석, 순진해 보이...지는 않지만 아무튼 평범스럽게 놀 듯이 보여서는 돈 많은 여자들을 상대로 하는 호스트? 지골로? 뭐, 그런 건가? 다시 핸들을 꺾어 모리스 앞을 벗어나며 물었다. "직업이 뭐야?" "백수." "학교 안 다녀?" "응. 고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했는걸, 뭐." "...그래?" 팔을 앞으로 쭉 뻗어 몸을 늘리며 채유라가 말했다. "나, 되게 가난하거든. 별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데다 엄마는 집 나갔고 아빠도 지금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공사장이다 뭐다 되게 일 많이 했어." "....그랬냐." "여기저기 구르다 보니까 술집이 편해서 지금은 술집에서 일해. 조금만 알랑거리면 건드리는 사람도 없고 돈도 많이 주고.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얼굴이라든가 키라든가 어느 정도 봐줄 만하잖아? 그러니까 제법 인기도 있어서 이런 옷을 사주는 여자도 있고 말야." 웃으면서 내가 좋다고 말한 셔츠깃을 슬쩍 세운다. 스스로를 봐줄만 하다고 말하는 녀석이 밉지 않은 건, 처음이다. 사실 그렇다라고 처음에 나도 생각했었으니까. "내 꿈은 있잖아. 돈 많이 벌어서 엄마랑 아빠를 찾는 거거든.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나버리면 날 잊어버릴 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빨리 돈 벌어서 찾을 거야. 그러려면 돈 많이 벌 수 있는 곳에서 일하는 게 좋잖아. 고작 2년 동안의 일인데 일생이 변했다는 기분, 알아? 다행인 건 그나마 18살이었다는 거야. 그래도 제법 머리가 굵어졌을 때의 일이니까. 8살이거나 했다면 아주 어두웠을 거라구." 할 말이 없었다. 내 주변의 사람 중 이렇게 어둡고 불행한 일을 겪은 사람을 아무도 없었고 실제로 본 것도 처음이다. 그런데도 이만큼 밝게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아마 보기 힘든 거겠지. "....힘내라." 건성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달리 해 줄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어렵게 꺼낸 한 마디는 확실히 전해진 듯 싱긋 웃는다. "힘내고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의 아주 오래 전에 왔던 기억을 더듬으며 외곽도로로 접어들었다. "근데 지금 어디 가는 건데?" "전에 왔던 던데 맛있었거든. 새벽 2시인가에 갔었는데 그때도 밥 먹었던 기억이 있어서. 지금 배고파." "밥 안 먹었어? 아까 전화했을 때만 해도 저녁시간은 훨 지나 있었잖아." "그때 비디오보고 있었어. 배도 별로 안 고팠고." "비디오? 뭐 봤는데?" "유주얼 서스펙트." "재밌어?" "3번이나 다시 볼 만큼이었던가? 싶으면서도 비디오 가게 가면 꼭 빌려오게 돼." "그렇구나. 있잖아. 뭐 하나 말해도 돼?" "그럼." 노란빛의 가로등이 세워져 있을 뿐 다른 조명이 없어 어두운 주차장의 선 안으로 신경 써서 차를 밀어 넣으며 대꾸했다. "넌 좋은 녀석이야." 차를 완전히 멈춰 세운 후 웃었다. "난 좋은 녀석이란 소리 듣기에는 좀 아닌데?" 차에서 나란히 내리며 아직 불이 켜진 가게를 향하는데 채유라가 다시 말한다. "역시 만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절대로 알지 못했을 거야." "뭘?" "한재준이 좋은 녀석이라는 거." 뭐야. 어디서 내 소문이라도 들은 건가? 하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학교 녀석이기만 해도 충분히 들었을 수도 있고 닉스에 다니는 녀석이기만 해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학교는 안 다닌다고 했으니 닉스에서였을까나. 닉스에서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지만 뭐, 어디서건 들었겠지. 유명하다거나 잘났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매일 같이 닉스에는 출근도장 찍다시피 했기도 했고 돈도 펑펑 써제끼는 세 명의 졸부아들들은 꽤, 얼굴이 팔렸으니까. "지금 식사되죠?" 가볍게 묻자 테이블로 안내를 해준다. 새벽이라 도시의 야경이 멀리까지 반짝이며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권한다. "와아... 잘 보이네? 멀리서만 보면 이렇게나 예쁜데 말이지." "가까이서 보면?" "일단은 나도 저 불야성 속의 근무자라서 말야, 안좋은 꼴도 많이 봤다구. 조금 멀리서 보는 게 뭐든 좋은 것 같아. 가까이서 들여다보았을 때도 좋을 거라는 자신이 드는 일, 아직 없었으니까." "하지만, 잘해나가는 걸로 보이는데?" "그런가... 어쩌면 내가 제대로 속하는 녀석이 아니어서 그런지도 모르지, 뭐." "그렇다 해도 역시 나는 못할 일을 하고 있으니까 잘하고 있어." "헤헤." 웃으면서 앞에 놓은 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연어, 좋아해?" "뭐든. 유통기한이 6개월 지난 빵도 맛있게 먹을 줄 안다구, 나." 보통 그런 걸 먹었다간 식중독 같은 것으로 병원행- 이란 것은 내 상식만의 일인가. "이 집 연어 맛있던데." "안심 먹고 싶은데." "안심? 그건 다음에 먹는 게 어때? 늘 가는 곳이 있는데 정말 맛있거든." 채유라가 메뉴판에서 고개를 들고 말그라니 나를 본다. "다음에 또 만나줄 거야?" "가끔 만나기로 한 거, 아니었나?" "...그랬으면 좋긴 하지만..." "그럼 그렇게 해. 싫은 녀석을 억지로 만날 만큼 좋은 녀석은 절대 아니니까 믿어도 좋아." 채유라가 어딘지 안쓰럽게 웃는다. 만나지 않을 거라도 생각했나? 사실, 남자끼리 이렇게 날 잡아 만난다는 것도 내게는 의외로운 일이다. 내 쪽은 솔직히 거의 데이트 패턴이니까. 조금 서글프게 여겨지는 채유라의 미소는 처음 보는 것이어서- 두 번째 보는 것이니까 채유라에게 얼마나 더 많은 표정이 있는 지는 아직 알지 못하는 탓도 있겠지만- 조금 맘이 아프다. 아마, 아까 들었던 얘기와도 상관이 있으려나. "그럼. 연어." 손을 들자 곧 직원이 다가온다. "연어 스테이크 둘하고 와인은, 한 잔 해야지?" "음... 별로 마셔본 적이 없어서." "나도 잘 마시지는 않지만. 뭐, 여기저기 들은 얘기는 많아서 생선은 화이트 와인- 하고 생각해 버리거든. 그래서 나도 이름 같은 건 몰라. 외국말인데다 길기까지 하잖아?"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채유라를 보다 기다리고 있는 직원에게 말했다. "독일산으로 한 병 주세요. 음... 바이스(화이트 와인) 할프트로겐(약간 단맛이 나는 정도)으로." "특별히 찾으시는 건 없으십니까?" "알아서 주세요. 맛있는 걸로." "예. 알겠습니다." 직원이 가고 난 후 채유라가 물었다. "혹시, 향수 같은 거 써?" "응? 향수? 아아, 냄새나나 보네." "향기라고 해도 될텐데. 향수잖아." "코로 맡아지는 건 냄새랑 마찬가지야. 응. 써." "뭔데?" "프리덤." "그렇구나." "왜? 싫어?" "아니. 처음부터 물어봐야지 했는데 까먹고 있었어." 에헤헤- 하고 웃는 채유라를 보고 있으니 왠지 아이와 함께 있는 기분이다. 일일이 하나하나씩 가르쳐주고 알아가는 모습이 기쁘다. 이전의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다. 주로 어울리던 녀석들 모두가 이런 것들에 익숙한 녀석들인데다 오래 함께였기 때문에 일상이라 분류되는 이런 일들에 나타내는 관심은, 없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세루티 아마쥬였어. 주로 쓰는 건 프리덤이긴 한데 닉스에 갈 때는 왠지 싫어서." 왠지 싫다는 것은 닉스에 가는 나를 부정하는 것. 닉스에서의 나는 겉돌기만 해서 어딘가 있기를 바라는 정말인 나를 찾을 때까지의 임시라는 기분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보니 나는 그 정말인 나를 찾기 위한 노력 자체가 부족했다는 결론이었지만. "그렇구나아... 난 그런 거 전혀 몰랐어. 옷이나 뭐나 꾸미는 데는 원래 관심이 없었고 나 좀 늦되다는 말 많이 들었거든. 고등학교 때도 다른 애들은 모두 여자다 멋이다 뭐다 하는데 나는 그런 거 죄다 관심이 없었어. 그나마 좋았던 게 술." 그렇게 말하며 밝게 웃는다. "나중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는 집이 영 난리가 아니어서 그럴 여유가 없었구." 채유라가 보기에 나는 어떨까. 지겨워-를 연발하며 세상을 우습게만 여기고 있는 내 모습은. 세상의 비리와도 조금은 연관되는 돈이니까 조금은 걸리는군- 멋대로 생각하면서도 그 돈으로 몇 천만원짜리 수입차를 굴리고 매일을 흥청망청 그 돈을 거리낌없이 써제끼는 나는 어떻게 보이는 걸까. 20살인 현재 세상은 별로였군- 이라고 잘라 말하는 나는. "내가 굉장히 한심하게 들린다." 손을 내젓는다. "안 그래. 너도 늦된 거야. 아직 길을 찾지 못한 것 뿐이야. 그러니까 너는 조금은 다르게 살아주겠지." "응? 무슨 소리야?" 싱글 웃으며 물잔의 목을 쥐고 만지작거린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어둡고 한심한 어른이 되진 말라는 거야. 만나지 못했다면,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막상 만나보니 말야, 좀 달라. 만나길 잘했다, 한재준." "뭐야. 마치 그 말은 날 알고 있다는 것 같잖아? 어디선가 내 소문, 들은 거야? 그랬으면 고약한 소문이었을 텐데. 그래서 그런 거야?" 고개를 젓는다. "그렇지 않아." 나는 그 말이, 내 소문이 고약하지 않다는 얘긴 줄 알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조금 더 지난 후 알게 된다. 그리고 알고서, 조금 더 채유라를 알고서. 나는 조금은 달라지게 되는 것 같다. 아마, 달라지기 위해 애쓰게 됐던 것 같다. 흰색의 단아한 접시에 담긴 연어 스테이크가 테이블 위로 세팅된다. "사회환원의 차원에서 내가 살 테니까. 먹자." "그거 되게 좋다. 먹어만 주면 사회봉사. 멋지다." 띠리리. "전화 왔어." 집은 아닐 거고. 희연이가 전화할 리도 없고. 수혁이 아니면 해건인데. 수혁이가 전화할 것 같지는 않고. 해건이라면 별로 안 받고 싶은데. 하지만 안 받았다간, 며칠을 두고 들들 볶겠지. 그게 괴로울까나, 지금 받아서 어딘지 설명...을 가장한 변명을 하는 것이 편할까나. 어느 쪽이나 괴롭긴 마찬가진데... 내가 왜 이런 걱정까지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과감하게 무시 또한 하지 못하는 소심한 나. "안 받아?" "음... 됐어. 먹기나 하자." 전화벨이 울리는 것을 멈추기를 틈타 전원을 끄려 종료 버튼에 손을 대는 순간 또다시 전화벨이 울려댄다. 징한 놈. 안 받으면 끊어. 포기할 줄도 알아라, 좀. "계속 울리는데. 받지 그래? 급한 일이면 어쩌려구." 포크를 들고 입으로 가져가며 채유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만, 해건이는 절대로 안 그렇다. 행여나 내가 만나는 게 채유라라는 말을 했다간 언제까지 볶일 지 짐작도 할 수 없다. "이거 참..." 아, 끊겼다. 난감해하는데 벨소리가 멈췄고 재빨리 전원을 껐다. "그래도 괜찮아? 되게 찝찝한 얼굴이야. 신경 쓰이는 거면서 그냥 받지 그랬어." "여기엔 니가 모르는 아주 깊은 사연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모른 척 해줄래?" "아, 알았다! 여자구나? 맞지? 그지?" "아냐." "인기 좋은데? 부럽다, 부러워." 니가 더 하다고 보지만. 직장여성이라고 하더라도 DKNY로 아래위 한 벌 뽑으려면 돈 좀 들었을 텐데 그런 걸 마구잡이로 사줄 리는 없는 거잖아. 난 말야, 내가 안 사주면 안 되는 입장이라구. "역시, 너 인기 많구나." "아니래도 그러네. 돈을 잘 쓰니까 그런 것 뿐이야. 그나마 요즘엔 그것도 뜸하니까 다 떨어져 나간지도 오래고." "설마. 농담하는 거지?" "이걸로 내가 농담해서 뭐하게." "그럴 리가 없잖아. 너 거울 안 봐? 거울 없어? 잘 생겼다구! 말하는 거라든가 행동하는 것도 상냥하고. 아까 내가 차 탈 때만 해도 일부러 차 돌려서 내 쪽으로 조수석 문이 오도록 세웠잖아. 거기다 문 열어주고 탈 때까지 기다려주고. 신경 쓴다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아주 자연스럽게 말야. 그렇게 하는 거 괜히 의식하게 되면 상대도 조금 껄끄러워지는 건데 전혀 그런 것 없이. 인기 없는 게 이상한 거 아냐?" "나도 모르는 걸 잘도 아네." "그러니까 더 대단한 거지. 나 봐. 너 꼬시려고 했었잖아. 난 눈 높다? 그런 내가 하는 말이야." "아, 고맙기도 하지." 씨익 마주보고 웃으며 와인잔을 들고 건배했다. "생각보다 맛있다." "내 선택이 아니라 탱큐하지는 못하겠고, 골라준 아저씨한테 탱큐다." "좋아, 좋아." 식사를 하며 11%밖에 되지 않는 약한 술이지만 그래도 한 병을 모두 비운 터라 운전은 조금 망설여진다. 일단 식사는 마쳐서 계산을 하고 나오며 머리를 흔들어보았다. "왜?" "아니. 운전할 수 있을까 싶어서." "에게? 꼴랑 그거 갖고? 너, 전에도 운전 때문이 아니라 술이 약해서 안 마신 거였지?" "안전운전 해야지." "헤에... 성실하기까지. 멋진 놈이야, 너." "당연한 거 아니냐?" 갑자기 채유라가 팔을 뻗어 내 손을 잡는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융통성을 가지는 게 어때? 남자라도 자보면 나쁘지 않다구. 뭣하면 내가 대줄게." 잠시 손을 잡힌 채로 서서 채유라를 바라보았다. "응? 어때? 응?" 손을 휙휙 털어 냈다. "...술 다 깼다. 운전할 수 있겠어." "칫." "뭐야, 이거 노린 거 아니었어?" 훗훗 웃으며 차문을 열자 올라타며 투덜거린다. "너무 튕기는 남자는 매력 없는 거다, 너." "그냥 이러고 살겠습니다, 네?" "하하."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리는 채유라를 보다 함께 웃었다. 잠깐 동안 웃음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운다. 기분 좋다. 즐거워. 한 거라곤 시시껄렁한 농담에 함께 식사한 것이 전부인데. 근래 들어 했던 어떤 것보다 즐거웠다. 채유라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고 가볍게 만드는 공기에 둘러싸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공기에 닿는 사람은 모두가 유쾌해지는 거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괴로운 환경을 겪은 채유라가 그 유쾌한 공기란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애썼을지 만은 조금도 알 수 없다. 나는 어쩌면 그 공기에 닿는 것도 불손한 녀석인지도 모르겠다. "공기...일까나..." "뭐라고?" 혼잣말이 들렸는지 묻는 채유라에게 그냥 웃어만 보였다. "아니. 아무 것도 아냐." 그리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도로변에 세워진 가로등의 불빛이 드문드문 차창 위를 스쳐 지나간다. "이제 정말 마셔야지?" "물론이지!" "어디가 좋아?" "아무 데나. 어디든 좋아." 고개를 힘껏 끄덕이고 액셀을 밟았다. 부앙- 요란한 엔진음을 울리며 차체가 빠르게 쏘아져 나간다. 차를 세운 곳은 호텔이었다. 그냥 술이나 사서 집에 가고 싶었지만 해건이가 찾아올까 겁나서 못 갔다. "어, 호텔이다. 여긴 왜에~~~?" "...쓸데없는 생각하지마. 마시러 온 거야." "마시는 데에~ 왜~ 호텔이야아~~~?" "호텔에서도 술 팔아. 지금 시간에 술집 찾기도 뭣하고. 게다가 괴상한 룸 같은 곳은 정말로 취미에 안 맞아." "아잉, 변명이 길잖아." 이마를 툭 치는 것으로 무시하고 콘솔박스를 향해 몸을 숙였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채유라가 그 등에 손을 얹는다. "무거워." 그 얹어진 손이 슬슬 움직인다. ...정말, 여기서 마셔도 될라나. "손 떼." "아니. 싫다고 하면 안 해. 그냥 만져보고 싶어서. 근데, 놀랐어. 말랐네? 보기에는 탄탄해 보이는데. 너 행여라도 깔기엔 무리겠다. 이런 몸으로 힘이나 쓰겠어?" "깔릴 일없어." 싫다고 하면 안 한다니. 아무리 생각이 넘쳐도 하지 않겠지. 나는 그렇게 채유라를 믿고 있었다. 한참을 박스 안을 뒤지다 겨우 찾았다. "프리덤은 없네. 있는 줄 알았는데. 자. 쓰던 거지만." 마치 호루라기처럼 생긴 마개가 달린 세루티를 내밀자 그저 얼굴을 쳐다만 본다. "받아." 어쩌면... 나는 정말의 나란 것을 찾는 것에 채유라의 도움을 바라는 건지도. 뭔가 다르다는 기분은,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눈을 깜빡인다. "받으라니까. 멋 부리고 다녀. 그런 멋진 옷에 향수 정도는 뿌려줘도 좋잖아." 작게 고개가 흔들리고 채유라가 이내 똑바로 나를 응시한다. "고마워. 너한테 받으니까 더 기분이 이상해." "부탁인데, 수상한 생각은 하지 말아 주라. 응?" "아니... 그런 거 말고. 잃었을 때의 기분이랄까... 그러니까 너한테 받는다는 게 더 미묘한 거야."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미묘해지지만 수상한 생각과는 무관한 감상이라는 것에 이내 잊어버린다. 손목에 살짝 뿌려 향을 들이마신 채유라가 말했다. "....응. 너랑 똑같은 향기다... 이거." "지금은 프리덤이라구. 기회가 닿으면 프리덤도 줄 테니까." "그건 수상하게 생각해도 되는 거?" "농담 말고. 그것도 사회환원." "흐응... 시시한 변명이네, 진짜." 차에서 내려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자주 오나 보네. 능숙한데." "자주 오는 편이었지." "그런 거, 좋아?" "여자랑 자는 거?" "응." "몰라. 싫은지 좋은지. 그냥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되어 있었어. 처음엔 별로 싫지 않았던 것 같지만. 그러니까 50대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러고 다녔겠지." "50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카드키를 꽂자 문이 열린다. "그런 게 있어." 진득하고 지루한 섹스를 하는 50대라는 말은, 죽어도 못한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자주빛의 카페트가 깔린 복도를 걸으면서 채유라가 재차 확인을 한다. "근데 여기서 술 마시는 거야, 진짜? 정말로 날 두고 마시기만 하는 거?" "그렇대두." "모른 척 그냥 덮쳐도 넘어가 줄 수 있는데." "니가 덮치지나 말아 주라." "쳇. 남자가 쫀쫀하면 매력없대두 그래. 마시기만 할거면 그냥 집에 가도 되잖아. 모처럼 이런 좋은 호텔에 와서는 손가락만 빨라니. 냉정하기도 하지." "응. 실은 집에 가서 마시고 싶었는데 손님이 있을 것 같아서. 누워서 뒹굴거리면서 마시는 걸 좋아하거든. 그래서 또 60대라는 말 듣고 있지만. 편하잖아." 들어오자 마자 냉장고를 열고 구비된 맥주와 작은 병의 스카치위스키를 주욱 바닥으로 늘어놓고 주거니 받거니 앉자마자 마시기 시작했다. 안주는 다급히 부탁한 감자 튀김과 마른안주. "술 세?" "어느 정도는. 아직 필름 끊긴 적은 없었어. 넌?" "세. 아무리 마셔도 몸도 정신도 멀쩡해. 그래서 조금 손해라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아." "그런가?" "굉장히 괴로운 일이 있을 때는 말야. 차라리 정신을 잃어줬으면 싶은데도 말짱하단 게 오히려 더 성질난다구." "하긴 그것도 그렇겠다." 가만히 수긍하자 얼음도 띄우지 않은 스트레이트로 홀짝이며 채유라가 말했다. "버번이 좋은데. 그건 없나보다." "난 스카치위스키가 더 낫던데." "조금 더 텁텁한 맛이 나잖아, 버번이. 그게 좋아." 그리고 웃으면서 작은 병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마신다. 매직미러인 창 밖에서 스며드는 달빛에 갈색의 머리칼이 비치고 있었다.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알아오던 녀석들과는 달라서일까. 채유라는 어쩐지 내가 속한 현실과는 다른 곳을 딛고 사는 것만 같다. 혹은 나로선 짐작조차 못할, 내 생각에는 견딜 수 없이 우울해질 환경이라는 것 때문인지도. 분위기라는 것과 생김새라는 것은 환경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중년 이후의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과도 일맥상통인 것인데 굳이 중년까지 가지 않아도 그것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채유라의 저 남자답다기보다는 어딘지 여리게 보이는 섬세한 얼굴 생김이라든가 길쭉한 팔다리, 그리고 웃고 있지만 안타까워 보이는 눈빛. 그것은 어둡지 않은데, 우울할 거야- 라는 것은 역시 또 내 착각일 뿐인 건가. 전혀 어둡지 않다. 오히려 뭔가 끌리게 하는 몽롱함...이랄까. 이상한 표현이지만 정말 그랬다. 달빛의 놀라운 효과가 더해진 탓에 더욱 나른해진다. 그것이 여자로도, 남자로도 보이지 않아서 마치 사람 이전의 존재 같다. "...준아? 재준아?" "어? 아, 응. 왜?" "아니. 왜? 조금 그럴 맘이 생긴 거야? 내 얼굴, 맘에 들어? 계속 쳐다보고 있네." "아냐. 마시기나 하라구." 퉁명스레 말하며 벌컥벌컥 마셨다. 후후- 조그맣게 웃으며 병을 쨍- 소리가 나게 부딪혀온다. "집, 어디야? 일한다고 했잖아. 안 그럴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혹시라도 내일 너 나갈 시간이 지나도 내가 안 깨면 곤란하니까 깨우라고. 데려다줄 테니까." 괜스레 지금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내일의 일을 걱정하며 말하자 빙글거리며 웃는다. "걱정마. 내일 쉬는 날이야. 근데 헤헤, 너 얼굴 빨갛다." "요즘은 술집도 한가한가 보지? 이틀이나 쉬도록 놔두게. 그리고 말야. 이게 좋은 거야. 빨리 분해하고 있는 거라잖아." "그래도 얼굴이 빨개지니까 귀여워." "....이런 놈/한/테 너는 귀엽다고 하고 싶냐." "상관없잖아. 귀여운 건 귀여운 거. 하고 싶은 건 하고 싶은 거. 마시고 싶은 건 마시고 싶은 거. 아, 맞다! 그리고 오해하지 마라고 하는 얘긴데 나, 되게 인기 좋아서 프리하게 쉬는 날 고르는 거라구." "아, 예. 잘 알아모시겠습니다." 생글 웃는 채유라를 보다 피식 웃고 말았다. 좋구나, 솔직하다는 것은. 만약 여자이기만 했다면 나는 채유라를 안고 싶었을 거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계속해서 만나고 싶어하겠지. 남자인 지금도 어울리는 것만은 분명히 즐거운 상대니까. 여자였다면 다르게 어울렸을 지도 모르지만, 이런 성격이라면 여자라도 틀림없이 즐거웠을 거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섹스 한 후로 벌써 1달하고 보름이 넘어 지났다. 그다지 관심 가는 종목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도 있었고 별달리 자극 받을 만한 일도 없었고. 그냥 저냥 묵혀둔 게 상당히 오래됐구나. 지금 생각난다는 자체가 채유라라는 남자에게 계속 대시를 받는 중에 떠올랐다는 것으로 찜찜하지만. 뭐, 그것도 넓게는 무관하지 않으니까 그런 거지, 별 거 아니다. 평소 나는 정작 50대의 노년이 더 가까운 중년보다 담백하단 말이지. 냉장고의 것은 모두 마셔버린 지 오래여서 룸서비스를 잔뜩 시켜 쌓아놓고 다시 시작했다. 얼마나 마신 거지. 알딸딸해기지 시작하는데. 흘끔 본 채유라는 여전히 멀쩡한 얼굴로 즐거워하며 술병을 홀랑홀랑 비우고 있었다. "아아... 정말 잘도 마시는 구나. 괜찮냐?" "어? 너 벌써 취하는 거야? 얼마나 마셨다고 그래애~~~" "얼마나가 아냐. 엄청나게 마셨잖아." 혀가 꼬이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말하자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몇 시야?" "으응...?" 술이 올라 반쯤 뻗으려는 것을 참고 손을 턱 내밀었다. "니가 봐." 손목에 걸린 시계를 보기 위해 채유라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온다. 어라라. 잘 긴다. 이런 우스운 것이 먼저 생각나는 지금, 나는 이미 상당히 취해있는 거였다. 손목을 잡은 채유라가 시계를 들여다본다. "와~ 시계 예쁘다." "그래애~? 너, 가질래?" "괜찮아."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채유라를 보다 불퉁하게 손목의 시계를 풀어냈다. "가져어~ 가지라구우!" "괜찮다니까. 시계 잘 차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나 같은 녀석에게 오면 이 시계 불쌍해져." "가지래두 그러네." 억지로 채유라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었다. "...곤란한데 이거..." 중얼거리는 것을 무시하고 시계가 채워진 채유라의 손목을 들고 공중에서 흔들어댔다. "이야~ 잘 어울려. 멋지다." "어어? 한재준?! 재준아?" 어라, 어라. 너, 어디 가냐? 왜 가고 그래애....?! 뒤로 풀썩 넘어갔다. 작은 병이라고 해도 양주 2병에 맥주까지 섞어서 9병. 뻗을 만도 하다. 채유라의 빠른 페이스에 맞춰서 말을 하면서도 줄곧 마셔댔으니. "잘 거면 침대에 누워서 편하게 자. 응? 정신 차리고 일어나 봐. 아니 정신 안 차려도 좀 움직여보라구." "기분 좋은데." 바닥에 누워서 대자로 몸을 뻗고 커다랗게 웃으며 말했다. 절대로 가볍지는 않은 나를 채유라가 어렵지 않게 팔에 안아 올렸다. 조심스럽게 침대에 나를 눕힌 채유라가 바닥에 앉아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역시 운동을 좀 할까나. 근육맨은 싫지만 가볍게 남자에게 들려지는 남자란 것도 역시 내키지 않는단 말야. "우쌰! 우쌰!" 팔을 허공으로 휘두르며 펄펄 날다 웃어버렸다. "하하." 계속해서 소리내어 웃어만 대는 나를 향해 채유라도 부드럽게 미소를 되돌린다. "맙소사... 그러니까 니가 조커였던 거라구. 하하. 생각도 못했는데. 뭐, 이것저것 생각을 많이 접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쯤은 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지. 그런데 너 보고 있으니까 그냥 아무렇지도 않아지는 것도 같아. 사실 너와는 달리 내 쪽은 더 나빠질 게 없다는 생각도 있고. 넌 악당이 되지는 못할 녀석인 것 같으니까."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채유라를 향해 여전히 나는 웃고 있었다. 술 취한 머리로는 뭐라고 말하든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그저 귓가를 지긋이 울리는 음성이 듣기 좋았다. "있잖아. 사람은 살면서 만남이란 것을 세 번을 갖는다고 해. 좋든 나쁘든. 나는 아마 널 만나는 것으로 그 세 번이 다 된 게 아닌가 싶어. 어떤 세 번인지는 지금 설명해주지 못하지만 널 만나길 잘했다는 것은 정말이니까. 의도는 나빴지만 시도는 나쁘지 않았어." 채유라의 서늘한 손이 이마에 닿는다. 그 손은, 무척이나 서늘해서 열이 오른 몸에 아주 기분 좋았다. 가만히 이마를 문지르자 머리칼로 올라가며 스친 손길이 다시 내 몸을 벗어나 내려간다. "난 계속 마실 거니까. 자." "어어...?" 거의 잠에 완전히 빠져들어 의미 없는 반문을 하자 빙글 웃는 얼굴이 언뜻 보인다. "술에 취한 사람은 아기랑 비슷하다고 생각해. 무척이나 약하기도 하고 또, 귀여워. 그러니까 지금 넌 내가 하는 말 뭔지 잘 모를 거야. 술에서 깨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아기랑 마찬가지로 머릿속 깊숙한 곳에서는 분명히 듣고 있는 거야. 나중에, 내가 한 말이 기억나면 말야. 내가 분명히, 만나서 좋았다-라고 생각한다는 거, 잊지 마라." 살며시 채유라의 얼굴이 내 쪽으로 숙여졌다. "음... 협박할 자신도 있지만. 네가 거절 못할 방법으로 말야. 하지만 역시 키스는 좀 더 애틋해야겠지? 그러니까 오늘은 이걸로 패스할래." 그리고 가볍게 채유라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으며 스쳐간다. 이거... 키스 당하는 거...? 키스...?! 잠으로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어린 시절의 꿈을 꿨다. 아직은 우리 집이 농사를 짓던 때. 그때는 엄마도 아빠도 모두 집에만 가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밤이면 바로 건넌방이던 내 방에서 조그만 소리만 내도 미닫이문이 스륵 열리며 엄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던 시절. 그 날도 그랬다. 낮에 본 독수리 5형제 때문이었을까. 엄청나게 커다랗고 난폭한 괴물들이 우리 밭이며 논을 짓밟는 너무나 무서운 꿈을 꿨다. "재준아?" 엄마의 손이 가만히 이마에 와닿았다. 눈을 뜨고 훌쩍거렸다. "쉬잇... 괜찮아." 조그맣게 웃으며 엄마가 물었다. "우리 재준이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독수리 5형제." "어머... 4명이나 모자라네?" 그런 식의 대수롭지 않은 엄마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안도해서 다시 잠이 들곤 했다. 언젠가는 꼭 4명을 채워서 독수리 5형제를 만들어주겠다는 엄마의 약속을 들으며. 그러나 20살인 지금 나는 아직 혼자서 1호를 하고 있고 상냥하던 엄마는 한 달에 한번 얼굴 보는 것도 여의치 않는 먼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실은 독수리 5남매여서 무리인 걸까... 라고.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변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진심으로 괴로워진다. 그리고 눈을 뜨자 머리가 지독하게 지끈거리고 있었다. 술을 마시다 잠든 것과 독수리 5형제 말고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일어났어?" 들려오는 익숙지 않은 목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에 술병을 잔뜩 쌓아놓은 채로 채유라가 응접세트의 소파에 앉아 한가롭게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아아.... 상당히 머리가 아프네, 이거." 일어선 채유라가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을 들고 내게로 다가왔다. "먹을 수 있겠어?" 손에 들린 물잔을 보며 누운 채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것만으로도 다시 지독한 두통에 멍해진다. "마시는 건... 절대 사양이야. 넌 괜찮냐?" "이거 술 깨는 약이래. 숙취로 인한 두통에 굉장히 효과가 좋다던데." 호텔방에 구비된 품목은 아닌데. 내가 자는 동안 나가서 사온 건가? "아아.... 기왕이면 바르는 약이었으면 좋았을걸." "하하. 그런 게 어딨어? 암튼 일어났으면 먹어. 가게 누나들이 이거 얼마나 좋아한다구. 이름이 기억 안 나서 혼났어. 일부러 전화해서 물어보고 산 거란 말야. 어서." 다행인 건 그나마 캡슐형이라는 거였다. 알약을 삼키면 어쩐지 목이며 가슴이며 어깨며 배며. 전신이 저리고 아팠다. 캡슐을 까서 물잔으로 털어 넣는 나를 채유라가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다. "왜?" 흰 가루가 녹아드는 것을 대충 확인하고 단번에 잔을 비우며 물었다. "아니... 알약 못 먹어? 되게 애기다아..." "알약은 쓰다구." "캡슐의 가루가 더 쓴데..." "지금 몇 시지?" 그러면서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려고 했는데... 없다?! 어, 분명히 차고 나왔을 텐데? 1년전쯤 불가리에서 구입한 백금으로 테를 두른 손목시계는 워낙에 맘에 들어서 나올 때면 반드시 차고 나왔다. 근 1년에 걸친 버릇이라 잊었을 리는 없었을 텐데. "아. 이거 찾아?" 채유라가 다시 테이블로 가더니 시계를 들고 와서 묻는다. "아. 응... 내가 풀었어?" "뭐, 그 비슷하지." 뭔가 기억이 날 듯도 한데... 인상을 찌푸리며 날 듯 말 듯한 기억을 더듬는 나를 향해 채유라가 쿡쿡 웃는다. "안 좋은 술버릇이야." "응?" "아무거나 마구 줘버리잖아. 시계 정도였던 걸 다행인 줄 알아." "내가 너... 줬었어?" "그래. 꿀꺽 하고 싶은 거 참느라 힘들었어. 이거, 비싼 거지?" "그럼 그거 니 꺼야." "돌려주고 있잖아. 장사꾼 안 남아요, 연예인 수술 안 했어요, 술 취한 사람 안 취했어요. 이 세 개는 절대로 믿을 게 못 되는 거야." "술이 취했든 아니든 줬을 때는 주고 싶어서 줬을 거라구. 그러니까 그건 니 꺼야." 채유라가 가만히 나를 본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앉아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래서 지금 몇 신데." "11시." "아우... 몇 시간 잔 거냐." 다리까지 마저 바닥에 딛고 일어섰다. "나가자. 밥은? 먹고 갈까?" "3시간밖에 안 잤어." "넌 안 잤어? 피곤하지 않아?" "아니, 뭐. 밤새는 건 자주 하는 거라서." "일단 나가자."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을 나와 주차요원이 가져다준 차를 보며 말했다. "스테이크 먹으러 갈래?" "아니." "먹고 싶다고 했었잖아." "지금 말고." "그래? 그럼 데려다줄 테니까 타라." 고개를 젓는다. "괜찮아. 지하철 타면 돼." "그러지 말고 타. 차 두고 뭐하러 지하철을 타냐?" "괜찮아. 너, 괜히 내가 보자 그래가지구 나와서는 돈만 쓰고 시계 뺏기고. 미안하잖아." "미안할 거 없어. 돈이야 내 돈도 아니고 쓴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는 데다 만나기 싫었으면 안 나왔을 거야. 그리고 충분히 즐거웠다구." 다시 한번 고개를 저은 채유라가 손을 흔든다. 어어- 하는 사이 채유라는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채유라!"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돌아본다. "연락처!" 멈춰서 있는 동안 뛰어가 말하자 웃는다. "없어." "그럼 집전화라도." "폰도, 집전화도 아무 것도 없어, 나." "그럼 가게 번호라도 있을 거 아냐." 고개를 갸웃한다. "혹시, 가르쳐주기 싫어서 그래?" 빙긋 웃으며 채유라가 말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보고 싶을 때면 내가 연락할게. 그게 더 좋아." "....상당히 불평등하다, 그거?" "넌 그냥 이대로가 좋아. 네가 연락하면 뭔가가 변할 것만 같아." 팔짱을 끼고 가만히 바라보자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친다. 아주 조금, 정말로 조금인 키 차이인데. 채유라의 그런 동작은 어딘지 어른스러워서 독수리 5형제의 꿈을 생각나게 했다. "연락할게." 그리고 채유라는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정오를 향하는 거침없는 태양이 분수대를 거쳐 미세한 포말을 흩뿌린다. 그 아련한 시야에서 채유라가 멀어지고 있었다. 다시 로비로 돌아와 차에 올라 핸들을 꺾었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대체 채유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대체가 세루티를 건넸을 때부터 뭔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채유라를 만났던 걸까. 그리고 채유라가 하는 말에는 뭔가 아주, 약간- 그래서 몇 번이나 되짚어 생각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묘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알고 싶기 때문에 만나는 건가? 그건 아닌데. 나의 일상을 벗어난 비일상. 가끔은 날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라던가. 언제라든가. 무엇 때문이라든가. 그런 건 조금도 알지 못한다. 그저, 채유라를 만나는 순간이 비일상이 된다. 그것은 기묘한 만족감이었다. 어린 시절 독수리 5형제가 종영하던 날, 광에 틀어박혀 이제 지구는 누가 지키나를 고민하다 결국은 울어 버렸던 그 날의 내가 놀랍도록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 시절의 것은 이제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 현실적인 매개물은 모두 사라져버린 지금에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나의 일상이 아니어서 일까. 채유라가 연락처를 가르쳐주지 않은 것은. 내가 연락하게 되면 무언가 변할 것 같다는 그 말은. 조금, 아주 조금 서글퍼진다. 혼자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해버리는 치졸한 나를 떠올리게 하기에. 브레이크를 밟아 길 한 옆에 차를 세우고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늦지 않은 지도 모른다. 아직은 크게 늦은 것이 아닐 거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리자. 조금만 더 망설이고 조금만 더 헤매자. 그러다 보면, 분명 내가 있을 곳을 찾게 될 거다. 그 곳이 어디인지, 무엇이 있고 누가 있을 지 지금으로선 조금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나는 좀 더 자유스러운 모습으로 있을 거라 믿고 싶다. 그리고 말하게 되겠지. 그리하여 독수리 5형제는 5남매가 되어서도 사이좋게 지구를 지켰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욕실로 직행해 샤워기 아래에 섰다. 훌훌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티셔츠가 문틈에 살짝 걸린 것이 보인다. 아아... 정말 피곤하다. 그렇게나 퍼마시고 3시간 겨우 자고서 집까지 한 시간 남짓 운전을 하고 왔더니 아주 죽을 것 같다. 무슨 놈의 길이 그렇게나 막히는지. 오후 12시가 조금 넘은, 막힐 시간은 절대로 아닌 것 같은데. 하긴 퇴근시간이라도 됐으면 2시간을 족히 걸렸을라나. 팔뚝에 소름이 돋을 때까지 찬물을 맞고 서 있다 돋은 소름을 긁으며 샤워기 아래를 벗어나 거울 앞에 섰다. 대충 머리를 털며 스킨을 들어올리는데 뭔가가 눈에 띈다. 이게... 뭐지? 오른쪽 쇄골 위에 마치 멍이 든 것 같은 자국. 이거, 키스마크잖아...?! 근데 이게 왜 있는 거지? 있을 이유가 없잖아! 설마... 채유라?!! 안 건드린다더니...! ....다른 데도.... 이따위 짓을 해 놓은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거울에 전신을 꼼꼼히 비춰보았다. 다행이 다른 곳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이거, 기념품 정도로 생각해줘야 하는 건가? 벌컥- 하며 반쯤 열렸던 욕실문이 활짝 열렸다. 순간 나쁜 짓 하다 들킨 꼬마 같은 기분으로 놀라 뒤돌아보았다. 몹시도 수상쩍은 눈초리의 해건이 허리에 손을 얹고 거만하게 쳐다보는 것과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와, 왔냐. 노크 좀 해라! 노크 몰라?" 말없이 계속 째리고만 있다. "여기가 대체 누구네 집이냐? 나도 사생활 좀 가져보자. 어째 샤워도 내 집에서 맘 편히 못하는 거냐?" 여전히 찌뿌둥한 얼굴로 보던 해건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호오... 연락두절에 외박하더니만, 키스마크?" "...니가 동거녀였냐?" "그래도 잘했다고 떠드네? 앙?!" "....지금 내가 너한테 혼나는 거야? 그래?" "잘한 거 하나도 없으면서!" "그렇다고 못한 것도 없잖아?" 울컥해서 쏘아붙이자 해건이가 파래져서는 부르르 떤다. "너... 너....! 뭘 잘했다는 거야!" 그리고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사태는 늦어 있었다. 아락바락 해건이 악을 써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게 왜 전화 안 받아! 그리고는 전원을 꺼놨잖아! 거기다 집에도 안 들어왔지! 그리고선 보니까 목에는 어디서 만들어왔는지 시퍼렇게 키스마크는 남아 있지! 그런데 넌 지금 못한 게 없다는 거야?! 너라면 내가 그랬으면 우스워? 앙! 너는 내가 그러고 싸돌아 댕기면 잘했다고 칭찬해줄 거냐구! 그래! 너, 잘났다. 한재준 잘났어! 친구가 기껏 걱정해주는 걸 그렇다고 못한 것도 없다 이거지! 잘났어, 정말! 그렇게 잘나서 너는 친구가 걱정하는 것 따위는 필요 없다 이거지! 니가 친구야?!!! 그게 니가 할 말이냐구!!!" 아아... 머리가 멍하다... 그냥 참고 말 것을...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던가. 한 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랬을까. 그렇게 몹시도 후회를 하고 있건만, 어째서인지 입은 딴소리를 하고 있다. "친구는 그따위로 룰도 전혀 없는 거냐? 나라면 니가 그랬어도 이따위로 아침부터 찾아와서 악쓰고 그러지 않아. 그게 왜 걱정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럼 넌 내가 어디 갈 때마다 여기는 어디, 몇 시 몇 분 현재 어디로 이동 중, 일행은 누구, 언제 어디 도착할 예정이다- 이러고 고해바치면 그러면 걱정 안 한다 이거야? 내가 언제 그래 달랬냐? 너 혼자 괜히 사람 못 잡아서 안달난 것뿐이잖아." 순간 해건이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흘려진 셔츠를 보는지 그저 바닥을 보는 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아래를 보던 해건이 입술을 꼭 깨문다. 그때 불쑥 해건의 어깨에 손이 올려진다. "그만해. 울잖아." 수혁이었다. "누가 운다고 그래!!!"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들어 수혁의 얼굴을 노려보며 해건이 소리쳤다. 그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수혁이 빙긋 미소지었다. "어라. 진짜 운다." 아닌 게 아니라 해건이는 눈물이 글썽했다. "저..." "됐어! 이 썩을 자식!"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해건이가 타다닥 소리를 내며 뛰어가 버렸다. 머쓱해져서 팬티를 주워 입는데 수혁이가 말했다. "그렇게 울리고 싶었냐." "....누가.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마." "그래도 울었는걸, 저 녀석?" "...내가 심했냐...?" "뭐. 심한 건 아니지. 사실이잖아. 저 녀석이 좀 과했어. 늘 그랬지만." "...그래...?" "그래도 말야. 늘 잘 참다 갑자기 터진 건 왜야? 변했다 싶기는 했는데. 정말 그런 거냐?" "...글세." "난 니가 어떻게 변하든 별로 상관없어. 하지만 왜 변하는가에는 조금 관심이 가는데." 주방으로 나와 정수기의 물을 받았다. "늘 변하고 싶다고 생각해왔던 거지. 항상 그랬던 거야. 돌아가고 싶다는 건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그 변한 니 놈에게는 연해건도, 장수혁도 없다 이거냐? 그래서 갑자기 터지셨다?" 그런... 건가? "그런 생각은 해 본적 없어. 정말로." "아예 생각을 안 했다?" "그런 것과는 달라." "별로 다르게 안 들리는 건 착각일까나, 그럼? 그러니까 말야. 너, 그 닉스에서의 그 녀석을 만난 이후야. 혹시, 어제도 그 녀석 만난 거냐? 그 녀석이 계기란 거냐구." "...그래. 만난 건 맞아. 계기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녀석은 다르냐? 나나 해건이와는 달라? 그래서 우리가 갑자기 찬밥이 된 거냐? 아니지, 처음에도 뜨신 밥은 아니었지. 요 근래를 생각하면. 그래도 너 혼자서는 제대로 놀 자신도 뭣도 없었으니까 그 동안은 어째어째 참았는데 이젠 아니라서 터졌다... 같은데. 그런 거냐?" 물 한 잔을 비우고 다시 물을 받아 마셨다.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 정말, 그런 건가. "그렇다면 말이지. 상당히 불쾌해지는데? 그렇잖아? 우리는 그럼 너한테 뭔데. 이런 거 묻는다는 자체가 기분이 더러워지려고 하거든. 똑바로 말해봐. 고결하고 싶은데 우리가 방해냐?" "장수혁....! 좀 심하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 없는 거 아냐? 별 거 아닌 일이잖아. 니네들하고 한 두해 안 사이도 아니고. 이제 와서 내가 왜 그러느냐구. 그런 생각 전혀 안 했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뒤늦게 내가 왜 그래야 한다는 거냐. 그렇다면 그렇다고 내가 말할 거라는 생각은 못하겠냐? 난 단지 해건이가 저러는 건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구. 한 두 번도 아니고 매번 해건이야말로 곤란한 거 아냐? 이젠 내가 묻고 싶다. 해건이는 그럼, 왜 저러는 건데? 너도 마찬가지야. 왜 너나 내가 일일이 해건이 장단에 엎어지고 자빠져야 하는 거냐구. 넌 항상 해건이가 심하다고 말만 하지, 늘 편 들잖아. 틀려?" 수혁이가 어깨를 으쓱한다. "몰랐냐? 나 해건이 편인 거. 귀엽잖아. 성깔부리는 게." "....귀엽긴 누가 귀엽냐. 눈깔이 썩었냐, 너는. 저게 귀여우면 홍콩할매 귀신도 귀엽겠다."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내 문 수혁이 길게 연기를 내 쪽으로 뿜어낸다. "연해건한테 한재준이란 녀석은 아주 중요한 거라구." "뭐냐, 그게?" "종합선물세트라는 거지. 열고 내고 열고 내고. 끝이 없다구." 담배 연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옆으로 조금 물러서자 수혁이 놀리듯 나를 쫓으며 연기를 뱉는다. "해건이 집에서도 너한테 하는 것만큼은 안 해. 너한테 하는 것처럼은 나한테도 안 해. 굉장히 민감한 녀석이란 말이다, 알겠냐?" "전혀 모르겠는데 말이지." 싱크대의 물을 틀어 담배를 적신 수혁이 꽁초를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는다. "희연이는 만나냐?" "응? 희연이? 안 만나는데?" "내가 이런 말 입장은 아니지만 걔는 좀 심해. 간판도 나름이니까. 알겠냐?"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해건이 얘기하다 말고 희연이는 왜?" 뒷머리를 벅벅 긁은 수혁이 입맛을 쩝쩝 다신다. "뭐야? 왜 그래?" "희연이 말야, 해건이한테 껄떡댄 모양이야." 순간, 벙쩠다. 내가 예전에 희연이 친구랍시고 어울려 다니던 여자애랑 잠깐 놀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희연이가 해건이에게 껄떡거렸다는 얘기는. 나와 해건이, 수혁이가 보통 이상으로 친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텐데. "제법 오래됐나봐. 해건이 녀석 소심하니까 너한테 말도 못하고. 어제도 그래서 너한테 열라 전화 때렸는데 너는 전원 띡 꺼버리지. 뚜껑 열리게 안 생겼냐." "...너한테는 안 그래...?" "진작에 그랬지. 나는 냉정한 남자잖아? 나한테 안 먹히니 해건이였지, 뭐. 걔도 일관성이 상당히 부족해." "....미안하게 됐다." "그래서 어쩔 거야?" "어쩌긴. 끝내야지." "호오." "내 주변부터 정리했어야 하는데. 변하니 마니 떠들 거면 말이다. 니들한테 괜히 화풀이했어. 미안하다." "그렇단다. 연해건, 이제 그만 들어오지 그러냐?" 돌아보니 현관에 해건이가 서 있었다. "그런 줄 몰랐다. 진작 말하지 그랬냐." "....말하면 뭐. 희연이 일만 사과하는 거잖아." 여전히 불퉁하게 말하는 해건이를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니까 결국 넌 또 모두 내 잘못이란 거네. "아아,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하나도 모르는 얼굴로 알았다고 말하지마. 놀리는 것밖에 안 되잖아." "놀리긴 누가 놀리냐. 미안해. 아깐 내가 괜히 열 냈어. 찬물 계속 맞았더니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보다. 이렇게 귀여운 연해건이한테 내가 신경질을 부리게. 화 풀어." 순간 해건이가 얼굴을 확 붉힌다. 귀엽다고 해서 화...났나? 예쁘장한 얼굴이란 거 충분히 이용해 먹고 있는 주제에 누군가에게서 그런 비슷한 말이라도 들었다간 억울해서 3박 4일을 징징대는 녀석이니. "...나도 미안." 이야, 이야. 상상도 할 수 없는, 끝내주게 신기한 전개다. 저 연해건이 순순히 하는 사과를 다 듣게? "니가 간섭이라고 생각하는 줄 몰랐어." "아니, 뭐... 그렇다기보단." "뭐 하냐. 고만하고 다 정리됐으면 술이나 한 잔 하자." 술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머리가 지끈 울린다. "난 그냥 안주나 썰고 있으면 안 될까? 어제 상당히 무리를 하는 통에 아직 골이 빠간데." "거 봐! 너 또 빼고나 있지! 뭐가 미안하단 거야! 우리랑은 같이 못 마시겠다 이거야?!" 수줍게 나도 미안... 하고 말하던 게 눈 돌아 깜빡이건만. 참... 그래, 연해건. 니가 어디 가냐. "알았어, 알았다구. 내가 죽으면 다 니들 탓이다. 응?" "쿡쿡. 이거 간만인데?" 거실 바닥에 퍼질러 앉자 내가 이 녀석들에게 들켜서 강탈당하지 않을 셈으로 여기저기 숨겨둔 양주를 귀신 같이 찾아내선 들고 나온다. 잭 다니엘도 있고 레미 마르뗑도 있고 헤네시도 있고 조니 워커 골드도 있고 베네딕틴도 있다. "...이거 어딨는지 어떻게 안 거냐... 니들?" "달리 매일 출근한 줄 아냐? 니가 무슨 생각하는 지는 손바닥이지." "그래서, 아까워? 앙? 이깟 술이 아깝냐구!" "아니... 아깝긴.... 마시자!" 이걸로 내일도 수업은 좍~ 째는구나. 내일은 수업이 6시간 풀이라 꼭 가야지 생각은, 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에 욱하는 거 그냥 참고 마는 거였다.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내가 사과듣긴 한 거였냐?" "간섭 아니래미?" "됐어, 우리 사이에 사과는 무슨." 수혁이는 우리 사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우리 사이란 게 대체 뭔지 너무 궁금해졌다. 다시 일어난 것은 오후 10시. 낮 내내 마시다 8시간 남짓 잤나보다. 언제 일어나서 나갔는지 녀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체력들도 좋지. 이틀 연속 술을 퍼는 통에 머리가 울렸지만 급한 일이 있었다. 수혁이가 말한 흘려들을 수 없는 얘기. 이 시간이면 희연이가 슬슬 나서기 시작할 시간이었다. 괜히 피크 맞는 새벽에 전화를 해서 씹히느니 미리 연락해두는 것이 나을 터였다. 핸드폰을 열고 메모리를 검색했다. 희연이는 27번이라는 어중간한 번지에 저장되어 있었다. [여보세요? 김희연 폰입니다~] 말꼬리를 기분 나쁘게 늘이는 만화주인공 같은 이 말투가 귀여웠던 때가 있었다. 교복 차림으로 건들거리던 열 아홉의 일이다. "나야." [어머, 뭐야아~ 재준이잖아? 왜에?] "좀 만나자. 어디가 좋아?" [으응~ 되게 오랜만이네? 나, 보고 싶었어?] "장소 내가 정할까?" [루카스에 있을 거야. 아무때나 와.]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시끄럽고 요란하고 그야말로 싸구려인 그 곳이 뭐가 좋은 지 희연이는 매일 출근이다. 닉스를 매일 같이 드나들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루카스는 조금 더 심각한 것이다. 우리가 부부가 행여라도 된다면 참, 가관일 거다. 청바지에 셔츠 하나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엄청나게 돌아가는 사이키 조명과 눈에 띄게 이곳저곳 박힌 앰프에서는 귀가 떨어져나갈 듯한 음량으로 음악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정도 되면 음악이라기보다는 귀를 찢어주마- 의 절규 같은 소음으로밖에 안 들리지만. 희연이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는데 누가 어깨를 툭 친다. 에에.... 그러니까 희연이 친구였던 것 같은데. 누구였더라? "희연이 찾아?" 악을 쓰며 귓가에 소리치는 노랑머리 여자애를 향해 고개만 끄덕였다. 같은 크기의 목소리로 대답해 줄 자신은 도무지 없었다. "저기!" 팔을 쭉 뻗어 가리킨 곳에는 희연이가 있었다. 역시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그 쪽으로 곧장 걸어갔다. 뭐라고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대고들 있다. 신기한 것은 분명히 귀가 멍해질 만큼의 음량으로 말하고 있는데도 무슨 소린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 "왔어!" 손을 팔락팔락 흔드는 희연이는 조금 취한 듯 보였다. 말없이 팔을 잡아 일으키자 손을 슉슉 뱀 쫓듯 내젓는다. 뭐냐, 그건? "얘기 좀 해!" 팔을 잡고 끌고 나오듯이 바깥 통로로 나왔다. 희연이가 날씬하다못해 마른 몸매라는 게 아주 다행스러운 순간이었다. 평소 생각에는 살이나 좀 찌워라 싶지만 이런 때 살이라도 쪘다간 끌고 나오지도 못했을 거다. "일단 나가자." 의자 위에 놓인 여러 개의 핸드백을 쳐다보다 언젠가 보아 눈에 익은 푸른빛의 사각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뭐? 어디? 놀다가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샐쭉 입술을 삐죽이는 희연이를 향해 참을성 있게 대꾸했다. "술 취해선 얘기가 안 되잖아. 술 깰 때까지 기다리자구." 어깨를 안 듯이 하고 부축하자 희연이가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샤넬 No. 5의 달짝지근한 향이 훅 끼쳐 올라왔다. 이런 점이 희연이의 매력이었다. 여자라는 공식을 최대한 이용할 줄 아는 것. 남자라는 동물은 민감하지만 의외로 고지식해서 꿈을 먹고 사는 것이다. 언제나 바라는 여자의 모습은, 고전적이다. 속은 전혀 아니지만 희연이는 언제나 길다랗게 내린 결이 고운 생머리에 색깔은 요란하지 않은 자연스런 밤갈색. 옷차림도 늘 수수한 듯 하지만 고급스런 느낌의 치마다. 겉만 봐서는 절대로, 나이트를 세끼 밥보다 좋아하고 술에 취해 실려나가기 다반사라고는 절대로 믿어지지 않는 곱게 자란 아가씨 풍이다. 그래서 나도 다 알아도, 나도 마찬가지로 노니까. 기왕이면 외견상이나마 구미에 맞춰서- 로. 그래서 희연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찢어진다 해도, 아까울 건 없다. "그러고 보니깐 우리 되게 오랜만이다, 그지이~?" "그래, 오랜만이니까 얘기 좀 하자구." "에이~~~ 얘기만 할 거 아니면서? 집에 갈 거야? 아님, 있잖아. 난 거기 가고 싶어. 리틀 프랑스라고 새로 연 호텔 있잖아. 응? 거기 가자아~~" 거기가 어딘데? 또 어디서 괴상한 러브호텔 이름을 주워듣고는 이러냐. 계속해서 칭얼대는 희연이를 힘들게 차에 앉혔다. 새벽 시간 한산한 도로를 천천히 달리자 창문에 코를 대고 한 동안 심호흡하던 희연이가 이내 신경질적인 어조로 날카롭게 쏘아붙인다. "뭐야? 잘 놀고 있는데. 술 다 깼잖아." 1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다리를 척 꼬아 다시 자리를 잡으며 핸드백을 열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내가 담배 피는 것들은 여자건 남자건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니까 일부러 더 이러는 거다. 잘 노는데 끌고 나왔다고 시위하는 중. 게다가 리틀 프랑스도 싫다니 수가 틀리셨다 이거지? "너 말야. 수혁이나 해건이한테 뭐라고 한 거야." "어머? 걔들이 뭐라 그래? 남자가 뭐 그래? 입 싸게." "그런 거야? 맞아?" "뭐, 어때서 그래? 어차피 너도 내 친구들한테 그러잖아?" 20살 되던 해 1월 중순. 희연이 친구 중 한 명이던 이름도 기억 아는 여자애랑 호텔을 나서다 희연이를 딱 맞닥뜨린 이후로 희연이 근처 여자애들은 준다 해도 안 건드렸다는 걸 잊은 걸까.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도대체 그 머리엔 뭐가 든 거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걔네한테 그러냐구." "뭘 하고 놀든 간섭 않기로 한 거 아니었어? 구질하게 왜 이래? 실망하면 좋겠어?" "니가 실망하든 절망하든 내 알 바 아니고. 다시는 걔네들한테 찝쩍거리지마. 알아들어?" "남이사. 신경 끄시지? 니가 나한테 그런 말할 자격이나 있어?" "내가 언제 다른 놈들한테 뭐라 그런 적 있어! 걔네들은 내 친구라구! 몰라서 그래?" 샐쭉하게 입술을 석 자나 내밀고는 툴툴거린다. "하지마안~~~ " 내가 정말로 화낸다는 것을 알고는 애교를 부리려고 한다. 이거 왜 이러시나. 한 두 번도 아니고 그 밑천 다 된지가 언제고 그 약발 떨어진 지가 언젠데. "하지만이고 뭐고! 두 번 다시 내 귀에 그 소리 들렸다간 알아서 해. 다 까서, 누가 손핸지는 말 안 해도 잘 알겠지? 어쩔 거야? 끝낼까? 다시 그럴 생각이 넘치시는 모양인데?" 당연히, 희연이가 더 손해다. 나야 어차피 막 나가는 고리대금업자에 복부인에 물장사하는 집 아들이라 소문이 안 좋게 돌아봐야 더 나빠질 것도 없었고 남자가 좀 놀았다고 죽일 놈 되는 분위기로 장가 못 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돈은 좀 없지만 유명한 학자인 아버지를 둔 희연이가 이 남자 저 남자 갈아 치워가며 놀았다는 소문은 너무나 불리한 거다. 그리고 현재 희연이가 놀아제끼는 돈의 상당부분이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중이니까. "그렇지마안~ 실제로 잔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걔네들 정말 유명하단 말야. 잔 애들마다 난린 걸? 그래서 나도 그냥 궁금해서 그랬어.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언제 화끈한 적 있었어? 너무 지루하다구. 너랑은 속궁합이 제로니깐. 정말, 그거 참아줄 여자 찾으려고 해 봐. 어디 있는 줄 알아? 너무 그러지 마아~ 인제 안 그러면 되잖아. 남자가 쪼잔하게 협박이나 하고. 칫." 애교를 부리는 것도 너무나 오랜만이라 여의치 않은 지 말하는 중간중간 씹어댄다. 이제 20살인 여자애가 속궁합 운운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 "다시 루카스로 갈래. 정말 기껏 마신 술 다 깨게 하고 무슨 얘기를 하나 했더니 맨날 실속없는 얘기나 하고. 너도 말야, 논다니가 될 건지 범탱이 될 건지 확실히 좀 해. 이도저도 아니게 어중간하게 잘난 척은 그만하란 말야. 남자 주제에 소심해 빠져선. 정말 밥맛이야." 루카스로 차를 돌리기 위해 유턴을 하다 들은 희연이의 말에 멈칫해서 고개를 돌려 희연이의 얼굴을 보았다. 두 번째 담배를 물고 내 얼굴로 곧장 연기를 뿜고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뭐야? 내가 틀렸단 거야? 뭘 쳐다 봐?" "아니... 조금... 놀라서." "흥." 큰 소리로 그렇게 코방귀를 낀 희연이 얼마 피지 않은 담배를 창 밖으로 휙 던지곤 새 담배를 문다. "넌 그 얘기를 누구를 위해서 한 건데? 명색이 니 여자친구인 내가 니 친구들에게 껄떡거려서? 행여나 니 친구들이 나랑 잘까 봐 내가 걱정돼서? 웃기지 말라 그래. 넌 그냥 니 그 개똥같은 양심에 걸린다 싶어서 괜히 말해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구. 니 생각만 하고 있잖아. 실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면서. 비겁해. 그런 주제에 생각하는 척 나서는 거." 수혁이나 해건이가 한 말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하아... 나란 놈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 거냐. 나도 긴가민가하던 것을 우습게 보던 남들이 더 정확히 알고 있다는 건. 한심할 지경이다. "....너한테도 내가 잘못을 많이 한 모양이네." "우습게 보지마. 매일 술이나 퍼마시고 흔들고 다닌다고 타고난 머리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구. 조금 썩기는 했겠지만 너처럼 할랑한 날라리를 몰라서야 날 텄지, 날 텄어." 픽, 웃으며 신호를 받아 잠깐 멈춰 섰다. 핸드폰을 꺼낸 희연이가 번호를 꾹꾹 누른다. 잠시 후 곧 상대가 받았는지 다시 코 메인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한다. "유강이니? 으응. 나 희연이. 지금 전화 받을 수 있어?" 별 걱정을 다하네. 받을 수 있으니 통화 연결된 거 아냐. "아니이~ 오늘 혹시 나올 건가 해서. 으응, 기다릴까?" 오오... 어제 오늘 신기한 거 많이 보네. 연해건이 나도 미안- 하질 않나, 김희연이 기다릴까- 하질 않나. 심장에 해롭다. 너무 놀라서 벌렁거려. "그래? 그럼 나 지금 가는 길이거든?" 그러면서 송화기 부분을 막고 거칠게 묻는다. "야, 루카스까지 몇 분이나 걸려?" 너무하네. 그 전화 상대는. 그래 속궁합이 아주 좋으신가 보지? "40분." "아이씽. 왜 이렇게 멀리 온 거야? 유강이 지금 10분이면 올 수 있다고 한단 말야." "좀 기다리라고 하면 되잖아. 너 특기 아냐?" "얘가 너야? 애들 붙으면 끝장이란 말야~~ 좀 밟아 봐!" "그럼 20분." "이씨... 너 처음부터 20분 걸릴 거 40분이라 그런 거짓!" "어이, 다 들리겠다?" 매섭게도 나를 째려보고는 다시 전화기 너머의 상대에게로 주의를 집중한다. "20분쯤 걸린대. 들어가지 말고 있잖아, 그냥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안 돼? ...아니, 그런 건 아니구 그냥 샘나서. 너, 너무 멋있단 말야아~" 희연이가 딱 잘라 멋있다고 말하는 남자는 과연 어떤 남자일까. 어느 만큼 멋있으면 눈이 이마 꼭대기에 달린 희연이 입에서 너무 멋있다란 말이 나오는 걸까.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응~! 그럼 앞에서 기다리는 거다? 응~ 알겠어. 그럼 20분 후에 만나아~ 응. 쪼~옥. 사랑해~" 건너 듣는 사람이 심히 괴로운 이 대사를 직접 듣는 사람의 기분이 궁금하다. "너, 너무 오버야. 뭐야, 그게." 빈정거리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쓰고 말한다. "빨리 밟기나 밟아." "예, 예." 군말없이 속도를 120까지 단숨에 올리며 물었다. "뭐하는 놈이야?" 끝까지 내렸던 창문을 올리고 바람에 날렸던 머리칼을 백미러를 휙 자기 쪽으로 돌려 한 가닥 한 가닥 정성껏 매만지며 희연이가 대답했다. "유강이." "그 놈은 성도 없냐? 학생이야?" "어머, 징그럽게. 답지 않게 질투하니?" 운전자를 위한 백미러라는 생각은 전혀 없는지 이번에는 핸드백을 열고 파우더를 꺼내 얼굴을 두들기고 붉은 빛 립스틱으로 입술을 깔끔하게 정리해 그린다. 움직이는 차안에서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완벽하게 치장을 끝낸 희연이가 마지막으로 향수를 살짝 머리칼과 손목에 뿌려 귀 뒤를 문질렀다. "몰라. 뭐하는 앤지. 그냥 유강이라는 것밖엔." "김희연... 그거 되게 수상하게 들린다?" "나쁜 애 아냐. 빌붙지도 않고 그냥 잘해 줘. 상냥하고." "정말로... 그게 다냐?" "응. 같이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져. 말수도 적어서 조용한데 가끔 슬쩍 웃을 때가 정말 예술이잖아. 너무 너무 귀엽고 멋져. 날 사랑하지 못해서 슬퍼요- 라는 눈빛, 알아? 하지만 당신은 소중해요-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 "...전혀 모르겠는데." "하긴. 너처럼 무신경한 애가 알 리가 없지." 그렇게 나를 비웃은 희연이가 창 밖으로 목을 쭉 빼고 소리쳤다. "여기 세워 줘." "응? 여기서 내리려고?" "유강이 만나는데 딴 남자 차에서 내릴 만큼 난 무신경한 여자가 아냐." 열녀 났네, 열녀 났어- 라고 크게 말해주지 못하는 게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차를 세우자 희연이가 또각또각 경쾌하게 하이힐 굽을 울리며 뛰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목을 늘여 전방을 살폈다. 대체 누구길래. 그러나 남자는 가로등 바로 아래에서 등을 지고 서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고 내가 본 것은 헐렁한 청바지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워크맨을 꽂은 뒷모습이었다. 단발 정도로 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고 있어 둥그런 이어폰이 보인다. 약간 붉은 빛이 도는 셔츠로 감싸인 등이 조금 구부정하게 앞으로 숙여져 있었다. 으음... 어쩐지 채유라와 비슷했다. 머리카락 길이가 비슷해서 그런가? 희연이가 달려가 남자의 앞에 멈추는 것을 보며 다시 차를 출발시키려는데 올려다보며 뭐라 말하는 희연이를 향해 남자가 고개를 젖혔고 그 순간 언뜻 얼굴이 드러났다. 그건, 채유라였다. 채유라가 어째서...? 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채유라는 허리를 숙이고 희연이의 뺨에 살짝 입술을 댔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루카스로 들어가지 않고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갔다. 어째서.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연락처, 없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렇다면 희연이는 어디로 전화를 건 거지? 유강이라는 이름은 또 뭐야. 유라와 비슷하긴 하지만. 멍하니 비슷한 이름이긴 하다... 라는 생각을 하다 머리를 저었다. 비슷한 이름인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게 말한 채유라라는 이름이 거짓인 걸까, 아니면 유강이라는 것이 거짓일까. 유강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생활이 있는 걸까. 술집에서 일할 때의 이름? 하지만 아무리 해도 하필 희연이라는 것은 이상하다.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희연이라면 여기저기 술집을 많이 다녔을 테니까 어쩌다 만났을 수도 있다. 그러다 맘에 들어 어찌 어찌 하다 보니 계속 연락을 하는 사이가 됐을 수도 있다. 또 채유라도 말하지 않았던가. 옷만 해도 여자가 사준 옷이라고. 희연이도 그렇게 알게 된 여자일 지 모른다. 이름 뿐이라 해도 희연이가 내 여자친구라는 것을 채유라는 전혀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이건 어쩌다 겹친 지나친 우연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필 내가 목격했다는 것만 아니면 유강이라는 남자를 희연이가 만나고 있다고 해도 나는 아마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그 유강이라는 남자가 채유라와 동일인이라는 것에 나는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당황하고 있었다. 채유라가 희연이를 만난다는 것에. 하지만 뭔가가... 뭔가를... 뺏기는 기분이라니. 해건이와 수혁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유라인데. 그런 채유라를 희연이가 만나고 있다.... 혼자만의 소중한 장난감이 아니었다. 아... 하긴, 사람을 향해 장난감이라 생각하는 자체가 틀린 건가... "이런. 미안하게 됐는걸. 방금, 남자친구 아니었어?"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말하는 유강, 아니 유라에게 희연은 빙긋이 미소지었다. "내가 연락했잖아? 난 유강이 만나줘서 기쁜 걸? 저 사람은 어디까지나 그냥 친구일 뿐이니까." "그건, 지금 희연이에게 필요한 것은 나란 뜻이야?" "응.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유강이야." "고마워. 너무 기뻐." 그리고 유라는 고개를 숙여 희연의 입술에 키스했다. 희연이 살며시 눈을 감는 것이 보였다. 입술을 뗀 유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재준의 폰티악은 그 곳에 멈추어 있었다. "재준아!" 무거운 것이 털썩- 침대 한켠을 퉁겨 오른다. "으음..." "한재준. 지금 벌써 오후 2시야. 안 일어날 거냐?" 어렴풋이 눈을 뜬 시야에 해건의 모습이 보였다. 팔을 잡고 일으킨 해건이 등을 툭툭 두들긴다. "배고프지 않어?" "....일어나자마자 배가 고플 리가 있냐." 어쩌다 스페어키를 뺏긴 걸까. 새삼 강하지 못한 자신이 조금 원망스럽다. 해건이가 맞은 편에 앉아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왜? 자다 깬 거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머리를 가로 저은 해건이 쿡 웃었다. "머리가 삐쳤어." 제법 길어 눈가를 가릴 정도의 길이인 앞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어 넘긴 다음 물었다. "수혁이는 안 왔어?" "내가 그 놈이랑 무슨 커플이냐. 매일 같이 다니게." "실제로 그랬으면서 뭘." "칫." 몸을 일으키자 해건이 신경질을 부린다. "뭐야, 넌. 옷 좀 입고 자. 한여름도 아니고." "어때서 그래. 누가 본다고. 그리고 나 팬티는 입었다? 너야말로 벗은 거 한두번 보는 것도 아니면서 뭘 그러냐?" 해건이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고는 칫칫거린다. "잘 빠진 몸매도 아니면서 뭐야." 욕실로 향하며 방문을 열기전 해건의 머리를 툭 쳤다. "그래도 홀쪽 마른 너보단 맘에 든다, 응?" "비겁하게! 너는 안 말랐는 줄 아냐!" "그래도 너보다 10킬로는 더 나갈걸?" 나는 70킬로. 언제나 70을 확실히 넘기는 것이 소박한 바램이지만 단 한번도 70을 넘기지 못했다. 근근히 딱 70에 턱걸이인 것이다. 그러나 해건이는 170이 조금 넘는 키에 언제나 60이 겨우. 그 60이란 것도 반올림이다. 실제로는 늘 58, 59정도밖에 안 나가니까. 욕실로 들어와 차가운 샤워기 아래에 서 물줄기를 맞고 있는데 해건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놀러가지 않을래?" "어디?" "그냥. 나가자." "오늘 학교 갈 생각이었는데. 4시 수업 있거든." "그냥 째버려." "너무 많이 쨌어. 넌 수업 없어?" "...있어." "그럼 학교나 가자." 쏟아지는 물줄기를 뚫고 들려오던 해건이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았다. "연해건? 학교 가기 싫냐?" "싫어." "난 유급은 절대 싫다." "별로 상관없잖아?" "난 상관 있어." "좀생이. 쪼잔하고 소심해." "응. 그래서 기왕 소심하고 쪼잔한 거 확실히 하려고. 그 동안 너무 미적지근했어." 샤워를 마치고 배스가운을 걸치고 나오자 해건이 소파에 무릎을 안고 앉아 나를 본다. "뭐라도 확실히 해 보려구." "....왜?" "왜라니. 그 동안 너무 놀기만 했으니까. 너도 그랬잖아. 나는 노는 것에조차 성의를 다하지 않았다고. 그러니까야." 싱크대로 몸을 돌려 문을 열고 안에서 냄비와 접시를 꺼내고 냉장고로 돌아서 재료를 살피다 물었다. "스파게티 먹을래? 지금 할 건데." 입술을 삐죽이던 해건이가 마지 못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토마토 소스는 싫어. 크림 스파게티 아니면 안 먹을 거야." "그래, 그래. 알았다구." 일단 방에 들어가 바지와 셔츠를 걸치고 나와 재료를 꺼내 늘어놓았다. 스파게티의 면을 꺼내 냄비에 물을 적당히 받아 끓이며 소스를 끓일 작은 냄비와 곁들일 재료들을 준비하는 동안 집요하게 따라붙은 해건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할 일 없으면 TV라도 보지 그래? 그렇게 째리면 쫄아서 다 망치는 수가 있다구." "칫. 핑계 대지마. 없는 솜씨 부리려니 힘든 거면서." "있고 없고간에 그나마 만들 줄 아는 건 나뿐이잖아." "그거야 니가 궁상인 거지." "아, 그랬냐. 그래도 잘만 먹으면서 말이지." "그게 악연이란 거야. 벌써 10년이야. 넌 처음에 나랑 수혁이 사람 취급도 안 했다구. 같이 놀자는 말 먼저 꺼낸 것도 2년이나 지나서였지. 10년지기라는데 꼭 8년이라며 초나 치지. 하여간에 한재준, 잘났다니까." "너무 그러지마. 나 그때 막 상경한 시골촌놈이었잖아. 낯가림이 심했다구." "웃기고 있네. 낯가림? 너, 우리를 비웃고 있었단 말야." "...아냐. 무슨 소리하는 거야?" 거기서 나도 해건이도 입을 다물었지만, 8살에 상경한 서울. 그리고 1년 동안에 변해버린 부모님과 주변 환경. 어렸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만난 수혁이와 해건이. 비웃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에 말했듯이 이제는 모두 똑같아져 버린 유유상종일 뿐이다. 과거는 존재하지만 현재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쪽도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미래는, 과연 어떨까. 스파게티를 완성해 내놓자 건넨 포크를 마다하고 젓가락에 면발을 돌돌 말며 해건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희연이, 사랑해?" "뭐?" "희연이 사랑하냐구." "새삼스레 그런 건 왜 묻고 그래? 매일 같이 붙어 다닌다고 놀리던 건 언제고." "그거야 고딩때 처음 만났을 때 얘기구. 그리고 그거 놀린 게 아니고 욕하던 거였어. 하여간. 희연이 사랑해?" "...사랑하는 거겠지...?" "그래서 그따위로 마구 놀아대도 사귀는 거야? 하긴. 지금 니네들 어디가 사귀는 거겠냐만. 그럼 사랑하니까 놀아나도 봐줄 수 있다는 거야? 사랑해서?" "연주나 경은이도 마찬가지잖아. 왜 희연이 갖고 그러냐." "그거 편드는 거야? 희연이 사랑해서?" "...사랑하고 싶다고 할까, 그럼?" "왜? 상관없잖아. 그런 애 어떻게 되든. 너 아니어도 전혀 상관없잖아." "내 쪽도 상관없긴 마찬가지니까. 너나 수혁이도 그렇잖아." "난 연주 사랑 안 해. 난 연주랑 아무런 접점도 없다구.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본 게 1년쯤 넘었나? 수혁이도 그래. 수혁이도 경은이 사랑 안 해. 우리는 거짓말 같은 거 하지 않아. 하지만 넌 속이고 있잖아." "...그럼 어떡하면 되는 건데." "...몰라." 픽 소리를 내며 포크를 내리고 물잔을 들었다. "나중 일이야, 뭐든.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구. 지금은... 아무래도 좋아..." 그것은 거짓말. 그러나 거짓말이 된 것이 채유라와 만나는 희연이기 때문인 것은 비밀. ...말할 수 없다. 도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희연이가 만나는 것이 누구이든 나와는 상관없었는데. 그게 채유라라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그 채유라이기 때문에- 라는 것으로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나. 내 주위의 무엇과도 접점이 존재하지 않는 채유라라서 우월감을 느꼈기 때문에? ...그런 건가? "누군가는 피해를 보고 있어, 분명히 말해서." "응? 뭐라고?" 내 생각에 잠겨 있느라 제대로 듣지 못해 되물었다. "니가 잘못한 거야. 니가 멍청하게 구니까 누군가 피해를 입고 있다구." 상처가 아니다. 피해?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몰아세우는 말, 피해라는 것에 대해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소리야?" "누가 널 좋아하고 있는데 넌 희연이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방패 삼아 물러서 있잖아. 그러니까 누군가는 다가갈 수조차 없는 거야. 다가가면 달라질 자신이 있는데. 그러니까 피해입고 있어. 그건 어리버리 처신하는 니 잘못이야." "어이, 어이. 연해건.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희연이가 있건 없건 상관없잖아. 누구든지 날 좋아한다면 고맙기는 해. 그래도 내가 좋아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다 내가 좋아해 줄 이유는 더욱 없는 거구. 그런데 그게 내 탓이라니. 우습지도 않다." 내 그 말에 해건이는 입술을 꼭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거나 먹어." 포크를 일부러 바쁜 척 놀리자 맞은 편에서 해건이가 젓가락을 탁 놓는다. "안 먹냐?" "....나도 포크 줘." 아까 포크 줄 때는 젓가락 달라더니. 하여간에. 말없이 포크를 건네자 그걸 받아들고 한 줄을 겨우 말아서는 든 채로 나를 빤히 본다. "왜 그래? 또." "됐어. 너처럼 냉정한 놈을 좋아하는 게 불쌍하다, 불쌍해." "그럼 좋아하지 말라 그래." 포크를 탁 내던진다. 던져진 포크가 내가 앉은 의자 옆에 챙-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게 맘대로 되면! 그럴 수가 없으니까! 누군 좋아하고 싶어서 좋아하는 줄 알아?! 그냥 정신을 차리니까 이미 좋아하게 된 걸 어쩌란 말야!" "야야, 진정해. 니가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잘 아는 애였어?" "....몰라! 알아서 뭘 어쩔 건데? 좋아해도 소용없다며?" 다시 포크를 내리고 해건이의 얼굴을 보았다. 스파게티 한 접시 먹기 참 힘들다. "한 일도 없이 나쁜 놈 되는 건 취미에도 없고. 누군지 몰라도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직접 하라 그래. 왜 그걸 니가 중간에서 전달한답시고 화를 내는 거냐? 내가 좋아해줄래도 얼굴도 모르는 상대여서야 말이 안 되잖아. 안 그러냐?" 침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의 전환도 할 겸 가볍게 물었다. "근데 누구야? 이쁘냐? 니가 잘 아는 애야? 그럼 나도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는데 그래?" "...이뻐. 다 이쁘다 그러니까." "흐응. 그래? 니가 보기엔 어때?" "...얼굴만은 멋지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성격은 영 아니다는 거야?" "제멋대로 고집불통 떼쟁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어쩐지... 너랑 비슷하다?" "...맞아. 나 같아." 그러고는 똑바로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본다. "다시 말해 봐. 그러면 좋아할 수 있어?" 뭐라고 말해야하는 거지? 해건이 같은 애라면, 나는 아마도 개목걸이 같은 것을 차지 않을까. 게으른 나는 늘 들들 볶일 지도 몰라. ...조금 무리가 따른다. "글세, 잘 모르겠는데?" 엉성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벌떡 일어난다. "안 먹냐?" "됐어! 그래, 넌 그렇게 잘나서 마구 튕겨! 그래, 그러구 살라구." "야야, 그게 무슨 상관이냐?" 해건이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선 채로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한 마디씩 천천히 말했다. "넌 아무도 안 좋아하지? 아무도 좋아해 본 적 없지? 그래서 사람 좋아하는 거 우습지? 그게 어떤 감정인지도 전혀 모르겠지? 계속 그렇게 살아봐. 나중에 니가 누굴 좋아하게 되면, 벌받을 거야. 틀림없이 너 상처 입을 거야. 그렇게 우습게 보다... 벌받을 거라구!"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한 해건이가 달려나갔다. 한 순간 멍해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겨우 한 마디 했다. "연해건... 그거 너무 비약이 심한 거... 아냐?" 하지만 그 말을 들을 해건이의 모습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4시 수업을 마친 오후 5시 40분 강의실을 나섰다. 같은 학교지만 학과는 다른 수혁이가 서 있었다. "수업 마쳤냐?" 가볍게 말을 걸자 고개를 젓는다. "아니, 오늘은 공강." "어, 그랬냐? 근데 학교는 왜?" "학생이 학교를 올 수도 있지." "니가 말하니까 좀 이상하다?" 웃으면서 나란히 건물을 빠져 나왔다. "나 오늘 차 안 가져왔다." "집으로 갈 거냐?" "아니."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며 수혁이가 물었다. "저녁이나 먹을까?" "벌써? 6시도 안 됐어." "그전에 그럼 한잔하든지." "무슨 할 얘기 있냐?" "얘기는 무슨. 언제는 뭐 할 말 있어서 이러고 다녔냐?" "해건이는?" "오늘 한번도 못 봤는데?" "그래...?" 심하게 삐진 것 같기는 한데, 수혁이한테도 안 갔으면 어딜 간 거지? 수혁이한테 가서 한재준은 바보천치에 축구쪼다라고 열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던 거냐?" "아니... 아까 낮에 왔었는데 엄청나게 성질부리다 갔거든. 그래서 너한테 간 줄 알았지." "내가 해건이 보모냐. 울면 달래주게." 투덜거리는 수혁이지만 그건 사실이니까. "그럼 아니냐?" "...보모 말고 더 근사한 표현이 없을래나." "유모?" "야, 핸들 확 꺾어버린다?" "그러지 말고 집에 가자, 그냥." "니가 밥해주려고?" "그래도 되고." 수혁이 쿡 웃었다. "왜?" "그러는 너는 파출부 같아서." "...파출부가 뭐냐, 파출부가." "가정부 할래, 그럼?" "됐어." 차로 30분 거리인 빌라를 가기 전에 중간에 길을 돌려 백화점으로 향했다. 기왕 파출부 소리들은 거 확실히 해주기로 맘먹었다. 이것저것 바리바리 사들고 돌아오는 길 내내 수혁이가 비웃었다. "대체 피자빵 가루가 왜 필요한 거냐?" "만들어 먹으려고지, 당연한 걸 왜 물어?" 앞쪽으로 빌라가 보이기 시작했고 한 동이 전부인 빌라를 둘러싸고 있는 담벼락 중 유일한 출입구인 곳에 출입번호를 찍으려고 차를 옆으로 세우는데 누군가 다가온다. "안녕." 채유라...였다. "...." 바라만 보자 이내 수혁이에게도 인사를 한다. "안녕? 혹시 나 기억나? 그때, 그때, 나이트에서 봤었는데. 음... 기억 안 나면 곤란한데. 나 이미 인사해버렸잖아. 그치?" 나룰 보며 그치? 하며 동의를 구하는 채유라를 그냥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 새낀 뭐야?" 화가 난 음성으로 묻는 수혁이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는 녀석." 인상을 쓰는 수혁이를 보고도 채유라는 여전히 생글거리고 있다. 여기는 어떻게 안 거지...? "바빠?" "아니." 뭐... 채유라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으니까. 전화가 아니라 내 집 앞에서 기다린다는 상황에 대해서는 정말로 무방비했지만. 어쨌든 만났으니 물을 게 있었다. 좀스럽다는 말을 들어도 할 수 없다. 나는 채유라가 어째서 희연이를 만나고 있었는지가 너무 궁금했다. "수혁아, 미안한데 콜택시 불러줄 테니까. 오늘은 이만 가라." "야, 한재준...!" 핸드폰을 꺼내 콜택시의 번호를 누르는데 채유라가 말했다. "좀만 더 걸으면 지하철 있는데." 수혁이가 사납게 노려보지만 채유라는 별반 반응이 없다. "걷는 거 싫어하나 보다." 콜택시를 부른 후 수혁이를 향해 다시 말했다. "미안하다. 이쪽이 사정이 좀 급해서 그래. 진짜 미안하다." 수혁이는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리더니 걸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다 작게 한숨을 쉬며 채유라를 향해 말했다. "타라." "응." 채유라가 올라탄 후 빌라 안으로 들어와 지하주차장에 차를 넣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옆에 선 채유라는 그저 싱긋 웃고 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심장의 한 구석이 쿵- 소리를 냈다. 떨림...인가? 아니면... 불안? 어느 쪽이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채유라는 여전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온 채유라는 넓은 거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썰렁한 곳이네." 있는 건 술병이 세워진 장식장 하나와 테이블, 1인용의 소파 하나, 3인용의 길다란 소파 하나. 그리고 맞은 편의 텔레비전과 오디오, 비디오가 얹힌 낮은 장식장 하나. 거실에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그리고 침실에 비디오와 텔레비전이 하나씩 더 있다. "집은 되게 좋다. 이런 곳에서 혼자 사는 거야?" 대답하지 않고 쳐다만 보고 있자 고개를 갸웃하다 조그맣게 미소를 짓는다. "그래도 쓸쓸할 것 같아.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혼자서 이런 넓은 집에서 살면." "...여긴 어떻게 알았어?" 그러나 채유라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소파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킨다. "저기- 나, 앉아도 돼?" 고개만 끄덕여 허락하자 곧바로 앉아서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목마른데." 마치 어린아이가 칭얼거리듯 그렇게 말하는 채유라에게 정수기의 물을 받아 건넸다. "에에. 물 말고 주스 같은 게 더 좋은데." "주스는 없어. 과일은 있으니까 갈아 마시든지." "음-, 그냥 물 마실래." 건넨 물 한잔을 단숨에 비운 채유라가 잔을 테이블 위로 내린 후 빙긋 웃었다.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다아~ " 태평하게 말하는 채유라를 보다 맞은 편에 앉았다. 똑바로 얼굴을 마주보지만 채유라는 여전히 빙긋빙긋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여긴, 어떻게 안 거야?" "어쩌다보니- 라고 말해도 안 믿을 거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키득키득 웃는다. "이야, 그런 눈, 굉장하다. 나 지금 의심받고 있는 거네." 희연이가 가르쳐 줬을까. 채유라가 자리에서 불쑥 일어섰고 조금 움찔하는 나를 보더니 픽 웃는다. "물 좀 더 마셔도 돼?"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자 정수기 앞으로 걸어간 채유라는 물 두 잔을 받아 연이어 마셨다. "음... 이건 그러니까 불법적인 일이라 좀 말하기가 그런데... 듣고 나서 신고 같은 거 하지 않는다고 약속해줄 수 있어? 약속하면 말할 테니까." 불법적인 일...? 조금 굳었을 얼굴로 그저 바라만 보자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는다.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고 맞은 편의 채유라를 바라보았다. "약속해. 그러면 말할게." 정의로운 인간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만 당장 대답하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심각해진 나를 보며 채유라가 풋-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것까진 없잖아. 그냥 응이라고 해도 될텐데. 정말로 심각한 일이라면 내가 이런 말따위 하지도 않는단 말야." 놀림 받았다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찡그려진다. 미간을 구기고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뭔지 말이나 해. 신고할 지 말지는 듣고 나서 결정할 테니까." 하하-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린 채유라가 눈가를 비져 나온 눈물을 닦아가며 입을 열었다. "네 핸드폰 01*잖아. 만나던 여자 중에 거기서 일하는 여자가 있어서 조금 부탁을 했어. 그런데 주소지는 여기가 아니더라구. 찾아갔더니 왠 아줌마가 넌 여기 안 산다잖아? 얼마나 애처롭게 빌었다구. 그랬더니 여길 가르쳐주길래 찾아온 거야." 임씨 아줌마구나. 입싼 건 하나도 안 변했다. 내가 어차피 부모와는 한 달에 한번도 제대로 얼굴 마주치기 힘든 집에서 굳이 나와 사는 것의 80%는 그 입싼 아줌마 때문인 것이다. "그럼 불법적인 일이란 건...?" "주소 가르쳐준 거 말야. 지금 핸드폰으로 114전화해서 물어봐. 주소 안 가르쳐줄 걸? 음... 그리고 그 아줌마에게 네가 벌써 한달 째 학교를 나오지 않고 있어서 아주 긴급하다고 말한 거. 엄밀히 따지면 그것도 공갈협박... 뭐, 그런 종류니까." 조금 어이가 없어진 나를 본 채유라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말하기 시작했다. "아줌마!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라구요! 해건이도 수혁이도 연락이 되질 않는 데다 재준이 차 아시죠? 폰티악말예요, 그걸 어느 녀석이 타고 가더라니까요! 재준이가 그 차를 얼마나 아끼는 지 아시잖아요, 그런 차를 누구에게 빌려줄 리가 없잖아요! 재준이 지금 대체 어디 있는 거죠? 학교는 벌써 한달째 나오지 않는 데다... 지금 재준이는 어디 있냐구요!" 가정부인 임씨 아줌마에게 말했을 대사를 그래도 반복한 채유라가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의 얼굴이 되어서 말했다. "어때, 굉장하지?" "내가 차를 안 빌려줬을 거란 건 어떻게 안 거야?" 말투는 여전히 추궁조였지만 분명히 어조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확실히 있을 법한 얘기였다. 확인하려고만 들면 임씨 아줌마에게 전화라도 걸어서 그런 적 있느냐고 물어보면 된다. 해건이의 이름도, 수혁이의 이름도 나이트에서 들었던 게 맞고 그다지 친하지도 않는 녀석들이 일부러 어울려 다닐 거라고 어거지로 생각하지 않는 이상 친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채유라가 이 곳에 나타난 것에 대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알게 되자 나는, 여유로워진다. "처음에도 그랬고 두 번째도 술 마실 때마다 너 직접 운전했잖아. 어지간히 아끼는 모양이다- 라고 추측을 했었는데. 실제로 그런 거야?" "...맞아. 이 차를 아낀다기보다는 내 차를 다른 녀석이 운전하는 것이 싫다는 것이 정확하지만." "그런데 추측이라고 말하니까 어쩐지 되게 격식 있게 들리지 않아?" 그러면서 웃는 채유라를 보다 픽 웃고 말았다. "이제 의심 안 해? 이제 의심 안 하는 거 맞아?" "...그래. 그보다 너, 보기보다 여자관계가 상당히 화려하다?" 희연이에 대한 것도 얼마간 암시하며 한 말이지만 채유라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휴우- 숨을 내쉰다. "헤헤. 만약 여기서 니가 그래도 의심해- 라고 하면 더 할 말없었는데. 다행이다." 활짝 웃으며 채유라가 두 팔을 공중으로 들어올려 목뒤로 깍지끼었다. "저기... 조금 거짓말은 아니고... 에에 뭐랄까.... 그냥 말하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아니지. 말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다 말하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뒷목을 누르는 채유라의 얼굴은 어딘지 씁쓸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지...? "저기... 나, 있잖아. 술집에서 일한다고 했잖아." "그래." "그 술집이란 데가 말야... 음, 그러니까..." "호스트바 같은 거?" 채유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봤다. "응! 맞아, 그거. 이야... 어떻게 알았어? 어머, 설마... 가본 거야? 에에~ 야하게." "안 가봤어." 눈을 가늘게 뜨고 채유라는 여전히 에에~ 거리고 있었다. "나도 추측한 거라구. 추측. 너처럼 말이지." "헤에. 그랬어? 어? 저거 다 비디오 테이프 아냐?" 채유라에게서 직접 희연이에 대한 것을 듣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희연이가 미남들이 우글대는 호스트바라면 천국일 거야- 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냈고 채유라가 호스트바에서 일한다고 인정했으니 채유라 정도의 얼굴이 셋만 더 있어도 희연이는 귀신 같이 알고 찾아갔을 테지. 그 거침없는 성격에 다시 만나자, 밖에서 만나자- 정도 말하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테고. 어쩌면 나는 채유라가 말하지 않은 것조차 스스로 앞뒤를 맞춰 혼자 납득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적어도 조금도 알지 못한 채 앞도 뒤도 맞출 수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빙글거리던 채유라가 텔레비전 옆에 쌓아둔 테이프를 발견하고 다가간다. "별 거 별 거 다 있네. 어, 유주얼 서스펙트도 있다." 윗부분에 놓인 유주얼 서스펙트를 들고 채유라가 돌아본다. "이거 봐도 돼?" 고개를 끄덕이자 비디오 데크에 테이프를 넣고 TV전원을 켠 채유라가 소파에 와 앉았다. "그때 니 얘기 듣고 한번 봐야지 했었는데 잘 안 봐지더라구. 집에 비디오가 없어서 비디오방엘 가야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서 말야."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자 채유라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영화에 몰입했다. 잠깐 그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정면에서 보면 길다랗게 찢어져 가늘어 보이는 눈매가 옆에서 보니 훨씬 커다래 보였고 콧날은 정면과 마찬가지로 우뚝 솟아 있다. 그리고 정면에서는 언제나 생글거리며 웃고 있는 입술은 옆에서는 단지 일자로 다물린 것으로 보일 뿐이다. 차갑게 여겨지는 옆모습이었다. 정면에서 볼 때는 늘 다정하고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이던 것이 옆이라는 것만으로 이렇게 달라진다는 것에 나는 조금 놀라고 있었다. "왜?"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채유라가 물었다. "아니... 그냥 조금 놀라서." "뭐가?" "앞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달라." "어떻게 다른데?" "음... 차가워 보여." 채유라가 싱긋 웃었다. "하나의 일면만을 가질 수는 없는 거니까. 양쪽이 모두 나야. 하지만 어느 쪽이 좀 더 본성에 가까울런지는 네가 판단할 문제야. 나는 모두 보여주지 않을 거지만 어느 쪽을 받아들이던 너의 선택이지. 네 선택과 판단에 나는 무의미해. 어느 쪽이건 나인 건 사실이니까. 단지 그건 너의 문제일 뿐 내가 어떻게 하고 싶다라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야." 그리고 다시금 가지런한 이빨이 살짝 입술 틈으로 드러날 정도로 호감 가는 미소를 지은 채유라가 고개를 돌려 화면을 응시한다. ...알 수 없어진다. 그렇다면 내 판단과 선택이란 것은 정말로 쓸데없는 짓이 아닌가. 너는 그럴 것이다, 나는 네가 그렇길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길 원치 않는다- 이걸로 끝이 아닌가. 어느 쪽이건 모두 자신의 모습이라곤 하지만 내가 바라는 대로 볼 수 있다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그 사람이 보이는 모습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 그러나 추측이라는 것은,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몇 번이고 바뀔 수 있는 것. ...소용없는 일일뿐이다. 다리를 절던 범인이 천천히 몸을 똑바로 세우고 바로 걸으며 다가온 차에 몸을 싣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났고 전원을 끈 채유라가 가슴 언저리를 쓸어 내리며 심호흡했다. "후아... 이거 간 떨리는 영화였잖아?" "응? 공포물도 아닌데?" "결국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녀석이 범인이잖아? 알아챘을 때는 이미 게임 오버. 이 영화는 속편 안 나오나..." "안 나오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나와봐야 별 볼일 없잖아." "그래도 궁금하잖아. 범인은 나중에 어떻게 됐을까. 행복해졌을까?" "행복해졌겠지. 하고 싶은 대로 했잖아." "어딘가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어서 복수 당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 마지막 장면이 가장 맘에 드니까. 여기서 끝나는 게 가장 좋아." 채유라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건 네가 그저 관객일 뿐이니까. 그래... 단지 관객일 뿐이니까... 그런 거겠지..." 영화였을 뿐이다. 누가 관객이 아닐 수 있단 말인가. 속편을 바라는 채유라 또한, 관객이 아닌가. 그리고 몸 저 안의 깊숙한 곳으로 억눌러졌던 이유 모를 불안감이 다시금 피부 위로 스며 나온다. 대체 채유라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아, 배고프다." 기지개를 쭉 켜며 몸을 일으킨 채유라가 물었다. "부엌, 써도 괜찮아?" "아... 그래." 성큼성큼 걸어 냉장고를 향해 걸어간 채유라가 몇 가지 야채와 햄, 닭고기, 쇠고기, 치즈, 버터를 꺼낸다. "뭐하려고?" "채유라 특제 퓨전 찌개." "퓨전 찌개?" 쿡- 소리내어 웃는다. "그냥 잡탕이야. 그래도, 기대하시라." 옴폭한 냄비를 꺼내 닭고기를 손질해 육수를 끓이고 쇠고기와 햄을 썰어 버터에 볶는다. 치즈는 잘게 찢어 준비해 놓고 야채도 손으로 큼직하게 찢는다. 두서없이 꺼낸 재료들을 능숙하게 손질하며 채유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소파의 등받이에 턱을 대고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냄새 좋지? 이 요리의 가장 큰 특징이 뭐냐면 말이야, 아무거나 마구 집어넣고 마구 뒤섞어버리는 데 있어. 볶았다가 끓였다가 간도 간장에 소금에 설탕에 후추에. 내키는 대로 넣는 거야. 그래도 완성되면 멋진 요리가 되거든. 음... 찌개라기 보다는 일품요리가 되는 건가? 아무튼, 기대하고 있으라구." 다 끓인 육수에 볶은 쇠고기와 햄을 넣고 조금 끓이다 야채를 얹고 그 위에 치즈를 뿌린다. 곧 불을 끄고는 싱크대를 열어 이리저리 뒤적이다 바닥이 깊은 그릇 2개와 수저, 젓가락을 챙긴 채유라가 손짓했다. "자~ 완성! 어서 와. 먹자." 식탁에 앉아 냄비를 들고 와 중앙에 내리고 두리번거린다. "밥 없어?" "없는데." "에이, 아쉽다. 밥 비벼 먹고 싶었는데." 노란 색 치즈가 약간 녹아 야채 위로 퍼져 있고 국물이 건더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육수를 내 너덜해진 닭고기까지 잘게 찢어져 들어 있다. 국자를 들고 그릇에 건더기를 건져 나눠 담고 나자 바닥에 약간 국물이 보였다. 일단, 냄새는 고소한 게 나쁘지 않았다. "자자, 어서 먹어. 사양하지 말고. 어서." 조금 망설이다 숟가락 가득 떠먹어 보았다. 닭육수의 고소한 맛과 아작 파삭한 야채가 함께 씹히는 것이 제법이었다. 이 정체 불명의 퓨전 일품찌개는, 생각 외로 맛있었다. "맛있는데?" "황금의 손이라고 불러 줘.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때려 넣어도 맛있어지는 요술 손이다. 후후후." 장난스럽게 그렇게 말한 채유라가 크게 한 입 떠먹으며 활짝 웃었다. 그 미소를 향해 마주 웃었지만, 아까의 그 불안감은 어딘가에 남은 채였다. 분명히 맛없지는 않다. 아니, 맛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하지만 마구 뒤섞여 조화롭다고는 할 수 없는 이 음식과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채유라라는 녀석은. 공식을 벗어난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묘한 한계. 그 너머에 있는 것은 뭐지...? 식사를 마치자 채유라가 빈 그릇을 개수대로 옮겨놓고 말했다. "이만 가야겠어." "가려고?" "응. 일단은 직장에 가야하거든. 내가 인기인이긴 하지만 아니, 인기인이니까 팬관리 차원에서." 활짝 웃으며 가볍게 말하고 돌아서던 채유라가 불쑥 뒤돌아보았다. "설거지가 니가 하는 거다? 원래 만든 사람이 설거지하는 거 아니래." "그런 게 어딨어. 같이 먹었으면 같이 하는 거지." "노노노." 왼손의 검지를 세워 살래살래 저은 채유라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음식맛이 떨어진다구. 그럼, 또 보자." 가볍게 인사까지 이어 말한 채유라가 곧 현관 너머로 사라졌고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이미 해는 저문 지 오래였다. 거실의 길다란 프랑스식 창으로 비춰드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퍼뜩 채유라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건 네가 그저 관객일 뿐이니까. 그래... 단지 관객일 뿐이니까... 그런 거겠지...] ...관객이 아니라면? 그때도 그것이 맘에 드는 결말이었을까. 잡아서 복수하고 싶지 않았을까. 언제 복수하기 위해 나타날지도 누군가가 두렵지 않을까. 채유라는 내가 관객이길 바라는 걸까...? 채유라는 나의 어떤 모습을 향해 무엇이길 바라는 걸까. ....관객일... 뿐인가. 수업을 마치고 오전 11시의 나른한 햇살에 복도를 걸으며 기지개를 쭉 켰다. 아침 1교시의 수업을 온 것은 처음 출석을 부른 이후로 2번째였다. 어떤 녀석에게 왜 지난 시간에 결석했느냐- 라고 물은 교수는 연이어 석달을 결석한 내게는 아무 말도 않을 뿐더러, 아예 눈도 마주치지 않아서 조금 서운했다. 이래저래 힘든 학교 생활이 아닐 수 없다. 갑자기 등허리를 걷어 채였다. 느른하게 하품을 하며 걷다 등허리를 걷어 채여 거의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것을 간신히 바로 잡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야!" 뿌루퉁하게 입술을 툭 내민 해건이가 서 있었다. "정신 차려. 젊은애가 어디다 정신을 놓고 걷고 있는 거야." "...젊은애고 늙은 애고 갑자기 그렇게 걷어차이면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하냐." "칫. 멀쩡하니까 됐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만." 폴로 반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아래를 보며 스니커즈의 앞축으로 바닥을 툭툭 긁는 해건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때, 수혁이한테도 안 가고 어딜 갔던 걸까. 벌받을 거라며 뛰쳐나간 후 조금 심했나 싶기도 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일 따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니까. 그래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의 감정에 대해서 지나치게 냉정했던 것도 같아서. 하지만 입밖에 낼 수 없는 말이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란 참 힘든 일이겠구나. 내가 심했어. 날 좋아한다는 그 아이를 좋게 생각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내가 아닌 타인을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멋진 감정이야. 괜찮으면 그 아이, 한번 만나볼 수 있을까? ...5개의 문장 중 진심인 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단지, 그런 '척' 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나에게 있어 외계인과의 조우라고 해도 좋았다. 믿을 수 없고,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도 제대로 좋아하지 못하는데. 불만스럽고 엉망진창인 내 현실에서조차 허우적댈 뿐인데. 그런 나는 타인을 향할 감정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럴지도 몰라- 그렇게 납득하려 할뿐이다. 그것에마저 노력은 없다.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도 해는 뜨고 달도 뜨고, 나는 매일을 보낸다. 누구도 날 좋아하지 않아도 나는 잠들 수 있고 밥 먹을 수 있다. 어차피 가져보지 못한 감정의 유희다. 알지 못하니, 없어도 상관없다. 적어도 거짓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상대를 속이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아닌 나 자신을 속이는 것에 대한 어려움과 불편함. 그래서 나는 해건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다보고 싶어." "바다? 피서철은 아직인데?" 정강이를 또 걷어 채였다. "아프잖아." "미안하다고 입이 찢어져도 말 못하는 놈한테 명령하는 거야. 바다보고 싶다구. 지금 당장." 입을 다물고 바라만 보자 흥- 하고 비웃는다. "어차피 정말은 미안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겠지. 왜 사과를 해야하는지도 전혀 모르겠지. 하지만..." 말을 맺지 않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해건이가 말을 멈추던 때처럼 불쑥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네게 사과 받고 싶었어. 아니, 사과가 아니라 변명이라도, 거짓말이라도. 그냥... 니가 나를 우습게 본 것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설명을 듣고 싶은 거야. 그게 아니면, 이상하잖아...? 10년이든 8년이든... 그렇게 오랜 동안 함께였는데... 조금도 너는 나에 대해 몰랐다니. 나는 이렇게 잘 알고 있는데 너는 조금도 모르고 있다니. 알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는 게 너무 화가 나! 화나고 미치게 억울해! 그래서... 그래서... 슬퍼." 슬프다고 말하는 해건이는 바싹 마른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 만큼 더 슬프게 느껴졌다. 혹은 슬프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미 슬픔의 본질 같은 것이 파괴된 듯한 안타까운 후회도 느껴진다. 그리고 해건이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어느 새 고인 눈물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아주 느려서 계속 보고 있지 않았다면 눈물이 흘렀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정도였다. 방울방울 가느다란 빗물처럼 끊임없이 흘러 해건이의 발아래 조그만 웅덩이를 만든 눈물은 해건이가 고개를 들고 눈물을 멈춤과 함께 천천히 말라갔다. 한참 동안 침묵이 해건이와 나 사이에 장벽을 만든다. 주위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소리도, 간혹 들리던 자동차의 경적 소리도, 흔들리는 공기의 소리도.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완전한 침묵의 공간이 해건이와 나 사이에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그 침묵을 만들지 못했으며, 나는 그 침묵을 깰 수 없으며, 나는 그 침묵에 동조도 할 수 없다는 기묘한 자각이 이어졌다. 나로 인해 슬퍼하는 것을 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그저 그 공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전부이다. 오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그것이 사실일 텐데. 그런데도 나는 무엇 하나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우울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도울 수 없는 것에 안타까워하는 내가 있는 반면에, 그저 무력하고 그것에 죄책감마저 느끼지 못하는 내가 또한 있다. 어느 쪽도 나이다. 해건이는 나의 어떤 모습을 바라는가. 하지만 안다 해도 내가 그 모습 하나만 보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일 뿐이다. 그랬다. 해건이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내가 보여줄 책임 같은 것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친구니까, 친구라고 생각해 왔으니까-, 조금 씁쓸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내가 바라지 않는 이상, 어떤 타인이 내게 무엇을 원하든 내가 그것을 따라줄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할 수 있었다. 고개를 흔들며 알 수 없이 흐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해건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바다보고 싶다며? 가자." 해건이가 울 것 같은 얼굴을 억지로 참아 일그러진 입매로 웃었다. "거 봐... 결국, 결국 들어줄 거면서...." "그래, 그래. 뚝 그치고." 건물을 나서 차를 세워둔 곳까지 오는 동안 해건이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괜히 튕겼다느니 울렸다느니 뭐라 한 마디 할 법도 한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해건이는 입술을 앙다문채 앞만 보고 있었다. 그것은 무언가에 짓눌려지는 것만 같은 압박감과 절실함이어서 나는 서둘러 조수석의 문을 열어준 후 운전석으로 돌아와 앉았다. 차안에 들어와 앉아서도 여전히 앞만 보는 해건이에게 가볍게 물으려 애쓰며 말했다. "안전벨트 매. 밟을 거라구." 그러나 듣지 못한 듯 움직이지 않는 해건이를 보다 팔을 뻗어 안전벨트를 매주려는데 해건이가 움찔 몸을 웅크렸다. "...야. 왜 그래? 벨트 매라니까?" "아... 내가 맬 거야!" 이내 아무렇지 않게 소리치는 해건이를 향해 핏 웃었다. "왜 소리치고 그래. 그냥 매면 되지." "내가 언제 소리쳤다고 그래? 맨다잖아!" "알았어, 알았다구." 안전벨트를 매고 차를 출발시키자 해건이가 시디플레이어에 든 시디를 이리저리 돌리다 투덜댔다. "가요 없어, 가요?" "3번 시디 가요잖아." "이런 청승맞은 거 말고 쌈박하게 신나는 거 없냐구." "없어. 운전하는 데 그런 거 들으면 정신 사나워." "칫. 노친네. 영감탱이. 이런 거나 듣고 사니까 니가 하는 짓도 50대인 거야, 알어?" "그냥 이러고 살게 두세요, 네?" 결국 해건이는 락 발라드가 든 2번 시디로 결정을 내렸는지 Pretenders의 I'll stand by you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아... 가사 좋은데..." 백미러를 통해 흘끔 본 해건이는 좌석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은 채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고 있었다. 뭐, 나는 한번에 이 영어가사를 들으며 한국어로 바꿔들을 재주가 없는 탓에 가사가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1년에 3개월, 벌써 5년째 방학마다 미국에 가서 어학연수를 받아온 연해건군의 말이니 믿어야겠지. And when... When the night falls on you, baby You're feeling all alone You won't be on your own I'll stand by you I'll stand by you Won't let nobody hurt you ...정말 좋은 가사일지도 모르겠다.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해건이는 차에서 내려 모래사장으로 뛰어갔다. 바다와 모래사장이 맞물리는 곳에서 발을 멈춘 해건이가 뒤를 보며 나에게 손짓했다. 6월초의 더구나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아직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옆에 서자 싱글 미소짓는다. "물이 되게 더럽다, 그치?" "하루 이틀이냐."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나를 말없이 올려다보던 해건이가 후웁- 크게 심호흡했다. "약속 하나 해." "약속? 뭐."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갖는다고." "그게 어디 쉽냐. 몰라서 그래? 나 밴댕이 소갈딱지잖아. 그냥 사과도 못하고 말이지." "그래도 지금은 적어도 눈앞에 바다가 보이잖아. 그러니까 조금 넓은 마음으로 듣겠다고 약속하란 말야." "할 말 있어?" "응. 약속하면 말할게." 어쩐지 채유라가 하던 것과 비슷하다. 그때 채유라도 불법적인 일이라며 신고하지 않겠다고 하면 말하겠다고 했던가. 하지만 내용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지. 해건이도 그 비슷하려나. ...그러고 보니 해건이와 채유라가 조금 비슷한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찝어 어디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때의 모습이라든가 생글거리고 웃는 얼굴이라든가. "알았어. 약속하마. 지금부터 니가 하는 말을 이 넓은 바다를 보며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듣겠습니다. 됐냐?" 해건이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다짐했다. "내가 뭐라든 니가 피하기 없기야. 농담 아니고 그랬다간 나 혀 깨물고 콱 죽어버린 다음에 유서에 모든 건 한재준의 탓이다, 한재준이 날 죽게 만들었다라고 써서 경찰서 보내버릴 거야. 온갖 사회단체에도 마구 보내서 암중 사회매장 시켜 버릴 거야. 알겠어?" "어이구, 거창하기도 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난리냐?" 어디까지나 가볍게 물어본 말이었건만 해건이가 내뱉은 말은 핵탄두 5만개를 연이어 터트린 것보다 더 나를 놀래켰다. 핵탄두 5만개에다 서비스로 우주선에 실어 우주로 날려버렸다고 하면 될까. "좋아해." "...갑자기 귀가 아프네?" 귀를 손가락으로 긁는데 팔을 뻗어 그 손을 내리게 하고 해건이가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좋아해. 얼굴도 모르는 애는 조금도 재고의 가치가 없다고 니가 그랬으니까. 넌 나 같은 여자애는 별로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남자니까. 다시 생각해 봐" "무...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하, 하하..." 어설프게 웃자 인상을 찡그리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헐렁한 바지의 천 위로 움켜쥔 주먹의 윤곽이 도드라진다. 지금, 해건이도... 심각하다...? 그건... 지금 이게 해건이의... 진...진...진...심이라는 거냐....?!! 얼굴이 나도 모르게 굳었다. 그런 나를 보는 해건이의 얼굴은 더 참담하게 굳어 있었다. "오래됐어. 아주 오래 되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러니까 계속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어. 오래 되는 만큼... 더욱 많이 쌓이는 거, 알겠어?" 연해건을 처음 만난 것은 10살 나던 해. 그리고 지금 나는 20살. 안 지가 10년. 오래라니, 오래라니. 언제부터였단 말인가. ...말도 안 돼. "다르게 생각하라는 건... 나하고 뭘 어쩌라는 것과는 달라. 그냥... 친구라도 상관없어. 한재준, 지금 듣고 있어?" 아아... 듣고 있지. 그러니 다르게 생각하라 어쩌라하는 게 들리고 있는 거겠지. "그냥... 친구라도..... 난 니가 있는 게 좋아. 단지 나보다 더 친한 친구 같은 거 만들면 역시 유서는 감행할 거야." 아아... 이거, 나 지금 협박받고 있는 건가? 그런 건가?!! "나는 분명히 말했으니까. 그러니까 만약 니가 알아주면 잘해보는 거고, 아니면... 여자는 참을게. 하지만 남자는 아무도 나보다 더 친하면 안 돼. 약속할 수 있지? 지금 니 마음은 바다만큼 넓을 거잖아." 달라, 다르다구! 뭐라 하고 말하고 싶은 것 같기는 한데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네게 전하고 싶었으니까. 정말은.... 좋아한다고 소리치고 싶었으니까..." "그럼 말하지 말지 그랬어." 해건이의 고백에 이은 내 한 마디라는 것은 잔인해서 해건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얼굴을 보며... 다르게 말했어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수혁이었다. [어디야? 해건이 같이 있어?] "...으, 응."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아니... 그러니까... 저기... 좀 그런 일이 있었어." [지금 갈 테니까 어디야?] 수혁이에게 위치를 가르쳐준 다음 통화를 끝냈다. 여전히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해건이가 중얼거렸다. 나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아서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그냥... 혼자... 알고 있었어야.... 했던 걸까...." 분명히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심하게 말할 것까지는 없었을 텐데. 틀림없이 해건이는 상처 입었을 테지. 그러면서도 허공이랄지 마음속이랄지 이건 모두 해건이가 자초한 일이야, 내 잘못은 아무 것도 없어, 남자가, 친구라고 믿어온 녀석에게 고백 같은 걸 듣고 달리 할 말이 있을 리 없잖아- 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내가 있다. 친구라고 믿어온... 이라는 말조차 우스워진다. 내가 믿은 친구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내가 과연 진심으로 친구라고 생각했던가, 혹은 해건이에게 내가 정말로 친구였던가. 해건이는 이제 바다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채 아무 말도 없었고 나는 그런 해건이를 바라보며 멍하게 서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쓰잘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뚜렷한 생각은, 이런 것 듣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것이었다. 끼익- 요란하게 울리는 차가 멈춰서는 소리에 뒤돌아보자 수혁이의 검은 색 SM5가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린 수혁이가 멀리서 나와 해건이를 유심히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천천히 나와 해건이가 서 있는 곳까지 걸어온 수혁이 입을 열었다. "이건 또 아주 심각한 분위긴데 그래." "뭐... 그런가." 아무 의미 없는 내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수혁이는 해건이를 쳐다보다 눈썹 윗부분까지 깔끔하게 잘린 앞머리를 길다랗고 보기 좋은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곤 물었다. "연해건, 괜찮냐?" 눈을 돌려 수혁이를 힐끔 본 해건이 다시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하여간에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어제는 미안했다. 집에는 잘 들어갔냐?" "그럼 내가 거기서 미아라도 될까?" "미안하다고 하잖아. 그때는 사정이 그랬다구." "그때 나이트에서 만난 새끼 맞지? 그 뒤로도 계속 만나는 것 같더니 집까지 불러들일 정도가 된 거냐?" "불러들인 건 아냐. 집 앞에 와 있었던 거지." "그게 그거 아냐. 아니면 니 집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단 거야?" 바다만 바라보던 해건이는 수혁이 나이트에서 만난 그 새끼 얘기를 꺼낸 이후부터 귀를 쫑긋 세우고 나를 보고 있었다. "둘이서 이런 데서 뭐하고 있었던 거냐, 니들은." "협박하고 있었어." "또 그 유언장이냐. 너도 좀 발전을 해 봐라." 그 유언장이란 건... 자주 있는 일이었나. "그 발전 못하는 게 아주 너다워서 귀엽다만.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어서 그렇게 급했냐, 연해건. 재준이한테 유언장을 들먹거리게." 수혁이는 그 유언장 협박에 익숙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처음이었다. "설마 고백이라도 한 건?" 그 말에 끄윽- 하고 숨을 삼켰다. "뭐야, 진짜 그랬던 거야? 흐응... 연해건, 너 각오가 상당했나 본데?" "...너야말로 뭐야. 알고 있었던 거냐?" "나야 연해건 보모 아니냐." 그런 같지도 않은 대꾸를 하며 수혁이가 셔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문다. 초지일관 마일드 세븐만 피는 수혁이는 이제껏 다른 담배는 단 한번도 피워본 적이 없다는 것이 은근한 자랑이었다. 이런 껄끄러운 분위기에는 담배라도 피우면 나을까 싶어지지만 역시 이 한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나중의 불편함을 감수한다는 것은 손해였다. 온갖 나쁜 짓을 다 했는데 담배라고 내가 안 피웠을 리가 없다. 다만 제대로 피워보지도 않고 나는 담배를 끊었다. 피고 싶다는 욕구가 충분하게 충족되지 못할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뭣보다 싫었다. 뭐, 피우기 시작한지 1달만의 일이었으니까 그런 거창한 이유 같은 것은 실은 별 상관없었는지도 모르지만. 다만 나다운 것이라고 하는 무언가. 내가 한재준이라는 한가한 녀석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그 무언가. 달리 대단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내가 나라는 육체, 혹은 존재라는 의미로서 머무는 것이 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이것은 지극히 나다운 일이므로 나는 그것을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것이 몹시 편하다- 라는 것. 버릇일 수도, 습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익숙해진 만큼 그 무게는 무겁다. 사라지는 순간,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해 바닥을 딛을 수 없게 되니까 반드시 필요하다고 해도 좋다. 그것은 간혹은 형체를 가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저 마음속 한 구석에 묻혀 있어서 어떤 계기가 없이는 절대로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이다. 담배가 그 한 계기였던 것 같다. 내게 담배는 어울리지 않아- 라고 그 무언가가 알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가 먼저 담배를 피우는 행위를 멈췄고 타인이 나와 맞닿는 공기 속으로 흘리는 담배 연기도 싫었다. 그것을 잘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싫다고 말해도 주변의 녀석들이 내가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피워대는 건지도 모르겠다.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것은 그리 많지가 않다. 나 이외의 인간에게 접근하는 가장 수월하고 가장 무난하며 가장 효율적인 말이라는 수단을 나는 잘 사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희연이도 수혁이도 해건이도 담배를 핀다. 기껏 떠오르는 것이 담배 피는 너희로 인해 나다운 것을 잃고 있다- 정도니 실제 말한다 해도 피는 것은 우리인데 어째서 그것이 너다운 것을 잃게 한다는 거냐-가 대답일 것을 안다. 이기적이란 비난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내가 싫다는 것을 이유로 타인의 기호까지 거부한다는 것은. 하지만 그것은 내게 있어 일종의 엄숙한 자기 증명과도 같기 때문에 타협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무슨 대답을 듣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이니 그 대답이란 것 역시 내 생각만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셋 중의 어느 누구에게도 나다움을 보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친하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일종의 법칙이다, 그것은. 단지 싫다는 말만으로는 납득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싫다는 것으로도 내게는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 그들은. 내가 우습게 보는 만큼, 마찬가지인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문득 든다. 보이려하지 않는 내가 90%정도 나빴다면, 보인 내 모습에 대해 알아주지 않은 그들도 9%정도는 나빴다. 그리고 남은 1%라는 것은 보다 근본적이고 원론적인 문제다. 아이든 어른이든 갖고 있을 마음.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고 추구하다.... 이뤄지지 않을 것에, 혹은 이뤄질 것에도 바라곤 한다. 그런 것이 내게도 또한 있는 것이다. "그보다, 채인 거냐?" "너, 뭐냐! 지금 시루는 거야?!" "야룬들 시룬들. 니가 그걸 알 수나 있을 것 같냐?" 수혁이가 빈정대자 해건이가 발끝에 채이는 모래를 마구 걷어차 올린다. "너 왜 왔어! 안 가?!" "어제 징징거리면서 매달리던 건 언제고 말이지." 얼굴이 빨개져서 열을 내는 해건이를 보는 건 언제나 재밌지만 지금 건 나와도 무관하지 않은 데다 비겁한 생각을 했던 것도 찔려서 수혁이를 말렸다. "그만해. 언제는 해건이 편만 들더니 오늘은 왜 이래." "찬 놈은 닥치기나 하시지. 나니까 이런 거야. 알아? 나야 연해건이 남자를 좋아하든 문어를 좋아하든 귀여워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너... 너도... 그런 거냐...?" "내가 어디가 남자를 좋아할 인물로 보이는 거냐, 너는." 음... 그건 그렇다. 여자를 좋아하는 녀석이라고 잘라 말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장수혁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90007654배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요컨대 장수혁은 여자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저 여자의 몸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라면 몸마저도 좋아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긴 하네..." 그렇다고 해서 수혁이 해건이를 귀여워한다는 것에 대해 완벽하게 납득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 이상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 둘은 그런 이유로라도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동질적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해건이를 향한 물음에 해건이는 고개를 돌리고 또 바다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넌?" 이번에는 나를 보길래 고개를 가로 저었다. "뭘 말야?" "피할 거냐?" "....글세. 피할 것까지야... 없겠지?" 그 말에 다시 고개를 휙 돌린 해건이가 내 쪽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떨떠름한 기분으로 그래, 피할 것까지야 없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해건이는 계속해서 노려보았고 어째서 이렇게 되버린 걸까-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런 엉성하고 성의 없는 코미디처럼 되버릴 줄이야. 후우- 작게 들리지 않는 한숨을 고개를 숙여 입술을 내미는 것으로 알아차리게 한 해건이 말했다. "그래도... 역시 넌 듣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수혁이 나를 돌아보며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물어도 이제는 정말로 잘 모르겠으니까." "뭘 모른단 거야? 기대하게 만들지마. 확실하지 않은 걸로 묶지 말라구." 그렇게 매몰차게 말한 것은 수혁이었고 해건이는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번도 그런 생각에 니가 대상이었던 적이 없으니까. 특별히 혐오스럽다거나 하다는 건 아니야. 그저 정말로 모르겠다는 거야." "나는 계속 너를 보면서 이딴 생각만 할 건데?" "....그거야... 니 생각인 거지. ....여하튼 그런 건 너 혼자 해." 딱 잘라 이제 꼴도 보기 싫다- 라고 말하지도 못하겠고 또 정말 꼴도 보기 싫은 건 아니고 그냥 조금 피하고 싶은 정도니까. 게다가 누굴 좋아하든 그건 자기 자유 아닌가. 상대가 나라는 것이 아주 놀랍지만 딱히 이유를 꼽을 일이 아닌 것 정도는 안다. 어디가 어떻기 때문에 좋아할 만하다- 라는 것은 얼마나 냉정한가. 사람을 제대로 좋아하지 못한다는 평을 들은 나보다 그건 더한 경우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서는 해건이가 고백을 했다한들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라는 확신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그게 너 혼자 해- 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인 것이다. 해건이는 분명히 나를 향해 좋아하는 감정을 우습게 여기다 벌받아 죽을 거라고 했으니까. 사람 좋아하는 게 어떤 건지 하나도 모르는 녀석이라 그랬으니까. 내가 달라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을 거다. 해건이는 내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해건이는 내게 좋아한다는 것으로 인한 그 어떤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나는 연해건이라는 하나의-아마도 가까울- 객체를 배척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여전히 무엇도 알고 싶지 않으니까. "그만 가자. 배고프다." 수혁이의 자연스런 말에 해건이가 나를 휙 돌아보고는 앞서 걸어나가기 시작한 수혁이의 뒤를 따라 뛰어간다. "뭐야, 내 차 타려고?" 수혁이가 물었다. 해건이가 주먹을 들더니 퍽- 소리가 날 만치 20여 센티 위의 수혁이의 턱을 올려쳤다. "아깝냐! 그게 닳기라도 하냐구!" 얼얼한 지 머리를 휙휙 두어번 허공으로 내젓고는 수혁이가 턱을 손바닥으로 슬슬 문지른다. "그 놈의 손모가지, 그따위로 계속 놀려라, 그래. 언젠간 부러질 줄 알아." ...또 알 수 없어진다. 이 둘은 과연, 또 어떤 사이인 건가. 사이가 나빠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한 것과는 또 다르다. 그 동안 보아왔던 것과도 다르다. 맞고도 입으로만 갈구는 수혁이는 확실히 연해건에게 약하지만- 다른 녀석이었다면 적어도 갈비 4대가 나가고 턱뼈가 금이 갈 정도로 팼을 거니까- 연해건의 자세가 또 이상한 거다. 쭈뼛거리는 것 같이 올려다보는 것이다. 사실, 해건이가 수혁이를 치는 모습을 처음 보긴 하지만 그 어느 때고 일방적으로 수혁이에게 당당하던 해건이가 어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잠깐이었다. "그래! 손이고 얼굴이고 다 부숴라, 다 부숴! 그래서 뭐! 뭐 어쩌라구!!!" 다시금 악다구니를 써대는 해건이의 이마를 가볍게 손끝으로만 툭 친 수혁이가 심드렁하게 내뱉는다. "임마, 진짜 아프단 말이다." 그리곤 운전석의 문을 열고 몸을 반쯤 실은 수혁이가 여전히 선 채로 있는 내게 불쑥 말했다. "넌 외계인의 연애를 할거다." "...뭐? 하하. 무슨 소리야?" 반쯤은 어이가 없어서 가볍게 되물었건만 수혁은 무섭도록 진지한 낯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절대로 쉽게 연애 못할 거라구. 보통을 넘어서 엉망진창이고 절대로 남들에게 이해 받지 못해서 같은 종족이 아니고선 알지 못할 연애 말이다." 엄숙하게 마저 여겨지는 다정한 얼굴이 걱정스럽게 나를 보고 있었다. 갑작스런 불안이 엄습해와 붙잡으려 했지만 찰칵- 소리를 내며 수혁이를 완전히 삼킨 차문은 닫힌 후였고 이내 수혁이의 검은 SM5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앞에서도 한참이나 그 차가 멀어진 후에야 간신히 되물었다. "같은 종족...?" 그러나 대답은 들을 수 없었고 내 차로 걸어와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을 때 불현듯 깨달았다. 나는, 채유라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바뀔 수 있기를, 바뀐 내가 온전히 채유라와 동일선상에 설 수 있기를. ....채유라로 인해 바뀔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건 무슨 의미인 걸까. 어째서, 채유라인가. 나는... 채유라의 무엇을 향하여 바라는가. 채유라의 무엇이 나로 하여금 바라게 하는가. ....아마도 그것을 알게 되는 때 나는 같은 '종족'이라는 것을 찾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예감이라는 것을 깨닫는 머릿속의 지식과도 같은 것으로 담는 순간 급작스레 부유감이 들어 바닥이 꺼지는 것만 같았다. 끝이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동시에 몸 안의 세포 하나하나마다에 이질적인 이물감이 들어찬다.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일상과 비일상의 극한에 다다른 경계선과 같았다. 나는 일상을 버릴 수 있을 것인가. 풍족하며 나태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흘러가는 일상. 익숙해진 만큼 버리는 순간 나는 지금까지의 '내'가 아니게 될런지도 모른다. 과연, 비일상이란 것에 그만큼의 가치와 절박함이 있는 걸까. 자문해 보지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어지는 자답은 내가 알지 못해도 가장 진실에 근접한 것이었다. 내가 아니게 되어도, 모든 것을 잃어도 나는 아마 비일상을 쫓을 것이다. 그러자 문득 채유라가 보고 싶어졌다. 비일상의 가장 자리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만 같은 채유라가. 그리고 보고 싶다라고 생각을 하는 순간,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정교하고 섬세하던 얼굴의 윤곽, 모양 좋은 콧날과 가늘게 위를 향해 쭉 뻗은 눈매, 그리고 몸의 움직임을 나른하고 아름답게 드러내던 길다란 팔다리. 그 모든 것들이 너무도 선명히 떠오르며 채유라가 보고 싶어졌다. 기대란 것은 그런 것이었다. 내가 채유라에게 바라는 것은, 나의 일상을 버리게 하는 것. 그저, 비일상이란 것의 위험한 경계를 혼자서는 넘고 싶지 않다는, 넘을 수 없다는 도움의 요청. 채유라가 그것을 이뤄줄 의무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나는 바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을 것을 알아도 나는 채유라에게 그것을 바라는 것이다. 일상을 벗어나는 순간, 채유라마저 잃을 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채유라를 만난 그때에, 그 모든 것은 결정되어 버린 거다. 그것을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검붉은 색으로 물든 드넓은 바다가 서서히 시야의 너머로 멀어지고 있었다. 채유라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 4일 동안 나는 8개의 수업을 들어갔고 매일 같이 전화를 걸어 나오라는 해건이의 말에 오늘은 쉬고 싶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잠깐은 청소를 하기도 했고 슈퍼에서 잔뜩 사다 나른 것들로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먹었다. 빌린 30개의 비디오 테이프를 하루에 10개씩 보기 위해 밥을 먹으면서도 비디오를 켜 놓았고 청소를 하면서도 샤워를 하면서도 틀어놓았다. 마지막 황제를 봤고 식스센스를 봤고 로마의 휴일을 봤고 러브레터도 봤다. 봤던 것들도 많았지만 그냥 계속 봤다. 그리고 5일째 되던 날, 보지 못한 비디오가 2개가 남았을 때, 주말이라 수업이 없는 토요일 오후- 전화가 왔다. "예." [안녕.] 채유라였다. "응...안녕." [오랜만이지. 그때 니네 집에서 보고 나서 한 일주일 더 지났나?] "정확하게 일주일이야." [와아- 그런 걸 다 세고 있었던 거야? 되게 보고 싶은가보다아~] "...그래. 보고 싶어. 굉장히 보고 싶었어." [음... 그거 대단한데.] "만날 수 있어?" [그래. 어디서 볼까?] "어디든." [멋진데... 그럼 전에 봤던 곳 어때?] "좋아." [2시간 후에 보자. 나 지금 뭐하는 중이라서 바로 나가지는 못하거든.] "알았어." [기대를 엄청 하면서 2시간 후에 만나아~] 장난스럽게 그렇게 말하며 채유라가 전화를 끊었다. 보지 못한 2개의 비디오중 그랑 블루를 틀어놓고 욕실로 향했다. 쏟아지는 물도 이제는 그다지 차갑게 여겨지지 않았다. 만나는 거다. 만나서... 만나서... 뭐라 하지?! ....일단은 만나는 거다. 모든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채유라는 전과 마찬가지로 모리스의 두 번째의 계단에 엉덩이를 걸치고 다리는 앞으로 쭉 뻗은 채 앉아 있었다. 오늘은 프라다의 검정 셔츠와 색이 바랜 회색 진에 아디다스의 운동화를 신고 있다. 투명한 플라스틱 헤드폰이 긴 앞머리를 뒤로 넘겨 고정시켜주고 있었고 간혹은 고개를 까딱이기도 하고 한번씩은 발끝을 차올리기도 하며 시원한 표정으로 박자를 맞추었다. 저만치 앞에서 내가 받아야 하는 유턴 신호로 신호등의 불빛이 바뀌는 것을 멍하니 의식하며 여전히 채유라를 보았다. 아직은 조금 이른 반소매의 셔츠가 옅은 바람에 팔락이며 그 아래의 매끈하고 균일한 근육이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인다. 그러다 문득 채유라와 시선이 마주쳤다. 손을 커다랗게 흔들며 채유라가 활짝 웃었다. 가슴이 지끈- 하고 울렸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신호를 가리켜 보였다. 아직 신호는 바뀐 후 그대로였다. 잠시 후 다시 유턴 신호를 받아 차를 돌리자 계단에서 일어나 탁탁 소리를 내며 다가온 채유라가 말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오래 기다렸어?" "아니." 헤드폰을 목으로 벗어 내린 채유라는 여전히 고개를 까딱까딱 하고 있었다. "무슨 음악이야?" "비틀즈. 지금 내가 제일 좋아하는 Eleanor Rigby나오는 중. 들을래?" "비틀즈 좋아해?" "응. 좋아해. 아무리 들어도 좋아. 넌 안 좋아해?" "잘 모르겠는데. 아는 건 Let it be나 Yesterday 정도일까." "아왓! 믿을 수 없어! 비틀즈는 누구나 좋아한다구!" "그런가." 채유라가 헤드폰의 줄에 연결된 작은 리모컨을 눌러 음악을 끄고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누구나 똑같이 좋아할 수는 없는 거니까." "정말 그래." "에엑, 그건 뭐야. 썰렁한 아저씨처럼." "그래도 할 수 없지 뭐.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생글 웃으며 채유라가 헤드폰을 말아 어깨부터 가슴을 가로지르게 맨 작은 은색 가방 안에 헤드폰과 줄을 잘 말아 집어넣는다. "그런데 얼마나 보고 싶었던 거야?" "많이- 인 것 같아." "그랬어? 헤헤. 으쓱해지는데." 조수석에 올라탄 채유라는 내 얼굴을 보며 계속해서 싱글대는 중이었다. "안전벨트 매." "아, 그렇지. 나 이런 거 버릇이 안 되서. 차를 탈 일이 별로 없거든." "그럼 보통 때는 어떻게 다니는데?" 사이드 미러로 주위를 살피며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 "걷는 거 좋아해. 정 어디 가야 하면 버스를 주로 타고. 좀 멀어도 되도록 버스로 가서 걷는 편." "전철이 더 편하지 않아?" "싫어." 딱 잘라 그렇게 대답한 채유라가 장착된 시디 플레이어를 보고 묻는다. "틀어도 돼?" "나하고 말하는 거 싫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평소에도 음악을 잘 안 듣는 편이기도 하고 말하는 게 귀찮다거나 할 때가 아니면 음악은 잘 안 들으니까." "배경음악이란 게 있잖아. 음악은 말야, 대화에 깊이를 더해준단 말야." "잘 모르겠지만." "그만큼 니가 여유가 없어서 그래." "글세." "아냐, 그래. 너는 음악이 어려운 거라구." "그렇다면 뭐 그런 거겠지." 어느 정도는 수긍을 하고 대꾸하자 채유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리고 이리저리 시디를 돌리던 채유라가 멈춘 곡은 Pretenders의 I'll stand by you였다. 바로 얼마 전 해건이가 골랐던 그 곡이었다. "이 곡이 좋은가, 다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 말을 들은 채유라가 묻는다. "누가 또 틀었어?" "응. 친구가." "그랬구나." 둘 다 말없이 허스키한 여성보컬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곡이 흐르는 동안 채유라는 리듬에 맞춰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음악 좋아하나 보지?" "응. 제일 좋은 건 역시 비틀즈지만 비지스도 좋고 카펜터스도 프랭크 시나트라도 바브라 스트라이젠드도 좋아." "올드 팝을 좋아하나 보네." "락이나 메탈도 좋아해. 음... 따지고 보면 별로 싫어하는 음악은 없다고 해야 하나. 넌 클래식을 좋아하는가 보지? 4번이랑 2번 말고는 모두 클래식이던데." "굳이 좋아하는 건 아니고 그냥 조용해서 듣는 거야. 난 음악 자체를 자주 듣는 편이 아니라서." "그래도 좋은 것만 모아놨던데? 파블로 카잘스는 나도 되게 좋아해." "잘 아는가 본데? 한번 듣고 바로 알고." "고 1때까지 무려 10년을 나 첼로 했었는걸." "그래...? 대단한데. 난 악기라곤 리코더도 제대로 못 부는데. 캐스터네츠도 박자에 맞게 못 친다구. 초등학교 같은 데 보면 합주하잖아. 그나마 제일 쉽다고 캐스터네츠를 시키는데 그것도 계속 틀리는 거야. 결국 우리 반이 꼴찌를 했고 얼마나 애들에게 눈총을 받았는지 몰라." 풋- 소리내서 웃은 채유라가 1번 시디로 돌려 파블로 카잘스의 베토벤 소나타가 든 연주시디로 바꾼다. 천천히 음률을 따라 손끝을 마치 첼로로 연주하듯이 따르던 채유라가 싱긋 내 쪽을 보고 웃었다. "놀랍지 않아?" "뭐가?"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 만든 곡을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 연주하는 것을 듣고 이렇게나 감동 받는다는 사실 말야." "그런가." "무슨 음악이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신경을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면 항상 귀를 지나서 심장에까지 닿는 선율이 있거든. 음을 읽을 줄은 아니까 악보를 보면 선율이 음악이 되어서 머릿속에 들리는 거야. 그 머릿속의 선율이 완벽하게 되살아난다는 느낌, 알겠어? 정말로 굉장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어선 그저 잠겨들고 말지. 그 느낌을 갖고 싶어서 악기를 배울 생각을 했었어." 그렇게 말을 하는 채유라는 무척이나 인상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온화한 톤의 어조였지만 그 얼굴은 어딘지 서글퍼 보이는 것이다. "니가 연주하는 거 듣고 싶어지는데." "어라라... 그거 유감이네. 첼로가 없거든. 먹고살기도 힘들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란 말야. 어떻게든 팔지는 않으려고 했었지만 역시 무리였다고나 할까." "아... 그렇구나...." 조금만 생각했으면 알 수 있었던 일에 무심하게 말해버린 내가 너무 바보스러워서 입을 꾹 다물어버린 내가 무안스럽게 채유라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가지고 있었어도 소용없었을 테니까. 그 녀석도 아마 더 좋은 곳에 갔을 거야. 가지고 있어봐야 제대로 보살펴주지도 못했을 건데 뭐." "....아, 안심 먹고 싶다고 했었지?" "응? 아, 응. 맞아." 지금이 오후 6시였다. 분명히 해건이도 수혁이도 집에 있을 시간이었다. 일단 집에 들어간 이상 쉽게 빠져 나오기는 어려울 게 뻔했고 나오려면 밤늦게나 되어야 할 테니까. 서든 하우스로 방향을 잡고 핸들을 꺾었다. 한 손만으로 능숙하게 핸들을 잡고 기어를 바꾸는 나를 보던 채유라가 감탄하며 말했다. "이야... 그러고 보니 손이 모양이 좋은데?" "응?" 핸들을 잡지 않은 왼손을 들어보았지만 별로 특별한 구석은 없다. 손가락이 조금 긴 편이긴 하지만 마디가 척 보기에도 불거져 있어 절대로 모양 좋은 손은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손 중 가장 모양이 좋은 것은 수혁이의 손이다. 손가락도 길었고 손의 두께도 적당하다. 거기다 마디도 매끈해서 알맞은 분홍빛으로 건강한 손톱이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수혁이의 손은 정말로 보기가 좋았다. "친구 중에 손이 정말로 멋진 녀석이 있어. 얼굴도 그렇지만." "혹시 장수혁?" "어? 어떻게 알았어?" "관찰력이 뛰어나거든. 나이트에서 봤을 때 술잔을 잡은 손을 보고 알았지." "....그래?" "뭐야. 앞의 침묵은? 오해한다?" "아니.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상한 생각이라니?" "그날 한번 봤을 뿐이잖아? 그런데도 잘 알고 있어서 조금 놀랐다고 해야 하나." 채유라가 고개를 일부러라는 느낌이 들도록 갸우뚱갸우뚱 했다. "하지만 멋있었잖아? 그런 얼굴 좀처럼 잊어먹기 힘드니까." "그런 얼굴?" "강하게 생겼잖아. 눈매도 코도 입술도 뚜렷하고. 동양인은 조금 가느다랗고 흐린 인상이 많다는 거 알겠어?" "글세. 생각 안 해 봤는데." "서양인에 비하면 조금 평면적이라는 거야. 물론 코도 솟아 있고 눈은 들어가 있고 입술도 조금 튀어나와 있지만 여기 말야, 여기." 그렇게 말하며 채유라가 손가락을 쿡쿡 찌른 곳은 눈썹이 난 부분과 광대뼈였다. "이 부분이 튀어나와 있기는 어렵단 말야." "확실히 그런 것도 같네." 안전벨트를 맨 채로 좌석 뒤로 팔을 쭉 뻗은 채유라가 그 팔을 다시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강한 얼굴인데 어딘지 섬세해서 인상적인 얼굴이야." "....자세히도 봤군." "그 옆의 연해건이라는 친구는 신경질적으로 생겼어. 보기 싫다는 그런 게 아니고 연약하게 생겼다는 느낌, 알겠어? 이런 사람은 차라리 알기 쉬워." "알기 쉽다니?" 턱을 오른손의 검지로 조금 긁던 채유라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우뚱했다. "솔직하니까. 숨기는 게 없어. 숨길래도 숨길 수가 없는 거야. 아아, 잘 설명을 못 하겠잖아." "그런 것치고는 할 말은 다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응. 맞아." 그렇게 대꾸하며 채유라가 빙긋 웃었다. 왠지 모르게 냉정한 웃음이었다. "그런 연약하고 예쁘장한 사람은 아이 같은 사람이 대개였던 것 같아. 싫은 것 좋은 것이 분명하고 주위 사람들을 휘두르는 것이 아주 능숙한데다 당연하게도 생각을 하고. 그게 안 되면 심술도 부리고 그러다 그 심술에 자기는 한 네 배쯤 더 상처를 입는 거야. 그런 사람은 소중하고 맘에 드는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니까 그런 사람에게 미움받는다는 생각이 들어버리면 견딜 수 없게 되거든. 여간해서는 맘에 드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쉽게 만들어지는 사람이 아닌데다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수 없으니까 심술을 부리는데 그게 모두 통하는 사람이 흔할 리가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몇 배로 더 상처 입어 버린다구." 직접 돌아보면 나에 대해서도 이렇게 정확한 평가를 내릴까 문득 신경이 쓰여서 백미러로 흘깃 보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관상 같은 거라도 공부했었어?" 그 말이 우스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키득거리며 웃던 채유라가 웃음을 멈추었을 때는 무척이나 씁쓸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냥 이런저런 사람 눈치 살피는 데 익숙한 거야. 익숙해지면 그게 또 능숙해져. 그러다 보면 그냥 얼굴이라든가 행동 같은 것만 보고도 끼워 맞출 수 있게 되는 거지. 닳고닳은 어른 같아서 20살인 나는 생각하면 조금 괴로워도 져.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되버린 거란 말야. 겨우 20살인데 이런 일은 조금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왼손으로 능숙하게 핸들을 잡고 오른손을 채유라의 이마로 뻗었다. 내 손에 닿은 채유라의 이마에서는 조금은 차가운 체온과 위쪽 구석에서 두근거리는 혈관의 박동이 느껴졌다. 어째서 그때 손을 내민 거지- 조금 후회를 하고 있을 때였다. 채유라가 그 이마에 천천히 고개를 내밀 듯이 기대어온 것은. 그래서 위로해 주고 싶어졌다. "10년이나 부딪히고도 알지 못해서, 이제야 겨우 알아서 뒤늦게 휘둘리는 것보다는 나아. 조금 더 편할지도 모른다구." "으응... 그래, 니가 그렇게 말하는 건 틀림없이 진심일 테니까... 으응..." 어쩐지 손을 떼기가 싫어졌다. 순순히 내 위로를 진심이라고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내 손바닥에 이마를 기대고서 말하는 채유라의 표정은 울 것처럼 보였다. 마침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우고 나도 모르게 채유라의 이마에서 손을 떼고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온 몸의 힘을 빼고서 기대고 있던 채유라의 몸이 조금 앞으로 기울여졌고 나는 그 어깨를 왼팔로 붙잡아 멈추고 몸을 틀어 조금 전까지 내 손이 닿아 있던 그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정말로, 진심이야." 조금 놀란 듯이 눈을 치켜 떴던 채유라가 눈동자가 가늘게 보일 만큼 눈매를 접으며 활짝 웃었다. "응... 고마워."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하게 솟아서 젖어 있었다. 그 손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핸들의 가죽커버에 문질렀다. 그러나 검은 가죽의 표면이 더욱 검게 젖어 변하는 것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건, 정말로 바보 같은 짓이다. 왜, 그랬던 걸까. "난 어땠어?" 일부러 활기차게 물었다. 마침 신호도 바뀌어서 운전에 집중하는 척하며 쉽게 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채유라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띄운 채 내 쪽을 쳐다만 볼뿐 대답하지 않았다. "난 어땠냐구. 정작 날 꼬시던 건 기억도 안 나냐?" "넌... 넌 마치 나 같아. 거울 속의 나. 똑같지만 내 심장은 언제나 네 반대편이지." "그래도 결국은 같은 거잖아?" "그럴까... 그게 같은 걸까..."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을 때 마주친 채유라의 눈은 악기를 배우고 싶었다는 얘기를 할 때의, 심장에까지 닿은 선율이 있어 그저 잠겨들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를 할 때처럼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서글퍼 보이는 그런 눈이었다. 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지만, 그것을 할 수 없을 때. 분명히 무엇도 해줄 수 없는데 그럼에도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그 안타까움만은 사라지지 않을 때의 그런 서글픔. 그런 종류의 서글픔은 자신의 무력함이 슬픈 것과는 전혀 다르다. 자신의 무력함과는 정말로 무관하게 오로지 그 사람이 자신이 아닐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받았어야할 다정함을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고 체념이기도 하다. 아마 채유라는 첼로를 생활고로 인해 더 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을 테지만 자신이 하나의 음악을, 완벽하게 언제나 자신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그 선율로서 그 자신의 연주가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어째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걸까. "조금만 더 열심히 살아 줘." 채유라가 가만히 손을 내밀어 기어 위에 얹힌 내 오른손으로 자신의 손을 포개며 말했다. 멍하니 눈을 내려 내 손을 덮은 채유라의 손을 보았다. 피아노였던 것도 아닌데... 손가락이 참 예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혁이의 손이 모양이 좋다는 것으로 설명을 한다면 채유라의 손은 가늘고 약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마." 내가 어떤 눈으로 채유라를 보고 있다는 걸까. "그렇게 울 것 같은 눈으로 보지마... 내가 먼저 울어버릴 거라구." 결국 8차선의 넓은 도로의 가장 바깥에 차를 세웠다. 핸들에 말없이 얼굴을 묻는 내 머리를 자신의 가슴으로 안아들인 채유라가 나직이 말했다. 채유라의 가슴에 뺨을 대고 있어 심장의 고동과 음성의 굴곡이 고스란히 머릿속으로 곧장 전해져서 마치 나는 그 말을 귀가 아닌 어딘가의 메아리처럼 듣고 있었다. "지겨워도... 지겨워도 할 수 없어. 그건 누구의 잘못이 아니니까. 알지도 못하면서 지루해한 건 너잖아. 그러니까 울어도 소용없어. 너는 약하지 않은 걸. 넌 그냥 의지가 없는 거야. 절실한 무엇도 없는 거겠지... 모든 것은 타인의 것이고 네게 남은 것은 그저 바라지 않고 외면해버리는 시간이 넘쳤겠지. 어느 날 갑자기 막연히 그것을 알게 되었겠지... 넌 그 이유를 알려고도 하지 않아. 그저 피할 뿐이니까. 그렇지?" 울 것 같은 눈이었다고 채유라가 말한 내 눈에서는 이제 눈물이 실제로 나오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의 일이라 어딘지 까마득해지는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그만큼 내가 우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울지마. 네가 지겹고 외롭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공정한 듯 다정하게 굴었던 건 모두 니 탓이야. 그건 모두 니가 비겁해서 그런 거야." 채유라는 부드럽게 내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어디선가 듣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가슴에 귀를 댄 채 듣는 음성은 기묘하게 울리고 있었다. 꿈을 꾸는 듯도 했다. "넌 나쁜 녀석은 아니니까. 비겁하긴 하지만 나쁜 녀석은 정말로 아니니까. 그러니까 더욱 처치곤란인 거야. 알겠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지. 할 수 있는 건 아닌 척 웃고 아닌 척 겉돌면서 어울리는 게 전부야. 정말은 싫다고 생각해도 절대로 말하지 못하고서. 하지만 그게 가장 최악인 거야. 네 그 비겁한 상냥함 때문에 누군가는 상처를 입어." 모두가... 모두가 그랬던 거겠지. 채유라도... 채유라도 그랬을까. 나의 비겁한 상냥함으로 채유라도 무언가 상처를 입은 걸까. "그리고 어쩌면... 어디의 누군가는 상처를 입을 준비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뺨을 살짝 들고 코끝을 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마가 느릿하게 떼어지고 채유라의 흰 아래턱이 보이고 곧 서글퍼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채유라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서로의 얼굴만을 응시했고 서서히 채유라의 눈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입가의 미소가 얼어붙었다. 그 지독하게 무표정하고 선득한 얼굴로 채유라는 나를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엉겨붙은 교자를 억지로 뜯어내듯이 힘들게 간신히 팔을 들어 채유라의 어깨를 짚었다. 어깨를 짚은 그 양 팔의 사이로 고개를 숙이고 한 음절, 한 음절을 정말로 간절하게 소리냈다. 그렇게 절실할 수가 없었다. "날... 미워하지마... 부탁이야... 날... 미워...하지...마.... 제발...미워하지마...." 얌전히 떨구어져 있던 팔을 들어 내 팔을 나란히 붙잡은 채유라가 호흡을 고르며 어렵게 입을 뗐다. "좋아할 수 없어...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건 다른 걸까? 응?" 어느 새 고였던 눈물이 주르륵 내 뺨을 타고 흘렀고 찡그린 듯도 보이는, 울 것 같은 눈이 되어 채유라가 속삭였다. "모르겠어. 좋아할 수 없다는 건...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과 어떻게 다른 거지...?" "미워...미워하지마..." 울면서 말하는 내게 채유라의 입술이 다가왔다. 아주, 짧은 순간- 채유라의 입술이 내게 닿았고 그것은 나의 그 간절하고도 절실해서 정말로 말하지 않은 순간에 지워질 그 기도를 앗아갔다. 그래서 나는 채유라에게 더 이상 나를 미워하지 말라고 말로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저 눈물이 흘렀고 채유라가 입술을 뗐다. 물기에 젖어 광택이 나는 채유라의 입술을 힘없이 지켜보았다. 아주 약간의, 정말로 조그만 움직임으로도 떨어져 박살날 유리그릇을 머리에 얹은 사람처럼 채유라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후로 오래 지난 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찰나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또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게 고개를 저은 채유라는 차문을 열고 다리를 보도블록 위로 내린 다음 몸을 세우고서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 버렸다는 것뿐이다.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채유라가 멀어지고 멀어지다. 그 작아져만 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지도 못하고 인파의 물결에 그림자마저 지워져 사라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아야 했다. 뛰어내려서 쫓아갈까. 소리쳐서 뒤돌아보게 만들까. 돌이라도 던져서 멈추게 만들까. 뛰어내려 도로 한 가운데로 달려 들어볼까. ....소용없었다. 채유라가 돌아보게 하기 위해서, 멈추게 하기 위해서,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내가 생각한 일들 중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가락의 끝조차 움직일 수 없었고 입술을 달싹여 숨소리를 내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채유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 그렇게 보이지 않을 때까지 쳐다만 보다 눈을 감는 것밖에 없었다. 이제 채유라에게 연락은 오지 않겠지. 어떻게 해도 우연히 마주칠 일 같은 것은 생기지 않겠지. 참, 이상하다. 오늘은 그저...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냥 안심 스테이크를 먹으려가던 중이었을 뿐이다.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차라거나 술이라도 가볍게 한 잔 마시며 이것저것 말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저... 나는... 채유라에게 나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조금만 도와달라고... 그렇게 말하려 했을 뿐이다... 그저 보고 싶었고... 아마도 그랬고... 조그맣게 도움을 구걸하려던 것이 전부였는데.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하다. 그건... 정말로 이상했다.... 이상한 일이라서. 너무나 이상하기만 일이라서. 조금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너무 당황을 한 나는. 그냥... 울고 있었다. 놀랍도록 오랜만에 내 눈꺼풀을 밀치고 새어버린 눈물은 그 동안 이만큼이나 모였다고 생색이라도 내려는 듯이 자꾸만 흐르기만 했다. ...이건, 이상한 일이다. 현실 같지 않은, 그런 이상한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울 수밖에 없는 거다. 조금도 현실적이지 못하면서 사실이 되어버린 일련의 일들이 너무나 가혹해서 나는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눈물을 끊이지 않고 나오기만 해서 오히려 신기한 기분이 될 정도였다. 채유라를, 볼 수 없을 지도 몰라. 그 하나의 생각이 무섭도록 슬프다는 것은 대체 어째서. 대체... 그건 어째서. 채유라의 실은 36.5도가 아닌 35.5도나 36도쯤 될 것 같은 차가운 입술의 감촉이 떠올랐다. 차가운 것과는 다른, 단지 조금 식어버린 것 같은 정도의 온기만을 가졌던 입술의 감촉. 조금 식어버렸다는 것은, 차가워졌다는 것의 860000000000배쯤 더 가혹하고 잔인한 일이다. 그건, 정말로 그랬다. 거울 안에 채유라가 있다. 혹은 내가. 그것은 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내 심장의 반대편에 심장을 가진, 그건 같은 종족. 지나칠 만치 닮았을 뿐,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닮은 것이다. 가장 가깝게. 그것이 채유라였다. 하지만 만질 수 없다. 가질 수 없다. 이렇게 손에 잡힐 듯 보이건만... 거울 속을 향해서는 손을 뻗을 뿐,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천천히 허공으로 손을 들어보았다. 아이보리 빛의 벽지를 배경으로 손의 모양이 뚜렷하게 보였다. 이 손의 어디를 보고 채유라는 모양이 좋다고 했던 걸까. 생각해 보지만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어제 돌아와 그대로 침대에 누운 후 잠이 들었고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은 내 손을 본 것이었다. 머리칼을 문지르며 욕실로 곧장 들어가 차가운 물에 몸을 적셨다. 이제는 그리 차갑게만도 여겨지지 않는 물이 얼굴을 적시고 계속 흘러 온 몸을 적셨다. 희연이는 내가 모르는 채유라의 번호를 알고 있다. 좋아할 수 없다던 채유라에게 내가 연락을 한들 무슨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미워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르냐며 묻던 채유라에게 연락을 한들 무슨 말을 들을 것인가. 유강이라는 녀석의 연락처를 묻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채유라가 유강으로 있고 싶어한다면 내가 채유라에게 할 말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유강과 채유라가 같은 사람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런 것이다. 연락을 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워져만 갔다.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샤워기의 버튼을 눌러 물을 잠근 다음 욕실을 나왔다. 띠리리.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예." [집이야?] 해건이었다. "그래." [나 지금 들어갈게.] "지금부터 할 일이 있는데...." 그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찰칵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열렸다. 스페어키를 손가락에 걸고 달랑거리며 흔든 해건이가 귀에 핸드폰을 댄 채로 들어오고 있었다. "집 앞에서 일부러 전화는 왜 한 거냐." "내 맘이지." 털썩 소파로 몸을 던지듯이 앉은 해건이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왜 그래?" 어색하게 얼굴을 쓰다듬으며 묻자 해건이 불퉁하게 내민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얼굴이 엉망이다?" "자다 일어나서 그래." "그런 게 아닌데? 머리칼은 온통 젖었잖아. 샤워한 거 아냐?" "잠을 제대로 못 잤어." "집으로 5시간 동안 5분 간격으로 전화했었어. 못 들었지?" "....질기기도 하다. 그래서 제대로 못 잤나보다." "그러면서 받지도 않고 말이지." "못 들었어."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거 거의 기절인 거 아냐? 의식불명 같은 거. 어떻게 그렇게 울려댔을 전화벨 소리도 못 들었다는 거야?" 해건의 맞은 편에 앉아서 꼼꼼하게 닦지 않아 아직도 물기가 뚝뚝 어깨로 떨어지는 머리칼을 털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해건이 또 입술을 삐죽거렸다. "왜 그래.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그러냐구." "어제... 나 봤어." "응? 뭘... 말야?" "니가 울고 있던 거." "....잘못 봤겠지." "그리고 그 자식이 키스했어. 아주 자연스럽던데?" 심술궂게 말하는 해건이를 보다 채유라의 말이 생각났다. 지금이 그 네 배쯤 더 상처입고 있다는 그런 순간인 걸까. 하지만 아무리 해도 남은 세배를 생각해 위로하고픈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해건이 자신이지만 나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끌려 들어간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해건이에게 상처 입을 일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건 순전히 해건이의 문제인 것이다. 조금 더 동정해줘도 상관없겠지만 지금 내 마음은 그 정도의 여유도 없었다. "참... 지독한 우연이군." "어제 우리 엄마, 아빠 결혼 기념일이었어. 아빠가 전화해서는 일이 아무래도 늦어져서 9시나 되서야 집에 올 수 있다고 하는 거야. 그리고 엄마가 테이블보를 바꿔야겠다고 난리를 쳤지. 아무래도 바꿔야겠다면서. 아직 9시까지는 시간도 많고 해서 백화점엘 가던 중이었어. 나도 니가 그런 곳에 차를 세우고서 그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 처음에 폰티악이 서 있는 것을 봤을 때만 해도 세상에 폰티악을 타는 사람이 너 하나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어. 그냥 무심히 지나치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신호에 걸려서. 그래서 봤던 거야." 담담해 보이는 해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라서 싫었던 거였어? 남자가 싫은 게 아니라?" "아니. 틀려." 분명히 그건 틀리다. 채유라니까, 그건 남자 이전에 채유라니까. 하지만 그걸 해건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어디가... 어디가 틀려?" 그렇게 힘없이 되물은 해건이 갑자기 옆으로 손을 뻗더니 잡히는대로 아무거나 마구 던져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쿠션이 날아왔고 그 다음에는 핸드폰이, 마지막으로 리모컨이 날아들었다. "거짓말쟁이!" 쿠션에는 잠자코 맞았지만 핸드폰부터는 피했다. 리모컨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다시 몸을 바로 앉은 내 쪽으로 재떨이가 날아왔다. "아..." 해건이 하얘진 얼굴로 나를 본다. 뭔가가 흘러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피였다. 조금 믿기지 않는 기분으로 손을 들어 이마를 만져보았다. 정확히 어디가 찍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내 손에는 피가 잔뜩 묻어 났다. "재...재준아...." 새하얗게 질려서 내 이름을 부르는 해건을 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혈사태까지는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이제... 그만두자. 별로.... 상관없으니까. ....그래, 이젠." 해건이 억지로 울음을 참으며 욕실로 달려들어가 가져온 수건으로 머리를 누른다. 누르는 위치로 봐서 이마가 아니라 더 위인 것 같았다. "병원... 병원... 가야지..." "그래. 아무래도 찢어진 모양이다." "심하지는 않겠지...?" "원래 머리의 상처가 피가 많이 난다고 하잖아. 큰 일은 없을 거야." 자리에서 일어서자 해건이 흠칫 몸을 움츠린다. "운전, 할 수 있지?" 고개만 끄덕인 해건이 움칫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 괜찮다니까." "....내가 잘못한 건데... 내가 잘못한 거 아는데... 나... 사과할 수가 없어." "....알았어. 병원이나 가자." 해건이 운전하는 옵티마를 타고 가까운 병원의 응급실로 일단 들어갔다. 다친 곳은 이마와 머리카락이 나는 경계보다 약 3센티쯤 위로 나는 7바늘을 꿰매야했다. 덕분에 상처 근처로 동그랗게 머리칼을 밀어버려서 영구가 된 채 붕대를 감고 나오자 수혁이 와 있었다. "해건이는?" 턱을 들어 수혁이 가리킨 곳은 복도 끝 흡연구역이었다. "많이 놀랐나보더라." "나보다 놀랐을라구." "하긴. 정작 피본 당사자시지." 어쩐지 비꼬는 말을 들은 듯한 기분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인다. "그 머리는 그럼 영구겠다? 나가자. 잘 어울리는 모자 하나 사줄 테니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냐?" "아니. 없어. 가서 저 떼쟁이나 데려와." "왜 내가." "내 말은 안 들으니까." 그 말에 어쩔 수 없이 해건에게로 다가갔다. 담배를 손에 든 채로 나를 보던 해건이 눈을 머리의 붕대를 향했다. "유감이네. 꼴좋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게." "...유감이기도 하겠다. 7바늘이나 꿰맸다구. 거기다 머리엔 땜통이 커다랗게 생긴데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해건이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우울해졌다. 그 사람답다- 라는 것이 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해건은 이렇게 억지로 웃지는 않았다. 울고 웃고 화내고 심통부리고. 아무튼 모든 게 자연스러웠던 녀석이다. 그 모든 게 정말로 울고 싶고 웃고 싶고. 그래서 그렇게 했던 녀석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억지로 웃는 해건을 보며 처음으로 맘이 조금 아팠다. 분명히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었지. 해건에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저 항상 대수롭지 않게 그래왔던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손을 해건은 움칫- 하며 어깨를 움츠려 피했다. 어어...? 하는 기분이 되어 해건의 얼굴을 보았다. 해건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이건 사과할 수 있는 걸. 미안이라고." 그리고 다시 한번 웅얼거리듯 '미안'이라고 말한 해건이 이내 큰 소리로 말했다. "가자!"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졌다. 미안이라니. 미안이라니. 대체 뭐가. 어디에 대한 미안인가. 앞서 걸어가는 해건의 등을 쳐다만 보았다. 멈춰선 채인 나를 돌아본 해건이 갑자기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아냐! 아무 것도 아니라구! 알겠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바보가 아니다. 해건의 안에서 무언가가 변해버린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악악!!! 어째서! 그 모자 안 쓴 거야!" 아락바락 일어선 채 날뛰는 것은 해건이었다. 여기가 실외여서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을 하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닌 듯 하다. 수혁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좀 봐주라. 니가 사준 모자에는 곰이 그려져 있다구, 곰이." "곰이 어때서 그래!" "그래, 곰이야 나쁘지 않지. 하지만 곰 엉덩이가 둥실 떠 있는 건 아무래도 곤란하지. 안 그러냐?" 내 말을 받아 수혁이가 말했다. "그래, 정말 곤란하지." "곤란하긴 뭐가 곤란해! 넌 내 성의를 그렇게 짓밟고! 그래, 속이 시원하냐!" 수혁과 얼굴을 마주보며 머리를 저었다. 어제 병원을 나서 모자를 사주겠다는 수혁의 말에 모두 백화점을 갔다. 수혁이 고른 것은 평범한 하늘색의 야구모자였고 해건이가 나도! 라고 소리치며 평소의 쾌활한 모습으로 어딘가로 사라졌다 들고 온 모자는 커다란 바가지 같은 모양의 모자로 곰이 그려져 있었다. 물론 곰 한 마리가 다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막상 쓰고 보면 곰의 엉덩이가 둥실 떠 보인다는 것이다. "자자, 그러지 말고 들어가자. 배고프다면서." "배 안 고파! 안 고프다구!" 고개를 팩 젖히고 말한 해건이 주위를 둘러보다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백화점이 아주 가깝네, 그래." 구원의 눈길을 다급하게 수혁에게 보냈지만 수혁은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가자." "....어디로?" 그렇게 힘없이 묻는 나를 턱을 도도하게 치켜든 해건이 당당하게 말했다. "백화점." "....가자." 수혁이 먼저 해건의 뒤를 따랐고 잠깐 서서 어물거려보았지만 해건이 빽 소리지르는 것으로 그 사소한 반항도 끝이 났다. "안 오고 뭐해!" "간다. 간다구..." 다시 백화점엘 온 해건은 나와 수혁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전문매장에 가서 입을 옷이라든가 이런저런 물건들을 오랜 시간들이지 않고 고르는 것이 나와 수혁의 단순한 쇼핑패턴이었고 그에 비해 해건이는 살 것도 없이 괜히 대형 마트나 백화점을 몇 시간이고 돌아다니는 것을 너무나 즐겼다. 티셔츠 하나 산다고 따라나서면 족히 5시간은 온갖 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다. 백화점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벌써부터 진이 빠져버린 나와 수혁을 향해 해건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빨리 와." 모자 때문이겠거니, 모자 하나만 사면 끝이겠거니 가볍게 생각한 우리의 기대를 너무도 쉽게 저버린 해건은 벌써 시계와 벨트, 컵, 이불 등등. 이제 시작이라며 눈을 부라렸다. 아이스크림을 할짝이며 사방으로 연신 눈을 돌려대는 해건의 뒤를 조용히 뒤따르다 이불을 손에 든 수혁이 말했다. "...그 모자 좀 쓰고 오지 그랬냐." "니가 써 봐." "연해건이 한재준 준 걸 나더러 쓰라고? 너... 아주 내가 죽었으면 싶지?" "그럴 리가 있냐." "너는 머리만 터지고 말았지? 나는 아주 산산조각나서 돌 매달려서 한강에 던져질 거다." "....진담 같은 게 더 무서워." "농담일 리가 있냐. 사실이라구." 갑자기 손에 든 마른 멸치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대체 왜 그런 걸까..." "넌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좋아한다고 한 거?" "그래." "고작 그것 때문에?" 수혁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반사적으로 따라 멈춰 수혁을 보았다. "고작...? 넌 정말 모르겠단 거냐? 니가 말하는 그 고작이라는 것에 저 녀석이 얼마만큼의 마음을 거는지? 니가 말하는 그 고작이라는 것에 저 녀석이 무얼 걸었는지!" 버럭 소리지르는 수혁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내게 이해하라고 강요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 난 정말로 모르니까." "알라는 얘기가 아니잖아! 넌 생각하기조차 싫어하고 있단 말이다!" 수혁의 화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사실이야. 난 알고 싶지도 않은 거야.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휩쓸리고 싶지 않아. 내가 아닌 것에 휩쑬려서 잃고 싶지 않아. 적어도... 적어도 해건이는 아냐. 모르겠어? 정말로 너야말로 모르겠다는 거야? 왜 해건이는 안 되는지?" 수혁이 혀를 차며 굳은 얼굴로 돌아서다 불쑥 말했다. "그래도 니가 나쁜 거다. 그래도 니가 더 나빠. 니 멋대로 그렇게 정해놓고선 따르지 않으면 내치겠다니... 달리 어쩌라는 거냐. 저 녀석이 달리 뭘 할 수 있단 거냔 말이다..." 그때 멀리서 해건이 손을 휘젓고 있었다. "....가자." "소중한 척 말하지마. 아픈 척 말하지마. 너는 그게 해건이가 아니어도 상관없으니까. 그냥... 조금 더 익숙할 뿐, 너한테 해건이는 네가 정한 위치에 현재 앉은 녀석일 뿐이면서... 그게 해건이가 아닌 누구라도 아무 상관없으면서... 영원한 것처럼 속이지 말란 말이다." 수혁이 먼저 성큼 걸어가 버렸고 그 가까워지지 않는 뒷모습을 쫓으며 생각했다. 그것과는 달라. 그것과는 정말로 달라. 조금 더 익숙하다는 것은. 모르겠어? 장수혁, 너야말로 정말로 모르고 있어. 내게 익숙해진다는 게 어떤 건지. 익숙하다는 것이 내게 얼마만큼 어려운지.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 네가 말하는 그 위치에 앉히려는 노력도 하기 전에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릴 텐데. 지금 익숙하다는 것이, 그것이 내게는 마지막인 것을. 너야말로 모르고 있지 않냔 말야... 이월상품이 잔뜩 쌓인 곳 앞에서 해건이가 환호하고 있었다. "이거 봐!" "....그거... 그거 살 건 아니지? 제발 참아주라. 제발 좀 부탁하자." "결정했어! 이거야!" 해건이 손에 들었던 모자를 머리에 턱 하고 씌웠다. 빨강색 커다란 리본이 달린 챙이 넓은 왕골모자였다. "풋." 수혁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야...." 넓은 챙 아래로 해건의 얼굴이 다가왔고 다음 순간 입술이 스친다. "해...." 수혁이 웃음을 멈추었고 나는 그 자리에 굳어 섰다. 해건이 환하게 웃었다. "이걸로 다시 시작이야. 알겠어? 아무 것도 달라진 건 없다구. 모든 건 원점인 거야. 이걸로... 됐어." 그리고 룰루랄라 해건이 양팔을 좌우로 커다랗게 흔들며 앞서 가버렸고 수혁이 그 뒤를 따르며 짧게 말했다. "좋겠다." 좋으면! 니가... 니가 당해 봐! 홀로 남은 나를 주위의 넘치는 아줌마들이 혹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챙이 넓어서 다행이다. 어버버거리다 이내 크게 소리치며 뛰었다. "연해건! 장수혁!!!" 야속하게도... 멈추지도 않네. "아하하." 결국 집으로 음식을 사들고 와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먹는 것으로 저녁을 해결하기로 하고 앉은 길이었다. 해건은 뭐가 좋은지 아까부터 계속 아하하거리며 웃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좋냐." "너 재준이 얼굴 봤어? 완전히 뻑 갔다구." "나라도 그랬으면 뻑 가." "아하하. 진짜 재밌다." "재미가 좋기도 하겠다. 난 이제 거기 다시는 못 가." "어차피 잘 가지도 않았으면서 뭘 그래?" "그게 같냐?" "너무 쫀쫀하게 그러지 마." "쫀쫀하다는 말로 끝날 문제냐, 너는." "그만하고 먹기나 하자." "넌 친구의 위기가 안 느껴지냐?" "누구의 어떤 위기?" "넌 지금 친구가 변태의 길로 빠져드는 걸 그렇게 수수방관할 수 있냐구." "나더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좀 그러면 어때서 그래?" "니가 친구냐." "그렇다고 원수도 아니잖아?" 산뜻하게 대답한 수혁은 생선초밥을 한 입 꿀꺽 삼켰다. "어. 그거 2개밖에 없는 건데!" 해건이 말을 하면서 동시에 젓가락을 놀려 나머지 하나를 오물거리며 씹는다. "...맛있냐." "먹고 싶어?" 그러면서 해건이 아직 형태가 그대로 남은 초밥을 혀 위에 얹어 내민다. "...됐어." 딴 걸 집어먹으며 고개를 돌렸다. "앗! 장수혁! 그거 먹지마!" 두 개의 젓가락이 허공을 가로질러 격돌했다. 파바박 마치 불꽃이라도 튈 듯한 기세로 초밥을 서로 잡으려던 혈전은 수혁이 젓가락을 쥐지 않은 손으로 해건의 손을 막아 집은 것으로 끝이 나려나 했다. "장수혁! 인간도 아냐! 이런 반칙이 어딨어!" "그런 규칙을 언제 정했었냐?"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우적우적 수혁이 초밥을 씹더니 꿀꺽 소리를 크게 울리며 삼킨다. 벌떡 일어선 해건이 수혁의 머리를 잡고 앞뒤로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뱉어내! 뱉어내라구!!" "올리면, 니가 먹을 거냐? 먹는다면 기꺼이 올려주지." "안 먹어도 뱉어!" "먹지도 않을 걸 내가 뱉을 것 같냐?" 어라... 수혁이 머리 좀 울리겠는데. 보는 내가 걱정될 정도로 심하게 수혁의 머리를 잡고 흔들어대던 해건이 이제는 수혁의 등을 두드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빨리 안 뱉어?!" 보기에도 안쓰럽게 겨우 초밥 하나 먹고 정신없이 뒤흔들리던 수혁이 해건의 손을 탁 쳐냈다. "그만해. 뭐가 이렇게 길어?" "니가 먹고 안 뱉으니까 그렇지!" "도대체 내가 먹은 걸 왜 뱉어야 한다는 거냐?" "하지만... 하지만...!" 수혁이 차분하게 묻자 해건이 우물쭈물 대답하다 말고 훌쩍대기 시작했다. "너... 너... 나 안 주고..." "됐으니까 그만해. 이거 너 다 먹으면 될 거 아냐." 정말... 웃긴다. 우리는 20살이나 됐는데. 그런데 지금 이건 유치원에서도 보기 드물 애보기 현장인 것이다. 꾸역꾸역 남은 초밥은 쉴새없이 해건의 입으로 삼켜지고 있었다. "잠깐! 그럼 나더러는 뭐 먹으란 거야!" "아까 라면 샀잖아." "장수혁!" 초밥을 모두 먹은 해건이 벌떡 일어섰다. "왜." 수혁의 짧은 물음에 해건이 현관으로 달려나간다. "...초밥집에 가는구만." "사와도 너희는 안 줘!" "그 많던 걸 혼자 다 먹은 니가 할 대사냐, 그게." "야... 난 먹어보지도 못했어...?!" 해건이 나간 후 텅 빈 도시락을 보다 아쉬운 마음에 2개 남은 마늘쪽을 집적대다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그런데 정말 너, 해건이한테 약한 거 맞냐?" "맞아. 봤잖아. 남은 초밥 다 먹이는 거." "그런데 왜 나는 그게 아닌 것 같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전에도 그랬고, 결정적일 때는 해건이 너한테 꼼짝도 못하는 것 같던데?" "뭐, 큰 형님의 권위라는 거지." "누가 큰 형님인데?" "당연히 나. 우리 태어날 때부터 붙어 지낸 사이라서. 둘 다 외동이긴 한데 내 쪽이 어째 형처럼 되 버려서." "말하는 요지가 뭐냐, 요지가." "큰 형님은 동생을 몹시 소중히 생각하지만 기어오르게 하지는 않는다는 거지." "....기어오를 대로 올라서 더는 올라갈 데가 없어 보인다만?" "해건이는 어릴 적부터 말야, 엄청나게 성질 사납고 욕심 많은 녀석이었어. 솔직하지도 못하고." "인정함." "낯가림도 얼마나 심했다구." "그것도 인정함. 난 제일 처음에 빗자루에 맞았었다구." "해건이는 내가 그 녀석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아." "역시 인정." "한번은 아주 엄청나게 떼를 쓴 적이 있었는데 그땐 난리도 아니었지. 정말 두 번 다시 그 녀석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니까." 그래, 내가 묻는 게 그거야. 무슨 일이었냐는 거지. "그리고나서였어. 해건이가 큰 형님의 권위를 인정한 건. 떼를 쓰고 응석을 부리되, 선을 넘지 마라." "...넌 내가 이제까지 뭘 물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 쪽을 돌아보며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수혁이 빙긋 웃었다. "그건 비밀이야." 말하고 싶지 않다면야. 내가 10년을 알았다면 이 둘은 20년을 알았다. 내가 모르는 10년이 있다해도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내가 없던 10년에 대해서 내가 궁금해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둘만의 것이니까. 수혁이 담배를 피는 동안 나는 연기를 피해 부엌으로 들어갔고 냄비에 물을 얹었다. "나도." "뻔뻔스런 놈." "계란은 풀지 말고 파만 넣어서." "2개?" "1개. 어차피 곧 초밥도 올 텐데 뭘." 수혁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해건이가 줄까? 그 녀석, 약 올리느라고 더 안 줄텐데." "다 주게 돼있어. 라면이나 남겨 놔. 해건이 것도 끓여야 할 테니까." 그리고 우리 라면을 끓여서 그릇에 나눠 담기 시작했을 때 해건이가 돌아왔고 수혁이의 예언은 적중했다. 3인분을 사온 것이다. 그리고 해건이가 말했다. "나도 라면! 계란 풀지 말고!" "....준비 끝났다." 역시 10년이라는 것과 20년의 차이란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거였다. 덕분에 나는 라면으로 배를 불리기 전에 맛있는 초밥을 먹을 수 있었다. "술 한잔하자." "그럴까? 혹시 내가 술 살 때마다 아저씨가 니네한테 전화라도 하는 거냐?" 새로 사온 잭 다니엘과 프링글스 한 통, 물잔을 내놓았다. "마시고 있어. 과일 좀 잘라갈 테니까." 오렌지와 사과를 자르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 오기로 한 사람 있어?" "아니. 누구지?" 인터폰을 들자 희연의 얼굴이 보였다. "어쩐 일이야?" [문이나 열고 말해.] 곧 희연이 검은 에르메스의 핸드백을 흔들며 나타났다. "어머? 계모임이야? 나도 한잔해도 되지?" 해건의 옆을 비집고 앉은 희연이 해건의 볼을 손가락으로 잡고 쭈욱 당겼다. "사내자식이 입도 싸지." "아야야. 머어어!" "뭐라니? 자주지도 않았으면서 그럴 꼰지르니?" "내가 아내써." "그럼 니가 안 하면 내가 했니?" 해건은 울상을 지으며 수혁과 나를 번갈아 돌아본다. 그냥 뿌리치면 될 걸 여자에게는 무조건 약한 해건이었다. "놔 줘. 내가 했으니까." "거바. 내가 아냈다니까." "뭐, 무슨 상관이야." 희연은 싱글잔 하나에 찰찰 넘치도록 술을 부운 다음 한번에 쭉 들이켰다. "안주 아직 멀었어?" 접시에 껍질만 벗겨 대충 담은 과일을 내가며 물었다. "어쩐 일이야?" "근처에 왔다가 생각나서." "별일이네? 내 생각이 다 나고." "낮에 아버님 전화 왔었거든." "아버님?" "우리 아빠 말고 니네 아빠." "흐응." "집에는 통 안 간다며? 반포에도 안 가고." "그 아저씨가 너한테 연락하는 줄은 몰랐는데." 얼음 하나를 넣은 더불잔을 들고 한 모금을 홀짝 마셨다. "가끔 만나서 밥도 얻어먹어." "사이가 좋네." "그렇지, 뭐." "근데 정말 그것 때문에 온 거야?" "설마 그렇겠니? 내 카드 너한테 있지 않아?" "카드? 없는데." "너한테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럼 어디 둔 거지?" "애인한테나 물어보지?" 비꼬는 기색으로 끼어든 것은 수혁이었다. "어머나? 무슨 소리야? 내 애인은 여기 있는 한재준인데?" "그럼 남자친구." 해건이가 이번에는 끼어 들었다. "음... 그런가." "요즘은 너 조신해졌다고 소문났더라?" "정말?" "루카스에도 안 다닌다며?" "요즘 만나는 애가 조용한 걸 좋아해서." "허." 짧게 경탄을 발하는 수혁을 가볍게 흘겨본 희연이 몸을 일으켰다. "유강이는 특별해." "잘났네, 진짜." "그러는 너야말로 한재준한테서 졸업이나 하지 그래?" 허를 찔린 해건이 술을 부어 훅 마신다. "너한테는 아까운 줄이나 알아." 역공에 이은 또 역공. "그래도 너 안 줄 거니까 걱정 마." 해건이 입을 꾹 다물었고 수혁이 일어섰다. "먼저 가야겠다." "어딜!" "11시야. 오늘 아버지와 면담이 있어서." "칫." 혼자 뭐라뭐라 웅얼거리는 해건의 머리를 쓰윽 쓰다듬어준 수혁이 내 쪽을 보았다. "수고해라." "니들은 여전히 궁상맞게 놀고 있구나아." 희연의 평가에 수혁이 짧게 말했다. "너도 나와. 태워줄 테니까." "아이씨. 오늘 유강이 만나기로 했는데. 카드 어디 둔 거지." 술잔을 내리고 지갑을 들었다. "가져 가." "너, 미쳤냐! 쟤한테 뭐하러 주고 그래?" 해건이 열을 내기 무섭게 희연이 카드를 나꿔챘다. "고마워. 넌 정말 사랑 받는 남편이 될 거야." "다 끝났으면 빨리 와." "자기, 안녕." "빨리 가!" "간다." "빨리 가라니까!" 수혁과 희연이 가고 난 후 해건이 잔을 채우며 투덜거렸다. "진짜 미친 거 아냐? 딴 놈이랑 뒹굴라고 돈을 쥐어주냐? 니들 대체 뭐야?" 아... 그건 생각해보지 못했다. 채유라는, 희연이와 섹스를 할까. 어떤 얼굴로? 왜... 갑자기 이런 게 궁금해질까. 술잔을 비웠다. "천천히 마셔."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채유라에게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잖아. "야, 한재준. 왜 그렇게 급하게 마셔?" 그런 게 아닌데... 그런데. 어째서... 그 얼굴이 갖고 싶어지는 거지.... "한재준!" 왜... 그 얼굴이... 갖고 싶은 걸까. 나는... 나는... "어라...? 재준아? 재준아?" 그래, 채유라가 '상대'라는 것으로 보이는 거다. "미치겠네. 혼자 퍼마시더니 이게 뭐야! 난 한잔밖에 안 마셨다구!" 해건은 혼자 연거푸 술을 마셔대다 혼자 뻗어버린 재준을 내려다보며 과장된 한숨을 쉬었다. 뒤로 길다랗게 몸을 뻗고 누운 재준을 해건은 잠깐 바라보았다. 이 얼굴... 좋아. 무덤덤해 보이는 이 눈이 좋아. 특별히 어딘가 잘 생긴 구석은 없다. 하지만 평범한 눈, 코, 입이 모여서 이뤄진 이 얼굴은 근사했다. 수혁이처럼 한 눈에 드는 미남은 아니지만 볼수록 새까만 눈동자가, 웃지 않는 그 눈이... 잊혀지지 않게 된 것이다. 해건은 손가락을 내밀어 조심스럽게 재준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끝이 조금 날카로운 코와 가늘지도 두껍지도 않은 평범한 입술을. 언제부터였을까. 재준을 좋아한다고 깨달은 것은. 자신은 대체 언제부터 재준을 좋아하게 되었던 걸까. 대체 어째서... 재준을 좋아하게 되었던 걸까. 알지 못한다. 어느 순간, 재준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이제 와서 이유를 생각해도 포기되지 않는다. 이제 와서 언제였나를 생각해도... 돌아갈 수 없다. 재준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은 해건은 힘껏 당겼다. 180이 넘는 70킬로의 몸이라는 것은 해건으로선 가뿐히 들어 나른다는 것을 시도할 수 없게 만드는 사이즈였다. 질질 끌어 겨우 침실로 데려온 재준을 침대에 반쯤 걸쳐놓고 반대편으로 올라가 힘껏 당겨 올렸다. 산을 오르기 위해 자일로프를 당기던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간신히 재준을 침대 위에 눕힌 해건은 후아-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그 옆에 앉았다. 재준은 그렇게 굴리고 끌었는데도 잠이 든 채였다. 해건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입술을 재준에게로 가까이 가져갔다. 그 다음 순간 재준이 손을 뻗어 해건의 머리를 안아 당겼다. "재, 재준아...?" "갖고.... 싶어..." "재준아....." 해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재준은 알지 못한 채 해건의 입술을 품었다. 해건의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지만 재준은 알지 못한다. 천천히 해건은 몸의 힘을 빼고 재준에게로 엎드렸다. 재준은 자꾸만 갖고 싶다라고 말을 한다. 울면서 해건은 재준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재준이 천천히 눈을 떴다. "채...유라....?" 재준의 손이 해건의 목덜미께로 늘어진 머리칼을 만진다. "채유라...?" 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래... 채유라... 보고 싶었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재준은 그저 눈앞에 채유라의 얼굴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 머리칼이 만져진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울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채유라가 있었다. 다시 입술을 겹치자 채유라가 울면서 입술을 더욱 깊이 포개어온다. 손을 뻗어 셔츠를 밀어올렸다. 해건은 어깨 너머로 떨어지는 셔츠를 느끼며 재준에게 더욱 매달렸다. 재준의 입술이 상반신의 빈곳에 빈틈없이 매달렸고 해건은 그저 재준의 머리를 안았다. 바지가 벗겨졌다. 해건은 자신의 내부를 뚫는 재준을 느끼며 끌어안지만, 울면서 몇 번이고 추스리며 끌어안지만. 재준은 말했다. "채유라..." 해건은, 소리내어 울어버렸다. 좋아해도 소용없어. 해건은 기억해냈다. 언젠가 재준이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을. 눈을 떴을 때 정말로 놀라고 말았다. 그야말로 양말 한짝 신지 않은 해건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나도, 였다. 점점이 떨어진 핏방울과 몸의 군데군데 남은 붉은 반점. 해건이와 나는 섹스를 했다. ....맙소사. 왜 이렇게 된 거지. 등을 돌리고 침대에서 내려서는데 해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냉정하네." "....괜찮냐." "몰랐는데 호모도 아무나 할 게 아니더라. 죽는 줄 알았어." "....그래....?" "이제 어쩔래?" "...미안하다." "그렇겠지. 그거 말고 니가 할 말이 또 뭐가 있겠어." "해건아....! 난..." "어차피 나 혼자 좋아했지. 너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내 일이지." "...."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지금?" "....미안하다." "나쁜 자식! 너, 정말...! 왜 이렇게 못됐어! 그냥... 그냥..." 몸을 돌려 해건을 보았다. 울고 있었다. 팔을 뻗다 멈추었다. 위로할 수 없었다. "....상관없어. 이제 아무 것도 상관없어. 계속해서 좋아할 거니까. 그러니까... 상관없어." 해건이 눈물이 멈추지 않는 눈으로 나를 본다. 그리고 내 머리를 당겨 입술을 겹쳤다. "알겠어? 세다리고 네다리고. 세컨이고 뭐고. 그래도 니가 좋아. 그래도 난 너 좋아해. 넌 아무나 좋아해 버려. 난 내멋대로 널 좋아할 거니까. 이렇게라도 가져야겠어. 이것도 싫다고, 안 된다고 하면, 여기서 죽는 거야." "해건아... 하지만.... 그건....!" "어차피 너란 녀석, 한번도 내 생각 같은 거 해준 적 없잖아. 그러니까 신경 쓰지마. 넌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 나도 그럴 테니까. 왜? 찔려? 찝찝해?" "...." 입을 다물고 해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울고 있다.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지만 해건의 말투는 독했다. "내맘대로 좋아하게 내버려둬." 그리고 해건이 침대위로 아무렇게나 뒹구는 셔츠를 입고 바지를 입었다. "택시 불러." "데려다줄게." "됐어. 택시나 불러." 콜택시에 전화를 하고 택시가 오기로 한 10분이 지날 때까지 해건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인터폰이 울리며 택시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려왔고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세운 해건이 몸을 돌려 나가기전 말했다. "두고 봐. 너, 절대로 나랑 아무 상관없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해건이 떠났다. ...맙소사. 꿈이라고 생각했다. 채유라라고 생각했다. 그건 꿈도 아니었고 채유라는 더더욱 아니었다. ....최악이다. 찰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리는 것 같지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 일 이후 어딘가 몸 속의 회로가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해건이에게서는 매일 전화가 오고 가끔은 직접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그때마다 해건이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빴어? 내가 그렇게 심했어? 왜 이런 식으로 시위하는 거야?" "시위하는 게 아냐." 그 말은 정말이었다. 나는 시위하려는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시위를 하려면 오히려 해건이 해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저 그 날 저녁, 잠이 들었을 때 채유라의 꿈을 꿨고 그 뿐이다. 다만 그 꿈을 매일 같이 꾸게 되면서 힘이 없어졌을 따름이다. 꿈에서 채유라는 말한다. "내게서 너는 무얼 바라는 거야? 네게는 '내'가 필요한 게 아니잖아? 너는 내게 무언가를 바라지만 나는 그걸 줄 수 없어. 너도 사실은 알고 있잖아? 나는 네 상대가 아냐. 너와 나는 닮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뿐이지. 닮았지만 그게 다야. 네가 바라는 건, 내게 없어." 내가 무얼 바랬었지....? 계속해서 그 생각만 났다. 내가 채유라에게 바란 것에 대한 생각. 나의 일상을 버리게 해 줘. 매일이 지겨워서 지쳐만 가는데 나는 어떡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너는 자유롭겠지? 그러니 조금만 나를 도와줘. 너라면, 도울 수 있을 거야. 일상을 버릴 수 있도록, 도와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맙소사. 여기가 무슨 시체안치실이야? 커튼도 다 치고 드러누워선 뭐하는 거야?" 희연이가 침실의 커튼을 활짝 열어 젖혔다. 아침인지 이른 오후인지 구별할 수 없는 환하고 투명한 햇살이 방안으로 넘실거리며 밀려들어왔다. "학교도 안 간다며? 수혁이가 전화를 다했더라니까. 가서 뭐하나 좀 봐 달라고. 웃기지 않아? 응? 안 웃겨? 난 한참이나 웃었단 말야. 끝내주는 친구들이 뭐가 아쉬워서 나한테 전화를 하냐구." 팔을 들어 눈 주위로 그림자를 만들고 멍하게 창 밖을 보는 나를 본 희연이 시트를 휙 걷어냈다. "하긴 네 꼴을 보니 오기 싫긴 하겠어. 뭐, 친구라서 부탁했다고 할 테지만 말야." 그리고 깨달았다. 내게 있어 비일상인 것이 채유라에게는 일상이라는 것을. 그리고 채유라는 그 일상을 버리려 하지 않음을. 아니, 버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 생각만인지도 모른다. 버릴 수 없어 얽매였다거나 버릴 이유가 전혀 없다던가. 채유라에게는... 내가 바라는 비일상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자자, 좋아하는 샤워라도 해. 시체놀이는 그만하고." 내 엉덩이를 툭툭 치며 밀어내는 희연이의 손목을 잡았다. "어머? 나, 시체는 취미 없는데?" "유강이. 유강이 전화번호!" 희연이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건 왜?" "어서!" "기억 안 나는데 이걸 어쩌나?" 손목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가르쳐 줘. 부탁이야." 가만히 내 눈을 마주보던 희연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파. 손 놔." "제발. 부탁이야." "한재준이 제발이라며 부탁을 다하고. 급한가 보네?" "그래, 급해. 그러니까 가르쳐 줘." 희연이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해건이가 하도 자주 사용하는 거라 이제는 아무 느낌도 없었지만 이럴 때 정말로 진심이란 것을 알리지 않으면 도저히 안 통하는 것이다. "정말로 급해서 그래. 꼭 알아야 해. 할 말이 있는 것 뿐이야. 네 얘기하려는 것도 아니고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도 없어. 그저 내가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부탁이야." "....이 번호 맞는지는 나도 몰라." "알았어. 그거라도 가르쳐 줘." "01*- 987-6543."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손목을 쥔 손이 느슨해지자 희연이가 탁 뿌리치며 몸을 세운다. "갈래." "...고마워." "됐어." 쌀쌀맞게 대꾸를 한 희연이 카드를 휙 내던졌다. "많이 쓰길 잘 했지. 쳇." 희연이가 가고 나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침대에 앉아 있는 것도 내키지 않아 일어서 서성이며 번호를 하나씩 주의 깊게 눌렀다. 받아. 제발, 받아. 신호음이 뚜르르 울리고 있었지만 통화연결음은 들리지 않는다. 받아 줘. 할 말이 있어. 네게 바라는 건 처음엔 내 일상을 버리고 싶어서였는지도 몰라. 하지만 이제는 달라. 그게 아냐. 난, 난.... [누구세요?] 초인종이 울릴 때 보통 말하는 것 같은 누구세요? 라는 말로 채유라는 전화를 받았다. "....잘 지내?" [....희연이구나.] "그래." [용케 번호를 가르쳐줄 생각을 했네.] "그러게." [다시 연락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틀렸나?] "만나자. 만나서 할 얘기가 있어." [....할 말 없는데. 게다가 만나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도 만나. 만나서 내 얘기만 들어 줘.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그냥, 들어만 줘." [....곤란한 말을 하네.] 채유라가 전화를 끊으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이지 않겠지만 필사적으로 관절이 새하얘질 때까지 수화기를 틀어쥐고 말했다. "만나기 싫다면 지금이라도 들어줘. 지금 말할 테니까 끊지 말고 들어줘." [...] 수화기 너머로는 한참이나 침묵이 이어졌고 이윽고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채유라가 침묵을 찢었다. [후우... 그래.] "좋아해." [...정말로 곤란한데, 이거.] "내가 네게 무얼 바랬건 잊어. 그런 거 모두 아무 소용없는 거니까 잊어." [니가 나한테 바란 게 대체 뭔데?] "내가 나빴어. 내가 해야할 일이었는데. 나밖에 못하는 거였는데. 귀찮았을 거야.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단지... 네가 좋아." [....그래?] "...정말로... 정말로... 그게 끝이야?" [....그래.] "...정말로... 정말로.... 소용이 없는 거야....? 그래...?" [....그래.] "친구가... 친구가... 그러더라. 벌받을 거라고.... 이렇게 가까운 일이었나... 이렇게 가까운 일인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나.... 벌받는 건가봐... 그렇게 우습게 보다...벌받나보다. 나는 안 그럴 줄만 알았는데... 나는 알지 못할 줄만 알았는데... 겨우... 겨우, 깨달았는데... 그래도... 조금도 소용이 없구나... 하지만 나는 네게 소리칠 수도 없어. 그 녀석이 그랬던 것처럼... 네게 소리칠 수도 없어... 모두 내 잘못이야. 내가... 내가 나빴던 거야..." [자학하지마. 네가 나빴던 일 같은 건 없었어.] "언제... 언제 이렇게 된 걸까...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모든 일에 인과가 있다는 건 거짓말이야. 어떤 일은, 그냥 일어나는 거야. 그냥, 그 일은 일어나 있지.] 수화기를 움켜쥔 채 바닥으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때... 그때... 네 말을 들었으면.... 그랬으면... 그랬으면... 달라졌을까...?" [일어나지 않은 일이 생각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응...? 달라졌을까....?" [....꽤 오래 전의 일이긴 하지만. 호텔에서 술 마시던 날, 기억나?] "....기억나." [나는 그때 분명히 네게 말했었어. 그러니 기억해낸다면. 그때는 네가 이제 어떡해야할지를 알게 되겠지. 이제는 네게 달린 거야. 알겠어?] 하지만 그때 나는 술 취해 있었고 채유라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이것은 또 다른 거절의 말인가. [거짓말 또 하나 할까?] "거...짓말...?" [나는 이게 마지막이야. 나는 세 번을 다 써버렸거든.] "나 역시 마지막이야!" [거짓말에 이은 또 하나의 거짓말- 이라는 거겠지만. 도박, 좋아해?] "도...박?" [호텔에서의 나. 그리고 네 차안에서의 나. 그건 달랐어. 분명히 달랐지. 어느 것이 진심이었을까.] "....모르겠어...! 기억도 나지 않는데...!" [그럼, 이걸로 끝이야.] "잠깐만! 기억해내면! 기억해내면... 답이 있어? 응? 답이... 있어?" 전화기 너머로는 정말로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꽤 오랜 동안 흐른 침묵으로 인해 내가 전화가 끊긴 것은 아닌가 걱정을 시작했을 무렵 채유라가 내가 들어왔던 그 장난기 서린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네가, 내게 보여줘 봐. 그 답이란 것을.] "내가.... 네게....?" [그래. 네가, 내게.] "그것이... 그것이... 답이 되는 거야...?" [그럴까. 모르겠어.] "아아... 채유라... 좋아해...." [하지만 쉽지 않을 거야. 난 달아날 거니까. 너는 어쩌면 보여줄 수조차 없을지도 모른단 거야.] "어디로...?" [그걸 말할 리가 없잖아. 아, 미안. 정말 끊어야겠어. 지금 가야하거든.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 건, 듣기만 하라는 건, 그저 말하고만 싶다는 건, 정말이야?] "...아니. 거짓말이야." [...그래. 그렇구나. 그럼, 안녕.] "기다려!" [미안하지만 이제 이 번호, 끊길 거야.] "....그럼 어떻게 네게 연락할 수 있지....?" [글쎄. 그거야 네 일이니까. 잘해 봐. 진짜 안녕이다.] 뚜두 길게 소리가 울리며 전화가 끊겼다. 툭- 하고 손에서 수화기가 떨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채유라는... 채유라는... 내게 뭐라고 했었지...? 내게... 뭐라고 말했던 걸까. 내게... 잡히길 원해...? 아니, 잡히는 걸 원치 않아....? 어느 것이 정답이지? 어느 것이 채유라의 답인 거야.... 채유라의 진심이란 것은.... 대체 무슨 모양을 하고 있는 걸까. 단숨에 심장을 꿰뚫어 죽게 할 창의 모양?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를 건질 날개의 모양? 만질 수 없도록 숨길 장막의 모양? 내가 채유라에게 보일 답이란 것이 채유라에게 의미가 있는 걸까. 보여달라니. 내게 그 답을 보여달라니. 내 답을 받아들인다는 그런 뜻인 걸까. 대체... 채유라의 진심은 어떤 모양인 걸까... "한재준! 재준아!" 해건의 목소리였다. 나는 오전 수업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려던 중이었다. "....어디 가?" "학교. 수업이 있거든." "얘기 좀 해." "갔다 와서 하면 안 될까? 수업을 너무 많이 빠져서. 다음 주면 기말이잖아." "잠깐 앉아. 먼저 듣고 가." 그렇게 말한 것은 수혁이었다. 해건의 뒤에서 수혁이 몸을 드러냈다. "아침부터 대체 무슨 일이야? 지금 몇 시줄 알아? 오전 8시야, 8시." 해건과 섹스를 한 지로부터 23일이 지났다. 그 동안 해건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대했고, 나 또한 그러기로 했다. 그것이 이제는 너무나 잔인한 일임을 알지만, 전과 다른 이유로 나는 받아줄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채유라를 좋아하니까. "그 채유라 얘기야." 우뚝 걸음이 멈추었다. 수혁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흥. 아주 관심이 지대하시네, 그래." 해건의 비꼬는 말을 흘려들으며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앉아. 서서 빨리 듣고 끝낼 얘기가 아냐." 차분한 수혁의 말에 소파에 몸을 앉혔다. "이제 얘기해 봐." "이 얘기 들으면 아마 웃을 거다. 나도 그랬거든." "뭐냐구!" 해건은 맞은 편에 앉아 입술을 꼭 다물어 붙이고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옆에 앉은 수혁이 담배를 꺼내 들고만 있는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이리저리 돌리던 수혁이 불을 마침내 당기고는 말했다. "굉장히 자주 들어본 얘기라." "그게 뭐냐구!" "작지만 건실한 공장의 사장님이었어. 그 채유라의 아버지가. 그러다 사업을 좀 키우려고 돈을 빌렸는데. 그게 해건이 아버지." 해건의 얼굴을 보았다. 냉정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돈을 못 갚게 됐는데 그걸 갚으라고 찾아다닌 사람이 우리 아버지." "...하." "공장을 밀고 그 땅에 건물 올린 게 너희 아버지. 저번에 건물 올린 곳 있지? 거기. 뭐, 아직 짓고 있는 중이지만." 수혁의 얼굴도, 해건의 얼굴도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조금 참담해져서 말했다. "정당한... 정당한... 방법이었어?" "...정당하지 않았지." "넌 이용당한 거라구!" 해건이 소리지르지만 그 얼굴을 보는 나는 담담했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절망하고 있었다. 채유라가 정말로 그런 걸 복수하고 싶어했다면, 내 곁에 좀 더 있어주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유치한 생각밖에 들지 않아 복수조차 하고 싶어하지 않은 채유라를 향해 나는 조금이지만, 절망해버리는 것이다. "뭘? 어떤 걸 이용당했다는 거야? 그런 거 없었어. 조금도... 없었어." "어째서 너였는지 모르겠지만 셋 중 누구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는 거야. 아니, 너였다는 것이 가장 이상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해건이 아버지, 그리고 우리 아버지니까." "아냐! 그렇지 않아! ... 그런 게 아냐." "그 자식, 지금 어딨어?" "...없어." "없다니!" "갔어. 떠났다구. 알아들어? 안녕- 하고 가버렸다구." "....확실한 거 맞아? 언제 나타나서 뒤통수 맞을 지 모르는 거 아니냐구." "그거 미안하게 됐군. 정말로 가버렸으니까." "...그럼 됐어. 학교나 가라." "...찾아야겠어." "찾아서 뭐! 그 자식을 왜 찾겠단 거야! 찾아서 어쩐다구!" "찾을 거야. 찾아서... 아무튼 찾을 거야." "한재준!" 해건이 비명을 지르듯 내 이름을 불렀다. 지금 내 기분은 뭔가 고소하다는 기분이었다. 수혁이나 해건이는 채유라가 내게 뭔가를 노리고 접근했다고 생각했겠지. 그런데 채유라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떠나버렸다. 굉장히, 시원한 기분이었다. 절망했으면서도, 그러면서도 가슴 한 켠이 시원해진다. 복수같은 가슴아프리만치 치졸한 이유가 아니어도 만났다는. "재준아. 찾는다는 거, 난 반대다." 수혁의 말에 돌아보았다. 언젠가처럼 진지한 얼굴이다. "소용없어. 난 찾을 거니까." "그냥 내버려두면 되는 일이잖아. 니 말대로 떠난 녀석이야. 아무 것도 하지 않고서. 그런데 찾아서 어쩌겠다는 거냐? 사과라도 하겠다는 거냐?" "그래, 하라면 할거야. 사과든 뭐든 할거라구." "왜냐." "반했어. 좋아하니까." "하... 그래?" 수혁이 담배를 눌러 껐다. "이상한 거 정말로 못 느끼겠냐?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데 어쩌다 우연히 만나서 너한테 접근한 거면 그나마 나아. 하지만 알고서 그랬다면?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어디선가 들었겠지.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어디선가? 어디서 들었다는 건데? 그리 쉽게 들을 만한 얘기가 아냐. 여기에 넌 돈이 얼마가 걸렸을 것 같아? 표면에는 아무도 안 나와. 알아들어? 그 돈을 빌려준 건 해건이 아버지도 아니고 협박하러 찾아다닌 것도 우리 아버지가 아냐. 그 건물 명의도 너희 아버지는 아니라구. 몇 번이나 속여서 숨겼다고. 그걸 어디선가 들었다고? 말도 안 돼는 소리하지마." "알았건 몰랐건 무슨 상관이야! 그렇다고 그 사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참 간단하구나? 그렇게 좋아? 좋으니까 뭘 해도 괜찮다는 거야?" "그것과는 다르잖아!" "다르지 않아! 어디가 다르다는 거야! 그래... 좋아하는 쪽이 언제나 그렇지. 불공평해. 이런 거.. 이런 거 정말 싫다구!" 수혁이 해건의 머리를 당겼다. 해건은 울지는 않았지만 수혁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내 쪽을 보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하지만... 그래도 난 찾아야겠어. ... 나중에 보자. 먼저 간다." 집을 나서 주차장으로 들어와 한참이나 차에 기대어 서 있었다. 왜... 하필 나였어? 수혁이 말처럼 누구라도 이상하지 않은데. 오히려 내가 아닌 것이 더 그럴 듯해 보이는데. 어째서... 그게 나였던 거지...? 응? 채유라... 왜... 나였던 거야...? [불편한 건 없고?] "응. 여기엔 뭐든지 다 있네. 조금도 불편하지 않아." [지루하지는 않아?] "응. 아직은 괜찮아. 그런데 넌 언제 와?" [글세. 조만간에 들리기는 하겠지만 잘은 모르겠는데.] "내가 보고 싶지는 않아?" [쿡. 넌?] "난 보고 싶어." [아마 나도 그럴 거야.] "거짓말. 넌 항상 나한테 거짓말만 하지." [네가 듣고 싶어하니까 그런 거잖아? 얌전히 기다리라구. 곧 들릴 테니까.] "그래, 알았어.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더 거짓말 해 줘." [사랑해. 그래서 미치도록 보고 싶어.] "...으응... 그래, 맞아..." [유라야.] "응?" [그 녀석, 어땠어? 솔직히 말해 봐.] "...좋은 녀석이야." [좋아졌어?] "...아니. 그것과는 달라. 내가 사랑하는 건 너인 걸." [쿡. 착하네.] "맞아. 착해. 그래서 난 거짓말하지 않아. 사랑해." [이틀 후에 갈 테니까. 상이야. 솔직히 말했으니까.] "기다릴게." [그래.] "..." [...] "오늘은 이상하게 다정하게 굴고 있잖아." [...넌, 이걸로 만족해?] "....응. 만났던 걸로 충분해. 만나길 잘 했던 것 같아." [...그렇군. 그럼.] "....안녕." 유라는 이미 끊어진 전화를 들고서 그렇게 말했다. "예. 이름은 채유라고 키가 185가 조금 넘어요. 그린파더라는 가게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거기서는 유강이라고 했구요. 기간이나 비용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찾아주세요." 수화기를 내려놓고 심호흡을 하는데 뒤에서 해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심이네." "아... 왔냐."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8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저녁은 먹었어?" "...아니." "지금 난 먹을 건데, 같이 먹을래?" "...응." 주방으로 들어와 냉장고를 뒤적였다. "아무래도 스파게티 말고는 할 게 없는데 괜찮아?" "크림 스파게티." "토마토 소스 사뒀는데 그건 안 되냐?" "싫어." "...후우, 그래. 그럼 기다려." 우유와 생크림을 넣고 소스를 끓인 후 삶은 면을 버터에 볶는데 해건이 말했다. "냄새... 좋은데." "그래? 마침 생크림이 있어서 다행이었어. 아침에 바게트 사면서 사 온 거였는데 남았더라구." 하얗고 걸쭉한 소스를 끼얹어 접시를 내자 해건이가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젓가락 줄까?" "...아니." 포크에 면발을 둘둘 말던 해건이 포크를 탁 내리고는 물컵을 들었다. 물컵의 가장자리에 입술을 대며 해건이 조용히 물어왔다. "그 녀석의 어디가... 좋아?" 방금 막 입에 물었던 면발을 입안으로 모아들이고 해건의 얼굴을 응시했다. "모르겠어. 어디가 좋은지. 그냥, 어느 순간 그렇게 돼 있었어." "이상하네... 한재준이 그렇게 말하니까... 이상해." 포크를 입술로 가볍게 물며 해건이 말했다. "맛은 어때, 먹을만해?" "아, 맛있어. 너, 스파게티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니까." "스파게티 하나냐? 이것저것 그래도 다 하잖아." "아, 그러고 보니까 그렇네. 요리도 제법 하고 빨래며 청소도 혼자 살면서 잘 하고. 나는... 그래서 좋아진 건가..." 입을 다물고 이제는 조금 퍼져버린 면발을 이리저리 뒤적이는데 해건이 불쑥 고개를 들고 나를 향해 웃었다. "아마 고2때였던 것 같아. 처음으로 네가 그런 식으로 보인 게. 수학여행 갔을 때 기억나? 다들 술 취해서 뻗었는데 멀쩡한 얼굴로 친하지도 않은 녀석들한테까지 이불을 챙겨주고 있었어, 너." "그래...?" "굉장히 사소한 것들이 계기가 되는 거지, 모두가. 별 것 아닌 일인데도 어느 순간 못 견디게 아련해지고 잊을 수가 없게 되는 거야. 나만 해도 그러니까. 그 이불 덮어주는 게 사실 뭐 어떻다는 거냐구. 그 일을 하는 얼굴이 싫은 얼굴이 아닌 게 또 어떻단 말이야. 안 그래? 그런데도 돌이켜보면 그 때의 니 얼굴이 정말로 선명하게 남아 있어. 엉망이 된 녀석들을 바로 눕힐 때 조금 웃고 있던 입술이라든지 이불깃을 바로 하는 차분한 얼굴이라든지..." 해건의 이런 얼굴은... 처음인 것 같았다. 쑥스러운 듯 하면서도 묘하게 진지했다. 그리고 어느 때도 본 적이 없는 다정한 얼굴로 부드럽게 웃으며 그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에, 얼마간 마음이 아파졌다. "너도 그런 거겠지... 거창한 이유 같은 것 전혀 없어도... 그냥 그런 사소한 것이 마음에 남아버린 거겠지... 그래서... 좋아진 거겠지..." 고개를 조금 숙인 해건이 포크를 느릿하게 움직여 면발을 집어 올리고는 유심히 바라보다 이내 포기한 듯이 입안으로 가져갔다. 오물거리며 주욱 당겨 삼킨 해건이 싱긋 웃었다. "맛있어, 역시." "....미안하다." 해건의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어서 시선을 떨구고 그렇게 말하는 내게 해건의 작게 웃음 짓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 단지 아직도 믿을 수가 없는 건... 어째서 내가 아닐까... 하는 거야. 왜 내가 아니지? 그런 사소한 일은.... 내 쪽이 훨씬 더 많았는데... 어째서... 그건 내가 아니지...?" 해건이 손에 들었던 포크를 떨어트렸고 포크는 챙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접시에 부딪혔다. 접시에 부딪혔다 곧 바닥으로 다시 퉁겨져 내린 포크를 식탁 아래로 허리를 숙여 주워 올린 후 몸을 일으켜 싱크대로 얌전히 내려놓았다. 새 포크를 가져다 놓고 해건의 얼굴을 보았다. 방울방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해건은 멍한 얼굴로 포크를 내리는 내 손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해건이 아닌 것 같았다. "이런 거... 너답지 않잖아." 해건이 고개를 푹 숙였다. 고개를 여전히 숙인 채 팔꿈치만 들어 식탁의 새로 가져다놓은 포크를 쥔 해건이 접시를 헤집다 조용히 말했다. "넌... 넌... 내가 네가 생각하는 것과 똑같아서... 날 사랑할 수 없는 거야." 해건이 가만히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보았다. 들여다보이는 해건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물기가 고여 있었고 그 색은, 몹시 까맸다. "언제나 알아오던 네가 아는 그 연해건의 모습과 다른 것이 없기 때문에 날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거야."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직 절반 정도밖에 먹지 못했지만 이미 식욕은 사라진 후였다. "미안... 이라고 말했던 거 기억나?" "...아...." 병원에서의 일이다. "어째서인지 궁금하지 않아? 응...? 궁금하지 않아...?" 해건의 목소리는 작다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낮게 속삭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다른 소리가 나면 사라질 것만 같이 조그만 목소리여서 나도 모르게 호흡도 억누르고 말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어. 알겠어? 난... 네가 알던 연해건으로 사랑 받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됐잖아? 내가 아닌 상대가 있다니... 내가 사랑 받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아마 조금 다를 거야. 그런 나를 지켜봐 줘. 너한테 사랑 받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모습은, 네가 아는 연해건과는 정말로 다를 거야." "해건아...." 해건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할 수 없잖아...! 그런 모습의 나를 사랑할 수 없다면...! 그래서 달라지는 거야. 너한테 사랑 받기 위해서 달라지는 거라구! 그래서 친구인 네게 미안했어....! 알겠어? 사랑 받을 수 없다면... 너와는 친구조차 아니게 되니까... 네게 미안했다구! 너한테 연해건은... 친구니까... 그러니까 미안했어..." 울먹이며 그렇게 말을 한 해건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웃는 얼굴이었다. 말할 수 없는, 내게는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눈동자는 얼어붙은 채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면... 아마 너는 나를 사랑하게 될지도 몰라." "해건아..." "응, 정말로... 너는 나를 사랑하게 될 거야. 친구가 아닌 나는... 네게 사랑 받을지도 몰라..."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걸까. 그래도... 내게는 연해건은 친구라는 것을. 그래도... 사랑할 수는 없을 거라는 사실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해." 해건이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아니. 두고 봐. 넌 날 사랑하게 될 테니까. 틀림없이 그렇게 될 테니까."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해건은 울 것처럼 입술을 악문 채로 그래도 다정하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아니... 네가 그 녀석을 계속해서 사랑하게 되어도... 나도 사랑하게 될 거야. 그 녀석을 아무리 사랑해도... 나도 마찬가지로 사랑할 거야."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해건이 허리를 숙이자 내 얼굴 앞까지 해건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빙긋 웃은 해건이 고개를 숙였다. 해건의 입술과 내 입술이 닿았다. 입술이 닿은 채로 해건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너는 그 녀석을 사랑해. 그건, 가의 사랑이야. 그리고 너는 나를 사랑해. 이건, 나의 사랑이지. 알겠어? 어쩌면 다의 사랑도, 라의 사랑도 있을 지도 모르지. 세상엔, 그런 사랑도 있는 거야.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도 있는 거라구." 단지 입술만이 닿았을 뿐인 키스를 한 해건이 식탁을 손으로 짚고 몸을 똑바로 세웠다. 식탁의 건너편으로 어느 새 멀어진 해건이 깨끗이 비운 접시를 들고 싱크대로 돌아나갔다. "설거지 해 줄게." 내 앞의 접시까지 가져가 개수대 앞에 서서 수도의 밸브를 여는 해건의 모습은 확실히 내가 알아온 해건의 모습과는 다르다. 떼를 쓰는 아이의 모습도, 샐쭉 웃으며 가벼운 농을 건네는 오랜 친구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건, 사랑을 하는 진지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어딘지 섬세하고 여린 그 모습은 분명히... 달랐다. 나의 사랑이라... 그런 것이 정말로 있다는 것일까. 정말로.... 나의 사랑이란 것이 있는 걸까. 그 날 이후로 해건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 안 볼래?" "영화?" 수혁이가 손을 들었다. "난 패스. 선약이 있어서. 둘이서 데이트라도 하라구." "식스센스 재밌겠더라." "더더욱 패스해야겠다. 난 봤거든." "재밌냐?" "볼만해." "잘 됐네. 실은 둘이 보고 싶었거든." 해건이 앞에 놓인 아이스 모카를 한 모금 마셨다. "보러 갈 수 있지? 아니면 너도 다른 약속 있어?" 내 쪽을 보며 그렇게 말하는 해건의 얼굴은 빙긋이 웃고 있었다. 뭔가 가슴 안쪽이 덜컹하는 기분이다. 어딘지 수줍어하는 기색의 그 미소는, 그야말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할 것을 조금은 염두에 둔 조심스런 걱정이었다. "...아니." "나랑 보러 가는 거 싫어?" "...아니. 가자. 주말인데 표가 있으려나." 해건이 환하게 웃었다. 순간 눈앞이 어찔했다. 다행이라는 안도를 조금 움츠렸던 긴장과 은근한 설레임으로 날려보내며 웃음 짓는 해건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이번엔 내가 긴장되는 것 같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짠~" 해건이 지갑을 척 펼치더니 영화표를 꺼내 보였다. "미리 예매해 놨지." "내가 안 보러 간다면 어쩌려고 그랬냐." 조금 쓰게 웃으며 묻자 해건이 내 이마를 툭 손가락으로 쳤다. "혼자 봐야지, 뭐." "태평하네." 씨익 웃은 해건이 자리에서 일어서 화장실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수혁이 말했다. "해건이, 무슨 일 있었어?" "응...? 아니, 뭐... 왜?" "그냥. 어째 얼굴이 산뜻한 게 좋아 보여서." "...그러냐?"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수혁이 길게 연기를 뿜었다. "사실 처음에 너한테 고백했다는 얘기 듣고 꽤나 놀랐거든. 그 후로도 계속 혼자서 악을 쓰는 느낌이라서 안쓰럽기도 하고... 암튼 걱정했었는데 저 얼굴 보니 어쩐 일인가 싶어서." 밝은 조명 아래를 보랏빛으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물끄러미 지켜보다 다시 화장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도 조금 다른 것 같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해건이가 귀찮다는 얼굴이었는데. 마지못해 상대한다는 얼굴이었던 녀석이 지금은 그냥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이 됐잖아. 그래서, 조금 놀라고 있어." 해건이 화장실을 나왔다. "미안한데 어쩌지?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집?" "별 것도 아닌데 엄마가 난리라서. 우리 엄마 알잖아." "그래, 그럼." "영화는 8시 30분 시작이니까 그때까지는 나올 수 있을 거야. 극장 앞에서 바로 만나면 되겠지?" "알았어." "나중에 보자, 그럼." 해건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멀어졌고 수혁이 다리를 왼편으로 바꿔 포개며 다시 담배를 물었다. "아침부터 나오라더니... 혼자 들어가 버리잖아." 손목시계를 보았다. "넌 어떡할 거냐?" "몇 시야?" "1시." "점심이나 먹고 들어가지 뭐." "약속은?" "저녁이야." 수혁이 반쯤 닳은 담배를 거칠게 재떨이에 비벼 껐다. "천궁이나 가자. 한정식 먹고 싶다." "그래." 스테이크는 서든 하우스, 한식은 천궁, 일식은 은종. 언젠가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는 장소였다. 천궁에 도착한 수혁은 안쪽의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차를 타고 오면서부터 담배를 입에서 떼지 않는 수혁이었다. "담배 좀 그만 펴라. 나도 숨 좀 쉬자." "해건이 말야. 처음 남자가 좋다면서 말한 게 17살 때였어." 불쑥 수혁이 입을 열어서 담배 연기를 날리기 위해 내젓고 있던 손을 멈추고 보았다. "...그래?" "내 친구였어." "...아." "어떻게 됐을 것 같아?" "...글세." "해건이가 찼어. 기껏 도와줬더니 말야. 석달만엔가 그러더라구. 도저히 아니라고. 덕분에 나는 그 녀석과는 두 번 다시 말도 못하게 됐지. 정말로 사이좋은 친구였는데 말야. 말도 없이 전학을 가버렸거든." "...서운하겠군." "그랬지. 큰 형님의 분노라는 건 그 일이었어. 별 일 아닌 것 같아?" "....아니.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해. 굉장히 슬픈 일이고." "그런가? 실은 이제 그 녀석의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아.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말야. 기억이 나는 건 아니라고 말하던 해건이의 불퉁한 얼굴하고 그 순간 내가 느꼈던 분노의 감각 정도랄까." 수혁이 담배를 비벼 끄고 나자 한복을 차려입은 중년의 아줌마가 들어왔다. "뭐 먹을래?" "그냥 코스 먹지, 뭐." "2개 주세요." 아줌마를 향해 그렇게 말한 수혁은 다시 담배를 물었다. "그러고 보면 너한테는 정말로 진심인 건가. 애처롭지 않아?" "뭐가?" "해건이 말야." "...글세." 수혁은 내 얼굴을 흘깃 한번 본 다음 물수건을 집어 손가락 사이마다를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담배를 쥐었던 오른손의 검지를 세심히 문지르던 수혁이 곧 물수건을 테이블 한 구석으로 내던졌다. "혹시, 화났냐?" "응? 나? 아니. 왜?"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래? 화내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해. 화내는 것과는 분명히 달라. ...포기라는 걸까. 아니, 그것과도 달라. 내가 무슨 말하고 싶은 지 알겠냐?" "아니. 모르겠는데." "그 부분의 마음이 사라져버렸어. 뭐랄까... 그 녀석에 대한 해건이의 가벼운 마음도, 그 녀석의 해건이에 대한 절박한 감정도, 그 녀석이 없어지고 난 후의 내 애틋함이라는 것도. 어느 순간부터는 모두 사라져버린 거야. 그건 어디로 가버렸을까?" "분명한 건 나한테도, 해건이한테도 가지 않았다는 거야." "...그래, 그건 그렇지." 똑똑 공손한 노크소리와 함께 코스에 따른 음식이 한 가지씩 날라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혁은 평소답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금 담배로 손을 뻗고 있었다. 음식을 앞에 두고는 담배를 피지 않았는데 조금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호모라는 건 말야.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인 건가?" "응?" "그렇다면 남자도 여자도 사랑하지 않으면 그건 뭐지? 분명히 호모라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잘 모르겠는데." 더덕구이를 씹으며 수혁이 물었다. "해건이가 부러웠던 적 없어?" "해건이가? 아니, 없는데. 넌 있냐?" "응, 있어. 어쩌면 그렇게도 솔직할까. 그런 점이 부러워." "그야 부러워할 수도 있는 거겠지만 너도 나쁘진 않아." 수혁이 젓가락을 내렸다. 그리고 몸을 뒤로 당겨 벽에 기댄다. "어쩌면 그렇게도 자신의 생각만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이기적인데도 왜 비난받지 않는 걸까. 한번도 부러운 적이 없었어? 정말로?" "그런 생각해 본 적 없어." 수혁이 피식 웃었다. "내가 정말로 부러운 건 이기적이지만, 미워할 수 없다는 거야." "...미워할 수 없어?" "응. 나는 해건이를 미워할 수 없어. 미워하려고 해도 이만큼 속속들이 알아버리면 무리라는 거지." "그렇다면, 해건이를 좋아해?" "그래. 좋아해. 싫어하지 않아." "미워할 수 없다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의 차이는 뭘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다시 새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렇게 말하는 수혁의 얼굴은 차가웠고 우월감에 차 있었다. 무엇에 대한 우위의 확인인가. "무엇도 바라지 않겠다는 거야. 미워한다는 것도 좋아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에너지와 의지가 필요한 일이야. 그래서 아무나 좋아할 수 없고 아무나 미워할 수 없지. 바랄 필요가 없는 상대란 무가치하다는 거지. 그야말로 길가의 잡초인 거야." "아무 것도... 아니란 거군." "그래." 그 뒤로는 서로 아무 말도 없이 밥만 먹었다. 그건... 그런 의미였을까. 채유라는 그런 의미로... 말했던 걸까. "그보다, 너 정말 그 채유라 찾는다며?" 상을 물리고 수정과를 마시던 수혁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응. 열심히 찾고 있어." "찾아봐야 소용없는 거 아냐?" "그렇지 않아." 고집스럽게 말하자 수혁이 작게 웃었다. "그거, 그 녀석의 얘기인 거지? 미워할 수 없다느니, 좋아할 수 없다느니." "...응." 수혁이 은은한 옥색이 도는 천장의 벽지를 향해 연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난이 쳐진 8폭 병풍으로 눈을 돌리고는 우두둑 고개를 꺾는다. "어째서 좋아하는지를 생각하면 나도 알 수가 없어. 그냥 찾아야겠다는 생각만 드는 거야." "찾아선?" "...모르겠어. 찾아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그래도 찾아야겠다는 거지. 안 그래?" "맞아." "대책 없군. 놀랄 지경이다. 그렇게 무방비하다니. 그 녀석이 네가 찾는 걸 바란다고 생각해? 찾아주길 원해서 사라진 것 같냐구." "...모르겠어." "모르는 게 아니겠지. 알고 싶지 않은 거야, 넌." "...그럴까." 수혁이 담배를 눌러 끄고 나를 보았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스스로 납득하기 전에는 무슨 말을 들어본들 소용없을 테니. 뻔한 결말에 덤벼드는 네 꼴이 우습지만 비웃는 건 오늘은, 이만 할 테니까." "어디에 있는 걸까..." "각자의 고민이 다들 거대하군..."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린 수혁이 일어섰다. "나가자." 천궁을 나와 수혁의 차를 세워둔 곳까지 데려다주었다. 차에서 내려 자신의 차까지 걸어가던 수혁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되돌아와 말했다. "남자도 여자도 사랑할 수 없는 녀석은 거짓말쟁이인 거야." "뭐라고?" "나중에 보자." 씨익 서글하게 웃은 수혁이 곧 자신의 차에 올라타더니 시동을 걸고 먼저 주차장을 벗어났다. "그럼... 무리란 말입니까?" [예. 딱 잘라 말하지만, 무립니다. 일단 명단이 확보 가능한 교통 수단을 이용한 것은 아니니 어디 외국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정도일까요. 게다가 버스 터미널이라든가 일일이 체크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저희가 무슨 경찰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도움이 못 되서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예. 감사드립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커다랗게 내쉬었다. 하긴 무슨 수배자도 아닌데 전단이라도 뿌려서 시민들의 협조를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다. 일단 신문광고라든가 여기저기 올려대기는 했지만 결정적으로 나에게는 전단을 만들 사진도 없었다. 그렇구나... 여기서 그만인 건가. 못... 찾게 되는 건가. 하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구나... 이제 못 찾는 거였어. 무작정 한국 방방곳곳을 돌아다닐 수도 없는 데다. 멍하니 천장을 보다 시계에 눈이 멎었다. ....8시 20분이었다. 젠장... 늦었잖아! 주차장에서 극장까지는 제법 멀어서 죽을힘을 다해 달려 도착했을 때는 해건을 향해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할 헉헉대고 있었다. "헉헉... 미...헉...미안..." "어라? 열심히 뛰어온 모양이네?" "하아, 하아. 영화시간... 지나 버렸다." "상관없어. 영화보다는 네 얼굴 보는 편이 더 좋으니까." 산뜻한 해건의 대답이 오히려 당황해버렸다. "이 영화, 보고 싶어했잖아....? 그게 다야?" "그게 다냐니?" "화... 안 내고....?" 벙하게 되묻는 나를 보던 해건이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내 뺨을 툭 찌르고는 웃었다. "늦었으니까 저녁은 니가 사는 거다?" "어... 그래...." "패밀리 레스토랑 갈까? 갑자기 느끼한 게 먹고 싶어졌어." 먼저 발길을 옮기는 해건의 옆으로 따라붙으며 말했다. "언제는 시끄러워 싫다며?" "그러게." "너... 변했냐?" "응? 내가? 니가 아는 모습이라는 거겠지, 그런 게. 넌 아직 나에 대해 절반도 모르고 있다구. 다 그런 거지. 나도 나를 잘 모르겠는데 너라고 알게 뭐냐? 이런 식으로 빙긋빙긋 거려도 싫지 않다니.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이게 또 나쁘지가 않단 말야. 기대되지 않아?" 줄줄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던 해건이 불쑥 물었다. "아, 응? 뭐라고?" 해건이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위로 치켜들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를 알게 되는 거, 기대되지 않냐구." 해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버벅거렸다. 해건의 미소는, 너무나 상큼해서 마주보고 있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어어... 그러니까..." 해건이 쥐었던 양주먹에서 검지만을 세워 내 뺨을 각각의 손가락으로 꾹 찔렀다.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보자 해건은 여전히 상큼하게 웃고 있다. "너로 인한 거야. 나도 알지 못한 나를 네가 만들어낸 거야." 이건... 내가 아는 해건이가 아냐. 그 녀석은 심통맞은 얼굴이 어울리는 녀석인데... 이건... 너무 상큼해, 너무 상큼하다. 벙하게 쳐다보는 나를 보며 키득 작게 웃은 해건이 말했다. "아, 다 왔다." 토요일 오후의 번잡한 패밀리 레스토랑의 실내를 들여다본 순간 나는 질려버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늦은 시간까지 아직 저녁도 안 먹고 뭐하고 있었단 말인가.... "자리 있어요?" "두분이십니까?" "예." "금연석은 있습니다만 괜찮으십니까?" 나는 당연히 해건이가 거절할 걸로 확신하고 느긋하게 서든이나 가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답은 정말로 의외였다. "예. 괜찮아요." "담배, 안 피려고?" "담배 피는 거 싫어하잖아, 너." 안내 받은 자리에 앉은 해건이 메뉴판을 펼치고 이리저리 뒤적인다. "피자나 먹을까?" "아무거나." 주문을 마치고 해건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도 확실히 시간이 조금 늦어선지 가족끼리 온 사람은 적다. 그치?" "그렇네." "어릴 때는 나도 엄마 아빠랑 여기저기 자주 다닌 것 같은데." 피식 웃은 해건이 냅킨을 만지작거렸다. "넌 어땠어?" "농사 짓는 시골 사람이 어디 자주 다니냐?" "우리 아빠한테, 화났어?" "왜?" "그 채유라 말야." 해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담담한 얼굴이다. "화나지 않았어." 그 말에 해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화났어." "네 아버지니까." "내 아빠라서 내가 화낸다는 거야?" "그러면? 너, 수혁이 아버지한테도 화났냐?" "....조금." "거 봐." 곧 주문한 피자가 나왔고 한 동안은 말없이 먹는 것에만 열중했다. 피자가 한 조각이 남을 때까지 먹기만 하다 그 한 조각도 해건이 반으로 잘라주어 모두 먹고 나자 해건이 말했다. "그때도 피자 먹었는데." "그때?" "응. 고1때 수혁이랑." 피자판이 치워지고 주스를 홀짝이며 해건이 웃었다. "그때 수혁이 친구랑 섬씽이 있었거든." "아..."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안 되겠는 거야. 좋은 녀석이었는데.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어. 그래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줬단 말이야. 처음에 쫓아다닐 때는 어려워만 하던 녀석이었는데. 그래서 수혁이가 정말 화를 냈었어. 그때 피자 먹고 나서 혼났어. 다 먹고 나니까 수혁이가 말을 꺼내더라구. 나, 알잖아. 할 말없으면 화내는 거. 또 수혁이는 내가 화를 내도 항상 봐주니까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정말 된통 깨졌어. 그 후로 그 녀석이 전학을 가고 수혁이는 다시 나한테 좋은 친구가 되었지만. 아니, 형인가." 배시시 웃는 해건인 20살 동갑내기라기보다는 두어살쯤 어린 동생 같았다. 굳이 수혁이처럼 하나같이 챙기지 않아도 해건이가 공정한 친구보다는 어리광을 받아주어야 하는 동생처럼 느껴진 것은 사실이다. "수혁이 말야, 어릴 적부터 늘 그랬어. 항상 내게는 잘해주었지. 넌 어때?" "나? 글세. 믿음직한 친구인가." "수혁이가 무서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어?" 해건이 내어놓기만 한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수혁이가, 무서워?" "응. 난 무서워." "어째서?" "수혁인 가장 중요한 순간에 친구도, 가족도. 그 자신마저도 버릴 수 있는 녀석이라서." "....처음 듣는 소린데." 지나가는 웨이트리스를 불러 맥주를 주문하며 해건이 나를 본다. "넌?" "콜라면 됐어." "치즈 마블 한 조각이랑요." 딱딱한 나무등받이로 깊이 몸을 넘기며 해건이 천장을 올려다본다. 한가롭게 돌아가는 널따란 팬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해건이 곧 몸을 당기고 맥주를 들이켰다. "우리들은 어쩌면 친구가 아닌 지도 몰라. 나와 수혁이를 실은 건달 취급하면서 벽을 쌓고 어울리는 것이 전부였던 너나 정말은 두려워하면서 아닌 척 나대는 나나 무엇도 소중하지 않아서 그저 우리를 관찰하면서 즐기는 수혁이나. 정말 친구라면 그러지 않겠지?" 씩씩하게 케잌에 포크를 꽂는 해건이는 즐거운 기색이었다. 그래... 친구가 아닐지도 모르지. 김이 다 빠져 단맛밖에 나지 않는 콜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입안 가득 단맛이 남아 꺼끄러웠다. "전혀 몰랐다. 니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너야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럼 수혁이는?" "수혁이는 싫어하니까. 내가 생각하는 걸. 수혁인 이대로가 좋은 거야. 좁혀지지 않은 간격, 언제까지고 맞댈 수 없는 우리가 편하다고 생각하거든." "....설마. 수혁이는 널 좋아해. 나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고." "응, 그건 그래. 날 좋아하고 너에 대해 생각하지. 충고도 할 줄 알고.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달라. 분명히 달라." "어떻게?" "날 좋아하기 위해서 수혁이는 자꾸만 노력을 하는 거야. 싫어지려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노력을 하지. 그러니까 난 수혁이가 노력할 수 있는 상태로 있어야 해. 수혁이는 날 싫어하고 싶어하는 자신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어째서 솔직하면 안 되는 건데." "모두 버려야 하니까. 나를 싫어한다는 건 지금까지의 것들을 버린다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그럼 난." "충고를 하는 건 널 위해서가 아냐. 뭔가 수혁이가 보고 싶은 상황이 있다는 거지. 너에 대해 생각하는 건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수혁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인 거야. 너라는 인격을 가진 녀석을 이리저리 움직여보고 싶어서일 뿐인 거야. 그게 순전히 이기적인 생각만이 아니라는 게 또 수혁이의 무서운 점이지만." 수혁이는 내게 해건이에 대해 얘기한다. 해건이는 내게 수혁이에 대해 얘기한다. 그것들은 아마도 모두가 사실일 것이다. 둘 다 내게 그들의 진실을 말한 것이다. "...수혁이는 모두 알고 있을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내 말에 해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고 있어. 수혁이가 나를 좋아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도, 내가 좋아할만한 모습이기 위해 항상 애쓰고 있어야한다는 것도. 수혁이는 모두 알고 있어. 하지만 아는 척 하지 않지. 늘 어쩔 수 없지- 뭐, 그런 반응이니까. 이건 비밀이거든. 말하지 않는 것이 룰이야. 나도 수혁이도, 버릴 자신은 없어서 말야. 조금 잔혹한 게임이긴 하지만." "이게... 게임이라고 생각해?" 심각해져 묻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해건이 똑바로 눈을 맞춰오며 대답했다. "응. 게임이라고 생각해." "하아... 끝내주는군."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너라면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존재가 실은 무서울 뿐이라는 걸 인정하겠어?" "....그것도 또 그렇네." 케잌을 깨끗하게 먹어치운 해건이 말했다. "너는 휩쓸리지 마. 나는 이미 늦었지만 너는 수혁이에게 휩쓸리지 말아. 이길 수 없어서 견디기만 해왔지만 네가 있어서, 그래도 이만큼이나 해 올 수 있었던 거야, 난. 하지만 넌 그럴 수 없을 거니까. 그러니까 견뎌 내주길 바래." "...그래." 시도 때도 없이 돌아다니는 웨이트리스를 붙잡고 맥주 한 병을 더 주문한 해건이 웃으며 말했다. "이거 편한데? 돌아다니는 것도 거슬리기만 한 건 아닌 모양이야." 내게도 콜라 리필해 줄까요? 라고 묻는 것을 거절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역시 귀찮아." 냉기가 아직도 살짝 피어오르는 맥주가 삼켜지며 울렁이는 해건의 목울대를 바라보았다. 순간 채유라가 떠올랐다. 해건에게 맥주는 무슨 맛일까. "무슨 맛이야?" "맥주맛. 싸하고 싱거워." 채유라와는 다르구나... 멀뚱이 생각하는데 해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얘기만 했네. 다른 얘기하려고 그랬는데." "어떤 얘기?" 해건이 단숨에 반쯤 남은 맥주를 모두 들이키고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심호흡했다. "가의 사랑이니, 나의 사랑이니. 실은 모두 허세였어." "....난 진짜로 받아들였는데 말이지." 해건이 활짝 얼굴 전체로 웃었다. "그 녀석, 찾을 때까지. 찾아서 서로 사랑할 때까지. 그때까지만이라도 날 사랑하는 척 해주면 안 되겠어?" 벙한 얼굴로 해건의 미소짓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말을 하는 해건의 얼굴은 시원스러웠다. 어디에도 음험한 구석은 없다. "라는 게, 원래 오늘 하고 싶었던 얘기." "...해건아. 그건..." 절래절래 해건이 머리를 저었다. "심각해지는 건 네가 그 녀석을 찾은 후부터야. 지금은 그냥 가볍게 생각해 줘. 나한테는 그렇게라도 니가 필요하니까 자선이라도 베풀어달라는 거니까. 니가 원한 가질만한 일은 안 할 거야. 상처 입어도 그건 내 문제야. 모두 내 탓이니까 너는 상관할 것 없어. 알고서 사랑했어. 지금도 너무 잘 알고 있어. 그래도 나는 니가 좋은 거야. 이해할 수 있어?" "...아니. 이해 못하겠어." "그럼 하지마. 이해할 필요 없어. 그냥 내 말대로 해 줘. 어렵게 생각할 것 없잖아? 몸이든 마음이든 편한 대로 이용해 먹어. 그리고 니가 그 녀석을 찾는 순간, 끝내면 되는 거야. 불가능할 것 같아?" "...불가능한 게 당연하잖아...!" "불가능하지 않아. 말했지? 지금 나는 네가 만들어낸 거라고. 필요하다면 나를 그 녀석의 모조품으로 만들면 되는 거야. 네가 그렇게 하면 돼. 어째서 불가능하다고 말해?" "하지만... 그런 게 될 리가 없잖아. 너는 연해건이야. 모조품 같은 게 아니라구!" 해건이 웃는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그래서 널 사랑하지만. 억지라도 그렇게 말해주는 너라서 사랑스럽지만." 성마르게 손마디를 문지르는 나를 향해 팔을 뻗은 해건이 그 손을 쥐었다. "하지만 너는 결국 그렇게 할거야." 내 손을 돌려 손바닥을 앞으로 펼쳐 테이블에 내려놓은 해건이 자신의 손바닥도 들어 보였다. "마지막 패야. 모조품은 알고 있어. 어디까지나 모조라는 걸. 언제 폐기된들... 나쁘지 않지." 해건의 얼굴을 어느 정도는 질려서 바라보았다. 해건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그런데... 어째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걸까. 그런 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 걸까. 해건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맥주 마셔서 그런가? 감자튀김이 먹고 싶어지는 걸." "아..." "응? 왜 그래?"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고개를 푹 숙였다. 해건이 옳았다. 나는... 결국.... 그렇게 할 거였다. 그렇게라도... 채유라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 버린다. 내게 그런 식의 채유라일지언정 필요하듯이... 연해건에게도 그런 식일망정... 한재준이 필요한 거라고. 그건, 나쁘지 않다고. 일방적인 이기만은 아니라고. 채유라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랑을 할까? ....이런 사랑을 할까... "들어가라." "...오늘 즐거웠다." "뭘, 내가 늦어서 영화도 못 봤는데. 그래도 밥 샀으니까 기분 풀어라. 응?" "이야, 연해건. 많이 싸졌다. 꼴랑 밥 한 끼냐?" 싱긋 웃으며 말하는 해건의 이마를 가볍게 손가락을 세워 땅콩을 먹였다. 이마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해건이 살짝 웃었다. 나도 모르게 해건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대고 있었다. 내 팔 아래로 눈을 들어 나를 본 해건이 가만히 눈을 감고 내 손바닥으로 머리를 기댄다. "....즐거웠어. 진짜로." "...그래." 해건이 고개를 팍 떼어내며 활짝 웃었다. "내일 니가 영화 쏘는 거다?" "뭐? 뭐야, 밥 샀잖아." "됐어, 됐어! 기껏 남이 예매씩이나 한 걸 못 보게 만든 게 누군데? 내일 니가 영화 보여주는 거야!" "야, 불공평하잖아." 양손을 퍼덕이며 아우성치던 해건이 문득 손을 떨구고 내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심장 부근이 저려왔다. 해건이... 애쓰고 있었던 걸까.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 위해서, 애썼던 걸까. "그래. 영화 보여줄 테니까. 밥은 니가 사는 거다?" "아앗! 그러면 벌칙의 의미가 없어지잖아." "싫으면 관두고." "싫지 않아. 정말은 기뻐." 환하게 웃는 해건은 정말로 기뻐 보여서 내 쪽이 오히려 서먹해지고 말았다. 그런 나에게 해건이 조금 발끝을 돋아 올려 살짝 입술이 닿는 키스를 한다. "아..." "데이트, 였잖아? 꼭 해보고 싶었거든. 소원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바라던 게 있었어. 애인과 함께 영화보고 밥 먹고, 그러고 나선 차라도 한잔 마시고. 어두워지면 집으로 함께 손잡고서 걷는 거지. 집 앞에 이르면 가볍게 키스.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몇 번이고 돌아보면서 멀어지는 거야. 그때 짜쟌- 하고 전화가 걸려오는 거야. 어디까지 갔어? 집에 다 와가? 그런 시시한 대화를 나누면서 애인이 집에 도착했어- 라고 말하면 내일 만나, 먼저 끓어, 아니 니가 먼저 끓어... 유치한 실랑이도 하면서...." 해건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전화할게." "응...." "가면서도 계속 돌아볼 거니까..." "...응." 팔을 풀고 돌아섰다. 몇 발자국을 걷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해건은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서 있었다. 살짝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보았다. 해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방금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내리지 않았던 손을 또 흔들어준다. 그렇게 몇 번인가 돌아보았다. 그때마다 해건은 그 자리에 선 채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왠지 가슴이 아파 왔다. 해건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곳까지 와서 핸드폰을 꺼냈다. "집에 들어갔어?" [아니. 아직.] "어서 들어가." [조금만 더 있다가.] "오늘 즐거웠어?" [응. 말했잖아. 기뻤다고. "다행이다." [너는? 넌 어땠어?] "즐거웠어, 나도." [....그래. 그거야말로 다행이다.] "이제 그만 들어가. 아직 밖이지?" [예리한데?] "니가 들어가야 차 있는 곳까지 갈 거 아냐. 너 보는데서 차 타면 안 되는 거잖아." [하하. 굉장한데? 그런 것도 다 알고.] "아쉬워하는 애인이어야 한다는 것 아니었어?" [맞아... 응... 맞아.] "...해건아." [괜찮아. 아, 지금 집안에 들어왔거든. 우리 집 앞에 차 세워뒀었지? 어서 와서 타고 가라.] "......" [안녕.] "...끓을까?" [응. 끓어야겠지. 아니면 자꾸 더 끓기 싫어질 거니까.] "그럼 끓지 말고 계속 할까?" [너 핸즈프리도 안 가지고 있잖아. 운전하면서 전화하면 안 되는 거 몰라?] "아, 참... 그랬지." [운전 조심해서 들어가고 내일도 좋은 하루.] "...너도." 해건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뚜- 신호음이 들리는 핸드폰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다시 해건의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문이 보이는 골목에 세워진 차에 올라타 해건의 방이 있는 2층을 보았다. 블라인드의 한쪽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비친다. 해건이겠지... 시동을 걸고 핸들을 꺾었다. 확실히... 나는 나쁜 놈이다. "운전 조심하고." "그래." 그의 손이 가만히 내 머리에 닿았다. 사람의 체온은 36.5도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리에서 목으로 미끄러지는 그의 손은 지독히도 차가워서, 그것을 믿을 수 없게 만든다. 그에게 나의 온기는 필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를 안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차가울 뿐인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의 체온일까. 나는 분명 그를 사랑해서 그의 체온으로 내 체온을 덥힌다. 그러면 내가 그의 체온을 앗은 것일까. 그의 체온으로 데워지는 나라는 존재가 그를 차갑게 만드는 것일까. "....차가워. 네 손." 내 말에 그가 작게 웃는다. "차가운 손, 뜨거운 마음. CF 카피였나? 그걸로 믿어주면 어때?" "....응. 믿어." 하지만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나를 보며 그가 조금 곤란한 듯이 웃는다. "이거... 룰 위반인데?" "...정말... 그렇네." 그와 나의 룰은, 몹시도 지독하다. 진심이 되지 않을 것. 사랑한다고, 몇 번이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안아달라고, 끊임없이 보챌 수 있다. 사랑하냐고, 몇 번이라도 물어볼 수 있다. 사랑하라고, 수없이 말할 수 있다. 몇 번이고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있다. 보채는 상대를 언제라도 안을 수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수없이 속삭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거짓말. 그것이 그를 사랑하는 룰이다. 나는 그를 사랑하니까... 벗어날 수 없다. 내가 진심이라고 말해버리는 순간, 그는 나를 버린다. 나를 사랑한다고 그는 몇 번이라도 말해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사랑의 룰. 그의 진심은, 단 한번도 내 것이지 않았다. 거짓말하지마,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해. 이것이 나의 진심. 그렇게 수없이 소리치고 싶지만, 말하는 순간 그는 나를 버린다. 이렇게 위선의 사랑이나마 내게는 절실하다. 나는 진심이니까... 이렇게나마 그의 사랑의 흉내를 내고 싶은 것이다.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어떤 식으로든 그의 체온을 나눠 받고 싶어서. 그 체온으로 데워지는 내가 너무나 서글퍼서. "사랑하니까 용서해 줘. 날 사랑하잖아?" 가볍게 말하는 나를 돌린 고개로 응시하던 그가 이윽고 웃는다. "그렇군. 잊을 뻔했어. 너는 내가 사랑하는 유라니까." 그의 목을 온 몸의 의지와 기력을 짜내어 살며시 안았다. 힘껏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간신히, 부드럽게 안았다. "사랑해. 너도 그렇지? 날 사랑하지?" "물론이야." 그 또한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준다. "이대로 헤어지려니까 너무 서운한걸. 조금만 시간 내주지 않을래?" 그가 팔을 풀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음, 30분 정도? 그 정도라면 괜찮은데." "그거면 충분해. 안아 줘." "그럴까? 사랑하는 유라의 부탁이니까. 들어가자." "응." 집안으로 다시 들어와 곧장 침실의 문을 열고 침대에 몸을 눕히자 그가 느긋하게 셔츠를 벗기고 바지를 벗긴다.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나의 옷을 모두 벗기고 바지를 내리는 그의 등을 장난스럽게 당겨 안았다. 정말은 울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아파서, 정신없이 끌어안고 싶지만 나는 장난스럽다. "네 여기가 좋아." 심장의 위를 덮은 가슴을 짚자 그가 웃는다. "하지만, 그 안은 비었어." "어디 갔을까?" "글세." "난 알아. 그건 여기에 있어. 넌 그걸 사랑하는 나한테 줬다구. 그래서 없는 거야. 여기가 빈 건 그 증거야. 그래서 나는 네 여기가... 좋아. 네 텅 빈... 심장이 좋아." 그의 손을 당겨 내 가슴을 만지게 했다. 조금 불만스러운 듯 가늘게 내리뜬 눈으로 내 얼굴을 살피던 그가 이내 싱긋 웃어버린다. "그래, 난 널 사랑하니까. 그렇겠지?" "그럼, 물론이야." 느슨하게 이완된 근육을 가르며 들어선 그가 미소를 띄우고 묻는다. "두 개 모두 네가 가지고 있을 셈인가? 내게는, 주지 않을 거야?" 이것은 함정. 빠지는 순간.... 죽을 거야. "미안해서 어쩌지? 난... 욕심쟁이라서... 주기 싫은데? 너한테... 줄 게 없어. 모두 내가 가져 버렸거든." 그렇지 않아... 언제라도... 나는 줄 수 있어. 여기엔... 내 가슴 안에는... 네게 주고 싶은, 네게 주지 않으면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그런 것이 너무나 많은데. 그래도, 줄 수 없어.... 그것이 지금 나를 안은 이 손을... 잃지 않기 위한 대가. 네게 주지 못해서 자꾸만 쌓여가다... 더는 담을 곳이 없어 터져 버릴 지도 모르지만... 그 전에 나는 네게 주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래도 나는 지금의 이 체온이... 소중한 거야. "할 수 없지. 너를 욕심쟁이로 만든 것은 아마도, 나겠지?" 허리를 내지르며 조금 빨라진 호흡으로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아학... 아아... 맞아... 내가 이렇게 된 건 모두 니 탓이라고... 하아... 설마 아깝다는 건 아니겠지? 겨우 그런 정도로? 그런 걸 내게 줬다고... 아까워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까울 리가. 말했잖아. 널 사랑한다고. 그따위 것, 조금도 아깝지 않아." 심장을 버린 곳은 내 가슴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아깝지 않은 것이다. 그와 사랑하기 위한 마지막 룰. 섹스하며 사랑을 말하지 않는 것. 그와 나는 섹스하며 수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거기에 사랑한다- 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몸을 빼내며 뺨에 붙은 내 머리칼을 부드러운 손길로 정리해준다. 타월로 세심하게 내 몸을 닦아준 뒤 가벼운 샤워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말끔한 모습으로 정돈되어 있었다. 그제서야 내 입은 그를 향해 속삭일 수 있게 된다. "사랑해." 그는 빙긋이 웃으며 내 뺨을 쓰다듬을 뿐이다. 정사 후의 나의 '사랑해' 그 말에만은 그는 대꾸하지 않는다. 알고 있다... 알고 있어. 그는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아... 그를 사랑하는 나라는 존재와 그는 즐기지조차 않는다. 그 모든 것은, 그의 거짓말. 내 마음의 깊은 곳, 하나의 사실이 있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 위로 놓인 두 개의 거짓말. 나의 사랑해. 너의 사랑해. 그래서 나는 언제까지나 비틀거릴 수밖에 없는 거다. 기울어지지 않도록 진실이 보이지 않도록 거짓말할 수밖에 없는 거다. "갈게." "응. 30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너무 격렬했던 거 아냐? 정말 30분을 채웠으며 아마 죽었을지도 몰라. 힘들어서 못 나가는 거, 이해할 거지?" "물론이지. 쉬도록 해. 이걸로 마지막일 건 아니잖아?" "당연한 거 아냐? 사랑하는 걸." 이마 위를 마치 닿지 않은 듯 스치는 그의 입술은, 역시나 차가웠다. 그리고 그 입술이 닿은 내 이마는 뜨겁다. 눈을 떴을 때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언제나 흔적도, 온기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나는 그였다. 타월로 정성스레 그가 닦아준 내 몸에는 그의 체액도, 키스마크도...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아서 남겨진 나는 울어버리고 말았다. 기만과 속임수의 사랑놀이. 처음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가 내게 말했다. 게임, 할까? 나를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그러면 나는 너를 사랑하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지독히도 건조했고 가벼워서, 그런데도 진심이어서 터질 것만 같았다. 상대에게 그 진지함이, 그 가벼움이, 그 건조함이 미처 닿기도 전 자신에게로 떨어져 내리고 말아 비수가 되고 말 그런 눈이었다. 그토록 아픈 눈으로 그는 나를 향해 말했다. 사랑하지 않겠어? 룰은 하나, 네가 내게 진심이 되지 않을 것. 그러면 나는 너를 기만하고, 또한 사랑할 거다. 그것으로 그의 척박한 대지에 내가 더 이상의 낯선 이족(異族)이 아닐 수 있다면. 가진 나의 수분마저 잃어 고사(枯死)하게 되어도 메마른 바람만이 부는 그의 대지에 내가 이방이 아닌 자로서 머물 수 있게 된다면. 나쁘지 않았다. 진심으로, 갈구했다. 그의 대지에 머물게 되어 내가 '사랑해' 이 한 마디를 그에게 남길 수 있다면. 수분을 모두 잃은 내가 '사랑'을 지각(知覺)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도 입에 남았을 그 한 마디를 그에게 전할 수만 있게 된다면. 그러나 나는 기만의 상대. 그와 나는 사랑하지만, 그것은 유희(遊戱). ....어디에도 진실은 없었다. "날더러 어쩌라는 건지." 수혁의 귀찮은 기색이 잔뜩 섞인 어조에 해건이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도 너무하네. 그 얘기하려고 너 보자 그랬다니." "그러게 말이다. 얼굴 보기 힘든 부친이 보잔다기에 한 가득 기대했더니만, 그 얘기다." "너무 이르지 않아? 이제 20살인데." "니들이 할랑한 거겠지." "그다지 할랑할 것도 없잖아." "사업에 참가를 하라...." 길게 말꼬리를 늘이는 수혁을 보며 해건이 설탕을 내민다. "단 거 먹으면 혈당이 올라가서 신경질에 좋다더라." "니가 말해봐야 전혀 신용이 없는데? 가장 신경질적인 게 누구더라?" 수혁의 핀잔에 해건은 방긋 웃었다. "난 이제 괜찮아." 순간 내게로 시선을 돌린 수혁에게 왠지 뜨끔해져서 눈을 돌리는데 설탕을 가득 퍼올린 숟가락을 입안으로 삼키는 해건의 모습이 보였다. "해건아?!" "너... 진짜 그걸 먹냐?" 수혁과 나의 거의 동시에 이어진 놀라움의 외침에도 꿀꺽 설탕을 삼킨 해건이 곧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뜨아악... 진짜 달다. 신경질에 좋다는 거... 거짓말이었던 거야. 더 화날 것 같다구." 물을 꿀꺽꿀꺽 마시며 입안을 한참이나 씻어내던 해건이 황당해하는 나와 수혁을 향해 말을 이었다. "하긴 나만 봐도 거짓말인 건 뻔하지 않냐? 나, 단 거 무지 많이 먹잖아. 그치?" 내가 먼저 풋- 웃고 말았다. "진짜 그래." "너란 놈은 진짜... 맞아." 수혁도 웃음을 터트리며 가벼워진 어조로 말했다. "결심이 섰어. 사업, 배워보겠어." "니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그런 거겠지. 넌 아마 아저씨 능가하는 거물이 될 거다." 해건의 말에 수혁의 얼굴에서 잠깐 표정이 지워졌다. 그러나 이내 처음의 얼굴로 돌아온 수혁이 조금 씁쓸한 듯 웃었다. "하긴... 지금도 전혀 상관없는 건 아니니까..." 마치 혼자 중얼거리듯 그렇게 말하는 수혁이 어딘지 낯설어서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듯 수혁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를 보는 그 시선이 너무나 차가워서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그건 내가 처음으로 보는 수혁의 얼굴이었다.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차갑고 건조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혁이 곧 미소지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눈을 숨기지도 않은 채 입술 끝만을 들어올려 부드러운 표정을 만들고서 웃는 수혁이 무서워졌다. 수혁이 무섭다던 해건의 말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투명한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로 서서히 감정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말없이 쳐다만 보았다. 그리고 나타난 감정은, 비웃음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통증과도 비슷했고 또 어떻게는 증오처럼도 보이는 기묘한 단면의 굴곡을 가진 소용돌이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실제로는 너무나 찰나에 이뤄진 일들이라 해건은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고 수혁도 아무렇지 얼굴이 되어 내게 묻고 있었다. "왜 그래? 멍한 얼굴로." 잘못 본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고 해건에게 들은 얘기로 내가 상상한 한낮의 백일몽은 아닌가 자문해 보았지만,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그런 기묘하게 뒤틀린 얼굴을 상상만으로 내가 만들어냈을 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적의로도, 조소로도, 한편으로는 고통으로도 보여지는 그런 감정의 형상이 존재하는 것조차 알지 못한 내가 상상만으로 만들어낼 만한 어눌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아... 아무 것도 아냐... 아무 것도...." "어, 수업 시작하겠다. 서둘러." 학교 밖까지 나와 점심을 먹던 참이었다. "난 아직 1시간 남았는데? 재준이도 그렇고." 수혁의 말에 해건이 시계를 보다 발을 동동 구른다. "에이씨! 그럼 나 혼자 가라고?" "어쩔 수 없잖냐. 너 혼자 튕긴 걸." 과가 모두 다른 탓에 전공은 어쩔 수 없었지만 5개의 전공 수업을 제외한 2개의 교양수업을 우리는 같은 것을 신청했다. 한 과목은 모두 함께 수강이 되었지만 나머지 한 과목은 인원 초과로 해건이 혼자 수강이 되지 않아 다른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들어가야 하는 수업이 바로 그 교양수업이었다. "씨이... 그냥 째버릴까?" "연해건. 이때까지 너 그 수업, 딱 한 번 들어간 거 기억은 나냐?" 수혁의 날카로운 지적이 해건이 목을 움츠린다. "영감처럼 이상한 것만 기억하고 있어... 아이씨... 재준아, 나 수업 가야될까?" 나를 한번 비벼보려는 해건의 노력은 눈물나도록 잘 알고 있지만 별 수 없었다. "수업은 들어야지." "....배신자들! 비겁하고 야비해! 간다! 가!" 순식간에 그렇게 소리쳐댄 해건이 후다닥 달려나갔다. "니들이 저녁 사!" 여유롭게 해건의 등으로 순을 휘휘 내젓는 수혁은 내가 알고 있는 여느 때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서 아까의 그 얼굴이 정말로 착각이 아니었을까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수혁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고 나는 그 알 수 없이 기묘하던 표정은 차지(遮止)하고라도 처음의 그 얼어붙을 듯 차갑던 눈만은 분명한 현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집 커피, 제법 맛있는데." "...난 바닐라 넛은 별로라서." "니가 좋아하는 게 브라질 오리지널이었나?" "...그래."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수혁이 빙글거리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게임, 할까?" "게임?" "그냥 말장난이어도 좋고." "....해." "네게 소중한 사람, 그러니까 음... 채유라였나? 그 채유라라 생각할까?" 말없이 수혁의 얼굴을 응시했다. "네게 몹시도 아끼는 것. 네 차 정도면 되겠지?" 환경을 하나씩 설정하는 수혁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인 환경을 제시해나가는 수혁은 정말 게임을 즐기는 얼굴이었다. "넌 아직 차를 갖고 있지는 않아. 언제든지 가질 수는 있는 상황이지만. 단, 그 차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기종이라고 해두자.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 편이 더 흥미로우니까." 커피를 어느 새 다 마셔버린 것을 깨닫고 들었던 잔을 내렸다. 그 모습을 보던 수혁이 자신의 잔을 들여다보며 손을 들었다. "커피? 아니면 다른 걸로 마실까?" "....커피." 다가온 종업원에게 커피잔을 가리키며 더 달라는 말을 하는 수혁은 눈이 부실 정도로 매력적인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웃음 짓지 않아도 남자다운 멋있는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이 수줍었을 종업원은 그 웃음에 확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디켄터를 들고 되돌아왔다. 다시 한번 수혁이 부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서인지 커피를 조금만 부어주는 그녀에게 수혁이 부드럽게 말했다. "조금 더 주시면 안 될까요?" 이번에는 커다란 머그컵이 넘칠 만큼 커피를 붓는 그녀에게 수혁이 다시 눈부신 미소를 지었고 그녀가 머뭇거리며 멀어졌다. "...너답지 않잖아. 해건이 그렇게 웃을 때는 화를 내놓고선." "재밌잖아?" 뜨거운 김이 오르는 커피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신 수혁이 가볍게 대꾸했다. "....재미? 난 그런 게 너답지 않다는 거였지만." "난 말야, 내 의도대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게 무척 즐겁거든. 좀 더 즐기는 건 뒤에서 움직여보는 거지만 가끔은 직접 나서는 것도 신선해서." 『뭔가 수혁이가 보고 싶은 상황이 있다는 거지. 너에 대해 생각하는 건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수혁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인 거야. 너라는 인격을 가진 녀석을 이리저리 움직여보고 싶어서일 뿐인 거야. 』 그렇게 말하던 해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너만은 휩쓸리지 말라던 그 말도 함께 기억났지만, 아마도 늦은 듯 했다. "그보다 원래의 얘기로 돌아가지. 그래서 너는 그 차를 갖기 위해서 굉장히 벼르던 중에 어느 날 기회가 드디어 생긴 거야. 너는 거부하지 않고 그 기회를 받아들일까? 첫 번째 선택관문이야. 어때? 대답은 예, 아니오." "...예." "좋아. 그 다음. 너는 그 차를 갖게 됐어. 무척이나 들떠 있겠지? 그런데 채유라가 그 차를 갖고 싶어하는 거야. 넌 어떻게 할까. 채유라에게 준다, 주지 않는다. 대답은 역시 예, 아니오." "....예." "이번이 라스트 스테이지니까 잘 생각하라고." 그렇게 단서를 붙이는 수혁의 얼굴을 보았다. 꽤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라는 것이 의외였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선득할 만큼 진지한 차가움이 서린 눈이 되어 나를 향해 똑바로 말했다. "그런 상황이 수없이 반복되고 있어. 너는 채유라를 싫어한다, 그럼에도 좋아한다. 라스트 스테이지니 만큼 대답은 자유형이야." "....그래도 아마 좋아할 거야, 난." 그 대답에 수혁이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쩐지 비웃음 당한 기분이어서 조금 불쾌하게 쳐다보자 수혁이 웃음을 멈추고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야. 나는 연해건으로 해 볼까?" 어디까지나 가볍게 그렇게 말한 수혁이 계속해서 말했다. "너와 설정은 똑같아. 그리고 두 번째 관문까지의 대답도 똑같지. 나는 기회가 생기면 가질 것이고, 해건이 갖고 싶어하면 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럼에도 좋아한다는 것에는 확실한 대답을 할 수가 없어. 좋아하는 지 아닌지 나도 잘 모르겠거든. 내가 맘에 든 것을 해건이도 맘에 들어하는 건 별로 상관이 없어.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말야, 내가 먼저 얻은 것이어서 내가 그걸 해건이에게 줬다고 해도 결국 그걸 가진 것은 해건이라는 사실이야." "...그래서." "그렇다면 실은 싫어하는 걸까." "해건이가, 싫어?" "아니, 그보다는 나를. 난 내가 나를 좋아하는 지 싫어하는 지가 더 알 수 없는 문제란 말야. 말했잖아, 해건이는 미워할 수 없다고, 그러니까 좋아한다고." "그렇다면 너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건 어째서?" "난 이기적이니까.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 아냐." "그렇지 않아. 정말 이기적이라면 처음부터 주지 않았을 테니까." "그거 알아?" 잠깐 말이 없던 수혁이 불쑥 그렇게 서두를 꺼냈다. "응?" "시소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으면 말야. 무거운 사람 쪽으로 균형이 쏠리잖아? 내가 지금 그런 기분이야." "뭐야, 그게?" 수혁이 손으로 찻숟가락을 집어들고 검지의 한 중간에 걸쳤다. 흔들흔들하면서도 용케 떨어지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숟가락을 말없이 보았다. "이 쪽이 너 아니면 나. 그리고 반대편이 너 아니면 나, 혹은 다른 누군가. 분명, 이건 내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어. 분명히 그랬었는데... 알고 있었으면서 그 위태로움을 즐겼으면서, 조금은 신경이 쓰이게 된 거야.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이제는 제대로 무게중심을 잡아 흔들리지 않는 숟가락이 수혁의 검지가 조금 움직임에 따라 급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진 비밀의 무게만큼, 내가 더 무겁다는 뜻이지." "...내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거지?" "음... 글세?" 수혁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수혁이 검지를 흔들었고 숟가락은 챙강- 요란한 소리를 내며 타일이 깔린 카페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네가 한 그 게임, 대체 의미가 뭐냐. 무슨 뜻으로 그런 질문을 한 거냐고." "나에 대해서 조금은 더 알게 된 것 같지는 않냐?" 수혁의 장난스럽게 마저 여겨지는 경쾌한 질문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너에 대해서... 내게 알리고 싶었던 거라고...?" 수혁은 여전히 빙글대는 얼굴이었다. 알 수 없는 이질적인 감각에 바라만 본 수혁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지고 쓸쓸하고 조금은 힘겨운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점점 더 균형을 잡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어서 말야. 그래서 네 도움을 얻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내... 도움?" "너는 그렇게나 솔직하고 변하지 않을 녀석이니까. 마지막 관문에서 너는 그래도 좋아한다- 라고 말했잖아? 나는 할 수 없는 말이라서." "....너, 뭔가 고민이 있는 거냐? 그래? 아저씨 사업, 참가하겠다고 결정한 일 때문이냐?" 사업체 등록도 되어 있고 제대로 된 직원도 거느리고 꾸려지는 회사를 분명히 경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본질은 폭력단이었다. 충분히 균형을 잃을만한 일인 것이다. 내가 알아온 수혁은 그런 소위 비합법적이라 일컬어지는 일에 혐오감을 드러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기지도 않는 말 그대로 무관심이었고 그건 실은 거부에 조금 가까울 형태의 감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말에 수혁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혀 상관이 없는 건 아닐 테지만 조금 달라. 뭐랄까... 룰 위반이라고 해야 하나." "누구의 룰인데?" "글세.... 그것도 이제 헷갈리고 있어서 말야." 그렇게 말한 수혁이 몸을 일으켰다. "나에 대한 네 생각이 바뀌었을까?" "....바뀌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계산서를 손에 들고 수혁이 나를 돌아본다. 수혁의 얼굴은 여느 때의 내가 아는 얼굴로 느긋하게 웃고 있었다. "질투, 라고 생각해 주지 않겠어?" "질....투? 니가?" "난 질투 같은 거 하면 안 되는 거였냐?" "대체 뭘...?" 그러나 수혁은 대답하지 않고 카운터로 향했고 계산을 마치고 학교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다 교내 주차장에 이르자 키를 꺼내 들며 말했다. "내가 네게 나에 대해 알려준 건 사실 엉터리일지도 몰라. 알겠냐? 판단을 내리는 건 너지만 그 판단의 근거 중 네가 찾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야. 모두 내가 네게 준 것뿐."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운전석의 문을 열고 올라탄 수혁이 윈도우를 내렸다. 이미 핸들을 손에 쥐고 시동을 건 수혁은 다시금 차가워진 얼굴이었다. "잊지 마. 나는 여전히 게임을 하고 있어." 수혁의 차가 후진을 해 도로변을 올라탄다. "장수혁!" 윈도우 밖으로 내민 손을 흔들며 말하는 수혁의 음성이 바람결에 실려 멀어진다. "해건이한테는 난 이제 한번 빠진 거라고 전해 주라." "수혁아!" 다시 한번 커다랗게 수혁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수혁의 차는 교내를 달리는 것치곤 지나치게 빠른 속력으로 시야를 벗어나고 있었다. 수혁이 가버린 후 수업에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 완전히 사라져 수혁의 차 옆에 세워두었던 내 차에 바로 올라타 버렸다. 집으로 갈까 어쩔까를 고민하는데 문자가 들어왔다. [수업 끝. 인대 로비.] 바로 통화로 연결시켰다. "나야, 지금 갈 테니까 나와 있어." [너, 수업은?] 혹시라도 해건이 수혁에 대해 물을까봐 먼저 선수를 쳤다. "튀었지. 그럼, 그 앞에서 보자." 전화를 끊고 차를 출발시켰다. 해건은 인대 현관의 낮은 계단 중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다리를 까딱이고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생각이 나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채유라였다. 모리스 앞에서 만나기로 했던 채유라는 쭈그리고 앉아 있었지만 지금의 해건처럼 엉덩이를 툭툭 털며 내 쪽으로 걸어왔었다. 그 그립고도 목이 메이는 것만 같은 터져 나오는 감정에 어깨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해건이 뒷머리를 슥슥 문지르며 마주본다. "수혁이는?" "아... 아, 그러고보니까 수혁이의 멘트. 나는 이제 한번 짼 거다- 라고." "쳇. 그러곤 날랐다 이거지?" 아랫입술을 손끝으로 쭈욱 늘리며 말하는 해건의 얼굴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여전히 기억에 뚜렷이 남은 채유라의 얼굴과 겹쳐진다. 길게 찢어진 눈매와 곧게 뻗은 콧날, 경사가 크던 호선의 입술... 해건의 얼굴과 어느 한 곳 닮은 곳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해건은 내게 채유라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는 정말로 채유라가 그리운 거였다. 조금도 잊지 못한 채 해건의 말에 따랐을 뿐이라는 최악의 비겁함으로 나는 해건을 채유라의 대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일단 타라. 어디든 가자." 그때 채유라에게 했듯이 조수석의 문을 열고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하고는 곧 올라탄다. 그리고 해건이 채유라가 그랬듯이 반대편으로 돌아와 운전석에 올라타는 나를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왜?" "아니... 그냥.... 그냥..."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를 억누르며 갈라진 음성으로 간신히 말하자 해건이 내 뺨으로 손을 뻗는다. "괜찮아. 그러니까 울지마." 결국 핸들에 얹은 양팔위로 얼굴을 파묻어 버리고 말았다. "....미안하다. ....미안해. 난... 정말 쓰레기다." 해건이 뒤통수를 철썩 내리쳤다. "괜찮다고 했잖아? 아니면 내 말은 씹겠다는 거냐?" 바라본 해건의 얼굴에는 구김 하나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거지... 넌...? 어째서... 나를 비난하지 않는 거냐... 넌. 왜... 나를 욕하지 않아... 왜.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 수업까지 째고 달려올 만큼?" 울음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겨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아마 지금의 내 얼굴은 몹시도 추하고 서럽겠지. 울면서 죽을힘으로 지어낸 미소를 짓는 나는. "...그래...." "....울고 싶으면 울어. 어깨 정도는 빌려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해건은 내 머리를 당겨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지만, 울어버린 것과 다름없는 기분이 되어 해건의 어깨에 잠시 머리를 기댄 채 있었다. 해건을 좋아할 수 있다면 되는 걸까. 해건이 바라는 형태로 해건을 좋아할 수 있다면... 그러면 나는 울지 않을까. 해건이 가볍게 내 이마를 톡 치고는 활짝 웃는다. "드라이브나 가자. 양평 쪽으로나 갈까? 별장에 간지도 그러고 보니까 꽤 오래 됐네." "...그럴까?" "좋아, 그럼 출발이다!" 밝게 웃는 해건의 얼굴을 보며 핸들을 돌렸다. 해건을 사랑할 수 있다면... 해건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다시 한번 생각하며 해건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란 것도 어쩌면 사랑의 감정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조금은 마음이 저리고 조금은 안타깝다. 그러나 나는 더욱 절절해서 터질 것 같은 심장의 통증을,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함에 안타까워 눈물도 나지 않는 그런 감정을 안다. 그것은... 해건이 아니었다. 해건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또한 사랑과 다르다. 해건의 모습에서 채유라를 떠올리는 이상, 해건의 모습이 아니어도 채유라의 모습이 어느 순간에고 불쑥 불쑥 떠오르는 이상... 그건, 꿈이었다. 오로지 나를 위할 뿐인 그런... 꿈. 해건은 자신 역시 바라는 것이라 말할 테지만, 아닌 걸 안다. 홀로의 이기에 받침한 사랑을 닮은 감정의 희락은, 결국 상대를 울게 만들뿐이다. 감정 없는 상대가 아닌, 조금은 마음을 담아버린 상대가 우는 모습은... 슬플 테지. 그리고 채유라를 만나기 위해 지나치던 거리의 풍경에서, 채유라가 남긴 가느다란 동작 하나마저 뚜렷이 떠올려질 때마다... 미친 듯이 사랑하는 나를 깨닫는다. 해건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간혹 보이는 해건의 나른한 얼굴에서 채유라를 더욱 강하게 느낄 때마다... 대신이라는 말로 무너지려는 나를 간신히 다잡는 또 다른 내가 있다. 조금만 더 견디면... 조금만 더 견뎌서... 하아... 견디면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그것은 채유라가 아닌데. 여전히 나는 해건을 채유라의 대신이라 여기며 해건의 미소에서, 나를 사랑한다 말하는 것에서 위안을 얻는데. 그 가학적이고 긍휼한 위안마저도 언제까지 이어질 지 알 수 없는데. 신호를 가늠하며 옆으로 팔을 뻗어 해건의 머리를 당겼다. 순순히 당겨오는 해건의 얼굴에 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부드럽게 입술을 겹쳤다. 다정하게 응해오는 해건의 입술에서는 패밀리레스토랑에서의 그 날 이후 담배를 끊어 버린 청량한 페퍼민트의 치약향이 났다. "그전에 일단 밥 먹고 가자." "....어쩐... 일이야?" 어제 저녁 늦게 서울로 돌아갔었던 그가 오늘 오후에 다시 나타난 것에 놀라서 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 대신 나를 힘껏 끌어안는다. "...무슨 일 있었어? 어째 너답지 않네." "보고 싶은 것 같아서." 이것도 그의 함정인 걸까. "내가 보고 싶어하는 것 어떻게 알았던 거야?" 가볍게 대꾸하자 그가 천천히 팔을 풀어내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 진짜 이상해." "게임은, 끝났어." "...무슨... 소리야? 하하... 게임이, 끝이라니? 룰이라면 지켰는데...?" 그는 다정하게 웃었다. 이 게임을 시작한 이후, 처음 보는 진심으로 다정한 웃음. 그렇지만 그것을 보는 나는 절망하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래. 너는 룰을 지켰어. 어긴 건, 내 쪽이다." "....그런...! 말도 안 돼! 어째서...!" "내게는 나의 룰이 있었다는 걸, 속였어." "....왜 갑자기 그런 소리하는 거야...? 네 말대로 모두 했는데... 진심이 아니면, 날 사랑하겠다고 말한 건... 너잖아...? 그래놓고 어째서....!" 그는 여전히 부드럽고 다정한 얼굴로 웃고 있을 뿐이다. "정말로 내게 진심이 아니라고, 맹세할 수 있어?" 그리고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나를 속이지 않는 게 좋아. 네게 속을 만큼 바보가 아냐, 난." 그렇게 말한 그가 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칼을 성마르게 쓸어 넘기며 고개를 내젓는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속아준 건 어디까지나 내 뜻이었다. 하지만 네게 말하지 않는 내 룰로 내가 움직였다는 것, 그리고 그 룰을 내가 어겼다는 것. 그래서 게임은 끝났어." "...너무하네... 정말로 너무해..." "맞아." 내 기도는... 뭐였을까. 바란 것은 단 하나였는데. 이렇게 빨리 끝나버리는 이것은... 대체 무엇일까. "내 잘못이다. 너는... 그냥 떠나면 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가지...?" "네가 가고 싶은 곳 어디라도." "갈 곳이 없어..." "어디로 가고 싶지?" "모르겠어...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의 대지에 나는 언제까지고... 이방인이었을 뿐이고 이제는 추방당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어떤 말조차 할 수 없다. 종말을 앞둔 지금에도 우리들은 서로를 기만한다. 그것은 이제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 기만하지 않는 그를 상상하는 것이, 기만당하지 않는 나를 상상하는 것이 더 힘들 지경이었다. "하루. 하루면 돼. 오늘 하루만 내게 줘." 그가 다정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여 내 입술을 덮는다. "좋아. 네가 내일 하루를 내게 주겠다면 나도 네게 오늘 하루를 주지."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으며 고개만 주억거렸다. 고작 이 정도의 일로... 그 또한 나를 보내기 싫어하는 거라고 믿고 싶어하는 나 자신이 가련하고 안타깝다. 그의 닿은 입술이 이동하며 내 눈물을 훔친다. "7시간밖에 남지 않은 하루를 울면서 시작할 셈이야....?" 머리를 가로 저었다. "너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어." "나에 대한 얘기...? 글세, 뭐가 있지?" 대수롭지 않은 얘기라는 듯이 아무렇지 않은 척 넘겨버리려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게임은, 끝났다고 했었지? 그러니까 말해 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 "나에 대해 네게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해?" "아니. 넌 우리에 대해 거짓말을 했지만 너에 대한 얘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단 얘기야?" 절박하게도 보이는 그의 얼굴이 낯설고 서글퍼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부 거짓말은 아니었다고 생각해." 내 손을 잡은 그가 그 손을 거실로 이끌었다. 거실의 소파에 나란히 앉자 그가 입을 열었다. "참 이상해. 내가 어째서 이런 녀석이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말야. 딱히 가정적인 불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신상에 지극히 중대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냐. 이렇게 꼬인 녀석으로 자랄 만한 일 같은 거 아무리 해도 찾을 수 없는데." 그가 손을 들어 내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매만진다. 그 손을 내려 내 이마를, 눈썹을, 콧날을 그리고 입술을 더듬던 그가 뺨에서 손을 멈추었다. "이미 그렇게 되었으니 찾을 수 없는 소용없는 이유는 내버려두자고." 볼 위에서 조그맣게 원을 그리며 손가락을 움직이며 그는 후후 웃었다. "그래, 전부 거짓말은 아냐. 네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순간 중 어느 순간은 분명히 진실이었을 거야. 남자는 네가 처음이다. 되는대로 놀아댔지만 남자는 네가 처음이었어. 남자를 안고서도 흥분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 넌 모르겠지? 안길 때의 네 얼굴이 내게 어떤 말을 건넸는지. 그 얼굴을 내가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았는지. 그 얼굴을 보며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너를 안았는지. 사랑은 아니지만 그것이 추호도 사랑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또 나를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지."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나의 이마를 가만히 맞대었다. 그의 목을 안은 내 손끝에 그의 혈관의 두근거림이 전해졌다. 규칙적이고 느릿하게 울리는 그 맥박은 편안해서 그가 하려는 말에 겁을 먹게 만들었다. 그건 떨림이 아닌, 혈액의 순환을 위한 펌프질의 박동에 지나지 않았다. "울기라도 할 것처럼 떨리는 가느다란 눈매가, 소리가 되지 않는 입술의 움직임이... 끊임없이 나를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거야. 그래서, 내가 어땠을 것 같아? 응...?" "모르겠어... 모르겠어... 그걸 알면서도 어째서... 그런데 어째서... 나를 안았던 거야?" 그가 팔을 들어 내 목을 안고 목덜미에 뺨을 대었다. "아마도 좋았던 거겠지. 그래서였을 거야. 응... 맞아, 그런 네 얼굴,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꽤나. 마치 내가 귀머거리라도 된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속삭이는 네 사랑한다는 그 말이... 꽤나 좋았던 모양이야." "그렇다면 나를 버리지마... 버리지 않아도 되잖아..." "닮았지만, 사랑이 아냐." "넌 누구를 사랑하지...?" 그가 고개를 들고 내 눈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이상하리 만치 맑은 눈으로 나를 보는 그는 담담했다.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그 정도로 다행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지만. ...무리일까." "나를 사랑할 수는 없는 거야?" "응. 미안." "그래... 그렇구나..." 그가 갑자기 내 머리를 힘껏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사랑하지 않을 거니까. 이 정도로 그만두자. 넌 내가 아니라도 사랑할 수 있어. 그렇지?" "네가 아니라도 나는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너를 사랑하는 걸." 그의 옅은 푸른빛의 셔츠가 눈물에 젖어 검게 변해 가는 것이 얼룩진 시야에도 뚜렷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나를 안아주었다. "그 한재준이라는 녀석은? 그 녀석은 어때?" "사랑할 수 없어." "단호한 대답이지만, 어째서? 라고 안 물어볼 수가 없는 걸." "같은 종족이라 그래. 똑같지만 내 심장의 반대편에 그 녀석의 심장이 있는 걸." 그는 턱을 내 정수리에 댄 채로 말이 없었다. "붙잡기 위해 돌아서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지. 언제까지고 마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사이야, 그 녀석과 나는." 그가 서서히 내 몸을 밀어내고 말했다. "선물이 있어." 그리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간 그가 잠시 후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첼로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꼭 한번 네가 연주하는 아다지오가 듣고 싶어서." 심장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summer를 그렇게 멋지게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는 녀석의 첼로를 꼭 듣고 싶었거든." 하지만 내가 연주한 것은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였다. 기억에 아련히 남은 악보를 되새기며 느릿하게 활을 그었다. 음이 어긋나 삐걱대는 내 연주를 그는 진지한 얼굴로 들어주었고 곧 껄끄러운 연주나마 본 궤도를 찾자 그의 얼굴은 더욱 진지해졌다. 4분 가량의 짧은 연주를 마치자 그가 잠깐 내 얼굴을 바라보다 말했다. "연주 그만둔 게 벌써 3년이 다 됐다고 그랬었지?" "...응." "다시 시작해." "...그건 안 돼." "내 호의야. 받아들이면 안 되겠어?" "그건 더더욱 안 돼." "투자라고 생각하면?" "그래도 마찬가지야. 안 돼." "연주하고 싶지 않아?" "하고 싶지만, 역시 안 돼." "어째서?" "나를 사랑할 수 없잖아? 네가 주는 첼로는 아무 의미도 없어." "너는 다시는 나를 볼 수 없게 되는 거야. 네 말대로 너는 사랑하는 나를 잃게 되는 거라구. 대신이라고 생각할 수 없어?" 그래도 고개를 가로젓는 수밖에 없었다. "...잔인하잖아. 널 대신할 수 있는 건, 없어. 네게 받은 첼로를 가져봐야 더욱 네 생각이 나겠지." 들고 있던 첼로를 소중히 다시 케이스 안으로 집어넣고 그에게 밀었다. "네가 가져 줘. 그리고 볼 때마다 내 생각을 해줘." "마찬가지야. 네 말도 잔인해." 웃어버렸다. "하지만 네가 좀 잔인해.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상처는 입어." "내가 좀 더 많이 입어." 쓰게 웃은 그가 첼로케이스를 내려다보다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가버리고 싶지만, 하루가 남았으니까. 약속이었잖아." 하지만 그 하루라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이미 그의 마음은, 이 곳을 떠난 후였다. "....가지마! 제발, 가지마.... 나를, 나를... 버리지마...!" 그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씁쓸하게 웃는다. "시간이, 내겐 시간이 없어. 어쩌면 나도 너처럼 사랑할 수 있을는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그 사랑을 할만큼의 시간이 없어. 알기도 전에, 끝나버릴 거야. 그런 건, 바라지 않아." 그를 원껏 끌어안고 입술을 찾았다. 그는 절박하게 그의 입술에 매달리는 내 등을 말없이 보듬어주었다. 그의 등이 소파에 닿았고 그의 몸 위로 올라가 그의 드러난 목덜미에, 턱 끝에, 가슴에 키스했다. 그는 피하지 않은 채 내 등을 계속해서 어루만지고 있었다. "안고 싶어." "아아.... 그래. 좋을 대로 해." 그의 가벼운 웃음기마저 어린 대답에 더욱 애가 타 그의 바지버클을 풀었다. 놀리듯 스치는 내 입술에 그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내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입술은 그의 몸에 머문 채 조금 상체를 들어 셔츠를 벗자 그가 손을 뻗어 내 셔츠를 마저 벗겨주었다. 이어서 내린 손으로 바지를 내리게 한 그가 말했다. "이제껏 고분고분 안겨왔던 게 신기할 정돈데?" "너였으니까." 그의 뒤를 할짝이며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로, 괜찮아?" "그래. 너니까. 이 정도는 해줘야겠지." 그 말에 또다시 상처 입으며 그의 다리를 들어올렸다. "사랑해."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사랑해." 몇 번이나 말하지만 단 한번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울면서 그를 안았다. 고통으로 움츠러드는 그의 몸을 정성스레 보듬으며 계속해서 사랑한다고 말했다. 몸을 이은 채 그의 입술과 이마, 콧날을 떨리는 손으로 만져보았다.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사랑스러워서, 너무나 사랑해서. 쏟아진 눈물이 그의 몸 위로 쉴새없이 떨어져 내렸다. "울지마." 짧게 말한 그가 몸을 떼어내고 일어나 앉았다. 눈썹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내 앞에 앉은 그가 손을 들어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미안. 아팠지."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울지마. 니가 울 일이 아니잖아." "하지만..." 벌거벗은 채 마주 안은 몸이 따뜻했다. 나와 비슷할 정도로 큰 키와 나와 비슷한 정도의 커다란 덩치. 실제의 몸무게보다 야위어 보이는 나에 비하면 오히려 단단한 몸집이다. 어디에도 여려 보이는 구석이 없는 강인한 생김새는 조금은 가녀려 보이는 나에 비하면 너무나 남자답다. 그런 그가 남자인 내게 안기고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 남자인 그를 안은 나를 향해 웃어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를 조금 더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이 아닐 지도 모르는데. 아니, 사랑해주지 않아도, 나를 버리지만 않으면 좋을 텐데. 내가 남긴 키스마크로 얼룩진 몸을 내려다보는 그를 향해 말했다. "...기분 나빴어...?" "아니. 괜찮다고 말했잖아." "씻을래...?" "그래." 발을 바닥으로 딛는 그를 잽싸게 안아들었다. 수월하게 들어올릴 만큼 가벼운 무게가 결코 아니었고 태연하게 발을 뗄 만큼의 무게도 아니었지만 필사적으로 그를 안고서 욕실로 향했다. 내게 안겨 욕실로 이동하며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맙소사. 땀이 나고 있잖아?" "웃지마. 이거 안 보여? 그렇게 흔들리면 떨어트릴 지도 모른다구!" 부들부들 떨리는 내 팔을 보며 그가 작게 웃고는 내 목에 팔을 감았다. "겁나는데." 쿡쿡 웃던 그가 순간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응?" 그를 안고 지탱하는 것에 온 정신을 기울이던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못 들었는데?" "...바람... 소리였나..." 그를 안은 채 뒤로 돌아섰다. "거 봐. 아무 것도...." 현관이 열려 있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그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태평스럽게 말했다. "어쩐 일이야, 여기까지?" 해건은 황급히 재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얼어붙었다는 표현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자연스럽게 채유라의 목에 팔을 감고 있던 것은, 수혁이었다. 그 채유라 또한 나신이었고 수혁의 몸에 남은 흔적들은, 그들의 정사를 알려주었다. 해건은 손을 내밀어 재준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지만 재준은 그런 해건의 손을 느리지만, 확실히 뿌리쳤다. "....찾았는데.... 여기 있는 줄은... 모르고 말야." "만날 일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온 거야?" 유라의 물음에 재준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몰랐어. 말했어도... 믿지 않았을 거야." 여전히 채유라의 팔안에 안긴 채 수혁이 입을 열었다. "기억나? 라스트 스테이지. 그래도 여전히 채유라를 사랑한다, 하지 않는다." "....대답... 했었잖아...?" "이건 응용이잖아? 조금 다르다구." "그래도... 마찬가지야." "그렇다는데? 뭐라고 한 마디 해주지 그래?" 느긋하게 대꾸하는 수혁을 보며 해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뿌리친 재준에게도 해건은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채유라에게도 할 말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곳에서, 해건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채유라와는 어떤 연결도 없었다. 수혁은 해건과의 연결을, 지금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속인 그 때부터. 그리고 유일하게 이어졌던 연결인 재준은, 자신을 외면했다. 모조품은, 모조인 것을 알고 있다- 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었다. 언제 버려져도 나쁘지 않다- 고 말한 것도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 버려지는 시간이 이렇게 빠를 줄은 정말로 알지 못했다. 이렇게 빨리 외면 당할 줄은... 몰랐다. 조금은 기회가 생긴 거라 믿기 시작했었는데. 조금쯤은 재준이 자신을 봐주기 시작했다고 들떴었는데... 진품에 버금가는 모조라 믿기 시작해버렸는데. 어쩌면 진품보다 더 명품일 거라 착각도 하고 있었는지 모르는데. ...소용없었다. 모조는 그저, 모조일 뿐이었다. 그래서, 외면 당한 것일 뿐이다. 그렇게, 정하지 않았었나. 그렇게, 결정되어 있던 것 아니었나. 해건은 돌아섰다. "내려 줘." 한참의 침묵을 가른 것은 수혁의 그 한 마디였다. 조심스럽게 수혁을 내리는 채유라를 보며 재준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괜찮아?" 걱정스럽게 건네는 채유라의 말에 재준은 픽 웃고 말았다. "예상외로 차분한 반응인데. 칼부림이라도 날 줄 알았는데." 유라는 수혁이 게임이 끝났다고 한 뜻을, 비로소 분명히 알 것도 같았다. 수혁은 연해건을, 한재준을 좋아하는 거다. 수혁의 그 말을 들은 재준은 성큼 다가서 있는 힘껏 수혁의 턱을 주먹으로 갈겼다. 그 주먹을 맞고 훌렁 나가떨어진 수혁이 몸을 일으키며 유라에게 말했다. "...옷 좀 주지 않겠어?" 다시 다가서는 재준을 유라가 막았다. "그만둬." "어...째서...!" 신음하듯 말하는 재준을 무시하고 유라는 셔츠를 가져다 수혁에게 걸쳐준 다음 정성껏 단추를 올려주었다. "어째서 수혁이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유라의 그 말에 재준이 조용해졌고 수혁은 말없이 바지를 입을 뿐이었다. 그리고 해건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뭐냐구..." 해건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만, 재준은 조금도 배려할 여유가 없었다. 유라와 수혁이... 유라는 수혁을... 사랑한다고 했다. 수혁은, 자신을 속였다. "왜 나를 속인 거야!" 어깨를 짚은 유라의 손을 떨쳐내며 수혁이 말했다. "안심해. 나와 유라는 끝났으니까. 지금, 가려던 참이었어." 수혁의 그 말에 상처를 입는 유라를 보면서도 재준은 움켜쥔 주먹을 부르르 떠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재준은 각막이 타버리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간신히 눈을 깜빡이고 유라를 향해 말했다. "...내게... 내게... 할 말은... 없는 거야...?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야...?" 유라는 잠깐 재준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게... 전부야...?" "네게 하고 싶은 말은 이미 모두 해버렸으니까." "대체 무슨 말을 했다는 거야! 수혁이 얘기?! 니가 수혁이와 이런 사이라는 얘기!? 니가 대체 나한테 무슨 말을 했다는 거야...!" 유라는 그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고 수혁은 현관으로 향했다. "기다려...!" 유라가 절박하게 불렀지만 수혁은 돌아보지조차 않았다. "먼저 가야겠어. 약속, 지키지 못해서 미안. 조금 몸이 안 좋아서." 아닌 게 아니라 수혁의 얼굴은 하얘져 있었다. 유라가 물었다. "....정말로 이게... 마지막이야...? 다신... 다신 볼 수 없게 되는 거야....?" 후우- 작게 어깨로 숨을 내쉰 수혁은 유라에게로 되돌아가 그의 이마에 손을 대고 살짝 쓰다듬었다. "그래. 만나지 않는 편이 좋아." 유라가 입술을 깨물었고 재준이 소리쳤다. "잘난 척 하지마!" 수혁이 천천히 시야를 돌려 재준을 쳐다보고 그리고 해건이 서 있던 빈자리를 보았다. "해건이... 가 버렸군. 그건, 괜찮다는 얘기냐?" 그제서야 돌아본 재준은 해건이 사라진 장소를 의식할 수 있었다. "그건..." 수혁이 짧게 웃음을 내뱉었다. "하! 좋겠군, 사랑받는 녀석은. 제멋대로 굴어도 된다니." "...마찬가지야!" "해건이가 나 때문에 떠났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지금?" "너 역시 유라에게 그렇게 행동하고 있잖아!" "그렇군,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어." 간단하게 수긍하며 웃던 수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네 쪽이 좀 더 암울해 보이는 걸? 해건이, 다신 만나지 않을 자신 있어? 난, 있거든. 유감스럽게도." "닥쳐! 어떻게 본인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수혁은 유라를 돌아보았다. "상처, 입었구나." 유라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결정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괴로워? 나를 몰랐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 유라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넌. 너는 후회해?" "아니." 결국 유라는 눈물을 떨구며 미소짓는 수밖에 없었다. 재준은 심장을 맨 손으로 틀어 잡히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은 그들 사이에서...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말하면서 유라와 수혁은, 그래도 알아서 다행이었다고,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면 나는...? 자신은...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해건은, 그래도 다행이라 말해줄 것인가. 스스로부터가 후회하고 있었다. 해건을 그런 식으로 취급했던 것을. 그들 사이에서 자신은 상처입지만, 그것은 그들의 문제도, 그 누구의 문제도 아닌 자신의 문제였다. 하지만 해건은 누구로 인한 상처를 입었나. 자신으로 인해 상처 입은 해건을 생각하면서도 어째서 자신은... 유라를... 유라를... 바랄 수 없는 유라를... 떠올리나...! "....행복해...?" 재준의 물음에 유라는 그저 웃었다. 그때 수혁이 작게 구역질을 했고 유라가 그를 바라본다. "괜찮아? 정말로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수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였다. "좀 이상해야 되는 상황이잖아." 유라는 그런 수혁을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고 수혁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진짜 가야겠어." "...안녕." 미소짓는 얼굴로 유라가 말했다. 조금 붉어진 눈가가 서글플 뿐, 유라는 정말로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짧은 대답만을 남기며 돌아서는 수혁의 등에 유라가 끝내 울음기 섞인 음성으로 소리쳤다. "나중에...! 더 나중에... 우연히... 우연히 우리 만나게 되면... 그때... 인사해도 되겠지...?" 수혁은 천천히 유라를 돌아보았다. 조금이지만, 비어 있을 심장의 자리가 저려오며 시야가 아련해진다. 시작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다. 시작은, 정말로 유치하기 그지없었다. 사랑이 아니었다. 지금도 사랑은 아니다. 이토록 메마르고 씁쓸한 감정은, 사랑과는 다르다. 그러나 유라를 안으며 느낀 그 한없던 안쓰러움이 추호도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음이 사라진 심장의 흔적을 헤집는다. 수혁은,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인정하지 않고, 사랑이 아니라 믿으며 자신은 떠난다. 정말은 그것이 사랑이어도, 아니어도. 자신에게는 그리 큰 상관이 없었다. 이것이 끝인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었다.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런 우연이... 그렇게 빨리 일어날 수 있다면. 그때는... 인사해도 좋겠지." 그리고 수혁은, 떠났다. 수혁이 떠난 후 유라가 조그맣게 어깨를 움츠리며 가까운 소파에 몸을 앉혔다. "...이제 어쩔 거야?" 재준의 물음에 유라는 빙긋 웃었다. "나도, 떠나야겠지." "...수혁에 대해서... 물어도 소용없겠지...?" "응." 기분 좋을 만큼 딱 잘라 시원하게 대답하는 유라의 얼굴을 보던 재준의 고개가 숙여졌다. "왜... 나는 아니지...? 왜, 나는 될 수 없던 거냐..." 재준은 그 물음이 언젠가 해건이 자신에게 건넸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나 자신의 사랑과, 타인의 사랑은 다른 거였다. 다르지 않은 마음의 무게, 마찬가지일 아픔과 좌절. 그러나 그것이 타인의 것일 때, 그것은 마치 깃털과도 같아진다. 조금도 무겁지 않는 조금 가려울 뿐인 정도의 불편함. 유라로 인해 그 지독한 잔혹에 대해 알게 된 재준이었지만, 그것은 해건에게까지는, 닿지 않는 배려였다. 분명히 안타깝고 위로하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그건 자신의 일 이전의 것이었다. "사람에겐 세 번의 만남이 있다고 해. 이 말, 기억나?" 재준은 그저 머리를 저었다. "그 첫 번째가 내 부모였고, 두 번째가 수혁이었어. 그리고 세 번째가 너. 충분하지 않아?" 유라는 재준의 악다문 입술과 침중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다 작게 혀를 찼다. "너는 내게 강요할 수 없어. 바랄 수도 없지. 알겠어? 그건, 나와는 무관한 네 일인 거야. 물론 나는 너를 동정할 수 있고 적선을 할 수도 있지만, 그걸 바라는 거야? 그걸 바란다면, 앞으로도 너는 얼마든지 나를 만날 수 있겠지." 하지만, 아니라면 만날 수 없다- 그렇게 유라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재준은 선택할 수 없었다. 동정을 원하는가. 적선을? 그러나 볼 수 없게 되는데. 결정 내리지 못하는 재준이 선 채로 망연히 유라를 응시했고 유라는 몸을 일으켜 반소매의 흰 티셔츠를 머리위로부터 덮어쓰고 길다란 다리를 청바지에 꿴 다음, 정면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유라가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재준은 가슴을 짓누르는 크나큰 압력에 어깨를 들썩였지만, 뒤쫓을 수도 없었다. 자신을 보는 유라의 눈에서 동정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견딜 자신이 있단 말인가, 자신에게. 잠시 후 나타난 유라는 커다란 빨강 백팩을 메고 있었다. "결정한 것으로 생각해도 되는 거, 맞지?" 재준은 고개를 끄덕여 그렇다고 할 수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수도 없는 갑갑해서 터질 것 같은 심정이 되어 그저 구원을 바라는 눈길로 유라만 바라보았다. "마음만으로 되는 일이 몇 가지나 될 것 같아? 거의 없다구. 그러니까 자존심을 버리지마. 좀 더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살아. 너는 그렇게 할 수 있잖아?" "아니야! 모르겠어...? 정말, 모른다는 거야? 나는 지금 네게 빌고 있는 거야... 나를 선택해 달라고, 나를 외면하지 말라고, 미워하지 말라고... 그렇게 애걸했잖아...! 네게 내세울만한 자존심 같은 것, 가졌던 적이 없어...!" 유라가 가방끈을 손에 쥔 채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게 필요 없는 걸."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희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재준은 자신이 지금 웃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너야말로 모르고 있어. 거울 같다는 내 말의 의미, 전혀 모르고 있다구." "똑같아! 비치는 그 모습이 바로 나고, 또한 너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픽 웃으며 유라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그런 게, 네 자존심이야. 네게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있지만, 그건 반대편인 거야. 우린, 절대로 겹쳐지지 않아. 나는 나를 비춰낼 상대 같은 것, 조금도 필요 없어. 나는 내가 끌어안을 상대가 필요하니까." "....그게... 어째서... 어째서... 수혁이야...!" "말해줘도 들을 생각도 없으면서 비겁하게 그런 걸 묻는 게 아냐." 주먹을 움켜쥐고 재준이 미친 듯이 머리를 휘저어댔다. "말해...! 날 동정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넌 말해야하는 거잖아..." 하지만 힘없이 늘어지고 마는 재준의 말에 유라는 천천히 자신의 심장이 있는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가리켰다. "그는, 내 여기에, 그의 심장을, 버려주었어." 주먹이 풀리고 이어 재준의 온 몸의 힘이 모두 빠져나가 버렸다. "나는... 나는 네게 심장을... 주지 않았던 것 같아....?" 힘없이 그렇게 중얼대는 재준의 음성을 듣지 못한 듯 유라가 말을 이었다. "비어버린 거기엔 항상 바람이 불어. 메말라서 아무 것도 없는 곳에 항상 바람이 부는 거지. 그건... 정말로... 슬퍼. 그래서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거야." 무릎이 꺾이려는 것을 간신히 벽을 짚고 지탱하는 재준의 모습을 보며 유라가 말했다. "너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인 거야." 그리고 유라가 수혁이 나가며 정중하게 닫아주고 간 현관의 문을 다시 열어 젖혔다. 반쯤은 얼이 빠져버린 표정으로 재준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유라는 바래선 안 되는 거였고, 바랄 수 없었던 거였고, 그리고 이제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디로... 가지....?" 찰칵- 경쾌한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닫히기 전 스며들 듯이 유라의 음성이 재준에게로 전해졌다. "부산." 아아... 부산... 부산이라... 좋지.... 재준은 마치 기력이 다한 노인의 마지막처럼 감기는 눈꺼풀마저 의식할 수 없었다.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며 밖으로 나온 수혁은 저만치 앞에 서 있는 해건을 보았다. 잠깐 멈춰서 둥글게 모은 손바닥으로 라이터의 불길을 감싸고 담배에 불을 당긴 수혁은 불끝이 완전히 오른 것을 보며 느릿하게 해건에게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들었던 해건은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군다. “재준이가 아니라서 실망한 얼굴인데 그래.” 그 말에 고개를 든 해건이 날카롭게 말했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여유롭게 연기를 뱉어 올리며 수혁이 담배를 다시 입술로 가져다댄다. “너한테까지 나쁜 짓 한 기억은 없지만. 아아, 한재준이 상처 입어서? 복수해주고 싶어진 거냐?” 짐짓 알았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말하는 수혁에게 해건이 입술을 깨물고 휙 쳐다보았다. “너란 녀석, 도저히 모르겠어. 이런 짓 해서... 니가 얻는 게 뭐야? 이런 게... 니가 바라던 거였어...? 이런 게... 보고 싶었어?” 조금 할 말이 없어진 기분으로 수혁은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보다 니가 말하는 이런 거라는 말인데. 난 잘 모르겠거든? 뭐가 문제였다는 거지? 내가 잔 건 너도, 재준이도 아니잖아? 어디까지나 유라와 내 문제일 뿐인데. 아, 재준이가 유라를 좋아한 거? 그 재준이를 니가 좋아한 거? 그래서 나와 유라의 일이 못마땅하다는 건가?” “우리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우리라.... 글세. 뭘까.” 무덤한 얼굴로 그렇게 되묻는 수혁을 보는 해건은 그 평온하기까지 한 어조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피곤한 듯이 손을 들어 이마를 문지르던 수혁이 말했다. “가야겠어.” “....수혁아... 난 정말... 모르겠다... 니가 왜 이러는 지... 정말 모르겠어...” “좋을 대로 생각해. 어차피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한들 뭐가 달라지겠어.” 건조하게 말하는 수혁을 보며 해건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일어난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남아있는 것 또한 많지 않은가. 자신과 수혁, 재준. 그리고 어찌 보면 유라 역시 남았다. 그 사람들에게 남은 그 엉킨 마음들은, 그 상처 입은 마음에 대해서만은...! “니 탓이야! 모두 니 탓이라고!!!” 수혁은 새 담배를 피워 물며 가볍게 미간을 문질렀다. 수긍, 하는 수밖에 없는 거겠지. “맞아. 애초에 채유라에게 그 곳에 오라고 말한 것도 나고, 그 채유라에게 재준이를 만나서 꼬시라고 한 것도 나고, 그 채유라를 안아서 재준이를 상처 입힌 것도 나고, 니가 재준이한테 반한 것도 내 탓이고, 재준이가 너 안 사랑하는 것도 내 탓이다. ...됐냐?” 해건이 한발 성큼 다가서 수혁의 뺨을 갈겼다. 휙 고개가 돌아가며 물었던 담배가 저만치로 날아갔다. 금세 벌겋게 달아오르며 열이 솟는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조금 문지른 수혁은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장초였는데.” 정말로 아깝다는 듯이 그렇게 수혁이 말하자 해건이 다시 손을 치켜올렸다. 수혁은 빙긋 웃으며 해건의 쳐든 손목을 잡았다. “아아, 그래. 알았어, 알았다구. 뒤에 말한 2가지는 내 탓이 아니었지? 착각했어. 모두 내 탓이어야 하는 줄 알고 말이지.” 해건의 손목을 내팽개치듯이 놓은 수혁은 길게 연기를 뿜었다. “...나쁜 자식...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렇게 미웠으면... 왜 참은 거야! 말해줬으면... 말했으면....” “웃기는군. 말했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이미 일어난 일에 이제 와서 말한들 또 뭐가. 그리고 말야, 너 남이 기껏 죽도록 노력한 일에 대해서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게 아냐. 내가 언제 니가 밉다고 했지? 분명히, 싫어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더 많이 좋아하고 싶다고, 그랬었잖아. 내가 니가 미워서 이랬다는 거냐? 내가 너냐? 그런 유치한 생각이나 하게. 너야말로 솔직하게 말해. 이젠 어쩔 거야. 울면서 기다려도 유라를 보느라 니가 가는지조차 모르던 재준이를 언제까지 사랑할 수 있어. 형입네 뭐네 떠들어도 결국 뒤에서 엎어버린 나는 또 어쩔 거야.” 해건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좋은 거지... 어쩌면... 좋은 걸까. “나에 대한 건 신경쓸 것 없어.” 해건이 눈을 들어 수혁을 보았다. 수혁은 싱긋 웃으며 해건의 피가 흐르는 입술을 엄지 끝으로 닦아주었다. “나는 니가 바라는 대로 할 거니까. 니가 필요하다면, 머물러 주겠어. 싫다면, 떠날 거고. 재준이를 잡아다주는 건 무릴 것 같지만 나에 대한 거라면, 니가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해건의 눈이 커다래졌다. “무...무슨 소릴 하는 거야...” “말했잖아. 죽도록 노력한 일이라고.” 가볍게 대꾸하며 수혁은 자신의 엄지에 묻은 해건의 피를 바라보았다. “그게... 성공한 걸까? 난 널 미워하지 않으니까. 여전히 소중한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빙글빙글 도는 머릿속을 느끼며 수혁은 담담하게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피곤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은. 진심이긴 하지만, 별로 소용없겠지. 그 편이 좋긴 하다. 진심이라고 해서 꼭 진심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도 그러고 있지 않은가. 타인의 진심을 언제나 기만하고 굴절시켜 받아들인다. “....정말로... 정말로... 하는 말이야...? 그게... 니 진심이라고...?” 그래, 믿지 않아 주는 쪽이 좋아. 자신으로서도, 믿어주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좋았다. 수혁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글세. 내가 그것까지 알려줘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판단은 네가 할 일이고, 난 모두 말했어. 중요한 건, 결과는 네가 바라는 대로 된다는 거잖아?” 해건은 머리를 내저었다. 대체 수혁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수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조금 더 생각의 방향을 바꿔도 보라구.” 해건은 다시 눈만을 들어 수혁을 보았다. 수혁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있었다. “재준이는 유라를 절대로 얻을 수 없어. 이건, 확실히 장담하지. 남은 건, 너 하나라구. 다른 사람이 나타난 들, 너를 걷어내지는 못해. 분명히 말하지만, 그건 너한테 유리한 상황이잖아? 재준이를 감싸줄 사람은 너 하나밖에 남지 않은 거란 말이다.” 해건은 자신이 그 말을 한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였다. “...절대로...?” “그래, 절대로.”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해건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런 게... 이런 게... 사랑인가. 그래도, 그렇게라도 얻고 싶은 것이... 사랑인가. 온통 상처 입어 무너진 그 사람의 고통에 기대려는 이 모습이... 사랑인가. 그렇게라도... 그 사람에게서 떠나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이... 사랑인가... “이런 게... 이런 게... 사랑일까...?” 이 추한 이기심이...? 이렇게 잔인한 탐욕이...? 수혁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사랑이지. 누가 너더러 사랑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습뿐이라고 말하던가? 희생은 겸양이지만, 꼭 미덕인 건 아니지. 추하겠지만, 그것도 사랑이다. 그것도 니 사랑이야. 그런 걸로도 사는 사람은 얼마든지 많아. 너만 그런 것도 아니란 말이다.” 수혁은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지만. 해건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그런 사랑을 하고 싶은가. 그것 또한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저... 재준이 자신을 보아주기를... 단지... 재준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재준은 보아주지 않는다. 재준은 자신이 머무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떡해야 할까. 이렇게나 간절하게 재준을 원하고, 재준을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을. 타인을 향한 마음이 이토록 간절해질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뿐이었다. 자신이 재준을 그렇게 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내가 필요해? 재준이는 이제 너밖에 없다고 몇 번이고 네게 말할 수 있는 내가, 너한테는 필요해?” 해건은 눈물을 흘렸다. 그런가... 내게는... 그런 수혁이... 필요한가. 수혁은 가만히 해건의 등을 당겨 안아주었다. “울지마. 왜 우는 거냐. 그런 내가 필요하다 해도 너는 나쁘지 않아.“ “....이제, 떠나.“ 그 말에 팔 안의 해건의 몸이 움찔- 떨리는 것을 느끼며 수혁은 선선히 팔을 풀었다. 수혁의 팔 안에서 빠져 나온 해건은 고개를 돌려 유라를 보았다.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외양의 근사함만이 아닌 어딘지 모르게 초연한 듯한 분위기는 그 사람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재준도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일까. 해건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사랑하려 했으나 돌아보지 못했던 재준도, 이 사람을 사랑했던 걸까. “아아... 떠나는군. 그래, 어디로 가지?“ “....부산.“ “부산...? 아아... 부산이라... 친척이 있다고 했던가.“ “뭐... 도움 받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조금 먼 곳이어야 해서.“ “....그런가...?“ “응... 우연이... 빨리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야.... 그래야 너는 나를 다시 또 버리지 않을 테니까.“ “....버린 것과는 달라. 버린 게 아냐. 단지, 게임이 끝난 것뿐이니까.“ 수혁의 말에 유라는 빙긋 웃었다. 수혁은, 자신을 버린 게 아니었다. 단지, 게임이 끝난 것뿐. 그것의 의미는, 수혁이 유라의 가슴에, 말라버린 심장을 버려주었다는 뜻. “...갈게. 무리하지마. 요즘 계속 얼굴이 안 좋았어.“ “고맙다. 너도, 무리하지마.“ “응. 알겠어. 다시 또, 만나면... 약속해. 그땐, 게임이 아니라고.“ 수혁은 환하게 미소 띤 얼굴로 유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하지. 그땐, 게임이 아냐. 그건.... ....현실일 거다.“ 해건을 향해서도 작게 유라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몰랐다고 해도, 소용없겠지만... 미안하게 생각하는 건 알아줬으면 좋겠어.“ 해건은 가만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하하... 정말... 소용없다구, 그런 거.“ 유라가 아픈 눈으로 해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해건은 그 눈을 멍하게 마주보며 말하고 말았다. “정말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걸 알아. 그냥, 그냥.... 엉켜버린 것뿐인 걸. 정말은... 사랑 받지 못한 내 문제일 뿐이란 거... 알고 있어. 하지만... 원망하게 해 줘서... 너랑 수혁일 원망할 수 있게 해 줘서...“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해건은 울음을 터트려 버렸다. 그런 해건의 어깨를 다시 감싸안으며 수혁이 중얼거린다. “이래서야... 아무리 해도 미워할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좋아하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유라가 돌아섰다. “유라야!“ 처음으로... 수혁에게 그렇게 불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유라가 돌아보았을 때 수혁은 웃는 얼굴로 무언가를 자신에게 던지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받아든 그것은, 수혁의 차키였다. “맡아 줘.“ “...맡아...?“ “다음에 만나면, 그때 되돌려 받도록 하자구. 그러니 그때까지 잘 부탁해.“ 차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응!“ 그리고 유라가 떠났다. “....보내고 싶지 않은 거야?“ “글세. 요즘은 정말 상태가 형편없는 것 같아. 내가 뭘 어쩌고 싶은지, 무얼 바라는지... 그런 것조차 도통 알 수가 없어져서 말야.“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그렇게 대꾸하는 수혁의 시선은 멀어지는 유라를 실은 자신의 차의 뒤에 고정되어 있었다. 문득 자신의 허리를 짚어오는 해건의 손길에 수혁은 시선을 내려 해건을 바라보았다. “형님에게 느끼는 성욕이란 거, 범죄일 걸, 아마?“ “그게 아니라....너, 말랐잖아....?“ “그래? 흠... 꽤 무리하고 있긴 했던 건가?“ “아니... 진짜야. 언제 이렇게...?“ “무슨 소리하는 거야? 이제 제법 괜찮은가 보지? 그런 곳에 신경이 다 갈 정도면?“ 해건은 수혁의 재킷 주머니에서 빼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괜찮지 않아. 괜찮아질 리가 없는 거잖아...? 아직, 멀었어. 한참이나... 남았다구.“ “좀 더 크게 말해. 저쪽에도 들리게 말야.“ 담배를 입에 문 채 뒤를 돌아본 해건은 그 곳에 재준이, 지독히도 일그러진 얼굴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가장, 서러워 보이는 얼굴인 게, 유감이야.“ 수혁의 빈정거림에 재준은 멍한 얼굴로 수혁과 해건을 번갈아 보다 곧 고개를 떨구었다.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 “흐응. 상관이 없다?“ “...그래. 아무래도 상관없어.“ “너무하잖아. 여기 연해건군은 말이지, 엄청나게 상관이 있어졌으니까.“ 재준은 굳은 얼굴로 해건을 바라보았다. 해건의 입 끝에 물린 담배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저 혼자 닳아버린 담배가 입술의 흔들림에 부스러지며 재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한테는... 미안하다.“ 미안하다- 다양한 구실이란 것에 대해 수혁은 논문이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아지는 심정이었다. 유라의 사과와, 자신의 사과와, 해건의 사과와, 재준의 사과는. 모두 달랐다. 사과라는 한 마디로 모두 뭉뚱그릴 수 있는 그 말들은, 그럼에도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과들 중, 어느 것이 가장 최악인지 수혁은 알 수 없었다. 누구의 사과의 가장 서러웠는지도. “이래서야... 논문은 무리겠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수혁의 말은 해건에게도, 재준에게도 전해지지 않았고 수혁은 해건의 입술 끝에 여전히 물린 채 닳고 있는 담배를 빼내었다. 수혁의 그 동작에 퍼뜩 놀라며 해건이 몸을 떨었다. 재준은 그런 해건에게서 눈을 돌리며 수혁을 보았다. “어쩌고 싶은 거야.“ “해건이에게는 확실했는데. 네게는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야.“ “정말로 지독해....“ “누구에게? 네게?“ “모두에게! 우리들 모두에게!!!“ “우리들이라니? 그 우리란 게, 누굴 말하는 거지? 너의 그 우리란 것에, 대체 누가 포함되는 거냐.“ “모두, 모두야!“ “하지만 나는 아냐. 유라에게 지독했던 건 인정하지. 하지만 나는 너와 해건이에게는 지독하다고 할만한 짓, 하지 않았어. 백번 양보해서 해건이에겐, 그렇다고 할 수 있어. 그렇다 해도 네게는 아니란 말이다.“ 수혁은 그때까지도 들고 있던 해건의 담배를 불쑥 생각난 듯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거칠게 짓이겼다. “나와 유라의 사정이었어. 유라가 너를 사랑하지 못한 건, 유라의 사정이지 내 탓이 아냐. 네가 유라에게 선택받지 못한 걸 내 탓이라고 하고 싶어? 그래? 나보다 부족하지 않은 너인데, 그런데 그런 유라가 선택한 것이 네가 아니어서, 그래서 나를 비난하고 싶어? 말도 안 돼. 너도 마찬가지야. 그게 내 탓이라면, 너도 해건이에게 똑같은 짓을 한 거야.“ “....같지... 같지 않아....!“ 재준은 입술을 악물었다. 자신이 해건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유라의 탓인가....? 그것이... 유라의 탓인가....? ....그렇지 않았다. 이미, 유라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그것은 해건과는 무관했다. “그만해...! 그만들 둬! 이러지들 말라구!“ 해건의 비명 같은 외침에 재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해건을 보았다. “그저... 그저... 사랑하게 된 것 뿐이야. 그저... 사랑하게 된 것뿐인데....“ 해건은 그런 재준에게서 눈을 돌렸다.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재준의 통곡과도 같은 한탄에 재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얼어붙어 버렸다. 남은 것은, 움직이지 않는 심장.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왜....!“ 무릎이 꺾이며 바닥으로 주저앉아 얼굴을 감싼 채 오열하는 재준을 보는 수혁은 참담해졌다. 자신이 바란 것은, 무엇이었던가. 원하는 만큼, 그들을 진탕질 쳤다. 어째서, 그랬던 걸까. 원하는 만큼, 실컷 재준이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계기를 만든 것은, 분명히 수혁 자신이었다. 대체, 자신은 왜 그랬던 것일까. 해건도, 재준도... 싫어하는 것이 아닌데. 유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게임을 시작했다. 해건이, 재준을 사랑하고 있었다. 유라를 재준과, 만나게 했다. 재준이 유라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게임은 끝이 났다. 유라가, 떠났다. 재준이, 오열했다. 해건은, 잃었다. 그래서 수혁에게 남은 것이 무언가. 가장... 나쁜 것은, 정말로 자신이었던 지도 모른다. “....가자.“ 수혁은 해건의 한 팔을 당겼고 해건은 그저 끌려왔다. 바닥에 엎드려 웅크린 채 한참을 울던 재준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부산으로.... 부산으로 가겠어.“ 해건이 재준을 돌아본다. 그러나 그 눈에는, 이제 감정이 없었다. 그런 해건을 수혁은 지끈- 울리는 호흡과 함께 서글프게 응시했다. “....유라를 만나고 싶어. 유라를......“ 한동안 그 곳에는 침묵만이 남았다. 그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것은, 재준이었다. “너도, 나도, 해건이도...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인 거다. 그냥... 그렇게 되버린 거야. 우리들, 이걸로 끝나지 않아. ...그러니, 나도 부탁하자고.“ 그리고 재준은 수혁에게 차키를 던졌다. 그러나 손 내밀지 않은 수혁으로 인해 키홀더는 수혁의 발치 아래 바닥에 툭- 떨어졌고 그것을 주워 올린 것은, 해건이었다. “받아. 재준이 말이 맞아. 니가 말한 것처럼,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어쩔 수 없어. 우리들은, 그냥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야. 하지만, 끝나지 않아.“ 수혁은 해건이 내미는 열쇠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아...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야.“ 단지 남게 되는 것은, 수혁 자신의 이유일 뿐. 어째서, 자신은 그렇게 했던가- 라는 것. 그것은... 해건도 재준도... 유라조차 알지 못할 이유. 그랬었다- 라고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수혁, 자신만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고 싶은 수혁, 자신만의 이유기에. 운전석에 앉은 수혁이 시동을 걸었다. 조수석에 앉은 해건이 좌석을 젖히고 몸을 눕힌다. 그리고 재준은 뒷좌석에 앉아 등받이 깊숙이 머리를 묻고 눈을 감는다. 수혁은 액셀을 밟아 그 곳을, 떠났다. “부산으로 가겠습니다.“ 근 석달 만에 처음으로 만나는 아버지였다. “부산?“ “예.“ “학교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부산으로 가겠다는 내 말에 아버지는 별 다른 반응은 없었다. “....휴학하겠습니다.“ “갑자기 학기 중에 휴학이 되던가?“ “....나중에, 휴학원 제출하면 되니까요.“ “한 10년 대학엘 다닐 셈이냐?“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대충인 나의 사과에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다 불쑥 인터폰을 눌렀다. “커피 한 잔 하겠냐?“ “아뇨.“ “커피 한 잔 가져 와.“ 짧게 말하고 인터폰을 끈 아버지가 이번에는 창 밖을 본다. “설마, 불만이 많아서 뒤늦게 가출하겠다는 그런 건 아니겠지?“ “....가출이면 이렇게 말할 리가 없잖아요.“ “하긴, 그렇지.“ 여직원이 커피를 내려놓고 나가자 아버지는 턱을 슬슬 문지른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겠냐?“ “....안 물어보시면 좋겠는데요.“ “너 말이다. 나한테 불만이 많은 건 알겠는데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너한테 아주 관심이 많단 말이다.“ “....농담이시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 사람이 내 아버지였던가... 의문이 일 정도다. “당연한 거 아니냐. 자식이라고 아들 하난데 관심이 없는 게 이상하지.“ “하지만 하신 행동을 돌이켜 보시라구요. 제가 그 말을 선선히 믿겠는지.“ 담배를 한 개피 꺼내 불을 불이려다 말고 불쑥 묻는다. “피지 말까? 너, 연기 싫어했었던가.“ “뒤늦게 뭔가 굉장히 감동을 주시려고 하는 것 같네요. 어색하지 않아요?“ “못 보는 새 너, 변했구나. 꼬여 버렸어.“ “원래 이랬어요.“ “소중하게 키웠더니만 다 소용없어. 이래서 품안의 자식이라 하는 게지.“ “...다른 사람의 자식도 소중하게 생각하세요.“ 나도 모르게 불쑥 내뱉은 말에 아버지가 눈썹을 가늘게 휘고서 담배를 내린다. “무슨 뜻이냐?“ “....이번에 건물 올리는 거.... 엉망이잖아요.“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안 거냐?“ “어떻게 알았건 상관없잖아요. 그 녀석.... 친구...라구요.“ 정확히 말하자면, 친구가 아니라 애인지망이었지만 별로, 나서서 말할 만한 알은 아니니까. 게다가 채유라에 대한 얘기를 아버지와 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도 컸다. “너한테... 그런 친구가 있었다고?“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데요? 나는 친구도 없어요?“ “몰라서 묻는 거냐. 네 녀석, 뭐하나 소중한 게 없는 녀석 아니냐.“ 할 말이 없어지고, 입이 악물리고, 인상이 일그러진다. 또-다. 나에 대한 것을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다는 비참하기까지 한 감정. 왜 그런 걸까. “인상 쓸 거 없다. 넌 아직 한참 멀었어. 새파란 녀석이 설마, 날 속일 셈이었던 게냐?“ “...그런 거 모른다구요.“ “인상쓰지 말래두. 그보다 부산엘 가면 어쩔 셈이야. 뭔가 대책이라도 있는 게야?“ “어쩌다뇨... 그저,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서울선 못 찾는 거냐? 박실장한테 말하면...“ “제가 찾을 거예요!“ 지그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아버지가 설래설래 고개를 젓는다. “아파트 하나 구해놓으마.“ “...됐어요. 혼자 갈 거예요.“ “무슨 소리야?“ “제가 알아서 할 거라구요.“ “너 혼자 빈 몸으로 덜렁 보냈다가 날더러 당하란 소리냐?“ “무슨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니 엄마한테 욕 들어먹을 거 말하는 거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어차피 지금도 맘대로들 사시잖아요!“ 가늘게 눈을 모아 뜨던 아버지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리곤 의자에서 일어서 맞은 편에 앉은 내 머리를 툭툭 두들기곤 다시 앉는다. 멍해져서 아버지를 뚱하게 쳐다보았다. 이건 또... 새로운 취미라도 생긴 건가. “니 엄마야. 분명히 나와는 별 상관없어지긴 했지. 그렇다고 해도 내가 니 아빠고 그 사람이 니 엄마라는 건, 그대로야. 생전 고생이라곤 안 해본 아들을 혼자 덜렁 부산으로 부쳤다는 거, 알면 너보단 내가 피곤하게 된단 말이다. 곱게 잘 보내주겠다는 것도 불만인 게냐. 그래서야 졸부의 아들답지가 않지. 안 그러냐?“ “...상관없잖아요... 무슨 상관이냐구요...“ 이마를 거세게 중지로 딱- 소리나게 퉁긴 아버지가 의자에 등을 기댄다. “너는 소중한 아들이라 입도 뻥긋 못할 테고 별로 상관없는 사람인 나한테 난리칠 게 뻔한데 뭐가 상관이 없어. 니가 사고라도 나서 덜컥 죽으면 누구한테 연락이 올 거 같냐? 나야. 알아듣냐. 너는 죽어도 내 아들인 거야.“ 조금, 가슴이 시큰거리고 있었다. 대체 알 수가 없다. 나에게 무얼 바라는지. 나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아는 그들은, 그러면서도 왜 나에게는 제대로 말해주지 않는 걸까. 그들이 내게 바라는 것에 대해 왜, 단 한번도 말하지 않는 걸까. 뒤늦게 이런 말을 들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는데. 뒤늦게 그런 말을 들어도... 나는 변할 수가 없는데. 해건이도... 내 아버지도.... 수혁이도.... 유라도. 그렇게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들이면서 어째서 그러는 것일까. 대체 나에게 그들은 무얼 바라는 건가. 내가 그들에게 어떡하길 바라는 거란 말인가. 타인에 대해 낯선 나를 안다면, 왜 말해주지 않는 걸까. 나를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싶다면, 그것을 어째서 이런 식으로밖에 알리지 못하는 걸까. 모두가 조금씩 상처 입는 이런 방법이 아니어도... 나에게 알릴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었을 텐데. 그들이 나에게 분명히 말해줬다면, 그래도 조금은 달라졌을지 모르는데. 그저, 나는 알지 못했을 거라서? 그들이 바라는 것을, 스스로는 알아채지 못할 나라서....? 보이지 않는 나를 알아버린 그들이 아니었던가. 알리고 싶지 않던 나를 알아버린 건 그들이 아니었던가. 그럴 수 없는 나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아니었나. 그러지 못할 나에 대해서도. “왜, 말하지 않았던 건데요? 왜, 진작에 나한테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똥고집인 주제에 누굴 원망하려 드는 거냐.“ 바지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내 탓이라고... 말하려는 거예요?“ “누구의 탓도 아냐. 잘잘못을 따질 문제가 아니야. 쉽게 말할 수 없는 문제고 쉽게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니까. 다만 되돌리고 싶은 게지. 누가 뭐래도 너는 소중한 자식이니까. 포기할 수 없는 거야.“ “....연락, 드릴게요.“ “아파트는 구해주마. 이건 절대로 양보 못한다.“ “....그러세요.“ “어디 정해놓은 곳이라도 있냐?“ “....물가가 좋아요.“ “...알았다. 구해놓으마.“ “....감사합니다.“ “원하는 만큼, 해 보거라. 하고 싶은 만큼, 해 봐.“ “....예.“ 자리에서 일어서 돌아서다, 믄득 돌아보니 아버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 대해, 생각을 해주고 있었다. 보통의 부모와는 다른 모습인 걸 모르지 않지만,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유라를 잃게 된다 해도. 내게는 많은 것이 남게 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최선을 다해볼 수 있다. 돌아올 곳이, 있었다. “...가보겠습니다.“ “그래. 준비하는 대로 연락하마.“ 아버지의 사무실을 나와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다시, 시작하는 거다. ?아파트, 구했다.? “어딘데요?“ ?하단. 강가야.? “예. ...감사드리고 있어요.“ ?알았으면 됐다. 무사히, 돌아오거라. 네가 아니게 되지는 말란 뜻이야.? “....걱정 마세요. 그냥, 다시 시작하는 것뿐이니까.“ ?...그래.? 이미 짐 정리를 끝냈다. 손안의 메모지에 적힌 새로운 주소를 응시했다. ....이상하군. 하단이라니. 신평 밖에 안 보이지만. 뭐. 강가라고 한다. 유라를 생각하면, 흐르는 물이 떠오른다. 무엇에도 유라의 흐름을 멈춰둘 수 없었다. 그래서, 내게 있어 물가란, 유라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었다. 다시 만날까...? 그 곳에서... 채유라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찰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소파에 누워만 있었다. “이야, 이거 진짜 빈집인데 그래? 털어 갈 게 없으니 상관없다 이거야?“ 희연이였다. “어쩐 일이야? 털어 갈 것도 없는 집엔.“ “짐 싸는 거나 도와줄까 했더니. 뭐라 해도 그런 건 여성의 손길이 더 섬세한 거 아니겠어?“ “쌀 거나 있었어야지.“ “정말 부산엘 가는가 봐?“ “응.“ “유강이 찾으러?“ “유라야. 내가 찾으려는 건.“ 희연이 치마의 주름을 가다듬으며 맞은 편 소파에 살며시 앉는다. “그보다 어쩐 일이야?“ “이게 필요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희연이 핸드백에서 꺼내놓은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건...“ 일어나 앉아 그 사진으로 손을 뻗었다. 사진 속에는 유라의 웃는 얼굴이 있었다. “...어디서 났어?“ “몰래 구한 거야. 유강이 사진 같은 거 엄청 싫어했으니까.“ “...나 줘도 괜찮은 거야?“ “아무래도 좋은 걸. 어차피 사랑 같은 거 아니었어. 가벼운 일탈 이상은 내 쪽에서도 사양이었으니까 유강이도 만나줬던 거야.“ 희연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붉게 칠한 입술이 동그랗게 말리며 연기를 피워 올린다. “하지만, 넌 사랑인 거지?“ 대답 대신 사진 속의 유라를 바라보았다. 웃는 그 얼굴엔 어디까지나 진심이 담겨 있다. 유라는 그런 녀석이었다. 언제 어느 순간에라도 웃는 것은 그 자신의 진심. “그래도 좋아?“ “네게서 필요한 건 사랑이 아니야. 너한테서 내가 필요로 하는 건 사랑이 아냐. 너는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 그건 다른 곳에서 찾으면 돼.“ “그럼... 넌 내게 무얼 바란 거야?“ 재떨이를 찾지 못한 희연이 술잔에 담배를 톡 담궈 불을 끄며 싱긋 웃었다. “네게 없는 것.“ “...그게 뭐지?“ “가진 적이 없으니 넌 말해줘도 모르는 거야.“ 진심을 보이지 못한 상대. 한때만을 위한 가벼운 유희의 상대. 그것이 희연이었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내가 조금만 솔직한 녀석이었던들... 아마 많은 일이 바뀌었을 텐데.“ “자존심을 버리지마. 한재준은 그런 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냐. 한재준은 어디까지나 비겁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또한 다정하게. 그렇게 한 걸음 건너 그저 바라보는 것이 어울리는 사람이야. 마음이 없는 게 아냐. 네 마음은 단지, 투명해. 그 사이로 타인의 마음이 보이지. 그런 너니까 알 수 없는 거야.“ “그게... 정말로 내가 맞아? 다들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잖아....? 어째서 그런 거야?“ 희연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성 따위 하지마. 네게 필요한 건 마음의 색이야. 반성과 후회 같은 것으로 얻을 수 없어. 마음의 색은.“ “그럼... 무엇으로 얻지...?“ 내게로 허리를 굽힌 희연이 부드럽게 입술을 겹친다. 닿은 입술에서 흘러 들어오는 말은, 따스했다. “오만과 이기. 끝없는 고통.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는 거야. 모든 것은 자신만을 위해서. 어설프게 상냥한 건, 민폐야. 그러니까 너 자신만을 위하면서 살아. 그렇게 살다 보면 네 마음에 색이 생겨.“ 팔을 들어올리고 희연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너, 아줌마 다 됐는데 그래...“ 위로 받는 기분이 이렇게나 좋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 자신만을 위한다는 말이 이렇게나 다정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희연은 내 마음의 색을 찾기 위해, 유라를 찾기 위해 떠나는 나의 여행에 최고의 축복을 해 주었다. “돌아오면... 돌아오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당연히, 니가 사는 거겠지?“ “물론. 나야 물주밖에 안 되는 녀석이잖아?“ “빙고.“ “가기 전에 송별회는 하는 거겠지?“ 주방으로 들어가 새로운 술잔을 내오며 희연이 물었다. “송별회는 무슨... 그런 거 안 해.“ 제이앤비 제트를 잔에 따른 희연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 귀여운 척이 위로 받았다한들 통할 리 없다는 걸 잘 알 텐데도 불구하고 시도하는 그 점이 희연이의 아마도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그나저나 여길 들릴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해건이가 가르쳐 줬어.“ “....너, 설마 이 사진....“ “수혁이가 줬어. 너 전에도 사진 한 장 없이 흥신소 의뢰하고 쌩쑈를 했다면서 주던 걸?“ “그래... 수혁이가...“ “그래도, 송별회 안 해?“ “안 해.“ 싱긋 웃었다. 우리들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실이 이토록 기쁠 줄은, 상상도 못했다. 8년, 아니 10년의 친구라는 것은 이런 기분이었던 것일까. “너, 안 가냐? 나갈 거니까 데려다줄게.“ “나야 당연히 루카스에 가지이~ “ “...너 말이다, 다 좋은데 그 루카스는 어떻게 안 되냐?“ “어디가 어때서? 나는 거기가 젤 좋아.“ “차라리 닉스를 가. 루카스가 뭐냐, 루카스가. 없어 보인다, 너.“ “그래서 좋은 거야. 어정쩡한 건 모두 그 곳에서 끝낼 거니까.“ “....흐응. 뭔가, 달라 보여.“ 희연이는 그 말에 그저 미소짓는다. 재킷을 걸치고 희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후회와는 다르다. 이런 모습에 대한 아쉬움과도 다르다. 무엇으로도 채유라를 사랑하게 된 것에 대한 깨달음을 지울 수 없다. 채유라에 대한 사랑이란 것을, 돌이키도록 하지 않는다. 다만 나를 위한 오만이다, 이것은. 뒤늦게 안 것이라 해도 그들은 내게 있어 소중한 존재들임을 진작에 알아왔다는 듯이 더욱 소중히 대하는 이것은 나의 이기. 그것으로 나는 돌아올 수 있다. 떠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또 다른 나를 향해서. 그 곳에서 나는 아마도 변하겠지. 조금 더 마음의 색을 갖게 되겠지. 그리하여 언젠가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에도 소중한 사람들이었다고. 채유라를 사랑함으로서 알게 된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채유라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채유라를 찾는다는 것의 의미였다. “이 자식. 너 말도 없이 떠날랬냐.“ 해건의 비난에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너 참... 용케도 알고 왔다. 신문에라도 나는 거냐? 한재준 스케줄 다이어리라도 뜨냐구.“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 가볍게 웃으며 대꾸하는 해건의 얼굴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해건의 머리칼을 문질러주었다. “잘 지내라.“ “....할 말 없어서 그냥 가려던 거였어?“ “그렇지 뭐.“ 해건이 물끄러미 내 얼굴을 올려다본다. 잠시 그 얼굴을 마주 보다 어쩐지 슬퍼져 해건의 어깨를 안았다. 그리고도 한참을 말이 없던 해건이 내가 팔을 풀자 겨우 입을 열었다. “...안 갔으면 좋겠어. 어쩐지.... 너, 변할 것만 같아서. ...그럴 수만 있다면 보내고 싶지 않아.“ “조금 더 좋아진 모습일 거라고 생각해. 지금보다는 나은 모습일 거라고.“ “지금의 네가, 싫은 거야? 싫어졌어?“ 가만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싫지 않아. 싫어진 것도 아냐. 오히려 그것이 나라는 것을 더 잘 알게 됐다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말하고 싶어. 나에 대해서.“ “....채유라에게...?“ “네게도.“ 양팔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안은 해건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에도, 나와는 무관한 일이야, 그건.“ 천천히 고개를 숙였던 해건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눈에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 아냐. 너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과도 달라. 하지만 그 사랑은 어딘가 멈춰버렸어. 한 귀퉁이가 비어 버렸어. 단지 내 안에서. 그건 내 일이니까. 그러니까 내게 말할 필요는 없어. 아니,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는 두려운 거야. 네 말을 듣게 된다면... 분명히 내 안의 너에 대한 사랑은 아마 변해버릴 테니까. 나에게 그것을 잃어버리게 만들지마. 사라진 조각이 있다는 것을 알아도 나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걸. 네 말을 듣게 되면 나는 정말로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고 말아. 그리곤 그것의 정체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겠지. 그런 거, 바라지 않아.“ 억겁의 시간이 지나는 것 같은 느낌으로 해건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다시 뜬다. “내게는 소중하니까. 잃게 되면, 그 텅빈 공간으로 어쩔 줄 모르게 될 테니까. 알겠어? 내게는 그것이 스타일인 거라구.“ “....스타일?“ 해건이 씨익 웃으며 입고 있는 고급스런 회색빛의 셔츠깃을 스윽 세워 올린다. “내가 패션리더라는 거, 알고 있잖아? 초라한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어. 그런 거 견딜 수 없다구. 세련되고 우아한 내가 아니면, 싫어. 그러기 위한 스타일이야. 한 귀퉁이가 떨어져나갔을지언정, 내게는 필요해. 그것을 내게 잃어버리게 만들지 마란 뜻이야.“ “...해건아....“ “이제 네게 바라지 않을 거야. 여기서, 멈추는 거다. 사라지지 않지만, 자리지도 않겠지. 나는 그것을 선택한 거야.“ “....그것으로 충분한 거냐? ....그래?“ 씨익 웃은 해건이 팔을 들어올리더니 있는 힘껏 내 뺨을 후려쳤다. 맞을 거라곤 생각도 못한 채 서 있던 나는 그대로 고개가 돌아가며 코피가 났다. 코피만이 아니라 입술도 터져 피가 나고 있었다. “이걸로 충분해질까?“ 코피가 뚝뚝 흘러 상의를 적시는 것을 느끼면서도 해건에게서 눈 돌릴 수 없었다. 손수건을 꺼내 든 해건이 내 콧잔등을 꾹 눌러주며 발돋움한다. 다음 순간, 내 입술은 해건의 젖은 입술과 겹쳐져 있었다. 그저 입술만을 맞댄 채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해건이 바로 바닥을 딛으며 말했다. “매너가 없어, 매너가. 이럴 땐 고개라도 좀 숙여주라구.“ 터진 입술의 피가 옮아간 해건의 입술은 정말로 멋진 미소의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그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서,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들어올린 시선에 드는 해건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정말로 이제는 충분해. ....진짜, 이걸로 충분해....“ 목구멍에 커다란 돌덩이 같은 것으로 꽉 막혀 있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무언가를 말해주고 싶은데. 할 말은, 없었다. 해건에게 충분하다면, 아니 충분하지 않다고 해도 해건이 충분하다고 말한 이상 내가 더 이상 할 말 같은 건 없었다. 코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새어나오고만 있었고 조금 미간을 찡그린 해건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기대하게 만든 건 너야. 그걸, 부정하지는 않겠지?“ “....그래.“ “그러니까 넌 맞아도 싸. 가능하다면 더 때리고 싶지만 피 흘리는 니 모습 같은 건 그리 봐줄만한 게 아니라서 참을려고. ....그래도 사랑하거든. 그러니까 사랑하는 한재준이 피를 흘리면 연해건의 어딘가에서도 피가 흘러. 내가 오히려 더 많이 피를 흘리니까.... 그래서 참는 거야.“ 해건이 짐을 모두 부친 후의 기본 붙박이 가구밖에 남지 않은 거실을 휘들러 본다. “...이 곳, 좋아했었어.“ 치우지 않은 소파의 등받이를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며 해건이 말을 이었다. “여기엘 오면 니가 보였지. 어딘가로 늘 달아나려는 니가 있었어, 이 곳엔. 언제나 맘대로 드나들지만 니가 없을 때가 더 많아서 혼자 니가 오길 기다리던 걸 생각해보면 나도 볼 수 있었어. 어떤 의미로였든 너한테 처음 안긴 곳도 여기야. ....한재준에 대한 사랑도 이 곳에서... 멈췄어. 양평에서의 나는, 내 사랑은 그저 연민이었지만, 이 곳에서의 나는, 내 사랑은-. ...상처야. 진실이고 절망이야.“ “....절망, 하고 있는 거야....? 나에게?“ 가죽이 일그러질 만큼 힘주어 소파의 등받이를 움켜쥔 해건이 이내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나에게. 그럼에도 잊지 못할 나에게. 그럼에도 계속해서 사랑할 나에게. 너를 향해서 뻗어나갈 수 없으니까. 그래서 자꾸만 내 안으로만 자라가는 그 사랑에. 부정도 되지 않는... 아무리 해도 외면조차 할 수 없는 내 안의 사랑이란 것이 정말로 그것이, 내 진실이라는 것에. ....네게 하는 절망이 아냐. 철저하게 내 일이잖아....?“ 해건의 일만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내가 조금, 씁쓸해진다. 돌아올 곳으로서, 채유라와는 다른 의미로서, 적어도 내 안에서 연해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건만, 그것을 말할 수 없어진다. 사랑이 아닐지언정, 연애의 사랑과는 다를지언정 소중하다고-. 나와는 무관하게 나를 사랑하는 한 사람의 타인으로서 연해건이 아닌 어린 시절을 함께 하고 자라나는 순간을 함께 나눈 우정으로서의 연해건만은 절대로 잃지 않겠다고 말하려는 내가. 그런 나를 해건이에게 알릴 수 없어진다. 알게 된 이상, 무엇을 어떤 식으로 말한다 해도 그것은 해건에게 위로조차 되지 못할 것을 알기에. 해건이 멈춰선 곳에서, 나는 그 곳에 다가서지도, 밀어낼 수도 없다. 자신의 일이라, 무어라 해도 나는 너와는 다르다- 그렇게 말해 버린 이상, 그것이 내게는 변하지 않을 진심임을 알린 이상. 그것들은 해건의 몫이 되어버린 것이다. 20살의 가을. 나는 처음으로 내 안의 지독한 이기와 정면으로 맞닥트렸다. 살금 먼 곳에서 그 존재만을 아슬하게 느끼던 내 안의 이기는, 너무나 지독해서 내가 아닌 사람들을, 어쩌면 나조차 짓밟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그래서 바뀌었다는 말을 하기 위해. 그리고 더욱 변하고 싶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러기 위해 네가 아니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애걸하기 위해. 그러므로 채유라를 찾아야 한다는 내가. 해건을, 부스러트리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손끝에서, 심장을 거친 모든 혈관의 비명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해건을 사랑할 수 없음이.... 슬펐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결국 양손에 얼굴을 숨기고 어깨를 움츠려 졸아들며 나는 흐느꼈다. “미안해.... 너를...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런 나를 해건은 그저, 바라만 본다. 그리고 잦아들지 내 흐느낌이 지루한 듯이 해건이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돌아올 곳이야. 그걸, 나는 알아.“ 점점이 바스라드는 울음의 너머에서 해건의 흡사 속삭이는 듯한 맥빠진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너는 돌아올 거야. 무너지고 가루가 되서, 아무 것도 아닌 니가 되어서... 돌아올 거다...“ 해건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고 그저 황폐할 뿐이었다. 지쳐 보였고, 감정의 극한이 말라붙어 해건의 그 말이 이루어질 필연의 무엇임을 말하고 있었다. “잘 다녀와. 최선을 다해서, 매달리고, 달라붙어 봐. 니가 원하는 만큼, 있는 힘껏 애걸해 봐. 그리고 돌아와서는... 울지 마. 울만큼의 후회가 남을 정도라면 돌아오지 못해. 그러니 죽을 만치 구걸해. 돌아오게 되면, 울지 못할 테니까.“ 돌아오게 되는 것은, 모든 것이 끝이 난 후. 그러니, 해건이 옳았다. 해건에게로 돌아오는 것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돌아올 곳에는 해건이 분명 있었고, 그러니 해건의 말이 맞았다. “....그래.“ 해건이 마치 미끄러지듯 내게로 몸을 기울였고 내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는 빌라의 열쇠를 빼내갔다. 말없이 선 채 서로를 응시했다. 그리고 마침내라고 여겨질 만한 시간이 지난 후 황량하던 해건의 얼굴에 서서히 표정이 떠올랐다. “이건, 나의 애걸이니까. 그리고 너의, 상처일 테지.“ 해건은, 울고 있었다. 울리고 싶지 않았는데. 근래엔 자꾸만 해건의 눈물만을 보아서... 웃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틀림없이 지독히도 매력적이라는 칭찬을 듣던 미소였던 것 같은데. 보는 것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만들던 미소라고들 했었던 것 같은데. “....웃어 봐.“ 머리를 내저은 해건이 우는 얼굴 그대로 말했다. “악당 흉내는 관 둬. ...지독하잖아.“ “....해건아...“ “가.“ “...그래....“ “돌아보지마.“ “....그래...“ 여전히 해건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축축했고 마침내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신발을 신고 현관으로 내려서 문을 열자 금세 등뒤의 철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잠겼다. 헛소리라고, 악당이라고- 수없이 비난을 받게 되더라도. 채유라를 찾아야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그것은 해건을 위해서. 내가 돌아올 곳의 한 모퉁이 확실한 주인이 되어버린 해건을 위해서. 마치 약에 취한 것 같았다. 이해 받을 수 없는 논리를 사고하는 약물 중독자가 된 것만 같았다. 이것은, 애시드 트립(acid trip)이다. 약효가 떨어지는 순간 끝나버릴 애시드 트립. 휘청휘청 내딛는 걸음이 흔들린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흐려진 나의 모습. 느껴지는 것은 내가 갈구하는 모든 것의 일그러진 형상. 여행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약효가 끝난 후의 나는, 무엇을 가졌을 것이며 무엇을 망각했을 것인가. 애시드 트립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난생 처음으로 타보는 기차는, 좁았고 더웠으며 흔들렸다. 객차 안에 꽉 찬 사람들의 나지막한 웅성거림과 쉬지 않고 들락거리는 승무원이며 간단한 먹거리를 실은 왜건까지, 게다가 덜커덩 덜커덩-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열차의 진동. 모든 것이 낯설었다. 폰티악의 낮고 격렬한 스무스한 엔진음과 등허리에 부드럽게 감겨오던 탄력적인 시트의 감촉 대신 열차의 조금은 딱딱하게 느껴지는 좌석의 시트도. 모든 것이 이제까지 알아오던 것과는 달랐다. 지금 막 영등포역을 지나는 것을 창 밖으로 내다보다 문득 바지 뒷주머니에 꽂힌 지갑과 핸드폰이 불편해 몸을 뒤척였다. 반으로 접혔던 지갑이 손에서 툭 떨어져 펼쳐지며 채유라의 사진이 보였다. 주워 올리기 위해 내밀었던 손을 멈춘 그대로 사진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고, 정말로 떠나고 있으면서도 어딘지 낯선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갑을 접어 다시 뒷주머니에 찔러 넣은 다음 핸드폰을 쥐고 객차를 나와 화장실과 세면대가 설치된 곳으로 나왔다. 그 곳마저도 나서 객차의 연결통로에 섰다. 객차 안 좌석에 앉았을 때의 흔들림과 소음은 아무 것도 아니게 여겨질 만큼 소음과 흔들림이 심해 귓전에서는 누군가 악이라도 쓰는 것 같았고 몸의 흔들림은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내동댕이쳐지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선 채로 익숙해지길 기다렸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고 바람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결국 다시 세면대가 놓인 곳까지 돌아와 핸드폰에 번호를 찍었다. 한참이나 신호가 갔지만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포기하려고 할 때 낮은 음성이 들렸다. ?예.? “....나야.“ ?부산으로 간다면서.? “응. ...사진, 고맙다.“ ?별로.... 널 위해서는 아니니까.? “...우연을, 기다리는 거냐?“ ?글세.? “네 말, 모두 수긍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모두 틀리기만 했던 건 아니었어.“ ?그만해.? 수혁이 짧게 내 말을 잘랐고 수화기 너머에서 찰칵- 라이터의 불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잘 가라.? “....그래.“ ?....당리라고 하더군.? “당리라니? 그게 뭔데?“ ?끊는다.? 그리고 내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수혁이 전화를 정말로 끊어버렸고 나는 당리가 뭔지를 한참을 생각했다. 설마 당근을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냉수로 밸브를 돌리고 졸졸 약하게 흐르는 물줄기에 잠깐 손을 대고 있다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수혁이도 채유라를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라고. 마지막에 차키를 던졌던 것은, 그래서였던 것일까- 라고. 정말은, 수혁이도 채유라를 잡고 싶었던 게 아닐까- 라고. 충분히 그럴만 하다라고 믿어지는 그 생각이 확실히 그렇다- 라고 납득이 되기 시작했을 때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을 보고, 그 얼굴에 더 놀라버렸다. 담담한 얼굴이었다. 화가 나지도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 막 깨달은 그 사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표정이었다. 채유라가 수혁이를 사랑하니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혁이가 실은, 채유라를 바랬다는 것을 이미 인식하지 못했을 뿐 무의식의 심층 같은 곳에선 알고 있기라도 했으니까? 아니, 그 둘의 생각이 어떻다는 것은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그저 나에게 수혁이 더 이상은 악당이 아니라는 문제일 뿐. 수혁의 그 행동들. 채유라를 만나게 하고, 그 채유라를 만나고 있었으며, 해건과 나를 기만하고. 그 모든 행동에 분노했었고 수혁을 향해서 느끼던 강렬하던 증오라 해도 좋을 감정들이 어느 새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그런 것인가. 해건과는 다른 의미로서 수혁 또한 나에게는 돌아갈 곳이라는 건가. 그 날 이후 수혁과는 전혀 연락이 없었다. 납득하게 할 만한 어떤 변명도, 설명도. 무엇도 없었다. 그 날, 양평에서 분명히 분노하고 절망했었지만 돌아온 후, 나는 그 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었다. 다만 채유라를 찾고 싶었을 뿐. 그럼에도 내 안에서 수혁을 향한 분노는, 가라앉아 있었다. 지워진 것과는 분명히 다르게 그저 담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더 이상, 수혁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미움 받길 원한 수혁을, 그냥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미워하지 않는 것으로 수혁과 나의 채무는 끝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고,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 최소한 수혁과 나는 원점인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설핏 잠이 들었고 눈을 다시 뜬 것은 구포역을 지나서였다. 부산역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가지고 탄 짐은 작은 백팩이 전부라 달리 챙길 것도 없었다. 곧 종착역인 부산역이 도착했다는 안내멘트를 들으며 몸을 일으켰다. 기차에서 내려 역을 빠져 나오자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역 앞의 넓은 광장이었다. 중간의 커다란 분수대 주변으로 수많은 비둘기떼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비둘기가 몹시도 싫었기 때문에, 상당히 기분 나쁜 광경이었다. 비둘기란 새가 가지는 그 뻔뻔스러움이 항상 싫었다. 당연하게 공원이며 어디를 꾸물거리고 다니는 꼴은, 정말로 뻔뻔스러웠다. 못 생긴 비둘기에 괜히 한참을 흥분하다 이내 생각을 접고 백팩을 다시 고쳐 매며 길게 심호흡을 해 보았다. 서울보다는, 나은 공기라고 기분이나마 생각해보았다. 항구의 도시 부산이라는 곳에서는 물씬 바다 냄새가 풀풀 날 줄 알았는데 아무리 코를 킁킁대도 바다 냄새는 맡아지지 않아서 유감스러운 것도 같았다. 나는 이 곳에서 어떻게 변하게 되는 걸까. 바다가 보이지 않는 항구 도시 부산에서, 나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뒤따르자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너무나 오랜만인 대중교통이었다. 그나마 이용하던 대중교통이라곤 택시가 전부였지만 이 곳에서는 달랐다. 졸부의 아들 한재준이 아닌, 아마도 생활고를 확실히 겪을 한재준이었기 때문이다. 신평이라는 지명을 입 속에서 연거푸 되뇌이며 표를 끊기 위해 매표소 앞에 섰을 때, 나는 비로소 당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당리는, 신평과 같은 지명이었다. 1번역인 신평에서 2정거장 떨어진 3번역의 이름. 하하. 수혁이가 바라는 ‘우연‘이라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나쁘지 않다. 그래, 조금도 나쁘지 않았다. “흥신소 하나 추천해 주세요.“ ?도착하자마자 한다는 얘기치곤 참 정감 없구나.? “잘 도착했어요.“ ?집은 맘에 들고?? “예. 이렇게 좋은 집 필요 없다고 말했어야 하는데 생각하고 있어요.“ ?불쌍해지겠다고 부산까지 간 건 아니겠지?? “농담... 하시는 거예요?“ ?알았다. 나중에 김비서 시켜서 알아보게 하마.? “감사드리고 있어요.“ ?주말엔 집에 들리고 해라.? “... 역시 농담하는 거야. 맞죠?“ ?이 녀석, 참 애교도 없고 재롱도 없구나.? “그런 게 필요한 쪽이 이상한 거 아녜요?“ ?그보다 용돈은 부족하지 않고? 흥신소는 이쪽에서 해결 봤으면 한다만.? “용돈 같은 거, 보낼 생각도 마세요. 흥신소 마찬가지구요.“ ?거창하게 내려갔으니 그 정도는 말해야지. 그래도 말이다,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어.? “뭔데요?“ ?넌 엄연히 졸부아들이란 사실이다. 졸부아들답게 행동해도 괜찮단 뜻이야.? “...감사합니다.“ ?뭘, 내가 그 졸부라서 말이다.? “들어가세요. 바빠요.“ ?나보다 바쁠라구.? “끊을게요.“ ?반포에도 전화해라.? “...나중에요.“ ?...그래. 이만 끊으마.? 수화기를 내리고 잠깐 천장을 쳐다보았다. 내가 어릴 적에 알던 아버지와 통화를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어릴 적의 아버지가 아니고 나도 어릴 적의 나는 아니다. 하지만 뭔가.... 정겨운 느낌이었다. 어머니가 대책없이 상냥했다면 아버지는 브레이크를 걸고도 남을 만큼 무뚝뚝하면서도 한번씩 꺼내는 말이 뒤집어질 만큼 웃겼던 것이다. 내가 그 졸부라서 말이다... 라니. 졸부가 되어 서울로 올라온 후 의식적으로 부모님을 피했고 그런 부모님도 나를 마찬가지로 피했다. 그것은 착각이 아닌 엄연한 사실이다. 나도, 부모님도 변했다. 변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것이 있다는 뜻인 걸까. 이런 식의 대화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어쩐지 멋쩍은 기분이 되어 내친 김에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번호를 누르자 예상대로 신호가 울린 지 얼마지 않아 자동응답기로 넘어간다. “...저, 재준이예요.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어머니도 잘 지내세요.“ 그리고 곧장 수화기를 철컥- 던지듯이 떨어뜨렸다. 아버지의 변화가 화가 났다면 어머니의 변화에는 절망했었다. 말했지만 대책이 안 설만큼 상냥했기 때문에, 화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절망만 해 버렸다. 어째서, 지키려는 노력도 않았던 걸까. 아버지를, 나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변해버릴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게 쉬웠을까. 뒤늦게 조금씩 찾아드는 후회에 수화기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다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은행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잔액조회를 했다. 이 돈도 부모님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인 걸 잘 알고 있지만 일단 흥신소에 의뢰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돈이 필요했고 이 돈은 오직 그 용도로만 쓸 생각이었다. 내 생활비와는 전혀 무관한 돈이었다. 호사스럽게 꾸며진 실내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빈집을 샀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실내장식이었다. 부동산을 통해 갑자기 샀다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 가구 하나, 커튼 하나. 일관성 있는 취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럭셔리한 로코코와 바로크의 짬뽕. 며칠만에 갑자기 준비했다고 생각하기에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내가 부산으로 올 것을 대비해서 미리 준비한 집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더 당연한 일이 아닌가. 내 취향으로 준비한 집이었다면 이런 과격한 소파는 절대로 아니다. 간소...라고 표현하기엔 돈이 좀 들는지도 모르지만 내 취향은 이것보다 조금 더 단순하다. 나는 이런 눈부신 금박 수도꼭지 같은 건 절대로 싫어한단 말이다. 손으로 뜬 레이스 커튼도 마찬가지로, 싫어한다. 이건, 대체 무슨 용도의 집인 걸까. ...하아.... 끝없이 의심할 만한 여력을 가진 내게 박수를- 이다, 이건. 또한 의심스런 곳에 잘도 보내 살게 한 내 아버지의 그 졸부 근성에도 박수를. 이제는 조금 가을다워진 날씨를 느끼며 베란다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정말로 멀리 보지 않아도 강이 보였다. 어스름하게 가라앉기 직전의 붉은 해가 강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고 그것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내 마주선 전신 또한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 이 곳에,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 채유라를 찾아서 만나게 되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곳에 오게 되어서 나는 달라졌다고. 채유라를 찾는다는 그 일로 인해 한재준의 일생의 길은 달라졌다고. 그래서 나를 사랑하게 되어도, 사랑하지 않아도... 고맙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채유라가 떠나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테지. 애정을 바래야할 대상인 나를 향해 그 애정을 멈추어야만 했다는 해건에 대해서도. 출구가 막혀버린 그 애정을, 그럼에도 버리는 것은 해건 자신마저 변하게 만들 것을 알아서 나에게 줄 수 없어졌다고 말한 그 애정을, 그저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는 해건에 대해서도. 사랑의 형태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다. 사랑의 정의를 단 한 가지로 국한시켜 당당히 말할 수 없음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백 명의 사람에게는 100가지의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100명의 사람 중 99명의 사람이 그것은 사랑이다- 라고 인정할 만한 가장 사랑이란 말이 가지는 정의에 가까운 형태를 또한 안다.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절실한 감정의 형태가 있는 것이다. 이 곳에 오고서야 나는 비로소 채유라가 내게 언젠가 했던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거울의 반대편. 반대의 가슴에 위치하는 심장. 자기애(自己愛)라는 이름의 사랑. 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지만 타인을 갈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아닌 타인이 아니고선, 애정을 갈구하는 타인이 아니고선 얻을 수 없는 것. 무엇이든 극한이 닿은 것을, 뒤집으면 그 끝이 맞닿는다고 한다. 뫼비우스의 띠. 그것과 같았다. 그 사람이기에, 그 사람이어야만 나는 행복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이기의 감정. 그 사람이기에, 그 사람을 위해서 나를 희생할 수 있다는 끝이 없는 이타의 감정. 내가 바란 것은, 그 두 가지 중 무엇도 아니었다. 내가 바란 것은, 내가 사랑하지 않아도 나를 사랑해줄 누군가. 나와 같은 모습으로 마치 경직되어 버린 듯 무엇에도 감정을 가지지 못한 오만한 나를 사랑하여 그런 나를 그럼에도, 사랑스럽게 여겨줄 상대. 상대를 위해 무엇 하나 하지 않아도, 나를 오로지 바래줄 상대. 나에게 바라지 않으며, 그저 바라볼 뿐. 필요할 때, 상처입지 않도록 나를 위로할 상대. 분명히 사랑이지만. 그것은 내가 아닌 타인은 할 수 없는, 타인이 될 수 없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채유라에게 바랬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채유라의 사정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채유라에 대해 알려고조차 하지 않은 채 나는 채유라에게 나와 같은 모습이 되어, 나를 사랑하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채유라는 수혁을 사랑할 수는 있었지만, 한재준이 될 수는 없었던 거였다. 그래서, 해건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 해건이 하는 사랑이란 것에 대해. 자신을 위한 이기를, 상대를 위한 이타로서 멈춰버렸다고 말한 해건에 대해. 그런 사랑을 알 수 있어서.... 그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어서... 그것만으로도, 채유라는 나에게 ‘나‘와 같은 모습이어서, 나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주었던 것이다. 일생의 세 번의 만남 중 내가 세 번째였다는 말은, 정말로 끝내줬다. 자존심을 지키라는 그 말은, 정말로 나를 위한 말이었다. 사랑을 알리기 위해 온 이 곳에서, 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나는 이 모든 생각을 눈앞에 펼쳐진 붉은 강을 보며 해낸 것이다. 흐르는 물 같다라고, 채유라는 강물 같다고 그렇게 채유라만을 생각하고서 내가 닿은 이 곳에서. 나는 정말로 많은 것을 생각해냈다. 낙동강... 왠지 코미디 같은 이름인 것이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나는 이 곳에 온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나의 감정은, 흐르고 있는 걸까. 그리하여... 색을 갖게 되는 것일까... 띠리리리. 저녁도 거른 채 베란다에 서서 어느덧 차가워진 강바람을 맞으며 온갖 생각에 잠겼다 새벽 동이 트는 것을 보며 침대에 누웠던 참이었다. 동이 터 오르며 다시 한번 강을 물들이던 붉은 색은, 정말로 근사했다. 어쩐지 벅찰 정도였다- 라는 감상을 중얼거릴 만큼 감동한 것 같은 기분으로 침실에 들어와 누워서도 한참을 생각하다 문득 잠이 들었고 지금, 깨어나는 중이었다. 뒤척이며 사이드 테이블의 탁상시계를 들어올려 시간은 보니 누운 지 벌써 7시간이나 지나있었다. 띠리리리. 계속해서 울리는 것은 핸드폰이었다. “예.“ 잠이 덜 깬 음성으로 대답하자 김비서아저씨의 음성이 들렸다. ?흥신소 번호를 알려드리려구요.? “아... 예... 불러주세요.“ ?789-4561입니다. 일단 연락 갈 거라고 그 쪽에 말은 해놨습니다. 이름을 말하면 알아서 해 줄 겁니다.?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뇨, 그럼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예.“ 전화는 바로 끊겼고 잠에서 완전히 깨어 일어나 앉았다. 김비서아저씨는 아버지가 서울에 올라와 사무실을 열며 처음으로 고용한 사람인데 어딘지 차가운 분위기가 영화 같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비서타입의 남자였다. 굳이 내게까지 말을 낮추지 않은 것 같은 이상한 곳에서 어렵게 구는 사람이었지만 아버지는 그런 점도 그 사람의 장점이라며 무척 맘에 들어하셨다. 나로서는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란 이미지가 더 강해서 아무리 해도 어려운 상대였지만. 그래도 일 하나는 분명히 하는 사람이니 이 번호에 전화를 해서 만나면 되겠지. 혼자 찾는다고 말한 것의 의미는 무척이나 없어져 버렸지만... 오전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계바늘을 보며 번호를 눌렀다. ?예, 우일종합센터입니다.? ....왠지 카센터가 생각나는 걸. “한재준이라고 합니다. 연락을 아마 먼저 했을 겁니다.“ ?아, 연락 받았습니다.? “오늘 만날 수 있을까요? 좀 급한 일이라서요.“ ?서울분이라고 하셨지요? 음... 지리를 잘 모를 테니 약속장소를 정하기가 어렵군요. 지금 계시는 곳이 어딘지 물어도 될까요?? 주소가... 주소가 뭐였더라... 아, 하단. “하단인데요.“ ?그럼 그 쪽으로 가겠습니다. 하단이면 동대앞이군요. 한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거니까 어디 눈에 띄는 큰 건물 앞에 나와 계시면 전화 드리죠. 핸드폰은 있으시죠?? 핸드폰의 번호를 불러주고 전화를 끊었다. 동대...? 대학인가. ....본 기억이 없는데. 잠깐 대학이랄 만한 큰 건물을 생각하다 30분이면 도착할 것 같다는 말이 퍼뜩 생각나 급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집을 나섰다. 그리고 지나가는 택시에 세워 올라탄 후 말했다. “저기... 동대앞에서 제일 눈에 띄는 큰 건물 앞으로 가 주세요.“ “예?“ “아... 제가 여기 이사온 지 얼마 안 되서요, 아직 지리를 잘 모르거든요. 그냥 동대앞에 눈에 띄는 건물... 아무거나 없을까요? 중요한 약속이거든요.“ 난색을 표하며 다시 말하자 기사가 잠깐 생각하더니 곧 차를 출발시켰다. “수협건물이라고 하면 아마 알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스치는 낯선 풍경에 대한 감상을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택시가 멈췄다. 요금은 기본요금도 채 떨어뜨리지 못한 채였다. “아... 감사합니다.“ 2000원을 내고 택시에서 내리자 눈앞에는 수협 건물이 있었고 확실히 눈에 띄는 건물인 것 같기는 했다. 기사가 잘 아는 사람이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잠깐 주변을 둘러보자 길 건너 산 중턱에 우뚝 솟은 높은 건물이 보였고 길가를 지나는 분명히 학생으로 보이는 차림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것을 보아 동대라는 대학이 있는 곳이 맞는 듯 싶었다. 내가 다닌 대학의 대학가에 비하면 꽤 간소해 보이는 거리였다. 요란한 가게도 그리 없었고 조금은 단촐한 느낌마저 들었다. “한재준씨, 되십니까?“ 30대 중반정도일까. 꽤나 젊어 보이는 스포츠 재킷과 청바지를 입은 남자가 내 쪽을 향해 서서 웃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남자가 고개를 들어 건물을 훑어보더니 손가락을 세운다. “마침 커피숍이 있는 건물을 잘 고르셨네요.“ 달리 대꾸할 말이 없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남자와 함께 건물 안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로 3층을 오르는 동안 남자도, 나도 별 말이 없었고 엘리베이터의 출입구와 바로 연결된 커피숍의 입구로 들어가 안쪽의 자리로 멋대로 들어가는 남자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자리에 앉고서도 남자는 말이 없었고 종업원이 메뉴판과 물을 내리자 그 메뉴판을 곧장 내 쪽으로 밀어준다. “커피.“ 남자는 메뉴판을 들어 종업원에게 건네며 손가락 2개를 세워 보였다. 종업원이 가고 난 후 남자가 말했다. “담배 피우는 거, 싫어하신다죠?“ “예...? 아, 피고 싶으면 피세요. 전 괜찮아요.“ “싫다는데 굳이 또 할 거 있습니까. 지금 아니면 담배를 못 피는 것도 아니고.“ 김비서 아저씨가 참으로 시시콜콜 잘도 말해뒀구나 생각하며 곧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음... 초콜릿 라스베리를 섞었군. 그리고 난 개인적으로 초콜릿 라스베리를 싫어한다. 종업원을 다시 불러 블루마운틴을 주문하자 남자가 웃고 있었다. “맛이 없나보죠?“ “아뇨. 향이 맘에 안 들어서요.“ “그냥 원두커피 냄새가 아닌가보죠? 인스턴트 아니면 원두. 딱 2개만 구분할 줄 알면 되는 줄 알았는데 것도 아닌 모양이네요.“ 제법 말이 많아지기 시작한 남자를 보며 웃었다. “그걸로 충분한 것 같은데요.“ 새로 나온 블루마운틴을 홀짝이고 잔을 내리자 남자가 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사람을 찾으신다구요.“ 귀에 익지 않은 사투리였지만 알아듣는 것에는 이상이 전혀 없다는 당연한 사실에 왠지 모르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기, 사진 있습니다.“ 희연에게서 받았던 사진을 테이블 건너로 밀어주자 사진을 집어 올려 잠깐 본 남자가 사진을 내리고 말했다. "사진은 내일 돌려드려도 될까요?“ “예.“ “그나저나 잘 생겼네요. 손님도 그렇지만요.“ 어색하게 그저 미소만 짓자 남자가 하하 소리내어 웃는다. “정말로 한 말인데요.“ “아... 그래요....?“ 사진을 다시 내려다보며 남자가 제법 진지해진 기색으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본 건 어딥니까? 주로 가는 곳이라든가 친한 사람들이라든가. 저희가 알아두면 좋을 얘기는 물론, 있겠죠?“ “....서울에 살았어요. 이름은 본명은 채유라지만 음... 혹시 유강이라고 하고 있을지도 모르구요. 서울에서는 술집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고 하지만 여기선... 잘 모르겠습니다. 사진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미남이라 인기가 많았다고 해요. 아, 술집에서요. 그래서 혹시나 여기서도 그런 곳에 있으면 아마 누군가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일단 술집 쪽부터 찾아보라는 뭐, 그런 얘깁니까?“ “...당리부터요.“ “당리에 있는 술집부터?“ 웃음기가 분명히 서린 어조로 말하는 남자를 향해 나도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당리에서부터 시작해주세요. ....확실한 정보거든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은 확실히 말해서 돈을 얼마를 들이느냐에 따라 차이가 많습니다. 돈을 많이 쓰면, 오랜 기간, 많은 사람을 시켜서, 더 많은 곳을 살펴볼 수 있죠. 여기저기 제법 찔러볼 수도 있고. 돈이 없으면 이제까지 말한 것의 반대일 거구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갑을 꺼내 한 장의 수표를 내밀었다. “이걸로 할 수 있는 만큼이면 됩니다. 일단 저도 찾아볼 생각이니까요.“ 수표의 0을 확실히 세는 표정으로 짧게 쳐다본 남자가 놀란 듯 말했다. “굉장히 중요한 사람인가 보죠? 돈이 큰데.“ “잘 부탁드립니다. 꼭, 찾아야하거든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커피 값은, 서비습니다.“ 씨익 웃은 남자가 계산서를 들고 일어섰고 걸어가다 말고 불쑥 뒤돌아보았다. “A/S는 안 되는 거 아시죠?“ “하하. 예, 수고하세요.“ 엘리베이터를 다시 타고 내려와 건물 앞에서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는 남자의 멘트는 A/S만큼이나 웃긴 것이었다. “정우일입니다.“ 자기 이름을 따서 간판을 짓는 사람이라니. ...촌스러웠다. 부산에 내려온 지도 어느 새 두 달이 다 되어 있었다. 6개월이라고 나중에 전화해 조사기간을 말했던 정우일씨는 아직까지도 채유라를 찾지 못한 채였고 당리를 샅샅이 헤집으며 길가는 사람마다를 잡고 채유라의 사진을 들이대는 나도 역시 찾지 못했다. 오늘도 부산 시내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채유라의 얼굴이 든 포스터를 붙이고 사진을 사람들에게 들이대며 찾아다니다 결국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침 11시에 집을 나섰는데 어느 새 새벽 4시였다. 지난 두 달을 매일 같이 하루 10시간 이상을 걸어다니느라 어느 정도는 이력이 났을 다리건만 여전히 퉁퉁 부어 걸을 때마다 욱신거렸다. 영화나 만화도 아닌데 너무 막무가내인 방법이었던 걸까. 어디에서도 채유라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던 중 문득 우편함 위를 비집고 나온 편지 봉투가 눈에 띄었다. 903호라고 라벨이 붙은 우편함은 확실히 내가 살고 있는 집의 주소였다. 편지를 꺼내드는데 그 편지 아래로 상당히 많은 봉투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상하다. 편지 올 곳에 없는데. 모두 꺼내어 보니 그것은 모두 19통이었고 발신인은, 모두 연해건이었다.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 2달이라고 하면, 8주다. 일주일에 2통의 편지를 쓴다고 해도, 19통이 될 수 없었다. 그 편지들을 손에 움켜쥔 채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도 그 편지에는 차마 시선을 줄 수가 없었다. 집안으로 들어와 곧장 편지를 거실의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 주방으로 들어와 물통을 꺼냈다. 차가운 물을 한 잔 가득 들이킨 후 간신히 다시 거실을 내다보자 테이블 위에는 하얀 편지봉투가 수북하게 보일 만큼 쌓여있었다. 다시 냉장고를 열고 소주 1병을 꺼내 들었다. 잔과 소주병을 들고 다시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지만 어쩐 일인지 편지에는 쉽사리 손이 가질 않았다. 부산에 내려와 처음으로 마셔본 소주였다. ...내가 그렇게 변했듯이 해건이도 변했다는 얘기인 건가. 편지를 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소주 1병을 모두 비우고 나서야 우편소인을 확인하며 가장 빠른 날짜의 것을 집어들었다. 흰색의 규격봉투를 뜯고 꺼낸 편지지는 아무런 무늬도 없이 그저 검은 줄이 그어져 있을 뿐인 단순한 규격 편지지였다. ?너한테는 처음 쓰는 편지네. 작문시간에 편지 쓰기 배운 것 같은데... 인사말부터 하는 거였나. 안녕.... 잘 도착했냐? 전화를 하려다 괜히 멋 부리고 싶어져서 편지 쓰고 있다. 읽으면서 웃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도 쪽팔려하고 있으니까 그만 웃어. 난 잘 지내고 있어. 이상하지? 난 너 가고 나면 내가 어떻게 될 줄 알았거든. 빌라에서 속 시원하게 니 뺨 때리고 나서 온갖 쓸데없는 소리한 것하며... 너, 가고 나면 정말로 정신 못 차리고 헤맬 줄 알았어. 그런데 학교 가고 집에 오고 밥 먹고 잠자고. 엄청 성실하게 잘 지내고 있어서 조금 실망까지 하고 있는 거, 믿을 수 있겠냐? 멀쩡하게 성실하게까지 잘 지내고 있는 연해건 씀. 추신. 이거 없는 편지는 애정이 없는 거라며? 난 한재준한테 여전히 애정이 넘치고 있으니까 꼭 써야할 것 같아서. 그리고 답장 쓰지 마라. 미친 척 해도 안 돼. 쓰지마.? 처음 편지를 채 접지도 않고 내린 후 다음 편지를 꺼내들었다. 특별한 내용이 있는 편지는 아니었다. 그저 오늘은 무얼 했다, 누구를 만났다, 저녁은 무얼 먹었다... 해건의 편지는 그런 소소한 일상사를 편지지 한 장에 적은 것이었다. ?19번째 편지다. 답장이 오지 않아서 아주 만족스런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지. 전화도 한 통 오지 않아서 더더욱 만족스럽다. 답장 대신 전화라도 같은 생각을 안한 게 아니고 아마도 못한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니가 역시 연락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너 혹시, 너 연락 받으면 내가 부산으로 당장 달려갈 거 알고서 연락 끊고 있는 거냐? 수혁이가 요즘 이상해. 학교도 잘 오지 않고 놀러도 안 다니고. 그렇다고 일을 배우는 것 같지도 않고. 얼마 전 심하게 감기에 걸려서 겔겔거리더니만 연락도 없다. 믿을 수 있겠냐? 감기에 걸려서 병원에 가다니. 감기란 건 잘 자면 낫는 병인 거 아닌가? 뭐랄까... 수혁이, 굉장히 신경 쓰고 있어. 수혁이한테 니가 화내고 있는 건 아닐 거라 생각하지만 만나게 되면, 이상하게 굴지 마라. 그래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준 녀석은 수혁이밖에 없어서 내가 편드는 거, 이해할 수 있겠지? 어떻게 채유라를 찾아라는 잘 되가고 있냐? 실은 걱정하고 있어. 너 월리를 찾아라 해서, 한번도 못 찾은 녀석이잖아? 나는 단박에 찾았는데 말이지. 그래도 도와달라고 할 생각마. 꿈도 꾸지마. ....어서 찾아. 어서 찾아서 끝장보고 돌아와라. 평생이라도, 평생이 걸린다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할 거다. 평생이라도 상관없어. 내 안에서 자라나는 사랑이란 건. 지금도 무럭무럭 두 달 넘게 얼굴 한 번 못 본 놈을 향해서 잘도 자라고 있다구. 음... 그래도 솔직하게 말하면 역시 서른 전에는 돌아와 줬으면 좋겠다. 너도 다 늙은 중년의 아저씨가 느끼하게 구는 건 싫겠지? 어서, 와라. 기다리고 있어. 어서 채유라를 뻥 차고 돌아오라구. 해건.? 해건의 마지막 편지를 손에서 내리며 문득 수혁이에 대해 생각했다. 수혁이... 잘 지내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일에 대해... 신경 쓰고 있었던 걸까... 당리를 알려준 것도 그렇고.... 채유라를 찾고... 돌아가면. 수혁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그 일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 같은 것은, 이 곳으로 내려올 그때 느낀 것처럼 크게 남아 있지 않았다. 수혁에 대한 원망보다는 나에 대한 원망이, 비애가, 참담함이 더 많아져 버렸었다. 기차 안에서의 전화 통화를 할 때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수혁의 말을 모두 수긍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틀리지는 않았다고 한 말은. 내가 알지 못하는, 알 수가 없을 방식으로 사고하는 나와는 다른 인간인 것이다. 나와 같은 식으로, 하나의 일에 대해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수혁의 마음이었다. 수혁은 내가 그런 것처럼 수혁이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지 않았다고 해서 원망하고 비난하는 것은, 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엄청나게 비난하고 원망했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수혁은 그래도 나보다는 조금 더, 정직했던 것이다. 그것에 나는 틀림없이 상처를 입었지만, 수혁이 나를 속일 의도가 있었다는 것마저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식이었다고 해도 나는 채유라와 수혁에 대해 상처 입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었다. 거울의 반대편, 반대편의 가슴에 심장을 가진, 가장 닮았으나 가질 수 없는 존재. 내가 그렇게 채유라를 생각한 이상, 나는 어떻게든 상처 입었다. 떠나올 계기를 주었다는 점에선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떠나지 않았다면, 떠날 올 수 없었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채유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해건에 대해서도, 희연에 대해서도... 내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서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계절은 완연한 겨울이었다. 이제 곧 나는 20살을 마감하고, 21살이 된다. 단지 숫자 하나가 바뀔 뿐인데. 무언가 엄청난 변화라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 또한 부산엘 오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서울에서의 나는 변함없는 겉만 성실한, 실은 썩은 버섯 같은 사이비 오렌지였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물론 바뀌려고만 들었다면 서울이건 어디건,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계기라는 것을 얻어야하는 것이다. 계기는 채유라였고, 채유라를 만난 것은 서울이었지만 나는 부산으로 혼자 내려와 지내며 더 많이 바뀌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 술값으로 몇백을 써도 아까운 줄 모르고 날뛰기...까지는 아니었지만 꽤나 무덤하던 내가 여기에서는 하루 만원으로 정해놓은 생활비도 아쉬워서 버스를 타도 될 것을 걸어다니고 더욱 싼 끼니를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일을 할까도 생각을 했지만 채유라를 찾는 일을 하기 위해선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당분간은 최대한 아끼는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의 나를 알던 사람이 듣는다면 웃을 일이었다. 바람 쐬고 싶다며 차 끌고 쏘다니느라 기름값에만 돈 십만원을 아까운 줄 모르고 다니고 한 끼니 식대로 몇 만원, 몇 십만원도 아무렇지 않게 써버리고 닉스에라도 가면 30년산 이하의 양주는 마시지도 않아서 몇 백을 예사로 알던 한재준이 말이다. 몸에 걸치는 속옷 한 장도 브랜드 매장이 아니면 가지도 않았던 나였다. 그런 내가 소주를 마시고 라면을 끓여먹고 600원이라도 하는 마음에 걷는다. 그런 내가 조금도 비참하지 않았다. 돌아갈 곳이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내 등을 떠밀며 강요하지 않은 선택을 나는 한 것이다. 부잣집 망나니 같은 녀석이 가난을 흉내내는 겉멋이다- 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은 없다. 나에게는 여전히 돈 많은 부모님이 계시고 지금이라도 당장 손 벌릴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렇지만 나는 내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은 남아 있었다는 것에 비참하지 않은 것이다. 아직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그런 것이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정말로 가난해져 보지 않았고 정말로 힘들어보지 않았다는 말을 들어도 나는 내가 겪은 상황에서만은 최선을 다한 거라고. ....채유라를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나는 채유라의 말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자존심을 버리지 않았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어쩌면, 사랑이란 것에 대해 말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아온, 내게 주어진, 내가 주게 될지도 모를... 사랑이란 것에 대해.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그럼에도 그것은 그것이 아니면 되지 않았다는 깨달음을. 읽은 편지를 차곡차곡 접어 다시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소파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기대어 앉아 소주가 담긴 잔을 들었다. 답장, 쓸 수 없는 것 같다. 전화, 역시 할 수 없을 것 같아. 쓸데없는 말만 해버릴 것 같아서. 편지, 잘 받았어.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야.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너를, 이상하지만-. 나는 웃긴다고 생각하고도 있다. 정말로, 그건 사라지지 않는 거냐? 니가 그랬었지. 사랑 받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아마 조금 다를 거라며, 그런 너를 지켜보라고. 나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 필사적인 모습은, 내가 아는 연해건과는 정말로 다를 거라고. 필사적인 걸까... 이 편지는 너의 그런 필사적인 노력에서 나온 것일까. 그래서 내 답장도, 전화도 필요하지 않은 거냐...? 내가 네게 연락할 수 없다는 것은 너의 그런 필사적인 노력을 알아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조금, 다르겠지만 그래도 뭐랄까. 노력하고 있다고는 알아 주라. 정리되지 않은 쓸데없는 말을 네게 하지 않으려는 나의 노력도 있단 걸. ....그나저나 정말 다르긴 하잖아? 내가 아는 연해건은, 절대로 편지 같은 거 쓰지 않는다구. 스트레이트로 전화를 해서 소리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성깔인데. 귀엽다면, 화낼 거냐? 가와, 나의, 그리고 다와 라의 사랑을 말했던 너였지. 나는 아직도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해. 그래도 적어도 연해건의 사랑이 있다는 건 알았으니까. 귀엽다고 말한 건 용서해 줘. 두 번은 유언장 협박받고 싶지 않거든. ...심장에 해로워. 3월, 꽃핀다는 3월. 꽃을 보면 드는 생각은 어릴 적 농사짓던 시절 어머니가 가꾸던 아주 작은 화단이다. 화단이라고 해 봐야 길이가 2미터도 채 되지 않던 작은 공간이었다. 어머니는 그 화단을 틈만 나면 살피곤 했었는데... 하긴 반포의 아파트엘 가면 지금도 베란다에는 수많은 화분이 놓여 있다. 거실에도 줄줄이 커다란 관목이 늘어서 있고. 다만 가꾸는 사람은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닐 뿐. 뭐...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냥, 그렇게 되버린 일이고 그것에 대해 내가 할 말은 한 가지 정도일까... 비싼 화분에, 비싼 풀만- 이네요. 그렇게 정말로 말했을 때 어머니는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채유라를 찾지 못한 채이다. 흥신소와 계약한 6개월까지는 이제, 한 달. 그 동안 찾지 못한다면 나 혼자 지금처럼 여기저기 들쑤시며 찾아야 한다는 뜻인데... 솔직히 암담했다. 채유라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디 산골짝에 은둔이라도 해버린 건가. 또한 해건이에게서는 변함없이 일기 같은 편지가 오고 있고, 나는 답장을 쓰지 않는다. 가끔은 희연이가 전화를 하기도 한다. 아버지에게서도 전화가 오기도 하고, 어머니가 전화를 한 적도 있었다. 연락이 정말로, 없는 것은 수혁이 뿐이다. 그 수혁의 근황도 실은 해건이의 편지로 전해듣긴 했지만. 요즘의 수혁이는 휴학을 하고 여행을 떠난다며 행방불명인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정직하게 말해 놀랐다. 수혁이가 여행을 떠난 것에 놀란 것이 아니라 여행가도록 수혁의 아버지가 그냥 놔 뒀다는 것에. 뒤를 이을 너무나 완벽한 후계자의 취급이어서 멋대로 놀아대긴 했어도 수혁인 책임감이란 것에 확실한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러니까 내가 들은 수혁이의 근황은 수혁이가 휴학을 하고 여행을 떠났다, 그리곤 연락이 없다, 그것이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라는 것이다. 채유라를... 찾고 있는 걸까. 누가 먼저 채유라를 찾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기분이었다. 지금의 나는 자존심을 버리지 않았고, 언제가 되든,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그렇게 채유라를 찾아서 채유라에게 나에 대해 말하고 싶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수혁이 먼저 채유라를 만나줬으면 싶은 지도 모르겠다. 수혁이, 채유라에게 특별한 사람이고, 수혁이에게도 그런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우연을 기다리겠는가. 수혁을 만난 채유라는 아마도 나에 대해 조금쯤은 여유로워질 것이고 나 또한, 여유로울 테니까. 흥신소에 의뢰한 계약기간인 6개월이 끝난 것은 벌써 석 달전의 일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21살의 6월. 어느덧 4번의 계절이 바뀌려 하고 있었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아침에 집을 나서 새벽 늦게까지 채유라를 찾아 헤매고 있었고, 아직 찾지 못했다. 사실 이제는 채유라가 짠- 하고 나타나주지 않는 이상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어느 정도 포기도 하고 있었다. 대체, 부산 어디에 있기에. 나는 부산이 이렇게나 미로처럼 숨을 곳 많은 도시란 것을 이 곳에 오고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연고가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대체 얼마만큼의 불가능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가. 부산에 친척이 있던가.. 라고 했던 수혁의 말에 그 친척도 찾아보았다. 흥신소에서 금방 찾아낸 그 중년의 남자는 채유라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연락 온 것도 없었다고. 연락이 오게 되면 꼭 이 쪽으로 연락을 달라며 사례금도 넉넉히 주었고 연락을 받게 되면 그때 또 사례금을 주겠다고 말도 해 놓았다. 그러나 채유라는 그 친척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내일이면 내 생일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서 맞는 생일이 될 것 같았다. 나쁘지는 않지만, 채유라라도 찾았다면 역시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이 곳에 내려올 때 나는 1년을 생각하고 10월초, 부산에 내려왔다. 1년까지는 아직 4달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과연 1년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자신감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슬슬 생활비로 생각했던 돈도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내 이름의 통장을 가진 이후, 사상 최악의 잔고였다. 아버지는 가끔 전화를 해선 생활비는 어떡하고 있느냐 물어왔다. 사람이 버릇이 있는데, 갑자기 돈 없이 생활하는 것이 쉬울 리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몇 번이나 돈을 더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쓰던 규모가 있고 버릇이 있는데-라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갑자기 뭐든 아끼며 살아야한다는 상황이 어렵지 않을 리도 없다. 그렇지만 나는 하루 차비, 밥값 모두 해서 최대한 만원안으로- 라는 것을 벌써 석 달을 실천하고 있었다. 어차피 집과 관련된 세금이라던가 하는 것은 모두 부모님이 내고 있었다. 나는 오로지 내 몸에 드는 비용만 충당하면 되는 것이다. 처음의 만원으로 정했으니 남은 잔돈으로 술이라도 한병- 하던 것이 이제는 그것도 없었다. 어떻게든 돈을 남겨 다음 날까지- 라는 것이 현재인 것이다. 정말로, 잔액이 하나도 없어지면 일을 하려고 마음도 먹고 있었다. 조금도 고생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채유라를 찾기 위해 이 곳에 왔고 처음 생각했던 1년이 아무리 지나도 채유라를 찾을 때까지는 이 곳에서 꼼짝도 안할 생각이었다. 매일 놀고 먹고 술 마시고 할 때보다 훨씬 많이 움직이고 있는데도 훨씬 몸이 가뿐했다. 매일 같이 걸어다니는 것도 상당한 운동이 되는지 몸 상태가 겉에서 보기에도 많이 좋아져 있었다. 그래서 규칙적인 생활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요리도 예전에도 조금씩 할 수 있었던 것이 이제는 일상적인 식단을 꾸밀만한 음식으로 가짓수도 제법 많이 할 줄 알게 되어 시장에서 재료를 사다가 해 먹고 다니는 것이 싸기도 하고, 재미도 있었다. 내일은 시장에 들러 마른 미역이라도 좀 사볼까... 오늘은 이상하게 몸이 피곤해서 오후 11시가 좀 넘어 집에 들어온 길이었다. 집에서 거의 생활을 하지 않아 집안 전체에는 부옇게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청소를 한답시고 소란떨기에는 늦은 시간이라 욕실로 들어와 차가운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에 서서 한참을 물을 맞으며 서 있었다. 하수도로, 흐르는 거겠지? 라는 샤워할 때마다 떠오르던 생각의 뒤를 이어 하나의 대화가 문득, 기억났다. ?해건이는 아닌 것 같지만. 나는 조금 걱정하는 거야. 알지?? 수혁이 그렇게 말했었다. 작년 5월에, 채유라와 처음 만났었던 그 다음 날에.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습기도 한 말이다. 수혁이는 누구의 걱정을 한 것이었을까. 나? 아니면 채유라? 수혁이만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나는 변했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문득 수혁과의 지난 대화가, 해건의 어떤 말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몇 번이고 어두워지는 것이다. 어째서.. 라고 묻기에는, 아직 내 안에 미련이 남았기 때문일까. 말끔하게, 완전히 모든 것을 잊고서 새로운 인간이 된다는 것은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행이라면, 그래도 원망의 마음만은 들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냥, 떠오르고... 조금, 미련이 남을 뿐이니까. 6월의 제법 따사로워진 기온에도 늦은 밤에 오래도록 찬물 아래 서 있는 것은 무리였는지 몸에 한기가 드는 것을 느끼며 밸브를 잠그고 배스가운을 입고 욕실을 나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내며 곧장 나는 베란다로 향했다. 지난 몇 달간, 나는 집에 들어오면 늘 베란다로 나왔다. 그리고 강을 바라보았다. 물색이 조금씩 바뀌고 풀색이 조금 바뀌는 것을 제외하면 조금도 변하지 않은 강을. 주변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어도, 강은 물이 있는 이상, 계속해서 흐른다. Nothing perfect lasts forever. Except in our memories. 불쑥 떠오른 그 구절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카피였다. 정말로... 그랬다. 나는 그 당연한 사실을, 이 곳에 와서, 직접 강을 보고서야 알게 된 것이다. 기억을 하기에, 인간은 감정을 가지고.... 그렇기에 또한, 용서를 깨닫는다. 따르릉.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전화벨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누구지..? 전화할 사람이 없는데. 자동응답기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 신호음이 한 동안 울리다 찰칵- 자동응답기로 넘어갔다. 안내멘트가 끝난 후 들리기 시작한 것은, 노래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재준이 생일 축합니다. 와아~~~ 21살이네? 생일 축하해. 자고 있어? 12시 지나는 거 보고 기다리다 바로 전화하는 거야. 전화 안 하려다... 어쩐지 목소리 듣고 싶어져서.... 괜찮아?? 거기까지 듣고 다가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어라?? “...고맙다.“ ?안 자고 있었어?? “음치는 여전한데.“ ?뭐야, 고마워하라구.? 수화기를 턱으로 받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앞으로 몸을 웅크렸다. “...기뻐하고 있다구. ....고맙다.“ ?재준아?? “정말로... 기뻐하고 있어... 이상하지...? 감동도 하는 것 같아.“ ?...괜찮아?? “아아... 기뻐서 그래.“ 보이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얼굴을 감싼 손바닥 사이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21살 된 거, 축하해. 아아, 좋은 시절 다 갔네. 곧 군대 가게 생겼잖아.? “뭐야, 설마 진짜 갈려구?“ ?농담 마. 매력밖에 없는 내가 그런 델 갔다 무사할 것 같으냐? 나중에 질투할 생각 말고 알아서 말려두는 게 어때?? “하하... 넌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응. 말했잖아. 잘 지내고 있어. 너, 나중에 나 보면 놀랄 거다.? “그래... 만나면 진짜로 놀라줄게. 됐지?“ ?...있잖아.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대답할 수 있는 거면.“ ?....내가 보고 싶어...?? 아직, 대답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거라고. 그러나 한참 동안의 침묵 후 입을 연 내가 한 말은, 그런 게 아니었다. “...보고 싶다... 만나고 싶어.“ ?응... 응... 그랬구나.? 아이를 어르듯 해건이 나지막하게 내 말에 그렇게 대답해주었다. 8개월을, 혼자 지냈다. 그리고 듣게 된 해건의 목소리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어버린 것이다. 부모님의 전화에도, 3번 걸려왔던 희연의 전화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수십 통의 편지를 내게 보내며 답장도, 전화도 필요 없다고 말한 해건의 음성을 듣는 순간 문득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선물이 곧, 갈 거야. 소중히 받아줄 거지?? “...물론이야.“ ?잘 자. 또 편지 쓸 테니까.? “그래... 오늘, 고맙다.“ ?안녕.? 그리고 찰칵- 소리를 내며 전화가 끊겼고 한동안 더 들고 있었지만 들리는 것은 뚜뚜-길게 울리는 신호음이 전부였다. 무언가 흐트러진 마음을 떨치듯 수화기를 내리고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조건반사- 같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해건은 편지에 끊임없이 몇 번이고, 사랑한다고, 한재준에게는 연해건이 아니면 안 된다고. 그렇게 쓰고 있었다. 199번째이던 바로 지난번의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연락하고 싶어 죽겠지? 미치겠지? 답장 쓰지 말라니까 막 쓰고 싶지? 그래도 안 돼. 답장 쓰면, 미워할 거야. 너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내 말 들어주는 거야. 이건 사랑의 이름으로 하는 명령이니까, 잘 수행하길 바란다. 그래야 계속 나한테 사랑 받을 수 있다구. 알겠지? 잘도 답장을 안 쓰고 있는 사랑하는 한재준에게 연해건이 199번째 보내는 편지였음.? 한 장 이상인 적이 없는 편지는 매번, 참 색다르기도 했다. 연해건에게 계속 사랑 받고 싶어서 답장을 시키는 대로 안 쓰고 있는 건지 아니면 할 말이 없어서인지 귀찮아서인지.... 이제는 아무려면 어떠랴 싶다.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다. 벌떡 일어서 침실로 들어왔다. 아아, 슬슬 이불도 바꿔야겠구나. 오리털의 아주 고급스런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이불이긴 하지만 겨울철 이불답게 그 우수한 보온력에 덥고 자기엔 꽤나 더운 것이다. 음.... 이것도 그냥 세탁기에 돌리면 되려나. 아니.. 드라이클리닝을 해줘야 하는 품목인가... 생활감이 물씬 풍기는 걱정을 하던 나는 어느 새 잠에 빠져들었다. 꿈도 꾸지 않을 것만 같은 깊은 잠이었다. 딩동! 딩동! 딩동! 쉼표도 찍을 새가 없이 마구마구 초인종이 눌려지고 있었다. 아아... 이 아침에 누구네 집이야... 몸의 시계는 아직 일어날 시간까지는 적어도 5시간은 남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쉬지 않고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짜증스런 맘으로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둔 전자시계를 보자 새벽 4시가 겨우 넘어 있었다. 젠장... 누구네 집이야...!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려는 순간 다시금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문득, 그것이 아주 가깝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이 집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비디오폰에 비치는 이 이른 새벽 방문자의 얼굴을 보려 했으나 사람 얼굴이 아닌 수북한 꽃다발과 편지 봉투만 비칠 뿐이었다. “누구세요?“ ?한재준씨 있습니까? 꽃배달 서비스 왔습니다.? 낯선 기계적인 음성에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뭐하는 정신병자가 이 시간에 꽃배달 서비스 같은 걸 시키는 거냐. 배달원도 배달원이다. 이 시간에 잠 안 자고 배달이 왠 말이냐. 아무리 배달의 민족이라지만, 이런 건 정말 너무하는 거다. 마지못해 현관문을 열자 꽃다발이 품안으로 던져지듯이 안겨왔다. “짠짜잔~~~ 선물이다!“ “...해, 해건아?!!!“ 진짜로, 엄청나게 놀라버렸다. 연해건이 서 있었다. “아까 그 목소리는...?“ 해건이 테이프 레코더를 번쩍 들어 보이며 다시 재생시키자 처음의 낯선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재준씨 있습니까? 꽃배달 서비스 왔습니다.“ “....그거, 설마 공들여 준비한 건 아니겠지?“ “아니긴. 애썼다구.“ “....들어와라.“ 신발을 벗고 들어온 해건이 집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째... 니 집 안 같다?“ “실제로도 아니거든.“ 꽃다발을 주방으로 가져 들어가 이 집 수납장 안에 처음부터 잔뜩 들어있던 요란한 크리스털 화병 하나를 꺼내 물을 받아 다발을 싼 포장 채로 꽂았다. 화병을 들고 나오는데 해건이 그 화병을 잽싸게 받아들고는 말했다. “그리고 이건 선물.“ 그러면서 내미는 것은 편지봉투였다. 편지 봉투 겉면에 커다랗게 매직으로 축! 200통 달성 기념!!! 이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에 그보다 작은 글씨로 한재준, 생일 축하 기념- 이라고 써 있었다. “대체.... 축하하려는 건 어느 쪽이냐?“ 화병을 들고 여기저기 마구 놓아보며 위치를 살피던 해건이 결국 거실 한 구석의 낮은 장식장 위가 맘에 들었는지 그 곳에 화병을 내리고 내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놀랐지?“ “죽을 만치 놀랐다.“ “어떻게 왔는지 안 물어?“ “어떻게 왔어?“ “차 타고 왔지. 새벽에는 차도 없이 도로가 한산한 게. 180킬로 밟아도 되더라?“ “....그러다 뒤집어지면 죽는 거, 알고나 있냐...“ 해건이 중얼거리는 나를 보다 활짝 웃었다. 그 얼굴을 말없이 마주보았다. “....좋아 보인다, 너.“ 한참이 지나서야 그렇게 말한 해건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너도.“ 전화를 끓고 무리해서 바로 운전해 온 것이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서글프기도 하다. “어떻게.... 올 생각을 다 했냐....“ 해건은 내 말에 다시 한번 밝게 미소를 지었다. “전화만 할 생각이었는데... 니가 보고 싶다고, 만나고 싶다고 말했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미치게 보고 싶은 거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못 보면 죽을 것만 같아서. 내가 온 거, 싫어?“ 천천히 머리를 내저었다. “...아니.... 잘 왔어.“ 빙긋 웃은 해건이 엉덩이를 살짝 들어 몸을 앞으로 내밀고는 가볍게 입술을 포갠다. 멍하니 해건의 얼굴만 보고 있던 나는 기습적으로 당한 키스에 해건의 웃는 얼굴을 당황해 쳐다보았다. 음... 사실 해건에게 키스를 당한 것은, 몇 번이나 있었지만 지금처럼 당황한 것은, 또 처음인 것 같다. 빙글빙글 나를 보며 웃던 해건이 완전히 몸을 일으켜 베란다로 나간다. “와아... 강이 바로 보이네.“ 베란다로 따라나와 해건의 옆에 섰다. “멋있지?“ “응... 넌 매일 강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작게 속삭이는 해건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저, 담담해 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울하게 흐려지는 눈빛이었다. “나보고 놀라지 않았냐?“ “응?“ “자세히 좀 봐. 안 놀라?“ 내 쪽으로 몸을 돌려세우고 말하는 해건의 아래위를 꼼꼼히 보았지만, 딱히 놀랄 만큼 달라진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미안. 뭔데?“ “쳇.“ 불퉁하게 입술을 실룩이며 해건이 휙 몸을 돌린다. “뭔데 그래. 살이 찐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잘 좀 봐봐. 응? 진짜 모르겠어?“ 그러면서 내 옆에 서선 손을 들어 머리 위를 슥슥 스친다. “음... 키가 컸나....?“ 자신 없이 한 그 말에 해건이 손바닥을 딱 소리나게 치며 환호했다. “174센티 되겠습니다아~~~! 아자!“ 입술 끝을 끌어올리며 씨익 웃은 해건이 말했다. “이제, 한 자리야.“ “...어쩌냐? 나, 84다.“ “아앗!!! 비겁자!!! 배신자!“ 흥분해서 발을 굴리던 해건이 동작을 멈추고 눈만 들어 나를 본다. “...몇 킬로냐?“ “75쯤 되나?“ “....젠장.“ “넌?“ “아, 몰라! 그래, 그래도 두 자리 차이다, 어쩔래! 뭐야, 시비라도 걸려구? 뭐! 어쩌라구!!!“ “뭐 어쩌라는 게 아니고...;;“ “그래도, 63이야. 후후.“ “....좋겠다...;;“ 문득 해건이 양팔을 치켜들며 탄성을 내뱉었다. “와아... 해뜨고 있잖아....“ 그 말에 고개를 돌려본 곳에는 강의 길다란 수평선 위로 태양이 천천히 떠오르며 맞닿는 수면을 온통 짙은 주홍빛으로 물들이는 광경이었다. “예쁘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주고 계속 강을 보았다. “전에 춘천에 갔을 때 본 새벽안개 이후로, 젤 이뻐.“ 대학 입학하기 전 2월말에 수혁과 셋이서 갔었던 춘천의 얘기였다. “그래... 멋있다.“ 해건이 베란다의 샤시에 팔을 얹고 그 위로 얼굴을 숙였다. “...채유라는, 찾아져?“ “...아니.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포기.... 안 되는 거지?“ “....응. 그런 것 같아.“ “나... 싫어하는 거 아니지?“ “싫어하지 않아.“ “미워하는 것도... 아니지?“ “미워하지 않아.“ “그냥, 사랑만 안 하는 거야?“ “해건아...“ 내 쪽을 보지 않고 고개를 든 해건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후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편지, 매일 쓸 때마다... 내가 얼마나 망설이는 줄 알아? 정말은, 매일 전화하고 싶고... 정말은 답장 받아서 편지지가 닳을 때까지 읽고 싶어. 그래도, 왜 안 그러는 줄 알아...? 나. 아무리 해도... 포기가 안 되는 거야. ....그래서, 너무 겁나. 너를 향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나 혼자 사랑할 거라고, 그건 내 일이라고... 그렇게 말해놓고서 있잖아, 자꾸만... 바라고 싶어져서... 전화했는데 니가 싫어하면 어쩌지...? 답장 받았는데 편지 쓰지 말란 말이면 어쩌지... 겁이 나서... 자꾸... 자꾸, 사랑하기만 해. ...바보 같지? 아, 슬프다. 이런 게 어디가 패션리더냐...“ “안 그래... 그렇지 않아.“ 길게 연기가 베란다를 채워가고, 재가 떨어진다. 투둑- 바닥으로 재가 떨어지는 것을 본 해건이 창문을 열고 담배를 밖으로 휙 던지고는 나를 본다. “생일, 축하해.“ “...고맙다.“ 해건이 나를 지나쳐 베란다를 나가며 어깨를 툭 쳤다. ....슬펐던 걸까. 늘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해건은 곧장 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해건아...?“ 신발을 신은 해건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갈래.“ 현관문의 손잡이에 손을 이미 얹고 있는 해건의 등에 대고 나는 다시 한번 해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해건아...“ “답장, 쓰지마. 전화도, 하지마. 이건, 사랑의 명령이니까 잘 지켜주길 바란다구.“ 현관문을 활짝 열어 젖힌 해건이 잠깐 다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래도, 내가 더 많이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부탁해.“ 해건이 사라지고 여전히 열린 현관문을 선 채로 쳐다만 보았다. 내 안에서, 변해 가는 것은 무엇인가... 해건의 안에서, 나에 대한 사랑이란 것은... 지금도 계속해서 바뀌고 있는 모습인 걸까. 아직은... 아직은, 무리였다. 지금의 나는... 아직 해건의 그 마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 여전히 무리였다- 라고 말하게 될는지, 아니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라고 할는지. 그것을 지금의 나는 알 수가 없다. 그저... 해건이 사라진 후 열려진 문으로 스미는 바람은, 어느새 습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물기에 젖어 있고, 조금은 선득하고, 어쩌면 따뜻하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쓸쓸하다. 마치, 연해건 자신과도 같은 바람의 감촉이었다. 21살의 생일. 그것은 어쩐지 서글프고, 무력하고, 그래서 꼭 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8월. 여전히 채유라를 찾지 못한 채이고, 정말로 생활비가 다 떨어졌다. 그리고 해건에게서는 230번째의 편지가 왔다. 여름옷을 입고 거리로 나섰다. 이제는 이 인근 지리에는 익숙해져, 아니 부산 전체의 지리에 익숙해진 기분이었다. 동대 정문 쪽으로 빠지는 앞길로 올라가 보았다. 방학이 끝날 무렵이 다 되어서인지 아르바이트 광고가 붙은 곳이 상당히 많았다. 꽤 오랜 동안을 여기저기 다니기만 하다 얌이라는 2층의 커피숍을 보았다. 얌이라는 이름이 눈에 띈 것은, 우연이었다. 그 커피숍의 1층에 있는 해피 버스데이라는 팬시점에서 내놓은 편지지를 보고 문득 해건의 생각이 나 발길을 멈췄고 그 옆에 붙은 광고지를 보았다. 2층으로 올라가 보자 몇 테이블 되지 않는 작은 가게 안에는 손님들이 꽤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커피숍인데도 차를 마시는 테이블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저, 아르바이트 광고보고 왔습니다만...“ 카운터 안의 아줌마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지금 바빠서 그런데 잠깐만 기다릴 수 있어요?“ “...예.“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바빠 보였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자 아르바이트생 혼자서 분주하게 오가는 것을 보다 안쪽 테이블에서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생은 그것을 듣지 못했는지 다른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잠깐 망설이다 안쪽 테이블로 다가갔다. “예, 부르셨습니까?“ “돈까스 하나 하고 치즈 스파게티 하나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주문을 받아와서도 잠깐 카운터 앞에서 기웃거렸다. 바빠 보이긴 하지만 그리 정신없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아까의 아줌마는 주방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아르바이트생은 세팅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저기, 저 안쪽 테이블 주문 받아 왔습니다만....“ 조금 망설이며 그렇게 말하자 아르바이트생이 에? 하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돈까스하고 치즈 스파게티 주문했거든요.“ “아아, 예. 고맙습니다.“ 빌지를 적은 아르바이트생이 주방 안까지 들리도록 큰 소리로 주문을 반복했고 또 한 옆에 서서 기다리던 나는 결국 어쩌다 보니 그 가게에서 1시간을 그냥 일하고 말았다. 어느 정도 홀 안이 정리된 것을 나도 느낄 무렵, 주방에서 처음의 아줌마가 나왔다. “수고 많았어요. 고마워요.“ “아뇨... 저야 별로 한 것도 없습니다.“ “고향이 여기가 아닌가 보네? 말투가 서울말 같은데?“ “아, 대학이 서울이어서요.“ “휴학생인가?“ “예.“ “나이가 몇 살이죠?“ “21살입니다.“ “오래 일할 수 있겠어요?“ “예.“ “우리는 지금 오전 타임 구하는데, 시간은 어때요?“ “괜찮습니다.“ “집은 어디예요?“ “신평입니다.“ “그럼 오늘부터 하는 걸로 할까? 저 애가 당장 사정이 급해서 오늘 배워서 괜찮으면 내일부터 혼자 바로 하고. 할 수 있겠어요?“ “예.“ “주영아, 이 학생 오늘부터 하기로 했으니까 홀 일 좀 가르쳐 주고. 앞치마 남은 거 있지?“ “예, 이모.“ 주영이라는 이름의 여학생이 앞치마를 건네주며 싱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예, 반갑습니다.“ 마주 웃어 보이자 역시 미소 띤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꼼꼼하고 친절한 설명이었다. 아까 정신없어 보이던 건 일을 못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손이 느려서 그런 모양이었다. 나로서도 난생 처음 매보는 앞치마, 처음 해 보는 서빙이지만, 뭐, 하다 보면 늘겠지. 시급 1700원이라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7시간을 일해도, 11900원.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풍족하게 지내왔는지 실감이 났다. 어떤 사람이 한달 내내 일해서 번 돈의 몇 배나 되는 돈을 하루에만도 쉽게 써버리던 내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있죠, 사장님은 이모라고 부르면 되거든요.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거 싫어하세요.“ 주영이라는 여학생이 그렇게 귀띔을 해 주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21살이랬죠? 나는 22살요. 동대 다녀요.“ “예에... 그럼 누나네요.“ “같이 일하는 거 오늘 하루밖에 안 되지만 담에 놀러오면 잘해주세요.“ 생긋 웃는 주영이라는 누나를 보다 어색하게 웃었다. 알던 누나라곤 학교 선배들이 전부인데 친한 사람이 없어 누나라고 불러본 적이 없었고 그나마 누나뻘의 알던 여자라고 해 봐야 닉스 카운터 누나, 술집에서 노느라 만난 누나... 누나라고 불러본 건 어릴 때 이후 처음이었다. “주영아, 너 멋진 남자는 그냥 두질 않는구나. 응?“ 이모라고 불리길 원하는 사장님이 놀리자 주영이라는 누나는 그 쪽에는 슬쩍 웃어만 보이고는 내게 다시 말했다. “반말, 써도 되죠?“ “예, 그러세요.“ “애인, 있어?“ “....애인요....?“ “어머, 있나보네? 금방 대답을 안 하는 걸 보니.“ “다른 사람이라고 눈이 없겠니?“ 꽤나 신랄하게 말하는 이모의 말에도, 주영누나는 대꾸하지 않고는 나를 보며 웃었다. “아깝네. 요즘엔 연하도 인긴데. 서울말 쓰는 왠지 있어 보이는 남자친구도 좋은데.“ “하하...“ 왜, 없다고 바로 대답하지 못한 걸까. 짝사랑중이라고도 어째서 곧장 대답하지 못한 걸까... “근데 그 옷, 진짜 엠포리오야?“ “예?“ “그 옷, 전에 잡지에서 봤거든. 그 옷은 짜가로도 안 나온 것 같던데.“ “아... 아뇨, 저기 그러니까 세일할 때...“ “세일해도 비쌌을 텐데. 얼마 주고 샀어?“ “저기... 그게 기억이 잘...“ 한참을 내 옷이며 뒤에 둔 가방을 살피던 주영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저 가방도 진짜면 200만원 넘는데 그런 거 살 돈 있으면 아르바이트를 왜 하겠어.“ “하하... 그렇죠.“ “근데 가방도 그렇고 다 진짜 같다.“ “아... 그게, 아, 친구한테 얻었어요.“ “와아, 저런 것도 주고. 친구 부잔가 보다.“ “예... 뭐...“ “부럽다. 난 왜 그런 친구가 없을까나.“ 손이 느린 것과는 별도로 무척이나 눈치가 빠른 듯한 주영누나는 한참을 가방이며 옷을 보다 앞치마를 벗었다. “이모, 저 시간 됐어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주방 안에 들어가 있던 이모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금고의 문을 열었다. “17만원이었지?“ “예.“ 만원짜리로 17장을 세어 주영누나에게 건넨 이모가 말했다. “고생해서 번 돈이니까 아껴 쓰고. 넌 낭비가 심해서 큰 일이야. 돈 버는 족족 옷이며 신발이며 다 쓰지 말고 저금하는 버릇도 들이고 그래.“ “그래도 1/3은 항상 저금했어요, 뭐.“ “2/3를 저금해야지. 돈 버는 거 어려운 거 알았으면 아껴 쓸 줄도 알고. 저번에도 세상에 어린애가 간 크게 20만원치나 옷 샀다면서.“ “그래도 그거 신발이랑 가방이랑 다 해서였단 말이에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조금, 거리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입은 티셔츠 하나 살 수 없는 돈으로 가방과 신발, 옷까지 모두 해결했단 말인가... 이제 8개월째로 접어든 해건의 표현을 빌자면- 열라 궁상떠는 사이비 서민- 검소한 생활이었다. 당장이라도 고생을 접을 수 있다는, 마음 한 편으로 기댈 곳을 가져서일까. 내 자신에게 실소를 하고 말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보았고 멋쩍게 고개를 젓는데 문이 열리며 또 다른 여학생이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밝게 인사를 하며 들어온 그 여학생은 나를 보며 어- 하는 표정을 지었고 이모가 먼저 말했다. “새로 일하는 녀석이야. 한재준이라고. 진희가 22살이었지? 동생이네.“ “처음 뵙겠습니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인사를 하자 진희누나도 고개를 꾸벅한다. “아까워라. 퇴근하면 나는 출근이라니. 모처럼 잘 생긴 남자랑 같이 일하나 해 봐도.“ “누가 주영이랑 친구 아니랄까 봐 그래, 똑같은 소리야.“ 주영누나가 벗어놓은 앞치마를 가져다 매며 진희누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모, 주영이보단 그래도 제가 낫죠.“ “너, 이젠 나 안 볼 줄 아나본데 매일 올 거야.“ 제법 쌀쌀맞게 그렇게 쏘아붙인 주영누나는 가방을 들고는 출입구로 향했다. “이모, 그 동안 고마웠어요. 자주 놀러올게요.“ “돈 내고만 먹으면야 얼마든지 환영이지.“ “냉정하기도 하지.“ 주영누나가 간 후 진희누나가 웃으며 말했다. “음... 그냥 이름 불러도 되지?“ “그럼요.“ “그럼, 재준이 너도 가 봐. 내일 보자.“ “가도 괜찮겠어요?“ “그럼. 서울말 쓰는 남자는 되게 닭살이었는데 넌 별로 안 느끼해서 괜찮아.“ “하하.. 그래요? 고마워요.“ “내일 11시니까 늦지 말고. 5분에 100원 까니까.“ “예, 이모. 그럼 내일 뵐게요.“ 가볍게 목례를 해 보이고 가게의 문을 열고 나섰다. 고작 몇 시간만에 무언가 자연스럽고, 그리고 내가 다른 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믿을 수 없다는 기분도 강하게 들지만, 그래도.... 이렇게 보통의 상냥한 분위기란 거... 나쁘지 않았다. 깊이를 아직은 가지지 못했지만, 내가 보통의 자연스런 태도를 취하면, 그것에는 마찬가지의 것이 따라온다. 내가 다정하면, 역시 다정하다. 내가 친절하면, 역시 그렇다. 그것이 아직은 깊이가 없는, 하루만에 이뤄진 겉일 뿐이라 하더라도, 이전의 내가 가진 겉모양의 친절함과는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제 겨우 21살인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왔던 걸까. 어째서, 상관없다고 생각해 왔던 것일까. 자연스럽게, 진심이라고 여겨지던, 정말로 즐거워 보이던 채유라의 모습에 그렇게나 놀라고 감탄을 했었으면서, 왜 나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걸까. 바깥은 아직 오후 6시로 여름답게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아 아직은 밝았고 방학이 끝나고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거리는 제법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좁다란 일방통행의 폭이 몇 미터밖에 되지 않는 좁은 길 사이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며, 웃으며 나를 스쳐간다. 나는 그러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것만은 아니었다. 풍족함이라는 여유와 운을 갖고서도 그것에 대해 비웃으면서도 그것을 누리며, 모든 것은 눈 아래로 내리깔았던 내 모습이, 이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채유라에게 나는 사랑 받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솔직했던 수혁이 오히려 더 사랑 받을 만했다는 것을... 이제서야 더욱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채유라를 찾는 것의 의미도... 다시금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 나를 위한, 이유였다. 한재준이 조금 더 다정하게, 조금 더 상냥하게, 조금 더 솔직하게. 더욱 많이 남은 살아갈 날을, 행복하게 지내기 위한 성적 증명서와도 같은 것. 순전히 나를 위해서라는 것으로도 이기적이다라고 비난받지 않을 자신. 변하는 나로 인해, 달리 보일, 나의 주변. 조금 더, 가까워질 사람들. 걷는 걸음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지하철역을 향해 걸으며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믿어져? 해건아, 연해건. 믿을 수 있겠어? 나, 말야... 솔직한 녀석이 되어가고 있어. 이런 내가, 네게는 보여? 응...? 이런 내가, 네게는 보였던 거냐...... 노포동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발걸음도 가볍게. 신평으로 다시 돌아올 때에는.. 부디 채유라를 찾을 수 있기를. 나머지 하나의 A는, 어디서 온 걸까. “예, 알겠습니다. ...예, 짐작이라면, 하고 있었으니까요. 제가 안다는 걸, 아버지에게는 알리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해, 하시겠죠?“ 톡톡톡-. 만년필의 뒤끝이 테이블 위에 부딪히며 건조한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수혁은 그 소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탁드린 것 말입니다만. 어떻게 됐습니까?“ 톡톡톡-. 탁-! “....그래요...? 수고가 많으셨겠군요. ...아버지께는 제가 말씀드리죠. 예. 수고하셨어요. 예... 아, 그리고 차 준비 좀 해 주세요. 내일 아침 바로 출발하죠. .... 아뇨. 정명형하고 갈 겁니다. ....예. 그럼.“ 수화기를 내리고 수혁은 테이블 위로 넓게 펼쳐진 지도를 보았다. 부산, 그리고 경남권 전체의 자세한 지도가 테이블 위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수혁은 만년필의 뚜껑을 열고 어느 한 지역에 굵게 몇 겹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어째서, 그런 곳에 있는 거지?“ 수혁은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번호를 누르고 신호가 가는 것을 기다리며 수혁은 다시 만년필의 뒤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정명형? 나야. 지금 좀 와야겠는데.“ 짧게 용건만을 전하고 통화를 끝낸 수혁은 방금 전 자신이 동그라미를 그려놓은 지도의 지명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일광해수욕장. 그런 곳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고아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수혁의 아버지가 거둬 지금은 중심가의 나이트 클럽 4곳을 맡고 있는 정명은 수혁에게 있어 해건과는 다른 의미로서, 또한 형제였다. “바쁠 텐데 불러서 미안해.“ “괜찮아. 네가 부른 게, 몇 년만이지?“ “조금, 급해서.“ 말과는 달리 느긋한 동작으로 담배를 꺼내 무는 수혁을 보던 정명은 아무 말 없이 라이터의 불을 일으켜 수혁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자연스럽게 그 불을 덜어 옮긴 수혁이 연기를 피워 올린다. “운전 좀 부탁할까 해서. 달리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어.“ “운전?“ “하루면 되니까, 부탁해.“ “부탁이라니. 장수혁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건, 명령으로 충분하잖아.“ “명령, 하고 싶었으면, 명령이라고 했어. 난 지금, 정명형한테 부탁을, 하고 있어. 싫으면 거절해.“ “거절이라니. 말도 안 돼. 어디까지? 차로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운전하지. 차로 갈 수 없는 곳이라도 어디든지.“ 서른의 정명은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동안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길게 앞머리를 길러 더욱 어려 보이는 인상이었다. 적당히 구겨진 편안해 보이는 중상급의 캐주얼 정장. 서른이라는 나이보다는 조금 더 원숙해 보이는 능숙함이 느껴지는 웃음을 지을 줄도 아는 정명이었다. “사장님께는 물론, 말씀드린 일이겠지?“ “아, 걱정 마. 허락 받을 테니까.“ “지금. 내가 보는 앞에서. 해줬으면 하는데.“ 대답 대신 수혁은 곧장 수화기를 집어 올렸다. “나야. 아버지, 계셔?“ 바로 연결된 통화에 수혁은 짤막하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접니다. 건강은 괜찮으시죠?“ 정명은 표정 없는 얼굴로 묵묵히 짧은 대꾸만을 하고 있는 수혁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무언가, 달라진 것 같지만. 그 무언가- 라는 것이 무언지를 알 수 없었다. “예, 정명형에게 부탁했습니다. 하루면 됩니다. 아뇨, 저는 3일 정도요.“ 조금 미간을 찡그린 수혁이 단호하게 되풀이한다. “아뇨. 혼자면 충분합니다. 3일. 정명형에게 운전을 부탁하는 것도 걱정하실까 봐서 억지로 하는 일이란 거, 알아주셨으면 합니다만. 아니면, 혼자 가겠습니다. 갈 수 있다는 거, 물론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다시금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수혁이 메마르게 소리내 웃었다. “쿡쿡-. 배운 게 그것뿐이라서요. 저야, 아버지 아들이잖습니까?“ 따끔따끔한 바늘이 신경을 찔러대는 느낌의 웃음이었다. “우수한 학생, 아니었습니까? 배운 대로 실천도 잘 하고 말입니다. 그럼, 3일 후에 찾아 뵙겠습니다.“ 일절의 망설임도 없이 수화기를 찰칵 내려놓은 수혁은 정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일 아침 9시.“ “알았다. 그보다... 좀 자두도록 해.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수혁은 정명의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눈으로 현관문을 주시했다.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 정명은 수혁의 사무실을 나오기 위해 돌아서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많이 줄었는데 그래....?“ “요즘 세상에 구질구질하게 많아봐야 컴퓨터 한 대만도 못해서 말야.“ 창가에 놓인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노트북을 본 정명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런가?“ 그리고 수혁은 곧장 손을 들어올렸다. 명백한 축출령이었다. 정명은 말없이 수혁에게 시선을 내리깔아 목례를 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수혁의 사무실을 나온 정명은 다시 방금 전 슬쩍 돌아본 사무실 안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컴퓨터라... 그렇긴 하지만... 그보다는, 마치 이사를 가기 직전의 황량함 같은 것이었다. 꽤나 위험한 일을 해온 정명이기에 눈치만은, 누구 못지 않다고 자신하고 있는 터였다. 어디로... 떠날, 생각인 거지.... 동생님? 아니, 서브 보스? 3일이란 건, 거짓말이 아니길 바라지. 우리는, 아니, 나는. 서브 보스가, 필요해. 당신이어서, 필요해. 당신은, 장수혁이라는 당신은. 그럴 만한 가치를 가진, 대단한 사람이잖아. 정명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느릿하게 건물을 걸어나왔다. 3일이라. 3일 동안 잠깐 비운다고, 큰 일이야 나지 않겠지. 처음부터 장수혁 전용 보디가드의 일로 시작한 정명이었다. 예민한 장수혁에게 들키지 않는 것에는, 꽤 오랜 동안 손을 떼고 있어 조금, 감이 녹슬었지는 몰라도 금세, 회복할 자신이 있었다. 수혁은 창 밖의 경치에 할 말을 잃었다. 부산이, 이런 시골구석이었나? 일광해수역장이라는 건, 부산에서도 아니면 특별한 시골인 건가. “하긴 이제 여름이군. 피서를 와도 될만한 계절이야.“ 수혁은 정명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용케 이런 한적한 해안을 찾았는데 그래.“ “미안한데. 시끄러워.“ “거슬렸나 보군.“ 그리고 정명은 입을 다물었고 수혁 역시 아무 말 없이 창 밖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채유라를 찾는 것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쉬웠다. 채유라는 떠날 때 수혁이 맡긴 차를 경찰에 주웠다는, 믿을 수 없게도, 자동차를 주웠다고 신고를 해놓은 상태였고 차량 도난 신고를 하자마자 바로, 채유라의 주소를 알 수 있었다. 부산시 기장군 삼성리 일광해수욕장. 친절하게도 채유라가 일하고 있다는 슈퍼마켓의 전화번호까지 알려주었다. 그 슈퍼마켓이 보이는 곳까지 오자 수혁이 손을 들었다. “여기.“ 정명은 차룰 세우고 백미러에 비치는 수혁의 얼굴을 보았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냉랭한 무표정이었다. “고마워. 이제 됐으니까 가 봐.“ “돌아올 때는?“ “알아서 가지.“ “돌아가면 된다는 건가?“ “알아들었으면, 그대로 하라구.“ “그러지.“ 수혁은 잠깐 정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 잊을 뻔했는데. 말해둘 게 있어서.“ “말씀하시죠.“ 수혁의 얼굴에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들키지 않게 조심해. 아직 하고 싶은 일도 많을 텐데.“ 정명은 수혁에게 보이지 않도록 속으로 작게 웃었다. 그래서, 당신을 포기할 수가 없는 거야. “아직 젊으니까.“ “가.“ 차에서 내린 수혁이 자동차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채 응시하는 것을 보며 정명은 차를 출발시켰다. 들킨 게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겠지. 그렇게 친절하게도 경고까지 해줬는데 거역했다간, 죽을 지도. 서울에 가게 되면 조금, 찾아봐야겠군. 한참을 멀어졌건만 수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 욕심이 많은 인간이라는 것이 다행스러워진 정명이었다. 만약 조금만 더 순수하게 인간적으로 수혁을 좋아했던들, 아마도 정명은 이 곳을 떠나지 않고 버텼을 거였다. 스스로도 말했지만 아직은 젊으니까 바라는 게 많은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서기엔, 이미 늦었다. 자동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수혁은 핸드폰을 꺼냈다. “출발했다. 서울까지 가는 것, 제대로 확인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수혁은 곧장 슈퍼마켓의 안으로 들어갔다. “마일드 세븐 있습니까?“ 주인이 말없이 내미는 담배곽을 집으며 수혁은 만원짜리를 내려놓았다. “혹시, 채유라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구? 유라? 유라... 친군가?“ 자신을 가늠하듯 바라보는 중년 남자의 눈길에 수혁은 담담하게 웃었다. “예. 아마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아아... 그랬지. 그 녀석, 친구가 찾아올 거라고 매일 같이 노래를 불렀었지. 진짜, 왔구만 그래.“ “어디 있습니까.“ 남자는 수혁에게 다시 만원을 내밀며 턱을 들어 가게 뒤편을 가리켰다. “상자 쌓고 있을 거야. 뒤에 가 봐.“ 수혁은 잠깐 남자의 얼굴을 보다 내밀어진 만원을 되집어올렸다. “....감사합니다.“ 슈퍼마켓의 뒤편과 연결된 문을 열자 그 곳은 바로 바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선 채로 둘러보자 한쪽 구석에서 젊은 남자가 빈 병이 가득 담긴 상자를 하나씩 나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좋아 보이는데.“ 그 말에 남자의 움직임이 멎었다. 돌아본 곳에, 수혁이 서 있는 것을 보며 유라는 길게, 공을 들여 눈을 깜빡였다. 천천히 다가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유라는 가만히 팔을 뻗어 수혁의 목을 안았다. 수혁이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다. 느리게, 떨리는 것을 의식하며 유라는 조심스럽게 수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차, 되돌려 받고 싶어서.“ 수혁은 가만히 유라의 등에 손을 얹어주었다. “....야아.... 이거, 우연인 건가....?“ 수혁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고의지, 이런 건.“ “.....그래도, 만났어. 그래도... 너를 만났어.“ “그래.“ “....어째서...? 우연이 아닌데... 어째서...?“ 수혁은 살짝 유라의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그리고 어깨를 완전히 넘길 만큼 길게 자라 한 가닥으로 묶인 유라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만져보았다. “너를, 만나고 싶었거든.“ “....다시 한번, 키스해도 돼...?“ 수혁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유라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유라는 눈가가 뜨거워지며 물기에 젖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수혁이었다. “기다렸어... 계속해서... 너와 만나기만을.... 그렇게 기도했어. 우연이 아닌데... 그런데 너와 만날 수 있어서... 네가 나를 보고 싶어서.... 네가 나를 찾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뻐. 나, 이렇게 기뻐해도 되는 건가...“ 수혁은 유라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피식 웃었다. “어째서... 너란 녀석은 하나도 변하질 않은 거냐. 왜... 그대로인 거야.“ 씁쓸하게 말하는 수혁을 향해 유라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너는 변한 거야....?“ 수혁은 잠깐 유라의 눈을 응시한 채 말이 없었고 이윽고 눈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너무나 많이.“ 수혁이 벌린 간격을 다시 좁히며 다가선 유라는 수혁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왜 이렇게... 야윈 거야. 얼굴이... 무척 피곤해 보여.“ “.... 지독한 감기에 걸렸었어. 정말로, 지독해서 몸이 배겨나질 않더군.“ 유라는 수혁의 목을 다시 끌어안았다. “있잖아... 내 생각을... 했었어?“ 팔을 늘어뜨린 채 유라에게 그저 어깨를 감싸안긴 채로 수혁이 대답했다. “아아... 그래, 했어. 아마도 눈뜨고 있는 동안에는 항상... 네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이마와 코끝을 맞댄 채 눈을 들면 너무나 가깝게 보이는 수혁의 눈동자를 보며 유라가 물었다. 수혁의 눈동자에는 슬픔의 그림자가 있었다. “나를, 사랑해?“ 어쩔 줄 몰라하며 유라는 물었다. 수혁은 유라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글세... 사랑하는 걸까? 모르겠어. 나는 사랑이 뭔지를 알 수가 없어. 하지만, 너를 만나고 싶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냐. ...이게 나의 최선이야. 더 이상을, 줄 수 없어서 네게 미안해. 그러니, 내게 바라지마. 너를 위해서야.“ 유라는 수혁의 목덜미에 콧잔등을 문질렀다. 청결한 비누내음과 뒤섞인 수혁 특유의 체향이 코 안 가득 들어차며 일순 호흡이 가파졌다. 잘게, 어깨로 숨을 내쉬며 유라가 대꾸했다. “괜찮아. 네가 사랑을 알아도, 몰라도. 이렇게 너를 만났는 걸.“ 눈물이 흘렀다. 수혁을... 만난 것이다. 드디어, 수혁을 만났다. 우연이 아니었지만, 그래서 산뜻하게 인사하지 못했지만. 지난여름 이후, 1년여만에 결국은, 수혁을 만난 것이다. 바닥 가득 쌓여 있던 상자에 대충 나란히 걸터앉아 수혁은 담배를 물었다. 손바닥을 모아 바닷바람을 막으며 불을 붙인 수혁은 눈앞으로 바로 펼쳐진 바다를 보았다. “이 곳에서, 뭘 하며 지낸 거지? 대체 이 곳에서 무얼 한 거야?“ 유라 역시 바다를 보며 대답했다. “지난여름에 막 도착했을 땐 민박집에서 일했었어. 여름이 끝날 무렵이라 오래 일하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팥빙수도 팔았었어. 오뎅도 팔았었구. 포장마차였는데 그때 주인아저씨가 아까 봤지? 여기 주인아저씨셔. 여름이 지나고는 이곳에서 일하게 해 주셨구. 굉장히 고마운 분이야.“ “아아.... 그래.“ 수혁의 느릿한 대답에 유라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참, 해변가 청소도 했어. 여름이 끝난 후의 바다를 본 적 있어? 그냥 바다 말고 해수욕장의 모래사장. 엄청 더럽혀지거든. 그래서 열심히 청소도 했지.“ 연기는 떠오르기가 무섭게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고 있었다. “바다를 보며 넌 무슨 생각을 했지?“ “네 생각. 정말로 니 생각만 했어. 믿어 줘. 정말이니까.“ 수혁의 보이는 옆얼굴만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라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얼굴은, 슬퍼 보였다. 가깝게, 마치 눈동자의 표면이 닿을 듯이 가깝게 보았던 아까의 눈동자에 남았던 그 슬픔의 그림자는 왜인지,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믿어. 네가 하는 말은, 믿을 수 있어.“ 그리고 순간 수혁이 쿡쿡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의아한 듯 바라보는 유라를 향해 수혁이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 마찬가지였다는 건가?“ 수혁의 마치, 게임을 할 때의... 그 때 같은 다정하고 낮은 어조의 음성을 들으며 유라는 미소지었다. 만났으니까... 수혁을 만났으니까, 유라는 웃을 수 있었다. 얼마든지, 그래... 얼마든지 웃을 수 있었다. 만난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었다. “응. 그러니까 너는 나를 사랑하는 거야. 게임이 아니게 된 그때부터. 더 이상 게임을 할 수 없게 된 그 순간부터. 실은 너는 나를 사랑한 거야. 너는 사랑을 모른다고 말하지만 이미, 너는 나를 사랑했어. 나는 네게 소중한 사람인 걸.“ 수혁은 유라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담배를 한 대 모두 피운 수혁이 몸을 일으켰다. “일, 하루 쉴 수 있나?“ “응? 아, 응. 쉴 수 있어. 이때까지 한번도 휴가 받지 않았는 걸.“ “기다리고 있지.“ 수혁이 새로운 담배를 피워 무는 것을 보며 유라는 웃는 얼굴로 다시 슈퍼마켓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수혁은 유라가 변하지 않았음을 느낀 그 순간 느낀 씁쓸함을 다시금 맛보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만이 이렇게 되버린 것일까.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군데군데 헤져 맨살이 드러나고 밑단은 아무렇게나 잘라낸 청바지에 소맷자락을 그대로 뜯어낸 듯한 흰 색 티셔츠라는, 전형적인 바닷가 청년스런 차림의 유라가 곧 다시 처음 들어갈 때 그랬던 것처럼 전력으로 밖으로, 수혁이 있는 곳으로 달려나오고 있었다. “어디, 어디 가는 건데?“ “근처에 호텔, 없을까?“ 유라는 활짝 웃었다. “있어. 휴양지인 걸. 많아. 걱정 말라구.“ 수혁이 먼저 발길을 옮겼고 유라가 그 뒤를 따르다 문득 수혁의 손을 움켜쥐었다. 수혁은 유라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 이내 다시 정면으로 눈을 돌려 잡힌 손을 외면했다. 문득, 잡힌 손이 못 견디게 무거워지는 수혁이었다. “호텔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던 건, 누구였지?“ 수혁의 느릿하면서도 담담한 물음에 유라는 싱글싱글 웃었다. “어, 미안. 이거 호텔이 아니었네?“ 알프스로젠이라는 간판이 붙은 건물을 보던 수혁이 먼저 한 걸음을 내딛었다. “들어가자.“ 급하게, 수혁의 뒤를 따라 뛰며 유라는 웃었다. 기뻤다. 수혁과 함께 있다는 것이. 객실에 들어온 수혁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형편없군.“ “뭐... 네가 보기엔 그렇겠지만... 그래도 더 나쁜 곳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렇게, 살아왔던 거였나?“ 수혁의 차분한 물음에 유라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마도 더 나쁘게.“ “왜, 내게 말할 생각을 하지 않았지? 난 그걸 바꿔줄 수 있었는데.“ “하지만... 너한테 바란 건 그런 게 아닌 걸.“ “....처음부터?“ “음... 아니. 처음엔 아니었어.“ “...그럼 언제부터였지...?“ 침대에 앉아 있던 유라는 그대로 누워 천장을 보았다. 조금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선 채인 수혁이 보였다. “말해도 넌 기억하지 못할 텐데?“ “어째서 기억 못할 거라 생각하지?“ “그때, 너 자고 있었으니까.“ “자고... 있었다고?“ 유라가 처음으로 수혁을 만났던 것은, 18살 때였다. “그래, 18살이었지, 우리들... 그때, 너를 만났어. 눈을 감던 네 얼굴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 “눈을, 감아?“ 유라는 수혁을 향해 빙긋 웃은 후 똑바로 수혁의 눈을 바라보았다. 수혁은 천천히 유라가 앉은 맞은 편의 소파에 몸을 앉혔다. “미친 듯이 너를, 아니 우리 집을 박살낸 아저씨들을 찾아다녔어. 아는 건 이름밖에 없었어. 장준호라는. 장준호를 아느냐고 장준호가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그렇게 돌아다녔는데 기억은 안 나지만, 음... 누나였던 것 같아. 술집에서 만났던 누나. 장준호는 만날 수 없지만, 그 아들인 장수혁이 늘상 가는 곳이라면 안다고.“ “....18살이라면... 애시드 트립(acid trip)?“ “응. 그 곳엘 나는 갔었어. 18살의 겨울에.“ 애시드 트립. 그 이름은, 수혁에게 겨우 3년전의 일은 마치 수십년전의 일처럼 떠올리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애시드 트립. 약에 취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무엇이나 다 눈 아래로 보이는 시절. 온전하지 못한 것 같았던 주변의 모든 것을 한번에 날려버릴 것만 같았던 난폭함. 미친 듯이 갈구하고, 결국엔 모든 것에 실망하고. 그래도 그 곳을 떠난 곳에는 무엇도 없을 것만 같았던 그때. 처음으로, 상처를 입고 절망을 하며... 벗어날 수 없었던 굴레의 기억을, 그 곳에서 가졌다. 수혁은 애시드 트립에서 그런 어쩔 줄 모르게 그저, 고통스럽기만 하던 기억을 얻었다. 19살, 1여년 만에 그 곳을 떠나며 결국엔 수혁 자신은 그 벗어나고자 하던 굴레에 의한 향유를 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 더, 냉정해지고 조금 더, 쓸쓸해졌다.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선, 무엇에도 진심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19살의 겨울. 그것을 알기 위해서, 수혁은 자신이 가진 2개의 A의 존재를 깨달아야 했다. 사라지지 않은 기억.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 시작을 찾으려 해도 결국엔 그저 외면하고만 기억. 수혁은 자신이 가질 수 없었던 2개의 A를 알게 됨으로서, 상처 입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에도 진심이 되어선 안 된다는 지극히도, 비겁하고, 그럼에도 당연한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가장 안쪽의 가장 넓은 둥그런 테이블의 소파의 중앙에 넌 앉아 있었어. 연해건과 한재준과. 모두들 술을 마시고 있었구... 연해건은 한재준을 무언가 불안하고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어. 너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어서 니 시선을 따라 나도 위를 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어. 그저, 가게의 요란한 천장 말고는. 한참을 멀리에 숨어서 너를 훔쳐보면서 생각했더랬어. 너는 무얼 보고 있는 걸까- 라고. 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지고... 내가 왜 거길 갔는지도 알 수가 없어지고 만 거야. 그리고 눈을 들어 다시 너를 보았을 때, 너는 의자 등받이에 목을 받치고서 잠들어 있었어. 연해건이 너를 마구 흔들어대면서 왜 자는 거야! 라고 소리치고 있었으니까, 알 수 있었어. 한참을 뒤흔들리면서도 너는 눈을 뜨지 않았고 한재준이 연해건을 잡았지. 그만해 둬- 라고. 그러자 연해건이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면서 수혁이 바보- 라고 말했고... 그리고도 한참이나 지나서 너는 겨우 눈을 뜨고는 불만스럽게 너를 바라보는 연해건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면서 뭐라고 했냐면-, 이런 응석받이 녀석. 귀엽긴 하지만 목이 아프잖아? ...부러웠어. 난 그때 연해건이, 너무나도 부러웠어. 그래서 내 자신이 정말 미치게 바보 같아서 정작 간 이유는 기억도 못 하고선, 그 곳을 나와 버렸지. 나와서도 한참이나 더 내가 그 곳엘 갔던 이유를 생각했지만... 기억나던 건, 허공을 응시하던 네 눈길과 연해건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하던 네 목소리... 한재준을 돌아보던 네 친근한 미소, 무감해 보이던, 네 눈빛. 그것이 전부였어. 그것이... 전부였어...“ 수혁은 따끔거리는 목안으로 천천히, 침을 삼켰다. “그런 일이... 있었나...? 대단하군, 그래. 그런 것을 모두 기억하는 거냐?“ 유라는 빙긋이 미소지었다. “너의 일이기 때문이야. 처음으로, 장수혁이라는 인간을 만난 날의 기억이기 때문에. 그건 내게 있어 더 이상 기억 같은 것이 아니야. 너로 이루어지는 내 사고의 모든 것과도 같고, 그래서 그건 곧,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의 표현이고, 형태인 거지.“ “....어떤 형태...?“ “네가 했던 모든 말을, 네가 보았던 모든 것을, 네가 느꼈던 모든 감각을... 나 또한 되풀이하면서... 같아지는 거야. 너를 사랑한다는 건 내가 곧, 너라는 거니까. 너를 위하는 것만으로, 네가 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수혁은 유라에게 보이지 않도록 바지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짧게 깎은 손톱인데도 손바닥의 살을 파고들며 저릿한 통증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조금 아픈 것도 같아서 수혁은 미간을 찡그리다, 이내 미소짓는 얼굴로 유라를 향해 물었다. “내게, 바라는 게 있나?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 거지?“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는 거야?“ “글세... 하고 싶은 대로.“ 일단은, 아직은, 지금은. 그 말들을 입안으로 삼킨 수혁이 여전히 웃음을 띄운 채 말했다. 유라가 수혁을 향해 서서히 손을 뻗었다. 그 손이 수혁의 가슴에 닿았고 유라는 몸을 앞으로 당겨 고개를 숙이며, 수혁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안기고 싶어. 니가 안아줬으면 좋겠어.“ “...그래?“ 수혁은 눈을 내리자 보이는 유라의 뒷머리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가만히 손을 들어 그 머리를 만져보았다. 햇살에 탈색된 자연스런 갈색 빛의 길다란 머리칼이 목덜미위로 부드럽게 늘어져 있었다. 그것이 손에 닿는 촉감은, 보기보다 조금 꺼끌해서 수혁은 머리칼을 한 옆으로 젖히며 목덜미에 입술을 대었다. 조금 짭짤한 맛과 함께 뭐라 표현할 길이 없는 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유라가 떨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수혁 또한 떨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참을 입술을 댄 채로 생각하던 수혁은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유라의 맥박이었다. 살아 있어... 유라는, 살아 있었다. 피식 웃으며 수혁은 유라의 턱을 손으로 받쳐 들어올렸다. “죽지 마라.“ “죽지 않아.“ “...그래.“ 목덜미에서 천천히 위로 옮겨가는 입술이 마침내 입술과 닿고 수혁의 상체에 밀리듯이 유라의 등이 침대의 시트에 닿았다. 티셔츠 아래로 넣은 손을 계속해서 느린 동작으로 어깨로 짚자 유라가 수혁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드러난 가슴에 유라는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말했다. “사랑하고 있어.“ “...그래.“ 머리 위로 벗겨낸 셔츠를 바닥으로 떨어뜨린 수혁은 무릎을 침대에 꿇고서 유라를 내려다보았다. “하하... 굉장히, 거만해 보여.“ 웃으며 말하는 유라에게 역시 웃어 보이며 수혁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기다리고 있잖아?“ 몸을 일으켜 세운 유라가 이제는 수혁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바지 버클에 손가락을 얹었다. “보고, 싶어?“ “여름의 노동은 그 어느 것보다 자극적일 테지. ...안 그래?“ “구릿빛 근육이라니... 우우... 아름답지 않다구. 미안.“ 완전히 나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굽어보며 서 있는 유라에게 수혁은 그저, 웃었다. “아름다워.... 정말로, 아름다워...“ 허리를 숙이고 수혁의 앞에 엎드린 유라가 수혁의 벨트 버클을 풀었다. 그리고 입술과 이빨로 지퍼를 내리며 유라가 속삭였다. “나, 나쁘지 않지?“ “그래.“ 유라는 정성스럽게 수혁의 중심을 물고, 눈을 감았다. 수혁은 유라의 감긴 눈꺼풀 위로 완만한 선을 이루는 눈썹을 살며시 문질렀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유라가 길게 침대 위로 몸을 눕혔다. 손가락에 감겨오는 유라의 안은 따스하고 작아서 수혁은 조금 손을 늦추었다. “그러지마. 그냥, 그냥... 해.“ “아프지 않아?“ “아프지 않아.“ 천천히 유라의 안으로 침잠 하는 자신의 마음과도 닮은 맥동 치는 몸의 선(線), 그리고 그런 수혁을 당기는 심장에 닿은 유라의 면(面). 조금씩, 다가설 때마다 유라의 팔이, 가슴이, 다리가 애절하게 감겨왔다. 너무나 절실하게, 너무나 간절하게. 그렇게 닿아와서 수혁은 점점 더 비었을 심장의 흔적마저 잠겨 버렸음을 알았다. 그 흔적에마저 유라가, 새겨졌다. 수혁의 목을 안고 유라는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느껴져...? 바다 같아. 네가, 파도를 만들고 있어. 내 안에서, 네가 만든 물결이, 흔들려.“ 사정을 한 후에도 수혁은 유라에게 몸을 묻은 채 그저 안고서 유라의 어깨에 키스했다. 머리를 들어 유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수혁을 똑바로 마주 보는 그 시선은, 행복해 보였다. “정말로, 사랑하고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수혁은 어째서인지 눈물이 났다. “울어....?“ “....그래.“ 가만히 팔을 뻗어 수혁을 끌어당겨 다시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게 한 유라는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소리내지 않고 흐른 수혁의 눈물이 자신의 어깨를 적시는 것을 느끼고만 있었다. 수혁의 눈물은 어깨와 이어진 등, 그리고 가슴, 복부까지 멈추지 않고 서서히 흐르며 유라의 전신을 천천히, 적셔 갔다. 유라는 수혁을 끌어안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말라버린 수혁의 몸의 드러난 굴곡이 못 견디게 서러워서 심장의 가장 깊은 감각의 어느 부분엔가에 걸려 왔다. 그 지독한 감각의 자극에 유라는 아프게 입술을 깨물며 수혁의 등을 어루만졌다. “괜찮아...“ 낮게 어르듯이 유라는 괜찮다는 말만을 되풀이해서 수혁의 귓가에 몇 번이고 속삭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수혁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자? 자고 있어...?“ 잠든 수혁에게선 대답이 없었고 유라는 조심스럽게 수혁의 등을 안은 팔을 들어 수혁의 침대에 바로 뉘었다. 눈물이 말라 까칠해진 수혁의 뺨을 떨리는 손으로 매만지며 유라는 수혁의 가슴에 닿지 않도록 그 위로 얼굴을 숙였다. 희미하게 얼굴에 느껴지는 심장의 울림과 체온의 열기가 서글퍼진다. 우리들... 다시 만났는데. 결국, 이렇게 만났는데. 왜, 우는 거야? 다시 얼굴을 들어 유라는 수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답게 선이 선명하고 일견 거칠어도 보이는 날카로운 윤곽을 손가락 끝만으로 조심스레 덧그리며 유라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움푹하게 패인 뺨과 더욱 날카로워진 콧날에 손가락을 세우고 유라는 고인 눈물이 수혁의 가슴에 떨어지기 전, 성마르고 떨리는 손으로 닦아냈다. 떨어진 셔츠를 주워 눈가를 누른 채 유라는 잠든 수혁을 바라보며 한참을, 그렇게 울기만 했다. “사랑하고 있어...“ 수혁은 단호한 손길로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차례대로 채워 올렸다. 셔츠를 단정히 모두 입은 수혁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기며 유라를 돌아보았다. 유라는 천장을 향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드러난 맨 어깨를 잠깐 바라보던 수혁은 시트를 살며시 끌어올려 주었고 그때 유라가 눈을 떴다. “...수혁...?“ “....깼군.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했는데.“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아 눈을 깜빡여 초점을 맞춘 유라가 일어나 앉았다. 말없이 유라를 바라보며 수혁은 빙긋- 짧고 건조하게 미소를 지었다. “....수혁...?“ 수혁은 꽤 길게 흐르는 침묵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유라를 바라만 본다. “...깨우지 그랬어? 아, 아침 먹어야...“ “잘 있어.“ “....무슨....?“ 수혁은 이미 문의 손잡이에 한 손을 얹고 있었다. “....수혁....?“ 손잡이를 비틀어 문을 연 수혁이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이제, 만나지 않는 편이 좋아.“ 그리고 수혁은 바깥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기다려....!“ 수혁은 그대로 멈춰서 유라를 돌아보았다. 반쯤 닫힌 듯도, 열린 듯도 보이는 문 너머로 유라를 보며 수혁이 말했다. “고의, 였잖아?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제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아. ..... 안녕.“ 수혁의 모습이 사라지며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고 유라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기다려...! 기다려 줘....!!!“ 유라는 자신이 완벽한 나신인 것도 잊은 채 침대에서 그대로 뛰어내려 객실문을 왈칵 열어 젖혔다. 그러나 그 잠깐 사이 이미 수혁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유라는 정신없이 복도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뛰어다니며 수혁을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수혁은 찾을 수 없었다. 서서히 유라의 무릎이 꺾였다. 바닥에 주저앉아 유라는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마지막....? 두 번 다시... 만나지... 못... 해....?“ 거친 울음이 터졌다. 쇳조각이라도 박혀 찢기고 헐어버린 듯한 목에서는 지독한 통증과 함께 끅끅- 기괴하게 울리는 울음 소리만이 나고 있었다. 피라도, 토하는 기분이었다. “어째서...? 사랑... 하는 게, 아니었어...? 사랑하는데...“ 유라는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에 몸을 웅크려 엎드린 채로 한참을, 울었다. 울음이 그치려 하질 않았다. 그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울어도, 기억나는 것은 단 한 가지. 사랑해―. 돌아오지 않는 대답. 듣지 못한 대답. 사라진 수혁. 사랑하고 있어... 불어오는 것은 선득한 바람이었고 그 바람에 젖어 유라의 몸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어제는 집회엘 갔었어.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어. 너도 수혁이도 없어서 심심해서 혹시나 해서 갔었는데 있잖아. 그게 꽤나 재밌더라구. 회비를 2만원씩 걷는 거 알아? 정말 놀랐어. 그렇게 2만원씩을 걷어선 그걸로 술도 마시고 나이트에도 갔었어. 그리고 당연하게 이 몸은, 인기폭발이었지. 뭐라더라? 너무 멋있고 잘 논다나? 평소엔 어려워 보였대. 너랑 수혁이 말고는 상대도 안 하고 또 엄청 안 좋은 소문도 많았었다면서. 뭐, 그래도 소문만이 아니라 아마 절반 넘게는 사실이란 건 말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말야, 내가 그 동안 친구가 없었던 건 너랑 수혁이 탓이었던 거야. 니들이 옆에서 무게 잡으니까 친구가 안 생겼던 거라구. 속 좁은 녀석들. 나처럼 멋진 녀석이 다른 녀석들에게도 인기 많을까 봐 질투했던 거였지? 그래도 걱정마. 내가 사랑하는 건 한재준뿐이고 장수혁은 내가 가장 존경하고 겁내고 만만한 형인 걸. 아마 두 사람 이상의 인간은 절대 없을 거야. 넌 어때? 잘 지내고 있어? 벌써 니가 내려간 것도 1년이 훌쩍 넘어 버렸네. 대체 너는 그 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온갖 사람 만나며 잘 놀고 잘 먹고 새 차도 사고 마구 즐거울 때. 넌 대체...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걸까. 알고 있어? 이제 곧, 우리들 22살인 거. 다들 너 군대간 줄 알고 있어서 내가 정정해 줬어. 한재준은 지금, 가출중이라고. 미안, 너 아마 복학하면 그 나이에 가출하는 등신 취급받을 거야. 잘 지내.? “지난 한 달도 수고가 많았어. 시간 연장도 잘해주고.“ “돈 받고 한 일인 걸요, 뭘.“ “니가 벌써 일한 게 4개월째인가?“ “예. 여름에 왔었는데 벌써 겨울이예요.“ “시간 참 잘 간다. 첨엔 잘 하려나 싶었는데. 지금은 너보러 오는 애들이 있을 정도니. 많이들 찝쩍거리지?“ “뭘요. 그런 거 없어요.“ “여자친구 사귈 생각 없어? 소개도 시켜줄 수 있는데.“ “이모, 오늘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왠 일이세요?“ “그냥. 니가 괜찮아서 그러지. 얼굴도 반듯하고 매너도 좋고. 성실도 하고. 아깝잖아.“ “....말했잖아요, 찾는 사람이 있다구요.“ “아,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아직 전혀 연락이 없어?“ “...예.“ “걔네 부모님도 속이 말이 아니겠어. 몇 달째야, 벌써.“ 몇 달이 아니예요. 벌써, 1년이 넘었으니까요. 이제 8달이 지나면 2년인 걸요.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가볍게 웃어 보였다. “...어디에서든 잘 지내고 있겠죠. 그럴 사람...인 걸요.“ “그래, 너무 걱정 마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니. 그보다 넌 다른 친구는 좀 없어? 그 동안 일한 게 얼만 데 놀러오는 사람 하나 없어?“ “하하, 이모 빈말하지 마세요. 공짜 아니면 안 데려와요.“ “무슨 소리야? 그래도 D/C는 해준대도.“ 벌써, 4달째다. 아니, 넉 달이 이제 넘어간다. 그 동안 35만원 가량 되는 한달 용돈 중 생활비로 10만원을, 나머지 10만원을 저금을, 그리고 나머지 돈으로 채유라를 찾아다녔다. 이제 정말 부산에서 안 가본 곳이 어디일까, 어디를 찾아보지 않았을까... 그렇게 고민을 하는 정도인 것이다. 정말, 부산에 오긴 한 것일까. 실은, 부산이 아닌 다른 도시엘 간 것이 아닐까. 머리를 흔들었다. “저, 그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오늘, 감사드리구요.“ “그래, 너야 알아서 잘 하겠지. 내일 보자.“ 지난달부터 함께 일하게 된 현숙누나에게도 가볍게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오늘은 또 어디를 찾아가 볼까. 대체, 채유라는 어디 있는 걸까. 어디에. 해건은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며 우편함을 확인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버렸다. 편지가 없는 날엔 실망을 하는 것도 같다. 뭐랄까... 해건의 편지만이 내가 알았던 모든 것을 확인시켜 주는, 잊지 않게 해 주는 유일한 연결고리처럼 여겨졌다. 내가 알던 사람들이 아직은 나를 잊지 않았음을 확인 받는 기분이랄까. 곧, 나는 22살이 된다. 이 곳에 이렇게 오래 있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찾을 때까지- 라고 하던 막연한 생각은 이제, 조금 달라져 있었다. 채유라를 찾지만, 찾을 거지만, 찾을 때까지- 라는 것과는 조금 달라진 것이다. 찾고는 싶다. 찾게 되면, 많은 할 말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반드시라는 점에서는 조금, 달라졌다. 채유라를 찾지 못해도, 채유라에게 내가 하려던 말들을 내가 잊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나는 달라진, 조금은 더 맘에 들어버린 지금 모습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처음에 그것을 확인 받을 대상은, 채유라가 유일했다. 그러나 이제는 채유라가 아니어도 말할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 지나치게 빠른 것만 같이 느껴지는 부산에서의 시간의 흐름과 그 안에서 또 하나의 나를 바라본다는 것. 신기했다. 그 안에서 나를 스치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과 공유한, 혹은 홀로이 존재하는. 내가 번 돈을 저금해서 모이는 돈을 보며 느끼는 감상. 내가 번 돈으로 내 끼니를 해결하는 것에 대한 감상. 느리지만, 서서히 변해 가는 것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해건과 채유라에 이어 사라진 수혁. 아직도 여행을 하고 있는 나. 찾을 수 없는 채유라. 가볍게 안부를 묻는 부모님. 웃으며 새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하는 희연. 무척이나... 그래, 신기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야. 나와 수혁이 탓에 해건이가 친구가 없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바보들, 우르르 몰려다니면 다야? 같잖아- 라고 말한 건, 우리들이 아니었잖아? 흠, 이것에 대해서는 좀 얘기를 해야겠는걸. 가게를 향해 올라가는 도중 비어 있던 도로변의 건물이 공사를 시작한 것을 보았다. 자리목도 꽤 좋은 건물인데다 일단 주변에 별 달리 눈에 띄는 건물 없이 혼자 서 있어 잘만 꾸민다면 눈에 잘 띌만한 위치였다. 미끈한 사암으로 건물의 겉만 얇게 입힌 건물을 잠깐 멈춰선 채로 보다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 반사적으로 그 쪽을 돌아보았다. 순간, 정말로 놀라버렸다. 그야말로, 텔레비전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의 조각 같은 미남이 서 있었던 것이다. 오리지널 한국인이, 맞는 건가? 머리도 검고 한국어도 쓰고 있긴 하지만... 키만 해도 185...? 게다가 저 체형은, 아무리 해도 동양인 같이 보이지도 않는데.... 얼굴 윤곽도 역시, 상당히 뚜렷해서 깊은 눈매가 더욱 돋보였다. 꽤나 잘 생긴 얼굴들은 많이 봐 왔다고 생각해 왔지만 저 남자를 보고 있으려니 모두 하수(下手)였다. 보기 좋게 적당히 헤진 진에 검정의 하프 가죽 재킷을 편안하게 걸친 남자는 담배를 손에 들고 계속해서 소리쳐대고 있었다. 저 재킷, 폴 스미스였나...? 주인, 이려나? “정한수! 넌 눈이 썩었냐!!! 좀 더 옆이라고 하잖아!“ 듣기에도 겁나게 소리치던 미형(美形)의 남자가 거칠게 바닥으로 담배를 내던지고는 갑자기 손에 들었던 자를 위로 높이 던져 올렸다.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자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 그 자의 끝에 있는 또 다른 남자를 보았다. 이야... 그건 또 무척이나 다정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인부로는 안 보이는데. “때려쳐! 너, 당장 일로 안 와?!“ 자에 가슴팍을 맞은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천천히 해.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현수, 너?“ “닥쳐!“ 뭔가... 이 끝내주게 잘 생긴 남자는.... 과격해 보였다. 멍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불쑥 그 미형의 남자가 내 쪽을 휙 돌아본다. 순간 당황해 걸음을 옮기는데 그 남자가 나를 향해 척척 걸어왔다. “뭘 봐, 새꺄! 썅! 무슨 구경 났어!“ 고개를 가로 저으며 어색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럼...“ 돌아서는데 어느 새 온 건지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뇨, 저희야말로 죄송합니다. 이 녀석, 너무 좋아서 좀 흥분했나 봐요.“ “닥치라는 소리, 못 들었어, 정한수!“ “이 녀석, 이번에 귀국을 해서요. 한국이 너무 좋은가 봐요.“ 웃으며 잘도 말하는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에게 역시 어색하게 웃어 보인 다음 살짝 고개만 끄덕이곤 그 곳에서 걸음을 옮겼다. “미친 놈. 넌 그저 아무나 좋지? 앙?“ “즐겁지 않아? 응? 연말인데.“ “지랄.“ 뭔가... 대단한 콤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건물, 뭘로 변신할 지가 기대되는데 그래. 달력을 보았다. 오늘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오전에 가게를 갔다 손님이 많아서 원래 시간보다 4시간을 더 연장했다. 오후 10시에 마쳐 집으로 돌아오니 10시 30분. 곧장 샤워를 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를 돌려놓은 다음 텔레비전을 켰다. 굉장히 하릴없는 느즈막한 중년처럼 여겨져서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오는 길에 사들고 온 적포도주를 한잔 따랐다. 온통 크리스마스 얘기밖에 나오지 않아서 이 세상의 모든 불교신자들과 천주교 신자들과 원불교 신자들과 에, 또... 이슬람교도인가? 아무튼 성탄절이 기념일이 아닌 모든 종교인들의 우울할지도 모를 마음을 생각하며 천천히 포도주를 마셨다. 가게가 문을 닫는 건 자정이니까 마치고 같이 놀러가자고 현숙누나가 말했을 때 따라갔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문득 들었다. 이제 11시가 조금 넘었으니까 지금 나가도 상관없겠지만 막상 집에 들어와 있으니 그것도 그다지 내키지가 않았다. 어차피 작년 성탄절에도 올해처럼 혼자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유독 올해만 어쩐지 쓸쓸하다는 건, 이상하지만 사실이니까. 빈 잔을 손에 든 채 어두운 거실 안에서 유일한 조명인 텔레비전 화면의 빛을 응시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면 그래, 저녁마다 해건, 수혁과 함께 여기저기 흥청망청 놀아대곤 했었는데. 아무 생각도 없었으면서 그냥 막무가내였다. 놀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그런 날 집에 있으면 바보가 되는 것만 같았다. 삐익- 하는 세탁기의 신호음을 들려 문득 시계를 보니 자정까지 5분이 남아 있었다. 잠시 전화기를 바라보다 불쑥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뚜우- 뚜우-. 통화중의 신호가 울렸고 전화를 끊은 다음 다시 한번 번호를 눌렀다. 여전히 통화중이었고 천천히 수화기를 내렸다. 하긴... 이렇게 한가한 건 나 정도일까. 빨래를 건조기를 옮기기 위해 일어서다 왠지 아쉬워서 다시 한번 수화기를 들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곧바로 통화연결음이 들려왔다. ?누구야?? 소리치는 음성에 조금, 당황해버렸다. “나야.“ ?뭐? 누구라고?? “나라구!“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웃어젖힌다. ?야아~~! 한재준!? “...메리 크리스마스다. 거기엔 눈 온다지?“ ?너, 아까 어디 전화하고 있었어? 몇 번이나 해 봤는데 계속 통화중이던데.? “통화중...? 전화 안 왔는... 아, 너한테 걸고 있었을 때였나 본데. 그러는 너야말로 통화중이던데.“ ?뭐? 너한테 전화하고 있었어!? 어디 소란스러운 곳에 있는지 소리쳐댄다. “하하... 그랬구나.“ 나는 해건에게. 해건은 나에게. 그렇게 전화를 걸고 있었고 미묘하게 어긋나서 자꾸만 통화중. 그리고 연결된 것은 내 전화. 그 미묘한 어긋남, 그리고 연결된 것은, 나.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이어!? “...너도.“ ?크게 말해! 안 들려!!? “어디야?“ ?뭐라고? 사랑한다고?? “...하하. 밖인가 본데?“ 그러나 해건은 다른 곳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은교형! 잠깐만!!! 기다리라구! 재준아, 메리 크리스마스다. 지금 시끄러워서 안 들리니까 나중에 전화할게. 알겠지?? “...그래? 잠이나 자지 뭐.“ ?학교 사람들하고 지금 나이트에 있어. 우루루 쪽수로 미는 것도 꽤나 재밌어서 말야. 그럼, 자고 있어. 전화 걸어서 깨울 테니까.? “....전화 못 받아도 원망은 마라.“ ?뭐라고? 안 들리니까 크게 말해!? “...조금, 피곤해서.“ ?나중에 전화할게!? 찰칵- 곧장 전화가 끊겼다. 확실히 쓸쓸하다. 음... 그런 것 같다. 내가 변했듯이 해건이도 변한 거다. 우루루 몰려다니는 같잖은 것들-에서 우루루 쪽수로 미는 것도 꽤나 즐거운 형편이 된 것처럼. 그래, 객관적으로 봤을 때 해건이는 멋진 녀석이다. 비록 남자가 아니라 애 같은 면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나나 수혁이 앞에서의 일이고 남들에게는 어딘지 부드럽고 섬세한 돈 많은 미소년이 아니었던가. 불멸의 것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불변과 가변의 것은 대개 어느 정도 적당히 뒤섞여 있는 것이니까. 이것이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저것은 상황대로, 혹은 마음에 따라 변할 수 있고 변해도 좋은 것, 어쩌면 그 가변성이 상관이 없을 수도. 반 넘게 비어 있는 와인병을 쳐다보다 손에 든 잔을 다시 채운 다음 침실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큰돈을 들인 3만원 가량의 적포도주를 혀끝에서 가볍게 굴리며 향기를 들이마셨다. 술이라면... 해건이가 취향이 뛰어났지. 칵테일, 브랜디, 위스키, 와인, 리큐르. 대개의 술 종류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서 멋도 잘 부렸고 말도 잘 했다. ??이게 로마네 콘티야. 맛있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해. 음... 그러니까 바로 감각 그 자체라는 기분, 알겠어???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항상 무슨 소리야? 라고 웃어넘기곤 했었지만. 올해 출하됐다는 보졸레 누보를 마시면서 향기라는 것이 느껴진다- 는 지금에는 조금 이해가 되는 기분이다. 방 중앙의 응접세트의 테이블에 잔을 내리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뺨에 닿는 베개 커버의 면의 촉감에 몇 번 얼굴을 부비다 푸욱- 얼굴을 묻었다. 이상, 하잖아? 이런 생각, 하는 자체가. 이렇게 쓸쓸, 하다니. 나야말로, 친구가 없었던 거야. 내 친구란 건, 누가 있지? 장수혁, 친구라고 생각하고 싶어. 그렇지만, 수혁은 나를 어떻게 하고 싶었던 거였지? 그저, 내가 부러웠다는 그 말이, 정말인가? 그건, 내가 친구였기 때문에, 나를 상처 입힐 수 있었단 건가? 연해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친구? 인가. 사랑을 해도, 친구일 수 있단 건, 어딘지 이상해. 친구의 감정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란 감정이 우정의 범위를, 넘어 버리니까. 사랑이 허락하고 수용하는 범위에서의 우정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 아아.... 그래, 김희연이 있었지. 정말로 친구라는 것에 가장 근접하지 않았나. 채유라....는 친구가 아니다. 친구, 가 아니지만. 되고 싶다. 찾을 수도 없는데... 그리고.... 또 누가 있지? 부모님? ....없잖아. 맙소사. 잠이 들었다. 띠리리. 뭔가... 소리가 들리는데. 띠리리. 무슨 소리...? 띠리리. 아, 핸드폰. 띠리리. 아닌가...? 집전화였나? 띠리리. ....집전화가 아니군. 들었던 수화기를 내리고 다시 손으로 사이드 테이블을 더듬었다. 눈이 떠지지가 않았다. 오랜만의 음주의 여파는 상당히 지독했다. 띠리리. 겨우 잡힌 핸드폰의 폴더를 열었다. ?잤어?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누구?“ 조금 탁하게 들리는 음성에 물었다. ?나야.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쥐어뜯는 기분으로 눈꺼풀을 열고 사이드 테이블의 전자 시계를 보았다. 새벽 5시였다. “아아... 자고 있었어.“ ?어디 아파? 목소리가 힘이 없잖아.? “아프긴. 잠이 덜 깨서 그래.“ ?술 마셨어?? “응. 포도주.“ ?포도주? 별로 안 좋아했잖아.? “크리스마스잖아. 그냥.“ ?뭐 마셨는데?? “보졸레 누보.“ ?헤에? 그래서 맛있었어?? “응. 향기가 좋던 걸.“ 엎드린 채 중얼거리듯 대답하자 해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넌? 잘 놀았어? 지금 집에 들어온 거냐?“ ?응. 재밌었어.? “그래? 즐거운 크리스마스 이브였겠는데.“ ?넌? 집에 계속 있었던 거야?? “아니. 저녁 10시에 아르바이트 마치고 집에 와서 샤워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와인 마시면서 텔레비전 좀 보다 너한테 전화한 후에 잤어. 아르바이트 때문에라도 집에 계속 있었던 건 아니지.“ 농담 삼아 가볍게 말해 보았지만 수화기 너머는 조용했다. “...여보세요? 해건아?“ ?만족스러워? 그렇게 지내는 게, 좋냐구. 그렇게 궁상떨려구 부산까지 내려간 거야? 넌... 그렇게 지내는 게... 좋은 거냐? 생일에도... 크리스마스에도.... 명절에도... 혼자서... 그게, 좋아?? “응... 나쁘지 않아.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구.“ ?그래서. 그렇게 혼자서, 변하다가... 그렇게 변하다가. 그러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 될 참이야? 내가 사랑하는 한재준은, 사라지는 거냐...?? “말도 안돼.“ ?말도 안 된다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내가 없는 곳에서, 내가 모르는 모습으로.... 나와는 무관하게 변하는데.? “...해건아. 난....“ ?돌아오지 않을 거야? 넌 어디에 있고 싶은 거야. 넌 무얼 하고 싶은 거냐....?? 이제까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 말이,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니, 쏟아져 나온 것도 같았다. “1년. 약속해. 내년 크리스마스에 나는, 그 곳에 있을 거다.“ 수화기 저편에서 해건은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말해 버리고 나니, 그래 2년이면... 햇수로는 3년이면... 이제 됐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담담하게 납득하며 해건의 대답을 기다리는 내가 있었다. ?....다행이네. 서른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서 다행이야....? 낮게 말하는 해건의 음성을 들으며 조용히 침묵했다. 침묵이 어렵다는 것은 무언가 듣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그러나 나는 지금 해건에게서 나도 모르는 새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 지 모를 말을 해버렸고 듣고 싶은 말을 이미 들었기에 그 침묵은 편안하기까지 했다. 돌아와도 좋다고, 그곳에 여전히 해건이 있을 거라고 말해준 것이다. ?군대.... 가도 좋을 지도 모르겠어.? “뭐라고?“ 갑작스레 바뀐 대화의 핀트에 어리숙하게 반문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불가능하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고서 군대는 가지 않겠다고 말하던 해건이었다. 갈 필요는 전혀 없다고. 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뇌물쯤은 애교라고. ?예비역 선배들 보니까 2년 6개월씩은 무리지만 아니, 실은 2년 4개월도, 2년 2개월도 무리지만 음... 한 18개월쯤? 그 정도는 갔다 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거... 공익 얘기 아냐? 너, 어차피 제대로 갈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선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아니지,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다구. 확실히 말해서.? “갑자기 왜?“ ?말했잖아, 예비역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구.? “뭐.... 좋은 건가.“ ?벌써 나, 2년째 어학 연수 안 간 건 알고 있어?? “아... 그러고 보니... 안 갔구나.“ ?....진짜 관심 없네.? “실은 안 가서 기뻐하고 있어-라고 할 건데도?“ ?...어째서 기쁜데?? “그냥.“ ?나, 놀리고 싶냐?? “놀리다니. 무슨 뜻이냐?“ ?그래, 너만 보느라 불안하고 겁나서 멀리 갈 생각도 못했어. 그래도, 우습게 보지마.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 그렇지만 내 애정은 내 문제니까 그런 식으로, 놀리지마.? “....놀리지 않았어!“ ?진심이라면, 기뻐해 줘야 하는 거? 내가 바란 식의 사랑이 아닐 뿐, 너는 내게 애정을 가졌다고... 그렇게 위안 받아야 하는 거냐....?? “...왜 그래, 너....? 내가 하는 말마다 계속 꼬아듣고 있잖아?“ ?꼬아듣는 거 아냐. 조금은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하게 됐을 뿐이야. 내가 원하는 식으로는 봐주지 않는 너에 대해, 그럼에도 바라는 식으로만 너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나에 대해.? “....그래서. 화가 나고 싫어졌어? 낭비처럼, 네 자기애(自己愛)에.... 이젠 그런 내가 거슬리게 됐어?“ ?그렇지 않아! 자기애? 자기애?!!! 그런 게 나한테 있다고? 있었으면! 있었으면!!! 진작에 널 사랑하는 건 때려쳐야 했다구! 뭐라 해도... 니가 상처 입히고, 네게 상처 입어서 몇 번이나 울었을 때... 그때... 포기해야 했었다구...?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내가 다시 너한테 상처 입히고 있는 거... 알아. 안다구. 하지만 나는 네게 나를 사랑하라고... 그 사랑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없었어. 그냥.... 그냥... 이대로 두고 싶어. 이기적인 거 알아.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오만한 소리지. 하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는 너를 그냥... 이대로 두고 싶다구...!“ ?어떻게 해도... 아무리 해도.... 나처럼은 사랑할 수 없어서...?? 해건의 가녀리게 속삭이는 음성을 들으며 일어나 앉아 이마를 짚었다. 너무나 오래... 지나치게 오랫동안... 나는 내 편의대로 해건을 방치... 아니, 외면해 왔던 것이다. 조금의 반응.... 아니, 보답. 되돌릴 줄 모르는 나를, 혼자서 너무나 긴 시간을 바래온 해건에게 나는 여전히 이런 말밖에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마음은 해건의 그 사랑과는 다른데. 소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해건의 그 마음과는 같지 않은데. 그럼에도... 이제는 그 마음에 거추장스러워졌냐고, 돌아오지 않는 그 마음이... 짐스럽냐고 묻는 나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모르겠어....? 니가 소중하지 않은 게 아냐.... 넌 내게 소중해... 너란 녀석은 내게 유일하다구... 같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같아야 한다고... 내게 안달내지 마. 그저 조금만 더... 내가 정말로 네게 공정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때까지 그냥 이대로 있어 줘. ....부탁이야. 지금의 내게... 너는 없으면 안 돼. 너는... 너는... 내가 돌아갈 곳의 기준이야. 이런 내게는... 니가 있어야 돼.“ ?....그저. 기다리기만 하지... 나는 그저, 기다리기만 해. 네 마음이 변할 지 아닐지... 조금도 알 수가 없지. 잔인하네. 그저, 너를 기다려야만 해.? “....해건아.... 난... 난....“ ?내가 그럴 수밖에 없는 거, 알고 있잖아? 그래서, 너는 내게 그런 말을 해. 나는 너를 사랑하니까.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놓칠 수가 없어서. 상처 입어도, 나는 그럴 수밖에 없어.? “...미안하다... 미안해....“ ?괜찮아. 그런 건, 이미 너도 나도, 알고 있잖아?? 해건의 조용한 목소리에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대체 언제까지, 어디까지 해건을 상처 입히려는 걸까. 그리고 왜 나는 그것에 나 또한 상처 입을까. 조금 더. 1년이 지나면, 돌아가게 되면. 그때의 내가, 나에 대해 해건에게 공정하고 다정하게 말하고 싶었다. 지금의 나는 하지 못한 일을. 지금과는 달라졌을 수도, 혹은 그대로일 수도 있는 1년 후의 나로서. 그때까지... 나는 해건에게 위로 받고 싶었다. 그런 끝없이 위태로운 만용으로 나는 해건을 상처 입히고, 나도 상처 입은 것이다. 오직, 나만의 비열함으로서. ?궁금한 게 있어. 물어봐도 되지?? 평정하게 들리는 해건의 물음에 누군가에게 보였다면 깜짝 놀래켰을 일그러진 미소를 마치, 해건이 보는 듯이 억지로 빚어내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답장, 쓰고 싶은 적이 있었어?? “....그래. 항상.“ ?쓰라고 하면, 쓸 거야?? “....그래.“ ?얼마나 자주?? “니가 보내는 편지 모두에.“ ?음... 그건 봐줄게. 너, 위대한 아르바이트생이잖아? 그러니까 한 달에 한 통. 답장을 써 줘.? “한 달에 한 통? 그걸로 되겠어?“ ?응. 쓸 거지?? “그래. 약속해.“ ?어라. 7시가 다 됐네. 고마운 줄 알아.? “응?“ ?니가 전화했으면 전화비는 어쩔 뻔했어? 가뜩이나 궁색한 녀석이. 고맙다고 해 봐.? “....고...마워....“ 그 말을 하는 것이 전화비 때문만이 아니어서... 목이 메었다. 해건 또한 그것을 알아서, 금세 대답하지 않았다. “....진심이다. 정말로... 고맙다....“ ?알아. 지금 니가 진심으로 말했다는 정도는. 한재준 매니아를 만만하게 보지 말라구.? “....그래...“ ?잘래. 내일 약속 있어.? “....편지 쓸 테니까...“ ?1월분으로 칠 거야. 12월은 벌써 다 끝나간다구.? “그래... 알았으니까...“ ?안녕.? 철커덕- 전화가 끊겼다. 멍하니 핸드폰을 손에 든 채 배터리가 다 닳지 않았다니.... 신기하군- 이라고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키득거리며 웃음이 새었다. 그리고 얼굴을 무릎에 묻었을 때, 눈물이 났다. ....쓸쓸하고, 서글픈... 크리스마스였다. ?새해가 밝고도 한참이 지났습니다. 한재준은 여전히 부산에서 잘도 개기고 있고 연해건은 꿋꿋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에도 이제는 익숙해진 연해건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울려대는 전화에 잔뜩 신경질이 나 있기도 합니다. 이 주체 못할 인기를 대체 어쩌면 좋은지 참으로, 난처하군요. 그래도 간혹은 맘에 드는 인간들의 전화도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정말로, 용케도 참고 있는 연해건이 장하기만 합니다. 간혹은 맘에 드는 인간에 한재준은 절대로, 없습니다. 한재준은 연해건이 온갖 비참함과 처절함과 굴욕을 참으면서도, 유일하게 사랑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간혹 맘에 드는 게 아니라 간혹은 때려죽이고 싶고 간혹은 미치게 쥐고 흔들고 싶은 인간입니다. 아무튼, 간혹 맘에 드는 인간 중 한 명인 백은교형과 함께 연해건은 스키여행을 떠날 생각입니다. 장소는 스위스입니다. 알프스의 그 만년설을 아주 뒤엎어놓고 올 거니까 궁상맞게 사는 한재준은 그냥, 부러워만 하세요. 기간은 보름이고 간 김에 유럽일주도 주욱- 하고 올 겁니다. 부러우면, 서울로 돌아와 본연의 졸부 아들 하세요. 짐 싸느라 좀 바빠서 줄입니다. 추신. 1년? 1년 같은 소리하고 있네, 썩을 놈. 그냥 이대로 두고 봐? 웃기지마. 이 빌어먹을 씨댕아. 난 너하고 노는 물이 달라, 알아? 내 이 고결하고 숭고한 애정전선을 니 놈이 알긴 뭘 알아. 상처 입히는 걸 알고 있다고? 알면, 알면 뭐! 디지게 삐져서 이빨로 한재준을 아득아득 갈아서 프라건에 넣고 비비탄에 비벼 다지고 싶은 연해건이 쓰셨다.? 스위스라. 좋겠군. 백은교라. 누구냐? “재준아!“ 나를 부르는 이모의 목소리에 퍼뜩 편지지를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예, 이모.“ 콜라캔 박스를 들어 나르다 말고 우뚝 멈춰 서서 눈썹을 찌푸렸다. 스위스라. 좋겠군. 백은교라. 대체 누구냐?!!! “우왓!!!“ 손에 든 박스위로 2개의 박스가 연달아 얹혔다. “이모!!“ “가벼워서 들고 놀고 있던 거 아니었어?“ “....무슨 말씀이세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팬시점에 들러 편지지를 보았다. 가급적이면 요란한 캐릭터 편지지를 피하려다 보니 너무나, 지나치게 줄어든 선택의 폭에서 간신히 미색의 편지지 하나를 골라 나오며 조금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말을 쓰지. 길을 보지 않아도 거의 자동이라 할만큼 발은 알아서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진짜, 뭐라고 쓰지. 문득 고개를 들자 전봇대 2개를 연결하며 붙은 플랭카드가 보였다. ??스웰덤 3월 3일 오픈.?? 가게의 종목도 밝히지 않은 채 상호와 날짜만 덩그라니 널찍한 플랭카드를 드넓게 비우고 있었다. 눈을 돌리자 언젠가 보았던 끝내주는 미남이 여전히 앞에 선 채 뭐라고 소리질러대고 있었고 안과 밖을 분주히 오가며 그 인상 좋던 남자가 인부와 그 성질 있어 뵈는 미남간의 의견을 조정하는 듯 했다. 아니, 의견의 조정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인부를 달래고 있는 듯 하다. 저기에 비하면 연해건은 그래도, 애교인 거겠지. 두서없이 이리저리 떠올랐다 사라지는 생각들을 쫓아 떠올렸다, 잊어버리기를 반복하다 어느 새 처음의 고민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대체, 뭐라고 쓰면 되는 거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장 거실 테이블에 편지지를 내려놓고 비닐 포장을 뜯었다. 푸른 계열의 편지지를 말없이 노려보다 머리를 흔들며 리모컨을 들어 오디오를 켰다. 가면 속의 아리아의 주제가가 흘러나오고 심각한 얼굴로 펜을 들었다. 안녕. 잘 지내고 있는지-까지 쓰고 펜을 놓았다. 잘 지낸다고 했는데 잘 지내는지 다시 묻는 건 좀 웃긴가. 새 편지지에 다시 펜을 대었다. ....역시 쓸 말이 없다. 어차피 당분간은 편지를 보내도 금방 받아볼 수 없을 거니까 좀 느긋하게 쓰자라고 맘을 고쳐먹고 일어나 벗어놓았던 더플코트를 다시 들고 집을 나섰다. 이번 달은 우암동을 찾아보기로 했었다. 우암동이라고 해도 한 동네인 것만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발품 팔아 찾는 것에는 한 달로는 턱도 없이 모자랄지도 모른다. 사진을 들이밀며 이런 사람을 본 적 없느냐고 물어도 자세히 들여다 봐주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바쁘다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많았고 무슨 사이비 종교 단체 피하듯 피하는 사람, 잡상인 취급하는 사람.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될 걸 위험인물이라도 된다는 양 아래위를 의심스럽게 살피는 사람. 아, 알아요- 라고 대답해 놓곤 반색하는 내게 다시 보니 또 아니네- 하면서 가버리는 사람. 보라는 사진은 보지도 않고 종교가 뭐냐는 둥, 도를 아느냐는 둥 쓸데없는 소릴 늘어놓는 사람. 같이 술이나 한 잔하자는 사람. 마스터를 구하고 있다는 룸싸롱의 삐끼들. 이제는 요령이 붙어서 대충 사진만 들이대면 그 사람이 아는지 모르는지,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고 한다는 정도는 금방 눈치챌 수 있게 되었다. 길가에 주저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보며 새삼 몇 번이나 놀라곤 한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치고 수없이 길을 헤매며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갔다. 그러나 채유라를 닮은 사람조차 만나지 못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면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곧장 집을 나서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닌다. 대중교통의 전문가가 되었다. 몇 번 버스의 노선은 어떤지, 어디를 가려면 어느 버스가 가장 빠른지, 어디까지 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어느 정도인지. 그것도 몇 시에는 어디가 가장 막히고 몇 시에는 어디가 한가하고. 사진을 들이대는 내게 여기를 가려고 하면 어떻게 가느냐고 간혹 되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교통방송 정보도 알려주지 않는 발로 뛰어 얻은 정보를 알려도 줄 수 있게 되었다. 버스는커녕 택시, 전철. 내 차를 두고 그런 게 왜 필요한가? 라는 자연스럽던 의문은 이제 기억도 잘 안 났다. 자동차 운전법까지 가물거리는 것이다. 열쇠를 꽂고... 돌린다? 그리고 어떻게 했더라. 문득, 편지에 쓸 말이 생각이 났다. 항상 들고 다니는 수첩을 꺼내 메모를 했다. 오늘은 무슨 동네를 어디까지 돌았음- 이라는 종류의 것만 잔뜩 적힌 수첩을 넘겨 마지막장에 볼펜을 끄적였다. 다시 수첩을 덮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바지의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내며 마을버스를 타지 않으면 한참이나 걸어 내려가야 하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가급적이면 신평이나 하단까지 가는 직통 버스가 가까운 곳에서 다니는 동네부터 뒤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띠리리.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마자 울리는 핸드폰이었다. 급하게 폴더를 열었다. “예.“ ?근로청년 생활은 할만해?? 수혁이었다. 굳이 누구일 거라고 짐작한 것은 없었지만, 적어도 수혁일 거라곤 조금도 생각지 못했기에 당황했다. “아아... 나야 뭐... 넌? 잘 지내?“ ?여기선 말야, 바다가 정말로 가까워.? “서울이... 아냐?“ ?여전히 채유라를 찾고 있어?? 내 대답에 대한 말은 전혀 돌아오지 않은 채 수혁은 자신의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그림자도 찾을 수 없어.“ ?바다. 그 녀석도 바다에 있어.? “....만난... 건가...?“ ?그래.? 쉽게도 대답하는 수혁의 말을 들으며 허탈해졌다. 나는 그렇게나 찾아 헤맸는데. “...채유라가, 연락을 했던 거야...?“ ?엄밀히는 아냐. 단지 찾기 쉽게는 해 줬던 걸.? “....맙소사.“ ?찾아서 어쩌려는 거지?? “그냥... 그냥 나에 대해 말하고 싶어...“ ?너에 대해?? “...그래. 조금은 나아진 나에 대해.“ ?넌 그 곳에 간 것이 좋았던 건가?? “그래.“ ?영원을 믿나?? 수혁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짐작도 되질 않았다. 다시 이런 식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실에 관하여 나에게 말하고 있는 건가. 그것에 또 나는 어떤 결과를 얻게 될 것인가. “...영원?“ ?인간이란 생물 자체가 유한하지. 존재했었고 그리고 사라지는 거야. 사라진 무엇에 대해서 사람들은 추억을 말하지. 대물림의 추억 혹은 유산... 하지만 말야, 그런 것들은 영원을 논할 것이 아니라 요컨대 내 말은 그러니까 말야. 얼마나-라고 하는 한정적인 기간의 문제라는 거야. 네 생각은 어때?? “뭘... 말하려는 거냐?“ ?너는 얼마나 기억되고 싶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수혁에게 정직하게 대답했다.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난 말야. 모르겠다. 기억되고 싶은 건지 잊혀지고 싶은 건지. 어느 순간엔 내가 잊혀진다는 사실을 생각하기만 해도 못 견디게 화가 나지. 그러다 또 어느 순간엔 내가 존재하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억한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화가 나는 거야.? “상대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기억해줬으면 하는 사람도 있는 한편, 잊어줬으면 하는 사람도 있는 거지.“ ?아아... 그런가... 너는? 너는 나를 기억할 거냐?? “그래. 기억할 거다.“ ?해건이는 어떨까.? “역시 기억할 거야, 그 녀석은.“ ?...역시 그럴까?? “....채유라는?“ 잠시 수혁은 말이 없었다. ?아아... 그 사람은 말야. 나를 기억하기를 가장 원하지 않는 사람이지. 절대로 나를 잊어야 하는 사람이야.? 수혁이 말하는 중간중간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면 위를 흐르는 바람의 소리가 이상하게 서글프게 들렸다. 아마도, 수혁이 하는 말이 진심으로 들렸기 때문에. ?찾아서 만나게 되면, 꼭 전해주지 않겠어?? “....니가 해.“ ?쿡쿡. 하지만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는 걸. 그러니까 부탁해. 꼭 좀 전해 줘. 절대로 나를 잊으라고. 절대로 나를 기억하지 말라고.? “어째서... 점점 너의 마음의 색은, 보이지 않게 되는 걸까. 점점... 흐려져만 가는 거지...?“ ?쿡쿡.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지. 흐려지다 어느 순간엔 사라지는 거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내가 변하듯이 해건이, 그리고 수혁이-,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왜, 수혁은 가라앉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 걸까. 처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수혁에 대해 알지 못한 것은. 무엇 하나 제대로 알았던 적이 없었던 거라고... 그렇게 알고는 있었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밖에 수혁을 몰랐던 거란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수혁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아무리 친근해도 내가 아닌 타인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그럴 것이다- 라는 믿음과 그가 알려주는, 혹은 그가 아닌 또 다른 타인을 거치는 정보, 그리고 그야말로 객관적으로 명시되는 소위 서류상의 법적 정보. 그러나 그것들이 그 사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되는 걸까. “....너에 대해, 조금도 몰랐던 거다... 나는 너를 지금도, 모르고 있는 거야...“ ?마찬가지지. 나도 나에 대해 모르니까. 그리고 너에 대해서도 나는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니까.? 낮은 음성으로 수혁이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즐겁지 않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소파 위에서 움츠렸던 몸을 더욱 웅크렸다. ?자신에 대해서조차 완벽하게는 알지 못해. 단지 더 많이 이해하려 하고 더 많이 용서하려 노력하는 것뿐이지. 그 어느 타인보다 말야. 친구, 혹은 연인. 그런 관계들도 어쩌면 더 많이 이해 받기 위해, 더 많이 용서받기 위해 필요한 것인지도 몰라. 자신이 할 수 없는 어느 부분에 대해서.? “내게... 이해를, 용서를 구한다는 거냐...? 네가....?“ ?쿡쿡. 그런 걸까. 아니, 그런 것도 같아. 너는 뭐라 해도... 몇 안 되는 내 친구라는 거니까. 실은 전화한 이유도 그래서니까. 네게,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다.? “사과....? 무엇에 대해...?“ ?그보다 먼저, 나를 친구라고 생각해?? “친구가 아니라고 하면, 사과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진 않아. 안면을 꽤나 오래 튼 사이란 건 틀림없으니까 역시 사과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 “....친구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네가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네게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친구라면, 상처 입히지 않았어야 하기 때문에?? “그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뭐랄까... 너에 대해 정말로 몰랐다는 거니까.“ 수혁이 길게 호흡을 고르는 조용한 숨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폭풍이 스러지기 직전의 일순의 정적처럼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슬픈 울림이었다. ?네게는 모르겠다고, 네게는 지독한 짓 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 정말은 그렇지 않았다는 거지. 그건 어디까지나 내 비열함이었으니까. ....미안하다.? “....괜찮아. 이건, 내 진심이다.“ ?....그래. 고맙다. 나중에, 나중에 또 보자.? “곧 네 생일이었지?“ ?그래, 차가운 2월생이지.? “연락할 테니까.“ ?아니, 하지마. 이걸로, 충분해.? “....수혁아.“ ?통화는 짧게, 용건만 간단히. 내 용건은 끝냈으니까. 이만.? “수혁아?“ 하지만 이미 뚜우뚜우- 길게 울리는 신호음밖에 들리지 않고 있었다. 폴더를 접어 내려놓고 무릎을 세워 턱을 괴었다. 이 기분은, 대체 뭐지? 무언가, 아슬하기만 한 이 기분은. 위태롭게 부서질 것만 같은 불안감이었다. 수혁.....? 그러나 해건은 아직도 스위스 알프스의 만년설을 뒤엎는 중이었고 이 불안감을 설명 받을 길이 없었다. 한참을 앉은 채 생각해 보았지만 맘에 드는 어떤 설명도 해낼 수 없었다. 퍼뜩 눈을 들었을 때 어느 덧 창 밖으로는 동이 트고 있었다. 베란다로 나와 강을 응시했다. 가능하다면 수혁에게 이 광경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수혁의 말처럼 유한의 존재인 인간이 무한의 자연을 보며 느낄 수 있는 애틋할 지경의 감상에 대해 말해주고 싶어졌다. 유한이 이어지는 것이, 영원과 다른 것이 뭐냐고. 끝없이 이어지는 유한의 반복이, 곧 영원이라 불릴만한 것이라고. 그것이 어쩌면 유한의 존재인 인간이 알 수 있는 최대한의 영원일지도 몰랐다. 딩동.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막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누구지?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숟가락을 내려놓고 인터폰의 화면을 보자 해건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해건아?!“ 문을 열자 안으로 들어서며 해건이 손에 들고 있던 에비앙병을 내밀었다. “이게... 뭐냐?“ “알프스의 만년설이라는 거지.“ “아무리 봐도... 눈은 아닌데 그래?“ “녹더라구. 안 녹았음 싶었는데.“ 집안으로 들어와 주위를 스윽 돌아보던 해건이 주방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저녁 먹던 중?“ “응.“ “옷 입고 있는 걸 보니 나가려고 했었나 보다?“ “아, 뭐...“ “채유라 찾으러?“ “뭐...“ 내가 앉았던 자리의 맞은 편에 앉은 해건이 말했다. “밥, 더 있지?“ “아, 응.“ 밥 한 그릇을 떠 내밀자 해건은 말없이 숟가락을 들고는 찌개를 떠서 먹어본다. “이거... 니가 끓인 거냐?“ “응.“ “이런 것도 할 줄 알았냐?“ “하다 보니 늘더라구. 매일 사먹을 형편도 아니고.“ “놀랬네. 사먹을 형편이 아니란 말을 들을 줄이야.“ “사실이니까.“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건은 이내 밥 먹는 일에만 집중을 했다. 밥그릇의 절반 정도를 비운 해건이 불쑥 입을 열었다. “맛있네.“ “다행이다. 이거 3일된 거야.“ “....3일씩이나 먹냐, 궁상아.“ “뭐, 매일 같이 할 것도 없고 나 혼자 먹으면 되는걸.“ “선물, 고맙다는 인사도 안 하냐?“ 그 말에 식탁 위에 올려둔 에비앙병을 쳐다보았다. “고맙다. 냄새만이라도 잘 맡으마.“ “냄새는 무슨. 병에 눈 담느라 손 시려 죽는 줄 알았다.“ 생각도 못한 선물이었다. 알프스를 다녀온 다른 사람들도 해건이처럼 눈을 담아올 생각을 할까. 음... 그러니까 기뻐서 생각도 못했다기보다는, 일단 선물을 들고 직접 찾아올 거란 생각도 전혀 하지 못했고 눈이 녹아 생긴 물이 담긴 생수병을 기념품으로 받게 될 줄은 더 몰랐기에, 조금 황당한 듯도 했다. 그래도, 일단 기쁜 것 같기는 하다. 그 사이 밥그릇을 모두 비운 해건은 숟가락과 빈 그릇을 들고 개수대에 넣고 있었다. “물도 받아놔라. 밥그릇은 마르면 잘 안 씻겨서.“ “....궁상도 느는 거였냐? 끝내주네.“ 씨익 웃으며 내 밥그릇에도 물을 받아 놓은 후 커피메이커의 전원을 켰다. “마실 거지?“ “응.“ 필터를 넣은 후에야 갈아놓은 커피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라인더를 꺼냈다. “커피 따지는 건 여전하네. 된장찌개를 3일씩이나 먹는 형편 어려운 녀석 치곤.“ “기구는 원래 여기 있던 거고 레귤러치곤 저렴하지. 가게에서 얻은 거거든. 1킬로에 16000원이라구.“ “...싸네.“ 분쇄한 커피가루를 필터로 옮기는데 해건이 입을 열었다. “난 잘 지내고 있어. 교통 전문가가 됐지. 600원으로 얼마만큼의 거리를 갈 수 있는지 알면 놀랄 거다. 버스도 나쁘지 않아. 시야도 높고, 운전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볼 것도 많고. 다음에 같이 버스 타지 않을래? 타기 싫으면 할 수 없지만. 이만 줄일게.“ 내가 쓴... 편지의 내용이었다. 조사 하나 안 틀리고, 해건이 보지도 않고 낭독하고 있었다. “어... 편지... 받았구나.“ “응.“ “어.... 그러니까, 아, 그래...! 너, 그 편지 대체 어떻게 쓰냐? 내 편지가... 좀 썰렁하지?“ “말이냐. 열라 썰렁해.“ “아, 저기... 그냥 생각이 나서...“ “어떻게 안부 한 번 못 묻냐?“ “그게 그러니까... 편지에 니가 잘 지낸다고 해서....“ “버스를 타자고?“ “저기... 싫으면 안 타도 되고....“ “타기 싫으면 또 할 수 없어?“ “아니.. 안 익숙하면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정류장마다 다 서고 난폭운전 같은 것도 있고....“ “교통전문가가 됐다 이거로군.“ “그거야 자주 타니까....“ “600원으로 몇 킬로를 가는데?“ “아, 그게 종점에서 종점까지도 가니까... 멀리 가.“ 흘끔 본 해건은 확실히 나를, 비웃고 있었다. “그...그렇게 썰렁했냐....“ “말이냐?“ “....안 쓰느니만 못했나 보네... 미안.“ “누가 쓰지 말래? 썰렁하댔지.“ “그, 그래...?“ 어색해져서 아하하거리는 나를 보며 해건이 냉혹하게 말했다. “바보 아냐?“ 머쓱하게 설거지를 시작하는 내 등뒤에서 해건은 여전히 나를 비웃고 있었다. “오리궁뎅이. 허리가 굽었어. 쭈그리고 서서 설거지를 하냐? 뭐야, 키 컸다고 시위냐? 고무장갑은 안 끼냐? 퐁퐁은? 앞치마는 안 해? 바보 같애.“ “저기, 해건아. 있잖아.“ 설거지를 급하게 마치고 돌아보자 해건이 뚱한 얼굴로 턱짓했다. “커피.“ 원래부터 이 집에 구비되어 있던 섬세한 장미 문양이 새겨진 데미타스잔에 커피를 따라주자 잔을 들고 한참을 살피던 해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줌마냐.“ “저기, 너 나한테 화난 거 있냐?“ “누가? 내가?“ “...기분이 나쁜 것 같아서. 편지가... 그렇게 열받게 만든 거냐?“ “니가 화난 거 아냐?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그런 거 아닌가?“ “난 화 안 났는데. 와줘서 기뻐.“ 진지하게 말하자 해건이 싱긋 웃었다. “애교 부리는군. 짜식.“ “아, 아하하....;;“ 그럴듯한 표정으로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던 해건이 푸학- 인상을 쓴다. “데었어? 많이 뜨겁냐?“ 잔뜩 미간을 찡그린 해건이 말했다. “설탕 줘.“ “아, 하하....;;“ 설탕을 티스푼으로 세 숟가락을 푹 퍼 넣은 해건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커피를 홀짝이기 시작했고 조금 기가 질려 그 모습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며칠 후면... 수혁이 생일이잖아...?“ “그렇지.“ “그때 괜찮으면 같이 저녁이나 하면 어때?“ “니가 서울에 온다고?“ “응. 당일치기가 되겠지만.“ “그거, 꽝 났다.“ “어... 그래...?“ 해건의 퉁명스런 대답에 무안해져 어설프게 대꾸하는 나를 보던 해건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혁이, 행방불명이야.“ “....행방불명?“ “좀 됐어.“ “....월초에 전화 왔었는데...?“ 눈썹을 치켜올리는 해건을 보며 다시 말했다. “이달초에 전화 왔었어.“ “어디라는 말은 없었어?“ “그냥... 바다가 보인다고만...“ “그래 가지곤 국내에 있는지 해외인지도 모르는 거잖아.“ “집에서도 모르는 건가?“ “아는 것 같은데 말을 안 해. 아저씨, 알잖아. 한번 아니면 죽어도 아닌 거.“ “어머니는?“ “모르신대.“ “확실히?“ “어머니가 그런 거 속일 분이냐?“ “하긴...“ 나의 모친이 뭐랄까... 그래, 캐리어 우먼의 세련된 이미지라면 해건의 어머니는 상당한 소녀풍의 이미지로 아들과 함께 백화점을 휩쓰는 것이 낙인 전형적인 여학생. 그리고 수혁의 어머니는 전업주부라는 것이 보는 순간 떠오르는 그런 분위기이다. 되도록 온화하고 조용한 전업주부. “수혁이... 무슨 일 있었냐?“ “모르겠어. 한 동안은 진짜로 열심히 일한 거 알아?“ “일?“ “여행 갔다는 얘기는 했지? 돌아와서 어디 갔었다 뭘 했다 말도 없이 아저씨 사무실엘 열심히 다니더라구. 수혁이야 뭐... 나나 너하곤 틀려서 그런 거 능숙했잖아?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지. 그러다 불쑥 사라진 거라구. 말도 없이. 너한텐 전화해서 뭐라 그랬는데?“ “수혁이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해?“ 해건은 잠시 말이 없었다. “글세... 보여주지 않은 것 이상을 내가 뭘 알고 있지...?“ “수혁이를 잊을 거냐?“ “농담 마. 어떻게 잊는다는 거야?“ “수혁이... 정말, 어려운 녀석이지? 안 그러냐?“ “....그래.“ “정말 어려운 친구야.“ “진짜.“ 그렇게 대답하며 해건은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왜 그래?“ “넌... 괜찮아?“ 해건의 걱정스럽기도 하고, 어딘지 신경질적이기도 한 물음에 나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응. 괜찮아.“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 안 믿을 거지?“ “응.“ “그냥.... 니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거야, 아마. 뭐랄까... 채유라는... 연애의 의미가 아니게 됐어. 내가 채유라를 찾는 건... 음... 뭐랄까... 인사를 하고 싶다는 건데... 알겠어?“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똑바로 말하라구. 내가 알기를 원하는 거면. 아니면, 모르는 게 좋으면 말할 필요 없겠지.“ “나를 변하게 만들어준 사람이야. 그것에 대해서는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조금 더, 조금 더 나은 내가 됐다고... 말하고 싶어서야.“ “왜 하필... 채유라야? 왜 그게 채유란데? 왜 채유라 때문에 더 나은 니가 됐다는 건데?“ 그 말을 해건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저 낮을 뿐, 서글프지 않은 약간의 분노마저 느껴지는 음색으로 말했다. “채유라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와 같아. 그러니까... 채유라가 나라는 게 아니고... 나는 채유라에게 내가 되라고 말했던 거야.“ 커피잔을 손으로 감싸고 해건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어떤 녀석이었는지... 너도 알잖아. 이기적이고 무관심하고... 그냥 대충대충이었지. 나는 조금도 변할 생각도 하지 않고서 주변만 탓하고 있었어. 너나 수혁이... 희연이... 모두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일 뿐이었어. 하지만.. 채유라는 뭐랄까... 자유로워 보였어. 전혀 달랐지.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던 거라고... 지금은 생각해.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말야.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건 전혀 몰랐던 거지.“ 조금의 미동도 없이 해건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유로운 채유라를 갖게 되면, 나도 변할 거라고, 그렇게 내멋대로 생각했던 거야. 내가 변해야 했는데 말야.“ 손을 뻗어 부드럽게 해건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서 말하고 싶은 거야. 채유라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너와... 수혁과... 희연이... 그리고 내 부모님... 그 모든 사람들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게 만들어줬으니까. 어째서 채유라냐고 물어도... 채유라가 그렇게 나를 만들어준 건 사실인 걸. 채유라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언제까지고 모두에 대해서 내멋대로 굴고 있었을 테니까.“ 가만히 고개를 숙이는 해건의 머리칼에 살짝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이해해 줘. ...오래 걸리지 않아. 여전히 나는 이기적인지도 몰라. 그다지 변하지 않았는지도 몰라. 그래도 적어도... 이렇게 말하게 됐잖아...? 기다려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야.“ 고개를 든 해건이 다정하게 미소지으며 입술을 겹쳐왔다. 그렇게 입술이 맞닿은 채로 조용하고,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해건이 속삭였다. “이건... 에로틱 키스가 아냐. 알지? 이건, 위로고... 위안이야. 너에게, 또 나에게. 내가 아니어서 슬프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고... 그냥... 그냥, 격려야. 아마도, 나에게. 네가 무슨 말하려는 지... 알겠지만, 그래도... 내가 아니라는 것만은... 달라지지 않잖아? 채유라가 아니었다면... 너는 나에 대해 조금도 몰랐을 거라는... 그런 뜻이잖아...?“ 내 쪽으로 좀 더 몸을 기울인 해건이 내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 뺨에 자신의 뺨을 맞댄 채 내 등뒤의 어느 곳인가를 보며, 해건이 말했다. “알겠는데... 그래도 순수하게 고마워할 수가 없어. 네가 나에 대해, 알게 된 이유가... 내가 아니고... 너조차 아니었다는 사실에... 상처 입는 내가... 더 많이 이기적인 걸 알면서도... 그래도, 여기가 아파. ...내가... 내가.... 얼마나 그 이유이길... 바랬는지... 얼마나 바랬는지...“ 슬픔, 그보다 조금 짙은 쓸쓸함, 더 많은 한숨을 담아 그렇게 해건은, 어느 새 분노가 사라진 단지 아리게 들리는 그 말을 했다. 자신이 이유이길 바랬노라고.... 해건이 내 손을 당겨 왼쪽 가슴에 얹어놓았다. “이 곳이, 아파.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아. 너무나 아파서, 마치 죽는 게 나을 것 같이 여겨져.“ 두근두근- 느리게 심장이 뛰고 있었다. 속삭이는 것도 같고, 혹은 흐느끼는 것도 같은, 느리고 불규칙한 고동이었다. 상처 입히려던 게 아닌데. 그저... 그저, 설명하고 싶었을 뿐인데. 애정의 문제가 아닌, 나에 대한 확신 그리고 해건에 대한 확신. 내게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확신을 좀 더, 분명히 원했을 뿐인데. 그것을 증명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되는 걸까. 왜 해건은 또다시 상처를 입었다고 말하는 걸까. 나는 정말로, 조금도 해건을 상처 입히려던 게 아닌데.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 자신의 심장을 짚고 있는 해건의 손을 당겨 그 손바닥에 가만히 입술을 대었다. 그 곳에서도 심장은, 울음의 맥박인 양, 울리고 있었다.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 “....응. 너는 그저, 설명하고 싶었던 거야.“ “난... 단지, 네게 말하고 싶었어....“ “내게- 라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도, 좋아?“ “....그래.“ “자만하게 되어도?“ “....그래.“ “사랑이라고 믿어버릴 지도 모르는데?“ “....사랑이라고 생각해.“ “다만, 나와 다른 사랑일 뿐...?“ “...지금은 모르겠어. 하지만, 너는 내게 소중해. 이건, 정말이니까.“ “내가... 보고 싶은 적이 있었어?“ “그래...“ “나를, 그리워했었어?“ “...그래.“ “나를... 사랑하고 싶어...?“ 천천히 얼굴을 들고 해건의 이마에, 콧날에. 그리고 마지막을 입술을 덮었다. “네가 믿지 않아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나처럼, 사랑해주지 않으면...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지마... 말했잖아...? 난 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그때, 그때까지만... 제발. 지금 내가 네게 무언가를 말하게 된다면... 그건 네게 공정한 게 아냐. 지금 내가 네게 말할 수 없는 건... 정말로 너를 위해서라구... 정말로... 정말로 모르겠어?“ 해건의 이마가 나의 이마에 닿았고, 그리고 콧날이 닿았고, 뺨을 스쳐가며 해건이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대고서 여전히 닿은 뺨을 살며시, 느리고 조심스럽게 문지르며 속삭였다. “안아달라고 하면, 싫어할 거야?“ “해건아....“ “안기고 싶다고 말하면... 싫어할 거야?“ “...해건아....“ 맞닿은 뺨을 뜨거운 물기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뺨을 마주 댄 채 해건은 내 머리를 끌어안고, 안아달라고 말하며... 울고 있었다. “울지 마...“ “안아 줘.“ “해건아... 울지 마. 그런 말하면서... 울지 마.“ “안기고 싶어.“ 천천히 뺨을 떼고 해건의 뺨을 감싸고서 눈을 마주보았다. “제발의, 제발이야. 안기지 않으면, 안아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슬퍼서, 정말로 죽을 지도 몰라. 그러니, 나를 안아.“ 1초가, 10년인 듯 여겨지는 움직임이었다. 한 뼘의 거리가, 100만 광년인 듯 여겨지는... 속도였다. 해건의 턱과 목덜미가 이어지는 곳의 동맥에 입술을 대었다. 파닥파닥 빨라진 심장의 울림이, 그저 서글프다면. 그건 왤까. 사랑스럽지만, 못 견디도록 안타까운 건 또 왤까. “웨지우드 잔을 쓰는 집은 침대가... 끝내주겠지...?“ 절박하게 들리는 그 음성을 나는 어떻게도 외면할 수 없었다. 이런 것이, 이런 것은... 조금도 해건을 위한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나는 뿌리칠 수 없었다. 위로하고 싶었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나만이 될 텐데... 이것으로 해건은 조금도 위로 받지 못할 텐데. 몸에 닿는 온기만으로 해건이 무엇을 위로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라고 위안 삼을 것은 나만이 전부인데. 그것으로는 해건에게 조금도 슬프지 않은 일이 되는 것이 아닐 텐데. 그럼에도, 지금 해건은 내게 말하고 있었다. 대체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 “너를 위한 일이 아니야... 그건... 너를 위한 일이 될 수 없잖아....?“ “이건, 우리를 위해서니까. 나만을 위하려고 할 필요 없어. 그런 것은... 진작에 거절했잖아...? 그러니까, 안아 줘. 머릿속으로 니가 무슨 생각을 하든, 내가... 어쩔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도 나를 위하고 싶으면, 그냥 안아. 내게, 필요해.“ “....어째서... 어째서...“ “섹스를 가볍게 생각하지마. 내 손에 닿는 네 몸을, 가볍게 여기지마.“ 해건이 손을 뻗어 내 셔츠의 가장 아래 단추를 풀었다. “사주침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기둥에 숨어서 유혹하는 장면을 항상 해보고 싶었거든.“ 가장 위의 단추만을 남기고 단추가 모두 풀렸을 때 해건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냥... 그냥... 보통의 침대야. 그래도... 니가... 니가...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힘겹게 침을 삼켜가며, 힘겹게 겨우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해건이 앞이 이미 모두 열려 펄럭이는 셔츠를 내 등을 스치게 하며 살짝 끌어내렸다. 셔츠를 손가락으로 감으며 해건이 거실의 가구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오우, 그래도 이런 로코코식은 아니길 바래.“ “직접... 직접... 보는 게.... 빠르겠지...?“ 여전히 해건의 오른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내 손을 교묘하게 비틀어 해건쪽에서 쥔 것처럼 다시 손을 잡은 해건이 팔을 당겼다. “처음, 기억나?“ 움찔- 몸이 굳었다. 해건이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이 나를 침대에 앉힌 채 등뒤에 앉아 목덜미를 부드럽게 주물러 주었다. “잔뜩 술에 취해선... 갖고 싶다라고... 계속해서 갖고 싶다는 말을 했었어. 기억나?“ “.....해건아...“ 간신히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해건은 여전히 조심스럽다가도 강한 터치로 뻣뻣해진 근육을 풀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채유라의 이름을 불렀지.“ 아주 무겁고, 아주 거대하고, 아무튼 내가 아는 가장 위험한 망치 같은 걸로 순식간에 전신 마사지를 당한 기분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내 온 몸을 놓친 곳 없이 잘게 내려찍은 망치를 해건은 아직도 휘두르고 있었다. 망치 아래서 내가 가루가 되어서 풀풀 날리고 있는 것은 조금도 모른다는 듯이 짐짓 상냥한 미소도 짓고 있었다. “나, 울었어. 그건, 기억, 나?“ 갑자기 해건이 힘껏 손아귀에 힘을 줘 내 어깨를 거머쥐었다. “그래도, 너는 채유라의 이름을, 불렀어.“ 다시금 손의 힘을 빼고 틀어쥐었던 어깨를 쓰다듬으며 해건이 말을 이었다. “그리곤, 나는 울고 있었는데 너는 잠들어 버렸지. 혹시 기억하고 있다면 말인데, 내가 빼먹은 부분 있으면 말해줄래?“ 굳어 있는 내 목덜미를 가볍게 문지른 해건이 내 등을 타넘어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내 허벅지 위에 앉으며 내 목을 끌어안았다. “내가, 갖고 싶어? 응?“ “....해건아...“ “갖고 싶다고 말할 수 없는 거냐?“ “해건아...“ “울지는 않을 거니까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보다 묻고 있잖아? 내가, 갖고 싶어?“ “.....이러지마...“ “내 이름을 불러. 채유라의 ㅊ이라도 나왔다간 니가 그렇게 죽도록 비웃던 실낙원꼴 날 줄이나 알아.“ “해....건아.... 난....“ “나를 위해서니까, 상관없잖아? 내가 원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해주겠다던 거 아니었어? 나에게, 공정하고 싶다면서?“ 할짝- 조금은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해건이 내 귓볼을 물었다. 그리고 귓가에 바싹 입술을 가져다대고서 말했다. “나를 위하고 싶어하는 네게 기회를 주고 있는 거잖아....? 이상하지만 난 그저 안기고 싶어. 왜 그렇지? 차라리 내가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냥 안아버리겠는데 말야...“ 해건이... 상처 입은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 모든 상처들은, 우유부단하고 이기적이던 내가 입힌 상처였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나도 해건으로 인해 상처 입고 있었다. 그것을, 해건 역시 모르지 않는다. 복수라고 하기엔 너무나 애처로운 몸짓이, 애달픈 호흡이... 나는 울 수조차 없었다. 해건의 머리를 당겨 안고 입술을 겹쳤다. 살짝 벌어지는 입술 틈으로 혀를 밀어 넣으며 아랫잇몸을 살며시 문질렀다. 해건의 혀가 느릿하게 엉켜왔고 해건의 손은 내 가슴을 매만지며 해건의 다리는 내 허리를 감았다. 벌려진 양팔 안으로 안기는 해건의 몸을 들어올려 침대에 눕히자 해건이 웃었다. 소리나지 않는 메마른 웃음. 공허하고 그 자체만으로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잔상을 가진 그 웃음을 보며 가슴속의 무언가가 스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뭘까. 안타깝고, 여리고, 애처로운 그것은. “나를.... 나를... 상처 입히려는 거야...? 상처... 입히고 싶어...?“ “울지 않아?“ 해건의 그 말을 듣는 순간 흐리게 보이던 해건의 얼굴이 어느 새 똑바로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 눈물이 맺혔던 걸까. 그리고 그 눈물이, 말라버린 걸까. “거짓말한 게 아니야... 정말로... 정말로... 너는 내게 소중해. 너는 다르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그건 거짓말이 아냐... 모르겠어...? 이 곳에서... 너는 내게 더 많이, 더 많이... 소중해졌단 걸....? 몇 번이나... 네 생각을 했다는 걸...? 어째서... 이러지 않아도... 이러지 않아도...“ 서서히 내 상체를 끌어안은 해건이 손을 내려 내 중심을 쥐었다. “왜 너는 모르는 거야? 내가 네게 했던 거짓말에 대해선? 나는 네게 거짓말을 했었어. 내 사정일 뿐이라고. 너는 너의 사정을, 나는 나의 사정에 대해. 그렇게 두면 되는 거라고. 부산으로 떠나는 네게 나는 거짓말을 했었어. 나는 계속 네게 사랑 받는 나를 원해. 끊임없이 너에게 사랑 받는 내가 되길 원해. 너한테, 내가 연인이길... 원해. 그런 내가 아니면, 정말로 주저앉을 것만 같아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모조품이어도 좋다고, 그렇게 자존심을 버리고, 나를 버리면서까지도 원했고, 지금도 원하고 있어. 그런 나조차 네게는 의미가 없었잖아. 그런데, 왜 너는 내가 없는 곳에서, 너도, 나도 아닌 이유로,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를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아는 녀석이 되버린 거야? 나에 대해서 너는 대체 무엇을 알게 된 거야? 그저,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너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는, 정말로 너만을 위한 나였는데. 너를 위해서, 바뀌었던 나였는데. 그런 나는 필요하지 않았잖아? 그런 나는, 버림받았잖아? 그런 나를 버린 건, 너잖아. 왜....! 오로지 너를 위한 나는 버린 니가, 이제는... 그런 내가 아닌 나를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됐다는 거야....? 그럼... 나는 뭘 한 거지...? 나는.... 나는... 뭘 했던 거냐구....!“ 있는 힘껏 해건을 끌어안았다. “그래도... 나를 사랑하는 거야. 그래도...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그 사실을 어째서 확인하고 싶어진 건지.... 그 사실이 미치게 중요해졌는지... 아직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확인 받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병신같이... 사랑하고 있어. 그래도... 사랑하고 있어.“ 벗은 몸에 닿아오는 해건의 몸에서는 연한 오렌지의 향이 났다. 머리로는 그것이 해건이 애용하는 샤워젤의 향임을 깨달으면서도 몸이 느끼는 감각은, 좀 더 강했다. 그것이 마치, 해건 본연의 향인 양 조금씩 살결을 맛보며 더 많이, 구하고 있었다. “혼자서, 이 사랑을 그저 혼자서... 그렇게 끌어안고서 지내는 것보다... 너한테 기다리라는 말을 듣는 것이, 더 힘들어. 기대하게 되는 내가, 더 많이 힘들어. 정말로... 정말로... 쓸데없는 친절이야.... 변했다고 너는 말하지만... 내가 처음 사랑하게 된 너는 조금도 변한 게 없어. 그대로라구... 알지도 못하는 녀석에게 이불을 덮어주던... 괜히 친절하고 상냥하던.... 처음 사랑하게 된 너와, 지금의 너는 조금도 다르지 않아. 내게는... 그냥, 항상 너였어.“ 가슴에서 시작해 천천히 입술을 위로 밀어 올려 목덜미를 지나고, 턱을 지나 마침내 닿은 해건의 입술을 덮자 해건의 목소리가 잠겨들었다. 듣기 좋을 만큼 조그맣게 웅얼거리듯 해건이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그냥, 내게는... 항상 너였어....“ 등을 어루만지는 해건의 손길은, 상냥하다. 항상 너였어- 라는 말이... 못 견디게 기뻐졌다. “상처 입히려던 게 아니었어. 심술이 났단 건 인정하지만... 조금보다... 많이겠지만... 그래도, 상처 입히려던 건 정말로 아냐. 너에게 나를 더 많이, 자꾸만, 계속해서 나에 대해 알리고 싶었을 뿐... 네게 조금이라도 더 많이 나에 대한 말을 하고 싶었을 뿐...“ 벌어진 다리를 조금 더 당겨내며 속삭였다. “한번만 더... 한번만 더 말해 줘.“ “넣어. 그러면, 말해줄 테니까.“ 다리를 내 허리를 감고 조이며 해건이 말했다. “하지만 아직....“ “괜찮으니까, 와.“ 어쩔 줄 몰라서 해건의 얼굴을 마주보다 조금 손가락을 뻗어 입구를 건드려 보았다. 여자가 아니니까, 아무리 의지가 넘친다 해도 메말라 있을 수밖에 없는 곳이 손끝에 닿아오자 여전히 어쩔 줄 몰라하며 해건의 얼굴을 보며 주춤했다. 그런 나를 보며 해건이 팔꿈치를 잡더니 손가락을 입술로 물었다. 손가락이 질척이며 내는 소리가 주는 생각지도 못한 외설의 강도에 나는 정말로, 둘 곳을 잃은 시선을 이리저리 방황하다 결국 해건의 얼굴을 다시 마주보았다. 강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해건의 부드러운 눈빛을 마주한 채 그 손가락을 내려 입구를 열며 훔쳐보자 해건은 여전히 웃어주고 있었다. 조금 용기를 내서 손가락을 늘려도 해건은 미소지었다. 그리고 하나 더. 서서히 입구를 늘이며 안을 문지르자 조금씩 복부를 해건이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다른 손으로 해건의 중심을 조심스럽게 감아쥐었다. 천천히 쓸어 올리자 해건의 몸이 조금 움찔한다. 가슴의 돌기를 살금 깨물던 입술을 편평한 복부를 따라 키스하며 내리다 어느 순간 해건의 중심에 닿았다. 목만 들어 그런 나를 보는 해건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것에 힘입어...;; 조금 더 자극하자 순식간에 해건은 폭발해 버렸다. 어정쩡하게 피한 덕분에 뺨에 해건의 정액을 묻힌 채 얼굴을 들자 해건이 폭소를 터트린다. “그 얼굴... 예술이다. 푸...풋... 하하...!“ 손가락이 빠진 엉덩이에 몸을 가져가자 웃는 얼굴로 해건이 내 어깨를 안았다. 어깨에 뺨을 대고서 해건이 말했다. “항상... 너였어. 나에겐... 그저, 항상 너였을 뿐이야...“ 어떤 모습의 나라도, 해건은 사랑해주었다. 내가 서서히 해건의 안으로 매몰되어 가는 동안 해건은 내 어깨를 한껏 당겨 안은 채로 조용히 속삭여주었다. 항상 나였다고, 그런 나를 언제나 사랑했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죽는 날까지 그럴 것이라고. 그래서, 그 사랑을 영원이라고 말할 거라고. 항상, 언제나,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영원. 실감나지 않은 말들이었다. 해건이 하는 그 말들은 비록 실감할 수 없었지만, 지금 해건이 내게 주는 것에 대해서만은 알 수 있었다. 해건이 내게 주는 그 마음의 깊이는. 완전히 내게 속하려는 해건의 의지는. 그 의지로서, 그 깊이로서 내가 느끼는 것은 불안을 닮은 초조와 온전하지 못한 나이기에 느끼는 후회와 미련을 더 많이 갖게 했다. 그래서 해건이 내게 한 그 말들은 어딘지 낯선 기분을 들게 했다. 오히려 고통을 억누르는 찡그린 해건의 표정과 쥐어짜듯 새어나오는 신음, 온 몸을 휘며 내게 안겨드는 그 떨리는 몸짓이, 더 현실로서 다가왔다. 이제는 뭘로도 물러설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든, 아니든. 나는 해건의 이 마음을, 이 의지를, 이 깊이를. 안고 가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은 회피도, 외면도 할 수 없는 이 감정의 무게를. 통증을 줄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내 움직임을 쫓아 허리를 드는 해건의 머리를 안으며 눈을 감았다. “....괜찮아...?“ 조심스럽게 묻는 내 말에 해건은 대답 대신 내 허리를 안고서 고양이처럼 머리칼을 가슴에 비벼왔다. 손가락으로 돌돌 말릴 만큼 길어진 머리칼을 매만지며 해건을 마주 안아주었다. “후아... 이래도 저래도... 죽을 만치 아픈 건 나 혼잔 거 같아서 어쩐지... 싫어지네.“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씨익 웃는다. “라고 말하는 건 뻥이야.“ 가만히 이마에 입술을 대자 얼굴을 들어 내 턱을 핥는다. “....소중히 대해줘서 기뻐.“ “...그래.“ “계속 안고서, 재워 줘.“ “쓰다듬어 주면서.“ 해건이 온화하게 웃었다. “맞아. 쓰다듬으면서.“ “부드럽게 토닥이면서.“ “맞아. 토닥이면서.“ 해건의 등에 손을 얹고 쓰다듬고, 그리고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 “아침에... 같이 나가자.“ “그래.“ “빨리... 빨리... 돌아와.“ “....그래.“ “기다리고 있어.“ “....그래....“ 내 등을 움켜쥐듯이 안고 있던 해건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고 있었다. 마침내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해건의 손을 당겨 가슴에 보듬으며 평온하게 들려오는 숨결이 귀를 기울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안도감에 닫힌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새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이것으로, 사랑이라 할 수 있나. 이것으로, 같아진다고 할 수 있나. 이것이, 사랑이 되는가. 단박에 대답해낼 수 없는 그 수없이 머릿속을 헤집는 의문이 느릿하게 흘러가며 해건의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규칙적인 해건의 호흡이 귀를 채우고, 야트막히 오르내리는 해건의 몸의 리듬이 눈을 채운다. 이것이... 새로운 시작이길 원하는... 나를 깨달으며 천천히 잠이 들었다. 응... 응... 같지 않아도, 네가 말하는 것과 다를 지 몰라도. 그건 정말이었어. 응... 응... 사랑하고 있는 거야. 너는 다르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거야. 지금 내 팔 안에 잠든 너를, 맞닿은 가슴의 고동이, 응, 정말로 사랑스러워. “태워주지 않아도 되겠어?“ “그래. 서울까지 운전하려면 힘들 텐데 어서 가 봐.“ 입술을 삐죽이며 나를 보던 해건이 운전석에 오르더니 차창을 내린다. “안전벨트.“ 내 말에 귀찮은 듯 안전벨트를 매면서도 해건은 입술을 삐죽였다. “조심해서 가.“ “가지 말래도 가....!!!지는 않겠지만. 가란 말 좀 그만해.“ “가지 말라면 안 갈 거냐?“ “...당연한 거 아냐...?“ 해건이 콘솔박스로 갑자기 몸을 숙이더니 선글라스를 꺼내 쓴다. 보이지 않는 눈동자로 나를 보며 해건이 역시나 입술을 삐죽인다. “그런 말할 생각도 없는 주제에 말만.“ 해건의 얼굴에서 선글라스를 밀어 올려 머리 위에 얹어주며 빙긋 웃었다. “....간다.“ 차 지붕에서 팔을 떼고 손을 들었다. “...편지 써.“ “썰렁하다고 또 딥따 씹을려고?“ “그래도 안 쓰기만 해 봐. 아예 갈아버릴 테니까.“ 웃으며 열린 차창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해건에게 가볍게 베이비키스를 했다. 해건이 얼굴을 돌려 잠깐 나를 쳐다보다 다시 선글라스를 내려 얼굴을 가리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곧장 핸들을 꺾어 떠났다. 그 사이 바뀐 해건의 에쿠스를 뒤에 선 채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백은교가 누구냐? 그걸 물어본다고 했었는데... 잊어버린 것이다. 진짜, 백은교가 누구냐? “저, 혹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재준이라고 합니다.“ 수화기 저편의 상대가 아하- 소리를 냈다. ?물론이죠. 기억합니다. 어떻게 그 친구분은 찾으셨구요?? “...아뇨,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연락 드렸습니다. 좀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사진하고는 다 돌려드렸는데... 뭐 빠진 거라도?? “아뇨, 그런 게 아니구요. 비용 말인데 착수에 필요한 금액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요.“ ?기간은 어느 정도 생각하십니까?? “....한 달이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러면 지난 번 주셨던 돈에 비하면야 껌값이죠.? 그리고 이어서 우일종합센터의 정우일씨가 말한 금액은 절대로 껌값이 아니었다. 그렇게 비싼 껌을 씹는 인간이 있다면 찾아가서 300원 하는 스파아민트를 권할 거다. 그건 내가 지금까지 모아놓은 돈의 무려 3배를 넘기는 금액이었던 것이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 드려도 되겠지요?“ ?물론이죠.? 통화를 끝내고 잠깐 앞을 바라보다 장식장의 서랍을 열고 통장을 꺼내 잔고를 확인했다. 역시, 많이 부족하다. 일단 오전, 오후 모두 알바를 해 볼까... 막무가내로 저녁 시간을 나 혼자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흥신소에 맡기는 한 달이 나을 것은 몇 번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일단 생각은 해봐야겠다. 가급적이면, 조금 빨리, 돌아가고 싶어진 것이다. “니가 벌써... 8개월이 다 됐나?“ “작년 8월부터였으니까... 곧이네요.“ 싱긋 웃으며 그렇게 대답하자 이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부를 훌훌 넘기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너무 오래 봐서 지겨우세요?“ “지겹긴. 계속 휴학중이야?“ “...예. 사정이 그렇네요.“ 이모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물끄러미 내 얼굴을 보기만 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오늘따라 왜 그렇게 보세요?“ “아니, 너야 일 하나는 똑소리나게 잘 하는 녀석이니 걱정 없겠다 싶어서.“ “저, 지금 잘리는 현장인 거예요?“ 장난스럽게 묻자 이모가 손에 들었던 장부로 내 머리를 툭 치곤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구나. 8개월이라... 아직 정확히 8개월이 된 것은 아니지만 달수로는 3월이면 8개월 째인 것이다. 방학중이라 학기중일 때보다는 손님이 줄어들긴 했지만 개강이 가까워옴에 따라 슬슬 학기중의 분위기로 돌아가고 있었고 잘릴 걱정은 안해도 되는 줄 알았는데. “이모, 자르려면 적어도 일주일전에는 말씀하시는 겁니다?“ “시끄러워!“ 얌에서의 오전 알바를 마치고 내려가는 길에 문득 스웰덤의 사암 기둥에 아르바이트 구함이라고 붙은 것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시간대가 오전부터 시작해 상당히 많았다. 문득 눈에 띄는 주방보조라는 것이 있어 시간을 보자 오후 6시부터 새벽 1시까지였다. 오후 6시부터 시작하는 타임이 하나가 더 있었지만 새벽 2시까지여서 다음 날 오전을 생각하면 조금 무리일 것 같았다.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계단에 한 발을 얹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공사를 할 무렵에 보았던 폴 스미스 재킷의 미남이 성큼성큼 걸어나오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얼굴 안 되는 것들은 처음부터 자르란 말이다! 못 생긴 것들이 드글거리는 데서 뭘 하란 거냐! 눈병나서 죽으란 거냐구!“ 눈병으로... 사람이 죽는 거였나. 흘깃도 흘끔도 아닌, 아주 당당히 미남이 멈춰선 채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다 계속해서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살짝 목례를 해 보이며 자나치려는데 남자가 불쑥 한 마디를 던졌다. “하려고 온 거 아냐? 왜 안 들어가? 얼굴에 자신이 없나 보지?“ 에... 못 생겼단 말보단 잘 생겼단 말을 그래도 많이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아무리 남들에게 뭐라고 들었건 눈앞의 이 미남에게는 도저히 할 말이 아닌 것 같아서 애매하게 웃어만 보였다. “들어가 봐.“ 그러고는 담배를 꺼내 물고는 내 얼굴에 직통으로 후우- 길게 연기를 뱉어놓는다. 얌에서 일하며 담배 연기에 상당히 익숙해졌다고 자신을 하고 있었건만, 순간 조금 콜록거렸다. 나는 금연자인 것이다. 그것도 담배 연기가 몹시 싫은. 내 반응에 미남이 보인 반응은 일단, 예술적이긴 했다. 이마위로 살짝 드리워진 윤기 흐르는 머리칼을 한 손을 들어 스윽 빗어 넘기며 고개를 뒤로 휙 젖힌 것이다. 정말로... 무슨 영화에서나 볼만한 부옇게 빛나는 그라데이션 처리된 클로즈업 장면처럼 멋있었지만. “픽-. 병신.“ 이라고 말하는 남자를 보는 순간... 인상이 찡그려졌다. “죄송하지만, 혹시 지금 그 말, 저한테 한 겁니까?“ 미남이 눈썹을 활처럼 치켜올림으로서 의문을 표시했다. 대체, 내 말에서 못 알아들을 부분이 어디 있었단 거지?!!! “설마. 어서 들어가 보라구?“ 이 사람... 이 가게랑 대체 어떤 연관이 있는 거지? 일단 채용 여부를 먼저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그래도 같이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얼굴은 예술일지 몰라도... 지나치게 부담스런 성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급스런 무늬목을 통째로 가져다 짠 듯한 실내에 적당히 넓은 간격을 주어 배치해놓은 테이블 세트라든가 교묘하게 직접 조명을 피하며 설치한 간접조명.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풍경화가 듬성듬성 걸려 있다. 무척이나 고급스럽다는 느낌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고급스러움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가게의 모든 것에 일일이 신경을 썼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주변을 두르는 중앙을 원목으로 가로지르는 두꺼운 파티션에는 청동의 추상적인 느낌의 50센티쯤 되어 보이는 조형물이 얹어져 있다. 상당히 인상적인 실내의 인테리어를 한참이나 살피는데 등뒤에서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봤어요? 어떻게 맘에 드는지 모르겠네요.“ 뒤를 돌아보자 언젠가의 인상 좋던 남자가 웃으며 서 있었다. “아... 멋진데요.“ “그래요? 어...? 그러고 보니 구면인 것 같은데... 그렇죠?“ “예... 구면인 셈이죠.“ 빙긋 웃으며 대답하자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정한수라고 합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한재준입니다.“ 뒤쪽의 의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앉기를 권한 정한수라는 이름의 남자가 물었다. “혹시, 들어오면서 누구 만나지 않았어요...?“ “저기... 그러니까 굉장히 잘 생긴 그 때의...?“ “아아, 만났군요.“ 어쩐지 안도하며 말하는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시선을 눈치챈 남자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꽤 사람이 많이 왔었는데... 다들 맘에 안 들어 하더라구요... 재준씨가 맘에 들었나 봐요. 참, 나이가?“ “아, 22살입니다.“ “저기, 아르바이트 광고보고 온 거 맞죠? 일해줄 수 있어서. 맞죠?“ “아... 예, 그렇습니다만...“ “어떤 시간을 하고 싶어요?“ “저기... 주방 보조를...“ “정직원을 할 생각은 없구요?“ “예. 시간이 조금..“ “음, 그럼 하는 걸로 알면 되겠죠?“ “예? 아, 예.“ 남자가 손을 내밀며 싱긋 웃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는 남자를 멀뚱 쳐다보다 뒤늦게 내민 손을 마주잡았다. “한수형이라고 불러주세요. 나이가 조금 더 많거든요.“ “아, 예...“ “참, 나는 매니저예요. 별로 도움은 안 되는 매니저겠지만, 잘 부탁해요.“ “예, 저도 잘 부탁 드립니다.“ 다시 봐도 정말로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굉장히 다정해 보이고 따스해 보였다.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아, 잠깐만요. 저기 같이 일할 사람이 한 명 더 있거든요?“ 그러면서 내 뒤쪽을 향해 한수형이 손짓을 하자 가죽 라이더슈트를 입은 조금 사납게... 음, 거칠게 생긴 느낌의 또 다른 남자가 꾸벅 가볍게 고갯짓을 해 보인다.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를 건네자 조금 거친 느낌의 얼굴선이 부드러워지며 귀여운 인상이 된다. “이영후라고 합니다. 참, 형이네요. 전 21살이거든요.“ “한재준요. 22살이구요.“ “어라? 근데 말투가 저기 서울말이네요?“ “아... 고향이 그쪽이어서요. 부산에 온 지는 꽤 됐는데.. 어째 안 고쳐지네요.“ “편하게 대하세요. 나이도 제가 어린데.“ “서울말 쓰는 남자는 다 느끼한 줄 알았는데 형은 별로 안 느끼하네요. 아하하.“ 기분 좋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영후를 향해 웃어 보였다. “라이더슈트를 입은 사람은 다 껄렁해 보일 줄 알았는데 그 쪽도 안 그렇네요.“ “혹시 오토바이 탄 적 있어요?“ “아뇨.“ “자자, 그럼 인사는 다들 사이좋게 잘 나눴죠?“ 유치원생에게나 할 법한 말을 하는 한수형을 영후는 굉장히 진지하게 쳐다봐서 어색해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말 낮춰도 되죠? 아, 물론 싫다고 하면 안 그럴 거지만요.“ “싫긴요. 그러세요.“ “형이잖아요.“ 한수형이 살짝 미소지으며 처음의 자리에 앉았고 그 앞에 영후와 나란히 앉았다. “일단 시간은 그러니까 둘 다 6시 출근에 재준이가 1시, 영후가 2시. 재준이는 서빙을 할 필요 없어. 설거지랑 주방일만 거들면 되고 영후는 서빙이랑 마감 정리. 참, 시급은 일단 2200원부터 시작해서 셋째달부터 2500원, 그 다음달부터는 달마다 계속 100원씩 올릴 거야. 혹시 적다거나 맘에 안 들면 미리 말하고. 일단 이 근처 다른 가게들이 어떤지를 잘 몰라서 그렇게 했는데 어때?“ 2200원 시작에 결국 다달이 100원씩 오른다는 얘기다. 일이 얼마나 힘들지는 모르지만, 아르바이트 시급으로 생각하면 적다고는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얌은 1700원으로 시작해서 8개월이 되어 가는 지금에야 겨우 2000원인 것이다. “참, 영후는 집이 이 근처랬고 재준이는 집이 어디야?“ “아, 신평인데요.“ “음... 그럼 마치면 차 끊긴 시간이겠네.“ “걸어서 가도 됩니다. 지금도 걸어다니는 걸요, 뭐.“ “그래도 그 새벽에 어떻게 혼자 걸어가. 그럼 재준이는 따로 교통비를 주는 걸로 할게. 음... 신평이면 1500원 정도면 되나? 아닌가... 혹시 부족해?“ “부족하긴요. 주시는 게 어딘대요.“ “그럼 재준이는 하루 1500원씩 교통비 따로 지급하는 걸로 하지. 영후, 샘 안 낼 거지?“ 아마도 오늘 모두 처음 만났을 텐데도 한수형은 굉장히 친근하게 말을 걸고 있었고 이상하게도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뭐랄까, 정한수라는 사람에게는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있었다. “샘은요. 대신 밥 많이 주세요.“ 영후라는 녀석은 무척이나 쾌활해 보이는 녀석으로 염색 같은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탈색된 듯한 황갈색의 제법 길다란 머리가 잘 어울렸다. 굳이 라이더슈트가 아니어도 야외활동을 엄청나게 즐길 것 같은 스타일. “그럼 일단 가게 정리도 해야 하니까 음... 1일부터 나올 수 있겠어?“ “아, 예.“ “저도 올 수 있어요.“ “그나저나 오후 바텐이랑 4시 타임, 6시 타임 한 명 더 구해야 하는데.“ “사람들 많이 오지 않았어요?“ 지극히 당연한 것을 묻는 영후에게 한수형이 곤란한 듯 웃었다. “그게... 마땅한 사람이 안 오네.“ 마땅하기보다는 눈병 안 걸리게 할 정도의 인물이 안 나타난다는 뜻이겠지. “그래도 아직 며칠 남았으니까 곧 구할 수 있겠지, 뭐.“ 굉장히 나름대로는 참고 있다 결국 묻고야 말았다. “그런데 아까 그...“ “아, 현수? 걱정마. 그 녀석 오전 바텐이라 오후 5시에 퇴근하거든? 됐지?“ 가볍게 윙크하며 그렇게 말한 한수형이 먼저 일어섰다. “어떻게 할래? 가게 좀 더 둘러보고 갈래?“ “아, 전 이만 들어가 봐도 될까요?“ “저두요.“ 내 말에 이어 그렇게 말한 영후도 자리에서 일어섰고 한수형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럼, 사흘 후에 보는 건가?“ “예.“ “참, 연락처는 둘 다 적어뒀지?“ “예.“ “안 오면 하루에 스무번씩 장난전화 걸 거야. 알겠지?“ “걱정 마세요.“ 인사를 하고 영후와 나란히 가게를 나서다 문득 생각이 나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그 현수라는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라이더슈트의 커다란 기능성 포켓에서 고글을 꺼낸 영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집으로 가는 거면 태워다 드릴까요? 신평 쪽으로 지나가면 되거든요.“ “응?“ “다대포에 가거든요. 조금 돌아가는 거니까 태워다 줘요?“ 주변을 다시 둘러보자 영후가 길가 한 편으로 밀어서 세워놓은 오토바이를 볼 수 있었다. 오토바이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꽤나 값비싸 보이는 오토바이였다. “멋있죠? 업스타일 중에 이 녀석만큼 멋있는 녀석은 아직 한번도 못 봤다구요.“ “아, 오토바이는 잘 모르지만, 멋있어 보이는데.“ “가와시키예요.“ 그렇게 말하는 영후의 얼굴에는 대단한 오토바이를 탄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나 오만함이 아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불안한 얼굴이어서 나도 모르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모른 척 부드럽게 대꾸하고 말았다. “아, 그 이름은 들어봤어.“ 빙긋 웃은 영후가 고글을 내려쓴 후 다시 물었다. “이제 다시는 권할 일없을 건데 정말 안 탈래요?“ “아, 그냥 걸어가려구. 조금 느긋하게 걸으면서 생각할 일도 있고. 권해줬는데 미안.“ 영후는 내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보통의 체격인 영후보다 훨씬 커 보이는 오토바이였지만 영후는 능숙하게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주변을 조금 살피다 금세 큰 도로에 올라타 멀어지는 영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도 곧 걸음을 떼었다. 생각보다 시급이 세서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교통비 지급까지 되고. 걸어다녀도 충분하니까 그 돈까지 모두 합하면 예상보다 목표 금액을 훨씬 빨리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그 좀... 성질 사납던 미남도 오전이라니. 정말로 다행이다. “재준아? 안 바쁘면 잠깐 얘기 좀 할래?“ “예, 이모.“ 한산한 홀 안을 빙글빙글 돌며 한가하게 테이블을 닦고 소파의 쿠션을 정리하던 손을 놓고 카운터로 다가갔다. “가게, 팔렸어.“ 밑도 끝도 없이, 아니 간간이 들리던 얘기를 단도직입적으로 곧장 말하는 이모에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괜찮게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잘 됐네요, 축하해요, 이모.“ 이모가 조금 멋적은 듯 웃어 보인다. “3월 중순까지는 일단 장사할 거니까.“ “혹시 제 걱정하는 건 아니죠?“ “하고 있어, 걱정.“ 1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나는 내가 한번도 정말은 가져본 적이 없었던 이모라는 호칭의 중년 아줌마였지만, 내가 아는 단 한 사람의 이모라고 부르는 이 여성을 나는 무척이나 좋아하게 되었다. 재혼 얘기가 나오면서 그 사람을 따라 경기도로 가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을 해 왔던 터라 혼수비용이라든가... 아무튼 가게가 적당한 가격에 팔리지 않아 꽤나 난처해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후에는- 그래봐야 그건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일이지만- 집에 손을 벌려서라도 돈을 마련하고 싶다는 충동마저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쩌죠? 저, 다른 알바 구한 거 있죠?“ 장난스럽게 말하자 이모는 눈에 띄게 안도하는 기색으로 이내 매섭게 쏘아붙인다. “이 녀석, 인정머리하곤.“ “그러니까 걱정 같은 거 하실 필요 없으세요. 저, 되게 믿으시는 거 다 알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