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달영 (cdggam@cdggam.com) Access : 1896 , Lines : 189 [소설] 고교 3년생의 사랑. #113 PART-113 지영은 재기와 상희들을 피자집에서 푸짐하게 포식시켰다. 뭔가 다른걸 해주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이상한 오해를 할 것 같기도 하고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된 것이 저녁을 사주는 일이었다. 피자집을 나서면서 재기는 연신 쑥쓰러운 듯 고개를 들 줄 몰랐다. "맛있었니?" "네, 맛있었어요! 재기야 너도 그렇지?" "으,응..... 정말 잘 먹었습니다 선생님." 지영은 대답대신 흐믓하게 웃었다. 더 맛있는걸 사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재기가 해준일은 그 이상의 보답을 받아도 충분할 정도로 지영에게 고마운 일이었다. 한편 재기는 아직도 주머니 속에 귀걸이를 가지고 지영에게 건넬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희와 미지가 함께 있어서 미처 건네지 못하고 있지만 이제 상희와 미지는 같이 돌아갈 것이다. 지영이 재기 자신과 같은 버스 정류정이라는 걸 재기는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럼 선생님 오늘 정말 잘 먹었어요. 내일 뵈요." "그래, 상희야. 그리고 미지." 미지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지영이 환히 웃었다. "정말 고마워. 내일 보자 얘들아." "네, 선생님 힘내세요." 손을 흔들며 거리 저쪽으로 사라지는 상희와 미지. 지영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동안이나 상희들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정말 고마운 녀석들...... 지영은 그녀들이 자기 편이 되어줘서 정말 고마웠다. 민형씨와 같은 나이지만 마냥 귀엽고 고마웠다. "자,재기야 갈까?" "네? 네......" 재기와 같은 버스 정류장으로 가야하는 지영. 재기는 두근두근 긴장된 가슴을 졸이며 주머니에 넣고 있는 귀걸이 상자를 힘주어 잡았다. 이번에 야 말로 고백하는거야! 타이밍도 딱 좋고 둘뿐이잖아! 누구도 방해하지 않아. 시내에 네온사인이 재기에게 고백하라고 응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재기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지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응? 왜......?" 태연하게 대답하는 지영. 그것을 보는 순간 재기의 얼굴이 굳고 입에 얼어 붙었다. 좋,좋아해요 선생님...... 좋아해요. 그 말하기가 이렇게 힘들줄이야......! 시뻘개져서 우물쭈물 하는 재기를 빤히 쳐다보는 지영. 얘가 뭔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무게를 잡지? "그림 좋네요." "......!?" 한순간 재기의 맥을 탁 풀리게 만드는 목소리. 김준석!? 재기의 눈에는 지영의 등뒤로 나타난 김준석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이 녀석 오늘 학원에도 나오지 않았는데 왜 이런 곳에서......!? "김준석......" 지영 역시 준석의 얼굴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이 아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나타난거야? 준석이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고 어슬렁 어슬렁 재기와 지영의 앞으로 걸어왔다. "둘이서 데이트라도 하시나? 하긴 강사한테 아부떨 때부터 알아봤지. 너 아무리 꼬리쳐 봐야 선생이 학생을 상대나 할 것 같냐?" "너,무슨 소릴......!!" 김준석 이자식! 아무리 침착하려고 해도 이 녀석의 면상만 보면 화가 치밀어! 재기는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주먹을 쥐고 준석을 노려보았다. 지영이 얼른 그런 재기를 말렸다. "재기야 그러지마! 김준석......! 넌 뭐가 부족해서 또 그러니! 이제 그만 화해하고 내일부터 다시 학원에 나와!" "흥, 물론 그래야죠 선생. 하지만 그걸 당신을 쫓아내고 나서야." "......!" 의기양양한 준석. 그의 눈가에는 오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당신 때문에 애들한테 망신당하고 수치가 장난이 아니었지. 야 쑥맥! 너 쌈좀 하던데 다시 한번 솜씨 좀 보자......!" "얼마든지 나쁜 자식!" 흥분해서 바닥에 가방을 집어 던지는 재기! 하지만 준석은 흥- 코웃음을 치면서 삐닥한 고개로 말했다. "이 대로에서 붙자고? 정신나간 자식......" "......!" "따라와. 어제는 갑작스러워서 당했지만 오늘은 쉽게 당하지 않을테니!" "좋아! 가자!" 준석이 턱으로 아파트 단지쪽을 가리켰고 재기는 던졌던 가방을 냉큼 집어 들었다. "재기야 그만둬! 싸움은 안돼!" "놔두세요! 제가 해결할께요!" 말리는 지영을 뿌리치는 재기. 재기는 화가나 있었기도 하지만 지영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기분이 더욱 컸다. 그 심리가 재기의 눈앞을 가렸고 가장 중요한 것을 잊게 만들었다. 준석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채 피식 웃었다. "흥, 따라와." 결국 재기는 준석을 따라 씩씩대며 아파트 단지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 한산하여 사람도 없고 주먹 다툼을 하기에는 딱 좋았다. 재기가 가방을 모래밭에 집어 던지며 준석을 향해 외쳤다. 말리기 위해 따라온 지영에게 잘보이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오버하고 있는 재기. 그는 자신이 가장 단순한 함정에 빠졌다는 것 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김준석! 너 선생님 한테 사과하기 전에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꺼야!" "재기야 그만해! 난 괜찮아!" 지영은 당황해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렇게 싸우는 남자를 앞에두고 조마조마 했던건 민형만으로도 지긋지긋해! 이제 학생이 자기 때문에 싸우는 일까지 일어났으니 지영은 너무너무 괴로웠다. 싸우지마......! 왜 나 때문에 싸우는거야! 지영은 재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굳이 싸우려고 하는 재기가 답답하기만 했다. "흥, 바보자식. 같잖은 주먹 가지고 놀지마...... 죽는수가 있어." "......!?" 순간 스윽- 스윽 놀이터의 한켠에서 처음보는 남자들의 모습이 들어났다. 그중 한두명은 손에 각목을 들고 있었고 나머지는 주먹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대여섯의 남자를 보는 순간 지영은 겁이 덜컥났다. << 함정이야! >> 이런 상황에 대한 경험이 있는 지영은 즉시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재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재기는 중앙에 서서 준석을 노려보며 꼼짝도 않고 있었다. "너냐 우리 준석이를 패줬다는 애가." "세상 막사는구만. 겁나는게 없나보지?" 금발 머리에 파란 머리. 장발과 대머리가 섞인 누가 봐도 깡패 패거리 였다. 게다가 숫자는 여섯!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지영이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그,그만해 준석아! 내가 학원을 그만둘게! 그러니 제발 그만해!" "흥 닥쳐요! 이젠 늦었어!" 메몰차게 대꾸하는 준석. 그의 눈은 사악하게 이글거렸다. "난 이 자식한테 개인적인 볼일이 있으니까! "......!!" 재기에게 얻어맞고 앙심을 품은 준석. 준석이 눈짓을 하자 금발을 리더로 여섯명이 천천히 재기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들은 궁지에 몰린 생쥐꼴인 재기를 비웃으며 주먹을 맞 부딪쳐 소리를 냈다. "재기야 도망가!" "시끄럽군 젠장!" - 철썩! "......!?" 외치는 지영의 따귀를 패거리중 한명이 갈겨 버렸고 지영이 모래밭 위에 털썩 쓰러졌다. 그것을 보는 순간 재기의 머리가 뒤집어 졌다. 저 녀석이 선생님을......!? 분노한 재기는 전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잊은 채 준석을 향해 달려 들었다. "이 나쁜자식!!!!" "......!?!?" - 퍼어억!! 한순간. 준석을 향해 달려들던 재기의 등을 패거리중 한명이 각목으로 가격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재기가 신음을 안고 바닥에 쓰러졌다. "재기야......!!" 지영이 울면서 재기의 이름을 외쳤다. 순간 재기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질 수 없어......!! 선생님을 지켜야 해......! 주위에 빙 둘러싼 6명의 남자를 사방에 두고 재기가 일어섰다. "근성이 있는 놈이군......" "얼마나 버티나 볼까!!!!" "......!!" 부웅! 바람을 가르며 재기를 향해 날아오는 각목! 순간 재기가 몸을 낮춰 그 각목을 피했다. "응!?" "크앗!!" -파칵!!!! 작열! 재기의 팔꿈치가 각목을 날린 패거리의 턱을 가격했고 녀석이 입에서 피를 흘리며 기우뚱 균형을 잃었다. 순간 금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자식 죽으려고!!" "밟어!!" 일제히 달려드는 5명!! 주먹이 일제히 재기를 향해 달려 들었고 재기는 수발의 주먹을 얼굴과 몸으로 받았다. 피할 공간도 없고 속수무책! 얼굴과 허리가 돌아가고 재기의 얼굴에서 피가 터지기 시작했다. "재기야!! 안돼......!! 필사적으로 외치는 지영! 지영은 급한 대로 준석에게 달려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외쳤다. "그만둬! 네 친구잖아!!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시끄러워요!" 확! 지영의 손을 뿌리치는 준석! 그가 비아냥거리며 대꾸했다. "주제넘게 나서니까 그렇지. 선생도 마찬가지야. 당신이 뭐라도 되는줄 알아? 당신 같은 사람이 제일 역겨워!" 그 와중에 퍽 소리와 함께 대장인 듯한 금발이 뒤쪽으로 기우뚱 움직였다. 피투성이가 된 재기가 회심의 일격을 날린 것. 하지만 그건 단 한방에 불과했다. 재기의 주먹은 패거리들의 화를 돋굴뿐 재기의 승리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화가 난 금발의 외침과 함께 다른 5명이 일제히 각목으로 재기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죽여버려!!" "개새끼!!" - 퍽퍽!! - 퍼억!! 지영은 더는 보지 못하고 준석의 몸을 흔들며 외쳤다. 이 악독한 녀석! 어떻게 친구를 저렇게 만들 수 있어! "김준석! 말려! 그만두라고 해!" "흥, 싫은걸......?" "제발......! 제발......!" 울면서 외치는 지영. 준석은 그런 지영을 빤히 바라보며 이내 히죽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무릎 꿇고 앉아서 제발 용서해 주세요. 라고 하시지." "......!" 뭐라고......? 지영은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 18살짜리 꼬마는 정말로 악독했다. 그의 표정 그의 몸짓하나 하나가 녀석이 얼마나 삐뚤어 졌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지영은 문득 미라의 말이 떠올랐다. << 언제 겁탈이라도 당할지 모르는데. >> << 가능성 없는 놈들은 포기해야 돼요. >>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구원해 주려고 했는데......! 그게! 그게 잘못 된거야!? 그 와중에도 재기는 6명의 깡패들에게 정신없이 얻어 맞고 있었다. 지영은 신속히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야,내가 왜 너희집 까지 가야돼. 나 이제 그만 갈래." 의연에게 이끌려 억지로 아파트 단지까지 들어오게 된 민형. 이대로는 지영씨와 합류하려던 원래의 계획이 어긋나잖아. 민형이 돌아가려고 하자 의연이 냉큼 쏘아 붙혔다. "숙녀를 만났으면 집 앞까지 데려다 주는 게 당연하지 돌아가긴!" "이미 다 왔잖아! 8단지가 너네 집이라며!" "8단지가 전부 우리집이냐? 입구까지 가줘야지 입구까지." 어휴,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쓸데없는데 똑똑해 가지고. 민형은 답답한 속을 참으며 하는 수 없이 의연을 따라 걸었다. 의연은 히죽 웃으며 민형의 옆을 따라 걸었다. - 퍽! - 퍼억! "......!?" 그때 익숙한 소리가 민형의 귀를 자극했다. 뭐지!? 민형이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 "왜 그래?" 전혀 듣지 못한 의연이 민형을 쳐다보았다. 민형은 사냥감을 찾은 포인터 처럼 감각을 곤두세우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의연이 놀라서 물었다. "갑자기 왜그래?" "저쪽에서 뭔가......" "저쪽? 저쪽은 놀이터야." "놀이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건 분명히 사람이 얻어맞는 소리다. 사람을 때리는 소리는 그 어떤 소리와도 구분된다. 민형이 가로등이 미치지 않는 어둑어둑한 놀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의연이 걱정되는 얼굴로 따라 붙었다. "야, 정민형! 어딜가......!" "쉿!" 순간 민형의 시신이 한곡에 멈췄고 의연도 멈췄다. 민형의 날카로운 시선은 놀이터의 한 가운데를 향하고 있었다. - 퍼억!! - 퍼벅!! 그 순간 의연도 놀랐다. 놀이터에서 깡패로 보이는 여러명이 한 사람을 무차별로 폭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치 고양이처럼 밤눈이 밝은 민형은 놀이터의 중앙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민형의 불길한 예감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지영씨......!!' 남자들 사이에 유난히 눈에 띄는 원피스 차림의 여성. 그녀가 모래밭에 무릎을 꿇고 체념한 듯 앉아 있었다. 그건 분명히 지영이었다. "자, 재기 녀석이 맞는게 불쌍하면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라고 해 보시죠. 선생이라 학생한텐 죽어도 고개 숙이지 못하겠다면 할 수 없지만......" "......!" 지영은 이미 무릎을 꿇은채 눈을 질끈 감았다.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재기. 이미 그 애는 싸울 능력이 없다. 재기가 이렇게 당한게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지영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미안해 재기야 선생님이 바보라서...... 그래서...... 이제 곧 구해줄게.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여는 지영. 그순간 준석이 약간 놀란 얼굴로 움찔했다. 하지만 준석의 얼굴에는 잠시후 이죽거리는 미소가 돌아왔다. 준석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 이 선생 진짜 싸이코네 이거!? 크하하!" "......!?" 갑자기 웃어 제끼는 준석! 지영이 놀라고 당혹해서 고개를 들었고 준석이 우습다는 듯이 소리쳤다. "자존심도 없구만! 그까짓 학생 하나 당하는게 뭐 어때서!" 갑자기 성큼성큼 쓰러져 있는 재기에게 걸어가는 준석. 그가 재기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이런 자식!" - 퍼억! "아......!!" 재기의 몸이 꿈틀 거렸고 지영이 눈을 크게 뜨고 신음했다. 그만해......! 잘못했다고 빌었는데 어째서......! "이런 자식 때문에 학생한테 빌어? 자존심도 없나 당신은? 이런자식!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이 꼴이지! 응!? 이 꼴!" 퍼억 퍼억! 마구 재기를 발로 걷어차는 준석! 지영이 울면서 외쳤다. "그만해!! 약속했잖아!!" "내 맘이지!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어 당신처럼 줏대없는 선생이라면 용서를 비는 것만으로는 너무 약해." 재기를 때리는 것을 멈추고 사악하게 지영을 내려다보는 준석.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신방에 입 맞추고 용서해 달라고 빌면 다시 생각해 보겠어." "그런......!!" 너무해! 너무 악독해! 어떻게 18살짜리가 저렇게 까지 할 수가......! 지영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미라씨의 말이 맞았어. 지금 세상엔 구제할 수 없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 지영은 절망적인 얼굴로 눈물을 삼켰다. "자. 어서." 태연하게 웃는 준석. 그리고 킥킥거리는 6명의 불량배들. 지영은 두 손을 모래밭에 묻고 몸을 지탱한테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어차피 이렇게 된거 자존심 따윈. 일어서서 준석에게 다가가려는 지영. 그때 준석이 그런 지영을 가로 막았다. "잠깐." "......?" 일어서는 것을 중지시키는 준석.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웃으며 한가지를 추가 시켰다. "거기서 여기까지 그대로 기어와. 그럼 인정하지." "......" 이제 황당하지도 않았다. 지영은 눈물을 삼키며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 개가 되주지...... 너희들...... 너희들 모두 이 세상에 쓰레기 들이니까. 지영은 그렇게 허물어져 가는 자기안에 '정의'를 느끼며 준석의 앞으로 기어가려고 했다. "그만둬요. 개도 아닌데." "......!?" 바로 그 순간 지영의 고개가 번쩍 들려졌다. 이 목소리는......? 이 목소리는......? "착한것도 정도가 있지...... 더 이상 하면 내가 용서하지 못해요." 익숙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단숨에 지영을 안심시키고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뿜어내게 만들었다. 준석과 패거리도 목소리를 듣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놀이터 저쪽에서...... 한 소년이 청년이 걸어 나왔다. "폭력도 필요할 때가 있지." 다른 한 손으로 손목을 만지며 걸어 나오는 소년. 위압적인 눈매. 익숙한 얼굴. << 민형씨......!! >> 그것은 오랜만에 극도로 화가 난 전국 최강. 정민형이었다. - 계속 - [소설] 고교 3년생의 사랑. #114 PART-114 "너희들 이리와." 양속에서 뿌드득 소리를 내며 민형이 턱을 위로 치켜올리고 거만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 민형의 모습을 본 지영은 왜 이곳에 민형이 있을 수 있느냐를 생각하기 전에 기뻐서 눈물이 흘렀다. 정말, 정말 민형씨는 나의 수호신이야. 유치할 수도 있겠지만, 지영은 지금 이 순간 민형이 나타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는 나타났다. 서러움의 눈물이 기쁨의 눈물로 바뀌었고 주위에 서 있던 준석과 그의 패거리들의 눈빛이 변했다. 준석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너 지금 뭐랬냐?" 피식- 준석의 입가에 조롱하듯 미소가 깃들고 다른 다섯명이 거들먹거리며 준석의 등뒤로 다가왔다. 민형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형용각색의 염색에다가 여러 군데 주렁주렁 달아놓은 피어스. 민형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들이었다. 민형이 손가락으로 파랗게 염색한 한놈을 가리켰다. "야,너. 그 피어스 때라." "이 새끼가...... 야,넌 어디서 튀어나온 새끼야?" - 퍽!!!! 바로 그 순간, 준석의 눈이 커졌고 다른 이들의 눈도 커졌다. 민형의 앞으로 거들먹거리며 다가가던 파란염색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스르르 앞으로 무너지는 파란염색의 귀걸이를 민형이 붙잡았고 쓰러지는 파란 염색의 귀에서 귀걸이가 뜯겨져 나왔다. 준석의...... 눈이 커졌다. - 털썩.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린 파란염색의 불량배. 민형이 들고 있던 피묻은 귀걸이를 땅에 떨어뜨렸다. 딸랑, 고요한 정적을 깨듯이 귀걸이가 땅에 떨어졌다. 그 소리와 함께 준석과 다른 패거리는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정지했다. "거기 있는 너희들......" 한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로 민형이 명령했다. "니들도 피어스 다 빼라." 그 위압감...... 준석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한방에......?" "뭔가 잘못된 거겠지......" 준석의 패거리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지영은 재기의 얼굴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두 손에 꼭 힘을 주었다. 이제 됐어, 민형씨가 왔으니 이제 됐어. 싸우는 것은 싫지만...... 저런 아이들에겐 힘이 필요해. 힘없는 정의는 무의미하다. 이성과 양심을 벗어난 폭력을 앞세우는 아이들에게 이성을 내세운 지도는 소용없다. 힘이 필요한 것이다. 민형씨 같은 강력한 힘이. "으......" 재기는 피로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가까스로 눈을 떴다. 무언가 따듯하고 부드러운 것 위에 자신의 얼굴이 올려져 있었다. "선생...... 님......" "재기야?" 유지영 선생님, 무사하셨군요. 상처입지 않은 지영의 모습을 억지로 뜬 눈으로 바라보며 재기가 심호흡을 했다. 지영이 웃는 얼굴로 재기를 안심시켰다. "이제 괜찮아.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 뭐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아직 준석이가 멀쩡히 서 있는데요. 재기는 입으로는 말하지 못했지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잖아요. 녀석들이...... 녀석들이 멀쩡하잖아요. 하지만 지영은 손수건으로 재기의 입가에 피를 닦아주며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걱정하지마. 이제 괜찮아." "......?" - 퍼어억!!!! "......!?!?" 그 소리와 함께 재기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엇인가 둔탁한 것이 부러지는 소리!? 재기가 가까스로 상반신을 일으키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아까 까지는 없던 한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내민 팔뚝을 가격한 각목이 큰 소리와 함께 부러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재기는 한순간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 뭐......? >> 뭐지 저게!? 그 순간 각목을 맞은 소년이 뿌드득- 주먹을 쥐더니 각목을 휘두른 불량배의 얼굴을 후려쳤다. 멀리서 보니 그것은 아주 한순간에 불과했다. 그렇다. 그것은...... 아주 한순간에 불과했다. "개새끼!!!!" - 퍼억!!!! "크학!!!!" 민형의 주먹에 가격 당한 각목을 든 패거리가 피를 뿌리며 허공으로 떠 올랐다. 놈은 각목으로 민형을 후려쳤지만 민형의 팔뚝에 방어 당해 오히려 각목이 부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 한방이 민형에게 불을 지폈고 민형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죽여 버리겠어!!" "너,너 우리가 누군줄이나 알아!!!!" "그런걸 내가 어떻게 알아 새꺄!!!!" - 퍼컥!! "크헉!?!?" 나머지 4명!! 저돌적으로 돌진한 민형의 발차기가 패거리중 한 놈의 복부를 가격했고 한방 맞을 때마다 패거리들의 입에서 거품이 뿜어져 나왔다. "주,죽여!!!!" 또 다른 녀석이 각목을 휘둘렀다. 제대로 한방만 맞으면......!! 각목이 민형의 머리를 향해 휘둘러졌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 뿌칵!! "......!?!?" "으!!" 또다시 힘없이 부러져 나가는 각목! 준석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뭐야?! 뭐야 저녀석!? 도대체 뭘 어떻게 하길래 각목이 솜방망이처럼!? "다했냐!!" - 퍼억!! 민형의 주먹 한방에 패거리들은 추풍낙엽. 아니, 길가에 휴지조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만 같았다. 도대체 저놈은 뭐야!? 도대체 뭐길래 엄선해 온 거리의 불량배를 저렇게 손쉽게! 게다가 혼자의 몸으로......! 준석의 이가 덜덜 떨렸다. - 콰악!! "크헉!!" 마지막 한 놈을 쓰러뜨린 후 놈의 배를 발로 밟는 민형. 쓰러진 녀석이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민형이 녀석의 코에 걸린 피어스를 손으로 붙잡았다. "이런건......" 어금니를 들어내는 민형. 쓰러진 불량배가 공포의 시선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떼라고 했잖아!" - 파악!! "아아악!!!!" 피와 함께 불량배가 코를 움켜잡고 나뒹굴었고 지영은 재기의 얼굴을 안은채 고개를 돌려 버렸다. 무서워...... 싸울때의 민형씨는 너무 무서워. 왜 저렇게 되 버리는 걸까. 보통 때는 그렇게 순수하고, 또 진지한 사람인데. 싸움을 할때의 민형은 평소에 지영이 알고 있는 민형과는 너무나 달랐다. 적에게 용서가 없고, 비정하고...... 또 너무나 강했다. 불과 5분이 지나지 않았는데 주위엔 다섯명의 패거리가 저마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채 신음하고 있었고 남은 것은 김준석 뿐이었다. 오른 주먹을 빙글 한바퀴 돌리며 민형이 준석에게 다가갔다. "으......!?" 준석이 비틀 뒤로 한발짝 물러섰다. 너,너무 강해......! 이 녀석은 뭔가 수준이 틀린 놈이야! 준석이 비틀 비틀 뒤로 물러나다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 콰당 "으......!!" 제길! 준석은 자신을 원망했다. 두렵고, 떨려서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을.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준석 자신은 결코 이 남자를 이길 수 없다는 확신. 그것이 준석에게 공포를 가져다 주고 있었던 것이다. "너......" 흠칫, 민형이 입을 열었고 준석이 떨었다. 떨지 않으려고 해도 떨리는 몸을 어쩔 수 없었다. 무섭다. 정말로...... 정말로 무섭다...... 준석은 처음으로 사람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넌 도대체...... 뭐야......?"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알 고 싶었다. 식은땀이 가득한 얼굴로 준석이 그렇게 묻자 민형이 대꾸했다. "피어스 떼." "......!?" 무슨 소리.......? 바로 그순간 지끈! 준석의 눈앞이 캄캄해 졌다. 민형의 발이, 준석의 복부를 사정없이 후려쳤던 것이다. 준석이 배를 움켜잡고 공중에 붕 떠올랐다. - 콰당탕! 온 세상이 하얗고 정신이 없었다. 이런 것인가. 쓰러진 저 녀석들도 모두 이 한방에 이런 기분을 느꼈던 것인가! 위액 같은것이 꾸물꾸물 입으로 스며 나오고 준석이 엄청난 고통을 참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죽을 것 같다...... 죽을 것 같아. 너무나 고통스럽다! "거기서......" 그때 민형이 준석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기어오면 용서해 주지." 사신같은 목소리. 준석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으......?' 위액이 모두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아찔한 고통.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준석은 비틀거리며 얻어맞은 복부를 움켜잡고 일어서려고 했다. "못 들었냐?" "......!!" 그때 준석에게 쏘아 부쳐지는 낮은 목소리. "기어오라고...... 했을텐데." 명령조의 한마디. 그리고 위압감. 준석은 난생처음 타인에게서 살기를 느꼈다. 이런 것이 공포인가. 태어나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진짜 공포. 타인인 누군가가 자신을 죽여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의 실감. 준석은...... 자기도 모르게 한손을 앞으로 내딛었다. 저기까지...... 기어가지 않으면 나는 죽는다. - 피식. 그순간 준석의 온몸에 긴장이 확 풀어지는 웃음소리. 진석이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고 곧 그는 엄청난 굴욕감과 자기 비애에 빠졌다. 정민형, 자신이 데려온 친구들을 모조리 때려눕힌 그 남자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준석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진짜 기어오려고? 한심한 놈......" "......!!!!" 한심한 놈......! 한심한 놈.....!? 준석의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제길! 제길......!! 저놈이...... 저놈이 날 가지고 놀았어! 준석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모멸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신 없이 내 달았다. 비록 자신이 먼저 건 시비였으나 가해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친구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민형이 혀를 찼다. "그참...... 이놈들은 다 어떻하라고......" 민형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재기를 무릎베개 해주고 있는 지영에게 걸어갔다. 지영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민형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다행이야......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재기 역시 지영의 무릎위에 누워서 멍한 얼굴로 민형을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뭐야 이 남자는...... 그리고 민형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게된 재기는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오늘 학원에 들어온 바로 그......!? 재기의 가슴이 뛰었다. "괜찮으세요 선생님. 일어나세요." 민형은 자연스럽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재기도 있고 해서 지영과 자신의 관계를 노출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민형은 그렇게 말하며 무릎베개하고 있는 재기를 은근히 노려보았다. 자식이 남의 여자 무릎 위에서 뭐 하는거야. 민형이 왠지 모를 무서운 시선을 재기는 사내자식이 빌빌거리지 말고 벌떡 일어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형이 싱긋 웃었다. "용감하던데 너." 민형이 한마디했고 재기는 아직도 멍한 상태에서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강한 사람...... 민형을 바라보는 재기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놀라움에서 동경으로 바뀌었다. 멋지다. 나도 좀 더 힘이 있었으면 유지영 선생님을 지킬 수가 있었을 텐데. 재기는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재기는 솔직하게 민형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고마워......" "됐어, 너도 대단한 놈이야." 민형이 주먹으로 재기의 볼을 슬쩍 건드렸다. 그때였다. 민형의 등뒤에서 은글슬쩍 나타난 한명의 소녀가 주위에 쓰러져 있는 깡패들을 슬금슬금 피해 다가오며 중얼거렸다. "야...... 정민형 너 정말 싸움 캡빵 잘한다 야. 이 많은 사람을 다......" 윽!? 그러고 보니 이 여자를 잊고 있었다. 신의연! 민형이 불길한 표정으로 뻣뻣이 서서 의연을 바라보았고 아니나 다를까, 지영을 알아본 의연이 미처 민형이 말리기도 전에 큰 소리로 인사했다. "어머! 언니 안녕하세요! 언니가 여긴 왠일이세요!?" "아...... 의연학생?" 지영이 왠지 멋쩍어서 민형을 한번 쳐다보았고 민형이 슬금슬금 고개를 흔들었다. 의연이 밝은 표정으로 이렇게 외쳤다. "이거 기막힌 우연이네! 하필이면 도와준 상대가 언니였네요~ 너무 운좋다. 에? 그러고 보니 만약에 민형이 없었으면 어쩔뻔 했어...... 우와, 큰일 날 뻔했네. 야,민형아. 너 누나인거 알아본거야?" "누...... 나......?" 예상대로...... 재기가 고개를 갸웃하며 지영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지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말 하지 못했다. - 계속 - 임달영 (cdggam@cdggam.com) Access : 1273 , Lines : 114 [소설] 고교 3년생의 사랑. #115 PART-115 비록 민형의 마무리이긴 했지만 청림학원 재기의 활약으로 지영을 향한 신입강사 크래쉬는 지영쪽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준석은 다음날부터 더 이상 학원에 나오지 않았고 지영의 수업은 아무런 문제없이 순조롭게 아주 잘 진행되어 갔다. 재기의 상처도 그리 심하지 않아 다음날부터 곧바로 학원에 나올 수 있었고 지영도 아무런 문제 없었다. 모든 사건이 너무나 별탈없이 잘 해결되었던 것이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나, 돌아갈래요." 휴게실에서 다 마신 커피캔을 우그러뜨리며 민형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렸고 지영이 쓰게 웃었다. 이 사건은 단 한명의 피해자를 남기고 끝났는데 그 피해자란 다름 아닌 민형. 지영을 위해서 학원에 등록했다가 졸지에 학원을 계속 다녀야 하는 상황이 된 민형이었다. 좀이 쑤셔서 짜증을 내는 민형에게 지영이 속삭이듯 나무랐다. 이곳엔 아직 학생들의 눈이 있어 아무리 휴게실이라 해도 두 사람의 평소의 말버릇이 나올까봐 걱정이 되었다. 지영이 소곤거리며 말했다. "좀, 참아요. 그리고 어차피 학원비도 다 냈는데...... 한 달은 다녀보고 그만 둬야죠. 돈 아깝잖아요." "싫어요 난.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것 만으로도 좀이 쑤신단 말이예요." 사실 오늘 저녁에도 학원에 오지 않으려는 민형을 지영이 억지로 끌고 온 것이었다. 일단 학원에 한번 가보면 생각이 달라질거라며 억지 권유로 붙잡아 오긴 했지만 역시 민형에게 이런 대입준비반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50분 수업이 끝나자 마자 돌아가겠다고 난리를 치는 민형은 지영이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이었다. "나 무섭단 말이예요. 아직 그 애들이 완전히 미련을 끊었다고 할 수 없고......" "그놈들이요?" 준석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리라. 민형의 눈이 반짝 빛났고 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준석이들이요...... 학원에 올 때도 갈 때도 사실 겁이 나는게 사실이예요. 한달 간이라도 좋으니까 민형씨랑 함께 다니면 좋을 텐데...... 오고 가면서 데이트 하는 기분도 나잖아요." "그러니까...... 보디가드 같은 거란 말이죠." 으음...... 민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썹을 실룩거렸다. 지영 씨가 무섭다고 하면야, 당연히 함께 다녀 주겠지만...... 하지만 수업시간은 너무 지루하다. 게다가 민형은 학교 수업에 과민한 콤플렉스 같은 것이 있었다. 예를 들어 머리가 아프다던가 눈이 가렵다던가 앉아 있는동안 항상 정신이 불안하다던가...... 공부 못하는 사람들이 꼭 한번씩 겪는 콤플렉스의 일종인 것이다. 학교에서 당하는 것도 모자라서 일부러 돈내고 학원에까지 나와 당해야 한다는게 민형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공부하는 것도 나랑 데이트한다고 생각하고 한달만...... 응? 안돼요? 내 수업 까다롭지 안잖아요......네? 네?" 말끝마다 데이트라는 말을 강조하는 지영. 민형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한참을 고민했다. 지영씨가 이렇게 귀엽게 호소하면 거절할 방법은 없지만 말이야...... 하지만 공부라는 건 너무 싫어. 너무 싫다고. 민형이 영 딱 부러지게 대답을 못하고 있자 지영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안그럼 나 바람필거야." "뭐......!?" 기가 막혀, 민형이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큰소리로 외쳤고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놀라서 민형과 지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민형이 어색하게 하하 웃었고 지영도 웃었다. 잠시후 민형이 진지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물론 아주 작게. "바, 바람이라니...... 농담이죠?" "왜요? 그거 모르죠? 학생들은 연상의 여자를 좋아해요." "쳇, 거짓말......" "흐응...... 거짓말일까?"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지영. 민형은 물론 그녀의 말이 거짓말 일 것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었지만 왠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아니 솔직히 괜시리 우월감이 들었다. 지영씨는 내거다. 내 여자다. 민형 역시 학생의 신분으로 지영을 선생에서 애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지영은 예쁘고 상냥하고, 또 스타일도 좋으니까 이곳의 남학생들이 한번쯤은 흑심을 품을 만도 하겠지. 하지만 유지영 선생님 예전에 일어를 가리킬 때하고는 태도가 많이 틀린데? 마치 정말 어른인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잖아. 어차피 이제 서로 알 거 다아는 사이니까 상관은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피식- 웃는 민형에게 지영이 다시 한번 애원하듯 부탁했다. "그러니까 한달만, 네? 내가 바람 피나 안 피나 감시도 할 겸."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말아요. 차라리 내가 바람을 피우지." "그럼 승낙하는 거죠? 헤헤?" "정말...... 한달 만 이예요." "야호, 민형씨 고마워요!" 지영이 자기도 모르게 마지막 말에 힘을 주었고 아이들이 또다시 민형들쪽을 쳐다보았다. 미, 민형씨라는 말을 들은 건 아니겠지? 민형과 지영이 쉬잇- 서로의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고개를 숙였고 아이들이 수상한 눈으로 잠시 민형과 지영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고개들을 돌렸다. 후후후, 이거 정말 스릴 넘치는데 그래...... 왠지 이런 학생들의 공간에서 일하는 강사 선생님이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이라고 생각하니 민형은 괜 시리 기분이 좋았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기분을 좀 더 만끽하기 위해서라도 괜찮지 않을까. 학원이라는 거 말이야. 민형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지영을 바라보았다. 방긋 웃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오늘부터 함께 공부하게 될 신의연 학생이예요. 여러분 잘 대해 주세요." 뜨아아아아아아......!?!? 어쩐지 모든일이 너무나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니! 민형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는 의연의 모습을 보며 쿵쾅쿵쾅 떨리는 마음을 가라 앉히지 못했다. 의연이다! 신의연이다! 반장이다! 자신의 최고의 숙적! 결국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안녕하세요~ 중영 실업고의 신의연 이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밝고 명랑한 목소리. 아이들은 모두 의연의 활기차고 깨끗한 인상을 마음에 들어 하는 듯 했지만 민형은 달랐다. 저 눈치칼이 옆에 있으면 아무래도 모든 것이 부자연 스러웠다. 가뜩이나 지영씨와의 관계 때문에 껄끄러운데...... 민형은 괜 시리 의연의 출현이 부담스러웠다. 지영이 교과서를 펼치며 쓰게 웃었다. "하프 타임부터 굳이 듣겠다니 열성이구나. 내일부터 나와도 되는데......" "돈 아깝잖아요. 40분이라도 더 들어야지.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며 지영을 지긋이 바라보는 의연. "쪽집게 강사님." "......" 지영이 모른채 하며 교과서를 펼쳤고 의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척척 걸어가 민형의 옆에 섰다. 그녀가 준비 해 놓은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너 정민형 아니니? 너 여기 다녀?" "쇼하지 말고 빨리 앉아......" 민형이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고 의연이 히히 웃으며 민형의 옆에 냉큼 앉았다. 지영이 시큰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가 교과서를 펼치고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자,정석 186 페이지. 나눠 준 프린트를 펼치세요." 애써 태연하게 수업에 들어갔지만 왠지 신경 쓰이는 아이 의연. 지영은 이럴때의 자신은 영락없이 유치한 여자 그 자체 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잡념을 떨쳐 버리려고 애썼다. 수업이 끝나고 재기는 가방을 챙기는 민형에게 다가갔다. 어제 경황중이라 제대로 하지 못한 인사를 할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재기를 본 민형이 가방을 챙기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 "안녕." "야, 안녕." 재기가 쑥스러운 얼굴로 안녕 인사를 했고 민형이 훗- 웃으며 주먹으로 재기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상처는 좀 어때." "괜찮아...... 그보다 어제는 고마웠어." "나야말로, 네가 선생님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나도 늦었을거야." "......" 대수롭지 않게 선생님이라고 지영을 호칭한 민형. 그러자 재기가 눈을 깜박거리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선생님...... 이라고 하니 학원에선?" "뭐?" "아니, 너희 누나...... 라고 들었는데." "아? 아아......! 아아...... 그래, 그게 학원에선 선생님이라고 하지 하하......" 크으, 정말 헤깔려 죽겠네. 그러고 보니 재기는 민형과 지영의 관계를 남매 사이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옆에서 보고 있던 의연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쏙- 끼어들었다. "넌 어제 대 핀치의 그 애구나? 괜찮니?" "응......" 재기가 의연의 얼굴을 알아보고 멋쩍게 웃었다. 의연이 민형의 팔짱을 끼며 싱글싱글 웃었다. "얘 싸움 캡빵 잘하지? 그렇다고 꽁깍지 낄건 없어 의외로 단순하거든." "얌마!" 민형이 인상을 찌푸렸고 의연이 헤헤 웃으며 뒤로 쏙 빠졌다. 재기는 그런 의연과 민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서먹하게 웃으며 물었다. "두 사람...... 애인사이야?" "뭐!?" "어머, 어떻게 알았어?" 야! 신의연! 의연이 천연덕스럽게 놀라는 표정으로 재기에게 대꾸했고 민형이 쓰게 웃으며 외쳤다. 민형이 얼른 양손을 흔들며 변명했다. "야! 아냐 아냐! 얘랑은 그냥 같은 반! 크래스 메이트야! 나 애인 없어!" 쫑긋, 문득 막 교실을 나서려던 지영이 멈칫 섰다가 작게 심호흡 하며 바깥으로 나갔다. 민형도 그런 지영의 몸짓을 눈치챘기 때문에 의연에게 따가운 눈총을 주었다. 진짜...... 의연이 요것 때문에 난처해 질 일 많겠군. 민형은 하하 웃고 있는 의연을 바라보며 요걸 한 대 때려줄까 무수히 고민했다. 그렇다고 여자애를 정말로 때릴 수 도 없고. 민형이 속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의연의 말이 농담이라는 것을 눈치챈 재기가 작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둘이 친하단 거지. 알겠어...... 그보다 정민형...... 이라고 했지?" "그런데......" "내가...... 음료수라도 좀 사고 싶은데......" "......" 언뜻 봐도 경우 있어 보이는 재기가 진지하게 음료수를 사겠다고 하니 민형은 잠깐 의연을 쳐다보았다. 의연이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민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민형이 다시 재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좋아. 긴거야?" "아,아니...... 용건은 간단하지만......" 왠지 쭈삣쭈삣 말을 잘 잇지 못하는 재기. 자식, 뭐 보나마나 어제의 감사를 하려는 거겠지. 음료수나 한잔 얻어 마시고 악수 한번 해 주면 되는 건데 뭐. "괜찮다면......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어서." 뭐야, 이 녀석 표정을 보니 되게 진지한데 그래? 결국 민형은 지영에게 따로 이야기를 하고 재기와 함께 학원 밖으로 나왔다. 좋지 뭐...... 왠지 첫날부터 같이 돌아가면 아이들에게 눈치도 있고 하니...... 민형은 지영과 함께 돌아가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재기를 따라 나섰다. 재기가 민형을 데리고 간 곳은 학원 근처에 있는 페스트 푸드점. 재기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페스트 푸드 괜찮아?' 라고 몇 번이나 물어보는 정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참, 성실한 녀석이네. 라고 생각하면서 민형은 자신의 앞에 앉아 콜라에 꽂힌 스트로를 만지작거리는 재기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혹시 나,네가 좋아! 라던가 하는 황당한 소리하려는 건 아니겠지? 관둬 제발. 이게 아무리 하이틴이라도 그렇지. "저기......" "응." "어제 정말 고마웠어......" 또다시 고맙다고 말을 하는 재기. 민형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 한마디를 꺼내고 다시 침묵...... 그렇게 한 3분쯤 지났을까, 지루해진 민형이 먼저 말을 꺼내려는 순간 재기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런 박력. 뭐 결심이라도 했나? "나......!" 왠지 필사적인 표정의 재기 민형은 오히려 궁금해 눈을 말똥히 뜨고 쪼로록 스트로로 콜라를 빨며 재기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재기의 입에서 예상도 못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나, 너희 누나가 좋아. 넌....... 넌 어떻게 생각하니!?" 뭐야아아!?!? 충격적인 재기의 한마디에 민형은 입에 물고 있던 스트로를 툭- 떨어뜨리고 휘둥그래진 눈을 떴다. 지,지,지 지금 뭐라고 그랬냐 너? 누,누굴 좋아한다고!? "동생으로서...... 동생으로서 먼저 의견을 듣고 싶어...... 나 선생님한테는 고백할 용기가 없어서......" 얼굴이 시뻘개져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재기. 하하...... 하하하...... 민형도 왠지 재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허탈한 웃음을 내지을 뿐이었다. - 계속 - 임달영 (cdggam@cdggam.com) Access : 1083 , Lines : 101 [소설] 고교 3년생의 사랑. #116 PART-116 << 나, 너희 누나를 좋아해...... 선생님을......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민형을 향한 재기의 충격적인 고백. 물론 그것은 민형에 대한 사랑 고백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지영에게 직접 마음을 전달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민형을 지영의 동생으로서, 재기가 좋아하는 여성의 동생으로서 그 의견을 물어본 것 뿐이었다. 만약 민형이 정말로 지영의 동생이었다면 어쩌면 이 순진하고 착실한 고등학생의 폭탄선언에 풋- 하고 웃음을 내던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솟아 나오는 웃음을 참거나 심각한 표정으로 이 연하의 꼬마와 누나의 진지한 관계에 대해서 고찰하거나 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민형이 지영의 '동생'이라면 말이다. '제기랄......! 제길! 제길! 제길! 제길!' 민형은 버스 안에 서서 손잡이를 잡은 채 연신 속으로 씩씩거렸다. 재기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민형에게 그런 고백을 했다는 것은 뭔가 그런 재기의 마음이 지영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 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여자의 동생에게 의견을 묻고 싶었다던가. 뭐,여자보다는 남자에게...... 통하는 점이랄까, 이해되는 점이랄까, 그런것들이 더 많은 법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재기의 그런 생각은 완전히 번지수를 잘못 잡은 꼴이 되고 말았다. '그자식 웃기네. 그래도 눈은 높아 가지고 지영씨가 좋다고? 어휴......' 생각 만 해도 답답하고 미간이 찌푸려졌다. 물론 민형은 재기에게 딱 부러진 대답을 해주지 못하고 그저 '그,글세 그런 문제는 난 잘 몰라서......' 라는 어리 버리한 대답을 남기고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속이 비뚤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도대체 어떻게 처신을 했기에 가르치는 학생에게 저런 말을 하게 만든 거야. 민형은 재기의 순진한 얼굴을 떠올리며 답답한 가슴을 풀어놓지 못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 하긴 그러고 보니 자신도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상황 아닌가. 손이 조금 빨랐다면 빨랐을 뿐...... 자신도 재기와 같은 나이에 지영과 연애를 하고 있었다. 문득 민형은 지영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찰해 보았다. 지영씨는 매우 예쁘고 능력있는 여자인데 비해 자신이 인기가 있을 스타일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남자들은 그녀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하지만 지영은 일단 접근해오는 남자들에게는 대부분 잘 해준다. 민형도 처음 지영을 만났을 때 그녀에 쓸데 없는 친절함에 짜증을 냈을 정도니까 말이다. 재기 같이 순진빵하고 순수한 녀석은 지영씨의 그런 호의를 전부 좋게만 받아들였을게 뻔한 일이다. 뭔가 묘하게 남자에게 길을 열어준 것 같은 그런 태도...... 그게 지영의 장점이면서 가장 큰 단점이었다. 즉, 남자가 쉽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24살쯤 됐으면 좀 어른스러운 면이 있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다가 민형은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지영씨가 그다지 어른스럽지 않은 점은 또 뭐냐. 번듯이 직장도 있는데다 책임감 강하고 사회 경험도 풍부하다. 민형은 머릿속에서 지영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여자를 떠올려 보았다. 몇 명의 여자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최종적으로 한 여성이 떠올랐다. '지혜씨......' 지영의 가장 친한 친구. 그래, 여자라면 뭔가 그런 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른스러운 것을 떠나 뭔가 다른 남자가 함부로 접근 할 수 없는 그런 어려운 점. 그런 것을 뭐라고 해야하나...... 인텔리 하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민형이 생각할 때 지영은 그런 점이 부족했다.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나......" 솔직히 지영씨는 뭐하나 부족할 게 없는 여자다. 민형은 마음속으로 툴툴대는 자신을 책망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결국 결론은 지영씨는 너무 괜찮은 여자라 남자가 꼬이기 쉬운 것이다. 민형은 그게 불안했던 것이고 그런 불안 요인이 현실로 다가오니 짜증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흐유......" 별로 보잘 것 없는 자신. 민형은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 서서 흔들리는 자신을 느끼며 땅이 꺼지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 일찍 들어왔네요?" 민형보다 한 반시간 정도 먼저 들어와 있던 지영이 민형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는 막 상에 국과 반찬을 딸랑 올려놓고 식사를 하려는 중이었다. 민형이 힘없이 가방을 마루에 올려놓고 신발을 벗었다. 지영이 민형의 가방을 받아서 방에 가져다 놓고 웃으며 말했다. "기다려요. 얼른 먹고 치울께요. "나도 밥줘요......" 민형이 왠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지영이 왠지 이상한 낌새를 느껴 민형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민형이 다시 말했다. "왜요? 밥 달라니까." "아까 재기랑......" "햄버거 먹었는데 양이 안차서요......" 사실은 햄버거는 시키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나와서 배고프다구요. 지영이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주방에 들어가자 곧 가스 레인지에 불이 들어오고 기름이 프라이팬에 둘러지는 소리가 났다. 민형이 마루에 올라서서 주방 쪽으로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저기, 뭘 해요?" "반찬 좀 만들려고요." "그냥, 밥이나 한 그릇 더 푸지." "에이, 혼자 먹는 것도 아니고 민형씨 공부하느라고 힘들었는데 저녁이라도 잘 먹어야죠. 불고기 남은 거 양념에 재워 놓은 게 좀 남았어요." "......" 붉게 양념된 돼지고기를 프라이팬 위에 올려놓으며 지영이 말했고 민형은 흐뭇한 표정 반, 씁쓸한 표정 반으로 요리를 하는 지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 씀씀이 하나 말버릇 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는 여자다. 만약에 나같은 놈한테 반하지 않았으면 훨씬 더 괜찮은 남자한테 시집갈 수 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문득 민형의 가슴이 쑤셨다. 제길, 나도 그렇게 못난 놈은 아니야! 아니지? 그렇지? 하지만 그렇게 반증하다 보니 그리 잘난 곳도 없는 게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만화가가 되겠다는 놈이 쌈질이나 잘하지 그림을 못 그리니 말이 되는가...... "뭘 그리 멍하니 서 있어요? 자, 앉아요." 먹음직스럽게 익은 고기를 접시에 담아서 가져오며 지영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민형을 빤히 바라보았고 민형이 제 정신을 차리고 얼른 상 앞에 앉았다. 지영이 밥통에서 뜨거운 밥을 퍼서 민형에게 건네며 웃었다. "맛있게 먹어요 민형씨." "선생님도......" "......?" 문득 밥공기를 받으며 대답하는 민형을 지영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빤히 바라보았다. 민형이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다가 지영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왜요......?" "민형씨 이상해요. 요즘엔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다가......" "아, 실수했다. 학원에서 습관이 돼서......" "그래요......" 민형의 말에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지영은 영 무언가 탐탁지 않았다. 확실히 무언가 이상해...... 민형씨는 언제나 힘이 넘치고 의기양양한 남자다. 실망하는 일이 있거나 해도 풀이 죽지는 않는다. 오늘의 민형씨는 확실히 무언가 풀이 죽어 있었다. 게다가 숟가락으로 퍽퍽 밥을 퍼먹던 민형씨가 오늘은 젓가락으로 깨작깨작 밥을 입에 넣고 있는 것이다. 지영은 젓가락을 입에 문채 가만히 민형을 바라보았다. "......" "......" 몇분동안 두 사람 사이에서 소리 없는 식사가 진행되었다. 민형은 별 이야기 없이 반찬을 집어 밥위에 올려놓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지영도 고기엔 별로 손을 안대고 김치를 밥위에 올려놓고 깨작깨작 식사를 계속했다. 한순간 민형이 젓가락을 딱 멈추었다. 지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 이번에도 선생님. 지영이 네? 하는 표정으로 눈을 밝게 떴고 민형이 왠지 모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다. "왜 나랑 사귀는 거죠?" "네......!?" 진지한, 너무도 진지한 표정. 하지만 너무나 황당한 질문. 지영이 잘 알아 듣지 못하고 한쪽눈썹을 찡그리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 했어요?" "왜 나랑 사귀는 거냐구요. 전 선생님이 보기엔 아직 어린애에다가 장래성도 없고, 또 집안이 잘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민형. 그래, 어쩌면 아주 오래 전부터 나 자신은 이런 의문을 품어오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에 비해 선생님은 어른이고...... 미인인데다 스타일도 좋고...... 학벌도 좋은데다 성격도 좋잖아요...... 왜...... 왜 나 같은 녀석이랑......" 얘기하다 보니까 점점 자기 비애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하지만 민형은 확실히 묻고 싶었다. 지영이 왜 자신과 사귀고 있는지를. 민형이 그렇게 이야기 하는 동안 지영의 얼굴은 점점 무겁게 굳어갔고 민형이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나랑 사귀는 이유가 뭐죠?" "민형씨가 좋기 때문이예요." "......!?" 한순간 민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민형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지영. 게다가 그녀의 얼굴이 굉장히 냉정하고 차분한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민형이 바라고 있던 그런 어른 여성의 얼굴이었다. 민형이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멍하니 지영을 바라보았고 지영이 입을 열었다. "다른 누군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민형이라는 남자를 좋아하니까. 그것은 나이와 신분, 모든 걸 떠나서 이루어지는 감정이예요. 다른 남자면 안돼요. 민형씨 당신 뿐이니까......" 당신 뿐이니까. 당신 뿐...... 그 말이 민형의 가슴을 흔들었고 민형이 알고 싶었던 불안한 의문에 해답을 주었다. 당신뿐...... 그 말이...... 민형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민형이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위재기가..... 선생님이 좋데요." "......!?" 그말에 지영의 눈이 커졌고 민형이 고개를 들어 똑바로 지영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다 말해 버리는 거야. 솔직히 민형은 불안했다. 혹시 지영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에게 연정이나 모성애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시작된 사랑을 거절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질질 끌 듯이 이어가는 것은 아닐까, 자신과의 관계도 그런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민형이 지영을 가만히 바라보았고 지영도 민형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몇 초간 정지하듯 서로의 정면을 꽤뚤었다. "정말......" 그 긴장을 깬 것은 지영이었다. 그녀가 한손을 볼에 가져간 채 난처하다는 듯이 쓴웃음 지었던 것이다. "요즘 애들은 너무 조숙해서 탈이라니까...... 내 친절이 너무 과했나 봐요 민형씨. 앞으로 좀 조절해야겠네......" "......!?" 요즘 애들? 지금 애들이라고 말했어요? 민형이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지영을 향해 외쳤다. 애들이라니, 재기는 나랑 동갑이라구요 선생님. 그럼 저도 애들이란 말인가요!? 선생님이 생각 할 땐....... "그럼 저도 애들이에요!?" "......?"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민형. 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형을 빤히 바라보았고 민형이 답답한 마음에 다그쳐 물었다. "그럼 저도......! 저도 애들인가요!? 재기랑 저는 동갑인데...... 그럼 저도 애들이라고 생각해요 선생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민형씨?" 한순간 민형의 생각들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너무나 의아한 표정의 지영의 한마디. "당신은 내 남자잖아요." 에? 민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이 애들이라니...... 그럼 제가 애들이랑 사귀고 있단 말이예요? 그러고 보니 한번도 생각 못했어요...... 민형씨가 그렇게 어리다는걸...... 세상에...... 민형씨도 고교생이죠." 뭐야....... 뭐야 이거...... 지영이 한 손을 볼에 가져간 채 재미있다는 듯이 킥킥 웃었고 민형은 뭔가 기운이 빠져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내가 자기보다 어리다는 걸 잊고 있었다는 말투잖아. 그때 그런 민형의 옆으로 살짝 다가온 지영이 민형의 팔짱을 끼며 속삭였다. "난 당신 거예요...... 알잖아요?" 살짝 웃는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민형은 자기도 모르게 팔을 뻗어 지영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래, 난 지영씨의 남자. 지영씨가 의지하는 단 한명의 남자다. 바보 같이 그런 것도 모르고 혼자 고민하다니...... 지영씨의 마음속에서 민형의 위치는 재기와 같은 어린아이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 그것이 지영이 생각하는 정민형이라는 남자라는 것. 그것을 느낀 민형의 마음은 거짓말처럼 편안해졌다. '내가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을 했어......' 그렇게 자책하면서도 왠지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참을 수 없는 민형이었다. - 계속 - 임달영 (cdggam@cdggam.com) Access : 1042 , Lines : 250 [소설] 고교 3년생의 사랑. #117 PART-117 다음날 민형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원에 나갈 수 있었다. 지영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실히 짐작했다고나 할까, 어찌 보면 자기의 발언을 듣고 갑작스럽게 생긴 노파심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고 민형의 마음도 그것과 같았다. 지영의 마음을 한번 확인하고 나니 재기의 고백 같은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재기가 귀엽게 느껴졌다. 자식, 뭐 한창때의 나이에 그럴 때가 있지. 민형은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 생각 못한다고 실실 웃으며 학원으로 올라갔다. "야, 정민형~" 웃, 이 목소리는!? 민형은 흠칫하며 자리에 멈춰서 휴게실에 놓여져 있는 자판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또랑또랑하면서도 듣는 사람에게 전혀 불쾌함을 주지 않는 익숙한 화술의 음성. 하지만 민형은 이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무언가 불안한 마음에 휩싸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바로 반장! 신의연의 목소리였다. "하이, 신입." "......" 우짠 일이래? 의연이 휴게실 앞 자판기에서 상희와 미지까지 끼고 같이 탄산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그 녀석 참 붙임성도 좋군. 얌전한 미지와 조금은 발랄한 상희는 이 학원의 단짝인 것 같았는데 어느새 의연도 그 안에 합류해 있었던 것이다. 의연의 부름에 민형이 미적미적 자판기 쪽으로 걸어갔다. 쳇, 뭔가 불길한데...... "정민형, 너 선생님 동생이라며!?" 그럼 그렇지! 아니나 다를까 눈을 동그랗게 뜬 상희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물어왔다. 의연 이 계집애 벌써 그걸 다 불었구나! 어휴, 이제 삽시간에 학원안에 소문이 다 퍼지겠군. 민형이 쭈삣쭈삣한 표정으로 으,응...... 말을 얼버무렸고 상희가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런데 돈 주고 학원에 왜 나오니? 돈 안 아까워?" "나는 알지." 알긴 뭘 알아!? 팔짱을 끼고 지긋이 대답하는 의연에게 불안해진 민형이 휘릭 고개를 돌렸고 의연이 손가락을 하나 세우고 입을 열었다. "누나가 학생들에게 괴롭힘 당한다니까 보러 온 게 뻔해. 얘가 한 싸움 하거든." "헤에...... 정말로? 정말로 누나 때문에?" 상희가 대단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고 민형은 어이가 없어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신의연...... 아무리 네 별명이 눈치칼 이라고는 해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맞추지? 민형은 한순간이나마 이 의연이라는 소녀의 옆에 있으면 이유도 없이 불안해 지는 자신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 이 눈치. 이 애의 이 눈치가 불안한 것이다. 언제 유지영 선생님과 민형의 사이를 알아 버릴 것 같은 눈치. 그게 불안했던 것이다. 상희가 사이다를 홀짝 마시며 귀여운 눈으로 민형을 빤히 보았다. "진짜야?" "응? 으응...... 그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거짓말을 하면 뭘 하겠는고. 민형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고 미지가 웃었다. "너 정말 죽인다. 요즘에도 자기 누나 일에 발벗고 나서는 남동생이 있네." "그러게 말이야. 남이 보면 애인인줄 오해 하겠다니까. 맨날 같이 놀러 다니고 말이야." 으윽! 또다시 철렁한 한마디. 하지만 아무것도 눈치채진 못한 미지가 깔깔 웃었다. "설마~ 혹시 시스터 콤플렉스?" "전혀 어울리진 않는데 후후." 잘도 지껄이는 군, 하여튼 계집애들 틈에 끼어 있으면 건질게 없다니까. 뭐라고 대꾸도 별로 하지 못했는데 자신의 진심의 반 이상을 드러내 버리게 된 결과를 초래한 민형. 이것도 다 저 신의연이의 말발 때문이다. 그때 사이다를 마시던 상희가 민형을 빤히 바라보며 한마디했다. "근데 너희 누나, 아니 선생님 애인 있니?" "뭐?" 갑자기 그건 왜 물어. 그것도 남자도 아닌 미지가. 민형이 한쪽눈썹을 찌푸렸고 미지가 말을 이었다. "애인 있냐고 애인. 사귀는 사람." "그건 왜?" 왠지 발끈해져서 민형이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고 상희가 킥- 웃으며 의연을 한번 흘끔 본 후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의 눈으로 민형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너 그거 알아? 위재기 있지. 걔가 너희 누나 좋아한다?" "......" 그게 뭐. 나도 아는 사실인데. 이미 민형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 없는 미지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별로 안 놀라네? 아니면 이런 소리 자주 듣나봐? 하긴 선생님은 인기 있을 타입이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추론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결론을 내는구만. 민형은 왠지 이 시시한 화제에 끼여드는 것이 싫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대충 얼버무리고 가 버려야겠군. 그렇게 마음먹고 있는 민형 앞에서 미지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재기도 대단해. 그 순정은 알아줄 만 하지만 나이가 몇 살 차인데? 생각은 있는 건가?" "고만할 땐 다 연상의 여자 좋아하잖아." "스타일이 좋으니까. 교복녀 들보다 눈에 콩깍지 쓰이는게 당연하겠지. 그래도 우리도 몇 년만 지나면 똑같아 진다구. 그때 되면 선생님은 아줌만데? 그럼 또 나이 어린 여자 찾는다니까 남자들은." "어머~ 싫다 정말." 듣자듣자 하니까 조금은 불이 받는군 그래. 민형이 쭈삣해서 잠자코 참고 있었고 상희와 의연의 이야기가 계속 되었다. "그래도 재기는 안됐어. 선생님이 학생을 상대나 해주겠어? 게다가 퀸카잖아. 퀸카. 올려다 볼만한 나무를 쳐다 봐야지." "아아, 순진한 학생하나만 마음 고생하는 거지 뭐." "남자애들은 생각보다 단순하니까 킥킥." "뭐가 단순해!" "......!?" 한순간 참다못해 한마디 언성을 높인 민형. 의연과 미지가 놀란 얼굴로 민형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민형이 진지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러는 너희들은 그렇게 어른이냐? 너희가 선생님 속을 어떻게 알아? 재기가 뭐가 단순해?! 뭐가 아줌마고 뭐가 퀸카야!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것들이......!" 그래, 그러는 너희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기나 해? 민형이 욹그락 붉그락 해서 이렇게 말하자 상희가 무안해 했고 의연이 쓴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나서 대답했다. "야야, 정민형. 우린 너희 누나 욕한 게 아니야. 그냥 그 재기라는 애가 걱정 되서 그러지." "신경꺼. 혹시 알아? 남녀관계는 나이차가 아니야! 서로 통하는게 있는가 하는게 중요한거야!" 이렇게 쏘아 붙인 후 민형을 휙- 의연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왠지 부아가 치밀어서 그냥 강의실로 들어가려던 민형은 우뚝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멍하니 서 있는 상희와 의연, 미지가 보였다. 민형이 비아냥거리듯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가슴도 쪼그만 것들이." 재기는 오늘도 유지영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며 제대로 공부가 되지 않았다. 어제 민형에게 고백한 이야기도 있고 또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커져가는 선생님에 대한 마음이 재기를 괴롭혔다. 민형은 어제 한 얘기를 누나에게 전해 주었을까.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 적으로라도...... 선생님은 그 얘기를 듣고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아니야, 아직 민형이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럼 곤란한데...... 뭐라도 좋으니까 내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한데...... 재기는 이런저런 고민을 하느라고 머릿속이 꽉 들어차 공부내용은 도무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위재기." "네!?" 한순간 차분하면서도 깔끔한 목소리가 재기의 이름을 불렀고 재기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수업이 끝나 아이들은 전부 가방을 챙기고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재기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멍하니 고개를 들고 있자 재기의 이름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 유지영 선생이 차분히 웃으며 재기에게 한마디 했다. "하루종일 무슨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아니요 저......" 선생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수 가 없다...... 재기는 쩔쩔매며 고개를 숙인 채 들 줄 몰랐다. 그때 유지영 선생의 어찌보면 부드러운 한마디가 재기의 정신을 번쩍 들게했다. "잠시 할말이 있으니까 상담실로 와줄래?" 그 한마디와 함께 재기는 온몸이 달아올랐다. "야, 정말 몰랐다. 재기가 민형에게 그런 고백을 했을 줄이야." 이곳은 상담실 입구 근처. 민형을 포함하여 의연, 미지와 상희 까지 상담실 문 앞에서 숨을 죽이고 지영과 재기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이미 이곳에 소녀들은 민형을 통해 어제 재기가 민형에게 선생님의 대한 마음을 밝혔다는 것을, 그리고 민형이 그 생각을 선생님에게 전달해 주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그래서 민형이 아까 화냈구나." "좋은 남자네. 재기의 마음을 생각해 준거잖아." 의연과 상희가 의외라는 듯 민형을 쳐다보았고 민형은 그녀들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전혀 재기의 마음을 생각할 생각은 없었다고. 단지 내가 입장이 같으니까 발끈했을 뿐이지. 그보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니들이 소곤거리니까 들리질 안잖아!! 민형은 속으로 이렇게 답답한 속을 추스르며 최대한 귀를 귀울였다. 다른 소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민형에게 얘기를 들었단다 재기야." 문득 들려오는 지영의 목소리. 민형이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들었단다. 들었단다. 확실히 어른스러운 말투...... 지영씨는 나말고 다른 고교생들에게는 저런 식으로 이야기 하는구나. 민형은 새삼스럽게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지영과 재기의 대화가 계속되었다. "날...... 좋다고 했다며." "......" 어찌보면 굉장히 낮 부끄러운 대화내용. 재기는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물론 지영 역시 이런 상황에 익숙한 것은 아니다. 지영이 화제를 이었다. "혹시, 요즘 성적이 떨어진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니." "죄송합니다......" 다짜고짜 사과의 말을 꺼내는 재기. 하지만 지영은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재기의 사과는 지영의 이야기에 수긍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지영이 입가에 작게 미소를 떠올렸다. 정말 순박한 아이구나. 지영도 이런 착한 소년이 자신을 좋아해 준다니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민형을 향하는 감정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지영은 재기가 바로 마음을 잡고 공부에 열중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을 향해 감정 같은건 한때일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면 젊고 어울리는 여자를 많이 만나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선생님을 좋아하던 아이들도 그런 감정을 추억으로 되돌리게 된다. 지영이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날 좋아해 준다니 고맙구나." "......"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재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까부터 죄송합니다 한마디를 제외하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지영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재기는 학생이 신분이지? 나는 널 가르치는 선생이고......" 얘기를 꺼내려니까 뻔한 레퍼토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런 걸로 재기를 설득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지영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재기의 그런 기분은 일시적인 거야. 그런 감정으로 인해서 재기의 수업이 방해받는걸 선생님은 원치 않아. 재기야. 날 봐." "......!" 순간 재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번쩍 고개를 들었고 지영이 깜짝 놀라 눈을 움찔 떴다. 바깥에서 엿보고 있던 일행의 심장도 두근거렸다. 재기가......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동문서답했다. "선생님 제가 싫으세요?"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된 재기가 식은땀을 흘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고 지영은 멍하니 그런 재기를 보고 있다가 쓴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싫은 게 아니라...... 나는...... 읍!?" "......!?!?" 그 순간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떨어졌다. 지영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지고 그녀의 양어깨가 재기의 강한 팔 힘에 꽉 붙잡혔다. 그와 동시에 다짜고짜 서툰 키스가 지영의 입술을 빼앗았다. 바라보고 있던 의연들의 눈이 휘둥그래졌고 민형의 시선이 멎었다. 잠시후...... 멍하니 앉아 있는 지영의 앞에서 입술을 떼어낸 시뻘게진 얼굴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좋아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 진지한 재기. 지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빨개진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키스...... 키스했어? 얘가 지금 나한테 키스했어? 지영이 어떨떨한 기분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 퍼카캉!! "캬악!?!?" 비명 소리!? 그와 함께 상담실의 문이 부서져 날아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는 재기와 지영. 그리고 지영이 기겁하며 황급히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랴. 이미 부서진 문 앞에는 악의 화신처럼 시뻘겋게 타오르는 민형이 서 있었다. 재기가 그 살벌한 민형의 얼굴을 보며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위...... 재기......" 뿌드득- 이빨을 가는 소리와 주먹을 쥐는 소리가 동시에 났다. "남의 여자한테 무슨 짓이야아아!!!!!!!!" 그리고..... 학원 전체가 떠나갈 듯한 한사람의 포효에 사로잡혔다. 의연들이 자신의 귀를 의심한 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었다. - 계속 - 임달영 (cdggam@cdggam.com) Access : 922 , Lines : 208 [소설] 고교 3년생의 사랑. #118 PART-118 "남의...... 여자!?" 그건 즉 내 여자라는 말......? 의연은 눈이 휘둥그래진 채 씩씩거리는 민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기...... 누난데......? 자기 여자래...... 상희 역시 입을 크게 벌리고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실감하지 못했다. 상의도 물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두 눈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란 건...... 바로...... "나...... 남의 여자?" 위재기였다. 갑자기 문이 날아와 박힌 것도 놀라운데 갑자기 튀어나온 민형이 다짜고짜 유지영 선생님을 자기 것이라는 양 선전포고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아니 그보다 지금 키스 한거 다 본 거야!? 어휴 이런 창피가!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모두들 어리버리한 채 어쩔 줄 몰랐고 얼굴이 빨개진 지영이 침을 꼴깍 삼켰다. 뭔가......! 뭔가 이 상황을 얼버무릴 상황이 필요한데! 얼버무릴......! 얼버무릴 상황이......!! 지영이 고개를 번쩍 들고 민형을 향해 외쳤다. "미,민형씨! 아니, 민형아......!" << 민형씨!? >> 이크크!! 지영은 또다시 자기도 모르게 찔끔 하며 말을 바꿨다. 너무 당황해서 평소 입버릇이 그대로 나와 버렸잖아! 의연의 시선이 낮게 번뜩였고 지영이 이판사판으로 억지로 웃으며 외쳤다. "얘, 얘는 이상한 소리 하긴. 흥분하면 단어를 헤 깔리는 버릇도 여전하구나! 남의 누나라고 해야지......!" "그,그래......!!"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민형이 황급히 말을 바꿨다. 어이쿠,이거 큰 실수 했네. 재기가 멋대로 선생님에게 키스하는 바람에 정신이 잠깐 나가 버렸나봐. 민형이 재빨리 붉어진 얼굴을 감추며 재기를 향해 소리쳤다. "남의 누나한테 무슨 짓이야 이 자식!!" 창피함과 무안함에 질린 재기의 멱살을 움켜잡고 민형이 번쩍 들어 올리자 재기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저렇게 힘이 세다니!? 의연과 상희들, 그리고 지영까지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지영이 얼른 민형의 팔을 붙잡아 내렸다. "내, 내려놓고 얘기해! 내려놓고......!" "쿨럭......! 쿨럭!" "......!" 이를 갈며 눈을 번뜩이는 민형. 그 시선이 하도 독을 품은 얼굴인지라 지영은 등에 식은땀이 가득 배어 나왔다. 민형씨 이렇게 화나면 또 물불을 안 가리고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지영은 애써 웃으며 민형을 말렸고 민형이 재기를 땅에 내려놓았다. 재기가 목을 잡고 콜록거렸고 의연과 상희들이 숨을 죽였다. 정민형 쟤...... 화나니까 무섭네. "죄송해요...... 선생님......" 그때 문득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비통한 표정의 재기의 목소리. 지영이 시선을 내려 재기를 바라보았다. 재기는 비참한 얼굴로 목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글썽였다. 한심했다. 그것도 과감한 남자의 모습이 아닐까 한순간 생각했던 것이 정말 민망할 정도로 바보스러웠다. "정말 죄송해요!!!!" "야, 위재기......!?" 재기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었는지 자리를 박차고 학원 입구를 뛰어내려갔다. 민형이 황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재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방도 내버려 둔 채 이미 학원을 빠져나가 버렸다. 민형이 인상을 찌푸린 채 멍하니 서서 지영을 쳐다보았고 지영도 할 말 없는 표정으로 민형을 마주 보았다. "위재기 재...... 의외로 화끈하다 얘......" "그러게......" 뒤에 남은 상희와 의연은 멍하니 서서 그렇게 한마디씩을 주고받았다. 문짝이 떨어진 상담실에서 민형은 한참동안이나 학원장의 설교를 들어야했다. 물론 지영도 함께 빈 것이 당연지사였다. 지영은 선불로 문값을 물어주고 다시는 이런일이 없도록 할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가르르르. 지영은 굉장히 무안한 표정으로 민형의 눈치를 보며 양치를 하고 있었다. 학원 안에 설치되어 있는 작은 세면대 앞에서 지영은 잘못한 것도 없이 반성을 해야만 했다. 그 이유는 물론 재기와 키스를 했기 때문. 민형이 어찌나 과민반응을 하고 있는지 지영은 찍소리 하나 할 수 없었다. 결국 지영은 민형이 시키는 대로 양치질을 하면서 무슨 소리를 들을까 고민했다. 물론 자기가 원해서 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눈치가 보이는게 어쩔 수 없었다. "다 끝났으면 가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지영은 죄진 사람처럼 민형을 따라 나섰고 상희와 미지, 그리고 의연이 작게 손을 흔들었다. 지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의연이 민형에게 멋쩍게 한마디 건넸다. "정민형...... 잘 가라?" "......" 하지만 민형은 의연의 말을 싹 무시하고 무뚝뚝하게 학원을 빠져나갔다. 뒤에 남은 의연과 미지는 무안하게 가만히 서 있다가 민형이 학원을 빠져나간 뒤에야 한숨을 푹 내쉬고 눈을 반짝였다. "수상해!" 의연이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눈을 빛냈고 상희가 동조했다. "양치질 시키는게 꼭 애인 같더라." "너도 느꼈니? 그리고 선생님 화도 못 내잖아. 그 모습이 불륜장면을 애인한테 목격당한 꼴이었어. 수상해! 정말 수상해!" "그래도 설마......" 설마...... 설마...... 하며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설마 남매끼리 그런 사이 일려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감히 함부로 추리할 수 없는 문제. 하지만, 하지만 왠지 의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두사람...... 두 사람...... 설마...... 그때 고민하는 의연과 상희 사이에 미지가 태연하게 툭- 한마디를 던졌다. "근친상간?" "어머 얘는! 태연하게 말하긴!" 의연과 상희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비비꽜고 미지가 손가락으로 얼굴을 긁적긁적 긁었다. 그럼 아냐? 고개를 갸웃하는 미지를 뒤로하고 상희가 의연에게 물었다. "너 민형이랑 같은 반이라며? 네가 잘 알 거 아냐." "정씨 가문 일을 신씨 가문인 내가 어떻게 알아. 같은 반이긴 하지만 가족 사정까지 알 수 있을 리 없잖아." "하긴 그렇지......" 미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상해. 보통 남매가 저러나......? 상희는 남동생이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 거북함이 피부로 느껴졌다. 자기 남동생이 자신한테 저런 행동을 했다면......? 어쩌고 말고 생각하기 전에 한 대 먹여 버리는 게 정상. 누님 일에 함부로 참견한다고 꿀밤을 한 대 먹였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렇지 않았다. 왠지 기죽어 있었다. "......?" 그때 상희의 머릿속에 무엇인가 엇갈리는 포인트가 스쳐지나가고 그녀의 눈이 커졌다. 미지가 놀란 얼굴로 의연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잠깐......!? 정씨..... 가문?" "뭐가......?" "정민...... 형. 정씨잖아!? 정씨!?" 상희가 기가 막히다 는 얼굴로 눈과 입을 크게 벌렸고 의연이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그래,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이윽고 상희의 오버의 이유를 알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리는 의연에게 상희가 폭탄 같은 한마디를 던졌다. "선생님 성은 '유'씨란 말이야!!" 집에 돌아올 때까지 민형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완전히 바늘방석.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영은 죄지은 사람처럼 꼼짝 않고 민형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좀 속상했다. 키스를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 또 상담하다가 갑자기 당해 버렸으니 불가항력이었다. 그런 일 가지고 저렇게 꽁하다니...... 그래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마음뿐이지 말로는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는 지영이었다. 민형이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 놓았고 지영은 쭈삣쭈삣 눈치를 보다가 뭐라고 한마디해야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저기...... 민형씨......" "벗어요." "네?" 놀라라, 갑자기 다짜고짜 벗으라니, 지영이 좀 황당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해서 얼굴을 붉힌 채 쓰게 웃었다. 뭘 벗으라는 거야...... 역시 옷이겠지? "뭘...... 벗으라고......" "입고 있는 게 옷밖에 더 있어요?" 아직 민형의 얼굴에는 여유라던가 웃음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조금은 굳은 얼굴. 마치 토라진 어린아이 같은 심술도 조금은 붙어 있었다. 지영이 서먹하게 웃으며 윗도리 단추를 풀렀다. 이럴 땐 맞춰 주는 게 제일이지. 아이들의 기분을 풀어 주는건 역시 해달라는 대로 해주고 달래는 게 최고다. 뭐, 민형씨가 아이라는 건 아니지만. 지영이 브라우스를 벗어서 바닥에 내려 놓고 스커트 지퍼를 내렸다. 브레지어와 팬티를 걸친 채 스타킹을 신고 있어서 그런지 상당히 자극적으로 보였다. 지영이 두손으로 가슴을 살짝 가리고 수줍게 물었다. "됐어요......?" "무릎 꿇어요." 민형의 한마디. 지영은 좀 거북했다. 죽을죄를 진것도 아닌데 너무 무섭게 나오는 민형에게 속도 조금 상하기 시작했다. 지영이 좀 못마땅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자 민형이 다그쳤다. "빨리 해요."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일부러든 아니든 잘못한 사람은 내쪽이니까...... 지영이 그렇게 생각하며 무릎을 꿇었다. 원래 민형씨는 좀 권위적인걸 좋아한다. 관계를 가질 때도 그런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키는 거라면 기분나쁠 것도 없다. 하지만 민형이 화가나 있는 것 같아 지영도 기분이 상했다. 시키는 대로 무릎꿇고 앉았지만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릎꿇고 앉아 있는 지영에게 민형이 한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민형이 지영을 내려다 보았고 지영은 민형의 무릎까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얼굴을 빤히 들고 민형을 쳐다본다는 게 왠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몸이 누구꺼라고 생각해요?" 문득 민형이 그렇게 물었고 지영은 잠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몸이 누구 것이라고 생각 하냐구요." 민형이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당신......" "확실히 말해요." "당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갑자기 민형이 지영을 확 밀쳐 넘어뜨리며 자신도 지영의 위로 쓰러지듯 안겨왔다. 지영이 미처 뭐라고 한마디 하기도 전에 민형의 입술에 지영의 입술을 덮쳤다. 정열적이고 뜨거운 입술, 지영은 놀라서 민형의 몸을 받치고 있던 손에 힘을 빼고 그의 등을 부드럽게 껴안았다. 어린애 같긴...... 지영이 씁쓸히 웃었다. 한참을 빼앗듯이 지영의 입술을 유린한 후에 민형이 고개를 들고 아래쪽에 누워 있는 지영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내 거라구요. 내 거...... 어떤 자식도 건드릴 수 없어." "......" "그런데 키스라니...... 열받아 미치겠어요. 열받아 돌아버릴 것 같다구요."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민형. 그 마음이 어찌나 순수하고 깨끗한 것일까. 지영이 아래쪽에서 손을 뻗어 민형의 볼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지영의 표정이 민형에겐 마치 엄마 같이 느껴졌다. "화났어요......?" "......" 웃으며 묻는 지영에게 민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영이 쓰게 웃으며 민형의 입에 키스했다. "미안해요. 요즘 애들은 참...... 이제 조심할께요." "그런말로 안 풀린다구요......" 민형이 토라져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지영이 킥 웃으며 민형의 볼을 꼬집었다. 이럴 때 민형씨는 정말 귀엽다. 어린아이 같은 소유욕도, 불같이 타오르는 정열도, 그리고...... 민형이 지영의 모든것을 독점하려고 하는 그런 욕심도. 지영에겐 모두 기쁘게만 느껴졌다. "사랑해요......" 그 한마디에 욹그락 붉으락 하던 민형이 수그러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한마디.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는 연인사이에겐 어떠한 변명이나 칭찬보다도 효과 있는 화해 법이었다. "난 사랑 안해요." 민형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는지 한마디 툭 던졌고 지영이 킥킥 웃으면서 민형의 목을 껴안고 자신의 이마를 민형의 이마에 댔다. "그럼 나 혼자 사랑할거야 뭐." 결국 민형도 항복하고 지영을 꽉 안아주고 말았다. - 계속 - 2001/05/20 (17:38) from 211.247.168.182' of 211.247.168.182' Article Number : 9 임달영 (mailto:임달영%20) Access : 2335 , Lines : 207 [소설] 고교 3년생의 사랑. #119 ## 고교 3년생의 사랑 ## PART-119 다음날 민형과 지영은 점심 때 즘 되어 눈을 떴다. 보통 때 지영이 먼저 잠들기 일수라 민형은 새벽까지 콘티를 짜거나 스토리를 구상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들곤 한다. 그럼 아침 9시 반이 되면 어김없이 민형을 깨우는 지영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지영도 민형과 같이 늦잠을 자고 만 것이다. 아마도 어제 밤 일로 인해 민형에게 어리광을 좀 부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눈을 뜬 민형은 아직도 옆에 안겨 있는 지영을 보고 선뜻 일어나지 못하고 게으름을 피웠다. 오늘은 어느 정도 기분 좋게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다. 전화위복이라고 어제 심란한 일을 정리한 후라 그런지 일이 잘되어 잡지사와 약속한 3회분 콘티가 기분 좋게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느낌이 좋았어. 잘 될 거야.' 3회분으로 늘리는 작업이 그다지 만만한 작업은 아니었기에 민형은 꽤 기분이 뿌듯했다. 그때 옆에서 자고 있던 지영이 끄응, 작게 신음하며 기지개를 폈다. 민형이 웃으며 물었다. "깼어요?" "아함~ 잘 잤다." 지영이 기분 좋은 얼굴로 쭈욱 기지개를 펴면서 두 손을 모아 민형의 가슴에 댔다. 그녀가 눈을 방긋 뜨고 웃었다. "잘 잤어요? 자기." "안 어울리게......" "쿡쿡......" 민형이 쑥스러운 얼굴로 뚱하니 인상을 찌푸렸고 지영이 웃었다. 요즘 지영은 애교랄까, 어린아이 같은 장난이 많이 늘어났다. 솔직히 예전에 지영은 좀 쭈삣쭈삣한 편이었다. 차분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였지 귀엽거나 애교를 부리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요즘엔 많이 변했다. 농담도 잘하고, 아마도 민형 자신을 가족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민형은 그런 지영의 변화가 싫지 않았다. "벌써 점심 이예요. 밥해야 되는데." "오늘은 외식할까요?" "정말?" 지영의 눈이 반짝 떠졌다. 지영은 외식을 좋아한다. 요리를 가리지 않고 먹는 편이라 특별히 집에서 하는 밥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민형씨와 함께 분위기 있는 집에서 식사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외식한다고 해도 그다지 비싼 곳에 가는 것도 아니니 일석이조였다. 물론, 비싸지 않더라도 그 횟수가 잦아지면 부담 되는건 사실이지만. "회전초밥...... 먹으러 가고 싶다." "가요! 가요! 나도 찬성." 지영이 그렇게 외치며 상반신을 훌쩍 일으켰다. 앞으로 가슴을 숙여 크게 스트레칭을 한번 한 후 지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속옷만 입고 있는 전신이 드러나서 상당히 야했다. 그것도 검은색...... 민형이 쓰게 웃으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되게 야하다......" "댁이 입혔잖아요." 지영이 훗- 웃으며 혀를 찼고 민형이 큭큭, 웃었다. 뭐랄까, 이런 대화도 이제는 자연스러운 편이다. 정말 지영과는 애인을 떠나서 가족과 같은 분위기가 강해졌다. 사귄 지 아직 1년이 넘지 않는데......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일까. 민형은 문득 지금까지 지영과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참...... 많은 일들이 그 짧은 시간동안 두 사람 사이를 휘감고 지나갔었다. 민형은 과거를 생각하며 작게 미소지었다. "정민형 놀자~!" "......!?" 엥!? 화들짝 놀란 지영이 의미는 없지만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어이쿠,이게 웬 날벼락이야!?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히 의연. 의연이었다. 다급해진 지영이 이불 속으로 쏙 들어왔고 민형이 어쩔 줄 모르며 눈을 크게 떴다. "정민형~ 놀자~" 또다시 들려오는 의연의 목소리. 아니, 저 계집애는 고등학생이 돼서 무슨 '정민형 놀자'야. 아니지 이게 아니지! 도대체 이 시간에 여긴 왜 나타난 거야!? 속옷차림으로 잠자리에 있는데 나가기가 뭐하잖아. 곤란 해 하는 민형에게 지영이 난처한 얼굴로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가보라는 것이다. 민형이 일단 안 나가볼 수는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청바지를 찾아 입고 살짝 문을 열었다. 대청마루를 통해 방안이 다 보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야," 의연이 방긋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고 민형은 뚱, 한 표정으로 의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도깨비 같은 계집애라니까...... 오늘은 또 무슨 꿍꿍이야? 민형이 모처럼 지영씨 와의 둘만의 분위기가 깨져서 못마땅한 투로 입을 열었다. "웬 일이냐." "입이 왜 나왔어?" "그래? 기분 탓이겠지......" 눈도 밝구만, 민형이 대충 얼버무렸고 의연은 무슨 생각인지 계속 싱글싱글 웃으며 민형의 근처로 다가와 마루 위에 걸터앉았다. 의연이 물었다. "누님은?" "방에 계시다." 웃, 의외로 대담한 대답. 의연이 쭈삣 웃으며 되물었다. "방안에? 네 방안에?" "그래, 이불 갠다. 무슨 볼일인데?" 민형이 일부로 지영이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했다. 방안에서 지영이 얼른 후다닥 옷을 입고 이불을 갰다. 민형이 저렇게 까지 태연하게 연기를 하는데 이쪽에서 실수할 수 는 없지. 지영은 창문도 열고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의연이 씩- 웃으며 왠지 묘한 표정으로 민형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놀러왔어. 놀러오면 안 돼?" "그래......?" 긁적, 왠지 할 말 없구만. 친구가 놀러왔다는데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민형이 왠지 할말이 없어서 잠시 타이밍을 잊고 있었다. 그때 활짝 웃으며 지영이 방안에서 나왔다. 그녀가 의연을 보고 인사했다. "아니, 의연 학생이 왔네. 웬 일이야?" "안녕하세요." 의연이 예절바르게 인사했고 지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부스스 하시네요." "어머, 그래? 화장을 안해서 그런가봐." "그러시겠죠." 의미심장하게 웃는 의연. 민형은 뭔가 불안함을 느꼈다. 요것이 이상한데...... 갑작스럽게 여기 찾아 온 것도 그렇고, 도대체 무슨 용건일까. 민형이 의연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의연이 웃으며 본론을 얘기했다. "점심 먹으러 나가자. 일부러 밥 먹기 전에 온 거야." "엉......? 글쎄......" "글쎄는 무슨 글쎄? 내가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데 설마 싫다는 거야?" 젠장, 타이밍 안 좋은데. 점심은 지영씨와 같이 외식하기로 했는데 이런 불청객 때문에 모처럼의 분위기를 망쳐야 한단 말인가. 민형이 흘끔 지영을 보았으나 지영은 뒤돌아 본 채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이 민형에겐 가기만 해봐라, 라는 의미로 들렸다. 민형이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오늘은 좀...... 선약이......" "선약? 누구랑?" "누나랑 갈 데가 있거든......" "왜, 데이트 약속이라도 하셨나?" 철렁,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던 지영이 흠칫 멈춰 섰고 민형이 눈을 크게 떴다. 마치 고양이에게 딱 걸린 쥐새끼처럼.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고 의연이 씩- 웃었다. 그녀가 태연히 대꾸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봐? 누나랑 어디 놀러가냐고 물었는데......?" "응? 아아, 응...... 누나랑 좀......" 놀러 가는 거다. 놀러. 누나랑 놀러. 데이트라는 말에 반드시 과민 반응할 것 없어. 민형이 우물쭈물 대답하자 의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냥 놀러 가는 거지? 그럼 무리를 해서라도 나랑 가자. 누나도 함께." "......?" 지영씨도 함께? 그 말에 구미가 좀 당기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의연과 함께 간다고 좋은 일 생길게 뭐가 있을까. 여전히 지영은 절대로 안 된다는 무언의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역시 안되겠지...... 민형이 쓰게 웃으며 거절했다. "미안하다 야. 여기까지 와줬는데 오늘은 좀......" "식당에서 재기도 기다리고 있는데?" 제길 뭐야 이거!! 아무리 얘기하고 또 얘기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잖아!? 민형이 열이 받아서 금방 얼굴이 욹그락 붉그락 해졌고 지영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재기 녀석은 또 왜 온 거야!? 민형이 조금 흥분해서 다짜고짜 물었다. "재기는 왜!? 난 그 놈이랑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정리하시지." "......!" 한순간 차분해지는 의연. 민형이 찔끔 입을 다물었고 지영이 처음으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연이, 정말로 의연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서서 침착하게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면 재기만 불쌍하잖아......? 네 쪽에서 확실히 못하니까 재기가 고민하는 거야. 물론 남의 일이니까 상관할거 없다고 말하면 나야 주제넘은 참견이 된 거지만......" 훗,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여는 의연. 민형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애써 태연한 척 의연을 바라보았다. 아니야, 아직......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게 아니야. 의연이 이 녀석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직 확실히 파악한 게 아니야. 민형이 최대한 태연하게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뭘...... 확실히 하라고?" "그러니까 너희 누나 말이야." 크으!? 설마 진짜로!? 민형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고 지영이 초조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아니, 너랑도 관계 있지. 안 그래 정민형?" "......!!" 제, 제길......!? 민형의 얼굴이 시뻘개지고 지영의 표정도 사색이 되었다. 이거 들켰구나. 완전히 들켰어. 언젠가 이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민형이 꾸욱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냥 남매 아니지?" "......" 걸렸다. 민형의 등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물론 지영도 빤히 질려서 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민형과 지영이 뭐라고 딱 부러지게 대답을 못하자 의연이 오히려 한숨을 내쉬었다. "성이 틀리니까 말이야...... 누구라도 알 수 있잖아. 애초에 얼버무리기가 어리숙했던거 아냐?" 다시 마루에 털썩 앉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의연.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의연은 지영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학원의 아이들은 지영의 이름을 안다. 강사로 들어갈 때 처음에 자기 소개를 하니까...... 그 중간에 낀 오류를 민형과 지영은 전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이 위기를...... << 어떻게 효과적으로 변명하느냐!? >> 이대로 아무말 하지 못하고 있으면 이건 완전히 의연의 말을 긍정하는 꼴이 된다. 변명해야 돼! 변명해야 돼! 반드시 변명해야 돼! "그래요, 의연 학생 말이 맞아요." 우왓!?!? 갑작스런 지영의 한마디. 민형이 화들짝 놀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지영이 악에 받친 표정으로 민형에 옆으로 달음질 쳐 오더니 민형의 팔을 꽉 붙잡고 팔짱을 꼈다. 의연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전, 이 사람을 사랑해요! 결혼할거예요!" "하......?" 폭탄선언. 의연이 눈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왕방울만 해졌고 민형도 얼떨떨해 옆에서 자신을 꽉 붙잡고 있는 지영을 멍히 내려다보았다. 지영씨...... 이렇게 대담하게 사실을 말하다니. 의외로 쌓인 게 터지면 화끈한 점이 있는 여자라니까...... 하지만 결혼 할 거라니. 거, 참...... 하하. 이제 다 끝났다...... 라는 얼굴로 하늘을 보고 웃는 민형의 아래에서 의연이 얼떨떨하게 손가락으로 두 사람을 가리켰다. "그, 그럼...... 두 사람...... 정말로......?" "당신이 생각하는 그대로예요. 뭐가 이상하죠? 서로 사랑하니까 관계없잖아요!" 지영이 화내듯이 인상을 지푸렸고 의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물론 대충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랬을 거라고는 100% 예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대단하네요......" 의연이 약간 기죽은 얼굴로 손을 입에 가져갔고 민형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에라, 뭐 될 대로 되라지. 민형은 쓰게 웃으며 지영을 흘끔 내려다 보았다. 강인하게 서 있는 지영. 왠지 불안한 기분이 민형을 감쌌다. - 계속 - 2001/05/22 (15:57) from 211.247.168.182' of 211.247.168.182' Article Number : 10 임달영 (mailto:임달영%20) Access : 2243 , Lines : 215 [소설] 고교 3년생의 사랑. #120 ## 고교 3년생의 사랑 ## PART-120 "정말 대단해...... 아니 놀래라...... 나, 사실은 설마 설마 했지 진짜일거라고는......" 의연이 입을 어색하게 벌린 채로 왠지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 표정으로 민형과 지영을 번갈아 보았다. 설마 ,정말로 그런 관계였을 줄이야. 그런건 만화에서나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나 마이 페이스인 의연도 이번만큼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의연의 앞으로 또박또박 걸어간 지영이 무서운 눈으로 의연을 내려다 보았다. "진짜예요." "예? 아...... 네......" 딱 부러지게 한 마디 하는 지영. 민형이 지영을 흘끔 쳐다보았다. 일단 무서운 분위기. 지영은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알았으니 됐지요?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은지 모르지만 우리는 잘못한게 없어요. 죄지은 것 도 아니고 원래 숨길 이유도 없다고요!" "아, 네...... 죄송합니다. 저...... 저도 그냥 신기해서...... 두 분이 뭘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신기해요? 뭐가요! 이런 관계가 신기할 정도인가요! 뭐가 신기해요!? 뭐가!?" "......!" 갑자기 성을 내는 지영. 순박하기만 하던 그녀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고 그녀의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지영씨...... 민형은 왠지 놀랍기도 하고 의외이기도 해 멍하니 지영을 쳐다보며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굉장히 무안해 하고 놀라하는 의연 앞에서 지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젠 싫어......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아......! 이제 더 이상 사람들 눈치보는 건 싫어!" "지,지영씨......"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원망스럽게 외치는 지영. 민형이 그런 지영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지영이 눈물이 맺힌 눈으로 민형을 올려다 보며 서럽게 외쳤다. "말해봐요 민형씨! 내가 잘못한 건가요?! 우리가......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 질 받을만한 짓을 했나요? 죄를 지은 건가요? 아니죠? 아니잖아요......!" "지영씨......! 의연이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이제 싫어! 싫다구요!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아요! 당당하게 민형씨의 여자라고 말하고 싶다구요! 민형씨가......!" 속상했던 마음을 다 털어 놓으면서 지영이 민형의 팔목을 붙잡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민형씨가 날 사랑한다고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 그 한마디를 끝으로 지영의 한쪽 눈에서 주루룩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영씨...... 천마디 말보다 지영의 속마음을 전해주는 그 한줄기 눈물. 언제나 태연하게 웃고 있고 의연한 척 이해해 주었지만...... 사실은, 사실은 그 누구보다 속이 상하고 마음이 답답했던 지영이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숨겨야 하고, 누나라거나, 이웃이라거나 속여가면서 조바심내야 했던 매일 매일. 지영은 한번도, 한번도 모두의 앞에서 떳떳하게 민형을 사랑한다고, 민형에게 사랑하는 여자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맺혔던 그것이 오늘 터졌고 지영이 눈물을 흘렸다. 민형은 가냘픈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강하게 움켜잡았다. 이렇게 여린데...... 나이는 많아도 민형 자신이 지켜줘야 할 상대. 그런 게 여자라는 것이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민형이 의연을 돌아보았다. "의연아." "으,응......?" 왠지 자신이 엄청나게 큰 못 된 짓을 해버린 것 같은 기분의 의연. 의연이 찔끔 놀라 어깨를 움츠렸고 민형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야. 난 지영씨를 사랑해. 누나 같은 게 아니야.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서 떳떳치 못했어. 하지만......"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숨겨야 했고 마음을 졸여야 했는지...... 민형은 새삼스럽게 지난 일들이 후회스럽고 또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아니야. 나 이 여자 사랑한다. 알겠어?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사람이야." "......" 그렇게 진지하게 이야기 해버리면 할말이 없어지잖아. 의연은 쑥스러운 얼굴을 숙이고 입을 비쭉 내민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밝혀지고 나니 뭐라고 할만한 이야기가 없었다. 그보다 저렇게 진지하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의연은 조금 부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여자란,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잘 어울려......' 그렇게 생각해 하고 보니 누나 동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의연은 씁쓸하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자신이 조금은 초라하게 느껴지는 의연이었다. "죄송해요, 저도 두 사람을 몰아 붙이거나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 버리고 말았네요." 재기가 기다린다는 시내 근처에 커피 숍으로 지영과 민형을 안내하며 의연이 자신의 집요한 스토커 행위를 사과했다. 사실 악의는 없었다. 지영과 민형도 의연의 진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사과를 솔직하게 받아 들였다. "넌 그 궁금증 많은 게 탈이야." "미안하다니까." 민형이 꾸지람하자 의연이 혀를 삐쭉 내밀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민형이, 여자 앞에서 뻣뻣한 이유가 그거였군. 이렇게 스타일 좋고 쭉 빠진 연상의 여인을 애인으로 두고 있으니 어느 고등학생 여자애들이 눈에나 들어왔겠어. 의연은 다시 한번 뒤따라오는 지영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죽 훑어 보았다. 이크크, 정말 기죽을 정도로 예쁜 몸매였다. 여자인 의연이 봐도 콤플렉스가 느껴졌다. 의연 자신도 그렇게 빠지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도 말이다. "그보다 오늘 재기한테는 뭐라고 할 꺼야." "음......" 재기는 오늘 유지영 선생님께 그때의 일을 사과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민형의 집을 아는 의연이 민형과 지영을 데리러 온 것이다. 의연의 질문에 민형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다 솔직히 얘기해야지. 그게 재기한테도 좋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 그게 좋을 것 같다. 다른 변명을 한다고 해도 걔 마음은 돌아서지 않을 것 같더라. 보기보다 뚝심이 있더라구." 의연이 흐응,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재기, 그 애...... 솔직하고 예의 바른 점이 아주 좋은 건실한 소년이다. 하지만 의외로 대담하고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의 사과도...... 어디까지나 사과를 한다는 전제였지만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는 것. 하지만 민형이 모든 것을 솔직하게 밝히는 이상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가엾지만...... 재기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올바른 처신일 것이라 의연도 생각했다. '그 애, 좀 비참하겠군......' 의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2층에 자리잡은 커피숍 입구로 올라갔다. 작은 문을 열자 딸랑, 하는 종소리가 울렸고 미리 자리잡고 앉아 있던 상희가 손을 흔들었다. "앗, 의연아 여기." "미안, 좀 늦었어." 의연이 살짝 손을 들어 주었고 민형과 지영은 의연의 뒤를 따라 커피숍에 들어갔다. 상희의 옆엔 미지가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 재기가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지영의 얼굴을 보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민형과 지영도 얼떨결에 꾸벅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자, 우선 앉아서 얘기하지?" 의연이 넉살 좋게 자리를 주선했고 상희와 미지가 옆으로 빠져서 그 자리를 민형과 지영이 차지했다. 재기가 여전히 지영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고 지영은 차분한 표정으로 재기를 바라보았다. 왠지 오늘 이 아이에게 상처를 주게 될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저......" "저......" 지영과 재기가 동시에 말문을 열었고 서로 고개를 들었다. 지영이 쓰게 웃었고 재기도 머리를 긁적거렸다. 지영이 웃으며 권했다. "먼저 말하렴." "......" 지영의 권유에 재기는 잠시 속으로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작게 입을 열었다. 아마도, 많이 고민한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이렇게......" "......" "선생님께......" "됐어 재기야." 지영이 재기의 말을 가볍게 막았고 재기가 눈을 흘끔 위로 치켜 떴다. 지영이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더 이상 재기를 탓하지 않을게. 그건 우리 둘 다 실수였어. 그러니까 나 화내지 않아." "......" 재기는 아무런 대꾸 없이 잠자코 지영의 이야기를 들었다. 뭔가 정말로 사죄를 하러 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게 이야기는 쉽게 마무리 될 것 같았다. 민형은 일부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자신이 끼어들어서 화제를 끊고 싶지 않았다. 지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재기의 사과는 받아둘게...... 그러니까......." "아니요 선생님." 그때 재기가 고개를 숙인 채 지영의 말을 막았고 민형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제가 사과하는 건 오늘 이 자리에 일부러 나와주셔서 하는 말이에요. 그때 키스한걸 사과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제 진심이에요." 웃 ,이 자식 안 좋은 방향으로 나가잖아. 의연이 곤란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고 지영이 당황해서 말문을 잇지 못했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재기였다. "전 그때의 대답을 듣고 싶어요. 확실히 하고 싶어요. 선생님은...... 절 어떻게 생각하세요." "난 재기를 학생 이상으로는 생각 안 해." 의외로 딱 부러진 대답. 의연도 놀라고 상희와 미지도 놀랐다. 제일 놀란 것은 민형이었다. 지영씨 저렇게 딱 부러지게 말할 줄이야...... 의외인걸. 지영의 대답에 재기는 고개를 한번 들었다가 다시 푹 수그렸다. "그럼......"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재기가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민형이는...... 괜찮고요......" "그래." 또다시 딱 잘라 대답하는 지영. 우와 지영씨 무섭네. 혹시 화난 거 아냐? 민형은 속으로 시원했지만 왠지 지영이 너무 재기에게 야박한 것 같아 걸리는 것도 없지 않았다. 좀 달래면서 말하면 안 될 까나...... "인정못해......" 그때 재기가 꽉 쥔 두손을 허벅지위에 올려놓고 부들부들 떨었다. 민형이 입을 다물고 그런 재기를 바라보았다. 재기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 두 눈이 민형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건 인정 못해......! 잘못되어 있어 이런 비뚤어진 상황은......!" "......!?" 이 자식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지금? 민형이 울컥 화가 나서 인상을 찌푸렸고 재기가 악에 받친 눈으로 민형을 노려보며 외쳤다. "모두 너 때문이야 정민형. 이 사랑은 잘못됐어! 이대로 계속 된다는 건 말이 안돼......!" "야, 위재기 너 왜 그래......!" 상희가 곤란한 얼굴로 재기를 말렸지만 재기의 분은 꺽이지 않았다. 마치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처럼 재기가 원망스럽게 민형을 향해 외쳤다. 이 자식 선생님의 마음이 자기에게 올 것 같지 않으니까 억지 쓰는거야 지금? "선생님을 놔줘......!" 외치는 재기. 뭘 놔주라는 거야......!? 갑자기 재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위압적인 표정으로 민형을 내려다보았고 민형은 눈 하나 깜짝 않고 한 손을 테이블 위에 걸친채 재기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재기가 주먹을 움켜쥔 채 민형을 향해 선전 포고 했다. "넌 선생님을 구속하고 있어...... 넌 선생님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럼 뭐가 어울리는지 좀 알고 싶은데 응?" 민형의 목소리에 비꼬임이 들어가 있었고 지영이 덜컥 겁이 났다. 민형씨가 화가 났나봐! 민형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가 있었고 입술이 억지로 미소짓고 있었다. 분명히 불 받은 모양. 이대로라면 민형 역시 침착하기 힘들다. "승부다 정민형!" "......!?" 승부!? 이 자식 웃기고 있네! 불받은 민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의연과 상희가 손가락을 모아 입에 물었다. 왜 이리 공포 상황이야......? 민형과 재기가 서로 불똥을 튀기듯 쏘아보았고 재기가 필사적으로 민형에게 외쳤다. "널...... 널 이기고 선생님이 잘못된 사랑에서 빠져나오게 만들겠어!" "재밌게 노시네...... 날 이겨?" 훗-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피식 웃는 민형. 잠시 후 그가 다시 재기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 그 얼굴은 이미 완전히 열이 받은 총 보스 민형의 얼굴이었다. "지금 나랑 한판 해 보자는 거야?" "......!" 놀랍게도 고개를 끄덕이는 재기. 앉아 있던 모든 여자들이 놀라서 입을 다물었고 민형이 콰드득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샌님 자식, 근성 개조가 필요하겠군......! 민형이 속으로 분을 삭이며 이를 갈았다. - 계속 - 2001/05/24 (19:47) from 211.204.50.141' of 211.204.50.141' Article Number : 11 임달영 (mailto:임달영%20) Access : 2072 , Lines : 238 [소설] 고교 3년생의 사랑. #121 ## 고교 3년생의 사랑 ## PART-121 정말로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위재기, 그가 억지가 가득한 결투신청을 민형에게 선포했던 것이다. 호신술과 격투기를 배운 재기의 실력은 보통 아이들 보다 뛰어난 편. 지영을 괴롭히던 같은 크래스의 아이들을 혼내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은 되었다. 하지만 상대는 민형이었다. 실례로 민형은 재기를 꼼짝 못하게 만든 불량배 다수를 혼자서 이긴 전력도 있다. 재기가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야, 위재기 너 억지쓰지마! 이게 뭐 하는 거니!" 일행은 재기를 따라 이름 없는 태권도 도장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은 재기가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배워온 도장이라고 했다. 말 없이 주먹에 테핑을 하는 재기를 향해 상희가 어이없다는 듯이 외쳤다. 하지만 재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테핑을 계속 했다. "선생님이 이미 싫다고 하셨잖아! 넌 차인 거야. 차인 거라구! 꼴사납게 이게 무슨 경우야?!" "......" 객관적으로 봐서도, 원칙적으로 봐서도, 재기의 행동은 안하무인. 이미 지영과 민형의 관계를 알아버린 이상 재기의 이런 행동은 어린아이 억지에 불과하다. 아무 말 않고 테핑을 계속하는 재기에게 상희가 계속 쏘아 붙였으나 재기는 한결 같았다. 상희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정말...... 정민형! 너 정말 할거니?! 이 의미도 없는 싸움을 말이야." 대답 않는 재기가 답답했던지 상희가 민형을 돌아보며 외쳤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반대쪽 의자에 앉아 있던 민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난 시비를 걸어오면 피하지 않는 주의야." "남자들이란...... 뭐야 그럼, 지면 선생님을 양보할거니?" "난, 안 져." 여유 있는 한마디. 그 한마디가 아무런 말 없이 테핑을 계속하던 재기를 자극 시켰다. 민형의 옆에 서 있던 지영이 민형에게 부탁했다. "민형씨, 이건 의미 없어요. 난 싫어요." "놔두세요 지영씨." 난감해 하는 지영을 쳐다보지도 않고 민형이 웃었다. 그 웃음속엔 진지함이 들어 있었다. "이건 남자들 나름대로의 마무리 방식 이라구요." "......!" 남자들 나름의? 이해하지 못한 지영과 역시 곁에 서 있던 의연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때 테핑을 끝낸 재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넓은 등. 의외로 재기의 덩치는 민형보다 커 보였다. 사실이었다. 재기는 민형보다 키도 크고 몸무게도 더 나갔다. 민형은 단지 강할 뿐 체구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재기가 일어서자 민형도 일어섰다. 그 얼굴은 의기양양했다. "미리 말하지만 이건 승부다. 안 봐준다 위재기." "......" 민형의 도발에 아무말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재기가 민형에게 글러브를 던졌다. 글러브를 끼라는 이야기. 민형이 글러브를 주워 들어 손가락으로 글러브 끈을 붙잡아 늘이고 좌우로 살짝살짝 흔들었다. "이런거 끼지 않으면 싸움이 안되는거지? 시합이라는건...... 그래 그래, 너 편한대로 해주지." 글러브를 끼고 지영에게 끊을 묶어 달랜 후 민형이 주먹과 주먹을 맞 부딪쳤다. 팡! 기분좋은 소리가 났고 민형이 재기를 향해 눈빛을 날카롭게 빛냈다. "내가 지면 선생님과 헤어져 주지. 대신......" 기브엔 테이크다. 민형이 씩- 웃으며 말했다. "네가 지면 공부나 열심히 하는거다 쑥맥." "정민형......"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움켜쥐는 재기. 분하다...... 저놈은...... 저놈은 강하고...... 또 선생님을 가졌다. 나약한 자신에겐 저 멀리 보이는 선생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이...... 그 점이...... "크아아아아!!" 그 점이 너무나 날 분하게 해!! 재기가 큰 소리로 기합을 내지르며 민형에게 달려들었다. 간다 정민형! 1대1이라면 나도 자신 있다! 재기가 움켜쥔 주먹을 민형에게 내 뻗었다. - 퍽!! "......!?!?" 바로 그 순간 달려들던 재기의 팔이 뒤로 퉁겨져 나갔다. 놀라서 멍하니 눈을 뜬 재기, 그리고 지켜보던 의견 상희 미지, 지영도 모두 놀랐다. 분명히 재기가 주먹을 뻗었는데...... 그 주먹이 마치 퉁겨져 나가듯 뒤로 나가떨어졌던 것이다. 놀란 재기를 향해 민형이 웃으며 한쪽 입술을 치켜올렸다. "왜 그래......?" "으......!" 어떻게 된 영문이야......! 주먹이 튕겨져 나가다니!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다! 오기로라도......! 오기로라도 저놈에게 한 대 먹여야겠어! 재기는 지지 않고 다시 민형에게 뛰어들었다. - 퍽!! "!?!?" 다시 나가떨어지는 재기의 주먹. 욱신거리는 주먹의 통증과 함께 재기는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재기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정민형...... 설마 이 정도까지의 실력이란 말인가!? "다시 와봐......" 재기가 내민 주먹을 민형의 주먹이 쳐냈던 것이다. 이것으로 두방 째. 뻗는 주먹을 정확히 맞추는 것도 어려운데 민형은 측면으로 비스듬히, 밑에서부터 재기의 팔목을 공격하여 주먹이 민형의 얼굴에 닫기 직접에 쳐 올렸던 것이다. 도저히...... 도저히 재기로서는 흉내낼 수 없는 일이다. 재기의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졌다. 눈앞에 민형이...... 묘하게 커 보였다. "태권도라면 싸워 본 적이 있지. 넌 절대로 날 못 이겨. 이번에 오면 한 대 맞게 될 거다." "으......!" 저,여유......! 그래, 저런 게 강한 자의 여유. 유지영 선생님도...... 결국은 강한 사람을, 조금 더 잘난 사람을 택하게 되는 건가. 오기, 민형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스며 나왔고 재기의 얼굴이 꿈틀꿈틀 흉하게 변해갔다. "정민형......" 싸움 좀 잘 한다고...... "전부가 아니야!!!!!!!" 정민형!!!! 민형의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달려가는 재기! 놀라는 지영들 의 앞에서 재기가 점프했다. 공중 차기! 태권도의 이기각 이라는 공중에서 두 번 발을 뻗는 기술이 있다. 재기는 민형의 얼굴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한 발 차기를 날렸다. - 뻐억!! "크억!" 그리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재기가 비명을 질르며 땅에 떨어졌다. 민형을 노리던 재기의 발에 민형의 팔뚝에 밀려 벨런스를 잃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밀어내는 팔뚝 방어라는게 거의 공격과 다름없는 파워가 실려 있었다. 재기가 바닥에 떨어져 양손으로 다리를 움켜쥐었다. 고통스럽다......! 어떻게 이런 일이! 공격 한 것은 내 쪽이었는데......! 재기가 고통을 참으며 일어섰고 그런 재기를 향해 민형이 턱을 치켜올렸다. "이번엔 이쪽에서 간다." "......!?" 으, 흠칫 놀란 재기가 뒤로 물러섰다. 온다!? 민형이 스르륵 앞으로 움직였고 재기가 반격 태세를 취했다. 다리를 쓸 수 있는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그렇게만 되면 곧바로 돌려차기로 반격할 수 있다. "......!!" 한걸음, 두걸음, 걸어오는 민형을 똑바로 집중하며 재기가 온몸에 기합을 넣으려고 애썼다. 와라, 와라 정민형. 와라......! << 와라......!! >> 이미 민형은 돌려차기를 하기에 충분한 거리에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재기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이유는 모른다. 어쨌든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위재기......" 지켜보던 상희가 두 손을 꼭 쥐고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재기가 움직여 주기를 바랬다. 바보같이 왜 목 움직이는거야 바로 코앞이잖아! "으......!!" 날린다! 날리는 거야! 돌려차기를 날리는 거야! 날려야해! 날려야 해! 날려!!!! "뭐하냐." "......!?!?" 공포, 흠칫한 공포가 재기의 온몸을 감쌌다 어느새 자신의 코앞으로 민형이 다가왔다. 하지만 재기는 돌려차기를 하지 못했다. 전신이 땀에 절고 몸이 패배를 인정하고 있었다. 봐준 것이 아니다. 차지 못한 것이다. 10년이 넘게 배워온 태권도가. 그 기술이 본능적으로 이 녀석과 대치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형이 재기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꽤, 강하군......" 강한자를 알아보는 것도 강자의 증거. 민형은 재기의 오기를 인정하고 훗 - 웃음 지었다. "내가 이겼어 위재기." "크흑......" 왠지 안쓰러워 보이는 민형의 얼굴. 그와 함께 지켜보는 모두의 앞에서 재기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위재기, 그는 울고 있었던 것이다. "크흑...... 큭....... 크흑......" 서러움의 눈물. 그것은 꿈에서 깨어난 아이의 안스러움. 알고 있었다. 재기는 처음부터 민형에게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이 대결을 떠나서, 민형과 유지영 선생님 사이에 자신이 파고들 틈 같은 건 애초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억지를 부렸던 것이다. "흐윽....... 흐으윽......." 우는 재기. 민형은 씁쓸한 얼굴로 재기를 내려다 보았다. 자식, 정말로 순수한 녀석이구나. 민형은 재기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억지스러운 대결도 받아준 것이다. 재기가 자신을 이기고 지영을 뺏어가려고 이 대결을 신청한게 아니라는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기야......" 우는 재기를 토닥거리며 상희가 위로했다. "바보같이...... 울긴 왜 우니? 바보......" 쓰게 웃으며 재기의 어깨를 쓰다듬는 상희. 어깨를 들썩이며 굵은 눈물을 흘리는 재기의 마음을 전부 알고 있다는 상희의 그런 모습에 의연도 지영도 쓰게 웃으며 아무런 참견을 하지 않았다. "저렇게 어른이 되어 버리는구나 남자들은......" 의연이 쓴웃음을 지으며 작게 속삭였고 지영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자기는 재기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했지만, 언젠가 재기에게는 자신보다 훨씬 더 어울리는 좋은 사랑이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지영은 생각하고 있었다. '힘내...... 재기야......' 한 소년이 짝사랑을 끝내면 소년은 어른이 된다. 지영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씁쓸하지 않게 웃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그날 따라 민형과 지영은 주위에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서로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었다. 재기는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고 민형도 재기의 마음을 알기에 기꺼이 화해를 받아 주었다. 마지막에 지영과 민형이 잘 어울린다며 눈물 섞인 얼굴로 활짝 웃는 재기가 안쓰럽긴 했지만...... 하지만 그것이 재기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하나의 단계가 될 것을 알고 있기에, 두 사람은 만족스럽게 모든 일들을 가슴에 갈무리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민형씨." "뭐가요?"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 가에서 지영이 민형을 향해 물었고 민형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영은 재기의 결투를 받아들일 때의 민형의 생각이 알고 싶었다. "재기에게 지면...... 정말로 나랑 헤어질 생각이었어요?" "난 절대로 안 져요." "하지만 나중에라도 정말 민형 씨 보다 강한 사람이 나왔을 때도 이런 조건으로 내기 할거예요 그럼?" "나보다 강한 놈은 없어요. 없어." 피식- 웃으며 말을 돌리는 민형, 지영이 삐쭉 입술을 내밀고 무책임한 민 형의 대답을 비꼬았다. "정말, 싸우는 거 좋아하긴. 제가 볼 때 오늘 이 대결은 아예 시작할 필요가 없는 거 였다구요. 순전히 재기의 억지였는데......" "......" 억지라...... 그랬다. 순전히 재기의 억지. 대결의 조건도. 대결 자체의 의미도 지영이나 의연에게는 억지로 보였을 것이다. 민형은 문득 자신의 옛날을 떠올렸다. 싸움에 싸움을 몰고 서로 울고 웃으며 친구들과 어울렸다. 억지가 억지로 통하지 않는 세계. 그 세계엔 룰도 있었지만 마음도 있었다. 억지를 받아 주는 마음. 그래서 부릴 수 있는 억지. 민형은 그때를 떠올리며 훈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요..... 억지죠......" 민형의 웃음 섞인 한마디에 지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민형을 흘끔 쳐다보았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민형의 얼굴에는 흐뭇한 웃음이 떠나지 않고 인었던 것이다. "그래도 남자들끼리는 그런 억지가 통하거든요. 그래서 남자들인 거잖아요." "정말 단순해 남자들은." 그말이 정답. 여자들이 보기엔 한없이 단순한 남자들의 세계. 손해를 보는 것을 알면서도 받아주고 치켜 세워준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자신이 손해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무엇', 바로 신의라고 하는 '무엇'은 여자들에겐 쉽게 생기지 않는 남자들만의 성역이었던 것이다. "지영씨 말 대로예요." "얼버무리지 말아요. 다음부터 이런 내기하면 내가 막을 거예요." "미안해요 미안." 결국은 여자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남자들의 대화. 그렇게 그 대화를 통해 한 소년의 짝사랑은 끝이 났고 그 소년은 어른으로 가는 계단을 한발짝 올라섰다. '나도......' 그런 재기를 보며 민형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자신도 어른이 되겠다고, 지영씨와 동등할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기를...... '반드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 역시 민형이 어른이 되기 위한 작은 시련들 중 하나임을 느끼면서. 민형은 곁에서 자신의 팔짱을 끼고 있는 지영을 더욱 꼭 안아주었다. 그날따라 지영이 훨씬더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 계속 - 2001/05/25 (19:18) from 211.204.50.141' of 211.204.50.141' Article Number : 12 임달영 (mailto:임달영%20) Access : 2433 , Lines : 242 [소설] 고교 3년생의 사랑. #122 ## 고교 3년생의 사랑 ## PART-122 - 퍼억!! "크아악!!" 보름달이 뜬 밤, 후끈후끈한 열기가 이름 모를 주차장 골목을 불태웠다. 주위에 행인 한 명 보이지 않는 새벽 2시. 콰당탕, 큰 소리가 나며 드럼통이 굴러 나갔고 그 위로 주유소 유니폼을 입은 한 명의 고교생이 나가떨어졌다. "허억......!? 헉......!" 유니폼의 고교생이 서둘러 드럼통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앞에는 서너명의 고등학생들이 모여 있었고 그 중앙에는 회색의 교복을 입은 위압감 넘치는 소년이 담배를 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 너희들 지금!? 쿨럭......!" 입술에서 피를 흘리며 앞에 있는 이들을 노려보는 주요소 유니폼의 고등학생. 그를 향해 담배를 물고 있던 회색의 교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영의 카리스마. 석대진...... 뭐, 이 정도로군....." "으......!" 유니폼을 입은 소년의 이름은 석대진. 도영 공고의 총 보스로 현재 3학년. 도영 공고는 이강 실고를 중심으로 한 전투고교 동맹의 하나로 취업률과 대학진학률도 높은 명문이다. 석대진이 입술에 피를 닦으며 눈앞에 있는 패거리들을 노려 보았다. 그가 기죽지 않고 외쳤다. "뭐 하는 거야! 이 구역에서 이유 없이 싸움을 걸다니! 구역다툼이라도 하자는 거냐......!!" "저게 어디서......" 옆에 있던 패거리 한 명이 주먹을 쥐고 나서려고 하자 담배를 물고 있던 소년이 그를 저지했다. 잠시 패거리들 사이에서 조용한 한기가 돌았고 담배를 물고 있던 소년이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회색의 연기가 어두운 주유소의 하늘 위를 어지럽혔다. "긴 말 없이 항복해라. 앞으로 우리 창명고 교복을 보면 무조건 머리를 숙여라. 그러면 돼." "무슨 헛소리를......!?!?" 창명 고교!?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전투고교는 이강 실업 고를 중심으로 동맹을 맺고 있다. 그것은 쓸데없는 구역 싸움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서울의 총 보스인 정민형이 만들어 놓은 자치 관리 시스템이다. 즉, 전투고교의 클럽이나, 팀원들은 쓸데없는 폭력을 휘두르지 않으며 자신의 학교는 자신들이 지킨다. 팀에 합류되어 있지 않거나 용병으로 움직이는 쓸데없는 양아치들은 구역에 따라 각 학교가 제압한다. 만약 양아치들의 세력이 세면 전투고교 동맹이 나서 그들을 응징한다. "너희들도 서울에 있는 학교라면 총 보스의 권유에 따라 동맹을 맺었을텐데......! 지금 이런 짓은 우리들의 규칙을 위반하는 거라는 걸 모르냐!? 컥!?" 바로 그 순간 담배를 물고 있던 소년이 석대진의 얼굴을 걷어찼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 석대진은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뒤로 날아가 다시 드럼통 위에 나동그라졌다. 비틀거리며 움직이지 못하는 석대진 앞에서 회색의 소년이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려 발로 비벼 껐다. 달빛에 비추여 드러난 얼굴, 군데군데 백발로 염색한 브릿지...... 180정도 되어 보이는 건장한 체격. 그리고, 더없이 냉혹해 보이는 위압적인 표정...... 그가 석대진을 향해 하찮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우리 창명은 이미 동맹을 깼다. 더 이상 이강이 만들어 놓은 소꿉장난에 놀아나지 않아. 잘 들어둬라 허울좋은 도영의 카리스마야." 저벅, 한발짝 앞으로 다가오는 백발 브릿지. 그가 석대진을 내려다 보며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창명의 새로운 보스인 '김영현'이다. 우리 창명은 6월을 시작으로 이강 동맹에서 탈퇴한다." "그,그런 바보같은......! 너 죽고 싶으냐!?" 어이없을 정도로 억지스러운 김영현의 선언에 석대진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바로 그뒤로 엄청난 위력의 주먹이 석대진의 얼굴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찍어 버렸다. 큰 소리와 함께 석대진의 뒷 통수가 콘크리트 바닥에 쑤셔 박혔고 잠시후 석대진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 석대진을 단방에 해치운 창명의 보스 김영현. 그가 손에 묻은 피를 털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다음 목표는 이강이다...... 빠를수록 좋아." 석영현의...... 눈가가 차갑게 그늘졌다. 한달 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는 짧은 여름방학이 끝이 났다. 서울에 있는 이강 실업고에도 2학기가 찾아왔고 3학년들은 곧 반년 후 에 들이닥칠 수능준비로 서서히 몸을 달구어야 했다. "야, 한성우. 이리와 봐 ." 점심시간 복도를 가로지르는 성우를 학생주임인 김원규 선생이 불러세웠다. 민형이 아직 이강실고 학생일 때 민형을 퇴학시킨 장본인. 성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멈춰서서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은 채 학생주임 김원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민형에게 씌인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긴 커녕 몰아 붙혀서 퇴학시킨 놈. 성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김원규 선생을 쳐다 보았고 김원규 학생주임이 성큼성큼 걸어와 성우를 흘끔 바라보았다. "2학기 됐으니까 정신 좀 차려야겠지? 수상한 짓 하면 죽을 줄 알아." "뭔 말씀이십니까? 생님?" 성우가 삐딱하게 턱을 옆으로 치켜올렸고 학생주임이 들고 있던 당구 큐대로 성우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성우가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분을 삭였다. "뭔 말인지 몰라서 그래? 그 정민형 놈 없다고 내가 안심할 것 같아? 네가 그놈 꼬봉이잖아? 아냐?" "생님, 꼬봉이라뇨. 우린 친구예요 친구." "잘났다. 넌 사귈 놈이 없어서 그딴 놈 사귀면서 친구라고 가슴 피는거냐?" "......" 말 한마디 한마디 긁어대는 학생주임에게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낀 성우가 입을 비쭉 내밀고 고개를 돌렸다. 학생주임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그런 성우를 쏘아 보았다. "어쨌든 2학기 됐다고 대포끼리 모여서 난리 치지 마라.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라는 걸 잊지 말란 말이다." "아,생님. 저도 공부하러 학교 왔다는 거 아닙니까." "이 자식이 말끝마다 난장 까고 있어!" 퍽, 소리와 함께 학생주임의 당구 큐대가 성우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고 성우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았다. "발음 똑바로 해, 새꺄." X팔, 말보다 손이 먼저야. 성우는 열이 확 오르는걸 참으며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악물었다. 정말, 성질 같으면...... 학생주임은 그런 성우를 한심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면서 혀를 찼다. "넌 집안은 멀쩡한 게 왜 그 모양으로 다니냐? 다 친구를 잘못 만나서 그래 친구를. 한심한 놈. 어쨌든 명심해. 이 학교 근처에서 시끄러운 일 생기면 네놈부터 족칠 테니까!" "......" 지 맘대로야...... 하고 싶은 말 멋대로 지껄인 후 교무실 쪽으로 들어가 버리는 김원규의 뒷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성우가 그가 완전히 사라진 후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샌님 같은게......' 성우가 맞은 머리를 문지르며 터덜터덜 매점으로 향했다. "야, 한성우!" "......!" 방과후 오후 5시경. 성우는 학교 정문을 나서다 말고 반가운 얼굴을 보고 달음질 쳐 달려갔다. 민형, 교문 앞에서 성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민형, 정민형 이었다. 성우가 반가움에 단번에 내달아 민형의 등짝을 철썩 때렸다. "어쭈구리! 네가 여긴 왠 일이냐?" "아퍼, 짜샤......" 더럽게 아프네, 민형이 성우를 노려보았고 성우가 하하하 크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방학 때 보고는 처음인가? 같은 학교였을 때는 매일 붙어 다녔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 떨어져 있다 만나니 강회가 새로웠다. 성우가 반갑게 물었다. "야, 넌 학교 안가냐? 여긴 웬일이야." "우린 내일 모래 개학이야." "그래!? 우와~ 좋겠다! 3일을 더 놀잖아!" "흐흐, 부럽냐?" "짜식, 놀구 있네." 두 사람은 반가운 마음에 서로 티격대며 교문앞을 나섰다. 성우가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울엔 웬일이냐? 날 보러 온거냐?" "널 보러 왔지." "호모 같은 소리말고. 뭔 일이야?" 성우가 웃기지 말라는 듯이 한쪽눈썹을 찡그렸고 민형이 큭큭 웃으며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사실은 잡지사 갔다가, 네 생각도 나고 학교도 보고 싶어서 잠깐 들렀지 뭐. 별일 없지?" "별일이야 있겠냐. 김원규 선생님도 안녕하시고. 수학선생님도 아주 잘 계시다." 일부러 학생주임 김원규와 수학선생의 이야기를 꺼내는 성우. 민형이 쓰게 웃었다. 민형의 학교는 대전이라 서울보다 개학이 3일정도 더 늦었다. 마침 오늘 잡지사에 콘티를 보이러 올 일이 있어 서울에 올라왔다가 성우를 만나러 온 것이다. 운좋게 교문 앞에서 만날 수 있어 민형도 매우 기분 좋았다. 그럼, 오늘은 성우랑 좀 놀아 재끼다 바에 택시라도 타고 들어가 볼까. 민형은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성우를 돌아보았다. "너 오늘 시간 많지?" "없으면 가도 돼?" "그래, 가." "농담이야 농담~ 자! 어디 갈까!" "우선 배부터 채울까! 햄버거 먹으러 가자 햄버거!" "이 자식은 여전하구만......" 성우가 쓴웃음 지었고 민형이 크크 웃으며 앞서 걸었다. 좋구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니. 민형은 안좋은 기억이 있는 학교였어도 서울에서 자신의 모교였던 이강에 다시오니 훈훈한 추억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이 생각나고 불과 몇 달 만인데도 굉장히 오랜만에 온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민형은 언제나 성우와 걸었던 하교길 지름길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죽고 싶냐! 뒤져서 나오면 대가리 날아갈 줄 알아!" "......!?" 이게 무슨 소리야. 문득 성우의 민형의 귓가에 들려오는 난폭한 목소리. 민형과 성우가 소리가 나는 골목 쪽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민형과 성우의 눈이 커졌다. 골목에 이강실고의 여학생 2명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고 그 앞에 처음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3명의 남학생이 여자아이들을 협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돈만 가져 갈테니까 지갑만 내놔! 지갑 없어! 지갑!?" "야, 니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성우가 대뜸 외치는 한 놈을 불러 세웠고 타 학교의 3명이 민형과 성우 쪽을 돌아보았다. 성우를 본 여학생 두 명이 안심했다는 듯이 활짝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배님......!" "너희들 이리와. 이리와." 성우가 손을 까딱까닥 움직여 여학생들을 손짓했고 여학생들이 얼른 성우쪽으로 발을 옮기려 했다. 그 순간 앞서가던 여학생 한명이 따귀를 얻어 맞았다. "꺅!" "이 X이! 어딜 맘대로 가!!" "엄마!!" 타 학교 교복을 입은 3명중 한 명이 여학생의 따귀를 때린 것이다. 따귀를 맞은 여학생이 바닥에 쓰러졌고 다른 여학생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비명을 질렀다. 저 자식들!? 성우의 얼굴이 꿈틀 일그러졌고 민형이 침착하게 숨을 조아렸다. 뭐야, 저 녀석들은......? 설마 이강실고 앞에서 여학생들에게 삥을 뜯다니...... 학생 맞아? "너...... 죽고 싶어!!" 성우가 으름장 놓았고 타 학교 3인이 이죽거리며 성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 자식들......!? 성우가 꾸욱, 주먹을 움켜쥐었다. 뭐야, 이 새끼들. 이강실고는 전투고교 동맹의 중심. 감히 이강고 근처에서 삥을 뜯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성우가 까드득, 주먹을 움켜쥔 채 타 학교 3인을 노려보았다. 3명중 한 명이 땅바닥에 침을 뱉은 후 성우를 향해 한마디 던졌다. "뭐야 넌." "......!!" 어절시구리......! 뭐야 넌? 성우가 기가 막혀서 피식 웃었다. 이 놈들 오늘 회를 떠버린다. "형님들 사업하시는데 함부로 끼어 들면 안되는 거 모르냐 꼬맹아?" "이 새끼들......! 너희 어느 학교야!?" "우리? 태성고다 왜." "......!?" 태성고!? 그말을 듣는 순간 성우와 민형의 얼굴이 굳었다. 태성고라면 동맹고가 아닌가. 태성고의 보스인 박우중은 민형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 동맹고교라면 결코 다른 학교의 구역에서 삥을 뜯거나 폭력을 휘두를 리 없다. 하지만...... 하지만 그러고 보니 교복의 배지가 태성고잖아!? 성우가 민형을 돌아보았고 민형도 영문을 몰라 성우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성우가 다시금 타 학교 3인을 돌아보며 외쳤다. "이강은 동맹고야! 규칙도 모르냐 너희들은!" "규칙......? 그게 뭐야?" "너...... 박우중 몰라!?" "하......! 박우중!?" 박우중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마 자 3인의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 서렸다. 성우가 당황해서 질끈 주먹을 움켜 었다. 이것들 뭐야!? "그게 뭐?" "박우중이가 뭐 우리 아빠라도 돼?" "우리가 사업하는 거랑 박우중이 무슨 상관이야!?" 이거 뭔가 확실하게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군. 민형이 뿌득 인상을 쓰며 3인의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 계속 - 2001/05/30 (23:49) from 211.204.48.163' of 211.204.48.163' Article Number : 13 임달영 (mailto:임달영%20) Access : 2485 , Lines : 231 [소설] 고교 3년생의 사랑. #123 ## 고교 3년생의 사랑 ## PART-123 "박우중이...... 알아 몰라." "......!?" 나서는 민형. 비록 타교의 3인이 민형의 얼굴을 모른다고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침착하면서도 무거운 위압감을 내뿜는 민형의 분위기에 3인은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민형이 성우의 앞으로 걸어나가 타교의 3인을 향해 다시 물었다. "너희들...... 정말로 태성고야?" "새끼가 뭐라는 거야? 이 배지 보면 몰라? 배지?" "......" 태성고가...... 태성고의 박우중은 신의 있고 명예를 중요시하는 녀석이다. 태성고의 불량배들이 박우중을 우습게 보고 동맹 구역에서 돈을 뺐거나 하는 일이 일어날 줄은 민형은 생각도 못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놈들의 교복과 배지는 태성고의 것이었다. 민형이 낮게 물었다. "너희들...... 몇 학년이야." 낮은 목소리...... 민형은 화가 나 있었다. "그건 알아서 뭐하게?" "이x끼, 아까부터 건방져?" 3인중 두 명이 민형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거들먹거리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 순간 번쩍, 하는 느낌과 함께 두 명중 한 명이 복부를 움켜쥐고 쓰러졌고 다른 한 명이 골목 옆 전신주에 등 채로 들이 박혔다. "크헥!?" "커헉......! 헉......!" 녀석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민형의 주먹과 발 공격. 3인중 두 명이 한방씩에 전의를 상실하고 움직일 줄 몰랐고 남은 한 명이 기가 막힌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민형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너, 너 뭐야!? 너......!" "민형아!! 쟤들은 1학년이야!" 상황이 다급해진 것을 안 성우가 민형을 붙잡아 말렸다. 민형이 1학년을 상대로 함부로 주먹을 휘둘렀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소문이 나서는 좋을 게 없다. 성구가 민형을 붙들어 말렸고 민형이 빠드득, 이를 갈며 남은 한명을 노려 보았다. "미 ,미...... 정민형!? 으아......!!" 민형의 이름을 듣자마자 남은 한명이 꽁지가 빠지게 줄행랑 쳤다. 그래도 한 싸움 한다는 녀석들은 모두 민형의 존재에 대해서, 민형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주먹을 움켜쥔 채 분을 삭이지 못하는 민형의 팔을 붙잡고 성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민형을 향해 말했다. "태성 고교...... 어떻게 된 걸까. "동맹교에서 1학년이 삥 을 뜯다니......" 민형역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렇게 되면 태성고의 보스인 박우중을 만나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 민형이 성우를 쳐다보았고 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선배......" 그때 무서운 얼굴로 서 있는 민형과 성우를 향해 돈을 빼앗기던 두 명의 여학생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감사를 표현했다. 민형은 그제야 자신의 얼굴이 귀신같이 일그러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표정을 풀었다. "그, 그래. 너희들은 어서 가봐라." 민형의 말에 다시 한번 꾸벅 고개를 숙이고 달음질쳐 달려가는 후배 여학생들, 민형은 그런 그녀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엇인가 불안한 바람을 감지했다. 강북이, 웬 지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그 날 저녁 민형은 성우와의 모처럼의 시간을 반납하고 태성고를 찾아갔다. 태성고의 보스인 박우중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자율학습중인 박우중과는 손쉽게 연락이 되었고 오래 기다리지 않고 근처 커피숍에서 박우중을 만날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오랜만이다 정민형. 한성우." 커피숍에 들어선 박우중을 본 민형은 눈을 크게 뜨고 신음했다. 태성고의 보스라는 녀석이...... 한쪽 눈은 안대를 하고 있고 왼팔이 부러져 깁스를 하고 있었다. 서먹하게 앞자리에 앉아 사과 쥬스를 시키는 박우중에게 성우가 물었다. "오랜만은 무슨......! 너 어떻게 된 거냐? 교통사고라도 났냐?" "좀......" 박우중은 이야기하기 꺼림직 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민형은 자리에 앉은 채 무서운 눈으로 박우중을 바라보았다. 박우중도 그런 민형의 시선을 느꼈는지 똑바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너희 학교 1학년이 이강실고 앞에서 여학생들에게 돈을 뜯더군." "......!?" 놀라는 얼굴의 박우중, 하지만 그는 곧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 얼굴에서 민형은 무엇인가가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민형이 다시 물었다. "네, 책임이야. 박우중." "미안하다......." 박우중이 신음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그, 미안하다는 말이 단지 후배 관리를 잘못 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민형과 성우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박우중이 견디기 힘든 목소리로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난...... 더 이상 태성의 오(대장)가 아니야.' "......!?" 그 말을 듣고 입을 굳게 다무는 민형, 성우가 놀라서 되물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네가 아니면 누구야!?" "......" 다그쳐 묻는 성우에게 박우중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말하기 괴로운 얼굴이었다. 민형이 무겁게 물었다. "누구야. 네가 아니라면." "일......" 일!? 설마. 민형과 성우의 눈이 커졌다. "일학년이야......" "뭐라고!?" 박우중에 대답에 끝까지 평상심을 유지하던 민형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주위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놀라서 이쪽을 돌아 보았고 성우가 쓴웃음 지으며 꾸벅꾸벅 고개 숙여 사과했다. 박우중이 차마 말하기 힘들다는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태성은 1학년이 움직이고 있어. 이강과의 동맹도...... 이젠 의미 없어. 우리 태성은 창명과 동맹을 맺었다." "창명......!?" 창명고교!?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인데! 민형과 성우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것 보다 동맹을 깨다니......! 어째서!? "왜 동맹을 깼지? 이강에서 부당한 요구를 했을리 없잖아......!" "너희는 강북이잖아......! 우리는 강남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서울연합에 강남과 강북이 어딨어!?" "우린...... 상관 있어. 강북에선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니까......" "......!?" 그말에 민형이 말을 멈추고 박우중을 노려보았다. 그때 마침 우중이 시킨 사과주스가 나왔고 우중은 힘겹게 그 사과주스를 입에 댔다. 잠시 말이 없이 민형의 시선을 피하던 우중이 힘들게 말문을 열었다. "창명의 석영현이...... 강남일대를 쑤시고 있어." "석...... 영현?" 처음 듣는 이름. 민형이 집중했고 박우중의 이야기가 계속 되었다. "불과 몇 달 되지 않았어. 그래, 정민형 네가 대전으로 내려간 직후라고나 할까...... 석영현을 중심으로 창명이 서울연합 동맹을 깨고 자치 선언을 했어. 알다시피 동맹을 깨면 지켜주지 않을 뿐 헤 꼬지 하지는 않잖아......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어." "......" 문제가 그게 아니라니? 민형이 눈빛으로 다그쳤고 박우중이 입술을 떼어냈다. "새로운 동맹을 만든다고...... 강남부터 쑤시기 시작 한 거야. 그것도 무작위로, 강남에서 서울 연합에 가입한 학교의 반 이상이 강제로 탈퇴했어. 석영현의 협박에 못 이겨서 말이야. 그놈은 각 학교의 대장을 상대해서 깨어놓고 1학년을 보스로 앉혀. 자신의 말대로 움직이기 쉽게 말이야." "뭐 그런 놈이......!?!?" 듣다못한 성우가 버럭 소리쳤고 또다시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성우가 무안해서 고개를 숙였고 민형이 대꾸했다. "왜 이강에 알리지 않았지. 동맹이 지켜 줬을 거야." "알다시피 우리는 강남이야. 강북에서 손을 쓰되 디테일 하긴 어려워. 놈 들은 그 점을 노린 거야. 게다가 너도......" "......!" 그 말과 함께 민형의 가슴이 뜨끔 저려왔다. "총 보스인 너도 없잖아. 놈들은 그걸 알고있어. 서울동맹은 정민형을 중심으로 지켜졌어. 정민형이 서울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흔들리는 거란 말이야." "그런......!" 민형이 이를 악물었고 성우가 민형의 팔을 붙잡았다. 흥분하지마 민형. 박우중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야. 성우가 눈으로 민형을 진정시켰고 민형이 작게 숨을 몰아쉬며 무서운 눈으로 박우중을 쳐다보았다. "창명의 석영현이라고...... 그놈은 제대로 된 동맹을 만들 수 없어." "나도 알아. 그놈은 단지 난봉꾼이야. 규칙도 없고 창명을 중심으로 도는 학원가는 난장판이야. 크고 작은 패싸움이 일어나고 사고도 많아. 질서가 없어. 하지만 너도 알잖아. 힘이 질서야! 석영현을 깨지 못하는 한 놈을 막을 수 없는거잖아!" 벌떡! 그순간 민형이 일어섰다. 그리고 외쳤다. "넌 너희 학교가 다른 학교에 지배를 받는데 움직이지 않는 거냐! 그러고도 오야!? 캡틴이야!?" "......!" 쩌렁쩌렁 외치는 민형. 박우중이 고개를 숙였고 주위 사람들이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안 싸웠어! 동맹에 도움 요청할 생각도 안하고! 싸우기도 전에 진 거야!?" "그게 현실이야! 태성 뿐만 아니라 반수가 넘는 동맹고가 항복했어! 그들이 전부 나 같은 비겁자 일까! 그건 아니야!!" "......!!" 나 같은......! 나 같은 비겁자!? 자신을 비겁자라고 얘기하는 박우중의 말을 듣고 민형은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민형이 아는 박우중은 적어도 비겁자가 아니었다. 그는 신의 있고 강직한 남자다. 하지만 그런 남자가...... 자신을 비겁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민형은 씁쓸함과 함께 울컥울컥 화가 치밀었다. "미안하다......" "......" 민형이 사과했고 박우중이 고개를 숙인채 어깨를 떨었다. 그 떨리는 어깨엔 지금까지 지켜왔던 긍지와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것이, 그것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나이의 긍지가. "힘이 없어....... 그래, 난 힘이 없어. 부탁해 대장! 대전으로 내려갔다고 우릴 버린 건 아니잖아!" "......!!" "너만 움직인다면 난 할거야! 창명과 싸운다! 다른 학생들이 피해를 입지 않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형 네 힘이 필요해!" 결사적으로 외치는 박우중! 그리고 민형은 그런 우중을 향해 진지하게 대꾸했다. "돕는다! 이건 내 일이야!" "후우......" 민형이 들어가 있는 커피숍 주변에 수십대의 오토바이가 모여 있었다. 바로 창명 고교생들의 오토바이, 그 중앙에 검은색 오토바이 좌석에 앉은 한 고교생이 가볍게 담배 연기를 하늘로 날려보냈다. "정민형이라...... 어떤 녀석이냐......"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띄운 고교생의 이름은 '현준'. 바로 석영현의 왼팔이자 창명의 서드(3인자)인 남자. 그리고 그의 주위에 모여 있는 창명고교 생들, 길가던 행인들이 겁먹은 채 슬금슬금 창명의 무리를 피했고 그들은 여유있게 거리를 점령한 채 커피숍 안에 들어갔다는 민형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전설답게 거창하게 생겼으면 좋을텐데 말이야......" 현준이 바닥에 담배꽁초를 떨어뜨리며 웃었다. - 계속 - 2001/06/20 (21:57) from 211.178.5.86' of 211.178.5.86' Article Number : 14 임달영 (mailto:임달영%20) Access : 1961 , Lines : 205 [소설] 고교 3년생의 사랑. #124 ## 고교 3년생의 사랑 ## PART-124 - 부릉부릉! - 부릉! 커피숍 앞에 모여 있는 수 십 대의 오토바이들이 저마다 개성 있는 엔진소리를 내뿜으며 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명 고교의 3인자인 현준이 이끄는 오토바이 부대. 그들은 노리는 표적은 오직 하나. 바로 서울에 올라와 있다는 이강의 전 보스 정 민형을 묵사발 내는 것이었다. "부디 재미없는 얼굴을 하고 나타나진 말아줘라..... 정민형." 담배 연기를 내뿜는 현 준. 그런 오토바이 그룹을 슬금슬금 피해 지나가는 행인들이 제대로 오금을 펴지 못했다. 그때 1층으로 통하는 입구로 3명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들은 바로 박우중과 성우, 그리고 창명고교 생들이 그렇게나 기다리고 있던 정민형이었다. "......!" 민형은 커피숍을 나서자 마 자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뭐지? 자신들의 앞에 수십 대의 오토바이가 둘러싸고 엔진 소리를 울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익숙한...... 그래, 익숙한 폭풍전야의 분위기이다. 성우와 박우중도 낌새를 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 순간 현준이 외쳤다. "넌 박우중이구나!" "......!?" 웃, 깜짝 놀라는 박우중.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박우중이 소리친 쪽을 돌아보았고 그 앞엔 현준이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박우중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아뿔사, 이 놈들 정보망을 너무 얏 보고 있었군, 박우중의 얼굴에 주루룩 식은땀이 한방울 흘렀다. 이 녀석들...... 벌써 민형을 칠 준비를 하고 온 건가? 박우중이 민형과 성우를 등으로 가리며 앞으로 나섰다. "창명의 현준...... 뭐 하러 온 거냐 여긴." "네 등뒤에 있는 녀석들은 누구시지?" 뻔히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은근한 얼굴로 묻는 현준. 박우중이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 친구들이다. 네놈들은 관계없어." "그래? 소개 좀 시켜 줘." "......!" 제길, 집요한 놈...... 박우중이 입술을 깨물었고 민형과 성우가 서로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뻔하다. 민형과 성우는 순간적으로 적의 동태를 파악했다. 오토바이가 12대. 그리고 바닥에 내려서 있는 녀석들까지 언뜻 모두 16명이었다. 16명...... 전국 최강 정민형과 그의 오른팔 한성우가 싸운다면 상대하지 못할 인원만은 아니다. 성우와 민형이 서로에게 신호를 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는 거냐 박우중! 소개 좀 시켜 달라니까......!!" "......!" 크크, 웃으며 외치는 현준. 박우중이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망설였다. 이대로 현준에게 민형과 성우의 신분을 알리면 남겨진 것은 하나뿐이다. 오토바이까지 타고 있는 저 놈들을 이긴다는 건 아무리 정민형 이라고 해도 불가능하다. 박우중은 그렇게 생각했다. "너부터 이름을 말해봐." "......!?"" 그때 고민하는 박우중을 밀어내고 민형이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민형의 질문에 현준이 으응? 하는 얼굴로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넌 뭔데...... 목소리가 그렇게 거만한 거냐?" "정민형이다." "......!?!?" 우옷? 순간 장내가 웅성거렸다. 정민형, 그렇군. 역시 박우중과 커피숍에서 접선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었군. 패거리들이 동요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현준은 낮게 시선을 내리 깔았다. 오라...... 저놈이 정민형. 키는 180이 채 안 되는 것 같고 주먹도 그리 세 보이지 않는군...... 하지만 저 위압감. 그것만은 진짜도. 현준은 창명의 3인자로서 강한 적의 세기를 느끼는 재주가 있었다. 전혀 당황하지 않고 떨지도 않는 저 처세. 처음 봤는데도 느껴지는 분위기만으로는 창명의 1인자 석영현과 동급이었다. '아니, 그 이상......' 인정하긴 싫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현준이 오토바이에서 내려왔다. 자기도 모르게 한 행동. 원래 오토바이에서 내려올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민형의 등장에 오토바이 위에 계속 앉아 있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네가 정민형이군......" "그래, 넌 누구지?" "내 이름은 현준. 창명의 써드지." "들어본 적 없는 걸." 태연히 대답하는 정민형. 삐직, 현준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흥, 도발까지 할 여유가 있으시다...... 과연 전 서울동맹 총 보스다운 여유로군. 석영현은 흥분을 참으며 담배를 한 개비 더 피워 물었다. 이쪽은 17명이다. 아무리 총 보스라고 해도 저쪽은 겨우 3명, 거기다 박우중은 아마 싸움에 합류하지 않을 것이다. 겨우 두 명. 얼추 계산해도 저쪽은 한명당 8명의 적을 상대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 여기서 밟아 주지 정민형......! >> 이것은 석영현의 지시 없이 현준이 독립적으로 발동시킨 계획이다. 창명의 써드인 현준은 주먹도 세지만 정보 전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정민형이 서울에 올라왔다는 정보를 캣취한 것도 그였다. 현준이 신호를 했고 16명의 창명 패거리들이 앞으로 스윽 걸어나왔다. "우린 서울동맹을 탈퇴했다. 그래서 전 보스에게 예를 갖추려고 찾아왔지......" "그래?" 도발하는 현준에게 태연히 대꾸하는 정민형. 그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예를 갖출 필요는 없어." "뭐......?" 이게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야? 현준이 약오른 얼굴로 민형을 빤히 바라보았고 민형이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탈퇴는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뭐라고......!" 이게 어디서 농담 까고 있어!! 실룩거리는 현준의 눈썹.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보이는 구 만! 하지만 여유 부리는 것도 여기서 끝이다!! 현준의 신호와 함께 16명의 패거리가 동시에 민형과 성우에게 달려들었다. '제, 제길......!?' 끝장이다!! 맞서서 싸워야 하나! 민형과 성우를 돕는다고 해도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박우중은 절박한 상황에 빠졌다. 여기서 창명에게 대적하면 태성은 창명의 적이 된다. 그렇게 되면 태성도 끝장이다! "넌 비켜 임마." "......!?!?" 그때 속삭이는 성우. 박우중이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 박우중에게 슬쩍 웃어주는 여유있는 얼굴의 성우가 우중의 눈앞에 있었다. "넌 낄 데가 아니야." "서......!?" 낄 데가 아니라니......! 낄 데가......!? 문득 박우중은 성우의 말이 가슴속에 와 닿았다. '날 위해서......!?' 그런가!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해져 있는 우중을 성우는 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자신들을 도와 싸웠다가는 창명의 표적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박우중에게 끼어 들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중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길...... 아무리 그래도...... '그래도......' 단 두 명으로 어떻게 저 녀석들을 상대한단 말이야! 역시 놔 둘 수 없어! 우중의 혈기가 끌어 올랐고 비록 태성이 창명의 표적이 된다고 해도 여기서 민형, 성우와 함께 싸울 것을 선택했다. 그래, 친구를 배신하면 그 자리에서 끝장이다! 성우와 민형은......! 적어도 친구가 아닌가! 박우중이 그렇게 결심하고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들었다. - 퍼어억.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토바이의 헤드라이트 불빛과 함께......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한명의 창명고 생이 공중에 떴다.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그 순간이 마치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무표정한 민형이 우뚝 서 있고 그 옆으로 달려들던 패거리 하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굴렀다. 우중이...... 입을 떠 억 벌리고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하......" 설마, 설마 이런 일이......? "한방......!?" - 퍼억!! - 팍!! 한방에!?!? 이게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투로 눈을 크게 뜨는 우중! 하지만 현실은 더 대단했다. 그저 몇 발짝 앞으로 걸어 나가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창명고 생을 한방씩 후려치는 민형. 그때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창명의 패거리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져 움직이지 못했다. 어느새 3명,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4명이 쓰러졌다. 거짓말이지......!? 이건 거짓말이야! 인간이 저럴 수가 없어! 체력은!? 4각은!? 박우중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서서 그렇게 마음속으로 외쳐대었다. "우랏차!" "크억!!" - 콰당탕!! 하지만 대단한 것은 민형만이 아니었다. 유도로 단련된 성우. 그 역시 민형의 오른팔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민형의 사각에서 달려드는 녀석들은 모조리 성우가 붙잡아 처리한다. 즉, 민형은 4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4각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이었다. 자신의 시야에 잡히지 않는 적은 성우가 막아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자식들......' 10배 가까운 적을 상대로...... 이렇게 서로 믿으면서, 이다지도 엄청난 파괴력을 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서울 총 보스......?' 이게 서울의 모든 전투 고교를 무릎 꿀리고 혼자서 30명을 상대했다는 전설의 사나이 정민형 이란 말인가! 그 소문도, 그저 전설이 아니고 사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박 우중이 몸을 떨었다. "이게...... 무슨......?" 그리고 눈앞에서 추풍 낙엽처럼 쓰러지는 자기의 친구들을 멍하나 바라보며 현준이 멍하니 눈빛을 떨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 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니...... 현준의 얼굴이 식은땀으로 가득해 졌다.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래, 싸우기 시작한 시간은 고작 5분이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증거로 오직 경찰도 나타나지 않았다. 패사움이 벌어진 커피숍 앞에는 이미 관중들조차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현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서 도망치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16명의 동료들이...... 모두...... 모두 단 두 명의 남자에게 묵사발이 났던 것이다. '거짓말이야......' 5분도 채 안 되서 싸움으로 단련된 16명을...... 단 둘이서 헤치우다니. 현준의 등이 오싹하게 달아오르고 식은땀이 흥건해 졌다. "오랜만에 움직이니까 뻑뻑한데 그래." 뚜두둑, 목을 움직여 소리를 내며 성우가 바지를 털었다. 숨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상처도 하나 없었다. 그러나 진짜 무서운 것은 성우가 아니었다. 한명의 남자. 그 남자는 아까부터 싸움이 끝날 때까지 한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단지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서 달려드는 적을 주먹하나로 때려눕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해치운 상대는 총10인. 발 끝하나 움직이지 않고 한 손으로만...... 달려드는 10명의 적을 해치웠다. 그 경이적인 남자의 이름은 정민형. 전 서울연합 총 보스 정민형이었다. "너...... 너 뭐야!!!!" 현준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뭐야!?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지!? 말이 안되잖아! 4각은!? 체력은!? 인간의 반사신경 이라는 게 한계가 있는 거잖아! 고등학생...... 맞아!! 폭력배라도 어떻게 이렇게 다수의 공격을 가만히 서서...... 현준은 현재 도저히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상태였다. "서드 라고 했지." 흠칫, 놀라는 현준. 민형이 고개를 들었고 그 압도적인 위압감이 현준의 몸을 떨게 만들었다. 이길 수 없다...... 도저히 이길 수 없어. 현준이 몸을 떨었고 민형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대장을 데려와." 그 말은. 현준의 직속인 석영현의 한마디 보다 더 무시무시하게 현준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