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 계셔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하였다. 아 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산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반하였 다.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 사람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와서 이 곳을 신시라 일컬으니, 이분이 곧 환웅 천왕이다. 그는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들 무릇 인 간의 삼백 예순 가지나 되는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에게 사람 되기를 빌었다. 때마침 신이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였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곰은 기한 지 삼칠 일에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능히 기하지 못하였으므로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여자가 된 곰은 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단수 밑에서 아기 배기를 축원하였다. 환웅은 이에 임시로 사람으로 변하여 그와 결혼해 주었더니, 여자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 다. 이름을 단군 왕검이라 일렀다. 단군은 요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요 임 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이니 50년은 정사이지 경인은 아니다. 아마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 같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불렀다. 또 다시 도읍을 백 악산 아사달에 옮겼다. 그 곳을 또는 궁-혹은 방자로도 되어 있다-홀산 또는 금미달이라 한 다. 그는 1천 5백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의 무왕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 자를 조선에 봉하매,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이 되 었는데, 그 때 나이가 1천 9백 8세였다. 갈래 - 신화(서사) 성격 - 건국신화(개국신화) 내용 - 단군의 탄생 및 고조선 건국의 경위 주제 - 홍익인간의 이념과 단일 민족의 역사성 의의 홍익인간이라는 건국이념을 밝히고 있다. 천손의 혈통이라는 민족적 긍지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유구한 단일성, 역사성을 암시하고 있다. 감상 '단군신화'는 환인, 환웅, 단군의 삼대기로 이루어져 있다. 환인은 역사적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고, 환웅은 초월적인 시간 속에서 역사적인 시간으로 들어오고, 단군은 역사적인 시간 속에서 일정한 수명을 지닌다. 이러한 현상은 천상의 것보다는 지상의 것을, 수직적인 질서 보다는 수평적인 질서를 더욱 중요시하는 사유 방식의 표현이다. 인간 중심 사상의 근거 -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 환웅과 웅녀의 혼인의 상징성 신과 인간의 결합 천상과 지상의 결합 천신 숭배 부족과 곰 토템 부족의 결합 선주족과 이주족의 결합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을 보여주는 상징물 - 천부인 세 개 단군신화는 현존 신화 중 가장 오래되었다. '환인 - 환웅 - 단군'의 삼대기이다. 민족 영웅 서사시의 원류가 된다. '신이한 탄생 - 신성한 결혼 - 등극 - 사후의 이적'의 구조이다. 민속적 금기 - 三七日 '기한지 21일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다.'의 신화적 의미 고난 시련 극복의 과정 새로운 생명의 탄생 과정 수성 제거의 주술성 후대의 서사시 - 제왕운기 - 이승휴 이 신화에 나타난 사상 - 토템 사상, 광명 사상, 산악 숭배 사상 , 숭천사상 하늘과 땅을연결하는 제의적 공간 - 신단수 동명왕(東明王)신화 형식 - 신화(서사), 건국신화, 개국신화 고도의 문학성을 지닌 개국 신화 남.북방계 신화소의 결합형 후대 서사문학의 구조에 영향(영웅의 일생) 표현 - 간결하고 소박함. 설화적 구성 주제 - 고구려의 건국 의의 우리 나라 문헌 설화 중 높은 문학성을 갖춘 작품 여러 가지 원초적인 신화소가 복합되어 있으며, 난생 설화 중 유일한 인생설화이다. 영웅의 일대기는 후대 서사 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조력자의 기능 - 고기와 자라 백발백중 쏘는 장면 - 설화의 전기적 구성과 신화에 나타난 영웅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구 절 신화적 요소 햇빛이 몸을 쫒아가며 비추어 잉태함 알에서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옴 아이가 기골이 영특하고 기이함 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아 줌 주몽의 영웅적 생애 고귀한 혈통 비정상적 출생 탁월한 능력 소유 성장 후의 위기 위기의 극복과 영웅적 사업 성취 해모수와 유화의 만남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물을 다스리는 하백의 딸 유화와의 결합은 결국 천신과 수신의 결합 으로서 비정상적이며, 기본 질서에 대한 반항이 내재된 새로운 세계의 실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또 유화가 임신한 뒤 버림받았다가 구출되는 일련의 고난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 키기 위하여 모체가 죽음을 체험하는 과정의 상징적 표현일 수도 있다. 주몽의 탄생과 신화성 주몽의 탄생 설화에서 햇빛이 유화의 몸을 따라가며 비춘 것은 하늘과의 연관이 지속되었음 을 의미하며, 그 결과 알을 낳는데 알은 '세계'를 상징한다. 세계는 깨뜨려져서 하나의 새로 운 질서를 창조하는데, 그 창조자가 바로 동명왕인 것이다. 알을 새나 짐승이 보호하는 것은 신성한 존재임을, 활과 화살은 바로 제왕의 상징이 된다. 화살은 햇살과 같은 의미로 활을 잘 쏜다는 것은 해를 통어하는 존재, 즉 왕을 의미한다. 감상 고구려 성업을 이룩한 주몽의 건국 신화로 원초적인 여러 가지 신화소를 바탕으로 하여 위 대한 영웅의 생애를 보여 주고 있다. 영웅의 생애는 고귀한 혈통, 비정상적 출생, 탁월한 능 력 소유, 기아로 고난을 겪음, 보호자가 양육, 성장 후 위기를 맞음, 위기를 극복하고 위대한 승리를 한다는 형식을 따르는데 주몽은 천신과 수신이 연관되는 고귀한 혈통이며 알에서 태 어나는 비정상적 출생을 하는 등 일련의 과정이 그에 일치하고 있다. 이 신화에서는 유화는 수신인 하백의 딸이고, 해모수는 천신인 천제의 아들이다. 따라서 동 명왕의 부계는 '천제-해모수-동명왕'이며, 모계는 '하백-유화-동명왕'으로 '단군신화'와는 모계가 지상의 웅녀에서 하백의 딸로 바뀌었다는 차이가 있다. 영웅의 일대기가 원형으로 나타나 있어 후대 서사 문학에 영향을 미친 동명왕 신화는 민족 적 우월성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흥미성도 강조되고 있다. 동명왕편 한나라 신작 3년 아득한 옛날 하느님의 아드님 해모수왕은 오룡거에 올라타고 땅에 내렸다. 백일하 푸른 천하 맑고 맑은 곳 성북 땅 청하에 하백의 딸 삼형제 오늘도 웅심연에 무심히도 노닌다. 꽃같은 얼굴에 달같은 맵시 사냥갔던 해모수 넋을 잃고서 숨죽여 잠잠히 서서 볼 뿐 장려한 궁전을 못가에 세워 향그러운 미주를 갖추어 두니 조심스레 세 여인 들어와 앉아 대작하며 서로들 즐겨 놀다가 기어코 유화가 잡히어 간다. 하백은 노발대발 하릴없어서 사신을 시키고야 힐문을 하니 천제의 아들이라 청혼있을 뿐 흔연히 대답하고 수궁으로 달린다. 하백이 푸른 강에 풍덩실 뛰어 홀연히 잉어 되어 자의로 노니니 해모수는 수달되어 마구 덮치고 하백이 날개 붙여 꿩 되어 나니 해모수는 시랑되어 뒤를 붸는다. 신기한 술법은 헬 길 없어 답례로써 성혼을 이루게 한다. 하백은 강술을 취토록 권해 넋이 빠진 부부를 수레에 담아 똑같이 천상에 올려 보낼 새 수레가 물 밖으로 나기도 전에 해모수는 깜짝 놀라 일어나더니 구름타고 혼자서 날아갔고야. 성낸 하백 분한 생각 막을 길 없어 입술을 석 자 뽑아 우발수로 내쳤더니 부여국의 고기잡이 그물에 걸려 금와왕 궁전으로 불리어 가니 마침내 이 곳에서 자라 갔고야. 세월은 흘러 신작 계해년 됫박이라 큰 알을 낳았었고야 마구에 내던지고 산에 버려도 온갖 짐승 아는 체 보호를 한다. 그 속에서 옥동자가 태어났고야. 어느덧 고이 자라 성년이 되니 일곱 왕자 모두들 주몽을 꺼려 후환이 있으리라 죽이려 든다. 슬기로운 세 친구와 몰래 짜고서 남으로 달아나 엄수에 오니 물은 깊고 강가엔 배 한 척 없다. 주몽은 개연히 한숨 쉬고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 난을 비껴 여기 온 외로운 이 몸 신명이여 도우소서."활 들어 강을 치니 물고기에 자라들 열을 짓는다. 경개 좋은 땅에다 왕도를 여니 산은 높고 물은 맑아 살기가 좋고 스스로 위에 올라 군신 위를 나리셨도다. 동부여의 금와가 왕위에 올랐을 때,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금와는 그 여자에게 이 곳에 온 까닭을 물었더니, "나는 하백의 딸로, 이름은 우화입니다. 여러 아우들 과 놀러 나왔다가 자칭 하느님의 아들 해모수라는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나를 웅신산 밑 압록강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정을 통해 놓고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의 부모님 은 중매 없이 남을 따랐다 책하며, 저를 여기에 귀양 보낸 것입니다." 금와가 이상히 여겨 유화를 집에 두었더니 햇빛이 비쳐 몸을 피해도 쫓아가며 비추었다. 이로 해서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들이나 되었다. 왕이 버려서 개, 돼지에게 주어도 먹지 않 으며, 길에 버리면 소나 말이 피해 가고, 들에 버리면 새와 짐승이 덮어 주었다. 왕이 깨뜨 리려 해도 깨어지 않으니 도로 어머니에게 주었다. 어머니가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기골이 영특하고 기이하여 7세에 벌써 보통 사람과 다르게 뛰어났다.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하였다.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 몽이라 하기 때문에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금와에게 아들 일곱이 있었다. 항시 주몽과 같 이 노는데, 그 재주가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맏아들 대소가 왕께 아뢰었다. "주몽은 사람 의 소생이 아닙니다. 만약 일찍이 조처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왕은 이 발 을 듣지 아니하고, 주몽으로 하여금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은 준마를 알아보고, 이는 조금씩 먹여 여위게 하고, 노마는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진 말을 자기가 타고, 여 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의 어머니가 왕의 다른 아들들이 여러 신하와 함께 주몽을 헤치려 함을 알고, "이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하려 하니, 너의 재략으로 어디를 간들 사지 못하겠느냐? 속히 대책을 세우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주몽은 오이 등 세 벗과 도망하여 엄 수에 이르러, 물을 향해 이르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다. 지금 도망하는데 길에 뒤쫓는 자가 있어 따라오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 아 건너게 하고 사라졌다. 쫓아오던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은 졸본주에 이르러 도 읍을 정했다.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위에 초막을 짓고 살며, 국호를 고구려라 하 고 고씨로 성을 삼았다. 그때 주몽의 나이 열 두 살이었다. 이에 바탕하여 이광수가 [사랑의 동명왕]을 썼다. 박혁거세 신화(朴赫居世神話) 신라가 여섯 마을로 갈라져 있을 때,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6부의 촌장들이 알천(閼川) 언덕에 모여 임금 모시는 문제를 의논하고 있었는데, 양산 밑에 나정(蘿井) 곁의 한 숲에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곳에 가 본 즉 말은 큰 소리로 울며 하 늘로 올라가 보이지 않고 자줏빛 큰 알이 있었는데, 갈라보니 한 아이가 나왔다. 그 아이는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놀랍고 이상히 여겨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추는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고도 맑았다. 그 아이가 10여 세가 되자 유달리 숙성하였고 또 출생이 신비하여, 모두가 우러러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그가 태어난 알의 모양이 박[瓠]과 같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김알지 신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탈해왕(脫解王) 9년 왕이 밤에 금성(金城- 경주) 서쪽 시림(始林) 숲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가보니 큰 빛이 시림에서 비치고 자줏빛 구름이 하늘에서 땅에 뻗쳤는데, 그 구름 속에 금색으로 된 조그만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궤를 가져 오게 하여 열어 보니 조그만 아이가 있었으므로 하늘이 준 아들이라 생각하여 거두어 길렀 다. 지혜가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하였 다. 그리고 시림도 계림(鷄林)으로 고쳐 국호로 삼았다. 김수로왕 신화(金首露王神話) 이 이야기 속에 '구지가'가 전한다.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 지방에는 아직 나라 이름도 없 고, 또한 왕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이 때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 鬼干) 들의 구간(九干)이 있었다. 이들 수장(首長)은 백성을 통솔했는데, 대개 1백호 7만 5천 명이었다. 그 때 사람들은 거의 스스로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 아서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 광무제(光武帝) 건무 18년 임인(A.D.42) 3월 상사일(上巳日) 에 (그들이)사는 곳의 북쪽 구지(龜旨)-이것은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거북이 엎드린 형상과 같으므로 구지라 했다.-에서 수상한 소리가 불렀다.(구간들과) 마을 사람들 2,3백명이 거기 에 모이니, 사람 소리 같기는 한데 그 모습은 숨기고 소리만 내었다. "여기 누가 있느냐?" 구간들은 대답했다.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데이냐?" "여기는 구지입 니다." 또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명령하신 것은 이 곳에 와서 나라를 새로 세워 임금이 되 라 하셨다. 그래서 내려왔다. 너희들은 이 산 꼭대기를 파며 흙을 집으면서 '신이여, 신이여, 수로(首露)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 노래하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하 늘에서) 대왕을 맞이하여 (너희들은) 매우 기뻐서 춤추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그 말을 따 라 마을 사람과 함께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얼마 후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니, 자주색 줄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는 것이었다.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단이 붙은 보자기에 금합이 쌓여 있었다. 열어보니 황금색 알이 여섯 개가 있는데 해처럼 둥굴었다. 여 러 사람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수없이 절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보자기에 싸 가지 고서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서 탑(榻- 깔거나 눕는 좁고 기다란 의자) 위에 두고 무리들은 모두 흩어져 갔다. 1 2일을 지난 그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합을 열어보니 알 여섯이 모두 화하여 어린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가 심히 컸으며, 이내 평상(平床)에 앉았다. 여러 사람 들은 모두 절하고 하례하고는 극진히 공경했다. (어린이는) 나날이 자라 열 며칠을 지나니 키가 9척임은 은(殷)나라 천을(天乙-탕왕)과 같았고, 얼굴이 용안임은 한(漢)나라 고조와 같 았으며, 눈썹이 팔채(八彩)임은 당나라 요임금과 같았고, 두 눈동자를 가짐은 우나라 순임금 과 같았다. 그 달 보름날에 왕위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라하고 혹 수릉(首陵)-수릉은 죽은 뒤의 시호다.-이라 했다. 나라를 대가락(大駕洛) 혹은 가야국(伽 倻國)이라고 일컬으니 곧 육가야(六伽倻)의 하나이다. 방이설화 일명 '금추설화(金錐說話)'라고도 한다. "내 코가 석자" 라는 속담도 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신라시대에 방이 형제가 살았는데 형인 방이는 몹시 가난하여 구걸을 하며 살았고, 동생은 부자였다. 어느 해인가 방이가 동생에게 누에와 곡식 종자를 구걸했는데 심술이 사납고 포 악한 아우는 누에알과 종자를 삶아서 주었다. 이를 모르는 형은 누에를 열심히 치고 씨앗도 뿌려 잘 가꾸었다. 알 중에서 누에 한 마리가 생겨나더니 황소만큼 커졌다. 질투가 난 동생 이 와서 누에를 죽였지만 사방의 누에가 모두 모여 들어 실을 켜 주어서 형은 누에 왕이 되 었다. 또한 종자에서도 이삭이 하나만 나와 한 자가 넘게 자랐는데 어느 날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이삭을 물고 달아나자 방이는 새를 쫒아 산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밤을 맞은 방 이는 난데 없는 아이들이 나타나 금방망이를 꺼내어 돌을 두드리니 원하는 대로 음식이 쏟 아져 나왔다. 그는 숨어 있다가 아이들이 헤어진 후 놓고 간 방망이를 주워서 돌아와 아우 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다. 심술이 난 아우도 형처럼 행동하여 새를 쫒아가 아이들을 만나 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금방망이를 훔쳐간 도둑으로 몰려 연못을 파는 벌을 받고 코 끼리처럼 코를 뽑힌 후에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그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속을 태우 다가 죽고 말았다.(다른 책에 의하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방이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병 구완을 하여 병이 나았다.) 그리고 방망이는 후손에게 전해졌는데, 어느 후손이 "이리 똥 내놓아라."고 희롱했더니 갑자기 벼락이 치며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신라 사람 방이에 대한 설화. 형과 동생 사이의 갈등을 통하여 권선징악(勸善懲惡)을 보여 주고 있다. 지귀 설화 선덕 여왕 때에 지귀라는 사람이 여왕을 사모하다가 미쳐 버렸다. 어느 날 여왕이 행차하는 길을 막다가 사람들에게 붙들린 지귀는 여왕의 행차 뒤를 따르게 되었다. 여왕이 절에서 기 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지귀는 탑 아래에서 지쳐 잠들고 만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여왕 은 그 광경을 보고 금팔지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에 놓아 두고 갔다. 잠에서 깬 지귀는 금팔 찌를 보고서는 가슴이 타들어가 급기야 화신으로 변한다. 지귀가 불귀신이 되어 온 세상에 떠돌아 다니자 여왕은 백성들에게 주문을 지어 주어 대문에 붙이게 하였다 그 후 백성들은 화재를 면하게 되었다. 불은 남녀의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불은 긍정적인 불과 부정적인 양면 성을 띤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지귀의 사랑은 절제를 넘어선 욕망이라 보겠다. 한풀이 문학과 주술성 지귀 설화, 즉 심화요탑은 선덕 여왕이 주문을 지어 불귀신을 달래어 물리치게 된 연유를 지닌 불의 기능을 지닌 설화 문학이다. 한을 소재로 하는 전통은 우리 문학사에서 신라 시 대를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조 시대를 거치면서 오늘에까지 이어져 왔으며, 여기에는 주술성 을 동반한 풀이 기능이 곁들여져 나타나고 있다. 신라 향가의 혜성가, 도솔가, 처용가 등에 보인 풀이 기능은 '성조풀이','바리데기'등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불이 사랑과 결합하고 성적인 환기 작용을 한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 다. 불은 인간 생활에서 필요 불가결한 것이지만 인류의 문화를 말살하는 부정적인 면도 있 다. 사랑도 고귀한 가치로서의 사랑이 있는가 하면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도 파멸시키는 사 랑이 있다. 불은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었을 때에 긍정적인 의미를 붙일 수 있는 것처럼 소중한 사랑도 절제되었을 때 참다움을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불과 사랑은 외연과 내포에 서 동일한 목표를 향하고 있다. 절제된 불의 사용과 절제된 사랑, 화재와 무절제한 사랑의 방종, 그리고 자신을 태우며 연소하는 불과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고귀한 사랑을 성취하는 것과 같이 불과 사랑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한편 이 설화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화재 를 막기 위한 풍속을 사랑과 연관시켜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동설화 주제 - 민족적 영웅의 참요를 통한 욕구의 실현과 왕으로의 등극 의의 - 향가 서동요의 배경 설화, 영웅 설화의 원형을 지니고 있는 설화 감상 백제 지역에 전해지는 설화와 신라 지역의 노래가 합친 것으로 보여지는 이 설화는 설화 자 체보다는 '서동요'라는 4구체 향가의 배경 설화로 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동요'의 유래 담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설화가 완결되어 있어 노래와 설화가 결합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애초에 남녀 결합을 핵심으로 하는 민담이 점차 역사의 특정 인물 ' 무강왕, 무왕, 선화공주, 진평왕'과 결부되고 그러면서 사적 '남지, 미륵사' 등 증거물을 확 보해 가면서 전설화되었고, 이것이 사실화되어 기록으로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설화 는 크게 서동의 출생담, 결연담, 등극담, 사찰 연기담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요소의 강조에 따라 민중적 영웅의 일생담, 사찰 연기 설화, 양자가 복합된 설화로 분류되고 있다. 한편 신화제의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마한계의 수부지모형 신화로 보는 견해와 성년식 의 통과 제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서동의 역사적 정체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아 백제 무녕왕설, 동성왕설, 무왕설, 원효 설 등이 제시되고 있다. 서동설화는 용자로 태어나서 고난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다는 영웅 설화의 공식적인 과정 을 밟는다. 삽입된 서동요는 이러한 성공의 열쇠 구실을 한다. 또한 '서동요'는 내용상으로 재기발랄하고 야심많은 한 젊은이가 몽환적 사랑을 재치와 기지로 현실화시키는 한 영웅의 일대기 가운데에서 차지하는 에피소드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설화에서 우리는 영웅설화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주인공의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는 제재 - 금 이물교혼담(야래자설화) 내용 제 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모친이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의 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곳의 용과 정(情)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어릴 적 이름을 서동이라 하였 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서 생활을 하였으므로, 굴 인이 이에 의하여 이름을 지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서동은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갔다. 동네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서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에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얼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라 하였다. 동요가 서울에 퍼져 대궐에까지 알려지니 여러 신하가 임금에게 극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하였 다. 장차 떠나려 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노자고 주었다. 공주가 귀양처로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며 모시고 가겠다고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지는 모르나 우연 히 믿고 기뻐하여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는 것을 알 았다. 백제로 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내어 생계를 꾀하려 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였다. 공주가 "이것은 황금이니 가히 백 년의 부(富)를 이룰 것이다."하니, 서동 은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피던 곳에 흙과 같이 쌓아 놓았다."하였다. 공주가 듣고 크게 놀 라 "그것은 천하의 보물이니 지금 그 소재를 알거든 그 보물을 가져다 부모님 궁전에 보내 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였다. 서동이 좋다 하여 금을 모아 언덕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 사자사(龍華山獅子寺)의 지명법사에게 가서 금을 옮길 방책을 물었다. 법사는 "내가 신력(神 力)으로써 보낼 터이니 금을 가져오라."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에 갖다 두었다. 진평왕이 그 신비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며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부터 인 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설씨녀와 가실 '설씨녀'는 가실의 인정과 설씨녀의 의리를 부각시키며, 이들 사이의 사랑에 따른 고난을 다 루었다. 여기에는 일반 백성의 삶이 고귀한 신분의 삶 못지 않게 훌륭한 측면이 있다는 사 실이 담겨 있을 뿐더러 빈번한 전쟁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백성들의 고난도 담겨 있다. 또한, 위기에 몰린 설씨녀와 가실의 사랑이 극적으로 이루어지는 서사적 구조의 단단함도 있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 구조에 근접하는 이 설씨녀는 단순한 설화에 그치지 않고 훌륭한 한 편의 서사물을 이루고 있다. 경주에 사는 설씨(薛氏)는 늙은 홀아비로 오직 딸 하나만 데리고 살았다. 설씨의 딸은 재색 을 겸비하였다. 그런데 진평왕 때에 이 늙은 홀아비도 병역의 의무는 치르게 되었다. 국방 경비를 위한 소집 영장이 나왔다, 늙고 병든 아비를 보내느니 차라리 자기가 나가고 싶지만 여자의 몸으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사량부(沙梁部)에 설씨의 딸을 좋아하는 가실(嘉 實)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가실은 설씨의 집에 딱한 사정을 알고 뛰어 와서, 자기가 대신 군 대에 나가겠다고 제의했다. 설씨 부녀는 이 기적같은 원조에 당황하기도 했으나 무척 반가 웠다. 설씨는 가실에게 "나를 대신하여 군대에 나가겠다니 기쁘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네. 그대의 은혜를 갚을 생각이니 만약 그대가 내 어린 딸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아내로 맞아주면 어떨지 ?"라고 운을 떠 보았다. 이것은 가실이 원하던 바였다. 딸은 거울 하나를 꺼내어 반을 갈라 한 조각은 가실에게, 나머지 한 조각은 자기의 품에 넣고 뒷 날 혼인할 때의 신표(信票)로 삼았다. 가실은 설씨녀에게 말 한 필을 주며 "이것은 천상(天 上)의 좋은 말이니 내가 없는 동안 맡아서 기르시오." 하고 의젓이 전쟁터로 나갔다. 3년이 면 돌아오게 되어 있는 가실은 기한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나이는 아흔에 가 깝고 딸의 나이도 혼기(婚期)를 넘기게 되었다. 아버지는 딸에게 다른 신랑감을 찾아서 가기 를 강요한다. 그럴 때마다 딸은 "신의를 저버리고 언약(言約)을 어기면 어찌 사람이라고 하 겠습니까?"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 모르게 이웃 청년과 혼약을 맺었다. 딸은 항상 가실 이 두고 간 말을 쓰다듬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그 말과 함께 집을 떠나 버리려고 했으나 실 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실이 돌아왔다. 그러나 몰골은 해골처럼 마르고 옷은 남루 하여 집안 사람들은 그가 가실인 줄을 몰랐다. 배고픔과 싸움에 지친 가실은 전혀 딴 사람 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가실은 거울을 내던졌다. 딸이 그것을 주워 자기의 것과 맞추어 보니 꼭맞았다. 가실이 분명했다. 기뻐하며 그들은 정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망부석(望夫石) 설화 신라 초기 내물왕이 즉위한지 36년 경인(庚寅, 390 A.D)에 일본이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앞으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표로 왕자 한 사람을 보내어 달라고 하므로, 셋째 아들 미해(美 海)를 보냈더니 돌려 보내지 않았다. 또 눌지왕 때에 고구려가 화친한다는 이름 아래 왕자 보해(寶海)를 보내 달라고 하므로 부득이 하여 눈물을 머금고 보냈더니, 역시 돌려 보내지 않았다. 이에 눌지왕은 아우 둘을 남의 나라에 두고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이를 안 박제 상은 고구려로 가서 보해를 구해냈다. 다시 일본으로 왕의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데리러 간 박제상(朴堤上)이 왕자를 구출했지만 자신은 돌아오지 못했다. 왜왕에게 환심을 산 후 미해 를 신라로 귀국시킨 박제상은 붙잡혀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 왜왕이 박제상에게 미해 를 빼돌린 이유를 묻자 제상은 자신은 신라의 신하지 왜왕의 신하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 러자 왜왕은 왜국의 신하라 한다면 상을 주겠다고 하자 제상은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은 받지 않겠다고 거절한다. 제상은 왜왕에게 다리 가죽을 벗기 고 갈대 위를 걷는 형벌, 뜨거운 쇠 위에 세워놓은 형벌 등을 받고, 결국은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아내가 자녀를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일본을 바라보며 박제상을 기다리다 가 돌이 되었다. 뒤에 사람들은 그녀를 치술령의 신모(神母)로 모시고, 이를 소재로 지은 노 래가 '치술령곡'이다. 연오랑과 세오녀 신화의 흔적을 갖춘 우리 나라 유일의 일월 신화 동해 바닷가에 살고 있는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일본으로 건너가 버리자 신라의 해와 달 이 빛을 잃었다. 이에 사자를 일본에 파견해서 세오녀가 짠 비단을 가져다 제사를 지내니 해와 달이 다시 빛을 찾았다고 한다. 연오랑은 일본 임금이 되었다고 하는데, 일본측 자료와 비교해 보면 일본 건국 시조 신화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우리 나라에 있는 '영 일'이란 지명은 이 설화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해와 달의 생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설화는 일월신화(日月神話)의 흔적을 간직하 고 있다. 더구나 일본 측의 자료를 보면 이 설화가 일본의 건국신화와 관계 있음도 알 수 있다. 또 우리 나라의 영일(迎日)이란 지명도 이 이야기와 관계 있다. 신라 8대 임금 아달라(阿達羅) 왕 때의 일이다.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 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다 위에 홀연히 바위 하나가 나타나자, 연오랑은 이것 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는 바위를 타고 온 이 사람을 왕으로 모셨다. 한편 아 내인 세오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궁금하여 바다에 나가 보았 다.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 자기도 그 바위에 올라탔다. 그리하여 세오녀도 일본으로 건너가 남편을 만나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이 부부가 신라 땅을 떠나 뒤부터 해와 달이 빛 을 잃었다. 왕은 천문을 맡은 신하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 신하는 "해와 달의 정 (精)이 우리 나라에 있다가 이제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곧 사람의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연오랑 부부을 귀국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연오랑은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 홀홀히 돌아갈 수 있겠소. 그 러나 나의 아내가 짠, 가는 명주를 줄 터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하늘에 제사하면 해와 달 이 다시 빛을 발할 것이요." 라고 말하며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그 비단을 가지고 와서 하늘에 제사했더니 과연 해와 달이 옛날같이 빛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 명주를 국보로 모시 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했고,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이라고 하였다. 구토설화 배경- 선덕 여왕 때 김춘추가 청병하러 고구려에 갔다가 옥에 갇히게 되자 선도해가 탈출 할 꾀를 이 설화로 암시함. 갈래 - 설화, 민담 의의 - 인도의 용원설화 계열의 우화 소설로, '별주부전'의 근원 설화가 됨. 풍자와 교훈성을 내포한 동물 우화 설화 소설적 수성에 가까운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어 소설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주제 - 위기를 지혜로써 극복함(토끼), 분수에 넘치는 행위 경계(거북) 특징 - 의인체의 동물 우화 성격 - 우화적, 풍자적, 우의적, 허구적 내용 - 우직한 성격의 거북과 간교한 성격의 토끼의 지혜 경쟁을 주지로 한다. 위기 극복의 지혜 분수에 넘치는 행위 경계 속이고 속는 세태의 풍자 지혜의 경쟁을 풍자 구토설화의 발전 과정 용원설화→구토지설→수궁가→토끼전,별주부전→토의 간 구토지설의 변용 용왕과 거북이로 형상화된 지배 계층이 토끼로 형상화된 피지배 계층을 속여 수탈하려 하자 이를 지혜롭게 벗어난다는, 극적 갈등을 가진 이야기로 전개될 소지가 있었다. 수궁 가, 별주부전 우화의 특징 동물이나 식물에 의탁된다. 항상 비유적으로 표현된다. 구성면에서 우연성을 띤다. 도덕적 교훈적 내용을 담는다. 우화의 속성 인간의 속성을 동물에 의탁한다. 도덕적이며 교훈적인 내용을 담는다 항상 비유적으로 내용을 표현한다 사람의 관습적인 특성이 투영된다 조선 후기에 민중에 의해 변용될 때 부각된 측면 - 수탈자와 모면하려는 자의 대립 비유 - 토끼 - 김춘추, 거북 - 고구려 보장왕 성격 대조 - 토끼의 임기응변성과 거북의 우직성 행위의 상징성 토끼 - 힘의 횡포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전술 거북 - 권력자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해 약한 백성을 속이려는 간계 감상 난관에 빠져서도 당황하지 않고 슬기를 모아 어려움을 헤쳐 나오는 토끼에게서 삶의 지혜와 자세를 배울 수 있다. 이것은 인도의 본생경의 불전설화인 용원설화를 모태로 한 것이며, 후 에 수궁가, 별주부전 등의 근원설화가 된다. 배경설화에서 보듯이 이미 고구려에서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서 한 마디로 그 주제를 요약 하기는 어려우나 지혜의 경쟁을 주지로 한 우화, 속고 속이는 인정 세태 풍자, 위기 극복의 지혜, 분수에 넘치는 행위의 경계 등으로 볼 수 있다. 내용 요약 옛날 동해 용왕의 딸이 병들어 앓고 있었다. 의원이 말하기를 토끼의 간을 구해서 약을 지 어 먹으면 낳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다 가운데 토끼가 없으므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때 한 거북이 용왕께 자신이 구해오겠노라고 아뢰었다. 거북은 마침내 육지에 올라 토끼 에게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 한 섬이 있고 그곳에는 맑은 샘과 맛있는 과일이 많고 날씨도 적당하며 매나 독수리들도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한 2, 3리 헤엄쳐 가다가 거북이 토 끼를 돌아보며 잡아가는 진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토끼는 말하기를 "나는 신령의 후예이 므로 간을 내어 씻었다가 다시 넣곤 한다. 마침 그것을 내어서 바위 위에 말려두었다. 나는 간이 없어도 사는데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는냐 ?"고 했다. 거북은 토끼의 이 말을 믿고 토끼 를 도로 업고 돌아서서 육지로 올라갔다. 토끼는 풀숲으로 뛰어들어가며 거북에게 말하기를 " 어리석구나. 이 거북아. 어찌 간 없이도 사는 놈이 있단 말이냐 ?" 하였다. 거북은 가련하 게도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이 설화는 토끼로 대표되는 평범한 인물의 지혜로운 행동과 거북, 용왕으로 대표되는 지배 자의 강압과 무능함을 대비시켜 토끼의 생기발랄한 성격도 보여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후 대 판소리, 소설로도 전승된다. 이 야기는 불경에도 나오며 일찍이 신라 김춘추가 고구려에 군사를 청하러 갔다가 옥에 갇혔을 때, 고구려의 신하인 선도해에게 뇌물을 주자 그가 탈출 을 암시하며 춘추에게 알려준 이야기라고 한다. 용원설화(龍猿說話) 바다 속에 용왕이 살았는데, 그의 왕비가 잉태하여 원숭이의 염통이 먹고 싶다고 하였다. 용왕은 원숭이의 염통을 구하기 위하여 육지로 나와 나무 위에서 열매를 따 먹고 있는 원숭 이를 만났다. 용왕은 "그대가 사는 이 곳은 좋지 못하니 아름다운 수목이 있고 먹을 열매가 많은 바다 속속으로 안내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솔깃한 원숭이는 기뻐하여 용왕의 등 에 업혀 물 속으로 갔다. 도중에서 용왕은 그만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그 말을 듣고 놀란 원 숭이는 용왕을 보고 "염통을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왔으니 어른 다시 가지러 가자."고 하였 다. 용왕은 원숭이의 말을 곧이 듣고 다시 육지로 업고 나왔다. 원숭이는 육지에 나오자마자 나무 위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고 용왕을 보고 조소만 하였다. → 구토지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역사적 사실의 문학적 형상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작품 감상 온달 설화에는 신분이 고귀한 공주가 스스로 미천한 바보 총각을 찾아가 결혼을 하고 남편 을 영웅으로 성장시켜 공을 세우게 하는 과정이 실감나고 짜임새있게 그려지고 있다. 공주 는 과단성과 비범성이 있는 인물이다. 공주의 신분으로서 과감히 궁궐을 버리고 온달을 찾 아 나섰을 뿐만 아니라 온달과 그의 모친이 신분의 차이를 들어 혼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 았으나 그들을 지성으로 설득하였고, 명마를 고르게 하여 온달을 영웅으로 입신케 하는 등 특출한 지혜와 안목을 지녔다. 또 온달이 신라군과의 전투에서 죽었을 때, 그의 관이 움직이 지 않자 '죽고 삶이 결정됐으니 돌아가자'고 하여 초탈한 모습까지 보여줌으로써 이인의 풍 모까지도 드러내고 있다. 반면 세상에서 바보라고 했던 온달이 공주의 도움을 받아 영웅적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사람을 신분이나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일깨 우는 부분이다. '온달'은 역사서인 '삼국사기' 열전의 하나이므로 그 내용은 객관적 사실로 이루어진 것으 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유 이야기 자체는 설화로 민간에 전승되었다. 예컨대 숯을 구 워 살아가던 총각이 우연히 찾아온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 살면서 부자가 되고 출세도 했다 는 이야기가 민간에 전승되었다. 온달 설화의 유형적 성격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조는 민간 전승을 통해서 형성된 설화가 편찬자게 의하여 다듬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구전되는 '바보 온달 전설'은 문헌에서 전하는 바와 거의 같으나, 공 주가 온달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쳤다는 내용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고소설 '온달전'의 줄거 리도 이와 같으나 문학적 형상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열전에서보다 민중 의식 이 한층 두드러져 있다. 갈등 구조상 동일 유형인 민담에서는 세 딸을 둔 아버지와 자기 복 에 먹고 산다고 하여서 쫓겨난 셋째 딸과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숯구이 총 각이 등장하므로, 인물과 배경은 다르나 그 구조의 주제는 전설과 다름없다. 화소들이 '무왕 설화'와 유사하여서 동일 유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설화가 남녀간의 신분적 갈등을 다 룬 것이라면, '온달 설화'는 부녀 간의 갈등을 다룬 것이다. 임재해 '온달 설화의 유형적 성격과 부녀 갈등'에서 내용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平原王) 때에 이름을 온달이라고 하는 마음이 착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용모는 괴상했으나 속마음은 밝아 홀어머니를 걸식으로 봉양하며 살고 있었다. 그 때 평강왕의 딸로 평강공주가 있었는데 어려서 몹시 울어, 부왕이 자꾸 울면 온달에게 시집 보 내겠다는 농담을 하곤 하였다. 시집 갈 나이 28세가가 되어 부왕이 귀족인 상부 고씨 집에 시집보내려 하자 공주는 부왕의 평소 말대로 온달에게 가겠노라고 우겼다. 부왕은 노하여 공주를 궁궐에서 내쫒자 공주는 그 길로 온달을 찾아가 결혼을 했다. 공주는 자기가 궁궐에 서 나올 때 가지고 온 패물로 의식을 해결하고, 왕실의 병약한 말을 사오게 하여 잘 먹이고 온달에게 무예와 학문을 닦게 하였다. 고구려는 매년 봄 3월 3일에 낙랑의 언덕에서 수렵대 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온달이 실력을 발휘하여 이 소식이 왕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중국 후주의 무제가 쳐들어오자 온달이 선봉이 되어 무찌르니, 사위로 인정받아 그에게 대형(大兄)의 벼슬이 내려진다. 그러나 다음 왕 때에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출전했다가 아차산성에서 전사했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 지며 생사(生死)가 결정되었으니 한을 풀라 하니 관이 움직여 비로서 장사를 지냈다. 역사적 인물 온달은 590년 전사했는데 민간에서 이를 설화화하여 전승시켰다. 그것이 {삼 국사기}에 수록된 듯한데, 이 글의 원문은 {삼국사기}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글이다. 이 글에는 당신 민중들의 애국심, 충성심, 무용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미천한 출신인 주인공이 시련을 겪은 후 숭고한 인물로 변한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잘 드 러나 있다. 백제의 '무왕설화'도 같은 계열의 작품이다. 이를 소재로 최인훈이 [온달]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그 소설은 소설과 희곡을 겸용한 특이 한 형태이다. 도미처 이야기 감상 도미설화는 열녀 설화에 속하는 점에서는 매우 보편적이고 유형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구성하는 요소 중 반동인물로 작용하는 인물이 왕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설화들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열은 충과 더불어 사회를 유지시키는 근본 윤 리 중의 하나인데, 그 윤리를 국가의 수장이 부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설화의 세계가 추구하는 가치관을 좀더 강화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즉 열을 왕이라는 절대 권력에 대 항해서라도 지켜야 하고 또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의미 부여를 하고자 하는 의도 가 엿보인다. 이런 과정에서 극적인 긴장감과 재미도 부수적으로 얻게 된다. 내용 백제 개루왕 때 도미라는 사람의 아내가 미색에다 절행이 있어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개 루왕이 도미처를 탐하여 난행하려 하자, 도미 처는 계집종을 잘 꾸며 대신 들여 보냈다. 이 에 속은 줄 안 개루왕은 도미에게 일부러 죄를 내려 그 눈을 빼어버리고는 작은 배에 태워 강 위에 띄웠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탐하려 하자 도미 처는 왕을 속이고 궁궐을 빠져 나와 남편을 찾아가 함께 고구려 산산 아래 당도하여 구차한 생활을 하며 나그네로 생을 마쳤다. 백제의 개루왕(蓋婁王) 때, 도미라는 사람의 아내가 아름답고 품행이 얌전하여 사람들이 칭 송을 받았다. 하루는 개루왕이 도미를 불러 말하기를 "비록 부인의 덕은 정결이 첫째라지만 만일 남이 모르는 곳에서 좋은 말로 꾀인다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자는 적을 것이다." 하 였다. 도미는 "사람의 마음은 측량하기 어려우나 저의 아내와 같은 사람은 비록 죽는다고 해도 딴 마음은 먹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고 왕은 시험해 보고자 도 미를 궁에 머무르게 하고 하인을 거느리고 밤중에 도미의 집으로 가서 하인으로 하여금 왕 이 왔다는 것을 알리게 하고 들어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도미 와 내기를 하여 내가 그대를 얻게 되었으니 내일부터는 궁궐에 들어와 궁인이 되라. 이제부 터는 그대는 나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하였다. 개루왕이 도미의 처를 탐내어 난행하려고 하 자, 도미의 처를 계집종을 잘 꾸며 대신 들여 보냈다. 이에 속은 줄 안 개루왕은 도미에게 일부러 죄를 내려 그의 눈을 빼어 버리고 작은 배에 태워 강 위에 띄웠다. 그리고 다시 그 녀를 탐하려 하자 도미의 처는 왕을 속이고 궁궐을 빠져 나와 남편을 찾아가 함께 고구려 산산(蒜山) 아래에 당도하여 구차한 생활을 하며 나그네로 생을 마쳤다. 박종화의 [아랑의 정조]는 이 설화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거타지 이야기 진성 여왕 때, 왕의 막내 아들 양패가 당나라 사신으로 가려고 활을 잘 쏘는 군사 50여명을 뽑아 호위시켜 곡도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 10여 일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만 이 섬에 남겨 두면 바람을 자게 할 수 있다 하 여 거타지만 남게 되었다. 그 때 한 노인이 연못에서 나와 이르되, 날마다 하늘에서 사미승 이 내려와 우리 자손들의 간과 창자를 빼 먹으므로 활로 사미승을 쏘아 죽여 달라고 하였 다. 거타지는 노인의 부탁대로 사미승을 쏘아 죽이고 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함께 여생 을 마치게 되었다. 진성여왕 때, 왕의 막내 아들 양패(良貝)가 당나라 사신으로 가려고 할 때, 백제의 해적들이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을 잘 쏘는 군사 50여 명을 뽑아 호위시켜 호위하도록 했다. 배 가 1993년 12월 22일곡도(鵠島)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 그곳에서 10여 일을 보냈다. 양 패공이 점을 치게 하였더니 점장이가 말하기를 "이곳에 신지(神池)가 있어 그곳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못위에 음식을 차려 놓으니 못물이 한 길이 넘게 치솟았다. 그 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활을 잘 쏘는 사람을 하나만 남겨 두면 바람을 자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일행들이 숙의한 결과, 나무조각 50개에 이름을 써 물 위에 띄우고 가라 앉는 사람이 남기로 하여 거타지가 남게 되었다. 그러자 배는 순행을 하게 되었다. 거타지가 조심스럽게 섬 위에 서있었는데, 그 때 한 노인이 연못에서 나와 이르되 " 나는 서해의 용 신(龍神)이다. 날마다 하늘에서 요괴(어린 중)가 내려와 주문을 외우며 이 못을 세번 도는 데, 그러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은 물에 뜨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어린 중은 우리 자손들의 간과 창자를 빼 먹는다. 그리하여 이제는 우리 부부와 딸만 남았다. 활로 어린 중을 쏘아 죽여 달라."고 하였다. 거타지는 노인(龍)의 부탁대로 사미승을 쏘아 죽인다. 그러자 어린 중 은 늙은 여우로 변하여 죽었다. 그리고 거타지는 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는데 거타 지는 당나라를 거쳐 귀국하여야 하므로 용은 자기의 딸을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당나라를 갔다가 귀국하여 소매 속에 감추어 온 꽃을 도로 내놓으니 어여 쁜 처녀로 변하였다. 둘은 결혼하여 함께 여생을 마치게 되었다. 더불어 당나라로 가는 길 에 두 마리의 용이 거타지와 사신들의 배를 호위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설화와 비슷한 것으로는 [용비어천가]에도 있고, 제주도 서사 무가 [군웅본풀이]도 같은 유형이다. 또 이 설화는 인신공희(人身供犧)가 주 내용인데, 이것이 훗날 [심청전]의 근원설 화(根源說話)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설화는 거타지라는 초인적인 영웅의 이야기요, 심청 전은 운명에 다소곳이 순종하는 여인이라는 점은 다르다. 오봉산의 불 옛날에 어떤 사람이 시집을 가서 재미있게 살았는데 남편이 문둥병에 걸려 헤어지게 되었 다. 여인은 남편을 위해 약이란 약은 다 써 보아도 효험이 없자 매일 남편의 병이 낫기만 빌고 있었다. 어느 날 중이 찾아와서 오봉산에 불을 놓고 남편을 찾아가면 낫는다고 하여 백 날 동안 오봉산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남편 옆에 가서 죽으려고 남편을 찾아가다가 도 중에 쓰러지고 말았다. 서산으로 지려는 해를 보고 제발 남편을 찾아갈 때까지 넘어가지 말 아 달라고 손을 휘젓다가 보니 자기 손이 오봉산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섯 손가락에 불을 켜 서 붙이고 남편을 찾아갔는데 남편은 이미 병이 다 나아서 둘은 동리로 돌아와서 행복하게 살았다. 삶의 진실한 가치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까운 곳에 있다는 지혜를 담고 있다. 주인공이 백 날 동안 찾으려고 했던 오봉산이 바로 자신의 손이라는 사실은 인간이 추구하 는 가치나 진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 혹은 우리 자신 속에 있다는 점을 설화적 상징의 수법 으로 나타낸 것이다. 주인공은 문둥병에 걸린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 겪 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소망을 성취한다. 이는 이야기 속의 갈등과 고난을 행복한 결말로 마 무리짓는 민담의 특징이며, 문제 해결의 가능성에 대한 낙천적 믿음에서 비롯된다. 지하국 대적 퇴치 설화 옛날 아귀 귀신이라는 큰 도적이 임금님의 세 공주를 납치해 갔다. 한 무신이 공주를 찾아 오겠다고 나서자 임금은 공주를 구하면 막내딸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하인들을 데리 고 공주를 찾아가던 무신은 꿈 속에서 산신령의 도움으로 아귀 귀신의 세 굴을 찾는데 성공 했다. 지하 소굴로 광주리를 타고 내려간 무신은 공주들과 합심하여 잠든 아귀 귀신을 죽이 고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소굴 밖에 있던 하인들의 배신으로 공주만 탈출하고 무신 은 굴 속에 갇히고 만다. 이 때 산신령이 나타나 말 한 필을 주어서 무신은 그것을 타고 무 사히 소굴 밖으로 나온다. 한편, 궁궐에서는 하인들이 공주를 데리고 임금님 앞에 나아가 자 기들이 구한 양 거짓말을 하여 큰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공주들도 자신들이 살아온 기 쁨에 젖어 무신에 관한 일을 잊어 버리고 있었다.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는 곳에 무신이 나 타나 자초지종을 임금에게 알리니 임금님은 크게 노하여 하인들을 죽이고 무신에게 막내딸 을 주어 결혼하게 한다. 이 설화에서 긍정적 인물로는 공주, 임금 및 무신과 산신령이며 부정적 인물로는 아귀 귀신 과 하인들이 있었다. 임금이 무신을 잊고 하인들의 말을 믿은 것은 인간의 몽매함을, 공주들 이 무신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이기심을 가진 인간의 한 단면을 드러낸 것이다. 조신몽 형식 - 설화, 사원 연기 설화, 환몽설화 구성 - 액자식 구성, 환몽 구조 (현실→꿈→현실) 주제 - 인생의 무상함(세속적 욕망의 덧없음)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의의 - 몽자류 소설의 근원 설화 조신 설화의 구성 - 전형적인 환몽 구조, 액자 구성 현실 배경 제시 문제 제시 절실한 소망 입몽 ⇒ 꿈(사건) 소망달성⇒고통의 삶⇒ 이별 꿈속에서의 체험 각몽⇒ 현실 각성 귀의 깨어난 후각성 의의 모티브상 - 꿈을 통한 비현실적 세계의 진술 주제상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꿈에서 실현 - 傳奇의 원형 형식상 - 액자 구성의 최초 형태 기록상 - '옛날'로 시작되어 후대의 기록임을 암시 조신설화의 전설로서의 특징 전설은 이야기 내용의 진실성을 내세우는 뜻에서 구체적인 증거물을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 인데, 이 작품의 경우에는 세규사와 정토사라는 절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정토사는 조신에 나중에 깨달음을 얻은 후에 세웠다고 하므로 이 전설은 정토사 건립의 내력을 설명 하는 사원연기설화가 되는 셈이다. 시간의 흐름이 강조하는 의미 - 無常感(무상감) 관련있는 소설 - 이광수 - 꿈, 김만중 - 구운몽, 임제 - 원생몽유록, 작자 미상 - 옥루몽 40여년 세월의 상징 - 고된 생애 인간세상의 의미 - 탐욕 주인공이 깨달은 내용 - 남가일몽, 한단지몽, 일장춘몽, 인생무상 감상 조신설화는 몽자류 소설의 근원 설화로서의 의의가 매우 크다. 평소의 어떤 생각 때문에 꿈 속에서 일련의 사건을 체험하고 꿈에서 깨어나 참다운 이치를 깨닫게 된다는 구조를 가진 설화를 환몽설화라고 하는데, 조신설화는 후에 몽자류 소설(구운몽, 옥루몽, 원생몽유록) 형 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광수의 '꿈'으로 개작되기도 했다. 이 설화를 통해 드러나느 주제는 세속적 욕망의 덧없음으로 고통의 근원에 대한 집착을 버 려야 한다는 불교적 가르침이다. 이 설화는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는 고사 성어의 근원이 되는 남가태수전과 연관지을 수 있으나 꿈의 내용이 조신설화는 불행과 고난의 연속, 남가 태수전에서는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조신설화 내용 옛날 신라 시대에 세규사란 절이 있어 그 절의 장원이 명주 날리군에 소재해 있었다. 본사에서는 중 조신을 그 절의 관리인으로 파련했다. 조신은 날리군의 장원에 와 있으면서 태수 김흔의 딸을 좋아하여 깊이 매혹되어 버렸다. 그는 누차 낙산사의 관음 보살 앞에 나 아가 그녀와의 결합을 남몰래 빌었다. 이러기를 수년간, 그 사이 김흔의 딸은 시집을 가 버 리고 말았다. 조신은 관음 보살 앞으로 갔다. 관음 보살이 자기의 비원(悲願)을 성취시켜 주지 않음을 원 망하며 슬피 울었다. 날이 저물 무렵 그의 사념은 지칠 대로 지쳐 깜박 풋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그 김씨 처녀가 반가운 얼굴로 문을 들어서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대사님의 모습을 어렴풋이 알고부터는 마음 깊이 사모해 왔었지요. 잠시도 대사님을 잊은 적이 없었어요. 부모님의 명령에 따라 시집을 갔었지만, 죽어서도 대사님과 한 무덤에 묻힐 반려가 되고 싶어 이렇게 왔어요." 조신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40여 년의 세월을 살았다. 자식만이 다섯이나 생겼을 뿐 집안은 휑뎅그렁하여 남은 것이라 곤 없었다. 나물죽마저도 넉넉하지 못했다. 그들은 실의에 찬 몰골을 한 채 먹고 살기 위해 사방을 헤매 다녔다. 이렇게 10년간 초야를 두루 유랑했다. 너덜너덜 해어진 옷은 몸을 가리 지 못했다. 명주 해현 고개를 지나다가 열다섯 살 난 큰 아이가 굶어 죽었다. 통곡을 하며 시체를 거두어 길에다 묻었다. 남은 네 자녀들을 데리고 우곡현으로 왔다. 길 곁에다 띠풀로 집을 얽어 살았다. 부부는 이미 늙고 병들었다. 거기에다 굶주림에 지쳐 일어나 다니지를 못 했다. 열살 난 딸 아이가 돌아다니며 걸식을 했다. 그런 葡그 달아이마저 마을의 개에게 물 려 아파서 울부짖으며 앞에 누워 있었다.부부는 탄식을 하며 두 줄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 다. 아내가 눈물을 훔치고 나더니 돌연 얘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내가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땐 얼굴도 아름다웠고 나이도 젊었습니다. 그리고 의복도 깨끗하 고 고운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라도 맛좋은 음식이 있으면 당신과 나누어 먹었고, 두어 자 옷감이 생겨도 당신과 함께 지어 입었습니다. 이러구러 살아온 지 50년, 정은 더할 수 없이 쌓였고 얽히고 얽혀 정말 두터운 연분이라 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노쇠와 병고 는 날로 깊어가고, 춥고 배고픔은 날로 더욱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남의 집 곁방살이, 간 많 은 집 문전에서의 그 수치는 무겁기 산더미 같았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지 쳐 있어도 그걸 면하게 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판국이 이러한 데 어느 겨를에 부부간의 애 정을 즐기겠습니까? 젊은 얼굴 예쁜 웃음은 풀잎 위의 이슬과 같고 굳고 향기롭던 그 가약 도 한갓 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 같을 뿐입니다. 당신에겐 내가 있어 집이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지난날의 즐거움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바로 번뇌로 오르는 계단이었습니다. 당산이나 나나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요? 뭇 새가 모여 있 다 함께 굶어 죽기보다는 차라리 짝없는 난새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이 낫지 않겠 습니까? 순경일 때는 친하고 역경일 때는 버리는 것이 차마 인정상 못할 짓이긴 합니다만, 그거나 가고 머무는 것이 사람의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요, 헤어지고 만남에는 운명이 있 습니다. 바라건대 여기서 서로 헤어지도록 하십시다." 조신은 아내의 제의를 듣고 무척 반가워했다. 네 아이들을 각각 둘씩 나누어 갈라서려 할 때 아내가 말했다. "나는 고향으로 갈 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서로 잡았던 손을 마악 놓고 돌아서서 길을 나서려 할 때, 조신은 꿈에서 깨어났다. 희미한 등불은 으스름한 불그림자를 너울거리고, 밤은 이윽히 깊어가고 있는 참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 보니 머리털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조신은 멍청히 넋이 나간 듯, 인간 세상에의 뜻이라곤 전혀 없었다. 이미 인간의 그 고된 생애에의 염증이 느껴짐이 마치 실제 백 년의 고생을 모조리 겪기라도 한 듯했다. 탐욕의 마음은 얼음이 녹아버리듯 말끔히 가시었다. 조신은 관음의 그 성스러운 모습을 부끄러이 우러르며 참회를 금하지 못했다. 해현으로 가서 꿈 속에서 굶어 죽은 큰 아이를 묻었던 자리를 파 보았더니 돌미륵이 나왔 다. 깨끗이 씻어서 그 부근의 절에다 봉안한 후, 서울로 돌아가 절 관리의 임무를 벗었다. 그리고 사재를 기울려서 정토사를 세우고 부지런히 선행을 쌓더니 나중에 그 종적을 알 수 없었다. 두견새(杜鵑) 촉(蜀:지금의 四川省) 나라에 이름이 두우(杜宇)요, 제호(帝號)를 망제(望帝)라고 하는 왕이 있었다. 어는 말 망제가 문산(汶山)이라는 산 밑을 흐르는 강가에 와 보니, 물에 바져 죽은 시체 하나가 떠내려 오더니 망제 앞에서 눈을 뜨고 살아났다. 망제는 이상히 생각하고 그를 데리고 돌아와 물으니 "저는 형주(刑州) 땅에 사는 별령(鱉靈)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강에 나왔다가 잘못해서 물에 빠져 죽었는데, 어떻게 해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라는 것이다. 망제는 , 이는 하즐이 내린 사람이다. 하늘이 내게 어진 사람을 보내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여 별령에게 집을 주고 장가를 들게 하고, 그로 하여금 정승을 삼 아 나라일을 맡기었다. 망제는 나이도 어리고 마음도 약한 사람이었다. 이것을 본 별령은 은 연중 불측한 마음을 마음을 품고 망제의 좌우에 있는 대신이며 하인까지 모두 매수하여 자 기의 심복으로 만들고 정권을 휘둘렀다. 그때에 별령에게는 얼굴이 천하의 절색인 딸 하나 가 있었는데, 별령은 이 딸을 망제에게 바쳤다. 망제는 크게 기뻐하여 나라일을 모두 장인인 별령에게 맡겨 버리고 밤낮 미인을 끼고 앉아 바깥일은 전연 모르고 있었다. 이러는 중에 별령은 마음놓고 모든 공작을 다하여 여러 대신과 협력하여 망제를 국외로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망제는 하루 아침에 나라를 빼았기고 쫒겨나와 그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죽어서 두견이라는 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를 부르짖어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 뒷사람들은 그를 원조(怨鳥)라고도 하고 두우(杜宇)라고도 하며, 귀촉 도(歸蜀途) 혹은 망제혼(望帝魂)이라 하여 망제의 죽은 넋이 화해서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귀촉도, 망제혼, 소쩍새, 불여귀, 자규 오영수의 [소쩍새]는 이 설화를 원용한 소설이다. 박타는 처녀 몽고설화. 일설에 의하면, 원대(元代)에 몽고에 귀화한 고려 여성들을 통해 유입되었다고 한 다. 옛날 어느 처녀가 바느질을 하다가 처마 끝에 집을 짓고 살던 제비 한 마리가 땅에 떨 어져 다리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실로 다리를 동여매 주었다. 이에 그 제비가 살아났다. 이듬해 그 제비는 강남에서 박씨 하나를 가져다가 뜰에 떨어뜨렸다. 그 처녀는 박씨를 심었더니 가을이 되어 커다란 박이 하나 열렸다. 그 박을 타 보니 온갖 보화 가 쏟아져 나왔다. 이로 인하여 그 처녀는 매우 큰 부자가 되었다. 이웃집에 사는 심술궂은 처녀가 이 말을 들었다. 그 처녀는 자기 집에 가서 제비를 잡아다가 일부러 다리를 부러뜨 려 실로 동여매 주었다. 그 제비는 이듬해 박씨를 가져다가가 주었다. 그 처녀는 좋아라고 박씨를 심고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 큰 박이 하나 열렸다. 따서 타 보니 수많은 독사(毒 蛇)가 나와 그 처녀를 물어 죽였다. 아랑각 전설 아랑의 성은 윤(尹), 이름은 정옥(貞玉)이었으며, 그는 부친이 영남(嶺南) 밀양태수(密陽太 守)로 부임하였을 때에 수행하여 밀양에 갔다. 그 고을 통인(通引- 관리명)과 그의 유모 음 모에 빠져서 아랑은 어떤 날 밤 영남루의 밤 경치를 보러 갔다가 통인 백가(白哥)에게 욕을 당하였다.그것은 아랑이 달 구경을 하고 영남루 위에 있을 때, 별안간 유모는 없어지고 기둥 뒤에 숨어있던 백가가 뛰어 나와서 아랑에게 연모의 정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랑은 그것을 거절하였다. 백가는 아랑을 죽여 강가 대숲 속에 던져 버렸다. 다음 날 태수는 여러 조사를 하여 보았으나 아랑을 찾지 못하고 마침내는 자기 딸이 야간 도주한 것이라 믿고 양 반 가문에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 이상 근신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벼슬을 하직하고 한양 본가로 갔다. 그 뒤로 신관 사또가 부임할 때마다 그 날 밤에 처녀귀신이 나타나서 신관은 비명횡사하고 만다. 이 때문에 밀양태수를 원하는 사람이 없어 지원자를 구하게 되었는데 이 상사(上舍- 지난날, 생원이나 진사를 가리키던 말)라는 사람이 지원하여 그 날 밤에 촛 불을 키고 독서를 하고 있을 때 별안간 머리를 풀어 헤치고 목에 칼을 꽂은 여귀가 나타났 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앉아 있었는데 여귀는 그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애원하였다. 날이 밝자 그는 통인 백가를 잡아 족쳐 자백을 받아내고 아랑의 원혼을 달래 주었다. 그 때부터 사또의 객사에는 원혼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설화는 매우 많다.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동일 인물명을 사용한 박종화의 [아랑의 정조]라는 소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 라는 것이다. 이 설화를 원용하여 변형시킨 소설로는 정한숙의 [해랑사의 경사]라는 소설이 있다. 뱀신랑 어떤 늙은 부부가 아이를 낳았는데 뱀이었다. 그 아들은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김정승의 달과 결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김정승의 딸들에게 의사를 물어보자 첫째와 둘째딸은 뱀이 라서 싫다고 했다. 그러나 셋째는 아버지의 뜻이라면 따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뱀신랑과 결 혼을 했다. 혼인하던 날 신랑은 허물을 벗고 잘 생긴 선비가 되었다. 어느날 남편이 길을 떠 나면서 아내에게 자기의 허물을 주면서 잘 보관하라고 하였다. 만약 없애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단단히 일렀다. 이 비밀을 알아챈 두 언니는 몰래 그 허물을 훔쳐다 태 워 버려서 남편은 돌아 올 수 없게 되었다. 아내는 남편을 찾아 바위 속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이미 딴 부인이 있었다. 남편은 몇 가지 문제를 내어 통과하는 사람을 진짜 아내로 삼겠다고 하였는데 찾아간 아내(김정승의 딸)가 시험에 통과하였다.(오영진 {시 집가는 날}과 관련) 출처:http://hanlover.pe.kr/ etext down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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