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SF & FANTASY (go SF)』 29503번 제 목:◁세월의돌▷ 연재시작전, 글쓴이의 잡설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1 20:59 읽음:256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0장. 연재 시작을 위한 글쓴이의 잡설 첨에 제목을 영어로 적을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곧 자칫했다간 '석기시대' 라는 뜻으로 들려버릴지도 모른다는, 중대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그래서 과연 잘 된 제목인건가....)연재를 시작합니다. ... 라는 건 참 긴장되는 말이로군요. 일단 시작했으니 끝까지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일단 클릭했으니 끝까지 보겠다고 하시면 얼마나 좋을까요...^^;환타지에 발끝을 담근지는 어느 정도 되었지만, 이런 스타일의 글을쓰는 것은 처음입니다. 단편만 가끔 썼었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괴롭혔었지요. (이 자리를 빌어, 한때 제 단편을 읽다가 쥐어뜯으신 머리카락들이빨리 자라시길 빕니다.... 물론 읽으신 분들 얘깁니다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같은 거라면,혼자만의 만족을 위한 글을 쓰기보다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되는 방법으로 써보고 싶다는욕심으로 '세월의 돌' 을 시작합니다만... 과연 많은 분들에게 전달이 잘 될지 모르겠네요. 재미있게 써보려는 노력도 많이 했고,그 사이사이에 하고싶은 이야기를 넣으려고,그리고 궁극적으로 결말에서는 정말 하고픈 이야기를 하게 되도록그렇게 이끌어가고자 노력중입니다. 글은 초등학교때부터 썼었고... 지금까지도 쓰지만 그동안 꽤 많은변천을 겪었었어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욕심많게 이것저것 써서 친구들한테 많이 보여줬었죠... 그 때 친구들이 재미있게 읽어줬던 기억을 요즘 다시 되새기고 있어요. 한동안 잊었었거든요. 소설에서 '재미'라는 것은- 정말꽤나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해요. 한동안 쓰던 자기만족적인 글을 과감히 떠나 보렵니다. 아직도 모자란 건 태산같이 많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비평도 해주시면 그 말고 바랄 게 없겠습니다. 다시, 모든 걸 시작하는 마음으로-그럼, 시작합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29504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1 21:00 읽음:304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 노장로의 별 '낭시그로 호(Nansigro Ho)'가 지배하는 한 해의맨 마지막 달(아룬드)이다. 노장로 아룬드의 '노인', 즉 '법칙의 장로'는 인자한 노인이면서동시에 모든 생명의 변화와 결과를 거두어가는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아룬드의 그림은 공통적으로 흰 수염과 백발을 지닌 노인이지만, 그 묘사는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에 따라 크게 두 가지 모습을 띤다. 하나는 흰옷을 걸치고 큰 의자에 걸터앉은 인자한 얼굴의 노장로, 나머지 하나는 검은 로브에 거대한 낫을 들고 서 있는 두려운 모습을 한 저승의 인도자. 그가 들고 있는 낫은 '시간의 낫', 또는 '수확의 낫'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아룬드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밝지 않다. 다만 암흑 아룬드가 뜻하지 않은 불행을 의미한다면 노인 아룬드는 원인이 있는 불행이라고알려져 있다. 이 시기엔 불경한 일이나 신, 또는 영적 존재들의 반감을 살 일을 삼가는 것이 좋다. 일기는 1년중 가장 추운 때로서 찬바람과 눈, 얼음으로 가득한 시기이다. 이 아룬드를 상징하는 경구는 "늙은이는 내일을 내다보고 잠자리에든다" 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 경구는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있음을의미한다. 좋은 일에는 좋은 결과, 나쁜 일에는 나쁜 결과가 돌아오고 은혜에는 보답이, 악행에는 원한과 복수가 뒤따른다. 또한 제14아룬드는 모든 여행을 끝내고 안식에 이름, 선행과 악행의 보답을 받음, 운명이 결정되어 재어짐,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감, 과거의 지혜를 빌려 미래를 내다봄 등을 암시한다. 이 아룬드를 상징하는 빛깔은흰색, 또는 은색이다. - 점성술사들이 달력에 적는 각 아룬드의 의미,그 중 열 네 번째. 1. 배달왔습니다 (1) 나는 꿈을 꾼다. 목소리를 듣는다. [네가 알고 있는 그 세계가 친숙하고 정겹겠지그렇지만 기대하지 말아곧 유리처럼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버릴 테니]나는 깨어난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 기억reminiscence I "단 1 로존드도 깎아 줄 수 없어요." 그렇다. 나는 늘 이런 말로 흥정의 시작 테이프를 끊는다. 이 녀석은 우리 마을에 오늘 처음 들어온 모양으로 나의 딱 잘라 끊는 이 말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바보 같은 녀석, 나를 잘 구슬려 보란말야, 적어도 80로존드는 깎아 줄 수 있을걸. "아니, 저……." 이 녀석은 틀렸군. 20로존드나 깎아 가면 다행이겠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 녀석의 행색을 훑어보며 뭐 더 팔아먹을 만한 게 없을까 머리를 굴려 봤다. 요즘 날씨도 한층 추워졌는데 사슴가죽 모자나 눈신발은 어떨까. "너무 비싼 것 아닌가요…? 저 건너 마을에서는 3존드에 샀단 말입니다." "그건 건너 마을 이야기고요." 나는 한껏 배짱을 퉁겨 가며 길 건너 무기 상점의 킬른 씨 흉내를내어 무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머니라면 이런 표정은 절대 못지으시겠지. "그래도, 약초 다섯 묶음에 5존드나 하다니, 너무 하지 않습니까!" 말이 안 되는 것 같냐. 그러면 네가 어쩔 테야. 하긴 5존드면 낡은것으로 나이프 한 자루 정도는 장만할 만한 돈이니 녀석이 흥분하는것도 전혀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냐,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뱃속에서부터 타고난 점원, '큰사슴 잡화점의 파비안'이 아니냐. 나는 싱긋 웃는 것으로 표정을 전환했다. "보세요. 여기 눈 덮인 산맥 어디에서 약초가 잘 발견될 것 같습니까? 다른 데 생산량의 반도 안된다구요. 게다가 다른 데서 들여오는것은 비싸고… 여행자시니까 잘 아시잖아요? 요즘엔 어디 가나 통과세가 장난이 아니란 걸. 정말이지 닷새 전에 큰 눈이 내린 뒤로는 마을에서 아무도 약초 뜯으러 갈 엄두를 못 내고 있어요. 저런 험한 산에서 눈을 헤치고 약초를 찾는 것도 큰일인데다, 실수로 한번 발이라도 헛디뎠다하면 그냥 그 길로 가는 거란 말이에요." 나는 효과를 높이기 위해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해보였다. 이럴 때 적절하게 바람이…… 그렇지, 부는군. 산에서 내려온 바람이 매섭게 창 덧문을 흔들었다. 여행자는 뒤를한 번 돌아보았다. "그래도, 저렇게나 비싸다는 것은…… 좀 사정을 봐주시죠. 저도돈 많은 모험가도 아니고, 그저 행색 초라한 여행자에 지나지 않잖습니까. 돈이 있다면야 드리고 싶지요." 어라, 이 양반 좀 하네. 그러나-, 리에주 상인을 우습게 보다간 큰코 다치지요. 난 이번에는 가능한 한 불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럴 때에는 나의 선이 가는 얼굴 생김새나 아무리 햇빛을 많이 보고 뛰어다녀도 잘 타지 않는 얼굴색 같은 것이 한 몫 한다. 평상시에쓸데없는 놈들이 덤빌 때는…… 도움은 커녕 방해나 안되면 다행이지만 말이다. 내 이런 얼굴은 우리 동네 사람들이 눈빛에 반사되는 강한 햇빛 때문에 거의 얼굴빛이 거무스름한 것과는 굉장히 대조적이었다. 덕택에 효과는 더더욱 좋았다. 거기다가 나는 내 특기인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시겠지만, 이런 산골 마을의 잡화점에서는 물건 가격이 저조차도 기억 못할 정도로 제멋대로거든요? 물건이 좀 들어왔다- 싶으면갑자기 싸졌다가, 좀 떨어지는가 하면 어느 새 전 가격의 두 배, 세배는 일도 아니죠. 마침 안 좋은 때 오셨습니다만, 필수적인 물건들은 안 살 수가 없잖습니까? 살아가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하여튼 물가가 이렇게 안정이 안되어서야 장사하는 사람들도 힘들어요…… 물론, 저도 맘대로 싸게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지만 그랬다가는 무서운 어머니한테 경을 치죠, 심하면 이 추운데직접 가서 약초를 캐와야 할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정 사정이 딱하시다면… 제가 혼날 각오하고서 4존드 80에는 드릴 수 있어요… 아아,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어머니 죄송합니다. 그럭저럭 선량한 어머니(결코 평균치보다 밑돌지는 않는다. 윗돌지도 않지만), 오늘도 당신을 팔아먹는 사악한 아들을 용서하시길.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의 이야기는별로 듣고 있지 않다가, 맨 끝의 값을 깎아준다는 말에만 귀가 번쩍트인다. 그래서 애써 입아프게 늘어놓은 이야기의 값까지 쳐 주는 셈치고 웬만하면 그 가격에 물건을 가져가게 되는 것이다. 여행자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한 30정도는더 깎자고 할 줄 알고 일부러 올려 부른 건데, 이 자도 선량한 사람이었군. 하긴, 이 시점에서 또 깎자고 나왔으면, 내 장광설 2탄을 들었어야했을 거다. "그럼, 약초 다섯 묶음, 여기 있습니다. 즐거운 여행되세요. 뭐 마을에 대해 물어보실 거라도 있으시면 뭐든지 물어보시고요. 더 필요한 게 있으신지 한 번 둘러보세요……." 그가 뭘 더 샀을 것 같은가? 당연히 내가 권하는 우리 마을 특제사슴가죽 모자를 샀지. 가격은 8존드. 나는 밝은 미소로 손님을 배웅했다. 그는 배낭 안에 약초를 꼭 싸넣더니 - 비싸게 샀으니 더 소중한 걸까 - 사슴가죽 모자를 눌러 쓴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며 문을 나섰다. 나는 얼른 일어나 문도 열어 주었다. 훌륭한 점원의 자세다. 그리하여 오늘도 한 건했다. 좋은 아침이야. "파비안, 파비안- 이리 와봐라!" "네- 곧 가요!" 나는 내 어깨 높이만큼 쌓인 상자들 너머로 고개를 빼고 창고 밖까지 들릴 만큼 소리 높여 외친 다음, 다시 약초 묶음에서 약초들을 조금씩 덜어내는 일에 몰두했다.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이유는 뻔하다. 배달을 시키려는 것이다. 나는 뱃속에서부터 점원이자 상인이었음에 틀림없지만, 저놈의 배달 일만은 도무지 좋아지지가 않는다. 아, 정정하겠다. 여름에만 싫어한다. 나는 늘 물건을 사고서 자기 손으로 가져가지 않고 배달을시키는 놈들 중에 특히 봄, 여름, 가을에 그런 짓 하는 놈들을 증오했다(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우기에는 말할 것도 없다!). 겨울에는 나나름대로 개발한 배달 방법이 있다. 물론, 배달이 싫어서 연구 끝에만들어낸 거지만. 배달을 하려면 바람보다 빨리 - 어머니의 표현대로 - 달려야 하고,힘이 무지 좋거나 아니면 물건을 드는 요령이라도 좋아야 하며, 100여 권 이상의 책을 줄줄 외워야 한다는 전설속의 에제키엘만큼이나영리하게 배달 목록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나는 이 세 가지에 있어서 우리 마을의 어느 가게 점원보다도 탁월하긴 하다. 그러시니 하던 건 다 끝내고 가야지. 우리 어머닌 한 묶음에 약초를 너무 많이 묶으시는 경향이 있으시단 말씀이다. 나는 리에주 상인이다. 아, 여기가 리에주는 아니다. 여기는 '큰사슴의 하비야나크', 그저대륙 제일 꼭대기에 위치한 하얀 산맥 아랫자락에 붙은, 크지 않은산마을일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상인이라면 누구나 입에 붙이고 싶어하는 이 말을 아주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리에주 상인이다. 물론 나는 리에주에 단 한 번도 가본 일이 없다. 그러나 어머니는적어도 리에주 출신이다. 물론 어머니도 리에주에 살 때는 상인이지는 않았다. 겨우 다섯 살 때까지 살았다고 하니까. 그럼 내가 무슨근거로 위대한 상인의 도시 리에주의 상인이냐고? 그거야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리에주에서 장사를 하셨더랬단 말이다!(음, 무슨 장사였더라)리에주라는 말은 우리 상인들에게는 동경의 언어였다. 이런 촌구석의 잡화점 점원도 상인이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나도 이렇게자라면 언젠가는 상인이 될 것이 아닌가. 아냐! 잡화상 주인 말고! 대륙을 종횡으로 다니며 자루에서 금화를 한 움큼씩 꺼내 지불하는대(大)상인 말이다. 현재는 '큰사슴 잡화'의 위대한 점원 파비안…… "파비안, 이 녀석아, 얼른 안 와-!!" 윽… 일단 달려가면서 이야기를 계속하자. 일단 약초 덜어내기는다 했으니까. 약초를 간추려서 창고 바닥 판자 아래 내 비밀 장소에넣어 두고서 그 위를 돌로 잘 눌러 놓은 다음, 나는 손을 털면서 창고 밖으로 달렸다. 18년간의 경험으로 나는 우리 어머니가 부르실 때엔 재깍 나타나는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아직도 언뜻 보면 처녀…는 좀 심하고 갓 결혼한 새댁 정도로 보이는 데는 손색없는 어머니지만, 십몇 년 여기서 장사하시는 동안 웬만한 동네 장사꾼들은 단번에 쥐어누르고도 남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성격상의 변천을 겪으셨다고 한다(하긴, 변한 게 아니고 원래 그런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묻지 말라. 나로서야 어디까지나 어머니의 주장에 근거하여 말했을 뿐이니까). 그러나 만일 어머니를 처음 만나는 누군가가, 어머니의 호리호리한 맵시와 아직도 상당히 고운 얼굴을 보고 어떻게 슬쩍 속여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무모한 계획을 떠올린다면 나는 그 사람에대해 미리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할 참이다. 그리고 요 최근 몇 년간 더 괄괄하게 변하실만한 이유도 있다. '큰사슴 잡화'라는 우리 가게 이름을 보면 상황은 간단해진다. 보통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잡화점 같은 곳에 간판이나 상호가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저 '잡화점'이면 그만인데, 우리 가게에 유난하게이름이 있는 것에는 다 까닭이 있다. 왜냐고? 우리에게는 경쟁사가 있단 말이다! 그것도 아주 극악한 상호를 가진 경쟁사다. 그 이름은 '사슴 잡화'. 누가 이름만 들으면 우리가 나중에 생긴 가게고 사슴 잡화가 먼저생긴 가게인 줄 알겠지만, 그건 정말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가 상호를 달게 된 것도 다 저 사슴 잡화가 3년 전에 생겼던탓이다. 물론 간판은 우리가 나중에 달았는데, 그 전에 우리 가게에는 이름 같은 건 없었으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간판 만드는 값도 꽤나 들었다. 우리 마을 목수 나스레트 씨는 이런 물건은 난생 처음 만들어본다고 말했다. 우리가 '큰'자가 하나 더붙는 통에 나무가 많이 들었다고 값은 더욱 비쌌다. 가끔은 우아한 미소(?)를 지으시며 얼빠진 모험가들에게 바가지도씌우시는 어머니, 그러나 역시 어머니의 궁극적인 재능은 사슴 잡화쿠멘츠 씨를 다루시는 태도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당연히 쿠멘츠 씨는 우리를 전혀 경쟁사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나는 이 점에서 갈데 없는 장사꾼이신 우리 어머니를 매우 존경해마지 않고 있다. 어머니는 가게 문 앞에서 내가 창고를 돌아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갈 곳은 눈이 많이 쌓인 아랫마을 쪽인지 손에는 내 눈신발도 들고 계셨다. 긴치마와 틀어 올린 뒷머리, 영주님네 마나님도저만한 맵시는 안 나시지. 단, 뒷모습일 때만! 어머니는 나를 보셨다. 치마 끝에는 눈 녹은 땅에서 튄 검은 얼룩이 점점이 무늬를 이루고 있었고, 찬바람으로 볼이 빨갛게 얼어 있다. 거기다 앞치마에는 또 뭘 흘리신 걸까. 어쨌든 어머니는 입을 여셨다. "배달이다." …… 라는 아주 별 것 아니라는 듯한 어조의 한 마디와 함께 나에게는 항상 작은 손수레로 하나 가득한 물건들이 안겨지기 마련인데…오늘은 좀 달랐다. "이 책을 영주님 성에 갖다 드리고 와." "누구한테 전하면 되는데요?" 저절로 이 말이 튀어나왔다. "누구긴 누구겠니? 이 녀석아, 그럼 네가 영주님한테 전하기라도한단 말이야?" 흠… 하긴 그렇지. "…… 문지기한테 전하고 올게요." 나는 어머니한테서 눈 신발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책도 받아 들었다. 겨우 한 권인데, 이걸 들고 터덜터덜 성까지 걸어가라고? 안될 말이지. 하비야나크에서 스피드 하면 또 나 아닌가. 오랜만에 짐이 가벼운데 몸이나 풀어 볼까. 나는 노끈을 찾아서 눈 신발과 책을 한데 엮어 어깨에 맸다. 그리고 문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어머니는 벌써 눈치를 채셨다. "이 녀석, 또 그걸 타려고? 위험해, 안돼." "에헤… 제가 언제 넘어지는 것 보셨어요?" "그래도 파비안, 저렇게 눈이 얼었는데 한 번 넘어지면 다리 부러진다. 목뼈 부러지면 그냥 가는 거구." "미리 부목이라도 대고 갈까요?" 그 놀라운 성격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선 그 아들인 나는 또 못 말리신다. 내가 일곱 살이 넘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렇다. 나는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세대가 내려가면 나아지는 게 있어야 한다고, 나는 우리 어머니의 성격조차도 극복한 궁극의 결정판인 것이다. 아냐, 이런 건 가전(家傳)의 절기(絶奇)라고 해야 하나. 세대가 내려가면 사람은 영리해지고, 세상은 좋아져야 해. '영원의구속자'라고도 불리는 마법사 에제키엘이 길가다 걸리는 몬스터들을모조리 봉인하면서 다녔다는 전설의 200여년 전보다 세상이 나빠진게 있다면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신기한 구경거리 같은 것들이 별로없다는 점, 정도라고나 할까. 나는 가게 구석에 박아 둔 '탈것'을 찾아냈다. 기분 좋게 손으로쓱쓱 비빈 다음 들고 나왔다. 이제 나가 볼까. +=+=+=+=+=+=+=+=+=+=+=+=+=+=+=+=+=+=+=+=+=+=+=+=+=+=+=+=+=+=저는 언제나 소외 계층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모든 RPG 세계의 궁극의 소외 계층! 그러나 없으면 안되는 인물! 바로 아이템 가게 주인이 아니겠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주인공의 뒤에서 묵묵히, 그러나 유용한 도움을 제공해 온(물론 이들도 돈은 받습니다만...) 비운의 엑스트라를 드디어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나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드디어 숙원 사업의 성취야……)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29505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1 21:01 읽음:256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2) "아하핫! 하비야나크 최고의 퀵 서비스 나가신다-!" 나는 신이 나서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씽씽 소리가 나도록귓가를 지나가는 바람 때문에 발갛게 익은 얼굴이 벌써 얼얼하다. 퀵서비스는 내가 만든 말이지만 이미 우리 동네에서는 일상 용어가 되어버렸다. 특히 점원들은 경쟁적으로 이 말을 좋아한다. 그러나 역시퀵 서비스의 왕은 항상 나였다. 쐐애애애액- 촤아~ 촤자자작!! 내가 타고 있는 것은 처음엔 납작한 널빤지를 길게 잘라서 기름을먹인 것이었는데, 이건 흠집이 잘 나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한 사건이일어나는 바람에 큰 마음 먹고 철제로 바꾼 것이다.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어쨌든 가능한 한 단단하고도 가볍도록 신경을 써서 대장간에 부탁을 했다. 그래도 철은 철인지라 꽤나무겁다. 이 모양은 벌써 몇 번의 개조를 거친 것인데 처음에는 그저 네모진모양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판의 양끝을 둥그스름하게 깎고, 양쪽이들려 올라가도록 만든 데다 크기 조절도 몇 번이나 한 마을에서는 제일 가는 물건이 되어 있다. 즉, 수많은 점원들의 시샘을 한 몸에 받는 물건인 것이다. 이름하여 '스노우보드'!(역시 이름은 내가 붙였다)내가 사는 하비야나크 마을은 우리 영지 전체에서 하얀 산맥에 가장 가깝다. 즉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네의 길들도 죄다 부드러운 오르막과 내리막들의 연속이다. 한 마디로 이 '스노우보드' 타기에는 제격인 지형인 것이다. 영주님의 성은 저 아래 '장미꽃의 엠버' 마을에 있다. 물론… 돌아올 때는 지형이 거꾸로이기 때문에 반쯤은 걸어오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눈 신발을 가져간다. S자 모양으로 이리저리 구부러지면서 마을 중앙의 대로로 접어들었다. 몇 번인가 정말 아슬아슬하게 길거리에 세워 놓은 술통이랑 지나가는 사람 등을 비껴 지나갔다. 옷자락이 후루룩 말려 올라간다. 혀를 쯧쯧 차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내 질주를 기분 좋게 쳐다보아준다. 왜? 보고 있으면 신나니까. 나도 처음부터 이걸 잘 탄 것은 아니다. 그저 썰매를 서서 미끄러지게 해 볼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한 거지만, 남 보기 우습지 않게 타기 위해서 죽지 않을 만큼은 고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목뼈를 유난히 중시하시는(?) 우리 어머니는 머리가 아직 내 어깨 위에 붙어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고 말하곤 하신다. 게다가 이걸 철로 개조한 다음부터는 팔다리 단련에 아주 그만이었다. 팔은 왜냐고? 돌아올 때는들고뛰어야 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배달도 즐겁게 해치울 수 있다. 순식간에 몇 개의 거리가 눈앞에서 후딱 지나갔다. 발 아래에서 눈이 조각조각 튀긴다. 벌써 저만치 마을 입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의 속도는? 한 번도 안 멈췄으니까 최고 기록에 가깝겠지. 기분 최고다! 그래도 목뼈는 부러지지 않게 조심해야지. "큰사슴 잡화의 파비안!" 누가 나의 풀네임(?)을 부르는군. 나는 고개를 돌려보려고 했지만 이미 지나쳐 버렸기 때문에 두 발을 움직여 판을 멋지게 꺾으면서 언덕 아래에 정지했다. 이 폼이 말되게 하느라 또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런데 저건 누구지? "응, 내가 잘못 보지는 않았군." 와, 저 머리에 손 쬐면 따뜻하겠다. 나는 마치 불붙은 것처럼 환한 빨간 빛깔 머리카락의 사내를 멀뚱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나를 불러 세운 사람인데 기억 창고를 더듬어 봐도 전혀 안면이 없다. 저렇게 특이한 머리카락을 기억 못할 리가 없는데. 그런데 내 이름은 어찌 안담. "사람들이 이상한 판 쪼가리를 타고 거리를 씽~ 지나가면 자네라고하더군." 내 의문은 금방 해결되었다. "무슨 볼일이시죠?" "아, 뭐 좀 시킬 물건이 있어서." 으음……. 이런 사람을 여름에 만났으면 용서 못한다. 나는 다른점원들처럼 장부를 꺼내 드는 대신 귀를 열심히 기울이는 시늉을 해보였다. "말씀하세요." "음, 바늘하고 실. 그리고 그물 한 묶음." "뭐에 쓰는 그물이요? 낚시? 곰잡이? 아주 큰 것도 얼마든지 있어요." "아냐, 내가 필요한 건 촘촘한 거야." "어드만한 거요?" "아주 작은 것. 제일 작은 것." "…참새 그물요?" 이상한 사람이다. 이 겨울에 참새를 잡나? 나는 상대방의 행색을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가죽 바지와 조끼, 끝이 닳아진 후드 달린모직 로브, 튼튼해 보이는 부츠. 그럴 듯한 모험가의 모습인데, 참새나 잡고 다니다니. 요즘 참새한테 새로운 용도라도 생겼나? 아무래도내 머리로는 구워 먹는 거 말고는 별다른 용도가 없는데. 내가 열심히 추리를 하는 동안 그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참새 잡는 그물 좋겠군." 나는 그의 목소리가 워낙 신중하고 진지해서 문득 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게 되었다. 평범해 보이는 갈색 눈이지만 눈빛은 상당히 날카롭다. 이런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눈매가 아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하는 순간 사내의 눈동자에 스쳐간이상한 빛…… 그건 내 경험상 '살기'라고 불려질 만한 것이었다. 이거 살벌한 사람이었군. 나는 태도를 전환했다. "아, 예~ 그러시군요. 아주 좋은 것이 있습죠. 그럼 어디로 배달해드릴까요?" "'설산의 불빛' 여관, 2층 동쪽 끝방이다. 미르보 겐즈를 찾게." 뭔가 사냥꾼처럼 들리는 이름이란 말야. 하지만 참새 사냥꾼으로는좀… 그렇군. 게다가 아마 저 자라면 참새를 눈빛으로 잡을 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물은 뭐에 쓰지? 으음……. 나는 내 생각이 딴 데로 더 뻗치기 전에 재빨리 해야할 질문을 했다. "언제 들르면 되죠?" "이제부터 아무 때나. 해가 지기 전에 가져오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노우보드는 한번 멈추면 언덕 꼭대기까지올라가야 다시 탈 수 있는데. 내가 다음 언덕으로 뛰어올라가려는 참인데 갑자기 뒤에서 미르보가 다시 나를 불렀다. "잠깐만." 뭐지? 저 살벌한 말투는? 나는 잠시 안 그래도 추운 언덕길에서 얼어붙을 뻔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별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오는 길에……." 뭔가 불길하다. "…군고구마 1존드 어치만 사다주게." 왜 나의 불길한 예상은 틀리는 법이 없나. 저 만치 영주님의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는 길에 주문 한 가지 - 사실 두 가지다. 이만하면 팁도 더 줘야하는데 - 받은 것을 제하면 별 일 없이 나는 '장미꽃의 엠버' 마을에도착했다. 영주님의 성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그래도 이 근처에서는가장 큰 건물이라 꽤 멀리서도 잘 보였다. 저기 성문이다. 나는 가능한 한 근처까지 미끄러져 간 후에 적절히 스노우보드를멈추었다. 장미꽃의 엠버는 우리 영지의 네 개 마을 중에서는 그래도가장 번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영주님의 성이 있는 데다, 그에 걸맞게 크고 번화한 가게들도 많았다. 외지 상인들이 이 북쪽으로와서 우리 하비야나크까지는 오지 않는 일이 많아도, 엠버에는 꼭 들렀다. 언젠가는 엠버에다가 가게를 내야지. 엠버 사람들은 내 모습에 그다지 익숙하지 못한지 이상한 판 쪼가리 (아니 이건 겐즈의 말투잖아)를 타고 돌아다니는 나를 신기한 듯이 힐끔힐끔 본다. 나는 스노우보드를 옆에 끼고 기운차게 성문 앞으로 걸어갔다. "파비안이냐? 배달이야?" 성문 앞에는 마침 아는 병사가 나와 있었다. 에렌트는 우리 하비야나크 출신이다. 성주님의 병사가 되다니 엄청나게 출세했다고 말할 수 있다. 뭐, 이건 마을 어른들의 말이고 사실난 병사가 되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왕의 기사라고 해도 관심이 없을 판인데, 영주의 병사 정도야. 하긴 나야 에제키엘 같은 대마법사가 되는 것보다도 리에주에다가 대륙 최고의 잡화점을 내는 일편이 훨씬 흥미진진하고 그럴듯하게 느껴지니까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 "네, 배달이에요. 에렌트형." 에렌트 옆에 한 병사가 같이 보초를 서고 있다가 나를 쳐다보았다. "큰사슴 잡화에서 왔소?" 음, 모르는 사람이라 존대를 하는군. 나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노끈 뒤에 엮은 책을 꺼내 그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그런데그가 고개를 젓는다. "아냐, 아냐, 직접 갖고 들어가요." "제가 직접요?" "응, 직접 가져오라는 말이었어." "누구한테 전하면 되는데요?" 윽, 또 저절로 이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는말이었어. "영주님의 아드님, 아르노윌트 크센다우니 엠버 님께 갖다 드리게." 저 이름은 뭐에 쓰려고 저렇게 길담. 배고플 때 잘라먹으려는 건아니겠지. 나는 어깨를 한번 움츠린 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끄덕 했다. +=+=+=+=+=+=+=+=+=+=+=+=+=+=+=+=+=+=+=+=+=+=+=+=+=+=+=+=+=+=군고구마... 는 동생의 발상이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데 자꾸 어깨너머로 넘겨다 보더군요. 앞으로도 종종 이 글에 영향을 끼치곤 합니다만... 참고로 이 녀석은 좀 웃긴 녀석이 아닙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29506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1 21:01 읽음:252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3) 그리하여 나는 분수에도 맞지 않게 영주님의 성안으로 혼자 걸어들어가게 되었다. 아냐, 아냐, 누가 들으면 내가 성안에 태어나서 처음 들어가는 줄알겠군. 난 이래봬도 벌써 성안에 들어가는 것이 두 번째란 말이다. 그럼 첫 번째는 언제냐고? 음…… 우리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출생 신고할 때 나를 안고 들어갔다고 한다. 어쨌든간 성은 멋졌다. 넓은 앞마당에 좍 펼쳐진 잔디밭이 일단 내 눈을 사로잡았다. 저긴눈도 안 쌓였잖아? 가만있자, 지붕도 없는데. 저렇게 눈을 치우려면도대체 사람을 얼마나 동원해야 하는 거지? 이 우리 나라 이스나미르에서도 가장 북쪽지방인 이곳 그레이 카운티(Gray County) 지방에서는 겨울이 무려 다섯 달이나 된다. 봄 축제'프랑딜로아'가 있는 제3아룬드 '아르나(Arna)'(거창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보통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3월, 정도로 불러줄 뿐이다)가 되어도 춥디추우니 말 다 했지. 눈도 얼마나 많이 내리는지 사람이 사는 곳이든 안 사는 곳이든 겨울에 눈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곳이란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아니, 여기만 빼고. 잔디밭 한 가운데로 포석이 깔린 길이 나 있다. 무진장 길다. "흠흠, 으흠, 크흠……." 나는 자신 있는 걸음걸이로 포석 깔린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지만조금 지나지 않아 금세 질리고 말았다. 저 멀리 밖에서 보던 첨탑 달린 성이 아주 잘 보였지만 걸어도 걸어도 가까워지는 것 같지 않았다. 이 성은 왜 앞마당이 이렇게 긴 거지? 나는 성에 대한 지식 같은 건 별로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가끔 읽은 용사나 영웅의 전기 같은데 나오는 성들은 대부분 성 주위에 깊은 해자가 파져 있고, 커다란 도개교를 내리는 식으로 되어 있다. 내 짧은 머리로도 그렇게 되어 있으면 적들이 공격할 때 방어하기 쉽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 성은 그저 예쁘기만 할 뿐 높은 성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깊은 해자는 당연히 없고, 마을의 집들은 아무렇게나 밖으로 노출되어 멋대로 지어져 있고, 앞마당만 쓸데없이 길군. 지금으로서는 정말 모든 것 가운데서도 맨 끝의 사항이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하도 지루해서 나는 옆구리에 낀 책의 표지를 보았다. '세르무즈 식 검술 실습 교본 3권'마브릴의 빛나는 검, 카로단 마이프허 지음 에헤, 이거야 내가 벌써 3년 전에 읽은 거잖아? 나는 절대로, 절대로 전사나 군인 같은 것은 되고 싶은 마음이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3년 전에 읽어치운 데는 다 까닭이 있다. 물론 우리 가게에는 이런 식의 검술, 궁술, 격투술 교본 같은 것들이 적지 않게 쌓여 있다. 그게 적지 않게 쌓여 있는 실질적인 이유는들여놓아도 잘 팔리지 않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이런 북쪽 오지 마을에서 교본씩이나 사서 검술이니 뭐니 연습할사람은 절대 많지가 않다. 우리 마을이 무슨 대단한 군사상의 요지도아니고,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는 것도 아니요, 별다른 몬스터가 나타나는 곳도 아니니 말이다. 내 기억으로도 이건 1년에 한 두 권 팔리면 잘 팔리는 거였다. 유일하게 좀 팔리는 거라면 사냥술 교본 정도? 오래 쌓여 있는 통에 호기심으로 몇 번 뒤적거리긴 했지만, 지금부터말하려는 사건이 있기 전에는 그저 어린애 그림책 넘기는 수준이었다. 그럼 뭣 때문에 아무 쓸모도 없는 이런 걸 독파하게 되었느냐고? 궁극의 성가심, 내 인생의 혹과 같은 녀석, 내 전생의 죄업을 깨끗이하기 위해 태어난 녀석, '사슴 잡화' 녀석이 아니면 무슨 이유가 있겠어! 음, 내가 좀 흥분했군. 어쨌든 아깐 생략했지만, 사슴 잡화에는 주인 말고도 나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좋고, 키도 크고, 나이도 많은 아들 녀석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게퍼 쿠멘츠. 처음 이사 오면서부터 사사건건 나한테시비를 못 붙여 안달이던 이상한 녀석이었으나(이 점은 쿠멘츠 씨가우리 어머니를 보기만 하면 사사건건 수상쩍은 수작을 거는 것과는또 별개의 문제다), 나는 처음에 딱 보기만 해도 상대가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길래 가능하면 부딪치지 말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사는 일이 내 맘만 같진 않은 법이지. 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쓸데없는 트집으로 시비를 붙인 그 녀석은당시 어느 모로 보나 상대가 되지 않던(이해가 안 가거든 그 녀석에대한 앞의 설명을 다시 보라) 나를 신나게 두들겨 팬 다음에 그때까지 쓰던 손때묻은 스노우보드를 부러뜨려 버렸다. 아마 녀석은 내가멋지게 그걸 타고 다니는 것이 오랫동안 눈꼴이 좀 시었던 모양이다. 그때만 해도 나무로 만들어 놨으니 녀석의 손아귀 힘에 당할 재간이없었다. 불쌍한 내 스노우보드. 어쨌든 나는 평생 처음으로 격렬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복수심에 불타던 나는 우리가게에 있던 교본이란 교본은 전부 읽어버렸던 것이다. 뭘 해도 체계적으로 시작을 해야지. 교본을 읽은 다음이 실전 연습 아니겠는가? 암, 나는 한번 결심하면 반드시 뭔가 해내는 사람이다. 지금도 보라, 드디어 포석길을 다 걸어 성에 도착했지 않은가. "큰사슴 잡화에서 배달 왔는데요." 내 앞을 막아서고 용건을 묻는 집사가 혹시 귀찮게 할까 싶어 가능한 한 순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나는 말을 마쳤다. 그런데 집사는뭔가 이미 알고 있는 듯 나를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죽 훑어본다. 내가 뭐 특별한 것이 있다고 저렇게 쳐다본담. "따라오게." 그리하여 나는 이번에는 성 가운데를 가로질러 가게 되었다. 석조로 지어진 성인데 그럴 듯한 투구와 갑옷 같은 것들이 복도에 세워져있기도 하고, 번쩍거리는 게 멧돼지나 사슴 잡기에는 아까워 보이는창이나 칼들이 벽에 걸려 있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내 허리에도 칼이 하나 걸려 있긴 했다. 주제에 맞지 않게 검술 교본이니, 창술 교본이니를 실컷 읽은 뒤에괜한 취미가 생겨서 하나 차고 다니게 된 칼이지만 여기서는 장식용으로나 쓰는 모양인 저 벽에 걸린 칼들과 비교해서도 형편없었다. 거의 대거(Dagger)에 가까울 정도로 짤막한 칼이니 말이다. 그래도 산자락에서 삵쾡이라도 만났을 때엔 꽤나 쓸모가 있었다. 복도를 지나 둥근 방으로 들어갔다. 천장이 굉장히 높은 홀이다. 신경쓰인다. 발소리가 소리나게 울리는 것이 또한 영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그 신경 쓰이는 방에 두 사람이 서서 나와 집사를 기다리고있었다. 보기만 해도 따뜻할 것 같은 거위털 외투를 입은 한 내 또래 남자와 그보다 키가 훌쩍 큰 인상이 고약한 중년 남자다. "아, 드디어 왔군." 드디어 왔다니, 이 책이 그렇게나 희귀한 거였던가? 내 기억엔 이책, 약 3년 전에도 우리 가게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는데……나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일단 옆구리에 낀 책을 꺼내 입을 연사람에게 내밀었다. 그 쪽이 이걸 기다린 사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옆의 중년 남자가 험악한 인상을 더욱 찌푸리면서 커다란 목소리를 냈다. "예의를 지켜라. 영주님의 아드님이신 아르노윌트 크센다우니 엠버님이시다." 아아, 자네로군? 아니지, 댁이 그 양반이시군요? 나는 영주의 아드님이라는 나와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 젊은 남자의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런데 영주님한테 이렇게 나이 어린 아들이 있었던가? 뭐야, 꽤나 예쁘장하게 생겼군. "뭐야, 꽤나 예쁘장하게 생겼군." 내 생각이 갑자기 말이 되어 들려오는 바람에 나는 심히 당황했다. 그런데 그 말은 영주 아드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럼 누구보고한 말이지? 설마, 나? 영주님 아드님('님' 자가 두 번이니 좀 이상한 어감이다) 아르노윌트는 곱살하게 생긴 얼굴에 짧은 금발을 얌전히 귀 뒤로 넘긴 제법소녀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저기에 비하면 나는 역전의 용사로 보일지도 몰라. "너를 기다렸다. 잡화점 점원." 나도 이름이 있는데. 좀 짧긴 하지만. "저를요?" "그렇지, 너에 대한 이야기가 이 내 귀에 들려오더군." 아르노윌트가 손을 들어 자기 귀를 가리켰다. 그럼 귀로 듣지 누구는 코로 듣냐? 나는 그가 빨리 용건을 말하기를 기다렸다. 나는 빨리 돌아가야 할필요가 있다. 우리 가게의 물건 한 개라도 어머니께서 팔게 해서는제 값을 받길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전의 절기라는 것은 이런 점에서도 역시 내 쪽이 우수하다. "일단 책을 줘." 나는 책을 건네주었다. 아깐 얼결에 한 손으로 줄 뻔했으나 이번엔깨달은 바가 있으니 두 손으로 공손히 내주었다. 으음, 이런 식이라면 겨울 배달도 재미없어질 것 같아. "너는 하비야나크에서 제일 몸이 날래다지?" "물론입니다." 나의 자부심에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나의 대답은 언제나 확고하다. "그리고 그 판…을 타고서, 그, 저… 이렇게……." 아르노윌트가 거위털 외투를 입고 S 자로 양팔을 저어 보이는 꼴은퍽이나 우스웠다. "…… 다닌다지?" "예." 가능한 한 짧게 대답해야 이야기도 짧아질 거야. "그래. 내가 들은 대로군." 아르노윌트는 싱긋 웃더니 옆에서 지나치게 힘줘서 입을 다물고 있는 험상궂은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타데아 선생님, 이만하면 쓸만하겠지요?" "그렇군요, 아르노윌트 도련님." 쓸만하다니, 도대체 뭐에 쓴다는 거냐?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타데아라는 남자는 척척 걸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키도 엄청나게 크군. "너." "네?" "내일부터 도련님의 대련 상대다." "네?" 이게 무슨 소리지? 분명 우리말 맞는데. "내일부터 매일, 아침을 먹고 성으로 와서 도련님과 검 대련을 한다. 검은 여기서 줄 테니 빈손으로 와도 좋다. 영광인 줄 알고, 그만물러가라." 할 이야기가 끝난 듯 두 사람은 몸을 돌리려 했다. 아냐, 얘기가 짧게 끝나는 건 좋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결정이 나면날더러 어쩌란 말야! 아니, 그러면 오전에 가게는 누가 보지? "저, 저…." "뭐냐?" 험상궂은 얼굴이 돌아보았다. +=+=+=+=+=+=+=+=+=+=+=+=+=+=+=+=+=+=+=+=+=+=+=+=+=+=+=+=+=+=오리털 외투가 따뜻할까요, 거위털 외투가 따뜻할까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29611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2 20:54 읽음:251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4) "그…… 저는 점원입니다." "점원이건 뭐건, 상관없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니 오라고 하는 것이지, 신분보고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내 이야기는 그게 아니란 말야. "저, 그게 아니라……." "또 뭐야?" 저렇게 당장 높아지는 목소리를 보니 저 자는 전직 군인이었음에틀림없어. 너만 목소리 큰 줄 아냐. "저는 가게를 봐야 한단 말입니다!" "뭐얏!" 역시… 나보단 컸어. 타데아 선생이 벌컥 화를 내려고 하는 판인데, 그보다 더 살벌한상황, 다시 말해 섬세하게 생긴 영주님 아드님 아르노윌트님('님'이세 번이니, 정말 어감은 개판이다)의 이마에 잔주름이 몇 개 그어졌다. 즉, 인상을 팍 쓰고 있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다. 타데아 선생은 도련님의 표정을 보더니 공손히 일단 뒤로 물러난다. 아르노윌트는 아까와는 판이하게 다른 어조로 말했다. 나하고 같은또래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평민의 자식이라면 절대 저 나이에 저런 목소리는 낼 수 없다. 나이가 들어도 사실 거의 불가능하지. 왜냐고? 낼 일이 없으니까. "네가 이 엠버리 영지에 살면서 내 말을 거역하느냐?" 엠버리는 큰사슴의 하비야나크, 장미꽃의 엠버, 월계수의 그릴라드, 눈꽃의 스덴보름, 이렇게 네 마을을 합쳐서 부르는 우리 영지 전체의 이름이다. 아니, 지금 한가하게 이런 걸 설명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얼굴을 찌푸린 아르노윌트는 꼭 늙은이 같았다. 다시 말해 어른 귀족들처럼 그는 화를 내려고 했다. 말투도 꼭 애늙은이 같이…… "내 말을 거역하면 감옥밖엔 없어!" 그래, 저말이야. 나는 성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되돌아 나오는 길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길었다. 아까도길었는데 더 길면 어떻게 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어쨌든 내가 발을 끌면서 느릿느릿 걷고 있어서 더욱 긴 건지도 몰랐다. 사람 키의 몇 배는 될 듯한 높다란 문을 병사들이 열어 주었다. 아까는 못 느꼈는데 저 문도 무지막지 크다. 그리고는 기나긴 앞마당이었다. 내일부터 매일 와야 할 길인데, 도대체 왜 이따위로 생겼을까. 저만치에서 영주님의 시녀인 듯한 여자들이 몇 명 지나가다가 나를보고 픽 웃는다. 저들끼리 속닥대면서 고개는 이 쪽으로 안 돌리고있다. 그러나 나는 다 안다. 그렇게 조그맣게 수군대도 다 들린단 말이다. 내가 어디로 봐서 귀엽다는 거냐, 젠장. 나는 한층 기분이 상해서 앞마당 포석길을 터덜터덜 걸었다. "가냐, 파비안?" 오오, 내가 드디어 이 길을 다 걸어나온 걸까? "교대중이야." 에렌트형, 나의 환상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깨버리다니. "무슨 볼일 이래냐?" "말하기도 끔찍한 볼일이에요." 물론 나는 그 끔찍한 사실을 에렌트형한테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아르노윌트가 얼마나 성격이 더럽고 타데아는 한 수 더 뜨며, 그두 작당이 우리 어머니까지 들먹이면서 나를 협박했다는 것이나, 앞으로 아르노윌트나 타데아한테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아 가면서 그대련인지 개뼉다귄지 하는 것을 아침마다 해야 된다는 거, 그리고 정작 중요하게는 내가 대련을 하다가 실수로라도 아르노윌트를 한대쯤때렸다가는 그야말로 오늘 그놈 입에서 나온 말들이 모조리 현실화될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그래, 그럼 말하지 마라." 친절하기도 하셔라, 에렌트 형님. 나는 에렌트형과 헤어져 천천히 성문을 향해 걸었다. 갖가지 복잡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르노윌트님, 오늘 중으로 어디 넘어져서 팔이라도 한 대 부러지시면 안될까. 그런데 앞으로 뭐라고 불러야하나? 영주님 아드님 아르노윌트님? 아니면 그 잘 기억나지 않는 긴이름인가? 설마…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내 이름은 물어보지도 않았군. 자기 이름보다 훨씬 외우기도 쉬운데, 씨이! 가게에 돌아온 것은 점심 먹을 때가 다 되어서였다. "파비안, 이 녀석, 뭘 그렇게 오래 걸려?" 말은 저러셔도 어머니의 말투로 말할 것 같으면 온화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팔자에 없는 엄한 인간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 귀에는 - 나는 아르노윌트처럼 귀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코로 듣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할 사람은 내 앞에 없기 때문에 - 졸음이 쏟아지게 할만큼 감미롭게 들렸다. "어머니." "왜 그러냐?" "사랑해요." 내 생각이지만 지금 어머니의 저 눈초리에는 내 머리의 상태에 대한 심각한 의심이 담겨 있음에 틀림없다. 이런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서 나는 대안 프로젝트 1을 적용시켰다. "점심 제가 차릴게요." "그럼 언제는 네가 차렸지, 내가 차렸냐?" 우리 어머니 말솜씨가 언제 저렇게 느셨지. 어머니와 마주보고 점심을 먹었다. 빵 두 개, 사치의 극치라고 할만한 양젖 버터, 감자 두 개, 사과 두 개. '점심은 간단하게', 이것은 그런 대로 수긍할 만한 어머니의 표어였지만…… 왜 아침하고 저녁도 표어가 똑같아야 하냐고. 나는 어머니에게 가능한 한 간단하게 브리핑을 마쳤다. "네 주제에 칼 연습이라고?" 어머니의 간단한 감상에 나는 아깝디아까운 먹던 빵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도 마다 않고 외쳤다. "어머니이- 그게 무슨 소리예요오-!!" 어머니는 나와는 달리 조금도 걱정하지 않으시는 투였다. 어머니의주장은 이랬다(어머니의 입에서는 감자가 좀 튀어나왔다). 나처럼 칼이라고는 빵 써는 칼 정도나 '가끔' 만져보는 주제에(이건 순 어폐가있다. 우리 어머니보다는 내가 식사 준비는 더 자주 한단 말이다) 영주님 아드님이라는 분도 한 두 번 건드려 보면 재미없어져서 그만 하겠다고 나올 것이라는 거다. 아들을 우습게 보셔도 분수가 있지. 하긴, 어머니는 나와 게퍼와의 관계에 대해선 잘 모르신다. 어머니만 나타나셨다 하면 그냥 걸음아 날 살려라 내빼는 녀석이니까(쿠멘츠 씨의 태도를 생각해 볼 때 게퍼의 그런 행동은 너무나도 당연한것이다. 그 정도 지능은 있는 녀석이었던 것이다) 아실 리가 없지. 그러니 빵 써는 칼 운운하시는 것도 전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디 내가 어머니의 걱정만 같은 아들인가 하면…. 3년 전의 일이 떠오르는군. 나는 넓지 않은 골목길에서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네 녀석을 하나 하나 둘러보았지. 하나야 당연히 아는 얼굴이고, 나머지 셋 중 하나도 한 번쯤 본 얼굴이고, 둘만 모르는 얼굴이었다구. 지금이야, 뭐다 아는 녀석들이지만, 가끔 인사도 한다. 이때 이미 게퍼는 나에게 몇 번 당한 끝에 마지막 결판을 내려고우리 집 앞으로 찾아왔었지. 어머니가 안 계신 틈을 타서 말야. 내가녀석들이 권하는 대로 들판이라도 쫓아 나갔을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 내가 왜 이런 좋은 위치를 버려. 어머니가 나타날지도 모르고,길가는 사람이나, 심지어 영주의 행차라도 있을지 누가 아느냔 말이다. 이 모든 것은 나의 팔다리 안전을 지켜 주는 확실한 이벤트들임에 틀림없다. "잔소리 말고 칼을 뽑아!" 네 녀석의 그 유치한 대사에 어울리는 칼이라도 내가 차고 있다면참 좋겠다. 나는 칼 운운하는 녀석이 들고 온 그 '칼'을 한 번 쳐다보고 혀를 찼었지. 기다란 나무 작대기를 끝만 뾰족하게 깎은 것. 그거 나스레트 씨 앞마당에 흩어진 것 중에서 하나 훔쳐온 것 누가 모를까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지. 뭐 내 주변엔 그만한 긴 막대기는없고 겨울이라 장작 몇 개만 뒹굴고 있었지. 돼지몰이 할 때나 쓰면제격이려나. 한 번 물어나 볼까. "혹시, 돼지였냐?" "뭐, 뭐라고?" 처음 칼을 뽑으라고 외친 장본인의 외침이었지. 나는 굳이 누구라고 지칭하진 않았는데 괜히 제발 저리는 이상한 녀석. 하긴 내가 잘알지도 못하는 다른 누구들더러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거니와, 사실돼지에 가깝게 생긴 건 너 밖에 없잖아. 음, 다시 생각해보니 훌륭한추리였어. "돼, 돼지라고…." 흥분한 게퍼가 긴 막대기를 꼬나들고 아직 그 같잖은 장작개비나마잡지도 않은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런데 어쩌면 오른손에 칼을 든주제에 왼발을 앞으로 내딛는담. 네 녀석한테 5개월 전에 얻어맞은덕택에 가게에 검술 교본이란 교본은 모조리 독파한 나다. 네 녀석의폼이 엉망이라는 것쯤은 알고도 남는다구. 그리고 폼이 엉망이면 아무도 칭찬 안 해줘! "이야야압!" 나는 위와 같이 멋지게… 외치면서 녀석의 너무 긴 막대기가 우리집 처마에 부딪치는 순간, 후닥닥 문간에 내놓은 통 뒤로 들어가 숨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녀석의 둔한 몸놀림에 대해 실로 감사하는 마음을품으며 이 축복을 누구에게 돌려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겁하다, 파비안!" 오오, 너 술집에서 깡패들이 싸우는 구경이라도 하고 왔나 보구나. 그렇다면 또 정통 검술을(책으로만) 배운 내가 뭔가를 보여주고는싶은데, 뭘 보여준담? "이야야압!" 내가 통 뒤에서 같은 기합을 한 번 더 넣자 게퍼는 움찔,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딴 데로 움직일 줄 알았지? 헤헤. 나는 통 뒤에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으앗! 더 비겁하다, 파비안!!" 오늘 저 녀석 덕택에 내 이름이 자주 불명예스럽게 거론되는걸. 아무래도 기분이 별로야. 대책을 강구해야겠어, 라고 나는 생각했지. 통 뒤에 쌓아 놓은 장작개비 중 한 개를 집어들었다. 가능한 한 긴것으로. 나는 녀석보다 몸이 두 배는 가볍거든. "이야야압!" 이번에 게퍼는 무슨 사태가 일어날지 몰라 불안스런 표정으로 뒤로한 걸음 물러섰다. 오, 적절한 위치. 나는 통 위로 가볍게 뛰어오르면서 모서리 부분을 차고 몸을 솟구쳤다. 통이 벽 쪽으로 휙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제발 조금만 부서져라, 물통아. 망가지면 고치는 건 어차피 내 차지다. 그리고 그대로 적절한 대각선상 위치에 멈춘 게퍼의 머리를 향해통 뒤에서 집어든 장작을 일자로 내리쳤다. 퍼억! 게퍼의 머리에 명중했다 싶은 순간, 양쪽에서 서 있기만 하던 두녀석이 막대기를 내리쳐온다. 이미 손을 돌릴 수 없는 상태, 이럴 땐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그래. 이렇게 쓰여 있었어! 나는 일단의 충격이 게퍼의 머리에 가해지는 순간 장작을 놓아버렸지. 그리고 지렛대가 없어지는 순간 아래로 뚝 떨어지는 몸을 최대한땅바닥을 향해 수그렸다. 퍼벅! 두 개의 막대가 저들끼리 부딪는 소리. 곧 아래쪽의 내 허리를 노리겠지. 양쪽 어디로든 피할 수 없다. 피할 곳이라면 뒤쪽뿐인데 몸을 돌리기엔 늦었어. 그러나 나는 게퍼보다 두 배는 재빠르거든. "오오오옷!" 머리를 싸쥐고 휘청이는 게퍼.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녀석이니 당연히 다리도 길지. 오늘은 그 점이 매우 고마운걸. 내가 굴러들어 가고도 남을 만한 구멍이야. 나는 수그린 몸을 그대로 앞으로 굴려서 게퍼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갔다. "정말, 비, 비겁……." 퍽-, 아이쿠 머리야. 너무 많이 굴러서 건넛집 울타리에 부딪쳤지만 나는 용감하게 벌떡일어나 뒤돌아섰다. 아니, 사실은 정신을 차린 게퍼가 어떻게 할 지몰라 후닥닥 일어난 것이다. 내 판단은 정말 옳았다. 막대기가 공중에서 달려들고 있었지. 이제 나는 빈 손. "하앗!" 오른발을 대각선으로 비스듬하게 올려서 녀석의 오른손을 걷어찼다. 발끝이 정확하게 힘이 끊기는 순간 녀석의 주먹에 닿자, 녀석이놓친 막대기가 훌쩍 담 뒤로 넘어간다. 안녕- 손을 흔들어 줄 새는없고, 내가 따라가 주마. 그대로 주먹을 싸쥔 채 황소처럼 달려드는게퍼를 피해 얕은 우리 집 담을 훌쩍 넘어갔다. 투다당- 퍼석! 어, 저 녀석이 우리 집 담 다 부시네. 그러나 담 안에는 나의 필살의 무기! 나는 스노우보드를 - 이 때는 이미 강철로 다시 만든 뒤다 - 바닥에서 집어들고, 일어나려는 게퍼를 향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힘껏내둘렀다. 이 근방 소년들 가운데 이만한 팔 힘을 가진 사람은 나밖에 없다. 다 강철 스노우보드 덕택이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게퍼네 덕택이기도 하고. 그러나 나도 무식하게 머리를 내려치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의사한테 드는 돈이란 정말 장난이 아니거든. "끄아아아……" 일어나려다 강철판을 그대로 어깨에 얻어맞은 녀석은 신세 좋게 옆으로 넘어가더니 땅바닥에 대자로 누워 버렸다. 언제 일어나려나. 나는 턱을 괴고 다른 녀석들이 벌써 도망치고 있는 아래쪽 골목을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었지. 나는 간신히 유쾌한 회상에서 깨어났다. 5개월의 각고 끝에 이룩한 게퍼 쿠멘츠에 대한 응징과 복수전 - 이런 것은 이후에라도 유쾌하게 회상할 수 있지만 아르노윌트와의 경우는 전혀 이야기가 다르다. 물론 나는 어머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줌으로서 어머니의 기분을모조리 망칠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벌어진 일인데 어머니까지 덩달아 기분 나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그만 아까운 빵을 마저 씹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 그래, 어머니께서 아들을 싸움꾼으로 안다고 뭐달라지는 거라도 있겠어. 어머니는 식탁에서 일어나고 계셨다. "게다가 어깨 너머로 검술 구경이라도 좀 해놓으면 혹시 돼지라도잡을 때 도움될지 아냐." 저, 저 말씀은 무슨 뜻이지? 나는 점심상을 치우고 방으로 들어가다가 말고 잠시 멈춰서 생각에잠겼다. 왠지 지금까지 내가 해온 추리를 모조리 다시 생각해봐야 할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파비안이란 녀석은, 아무래도 실력과 요령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녀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다가 행운이라는 양념만 잘 뿌려지면 기가막힌 요리가 될 텐데...... 음...... 그리고... ...... 지금까지 주인공을 요리로 착각하고 있는 작가였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29612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2 20:54 읽음:250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5) "파비안이구나. 2층이다." '설산의 불빛' 여관 주인 고르만 씨가 정신없이 주방에서 나오는맥주 잔들을 양손에 몰아 쥐다 말고 계단 쪽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평상시대로라면 맥주 나르는 것 좀 도와주고 고르만 부인 특제 피넛쿠키나 몇 개 얻어먹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닌지라, 나는그저 고개만 끄덕해 보였다. 사실 고르만 씨는 대단히 바쁜 척 하지만 보기만큼 실제로 그렇게 바쁘지는 않다. 저런 모습은 아주머니가홀로 나와볼 때가 되었다는 의미일 뿐이다. 나는 계단을 올라갔다. 미르보 겐즈 씨는 분명 몇 개 묶음 짜리 그물을 달라고 정확히 주문하지 않았다. 그저 그물 한 묶음 달라고 했을 뿐이다. 그러니 내가 가장 큰 20개 짜리 묶음을 들고 가더라도 절대 할 말은 없다. 동쪽 끝방이랬지. "겐즈 씨, 겐즈 씨!" 문을 두드리는데 대답이 없다. 어디 나갔나? 그런데 문고리를 만져보니 문이 열려 있었다. 초저녁부터 자느라 못 듣는 건가. "겐즈 씨-."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람이 들어 있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방은 새로 정리해놓은 그대로의 방이다. 여관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언젠가는 집을 떠난 여행자(어디까지나 대륙을 주유하는 거상!)로서 여관에 한 번 머물러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단 말씀야. 방 모양새는 정말이지 거의 고르만 부인이 손님 오기 전에 정리해놓는 모양 그대로였다. 내가 이걸 어떻게 잘 아냐 하면, 가끔 눈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이여름에 몰려서 바쁠 때 여관 일을 도와주고 얼마씩 챙긴 일이 있으니까 그렇다. 내가 일 도와주고 몇 푼 챙긴대도 고르만 씨나 고르만 부인이나 별 소리 하지는 않는다. 잡화점 파비안이 공짜로 일하는 법이없다는 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으니까. 게다가 나만큼 손재주 있게일을 금방 배워서도 잘 해내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저 아무 애들이나 채용해 봤자 일하는데 귀찮기만 하기 십상이란 걸 그들도 잘 알고있다. 물론 나라고 돈에만 눈이 멀어 마구 요구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상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아야 하는 것이다. 가끔은 그냥 들러서 도와줄 때도 있다. 그런데 테이블 위에 흰 천으로 둘둘 만 무언가가 얹혀 있었다. "겐즈 씨-!" 나는 한 번쯤 더 외쳐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이 없자 나는 일단 가져온 그물을 테이블 위에 얹어 놓을까 하고 꾸러미를 한쪽으로밀어 놓았다. 허, 이거 뭔지 몰라도 꽤나 무겁네. 꾸러미는 세로로 길쭉했다. 그물이 20개나 되고 군고구마가 든 바가지도 있었기 때문에 테이블이 비좁아서 기다란 꾸러미가 바닥에 떨어질 것 같다.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쉰 다음 힘껏 꾸러미를 들어 침대 위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겐즈 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깜빡 졸았을까. 나는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일어났군, 이라는 말 정도는 할 법도 한데 미르보 겐즈는 그저 내얼굴을 한 번 쳐다보기만 할 뿐 계속해서 군고구마를 깠다. 그리고내가 잠시 동안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쓰는 동안에도 아무 말도 없이군고구마를 입에 넣고 있었다. 한 개 먹어봐라, 하면 어디 덧나냐. 겐즈 씨의 이상한 취미 - 물고구마 반, 밤고구마 반이라니, 까다롭기도 해요 - 를 맞춰 주느라 고구마 파는 아주머니한테 잔소리까지들은 나인데, 게다가 저 고구마 담은 바가지도 이따가 내가 갖다 줘야 되는데, 치사하다 치사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미르보 겐즈 씨는 이제 세 번째 고구마를 집어들어 까고 있을 뿐이다. 이제 나는 졸음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그리고 저 가증스런 행태에 보답하여그물 값을 톡톡히 쳐 받아야겠단 확고한 의지도 그와 동시에 발동되었다. "그물은 개당 6존드, 모두 합쳐서 120존드예요." 대답이 없다. 너무 세게 불렀나? 그렇다고 숙이고 들어갈 잡화점 파비안이 아니지. "그리고 고구마는 1존드 어치는 안 판다고 해서 1존드 50 줬어요. 그게 일 인분이래요." 여전히 조용하다. "그리고 아저씨 기다리느라고 여기서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했어요. 이 시간이면 물건 몇 개는 더 팔았을 거예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가 내가 정확히 알 리가 없다. 다만 밖이 약간 어둑어둑해지는 듯해서 대충 때려잡은 것뿐이다. 역광을 받은 겐즈 씨의 얼굴은 약간은 괴기스러운 윤곽이 되어 있었다. 저 허리에찬 긴 검이 좀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일단 시작한 거 끝까지 밀어야지. 그런데도 말이 없네. 화났나? "…… 저 그만 가야 해요. 날아가는 제 시간, 돈으로 쳐주실 거 아니면 그만 그물 값이랑 고구마 값이랑 계산하시고 보내주세요." "너…." 앗, 드디어 말한다. 고구마 먹는 자세 그대로 잠든 건 아니었어. 하긴 그랬다면 벌써 저 고구마가 다섯 개째일 리가 없지. "… 네가 옮겼나?" 미르보는 턱짓으로 침대 위에 놓인 천꾸러미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하, 그랬구나. 내가 여기 오래 있었고, 저런 것도 옮겨 놓고 했으니까 뭘 훔치기라도 한 게 아닐까 싶은 모양이구나. 잡화점 파비안을 뭘로 보는 거야. 네가 우리 마을에 온지 얼마 안되어서 나를 잘모르는 모양인데,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씀이다. 없어진 거라도 있음말을 해라. 괜히 살벌하게 분위기 잡지 말고. 내 머릿속에 오간 생각과는 딴판으로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은 이랬다. "…… 네." "흐음……." 생각에 잠긴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손은 여전히 일곱 개째의 고구마를 까고 있었다. 정말 빨리도 먹는다. 물도 한 잔 안 먹구 말야. "가거라." "네?" 이게 무슨 봉창 치는 소리야. 이제야말로 뭔가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할 말을 황급히 제조하고 있는 동안 미르보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분명 아까는 방안에 없었던 배낭을 당겨 끈을 풀고는 손을 넣어 뒤적거리더니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주머니를 열자 저녁빛에도 찬란한 광채가 방 안에 반짝거렸다. 붉고 푸르고 노란, 제각기 다른 빛들. 그리고 그 중에 한 개를 고르더니 끄집어 냈다. 그리고 곧 그것은 내 손에 쥐어졌다. 보석……인가? 눈앞에 푸른 광채를 발하는, 한 손에 꽉 쥐일 만한 알맹이가 구르고 있다. 아주 말갛게 빛나는 동그란 돌 조각이다. 나는 최대한 속도를 내어 머릿속의 쓰다만 상식백과를 뒤졌다. 엣참, 좀 많이 써두는건데. 대상인이 되기 위해선 필요할거다 싶어 이것저것 기억해두긴했지만 아직은 잡화점 점원에 불과한데, 금화도 몇 개 보기 전에 당장 보석이랑 맞닥뜨리기엔 이르잖아!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망설이고 있자 그는 내가 왜 그러는가 생각하는 눈치 더니 나름대로 결론을 내었다. "거슬러 주려 애쓸 것 없다." 나는 스노우보드 위에서 내내 오랜만에 드는 약간의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물 20개라…… 그 양반, 그걸 갖고 도대체 무얼 할까. 자신을 약빠르다고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사기를 친다 싶으면 당장 언성을 높이거나 표정을 바꾸어서 상대방을 일단 눌러 놓고 보려고 든다. 나라고 예외라고 하지는 않겠다. 단 1 로존드라도 걸려 있을 때에는 일단 본마음을 숨겨놓고 보는게 상인이니까. 그런데 저렇게 상대가 사기를 치든 말든, 자기가 얼간이여서가 아니라 정말로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 처리가 곤란해진다. 더구나 오늘처럼 단숨에 세게 나갔을 때에는… 거기다 비록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었지만 쓸데없는 의심까지 했으니……. 에라, 그만두자. 그물이 20개면 참새도 많이 잡고 좋겠지, 뭐.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은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어머니한테 일단 보여주기 전까진 신경 안 쓰려 했지만, 자꾸만 손은 바지주머니로갔다. 처음에 그 반짝이는 돌을 받아들었을 때는 이게 혹 가짜가 아닌가하는 일말의 의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뭐 가짜 보석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마디라도 들어 본 것은 아니다. 그저 너무 엄청나서 든 생각이었을 뿐이다. 나같이 태어난 마을을 한 번도 떠나 본 일 없고, 귀족도 아닌 바에야 진짜 보석도 몇 번 구경하기 힘든데 가짜 보석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누가 농사나 짓고 약초나 파는 평민들 놓고 애써 만든 가짜 보석으로 사기를 치겠는가. 그런걸 공들여 만들었으면 귀족들을 멋지게속여먹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내가 잠시 얼떨떨한 다음에, 2층이 곧 무너지기라도 하는것처럼 계단을 반은 구르다시피 내려와서, 고르만 부인의 동생 딕 -젊어서 보석 상인을 따라다닌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기억나서다 - 을숨 넘어가게 불러서, 한 구석으로 질질 끌다시피 데려오고는, 그 파란 구슬을 보여줬을 때 그의 눈은 야릇한 빛을 냈다. "오랜만에 진짜 보석을 본다." 그가 한참을 만지작거린 끝에 입밖에 낸 첫마디였다. 이게 얼마짜릴까. 한때의 허풍과는 달리 보석 상인을 그저 좀 따라다녔을 뿐, 보석감정에 대해서는 사실 쥐뿔도 모른다는 딕의 고백을 듣게 된 것도 성과라면 성과려니와 - 나 같은 사람한테 남들이 모르는 이야기면 모두돈하고 직결될지 모르는 정보다 - 그것을 적절히 이용해서 파비안이웬 보석을 보여주더라는 이야기를 퍼뜨리지 못하게 입단속을 시킨 것도 정말이지 적절한 조치였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이런 약빠른 점을 발휘해 봤자, 이 보석의 시가를 알아내는데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말 눈알처럼 반짝거리는 이 돌 조각이 진짜 보석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딕도 결코 양보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뭔가 대단한 물건이긴 한 모양이니, 아무나 붙잡고 보여주면서 화를 자초할 만큼 나도 어리석진 않았다. 그러니 어쩌란 말야. 잡다한 고민으로 머리가 터지기 일보 직전쯤 나는 문 앞에 당도했다. +=+=+=+=+=+=+=+=+=+=+=+=+=+=+=+=+=+=+=+=+=+=+=+=+=+=+=+=+=+=+=요즘은 군고구마 먹기엔 좀 따뜻한 계절이 되었죠?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29613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2 20:55 읽음:249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6) "다녀왔어요." "저녁 먹어라." 이게 웬일이람. 저게 내가 먹을 저녁상 맞나. 식탁에는 그럴 듯한 냄새가 풍기는 쇠고기 스테이크와 버터를 촉촉하게 녹여 요리한 아스파라거스, 게다가 이 계절에 구경하기조차 힘든 나무딸기 파이가 놓여 있지 않은가. 나는 식탁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멈춰 섰다. "빨리 말씀하세요. 잘못한 거 다 용서해 드릴게요." "이 녀석아, 에미의 정성을 그렇게밖에 해석 못하니?" 하긴 우리 어머니의 요리 솜씨는 웬만한 직업 요리사 뺨치는 실력이다. 잡화점 안 차리고 여관이나 식당을 냈어도 괜찮을 만큼이다. 흠, 그랬다면 나는 하비야나크 최고의 급사가 되었겠군. "알았어요, 어머니. 멀리 떠나시는군요? 그렇죠? 어머니가 안 계셔도 제가 가게 잘 보고 창고도 관리할게요. 뭐, 안 그래도 어머니보다는 제가……." 이쯤에서 나는 날아오는 빵조각을 적절하게 피했다. 음식은 식기 전에 먹어야 한다. 특히 몇 달에 한 번도 먹기 힘든 성찬일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연신 고기를 썰어 씹어 삼키고 걸신들린 듯 파이를 뱃속에 쓸어넣으면서 겐즈 씨가 준 보석 이야기를 언제 할 것인가 고심했다. 어머니는 아주 평안한 모습으로 우아하게 스테이크 조각을 입안으로 던져 넣고 계셨다. 그런데 보석이란 이렇게 무거운 거였나. 당장 그 파란 구슬이 주머니를 뚫고 나와 바닥에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과분한 진미를 앞에 놓고서도 내내 손을 주머니로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니. 어쨌든 식사가 끝날 때까지는 억지로 참아야 했기에 나는 가능한 한 음식에 열중했다. 스테이크는 말할 것도 없이 맛있었지만, 반쯤은 입이 아닌 다른 곳으로 들어갔더라도 나로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머니께서 별 소리 않으시는 걸로 보아 아마 제대로 먹고 있긴한 모양이야. "너야말로 할 말 있으면 빨리 해라. 용서해 줄 테니." 오, 드디어 어머니께서 나한테 배우시는 게 있으시군. "제가 알고 싶은 건, 오늘이 무슨 날이냐는 거죠." "오늘은 14월 7일이고, 작년 오늘에는 아마도 네가 건너 무기점집딸 벤야 킬른하고 끔찍스런 소문이 났다면서 죽을상을 짓고 밥을 먹다가 나한테 먹을 때는 인상 펴라고 한 대 쥐어 박혔던……." … 이만하면 내 기억력이 누구한테서 나온 것인지는 알만하리라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 게 아니라구요!" 벤야 킬른 이야기는 듣고 싶지조차 않다. 난 그 애 때문에 데인 이후로 여자 애들한테 친절하게 하는 것을 심각하게 재고한 끝에, 요즘에는 차갑고 우울하며(도저히 어울리지조차 않는다), 여자한테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내가 정말 그랬나?), 즉, 이상한 녀석으로 이름을날리는 의아한 사태에 직면해 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이렇게 앉아서 평소에 냄새맡아보기도 힘든특식을 먹고 있는 오늘이 무슨 날이냐는 거죠." "왠지 오늘은 가산을 탕진하고 싶더라. 신이 행운을 줬을 때 자꾸왜냐고 묻는 법이 아니야. 왜냐고? 자꾸 따지면 도로 뺏는 수가 있거든." 나는 즉시로 입을 다물었다. 어쨌거나 의문스럽다. 어머니는 무슨 기분이 드신 걸까.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이상한 짓을 한다고 하던데 혹시…… 에라, 내가 지금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오, 혹시 어머니께서 아들이 떼돈을 벌어 온 것을 눈치채신 것일까? 어쨌든 가산을 탕진할 염려는 없다는 점을 안심시켜 드려야겠다. 나는 저녁상을 치우기가 무섭게 어머니를 끌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보석을 꺼내 보여 주었다. 예상대로 어머니는 긴장했다. "그걸 그냥 주더란 말이니?" "물론 그물 값을 낸 거죠." "요 녀석, 또 네가 바가지 씌웠구나." 뭐, 좋다. 지금 그런 걸 대답하고 있을 때가 아니니까. "그런거야 아무래도 좋잖아요. 이거, 얼마나 할까요? 이렇게 큼직한 걸로 보아 꽤나 비싸겠죠? 보석은 어떻게 만들어졌냐에 따라서 값이 정해진다고 하던데. 보석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잘못했나봐요. 하지만 그 때는 그럴 정신이 없었거든요. 이걸 어쩐다." "…… '설산의 불빛' 여관의 딕한테 물어보면 되잖니." 푸하. 나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비밀 지키기로 한 건 지켜야지. "벌써 물어 봤다고요. 이건 잘 모르는 보석이래요." "네가 물건값을 얼마 불렀지?" "에…… 그물 하나당 4존드 50 달라고 했어요." "음… 5존드 불렀구나." 헤헤… 어머니, 아직 아들을 못 당하시네요. "예……." "너, 고분고분히 예, 하는 거 보니 5존드 50은 불렀구나." 음, 어머니도 요즘 머리를 많이 쓰신 다니까. "그만 하세요. 그러다가 100존드까지 올라가겠어요." 어머니는 양피지를 꺼내 놓고 계산을 하셨다. 어머니는 나처럼 셈이 빠르지 않으시다. 음, 군고구마 이야기는 아예 안 꺼내는 게 좋겠군. 이거 심부름 값을 얼마 받은 셈이 되는 거야? "이만한 보석이 아무리 싸다고 해도 500존드는 넘을 거야. 아무래도……." 어머니, 제발 그 말만은…… "거슬러 줘야겠다." 나는 걱정했던 한 마디가 드디어 나오자 앉아 있던 침대에서 벌떡일어나며 어머니 팔을 잡았다. "어머니!" "그래, 너도 그게 걱정인 모양이로구나. 우리 집에 이걸 거슬러 줄돈이 아무래도 없을 것 같다." …… 뭐, 나로선 아무래도 좋았다. 일단 돌려주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요, 그러니까 거슬러 줄 방법이 없다니까요. 게다가 거슬러줄 필요가 없다고 분명히 말했단 말예요. 아마 그 사람도 돈이 없어서 그런 걸 거니까 우리가 귀찮게 하는 것은 바라지 않을 거예요. 거기다가 인상도 얼마나 험악한지……." 사실 그렇게 엄청나게 험악하진 않았지만… "너, 똑똑한 줄 알았는데 영 바보로구나." "네?" 어머니,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어머니는 아주 나를 훈계하는 표정까지 잡으셨다. "돈이 없으면 물건으로 주면 되잖느냐. 넌 상인이 되어 가지고 그런 것도 몰라서야……." 어머니- 안돼요오-!! 안돼긴 뭘 안돼? 난 지금 참새 그물을 짜고 있다. 내일 아침이라도 겐즈 씨가 떠나버릴지 모르니 일단 오늘밤부터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것이 어머니 주장이셨다. 물론 겐즈 씨한테 참새그물은 더 필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점을 내가 지적했을 때에는어머니도 그럴 지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사실 내 생각에는절대로! 한 개도 더 필요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러나 어머니는 이런경우에 설득되는 분이 아니시다. "녀석아, 그러다가 혹시 정말 참새 그물로 달라고 하면 어쩔 참이야." ……우리 어머니는 이런 분이시다. 내가 유래없이 스무 개나 단번에 팔아버린 결과 참새 그물은 가게에 몇 개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 사실 궁극적인 재앙은 이것이었다 - 오늘밤은 잠 다 잔 것 같다. 500존드가 되려면 앞으로 몇 개나 더 짜야 하나…… 아니, 아까의어머니 계산에 의하면(개당 5존드로 잡고 계시다) 앞으로 400존드 어치 그물을 더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면 앞으로 몇 개냐… 80개나 짜야 하는군. 차라리 그물 개당 6존드씩 받았다고 고백해버릴까. 약간 폭리이긴 하지만 어머니도 상인이기 때문에 이윤을 남기는 것에는 그래도 관대하시다. 이 점에서는 그래도 설득이 가능할 텐데. 군고구마 값이랑, 심부름 값이랑, 기다린 값이랑 다 쳐서 한 100존드(20개)쯤 빼고 나면 기운 내서 열심히 짤 것 같은데. 결국 어머니와 나는 그물 10개를 짠 끝에 새벽녘에 잠자리에 들 수있었다. 사실 그물 80개를 하룻밤에 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으니까. 잠들기 전에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또한 가관이었다. "음…, 파비안, 혹시 곰그물은 필요없대니?" "으아아악~!" 내 비명 소리에 놀라 간신히 새벽에 잠드셨던 어머니께서 벌떡 일어나 앉으셨다. 물론, 눈은 뜨고 있지 않았다. "뭐냐, 이 녀석아! 어제 먹은 건 한 달은 두고 소화시켜야 되는 것들이란 말이다." 이 와중에서도 발음 하나 틀리지 않고 할 말을 마치시는 어머니였지만… 나는 어쨌건 할 말을 해야 했다. "지각이에요오-!!" 나는 아침밥도 마다하고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정신없이 스노우보드에 올라타 지금 달리고 있다. 평소에는 무진장 빠른 것 같았는데 오늘은 왜이리 느리지. 이럴 때면 이야기에나 나오는 마법사라는 직업도 꽤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단 말이야. 그 뭐더라…… 그래, 순간이동, 그런 거. 고귀하신 영주님 아드님께서 느긋하게 첫날부터 늦고 있는 평민 아들을 기다려 주면서 선생이랑 몸이나 풀고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모르긴 해도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기다려 줄 리 없다. 어엇, 비켜! 아슬아슬하게 사과 수레를 비껴 지나갔다. 이미 장미꽃의 엠버다. 성 앞 번화가에는 상인들이 아침부터 좌판을 벌인답시고 준비하고 있어서 지나가기가 몹시 까다로웠다. 사과를 보니 배가 몹시 고파지는군. 어제 먹은 건 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진다. 한 달은커녕 하루도못 가는군. 성에 도착했을 때 내 꼴은 정말이지 말씀이 아니었다. 머리는 자다 일어난 그대로고, 얼굴은 세수도 못했지, 옷은 어제입고 잔 그대로인데다 급히 오느라 상기된 얼굴은 마치 촌놈처럼(그러고보니 촌놈 맞군) 보일 것 같다. 그래도 귀족을 기다리게 하는 것보다는 귀족의 비웃음을 사는 편이 몇 배 낫다는 것을 나는 생리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음, 왔구나." 왜 저 사람이 여기 있지? 나는 성문 앞에 선 채로 나를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는 아르노윌트를 보고서 당황해서 말을 잊었다. 왜 여기 나와 있지? 혹시 늦고 있는 나를 당장 잡아넣으려고? 얼굴을 보니 그건 다행히 아닌 것 같았다. "아, 네가 늦기에 데리러 갈까 하고 있던 참이야. 마침 오네. 들어와라." 이거야 점점, 도깨비놀음 같은걸. 검술 복장인 듯, 어제와는 달리 말끔하게 차려 입은 아르노윌트의뒤를 따라서 성 뒤쪽 잔디밭으로 가니 어제의 선생이 근엄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다. 손에 플러레(Fleuret)를 한 개 들고 있다가 나를보더니 내 쪽으로 내밀었다. "늦지마라." 다들 왜 이렇게 관대하지? 곧 내 생각은 잘못되었음이 판명되었다. +=+=+=+=+=+=+=+=+=+=+=+=+=+=+=+=+=+=+=+=+=+=+=+=+=+=+=+=+=+=+=저도 파비안의 어머니를 존경합니다... 어떤 점에서냐고요? 음...특히 요리를 잘 하신다는 점에서 저는 따라갈 재간이 없군요 ^^; (물론, 파비안과 같은 이유로도 존경받으실만한 분입니다만...^^)또, 추천해 주신 분- 감사합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29681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3 19:55 읽음:247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7) 내가 받아든 플러레는 플러레 자체가 본래 그렇듯 날은 하나도 없고 끝만 뾰족한 연습 검이다. 이걸로는 그물 짜는 실도 못 자를 판이다…… 젠장, 난 그물을 너무 많이 짠 거야. 그런데 아르노윌트가 든 것은 어이없게도 롱소드(Long Sword)였다. 검 자체의 무게로만 보아도 일단 비교가 안 된다. 위력으로 말할것 같으면 롱소드로 한 대 내려치면 플러레 같은 것은 일격에 부서져나가고도 남을 판이다. 게다가 저 롱소드는 겉으로 보기만 해도 상당히 비싼 물건 같다. 손잡이에는 내가 어제 받고서 지금까지도 가슴이벌렁벌렁하는 보석보다 더 큰 것이 떡 하니 박혀 있었다. 최소한 에페(Epee)라도 줘야 뭘 해봐도 할 거 아냐. 게다가 이 플러레는 끝도 뭉툭한 게 찔러질 것 같지도 않잖아. "이, 이걸 들고 싸우라고요?" "물론 아니지." 오오, 그러면 뭔가 다른 것이라도 주시려고? "언제 너보고 도련님과 싸우라고 했느냐? 다만 너는 도련님에게 연습이 되도록 열심히 피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감히 도련님에게 덤벼들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사정은 곧 판명되었다. 내게 검 같은걸 쥐어줄 생각은 애초에 없었던 그들이었다. 귀하신몸에 상처라도 날세라 이렇게 플러레 따위나 쥐여 놓고, 또 그러고도혹시나 싶어 끝까지 뭉툭하게 해 놓은 그들이다. 그럴 바엔 도대체아무 도움도 안 되는 이따위 물건은 왜 들고 있어야 하지? 하, 최소한 상대가 뭐라도 들고 있어야 싸우는 맛이 난다는 건가. 어디서 재주 잘 넘는 광대라도 하나 데려오시지 그래. 이따위 상황인데도 아르노윌트는 몹시 흥미진진한 듯 눈을 빛냈다. 겨우 검술 교본 3권 읽는 주제이니 실력도 보나마나 형편없겠지. 이런 어린애 장난 같은 것에 좋아하는 꼴이라니. 그러나 나는 자세를 가다듬고 그를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자, 시작하십시오." 뭘 시작해? 이제부터 춤이라도 추라는 건가? 윽, 그게 아니군. 시작하라는 건 아르노윌트를 보고 하는 말이었나 보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르노윌트의 롱소드가 곧장 내 왼쪽 어깻죽지를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끓어오르는 바람에 이렇게 갑자기 시작될 줄 몰랐던 나는 엉겁결에 플러레를 들어칼날을 걷어내려는 바보 같은 자세를 취했다. 당연하지. 턱도 없지. 나의 유일한 무기, 아니 저따위 걸 도대체 내가 무기라고 불러야하나? 이런 상황에서는 무기라고 부를만한 가치도 없는…… 아냐, 고인(故人)한테는 일단 예를 지키는 법이랬어. 고(故) 플러레의 두 동강난 시체가 잔디밭 위로 요란하게도 떨어졌다. 아, 무기여 잘 있거라. 나는 예의를 지켰노라. "헤에, 벌써 뭐지?" 아르노윌트는 기세가 올랐다는 듯 약간 올려진(정말, 약간밖에 튕겨올려지지 않았다) 칼날을 그대로 내리그었다. 투둑- 하고 웃옷 천의 올이 낱낱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왼쪽 어깨가 선뜩하다. 주륵. 이건 뭐지. "아……." 내가 아침도 못 먹고 씻지도 못한 채, 조금이라도 늦을 세라 숨이턱에 닿도록 달려온 것은 이런 일을 위해서였나. 그날 아침의 풍경이 아주 짧은 순간, 내 눈앞에서 멈췄다. 아르노윌트도 피를 보더니 약간 흠칫, 하는 모양이었다. 약하게 배어 나오는 정도가 아니다. 팔꿈치까지 소매가 온통 벌겋게 젖어든다. "날래다더니, 엉터리 소문이었나." 군인답게 피에도 꿈쩍하지 않는 타데아 선생은 점잖게도 그런 말씀을 하시고 계셨다. 아르노윌트도 이런 일에 놀라는 시시한 '평민'이아니라 명색 귀족인지라, 가벼운 당황쯤은 금세 접어버리고 다시 칼을 똑바로 거두었다가 날쌔게 내리쳐온다. 이번엔 손목을 노렸다. 오늘 아침, 평민 자식 하나 죽인다 해도 점심 먹기 전에 잊을 인간들이다. 근육이 부르르 떨면서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내 기억으로 이런 기분은 게퍼 녀석과 싸울 때 이후로 처음이야. 초보자답게 돌이라도 쪼개놓을 듯 힘이 들어간 아르노윌트의 롱소드가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은 내 오른 손목을 노리고 야수처럼 달려드는 동안 머릿속에서 재빨리 몇 개의 생각이 오갔다. 롱소드처럼 무거운 검을 다루기에는 아르노윌트의 체격이 너무 연약해 보인다. 그러므로 저렇게 힘주어 내리치는 검을 중도에 스스로 제어하기란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르노윌트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입힐 방법도 없지만). 그렇다면 싸움을 끝내는 방법은 저 검의 무게로 제풀에 꺾이게 하는 방법 뿐! 롱소드가 목표한 곳에 닿기 직전을 기다려 순간적으로 녀석이 노린손을 땅바닥까지 끌어내렸다. 그리고 그 박자대로 잔디밭을 짚고는한 바퀴 앞으로 굴렀다.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방향은 아르노윌트의 오른발이 있는 쪽. "어쿠!" 아르노윌트는 힘의 최대치가 집중된 목표점이 갑작스럽게 수직 이동하는 바람에 충격을 예상하고 멈출 준비를 하던 칼날을 황급히 더아래로 끌어내렸다. 그 바람에 밸런스가 깨어지는 순간, 내 몸이 굴러오자 오른발을 들어올려 피하려 하는 실수를 범했다. 균형을 잃은 그는 그 속도 그대로 칼을 바닥에 찔러 넣으면서 몸을간신히 넘어지지 않게 세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손목이 맥없이 축 늘어지며 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아파……." 나는 롱소드의 칼날이 그렇게까지 날카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롱소드와 같은 커다란 양날 검은 보통 찌르기 용이고, 벤다고 해도 식칼만큼의 깨끗한 절단력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칼날을 지나치게 예리하게 해 봤자 소용없다. 내 계획에는 이 점이 들어가 있었다. 예상대로 내가 몸을 수그리는순간 아르노윌트의 롱소드가 내 등을 가볍게 스쳤지만 옷이 약간 긁혀나갔을 뿐, 큰 피해는 없었다. "도련님!" 타데아가 그제야 놀라서 달려와 아르노윌트를 부축했다. 아르노윌트는 한 번의 실패로 완전히 어린애로 돌아가서 아까의 위세 등등한모습은 어디 가고 선생이 부축하자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손목을 다치셨습니까? 여깁니까? 어디……." 바보 같은 타데아는 아르노윌트의 손목을 잡고서 한 바퀴 돌렸다. 다음 순간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후원을 가득 채웠다. "아야얏-!" 인대가 늘어났나 보다. 나는 가게로 빨리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미르보 겐즈에게 가서 참새 그물 흥정 - 뭐 다른 이름 없나 - 을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는 일단 고무적이었지만, 늙은 집사의 뒤를 따라 긴 복도를 걷고 있는 내 심정은 꼭 죽을 맛이다. 어쨌든 이수고가 제 값을 하려면 겐즈 씨가 오늘 오전 중에 여관에서 사라져줘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세수도 못하고 밥도 굶은 퀭한 눈으로, 그것도 처음부터 구깃구깃하던 옷에 소매는 피로 반쯤 적신 꼴을 하고서 훌륭한 융단이 깔린 복도를 걸어갔다. 왼팔은 조금만 움직여도 찢겨나간 상처에서 피가 쿨럭쿨럭 솟아났다. 대강 천으로 피가 떨어지지 않도록만감싼 상태에서(아마 그들도 훌륭한 융단이 피로 얼룩지는 것은 별로바라지 않는 모양이다) 오른팔에는 스노우보드를 끼고 있자니 자세가영 불안했다. 아직까지도 출혈이 멎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내 상처보다 아르노윌트의 손목 인대가 늘어난 것이 이 성에는 훨씬 충격적인 일대 사건이었다. 나참, 내 계획에는 아르노윌트가 저렇게 몸이 유연하지 못할거라는 것은 전혀 계산에 들어 있지 않았는데. 당장 의사를 불러라, 들것(도대체 왜?)을 가져와라, 난리가 벌어진와중에 그 틈을 타 슬금슬금 도망치려 하고 있던 나를 붙든 것이 이늙은 집사님이었다. "그 몸으로 어딜 가니?" 지금까지 이 성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제일 인간 같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늙은 집사님이다. 이름은 뭐랬더라. 꽤 복잡했는데. 하여간 그는 상처를 싸매도록 린넨 천도 가져다주고 아르노윌트를 치료한의사 - 치료는 무슨, 그저 손목 안 움직이게 조심하라고 한 마디 한게 전부일거다 - 가 나도 치료하게끔 일러 놓기도 했다. "어이쿠, 이게 다 뭐야?" 나는 별로 심각하게 다치거나 하는 일이 잘 없기 때문에 엠버의 의사 선생까지는 얼굴을 모른다. 생각 외로 그는 매우 젊은 남자였다. 겨우 서른이나 되었을까? "그 도련님한테 들으나 마나한 설교나 하랍시고 이런 중환자를 그냥 내버려두게 하다니, 하여간 귀족들이란……." 오, 꽤 과감하시기까지 한걸. 당장 나는 침대에 눕혀지고 상처를 씻어라, 깨끗한 천을 가져와라,지혈대를 묶어라, 하는 식의 호강이란 호강은 다 누리게 되었다. 대충 치료가 끝나자 그는 빠른 말씨로 안정을 취해라, 왼손으로 뭐 들지 마라, 음식은 잘 먹어라, 같은 호강스럽지만 불가능한 사후조치들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그래, 이름은 뭐냐?" 나는 지금 고매한 인격의 집사님과, 그 점으로는 둘째가라면 또 서러워할 젊은 의사 선생님한테 둘러싸여 이런 온화한 질문을 받고 있다. 헤, 그러고 보니 성에서 이름을 묻는 것도 처음이군. 오랜만에풀 네임을 말해볼까. 나도 무진장 길었으면 좋겠지만… "파비안 크리스차넨, 이예요." "하비야나크에서 왔어?" "네." "너, 점원이지?" 헤에? 나는 그때까지 의사가 시킨 대로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지만 뜻밖의소리에 놀라 질문한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리느라 신음 소리를 내고말았다. "으으윽…." 질문한 본인인 의사 선생은 환자의 신음 소리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어라? 의사가?) 혼자 싱글거리더니 다시 재차 물었다. "점원은 아닐지 몰라도, 어쨌든 상업하고 관계 있지?" "…그렇긴 한데, 어떻게 아셨죠?" 나는 이번에는 고개를 천장을 향해 빳빳하게 한 채 주의 깊게 대답했다. 그러나 의사 선생은 질문은 좋아해도 대답에는 취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머리 좋고 계산 빠르다는 소리 듣지 않니? 몸도 빠르고?" "……." 나는 이번엔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가 어깨가 당기는 바람에 간신히신음을 삼켰다. 내 그런 모양을 보더니 대답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그는 또 물었다. "게다가 돈도 좀 밝히지 않니? 아니, 밝힌다면 뭐하고, 하여튼 자질 있는 점원이란 그 말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이번에는 아픔조차도 잊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혹시 점 쳐요?" "너 아버지랑 같이 안 살지?" 아이고야, 대답 좀 하시라고요! +=+=+=+=+=+=+=+=+=+=+=+=+=+=+=+=+=+=+=+=+=+=+=+=+=+=+=+=+=+=+=감기에 걸렸습니다. 목도 아프고, 또 어제오늘 재미없는 책을 읽자니 죽겠군요... 그나마 앞서 올린 글을 여러분이 많이 읽어 주셔서삶은 즐겁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29682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3 19:55 읽음:244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8) 그렇지만 마지막 말은 정말이지 충격적인 사실이었기에(돌아가셨으니 당연히 같이 안 사는 것 아닌가) 나는 이번에는 반드시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비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의사는 머리를 긁으면서 웃고 있었다. "네 얼굴에 다 쓰여 있는걸?" "제 얼굴이 무슨 호구조사표예요?" 의사 선생은 한층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긴, 말이 안 된다. 성에 있는 호구조사표에는 기껏해야 이름이랑사는 곳, 직업, 생년월일 뭐 그런 것밖에는 적혀 있지 않으니까. 거기다가 내 이름도 방금 알아낸걸 뭐. 어쨌든 그가 나를 미리 알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해 보였다. "푸, 푸훗, 푸하하하… 이것 봐, 파비안. 내가 무슨 얻을 게 있다고 네 뒷조사를 하겠니? 너 그 정도로 훌륭한 인물이야?" 나는 얼굴이 벌개졌지만 - 사실 생각뿐이었고 몸에서 피가 많이 나가서 그런지 내내 나는 창백한 상태였다고 나중에 집사님은 말했다 -그것보다는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급했다. 그러나 의사의 놀랄 만한 호기심만은 못했다. "그리고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하나 정도 틀렸건 어찌 됐건 나는 이제 비밀을 알게 될 때까지 방을 나가지 않겠다는 자세를 취했고 의사 선생은 여전히 대답하는 취미는 없는지 그런 나를 아랑곳도 하지 않고 웃어대고만 있었다. 결국보다 못한 집사님이 입을 열었다. "'관상'이라는 거다." "관상요? 그게 뭔데요?" "그게… 나도 잘 모르니 뭐라고 딱히 설명하긴 어렵다만, 여기 나우케 씨(의사 선생의 이름이다)가 그런 게 있다고 하더라.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과거나 현재 상황, 미래 같은 것을 맞추는 건데, 처음에는 나도 안 믿었다만 이것저것 척척 맞추는 걸 보고서 신기해서 이젠 어느 정도 믿게 되었지." "하하핫… 집사님도 참, 제가 어디 척척 맞추는 수준입니까? 아직도 가르쳐주신 분에 대면 어림없지요. 그저 좀 재미있겠다, 싶은 사람 만났을 때 장난치는 정도일 뿐이잖습니까?" 흐음… 내가 장난치면 재미있을 거 같아 보였다 그거군. 난 갑자기 약간 서글퍼졌다. 아니,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장난이셨다면 저 이만 가겠어요." "어어, 잠깐만 기다리라구." 의사 선생이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고 있는 나를 다시 잡아누르는 바람에 나는 거의 죽을 뻔했다. 저 사람 의사 맞나? "장난이긴 해도 다 맞았잖아? 그렇게 시무룩한 표정 짓지 말라고. 상처 낫는데 나빠." 하나가 틀리긴 했지만…… "알았어요." 그 정도 대답은 하지 뭘. "허허… 이것 참." 의사 선생 나우케 씨는 여전히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이거 난처하게되었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댔다. "너무 그러지 마라. 다 설명해주면 되잖아." 이리하여 나는 한 사람에게 대답하는 방법을 가르치게 되었다. 오늘도 보람찬 하루. 그날 저녁,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너, 여기서 아주 먼 곳에서 태어났지?]그 의사 선생이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전 이곳 큰사슴의 하비야나크에서 태어났다구요.][너, 숲 속에서 태어났지?]의사 선생은 내가 애써 가르친 대답하는 방법은 어디다 버렸는지여전히 처음처럼 질문만 해댔다. [무슨 헛소리예요. 전 우리 집 지붕 밑에서 태어났다니까요.][태어난 너를 받은 것은 엘프(elf)들이었지?]아이구, 답답해라! 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절대 못 알아들을리 없는 정확한 발음으로 커다랗게 외쳤다. [저, 는, 이, 동, 네, 에, 서, 태, 어, 나, 자, 랐, 다, 니, 까,요, !][너, 곧 여기를 떠날 거지!]의사 선생은 역시 그 고집불통의 질문을 내 목소리 못지 않은 큰소리로 외쳤다. 그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추운 날씨인데도 몸에서 땀이 난다. 별 악몽은 아니었는데. 나는꿈 내용을 차근히 되새겨 보았다. 내가 여기를 떠나? 세상에, 이렇게 살기 좋은 곳을 떠나?(물론 이 말에서 아르노윌트와 그의 잔당이 존재한다는 점은 제외다)혹시 돈을 많이 벌어 전국에 큰사슴 잡화 지점망을 만들고 그거나돌아보러 떠난다면 모를까. 나는 상체를 일으킨 채로 옆 침대에서 주무시고 계신 어머니 쪽을힐끗 쳐다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움직임도 소리도 없이 단지 잠에 빠져 있는, 한 사람의 윤곽이 보인다. 마치 시체 같다. 에잇,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잠이 덜 깼군. 나는 자다가 잘 깨시는 어머니를 위해 항상 침대 머리 탁자에 준비해놓는 물컵을 끌어당겨 벌컥벌컥 마셔 버렸다. 뱃속으로 차가운 물줄기가 좌악 퍼져나가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몽롱한 머릿속이 확 맑아졌다. 헤, 이따가 일어나서 물 찾으시면 어쩐다. 나는 내가 왜 이런 꿈을 꾸었는지 약간은 맑아진 머리로 생각해보려 했지만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의사 선생이 오늘 낮에 쓸데없는 질문을 많이 해서, 라는 단순 무식한 추리밖에 없었다. 내가 언제 여길떠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어머니가 어제처럼 참새 그물 짜자고 밤잠도 못 자게 하는 경우 말고는 없는데. 그러고 보니 실컷 짠 참새 그물이 소용없게 되었다는 사실도 떠오른다. 어제 성에서 돌아와 결국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팔 싸맨 채로 걸어서(어머니가 팔을 보더니 절대 스노우보드를 못 타게 하신다. 아마 스노우보드 때문에 다친 거였다면 아예 앞으로 만지지도 못하게감춰버리셨을 것이다) 설산의 불빛 여관을 찾아갔지만, 어디 이런 점에서 내 예상이 틀린 적이 있었나. "그물은 더 필요없는데." 언제나처럼 조금 있으면 떠날 듯이, 아니면 방금 들어온 듯이 깨끗한 방안에 앉은 미르보 겐즈가 했던 말이다. 나는 당연히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곧 은근한 표정으로 종목을 바꾸어 보석의 이름을 물어 보았다. "이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물 값은 될 것이다." 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고개를 꾸벅 하고는 돌아서 나가려했다. 거스름돈은 필요없다는 그의 의사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만 하면 충분했다. 그러나 겐즈 씨는 저번 날과는 달리 뭔가 더 말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문을 닫으려는 나를 불러 세웠다. "잠깐, 이리로 와서 이걸 잠깐 만져 보겠나." 예의 흰 꾸러미다. 이상한 부탁도 다 있네. 걸어 들어가 꾸러미를번쩍 들어올렸다. 이상하다, 어제는 이거보다 더 무거웠던 것 같은데. "무겁지 않은가?" "별로요." "그래, 그렇군." 그는 다시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문을 닫으려는 순간, 겐즈 씨는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마치 자신에게 속삭이기라도 하듯 어떤 문장을 중얼거렸다. "… 페어리(Fairy)의 생명이다." "예?" +=+=+=+=+=+=+=+=+=+=+=+=+=+=+=+=+=+=+=+=+=+=+=+=+=+=+=+=+=+=+=저도 한때 관상 보는 법을 공부해보려고 한 일이 있습니다. 근데 책을 보고 포기해 버렸습니다. 글쎄, 제 눈에는 책에 그려진얼굴들이 모조리 같아 보이지 뭡니까! 그래서 대신 방향을 점성술로 바꿨죠...^^본래는 저 자신에 대해서 조금 더 잘 알아볼까 해서 시작했었던 건데, 여러 사람의 점을 봐줄수록, 똑같은 천궁도를 놓고도 해석하는방법도 점차 늘더군요.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보면 참 재미있고도 신비합니다. 또 특이한 운명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면 그것도 흥미롭더군요. 그, 그렇지만 봐달라고 하시진 마세요...너무 힘들거든요..^^;;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29683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3 19:56 읽음:242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9) 나는 앞부분을 못 알아들었기에 되물었지만 겐즈 씨는 더 말할 기색을 보이지 않은 채 나를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그냥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돌아오는 내내 중얼중얼, 그가 하려던말이 무엇일까 되뇌어 보았다. 그래, 저 소리 때문에 엘프가 나를 받았다느니, 하는 엄한 꿈을 꾼거야. 틀림없어. 그렇지만 페어리하고 엘프는 엄연히 다른데. 엣, 참(둘 다 본 일은 결단코 없었다). 이것이 나의 한계였다. 나는 드러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 "어머니, 관상이라는 게 있대요." 어머니와 나는 간단한 아침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메뉴는 빵 두개, 호화의 극치를 달리는 양젖 치즈, 물 두 잔. 즉, 평상시의 식단('아침은 간단하게!'). "관상? 그게 뭐니?" 어머니는 관심을 나타내었다. 예의바른 우리 어머니. 자식의 말이고, 하등 도움 안될 것 같은 말이라도 일단 관심은 보여주신다. "그게 얼굴을 보고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알아맞히는 건데요,아주 신기하더라고요. 한 개만 틀리고 다 맞췄어요." "얼굴을 보다니, 얼굴이 무슨 호구조사표냐?" 킥, 킬킬… 역시 나는 우리 어머니 자식이 맞나봐. "어머니, 미래도 맞춘다니까요. 호구조사표에 무슨 미래가 쓰여 있겠어요." 말하다보니 그제야 생각이 미쳤다. 그렇지 미래라, 내 미래에 무슨일이 있을지도 알아낼 수 있다는 건가. 내가 리에주에 가서 대상인이 되는지 좀 물어볼걸. 갑자기 관상이라는 것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생기는 듯한 느낌이든다. 마침 어머니께서는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반응을 보이셨다. "그게 정말 그렇기만 하다면 매우 신기하겠구나." 저 예의바른 말씨, 정말 존경해야해. 저게 바로 상인의 자세야. 즉, 어머니는 내 말을 전혀 믿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 너를 보고 뭐라든?" "아, 하하하… 그게, 다 맞추지는 못하더라고요. 제가 점원이고,날래고 계산 빠르고, 아버지 안 계시고(돈 밝힌다는 이야긴 뺐다),그런 것은 다 맞췄는데……." "호오, 그런 걸 다 맞췄어?" 어머니는 마침 마지막 치즈 조각을 빵에 얹고 계셨다. 갑자기 저걸위해서 어머니가 지금까지 나한테 말을 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일단 내 손을 벗어난 이상 치즈조각은 잊자)글쎄, 저보고 여기서안 태어났지? 그러는 거 있죠? 하하, 내 참 웃겨서. 그래서 전 우리집 지붕밑에서 태어났는데요, 그래줬죠." 잠시 생각해보니 그 말은 꿈에서 해준 말이잖아.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빵을(치즈도 함께) 씹기만 하실 뿐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아마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셨기 때문에 더 물을 필요를 못 느끼시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더 이야기하는 것을 포기했다. "…… 그만 성에 갈게요." 팔을 다쳤어도 오지 말란 말은 안 했으니 가긴 가야한다. 나는 과감하게 설거지를 어머니한테 맡기고 스노우보드를 꺼내 들었다. 어머니는 사나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신다. "안 돼." "설거지할게요." 잽싸게 팔을 걷어붙이려는데 왼쪽 어깻죽지가 쿡 아프다. 눈물이글썽해져서 팔을 싸쥐고 있으니 어머니께서 팔을 걷으시며 내 쪽은돌아보지도 않고 한 마디 더 하셨다. "안 돼." 알았어요. 안 타면 되잖아요. 이리하여 어머니는 내 고집을 십여년 만에 꺾으셨다. 평상시에 없던 일…… 음, 나도 죽을 때가 되었나. 걸어서 가는 성은 또 왜 이리 먼 거냐. 오랜만에 주위 경관을 돌아볼 여유는 좀 생겼다. 장미꽃의 엠버는여전히 활기가 있다. 오늘 어머니께서는 혼자 가게를 보시겠다고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극구 강경하게 주장하셔서 오늘 나는 성에서볼일이 끝나고도 갈 곳이 없다. 이유는 뻔하다. 다친 팔을 하고서도영주님 아드님이 부른다니까 꼼짝없이 가야 하는 아들녀석이 안쓰러우신 것이다. 에이구, 그런 마음이시니 내가 또 이해해 드려야지. 시간도 남고, 오랜만에 엠버 마을이나 구경할까. 성에 도착했다. 후원까지 들어갔으나 아무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영주님아드님 아르노윌트님이 팔목 인대가 늘어나서 후방으로 후송되기라도했나. 나는 후원의 구석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잠시 기다려 보기로 했다. 저 잔디에 묻은 벌건 게 뭐지. 나는 일어나 그 쪽으로 다가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내가 흘린 핏자국이 아직 희미하게 덜 지워진 채다. 새삼스럽게 분한 심정이 들어 왼팔을 보니 이제 피는 나지 않지만 내내 움직이지 않도록 조심하느라 어깨 근육이 뻐근했다. 영주님아드님 아르노윌트님이란 놈(이건 더 이상한 어감인데), 다시는 그런엉성한 검에 맞나 봐라. 이제부턴 너도 재미없을 거다. 적어도 게퍼와 싸울 때에는 이렇게 도무지 풀 수 없는 답답한 기분따위는 되지 않았었는데. "어라, 파비안 아니냐?" 저 질문부터 시작하는 말투는 무척 귀에 익었군. "어, 의사 선생님 아니세요?" 나도 할 수 있다. 나우케라는 젊은 의사가 성에서 나오다 말고 나를 쳐다보더니 무척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여기서 사나, 저 양반? 아니군. 다시 생각해보니 분명 영주 아들놈(멋지게 줄였다!)의 늘어난 인대가 언제 줄어드나 보러 왔을 거야. 불쌍한 의사 같으니라고. 아, 그러고 보니 잘만난 김에 관상 이야기나 좀 물어볼까. "환자 보러 오셨군요?" "핫핫, 환자 같은 환자는 지금 만나고 있는걸? 상태는 좀 어떠냐?" 저것도 기술일거야. 대답해야 하는 타이밍에 적절히 질문하는 거. "그저, 어깨 근육이 좀 뻐근해요." "너 팔에 잔뜩 힘주고 다니는구나, 그렇지?" 나는 의사 선생에게 어제의 복습을 시켜야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섰다. 겨우 하루 사이에 교육의 효과가 도로 제로다. "나우케 씨, 관상에 대해서 좀 자세히 말해 주세요." "관상? 왜?" "아휴, 자꾸 질문만 하시지 말고요, 관상을 정말 볼 줄 아신다면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 좀 봐달라니까요." "미래라, 갑자기 그건 왜 궁금해졌냐?" 이럴 때는 질문으로 선수를 쳐야 해. 엣, 갑자기 교육학에 대해 아는 척해서 미안하군. "제가 앞으로 돈 많은 거상이 될 수 있을까요?" "상인이라, 글쎄다……" 오, 효과가 있었군. 나는 교육의 결과에 너무 만족한 나머지 그의 대답에 똑똑히 귀를기울이지 못하고 말았다. "…… 면 혹시 모르지." "뭐라고 하셨죠?" "열심히 노력하면 혹시 모른다고 했다." 헤, 그걸 누가 모르나. 나는 바보 같은 표정으로 의사 선생을 쳐다보았다. 내 의사가 전달된 모양이었다. "그걸 누가 모르냐고 하고 싶은 거지?"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역시 전달되었다. "그건… 내가 아직 높은 경지가 아니라서 그래." 헤에, 그래요?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뭔가 그럴듯한 변명이 나올 줄 알았는데. 운명이란 원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것이다, 라든지 뭐 그런 거. "그럼 높은 경지에 이르면 그런 것도 알 수 있어요? "물론이지." "혹시 그런 경지에 오른 사람 없어요? 내가 리에주에 가게를 낼지,엠버에 가게를 낼지, 그런 것까지 알만한 사람." "있지." "헤, 혹시 복채가 비싸면 가르쳐주지 말고, 안 그러면 어디 사는지알려주시면 안돼요?" "어려울 것 없지." "어딘 데요?" 나는 배달 주문을 들을 때처럼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해 보였다. "음…… 너, 하라시바 시라고 아냐? 요즘엔 거기에 있을 텐데…." "뭐야, 농담하세요옷?!" 이건 농담이 아니면 나를 놀리는 것이다. 나는 입을 비죽이며 의사선생을 기분나쁘게 쳐다보았다. 하라시바는 우리 이스나미르에 있는 도시가 아니다. 물론 내가 견문이 넓어서 이런 남의 나라 도시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건 바보라도 한 번은 들어보았음직한 이름이거든. 하라시바는이웃 나라 세르무즈의 수도니까. 꽃의 하라시바. 들려오는 소리에 의하면 대륙에 존재하는 꽃이란꽃은 모조리 하라시바에서 볼 수 있다고 했다. 하라시바에 없는 꽃은세상에 없는 꽃이라나. 온갖 꽃이 찬란하게 핀 곳, 특히 봄에는 기가막히게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결코 아무나 가볼 만한 곳은 못된다. 멀기도 하지만 이유는 다른 데도 있다. 세르무즈를 지배하고 있는 마브릴 족은 이 대륙의 5대 인간족 중에서도 가장 사나운 전사들, 평범한 시민도 마치 우리 마을 최고의 싸움꾼 같은 자들이라고 어머니에게 들은 일이 있다. 그런 자들이 꽃은어떻게 키우나 몰라. 하여튼 우리 나라 인구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엘라비다 족과는 차원이 틀리단다. 한 마디로 줄이면, 갈 생각 말아야 할 도시라는 뜻이다. 나는 인상을 썼다. "그림의 떡이니, 꿈도 꾸지 말란 뜻이죠?" "하핫, 그렇게 과민하게 반응하지 마라. 물론 하라시바까지 찾아가란 말은 아냐. 그저 그렇다는 말일뿐이라구. 그러나 다른 대안도 있지." "무슨 대안인데요?" +=+=+=+=+=+=+=+=+=+=+=+=+=+=+=+=+=+=+=+=+=+=+=+=+=+=+=+=+=+=+=비가 그쳤습니다. 내일도 비가 올까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29758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10)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4 21:21 읽음:241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10) "월계수의 그릴라드에 사는 내 여동생." "동생이 점 쳐요?" 이상하다. 나우케 씨는 의사이기라도 하지만 나는 점쟁이라면 주로늙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제격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괜한 고정관념인가. 아무튼 척 보아도 몇 살 안 먹어 보이는(나보다는 많이먹었겠지만) 의사 선생의 동생이라면 젊은 처녀일텐데. 처녀 점쟁이라, 왠지 우스운걸. "응. 류지아는 그릴라드에선 꽤 유명해. 사실 실력만큼 유명하진않다만, 그건 걔가 별로 알려지길 바라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어쨌든나 같은 얼치기와는 확실히 다르지." "얼치기라뇨?" "난 이래봬도 본업이 의사 아니냐." 다행이군. 난 자기가 무슨 돌팔이 의사라는 줄 알았잖아. 순간 팔이 뻐근한 게 이유가 있었군, 하는 생각이 들 뻔 했다구. "그릴라드 어디 사는데요?" "가서 물어보면 다 알 거야. 류지아 나우케라고 하면." 그래, 오늘 시간도 남는데 그릴라드나 다녀올까. 거기 가본지도 오래 되었군. 그런데 복채가 비쌀까? 의사 선생이랑 아는 사이라고 하면 좀 깎아주지 않을까? 그 이야길 꺼내야겠는데……. "아참, 중요한 얘기 전해주는 걸 잊었구나. 영주님 아드님 아르노윌트님이 오늘은 연습 못한다고 전해 주라는구나. 한 이틀 쉴 테니모레 다시 오라는군." 헤헤, 그거야 아까 전부터 이미 다 짐작하고 있었다구요. 그런데의사 선생도 나하고 비슷한 길고 애매한 호칭을 쓰시네? 내가 아까전에 새로 개발한 짧고 어감 좋은 호칭이나 가르쳐줄까. 그건 그렇고 그 '영주 아들놈'은 몸만 둔한 줄 알았더니 엄살도 상당하군 그래. "그럼, 난 이만 가마." 나우케 선생은 내려놓았던 가방을 집어들더니 팔 조심하라는 한 마디를 던지고는 휘적휘적 성 앞문 쪽을 향했다. 나는 신나게 손을 흔들어 주면서 외쳤다. "선생님 이름 대면 복채 좀 깎아 주겠죠? 믿어도 되죠?" 그런데,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느껴진다. … 왠지 의사 선생의 '질문병' 증상이 나한테 옮겨온 것 같아. 쳇, 의사란 사람이 병은 안 고치고, 되레 자기 병을 옮기면 어쩌잔거야? 월계수의 그릴라드는 장미꽃의 엠버보다 더 아래쪽 마을이었다.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한다. 길은 평탄하고 옆으로는 숲도 우거진 험하지 않은 고개다. 별다른 이름은 없고 그저 그릴라드 가는 길이라 '그릴라드 고개'라고 부르는 곳이다. 별로 긴 길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꽤 긴 것 같군. 그거야 스노우보드가 없으니까 그렇지. 젠장, 이건 전부 어머니 탓이야. 고갯길에는 눈이 곱게 쌓여 있었다. 뽀득, 뽀득, 눈 밟는 소리가 내 뒤를 따라온다. 언덕 꼭대기까지 오르자 저만치 월계수의 그릴라드가 내려다보인다. 오늘처럼 눈이 쌓여 있는 날에는 여기부터 죽- 미끄러져 내려가면아주 편한데, 이번에는 별 수 없이 걷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그릴라드에 와 보는 것도 꽤 오랜만인 것 같은걸. 우리 영지의 네 개 마을 중 가장 따뜻하고 농사도 잘 되는 곳이다,그릴라드는. 엠버에 비록 영주님이 살고 있어서 타지 사람들이 많이모여들긴 하지만 역시 전형적인 대륙 평야 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는것은 여기였다. 우리 하비야나크를 산마을이라고 부르는 것이 걸맞다면 여기는 확실히 농촌이라고 해도 좋은 곳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릴라드는 소복이 눈에 싸여 있었다. 희거나연갈색, 초콜릿 빛깔인 지붕들이 줄이어 저만치 보이는 겨울 밀밭까지 이어져 있다. 그 뒤로는 녹색 호수다. 주변에 우거진 숲 때문에그런 이름이 붙었지만 지금은 겨울이니까 녹색 호수도 멀리서 마치얇은 은반처럼 빛나고 있었다. 평화로워 보이는군. "어이, 거기 소년." 나를 부르나?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몸을 돌려 그릴라드를 등지고 섰다. 엠버 쪽에서 나타난 말 한 필과 그 옆에서 걷고 있는 사람의 일행은……영주 아들놈이었다. 아…… 물론 나는 내 머릿속에 떠오른 저 명칭을 그대로 쓸 수는없었기에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아, 안녕하세요……." 가만있자, 일단 앞의 명칭은 안 쓰기로 한 거 맞는데, 그럼 뭐라고부르나? "아르노윌트님, 이지." 저런 걸 친절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군. "아, 예. 아르노윌트님. 날씨가 좋군요." 나는 대충 헛소리를 해댔다. 머릿속으로는 손목 아프답시고 연습도놀겠다던 녀석이 왜 여기서 어슬렁대고 있는지에 대해 열심히 계산을했다. 아르노윌트는 흰말을 타고서 내리지도 않은 채 아래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고삐를 잡은 것은 시동인 모양이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아, 그릴라드 마을에 가는 길입니다." "어깨는 좀 어때?"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런 다음 특유의 잔머리로 분명 내일 연습에는 나오라는 뜻일 거야, 라는 결론을 내렸다. "참을 만은 합니다." "그래." 아르노윌트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가만히 보니 손목에는 천이몇 겹으로 단단히 감겨져 있다. 쳇, 엄살떨긴. 아르노윌트는 내 옆으로 와서 섰다. 나는 뭔지 모를 불안감으로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약간 떨어져 섰다. 그는 나에게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릴라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행동과는 달리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감상하는 고상한 습관도 있는 모양이야. "멋지군. 아름다운 나의 영지." … 소유물 감상 중이었군. "어때, 아름답지 않아?" "멋진 곳입니다." 대답을 하기는 한다만, 내가 왜 녀석의 시동이라도 되는 양 이렇게일일이 맞장구나 치고 있어야 하는 거지? 말을 타고 왔으면 걷는 사람은 신경 쓰이지 않게 빨리 지나가란 말이다. "너, 녹보석의 기사를 알아?" "압니다." 우리 나이 소년들 치고 녹보석의 기사 이야기 안 듣고 자란 애들이몇이나 되겠어. 아니, 어른들이라도 누구나 그 이야긴 알고 있단 말이다. 어른들이 모르면 얘기는 누가 해줬겠어? 녹보석의 기사. 그 녹보석이 뭘 의미하는지는 이야기하는 사람마다 모두 달랐다. 평범하게 녹색의 보석을 가지고 다니는 기사란 식의 해설에서부터,무슨 녹색은 봄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겨울과 같은 고통스런시대가 찾아올 때 봄을 가져오는 사람이라는 둥 복잡한 해석까지 내가 들은 것만 해도 줄잡아 대여섯 가지는 된다. 녹보석의 기사 이야기는 특이하게도 보통 전설들과는 달리 과거의영웅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정말 까마득한 옛날, 우리 나라의 유명한 무녀가 썼다는 한 예언시에서다. 그런데 워낙 이야기 자체도 흥미로운데다, 수없이 노래로도 만들어지고해서 사람들은 그 이야기 자체가 예언이라는 것을 주로 망각하고 지낸다. 즉, 마치 실재하는 영웅이었던 것처럼 그의 이야기는 많은 기사 지망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녹보석의 기사를 좋아해." 아르노윌트는 나를 바라보면서 눈을 반짝거렸다. 이럴 때는 평범한소년과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자칫 잘못했다가는 금새 늙다리 귀족으로 돌변해 버린다는 걸 나는 이미 경험으로 배웠다. 그래서 나는 그저 예의바르게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속으로는 나도 좋아한다네, 하는 시답잖은 대답을 해 주면서. "그의 이야기는 능력 있는 기사 지망생들에게 있어서 사표와도 같은 것이지. 그의 드높은 기사도, 희생적이면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마음, 비견될 수 없는 날카로운 검. 너 같은 평민들이야 잘 모르는얘기겠지만, 높은 신분의 자제들 사이에서 그의 이야기에 매료되지않은 사람은 별로 없지." 어디, 네가 더 그 예언시를 잘 외우나, 내가 더 잘 외우나 시험이라도 해 보고 싶어지는데. "나도 녹보석의 기사와 같이 비천한 평민들을 사랑하고 지키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아무래도 나는 이 장면에 잘못 나타난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높은 신분의 자제님 - 철저히 아르노윌트의 표현을 따라서 - 이 자신의 소유지를 내려다보며 그 고귀하신 뜻을 세우는 장면에 들러리로서 있는 평민 소년의 역할이 방금 깨달아졌기 때문이다. 그 소년은 이렇게 말하겠지. 무릎을 꿇으면서. 아마도…………아악! 고귀하고도 훌륭한 기사시여, 저를 당신의 길 앞을 닦는 시종으로 영원히 봉사토록 해 주십시오… 이런 것일 것 같애! +=+=+=+=+=+=+=+=+=+=+=+=+=+=+=+=+=+=+=+=+=+=+=+=+=+=+=+=+=+=+=오늘은 맑았습니다. 화창한 날씨에, 유네스코 발간 자료집을 열심히 읽었습니다....;Luthien, La Noir『게시판-SF & FANTASY (go SF)』 29759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1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4 21:22 읽음:240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11) 나는 혼비백산하여 아르노윌트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 그는 자신이세운 높은 뜻에 감동하여 얼굴을 붉힌 채 그릴라드의 색색가지 지붕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에게 그 고귀한 옆얼굴을 보인 채, 마치무슨 말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 나는 다급하게 어디론가 돌릴 말을 찾으려고 버벅거리고 있었다. "그, 저… 그러니까, 으……." 아르노윌트가 뭐지? 하는 표정으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으…… 아! 검에 박아놓으신 보석은 그런 뜻이군요?" 나는 간신히 저번 대련 때 이미 본 일이 있는 아르노윌트의 검에박힌 큼직한 보석에 대해서 생각해 낼 수가 있었다. 어휴, 식은땀이야. "물론. 나는 녹보석의 기사가 될 것이니까." 그 보석은 녹색이었다. … 아르노윌트는 철저하게 제일 단순한 해석을 따랐군. "그래서 언젠가 이 영지에 재난이 닥치면 그처럼 용기 있게 나설수 있게 되기를 나는 기대하고 있다." "… 좋은 뜻이십니다." 뭐, 영지에 재난이 닥치길 바라는 것만 아니라면 네가 무슨 마음을먹든 내가 뭘 상관할 것이냐. …… 나는 위기를 벗어난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약간 춥군. 이만 내려가자." 저건 자기 시동한테 하는 말이겠지? 그 친구는 지금 저 뒤에서 말고삐를 잡은 채 입 꾹 다물고 벙어리처럼 기다리고 섰는데. 그런데 왜 저 귀한 집 자제가 내 얼굴을 보고 있지? "아, 미안하군. 잠깐 착각을 했어." 상황은 밝혀졌다. 아르노윌트는 나를 자기 집 하인으로 착각한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몸을 돌려 턱짓만으로 시동을 불렀다. 그가 말을 끌고 다가오자 그는 정말이지 멋진 폼 - 이것만은 나도 흉내낼 수가 없는 것이다 - 으로 말 등에 올라탔다. 흰말도 꽤 멋진걸. "그럼, 모레 보게 되기를 바라겠다……." 그 말을 남기고 아르노윌트는 산책을 끝내기로 맘먹은 듯 고개 아래로 가볍게 말을 달려 내려갔다. 제 발로 걸어온 시동이 그 뒤를 꽁지가 빠져라 뒤쫓아 달린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나는 잠시 아르노윌트가 왜 마지막 말을 끊지 않고 조금 끌었는지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결론은 내려졌다. 저 자식, 아직도 내 이름을 모르는 것임에 틀림없어! 헤, 동생이래도 이렇게 어릴 줄은 생각도 못했어. 나는 잘못 찾아오기라도 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앞에 앉은 소녀를쳐다보았다. 한 열 두세 살은 됐을까? 자그마한 얼굴에 무심해 보이는 눈동자. 어려보이는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그릴라드에서 류지아 나우케라는 이름의 사람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릴라드에 들어서자마자 마을 입구에 있는 '그릴라드의 녹색깃발'이라는 주점 겸 여관에 들어가 아무나 붙잡고 물었는데, 처음걸린 사람이 바로 다음 길모퉁이에 보이는 작은 일층 집을 가르쳐 주었다. 갈색 가로세로줄이 무늬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들어간 하얀 회벽과그 위에 경사가 큰 큼직한 초콜릿색 지붕이 얹혀 있었다. "네가 류지아 나우케니?" "그래." 점쟁이들은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꼭 반말을 쓰더라. 그러나 나는 나이 고하를 꼭 따져서 반말을 쓴다. "난 하비야나크 마을에 사는 파비안이라고 하는데, 오빠의 소개를받고 왔어. 엠버 마을 의사 나우케 씨 알지?" "그래도 명색 오빠인데 설마 모르겠어." 참 이상한 어투다. 역시 신통력이 있으면 어린애라도 좀 달라지나봐. 류지아는 그저 난롯가에 놓인 안락 의자에 앉아 잠시 나를 외면한채 난롯불을 바라보고 있다. 무릎에는 짜다 만 듯한 뜨개질거리가 그대로 얹혀 있었다. 그녀의 자리 뒷벽에는 마법사의 로브(Rob)라고 생각되는 것을 입고서 허리에 검을 찬 이상한(도대체 마법사냐 검사냐?) 남자, 그리고 그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는 은발의 소녀를나타낸 낡은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녀가 별달리 권하지는 않았지만 손님이 앉는 데라고 생각되는 의자를 끌어다 앉고는 약간 의문이 들었다. 이 조그만 집에는 다른 사람이 더 사는 듯한 기척이 없다. "너는 혼자 사니?" "그래." "몇 살인데?" "이제 곧 열 다섯이 되지." 보기 보단 나이 많네. 그래도 열 다섯 짜리 여자애가 혼자 독립해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엣참, 하긴 난 용건이 있어서 왔지,나우케 의사 흉내나 내러 온 건 아니야. "너도 '관상'이란 걸 보니?" "그런 거 물어보는 게 아냐." 그 말을 들으니 뭔가 생각나는 점이 있다. 오빠와는 반대로 묻지는않고 대답만 하는 체질이로군. 게다가 묻지조차 못하게 하네. "알았어. 그럼 복채는 좀 깎아 주겠지?" "내가 왜?" 만만찮네. "난 네 오빠 친구란 말야. 오빠가 깎아 줄 거라고 했는걸." "그럴 리 없어. 만약 그랬다면 오빠가 뭔가 잘못 생각한 거야." 류지아는 또박또박 말을 마치고는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나는 류지아가 나를 쳐다보는 동안 별달리 할 일도 없고 해서 류지아의 얼굴 쪽을 마주 뜯어보기 시작했다.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돌려묶었는데 나이에 비해서 키도 작고 얼굴도 작고 눈을 빼고는 윤곽도조그맣다. 특히 입술이 작다. 그런데 되게 야무지군. "그래, 너 돈 좀 밝히겠구나." 그 이야긴 벌써 오빠가 했으니까 새삼 돈 내고 들을 필욘 없는데. "좀 깎아주지. 10존드지만 8존드 50 내." "화아, 뭐가 그렇게 비싸?"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왜 내가 돈을 밝히면 복채를 깎아주는 걸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네가 오래 시끄럽게 구는 것이 싫어서야." 점쟁이들은 생각도 읽나? 놀랍군. 8존드 값은 하겠는데. 그러나 그런 생각과는 무관하게 저절로 나는 다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비싸. 5존드만 하자." "5존드 내고 점 봐주는 데 있으면 한 번 대 봐." "너네 오빠는 한 푼도 안 받던데." "우리 오빠는 얼치기잖아." 남매는 맞나 보군. "넌 그 오빠보다 더 어린데 무슨 근거로 믿겠어?" "못 믿으면 집으로나 가. 뭐하러 여기까지 왔니?" 그 말을 하더니 류지아는 고개를 홱 돌려버린다. 나는 약간 당황했다. 이렇게 똑 부러지는 소녀 점쟁이는 또 처음… 아냐, 소녀 점쟁이자체가 처음인데. 그렇다고 내가 호락호락 물러날쏘냐. 하비야나크 사람이 그릴라드에 와서 눌리고 갔다는 소릴 듣고 싶진 않다고.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점쟁이는 복채를 안 받으면 신통력이 떨어진다죠? Luthien, La Noir『게시판-SF & FANTASY (go SF)』 29760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1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4 21:22 읽음:240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12) 류지아는 고개를 들지는 않고 있었으나 대답은 해 왔다. "말 해." "네가 일단 내 과거 이야기를 해 보는 거야. 들어보고, 좀 중요한걸로 한 개 맞추는 당 30로존드씩. 어때?" "70로존드." "그럼 50로존드." "좋아." 다시 뜨개질에 돌입할 태세던 류지아가 그제야 다시 고개를 든다. 휘유, 우리 동네 여자 애들은 비교도 안 되겠는데, 저. 나는 오기가올라 앞으로 들을 이야기를 엄청나게 집중해서 자세히 선별할 준비를마치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그럼, 시작하자." "좋아, 이걸로 3존드 50." 류지아도 처음과는 달리 약간 약이 오른 듯한 모습이다. 당연하지. 내가 류지아의 이야기를 이리 저리 엮어서 한 개로 합쳐버리기도 하고, 웬만한 이야기에는 눈도 까딱 안 하고 누구나 할 만한 이야기라고 배짱을 부리자 침착하기만 하던 얘도 슬슬 내 돈을 어떻게든 한푼이라도 더 빼내 가고야 말겠다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군.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 그리고, 여자친구도 없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지?" "…… 4존드." 류지아도 만만찮다. 내 얼굴을 요리 조리 뜯어보고 생년월일을 물어보고 하더니 벌써 그럴 듯한 걸로 여덟 개나 맞췄다. 이제 내가 제시한 5존드까지는 두 가지밖에 안 남았는데. "그래, 그리고… 너네 아버지는… 같이 안 살지만, 어딘가에 살아계시지?" "틀렸네요.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지 벌써 내 나이만큼 지났어." "뭐야?" 류지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갑자기 후닥닥 저었다. "아냐, 분명 살아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작작해. 무덤도 있다." "가짜야." "억지 부릴래? 확 50로존드 깎아버리는 수가 있어-." "… 분명, 아닌데…." 류지아는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으나 내가 50로존드 도로 깎는다는 말에 잠잠해져서 다른 것을 알아내려고 다시 내 얼굴을 뜯어보기시작했다. 괜히 엄한 억지는 그러길래 부리고 난리야. "너네 어머니, 아버지하고 정식 결혼 안 했구나? 그렇지?" "그런 것까진 몰라. 인정 못함." "체, 괜히 밝히기 싫으니까 그런 거지?" 류지아는 이제 슬슬 내 신경까지 건드리기 시작한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정신 공격이다. "내가 거짓말한다는 증거 있으면 대봐. 점쟁이가 그 정도는 알아야잖겠어?" 생각대로 류지아는 진퇴양난에 빠져 나를 한 번 노려본 뒤에 이 문제는 넘어갔다. 당연하지. 손님이 거짓말하는지도 모르는 점쟁이가남의 과거를 안단 게 말이 되겠어? "으음, 음…, 너 이 마을에서 안 태어났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내가 하비야나크에서 왔단 말 아까 안 했어? 당연히 하비야나크에서 태어났지. 이런 건 인정 못해." 그럼 내가 그릴라드에서 났겠냐? 얘가 이젠 별걸 다 써먹으려고 드네. "아냐, 그게 아니라 이 엠버리 영지 밖의 어디 먼 곳에서 태어나지않았어?" "하비야나크에서 났대니까."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났다. 꿈속에서 의사 선생도 저 말을 했는데? 내가 이상한 표정을 짓자 류지아가 입술을 오므리더니 눈을 가만히올려 뜬다. 뭔가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인걸. "너 숲 속에서 태어났지?" 순간, 나는 그대로 잠시 멈춰버렸다. 저것도 꿈속에서 들은 말인데. 기분이 묘하다. 다시 생각해보니 류지아의 목소리는 오빠와 꽤나닮아 있었다. 이상해, 이상해. 이런 이야기를 두 번이나 듣게 되다니. 내가 말을 하지 않고 있자 류지아는 재차 물어왔다. "그래, 안 그래? 설마 그런 것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아…… 잘 모르겠는걸…." 내가 왜 이러지? 나 분명히 우리 집 지붕 밑에서 태어났잖아? 그러나 갑자기 대답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뭔가 헷갈리는 기분이다. 이때의 류지아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과 같은 눈동자를 하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몰-라?" 싸늘한 바람이 창문을 흔든다. 결국 나는 류지아에게 7존드의 복채를 주기로 합의하고 말았다. 괜히 손해보는 듯한 생각이 든다. 7존드면 결코 많이 주게 된 것은 아니지만, 아까 쓸데없이 정신 공격을 당해서 6존드 정도로 해결될걸괜히 이렇게까지 주게 된 것 같은걸. 1존드 50 깎으려고 이 정도나시간을 낭비하다니, 파비안 너도 이제 맛이 갈대로 갔구나. "좋아, 이제 예언인지, 그런 거 해봐." "넌 리에주 상인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군." 대뜸 저게 무슨 소리야? 쟤가 갑자기 전형적인 예언자의 말투로 돌아가기로 작정했나? 나는 똑같이 대뜸 받아치기로 작정했다. 아무래도 아까의 거래로 이런 식이 익숙해진 것 같은 생각이 든단 말야. "넌 진짜 점쟁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군." "장난은 그만해." 난로 안의 엇갈려 세워 둔 장작이 툭 떨어지면서 불꽃을 날린다. "그럼 방금 무슨 소리 한 거야? 알아듣게 말하라구. 예언자끼리는통할 지 몰라도 평범한 나는 못 알아먹는단 말이다." "평범? 하, 그게 무슨 소리지?" 류지아는 이제 상당히 이채로운 눈빛을 하고 있다. 저런 눈을 어디서 봤더라… 윽, 꼭 무녀 같군. "너는 하나도 평범하지가 않아. 평범하고 글자 그대로 거리가 멀다구." 쟤가 지금 뭔소릴 하는 거야. "… 안 평범한 건 너 같은데." "그걸 누가 몰라?" 하, 저 당연한 말투라니. "넌, 훌륭하신 소녀점쟁이여서 안 평범한지 몰라도 나까지 끌어들이는 건 무리 아니냐? 차라리 너네 오빠 쪽이 어때? 가만히 보면 안평범한 점이 많다구." "… 어쨌거나 그럭저럭 살 줄 알면 큰 오산이야." 마치 협박 같군 그래. 내가 평범하게 살면 어쩔 거냐? 아냐, 대륙을 주유하는 거상이 될 텐데, 그게 평범하다면 말이 안 되는군. 그래류지아, 네 말이 맞아. 난 안 평범해. 으핫핫. "상인같은거 말고 말야." 아니, 얘는 정말 마음을 읽나? "그래, 잘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좀 말해봐. 나 좀 알아먹게." 류지아는 기다리지도 않고 대뜸 말했다. "너, 곧 이 마을을 떠나겠구나." 어라.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내가 왜? 그리고 입 밖으로 내어 말했다. "응, 점 끝나면 집에 갈 거거든." 류지아는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어, 그렇다고 화낼 건 없잖아. 그렇지만 그녀는 곧 말을 다시 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복채를 받으려면 말을 하지 않고는 안 되니까. "…… 내년은 놀라운 것을 많이 보는 해가 될 거야. 이 마을을 떠나게 될 거구,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것이고…… 무엇보다도 네 마음이 많이 자라게 될 거야. 어려움도 많지만, 희망도 많아." 흠. 나는 즉시로 소감을 말했다. "… 좀 당장 눈앞에 닥치는, 실감나는 예언 없어?" 이 소리 저 소리 들었지만 도무지 구름 잡는 것도 같고, 기분이 영이상하고 껄끄럽기에, 괜히 시비 거는 심정으로 쏘아붙인 감도 없지않다. 어쨌든 그렇게 말해 놓고는 약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류지아 쪽을 쳐다보았다. 류지아는 가만히 나를 쏘아보고 있다. 저게 왜 저러지. 아무래도불만이 가득한 얼굴일세.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나와 눈을 맞추고 있더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높여 단호하게 외쳤다. 마치 '좋아!' 라고 외치기라도 하는 듯한눈초리다. "오늘 내, 죽을 고비를 넘길 거야!" 오오, 너무 적나라해서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자아,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기대하고 있는 작가... 새디스틱한 취미다)그런데 제 글,재미.......... 있으세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29835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1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5 21:17 읽음:237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13) 이거 기분이 이상해져 버렸잖아. 그릴라드 고개 위로 힘겹게(분명 아까는 손쉽게 올랐는데) 오르면서 나는 우울한 심정이 되어 불빛 몇 개로 윤곽만이 보이는 그릴라드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어제 벌써 난 죽을 고비를 넘겼다구. 이팔을 봐. 얼간한 영주 아들놈이 조금만 힘 좋게 제대로 겨냥했어도벌써 날아가고도 남았어. 그리고 녀석이 의사한테 늘어난 인대에 대해 설교를 듣는 동안 출혈과다로 사망했을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또 죽을 고비를 넘겨? 파란만장도 하시지. 확실히 평범한 인생은 아니로구만. 나는 별다른 이유 없이 연속되는 연상들에 대해 계속해서 툴툴거렸다. 오늘 내라면 겨우 몇 시간도 남지 않았잖아, 그 사이라면 지금당장 뭔 일이든 일어나야 할 거 아냐, 안 그래? 기타 등등. 그릴라드고갯길 오른쪽 숲 속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려오기까지는. 그건 정말이지 의심해야만 할 소리였다.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 그으으, 그그그……. 불길하다. 저 소리는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 소리다. 나는 지금 고갯길 한 가운데 노출된 위치에 서 있다. 이것은 꽤나나쁜 소식이었다. 내가 가진 거라곤? 돼지…… 아니, 살쾡이 잡는 데쓰는 짤막한 칼 한 개. 그으, 그르르…그그그르르르…아니야, 다가가선 안돼. 류지아가 한 이야기 기억 안 나? 그러나 나는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바닥에서 떼었다. 그그, 크, 크르르르… 크윽, 크크큭! 한 걸음, 다시 두 걸음. 그리고 저기 보이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그 뒤에 숨자. 이런 나의 생각은 실행으로 옮겨지기 전에 이미 저절로 취소되고말았다. 온 정신이 발뒤꿈치에 몰릴 만큼 끔찍스런 외침이 고갯길을울렸다. 크, 크, 크캬아악! 캬오오오오오!! 짐승! 몸을 수그린다. 이 때에는 나의 몸도 짐승과 비슷한 감각으로 움직인다. 가능한 한 몸을 바닥에 붙인다. 흙 냄새가 물씬하다. 그런데 갑자기 바닥을 차며 달려가는 소리가 땅을 울리며 귓속으로파고든다. 분명 나의 것은 아닌데. "하잇!" 짧고 분명한 외침이 밤공기를 울렸다. 그리고 서슬 푸르게 떠오른달빛이 얇고 긴 쇳조각에 반사되는, 선명한 광선이 내 스무 걸음 앞을 스쳤다. 오오, 저것은? 경험상 검광이라고 부를 만한 것인데. 게다가 움직여가고 있는걸. 내 몸은 지금 거의 땅바닥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 옷이 눈에 닿아 흥건하게 젖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크아아아악- 캬아아악-! 한 번 커진 소리는 줄어들 줄을 몰랐다. 그런데 뭔가 불길한 사태가 벌어졌다. 발소리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사람의 발소리. 뛰고 있다. 오지마! 오지마! 툭. 땀방울. 이 겨울에 땅바닥에 저 툭, 툭 떨어지는 것은 내 이마에서솟아나는 땀방울. 드디어 눈앞에까지 다가왔다. 무엇이? 두 개의 발걸음, 아니, 끔찍한 운명이! 산처럼 나무처럼 거대한 몸체가 내 눈앞에서 지금 멈춰서 있다. 하얀 털, 그리고… 윽, 목에 뭐가 치밀어 올라서 말하기가 힘들다. 기침을 하고 싶지만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지금 내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류지아가한 말, 오늘 내 죽을 고비를 넘길 거라는 말, 그렇다면? 넘긴댔으니까, 죽는 것은 아닐 거야, 그렇지? 그렇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마구 하면서 눈앞에 선 괴물, 그리고 그 괴물과 지금 맞서고 있는 한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냄새도맡았을까? 아냐, 난 지금 심혈을 기울여 땅바닥과 혼연일체가 됐다구. 제발 없는 걸로 해줘. 약 10큐빗은 되어 보인다. 거대한 은빛 갈기와 깔개 열 개는 만들고도 남을 것 같은 흰 털가죽, 긴 주둥이, 마치 사자와 늑대를 합해놓은 것 같지만 그것보다 열 배는 끔찍스럽다. 왜냐고? 크기가 사자떼와 늑대 떼를 합쳐 놓은 만큼은 되니까! 게다가 입을 쩍 벌리자 그 안에 수십 개의 달이 열 지어 들어앉은것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저, 저게 이빨이란 거군. 엄청나게 번쩍거리는데. 게다가 저 끔찍하게 날카로운 모양에 벌써 내 목이 뚫리는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 게다가 들려진 두 개의 앞발에 박힌 날카로운 반달 모양의 발톱들은 마치 하나 하나가 대거(Dagger)에 맞먹는 것 같다. 저걸로 밭도갈겠어. 앞발은 뒷발에 비해서 두 배는 길어 보인다. 아까 동물들에서 원숭이도 추가해야겠군. 이상한 모양새야. 저러고 균형이 맞을까. 게다가 서 있는 자세는 마치 곰 같군. 저런 몬스터 이야기는 내 평생 들어본 일이 없는데. 수천 마리의몬스터를 단숨에 봉인해 넣었다는 에제키엘조차도 저런 괴물은 못 만났을 거야. 하긴… 내가 아는 몬스터가 사실 몇 되기나 하나. 그러나 나는 오래 놀라고 있을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비안이로군?" 누가, 나를 알아보는 거지? 제발 모른 척하라구. 난 땅이야, 땅! 그러나 별 수 없이 머리를 들고 위를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라, 이게 누구야? +=+=+=+=+=+=+=+=+=+=+=+=+=+=+=+=+=+=+=+=+=+=+=+=+=+=+=+=+=+=+=감기약을 냅다 먹어치웠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29836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1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5 21:17 읽음:237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14) "겐즈 씨?" "미르보라고 불러." 이건 웬 인심이지? 이제 곧 죽을 테니 인심쓰겠다 이건가? 아냐,본인이 죽을 때 되어서 인심쓰고 싶은 건 상관없지만, 죽을 때 됐다고 인심 받긴 싫다구! 왜냐면 난 안 죽을 거니깐! 내가 마구 머릿속으로 발을 구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침착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일어나. 칼을 잡아." "네, 네?" 내 목소리는 거짓말 안 보태고 정말로 모기소리만했다. "벌써 네 존재쯤은 알고 있을 거다." 두 말 않고 핵심을 찔러주는 미르보. 그건 정말이지 계속 생각하고싶지 않은 사실이었는데. 별 수 없었다. "저건 뭐죠?" "알 거 없다. 우릴 죽일 거라는 것밖에는." 하긴, 죽은 뒤에야 몬스터 도감을 독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나를 죽인 몬스터가 뭔지 알아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그런 이상한 성미는 없다구. 그저 살고 싶다는 평범한 성미 뿐이야. 나는 일어섰다. 그러나 칼이라도 뽑고 폼을 잡기에 내 칼은 지나치게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미르보는? 유감스럽게도 그의 칼은 이미 부러져서 저만치 내던져져 있었다. 이거 죽을 확률이 5%는 늘어난것 같은 기분인걸. 이리하여 죽을 확률 95%다. 그는 허리에서 두 개의 짤막한 무기를 뽑아 양손에 들었다. 가만히살펴보니 양날 손도끼였다. 이상한 무기로군. 저런 걸 싸우는 데 쓰는 건 처음 보는데. 한쪽 날 한 개가 저 짐승의 이빨 한 개만하니까꽤 대단한 무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그런데 왜 저 몬스터 친구는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무기를 뽑아들도록 그저 구경만 하고 있지? "감지하는 거다. 주위에 다른 적이 있는지. 저 녀석은 굉장히 예민하거든." 오늘은 내 생각에 대답해주는 사람을 많이 만나는군. 죽을 때가 되면 이상한 일이… 으아아,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아야지. 그런데 미르보는 저 낯선 괴물이 뭔지 아는 모양이네. "저… 구면이신가 봐요?" 나의 이 황당한 어법에 미르보조차도 어이가 없어서 입술을 이상하게 비죽였다. 저걸 미소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 "…… 그래." 그 순간 하얀 털 몬스터는 - 이름이 없으니 멋대로 부르겠다 - 방금 그 감지인가 하는 것을 끝냈다. 크르르… 크아아아아악! 실감 100%. 나는 무릎이 중풍 환자처럼 후들거리는 것을 간신히 주저앉지 않을 만큼의 진동수로 조절했다. 미르보는 까딱 않고서 양손에 예의 손도끼를 든 채 몸을 약간 수그린 자세 그대로다. "네 무기가 내 것보다 기니, 뒤를 맡아라. 내가 먼저 친다." 그거 반가운 소린데, 이 상황에서 조금 나중에 죽으면 뭐 달라지나… 아냐, 싸움을 앞두고 이따위 생각은…… "금물이다." 달려들면서 기합을 넣는 대신 미르보가 끝으로 한 말이었다. 헤,하고 놀라려는 찰나 미르보가 그 거대한 은빛갈기 괴물 - 자꾸 이름이 바뀌지만 같은 놈이다 - 의 왼쪽 다리를 노리고 손도끼를 휘두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위험한 수법이군. 몬스터도 바보는 아닌지라 자기 키의 1/3밖에 안 되는 것이 왼쪽다리에 뭔가 꽂아 넣으려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거대한 앞발인지 손인지를 들어 쳐내기 위해 몸을 수그린다. 머리가 바로 내 앞에까지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이, 이걸 어째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수십 가지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지만 그 순간에 내가 해야 하는일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나는 안다. 그렇지만……. 에라, 모르겠다! 아까 목표해 둔 나무를 향해 몸을 날렸다. 가볍게 왼쪽 다리로 나무를 찍고 바로 내 어깨높이까지 내려온 몬스터의 갈기를 향해 뛰어들었다. 파비안, 드디어 미쳤구나. 리에주도 한 번 못 가보고 괴물의갈기머리 위에서 생애를 마치려 하다니……잡았다! 크게 흔들렸다. 괴물이 머리를 든다. 그 다음은? 당연히 그 앞발로머리를 긁겠지? 아, 안돼애- 평상시에 머리는 감고 다니란 말야! 죽자살자 머리 꼭대기로 기어올랐다. 팔이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아슬아슬하게 내 다리를 칠 뻔하던 앞발이 갑자기 흔들린다. 쿵! 갑자기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괴물의 몸.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앗!" 미르보가 은갈기 늑대괴물 - 이름 짓는데 나는 뭐가 있는 것 같아- 이 나를 신경 쓰는 틈을 타 왼쪽 다리를 찍은 게 나를 위해 잘된일일까, 못된 일일까. 이런 건 전체적 관점에서 봐야 하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미시적 관점으로밖에 봐지지가 않는걸. 그건 그렇고 내 비명 소리 정말 길지 않아? 쿠아아악- 구구그그그윽-! 칼이 허리에서 빠져 버렸다! 갈기에 얽힌 칼이 칼집째 빠져나갔다. 내가 너무 죽자살자 정신없이 팔다리를 움직인 탓일까. 보이진 않고 떨어지는 소리만 들린다. 다행히 - 이 상황에서 이따위게 뭐가 다행이냐 - 괴물의 괴성이 끝난다음으로 적절히 시간 맞춰 떨어졌기 때문에 나도 그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철컥. 나 이제 이 위에서 뭘 해야 해? "파비안-!" 몬스터는 말을 못했던 거 같으니 - 혹시 모르지만 - 저 소린 미르보가 나를 부르는 소리야. 뭐야, 이 상황에서 훌륭한 판단력이라고? "뒤로 뛰어 내려!" "너, 너무 높아요!" 그랬다. 몬스터는 허리를 펴고 이제 똑바로 서 있었다. 그러나 길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몬스터의 양 앞발이 곧 내가 있는 곳으로덮쳐왔다. "으헤에에에엑!" 멋지게 괴물 못잖은 기괴한 고함소리를 내며 떨어진 곳은 다행히도근처 나뭇가지 위였다. 온 몸이 쑤시지만 - 그 중에서도 특히 아직완전히 아물지 않은 어깨가 제일 심각했다 -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아래를 내려다보니 미르보는 나의 명예로운 직책(아르노윌트의 엉성한 검 피하기 따위의)을 당장 물려줘도 될 만큼 솜씨 있게 연속해서달려드는 괴물의 앞발을 뛰어 피하고 있었다. 굉장한 구경거리인걸. 계속 이 위에 있을까보다. "파비안, 아래로 내려가서 검을 잡아!" 그 검, 과연 도움이나 될까요? 우리 동네 돼지 스무 마리를 합친것 같은 몬스터한테 말입니다. 그러나 도움은 고사하고 검 떨어진 위치나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아냐! 그 싸우는 와중에 칼은 어디로 떨어졌는지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게다가 이젠 어두워져서 달빛밖에 없다. 물론 달빛을 멋지게 반사하는 은빛 털가죽이 그릴라드 고개 전체를 밝히고도 남을 정도로날뛰고 있지만. 젠장, 이럴 때 이야기책에 보면 '내가 시간을 벌 테니 어서 도망쳐!'하고 외치는 훌륭한 동료가 있곤 하던데.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있으면 오히려 방해만 돼!' 혹시 방해가 될 것 같지 않아요, 미르보? 친절하게 사라져 줄 용의가 있는데……나는 그 말을 앉아서 생각하고 있을 새는 없었다. 나는 괴물의 내리쳐지는 다리를 피해 곧 그 자리를 떠야 했으니 말이다. 나는 거의 상황이 따라주면 도망이라도 칠 참으로 좀전에 미르보가있던 쪽으로 죽어라 달려갔다. 그래, 이럴 땐 사람들을 부르러 가는게 나 같은 소년이 할 역할로는 제격이야, 라고 뇌까리면서. 퍼억! 뭐야, 남의 갈 길을 막는 이것은! 나는 거의 땅에 코를 박을 뻔했지만 간신히 고꾸라지지 않게 자세를 가다듬고 보니 발에 걸린 것이 눈에 띈다. 미르보가 아까 내려놓은 배낭인 모양이다. 옆에 하얀 천꾸러미가 있는 걸 보니 틀림없이…저, 빛나잖아?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보지 못했었지만 지금 하얀 천꾸러미는, 아니정확히 그 안에 든 무언가가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뭐, 뭐지? 일단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거라면 뭐라도 좋은데. 나는 발로 차올린 꾸러미를 한 손으로 단번에 낚아챘다(평상시라면이런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남의 물건이니까). 흰 천이 풀려 아래로 미끄러진다. 검? 게다가 뜨, 뜨거워! 나는 갑자기 검이 확 달아오르는 바람에 바닥에 그것을 내동댕이칠뻔했으나 따뜻한 물에 손을 담갔을 때처럼 순식간에 내 손에 그 온도가 익숙해지는 것을 느끼고 간신히 양손으로 그것을 쥐었다. 검에서나오는 광채 때문에 내 손까지 벌겋게 물들었다. 파박-! 내가 검의 손잡이를 잡은 순간 일렁이던 불꽃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블레이드(blade) 위쪽으로 거의 1큐빗이나 튀어 올랐다. 덕택에 나는 놀라서 잡았던 검을 다시 떨어뜨릴 뻔했다. 세상에,불이 나오는 검이라니? 두 손으로 쥐어야 간신히 휘두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양날 검이다. 아니, 내 힘으로 휘두를 수 있을까 의심될 만큼 엄청나게 큰 검이다! 이런 걸 실제로 만져 보는 것은 처음이야. 윽, 큰일이군. 지금 왼쪽 어깨는 도저히 쓸 만한 상황이 아닌데,기껏 나타난 것이 투핸드소드(Two-hand Sword)라니. 천을 벗겨 놓으니 광채가 더욱 기괴하게 숨쉬듯 빛난다. 미르보가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이쯤의 광채는 보이지 않을까. "파비아아아안?" 저건 애타게 나를 찾는 소리야. 즉, 어디 있냐는 소리겠지. 검 때문에 넋이 나가 있던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뭐, 이게 대단하고도 괜찮은 무기라면 적어도 당신한테 전해 주는일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파… 비안?" 내가 괴물의 등뒤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멈춰 섰을 때, 몬스터의 손을 피해 펄쩍 뛰어 나무 뒤로 몸을 숨긴 미르보가 내 쪽을흘끗 쳐다보고 한 말이었다. 목소리에 놀라움이 숨김없이 나타나 있다. 이 검 때문에? 파앗-! 갑자기 검이 불을 뿜기라도 하는 것처럼 엄청난 광채를 사방에 뿌렸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치 산불이라도 난 것 같다. 내 얼굴까지 붉은 기운으로 환하게 빛났다. 이,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혹시 이대로 확 타버리는 것 아냐? 갑자기 몸 안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아! "파비안!" 미르보의 목소리는 검 때문에 얼이 빠져버린 내 귀에 아주 조그맣게 들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아마 작지 않았던 모양이다. 양 발목에 피를 흘리고 있던 몬스터는 종이조각이라도 찢듯 미르보 앞에 있는 나무를 낚아챘다. 정말로 두 아름은 될 법한 나무가 장작개비처럼반으로 찢겨나갔다. 나뭇조각이 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르보는가능한 한 내가 자신을 보게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에 동시에 신경을 쓰기에는 미르보도 사람이었다. "컥!" 상황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지금 내 눈앞에서 타오르고 있는검으로 시야가 거의 가려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르보가 오른손에 든 도끼를 몬스터의 왼쪽 어깨를 향해 던져버림과 동시에 배를 감싸쥐면서 앞으로 몸을 푹 꺾은 것까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도끼는 제대로 맞았을까? 아니, 그보다, 저러다 죽겠어! 몬스터의 앞발이 그 위로 그대로 내리쳐진다. "으아아아아아아앗!"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몬스터의 앞발이 움찔, 한다. 그 순간미르보가 극적으로 몸을 옆 경사면으로 굴렸다. 그러나,몬스터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발이 아파요... 오늘 음악회를 보고 왔는데(물론 공짜표!)너무 걸었나봐요...;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29837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1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5 21:18 읽음:237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15) 그그그… 그아아아아아아아-! 그 포효에 화답이라도 하듯 검에서 불꽃이 파박! 튀었다. 이걸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나로서는 전혀 감이 서지 않는다. 미르보는 흙투성이가 된 채로 바위에 몸을 기댄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자세를 낮춰라!" 저런 상황인데도 목소리는 상당히 침착하고 날카롭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만큼 아까처럼 힘있는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몬스터의 발톱이 배를 찢어놓은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 상태에서 자세를 낮춘다고 무슨 도움이 되지? 불꽃이 춤추듯 너울거리고 있다. 정신을 못 차릴 만큼 휘황찬란하다. 그러나 일단 연장자의 말을 듣고 보자. 나는 다리를 벌리고 자세를 낮춰 섰다. 양손으로 칼을 쥐었다. 오른손잡이니 오른손을 앞으로. 그리고 투핸드소드와 같은 검을 쥘 때는 힐트(hilt)를 쥔 양 손 사이는 내 주먹 하나만큼의 간격을 둔다,라고 검술 교본에 쓰여 있었어. 그렇게 쥐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을 위로 쳐들고 휘두를 만큼 만만한무게는 절대 아니었다. 나는 괜히 위협적으로 검을 한 바퀴 휘두르려다가 땅바닥만 한바탕 긁고 말았다. 피시시시익…이건… 눈 녹는 소리야. 내 손에 쥘 정도의 온도인데 눈이 저렇게 김을 내며 녹아버리다니. 그렇다면? 그래, 이 칼날에 한 번 맞아봐라! 나는 몬스터가 달려들면 올려칠 수 있도록 칼날을 아래로 내려 겨냥했다. 이 검의 바디(body)는 정말 사정없이 길어서 블레이드 부분만 해도 약 3큐빗에 달했다. 이걸 들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 해도강철 스노우보드를 들고, 타고, 뛰어다닌 내 이력이 한 몫 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어떠냐, 털북숭이 몬스터. 내 자세 훌륭하지? "오른쪽 앞발이 먼저 온다!" 미르보의 목소리. 어떻게 저렇게 잘 아는 거지? 믿어도 되는 거야? 그러나 믿을까 말까 고민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두어 걸음 내 쪽으로 달려든 몬스터의 오른쪽 앞발이 사정보지 않고 비스듬히 내 옆구리를 향해 내리쳐져왔다. 상대는 나보다 힘이 최소 다섯 배에서 열 배! 저건 어떤 종류일까. 늑대? 사자? 원숭이? 곰? 어쨌든 넷 다 마찬가지일거야. 내가 지금 필요로 하는 부분에 있어선! 내게 달려드는 것은 앞발. 그렇다면? 나는 단박에 뒤로 한 걸음 껑충 뛰었다. 그리고 내 눈앞으로 떨어지는 몬스터의 앞발, 그 한가운데를 힘껏올려 그었다. 뒤로 물러섰음에도 불구하고 검신의 길이 때문에 푸욱-하고 약 손가락 세 마디 정도는 파고든 듯한 느낌이다. 곰도 발바닥은 연하고 맛있다(라고 누군가가 말했었다)! 촥-! 퀴에에에에엑! 물줄기처럼 피가 눈밭에 뿌려지고, 몬스터의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고함소리가 뒤를 이었다. 내 얼굴에 와 닿는 피. 이상하다, 살아있는 짐승의 피가 왜 이렇게 차갑지. "뒤로 물러나!"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에요. 나는 뒤로 후닥닥 물러섰다. 머리 위에 피가 쏟아지는 것은 바라지않는단 말야. 물러나서 보니 미르보가 왜 오른발이 먼저 온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왼쪽 어깨에 미르보가 던진 도끼가 박혀 있었다. 이미 거기에서도피가 솟구쳐 하얀 털가죽을 벌겋게 물들였다. 커륵, 크어어- 크어어억! 커르륵…몬스터는 손(?)을 다친 채로 팔꿈치(그런 게 있다면)를 휘둘러 나를 치려 했다. 이런 때면 나도 미르보 못지 않게 잽싸게 움직일 수있지. 나는 칼을 꽉 쥔 채로 괴물의 팔을 오른쪽으로, 더 오른쪽으로, 마지막으로 뒤로 피하면서 양어깨에 힘을 실어(이걸 하기 위해서정말 이를 악무는 인내가 필요했다) 칼을 가로로 휘둘렀다. 덕택에괴물 주위를 반 바퀴 빙글 돌았다. 그리고 마지막 동작으로 내 허리도 오른 방향으로 반쯤 돌았다. 끄어억! 세 번째 달려들던 팔꿈치가 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힘껏 풀 스윙한 검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하얀 털이 흩날린다. 턱, 그르륵-뼈에 닿는 느낌. 그리고 긁고 지나가는 감촉. 아… 이번엔 너무 많이 베었어. 괴물의 팔이 덜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 발앞에까지 흘러왔다. 이런 동작이 가능한 것은 순전히 괴물의 공격이 오른팔 한쪽 만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이 칼이 길어서이기도 하고. 세 군데 상처를 입자 몬스터는 잠시 움직이지 않는다. 이상하다. 짐승들은 거대한 놈일수록 상처를 입으면 더욱 광분해서 적을 공격해오기 마련인데. 저 놈은 마치 자신의 상처 상태를 알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잠시 멈추어 있었다. 고개 온 천지에 피, 피.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캬아악! 하얀 털을 가진 거대한 짐승은 뛰었다. 세 군데 상처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한 달음에 내 눈앞까지 달려든다. 은빛 찬란한 갈기에 젖어든 피가 밤하늘에 흩날렸다. 기이하다. 지금까지 보아온 더러운 몬스터들에게서 느껴지는 것과는 뭔가 다른느낌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자세히 분석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파비안, 칼을 오른쪽으로 들어! 앞으로 세우고 곧장 달려들어!" 뭐, 뭐라고요? 지금 저 괴물이 내 앞으로 달려들고 있다. 그런데 나더러 그 수고를 덜어 주라고? 괴물이 다쳐서 여기까지 오는데 힘들까 봐 그러나? 몬스터의 걸음으로 이제 세 발짝 앞! 그러나 이어 힘겹게 외치는 미르보의 목소리에 나는 내 귀를 잠시의심했다. 엉뚱한 말을 들어서냐고? 아니지, 내가 저 말을 이해했다는 데 놀란 거야! "…그리고… 몸을 꺾어서 괴물의 오른팔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라!" 알았다고요! 그러나… 계획의 훌륭함이 내 위험 부담을 덜어주지는 않는군. 저 짐승이 처음 왼쪽 어깨에 도끼가 박힌 뒤부터 왼팔을 들어 공격하지 않는 것은 방금 공격으로 나도 눈치챈 바였다. 미르보는 아까부터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번 공격으로 이번에 괴물은 오른팔에 더 큰 상처를 입었다. 지금도 팔꿈치 언저리가 너덜거리면서피가 뿜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이제 왼팔 공격 차례다! "당연하지…만, 너무 위험하다고 봐욧!" 괴물이 미친 척 하고 오른팔로 치면 어떻게 해? 그렇지만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빠른 공격이 승부수! 나는 더 생각하려고 애쓰는 것이 너무 힘든 나머지 그냥 상황을 잊어버린 채 냅다 앞으로 달렸다. 지능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있을수 없는 행동이라 해도 할 말도 없고 말할 정신도 없으니, 말 걸지마! 손등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나는 칼을 꽉 잡고 있다. 발이 뭐를 밟았는지도 모른다. 그저 약 일곱 걸음 정도, 무념의 상태다. 팔을 수평으로 가슴높이까지 들어올려 약간 위를 겨냥했다. 그대로 찔러 들어가면 괴물의 허리 아랫부분을 찌르게 된다. 두 걸음, 한 걸음, 마지막…그리고… 바로 눈앞에 거대한 털가죽! 푹! 칼을 뺄 틈도 없다. 그대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반쯤 칼이 박혀 들어갔다 싶은 순간 그대로 시계 방향으로 옆으로 틀었다. 살점이 그대로 도려내어지는 느낌. 칼에서 솟아나던 불꽃이 짐승의 몸 안으로 들어가 박히자 주위는순식간에 어두워진 것처럼 느껴진다. 대신 몬스터의 살 안쪽이 붉게변하기 시작한다. 피! 푸아아악-! 분수처럼 솟아났다. 내 칼은 그대로 짐승의 몸 반을 도려내고 등뒤로 반쯤 빠져나왔다.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짐승은 오른팔을 들었다. "파비안! 검을 놓아라!" 아, 이, 이 좋은 걸 놓으라고? 비쌀 것 같은데…그러나 내 것도 아니잖아. 뭐, 주인이 버리라는데. 나는 검을 놓고 언덕 아래로 굴렀다. 짐승의 허리에서 쏟아지는 피가 머리 위에 그대로 뒤집어씌워졌다. 피로 목을 축일 생각은 없어서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런데 아까보다는약간 따뜻한 것 같아. 우워어어어어어억! 커억! 허리가 반이나 베어져 나간 짐승이 땅바닥으로 쓰러지면서 소떼 백마 리가 질렀을 법한 신음소리를 하늘로 내뱉었다. 그, 그리고…내 쪽으로 굴러오잖아! +=+=+=+=+=+=+=+=+=+=+=+=+=+=+=+=+=+=+=+=+=+=+=+=+=+=+=+=+=+=+=추천이라는 것은 남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거든요... 그런데 연재 첫날 추천해주신 분에 이어두 분이나 또 추천을 해주셨군요 ^^솔직히, 봤을 때 굉장히 기뻤습니다...^^;정말 고맙고요, 열심히 쓸게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29923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1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6 21:24 읽음:235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16) 정신없이 구르고 있는 상황인데도 이보다 더 빨리 구르는 방법은없는지 순간적으로 모색해 보았다. 그러나 그런 건 없었다. 에라, 방향을 바꾸자. 친절하게도 저기 튀어나온 바위가 보이는데. 뭐, 친절이라구? "으아아아악!"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보다 내 비명 소리가 더 컸기 때문에 앞의소리는 생략했다고 봐도 좋다)나는 간신히 바위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바위를 디딘 발목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발목이 아픈 정도는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 곧 밝혀졌다. "히에에엑?" 바위 아래는 벼랑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흰털의 울음소리 요란한 괴물은 그대로 떨어졌다. 캬아아아아악! 저 놈도 나와 비슷한 심정일거야. 캬아아아아아…그리고 지금은 더 절망적이겠지. 안됐다. 쯧쯧. "파비안!" 언덕 위에 나타난 얼굴. 나는 그대로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을 받으며 바위 위에 널부러지… 흐에엑, 그대로 떨어질 뻔했네.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온 몸을 긴장시킨 채 마치 왕이라도 나를 구해주러 온 것처럼 미르보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온 몸이, 발목이, 허리도, 어깨도 장난 아니게 쑤신다. 어깨에서는상처가 터져서 다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누가 나좀 업어가요. 그런데… 미르보는 나를 도와줄 입장이 아닌 것 같은걸. 그의 배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아직 지혈도 되지 않은 상태 같았다. 저런 몸으로 그렇게 소리를 질렀나?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온다. "괘, 괜찮으니 저 혼자 일어나죠." "일어나는 건 좋은데…." "은데…?" "안됐지만, 올라오기 전에 먼저 아래로 내려가 주지 않겠나?" 무, 무슨 소리예요. 지금도 저 괴물이 질러대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지 않으세요? 캬오오오오… 쿠그그그그… "가서 괴물의 허리에 박힌 칼을 가져왔으면 좋겠네." 아, 아니 왜요? 그건 내 칼이 아니잖아? 게다가 버리라고 한 것도당신이었잖아! 왜 나한테 이런 책임까지… "안됐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군." 그건 나도 알아요. 당신이 많이 다친 건 알겠는데, 그거 저 녀석이죽은 다음까지 기다렸다가 가져오면 안 되는 건가? 아니면 당신이 나을 때까지 기다리던가. 그렇게 귀한 물건이면 놓으라고 하면 안되잖아! 내가 죽을까봐 그랬다구? 아니, 무슨 소리야, 지금 죽이려고 하는 주제에! 그때 죽으나 지금 죽으나 매한가지야! 나는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무슨 소리를 지껄여 댔지만 실제로 입밖으로 나온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저렇게 기운 좋게 소리를 지를 만한 힘을 비축해 뒀더라면 아까 벌써 다 썼어. "내가 다쳤… 기 때문에 못 내려간다는 것은 아니야." 그러면? "저 칼은 내 손으로 잡을 수가 없는 물건이네." 나는 황당한 표정 - 이미 짓고 있던 얼빠진 표정 위에다 지으니 가관이었다 - 으로 미르보를 쳐다보았다. 내 머릿속에서는 이 즈음 분주하게 칼을 손으로 잡지 않으면 뭘로 잡을까, 발이냐, 입이냐, 하는논쟁이 오가고 있었다. "왜요?" "그 원인을 내가 알면 이미 해결해서 들고 다녔으리라고 생각되지않는가?" 하긴 그렇다. 미르보는 저렇게 기가 막힌 검 - 정말 기가 막힌다. 저 무식한 크기라니 - 을 가지고도 금세 부러지는 롱소드 따위로 괴물에게 덤볐지 않아. 그것도 부러진 뒤에는 손도끼를 쓰고. 흰 천으로 싸 갖고 다니면서 한 번도 꺼내놓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나. 어쨌거나 이렇게 위를 올려다보며 하는 대화는 꽤나 힘이 드는걸. "자네가 저 검을 잡을 수 있어서 나는 매우 놀랐지. 여기에는 뭔가사연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이야기는 검을 가져온 뒤에 하기로 하지. 검을 어떻게 얻게 된 것인지부터 소상하게 이야기해야겠군." "……." 그리하여 나는 벼랑 아래로 지금 죽자살자 내려가고 있다. 몸이 평상시 상태라면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겠지만 - 그릴라드 고개는 별로험한 지형은 없었다 - 지금은 온 몸이 조각조각 분해되기 직전 상태라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가까이 내려갈수록 무진장 시끄럽다. 크륵, 크르르륵- 키아오오오…이어지는 괴성, 듣기가 괴롭다. 정말이지, 못 참겠다. 크으으… 크그그그그- 쿨럭, 캬르륵… "으아아- 시끄러웠!"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한 거지? 크르르르…이상하다. 내 말을 알아들었나. 괴물의 괴성이 점차 잦아들었다. 죽었나? 그랬다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벼랑을 거의 다 내려갔다. 저만치 피를 사방에 흘리고 있는 흰 털가죽이 보인다. 옆으로 누워 있어도 서 있는 것 못지 않게 거대했다. 죽었니? 죽었나봐. 그런데 왠지 몬스터의 몸체 너머에 있는 나무들의 윤곽이 보이는것 같다. 괜한 착각인가? 아닌데. 엑, 이게 어찌된 거야? 그렇다는것은……투명해졌다! 커다란 몬스터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얼이 빠져서 잠시 부러진 상록관목들과 온 천지에 밟힌 채 녹아가고 있는 눈, 그리고 거기에 펼쳐진 얼어붙은 피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얼어붙다니? 그러나 몬스터는 가고 없었다. 어디로 갔담? 하늘로? 밤하늘에는 별 밖에 안 보인다. 그럼 땅으로? 단단한 게 도무지 아무 것도 들어갈 틈새는 안 보이는데. 다행히 검은 허리에 꽂은 채로 가지고 가지 않았군. 나는 다가가서검을 집어들었다. 아까의 불꽃은 어디로 간 거지? 지금 검은 끔찍하게 무겁다는 것만 똑같을 뿐, 도저히 아까의 검이라고 생각할 만한자취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람. "미르보!" 나는 검을 쥐는 순간 맥이 탁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어졌다. 그래도 이 장소에서는 아니야. 저 피비린내. 얼어붙었는데도 비린내가 사방에 진동했다. 저 차가운 피. 보통의 피라면 이렇게 빨리 얼어붙을 리가 없는데. 갑자기 주위가 몇 배로 추워지는 느낌이다. "파비안, 이게 무슨 꼴이야? 응?!" 어머니는 기겁을 하셨다. 온 몸이 눈 투성이, 타박상 투성이가 되어서 절뚝대며 돌아오는 아들, 그것도 머리에는 방금 도살장에서 나온 것처럼 피를 한 양동이는 뒤집어쓰고 있으니 놀랄 만도…… 그 정도가 아니군. 동네 사람 하나가 쓰러지려는 어머니를 부축했다. 지금 마을 어귀에서부터, 아니 정확히는 엠버 마을에서부터 나를따라온 사람들, 그리고 초소의 군인들로 우리 가게 앞은 떠들썩했다. 즐거운 일로 그런 거라면 좋겠지만, 적어도 군인들은 내가 무슨 일을저지른 건지 알고 싶은 거겠지. 이만한 양의 피가 나올 만한 곳은 돼지 도살장밖엔 없을 것 같다. 아니, 거기라도 역부족일 거야. 나는 마을에 거의 핏방울로 도로 선을 만들어 놓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니 말이다. "궁금하시겠지만……." +=+=+=+=+=+=+=+=+=+=+=+=+=+=+=+=+=+=+=+=+=+=+=+=+=+=+=+=+=+=+=이름들이 마음에 드신다는 메일이 있었어요. 사람이름이나 지명. ...... 저와 감성(?)이 비슷하신 분인가봐요..^^;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29924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1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6 21:24 읽음:235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17) 나는 군인들을 향해 입을 헤벌리고 웃어 보였다. 그 이상 무슨 대책이 있으랴. 몬스터의 시체라도 남아 있다면 가서 보라고 하면 되겠지만, 흔적이라고는 고갯길에 얼어붙어 있는 피바다밖에는 없는데.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의심하지 않는다면내가 그 놈의 지능지수를 의심해야 할 판이다. "설명은… 나중에…." 그래, 좋았어. 이대로 쓰러지는 거야. 그러면 나머지 일은 나중에생각해도 되겠지. 그런데… 그런데, 왜 기절이 안되는거지? 기절도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내 아들한테 뭘 물으려는 거예욧! 이 꼴을 하고서 죽다가 살아온 애한테… 어디 안 보낼 테니 지금은 돌아가고 내일 다시 와요!" 나는 이럴 때면 우리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세상에서 가장자랑스럽다. 허리에 팔을 얹은 채 화난 얼굴인 어머니는 흐릿한 내눈에 마치 천사의 후광을 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횃불이었군. 앞치마가 내가 묻힌 핏자국들로 더러웠지만 그런 것은 천사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못했다. 나는 지금 씻고 잘 수 있다는 데 대해 무한히 아무한테든 감사하고있는 중이다. 지금 상황에선 다른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러니까 다른 설명들이들랑 내일 하자. 괜찮지? 그러나 아침에 깨어난 나는 분명히 말하건대 이제 절대 어제 잠들때와 같은 기분으로는 돌아갈 순 없었다. 게다가 어젯밤에 꾼 꿈이란 것은 도대체… 걱정을 덜어 주기는커녕오히려 끔찍한 기억을 증폭시켰을 뿐이다. 깨어났는데도 얼마나 온몸이 싸늘한지 아침 햇살을 보는데도 따뜻하단 느낌조차 안 든다. 그 꿈이란 이랬다. 나는 어젯밤에 한 그대로 미르보의 칼을 가지러벼랑 아래로 내려갔다. 거기까지는 똑같다. 그런데? 나는 생각한다. 죽었니? […파…브…….]나는 발을 멈췄다. 온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다. […파브…이안이라…고 했나….]말을 해! 모, 몬스터가 말을 해! 나, 난 이런 상황 싫어! 미, 미르보가 알아서 해결하라구! 난 이친구와 아무 관계도 없어. 오늘 초면이란 말이야! 나, 나 가도 되지? 되지? 그러나 꿈속의 나는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저기 몬스터의 허리에서 반쯤 빠져나온 붉은 칼이 아직도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칼은 왠지 실제보다 더커다란 것 같다. 그리고 끔찍스럽게도 몬스터는 그 입을 약간씩 벌려 계속 말을 하고 있었다. [너…는 나와 아무…런 과…계도 없…….]그래, 관계없지. 그럼 우리 대화하지 말죠. 난 괜찮은데. 그러나…[누…구세요?]이건 정말 바보중의 바보가 할 만한 질문이다. 지금까지 실컷 찌르고 싸워 왔으면서 새삼 누구냐고 묻다니. 넌 지금 사악한 자들에게습격 받고 쓰러져 있는 녀석을 발견한 게 아니잖아. 잠깐, 그럼 내가사악한 자야? 꿈속에서조차 이토록 바보라니. 그러나 그 순간 내게 든 생각은 사실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다. 몬스터가 지금 일어나 나를 후려칠 힘이 있을까. 내가 몬스터고 그런 힘이 있다면 지금쯤 후려치기 딱 알맞은 거린데. 그러나 몬스터는 이미 그런 데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 는 페어리… 들을 지크… 쿨럭, …키는 자…… 에졸리….]띄엄띄엄하긴 했지만 꽤나 커다란 목소리라 어느 정도 내용을 알아듣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물론, 하다가 끊겨서 못 들은 말까지 알아들을 순 없지만. [너…는 나를 죽인 몸을 깨끗이 해야… 아니면 페어리들이 나의 피를 기억…….]나는 펄쩍 뛰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페어리들이 나를 어떻게 한다고? 나는 페어리가 어떤 존재들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저주를 하거나 복수를 하거나 하는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하나도모른다. 그러다 보니 내 머릿속에서는 당장 내 손바닥 크기 만한 그들이 마치 벌떼처럼 내 꽁무니에 달라붙어 나를 공격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흐엑, 꿈속인데도 끔찍하네. 그것보다 나는 궁금한 것이 있었다. [왜 미르보를?][원한…….]그게 전부였다. 그 다음부터는 실제와 똑같다. 몬스터는 사라지고, 내려가서 나는칼을 집고, 왜 이렇게 무거운지 투정 한 번하고, 그리고 미르보와 서로 행려병자처럼 부축한 채 마을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 큼직한 검을질질 끌면서. 그 검은 지금 저쪽 벽에 기대 세워져 있다. 나도 모르겠다. 내가 왜 저 검을 가져야 하는지. 그저 미르보는 그검에 손도 댈 수 없다는 것만이 이해할 만한 - 나도 처음 잡았을 때의 그 뜨거운 감각은 느껴보았으니까 - 일이었고 그 외에는 내가 저황당하리만치 살벌한 검을 가져야 할 어떤 타당한 이유도 사실 없었다. 게다가 저 검의 주인이 나라는 것은 고갯길의 그 피바다를 내가 설명해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 같잖아. 미르보는 약빠른 건지,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지 엠버 마을에 들어왔을 때 의사를 찾아간다며나와 헤어져 버렸다. 그는 나처럼 피를 뒤집어쓰거나 하지는 않았기때문에 눈밭에 흔적 남길 일도 없었다. 배의 상처만 잘 다룬다면 말이다(사실 몬스터의 발톱에 찢긴 그의 상처는 만만치 않았다). 그는 아직 엠버에 있을까? 나는 지금 아무 확신도 없이, 미르보가믿을만한 사람인가 하는 것은 전혀 관계없이, 그저 내가 믿고 싶기때문에 무작정 그가 엠버에 아직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물론 다시 만나자는 말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만약 그가 정말 사라져 버렸다면 지금 나는 뒷문으로 해서 하얀 산맥으로 도망쳐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무슨 누명을 덮어쓰게 될 지는 신만이 아실테니까. 내가 어디 어디를 다쳤더라. 도망갈 만한 상황이 지금 되는 걸까. "으그그극!" 발목을 삐었군. 그리고……. "아쿠, 크크크크…." 어깨에 이상이 있는 것 같군. 당연하지. 제대로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휘둘러댔으니. 또 있나…? "아파팟! 아구구구구…." 이번엔 손목이냐. 보아하니 아르노윌트를 형님이라고 불러야 할 증상 같은걸. 내가 이렇게 침대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온 몸을 점검하고 있는 동안 침실 밖 - 사실 침실이래야 덜렁거리는 칸막이에 간이 문이달렸을 뿐이다. 그나마 어머니와 사니까 이런 거라도 있는 건지 - 에선 뭔가 쓸만한 냄새가 흘러 들어온다. 그 침대 밖이란 건 부엌과 거실, 현관, 그 외 내가 잘 모르는 기타 등등의 장소들을 겸한 것으로지금의 용도는 아무래도 부엌과 관계가 있겠지… 내가 지금 이런 걸왜 분석하고 있담. "파비안- 나와서 아침 들거나 혹시 상황이 안 좋으면 갖다주마!" 음, 뭔가 말이 되는 듯 안 되는 듯 하는 말이야. 아까 신체 구석구석을 점검해 본 결과 후자 쪽이 그럴 듯하다는 고견을 나는 방밖으로 전달했다. 일단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발을 질질 끌고서라도 전혀 꼼짝 못할 정도는 아니니 다행이었다. 왼팔을 바보처럼 축 늘어뜨린 채 나는 벽에 기대 놓은 검에게로 다가갔다. 검을 들고 어쩌고 할 처지는 절대 아니다. 난 오른손으로 그 물건을 슬쩍 건드려 보기만 하고서도 어젯밤에 내가 무슨 기운으로 저걸 휘둘렀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모양새란 말야. 크기로 보아 투핸드소드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손잡이끝에 폼멜(pommel)이 없다. 그럼 저렇게 무거운 검을 뭘로 지탱하란말이지? 모르긴 해도 팔 힘이 엄청 좋은 놈을 위한 검임에 틀림없다. 또 보면 블레이드도 엄청나게 두껍고 폭도 널찍하다. 최소한 내 손바닥보다는 넓다. 이런 상황인데 무게는? 장난이 아니다. 지금 힘으로는 들어올리지도 못하겠다. 게다가 이상한 것은 모양뿐이 아니었다. 블레이드 가운데 부분을 길게 파 놓았는데(그래도 이렇게나 무겁다니) 그 사이에 이상한 글자 같은 것이 죽 새겨져 있다. 무슨 말인지는 당연히 모르겠다. 게다가 글자들이 까맣다. 철을 파 낸 다음에 뭔가 채우기라도 한 것인지, 하여간 검다. 무슨 기술인지는 내 주제에 당연히 알 리가 없었다. 내가 평생 본중 가장 좋은 칼을 엊그제 봤는데, 그게 아르노윌트의 롱소드였단 말이다. 그러나 역시 가장 이상한 점은 검 어디를 봐도 어제 본 그 불꽃의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저 커다란 쇳덩어리, 어디를 봐도 불길이 나올 만한 구멍 따위는 없었다. 혹시나 싶어 구석구석 살펴봤지만, 멀쩡하고 무겁기만 한 것이 내가 헛것을 본 것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흐음, 나는 칼날을 살펴보고서 생각에 잠겼다. 혹시 그 불꽃, 대장간 모루하고 비슷한 역할을 하는 거였나? 그렇게 내리쳤는데도 이가 빠지거나 한 흔적이 전혀 없다. 말짱하다. 그러고 생각해보면 그 불꽃이 흩날리는 검을 내가 잡고 휘둘렀단말이야. 참, 누구 보여줬으면 멋졌을 텐데. 그런데 본 것이라고는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이제는 증명할 길 없는 허연 털가죽 덩어리랑,입이 있는지 없는지 가끔은 헷갈리는 과묵한 미르보밖엔 없으니 좀아쉽군. 손에 화상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하여간 기괴한 검이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이런 것이 전설의 명검? 헤, 전설의 명검이 이렇게 무식하게 생겼다는 상상 따윈 도저히 하고 싶지가 않군(도저히 비싸 보이지조차 않는다. 쩝, 무거우니까 쇠는 많이 들어갔겠군)게다가 내 주제에 전설 명검 어쩌고가 어울리기나 해? 그런데 미르보는 이 검이 내 것이라고 했단 말이다.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해가 안 가면 설명이라도 잘 해줘야 하는데, 지금 와서 생각에 도무지 왜인지 모르겠는거 보니 둘 다다치기도 했고 정신이 없어서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던 모양이다. 미르보는 몰라도 적어도 난 그랬던 것 같으니까. 만약에 미르보가 사라졌으면 일단 이것도 문제로군. 참. 일단 내 머리에 떠오른 대책은 대장간에 가져가서 물어본다, 이것밖엔 없었다. 나도 참 대책 없는 녀석이다. 미르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검……." 그래, 지금까지 기다렸다고요. 제발 아는 게 있으면 좀 말해봐요. 궁금해 미치겠으니. +=+=+=+=+=+=+=+=+=+=+=+=+=+=+=+=+=+=+=+=+=+=+=+=+=+=+=+=+=+=+=여러분들이 '엄마' 라고 지칭해주시는 크리스차넨 양(?)도사실은 이름이 있습니다. 물론 이미 정해져 있지요. 조금 있으면 나올 거예요....^^(그런데 어울릴래나..?)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29925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1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6 21:25 읽음:236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18) 지금 나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전설의 명검의 전설'을(뭔가 또불길한 어감이다) 듣고 싶다는 호기심이 솔솔 동하는 것을 느끼고 있다. 나는 옛날 이야기를 꽤나 좋아하는 편이다. 게다가 검 어쩌고 하니까 내가 좋아하는 마법사 에제키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명검이 떠오르기도 해서 이 검에 얽힌 이야기도 꽤나 궁금했다. 물론 내 맘대로 전설의 명검이라고 부른 것은 미안하지만, 아냐,미안한 건 그 전설의 명검한테지, 무식 거대한 너한테 한 말은 아니라구. …… 언제부턴가 나는 검을 '너'라고 부르기 시작하고 있다. 아마아까 침실에서 빤히 쳐다보며 머릿속으로 너무 많은 연구를 해서일거야. 아니면 이거 새로 발견된 병이든지. 그러나저러나 너, 정말 정체가 뭐냐? "내가 그 검에 대해서 해 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좋겠지만." 미르보는 지금 불길한 내용으로 말을 시작하고 있다. 즉, 다시 말해 자기도 모른다는 듯한 말투다. 그럼 누구한테 들어야 하지? 미르보가 엠버 마을에서 치료를 받고 스리슬쩍 떠나버리지 않고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은 정말이지 다행한 일이었지만…… 지금 우리는엠버리 영지 경비병들과 함께 그릴라드 고개 쪽으로 반쯤은 연행되는듯한 모양새로 걸어가고 있다. 미르보는 태연한 모습이었다. 배에는 커다란 붕대를 둘둘 감고 있었지만 안색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싸움을 자주 해봐선지 빨리 회복되는 모양이다. 쳇, 그에 비해 에렌트형한테 업혀서 가고 있는 난 뭐람. 나는 그에게 꿈 이야기를 꺼내볼까 했지만 일단은 검에 대해 말하도록 내버려두기로 마음을 정했다. "내가 세르무즈에 있을 때다, 그 검을 얻은 것은. 그게 벌써 5년전의 일이지. 그렇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일전에 본 그대로 하얀 천에 싸서 가지고 다녔다. 처음에는 천으로 싸고서도 잡지조차 못했던 물건이다." 이 녀석이? 나는 내 등에 매달려 있는 녀석을 흘끗 뒤돌아보면서고개를 갸웃 했다. 겨우 손잡이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게 손도 댈수 없는 검이라고? 꼭 거짓말 같다. 그건 그렇고 세르무즈라니, 미르보 당신도 꽤 많은 곳을 돌아다녔군요. 그런 싸움꾼들의 나라까지 갔다니… 야, 검군, 너도 그러고 보니 꽤 멀리서 왔구나. "못 믿겠다면 지금 너를 업고 있는 그 친구한테 한 번 만져보라고해 봐라." 집 문 앞을 나서면서부터 내 꼴을 보더니 마음좋게 업기를 자청한에렌트형은 씩 웃기만 할 뿐 계속 걸음을 재촉한다. 아무래도 만져볼 기색이 아니기에 나는 물었다. "안 잡아봐요?" "이미 아까 전에 벌써 건드리려고 해 봤어. 어림없던걸." "에엑?" 나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뒤로 가져가 보았다. 물론 손목에는 문제가 있어도 어깨 쪽은 멀쩡한 왼손 말이다. 손잡이가 턱 닿는다.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까 너희 집에서 나올 때 하도 신기하게 큰 검이라 한 번 잡아보려고 했지만… 빨리 손을 떼었기에 망정이지 거의 손이 타버리는 줄알았지 뭐야. 모루에서 금방 나온 것처럼 확 달아있던걸. 파비안, 네가 이걸 잡고 휘둘렀다니, 솔직히 나로선 믿어지지가 않는다. 하긴지금 네 등에 매달려 있다는 점만 해도 말야." 에렌트형은 우리 하비야나크에서 제일 검을 잘 써서 영주님의 병사가 되었는데, 어제의 싸움으로 보아 미르보보다 검을 잘 쓸 거라고생각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나하고 비교할 수준은 아니다. 미르보가낫든 에렌트가 낫든, '나'는 이 두 사람들과는 달리 '검사'라는 이름을 붙일 수조차 없는 잡화점 점원인걸. 그런데 이 검을 잡을 수 있는것이 나뿐이라고? 거 참. "네가 내 방에 그물을 배달하러 왔던 때가 기억나나." "물론…… 이죠." 기억난다. 그 때 그 검을 들어서 침대 위로 옮겼었다. 미르보는 아마 그것을 상당히 놀랍게 생각했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고구마를일곱 개나 먹으면서 한 생각이니까 꽤 깊은 생각이었을 거야. 그래, 어쨌든 내 기억으로도 나는 미르보와는 달리 천으로 싼 검을그냥 잡았었다. "나는 그때 매우 놀랐었다." 알아, 안다고요. "그 검은 여기 병사가 말한 것처럼, 잡아서는 안 될 사람의 손이닿았을 경우에는 매우 뜨겁다. 그건 나도 예외가 아니었지." 미르보는 자신의 손을 펴서 내 눈앞에 내보였다. 오른손, 거기에는선명한 화상 자국이 손바닥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세상에, 미르보는 저렇게 뜨거운 것을 저렇게 되도록 놓지 않고 잡아보려 했음에 틀림없어. 나라면 도저히 생각도 못할 일인데. "나는 견뎌 보려 했었지." 그랬겠지요. 요새 남의 생각을 잘 넘겨짚는 것 같애, 나. 미르보가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우리는 그릴라드 고개 입구에도착했다. 거기에는 오늘 고개를 지나가다가 기괴한 피바다를 발견하고 경비대에 알린 사람들이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 라고 말하지 않아도 나는 어딘지 잘 알지. 점심때가 가까워온다. 그러나 어젯밤의 피비린내를 떠올리니 식욕이 도저히 생기지 않았다. "점심이라도 일단 먹었으면 좋겠군." 미르보…는 비위가 대단한 양반이었다. 고갯길을 올랐다. 아마 고갯길 한 가운데만 해도 꽤나 많은 피가떨어졌을 거야. 어두워서 어제는 살펴볼 계제가 아니었지만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었으니까. 그런데 어라? 고갯길은 깨끗했다. 이, 이게 어찌된 일이지? 돌아보니 미르보 역시 좀 놀란 듯한 표정이다. 머릿속으로 뭔가 분주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아침에 피를 발견한사람들의 이야기는 더욱 가관이었다. "여기에, 그러니까 여기쯤에 피가 꽤 많이 떨어져 있었는데…… 그러니까 사슴 잡은 정도는 됩니다. 그런데 어딜 갔담?" 사슴이라니, 미르보와 내가 잡은 것은 사슴 열 마리는 합한 거랑맞먹는 엄청나게 커다란……미르보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커어…! "어, 어깨 상처 터졌다구요… 오른팔 움직이지도 못해요……." 죽어 가는 목소리로 내가 사정을 설명했지만 미르보는 그런 말에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목소리를 낮춰서 나와 에렌트형한테나 들릴 법한 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 피가 돌아가는 것이다. 그 녀석한테로." 무슨 소리지? 미르보는 그런 내 얼굴을 보더니 한 마디 했다. "어제 시체가 사라지는 것을 봤으면서도 그런 표정인 건가." 말은 이해가 갔지만, 어쨌든 이해가 가지 않는걸? 에…… 또 이상한 말을 만들고 말았지만, 이제 어제의 꿈을 이야기해야 할 참인가? "미르보. 어제 꿈을 꿨어요." "… 흰 털가죽이 나왔어?" 힉, 미르보도 나와 비슷한 이름으로 그 몬스터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요. 어제와 똑같은 상황이었는데…." "말을 했겠지." "어, 어떻게 알았어요?" 깜짝 놀랐다. 어떻게… 미르보도 그럼 똑같은 꿈을? "나랑 같은 꿈을?!" +=+=+=+=+=+=+=+=+=+=+=+=+=+=+=+=+=+=+=+=+=+=+=+=+=+=+=+=+=+=+=또 추천해준 분이 계십니다. 역시 감사합니다- ^^있어보이는(?) 주인공이라고 말씀들 하시는데,물론 파비안이 뭔가 하기는 하겠죠? 설마하니 '그는 결국 대륙최고의 잡화점...은 아니고 그럭저럭 쓸만한 잡화점을 차리고 배불뚝이아저씨가 되어서 결혼은 벤야 킬른 양과......... '는 결단코 아닙니다! (그렇지만, 과연 뭘까...;)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020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1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7 21:44 읽음:237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19) 미르보는 내 어깨의 상처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듯 다시 한 번 어깨를 툭 쳤다. 그 덕택에 나는 또다시 숨막히는 비명을 질러야 했다. "네가 네 꿈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같은 꿈인지 내가안다는 거야?" 미르보는 피식 웃고 있다. 어째 어제보다는 좀 더 웃음에 가까운듯한걸. "그렇지만 네가 무슨 꿈을 꾸었을 지는 짐작하고 있다. 너에게 그놈이 했을 말도." "어, 없어요!!" 내가 미르보에게 뭔가 말하려는데 안내인들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들린다. 아무래도 방금 미르보와 한 대화로 보아 어떤 상황일는지짐작이 갔다. "부, 분명히 여기였는데…." 세 사람인가가 벼랑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꺾어진 나뭇가지 사이를방황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이른 새벽 아침부터 그릴라드에서 엠버로 물건을 나르던 짐꾼들로 말하자면 신고자들이다. 그들은 몹시당황하고 있었다. 땅바닥에는 한때 피가 있었던 적도 있었느니라- 는식의 약간의 혈흔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그, 꿈에 나올 것 같은피바다가 말이다. 경비병들이 벼랑 아래쪽으로 우르르 내려갔다. 그들은 몹시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한 두 방울의 핏자국이라면 그들이 발견한 새벽부터지금 사이에 없어졌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만일 내가 어젯밤에 피칠을 하고 돌아오던 꼴을 못 보았더라면 아마 거짓말로 사람을 놀린다고 몹시 화를 냈을 법했다. 그러나 그들은 화를 낼 수 없었다. 벼랑 아래, 엄청나게 꺾어지고부러져 있는 작은 관목들과 나뭇가지들의 흔적이 있었다. 얼마나 큰 물건이 떨어지면 이런 꼴이 되는 걸까, 하며 그들은 수군대고 있다. 하긴,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한 나보고 믿으라고 해도안 믿겠지. 내가 우리 집 앞으로 찾아온 군인들에게 흰털의 하얀 몬스터 어쩌고 했을 때 너 미쳤냐? 하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코방귀를 뀌던 그들이 떠오른다. 젠장, 아무래도 내 입장을 설명하기란 곤란할것 같은걸. "큰일 났네요." "큰일은 곧 날 거야." "큰일은 벌써 났어요." "더 큰일은 따로 있다." 이것이 미르보와 내가 그 꼴을 내려다보며 나눈 대화다. 선문답이따로 없었다. 아마도 저 짐꾼들이 본 핏자국은 우리가 어제 본 것의 반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게 그렇게 빨리 사라져버린 핏자국을 설명할 만한 증거가 될까. … 안될 것 같아. 아무래도 여기서 끝날 것 같지가……. "어이, 파비안-, 아무래도 성까지 가줘야겠다." 예언자나 되는 건데 잘못했어. 우리가 성의 손님으로 하룻밤 머물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야겠다. 쳇……, 이런 식으로 말해보았자, 하나도 기분 좋아지지 않아. 멋진 방이다. 벽에는 고풍스런 쇠사슬과 전위적인 그을음들, 구하려고 해도 힘들 것 같은 고대의 유물에 가까운 벽난로, 추운 바깥이아니라 이 방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알려주는 손바닥만하게 안쪽으로 기울어져 뚫린 창, 그리고…… 오늘 저녁 우리의따사로운 잠자리 짚단. 미르보는 저 만치 벽에 기댄 채 별 표정이 없다. 나도 아까까지는 아니었지만 좀 전에 들여온 저녁밥 - 엄청난 저녁밥이었다. 글쎄, 우리 어머니보다 영주님 성에서 더 절약을 실천하는줄은 몰랐었는데 - 을 먹고 나서는 그만 지쳐서 불평도 그만두어 버렸다. 에렌트형이 어머니한테는 자기가 사정 이야기를 전해 주겠다고해서 그나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아침에 내가 경비병들과 집을 나설 때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시면서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떠오르는군. 어머니는 어제 내가 피를 잔뜩 묻혔기 때문에 정말 오랜만에 새로 빤 깨끗한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계셨다. "어디서 일만 저지르고 다녀서는, 응? 빨리 갔다와서 가게나 봐!" 에휴, 그 말대로 되어야 하는데. 아들이 영주님의 괴상한 손님이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면 또 얼마나 놀라실까. 수명이 며칠은 단축되실 거야. 윽, 지금까지 쌓은 효도(과연?)가 한 1년치는 수포로돌아가는 것 같애. 그렇지만 내가 죄가 있어야 말이지,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이 꼴이 뭐얏! 앗, 또 열이 치받는군. 배 꺼질라, 조용히 하자. 그러고 보니 아무 죄가 없기로는 저기 저 조용한 사람도 매한가지인데. "미르보." 그가 고개를 약간 내 쪽으로 돌렸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참 큰 변화였다. 일전에 내가 여관으로 찾아가던 시절에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대답 한 번 시원하게 하는 일이 없던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한 마디에 반응을 보이니 말이야. 혹시, 이런걸 함께 싸운 전투애라고 부른다면… "검은 꼭 되찾아라." 미르보는 그 검과 5년을 함께 다녔다고 했다. 뭔가 굉장한 물건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자신이 사용하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가 쓰지도 못하는 그 무거운 녀석을 계속해서 천에 싸서 가지고 다닌것만 보아도 그가 그 검에 대해 가진 애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간다(나 같으면 떠돌아다니는 입장에 검 하나도 귀찮았을 텐데). 그런데 그런 검을 잡을 수 있는 주인이 겨우 이런 잡화상 점원 녀석이었다, 라니.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그런데 누구한테 미안해야 하는 건지 확실치가 않군. 그는 확실히 그 검의 소유권 이전을 분명히 했다. 그날 하얀 털 몬스터와 싸우고 돌아오던 때, 그는 내가 벼랑에서 가지고 올라온 검을한 번 흘끗 보더니 '네가 가져가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 다시는 그 검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걸 사용해보려고 손바닥에 지워지지 않는 화상까지 입은 그인데. "미르보, 그 검 나한테 주는 건가요?" "두 번 묻다니, 바보로군." "……." 역시 내 판단은 틀림없었군. 으음, 뭔가 다른 이야기를 꺼낼까. 안그래도 추운데 공기가 더 싸늘해지는 것 같아. "그 검,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 "… 물론이죠." 미르보와 내가 영주님 앞으로 갔을 때, 아마도 영주님은 무슨 사정이었는지 일 처리하기가 꽤나 귀찮았던 모양이었다. 피곤한 표정으로'내일 처리하겠다' 하더니 우리가 이 꼴이 된 것 아냐. 왜 우리 영지의 일 처리하는 방식은 도대체가 이따위인 거지. 친애하는 영주님,그러면 내일 아침에 당신 아들은 어느 새로운 바보를 데리고 칼을 휘두르게 되죠? 그나마 약간 다행이었던 점이라면 그 검을 병사들이 압수할 때 영주님은 이미 사라지고 안 계셨다는 점이다. 안 그랬으면 지금쯤 그녀석은 영주님의 보물창고라든가 뭐 그런데 들어앉아 있을수도 있을거야. 나보다 몇 배 호강을 하면서. "어엇, 이 검 뭐야?" 검을 처음에 들어올린 병사는 단단한 사슬 건틀렛(Gauntlet)을 끼고 있었는데도 한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비명과 함께 검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병사들이 저마다 돌아보았다. "왜, 왜 그래, 야스발트?" "엄청나게 뜨거워!" 야스발트가 그렇게 외치고 나서야 병사들은 이 멀쩡해 보이는 강철검이 이상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알게 되었다. 다들 한번씩 쥐어보겠다고 덤비는 것을 에렌트형이 간신히 말렸다(나는 에렌트형이 성문을 지키는 경비2소조의 부대장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처음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생긴 화상 - 미르보만큼 심각하지는 않다. 그저 곧 나을 만한 것이다 - 을 본보기로서 보여 주었다. 그리고 술렁임이 일단 가라앉고 나자, 에렌트형은 약간은 겁을 주어 가며 이런 신기한 검은 주인이 가져야만 한다는 일장의 감동적인연설을 했다. 산맥과 같은 거대한 자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흔히그렇듯, 우리 영지 사람들은 미신에 꽤나 약한 편이라, 대강 말은 먹혀 들어갔다. 약간의 투덜거림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검을 들고 감옥(이제야 밝히는 것이지만, 쩝)에 들어가는것은 아무래도 상식 밖의 일이라, 검은 에렌트형이 일단 맡아두겠다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 지어졌다. 아마도 여기서 나갈 즈음에는 되찾을 수 있겠지. …… 내가 별 죄가 없다는 것이 빨리 밝혀지기만 한다면 말이다. "이 검, 어디서 났어요, 미르보?" 미르보는 내 쪽을 보지 않았다. 다시 옛 버릇이 도진 건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일어서더니 내 쪽으로 가까이 왔다. "이야기를 해줘야겠지." +=+=+=+=+=+=+=+=+=+=+=+=+=+=+=+=+=+=+=+=+=+=+=+=+=+=+=+=+=+=+=중간고사들 보시죠? 시험과 무관한 저는 계속 열심히 써서 올릴 테니까요,여러분들은 시험 잘 보시고요-나중에라도 와서 읽어주세요. ^^시험 보시는 독자 여러분, 화이팅!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021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20)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7 21:44 읽음:235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20) 이리하여 춥고도 지루하고도 배고픈 우리의 하루감옥체험은 신기한전설 이야기와 함께 지나가게 되었다. 아, 이런 상황일지라도 매사를즐겁게 생각하도록 노력하는 나의 자세, 놀랍다. "어디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세르무즈에 있는 스조렌 산맥에 대해서는 너도 들어보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대륙최고봉인 융스크-리테가 솟아 있다. 보통은 설산으로 알려져 있지만그것은 꼭대기의 만년설만 올려다 본 사람들이 하는 말이고, 본디부터 화산이었던 융스크-리테의 아래쪽에는 굉장히 다양한 지형이 있지. 그 아래에 있는 한 종유 동굴에 나는 들어갔었다." 나는 전설 이야기, 특히 보물이 나오는 이야기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게 전설의 명검이 되었든, 드래곤의 보화가 되었든 그걸 팔아먹는다는 상상은 항상 나를 기쁘게 하니까. 그… 게 한때 내 등에 걸려있던 녀석의 이야기만 아니라면 더 신비로울 텐데. "찾고 있었지. 그것을 찾아 동굴 안쪽으로 계속해서 깊숙이 들어갔다. 동굴 안쪽은 상당히 아름다운 종유석들이 천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득한 곳이었지. 석회암 기둥이 얼마나 많이 비죽비죽 솟아 있는지, 단 몇 걸음도 똑바로 전진할 수가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준비한횃불도 조금 있으면 다 떨어질 상황이라 되돌아올 때 어떻게 해야 할지도 완전히 막막한 상태였지. 그래도 나는 거기까지 오기 위해서 들인 노력 때문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미르보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 그것이 그런 검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미르보의 목소리가 약간 서글픈 듯이 들리는 것은 지금 내 처지가이 꼴이기 때문에 드는 착각인 걸까. "그 때까지 가지고 있던 내 검은 거기까지 가기 위해 한 수많은 싸움들 때문에 이가 모조리 빠져 버려서 동굴을 나왔을 때 내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무덤을 만들어 주었지. 나는 지금껏 수많은 검들을상하게 했고, 그것을 버릴 때마다 그렇게 해 왔다. 검이란 자신의 몸의 일부분, 마치 자기 팔처럼 다루어야 하는 법이지. 당시 쓰던 검은그 동안 만져 본 검들 중 최고였었는데도 그 싸움에서 견디지를 못했다. 그 정도로 심한 싸움이었지." 미르보가 저렇게 감상적인 사람이라니, 헤. "뭐하고 싸웠는데요?" "골렘(Golem)." 하, 이가 다 빠지고도 남을 법하네요.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실제로 본 일은 없지만 골렘의 거대한 몸집과 딱딱한 피부에 대해서는 전해들은 바 있었다. 물론, 어딘가에서 얻어들은 전설 이야기에서. 실제로 나는 대부분의 몬스터들을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 정말로마주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젯밤의 그 녀석을 제한다면 말이야. 아무래도 몬스터들은 요즘에는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전설 시대처럼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 것 같단 말야. '영원의 구속자' 에제키엘이 몽땅 다 봉인해 버렸나. 게다가 이런 점에서는 유감스럽게도 보물이란 녀석들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이런 이야기인데도 미르보가 하고 있으니 굉장히 일상적으로 있을 법한 이야기같이 들리는걸. 요즘 시절에 천연기념물이라고할 만한 것들을 만나고 다녔다는데도. "물론 그것만은 아니었지만, 그 놈이 내 검을 상하게 한 결정적인적수인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이 양반 농담도 할 줄 알았던가? 미르보는 웃고 있지는 않았다. "엠버 마을의 의사한테 맡겨 뒀지만, 그때 쓰던 도끼도 꽤 괜찮은놈이지." 엠버 의사라면, 나우케 씨요? 하핫, 왠지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데. 나우케 의사는 묻기만 하는 양반이고, 미르보는 대답을 안 하는 양반이니, 두 사람이 만난다면 새로운 대화법을 연구해내지 않으면 안 될거야. "의사 양반은 대화하기 꽤 어려운 사람이더군." 가끔 미르보도 내 마음을 읽는 것 같단 말야. "…… 그래서 계속 들어갔다. 이가 다 빠져서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검에, 기름이 다 떨어져 가는 횃불이나 들고 말이지. 그 안에서헤맨 이야기는 생략해도 좋겠지. 결국 동굴의 끝에 도달했다." "그래서요?" 나는 완전히 옛날 이야기를 듣는 어린애의 자세로 돌아가 있다. "탁 트인 방이었다. 지금까지 오던 길들과는 달리.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미르보는 약간 자조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즘 들어 저 양반이웃음이 많아졌는데. "어젯밤 몬스터를 만났을 때, 네가 도망치다가 내 칼을 들고 되돌아왔었지. 그 때 본 불길, 나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었던 그 검에서 나온 불꽃, 그걸 나는 어제 처음 본 것이 아니었지." 짐작이 갔다. 그러나 도망치다가, 란 말은 좀 심하잖아. 난 그저 도움을 청하러가려고 했던 것 뿐이라고…… 으음, 양심에 찔리니 그만해야지. "방 한 가운데에서 불타고 있었다. 마치 석순에서 솟아나기라도 한것처럼 박혀 있던 그 검, 내가 들고 간 꺼지기 직전의 횃불 따위는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환한 빛이 너울거리는 것은 참 장관이었지. 그리고 그날이, 어제 그 일이 있기까지는 그런 불꽃을 본 마지막 날이었다." "그 이후로는?" "검은 다시는 불타지 않았다. 내가 그 동굴에서 석순을 모조리 부수어서 그것을 뽑아 가지고 나온 뒤부터는." 조금 후에 그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그때 내가 본 아름다운 불꽃도 어젯밤에 네 손에서 빛나던것만 같지는 못했다. 어젯밤, 5년만에 본 그 빛나는 불, 내 기억 속에 있는 것보다도 몇 배나 강렬하게 타오르는 그것을 보고서 나는 거의 넋이 나갔었지. 그걸 본 순간부터 이미 저 물건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고? "너를 살려야겠다는 생각도 그 때 들었다." 으… 갑자기 가까이 가기가 싫어진다. 창가로 들어오던 햇빛이 깜빡깜빡 하다가는 드디어 사라져 버렸다. 성 바닥의 석조 감옥에서는 오래 묵은 냉기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온 몸이 으슬으슬하다. "짚단으로 몸을 덮어라." 지당한 말씀이었다. 나는 짚단을 풀어서 바닥에 죽 깐 다음 다시한 겹 고르게 위를 덮었다. 손목이고 어깨고 이런 상황이라면 악화되고도 남을 거야. 의사한테 돈 꽤나 갖다주게 생겼군. 자리를 만들어놓고 그 차가운 돌 벽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미르보를 불렀다. "몸을 맞대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따뜻할 거예요." 미르보는 순순히 내 쪽으로 와서는 짚 위에 드러누웠다. 짚을 끌어다 덮었다. 이렇게 춥지만 않다면 이야기하기에는 꽤 좋은 분위기다. 기분이 묘했다. 평생 감옥 같은 데 들어와보리라는 생각은 해 본 일도 없다. 나는 정직한 상인이 될 예정이었으니까.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기는구만, 그래. 에라, 느긋하게 생각하자. 분명 내일이면 다 잘 될 거야. "아침밥 달란 말이에요오-!!" 있는 힘껏 열 다섯 번째 외친 나는 맥이 빠져서 그대로 짚단 위에풀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잖아. 점원 인생 10년 이상인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아예 습관이 되어 있단 말이다. 아이구, 배고파. 벌써 일어난 지 세 시간이 되어 가는 중이다. 미르보는 일어나서 자기 키가 밤새 얼마나 자랐나 재어보는 중이다…… 는 아니고 그는 키가 닿지 않는 창 밑에서 길이를 가늠해보더니 나를 불렀다. "파비안, 밖을 내다보는 것이 좋겠다." +=+=+=+=+=+=+=+=+=+=+=+=+=+=+=+=+=+=+=+=+=+=+=+=+=+=+=+=+=+=+=밥 못 먹는 거 정말 괴롭죠. 굶기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여러분, 밥은 제때 제때 먹읍시다! 저처럼 위장 몽땅 버리시기 전에.... (이거, 19편부터 무슨 캠페인 분위기로 가는군....;)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022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2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7 21:44 읽음:234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21) 배가 고파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일단 맞는 말 같아서 창가로 다가갔다. 미르보가 허리를 굽히고 나를 자기 어깨 위에 앉게 하더니, 힘든 기색도 없이 번쩍 들어올렸다. 아침도 못 먹었는데 전혀 지친 기색이 없다. 게다가 상처도 덜 아물었을 텐데. 놀라운 사람이야. 아마 내가 아침을 굶어서 좀 가벼워…… 말이 안 되는군. 나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에에… 조용한데요?" 감옥은 반 지하라 그 창은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발높이에 닿을 정도 높이다. 그러나 비스듬하게 경사져 뚫려 있는 덕택에(만약에어젯밤 비라도 왔다면 절대 '덕택'이라는 말은 못한다) 어느 정도 바깥 상황을 대충 살필 수가 있었다. 밖은 성 뒤편의 후원이었다. 후원너머에는 그다지 높지 않은 성벽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내가 아르노윌트와 같잖은 칼 연습인지 하던 거기와그다지 멀지 않은 것 같다. "아무도 없나?" "지나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요. 해가 뜨고 얼마나 지난 걸까요?" "아마, 아침 식사 일곱 번 할 정도는 되겠지."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무방비 상태의 내 위장으로 강력한 허기가엄습해온다. 미르보는 잠시 있더니 다시 물었다. "들리는 소리가 없나?" "음… 아무 소리도요."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이 정도 시간이라면 하인이나 하녀 등등이충분히 왔다갔다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게다가 아르노윌트는 오늘도 검 연습 쉬나? 음, 분명 그렇다면 내가 없다는 핑계대고 며칠 더 놀아보려는 걸거야, 그 녀석. 후원은 인기척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만 내려와라." 다시 짚단 위에 몸을 던졌다. 아이고야, 힘들어. 왜 위에 있었는데내가 더 힘든 것 같다냐. 미르보는 침착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바닥에 드러눕는다. 역시 당신도 피곤해서…… 가 아니었군. 그는 바닥에 귀를 갖다 댔다. "발소리가 전혀 없군." 나도 누운 김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뭐, 나한테 그 정도 좋은 청각이 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아무런 울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르보는 일어나 앉았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생긴 것이 틀림없군." 그런 것 같네요. 그런데 뭘까? 애써 생각해보려 했지만 지금 상태에서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어제아침에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닭고기 수프라거나, 전전날 저녁에 먹은 스테이크랑 나무딸기 파이나 뭐 그런 것밖에는 없는걸. 하다못해궁극의 사치품, '양젖 치즈'를 얹은 빵조각… 아이고, 괜히 생각해냈다. 그렇게 내가 약 반 시간동안 이 음식, 저 음식 생각하며 - 그랬댔자 내가 뭐 별다른 음식 종류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반시간도 채되기 전에 아는 음식 종류가 모조리 떨어진 것을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 허기를 달래기는커녕 더욱 부추기고 있는 참인데 미르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피다." "에?"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피라니. 피가 먹고 싶다는… 건 아닐 테고… 음냐, 그럼 뭐냐… 피로 만든 음식이 뭐가 있더라…으윽, 이게 아니잖아? "싸움? 습격? 전쟁? 몬스터? 깡패?" "정확히 알 수야 없는 노릇이지." "무슨 근거로?" 미르보는 약간 짜증스러운 듯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엉뚱한 소리를했다. "성안에서 가장 많은 직업은 뭐지?" "뭐, 귀족보다야 역시 하인이 많겠죠." "그래. 귀족보다야 하인이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기도 하고 말이지. 우리가 성에 있다면 그들이 귀족보다야 눈에 띌 기회가 많지." "그런데요?" "귀족의 하인 중에서 좀 특수한 자들이 있지? 먹여주고 입혀주는하인들 말고, 생명을 지켜주는 하인들." "병사들이요?" 이상한 비유를 하네, 이 양반. "그리고 지하 감옥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하인은 누구겠나?" "역시 병사들이죠." "그럼 그들이 없다는 것은?" "뭔가 처리할 일이 생겼나보죠." 말해놓고 보니 약간 살벌한 느낌이 들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무리한 추리는 아니다. 그러나 왠지 자꾸 무리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 결론으로 이끌어가고 싶지가 않다. 그냥 오늘이 영주님네 기사단 창립일 이라도 되어서, 어디 단체로 소풍이라도 갔다고 생각하면안될까. ……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군. 미르보가 덧붙였다. "병사들이 이렇게 조용하도록 성을 비울 이유란 몇 가지 없지. 게다가……." 게다가? "… 오늘 새벽녘에, 요란한 발소리가 울렸었다. 분명. 그 때는 무슨 일인지 짐작 못했지만 그저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했지. 오오, 이 심장 뛰는 소리! 미르보의 추론은 이제 확실한 구체성을 띠고 내게 다가왔다. 아무리 우리 영주님의 성이 방어와 무관하게 생겨먹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귀족의 성은 귀족의 성이라 병사도 없이 무방비 하게성을 방치하지는 않는다. 우리 같은 죄수… 아니얏, 난 죄수가 아냐! …… 어쨌거나 아침밥도 안 갖다준다는 것은 기본적인 인력조차 거의남김없이 빠져나갔다는 말. 아니면 지금쯤 외성 방어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라도… 아냐, 그러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잖아. …… 게다가 우리 성에는 외성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뭔가, 큰 것이다." 미르보의 나지막한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입을 다물어 버렸다. 뭐지? 뭐지? 뭘까? 뭘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불안한 기분은 더해 갔다. 다들 나가버렸다면 우리는 누가 꺼내 주나? 제대로 해명할 기회도없이 애매하게 나중에 죄인 취급당하는 것 아냐? 일이 벌어졌다면 어느 쪽일까? 장미꽃의 엠버라면 밖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지 않아? 확실히 시민들조차 거리를 비우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엠버 성의병사들이 나가는 것 보면 우리 엠버리 영지 일 맞지? 그렇다면? 하비야나크, 스덴보름, 그릴라드, 셋 중의 하나다. 오, 하비야나크…… 안 되는데. 일이 벌어졌다면 무슨 일일까. 우리는 국경지방도 아니고 특별한원한 관계에 있는 영지도 없다. 몬스터라고는 엊그제 저녁 빼면 내평생 구경도 제대로 못해 봤으며 어디선가 떼강도라도 이동해 왔다면어제까지 아무 소문도 없이 이렇게 조용했을 리가 없어. 그러나 병사들이 이렇게 자리를 비우는 것 보면 분명, 큰 일은 큰 일! 아아, 머리가 터지려고 하는군.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상한 걱정이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하는 통에 숨이 막히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어떻게 됐을까. 미르보 당신, 추리가 완전히 틀렸기만 해 봐요. 이렇게 걱정시킨대가로 단단히……아냐, 제발 틀리기만 해라. 그러면 그저 좋아서, 걱정한 거고 뭐고아무 것도 안 따질 텐데. 여전히 밖에서는 쥐새끼 하나 움직이는 기척이 없었다. 점심 시간이 가까워오려고 한다. 나는 배고픈 것도 잊어버렸다. 딸그락, 딸각. 이상한 소리가 들려. 탱겅! 탱겅! 저건 무슨 소리지? 으으으… 으아아아악! 저건 무슨… 비명 소리야! 나는 후닥닥 몸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깜깜하다. 눈을 비볐다. 창밖으로 달빛만 약간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쓰러져 잠들었는지, 마치 영원과 같은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미르보는 벌써 일어나 있었다. 그가 재빨리 어둠 속에서 손짓했다. "이리로." 나는 미르보와 함께 달빛이 비쳐들지 않는 어두운 벽 쪽으로 붙어섰다.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불안한 상태에서, 그것도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잠든 터다. "쉿!" 알고 있다고요. 그러나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낼 뻔하고는 황급히 입을 손으로 막았다. 달빛이 비쳐나는 바닥에 그림자, 슥- 움직인다. 창밖에 뭔가가 있다. 츠르르르- 철컹-창에 걸린 쇠창살을 단단한 것이 긁고 지나가는 소리. 금속성의 물체가 연이어서 부딪치는 소리. 침착하자, 침착해. …… 그러나 미르보와 나, 둘 다 무기라고 할 만한 것은 하나도 가지고 있질 않았다. 미르보도 그 사실 때문에 별다른 행동을 취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감옥 안에는 하다못해 무기 대신으로라도 쓸 만한 것조차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거라면 지푸라기들 뿐. 그림자는 다리뿐이지만, 분명… 인간의 다리는 아냐. 반쯤 구부러진 채로 움직이고 있는 무릎, 그리고 신발이라고 할 수없는 발치께의 이상한 돌기. 그런데 저, 몸을 수그리잖아? 들여다보려는 거야? 그때였다. 츠억- 푸아아악! "끄으으으……."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조그만 창문을 통해 기다란 물체가 불쑥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도 지금까지 창밖에 서 있던 자의 몸을 꿰뚫고. 후두둑- 검붉은 액체가 감옥 안으로 떨어지는 소리. "읍……." +=+=+=+=+=+=+=+=+=+=+=+=+=+=+=+=+=+=+=+=+=+=+=+=+=+=+=+=+=+=+=뭔가 어려운 말을 써서(주, 주식이라니...^^;) 추천해 주신 분,너무 고맙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다음 편부터는 분위기가 잠시 바뀔 겁니다. 뭐, 곧 본래 궤도로 돌아올 예정이긴 하지만요. (본래 궤도가 뭐냐고요? 아, 저 그게, 글쎄.....;)어쩌면.... 여러분들이 들어와 보고, 혹시 글을 잘못 클릭한 게 아닌가? 하실정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086번제 목:◁세월의돌▷ 1-1. 배달왔습니다 (22) -END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8 14:46 읽음:236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1. 배달왔습니다 (22) 미르보의 손이 다가와 어느 새 손을 뗀 채 벌어지려 하고 있는 내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그러나 인간적인 생리 작용은 어쩔 수가 없다. "흡, 우웁……."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창으로 들어온 긴 물체가 몇 번 양쪽으로움직이더니 쑥 빠져나갔다. 창끝에 뭔가를 꿴 채로. 제대로 된 비명한 번도 없이 그대로 창 위에 드러누워 버린, 달빛을 가리고 있는 정체 모를 시체에서 피 이외에도 뭔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턱. 다시 한 번, 툭. 무언가 축축하며 부피가 있는 물건. 확인하고 싶지조차 않아. 그리고 계속 샘물처럼 쏟아져 내리는 피, 피. 이, 이런 상황, 겨, 견디지 못하겠어. 갑자기 감옥 안이 밝아진다. "안에 누가 있는가?" 오오… 나는 말을 잊었다. 시체를 창 옆으로 걷어치워버린 그 자는 지금 몸을 수그리고 감옥안을 들여다보려고 하고 있었다. 낯선 목소리지만… 사람, 사람이었어! 내가 즉시로 잘 보이는 앞으로 튀어나가려는데 미르보가 거세게 내팔을 휘어잡았다. "?!" 살벌한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없는가?" 무응답. 아니, 응답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나는 부상에 하루종일굶은 주제에(나도 마찬가지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나를 잡아누르고 있는 미르보의 강철같은 양팔에 가로막혀 있었다. 그 때다. "… 파…비안?" 내… 이름? "……!" 나도 미르보처럼 밥 굶는 데 익숙했더라면 - 이건 절대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현재 상황으로 봐선 그렇다 - 그의 팔을 뚫고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미지의 인물에게 나의 존재를 알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이 옳은지 도무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 "당신은 누구요." 미르보의 묻는 목소리. 처음 그를 만나 느꼈던 감정이 있었다. 어떤 살기와 같은 것이 전신에 깃든 사람. 그리고 그 살기가 지금 목소리에 가득히 묻어 났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추워지는 기분. "그렇게 묻는 자는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니군." 다른 목소리. 단단하고도 강력한 힘이 실린, 어떤 위엄까지 느껴지는 저음의 목소리. 그림자. 창가로 다가오는 그림자. 이윽고 완전히 달빛이 가려졌다. "누구인가." 어느 목소리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에 쥔 것은 아무 것도없는데도 이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나를 찾는 저 사람은 나를 구하려는 사람일까, 해치려는 사람일까. 다시 단단하고도 검푸른 목소리. 밤의 어둠과도 같은 목소리. "파비안이 안에 있다면, 말해라." "나는 관심 없다." 미르보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빠르게 대답을 해치운다. 추호의망설임도 없이. "그렇다면." 갑자기 창이 밝아졌다. 밖의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무엇을 하려고? 불안한, 주체할 수 없는 감정. 드르르- 드드드드드…터억! 창살이 흔들리더니,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나를 감싸안다시피 하고 있는 미르보의 팔에 순간적으로 경련이 인다. 어… 떤 힘을 가지면 강철 창살을 그대로 뜯어버릴 수가 있을까. 그는 뜯어낸 창살을 그대로 밖의 잔디밭에 팽개쳤다. 그러더니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한 사람의 몸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 창 안쪽으로단숨에 뛰어내렸다. 타당! 어둡다. 칠흑과도 같은 검은 망토의 펄럭임. 나비, 거대한 새, 왕국의 깃발. 가라앉았다. "파비안이냐?" 그는 내 양팔을 틀어쥐고 있는 미르보를 한 번 흘끗 보더니 곧 시선을 내게로 집중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얼굴. 그러나 강한 굴곡을 지닌 윤곽이달빛의 역광을 받아 가느다란 빛의 선을 그렸다. 굉장히 큰 키, 암흑을 뚫는 안광, 어깨를 넘는 검푸른 머리카락……! 내 머리색깔과 같았다. "파비안이구나." 고요의 바다. +=+=+=+=+=+=+=+=+=+=+=+=+=+=+=+=+=+=+=+=+=+=+=+=+=+=+=+=+=+=+=1장 1편인 '배달왔습니다' 끝입니다. 이제서야 하는 말인데, 제목 멋지지 않았나요? ...^^;... 사실은 언니가 지은 제목인데요...^^a그리고 또! 추천해주신 분들이 계세요. 세 분 모두 굉장히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읽을만하게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분에 대한 감사는 저번 잡담에다가 썼어야 했는데,제가 출근을 하다 보니 올릴 글을 그 전날 작성해 놓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087번제 목:◁세월의돌▷ 1장 2편 시작합니다. 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8 14:46 읽음:2121 관련자료 없음----------------------------------------------------------------------------- 1장 1편 '배달왔습니다' 끝입니다-곧장 1장 2편 '사계절의 목걸이' 시작합니다. 오늘은 좀 일찍 올렸죠? 음...... 왜냐면...... 오늘은 일요일이잖아요 ^^직장인이다 보니, 쉬는 날을 맞아 일찍 올리게 됐습니다. ^^;평일에는 다시 평상시 올라가던 시간대에 올라갈 거예요. (평일엔 일찍 올릴래도 올릴 길이 없거든요...;)그럼, 1장 2편도 재미있게 읽어 주세요- ^^Luthien, La Noir(루디엔, 라 느와르)『게시판-SF & FANTASY (go SF)』 30088번제 목:◁세월의돌▷ 1-2. 사계절의 목걸이 (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8 14:47 읽음:236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2. 사계절의 목걸이 (1) 오! 아룬드나얀! 비밀을 숨긴 천연의 순전한 광채! 흩어진 네 개의 보석이 눈뜨고 깨어날 때면목걸이는 노래하리, 세상의 종말을 위한장엄한 별의 죽음의 축가를……오, 그대는 잊었나? 200년을 간직한 약속이 이루어지고,잊혀진 네 종족들이 기억을 되찾을 때면검푸른 깃털, 희생물이 제단이 올려져계절을 다시 눈뜨게 하리……- 고(古) 이스나미르 왕국, 일곱 별자리의 예언자헬 위스 카르모하드의 축시 <아룬드나얀> 13-14연 그는 내 이름을 안다. 내 이름은 어디에서 지어 받았을까. 그러나적어도 이 사람에게서는 아니다. 나는 그것을 안다. "많이 자랐구나." "……." "키는 조금만 지나면 나만큼이나 크겠구나." 기분이 이상해. 낯설어. 저런 이야기는 살아오며 한 번도 들어보리라 예상한 이야기가 아니야. 이런 상황은 내 가장 깊은 꿈속에서조차없었어. "내가 너의 아버지다, 파비안 나르시냐크" 정말이야. 아무 실감도 나지 않아.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나는 뭔가 실체가 아득하게 느껴지는것이, 마치 우리가 연극이라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감옥을 나오고, - 내 아버지임을 주장하는 저 남자는 정말이지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 성을 한 바퀴 돌아 앞뜰 쪽으로 나왔다. 나는 갑작스런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금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저 낯선 사람과 내가 피가 닿아있다고? 게다가 내 성이 크리스차넨이 아닌, 나르시냐크라고? 아직까지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동안 왜 따로 떨어져 있었는지,무엇 때문에 이제 와서 나를 찾은 것인지, 그런 것들을 물을 기분이도저히 안 난다. 텅 비어있는 성의 앞뜰. 한없이 긴 포석 위를 걸었다. 우스워진다. 어제까지만 해도 죄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얌전히 영주님 시키는 대로 예, 하고 갇혀 있던 내가 성의 기물을 부수고 - 창살은 엄연히 영주님의 재산이다 - 미결수(?)들을 꺼내 준 사람과 함께 태연자약하게성의 앞뜰을 거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우리 일행을 아무도 잡는 사람이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요?" 미르보. 그는 감옥 안의 대치 상태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경계를풀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런 것은 그의 체질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왔겠지. "영지가 공격당했소이다." "!" 미르보와 내가 한 추측 그대로다. 나는 황급히 멈추어 섰다. "어, 어디가? 누구한테요? 어머니는! 어머니는 만나셨어요?!" 그는 멈추어 섰다. 나의 아버지라는 사람, 한없이 낯설고 닿을 수없는 느낌을 주는 이상한 사람. 그러나 저 사람은 내가 아직까지 거울 속을 제하고는 어디에서도본 일이 없는 나의 머리색깔, 그리고 눈 빛깔을 똑같이 가지고 있었다. 푸른 기가 도는 검은 색, 검푸른 밤의 빛깔.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을 때와는 달리 이상하게도 그의 머리와 눈동자의 빛깔은 훨씬 비밀스러운 느낌을 준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일이 없었는데. 미르보조차도 감옥을 나오면서 불빛이 있는 곳에서 그의 얼굴을 보더니 한 마디 했다. "닮았군." '아버지'는 잠시 침묵했다. 멈춰 선 그대로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뒤로 수많은 별들을 이고 있는 그의 머리카락은그 빛깔 그대로 밤하늘의 일부분, 그 자체였다. "파비안, 마음을 가다듬어라. 가다듬고 내 이야기를 들어라."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슬픈 이야기? 알고 싶지 않은 사실? 조금도 듣고 싶지 않은데. 전혀, 듣고 싶지 않은데. 온 몸이 조금씩, 조금씩 떨려 온다. 싫어, 이런 기분 질색이야. "너에게 와서 찬찬히 이야기를 나누고, 때늦은 내 존재를 너에게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하고 싶었었다. 네가 나를 이해하고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또한 너를 돕고 싶었었다. 그러나 때가좋지 않았구나." 무슨 때? 무슨 때인데! 미르보는 다른 쪽을 보고 있다. 이미 나올 이야기를 짐작하고 있다는 듯한 저 표정, 거짓말! 당신이라도 틀린 추리는 할 수 있어! 나는 간신히 다리를 지탱하고 선 채로 '아버지'를 쏘아보았다. "하비야나크로 돌아가지 말아라." "왜요!!!" 내 자신도 놀랄 정도로 고음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체력도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연이어 세 끼를 굶은 내 몸에 아직 그런 기력이남아있으리라고는 나조차도 생각하지 않았다. "… 보지 말아라." 무엇을! 나는 이제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온 몸을 심하게 떨었다. 땅바닥이 들썩들썩 나에게 덤벼드는 것 같다. 이를 꽉 악물었다. "…… 어떻게… 됐지요?" 꽉 낀 잇새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왠지 기괴하게 들렸다. 내가나 자신이 아닌 것 같다. 내 몸이 낯설고 내가 선 이곳이 낯설다. 그리고 저어지는 고개. 안돼! "아니야-!!!"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나갔다. 무릎이 휘청, 꺾였다. 뒤로 한 발짝내쳐 디뎠다. 내 몸이 세상 무엇보다도 무거웠다. 미르보는 얼굴을 '아버지'를 향해 돌렸다. 그리고 침착하게 물었다. "무엇의 습격이오?" "시체들, 아니 사자(死者), 죽은 자들의 집단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소." "좀비(Zombie)를 말하는 거요?" "아니… 좀 다릅니다." 두 사람은 마치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여상스럽게 이야기를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런 것은 궁금하지도 않아. 아무래도 필요없었다. 마을을 습격한 것이 좀비든 뭐든, 그 소식을가져온 사람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였든, 아무 것도 중요하지않았다. 가서 보게 되면 말은 필요없다. 보지 말라는 것, 그게 무엇이든 간에 나는 보아야 했다. 나는 그대로 두 사람에게서 등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파비안! 어딜 가느냐!" 아아, 왜 저 외침 소리는 저다지도 나와 비슷한 걸까. 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잠시 멈추었다. "하비야나크로 갑니다." "가지 말아라." "갑니다." 잠시의 침묵. "…… 죽을 지도 모른다." 그렇겠지. 당신은 18년 동안이나 떨어져 있었던 아내의 생사 따위는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에게는, 18년 동안이나 아들을 붙들고 잔소리를 하시고,어제 아침에 헤어진, 따뜻한 수프를 끓여 주고, 걱정스럽게 다녀오라는 말을 하시던, 흰 앞치마와 틀어 올린 머리카락, 나의 하나 뿐인어머니란 말이다! 대답은 필요없었다. "파비안." 이번에는 미르보다. 당신은 무슨 말을 하려고? "파비안, 검을 가져오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닐테지?" 미르보는 가지 말라고 잡지 않았다. 그렇지. 당신은 그런 사람이지. 그런 당신이 좋아. 더 이상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눌 필요를 나는 느끼지 않았다. 성안으로 달렸다. 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경비병도, 하녀도, 귀족들도, 아무 것도 없었다. 성의 지리를 몰라서 약간은 헤매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뭔가가 나를 자석처럼 끌어당겨 가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한 기분 따위는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저, 너무 당연하다, 그것이나를 찾고 있는 것은, 그렇게 생각했을 뿐. 마음을 따라서 발길을 옮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나니 별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곧 경비병 숙소에 이르렀다. 그리고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한개의 문을 택했다. 문이 잠겨 있다. 걷어찼다. 낭비할 시간 따위는없어. 전혀 없어. 영주님의 재산이고 뭐고,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아. 셀 수 없을 만큼, 내 발에 느낌이 없어질 만큼, 걷어차고 나니 문을 잠근 고리가 툭, 떨어져 나갔다. 부서질 듯이 흔들거리며 열린 문. 방안은 급히 출동한 흔적이 남아온통 난장판이다. 그 안에 놓인 네 개의 침대 중에 하나에 흰 천으로감싸인 기다란 물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 몸이 쑤시지만 그보다 턱끝까지 치밀어 오르고 있는 뜨거운 기운, 그것 때문에 몸의 고통은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까마득하게먼 어딘가에 있는 듯, 불확실하기만 하다. 천을 풀어버리고 검을 쥐었다. 이 뜨거운 기운, 좋아. 성밖으로 나섰다. 성의 앞뜰이 길다는 것은 기억나지도 않았다. 하루 종일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주제에 나는 평생토록 아껴놓은기운을 온 다리에 집중하기라도 한 듯 달리고 있다. 그 큼직한 검을양팔로 껴안다시피 하고서. 아아, 느려, 느려. 제기랄, 이렇게 무거운 몸 따위 벗어버리고 날아서 갈 수 있다면. 도개교는 내려진 그대로다. 그대로 뛰어서 건넜다. 하비야나크로 가는 가장 빠른 길. 똑바른 오르막이다. 언제나 붐비던 장미꽃의 엠버, 장사치들의 그 많던 좌판들. 그러나 길거리에는 정말로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터져버릴 듯, 온 몸을 압박하는 이 불길한 기운. 내 귓가에 윙윙대며 울리는 저 굉음은 뭐지? "파비안." 엠버를 나서는 길목에 미르보와 검푸른 머리의 남자가 서서 나를기다리고 있었다. 부르는 소리, 간신히 알아들었다. "함께 가겠다." +=+=+=+=+=+=+=+=+=+=+=+=+=+=+=+=+=+=+=+=+=+=+=+=+=+=+=+=+=+=+=드디어 1장 2편의 시작입니다. 1장 1편이 제 생각보다 좀 길어졌지만, 제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저도 굉장히 즐거웠어요. 1장 2편은 훨씬 짧게 쓰려 합니다. 그렇지만 이번 편은 가히 '격변!' 이라고 부를 만한 스토리상의 급진전이 있을 예정이에요. 많이 지켜봐 주세요. 그럼, 또 시작합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089번제 목:◁세월의돌▷ 1-2. 사계절의 목걸이 (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8 14:47 읽음:234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2. 사계절의 목걸이 (2) 저게 뭐더라. 저기에 있던 저 건물이 뭐더라. 분명히… 대장간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이미 건물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상태. 저것은? 저게 그 여관이었던가? 몰라, 도저히 모르겠어. 여기가 우리 마을이었는지조차도. 나는 배달하러 스노우보드를 타고서 신나게 내려오던 '그 길'을 지금 걸어서 올라가고 있다. 그런데 엊그제만 해도 길가에 단단히 얼어있던 눈이 도대체 보이지 않았다. 여기 저기 녹아서 흘러내린 자국만남아 있다. 그 많던 눈이 저렇게 빨리 녹아 없어질 수 있는 건가? 그 의문은 곧 풀렸다. 길바닥 여기저기가 온통 뭔가 태운 자국들로 가득했다. 게다가 군데군데에서 오르고 있는 매캐한 연기. 내 옆을 걸으면서 무표정하게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그 남자가 말했다. "누군가 좀비를 퇴치하는 방법에 대해 조금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그렇지만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좀비와는 다른 놈들이었다고 하니까. 마을 어귀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벌써 십여 구의 시체를보았지만 그 '뭔지 모를 적'의 시체라고 할 만한 것은 하나도 눈에띄지 않았다. 시체. 시체를 본다는 것은, 그냥 명이 다해 죽은 경우일 때에도 매우 꺼림칙한 일이다. 그것이 살해된 것일 경우에는, 앞의 것과 비교할 수도 없도록 커다란 감정상의 충격을 준다. 그리고, 그것이 아는 사람일 경우에는…… "고르만 씨!" 갑자기 몸을 급하게 움직이다가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녹은 눈이 그 사이 다시 얼어붙고 있었다. 다물고 있는 입안의 이빨이 시릿시릿할 정도로 추운 날씨니까. 간신히 몸을 추슬러 반쯤 탄 폐허 앞에 엎드러져 있는 한 사람에게달려갔다. 저 체크무늬 웃옷은 눈에 익숙한 것이다. 도대체 왜 갈아입지도 않고 만날 그 옷만 껴입고 다니냐며 고르만 부인이 짜증스레잔소리하던 그 옷. 더러워도 괜찮으니 내 좋아서 입는다며 사람 좋게고집을 부리던 고르만 씨.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갈색 앞치마를 두른 살집 좋은 큼직한 몸집이 내가 흔드는 것에 따라 좌우로 흔들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고개를 들어올려볼까… 그만두자. 숨을 들이켰다가, 몸을 일으켰다. 눈가에 뜨뜻한 것이 맺히는 것이 느껴진다. 고개를 흔들어 털어 버렸다. 아직, 아직이야. 아직 볼 것이 남아있어. "가자." 가야지요. 지난 18년간의 내 삶, 그것이 마치 환상처럼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을 보기 위해서. 확인해야만 해. 괜찮으냐고 물을 만한 사람은 둘 다 아니었다. 이제 20여 구를 넘기고 나니 나는 아예 어떤 감정을 느낄 마음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같은 느낌이다. 마음도 닳아서 없어지는 걸까. 내가 본 시체 중에는 '사슴 잡화' 주인 쿠멘츠 씨도 있었다. 게퍼녀석은 어디로 갔을까. 계속해서 걷고 있다. 너무나 조용하다. 나는 아무 것으로부터도 위협받고 있지 않다.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죄없는 저를 일없이 가두신 영주님, 당신에게 감사해야겠군요. 그러나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곧 판명되었다. 저 만치 보이는 나의 집, 가게 '큰사슴 잡화'의 간판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열에 들뜬 사람처럼 온 몸이 홧홧해졌다. 동시에 시키지도 않은 눈물이 당장에 주르르 떨어진다. 가게는 지붕이 날아가고 없었다. 이, 이건 아니…아닐… 거야아아아아!!! 어디에서 힘이 났는지 나는 뛰었다. 한 달음에 뛰어서 가게로 올라가는 언덕을 올랐다. 미끄러지지도, 멈칫거리지도 않았다. 단숨에 올라가서… 문을 열고……뒤에서 나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내 팔을 붙잡았다. "보지 말아라, 파비안." 여기까지 와서요? 보지 말라고요? 무엇을! 어머니는 사, 살아서, 언제나… 처럼 그랬듯이 가게 앞 의자에 아… 앉아 계실 텐데! 아니, 치이…, 침대 밑이나, 창고로 통하는 문이나… 그으런 데잘… 수, 숨어서 분명…… 분명히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눈이 빠져라 기다리… 계, 계실 텐데에!!! 뭐라고 나는 외치고 있었지만 내 목소리는 완전히 갈라져나가, 나조차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간다. 나는 나를 잡은 그 억센 팔을 단숨에 뿌리치고 문을 열어제쳤다. "아……." 세상이 멈췄다. [파비안, 파비안, 이 녀석아, 배달 안 가?][아휴, 어머니- 참새 그물은 분명 안 사갈 거라니까요-!][네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니? 얼렁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훌쩍 갔다 와.][어머니도 참…….]겐즈 씨는 참새 그물은 분명 더 필요하지 않을 거라니까요. 나는 별 수 없이 휘적휘적 옷을 추스르며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가게 의자에 앉아 계신 어머니는 이상하게 온통 새하얀 옷을 입고 계신다. [어머니, 그 하얀 옷은 어디서 난 거예요? 우와아- 천사 같긴 한데창고 먼지를 감당할 것 같지는 않네요.][그렇게 밖에 말 못해, 이 녀석아?][헤헤헤, 농담이었어요, 어머니. 영주님네 마나님보다 더 우아하고멋져요.][겨우 그런 데 비교해서야 되겠어?]어머니는 의자에서 일어나신다. 희고 긴 치맛자락과 눈이 부실 만큼 희디흰 목덜미. 부드럽게 흘러내린 갈색 머리카락에서는 마치 빛이 나는 것 같다. 아니, 몸 전체에서 빛이 나는 것 같다. 우리 어머니가 언제부터 저렇게 멋있었지? [응, 겨우 영주 부인한테나 비교해서야 되겠어?]날개…어머니의 양 팔 아래에서 커다랗고 눈처럼 새하얀 날개가 훌쩍 돋아난다. 양쪽으로 좍 펴니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날개를몇 번 움직이더니 마치 날아오를 것처럼 깃을 펄럭였다. 저런 모습을 하고, 어딜 가시려는 거지? 눈이 부셔……! [천사를 말이다.]가게에는 지붕이 없다. 어머니는 날개를 한 번 치셨다. 순식간에내 키의 몇 배나 되는 높이로 솟아오르신다. [어머니…! 어디 가세요!]어머니는 대답이 없으시다. 나는 멍청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미 까마득한 한 점이 되어버린 날개 달린 어머니를. 어머니는 그렇게 대답 없이 멀어지신다. 영원히 대답이 없으시다. "어머니!" 아아, 나는 잡히지 않는 허공을 움켜쥐고 있었다. 내 팔에서 흘러내린 이불, 여기는 여관이지. 낯설고 싸늘한 방. 단정하지만 낯선 방. 그렇지만 나는 여행을 떠나 여관에 든 것이 아니야. 나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다. 도저히 일어날 기분도, 기운도 나지 않았다. 오늘은 며칠일까. 네 개 마을중 유일하게 큰 피해가 없는 곳은 월계수의 그릴라드뿐이었다. 이곳은 그릴라드의 '푸른 잎사귀' 여관. 마치 엠버리 영지의네 개 마을 중 가장 따뜻한 지역이라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지은 이름 같다(그러고 보니 그릴라드에 일전에 왔을 때 들어갔던 여관 이름도 '녹색 깃발'인가 뭐 그런 것이었던 생각이 나는군).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보려 했지만 양팔이 어느 쪽이나 너무 무거운 나머지 그만두어 버렸다. 죽기 직전의 병자라도 된 것 같다. 누워서 올려다보는 천장은 네모지고, 정말로 푸른 잎사귀들이 그려져 있군. 나는 아침이면 늘 바빴기 때문에 방의 천장 따위를 감상할 시간이있었던 적은 거의 없다. 밤에는 깜깜하니까 당연히 안 보이고. 그런데 지금은 감상하기 싫어도 눈을 뜨고 있는 한, 쳐다볼 것은그것밖에 없었다. 머리를 돌릴 기력조차 없었다. 발가락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움직였는지 아닌지조차 모르겠다. 마치,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몸 안에 들어앉은 내 영혼. 지금 그안에서 무슨 생각에 잠겨 있을까. …'무슨 생각에 잠겨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겠군. 그 동안 내가 뭔가 먹었는지, 잠은 얼마나 잔 것인지, 도무지 나는알 길이 없다. 여기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조차도. 그리고 여기가어딘지에 대해 왜 내가 알고 있는 건지도 헷갈려. 기억을 더듬어 보면 혹시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전혀 그렇게 하고싶지가 않아. 아무 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대답할 기력 따위는 없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데 다시 한 번두드린다. 바보,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냥 들어오라구. 문이 딸깍, 열렸다. 여자, 아니 아는 얼굴이야. "류지아… 나우케?" +=+=+=+=+=+=+=+=+=+=+=+=+=+=+=+=+=+=+=+=+=+=+=+=+=+=+=+=+=+=+=제가 예전에 써서 올린 단편에도 '그릴라드의 녹색 깃발' 이라는여관이 나옵니다. ...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글의 중심적 배경이죠 ^^;물론, 그 여관은 '월계수의 그릴라드' 마을에 있습니다. 일요일, 날씨 좋군요. (그러나 방구석에서 열심히 글쓰고 있습니다. ^^;)Luthien, La Noir『게시판-SF & FANTASY (go SF)』 30201번제 목:◁세월의돌▷ 1-2. 사계절의 목걸이 (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9 20:47 읽음:234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2. 사계절의 목걸이 (3) 말해놓고서 나는 당황했다. 나타난 사람이 의외여서가 아니었다. 이게 도대체 내 목소리야? 마치 쇠를 가는 듯한, 기괴하게 비틀린 목소리. 그러나 상대방은 내가 깨어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놀란 듯 했다(그랬다면 문은 왜 두드려?). "깨어 있었네?" "……" 뭔가 대답할까 했지만 일단 할 말도 없거니와, 내 목소리를 나 자신이 도무지 듣고 싶지가 않아서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가내 머리맡으로 다가왔다. 머리맡에 의자가 있었나 보다. 뭔가에 걸터앉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분이…… 어때?" 내 기분이 어떻지? 그것을 알아보려고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니, 갑자기 참을 수 없는기억들이 오래된 파도처럼 치밀어 올라온다. "욱……." 내가 갑자기 턱을 허공으로 치켜올리며 이상한 소리를 내자 류지아는 당황했다. 머리까지 들어올릴 힘이 없어 머리는 그대로 베개 위에축 늘어진 채였다. 숨이 턱 막힌다. 류지아는 의자에서 급히 일어나더니, 내 머리를 잡고 진정시키려 애썼다. "파비안, 파비안, 괜찮아, 괜찮아." 무… 엇이 괜찮지? 갑자기 류지아가 나에 대해 점을 쳐주던 때가 떠오른다. 류지아는 나에게 말했었다. 이대로 잡화점 점원으로 계속해서 살다가 잡화점이나 물려받아 그대로 늙어 죽는 게 좋니? 나는 고개를 흔들었고,그러면 어떤 식으로든 네 생활이 바뀌기를 원하는 거야? 바뀐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확실치 않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설명해달라고 말했었다. 그녀는 가만히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지. '바뀐다는 것은 좋은 쪽일 수도 있고, 나쁜 쪽일 수도 있다. 또,네가 좋게 느끼는 그것이 사실은 나쁜 것일 수도 있고, 네가 싫어하는 일이 네게 실은 좋은 것일 수도 있다. 바뀐다는 것은 말 그대로,그 자체이다. 바뀐다는 것은 용기. 위험. 그리고 그 대가.'이해하지 못한 나는 답답해져서 다음 이야기를 하자고 했었지. 뭔가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생각해봐야 결정하겠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내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어. 내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나는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았는데. 다시 뭔가가 치밀어 오른다. "우웁……." 도저히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 한 가지가 있다면,내가 발견한 어머니,그 가슴 가운데 뚫려진,커다란, 심연과도 같은 구멍,그 둘레에 차갑게 얼어붙은 피. 가슴이 마구 들썩거렸다. 침대가 흔들릴 정도다. 내가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자, 류지아는 잠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더니 뜻밖의 행동을 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침대 위에 올라오더니 그대로 내 위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녀의 몸으로 내 떨리는 몸을 지그시 눌렀다. "……" 그녀의 팔이 내 몸을 감싸 안는 것이 느껴진다. 순식간에 코 안 가득히 들어찬 그녀의 냄새.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얼굴과 베개에 가닥가닥 흩어져 뒤덮였다. 그 전에 보았을 때는 단정히 뒤로 묶고 있어서 몰랐는데 그녀의 머리는 매우 길었다. 따뜻하다. 점차로 나는 조용해졌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 경련은 점차 가라앉았다. 조금씩 잦아들더니 서서히 가늘어진다. 그리고 내 것이 아닌 듯, 완전히 굳어 있던 내 몸 구석구석에 조금씩감각이 돌아온다. 처음 느껴진 감각은 끔찍한 통증. 어디가 아픈 지도 확실치 않은. 그리고 다음 느껴진 감각은……. 나는 그녀의 몸의 윤곽을 조금씩 감각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아아…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러나 점차 따뜻해진 내 몸에 피가 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지금내 얼굴을 붉힐 만한 피가 내 몸 안에 있을까? "얼굴에…… 화색이 도는걸." 으……. 할 수만 있다면 후닥닥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힘이아직은 없었다. 다행히도 류지아가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그녀의 손. 에라, 차라리 눈을 잠깐 감자. 눈을 감고 있는 내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히 단정하게 가라앉아 있어서 나도 그 목소리에 점차 침착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예언자. 말하자면 점쟁이지, 너도 알다시피." 그래. 흠, 그러고 보면 너는 여기까지 나를 찾아올 만큼 나와 친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은걸.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지. "너, 내가 아버지는 살아있다고 한 말 기억나?" 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나는 눈을 뜨고 류지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침대에 반쯤 걸터앉은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깊은 우물처럼 가라앉은 그녀의눈동자. 저번에 점을 볼 때에는 저런 눈은 본 일이 없어. "네 아버지를 보았어." 그래, 내 아버지라는 사람이지. 안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혀 그런 것은 중요하게 생각되지가않는다. 어머니가 없는 지금, 나에게 나타난 아버지의 존재. 느낌이없다. 텅 빈 것 같다. 왜, 왜 이제야 나타났지? 왜 우리는 처음부터함께 있을 수는 없었지? 왜 이런 때에 나타나서 내 감정을 엉망으로만들지? 젠장,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는 운명이라는 거야? "그리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떤 표정을 보이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류지아는 계속 말하고 있다. "너의 운명이 나에게 느껴진다." 무슨 소리? 나는 흠칫해서 몸을 일으키…… 켰는 줄 알았는데 그대로 있네. 나는 누운 채로 고개만 약간 들었다. "무… 슨 소리… 야." 아아, 저 듣기 싫은 그르렁대는 쇳소리. 행려병자의 말로 같애. "예언자는 일생 수많은 예언을 하고 점을 치지만, 그 모든 사람의이야기가 다 중요하게 되는 것은 아니야. 어떤 날은 하루에도 수십명의 운명을 점쳐볼 때가 있지. 그리고 나서는 잊어버리기도 해. 다음에 찾아왔을 때, 그쪽에서 잘 설명해주지 않으면 전에 뭐라고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있어." 의아한 소리다. 류지아는 말을 계속했다. "파비안 네가 찾아왔을 때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뭔가 나 자신도 잘 모르는 인상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을 느꼈어. 네가 돌아간 후에, 나는 그것에 대해 잘 생각해 보았지." 도대체 뭘? 나는 일단 고개라도 끄덕여 주고 싶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잠자코 눈만 감았다가 떠 보였다. "예언자에게도 그 운명의 줄이 자신에게 닿아 있다는 느낌이 드는사람이 있지. 아직까지 나에게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었지만,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어. 너." 기분이 이상해지는 말인걸. 그리고 마치 단정짓듯이 하는 류지아의 목소리. "너는 예언자로서의 내 운명과 맞닿아 있어." +=+=+=+=+=+=+=+=+=+=+=+=+=+=+=+=+=+=+=+=+=+=+=+=+=+=+=+=+=+=+=추천해 주신 분, 또 감사합니다. 별 것 아닌 글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좋은 이야기를 써 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202번제 목:◁세월의돌▷ 1-2. 사계절의 목걸이 (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9 20:48 읽음:233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2. 사계절의 목걸이 (4) 류지아는 계속해서 말한다. 다른 사람 100명을 모아 놓은 것보다도내 운명에 대해 자신은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말까지.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듯,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나는 그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 저렇게 말하는 류지아가 과연 나보다도 나이 어린 여자아이 맞을까. 예언자란 어떤 신비로운 무리이기에 저런 말을 저런 표정, 저런 말투로 할 수 있을까. 그녀는 마지막으로 가라앉았으나 단호한, 그녀 특유의 목소리로 끝말을 맺었다. "네 운명을 다시 한 번 점치겠다." "다시…… 한 번?" "지금은 아니야. 좀 더 준비하고, 때를 잘 맞추어서. 주의 깊게,최대한의 정성을 들여서 할거야. 한 달 정도는 준비가 필요하니까 그때까지는 어디도 갈 생각하지 말아 줘. 이건 너의 운명이라는 점에서너에게 중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나에게도 중요한 의식이야. 예언자로서의 내가 걸려 있어. 내가 무언가를 잘못 말하면, 그 영향이 나에게도 올거야." 류지아는 말을 맺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나갔다. 문이 닫혔다. 전환기. 이런 것을 전환기라고 하는 걸까. 뭔가 기존의 물들이 쏟아져 나가고 새로운 것들이 바뀌어 들어오고 있어. 그 물결이 느껴져.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뭐란 말이야. 복잡해. 그냥 처음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어. 원래대로 다시 돌려놓고 싶어. 그냥 아침에 일어나 가게보고, 배달 가고, 그러고 싶어. 이 세상은 너무 차가워. 어머니가 있는 세상…… 으로 가고 싶어…. [파비안.][네, 어머니.][이것 좀 먹어라. 닭고기 수프를 끓였단다. 몸이 그래서야 어디 제대로 배달이나 하겠니?][제가 배달 못하게 되면 가게 곤란할까 봐서 지금 만들어 주시는거죠?][이 녀석이…….]나는 어머니 목소리를 듣고 있지만, 어머니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두리번거리다 못해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어머니, 어디 계신 거죠?][몰라도 된다.][뭐라고요?][거기 그냥 그대로 있어. 네 일이나 잘 알란 말이다, 이 녀석아.][무, 무슨 소리예요, 어머니? 어머니 일이 내 일이지, 무슨 소리를하시는 거예요?]나는 꿈속에서도 화가 나서 어머니를 찾아내려고 주위를 빙글빙글돌았다. 그런데 꿈속인데도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 너무 힘들어서 못 하겠어요. 어머니 계신 데로 데려가 주세요. 몸이 너무 아픈 걸요.]그러나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으신다. 나는 힘들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파비안.]갑작스레 어머니가 불러서 나는 벌떡 일어났다. [네, 네, 어머니. 왜요?][아프면, 빨리 나아야 한다.][어머니가 안 아프게 해 주세요.]안 보이는 어머니는 신경질을 내셨다. 꿈인데도 무서워라.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 아프면 안 아프도록 어서 일어나서 수프라도 떠먹고 정신을 차려야지!][수프……요?]수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킁킁, 냄새는 난다. 어디 있지? [네 코앞에 있잖아! 어서 일어나서 떠먹어!]주위가 희미하다. 나는 서서히 꿈에서 깨어나는 나를 느낀다. 정신이 반쯤 내 몸에돌아와 있다. 그러나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는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헤맨다. 벌써 몇 번째, 아직 정신은 몽롱한 채. 몇 번이고 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익숙한 가게의 풍경, 그 바닥에 망가진 인형처럼 가지런히 눕혀져 있는 어머니의 초점없는 동공,그리고 가슴에 뚫린 구멍 주위에 마치 검은 얼룩처럼 얼어붙은 약간의 핏자국…… 이게 현실이야, 도저히 눈뜰 수 없는 현실. 아아, 어머니. 그대로 계속 꿈속에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이… 이 일대를 갑작스럽게 휩쓸고 지나갔소이다. 좀비와 같은 언데드(Undead)인지, 스펙터(Specter)같은 망령의 일종인지조차잘 알 수가 없소. 확실한 것이라면 이들은 일종의 이성이랄까 '의도'라고 부르면 좋을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어떤 사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하얀 산맥을 넘어 왔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리라 보오. 다른 데에서 이런 놈들에 대해 전해진 바가 전혀 없는 것을 보면. 닥치는 대로 학살을 자행하며, 말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합디다……." "어떤 모습이라고 합니까?" "목격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겉모양은 각양 각색이나 전체적으로 마치 흐물흐물한 회반죽 비슷한 모양새였다고 하오. 윤곽은 사람과 비슷하지만, 반쯤 썩어 가는 몸체, 그리고 지독한 악취…… 사람이 아닌, 본래는 다른 종족이었을 것 같은 자들을 봤다는 사람도 있어요. 실제로 엠버에는 오르크 수십 마리가 마치 그 놈들과 약속이나한 것처럼 때맞춰 침입했다지 않습니까? 물론 오르크 놈들이야 병사들이 거의 다 소탕했지만, 어쨌든…… 그 놈들은 일반적인 언데드와는 달리 불로는 전혀 효과가 없었고, 계획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이동했다고 합디다." "목적이 뭔지 알 만한 것은 전혀 없다고 해요?" "목적이라…… 글쎄, 닥치는 대로의 학살이라고나 하면 적절할까. 게다가 엄청나게 힘이 세고, 칼이나 연장에 베어져도 아예 효과가 없답니다.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면, 그것 그대로 마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공격했다고 하더군요." "공격은 어떻게?" "무기까지 쓰니 정말 끔찍하지요. 물론 대부분은 빈손이지만 일부는 칼이니, 창이니 저들 취향대로 무기를 들고 사람들을 베어 넘기는데, 그 힘이 예사 장정 두세 배는 되는 힘이랍니다. 무기가 없는 놈들은 맨손으로 사람을 잡고 그대로 찢어 놓기까지…… 했다고 하더군요." "음… 게다가 숫자는 엄청났다지요?" "예. 모르긴 해도 백 이상은 넘는다고 보아야……." "단 하나라도 죽이지 못했대요?" "알 수야 없죠. 그러나 시체가 남아있지 않은 걸로 보아…… 거의그 숫자 그대로 이동해 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지휘자는 없고요?" "검은 말을 탄 자들이 있었대요. 시커먼 옷으로 온 몸을 둘러써서그들과 같은 종류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어쨌든 일종의 명령을 내리는 듯 했던 모양입니다. 먼발치에서 본 사람들이 있어요. 이리저리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마치 독려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어느 쪽으로 갔답니까?" "낸들 아나요. 어디에서부터 나타났는지조차도 모르는 판인데……." 내 옆방에서는 지금 두 사람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저 목소리가 누구더라. 저 중에 한 사람은 익숙한 목소리, 아니 말투인데……. 나우케 의사다. 죽지 않은 사람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다. 내 침대 옆 탁자에는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수프가 놓여 있었다. 다시 잠이 들었었기 때문에 누가 갖다놓았는지는 보지 못했지만 아직김이 오르는 것으로 보아 다녀간지 얼마 안 되었나 보다. 닭고기 수프의 냄새야. 아까보다는 조금 몸의 상태가 나은지라(누구 덕택인지는 묻지 말라), 나는 애써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래도 상체나마 일으키고 보니머리가 휘청휘청하는 게 주위가 핑글핑글 도는 것 같다. 그래도…… 죽을 수는 없잖아. 나우케 의사가 살아있는 것도 이렇게 좋은 일로 느껴지는데, 내가살아있으면 어머니는 분명히 기뻐하겠지. 수프라도 떠먹고 어서 정신을 차리라시던 꿈 속 어머니의 목소리가쟁쟁하다. 그런데 그 밖의 것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아아, 난 이대로 살아야 하는 걸까. 수프 그릇을 들려고 했는데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집어지지가 않았다. 창피하군. 3큐빗이 넘는 검도 휘두른 나인데. 그러고 보니 그 검은 어디로 갔지? 두리번거려 봤지만 방 안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어라, 내가 고개를 돌릴 수 있네. 이번에는 숟가락에 도전이다. 이건 그래도 어느 정도 들어올릴 수가 있었다. 수프 그릇을 내 무릎 위로 옮겼으면 좋겠는데. 불가능한꿈일까. "파비안? 일어났니?" 아아, 저 질문하는 목소리조차도 너무나 반갑군. "일어났구나?" +=+=+=+=+=+=+=+=+=+=+=+=+=+=+=+=+=+=+=+=+=+=+=+=+=+=+=+=+=+=+=여전히... 남은 시험 잘 보세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203번제 목:◁세월의돌▷ 1-2. 사계절의 목걸이 (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19 20:48 읽음:232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2. 사계절의 목걸이 (5) 나우케 의사는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내 악전고투를 목격하고는 친절히 도와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남매를 다 만나는군. 나는 숟가락을 애써 혼자 들려고 애쓰다가 그냥 나우케 의사가 떠먹여 주는 대로 가만히 있기로 마음을 정했다. 다시 말해, 주제 파악을 했다. 나는 혓바닥으로 수프를 굴리면서 물었다. "오늘은 남매 분을 모두 보게 되네요?" 윽…… 목소리는 여전하군. 꿈속에서는 괜찮았는데. "어, 아냐. 류지아가 여기 온 것은 어제인데?" 헤에, 어제? 이거야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 나는 얼떨떨하고 있다가 나우케 의사의 숟가락 공격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풉…… 그랬, 군요." "그래. 류지아가 네 점을 보겠다고 하데? 너 복채는 있냐?" "에…… 예?"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는데? 뭐, 운명 어쩌고 해서 그냥 공짜로 봐 주는 줄 알았는데? 이거 류지아가 나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었잖아? 그건 그렇고, 가게고 뭐고 다 망한 마당에 복채가 어디 있어? 갑자기 쓸데없는 기억이 튀어 올라 나는 입을 그대로 벌렸다. 수프가 입가에서 흘러내렸다. "우웁……." 나우케 의사는 내 얼굴 표정을 흘낏 보더니, 그대로 일상적인 일을말하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파비안 임마, 너 점쟁이는 복채 안 받으면 신통력 떨어진다는 이야기 못 들어보았어?" "…… 에…." "이번에 류지아가 뭔가 제대로 준비하는 모양이던데, 너 복채 단단히 준비해야겠던걸? 뭣하면, 몸 나은 다음에 내 일이라도 도와서 몇푼 마련해 볼래? 내가 그 정도는 도와줄 수도 있거든?" "… 의사 조수요?" "임마, 것두 쉬운 일이 아닐걸? 난 돈을 꺼냈다 하면 본전은 완전히 뽑거든? 내 동생 성격이 어디서 나왔겠냐? 너도 봤지?" "……." 나는 깨달았다. 나우케 씨네 집 두 남매는 방법은 다르지만 충격에빠진 사람을, 아니 적어도 '나'를 어떻게 달래야 할 지에 대해서는나름대로의 놀라운 방식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란 걸. 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점차로 이성적이 되어 가는것 같은…… 엣, 나우케 의사가 내 성격을 저렇게 잘 파악하고 있었나. "…… 이래봬도 이름난 점원이에요……." "푸핫, 그렇다면 한 번 기대해 봐도 될까?" "……." 사정없는 수프 어택까지 퍼부어 가며 나우케 의사는 자신의 고질병이 전혀 고쳐지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이 몸이 병자만 아니었어도 다시 시술에 들어갈텐데. "그건 그렇고, 네 아버지란 사람 만났는데……." 수프를 다 먹었다. 나우케 의사가 친절하게도 손수 수건을 꺼내 내입가를 닦아주고 다시 눕혀 주는 동안 나는 아버지란 사람의 존재에대해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나우케 씨, 당신은 내 '아버지'라는 사람을 어떻게 보았나요. "매일같이 와서 여관 아래층에 있다가 돌아가시더군. 같은 여관에그냥 묵으시지 그러시냐고 했지만 아직 네가 그 분을 받아들이지도않은 상태라 그러신다고 말하더라. 이야기를 하는 건 네 몸이 나을때까지 기다린 뒤로 미루시겠다고." 검푸른 머리카락. 나는 눈을 돌려 관자놀이에 늘어진 내 머리카락을 보았다. 내 머리도 아주 짧지는 않은 편이라 머리 가닥가닥을 보는 것이 어려운 일은아니다. 손을 들어 약간 만져보았다. 매끄럽다. 머리 곱다는 소리 종종 들었었는데, 이상하게도 어머니한테서는 한 번도 못들은 것 같다. 왜였을까. 아버지를 기억하기 싫으셨을까. 두 분은 무슨 인연이시기에 이렇듯, 결국 여기까지 와서도 서로 얼굴 한 번 마주보지 못하는 사이가 되셨을까. "어쩌면 지금도 아래층에 계실지도 모르지. 저녁때까지는 계시는것 같으니 말야. 식사도 전부 여기서 하시고."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아까부터 내 침대 안에는 따뜻한 물주머니가 몇 개나 놓아져 있었지만 이 닭고기 수프 만한 효과는 없었다. 피가 돌기 시작하고…… 지금 생각하니 닭고기 수프보다 더 효과가직방인 것이 또 한 가지 있었는데……윽,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파비안, 혈색 좋아졌구나." … 누가 남매 아니랄까봐. "제가 얼마 동안 누워 있었어요?" "음…… 5일째지." "그렇게 오랫동안, 아무 것도 안 먹고 살아있는 것이 신기하네요." "나도 신기하다. 하긴 지금 네가 거울을 볼 수 있다면 신기한 것이좀 더 늘겠지만 말이야." "보여주세요." "참아. 정신적 충격을 또 받게 되면 이번엔 회복이 어려울지도 몰라." 저렇게 평범한 말투로 해대는 살벌한 말이라니. "… 피해가… 얼마나 되죠? 나우케 의사는 머리를 긁었다. 입은 싱긋 웃어 보인다. 그런 그의얼굴을 보자니 뭔가 어색한 것이 느껴져서 나는 다시 한 번 찬찬히그 얼굴을 뜯어보았다. 머리 위에서부터 귀 아래까지 이마를 가로지르는 긴 상처. "큰사슴의 하비야나크가 가장 피해가 심해. 모르긴 해도 수년 안에복구되기는 힘들 것 같다는군. 그 다음이 눈꽃의 스덴보름. 그래도스덴보름에는 조금 생존자가 있다더라. 장미꽃의 엠버는 사람들은 모조리 도망갔지만 실제로 큰 피해는 없고, 사람도 많이 안 죽었어. 월계수의 그릴라드는…… 보는 바대로지." 분명히 예전에는 없었었다. 아마도 칼자국인 듯? 그러나 저 사람은아무렇지도 않은 양 웃고 있다. 하비야나크에선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걸까. "하비야나크는……."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할 지 이미 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더니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너를 제하면 확인된 사람은 단 한 명 뿐이다." "누구죠?" 누굴까. "설산의 불빛 여관의 고르만 씨 부인." "아아……." 갑자기 가게로 올라가는 길목에 앞으로 쓰러져있던 고르만 씨의 뒷모습이 눈가를 스친다. 그렇게 생각해서인가. 눈물이 약간 솟아났다. "그러나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야. 상처도 상처거니와,거의 제정신이 없으니까. 그 상황에서 살아남은 것도 기적인데, 아마도 부인의 동생 덕택인 것 같다더군. 그 사람의 시체가 부인을 몸으로 감싸 덮고 있었다니까." 그렇군요. 싹싹하고 활기 있는 부인이던 그녀가 떠오른다. 래프티 고르만이던가. 고르만 씨가 '래프티!'하고 부르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딕도 죽었구나. 딕이 감정, 아니 보석임을 증명해주던 그 보석은 가게에 그대로 있을까. "파비안, 많이 회복된 것이 정말 확실하구나. 이런 이야기를 그냥들을 수 있는 것 보니." 그… 런가요. 목덜미가 싸늘한 느낌이 든다. 사라진 사람들. 얼굴이 푸석푸석한 느낌이 드는데, 이런 느낌이라도 느낄 수 있는것이 회복의 증거인가. 잠시 입끝을 올리면서 천장을 쳐다보는 나우케 씨. 당신은 잃은 것이 없나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우케 씨는 역시 의사였다. 자기 병을 방금 스스로 고친 것 같은걸. 대답만 잘 하네. "참, 혹시 미르보 겐즈 씨는 어디로 가셨는지 아세요?" "겐즈 씨… 그 참새 그물인가, 그거 잔뜩 들고 다니던 양반 말이군." +=+=+=+=+=+=+=+=+=+=+=+=+=+=+=+=+=+=+=+=+=+=+=+=+=+=+=+=+=+=+=계란유골 님께서 보내주신 질문 잘 받았습니다. "Luthien, La Noir"는 저의 닉네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좀 그렇긴 하지만(하하...), 어쨌든 뜻을 설명하자면 이래요. Luthien - '루디엔'이라고 읽고요, J.R.R.톨킨의 <반지전쟁>과 <실마릴리온>에 등장하는 요정의 이름입니다. 저의 닉네임이지요. La Noir - '라 느와르'라고 읽고요, 프랑스어로 '검은색' 이라는뜻이죠. '라느와르'의 유래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입니다. 장발장의딸 꼬제뜨의 별칭이지요. 그녀가 뤽상부르 공원에서 늘 검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학생이 멋대로 그녀에게 붙인 별명이었습니다. 그 옆에 앉아있는 흰 머리의 장발장의 별명은 뭐였냐면.... 르블랑 씨였죠. (Le Blanc = 프랑스어로 흰색). ^^;;저도... 검은 옷을 주로 입고 다닙니다. ^^그리고 <레미제라블>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현재는 인터넷 아이디이지만, 바꾸기 전 아이디도 이 소설에나오는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복잡하고 긴 소설을 끝맺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존경받을 만합니다만....^^;)설명이 생각보다 몹시 길어지고 말았다...;;Luthien, La Noir ^^; .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327번제 목:◁세월의돌▷ 1-2. 사계절의 목걸이 (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0 20:44 읽음:228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2. 사계절의 목걸이 (6) 어라? 어떻게 알지? 그물 20개가 너무 많아서 배낭에 다 안 들어갔나? 갑자기 이 와중에도 느껴지는 죄책감. "며칠 전에 나한테서 짐을 찾아갔는데, 그 이후에는 어디로 갔는지모르겠군." 그래, 떠났다는 거지. 사람은 기다려주지 않는구나. 그다지 친분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는 사람이었지만, 왠지 그 사람도 보고싶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에참, 이러다가는 세상 모든 사람을 그리워하게 될 지도 몰라. …… 죽어간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싶지는 않은데. "내일까지는 수프 정도만 들고, 계속 괜찮으면 모레부터는 식사를해도 좋을 것 같군. 몸이 워낙 쇠약한 상태에서 정신적으로 충격을받아서 꽤 오래 자리에 누웠었지만, 워낙에 강단 있는 체질이라 금방회복되는 모양인걸." 그래요. 죽은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게 되어 있지요. 내가 정말 그리워해야 할 사람은 미르보가 아니라 그… 옆에 있던사람인가. "제 검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네가 껴안고 있던 그 끔찍한 검이라면, 네 침대 밑에 있는걸." "엣?" 그랬군. 하긴 그런 걸 누가 가져가겠어. "그럼, 난 이만 간다. 몸조리 잘해라, 파비안." 나우케 의사는 일어섰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간다. 문이 닫혔다. 일어나야지. 빨리 일어나야지. 그리고 하비야나크를 보러 가야지. 어떻게 되었는지 모조리 내 눈으로 똑똑히 봐야지. 저 사람이 나의 '아버지'다. 수프라도 먹게 된 날로부터 하루가 지나고, 오늘 저녁에 드디어'빵'을 먹을 수 있었다. 불안정하지만 어느 정도 걸어다닐 수도 있다. 나우케 의사가 한 번 다녀가면서 반은 농담 삼아 기적이라고 말해 주었다. 하긴 의사의 평가만은 아니다. 거의 대책본부가 되어있다시피 한 이 푸른 잎사귀 여관에 드나드는 수많은 엠버리 영지 사람들이 나의 빠른 회복을 놀라워했다. 아마도 앞서 5일 동안 거의 혼수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하루만에 회복된 것을 놀라워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극복해야 할 것을 극복하자, 몸의 상태 따위는 이미 문제도아니었다는 것을. 저기 내 '아버지'가 앉아 있다. "파비안. 많이 나아졌구나." 그렇다. 저렇게 말하는 존재, 아마도 나의 피붙이. "자주 오셨었다죠." "……." 내 말에 아버지는 침묵했다. 어머니와 이야기할 때와는 아무래도다른 것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 익숙해져야겠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요." "…… 그러리라 생각한다." "물어보아도 되겠죠?" "물어보아라." 나는 숨을 약간 들이마셨다. 창 밖은 이미 캄캄해졌다. 일하는 여자가 켜 놓은 촛불이 들창을 흔드는 바람 때문에 탁자 위에서 가만히깜박거린다. 낮에는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던 이 여관의 홀은 이제 조용했다. 한쪽 테이블에 마주 앉은 나의 '아버지'와 나, 두 사람을 제하고는 오직 저쪽 바에 앉아 있는 여관 주인이 있을 뿐이다. 홀은 초 몇 개만 켜 놓아 어두웠다. 나는 처음에 만났을 때처럼 윤곽이 뚜렷한 그의 얼굴이 가느다란 빛선들로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마치 반은 꿈을 꾸는 것 같지만, 나는 오늘 일부러 이 사람에게 저녁 이후에 여기 있어달라고 말했고, 그리고 여기에서 마주보고있다. 이 모든 것은 현실이다. …… 이제 어머니가 없는 그 현실처럼. "왜 떠나 계셨죠?" 나는 묻는다. 첫 번째 질문을 입밖에 낸다. "내가 떠난 것이 아니야. 네 어머니가 나를 떠났지." "어머니는 왜 떠나신 거죠?" "…… 그녀는… 이진즈는…… ." 어머니의 이름. 알고는 있지만, 평생 몇 번도 내 귀로는 들어보지 못하던 이름이지금 저 입으로 말해졌다. 내 어머니의 이름은 분명한데, 저렇게 확실한 발음으로 들으니 왠지 낯설었다.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항상'잡화점 부인' 이 아니면 '파비안 어머니', 그것도 아니면 이제는 잘못된 명칭이란 게 밝혀졌지만 '크리스차넨 부인' 이었으니까. 그녀에게도 고르만 씨와 같은 남편이 옆에 있었더라면 늘 '이진즈!' 하고 불러주었을까? "…… 아이를 가진 것을, 그러니까 너를 가진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거지. 우리는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다." 류지아가 한 말이 저 이야기구나. 분명히 기억이 난다. 류지아가 쳐주겠다는 점, 그거 꼭 들어보아야겠어. "사랑했지만, 결혼할 수 없는 사이. 이진즈는 내가 아니었다면 곧무녀가 될 몸이었다." 무녀! 어머니가? 생각해보지도 못한 사실이었다. 왜? "왜요? 무녀라니요?" "'흰옷의 듀나리온'이라고 불리는 생명의 무녀다." 아, 들어본 기억이 있는 말이야. "이진즈의 친정인 크리스차넨 가문은 상인의 도시 리에주에서 대대로 이스나미르와 세르무즈 사이의 중개 무역을 해 오던 상인 집안이다. 이진즈가 다섯 살 때에 님-나르시냐크로 옮겨오면서 가세가 좀기울었지만 그런 대로 착실한 명성을 쌓은 집안이었지. 그렇게 옮겨오게 된 것 자체가 이진즈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때마침 리에주를 방문한 듀나리온의 일단으로부터 무녀가 되리라는 수기(授記)를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수기, 영 엉터리였네요, 결과적으론. 무녀는커녕 영지에서 제일가는 잡화점 주인이 됐잖아. "듀나리온에 대한 신심이 대단하던 네 외가에서는 이진즈가 하나뿐인 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데리고 듀나리온의 본당이 있는 님-나르시냐크까지 와서 어릴 때부터 그녀를 무녀들 사이에서 자라도록했다. 그래서 이진즈는 무녀들 사이에서 이것저것 배우면서 자랐으며, 자신이 듀나리온 무녀가 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해왔었지." 머리가 복잡하다. 외가에 대한 이야기는 어머니한테서 한 번도 자세하게 들은 일이 없었다. 리에주에서 옮겨갔다는 도시가 우리 나라수도의 핵심 방위도시인 님-나르시냐크라는 것도 전혀 몰랐다. 그리고 무녀인 어머니도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꿈속에서 본천사의 모습이라면 혹 모를까. 흰옷의 듀나리온, 이라면 들어본 일은 있다…… 그렇지, 어느 날인가 어머니에게서 들었어. 별로 개의치 않으시는 듯한 말투로, 어느날인가 그런 이야기를 하셨지. 왜 했더라. 잘 모르겠어. 게다가 무엇하는 사람들인지에 대해선 전혀 못 들은걸. 그럼… 어머니가 무녀가 되지 못한 이유는? 나는 내 앞의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입술이 움직인다. '그래'라고 말하는 입술. "그래. 너를 가진 것을 알고서, 그녀는 도망쳤다. 실질적으로 무녀로 거듭나게 되는 축복의 행사를 겨우 이틀 앞둔 채." 나…… 때문이구나. "그 뒤로 어떻게 이진즈가 너를 낳고,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는전혀 모르겠구나." "왜 찾을 생각은 안 하셨죠?" 내 목소리가 왠지 날카로워지는 것 같다. "안 하다니. 얼마나 찾고 싶었는지, 그리고 찾아 헤맸는지 너는 모를 거다. 그녀를, 그리고 너를." 나라고? 그래서 무려 18년이나 지나, 이제서야 찾으셨나요? "나는 지금까지도 결혼하지 않았다. 네 어머니만이 유일한 나의 아내, 너만이 하나뿐인 내 아들이다. 네가 이 긴 세월을 기다리고,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결국 이진즈의 시체를 보아야 하는 내 심정을 알까? 나는 모르겠다." 그만, 그만 하라구요! 흔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목에서뭔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 때문에 가슴을 쥐어뜯었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 가장 하기 싫은 생각. 왜 어머니는 그런 표정으로, 그렇게 회한에 찬 표정으로 차가운 바닥에 누워 계셔야 했죠? 그 가슴에, 마치 주먹 두 개는 드나들 정도로, 커다랗게 뚫려진 구멍, 그것은, 어린 나를 껴안아주시던 그 가슴. 그 곳에 차갑게 엉겨붙은 피. "으윽……"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고 계셨다. 마치 당신이 내 어머니를 빼앗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지만 그런 건 아니야. 뜨거운 것이 몇 줄기, 내 뺨 위로 휘갈겨 그어졌다. 계속, 계속해서. 한 번도 제대로 흘려 보지 못한 눈물이 이제서야 쏟아진다. 한 방울, 두 방울이 아니라 몸 안 모든 것이 빠져나가는 듯한,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눈물. 내 눈이, 내 몸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내 감정 밑바닥의 모든 것이 철저히 녹아 없어질 정도로, 잊어버리고 싶은 감정 모두가 눈물로 변할 때까지, 어머니를 찾아 언덕길을달려 올라가던 때도, 가게 바닥에 누운 어머니를 본 그 순간도, 그리고 닷새 동안을 누워 있으면서도, 제대로 흘려 보지 못한 눈물. 나는 울었다. +=+=+=+=+=+=+=+=+=+=+=+=+=+=+=+=+=+=+=+=+=+=+=+=+=+=+=+=+=+=+=저는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됐어요. 그래서 접속해서 들어올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아침에 출근하기 전,그리고 밤에 글 올리러 들어올 때 뿐이죠. 가끔 낮에 제 아이디가 통신에 있으면....그건 90%이상이 제 동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은 언니일때도 있지만.... 이 경우는 드물죠. ^^그러니까... 제가 질문에 일찍일찍 대답 안한다거나, 쪽지에 빨리 답변을 못한다고 해서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T_T(참고로, 제 동생은 타이핑 속도가 몹시 느립니다...; 대답 안하고잠자코 있는 건 열심히 '동생인데요' 라는 말을 타이핑하고 있는 중인 거죠.)동생한테 꼭 msg off를 하라고 부탁하는데, 자주 잊어버리더군요;;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328번제 목:◁세월의돌▷ 1-2. 사계절의 목걸이 (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0 20:45 읽음:227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2. 사계절의 목걸이 (7) 바람이 차가웠다. 지금껏 열 여덟 해 동안이나 하얀 산맥 아래에 살았었지만 오늘처럼 바람이 차갑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칠일 밤낮이 흘러버린 지금 나는 지금 다시 그 때의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고 있다. 언덕길의오르고 내리는 완만한 경사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배달을 한답시고하루에 한 번은 꼭 오르내리던 그 길.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사람들,그리고 스노우보드를 탄 나한테 인사를 보내거나 또는 욕을 퍼붓던사람들이 몇 명이라도 항상 있었던 그 길. 그러나 낮인데도 지금은마치 한밤중처럼 조용한 길. 내 옆에 나와 너무나도 비슷한 얼굴의 키 큰 남자가 걷고 있다. 사람들은 처음 보고 말들이 많았다. 파비안이 아버지가 없는 줄 알았더니만 저렇게 훌륭한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는 둥, 너무 닮아서 말안해도 누구 아들이고 아버진지 다 알겠다는 둥, 그리고…… 심지어어머니하고 사는 것보다 낫게 됐다는 말까지도. 도대체 그들은 무슨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나는 어머니와 겉모습으로는 거의 전혀 닮지 않았었다. 그때 그렇게 바쁘고 활발하게 움직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바람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린다. 너무 조용한 것이 마치 꿈 속같다. "파비안." 이제 여기서 내 이름을 부를 사람은 내 옆을 걷고 있는 한 사람밖에는 없지. "네." "내가…… 네 곁에 없는 것이 좋겠니?" 나는 고개를 들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매서운 눈매와 코의 생김새, 날카로운 조각칼로 다듬은 것 같은 그런 얼굴. 이런 마을에 있기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고귀한 인상, 그리고 훌륭한 복장. 내가 저렇게 생겼나. 그렇지만 저 검푸른 머리카락, 눈동자만은…부인할 수 없는 나의 근원. "아… 니요." "…… 너는 너무 말이 없구나." 아, 저런 이야기를 내 평생 처음 들어보는구나.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아버지'. 아들이 손 한 번도 잡아주지 않는 '아버지'. 18년 동안을 그리던 아내를 잃은 남자의 기분은 어떤 걸까. 참으로짐작하기 어려운 문제다. 18년 동안을 사랑하던 어머니를 잃은 사람의 기분과 비슷한 걸까. 그리고 그 아들이 아직 한 번도 정식으로 '아버지'를 부른 일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이 사람을 더 아프게 할 자격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 둘 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프고 슬픈데. 마을은 그야말로 폐허였다. 부서지지 않은 집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집들은 여기 저기 무너지고 부서져, 그대로 사람이 들어가 살 만한 집은 별로 없었다. 저기는나스레트 씨의 목수집, 저기는 군고구마를 팔던 안다 아주머니의 집,또 저 건너는 가죽으로 구두 만드는 솜씨는 엠버리 영지 전체에서 따라갈 사람 없다던 뢰야네 할아버지의 구둣가게. 모두 슬플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이제 언덕 하나만 오르면 우리 가게다. 시체들은 엠버와 그릴라드에서 사람들이 와서 대부분 이미 치웠고,오늘 저녁때 한꺼번에 장례식을 치르기로 되어 있다. 물론, 우리 어머니의 시체도 이미 엠버에 가 있다. 이렇게 장례가 늦어진 것은 영주님 가족이 도망쳐버린 곳에서 돌아오지 않고 늦장을 부렸기 때문이다. 아니,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해야겠군. 그들은 지금도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까. 기다리다 못해 추운 날씨에도 시체들이 부패할까봐서 각 마을 촌장들이 모여서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각 마을 촌장이래야…엠버와 그릴라드뿐이군. 하비야나크는 이제 아예 없는 마을이 되어버렸으니까. 스덴보름도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십여 명도 안 된다고 들었다. 장례 집전을 합동으로 해도 좋은 이유는…… 남은 연고자가 하나도없는 가족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저 세월 속으로 묻혀버렸군. 아니, 그냥 잊혀져 버리게 되겠지. 본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나는 멈추어 섰다. 어젯밤 내내 생각한 사실이 있었다. "저……." 나는 머뭇거렸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입밖에내어본 일이 없는 말이니까. 우리는 멈추어 섰다. 간판이 떨어지고 지붕이 날아간 '큰사슴 잡화'가 올려다 보인다. 신나게 뛰어올라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는 나를 보고 있다. "불러도…… 될까요?" 나는 일부러 정확한 단어를 말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내가 말하지않아도 그는 알아들었다. 그의 얼굴이 개었다. 처음으로. "물론이다." 그래요. 내가 아프다고 해서 당신을 아프게 할 자격이 생기는 것은아니지요. 누가 더 고통스러운가를 따지는 것은 아마 바보 같은 일일거예요. 아마도 애를 썼겠지요,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우리 모자를 찾기 위해 조금은 애를 썼겠지요. 당신이 결혼하지 않은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지도 모르지요. 결혼하려다가 어떤 문제가 생겨서 못한 것일 수도 있겠죠. 그래도 어쨌든 이제 당신의 핏줄은 나 하나이니까. 아마도 다른 일이 바빴겠지요, 18년이나 전에 헤어진 우리 모자를찾아 전 대륙을 돌아다니기에는. 아니면 당신의 친척이나 그런 사람들이 말렸겠지요. 이제 와서 그들을 찾아 무엇하겠느냐며. 당신이 이렇게 늦게 찾아와서, 우리 어머니는 남편이 '이진즈!' 하고 부르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그녀 대신 내가 당신이그녀를 '이진즈' 라고 지칭하는 것을 들었죠. 그걸로는 보상되기에는이다지도 긴 세월이 너무 모자라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나요. 어머니, 당신도 처음에는 부인하고 싶었던 그 아이를 낳아서 열 여덟 해를 이렇게 정성스레 기르시지 않았나요. 그러니 내가 이 사람을 18년 동안 부르지 못한 이름으로 부른다고해서 어머니, 당신이 너무 싫어하시진 않겠죠? "아버지……." +=+=+=+=+=+=+=+=+=+=+=+=+=+=+=+=+=+=+=+=+=+=+=+=+=+=+=+=+=+=+=우울한 분위기는 여기에서 end-입니다. ^^자- 다시 좍좍 나가보죠...^^;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329번제 목:◁세월의돌▷ 1-2. 사계절의 목걸이 (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0 20:45 읽음:227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2. 사계절의 목걸이 (8) "하앗-!" 소리를 질러야만 하다니, 이것도 참 골치 아프네. 소리를 안 지르면 정신집중이 안 된다나? 내참, 나같이 이런 상황에서 정신이 딴데왔다갔다할 만큼 여유 있는 사람 있음 한 번 나와 보라 그래. 왼쪽 발을 옆으로 한 번 디뎠다가 그대로 왼쪽으로 몸을 돌린다. 이때 오른발을 반원을 그리며 왼쪽으로 딛는다. 동시에 양손으로 쥔검을 오른쪽에서부터 가로로 휘두른다. 이봐, 이건 지금 베는 거야! 검날은 수평으로! 손끝에 힘을 빼선 안 돼! "으으라아아……." 윽, 이상한 외침이 나와버렸다. 그거야 몸이 검의 무게에 딸려서휘청, 따라가는 것에 신경을 쓰다 보니 기합의 모양새(?)에 신경을쓸 틈이 없었던 거다. 아이쿠! 허리가 왼쪽으로 왕창 꺾여지는 것 같다. 거의 반쯤 뒤로 빙그르르돌면서 간신히 멈추긴 했는데 옆구리에서 뼈가 부딪쳐 나는 소리가들린다. 으득. "으으으으……." 아이구, 허리야. 이렇게 무거운 검을 가로로 휘두르면서 몸을 휘청거리지 않게 컨트롤하자니 정말 장난이 아니네. 이렇게 계속하면 허리가 왼쪽으로 먼저 부러지나 오른쪽으로 먼저 나가나 내기라도 걸 판이야. 이런 건 일단 좀 가벼운 검으로 먼저 연습하면 안 되는 건가? 안그러냐, 이 무식 거대한 녀석아. 음음, 아버지 아직 안 오셨지, 지금? "에라……." 잠시 풀밭에 길게 누워버렸다. 겨울의 풀밭은 별로 푹신하지가 않아서 누워 있어도 뼈마디가 쑤신다. 게다가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오기도 하고. 같은 동작을 매일같이 수백 번도 넘게 하자니 정말 허리고 어깨고할 것 없이 온 몸이 욱신욱신 아파 온다. 처음에 손바닥 벗겨졌던 것은 그래도 좀 나아가는 중이다. 처음 며칠간 아래로 내려치는 연습을하는 것만 갖고도 손바닥은 이미 맛이 갈대로 가버렸다. 그저 검을움직일 때마다 힐트와 손바닥이 마찰되는 것뿐인데도 이 모양이다. 아니야, 단순하게 말해서 그것뿐인 거지, 실제론 이런 무거운 검을들고 하루만 연습해도 이 꼴이 되는 건 당연지사일 거야. 하긴 이래봬도 강철 스노우보드를 들고 매일 뛰던 몸인데도, 내 손바닥은 아버지의 손바닥에 대면 정말 이팔청춘 아가씨 손이다. 아니지, 이제 이 손을 비교할 데는 문둥병 환자 같은 것밖엔 없겠는걸. 그래도 지저분하게 부르튼 자국들이 이제는 좀 가라앉아 간다. 가게는 거의 그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다시피 하고 있다. 지금 지내고 있는 그릴라드의 잡화점 주인 신데볼프 씨 - 어머니와는 오랫동안잘 알고 지낸 집이었다 - 집으로 옮겨 올 때 가게로 돌아가서 필요한 것은 몇 가지 챙겨서 나오긴 했지만, 아직은 도저히 들어가서 뒷수습 어쩌고 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 그 사건 이후로 하비야나크는 거의 유령들이 나오는 마을이라도 되는 양 드나드는 사람이라고는 없다. 누구나 말은 안해도 마찬가지 기분이었는지, 시체들을 수습해 옮긴 뒤에 하비야나크로 가는 길목은정말 발길이 뚝 끊겼다. 이러다가 우리 마을은 그냥 그대로 하얀 산맥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문득 옆에 놓인 내 팔뚝을 만져 보았다. 내 착각인지 몰라도, 전보다 훨씬 단단하고 두꺼워진 것 같다. 내가 아는 다른 소년들 몇처럼 검사가 되는 것이 본래 내 꿈이었을것 같으면 어쩌면 지금 이 고생을 할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잡화점 주인이 되겠다고 생각했었고, 그리고 지금 운명이바뀐 나는 이 꼴이다. 아니, 내가 정말 운명이 바뀐 것은 맞나? 나는 지금 검사가 되겠다고 이런 연습을 하는 중인 건가? 잠시 드러누운 김에 생각에 잠겼다. 잠깐사이에 나는 참, 우스운 신세가 되어 있었다. 18년간 살아오면서 배운 것이라고는 물건 팔고, 손님 상대하고, 물건 값 흥정하고 하는 것들밖에 없는 나다. 그 밖에 자잘한 기술들도있지만 그런 거야 부수적인 거고. 그런데 생활의 터전이던 잡화점은 깨끗하게,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내 인생에서 꿈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저 화재나 그런 걸로 가게가 망한 거라면 나도 좋겠다. 그러면 타버린 건물이야 새로지으면 되고, 물건도 다시 사들여 갖다 놓으면 된다고 고집부리며 목청껏 주장할 수도 있고, 실제로 시간은 오래 걸리더라도 정말로 다시모든 것을 복구할 수도 있겠지. 내게 용기를 줄 만한 사람들도 있을테고, 도움 줄 사람들도 있을 거야. 그러나 내가 잃어버린 것은 생활의 기반이 되던 터전, 그 자체였다. 사라져 버린 하비야나크. 나의 이웃들. 그리고 어머니. 내 힘으로 마을 하나를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나? 나와 알고 지내던많은 사람들, 지금까지 내 삶에서 자주 등장하던 인간 관계의 전부라고 할 만한 그들을 다시 살려낼 수 있나? 항상 내 곁에 계시던 어머니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시게 할 수 있나?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무기력했다. 오른손을 뻗쳐 내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려봤다. 이게 내 생활에 끼어든 것은 진짜 얼마 되지 않았다. 미르보를여관에서 처음 보던 날부터라고 해도 기껏 반달도 안 되는, 18년 인생에 비하면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라고 할 만한 기간밖에 안 된다. 그런데 이게 지금 내 삶을 지탱하는 도구가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아침부터 밤까지, 검 연습 말고는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아아……." 아무도,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기분이란.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검 연습은 왜 하지? 새로 태어난 아기가 된 것 같아. 18년간 동굴에서 은둔하다가 막내려온 은자라도 된 것 같군 그래. 하긴 실제로도 별 다를 것도 없지뭐야. 18년 동안 잡화점 경영에 대해서 명상하다가 내려온 은자라면말이다.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난다. 나는 꽤나 벌써부터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다. 아버지는 언젠가 떠나신다. 당신이 속한 땅으로.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아버지의 훌륭한 몸차림 - 감옥 안에서 처음보았던 검푸른 망토 안에 칼과 마법사의 스탭(staff)이 교차된 희한한 무늬의 문장이 새겨진 은빛 풀 플레이트(Full Plate) 갑주 - 로보아 뭔가 내 예상보다 훌륭한 신분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결국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밝혀지자 알 만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굽실대는 꼴은 정말 가관도 아니었다. 영주 집안이 모조리 자리를 비운 터라 엠버와 그릴라드의 촌장들이 아버지한테 와서 영지의 임시대표가 되어주십사 부탁하는 일까지 생길 정도였던 것이다. 물론 한마디로 아버지는 거절하셨다. "여기까지 와서 18년간이나 헤어져 있던 아들과 보내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 남쪽 지방, 수도가 속해 있는 블루 카운티(Blue County)에서도가장 유명한 님-나르시냐크 구원 기사단(Nime-Narcignac SalvationKnights) 단장, 그것이 우리 아버지다. 아아, 매번 말해볼 때마다 정말 실감이 안 나는군. 처음에 들었을때는 그저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말할 때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기까지 하는걸. 어쨌든 지금은 이렇듯 비교적 별 일 아닌 듯 이야기하고 있지만,이 이야기를 처음 아버지한테 들었을 때는 나 역시 도저히 믿을 수없다고 생각하면서 의심스레 쳐다본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그런 대단한 힘을 가지고 계시면서 어떻게 어머니와 나를 못 찾았죠?" 아버지는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항상 미안하다는 듯한표정을 지으신다. 매번 똑같아서 조금 찔릴 정도다. "내가 그 모든 자리를 물려받은 것은 겨우 5년 전이다. 그 전에도은밀히 손을 써서 알아보려고는 했었지만, 여의치 않았지. 5년간은그 엄청난 조직을 물려받아 제대로 장악하기에 바빴고……."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처음 탄로났을 때(물론 어머니가 도망쳤기 때문에 들통난 것이다. 아버지는 상당히 '용기 있게' 이진즈와자신과의 관계를 듀나리온 대신전에 나가 밝혔다고 한다. 지금의 아버지 얼굴을 보면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는 일인데, 그때는 아버지도갓 이십대가 된 때였다고 하니까. 흐음) 님-나르시냐크 영지 안에서엄청나게 강력한 비난에 부딪쳤다고 한다. 왕의 명령도 거부할 수 있다는 강력한 치외법권으로 유명한 구원 기사단에 속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추방까지 거론되었을 정도로. 어머니는 결혼할 수 없게 결정된 무녀, 그것도 시시한 그런 신분이아니라 남쪽 블루 카운티나 퍼플 카운티(Purple County)에서는 가장큰 종교 집단이며 고귀한 대접을 받는 생명의 무녀 '흰옷의 듀나리온'이 아닌가. 그런 여자를 아이를 갖게 하고, 도망치게 했으니 분명여파는 상당했겠지. 나도 알고는 있지만 지역 사회의 눈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모든 방해와 시기를 이기고 기사단장이 되기까지는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았을까. "… 그래서 어느 정도 세력이 안정된 지금, 이렇게 직접 찾아 나서게 된 것이지." 내가 이렇게 아버지가 했던 말을 되새겨보고 있는 중인데 문득 머리맡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음, 아마도 지금 벌떡 일어나기에는 이미늦었겠지. 바로 가까이 에서 들리는 것 보니 말이야. …… 그래도 계속 누워 있는 것보단 낫겠군. "아버지, 오셨어요?" 황급히 몸을 일으키는 내 눈에 예의 갑주 차림인 아버지가 걸어오시는 것이 보였다. 아직까지도 가끔은 내 눈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훌륭하게 정돈된 모습의 아버지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그 손에 평상시에 없던 것이 하나 들려 있었다. 대낮부터 술병이라니, 어찌 된 일이람. "파비안, 좀 걸을까?" 다행이군. 내가 연습 작파하고 누워 있는 것에 대해서 아무 말씀이없으시군. 모르긴 해도 아마 내가 구원 기사단의 아버지 부하이거나 했으면벌써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연습하다가 땅바닥에벌렁 드러누워 있다니, 당장 짐 싸 갖고 집으로 갓! …… 쓸데없는 상상으로 괜히 위축되어버린 나는 이유 없이 어깨를한 번 움츠리고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뒤따르다 보니 엠버와의 경계 쪽에 위치한 주점 '그릴라드의 녹색깃발'이 나왔다. 아버지가 앞서서 들어가시기에 따라 들어갔다. "앉자." 주점의 주인은 스륌스 씨로 주점 운영이 좀 서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주점을 물려받은 것이 몇 달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스륌스씨가 한참 만에야 손을 앞치마에 슥슥 문질러 닦으며 테이블로 달려왔다. "뭐 주문하시겠습니까?" 아버지는 내 쪽을 보고 약간 웃어 보이셨다. 그러더니 말했다. "잔 두 개만 갖다주시고, 여기서 가장 맛있는 파이가 어떤 겁니까?" "잔이요…… 아, 그리고 파이는 전부 맛이 있지만…… 커스터드 크림 파이를 드셔보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커스터드 크림 파이와 아버지가 가져오신 술 한 병을 앞에 놓고서 마주앉게 되었다. 아버지가 직접 병의 마개를 뜯었다. 코르크가 뽑혀 나오자 낯설면서도 강한 향이 흘러나온다. 약간 쏘는 듯도 한 독특한 향내가 풍겼다. "저 남쪽 하르마탄 섬에 가면 나르시냐크 집안이 100여년도 더 전부터 대대로 살아오던 영지와 성이 있다. 우리 나라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예모랑드 영지라고 하고, 성 이름은 피아 예모랑드라고 부른다. 너도 알겠지만 피아 예모랑드는 제11아룬드 '점성술'을 지배하는 별의 이름이지. 지금은 내 친구가 내 대신 관리하고 있고 1년에 한 번정도 들러서 살펴보곤 하지." 포도주가 잔에 따라졌다. 무르익은 포도의 빛깔이다. "이건 그 곳에서 나는 유명한 포도주이지. 예모랑드 포도주라고,마브릴 족 사이에서까지 이름이 있는 술이다." 아버지가 잔을 들고, 내가 뒤따라 들었다. 진하고도 향기로운, 그리고 상당히 독한 술 같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예모랑드 영지에 들러 특별히 좋은 것으로 한 병 구해다가 가지고 다녔지. 이건 올해로 봉인한 지 87년이 지난, 값으로 말하자면 가치를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희귀한 술이라고 할 수 있구나." "……." 내가 지금 삼키려는 것이 전부 금화라고 생각하니까, 목에 걸려서잘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 네 어머니와 너를 만나게 되면 셋이서 마시려고 준비했던 술이다." "……." 이번의 침묵은 금화가 목에 걸려서가 아니다. 그보다 더 큼직한 뭔가가 걸려서 숨이 막힐 것 같다. "파비안." 계속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나를 아버지가 부르셨다. 대답을 해야지. 목에 막힌 것을 넘기기 위해서 그 비싸다는 술을단숨에 비워 버렸다. 포도주는 이렇게 마시는 게 아니라고 들은 것같지만 할 수 없었다. "…… 예." 주점의 열어놓은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마루에 하얗다. 나무 테이블 위에 아버지의 손이 얹혀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전투속에서 단단하게 단련된, 그 손으로 테이블도 단숨에 부술 수 있을것 같은 전사의 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평온하게 테이블 위에놓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야 할 손이다. "나를, 진심으로 아버지라고 생각해주길 바란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다만 당신의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되고싶진 않아요. 그러나 나는 또 당신을 필요로 하죠. 외로우니까, 지독하게 외로우니까. 세상과 이어져 있는 유일한 끈이니까. 모순이야. "네…… 어머니와 함께 네가 가 버리지 않고 이렇게, 무사히 있어줘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슬픈 사건 속에서도 나는 그런 생각을했었다. 너만이라도 마치 기적처럼, 따로 살려놓은 신에게 감사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늦었으면서 이제 와서 다시 예전의 잘못을본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기대했던 내가 지나친 욕심을 부렸던 것은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지의 잔이 비어서 나는 술을 다시 따랐다. 커스터드 파이도 한조각 잘라서 먹었다. 일상적인 행동들을 하면서 나는 내 입장에 대해생각하고 그것을 받아들여 보려 애썼다. 그리고 올바른 판단을 해보려 애썼다. "오늘은 너에게 할 말이 있고, 그리고 보여 줄 것이 있구나." +=+=+=+=+=+=+=+=+=+=+=+=+=+=+=+=+=+=+=+=+=+=+=+=+=+=+=+=+=+=+=전에도 말씀드렸듯, 어제도 그날 글을 올린 뒤에야 새로운 분의 추천을 보았습니다. ^^; 역시 고맙습니다. 빠져들게...라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예전에는 메모나 메일을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일 줄은상상도 못했습니다. 가끔 보내주시는 메모나 메일들을 저는 모조리mybox로 보내 놓고,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곤 해요. 한 줄 짜리 메모라도 모조리... 그리고 또, 접속할 때마다 혹시라도... 하는 기대감에 들뜨게 된답니다. ^^;가끔 user를 해봤을 때, 그 분들의 아이디가 같은 게시판에 있으면괜히 즐거워지곤 합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450번제 목:◁세월의돌▷ 1-2. 사계절의 목걸이 (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1 20:17 읽음:226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2. 사계절의 목걸이 (9) 이야기들이 내 옆을 바뀌어지는 계절들처럼 흐른다. 누구나 계절의 변화를 모르고 있지는 않아. 그것이 인생의 주제가아닐 뿐이지. 언제였는지 모르게 봄이 되고, 가을이 된다. 어느 날얇은 옷을 입고 나가 볼까, 하다가 차가워진 공기를 깨닫는 것이다. "아버지는, 저를 진심으로 아들로 생각하시겠지요. 저도 아버지를진심으로 아버지로 생각해요. 다만……." 모순된 말인 것 같아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끝까지 하기로 마음을정했다. "저는…… 저 자신을 진심으로 아버지의 아들로 생각하지는 않는모양이이에요. 아버지가 필요하지만, 아버지에게 기대고 귀찮게 하고싶진 않아요. 아버지가 떠나셔야 하는 것, 저도 알고 있어요. 그저저를 두고 가신다고 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요. 저는…… 이곳사람이고 지금까지도 잘 해 왔으니까요. 앞으로도… 잘 할 거예요." 마지막 말은 거짓말이다. 그리고 내가 정말 원해서 하는 말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모든 상황이 고통스러울 뿐이다. ……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나는 눈물이 많아진 것 같다. "……."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의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린 것 같다. 그러나 곧 방금 전의 온화한 빛으로 되돌아왔다. 짧은 시간 동안무슨 고민을 하셨을까. 바보스러운 아들을 앞에 놓고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무엇으로 마음이 흔들리셨을까. "그런 말은 말아라." 아버지는 파이를 한 조각 잘라서 입에 넣더니 내 빈 잔에 술을 따르셨다. "처음부터 너를 데려갈 마음으로 온 거야. 여기까지 온 나를 보고너를 이 먼 곳에 홀로 내버려두고, 나 혼자서 영지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이냐, 너는?" "그건…… ."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의 말이 들린다. "파비안, 나는 너를 우리 가문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다." 내가 요구할 수 없다고 생각해오던 어떤 세상으로의 이동. 내가 속해 있다고 생각하던 곳이 산산이 부서진 뒤에, 뒤따라 온 어떤 높은곳으로의 초대. 너무 낯설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약간 우울한 듯한 미소를 지으셨다. "너는 아버지와 사는 것이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 그런 건 아니……." "그럼, 정말 내가 너를 내버려두고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냐?" 아버지는 이제 완연히 웃고 계셨다. 농담을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란 본래 어때야 하는 걸까. 아마도 이렇게 움츠러들어있는 아들이 한심하게 보이시겠지. 충분히, 내 손이 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아버지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고, 웃고는, 잔을 입에 갖다 댔다. "이걸 보아라." 아버지는 품안으로 손을 넣더니 갑주 안으로 넣어서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하나 끄집어냈다. 은빛 사슬을 목에서 벗겨내더니 탁자위에 얹어서 내 쪽으로 밀었다. 탁, 하고 테이블 위에 놓이는 소리만으로도 꽤나 묵직한 물건이라는 느낌이 온다. 손바닥만큼 커다란 검은 원반 모양 장식추가 사슬의 끝에 달려 있었다. 뭔가 나와는 다른 세상에 속한 듯한, 낯선 느낌을 주는 물건이다. 특히 그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새카맣게 어두운 빛깔이. "이게 뭐죠?" 나는 손을 뻗쳐 그것을 손에 집었다. 그리고 들여다보았다. 내가 세공의 수준을 알아볼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온통 검은 줄로만 알았던 그 위에는 한눈에도 감탄이 솟을 정도로 정밀한 조각이 되어 있었다.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멀리서 볼 때에는보이지 않을 만한 조각들이다. 손가락으로 원반 위를 따라갔다. 부드럽게 맺음된 돌기들이 손가락끝에 느껴진다. 둥글게 돌아가며 새겨진 이름 모를 문자들이 있고, 그리고 검은 태양처럼 주위로 뻗어난 열네 개의 짧은 가지들에 정교하게 자리잡은열네 달의 상징들이 있다. 내 손가락은 원반 한가운데의 움푹 패인 자리들에서 멈췄다. "사계절의 목걸이라고 불리는, 우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가운데서도 가장 귀중한 것이다. 잘 살펴보아라."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내 손가락은 십자 모양으로 늘어선 네 개의 패인 자리들을 더듬고 있었다. 십자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그 중한 개의 자리에는 마름모꼴의 초록빛 보석이 하나 박혀 있었다. 햇빛이 무색하도록 찬란한 빛깔을 지닌 녹색의 돌. 윤기 나는 검은 돌 위에 녹색이란 굉장히 유난한 것이다. "사계절…… 그렇다면 이것은 봄이로군요?" 내가 제대로 뜻을 알고서 이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군, 사계절이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의 보석은 어디로 갔을까? 내가 의문 가질 것을 미리 짐작이라도 하셨는지 아버지는 곧장 말을 이었다. "나머지들은 대륙 각지에 흩어져 사라졌다. 그래서 그 목걸이는 본래의 숨겨진 능력을 잃고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 그저 아름다운장식품에 불과한 것이 되었지." 장식품이라 할지라도, 솔직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가치를 지닐 만큼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적어도 내 눈엔 그렇다. 그리고 거기에 박힌 이 녹색 돌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아까 이 술처럼 '값으로 따지자면 가치를 측정하기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목걸이에 무슨 힘이 있다는 거지? "그 '봄'은 내가 이번 여행에서 찾아 넣은 것이다. 저 서쪽, 로존디아와의 국경 근처에 있는 무녀들의 마을에서 그걸 찾았지. 어쩌면우연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서 내가 그것을 찾을 수있도록 도와 주었고, 지금도 그것에 대해서 나는 신기한 마음을 품고있다." 우연이라. 그것 참 애매한 말이다. 나는 목걸이를 매만지면서 아버지가 이 물건에 대해 좀더 설명해주시기를 기다렸다. "이 목걸이는 우리 가문에 약 200년 전부터 내려오고 있는 보물로서, 국왕 폐하께서도 탐내실 만큼 왕국 내에서 유일무이한 물건이지. 이 안에는 너도 들어서 알고 있을 '마법사 에제키엘'이 남긴 마법의문장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그 문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된 것이 없지만 네 개의 돌을 찾아서 채워 넣게 되면 비밀이 모두풀린다는 것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지. 물론 이 말의 진위에 대해선논란이 많았고, 그래서 이것은 지금까지 그대로 일종의 유물로만 전해져 왔다." 뭐…… 라고? 나는 잠깐 고개를 흔들었다가, 침을 삼킨 다음 되물었다. "영원의 구속자, 에제키엘요?" 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설로만 생각했던 사람과 직접 관련된 물건이라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손에 쥔 물건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게 했다. 분명히 깨끗하고,그렇게 먼 시절에서 전해내려온 물건이라고 보기에는 낡은 흔적이 전혀 없다. 그러나, 그 특이한 문양들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고대의 냄새가 난다. 내가 그런 걸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내가 한 개를 찾은 것으로 보아 알 수 있겠지만, 내가 영지를 떠날 수 있었던 명목상의 이유는 네 개의 보석을 찾아 채워넣어 돌아오겠다는 장로들과의 약속이었다. 우리 가문에서는 이 목걸이를 완성하는 자에게는 놀라운 힘이 주어지게 된다는 말이 전해내려오고 있지만, 옛 전설이라는 것들이 늘 그렇듯 사실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 게다가 그 힘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고 말이다. 그러나 나이 든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전설들에 대해서 강한 애착을 가지게 되는 법이라 장로들은 모두 내 생각을 환영했다. 알다시피 우리가문에서는 많은 훌륭한 기사들이 배출되었고, 우리 가문이 예로부터중심이 되다시피 하는 구원 기사단은 대륙 최고 수준의 기사단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설의 목걸이를 완성할 인물에 대한 기대는 아직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버지가 기사단장이면서 또한 가문의 장으로서그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이렇게 먼 곳까지 단신으로 여행할 수는 없었겠지. 왠지 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이 목걸이, 이건 나와 어머니의 존재보다 그들에겐 몇십 배 더 소중한 거겠지.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실제로 몇 명이나 과거에도 이 일을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지만,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 모양 그대로인 것을 보면 알 수있는 일이지. 200년 동안이나 이 목걸이는 이런 상태로 보존되어 전해내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간다. 이 얼마나 막막한 일이냐고. 이 넓은 대륙에서 보석 세 개를 어떻게 찾아내겠어? 그것도 어떻게생겼는지조차 모르고, 아무 정보도 없는데. 내가 이렇게 묻자 아버지는 웃으셨다. "보물이라고 불리는 것에는 다 나름대로 특수한 점들이 있기 마련이지. 이 목걸이에게는 기본적으로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가려는 속성이 있다."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가다니요?" "이 목걸이가 설마 처음부터 이런 모양이었겠느냐? 목걸이 스스로나머지 보석들을 찾아 완성된 모양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지. 이 안에는 에제키엘의 특별한 주문이 걸려져 있어서 이 목걸이를 걸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증거들이 나타난다고 전해진다. 나는첫 번째 보석을 찾으러 가면서 이 애매한 말의 의미를 충분히 알 수있었다. 나 역시 아무런 정보도 없이 길을 떠났는데도, 내 앞에 저절로 길이 열리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에에……." 믿기지가 않는데. 정말 200년 전에나 걸맞을 만한 이야기로 들리는걸. 그러나 아버지는 직접 경험했다지 않아. 정말일까, 과연? 게다가 왠지 목걸이가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나는 좀 섬뜩한 기분이 되었다. 뭐야, 목걸이가 의지를 가지고 원래 모양으로 돌아가려고 하다니. 예전에 잘라도 잘라도 다시 재생된다는 괴물 뱀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난생 처음인걸. +=+=+=+=+=+=+=+=+=+=+=+=+=+=+=+=+=+=+=+=+=+=+=+=+=+=+=+=+=+=+=피곤하군요... 아무래도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네요..^^;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451번제 목:◁세월의돌▷ 1-2. 사계절의 목걸이 (10)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1 20:17 읽음:227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장. 제14월 '노장로(Elder Sage)'2. 사계절의 목걸이 (10) 나는 좀 전부터 아버지가 왜 이 이야기를 하시는가에 대해서 나름대로 추리해 보고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아버지는어찌 되었든 계획대로 이 목걸이의 전설을 완성하실 셈이고, 그리고그걸 위해 나를 데려가고 싶어하시는 거라고. 내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거라고. 아버지와의 여행이라. 그것도 저렇게 강한 아버지와 다닌다면 분명배우는 것도 많을 거고 잃어버린 시간들도 어느 정도는 보상될 수 있겠지. 먼저 영지로 가서 나를 환영하지도 않을 사람들 틈에서 아버지가 오기를 줄창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는 백배 낫겠다. 그런데 아버지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우신지 계속 목걸이의 전설에대한 이야기만 하고 계신다. 난 괜찮은데. 나는 아버지를 도와 줄 생각으로 나는 입을 열었다. "그걸 찾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그렇게 생각하느냐?"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지신다. 거봐, 내 추리가 맞는다고. 일단 돕는 김에 더 도울 생각으로 나는 말을 이었다. "저라면, 이제 여기에서 더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그런 멋진 이야기가 될 만한 흥미로운 일에 뛰어들어 보고 싶을 것 같아요." 이만하면 선량한 아들 아냐? "파비안." 아버지가 갑자기 내 이름을 진지하게 부르셨다. 나는 그 때 목걸이를 다시 아버지의 손에 돌려주려고 하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내 마음도 훨씬 가벼워지는구나. 그래,나는 내 아들을 믿는다. 너에게 이 일을 맡긴다고 해도 나는 하나도불안하지도 않고, 보물에 대해 걱정하지도 않는다. 너는 내 아들, 구원 기사단장의 유일한 아들이니까." "……?" 뭐, 뭔가 이상한 쪽으로 이야기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아버지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시며 이렇게 말하고 계셨다. "잘 해낼 수 있겠지?" "그…… 게……." 이게 아니었는데. 분명 이게 아니었는데. 나는 어떻게 하다가 이야기가 이렇게 되어 버렸는가 생각해보려 했지만,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목걸이를 단단히 쥐어 주는 바람에 그런 생각은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 나는 불안한 표정을 애써 감추면서간신히 미소를 지었지만, 속마음은 몹시 당황해서 대책을 찾으려고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너를 사랑한다, 파비안. 그리고 너를 믿는다. 가문의 보물을 소중히 지킬 능력이 너에게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네가 돌아오기를 행복하게 기다리도록 하마. 아마 그 날은 매우 즐거운 날이 되겠지." 도, 돌이킬 수 없어! 나는 있는 힘껏 머리를 굴려봤지만 머리가 아파지는 것 말고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 예, 제 힘껏 해볼게요." 결국은……아버지는 완연히 밝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그 얼굴에는일점의 의혹도 나타나 있지가 않아서 속으로 의아한 심정까지 들었다. 뭘 믿고 나를 저렇게까지 신뢰할 수가 있는 걸까. 내가 누군가한테 이렇게까지 신뢰를 받아본 일이 있나? "파비안, 이걸 써 보겠느냐." 아버지는 내 손을 잠시 바라보시다가 손에 끼고 있던 건틀렛을 두짝 다 벗으시더니 내 손을 끌어당겨 직접 끼워 주셨다. 아……. "네 손바닥을 보니 안쓰럽구나. 그리고 그런 검을 휘두르면서 건틀렛이 없어서야 어디 손이 남아 나겠느냐." 나는 고개를 숙여 건틀렛을 낀 손을 들여다보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건틀렛, 약간 낡기는 했지만 훌륭한 장인의 작품인 듯 가죽과 사슬의 이음매가 매끄럽고 정교한 고급품이었다. 일개 소년 검사가 만져볼 만한 물건이 아니다. 거기다가 아버지가 길을 잘 들여놓아서 처음 이런 것을 낀 내 손에도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나는 겨우 내가 할 수 있는 한 마디를 찾아냈다. "아…… 버지는요?" "내게는 이게 있잖느냐." 아버지는 은빛 갑주에 어울릴 만한 플레이트 건틀렛을 들어 보이며웃으셨다. 나는 저게 평상시에 끼고 다니기에는 꽤 불편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고? 팔아봤으니까. 물론 내가 팔아본 물건들은 아버지가 갖고 계시는 두 개의 건틀렛에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 잘 쓸게요." "그래라." 아버지는 밝게 웃으셨다. 내가 잘 쓰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나는 아버지의 건틀렛을 벗은 손을 다시 보았다. 맨손인데도 건틀렛을 낀 내 손보다 더 튼튼하고 강력해 보였다. 나는 저 아버지가 하신 것처럼 모든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는 일, 훌륭한 기사, 가문의 수장 그 모든 것들을? 아마도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이번 일을 잘 해내는 것부터겠지. 나는 새삼 건틀렛을 낀 채로 목걸이를 다시 만져 보았다. 처음보다는 한결 내 소유물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뭔가 시작되려 하고 있어. 창으로 바람이 들어오는지 스륌스 씨가 덧문을 닫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지금 어떤 바람이 불고 있다. 무언가가 시작되는 녹색의 바람. 어떤 것을 예감하게 하는 푸른 바람. +=+=+=+=+=+=+=+=+=+=+=+=+=+=+=+=+=+=+=+=+=+=+=+=+=+=+=+=+=+=+=노장로 아룬드의 끝입니다. 아룬드의 의미에 맞는 사건들이 있었던 것 같으세요? (아룬드의 의미는 각 장의 앞에 써놓을 생각입니다. 노장로 아룬드의 의미도 이미 쓰여 있었죠)다음 달은 '음유시인' 아룬드입니다. 1월 정도에 해당되겠지만 우리 나라의 1월처럼 끔찍하게 추운 때는 아닙니다. 오히려 봄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상당히 온화한 겨울 날씨의 아룬드죠. 이번 편으로 1장 2편도 끝입니다. (금방 끝났죠?)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2장으로 넘어갑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452번 제 목:◁세월의돌▷ 2-1.은빛머리의 유리카 (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1 20:19 읽음:229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음유시인의 별 '라 트루바 드루에(La Trouba Drooe, 흔히들 줄여서 '드루에'라고 말하는)'가 지배하는 아룬드이다. 이 시기에 북쪽지방에서는 운 좋으면 극광을 볼 수도 있다. 날씨는 봄을 예감하게할 정도로 부드럽고 온화하다. 일기도 좋은 편이며 가끔 눈이 내리는것을 제외하고는 여행하기에도 큰 지장이 없다. 이 시기에 음유시인을 만나면 노래를 지어 받기를 청하는 풍습도있으며 이때에 음유시인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서 수호의 힘을 가지는 노래를 만들어 선사한다. 생명의 음유시인, 계관자(桂冠者)라고도불리는 고귀한 트루바드(Troubard) 음유시인들은 이때에 어딘가에 모여 회합을 하는 모양이나 장소나 시간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옛부터 내려오는 노래가 스스로의 존재를 알리다" 는 경구로 요약되며 숙명을 탐색해야 할 이유를 알게 됨, 잠재된 능력의 힘을 느낌,자신의 그림자를 우연히 만나게 됨, 오래 계속될 방랑에 들어섬, 과거를 위한 미래 등의 암시를 가진다. 이 아룬드를 의미하는 빛깔은보랏빛이다. - 점성술사들이 달력에 적는 각 아룬드의 의미,그 중 첫 번째. 1. 은빛 머리카락의 유리카 (1) 자 이제, 그 기사의 이야기를 한 번 해 볼까요? 겨울의 끝은 봄, 니스로엘드가 가고 프랑드의 꽃이 피도록누구나 기다리고 기다리게 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네 계절을 되찾아 닫혀버린 시간을 열어놓고자열 네 별이 은밀히 세상에 내려 준 그 이야기를? 나는 할 수 있어요. 내 노래 속에는 운명의 속삭임이숨어 있죠, 그 누가 내려 주었던가요? 내게 거울을 들여다보듯 세상 사람의 미래를들여다보도록 하는 예언의 힘을. 당신이 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고(古) 이스나미르 왕국, 이스나에의 무녀'레 끌로슈' 엘리종의 예언시 <녹보석의 기사> 1연 아버지가 내 곁에 계시게 되고 검술 연습을 시작한 것도 벌써 한달이 되어간다. 제1 아룬드인 '음유시인(Troubard)'이 꽤나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새해가 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번 달이 거의 끝나 간다. 올 새해맞이나 송년제가 즐거운 마음으로 치러지지 못했음은 말할나위도 없다. 예년 같으면 떠들썩한 파티가 벌어지고, 갖가지 재미있는 구경거리들이 많았을 때인데, 이번에는 그저 죽은 사람들에 대한추모제가 있었을 뿐이다. 사람들도 작년의 반도 되지 않았다. 너무당연하다. 두 마을의 사람들이 말 그대로 '몰살'을 당했으니까. 다시 생각해도 씁쓸한 기억이다. 에라, 쓸데없는 생각이나 할 바엔 빨리 매일 정해놓은 연습량이나채워야지. 녹색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나는 요즈음 예전보다 더욱검 연습에 정진하고 있다. 연습량 역시 내가 직접 정했다. 좀 무리하게 정했는지 처음에는 매일 허리가 꺾어질 지경이었는데 그 효과를최근에는 좀 보는 중이다. 해야 할 일이 생긴 이후로, 나는 내가 강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 한결 자각하기 시작하고 있다. 꽤나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뺨에 느끼면서 나는 검을 똑바로 세워 잡았다. "캬아앗-!" 으… 이건 내가 생각해도 무슨 드래곤의 울음소리 같군. 아버지는 오늘 떠나신다. 처음부터 여기에 계속 계시리라는 예상은하지 않았었지만…… 장례식도 끝나고, 한 해가 거의 끝나가던, 그러니까 제14 아룬드 '노장로(Elder Sage)'가 거의 마지막 마무리를 짓던 때 아버지는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내셨지.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었고. 아버지가 내게 목걸이를 맡기고 그 일에 대해 부탁을 하신 이후로, 이제 나는 상당히 아버지와 헤어지는 것을 편안하게받아들일 수 있게 변해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놀라운 변화다. 장례식이라고 하니까 이상했던 사실이 하나 떠오르는군. 제대로 알아볼 수조차 없는 수십 구의 시체를 묘석에 새길 이름도 없이 묻던때에 누군가가 지적했던 점, 연고자가 있거나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는 시체들을 제하고 모아 놓았던 그 시체들에서 이상했던 점. 너무 숫자가 적었다. 나머지 시체들은 다 타버렸거나, 혹은 너무 엉망으로 뭉그러지고조각조각 흩어져서 거두어지지 못했기 때문일 거라고 일단 생각되었지만, 혹시 괴물들이 시체를 먹어치운 것 아니냐거나, 심지어는 사람을 산 채로 잡아먹었을 것이라는 식의 갖은 불길한 소리가 한동안 영지 일대에 돌아다녔다. 다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분나쁜 상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런 소리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가슴…… 에 난 상처, 거기에 얼어붙어 있던 피를 떠올려볼 때, 괴물들이 뭔가 이상한 능력을 지녔음에는 분명한 모양이다. 아무리 추운 날씨라고 해도 피가 당장에 얼어붙어 버린다는 것은 보통의 경우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다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목걸이를 완성해서 님-나르시냐크로 돌아가 구원 기사단에 들어가고, 집안의 상속인이 되는 것.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인생의 계획이란 그렇다. 그게 내가 세운 계획은 아니지만. 물론, 내 생각으로도 내가 그 곳에서 별로 환영을 받을 것 같지는않다.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보물을 내가 맡아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 그들은 무슨 표정을 지을까. 블루 카운티는 이 북쪽의 그레이 카운티처럼 마을 몇 개가 모여서영지가 되는 그런 곳과는 다르다. 우리 나라 안에서도 중심지라고 할만한 지역이 있다면 주변 촌구석 지방이 존재한다. 그리고 블루 카운티 같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여기 같은 시골 마을 사람들과는 생각하고 말하는 것 전부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가 난다. 가끔이지만 그런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뭔지 모를 괴리감을 느끼곤 했었다. 그들이귀족이 아니었더라도. 그런 곳에서, 그것도 일종의 '사생아'라는 곱지 않은 눈길이 쏟아질 것을 생각하니 솔직히 아주 내키는 마음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어쩌면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아시고 일부러 나에게 가문의 숙원을 완수하는 임무를 맡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아직 열 여덟이고, 국왕 폐하마저도 탐낸다는 보물을 갖고 다니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할 정도로 별 실력도 없다. 그런데도 이런 것을 내게 맡긴 것은 한 가문의 수장으로서 참 대단한 모험이기까지 하다. 처음엔 얼떨결에 일을 떠맡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다시 생각할수록 그게 아니라 내가 오히려 아버지에게 부담을 안겨 드린 것이라는것을 나는 깨달았다. 내가 해낼 수 있을지 아닐지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가문의 수많은기사들을 버려두고 굳이 나에게 맡기셨다. 그러다가 목걸이를 내가잃어버리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어머니 사건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징계가 내려지겠지. 지위 높은 자들의 잔인함을 생각해보면 기사 단장직을 그만두고 가문에서 추방까지 당할지도 모른다. 정말 엄청난 도박이다, 이 일은. 내가 이 일에 성공한다면 가문의 인정을 받게 되리라는 그 하나의사실만 갖고서 실행하기에는 너무 엄청날 정도로. 아, 이 생각을 할 때마다 내 단순한 머리는 복잡하고도 무거워라. "오늘도 여기 있었구나." 아버지께서 언덕을 올라오고 계셨다. 예의 망토와 갑주 차림. 오늘은 떠나는 날이니 그렇다고 쳐도, 평상시에도 그 무거운 것을 결코벗어놓는 법이 없으셨다. 그런 모습이 나름대로 상당히 멋이 있기도하다. 풀 플레이트를 입고 돌아다니려면 상당한 장사가 아니면 안 된다던데. 하기야 처음에 쇠창살도 뜯어내시던 분이니……(갑자기 드는생각인데, 어머니의 시체를 발견하던 날, 그런 아버지의 팔을 나는어떻게 뿌리쳤었을까?). "꽤 열심이구나." 아버지는 저런 말이 나에게 얼마나 죄책감, 또는 의무감을 상기시키는지 알고나 계신 걸까? 전에도 말했듯, 나는 어려서부터 검 연습 같은 것에 별로 열심을세워 본 일이 없다. 게퍼 쿠멘츠와의 사건이 있던 때처럼 무슨 필요가 생겨야지 그제야 연습하는 척이나 할까, 이런 무기류들과 별로 친분 따위는 없다. 내 손에 들고 있는 녀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연습하려고 들어올리는 순간, 정말이지 도무지 친해지려다가도 정이 떨어지는 놈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얼굴을 보게 될 때면 이런 나의 감정도 달라진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마을을 송두리째 없애버린 괴이쩍은 무리들, 아무도 그 정체를 잘 모르며 오래 살았다는 노인들조차도 처음 들어본다는 좀비도 스펙터도 아닌 괴물들. 몬스터가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그저 자연재해였다는 생각까지 들게 하는 저 재앙의 무리. 조금잊어버릴 만 하다가도 아버지의 얼굴만 보면 모든 감정이 확 솟구친다. 어머니의 얼굴과 저 얼굴이 겹쳐지면서 복잡한 감정이 밀물처럼밀려온다. 검사도, 검사 지망생도 아닌 내가 지금 밤낮으로 검을 휘두르게 된이유. 목걸이에 대한 임무보다도 더한 근본적인 감정. 아마도, 아마도 촌구석 잡화점 점원이 딱 어울릴 나는, 이야기나전설에 나오는 부모를 잃은 소년들(이들은 언제나 나중에 대륙, 좀스케일이 작으면 자기 나라나 최소한 영지라도 구하는 영웅이 되는것이다)처럼 '반드시 복수하고야 말겠어어어-!!!' 하는 결심 같은 것이 불타오르지는 않는다. 이야기로 들을 때에는 그런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들렸지만, 당장 그것이 내 이야기로 돌아오고 보니 기백을 헤아리는 숫자의 몬스터들을 일생 쫓아다니며 쳐죽이겠다, 라는결심이 결코 아무한테나 솟는 것은 아니었다, 는 거다. 그렇다. 이건 슬픈 이야기다. 나는 전설의 주인공도, 영웅의 재목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 그렇다고 몬스터들을 증오하거나 개죽음을 분하게 여기는 마음이부족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몰라서 부연하자면 그런 식의 복수가 나에게 '가능하다'는 생각 자체를 나는할 수가 없다. 역시 이야기와 현실의 차이는 이런 데에 있다는 것을나는 뼈저리게, 아프게 통감하면서 지금 이렇게 소박하게나마 검을휘두르고 있다. 잊지 않으려고. 지금의 고통스런 감정과 복수하겠다는 자신감조차솟지 않는 이 마음의 수치스러움을 보상하려고.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 그리고 그의 고귀함과 훌륭함을 보면, 이런우습지도 않은 나 자신을 마구 혹독하게 고생시키고 싶은 욕구가 솟아나는 것이다. 그런데 의아한 사실이 하나 밝혀진 것이 있다. 이토록 거대한 몬스터의 일단은 우리 마을을 떠난 뒤 어디에서도발견되지가 않고 있다. 한 달이나 지났건만, 어느 영지에서도 그와비슷한 것에라도 습격 당했다는 소식은 없었다. 마치 다음 영지로 가는 도중에 들판에서 그냥 증발해버리기라도 한 것 같다. 도대체 어디로,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러면 이 한낱 꿈처럼 지나가 버린 몬스터들한테서 어머니를 잃은나는 누구를 미워하면서 이 마음을 보상받아야 하지? 사람들이 얼마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이런 사건 자체를 모조리 잊는다면? 그렇다면 이것은 더욱 더 울화가 치받는 일이야! 나는 목적 없이 맹렬하게 검을 휘둘러댔다. 아무래도 웃긴다. 나는 그 몬스터들이 온 대륙에 창궐해서 가는 곳마다 동네 소년들의 어머니들을 사그리 죽이길 기다리기라도 하는 걸까. 몰라, 모르겠어. "파비안, 그만 멈추고 아버지와 한 번 대련을 해 볼까?" "네?" 느닷없는 아버지의 제의에 나는 우물쭈물 하며 검을 내렸다. 풀 플레이트 메일을 걸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다니는 아버지하고 검대련이라. 저 건너 영지인지 어디인지 도망가서(어쩌면 수도까지 달아났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안 오고 있는 영주 아들놈하고 대련하는 것과는차원이 틀릴 것 같은데. "상대도 안 될 것 같은데요?" "그저 해 보자는 것이다. 네가 연습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한 번쯤대련을 해 보고 싶어지는구나." "에에……." 이 언덕 위에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하늘에 둥실 구름이 흘러간다. 엠버리 영지의 경계에 걸려 있어 관문이나 다름없는 이 언덕은 약간의 눈 발자국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인기척은 전혀 없다.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이제 떠나시는데 한 달 동안얼마나 늘었는지 보고 싶으신 거겠지. "좋아요." 아들인데, 죽이기야 할려구. +=+=+=+=+=+=+=+=+=+=+=+=+=+=+=+=+=+=+=+=+=+=+=+=+=+=+=+=+=+=+=.... 정말 아들이니까 안 죽일까요? 추천해 주신 비와함께 님... 그렇게 자세히 봐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462번제 목:◁세월의돌▷ 2장 시작합니다..아니, 했습니다;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1 21:17 읽음:1825 관련자료 없음-----------------------------------------------------------------------------본래.... 2장 시작하기 직전에 2장 시작 안내글을 쓸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회사에서 야근중이에요. T_T그래서 동생한테 부탁해 놨더니, 이게 빠져 버렸네요. 미리 말을 안해 놓은 제 잘못이죠 뭐...^^;어쨌든간, 그래서 이렇게 뒷북을 울립니다...;------------------------------------------------------------------- 드디어 1장(1편, 2편)이 끝나고 2장 1편으로 들어갑니다. 일단, 보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1장이 뒤의 이야기를 위한 준비였다고 할 것 같으면2장은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1장을 연재하는 동안 격려해주시고 추천해주신 모든 분들-정말, 감사합니다! 특히.. 감상글 보내주시는 분들, 매우 열심히 읽고 있답니다. ^^ Luthien, La Noir. ps. 아참, Derod & Deblan 완결하셨더군요. 축하드립니다. ^^오랜 연재 끝에 결말을 내시니 정말 기쁘시겠어요.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574번제 목:◁세월의돌▷ 2-1.은빛머리의 유리카 (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2 21:18 읽음:226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1. 은빛 머리카락의 유리카 (2) 나는 검을 똑바로 쥐었다. 왼손으로 검 손잡이의 끝을 잡고, 손 하나 간격만큼 앞으로 떼어서 오른손을 잡는다. 긴장을 하고 잡으니 손바닥이 다시 화끈거리는 것 같군. 아버지가 든 검은 세이버(Saber)다. 아무래도 내 검과는 질적으로좀 다른 검이라 제대로 대련이 될는지 내심 약간 의심이 생겼다. 게다가, 겉으로 보기에도 대단한 보검처럼 보이지는 않는 그저 평범한세이버였다. 왠지 아버지의 다른 점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아버지라면 적어도 내 검하고 맞먹을 정도는 되는 대단한 검을 지니셔야 할 것 같단 말이야. 아버지는 내 앞에 칼 하나와 한 걸음 정도 되는 거리로 떨어져 서시더니 입을 열어 내 기대와는 전혀 상반되는 말을 하셨다. "일단 시작한 이상, 나를 이겨서 눕히겠다는 각오로 해라." 장난이 아니었구나. "일단, 좌우 어깨를 내려칠 테니, 검을 받는 것을 보자." 음, 방금 연습하던 거다. 그러니까 오른쪽 어깨를 노리고 떨어지는검을 왼쪽으로 돌면서…스슥. 아버지의 검이 거의 어깨를 스칠 듯 다가와서 나는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아슬아슬하게 비껴 지나가는 검. 에…… 연습으로 내려치는 검이 아닌 것 같은걸. 빙글, 사분의 일 바퀴 정도 옆으로 돌았다. 마주보고 계신 아버지의 위치도 똑같은 만큼 반대 각도로 움직였다. "다음!" 다시 순식간에 한 걸음 사이를 좁히신 아버지의 검이 이번에는 왼쪽 어깨로 내리쳐져 온다. 으왓! 빨리 발을 바꿔서 반대쪽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생각만큼 발이 빨리 움직여주지 않았다. 겨우 엉터리로 뛰어서 검을 피하느라고 호흡이 가빠졌다. 에또, 분명히 잔소리가 있으실 것 같은……. "파비안." 아버지는 잠시 나와의 거리를 다시 넓히시더니 그대로 검을 겨냥한채 입을 열었다. "발을 바닥에서 어떻게 떼라고 했지?" "…… 거의 떼지 말라고 하셨죠. 바닥을 끌 듯이 움직여야 한다고."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구나." 에, 제가 또 기억력은 괜찮은데… 그게 꼭 중요한 순간에는 잊어버린다니까. 고개를 끄덕이신 아버지는 다시 본 거리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럼, 이제 제대로 시작해 볼까." 조용한 어조의 마지막 말과는 딴판으로 아버지는 나를 향해 겨냥한칼을 곧바로 찔러 오셨다. 오른발로만 두 걸음, 재빠르게 앞으로 디뎠다. "하앗-!" 내가 아버지의 발 따위에 신경 쓰고 있는 동안 내 어깨 쪽으로 파고드는 검을 나는 펄쩍 뛰어 피했다. 전에 아버지가 직접 가르쳐 주었고 방금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준 자세 따위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내가 감상한 내 피하는 꼴은 완전히 동네 애들 싸우는 수준…… "검을 걷어내라!" 금세 거두어진 검이 이번에는 곧장 내리쳐져 온다. 그걸 보니 방금생각났는데, 검이 오면 피하든지, 걷어내든지 해야 하는 것이다. 안그러면 다치든지, 죽든지 하는 거라고…… 으앗! 난 방금 뻔한 소리를 되풀이하다가 다치거나 죽을 뻔했으나 다행히천운이 도와 위의 사실을 생각해내고 검을 머리 위로 당겨 올렸다. 대각선, 비스듬하게 닿는 순간 세이버의 날이 한 조각 떨어져 나가는소리가 들렸다. 내 검이 세이버의 날을 긁고 지나갔다. 그그그극-나는 정신이 났다. 지금 부딪치는 저 두 자루의 쇳덩어리는 분명 날카롭게 날이 선 칼이야. 게다가 내 것은 날이 빠지지도 않는 괴물이고. 아버지의 것은? 아버지의 검은 멋진 갑옷과는 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세이버지만…… 아냐 아냐, 세이버는 좋은 검이지. 내 검 녀석이 이상한 거고. 죽을 수도, 다칠 수도 있다! 나는 오른발을 뒤로 한 걸음 빼면서 자세를 낮췄다. 무게중심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정확히 아버지의 칼이 내 칼과 서로 부딪쳐 긁히다가 위로 올려진 순간을 노렸다. 오른쪽 옆에서부터 대각선으로 치고 올라가는 검. 손가락에 힘이들어간다. "이엽!" 커다랗게 비스듬한 반원을 그리며 올려치는 칼. 아버지의 세이버는 내 검 두께의 사분의 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내 검을 그대로 정면으로 막다가는 이가 나가도 다신 못쓰도록 제대로 나가버리거나, 심하면 부러질 수도 있다. 내 팔 힘도 보통은 아니니까. 아버지의 왼발이 한 걸음, 둥글게 내 쪽으로 디뎌진다. 자세가 반정도 옆으로 틀어졌다. 자세를 훌쩍 숙였다. 내 검은 느리다. 빠를 수가 없다. 아직 내 몸하고 완전히 맞지도않으니까. 아버지의 검이 내 검이 지나간 아래쪽, 내 왼쪽 허리 쪽으로 파고든다. 왼쪽 무릎을 잔뜩 굽힌 채, 오른쪽으로부터 휘어 베는 검. "받아라!" 이럴 땐,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 나는 무작정 검을 잡은 손을 아버지의 세이버가 날아오는 쪽으로그대로 밀어 붙였다. 젠장, 폼멜이 없는 것이 이럴 때 엄청나게 아쉽군. 아앗, 건틀렛을 안 낀 것도 후회해! 콰쾅! 으… 아…… 입이 벌어질 정도로 아프다. 아버지의 밀어져 베어오는 검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손잡이 부분, 거기에 나는 무작정 검을 밀고 들어간 셈이다. 그러나 계산이 잘못되어 손끼리 미끄러져 부딪치다시피 하고 나니 나는 내 검을 거지반 놓쳤다. 이렇게 대련을 하려면 확실히 건틀렛을 끼었어야 했는데. 나는 조금이라도 아버지만큼 손을 단련시켜볼까 싶어서, 건틀렛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끼지 않고 연습을 해 왔다. 간신히 아버지의 공격은 멈추었으나, 여전히 내 허리는 그대로 노출된 채였다. 게다가 손가락 마디가 불에 닿은 것처럼 쓰리다. "으으으윽……." 고통으로 신음하는 와중에 아버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동요되지 않은, 아주 침착한 목소리. "방금처럼 공격하게 되면 다음의 일은 전혀 생각지 않는 행동이다. 이 상태로 상대방이 공격할 기력이 남아 있고, 무기를 아직 잡고 있다면, 상대방의 승리나 다를 바 없다." 정곡을 찌르시네요. 저도 지금 그 생각을… 아으윽! 아버지가 다가와서 내 손을 잡고 들여다보셨다. "살점이 뭉그러졌다. 그렇지만 큰 상처는 아니구나." 아, 아버지와 어머니의 차이가 이런 건가 보죠? 검을 간신히 놓았다. 쥔 손을 펴려니 도저히 얼얼해서 못 하겠다고생각하는 참인데, 아버지가 그대로 내 손을 잡더니 좍 펴버렸다. "프으앗!" 아버지는 내 손을 펴더니 손가락을 하나씩 만져 보셨다. "손가락이 괜찮으냐?" "…… 아마도요." 엄청나게 아팠던 것과는 달리 중대한 상처는 아닌 듯 싶었다. 오히려 겉으로 보이는 상처의 강도로 보면 손바닥에 생겼다가 사라지는중인 물집들이 훨씬 살벌하게 보였다.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터진 손바닥은 살벌했다. "다시 시작한다. 그 정도 상처를 입었다고 봐주는 적은 어디에도없다." 맞는 말이긴 한데, 지금은 적이 아니고 다시 아버지로 되돌아가시면 안될까요? 아버지는 내 생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시고 - 다시 생각하니 생각은 들을 수가 없군. 한동안 생각을 알아들어주는 사람들한테 너무익숙해져 있었다니까 - 다시 검을 들어올리셨다. 계속해야 한다. 어쨌든, 정말로 이 정도에서 물러나 주는 적은 없을 거야. 순간적으로 든 생각. 공격은 최선의 방어! "갑니다!" 한껏 위로 들어올려진 검, 그리고 짧게 한 번, 크게 한 번, 순간적으로 앞으로 뻗는 두 번의 발걸음. 자세 좋고. 순식간에 사정 거리 안. 허공을 오른쪽으로 휘어 가르면서 내리치는 검. "……." 말없이 검을 내 검과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갖다대시는 아버지. 책에서 본 어떤 자세하고 한 치도 틀리지 않는 완벽한 자세다. 아마도두 개의 검날이 부딪치면서 옆으로 미끄러져……챙!!! 지독하게 날카로운, 쇠가 갈라지는 소리. "아……." 아버지의 세이버가 그대로 부서져 나갔다.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론, 블레이드 쪽만. 힐트쪽은 아버지가 쥐고 계시다. 역시 나는 수련이 모자라는지, 내 생각대로 되지가 않는군. 그런데 이게 잘 된 건지 잘못된 건지 분간이 안 가. "팔이 잘 단련되어 있구나." 아버지의 팔에도 약간 충격이 온 모양이다. 그대로 검 반쪽을 바닥에 내던지시더니 잠시 팔을 늘어뜨리셨다. "죄, 죄송해요 아버지. 어쩌죠?" 아버지는 씨익 웃으신다. 저런 웃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이렇게 부러진 건 두 개의 검이 도저히 수준이 달랐기 때문이긴하다만…… 어쨌거나 훌륭하구나. 실전에서 서로 비슷한 검만 휘두르라는 보장은 없으니 이번 싸움은 네가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 한 달동안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구나." 내가 잠시 얼떨떨해 있는 동안 아버지는 다가오셔서 내 검을 살펴보셨다. 검을 바라보는 눈조차 나하고는 차원이 틀리다. 어쩔 수 없어서 억지로 들고 휘두르는 나와는 달리 마치 자식을 살펴보듯 하는모습이다. "좋은 검이구나. 상대의 무기를 부수고도 날 한 군데 상하지 않았다니. 보통 대장장이가 만든 물건이 아닌 것 같은데, 겐즈 씨가 주었다고 했나?" "네." "소중하게 다뤄라. 일생 이런 검 한 번 잡아보는 것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검에 일생을 바쳐 온 나조차도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 이런 검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다." 이 녀석이 그렇게 대단한 검? … 그런데 왜 그 소리를 들으니 검이 더 무거워지는 것 같담. 검군, 살좀 빼, 살좀. 뭘 얼마나 먹어치우길래 도대체 몸무게가……. … 내가 이런 헛소리를 속으로 해대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내 검에서 눈을 떼고 물러나시더니 언덕을 올라올 때 나무 밑에 내려놓으신짐에서 뭔가 큼직한 것을 들고 오셨다. 헤에, 저게 뭐람. 말로만 듣던…… +=+=+=+=+=+=+=+=+=+=+=+=+=+=+=+=+=+=+=+=+=+=+=+=+=+=+=+=+=+=+=어제는 눈치보면서 2장 시작합니다.. 아니, 시작했습니다; 라는 글을 회사에서 쓰느라 약간 고생을 했습니다..^^;이제 중간고사 거의 끝나 가시죠? 물론, 아닌 분들도 계시겠지만... 다들 남은 시험 잘 보세요-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575번제 목:◁세월의돌▷ 2-1.은빛머리의 유리카 (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2 21:18 읽음:225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1. 은빛 머리카락의 유리카 (3) "모닝 스타(Morning Star)!" "그래." 아버지는 내 말에 미소하시더니 곧 아까의 자세로 마주보고 서셨다. 설마, 저걸 들고 다시 대련을? 설마는 사람을 잡고 말았다. "자, 다시 시작하자. 아버지가 한 번 이기고 한 번 졌으니, 마지막엔 꼭 이기도록 열심히 해야겠다." 제발, 그, 그런 살벌한 말씀은……. "간다!" 모닝 스타라는 것은 기다란 막대 끝에 쇠뭉치가 달려 있고 심하면거기에 각종 스파이크가 박혀있는 보기에도 끔찍스런 무기다. 하필아버지께서는 저런 무기를……. 게다가 쇠뭉치 끝에는 날카로운 창날까지 박혀 있었다. 간다고 하신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저기 빛나는 아침별이 날아오는 게 보이는군. 으앗,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얏! 똑바로 내리쳐져 온다! "으랏찻차!"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동시에 왼손을 힐트에서 빼어 블레이드끝쪽을 움켜잡았다. 손 베면 큰일인데. 지금은 마치 막대처럼 쓰는 검이지만 정면은 안돼, 충격이 너무큰……. 티캉! "으읍……." 가능한 한 비껴 받는다고 받았는데도 팔꿈치에 가해진 충격은 엄청났다. 뼈 속이 지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팔을 타고 어깨까지 순식간에 전해진 충격은 그대로 검을 놓치고도 남을 만큼이다. 그렇지만… 떨어뜨리면……. 블레이드를 쥔 왼손을 일단 놓았다. 한 손으로 지탱하기엔 너무 큰 검, 순식간에 휘청대는 오른팔을 왼손으로 움켜잡았다. 정확히는 손목을 받치고 들어갔다. 끝… 아니군. 내 검과 정면으로 맞고서 위로 잠시 튕겨오른 모닝 스타는 치켜올린 그대로 이번엔 대각선으로 치고 들어왔다. 괴, 괴물이군. 검을 한껏 왼쪽으로 뺐다가 힘껏 가로로 휘둘렀다. 미리 검한테 물어보고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너 저거랑 부딪쳐서 안 깨질 자신 있냐?' 등등……. …… 검의 의견이 문제가 아니군. 허리가 장난 아니게 휘청한다. "어어억……." 검을 맞은 것도 아니고 휘두르면서 저런 비명소리를 내는 놈은 별로 없을 거야. 날아간 블레이드가 모닝 스타의 창끝과 정확히 맞닿는다. 손가락한 마디, 아니 반 마디……. 쳐낸다! "차아앗!" 내 계산은 틀렸다. 나는 날아오는 쇠공을 단숨에 옆으로 쳐내고 있었다. 흔들리는 모닝 스타, 마치 공놀이하는 식으로……. 공놀이는 쇠공으로 하, 하는 법이 아니……. 정신을 차릴 틈이 없다. 다시 날아온다! 이번엔 반대쪽! 탱겅!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 두 번째 팔에 전해졌다. 아까와 똑같은 자세지만 좌우를 완전히 반대로 해서 다시 모닝 스타의 쇠뭉치를쳐냈다. 아, 이렇게 하고 나니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요령이 생기는걸? 다시 한 번! 투캉! 이번 공격으로 스파이크 두 개가 내 검에 걸려 잘려져서 언덕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내 검의 절단력에 다시금 찬탄을 보낸다. 손목이비틀거렸지만 힐트를 더욱 꽉 쥐었다. 정말 아버지는 장난으로 공격하고 계신 게 아니다. 매번 날아오는 모닝 스타를 막아낼 때마다 마치 죽을 고비를 넘기는 기분이다. 아버지의 눈동자도 진지함을 넘어서……정말 나를 죽이시려는 것 같은 기분이야. "으음!" 모닝 스타와 내 투핸드소드가 약 다섯 번 정도 교차되어 튕겨나고나자 이번엔 그 섬뜩하게 생긴 창날이 똑바로 내 앞으로 겨냥된 채달려든다. 그, 그러니까…빨리 머리가 돌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막으면 좋을지 빨리 판단이서지 않는다. 일단, 왼발을 앞으로 디디면서 몸을 반쯤 튼다. 힘껏 검을 쳐들었다. 모닝 스타도 가벼운 무기가 아니니만큼 위력은 있어도 속도는 빠르지 않다. 단, 내려쳐지고 있을 때는 예외지. 그러나 지금은 찔러오고 있는 거니까. "이야아아압!" 내가 노린 것은 철퇴의 끝이 아닌 손으로 이어진 막대 쪽이다. 머리 위에서부터 힘껏 내리쳤다. 두 무기가 닿는 순간, 그대로 몸 전체로 밀고 들어갔다. 한 걸음, 두 걸음… "하아앗!" 아버지의 힘도 만만치 않으시다. 꺾어지려는 모닝 스타의 방향을비스듬하게 아래로 틀어 밀어붙이신다. 서로 무기를 맞댄 채 가능한한 힘껏 버텼다. 쇠가 마주 문질러지며 내는 지독한 마찰음그그그그그극…아, 팔이 끊어질 것 같애. 내가 이만큼 버틸 수 있는 것도 기적임에 틀림없어. 도저히 밀려드는 힘을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아까보다는 그래도 훨씬 냉정하게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다. 힘과 힘이 닿는 면을 옆으로 비껴나게 하려면……. 나는 칼날 면을 살짝 꺾으면서 그대로 서로 닿은 부분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츠츠측- 손이 닿기 직전이다. 그러나 내 것은 날이 선 칼, 아버지가 든 것은 쇠뭉치가 달린 '막대'. 게다가 내 검을 만질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지. 아버지는 서로 손이 맞닿기 직전, 재빨리 막대를 잡은 손을 위로올렸다. 뒤집히며 꺾어지는 힘. "으음……." 아버지는 잠시 공격을 멈추신 채 내 자세를 보고 계셨다. "방금 자세는 좋았다. 훌륭했다. 하지만." "…… 파, 팔이 너무 아픈데요…." "내가 시킨 것을 하나 잊었기 때문이지." 뭐더라? 아이쿠, 지금은 칼 잠깐 내려놓으면 안될까요? 그렇지만 나는 그대로 애써 검을 버틴 채였다. 손목에 힘을 주었지만 검 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다. 왜냐고? 숨이너무 가쁘거든! "그래, 바로 네 검이 떨리는 이유다."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검을 안정시키려고 해 보았다. 그런 애매한자세로는 생각만큼 빨리 되지 않았다. "호흡 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내가 힘을 약간 뺀 틈을 타서 아버지는 모닝 스타를 훌쩍 뒤로 빼셨다. "검을 받을 때는 호흡을 어떻게 해야 하지?" 아, 그렇다. 내가 내리쳐진 아버지의 검을 받을 때, 내 생각보다 충격이 굉장히컸었어. 그 이유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숨을 잔뜩 들이쉰 때문. "숨을 내쉬어야 합니다." "그래. 검을 내리칠 때도, 받을 때도 숨은 내쉰다. 겨냥할 때 숨을미리 들이쉬어라. 기합을 지르는 것도 숨을 내쉬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래야만 검과 검이 맞닿았을 때, 충격이 덜하다." 아버지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한 마다 덧붙였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마구잡이로 움직이니까 숨을 황소처럼 내쉬게되는 거야. 움직임은 최소한. 알아들었느냐?" "… 예." 이렇게 자주 잊어버리는 걸 보니, 몬스터를 쫓으며 일생을 보내기에는 정말이지 적절치 않은 것 같애. 그래도 나 자신을 포기할 순 없다. 아버지는 말을 이으셨다. "파비안. 아직 너는 그 검을 네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요즘 글을 쓰다보면, 검술 교본이 필요한 건 아르노윌트가 아니라저 같습니다.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거든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576번제 목:◁세월의돌▷ 2-1.은빛머리의 유리카 (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2 21:19 읽음:226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1. 은빛 머리카락의 유리카 (4) 그럼요. 미르보가 갑자기 엉터리없이 맡겨버리는 바람에 떠맡은 거지, 결코 내가 고른 건 아니라고요. 골랐으면 좀 더 가벼운 걸 골랐을거야. 그렇지만 준다고 했는데. 좀 묵혔다가 잘 숙성될 때쯤(검 말고, 나 말야 나) 다시 쓰면 안될까 싶긴 합니다만. "네 몸이 네가 든 무기를 버티지 못해서야, 그런 무기는 없느니만못하다. 적에게 그런 걸로 대적하느니 차라리 버리고 뛰어 달아나니만 못하다." 좀… 심한 말씀 같네요. 나는 새삼 검을 내려다보았다. 내 수준에서 아직 소화를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사실 뜯어보면 꽤나 그럴 듯하고 멋진 점도 있는 놈인데. 남들이 손 못 댄다는 점도멋지고, 그 가운데 새겨진 이상야릇한 글자들도 폼나잖아(그런데 그걸 뭐에 쓰지?)? …… 게다가 버리고 가면 미르보가 무척 화낼 것 같은데. "버리기 싫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 씹어 소화해야지요." "옳은 말이다." 아버지는 내 쪽으로 다가오셨다. 바람이 불어왔지만 이미 차갑다는느낌은 없었다. 곧 다가오는 2월, 암흑(Darkness) 아룬드에는 검은비가 내린다. 눈이 아니고 비다. 날씨는 점차 풀리고 있었다. "혹독한 수련을 거쳐서 검을 쥐어야만,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네몸 안에 들어있게 되는 것이다. 즉, 너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선 채로 나를 내려다보신다. 나도 일어서 있긴 하지만,아직 아버지의 키에 닿으려면 어림없다. "왜 검을 수련하는 데 몸을 단련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거야…… 일단 검을 들고 다녀야잖겠어요?" 그랬다. 그거야말로 요즘 내가 가장 심각하게 맞닥뜨린 문제니까. 아버지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검을 들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유사시에 내버리고 가면 적들이 그거 줍느라고 쫓아오지 못하기라도 한다는 거냐?" 오오, 그거 참 좋은 방법…… 미안하다, 검군아. "네 검이 어떤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것인가에 대해서 잘 생각해야 한다. 네 검과 같은 무거운 검의 특징은 무엇이냐?" "무거우니까… 느리겠지요. 대신 파괴력이 있고." "맞았다. 그런 검을 너는 자꾸 좌우로 휘두르려고 하는데, 그렇게해서야 어디 네 허리가 성하겠느냐."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왜 내 허리가 이렇게 자주 끊어질 듯이 아픈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거야 정말, 뻔한 일인데도 깨닫고 실천하기는 힘든 일이로구나. "투핸드소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칠 때 가장 위력이 있다. 그리고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것도 괜찮지. 좌우로 휘두르며 베는 것은 그검이 롱소드만큼이나 가볍게 느껴진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알았어요." 아버지는 정말 기억해야만 할 것 같은 말씀을 하신 뒤에 잠시 나를쳐다보시더니 말을 이었다. 모닝 스타를 오른손에 그대로 들고 계신채로. 나 같으면 일단 내려놓고 시작할 것 같은데. "너는 얼마나 빨리 움직일 수 있지?" "빨리요?" 빨리라면 자신이 있다. 하비야나크에서 스피드 하면 또 날리는……아냐, 하비야나크는 이제 없지. 나는 숨을 약간 들이쉰 다음에 생각에 잠겼다. "달리기라면 자신 있어요." "그것도 물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한 것은 너의 손,손목, 팔, 어깨, 허리 등등이 순간적으로 낼 수 있는 속도에 대해서네가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손, 손목… 음 그러니까, 어쩌고…… 어라, 허리가 무슨 속력을 내지? 아냐, 이런 뜻은 아닐 거야. "빨리 움직이면… 공격을 피하고 먼저 공격하겠지요." "느리게 움직여야 하는 때도 있는 것이다. 파비안." 아버지의 눈동자가 상당히 진지한 빛을 띠고 있다. "기억해두거라. 네 극한의 빠르기를 알고 있어야만, 위급한 상황에서 네 몸을 어떻게 놀릴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알 듯 말 듯 한 말이지만, 나는 기억해두기로 했다. 빠르기, 얼마나 빠른지 알아야 한다는 말이지. 허리라도 돌려볼까. "또, 고통스런 수련을 일부러 찾아서 할 필요도 있다. 네 온 몸의감각을 미리 깨워두는 것이 이후에 실전에서 몸을 다치지 않도록 너를 지켜주게 되기 때문이지. 몸을 다치지 않으면서 곱게 배운 검술은실전에서 금방 드러난다." 갑자기 아르노윌트가 떠오르는데.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실전에 닥쳐 한 군데라도 상처를 입거나다치는 순간, 자신이 그 동안 배우고 몸에 익혀 온 모든 검술을 모조리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지." 아르노윌트, 혹시 너 거기서도 귀 가리키면서 들을 수 있다면 좀들어! 명언이다, 명언! 적어라, 적어! 나는 아르노윌트를 대신해서 대단히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나한테도 감동적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세상에, 플러레를 주고 롱소드와 싸우라고 하는 사람이었다니까, 아르노윌트의 검술 선생이라는 작자는. 그에 비하면 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훌륭하시냔 말야. "꼭 기억해둘게요." "그래……." 아버지는 말을 맺지 않고 약간 끄시더니 나를 똑바로 쏘아보신다. 갑자기 왜 저러시지?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나? 아버지는 입술을 움직이며 똑바로 말하시는 걸 보니 뭔가 불길한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후두부를 강타하는…… "그러니, 고통을 미리 자주 느껴보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이지!" "으아아아아아아아!!!" 아버지가 내 손을 덥석 잡는 순간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극한의고통이 나를 찾아왔다. ………… 잠시만 기절이 하고 싶어지는데… 으라라랏! 너무 아파서 그것도 못 하겠군. 아버지는 그리고 몇 마디 더, 검을 다루는 것과 그리고 내가 해야할 임무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뒤 떠나셨다. 좀더 내 곁에 있으시면서 좀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어하신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기사단장이 그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는 없는 일, 아버지는 언덕을 내려가는 마지막까지도 뭔가 안심되지 않으신 듯 몇 번이고 언덕 위쪽을돌아보셨다. 녹색 호수 저편으로 아버지의 뒷모습이 사라져간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하실 일이 있으시잖아요. 저도 할일이 있고요. 그리고 잘 해낼 테니까요. 아버지가 주신 임무, 반드시멋지게 완수할 테니까요. 오늘은 왠지 그런 자신감이 드는 날이다. +=+=+=+=+=+=+=+=+=+=+=+=+=+=+=+=+=+=+=+=+=+=+=+=+=+=+=+=+=+=+=그런데... 제목의 '유리카'는 과연 언제나 나오는 걸까요? ...^^추천해 주신 분, 역시나 감사합니다. 하루의 기쁨이라니... ^^*그리고 저 역시 다시 한 번, D&D 완결 축하드립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597번제 목:◁세월의돌▷ 죄, 죄송해요..^^;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3 08:33 읽음:2016 관련자료 없음----------------------------------------------------------------------------- 정말....이네요..^^; (아래 30596 게시물)방금 고쳤습니다. 출근하기 전에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들어와봤는데... 안 들어왔으면 어쩔 뻔 했을까 모르겠네요. (삐질..;)신청학동 님, 지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652번제 목:◁세월의돌▷ 2-1.은빛머리의 유리카 (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3 21:36 읽음:225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1. 은빛 머리카락의 유리카 (5) 간판을 뒤집어 놓고 글자를 쓰기 전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파격 대 할인 봉사!', '잡화점 주인은 미쳤다', 으음, 또는 '이보다 더 싸고 좋을 순 없다!' 느낌표를 여러 개 달아볼까? '대륙 최고의 보물들, 창고 정리 대매출!!!'좀 과장이 심했나? 그럼 동정심 유발 글귀'참화가 휩쓸고 간 땅에 다시 태어난 삶의 의지', '재앙의 땅에도생명은 살아간다', 에 또…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좀 신파조군. 맑은 하늘. 오늘은 날씨가 맑다. 그리고 상쾌한 공기. 음유시인 아룬드가 중반에 접어들 무렵이면 누구나 하는 착각, 마치 곧 봄이 올 것 같은 기분을 지금 나도 느끼고 있다. 이 때의 날씨는 굉장히 좋고 온화해서, 눈조차도 잘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대로 날씨가 지속되다가 점차 따뜻해지면 그대로 봄으로 이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봄이 시작되는 아르나 아룬드와의 사이에는엄연히 암흑 아룬드가 떡 버티고 앉아 있다. 1년 중 대륙에서 가장끔찍한 일기와 날씨, 기상을 자랑하는 달이 아닌가. 나는 떨어진 간판을 앞에 놓고 목탄 조각을 든 채 지금 하염없이봄이 주는 온화한 기분에 사로잡혀 쓸데없는 갖가지 생각으로 시간을낭비하는 중이다. 가게를 정리한다. 음유시인 아룬드가 가기 전에 남은 물건들을 모조리 정리할 생각이다. 돈주고 산 물건들을 그대로 버린다는 것은 결국 내 성미에 맞지않았다. 어머니가 이 나이 때까지 가르쳐 오신 것이 있는데. 암, 그게 말이 되냐고. 물건이 대충 정리되면 어머니의 유품이나 나한테 필요한 물건 몇가지를 남기고 나머지는 없애버리거나 누구 필요한 사람한테 주기로했다. 가게는 못을 칠까, 아예 태워버릴까 아직 결정을 하지 못했다. 곧 결정하게 되겠지만. 나는 드디어 여행을 떠난다. 애매하면서도, 어쩌면 매우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걸이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따뜻하고 온화한 공기. 겨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걸. 이런 날씨에 하는 여행은 꽤 괜찮을 테지만, 곧 다가오는 암흑 아룬드를 생각하니 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눈은 거의 녹았다. 아버지가 어제 떠나신 뒤, 오늘부터 나는 가게 정리를 시작했다. 약 한 달 반 가량의 아버지와의 생활. 정말, 아버지라는 존재는 확실히 어머니와는 다른 점이 많다. 같이지낸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어머니처럼 친근한 존재가 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확실히 색다른 것이다. 짧은기간동안 내가 확실하게 느낀 점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주고, 알려주고, 생각하게 해 준 것들. 내가 해야 하는 새로운 일들. 아직까지는 차가운 느낌을 더 많이 주는 하늘의 파란색. 그 하늘 가운데를 검은 겨울새가 한 마리 가르고 지나갔다. 나는 폐허 가운데서 몸을 일으켜 섰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약간 지대가 높은 우리 가게 앞, 거기에서는 마을 전체가 거의내려다보인다. 몸을 한 바퀴 빙 돌렸다. 엠버로 내려가는 둔덕, 지붕이 부서져 나간 목수의 방, 사람 하나 없는 긴 골목, 하얀 산맥으로이어지는 비탈. 내 눈에 들어오는 것들. 나를 떠난 것들이 무엇인지잊어버렸더라도 다시 한 번 잘 기억해내게 해 주는 것들. 그러나 이제 나를 구속하지는 않는 것들. 좋은 공기다. 한껏 마셨다. 내 머리카락을 날리는 산바람에도 흡족하게 옷자락들을 맡겼다. 이제 나는 괜찮아. 내가 알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른 세상으로 가 버렸어도 나는 괜찮아. 어머니의 복수를 할 능력이 없어도, 복수하겠다는 불굴의 의지로온 몸이 채워지지 않았어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어. 봄을 예견하게 하는 시원한 바람. 그것이 오류에 불과한 기분이라도. 저녁을 먹고서 신데볼프 씨네 집 안쪽의 내가 쓰는 방으로 들어갔다. 장사는 본격적으로 내일부터 시작하기로 했고, 오늘은 내내 그릴라드로 물건들을 옮겼다(신데볼프 씨는 물건을 수습하는 나를 보고'지독한 녀석'이라고 말했는데 칭찬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유령마을이 되다시피 한 하비야나크로 물건 사러 올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방안에 앉았다. 이 방에는 침대가 없다. 하긴 작아서 침대 들어올자리도 없지만. 구석에 담요가 깔려 있다. 내가 덮고 자는 것이다. 담요를 젖히고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내 목에 걸고 있는 아직 조금은 낯선 목걸이를 만지작거려 본다. 최근에 새로 생긴 버릇 중 하나다. 혹시라도 따로 두었다가 잃어버릴까 봐서, 또는 나를 인도하는 어떤 증거를 우연히라도 놓쳐버릴까 봐서 나는 거의 한시도 목걸이를 내 몸에서 떼어놓질 못했다. 아버지가 그랬듯 나 역시 이것을 옷안으로 걸었다. 남의 눈에 이렇게 띄는 모양이니 밖으로 걸기엔 좀 무리가 있다. 이 목걸이에 달린새까만 장식추는 무슨 광석인지 몰라도 꽤나 무겁다. 그리고 비어 있는 세 개의 패인 자리. 나의 숙제. 사실 나는 이렇게 무거운 목걸이 따위에는 취미가 없다(이건 무거운 검을 싫어하는 것하고 똑같은 맥락이다). 예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말야. 나머지 세 개를 더 채워넣으면 더 무거워지겠군. 거기에 채워넣어야 하는 네 개의 반짝이는 돌. 과연 어디에 있을까. 이 목걸이가 정말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 줄까. 이미 제 자리에 와 있는 기특한(?) 녹색의 보석을 쓰다듬었다. 보면 볼수록 진짜 보물이라는 느낌이 새삼스레 드는 아름다운 빛깔의광채는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마치 봄에 새로 돋아난 연녹색 마름모꼴의 잎사귀처럼, 연약한 듯하면서도 생명력 있는 광채. 그리고 그것은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불투명한 빛이기도 했다. 평소 보아온(이것은 절대! 과장이자 거짓말이다) 투명한 보석과는 또다른 기이하고도 은은한 반짝거림이 까만바탕 위에서 유난했다. 아름답다. 그러니, 아마 꽤나 비싸겠지. 아니, 헤아릴 수도 없는 가격인건가. ……나더러 이것을 흥정을 붙여 팔라면 정말이지 제 값을 받고도 한참은 이익을 남길 자신이 있다(그 제 값을 잘 모르는 것이 문제지만). 뭐라고 선전할지 그 문구들까지 훤히 떠오른다. 물론, 나도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잃어버릴까봐도이렇게 겁나는 물건을 팔. 다. 니. 솔직히 꿈도 못 꿀 일이지만 상상은 할 수도 있는 거 아냐. 내가 처음 아버지로부터 이것을 받았을 때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가장 아쉬웠던 점이 '팔 수 없다는 것' 이거였다. 아무래도 나는 무슨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팔아먹는 것을 훨씬 좋아하는 것 같다. 돈 때문이 아니라 그 '이익 남게 판다는 행동' 그 자체가 나에게는 신나는 일인 모양이다. 어쩌면 이걸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것 자체가 이런 심정과 관계가 있는 건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해보면 난 정말 직업 잘 택한 거였었는데. 그러나 나는 이제 삶의 새로운 페이지로 가려고 하고 있다. 그러니과거의 것에 미련을 가져봤자겠지. 잠시 아버지의 말을 되새겨 보자면……. "파비안. 이것을 모두 찾아서 채울 수 있게 되거든, 님-나르시냐크로 오너라. 물론, 내 마음은 너를 당장이라도 데려가서 내 아들이라고 선언하고 싶은 심정이다만,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질시 어린 눈으로 인해 네가 겪게 될 고통이나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생각하니, 차마 나 좋자는 쪽으로만 할 수가 없구나." 그래… 그런데 사실 사려 깊은 것 같으면서도 애매한 말이란 말야. 아버지의 생각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아버지는 물론 말 끝에 이렇게 덧붙이셨다. 만일, 너무 오랫동안 못 찾으면 그냥 님-나르시냐크로 와도 좋다고. 그러나 그러고 싶은 생각은 나에게도 없다. 나도 색바랜 초라한 것이나마 모험심이라는 것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반드시 이 일을 해내서 멋지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도 있다. 아버지의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마음도. 그래서 나는 그 뾰족한 장식 가지로 머리나 긁는 데 쓰면 딱 좋게생긴 목걸이를 이렇게 심각하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팔아먹지도 못하고, 놔두고 가지도 못하고, 상관 안 할 수도 없는, 가지고 다녀야만하며 그것도 잃어버리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물건(한 마디로 골치 아픈 물건). 내가 아버지의 아들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가 건 비싸디비싼 도박이고, 나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되는 막중한 책무를 지고 있는 거야. 세 개의 돌을 찾아내어 반드시 님-나르시냐크로 돌아가야 한다. 귀족 생활 따위가 즐거울는지는 전혀 예상이 안되지만, 어쨌든 나는 아버지 곁에 있고 싶다. 담요 속이 따뜻하지 않아선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옛날집의 침대가 굉장히 따뜻한 물건이었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닌데,왠지 지금은 그 곳으로 돌아간다면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주위는 캄캄하고,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창은 덧문조차 닫혀 있다. 나는 지붕 위 저 너머에서 비치고 있을 달빛을 생각한다. 맑고 차가운 공기, 아마도 밖의 날씨는 맑을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검은 휘장 위의 수많은 별무늬들. 눈을 감고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자, 싸게 팔아요, 싸게 판다니까요!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자아, 이쪽으로 아가씨. 안에 더 좋은 물건들이 있다니까요. 그렇게지나가지만 마시고 한 번쯤 둘러보세요. 이런 기회가 또 온다고 생각하시면 착각이십니다. 저기 가시는 아주머니! 여기 평생 쓰고도 남을좋은 물건들이 산더미예요, 산더미." 내 말에는 좀 과장이 있지만 그 정도 과장도 않고서 물건을 팔 수는 없는 일이다. 암, 당연하고 말고. 그럼 내가 내놓은 상품들에는뭐가 있냐 하면……약초, 모자, 장갑, 허리띠, 부싯돌, 횃불, 램프, 기름, 양피지, 종이, 깃펜, 잉크, 밧줄, 눈신발, 여행용 배낭, 각종 그물, 지팡이, 줄사다리, 부츠들, 수건, 가죽에 칠하는 기름, 모래시계, 각종 교본들,악기, 인형…… 헉헉, 이하생략. 물건들은 잘 팔렸다. 비싼 것은 정가의 십분의 일 정도 빼주고, 싼것들은 슬쩍슬쩍 제값을 다 받았지만, 어젯밤에 생각해놓은 수법을썼더니 정말 떠나는 계획 때려치우고 계속 장사나 하고 싶어질 정도로 물건들은 무진장 잘 팔렸다. 내 전략은 이렇다. 일부 비싼 것 몇 가지를 정말 왕창 싸게 팔아주면서 대거 선전을 해서 일단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놓는다. 사람들이모이고 나면 일상 생활에서 필요해 보이는 자잘한 것들을 앞에 내놓고 덩달아 사게끔 만든다. 그리고 입선전은 절대, 그 외의 어중간한물건들에 대해서만 떠들어준다. 정말이지 멋진 삼박자 아냐? 나는 아무리 급히 떠나야 하는 입장이라고 해도 함부로 손해보고 파는 짓은절대 하지 않는다. "자, 가게 정리예요, 정리! 완전 손해보고 파는 중! 원가에서도 반값밖에 안 되는 물건들이 헐값에 주인을 찾고 있어요. 기간은 단 3일!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저녁때가 되어 계산을 해 보자 3일을 예상하고 나눠 놓은 물건들중 절반 이상이 첫날에 팔려버렸다. 잡화점에 이렇게 많은 인파(?)가몰려 있는 것을 처음 본 사람들이 뭔가 싶어 덩달아 여기저기서 모여들면서, 나는 심각하게 기간을 5일 정도로 늘리고 신데볼프씨 가게물건들을 넘겨받아 파는 것을 고려해야 될 지경이 되었다. 다음날 점심때쯤, 물건은 거의 동이 났다. 나는 목도 아프고 피곤하기도 하고 해서 밖에 내다 놓은 나무 상자중 하나 위에 걸터앉은 채 사과를 베어먹었다. 내 시야가 가 닿는 저먼 곳에는 아버지와 헤어지던 날 검 대련을 하던 언덕이 보이고, 그너머에는 녹색 호수가 희게 반짝거리는 것이 보인다. 따뜻한 햇빛이내려쬐이고 바람도 차갑지 않다. 오늘은 제1 아룬드 20일. 음유시인들이 오늘 만나게 되는 소녀들에게 미래의 남편을 암시하는 노래를 불러 준다는 날이다. 나야 소녀가아니니까 신경쓸 것은 없지만, 오늘은 유난히 젊은 여자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마을 길목에라도 나가 있나. 내일은 떠나는 날이다. 이렇게 느긋하게 앉아 사과나 먹고 있자니별로 실감이 나지는 않지만, 이미 필요한 물건들은 미리 골라서 어젯밤에 미리 여장을 챙겨 놓았으니 떠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시간은 내일 아침, 일찍으로 생각해 두었다. 굳이 사람들과 많이마주칠 필요가 없었다. 인사할만한 사람들에게는 이미 다 인사도 해 두었고, 내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하나도 없다. 무슨빚을 진 것도 아니고, 남기고 가는 것도 전혀 없으니까. 내일도 이렇게 날씨가 좋다면 좋으련만. 이제 손님도 별로 오지 않고 하니, 심심한데 검이나 휘둘러볼까.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검을 꺼내왔다. 예전만큼 무겁게 느껴지지만은 않는 녀석이다. 거의 나아가는 손바닥에 딱 맞게 느껴질 만큼 익숙해진 힐트의 감촉. "히압, 합!" 양손으로 검을 쥐고 똑바로 겨냥한 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가 내렸다 하는 일을 반복한다. 이 검의 무게에 익숙해지고, 그만큼의 팔힘을 기르기 위해서 생각해 낸 방법이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니만큼 그렇게 부담이 크지도 않다. "… 허업, 흐으업…." …… 부담이 전혀 없지는 않다. 오십 번쯤 휘두른 뒤에 다시 잠시 검을 내리고 쉬었다. 장사하느라체력이 소모되어서 그런지 팔이 뻐근한걸. 나머지 오십 번은 저녁 먹고 나서 해야겠다. "그렇게 해서 무슨 연습이 되겠니?" 땅바닥에 잠시 주저앉았던 나는 돌아보기가 귀찮아서 고개를 돌리는 대신 머리를 굴려 봤다. 여자, 그것도 소녀의 목소리네. 그런데최근에 들어본 목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한데, 나한테 저런 식으로 말을 걸 만한 여자애들은 이미 한달전에 거의 다 죽어서 없어졌는데. "겨우 오십 번만에 나가떨어지다니, 그런 검은 내버리고 도망치는편이 낫겠다." 어라, 저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인데? 나는 그제야 말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려 나를 찾아온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파비안의 3단계 가게 정리 전략을 보고 뭐 떠오르는 것 없으세요? ..... 현실 세계에서도 저거하고 똑같은 전략을 쓰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누구게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653번제 목:◁세월의돌▷ 2-1.은빛머리의 유리카 (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3 21:36 읽음:223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1. 은빛 머리카락의 유리카 (6) 모르는 얼굴이었다. "모르는 얼굴인데?"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담. 마치 옆에 다른 사람이라도 있는 양내가 소감을 말하자 여자애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얼굴이면 말을 걸면 안된다는 뜻이야?" "'왜 초면에 반말이십니까'를 완곡하게 돌려 한 말인데." "그러는 너도 반말을 하고 있잖아?"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두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완곡하게 알려 주고자 했을 뿐이야." 왠지 어머니 돌아가신 이후로 이런 식의 대화는 참 오랜만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걸.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서 오랜만에 옛날(사실 별로 옛날은 아니다)기분을 느끼게 해 준 소녀는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모양으로 뭔가 미심쩍은 듯이 눈썹을 가볍게 찡그렸다. 선명하게 고운 선을 가진, 마치 그린 것 같은 눈썹이다. "이런 대화는 참… 오랜만인 것 같네." 어라, 나하고 똑같은 생각을? 갑자기 나타난 소녀는 내 곁으로 천천히 걸어오더니 아무 거리낌없이 내가 아까 전에 앉아 있던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더니 내가좀 전에 몇 개 꺼내다 놓은 사과 가운데 한 개를 집어들어 깨물기 시작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맛있는데. 사과 먹어본지 정말 오래됐다." "난 사과 먹어본 지 10분 정도밖에 안됐는데." "그래서 뭐?" "뭐, 먹으려면 먹으라는 거지." 어라, 내가 왜 이러지? "고마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단정하게 웃어 보인다. 사과의 붉은 빛과 드러난 하얀 이의 대비가 놀랍도록 선명하다. 자그마한 얼굴에는 곱고 또렷한 윤곽. 그리고…… 오후의 햇빛 아래 환영처럼 반짝거리는 은빛 머리칼은 겨울의 빛깔, 그 아래 엘프의초록 돌처럼 아로새겨진 녹색의 눈동자는 여름의 빛. 생각지도 못한 하루의 발견. …… 언제부터 내가 대낮에 넋놓고 시나 쓰게 됐지. "사과 하나 더 먹어도 되니?" "아, 물론." 에, 아까는 안 물어보고 그냥 집어먹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한 손에 다 쥐이지도 않을 만큼 커다란 사과를 집어들어서는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사각- 향기로운 사과의 살이 시원하게 떼어져 나가는 소리. 그 선명한 현실감에도 불구하고 헛것을 보는 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드는 이유가 뭘까. 오늘은 소녀들이 미래의 남편을 점지 받는 날이라고는 하지만, 소년들이 미래의 아내를 만난다는 말은 없었는데. …… 사과 먹는 소녀를 얼빠진 듯이 쳐다보는 내 모습 자체가 현실감이 전혀 없군. "아, 맛있어, 맛있어. 살아있는 것은 맛있어." 연신 중얼대는 소리에 나는 무심코 물었다. "… 이상한 취미구나. 사과가 살아 있어?" "그럼, 지금 이 사과가 나한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리가 들리는걸." "헤에……." 저, 정신이 좀 이상한 아이인가? 다시 한 번 물어봐야지. "그래, 사과가 뭐라든?" "자긴, 아직 죽기에는 너무 젊고 예쁘다는데." 사과는 이미 반쯤은 여자 애의 입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없었다(그렇다면 저 말은 반쪽 남은 사과의 의견일까?). 정말, 좀 이상한 애 같애. 나는 슬슬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 낯선소녀한테서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걸. 일단, 몸차림부터가 특이했다. 머리 빛깔과는 전혀 판이한 새카만 색깔의 종아리까지 오는 치마인데, 후드가 달린 대신 소매가 없고 위부터 앞을 여미게 되어 있어서거의 망토처럼 한쪽 옆이 완전히 트인 옷이다. 누구 좋은 일 시킬 생각은 없었는지 트인 치마 안쪽에는 연한 푸른색 바지를 입었고 발에는 짤막한 까만 에나멜 부츠를 신었다. 굉장히 선명하면서도 인상깊은 대조인데. 안에 받쳐입은 긴소매의 검은 웃옷, 그리고 특이하게 허리를 조인띠는 은으로 된 장식물들이 죽 연결된 희한한 물건이었다. 손목에도은으로 된 링팔찌를 한쪽에 두 개씩 끼었고, 귀에도 역시 은 귀고리가 걸려 있다. 저런 차림이라니, 도대체 뭘 하는 앨까. "사과 잘 먹었어. 안 죽겠다고 발버둥치는 녀석이라 그런지 더 맛이 있었어." 나는 검지손가락을 머리 옆에서 빙글 돌려 보였다. "너, 이거니?" "으이그 촌스럽긴. 하여튼간 나는 매번 이렇게 뭐 시작하려고 그럴때마다 고생문이 훤히 열렸다니까." "무, 무슨 소리야?" "나는 유리, 유리카." … 대화가 완전히 엉망이었다. 나는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어 다시 한 번 되물었다. "뭐라고?" "아, 유리카라니까. 유리카 오베르뉴. 유리라고 불러도 좋아." 아… 예쁜 이름인걸. 윽, 이게 주제가 아니지. "그게 아니고, 뭐가 고생문이 열렸다는 거야?" "너무 미리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 너는 파브… 아니, 네 이름은뭐니?" 내가 잘못 들었을까. 방금 분명 내 이름을 아는 듯이 말하려는 걸들은 것 같은데. 에라, 내가 잘못 들었겠지. "파비안." "성 없어?" "… 크리스차넨." 나는 아버지가 맡긴 임무를 끝내고 님-나르시냐크로 돌아가기 전까진 어머니의 성을 그대로 쓸 작정이었다. "응, 그렇구나. 만나서 반가워." 자신을 '유리카'라고 밝힌 소녀는 상자 위에서 일어나더니 왼손에는 마지막 남은 사과 한 개를 쥔 채로 오른손을 내 쪽으로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손을 잡고서 흔들자 유리카의 손목에서 은고리들이 찰랑거렸다. 은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라 그런지 굉장히 맑았다. "그건 그렇고, 무슨 볼일이야?" "아, 물건이나 살까 하고." "별로 남은 게 없는데." "있는 것 중에서 찾아보지 뭐." 매우 관대하게 말을 시작한 그녀였지만 잠시 후, 그 관대함은 그녀의 까다로운 안목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백보 양보해서 그래도 처음에는 관대하게 생각하려고 했었다고 일단 믿어주기로 했다). 유리카는 신데볼프 씨 댁 상점 앞마당을 이리저리돌아다니면서 내가 아직 못 판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죄다 안 팔릴만한 이유가 있는 것들이었는지라 그녀의 눈에 찰 턱이 없었다. 그녀는 빈손으로 내 앞으로 돌아와서는 양쪽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야. 싸다고 해서 왔더니만. 쓸만한 건 하나도 없네." "일찍 못 온 네가 잘못이지. 괜찮은 게 많았었지만 다 팔렸다구. 좋은 걸 고르려면 부지런해야지." "일찍 왔었더라도 고를 만한 건 없었을 거 같은데." "무슨 근거로 하는 소리야?" "딱 보니까 가게 정리하는 물건들인데 뭘." 딱 맞췄는데? 별로 숨길 만한 일은 아닌지라 나는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맞아. 오늘로 가게 정리 끝. 내일이면 닫을 거야." "왜?" "이사갈 거야." "어디로?" "세상 속으로." 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내가 뭐라도 된 것 같다. 유리카가 입술을 약간 비죽이더니 이어 지은 표정에는 잘난 체 하는군, 하는 의미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저, 저렇게 솔직한 표정을 짓다니, 사람 무안하게시리. "그래, 이사 잘 가라. 나도 그만 가볼 테니." 유리카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은 채 마지막 사과를 손에 쥐고는간단히 작별의 눈짓을 했다. 그제야 눈치챈 거지만 몸놀림이 굉장히가볍고 재빠르다. 그녀는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마을 안쪽으로 난 길로 접어들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저런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면 무척 눈에 띌 텐데. 혹시 도시에서는유행이라도 되고 있는지 몰라도, 이런 동네에서는 아무리 아가씨들옷이라 해도 그 옷이 그 옷이란 말야. 거기다가 눈에 띄게 생기기도 했고 말야. 여행자일까? 에라- 파비안, 괜한 관심은 꺼라, 꺼. +=+=+=+=+=+=+=+=+=+=+=+=+=+=+=+=+=+=+=+=+=+=+=+=+=+=+=+=+=+=+=추천해 주신 두 분- 너무 너무 감사해요. ^^앞으로는 타이트하게 이야기를 당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의 장래를 걱정해주시니... 제가 꼭 전해주도록 하겠습니다.. ^^ (누구한테?)가끔 첫번째 올렸던 글, 즉 1회를 찾아보곤 하는데그 글의 조회수가 조금이라도 올라간 게 보이면새로 찾아주시는 분이 있구나- 싶어서 참 즐거워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654번제 목:◁세월의돌▷ 2-1.은빛머리의 유리카 (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3 21:37 읽음:223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1. 은빛 머리카락의 유리카 (7) 그릴라드에 사는 애는 확실히 아니었는데. 나는 낮의 결심(쓸데없는 관심은 끄자는)을 그다지 오래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저녁 먹을 때가 되어 신데볼프 씨의 아들 스바형이 물건을 걷어치우고 있는 나를 부르러 왔는데 그의 얼굴이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 양 상기되어 있었다. "파비안, 그 애 봤냐?" "웬 애?" 뭘. 나는 이미 스바가 말하는 '그 애'가 누구인지 짐작했다. "아, 점심때쯤 마을로 들어온 여자 애 말야. 은빛 머리카락에 까만치마 입은 애 못봤어?" "아……." 아는 시늉을 했다. 스바형은 스물 일곱이나 먹도록 아직까지 장가도 못 가고 있는 실속없는 미남이다. 문제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리시고 눈만 높으시다는 거지. "봤지? 예쁘지? 내가 지금까지 스물 일곱 해 살면서 그렇게 예쁜애는 처음 봤다. 누가 말을 걸어도 도도하게 입도 안 여는데, 그 뾰족한 입술이 얼마나 귀엽던지……." 왠지 좀 잘난 체 하고 싶은 생각이 머리를 치켜드는걸. "유리? 나한테는 말만 잘 하드만." "뭐? 걔 이름이 유리야?" … 실수였다. 지금 나를 유심히 쳐다보면서 할 말을 구상하고 있는스바형을 보니 내일 아침에 내가 이 마을을 떠날 수나 있을는지 조금걱정된다. 그건 그렇고 제발 스바형의 최근에 새로 생긴 말버릇인'기사 단장님의 아들이라서 그런가?'만 안 들었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담긴 의미가 비아냥거림인지 동경인지에 대해서는 예언자들만이알리라. 류지아의 집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 전에도 별로 헤매지는 않았었지만 지금 다시 보니 처음 찾아가던 때가 떠올라서 감회가 새삼스럽다. 그래 그 날, 내 18년 평생에없던 일들이 갑자기 일어나기 시작하던 날이 바로 그 날이야. 류지아는 마치 내가 방문했던 그 날로부터 전혀 움직이지도 않은것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 안녕." 이유 없이 약간 말을 더듬었다(사실, 전혀 이유가 없진 않다). 류지아는 그저 자리에 앉은 채 고개만 까딱, 해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변함없이 예의하고는 무관한 그녀다. "기다리고 있었어. 네가 내일 떠난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아마도 나우케 의사한테 들었겠지. "따라와. 뒷방으로 가자." 뒷방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었다. 류지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뒤에 걸려 있던 저번에도 본 큼직한 태피스트리를 젖히자, 그 안에바로 문이 있었다. 문이 작아서 나는 허리를 숙이고서야 간신히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건, 마치 작은 기도실 같은걸. 정면에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천이 걸려 있고 그 앞에 류지아가 앉는 듯한 자리와 작은 탁자가 마련되어 있다. 탁자 위에는 무엇에 쓰는 것인지 몰라도 짧은 나이프(Knife)가 한 자루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자리는 벽쪽으로 거꾸로였다. 게다가 의자도 없이 완전히바닥에 앉아야 되게 해놨네. 초가 방 양쪽으로 두 개만 붙여져 있어서 좀 어두웠다. "여기 앉아." 류지아가 가리킨 붉은 빛 방석 위에 나는 시킨 대로 주저앉았다. 아버지 말씀이 절대 몸에서 떼어놓는 법이 아니라고 해서 여기까지가져온 검을 등뒤에서 꺼내 왼쪽에 내려놓았다(오른쪽에 내려놓아선안 된다. 숙련된 전사는 그렇게 하는 법이 아니란다). 그런데 기분 나쁘게 방석이 방의 정 중앙에 놓여져 있다. 구경하는사람도 없는데 구경거리가 된 것 같잖아. 싫은 상황이야, 이거. 류지아는 내가 앉자 자기 자리로 가더니 등을 돌려 벽 쪽으로 무릎을 꿇고 돌아앉았다. 그러더니 품안에서 새끼손톱 끝만한 보석 네 개를 꺼내어 앉은뱅이 탁자 위에 차례로 얹어 놓았다. 내가 미르보한테받은 것이나 아버지의 목걸이에 박힌 것처럼 멋지게 휘황한 광채를내지는 않지만, 조촐하게 반짝이는 돌들이다. 첫 번째 것은 보라색,두 번째 것은 노란색, 세 번째 것은 희한하게도 갈색, 마지막 것은타는 듯한 붉은 색이다. 이거 뭔가 흥미진진해지는 것 같애. 탁자 위에는 나이프와 보석 네 개 이외엔 아무 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방 안도 몹시 깨끗하다. 뭔가 분위기가 예전과는 달라(그 때는뜨개질을 하다 말고 내 점을 쳐줬었지). 그러고 보니 류지아가 입은옷도 전에 보던 것과는 다른데. 잠옷처럼 기다란 원피스 치마에 색깔은 온통 갈색뿐이었다. 그리고허리까지 오는 기다란 갈색 머리카락도 아무 장식 없이 풀어놓은 채다. "파비안, 내가 의식을 시작하면 이리저리 움직이거나 말을 해선 안돼. 그리고 이따가 내가 갖다달라고 하면 저 안에 든 술병을 갖다줘." 류지아가 가리킨 쪽을 나는 돌아보았다. 작은 벽장이 있는데 문이닫혀 있다. 그 안에 있겠지 뭐. "그럼 시작하겠어." 나는 이상하게 생각한 점들에 대해 뭐라도 물어 볼 기회를 완전히놓쳐 버렸다. 이제 와서 '잠깐' 이라고 하면 뭐라고 그러겠지? 그나저나 얼마나 오래 걸리는 거야? 발이 저리면 어쩐다? 아니, 등이라도 가려우면 어쩌라구?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어쩌지? 이런 못 물어본 모든 중대한 생각들을 내가 갑작스레 왕창 생각해내고 있는 동안, 류지아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더니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이스나에-드라니아라스, 시간이 열린 이후 최초의 영혼생명의 사슬에서 벗어나 세상을 굽어보는 자들이여그 가운데에서도 인간을 벗으로 받아들이고예니체트리의 딸과 대화하기를 원한그대, *****이여,영원히 평안하며 다시는 수레바퀴에 얽혀들지 않기를. 그대들의 예지를 빌어앞날을 비추어 볼 자격을 가진 자,여기에 의식을 행하고자 무릎 꿇으니친구의 선물에 눈을 뜨고 다가와오래 전에 잊었던 인간의 애증에잠시 동안 발을 담그기를 청합니다."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네. 게다가 '그대, *****이여' 라고 하는 말에서 뭐라고 이름을 말하는것도 같은데 어느 나라 말인지 발음이 요상했다. 한 마디로 내 머릿속에 든 언어체계로는 번역이 되지 않았다. 그, 뭐냐 에렐렐… 어쩌고 그런 거 같은데. 도저히 발음을 옮길 수가 없네. 그런데 내가 얼떨떨해 있는 동안 류지아의 앞에 걸린 흰 휘장에 무슨 변화가 있는 것 같다. 뭔가 조그만 것이 움직이는 듯도 하고… 뭔가 비치는 것도 같고…… 점점 커지는……. 불이다!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을 뻔했다. 정말이다. 하얗게 아무 흔적도 없던 흰 천에서 작은 불씨가 나타나고, 금세 모닥불 만하게 커진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어, 어디서 저게 타고 있는 거지? 그림도 아니고, 비친 것도 아니고, 저 휘장 뒤에뭐가 있나? 나는 일어나서 휘장 뒤를 들여다보러 갈 뻔 했으나 류지아가 당부한 말이 생각나서 간신히 참았다. 류지아는 눈을 감고 잠시 동안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소리내어 웃었다. 힉, 무서워. "… 아무리 섭섭했더라도 장난이 지나쳐요." 누구한테 하는 말이지? 저게 나한테 하는 말일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류지아가 나한테 하는 것이 분명한 말을 입밖에 냄으로서 앞서 말에 대한 내 고민을 말끔히 해결시켜 주었다. "파비안, 병을 갖다 줘." 그러니까, 앞의 말은 나한테 한 말이 아니란 뜻이다. 나는 일어나서 벽장을 열러 갔다. 안에는 목이 긴 유리병이 하나들어 있고 작은 잔도 들어 있었다. 둘 다 필요할 것 같아서 집어들었다. 유리병 안에는 뭔지 모를 주홍빛 감도는 노르스름한 액체가 반쯤담겨 있었다. 음… 갑자기 저게 뭔지에 대해 지저분한 추측이 떠오르지만 생략하기로 하자. "고마워." 류지아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내가 탁자 위에 병과 잔을 내려놓는 소리만으로 그렇게 말했다. 대답을 해야 하나? 아무래도 말하지말라고 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자리로 돌아갔다. 꼭 심부름 시키는 어린애가 된 듯한 느낌인걸, 이거. "… 그럼 일단 술을 한 잔." 류지아가 눈도 뜨지 않은 채 정확히 병을 잡더니 어디 놓았는지도잘 몰랐을 술잔에 정확히 노란 액체를 따르는 것을 나는 얼이 빠진채 쳐다보고 있었다. 귀신같네. 류지아는 정확히 잔이 가득 찰 즈음해서 병을 멈추었다. 아, 굉장히 향기가 강한 술인가 봐. 여기까지 냄새가 난다. 마치 꽃향기 같은, 굉장히 진하고도 향긋한 냄새. 뭘로 만든 술이람? 과일주는 아닌 것 같은데… 에엣? 류지아는 그 술잔을 잡더니 흰 휘장을 향해 휙 부어넣었다. "즈……." 하마터면 뭐라고 말할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 넘겼는데 술이 부어진휘장을 보고서 나는 더 어안이 벙벙해졌다. 전혀 젖지 않았다. 술은 마치 어디론가 빠져버린 것처럼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저 너머에 무슨 마법의 장소가 있나? 공간을 이동하는 결계라도? 그것도아니면… 나는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것임에 틀림없는 건가……. 술이 부어지자 갑자기 한층 커진 불꽃은, 이제 옆에 켜 놓은 촛불은 마치 있지도 않은 것처럼 방을 환하게 밝혔다. 방안 공기는 뭔가에 눌리고 있는 것처럼, 이상한 압력을 지니고 있다. 마을 전체의 공기가 마치 이 작은 방 하나 안에 모여들어 갇히기라도 한 것 같다. "어때요? 얼마 만에 마셔보는 환영주(幻影酒)인지 모르겠죠? 내 생각엔 꽤 오래된 거 같은데……." 류지아, 제발 누구하고 이야기하는지 좀 밝혀랏! 눈감고 혼자 중얼대고 있으니까 기분이 오싹하잖아. 술을 누가 마신다는 거야……. 휘장 속에서 마치 환영처럼 투명한 불길을 내고 있던 그 불덩이가갑자기 훨씬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역시내가 본 그대로였다. "그럼, 일단 봉헌물을 내드려야죠. 마음에 안 든다고 투정은 말고요." 류지아는 계속 혼자서 중얼대더니 오른손으로 첫 번째 보석, 보라색의 것을 집었다. 그러더니 아까처럼 시 비슷한 것을 외웠다.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는오늘은 어떤 날인가흰 눈, 니스로엘드의 중심옛 노래가 새로 태어나며새 노래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음유시인의 아룬드하늘에는 세상을 노래하는 라 트루바 드루에(La TroubaDrooe)고귀한 보랏빛의 봉헌물이어울리는 때." 류지아는 보랏빛 보석을 술을 부을 때처럼 휘장 안으로 가볍게 던져 넣었다. '넣었다'라는 말은 좀 어폐가 있게 들리겠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가 없다. 그 이상 다른 표현이 없으니까. 보석은 휘장 안 불길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이제 놀라지도 않고 그저 눈을 다시 한 번 비볐을 뿐이다. 류지아가 오늘은 아무래도 신기한 걸 보여주기로 작정했나보다. 류지아는 두 번째 보석을 집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그대는 어떤 자인가고귀한 이스나에 가운데서도가장 고귀한 이스나에-드라니아라스생명의 사슬을 벗어난 영혼이자인간의 내일을 들여다보는 자하늘에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키티아니(Kitiani)은밀한 노란빛의 봉헌물이어울리는 자." 마찬가지로 노란 보석도 휘장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저거 한 개 얼마짜릴까. "그대 앞에 이렇게 앉은나는 어떤 자인가인간의 의지로 빚어져영혼의 숨결로 세례 받고미망의 골목을 불빛 하나로 헤매이는오래된 어머니 예니체트리의 딸하늘에는 과거를 기억하는 푸비아니(Fubiani)가라앉은 갈빛의 봉헌물이어울리는 자." 저건 류지아 자신을 이야기하는 건가? '푸비아니'라면 문자 아룬드에 태어난 모양이지? 그럼 저 마지막 보석은……내가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류지아는 마지막 읊조림에 들어갔다. "나와 그대가 이야기하려는그는 어떤 자인가기나긴 운명의 도박에 사로잡힌 그를기다리는 것은 칼날과 방패그가 받은 의지는 파비안느의 불꽃그가 잡은 검은 시간을 베는 손하늘에는 가로막는 자 멸하는 파비안느(Pabianne)열렬한 붉은빛의 봉헌물이어울리는 자." 저게…… 나한테 하는 말인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지만 뭔가 파란만장하다는 예전 예언하고상통하는 데가 있는 것 같애. 파비안느 아룬드에 태어난 건 맞지만, 저렇게 거창스럽게 말하니까정말 뭐라도 된 것 같잖아. 순간, 갑작스런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 자네가 파비안?] +=+=+=+=+=+=+=+=+=+=+=+=+=+=+=+=+=+=+=+=+=+=+=+=+=+=+=+=+=+=+=이번 화에서 제 세계관(?)이 꽤 많이 나온 셈이 되었네요. 제 세계의 1년에는 모두 14달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아실 겁니다. 각 달(아룬드)은 모두 역사적 사건이나 상징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존재 등의 이름을 딴 "....아룬드" 라는 이름들이 붙어 있고,각기 수호성이 있으며 상징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하는 바는 어쩌면 이 속에 많이 들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세계관을 가지는 단편이 하나 올려져 있고, 그리고 다른장편 하나가 또한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장편은아직 올리지 않았지요(사실 많이 쓰지도 못했고요). 그러니 저로선 굉장히 오랜 연원을 지니는 세계관인 셈입니다. 실제로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요. 아주 오랜 시간(처음 설정을 시작했던 것은 벌써 수년 전이지요)을 두고 조금씩 조금씩 쌓아져나간 것들이 지금에 와서 점차 구체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세월의 돌'에 표현되지 않은 많은 것들이 이미 설정되어 있고,언젠가 다른 글들에서 표현해 볼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환상 소설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 아직 모든 것이 완성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표현해 나가고자 합니다. (왜 이 순간, Brood War에 같이 들어 있는 디아블로2 광고편 맨 마지막.... "FOREVER" 라는 대사가 하고 싶은 걸까요....^^;;)잡설이 길었네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763번제 목:◁세월의돌▷ 2-1.은빛머리의 유리카 (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4 22:53 읽음:223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1. 은빛 머리카락의 유리카 (8)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거의 기절할 만큼 놀랐다. 고개를 들어 황급히 두리번거렸지만 새로 나타난 사람은 없었다. 그럼, 저 목소리는? 류지아가 드디어 눈을 뜨더니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인사해. ***** 하고." 으으, 저 이름을 알아먹어야 '안녕하세요 *****씨' 든지 뭐든지 할거 아냐. 어라,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지금 눈앞에는 아무 것도안 보이는데 누가 있다는 거야. [어이, 인사도 안할 텐가? 나는 *****라고 하네. 만나서 반가워.]남자 목소리였다. 그것도 별로 나이가 많게 느껴지지는 않는 서른안팎의 남자. 이걸 어째야 되나. 나는 부지런히 우물쭈물하면서 계속 뭔가 눈에보이는 것이 나타난 게 있는가 두리번거려 댔지만, 노력의 보람도 없이 나는 계속 열심히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우물쭈물할 거야?" …… 류지아가 핵심을 잘 찌르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별 수 없이 어디다가 시선을 두어야 할지 고민하면서 입술을뗐다. "아, 저…… 그러니까 안녕하신지, 그런데 이름을 못 알아듣겠어요." [*****.] "아, 예……." 세상에, 미치겠군. 어떻게 내 귀에 들리고 있는데도 내 입으로는 발음이 안되냐. 류지아가 피식 웃었다. "*****, 당신 이름은 너무 어려워요. 그냥 저 사람한테는 헤렐, 이라고 부르는 걸로 하지요." [헤렐? 나 참, 좀 바꿔도 고상하게 바꿀 수 없어?] "당신 이름이 이미 너무 고상해서 이 난리잖아요. 좀만 더 고상하게 바꿨다간 이름 부르다가 오늘 대화 종치겠어요." [류지아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별 수 없지. 이봐, 젊은 친구, 나는헤렐이라고 하네. 에이 참, 영 어감도 별론데.] "… 그렇군요." 이런 황당한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류지아와 그 보이지 않는 '헤렐'이 부지런히 농담을 주고받는 불길한(?) 상황 속에서 열심히 나 나름의 타개책을 구상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집에 좀 갔다오면 안될까요?' 그런 다음왔던 길로 쏜살같이 되돌아가서 돌아오지 않는다거나, '류지아, 헤렐하고 좋은 시간 보내. 안녕-' 그런 다음에 내일 아침에 떠날 걸 오늘저녁에 떠나버린다거나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나 류지아와 '헤렐'은 오래 노닥대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그래, 헤렐이고 '베*ㄹ이*'고 간에('헤렐'이 생각해 낸 두 번째의 좀더 고상한 발음 방법은, 류지아가 예상한대로 절반도 알아들을 능력이 없었다), 중요한 게 그건 아니니까 본론으로 그만 들어가야겠군.] "잘 생각했네요, *****. 시간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니까." 휘장 속에 불타고 있는 불, 저기서 나는 소린가? 그 쪽으로 고개를돌리고 한참 귀를 기울이며 고민하는 참인데, 내 왼쪽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 [파비안, 이름 좋군.]나는 불쌍하게도 완전히 혼란상태에 빠져서 어딘가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요, 좋아요, 이야기하죠." [그런데 왜 자네는 허공을 보고 이야기하나?]아니, 그럼 지금 나한테 무슨 대안이 있단 거야? 약이 올라서 방금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는데, 갑자기 뭔가 희끄무레한것이 망막에 잠깐동안 맺혔다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 기, 기분 더 나빠. "그래요 헤렐 씨, 당신이 무슨 안 보이는 귀신이라고 쳐요. 그래도가능하면 한 자리에 가만히 있어서 저를 좀 도와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제 혼란을 이해하신다면 말예요." [난 귀신이 아닐세, 이 친구야.]아니면 뭔데? "아, 알았다구요. 그럼 신성한 영혼(내가 생각해도 좀 지나치게 멋진 말이었다)." [그건 괜찮군 그래. 그럼 요기, 류지아 왼쪽에 앉아 있지 뭐.] "나한테 몸 붙이지 말아욧!" [아, 알았어. 그래그래.]이거야 정말, 뭐가 뭔지. 류지아는 정말 붙어 앉는 게 싫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 왼쪽을 노려보고 있어서 나는 그녀 눈에는 정말 보이는 모양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판단을 내리면서도 내 머리가 정말 이상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있다. [그래, 이제 우리 무슨 이야기를 할까?] "부른 용건이 있는데, 무슨 이야기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알았으니까 성질 부리지 마, 류지아.]뭔가 나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눈을 천장을 향해 굴리면서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당신은 뭐죠? 귀신도 아니랬고, 뭐하는 존재죠?" [아, 나? 나는 류지아 시중들어주는 별 거 아닌 영혼인데, 요새 류지아가 얼마나 무서운지 말도 제대로 못 붙이고 있어서 …….] "헤렐, 말을 해도 그렇게 밖에 못해요?" 저 둘은 뭐하는 사이람. "영혼… 이라면 귀신 맞잖아요?" "파비안, 헤렐은 '이스나에'야. 그것도 이스나에-드라니아라스, 즉귀족 이스나에라고 불러야 될걸. 그런데도 행동하는 건 저 모양이니,너 아니라 누구래도 이 소릴 믿겠어?" "이스나에도 귀신의 일종 아냐?" [아니라니까!]귀신인지 이스나엔지 뭔지 몰라도, 귀신이라는 말에 무지 민감한것만은 틀림없었다. 이스나에라면, 내 상식으로는 윤회해서 돌아오지 않고 독자적으로살아가는 영혼, 그러니까… 아, 그래서 아까 생명의 사슬을 벗어난자라고 불렀구나. 그런데 귀족 이스나에는 또 뭐냐. "아, 그래요. 어쨌든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이스나에인가 뭐, 그런것이라고 해 두고, 그럼 당신이 예언을 해 준다 이거죠? 일단 빨리들어보죠." 내가 무슨 배짱으로 보이지도 않는 괴물한테 이렇게 태평하게 말을하고 있담. "파비안, 저래뵈도 나이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아. 하는 짓은 꼭 어린애……." [아잉, 류지아양~ 너무 미워하지 말아잉~]… 닭살이 온 몸에서 비참할 정도로 솟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처음의 활기 있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에서 저런 소리로 바뀔 수가 있는 거지? "헤렐, 그런 식으로 정신 공격을 해도 소용없다구욧!" 류지아는 얼굴이 벌개져서는 소리를 질렀다. 아무래도 헤렐은 자주저런 짓을 하나보다. [헷헷, 류지아 말이 많아. 나도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잘 모르겠으니까. 뭐 하지만, 적어도 너희 나라가 생긴 때보다는 더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지. 그러니까 너희 나라보다 나이가 많아, 난. 이스나미르의 기초를 쌓은 것이 귀족 이스나에들이라는 것은 너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 나도 그 중의 하나였다구. 험험.]건국의 이스나에? 음, 드는 생각은 한 가지 밖에 없군. 어쩌다가 저렇게 비참하게(?) 전락했담. 나도 우리 나라의 이름인 '이스나미르'가 '이스나에들이 세운 나라'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물론 '이스나에'라는말에 '나라'를 더했는데('세웠다'는 일단 빼고라도 말이다) 왜 저런말이 만들어지는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내가 모르는 무슨조어법이겠거니, 하고 하여튼 그렇게 알고 있다. [어쨌든 류지아가 자기 이외의 사람 앞에서 나를 부르는 것을 본것은 처음이야. 게다가 희귀한 하쉬 미오사 술까지 만들어서 대접하고 말이지. 모르긴 해도 자네는 뭔가 대단한…….]헤렐은 갑자기 말을 끊었다. 방 안에 불안한 기운이 감도는 느낌,언젠가 들은 일이 있다. 이게 바로 가까이에 있는 이스나에의 감정이옆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는 바로 그것인가? 한참만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은 짓눌린 듯한, 놀란 사람의목소리 같다. […… 자네… 그 검, 어디에서 났나?] +=+=+=+=+=+=+=+=+=+=+=+=+=+=+=+=+=+=+=+=+=+=+=+=+=+=+=+=+=+=+=몇 분한테서 쪽지가 와서 기분이 좋습니다.. ^^물론, 메일이나 메모도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764번제 목:◁세월의돌▷ 2-1.은빛머리의 유리카 (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4 22:53 읽음:221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1. 은빛 머리카락의 유리카 (9) 아, 이 검. 어디가나 화제가 되는 녀석이로구만. 나는 친절한 마음에서 검을 바닥에서 집어 들고는 헤렐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방향 - 즉 류지아 왼쪽 - 으로 잘 보이게 내밀어 주었다. [아, 아냐, 난 이미 자네 옆에 와 있다구. 허어, 이거 신기한데.] "야, 약속을 했으면 지키라구요…." 내가 불평을 해 보았자 소용없었다. 류지아는 그저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보고만 - 어쩌면 헤렐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있을뿐 별다른 참견은 하지 않았다. 보이지도 않는 녀석이 내 근처 어딘가에서 은밀하게 얼씬거리고 있을 때의 그 이상한 기분 알아? [놀랍군. 굉장히 강력한 힘이 안에서 잠자고 있는데. 나오고 싶어서 온 몸을 이리저리 꼬고는 있지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디 그 힘을 해방시켜 줄 힘이 있어야 말이지.]뭐, 뭐야? …… 표현은 좀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 검은 대단한데 내가별 볼일 없어서 지금 능력 발휘가 안 된단 거야? "…… 예요?" 내가 머릿속에서 떠오른 말을 그대로 해치우자 헤렐은 흠흠, 하는소리를 내었다. 이번에는 내 뒤쪽에서 말이다. 정말이지 신경 쓰이는귀신, 아니 이스나에야. [그래. 저 검은 정말 때를 잘못 탔군. 좀더 멋진 시절에 깨어서 돌아다닐 일이지. 잠을 너무 오래 잤다고. 요즘 시절에 뭐 재미있는 일이 있어야 말이지. 재미있는 주인은 물론이고.]이거 기분 나쁜데. "아니, 그래도 저 검은 나 말고는 만질 수조차 없는데요. 내 검임에는 틀림없다고 보는 편이……." [그거야 그렇겠지. 내가 봐도 네 거 맞으니까. 아까 한 말은 농담이고, 내가 때를 잘못 탔다는 것은 주인이 좀 능력이 생겼을 때 만났더라면 저렇게 몸을 꼬면서 고생할 필요도 없었을 거란 말이야.]이제와서 그렇게 말한다고 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애? 검이 몸을꼰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이상해져 버렸잖아, 이 영감귀신아. "아, 알았으니까,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되죠?" [검하고 수준을 맞춰줘야지.] "무슨…! 그쪽이 물건인데 나한테 맞출 일이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구. 지금 별 것 아닌 것처럼'물건'이라고 부르지만, 저런 녀석이(나로선 '녀석'과 '물건' 가운데어느 쪽이 더 별 것 아니라는 뜻인지 판단이 안 서는걸) 너를 택한걸 감지덕지하게 생각하는 편이 좋을걸. 저 검의 나이는 거의 내 나이하고도 맞먹는 것 같은데.] "에엣?" [안 그런가 검군?]헤… 저건 내가 검한테 쓰는 말투 그대로잖아. 그런데 헤렐이 이어서 하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아, 오래되었다고 고물이라고 욕하진 않았어. 아니야, 아니라구-그렇게 화내지 말란 말야. 이 친구가, 늙더니 아주 성깔만 더러워잖아? 뭐? 아, 그러길래 누가 늙으래? 늙는다고 다 그런 게 아니야. 나를 봐, 늙어도 훌륭한 인격 그대로잖아.]… 저 늙은이(?), 설마 내 검이랑 이야기를? 그건 그렇고, 훌륭한 인격이 무슨 뜻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군. [아이구 그래, 알았어. 네가 저런 주인이랑 다니느라고 스트레스쌓이는 건 알겠는데, 그걸 나한테 풀 필요는 없잖아- 난 죄가 없으…아, 뭐야? 주인은 말도 못 알아들으니 화를 내 봤자 소용없다고?]… 나는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같이 소외된 대상인 류지아한테나 말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류지아, 나 이러다가 오늘 밤 새워야 되는 건 아니겠지? 난 내일새벽에 떠날 참이라구." "헤렐, 적당히 해요. 당신의 손님은 저 검이 아니고 이 친구야. 아무래도 오늘은 정말 너무 자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잖아." 나의 할 말 없어서 아무렇게나 뱉은 듯 하면서도 매우 시의 적절했던 말에, 역시 아주 중요하고도 필요 불가결한 대답을 해 준 류지아에게 나는 감사의 뜻으로 싱긋 웃어 보였다. 확실히 영감 귀신은 류지아의 말에는 반응이 있었다. 헤렐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아, 아닛? 내가 지금 헤렐이 고개 끄덕인 걸 어떻게 알았지? [그래, 일단 이 검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주지.]나는 알 수 있었다. 헤렐이 내 검에 손을 대자(그것도 칼집 째인데도) 그의 모습이 내눈에도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검에 닿은 손과 팔 부분이 보다 확실하게 보인다면, 검에서 먼 발치께는 연기처럼 스르르 없어지는 듯한 모양이다. 아니, 정확히는 귀신처럼(이렇게 말하니 평소에 귀신을 많이 본 사람 같군). 헤렐은 상당히 젊어 보이는 얼굴, 큰 키와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상당한 미남자다. 이스나에라는 직업,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는 거라니, 꽤 괜찮은걸. 그건 그렇고, 이런 걸로 봐도 이 검한테 정말 뭔가 능력이 있긴 한모양이었다. [이 늙은 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멀리 융스크-리테의 동굴집에서무려 200년 가까이 썩고 있다가, 어떤 사냥꾼 친구가 무식한 방법으로 해방시켜 줘서, 그 친구랑 같이 5년동안 대륙을 떠돌다가, 이제서야 겨우 주인을 만나서 이렇게 힘들여 목매달고 있다는군. 이상 검군의 이야기 통역 끝.] "토, 통역이었어요?" 헤렐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통역이라는 사실이 놀랍긴 한데… 저건 다 아는 사실이잖아. 그래서 나는 말해 주었다… "그건 전부 아는 얘긴데요." [아, 그래? 그럼 다음 이야기. 이 검한테는 쌍둥이 여동생이 있다는데?]으…… 검한테 무슨 동생, 그것도 여동생이 있냐! 아니, 동생은 원래가 있을 수 없으니까 그게 여동생이라도 이상할것은 없는… 젠장, 이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게다가 쌍둥이는 또 뭐야? "파비안, 쌍둥이 검이라는 말도 못 들어보았어? 훌륭한 장인들은가끔 그렇게 검을 만들기도 하지." 오랜만의 류지아의 참견이었다. 그래, 그건 뭔가 조금 말이 되는 듯도 한데. "그래, 그럼 그 동생, 아니 여동생…은 어디 있대요?" [모른대.]정말이지…… 장난하냐. 다행히 헤렐이 다음 말을 덧붙여 주었다. [검군 말이, 자기의 속성이 화(火)와 풍(風), 즉 두 개의 남성성이라면 여동생의 속성은 지(地)와 수(水), 두 개의 여성성이라는군. 대비되는 양(陽)과 음(陰)의 성질을 가진 함께 태어난 검, 그래서 여동생이라고 불렀다는 거야. 검한테 실제로 성별이 있는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군.]솔직히 그런 걱정은 안 했다. 그러나 저것은 알아들을 만한 이야기였다. 세상의 현상들을 2대 극성(polarity)으로 나누면 여성과 남성이고, 3대 특질(quality)로 구분하면 활동, 고정, 변통이며, 4대 원소(element)로 나누면 불(fire), 흙(earth), 공기(air), 물(water)라는 이야기 정도는 나도알고 있다. 그런데 동시에 태어났다면, 혹시 그 여동생을 만나면 자기가 누나라고 주장하는 거 아닐까? 그런 놈들을 자주 본 일이 있는데. [자긴 여동생이 아니고서는 절대 파괴될 일이 없다는 거야. 그 점에서는 안심해도 좋다는군. 자기가 이렇게 튼튼한 것이 자랑스럽지않냐는데?] "자, 자랑스럽군요…. 그럼 여동생… 한테는 진대요?" 내 말투는 마치 어린애들이 '누구랑 누구랑 싸우면 누가 이겨? 누가 더 세?' 하고 물어대는 거랑 똑같았다. 나도 이런 식은 싫지만 당장 다른 방식이 떠오르지 않는 걸 어떡해. [아냐. 두 개의 검은 우열을 가릴 수 없도록 만들어졌을 뿐더러,자기도 아직 싸워본 일이 없으니 어느 쪽이 강할지는 잘 모르겠대. 아, 물론 누가 이기냐 하는 점에선 그 검을 든 사람이 얼마나 능력있는 검사인가도 '아-주' 중요하고 말이야. 어쨌거나 푸른 기운을 가진검을 만나면 제발 조심해 달래. 평상시에는 지금처럼 대화가 되질 않으니 미리 말해 둔다나 뭐라나.]푸른 기운이라니, 내가 그런 것을 알아볼 능력이 있었으면 네가 몸을 꼬도록(이 표현은 싫지만…) 내버려두고 있겠냐. 게다가 능력 어쩌고 하는 부분은…… 아무래도 나 들으라고 하는소리 같은데. 아무래도 앞으로 검한테 '너' 또는 '…군' 이라고 부르면서 중얼대는 것을 자제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들을다 알아들어 왔다면 별로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애. 어느 날 열받아서'나 네 검 안해' 그러면 나만 곤란해지는 것 아닌가(아무래도 그런일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게다가, 나이도 많다는데 '너'라고 불러도 되는 거 맞나? "그럼 좀 물어보아 주세요. 나를 만난 뒤로 내가 그… 기분을 상하게 한 일이 있는지." [음…… 별로라는군. 네가 자기의 능력을 밖으로 이끌어 내 줄 수있도록 좀 수련을 열심히 해서 전투시에 자기 힘을 다 보여주면서 싸워보는 것이 소원일 뿐이라는데. 아, 그리고 네가 평상시 괜히 혼자서 중얼중얼 대면서 자기한테 말을 잘 거는데…….]으……[그거 몹시 재밌다더군. 개의치 않고 듣고 있으니 앞으로도 심심지않게 계속 했으면 좋겠다는데.]… 이상한 취미의 검임에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점을 물어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났다. "아, 참 이름이 뭐래요?" 내가 듣기로, 이런 대단해 보이는 검들에는 항상 이름이 있기 마련이다. 정말 대단한 검이라면 말이야. [뭐, 이름?]헤렐은 잠시 조용히 있더니 혼자서 키들거리기 시작했다. 으… 무서우니까 제발 좀 그만둬줘요. +=+=+=+=+=+=+=+=+=+=+=+=+=+=+=+=+=+=+=+=+=+=+=+=+=+=+=+=+=+=+=곧, 끔찍스런 이름이 등장합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765번제 목:◁세월의돌▷ 2-1.은빛머리의 유리카(10)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4 22:54 읽음:222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1. 은빛 머리카락의 유리카 (10) [킥, 크크크…… 하, 그게 그러니까… 자기 이름이 '멋쟁이 검'이라는데?] "풉!" 나는 뒤로 나자빠질뻔 했다가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머, 멋쟁이라니…… '무식거대'나 '오우거 슬레이어(Ogre Slayer)'뭐 이딴 거라면 혹시 모를까, 도대체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야 할 거아냐, 이 친구야- 아니 이 친구를 만든 대장장이야. "…… 혹시 여동생은 '이쁜이 검'이래요?" [이쁜이 검? 우하하하하…….]자세한 사정을 모르긴 해도, 헤렐은 지금 '멋쟁이 검'한테 일종의꼬집힘 비슷한 것을 당한 모양이다. 간신히 웃음을 멈추더니 그는 말했다. [멋쟁이 검… 푸훅, 푸힛힛… 이란건 농담이고, 아, 아니 농담이아니라 별명이래고, 본래 이름이 좀 거창해서 그랬다는 거야. 본래이름은 '영원의 푸른 강물을 가르는 찬란한 광휘' 라는데.]이쯤 되면 안 물을 수 없지. "동생은요?" ['순간의 붉은 화염을 삼키는 싸늘한 파도'.]귀한 집 남매였군. 이름 긴 건 무조건 귀족이라는 이상한 고정관념을 가진 나는 그렇게 단정짓고는 예의바르게 둘(검과 헤렐)을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냥, 멋쟁이 검, 이쁜이 검으로 부르도록 하죠." [뭐, 좋을 대로. 자, 그럼 늙다리 검군과의 대화는 이만 접고…….]헤렐이 검에서 손을 떼자마자, 그렇지 않아도 희미하던 그의 모습은 마치 물로 씻은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으아, 새삼스레 낯설어라. [파비안느 아룬드에 태어난 파비안. 참으로 이름 한 번 잘 지었군그래. 어머니 작품인가?] "글쎄요……." 모르니 글쎄 라고 말할밖에. [뭐, 어쨌든 좋아. 제8아룬드 파비안느, 여름 중에서도 가장 폭염을 자랑하는 때로군. 자네의 운명과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어. 자네의검과도 확실히 어울리는군.]더울 때 낳느라 고생했다고 푸념만 하시던데요, 어머닌. [파비안느 아룬드의 의미는 자네도 알고 있겠지?] "의미라니요? 그저 여성 전사를 의미한다고 밖에는……" 내가 말을 채 전부 맺기도 전에 헤렐의 입에서 청산유수로 말이 쏟아져 나왔다. [자신의 얕은 능력을 지나치게 신뢰함, 넘치는 자신감이 높은 성취혹은 지독한 패배를 부름, 자신의 사명에 대해 지나친 환상을 지님,타인을 위해 남김없이 모든 것을 희생함, 죽음의 고비를 알지 못하는사이에 그냥 지나침, 중대한 잘못을 영영 깨닫지 못함, 어려운 고비를 빠르게 돌파함, 적에게 강력한 피해를 줌과 동시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음, 잘못을 죽음으로서 보상함, 온화함을 잃음으로서 중요한 것을 놓침.]으아아… 머리 터지겠다. "제 머리 터졌어요." [아니, 터지다니, 그거 큰일이군. 왠가?] "…… 그 긴말을 한꺼번에 듣느라고요." 헤렐은 농담은 혼자 다 하면서 남의 농담은 잘 못 알아듣는 것 같단 말야. 오래 살면 저렇게 될 수도 있겠지, 뭐. [뭘, 다른 아룬드들도 다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자네는 자네가 태어난 아룬드의 의미 정도는 적어도 정확하게 알아야지. 그리고터진 머리는 빨리 꿰매는 편이…….] "…… 터진 머리는 됐고요, 그렇지만 그렇게 한꺼번에, 그것도 빨리 들으니까 알아들을래도 못 알아듣겠어요(말되나?)." [그래? 그럼 다시 한 번 말해줄까? 자신의 얕은 능력을 지나치게신뢰함, 넘치는 자신감이…….] "으아아, 됐다고요!" 나는 너무 때가 늦기 전에 황급히 헤렐의 말문을 막았다. 저 하는행동이나 기억력으로 보아 방금 한 말을 처음부터 글자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그대로 말할 가능성이 크니까. 나도 기억력 하면 남들한테지지 않지만 저 '이스나에'라는 자들의 기억력을 따라가려면 한참 먼것 같다. [그래? 뭐 그렇다면야. 그럼 얘기를 계속하지.] "그게 좋겠어요." 이럴 때는 빨리 대답하는 것이 속 편했다.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구만?] "… 이미 아는 이야기는 해봤자 복채도 안 줘요." 이 영감 귀신이 류지아보다 더 야무질래나. [호오, 그런가? 그럼, 남쪽으로 갈 것이라는 것도?]나는 지지 않고 대답해 줬다. "여기가 제일 북쪽인데 하얀 산맥 넘어가지 않는 한 남쪽으로 가지어디로 가요?" [세르무즈로 가야 한다는 것도?]그제야 내가 모르는 사실이 나왔으므로 나는 적절한 대답을 했다. "세르무즈?" [아하, 별로 갈 생각은 없었나 보군 그래. 그렇지만 내가 봤을 때자네는 세르무즈로 가야 해. 거기에 자네의 볼일이 있어. 자네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내가 그 끔찍한 동네로는 왜 가야 하지? 서, 설마 보석을 찾아 세르무즈까지 가라고? "세르무즈, 어디쯤요?" 나는 우리 나라와 세르무즈의 국경 근방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물었지만 내 희망은 완전히 빗나갔다. [융스크-리테, 그곳으로 가게.] "거긴 이 검이 발견되었다는 데…… 아, 아니 거긴 세르무즈 서남쪽 끝이잖아욧!" 큰일났다. 융스크-리테가 있는 스조렌 산맥은 세르무즈를 완전히가로질러 가야만 다다를 수 있는 곳에 솟아 있다. 세르무즈는 수도를비롯한 중심지 거의 전부가 스조렌 산맥 아래 위치한 세르네즈 고원에 있다고 들은 일이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세르무즈의 중요한지역은 거의 다 지나가야 한다는 말이잖앗! [왜, 거기가 어때서. 나라 자체의 의미도 '세르네즈(내가 잘 모르는 말로 이것은 '여름'이란 의미라고 한다. 언뜻 듣기론 이스나에들의 말이라고 한 것도 같은데. 멀쩡한 '여름'이라는 말 내버려두고 왜저렇게 복잡하게 부른담)의 꽃'이라는 뜻인데다, 비길 데 없이 아름다운 수도 하라시바- 꽃의 하라시바에 대해서 혹시 들어 봤어? 거기가 얼마나 멋진 데라고. 일명 '세르네즈의 화관'이라고도 하는 꽃의도시지. 요새 여기 이스나미르 촌구석에 박혀 있느라 가본지는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그곳에 가득한 천상의 꽃들의 향기는 잊을 수가 없다구.] "이스나미르 촌구석이라니, 말 다했어요?" 자라오면서 내가 별달리 애국자라고 생각해 본 일은 없지만, 그래도 이웃의 세르무즈하고 비교하면서 저런 식으로 하는 말은 못 참는다. 전쟁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서로 아웅거리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세르무즈의 마브릴 족이 얼마나 우리 엘라비다 족을 무시하는가에(물론 엘라비다가 마브릴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도 이에 만만치않다) 대해서는 엘라비다의 피를 받은 이상 모를 수가 없다. 내가 비록 이 하얀 산맥 아래 촌구석에 사는 잡화점 점원이지만…… 아냐,이젠 잡화점도 없군. [하핫, 이스나미르도 좋은 곳이지. 내가 그 기초를 다질 때 같이있었는데, 오죽하겠어?]으음…… 이걸 넘어가 줘야 해? 류지아가 참견했다. "이스나미르의 수도 달크로즈도 '순백의 보석'이라고 불릴 만한 가치는 있는 곳이라구요." [아, 알았어. 이스나미르의 두 애국자님. 내가 말을 실수했어. 참으라고들.]헤렐은 대충 웃어가며 위기를 모면하려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심정은 정말로 착잡했다. 내가 마브릴 족을 이렇게 좋아하질 않는데마브릴들이라고 엘라비다를 좋아할 리가 없다. 왜 이 두 나라는 이렇게 판이하게 종족이 달라서 말썽이람. 아, 하긴 똑같은 마브릴 족이 세운 옆 나라 '로존디아'하고 세르무즈를 붙여 놓으면 둘이 싸우느라 옆에 이스나미르 사람은 본 척도 안한다던데,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마브릴 족들의 성격이 나쁜 탓이지,우리 탓은 아냐. …… 내 좋을 대로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이건 거기 가서 부딪칠문제들과는 순전히 별개의 얘기로군. "알았어요. 세르무즈로 가라 이 말이죠. 가서 혹시 죽거나 해서 못돌아올 수도 있나요?"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알아. 다 네 할 탓이지.]뭐야, 저 따위로 말하다니. 예언을 하려면 그런 걸 확실하게 예언해 줘야 할 것 아냐…… 그렇지만 저렇게 안 보이는 친구를 상대로불평해봤자 별 수 없겠지. "알았으니까, 또 해 봐요." … 정말이지 애들한테 서툰 묘기 시켜놓은 어른들의 기분으로 나는그렇게 말했다. [융스크-리테에서 너는 너를 도와줄 사람을 만날 거야. 그것도 아주 중요한 사람, 정말 중요한 사람이로군. 어디 보자…… 하긴, 넌이 마을을 나가자마자도 이미 중요한 사람을 한 명 정도 만날 것도같은데?]헤에, 그래요? [어쨌든 그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잘 잡아. 그 사람들을놓치면 네 임무는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어.] "잠깐, 임무라니요?" 난 분명 저 이스나에에게 내 임무에 대한 이야기는 한 적이 없는데. 하긴 내 옷 안에 그 목걸이를 걸고 있긴 하다. 혹시 투시력 같은것도 있나? [자네 옷안의 목걸이에 대한 이야기야.] +=+=+=+=+=+=+=+=+=+=+=+=+=+=+=+=+=+=+=+=+=+=+=+=+=+=+=+=+=+=+=새로 추천해 주신분들이 계시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추천글 하나하나가 제겐 큰 힘이 된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876번제 목:◁세월의돌▷ 2-1.은빛머리의 유리카(1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5 21:45 읽음:221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1. 은빛 머리카락의 유리카 (11) 헉… 정말 있었다. 나는 상관없지만…… 나는 갑자기 내 옆의 류지아가 심히 걱정되기시작했다. 헤렐은 개의치 않는 듯 유쾌하게 말을 이었다. 이스나에들은 원래저렇게 항상 기분이 좋은 걸까? 아니면 혹시 내가 방금부터 걱정하기시작한 사실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것은…… 설마 아니겠지. [세르무즈에 가면 그 임무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줄 사람도 만날 수 있을 거야.] "혹시… 그 사람이 마브릴은 아니겠지요?" 이렇게 묻는 걸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엘라비다 족인가 봐. [뭐, 모르겠지만, 장소가 세르무즈다 보니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젠장, 저런 대답은 안 듣는 편이 낫겠다. 기분이 한결 잡쳐지는데. [그리고…….]아까의 장난스런 어투와는 달리 헤렐의 어조가 약간 진지해졌다. 어디까지나 아까에 비했을 때 '약간'이다. [자네에게 닥칠 대단히 고통스런 난관들이 내 눈에 보이는군. 몇가지는 자네 힘으로 헤쳐나갈 수도 있으려니와, 마지막 것은…… '마음'의 문제라, 어떻게 될지 나도 장담할 수가 없군.]마음의 문제란 무슨 말일까. 게다가, 이 일을 그렇게 심각하고 어려운 일일 거라고 생각한 일이난 없는데. 역시 내게 제일 심각한 임무는 목걸이를 잃어버리지 않는거야. [그리고 그 난관 이후에도, 고통스러운 문제가 있을 터네. 자네의임무에는 이상하게도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의 고통이 많이 닥칠 것으로 보이는군. 임무를 끝낸 뒤에도 이것을 이기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어.] "왠지 겁주는 것 같은데요." [오, 그럼. 나는 지금 경고하고 있는 거네. 겁을 먹는 것도 당연한일이야.] "그… 렇군요. 상당히 애매하게 들리긴 하지만요." [애매하다라. 하긴 사실, 자네 운명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 못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네.] "이유요?" 류지아가 언제부터인가 내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다. [뭔가가 가로막혀 있어. 워낙 많은 것들이 얽혀 있어서 정확히 알아볼 수가 없는 데다 그것조차도 안개 속처럼 희미하군. 다양한 경우들이 모두 동일한 만큼의 가능성을 가지고 자네를 기다리네. 그 얽힌색실들을 풀어내고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그림으로 짜내는 것을 할사람은 어떤 다른 사람일 것 같군.] "그렇지만…… 류지아의 예언력이 나하고 연결되어 있다고 했어요." 내가 그 혼수상태와 같은 상황에서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했던 말이다. 내가 알기로 예언력이라는 것의 근원은 소멸되지 않고 되풀이되는 인간의 오래된 영혼이다. 그리고 전생에 어떤 이유에선가 영혼이 얽혀든 일이 있는 사람의 운명을, 마치 언젠가 읽은 소설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예언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도 종종 들어본 일이 있다. 마치 자석의 양극처럼, 서로 잡아당기는 운명을 지닌 사람들 말이다. 헤렐은 잠시 말이 없었다. 류지아 역시도. 내가 뭔가 잘못 말한 걸까. […… 사실 내가 이만큼이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류지아의 예언력이 자네의 기운과 맞아떨어지는 점들이 많기 때문이긴 하네.]헤렐이 한참만에 입을 다시 열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네한테는 류지아보다 더 정확하게,그리고 강하게 운명이 연결된 예언자가 있는 모양이네. 자네가 아직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자의 엄청난, 심지어 나조차도 꿰뚫어 볼 수 없는, 그런 지배력이 자네한테 이미 드리워져 있기때문에 다른 예지력이 뚫고 들어갈 틈이 없네.] "그럼, 류지아는?" [지금까지 내가 본 바로는 자네와 같이 운명의 스케일이 넓은 자의미래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녀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야. 어딘가에류지아 말고 다른 연결자가 분명히 있네. 어쩌면 자네의 새로운 연결자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이전까지 자네와 연결되어 있던 류지아가튕겨난 것일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자네의 운명은 최근에 꽤나거창하게 뒤바뀌었나 보군.]아……. 나는 류지아의 얼굴을 보았다. 미동조차 없이 그대로 내 쪽을 보고 있는 그녀. 헤렐은 저런 말을 아무 감동도 없이 그냥 해버리는군. 류지아와 매우 친한 것처럼, 그렇게 말해 놓고서도. 예언자에게 있어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이 어느 정도 자존심 상하는 말인 걸까. 물론 내 운명이 최근에 완전히 뒤집힌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그렇군요." ['소중한 것을 잃은 후에야 임무를 완성한다', 이것을 피하려면 버릴 것을 버려야 하는 순간을 알아야만 하네. 잊지 말게나. 이것이 내가 해 줄 마지막 말이지. 버려야 하는 것은 과감하게 버려. 자네 마음을 믿고 따르게.]끝까지 애매한 말로 말을 맺은 헤렐은 다시 기운찬 목소리로 바뀌었다. 나와 류지아가 말문이 막힌 채 서로 쳐다보고 있는 동안에도. [이제 끝. 그럼 류지아, 이만 갈 테니 약속한 선물 줘.] "말 안 해도 줄 거니까 보채지 말아요." 류지아는 드디어 나에게서 눈을 떼었다. 그런데 아까 이미 보석을 네 개나 꿀꺽(?) 했잖아. 거기다가 뭘 또달라는 거지? 류지아는 무릎 꿇은 채로 몸을 일으키더니 탁자 위에 놓아 둔 나이프를 집어든다. 뭐야, 뭘 하려는 거야? 류지아는 그 칼을 목께로 가져갔다. "류, 류지아!" 류지아는 내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나이프를 잡지 않은 왼손으로 긴 머리채를 모아 쥐었다. 왼쪽 어깨로 머리채를 늘어뜨린 채 칼날을 가져갔다. "아, 아니……." 투둑. 류지아의 손에는 잘려 나간 머리채가 들려 있다. 거의 목께에서 완전히 끊긴 짧은 머리카락들이 힘없이 등 뒤로 흩어졌다. 머리를 자른 류지아는 그렇지 않아도 작은 얼굴이 더욱 초라해 보였다. 내가 놀라서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류지아는 잘라낸 머리채를한 번 꼬아 묶더니 여전히 타고 있는 휘장 속의 불로 던져 버렸다. 결과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 불에 제대로 닿는가 했더니 그대로사라져 버렸다. "왜, 머리카락을……." 그제야 헤렐이 말한 선물이 나는 무엇인지 깨달았다. 도대체 인간의 머리카락이 이스나에에게 왜 필요한거야? 도대체 무엇에 쓰겠단 거야? 머리카락… 그것도 저렇게 오랫동안 정성 들여 기른 것을, 별 것아닌 그런 것, 이라고 말할 만한 용기가 나에게는 없다. "헤렐, 아니 이런…… 별다른 이야기를 해주지도 못하고서 이런 걸요구해도 되는 거야?" "이미 계약한 거야. 계약은 어길 수 없어. 어떤 경우에든 그렇지만, 특히 예언자가 계약을 어기는 것은 치명적이지." 류지아가 대신 대답하는 말소리다. 이런…… 류지아도 이런 결과가올 줄은 몰랐던 건가? 이번에는 왜인지 수다 떨기 좋아하는 헤렐이아무 대꾸도 없었다. "헤렐! 헤렐! 나하고 이야기좀 하자구요! 어디 있는 거야?" "그는 갔어." "뭐라고?" 나는 정신없이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그 때 휘장 속의 불꽃이 갑자기 꺼졌다. 방안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헤렐! 이것 봐, 헤렐!" "이미 갔으니까 그는 못 들어. 소리질러도 소용없으니 조용히 해." 류지아의 언제나처럼 차분한 목소리. "아니, 처음에는 인사도 안 하냐고 하더니, 이번엔 인사도 없이 가버려? 게다가 경우가 없어도 분수가 있지, 계약을 했어도 좀 조정할수도 있는 거 아냐! 나도 모든 손님한테 물건값을 다 받지는 않는다구. 게다가 물건에 하자가 있을 땐 깎아주는 날도 있고, 반품도 받아준단 말야! …… 그 예언 반품하자!" 이게 제대로 예를 들고 있는 거 맞아? 어쨌거나 류지아는 별 반응이 없는 얼굴로 일어나더니 촛대로 다가가 손을 휘둘러 촛불을 껐다. 주위는 완전히 캄캄해졌다. "나가자." 류지아는 앞장서서 문을 밀어 열었다. 밖의 등불로 돌아선 류지아의 뒷모습이 역광을 받아 빛난다… 어깨에 닿지도 않게 달랑한 그녀의 어린아이처럼 초라한 머리카락. 뭔가 착잡한 심정이 되어 나는 말을 잊었다. +=+=+=+=+=+=+=+=+=+=+=+=+=+=+=+=+=+=+=+=+=+=+=+=+=+=+=+=+=+=+=제일 처음에 올렸던 1장1편의 조회수가 1000을 넘었다는 사실을발견했습니다...^^;너무 기쁘네요. ^^; 다 여러분이 읽어주신 덕택입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877번제 목:◁세월의돌▷ 2-1.은빛머리의 유리카(1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5 21:45 읽음:220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1. 은빛 머리카락의 유리카 (12) 내 착잡한 심정 속에는 '저 모습을 보고 나우케 의사가 뭐라고 하면 어쩌나' 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대안이 있다면, 내일 아침에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잽싸게 마을을 뜨는 거다. 아니, 더 나은 대안이 있다면 지금 밤도 늦었는데, 당장 싸놓은 짐들고 사라지는 거다. 이미 할 만한 데 인사도 다 해놓았겠다, 못할 것도 없지.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지금 신데볼프 씨 집의 문을 나서고 있다. 벌써 새벽이 가까워 오는 시간, 등을 가로지르는 긴 끈을 대각선으로 늘인 가죽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정말 내가 18년이나 살던 동네를 떠나면서 이것밖에 가져갈 것이 없다는 사실을 조금은 아프게 느끼고 있다. 내 짐이래봐야 조그만 배낭 속에 든 담요, 갈아입을 셔츠와 바지,부시와 기름, 지도, 가죽 물통, 약간의 건량, 뭐 그런 것들이 전부다. 발에는 그래도 우리 가게에서 팔던 것 중 가장 튼튼한 사슴가죽부츠를 남겨두었다가 신었고, 주머니 속에는 가끔 산 속에서 토끼나잡을 때 쓰던 손익은 슬링(Sling), 허리춤에는 대거 한 자루, 등뒤에는 나의 위대한 친구(?) '멋쟁이 검'이 매달려 있다. 손에는 아버지가 준 훌륭한 건틀렛. 갑옷을 하나 사서 걸칠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우리 마을의 무기나 갑옷 만드는 기술 따위는 정말형편없다. 평소에 제대로 싸움 같은 싸움을 겪는 일 없는 평화로운영지의 문제점인 셈이다. 여기서 사느니 다른 번화한 곳에 가서 좀싼값으로 훨씬 나은 물건을 구할 수가 있다. 아버지처럼 풀 플레이트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하드 레더(Hard Leather)는 걸쳐야지. 가격이괜찮으면 체인 메일(Chain Mail)로 하나 사 보고도 싶은데. … 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걸. 어머니의 유물로는 머리카락 한 줌과 손때 묻은 조그만 장부를 챙겼다. 다른 것을 가져갈래도 어머니는 별달리 비싼 것이나 좋은 것을몸에 지니신 일이 없으셨다. 그래도 가장 자주 만지시던 것이고 또매일같이 나도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이다 보니 도저히 버릴 수가 없어서 남겨 두었던 것이다. 남들이 보면 웃을지 몰라도 내게는 분명소중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가져간다. 게다가 중요하게는 이틀동안 남은 물건을 판 7000존드가 반은 금화로 배낭 안의 양가죽 주머니 안에, 반은 은화로 내 허리춤에 꿰매 놓은 천 전대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떠나기 전에 내게 여비가 될 만한 것을 뭔가 주고 싶어하셨지만 나는 일단 하기로 한 것,처음부터 끝까지 내 스스로 해보이겠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사람들은 내가 돈만 밝히는 줄 알지만 내게는 이런 일면도 있다. 흠흠. 그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냐고? 물론이다. 미르보가 준 푸른 구슬보석이 아버지가 준 목걸이와 함께 내 목에 옷 안쪽으로 넣어져 걸려있다. 물론 작은 주머니에 넣어서 꼬아 놓은 실로 꿰어진 채 매달려있다. 어제 저녁, 내가 더 되돌아보지 않게끔 나는 폐허가 된 '큰사슴 잡화'에 불을 질렀다. 이번 겨울 들어 어머니와 둘이 큰마음 먹고 손질했던 굴뚝, 칠 좀새로 하라고 입버릇삼아 잔소리하시던 얕은 울타리, 망가뜨릴 때마다내가 손수 고쳤던 오래된 손수레, 커다란 나무 물통, 매일 식사하던나무접시와 그릇, 손때 묻은 많은 물건들. 그리고 오랫동안 내 보물이었던 스노우보드(사실 가져가고 싶었지만, 겨울이 긴 이곳 북쪽 지방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필요할 것 같지가 않았다). 일부러 다시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서 나는 기름을 뿌렸다. 남은물건을 모조리 팔아버리면서도 여기에 쓸 기름만은 일부러 계산해서남겨 두었었다. 이미 거의 허물어진 큰사슴 잡화는 저녁 차가운 바람에도 불구하고잘 타더니, 약 세 시간만에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모든 것들을 없애 버렸다. 불은 굉장히 깨끗한 친구다. 나는 녹색 호수가 보이는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다. 아버지와 대련하던 언덕 위 빈터도 지나쳤다. 아마도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저것이녹색 호수겠지. 내가 들고 있는 램프는 기름을 가득 채워 넣었는데도사방 천지가 캄캄한 여기에서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저 하늘에서 빛나는 저 별들 중 한 개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어머니, 무덤을 한동안 못 돌아봐요. 만든 지 얼마 됐다고 벌써냐고요? 에이, 사정 다 아시면서. 하비야나크의 모든 사람들, 잊지 않을 테니까 괜히 거기서 눈물 짜지 말아요. 뭐라고요? 귀신은 눈물이 안 나온다고요? 고르만 부인, 그만 몸져누우시고 이제 다시 몸 가누셔야죠. 그리고정신도 가다듬으시고. 우리 마을 누가 다시 살리라고요. 흐음, 혼자살리시려면 고초가 좀 많으시겠지만. 신데볼프 씨, 신세 많이 졌어요. 아주머니가 내일 고집 안 꺾으시고 제 아침도 차리시거들랑 말씀 좀 잘 전해주세요. 스바형, 예쁜 아가씨 잘 꼬셔봐요. 유리카같이 어린 애 말고. 나이를 생각하셔야지. 나우케 선생님, 질문에는 대답하는 것 잊지 마세요. 그리고 류지아, 머리가 빨리 자라길 빌겠어. 또 없나……그래. 예전 같았으면 몰라도 지금은 별로 없다. 안녕, 엠버, 그릴라드 스덴보름, 그리고 나의 하비야나크… "뭐야? 앞을 보란 말야!" 녹색 호수에 다다라 약간씩 녹고 있는 얼음 호수를 바라보며 한껏분위기 잡는 내 앞으로 갑자기 누가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나는 기겁을 하며 뒤로 펄쩍 뛰었다. 뭐, 뭐야 이 밤에 돌아다니는 게 나 말고 또 있단 말야? 어라, 의외의 인물? "유리… 카?" "그래."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나를 도전적으로 쏘아보고 있는 소녀를 간신히 램프를 들어보고서야 알아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사람을 만나고 보니 램프가 하늘의 별빛만도 못하다는 말은 좀 정정해야겠다. 유리카의 은빛 머리카락은 램프의 붉은 빛을 받아 온통 발그스름하게빛이 났고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날씨가 추워서일지도 모르고, 다른이유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램프만 들면 다야? 앞을 봐야지." "앞을 보고 있었어. 램프를 옆으로 들고 있었을 뿐이지." 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솔직한 답변을 마치고는 유리카를 바라보았다. 마을로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나가는 길목에서 얼씬거리는 거지? 게다가 작은 천 배낭을 어깨에 걸고 있는 걸 보니 분명여행하는 중 맞는데. 내가 궁금했던 점에 대해 유리카가 먼저 질문했다. "벌써 떠나는 거야?" "응, 좀 일정을 변경했어." 변경한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러는 넌? 벌써 떠나니? 우리 마을이 별 볼일 없든?" "아, 마을은 좋은데, 사람들이 이상하던걸." 유리카가 냉큼 대답하는 것을 들으니까 갑자기 스바형이 떠오르는데. 혹시 쫓아가 본다더니 정말이었나. 뭐, 어쨌거나 이미 마을을 나왔으니까 다른 나이 찬 아가씨 찾아보라고요. …… 내가 왜 쓸데없이 이런 일에 신경을 쓴담. "그러나 저러나 잘 됐네. 난 램프가 없거든. 밤 동안만 동행해도될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기회 김에 베푸는척 해보는 것도 괜찮고, 오랜만에 어머니와의 추억을 느끼며 대화를나누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일 거야. 내 생각은 정확히 반만 들어맞았다. 우리는 지금 함께 탁 트인 고원 길을 걸으면서 몹시 화기애애한(?)대화를 나누고 있다. "… 그래, 목적지는 정했니?" "남쪽으로 갈 거야." "지금 가고 있는 쪽이 남쪽이니까 그런 대답은 해 봤자 소용없다구." "혹시 알아? 내가 지금부터 동쪽으로 방향을 틀지." "응, 그러면 내가 다시 남쪽으로 틀게 해 줄게." "헤, 네가 무슨 수로?" "밤 동안 동행하기로 이미 약속했잖아? 난 계속 남쪽으로 갈 거거든." …… 나는 그 사이에 밤 동안 동행해주는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 밤 동안 동행하겠다는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있었다. "파비안, 배고프지 않니?" "낮에 먹은 사과가 모자랐니? 말을 하지. 내 것도 아닌데, 마을 떠나는 마당에 남의 걸로 인심 좀 썼을 텐데." "그러는 넌 내일이면 다시 배고파질 텐데, 저녁은 왜 먹었니?" "네가 사과를 몽땅 가져가서 점심이 모자랐거든. 그러니 아쉬운 대로 저녁이라도 먹을 밖에." "뭐야, 내가 사과 몇 개 먹은 게 그렇게 억울했니?" "아니. 미안해하는 구경이나 해 보려고 한 말인데, 네 반응을 보아하니 영 가망이 없구나." "……." 이런 식으로 유리카와 나는 한 번 주면, 한 번 받고, 한 번 이기면, 한 번 지고, 하는 식으로 한참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는 어머니와 평상시 상당히 전투적으로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해 왔는데 오늘부로 생각이 바뀌었다. 세상엔 언제나 더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야. 역시 세상은 발전하고 있다니까. 어쨌든 추억을 되살리는 것은 다른기회로 미뤄야겠어. +=+=+=+=+=+=+=+=+=+=+=+=+=+=+=+=+=+=+=+=+=+=+=+=+=+=+=+=+=+=+=좀 있으면 다시 배고파질 텐데 밥은 뭐하러 먹느냐... 이건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나단 스위프트가 '어차피 또 더러워질거, 구두는 왜 닦느냐' 고 게으름을 피운 하인을 골탕먹이려고 한 말이라는군요..^^;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0878번제 목:◁세월의돌▷ 2-1.은빛머리의 유리카(1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5 21:45 읽음:220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1. 은빛 머리카락의 유리카 (13) 얇은 달빛이 파르스름하다. 넓은 곳에 있어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마치 검은 뚜껑이 덮어진 가마솥 안 같은걸. 꽤나 낡은 가마솥인지 저기 위에는 구멍도 많이도 뚫려 있구나. 저 새어 들어오는 빛들 좀 봐. 어이, 이런 가마솥으로 뭘 끓인다면 장작만 낭비라구요. 나는 내가 걷고 있는 이 곳의 풍경이 낯선 것에 새삼 놀라고 있다. 아니, 다시 말해 나 자신에 대해 놀라고 있다. 세상에, 같은 영지에18년을 살았으면서 녹색 호수 너머로는 모조리 모르는 곳이라니. 놀랄 만해. 놀랄 만한 일이야. 여기에 나오자마자 아무 것도 익숙한 것이 없는 어린애로만 느껴지니 말이지. 녹색 호수 변으로 길게 드리워진 휘어진 가지의 나무들, 내가 그릴라드에서 언덕에 올라가 섰을 때마다 볼 수 있었던, 실체를 가진 가장 멀리 있던 것들이 저것들이다. 그 너머로 보였던 것은 넓고 평탄한, 그저 기나긴 길들, 땅들. 그저 나와 관계없다는 심정이었을 뿐, 아마 그때 내가 떠올렸던 것은 저 너머에 저렇게 넓은 평야가 있는데 왜 우리 영지 사람들은 경사 투성이인 이 녹색 호수 안쪽에서만 살아가려고 하는 걸까, 하는정도다. 그러고 보니 정말 왜 그랬지? 우리 엠버리 영지는 이스나미르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땅, 그레이카운티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붙은 땅이라고 들어서 알고 있다. 게다가 그 중 반을 차지하는 두 마을, 하비야나크와 스덴보름은 산줄기사이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완전한 산마을이다. 장미꽃의 엠버조차도 반은 구릉과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릴라드만이저 먼 들판하고 연결된 땅이다. 농사라고 할 만한 것을 제대로 할 수있는 유일한 땅이 거기다. 게다가 내가 듣기로는 저 들판은 별 이름도 없다던데. 어두운 들판을 램프 하나로 걸어가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주 먼곳에서 본다면 내 등불도 지평선 근처에 붙은 별 가운데 하나로 보이지 않을까? 아냐, 그렇게 먼 곳에서는 보이지도 않을텐데, 뭘.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제 익숙한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고요. 네 개의 신발이 바닥을 차는 소리를 빼고는 완전한 고요. 아니, 그 외에도 내 배낭 안에 든 무언가가(도대체 뭘까? 신경쓰여미치겠군) 달그락대는 소리, 검이 내 걸음에 따라 약간씩 절걱거리는소리, 그리고 나지막한 유리카의 숨소리. 반드시 떠나고 싶어 떠났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밤길을 여자와단 둘이 걷는 것도 괜찮구나. 게다가 파란 달빛을 받아 곱게 빛나는은발의, 마치 어딘가 모를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요정과도 같은 소녀와 함께라면. …… 물론 그렇긴 해도 유리카가 겉보기처럼 곱고 조용한 소녀가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유리카가 처음 만나던 날부터 다짜고짜 반말을 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서로 반말을 하는 점에 대해 좀 주의를 환기시켜 보고자(실은 당연히 이익을 볼 거라는 확신 속에) 화제를 꺼냈다. "몇 살이니?" "나? 너보다는 많이 먹었을걸." "어라, 무슨 근거로 하는 말이야?" "음… 너의 어린애같은 눈매나 여행은 처음 해보는 사람 같은 서투른 몸차림,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나와 동행하는 것, 뭐 그런 것들." "그게 무슨 근거가 되냐?" 어린애같은 눈매라니. 18살이나 먹은 사람한테.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서투른 몸차림은 또뭐야? "내 몸차림이 뭐가 어때서?" "응, 네 부츠가 새 것 같아서." "물론 새 거지." "바보야, 여행자가 첫 도보 여행에 나서면서 새 신발을 신는 법이어딨니? 좀 있으면 발이 다 물러터질 거야. 그런 다음에 헌 신발을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데서 찾은들, 찾아질 리가 없지." 그런가? 나는 내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아직 코도 제대로닳지 않은 새 것이다. 여행 준비하면서 몇 번 신어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오래 걸은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발이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발 안 아픈걸." "그거야 아직 별로…… 뭐야? 네 발가죽이 좀 두꺼운 모양이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소녀와 발가죽에 대해서 논하고 싶지는않아서 나는 화제를 바꿨다(사실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하군) "너와 동행하는 것이 뭐 어때서?" "어제 겨우 처음 본 사이인 주제에 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장소에서 이렇게 마구 우연히 마주치고 있잖아?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접근해서 네가 잠든 사이에 슬쩍 돈이나 빼가려는 소매치기 계집애인지어떻게 판단할 거야?" 음… 확실히 그런 점이 없지도 않군. 하지만 내가 여행자로서 너보다 경험이 없는 지는 몰라도, 아무 상황에나 임기응변으로 대답하는 데는 꽤 경험자라고 할 수 있지. "아, 그건 아닌 것 같은걸." "어째서?" "네가 그런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면 이렇게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떠벌리겠냐?" "혹시 알아? 새로 개발된 접근 방식인지." "헤, 나라면 나 같은 얼뜨기 여행자한테는 그저 전통적인 방법 쪽이 더 잘 통할 것 같은데. 만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도 그다지 전문가라고는 할 수 없구나." "맞았어. 난 그런 점에 전문가가 아니야." 저 말은 전문가는 아닌데 그런 직업에 종사할 수는 있단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그냥 해본 소리였단 건가. "어쨌든 몇 살인데?" "예의 없긴, 만난 지 얼마 되었다고 나이를 마구 묻는 거니? 어쨌든 너보다 많으니까 그런 줄로만 알면 돼. 자꾸 물으면 누나라고 부르라고 하는 수가 있다구." …… 나는 이야기 시작해 놓고 본전도 못 건지고 말았다. 나무도 별로 없는 겨울 들판에는 구겨진 종이처럼 부스럭대는 잡풀들만이 밟힌다. 암흑 아룬드가 지나면 여기에 정말 다시 파란 풀이돋고 꽃이 피게 될까. 그걸 보러 올 수 있다면 좋겠는데, 약속은 못하겠다. 아니, 지금 내가 누구한테 약속을 하겠단 거야. 들어줄 사람도 없는데. 머리를 굴리면서 나는 다른 화제가 없을까 생각해 봤다. 내 옆에서 유리카는 한참 동안 말없이 앞으로 발을 내딛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별다른 무기라고는 지니지 않은, 나보다도 어려보이는(분명! 그렇다) 여자 아이. 무슨 목적이 있어서 이렇게 돌아다니고있을까? 뺨과 코의 선을 타고 하얗게 빛나는 실루엣. …… 저런 얼굴이면 위험도 많을 텐데. 유리카는 오랫동안 여행을 했을까? "오래 여행했니?" "응." "얼마나?" "수백, 수천 년을 늘 여행해 왔지. 헤아릴 수도 없는 긴 시간." +=+=+=+=+=+=+=+=+=+=+=+=+=+=+=+=+=+=+=+=+=+=+=+=+=+=+=+=+=+=+=저도 여행이나 다녔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추천해주신 분, 진부해지지 않도록 유념하겠습니다. ^^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010번제 목:◁세월의돌▷ 2-1.은빛머리의 유리카(1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6 23:42 읽음:220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1. 은빛 머리카락의 유리카 (14) 나는 유리카 쪽으로 얼굴을 돌리면서 '장난 하냐, 너?'라는 표정을지어 보이려고 했지만, 램프빛은 우리 앞길에 있을지도 모를 장애물들을 비추는 데에도 모자랐기 때문에 내 의도가 무리 없이 전달되는것을 기대하기란 좀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농밀한 어둠은 탁 트인 벌판에서도 휘장 속에 갇혀 있는 것같은 느낌을 준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큼직한 시트를 뒤집어쓴 강아지, 또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다. 이야기가 내 밖으로 나가는방법은 매우 한정되고, 줄어든다. 그것도 멀리 전해질 수도 없다. 그렇더라도 나는 사용 가능한 방법이나마 쓸 수밖에 없다. 의사를전달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 "뭐야, 장난해?" "응." 도대체…… "도대체……." "파비안 너, 여기가 무슨 들판인지 알아?" 갑자기 엉뚱한 소리다. 하긴 저번에도 뭔 소리를 하다가 다짜고짜자기 이름을 말했더라… 하여튼 너도 듣는 자세는 영 꽝이로구나. 너랑 나우케 의사랑 불러다 놓고 '대답하는 법' 강좌라도 개설해야겠다. 강좌료는 제대로 대답 한 번 안 할 때마다 1존드. "여긴 이름 같은거 없어." "웃기는구나. 이름 없는 건 세상에도 존재하지 않는 거야."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유리카는 소녀다운 말투에 말 내용은 할머니같을 때가 많다. 거참. 그건 그렇고 그럼 이름이 있단 건가? "그럼 넌 이름을 알아?" "몰라. 너네 영지 앞이잖아.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아니?." "…… 그럼 우린 지금 이 세상에 없는 들판을 걷고 있군 그래." 지금 내가 할 만한 가장 적절한 대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리카는 내 쪽을 더 이상 쳐다보지 않았지만 대답은 해 왔다. "우리에겐 필요없이 지나치는 곳일 뿐이라 이름을 몰라도 상관없고, 꼭 알아야겠단 생각도 없지만 누군가, 누군가 이 들판이 필요했던 누군가가 이름을 지어 두었겠지. 그 사람의 들판과 너와 나의 들판을 꼭 같은 들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야." "어째 다른 들판이냐? 여기는 여기일 뿐이라구. 아마 이런 들판이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영주나 왕이나 아니면 그들의 측량기사 정도라고 봐, 난." 유리카는 피식 웃었다. 뭘 모르는구나, 하는 듯한 태도라 나는 어이가 없었다. "너하고 나한테, 여기는 지금 '이름 없는 들판'이지." "그걸 누가 모르냐?" "아니, 그게 아니고, 현재로선 들판 이름이 '이름 없는 들판'인 거나 마찬가지란 거야. 너나 나나 나중에 여기를 떠올릴 일이 있다면뭐라고 생각하겠어? 아, 우리는 그때 이름 없는 들판을 걸었었다, 뭐그런 식 아니겠어? 그렇지만 만약에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여기를 설명하려면 그런 식으로는 안 될 거야. 아마 엠버리 영지 앞의 녹색 호수 남쪽에 있는 어떤 이름 없는 들판, 뭐 그렇게 말하겠지." "넌, 무슨 당연한 말을 그렇게 복잡하게 하냐?" 어둡고, 일행도 없고, 할 일도 없고, 게다가 심심하기까지 하니 내가 네 말을 듣고 있다, 그래. 유리카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는지, 어쨌든 별로 말을 멈출 생각은없어 보였다. 내용이야 궤변 아니면 말장난인 것 같지만. "그러면 너는 이 들판을 생각하다가 너네 고향 영지가 생각나게 될테고, 그러면 너에게는 여기가 향수 어린 장소가 되는 거지. 그러나만약에 이 들판에 너나 내가 모르는 진짜 이름이 있다면 그 사람과이 들판에 대한 동일한 인식을 공유하기는 어려울 거야. 그 사람의머릿속에 든 생각과 너와 나의 생각은 전혀 다르니까. 만일 그 사람들이 여기를 '황량한 들판'이라고 이름 붙였다면 그들의 머릿속에는나름대로 떠오르는 관념이 있겠지. 그건 분명 우리와는 달라. 그래도그 사람들하고 너와 나의 '이름 없는 들판'이 같은 곳이야?" "당연히 같은 곳이지. 들판은 한 개니까." 나는 세상의 가장 일반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을 대표해서 그렇게 말했다. 어둠이 약간 옅어진 것 같다. 조금 있으면 날이 샐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봐, 파비안. 누군가가 겨울을 놓고 눈이 오는 날은 '구울'이라고 부르고, 얼음이 어는 날은 '기울',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고울'이라고 부르자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녀석은 내가 혼내 줄 테니까, 걱정하지마." 유리카는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다. 내 세련된 유머를 못알아듣는군. 아쉽구나. "이건 앞의 경우랑 마찬가지란 말야. 만약 눈을 맞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종족이 있다면 그 종족은 그 날을 특별히 구별해서 '구울'이라고 부를 필요가 생기지 않을까? 자식들한테 '구울'에는 절대나가면 안 된다, 뭐 그렇게 가르칠 수 있잖아." "그게 뭐 중요해? 그 사람들도 그저 '눈 오는 날'이라고 부르면 그만이라구. 이 들판 역시 어디로 날아가지 않는 한, 같은 덴 같은 데지. 혹시 백년이나 천년쯤 지나서 여기가 산으로 바뀐다면, 그 때는다른 데라고 생각하기로 하겠어." "그래, 좋은 대답이야." 유리카는 잠시동안 말이 없이 다시 걸어갔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그녀의 걸음이 약간 느려진 것 같다. 분명 뭔가 또 복잡한 말할 거를 생각해 내느라 그런 것이 분명해. 유리카, 네 머리가 왜 은빛인지 알겠다. 맨날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머리가 다 하얗게셀 밖에.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럼 이 들판이 없어져버리면, 예를 들어 한 200년쯤 지나서 여기가 호수로 바뀌어 버린다면, 그 200년 뒤 미래 사람들의 호수와 너와나의 이 '이름 없는 들판', 그리고 아까 말한 '황량한 들판'은 다른데니?" "장소는 같지만, 다른 데지. 호수와 들판이 같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보게." "200년 뒤에도 그냥 들판이라면?" "이름이 달라졌으면 다르게 부르겠지, 뭐. 그렇지만 실체는 그대로잖아." "아마 200년쯤 지났다면 그 들판을 구성하는 흙과 풀과 나무 같은것들은 모조리 새 것으로 바뀌었을텐데도? 그 안에 든 것들이 깡그리바뀌어도 겉만 비슷하면 그냥 그 '사람' 이야?" 방금 들판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사람이라니? "…… 뭐 그거야… 글쎄…, 그런데 갑자기 '사람' 이라니 무슨 소리야?" "아…냐, 내가 말을 실수했어."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장담할 수는 없지만 유리카는 약간 당황했음에 틀림없다. 목소리에서 그런 것이 느껴졌다. 뭐, 실수할 수도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카는 포기하는 기색은 없었다. 참, 끈질기기도 하지. "…… 그럼, 반대로 겉은 완전히 달라졌어도 속이 같으면?" 처음에는 단순하고 당연한 말의 연속이었는데 여기까지 오고 나니나까지 복잡해지는 느낌이 든다. 여기 들판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모조리 어디론가 옮겨가 있다면 거기다가 이 들판의 이름(있는지 없는지조차 사실 아직 알 수 없지만)을 붙여도 좋은 건가? 아니, 이 들판의 흙을 퍼다가 집을 지었다고 그게 이 들판인 건 아니잖아? 그럼 사람으로 생각했을 때, 어떤 사람이 죽어서 이스나에가 되었다면 그건 그 사람과 같은 존잰가? 기억상실증으로 다른 자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으으아아… 난 모르겠어. 그래서 난 솔직하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그래, 모르겠지…… 나도 모르겠어." 날이 희미하게 밝아 온다. 신발 코에 스쳐 사각거리는 것은 겨울의 노란 풀들, 코끝에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은 아침의 안개겠지. 모르는 곳에 와 있지만 이런 것들은 어디에서나 같구나.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서 와서 그런지 하룻밤 내내 걸으면서 꿈을꾼 것처럼 느껴진다. 한참동안 유리카가 조용했다. 이런, 갑자기 아무 말도 안 하니까좀 그렇잖아. 여름불도 쬐다 물러나면 섭섭하다는 건 이런 걸 두고하는 말인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한참만에 유리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네 이름을 물은 것은 너무나 당연해. 안 그랬으면 내가 나중에 바뀌어진 너를 만났거나, 다른 면모의 너를 알고있는 사람에게 내가 너를 안다는 사실을 설명할 길이 없어. 우리가 걷지 않은 이 세상의 다른 곳들은 모두 이름만으로 존재하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아. 적어도 너와 나의 세상에서는 존재하지않지. 즉, 우리 세상에서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있다는 전제 하에 행동하잖아." "그 전제조차도 필요없는 이름들이 있지. 너는 200년 전 사람들을고려에 넣고서 행동하니? 네 10대 위 정도 조상들의 이름 같은 것은당연히 알지도 못할 거야. 그들이 갑자기 네 앞에 나타나면 뭐라고부를래?" "뭐, 그쪽에서 이름을 말해주지 않을까? 상대를 고려할 줄 아는 현명한 이스나에라면 말이야." 10대나 전의 사람들이 내 앞에 나타난다면, 그건 이스나에밖에 없다는 전제하에 나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유리카는 시원치 않다는 듯한표정이었다. "언제 내가 이스나에 말했니? 그냥 사람 말야, 사람." 나는 짜증이 약간 나서 되는대로 대답해 주었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긴 왜 나타나. 죽었으면 그냥 가만히 죽은 대로 잠이나 잘 일이지. 괜스레 나타나서 후세 사람들 골치나 아프게할 일 있냐." 유리카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약간은 주위가 밝아져 있었기에 나는 유리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추위에 얼어붙은 것인지 그녀의 표정은 약간 경직된 것처럼 보인다. "과거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혜를 간직하고 있을 지 상상해 봤어?" "뭐… 참견 말라는 뜻에서 한 말은 아니지만…… 그 시대의 일들은그 시대 사람들이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들이 많은 지혜를 갖고 있어 봤자, 그런 것들은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용할 뿐이야." "그렇단 말이지?" 내 말에 대답하는 유리카의 목소리는 약간 격앙되어 있었다.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 세상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사람들이 다 같이 살아가는 곳이야. 없어지는 것은 없어. 너에게 들판 이야기를 내가 했지? 왜 그 들판의 구성 요소나 겉모양이 바뀌어도 사람들에겐 거기가 같은 들판으로 간주되는지 알아? 그건 들판의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이 고려하는것이 그 들판을 이루고 있는 흙이나 나무나 풀이 아니라, 그 들판이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야. 그 장소에 그대로 있는 것이편의상 가장 사람들에겐 중요하기 때문에 그 장소에 그대로만 있다면그 들판일 수 있는 것이지. 아마 호수가 생겨도 마찬가질 걸? 만일여기가 엠버리 들판이었다면 아마 엠버리 호수라고 이름 붙이게 되겠지. 그게 같은 장소라는 걸 알아듣는 데 가장 편리하니까." "그래서?" "그렇지만 사람은 달라. 만약에 네가 지금 엠버리 영지를 떠났다고더 이상 '파비안 크리스차넨'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너는 뭐라고 할거야?" "뭐야,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너는 그것만 말이 안 되는 것 같니? 너는 네가 사람이니까 그걸'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사람'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 자기옆에 있는 것, 자기한테 필요한 것, 그리고 자기 시대에 있는 것들만중요하다고 하는 경향이 있어. 지나간 시대나 앞으로 올 시대 따위는중요하지도 않겠지. 그런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나 또 다른 시대에 살아갈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유리카는 왠지 그 끝의 말을 딱딱 끊어서 발음했다. 나로서는 도대체 유리카가 화가 난 까닭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너도 사람이잖아?" "적어도 죽은 사람 따위는 계속 죽어 있으라고 하는 너와는 다른사람이야!" 그 말을 끝으로 유리카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침 햇빛이 들판에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한다. 도대체 이 이야기가 왜 시작됐지? 그래, 그 이름 없는 들판, 에이참, 까짓 들판 이름이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유리카는 내게 말도 안 걸고 내 앞으로 질러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 "너 안 보이는 곳으로 간다." "동행한다면서?" "이제 날 샜잖아." 그 말이 끝이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서 어떻게 그런 속도가 나는지 유리카는 걸음을 빨리 하니 정말 나는 것 같았다. 저런 속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지금까지 나하고 보조를 맞춰서 걷고 있을 수있었지? 잠깐 사이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아직 좀 어두워서 그런가? 정말이지, 뭐가 잘못되었다는 거야? 들판 이름, 그게 뭐 중요한가? 까짓거 없으면 지으면 되지. 그 뭐냐, '유리카하고 헤어진 들판'이라고 불러주면 되잖아. 나는 램프불을 껐다. 이제 아침이다. +=+=+=+=+=+=+=+=+=+=+=+=+=+=+=+=+=+=+=+=+=+=+=+=+=+=+=+=+=+=+=2장1편 끝입니다. 조금…… 헷갈리는 이야기였죠? 월요일이란 역시 몹시 피곤합니다. 직장인은 일요일에 잠을 자야하는데... ^^;아아아.... 하품...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011번제 목:◁세월의돌▷ 2장 2편 시작합니다. 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6 23:42 읽음:1924 관련자료 없음----------------------------------------------------------------------------- 2장 1편. '은빛 머리카락의 유리카'가 끝났습니다. 2장 2편.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시작입니다. 시작 전부터 걱정... 저 긴 제목을 어떻게 타이핑해야 하나....;;아직도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으음... 지금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번 편은 꽤 길 것 같습니다. 새로운 인물도 등장하고요. 음유시인 아룬드는 결국 조.. 금 길어질 것 같네요. 다음 편도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012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6 23:43 읽음:224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1) [가지 말아.]그녀는 잠시 기둥에 기대었다가 숨을 멈추었다. 시간이 잿빛으로 흐르는 것이 보인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빛, 영원히 푸를 것처럼……. [가야만 해.]천천히 불어오는 바람,그리고……그의 어깨에 드리워진 금빛 가닥들을 쓰다듬고 사라지는 바람. 천년을 산다는 엘프의 수명은 이제 축복이 아니다. 인간들처럼, 그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수십 년에 불과하다면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하루도 천년처럼 길 그 시간, 어쩌면'시간의 길이'는의미가 없을 지도 모르지. 줄지어 세워진 기둥들은 세월을 타지 않는 회색의 팔과무심하고 긴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모나드(가을)의 잎들이 슬픈 얼굴을 하고 떨어져 있다. [미칼리스 마르나치야, 시간이 되었소.]그를 데려가려는 마법사의 말소리가 그녀에게는다가온 세계의 종말보다도 더 지독한 죽음에의 선고로 들린다. 그녀의 미칼리스는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말한다. [잊어버려.]불가능한 말이야. 그것보다는…… 100년 남짓 남은 그녀의 죽음이더 빠를 것이다. 그는 몸을 돌려 멀어져 간다. 모나드의 잎 속에서,긴 길 위에 마치 갈색의 발자국만이 남는 것처럼 보인다……[나를 기억하겠어?]- 기억reminiscence II "이야아아아- 도오시이다아-!" 이렇게 외쳐도 듣는 사람은 절대 없다. 확신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릴라드를 떠난 지 거의 5일 만에 발견한 도시였다. 아, 물론 발견이라는 말은 사실 좀 어폐가 있고, 지도에 나와 있는대로 찾아낸 것 뿐이지만, 거기에 감동한다고 안될 것은 없잖아? 난여행 초보라고, 초보. 지도도 제대로 보고, 훌륭하다 파비안. 음하하. 특히 발이 짓무르도록 아프다가 이제는 웬만큼 다시 괜찮아지고 있는 이 시점에 말이다. 정말이지 걷기 힘들었었다. 그러므로 발의 입장에서 보면 그동안 별다른 사건과 마주치지 않은 것은 꽤 감사할 만한 일이긴 했지만, 또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여행이란 게 좀 지루한 게 아니었다. 거기다 건량으로만 식사하는 것이 얼마나 지겨운 줄 아는가? 앞으로는 요리를 하면서 여행하는 방법은 없는지 좀 강구해볼 필요가 있겠다. 짐은 좀 무거워지겠지만. 입맛이 별로 까다롭지 않은 나도 3일만에 건량에는 완전히 질려 버렸다. 특히 시냇물과 함께 먹는 마른과일과 고기 같은 것 말이야. 식사가 아니고 꼭 간식 같아서, 나는먹을 만큼 먹고도 내내 배가 고프다는 환상에 시달렸다. 게다가 작은 마을에 한 번 들렀던 것을 빼고는 내내 야영이었다. 일단, 생각을 좀 하자.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지도에 의하면 저긴 힘보른 시다. 지도가 아니었더라면 풍문으로라도 못 들어보았을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꽤나 크고 잘 구획 지어진 것처럼 보였다. 보아하니 사람들도 많이 오가는 것 같고, 집들도 크고 훌륭하게 지어진 걸로 보아쓸만한 장인들이 많이 살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이런 평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힘보른 시에서 가장 높은건물(종탑이었다)이라 하더라도 내 발밑에도 못 미칠 만큼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냐고? 나의 고민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저, 저길 어떻게 내려가지?!" 나는 발 아래로 힘보른 시와 함께 거대한 절벽을 내려다보고 있다. 지도에 그려진 지형을 보는 법에 대해서는 깜깜이었기 때문에 힘보른시 앞에 이런 절벽이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만일 그런 줄 알았더라면 여기보다 좀더 멀긴 하지만, 그래 어디야, 음…… 훼제르담 시로 갔을 것이다. 뭐야, 여긴 왜 이름이 이따위람. 이런 위치에 있고 보니 발견자로서 기쁨의 함성을 지르기에는 안성맞춤이었지만, 그 말고는 좋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나는 내 신발을 점검해 보았다. 절벽을 내려가는 데 어떤 신발이 필요한 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부츠가 그런 용도가 아님에는 분명했다. 모래와 흙 위에 약간 눈이뒤덮인 그 절벽으로 발을 내디뎌본 순간…… "으아아아앗! 나 살려!" …… 그리하여 나는 단숨에 약 20큐빗의 거리를 내려올 수 있었지만 이제 점검해야 할 것은 신발 밑창이 아니라 내 바지 엉덩이라는생각이 든다. 엉덩이에 철판 몇 개를 깔면 이 절벽을 방금처럼 단숨에 내려갈 수있을까? 스노우보드를 괜히 냅두고 왔어. 벌써 후회 막심이네. 하긴 이렇게 경사가 급한데 스노우보드 있은들 도움이 될려구. 이렇게 전혀 도움 안 되는 쓸데없는 생각들과 더불어 나는 이어진절벽을 내려갈 방법에 대한 명상에 들어갔다. 힘보른 시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의 지형은 하얀 산맥이 끝나고 한동안 이어지던 평야가 사실은 평야가 아니라 고원이었다는 것을 반증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아니지만 길게 이어지던 평탄한 지형이 갑자기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이다. 힘보른 시는 분지 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저 너머는 더 까마득하게 보이는 저지대였다. 그래도 만약 이 지형이 뾰족뾰족한 돌들로 되어 있었으면 방금 나는…… 으, 생각도 하기 싫다. 아무리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해도 전혀 내려가기 쉬운 모양새가아닌걸. 녹아 가고 있는 눈들로 미끄러운 데다가 강약 없는 둥글둥글한 경사, 내가 지금 앉아 있는 곳은 정말 멋진 곳이었다. 본격적인 고생이시작되기 전의 마지막 휴게소라고나 불러주면 딱- 이겠다. 갑자기 나는 다음의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이런 지형이 어제 아침에 생긴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여길 내려갔담? 숲. 울창하다. 가끔 올라가 보았던 하얀 산맥은 주로 침엽수림이고, 그것도 작은 떨기나무들이 대부분인 바위산이라 이렇게 바다처럼 들어찬 수목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말 바다처럼 넘실거리는 것 같아. 슈우우… 쉬이…바람 소리조차도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 수많은 상록 잎새들이 한꺼번에 몸을 흔들고, 멀리서부터 바람이 달려오는 듯하더니, 나무 사이사이를 뚫고 한참 만에야 내 뺨에 느껴지는 곳까지 도달했다. 이곳에서는 공기가 움직이는 것도 장애물이 많아서 자주 꺾이다보니 느려지는 모양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들이 꼭대기를 향해 빽빽이 돋아나 있었다. 올려다보니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잎새들에는 아직 눈이 꽤 쌓여 있었다. 아니, 얼어붙어 있었다. 나중에 저거 녹을 날씨가 될 때쯤에 여기 지나가다간 소낙비나 왕창 맞겠다. 지금 나는 절벽 뒤로 빙 돌아서 그 아래쪽에 들어차 있는 숲 속으로 접어들어 걷고 있는 중이다. 길이 걷기에 용이하지는 않았지만 - 사실 길이라고 할 만한 것도없었다. 내가 못 찾은 게 아니라면 - 절벽을 내려가는 것에 비하면닦아놓은 탄탄 대로였다. 튀어나온 나무 뿌리들과 얼굴에 부딪치는가지들을 피해 가며 한참을 걷고 나니 좀 나무가 드문드문한 곳이 나왔다. 얼음 조각들도 가끔 떨어져 머리를 때리기도 하고, 돌부리에걸려 휘청대기도 했지만 꽤 상당한 거리를 걸었다. 게다가 지대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확실히 내려가는 것은맞는 모양이었다. "으음?" 숲 속 공터처럼 약간 나무가 적은 곳에서 오랜만에 손바닥만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섰는데, 저 쪽에 일부러 누가 뚫어 놓은 것 같은 길이 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짧은 나무들이 부러지고 바닥이 다져진 것이 누가 다니는 길 같다. 일부러 닦았다고 보기에는 좀 투박한 감이 있지만, 확실히 내 손으로(가끔은 검도 이용해 가며) 나무를 헤치며 걷는것에 비하면 백배 나아 보이는 길이었다. 그런데 왜 저 길은 이 공터로 들어오기만(또는 나가기만) 하고 다른 데로 이어진 길이 없는 거지? 여기가 무슨 중요한 장소라도 되나? 중요한 장소든 뭐든, 그런 건 현재의 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기때문에 나는 그 길로 접어들어 걷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한 흙이나 떨어진 가지 등도 바닥에 잘 다져져 있고, 옆에서 부딪치는 것들도 없으니 확실히 걷기가 두 배는 수월했다. 길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 비탈이나 돌 바닥만 가다가 이런 길이 나타나 걷게 되었으니 확실히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아니, 사람은 어떻게든 다 살기 마련이라는 생각도……. 누군지 몰라도 참 친절하기도 하시지. 어라? 바닥에 이상한 울림이 있네? 내가 그렇게 몸무게가 많이 나갔던가? 두두두두……흐음, 그건 그렇고 이상한 점이 있는데 말야. 만약 이 길이 사람이 뚫어 놓은 길이라면 무진장 키가 작은 사람인것 같애. 왜냐고? 내 허리 아래로는 굉장히 길이 깨끗하게 잘 뚫려져 있는데말씀야. 내 가슴 위쪽은 도대체가 손질이 영… 하여간 정원사는 제대로 된사람을 고용해야……. 투두두두두두둣! "어……." 놀라고 있을 사이도 없었다. 괴, 굉장해……! 게다가 감탄하고 있을 때는 더더욱 아니었다. 사실 감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거의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오른쪽으로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나무둥치에 부딪치는 것을 피하고는 바닥의 눈과 관목들 속으로 뒹굴었다. 내 몸이 지나가자 얼음 조각들과 뾰족한 잔가지들이우수수 부서지면서 내 몸 위로 떨어졌다. "으… 따가워…." 당장에 온 몸을 찔러대는 나뭇가지들 때문에 아무리 빨리 일어나기싫었대도(별로 싫을 건 없었다) 후닥닥 일어나 설 수밖에 없었다. 방금 지나간 것은? "메, 메, 멧돼……." 내 입과는 달리 내 마음속의 목소리는 훨씬 명확하고도 날카롭게외치고 있었다. 멧돼지다아아아아아! +=+=+=+=+=+=+=+=+=+=+=+=+=+=+=+=+=+=+=+=+=+=+=+=+=+=+=+=+=+=+=어제부터 '세월의 돌'이 하이텔에도 올라갑니다. ^^하이텔 환동 장편란입니다.(go fntsy)우여곡절... 끝에 결정된 만큼, 하이텔에서도 많은 분이 재미있게봐주시면 좋겠네요. 엑사일런(meenjoon) 님, 정말 감사하고요, 많이 수고해 주세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013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6 23:43 읽음:221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2) 그것도 거의 집채, 아니…… 정확하게 아까 말한 내 허리께까지의높이로 등이 솟은 엄청난 놈이었다. 시커먼 털하며, 저 험상궂은 코(미안하다, 핵심을 찔러서), 매일의달리기(?)로 단련된 거대한 어깨. 저기에 한 번 받혔다가는 유언이고 뭐고 없겠는데. 혹시, 죽기 직전에 하늘을 나는 기분 같은 걸 잠시 맛보는 거라면 몰라도……. 길이 왜 다져졌는지 알만하다. 저 덩치로 매일 여기를 지나다니려면…… 아, 아냐, 아까 별 볼일 없는 정원사 어쩌고 한 거 다 취소할게. 제발 그냥만 보내 줘! "크르르르르……." 멧돼지는 거의 공터 건너편까지 단숨에 달려가더니 간신히 멈춰 선모양이었다. 그러더니 나의 간절한 바램을 완전히 저버리고는 자세를이쪽으로 휙 돌렸다. 으……. 멧돼지라는 놈은 엄청나게 소리를 질러대는 놈은 아니다. 나지막하고도 살벌한 즉, 목적 달성에는 충분한 으르렁대는 소리(돼지가 왜소리가 저 모양인가. 마치 호랑이라도 되는 것 같애!)를 내던 녀석은발로 바닥을 차면서 다시 내가 있는 쪽으로 달려올 태세를 취했다. 엄청나게 불길하다. 오랜만에 다리가 와들와들 떨리는 느낌, 저렇게 커다란 야생 짐승을 확실히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도대체 나한테 불만이 뭐야? 응? 길 닦아놓은 값이라도 내놓으란거야? 좀 지나갔기로서니 그게 그렇게 울화가 치밀어? 사람이었다면 이런 말로 통할지 몰라도 멧돼지는 내 처절한 외침 -사실 마음속으로 외친 것이긴 하다 - 도 외면한 채 그 육중한 몸을가볍게도 날렸다. 메, 멧돼지가 달려온다아-! 투투투투투투투투! "뀌에에에에-!" 저 소리는 한결 돼지답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나의 감상안을 한껏 펼칠 여유도 얻지 못하고 이번에는 죽자사자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다시 엎어져 있을 새는 없었기에 바닥에 발이 닿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나뭇가지를 뚫고 달려가기시작했다. 멧돼지 방불하게 달렸다. "뀌이이이이이익!" 나뭇가지가 언제 얼굴에 부딪쳐 따가운 일이 있었냐는 듯이 나는마구 양손으로 앞을 헤치며 달렸다. 주먹을 쥐고 아무렇게나 휘저어가면서. 검을 꺼내서 어쩌고 할 만한 여유조차도 없었다. 이리하여먼 훗날 또 다른 여행자가 여기를 지나가게 된다면 멧돼지가 두 마리라거나, 적어도 잘 닦아진 길이 두 개는 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열심히 해보려 했으…… 으아아아, 바로 뒤에 있어엇! "뀌이이익- 뀌엑-!" "으아아아- 으앗-!" 인간이 아무리 빠르게 달린댔자 멧돼지의 돌진력을 당하기는 어려우며 장애물을 헤친다고 헤쳐 봤자 멧돼지의 도로포장력(가히 그러고도 남을 수준이었다…)을 당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을 내가 깨닫기도 전에……절벽이닷! 갑자기 숲에서 튀어나오면서 내 옆에 가득하던 장애물들이 문득 없어졌다는 것을 느끼기도 전에, 나는 눈앞에 까마득하게 펼쳐진 거대한 하늘, 그리고 그 아래 도시의 전경과 맞닥뜨려야 했다. 여기는 아까 그 절벽이었…… 어라? 방향 감각이 완전히 엉망이었다. 맹렬하게 돌진해오던 멧돼지는 숲가를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 멈추어 섰다. 저 몸집에 저런 정지가 가능하다니, 멧돼지한테 한 수 배워야 할 판이다. 아냐, 저런 건 뒤쫓아오는 자의 여유라고 할 만한 걸거야. 혹시 멧돼지는 여기 절벽을 알고서 나를 일부러 여기로 몰아붙인건 아닐까? …… 이렇게 나는 멧돼지를 인간 전략가로 착각하는 각종 망상을발휘하면서(게다가 이 방향으로 달려오기 시작한 것은 나라는 사실까지 망각했다) 멧돼지와 마주보고 섰다. 거리는 약 30큐빗. 검, 검을 꺼내야지. 이제 1대1이잖아(언제는 2대1이었냐?). 죽기 전에 하늘을 날고 어쩌고 아까 중얼댔지만, 내가 그렇게 되고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투르르르……." 저게 제법 이제는 투레질까지 하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인데 하얀 산맥에는 왜 멧돼지는 안 살아갖고이렇게 내 대처력을 형편없게 만든 거람. 멧돼지 정도는 옛날에 한두 번쯤 미리 마주쳐 봤어야…… 으으으, 끔찍스런 상상은 그만 하자. 이 상황에서도 나는 여행을 떠나 처음 마주친 어려움이 겨우 '멧돼지' 라는 데 조금 실망하고 있으니…… 정말, 난 웃기지도 않는 놈이었다. 극심한 공포(정말이다. 막다른 곳에 몰리는 것보다 탁 트인 곳에몰리는 것이 훨씬 더 끔찍하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속에서도 나는재빨리 머리를 굴려봤다. 지금까지 관찰한 것과, 과거에 들은 것을 종합해 볼 때, 멧돼지는측면에서 달려든다거나, 곰처럼 앞발로 친다거나 하는 식의 공격 방법은 쓰지 않는다. 즉, 무조건 앞으로만 달려간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 버리는 거라면 오죽이나 좋으련만 결코 그렇지는 않으니 문제지. …… 아냐, 내가 이 분석을 한 이유는 푸념이나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게다가 이 상황에서는 양옆으로 도망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초승달 모양으로 둥글게 튀어나온 이 절벽에서 내가 어느 쪽으로 달린다해도, 지금까지 관찰한 멧돼지의 속도로 보아 절대 사정 거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일단 검을 꺼내 들었다. 물론 뒤는 절벽이고, 약 2큐빗 정도의 간격도 없었기 때문에, 검을 들고 달려오는(그것도 보통의 힘이아니다) 멧돼지를 막는다거나, 사투를 벌인다거나 하는 것은 승산이없었다. 그런 짓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고작일 거다. 그리고 날아가는 기분을 한 번 느낀 다음에 죽…… 흠흠,어쨌거나 그 방법은 안 된다. 그럼, 어떻게? 내가 망설이는 동안 멧돼지는 훨씬 간단하게 자신의 고민을 마쳤다. 내 생각인데, 저렇게 고민하는 걸 보니 멧돼지도 아마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싶진 않은가 보다. 저렇게 직선 돌격만 해대는 녀석이니나를 받아버린다면 그 다음에는 절벽 밑 천국 입성…… 아앗, 바로그거야! 절벽! 이런 바보, 이제야 그걸 생각해내냐. 그것도 멧돼지가 한 발을 높이 들어올리고 땅을 걷어차려는 이 순간 말이야. 나는 검을 양손으로 잡고 칼날을 아래로 한 채 높이 들어 올렸다. 아래 바닥 속에 돌덩이가 들었는지 쇳덩이가 들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이 방법밖에……. "히야아압!" 나는 검을 머리 위까지 치켜든 다음 아래로 힘껏 내리찍었다. (분명 이 검도 자신의 첫 임무가 겨우 이런 것이라는 데 실망하고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검끝이 땅바닥을 향해 질주해 가는 짧은 순간 동안 머리 속에서는온갖 만감이 교차했다. 명색이 '전설의 명검' 이래길래 그 몸무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고이(사실 고이, 라는 말에는 좀 어폐가 있지만) 들고 다녔지 않냐, 멋쟁이 검이라면 이런 때 멋진 모습으로 진가를 보여라, 너도 주인이 죽으면 좀 곤란하지 않냐(솔직히 확신은 없었다) 기타 등등. 말해놓고 보니 이건 만감이 아니군. 거의 살려달라는 애걸복걸이잖아. 뭐 어느 쪽이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박혀랏! "으으으……." 양 손, 그리고 양 팔, 그리고 양어깨, 곧 이어 가슴 위 온 몸으로기가 막히게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즉, 무식한 방법의 대가인 충격파가 확실하게 왔다. 그러는 동안 멧돼지는 뭘 하고 있었냐 하면…달리고 있었다. 절벽이 나에게 위험이라면 멧돼지한테도 위험인 게 당연한데, 저녀석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대단한 용사가 되었을지도 몰라. 적어도나 같은 녀석은 비교도 안 되는… 아냐, 다시 생각해보니 머리가 모자란 용사가 되었을 거 같군. 10큐빗 앞! 내 검, 이거 제대로 박힌 거 맞아? 그러나 그런 걸 이제서 뽑아 확인하는 건 바보지. 다시 박아 넣을시간이 없거든. "뀌에에에에엑!" 멧돼지는 용자답게 비명을 올려가며 신나게(?) 달렸다. 죽는 길 질주하는 주제에 뭐가 그렇게 신나냐. 왜, 이렇게 멋지게 죽어보는 것이 평상시 너의 소원이었냐? 그러나 너의 행복은 나의 불행, 나의 행운은……너의 죽음! 퍼어억! "으그그그으윽……." 현재 상황, 나는 검 손잡이에 온 몸의 힘을 다 쏟은 채 버티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정면으로 멧돼지의 온 몸무게와 속도가 더해진강력한 힘이 부딪쳐왔다. 결과가 어땠냐구? 칫, 예상한 대로지 뭐. "크아아아아앗!" +=+=+=+=+=+=+=+=+=+=+=+=+=+=+=+=+=+=+=+=+=+=+=+=+=+=+=+=+=+=+=추천해 주신 분, 역시 감사합니다. 읽고 재미있으시다니, 기쁘네요. ^^매일...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 나우에 접속하고 go sf를 타이핑합니다. 그럴때 추천글이 보이면 솔직히 가슴이 두근거려요... ^^;무척 힘들고 피곤하지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아... 내일도 출근이군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064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7 21:13 읽음:218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3) 검은 앞서 열거한 나의 간절한 소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당장에 냉큼 뒤로 뽑혀 버렸다. 그리고 검 하나에 모든 희망을 걸고 매달려 있는 내 존재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그 검은 절벽 뒤로 스릴넘치는 낙하를 시도했다. 어디 가냐, 멋쟁이 검, 너도 멧돼지의 정신에 감복했냐? 즉, 나는 검을 잡은 채 절벽 뒤로 휘떡 넘어갔다는 말이다. 멧돼지는? 뭐, 멧돼지라고 별 수 있겠어? "뀌에에에에엑!!!!" 잘가라, 검고 지저분한 갈기의 나의 적이여. "뀌에에에에……." 소리는 아련히 멀어져 갔다. 절벽이 꽤나 높긴 한 모양이다. 아마이런 데서 떨어지면 열 네 조각은 나겠지. 그러나 과연 절벽 뒤로 떨어진 나는 어떻게 되었냐고? 어떻게 되었길래 이렇게 느긋하게 멧돼지 울음소리나 감상하고 있냐구? 사실상 그럴 여유는 없었다. "으큭, 으으으…." 멧돼지가 내 검에 부딪쳐 온 순간, 검이 조금이라도 버텨 주었다면지금과 같은 결과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멋쟁이 검 녀석은정말 '전설의 명검' 어쩌고 한 내 말이 무색할 정도로 어이없게 쑥빠져 버렸고, 덕택에 멧돼지의 힘은 전혀 감소되지 않은 채 절벽 밖으로 자기 몸을 밀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멧돼지는 훨훨 새처럼 날아서… 멀리 멀리 사라져 갔다. 그럼 나는? 나 역시도 물론 절벽 뒤로 넘어갔다. 겨우 2큐빗 정도공간에 그런 무지막지한 녀석이 밀어붙였으니, 한두 번 휘청대기도전에 이미 발이 허공에 닿았다. 그 때 이제 죽었다는 생각이 머리를스쳤다. 순식간에 싸늘해지는 가슴. 정말 끔찍히 싫은 느낌이었다. 짧은 순간 동안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 유리카 얼굴까지 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 생각이나 했다. 어머니 무덤도 돌봐야 하고, 아버지 일도 해야 하고, 유리카도 다시 보고 싶고…… 어라? … 어쨌든 그래서 나는 죽지 않기로 했다. 검이 길다는 것이 이런 때 소용이 닿는 줄은 몰랐다. 절벽 아래에는 마치 아까 내가 엉덩이 대고 미끄러졌던 곳처럼, 아예 아래로 떨어지는 급경사 전에 좁은 공간이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그 위에 한 발을 디뎠고, 그리고 떨어지던 반동으로 곧 아래로 떨어지려는 찰나 그대로 좀전과 똑같은 방식을 써서 검을 그 돌 바닥에내리 박았다. 팔에 전율 어쩌고 느껴질 새도 없었다. 그 순간만은 정말 절대 절명, 내가 뭘 하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무아지경 속에불쑥 튀어나온 행동이었다. 뭔 배짱이었을까. 아까는 안된 일이, 똑같은 검하고, 똑같은 팔 힘으로, 그것도 중심도 제대로 못 잡는 상황에서 될 성싶으냐고?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어어……." 멋쟁이 검은 정말 멋지게도(정말! 이다) 마치 바위를 버터처럼 가르고 그 안에 박혔다. 그것도 거의 블레이드의 반이나! 그래서 나는 내 머리 위로 멧돼지가 날아서 제 갈 길로 가는 것을감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몸은 물론 절벽 뒤로 넘어갔기 때문에 나는 지금 검 손잡이에 애매하게 매달린 채로 목숨을 건진 감격을 맛보고 있다. 물론 멋쟁이 검의 놀라운 성능에 대해서도 함께 감탄하면서 말이다. 휘잉…절벽 위에서 부는 차가운 바람이 내 얼굴에 흐른 땀을 식혀 주며지나간다. 사, 살아있는 건 역시 기쁜 일이야. 그렇다고 지금 내가 느긋한 상황이냐 하면… 실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큭, 으크윽, 크아아……." 땅바닥에 박힌 검에 매달려 절벽 아래 허공을 느끼는 일이 쉬울 것같은가? "파,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애……." 윽…… 아무래도 나는 바보가 아닌가 싶어. 유리카 말대로. 절벽에서 어떻게 올라왔냐고 묻지 말라. 지금은 벌써 저녁때다. 아까 지루하고 어쩌고 한 말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 지독한 고생을겪은 나머지 팔 다리를 움직이기도 힘이 든다. 앞으로도 매일이 이런식이라면 지금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는지도 모르겠다는생각까지 든다. 게다가 배는 얼마나 고픈지, 지금 소도 한 마리 주면 잡아먹을 것같다. 이런 상황이니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은 아까 절벽 아래로 멋지게비행한 멧돼지 녀석이었다. 쳇, 멋쟁이 검 녀석. 처음에 제대로 박혔으면 멧돼지 고기도 잘 하면 먹었을지도 모르는데, 꼭 하필 그 나중에, 급박한 상황이 되어서야 박히냐? 참, 까다롭긴 하여튼. 음… 그런데 멧돼지 고기, 그거 맛있을까? 음음……. 가장 힘든 일이 뭐였을 거 같은가? 절벽 위로 다시 올라가는 거?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길 찾는 거? 절대 아니다. 가장 끔찍한 문제는, 아까는 마치 버터처럼 부드럽게 바위를 가르고 박힌 멋쟁이 검 녀석이 박을 때처럼 급박한 상황이 안 되면 나올생각도 없다는 듯 배짱을 부렸다는 사실이다. 검을 뽑는 데만 무려두 시간을 소비했다. 힘을 쓸 방향이 마땅찮아서 절벽에 떨어질 뻔한것도 수 번이었다. 하도 고생스럽고 화가 난 나머지 나중에는 온갖 고함까지 질러댔다. "정말, 이렇게 상황 따질래? 까다롭게 군다고 나오는 거 있는 줄알아? 열 받으면 확 버리고 간다! 그럼 네가 그 바위에 박혀서 무슨영화를 누리나 내 나중에 와서 볼 거야. 암, 꼭 보고 말고!!" 고함은 안 그래도 기진맥진한 내 힘을 더욱 빼는 데에만 약간 효과가 있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긴 하다. 나는 검을 뺀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검이 박힌 자리를 들여다보았다. 정말이지 검 모양 그대로 들어가 박혔다. 바위를 통째로 들어다가 어디 갖고 가 보여주지 않는 한 아무도안 믿을 것 같다.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어디 가져다 팔아먹어도될 것 같이 깨끔한 구멍이었다. 물론 나에게 바위를 뽑을 힘이 있을 리 없었다. 들고 갈 만한 힘은말할 것도 없고. 사실, 있었대도 지금은 그런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너무너무 힘들고 아사 직전이다. 게다가 나의 바보스러움에 대한 존경심, 아니 말을 잘못했군, 증오심은…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다. 바위 위에 매달려 십여 분간 허우적대는 동안 내 눈은 맨 처음에마주쳤었던 바로 그 절벽 아래에 뚫린 동굴 모양의 길을 발견했다. 그 쪽으로 사람이 좀 드나든 것이 확연한 흔적이 주변에 가득했다. 어쩌면 나는 절벽에서 아래를 자세히 내려다보는 수고조차도 못했지. 하긴, 그 위에 있을 때는 바로 아래에 있는 것을 못 발견할 성도싶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화끈한 고생을 할 것까진 없잖아! 아무래도 고생을 찾아서 하러 다니는 놈 같다니깐. 약 한 시간을 소비한 끝에 아까 본 동굴 입구에 설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 길을 이용한다고 생각하기에는 좀 좁은 감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아까 저지른 일련의 바보짓들에 비하면 희망이 넘쳐흐르는 발견이다. 나는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둡다. 램프를 또 켜기엔 좀 아까운데. 점심을 해결한 것이 아득한 먼 옛날 같다. 5일간이나 늘 불평을 해오던 건량이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 꺼내 먹을 힘조차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게다가 목도 마르군. 아까는 꽤나 오랫동안 들판을 걸어오면서도 흐르는 시냇물 하나도 발견하질 못한 채, 앞서 마을에서 물통에 물을 채워 온 나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면서 상당히 감격적인 식사를 마쳤었지…… 그리고… 노숙자용 건량이라는 건 정말 '식사를 했다'는 그 의미 말고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것을 언제나처럼 약 두 시간만에 깨달았었다. 그리고 지금은 더 절실하게, 평생 못 잊을 교훈이라도 되는 것처럼느끼고 있다. 지금 생각은 그때의 '왜 이렇게 모자라담'과는 달리'좀만 남겨 둘걸'로 바뀌어 있지만 사실 이 상황에선 당연한 일이니너무 뭐라 하지 말라. 동굴 입구는 좁았지만 안쪽은 상당히 널찍했다. 다행히 바닥은 평탄해서 램프를 켜지 않고 손으로 더듬어 가며 어둠에 눈을 익혀 가는 중인데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고인 물 같은 걸로 길이 막혀 있는 건 아니겠지? 꽁꽁 추울 때였다면 모조리 얼어 있어서 건너다니긴 쉬웠을 텐데. 동굴 안 공기는 상당히 차가웠다. 한겨울에도 누구처럼 털외투 같은 걸 걸치고 다닌 일은 없지만 - 외투는 활동성이 별로 없다 - 그래도 지금 같아서는 털 담요라도 덮고 한잠 낮잠을…… 어라, 내가 왜이러지? "하아아암…." … 그러고 보니 벌써 저녁때가 되었구나. 잘 시간이라고는 할 수없지만 지금은 너무너무나 피곤하니까. 오늘 내내 헛고생을 한 대가긴 하지만…… 지금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낮에는 세상 버리고라도한 잠 자 뒀을 텐데. 급속도로 나는 졸립기 시작했다. 배고픔보다 수면 욕구가 본래 더큰 건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여기가 어둡기 때문인지도 몰라. 내 몸이 지금 잠깐 착각을 하나봐, 지금 초저녁밖에 안 되었는데벌써 한밤중이라도 된 걸로 말야…… 뭐라고? 아, 물론 자면 안 돼지……. +=+=+=+=+=+=+=+=+=+=+=+=+=+=+=+=+=+=+=+=+=+=+=+=+=+=+=+=+=+=+=기분 안좋은 하루는 잠으로 풉니다...^^;박카스보다 효과 만점...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065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7 21:13 읽음:217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4) 쪼로록, 찌릭 찍. … 이게 무슨 소리지? 촉, 차라락, 쪼록, 쪼록. … 뭐야, 이건? 뭔가 조그만 것들이 요리조리 다니는 듯한 소리다. 하나도 아니고여러 마리. 내 몸에 직접 닿진 않았어도 뭔가 고물고물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쥐? 조그만 새? 혹시…… 뱀?!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내가 온 몸이 쑤시다는 사실을 망각한 행동이었다). 샤샤샤- 솨라락-순식간에 내 주변에 있는 듯했던 조그만 기척들이 썰물이 빠지는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잠이 다 깼건 어쨌건, 의식이 드는 순간 제일먼저 되돌아오는 팔다리 쑤시는 감각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오른손을등뒤의 검 쪽으로 가져가면서 반사적으로 발로 주위를 죽 훑었다. 퍽- "꺅!" 부츠 끝에 뭔가가 채이자 화닥닥 놀라 움직이는 감각이 두꺼운 신발창을 통해서도 전해졌다. 게다가 가벼운 비명 소리까지. 이것들이뭐지? 에라, 불 켜야겠다. 불안해. 탁, 탁, 타닥. 후루룩…부싯돌을 쳐서 부싯깃에 붙였다가 램프의 심지로 옮겼다. 와, 캄캄한 들판에서는 손바닥만하던 등이, 여기 동굴에 갖다놓으니 거의 빛나는 태양 수준인데. 내 발밑에 확실히 뭔가가 있었다. "어라……." 쥐도 새도 뱀도 아니다. 갈색의 덩어리, 기다란 갈색 머리카락과털들. 그리고…… 옷?! "에엑?!" 누가 서로 더 놀랐는지 모르겠다. 서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표정을 살펴보니 가관도 아니다. 나는 도대체 저런 생물이… 하는 경악스런 표정, 저쪽은 이제 죽었네, 하는 듯한 공포스런 표정. 그런데 도대체 저게 뭐냐. 평생 듣도 보도 못했어. 여행 나온 지얼마 됐다고 벌써 처음 보는 이상한 걸 만난담. 어쨌건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 넌 뭐냐?" 묵묵부답. 내가 검에 손을 대고 있어서 그런가. 오른손을 검에서떼고 양손을 앞으로 들어 보였다. 저렇게 생긴 녀석이 설마 위험하진 않겠지. 손바닥만하게 생겼지만 인간과 거의 똑같은 모습이다. 갈색 머리카락이 털인지 뭔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길고 옷조각이라고 걸친 것은 뭘로 만든 건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나뭇잎도 아니고, 털가죽도 아니고. 짤막한 다리와 팔, 간신히 윤곽을 알아볼 만한 코와 뺨, 이마. 빤히 쳐다보는 겁에 질린 까맣고 큼직한 눈. 큼직하대봤자… 거의 밀알 수준이지만. "이거 봐, 이거. 나 무기 없어. 너 해칠 생각 없어." "……." 여전히 대답이 없다. 혹시 입이 없는 생물인가? 다른 녀석들은 있었는지 확실하진 않아도 하여튼 모조리 사라지고없는데 왜 저 녀석만…… 아아, 내 발에 다쳤나? "내가 혹시 쳤니? 이걸로?" 발을 가리켜 보였다. 이거 말을 하기 싫으면 고개라도 움직여야지. 끄덕, 도 없고 도리, 도 없고. 혹시 목이 부러져서…… 아니, 그러면 죽었어야겠군. "다쳤으면 치료를 해야지. 응? 치료." 조심스럽게 머리에 베고 있던 배낭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아주 천천히, 그것도 한 손만. 또록또록한 눈동자가 내 손을 따라간다. 상당히 귀여운데. 배낭을 뒤져서 간직해 두었던 약초 묶음을 찾았다. 가게에 불이 붙는 바람에 약초 같은 것은 모조리 날아가 버렸지만 내가 창고 밑바닥에 간수해 둔 것들은 아직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이걸 챙겨놓은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었지만, 결국 엉뚱하게 쓸모가 있게 되었다. 가게 정리하면서 나는 그것을 나중에 쓸 양으로 종류별로 잘챙겨 두었다가 배낭에 넣어 가지고 나왔다. 내가 정확히 약초들의 용도를 다 알진 못했기 때문에 차조기과 풀인 샐비어(salvia) 잎사귀, 즉 세이지(sage)풀이라면 일단 만병 통치나 다름없다고 들었으니까 일단 그걸 끄집어냈다. 물론 당장 생풀만갖고 어쩔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일단 안심을 시키기 위해서 앞에서흔들어 보였다. 그런데 지금 약초가 필요한 건 사실 쟤가 아니라 나 아닌가? "이건 약초. 미안하니까 이거 줄게. 너한테도 소용이 있는 거니?" 내가 이걸 흔드니까 눈동자가 세이지 잎사귀를 따라 양쪽으로 왔다갔다 한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필요하면 말해. 줄 테니까." 세이지는 사실 추운 지방에서는 좀 귀하다.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이쪽까지 오려면 햇빛에 잘 말린 것이라야 했다. 내가 꺼낸 것은 안 그래도 주름진 세이지의 잎이 쪼글쪼글하도록 잘말려진 것이었다. "싫어? 필요없어?" 달라고도 하지 않고, 손을 내밀지도 않으므로 나는 세이지를 든 손을 뒤로 약간 빼면서 그렇게 물었다. 하, 정말 기다렸다는 듯이 조그마한 손바닥이 불쑥 앞으로 내밀어졌다. 내가 손을 멈추자 내민 손바닥이 다시 움찔, 한다. 겁도 많은 친구군. "가져가라구." 나는 주의 깊게 세이지 풀을 그 조그마한 손에 건넸다. 하하, 그손에 약초는 너무 컸다. 아마 이걸 다 쓰려면 평생이라도 힘들겠다. 물론 그렇게 작은 몸집으로 자기 키만한 세이지를 잡을 수 있을 리없었다. "끽!"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떨어뜨려 버렸다. 물론 말린 거니까 굉장히가볍긴 하지만. 그런데 다시 슬슬 끌어당긴다. 끌어당기더니 자기 몸뒤로 숨겼다. 푸하, 이 친구야, 다시 뺏진 않아. 난 그런 놈이 아니라구. "이름이 뭐니?" 여전히 묵묵부답. 이건 나우케 의사나 유리카의 대답 안 하는 증세와는 또 상당히 다른 것인데. 가장 정통적인 증세 같애. 아예 아무말도 안 하는 것. 에, 그러니까……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이 병을 증세별로 연구하게 됐담. 이름이라도 붙일까? 파비안 병. 아냐 아냐, 그러니까 꼭 내 증세라는 것 같잖아. 역시 나우케 병이 적당할 것 같군.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있는 새 꼬마 친구는 가려고 꼬물거렸다…하긴 초면에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거 말고 다른 적당한 표현이 없네. "이름도 안 말하구 가?" 내 목소리가 좀 컸는지 꼬마 친구가 화닥닥 놀란다. 그런데 가만히보니 확실히 움직임이 이상했다. 발을 전다. 아, 그래서 저 녀석은 도망을 못 갔구나. "저거, 원래 그래?" 발목 쪽을 - 발목 쪽이래 봤자 사실 몸 전체를 가리키는 것하고 다를 것도 없다 - 가리키면서 그렇게 물었다. 물론 내 예상대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묵묵부답. "내가 그런 거야? 내가 다치게 했어?" 지금이 몇 시쯤일까. 동굴 속은 어두컴컴하다보니 시간 개념이 도저히 안 섰다. 일단 들어왔으니 나가 봐야 알 것 같은데. 내가 얼마나 잔 거람. 담요를 끄집어내서 둘둘 만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 다음엔 그냥 죽은 것처럼곯아떨어졌군. 게다가 배도 끔찍스러울 정도로 고파. 꾸르르르륵… "!" 배고프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내 뱃속에서 당장 반응이 왔고, 그리고 그 소리에 대해 꼬마 친구의 반응도 재빨랐다. 절고 있는 발을 끌고 황급히 도망치려다 - 그 와중에도 세이지 풀은 놓치지 않았다 -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다. "킥-!" 이상한 소리를 낸다. 웃는 소리는 아니고, 일종의 비명이라고 봐야하나? 나는 지금까지 조심하던 것은 깡그리 잊어버린 채, 얼떨결에 얼른넘어진 꼬마 친구를 양손으로 잡아 올렸다. 폭신한, 마치 고양이 꼬리 같은 감촉이군. "…!…, ……!" 꼬마 친구의 표정이 영 요상했다. 그 기분 알 것 같다. 도망가려고 하는데 산더미 같은 괴물이 그냥낚아챘다 이거지. 아하, 또 하나 알았다. 너, 내가 배고프면 잡아먹을 줄 알았구나! "풋, 푸훗, 푸후후하하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느라 내가 그렇게 유쾌하게 웃어대는 동안 조그만 친구가 내 손안에서 얼마나 불안에 떨고 있을 지에 대해 잠시 잊고 말았다. "놓아 줘……." +=+=+=+=+=+=+=+=+=+=+=+=+=+=+=+=+=+=+=+=+=+=+=+=+=+=+=+=+=+=+=라이브클럽이 합법화되었다더군요. 음악이나 들으러 갈까... 저는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자주 쓰는데, 빠른 장면이나 슬픈 장면에서는 가끔 대단한 도움을 주지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066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7 21:14 읽음:218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5) 나는 흠칫 해서 소리가 혹시 다른 곳에서 들린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소리는 바로 내 양 손바닥 사이에서 나고 있었다. "놓아 줘… 놓아 줘…." 마치 변성 안 된 꼬마 같은 목소리였다. 흠. 말을 할 줄 아신다. 그런데 지금까지 대답을 안 하셨다 이거지. 흠흠, 예의 바른 여행자들끼리 그러면 안 되죠. 그럼 내가 또 오늘의 강의를 시작해야지. 아직까지는 개업을 안 했기 때문에 강좌도 클리닉도 공짠데 말씀야. "이름이 뭔데?" "……놓아…." "아, 이름을 말해. 놓아줄 지 안 놓아줄 지는 내가 결정한다구." 제법 고압적으로 말하면서 눈을 치떴다. 참, 이 상황에 효과적인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하여튼 효과음도 하나 울렸다. 꾸르륵! 천둥치는 소리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꼬마 친구를 쥔 양손을 배 위에 얹어놓고 있었으니 말이다. 예상대로 녀석은 황급히 꼬물대면서 제 갈 길로 가고 싶어 했다. 하하, 네 몸집으로는 팔다리 가늘가늘한… 유리카 같은 소녀가 잡았대도 못 도망갈 판인데, 팔 힘하면 또 한 가락 하는 내 손에서 어떻게 도망치겠니. …… 이 와중에 유리카 생각은 왜 하는 거지? 하여간 한참을 떨더니 꼬마 친구는 입을 열었다, 아니 열 수밖에없는 상황이 되었다. "…… 주아니." "응, 그래? 나는 파비안 크리스차넨이야. 만나서 반갑다." 악수를 청했다가는 도망쳐 버릴 것 같아서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싱긋 웃어 보였다. 웃는 것이 쓸모가 있는가 슬쩍 살펴보았지만… 그다지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너는 무슨 종족이니?" "……." 아마, 거의 확신하건대 방금 말을 삼키긴 했지만 '놓아줘-'라고 말하려고 했을 것이다. 나 참, 어휘력도 부족한 종족이구나. "응, 어딜 그렇게 급히 가고 싶어하는데? 나하고 좀 놀다가 가면안 되니? 응? 화장실이라도 급하냐?" 내가 생각해도 참 말도 안 되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이 '주아니'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끄덕거린것이다. "쿡, 쿡쿡……." 황당해서 웃음이 다 나왔다. 이 동굴 속에 화장실이 있으면 어디있겠으며, 또 이 와중에 그걸 핑계라고 대는 거냐… 풋, 푸후훗……. "야, 주아니. 화장실은 조금 있다가 가. 알았지?" 내가 말끝을 강조하면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니까, 황급히 몸을 비틀면서 화닥닥하는 것이 내 손을 통해서도 느껴졌다. 이거야참, 겁내는 건지, 수줍어하는 건지. 수줍어? 음, 그렇군. "너, 여자냐?" "……." 여전히 묵묵부답. 나참, 여자한테 나이 물어보면 대답 안 한단 소린 들어보았어도 여자냐고 묻는데도 대답 안 한단 이야긴 처음 듣네. 여자라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닐 거 아냐? "대답을 해, 대답을." "…… 내가 남자로 보였단 말이야?" 정말이지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하, 내가 착각했다. 이건 나이를 묻는 것보다 훨씬 실례였다. 세상에 여자더러 남자냐고 묻는다면 그만한 실례도 별로 없을 텐데, 똑같은 짓을 한 셈이네. 헤헤, 이런. 난 경험이 없어서. "하하… 미안하구나, 주아니 아가씨. 긴 머리도 이쁘고 눈동자도이렇게 이쁜데, 그럼 네가 너를 남자로 봤겠니? 오해야, 오해. 화 풀라구." …… 라고 나는 뒤늦게 변명을 늘어놓아 사태를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화…… 안 났어." "아, 그렇다면 다행이구." 언제부터 내가 비위를 맞추는 것으로 상황이 급변했지? 주아니의 조그마한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본 결과, 정말 화가 난 것임이 분명하다는 판단을 나는 내렸다. 왜냐하면, 얼굴이 잔뜩 붉어져있었거든. 게다가 여자들은 화났으면서도 화 안 났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걸 경험상(사실 별다른 경험도 없지만) 알고는 있다. "많이 화났어? 아냐- 정말 예쁘다니까. 정말이야. 이렇게 귀엽고깜찍한 아가씨는 처음 봐." …… 라고 말하면서 나는 주아니가 혹시 기혼, 즉 아줌마라면 이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해 보았다. 처녀한테 아줌마라 그래서 화내는 경우는 많이 봤지만, 반대의 경우는 아닐 거야. 음, 그렇고말고. "화나지 않았어…." 어, 목소리가 이상하다. 약간 떨리는 것 같은게, 게다가 몸에서 열도 나잖아. 손바닥이 따뜻해. 얼굴도 아까보다 더 달아올랐어. 아,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단단히 났나 보다. 웬만하면 풀지, 뭐 이런 거 갖고 그렇게까지 화를 내고 그러냐. 무안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잖아. "주아니…… 내가 잘못했어. 응? 그렇게 열 내지 말라구." 나참, 누가 들으면 내가 주아니 손에 잡혀 있는 줄 알겠군. "파비안…… 너 바보니?" 힉. 나는 정말 뜻밖의 말에 놀라서 주아니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이렇게 열심히 사과하고 있잖아. "왜, 왜 그래…?" "화가 안 났다면 안 난 줄 알아야 할 것 아냐. 남의 말을 그렇게못 믿어?" 헤에……. 지금까지 언제 대답을 안 했냐는 듯, 그리고 어눌하게 끌던 말투는어딜 갔는지, 방금의 목소리는 유리카… 아니, 말투는 마치 유리카같잖아. 아주 쨍쨍한 것이 '유리카하고 헤어진 들판'에서 마지막 들은 목소리 같다. "아, 미안해. 미안해." 이거야 내내 사과 연속이로구만. 어디서 내가 이렇게 죄를 많이 지었지? 이따가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차분히 세어봐야겠다. "됐어." 주아니는 정말 화가 났나보다. 이제는 고개까지 홱 돌려 버렸다. 하이고, 나 참. 화 안 났다더니, 그 말 안 믿는다고 화가 났냐? 참, 알다가도 모르겠는걸 보니 여자가 맞긴 맞군. 나는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어디에서부터 갑자기위치가 바뀌었더라… 그래, 거기였어.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나는 내가 아는 최대한의 요령을 동원해보기로 했다. 즉, 방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친절하게 하던 질문을 계속하는것이다. "그래, 주아니. 난 인간이거든? 너는 무슨 종족이니?" 나는 물으면서도 내심 주아니가 페어리가 아닐까 의심해 보았지만아무래도 그것은 신빙성이 없었다. 조그맣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내가 들은 페어리의 모습과는 머릿속에서 겹쳐 볼 때 전혀 그림이 안맞는다. 첫째, 날개도 없고, 둘째, 날개가 있대도 날아다닐 몸매가아니잖아? (이런 이야기를 주아니가 들었으면…)내 예상대로 엄청 낯선 대답이 나왔다. +=+=+=+=+=+=+=+=+=+=+=+=+=+=+=+=+=+=+=+=+=+=+=+=+=+=+=+=+=+=+=컴퓨터들 괜찮으세요? 하도 주변에 액을 당한 사람이 많아서 걱정됩니다. 또, 추천해주신 분, 열심히 쓰겠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133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8 21:12 읽음:212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6) "로아에." "로아에?"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로아에라는 종족도 있었나. 음음, 그렇지만 가능한 한 예의바르게 말해야지. "으응, 그럼 너희 로아에들은 동굴 속에서 사니? 나는 솔직히 로아에에 대해서 처음 들어보거든? 나한테 얘기해 줄래?" "파비안, 난 어린애가 아니야.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애들한테 묻듯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 미안해." 주아니는 점점 생각지 못한 점들로 나를 놀라고 하고 있었다. "어린애가 아니면 몇 살인데?" "65살. 그리고 예의바른 건 좋지만, 일단 내 몸을 바닥에 내려놓고이야기하는 것이 예의의 기본 아닐까?" 65살! 후아아…… 나는 후닥닥 주아니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참, 내가 생각해도 우습다. 65살 짜리 쥐라면 갑자기 이런 태도를보이지는 않을 텐데, 말이 통한다는 한 가지 점 때문에 이런 식으로당황해야 하다니. "너, 너…… 정말 65살이야?" "그럼. 아직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지. 적당한 숙녀의 나이라고 생각해." 음……. 저렇게 말하는 것 보니 주아니는 65살쯤은 아주 별 것 아닌 나이로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아무래도내 신변 정보를 밝히기 전에 먼저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로아에들은 보통 몇 살까지 사니?" "뭐, 한 200살 정도까지 살면 다 살았다고 봐야지." 주아니는 아까 처음의 겁먹은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찾을수도 없게 - 정말! 찾을 수조차 없다. 같은 사람, 아니 같은 로아에인지 조차 의심스럽다 - 변해서는 당당하게 바닥에 놓인 세이지 잎을집어들었다. 물론 너무 길어서 자세가 애매하긴 했지만, 아까보다는훨씬 당당한 자세였다. "나도 예순 다섯 평생에 인간은 처음 봐." 음, 저런 건 쪼글쪼글 할머니나 하면 어울릴만한 대산데. "나도 열… 아니, 로아에는 하여튼 처음 봐." 주아니는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치켜 떴다. "파비안 너……." 아아, 제발 묻지 마! 그래 난 어린놈이야- 그러니까 제발 할머니,조상님, 아니 아가씨 앞에서 나이 밝히라곤 말라구- "몇 살이니?" …… 묻고 말았다. 나는 결국 거짓말을 하지는 못하고 사실대로 말하고 말았다. 내가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무진장 선량한 사람이어서가 절대! 아니다. 세상에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65살이나 먹은 할머니, 아니 아가씨(정말 헷갈렸다) 앞에서 당신의 나이를 슬쩍 높여 속여 봤자, 금방들통나게 될 거란 것쯤은 알 수 있다. 애매하게 한 열 살쯤 높여 봤자 명함도 못 내밀 텐데 차라리 그냥 말하는 편이 낫지. 이왕 말하는 거 자신 있게 해야지. "음…… 음음, 열 여덟이야." … 내 귀에도 그다지 자신감 있게 들리지는 않았다. "응, 그렇구나." 가만, 내가 잘못 말했나? 쟤가 내가 백 열 여덟이라고 한 걸로 잘못 알아듣기라도 했나? "응…… 그으래…." "뭐. 열 여덟 이래도 이백살 사는 로아에의 예순 다섯이나, 기껏해야 육칠십년이나 사는 인간의 열 여덟이나 피차일반이지." "그, 그래. 생각해줘서 고맙구나." 관대하다고 해야 하나, 이런 걸. 그렇지만 어쨌든 65년이나 살면 뭔가 나보다 알아도 몇 배는 더 알고 경험을 해도 몇 배는 더 했을 텐데. 로아에 사회에서는 그저 어린 처녀인지 모르지만…… 하긴, 처녀가아니고 아줌마일수도… 힉, 이런 거 물었다가 또 쓸데없이 고생만 하지. 갑자기 내 생각의 흐름을 완전히 막아버리는 말소리가 있었다. "나이가 뭐 중요해? 서로 생각해주고…… 좋아하는 마음이 중요하지." 뭐, 뭐라고? 동굴 길은 찾기 쉬웠다. 정말이다. 정말이지 모든 길은 찾기가 기가 막히게 쉬웠다. 모퉁이를 도니까 갈림길이 나오고, 통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탁 트인 곳에 기둥 몇 개만 서 있고, 그래도 나는 어느 쪽으로가야 할 지 정확하게 안다. 동굴, 제까짓게 괜스레 복잡하게 꼬여 있어 봤자 헛일, 세 갈래, 네 갈래 길이 있어도 내 앞에서는 맥도 못춘다. 나는 숙련된 레인저(Ranger)처럼 ………… 그게 아니라 그 동굴 안에서 65년이나 산 로아에 앞에서는 이겠지. 주아니는 정말 동굴의 모든 구석과 길을 훤히 알고 있었다. 하긴그럴 만도 하다. 누가 나보고 눈감고 하비야나크의 어디라도 가라면못 갈 리가 없다. 18년밖에 안 산 나도 그러한데 65년을, 그것도 이좁은 동굴에서만 살았으니 오죽하겠어. 음, 하긴 팔다리가 저렇게도 짧으니, 로아에에겐 꽤나 넓은 동굴이겠군. "어깨 안 아파?" 하, 정말 귀여운 질문을 하는 친구다. 네 몸무게 정도는 어깨 위에 떨어진 가랑잎 정도밖에 안 돼, 라고말해주려다가 혹시 또 그런 걸로 자존심이라도 상하면 어쩌나 싶어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렇고 좀 큰일이긴 하다. 주아니는 내 왼쪽 어깨 위에 앉아 연신 조잘거리면서 이쪽으로 가면 어디고, 저쪽은 어디로 이어지고 하는 식의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다. 그러느라 이렇게 신이 나서 길을 안내해주는 얘는 동료들한테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는 것을 걱정하는 내 마음도 모른다. 그것도 저렇게 저는 다리로 어느 하세월에 돌아간다냐? 정말 걱정되기 시작하네. 으음…… 이렇게 팔다리가 모조리 노곤하고 어깨가 쑤시는데, 도대체 여기저기 신경 쓸 정신이 어느 구석에 남아 있는 걸까. "저쪽의 동굴 틈새 갈라진 데로 들어가면, 오백 년도 넘게 계속 물이 떨어지고 있는 바위가 있어. 가운데가 옴폭 파여 있어서 목욕하기아주 좋다." 그래, 아주 샤워장이겠구나. …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은 달랐다. "그래? 겨울인데 안 얼어? 그리고 춥지 않아?" "로아에는 추위를 타지 않아." 그러고 보니 그렇다. 주아니가 입은 옷은 재질이 뭔지는 몰라도 팔다리가 다 드러나는 것이다. 햇빛을 별로 못 본 듯 팔다리는 몹시 하얬다. … 화가 나지 않았을 때의 얼굴처럼. "그 옷은 뭘로 만든 거야?" "골풀." 음…… 골풀을 가늘게 엮어서 저렇게 짤 정도라면 로아에들은 아주섬세한 종족이거나… 취미가 무지 고약한 어머니들로 가득한 종족인가봐. "너도 짤 줄 아니?" "그럼. 로아에라면 누구나 짤 줄 알아." "골풀은 어디서 나니? 이 근처엔 호수도 늪지도 없는 것 같은데." "전통이라서 어쩔 수 없어. 우리가 키우지." "힘들겠구나……." 참 이상도 하다. 그러면 로아에는 아마 본래는 호숫가 같은 데 사는 종족이었나 보지? 그러나 내 의문의 고리가 질문으로 이어지기 전에, 갑자기 저만치앞에서 동굴의 갈라진 틈으로 느닷없이 쏟아져 들어온 별하늘이 내말문을 막아버렸다. "히야……." 큰 도시의 멋이란 이런 거구나. 지금이 몇 시인지 몰라도, 어쨌든 하루가 가진 않은 거 같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아예 한밤중이라면 저렇게 불이 많이 켜져 있진 않겠지?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나가면 도시고, 그러면 제대로 된 식사도 좀 하겠지! 한달음에 달려가려다가(사실, 달려갈 수도 없었다) 문득 주아니 생각이 났다. "너 돌아가야지? 내가 오는 길 기억해 뒀으니까, 데려다 줄게. 그런 다리로는 하루 종일 가도 못 돌아갈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는데 뭔가 왼쪽 어깨 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음,이상한 말이야). "주아니?" 갑자기 들려온, 비난하는 듯한 조그만 목소리. "파비안…… 벌써 나를 버리려구?" 히익. 이게 무슨 소리냐.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주아니 얼굴을 보기 위해 손위로 옮겨 태우려 하는데 갑자기 어깨 위에서 뭔가가 폴짝 뛰어내려…… 아니, 뛰어내릴 건 주아니밖에 없잖아! 얘가, 내 키가 얼만데 여기서 뛰어내려! "주아니!" 누가 들으면 절벽 밑으로라도 떨어졌으리란 짐작을 할 정도로 처절한 목소리로 주아니의 이름을 부른 뒤에, 나는 당장 동굴 바닥으로몸을 던졌다(무릎이 무지 아팠다). 어딘가 부러져도 단단히 부러졌을주아니를 찾으려고. "주아니, 주아니이-!" 또 누가 들으면 마치 망망대해에서 헤어진 연인이라도 처절하게 부른다고 생각할 법한 목소리로 나는 주아니를 부르면서 땅바닥에 배를무릎을 꿇고 손으로 바닥을 헤집었다(굉장히 차가웠다). 마치, 흠흠, 쥐잡는 폼이군. "주아니이이이-!" "귀청 떨어지겠어." 바로 옆에서 들린 대답이었다. "주아니?" 손으로 더듬어 주아니를 찾았다. 가볍게 손가락이 닿는 순간 주아니가 내 손바닥 위로 폴짝 올라탄다. 얘, 요령 많이 생겼네. 세이지는 여전히 꼭 쥐고 있었다. 저걸로만 봐도 그녀의 대단한 집착을 알고도 남을 만했다(호, 혹시 첫 번째 사… 랑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 아니겠지?!) "그렇게 애타게 부르는 걸로 봐서 용서해 주기로 하겠어. 다시는나를 버리고 간단 소리 하기만 해봐라. 그땐 그냥……." "……."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대답도 못한 채 주아니를 어깨에 다시 태울 수밖에 없었다. 가득히 펼쳐진 별하늘. 그 아래 펼쳐진 불빛의 도시. 마치 초가 가득 켜진 케이크 같다. 뭐 그런 케이크래야 딱 한 번밖에 본 일이 없긴 하지만. 별빛 아래 펼쳐진 힘보른 시의 전경은 정말 우리 고향 마을 같은건 사람 사는 데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아마 도시에 내려가서 보면 절벽을 등뒤에 지고 있어서더욱 멋지겠지(그렇게 고생을 해놓고도 벌써 이런 생각이라니, 나도참 느긋하긴 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3큐빗 반은 되는 내 어깨 위에서 떨어져놓고도 멀쩡한 주아니가, 저 발목은 어쩌다가 저렇게 됐을까? +=+=+=+=+=+=+=+=+=+=+=+=+=+=+=+=+=+=+=+=+=+=+=+=+=+=+=+=+=+=+=너무 너무 피곤하군요. 팔다리가 다 노곤하고 눈이 저절로 감겨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134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8 21:12 읽음:210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7) 내가 힘보른 시에 첫 발을 들여놓은 뒤에 제일 먼저 알게 된 사실은 여기 이름이 '힘보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럼 여기는 어디죠?" "여기는 이베카 시야." 마치 별 촌놈 다 보겠다는 듯한 표정을 한 길가는 시민으로부터 듣게 된 이곳의 지명은 마치 무슨 여자 이름 같다. 친절한 시민이 지나간 다음에 나는 혼자서 피식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내 배낭 겉에 달린 주머니 속에서 머리도 내밀지 않은 채 주아니가하는 말이다. 주아니 때문에 나는 배낭을 몹시 바투 메지 않으면 안되었다. 도대체 한시라도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참을 수 없다는 듯이극성스럽게 끼여드는 주아니, 누가 그녀를 '나우케 병' 환자라고 했던가. …… 나였지. "아, 도시 이름이 좀 우스워서." "이베카 시?" …… 음, 미리 주아니한테 물어나 둘걸. 괜히 촌놈 됐잖아. "이 도시를 다스리는 여자 시장 이름이 이베카야." "헤에? 그게 정말로 사람 이름이었어?" 내가 놀라는 사이에 주아니는 잠시 생각하는 모양이더니(이것은 순전히 그녀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었기 때문에 내가 당연히! 한 추측이다) 말을 이었다. "음음, 내가 한 40살밖에 안 되었을 때 이베카였으니까, 지금은 아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뭐, 그 전에 내가 30살 때도 이베카였고, 20살 때도 이베카였는데 뭘. 대대로 '이베카'라는 이름을 선호하는 지도 몰라." 그렇다면 지금 시장도 '이베카'일지도 모르겠군. 그렇더라도 의문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성(性)도 아닌 이름을, 그것도 영주도 아닌 시장의이름을 따서 시 이름을 짓니? 좀 이상하네." "뭐, 글쎄. 난 인간들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서." 자기가 모르는 화제가 나오자 다시 주머니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면서 입을 다무는 주아니였다. 흠, 그렇게 인간들의 일에 관심이 없는데, 도대체 나는 왜 따라온거냐? 그건 그렇고, 앞으로 지도를 신용하지 말… 아니, 내 지도 보는 능력을 절대 신용하면 안될 것 같다. 음, 힘보른 시는 어디쯤 붙어 있는 걸까. 뭐, 아무래도 사실 상관없다. 꼭 가봐야 할 이유도 없거니와, 어쩌다 보니 지나쳐 왔겠지. 이따가 여유 생기면…… 그러니까밥 먹고, 씻고, 쉬고, 잔 다음에 지도 펼쳐 봐야지. 도시는 번화했다. 내가 기대한 이상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동굴에서 잠들었던 시간은 몹시 짧았었나보다. 아직도시는 늦은 밤은 아닌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갔다. 특히상점 거리는 내 입에서 탄성이 나올 정도로 다양하고 큼직한 상점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손수레에서나 파는 줄 알았던 사과나 과일들을 파는 가게, 어디나있는 대장간, 목공소, 푸줏간, 구둣방, 무기점, 가죽가게 등등은 너무 큼직하게 잘 되어 있어서 마치 내 눈에는 궁궐처럼 보였고, 내가생각하지도 못한 빵가게(빵은 집에서 만드는 것 아닌가? 어쨌든 제과점이라 부른다고 한다), 유리가게(그 앞에서 한동안 황홀해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보석상(저런 게 정말 존재하다니, 대륙은 넓고 볼일이야), 애완동물 가게(충격이었다. 난 개나 고양이를 돈주고 산다는 생각은 해본 일도 없다), 책방(저 많은 책을 누가 다 읽… 아니 사가지? 책이란 언감생심 무지 비싼 물건인데), 옷가게(별의별 옷들이 다있었다. 그러나 저런 걸 입고 어떻게 움직인담), 약방(저기서 약초를팔면 우리 같은 데선 뭘 팔지?) 등등 내 눈을 휘둥그래지게 할 만한온갖 상점들이 거리에 즐비했다. 그런데 거리를 죽 돌아보면서 내가 깨달은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있었다. 글쎄, 잡화점이 없는 것이다! 나는 정말 충격을 받았다. 전국에 큰사슴 잡화 체인을 낼까 하는것도 한때 심각하게 구상했던 나다. 그런데 세상에 잡화점이 없는 도시가 있다니. 나는 한참을 이 골목 저 골목 두리번거렸다. 구석구석에 주점도 있고, 손수레들도 있고, 있을 건 다 있었는데,잡화점만은 없었다. 내가 못 찾았다고 생각하기도 그렇다. 아마도 여긴 잡화점에서 취급하는 물건들을 모조리 분담해서 취급하는 모양이다. 참 놀랍기도 해라, 라고 일단 나는 결론을 내렸다. 잘 적어 뒀다가 나중에 여기다 체인 1호점이나 내는 게 좋을지도몰라. 어쨌든 의문이 일단락 되고 나니 여관을 찾고, 식사를 하고, 그리고 씻고, 잔 다음에 도시 구경을 해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걷고 세수도 못 했으며, 멧돼지한테 쫓기다 저녁도 굶은 내 꼴은 거의 방랑 거지 방불하는 모습이라, 지나가는 사람들이계속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도시라서 그런지 꽤나 잘 차려입은 사람들도 자주 지나갔다. 음음, 내가 갈아입을 옷이 있으니 망정이지……. 아, 그렇군. 한잠 자고 나서 내일은 여기서 갑옷이나 사야겠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여관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골목을 찾았다. 골목이라고는 해도 우리 영지의 큰길보다도 컸다. 고개를 들어올려 본도시의 건물들은 끝없이 이어진 경사 지붕들의 연속이다. 마차가 두대는 한꺼번에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널찍한 한길 가에 죽 늘어선집들은 마치 서로 이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나란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즉, 어디로 들어가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흠흠… 크흠." 이렇게 꾀죄죄한 꼴이긴 해도 적지 않은 돈을 지닌 손님인데, 여긴누가 들어오라고 하는 사람조차 없군. 다들 장사 할 마음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물론 그들이 장사할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길을 지나가다 쉴곳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는 말 탄 여행자들, 그럴듯한 차림새에 노련한 모험가처럼 보이는 검사나 궁사들, 짐꾼들을 여럿 부리는 돈 꽤나 있어 보이는 상인, 이런 사람들을 잡느라 그들은 진짜 고객을 알아보지 못하는 중인 것이다. "어서 옵쇼~ 모험가 나리. 우리 여관은 손님 같은 경험이 풍부한여행자들이 많이들 오셔서 묵는 곳입니다요-. 동료들을 많이 만나실수 있으실 겁니다." "상인님처럼 물건이 많으신 분은 저희 여관에 오셔야 합니다. 저희는 짐을 지켜드릴 검사를 고용하고 있거든요. 자리도 아아주- 넓습니다." "맛있는 맥주로 할 것 같으면 우리 여관 만한 곳이 없습죠. 얘야,손님 말고삐 잡아 드려라." … 이런 식이었다. 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들 사이를 천천히걸으면서 '경험 풍부한 모험가 많아 여관', '자리 넓어 여관', '맥주맛나 여관' 가운데 어디가 그나마 제일 괜찮을까 궁리해 보는 중이다(왜냐하면, 내가 찾고 있는, 즉 예를 들자면 '딴 데보다 20% 싸 여관' 같은 데는 아무래도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큰 일행에 치이지 않게끔 조심하면서 걸었다. 여관을 알아보려고 둘러보는 여행자들이나 그들을 유치하기 위한 처절한투쟁을 벌이고 있는 주인과 종업원들, 그 가운데 어느 무리도 먼지는까맣게 뒤집어쓰고 옷은 찢어진데다, 곧 '한 푼 줍쇼'를 외칠 것 같은 녀석, 어울리지 않게 검만 커다래서 곧 허리가 휘어 쓰러질 것 같은 폼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 내가 말해 놓고도 너무 처량하잖아. 저들 중에는 겉은 번지르르해도 어떻게 슬쩍 여관비나 떼어먹고 달아날까 궁리하는 녀석,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오늘은 어느 여관을 털어 볼까 고민하는 놈, 어디 가서 술 퍼먹고 행패 부리면서 스트레스나 풀어 보려는 작자, 갖가지가 있을 텐데, 나는 그 중 어디에도 끼지 않는 매우 건전하고도 여관업자로서는 자주 오기를 바람직한 손님이란 말이다. 나의 풍부한 상업 경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는……. "비키란 말이다, 이 녀석! 말발굽에 채이고 싶나-." 나는 깜짝 놀라서 길옆으로 물러섰다. +=+=+=+=+=+=+=+=+=+=+=+=+=+=+=+=+=+=+=+=+=+=+=+=+=+=+=+=+=+=+=날씨 모양새가...벌써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오려나 봅니다...^^;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135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8 21:12 읽음:211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8) 와- 정말 커다란 말인데, 엄청난 몸집의 회색 말이야! 길가로 비켜선 내가 감탄하고 있는 사이, 똑같은 회색의 말이 다섯마리,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저렇게 다리가 긴 말이니 한 걸음 보폭은 또 얼마나 크겠어. 말 위에 탄 사람들은 말 빛깔이 똑같은 것과마찬가지로, 모두 검은 망토로 온 몸을 가리고 있었다. 호객에 목숨 걸고 있던 여관 주인들도 감히 그들에게는 말을 붙일엄두도 못 냈다. 그들은 그대로 직선으로 거리를 지나 거리에 가득한여관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멀어져 갔다. "시장님을 뵈러 가는 모양이야." "시장 관저에는 무슨 볼일이람? 저런 말들을 수용할 만한 마구간도없을 텐데." 몇 사람이 수군대자 곧장 다른 사람들이 키득대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여행자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사정을 몰랐지만 여기 사는 사람들한테는 뭔가 굉장히 재미있는 농담인 모양이었다. 내가 알 게 뭐람. 다시 사람들의 흐름 속으로 끼여들려는 참인데, 갑자기 웬 손이 사람들 사이에서 내밀어지더니 내 어깨를 불쑥 잡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만, 가만히 있어." 뭐, 뭐야, 이 사람은? 목소리는 등뒤에서 들려왔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려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쪽 손이 다시 불쑥 나오더니 내 머리를잡았다. "잠깐만, 가만히 있어주게. 제발, 잠깐이면 돼." 나이 많은 사람 같진 않고, 내 또래 목소리 같은데? 그것도 굉장히 절박하게 부탁하는 듯한 말투라 나는 관대하게 잠깐, 말한 대로 아주 잠깐만 참아 주기로 했다. 그러니까 한… 눈 두 번 정도 깜박거릴 사이 말이다. "넌 뭐야?" 내가 몸을 홱 돌려서 뒤를 돌아보자, 내 어깨와 머리를 잡았던 상대방이 미안하다는 듯 양손을 든 채 싱글싱글 웃고 선 것이 보였다. 뭐야, 이 친구. 뭐하자는 거야? 내 생각대로 나이는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소년. 옷차림은 거의내 수준에 버금갈 만한 모습이었다. "무례하게 굴어서 정말 미안하게 됐네. 내 사과를 받아 주겠는가?." 어라? 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넌, 나이도 안 많은 녀석이 말투가 그게 뭐냐?" 내 말에 상대방은 다시 입을 벌리더니 하하 웃었다. 저 녀석, 바보인가? 그러기에는 얼굴이 너무나 똑바르게 생겼는데. 먼지가 많이 묻긴 했지만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 잘 닦아 놓으면웬만한 여자들이 뒤로 넘어가고 남을 정도로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현재로서는 지저분함으로 그 진가가 발휘되지 않고 있는 얼굴을 보아하니 어디 빌어먹으면 빌어먹었지, 머리가 이상해 보이진 않는걸. 그리고 자세히 다시 보니까 입은 것들도 먼지 때문에 지저분해져서 그렇지 꽤 괜찮은 것들이다. 적어도… 나보다는. "이해해 주게나. 버릇이라서 어쩔 수 없이 그러하네." 갈수록 태산이었다. "왜 못 움직이게 한 거야?" "아, 그게 말이지……음, 이야- 굉장히 좋은 검을 가졌는데?" 어랍. 나는 10년 이상의 점원 생활로 다져진 눈치를 십분 발휘하여 대답해 주었다. "말 딴 데로 돌리려고 하지 마." "아니야, 아냐, 정말 좋은 검이로군." 녀석은 내가 말리기도 전에 바보스럽게도 내 검 손잡이를 쓰다듬어보려 했다. 뭐, 모두 다 네 할 탓이니까 나야 무슨 죄가 있겠어. "뜨아, 뜨거엇!" … 예상했던 결과다. 녀석이 예의바르게(으음?) 손잡이를 약간 쓰다듬으려고만 했기에그 정도로 끝났지, 안 그러고 만약 잡아 보려는 거였으면 나조차도책임을 못 질 사태가 발생하는 거였는데. "미, 미안하군. 남의 검을 허락도 없이 함부로 만져 보려 한 대가를 받는군." 거참, 내가 탓하기도 전에 미리 자기 잘못을 인정하네. 갈수록 이상한 녀석인걸. 녀석은 그래도 꽤나 뜨거웠는지 손바닥을 연신 쓰다듬어 보고 있었다. 뭐, 추운 겨울에 난로 좀 쬐었다고 생각하라고. 에참, 그러고 보니 내가 만질 때도 좀 저런다면 겨울에 난로 대용으로는 그만일 텐데, 그렇게는 또 되지 않는단 말야. …… 나는 이렇게 '검'이라는 물건의 용도를 망각하는 생각을 하면서 녀석에게 말했다. "어디 가서 물로 좀 씻는 게 나을 거야." "아, 자넨 정말 친절하군. 고마워." "그런 대답이라면 좀 편한 말투로 하라구." "아, 노력하고 있다네." 그러면서도 '수상한 말투의 금발 녀석'은 내 검을 유심히 쳐다보고있었다. 훔쳐갈 생각이라면 아예 마셔. 방금 만져보고도 몰라? "어쨌든 고마웠어. 검은 잘 간직하게나. 그럼 안녕히." 내가 뭐라고 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녀석은 무섭게 빠른 속도로 사람들을 헤치고 사라져 버렸다. 요즘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 나보다빠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나도 예전엔 스피드라면 누구 못지 않았었는데 말야. 음……. 저 녀석의 진가는 그런 데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다. 녀석, 결국에는 이유를 안 말하고 슬쩍 사라졌군. 결국 내가 들어간 여관은 '모험가 많아'도, '자리 넓어'도. '맥주맛나'도 아닌 '손님 많아' 여관…… 아니, '늦가을 들녘' 여관이다. 내가 이 여관을 택한 이유는 한 가지 뿐이었다. 여관이 새로 지었다거나 해서 겉모양이 번지르르한 것도 아니고,특별히 딴 데보다 값이 싼 것도 아닌데, 이 많은 여관들 가운데 유난히 손님이 많다면 분명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이 내 소견이다. 여관에서 일해 본 적도 있는 나다. 틀림없었다. 이런 이유 가운데 가장 가능성이 높을 만한 것이라면 단연 '맛있는음식'임에 틀림없다. 아아… 저 향기로운 냄새! '늦가을 들녘' 이란 건, 분명 먹을 것이 많다는 의미임에 틀림없어. "어서……." 뭐, 손님을 맞으러 달려나온 급사 소년이 나를 보자마자 말꼬리를흐렸다고 해도 굳이 탓할 생각은 없다. 나도 구질구질한게 물건 살거같이 안 생긴 사람이 들어오면 귀찮다는 생각을 먼저 한 일이 있으니까. 일단 테이블에 앉은 나는 그 쪽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일단 내 할말을 했다. "잠 잘 방하고요, 저녁 식사. 주문은 아무거나 되겠죠?" "예……." 쪼르르 주인에게 되돌아 달려가는 급사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녁식사로 뭘 먹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내내 건량만 먹으면서 배를 곯아 오다 보니(건량이 들으면 좀 섭섭하겠지만), 이젠 위장이 아플 정도다. 뭘 먹어도 맛있을 것 같다. 내가 별로 많이도 알지 못하는 음식 종류들을 하나씩 하나씩 몽땅떠올리고 있는 중인데 - 내가 내 돈주고 밖에서 음식을 사먹는 것은처음이라 솔직히 좀 흥미진진했다. 내 손으로 만들어 먹는 것과 누가갖다 주는 것은 확실히 기분이 틀리니까 - 옆에서 누군가 주문하는목소리가 들렸다. 어라, 귀나 기울여 볼까. "1인용 독실, 화장실이 옆에 딸린 것으로. 창은 여관 뒤쪽으로 난데로 주십시오. 2층 방으로 주시면 더욱 고맙고요. 그리고 식사는 돼지고기 구이 마늘로 재운 것, 레몬 파이 큰 것 따뜻하게, 치즈 녹여넣은 으깬 감자, 브로콜리 감자 샐러드, 그리고 후식으로는 마들렌쿠키 한 접시를 주십시오. 아, 맥주도 한 잔 갖다 주시고요. 감사합니다." 여기서는 저렇게 정중하고 공손하게 음식을 시켜야 하는 건가? 게다가 뭔가 복잡하고 까다로운 주문, 왠지 돌아보고 싶은 기분이드는데. "에엣?" "아, 또 만났네." +=+=+=+=+=+=+=+=+=+=+=+=+=+=+=+=+=+=+=+=+=+=+=+=+=+=+=+=+=+=+=요즘 집앞에서 하수관 공사를 하고 있어서 걸어다니기가 몹시 힘이듭니다. 공사 벌려만 놓고 자갈밭 상태로 내버려두기가 벌써 두 주는 넘었답니다. 오늘은 시멘트관을 가져와서 도로변을 모조리 막았기 때문에, 글쎄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보도로 들어갈 수가 없지 뭡니까! 포장된 도로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려고 그러는 걸까요...? 추천해 주신 분들, 역시 고맙습니다. 쓰는 사람도 즐겁고, 읽는 사람도 즐겁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247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9 21:53 읽음:207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9) 그 녀석이다. 아까보다는 그래도 비교적 말끔한 모습을 하고는 나를 보며 웃고있었다. 머리도 감았는지 약간 물에 젖은 금발이 램프빛에 휘황하게빛나는 것이 볼만했다. 만약에 내가 여자였다면 말이지…… 으음. 그런데 볼 때마다 싱글거리는 표정이니 다른 표정을 지으면 어떻게되는가 궁금해진다.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그는 큼직한 배낭을 옆에내려놓은 채 의자 위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거의 테이블에 기대다시피 앉은 나하고는 꽤나 대조적이었다. "아까부터 자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었네. 그런데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군." "제발 그 '자네' 소리 좀 집어치울 수 없겠나? 듣기가 심히 거북하이." "하하, 그런가?" 으음……. 흉내낸 내가 한 수 더 뜬 느낌이 든다. 그나저나 이름 모를 금발녀석은 계속해서 웃고 있다. 음흉한 미소도 아니고, 소리내어 껄껄거리는 것도 아니고, 마치 아이처럼 순진하게, 싱글싱글 웃는다. 참,이상한 녀석이야. 게다가 말투가 이상하긴 하지만, 목소리는 활기차고 맑았다. "이름이 뭐니?" "나? 음, 나… 나르디." "나나르디?" "아니, 나르디. 나르디야." "넌 성도 없냐?" "아… 그, 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성이 없거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고 성이 없냐?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듯하지만, 나는 그냥 고아라는 말 정도로 대충 알아듣기로 했다. "나는 파비안이야. 파비안 크리스차넨이야." "아, 그렇구나. 만나서 반가워." 아까도 본 주제에 새삼 만나서 반갑다며 나르디는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는 자세도 굉장히 각이 잡혀 있는 것이, 아무래도 어디 군대에서 나온 친구 같다. "몇 살이니?" "열 여덟. 그런데 나르디, 너 혹시 군인 밑에서 컸냐?" "아, 뭐? 아, 하하하… 아니, 아 그래. 잠시 그런 일이 있었어. 나도 열 여덟이다. 우리 동갑이구나. 하하하……." "그래……." 진짜도 거짓말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저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일 것 같다. 앞의 말이 진짠지 거짓말인지 몰라도 열 여덟이란말까지 거짓말로 들리니 말 다 했지 뭐. "여행하니?" 나르디가 그렇게 묻는데 마침 나르디의 테이블에 수프가 나왔다. 수프를 가져온 급사가 접시를 놓고 가는가 했는데, 약간 쭈삣거리면서 내 옆에 와 선 것이 문득 느껴졌다. 나는 돌아보았다. "주문요?" "아, 그게 아니고…… 여관비가 있으신지 좀 보여주셨으면 하고요……." 흐음. 이거 겉모양 갖고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은 그래도 참아 줬지만, 이렇게까지 나오니 영 화가 치미는데. 그러나 급사한테 잘못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급사는 역시 내또래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년으로 나한테 이 말을 하면서 몹시 미안해하고 있었다. 에라, 까짓 거 보여준다, 보여줘. "여기요." 나는 웃옷 주머니를 뒤져서 좀 전에 약간 따로 빼 놓은 은화들을몇 개 집어 손바닥에 얹고는 내보였다. 나도 은화가 가득 든 돈주머니를 열어 여관비를 지불하면서 도둑들더러 '나 잡아 보쇼' 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다. 급사는 고개를 끄덕, 하고는 주문을 듣겠다는 자세가 되었다. "음… 뭘 먹을까. 일단, 오늘밤에 여기서 잘 거구요. 식사는……여기서 가장 잘 하는 것으로 한 코스 갖다줘요. 돈 보여줬으니까 그정돈 되겠죠?" 나는 평소에 돈을 아끼는 사람이다. 돈 버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처음 여행 나와 객기를 좀 부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결정적으로는 이런 여관에 최고 특식이래 봤자,약 얼마 정도 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거다. 기껏 해봐야 '설산의 불빛'보다 조금 더 비싸겠지. 사실 정말 오랜만에 이번엔 제발 좀 음식다운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예? 예." 급사가 가고 나자 나르디는 내 쪽으로 의자를 끌어다 앉으면서 말했다. "우리, 합석할까?" "좋을 대로." 나르디는 수프 그릇을 들더니 내 테이블로 옮겨왔다. 수프 냄새가꽤 그럴 듯 했다. 식사하는데 말동무가 있는 것도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에 나오는 모험가들을 보면 다들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 다니지않던가? 검사가 있으면 옆에 마법사가 있고, 거기다 궁수, 엘프, 드워프…… 뭐 이렇게 꼭 무리를 지어서 다니던걸. 하긴 이야기니까 그렇게 팀웍이 딱딱 맞게 만나지고 그러지, 어디 현실에서야 그런 일이쉽게 일어나려구. 게다가 엘프나 드워프는 이제 구경하기도 힘든 세상이고. 뭐, 좀 실없이 잘 웃고, 말투가 이상한 또래 녀석과 만나게되는 정도가 일반적인 축에 속하지. 현실에서야 역시 별 도움이 안되는 동료를 만나기가 일쑤 아니겠어. 암, 게다가 나라고 꼭 고독한 여행자가 될 필요는 없잖아?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르디는 연신 뭐가 그렇게 즐거운가싶도록 싱글벙글이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뭔가 속이 안 좋아지려고한다. 곧 나르디가 시킨 음식이 나왔다. "고마워요." 음식을 가져다주고 수프 그릇을 걷어 가는 급사에게도 꼬박꼬박 존대로 인사를 하는 나르디, 참 보기 드문 녀석이야. 뭐, 인사를 하는것이 나쁜 것은 아니니까. 예의바른 것은 좋은 일이지. 암. 그런데 나는 도대체 예의라고는 없는 녀석인지 몰라도 말야, 나르디의 저런 모습이 뭔가 불편하단 말씀야. "먼저 먹어도 될까?" 그런 건 안 물어봐도 된단 말야. 당연히 내 음식이 나오면 나도 먹을 거라구. 나는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럼, 좀 실례하고 먼저 시작하도록 할게. 워낙 배가 고파서 말이지. 이해해주기 바라네." …… 내 음식이 먼저 나오지 않길 천만 다행이었다. 나도 너처럼먹기 전에 정중하게 인사를 해야만 한다면, 차라리 나중에 먹고 말겠어. 김이 따끈하게 오르는 돼지고기 스튜, 달콤하게 녹은 레몬즙이 코를 자극하는 노릇노릇한 파이, 치즈가 풍부하게 무르녹은 것이 먹음직해 보이는 으깬 감자…… 으음, 기타 등등. 나는 갑자기 지금까지 고팠던 것보다 열 배는 더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지금까지가 최대인 줄 알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이 여관을 택한 그 '이유'는 확실히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 나르디는 전혀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돼지고기를 자르고 씹어 삼키며, 레몬 파이를 썰어 입 안에 집어넣었다. 냅킨을 무릎에 편 것도어쩌면 그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는지, 마치 무릎 위에 얹은 다음 다리미로 다려놓은 것 같다. 고기 써는 칼을 움직이면서도 한 번 실수로 헛손질하는 일도 없다. 으깬 감자를 떠먹으면서도 한 조각 흘리지조차 않았다. …… 내가 어쩌자고 이렇게 남 먹는 것을 빤히 쳐다보고 있담. 이상하게 나르디 옆에 있으니 있던 예의도 사라지는 것 같다. "좀 먹어 보겠어?" 아, 아니야-나는 손을 황급히 내저으면서 아니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글쎄 말야, 혹시 우리 마을 누군가가 옆에서 먹고 있었다면 당장에 '같이 좀먹자' 그러고 덤볐겠지만, 네 녀석이다 보니 도저히 그럴 마음이 나지 않는다. 다행히 내게도 수프가 나왔다. 게다가 코스라고 하니까 무슨 전채요리라도 되는지, 오믈렛이 따라 나왔다. 덕택에 나는 한숨 돌리면서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서 왔는가?" "엠버리 영지. 하얀 산맥 아래, 그레이 카운티에 있는 곳이야. 넌?" "아, 나? 나는…… 블루 카운티에서 왔어. 떠돌이라서 말이지, 어디서 왔다고 말하긴 좀 그렇네." 이번 말은 그래도 좀 진짜 같다, 이 친구야. "그래? 오랫동안 여행했니?" "아… 뭐, 그런 셈이라네." 갑자기 이 친구가 블루 카운티에서 왔다고 한 데 생각이 미쳤다. 거기는 아버지가 계신 곳이 아닌가. "아, 그럼 너, 님-나르시냐크도 가보았겠네?" "님-나르시냐크라면 구원 기사단으로 유명한 곳?" 화아, 어쩜 그렇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꼭 집어 내냐. "응, 그래. 구원 기사단은 어떤 곳이니?" +=+=+=+=+=+=+=+=+=+=+=+=+=+=+=+=+=+=+=+=+=+=+=+=+=+=+=+=+=+=+=오늘 세 편은 거의 음식 특집이라고 할만하군요...^^;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248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10)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9 21:54 읽음:206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10) "뭐, 대단한 기사들이 많은 곳이지. 그 실력만은 왕국 최고 수준의기사단이라 칭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네. 왕가하고는 그다지 사이가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왕가라는 것은 경험상 나하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나는 뒤의 말은 무시했다. 즉, 앞의 말에만 탄성을 지르며 입을 벌렸다. "햐아, 그렇게 대단한 기사단인가?" 나르디는 내가 왜 그렇게 구원 기사단 일에 감동하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아마도 구원 기사단 입단 희망자 정도인 모양이지, 라는 식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즉, 대답이 이랬다. "아, 거긴 입단이 상당히 까다롭다네. 자주 뽑지도 않고. 지원을한댔자 결원이 생겨야만 그제야 정식 입단이 되고, 그 전에는 계속수련 기사로 있어야만 하거든." "수련 기사?" "응. 구원 기사단을 동경하는 젊은이들이야 많지만, 실력 있는 사람은 그다지 없고, 그나마 자주 있지도 않는 복잡한 시험에 통과한사람이라고 해도 겨우 수련 기사 신세라는 말이지. 수련 기사로만 무려 10년씩 지내는 사람들도 숱하다네." 나야 구원 기사단에 들어갈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제도가 끔찍하다거나 하는 감정은 간단히 느낀 뒤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내 관심사는 그런 것이 아니니까. "그럼, 수련 기사들은 구원 기사단의 일원이 아닌 건가?" "그럼. 그들에게는 봉급도 지불되지 않아. 언젠가 구원 기사단이될 거라는 것 빼면 갈 데 없는 백수 신세라고나 할까." 헤에, 그렇게 생각하니까 꽤나 살벌한 제도 같긴 한데. 그래서 나는 물어 보았다. "그럼 그 사람들은 뭘 먹고 사냐?" "뭐… 나름대로 생계를 잇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될 거라네. 그래서 수련 기사들은 대체로 귀족의 자제가 많다고 들었네만. 다른벌이를 하면서 수련 기사의 법도나 각종 의무들을 지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라서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고 알고 있어." 봉급은 안 주면서, 법도와 의무는 지켜야 한다라. 왠지 좀 불합리한 것 같은 느낌인걸. 그런 제도는 누가 만들었을까. 정말 평민 자식은 꿈도 못 꿀 곳이구나. 참 이상하다. 내가 구원 기사단장의 아들도 아니고, 그저 전처럼평범한 잡화점 집 아들이었다면 이런 이야기에 꽤나 분개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우습게도 지금은 감정이 그렇게 가질 않는다. 이런 게 핏줄의 힘인 건지, 또는 이미 그 계급에 속할 자신이 있다는 자의 오만이란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군……." 내가 말끝을 흐리는데 나르디가 덧붙인다. "어쨌거나, 왕궁에서도 함부로 못 하는 단체지. 어찌 보면 독립된소왕국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 기사단장에게 귀족 작위를 주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 그럼 기사단장은 귀족이 아냐?" 급사가 내 음식을 가져와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우리가 합석한것을 보더니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는 눈치였지만, 접시들이 하도 많아서 테이블에 다 내려놓는 데 좀 골치를 앓았다. 나르디가 시킨 것도 적은 양은 아닌데다, 내가 시킨 이 집 최고 요리 코스라는 것은……. "이, 이게 뭐죠?" "그…건, 메인 요리로 피망 스프링롤을 곁들인 양 안심구이와 오리가슴살 버섯 샐러드, 양배추 소시지 찜과 마늘빵, 달걀 크림치즈 케이크, 포도주 한 병, 후식으로 오렌지 타르트와 '떠 있는 섬'이라고불리는 특별 요리가 나오는 코스 A 입니다만……. 옛날부터 나는 음식의 이름이 뭐건 일단 먹을 수 있기만 하면 별로구애받지는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이름들에잠시 어안이 벙벙해지는 것도 내 마음이었다. "아…… 예." 나는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테이블 위에 늘어놓아지는 접시들을 보며 속으로 한 요리당 얼마 정도 나갈까 황급히 계산하기 시작했다. 나르디는 웃었다. "맛있겠구나. 나도 '떠 있는 섬'을 먹어 본 것은 굉장히 오래된 것같은 걸. 굉장히 멋진 요리이지." 흠, 나르디는 나하고 똑같은 나이인데도 제법 견문이 넓은 모양이다. 섬 어쩌고… 나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어쨌거나 나오는 거보고, 먹어 보고, 맛이 별로면 나르디한테 주면 딱 되겠군. "맛있게 드십시오." 처음 태도와는 달리 인사까지 하고 간다. 혹시나 해서 주위를 둘러보니까 나와 나르디처럼 거창하게 저녁을 먹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다들 파이와 닭요리 정도로 간단히(어디까지나 우리와 비교했을 때) 식사들을 하고 있었다. 그래, 이것도 처음이니까 기념이다 이거야. "음음, 쩝… 이거 맛있는걸." 나르디와는 달리 나는 음식을 먹으면 먹고 있다는 표시를 확실히해가면서 먹는 편이다. 집에서 어머니가 요리를 해도, 계속 맛있다-를 연발해주는 것이 우리 지방의 예의라면 예의란 말이다. 나르디는 말을 계속했다. 게다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그는 음식을깨끗이 먹지 않고 전부 조금씩 남겼다. 식욕이 별로 없나? 그럼 저렇게 많이 시키질 말 것이지. "기사단장은 세습직은 아닌데도 대대로 거의 나르시냐크 집안 사람들끼리 서로 물려 왔지. 반드시 아들이 아니라도 적어도 그 성을 가진 그 집안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 갔다네. 사실 나르시냐크 가문이그 동안 대대로 세운 수많은 공적들을 생각하면 벌써 몇 번은 작위정도는 받고도 남았어야 할 테지만, 예전에는 스스로들 고사했다고하고, 지금은 달래도 안 줄 판이지." "음… 달래도 안 준다고?" 나는 입에 버섯 샐러드를 문 채 되물었다. "이미 그 세력은 웬만한 귀족 쯤은 비교도 되지 않네. 더 강해질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대하지. 그 위에 백작 작위 정도 더한다고 해봤자, 별로 생기는 것도 없을 정도야. 그러니 그들로서도 굳이 작위를 얻으려고 기를 쓰고 덤비지도 않는 것이네만 말일세." 글쎄다… 내가 그렇게 들어선지 몰라도 나르디의 목소리에서는 누구에게인지 모를 불쾌감이 묻어났다. 말투도 새삼 다시 고상해지고. 음, 내가 음식을 씹으면서 말을 해서 그런가? 경고를 이상한 방식으로 하는군. "어쨌거나, 현 기사단장도 보통 인물은 아니지." 음, 나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버섯 샐러드를 삼킨 다음에 다시 물어 보았다. "어떤 사람인데?" "대대로 거의 세습하다시피 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구원 기사단의 이름이란 게 있고, 그 지휘 체계의 기본이 '실력'에 의한 것이니만큼,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고서는 기사들에게 신망을 얻기란 매우어려운 일이라네. 현 단장인 아르킨 나르시냐크(이름을 직접 들으니더 신이 났다)는 그 '실력'이라는 점에서 최근 단장을 역임한 어느인물보다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 거의 기사도의 화신으로까지 불리고 있으며 기사단의 기사들로부터 절대적인 추종을 받고 있다고 들었네." 음식은 어느 하나 가릴 것 없이 맛있었다. 양고기는 피망 맛과 조화되어 느끼하지 않고 향긋했으며, 소시지는 훈훈한 훈제 본연의 맛이 났고, 치즈 케이크는 거의 입에서 녹았다. 버섯은… 산마을 출신인 나조차도 감탄할 정도다. 어쩌면 아버지에 대한 칭찬을 들어서 더맛이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게다가 사실 배가 좀 고팠는가) 나는 거의 음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비웠다. 아니, 사실 정확히 말하면 나르디가 남긴 음식까지도 내 것인 줄착각하고 모조리 먹어 버렸다. 나르디는 상관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저 녀석은 수도 근방에서 살다 와서 그런지 촌구석 출신인 나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세상 물정에 밝단 말씀야. 뭐, 배울 건 배워야겠지. 나는 쓸데없는 시기 같은 것은 하지 않는 사람이다. 후식이 나왔다. 나르디가 조개 모양으로 만든 마들렌 쿠키를 바스락거리며(아무리나르디라 하더라도 쿠키 씹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맛보고 있는 동안, 나는 잠시 그 '떠 있는 섬' 이라는 녀석과 눈싸움을… 아니, 사실 녀석한테 눈 같은 건 없었지만, 하여튼 한참을 노려보았다. 모양새가 영 이상하다. 말간 그릇에 노르스름한 액체가 얇게 깔린 채 담겨 있고, 그 가운데 마치 크림 덩어리 같기도 하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잡아다가그릇 위에 앉혀 놓은 것 같기도 한 괴상한 녀석이 웅크리고 있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이 기괴한 요리를 쳐다보았다. '떠 있는 섬'이라는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다. 그렇지만 무슨 맛일지 전혀 짐작이가지 않는데 말씀야. "나르디, 이건 뭘로 만드는 거니?" "음, 달걀과 우유 정도를 주 재료로 생각하면 될 거야. 그 외로는설탕이랑 바닐라 정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음식은 아니지. 이곳에서제대로 맛을 낼 줄 아는지는 모르겠네만." 흠, 달걀과 우유라. 그 친구들이라면 나하고도 잘 아는 사인데 말야. 못 알아봐서 미안하군 그래. 한데 이거 인상이 여간 달라졌어야말이지. 그렇지만… 나르디의 마들렌 쿠키 쪽이 훨씬 맛나 보이는걸. 일단 숟가락을 대 보았다. 물렁물렁하군. "흐음……." 한 스푼, 입안으로 집어넣어봤다. 솔직히 좀 긴장이 되었다. 에라,먹을 게 먹을 거지 뭐 별맛이겠냐. 스르르, 입안에서 녹아버리는 것 같다. 이 맛은……. 꿀꺽. "햐……." 미안해. 미안해 나르디. 너보고도 한 숟갈 정도 먹어보라고 했어야 하는데말야. 내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질 못했어. 미안해. 나르디는 정말 이 요리와 과거 친분이 돈독했던 듯, 내 입과 그릇을 오가는 숟가락을 꽤나 유심히(아까의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에겐 나르디에게 이걸 권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어쨌든 간에 좀 미안하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걸. 나도 이 친구랑 친해질 것 같거든. 헤헤. +=+=+=+=+=+=+=+=+=+=+=+=+=+=+=+=+=+=+=+=+=+=+=+=+=+=+=+=+=+=+=맛있어 보여요? ^^;그리고... '떠 있는 섬'이 어떤 모양인지 상상이 가세요? 이건, 실제로 있는 요리랍니다. 프랑스에서 디저트(데쎄르)로 나오는 음식입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249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1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29 21:54 읽음:207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11) 나는 앞서의 일을 만회도 할겸, 급사더러 잔을 하나 더 갖다 달래서 포도주를 나누어 마셨다. 솔직히 어머니와 살 때는 술 같은 것을마실 만한 기회도 별로 없었거니와(사실 기회보다는 돈이 없었다),음식에 곁들이는 술에는 더구나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사가 다끝났는데도 포도주는 꽤나 많이 남아 있었다. 나르디는 자신의 맥주잔을 다 비운 터라, 기꺼이 내 제안에 응했다. "약간 떫은걸." 내 말에 나르디는 포도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어 보더니,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본래 스테이크와 같은 요리에 곁들여지는 붉은 포도주는 약간 떫은맛이 나는 것을 내놓는 법이지. 자네의 메인 디쉬(음냠, 이상한 말쓰지 말라구)가 양고기 구이였으니 그런 모양이네. 차게 해서 내는고기 요리에는 별로 상관이 없겠지만." "너, 술집에서 일한 일도 있냐?" "나? 하, 하하…… 뭐, 그렇다고 해 둬." 별난 경험이 많은 녀석이로군. 어쨌거나 주거니 받거니 포도주 병을 깨끗이 비워 버렸다. 그런데그 다음이 문제였다. "한 병 더 할까? 아니면 맥주?" 나르디는 나와는 달리 술에 꽤나 익숙한 듯 내게 제의를 해왔다. 음음, 내가 평생 술자리에서 주거니 받거니 술을 먹어 본 것이 몇 번이나 되더라. 뭐 한두 번은 아니지만……(사실, 세 번 정도다). 도시 녀석들은 본래 저렇게 술을 좋아하는 모양이지? 술이란 먹어서 배가 불러지거나 식사 대용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물배만 찰 뿐인데다 자칫하면 실수를 하게 만드는 것이니, 나로서는 이런 것에 돈을 지불해 가며 굳이 많이 먹어야겠다는 중대한 필요성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다. 고향에서의 생각이 그랬고, 나왔더라도 이런 생각이 바뀔 만한 이유는 없다. 그런데……. 그만 하자는 말을 꺼내려니, 뭔가 오기 비슷한 것이 생기는 것 같다. 이건 무슨 기분이려나. 왜 먼저 그만 마시자고 하기가 이렇게 곤란하지. 에라, 모르겠다. 조금 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평상시의 좌우명대로 말했다. "싼 걸로." "좋아. 그럼 맥주." 나르디는 손을 들어 급사를 부르더니 맥주 잔을 내밀며 내 것도 새로 한 잔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다. 음, 저런 행동은 자기가 사겠다는걸까? 알 수 없지만 곧 알게 되겠지. "자." 잔을 부딪치고는 죽 들이켰다. 나르디의 잔은 1파인트 짜리였고,그래서 급사가 가져온 내 잔도 역시 1파인트 짜리였다. 내가 이번 말고 두 번쯤 술이라고 제대로 마셔본 놈이 맥주니만큼 그런 대로 이술과는 안면을 텄다고 자신하고 있었는데, 목구멍을 넘어가는 맛이상당히 짜릿했다. 이거 가끔 한 잔씩 얻어 마시던 것과는 맛이 다른데. 저도 모르게 다 마셔 버렸다. "시원한걸." 나르디가 남긴 마들렌 쿠키와 내 후식이었던 오렌지 타르트를 하나씩 집어먹었다. 타르트의 새큼한 맛이 혀에 닿으니 정신이 번쩍 드는것 같다. "한 잔 더 하자." 이번에는 아예 의향을 묻는 것도 아니라 다짜고짜 그렇게 하자고나오길래 나는 어쩔까 하다가 씩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니까 나르디도 그 잔을 다 마신 모양이다. 다시 급사를 불렀다. "한 잔씩 더 줘요." 이번에는 내가 말했다. 은근히 다음 잔은 내가 사겠다는 뜻을 담아서 한 말이다. 배도 부르고, 이렇게 동갑내기 친구를 만나 맥주 잔을 부딪치고 있자니 사실 기분이 좀 유쾌하기도 하다. 이 나이가 되도록 느긋하게술잔 같은 것을 들고 노닥거려 본 일은 없다. 오늘에 와서 조금 그런다고, 뭐 크게 달라지는 일이야 있으려고. 급사는 금방 다시 잔을 가져왔다. 아, 시원한 맥주, 좋지. 좋아. "다시." 잔을 부딪쳤다. 이번에는 조금만 마시려고 했는데 나르디는 한번에반이나 들이켜 버렸다. 저 친구, 술 정말 잘 하나? 겉으로 보기엔 별로 그래 보이지 않는데. 새삼 나르디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빛이 좋은 금발은 어깨 언저리에서 뭘로 다듬지도 않고 그냥 잘라버린 것처럼 끊겨서 나풀거렸고, 자그마한 얼굴의 윤곽은 또렷하고기품이 있다. 좀 있는 집 자식처럼 보일 법한 얼굴이다. 금갈색 눈동자는 어린아이처럼 큼직하고 맑았다. 오뚝한 코와 뾰족한 턱이 얼굴에서 특색이라면 특색을 이루고 있어서, 눈만 아니라면상당히 날카롭게 보일 뻔했다. 그러나……. "파비아안…… 한 잔 더 할거지이?" 흠. 나르디 녀석, 마치 술에 굶주린 것처럼 마셔대는걸. 나는 평상시의 똑바른 정신을 잠시 되찾아 나르디의 어깨를 툭툭쳤다. "야, 야- 너무 많이 마시는 것 아냐?" "아냐. 이 정도야 뭘." …… 내가 그 소릴 하자마자 갑자기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는 나르디. 흠, 웃기는 녀석 같으니라고. 그래도 나는 그러니까…… 어딘가에서 슬쩍 베껴먹은 것 같은 이야기를 마저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거 어디서 들었던 소리더라. 우리 마을에 잘 나가던 웬 술꾼한테 들은 것도 같은데. "평소 마시던 만큼 마셔야지. 갑자기 많이 마시면 네 몸이 주체를못한다고. 몸 상태를 봐 가며 마셔야 하는 거야." …… 힛힛, 사실 술에 대해서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나다. 그러고보니 이 말을 한 술주정뱅이는 말은 잘하면서도 왜 그 따위로 매일같이 마셔대고 엉망이 됐담. 역시 이론과 실제는 다르단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중인데 나르디가 고개를 바로 들고 나를 보고 있다. 약간은 눈이 진지해 보이는 것 같은데…… 혹시 내가 술을 마셔서 괜히 그렇게 보이는 건가? 나르디는 말했다. "아니지. 술이란 기분이 좋은 날 마시라고 있는 거야." "기분이 좋은 날?" "음, 난……." 흠흠. 뭔 소리를 하시려고. 말을 잇는 나르디의 뺨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너 같은 동갑내기 친구를 이렇게 만나서 참 기뻐." +=+=+=+=+=+=+=+=+=+=+=+=+=+=+=+=+=+=+=+=+=+=+=+=+=+=+=+=+=+=+=요즘 업무가 많아져서 몹시 피곤하군요... 전화 수화기를 들고 잠들기도 하고, 죽은 것처럼 쓰러져 잔다는말도 실감하는 중입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349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1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30 21:56 읽음:205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12) 별 일이 다 기쁘기도 하군. 넌 평소에 기쁜 일 많아서 좋겠다. 너처럼 살면 날마다 기쁜 일이 넘칠 것 같아. 모르긴 해도 나르디는 어른들하고만 살았었나 보다. 동갑인 나와말을 트고, 이렇게 유쾌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게 너무 좋단다. 흠,뭐 나도 싫을 건 없지만, 너처럼 그런 이야기를…… 처음 만난 사람한테 대놓고 직설적으로 하는 사람은 처음 만났기에 사실 좀 당황하고 있다고. 내 몸에 상인의 피가 흘러서인지 아니면 본래 성격이 그렇게 생겨먹었는지 몰라도, 여하튼 나는 일단 사람을 만나면 경계한다. 나쁜의미에서의 경계가 아니라, 일단 저 쪽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판단한 후에야 내 행동을 결정하려 한다는 말이다. 점원이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평상시에도…… 어쨌거나 상대방이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호감이 좀 간다손 쳐도 쉽게 호의를 내비치지 않는다. 그런데 나르디는 달랐다. 순진한 건지, 세상 물정 모르는 건지, - 아냐, 아까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것 보면 나보다 훨씬 세상 돌아가는 데는 도통했음에 틀림없는데 - 하여간 일단 터놓고 나를 만난 게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아니, 자기가 나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내가 사기꾼인지, 도둑인지,소매치기인지 어떻게 판단하고서 하는 말이야? 음, 그런 걸 하기엔 내가 너무 굼떠 보인 모양이군. 하긴, 나 역시도 나르디가 저 중 어느 쪽일 수도 있지만 전혀 경계하고 있진 않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쉽게 터놓고 접근하는 것이 다술수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나도 이 상황을 나르디하고 똑같이 생각하고 있단 건가? 즉…… 너무 기쁘고 좋다고? 으, 으음… 역시 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어. 하긴 일단 대강의 판단력만 굴려 봐도, 나 역시 나르디가 뭐 그런직종에 종사할 거라는 생각은 사실 들지 않는다. 이건 저번에 유리카한테 한 말하고는 또 달라서, 앞 뒤 상황 보아서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 아니라, 딱 보니까 벌써 나르디는 그런 짓 할 사람이 아니게 보였다는 거다. 내 사람 보는 눈, 그거 믿어도 될까. 나는 기분 난 김에 오늘 멧돼지한테 쫓긴 이야기를 한바탕 신나게늘어놓았고, 나르디는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눈을 엄청나게 반짝거리며 들었다. 멧돼지가 망설이다가 용기 있게 벼랑으로 뛰어내려 자살해버렸다는 대목에서는 함께 배꼽을 쥐고 웃어댔다. 아무래도 지금이야기의 재미에 비해서 지나치게 웃음이 많이 나오는 것 같기는 하지만 말야. "하하, 그 멧돼지, 그럼 그냥- 열 네 조각은 났겠다. 확실히 인간용사라면 못할 일임에 틀림없는데, 푸훗훗……." "사실 좀 아깝긴 해. 우리 동네에서였다면 다들 보기만 하고도 기절할 만한 놈이었거든. 내가 그런 거 잡았다고 말해도 아무도 안 믿을 거다. 잘만 했으면 내가 지금 너한테 맥주가 아니라 멧돼지 통구이를 대접하고 있을 텐데 말야." "하하하하……." 나르디는 너무 웃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술을 마시니 나르디도 아까처럼 절도 있는 자세는 아니다. 거의 나하고 비슷한 자세로앉은 채 술잔에 얼굴을 댔다가 뗐다가 했다. "얼굴이 뜨거운걸." "술 때문에 열이 나는 거야." "에이. 내가 이 정도 마셔서 취할쏘냐." 나르디는 반정도 남은 잔을 들더니 다시 단숨에 비웠다. 지금 와서드는 생각인데, 저 녀석은 객기로 뭉친 녀석일지도 모르겠어. 나보다 전혀 술을 잘 마시는 것 같지 않거든. "아아, 파비안. 과자 한 접시 더 달라고 하고, 우리 맥주 더 마시자." 우리가 지금까지 마신 맥주를 세어보자면…… 아마도 한 사람당 10잔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그럼 둘이서 무려 20파인트를 마셔댔군. 뭐 정신이 아주 갈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사실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있다. 아 물론, 나르디처럼 심각하진 않다. 뭐야, 술자리 세 번만에 10파인트면 잘 마신 거잖아. 안 그래? 안 그래? 딸꾹. "야, 나르디. 우리 술값 꽤나 나왔겠다. 그치?" "어, 술값? 에이. 내가 산다 사." 그런 말 하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나르디는 그 곱살스런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호탕한(?) 말투로 말하더니 주머니를 뒤적뒤적, 뭔가를끄집어냈다. 돈? 좌락. "뭐야, 동전들만 나오네." 나르디가 테이블 위에 흘려 놓은 것은 은화들이다. 슬쩍 보아도 10존드 짜리가 일곱 개나 나왔다. 그러고도 더 뒤적거린다. "금화가 있었는데……." 금화도 역시 동전의 일종이라고 이야기해 주려다가 일단 나도 지지않고 주머니를 뒤졌다. 어라? 나도 은화들밖에 없잖아? 그것도 나르디의 은화보다 더 적네? 일단 올려놓았다. "나도 있어. 술값은 같이 내면 된다구. 돼." "뭐야. 내가 낸다고 했잖아. 나 기분이 너무 좋아." 나르디는 드디어 뭔가를 찾은 듯,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손에 쥔 것들을 얹어놓았다. 이번에는 확실히 금화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다. 무려 열 개나 되는 금화, 그것도 모두 100존드 짜리다. 나는 취기가 확 가시는(사실, 반 정도만) 것을 느꼈다. "야, 야, 나르디. 이렇게 큰 돈을 함부로 꺼내놓으면 어떻게 해." 나르디는 개의치 않는 듯 금화들을 내 쪽으로 밀었다. 나르디가 좀헛손질을 했기 때문에 두 개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짤그랑. 짤그랑. 나는 정말 언제 술을 마셨나 싶을 정도로 빠른 몸짓으로 그것들을주웠다. 그리고는 재빨리 양손으로 금화들을 모았다. "어서 넣어. 계산은 이걸로도 충분해." "아음…, 파비안……." 녀석, 전혀 말을 안 듣잖아. 아예 맛이 간 건 아닌데, 술에 취하니고집이 장난 아닌 녀석이군. 나르디는 손을 좀 요란스러울 정도로 내저었다. "가져. 계산하고 남으면 팁도 주고. 밥값도 주고." "야, 나르디! 이 녀석이, 누굴 거지로 아냐?" 물론 화가 난 것은 아니다. 나르디가 무슨 마음에서 하는 소리인지대충 아니까. 여관에서 일하면서 술 취한 손님들 많이 보았다. 다음날 아침이면 술 깨서 내 돈 어디 갔냐고 찾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꼭몇 명씩은 있는데, 이 녀석도 그 패거린가 봐. 그렇지만 나르디는 술이 취해서도 예의가 정말이지 발랐다. "아. 미안해. 미안해. 내가 실수했어." 그러더니 나르디는 몸을 갑자기 꼿꼿하게 세운다. 왜 저러지? "급사님- 이쪽으로 좀 와보실래요?" 흐, 저 녀석은 술 취하니까 아예 급사까지 님으로 불러대네. 그건그렇고 왜… 아, 직접 지불하시겠다 이거지. 지지 않고 나도 불렀다. "여기요오-." 흐음. 내가 들어도 내 급사 부르는 목소리는 좀 요상스럽다. 급사가 오긴 했는데, 우리가 뭘 시킬 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눈초리다. 뭔가 알고 있다는 눈초리로 주변을 주욱 훑어보면서…… 흠흠, 내가 이 정도 술을 마셔도 눈치 하나는 죽지 않는구나. 그럼, 내가 누군데. 하핫. "저, 손님들……." 내가 입을 열려는데 급사가 먼저 말을 시작한다. 목소리가 조그맣다. 뭐야? 안 들린단 말야, 크게 말해. "뭐라고요?" "조, 조용히… 제 말 들으세요." 왜 저러지. 다가온 사람은 처음 내 주문을 받던 내 나이 또래의 급사다. 그는일단 주섬주섬 우리 테이블의 잔들을 주워들면서 일부러 테이블을 정리하려는 듯 손을 이리저리 놀렸다. 그러면서 조그맣게 말한다. 내얼굴을 보지도 않고 말이다. "손님들, 조심하세요. 노리는 자들이 있어요." "응?" 내 목소리가 좀 컸나 보다. 급사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제발, 조용히요. 들리면 저 죽어요." 급사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기까지 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노리는 자들? 아마, 깡패들인가 보지? 예전에 설산의 불빛 여관에서도 가끔 동네 깡패들이라고 할 만한자들이 손님들에게 시비를 거는 것을 본 일이 있다. 하지만 우리 영지야 어디까지나 여행자들이 많은 곳도 아니고, 오랫동안 같은 곳에살고 영업해 왔기 때문에(여관 주인은 여관업, 깡패는? 깡패업) 대부분 아는 사이들이다 보니, 간단히 몇 마디 말로 끝나고 심해 봐야 주먹질 한 두 번 정도지 특별히 겁먹을 만한 사건이 일어난 일은 없다. 그러나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니다. 일단, 내 고향이 아닌 것이다.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즉 아무도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없는 낯선 외지란 말이다. "아까부터 쳐다보고 있었는데 손님들이 돈을 꺼냈으니…… 모르긴해도 이제 그냥은 안 지나갈 겁니다. 저…… 나이도 별로 안 많으신것 같고 해서 좀 걱정… 아니, 그냥 알려드리는 거예요. 그…… 저쪽구석 테이블."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아들었다. 돈 좀 있는 얼뜨기들로 보였다 이 말이구나. 그럴 만 하구나. 어디서 굴러먹다가 왔는지도 모를 애녀석들이 비싼 음식 시켜먹고 술이나진탕 마시고 앉아 있다 이거구나. 힛, 너희들의 그런 생각도 무리는아니란다. 푸히히. ……음, 내 상태도 좀 이상한 것 같군. 일단 얘를 좀 깨워야겠다. 내가 잠깐 한눈을 판 새 나르디는 어느 새 테이블에 코를 박고 있었다. "야, 나르디. 나르디." 나는 나르디의 어깨를 툭툭 치고 흔들었다. 급사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잔 두 개를 들더니 일없이 테이블 위의 쓰레기들까지 몽땅치워 주고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왜…… 파비안, 왜?" 다행이군. 아예 죽진 않았으니. "네가 돈을 꺼내서 이 말썽이잖아. 우릴 노리는 자들이 있다나봐." 말해 놓고 보니 좀 지나치게 거창한 것 같다. 사실 시골 촌놈과 도시 떠돌이 녀석 두 명이 그저 식사 좀 비싸게 먹고 술 좀 마신 것뿐인데, 누가 노린다고 하니까 우리가 무슨 중요한 인물들이라도 된 것같잖아? 나는 말해놓고도 약간 계면쩍어서 피식 웃었다. 사실, 웃을 만한상황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나도 술기운이 아직 좀 남아 있나보다. 깡패들이 별 거 아닌 것처럼 생각되니까 말야. 그런데 나르디의 반응이 이상했다. 순식간에 표정이 달라진다. "뭐? 여기까지 쫓아왔어?"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흠. 꼬마 손님들." +=+=+=+=+=+=+=+=+=+=+=+=+=+=+=+=+=+=+=+=+=+=+=+=+=+=+=+=+=+=+=몇몇 분들께서 제 단편에 대한 문의를 해오셨어요. 그다지 잘 쓴 것도 아닌데... 어쨌든, 혹시 또 찾으실 분이 있으실까 싶어, 이야기를 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제가 통신에 올린 단편은 네 개고요, 모두 환동(go fan)에 있습니다. 단편 게시판에 있지요. 그런데... 제 아이디가 최근에 바뀐 거라서 LI 모래의책 하면 절대안 나옵니다. LI enjolas 하시면 세 편이 나옵니다. 참고로 이 아이디는 현재는제 인터넷 아이디예요. (pf하면 나오죠 ^^)그리고 또 하나는 아이디가 잠시 유보중이었을 때 아는 동생 아이디를 빌려 썼습니다. 그래서 이건 LT 루디엔(말머리를 달았기 때문에...LI가 아닙니다) 하면 나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넷 다 '세월의 돌'하고는 분위기가 많이틀립니다. ^^;그 중 두 편은 '세월의 돌'과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고, 나머지 두개는 아닙니다. 읽어보시면 알겠지만...(그런데 누가 읽으려나?;)특히 그 중에 한 편은, 잠 안오실 때 수면용으로 권해드립니다... 하하하...^^;; 읽어보시면 어느 걸 말하는 건지 다들 아실 거예요. 그럼, 주제넘은 잡설은 이만.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350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1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30 21:57 읽음:205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13) 꼬마라고 하기엔 내 키가 지나치게 큰 것 같은 걸. 나르디도 나보단 조금 작지만, 그래도 그 나이 또래 치곤 작은 편은 아니잖아? 꼬마 손님들이라고 불릴 만하진 않다고. 사실 꼬마들이라면 너희 쪽에도 그런 녀석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무심결에 쓸데없는 분석을 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나는, 말을 건사람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일단 저들이 적이라면, 상황 파악을 해야하지 않겠어? 흠흠, 그러니까. '꼬마 손님들'을 잡으려는 녀석들치고는 너무 많군. 무려 다섯 명이나 되잖아. 두 사람은 덩치가 꽤 큰 편이고, 한 명은 보통, 하나는 좀 작고(나보다도 작았다), 마지막 한 사람은 보기 드문 거구다. 지저분하게 수염을 기른 놈도 있고, 하여간 친절한 인상과는 거리가 멀다. 하, 당연하지. 친절한 얼굴 깡패 봤냐? 그런 얼굴로는 깡패 짓도 못해. 점원 같은 거나 하는 거라고. 그건 그렇고, 너네 동네에는 별로 벌이가 신통찮은 모양이구나. 먹이 없는 골짜기에서 토끼 한 마리 걸리면 여우, 삵쾡이 할 것 없이모조리 달려들어 패싸움을 벌인다지? 보아하니 그 말고 달리 설명할말이 없구나. 너네들도 일단 한푼이라도 뺏고 나면 너네들끼리 다시싸워야 할 것 같은걸. 흠, 물론 그렇지만 그렇게 되어선 안되지. 일단 별다른 무기는 든 것 같지 않아 조금 안심이 되었다. "무슨 볼일이세요?" 음, 마치 상점에 물건 사러 온 사람을 받는 듯한 내 말투. 아무래도 한 직업을 너무 오래 가지는 건 문제란 말야. 문제. "몰라서 묻냐?" 저들끼리 얼굴을 쳐다보더니 웃는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해서 약간비위가 상했다. 흘끔 나르디 쪽을 보니, 뭔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노리는 자들은?" "앞에 안 보이냐?" "이 사람들?" 나르디는 고개를 돌리더니 '이 사람들'을 하나 하나 얼굴을 보며자세하게 관찰했다. 마치 무슨 '관상'이라도 보려는 사람처럼. 그러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 그 친구들을 말하는 게 아니구나? 이 친구들은 누구지?" 뭐라고? 이상한 소리하네, 얘. "야, 뭐야, 그러니까 저 깡패들이 너를 쫓아다니고 있었단 거야? 아니면 다른 패거리 하나가 조만간에 또 올 예정이란 거야?" "아, 아니야, 그런 건 아니라구-!" 우리가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그들은 나르디의 말에서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 같은 기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뭐, 사실 못 알아채면 바보라고 할 수 있다. "뭐야, 이 꼬마 녀석들은. 우리가 별 거 아니게 보인다 이건가?" "간이 부어서 배 밖으로 나왔구나." "한 번 죽어봐야 정신을 차리겠다 그건가 본데?" 보아하니 무리가 많아서 그런지 행동 개시하기 전에 말들이 많으시군. 그래서 어디 그 직업 해먹겠어? 그래서 나는, 술 마신 객기도 있고 해서 한 마디 해주었다. "말들이 많으시군요." "뭐야?(평범한 반응이다)" "네 녀석이 웬 참견이야?(좀 이상한 반응인데?)" "어디 한 번 맛좀 보여줄까?(오, 교본적인 반응이로군)" "에잇!(그래, 깡패는 역시 말보다 행동!)" 내가 마음속으로 마치 그들을 가르친 선생이라도 되는 양 주절주절해설을 붙이고 있는데, 큼지막한 주먹(제일 커다란 덩치의 주먹이군)이 우리 테이블 한 가운데로 날아들었다(왜 애꿎은 테이블은 치냐? 상대방을 치면 되지). 퍼억-!(와, 주먹 안 아프냐?)쩍…….(어, 정말 갈라지네)오, 꽤 사줄만한 힘인데. 테이블 가운데가 쩍 갈라진다. 순식간에 테이블 위에 있던 접시며기타 것들이 양쪽으로 편을 가르더니(전쟁놀이라도 할 참인가?), 와장창 바닥으로 떨어졌다(아, 바닥에서 하려고?). 나는 숨을 가다듬으면서 싸울 준비…… 아니, 한바탕 뭐라고 외칠준비를 했다. 고향에서도 나는 사실 주먹만큼이나 입심으로 먹고살았었는데, 오늘 이 외지에서 자랑할 만한 기회가 왔지 않아(확실히 나는 술로 맛이 좀 가기 시작했음에 틀림없다). 오랜만에 솜씨 자랑이나 할까 싶어서 목도 가다듬었다. "으흠, 큼큼-." 그런데 나르디는 그 와중에 뭘 하고 있었냐면……잽싼 솜씨로…… 어음, 떨…어지는 접시를 낚아채고 있네? "어, 깨면 안되잖아요. 나라… 아니, 여관의 재산인데." 나는 정말 놀랐다. 그래서 해설도 잊어먹어 버렸다. 나르디는 그 짧은 순간,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접시들 중 무려세 개를 잡아내었다. 즉, 다 잡아내었다. 음, 알았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긴 들었어도 나르디, 네가 그런 사람인줄은 몰랐어. 술 마시면 이상한 잔재주가 느는 사람들 말야. 그거 보기만 해도 신기한데. "뭐야, 저 녀석!" 아마도 테이블을 친 거인은 나르디에 대한 평가가 나와는 달랐던모양이다. 즉, 자기가 한 일을 무위로 만들어 놓은 데 대해 불같이화를 냈다. 참, 웃기는 녀석이지? 접시 깨지면 접시 값을 물어줘야하는 법이라고. 아마도 접시 값이 꽤나 물어주고 싶은가봐. 어떻게 알았는지 여관 주인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아이고, 싸움은 여기서 말고 나가서들 하시라고요~. 여기 집기들이 돈이 얼만데……." 나는 여관 주인의 얼굴을 흘끔 보았다. 아까까진 코빼기도 보이지않더니, 이런 일이 생기니까 황급히 기어 나오는군. 아까 내 꼴보고는 돈 보여줘야 주문 받겠다고 한 사람이 당신이겠다? "아, 당신이군요?" 흐…… 멋대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마지막 말뿐이었으니 이야기가 통할 리 만무하다. 여관 주인은 무슨 소리냐는듯 멀뚱히 내 얼굴을 쳐다봤다. "뭐요?" "아, 여관 주인장. 마침 잘 왔어요. 당신이 좀 증명해주지 그래요? 나 돈 없는 거 딱 보고 알아챈 사람이 당신인데, 이 친구들은 아무래도 내 주머니에 돈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애서요. 당신 만한 안목들이 아무래도 없는 모양야." 음, 내가 생각해도 정말 달변이군. 그러나 내 명연설에도 불구하고 여관 주인은 무슨 개가 짖느냐는표정이었다. "이 친구가 돌았나." "… 음." 그 순간 중대한 사실이 깨달아졌다. +=+=+=+=+=+=+=+=+=+=+=+=+=+=+=+=+=+=+=+=+=+=+=+=+=+=+=+=+=+=+=요즘 자꾸 피곤한 게, 날씨 탓일까요? Luthei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351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1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4/30 21:57 읽음:206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14) 여관 주인은 기껏 뛰어나와서는 나와 나르디한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 5인조한테 볼일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의 주문인 즉슨,싸우지 말라거나, 손님을 괴롭히지 말라거나, 아니 진짜, 진짜 최소한도로만 바래서 소란을 일으키지 말아 달라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밖으로 나가서 싸우든지 말든지, 즉 깡패들이 애들을 요리해 먹든날로 먹든 알아서 하라는 것, 그리고 자기네 재산만 부수지 말아 달라는 것, 이것이 그의 요구였다. 흠, 상황 명쾌해서 좋군. 이제 어떻게 해야 할 지 좀 알겠어. 나는 말했다. "아니, 썩은 고기 한 조각에 모여드는 독수리들이 이렇게 많아서야, 어디 남아나는 것이 있을라구." 깡패들은 잠깐 당황하더니 당황한 것의 열 배 정도로 얼굴이 시뻘개졌다. 음, 그렇지.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독수리들끼리 나가서 회의라도 하고 오시죠? 분배안에대해서 좀 숙의를 하신 다음에 썩은 고기한테 문의를 하심이? 아, 나여섯 조각으로 잘라지긴 싫다구." 퍼벅! "웁……." 술 마신 객기의 대가는 이런 거구나. 턱이 돌아갈 정도야. 괜찮은솜씨였어. 나는 입안이 찢어져 흐른 피를 바닥에 탁 뱉고는 계속 말했다. "뭐죠? 아하, 썩은 고기이긴 하지만 잘 두드려서 부드럽게 하려고? 샌드위치 속이라도 넣을 참인가? 아니면 커틀렛?" 내가 계속해서 나의 '오늘의 명언'들을 늘어놓으려는 참인데 나르디가 갑자기 끼여들어 말했다. 그 말인 즉슨……. 나르디는 빠르게 말했다. "혹시 접시 필요하세요?" 다음 순간 접시 세 개가 정말 환상적으로 날아가 가장 앞에 선 평범한 몸집의 깡패 녀석 - 그러니까 나를 때린 녀석 - 의 머리, 가슴,배에 작렬했다(아, 내 표현은 역시 멋지다니까). 깨진 접시 조각이얼굴로 튀어 오르자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쌌다. 그러더니 나르디는 훌쩍 의자 위로 뛰어오르면서 옆 테이블을 딛고, 몸을 빙글 회전시켜 누군가 막아보려고 하기도 전에 3큐빗이나오른쪽으로 떨어진 홀에 내려섰다. 정말 가볍고도 멋진 동작이었다. 하 참, 아까 까지 술 먹고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녀석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물론 나도 멍청히 보고만 있지(사실 방금 까진 그랬지만)는 않았다. 즉시 의자 뒤로 일어서면서 방금 까지 앉아 있던 의자를 움켜잡고 빙글, 돌렸다. 의자 다리 네 개가 풍차처럼 반 바퀴 빙그르르 돌자, 사람들이 움찔 뒤로 물러서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외쳤다. "의자 든 놈한테 테이블 들고 덤비면 바보!" … 음, 이번 작문은 좀 유치하군. 그런데 내 말이 깡패 녀석중 하나한테 뭔가 번뜩이는 영감을 준 것같다. 왜, 그 덩치 큰 녀석 말이다. 그 녀석은……테이블을 집어들었다. 나르디가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헤, 저 녀석 이젠 발음도똑발라졌네. "바보셨군요?" 여관 주인은 이제 자기 힘으로 못 막겠다 싶었는지 주방 안쪽으로도망쳐 들어갔다. 홀에 남아 있던 몇 명 다른 손님들도 후닥닥 밖으로 나가거나, 나가기에 적당한 위치를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은 홀 구석으로 좌악 몰려 서는 빠른 판단력과 기민한 행동력을 선보이고 있다. 아마 밖으로 나가는 녀석 중에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음식값 떼어먹고 가는 놈도 있을 게 틀림없어. 뭐, 하지만 난 저 여관 주인 녀석의 돈 따위에는 상관하지 않기로했다구! 나는 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의자를 힘껏 내던졌다. "바보야 받아!" 바보는 테이블로 막았다. 투다당… 와장창! 하하, 내 생각 대로지. 테이블에 정면으로 부딪친 의자는 부서지면서 몇 조각으로 부서져주위 사람들에게 날아갔다. 예상대로 녀석들은 의자 다리들을 피하느라 죽 떨어져 선다. 그 사이 나는 나르디가 있는 쪽으로 재빨리 다가가 섰다. "파비안, 핫핫, 아까 연설 멋지던걸." "하하, 나르디, 넌 나한테 작문은 한 수 배워야 된다." 우리는 여관 안쪽 벽으로 몰려 있었다. 깡패 녀석들이 문 쪽을 점거하고 있어서 나가기가 어렵군. 일단 부채꼴로 떨어져 섰다. 검을써야 할 상황 같은 건 안 오길 바라지만 일단은 그렇게 섰다. 일단 좀 거리가 확보되었지만 녀석들은 곧 좁혀 들어왔다. 음, 내 판단 착오로군. 녀석들은 내가 던진 의자의 조각들을 분분히 들고 있었다. 의자 다리, 기타 등등. "건방진 꼬마 녀석들!" 나는 상관하지 않고 등뒤의 나르디에게 한 마디 더 속삭였다. "그런데 접시 던지기는 언제 배웠냐? 군대에 술집, 이젠 서커스에있은 일도 있냐?" 나르디가 대답하기도 전에 첫 번째 녀석이 육박해왔다. 어쩌지? 월로 막는담? 일단 말부터 하자! "어, 꼬마는 그 쪽 같은데요(제일 작은 그 녀석이었다)?" "우오오옷!" 똑바로 머리 위에서부터 내려쳐지는 막대. 검을 먼저 뽑아들고 싶지는 않다. 저 쪽도 검은 한 자루씩 차고 있었지만 아직 꺼내들지는 않고 있다. 그러니 나도……. "에에랏!" 이에는 이! 의자에는 의자! 푸퍽! 나는 외쳤다. "의자 두 개째!" 내 말은 마치 여기 있는 의자들을 모조리 부수겠다는 말로 들렸나보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일어서더니 의자들을 홀 안쪽으로 밀어 넣었으니 말이다. 흠, 다들 이 집 여관 의자랑 원한이 깊은가봐. 기회를 봐서 없애려고 기를 쓰는 저 모습들을 봐. 깡패들은 아마도 이런 식으로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이번에는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나르디가 약간 걱정되었지만, 아까 보여준 기민한 동작으로 보아잘 피할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으잉?" 나는 나르디 쪽을 흘끔 돌아보고는 흠칫했다. 나르디의 손에 들린것은……. "야, 그건……." 검이었다. 애써 뽑지 않으려고 했는데. 우리가 뽑으면 저 쪽도 당연히 뽑을텐데. 나는 걱정이 무지 되려고 했지만 다시 한 번 나르디 쪽을 보고새로운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검을 검집에서 뽑지 않고 있었다. 아, 그렇구나. 좋은 생각이긴 한데…… 그런데 나한텐 제대로 검집이라고 할 만한것이 없는데. 검이 워낙 크다 보니 검집을 사거나(어느 대장간에서 그런 걸 팔겠어?), 맞출(무게만 엄청 늘어난다. 관둬라 관둬) 엄두도 못 내었거니와, 보다 나은 방법이 생각났기 때문에기도 하다. 내 검집은 검 손잡이 쪽을 어깨띠에 걸고, 등뒤의 허리에 매어진가죽띠에 중간을 걸고, 끝을 감싸는 가죽 주머니를 거기 연결해 놓은모양새다. 그렇게 등에 걸고 있으니 걷기도 좋거니와, 투핸드소드를가진 검사들이 흔히 그렇게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뭐,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이런 모양으론 검집이 영쓸모가 없다는 점이겠지. 그런데 가만히 보니 더 중대한 사실을 나와 나르디 모두가 눈치를못 챘던 모양이다. "어……." 나는 홀을 휘둘러보았다. 깡패들은…… 모두 어디선가 검을 빼들고 있었다. 그렇지. 저들은 깡패들이었지. 그럼, 깡패들이란 상대가 뭘 하면, 그보다 한 수 더 뜨는 걸 해야지, 안 그러면 깡패짓 해먹고 살겠어…… 아악, 이게 아냐! 큰일났다! 나는 가슴속에 뭔가 불안한 기운이 한 줄기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느꼈다. 아까는 술기운도 있었고, 동네에서 싸우던 것 같은 기분으로약간은 객기도 부려 가며 덤빈 거였지만, 일단 검을 들고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 검을 들고 장난을 쳐서는 안 된다, 검을든 이상 이기겠다는 마음을 가져라, 그리고……. 어쨌든간, 나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인간을 대적해서 진짜 검을 써야 하는 상황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여, 여행이란 역시나 골치아픈 걸까? 상황은 조금도 진전되지 않았다. 음, 이걸 감사하게 여겨야 하나? 나르디, 네 생각은 어때? 나르디는 오른손에 검을 들고 앞을 똑바로 겨냥한 채,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지루하군……." 아마도… 나르디한텐 아닌가 보군. 나르디가 검에서 검집을 뽑아 던지고, 내가 등뒤에서 '멋쟁이 검'을 꺼내 자세를 취한 뒤부터 약 맥주 한 잔 마실 만한 시간(이런 식의 시간 재기는 언제부터 생긴 버릇이지?)이 흘렀지만, 깡패들은 우리들을 노려보기만 한 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서, 설마, 우리가 무서워서? +=+=+=+=+=+=+=+=+=+=+=+=+=+=+=+=+=+=+=+=+=+=+=+=+=+=+=+=+=+=+=드디어, '세월의 돌'이 천리안에도 올라갑니다. ^^천리안 검과 마법동호회(go sword) 장편게시판에 올라가게 되고요,warewolf(성준엽)님께서 수고해 주시기로 했답니다. (감사합니다- ^^)이로서 3대 통신망에 올라가게 되는군요...^^;즐겁기도 하고, 한편으론 걱정도 됩니다. 새로운 분들도 재미있게읽으실런지.... 더욱더 열심히 써야겠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430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1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1 20:32 읽음:203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15) 아까 전에 한꺼번에 달려들던 깡패들은 나르디의 칼집을 씌운 칼이한 번 가볍게 허공을 가르자 순식간에 후닥닥 물러섰었다. 순식간에세 녀석이나 얻어맞았는데, 나로서는 어떻게 움직였는지 정확히 보지도 못했… 사실은 나는 내 앞에 달려들던 녀석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녀석을 관찰할 여유는 없었지. 흠흠, 하여튼 아직까지 검을 뽑지 않고 있던 나는 그저 입을 벌린 채 구경만 했는데, 확실히 귀신같은 솜씨였다. 놀랍다. 나르디의 오른손에 들린 것은 내 멋쟁이 검과는 차원이 다른 세검(細檢). 내 상식으로는 세이버라고 하기엔 좀 더 가늘고, 레이피어(Rapier)로 보기엔 좀 폭이 넓은 것인데, 게다가 반달 모양으로 이상하게 휘었다. 저게 뭘까? 그건 이따가 볼일 다 본 다음에 물어봐야겠다. 어쨌든 나는 이제 나르디가 검사를 따라다닌 적도 있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이로서 나르디의 경력이 모두 몇 개가 된 거더라. 그리고 내가 드디어 등뒤에서 검을 뽑은 순간……. "헤에, 저 녀석 뭐 검이 저래?" "저거 갖고 어디 휘두를 수나 있겠어? 아예 쇠뭉치를 들고 다니지." …… 역시나 말 많은 그 녀석들이 분분히 한 마디씩 거드는 가운데나는 뽑아든 멋쟁이 검을 전투 태세로 잡고 허공을 향해 휙 반원을그렸다. 상당히 가볍게, 심지어 우아할 정도로 아름다운 곡선이야. 나조차도 오랜만의 이 연습 동작에 감동할 정도였다. 물론 그들도 보았다. 그리고……지금 이 꼴이다. "하아암……." 상황의 급박함이 사라지자(사실 내 입장에서는 전혀 사라졌다고 여겨지지 않았지만) 나르디는 다시 술기운이 도는 듯 하품을 하고 있다. 확실히 이상한 녀석인 게, 멋대로 술 취한 상태와 멀쩡한 상태를왔다갔다한단 말야. 저러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다면 물론 기쁘긴 하겠지만, 확실히 동료를 믿고 안심한다는 점에서는……. "흐아, 하아암… 파비안, 내가 다시 눈을 좀 붙이려면 오래 걸릴까? 네 생각은 어떠냐?" "……." 글쎄, 그게 그렇게 잘 될까. 아까 나르디의 환상적인 칼 솜씨, - 나조차도 어안이 벙벙했던 -그걸 보고 덤비지 못하고 있는 것임에 분명한데, 그 실력으로 쟤네들을 먼저 잠재운 다음에 잠을 자도 자는 게 어떠냐. 뭐 어쨌든, 나는 말했다. "그러고 깨서도, 나하고 다시 느긋하게 맥주나 마실 상황이 될는지는 모르겠는데." "어… 그래? 그럼 지금 마실까?" "……." 나르디는 분명 벌써 잠결임에 틀림없어. 어쨌든 간 침묵이 너무 길었다는 점이 저 쪽에서도 분명 팔목 근질거리는 사실임에 틀림없었던 모양이다. 그 중 가장 다혈질인 듯한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애송이 꼬마놈들! 검 좀 휘두른다고 모두 검사인줄 아냐? 진짜 검사라면 어디들 덤벼 봐!" 내 생각이 틀렸다. 소리를 지른 놈은 다혈질이 아니라 저들의 참모쯤 되겠다. 은근히 자극적인 말로 흥분을 유도해보려 하는군. 그런 의미에서 우리 팀의 참모인 내가 대답할 필요가 있군. 사실…… 나르디는 참모 문제가 아니라 다른 점에서 대답할 상황이못 되었다. "초짜 깡패 님들! 욕 좀 하고 시비 좀 건다고 모두 깡패인줄 아슈? 진짜 깡패라면 어디들 덤벼 보시죠!" "입만 살았으면 뭐해, 용기가 없는 걸! 그런 솜씨 갖곤 약이나 팔면 모를까, 초원에서 곰만 한 마리 만나도 그냥 도망이나 갈걸?" "입만 더러우면 뭐해, 용기가 없으신 걸! 그런 솜씨 갖곤 약도 못팔거니와, 여관에서 애송이 둘만 만나도 그냥 도망이나 가겠죠?" "크아악, 이 녀석이! 너 당장 이리로 와! 내가 당장 고깃덩어리로만들어 줄 테니!" "어이구, 저 양반이! 잠시 이리 와 보실래요? 제가 이걸로 등이라도 긁어드리죠!" 깡패 쪽의 상당히 창조적인 발언들에 대해, 내 쪽에서 상당히 독창적인 변형을 가하자 녀석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는지 입을 다물고뭔가 궁리하는 눈치였다. 하하, 얼마든지 말해 봐라, 내가 깡그리 멋지게 바꾸어 줄 테니. 그러나 두 참모간의 싸움이 길어질 조짐을 보이자 두 팀 모두가 슬슬 열이 받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누구, 상대편한테? 아니, 자기편한테. "파비안, 너의 작문 실력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우리 그만 끝내보는게 어떨까 하네." 우스운 일이지만 나르디의 말투 속에서 '자네'가 사라지니 좀 이상스럽게 느껴져서 다시 한 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다른 깡패들이 내 고민을 덜어 준다. 그들은 외쳤다, 자기 편의 참모에게. 나만큼 독창적이진 않지만,어쨌든 들은 말을 번안해서. "야, 네 목소리 큰 거 그만 자랑하고, 저 녀석들 고만 끝내버리자." 음… 어느새 각 팀의 다른 일원들도 게임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걸. 나르디는 눈을 비비더니 다시 칼을 똑바로 쥐었다. "좋은 생각이야." 모든 사람의 진심을 대변하는 한 마디가 떨어지자, 숫자가 많은 쪽이 먼저 분분히 검을 휘두르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거리는 4큐빗 정도 된다. 내 검으로도 사정 거리 밖이니, 나르디나 상대들의 검으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르디의 그 이름 모를 검의 길이는 약 2큐빗 남짓밖에 되지 않았고, 놈들의 브로드소드(Broad Sword)도 그보다 조금 긴 정도다. 홀 안에는 이제 우리들 외엔 두어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여관 주인 아저씨, 오늘 장사 다 하셨군요. "키야앗!" 브로드소드의 특성상 베기를 위주로 한 공격이 될 거라고 예상하고있었는데 생각한 대로다. 왼손에 칼을 쥔 녀석 하나가 위협적으로 한걸음 뛰어오르더니 가로로 검을 휘두르며 육박해 왔다. 가슴 높이에서 평행으로 베어 들어오는 검. 약간 아래를 겨냥하고 있던 검을 슬쩍 앞으로 당기면서 힐트를 잡은 손을 위로 당겨 올린다. 앞으로 세워 들고는, 가슴께로 들어오는검을 막았다. 티캉! 팔목이 지릿, 했다. 정면으로 부딪친 검 때문에 브로드소드를 휘두른 자는 뒤로 휘청하며 뒤로 2큐빗은 튕겨나는 검을 든 채 중심을 잡으려 했다. 그러는 바람에 정면이 완전히 비었다. 그 순간을 놓칠 내가 아니지! "여기!" 마치 주문한 물건을 내주기라도 하는 듯한 기묘한(?) 기합을 외치면서 그대로 밑으로부터 검을 위로 쳐 올렸다. 치명상을 입히고 싶진않아, 아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가 죽기를 바라지 않아. 나는 다리를 노렸다. 목표점은 허벅지, 힘을 주어 끊어 쳤다. 그리고…… 검 끝이 살을 파고드는 느낌. 파밧! 검이 대동맥을 끊었는지, 피가 두 뼘은 튀어 올라 허공을 친다. 녀석의 다리가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후두둑, 바지를 적셨다. 상대를 베었는데도 기분이 영 더러웠다. 왠지 보고 있기가 어렵다. 보고 싶지 않아서 나는 물러서 버렸다. 더 공격하지 못하고 뒤로세 걸음이나 물러서 버렸다. 피, 마룻바닥에 피가 생경한 빛깔로 뿌려졌다. "으… 이 녀석!" 내 검을 맞은 자는 나처럼 생각하진 않는 모양이다. 당장에 칼을휘두르며 앞으로 달려든다. 대각선으로 베어 들어왔다. 왼손에 칼을쥔 자라 베어 들어오는 방향은 내 오른쪽이었다. 애매했다. 아직 왼손으로 검을 휘두르는 자를 만나본 일은 없었다. 사실… 검을 휘두르는 상대와 진짜로 싸워 본 일 자체가 없었다. 내가 망설이는 새 검은 이미 치고 들어왔다. "차아!" 내가 어물거리는 사이, 갑자기 들린 낯선 외침소리와 함께 내 앞으로 들어오던 브로드소드가 움찔, 비틀거린다. 내게 짧은 호흡의 기회가 났다.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 들고 있던 검을 상대방 어깨를 향해 내질렀다. 뭔가가 턱, 닿더니 뚫고 들어가는 느낌은……. 마치, 바위를 버터 자르듯 뚫던 그 기분. "으아아……." 내가 소리를 지른 것 같기도 하고, 검을 맞은 자가 지른 소리 같기도 한데, 어쨌든 둘 다 함께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선다. 짧은 눈 동작만으로도 상황은 금방 파악되었다. 좀전에 들린 낯선 외침의 주인은 나르디다. 나르디가 든 그 곡면의검이 위에서 내리쳐지는 브로드소드를 피해 그 아래 왼쪽 다리를 베었다. 그것도 아주 얇게, 포를 떠내듯 베었다. 어떻게 되었냐고? 떠내진 살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그 바람에 나르디는 몸을 아래로 수그리고 있었다. "죽인다!" 다른 자, 나르디 오른쪽에 서 있던 거구의 사내가 좀 수상해 보이는 무기를 꺼내 잡은 것이 보였다. 단단한 쇠 곤봉 끝에 사슬, 그리고 그 끝에 붙은 큼직한 화살촉 같은 쇠추. 저것은 아마도… 프레일(Flail)의 일종. 윙윙대는 소리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아니, 이미 그것은 여관 홀의 램프를 쳐서 산산조각으로 부쉈다. 파편이 2큐빗 반경 안에 모조리 튀었다. 저 끝에 달린 추는 굉장히 묵직한 것임에 틀림없다. 나르디는 숙인 자세로 그것을 보았다. "잇!" 나르디의 외침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좀 낯설다. 뭔가 내가 모르는나라의 말 같은 느낌이 든다. 어쨌든 그렇게 외치며 나르디는 허리춤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뽑아 든다. 뭐야, 또 검이잖아? 짤막한… 숏소드(Short Sword)? 아냐, 그거 치곤 좀 짧잖아. 그렇다고 보통 보는 대거도 아니고. 게다가 블레이드는 왜 저리 까맣담. 저 녀석은 꺼내는 것마다 출처불명이로군. 그 용도는 금방 판명되었다. "이카!" 두 개의 길고 짧은 검, 허공에서 가볍게 열십자로 교차되더니 달려드는 프레일의 추를 쳐내는… 그리고 곧장 왼손의 새 무기로 프레일의 사슬을 노리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어쩌려고? 무기 파괴용 검인가? 아냐, 무기 파괴용은 블레이드가 톱날 모양이라고 들었는데. 무, 무식한… 아니, 어쨌든간 내가 모르는 기괴한 방법이야. 그렇다고 내가 계속 보고 있을 여유가 있느냐 하면……. "애송이 놈!" 내 앞가림이나 해야지. 두 군데 다리를 다친 동료가 비척거리며 문가로 쓰러지는 것을 보고서 다른 녀석이 좀더 긴, 역시 브로드소드를 들고서 우습게도 아래로 내리치는 공격을 감행했다. 왜 우습냐고? 이걸 막는 걸 내가 몇 번이나 연습했을 것 같아! "좋지!" 내가 힐트를 쥔 오른손을 눈썹 높이로 치켜올리면서 다른 한 손으로 블레이드 끝쪽을 잡아 똑바로 내리쳐지는 검을 받아내는데, 뭔가느낌이 이상하다. "허엇!" 키가 작은 놈. 말 많고, 많은 만큼 계속 나한테 씹히던 놈. 녀석은 그 키를 이용해서 손에 든 가느다란 행어(Hanger)로 내 허리를 베려 들었다. 그런데 나는? 검을 머리까지 치켜올리느라 팔 아래가 모조리 비었다! "아!" +=+=+=+=+=+=+=+=+=+=+=+=+=+=+=+=+=+=+=+=+=+=+=+=+=+=+=+=+=+=+=MAY DAY입니다. 노동자 여러분, 모두 즐거운 하루 되세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431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1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1 20:33 읽음:201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16) 자세가 기묘했지만 일단 피하고 볼일이었다. 그 자세 그대로 허리를 뒤로 죽 뺐다. 마치 엉덩이를 뒤로 들이미는 것 같은 이상한 자세가 되었지만 간신히 달려 들어오는 행어의 공격을 피했다. 두 손으로 들었는데도 치켜든 검의 무게가 묵직하게 팔을 눌러 온다. 이로서 한 사람을 대적할 때와 여러 사람을 대적할 때의 행동이 같을 수가 없다는 것에 실감이 온다. 우스운 자세로 비틀거리는 내 쪽을 향해 용서 없이 브로드소드를가로막힌 놈이 다시 같은 공격을 감행해 왔다. 그러나 아까처럼 막을상황은 도저히 아니다. 왼발을 뒤로 빼면서 순식간에 몸을 측면으로돌렸다. 그리고 검을 위로 쳐 올렸다. 한꺼번에 무리한 동작을 황급히 소화해 내느라 머리, 몸 할 것 없이 정신이 하나도 없다. 비명을 질러 가며 이미 머리 높이로 내리쳐진 상대방의 검을 쳐냈다. 정말이지……. "아아윽!" 이러니까 마치 내가 맞은 것 같군. 일단 검은 쳐냈는데 내가 여전히 중심을 못 잡고 있어서였는지 검이 너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뒤로 휘청, 허리가 꺾일 것 같다. "윽, 으앗, 아아악!" 누가 들었으면 내가 계속 맞고 있는 줄 알겠다. 그렇지만 무리도아닌 것이 한 걸음 건너니 다시 한 걸음, 도저히 숨 돌릴 틈이 없었다. 갖은 포즈를 다 취해보면서 세상에 이렇게 많은 동작이 존재했었나궁금해하고 있다. 사실 간단하게 피하면 되는 걸 괜히 복잡하고 피하고 있는 건가? 혹시 내가 방금 새로 몇 가지 개발해 낸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난 역시 임기응변에 강한 걸까? 흠, 그런데 나르디는 어쩌고 있담? 내가 마저 다 궁금해하기도 전에 나르디의 짤막한 두 번째 검이 내밀어져 내 앞으로 육박해 오던 키 작은 녀석의 행어를 쳐내는 것을나는 보았다. 아, 별 일 없군. 그런데 좀 이상한 소리가 난다. 그저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하곤 다른데. 금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르디의 왼손 검은 도대체가 뭘로 만들어진 건지……. 행어가 부서져 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해 날이 무지 큼지막하게나갔다. 깨져나간 칼날 조각이 떨어지는 소리가 그 난전 중에서도 들릴 정도다. 챙겅-! 녀석은 굉장히 당황한 모양이다. 나는 무기 파괴용 단검이라는 이야긴 들어 봤어도 실제로 저렇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다. 그야말로 입을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다른 녀석들도 나처럼 입을 벌리는 바람에 잠시동안의 내 여유(?)가 방해받지는 않았다. "너, 너……." 그러나 나르디는 같이 놀라고 있지 않았다(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곧바로 오른손의 휜 검으로 부서진 행어를 든 녀석의 어깨를 노렸다. 부서진 걸로 막아봤자……. 더 부서질 뿐이지. 팅강-! 방금의 동작을 하는 나르디는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 내게는 겨우 흩어진 머리카락에 가려진 옆얼굴이 보일 뿐이다. 그런데 녀석, 나를 흘끔 보고 있잖아? 그 와중에서도 싱긋, 미소를 잊지 않는 녀석. 그러지 마, 이 녀석아, 머, 멋지려고 하잖아……. 어쨌든 간 덕택에 나는 내가 아픈 것을 잠시 잊어버렸다. 왜냐면…… 신세만 지고 살 순 없기 때문이지. 나는 아직까지 공격하지 않고 있던 맨 뒤의 녀석을 겨냥했다. 그것도 굉장히 멀찍이 선 녀석은. "너!" 음, 내가 생각해도 황당하다…… 검으로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으니. 지적당한 녀석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왜!" "너…… 이리 와서 나하고 한판 붙자!" 아까의 아름다운 작문 실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내 발언은 거의유치의 극한을 달렸다. 그러나 의사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왜냐면 녀석이 대답을 했으니까. 녀석은 소리를 질렀다. "니가 와!" 나참. 지금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면……. 일단 나와 나르디가 한쪽 다리씩 베어 준 녀석은 이미 싸울 의지는없는 것 같다. 일단 제외. 그리고 행어를 부러뜨린 키 작은 녀석, 무기가 없을 뿐, 아직 다친 데는 없군. 브로드소드를 든 두 녀석은 멀쩡하긴 하지만 방금 전까지 내게 덤벼들던 친구는 실력이 별로인 것같다. 뒤쪽에 있는 녀석은 뭐… 아무 것도 한 게 없으니 모르겠군. 마지막으로 나르디에게 프레일을 휘두르던 놈이 있는데 흘끔 돌아보니, 프레일 끝이 깨진 것이 보인다. 그런데 아까 나르디는 분명 저공포스런 대거(그렇게 불러 마땅했다!)로 프레일의 사슬 부분을 친것 같은데 왜 저 추 끝이 깨져 있담. 하지만 아예 무기가 못쓰게 된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모르긴 해도 손을 다쳤는지 프레일을 왼손에 옮겨 잡은 채사태를 관망하고 있다. 허리엔 칼도 하나 찼다. 아마도 브로드소드. 몸집도 크고, 어쨌든 제일 위협적이군. 상황은 그런 식이었다. 나는 말했다. "뭐야, 겨우 한 녀석 처치했을 뿐이네." 나르디가 대꾸했다. "노력한 보람이 영 없네." 나는 물었다. "또 하나, 검 부순 것도 실적에 넣어야 할까?" 나르디는 대답했다. "그런 것까지 치면 너무 비참하잖아." 대화는 끝났다. 대화가 계속되도록 청중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던것이다. 그들은 신랄한 야유와 함께 내용에 대한 불만을 마음껏 토로해왔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그래! 어디 네놈들이 살아서 여길 걸어나가나 보자!" "너! 아까 나하고 붙어보자 그랬지? 당장 받아주마!" 음… 기타 다른 말들은 비슷한 내용이라 편집자 권한으로 생략……어라? 잠깐의 막간이 끝나고 다시 혼전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물론이 상황에서 다시 혼전이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나는 상황 타개에 대한 충분한 자신이 있었다. 첫째, 훌륭한 동료, 둘째, 넘치는 의욕,셋째, 잠깐의 실수가 유발한 순간적인 당황을 막간을 이용하여 재빨리 극복함. 이렇게 모든 조건이 다 갖춰졌는데 내가 겁낼 건 하나도없다. 신난다. 잘 해 보자. 기타 등등. 그런데 문이 덜컥 열리면서낯선 목소리가 터져나왔던 거다. "뭣들 하고 있냐!" 오오, 꽤 묵직한 목소리인걸. 주위의 반응들을 둘러보니 아마도 우리 적이 하나 늘어난 모양이다. 순식간에 앞의 다섯 녀석이 양쪽으로 좍 갈라졌다. 그리고 문을열고 들어온 자가 척척 몇 걸음 안으로 들어와 섰다. 험상궂은 면상에 아까의 거한보다 목 하나 정도는 더 높은 거한이다. 그는 순식간에 작아져 보이는 깡패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뭐야, 겨우 어린애 둘 놓고서 이 난리들을 치고 있었던 거냐?" 헤헤, 창피하겠군, 녀석들. 보아하니 한 패거리인 데다가, 조금 높은 자인 듯하다. 딱 말하는것을 보니까 애들 꾸짖는 것 같은 게, 어디서 한 가닥 하는 자의 말투다. 나르디와 나는 칼을 고쳐 잡았다. 좋은 상황일 수도, 나쁜 상황일 수도 있다. 좋은 쪽이라면, 저 한 녀석을 쓰러뜨리면 만사 해결이라는 것, 나쁜 쪽이라면 저 하나가 엄청나게 강해서 지금까지의 수고를 도루묵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 나르디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저 자를 쓰러뜨려야겠네." "그렇지?" 새로 나타난 자는 말을 길게 끌지 않았다. 곧장 검을 뽑더니 단숨에 달려 들어왔다. 양쪽으로 갈라지는 깡패들, 가운데로 쿵쿵거리며다가오는 실력을 알 수 없는 거한. 나르디 쪽을 흘끗 보았다. 아직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합동 공격이 될까? "위!" +=+=+=+=+=+=+=+=+=+=+=+=+=+=+=+=+=+=+=+=+=+=+=+=+=+=+=+=+=+=+=사람들이 다들 저를 보고 핼쓱해졌다고 합니다. 직장과 글쓰기의 병행은 역시 무리인 것일까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551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1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2 21:28 읽음:200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17) 통하든 안 통하든 일단 무턱대고 소리를 질러보면서 나는 아래를향해 들고 있던 검을 힘껏 들어올리면서 왼쪽 대각선 방향으로 뿌렸다. 그러나 마치 내 공격을 예상했다는 듯 거구의 사내는 간단히 오른발을 뒤로 빼면서 나르디 쪽으로 자기의 검을 불쑥 내밀었다. 다음공격을 준비하던 나르디는 흠칫 당황하여 옆으로 몸을 비스듬히 꺾어피했다. "조그만 녀석이 투핸드소드를 제대로 다룰 수나 있나." 마치 중얼거리듯 하는 저 소리는 내 빗나간 검을 두고 하는 말일것 같군. 내가 제대로 다 화가 나기도 전에 나르디 앞으로 지나 온검은 이미 내 가슴께로 다가와 있었다. "엑!" … 나는 나르디처럼 멋진 외침을 내지는 못하는군. 어쨌든 간 힐트를 가슴 위로 잡아끌면서 나 역시 뒤로 물러났다. 이리하여 나르디와나 둘 다 한 걸음씩 물러난 꼴이 되었다. 이거 아까와는 딴판인 형세인데. 깡패들은 기가 올랐는지 다시 분분히 검을 들고 공격해 왔다. 어어, 이러면 안 되는데. 빨리 처치해야겠어! 그런데 내 옆을 스쳐지나가면서 짧게 끊는 외침. "빨리 끝내야겠군!" 역시 나와 마음이 잘 통하는 녀석이라니까. 나르디는 일단 당장 오른쪽에서 내밀어 오는 다른 깡패녀석의 브로드소드를 오른손 곡도의 블레이드 면으로 비스듬히 받아내면서 왼손의 대거로 녀석의 손목을 간단히 그었다. 피싯-! 가늘게 튀는 피는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에는 다시 오른손 검의 폼멜로 그은 손목 위를힘껏 내리찍었다. 터져나오는 비명 소리. "으아앗!" "그 쪽은 좀 낫군." 저건, 그 거한의 평가다. 이거 은근히 화가 나는데. 그는 나르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치명상을 입히는 검법은 못 되는군." "그 쪽이야말로 솜씨를 보여 주겠는가?" 군인, 술집, 서커스, 검사 기타 등등 온갖 경력을 지닌 나르디가점잖게 대답한 말이었다. 그러나 느릿한 대답과는 달리 검은 빨랐다. "하잇!" 어딘가에서 들어 본 외침 같지만. 다음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감상할 틈이 없었다. 다짜고짜 끝이깨어진 프레일을 든 놈이 내 쪽으로 육박해온다. 윙윙대는 소리가 바로 귓전에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히익!" 비, 비슷한 듯 하면서도 좀 이상한 외침. 어쨌든간, 나는 위에서 내리쳐지는 프레일의 추를 똑바로 보았다. 보아하니 저 무기는 파괴력이 상당할 것 같다. 저 추가 허공에 그리고 있는 곡선은 그걸 잡은 손이 그리는 곡선보다 훨씬 길다. 간단히말해, 멀리뛰기 같은 것과 비교하자면 '도움닫기' 거리가 엄청 긴 것이다. 저, 저거 맞으면 안돼! 나는 다짜고짜 들어올렸던 검을 프레일을 향해 마주 내리쳤다. 타이밍을 잴 여유도 없었다. 워낙 허공을 그리는 프레일 추의 속도는빨랐다. 그리고 … 부딪쳤다. 티츠츠츠… 챙그렁! 추가 아니라 연결된 쇠고리들과 맞닥뜨린 내 검은 사슬이 감기는바람에 그걸 끊지는 못하고 말았다. 추가 한 바퀴 내 검에 감겨든 것이다. 한 바퀴 감긴 추가 아주 신랄하게 블레이드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막고 싶은 소리야. 츠캉! 어, 어라? 검을 당겨 보았다. 빠지지가 않는다. 이 프레일의 추 끝은 마치 배의 닻처럼 네 가지가 안쪽으로 꺾어들어간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끝이 블레이드를 단단히 움켜잡은 모양새가 되어 있다. 마치 낚시바늘에 걸린 물고기 같다. 녀석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프레일을 마주 당겼다. "이이익!" 질 수야 없지. 나도 힘껏 당겼다. "으갸아-!" 이상한 소리를 지른다. 우리 둘이 이 우스운 꼴을 하고 있는 새 다른 녀석들이 구경만 하고 있진 않았다. 나르디에게 상처를 입은 놈말고 마지막 사람, 지금까지 구경만 하고 있던 녀석이 브로드소드를꼬나들고 드디어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이, 저 녀석 이런 기회만 노리고 있었나! "이햐하하~!" 도대체 신나서 웃는 건지 기합을 지르는 건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하여간 그는 정말 신이 난 듯, 오른손으로 검을 잡고 그 면을 비스듬하게 해서 내 허리를 향해 베어 들어왔다. 다행히 자세는 좀 낮았다. 이거… 이렇게 해서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오른발을 높이 쳐들고는 블레이드 면을 힘껏 걷어차 버렸다. 겨냥이 맞은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끅!" 어랍? 녀석이 죽는 비명을 지르면서 그대로 오던 방향으로 밀려가는 것이보인다. 내가 생각해도 무모한 짓인데, 이상하게 먹혀 들어가는 것 같네. 어떻게 된 녀석이… 아, 알겠다. 내 다리 힘은 철판 스노우보드를 타고 다니던 때부터 이미 장난이아니다. 예전에 마을에서 실수로 홧김에 술통을 걷어찼다가 구멍을낸 일도 있다. 그 때는 누가 볼세라 죽기 살기로 도망질쳐 집으로 달아났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지. 내가 걷어찬 녀석의 브로드소드는 그대로 녀석의 가슴께까지 밀려갔다. 검을 쥔 손을 보니 거의 검을 놓친 것이나 다름없는 자세다. 뒤로 엉덩방아를 찍기 직전이었다. 그러는 새 프레일을 든 녀석이 힘을 썼다. 엄청난 힘으로 당겨지는것이 느껴진다. "푸엑-!" 휘청- 앞으로 당겨지는 바람에 엎어질 뻔했는데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방금 발견한 사실을 당장 사용해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오른발을 이번엔 제대로 겨냥질해서 녀석의 프레일 자루를 쥔 손을가격했다. 이번엔 상대가 든 게 검이 아니니 아까처럼 발 다칠 염려도 없다. "커!" 예상대로, 그 거구의 녀석은 프레일을 놓쳐버렸다. 갑자기 거꾸로힘이 전해져서 나까지 휘청했다. 어쨌든 간……. "그렇지!" 녀석이 손을 놓친 사이, 재빨리 검을 당겼는데 프레일이 감긴 채인이상스런 모양새다. 에익, 이거 어떻게 못 떼어버리나? 무기를 빼앗은 건 좋지만 골치 아프잖아. 어떻게 할까 하다가 그냥 윙윙 돌렸다. "에익- 떨어져랏!" 어, 도로 더 감겼네. "으아앗, 안 떨어지냐앗!" 내가 이상한 짓(?)을 하면서 한 바퀴 도는 동안 어이없이 나를 쳐다보는 녀석들이 있는 것 같군. 좋아, 이게 떨어지기만 하면 당장에……. 어? 휘두르는 사이에 프레일 자루 쪽이 손목을 다친 녀석의 얼굴로 날아갔다. 퍼억! "이, 그건 본심은 아니……." 헤, 다시 생각해보니 본심이 아니면 좀 어때? 어쨌든간 프레일 자루를 정통으로 머리에 맞은 녀석은 완전히 뒤로넘어가더니 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내가 이거 떨어져랍시고 좀 심각하게 흔들었나보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이것도 괜찮은데? "에라 모르겠다- 받아랏!" 나는 검에 감긴 프레일을 휘둘러대면서 두리번대다가 옳지, 눈에띈 키 작은 녀석에게 다가갔다. 아까 행어를 망가뜨린 이후로 지금까지 빈손인 녀석이다. "으아앗, 저리 가!" 예상대로 펄쩍 뛰면서 뒷걸음질치는 걸 보니 왠지 신바람이 난다. 이거, 휘두르는 무기도 꽤 재미있는데? 나도 이런 걸로 하나 장만해서 써 볼까. 뭐, 지금 이걸로도 괜찮은걸? "야, 저리, 저리가! 저리 가라구!" "전 '저리'가 아닌데요?" "오지마, 오지마!" 키 작은놈은 아마 아까 내가 무심결에 휘두르던 프레일 자루에 맞고 뒤집어져 아직도 못 일어나는 동료를 보고 완전히 겁에 질린 모양이었다. 뒤로 걷다가 의자에 걸려 반쯤 주저앉았다. 조금 불쌍한 생각까지 든다. 그렇지만 일단 시작한 거, 끝까지 해야지. 내 발길에 채인 녀석이 도와준답시고 막아서 보려 했지만 이미 요령이 생긴 나는 간단히 프레일을 휘둘러 녀석의 검을 쳐내 버렸다. 검이 문간까지 날아가서는 나무 문짝에 부딪치고 떨어졌다. 손 힘이어지간히도 없는 녀석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간신히 나한테 프레일을 뺏긴 덩치 큰 녀석이정신을 차리고 검을 뽑아 덤벼들었다. "내 놔!" 내 놔? 어지간히도 웃기는 놈이었다. "줬다 뺏는 게 어딨어요?" 나름대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대답을 마치고 나는 프레일이 달린채로 검을 휘둘렀다. 생각대로 프레일 자루가 검보다 먼저 날아갔다. 일단 그걸로 블레이드를 내려치고, 다음으로 내 검이 닿았다. 팔이 지끈, 울린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프레일이 다시 상대방의 검에 얽혀들어 버렸다. "에잇!" "에익!" +=+=+=+=+=+=+=+=+=+=+=+=+=+=+=+=+=+=+=+=+=+=+=+=+=+=+=+=+=+=+=좋은 주말 되셨어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552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1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2 21:28 읽음:201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18) 결국 다시 힘자랑이다. 흠흠, 저 친구도 힘 꽤나 쓰는 듯한데… 그렇다면 결과는? 둘 다 힘껏 집어 당겼다. 꽤나 단단히 얽혔는지 금방 빠지지가 않는다. "흐읍!" "흐아압!" 트드드… 트캉! "어?" "엣?" 프레일 사슬이 끊어져 버렸다. 동시에 양 쪽 검에서 사슬이 풀려바닥으로 떨어졌다. 둘 다 뒤로 넘어갈 뻔하다가 간신히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양쪽의표정이 모두 똑같다. 즉, 프레일이 망가진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단하긴 하군. 둘 다 사슬을 끊어버릴 정도라니. 엣, 내 팔 힘이 그렇게 셌었나? 덩치 큰 녀석은 당황해하고 있었다. "저 녀석…… 어떻게 저런 몸집에 이런 괴력이지?"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뭐, 그건 당신도 그런데요?" "그게 아니야! 이 바닥에서 팔씨름을 해서도 져 본 적이 없는 난데……" "뭐, 그거라면 저도 제가 자란 바닥에서 그랬는데요?" "…… 깡패들하고 네 친구들이 같냐?" 말이 안 통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던 녀석은 그래도 더 덤벼들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나 같은 애송이와싸우다가 졌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은가 보다. 나는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살펴보니 대장인 듯한 놈은 나르디와아직도 겨루고 있는 중인 모양이다. 쳇, 그래도 좀 하는 놈이란 게겨우 나르디와 비슷한 정도 실력이란 거지. 아니야, 나르디가 내가생각한 것보다 훨씬 대단할 수도 있어. 지금까지 관찰한 결과 꽤나 신빙성 있는 추측이다. 옆에서 보니 나르디는 확실히 동작 하나하나가 시시한 초보자들의것이 아니다. 두 개의 검을 사용하는 방법은 굉장히 낯설고 복잡해보이긴 하지만, 나르디가 하니까 민첩하고 솜씨 있어 보였다. 나보고하라면 도저히 못할 것 같다. 가장 기본적인 동작들도 익힌다는 것이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경험한 나인데, 저런 복잡한기술을 익히려면 몇 년 줘도 안될 것 같다. 그런데 싸움은 꽤나 길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르디의 이마에도 땀이 배어나 있다. 물론 상대방도 여유 있진 않다. 요리조리 재빠르게 찔러 들어오는 두 개의 검을 모두 막아내느라 상당히 진땀을빼고 있는 것 같다. 모양새를 보니 나르디가 공세, 상대가 수세. 그러나 나르디도 결정적 상처를 입히는 데는 어쩐지 약해 보였다. 나르디가 십자로 양 검을 겹쳤다가 순식간에 자세를 풀면서 왼손검을 가늘게 찔러 들어간다. 오른손은 안쪽으로 당겨 방어 자세를 취했다. 거기로 상대의 검이 예상대로 들어오자 단번에 쳐내 버렸다. 그러더니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양손 위치를 바꾸어버렸다. 두 검이 전부 가벼우니까 저런 자세가 가능한 거다. 상당히 묵직한브로드소드인 상대방은 그런 전환적인 공격에 약했다. 이제 이기려는 건가? 그런데…… 어엇, 조심해! "나르디, 피해!" 우리가 지금까지 신경 쓰지 못하고 있던 녀석, 처음에 양쪽 다리에칼을 맞은 녀석이 싸우다가 어느 새 자기 쪽으로 다가온 나르디의 다리를 베려고 앉은 자세로 칼을 휘두르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르디는 분명히 내가 경고하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피하지 않았다. "야!" 무리한 동작, 상황이 급한 나머지 나는 너무 급하게 커다란 검을허공을 향해 반원으로 휘둘렀다. 곧 허리에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그리고 바닥을 쓸 듯이 나르디의 다리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브로드소드를 그대로 위에서부터 찍었다. "이츠!" 나르디는 상대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듯, 자기의 상대가 보인 빈틈을 놓치지 않고 긴 검 쪽을 움직이더니 그대로 그 자의 턱을 찔러 버렸다. 푸웃! "커륵……." 상처와 입에서 동시에 피가 쏟아지는 것이 내 눈에 들어오는 순간,나는 고개를 돌리면서 내가 순간적으로 바닥을 찍으면서 파괴해 버린상대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내 검은 브로드소드의 블레이드 한 가운데를 정확히 쳤다. 그리고 거기를 중심으로 칼조각들이 산산이 흩어진 것이 보인다. 정말…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괜찮은가?" 돌아보지도 않았지만 내 귀에 들리는 나르디의 목소리다. 곁눈으로비껴 보니 그의 뺨과 머리카락에 피가 잔뜩 튄 것이 보인다. 나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발로 검을 쥔 자의 손을 걷어찼다. "비겁하게!" "커윽!" 내 발에 힘이 들어가면 봤다시피 파괴력이 장난이 아니다. 내 발에손을 채인 녀석은 그대로 문 뒤로 넘어가 버렸다. 나는 문 쪽으로 다가가 벽에 약간 기대섰다.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그제야 나르디를 돌아봤다. "너는 괜찮아?" "아, 나는…………!." 어……. 나르디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이건 뭐지? 뭔가가 내 목을 감아 조르고 있다. "크……." 그리고 내 목을 감아 쥔 자가 외치는 소리도 희미하게 들린다. "타르차 님에게 항복해라!" 음…… 아마도 나르디한테 하는 소리로군. 그렇다면 이 손은…… 큼직한 것이 프레일 휘두르던 녀석이다. 타르차는? 아마도 나중에 들어온 친구인가 보네. 나르디는 얼굴이 약간 굳어져 있었다. "파비안이 한 말대로 비겁한 자들이로구나." 으…… 내용은 좋은데 그 고색창연한 말투 좀 안 쓸 수 없냐? 나는 지금 내 검을 바닥에 짚은 채다. 팔이 약간 아리긴 하지만 아마 내 검을 빼앗으려 하다가는 큰코다치게 되겠지. 그러나 저러나 내목에는 이미 대거가 하나 대어져 있다. 쳇, 유치한 놈들이로구나. 그러나 좀 목줄기가 서늘하긴 한데. 검 끝을 살짝 내려다보니 파랗게 날이 제대로 서 있다. 갑자기 목이 미칠 것처럼 간지러워졌다. "너희들이 파비안을 죽일 수 있을까? 있겠지. 그러면 내가 너희들을 죽일 수 있을까? 있겠지." 뭐, 뭐냐? 나르디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나조차도 이해가 안 갔다. 타르차라는 자는 턱을 감싸쥔 채 아무 대답도 없다. 아마도 입안을다쳐서 말을 할 상황이 못되는 모양이야. 나르디는 양손에 든 검 중에 왼손의 것을 다시 허리에 꽂았다. 뭘, 어쩌려고? "무슨 소리! 네가 아무리 빨리 공격을 한들, 네 친구의 목숨은 이미 없다!" "'아무리 빨리'라는 말은 그렇게 아무 때나 쓰는 것이 아니야." 채 말이 끝나기도 전이다. 뭔가 내 귓전에서 휙 날았다. "어억!" 나와 내 목을 조른 녀석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뭐지? 저건? 그러나 나는 돌아볼 수가 없었다. 내 머리 바로 옆 기둥에 뭔가가꽂혀 부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나르디의 왼손에 한 개가 더 쥐어져있었으니까. 짧은 대거. 그것도 손잡이 장식이 기가 막히게 고급스러운 물건이다. 나르디는 고개를 '타르차' 쪽으로 돌리더니 말했다. "혹시 벌레를 좋아하시진 않겠죠? 방금의 행동으로 저를 증오할 정도로 말입니다." 무슨 소리야? 그러나 내 옆의 녀석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내 목을 잡은 손이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내 목에 들이대어진 대거가 치워졌다. 녀석은 그대로 물러났다. 뭐가 어찌된 거야? 목이 자유로워진 나는 고개를 돌려 기둥을 살펴보았다. "히익!?" +=+=+=+=+=+=+=+=+=+=+=+=+=+=+=+=+=+=+=+=+=+=+=+=+=+=+=+=+=+=+=내일 다시 월요일이네요. 월요병이 도지려는지 갑자기 팔, 다리, 어깨 구석구석이 안 쑤신곳이 없군요. ^^;추천, 감사합니다-. 개성 강한 주인공이라니 기쁘네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628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1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3 21:00 읽음:198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19) 지금 나르디의 손에 들린 것과 꼭 같은 대거가 하나 박혀 있고, 그리고 그 끝에는……. 큼직한 벌레가 한 마리 기둥에 꽂혀 죽어 있었다. 진물이 주르르 흐르는… 윽, 지저분해. 나는 부엌에 돌아다니는 시커먼 벌레 녀석들을 항상 증오해 왔다. 나는 후닥닥 옆으로 물러섰다. "뭔가 더 하실 말씀이라도?" 이미 거의 텅 비어 버린 홀에 남아있던 여섯 명의 사내들이 나갔다. 양 다리를 다친 놈, 오른팔을 싸쥔 놈, 아예 기절했다가 일어난놈, 무기를 잃어버린 놈, 검은 남았지만 프레일도 용기도 자존심도내버린 놈, 그리고 턱을 싸쥔 지각생.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괜찮아, 파비안?" 텅 빈 홀을 가로질러 나르디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미 여관 주인도 급사도, 손님들도 다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르디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좀 놓였다. 비록 노란 머리에 빨간피가 튀어 있는 얼굴이라고 해도 말이다. 마음이 놓여서 그런지 갑자기 온 몸이 쑤셔 왔다. 아까 너무 무리한 동작을 한번에 많이 개발해낸 탓일 거야. "아니, 저 벌레를 보니 전혀 괜찮지 않아." 나르디는 정말이지 벌레 씹은 - 저 표정을 보니 정말 벌레를 씹었다가는 나가서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되긴 하지만 -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참을 멀찍이서 기둥을 심각하게 찌푸린 채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이런 짓은 안 했는데." 그는 대거를 기둥에서 뽑아 보려고 했다. 그런데 도대체 빠지지가않았다. 잠깐동안 힘을 써 보더니 결국 나르디는 내 쪽을 보며 씨익웃어 보였다. "파비안, 자네가 뽑아 보지. 너무 깊이 박혔나 봐." 평상시에 나 없을 땐 안 뽑히면 어떻게 했냐? 오른손으로 자루를 잡고 조금 흔들었다가 힘껏 잡아당겼다. 잠깐만에 대거가 기둥에서 쑥 빠져나왔다. 뽑힌 칼끝에 벌레가 그대로 달려나왔다. "아으윽…… 싫군." 나르디의 표정은 정말 죽을 맛이라는 말 그대로였다. 죽은 벌레를 벽에 문질러 떼고 칼끝을 들여다보더니, 그는 정말 측은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 했다(벌레를 측은히 여겨서 그런것은 절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다). "이거 준 사람 문제만 아니었어도 내가 버리고 갔다……." 우리는 여관을 옮겼다. 우리는 정말 깡패라도 된 양 '늦가을 들녘' 여관에 저녁 값과 맥주값 이외엔 한 푼도 더 지불하지 않았다. 망가진 의자? 손님들이 도망가버린 것? 알아서들 하라지. 게다가 주인 쪽에서도 빨리 우리가 가 주기만을 바라는 눈치라 뭐더 거리낄 것도 없었다. 계산은? 나르디는 술 마시면서 한 말을 잊어버리지도 않았는지 온갖 고집을 부리며 술값을 자기가 내고 말았다. 그래서 나도 덩달아심심한데 실컷 고집을 부려서 저녁 값은 내가 지불하고 말았다. 나참, 잡화점 파비안한테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 내라고하는 돈도 안 낼 수 있다면 절대 안 내는 나인데. 에 또…… 우리에게 경고를 해 준 급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는 나르디를 황급히 말려야 했다. 그래봤자 저 급사는 깡패들과 한패거리임에 틀림없는 여관 주인한테 흠씬 두들겨 맞는 거밖에 생길 게없다. 모르는 척 해 주는 것이 돕는 거다. 간신히 나르디의 입을 막고 끌고 나온 다음에 상황을 설명해 줬더니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었다. 오래 여행했다는 녀석이 상황 파악이 그렇게 늦냐. 그리고 우리는 지금 속칭 '2차'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일을 겪고 난 뒤인데 그냥 헤어질 수 있을 리 없다. 내일 헤어지더라도 일단이야기나 좀 하자고 했다. 솔직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갑자기 많아졌다. 여기는 '황금 술통' 여관인데 이름만큼 맥주 맛이 꽤나 괜찮았다. 그 점이 지금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 왜냐고? 지금 시간은 벌써 한 밤중이거든. "그런데……." 나는 물어볼 것이 굉장히 많았던 것 같아 한참동안 머리를 굴려 봤다. 분명, 진짜 많았는데. 헷갈려서 뭐부터 물어봐야 할 지 판단이안 선다. 술기운 때문에 그런가. 일단 아무거나 물어봐야겠다. 나르디는 앞에 놓인 땅콩을 까서 하나 입 안에 집어넣으면서 내가말을 계속하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음식을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 왜?" "너, 그… 어디서 그렇게 검을 배웠냐?" "검? 아, 검." 나르디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아까 그, 평생 처음 보는 솜씨로 대거를 기가 막히게 던진 녀석과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질 않는다. 그 앞엔 또 어땠고. 두 개의 검을 얼마나 민첩하게 휘둘렀는가. 그검이 지금 멀쩡히 허리에 꽂혀 있는데도 도대체가 믿을 수가…… 아,그걸 물어봐야지. "나르디, 그 검 이름이 뭐니?" "아, 이 검?" 나르디는 허리에 꽂은 검 중 길고 휜 쪽을 약간 만져서 절걱거리게했다. 소리를 들어봐도 확실히 가벼운 것 같다. "시미터(Scimitar)." 처음 들어보는 검 이름이었다. "시미터?" "삼쉬르(Samshir)라고도 부르지. 외국에서 유래된 칼이라 우리 나라에서는 별로 볼 수 없어." "외국이라면 세르무즈?" 내 머릿속에 일단 떠오르는 외국은 세르무즈 아니면 로존디아 밖에없다. "아니. 세르무즈식 검술은 우리 나라와 비슷한 데가 많아서 그 쪽에서 만들어진 교본이 수입되기도 하잖은가? 따라서 검도 대부분 우리 나라하고 비슷하지. 이건 좀 더 먼데서 온 것이라네." 흠, 세르무즈보다 로존디아가 더 멀던가? 일단 물어보려다가 나르디가 대답할 때까지 참았다. 그런데 내 생각엔 두 나라 모두 거리 상으론 비슷했던 것 같은데. 내가 무식을 탄로내기 전에 다행히도 나르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미터는 차크라타난에서 유래된 칼이지. 들어보았는지? 비카르나들의 나라 차크라타난. 하르마탄 섬의 남쪽 해안에 위치해 있는데,다른 나라와 거의 교류가 없는 곳이지." "비카르나라면… 그 피부가 검다는?" 나르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잔을 마저 비웠다. 우리는 일단 맥주를 접고서 지금은 위스키로 주종을 바꿨다. 어쩌자고 그렇게 독한걸 시켰냐고? 젠장, 두말하면 잔소리 아냐. 독하니까 조금 마실 것같아서지. 적게 마시면 술값도 적게 나오고. 실제로 우리는 아직 반병도 비우지 않은 채다. 위스키는 정말 독했다. "그래. 나도 딱 한 번 수도에서 비카르나를 본 일이 있어. 정말 피부가 모조리 까맣더군. 밤의 빛깔, 참 신기하던데." 나는 비카르나 족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대륙에 5대 인간족이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 나라 안에서도 북쪽 구석 지역에 사는나로서는 이스나미르 인의 대부분을 이루는 엘라비다 족 외엔 다른인간족을 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하긴, 비카르나는 고사하고엘라비다에 이어 대륙에서 두 번째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마브릴조차본 일이 없다. 그 외에 나머지 두 종족, 아르마티스 족과 네이판키아 족은 아예나라를 이루고 있지조차 않기 때문에 볼 기회는 더더욱 적은 편이다. 즉, 그 인구 자체가 엘라비다나 마브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적다. 또한 비카르나는 한 나라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치로보아도 한참 동떨어져 있고, 또 매우 폐쇄적이고 왕래가 없는 종족이라, 이 세 종족은 거의 우리 같은 평범한 엘라비다 족 사람들 머리속에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르는 나라의 이야기를 듣는 소년들이 누구나 그렇듯, 나는 흥미진진한 감정이 되어 나르디의 허리에 찬 시미터를 만져보았다. 들어보니 정말 내 멋쟁이 검의 오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되는 무게다. 음…… 갑자기 같은 도보 여행자로서 나르디가 몹시 부러워졌다. "비카르나는 어떻게 생겼든? 얼굴은 우리처럼 생겼어? 그, 저……피부만 까맣고?" "아니, 우리보다 얼굴이 훨씬 좁고 갸름하다네. 내가 본 사람만 그랬는지 몰라도 굉장히 호리호리하던걸. 머리숱도 별로 없고,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뜨렸는데, 음…… 푸른빛이 도는 검은빛이었어. 에엑? 나는 내 머리털을 만져 보았다. "이… 런 색깔이야?" "어…… 조금 비슷한 것도 같은데, 그들의 머리카락 쪽이 훨씬 파란빛이 많네. 검은빛이 도는 푸른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래?" 일단 그 정도로 종족에 대한 의문은 접어 두고 나는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럼, 왼손의 작은칼은?" "이건, 그냥 숏소드인데, 좀 길게 개조한 거지. 이렇게 보면……." 나르디는 두 개의 검을 갑자기 뽑아들었다. 저럴 때는 무지 손이빠르다니까. 싸악- 가늘게 칼집을 스치는 소리. 나르디는 뽑아든 두 개의 검을 나란히 들어 보였다. 시미터의 활처럼 휘어져 반짝이는 날, 개조한 숏소드의 희한하게 검은 칼날. "길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지? 정말 그렇다. 시미터가 굽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두 개의 검은반 큐빗 정도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 "검을 두 개 쓰는 건 비카르나의 검술은 아니라고 알고 있어. 나도우연히 어떤 사람에게 배웠을 뿐이라 그 이상 정확한 설명을 해줄 수가 없겠는걸." 흠, 네가 설명한대도 내가 그걸 알아들을 지에 대해선 신만이 알겠지. 나르디도 뭔가 할 말이 있나보다. "그건 그렇고, 네 검은 무슨 유래가 있는 모양이지?" "응."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그 다음 할 말이 있냐 하면……. +=+=+=+=+=+=+=+=+=+=+=+=+=+=+=+=+=+=+=+=+=+=+=+=+=+=+=+=+=+=+=저한테 쪽지 보내시다가 본의 아니게 제 동생과 대화하시게 된 분들-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한 마디.. '동생인데요'이지만;)... 한테 안부 전해 달라고 제 동생이 말하는군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629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20)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3 21:01 읽음:199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20) "뭔데?" "몰라." …… 나르디가 말한 시미터의 유래만큼도 할 말이 없었다. "모른다고?" "어, 음… 그러니까 나도 우연히 구하게 된 검이라 자세한 유래는몰라. 내가 아는 거라면 지독하게 무겁다는 거, 그리고 다른 사람이손을 대면 몹시 뜨거워진다는 것." 나는 황급히 생각나는 대로 뭔가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주워섬겼지만, 나르디는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건 말이지, 내 소견으론 그 상황을 경험해본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다. "그것밖에 몰라. 나도 좀 유래를 알게 되길 바라고 있어." 우리는 한참 동안 별 말없이 다시 위스키 몇 잔을 비우고, 땅콩들을 주워먹었다. 이 술은 한 병밖에 안 되는 걸 그것도 나누어 마셨는데, 마치 아까 맥주 열 잔 마신 것 같은 효과가 난다. 아까 마셨던술은 실컷 운동을 해버린 뒤라 깨끗이 깨버렸지만(어디까지나 내 이야기다. 나르디는 끝나고 나서도 다시 졸고 싶어하는 표정을 지었다)아무래도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긴 그른 것 같다. 일생을 통해 익힌 버릇인데, 벌써 엉망이 되는군. 뭐 이왕 이렇게된 거 내일은 느지막이 일어나 갑옷이랑 그런 것들이나 구경하러 가야지. 나르디는 내일 뭘 하려나. "너는 곧 떠나니?" "아, 별 일정은 없어. 그저 떠돌아다니니까." 이 순간 나는, 정말 이야기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길 가다가 우연히사람을 만나 정말 쉽게도 내뱉는 그 말이 하고 싶어져서 하마터면 그냥 입 밖으로 뱉을 뻔했다. 하지만 고쳐 생각해 보니 아직 이 친구의정체도 모르거니와, 아버지가 맡긴 중대하다면 중대한 사명이 있는데함부로 아무나 동료로 삼을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쯔… 아까의 실력으로 봐선 확실히 도움이 될 만한 동료인데 말야. 나는 이렇게 헤어지게 된다면 몹시 아깝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손을뻗어 남은 땅콩들을 한 줌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아깝네……." 그런 나를 보더니 나르디가 한 마디 한다. "땅콩 더 가져다 줄까?" …… 이 친구는 다 좋은데 눈치가 너무 없단 말이야. 뭐,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는 것이고. 아니면 좋은 추억인 거지. 헤, 내가 이런 멋진 말을 어디서 주워들었지. 이젠 술도 다 떨어지고 일어설 때가 되어 나는 처음부터 하려던 말을 꺼냈다. "아까, 고마웠어." "아, 무슨. 서로 주고받은 것 뿐이지. 빚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네." "주고받아?" "아까, 조심하라고 경고해주고 적의 검을 막아주었지 않아." 뭐야, 정말 다 듣고 알고 있었네? 그러면 알고도 피하지 않은 이유도 내가 생각한 그대로일까? "그럼, 왜 피하지 않았어?" "아, 그건……." 나르디의 얼굴에는 내가 흔히 볼 수 없는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 저런 것을 뭐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소녀들이 잘 짓는 표정이긴 한데……. 그래, 수줍음! 나는 결론을 내고도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분명한데? 분명한데 말야. "적에게 상처를 입힐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 조금…상처를 입게 되더라도 말일세. 만용이라고 한다면 내 대꾸할 말은 없지만." 하……. 나르디는 정말로 쑥스럽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의자를 밀면서 일어섰다. "좋은 밤, 앞으로도 좋은 여행 되길." "아, 그래. 잘 자." 나는 계단을 올라가서 방문 앞에서 그와 헤어졌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나르디의 인사는 언제나 너무 격식을 차린 것 같단 말이야. 그것도, 아무 때나. 기진맥진에 술기운까지 겹쳐 방 안에 들어간 나를 기다리고 있던것은 부드러운 침대와 편안한 휴식……이 아니라 생각도 못했던 날벼락같은 비명소리였다. 아아아아, 잊고 있었어어어! "아, 저 그……." 그 몸집에서 어떻게 저런 목소리가 나올 수 있으며, 저런 몸짓이나올 수 있으며, 특히나 내 입으로 하는 주장에도 불구하고도 저 두가지 일이 가능하다는 점에 충격받은 나머지 나는 이 모든 일들의 실행자를 바라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연히… 주아니다. 갑자기 나는 내가 죽어야 할…(쩝…) 이유를 깨달았다. "나, 나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지-!!!" 음, 주아니는 반대로 생각하는군. 어쨌든간 나는 몹시 곤혹스런 상태가 되어 문을 닫음과 동시에 배낭 주머니에서 섬광처럼(?) 튀어나와 침대 한 가운데 버티고 선 주아니를 바라보고 있다. 내 손은… 음, 머리를 긁고 있군. "이 나쁜, 악질 모험가 녀석! 겨우 함께 떠난 첫날부터 나를 깡그리 잊고서 그래, 혼자서 실컷 먹고 술까지 마시고- 응, 친구 만나 노닥거리면서 내가 굶고 있다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안 했다 이거지! 이길가다 넘어져 도랑에 머리 박고 죽을 놈아-!" 나는 할 말이 없었다(악질 모험가라는 부분만 빼고. 나는 모험가가아니다). 솔직히 처음에 저녁 먹을 때는 다 먹고서 주아니의 것도 챙겨 방으로 쉬러 올라가면 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르디를 만나 술을마시고, 우연히 싸움이 벌어지고, 게다가 그 싸움이 길어져서 머릿속이 엉망이 되면서 나는 내가 해야만 했던 많은 생각들 가운데 하필이면 주아니에 관한 것을 깜빡 빠뜨리고 말았던 거다. 어쩐지 아까부터생각할 게 많은 것 같다 싶더니. 주아니가 조금만 숫기가 있었어도, 다른 사람이 있든 말든 일단 이런 상황까지 되기 전에 나한테 구조 요청을 했을 텐데.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주아니가 하는 말들을 다 듣고 있는수밖에 없었다. 마치 작은 새처럼 높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군. 옆방에서는 제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주아니는 굶었다는 말이 마치 거짓말로 들릴 정도로 기운이 넘쳐 났다. 눈에 독기까지 서린 것이… 윽, 무섭기까지 해. "내가 이런 놈을 믿고서 고향을 버리고 오다니, 내가 미쳤지, 미쳤어. 단단히 미쳤어. 남자들이 처음엔 달콤한 소리로 어쩌고 해도, 일단 같이 살기 시작하면 자기일밖에 모르고 여자야 굶든 말든 돌아보지도 않는다더니, 어쩜 그렇게 어른들 말하고 똑같니, 응? 우리가 같이 산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굶기고 구박하고- 이럴 줄까진 몰랐어. 내 평생 이런 꼴을 당해 보긴 처음이야! 책임져, 책임져, 책임,책임, 책임져어-!!!" 주아니는 화가 나니까 나 같은 것은 집에나 가야 될 정도로 달변이었다. 나는 속으로 내용의 실제 유무와는 관계없이 상당히 감탄하고 있는중이다. 하지만 그러니까, 실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나도 책임지고 싶으니까, 책임질 방법을 좀 알려주면 안될까? 그리고 고향버리고 따라 오라고 그런 건 사실 내가 아닌데……. 게다가…… 같이 살기 시작하고 어쩌고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일단 물어 보자. "그러니까 책임을……." "어디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는 거얏!" ……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한 적 없는데. 완전히 고양이 앞의 쥐 - 다른 사람이 본다면 쥐 앞의 소로 보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 가 되어서 나는 어떻게 용서를 빌까고심했다. 왜 나는 이렇게 매번 주아니 앞에서 용서를 빌어야 하는상황이 되는 거지? 거참, 평상시 살아오면서 자주 용서를 빌어봤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난데. 만난 지 하루 만에 벌써 두 번째잖아? "내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글쎄, 세이지를 뜯어먹었겠어!" 그러면서 주아니가 내미는 세이지 잎사귀를 보니……. 푸, 푸하하, 하핫…… 아니, 지금 웃을 상황이 아닌데, 아니, 그…푸히힛, 힛힛, 큭큭큭……. "파… 비안?" 세이지는 마치 쥐가 파먹은 것처럼 조그맣고 동그란 자국들이 조르르 나 있어…… 푸힛힛힛… 정말 쥐 같다. "끅끅… 크으, 하하, 히히힛…." 주아니는 내가 너무 심한 말을 들어서 혹시 정신이 이상해지기라도한 줄 알았는지 화난 표정은 어디로 가고, 눈이 동그래지면서 의아한표정이 되었다. 하긴, 나라도 그렇게 생각하겠다. 설마, 로아에가 몇십 년을 산들, 인간이 무엇 때문에 웃을 수 있는지 알 수야 있겠어? 크크큭. "너… 괜찮니?" +=+=+=+=+=+=+=+=+=+=+=+=+=+=+=+=+=+=+=+=+=+=+=+=+=+=+=+=+=+=+=개인적으로 잘 아는 독자분께서(즉, 다시 말해 제 글 읽어주는 친구입니다..^^;) 멋쟁이 검이 말을 하게 할 생각은 없냐고 하더라고요. 으음... 그랬다간 이야기가 노사문제로 변해버릴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열악한 주인 밑에서 살순 없다! 각성하라! 처우를 개선하라~!.... 고 말하는 멋쟁이 검 이야기도.... 재미있을라나요? ^^) 추천해 주신 두 분, 감사합니다- ^^그런데.. 나르디가 좋으시다고요? ^^.... 으음...조금 있으면 헤어질텐데, 어쩌죠?;(이와 똑같은 기분을 파비안 어머니 이진즈 양이 좋다고 한 사람이있었을 때 느꼈답니다..;;)그래도 뭐, 이진즈 양처럼 죽어버리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작가를 미워하시진 마세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723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2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4 21:33 읽음:196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21) "주, 주, 주아니, 내가 잘못, 잘못 했… 쿡, 했어. 크큭… 했다니까. 그러니까 용서해 줘? 아니, 용서해 줘." 나는 의문문을 아무 데나 써버리는 둥 마구 엉망진창으로 말해 가면서 계속 킬킬댔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심각하게 웃음이 나오는 건역시 술기운의 탓일 수도 있어. 나르디, 고맙다. 덕택에 이렇게 생각지도 않게 '은근슬쩍' 넘어가게 되는구나. "너도 먹을래?" 주아니는 내가 아프다고 생각한 건지 이젠 먹던 세이지까지 내민다. 나는 이제 아예 바닥에 굴러 버렸다. "크하하핫!" 이젠 내가 웃는 소리가 옆방에 들릴 판이다. 나르디, 잠 설치더라도 좀 용서해 줘. 나는 방안을 굴러다닐 정도로 심각하게 웃은 뒤에 간신히 웃음을멈추었다. 그 동안 주아니는 침대 위에서 세이지를 한 손에 든 채로놀란 토끼 눈이 되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다란 세이지를 끌고서 침대 끝까지 오는 걸 보니까 영락없는 쥐라서 나는 다시 한 번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일단, 또 웃음이 나오기 전에 할 말을 해야겠다. "주아니, 미안해. 아, 웃어서 미안하고, 또 굶겨서 미안해. 아, 잊어버리고 모른 척해서 미안해. 거기다가 놀라게 해서 또 미안해. 정말 미안해." "……." 얼굴을 보아하니 아직도 내가 제정신인지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의심을 풀어주기도 해야겠거니와, 일단 오해부터 풀어야 할 것같다. 주아니가 한 말엔 좀 어폐가 있는 부분이 많다. "일단 이야기부터 하고, 내려가서 뭐라도 먹을 것을 구해다 줄게. 그 점은 그러니까 잠깐만 참아 줘. 그리고 그러니까, 내가…… 너,우리가 같이 살기 시작했다고 했니?" "…… 그럼 지금 따로 살고 있는 거니?" "아, 물론 그건 그렇지만, 네 말은 그런 뜻이 아닌 것 같아서." "무슨 뜻?" 불길하군. "난 지금까지, 뭐 지금이래야 별로 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일종의 '여행 동료'가 되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함께여행하는 친구 말이야, 친구. 혹시 내 말에 틀린 점이 있니?" "친구……지." 햐, 다행이군. 불길한 짐작이 들어맞지 않아서. "특별한… 친구." 으음? 이거 다시 불안한데. 일단,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웃어 보였다. 흠냐, 좀바보 같다. "아, 그럼. 인간과 로아에가 친구가 된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고특별한 일이지. 그럼 그럼. 우린 특별한 친구야." "……." 아, 졸려. 자고 싶다. 갑자기 아까까지는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던 졸음이 한꺼번에 확 몰려왔다. 나는 눈을 깜박거려 보면서 주아니를 봤다. 그러나 침대 위의 주아니는 도저히 나를 재워 줄 생각은 없다는 듯한 눈동자로 지금 나를 쳐다보고 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것 같기도 한데, 말을 하지 않는다. 하려면 빨리 하지. "하아아암……." 하품을 참으려고 했지만 저도 모르게 나와 버렸다. 주아니는 그런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고민은 조금도 몰라." 아, 그래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날 재워주기만 한다면 무슨 말이라도 다 맞다니깐. "나쁜 녀석. 그렇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뭘? 아, 자고 일어나면 모든 걸 알게 될 거야 그 때는 내 머리도맑아져서 뭐든 다 알게 될 거라구. "자도 좋지만, 내 저녁은 갖다 주고 자겠지?" 아, 그게 있구나. 아…… 그게 있었지. "하아…… 로아에는 뭘 먹냐?" 말하는 데 반은 하품이 섞여서 나왔다. "인간들이 먹는 것은 대부분 다 먹지만, 지금은 단단한 나무 열매같은 거라면 아무거나 좋아."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 나는 주머니에서 아까 먹다 집어넣은 땅콩들을 한 줌 끄집어내었다. "이거면 돼?" "…… 그래." 아아, 너무 잘됐군. "그… 그럼 이만…… 하아아음……." 나는 부츠를 집어 벗고는 침대 위로 기어올라갔다. 벌써 정신은 반정도 수면에 돌입해 있는 상태다. 잠결에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뭐랬더라, 이런 소리 비슷했어……. "너한테 줄 벌은 내일 생각하기로 하겠어……." 나르디가 한 밤인사의 뜻을 알게 된 것은 다음날 점심때가 되어서였다. 내가 일어난 것은 잠을 다 자서가 아니라, 솔직히 배가 너무 고파서 더 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느지막이 일어나 반쯤은 눈을 감은채, 거의 점심에 가까운 식사였지만 하여튼 식사하러 내려가자고 할참으로 옆방의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었다. 아직 자는 건가 싶어깨우지 않고 홀로 내려갔더니 주인이 편지인지, 무슨 종이를 건네 준다. 파비안,오랜만에 행복한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끼도록 해 준 고귀한 벗, 짧은 인사로 정리를 배반할 수밖에 없음을 너그러이 용서하게. 언젠가 우연이 우리를 도와, 꼭 다시 한 번 재회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축복 깃든 생명, 영원한 여행, 가는 길마다 익은 과실. 나르디. 아, 몹시도 짧은 편지. 게다가 끔찍스럽게 예스런 말투. 그리고 지금까지 나르디가 해 온 갖은 이상한 말들 가운데서도 가장 고풍스러운 인사말! 정말, 책에서만 읽어 본 인사말이다. 하긴,지금도 종이 위에서 보고 있군. "으갸갸갸……." 기지개를 켜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훈훈한 것이 마치 봄 같은 날씨다. 홀에는 이른 점심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몇 내려와 있을 뿐,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는 여관 주인에게 물었다. "언제쯤 이걸 맡겼어요?" "아침 먹을 때요. 아침을 먹고서 계산하면서 이걸 주고 나갔지." 화아, 녀석. 일찍도 일어났구나. 나보다 더한 놈이네. 모르긴 해도나보다 더 지독한 어머니 밑에서 컸나 보다. 아, 그러고 보니 위층에 지독한 여자 하나 더 있는데. 잠을 안 재우는 친구들은 모조리 지독한 사람이라니까. 하… 아니, 사람이 아니고 로아에군. 내가 잠이 덜 깼나봐. 일단 위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주아니." 푸하……대답이 없어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내가 벗어놓은 저고리 위에서 땅콩에 파묻힌 채 자고 있는 주아니를 발견하고는 실소했다. 한줌은 되는 땅콩들이 여기 저기 굴러 있었다. 주아니가 그러고 있으니까 땅콩 둥지 위의 꼬마 다람쥐를 보는 것같다. 갈색 로아에에 베개 만한 갈색 땅콩, 킥…… 어제는 무섭더니오늘은 귀엽네. "주아니-." 톡톡 두드렸더니 끄응, 하면서 몸을 뒤채다가 땅콩에 머리를 부딪치고는 화들짝 깼다. "끽!" 아, 맞아. 처음에 만났을 때 저런 소리를 냈었지. "아침, 아니 점심 먹자. 주아니. 오늘도 굶기면 나 죽일 거지?" "까끄륵…… 아, 파비안이구나." 눈을 비비고서 크게 뜨니까 내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어서 그런지 더욱 눈이 커 보인다. 주아니는 잠깐동안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있더니 손을 들어 코를 잡고는 뒤로 밀어냈다. "응? 왜?" "가서 세수나 먼저 하고 와. 아침은 여기에서 먹자. 난 너랑 같은거 먹을래." "아…… 그래." 시킨 대로 세수를 하러 가면서도 나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마치 우리 어머니가 나한테…… 아니야, 그거하고도 뭔가 조금다른데. 뭐냐, 이 이상한 기분은. 얼굴에 물을 끼얹으면서 내내 잠겼던 생각이었다. +=+=+=+=+=+=+=+=+=+=+=+=+=+=+=+=+=+=+=+=+=+=+=+=+=+=+=+=+=+=+=아... 아... 나르디는 가버렸네요;(모 분에게 책임을 느끼고 있는 루디엔..;)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724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2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4 21:33 읽음:196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22) "알았지?" "아…… 알긴 알았는데……." 그러나 주아니는 내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은 채 주머니 속으로 쏙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거야 참, 애완동물도 아니고 하니 이걸 다시 끄집어내기도 그렇고. 엔간히 센 자존심이라야 말이지. 그러나 저러나 부탁을 안 들어주면 이젠 몰매(가능한가?)라도 맞을것 같군. 주아니와 아침 식사를 하고서 나는 괜찮은 갑옷이나 여행 복장들을몇 가지 사서 갖출 양으로 이베카 시에 들어올 때 처음 보아 두었던상점들이 많은 골목을 찾았다. 배낭은 여관에 놓아두었는데, 엉뚱하게도 말도 못하고 주머니 속에 있을 걸 그냥 여관에 있지 그러냐는나의 친절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따라나설 것을 고집한 주아니는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말이다. 벌써 대낮이라 꽤나 붐볐다. "흐음……." 여관 주인한테 물어 보았더니 이 도시에서도 가장 괜찮은 갑옷을만드는 장인의 집을 알려 주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간판 있는 상점이라고는 우리 가게랑 게퍼네 가게 두 집밖에 없었지만 - 지금 생각해보니 꽤나 시대에 앞서가는 판단이었던 것 같기도 한걸 - 여기는 어디나 간판이 있다. 재미있는 장식물도 세워 놓았다. 말하자면 신발가게 앞에는 내 허리에 닿을 만큼 커다란 나무 신발, 대장간 앞에는트롤이라 해도 못 휘두를 것 같은 망치가 걸려 있는 식이다. 나는 한참을 물어물어 '드래곤 비늘'이라는 이름의 갑옷 전문점을찾았다. 대장간에서 취급하지 않고 갑옷 전문점이 따로 있다는 것 자체도 사실 놀랄만한 일이었다(물론 바로 옆에 대장간이 붙어 있었다. 대장간 없이 갑옷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그 옆에는 검 전문점, 마구(馬具) 전문점…… 기타 등등). 손님은 나 하나였다. "뭘 찾나?" 음… 그렇게까지 친절한 말투는 아니군. 시커멓고 곱슬곱슬한 수염을 턱 가득히 기른 중년의 남자가 손에든 하드 레더(Hard Leather)에 기름을 칠하다 말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툭 던진 말이다. 뭐, 가끔 저런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로 자기 물건에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 저렇다. 그런 사람을 대하는 요령은? 이쪽에서도 충분히 뻣뻣하게 나가도 저쪽에서는 웬만해선 실제로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비록 겉으로는 큰 소리를 지르더라도 말이다. "갑옷 전문점에 갑옷 사러 왔지, 뭐 하러 왔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근처의 의자를 하나 끌어다가 물어보지도 않고 걸터앉았다. 예상대로 고성이 터졌다. "남의 가게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 앉나!" 뭐, 예상한 바니, 대답도 이미 정해 놓았다. 나는 우습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당신 가게는 손님이 애걸하기 전에는 앉으란 말도 하지 않는 것같아서요." "딱 보니, 허락하지 않아도 앉을 것 같았다." 그제야 주인은 내 쪽으로 돌아앉았다. 위아래로 나를 죽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상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세상물 별로 먹은 것 같진 않은데, 꽤나 약은 녀석이로구나. 어디보자. 갑옷을 산다고?" "저, 세상 물 먹을 만큼 먹었어요. 이제 열 여덟 살인데 십 년 이상 장사를 했으니까요. 괜찮은 걸로 좀 권해주세요." "인생의 반을 장사로 보냈다라, 그런 놈이 이제 와서 뭐하러 갑옷은 사? 돈은 얼마 정도 생각하냐?" "뭐,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으니 갑옷이 필요한 거죠. 이 검보면 모르시겠어요? 제 몸에 맞고 튼튼한 거면 가격은 적당하게 정하죠." "검 생겼다고 세상에 마구 나서는 게 아냐. 그만 하면 어디 가서굶지는 않겠다. 가격은 내가 정하지 네가 정하냐?" "이미 가게 다 정리했고 돌아갈 데도 없답니다. 적당한 가격이면야, 제가 괜히 토 달 것 같습니까?" "무슨 사정인지 몰라도, 그만하면 어디 가서 사기는 안 당하겠군. 가죽이냐, 체인이냐, 플레이트냐?" "그럼 당연하죠. 사기를 치면 쳤지 당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어요. 그리고 제가 그런 것 고를 줄 알면 아저씨한테 묻지도 않고 벌써 샀어요." "그럼 이리로 와." 우리가 나눈 대화는 철저하게 앞부분은 신상 대화, 뒷부분은 물건에 대한 대화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서로 아무 불만이나 문제없이 이야기를 잘 주고받고는 둘 다 일어섰다. "몸이 건장하구나. 키도 크고. 체스트 아머(Chest Armor)만 장비할거라면 체인을 권하고 싶다. 여행하는 사람에게 더한 것은 무겁고 좋지 않다." "갑옷에 대해서라면 저보다 훨씬 안목도 식견도 있으실 테니, 그말을 따르기로 하죠." 전문가와 만났을 때는 적당히 그의 전문 지식을 인정해주는 것이대화를 원활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그래…… 어디 보자, 내가 괜찮은 놈을 어디 남들 안 보이는 데다가 몰래 잘 숨겨 뒀는데……." 푸하, 저 말이 만약에 장사꾼의 감각에서 나온 말이라면 내가 배워뒀다가 언젠가 써먹어야 할 정도로 괜찮은 발언이야. 검은 수염의 주인은 벽에 걸린 수많은 갑옷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벽 중간쯤에 붙은 여닫이문을 열쇠로 땄다. 그러더니 의자를 놓고 위로 기어올라가 들어가더니 잠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곧 그는 상자를 하나 들고 밖으로 나왔다. "봐라." 나더러 열란 말 같아서 얼른 받아든 상자 뚜껑을 열었다. 헤…… 상당히 멋진데. 거의 옷감처럼 보일 정도로 아주 가늘게 짜진 강철 체인 메일이다. 아직까지 이렇게까지 곱게 만들어진 물건은 처음 본다. 가끔 본 체인메일들은 손가락 만한 굵직굵직한 사슬들이 엮어진 것이나, 좀 나은것이라고 해도 한 눈에 구멍들이 들여다보일 정도밖에는 안 되던데,이건 갑옷에 코가 닿도록 들이대지 않고는 도저히 고리들이 보이지가않는다. 무게는? 음… 무게는 꽤 나가는군. "마음에 드나?" "비싸겠군요." "물론이지. 사지 않을 놈한텐 구경시키는 것조차 아까울 정도지." "사라는 협박처럼 들리는군요." "당연하다." +=+=+=+=+=+=+=+=+=+=+=+=+=+=+=+=+=+=+=+=+=+=+=+=+=+=+=+=+=+=+=제 말투가 이상한... 고풍스러운 편인가요? ^^;또, 추천해주신 분들, 고맙습니다-말로 표현하기 힘든 진정한 재미... 라니,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확실히 예전 단편들하고는 좀 달라지긴 했는데, 놀라운변신이라고 하시니까... 음.. 정말 놀라운 기분이 들어버렸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874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2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5 22:01 읽음:195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23) 나는 물건을 꺼내 들고 이리저리 뒤집어 살펴봤다. 일단 물건에 하자가 없는지 점검해야 하니까. 완벽했다. 확실히 장인이라고 할 만한자의 솜씨였다. 이걸 직접 만든 걸까?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않는데. "솜씨가 좋으시군요." "내 솜씨가 아니다. 우리 아버지 솜씨지." "돌아가셨나요?" "그래." "그럼, 꽤나 오래된 물건이겠군요. 아, 돌아가셨다니 정말 안됐어요." "……." 내 얼굴에 아주 잠깐이지만 완벽한 애도의 표정을 지은 뒤, 나는값을 깎을 것을 궁리했다.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되었는데요?" "…… 3년 되었다." "아, 그렇군요." 검은 수염의 얼굴을 보아하니 벌써 나한테 한 수 넘어가기 시작한것을 스스로도 눈치챈 듯, 그다지 즐거운 표정은 아니었다. 저런, 안되지. 즐거운 마음으로 물건을 파셔야지. "어쨌든, 장인의 물건을 보게 되어서 참 기분 좋네요. 그런데 얼마부르실 참이에요?" "500존드다. 한 푼도 더 깎을 수 없어." 호, 이건 내가 잘 쓰던 말이잖아. 나는 생각해 보았다. 500존드가 비싼 걸까. 조금은 그렇다. 보통체인 메일 가격이 300존드 정도는 하고, 하드 레더라도 150존드는 하니까 일반 갑옷의 두 배는 하는 셈인데, 그만한 가치가 아주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확실히 이건 플레이트에 맞먹는 가격이다. 체인 메일로는 최고급일거야. 그러나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약 400존드 정도로 깎아 볼 가치도있는 법이지. "하, 만든 지 3년이나 된 물건에 500을 달라고요? 아냐, 3년이라니, 설마 돌아가시기 전날 밤 이걸 만드신 건 아니겠죠?" "그건 네가 알 바 아냐." "이게 겉으로는 그럴 듯해 보여도 내년이면 못쓰게 될지 누가 알아요?" 나는 물건을 상자 위에 내려놓은 다음에 검은 수염의 눈을 주시했다. 그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리더니 말했다. "싫으면 사지 않으면 그만이야." 그는 물건을 도로 챙겨 넣으려 했다. 안될 말이지. 나는 급하게 주인의 손목을 잡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성급하게 그러시지 말라고요. 세월이 간다고 이걸 팔 기회가 늘어나는 건 설마 아닐 테니까." 내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의 손이 좀 느려졌다. 어쨌든 그는 내손을 밀어내고 일단 갑옷을 잘 개어서 다시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천천히, 비록 천천히 이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모르는 척 내버려두고는 의자에 앉은 자세로 되돌아갔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걸 팔려고 해 보셨어요?" "쓸데 없는 것 묻지 말아!" 주인은 벌컥 화를 내었지만, 나는 그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안다. 뭐, 나도 그가 대답할 거라 생각하고 묻진 않았다. 그저 그가 이걸팔 기회가 별로 없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 그만인 것이다. 나는 다음 계산으로 손을 어깨로 보내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여기, 잠깐만 손 대 보시겠어요? 잡으면 안 되고, 살짝만." 뭐, 선량한 사람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는 무심한 눈으로 나를 흘끗 보더니 멋쟁이 검의 손잡이에 손을얹었다. "으가앗! 뜨거!" "……." 이 시점에서 절대 웃으면 안 되지.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끄덕거렸다. 그리고 아주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뜨겁죠?" "이, 이런 검이, 도대체 저건 뭐야?" 나는 오른손을 돌려서 내 검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검은 수염의눈이 둥그래지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자, 자네는……." "아셨겠죠? 이건 상당히 보기 드문 물건이라 그 말씀입니다." 내가 이걸 강조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비싼 갑옷을 사는 여행자, 그것도 이런 신기한 아티팩트를 가진 모험가가 세상에 그렇게많을 리가 없고, 그가 마침 갑옷이 없어서 새로 사려고 하는 상황도자주 있을 리가 없다. 즉, '이런 사람을 또 만나서 이런 비싼 갑옷을 팔아먹을 기회가 그렇게 많을까요, 아저씨?' 라는 말을 나는 간단히 대신한 것이다(이런때 멋쟁이 검 안 써먹으면 어디다 써먹겠어?). 주인은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흐음…… 480존드." "350존드입니다. 그 이상은 안돼요." "말도 안 돼! 350존드라니, 여기에 들인 정성이 얼만데! 만드는데꼬박 1년은 걸렸어! 조그만 녀석이 사기를 치려고!" 뭐, 아주 거짓말은 아닐 것 같다. 내가 갑옷 만드는 법은 잘 모르지만 말이다. 음, 조그맣다니 그리고, 아저씨보다 더 큰 키가 안보이시나요. 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350- 350-." "350 갖고는 가서 하드 레더나 알아봐!" 다시 상자 뚜껑을 덮으려는 팔을 나는 이번엔 가볍게 잡으면서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저도 내가 이거 아니면 살 거 없는 줄 아냐~, 이런 식으로 야비하게 말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좋은 물건이니까 사고 싶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적정 가격을 이야기해보자 이거예요. 성급하게 그러지 마시고." 그는 내 손을 뿌리치고 상자 뚜껑을 덮었다. 그러나 다시 갖다 넣지는 않았다. 그는 잠시 천장을 쳐다보았다. "으음…… 450. 더 양보는 없어." "저도 370. 더 양보는 없다고요." 그런 다음 우리 둘은 서로의 눈을 한동안 쏘아보고 있었다. 눈싸움이다. 여기서 지면 지금까지 한 거 말짱 헛거다. 이런 상황에서의 눈싸움이란 것은 보통 깡패들이 싸우기 전에 하는눈싸움하고는 큰 차이가 있다. 서로 지지 않겠다는 투지를 내보이는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봐야 한다.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아주 정직하게' 이 가격이 적정 선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당신은지금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 이런 말을 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음…… 전달되었나 보다. "…… 자네는 지금 400존드를 원하고 있군. 그렇지?" 어라, 이상한 쪽으로 전달되었네? "그렇지만 양심적으로 생각해 봐라. 보통 괜찮은 체인 메일의 가격이 약 350존드다. 400존드에 이걸 넘긴다는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를생각해서라도 내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 검은 수염은 갑작스레 이상한 쪽으로 나를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다지면서 넘어가지 않으려 했지…… 만…… 으으음…… 이게 아닌데…… 이거야 정말……. "…… 좋아요. 420이에요." 으윽…… 내가 최근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이런 말에는 넘어가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이만하면 많이 깎은 셈이니 참아준다, 참아줘. 쇼핑을 끝냈다. 내가 산 것 중에는 체인 메일 외에도 건량 자루 같은 자잘한 것들과 함께 긴 망토가 한 벌 있었다. 몸 전체에 두르게 되어 있는 커다란 후드가 달린 망토인데 특이하게도 전체 재질이 가죽으로 되어 있다. 이걸 발견했을 때 처음에는무겁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생각만큼 그렇지도 않은데다, 얇으면서도가벼운 화살 같은 것은 충분히 막을 만하게 생겼다. 에라, 입고 다니면 어깨 힘이라도 기르겠지. 음…… 체인 메일도 있는 걸 고려 안 했군. 어깨 힘이 좀 많이 길러지겠다. 그리고… 내 고민의 원인인 주아니의 견과 나무 열매들- 이걸 사모으는데 무려 세 시간은 걸렸다. 확실히 벌다운 벌이군. 다시는 굶기지 못하게 아예 도시락을 만들어서 갖고 다니겠다니. 쳇, 그것도 한두 가지로 통일하지 않고 꼭 종류별로 해야 하는 이유는 뭐람. 모르긴 해도 아마 궁극적인 벌의 내용은 바로 이 부분일거야. 한 주머니 가득한 밤, 호두, 땅콩, 도토리, 개암, 대추야자 등등. 나는 일단 여관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여관 문을 들어설 때다. 웬 낯선 남자 두 사람이 내 앞을 막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물었다. "혹시 자네가 파비안인가?" 내 이름이 맞군. 그런데 지금 내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해도좋은 상황인 건가? 나는 조금 더듬거렸다. "아, 저 그……." 그러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찾는 사람이 있으니, 같이 가자." 내가 대답하든 말든, 그 쪽에서는 이미 내가 파비안이라고 결론 내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누가 날 찾는단 말야? "누가 날 찾는데요?" "가 보면 알아." "당신네들이 누군지 알고 내가 따라가요?" 허허, 녀석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웃는 것이 보인다. 왜 저래? 내가 유괴나 당할 어린아이 나이인 줄 알아? "네 아버지가 보냈다면 믿겠나?" "…… 뭐라고요?" 나는 나타난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기사단'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로는 안 보이는데. 혹시 '도둑단'이라면 모를까 말야. 혹시 아버지가 부업으로…… 에라,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그러나 그들은 서두르는 모양이었다. 내가 다 생각하고 있도록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의심 많은 녀석이군." 갑자기 문 양쪽에서 낯선 남자 두 사람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그리고 내가 뭔가 상황을 판단하기도 전에 내 뒤에서 나타난 다섯 번째의남자가 뭔가 단단한 걸로 내 머리를 휘갈겼다. 아…… 누가가 휘갈겼다는 것은 지금 내가 어떻게 파악한 거람? "……." "끌고 가라." 희미하게 내 귀에 들려온 마지막 소리였다. +=+=+=+=+=+=+=+=+=+=+=+=+=+=+=+=+=+=+=+=+=+=+=+=+=+=+=+=+=+=+=어린이날인데, 회사입니다. T_T못 올릴 뻔 했네요...동생의 협조로 회사로 파일을 메일로 보내게했답니다. 그래서 여기서 잘라서 올리려고요... 그런데도 늦었다...;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875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2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5 22:02 읽음:196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24) 주위는 깜깜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여기가 어디람? 주아니는? 소리 죽여 불렀다. "주아니, 주아니." 다행히도 곧 대답이 있었다. "파비안, 깼어?" 저 목소리가 들려오는 장소가 내 겉옷 주머니 안은 아닌 것 같군. 더듬더듬 하다가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윽, 별이 번쩍 하는군. "아이쿠……." 로아에는 밤눈이 밝기라도 한지 주아니 쪽에서 먼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다만 나는 지금 앞이 안 보이기 때문에(벽에 머리 박는 걸로이미 그 사실은 충분히 광고되었다) 혹시 실수로 깔리기라도 할까 싶어 조심조심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멈춘 모양이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가만히 있을게. 이쪽으로 와봐." 일단은 내가 산 물건들이 걱정이 됐다. 주아니가 주머니 안으로 들어오자 주변을 더듬거려 봤지만(벽에 부딪치지 않게 조심!) 아무래도물건은 녀석들이 빼앗아 간 모양이다. 이렇게 갇힌 것보다 일단 비싸게 주고 산 물건들 때문에 화가 벌컥 치밀었다. 물건 찾는 건 포기하고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주저앉는데, 문득 내저고리 주머니에서 뭔가 묵직한 게 흔들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쳇, 기껏 견과 꾸러미잖아. "주아니, 혹시 여기가 어딘지 오면서 못봤니?" "보진 못했구, 꽤나 빙빙 돌던걸. 지금은 벌써 저녁때는 되었을 거다." 그 말은 맞는 것 같다. 배가 고픈 것 보니 말이다. "나를 습격한 사람은 몇 명?" "다섯 명이지 뭐야." 겨우 나 하나를 잡으려고 다섯 명이라니 너무했다. 그건 그렇고 아버지가 보냈다는 말은 도저히 못 믿겠는데. 나에게일을 맡긴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다시 나를 보자고 하며, 게다가이 끌고 오는 방식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으니까. 아버지라면 절대이런 식으로 일을 하지 않을 거야. 한 마디로 말도 안 돼. 쳇, 아버지란 말에 방심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면 이놈들은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지? 혹시 어제의 싸움과 관계 있는 놈들인가? 내 이름을 아는 것은 어제 나르디하고 서로 실컷불러댔으니 그렇게 생각하면 해결이 되고, 그렇다면 다섯 명이나 몰려온 건 나르디가 있을 것을 염려한 것일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고…… 아니, 그렇다면 그 녀석들이 아버지에 대한 일은 또 어떻게아는 거야? 머리가 복잡해져 버렸다. 일단 두 가지 가능성인데, 그거 말고 뭐 다른 가능성이라도 있나? 아무래도 없을 것 같다. 나 같은 놈을 잡아갈 놈들이 세상에 그렇게많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혼자 중얼대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그거 말고 뭐 아는 거 없어?" "여기는 지하라는 것. 문은 저쪽이야. 잠겼을 테니 별로 도움은 안되겠지만." 어둠 속이라 한참을 주아니와 함께 더듬거리고서야 '저쪽'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바닥? "바닥?" "응." "지하라면서?" "처음 들어올 때는 지하였는데, 다시 올라가던걸." 꽤나 복잡한 건물인가 보다. 일단 머리를 굴려 봤다. 아무래도 이 도시에 온 것은 처음인데 이렇게 당한 것을 보면 어제의 일과 관계가 있을 거야. 아버지 어쩌고 하긴 했지만, 세상에 아버지가 있는 녀석은 많으니까 말야(없는 녀석보다야 훨씬 많지). 어제본 녀석들은 아마 깡패 일종인 것 같던데. 그렇다면 여긴 깡패 소굴인가? 그런데 무슨 깡패 소굴이 이렇게 복잡해? 아냐, 깡패 소굴이니까 복잡한 건가? 어쨌든 보통 깡패 소굴은 아닌데. 어제 녀석들은 그런데 보통 깡패였단 말씀야. 내가 이렇게 결론을 못 내리고 헤매고 있는 중인데, 갑자기 주아니가 말한 정보와는 전혀 무관하게 정면에서 문이 덜컥 열리는 것이 보였다. 뭐야, 문이 두 개야? 나는 후닥닥 뒤로 물러섰다. "실컷 잤나?" 나는 무심결에 검을 잡으려고 손을 뒤로 가져갔는데…… 실질적으로 그래야 할 진짜 상황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검은 그 자리에 그대로있었다. 어라? 나는 도리어 당황했다. 가둬 놓는 주제에 검을 빼앗지 않는 이유는뭐야? 일단 앞을 보았다. 빛이 들어온 쪽을 자세히 보니, 그 열린 문과내가 갇혀 있는 곳 사이는 강철 창살로 막혀 있었다. 아까 헤맬 때저기다가 머리 박았으면 큰일날 뻔했군. 그 너머에서 나타난 녀석은 계속 외치고 있었다. "기분이 좀 어때?" 뭐, 지금이야 솔직하지 못할 것도 없지. 나는 맞대놓고 소리질렀다. "기분 더러운데요!" "그럼 계속 더러운 채로 있어. 낄낄낄……." 뭐야, 성질 더러운 녀석이로군. "혼자 더러울려니 왠지 억울한데요!" "내가 알 게 뭐냐!" 기분 나쁘다. 만일 나가게 되거든 혼내 줘야지. 그래서 나는 다시 소리쳤다. 이름을 알아 둬야 나중에라도 혼내 주거든. "영감님, 듣기 괴로운 목소리로 그만 고문하시고 가서 낮잠이라도주무시죠?" "뭐야, 영감이라니! 난 헬코즈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어!" 음, 그러셨군. 머릿속에 잠시 메모한 뒤에 나는 일단 느긋한 심정이 되어 아예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저쪽에서야 안 보일 테니 내가 여기서물구나무를 서든 네발로 기든 무슨 상관이냐. 아,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네? "그럼, 헬코즈 영감, 용건이나 말해봐." "나이 40도 안된 사람한테 영감이라니, 이 꼬마녀석이 죽고 싶나!" "어, 눈이 부셔서 잘 안보여서 말이죠. 그런데 목소리는 완전 영감인데……." "이 녀석이!" 저벅저벅, 창살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다. 그럼 어디 실례. "쿠엑!" "그럼 이제 저와 얌전히 대화를 나눠 보실까요?" 나는 느긋하게 창살에 낀 헬코즈 영감인지 젊은이인지의 머리를 왼팔로 감아쥐고 그 이마에 따뜻한(?) 검을 들이댄 채, 이 좌담을 어떤식으로 진행시킬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엊그젠가, 글 올려주시는 엑사일런(meenjoon)님께서 하이텔에 올라간 첫 번째 글이 조회수 1000을 넘었다고 하시길래, 친구 아이디를빌려서 한 번 들어가 봤답니다. ^^... 정말이더군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960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2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6 22:30 읽음:195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25) "으으윽, 앗 뜨거!" "그러니까 빨리 빨리 말씀하시라니까요." 좌담회의 진행은 아주 순조롭다. 물론, 내 입장에서만 말이다. 더듬거리거나 뭔가 생각하는 눈치면 가차없이 멋쟁이 검이랑 뽀뽀를 시킨다. 뭐, 멋쟁이 검의 기분이 조금 염려되긴 하지만 말이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좀 이해해 주겠지 뭐.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데, 이 친구 입술이 어떤 모양이 되었을지지금쯤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하고 있다. 게다가 오래 이러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결국 아는 게 별로 없으시다, 그 말씀이시군요?" "…… 그만큼 말했으면 됐지…… 으갸앗!" …… 나의 저런 발언에도 불구하고 내가 실질적으로 알아낸 것은상당히 여러 가지다. 이곳은 어디인가? 이베카 시 도적 길드. (하, 도적들한테도 길드가존재한다는 얘기, 들어만 봤는데 정말로 있었군) 여기의 위치는 어디쯤인가? 굉장히 열심히 버틴 끝에 얻은 대답, 시장 관저 옆의 어떤건물과 비밀리에 이어진 거대한 지하 구조물이라는 이야기. 그러면왜 내가 여기에? 모른다- 라는 대답 끝에 곧 튀어나온 누군가의 부탁이라는 대답. 그 누군가는 어떤 놈인가? 또 모른다- 라는 대답 끝에이번에는 정말 모른다(정말 확실히 '모른다'는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나는 꽤나 고통스런 '모른다!'를 서너 번은 들어야 했다. 음, 내 귀도 괴로웠다고. 마구 외쳐대는 헬코즈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전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 "그 누군가가 누군지 모르는 이상 별 것도 아닌 정보잖아요. 뭐 도움이 되는 걸 말해야 할 것 아냐, 도움이." 헬코즈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 곧 끌고 나가면 서로 네 의문점들을 풀어 주려고 난리들을칠 텐데 뭘!" "하, 그건 좀 쓸만한 정보인데요?" 나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좀 전부터 깨닫고 있었던 실수가 생각나서다. 무슨 실수인지는 뻔하다. 어차피 사람들이 여럿 오면 이 양반을 인질로 잡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거지. 생각해 보라, 아무리 이렇게 내가 휘어잡고는 있다 해도 철창 안과 철창 밖이지 않은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담. 결국 아까와 같은 상태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네. 나 자신이 한심해서 한숨이 나왔다. 에라, 모르겠다. 그렇다면 뭐, 조금 일찍 상황을 당긴대도 별다른문젠 없겠지. "자, 가 봐요." 내가 문쪽으로 힘껏 떠밀자 헬코즈는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중심을잡고는, 그가 덤비기 전에 금세 후닥닥 철창 안으로 도망친(?) 나를한껏 노려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저 눈초리를 보아하니 일당들을 데려오면 아무래도 좀 얻어맞아야 되겠다. 에라, 손해보는 장사만 하는구나, 파비안. 별로 기다리지 않아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꽤 여럿이 들어온다. 무려 다섯 명이나 된다. 게다가 앞서의 불운한 양반과는 달리 이 자들은 별로 입도 열지 않았다. 그저묵묵히 창살문을 열고 나를 붙잡아 묶은 뒤, 밖으로 끌고 나갔다. 어쨌든 아까 무리한 도박을 벌인 결과, 일단 대강 상황 파악은 된것 같다. 내가 어제 싸운 자들과 오늘 나를 데려오도록 사주한 자가같은 일당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 빼고 말야. 그것도 뭐, 곧 확인될 것 같은데? 한참동안 복잡한 미로를 눈까지 가린 채 끌려온 나는 간신히 의자에 앉아서는 내 앞에 앉은 자의 얼굴을 보았다. 붉은 머리카락,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는,내 나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 "파비안… 그러니까, 파비안인가, 네가?" 이 자들은 하여간 만났다 하면, 꼭 뻔히 다 알면서 남의 이름을 물어댄다. 몇 번을 보고도 절대 이름 따위는 묻지 않는 우리 영지의 누군가와는 완전히 딴판이로군. 성격 좋은 내가 참는 수밖에 없는 듯해서 나는 대답해 주었다. "내가 파비안 맞아." 퍼억!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한 대 얻어맞았다. 오른쪽 뺨, 순식간에 손바닥이 치고 지나갔다. 눈앞에서 불이 번쩍 한다. 뭐야, 뭘 잘못한 거야? 내, 내 이름이 파비안인 것이 잘못이야? "그래, 네가 파비안이군." 계속 말을 잇는 붉은 머리의 남자. 그러나 나를 때린 것은 내게 말을 걸고 있는 놈이 아니라 그 옆에 선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녀석과 마주보고 놓인 의자에 앉혀져 있다. 이 붉은 머리의양쪽에는 두 남자가 보호라도 하듯 둘러서 있고, 나를 데려온 놈들은모조리 나가버려 방안에는 나와 이들이 전부였다. 가구라고는 의자밖에 없고, 주위는 나무 칸막이로 막혀진 방이다. 방금 전까지 어두운곳에 있다가 나온 나에게는 지나치리 만치 밝은 램프가 내 머리 위에걸려 있었다. 다시 한 번 상황 파악을 좀 하자. 만일 말하고 있는 쪽이 명령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가 입을 열어뭘 시키기도 전에 너무도 빨리 얻어맞은 나는 지금 굉장히 어이가 없다. 그러나 뭐라고 제대로 항의할 만한 입장도 못 되었다. 팔다리가 의자에 묶여 있었으니 말이다. 아까 지하에 있던 나를 끄집어내겠다고 온 사람들은 확실히 먼젓번영감(?) 보단 머리가 좋았다. 저들이 감히 손을 대진 못하지만 일단,위협을 통해 내 검을 빼앗아 저만치 두었다. 그리고서 어쨌든 손을등 뒤로 돌려 묶도록 했다. 무려 다섯 명이나 되니 말을 안 들을 재간이 없었다. 문득 생각난 건데, 그나마 내 주머니를 뒤지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다. 주아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 괜히 이상한놈을 따라와서 끔찍한 꼴 본다 싶겠지? 문득 혀 끝에 느껴지는 찝찔한 맛. 입 안에서 어제의 상처가 터져 피가 흐르는 모양이다. 내가 생각하는 동안 의자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비협조의 벌이다." 나를 심문(?)하고 있는 자는 아무리 관대하게 보아도 스물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남자였다. 그런 그가 입을 열어 한 말이 저거였다. 비협조? 뭘 협조해야 되는데, 내가? 간신히 나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뭘 협조했어야 한단 거지?" "네가 괜히 멍청한 녀석을 붙잡고 사납게 굴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다룰 생각은 없었어. 그저 이야기나 했을 텐데. 이런 모양새를 만들어 내도록 하느라 나를 꽤나 귀찮게 하지 않았는가." 하, 나는 웃기지도 않아서 턱이 얼얼한 것도 무릅쓰고 한 마디 쏘아붙였다.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렇게 때려서 끌고 온 주제에, 지금 나에게평화로운 대화를 기대했다고 말하고 있는 거냐, 지금? 이 따위 상황에서 그런 판단이나 하고 자빠진 놈이 있다면, 어느 구석에 끌려가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간대도 따질 자격조차 없을 거다." 퍼억! 또다시 옆에 선 남자의 손이 움직이더니 이번엔 내 왼쪽 뺨을 쳤다. 눈앞이 다시 핑 돌더니 얼굴 전체가 화끈하다. 그래, 때려라 때려. "남의 기분도 모르고 건방지게 떠드는 벌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손끝 하나 까딱거리지도 않은 채 있는, 나와 마주앉은 녀석이 한 말이다. "남의 기분도 모르고 건방지게 때리는 데 대한 벌은 없냐?" 돌아올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퍼억! 여기가 엠버리 영지고, 네가 잘난 영주 아들놈이라 해도 이렇겐 못해(그러고 보니 아르노윌트와 말투가 좀 닮은 데가 있다. 옷차림은훨씬 수수하지만). 몸 속에서 오기가 끓어올랐다. 거기에 녀석의 대답은 가히 내 투지에 불을 붙여 놓았다. "자꾸 맞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잠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목구멍으로 끓어오르는 뭔가를 꿀꺽 삼킨 뒤 한숨을 한 번 토하고, 그런 다음 나는 말했다. "건방지고 뻔뻔스럽게 말할 때마다 한 대, 그러니까 지금까지 네가번 매는 도합 네 대." "뭐?" 무슨 소린지 모르겠냐? 계산도 지지리 못하는 녀석이구나. "지금은 좀 사정이 있어서 나중으로 예약해 놓겠다. 내일 정도는어때?" 녀석 얼굴 표정을 보니 그제야 알아들은 모양이다. 대가가 돌아왔다. 퍼억! 나는 지지 않고 소리쳤다. "용건을 말해, 용건을! 난 바쁘니까 자꾸 이렇게 지체하는 데 대한벌로 다섯 대는 더 예약해 놓겠어!" 퍼억! 퍼억! "거기다가 네가 지금까지 때린 여섯 대에, 이자로 세 대는 붙여서,모두 아홉 대는 내가 우선 순위로 예약할거야!" 퍼억- "조용히 못해?" "거기다가 내가 친히 너 같은 녀석을 때려 주는 데 대한 황공스런보상으로 한 대! 이런 예약을 내가 기억해야 되니 내 기억 창고 사용료로 한 대! 방금 또 뻔뻔스런 소리 한 마디 했으니 또 한 대! 내일까지 기다리느라 내가 받을 스트레스 가격도 한 대!" 쿠당탕! 나는 아예 의자 째로 넘어가 버렸다. 머리가 마룻바닥에 의자 째로부딪치니 장난 아니게 아프다. 이런 상황에서도 덧셈이 되는 내가 존경스럽다. 모두 스물 두 대나벌었어, 친구. "방금 충격으로 머리가 아파서 기억을 유지하기 어려우니 또 한대! 방금 때린 한 대도 추가! 오늘은 가격이 싸기도 해요! 오늘 같은날 평생 맞고 싶던 매 다 벌어보시지 그래? 아주 싸다 싸!" 내 목소리는 악에 받친 나머지 거의 방 안에 찌렁찌렁 울렸다. 나도 나한테 이런 성깔이 있는 줄은 사실 잘 몰랐었는데. 하긴, 언제성깔 부려 볼 기회가 있었어야 말이지. 이건 나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내 앞에 앉은 녀석도 꽤 놀란모양이다. 약간은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재빨리 저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렇게까지 맞고 싶다면, 그냥 입 다물고 있어도 때려줄 수 있어." "누가 할 소리." 내가 웬만큼 맞아서는 고집을 꺾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표명하자, 상대방은 전략을 달리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때리던 오른쪽 남자 말고 왼쪽의 남자를 손가락으로 불러 뭔가 귓속말을 한다. 그 녀석이 옆문으로 나가더니 조금 후에 뭔가를 잔뜩 들고다시 들어온다. "어……." 내 짐들이었다. 새로 산 체인 메일, 아버지가 주신 건틀렛, 가죽 망토, 건량이나기타 물건들, 그리고…… 저, 저건! "도, 돌려줘!" 순간 반쯤 눈이 뒤집힌 나는 의자째 뒤로 넘어가 있는 상태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물론 일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몸을 힘껏 비틀었다. "이 도둑놈들! 돌려주지 못해!!!" 붉은 머리가 의자에서 친히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물건들중에서 특별히 친절하게 내 눈앞으로 들이대어 보여 준 것은 아버지가 준 목걸이, 검은 원반추가 달린 사계절의 목걸이였다. "이게 갖고 싶나?" +=+=+=+=+=+=+=+=+=+=+=+=+=+=+=+=+=+=+=+=+=+=+=+=+=+=+=+=+=+=+=채널아이에도 드디어 '세월의 돌'이 올라갑니다. 채널아이의 환타지 동호회 '다른 세계의 모험담'(이름이 맞나..)이라는 게시판에 올려주시기로 했습니다. gish님, 감사합니다-^^이로서 나우누리, 하이텔, 천리안, 채널아이까지 네 군데에 올라가게 됐군요. 모두 여러분이 읽어주신 덕택입니다. ^^그런데... 채널아이에는 들어가 볼 길이 없군요;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1961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2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6 22:30 읽음:195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26) 저게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내 목에 저게 걸려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난 왜 이렇게 잘 잊어버릴까. 게다가 저걸 노린다면 도대체 저 녀석의 정체는 뭐지? "일으켜 줘라." 양쪽에 섰던 두 남자가 다가와 내가 묶인 의자를 번쩍 들더니 다시바로 세웠다. 그러는 동안 목걸이는 녀석의 손가락에 걸린 채 내 눈앞에서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뭐,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곧 돌려줄 테니." "…… 돌려준다고?" 귀를 의심하게 하는 소리였다. "그래, 돌려준다. 내 말에 제대로 대답하기만 하면." 심문자는 그제야 좀 느긋하게 우위를 점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의자로 돌아가 앉으면서 목걸이의 끈을 손가락에 감아 흔들거리게 했다. 그건 아주 잘한 일이다. 만약에 목에 걸기라도 했으면 내가 무슨소리를 또다시 질러댔을지 나도 모르니 말이다. 어찌 됐든, 나는 이판사판으로 나가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아무 질문이나 해라. "이 목걸이는 무엇에 쓰는 것이냐?" 그러나……그가 첫 번째 한 질문에서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목걸이는 목에 거는 것이지- 라는 식으로 대답해 봤자 귀찮은 말만길어질 테고, 분명 무엇을 묻는 것인지는 알겠는데, 대답할 말이 없다. "그…… 나도 몰라." 예상대로 상대방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이걸 돌려받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참으로 우스운 소리다. 그게 뭐든 간에 쓸만한 거란 게 판명된다면네 녀석들이 무엇 때문에 그걸 나한테 돌려준단 말이냐. 지금 나한테그걸 판명할 능력(즉, 쓸만한 거란 걸 증명할 능력)이 없어서 그 가설을 실행해 볼 수 없을 뿐이지,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 그만큼 명석판명한 진리도 없다고 본다. 어쨌든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어. 그건 나만이 아니라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테니 다른 질문을 해라." "……." 잠깐 생각하는 눈치더니 그는 다시 물었다. "그럼 이 보석의 용도는 뭐지?" 한 개 박혀 있는 녹색의 보석. 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를 해 주는 수밖에. "그것은 봄이다." "뭐야?" "네 계절을 모두 찾아 넣은 뒤에야 목걸이의 능력도, 보석의 의미도 알 수 있게 되는 거야. 목걸이가 갖고 있는 힘도 돌아오게 되는것이고. 그것이 가진 의미들은 이미 수십년 전에 세월 속으로 묻혀서전해지는 바가 없단 말이다. 혹시 네가 알면 나한테도 가르쳐 주든지." "사계절의 목걸이 아룬드나얀(Arundnayan), 겨우 그런 의미인가?" 마치 중얼거리듯 상대방이 내뱉은 말 가운데 내 귀에 굉장히 민감하게 잡히는 말이 있었다. 사계절의 목걸이… 뭐? "그게…… 이름이야?" "사계절의 목걸이, 아룬드나얀. 에제키엘의 네 개의 눈동자라고 불리는 네 보석의 주인. 에제키엘의 다른 이름은 '사계절의 왕'이라는것을 너는 모른단 말이냐?" 나는 잠시 얼이 빠져서 눈을 껌뻑거렸다. "나는 에제키엘의 다른 이름이라고는 '영원의 구속자' 밖에는 모르는데." "영원의 구속자, 사계절의 왕, 검은 포도의 아들, 이 말고도 에제키엘의 이름은 더 있어. 모두 각각 다른 뜻이 있지. 너는 도대체 아는 게 뭐냐?" 누가 누구에게 정보를 주기 위해 끌려온 건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자기가 아는 지식들을 즐겁게 늘어놓기 시작하는 상대방을보면서 나는 이제 나도 좀 물을 것은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걸이나 에제키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티무르라는 놈은 이제 우리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다는 말에서부터 어제 나와나르디가 깡패들을 두들겨 팬 것 때문에 내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늘어놓고 있었다. 자기한테 그 정도 정보를 입수하는 것은식은 죽 먹기라나 뭐라나. 처음에 나와 그저 이야기나 하려고 데려온 거라고 했겠다. 그러면못 물을 것도 없지. 우선 네 녀석이 누구인가부터……. 그런데 나는 첫째 질문부터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는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겠지?" 의외의 곳에서 마음이 잘 맞는 녀석이로군. 나는 친절하게 고개를 끄덕여 녀석이 뭔가 자랑하고 싶어하는 그기분을 그냥 맞춰주기로 작정했다. "궁금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아주 가소롭다는 듯이 나를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마치 은혜라도 베풀 듯 말을 꺼내는 녀석의 얼굴이 꽤나 역겨울 것이라는 점. "님-나르시냐크 구원 기사단의 부단장 한젤 리안센의 둘째 아들 티무르 리안센. 그게 내 이름이다."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별 수 없어서나는 입을 열었다. "뭘 그런 이야길 하면서 그렇게 잘난 척 하냐? 네 아버지를 자랑하고 싶은 거라면, 적어도 구원 기사단장의 아들 앞에서는 그만두는 편이 낫지 않냐?" "무슨 소리! 네가 기사단장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건 네 녀석 하나밖에 없어. 어디서 감히 누구의 아들 입네 떠드는 거야?" 하도 의외의 말이라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지, 지금은…… 아직 이지만, 어쨌든 곧 아버지는 나를 아들로 인정해 주시기로 약속하셨단 말이다. 게다가 이 문제에 네가 참견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보는데." 티무르의 얼굴에 경멸 어린 표정이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갔다. "흥. 하르얀이 그러도록 너를 가만히 두는가 보자." "하르얀? 그게 누군데?" 티무르는 이제 아예 소년답게(?) 입술을 비죽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목걸이를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장난을 하면서, 아주 나를 놀리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담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정말 관대하게 말했을 때 네 동생, 네 동생 되는 하르얀이다. 하르얀 나르시냐크, 단장님의 아들은 그쪽이란 말이다, 네가 아니라. 장담하건대 하르얀이 너를 형이라고 생각할 리는 절대 없겠지만 말야."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세월의 돌'을 퍼 가시고 싶으신 분이 계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최소한의 원칙만 있으면 저는 괜찮습니다. 물론, 이미올라가고 있는 게시판(하이텔의 환타지동호회, 천리안의 검과 마법동호회, 채널아이의 환타지동호회)은 안되겠지만요. 그렇지만, 모아서 올리는 것은 자제해 주셨으면 해요. 모음집을 만들어야겠다 싶으면 제가 직접 만들 생각입니다. .... 이런 기우에 불과한 말씀을 드릴 만한 사건이 있었답니다. 다른 독자분들께 죄송합니다. 참, 추천해 주신 분- 역시 감사드립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그걸로 즐겁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047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2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7 23:28 읽음:192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27) 주아니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한 구석에 쭈그리고 있으니까 괜히 불안한 모양이었다. "파비안, 왜 그래? 무슨 걱정을 하는 거야?" 내가 설명한댔자 네가 알아듣겠냐. 주아니는 내가 계속 대답하지 않자 일단 포기한 듯, 불안하게 주머니 안에서 꼬물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생각할 여유가 필요했다. 나에게 '동생'이 있다. 하르얀 나르시냐크, 공식적인 님-나르시냐크 구원 기사단장의 아들. 그 녀석도 어머니는 없단다. 나보다 겨우…… 한 살이 적다. 왜, 왜 아버지는 내게 거짓말을 했을까. 내가 아버지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을까 봐서? 어머니가 갑작스레죽은 마당에 그런 이야기 꺼내기가 어려워서?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강조해서 '내 아들은 너 밖에 없다' 고말할 건 뭐야? 솔직히 좀 배신당한 느낌이다. 흠…… 그건 그렇고, 왜 17년이나 키운 아들을 두고 나를 후계자로삼겠다고 한 거지? 티무르 리안센은 '하르얀'이라는 내 동생… 과 잘 아는 사이라고했다. 덕택에 내가 여기에 지금 갇혀 있는 이유도 명백해졌다. 하르얀은 내 존재에 대해 벌써부터 알고 있단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를 찾아 떠난 것도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그렇겠지. 그럴 수 있겠지. 17년 동안 아들은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아버지가 형이 있다면서 찾으러 갔다니 마음이 좋지 않을 수도 있겠지. 어머니도 다른데. …… 물론 이렇게 좋게 이해하는 쪽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내 속마음은 그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어떤 마음이냐고? 하르얀은 티무르를 시켜서 내가 어떤 놈인지 캐볼 참이었단 거겠지. 그 정돈 말 안해도 알 수 있다. 아버지가 맡긴 목걸이에 관심이있는 것이 하르얀이면 하르얀이지 티무르 쪽일 리 없으니까. 그 방법이란 게 도저히 내 마음에 들래야 들 수가 없단 말이다. 17년 동안 권력자, 세도가의 아들로 자란 녀석의 일하는 방식은 본래이런 것인가? 명목상으로나마, 아니 실질적으로도 반이나 피가 이어져 있는 형제를 이렇게 멋대로 잡아가두고, 나중에나 거만하게 나타나 자기 잇속을 챙기겠다고? 나라면 적어도 이렇게 하지 않았을 거다. 나야 가난하고 평범하게자랐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양 뺨이 얼얼했다. 좀 의아한 점이 있다면 티무르는 처음 내가 생각한 거와는 달리 하르얀의 이해 관계 따위에는 그다지 연연해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라는점이었다. 처음에는 꽤나 신경전을 벌였지만 거만한 말투 이외엔 특별히 내게 반감이 있는 것 같지도 않으며, 내가 묻는 대로 '아룬드나얀'이라는 목걸이에 대해 대강 대답해주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렇지만 그는 나를 계속 가둬 둘 참이라고 말했다. "하르얀이 곧 여기로 온다. 내일 아침 정도면 도착할거야. 형제 상봉도 괜찮겠지, 어때?" 말이야 좋지만, 하르얀이라는 녀석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이미 알아버린 상황에서, 지금 만나는 것에 나는 전혀 찬성할 수 없다. 목걸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도저히 돌려주리라는 기대는 하기 힘들었다. 티무르는 물론 내 예상대로 목걸이를 돌려주지 않았다. 자기가 잠깐만 맡아 둘 테니, 하르얀에게 직접 돌려받으라며빙글빙글 웃는 녀석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었다. 하르얀에게 목걸이를 빼앗긴다면? 지금 내가 하르얀의 일로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낀다고는 하지만,그래도 일단은 아버지가 맡긴 일을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 인정받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알겠다. 그러니까 하르얀에게 이런 식으로 뒤져서 내가 바보라는 것을 증명해선 안 된다. 아버지가 하르얀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나로선 전혀 짐작할수가 없다. 내 일을 성공하고 난 뒤에 따질 것은 따져도 늦지 않다. 그렇다면 결론은? 여길 나가야 해! 그리하여 어쨌든, 다행스럽게도 일단 생각할 것은 한 가지가 되어버렸다. 검은 여전히 빼앗긴 상태다. 내가 네 말대로 잡혀온 것이 아니라그저 이야기나 하려는 거였으면 그만 돌려줘도 좋지 않냐고 말했지만, 녀석은 코방귀도 뀌지 않았다. 녀석의 뻔뻔스런 말투를 잠시 빌려 여기에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뭐, 하르얀이 직접 돌려줄 거야. 너무 상심하진 말라구." …… 마치 이 티무르라는 녀석은 나와 하르얀이 만나 어떤 일을 벌일 지에 대해 신나는 구경이라도 기다리는 놈 같다. 지금 다시 갇힌 여기는 처음에 갇혔던 그 곳은 아니었는데 여전히건물 몇 층인지조차 짐작하기 힘들었다. 눈을 가린 채 한참이나 빙빙돌았기 때문에 어떤 방향으로 온 건지조차 모르겠다. 다행히 아까보다 나은 점이라면, 철창 따위는 보이지 않고 어디에선가 빛이 새어들어온다는 점이었다. 일단 움직여 봐야겠다. "주아니." "응, 응?" 내가 오랜만에 입을 열자 주아니는 반색을 했다. 음…… 꽤나 심심했던 모양이군. "빠져나가야겠어." 음…… 얼굴이 잘 안 보이긴 하지만, 모르긴 해도 주아니의 침묵은'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라는 의미 같군. 일단 빛이 새어 들어오는 쪽으로 다가갔다. 한쪽 벽과 천장이 붙은부분인데 자세히 보니 아무래도 천장을 나중에 새로 만들어 붙인 것같다. 이음매가 벌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생각건대 윗방에서 내려오는 빛 같다. 틈새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군. 으음? "주아니, 이리로 와볼래?" 잠시 후 주아니는 내가 한껏 위로 뻗쳐 올린 손바닥 위에 발돋움까지 하고 서서는 천장 틈새로 윗방을 엿보는데 성공했다. 아, 주아니,내가 솔직하게 하는 말인데 네가 이런데 도움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물론 이런 자세를 취하고 있기도 영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도 없어." "아무 것도 없어?" "의자밖엔 아무 것도 없어." 내가 아까 있던 방이랑 똑같네. 여긴 그런 심문실(?)이 많은 모양이지? 혹시, 내가 있던 방도 이 근처인 건 아닐까? 팔을 뻗쳐 올린 채 머리를 굴리느라 약간 고생하고 있는 참인데 주아니가 입을 열더니 결정적인 말을 했다. "어라…… 어디서 많이 보던 데 같은데?" "뭐?" 로아에들의 기억력에 대해서 들은 바는 없지만, 이번 건으로 보아기억이 상당히 느리게 돌아온다는 점에 대해선 확신해도 좋을 것 같다. "웃기는 놈들이네. 그래, 바로 아랫방으로 데려오면서 그렇게 빙빙돌았단 말이지?" 주아니의 설명을 대강 들어 본 결과 윗방이 내가 있던 방임에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아니면 적어도 비슷하게 만들어진 나란히 있는방들 가운데 하나일 것 같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저 근처에 내 물건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로군. 그나저나 위든 아래든 어떻게 나간담. "어, 누가 들어왔어!" 주아니가 잽싸게 고개를 수그리면서 조그맣게 속삭이길래 나도 덩달아 조그맣게 내 의견을 말했다. "야, 수그리면 어떻게 해. 누가 들어왔는지 봐야지." "들키면 큰일이잖아."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참았다. '누가 네 조그만 머리를 발견하겠냐?'대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조심해서 봐." "어라…… 어디서 많이 보던 자들인데?" …… 주아니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나는 들어온 사람들이 누구인지벌써 짐작이 가 버렸다. 조금만 느긋했다면 이렇게 묻고 싶은데. '혹시 빨간 머리 아니냐?'그런데 주아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뭔가 이야기들을 하고 있어." 근데 나한텐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쉿, 조용히 해봐. 너 땜에 안 들리잖아. 로아에의 청력을 뭘로 아는 거야?" 나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로아에라는 종족을 안 지도 얼마 안된 내가 너희들이 귀가 좋은지안 좋은지까지 알 수 있을 턱이 없잖아. 혹시 몰라서 나도 귀를 기울여 보려 애썼지만, 정말이지, 한가로운모기 한 마리가 날개짓하는 소리도 안 들리는데 뭘 듣겠단 거야? 무슨 생각인지 주아니가 나한테 핀잔을 주듯 한 마디 던졌다. "로아에는 일생 동안 도망갈 일이 굉장히 많아. 토끼나 쥐 따위는비교도 되지 않는다구. 인간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지." 음…… 내가 가끔 너를 쥐에 비유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알았냐? 주아니가 열심히 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 나는 안들리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애쓰는 것은 포기하고 열심히 나갈 계획이라도 짜 보려 애쓰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간도 흐르기 전에 나는 벌써 이 일이 쉽지 않은 것이라는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상황은 매우 단순했다. 문이 잠겨 있다 -> 열쇠가 없다 -> 열쇠 대용으로 쓸만한 것도 없다 -> 문은 부술 만하게 생기지도 않은 철문이다 -> 설상가상 무기도없다 -> 게다가 속여먹을 만한 지키는 놈조차 없다. 잠깐, 이 마지막 항목은 좀 이상한데? 지키는 놈이 있고 그 놈이 어벙한 놈이라면 뭔가 수를 써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지만, 사실은 지키는 사람이 없는 쪽이훨씬 행운이 아닌가? 아냐, 지금같이 전혀 손쓸 건덕지가 없는 상황에서는 뭐라도 있는 편이 나은 건가? …… 어쨌거나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라도 있어서 나에게 속아 열쇠를 갖다주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 속인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건가하는 점은 일단 제쳐두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 참인데 주아니가 문득 말했다. "파비안, 나 내려줘." 주아니와 구석에 일단 주저앉았다. 주아니의 표정을 보니 뭔가 정말 듣긴 들은 모양이다. "네 동생, 그 뭐라는 사람한테 빨리 오라고 전갈을 했대. 파비안너를 성공적으로 잡아놓고 있으니 말야." …… 아주 안 좋은 소식이었다. "다른 건?" "그리고, 혹시 모르니 아랫방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라고 말했어. 곧 보초를 보낼 모양인가 봐." 음, 아까의 계산에 따르면 좋은 소식인 것 같긴 한데,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건가? "그리고?" "저녁밥을 갖다주래." 이것만은 확실히 좋은 소식이로군. 아, 아니 배고픈데 밥이나 갖다준다고 좋아서 하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저 소리를 들으니 뭔가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 말이다. 그런 뜻에서 좋은 소식이란 말이다. 주아니의 보고는 일단 끝이어서 나는 일단 주아니를 주머니 속으로돌려보냈다. 그리고는 저녁밥을 갖고 올 보초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여전히 내게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주아니가 문득말했다. "발소리다." +=+=+=+=+=+=+=+=+=+=+=+=+=+=+=+=+=+=+=+=+=+=+=+=+=+=+=+=+=+=+=햇빛은 따뜻한데, 바람은 차가워요. 저는 날씨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몇 개 안에 꼽는 사람입니다만...^^;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048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2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7 23:29 읽음:190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28) 주아니가 그렇게 말했을 때에도 내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않았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미르보를 흉내내어 땅바닥에 귀를 갖다대 보았지만 그래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능력을 믿는다는 건 참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걸 믿어야 돼, 말아야 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복도를 울리는 신발 소리가 들리고,이어 철문을 쾅쾅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식사다!"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킨 다음, 나는 계획대로 일부러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하아아음, 음냐… 예? 뭐라고요?" "이 녀석, 냉큼 오지 않으면 도로 가져갈 테다! 식사야, 식사!" 큰소리는 칠 수 있을 때 실컷 치시지. "아, 예……." 대답과는 달리 나는 재빠르게 문 곁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가능한한 몸을 도사리며 곧 있을 지도 모르는 주먹다짐을 준비했다. 그런데내 예상하고는 달리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문 아래 조그마한 창이 덜컥, 열렸다. 저, 저런 게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받아라." 아무래도 어두워서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위로 들리게 되어 있는 덮개 달린 조그만 창이다. 고양이나 드나들면 모를까,내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유감스러웠지만 일단 식사를 받았다. 둥그런 쟁반 위에 나무 접시,그 위에는 빵과 버터 등의 조촐한 식사가 놓여 있었다. 저걸 보니 괜히 어머니와 하던 식사가 떠오르는군. "단단히 지킬 테니 도망칠 생각은 말아." 뭐, 대답할 필요는 없는 말이었다. 일단 배도 고픈데 빵이라도 베어 물어 볼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혹시 무슨 약이라도 섞어 놓았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파비안, 빵 이리로 가까이 줘봐." 뭘 어쩌려고 그러지? 그러나 일단 주아니를 빵에 가까이 오도록 손바닥에 얹어서 쟁반 위로 올려 주었다(빵을 주아니에게 주나, 주아니를 빵에게 주나 어차피 똑같은 상황이다). 주아니는 재빠르게 쟁반 위를 돌아다녔다. "으음…… 빵에서는 별 냄새가 안 나. 대신에 이 버터는…… 그러니까 음… 이건 루타, 그래, 루타 냄새다." "루타라면…… 마취초?" 운향과 풀인 루타는 그 향 자체가 굉장히 강한 풀이기 때문에, 혹시나 하고 나도 버터를 들고 직접 냄새를 맡아 봤지만 솔직히 전혀모르겠다(풀에 대한 지식은 약초를 팔았던 나로선 기본 과목인데도). 하지만 앞서 로아에들의 희한한 청각에 대한 것을 체험한지라 이것도전혀 안 믿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희한한 청각에 희한한 후각이라,거참 생각 외로 대단한 종족인걸. "뭐, 이 버터에서 나는 냄새 중에 내가 아는 냄새라고는 루타 냄새뿐이란 거야. 뭔가 이것 저것 섞어서 만든 약이겠지. 버터는 안 먹는게 좋겠다." 아무래도 주아니의 말을 앞으로 꽤나 신용하게 될 것 같다. 맨 빵을 그냥 씹고 있는데 위층에서 뭔가 쿠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지들끼리 싸움이라도 났나? 아니면 친선 씨름 대회라도? 버터는 아주 조금밖에 없었다. 이걸 먹어서 나한테 마취 효과를 바라려 했다면 아마 엄청난 양의 약이 들어갔음에 틀림없다. 어디 쓸데 없을까? 이걸 확 얼굴에다가 날려 주었으면 좋겠는데. 마침 내가늘 가지고 다니는 조그만 슬링도 주머니에 있고 한데 말야. 그렇지만버터를 날려 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어? 최소한 돌멩이는 날려야 뭔가도움이 되든지 하지. 그 순간, 주머니 안에 든 견과 꾸러미에 생각이 미쳤다. "주아니, 넌 정말 도움이 되는 친구야." "뭐?" 주아니는 당연히 내 말뜻을 못 알아들었지만 어쨌든 상관없었다. 일단 조그만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소리가 안 나게 조심조심열고 보자 내 방에서 똑바로 앞으로 뚫린 복도가 보이고, 저만치 보초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한 사람이라니, 나를 과소 평가하시는군. 마침 녀석이 다른 쪽을 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마도 몹시 지루하겠지. 이런 강철 문짝 안에 갇힌 녀석이 갑자기 이걸 뚫고 나올 수있다면 그게 신기한 거니까. 나는 문 앞에서 반쯤 뒤로 누운 다음 왼발을 창 사이에 끼워 덮개가 닫히지 않도록 했다. 그런 자세로 견과들 중에 제일 단단하고 큼직해 보이는 알밤을 하나 골라 슬링에 메겼다. 겨냥이 중요해. 스노우보드 위에서도 정확하게 날아가는 새를 맞힌 일도 있는 - 물론 별로 높은 곳에서 날아가는 새는 아니었다 - 내 실력은 결코 닳지않았다. 슬링의 끝을 놓으면서 나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주아니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가 하는 일을 보고 있었다. "날아가라." 휙! "맞아라." 딱! "끄윽…… 뭐얏!" 나는 다시 속삭였다. "와라." "이, 이 녀석이…!" 예상 대로였다. 밤은 돌멩이하곤 달라서 아무리 세게 날려 봤자 상대를 단박에 기절시킬 만한 능력은 없다. 대신에 상대를 열받게 하는 데는 충분할정도로 쓸만했다. 보초는 구석으로 굴러간 밤을 찾아내서 집어들고 확인하더니 내 쪽을 무시무시하게 쏘아보며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벌써 벌겋게부풀어오르기 시작하는 왼쪽 이마를 문질러가면서. "죽고 싶냐!" 철문 앞까지 온 녀석에게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아, 좀 심심해서 말이죠. 마땅한 과녁이 마침 거기 있길래 좀 써먹어 봤네요. 뭐 그렇게 화낼 건 없잖아요. 당신도 심심해 보이던데." "어, 어떻게 한 거야!" "아, 밤팔매질이라고나 할까요?" 속으로 나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열받아라! 열받아라! "내, 이 녀석을……." 황당한 일이지만 내 위치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보초는 문을 열고 들어올 수가 없는 거다(마치 내가 아니고 녀석이갇혀 있기라도 한 것 같군).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렇다고 과녁이 안 되기 위해 어디 숨을 수도 없다. 보초가 포로를 두고숨는다는 것이 말이 되나 글쎄. 게다가 이런 일로 동료를 부른단 건 아마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일걸. 그렇다면 대안은? 녀석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더니 내 쪽을 똑바로 쏘아보기 시작했다. 결코 눈을 떼지 않겠다는 듯이. 물론, 그렇다고 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번엔 아예 녀석이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창을 들어올린채 이번엔 호두를 슬링에 메겼다. "야!" 녀석이 벌떡 일어나 다시 내 문 쪽으로 달려온다. 그러면 나는 잽싸게 창에서 발을 빼고 뒤로 숨었다. "밤 싫어하시나 싶어 이번엔 호두였는데?" "너, 너 그 슬링 내놓지 못해!" "어어, 싫어요." 빼앗으려면 문을 열고 들어와 보란 말야. 화가 나서 문 앞을 왔다갔다하던 녀석이 다시 자리로 돌아간다. 계속 서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이번엔 의자를 좀 가까이 가져왔다. 뭐 나도 이젠 아까운 견과를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이젠 창만 슬쩍 열어도 된다. "이 녀석이!" 후닥닥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잽싸게 다시 발을 뺐다. 주아니도이 웃기는 실랑이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주머니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킬킬댄다. 몇 번이나 이런 모양새가 반복되었다. "다시 한 번만 던졌담 봐라!" 화가 치미는 것을 참으면서 저렇게 엄포를 놓지만, 내 목적이 뭔데그런 위협에 그만두겠어. 저럴수록 더더욱 몰아쳐야 된다. 녀석이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가 무섭게 나는 이번엔 손으로슬쩍 창을 들어올렸다. "주, 죽고싶……." 아예 말을 똑바로 끝내지도 못하면서 벌떡 일어나는 녀석이 가까이다가오기를 기다려 창을 쾅 소리나게 닫았다. 그리고 밖에 들릴 정도로 커다랗게 키득거렸다. 이번엔 주효했다. 오랜 수고에 보답이 왔다. "죽었어!" 쩔그럭대며 열쇠를 찾아 문을 여는 소리. 내가 누워서 발로 아직까지 창을 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커다란 오산이다. 나는 바로문 뒤에 서서 녀석이 머리를 들이밀기를 기다려 아까 친절하게 갖다준 쟁반으로 그 머리를 힘껏 후려쳤다. 촤장캉-! 좀 이상한 소리가 나네. 내 끔찍한 팔 힘이라 해도 단번에 기절할 리는 없다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비틀대다가 앞으로 와락 뛰어나오는 것을 기다려 뒤로 빠졌다. 그리고 힘껏 갑자기 어두운 곳으로 들어와서 앞이 잘 안 보이는 녀석을 향해 쟁반을 내던졌다. 쟁반 모서리가 어딘가에 부딪치는소리가 들린다. 다음 수순은? 기다리고 있던 대로 녀석은 내가 미리 바닥에 펼쳐 발라 놓은 버터를 힘껏 밟고는 그냥 미끄러져 구석으로 굴러갔다. 마취제가 든 버터라고 해서 꼭 마취에만 쓰란 법은 없는 것이다. 암, 그렇고 말고.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는 법이지. 나는 재빨리 밖으로 튀어나가 문을 힘껏 닫았다. 걸쇠를 걸었다. 자물쇠는 못 잠그지만 일단 걸쇠를 걸어 놓는 것만해도 금방 빠져나올 수는 없겠지. 뒤에 남은 녀석의 울분에 관해서는 내 알 바 아니었다. "야, 이 녀석아아아아아……." 무슨 소리가 아련히 들려 오긴 하는군. 철문을 빠져나왔다고 다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는 데는 그다지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보초 녀석이 처음에 의자를 놓고 앉아있던 복도 앞에 계단이 있기에 일단 위로 올라갔다. 아까 주아니가 엿본 방 근처에 뭐가 있어도있을 것 같아서다. 그러나 손에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이 상황에서 슬링을 무기라고 부를 수는 없는 법이지), 그저 빈손으로 걷고만있을 뿐이니 솔직히 누군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두 손들고 걸음아날 살려라- 튀어 내려올 수밖엔 없는 상황이었다. 한심한 상황이지만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들키지 않게, 발소리 안 나게, 가만가만히 걷는 것 밖에 없었다. 복도에는 희미한 램프들이 몇 걸음마다 하나씩 밝혀져 있었다. 2층, 아니 어쨌든 위층에 와서 보니(여기가 몇 층인지는 도저히 알수 없었다) 비슷비슷한 문이 잔뜩 늘어서 있다. 대강 위치로 보아 아까 내가 있던 방의 윗방이라고 생각되는 쪽으로 다가가서 귀를 갖다대 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걸 하는데도 이마에서 진땀이 관자놀이에 흐를 정도로 났다. 아참, 내가 지금 뭔 짓을 하는 거야? 훨씬 우수한 귀를 놔두고. "주아니, 네 귀에 뭐 들리는 소리 없어?" "없어." …… 모처럼 해낸 생각도 소용이 없었다. 그럼 어쩐다? 아무 문이나 막 열어 봐? 정말 위험한 생각이로군. 삐이걱. 그러나 나는 위험한 생각이고 뭐고 실천하는 수밖엔 다른 수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도 누구 지나가는 녀석이라도 있다면, 어딘가 살짝 숨어서 상태를 관전할텐데. 어째 쥐새끼 한 마리 얼씬도 안 하냔말야. ……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아무래도 나는 일반적인 포로들과는안전에 대한 관점이 좀 특이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네?" 나보다는 주아니의 관점이 훨씬 소용이 닿는 것이로군. 주위에는 내 짐도 물론이고 무기로 쓸 만한 것조차 하나도 없었다. "무슨 소리 들려?" 주아니를 손바닥에 얹은 채 문마다 귀를 갖다대게 하고는 문을 열어보는 중이다. 지나치게 한심한 과정이긴 해도 뭐, 다른 대안이 없는걸 어떡하냐. 그런데, 여긴 지나치게 오가는 사람이 없네. "안 들려." 덜컥. "또 없군……." 그럭저럭 제법 커다란 방문 앞에 도달했을 때였다. "어, 무슨 소리가 들려." 나는 긴장해서 멈추어 섰다. "음…… 뭔가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소리 같은데?" 이게 무슨 소리야. 바닥에서 꿈틀댄다면 사람일리는 없고, 그렇다면 뭐지? 바닥에서기니까…… 혹시 뱀인가? 윽, 생각만 해도 끔찍스럽다. 이걸 문을 열어봐야 돼, 말아야 돼? 주아니가 갑자기 말했다. "조용해졌다." 흠흠, 그렇다고 있던 게 갑자기 사라졌단 말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이 안에는 뭔가 중요한 인물이 들어앉아 있든지, 아니면하다못해 아까 티무르라는 녀석이라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여기까지 오도록 이렇게 조용한 이유는 뭐야? 내가 아무리 소리를 안내면서 왔다고 해도 정말 아무 소리도 안 낼순 없단 말이다. 그런데도 지나치게 조용하다고. 게다가 꿈틀대는 소리라니, 다들 땅바닥에서 헤엄이라도 치고 있나? 마음속으로 약 5초간 심사숙고했지만 대안이 없었다. 지금까지 열어본 문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이번 문안엔 그래도 뭔가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계속 아무 대책 없이헤매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지도 몰라. 조금 있으면 어차피 누구라도내가 도망친 것을 알아채게 될 텐데. 그 보초녀석의 소리지르는 상태를 보아하니 말야. 에…… 이거 너무 대담한 것 아냐? 아무래도 난 포로로서는 자질이좀 부족한 것 같은……. 나는 문을 열었다. 덜컥. "어……." "이제 오니?" 나는 입을 이만큼 벌린 채 그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눈앞에 벌어진 광경은 당황스럽다 못해 아예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상황에 대한 대책은 없었단 말이다. 황당, 당황, 기막힘, 그리고……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여튼 느려터지긴. 기다리느라 벌써 지쳐버렸어." +=+=+=+=+=+=+=+=+=+=+=+=+=+=+=+=+=+=+=+=+=+=+=+=+=+=+=+=+=+=+=요즘은 토베 얀손의 무민이야기 시리즈를 읽고 있습니다. 저는 옛날의 동화 환타지들을 꽤 좋아해요.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있을 정도입니다(긴양말의 삐삐를 쓴 작가죠). 이 작가가 쓴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라는 작품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책입니다. 무민은... 초등학교 4학년 땐가, 처음 접했었는데, 그 너무 느긋한사고방식에 놀래버렸죠. 그런데 요즘 다시 읽으니까, 그의 호흡에 잘몰입이 되지 않네요. 얼마전에 린드그렌이 쓴 <미오, 나의 미오>를 읽었을 때도 별로였는데 말입니다. 좀, 마음이 아프네요... 재미있는 동화를 읽는 것은 참 즐거운데요. 읽을만한 동화환타지는 다 어디에 숨어 있을까요...^^;(분명, 내가 못 찾고 있는 걸거야..;)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150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2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8 23:49 읽음:185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29) 널찍한 방이었다. 바닥에 융단도 깔려 있는, 일종의 회의실처럼 보이는 방이다. 방바닥에 쓰러진(아마 꿈틀대는 소리? 의 주인공들이었으리라) 여섯 사람의 남자, 그리고 그 한 가운데 팔다리들을 피해 교묘하게 의자가 놓여져 있고, 그 위에 천연스런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검은 치마와 긴 은발의 소녀가 있다. "유…… 리." "내 애칭을 잊진 않았구나?" 그건 오해다. 나는 이름을 말하다가 도중에 멈춘 것에 불과하니까. 물론 이름도 잊어버리진 않았다. '아르노윌트 크센다우니 엠버'도 기억하는 난데, 그 정도를 잊어버렸을까봐. '유리카 오베르뉴'는 뭔가 신나는 일이라도 했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생긋 웃어 보였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이 있다면 유리카의 발치에 내 검과 짐들이 고스란히 흩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목걸이는? …… 유리카의 목에 걸려 있었다. 음, 뭐부터 생각해야 한담. 이 남자들이 뭘 하고 있냐는 것, 이들을 해치운 게 설마 유리카 너냐는 것, 검이랑 저런 것들을 어디서 찾았냐는 것, 아니, 유리카 네가 왜 여기 있냐는 것부터? 그러나 내 입밖에 나온 말은 그 모두를 포괄하기엔 지나치게 한심하고도 단순한 질문이었다. "아까…… 그 소리가 너?" 아까전에 빵을 씹으면서 들었던 위층의 소리가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유리카는 픽 웃었다. "그럼, 당연하지." 흠, 당연한 대답이었다. 의자를 덮고 있는 치마를 옆으로 걷으면서 유리카가 일어섰다. 그사그락대는 소리처럼 깔끔하게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 그대로다. 어깨위에 늘어진 은빛 머리카락들조차도 가지런하게 늘어져 있었다. 도저히 방금 싸움을 끝낸 모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그에 비하면 내 얼굴이 몇 배 더 엉망이었다. 티무르의 부하에게맞은 뺨이 심하게 부어 올라 있었다. 나는 일단 물었다. "뭘… 로 이렇게 한 거니?" "아, 뭐 그냥 내 숨겨진 실력이라고 생각해 둬." "네가 이랬다고?" "그럼 저들끼리 싸우다 엎어지기라도 한 줄 알았니?" "……." 이제 움직이지 않는 바닥의 남자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유리카는 성큼성큼 내가 서 있는 문 쪽으로 걸어왔다. 정말 아무 스스럼없는 걸음걸이다. 도저히 여섯 명이나 되는 남자들을 죽여버리…… 아니, 정말? "죽었니?" "몰라." 저 무심한 말투. 배울 점이 많군. 나는 아까까지 흘렀던 땀을 닦고는 혹시 남자들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지 않는가 유심히 살펴봤다.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주아니는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얼굴도 내밀지 않고 있네. "뭐하니? 저것들 안 가져가?" "가, 가져가야지." 배낭을 메고 건틀렛을 끼고 검을 등 뒤에 꽂았다. 의아했던 거라면등에 검이 닿는 그 묵직한 느낌이 그렇게 안심이 될 수가 없더란 점이다. 마치 자기 집이라도 되는 양 당당한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는 유리카의 뒤를 따라가면서 몇 가지 상황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우선믿을 수 없었던 점은 유리카가 나를 '구하러' 여기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다. 아니, 나를 언제 보았다고 이런 곳까지 찾으러 와? 나라면절대 그런 일은…… 혹시 했을 지도 모르겠군. "그럼, 왜 거기서 그냥 기다리고 있었는데?" "갇힌 방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할 정도라면 도와줄 가치도 없을 것같아서." "만약에 거기서 못 나왔으면 그냥 모른 척 했을 거란 거야? 방금일은 그냥 미용체조라도 한 셈치고?" "두말하면 잔소리." 이걸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헷갈리는군. "고맙다." "별소릴." 유리카는 내가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를 가진 모양이다……헤,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유리카가 내 쪽을 한 번 쳐다보더니 묻는다. "얼굴은 어쩌다 그랬니?" "아, 이거? 음, 그러니까…… 어쩌다 보니 그랬다." 별로 말하고 싶은 화제가 아니로군. 나는 말을 돌렸다. 아까 쓰러져 있던 녀석들 중에 티무르만은 없던데, 녀석 어디에 숨어 있는 거지? 계산 종료된 스물 네 대 빚은 갚아주고 떠나야 하는데. 복도를 걸어가면서 유리카가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글쎄, 여기가지상 1층이란다. 황당했다. 좀더 오래 갇혀 있었더래도 벽이라도 뚫고 나갔으면 됐겠군. 유리카는 계단 앞까지 가서 서더니 손가락으로 위쪽 계단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올라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냐?" "그럼, 내려갈까?" "뭐야, 너도 모르는 거야?" "그럼. 나도 여기 처음 들어온 거라구." "……." 내내 황당한 일의 연속이군. 지금까지 뒤에서 따라간 건 유리카가길을 알고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는데. 어디서 시시한 녀석이라도 하나 나타나서 유리카가 어떤 실력을 갖고 있는지 구경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혹시 여섯 명의 남자를 단번에때려눕혀 버리는 무슨 요령이 있다면 미래를 대비해서 나도 좀 배워두게. 쳇, 바라니 또 안 나타나는군. …… 이런 식으로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매번 갇혀있거나 도망치는 주제에, 적들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이상한 사고방식으로 이상한집안을 전전하고 있다. 여기가 1층이니 아래는 지하고, 게다가 지금까지 갇혀 있었던 곳이라는 생각에 일단 우리는 위로 올라갔다. 계단을 거의 다 올랐을 때다. "아잇!" 유리카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질러서 나는 당황하여 뒤로 한 발짝 물러서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뒤따라가는 주제에 도망까지 가서야 어디 나중에 할 말이나 있겠어? 복도 위쪽에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렸다. 그리고 램프빛이 비쳐 내려왔다. 유리카가 재빨리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면서 자기는말을 했다. "아까 녀석들이 말하던, 자리에 없는 그 녀석 같은데……?" 아까 없던 사람이라면? 추리를 할 필요도 없이 너무 당연한 사실이떠올라왔다. 그리고 그림자 사이로 언뜻 보이는 붉은 빛의 머리카락. 생각 대로다. 내가 바라던 상황…… 허억? 유리카가 한 발로 바닥을 가볍게 차더니 그대로 날아올랐다. 아니…… 날아? 그리고 날카로운 외침. "하!" +=+=+=+=+=+=+=+=+=+=+=+=+=+=+=+=+=+=+=+=+=+=+=+=+=+=+=+=+=+=+=여주인공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느냐고 물어보신 분-오늘 편이 대답이 되었을까요? ^^그리고.. 주아니 이야기는.. 조금 더 지켜봐 주세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151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30)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8 23:49 읽음:186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30) 나로서는 언제 유리카가 칼을 뽑았는지 제대로 보지조차 못했다. 그저 뭔가 그녀의 손에서 반짝, 하는 것 같다고 느꼈을 뿐이다. 펄럭. 검은 옷자락이 허공에서 새처럼 날개를 친다. "으윽!" 그녀는 반쯤 허공에 뜬 상태에서 몸을 왼쪽으로 틀더니 오른손으로, 그것도 거꾸로 뒤집어 날이 안쪽으로 향하게 잡은 칼을 나타난자의 턱 아래 갖다 들이댔다. 공기라도 베어 낼 듯이 날카롭게 날이 선 짧은 칼이다. 저런 칼이라면 꺾어 쥔 그대로 오른팔을 한 번 휘두르면 목줄기를 단번에 잘라내고도 남겠지. 칼손잡이를 쥔 그녀의 자그마한 주먹이 자기 턱에 닿을 만큼 그녀와 상대는 가까이 붙어서 있다. 그리고 나타난 자는 내 예상대로 티무르 리안센이었다. 그녀 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녀석은 주먹을 부르쥔 채턱 바로 아래 들이대어진 반짝거리는 칼날을 곁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녀석의 긴장하고 당황한 표정을 보니 내가 앞에 설 것을, 하는후회가 새삼 생긴다. 위로 떠올랐던 은빛 머리카락들이 나무를 잠시 떠났던 새들처럼 다시 유리카의 어깨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유리카는 칼을 쓰는 방식이 영 요상스럽다. 숏소드보다 더 짧아 보이는 칼이다. 날이 파르스름하게 빛날 정도로 아주 날카롭게 서 있고, 그것도 한쪽으로만 날이 있는 종류다. 끝도 아주 예리했다. 저게 어디서 튀어나왔지? 아까 까지만 해도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칼을 날이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뒤로 꺾어쥐고, 그대로 자기 이마높이의 상대방 목에 들이대고 있는 유리카의 자세는 상당히 역동적이었다. "손 머리 위로 올려." 티무르는 곁눈으로 유리카 뒤에 선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사태를눈치채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희들, 어떻게 빠져나왔는진 몰라도 그냥 나가진 못할 거다. 각오하고 있어." 녀석은 악당들의 일반화된 대사를 중얼거렸지만 일단 무시하고 손을 올리라는 뜻에서 팔을 쿡 찔렀다. 나는 처음부터 티무르라는 녀석한테 감정이 썩 좋지가 않다. 티무르의 양손이 위로 올라가자 유리카는 왼손으로 상대의 허리에꽂힌 검을 손쉽게 뽑더니 내 쪽으로 던졌다. 철그렁. "맡아 둬." 그러더니 입을 열어 마치 친구를 대하듯 상냥한 목소리로 티무르에게 말했다(보초한테도 존대를 하는 나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마치서로 안면 있는 사이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좀 도와줘야겠어." 티무르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도와주는 것 말고는 별 수가 없을 듯 싶다. 어쩌면 조그만 여자 애한테 당한 것이 수치스러워서 입을 열지 않고 있는지도 몰랐다. 세상엔 어디나 저렇게 쓸데없는자존심만 센 친구들이 있다. "나가는 길, 알고 있겠지?" 유리카는 턱짓으로 내 쪽을 가리켰다. 티무르는 여전히 말없이 나와 유리카를 번갈아 노려볼 뿐이다. 그러나 유리카는 그런 것은 전혀 관계없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기울여 보였다. "그래. 그럼 안내 좀 부탁해." 친절한 말씨와는 달리 그녀는 오른발을 들어 그대로 그의 허리를걷어찼다. "끄으……." 정말, 생긴 거하곤 다르게 험악하다니까. 유리카는 나더러 검을 똑바로 녀석의 등에 겨누라고 하고는 이번에는 내 뒤에서 걸어갔다. 자기 칼을 집어 꽂는데 칼집이 허리 뒤로 가있는 것이 이채롭다. 그녀가 걸친 검은 망토 같은 치마 때문에 뒤로꽂고 나니 검이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티무르의 검을 집어들었다. 일단 한 손으로 들어보았는데도 웬걸, 지나치게 가볍다. 이런 걸 가지고 무슨 싸움을 하나,하기를. 숟가락도 이거보다 무겁겠다. 물론, 좀 과장을 섞어서. 나는 티무르의 검을 아무 방문이나 열고 안으로 던져 버렸다. "자, 하나, 둘! 하나, 둘!" …… 유리카는 아예 구령까지 맞추어 가며 녀석을 몰아서는(?) 복도를 걸어갔다. 신나는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참 이상한 구조로 된 집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벌집 같다. 조그마한 방들이 빼곡하게 층마다 열 지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더 웃긴건 하나같이 비어 있다. 각 방마다 잠자는 손님만 하룻밤에 5존드씩받아도 떼돈을 벌어…… 음, 여기까지 와서 직업 의식을 발동시킬 필욘 없지. "들어올 때는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왔기 때문에, 여긴 어떻게 나가는질 모르겠지 뭐야." 유리카의 황당한 설명에 내가 해 줄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정문으로 당당히 나가면 되잖아?" "그 정문을 지금 찾고 있는 거라고." "들어온 델 못 찾다니, 어이가 없구나." "그건 네 생각하곤 달라. 어쨌든 그런 점이라면, 이런데 어이없이갇혀 있는 네 쪽이 훨씬 심한걸." "그건 나야말로 하고 싶은 말이야. 나 같은 놈을 뭣 때문에 가두지? 나참 어이가 없어서." "그런 너를 구하러 온 나도 어이가 없다." "내가 네 도움을 받는 것만큼 어이없는 일도 없을 거야." "무슨, 가장 어이없는 건 너를 가둔 저 녀석이야." "그 녀석을 사주하는 놈은 또 어떻고?" ……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사실 우리가 무슨 미로에 갇힌 것도 아니고 그저 보통 건물 1층이라고 할 것 같으면 아무 문으로든 나가면 될 거라고 쉽게 생각하면될 것 같지만, 내가 유리카로부터 곧 사정을 알게 된 바에 의하면 상황은 단순하지가 않았다. 들은 대로 여기는 도적 길드, 마음먹은 대로 그저 아무 문으로나훌쩍 나갈 수는 없단다. 나갈 수 있는 문은 교묘하게 정해져 있다. 그리고 나갈 수 있는 방법도. 물론 이제부턴 티무르가 안내를 잘 해줄테니까 더 걱정할 필요는없지만 말야. 그러나 나도 유리카가 정문(?)으로 들어와서 다시 은밀하게 이어진 이 비밀 구조물로 들어오기 위해 아까 그 방의 천장을뚫어버렸다는 대목에서는 솔직히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천장이 뚫리는 동안 도적 길드에 있다는 녀석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담. "도대체 거기를 어디라고 생각하고 뚫은 거야?" "그냥, 뭐 설마 아무 것도 안나오기야 하겠어? 라고 생각했지. 생각보다 운이 좋았지만 말야." …… 저렇게 태평스런 사고방식으로 어떻게 이제까지 잘 다녔담. "하, 그건 그렇다 치고 천장을 도대체 뭘로 뚫었니?" "그건 비밀." "……." 다시 한 층 위로 올라갔다. 이번엔 3층으로 왔겠군. 그런데 이상한점이 하나 있다. 이렇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이하나도 없었다. 또 하나 이상한 점, 층을 올라갈수록 방의 수도 줄어들고 길도 좁아지고 있었다. 한참 복도를 걷다가 우리는 심심해서 티무르 녀석의 직업에 대해약간 관심을 표명했다. "너, 도적길드에서 뭐야? 마스터는 아닐 테고." "알 거 없잖아." 여전히 대담한 체 잘난 척 하는 녀석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검끝으로 등을 몇 번 세게 찔러댔다. 유리카는 모르는 척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티무르한테 도와달라고 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리는 확실한 의사 표현이겠지. 어쨌든 티무르 녀석은 복도의 끝까지 가더니 방문 하나를 열고 들어갔다. 어라? 우습게도 방 안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꽤나깊은 계단 같다. 불도 켜져 있지 않아서 끝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층계참에 이르러 나는 녀석을 그 끝에 세웠다. 등뒤에는 검을 바짝들이댔다. 등줄기가 움찔, 하는 것이 내 눈에도 보인다. "말로 할 때 귀 기울여 들어. 너 뭐야? 정체가 뭐길래 도적 길드건물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거야?" 티무르는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는데, 아마 대답여부에 따른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가 아무리 생각해 봤자, 바로 등뒤에 있는 칼을 무시할 수야 있겠어. "…… 지금 내가 서 있는 층계가 문으로 가는 길이야. 단번에 세층을 똑바로 내려가는 계단이다." "그래? 그건 고맙군. 어쨌든 내 질문에 대답은 하란 말야." "여기서 떠밀면 곧장 문 앞으로 떨어진단 말이다. 너희들에게는 좋을 게 하나도 없어." 음, 듣고 보니 이해가 갔다. 내려가기 전에 미리 갑자기 뭔가를 우당탕 떨어뜨려서 경계심을 강화시킬 필요야 없지.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걸 보니 티무르 입장에서도 아마 계단을 한참 굴러 내려가는 일이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던모양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멋쟁이 검의 효용은 참 여러 가지란 말야. "으으윽!" "그러니까 말하랄 때 하란 말야." 앞으로도 종종 써먹으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두 번짼 데도이렇게 효과가 좋으니 말야. 사람들은 멋쟁이 검과 뽀뽀만 시켰다 하면 저렇게 기겁을 한단 말야. 아마도 얘가 엔간히 매력이 없나봐. "응, 파비안. 그 검이 좀 뜨겁긴 하더라." "에? 유리카, 너도 혹시 데었어?" "얘는. 내가 바보인 줄 아니?" 티무르는 우리가 평화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머리 위로 올린 팔을 풀지도 못하고 황급히 입술에 침을 바르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알지만, 저러는 꼴을 보고 있자니 마치 거짓말이라도 준비하는녀석 같다. "뽀뽀 한 번 더 할래?" "시, 싫어!" 티무르의 반쯤 죽어 가는 반응을 보면서 내가 깨달은 게 있다면 녀석은 단지 뜨거워서 저 난리를 치는 것 같진 않다는 거다. 입술을 데면 솔직히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우스꽝스런 꼴이 되는데 아마도 그것을 염려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티무르, 네가 스타일 구겨질까 봐 아등바등하는 꼴을 보자니 자꾸 내 내면에서 네 스타일을 더더욱 구겨주고 싶은 욕구가 스물스물 치미는걸. 이걸 어쩌냐? 나는 양쪽 손을 들어올려 보였다. "그럼 얘기를 하라구." "…… 나는 그저 손자일 뿐이야. 도적 길드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단 말이다."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빨리 대답할 일이지. "이 구조를 이렇게 속속들이 알고 있고, 거기다가 마음대로 사람들을 부리기까지 하는 네가 말이야?" "그건, 할머니의 명령이 있어서……." 티무르가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유리카와 나는 동시에 황당한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할머니이-?" +=+=+=+=+=+=+=+=+=+=+=+=+=+=+=+=+=+=+=+=+=+=+=+=+=+=+=+=+=+=+=왜 "1-1. 배달왔습니다" 마지막 편에만 END표시가 제목에 쓰여져있고, 다른 편들에는 없냐고 물어보신 분이 계셨어요. 그런 것까지 발견하시다니.. 예리하시네요..^^;사실... 이유는 굉장히 간단한 건데요,다른 제목들은 너무 길었던 겁니다! 하하하...(긁적) ^^;; "배달왔습니다" 편은 유난히 제목이 짧았기 때문에 END같은 걸 쓸생각이 났었던 거죠. 다른 편들(사계절의 목걸이, 은빛 머리카락의 유리카,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제목은 너무 길었기 때문에 칸이 없었어요. 시시한 이유였죠? ^^;그리고 새로 추천해 주신 분... 역시 감사합니다 ^^;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271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3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9 22:56 읽음:181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31) "내가 데리고 나가는 거니, 만일 오늘 밤 안에 하르얀이 오면 신경쓸 거 없다고 일러라." 문을 지키고 있던 두 녀석은 딱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표정을 지었지만 우리를 통과시키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안을 내지못했다. 하긴, 누구라도 자기 상관의 등뒤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녀석과 그일행이 나가는데 상관이 '내가 데리고 나가는 거다' 라고 말하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 결정하기가 힘들 것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여유있게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또……." 하마터면 또 보자고 말할 뻔했지만, 또 보고 싶진 않군. 건물을 나오자마자 안 거지만 우리가 나온 문은 중앙의 문과는 별개로 마치 지붕에서 내려오는 계단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중앙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별로 많지가 않다. 확실히 이쪽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실질적인 볼일이 있는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겉으로 보이는 이 건물의 용도는 시청 부설 시 회관이었다. 어쨌든간 이렇게 나왔는데, 나오고 나서 보니 아까의 그 방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왜냐면……. 1층은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커다란 강당이었던 것이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또 하나 듣긴 했지만 손쉽게 믿을 수 없었던 점을 확인한거라면……. 눈앞에 정말 시장 관저가 솟아 있었다. 별로 큰 건물은 아니다. 시장의 누구들이 지껄이던 대로 커다란 말들을 들여놓을 만한 변변한 마구간조차도 찾아보기 힘든 그런 곳이다. 거기에 늙은 여자 시장이 혼자 산다고 했다. 지나치게 검약한 할머니, 그리고 어떻게 하는 건진 몰라도 시안에서 일어나는 아주 조그만 일까지 구석구석 미리 알고 있는 할머니 시장. 이젠 그 이유도 알만하지 뭐야. 아- 아- '할머니 길드마스터'란, '소녀 점쟁이'는 저리 가라로 이상스럽게 들리는걸. "나는 이만 보내줘도 좋지 않아?" 티무르 녀석이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길래 나는 무릎으로 녀석의오금을 가볍게 걷어차 주었다. "어쿠!" "야, 야- 내가 이 도시를 뜰 때까지 넌 내 동행이야."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을 조용히 지나가고 싶다는 우리의 소망은 완전히 실현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나는 얼마 걷지 않아 곧 깨달았다. 우리 일행이 확실히 눈길을 끌 만한 요소를 지니고 있긴 했다. 일단 밤이긴 해도, 말쑥하게 잘 차려입은 티무르 리안센과 초라한평민 복장의 내가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걸어가고 있다. 내가 녀석의옆구리에 대거를 들이대고 걷기 위해서는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라고 좋아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유리카, 좀 눈에 띄는 차림인가? 게다가 엷은 달빛에도 작은 폭포처럼 빛나는 은발의 미소녀라는 점도 길가는 남자들의 눈을잡아놓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좀 더 황당한 점이라면 두건장한 소년을 내버려두고 큼직한 배낭을 자기가 지고 가고 있다는점도 있다. …… 참고로 그 점은 유리카가 자청한 것이고, 절대 내가 제안한것은 아니다. 배낭에는 체인 메일까지 들어 있어서 결코 소녀들이 메고 다닐 만한 웬만한 무게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유리카는 생긋 웃으면서 그걸 받아 들어서는 자기 어깨에 걸었다. 아마 길거리라 표정관리를 하느라 저렇긴 해도 속으로는 엄청 후회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나머지 한 일행은 아까 전부터 내내 주머니 속에서 뭘 하는지 결코눈에 띄지 않고 있다. 티무르가 짓눌린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르얀이 곧 쫓아올 거다." "응, 나라도 그러겠다." "나라도 그럴 것 같은걸?" 유리카까지 덩달아 대답하는 바람에 티무르가 애써 잡은 심각한 분위기는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그래도 그는 억지로 굳어진 표정을 펴지 않으면서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무슨 대단한 실력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하르얀은 기사단장의 정식 후계자로 지금까지 길러진 녀석이고, 검 실력은 우리또래 가운데서는 최강이었지. 너 같은 촌구석 실력으로 감히 대적할수 있을까?" "뭐, 티무르 너한테 이기는 실력이래봐야 얼마나 대단하겠어? 너,나한테도 지는 실력이었잖아?" 유리카는 참 때맞춰 말을 잘 거든단 말야. "…… 그건 내가 기습을 당했기 때문이다. 내가 계집애한테 질 실력으로 보이나?" "응." 우리는 입을 모아 대답하고는 다시 걸음을 빨리 했다. "뭐, 뭐야- 너희들은!" 티무르가 아무리 떠들어 봤자, 우리가 '그래? 그럼 다시 정식으로실력을 겨루어 보자!' 고 말할 만한 바보는 절대 아니다. 그런 말을 할래도 사람을 잘 골라서 해야지, 임마. 여관으로 곧장 가는 길에 들른 곳이라면 딱 한 군데. 시장에서 밧줄을 산 것 뿐이었다. 우리 괴상한 일행은 서둘러 여관으로 들어가서는 곧장 함께 방으로 올라갔다. 여기까지 오면서 느낀 건데, 그러고 보면 유리카의 미모는 어디에가나 눈길을 끌고 있다. 누군가 우리를 추적하고 있다면 그것 참 뒤쫓기 쉬울 것 같은걸. 방으로 올라가자마자 밧줄로 일단 티무르의 손목을 뒤로 돌려 묶었다. 티무르는 포기하기라도 했는지 별로 반항은 하지 않았다. 별로 짐이랄 것도 없지만 일단 깨끗이 챙겼다. 유리카에게 메고 온배낭을 내려놓게 해서 짐들을 전부 배낭 하나에 들어가게끔 갈무리하고는 체인 메일은 꺼내 입었다. 마치 맞춘 것처럼 착 달라붙는 게 확실히 비싼 값은 하는 물건이었다. 아버지의 '아룬드나얀'과 미르보가 준 푸른 구슬 보석은 갑옷 안쪽으로 넣고 그 위에 다시 겉옷을 입었다. 이제부터 이베카 시를 나갈때까지 어떤 위험이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준비를 해야했다. 도적 길드의 일원들이 길드장의 손자를 찾으려고 어디쯤 매복하고 있을지, 이 근처 지리도 사정도 잘 모르는 우리로서는 도저히알 길이 없다. 긴장되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팽팽한 긴장감. 정말로 싸움을 앞두고 있다는 실감이 나는군. "으음……." 입고 보니 꽤나 어깨가 묵직해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유리, 이리 와 봐." "응?" 생각 없이 내 앞으로 다가오는 유리카. 나는 모르는 척, 그녀의 어깨를 세게 눌렀다. "아야……." 생각 대로였다. "괜히 고집 부리더니, 어깨에 상처 안 났어?" "아,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리카의 이마는 가볍게 찡그려져 있다. 그걸보니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절실히 든다. 고집부리게 두지 말고 진작에 내가 뺏어 메는 건데.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유리카가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천 배낭을잽싸게 잡아챘다. "뭐야?" "이리 줘." "시, 싫어." "이리 주라니까." 결국 나는 고집을 부려 유리카의 짐도 내 배낭 안에 모조리 꾸려넣었다. 어깨에 혹시 상처가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쩌면 싸워야할 지도 모르는데 더 이상 부담을 주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나 때문에 이런 일을 자청해서 겪고 있는 그녀니까. 그러고 보니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유리 너, 왜 나를 도우러 온 거니?" "아…… 그건……." 유리카는 우물쭈물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입술을 실룩였지만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사실, 우리에겐 오래 지체할 만한 시간은 없었다.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저쪽에서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더더욱 귀찮게 굴 것이 틀림없으니까. 그러나 난감한 듯이 굴리고 있는 유리카의 초록색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 질문을 한 내가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든 도와 준 것 아냐. 왜 도와놓고도 도리어 추궁을 당해야 한다는 거야?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은 빈손의 유리카는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도 날려갈 것처럼 가벼워 보인다. 내가 그 손에 도움을 받았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가자, 유리." "아…… 으응?" "그 이야긴 나중에 하자고." 유리카가 뭐라고 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나는 티무르의 묶인 손에길게 연결해놓은 밧줄 끝을 잡고는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았다. "파비안, 잠깐." 그제야 말하는 유리카의 제지하는 목소리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문으로 나가면 안 돼." 나는 잠시 생각한 다음에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 창도 이미 지키고 있을 거야." "그럼 다른 방으로 가자." 복도를 따라 제일 끝방으로 갔는데 손님이 들지 않은 방이라 문이잠겨 있었다. 내가 한 두 번 문을 흔들어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방으로 나가는 것은 무리겠어." "이리 나와 봐." 유리카는 무슨 생각인지 나더러 손을 떼게 하더니 자기가 문고리를잡았다. 뭐, 자기가 잡는다고 열릴 리가 있어? "열렸어. 들어가자." "뭐?" 문이 안쪽으로 열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방금 전에 내가 문을 잘못만졌나 의심하기 시작했다. 슬쩍 보니 티무르 녀석이 유리카를 이채롭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녀석아, 쳐다보긴 뭘 쳐다봐. 곧 헤어질 거란 말이다. 창문으로 다가갔다. "여기는 괜찮겠다." 티무르 녀석이 문제였다. 2층에서 그냥 떨어뜨렸다가는 뼈 하나 쯤은 그냥 부러질텐데,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을 정도로 심각한 악당은 못된다. 게다가 결정적으로는…… 다리라도 삐거나 하면끌고 가기가 골치 아프다. 업고 갈 수도 없고 말이다. 티무르는 별 표정 없는 얼굴로 나와 유리카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머릿속을 뒤집어엎은 끝에 간신히 타개책을 찾아냈다. "이것 봐, 티무르." "…… 말해." "너와 하르얀은 어떤 관계냐? 바꿀 수 없도록 주종의 계약이라도맺은 관계냐?" +=+=+=+=+=+=+=+=+=+=+=+=+=+=+=+=+=+=+=+=+=+=+=+=+=+=+=+=+=+=+=황당한 일이 있었어요. 엊그제 글을 올리는데, 올리고 다시 살펴보니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져 있더라고요. 글쎄.... 글이 반쯤 잘려나가고 나머지만 올라간 거예요! 그것도... 뒷부분이 아니고 앞부분, 즉 제목 있는 머리부분이 잘렸더란 말입니다..;;(물론, 지우고 다시 올렸지요)그래서 깨달은 점. 나우 안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많은 던젼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잘 찾아보면 더 많은 뭔가가 있을 거야..으음..)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272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3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09 22:56 읽음:182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32) 티무르는 발끈했다. "주종이라니, 무슨 소리야!" "그럼 피로 맺은 동지라도 되니?" "무슨 유치한 소리야?" 예상대로의 반응이길래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럼 너와 나는 무슨 관계냐? 무슨 부모를 죽인 원수이기라도 하나?" 티무르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이 코방귀를 뀌었다. "흥, 난 네 부모 따위엔 관심조차 없다구." 화가 나는 것을 일단 꾹 눌러 참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네 부모 따위엔 전혀 관심 없다. 네 할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솔직히 여동생이 있대도 관심이 없다구. 하여간 관심이 없어. 그럼 우리가 도대체 왜 만나게 된 거냐?" "무슨 소릴 하려는 거야?" "너하고도, 나하고도 별 관계없는 하르얀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런고생을 하고 있는 거, 틀리냐?" 티무르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유리카가 입을 열었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 네 다리를 걱정할 만큼은 말이지." …… 놀랄 만큼 정확한 지적이어서 나는 박수라도 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대신 말했다. "티무르, 난 내 다리도 몇 번은 부러뜨려 본 처지야. 남의 다리 쯤이야, 걱정도 하지 않는다." 티무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을 보니 영 뭐 씹은 것같은 기분인가보다. 거짓말 하는 게 아니다. 내가 스노우보드 연습하다가 발목 삐고, 뼈 접질린 것이 몇 번이냐. 솔직히…… 부러뜨린일은 없지만. "…… 하고 싶은 말을 해라, 파비안." 흐음, 내 기억으로는 고귀한 구원 기사단 부단장의 아드님이 내 이름을 직접 불러준 것은 처음 같은걸.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말했다. "어쨌든 난 네 다리를 별로 부러뜨리고 싶진 않으니, 이베카 시를나갈 때까지만 좀 협조해라." "싫다면?" 등뒤에서 대답이 들렸다. "싫을 이유가 없지 않아?" 돌아보니 유리카가 또렷한 눈을 한 번 깜박거리지도 않은 채 티무르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이곳 시장직은 거의 세습제나 다름없지. 아마 외할머니께서돌아가시면 이모님께서 맡으시게 될 거야. 그 다음은 아마 서류상 이모님의 양딸로 되어 있는 내 여동생일 거고. 이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이베카야. 일부러 그렇게 지은 거지." "그러니까 여자 시장만?" "그래." "무슨 이유냐?" 티무르가 나와 유리카를 데려간 곳은 시 입구 쪽이 아니라 이곳의남쪽에서부터 시작되는 커다란 숲지 쪽이었다. 켈라드리안 숲이다. 지도에 그렇게 나와 있었다. 이 숲을 따라서 야트막한 성벽만 넘으면이베카 시를 빠져나갈 수 있다고 했다. 아마 성문 쪽에는 지금쯤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우리를 잡으려고 집결해 있을 터였다. "201년 전의 어느 한심한 '이베카' 때문이지 뭐야." 티무르 대신 앞서 걷고 있던 유리카가 대답하는 바람에 티무르와나는 동시에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한심한 '이베카'?" 티무르의 입에서 먼저 반응이 나왔다. 티무르는 그렇게 우리에게 우호적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적대적일 것도 없는 모호한 태도로 내내 일관했다. 좀 전에 여관창문 앞에서도 그는 속시원하게 우리를 돕겠다, 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다리가 부러지긴 싫어서…' 하는 정도의 애매한 대답을 했을뿐이다. 게다가 도적 길드원들과 마주치는 것 길드를 빠져나올 때처럼 역시자기가 말 몇 마디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텐데도, 일부러그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샛길을 알려주는 방법을 택했다. 참, 매번중간 정도의 대책을 잘도 찾아낸다. 솔직히 까놓고 생각해보면 티무르는 여관 창문 앞에서 우리를 속이고 곧장 도망쳐 버릴 수도 있었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두 번째로 뛰어내리게 하긴 했지만, 손도 묶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쯤 때려눕히고도망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러나 그는 그렇게하지 않았다. 확실히 수상한 기분이 든다. …… 게다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비아냥대는 듯한 말투는 변화 없이그대로였다. 지금 티무르의 말투는 완전히 '네가 뭘 안다고 아는 척이냐' 의 뜻이 고스란히 담긴 그대로였다유리카가 티무르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멀쩡한 시 이름까지 '이베카'로 바뀌어 버린 거잖아." 흠. 200년, 아니 201년 전 이야기라니 내가 알리는 없었지만, 일단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럼 그 전에는 무슨 시였는데?" "힘보른 시." "뭐?" 흠…… 내 지도, 이거 언제 만들어진 거냐. 번화가를 벗어나 숲지에 가까워질수록 주위가 캄캄해져서 서로의얼굴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램프를 켤 수도 있었지만 추적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별로 바람직한 것 같진 않아 그만두었다. 바닥에 점차 돌과 잡풀 같은 것이 밟히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주머니 속에서 주아니가 자꾸 꼬물거리는데,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아 다른 사람들 앞에 나오고 싶어하진 않는 듯해서 그저 내버려두는 수밖엔 없었다. 티무르가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는 거야. 뭐가 한심한 거냐구." "이베카가 한심한 거지." "왜?" "사랑에 빠진 여자만큼 한심한 건 없어." "뭐?" 한참이나 티무르가 캐물은 끝에 우리는 유리카로부터 그 이야기를들을 수 있었다. 유리카의 목소리에는 내키지 않는다는 티가 역력했다. 특히 티무르를 쳐다보는 눈빛은 훨씬 더했다. "이베카는 원래 리안센 가문의 여자는 아니야. 이베카 민스치야,그루터기 엘프족의 일원이었지." "엘프?" "그루터기 엘프는 또 뭐냐?" 유리카는 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설명했다. "그루터기 엘프는, 숲에 사는 세 종류의 엘프 가운데 하나야. 고사해서 죽었거나, 베어져나간 나무 그루터기만 보면 슬프게 운다고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어. 다른 이름으로는 녹색 발자국의 엘프라고도하지…… 너희는 이런 이야긴 처음 듣니, 그런데?"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 되어서 유리카만 쳐다보고 있는 티무르와나를 보고 유리카는 고개를 까딱하더니 그렇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엘프를 못 보게 된 지가 벌써 몇 년이니." 티무르가 물었다.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유리카는 피식 웃었다. "옛 지식들에 좀 관심을 가져봐라. 모르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말라고." 티무르가 발끈해서 뭐라고 또 한 마디 하려는 것을 내가 손으로 제지했다. 네 녀석이 유리카한테 잔소리까지 하는 건 바라지 않는다. 지금은 어쩔 수 없어서 이렇게 도움을 주는 건지 받는 건지 애매한관계라도 맺고 있지만 말야. "그래서, 이베카 민스치야가 어떻게 되었는데?" "사랑에 빠졌겠지, 뭐." 티무르가 시답잖다는 듯이 내뱉은 말이다. 목소리가 부루퉁했다. "그래. 그때는 저쪽 켈라드리안 숲 속에 엘프가 많았어, 아니 많았었대. 그루터기 엘프들도 한 무리를 지어 살았었고. 엘프족들은 인간들의 도시와 왕래도 많았었지. …… 뭐야, 그런 눈으로들 보지 마! 너희들의 유치한 예상대로 인간하고 사랑에 빠진 건 아니라고! ……이베카가 사랑한 것은 하얀 부리 엘프라고 불리는 종족이었지. 그 엘프 남자도 이베카를 사랑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말야, 하여튼 남자는 떠났어." 하얀 부리 엘프라니, 이름이 좀 우습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나중에 물어봐야겠다. "어딜?" "왜?" 동시에 질문이 튀어나왔다. "어디…… 라는 말에는 대답하기가 그렇고, 어쨌든 그는 에제키엘을 따라갔거든. 봉인을 푸는 자, 에제키엘." 이상한 말이다. 에제키엘은 봉인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었다고 알고있는데 봉인을 푸는 자라니. "에제키엘한테 그런 이름도 있었어?" 나를 만나서 한참 잘난척했던 티무르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런 이름'도'라니, 그가 살아있던 시절엔 그 이름으로 가장 많이불렸다구." 참, 이해가 안 가네. 어쨌든 넘어가자. 그 다음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까. "그 엘프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어. 에제키엘의 동료로서 여행했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에제키엘의 손에 봉인되어 버렸거든." "흐음……." "그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동료를 봉인했다라, 참으로 이상한 취미다. 정말이지 무슨 잘못을했기에? 유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잘못도 없었어." "그런데 왜 동료를 봉인하는 거야?" "그 이야기는 일단 넘어가자. 하려는 이야긴 그게 아니니까." 거기까지 말했을 때, 캄캄한 밤하늘에 달이 떠올랐다. 주변이 아주조금은 밝아진 것 같다. 보름이었다면 좀더 좋았겠지만. 우리는 작은 떨기나무들이 드문드문 들어찬 곳을 걷고 있었다. 주위를 휘둘러보니 인기척은 없었다. 아직은 들키지 않은 건가. 티무르는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아." 자신만만하시긴. 내가 아까부터 마음속으로 세우고 있는 계획을 안다면 그렇겐 말 못할 거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계속 이야기해 봐." 티무르도 나만큼이나 이야기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이베카는 기다렸어. 바보 같은 일이지만 그랬어. 엘프 남자가 무슨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도. 평생 기다렸지만 봉인된사람이 돌아올 리 만무하지. 이베카가 그걸 몰랐던 것도 아니야. 봉인을 풀어줄 에제키엘이 이미 죽었다는 것도 벌써부터 알고 있었지. 엘프들은 꽤 오래 살잖아? 그런 그녀가 그 긴 세월을 속절없이 죽자고 기다린 거야. 결국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그녀가 택한 해결책이 뭐였냐면……." 바삭, 바스락. 갑자기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 "엎드려." +=+=+=+=+=+=+=+=+=+=+=+=+=+=+=+=+=+=+=+=+=+=+=+=+=+=+=+=+=+=+=내일은 월요일입니다. 즉... 출근입니다. 오늘은 아침 내내 실컷 자버렸는데도 어깨가 뻐근하고 나른하군요. 내일도 잠이나 잤으면... 힘 날 만한 일을 하려고 궁리하다가, 다음과 같은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추천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오늘도 새로 추천해주신 분이 계세요. 게을러지려다가도 힘이 나도록 해 주시는 분들입니다)메일 보내 주신 분들도 감사합니다-! 쪽지 보내 주신 분들도 감사합니다-! 물론,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아.. 힘 난다)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353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3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0 23:35 읽음:177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33) 조그맣게 티무르가 말하고는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도 떨기나무 사이로 배를 깔고 엎드렸다. 유리카는? "유리카?" "조용히 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다. 숨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렸다. 이윽고 마른풀을 밟는 발소리가 들렸다. 금방 가까워졌다. 뭔가 찾기라도 하는 듯, 주의 깊게 딛는 걸음이다. 유리카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 숨을 죽이고 조용히 귀를 기울여본 결과, 한 명인 것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숨어 있을 필요가 없는데. 나는 힐트를 고쳐 잡고 녀석의 옆구리를 찔렀다. "티무르, 네가 말해." "뭐, 뭘?" 티무르는 당황하는 모양이다. 힐트 끝으로 녀석의 옆구리를 한 차례 다시 찔렀다. "네 동료일 거 아냐. 나가서 이야기하라구. 내가 알아서 할 테니가라고 하면 되잖아." "……." 왜 망설이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망설일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수상하다. 나는 갑자기 녀석의 옆구리를 껴안듯이 휘어잡고는 내 앞으로 힘껏당겼다. 동시에 대거를 꺼내 옆구리에 들이댔다. "왜, 왜 이래……." 티무르의 목소리가 높아지려다 다시 잦아들었다. 동시에 들려오던걸음 소리도 멈췄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티무르도 덩달아 일어서는 셈이 됐지만). "무슨 볼일이냐!" 내가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상대방도 놀란 모양이었지만 사실을말할 것 같으면 내가 몇 배 더 놀랐다(내 손에 잡힌 티무르는 말할것도 없다. 유리카는 어땠을까). 우리 일행 주변을 반원형으로 둘러싸다시피 한 위치에서 순식간에열 명도 넘는 사내들이 우르르 일어선 것이다. 저 사람들이 어느 새 우리 주위에 가까이 와 있었지? 전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아, 주아니가 자꾸 움직인 것이 저들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나?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담한 녀석이구나." 어두컴컴한 그림자들이 빙 둘러서 있으니 누가 말하는지조차 확실치가 않았다. 뭐, 사실 누가 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지. 나는 숨을 가다듬은 뒤에 외쳤다. "긴말은 필요없다. 나는 갈 것이고, 이 녀석은 안전한 곳까지 간뒤에야 놓아주겠어." 유리카가 엎드렸던 곳에서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달빛에 머리카락이 파르스름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당당하고도 낭랑했다. "티무르 리안센, 네가 이야기 좀 해 줘. 우리는 가던 길을 가겠으니 상관하지 말아주십사 하고 말야." "……." "말이 안 들려?" 내가 양팔로 움켜잡다시피 하고 있는 녀석의 몸이 좀 떨리는 것 같다. 아마도 이걸 믿고서 여기까지 고분고분 따라온 모양이지만, 우리도 너를 믿고서 여기까지 널 고분고분 따라온 거라고. 누구나 믿는구석은 있어야 하는 법이란 말야. 그리고 유리카의 목소리. 티무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녀의 말투는 상당히 느긋하게까지 들렸다. "빨리빨리 보내. 그래야 이베카 민스치야 이야기도 마저 해주지." 그러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는 유리카의 목소리에서 뚜렷한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만에 티무르가 입을 떼었다. "…… 비켜줘라." 우리 셋은 반원형으로 둘러싼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있는 일단의 사내들을 뒤로 남기고 앞으로 걸었다. 가능한 한 천천히걸었다. 뒤에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행동에 대비하기 위해서 귀도민감하게 곤두세웠다. 등뒤에서 느껴지는 시선 때문에 뒤통수가 잔뜩 간지러웠다. 아마도엄청 노려보고 있는 모양이다. 그들에게서 멀어지는 동안, 우리는 내내 말이 없었다. 주머니 속의주아니도 조용했다. 주변은 미칠 것처럼 적막했다. 발에 밟히는 풀소리뿐이었다. 당장 뛰어서 멀리 달아나고 싶은 심정을 억지로 누르면서 천천히걷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숲이 시작되고 있었다. 숲 속은 밤이라 검디검었다. 울창한 상록 나뭇잎들 때문에 별빛마저 거의 가려졌다. 발부리에뭐가 채여도 모를 판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더더욱 불을 켤 수 있는상황이 못 되었다. 우리는 그저 넘어지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걷는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아까완 달리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주변의 공기가 마치 무게가 있는 것처럼 호흡기를 눌러 온다. 누군가 손으로 틀어쥐고 있는 것 같다. 힘들어. 티무르를 너무 긴장해서 꽉 잡고 있은 나머지 등과 팔뚝에 땀이 흥건했다. 지금 티무르는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일까. 아니, 나는 무슨생각을 하는 것이 좋을까. 내가 좀더 잔인한 사람이라면 너를 죽이는 상상을 해볼 텐데 말야. 별로 잔인한 사람이 아니라, 일단 나는 내가 저녁을 먹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거든. 그러나 이 생각은 긴장을 푸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리카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지만 그들이 뒤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티무르, 너 우리를 어쩔 셈이었니?" 유리카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발끝에 마른 풀잎들이 바스락대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 그러더니 티무르가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있던 곳으로 돌려보낼 셈이었지." "왜?"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아까 우리가 했던 말에는 전혀 수긍이 가지 않는다는 거야?" "그런… 것은 아니야." "그러면?" 다시 침묵. 한참만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은 나를 이해 못해." 티무르는 나와 유리카의 중간에 서서 걷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허리에 감았던 팔을 풀어준 대신 바로 등뒤에 대거를 들이대고 걸었다. 팔목도 다시 밧줄로 묶어 두었다. 이젠 조금도 방심할 수 없는 녀석이니까. 나도 모르게 심사가 꼬여서 말이 막 나왔다. "그렇겠지. 나 같은 촌구석 무지랭이가 수도 기사단 부단장님의 아드님이 무슨 생각하는지 어찌 속을 짐작하겠어. 가당키나 하냐구." "그런 것보다는…… 수도의 복잡한 인간관계나, 권력 문제란 한 두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설명할 생각도 없으면서 뭘 그래?" 한참을 걸어온 것 같다. 그들이 아직도 쫓아오고 있을까? 혹시 미리 앞서 가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나지막하게 협박하듯 말했다. "만약에, 또 뭔가 나타나서 나하고 유리카를 위험하게 한다면, 인질이고 뭐고 없이 그냥 이대로 찔러버릴 테니 알아서 해. 나는 네 말대로 촌녀석이라서 앞 뒤 사정 같은 거 잴 줄 몰라. 기분 나쁘면 내마음대로 할거야." "……." 티무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어깨가 긴장해서 올라가는 것을 어두운 가운데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다시 한참을 숲 속으로 들어갔다. 들어갈수록 나무가 울창하게 빽빽하다. 눈도 별로 없었다. "너, 나이 몇 살이냐?" "그건 왜 물어?" "그 수도의 복잡한 관계인지 뭔지에 대해 고찰할 만한 나이가 과연몇 살인가 궁금해서." "열 여덟." 딱 자르듯이 대답하고는 말이 없었다. 앞서가던 유리카가 픽 웃는소리가 들렸다. "파비안, 너랑 동갑이네?" 으으음… 일단 그 점은 넘어가고 녀석이 불리할 만한 이야기를 해야지. "열 여덟이란, 너보다 어린 녀석의 심부름이나 하고 다닐 만한 나이인가?" "말 함부로 말아. 너는 아무 것도 몰라." 기분나쁘네. 일단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숲이 조금씩 트이는 것 같다. 벌써 끝나는 건가? 꽤 큰 숲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강물 소리다." 유리카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니 확실히 물 흐르는 소리 같은 것이들린다. 방향을 바꾸어 서둘러 걸었다. 물소리를 들으니 목이 마른것도 같다. 하긴, 저녁도 제대로 못 먹었으니까. 곧 우리는 멈춰 섰다. 길게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들을 벗어나 하얗게 다듬어진 바위 둔덕으로 나아가자 눈앞에 폭이 10큐빗 정도는 되어 보이는 강이 빛나고 있었다. 튀어오르는 물방울들이 마치 은빛 등을 가진 물고기들 같다. 지금이 여름이라면 더 멋질 것 같은데. 차가운 바람이 주변에 가득했다. 지금까지 오던 숲도 상당한 규모였는데 저 강 너머 둔덕에 이어지고 있는 숲은 훨씬 거대해 보인다. 강 위로 약간 트인 하늘에서 가느다란 달이 뜬 것이 보인다. 조금이라도 트여서 그런가, 오랜만에 주변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였다. 여기가 어디쯤인 거지? 지도를 꺼내봐야겠다. 내가 배낭을 내려놓고 뒤지려는 참인데 유리카가 말했다. +=+=+=+=+=+=+=+=+=+=+=+=+=+=+=+=+=+=+=+=+=+=+=+=+=+=+=+=+=+=+=좀 지난 얘기지만, 어버이날에 저는 카네이션을 안 샀답니다. 저희 부모님께선 지금껏 단 한 번도 카네이션을 달고 밖에 나가신일이 없거든요(왠지 늙어보이는 것 같아서 싫으시다나..). 카네이션은 늘 유리컵에 잠시 꽂혀 있다가 사라지는, 꽃다발도 아니고 하니오히려 썰렁하고 이상해 보이는 그날의 장식품이었죠. 그런데 요즘, 카네이션 값이 점점 무식하게 비싸지고 있잖아요? (올해는 안 샀으니 얼만지 모르겠다... 얼마였어요?)디자인 하는 언니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종이 카네이션을 갖고 왔고요, 저는 녹색 종이에 싸진 소국 꽃다발을 사 드렸습니다. 본래는 장미꽃을 살까 했는데... 그 녹색과 흰색의 꽃다발을 보고 너무 예뻐서그냥 사 버리고 말았죠.. ^^;지금도 저기 탁자 위에 꽂혀 있는데 정말 예뻐요. 개인적으로 카네이션이 그렇게 예뻐보이지가 않거든요. 어버이날과 스승의날 덕택에카네이션은 왠지 늙어보이는 느낌이 들고... 꽃이 볼수록 예뻐서 해 본 잡담이었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354번제 목:◁세월의돌▷ 2-2.엘프의 이름을... (3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0 23:36 읽음:180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2.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34) "여기부터가 켈라드리안이다." "뭐? 그럼 지금까진?" "그건 그냥 이베카 시에 딸린 조그마한 숲이고. 이름이나 있나 모르겠다. 진짜 켈라드리안은 그것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아." 헤에…… 지금까지도 상당한 숲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저 강은 건너고 봐야 할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보니 조그마한 나무 보트가 하나 기슭에 끌어올려져 있긴 하다. 그런데 나는 한번도 배를 저어 본 일은 없단 말씀야. 녹색 호수에서 배를 띄우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어. 일단 물어 보았다. "그럼 저건 무슨 강이야?" "셔벗." 흐음…… 유리카는 모르는 게 없군. 우리는 일단 강변으로 내려갔다. 번갈아 티무르의 손목을 묶은 끈을 맡긴 다음 건틀렛을 잠깐 벗고강물을 손으로 떠서 마셨다. 등줄기까지 시원해지는 것 같다. 어느새 주변은 물소리로 가득해져 있었다. 지금까지 너무 조용했기 때문인지 오히려 가득한 소리가 낯설다. "너도 마시겠어?" 티무르는 말없이 강물에 직접 입을 대고 마셨다. 조금은 추운 듯한밤공기인데 얼굴과 목께의 옷이 다 젖었다. 돌아갈 때 조금 춥겠군. 그러고 보니 나도 조금 추운 것 같네. 유리카는? 옆을 돌아보니 그녀도 조금 추운지 어깨를 잠시 감싸안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배낭을 잠시 내려놓고 뒤졌다. "이거 덮어." "응?" 새로 산 가죽 망토, 개시는 다른 사람이 하게 되는군. 유리카가 얼결에 그걸 받아든 것을 보더니 티무르가 비꼬는 듯한말투로 한 마디 한다. "너희 둘은 도대체 무슨 사이냐?" 꽤 밝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밤이라, 유리카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티무르의 손을 묶은 끈을 힘껏 앞으로 잡아챘다. "어억!" "네가 지금 우리한테 말장난할 위치라고는 생각 안 해." 나는 주고받는 계산에 있어서는 매우 철저하다. 주위를 두리번거려보니 상당히 쓸만한 나무가 한 그루 보였다. 굵직한 가지가 강 쪽으로 드리워져 있다. 나는 그 쪽으로 걷도록 녀석을 떠밀었다. "이제 계산을 끝낼 만한 시기지?" 유리카도 금방 내 말을 알아듣고는 망토를 어깨에 두르더니 내 뒤를 따라왔다. 일단 배낭 안에서 남은 밧줄을 꺼내서 쓸만한 크기로 잘랐다. "뭘 하려는 거야?" "잠자코 기다리고 있어." 밧줄을 잘라서 어깨에 걸고는 나무 둥치에 달라붙었다. 나무 타는것쯤이야 수백 번도 더 해보았다. 금세 둥치를 타고 가지 위로 올라섰다. 아래로 티무르와 끈을 잡고 선 유리카가 내려다보였다. 밧줄을 가지에 묶었다. 밧줄을 팔았던 입장으로서 나는 매듭이나 올가미 같은 것을 만드는데에는 상당히 정통하다(하물며 그물까지 짰던 내가 아닌가!). 이런재주는 어디 가서나 쓸모가 있다고 볼 수 있지. 튼튼하게 가지에 묶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밧줄 한쪽 끝을 올가미처럼 둥글게 매듭을 짓고, 또 한쪽은 그대로 바닥에 늘어뜨렸다. 준비가 끝나자 가지에서 뛰어내렸다. 티무르는 눈치를 챈 모양이다.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뭐야, 나를 어쩌려고……."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눈치를 미리 채 봤자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단 말이다. "유리, 밧줄 꽉 잡고 있어." "야, 이 깡패 같은 놈들아! 이거 내려주지 못해!" "너를 내려주려고 내가 이 수고를 했겠냐? 난 그렇게 안 한가해. 아까 내가 애쓰는 거 다 보고도 그런 소리 하면 죄 받는다- 죄 받아." "걱정 마, 네 동료들이 적어도 내일 아침에는 풀어주지 않겠어?" 유리카조차도 티무르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상관도 하지 않은 채빙긋 웃으며 말했다. "유리, 아무래도 저 녀석 입도 막는 게 좋을 것 같지 않아?" "너무 시끄럽지?" 눈짓을 주고받고는 내가 다가가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녀석에게말을 걸었다. 한쪽 손은 늘어뜨려 놓은 밧줄을 쥐고 있다. 이걸 당기면 그대로 가지 위로 올라붙게 되는 것이다. 물론, 적당한 위치를 조절해서 당겨야지. 티무르는 손을 묶었던 밧줄로 지금 팔과 몸통이 꽁꽁 싸매진 채 꼼짝도 못 하고 우리를 노려보고만 있다. 저대로 놔두면 죽진 않겠지만, 다리에 쥐가 좀 나겠군. 그래서 친절하게 다리 운동 하라고 다리는 풀어 뒀지 않아. "야, 티무르. 네가 자꾸 소리를 지르면 입도 막고 갈까 하는데, 네생각은 어때?" "이……." 티무르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입까지 막아버리면 누가언제 와서 구해주게 될지 어떻게 기약을 하겠어. 그냥 우리가 사라질때까지 조용히 있다가 나중에라도 소리를 질러야 구원받을 가능성이조금이라도 커지지. "알겠냐?" "……." 티무르는 벌써부터 입 다물기로 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티무르, 또 하나 네가 잊은 게 있는데 말야." "…… ?" 티무르는 정말 말을 잘 들었다.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조금 든다. "스물 두 대, 아니 스물 네 대 말야. 잊어버렸니?" 순식간에 티무르의 표정이 바뀌었다. 녀석의 기분에 대해서 나는거의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죽자고 뼈빠지게 일해서 빚진 100존드 갚으려는 참인데, 갑자기 1000존드 빚이 있다는 통보를 듣는 것같은 기분 말이다. "스물 네 대? 그게 뭐야?" 영문을 모르는 유리카가 옆에서 거든다. 나는 조금 음흉하게 웃었다. "아, 티무르가 나한테 진 빚이 있거든. 그래서 스물 네 대를 나한테 맞아야 되는 입장이야. 야, 티무르, 어디를 맞을래?" "그래? 스물 네 대나 때리려면 꽤나 시간 걸리겠다. 빨리 하고 가자." 이럴 때면 유리카와 나는 정말 하늘이 정해준 팀이라는 생각이 든단 말야. "빨리 때리려면 따귀가 최곤데. 티무르, 괜찮겠냐?" 티무르는 말없이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은 부기가 좀 가라앉았지만 부어오른 자국이 선명한 내 양 뺨을 보고 있는 걸 거다. 맞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좀 알고 싶을 테니까. 나는 오른 주먹을 왼손바닥에 비비며 외쳤다. "자자, 빨리 골라! 시간 없으니까." "……." 이제 협상 조건을 제시할 때가 된 것 같군. 내가 상대방을 무지막지하게 스물 몇 대나 두들겨 팰 만큼 악독한성격이 못 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라구. 솔직히 네 얼굴을 내 손으로 그렇게 때리면 어느 한 구석 남아날 것 같지가 않구나. 그러면또 네가 얼마나 나를 평생을 두고 원망하겠냐. 그런 입장은 되고 싶지가 않다. "야, 티무르. 내가 시간도 없고, 또 스물 네 대나 때리려면 내 손도 아플 것 같고 하니까 한 가지 타협안을 제시하겠어. 들어볼래?" "말해 봐." 목소리도 조그맣다. 오히려 내 목소리가 더 클 지경이었다. "딱 한 대. 한 대만 맞고 끝내자는 거야. 대신 이걸로 깨끗하게 서로의 빚은 없었던 걸로 하자. 협상은 타결되었다. "자, 각오해! 하나, 둘, 셋!" 퍼억! "으윽……." 좀 미안하게 됐다. 나는 밧줄을 힘껏 양손으로 잡아당겼다. 녀석, 좀 무겁군 그래. "그럼, 다음에 또…… 보지는 말자!" "조만 간에 빨리 누가 와서 풀어주기를 빌겠어!" 나와 유리카는 친구한테 인사하듯 손을 흔들면서 강변으로 내려갔다. 사실 이런 행동은 하나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왜냐면 인사를들을 상대방이 현재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상태였으니까. 내가 힘을 모아서 배에 주먹을 한 대 먹인 결과, 티무르 녀석은 지금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한 일은 아니지만,어쨌든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 오히려 잘 된 걸지도 몰라.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보지도 못할 테고, 조만간에 소란을 피우지도 못할 테고. 게다가, 저러고 있으면 밤새 매달려 있느라 지루하지도 않을 테고. 깨고 보면 시간이 갔더라, 이거 아니겠어? 봐둔 나룻배를 강가로 끌어냈다. 크지 않은 나무 보트라, 나 혼자의 힘으로도 끌어내기가 그다지 어렵진 않았다. 줄에 매어져 있지도않고 오랫동안 그냥 내버려둔 배라, 혹시 어디가 샐 지도 모른단 생각에 일단 가까운 물위에 띄워 보았는데 별 문제는 없는 듯했다. 배위에 쌓인 나뭇잎들을 걷어낸 다음, 수건을 꺼내 물에 적셔서 흙먼지를 좀 닦아냈다. "이리 와, 유리." 유리카를 배 위에 먼저 앉혔다. 배낭도 올려놓고는 강 쪽으로 조금씩 밀었다. 다행히 물의 흐름이 그다지 세지는 않아서 배 옆에 걸쳐져 있던 장대만으로도 충분히 헤치고 갈 수 있을 듯 싶었다. "하압!" 몇 걸음 밀다가 훌쩍 배 위에 올라탔다. 둥실, 물위에 뜬 배가 가볍게 좌우로 흔들린다. 불안한 마음에 숨을 죽이고 꼼짝도 하지 않았더니 먼저 앉아 있던 유리카가 까르르 웃었다. "물결 때문에 그런 거야." 달빛에 어렴풋하게 보이는 건너 기슭의 검은 윤곽을 따라 장대를저었다. 별로 깊지는 않은 듯 4큐빗 반정도 되는 장대가 바닥까지 닿았다. 배가 강물을 가르고 지나감에 따라 하얀 물등들이 불쑥불쑥 솟아났다. 은빛의 긴 머리채 같은 강물. 주변은 온통 검은 색과 은빛, 그리고 희미하게 솟아난 검푸른 숲으로 차 있었다. 신기하다. 물 한 가운데 이렇게 옷 적시지 않고 떠 있어 보는 것은처음이었다. 장대를 젓는 데 따라 배는 뒤집히지도 않고 둥실둥실 잘도 흘러갔다. 이걸 아까 올라탈 적에 내심 겁이 전혀 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강 한가운데까지 오도록 겁먹을 만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슬그머니 재미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괜…… 찮네?" 그 말이 화근이었다. 유리카는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갑자기 생긋 웃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으악, 앉아, 유리카!" 배가 갑자기 커다랗게 기우뚱거리는 바람에 기겁을 한 내가 뱃전을붙잡고 소리를 지르자 유리카의 웃음소리가 음악처럼 강가로 퍼져나갔다. 유리카는 아마도 배타는 것에 꽤나 익숙한 모양이다. 아니면겨울에 강물로 빠지는 것이 무섭지 않을 정도로 수영을 잘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쪽으로 갈까?" …… 그 모든 것을 모조리 극복하고도 남을 정도로 심각하게 장난꾸러기거나. "오지마, 오지마!" "아하하……." 배가 기슭에 닿기가 무섭게 나는 유리카가 내리는 것도 기다리지않고 후닥닥 강둑으로 뛰어내렸다. 그 바람에 배의 무게가 유리카 쪽으로 휘청 기울어서 이번에는 도리어 유리카가 비명을 질렀다. "파비안!" "내 손잡아!" "응!……." 윽…… 덕택에 나는 급히 뛰어내린 보람도 없이 결국 부츠를 물에완전히 적시고 말았다. 앞으로 유리카와 뭔가 위험한(?) 일을 할 때에는 좀 주의 깊게 행동해야 되겠다. 아무래도 골탕을 먹는 것은 항상 내 쪽인 것 같으니 말야. +=+=+=+=+=+=+=+=+=+=+=+=+=+=+=+=+=+=+=+=+=+=+=+=+=+=+=+=+=+=+=2장 2편.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끝입니다. 제목이 엄연히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일진대, 그 엘프 이야기에 대한 설명이 다 나오지도 않고 이번 장이 끝나버리다니, 황당하시죠? (긁적..)곧 나오니까 너무 미워하진 마시고요...;그런데 다시 한 번, 제 말투가 어디 이상한가요? 저는 그저 평범하게 말하는 것 같은데...;세 번이나 추천하셨다는 분,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특히 평소에 추천을 잘 안 하신다는 분이 추천해 주시면 고맙기도하고, 왜인지... 좀 미안한 생각이 든답니다. 과연 왤까요?)오늘 잡담이 길다..;『게시판-SF & FANTASY (go SF)』 32426번제 목:◁세월의돌▷ 2장 3편 시작합니다. 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1 23:59 읽음:1430 관련자료 없음----------------------------------------------------------------------------- 네, 2-3편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께서 쪽지로 알려주지 않으셨으면 몰랐을, 오늘로 1달째 연재입니다. ^^*(저도 그분 축하쪽지 보고서 앞을 뒤져봤습니다. 정말 4월 11일에 시작했더군요 ^^; 알려주신 분, 감사합니다)2장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3편으로 끝나겠죠? (뭘 근거로 장담하는 걸까..;)켈라드리안, 이 숲에 관련된 이야기는 참 하고 싶었던 이야깁니다. 아마도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던 '숲 이야기' 쪼가리들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부스스 쏟아져나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어쨌든매우 즐거운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작가한테만? 으음, 그러면안되는데...;). 조회수에 나타난 천 몇 명 중의 한명일 지라도, 즐겁게 읽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으셨다는 한 독자분의 쪽지가 참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래요-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아무리 반내 인기 작가(?)였다지만, 기껏해야 십여 명 안팎의 독자가 있었을 뿐이었으니까요. 세상에 1000명이라니! 놀라고 또 놀랄 일 아니겠습니까? ^^;글을 끝맺을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축복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요즘와서 들어요. 모든 끝나버리는 이야기들이 싫어서 '네버 엔딩 스토리'도 나왔다지만, 그 끝이라는 것이 진짜 끝나버리는 것과는 다르잖아요? 언제든지 읽는 사람의 마음 속에선 끝나버린 이야기도 영원히 진행되니까요. 어려서 읽은 동화들의 후속편을 써보셨나요? 그것 참 재미있는작업이었어요. 일단, 인물 만들 필요 없고...우웅...하여간 좋은점이 많았습니다. 버넷 아주머니의 '소공녀' 후속편을 혼자서 써봤던 생각이 납니다. 그거 꽤나 신나는 일이었어요. 비록 다 쓰진못했지만...(그러고 보니 벌써 중학교 때 이야기다;)지금 생각해보면 소공녀의 세라는 원조 공주병이었지요? ^^;...... ... (으음...분명 처음엔 그저 2-3편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던거였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가 버린 걸까;;)어, 어쨌든, "2-3편.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도 재미있게읽어주세요- ^^(마구 얼버무리며 끝내고 있다..)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427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2 00:00 읽음:179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1) 인간들에게 황금과 왕홀과 영예의 관이 있다면우리들에겐 보석중의 보석, 숲 중의 숲세월 속에서 늙지 않는 켈라드리안이 있다. 영원한 어머니, 영원한 처녀여. - 그루터기 엘프의 노래 숲자락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 나뭇잎과 낙엽이 부딪쳐 바스락대는 소리, 잎사귀에 맺힌 물방울들이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 오랜 세월 잠든 흙바닥을 힘있게 차고 지나가는 소리들. 위를 쳐다보면 서로가 서로를 가리고 가득하게 하늘을 메운 굵은 가지들과 각양각색의 잎의 그림자, 그 사이를 곧게 뚫고 들어오며 곧 부서지는 짧은 섬광들, 숨막힐 듯 향기로운 녹색과 나무진의 냄새, 새벽으로 촉촉이 젖은 잃어버린 숲. "유리카, 그만 네 목에 걸린 목걸이, 돌려주는 게 어때?" "이거?" 새벽이 올 때까지 우리는 걸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숲이다. 시험삼아 숲의 넓이가 얼마나되나 싶어 가로지르는 시간을 재어 보려 했는데, 벌써 불가능해져버렸다. 약간씩 아침이 밝아오는 느낌으로 보아 꽤 많이 걸었다는생각을 할 뿐, 시간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지독하게 피곤했다. 오면서 본 것이라면, 가끔 큼직한 밤송이처럼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다가 후닥닥 달아나는 조그만 고슴도치들이나, 나무 가지들사이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가 후드득 날아오르는 작은 새들 뿐. 유리카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돌아봤다. 아무리 봐도 그녀는 나만큼 지치진 않은 것 같단 말야. 몸이 가벼워서 그런가. 그녀는 목에 걸린 목걸이 추를 손으로 들어 보였다. 녹색의 숲속에서도 가장 빛나는 잎새가 그 위에서 반짝였다. "이건, 너 구해준 값인 줄 알았는데?" "야, 그건 안돼."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사실 아까부터 목걸이를 돌려달라고 하겠다는 생각은 계속 하고있었는데, 왜 그런지 그 말이 잘 꺼내지지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 아니, 다시 생각하자면 유리카의 눈 색깔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 목걸이가 유리카의 가슴 위에서 매우 어울려 보인 것도 그 원인인 것 같았다. 유리카는 계속 장난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건 내가 가질래. 너무 예쁜 보석이잖아." "그……." 뭐라고 하면 좋을지 좋은 말이 생각나지가 않았다. 어찌 됐든 목걸이와 보석은 아버지의 것이고,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아무한테나 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 한구석에서 그저 유리카에게 저걸 줘버리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불쑥 솟아나 나는 스스로도 놀랐다. 어찌 됐든 안 될 말이지. 내가무슨 생각이 들든 말이야. "돌려 줘. 구해준 값이라면…… 뭔가 다른 선물을 할 테니까." "다른 선물 뭐?" 음…… 뭐가 있나. 머리를 아프도록 굴리면서 가슴을 헤집다가 문득 손에 잡히는것이 있어서 끄집어냈다. 평상시라면 꽤나 아까워했을 텐데, 지금은 이거라면 줘도 되겠지, 하는 생각이 앞서는 것이 참으로 이상했다. 어쨌든 미르보가 준 푸른 보석이 든 주머니를 나는 목에서 벗겨내어 내밀었다. "자." 유리카는 일단 받았다. 그리고 주머니를 열어 보더니 안색이 변했다. 왜 저러지? 내가 보기에 저 둥근 알 보석은 예나 다름없이 파랗게 빛나고 있을 뿐인데. "파비안, 너 이거 어디서 났니?" 새벽빛이 숲에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 안개가 남아 있어 아직 공기는 촉촉했다. 미칠 듯이 졸립던 것도 싸한 공기 때문에 조금은 가시는 것 같다. 유리카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 있었다. 바닥에는 눈 기운이 남은 잎새들이 푹신할 정도로 깔려 있었다. 길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 숲 속에서 우리는 풀과 나무를 헤쳐가며 걷고 있었다. 유리카가 저런 눈으로 보니까 뭔가 내가 죄라도 지은 것 같잖아. "어디서 났냐구." "전에 어떤 사람한테서 받은 거야." 못 대답할 건 없었다. 유리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어떤 사람이었는데?" "뭐, 사냥꾼이었어. 예전에 우리 가게에서 물건 사고 물건값으로 준거라고." 물건 값 치고는 좀 많긴 했지만 말야.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유리카는 손에 든 구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리카의 손위에 있으니 내 손에 있을 때보다 한결그 빛이 돋보이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조금 후에 고개를 든 유리카의 표정은 상당히 심각했다. "일단, 이건 내가 맡아 둘게, 파비안. 내가 가지겠다는 게 아냐. 이건 누가 함부로 가질 수 있는 성격의 물건이 아니거든." "가질 수 없다니?" 나로서는 돈 대신 받은 건데, 가질 수 없다니 무슨 소리야? "그건…… 살아있는 한 개의 생명을 보석으로 만든 거야. 아니,그 생명이 보석화한거지. 어떤 사람이든 한 생명을 개인의 소유물로 할 자격은 없는 거야." "뭐……?" 유리카의 표정이 하도 심각해서 나는 그녀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뭐야, 보석이 살아있다는 건가?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그럼 이 보석이 살아있다는 거야?" "그렇게도…… 말할 수 있고 아니기도 해. 어쨌든 한때는 생명이었고, 다시 생명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전혀 없지도 않아. 조심해서 다루는 게 좋겠다. 더군다나 여기 켈라드리안처럼……." 유리카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이스나에의 힘이 강한 곳에서는 말이지." 나는 황당해져 버렸다. 확실히 켈라드리안 숲에 들어와서 걷는 동안 숲의 규모나 마치태곳적 삼림처럼 울창하게 들어찬 각종 식물들이 놀랍지 않았던것은 아니다. 그리고 숲 안에 가득한 생명력과 기운이 지금까지밤새 걸으면서도 몸을 지탱하게 해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스나에라는 것이 어디 그렇게 흔하게 볼 수 있는 존재들인가? 류지아가 불러내던 헤렐인가 하는 그 이스나에만 해도 상당히 까다로운 의식을 거쳐야지만 간신히 와 주지 않았던가(게다가 보석은 무지 많이 달래고, 거기다가 머리카락까지, 으음)? 유리카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스나에와 같은 문제는 내가 알고 상관할 수있는 영역이 아니니까 아는 사람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리카는 어떻게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는 걸까? 내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유리카는 주머니를 목에 걸고 옷 안쪽으로 집어넣더니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도 황급히 다시 걸음을 떼 놓았다. "유리, 내 목걸이는 줘야 할 거 아냐?" "음……." 앞서 걸어가면서 유리카가 생각에 잠겨 낸 목소리였다. 뭐야, 푸른 구슬은 뭔지 모를 이상한 이유로 가져가고, 내 목걸이는 또 어떻게 돌려받는담? 내가 고민에 싸여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때 유리카의 다시밝아진 목소리가 들렸다. "응, 네 이야기와 교환하기로 할까?" "무슨 이야기? 이야기라면 네가 하고 있는 중이었었잖아?" "이베카 민스치야 이야기?" 유리카는 돌아보더니 가볍게 입끝을 올리며 웃어 보였다. 희고갸름한 얼굴에 그려진 은빛 눈썹이 나는 새의 날개 끝처럼 아주조금, 움직였다. 그리고 드맑게 갠 이마. 정말 조각가가 깎아 놓은 대리석처럼 흠 하나 없는 얼굴이다. 어쩌면 저런 얼굴이 존재할 수가 있지? 내가 엉뚱한 생각에 잠겨 생각의 끈을 놓치고 있는 사이 유리카가 말을 이었다. "그 이야기라면 조금 있다가 해주고, 내가 듣고 싶은 건 너와이 목걸이의 이야기야. 네가 왜 떠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렇게'예쁜' 목걸이가 어디서 났는지, 뭐 그런 것들." "내 이야기? 별로 할 것도 없는걸. 목걸이도…… 마찬가지고,해줄 이야기가 별로 없어. 아는 이야기가 있어야 말이지." "아, 상관없어. 아는 이야기만 하면 되잖아." 이상한 반응이로군. 보통 사람이라면 '왜 아는 이야기가 별로 없냐', 는 말부터 나올 법한데 유리카는 마치 '네가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는 듯이 그저 아는 이야기만 하라고 미리서 관대하게 말해버리는 것이다. 뭔가 기분이 좀 이상한데. 그리고 이 목걸이가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 쟤가 알 리가 없는데, 왜 하필 목걸이 이야기를 묻는담? "아, 그러니까……." +=+=+=+=+=+=+=+=+=+=+=+=+=+=+=+=+=+=+=+=+=+=+=+=+=+=+=+=+=+=+=저 첫머리의 시(?)는 짧으면서도 참 마음에 들어요. 나만 그런가...? 세월의 돌에 마법은 안 나오냐고 물으셨던 분! .... 대답, 나옵니다...^^;(과연, 언제?)또 다른 분, 보르헤스 좋아하냐고 물으셨지요? 물론이죠! 제 아이디(모래의책)가 보르헤스의 단편 제목 아닙니까^^보르헤스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환타지 뿐 아니라 기타 소설, 시까지 포함한 모든 장르를 통틀어서. 물론, 그 말고도 좋아하는 작가는 많습니다만...(제 취미는 워낙장르와 무관하게 아무데나 퍼져 있습니다. 사랑스런 동화에서 엽기적인 괴기 동화, 오래된 고전에서 아주 최근의 글들까지..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428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2 00:00 읽음:178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2) 나는 생각을 하느라고 말꼬리를 약간 흐렸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조금씩 아침이 되어가고 있었다. 공기는 차갑고 맑았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나는 냄새를 맡듯이 숨을 연달아 짧게짧게 들이쉬어 보았다. 차갑고 시원한 공기가나무 사이로 뚫린 오솔길을 휘돌아 나간다. 유리카가 빙긋 웃더니내가 한 그대로 따라했다. "맑고, 차다." 마치 방금 전 내가 했던 생각처럼 말하는 그녀. 촉촉하게 물기 어린 공기가 너무나 차갑고 신선한 나머지 그것을 들이쉬는 목구멍과 폐에서는 약간의 고통마저 느껴졌다. 그런대로 그것도 좋은 기분이다. 발을 옮기자 그 사이 좀더 밝아진 숲 속의 빛깔은 문득문득 다양하게 변했다. 손바닥보다도 커다란 흰 바탕에 보랏빛 무늬의 버섯들이 좀더 앞에 줄지어 돋아나 있었다. 커다란 숲 속에는 별가지 생명들이 여기 저기 무더기져 자라고 있다. 내가 결코 이해할수 없는 그 세계에서는. "우리 마을에서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내가 '세상 속으로' 이사간다고 말하던 생각난다. 물론 그땐 너를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생각도 못했는데 말야." "응, 그 '이사'가 이 목걸이 때문이었니?" 어떻게 아는 거지? 음, 그리고 이런 이야길 모두 해도 괜찮을까. "그 목걸이의 이름은 '아룬드나얀'이라고 해. 사계절의 상징인네 보석을 지니고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나봐. 물론 지금은 그중에 한 개밖에 없지만 말야." "녹색이니까, 봄의 상징이구나." "응……." 어느 정도 미심쩍어 하는 내 속생각과는 딴판으로 나는 계속 말해대고 있었다. 한 번 이야기를 꺼내니까 마치 실타래처럼 술술이야기가 풀려 나온다. "…… 그래서 아버지가 이 목걸이를 내게 맡긴 거야. 나는 다른세 보석을 모두 찾는 대로 아버지의 영지로 갈 생각이고." "그 다음에는?" "아, 그 다음에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정말이다. 그 다음에 어쩔 것인지에 대해선 그다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니 별로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이 목걸이를 가져간다고 과연 아버지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내 존재를 인정해 줄까? 그 곳에서 나는 과연 잘 살아갈 수있을까? 그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어쩌면 하르얀의 일을 알게 되기 전부터 생각해왔던 일이면서도, 그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았던 생각인 것같기도 하다. "그래…… 그렇구나." 유리카는 고개를 흔들더니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유리카의 분홍색 손톱과 검은 아룬드나얀이 희한한 조화를 이루는 것 같다. 한참을 쳐다보고 있는데 유리카가 걸음을 멈춘 그대로 그냥 서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좀 이상하다. 설마 나더러잘 쳐다보라는 배려는 아닐 테고. "참 예쁜 목걸이야, 그렇지?" "아? 응." 뭐, 새삼스레 할 만한 말이었던가? "녹색, 좋아해?" "아? 응……." 싫어하지는 않으니까. "그래……." 이상하군. 저런 모습을 보일 때에는 분명 이유가 있는데. 내 경험상 저런 건, 뭔가 하기 골치 아픈 말을 하려고 할 때야. 어머니는 가끔 귀찮은 심부름을 시키기 전이나 오늘 점심은 빵 뿐이다, 같은 말을 하기 전에 저런 모습을 보이곤 하셨어. 그러나 저러나…… 배 무진장 고프네. "배 안 고프냐?" 음…… 뭔가 말하려고 고민할 때 이런 말 하긴 싫지만, 정말이지 너 배 안 고프냐? "뭔가 먹을 거라도 갖고 하는 소리야?" 할 말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양손을 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건량이라도 좋다면." "누구나 배가 지독하게 고플 땐 건량이라도 좋지. 네가 먹을 거이야기해서 더 지독하게 배가 고파졌어." 유리카는 갑자기 하려던 말을 그만두고 다른 말을 하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음, 우리 어머니도 가끔 저런 일을 하곤 하셨지. "우리 건량 말고 뭐 먹을 만한 걸 좀 찾아보자." "뭘 찾잔 거야?" "물이랑 나무 열매, 그런 거지 뭐. 하지만 겨울이라서 쓸 만한열매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는걸." 갑자기 머릿속에서 멧돼지 고기는 어떠냐, 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일단 목구멍 속으로 꾹 눌러 두었다. 잠시 동안 이베카 시에서 건량 아닌 다른 음식들을 먹긴 했지만, 그 동안의 경험으로 건량만 씹는 게 얼마나 맛없는 식사인지나도 잘 알기 때문에 일단 유리카의 뒤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유리카는 나보다 여행을 오래 했기 때문인지, 이런 숲 속에서뭘 찾을 수 있는지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리고 훨씬 귀가 밝기도 했다. "물소리, 들리지?" 나무 사이로 걷고 있다가 문득 멈췄다. 아직 덜 걷힌 새벽 안개가 흐릿하게 이리저리 움직여 내 옆으로 흘러갔다. 내 귀에도 곧물소리가 들려 왔다. 가볍게 통통거리는 듯한, 물방울 튀는 소리, 가볍게 흘러내려 떨어지는 낙수, 햇빛처럼 조잘대는 소리를쫓아 나는 걸음을 재촉해 바위를 넘고, 가로놓인 나무를 뛰어넘고, 작은 둔덕을 가로질렀다. "조그맣고 깨끗한 샘일 것 같아." 저만치 희미하게 보이던 안개가 한순간 걷히자 정말로 탁 트인작은 빈터에 자리잡은 샘이 보였다. "정말이네." 갑자기 커진 물소리와 마주하자 머릿속이 맑게 개는 것 같다. 두어 발짝 샘가로 걸음을 옮겼다. 물 가운데는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조그마한 자연의 분수가 마치 말뚝처럼 솟아 나온 것이 보였다. 샘에서 발원한 시내가 숲속으로 흘러 사라진다. 정말이지 자연스러운 조화로 이루어진 샘이다. 잎새 사이로 눈이 희미해질 만큼 하얗게 내리는 햇빛과 함께 옅은 안개 속에 자리잡은 그것은 입가에서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유리카가 먼저 샘 앞으로 달려갔다. "이거 천연의 샘 맞을까? 누군가 만들어 놓은 것 같지 않아? 이걸 좀 봐." 녹색 이끼가 가득한 작은 바위들이 샘을 둘러싸고 있었다. 유리카가 가리키는 대로 다가가 물 속을 들여다보니 바닥에 부드러운모래가 깔린 것이 보였다. 확실히 이 주변 다른 곳에는 모래가 없었다. 어디서 가져다가 깐 것처럼 보인다. 복잡한 생각을 하기 전에 일단 우리는 물부터 마셨다. 셔벗 강을 떠난 이후로 처음 마시는 샘물이었다. 손을 안에 담그자 물은 몹시 차가웠다. 오는 도중에 물통에 약간 남은 물을 마셨지만 이렇게 신선하고 차지는 못했기 때문에 몇번이나 손으로 떠서 마셨다. 물통도 채웠다. 유리카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파비안,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나." 알고 있다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나, 네 그 목걸이에 대해서 벌써부터 알고 있었어. 네가 그 주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지금까지 말하진 않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주욱 알고 있었는걸." 놀라야 마땅할 것 같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아까 몇 가지 의문을 가지면서 생각했던 그대로, 유리카의 태도에는 처음부터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뜻에서 고개만 끄덕였다. "전에 봤을 때부터 이야기하려 했지만, 네가 이 목걸이 때문에내가 접근하는 거라고 생각할까봐서 몇 번 망설이다가 말을 못했어. 이번에 너를 도와주고 나서 네가 보였던 반응 때문에 그 생각이 더욱 강해졌지." 잠시 동안 물 솟아나는 소리만 들렸다. "그렇지만, 그 목걸이 때문에 너와 내가 만나게 된 것은 사실이야. 그 목걸이, 너에겐 정말 중요하지." 그 말을 하며 유리카는 목에서 목걸이를 벗겨냈다. 하얀 손위에검은 아룬드나얀과 사슬이 늘어져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중요하지." 목걸이가 내 손에 건네졌다. 아주 잠깐, 그러니까 하루 정도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오래간만에 쥐어 보는 것 같다. 아룬드나얀을 빙 둘러가며돋아난 열 네 개의 돌기, 그리고 검은 원반 가운데 박힌 녹색돌. 유리카에겐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걸까? 아버지조차도 잘모르는 여기에 숨겨진 문장에 대해 유리카는 들은 일이 있다는 걸까? 다른 것들을 잘 아는 것처럼? "너는……." "말하지 마, 파비안." 유리카는 샘가에서 일어섰다. 목걸이를 돌려준 것으로 그녀가밝히려 한 것은 모조리 끝났다는 듯이. 그러나 내 의문이 풀린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렇다면 나를 도와준 이유는 뭐였냐는 거야." "나중에, 나중에." "유리, 나는……." 유리카가 갑자기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바람에 나는 말을 멈추었다. "이상한 소리 안 들려?" "으응?" +=+=+=+=+=+=+=+=+=+=+=+=+=+=+=+=+=+=+=+=+=+=+=+=+=+=+=+=+=+=+=지도를 그렸습니다. 그것도 아주 정성들여서, 자세하게요. 그런데... 전해 드릴 방법이 없군요. T_T예전에 통신환타지 마스터할 때, 그렸던 '텍스트 파일용 네모네모지도'가 아닙니다! 아아... 그러나 저의 그림 솜씨란..;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511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2 23:26 읽음:175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3)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바람이 바스락바스락 숲 사이를 헤치고 돌아다니는 소리 외엔 영원처럼 고요한 숲이다. 나는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흔들었다. "전혀." "잘 들어봐." 유리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좀더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 봤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그래?" "웃는 소리, 조그맣게 속삭이면서 웃는 소리가 들렸어." "뭐야? 벌써들 쫓아왔나?" 나는 유리카를 따라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유리카가 아니라는듯이 손을 저었다. "아냐. 그런 소리가 아니고 마치 조그마한 아이들이 내는 것 같은……." 나는 그제야 짐작이 갔다. 유리카 앞에서라면 괜찮겠지. 지금까지도 계속 상황을 봐 왔을거 아냐. 나는 주머니를 가볍게 두드렸다. 꼼지락. "주아니, 주아니. 그만 나와봐." "주아니가 누구야?" 유리카가 의아한 표정이 되어 내가 하는 양을 보고 있더니 내주머니 안에 뭔가 움직이는 걸 보고선 눈이 동그래졌다. "쥐? 토끼?" "그 소리 들으면 주아니가 화낼걸." 그런데 한참동안 다시 반응이 없다. 나는 다시 주머니를 두드리다가 이번엔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꺄륵-!" 히유. 주아니는 내 손이 닿자 굉장히 깜짝 놀란 듯이 후닥닥거리더니,주머니 속에서 팔짝 뛰어나오다가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얘가참, 방금 종알대고 웃고 했다면서 놀란 척 하긴. "야, 야, 진정해." 주아니를 샘가에 내려놓았다. 정말 자다 일어난 듯이 눈이 부스스하다. 두리번대다가 다시 한번 이번엔 샘 속으로 떨어질 듯이비틀거려서 나까지 깜짝 놀랐다. 얼른 손으로 샘과 주아니 사이에담을 쳤다. 유리카는 흥미진진한 눈이 되어 주아니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입을 열어서 의외의 한 마디를 했다. "로아에구나?" 어, 로아에를 알고 있었어? "처음 보는 게 아닌 거야?" 유리카는 주아니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주의 깊게 펴서, 가까이 가져다댔다. 올라오라는 듯이. 그런데 곧 잠에 취한 상태에서 깨어난 주아니는 불안한 듯한 눈동자를 굴리며 나와 유리카를 번갈아 쳐다볼 뿐, 도망가지도 손바닥 위에 올라가지도 않고 몸을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아무래도 주아니는 한 번 잠이 들었다 하면 제대로 깨질 못하는것 같단 말야. 깨울 때마다 놀라니 말야. 아까 웃었다는 것도 잠꼬대가 아닌가 모르겠는걸. 나는 안심도 시킬 겸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내 친구야, 주아니. 괜찮아." "꼬마 로아에 친구, 나는 유리카 오베르뉴라고 해." 유리카가 자기 소개를 하면서 생긋 웃어 보였는데도 주아니의표정은 전혀 풀어지지가 않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내가 민망해질 지경이 되었다. "왜 그래? 뭐 잘못됐어?" 묵묵부답. 이거 아무래도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증상 같은데. "야, 주아니." 주아니를 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가까이서 표정을 들여다보니왠지 이것도 전에 본 표정 같다. 언제 봤더라, 음 그러니까… 그동굴에서 '나 화 안 났어' 할 때 표정 같은데? 확인 삼아 물어 보았다. "너 화났냐?" "아니." 흠, 정말이로군. 주아니는 그 말을 하고도 한참은 몸을 비틀고 꼬고 하더니 이윽고 드디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이라는 것이 심히 황당했다. "파비안, 너…… 내가 좋아, 쟤가 좋아?" "뭐…… 뭐?!" 그 순간 유리카의 표정도 정말 기억해 둘 만 했다. 입가가 일그러지면서 뭔가 애써 참느라 얼굴을 찌푸리는 듯 하더니…… 결국그녀는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려 버렸다. "파하하하……." 음,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한담. 다행히 유리카가 도저히 멈추지 못할 것처럼 웃어대고 있어서나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주아니의 표정은…… 말하지않겠다. "하, 하하하하… 아하하하하……." 간신히 웃음을 멈춘 유리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는 또 말하지 않아도 좋았다. 사실 지금은 별로 말 같은 거 하고 싶지가않다. 굉장히 애매한 상황에 빠진 것 같으니까 말야. "얘, 꼬마 로아에 아가씨. 너하고 파비안이 어떤 사이인지는 내모르겠지만 말이야……." "무, 무슨 소리야, 유리!" 내가 당황해서 외쳤지만 유리카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나하고 파비안은 그저 '친구' 사이란다. 뭐, 친구로서 누구를더 좋아하네 하는 것은 별로 의미 없는 질문 아닐까? 적어도 내생각엔 그런데 말야." 주아니가 뭐라고 대답할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같이 다닐 거야?" 음, 실질적인 질문을 하는군. 유리카는 고맙게도(내가 왜 고마워해야 하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군. 그런데 또 얘가 나하고 동행하려는 이유는 뭘까? 아이구 머리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도대체 나한테 이해되는 행동이라고는 하질않는단 말야. "응. 그러니까 주아니…? 너하고도 같이 다니게 되는 거겠지? 나는 너하고도 친구가 되고 싶은데 말야. 어려울까? 어때?" 유리카는 정말이지 말을 잘 했다. 내가 주아니라도 별로 대답할말이 없을 것 같다. 예상대로 아무 말이 없군. 그런데 유리카는 그 뒤에 더 상냥한 말씨로 한 마디 덧붙였다. 뭐라고 했냐 하면……. "내가 파비안보다 주아니 너를 더 좋아하게 될지 누가 아니?" 뭐야, 방금 그 말은……. "그래서, 이베카 민스치야가 한 선택은 이거였어." 나보다 어째 주아니가 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는 것 같다. 뭐 주아니는 유리카보다 나이가 많은 셈이니 저 이야기가 어쩌면더 가까운 시대의 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유리카는 선택을 잘 했다. 뭔가 주아니의 흥미를 끌 만한 일을 금방 찾았으니말이다. 유리카는 거의 주아니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라고 이야기에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닌데 괜히 소외된 것 같은 기분이 드네. "그녀는, 죽을 때가 가까워오자 인간들의 도시로 찾아갔지. 그때만 해도 힘보른이라는 이름을 가졌었던 그 도시 말야. 그때는지금처럼 시장 제도가 아니고 수도에서 파견된 귀족이 와서 다스리고 있었대. 물론 세습되는 자리는 아니었지. 그런데 그 때에도힘보른 시는 상당히 발전한, 그러니까 수익이 좋은 도시였었나봐. 그녀는 그 사람을 찾아가서 이렇게 제안을 했대." "뭐라고 했는데?" +=+=+=+=+=+=+=+=+=+=+=+=+=+=+=+=+=+=+=+=+=+=+=+=+=+=+=+=+=+=+=어제, 글을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에 올린 것 보셨지요? ^^;글 세 개를 올리는데 첫 번째 글이 11시 59분... 하하;지도를 올려달라는 분들이 많으셨는데, 그건.. 좀 더 잘 그린 다음에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끔찍해..;;)괜찮죠?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512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2 23:26 읽음:176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4) 우리는 샘가 근처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밤은 아니지만 도저히 피곤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잠시 쉬면서건량이라도 씹고 나니 피곤이 더 몰려와서 우리는 근처에 올라갈만한 나무를 찾았다. 지금 올라와 있는 곳은 아주 큼직한 가지를가진 높직한 떡갈나무 위다. 우리가 올라와 자리잡은 가지만 해도땅에서 약 15큐빗 이상 떨어져 있는 것 같다. 거기에서 우리는 적당히 기대고는 망토와 담요 등을 꺼내 덮었다. 편안한 잠은 아닐 것 같지만 이런 상황이고 보니 등만 딱딱한데 닿아도 잠들 것 같단 말야. 물론, 유리카의 이야기가 끝나는 대로 말야. 주아니는 중간에 끼여들기까지 하면서 잠도 안 자고 흥미진진해했다. 쳇, 자기는 여기까지 오면서 내내 주머니 속에서 잤잖아. 그러니까 안 졸린 것도 당연하지 뭐야. "뭐라고 했냐면, 자기가 마법으로 당신 핏줄을 이은 딸들에게대대로 이곳 시장직이 물려지도록 해 주겠다, 이렇게 말했대. 그녀는 켈라드리안에 살고 있던 그루터기 엘프 일족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마법사 중 하나였거든." "그래? 그런데 아무리 마법이라도 그런 일이 가능한 건가?" 유리카는 빙긋 웃더니 입을 내밀어 보였다. "물론, 불가능하지." "뭐야?" 내가 황당해서 몸을 뒤채다가 바닥으로 떨어질 뻔한 소동이 있은 다음에 유리카는 설명을 해 주었다. "그녀는 자기의 마법이 아니라 이스나에들의 힘을 빌리려고 한거야. 그런 마법사이니 알고 지내는 이스나에가 전혀 없을 리야있었겠어? 이스나에들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영원히 산다는 것은알고 있지?" 아, 그렇겠군. 그러면 이스나에들의 힘을 빌려서 인위적으로 인간들의 질서에 조작을 가하려 한 건가? 아니, 그런 일을 해서 뭘얻으려는 거였는데? 나보다 주아니의 추리가 더 빨랐다. "그리고 그 딸들은 대대로 '이베카'라는 이름을 가지게 하고?" 아하. 나는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갔다. 그녀는 자신이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연인이 돌아올 때까지살아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의 기억을 영구히 남길방법을 찾았겠지. 엘프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으니, 세월이 까마득히 흐른 후 언제인가 봉인에서 풀려날 자신의 연인에게 자기의 기억을 남겨둘 방법이 없었겠지. 그런 방법을 썼구나. 대대로 사람사이에 전해지는 이름이라니, 기발한데.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중인데 유리카가 웃으며 손뼉을 쳤다. "맞았어. 그거야. 자기 이름이 영영 없어지지 않게끔 도시의 이름도 이베카로 고치게 하고 말이지." 주아니는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주머니 안에서 얼굴을 내밀고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신나게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네? "그 이스나에는 그런 일을 해서 얻는 게 뭔데? 그리고 이스나에가 무슨 수로 인간들의 시장직 같은걸 이래라 저래라 할 수가 있지? 그들은 그저 영혼들일 뿐이잖아?" "그건." 유리카는 잠자기 전에 리본을 꺼내서 머리카락을 묶었다. 그것조차 까만 천이다. 묶은 머리채를 가지 뒤로 늘어지게 하면서 가능한 한 편안하게 자세를 잡던 그녀가 말했다. "조금만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라구." 왠지 바보가 되는 것 같군. "이스나에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아. 그러나 스스로가 원하면 무슨 모습으로든 나타날 수 있지. 이베카와 계약을맺은 이스나에는 새로 부임한 귀족들에게 매번 장난을 쳤대나봐. 혼비백산해서 도망갈 정도로 말야. 그러면서 아마 누구를 불러오라는 말을 했겠지. 이베카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처녀 말이야. 귀족들이 예나 지금이나 귀찮고 무섭고 그런 거 버티는 경우는 별로없었거든? 결국 원하는 대로 됐지 뭐. 그래서 파견 귀족 대신 세습 시장이라는 이상한 제도가 생긴 거야. 이걸로 두 번째 의문은해결." "그럼 첫 번짼?" 유리카는 약간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마치 이야기 듣는 애들한테 겁을 주려고 하는 어른처럼. "켈라드리안에 이스나에들이 많아지게 된 게 그때부터지." "뭐?" "이스나에는 종류가 많지만, 그 중에는 어떤 자연물이나 장소에자리잡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종류가 있어. 그런 그들이 오랜 세월 살아가는 동안 있던 곳에서 쫓겨나거나 갈 곳을 찾지 못하게되는 경우가 있지. 그런 이스나에들이 이곳 켈라드리안에 둥지를틀도록 해 준 거야. 그 전까진 여긴 엘프들의 땅이었지, 이스나에의 땅은 아니었거든." "그럼 엘프들은?" "넌, 엘프들이 거의 없어지게 된 것이 그 200년 전이란 것도 모르니? 빈땅을 누구한테 주건, 그건 엘프 마법사들이나 관여할 만한 문제라구. 엘프들 입장에서는 당시에 이미 어쩌고저쩌고 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으니 말야. 종족이 멸망해 가고 있다는 중대한문제 앞에서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을 텐데, 특별히 싫을것도 없는 - 어디까지나 엘프들 입장에서 말야 - 이스나에들이 좀와서 자리를 잡은들 누가 상관했겠어?" 말이 되는군. 나는 머쓱해져서 코를 약간 훌쩍인 다음 머리도 약간 긁었다. "말하자면 한동안 엘프들과 이스나에들은 공존 공생했어. 엘프들이 도움 받은 것도 많았으니까. 그러나 결국 마법을 잃은 엘프들은 차츰 도태되어 갔고, 이젠 이스나에들만 남아 있게 되었지. 다시 말해……." 이제 유리카의 표정은 본격적으로 겁을 주려는 의도로 가득했다. "인간들에겐 마치 유령이나 다를 바 없는 이스나에들이 가득 찬숲이 된 거라고." 으음…… 밤에 들었으면 좀 더 음산했을 것 같다. 주아니는 실제로 몸을 좀 떨었다. 로아에도 유령이나 귀신을 무서워하나? 하긴, 무서워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뭐야. 유리카는 나와 주아니의 표정을 번갈아 보더니 효과가 있었다고생각했는지 기분 좋게 생글생글 웃었다. 아무래도 저 애는 얼굴과는 달리 여기저기 사악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이제, 자야 할 것 같다. "하아아음……." 마치 잠결 속에서 꿈인 양 뒷이야기를 덧붙이는 유리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는 확실히 나만큼 졸립지도 않은 것 같다. 어쩌면 나보다 훨씬 건강체질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웃긴 건, 나중엔 서로 그 이베카라는 이름을 쓰려고 집안끼리 암투를 벌였다는 거야. 딸에게 물려주는 거다 보니까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 집안만 거기에 연루되는 것이 아니지 않겠어? 결국 여러 번의 분쟁 끝에 아까 그 티무르의 리안센 가문에서 거의 독점을 하게 됐는데 그 이유도 아주 웃겨." "이유가 뭐였는데?" 이건 나보다 훨씬 쌩쌩한, 그러니까 훌륭한 청자인 주아니의 질문이다. "글쎄, 리안센 가에서는 자기네 이베카한테 결혼을 시키지 않았지 뭐니? 그러니까 이베카가 다른 가문으로 갈 여지를 완전히 막아버린 거지. 지금의 시장인 이베카 할머니 역시 처녀야. 처음에이베카 민스치야는 이런 결과까지 예상하진 못했을 텐데 말야. 하여간 인간들이 일을 그르치는 데는 뭐가 있단 말야." 마치 자기는 인간이 아니기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그런데 쏟아지는 졸음을 뚫고라도 이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할머니, 티무르한텐 외할머니가 된다던데?" "양자를 들인 거지. 그것도 한 집안 안에서." 어이가 없다는 감정과 더불어 나는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잠꼬대? 그럴 리가 없는데?" "무슨 소리야. 유리카가 들었댔어." 그런데 유리카마저도 고개를 저었다. "아냐, 지금까지 주아니 목소리를 죽 들었었지만 목소리가 달라. 그리고 하나가 아니라 여럿 같았다구. 웃고, 떠드는 소리." "괜히 음산한 소리 하지마. 아깐 낮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라구." 밤이다. 우리는 약 30분전부터 차례로 깨어나 지금 나무 위에서내려올 차비를 하고 있다. 나무 위에서 자면 굉장히 불편하고 제대로 자지 못할 것 같지만 방금의 경험상 꼭 그렇지도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마치 집의 침대에서 실컷 잔 사람처럼 개운하게잠에서 깨어났다. 밤에 깨어나는 것은 좀 낯설었지만 말이다. "캄캄하니까 낮에 본 샘가가 어디 있었는지 보이지가 않는걸?" "내려가 보면 눈에 좀 어둠이 익숙해질 거야." "램프를 켤까?" "아냐, 이스나에들은 인공적인 불을 싫어해." 유리카는 몇 가지 아래로 잡고 내려가더니 약 10큐빗쯤 되는 높이에서 그냥 훌쩍 뛰어내렸다. 하…… 말이 나오지 않는군. 유리카는 아주 가볍게, 자세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지상에 착지했다. 흠…… 난 저런 흉내를 내다가 다리가 부러지고 싶진 않다. 게다가 나는 배낭도 있으니까 말야. 그래서 적당히 올라오던 방법대로 줄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피로가 꽤나 풀린 것 같아." "켈라드리안은 자기 품안에서 피로해 하는 아이를 보지 못하는어머니거든." "뭐?" 유리카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는 주위를 약간 둘러본 뒤에 더 말하지도 않고 어둠 속에서 한쪽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뭔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말 뭐가 보이는 걸까? 빛이라고는 약간의 별빛, 거의 져 가는 엷은 달빛, 그리고 어디선가에서 비쳐오는…… 으음? "어딘 가에서 빛이?" "정말." 주아니가 주머니 안에서 고개를 내밀고 재잘대더니 한쪽 방향을가리켰다. 희미한 빛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 아, 유리카였군. "기다려, 유리!" +=+=+=+=+=+=+=+=+=+=+=+=+=+=+=+=+=+=+=+=+=+=+=+=+=+=+=+=+=+=+=추천해 주신 분들, 역시역시 감사드립니다- ^^전투신에 문제가 있나요? 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버그 지적해 주신 분, 신경써서 읽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빠른 시일 안에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513번제 목:◁세월의돌▷ 방금 바로아래 2-3-4 읽으신 몇 분께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2 23:31 읽음:1676 관련자료 없음----------------------------------------------------------------------------- 만약 갈무리하셨다면, 다시 해서 보세요..;;나우누리의 놀라운 서비스로 인하여... 올라가다가 끝이잘렸습니다. T_T그래서 수정하려고 하니, 아예 노이즈로 글 자체가 써지지 않더군요 ;;;간신히 끊었다가 다시 들어왔는데...; 벌써 몇 분이 읽으셨네요. 만약 온라인으로 읽으셨다면 정말 죄송하고요,갈무리하셨다면 8페이지가 늘어났으니 다시 보아주세요;;(아... 나우의 숨겨진 던젼은 또 얼마나.....)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571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3 20:17 읽음:171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5) 쫓아가고 보니 낮의 그 샘가였다. 아까 본 듯했던 희미한 빛은 다시 찾아볼 수 없게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샘가에 앉아 양손을 물에 잠그고 있는 유리카가 보일뿐이다. 나도, 주아니도 그 쪽으로 다가갔다. "밤에 마시기엔 좀 차갑네." 정말 다시 보아도, 손금까지 자세히 비쳐 보일 정도로 맑은 물이다. 물 속에는 작은 물고기 하나도, 조그만 물풀조차도 살고 있지 않았다. 손을 오므려 담은 물을 입가로 가져가 마시자 온 몸구석구석으로 차가운 기운이 퍼져 나갔다. 나는 몸을 떨었다. "으…… 추워라. 주아니, 물 마실래?" "응…… 아니, 응?" 주아니는 갑자기 대답을 이상하게 하더니 주머니에서 기어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덩달아 나까지 두리번댔지만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아, 밝네?" 주아니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주위를 세심하게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이렇게 어두운데 내가 물 속에 잠긴 내 손의손금을 들여다보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빛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은, 이곳이 그빛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이 주변이 모조리 연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다만 어둠과 크게 차이나지 않을 정도의 약하고 부드러운 빛이라 잘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뭐가 빛나고 있는 거지?" 내 질문에 대답한 것은 유리카였다. "샘이야." 그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샘을 들여다보았다. 어느 한 구석에서빛이 나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샘 전체가 마치 발광체처럼빛을 내고 있었다. 스스로 빛을 내는 곤충이나 그런 것에 대해선들어보았지만 샘이 빛을 낸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일이 없었다. "분명, 이스나에의 장난이야 이건." 유리카는 단정적인 말투로 말하면서 손을 샘 안에 집어넣어 휘저었다. 하얀빛이 샘이 움직이는데 따라 위로 솟아나는 것 같다. "이스나에는 이런 장난도 쳐?" "이스나에들 가운데 한 장소에 붙박이로 있어야 하는 종류가 있다고 아까 말했지? 그런 종류들 중엔 자기가 있는 곳을 이상하게만들어놔서 인간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이 빛나는샘도 그런 종류 중 하나일 것 같다. 여기가 켈라드리안인 이상,그렇게까지 이상한 일도 아니지." 혹시나 저번에 보았던 류지아 친구 헤렐과 같은 녀석이 지금 안보이는 곳에서 우리를 쏘아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왠지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무슨 소리야. 당연히 보고 있다고. 이런 이스나에들은 웬만해서는 자기 자리를 떠나지 못한단 말야." 저…… 런 말을 저렇게 예사롭게 하다니. 유리카는 어제 낮에 나와 주아니한테 겁을 주던 때처럼 마치 자기는 유령이나 귀신 따윈 조금도 무섭지 않다는 투였다. 저 나이또래 여자아이 치곤 흔한 일이 아닌데.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으니왠지 내가 무서운 느낌을 갖는 것 역시 숨길 필요가 없게 느껴지는데. 보통 여자아이들 앞에서라면 용기 있는 척, 아무렇지 않은듯이 행동해야 하는 법인데. "어쨌든 샘은 그만 들여다보고, 건량이라도 씹은 다음에 걷기로할까? 우린 갈 길이 바쁘다고." 우리는 이윽고 일어섰다. 걸으면서 생각해 보았다. 갈 길이 바쁘다니, 내가 바쁠 게 뭐란말인가. 만사 너무 오래 걸리면야 좋을 것 없겠지만, 내 일이란것이 시간 제한 같은 것은 전혀 없는 임무인데 말야. 오래간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숲이라 드문드문 잎새에 별이가려지기는 하지만 꽤나 맑은 밤하늘이었다. "유리카, 넌 어느 아룬드에 태어났니?" 유리카는 나와 나란히 서서 걷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고집을부려 내 배낭 안에 든 그녀의 천 배낭을 되찾아 멘 그녀는 머리를묶었던 폭 넓은 리본을 풀지 않은 그대로였다. 묶은 머리채인데도허리께까지 닿아서 흔들렸다. "난 아무 때도 태어나지 않았어." "뭐……?"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14달 가운데 2월인 암흑 아룬드, 이 때에 태어난 사람들은 자기의 생일을 잘 밝히지 않을뿐더러 누군가 물어서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없는 달 태생' 이라거나 또는 '태어나지 않았다' 는식의 말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암흑 아룬드는 생명과는반대되는, 저주받은 아룬드이다. 이 아룬드에 태어난 사람들은 자기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기피 대상이 되는 경우마저도 있다. 그러니 만큼 부모들은 이 달에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상당히 주의 깊은 계산을 한다. 따라서 실제로 이 달에 태어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나도 스스로 암흑 아룬드에 태어났다고 말하는사람을 만난 것은 유리카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꽤나 놀랍기도 했다.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도 그 때문인가? 문득 오늘이 음유시인 아룬드 29일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이번달은 30일까지 있으니까 이제 하루 남았네. "그럼 생일이 얼마 안 남았겠구나? 언제니?" "넌, 암흑 아룬드에 태어난 사람들은 생일을 기념하지 않는단것도 모르니?" "……." 유리카는 별 감정 없는 말투였지만 나는 마치 아픈 곳을 찌르기라도 한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유리카의 말이 맞다. 암흑 아룬드 태생은 '태어나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에 생일이 없다. 아무도 기념해주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부모조차도. 문득 부당하다는 감정이 치밀어 올라왔다. "왜 꼭 기념하지 않아야만 하는 거지? 그 때 태어난 게 자기 잘못도 아니잖아. 무슨 끔찍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유리카는 대답하지 않고서 그저 걷고만 있었다. 이거 참. 나는 그저 수호성이 무엇인가 물어보고, 하늘에 별이잘 보이는 김에 서로 별이나 찾을까 싶어서 태어난 달을 물었을뿐이다. 그러나 암흑 아룬드 태생한테는 수호성조차도 없었다. 물론 그 달을 상징하는 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달이나 상징하는 별이 하나씩 있게 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암흑 아룬드를상징하는 별인 '사스나 벨(Saasna Belle)'은 수호성이 될 자격같은건 전혀 없는 별이다. 별 자체로 이미 불길함과 동의어인 별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나머지 13달 동안은 볼 수조차 없는 별이란말이다. "이런 이야기 괜히 꺼내서 미안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런다고 꼭 생일을 그냥 지나갈 필요는 없잖아? 나한테 가르쳐 줄 수는 없어?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꼭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유리카는 그제야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별다른 표정은 없었다. 마치 이런 일쯤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는 듯이. "그만해 파비안. '없는 달' 태생한테 자꾸 생일을 묻는 것도 실례야." 나는 더 할 말이 없어졌다. 한동안 말없이 걸으면서 주아니한테나 생일을 물어볼까 하다가괜히 유리카를 더 아프게 할까 싶어서 그것도 그만두어 버렸다. 별이 잘 보이긴 하지만 전혀 쓸데가 없네. "유리카." 주머니 속의 주아니가 문득 말소리를 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다시 정확히 말하자면 주아니가 유리카의 이름을 불러서 놀란 것이다. 아까 잠자기 전에도 내내 유리카가 해주는 이야기를듣고 있긴 했지만 유난히 낯을 가리는 주아니가 유리카와 쉽게 친해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 유리카가 그냥 앞을 본 채 대답했다. "왜." "암흑 아룬드 어쩌고 하는 건 인간들 뿐이야. 로아에들 사이에서 그런 건 없어." "……." 유리카는 대답이 없었지만 주아니는 계속 말했다. "우리들도 달 체계는 알고 있어. 이를테면 나는 약초 아룬드 2일 태생이고, 수호성은 에를라니(Erlani)지. 그러나 어느 아룬드에 태어난 로아에든지 그 가치는 똑같아. 암흑 아룬드에 태어났다고 '태어나지 않았다' 고 말하는 건 인간들 뿐이야." 흠, 약초 아룬드라. 왠지 세이지를 들고 있는 주아니의 모습에잘 어울리는 달인 것 같다. 나는 궁금한 게 생겨서 물었다. "그럼, 암흑 아룬드에 태어난 로아에의 수호성은 뭐니?" "고통받는 달." 내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헤매고 있는데 유리카의 한결 밝아진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재미있는 생각이구나." 두 소녀(혹은 소녀와 할머니일지도……)가 한참 그 의미에 대해서 재잘거리는 동안 나는 잠깐 동안 고민에 빠져 있다가 드디어해답을 찾았다. "사스나 벨에 의해서 고통받고 있는 달, 그 자체란 말이지?" "그걸 이제 알았니?" …… 합창으로 대답할 필욘 없어. +=+=+=+=+=+=+=+=+=+=+=+=+=+=+=+=+=+=+=+=+=+=+=+=+=+=+=+=+=+=+=어제 쪽지보내주신 분, 대화도중에 달아나서 죄송합니다. 저희 집은 전화가 오면 통신이 끊겨 버린답니다...;그 전화가 뭔가 중요한(?) 것인 다음에야, 되돌아오긴 그른거죠;아아... 하루하루가 너무너무 힘드네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572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3 20:17 읽음:171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6) 암흑 아룬드의 별 사스나 벨은 14달 가운데 암흑 아룬드에만 위치를 알 수 있는 희한한 별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 별은 아룬드의 이름이 뜻하는 바대로 온통 검은 색이라 그렇다. 까만 하늘에까만 별이 보일 리가 있겠어? 당연히 낮에는 아무리 별이 검다고해 봤자 햇빛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니까 13달 동안 아무리 기를쓰고 찾아봐도 전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 그 별은 언제 볼 수 있냐고? 암흑 아룬드가 되면 그 위치는 확실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별은 그 시기에 달 위에 나타나는 것이다. 하얀 달 위에 나타난 끔찍한 검은 구멍. 그 모습을 한 달 동안 밤마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암흑 아룬드는 불길한 느낌을 주고도 남는다. "…… 사스나 벨의 나머지 13달간 이동 경로를 계산해보려고 많은 점성술사들이 노력했지. 아직도 확실한 결과는 내지 못했지만말이야. 아니, 낼 수가 없는 지도 모르지. 보이지 않는 별이 어디에 있는지, 없는지 무슨 수로 확신할 거야?" 결국 설명의 배턴은 유리카가 넘겨받아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복잡한 이야기까진 몰랐기 때문에 귀를 기울였고, 주아니도 마찬가지다. 하늘에는 점차 그믐을 앞두고 있는 달이 떠올라 있었다. 조금전부터 30일이 되었으니까, 이제 하루만 있으면 그믐달이다. 그리고 암흑 아룬드 1일 밤부터 가느다란 초승달의 허리를 뚝 자르는것처럼 나타나는 사스나 벨의 모습도 볼 수 있겠지. "그럼 점성술사들이 그 경로를 예측한다는 건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그들이 무슨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라도 그런 건 알 수 없을 거야." 나와 주아니가 저마다 떠드는 가운데 유리카의 말소리가 이어졌다. "그들은 다른 별들과 아룬드, 별자리와의 관계 속에서 사스나벨의 위치나 움직임을 알려고 했어. 달 위에 나타난 사스나 벨이밤을 지배한다는 것은 너희들도 알지? 그러니까 암흑 아룬드의 반이 거의 밤과 다름없는 거 아냐. 불길한 밤이 계속되는 아룬드이지, 암흑 아룬드는."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그러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때를 기점으로 삼아서, 그 연관관계 같은걸 연구해 가지고 사스나 벨이 어느 별 근처인지, 어느별자리 옆에 있었는지 그 위치를 알려고 했단 거야?" 주아니가 맞받았다. "그건 너무 작위적인 것 같은데?" "차라리 나라면 해가 질 무렵쯤에 하늘을 차근차근 관찰하는 쪽을 택하겠다. 여러 사람이 잘 보다보면 혹시 잠깐이라도 사스나벨이 보일지 알아?" "맞아맞아." 우리 두 무식한(?) 인간들, 아니 인간과 로아에가 떠들어댔지만유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입을 열어 뭔가 말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딱 벌렸다. "왜 그래, 유리?" "세상에……." 나도 곧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유리카가 바라보는 쪽, 우리가 걷고 있던 길목 저 앞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뭔가 익숙한 것. 빛나는 샘? 유리카는 그저 못 박힌 것처럼 자리에 서 있었지만 나는 샘가로달려갔다. 덩달아 주머니 속의 주아니도 함께. "이건……." 긴말이 필요없었다. 우리가 떠나온 바로 그 샘이었다. "이게 어찌된 거야?" "우리가 아무리 이야기에 정신 팔면서 왔다고는 해도 이렇게 왔던 자리로 똑바로 되돌아올 수는 없어. 유리카가 분명한 어조로 말을 맺더니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뭔가를 찾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유리카의 목소리가 밤의 어둠을 자르기라도 하듯이 퍼져나갔다. "우리한테 바라는 게 있다면 모습을 드러내고 말을 해!" 유리카의 어조는 꽤나 날카롭다. 우리는 어제 아침에 우리가 올라가 잤던 나무까지 가서 확인하고는 확실히 여기가 우리가 왔던 그 자리가 분명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귀가 밝은 주아니조차 주변에 누가 있는 기척은 없다고 말했다. 아까 내내 우리가 걸을 때에도 역시 없었고. 그러니까인간과 같은 종류가 우리를 혼동되도록 인도했다고는 생각할 수가없다. 분명, 이건 유리카 판단대로 이스나에 짓이야. 유리카는 말했다. 우리가 이스나에의 장난에 걸려들었다면 밤새숲을 헤매고 내일, 모레, 아니 1년 내내 여기를 헤맨다고 해도 같은 장소로 되돌아오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죽을 때까지라도 못빠져나가냐는 주아니의 질문에 유리카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래서우리는 매우 당황스런 심정이 되어 있었다. "…… 유리카, 화났나보다." 주아니가 속살거린다. 나는 고개를 끄덕, 하고는 손을 등뒤의검으로 가져갔다. 도움이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뭔가일어날지도 모를 사태에 내가 대비할 수 있는 거라곤 이것밖에 없었다. "그래, 안 나오겠다는 거지……." 유리카의 목소리가 뭔가 위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지막하게잦아들었다. 쟤가 뭘 하려고 저러지? 유리카는 둘러보기를 멈추고샘가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배낭이 앞쪽으로 오도록 빙글 끈을 돌렸다. "후회하게 해 줄 거야." 음……. 나와 주아니는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참견하지도 못하고 잠자코 지켜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유리카가 배낭을 열더니 코르크로 막힌 약병을 하나 끄집어냈다. 손바닥만한, 자그마한 유리병인데 병 안에는 사탕알만한 동그란 알맹이들이 가득 차 있었다. 빨갛고도 투명한, 마치 장식 구슬처럼 보이는 색깔이다. 유리카는 코르크를 뽑고 손가락을 넣더니한 개를 끄집어냈다. "뭘까?" "글쎄." …… 하여간 우리는 이 상황 앞에서 정말 무식해져 있었다. 유리카는 약병을 넣고 그 붉은 구슬 같은 것을 집게손가락 사이에 끼워 잡더니 샘 앞으로 그걸 불쑥 내밀었다. 그러더니 그걸 쥔손을 흔들어 보이며 외쳤다. 구슬에서 희미한 빛이 나와 어둠 속에 마치 착시 같은 선을 그렸다. "네가 정말 이스나에라면 이게 뭔지 모르지는 않겠지?" 조용……. 유리카는 목을 가다듬더니 다시 한 번 외쳤다. "의식을 통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어. 내가 무슨 힘을 가졌는지 자세히 본다면 너도 알 수 있을 텐데?" 역시 조용. 나는 유리카가 무슨 힘을 가졌는지 궁금해졌으나 유리카는 더는말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나지막하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네가 정말 샘의 이스나에라면, 블로지스틴의 구슬을 무서워하지 않을 리가 없을 거다." 블로지스틴의 구슬이 뭔지에 대해 나는 역시 도통 무식했다. 유리카는 샘가에 쪼그리고 앉더니 물이 솟아나 조그마한 말뚝처럼 튀어나온 바로 앞에 그 구슬을 갖다댔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화르르……마치 어딘가에 불이 옮아 붙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구슬이 갑자기 아까의 백 배는 되는 빛을 내기 시작했다! "어, 어어……." 유리카의 손이 마치 불꽃에 타는 것 같다. 샘 위에 커다란 불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주변 숲이 불이라도 난 것처럼 시뻘겋게 밝혀졌다. 붉은 빛을 받은 유리카의 화가 난 얼굴은 마치 환영처럼 타오르고 있어 내 눈에도 무섭게 보일 지경이었다. 유리카는 힘껏 소리 높여 외쳤다. "이래도!" 유리카의 째랑한 목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갑자기옆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매우 급박한 듯한. "그만두지 못해! 뜨겁단 말야!" 어라? 마치 소년 같은 목소리였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샘가의 녹색 이끼 가득한 바위 위에 누가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으헤엑!" +=+=+=+=+=+=+=+=+=+=+=+=+=+=+=+=+=+=+=+=+=+=+=+=+=+=+=+=+=+=+=채널아이에 가봤더랬습니다(도저히 가볼 수 없다던 곳을 가다니,루디엔, 과연 무슨 수를 썼던 걸까...). 단 한 분! 이지만 추천을 보니 굉장히 기뻤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652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4 21:32 읽음:167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7) 나도 모르게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섰다. 정말이다. 아까는 절대로 없었던 사람이다. 맹세해도 좋다. 아니……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그 편이 좀 더 신빙성 있게 들리는…… 에라, 모르겠다구. 어쨌든 나는 혼란에 빠진 채로 내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귀신이라고 생각하니 은근히 무서운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헤렐처럼 희미하게 보이는 둥 마는 둥 하다거나 그랬으면시커먼 밤에 깜짝 놀라서 진짜 비명이라도 질렀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생긴 건 별로 안 무서워 보이는데? 숲을 감싼 안개처럼 푸른 기 도는 회색의 표정 없는 눈동자, 그아래로 홍조라고는 없는 희기만 한 피부의 뺨, 그리고 가볍게 다물어진 붉은 입술의 기이한 조화로움을 지닌 얼굴이었다. 흑녹색눈썹이 선명한 선을 그리며 이마를 가로질렀고, 그 아래로 길고섬세한 속눈썹이 샘을 감싼 검은 갈대처럼 곱게 펴진 채 가볍게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아주 날씬하고 마치 날아가기라도 할 것 같은 몸매와 팔다리. 그리고 뾰족하게 위로 선 귀. 열 두어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소년' 이다. 그리고 그가 마치 심술난 어린아이처럼 말하는 것도 들렸다. "이제 그만둬. 위협이라니, 기분 나빠." "흥, 네가 먼저 장난을 시작한 주제에. 게다가 아까 부를 때 냉큼 나타났으면 이런 일도 없잖아?" 유리카는 그가 나타난 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는 듯이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구슬을 든 손을 샘 위에서 치웠다. 구슬은 놀랍게도다시 처음의 약한 빛으로 순식간에 되돌아갔다. 주변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바람에 주변 사람을 한동안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신기해 죽겠다. 저런 구슬을 아까 보니 다섯 개도 넘게 갖고 있던데. 주위가 캄캄해지자 녹색 옷을 입은 소년이 손을 휘둘러 주변을밝혔다. 어떻게 했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그저 손이 허공을 가로지르자 주변이 밝아졌다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단말이다. 어쨌든 으스스한 기분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아 걸치고 있던 망토자락을 끌어당겼다. 유리카가 저렇게 막 말해대니까 무서운 기분이 좀 덜한 것 같긴 하지만 말야. "그래도 그렇지. 이스나에가 위협에 굴복하다니 이건 있을 수없는 일이란 말야." "그럼 굴복하지 말고 그냥 어떻게 되나 보지 그랬니?" 유리카가 쏘아붙이는 어조는 냉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뭐냐, 저번에 들판에서 만났다가 화가 나서 갈 때에도 저런 말투는아니었다고. "블로지스틴의 구슬을 쓰는 여자애라니……." 나이는 유리카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주제에 소년은 바위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한 말투로 그렇게 중얼대며유리카를 째려봤다. "내가 뭘 쓰든,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유리카는 구슬을 집어넣지 않고서 손에 그대로 쥐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스나에 소년 - 일반적인 이스나에의 나이에 비추어 생각했을 때 이렇게 부르는 게 적당할지는 모르겠지만 별달리 적당한이름이 없으니까 - 을 위협하는데 꽤나 효과적인 물건인 모양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정령의 구슬을 쓰는 거야?" "그런 것을 궁금해하고 있을 처지가 아닐 텐데. 내가 손 한 번잘못 움직이면 넌 다른 집을 찾아봐야 한다고." 우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물건이었다. 어쨌든 이스나에 소년은 유리카와는 상당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 필요한 질문은 내가 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일단 묻자. 네가 이 샘의 이스나에야?" 내가 말하자 소년의 고개가 이쪽으로 돌려지…… 는 대신에 내쪽을 향한 귀 한쪽이 가볍게 쫑긋거리면서 움직였다. 꼭 토끼 귀움직이는 것 같다. 참말 이상한 기술이다. 내 귀는 아무리 움직여보려고 해도 절대안되던데. "나는 이 샘, 메르농의 주인이야." "그럼 네가 장난을 쳤니?" 내가 두 번째 질문을 하는데 유리카도 소년이 귀를 움직이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더니 한 마디 했다. "무지개 껍질 엘프의 일족이시군?" 소년은 기분 상한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엘프니 뭐니, 난 이스나에지 그런 것들하곤 관계없어." "뭘, 이스나에가 되기 직전에는 엘프였음에 틀림없으면서. 귀를벌레 더듬이처럼 사용하는 무지개 껍질 엘프……." 소년은 이 이야기를 더 하는 것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리카의 말을 중도에 자르고 들어왔다. "원하는 게 뭐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그건." "너희들이 귀찮게 굴지 않고 썩 사라져 주는 게 내가 바라는 바야." "뭐라고? 이게 어디서 장난을 걸어 놓고 딴소리야!" "너 따위한텐 볼일 없어!" "볼일 없는데 왜 이렇게 되돌아오게 만들어!" 그것 참. 아무래도 이야기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야 할 필요성과 그리고그에 대한 중대한 사명감이 내게 느껴지는군. 유리카와 이스나에 소년이 한참 열이 올라서 노려보고 있는 사이로 나는 걸어 들어갔다. 두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내 쪽을 향하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양손을 들어올렸다. 한쪽은 유리카 쪽으로, 나머지 한 쪽은 이스나에 소년 쪽으로. 나는 이런 상황을 중재한다는 것이 꽤 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말했다. "둘 다, 그만하라구. 지금 앞서 상대방의 행동이 어땠냐를 가지고 감정 싸움하는 건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봐. 어때? 이스나에소년, 당신 이름 뭐야? 난 파비안 크리스차넨이고 켈라드리안을그저 지나가려는 단순한 여행자야." "누구 마음대로 켈라드리안을 지나가?" 나는 양쪽으로 똑같은 높이로 들고 있던 손 중 이스나에 쪽의손을 약간 더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자꾸 시비 걸래? 긴 말 안하고 저 그…… 구슬이라는 걸 그냥떨어뜨려 버리는 수가 있어." "……." 소년이 입 다물고 있는 동안 유리카가 입을 열었다. "난 유리카 오베르뉴. 고상하게 나오는 상대에게는 한없이 고상한 사람이지." 나는 이번엔 유리카 쪽의 손을 약간 들어올렸다. 양쪽의 높이가같아졌다. "유리…… 싸울 필욘 없단 말야." 둘은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난 주아니. 켈라드리안을 지나가고자 하는 로아에지." "로아에?" 주머니 밖으로 주아니가 뾰족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스나에의 표정이 묘했다. "로아에가 여행을 한다는 이야긴 처음 들어보는데?" "내가 그 첫 번째 로아에야." 흠. 주아니의 표정은 꽤나 자랑스러워 보여서 나는 속으로 좀 웃겼다. 하긴, 저렇게 작아서는 여행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아니겠다. 게다가 낯까지 가리니(그게 주아니 혼자의 성격이 아니라 로아에 족 전체의 특징이라면 말이다) 누굴 따라서 여행하는것도 쉽지 않을 거고. 주아니와 나, 그리고 유리카를 번갈아 보던 이스나에 소년은 끼고 있던 팔짱을 풀더니 포기했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하긴 포기하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어. 자기가 어차피 처음부터 설명해줘야 하는 입장이었잖아. 어쨌든 그는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 좋아. 난 아르단드. 메르농의 주인이자 켈라드리안의 이스나에. 이 곳에 살아온 지 15년 정도밖엔 안 되지만 그 동안 여길 찾아온 인간은 처음 보는군." "용건은?" "너희들을 잡아놓는 것." 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나 뿐 아니라 유리카마저도 눈을 깜박거리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아르단드를 쳐다보았다. "왜?" "부탁을 받았어." "누구한테?" 아르단드는 입끝을 일그러뜨리면서 거만한 표정이 되었다. 마치대단한 비밀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꼬마 소년의 표정 같았다. 그는 샘 뒤에서 우리 앞으로 걸어나왔다…… 아? 그는 샘 위를 그대로 걸어서 가로질러왔다. "물위를 걷네?" 내가 순진하게 탄복해서 그렇게 말하자 아르단드는 더욱 잘난체하는 표정이 되어서는 손가락을 들더니 우리 앞에 대고 까딱거렸다. "너희들을 가지 못하게 여기 붙잡아 놓아 달라고 부탁한 이들이있었어. 보아하니…… 돌려보내는 것도 아마 내 몫이 될 것 같지만. 어쨌든 이제 뭐, 시간이 거의 다 됐어. 그러니까 내가 말해준대도 상관없겠지. 거기다가 내가 잡고 있기로 한다면 너희들이 도망칠 능력이나 있겠어?" "우리가 여길 떠날 능력이 없는지는 몰라도, 너를 떠나게 할 능력은 충분하지." 유리카의 눈이 손가락 사이의 붉은 구슬과 함께 감정적으로 반짝였다. 빛이 울렁거리며 손가락 사이에서 뿜어져 나왔다. 아르단드는 기분 나쁜 듯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겁이 나지 않는건 아닌 모양이었다. "…… 정령사인가?" "네가 알 거 없고, 빨리빨리 대답이나 해. 누구야? 왜 우리를붙잡는 거야?" 아르단드는 드디어 내뱉듯이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내놓았다. +=+=+=+=+=+=+=+=+=+=+=+=+=+=+=+=+=+=+=+=+=+=+=+=+=+=+=+=+=+=+=한동안 안 보이던 광고 메일이 요즘 자주 날아옵니다. 혹시, 이 게시판에서 아이디를 긁어서 보내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아이디 바꾼 뒤론 별로 글을 남기고 다닌 일이 없거든요. 오늘 컨디션이 무척 안좋습니다. ...... 뭘 먹어도 잘 소화도 되지 않고, 산소 부족성(?) 두통이 자꾸 생겨요. 게다가 졸립고, 얼굴에 뭐가 나고..... 죽을 때가 되었나..;...그저 해 보는 푸념입니다. 너무 신경쓰시진 마세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653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4 21:32 읽음:167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8) "페어리 족이 너희에게 볼일이 있댄다." 갑자기 유리카는 긴장한 눈빛이 되어 나를 쏘아보았다. 왜 나를?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골치 아프게 됐다, 파비안." 그러더니 유리카는 다시 아르단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한 마디 던졌다. "너 같은 애가 어떻게 이스나에가 되었나 모르겠다. 요샌 이스나에의 기준도 꽤 약화되었나 보지?" "너, 너……." 밤이 깊어졌다. 달 없는 하늘에 별들이 얼음 조각처럼 빛났다. 모르긴 해도 새벽 1시 정도는 되었을 것 같다. 우리 넷은 옹기종기 샘가에 앉아서 올지 안 올지 모를 페어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웃기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그냥 간대도 아르단드가 그냥 보내주지 않을 테니 걸어봤자 시간낭비요, 애매하게 기다리고 있자니 마치 우리한테 좋지 않은 볼일이 있는 듯한 상대를 친절하게기다려주고 있는 셈 아냐. 우리는 심심해서 말을 시작했다. "아이, 지루해." "그 페어린지 뭔지, 좀 빨리 오면 안 된대?" "아르단드,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해봐.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알 거 아냐?" "기다리는 게 제일 귀찮아." "당장 오라고 불러, 불러. 우리 겁 하나도 안 나." 아르단드는 어이가 없는 모양으로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뭐, 어이가 없는 쪽으로 하면 나도 만만치 않다. 아르단드가 앉아 있는 모양새를 보기만 하면 나도 황당해서 웃음이 나온단 말이다. 그는 샘의 수면 위에 마치 무슨 나뭇잎처럼 떠서 앉아 있었다. "꼭 그런 모양으로 앉아 있어야 되니?" "알만 해. 괜히 잘난 척 하고 싶어서 그런 거지, 아르단드?" "그냥 앉아 있어도 될걸, 그렇게 자랑하고 싶냐?" "이스나에가 잘난체 하고 싶어한다는 사례는 오늘 처음 확인하는 중인걸." 나와 유리카는 화 돋구기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번갈아 떠들어댔다. 이야기 내용은 대부분 아르단드를 바보 만드는 것들이다. 아르단드는 뾰족한 귀를 이리 움직였다 저리 움직였다 하면서 우리 사이에서 소외당한 채 어쩔 줄 몰라했다. 특히 유리카는 화풀이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아르단드 너, 페어리들의 하인쯤 되는구나, 그렇지? 요새 켈라드리안의 패권은 페어리들이 쥐었나 보지? 난 켈라드리안 하면 이스나에의 숲인 줄 알았더니만." "너, 말이면 단줄 알아!" "오오, 드디어 화나셨구나?" 유리카의 목소리가 극도로 비꼬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중인데 갑자기 가만히 있던 주아니가 주머니 속에서 꼼지락대면서 나를 불렀다. "파비안, 파비안. 누가 와." 유리카도, 아르단드도 주아니의 말을 들었다. 모두들 두리번거리는 눈에 어두운 숲 쪽에서 어렴풋한 그림자가 비쳤다. 하얀 그림자? 조그맣고 하얀 불빛 같은 것들이 덩어리져 왔다갔다하는 것이보였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저게 페어리야?" 아르단드가 비꼬았다. "넌, 페어리도 처음 보냐?" "난 18년의 기억밖에 갖고 있지 않은 인간 소년이야. 너같은 몇백년 산 귀신 나부랭이가 아니라." "너, 너……." …… 나도 유리카와 비슷해져 가고 있었다. 유리카도 일어섰다. 그러더니 아무 대책 없이 있는 나와는 달리옷섶 안쪽에서 뭔가를 꺼냈다. 어라, 저건? "유리카, 그걸로 뭘 하려고?" 유리카가 꺼낸 건 내게서 받아간 파란 구슬이 든 주머니였다. 유리카는 주머니를 열고 보석을 꺼냈다. 그리고는 왼손바닥에 보석을 얹어 놓고는 하얀 그림자들이 떠돌고 있는 숲 쪽으로 내밀었다. 이제 하얀 불빛들은 훨씬 많아져 있었다. 수백 개는 되어 보였다. 그것들이 숲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쪽을 향해 유리카가 입을 열었다. 아르단드한테 말할 때와는달리 상당히 진지한 말투였다. "너희들, 이것 때문에 볼일이 있다는 거야?" 헤, 저 보석이 페어리와 무슨 관계란 거야? 그런데 갑자기 아르단드가 샘의 수면 위에서 벌떡 일어나더니유리카에게 소리쳤다. "저 중에는 여왕이 계실지도 모르는데 지금 반말을 하는 거야?" 유리카는 예상대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불빛들이 가까워졌다. 거의 2큐빗 전방으로 다가오기 전 까진 도대체 형체라고는 보이지가 않아서 나는 눈을 비벼가며 계속 집중해서 보느라 머리가 아파지려고 했다. 그저 하얀 불덩어리들을 계속 쳐다보자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불빛들의 크기는 꽤나 다양했다. 주먹만한 것, 달걀 만한 것, 접시 만한 것…… 그 중에서 큰 것은 거의 둥그런 방패 만했다. 그, 팔에 다는 종류 말이다. 그런빛덩어리들이 가까이 다가오니 정말이지 눈을 똑바로 뜨기가 어려웠다. 나는 눈도 쉬게 할 겸 아르단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페어리들은 원래 평소에도 저렇게 눈 아픈 빛을 내냐?" "밤이니까 그런 거야. 그리고 오늘같이 어떤 방문객에게 볼일이있을 때 그들의 권위를 위해서 치장을 했다고 봐도 되겠지." "그런 치장이라면 좀 자제해 줘도 괜찮은데." 내 중얼거림에 아르단드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쳤다. "저건 저들 종족의 권위를 나타내는 거야. 너를 위해서 저러고있는 게 아니라구. 괜찮다니, 웃기지도 않는구나." …… 아마 아르단드는 나한테도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었다. 춤추는 빛무리들. 숲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고 있던 그들이 이윽고 가까이 모여둥글게 무리 짓기 시작하자 그것은 커다란 빛의 공이 되었다. 백열광의 공이다. 그 안에 무수한 작은 사람들의 윤곽이 오가고 있었다. 희미한, 잠자리 같은 날개가 달린 사람들이었다. 참으로 희한한 광경이었다. "놀랍고도, 눈 아픈데?" 나는 솔직한 감상을 말하고는 저들과 싸우게 된다면 뭘 어떻게해야 좋을 지에 대해 궁리하기 시작했다. 검으로 대적한다는 것은말이 안될 것임에 뻔했다. 날아가는 새, 아니 나비나 잠자리를 검으로 잡는다는 게 말이 되나? 더구나 내 검처럼 큼직하고 묵직한녀석을 갖고서 말이다. 활? 갖고 있지도 않지만 역시 불가능해 보였다. 혹시 꼭 매달아놓고 쏘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러니 내가 갖고 있는 슬링 역시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궁극적으로 혹시 저들이 뭐 이상한 능력이라도 갖고 있으면 정말 대책 없는 거 아냐? 저렇게 빛을 내고, 또 날아다니고 어쩌고하는 거 보면, 게다가 샘의 이스나에라는 자에게 심부름(?)도 시키고 하는 거 보면 뭔가 대단한 존재들일 지도 모르잖아? 아…… 그냥 확 그물 같은 걸로 싸잡아 버리면 아주 제격일텐데. 지금은 저렇게 한꺼번에 몰려 있으니까 큼직한 그물로도 잡고도 남을 거야. 한 명과 마주쳤다면 촘촘하고 조그마한 그물이 필요하겠지만…… 어? 갑자기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무엇을 원하지? 싸움인가, 대화인가?" 유리카는 아르단드가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지든 말든 관계치 않고 여전히 반말로 대하고 있었다. 하긴 그러고 보면 유리카가 지금까지 존대를 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것 같긴 하다. 본래 존댓말이란 걸 모르는 건가? 빛무리들이 갑자기 선형으로 죽 펼쳐지기 시작했다. 빛무리들은 순식간에 가로로 뻗친 긴 끈이 되어서 우리를 반원형으로 둘러쌌다. 어쩌면 선형보다는 구슬을 엮은 반지나 왕관 모양이라고 해도 좋겠다. 선 중앙쯤에 큼직하게 무리 지은 둥그런무리들이 있었다. 유리카가 그 쪽을 쏘아보고 있어서 나도 그 쪽을 바라보았다. "……." 페어리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볼일이 있다며? 볼일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유리카가 둥그런 무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것을 보고 나는 쟤를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속으로 고민했다. 이런 문제에관해선 나보다 훨씬 잘 아는 것 같은데 말야. 유리카는 그들과 1큐빗 조금 더 되는 사이를 두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서 유난히 커다란 빛을 내고 있는 한 페어리와 그 주위의 무리들을 잠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너는 여왕이 아니구나. 말을 전하고자 왔으면 빨리 전해라.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쓸데없는 시비를 하기보다는 그 쪽이 나을터." 헤에……. 저렇게 말하는 유리카는 마치 어느 나라 공주라도 되는 것 같아보였다. 다시 말해 말투가 아주 엄숙하고도 고압적이라, 말대로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다. 저렇게 말하다니, 더구나'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이라니?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면서 페어리가 뭐라고 답할 것인지에 귀를 기울였다. +=+=+=+=+=+=+=+=+=+=+=+=+=+=+=+=+=+=+=+=+=+=+=+=+=+=+=+=+=+=+=옛날에 산 음악 테이프들을 이리저리 돌려 들으면서 글을 씁니다.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 때 좋아해서 샀던 것들이죠. 요즘은... 테이프는 잘 안 사고 CD를 사거나, 아니면 다운받아서 듣죠. 옛날 음악을 새삼 듣는 건, 독특한 맛이 있습니다. 언젠가 글쓰면서 들었던 음악 이야기를 잡담 시리즈로 써 볼까, 하는 마음이 지금 생기려고 합니다... ^^(사실, 인물 이름들의 유래를 시리즈로 쓰려는 계획도 있는데... 쓸데없는 계획만 는다... ^^;)지금 TOTO의 I'LL BE OVER YOU가 나오는군요. ....as soon as my heart stops breakin' anticipating.... 오랜만에 추천해주신 분, 덕택에 힘이 나네요. ^^이걸 보고 동생녀석이 말하는군요, 누나는 운이 좋대요- ^^(운이 좋다기보다는 좋은 분들이 많은 거죠)힘 내야겠죠? 100회가 얼마 안 남았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760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5 22:39 읽음:164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9) "……." 소곤대는 소리, 재잘대는 소리. 그러나 어느 것도 대답은 아니었다. 페어리들은 끊임없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렇게 엄숙한대열을 짓고 있는 가운데서도 조그마한 소음들이 계속 흘러나왔다. 뭐라고 하는 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리고 끊임없이 날개를 파닥이고, 조금씩 꼼지락거렸다.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처음에 유리카가 들었다는 소리가 저들의 소리였을까? 꼬마들이웃는 것 같은, 재잘대는 소리 말이다. "알았어." 유리카는 마치 나는 듣지 못한 대답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있어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리카는 내 쪽으로 고개를돌렸다. "파비안, 아무래도 오늘 길을 가긴 틀린 것 같네. 이들을 따라가야 할 것 같아." "따라가다니, 어디로?" 이게 내가 가장 궁금한 점이다. 설마 눈을 속여서 벼랑으로 이끌어가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옛날 페어리나 엘프에 관련된 이야기들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나는 들어서 알고있었다. 저들이 그런 의도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대화로 풀자구, 대화로 풀면 되잖아. "나도 몰라. 저들의 여왕이 자리를 만들어 두었다나봐. 어쩌면재판정이 될 지도 모르고, 어쩌면 연회가 될 지도 모르지. 일단따라는 가야겠어." "왜?" 설마, 여기서 빙빙 도는 수밖에 없어서 따라가야 한단 건 아니겠지? 유리카가 약간 웃더니 내 기대와는 전혀 어긋나는 대답을 한다. "페어리 여왕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숲을 지나가는 사람의예의가 아니거든." 하얀빛들로 불이 켜진 것 같은 숲. 페어리들은 날개가 달렸기 때문인지 무척 이동이 빨랐다. 그 뒤를 따라가는 나는 금세 숨이 차 올랐다. 요정처럼 몸이 가볍고 날씬한 유리카가 저들을 따라가는 건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커다란검에 체인 메일까지 입고 배낭을 어깨에 멘 내가 그렇게 걸음을재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주아니가 끊임없이 말을 걸어대는 상황에서 말이다. "파비안, 무서워. 정말 따라가도 되는 거야? 가다가 절벽으로떨어지거나 그런 거 아냐? 지금은 밤이란 말야. 밤의 숲은 저들의세계라고." 주아니도 나와 같은 걱정을 하다니 황당했다. "…… 절벽으로 떨어진대도 넌 내 위에 떨어질 테니 죽을 걱정은 없잖냐?" "혼자 살아남는 건 필요없어." "……." …… 주아니는 아무래도 나보다 더 전설이나 모험 이야기를 많이 들은 모양이다(로아에가 책을 읽는다는 건 왠지 어불성설인 것같으니). 저런 대사는 함께 다닌 지 몇 년씩 된 절친한 동료들이 위기에닥쳐서 하는 대사 같은 거란 말이다. 솔직히 너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기쁘긴 해도…… 좀 이르지 않냐? 그렇게 심각한 상황으로생각할 필요 까진 없는데. 갑자기 나까지 일없이 장엄한 기분이들게 하잖냐. 모험 이야기를 좋아하는 로아에라. 확실히 저렇게 유별나니 이렇게 나를 선뜻 따라나선 것 같긴 하지만 말야. 나뭇가지들이 목과 머리, 팔 등을 찔러와서 걷기는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 우리가 걷던 길에 비해 나무가 지나치게 빽빽했다. 숲에서도 은밀한 장소에 가기 위해선 이런 길 아닌 길을 지나가야하는 모양이다. 정말 이건 길이 아니야. 도끼가 있다면 나무를 베면서 가야 할 상황이었다. 도끼 이야기를 하자니, 아까 떠오른 사람이 다시 떠오르는데 말씀야. 그런 손도끼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탁 트인 둥그런 언덕에 우리는 도달했다. 팔다리 움직이기도 힘들만큼 울창한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갑작스럽게 나타난 널찍한 공간이라 팔다리를 쭉 펼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까지 느껴졌다. 나무숲으로 빙 둘러진, 반경 30큐빗 정도 되어 보이는 거의 완벽한 원형에 가까운 언덕이었다. 그 위에는 별로 꽉 덮인, 보석이불 같은 밤하늘. "다 온 건가?" 밤공기가 싸늘하게 감돌고 있었다. 게다가 언덕 위라선지 바람이 좀 분다. 잠시 흘렀던 땀이 금세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헤치고 오느라 고생은 할만큼 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둘러보는 주변의 숲은 심연처럼 아름답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마치 펼쳐진 흑녹색의 바다 같다(바다라고는 그림으로밖에 본일이 없지만). 땀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이마를 소매로 훔치면서 나는 힘차게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짧게 끊어진 숨을 연이어 내뱉었다. 일행은 잠시 언덕 입구에 멈춰선 채 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약간 흐려진 눈으로 돌아보는 숲은 서로 얽히고 섥힌채 수백 년을 있었던 그 모양 그대로, 방금 전의 침입자를 잊어버린 것처럼무심한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애써 헤치고 왔건만, 내가거기를 통과해 왔다는 흔적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안개 때문에 열 발짝 앞은 이미 흐릿한 빛에 싸여 있었다. 숲은푸르스름했다. 그리고 싸늘하다. 망토를 걸친 나도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데 유리카는 춥지 않을까? 문득 쳐다보니 하얀 빛덩어리들에 둘러싸인 유리카는 그 빛들때문엔지 그다지 추워 보이지는 않았다. 뺨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거의 다 왔대." 유리카가 그들과 뭔가 이야기하는 듯 하더니 한참만에 나를 돌아보고 한 말이었다. 다 오면 다 온거지, 거의는 뭐야? 이윽고 페어리들의 일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빠르지 않게, 천천히 언덕 꼭대기로 올라갔다. 걸으면서 내려다보니 아마도 지금이 봄이었다면 꽤나 아름다운 언덕이었을 듯하다는생각이 든다. 수많은 풀씨들이 깨어나지 못하고 언덕 아래에 아직잠들어 있었다. 언덕 한가운데에 이르자 나와 유리카를(물론 주아니도) 가운데두고 빛무리들이 주변을 둥글게 빙 둘러쌌다. 뭘 어쩌려는 걸까? 주머니 속의 주아니가 불안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페어리들은 우리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꽤나 엄숙한 느낌이 들게 하는 원형의 춤이다. 서로서로 손에손을 잡고 있는 페어리들은 그 크고 작은 불빛에 관계없이 커다란구슬 팔찌와 같은 빛고리를 이루고 있었고, 느리게 느리게 돌고있었다. 빛이 점차로 커지는 것 같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걸까? 파닥이는 날개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느껴지는 것은 그저 착각일까? 유리카의 입에서 조그마하게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것도 내 착각일까? …… 요정 여왕에게 초대된 이들은평생 잊지 못할 것들을 보게 된다네. 새벽의 베일 같은 그들의 날개를 보았는가? 밤새의 지저귐 같은 그들의 웃음소리, 들었는가? 별들의 머리장식, 밤을 밝히는 작은 초롱천진스런 소란, 벌새의 지껄임, 귓가에 키스하는 나비어디선가 향긋한 나무딸기 주스의 냄새가 나네…… 나는 그제야 아까 전부터(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들려오고 있는 희미하고 이상한 멜로디에 맞춰 유리카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음악 소리는 어디에서 들려오는 거지? 게다가 회전 속도가 점차로 빨라진다. 주아니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눈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아." 나도 그래. 그러더니 주아니는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속 편해서 좋겠다. 유리카를 보니 가볍게 눈을 감고 있었다. 나비 날개 같은 속눈썹이눈꺼풀 아래로 내려앉아 있었다. 나도 눈을 감을까? 눈도 아픈데. 눈을 감으니 하얗게 되어버린 눈앞에 빛무리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희고 검은 것들이 뒤섞여 어지러웠다. 유리카의 노래 내용 때문인지, 정말 코에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도같은데. 진짜 나무딸기 냄새 말이야. 여름의 포도에서 나는 향긋하면서도 새큼한 그런 향기. 귓가에는 그 희미한 음악 소리가 계속 들린다. 조금씩 커지는 것도같다. 악기 연주인지, 노랫소린지, 휘파람을 부는 듯도 하고 바람에풀이 스치는 것도 같은 소리. 조금씩 빨라지는 듯한…… 마치 춤을 추면 좋을 것 같은 음악. 갑자기 눈앞이 지독하게 밝아지는 바람에 나는 놀라 눈을 떴다. "아……."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파비안, 저게 뭐야? 뭐지?" +=+=+=+=+=+=+=+=+=+=+=+=+=+=+=+=+=+=+=+=+=+=+=+=+=+=+=+=+=+=+=오랜만에 비가 오는군요. 빵가루같은...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761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10)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5 22:39 읽음:165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10) 주아니가 조잘거리는 소리가 환영처럼 잦아든다고 느끼면서 나는주변을 휘둘러보았다. 풍경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겨울의 마른 풀 언덕이, 한여름 녹색 초지로 바뀌어 있었다. 마법인가 싶어 눈을 몇 번이나 비볐다. 하긴 마법의 일종일는지도모르지. 그렇지만 내 정신으로 그걸 깰 만큼 시시한 마법이 아님에는틀림없었다. 몇 번 눈을 비비고 봐도 주변 풍경은 그대로였다. 지금이 약초 아룬드라고 해도 믿겠다. 들풀과 꽃들이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 융단처럼 푹신한 잔디를 만드는 달. "멋진 솜씨야……!" 유리카의 탄성에 그제야 그녀를 돌아봤다. 유리카는 나처럼 가만히서서 풍경을 감상하고 있지 않았다. 반짝이는 잎새들과 빨갛고 노란꽃들이 가득한 밤의 정원으로 그녀는 달려 내려갔다. 멈추고, 자리에주저앉아 풀들을 만졌다. 어느새 훈훈해져버린 여름밤처럼 향기로운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페어리들은 어디로 갔을까? 고개를 조금 들어보니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허공에 빛나는 빛의링이 만들어져 있었다. 달 없는 밤에 달빛보다 환했다. 바로 우리가서 있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던 그것은 조금씩, 아래로 내려왔다. 귀에 들려오는 소리들, 조그맣게 속삭이고 까르륵대는 꼬마 아이들의 웃음소리 같은. 유리카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멋진 구경을 시켜 줘서 정말 고마워. 충분히 기분이 좋아졌어. 무례하게 불러 세운 것도 다 용서할 것 같아." 유리카는 허공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어딜 보고 말하는 거지? 내가 두리번대고 있는데 다시 유리카가 말했다. "그럼,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지?" 그제야 나는 발견했다. 하늘에 떠 있던 빛고리들이 여기 저기에서 속속 땅 위로 내려서고있었다. 그리고 내려서는 즉시 그들은 작은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처음에 빛의 공 속에서 희미하게 보았던, 손바닥만한 모습이 아니라약 1큐빗 반 정도는 되는 정말 '작은 사람' 이라고 부를 만한 모습들이었다. 날개는 여전히 달려 있었지만 그건 이제 잠자리에 비교하기에는 너무 커져 있었다. 그래도 그들이 내는 희미한 빛 - 작았을 때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어두운 빛이라 할 만했지만 - 속에서 그 얇은 날개는노래에 나오는 '새벽의 베일' 이라는 이름에 손색없는 연약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키에 걸맞은 아주 날씬한 몸과 가느다란 팔다리들을지니고 있었다. 그런 날개로도 충분히 그 몸을 하늘에 띄울 수 있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아르단드의 모습도 그들에 비하면 '날아갈 것같은' 이란 표현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윽고 그들은 수백의 작은 사람들이 되었다. 유리카와 내 사이에는 그들이 가득 차 있어 서로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예의바르게 길을 내주었다. 그래서 내가 유리카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옆으로 가자마자 유리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정신 바짝 차려. 아름답지만 장난꾸러기이고, 선량하지만 교만하며, 천진하지만 그만큼 화도 잘 내는 종족이니까, 저들은. 일단은 우리를 초대해 줬지만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어." 잠깐 사이에 자리가 정리되었다. 내가 미처 눈치채기도 전에 이리저리 움직이던 작은 사람들의 손으로 꽃들과 여름 목초로 쌓아올린 높다란 자리가 만들어졌다. 확실히왕의 옥좌와는 다른 멋을 지닌 자리였다. 보석이나 황금은 없어도 여름 들판에서 볼 수 있는 온갖 야생 꽃들이 거기에 있었다. 데이지,앵초, 수레국화, 삼색제비꽃, 은방울꽃, 미나리아재비, 참제비고깔,매발톱꽃, 백리향, 그리고 야생 장미꽃. 하얀빛을 몸에서 내는 키 작은 친구들은 사뿐사뿐 돌아다니면서 몸을 나뭇잎과 꽃들로 치장했다. 길게 엮어진 잎새들을 띠처럼 두르기도 했고 화관을 머리에 쓰거나 귀 뒤에 흰 꽃을 꽂기도 했다. 그들의머리카락은 마른풀처럼 부석부석하고 윤기는 없었지만 개구쟁이처럼흐트러진 그대로 특이한 매력이 있었다. 꽃과 나뭇잎 장식이 가장 잘어울릴 것 같은 풀어헤쳐진 금발 아래에는 일고여덟 살 먹은 아이처럼 조그마한 윤곽의 손바닥만한 얼굴들이 있었다. 제각기 하늘하늘하고 흰 치마 같은 천이나 팔이 드러난 녹색의 낡은 옷을 걸치고 있는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저들끼리는 몇 번이고 속닥이면서 웃기도 했다. 금빛, 헝클어진 머리의 아이들. 여름밤의 아이들. "여왕이 앉을 자리야." 유리카가 잎새와 꽃으로 된 높직한 단을 놀란 듯이 바라보고 있는나에게 알려 주었다. 마치 마술처럼 순식간에 만들어진 그 단 한가운데에 큼직한 살아있는 나무가 천천히 돋아나는 것이 보였다. 또 이상한 마법인가? "저…… 지금 움직이고 있잖아?" "응. 마법의 힘으로 빠르게 자라고 있는 거야." 나무가 자라는 모양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황당한 심경을 뭐라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게다가 나무의 모양이 퍽 기이했다. 마치 처음부터 누가 앉도록 다듬어진 것처럼 단 위에 이르러 마치의자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누군가가 그 위에다가 풀방석을 가져다 깔았다. 나무는 그 위로도 계속 돋아나더니 순식간에 가지가 양쪽으로 죽죽 늘어졌다. 나무가 다 자라고 나자 그제야 나는 무슨 나무인가를 알아보았다. "사과나무다." "오늘은 사과주를 마실 건가 보지." 유리카의 목소리는 느긋하고 흥겹게 들렸다. 그러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꿈같은 장면들을 나는 유리카처럼 느긋한 심정으로 지켜볼수는 없었다. 반은 날아다니고 반은 바닥을 가볍게 차면서 통통 튀는 것처럼 돌아다니고 있는 페어리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경험이다. 눈을 뜬 채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언덕 가득한 작은 불빛들, 향긋한 꽃, 풀, 그리고 과일의 향기, 갑자기 달라져버린 계절. 딱 하나,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면 하늘의 별자리였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의 별들은 겨울의 모습 그대로 빛나고 있어서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우리가 방금 빠져나온 숲조차도 여름의 빛으로 바뀌어 있는데 말이다. 흥분되어 있기는 주아니도 마찬가지였다. "신기해, 신기해. 놀라워, 놀라워." 나도야. 이윽고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나와 유리카가 나란히 선 앞쪽에 풀꽃 단이 있고 그 위의 생나무의자(?)를 기준으로 페어리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늘어섰다. 그들은인간들이 열병식을 할 때처럼 그렇게 규율 있게 늘어서지는 않았다. 그저 모여 있다는 느낌만 줄 정도로, 그렇게 자유롭고 삐뚤삐뚤한 줄을 만들었다. 여전히 웃고 소곤대면서. 그들에게 그 이상의 질서를주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꼬마 아이들을 똑바로 줄 세우는 것이어려운 것처럼. 그런 그들도 문득 음악 소리가 멈추고 바람 소리조차 고요해졌을때에는 소곤거림을 뚝 그쳤다. "여왕이 나올 차례야." 나는 여왕은 어떻게 다르게 생겼을까 싶어 잔뜩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목초를 쌓아올린 단을 주시했다.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 여왕이라니, 아마도 이들 페어리 일족들보다 몇 배는 아름답겠지? 그리고멋진 치장도 했겠지? 아냐, 혹시 나이 많은 할머니 여왕인 건 아닐까? 페어리들도 늙나(왠지 바라고 싶지 않은 예상이로군)? 다행히 내 기대가 모조리 틀리지는 않았다. "봐." 어디서 나타날까 궁금해서 주위 숲이나 하늘 등등을 두리번대고 있는 나를 툭툭 치면서 유리카가 단 쪽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하늘에서 달이라도 떨어져 내린 것 같은 강렬한 광채에 나는 눈을감아 버렸다. 주변이 한 순간, 낮처럼 환해졌다는 착각이 눈을 감은 내 머릿속을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눈을 떴다. "여왕…… 인가?" 내 질문은 필요가 없었다. 페어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나도 얼떨결에 같이 무릎을 꿇으려고 하다가 유리카가 꼼짝하지 않고 똑바로 선 것을 보고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혼란에 빠졌다. 혼란에 빠진 내 귀에 유리카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단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말하고 있었다. 단 위는 아직도 찬란한 빛으로가득했다. "밤의 어린아이들을 다스리는 여왕이여, 그들의 웃음과 속삭임을지켜보는 자애로운 광채의 어머니여, 그대의 땅에 초대된 기쁨은 실로 겨울 속에 숨어 있던 한 조각의 여름을 발견한 것에 비할 만하나,내가 그 어떤 권위 앞에서도 무릎을 꿇을 수가 없는 자임을 이해해주겠소?" "저게 무슨 말이야?" 나하고 똑같은 의문을 가진 주아니의 말소리가 나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바람에 나는 더 말할 필요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아무앞에서도 무릎을 꿇을 수 없다' 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려고 애썼다. 물론 생각해 본다고 알 수 있을 리 없다. 괜히 머리만 아파지는구나.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프랑드(Prande : 봄)의 신부, 검은 봉인의 공주 유리카 오베르뉴. 세월의 강을 건너 이곳까지 잘 와 주었소. 그대의 특권은 내 잘 알고있지." 고귀한 느낌을 주는, 온화한 목소리. 게다가 특이한 억양의 가늘고고운 목소리였다. 이윽고 빛이 걷히고 목소리의 주인공의 얼굴을 내 눈으로도 볼 수있게 되었다. 무릎을 꿇었던 페어리들은 여왕이 한 번 손을 젓자 자리에서 다시 일어섰다. 나무 왕좌 위에 앉은 페어리의 여왕이 우리를 굽어보고 있었다. +=+=+=+=+=+=+=+=+=+=+=+=+=+=+=+=+=+=+=+=+=+=+=+=+=+=+=+=+=+=+=페어리는 어떻게 생겼을 거라고 생각해 오셨어요? 그리고 페어리 여왕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아마, 심술궂은 꼬마들이겠지요? 아름다운 여름의 가벼운 환영들. 망각의 안개로 가린, 풀녹빛 커튼 뒤에서....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862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1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6 20:18 읽음:165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11) 금빛 고수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자그마한 얼굴의 소녀, - 절대!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 빨간 나무 열매와 흰 꽃으로 장식된 관을머리에 썼고 푸른 안개처럼 하늘거리는 하얀 옷의 무릎 위에는 제비꽃 화환이 얹혀 있다. 목소리에서 받은 느낌과는 달리 마치 열 네댓살 먹은 소녀 같은 모습의 여왕을 보고 나는 아연해져 버렸다. 그리고 내가 아연해진 이유는 한 가지 더, 여왕의 등에서 천천히나부끼듯 움직이고 있는 날개의 모양 때문이었다. 그건 다른 페어리들의 잠자리 날개 같은 긴 날개와는 달리 커다랗게 펼쳐진 나비의 날개였다. 무늬 없이, 티 하나 없이 하얀. 저마다 날개를 움직이며 모여 선 환영 같은 페어리들, 그 앞의 녹색 제단과 왕좌, 그리고 나비 날개의 여왕. 모두 다, 마치 그림에서한 번 정도 보았을 법한 모습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런 그림이라고는 한 번도 본 일이 없어서 이렇게 두 배로 신기해하고 있지만말이다. 나와 유리카(그리고 주아니)는 꿈속의 한 장면 그 앞에 불려 와 있는, 지금의 풍경에 가장 낯선 모습인 인간들이다. 유리카가 머리를묶었던 끈을 풀었다. 페어리들의 금빛 머리카락과는 또 다른, 지금은지고 없는 달빛 같은 그녀의 은발이 마치 작은 시냇물처럼 흘러내려반짝였다. …… 그렇게 하고 보니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나 혼자가되어버렸다. 아참, 주아니도 있군. "그 옆은…… 그대가 찾던 자인가?" "그렇소." 나? 유리카를 봤다. 유리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분명 '그렇다' 고 말하고 있었다. 유리카가 나를 찾아다녔다고? "그렇군. 소개를 부탁해도 되겠는지, 인간의 소년이여."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른의 목소리는 참 낯설었다. 얼굴하고 조화가 안 되니까 아예 딴 데서 들려오는 소리 같잖아. 게다가그 말투로 할 것 같으면 여왕이라 당연한 건지 몰라도 하여간…… 곤란한 심정이 들게 한다니까. 그건 그렇고, 나 역시 반말을 하면…… 안되겠지?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입은 저절로 열려서 말하고있었다. 이 이상한 언덕에 있자니 나까지 좀 이상해진 것 같다. "파비안 크리스차넨, 엘라비다 족이며 이스나미르의 국민, 엠버리영지 하비야나크 마을 출신입니다. 켈라드리안을 안전히 지나갈 수있도록 여왕님의 가호를 바라는 미거한 여행자입니다." 으…… 이건 내 말투가 아닌데. 평상시 읽은 책들한테 이 영광을돌리…… 거나 말거나, 입밖에 내고 보니 정말 무안한 말투군. 내가 말해놓고도 온 몸을 긁고 싶어져 있는데 여왕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어쩌면 온 몸의 가려움을 참는 대가 정도는되는 말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여왕이 입을 열었다. "나는 켈라드리안의 페어리들을 보살피는 자, 여왕 에졸린이라고하오. 이곳 춤추는 언덕 바드 댄스(Bard Dance)는 내 영지의 중심이고요. 그대들을 이렇게 양해 없이 불러 세운 점, 일단 사과하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저, 그……." 내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 유리카의 대답이 빨랐다. "마법이 깃든 아름다운 땅, 그대의 영지를 이렇게 방문하여 예상치못한 멋진 구경을 한 것으로 사과는 필요없을 만큼 보상이 되었다고생각하오. 밤의 숲의 보석인 페어리 일족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 영광도 물론 함께." 진짜 모습이라. 나는 새삼 우리를 둘러싸다시피 한 페어리들을 바라보았다. 일반적으로 손바닥만한 크기에 날개 달린 꼬마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지금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한 번도 들어본일이 없다. 더구나 페어리의 여왕을 만났잖아. 확실히 쉽게 못할 경험이기는 하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초대에 재차 감사드립니다." …… 나는 정말이지 내 예상보다 훨씬 말을 잘 하고 있었다. 점원술 개론이라는 게 생긴다면 나는 이 학문이 어디 가서나 말만큼은 빠지지 않게 하게 해주는 놀라운 학문이라는 점을 반드시 선전해야겠다. 에졸린 여왕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떠올랐다. "그대의 솔직한 말투는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군요." "예?" "내가 아주 옛날, 까마득한 옛날에 본 어떤 사람과 참 많이 닮았군요." 페어리들은 대체 몇 살까지 산담. 그게 누군지 알 가능성은 전혀없을 것 같군. 혹시 우리 조상쯤 되려나? 나 말고도 여행 떠난 조상이 한 명도 없다는 건 말이 안되긴 해도, 이런 놀라운 경험을 한 조상이 만일 우리 가문에 또 있었다면 우리 가문도 꽤나 괜찮은 가문임에 틀림없었다. 내 공상을 깬 것은 언제나처럼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유리카의 말소리였다. "그럼 여왕이여, 우리를 아름다운 밤에 친절하게 초대하신 용건을말해 주시길 바라오." "서두르지 마시오, 봄의 공주. 손님들을 위해 일단 사과주를 좀 대접하고자 하는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리라 믿소만." 유리카 말대로 진짜 사과주네. 여왕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양손을 들더니 마법을 거는 것처럼 손을 허공에 흩뿌렸다. 그녀의 손에서 하얗게 빛나는 가루 같은것이 떨어져 내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왕좌, 사과나무 가지에서 주먹 두 개 만한 큼직큼직한 사과들이 불쑥불쑥 맺히기 시작한 것이다. "우와아……." 주아니가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에서 탄성을 지르자 여왕은 잠깐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일행이 한 사람 더 있군요." 주아니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대해선 굳이 설명하지않아도 될 것 같다. 그저 여왕의 '한 사람' 이라는 말에 '한 로아에'라고 응수했다는 것으로 간단하게 설명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에졸린 여왕은 빙그레 웃더니 덧붙였다. "로아에 일족의 방문자는 내 오랜 삶의 흐름을 거슬러 바라보아도오늘의 그대 이외에는 떠오르지 않는군요. 부디 아름다운 밤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 생각난 건데, 여왕은 나한테 하는 말투와 유리카에게 하는 말투가 달랐다. 낮춰 말하는 유리카에겐 자기도 역시 낮춤말을, 경어를쓰는 나에게는 똑같이 경어를 썼다. 주아니도 마찬가지다. 굉장히 평등한 걸 좋아하는 여왕이라고 해야 하나. 쩍- 쩌억-큼직한 가지들에서 툭툭 불거져 맺힌 사과들이 소리까지 내면서 생장을 마치더니 이번엔 가지에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물론 에졸린 여왕의 손길이 한 번 휘저어지자 사과들은 허공에서 멈추었고 여왕 주변에 있던 몇몇 페어리들이 다가가 사과 밑에 그들이 가져온 나무잔을 댔다. 그러자 또 한 가지 기적이 일어났다. 사과는 저절로 즙을 내어 나무잔에 담기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들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는 나와, 그저 생긋 웃으며지켜보고 있는 유리카 주변으로 다른 페어리들이 다가왔다. 그들은마술처럼, 아니 마술로 우리가 앉을 목초 더미 의자를 만들어 냈다. 앉아 보니 마치 푹신한 쿠션 의자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다. 꽤나 쓸만한 것 같은데, 나도 나중에 한 번 만들어 볼까. 어디선가 나무 탁자들도 나타났다. 굉장히 긴 탁자라 여왕의 자리에서 언덕 아래까지 닿을 정도다(그렇지만 길긴 해도 그다지 높지는않았다). 그 주변에 페어리들이 둘러앉았고, 우리 앞에는 따로 우리키에 맞는 탁자가 준비되었다. 희한한 일이 또 한 가지 있었다. 탁자와 의자 때문에 한눈을 파는 새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우리 앞에 놓인 나무잔에서 나는 냄새는 사과 주스가 아니라 분명 사과주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사과즙이 발효가 되어서 술이 됐다고?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는 기분이군. "와, 이 모든 게 다 마법인가?" 내가 진심으로 감탄해서 그렇게 말했을 때 여왕이 자기 앞에 잔이놓이는 것을 주의 깊게 지켜보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여왕의 잔은 허공에서 천천히 그녀의 손께로 내려앉았다. "과거에 전 세계에 어둠이 닥쳤을 때, 우리의 마법 가운데 중요한것들은 대부분 소실되어 버렸지요. 그 때는 당시 마법을 지니고 있던수많은 다른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페어리 일족에게도 위기가 닥쳤던 때였지요. 이렇게 숲에 은거하면서 잃지 않은 것을 지키려고 애써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도 그 때부터……. 그래서 지금 쓰는마법들은 모두 보잘것없는 것들에 지나지 않아요." 내 눈에는 전혀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모두 다 훌륭했다. 에졸린 여왕이 잔을 들었고, 나와 유리카가 따라 들었고, 페어리들이 잔을 들어올렸다. 향긋한 액체가 나무 잔 속에서 출렁거렸다. "예의바른 여행자와 봄의 공주에게, 결실의 별이 비치기를." "겨울 가운데, 아름다운 한 조각의 여름을 주신 켈라드리안의 페어리 일족에게 영원한 계속됨만이 있기를." 조금 이상한 인사였다. 보통 무궁한 발전이라거나 행복이라거나 그렇게 말하지 않나? 계속되기만 한다고 해서 축복이라고 볼 수는 없을것 같은데. 또한 에졸린 여왕이 유리카를 지칭하는 호칭들은 모두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이따가 여길 떠나게 되면 유리카에게 꼭 물어봐야겠다. 그검은 봉인의 공주니, 프랑드의 신부니 하는 소리가 다 뭔지. 사과주는 숙성된 맛이라기 보다는 신선하고 향기로웠다. 아마도 영원히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페어리들의 솜씨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들의 솜씨였다면 숙성이 덜된 술이란 분명 아주시고 떫은맛이 났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주아니를 위한 조그마한 -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나무잔까지 준비하는 걸 보면 참 사려 깊은 종족 같다. 유리카까지 말했다. "좋은 솜씬걸." 술이 한 순배 돌아가고 나무딸기와 호두 파이, 꿀, 개암 열매 같은것들도 식탁 위에 놓여졌다. 사람들이 잔치를 벌일 때처럼 푸짐한 음식들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산뜻한 맛이 있었다. 인간들은고기에 케이크에 하여튼 각종 솜씨를 부린 요리들이 상다리 부러지게나와야 제대로 된 잔치인 줄 안다니까. 이렇게 말하니 마치 나도 인간이 아닌 것 같네. "본래대로라면 음식이 돌아간 뒤에는 춤이 있기 마련이지요." 에졸린 여왕이 입을 열자 모두 조용해졌다. 그래도 먹던 것을 아예멈춘다거나 하는 식의 예의는 필요없었다. 필요한 이들은 입 안에 든것들을 씹었고 사과주 다음에 나온 펀치 잔을 들고 마시기도 했다. 펀치는 아몬드, 건포도, 레몬 등등이 들어간 딸기술 펀치였다. 여름에 정말 딱 맞는 음료수였다. 나는 슬슬 겨울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어하고있었다. 풀 냄새가 그렇게 싱그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할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하겠군요." 유리카는 펀치 잔을 마저 마시더니 내려놓았고, 나도 그렇게 했다. 또하나 놀라운 것은 우리가 펀치 잔을 탁자에 내려놓기만 하면 신기하게도 다시 잔이 가득히 차는 것이다. 편리한 것 같기도 한데, 왠지끝없이 먹게 될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좀 불안하다. 게다가 탁자에 내려놓는 것이 마법을 쓰는 사람한테 뭔가 수고로운 일을 시키게 되는기분이 들어서 내려놓기가 자꾸 미안하단 말씀야. 그저 먹고 싶은 만큼 나무통에서 퍼다 마시는 쪽이 내 취향엔 좀더맞는 것 같다. "두 사람을 부른 것은……." 여왕이 채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유리카가 다시 목에 걸린 주머니에서 보석을 내어서는 탁자 위에 탁 올려놓았다. 여왕은 말을 멈추어 버렸다. "이것 때문이신지?" +=+=+=+=+=+=+=+=+=+=+=+=+=+=+=+=+=+=+=+=+=+=+=+=+=+=+=+=+=+=+=뉴트럴 블레이드, 완결 축하드립니다- ^^긴 글을 다 끝내셨다니 부럽네요. 다음에도 좋은 글 쓰시길... 바드 댄스(Bard Dance). 이 부분을 쓸 때 엔야(Enya)의 라는 앨범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앨범에 보면 '바드 댄스'라는 곡이 실제로 있습니다. 이 앨범의 곡들은 실제로 굉장히 멋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오프닝 곡인 'The Celts'입니다. 아일랜드의 TV시리즈 'THE CELTS'의 주제음악이라더군요, 음반 자체가...(우리나라에선 종종 무슨 광고 음악으로 나왔던 듯..)꽤 오래 전 일이지만 우연히 TV에서 이 'The Celts'의 뮤직비디오를볼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너무너무환상적이어서...저는 가끔 꿈에서도 볼 정도입니다만일 기회가 되신다면.. 꼭 보세요. 켈트의 전설을 영상으로 옮겼을 때, 어떤 모습일지, 저로선 아무리 상상해 보아도 이것보다 더 완벽하지 못했어요. (아일랜드에서 했다는 TV시리즈가 너무 보고 싶다...흑흑...T_T) 켈트 신화라는 데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이거였습니다. 지금도 흐트러진 밀짚색 머리카락에 다람쥐처럼 잽싼 꼬마 소녀와,아마빛 수염을 발밑까지 늘어뜨린 왕이 가랑잎 낙옆 속에서 눈을 뜨는 장면이 눈앞에 생생합니다. 치렁치렁한 붉은 옷을 걸치고 백마를 탄 엔야도 ... 기회가 안 되시면..(솔직히 저도 다시 볼 기회는 못 잡았습니다)음악이라도 들어보시길...^^ 환타지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863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1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6 20:18 읽음:166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12) 여왕만 말을 멈춘 것이 아니다. 페어리 일족의 움직임 전체가 한순간에 멎었다. 그들의 눈길은 모두 우리를 향해, 아니 탁자 위의 파란보석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저게 뭐길래? "…… 유리카, 그대는 저것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에졸린 여왕이 가까스로 다시 말을 시작하자마자 유리카는 빠르게대답했다. "무엇을 묻는지 모르겠소." "저것을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소?" "적어도, 내가 저것을 봉인하지는 않았소." 여왕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페어리들은 저들끼리 속닥이면서뭔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이 보석에 대해 저들 나름대로 추측을 하는 모양이다. 적어도 나보다는 다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거 참새 그물 값으로 받은 건데요' 하고 대답하면 다들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진다. 솔직히 내가 할 말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잖아. 방금 전까지의 온화한 분위기와는 딴판인 정적이 흘렀다. 에졸린 여왕은 그 소녀 같은 얼굴에 심각한 빛을 띠고는 유리카가뭔가 대답하기를 기대하는 듯했고, 유리카는 그녀대로 여왕이 뭔가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내 생각에는 둘 다 할말이 없을 것 같다. 할 말이 있는 건 내 쪽이었으니까. 나는 가만히 목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주위에서 갖가지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 "아시다시피 사스나 벨의 가호를 받는 검은 봉인의 공주는 지상에존재하는 어떤 생명도 봉인해 넣을 수 있습니다, 여왕님, 저 엔젠을돌려받아 그 안의 봉인의 기운을 살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검은 봉인의 공주가 한 봉인이라면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봉인을 풀도록 명령해야 합니다." "그녀의 봉인이 아니라고 해도 어디에서 얻었는지 반드시 말하도록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라우렐란 님의 엔젠을 돌려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왕님. 결정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다른 수를 써서라도……." "저는 언제든지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왕님, 저는 뭘 할까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아참, 그럼 호두 파이 더 가져와도 되나요?(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그러고 보니 춤은 언제 추죠?(…????)" 페어리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말하기 시작해서 나는 말할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좀더 키가 크고 우아한 외모를 지니고 있던페어리들, 즉 에졸린 여왕 주변에 서 있던 아마도 측근이라고 생각되는 페어리들이 말을 시작했으나 서너 마디 오가자마자 페어리들은 너도나도 소리 높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게다가 말하는 내용은 논리의 비약과 비약을 거치더니 황당하게도결국 엉뚱한 곳으로 마구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보통 아이처럼 가늘고 귀여웠지만 여럿이 말해대니까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왁자지껄하다. 손을 내젓는 자도 있었고, 저들끼리 논쟁하는가 하면 여왕 앞으로 직접 뛰어나와 무릎을 꿇는 등 주변은 굉장히 소란스러워졌다. …… 페어리란 어떤 종족들인지에 대해서 조금씩 더 잘 알게 되는것 같다. 유리카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갑자기 벌어진 언덕 위의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리, 저들이 영 너를 이상하게 매도하는 것 같은데?" "유리카, 그 보석 이름이 엔젠이야?" 주아니의 질문에 유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골치 아프게되었다는 듯이 나를 돌아봤다. "아무래도 이 엔젠 보석 안에 봉인된 자가 꽤나 대단한 인물인 모양이야. 페어리인 줄은 알았지만 이럴 줄까진 생각 못했는데. 일이조용히 끝나지 않겠는걸." 나로선 페어리가 이 보석 안에 들어있다는 것 자체가 일단 이해가가지 않는다. 호박 같은 보석 속에는 파리나 모기 같은 것이 갇혀서있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긴 나도 들어 본 일이 있다. 희귀한 경우라서 그런 것은 꽤나 고가로 팔린다고 듣기도 했고. 좀 끔찍하긴 해도보석 안에 그보다 더 큰 게 갇혀 있다면 더 비쌀래나? 그러나 이 '엔젠' 인지 뭔지 하는 보석 안에는 페어리는커녕 좀벌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벌레는 고사하고 흠집 하나도 없이 말끔했다. 나는 골치가 아파졌다. "유리, 그 안에 그 라우렐인지 뭔지 하는 페어리가 저 안에 들어앉아 있다면 그냥 빨리 내보내 줘 버리면 안되나? 그렇게는 못 하는 거야? 그런 다면 소란도 깨끗이 진압될 것 같은데." "그걸 못 하니까 문제지. 내가 봉인했다면 내가 풀겠지만, 이 엔젠의 봉인자는 내가 아닌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구." "그럼, 그렇다고 말하면 되잖아?" "저들이 지금 내 말을 들을 정신이 있어 보이니?" 다시 앞을 바라보니 이제 페어리들은 상당히 흥분해서 처음의 목적은 대강 망각해버리고 마구 아무 이야기나 떠들거나 멋대로 주변을날아다니기 시작하고 있었다. 술에 취하기 시작하기라도 한건지 황당하게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고 있는 페어리들까지 있어서 나는 반쯤 얼이 빠졌다. 어떤 감정적인 고조가 일어나면 이들은 도저히 자신들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도저히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다. 게다가 여왕은왜 저들을 제지하지 않는 거지? 에졸린 여왕은 그들의 광란(?)에 끼여들진 않았지만 아무런 말도표정도 없이 가만히 왕좌 위에 앉아있기만 했다. 생각에 잠긴 건지,아예 방관하는 건지. 이런 꼴을 보고 있자니 인간인 나는 도저히 못 견딜 상황이 되었다. 나는 페어리가 아니기 때문에 처음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지몇 분 되지도 않은 지금 잊어버린 건 하나도 없단 말이다. 하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아냐, 하던 이야기를. 흠. 아무래도 이건 아니야. 이 아무 생각 없는 페어리 떼(종족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으음……)에게 인간의 질서를 가르치겠다는 위대한 결심이 서는 순간, 나는 유리카를 향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주아니를 주머니에서 꺼내 유리카에게 맡겼다. "파비안……." "잠깐, 잠깐만 유리하고 같이 있어." 주아니를 받아든 유리카는 내가 하려는 의도를 알아채진 못했을 텐데도 잘 해보라는 듯이 생긋 웃어 보였다. 주아니는 별 수 없다는 걸알게 되자 유리카의 옷주머니 속으로 냉큼 숨어 버렸다. 아무 것에도가려지지 않고 그저 서 있는 것은 불안한 모양이었다. 주위를 두리번대다가 탁자 위에 놓인 펀치 잔을 들어 죽 들이켜버렸다. 탁, 하고 탁자에 놓기가 무섭게 다시 가득 차버리긴 했지만. 나는 그런 다음 탁자 위로 올라섰다. 요정 여왕 에졸린의 눈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진다. "다들 집중해요, 그만들, 조용히 하고!" 이 정도로 어림없으리란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가까이 있던 페어리 몇이 내 쪽을 흘끔 쳐다보긴 했지만 그다지 큰 반향을 주지는 못했다. 나는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여왕님, 죄송합니다." +=+=+=+=+=+=+=+=+=+=+=+=+=+=+=+=+=+=+=+=+=+=+=+=+=+=+=+=+=+=+=어제 하루 사이에 굉장히 많은 분들이 추천을 해주셨어요..^^모두 다 너무 감사합니다. 기다려지신다니, 열심히 써야겠다는 의욕이 생깁니다- ^__^환상의 분위기란 것을 애써 잘 표현하려고 해 보았었는데, 좋으시다고 하시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네요. 그리고 트루바드... 알아보시는 분이 있어서 기뻐요. ^^*사실, 프랑스의 음유시인은 북부에서는 트루바두르(Troubadour),남부에서는 트루베르(Trouvere)라고 불렸지요. 저의 트루바드..는 보통 켈트의 음유시인을 뜻하는 바드(bard)하고 약간 뒤섞여버린 말이된 셈입니다만..^^;그 외에도 민스트랄, 종글뢰르..등이 있습니다만, 좀더 후기의 음유시인들이고, 좀 더 지위도 낮지요. 주술적인 면도 부족하고요. 켈트의 Bard가 가장 제가 설정한 트루바드의 이미지와 맞을 것 같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951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1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7 21:25 읽음:190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13) 내 목소리가 들렸을 지는 모르겠다. 나는 등뒤에서 검을 빼들어 휘두르지는 않고 그대로 펀치 잔에 꽂아 버렸다푸슈슈슈슈……순식간에 펀치가 뜨거운 것에 닿아 증발되는 소리와 함께 하얀 김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이 잔이 어떤 잔이야. 비어있는 것을 용납 못하는 잔이잖아. 게다가 이 검은 또 어떠냐 하면 온도가 내려가는 검이 아니란 말씀이야. "뭐야, 저건!" 예상대로 주변의 몇이 내 쪽을 가리키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돌아보기 시작했다. 나와 유리카 주변은 펀치가 증발한 김으로 온통 가득해졌다. 유리카가 기침을 했다. 연기는 계속해서 생겨났다. 펀치가 계속 솟아나오니 별 수 있겠어? 페어리들이 내 주변으로 잔뜩 몰려들기 시작할 즈음해서 나는 검을잔에서 뺐다. 검을 들어올리자 페어리들이 뒤로 우르르 물러섰다. "아, 아니에요. 해칠 뜻은 없다구요." 나는 얼른 검을 다시 등 뒤로 보내…… 고 싶었지만 칼집 모양이워낙 괴상하다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검을 들고 있는 한, 놀란 페어리들이 도저히 내 쪽으로 올 것 같지 않아서 일단 탁자에서훌쩍 뛰어내렸다. 페어리들이 반쯤은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나다가 한둘쯤은 바닥에 넘어지기도 했다. 나는 검을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내려놓을게요. 내려놓는다구요. 그렇지만 만지지 마세요. 뜨거우니까 뒷일은 책임 못 져요." 그러나 내 경고는 호기심 많은 페어리 족을 만족시킬 만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꺄악!" 벌써 하나가 다가들어 검을 건드렸다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하나가 그러면 인간들 같으면 다들 일단 만지지 않을 텐데 페어리라는 친구들은 또 하는 짓이 달랐다. "꺅! 뜨거!" "아얏! 데었어!" "아차찻… 뜨거라!" 그것 참. 나는 더 난리가 벌어지기 전에 검을 집어서 탁자 위에 올려놓아 버린 다음 그 위에 훌쩍 뛰어서 걸터앉았다. 검을 깔고 앉은 형상이라검한테 좀 미안하군. 앞으로 다시 멋쟁이 검이랑 대화 나눌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성이 장난이 아닐 것 같아. 나는 눈을 크게 뜨고는 몰려든 페어리 족들을 둘러보았다. 페어리들은 아마 놀라기도 잘 하는 만큼 또 그것을 금방 잊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멋모르고 달려들다가 손을 덴 친구들을 제하고는 그들은 그저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세요. 아마 알고 싶은 이야기일 테니까." 내가 정말 거창하게 할 이야기나 있는 걸까? 나는 에졸린 여왕을 쳐다보고 그 쪽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소란을 피워 정말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그랬으니가벼운 벌이라면 받겠지만 무거운 벌은 억울하다구요. 아시죠? 어쨌든 제가 할 말은……." 내 말 내용이 이상했나? 유리카가 옆에서 피식피식 웃고 있다. "이 보석인지 엔젠인지 하는 물건은 본래 유리카 게 아니고 제 겁니다. 그러니 뭐든 물으시려면 저한테 물으시죠." 여왕보다 대답 빠른 페어리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그녀가 갖고 있는 거지?" "선물한 거야? 둘이 무슨 사이인데?" "너는 어디서 났는데?" "둘이 애인 사이야?" "결혼은 언제……." …… 이야기가 엉뚱한 쪽으로 발전되기 전에 서둘러 말을 막는 것이 신상에 이로웠다. "아뇨. 제가 맡긴 거예요. '여왕님', 물어보실 게 있으시면 물어보세요." 일부러 '여왕님' 이라는 말을 커다랗게 했다. 에졸린 여왕이 기대 있던 나무줄기에서 그제야 등을 떼는 것이 보였다. 참, 게을러 보이기까지 하는걸. "엔젠을 어디에서 얻었나요, 파비안 크리스차넨?" "물건 팔고, 물건 값으로 얻었습니다. 전 잡화점을 경영했거든요." 나는 진짜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작정했다. 거짓말 끼워맞추는 것이훨씬 귀찮으니까. 다만, 잡화점이 '나 혼자' 경영한 것처럼 들리는것만 빼고 말이다. 여기까지 와서 괜히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다. 여왕은 정말로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잡화점? 인간의 잡화점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거기에 저 엔젠과바꿀 만한 물건이 있던가요?" 이거 참 우습게 됐다. 사실대로 말하기로 맘먹었으니 말하긴 해야겠는데 이러다가 내가 꼭 사기꾼으로 찍히게 생겼네. 에라, 내가 이게 얼마나 귀중한지, 비싼지 알게 뭐였겠어. 돈이야주고 싶은 사람 마음이고. "…… 참새 그물이죠." 유리카가 쿡 웃음을 터뜨리다가 간신히 자제했다. 페어리들은 꽤나당황한 표정이 되었는데 그게 참새 그물이란 게 어떻게 생긴 건지 잘몰라선 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진 모르겠다. 여왕의 표정도 당황스런 감정으로 가득했다. "참새 그물이란 게 그렇게 귀중한 건가요? 아니면 훌륭한 공예가가만들었다거나……." "아, 저희 집에서 참새 그물은 제가 직접 짭니다." …… 이리하여 나는 이상스런 논리로 페어리들 사이에서 훌륭한 공예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참새 그물도 공예에 들어가는지는 잘 모르겠다. 에졸린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더니 갑자기 양손을 허공에 들어올렸다. 뭐야, 또 무슨 마법을 부리려고?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둥그런 모양으로 움직였다. 빛의 원 같은 것이 만들어진다. 뭘 만드시려나. "혹시, 이런 건가요?" 툭. "헤에……." 에졸린 여왕의 손에서 툭 잔디밭으로 떨어진 물건은 분명 참새 그물이라 이번엔 내가 당황해 버렸다. 여왕은 오래 살다보니 정말 모르는 게 없는 건가? 어떻게 설명도듣지 않고 저런 모양을 고대로 만들어 냈지? 저걸 진짜로 짜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경험상 하룻밤에 5개도 못 짠다!). "맞는데요." 내가 대답하자마자 여왕의 표정이 거의 사색에 가깝게 변하는 바람에 나는 놀랐다. 뭐야, 내가 대답 잘못했나? 나는 가장 평범한 대답을 했을 뿐인데. "혹시, 혹시……." 말 더듬지 말고 그냥 하세요. 저도 무슨 말씀 하실지 궁금해 죽겠어요. "그 그물을 산 자가, 혹시,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갖고 있지 않던가요?" +=+=+=+=+=+=+=+=+=+=+=+=+=+=+=+=+=+=+=+=+=+=+=+=+=+=+=+=+=+=+=환타 포도맛이 왜 이렇게 달지? 입맛 버렸다...;;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2952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1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7 21:26 읽음:166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14) 미르보 겐즈 씨는 알고 보니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정말 감동적이다. 내가 그 옆에서 지냈었다는 것을 영광으로 삼아야 할정도였네. 사람들 사이에서의 유명세도 아니고 세상에, 보통 사람은한 번 만나기조차 힘든 켈라드리안의 페어리 일족 전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지 정말 대단하지 않아? 에졸린 여왕의 말 한 마디에 한동안 조용해져 있던 페어리 전체가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간신히 조용히 시킨 얘네들이 다시 아까처럼 소동을 벌일까 싶어 내심 굉장히 걱정스러웠다. 애들 열 명씩데리고 있는 보모나 엄마의 심정이 이해가 가려고 한다. "그 자…… 그 자를 만났군요……. 그렇다니 라우렐란의 엔젠을 갖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에졸린 여왕이 마치 무슨 시라도 읊조리는 것처럼 중얼대고 있어서나는 뭐라고 더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유리카를 흘끔쳐다봤더니 내가 알아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전혀 참견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 유리카는 주아니하고 속닥속닥 이야기나 하고 있었다. 어쨌든 알아서 타개해야겠군. "아, 그러니까 라우렐란이 누군데 그러세요?" 내 말에 갑자기 페어리들이 분개했다. "라우렐란 님의 이름을 인간 주제에 함부로 부르다니!" '인간 주제에' 라는 말은 좀 기분 나빴지만 실수한 거라면 일단 사정은 알아야잖겠어? "아, 그러니까 그 라우렐란… 님이 누군지 알아야 높여부르든 어쩌든 할 거 아닙니까?" "라우렐란 님의 이름을 자꾸 말하지 말아!" "여왕님에 대한 불경이다!" 젠장, 설명은 안해주고 엉뚱한 소리만 하다니. 내가 기분이 나빠져서 '라.우.렐.란' 이라고 한 열 번쯤 외쳐버릴까 고려하고 있는 중인데, 혼자 중얼대고 있던 여왕의 목소리가 내귀에 들려왔다. "라우렐란은 내 딸이에요. 페어리 일족의 공주이자 내 뒤를 이어서여왕이 될 몸이었죠." 으…… 정말 불경죄가 맞았군. 그런데 저렇게 어려보이는 여왕의 딸이라니, 도저히 짐작이 가지않는다. 혹시 갓난아이 모습을 하고 있기라도 하나? 내가 당황해서 어떻게 할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유리카가 갑자기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아니는 어느 새 주머니로 복귀하고 보이지 않았다. "여왕이여, 이제 우리에 대한 의심은 그만 해도 되지 않겠소? 엔젠을 준 붉은 머리의 남자에 대해 궁금하다면 물어도 좋고, 엔젠이야그대들 종족의 것이니 이 엔젠을 내놓고 가라고 한다면 내주겠소. 더이상 죄인 취급당할 필요는 이제 없다고 생각하오만." 에졸린 여왕이 이번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 자리로 돌아가라." 여왕의 한 마디에 페어리들이 분분히 날거나 뛰거나 하면서 본래의자리로 돌아갔다. 자리가 정돈되자 여왕은 손을 내저어 다시 은빛 가루를 주위로 뿌렸다. 그러자 페어리들이 돌아다니느라 흐트러진 자리나 컵, 음식 같은 것들이 깨끗이 정리되어 제자리로 돌아가거나 없어지거나 했다. 나와 유리카 주변에 아직도 떠돌고 있던 하얀 김도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몇몇 페어리들이 봄의 공주를 의심한 것에 대해선 내가 사과하겠소. 나는 본래부터 그대를 의심하지도 않았거니와, 만일 의심했다면일족의 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나의 영지의 중심점으로 위험하게불러들이지도 않았을 것이오." 유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를 받아들이겠소. 나 역시 여왕께서 나를 의심하였다고는 생각지 않았소." 나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유리카가 '뭐'길래 의심했다면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을 정도로 위험하다는 거지? 저렇게 훌륭한 마법을 자유자재로 쓰는 페어리의 여왕이? "그리고 파비안 크리스차넨."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려 대답했다. "예." "여행자께선 미르보 겐즈에 대해서 아는 바대로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그가 다른 엔젠을 많이 갖고 있었는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떤 일을 준비하거나 계획하고 있든지. 아는 것 무어라도좋으니 소상하게 이야기해 줘요." 나는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페어리 일족에게 대접을 잘 받고, 또 이들이 오래되고 훌륭한족속이라고는 하지만, 그들과 미르보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그들끼리의 문제다. 내가 미르보를 꼭 도와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굳이에졸린 여왕을 돕고 미르보를 불리하게 할 필요도 전혀 없다. 더구나미르보는 나를 많이 도와주었고, 결정적으로 이 검까지 내게 주었던,친구라면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아닌가. 더구나 저 쪽이 페어리라면 그 쪽은 인간이기도 하고. "죄송합니다만, 여왕님. 저로서는 여왕님께서 미르보 겐즈와 어떤관계이시며, 그가 무엇을 여왕님께 잘못했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을해 주시기 전에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저와 함께 있는 동안 미르보 겐즈는 저에게 어떤 나쁜 일도 하지 않았고(이 말을 하면서 미르보가 감옥 안에서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그가 악한 일을 한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서 들은 일도 없으니까요. 따라서 저는 그를 악한이라고 생각할 만한 어떤 근거도 알고 있지 못하며, 그런 상태로 그를 불리하게 할 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묻는다고 그저 늘어놓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 길게 말하느라 숨이 차는군. 내 입에서 이렇게 길고 조리 있는 말이 나올 줄은 나도 사실 예상치 못했다. 여왕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페어리들 사이에서분개한 어조의 말들이 쏟아졌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내가 여왕과 그들의 일족을 의심했다거나, 또는 여왕의 온화한 제안에 건방진 대답을 함으로서 그녀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멋대로들생각해라. 나는 왕이 코앞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곳에서 태어나 자라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나 여왕은 역시 생각하는 것이 달랐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그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에요. 그대의 지적은 모두 다 타당해요. 그럼 내가 미르보 겐즈에게 어떤 '원한' 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도록 하지요." 에졸린 여왕의 입에서 '원한' 이라는 말이 떨어졌을 때, 나는 지금까지 느껴왔던 그녀의 온화한 말씨와는 딴판인 어떤 한기를 거기에서느꼈다. 가장 순진한 어린아이가 품은 원한이 가장 깊고도 결코 없어지지않는다. 그리고 짓궂긴 해도 순진무구한 종족이라고 말해지는 페어리들도 어쩌면 그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이제부터 듣게 될 이야기는 페어리들 입장에서는 적어도꽤 심각한 이야기들일 것 같은걸. 여왕은 입을 열었다. "미르보 겐즈, 그의 별명은 '페어리 사냥꾼' 이라고 하지요." 그 말에서 미르보가 페어리를 잡아먹는다는 뜻이 겹쳐져 떠올라 나는 끔찍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일반적으로 사냥꾼들이라면 자기가 잡은 포획물을 팔거나, 적어도 죽은 고기라면 요리해 먹는 것을 서슴지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여왕의 다음 설명이 나의 끔찍한 상상을다행히 봉쇄해 주었다. "그는 어디에선가 페어리들을 실질적으로는 죽음과 진배없는 상태에 빠뜨릴 수 있는 특별한 재주를 알아 왔어요. 페어리들은 실질적으로 죽어서 소멸되는 것 말고도 지금 보고 있는(여왕은 내 손의 푸른엔젠 보석을 가리켰다) 저 엔젠의 형태로 봉인되어 깨어나지 못하는깊은 잠에 빠져들 수가 있지요. 과거엔 그것을 봉인하거나 푸는 것이페어리의 여왕들에게 가능한 일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어느 때부턴가그런 기술은 실전되어 사라지고 말았지요." 여왕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고, 지나칠 만큼 차가운 느낌을주었다. "그러나 그 기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내 눈으로 직접 페어리의 엔젠을 보고 있으니 말이에요. 나는 여왕이지만 인간인 그 미르보 겐즈조차 가지고 있는 재주를 이미 잃었으니 참으로자격 없는 여왕이라 하겠지요." "……." 뭐라고 위로하는 말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에졸린 여왕의 어조는슬펐지만 이 상황에서 끼여들 만한 용기는 없었다. "그의 별명을 보아 알 수 있듯이, 그는 페어리들을 닥치는 대로 사로잡아 엔젠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나의 딸, 라우렐란과 마찬가지로그런 식으로 희생된 페어리가 무려 수십에 달했지요. 이만하면 내가,그리고 우리 페어리 일족이 그 엔젠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동안 우리 손으로 돌아온 엔젠은 단 하나가있었지만……." 여왕은 오른손을 들어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러자 그 빛의원 안에서 한 개의 보석이 나타나 허공에 머물렀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그 페어리의 공주가 봉인된 엔젠과는 달리 분홍색 보석이었다. "어떤 방법을 가지고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었지요. 이제는 거의포기하고 있답니다." 갑자기 내 옆에서 유리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왜 처음에 저들은 나를 의심한 것이오?" "그건, 봄의 공주, 우리로서도 모든 것을 확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오. 미르보가 그 재주를 가지고 있는데 훨씬 높은 봉인력을 가진 그대가 그 재주를 가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겠소? 물론, 나는그대가 그런 일을 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다만 나의 일족들은 '검은 봉인의 공주' 라는 별명을 가진 그대가 그 보석을 가지고나타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심할 만 했던 것이지요." "그러면 미르보는 왜 여왕의 일족을 공격하는 거죠?" 이번에는 내 질문이다. +=+=+=+=+=+=+=+=+=+=+=+=+=+=+=+=+=+=+=+=+=+=+=+=+=+=+=+=+=+=+=갑자기 어디로 갔냐고 궁금하셨을 미르보 겐즈의 뒷이야기... 가아니고 앞이야기 등장입니다. 이 양반은 과연 언제나 다시 복귀하게 될까요? 아...무도 관심 없으신 것 같지만...^^;사실, 미르보 겐즈의 탄생비사(?)에는 제 동생의 입김이 컸더랬습니다. '겐즈' 라는 성을 만든 것도 그녀석이거든요. 그리고 성격과 생김새, 하는 일에 관해서도, 꽤나 많이 개입을... 이 아니고 실질적으로 창조주는 그쪽이라고 보는 편도. ^^;그런 만큼, 이 녀석은 미르보한테 상당한 애착을 보입니다. 동생은주인공이나 다른 사람들한테는 별반 관심도 없어요. 그저 제가 글 쓰고 있으면 들여다보다가, '미르보 다시 나왔어?' 이 정도-. 심지어, 제 동생은 제 글을 '세월의 돌' 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겐즈가 안나와서 슬픈 이야기' 라고 부르죠..^^;(동생이 잘못하면 아예 사장시켜버려야지....--+)추천해 주신 분, 정말 고맙습니다. ^^ 언제나 힘이 되거든요. 흡입력이라...^^;;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003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1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8 19:18 읽음:158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15) "그가 무엇을 목적해서 페어리들을 지적해 공격하고 있는지는 나도모릅니다. 전통적으로 인간들에게 어떤 해도 끼친 일 없는, 실질적으로 별로 인간들 앞에 나타난 일조차 없는 우리 일족인데 말이에요. 처음엔 엔젠 보석의 가치가 탐나서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가 마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는 듯, 자기가 손에 넣게 된 엔젠들을아무 데나 뿌리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됐지요. 물론, 그런 걸로 위험을 불사하고 페어리들을 공격할 만큼우리 페어리 일족도 그렇게 약하지만은 않단 것도 앞서의 생각을 재고케 한 하나의 이유가 되었지요." 아까 전부터 에졸린 여왕이 각종 마법을 쓰는 것을 나는 신기하게보아 왔다. 여왕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다른 페어리들도 전혀 마법에무지하지만은 않을 텐데, 그런 그들을 무슨 수로 잡았을까? 아까부터생각한 거지만, 페어리를 검이나 활로 잡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렇다면…… 아! "그, 그럼 그 그물은……." "그대의 생각이 맞아요, 예의바른 여행자." 여왕이 아까 빛의 원 속에서 끄집어내었던 참새 그물, 저건 아마도여왕이 미르보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증거물 가운데 하나였겠지. 그런데 말야, 아무리 그물이라도 그렇지, 과연 그런 사냥이가능하기나 한 건가?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여왕님, 페어리들이 여왕님처럼 마법을 쓴다면 어떻게 미르보의그물에 잡힐 수 있었습니까?" 약간 실례되는 질문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이다. 여왕보다 먼저 그 옆에 서 있던 금빛 고수머리의 페어리가 내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미르보는 그물에 페어리들이 꼼짝할 수 없는 어떤 마법을 거는 모양입니다. 마법이 아니라면 약이나 기타 다른 것이겠지요. 어쨌든 그의 그물에 잡힌 우리 일족 중 어느 누구도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잡혔다가 빠져나와보아서 잘 알고 있죠." 음…… 그는 여왕을 제하고는 내게 경어를 쓰는 유일한 페어리였군. 페어리들은 침울해져 있었다. 아까 같은 상황에서도 금방 모든 걸 잊고 활기 있게 떠들던 모습은어디로 갔는지, 눈에서들 금방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모양새였다. 작은 새들보다도 더욱 쾌활한 그들이 저러고 있는 것을 보니 영속이 편치가 않다. 아이들은 떠들어야 아이들다운 것처럼, 페어리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적어도 내 생각엔. 나는 짐짓 활기 있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왕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원하신다면 공주님의 엔젠은 여기에 당연히… 두고 가겠습니다(아까운 내 돈……). 그리고 아까 물으신 것들에 대해서라면, 미르보는 여기에서 꽤 많이 떨어진 하얀 산맥안으로 들어갔다고 생각됩니다." 이건 나중에 나우케 의사한테 들은 말이다. 내가 병상에 누워 있는동안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미르보. 그가 마지막으로 묵고 있던 여관주인에게 돈을 치르면서, 저기 저 산으로 올라가려면 필요한 것이 무엇무엇인가를 물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엔젠이라면 조그만 가죽 주머니 하나 가득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저는 그런 것을 알아볼 능력은 없기 때문에 그게 다 엔젠이었는지, 아니면 보통 보석이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이 엔젠을 그 속에서 꺼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줄잡아약…… 20여개 정도는 되어 보였고요. 어디까지나 어림입니다만." 여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혹시, 뭔가가 그를 습격하거나 그가 상처 입은 것을 보거나 한 일이 없나요?" "습격이요? 글쎄요……."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내 뇌리에 뭔가가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 하얀 털 몬스터! "그, 그게 혹시 그러면?" "본 대로 말해 줘요." 잠시 충격으로 멍해졌지만, 이제 대답을 피할 길은 없었다. 나는 당시의 싸움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했다. 내가 바로 옆에 있었으니, 그걸 설명하는 거야 식은 죽 먹기다. 페어리들이 그 괴물을 보낸 거였다니, 그리고 그게 요정계의 괴물이었다니.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 괴물이 다음날 핏자국까지 사라져 버린 일도 대강 설명이 되는군. 꿈에 나타난 것도 혹시? 다만 내가 결국 그 몬스터를 죽였다는 점에서는…… 나도 이유 없이 잘못한 것 같은 생각에 말을 더듬었다. "그 검으로?" 으아아, 난 그저 정당방위였을 뿐이라고! 그러나 설명할 말이 적절치가 않았다. 다행히 유리카가 끼여들었다. "에졸린 여왕, 파비안은 우연히 그 옆을 지나가다가 휘말린 것이고, 인간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자기를 향해 덤벼드는 괴물이 있었다면 죽을 힘을 다해 싸웠을 것임에 틀림없소. 그 점에 대해서 물론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소만." "그러나…… 결국 그를 죽인 것이 파비안 그대로군요?" 나는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내가 하얀털 몬스터라고 부르는 녀석을 꽤나 다정스런 말투로 '그' 라고 지칭하는 여왕 앞에서야). 분명, 당시에 난 정당한 일을 한 건데 왜 이렇게 쥐구멍을 찾아야하는 입장이 되었지? 왜 당연한 일을 설명할 말이 겨우 '정당방위'어쩌고 하는 초라한 말밖에 없지? 나보다는 이 점에서 유리카는 말을 잘 했다. "페어리들의 보호자여." 여왕의 눈이 유리카를 향했다. 그리고 웅성대며 나에게 분개하는중이던 페어리들의 눈도. "만일, 그 괴물에게 파비안이 다행히 - 분명 이건 다행한 일이오 -이기지 않았더라면, 그저 지나가려던 파비안 쪽이 괴물에게 아무 죄없이 희생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지 않소? 그대 페어리 일족들은 그를보낼 때 이 점에 대해서 사과할 준비가 다 되어 있었소?" "……." 화아, 얘하고 같이 다니길 정말 잘 했어. 유리카의 말에 페어리들은 당황한 듯 말문을 열지 못했다. 여왕 역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니까 니할룬은……." 그 하얀털 몬스터에게는 심지어 이름까지 있었다. "내가 소녀시절부터 키우며 사랑해 오던 아름다운 흰 늑대였소. 올해 나이가 78살이 되는……. 그를 보내지 않는 건데 그랬소. 그가 가겠다고 했을 때 말리는 건데 그랬소…… 다 내 잘못이오." 여왕의 목소리에는 눈물이 어려 있는 것이 느껴져 나는 정말 몸둘바를 몰랐다. 유리카의 달변으로 페어리들과 여왕 앞에서 결국 나는 잘못한 것은없는 것으로 되었지만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찜찜한 심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흰 늑대 니할룬은 나이가 끔찍하게 많을 뿐만 아니라- 그럼 저 여왕은 과연 몇 살일까? - 원한다면 그때 내가 본 것과 같은 괴물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충성스런 여왕의 친구였다고 했다. 아무리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하긴 하지만 설마 여왕이 나를 원망하는마음이 조금도 없을까? 여왕이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니할룬은 그런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만일 파비안그대가 그날, 그 순간 그 고갯길을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기목적을 달성했을 것이고, 기쁘게 우리들 곁으로 돌아왔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계기로 해서 그대는 그대 임무에 중요한 검을 얻었으니, 결국 일은 본래 이렇게 되도록 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친구를 잃더니 여왕은 운명론자가 되었군. 여왕은 니할룬이 죽은 날 밤에 이미 그의 죽음을 알았다고 했다(하긴, 지금 안 거였다면 난 혹시 여왕의 진노로 여기서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어) 그래서 그의 시체와 모든 것들이 켈라드리안으로 돌아오도록 손을 썼다고 했다. 그러나 거기 가서 직접 본 것이 아니니까누구 손에 죽었는지는 알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우연히 우리가 여길 지나가게 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러나 여왕도 내 꿈 이야기를 듣더니 그것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또 비가 오는군요. 오늘은 빵가루같은 비가 아닙니다...^^ 마치 여름의 전초전이라도치르듯, 빗소리 가운데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산뜻하게 납니다. (옆에서 보던 동생 : 까오옥~ 까옥~)...;;제 글을 읽으시다가,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라는 메일을 보내 주신 분이 계세요. 다른 세상의 표현- 이건 제가 글을 쓰면서 꼭 표현하고 싶었던 몇가지 중의 하나였는데, 그렇다고 말씀해주시니 너무 기뻤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004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1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8 19:20 읽음:159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16) "그건 내가 손을 썼던 게 아니에요. 니할룬이 아마도…… 영혼의상태가 되었으면서도 우리가 그의 원한을 아무 관계없는… 그대에게갚으려 할까봐 우려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매우 선량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으니까요. 단…… 괴물의 모양으로 변해 있을 때에는 그도 이성이 없는 상태이지요. 아니었다면 파비안 그대를 공격했을 리가 없어요." 말을 하다가 갑자기 여왕은 밝은 표정이 되었다. "고개 밑에서 니할룬이 완전히 숨이 끊어졌었다고 했지요? 만약 그런데도 그대의 꿈에 나타났다면 그가……." 여왕이 말을 못하고 있는데 유리카가 대신했다. "이스나에." 아, 그렇군. 다시 만나서 사과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괜히 끔찍한 기억을 되살리지 않는 편이 좋은 건가, 쓸데없는 논쟁을 머릿속에서 하고 있는데유리카의 입에서 떨어진 '이스나에' 를 들은 여왕이 허리를 죽 펴면서 밝은 어조로 말했다. "봄의 공주,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렇겠소, 그렇다면 언젠가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르니 나는 더 슬퍼하고 싶지 않소. 어떤 생명에게건, 그가 이스나에가 된다는 것은 영광 중의 영광이라고 나 역시 생각하오." 이야기는 다행스러운 방향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서로 잠시나마 저질렀던 - 또는 저질렀을 지도 모를 - 무례를 사과했고, 여왕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말했다. "밤이 끝나간다. 손님들을 위해 늦은 무도를 보여 드리자." 페어리들은 여왕의 기분이 다시 좋아진 것을 보고는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행복한 웃음소리를 냈다. 어쩌면 여왕과 그녀의 일족은 이렇게 서로 한마음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그대로 '계속' 되기만 해도 충분히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여왕의 측근으로 보이는 페어리들이 먼저 외쳤다. "춤을 추자!" "둥글게 서서 춤을 추자!" "뛰어라! 돌아라!" "페어리 일족의 춤 솜씨를 선보이자!" 식탁과 의자, 그 밖의 모든 음식 같은 것들이 어떻게 치워졌는지에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어느새 페어리들은 여왕의사과나무를 중심으로 둥글게 손을 잡고 늘어서 있었다. 유리카가 내 얼굴을 보았다. "파비안, 우리도 저기 끼자." "응? 응……." 유리카의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군무의 원 안으로 뛰어든 나는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그들과 어느새 발을 맞추고 있었다. 여왕도 단에서 내려와 다른 페어리들과 함께 그녀의 일족과 손을 맞잡고 섰다. 여왕의 나비 날개가 다른 페어리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흰 비단처럼곱고 우아한 빛을 발했다. 어디에선가 음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잊혀진 숲속 가장 깊은 자락엔봄 신부의 베일보다 아름다운 날개- 아, 누구인지? 그 곳엔 향기 나는 목초와 꽃들 영원히 살아있고고귀한 깃털의 작은 새들이 보석처럼 숨겨졌네. 세상에서 사라진 기억 가장 깊은 자락엔꽃잎 속 꿀물보다 달콤한 속삭임- 그 누구인지? 자줏빛 푸른빛 안개 커튼처럼 드리워진 안쪽눈뜨면 부서질 듯, 희미한 꿈이 색칠되고 있네. 온갖 영롱한 곤충의 껍질, 찬란한 날개오색 깃털 새들의 노래, 상냥한 지저귐풀밭 위의 검은 동그라미, 누구의 흔적인가요? 눈 돌리면 환영인양 힐끗 사라지는 작은 친구들. 페어리들과 함께 춤을 추어요. 향긋한 과일의 풍부한 즙을 맛봐요. 아름다운 새벽이 또다시 눈을 뜰 때까지. 페어리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자니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다. 가사가 아무래도 저들이 지은 것 같지가 않다. 인간이 본 페어리를 묘사한 듯한 가사거든. 나는 페어리들과 함께 빙글빙글 사과나무 주위를 돌면서 내 바로옆에 선 유리카의 손을 잡고 있다. 어쩐지 군무 속에서도 그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생생한 사실로 내 머리에 박혀 있다. "누가 지은 노래지?" 유리카 대신 반대쪽 손을 잡은 페어리가 대답해 주었다. "아주 옛날에, 여길 방문했던 한 시인이 지은 노래야." 페어리들은 키가 작기 때문에 나나 유리카의 손을 잡기 위해선 높이 팔을 들어야 했다. 별빛이 가마솥에 뚫린 구멍으로 쏟아지는 빛처럼 - 이 표현은 여기선 좀 아닌데 - 내려오는 푸른 언덕에서 우리는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녹청빛 휘황한 광채를 지닌 독서린 갑충이황홀한 무지개를 그리며 번개같이 사라지고길다란 잎새에서 이슬이 쏟아지는 켈라드리안붉은 무늬의 버섯, 밝은 레몬빛 나비. 죽음을 향해 떨어지는 노란 낙엽도 없고다가올 겨울을 위해 갈아입을 색깔도 필요없는영원한 여름의 나라, 그 곳에 사는 여름 아이들소매 없는 녹색 옷을 걸치고 영원한 세월을 즐기네. 헝클어진 머리의 꼬마 요정, 마주보면 재빨리 달아나요. 뒤를 쫓을 생각은 말아요, 그들은 심술궂어요. 오늘은 착한 마음이 들어 당신에게 인사했지만,내일이면 다 잊고 무슨 장난으로 곯려줄까 궁리할걸요. 페어리들과 함께 춤을 추어요. 끝나지 않는 여름의 밤을 노래해요. 아름다운 새벽이 하얀 눈꺼풀을 올릴 때까지. 커다란 군무의 원이 작게 작게 나눠졌다. 일곱 개나 되는 작은 원들이 이제 멋대로의 속도로 춤추며 돈다. 아마 위에서 내려다보면 풀밭에 뿌려진 일곱 개의 은반지 같을 것이다. 그들의 등에서 파닥이는 날개들은 인간들이 입은 파티 의상들보다몇 배는 아름다운 치장이 되었다. 재잘대며 웃는 소리들이 하늘 가득히 울려 퍼졌다. "여왕이시여, 춤을!" "여왕님의 아름다운 춤을 보여 주세요!" 춤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여기저기서 이런 소리들이 터져나왔다. 인간들의 관습을 생각한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그들이 다시 둥글게 둘러서자 여왕은 미소지으면서 가볍게 날아서 한가운데로 나섰다. 유리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여왕의 춤은 페어리들의 여름 파티에서는 하이라이트야. 또 가장아름다운 춤이기도 하고. 오늘 정말 멋진 구경을 많이 한다." 춤추는 여왕, 가벼운 날갯짓. 열 두어 살 소녀 만하고, 또 얼굴도 소녀 같은 여왕은 밤의 언덕위에서 하얀 옷깃과 금빛 고수머리를 흩날리며 춤을 추었다. 달 없이별로만 장식된 검은 천구 아래에서 하얗게 빛나는 그녀는 이날 밤의달빛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다. 날개 때문인지 바닥을 디디는 발끝은 비할 데 없이 가벼웠고, 가냘픈 팔은 마치 버드나무 휘어지는 것같다. 그렇게 새벽이 하얀 눈꺼풀을 들어올릴 때까지 페어리들의 무도는계속되었다. 한 편의 꿈처럼, 그렇게 잊어버릴까봐 두려운 겨울 속의여름 환상. "음, 으음……." 팔다리가 온통 뻐근했다. 엄청나게 졸립다. 이미 주위는 밝은 것같은데, 왜 이렇게 일어나기가 힘들지? 일어나는 거 하나는 정말 자신 있었던 난데. 눈이 희미하게 감기려다가 다시 떠졌다. 코끝에 느껴지는 차가운공기. 여기가 어디야? 머리가 몽롱해지는 것 같다가 갑자기 확 깨쳐지는 느낌이 든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아……!" "이제 깼니?" 내 몸에 덮여 있던 나뭇잎들이 풀썩 날려서 바닥에 떨어졌다. 갑자기 정신이 든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유리카가 차가운 물에 적신수건을 가져다가 내 얼굴에 덮어버린 것이다. 가슴 위로 떨어지는 수건을 엉겁결에 잡았다. "잠결에도 반사신경이 훌륭하구나?" 으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젖은 얼굴에 느껴지는 공기가 제법 차다. 물이묻어서 그런가. 아니, 차갑다 못해……. "에취!" 내 앞에 앉은 유리카가 혀를 쯧쯧 찼다. "뭐야, 따뜻한 대낮에 푹신한 잔디에 누워 실컷 잔 주제에 어디서감기 걸린 척 하는 거야?" 수건을 짜서 얼굴의 물을 훔치다가 유리카의 말에 그제야 주변을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여기는… 아, 그렇지. 여기까지 오던 생각이 나는군. 그런데 어젯밤하고는 영 경치가 딴판인데? "음…… 다들 가버렸나?" "그럼, 지금까지 있겠냐?"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다. 세수를 못해서 얼굴은 부스스하고,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배고픈걸……." 유리카가 재빨리 내 머리를 딱 때리려는 걸 훌륭한 '잠결 반사신경' 으로 잽싸게 피했다. 유리카는 헛손질을 했지만 관계없다는 듯이핀잔을 주었다. "얘, 내가 네 엄만줄 아니? 자고 일어나서 배고픈 거야 당연하지. 얼른 일어나서 세수나 하러 가. 그런 다음에 뭘 먹어도 먹지." …… 엄마가 아니라고 하는 주제에 하는 말은 꼭 우리 어머니 같잖아. 가까운 곳에 시냇물이 있어서 대강 세수를 했다. 몇 시쯤 되었을래나. 적어도 점심때가 가까웠음에 틀림없었다. 배가 지독히 고픈 걸보니 말이다. 어젯밤에 먹었던 호두 파이가 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라?" 언덕 위로 되올라온 나는 풀밭을 쳐다보고서 의아해져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저게 뭐지? +=+=+=+=+=+=+=+=+=+=+=+=+=+=+=+=+=+=+=+=+=+=+=+=+=+=+=+=+=+=+=꿈이 끝나는군요... 그러나 그냥 끝나는 꿈은 아니니. 참, 제가 쓴 노래가사 마음에 드세요? ^^추천, 고맙습니다아- ^^100회가 되도록 하루도 빠짐없는 연재라... 앞으로도 계속 끊기지않는 연재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 그리고 저 예전에는 더 호흡이 길었었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005번제 목:◁세월의돌▷ 모음집 보내달라는 분들께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8 19:21 읽음:1631 관련자료 없음-----------------------------------------------------------------------------모음집을 보내 달라는 메일을 보내는 분들이 요즘 종종 있으셔서이 글을 씁니다. 그 분들을 위해서 설명을 좀 드릴게요. 일단, 저 역시 글 하나하나가 한 개씩 따로따로 잘라진 파일인 관계로, 보내드리는 것은 매우 곤란한 작업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게시판에서 한꺼번에 받아가시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작업이 아닙니다. 혹시, 혹시나! 모르시는 분이 있으실까봐 설명을 드릴게요. (물론 대부분의 독자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혹시나 한분이라도 모르실까봐 설명 드리니까, 이해해 주세요 ^^;)- 먼저 li 모래의책 을 치세요. lt 세월 이나 lt 세월의 를 치시면추천글들 같은 것이 같이 나오거든요. 추천들도 함께 읽고 싶으시면상관없지만요. ^^;- ◁세월의돌▷ 라고 쓰여진 글들이 죽 뜨면, dn *****-*****, 즉첫 번째 글의 번호-맨 마지막 글의 번호를 치세요. 이렇게 하면 사이사이 번호의 글들은 빼고 li로 따로 불러놓은 글들만 받아집니다. (제가 이 글을 쓰려고 좀전에 찾아봤더니 첫 글의 번호가 29503이군요. 마지막 글은 어제것까지 32952입니다. 그러니까 어제것까지 받으시려면 dn 29503-32952 라고 치시면 돼요.)- 참고로 li나 lt를 해서 화면에 필요한 것만 검색해놓지 않고 그냥 본래 화면에서 dn *****-*****를 치면 그 사이에 있는 모든 번호의 글들이 받아집니다. 아마...그렇게 많은 글들을 한꺼번에 받기도힘들거고요..^^; 그러니까 꼭 li나 lt로 검색해놓고 받으세요. - 어쨌든 dn *****-***** 하고 엔터를 치면, 한참 기다리다가(꽤오래 기다릴 겁니다. 아마 띄엄띄엄 있는 글들을 하나로 읽어들이느라 그런 것 같아요) 파일이름 지정하라고 뜨지요? 그러면 뭐..좋으실대로 이름 지정 하시고요. 예를 들자면 세월의돌.cap - 이런 식으로... - 그리고 (1.ZMODEM...)이런 식으로 글자가 떴을 때 다시 엔터. - 그러면 글 받는 화면이 뜨고, 글이 받아집니다. 아마... 다 받는데 십 몇분이면 되지 않을까요? 직접 안해봐서 모르겠지만..^^;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메일로 이분 저분 글을 보내드린다면 게시판 연재 작가라기보다는 메일링하는 작가가 되는 셈인 것 같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구별 없이 누구나 공평하게 볼 수 있게 게시판에 연재를 하고 싶네요. ^^ 그래서 다른 데 퍼가고 싶으시다는 메일이 오면 구별없이 몇 가지 전제조건하에 다 허락을 했었고요(하이텔,천리안, 채널아이).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구별 없이 가능한 한 게시판에서 보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잡담이 길었습니다. 그럼 내일 뵐게요. ^^주제넘은 설명 드려서 죄송합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094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1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9 19:30 읽음:156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17) 언덕의 풀밭 군데군데에 검푸른 원들이 그려져 있었다. 가까운 데로 다가가서 들여다보니 버섯이 둥그렇게 난 자국이다. 그런데 그런자국이 한 개가 아니고 주변에 몇 개나 있었다. 내 뒤로 유리카가 다가왔다. "뭘 보고 있어?" "이거, 이 둥그런 자국들 말야." 유리카는 픽 웃더니 내 머리를 지분거렸다. "야, 넌 '페어리 링(fairy ring)'도 모르니? '요정의 테' 라고 하는 거잖아. " 아……. 들어본 것도 같다. 요정의 테는 밤새 요정이 춤춘 자국이라고 하던데, 정말 그렇잖아? 신기하네. 그러면? "정말, 일곱 개잖아." 자세히 세어보니 둥그런 버섯 자국이 진짜 일곱 개 나 있다. 같이춤추다가 다시 작은 원으로 나누어서 춤췄을 때 일곱 개의 원으로 나누어졌었지. 왜 커다란 자국은 안 남나 모르겠네. 군무를 추던 생각,그리고 그 가운데 나비 날개를 단 여왕의 춤. 어젯밤의 생각이 떠올라 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생각하니?" "응." 유리카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는 유리카와 손을 잡고 일곱 개의 원에 하나씩 가까이 가 보았다. 모양이 일정하거나 똑바른 원은 아닌 것이, 꼭 어젯밤 페어리들의 제멋대로인 행동들을 생각나게 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참,그러고 보니 어제 마지막에 어떻게 됐더라? "유리, 우리가 어떻게 하다가 잠들었었지?" 우리가 잠들어 있던 곳은 언덕의 한쪽 아래 양지바른 평평한 곳이다. 겨울 풀 - 어젯밤엔 여름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겨울이니까 -치고는 꽤 자란 풀들이 소복하게 나 있는 것이 언덕 가운데에서도 가장 편안하게 누울 만한 곳 같았다. 그 위에 나뭇잎들이 많이 모아져있었다. "페어리들이 모아다 주었었잖아, 나뭇잎." 정말, 그랬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어젯밤 일이 어렴풋이 기억나려고 한다. 나는이렇게 물었었지. "여왕이시여, 이 엔젠은……." 여왕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은 그대들이 가지고 있어 주어요. 내가 이걸 되찾아 가지고있는다 해도 어떤 방법도 없었다는 것을 이미 말했지요? 그대들의 비범한 여행 속에서 어쩌면 라우렐란도 깨어나 다시 우리 일족 곁으로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군요." 맞아, 그랬어. 나는 유리카에 목에 걸린 주머니를 쳐다보았다. 유리카가 시선을느끼고는 주머니를 벗어서 내 손에 넘겨 주었다. 내 손바닥 위로 굴러 나온 엔젠이라는 이름의 파란 보석. 이게 페어리의 공주라고 했지. 잘 모시고 다녀야겠네. 귓가에 여왕의 마지막 인사가 쟁쟁했다. "그대들의 생명에 축복이 깃들길, 그대들의 영원한 여행이 아름다운 끝으로 마무리되길, 그대들 가는 곳마다 익은 과실이 기다리기를." 어라? 어디서 듣던 말 같은데? 이건…… 나르디의 편지에서 읽은 내용 그대로잖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유리카가 배낭을 끌어당기면서 서두른다. "얼른 뭘 먹어야 다시 길을 갈 거 아냐." 함께 배낭을 열어보고 우리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배낭 안에는 늘 가지고 다니던 건량 꾸러미 대신, 조그마한 단지와나뭇잎으로 싼 호두 파이, 견과 열매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언제나 나보다 적게 놀라는 유리카는 벌써 눈치챘다는 듯이 배낭안에서 그것들을 끄집어냈다. 그러면서 말했다. "에졸린 여왕의 친절이겠지. 이거 봐, 이 단지. 아마 꿀인 것 같은데?" 정말이었다. 음식들을 꺼냈다. 호두 파이는 어떻게 된 참인지 아직까지도 따뜻하다. 이것도 여왕의 신통력 탓일까? 견과류를 보니 문득 생각나는 친구가 있군 그래. "야, 주아니, 주아니." 주머니를 툭툭 쳤는데 응답이 없었다. 아예 완전히 푹 잠든 모양이네. "일어나. 안 일어나면 아침, 아니 점심 없다." 그제야 반응이 있었다. 먹보 같으니라구. "끄응…… 여기가 어디야……?" 우리는 오랜만에 야외에서 식사다운 식사를 했다. 우리까지 가지않아도 '나'는 앞으로는 절대! 건량만 갖고 여행하지는 않으리라는다짐을 식사 중에 마음속으로 했다. 그건 그렇고…… 배낭에 넣어 두었던 내 건량 꾸러미는 어디로 갔지? "여왕은 경제적인 원칙에 철저한 페어리였나 봐." 꿀을 바른 호두 파이를 씹어 삼킨 다음 내 의문에 대해 유리카가한 논평이다. 또 하나 웃겼던 점. 주아니는 어젯밤 페어리의 군무에 대해서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너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나?" "그럼 어디까지 기억이 나는데?" 나와 유리카의 집중 추궁…… 끝에 우리는, 주아니가 어젯밤 우리가 여왕과 지루한(주아니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던 즈음해서조용히 혼자 꿈나라로 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내참, 본편은 나오기도 전에 조용히 갔단 얘기네. 더 의아한 사실이 떠올라 나는 조용히 물어 보았다. "야, 주아니, 내가 그렇게 뛰어 돌아다니는데도 한 번 깨지도 않고잤단 말이냐?"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뛰지도 않은 주제에 주아니는 몸무게 비례로 보아 가장 강력한 식욕을 과시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어이가 없었다. "이제 그만 가야지." 식사한 자리를 정돈하고, 남은 음식을 챙겨 넣은 다음 그만 가려고배낭을 짊어지다가 문득 생각나는 사실이 있었다. "유리, 우리 나가는 길은 어떻게 찾지?" "길? 으음……." +=+=+=+=+=+=+=+=+=+=+=+=+=+=+=+=+=+=+=+=+=+=+=+=+=+=+=+=+=+=+=fairy ring은 영어 사전에 찾아보셔도 나옵니다. 제가 만들어 낸것이 아니랍니다..^^추천해 주신 분, 격려해 주신 분, 역시 감사합니다- ^^봄날의 햇살이라..^^;연재 끊기지 않도록 열심히 쓰겠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095번제 목:◁세월의돌▷ 2-3.켈라드리안, 이스…(18) - END! ^^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19 19:31 읽음:158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2장. 제1월 '음유시인(Troubard)'3.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 (18) 갑자기 우리는 곤란에 빠졌다. 배낭을 지고 선 채로 고민하는 것은 별로 재미없을 것 같아서 우리는 일단 잔디밭에 다시 주저앉았다. 잔디라고는 해도 어젯밤에 본 그반짝거리는 여름의 푸르른 잔디하고는 큰 차이가 있다. 지금 우리 밑에 있는 것은 누르스름하게 변색된 마른풀들일 뿐이었다. 어젯밤은참 멋졌는데 말야. 겨울로 돌아오니 이렇게 우울하군. 그 많던 페어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가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있자 유리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파비안, 길을 얼마나 기억해?" "음…… 저 빽빽한 수림을 빠져나가는 것조차 어려울 것 같은데." "처음에 있던 그 샘가, 그 메르농인가 거기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한 번 듣고 벌써 잊어버렸던 이름을 말하면서 유리카는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르단드 생각도 난다. 우리한테 협박으로 불러내어져서 실컷 놀림만 당하던 불쌍한 친구 말이다. "아르단드는 잘 있을까?" 내가 그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유리카가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그래! 아르단드!" 내가 영문을 모르고 있는 사이에 유리카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았다. "뭘 찾는 거야?" "아르단드, 아니면 그 애가 보냈을 어떤 표지 같은 것." "걔는 갑자기 왜?" 어리둥절한 내가 따라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않았다. 유리카는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너, 아르단드가 우릴 돌려보내는 것도 내 몫, 이라고 말하던 생각안 나?" 아, 그것. 그렇지만 이제 와서 그걸 믿고 뭘 찾는단 말야? 내가 유리카와는 달리 멀뚱한 표정이자 그녀는 보충 설명이 필요할것 같다고 느꼈는지 여전히 눈은 언덕 여기저기를 향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스나에라는 자들은, 절대 거짓말이나 빈말을 못해. 아르단드가우습게 보여도 그도 이스나에야. 이스나에한텐 그런 속임수 같은 것은 전혀 허용되어 있지 않아. 혹시 장난이나 할 말을 일부러 안 하는수는 있을지 몰라도 고의로 남을 속일 수는 없단 말이야." "왜?" 이 시점에서 하는 질문 치고 쓸만한 건지 모르겠네. "그들은 깨끗한 영혼이니까." 유리카는 그 말로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대책도 없고 해서 나도 그녀처럼 언덕을 돌아다니면서 두리번대는 수밖에 없었다. "저기, 저걸 봐!" 갑자기 주머니 속의 주아니가 종알대어서 나는 그 쪽이 어딘지 알기 위해 주머니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디?" "저기!" 주아니는 작은 팔을 내뻗어 한 쪽을 가리켰다. 유리카와 내 눈이 동시에 그 쪽을 향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주아니의 눈은 우리 둘보다 월등 좋으니 우리는 크게 볼멘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뭐 말야? 어떤 건데?" 주아니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것은 천천히 우리 눈에도 보일 정도로다가왔다. 온통 흑녹색의 날개를 가진 번쩍거리는 커다란 나비였다. 찬란한날개 색이 그다지 밝지 않은 햇빛 아래에서도 기이한 빛으로 번뜩였다. "나비잖아?" 내 심드렁한 반응과는 달리 유리카는 마치 찾던 것을 찾았다는 듯뛸 듯이 기뻐했다. "주아니, 너 정말 눈 좋구나. 너도 나하고 같은 것을 찾고 있었니?"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비가 뭘?" 유리카가 나비 쪽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기면서 한심하다는 듯콧소리를 냈다. "파비안, 파비안. 아르단드의 머리색깔 기억 안 나?" 물론, 아르단드의 머리색이 저 흑녹색이긴 했지. 그렇지만 흐음, 겨우 그런 게 지금 저 나비를 따라가야 할 확신이라고 할 만한가? 아르단드하고 관계 어쩌고 하는 것보단 우연히 나타난 멋진 나비라는 쪽이 훨씬 신빙성 있는 설명으로 들리는데. 그러나 결국 나는 유리카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아무 것도 하지않고 주저앉아 있거나, 아무 데나 모르는 데를 헤매거나, 그것도 아니면 계속 목빠져라 뭔지도 모를 증표를 찾고 있는 것보단 그 편이나아보여서지 절대, 내가 아무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다. 절대, 절대. 유리카는 정말 확신을 가진 듯했다. "파비안, 너는 모르고 있어. 이 겨울에 나비가 어디 흔하니? 게다가 저런 나비는 여름철에도 잘 볼 수 없는 나비란 말야. 게다가 아주눈에 잘 띄는 색깔이고, 우리가 찾는 사람의 머리색과 똑같기까지해. 그런데도 저게 아르단드가 보낸 나비가 아니라고 생각하겠단 거야? 분명해, 저건 아르단드가 보낸 거라고." 그렇게 말하니 좀 그런 듯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결정엔 우리가 저 나비를 어디 사라질세라 눈이 빠져라 쳐다보면서, 밤에 도끼로 찍으면서 오기라도 해야 할 것 같던숲을 지금은 죽어라 양팔로 헤치면서 가야 한다는 사실은 포함하지않았던 것 같군. 지루하고 피곤해서 나는 물어보고 싶던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아까 에졸린 여왕이 너보고 공주니 어쩌니 했잖아. 그건 어떻게된 말이야?" "그냥 여왕이 나 높여 주려고 적당히 한 말이야. 신경 쓸 필요 하나도 없는 말인걸." 유리카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별 것 아니라는 식이다. 비밀은 혼자다 갖고 있으면서 하나도 설명해주는 게 없다. 음, 또 뭘 물어보려고했더라. "음…… 그럼, 검은 봉인은 너하고 무슨 관계야?" "아무 관계도 없어. 내가 까만 옷을 입어서 그랬나?" 이건 말도 안 되는 말이다. 그럼 나는 '갈색 봉인의 왕자(말해놓고보니 좀 간지럽군)' 쯤으로 부르지 않고 왜 '예의바른 여행자' 라고그랬단 말야? "그럼, 프랑드의 신부는? 봄이 너하고 또 무슨 관계인데?" "그런 질문은 어제 여왕한테 할 일이지, 왜 이제 와서 나한테 하니? 내가 한 말도 아닌데 내가 뭘 설명하니?" 이제 유리카의 대답은 궤변으로 치닫기 시작하고 있었다. 보다 실질적인 질문을 해야겠다. "그 어제 아르단드를 위협하던 구슬은 뭐니? 이스나에가 겁을 먹을만한 거 보니 대단한 무기 같던데." "블로지스틴의 구슬. 너도 블로지스틴이 불원소의 힘을 가진 정령을 이르는 말이란 건 알지?" 몰라서 미안하군. 모르면 물어야지 별 수 있냐. "몰라. 설명해 줘." 우리는 이제 간신히 숲을 벗어났다. 이제부터는 좀 그래도 평탄한길이다. 나비는 계속해서 나 잡아보라는 듯이 우리 앞에서 나풀나풀 날고있었다. 우리는 죽어라 걷는데 혼자 날고 있으니 왠지 불공평하게 느껴지는군. "정령이란, 이스나에의 한 종류야. 이스나에 중에서 특별히 4원소에 몸담고 있는 자들이지. 그래서 보통 이스나에하고는 달리 우리 눈으로 쉽게 볼 수 있어. 인간이나 다른 종족들처럼 모여 살기도 하고말이야. 그래서 반(半) 이스나에라고 부르기도 해. 만나보면 알겠지만 정말 꽤나, 인간답다니까. 특이한 점이나 능력을 가졌다는 것만빼면." 나는 생각했다. 어젯밤에 이렇게나 많이 왔던가? 왜 이렇게 길이길어? "그래서?" "그런 반 이스나에에는 네 종류가 있어. 4원소니까. 그 중에 불원소에 관계된 정령을 블로지스틴이라고 하지. 흙에 관계된 자들은 나스펠, 공기는 실피엔이라고 해." "물은?" 구릉지를 벗어나자 다시 숲이 나왔다. 그러나 빠져나왔던 숲처럼가기 힘든 길은 아니었다. 덕분에 좀 이야기를 들으며 걸을 만했다. "강의 정령을 미라티사라고 하고, 바다는 프라티사라고 따로 불러. 그런데 이 프라티사는 대부분 대가 끊어져서 거의 볼 수가 없다고해. 미라티사가 프라티사에서 갈라져 나온 자들인데 이들은 꽤 번성하고 있지. 프라티사가 거의 없어진 뒤로는 바다를 항해할 때 정령의도움을 빌기가 어려워져 버렸어." 정령의 도움이라는 것이 아무나 빌릴 수 있는 것은 아닐 거야. 그러니까 뭐, 나로서야 설마 그 힘을 빌릴 일이나 있겠어? 그러니까 프라티사가 사라졌다는 것이 나한테 크게 불편한 일이 되진 않을거라고봐. "그래서, 블로지스틴의 구슬은 그들이 만든 구슬인가?" "그들의 힘을 응축시킨 구슬이지. 그들이 직접 만들기도 하지만 정령이라고 아무나 그런 힘을 가지는 것은 아니고, 인간이 만들어 낼수도 있어." "그 구슬은 뭐에 쓰는데?" "봤잖아?" 음…… 설마 샘의 이스나에를 위협하기 위해서 애써 만들어 갖고다닌단 건 아니겠지. 유리카는 내 표정을 보더니 싱긋 웃었다. "아르단드는 샘의 이스나에잖아. 만약에 내가 미라티사의 마법물을가지고 있었다면 아르단드는 전혀 겁 안 냈을 거야. 그러나 블로지스틴은 반대, 샘을 없애버릴 수도 있는 힘이지. 다행히 내가 그걸 갖고있었지 뭐야." 와……. 나는 상당히 감동해서 새삼 유리카의 배낭을 감탄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걸 쳐다본다고 구슬이 보이는 건 아니지만, 왠지 그 안에는 뭔가 더 신비한 것들이 많이 들어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뭐,없다고 해도 블로지스틴의 구슬은 적어도 다섯 개 이상 들어있을 거아냐. 유리카는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거, 갖고 있다고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냐. 내가 너한테한 개 준다고 해도 넌 사용 못해." "그럼 너는 어떻게?" "나야 뭐…… 아, 저기 샘이 보인다." 한참을 걸어온 터라 차갑고 신선한 물이 마시고 싶어서 우리는 달리다시피 샘가로 다가갔다. 아르단드는 없었지만 - 보였다면 그게 더이상한 거겠지 - 샘물은 어쨌든 실컷 마실 수 있었다. 주아니는 물을 마시다가 거의 샘에 빠질 뻔한 주제에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아, 시원해." 만약에 빠졌다면 정말로 '아, 시원해' 라고 말할 처지가 되었겠지만. "아르단드가 이 근처에 있을까?" "글쎄? 있을 가능성이 한 열에 여덟은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샘가에서 몸을 일으켜 일어나서 말했다. "아르단드, 어제는 좀 무례하고 굴었다고 생각해. 사과할게. 그리고 샘물을 여러 번 시원하게 마실 수 있어서 고마웠어." 유리카가 놀란 듯이 나를 쳐다봤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언제까지나 행복해라." 말을 마치고 나는 물통을 다시 채운 다음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는두 여성 동료들을 향해 말했다. "뭘 보니? 그만 가자." +=+=+=+=+=+=+=+=+=+=+=+=+=+=+=+=+=+=+=+=+=+=+=+=+=+=+=+=+=+=+=긴 1월이 끝났습니다. 다음 달은 열 네 아룬드 중 가장 어둡고 음험한 달, 제2월 암흑 아룬드입니다. 그리고 오래간만의 대규모 전투신.... 도 나옵니다. (간만이 아니고 처음인가요?)그리고! 이제 100회가 두 번 밖에 안 남았습니다..^^(혼자서 감격하고 있는 루디엔)그리고.. 저는 추천 하나가 올라올때마다 상당히 힘을 얻는답니다. 그런데 추천이 많아서 읽기 싫으시다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군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214번 제 목:◁세월의돌▷ 2장 끝, 3장1편 시작입니다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0 23:50 읽음:1108 관련자료 없음----------------------------------------------------------------------------- 드디어 길었던 2장, 즉 1월 '음유시인(Troubard)'의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3장은 당연히, 제2아룬드 '암흑(Darkness)'에 대한 이야깁니다. ^^오랜만에 장이 바뀌니까 무슨 말부터 써야할지 모르겠군요. ^^;그러니까..에에....전에 쓰던 대로... 2장 3편 '켈라드리안, 이스나에의 숲'이 끝나고,3장 1편 '악령의 노예들' 시작입니다. ..... 하하...--;;아룬드의 이름이 '암흑' 인 것처럼 결코 밝은 이야기의 연속은 아닐 것 같습니다. 저는 제1아룬드의 마지막 부분, 켈라드리안의 페어리 이야기처럼 동화같은 환상 이야기도 좋아합니다만, 그 반대의 이야기도 좋아합니다. '암흑'의 이야기는 어쩌면 그런 쪽이겠죠. 어떤 분께서 전투신이 지루하다고 하셨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고요,계속 열심히 쓰겠습니다-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215번제 목:◁세월의돌▷ 3-1. 악령의 노예들 (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0 23:51 읽음:157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 암흑의 별 '사스나 벨(Saasna Belle)'이 지배하는 아룬드. 봄을 앞두고서 마지막으로 어두운 일기가 기승을 부리는 때로서 해를거의 볼 수 없는 흐리고 어두운 날이 계속된다. 밤이 되면 달 가운데 사스나 벨이 검은 구멍처럼 나타나 달의 빛을압도하며, 습기와 안개가 가득한데다, 대부분의 날들이 천둥, 마른번개를 동반한 음산한 날씨의 연속이다. 가끔 검은 비가 내리기도 하는데 그날은 거의 반드시라고 할 만큼 무서운 불행이 발생하는 날로서 모든 여행을 중단하고 근신하는 것이 제일이다. 각종 욕망을 가능한 한 억제할 것이 요구되는 때이며 작은 잘못이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때이기도 하다. 자연이 주는 해악과여행하는 사람의 질병, 특히 믿고 있던 동료의 배신에 주의할 필요가있다. 높은 의지를 가진 자에게는 각종 시험이 주어진다. 암흑 아룬드의 끝은 니스로엘드가 물러가고 프랑드가 시작되는 때이다. 이 시기에 만난 검은 예언자는 평시와는 달리 많은 예언을 들려주며 일부무리는 물과 약초만으로 단식을 하는 경우도 있다. 많은 사람이 이 시기에 과거의 고통을 끊기 위해서 극단적 방법을택한다. 전설 속의 처녀 아르나가 강물에 몸을 던짐으로서 죽음을 택한 시기도 이때로서 이 시기에 아르나니 별은 별자리 중 '시간의 강'자리의 가장 급한 급류 지점에 머문다. "달빛 없는 밤에 털이 아름답고 울음소리 높은 야수의 공격을 받다"의 경구로 요약되며 첫 번째 주어지는 강력한 시련, 마지막으로뛰어넘어야 할 고비, 힘에 벅찬 어려움, 은밀하게 닥치는 시험, 뒤에시련으로 변할 드높은 상급을 받음, 작은 실수의 크나큰 대가, 피할수 없는 억울한 불행, 고통을 견딘 자에게만 주어지는 예지 등의 암시를 지닌다. 이 아룬드를 상징하는 색깔은 없다. - 점성술사들이 달력에 적는 각 아룬드의 의미,그 중 두 번째. 1. 악령의 노예들 (1) [봉인이란 무엇입니까.]흰 로브를 걸친 늙은 마법사 앞에 선 검푸른 머리카락의 젊은이. 마법사의 로브도, 군인의 갑옷도 걸치지 않았으나두 가지 모두가 무색하리만큼현명한 기품과 활달한 기개를 동시에 지닌 그가 걸친 옷은긴 여행을 하는 자의 튼튼한 망토였다. 단단한 돌이 깔린 바닥을 딛고 그는 고요한 자세로 서 있었다. [봉인이란 약속이다. 그리고 대가다.]늙은 마법사는 창 앞에 놓인 그의 의자에서 몸을 돌려젊은이 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의 머리빛처럼 검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약속을 한 자는 그것을 지킨다. 받은 것은 되돌려준다. 네가 공포를 봉인하면 그것은 희망도 함께 가져간다. 네가 희망을 풀어놓으면 공포도 함께 되살아난다. 봉인자는 대가를 치른다.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잘 알았습니다.]공손한 자세의 젊은이.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마법사들의 로드(Rod). 그리고 허리에는 얇은 검이 매어져 있다. [떠나겠거든, 무엇이 돌아올 것인가를 생각해라, 에즈.][제가 돌아올 때, 혼란의 바람도 붑니다. 평화가 찾아오면, 죽음도 옵니다. 악령의 힘이 죽음을 벗어나지만, 죽음은 노예를 되찾습니다. 인간은 작아졌지만, 그들은 행복합니다. 저는 봉인을 하면서 그것을 풀겠습니다. 없애야 할 것을 없앨 때, 사랑하는 것 또한 버리겠습니다.][가거라.]젊은이는 떠났다. - 기억reminiscence III 며칠 전부터 밤에 달을 별로 쳐다보고 싶지가 않다. 그러나 밤길을 걸으면서 달을 보지 않는단 게 도저히 가능하기나한 일이야? 이마 위에 차양이라도 하나 만들까보다. 저런 달은 아예 뜨지 않는 편이 도와주는 거라고. 메르농 샘을 떠난 이후로 3일 반 걸려 켈라드리안을 거의 다 빠져나왔다. 이제 나무가 점차 드문드문해지는 것이 인간들이 사는 곳이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즐거운 추억도, 어려운 일도(그 3일을 우리가 멀쩡히 여행했다고 생각하진 말아달라) 많았던 숲이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이번 달에 접어들기 전 까진 겨울이라도 정말 나름대로 멋이 있었다. 약간의 아쉬움마저 남을정도로. 그러나 지금 우리 머릿속엔 빨리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 왜냐고? 우리는 암흑 아룬드에 접어들어 있었다. 낮이라고 일기가 좋은 건 아니지만, 아직은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그러나 밤에 우리를 내려다보는 시커먼 구멍은 정말 견딜 만한 것이못된다.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간다고 뭔가 딱히 나아지는 건지는 나도 잘모르겠다. 하지만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인적이 드문 곳에 홀로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점에선 나도, 유리카도, 인간이 아닌 주아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인간이 있어봤자 낯만 가리는 주제에). "숲 입구에 가면 '여기까지 켈라드리안이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하는 팻말이라도 붙어 있을까?" "시답잖은 소린 그만해, 파비안." "아니면 '인간 마을에 잘 오셨습니다, 오랜만이네요' 하는 환영단이라도 나와 있으려나?" "쳇, 만약 있다면 우리 돈을 긁어가려고 갈퀴들을 들고 서 있을 거다." 숲을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 핀잔과 지분거림을 주고받는데 굉장히 익숙해져 있었다. 아직까지 이렇게 주고 받고가 잘 되는 친구를만난 일이 없다. 나도 어디 가서 싸우다가 말 모자라 진 적은 없는데유리카에겐 곧잘 진다. 그러나 유리카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였다. 자기도 별로 져본 적이 없는데, 나한텐 종종 진단다. 우리는 서로 말싸움하다가 지면 살인이라도 나는 양 그렇게 즐겁게우리끼리의 유희 - 주아니의 의견을 빌리자면 그건 싸움을 넘어서 전쟁을 방불했다고 했다 - 를 즐기면서 여행을 하고 있었다. 주아니는종종 이렇게 말한다.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어! 둘 다 잘했고, 내가 잘못했어! 그만들하라구!" …… 십중팔구 이런 경우, 주아니는 잘못은커녕 우리의 이야기와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또 알게 된 건데, 유리카도 돈 아끼는 문제에 있어선 나 못지 않게민감했다. 내 생각인데, 이런 식으로라면 그저 누가 우리 돈을 빼앗아가려는 기미만 보였다 하면 그쪽에서 가졌던 돈도 몽땅 거꾸로 우리한테 털릴 판이다. …… 말해 놓고 보니 여행자들이 아니고 흡사 강도단이군. 유리카가 말솜씨에 있어 가장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때는 역시내가 그녀가 숨기고 있는 이상한 점들에 대해 질문했을 때다. 온갖궤변과 농담과 표정연기와 말 돌리기로 잽싸게 논지를 흐려놓고 도망치려는 유리카의 말꼬리를 잡아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몇 번이나 해냈었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지. "유리, 그러니까 너는 나와는 달리 블로지스틴의 구슬을 다룰 능력도 있고, 온갖 이스나에나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페어리족의 여왕이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네 이름을 알고 있고, 그 페어리의여왕조차도 처음 본다는 로아에 족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이미 알고있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남자들 서넛을 처리하거나 천장을 뚫고 지나다니는 것은 아주 일도 아니고, 보석을 척 보기만 하면 그 안에 페어리가 갇혀 있는지 아닌지도 알아보고, 그러면서도 내 목걸이가 필요하면서도 그걸 빼앗아가지도 않고, 그렇다 이거야?" 내 장황하고도 예리한(!) 지적에 유리카의 대답은 언제나 짧았다. 말하자면 긴 이야기들 중 논지와 좀 먼 쓸데없는 부분에 대답해버리고 다른 부분은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이다. "네 목걸이가 필요하지는 않아." "너한테도 중요하다면서?" "중요한 거랑 필요한 거랑은 다르잖아." "그럼 좋아. 왜 중요한데?" 이쯤 되면 나오는 대답은 뻔했다. "보기 좋잖아. 예쁘고." 이렇게 말하면서 유리카는 웃는다. 정말, 목걸이가 예쁘다라는 말정도는 귀에도 안 들어올 정도로, 감히 비교도 안될 정도로 예쁘게웃는다. 내 입에서 나올 건……. "에휴……." 한숨밖에 없지. 내가 좀 독한 놈이었다면 '그럼 네 갈 길로 가! 너랑 동행하지 않을 테니까' 하는 식으로 극약 처방을 썼겠지만 나로선 그렇게 까진못하겠다. 저번에 들판에서 헤어질 때를 생각하면 별로 그렇게 하고싶은 생각이 안 난다. 유리카 성격으로 보아 자기 일이야 어찌 되었든 - 그 일이 뭔지가 정말 궁금하단 말이다! - 정말로 그냥 가버릴가능성이 열중 일곱은 된다고 보기 때문에(물론 이건 내가 정말 가라는 듯이 아주 생생한 연기를 해냈을 때를 말한다). 간신히 끔찍스런 달이 지고, 새벽녘이 되었을 때다. 우리는 좀전부터 숲 가장자리를 따라 나타난 길로 걷고 있었다. 아침쯤에는 숲의 끝자락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아까부터 이야기하고있던 참인데, 저만치 언뜻 사람의 그림자 같은 것이 휙 지나갔다. 유리카가 놀란 듯한 탄성을 냈다. "아?" 나만 본 게 아닌 모양이네. 유리카가 내 얼굴을 봤다. 암흑 아룬드에는 사정없이 기름을 아끼지 않고 램프를 켜기로 했기 때문에 불빛에 비친 얼굴이 발갛게 열에들뜬 것처럼 보인다. "너도 봤지?" "응." 내가 앞에 섰다. 유리카는 남 앞에 서서 걷기를 좋아해서 종종 앞서 걷곤 했는데, 위험할지도 모를 때는 내가 항상 애써 뒤에 세운다. 내가 유리카보다 검을 잘 쓸 지에 대해선 솔직히 자신이 없지만 말이야(싸워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어?). "또 지나갔다. 소리 들려." 주아니가 주머니에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그렇다면 확실하다. 주아니의 청력은 믿을 만 하니까(이젠 믿기로 했다). "마을에서 나온 사람인가?" "내가 마을 사람이라면, 암흑 아룬드 새벽녘에 뭐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거대한 숲 주변을 혼자 배회하는 일은 하지 않아." 유리카는 단호하게 내 말에 반대했다. 그도 그럴 듯 했지만 어쨌든가까이 다가가 보아야 알 일이다. 주의 깊게 걸음을 떼려고 하는 참인데……. "뭘 조심하겠단 거야?"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휙 지나가는 그림자. "뭐, 뭐야!" 으아…… 희미한 것이 귀신, 아니 이스나에인가? 순간적으로 유리카가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놀라서 그런 건지 몰라도 갑자기 그 순간, 내 마음 속에서 용기 비슷한 것이 솟아나는 것같다. 이게 용기 맞냐? 뭐, 그거야 써 보면 아는 것이고. "누구냐! 앞으로 나서라!" 음…… 맞는 것 같군. 상대방의 그림자가 훌쩍 앞으로 뛰어드는 듯하더니 내 앞에 버티고섰다. 어라…… 아는 얼굴? "뭘 그렇게 놀라냐? 구면인 주제에." +=+=+=+=+=+=+=+=+=+=+=+=+=+=+=+=+=+=+=+=+=+=+=+=+=+=+=+=+=+=+=이번 장 프롤로그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덕택에 하고 싶은 이야기도 조금... 나왔던 것 같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216번제 목:◁세월의돌▷ 3-1. 악령의 노예들 (2) - 100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0 23:51 읽음:155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1. 악령의 노예들 (2) -100회! 아…… 르단드 아냐? 괜히 긴장했다가 갑자기 맥이 탁 풀린 나는 볼멘소리로 툭 첫마디를 던졌다. "웬일이냐? 놀라고 하려고 작정했냐?" "넌 네가 그냥 멀쩡히 돌아다니는데, 마주치는 사람이 놀랄지 안놀랄지 고려하면서 맨날 다니냐?" 말 되는군. 아르단드는 그동안 우리한테 뭔가 배운 게 있어서 수련을 좀 쌓았음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유리카가 그제야 입을 열어 말을 했다. 문득 바라보니 아르단드는 예의 옷차림이 아니다. 게다가 처음 보았던 때의 똑바른 영상과는 달리 지금은 좀 희미한 상태라 보고 있는것이 왠지 좀 섬뜩했다. 밤새 옆에 앉아서 농담 따먹기로 지분거렸던상대 같지가 않다. 헤렐이 생각나는군. 역시 인간에겐 잘 안 보이는건 무서운 거야. "그 옷이 뭐냐?" "잠시 나들이 복장좀 입었다, 왜?" 파하- 나들이 복장이 그러냐? 웃음을 터뜨리다 옆을 보니 유리카의 얼굴에서도 한심하다는 듯한웃음이 비어져 나오고 있다. 그녀가 입을 열자 내 생각 속의 말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넌 그런 옷 입고 나들이를 다니냐?" 푸하……. 아르단드는 전에 입고 있던 녹색 옷 대신 나무껍질이 덕지덕지 붙은 것 같은 이상한 갈색 옷을 뒤집어쓰고 있다. 마치 비올 때 입는우비처럼 몸 전체에 통째로 뒤집어씌워지는 것이, 옷이라기 보다는무슨 자루를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결코! 우리가 웃는 것도무리는 아니었다. "나라고 좋아서 이런 옷을 입는 줄 아냐." 아르단드는 전의 상황이 재현될까봐 두려웠는지 급히 우리 말을 막았다. 웃는 건 자유니까 계속 웃지만 남의 옷 갖고 지나치게 계속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나는 계속했다. "그럼 왜 입는데? 전통의 나들이 복이라 감히 거스르지 못하는 거냐?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한 옷이래서? 그것도 아니면 알고보면 굉장히 비싼 옷이냐, 그거?" 유리카가 내 말을 받았다. "아냐, 오늘은 목욕을 안 해서 일부러 팔도 안 보이는 자루같은 옷을 입은 걸 거야. 또는 옷이 단벌이어서 저번 옷을 빨았더니 이거밖에 없었거나, 아니면……." "그, 그만들 해! 난 도와주려고 온 건데……." 우리 중에서 제일 선량한(?) 주아니가 주머니 속에서 내 배를 툭툭친다. 나는 큼큼 목을 가다듬으면서 일단 말을 멈췄다. 유리카는 계속 웃고 있었다. "미안해. 오랜만에 사람, 아니 이스나에를 봤더니 너무 즐거운 나머지 우리가 좀 이상한 상태야. 네가 이해해라. 유리, 그만 웃고 좀예의바른 미소를 지어봐." "이렇게……?" "……." 유리카의 예의바른 미소에 대해 아르단드가 만족했을는지에 대해선상상에 맡기겠다. 어쨌든 실컷 우리에게 공격당한 끝에 배가 고픈 상태였던 우리가잠시 이야기를 멈추자, 아르단드는 입을 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하여간 너희들은…… 내가 온 건 일단 내가 켈라드리안 밖으로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한 거고, 둘째는 에졸린여왕하고 이야기한 결과, 너희들이 쉴 만한 적당한 곳을 이야기해 주자는 데 의견이 일치해서 이렇게 온 거야. 그리고 너희들이 그렇게웃어마지 않는 이 옷에 대해서는……." 아르단드가 자루를 치마처럼 양손으로 들어 보이는 바람에 우리는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메르농 샘에서 멀리 벗어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입어야 하는옷이란 말이다. 샘을 벗어나는 건 나 같은 종류의 이스나에로선 별로바람직한 일이 못 돼. 부득이하게 이렇게 멀리 올 경우에 내 이스나에로서의 힘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면 어쩔 수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좀 그만들 웃으란 말야!" 우리가 계속 웃고 있었기 때문에 아르단드는 마지막 말을 거의 외침에 가깝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알았어…… 소리는 지르지 마." "웃어서 미안해." 유리카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아르단드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래서 네가 지금 희미하게 보이는 거군?" 아르단드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자세히 보니, 아까보다 더 몸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해서 그런가? 이스나에가햇빛을 무서워한단 말은 들어본 일이 없는데. "파비안, 우리 그만 웃어야겠다. 얘 오래 지체하게 하다간 우린 안보이는 친구랑 대화를 나눠야 할 지도 몰라." 별로 바람직하지가 않은 상황상정이군. "그런데 너 우리한테 꼭 그렇게 인사를 하고 싶었니?" "하하, 너 사실은 우리가 좋았던 거지?" "너 성향이 좀 이상해서 우리한테 정신공격 당하는걸 좋아하는 거아니니? 삶의 활력소가 되는 거 아냐?" "아냐, 쟤는 이스나에 사이에서 따돌림 당하고 있었을 거야. 그래서 우리가 말 거니까 눈물나게 고마웠구나?" "그마안- 파비안, 유리카, 그만좀 하고 쟤 얘기좀 듣자, 응?" 결과는 결국 주아니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란 거다. 어쩌면 우리도 이렇게 신나게 말을 걸려고 하는 거 보면 은근히 아르단드를 좋아하는 건지도 몰라. 그래서 이렇게 한 마디라도 더 시키려고 안달인 건지도 몰라. 그게 아니면 우리 쪽이 성향이 좀 이상하든지……. "너희들한테 인사하는 건 계획 수정해야겠다. 언젠가 만나서 원한을 갚을 때에 그때 새로 인사하도록 할게." 아르단드는 투명한 주제에 얼굴까지 붉히고는 그렇게 말했다. 유리카와 나는 얼굴을 마주보고 웃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가고 있는 길을 벗어나서 여기서부터 정남 쪽으로한나절 정도까지 걸어가면 숲 속에 있는 통나무집이 한 채 보일 거야. 통나무집 치곤 꽤 크지. 지붕 꼭대기까지 한 20큐빗은 될 테니까. 거기에 들러서 거기 사는 사람에게 인사하고 에졸린 여왕의 인사를 전한다고 말해. 그러면 그 사람이 너희들에게 한 상 잘 차려줄 뿐만 아니라 잠자리도 제공해 주고, 너희들이 이번 아룬드에 피해야 할것들을 일러 줄 거야." 나는 보통 사람은 해낼 수 없는 점원만의 비기… 를 이용하여 재빨리 내용을 머릿속에 저장했다. 손님 주문이라고 생각해버리면 이쯤이야 간단하다. 아르단드는 이제 처음과 비교했을 때 거의 투명하다고 할 정도로까지 희미해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릴 때 보니, 투명하게 그너머의 나뭇잎들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유리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잘 알았어. 이렇게 애써 찾아와 줘서 고맙고, 저번에 샘에 대해서내가 한 위협에 대해서도 사과할게. 그리고 너 빨리 가야겠다. 내가봤을 땐 거의 위험 수위에 다다른 거 같으니 말야." "그래." 아르단드의 목소리는 이제 그다지 명확하지가 않았다. 괜한 이야기로 시간을 지체하게 한 것이 좀 미안해진다. "그래, 그럼 잘 가!" "메르농이 영원히 신선한 샘물을 품게 되길!" 아르단드가 입술을 움직여 뭐라고 말한 것 같긴 했으나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더니 그는 그 자루 옷으로 머리까지 감싸고는우리 앞에서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주아니가 주머니에서 고개를 내밀더니 말했다. "나중에 꼭 만나서 앙갚음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라고 말했어." "그, 그래……?" 주아니가 귀 좋은 것이 이럴 땐 도움이 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단말이야. 나는 유리카에게 물었다. "오는데 이렇게나 걸렸는데, 돌아가는 도중에 문제 생기는 거 아냐, 쟤?" 유리카는 걱정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샘으로 한 걸음이라도 가까워질수록 계속 다시 힘을 얻게될 테니까. 이스나에는 우리보다 걸음이 훨씬 빨라." +=+=+=+=+=+=+=+=+=+=+=+=+=+=+=+=+=+=+=+=+=+=+=+=+=+=+=+=+=+=+=이걸로 100회입니다...^^계속 갑니다-! 또 추천해 주신 분들, 정말 감사해요- ^^정통 환타지의 계보를 이을 작품이라니,정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제가 보고 있는 세상을 여러분도 같이 볼 수 있기를, 너무나도 희망합니다. 그걸 위해서 있는 글재주, 없는 글재주 다 쥐어짜고 있습니다. ^^;잘..되고 있나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217번제 목:◁세월의돌▷ 100회가 되었습니다.. 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0 23:51 읽음:1225 관련자료 없음----------------------------------------------------------------------------- "100회입니다." 스스로도 놀라고 있는 중이에요, 100회, 100회라... 오늘이 5월 20일이니, 100회까지 오는 데 꼬박 끊기지 않고 39일걸렸습니다. 한달 조금 더 되네요. 물론, 훨씬 긴 기간에 훨씬 긴 글들을 오랫동안 연재하시는 분들이많으시고, 그 분들에 비하면 하잘 것 없습니다만, 그래도 '100'이라는 것은 저 나름대로 어떤 자신감이 생기는 숫자인 것 같습니다. 이제서야 다른 분들의 100회, 200회 쓰시는 기분과 '몇회 기념 이벤트' 하시는 마음을 알 것 같아요. (에...저는 할 만한 이벤트가 없군요.. 긁적;)숫자같은 것에 의미를 두는 건 인간 뿐이겠지만...^^그래도 새로운 힘과 의욕을 얻기 위한 '의미두기'라면 충분히 쓸모있는 것이고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축하는 의미에서 이 글을 씁니다...^^;그 동안 글 읽어주셨던 모든 독자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게시판에 추천 써 주셨던 모든 분들, 다시 한 번 고맙고요(추천해주신 분들의 아이디는 이상하게 잊어버려지지가 않습니다. ^^;),메일이나 메모 보내주신 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고맙다는 말씀 드립니다(모두 개인보관함에 저장되어 있어요..^^). 이 글 읽으시는 나우누리, 하이텔, 천리안, 채널아이의 모든 분들께 인사를 이런 식으로나마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무슨...작별 인사 같지만, 100회라고 그만 쉬겠다는의미는 아니에요..^^;;;그럼! 내일, 101회에서 뵙겠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305번제 목:◁세월의돌▷ 3-1. 악령의 노예들 (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1 23:54 읽음:150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1. 악령의 노예들 (3) 태양이 머리 위에 떠올랐다. 우리는 아르단드가 알려준 쪽으로 가기 위해 걷던 길을 벗어나 나뭇가지들을 밟으며 숲길을 걷고 있다. 길을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이쪽 방향 역시 누군가 지나다녔던길처럼 지나기가 편하게 뚫려져 있다. 꺾어진 나뭇가지들이 바닥에떨어져서 잘 밟아 다져져 있었다. 예전의 경험을 되살려 혹시 멧돼지 같은 것이 지나간 자국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때처럼 아래쪽으로만가지가 꺾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하늘까지 나무들이 탁 트여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사람들이 다녀서 뚫린 길처럼 나무가 점차 드문드문해지고 있다. 암흑 아룬드치고는 꽤 맑은 날씨다. 하늘이 파랗다고 느껴지는 걸보면, 이번 달이 끝나면 봄이 온다는 것이 전혀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다. "우리 걸은 지 얼마나 됐지?" "한나절이 다 되어가." "그럼 나타날 때가 됐잖아." 어째서 낮이 되어 가는데 안개는 걷힐 생각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 해가 떠오르면서 꽤 엷어졌다고 생각했는데 한참 걷다보니 다시 짙어지고 있다. 이 근처에 무슨 커다란 호수라도 있나? 검은 새 한 떼가 머리 위를 비스듬히 가로질러 날아왔다. 그런데보통의 무리 짓는 커다란 새들처럼 정연한 대열을 갖추지 않고 이상하게 멋대로 뒤엉켜 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거의 기러기 만했다. 저 정도 크기의 새들은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서로 부딪치기 십상일텐데. 게다가 까마귀도 아니고, 저렇게 커다랗고 검은 녀석들은 도대체무슨 새야?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중인데 바로 머리 위까지 날아온 새들이날카롭게 울부짖는 소리가 순식간에 공기를 찢어 놓았다. 카아아악- 카아악-! 캬캬캬아아- 카악! 캬르르르륵- 캬오- 코오! …… 새 소리도 엄청나게 불길하군. 머리 위로 수십 마리나 되는 새들이 소리를 지르자 유리카가 몸서리를 치며 귀를 틀어막았다. 쇳조각을 마주 긁는 것 같은 금속성의우짖는 소리, 기분 탓인지 죽어 가는 사람이 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처럼 들렸다. 새들은 서서히 서편 하늘로 멀어져 갔다. "지도나 볼까." 쓸데없는 생각을 잊어버릴 겸, 배낭을 힘들게 뒤져서 지도를 끄집어냈다. 유리카가 내 옆에 나란히 걸으면서 지도를 들여다봤다. "우리가 지금까지 온 길을 표시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잉크 있어?" "없어." "그럼 별 수 없군." 켈라드리안이 꽤 큼직하게 나타나 있다. 이 지도는 우리 나라 이스나미르의 지도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로 표시되어 있다. 하기야…… 아예 지도 경계가 이스나미르의 경계인 셈이니지도 밖이라고 하는 편이 오히려 낫겠지. 나중에 국경을 넘게 되면그야말로 눈감고 가는 수밖에 방법이 없겠다. 지도란 것은 그리 쉽게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말야(지도 같은 것을 함부로 구하겠다고수소문하고 다녔다가는 관리들한테 딱 의심받기 좋다, 첩자나 뭐 그런 걸로). "쳇, 그저 '숲' 이라고만 써 놓으면 어쩌란 거냐." "이미 숲 이름은 아는데 뭘. 그건 그렇고 크기가 뭐 이래?" 나 역시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어라, 정말 "여기 숲이 두 개나 있었던가?" 유리카는 내 질문에 고개를 젓더니 물었다. "아냐. 이 지도 언제 만든 거야?" "몰라. 이 지도를 만든 시점에서 제작자는 힘보른 시가 이베카 시로 되었다는 것에 대해선 전혀 몰랐단 것만 알 수 있지." "좀 한심한 지도겠구나." "유리…… 한심한 지도겠다, 가 아니라 실제로 한심해." 왜냐면…… 지도에는 숲의 크기가 완전히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켈라드리안이 말도 안되게 크게 그려져 있었다. 켈라드리안이 작은숲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약 4일만에 충분히 가로지를 수 있었던 곳인데 반해, 지도에 나타난 숲의 크기는 실제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숲이 둘이냐고 물었던 이유가 그거다. "어이가 없네." 내가 헛웃음을 치면서 이 지도를 버릴까 말까, 버린다면 어디다가버려야 할까, 버리기보다는 팔아먹는 편이 좋지 않을까를 고민하고있는데 유리카가 손을 내밀어 지도를 받아들었다. "너 이 지도 어디서 났니?" "우리 집 구석에 굴러다니던 거야." "흐음…… 여기 그려진 국경 모양하고 지명들로 볼 때, 이거 약100년은 된 지도 같은데." "뭐야?" 내 머릿속에는 그 순간 골동품으로 위장하면 꽤 비싸게 팔아먹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런 점에서 유리카는 나를 따라오려면멀었다. 여전히 다른 생각에 잠겨 심각한 표정을 했기 때문이다. "이 켈라드리안, 예전엔 지금보다 넓었다고 하거든." "그래? 그럼 어디가 숲에서 마을로 변한 거야?" "아마도…… 이 지도에 의하면 우린 지금 숲 한가운데 정도에 있어야 하는 게 맞거든? 이쪽부터, 이쪽." 유리카가 손가락으로 지도의 남쪽과 북쪽, 그리고 동쪽으로 훨씬넓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나는 보이지 않는 동그라미를 들여다봤지만그렇게 숲이 컸대봐야 우리가 빠져나오는 데 더 골치 아팠을 거란 점말고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유리카, 파비안, 저길 봐, 저기." 주아니가 갑자기 지도에 정신 팔고 있는 우리를 불러서 우리는 지도에서 눈을 떼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라, 갑자기 나타난 저건 뭐지? 희미한 지붕 같은 것이 나뭇가지 너머로 아른거리고 있었다. 급히 발걸음을 빨리 해서 다가갔다. 그리고 미처 십여 걸음도 가기전에 안개 속에서 갑자기 통나무집의 윤곽이 불쑥 나타났다. 나와 유리카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우리, 아무리 안개 때문이래도 저렇게 커다란 집을 지금까지 못봤단 게 말이 되냐?" "글쎄, 아무래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유리카와 내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올려다본 집은 아르단드가'통나무집' 이라고 표현한 그 집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로 거대한……다시 말해 통나무 저택이었다! '통나무' 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것이 가능하다면, 저건 정말 수십 그루의 나무를 통째로 가져다 심어서 지은 집임에 틀림없다. 통나무집이라기 보다는 '통숲집'이 쪽이 낫지 않아? 우리는 '통숲저택'의 앞마당으로 주의 깊게 접근해갔다. 집이 굉장히 커선지 우리가 처음 발견한 때부터도 꽤 여러 걸음을걸어서야 집 앞으로 다가갈 수가 있었다. 큼직한 울타리로 둘러진 앞마당이 보인다. 울타리도 웬만한 나무를 통째로 잘라서 갖다 꽂은 것 같다. 울타리앞에 다가서고 보니, 보통 집이라면 무릎에서 허리 높이쯤 닿도록 만들 울타리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나무판자 한 개 한 개가 내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높이다. 가로 길이도 1큐빗 이상이다. 이것 역시조촐하게 '울타리'라고 말하기는 좀 미안하고 나무로 만든 담벼락 정도라면 적당할 정도로 충분히 무식했다. 여기 사는 인간들은 도대체 얼마나 키가 큰 거지? "어라? 음악 소리-" 주아니가 말하지 않아도 이번엔 나도 유리카도 그 음악 소리란 걸들었다. "정말?" +=+=+=+=+=+=+=+=+=+=+=+=+=+=+=+=+=+=+=+=+=+=+=+=+=+=+=+=+=+=+=100회 축하 메시지 보내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메일, 쪽지, 게시물 모두요...^^)너무 많은 분들이 축하를 해 주셔서 정말 행복합니다..^^;힘내서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306번제 목:◁세월의돌▷ 3-1. 악령의 노예들 (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1 23:54 읽음:149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1. 악령의 노예들 (4) 음악 소리는 집안에서 나는 것 같은데, 상당히 신나는 춤곡이다. 농촌에서 수확 잔치 같은 걸 벌일 때 아줌마 아저씨들이 손 마주잡고빙글빙글 돌 것 같은 멜로디였다.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유쾌하게 사는 사람인가 봐." 내가 애써 해석을 갖다 붙인 다음 울타리 문으로 다가가 보니, 문은 닫혀 있지만 잠긴 것 같지는 않았다. 유리카는 아직도 그 높직한울타리 문을 올려다보고 있기에 내가 손을 잡아끌었다. "들어가자. 에졸린 여왕님이랑 아르단드가 추천한 집인데 무슨 문제야 있겠냐?" 나는 마치 아는 사람이 추천한 식당이나 여관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말해버린 다음, 내 말에 대해 스스로도 좀 의아하게 느끼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음악 소리는 계속 나고 있었다. "흐음……." 앞마당은 평범한 농가의 모양이다. 한 구석에 좀 지나치게 크다 싶은 빈 닭장이랑 뭔가 심었던 듯한 작은…… 이 아니고 사실은 커다란텃밭, 그리고 정면에 높이가 약 8큐빗에 달하는 '대문'이 보였다. 문은 역시 닫혀 있었다. 즉, 평범한 모양이긴 한데 다들 지나치게 컸다. "아무도 없나?" 아무도 없는 집이라 해도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실례다. 나는 조심스럽게 마당을 가로질러 가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음악소리만 계속 흘러나올 뿐, 아무 대답도 없었다. "아무도 없나 봐." 몇 번 더 두드려 보았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창문이 있었으나역시 안쪽으로 덧문까지 꼭 닫혀 있었다. 내가 촌구석에 살던 경험을 살려 중얼거렸다. "마당에 물건들 늘어놓은 걸로 봐서 집을 오래 비운 것 같지는 않은데. 게다가……." "음악 연주하는 사람은 문 열어줄 생각이 없나봐. 혹시 귀머거린가?" "귀머거리가 어떻게 연주를 하니?" "하여간, 말이 그렇단 거야. 사람인지 뭔지 몰라도 일단 문 열어줄 생각은 없어 보이잖아?" 유리카는 그렇게 대답하더니, 별 수 없잖냐는 듯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잘 차린 한 상을 기대했더니만, 오늘 점심은 글렀구나." "찾으러 갈까?" "어디로 간줄 알고 찾아가니?" "그렇다고 계속 여기 서서 이렇게 기다릴 거야?" "기다리긴, 우리 갈 길을 가야지." "가자고?" 유리카는 집 쪽을 다시 힐끗 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우린 지금 숲에서 거의 다 나왔어. 잘 차린한 상이라면 가까운 마을 여관에 가서 해도 충분하다구." "하지만, 아르단드는 이 집의 주인이 우리한테 뭔가 도움될 이야기를 해 줄 거라고 했잖아. 그 얘기를 들어야 되는 것 아냐?" "그거보다 우리 갈 길이 더 급해." 내가 항상 가장 이해되지 않는 것이 바로 저 말이었다. "우리 갈 길이 뭐가 급하다는 거야? 나한텐 마감시간 같은 것도 없고, 시간이라면 충분하단 말야. 항상 네가 서두르는데 나는 그게 이해가 안 돼." "네가 너무 느긋한 거야. 우리가 켈라드리안을 가로질러 오는 데만벌써 4일도 넘게 소비했어. 일단 여길 빠져나가면 우리는 말부터 한필씩 구해야 할거야." "어딜 급하게 갈 건데? 넌 내가 어디 가는지 알고나 있는 거야?" "적어도 너보다는 더 잘 알고 있어!" 유리카는 말하다 보니 정말 화가 났는지 마지막 말에서 언성이 높아졌다. 우리는 잠시동안 서로 쳐다보고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면 주아니가 도움이 된다. "파비안, 유리카, 둘 다 그만둬. 이 집주인을 찾으러 가나, 여기서묵지 않고 마을을 찾아가나, 여길 떠난다는 점에선 둘 다 똑같잖아. 일단 여기를 뜨면 된다구. 그러다가 주인을 만나면 돌아오면 되는 거고, 못 만나면 마을로 가서 하룻밤 묵은 다음에 그 다음 일은 다음에생각해도 좋잖아?" 다시 생각해봐도 주아니의 말은 명언이었다. 우리는 지금 서쪽으로 차츰 빠지면서 숲길을 걷고 있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야 할 지도 모르겠다. 100년 묵은 골동품인 엉터리 지도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사그락, 바삭, 바삭. 숲을 다 빠져나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나무들은 굵은둥치와 오래된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똑바로 앞을 바라보면 쭉쭉 위아래로 뻗은 수직의 세상이 펼쳐져 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인지,그것은 시원하다기보다는 위압적인 느낌을 주었다. 어떤 위협적인 존재가 노려보는 것처럼……. 마치, 곧 비라도 쏟아질 것 같은 날씨. 유리카는 아까 화를 낸 이후로 웬일인지 말이 없다. 아직도 화가나서 그런 건지, 무슨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숲속으로 한 시간여 이상 걸어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아니가 평소에 안 하던 짓, 즉 유리카의 주머니 속에서 가기를자청했는데도 그 주아니조차 아무 말이 없었다. 일단, 나라도 말을 걸어야지. "유리카, 화났니?" "……." 내 쪽을 보고 있지도 않다. 계속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내가 뭘 잘못했니?" "……." 아휴, 난 말 없는 게 싫어. 그게 주아니였든 유리카였든. 점심때가 가까워 올 때쯤, 우리는 작은 시냇물을 발견했다. 앞으로 몇 시간 안에 마을을 발견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여서 일단 여기서 좀 쉬어가기로 했다. 약간 올라온 둔덕에 내가 걸터앉았고유리카는 내려가 물을 떠 마시고는 잠깐 동안 얼굴을 씻었다. 다시 위로 올라온 그녀가 말했다. "파비안, 아까 전에 화내서 미안해." 아주 미안해하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일단 사과하고 싶어하는 것 같기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가 먼저 심하게 말한 점도 있지. 네 화가 풀렸다면 그걸로 좋아." "네게 아무 설명도 않고서 내 맘대로 서두른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는데, 너무 내 멋대로였나봐." 으음…….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뜬 다음, 턱을 앞으로 쭉 뺐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네가 아닌 것 같다." "뭐야, 나는 사과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니?" 유리카는 눈썹을 약간 치켜올리고서 나를 쏘아봤지만, 반은 장난인것을 알기 때문에 싱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주아니는 우리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도저히 말릴 수 없다는듯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걸었는데도 통나무집 주인은 못 찾았으니까, 네 생각대로 일단 마을로 가는 것이 좋겠어. 그 다음 일은 주아니 말대로 그다음에 생각하고." "지도 잠깐 다시 줘볼래?" 유리카한테 지도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그걸들여다보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제일 가까운 켈라벤 마을은 오늘 저녁 안에 갈 수 있을 것 같긴한데, 숲에서 완전히 벗어난 지대는 아냐. 아마 나뭇꾼들과 화전민들의 마을인 것 같다." "이렇게 아름다운 숲을 태운다고?" 내가 화전이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자 유리카는 픽 웃었다. "그게 아니고서는 굶는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야. 죽음은종종 살아있는 것들을 먹여살리지. 생명과 죽음은 항상 동전의 양면이니까." 나는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 다음 이야기를 물었다. "그럼 다음 마을은 얼마나 떨어져 있는데?" "한…… 모레 오후까진 꼬박 잠도 안 자고 걸어야겠는걸?" "뭐가 그렇게 멀어? 무슨 마을인데 그래?" 유리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아르나 시." +=+=+=+=+=+=+=+=+=+=+=+=+=+=+=+=+=+=+=+=+=+=+=+=+=+=+=+=+=+=+=파비안은 시간이라면 충분하다는데, 저는 늘 그렇지가 못하군요..^^;;저에겐 매일의 마감시간이 있으니까요. ^^;오늘도 후다닥...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387번제 목:◁세월의돌▷ 3-1. 악령의 노예들 (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2 23:54 읽음:146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1. 악령의 노예들 (5) "……." 그게 마을이냐? 이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가 아르나 강변의 아르나시 아냐? "그것 말고는 없어?" "없는걸. 켈라벤, 아니면 아르나 뿐이야. 적어도 이 지도에선. 켈라드리안 숲에서 일단 벗어나려면 적어도 오늘 저녁이면 되지만, 그래 봤자 커다란 황야로 나가는 것 뿐이고, 결국엔 둘 중에 한 마을로가야 해." 나와 유리카는 잠깐 동안 고민하느라 말이 없었다. 숲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긴 한데, 숲 안에 있는 마을을 안전하다고 봐도 좋은건가? 지도에 표시된 켈라벤은 정말 조그맣기 이를 데 없었다. 대강 계산해보아도 십여 호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마을이다. 주아니가 새로운 의견을 내놓았다. "차라리 통나무집으로 되돌아가는 게 어때? 그 집 주인도 밤이 되면 돌아오지 않을까? 그러면 혹시 근처에 다른 마을이 있는지 물어볼수도 있고." 이리하여 세 가지 길을 놓고 우리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한참동안 시냇물이 졸졸거리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각각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시냇물을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문득 한 가지에 생각이 미쳤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으응?" 나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아니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윽고 끄덕였다. "정말이네. 바람 소리 하나 없어." "숲 속인데, 새 울음소리도 안 들리네." "저 숲을 봐." 나는 손가락을 들어 우리가 빠져 나온 쪽을 가리켰다. 유리카와 주아니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나뭇잎 하나 까딱하지 않아." "……." "……." 불길한 느낌이 갑자기 온 몸을 휩쌌다. 유리카가 고개를 바르르 떨며 젓더니 몸을 고양이처럼 움츠렸다. 그녀의 얼굴에 공포의 기색이 역력했다. "빨리, 빨리 나가고 싶어. 여긴 이미 우리가 아는 그 켈라드리안이아니야. 암흑 아룬드의 숲은 그 어느 때의 숲과도 달라." "다르다니?" 온 몸이 뭔가가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가느다란 전율 같은 것, 또는 가벼운 날개의 벌레들. "다른 숲, 다른 숲이야. 다른 때의 선량한 산짐승이 암흑 아룬드에는 목숨을 빼앗아 가는 피에 굶주린 괴물이 될 수 있는 것과도 같아. 암흑 아룬드는 소박한 포크 한 개가 사람을 찔러 죽이는 흉한 물건이될 수도 있는 때야. 좋은 마음으로 마신 술에 취해 친구를 죽어가게할 수도 있는 때……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 숲 안에 가려진 다른 기운들이 눈을 뜨고, 우리를 방금 보았어." "뭐…… 라고?" 나는 수십 개의 눈동자가 내 몸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에 순간적으로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후딱 몸을 일으켰다. "그게 뭐라고는 설명 못해도, 방금 전부터 우리를 쫓는 눈들이 있어. 그게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집요하고도 악의어린 힘."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내렸다. 고요한 숲이 이제는 두렵다 못해 끔찍하게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어서, 가자. 여기 더 있다간 머리가 어떻게 되겠어." 유리카는 내가 배낭을 집어 메는 동안에도 양팔을 가슴에 꼭 붙인채 내가 가리킨 숲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온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서둘러 떠났다. "가까운 마을이더라도 일단 거기로 가자." "숲을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야. 일단 황무지로 나가게 되더라도 빠져나가고 봐야 해. 내 직감이 그래." "그렇지만, 황무지라고 안전할 것 같아? 어차피 암흑 아룬드인데,황무지는 위험한 곳이 되지 않으란 보장이 있어? 일단은 사람이 사는곳으로 가야 해.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다른 생명의 접근을 거부하는 뭔가가 생겨나게 되어 있어. 그게 강하든 약하든 간에 말야.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어." "겨우, 십여 호 사는 마을에서 그런 것을 믿어?" 유리카는 빨리, 지체하지 않고 숲을 빠져나가고 싶어했다. 그리고나는 일단 사람 사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후가 다 지나가도록 걸으면서 내내 그 논쟁이었다. 우리 둘 다, 지독하게 불안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았기 때문에오히려 의견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논쟁은 점차 신경전으로 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통나무집에서 그냥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걸. 거기 사는사람들은 덩치도 크고 힘도 대단한 것 같던데, 십여 호 정도 되는 마을 같지도 않은 화전마을보다는 훨씬 다른 것들이 범접하지 못할 것같지 않니? 일당 백 정도는 대신하고도 남지 않을까?" 나는 발끈해서 말했다. "비꼬는 거야? 괜히 서둘러서 거길 떠나자고 한 것은 네 쪽이었잖아-." "그래서, 이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탓을 하려면 암흑 아룬드에여행하는 사람이 본래 바보란 말야. 게다가 이런 인적 없는 숲이라니,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수도 없는 짓이야, 이건." "지금 너는 우리 일행이 아니니? 게다가 언제 우리가 그러고 싶어서 이렇게 된 거야? 이베카 시에서 급히 도망치느라고 어쩔 수 없었잖아!" "누가 몰라? 불안하다고 사람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하는 건 너잖아! 그래서 한 말일 뿐인데 도대체 왜 그래?" "나보다 더 불안해하는 것은 너야, 유리카! 난 네 걱정을 하고 있는 거라고!" 내 말에 유리카는 비웃듯 쏘아붙였다. "그래서, 너는 전혀 불안하지 않다고?" "……." 화를 삭이느라고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주아니는 우리가 하도 언성을 높여 신경질적으로 싸우는 통에 찍소리도 않고 가만히 있다. 모르긴 해도 자기도 화가 났겠지. 이렇게싸우기만 하는 동료들한테 넌더리가 났겠지. 나는 애써 화가 나는 것을 누르면서 말했다. "왜 이렇게 우리가 싸우게 됐지? 지금까지 다니면서 단 한번도 싸운 일 없는 우리가 오늘 벌써 두 번째 싸우고 있어." "암흑 아룬드의 영향이겠지." 유리카의 그 담담한 듯 말하는 말투에 나는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 그래서 암흑 아룬드에는 아무나 꼭 싸워야 한다는 듯한 말투구나?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니까 탓을 하려면 거기다가 해라? 어차피 순응해야 할 운명,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기만 다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사고방식이 어디 있어?" "난 그저 이유를 말했을 뿐이야! 괜히 신경질적으로 듣는 것 네 쪽이야!" "너야말로 혼자 대담하고 고고한 척 하지 말아! 우리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는 것 잘 안다고! 지금 우리는 해결책을 생각해도 모자랄……." 유리카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 이게 해결책을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니?" "……." 나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어떻게 되는 것 같아 발걸음을멈췄다. 머리가 뜨겁고, 마구 어지러워진다. 속에서 뭔가 응어리진 것이 맺혀 있는데 밖으로 나오지가 않는다. 끔찍하게 답답했다. 아아, 뭐든 간에 확 부숴 버렸으면 좋겠다.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아무 것도 못하겠어. 몇 걸음 더 가던 유리카도 멈춰 서 버렸다. 그런 가운데 주아니의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렸다. "둘 다, 아무 말 하지 마. 어차피 이쪽이든 저쪽이든 정확한 방향도 모르잖아? 마을 쪽이든 숲 경계 쪽이든, 방향이나 제대로 알고 있는 거야? 너희 둘한테 정말 지쳤어. 차라리 아무 말 않고 걷기나 했으면 좋겠다. 빠져나갈 때가 되면 어떻게든 나가겠지. 세상 끝까지이어져 있는 숲은 아닐 테니까. 이렇게 싸워야만 한다면 차라리 불길한 거든 끔찍한 거든 하여간 아무 일이나 일어나는 편이 낫겠어. 내생각엔 너희 둘이 이 숲보다 훨씬 끔찍해." 우리 둘 다 가타부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정말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작정 걸었다. 무슨일이 일어나든 지금 기분보다 더 끔찍할 것 같진 않았기 때문에 나도더 이상 어디로 가자느니 하는 주장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걷고 나니 이제 마음이 점차 가라앉았다. 말을 걸어볼까. 잠시동안 더 말없이 내쳐 걷다가 나는 걸음을 빨리 해서 앞서 걷고있는 유리카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뭔가 말을 걸려는 참인데 갑자기 유리카가 손을 들더니 나를 제지했다. "왜……." 그러나 더 길게 말할 수가 없었다. 유리카의 주머니 속에서 머리를내민 주아니조차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 +=+=+=+=+=+=+=+=+=+=+=+=+=+=+=+=+=+=+=+=+=+=+=+=+=+=+=+=+=+=+=오늘은 하나밖에 올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왠지, 글이 써지지가 않더군요. 이어서 올릴 장문의 잡담에서 그이유를 말씀드릴게요. 영 마음이 불편합니다. (참, 오늘 나우누리, 드디어 마성을 드러내더군요...)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388번제 목:◁세월의돌▷ 우울합니다... 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2 23:54 읽음:1563 관련자료 없음----------------------------------------------------------------------------- 어떤 메일들을 받고 좀 당황하고,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한 분께서 새로운 곳에 퍼가도 좋으냐는 메일을 주셨지요. 그런데... 그게 이제부터 퍼가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퍼가고 있는사람이 있는데 허락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허락을 받을 겸 메일을 주신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리고, 다른 어딘가에 글이 올라가고 있는 듯하다고 알려주는 어떤 분의 또 다른 메일... 저는 한 분이라도 많은 분이 제 글을 읽어주시는 것, 좋아합니다. 일단 즐거워서 썼던 글, 함께 즐겁고 싶어하고, 그 함께가 더 많은분이 되었으면 하고 바래요. 그래서 다른 곳에 제 글을 소개하시겠다는 분의 메일을 받으면 기쁜 마음으로 허락했었죠. 그래서 지금 하이텔 환동, 천리안 검마동,채널아이 환동에 글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 세 곳은 제게 직접 문의하셔서 허락해 드렸고, 한 번씩은 가서구경하기도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제가 모르는 곳이 몇 군데 더 있나 봅니다. 왜... 제게 직접 퍼가도 좋으냐고 물어보지 않으세요? 제가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겠다고 한 일도 없는데... 솔직히, 저도 이럴 줄은 몰랐는데 이 이야기가 영 제 마음을 심란하게 했나 봅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속사정은 잘 모르지만, 새로 메일을 보내 허락을 받으려고 하신 분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으세요. 제게 생각을 많이 하도록 하신것은 무단으로 가져가신 어떤 분이죠. 애쓴 만큼, 잘났거나 못났거나 애정이 가득한 것이 '글'이라는 존재죠. 조금이라도 끄적거려보신 분들은 다 아시듯... 어린 시절에 습작했던 노트 한 권을 잃어버려도 밤새 끙끙 앓게 하는 그런 것이, 글에는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때 끄적인 노트 한 권도 버리지 않아요. 어쩌면 제가 자세한 설명을 드리지 않아서 착오가 있었던 것일 수도있겠지요... 그러나 저의 어떤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가 제 글을 아무데나 제게 연락도 하지 않고 퍼가도 좋다..고말한 일은 결코 없습니다. 왜, 어디의 독자분들이 또 제 글을 읽어 주신다는 소식을 제게 알려주기 싫어하세요? 저는 그 소식을 듣고 같이 기뻐하고 싶은데.... 긴 글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한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 제 글을 가져가시기 전에, 반드시 미리 연락을 해 주세요. 메일한 통만 보내주시면 제가 어떠어떠한 점을 주의해 주세요...하는 답변을 분명히 보내드립니다. * 만일, 지금 제가 모르는 어떤 곳에다가 제 글을 연재하고 계신분이 있으시다면 지금이라도 연락해 주세요. 저는 그런 것을 원천봉쇄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제 글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알고 싶을 뿐입니다. 또, 기회가 된다면 그곳의 반응은 어떤지 구경하러 가고 싶을 뿐이고요. * 제가 공식적으로 퍼가는 것을 허락한 곳은 여기 나우누리의SF&FANTASY 게시판 외에는 세 군데 뿐입니다. - <하이텔> 환타지 동호회 (GO FNTSY, 장편연재란) : 엑사일런 님- <천리안> 검과마법동호회 (GO SWORD, 장편연재란) : 웨어울프 님- <채널아이> 환타지 동호회 : GISH 님이 세 곳 외에 다른 어디(다른 통신망이나 다른 동호회, 기타 BBS,인터넷 홈페이지 등등)에서 제 글을 연재하는 것을 보신 분이 있으시다면 제게 꼭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장황한 말씀 드리게 되어 제 마음도 좋지 않습니다. 내일은 다시 두 편 올리도록 노력...노력은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다시 없었으면 좋겠네요. 꽤 오랜시간 노력했지만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네요... 앞으로... 타 통신망이나 BBS, 개인 홈페이지등 새로운 곳에서 요청이 들어올 때, 과연 기쁘고 편안한 마음으로 허락해 드릴수 있을지... 저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참, 메일 보내신 분들 마음 상하지 마십시오. 그 분들을 탓하고자이런 글 쓰게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사실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행복한 통신 되세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504번제 목:◁세월의돌▷ 3-1. 악령의 노예들 (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3 23:55 읽음:140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1. 악령의 노예들 (6) 무슨 소리를 들었나? 유리카가 걸음을 멈췄다. 나도 옆에서 같이 멈추었다. 멈춰 선 그녀의 옆얼굴이 불안을 느끼고 도사린 고양이의 그것처럼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 모르겠니?" 짐승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 낯선 사람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저쪽에 노출되기 전에 주아니가먼저 저쪽의 소리를 들었어야 하잖아. 유리카가 갑자기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서둘러. 여기를 빨리 빠져나가야겠어. 피해야 할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져." "이상한 소리라도 들려?" "소리가 아냐."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유리카는 입을 다물었다. 밤을 기다리는 숲은 몹시 싸늘해 보인다. 그 안에서 시시각각으로다가오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 궁금하고 불안해서 미치기 직전이었지만 걸음을 빨리 하기 시작한유리카의 뒤를 따라 거의 뛰듯이 숲을 지났다. 달리는 동안에도 유리카는 계속 뭔가 말하다가, 다시 고개를 젓곤 했다. "아닐 거야. 아냐, 그럴 리가." 뭐길래 저런담. 묻고 싶었지만 문득 스며오르는 이상스런 불안감이 내 입을 다물게했다. 말없이 잠시동안 나도 귀를 기울였다. 우리들의 발소리 말고는 온통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숲. 그러나 뭐지? 보이지 않는 큼직한 눈동자들이 은밀하게 적대적인시선을 보내는 듯한 이 느낌은 뭐지? 문득, 힘센 손이 어깨 뒤를 옥죄는 듯한, 뻐근한 감각이 근육에 몰려오는 것을 나는 느꼈다. 쫓기는 야생 짐승들이 감지할 만한 위험에의 본능, 왜 이런 것이인간인 내게 느껴지는 거지?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헤치고 들어갔다. 길이 가로막혀서 잠시 멈춰 섰다가 돌아보는 유리카는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굳어져 있었다. "난 지금 모르는 게 아냐. 믿어지지가 않는 것 뿐이야. 내 느낌을못 믿겠어. 너무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내 능력을 못 믿겠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일단 빠져나가면 돼. 괜찮을 거야." 길을 찾아서 눈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갑자기 뺨에 오한이 이는 것을 느끼고 나는 흠칫했다. 저게 뭐지? 저 앞에 쓰러져 있는 것들은? 저기서 우리를 기다리고있는 저건 뭐지? 나는 나지막히, 쥐어짜듯이 말했다. "유리, 저… 걸 봐……."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아아……." 그녀의 목소리에 섞인 것은, 제발 틀리길 바라던 불길한 추리가 결국 사실로 밝혀진 사람의 체념어린 한숨. 우리는 말없이 그 쪽으로 다가갔다. 봄을 기다리며 조그맣게 돋아나고 있는 연두색 풀들 위에 선명한핏방울이 점점이 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붉은 핏빛 물줄기가 냇물처럼 우리를 향해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 풀밭에 결코 보고싶지 않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저게…… 몇 명이야…?" 도살장의 피비린내, 그리고 뭔가가 썩고 타들어가는 냄새. 우리는 적당한 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도저히 더 다가갈 수가없었다. 몇 구인가의 시체들과 죽은 말 세 마리가 나무 사이 사이에 널부러져 있었다. 반쯤 짓이겨진 사내의 머리가 한구석에 뒹굴었고, 눈을 번히 뜨고누워 있는 한 시체는 팔이 어깨 안쪽부터 찢겨나가고 없었다. 가장끔찍한 금발 여인의 시체는 허리 위쪽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온 풀밭과 나무 줄기들, 근처의 잎새들이 온통 방금 전에 일어난 살육으로피에 물들어 있었다. 아침에 맺힌 이슬방울들처럼, 핏방울들이 잎새들에 맺히고, 아름다운 켈라드리안의 한꼍은 완전히 피로 맥질이 되어 있었다. 목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겨우겨우 삼켰다. "세 명. 말이 세 마리인 것으로 보아 그럴 것 같아." 유리카는 보통 여자아이 같으면 가까이 오기도 전에 이미 기절하고남았을 광경을 놀랍도록 담담하게 살펴보고 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뺨도 미세한 경련으로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짧게 말했다. "시체, 어떤 죽은 자들, 질서에서 벗어난 생명의 냄새가 난다." 세 사람 모두, 검이나 그런 날카로운 것에 상한 상처가 아니다. 아주 힘센 사람이 온통 찢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사나운 짐승들이 물어뜯어 찢은 것도 같다. 그렇지만…… 도저히 제 정신을 가진 인간이저런 살육을 할 수 있단 말이야? "저… 건……?" 다시 살펴보니 곳곳에 회색의 이상한 반죽 같은 것이 시체와 바닥,나무줄기에 잔뜩 묻어 있었다. 오래 관찰할 틈이 없었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서, 여길 떠나자. 우리도 안전하지 않아." 어떻게 거기를 떠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좀 전까진 어렴풋하게만 느꼈던 공포가 이제 너무나 순식간에 정신을 위압하고 들어오는 바람에나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한참이나 숲을 지나오면서도 앞서의 광경이 뇌리에서 떠나가지를 않았다. 시체, 피, 도살장……. 저런 광경은…… 예전 고향에서, 단 한 번 본 일이 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몇 번이고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내머릿속에 차갑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단 한 번 본 것으로도 며칠밤낮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광경. 왜, 이렇게 열심히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도, 계속해서그 불길한 기운과 점점 가까워진단 느낌이 나지? 걷고 있는 것인지, 뛰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런 가운데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온갖 생각들. 저 회색의 기묘한 흔적들, 어디선가 본 일이 있는……. 그 순간, 갑자기 내 머릿속에 끔찍한 상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 입에서 반쯤은 비명에 가까운 탄성이 터져나왔다. "아아, 아니야……!" 유리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나는 갑작스레 멈춰 선 채로발작이 일어난 사람처럼 덜덜 떨었다. 유리카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왠지 듣고싶지 않다는 기분이 드는 건 웬일일까. "네 고향에…… 저런 일이 일어난 일이 있지?." 아아……. 숲 전체를 울리고 있는 이 낯선 느낌. 내가 보고 겪어온 그 어떤것도 아니야. 이 세상의 것이 아니야, 낯설어. 주위는 모조리 숲. 가득히 뻗어난 나무들.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숲은 온통 회색으로 흐려져 있다. 조금이라도 멀어지고 싶은 생각에 빠르게 걷고는 있지만, 달리면더 빠를텐데도 왠지 아주 이상한 기분…… 그래 보았자 아무 소용이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 의식 위로 점차 떠올라오는, 이제는 확실한 위기에의 감각. 그리고 이제는 내 목을 졸라오는 강력한 살의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결코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는, 이미 때가 늦었다는 사실이 갑자기 머리를 후벼파듯이 내 의식을 치고 지나간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벌써 이게 어디까지 와 있는 거야?! 문득 돌아본 유리카의 입술이 파랗게 변해 있었다. "아주, 가까워." +=+=+=+=+=+=+=+=+=+=+=+=+=+=+=+=+=+=+=+=+=+=+=+=+=+=+=+=+=+=+=정말... 어제는 너무 많은 분들께서 걱정하는 메시지를 보내주셔서많이 놀라고, 또 너무 감사했습니다. 네..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기에 생기는 일이고, 처음이라 당황했었지만 현명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을 배운 것 같아요. 게다가 잘 해결되었답니다. ^^글 열심히 쓰는 것 말고는 여러분한테 보답할 길이 없는 것 같네요. 격려 메일, 쪽지 보내주신 분들, 이 자리를 빌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책임감도 더욱 느끼게 되었고, 여러분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건강도 조심하겠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505번제 목:◁세월의돌▷ 3-1. 악령의 노예들 (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3 23:55 읽음:140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1. 악령의 노예들 (7) 나도 느껴진단 말이다. 검을 뽑아 들었다. 하얗게 빛나는 블레이드를 보면서 오늘은 위협이나 다른 용도가 아니라 검이라는 물건이 태어나는 그 본연의 목적으로 사용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보아선지, 검이 일순간 붉은 빛을 띤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짐승처럼 감각에 의지해서 나는 숲을 헤집고, 헤쳐 나아갔다. 나무들이 양쪽 시야로 휙휙 스치고 지나간다. 머리 속에 너무나 많은 생각이 떠올라 터져버릴 것 같다. 나는 이제 거의 일행을 위협하고 있는 두려움의 결말에 대해 점차확신을 가지기 시작하고 있다. 분명하다, 그래 분명해. "유리카." 응, 하고 유리카가 대답하는 소리. 그지없이 작았다.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나도 그래, 라고 말하는 목소리, 내 작은 희망이나마 꺾어 놓는 목소리. "너도…… 뭔지, 알겠…지?"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타닥타닥 따라오는 발소리만이 들렸다. 우리는 뛰다가 걷다가 했다. 절망적인 느낌이 다리를 끌어당기고있다. "마을…… 수백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살해한 괴물……." "……." 숲이 마치 책장을 넘기듯, 눈가를 화살처럼 스쳐간다. 뛰듯이 걷던 우리의 앞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어느 방향으로온 건지 전혀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 저 폭포가 흐르는 강이 무슨 강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의 장소에서 얼마나 벗어난 것일까. 곧, 우리는 폭포 앞에 섰다. 잔디 벼랑이었다. 거기에서 이어진 암벽 골짜기 사이로 우리 정면의 왼쪽에 가늘지만세찬 폭포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 아래를 별로 내려다보고 싶은생각은 없었지만 일단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안개가 피어올라 주변 공기는 눅눅한 물 입자들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강물이 암초와 강변에 힘있게 부딪치면서흘러가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급류였다. 함께 내려다본 유리카가 말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르나 강이야." 아르나. 이런 순간에는 봄의 첫 시작을 알리는 아르나 아룬드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겨우 다음 달일 뿐인데도. 내 지식이 맞다면, 아르나 강은 아르나 시로 흘러 들어간다. 전설 속의 처녀 아르나가 태어난 곳이자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이기도 한, 산 아래의 도시 아르나. 그렇다면 우리는 꽤 남쪽으로 내려왔던 모양이다. 물론 아르나 강의 하류는 상당히 큰 흐름을 형성하는 곳이고, 아마 여기는 그저 발원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류 쪽일 것이다. 아르나 강은 이스나미르에서 두 번째로 큰 강이고 상류라고는 해도쉽게 건널 수 있는 강은 아니다. 매번 협곡과 여울을 돌면서 바다로들어가는 하류에 이르기까지도 유속이 매우 빠른, 세차고 험한 강으로 유명한 아르나. 끊임없이 어려움을 뚫어야 했던 전설 속의 아르나의 인생도 꼭 그랬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더 갈 곳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것에 쫓긴다는 것은 참 우습다. 그러나 등뒤에 절벽을 두고, 그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점차로 곧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을 향해 육박해 들어온다는 느낌은 마치 서서히 목이 졸리는 것과도 같은, 희미하지만 분명한 공포다. 서서히끼쳐오는, 온 몸을 눌러오는 공포감. 절벽 위와 우리가 방금 빠져나온 숲과의 사이는 20큐빗 정도 되는공간밖에는 없다. 절벽은 오른쪽으로 길게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어져 있다. 왼쪽은 아까 보았던 암벽 계곡이다. 이거야말로 이야기에 나오는 배수진이 아니면 뭐겠어. 하늘은 흐렸다. 주변은 회색 안개로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공기는 차갑고 시원했지만 물기가 많고 불길한 느낌을 준다.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말했다. "우리를 쫓아오는 걸까, 저들이? 그저 마주친 자들을 학살하는 것만이 아니고? 도망치기 보단 어딘가에 숨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나라고 확신을 갖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나 자신을 조금이나마위로해보고 싶었을 뿐인지도 몰라. "…… 아니야." 망설였지만, 유리카의 대답은 지극히 단호했다. "너에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저들은…… 내 존재를 감지하고 있어. 내가 있는 한, 저들은 따라와."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 다시 내 옆에서 사람들을 잃어야만 해? 혼자가 아니라 동료가 있다는 것이 내겐 의지가 되지 않았다. 이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같이 죽어 주는 사람이란 적어도 내겐 아무 소용이 없다. 유리카, 주아니, 그들이 죽어서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내가 죽는 것만큼이나 무섭다.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단번에모조리 잃은 일이 있어서일까. 나의 마을, 나의 이웃, 나의 어머니. 혼자 살아남는다는 느낌, 그것만큼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감각은 세상에 다시 없다는 걸 나는 안다. 차라리 나 혼자였으면 좋겠다. 차라리 나 혼자라면, 나 혼자라면 그저 미쳐버리고, 미쳐버린 다음에 원한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절벽 위에 이르러 별로 말이 없던 유리카가 내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눈동자에 어린 빛이 특이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표정이다. "파비안, 이리 와. 가까이." 검을 든 채로 유리카 옆으로 다가갔다. 마치 뭔가를 결심한 듯한그녀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싸움을 피할 수 없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야. 그리고 나보다는…… 네가 더 위험해. 사실, 나는 그렇게 위험하지 않아." 이게 무슨 소리야.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동자로 유리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 눈에 어린 빛은 뭐야. 어떤 마음을 먹은 거야. 네가 위험해지는것, 죽기보다도 싫어. 아까전에 싸웠던 일 따위는 이미 깨끗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고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지?" 그런 이야기라면 위험을 벗어난 다음, 벗어나게 된다면 그때 해줘도 좋아. 아니, 해주지 않아도 좋아, 여기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말이야. "어째서 네가 위험하지 않아? 너라고 죽지 않는다는 건 아니겠지? 너라고 날아서 저 절벽을 건널 수 있다는 건 아니겠지? 아냐, 네 말이 사실이라면 좋겠다. 그러면 마음이 반은 놓이겠다." 유리카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은, 저 적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때문이야. 차라리 산짐승이나 그런 것이었다면 나 역시 너하고 하나도 다르지 않을 거야. 다치고, 죽겠지. 오히려 내가 처음 말했듯 이것이 오래된 숲이나 산이 속 깊은 곳에 품기 마련인 통행자, 특히 인간에 대한 악의였다면…… 그렇지만 아니었어. 켈라드리안은 우리를 위해서훨씬 두려운 것을 가슴 속에 품고서 기다렸으니까. 그래, 그러나 저들은 아니야. 나는 저들에게는 절대 죽지 않아. 그러니까……." "저들이 누군데? 저들이 누구인지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우리어머니를 죽인 자들…… 내 고향을 파괴하고, 내 친구들을 죽이고,내 이웃과 내 과거 모두를 죽여버린 놈들이지! 저들은 무엇이든 죽일수 있어!" 나도 모르게 유리카의 말을 중간에 막아 버렸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지금이 이렇게 싸울 땐가? 차라리 절벽을내려갈 방법이라도 연구해 봐야 하잖을까? 하나만이라도 살아남을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하잖을까? 그렇지만 유리카는 더없이 침착한 표정이었다. "파비안, 네 마음, 나도 전혀 모르진 않아. 나도 내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 본 적이 있는 사람이야. 이별의 슬픔, 누구보다도잘 알아.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줘. 나는……." 유리카는 잠깐 눈을 감고는 입안으로 뭔가 중얼거렸다. 그러더니갑자기 손을 불쑥 내밀어서 내 검을 잡았다. 나는 깜짝 놀라 검을 그녀의 손에서 떼어내려 했다. 이게 다른 사람에게는 얼마나 뜨거운데! 지금 상황에 손을 데면 칼도 못 쓸 텐데,왜 이러는……. "파비안, 봐."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추천에도 감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늦었지만 정말 고맙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593번제 목:◁세월의돌▷ 3-1. 악령의 노예들 (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4 21:54 읽음:143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1. 악령의 노예들 (8) 유리카는 내 검을 잡은 채로 그대로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양손바닥으로 블레이드를 감싸듯 잡고 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않는다. 마치 보통의 평범한 검을 잡은 것처럼, 뜨겁다는 기색조차보이지 않는다. "뜨겁지…… 않아?" "응." "어떻게……." 유리카는 이제 아예 내 손에서 검을 받아들었다. 나는 바보처럼 손을 허공에서 놓은 채 얼떨떨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리카는 한 발뒤로 물러서더니 검을 바닥에 놓았다. 검을 놓고 일어서는 그녀의 손에는 아무런 화상의 흔적도 없었다. "파비안, 내 손이 지금 괜찮은 것은 방금 짧은 주문을 외웠기 때문이야. 지금, 그 주문만 갖고도 나는 충분히 잠깐 동안은 네 검의 힘을 차단할 수 있어. 왜일 것 같아? 나는 너와는 좀 다른 사람이야. 아냐, 항상 이럴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지금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시체의 기운이 오히려 내게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하고 있어." 불길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 것을 솔직히 부인할 수가 없다. 나는머뭇거리다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어떻게…… 다르다고? 넌 누군데?" "난 무녀야." 무녀? 무녀라는 말을 내가 가장 최근에 들었을 때는 어머니가 본래는 무녀가 될 몸이었다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다. 어머니는 생명의 무녀, 듀나리온이 될 예정이었다고 했지. 내가 아는 무녀는 그들밖에 없다. "듀나리온?" 유리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유리카의 온통 검은 복장, 그것은'흰옷의 듀나리온' 이라는 그들의 별칭과는 확실히 맞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무녀, 검은 옷의 아스테리온." 굉장히 낯선 단어였다.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무녀라는 이름 자체가 약간은 섬뜩한 느낌을 준다. '검은 옷'이라는 말은 잘 맞는 것 같지만. 나는 망설이다가 입을 떼었다. "그…… 무엇 하는 건데?" "이런 것을 하는 거지." 유리카는 오른손을 펼쳐서 내 앞으로 내밀었다. "……!" 손이 빛나고 있었다. 하얀빛에 감싸인 유리카의 손은 회색으로 흐린 숲가와 벼랑을 환하게 비추었다. 빛이 점차로 부풀어오르고 있다. "어, 어떻게……." 이윽고 유리카의 손위로 둥근 빛의 공이 둥실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유리카의 얼굴은 진지했으며, 약간은 슬픈 빛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왼쪽 손으로 내 검을 잡았다. "죽어야만 할 생명, 묘석을 비추는 혼의 빛이여." 그 말과 함께 빛이 살아있는 것처럼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기이한 울림을 지닌 목소리. 평소와는 완연히 달랐다.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마치 오래 전에 잊혀져 버린 주문, 또는 폐허의 도시에 새겨진 비밀의 말처럼 긴 시간으로 다져진단단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깃든 생명력은 살아서 약동하는 이곳의 생명체들과는 다른 어떤 것이며, 마치 다른 세계에서 섬겨져야 할 말들이 어떤 힘에 의해 이곳으로 잠깐 불려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힘의 근원은 유리카였다. "영원히 도는 수레바퀴 속의 정화된 불꽃,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계율의 지배자여. 끝을 지배하는 잔인한 그대의 권리를 찾으라. 잠들어야 할 때, 사슬을 깨고 바퀴에서 벗어난 자에게본래 주어진 때를 기다리도록 폭군의 칼을 휘두르라. 공과에 대한 응분의 상벌은 결코 거스를 수 없는 것거부할 수 없는 한계를 벗으려 하는 자, 대가를 받는다. 하늘에서는 법칙의 장로, 낭시그로 호(Nansigro Ho)의광채. 죽음이여, 잔인한 힘이여, 수확과 시간의 낫이여,생겨난 모든 것을 도로 집어삼키고태어난 것들을 도로 거둬들이라." 그녀의 손에서 흘러내릴 듯이 움직이던 빛 가운데에서 검은 심지같은 것이 솟아났다. 검은 덩어리가 점차 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흰빛이 검게 물들어 가는 것이 보인다. 검은 광채란, 흰 광채와는 아주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살아있는 단검처럼살갗을 베어내는 것 같다. 언제나 들어오던 그 목소리에 지금 서린한기는 방금 전의 공포감마저 현실감 없는, 오래된 기억처럼 바꾸어버렸다. "인과의 힘이여, 영원의 푸른 강물을 가르는 찬란한 광휘 속에서그 본래적 목적을 달성하라……."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본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다음 순간 나는퍼뜩 눈치챘다. 헤렐이 말해 준, 내 멋쟁이 검의 본래 이름, 저것을유리카가 어떻게 알고 있지? 그러나 그런 것을 물어 볼 상황은 아니었다. 유리카는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유리카의 손에서 빛나던 - 이제는 검게 변했으니 빛난다고 하기는좀 그렇지만 - 덩어리가 손에서 흘러내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검에 달라붙었다. 끈적거리는 것처럼 달라붙는 기이한 덩어리. 그 번뜩이는검은 덩어리가 검 전체를 휘감았다. 그리고 그것은 갑작스럽게 사라져 버렸다. 유리카는 검을 떨어뜨리듯이 바닥에 놓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과 같은 그 검. "가져가." 다시 보통 때로 돌아온 유리카의 목소리에는 맥이 빠진 듯, 길게내뱉는 한숨이 섞여 있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자 다시 그 얼굴은 평상시처럼 보였다. "……." 나는 다가가 검을 집었다. 으음? 약간 무거워진 것도 같다. 내가 어떻게 한 거냐고 묻기 전에 유리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문을 건 거야, 네 검에. 네 검은 그 자체만으로도 본래 보통 물건이 아니지만, 이 주문은 저 법칙을 거스르는 괴물들에게 직접적인효과를 가지지. 저들을 우리 아스테리온 무녀들은 '악령의 노예' 라고 불러." "악령의…… 노예?" "깨끗한 영혼인 이스나에와는 정 반대라고 할 만한 생명체들이지. 영의 단계가 높아져서 자연스럽게 생명의 수레바퀴를 벗어난 자들이이스나에라면, 저들은 제 멋대로 그 수레바퀴를 부수고 억지로 튀어나온 거야.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자연 가운데 떠도는더럽혀진 영혼들이야. 벌을 받아 인과의 바퀴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된 '악령' 들. 악령에 사로잡힌 저 노예들은 인과의 법칙으로 벌하지않으면 안 돼. 지금 것은 '인과율의 주문', 저들의 살갗을 태워버리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자들을 본래대로 돌려보내는 주문이지. 또한 네 몸을 지켜주기도 할거야. 그들의 몸에는 지독한 독액이 흐르거든.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다시 한 번 검을 만져 보았다. 검은 매우 차가워져 있었다. 그러나저러나 유리카는 전에 저 괴물들을 만난 일이 있는 걸까? "네 검의 기운과 그 주문이 서로를 튕겨 내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말을 맺더니 유리카는 숲 쪽으로 몸을 돌렸다. 주변을 감돌던 주문의 기운이 걷히자, 아까의 공포가 거짓말처럼되살아났다. 어쩌면 이렇게 책장이라도 넘기듯, 감정이 순식간에 휘감기고 바뀔 수 있을까. 이렇게 마구 정신이 휘둘리는 느낌은 딱히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너무나 감각적으로 와 닿는 공포. 우리가 잠시 다른 일에 열중하는동안 이제 그것은 끔찍이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너무나도 생생하고분명하다. 손으로 그 실체가 잡히기라도 할 것처럼. 어떻게 생겼을까. 케르르르…… 케륵! 무, 무슨 소리가 저렇지? 소리만으로도 전율한 나머지 나는 그녀를내 뒤로 힘껏 끌어당겼다. 훌쩍, 너무나도 가볍게 끌려온다. "주아니, 유리카에게 가. 알았지?" 주머니에서 주아니를 꺼내서 내 뒤에 선 유리카에게 맡겼다. 아까부터 공포에 질린 건지 아무 말도 없던 주아니는 내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죽은 것처럼 내 손에서 유리카의 손으로 넘겨졌다. 나는 배낭을 벗어 옆으로 내던진 뒤, 검을 양손으로 단단히 잡고는앞을 보고 섰다. 온 팔이 긴장감으로 떨린다. 이제는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과 냉기조차 내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생각이 꽉 들어차 그런 소소한것들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내 등뒤에 있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면 안된다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내가 천운으로 마주치지 않았던 괴물들, 한 마을을 싹 쓸어버리고내 어머니를 죽인 놈들. 아마도 보기에도 끔찍스러울 그들, 그리고그들을 보게 되었을 때 내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이 솟아날지 도대체짐작이 가지 않았다. 두렵다. 그 얼굴을 보게 될 것이 두렵다. 두두두두……. 땅을 울리는 소리. 눅눅하고도 묵직한 발걸음들, 나뭇가지가 헤쳐지고, 부러져 떨어지고, 밟혀나가는 소리. 그리고…… 공기 중에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이상한 냄새, 썩은 냄새, 고약한 악취. 몇 놈이나 될까. 힐트를 쥔 손에 땀이 배어난다. 키키키키키키……. 쇠를 긁는 것 같은 기괴한 소리가 갑자기 커진다. 목덜미에 느껴지는 유리카의 숨결이 한순간 거칠어지는 것 같다. 키키키킷! 한순간, 눈앞에서 뭔가 터진 것 같았다. 숲에서 뭔가가 눈 깜짝할 사이에 튀어나와 내 쪽으로 마치 날아드는 새처럼 쏜살같이 덮쳐왔다. 그게 무엇인지 똑바로 볼 새조차 없었다. 파밧! +=+=+=+=+=+=+=+=+=+=+=+=+=+=+=+=+=+=+=+=+=+=+=+=+=+=+=+=+=+=+=포항공대 BBS "posb" 에도 '세월의 돌'이 올라가게 됐습니다. ^^bleuatre(jiny)님, 수고해 주시기로 한 것, 감사드립니다. 스노우보드에 대해서 물으신 분... 물론, 단단히 묶어야만 하죠. ^^;또, 제 아이디의 유래를 물으신 분이 있으셔서 대답 드릴게요. '모래의 책'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집 제목이자, 거기에 수록된 단편 제목이기도 합니다. 환타지 작가 중에도 단연 최고라고 생각하고, 다른 장르를 통틀어서도 가장 좋아하는 세 명의 문학가중 한 사람입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라는 이름입니다. 아르헨티나 사람이고 환상 단편들을 주로 썼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바래요- ^^보르헤스의 단편 저작은 민음사에서 5권 전집으로 완간되었습니다.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인간 사고의 끝간 곳을 보여주는 놀랍고 기발한 작품들로 가능합니다. 다만.... 어떤 분들은 좀 어렵다고들 하시니.. 읽고 '이건 아니다' 싶으실 수도 있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594번제 목:◁세월의돌▷ 3-1. 악령의 노예들 (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4 21:55 읽음:143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1. 악령의 노예들 (9) 무아지경에서 풀스윙으로 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둘렀다. 허리가 반쯤 꺾어지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검이 중간쯤에 왔을 때 뭔가가 진로를 막는 것이 느껴진다. 그대로 베어 버렸다. 왜 내 목에서 비명이 나오는 걸까. "으아아아아!" 키케엑! 날카로운 금속성의 외침이 귓가를 갈랐다. 동시에 내 손과 팔에 뜨끈한 액체 같은 것이 끼얹어졌다. 촤좌아…… "으윽……." 뭔가가 타는 듯한 소리, 그리고 한층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뭔가 살피기도 전에 이번엔 셋이나 한꺼번에 숲에서 튀어나온다. 이번엔 긴장하고 있어선지 그 움직임이 보였다. 한 발 뒤로 물러서서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물러나, 유리카!" 팔을 뒤로 뺐다가 앞으로 지르면서 제일 정면으로 달려온 놈을 향해 힘껏 검을 찔러 넣었다. 그 상태로 한 발 앞으로 내딛자, 검 끝이 완전히 몸을 뚫고 나가는것이 느껴진다. 거의 블레이드의 반이나 꿰뚫고 들어갔다. 마치 두부를 자르는 것처럼 칼날이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중간에 걸리는 단단한 뭔가가 내 검의 힘으로 파삭 부서져 나가는 느낌이 힐트를 잡은손에까지 와 닿았다. 마치, 회색의 흐물거리는 덩어리 같은, 그러나 아예 형체가 없지는않은 그 얼굴이, 몸이 허물어짐과 동시에 내 얼굴 앞으로 꺾어지며달려드는 바람에 나는 급히 다시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욱……." 정말이지 지독한 냄새다. 살 타는 냄새, 썩는 냄새. 손으로 검을잡아야 할지 코를 쥐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다. "아……." 유리카의 짧은 탄성. 그녀가 무슨 심정인지 나는 안다. 나도 같은 심정이니까. 마치 회반죽 덩어리 같은, 그러나 거기에 한때 인간이었음을 보여주는 것들은 다 있었다. 길게 늘어져 처진 팔다리, 반쯤 회반죽 사이로 흘러내리기 직전인 양쪽 눈알, 거의 뭉그러진 코, 입술은…… 거의 형체가 없고 마치 반죽 사이로 벌어진 틈새 같다. 그 안에 인간의 것보다 훨씬 날카롭고 길게 벼려진 누르스름한 이빨이 엿보였다. 그리고 그 표정은……. "으윽!" 무표정하면서도 잔인한 충동에 사로잡힌 그 표정. 저들이 정말로한때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을까. 내 검에 베어진 두 놈은 탄내를 풍기면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검에 베인 면이 계속 타 들어가면서 냄새를 공기 중에 흘렸다. 크르르…… 크흐……누런 이빨을 드러낸 놈들이 어느새 대여섯 이상이나 절벽 주위로나와 우리를 에워싸기 시작하고 있다. 이제 저들의 끔찍한 생김새가한결 자세히 보인다. 그 중에는 옷조각 비슷한 것을 걸쳤던 흔적이남은 자들도 있고, 머리에 머리카락이 반쯤 덩어리져 붙은 놈들도 있다. 크기도 각양각색, 그리고 아마 능력도 가지각색인 모양이다. 처음튀어나왔던 놈들처럼 강한 속도를 내는 놈은 아직 없는 것 보니 말이다. 저들이 만일에 한꺼번에 달려들면 막을 수 있을까? 내 질문에는 금방 대답이 왔다. "조심해!" 숲에서 절벽의 빈터로 속속 놈들이 기어 나오는 가운데 다섯 놈이순식간에 내쪽으로 몸을 날렸다. 검을 오른쪽으로 꺾어 들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들이닥치는 놈을향해 힘껏 대각선으로 베어 들어갔다. 츠컥! 케에……. 어깨를 단숨에 베어 버렸다. 아까와 같은 이상한 거무스름한 액체가 어깨에서 주르륵 흘렀다. 푸슈슉……. 캬르륵! 상처가 타들어가기 시작하자 놈이 비명 비슷한 것을 지른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쓰러지지 않는지 반대쪽 팔을 휘두르며 다시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동시에 오른쪽으로 또 다른 놈이 내 팔을 노렸다. 캬아아아아! 더 괴상하고, 더 끔찍한 비명을 지른다. 나는 검을 몸쪽으로 당겼다가 이번엔 아래에서 위쪽으로 그어 올렸다. 속도, 그리고 위치를가늠하면서 비스듬하게 방향을 조절했다. 처음 녀석의 팔과 두 번째녀석의 목을 동시에 베어 들어갔다. "으랏차!" "파비안, 왼쪽!" 유리카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내 왼쪽으로 무슨 빛이반짝, 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는 동안 나는 목적한 적들을 베었다. "차아!" 끄에……. 아무리 괴물이었지만 목이 날아가는 모양은 끔찍스러웠다. 뒤로 또 한 발 물러났다. 그리고 유리카가 내 왼쪽에서 벤 녀석을흘끗 보았다. 방금의 공격으로 보아 저들은 지능이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분명저것은 합동 공격이다. 그리고 아직 가까이 다가온 두 놈이 남아 있었다. "덤벼어어-!!!" 내 목소리가 저렇게 컸던가. 나는 커다랗게 외치면서 올라갔던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분명, 아버지가 이 검은 가로 베기를 하기엔 적절치 못하다고 했는데 나는 지금 벌써 두 번째 가로로 베고 있다. 금방 허리에 무리가 왔다. "으윽……." 키케케케켁! +=+=+=+=+=+=+=+=+=+=+=+=+=+=+=+=+=+=+=+=+=+=+=+=+=+=+=+=+=+=+=어제로 연휴가 끝나고, 다시 등교, 또는 출근이네요. 다들 즐거운 연휴 되셨어요? 어느 분의 편지... 여러분께 위안이 되고, 휴식이 될 수 있다는것, 정말 기뻐요. 저는 여러분 덕택에 우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메일들, 절대 귀찮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께서, 인물 캐릭터들과 설정에 관해서 설명해 달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미리서 다 설명해 버리면 재미없는데... 유리카나나르디 같은 인물은 나름대로 비밀이 많아요. 그런 거 다 설명해버리면 재미없잖아요. 앞으로 글에서 차차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또, 달력이나 세계관 설정같은 것도, 차츰차츰 밝혀지게끔, 그러니까 본 글만 갖고도 그 설정들을 다 이해할 수 있도록 쓰고 싶어요. 그걸 성공하는 것이 저의 목표 중 하납니다..^^그래서..결론은 다 미리 설명하면 재미 없다! 라는 겁니다. 이해해 주시겠죠?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682번제 목:◁세월의돌▷ 3-1. 악령의 노예들 (10)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5 22:06 읽음:139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1. 악령의 노예들 (10) 그러나 무리한 만큼의 성과는 있어서 두 적의 허리가 동시에 끊어져 나가는 게 보인다. 그 경탄스런 파괴력에 내가 놀랄 지경이다. 허리가 끊어진 두 괴물의 베어진 부분에서 이번엔 누런 물까지 섞인 거무튀튀한 액체가 물주머니처럼 팍 터져나왔다. 내 쪽으로 끼얹어지기전에 피하려고 했지만 이번엔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말았다. "우욱!" 입안으로 들어간 것을 뱉어 내면서 그 더러운 입맛에 나도 모르게몸서리를 쳤다. 입 안이 타 들어가기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끔찍하게 큰 검의 제대로 된 타격력을 나는 오늘 처음 보았다. 과연 엄청나다. 입맛은 썼지만 소매로 재빨리 눈가를 훔쳐내고다시 공격 자세를 잡는데, 흥분해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반은공포, 그리고 반은 싸움의 흥분. 캬아아아아악! 케레렉- 케케케케케……! 그러나 숲에서는 계속해서 같은 괴물들이 연달아 튀어나오는 중이다. 모두 몇인지 짐작조차 못하겠다. 이야기에 나오는 전설의 용사라해도 해치울 수 있을지 모를, 승산 없는 싸움의 시작이다. 그래.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승산이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것은, 한 순간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는 거야! "이랴압!" 내 앞은 이상하게 타 들어가고 있는 덩어리로 이미 발밑까지 질척하다. 냄새는 이 탁 트인 절벽 공간에서도 죽기보다 고약했다. "빌어먹을……." 지금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다. 그랬다가는 검을 휘두르는 리듬이 흐트러질까 봐서다. 이제 우리를 둘러싼 괴물은 수십이 되어 있었다. "와라!" 나는 검을 잡은 힐트를 왼쪽으로 비껴 들고는 죽 팔을 편 그대로검에 힘을 주었다. 차근히 호흡을 조절했다. 숨결에 따라 조금씩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검날 사이로 보이는 숲가에 내 시선이 박혀 있다. 캬캭- 크케케케……. 첫 번째 달려드는 괴물의 머리를 향해 검을 크게 내리쳤다. 머리가반으로 쪼개지면서 누런 액체가 하늘을 향해 분수처럼 솟는다. 누런진액이 내 머리 위로 비처럼 떨어지는 가운데 다가오는 두 번째 놈을걷어찼다. 커륵… 쾨엑……. "너희들은 너무 냄새가 나!" 검날을 비스듬히 해서 거의 반 바퀴나 몸을 돌리며 세 번째와 네번째를 향해 검을 휘돌렸다. 가슴 언저리에 닿는가 하더니 손목에 단단한 충격이 왔다. 그극-! 그대로 팔에 힘을 주어 갈비뼈들을 단숨에 잘라버렸다. 어깨 안쪽에까지 마치 비파를 긁는 것 같은 충격이 온다. 처음으로 붉은 액체가 쪼개진 가슴에서 솟는 것이 보였다. 그나마피에 가장 가깝지만, 색깔로 말할 것 같으면 십년 앓은 병자의 피 빛깔보다도 시커멓게 흐렸다. "게다가 아주 더러워!" 검을 도끼처럼 다가드는 한 놈의 어깨에 내리찍었다. 팔 하나가 어깨와 함께 통째로 잘려서 털썩 바닥에 떨어지더니 부르르 경련이 일다가 잠잠해졌다. 팔꿈치를 구부려 검을 오른쪽 안으로 당겼다가 단숨에 내지르며 두발짝 앞으로 디뎠다. 배 한가운데를 꿰뚫고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내딛는 내 발에 아까 떨어진 손이 밟히는 것도 느껴졌다. 발 밑에서 뭉그러지는 기이한 느낌. "너희를…… 다 죽여도……." 절벽으로 내가 계속 한 걸음씩, 물러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다가 끝까지 다 물러나면 끝이겠지. 그래도 끝날 때까지는 휘둘러 주겠다! 푸컥! 정확하게 목 한가운데를 뚫었다. 목뼈가 부서지는 느낌이 온다. 목을 지탱하던 근육이 끊어지며 머리가 검 위로 데구루루 굴렀다. 그대로 선 채 부르르 떨고 있는 목 없는 시체를 - 목이 있어도 시체였지만 - 걷어차서 쓰러뜨렸다. "…… 너희가 죽인 사람들 숫자를 맞추기에도 모자라!!" 가슴이 터질 것처럼 숨이 찼다. 겨우 십여 놈을 쓰러뜨렸을 뿐인데, 벌써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물론 땀보다는 그 기분 나쁜 액체와 점액 조각 따위로 더더욱흠뻑 젖었다. 절벽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내 발 아래는 지옥에서 한 국자퍼 올린 것 같은 더러운 시체 스튜가 끓는 중이다. 뭉클뭉클한 회반죽 같은 시체 덩어리들이 갖가지 색깔의 액체들과 눈알 같은 기타 것들과 함께 잡스럽게 얽혀 있었다. 자꾸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유리?" 돌아보지도 못한 채 그렇게 물었다. 대답은 들리지 않고 다만 거의없는 햇빛 아래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숏소드의 칼날이 다가든 괴물하나의 손을 빠르게 끊어버리는 것만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몇이라고 숫자를 헤아리기도 어렵다. 그리고 숲에서 얼마나나오고 있는지 살필 겨를도 없다. "다시 한 번!" 캬륵- 케레레레레렉-! 내가 위쪽으로 향해 휘두른 검에 한 녀석의 얼굴이 가로로 반쯤 잘라졌다. 그 안으로 파고든 내 검날에 눈알 한 개가 터져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이어서 광대뼈가 갈라져 나갔다. 크랴악-!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가 단번에 치고 들어갔다. 또 하나를 베어 넘겼다. 힘이 부치기 시작한다. 검을 꺾어서 오른쪽의 적의 턱을 올려 베는데 팔힘이 아까 같지가않다. 이제 내가 휘두르는 검을 나조차도 알 수가 없다. 검술 교본들도, 아버지의 가르침도,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뒤다. "어머니를…… 죽일 때도……." 몸을 절벽 쪽으로 돌린 새 양팔을 벌리고 내 앞으로 똑바로 달려드는 놈을 향해 나는 세 발을 동시에 내디디며 발돋움하여 검을 가슴한 가운데로 찔러 넣었다. 가슴, 그 한 가운데. 검붉고, 흐린 액체가 돼지를 잡을 때처럼 내 얼굴에 흠뻑 집어 씌워졌다. "…… 이런 식이었냐!!!" 감정적으로 북받친 나머지 너무 힘껏 찔렀는지 빨리 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몸을 뒤틀며 검을 뽑기도 전에 왼쪽 어깨에 지독한 고통이 왔다. "아으윽……." 살갗을 바스러뜨리는 송곳같은 이빨의 감촉. +=+=+=+=+=+=+=+=+=+=+=+=+=+=+=+=+=+=+=+=+=+=+=+=+=+=+=+=+=+=+=……길게, 잡담을 썼다간 글의 호흡만 흐트러뜨릴 것 같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683번제 목:◁세월의돌▷ 3-1. 악령의 노예들 (1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5 22:06 읽음:139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1. 악령의 노예들 (11) 왼쪽 팔을 허공을 향해 뿌리면서 떼쳐내려고 했지만 날카로운 이빨이 단단히 어깨에 파고든 모양이다. 괴물 하나가 팔을 내 가슴에 휘감고 덩굴 풀처럼 떨어지지를 않았다. "파비안!" 놈이 달라붙은 대로 몸을 애써서 반쯤이나 빙글 돌리는 참인데 내바로 옆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린다. 유리, 네 앞의 적을 신경써,다른 데 신경 돌리지 마. 다치지 마. 죽지 마. 캬륵- 캬캬캬캬……. 마치 웃는 소리 같은 괴물의 비명,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내앞에 달려드는 놈을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갑자기 어깨를 조이던 느낌이 풀어진다. 몸을 재빨리 뒤로 돌렸다. 유리카의 손에 쥐인 짧고 날카로운 칼날, 그걸로 몇 번이나 쑤신모양이다. 하여간 유리카는 보통 여자애들은 못할 것 같은 일을 곧잘한다. 떨어진 괴물의 등이 무수한 구멍으로 가득했다. "괜찮아?" 대답할 새도 없이 나는 양쪽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맞았다. 뭔가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왼팔이 푹 꺾이고, 다리가 휘청였다. 빙글, 내 눈앞에서 도는 하늘. "!"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어 한 놈의 옆구리를 깊숙히 베었다. 척추 언저리까지 살덩이가 잘라져 나가고, 베어진 면 전체에서 고약한 액체가 튀어오르는 것이 보이……. "흐아앗!" 누, 눈이 보이지 않아! 황급히 왼손으로 눈을 비비려 하는데 뭔가가 세게 왼쪽 어깨로 부딪쳐왔다. 그리고 미처 중심을 잡기도 전에, 상박부에 달라붙는 뭔가가 느껴졌다. 무의식중에 옆으로 몸을 힘껏 트는데, 내 발밑에 돌덩어리가 부서져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저, 절벽이야! 키루룩- 키육-! 뭔가가 머리를 세차게 휘갈긴다. "크윽!" 잠시동안 사라지는 공간 감각, 그리고 곧 광대뼈부터 바닥에 힘껏내리쳐지는 끔찍한 충격이 왔다. 윙……머리가 송두리째 돌바닥에 처박히면서 의식이 잠깐 흔들리는 것 같더니, 시간 인식이 머릿속에서 투둑, 끊겼다. 캄캄하다……. 그, 그렇지만 정신을 잃으면 안 돼! 나는 온 몸을 무방비상태로 내버려둔 채, 소매를 들어 눈부터 급히비볐다. 뭐가뭔지 뒤죽박죽인 세상이 잠깐 동안 시야에 나타났다가사라진다. 다시 한 번 씻어내고 나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유리, 안 돼!!!" 나를 내려다보는 유리카의 등을 향해 팔을 벌리고 달려드는 놈을발견하고 소리질렀을 때에는 이미 한 발 늦었다. "아아아앗!" 놈이 유리카의 어깨를 움켜잡고 번뜩이는 이빨을 목덜미에 꽂아 넣는 것이 보인다. 놈의 팔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안돼!!!" 바닥에서 일어날 새도 없이, 유리카의 하얗게 질린 얼굴 옆으로 튀어나온 머리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어떻게 된 셈인지 정확히 맞지가 않았다. 반쯤 뺨을 쪼갰는데도 떨어지지 않고 마치 피라도 빨겠다는 듯이 더욱 더러운 이빨을 조이는 것이 보였다. "더러운 손을 치워-!!!" 갑자기 가슴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내 위로 올라타고 앉은 놈이 보였다. 키케케케……누운 상태로 검을 위험스럽게 휘둘러 놈의 목을 단숨에 날려 버렸다. 그런데 몸만 남은 괴물의 손이 내 목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크윽!" 머리도 없는 저 몸에서, 어떻게 힘이 나는 거야? 괴로움으로 몸을 뒤틀었지만, 목을 조이는 힘은 점점 강해졌다. "……, …, ………." 잘려진 목에서 떨어지는 액체가 쉴새없이 내 얼굴로 쏟아졌다. 눈을 감으니 갑자기 세상이 까마득했다. 의식이 점차 흐려졌다. "……… …… …!" 갑자기 목을 조이던 손이 풀어지면서 나를 타고 앉은 괴물의 몸이옆으로 푹 넘어갔다. 정말이지…… 끈질긴 생명이다. 나는 용수철처럼 몸을 튕겨 일으켰다. "놔!!!" 보지도 않고 일단 소리부터 질렀다. 다시 눈가를 훔치면서 주위를살폈다. 어, 어디갔지? 저기! 절벽 쪽에서 거의 굴러떨어지기 직전이 되어 괴물들과 뒤엉켜 구르고 있는 유리카가 보였다. 이미 누가 누군지 잘 알아볼 수조차 없는상태다. "아아……."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난다. 엉망으로 뒤엉킨 상태라 검을 함부로 휘두를 수가 없다. 내 주위로차례차례 새로운 놈들이 달겨드는 것을 길게 초승달 모양으로 베어넘겼다. 그리고는 검을 내던져 버렸다. "유리카-!!!" 나는 그대로 아수라장 속으로 뛰어들었다. 케르륵! 키케케케케-! 퀴이이익- 캬캬캬……. 마치 지금까지의 보복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한꺼번에 내 등 뒤로놈들이 달려든다. 유리카의 비명 소리가 다시 한 번 허공을 찢어 놓았다. "아아아아아악!" 나는 앞 뒤 볼 것 없이 당장 앞에 있는 괴물의 몸통에 부딪쳤다. 손이 박혀들어가는 것이 어디인지 모른다. 그저 있는대로 쥐어뜯고끌어당기면서 미친 듯이 덤벼들었다. "떨어져… 떨어져… 떨어져… 떨어져… 떨어져……." 한 덩어리가 되어 두어 바퀴나 굴렀다. 내 몸이 위로 올라가자 나는 몸을 일으켜 손에 걸리는 것을 닥치는대로 휘어잡았다. 팔인지 다리인지 하는 것을 잡아당겨 끊어 내던지고, 한 놈의 머리에 무작정 손을 박아넣었다. 물컹거리는 느낌과 함께 내 손 옆으로눈알이 흘러내렸다. 허연 뇌수 같은 것이 주위로 스며나왔다. 놈들을 헤쳐내는 가운데 보이는 유리카의 눈감은 얼굴이 마치 시체처럼 보여, 그것이 더더욱 나를 견딜 수 없게 했다. 이제 한 놈! 내 옆에서 희미한 붉은 빛을 내고 있는 검을 끌어당겨 잡았다. 그리고 검을 힘껏 위로 세워서 내리꽂았다. 검은 꽤 정확하게 놈의 뒤통수를 뚫었다. 수박을 쪼개듯 긴 흠집이생기면서 갈라지는 놈의 머리에서 허연 뇌수 같은 것이 주르륵 쏟아졌다. 내 검에 유리카의 머리카락이 조금 잘라져 허공에 흩어졌다. 그 예쁘던 은빛 머리카락이 지금은 더러운 피에 엉망진창으로 젖어 있다. "놔! 놔, 이 더러운 놈아! 죽여 버릴 테다아!!!"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면서 나는 놈의 머리에다가 다시 검을 찌르고 헤집었다. 아예 으깨어버리겠다는 듯이. 으깨고 반죽해서, 진짜회반죽이 되어버릴 때까지 언제까지고 찌를 참이다. "유리!" 겨우 놈의 팔이 풀어지는 것이 보인다. 놈이 바닥에 떨어져 엎어질때까지 나는 다른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죽어버린 놈한테 다시 검을몇 번이고 박았다. 그리고 발로 밟고, 쪼개진 머리를 걷어차 버렸다. 그러고도 분이 덜 풀려서 아예 찢어 놓으려는 참인데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린다. "파비……." "유리!" 그제야 내 등에 붙은 뭔가가 느껴진다. 그저 한 손을 뒤로 돌려 놈의 목을 움켜잡고는 그대로 졸랐다. 그리고는 잡아당겨서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손을 앞으로 하고 보니, 지금까지 보던 칙칙한 액체 대신 선명한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내 피였다. 아…… 나는 지금 이상한 상태야. 이렇게 힘이 셀 리가 없는데. 고개를 돌려 바라본 유리카는 온 몸이 더러운 액체로 흠뻑 젖은채, 완연히 창백했다. 터질 듯 뜨거워졌던 머리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갑자기 싸늘해지는 듯하다. +=+=+=+=+=+=+=+=+=+=+=+=+=+=+=+=+=+=+=+=+=+=+=+=+=+=+=+=+=+=+=추천해 주신 분, 고맙습니다- ^^그리고 늦게 100회 축하 써 주신 분들도 감사해요. ^^격려 쪽지나 편지 보내주시는 분들께도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엔야 비디오에 대해서 물어보신 분이 계셨는데, 저도 어디서 볼 수있는지는 몰라요..^^;그저 TV에서 우연히 본 거였거든요, 그것도 굉장히 예전에요. 그러나저러나, 내일 CIH변종이 돈다던데... 게임방에라도 가서 글을 올려야되나..?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790번제 목:◁세월의돌▷ 3-1. 악령의 노예들 (1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6 23:48 읽음:137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1. 악령의 노예들 (12) "파비…… 안, 우리가 싸운 지 얼, 얼마… 나 되었지?" 잘 모르겠다. 공격이 잠시 주춤한 것 같다. 대신 주위를 겹겹이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불쑥 튀어나오는 놈이 있었다. 일단 덤벼오는 다른 놈을 향해 검을 찔러 박은 다음 뒤로 한 발 물러서며 검을 빙글빙글 허공을 향해 휘저으면서 돌렸다. 놈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등 뒤에 뭔가 흘러내리는 것은…… 피인가? "모르겠는데. 꽤 오래 된 것 같아, 내 느낌만일 수도 있지만." "꽤 되었어…… 파비안, 내가 예전처럼 힘만 있었어도……." "힘이 없는 거야, 다쳐서 그렇잖아. 기운을 차리란 말야. 네 목소리에 힘이 빠져있으니까 꼭 딴 사람 목소리처럼 들린다." 내 의식적인 농담에도 유리카는 그 창백한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가득하다. "그렇기만…… 했어도 이런 놈들쯤은 문제도 되지 않을 텐데……."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일단 다시 옆으로 틀어 달려드는 놈을 향해 검을 길게 휘둘렀다. 배 가운데 기다란 흠집을 만들어 주고는 다시 내 등뒤의 유리카에게 말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혹시 구해 줄 사람이 올 지도 모르잖아. 조금만 더 참아봐. 조금만." 차라리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소리였지만 너무 희망 없는 막연한말이라 내 귀에도 낯설게 들렸다. 유리카는 잠시 말이 없었는데 아마도 고개를 저었던 모양이었다. "아냐…… 파비안,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키르륵! 티캉! 한 놈이 다시 불쑥 튀어나오고 동시에 나도 검을 휘둘렀다. 힘을 조절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나는 계속 무작정 검을 휘둘러대고 있다. 달려드는 한 놈의 허리를 반쯤 베어버리고는 다시 머리하나를 쪼개 놓았다. 다시 휘두른 검에 팔 하나가 팔꿈치에서부터 잘라져 허공으로 날아간다. 아까 분노로 솟아났던 힘이 지금 이렇게 버티게 하고 있지만, 얼마나 갈 지는 나조차도 몰랐다. "하앗!" 다시 힘을 주어 검을 뽑고 찔러 들어가면서 이제는 자리를 별로 바꾸지 않았다. 내 뒤에 주저앉아 있는 유리카가 움직일 형편이 아니라서 그렇다. 내가 다른 데로 가면 그대로 유리카는 끝장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조금은 버틸 지도 모르지만, 그래 보았자 종말을 조금늦추는 것 뿐. 하긴, 지금 우리 둘 다 이러는 것이 그저 종말을 조금 늦추는 것에불과할지도 모르지. 캬르륵… 케게게게게켁! 그러나 우리 사정을 저 괴물들이 알 턱이 없지. 끝없이, 희망 없이, 나는 검을 휘둘렀다. 내 눈에서 뭔가 뜨거운것이 문득 느껴진다. 그렇지만 끝낼 수는 없어. 그러나 나는 이제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있었다. "파비안……." 유리카는 힘을 짜내어 가능한 한 크게 나를 불렀다. 돌아볼 사이는없었지만 나는 대답했다. "왜?" "그 검에 걸었던 주문, 그거…… 조금 있으면 없어질 거야…… 끝날 때가 다 되었어……." 나는 이 상황에서도 문득 목덜미가 선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에잇, 지금까지도 어차피 희망은 없이 싸워 왔잖아! 그깟 주문이있든 없든, 나는 이대로 하는 수밖에 없어! 어차피 끝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상관없어, 상관없어! 나는 고개를 힘차게 도리질했다. 얼굴과 머리에 붙은 갖가지 지저분한 액체들이 흩어져 떨어지는 가운데, 뭔가 다른 액체가 한 가지더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이제 아까 눈시울을 뜨겁게 했던 것이무엇인지 확연히 알 수가 있다. "유리카." 이번에는 내가 불렀다. "왜?" "주아니, 깨어 있니?" "…… 아닌 것 같아." 등이 온통 화끈거렸다. 어떤 상태인지 뒤에 있는 유리카한테 물으면 되겠지만, 어차피 이제 물어보았지 소용없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 놓은 걸까. 계속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으니말야. "주아니, 깨워봐. 그래도 동굴에 살던 로아에야. 혹시 절벽을 내려갈 줄 알지도 몰라." 유리카는 잠시 말이 없다. 주아니를 깨우고 있는 건지, 다른 생각에 잠긴 건지는 모르겠다. "혼자라도 살 수 있다면 살려 보내야지……." 또 한 놈이 펄쩍 뛰어오르는 것을 위에서부터 그대로 검을 내리그어 반으로 쪼개 놓았다. 문득 생각나는 점이 있어 한 마디 더 했다. "하긴, 주아니는 발을 저니까 내려가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끝이 다가온다는 느낌이 든다. 하늘이 아까보다 더 흐리다. 이젠 정말 곧 비가 올 것 같다. 콰르릉……. "나한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많은 시체로 환산되나 보자!" 그 순간에도 점원의 본분을 살려 환전의 개념을 떠올린 나였다. 이제 절벽 위는 늪처럼 널린 회반죽 진창과 꾸역꾸역 계속 달려드는 괴물들로 온통 회색이 되어 있었다. 이제 유리카와 나는 거의 절벽 끝까지 몰렸다. "파비안, 나를 두고 가. 주아니는 내가 데리고 있겠어." 유리카가 문득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내 뒤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그 내용은…… 내가 알아들을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뭐?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 그거 설마 우리 나라 말은 아니었겠지? 전혀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빠르게 주워 섬기면서 다시 달려드는 두 놈을 향해 힘겹게 검을 휘둘렀다. 이제는 팔이 천근처럼 무겁다. 게다가 검 한 자루로 이들을막는다는 것이 마치 둑이 터져서 쏟아지는 물을 손바닥으로 막아 보겠다고 달려드는 꼴처럼 보였다. 내가 벤 놈들만 해도 벌써 20은 넘을 텐데, 놈들은 줄어드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말했지. 나는 저들에게 죽지 않는다고." 처음에 들었던 말이지만, 이제 와서 그런 말을 믿고 유리카를 혼자내버려 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게다가 아까 저들에게 다치는 모양까지 봤는데 그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야. 그래서 지금 저렇게 주저앉아 있으면서. "다치기는 하고, 죽지는 않는다고?" 내 말이 이 상황에서 약간 비아냥대는 듯이 들렸다고 해도 용서해줘야 한다. 나는 유리카에게 비아냥댄 것이 아니라 이 황당하고 우스운 상황을 비웃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뿐이다. "그렇게 말하지 마. 저들은 나를 못 죽여. 정말이야." "못 죽이면 절벽 너머로 던지기라도 하겠지. 아니야?" "아까는, 아까 나를 공격한 것은 저들이 보통 상태에서 특별한 의식이 없이 마구 움직이기 때문에 그런 것 뿐이야. 아마…… 나를 죽이기 직전이 되면, 저들도 알아차릴 거야." "뭘?" "나를 죽이면, 저들도 끝장이란 것을." 뭔가 깜짝 놀랄 만한 말이었는데, 이제 온 몸에 힘이 빠진 채 무한히 달려드는 적들을 바라보느라 나는 그 말에 대해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네 농담은 저 놈을 처리한 다음에 들을게. 지금은 농담을 들을 상황이 아닌 것 같애." 이번엔 넷이 한번에 튀어나온다. 점차로 한번에 튀어나오는 놈들이많아지고 있다. "흐윽!" 피하기가 용이하지가 않다. 이젠 거의 서너 걸음 뒤가 막바로 절벽인 상황에서 뒤에는 유리카가 있다. 창 비슷한 것을 든 놈이 내 쪽으로 달려드는 것을 보며 손목에 힘을 주어 마주 쳐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한 푼의 시간이라도,제발 너와 내가 모두 살아있는 그대로 한 푼의 시간이라도. 그리고……. "크윽……." 이상할 만큼 정신이 맑아져 있는 나는 창날이 내 몸 안으로 찔러져들어오는 것을 아주 확실하고도 생생하게 느꼈다. 차가운 느낌, 그리고 다리를 적시며 흘러내리는 피의 감촉. "파비안." 유리카의 침착한 목소리. 그녀가 일어서 내 옆에 와 서는 것을 곁눈으로 보고는 나는 말했다. 뒤로 가라고 크게 외칠 힘도 없었다. "유리, 위험해." "너보단 내게 덜 위험해." 그녀가 칼을 곧 뽑아들 수 있도록 손을 옷 뒤의 칼자루에 갖다 얹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유리카는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목소리도 예전 같지 않다. 말끝마다 힘을 주어 말하고는있지만 생기가 없었다. 그러나 어조만은 더없이 침착했다. "비스듬히 서서 대각선으로 등을 마주 대." 어쩌면, 그녀도 그냥 앉아서 죽고 싶지만은 않을지도 모르지. 내가말릴 자격이 없을지도 모르지. 사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의미 있는 '누구' 도 아니잖아. "조심해." 다음 놈이 달려드는 순간, 내가 손을 올린 아래로 고개를 수그린유리카가 빠르게 들어와 양손으로 쥔 숏소드를 핑글, 강하게 돌려 쳤다. 칼을 휘두르면서 거의 반바퀴 가량 돌았던 유리카는 간신히 자세를다시 바로잡으면서 내게 빠르게 말했다. "저들이 다시 공격해 오면 이번엔 반드시 놈들의 미간을 꿰뚫어버려." "미간?" "네 검에서 주문이 사라졌을지도 모를 지금, 저들을 단숨에 죽일수 있는 부분은 거기밖에 없어. 똑바로 꿰뚫어. 머리뼈 뒤까지 뚫고나가도록. 아니면 머리를 아예 쪼개던가. 어찌됐든 머리 중심을 베어야만 돼." 더 할 말은 없었다. 나는 짧게 말했다. "온다." +=+=+=+=+=+=+=+=+=+=+=+=+=+=+=+=+=+=+=+=+=+=+=+=+=+=+=+=+=+=+=오늘은 무서운 날이었습니다- 컴퓨터들은 무사하세요? 에, 저는 잘 몰랐는데 엔야 뮤직비디오는 큰 음악사에 가면 구할 수 있대요. 어떤분이 쪽지로 알려주셨답니다- ^^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791번제 목:◁세월의돌▷ 3-1. 악령의 노예들 (1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6 23:49 읽음:138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1. 악령의 노예들 (13) 이제 숲 속에서 더 기어 나오는 놈들은 없다. 약 50에서 60마리 정도 되어 보이는 숫자의 괴물들은 이제 거의 반원형으로 우리를 에워싸기 시작하고 있었다. 절벽 뒤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어떤 선택도없게끔. 나는 유리카의 얼굴을 봤다. "끝까지." "그래." "…… 혹시, 혹시라도 달아날 기회가 생긴다면 망설이지 말고 도망가." 내 마지막 말에 유리카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인데도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좋은 친구야, 넌." 그 말에 대해 뭔가 논평할 겨를이 없었다. "하앗!" 내 검이 한 번 내리쳐졌고, 가까이 다가온 한 놈의 머리가 둘로 쪼개졌다. 이제 이 뒤에 온 놈들은 처음처럼 빠르지는 못한 것 같다. "타아!" 유리카의 칼이 허공에서 곡선으로 휘둘러지고, 마치 뚜껑처럼 한놈의 머리 위쪽이 달아났다. "등이 따뜻해." 내 등에서 흘러내리는 피나 갖가지 것들로 자기 옷이 더러워지고있는 중인데도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뭔가 마음이 따뜻해지는듯한 야릇한 느낌이 든다. 한 놈이 유리카의 검 끝을 휘어잡았다. 평상시 유리카의 검 빠르기로 보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제 유리카도 그렇게 빨리 검을휘두르지는 못했다. 놈들이 셋이나 달라붙어서 검을 끌어당기는 새 이제 두 놈이 또다시 옆으로 달려드는 것이 보인다. 벌어진 입가에서는 기이한 침 같은액체가 흘러내렸다. 이제 끝난 건가. 키에에에엑-! 갑자기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서 이상한 비명 소리가 들린다. 숲속인가? 그리고 뭔가가 집어던져지는 듯한 소리. 털썩-캬- 키아아아아악!! 케르륵, 케륵……. 큐큐큐…… 큐르르르……. "어…… 어떻게 된 거야?" 유리카는 대답할 여유가 없는 듯했다. 양손으로 검을 꽉 잡고 마주집어 당기고 있는데 도저히 힘이 미치지 못한다. 곧 앞으로 끌려갈듯한 기세였다. "유리, 칼을 놔버려!" "아, 안돼!" 비싼 칼인가? 나도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다. 간신히 힘을 주어서 검을 위로 당겨 올렸다. 내 검을 잡았던 손 하나가 잘려서 바닥에 떨어져 푸들거리는 것이 보인다. 잠깐 여유가 생긴 새 나는 발돋움해서 괴물들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려고 했는데, 장애물이 많아서잘 알아볼 수가 없다. 다만 숲 위로 솟아난 잎사귀들이 마구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저렇게 높이 달린 나뭇잎들을 흔들다니, 얼마나 대단하게 싸우고 있는 거지? "이야아아-!" 잠깐 자유로워진 검을 유리카의 검을 잡은 놈들의 팔로 내리쳤다. 놈들은 검을 피해서 재빨리 팔을 뺄 만한 민첩성이나 판단력을 갖춘놈들이 아니기 때문에 크게 내리쳐진 내 검에 그대로 팔이 세 개나잘려나갔다. "아앗!" 유리카는 갑자기 검이 자유로워지는 바람에 뒤로 휘청거렸다. 뒤는절벽, 나는 깜짝 놀라서 유리카를 부축하려고 했다. 숲속에서는 이상한 외침. "우워어어어어어-!" 이상한 외침 소리다. 마치 곰 같기도 하고……, 뭐라고 해야 할지모르겠다. 간신히 유리카의 팔을 잡아당겨서 뒤로 떨어지는 것은 면했다. 그러나 괴물들은 뒤의 소리에도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이 계속 앞으로 전진해왔다. 이제 몇 걸음만 몰리면 뒤로 뛰어내려야 할 판인데. 지금은 정말로 불어오는 바람에 등이 시원하다못해 싸늘하다. 뒷걸음으로 절벽 끝까지 다가가고 있으니 목덜미에 없던 식은땀이 솟아줄줄 떨어진다. 숲에서 나타난 건 누굴까. 우리를 도와주려는 거면제발 빨리 와 줬으면 좋겠는데. 좀 더 늦었다간 오나 안오나 마찬가지가 될 거라구! 케에에에엑! 푸퍽! 괴물들의 익숙한 비명 소리와 뭐가 터져나가는 듯한 소리가 계속가까워지고 있었다. 내 기억상 저건, 괴물의 몸에서 액체가 터져나올때 나는 소리 같은데. 나는 유리카를 돌아봤다. 이제 우리는 절벽 뒤로 약 세 발짝 정도밖에 남기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 오고…… 큭! 있어." 말하는 사이에도 달려드는 괴물을 향해 검을 들이꽂았다. 코 한가운데로 박혀서 그나마 있지도 않은 코가 뭉그러지는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튀어나오는 예의 액체가 얼굴에 튀겼다. "픕!" 액체가 코에 하필 들어갈 건 뭐야. 쿵-이상하게 땅이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 쿵- 쿠궁… "으음?" 유리카가 달려드는 괴물에게 왼팔을 잡혔다가, 오른손의 검으로 팔꿈치째 잘라내 버렸다. 이상하게 그녀의 움직임에 아까보다 활기가있다. 그녀가 외쳤다. "저걸 봐!" 그리고 나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 세상에. 저게 뭐야? 내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거…… 인인가?" +=+=+=+=+=+=+=+=+=+=+=+=+=+=+=+=+=+=+=+=+=+=+=+=+=+=+=+=+=+=+= 세월의 돌이 출판되느냐고 묻는 분들이 종종 계신데요... ^^;에... 아직 그런 계약같은 것은 다행히도? 불행히도? 맺은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만간에 갑자기 지워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비가와서 그런지 날씨가 차군요. 감기 조심하세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832번제 목:◁세월의돌▷ 3-1. 악령의 노예들 (14)-End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7 21:39 읽음:133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1. 악령의 노예들 (14) 머리 가득히 부석하게 난 녹색 머리카락 때문에 그를 지금까지 숲과 구별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지금 보니 거인의 키는 약 8큐빗 정도, 그리고 팔과 다리는 마치나무 둥치 같다. 거대한 갈색의 통나무, 그리고 그 안의 힘은 내가상상도 못할 정도. "크어어어- 크워워어-!" 이상한 소리를 지른다. 설마…… 말을 못하는 건 아니겠지? 그는 우리를 향해 걸어오면서 - 우리를 정말 본 걸까? 우리는 지금도저히 눈에 띌 상황이 아닌데 - 손에 집히는 대로 괴물들을 잡아 눌러 곤죽을 만들거나 던져버렸고, 발에 걸리는 대로 밟아서 걷어찼다. 마치 잡초들을 갈아엎는 농부의 쟁기질에 비유할 만했다. 그 모습은 확실히 통쾌한 장관이었다. "파비안, 옆을 봐!" 잠시 이 사건으로 얼이 빠져 있는 새 괴물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내팔에 매달리기 시작하고 있다. 포위는 더 좁혀졌다. 거인의 한 걸음은 굉장히 크긴 했지만, 마치 오는 도중에 걸리는 것들을 모조리 없애고 오기라도 하려는 듯 손발을 놀리고 있어서, 실질적인 전진은 매우 더뎠다. 저 양반, 저렇게 나타났다고 해도 그 전에 절벽 너머로 떨어져 버리거나, 죽어버리거나 하면 아무 소용없잖아!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도 괴물들은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앞의우리들에게만 차츰차츰 다가오고 있다. 뒤에서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소리가 나도 아무 반응도 없다. 유리카 말대로 이들은 정말 머릿속에 아무 생각들이 없는 건가. 이제 뒤로 약 한 발자국. "빨리! 빨리!" 참다못해 외쳤지만 괴물들의 케르륵대는 소리 때문에 저기까지 들렸을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뭐야, 상황을 더 아슬아슬하게 해서스릴을 만끽하기라도 하라는 거야? 스릴이라면 이미 평생 맛볼 양보다도 넘치게 맛봤으니까 이제 그만 쉬고 싶단 말야! "빨리! 빨리!" 유리카도 똑같은 심정인 모양이다. 그녀가 마지막 힘을 짜내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보다는 한결 속도가 빠르다. 그러나 저게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으허어어어어-!" 거인은 이제 거의 눈앞에 다가왔다. 우리를 충분히 알아보고도 남을 만한 거리다. 그리고 한 순간,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되자 나는 발을 구르며 비명에 가깝게 악을 썼다. "빠아아아아아알리이이이이이-!!!" 그 때였다. "아앗!" 유리카의 비명 소리. 정신없이 되돌아보는데 이제 우리 뒤로까지 돌아온 놈들이 유리카를 먼저 둘러싸고 몇이 한꺼번에 달라붙었다. 그 바람에 유리카의 머리카락만 빼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얼굴조차도. 발을 헛디딘 놈들이 절벽 너머로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저들은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놈들인 모양이었다. 아…… 아니, 아무 생각이 없는 건 나잖아! 검을 고쳐쥐고 유리카를 둘러싼 놈들을 향해 달려들려는 참인데 갑자기 하늘에서 뭔가가 뚝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어?" 거인의 커다란 손이 내려와 유리카를 잡았다. "어, 어쩌려고……." 내 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거인은 거의 기절 상태인 반죽더미속의 유리카를 잡아 올리더니 반대쪽 손으로 거기에 붙은 놈들을마치 껍질 까듯 죽죽 훑어 떼어냈다. 그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붙은 놈들이 맥없이 떨어져나가는 것이 보인다. 아, 다행이다. 이젠 살았어. "잘 돼……." 뭔가가 갑작스럽게 내 시야를 덮쳐왔다. 그리고 정적. +=+=+=+=+=+=+=+=+=+=+=+=+=+=+=+=+=+=+=+=+=+=+=+=+=+=+=+=+=+=+=3-1. '악령의 노예들' 끝입니다. 이번 제목 짧아서 타이핑하기 쉬웠는데, 다음 제목은 다시 길어져버렸다...--;(난 왜 이렇게 긴 제목을 좋아할까?)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833번제 목:◁세월의돌▷ 3-1 끝, 3-2 시작입니다. 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7 21:39 읽음:1194 관련자료 없음----------------------------------------------------------------------------- 3장 1편. '악령의 노예들'이 끝나고3장 2편. '고대의 거인과 은둔 검사' 시작입니다. 으아..긴 제목.... 그러나 이번 제목은 정말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는 소박한 제목입니다. ^^;;즉, 거인과 검사가 나옵니다. 암흑 아룬드의 첫 번째 편이 어떠셨는지 모르겠네요. 다른 부분에 비해 꽤 수정을 여러 번 했던 부분이었거든요. 암흑 아룬드의 이야기는 다른 아룬드보다 좀 짧아질 것 같습니다. 이번 편으로 끝날 것 같거든요. 참, 이번 전투 씬 좋다고 하신 분들, 힘이 많이 되었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834번제 목:◁세월의돌▷3-2.고대의거인과 은둔…(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7 21:40 읽음:137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2. 고대의 거인과 은둔 검사 (1) 거인족은 최전성기의 고대인들조차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몸집과 키를 가지고 있으며, 그에 걸맞는 엄청난 완력을 지닌 종족이다. 그들의 성격은 종잡을 수 없으며, 그 종류 역시 고매한 현자라고해야 좋을 자들에서부터 인간들을 잡아먹는 괴물에 가까운 것까지 편차가 매우 심하다. 주의 깊은 연구자들의 고찰에 의하면 그들의 수명은 보통 그들의 정신 수준에 비례하는 듯 하다. 괴물에 가까운 거인들의 수명은 보통 인간보다 조금 긴 70-100년 가량, 보다 인간적인거인들은 200-300년 정도, 매우 드물지만 그보다 현명하고 많은 지혜를 지닌 자들은 500년 정도까지도 산다. 현명한 거인들 중 가장 유명한 거인은 사계절의 왕, 또는 순결한 봉인자로 불리는 마법사 에제키엘의 질문에 응했던 켈라드리안의 은둔 거인 자녹(Zanok)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과묵한 편이며, 세상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고다른 종족과 잘 우정을 맺지 않는다. 숲과 산에 사는 거인들의 경우엘프나 페어리족과 친근하게 지내는 경우도 있지만 결코 흔한 일은아니다. 인간과 거인이 우정을 맺는다는 것은 매우 희귀한 경우로서아직까지 기록에 남아있는 바가 없다. 현자 거인들조차 인간들과는다만 대화의 상대 정도로밖에 응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쩌면 그들의본성 가운데 가장 깊숙하고 사악한 곳에는 인간을 잡아먹던 시절의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듀나리온 무녀들의 <생명 백과> 2권, 작자 미상 [내가 놈들을 기가 막히게 베어 넘기는 것 못 봤어? 아주 기가 막혔잖아!][허허, 검에 베인 놈들이 얼마나 되었다고 그래?][그건, 네가 시체고 뭐고 할 것 없이 모조리 밟아버려서……][또 내 탓인가. 자넨 잘했어. 일단 아이들이 무사하잖은가. 그럼된 거지.][저 친구, 또 은근슬쩍 넘어가려고…….]두 팔, 다리 그리고 온 몸에 닿는 감촉이 굉장히 부드러웠다. 그게뭔진 몰라도 마치 물 속에라도 잠겨있는 듯 몹시 편안했다. 이대로좀더 눈을 감고 있고 싶다. [오늘 저녁 준비 당번 자네지?][나? 나였던가? 그러니까…… 점심은 안 먹었고…….][아침은 내가 했지.][그랬나……? 그게 그러니까 그렇게 된다면…… 식탁은 내가 치웠던 것 같은…….][그러니 식탁은 내가 치우면 되잖아. 오늘 아이들도 있는데 오랜만에 자네 요리솜씨 좀 보여 봐.][아니, 그게 말일세. 그러니까 그게…….][이번엔 자네가 은근슬쩍 넘어가 보려고 딴소린가? 자넨 다른 건다 잘 기억하는데 꼭 식사 당번만은 잘 기억 못하더군.][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그것도 열 명, 스무 명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 다섯 명쯤 되는 것도 아니고, 겨우 둘이서 하는 주제에 말야. 하하하하…….][노, 놀리긴가!]뭔가 벌떡 일어나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관심 없었다. 눈을더 꾹 감았다. 좀더 이 편안한 기분을 맛보고 싶은데 주위가 너무 시끄러웠다. 물론, 그들의 목소리는 마치 뭔가로 줄여진 것처럼 아득하게 들려왔지만. [하하, 검은 뽑지 말아. 아까 절벽 위에서 자네 솜씬 실컷 보았어. 그러니까 더 보고 싶은 생각은 없네. 그러지 말고 그 검은 두고, 부엌칼이나 좀 잡게나 그려. 하하하하…….]웃음소리가 저렇게 멀리서 들리는데도 가히 천둥소리에 비교할 만하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움직였다가는 그냥 깨어나버릴 것 같아서다. 당연히 무슨 내용인지 잘 이해되지도 않는다. 그저 시끄럽다는 기분 뿐이다. [그러나저러나 이 친구, 얼마나 누워 있어야 되려나?][기본 체력에 달렸지 뭘.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기도 하던데.][우리가 오기 전에 수십 놈이나 베어 넘겼어. 예사 녀석은 아냐.][게다가 이 머리 색깔, 어디선가 익숙하단 말씀야…….]마지막 남자가 한 말이 뭔가 신경에 거슬리는 듯 했는데 대충 넘겨버렸다. 지금 상태로 생각 같은 건 도대체 하고 싶지가 않다. 웬만한거면 그냥 모르고 말겠다구. 그런데……. "여자앤 좀 어때?" 갑자기 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내 귀를 파고드는 바람에 나는 눈을번쩍 떴다. 어…… 주위가 온통 하얗네? 혹시 천국인가? 그러나 다시 보니 나는 시트를 덮어쓰고 있었다. 어쨌든 제일 먼저 생각난 사실이 당장 입에서 튀어나왔다. "유리는?" 갑자기 네 개의 손이 달려들어 시트를 벗겨냈다. 그러고 나니 주위가 확 밝아졌다. 커다란 램프가 내 바로 머리맡에 밝혀져 있다. 여기는 어디…… 으음, 통나무집 같은데? 그것도 천장이 엄청나게 높은게 왠지……. 그런데 갑자기 의식이 드는 순간 온 몸 구석구석이 쑤셔 오기 시작했다. "으으으……." "어라, 이 친구 좀 보게." 아직은 희미한 내 시야에 뭔가 큼직한 그림자 덩어리 두 개가 나를굽어보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다. 마치 커다란 나무 그늘아래 누워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저게……. "우리를 구해 준!" 내가 벌떡 몸을 일으키려는 참인데 커다란 손바닥이 내 가슴을 부드럽게 지그시 눌렀다. 부드러운 갈색털이 가득한 것이 마치 무슨 호밀빵처럼 느껴지는 손이다. 가볍게 누르는 것 같지만, 실상 내가 멀쩡했다 해도 밀어젖히고 일어나는 것은 꿈도 못 꿀 힘이다. 손가락 하나 제대로 까딱해보지 못한 채, 나는 처음부터 일어나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다시 가만히누워 있게 되었다. 하긴,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상태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다가는 온 몸이 지독하게 쑤시기나 했을 뿐, 별다른 대책은 없었을 것 같다. 커다란 손의 행동은 아주 현명하고도 친절한 처사인 셈이었다. 나는 눈을 굴려 그 손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아……."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일단 말을 할 줄 모르는 거 아니냐는 나의 걱정은 아까의 대화로기우임이 판명되었고, 흐트러진 녹색 머리카락에 연갈색 얼굴, 그리고 피부도 모두 갈색으로 그을린, 어찌 보면 무시무시하게 보일 만한모습이었다. 옷은 인간들의 사냥꾼 같은 복장이었지만 물론 하나 하나가 비교도 안 되게 컸다. 평생 처음 이런 종족을 본 나는 온 얼굴에 놀라움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즉,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정말, 거인…… 거인이야! 머릿속에 문득, 거인 중에는 사람 잡아먹는 종류도 있다는 이야기가 퍼뜩 스쳤다. 나는 벌렸던 입을 다시 다물지도 못하고, 이번엔 눈까지 커다랗게 떴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온화한 빛으로 가득했다. 그지없이 부드러운 미소였다. "저…… 정말 고맙습니다.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조금만 더 일찍왔더라면 훨씬 좋았겠지만) 꼼짝없이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유리카는…… 어떻게 되었죠?" "그 아가씨 이름이 유리칸가? 아아, 음, 그렇겠군, 그렇겠군." 갑자기 옆에서 불쑥 끼여드는 사람을 나는 멀뚱히 쳐다보았다. 옆에 거인이 있어서 그런지 유난히 작아 보이는(그러나 인간치고는 결코 작지는 않은), 체격 좋은 중년의 남자가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노련한 전사와 같은 인상에 허리에는 롱소드가 하나 걸려 있고, 그의복장은 마치 거인의 옷을 크기만 줄여 놓은 것 같았다. 나는 간신히 입을 다물고는 말했다. "아, 이름도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저는 파비안 크리스차넨입니다. 제 친구는 유리카 오베르뉴고요." 내가 이렇게 여유 있을 수 있는 것은 내가 마지막 본 유리카의 모습이 죽을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다. 괴물들이 한꺼번에 덮치는 순간 정신을 잃은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 사실 정말 멀쩡한지는 알 수 없지만 - 여기 누워 있는데 유리카한테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역시, 사정은 궁금했다. "호그돈이라고 부르게." "나는 릴가 하이로크라고 하네, 젊은이." 거인들은 본래 성이 없는 건가? 아님, 낯선 사람에겐 성을 밝히지않는 관례라도 있나? 둘은 그러더니 예의바르게 나의 상처에 대해 물어 보았고, 아주 점잔을 빼며 자기들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점잔을 뺀다는 것은 릴가 쪽 이야기고 사실 거인은 전혀 점잔을 빼지않았다. 그는 매우 소탈하고 솔직한 성품인 것 같았다. ……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역시 이야기를 길게 하는 것은 꽤 즐겼다. "그러니까 그래서, 그 놈들을 내가 단칼에 대여섯씩 베어 넘기는동안 호그돈은 앞으로 전진했지. 자네들을 빨리 구하기 위해서 말이야. 사실 말이지 자네들은 금방이라도 절벽 뒤로 떨어질 것처럼 보였거든."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발바닥이 간지러워지는 듯한 느낌을받았고, 발바닥이 간지러운데 배를 긁고 싶은 것 같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나는 나중에는 어디를 긁어야 할지 곤혹스러운 - 사실 어디였다 하더라도 긁을 만한 재주는 전혀 없었다. 또한 어디를 긁는대도간지러움이 해소될 것 같지는 않았다 - 상태가 되어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세 번째 똑같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유리카는 괜찮은가요?" 둘은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다시 자기들끼리 한 번 마주보더니(둘은 마주보기 위해 상당히 서로를 배려하여 눈 높이를 맞추었다. 확실히 둘은 한두 해 같이 살아온 사이가 아님에 분명했다) 고개를 끄덕하고는 말했다. "그 아가씨라면, 아까 전부터 물통 속에 있네." "네?" +=+=+=+=+=+=+=+=+=+=+=+=+=+=+=+=+=+=+=+=+=+=+=+=+=+=+=+=+=+=+=싸늘하다가, 다시 환하다가, 다시 싸늘한 날씨는... 감기걸리기 딱이죠. ^^한 장의 끝과 한 장의 시작을 하나씩 올리자니 이상하네요..^^;그것도 사이에 시작 안내를 끼워서..;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903번제 목:◁세월의돌▷3-2.고대의거인과 은둔…(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8 22:31 읽음:130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2. 고대의 거인과 은둔 검사 (2) 잠시 후에 상황을 설명 받은 나는, 유리카가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움직였다는 사실에 대해 약간 놀랐다. 유리카는 벌써 약 한 시간 전에 일어나서 그들이 보지 않는 사이에 이미 목욕통 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그래서 그들은 그녀에게 말을 걸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말했다(이것이 그들이 유리카의 이름도 몰랐던 이유였다). 어쨌든 그렇게 잘 움직일 수 있다니, 내가 그렇게까지 걔보다 많이다친 상태였었나? 그 사실은 곧바로 증명되었다. "으윽……." "거 봐, 그러길래 몸을 움직이지 말랬지." "옆구리에 붕대를 감아 뒀네. 거기 상처가 제일 크거든? 한동안은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 있는 걸로 생각해 두는 편이 나을 거야. 쓸데없이 조바심을 가져 봐야 소용없지." 나는 조바심 따위는 없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몸을 움직이지 않도록 지나칠 만큼 조심했다. 빨리 가야 한다고 열심히 주장하는 것은유리카지 내가 아니란 말이다. 그건 그렇고, 목욕통까지 준비되어 있다니, 꽤 괜찮은 집인걸. "잠시 그대로 누워 있게, 다음 이야기는 좀 있다가 하기로 하고. 이제 식사 준비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거든." 그 말을 한 것은 릴가가 아니라 호그돈이었다. 아까 잠결에 분명……. "그렇지 않나, 릴가? 나는 나가서 장작을 몇 개 가져오겠네." 거인은 유쾌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일어선 그의 머리는 까마득한 높이의 산처럼 보였다. 특히 침대에 누워 있는 나로서는) 한쪽 문으로 나갔다. 그는 문을 나갈 때 고개를 약간 수그렸는데, 낮에봤던 이 통나무집의 문 높이를 생각해 볼 때, 그의 키는 정말 끔찍할정도라는 결론이 선다. 릴가는 입술을 괴상하게 일그러뜨리더니 마치 하기 싫은 심부름을하는 꼬마처럼 엉기적엉기적 의자에서 일어나 역시 같은 문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잠시 동안 혼자 남겨졌다. 끔찍한 싸움을 끝낸 뒤 안전하고 따뜻한 집 안에서 부드러운 이불을 덮고 친절한 사람들로부터 보호받으며 이렇게 누워 있으니 어쩐지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잠시 조각조각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들에 마음을 맡겼다. 내가 했던 일들, 그게 정말 내가 한 거였나? 조그만 산마을 잡화점에서 물건이나 팔던 점원 파비안이 칼을 휘둘러 적 - 비록 사람이 아닌 괴물들이긴 했지만 - 들을 사정없이 베어넘기고, 파괴욕에 사로잡혀 이 손으로 팔다리를 갈기갈기 찢어 내던졌노라고? …… 그게 정말 나였을까? 정신이 어떻게 되지 않고선, 도저히 그런 일을 다시 하라고 해도해내지 못할 것 같다. 그럼, 그땐 정신이 어떻게 되었었나? 막다른 골목에까지 몰리면 누구든 그렇게 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나? 나는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어떤 당위성을 찾아내려고 해 보았지만, 되새기는 과정에 떠오르는 영상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일단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온통 범벅이 되었던 끔찍한 반죽. 그러고 보니, 아까 나는 분명 피다 점액이다 해서 온통 지저분한상태였는데 지금은 아주 깨끗해진 상태다. 옷도…… 아니, 옷은 어디갔지? "헤에……." 나는 이불 안에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몇 겹으로 덮인 두툼한 이불 안은 굉장히 따뜻해서 사실상 나는 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옆에는 벽난로에 장작이 타고 있었고 이제는 약간 더울 정도였다. 뭘로 만들었는지 이불 천이랑 침대 밑의 시트 역시 굉장히 부드럽다. 아까 물 속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이것 때문이었나? 내가 지금까지 덮어본 이불 중에서 제일 괜찮은데? "어……?" 갑자기 미치는 생각이 있었다. 유리카도 나 못지 않게 엉망인 상태였는데. 옷이고 머리고 할 것없이. "에에…… 음……." 설마. 유리카가 지금 목욕을 하고 있다는 건, 그들이 유리카를 나처럼은다루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 분명, 분명 그럴 거야. 그들은 점잖은사람들이고 또 숲에서 사는 선량한 인물들이고 우리들을 위험에서 건져 주기도 했으며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방 옆은 바로 주방인 모양이었다. 배가 고픈데 무슨 냄새인가 아주달콤하게 코를 찔렀다. 덕택에 상처만큼이나 위장이 괴로워 미칠 지경이었다. 통나무집은 겉보기에 컸던 것처럼 그 안 구조도 몹시 크고 잘 되어있었다. 침실이 따로 있고, 욕조를 놓는 곳이 또 있으며, 주방과 거실 또한 따로 있는 모양이니까. 게다가 이 방 안에 침대가 한 개밖에없는 것 보면 호그돈은 어딘가 다른 데서 자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어쨌든 이 침대는 평범한 사람들의 치수에 맞는 물건 같았거든. 그럼, 아마 릴가의 침대겠네. 잠시 후에 호그돈이 들어와 방 안에 큼직한 탁자를 가져다 놓았다. 내가 움직일 수 없으니 이리로 식사를 가져다 줄 모양이었다. 조금있다가 문이 다시 빠끔히 열리고 내가 고대하던 얼굴이 머리를 내밀었다. "실컷 잤니?" 문간에 나타난 유리카는 커다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둘둘 감아서말아 올리고 있어서 자그마한 얼굴이 더욱 도드라진다. 뺨은 목욕을끝낸 다음이라 그런지 약간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문을 닫고 들어오는데 이상한 흰 가운 같은 것을 온 몸에 두르고허리에 끈을 매고 있다. 전체적으로 그녀에겐 너무 컸다. 큼직한 주머니가 그녀의 다리께에 축 늘어져 있을 정도였으니까. "몸은 어때?" "너야 말로, 몸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그렇게 돌아다녀도돼?" "그럼. 내가 너 같은 약골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농담을 하는 그녀를 보자니 이제야 우리가살아 있다는 실감이 났다. 그래서 뭐라고 굳이 대꾸할 마음도 나지않았다. 괜시리 웃음이 나서 나는 자꾸만 빙그레 웃었다. 유리카가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자, 주아니." 동그랗게 수건에 싸인 꾸러미 같은 것을 그녀가 내 침대 위에 내려놨다. 수건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더니 이윽고 익숙한 갈색 머리가불쑥 내밀어졌다. "파비안, 파비안, 괜찮아, 괜찮아?" "나보단 얘가 더 너를 걱정한대니깐." 유리카는 생긋 웃고는 의자를 하나 끌어다가 앉았다. 의자는 두 개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도저히 앉을 만한 크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 게다가 옮길 만한 무게도 아니다 - 그녀는 당연히 릴가의 의자를 끌어왔다. "괜찮아." 나는 주아니를 안심시키느라 무리긴 했지만 애써 몸을 약간 일으키려고 했다. 주아니는 머리는 촉촉이 젖었는데 입은 옷은 멀쩡하다. 주아니가수건에서 반쯤 기어 나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동안 유리카가 말했다. "로아에들의 골풀옷은 확실히 대단하더라니까. 물에 퐁당 빠졌다가꺼내도 금방 말짱해지는 것이." 그렇게 말하면서 유리카는 무심결에 일어나려는 나를 도와주려고이불을 젖히려 했다. "야, 안돼!" 유리카가 깜짝 놀라서 손을 떼기도 전에 내가 이불을 훨씬 화닥닥잡아당겼다. 그러자니 금방 옆구리에 통증이 왔다. "으으……." "아파?" 내가 이불 속에서 옆구리로 손을 가져가는 것을 보고 이번엔 유리카가 이불 옆을 들치려고 하는 바람에 나는 거의 사색이 되어 아픈것도 잊어버리고 이불을 움켜잡았다. 간신히 이불을 잡자마자 당장이번엔 비명이 나왔다. "아으으윽-!" 유리카와 주아니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지는 것이 보인다. 나는 간신히 숨을 고르면서 통증이 가라앉도록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이불 들치지 마." "왜?" "그게…… 지금 안에 아무 것도 안 입었단 말이야." +=+=+=+=+=+=+=+=+=+=+=+=+=+=+=+=+=+=+=+=+=+=+=+=+=+=+=+=+=+=+=이야기책에 나타나는 거인들의 양상도 매우 다양하지요. 주로 사람 잡아먹는 거인... 이라는 인상도 꽤 강하고(나니아 연대기 중 하나인 '은 의자'를 읽어보면, 사람 잡아먹는 거인이 정말 실감이 납니다..^^), 반지전쟁에 나오는 엔트들처럼 오래된 자연 그 자체, 라는 식의 느낌도 있고 말이죠. 물론 엔트들은 거인이라기 보다는 아예 새로운 종족이지만... 게다가, 거인은 주로 머리가 나쁘다는 사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거인의 반대라고 할 '난쟁이'는 인간하고 키 차이가 그렇게 나지 않잖아요? 그런데 거인은 인간의 수십, 수백 배라니..으음..;;게다가, 거인한테도 사람 요리는 굉장히 특미래요. ^^;오늘도 이상한 이야기만 늘어놓다가 간다...;;;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904번제 목:◁세월의돌▷3-2.고대의거인과 은둔…(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8 22:31 읽음:132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2. 고대의 거인과 은둔 검사 (3) 제발 유리카가 장난스런 생각이나 떠올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슬그머니 유리카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보니까 불안해 죽겠는데. "알았어." 어라, 왜 저렇게 순순하지? 유리카가 손가락을 들어서 내 뺨을 쿡 찔렀다. 나는 갑작스런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유리카를 올려다보았다. "야, 얼굴이 아주 벌겋게 됐잖아. 뜨겁다 뜨거워. 응, 응? 장난을칠래도 이런 얼굴을 보고서야 어디." "……." 그 순간 호그돈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나는 간신히 곤란한상황에서 구원되었다. 호그돈은 유쾌한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우리가 모여 있는 쪽으로다가왔다. 호그돈의 걸음으로도 몇 걸음이나 와야 되는 데니까 방이정말 넓긴 넓다. 일반적인 침실의 약 세 배는 될 것 같다. "아가씨는 식사 제대로 할 수 있지?" "그럼요. 그리고 유리카라고 부르세요." 유리카는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싹싹하게 말하더니 내 쪽을 보고 웃었다. 저 웃음이 뭘 의미하는지 나는 안다. 나는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 호그돈을 바라보았다. "젊은 친구는……." "파비안이라고 하세요." "그래, 파비안 자네를 위해서 기가 막힌 죽을 릴가가 지금 끓이고있어. 어때? 맛있을 것 같지? 그렇지만 그것도 너무 많이 먹으면 안된다네." "……죽이요?" 내가 죽어 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내침대 앞에 상이 차려졌다. 테이블을 가져온 것은 릴가와 유리카를 위해서였고 호그돈은 밖의 큰 테이블에서 먹을 수밖에 없으니 양해해달라고 말했다(양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키로 어디에 앉아서 밥을 먹겠는가). "이제 먹어 볼까." 릴가는 아까와는 달리 요리가 다 끝나자 굉장히 유쾌한 기분으로돌아갔다. 머리는 풀고 옷차림은 그대로인 유리카도 그래 보인다. 심지어는 식탁 한구석에 앉은 주아니조차도 그렇다. 어찌 된 셈인지 주아니는 거인 호그돈에게는 전혀 낯을 가리지 않았다(덩달아 릴가에게조차도).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을 누가 한 거지? 참 명언이다. 식탁 앞에 앉은 유리카가 유쾌한 목소리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파비안, 맛있게 먹어." "…… 그래. 잘 먹을게요 하이로크 씨." "릴가라고 불러." "…… 예." 나는 감자와 브로콜리를 넣은 허연 오트밀 같은 죽을 앞에 놓고서릴가에게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죽 안에는 다양한 야채가 들어 있었지만 야채와 곡식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그것도 그렇게 나쁜 음식은 아니었겠지만 옆에서들 성찬을 먹고 있을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큼직한 사슴 뒷다리를 통째로 구운 것이 나와 있고 사과를 넣은 둥그런 파운드케이크, 팔뚝만한 소시지를 양념해서 구운 것, 바구니에가득 담긴 다갈색 호밀빵, 빵에 바를 꿀이 한 단지, 보기만 해도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커다란 치즈 덩어리와 버터 그릇, 땅콩버터로 버무린 양상추 샐러드, 버섯을 넣은 달걀 오믈렛, 초코 브라우니 큰 접시 두 개, 등등. 거인이 사는 집이라 그런지 무엇 할 것 없이 모조리컸다. 릴가의 요리 솜씨는 확실히 거인이 '발휘해보라'고 할 만한 것이 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다들 죽 한 그릇에 숟가락 한 개만 들고 있는 내 쪽을 보며한 마디씩 거든다. "옆구리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육류는 금물이야." "빨리 나아야잖겠어? 그래야 어서 길을 떠나지." "허허, 아가씨는 우리 집이 그렇게나 빨리 떠나고 싶어?" "아이 참, 유리카라고 하시라니까요." …… 화기애애하기도 하군. 온갖 음식 냄새가 괴롭히는 가운데 어찌어찌 저녁 식사(그것을 식사라고 부를 수 있다면)를 마쳤다. 아픈 것과 식욕은 아무 관계도 없는지 내게 처방된 죽을(죽이 약은 아닐진대……) 나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치웠다. 죽이라도 더 줬으면 싶었지만, 릴가는 과식도좋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식탁이 치워지고 나자 거인 호그돈도 들어와 커다란 의자를끌어다가 앉고 우리는 난로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먼저 우리 사정을 이야기해야 예의일텐데도 이들은 개의치않고 일단 자기 소개들을 했다. 주로 이야기는 릴가가 했고, 호그돈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거인 호그돈이 200살이 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상당히 놀랐다. 그의 인상은 키만 아니라면 기껏해야 4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헛, 내가 그렇게 젊어 보이는가?" "저 친구가 거인의 나이를 잘 몰라서 그러는 거야, 이 친구야. 이봐 파비안, 거인들은 보통 300살 정도까지는 산다네. 저기 저 로아에친구, 저 친구들이 약 200년 정도 살지. 숲이나 동굴의 종족들에게그 정도 나이는 그다지 신기한 것이 아니야.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엘프들의 나이는 가히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하거든? 오래 사는자들은 거의 1000살에 미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지. 보통은 약 500살 정도지만." "그…… 저희는 에졸린 여왕님의 소개를 받고 왔는데, 페어리들의나이는 그럼 얼마나 되죠?" "이미 호그돈이 아르단드를 만나서 대강 이야기를 들었어. 아르단드 알지? 며칠 전에 숲을 살펴볼 겸, 안쪽 숲까지 갔다가 부탁을 받았거든. 그래서 우리도 자네들이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다네. 페어리들의 나이? 글쎄? 아직 페어리가 늙어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서." "…… 그, 그렇군요." 아르단드는 아예 연락책이 직업인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페어리들이 만일 죽지 않는다면 그 종족의 숫자가 왜 그것밖에 안 되는가 궁금해졌다. 어쨌든 일단 그 이야기는 뒤로 넘기고 릴가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통나무집은 그 모양새로 보아 알 수 있듯이 호그돈이 지은 것이라고 했다. 릴가가 여기 와서 호그돈과 같이 살게 된 것은 약 7년 정도 되었다는데, 그 전에도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둘은 거의10년이 넘게 사귄 친구 사이였다(나이로 보면 둘 사이엔 실로 엄청난차이가 있었지만 호그돈은 그런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릴가가 막 자신이 대륙에서 날리던 검사였던 시절에 대해 길게 떠벌리려고 하는 순간 한참 조용하던 호그돈이 입을 열었다. "자네들 이야기를 좀 듣지. 여왕께서 이야기를 해주셔서 몇 가지는알고 있네만, 자네들은 무엇을 찾아 여행하는가?" 순간, 이걸 말해도 좋은 것인가 나는 잠시 동안 망설였다. 호그돈의 말씨는 매우 온화하고, 또 생김새와는 다른 기품이 있어서 마치 나무꾼 중에서도 왕족이 있다면 이런 말씨일 것 같은 생각이들게 했다. 어쩌면, 본성이 어떠했든 간에 200년이 넘는 세월은 어떤생명이든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유리카를 흘끔 쳐다보았다. 물론 이 일에 대해 유리카와 의논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그래도 사정을 다 알고 있는 유리카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서다. 그러나 유리카는 그저 내 얼굴을 마주 보고 빙그레 웃기만 했을 뿐 어떤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어떤 중대한 일인가? 비밀을 지켜야 하는 일이라면굳이 묻고 싶진 않아. 또는 비밀의 맹세를 이미 했다거나." "……." 아마도 그들은 내 옷을 벗기면서 이미 아룬드나얀 목걸이를 보았을것이다. 그들은 아까 전에 이미 내 소지품은 모두 내 배낭이나 검과함께 챙겨 두었다고 말했다(멋쟁이 검을 운반하는 데 들었던 특별한수고에 대해서도 릴가가 식사 중에 장황하게 언급했다). 특별히 목걸이에 대해서 따로 지칭해서 말하진 않았지만 그들로서도 그게 무엇인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침묵의 맹세를 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나를 도와 준점잖고(릴가가 이 말에 해당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온화한 사람들을 특별한 이유 없이 속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7년 이상이나 이 숲에서 은둔해 왔다면 내 임무에대해서 조금쯤 안다고 해서 무엇이 그렇게 큰 문제겠어? 사실, 나는 이런 모든 생각들보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정확히는 내려다보고 있는) 호그돈의 선량한 눈동자에 더 끌렸다. 나는 입을 열었다. "제 목걸이를 보셨겠지요." 릴가와 호그돈이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처음에 내가본 것처럼 아주 서로에게 예의바르게 고개를 낮추거나 높였다. 내가보기에 그들은 정말 서로를 존중하는 친구였다. "그 목걸이의 남은 자리에 채울 보석을 찾아내는 것이 제 여행의목적입니다. 어떤 예언자(류지아를 놓고 이렇게 말하자니 나도 모르게 약간 웃음이 나왔다)의 충고에 따라 지금 마브릴들의 땅으로 가고있는 중이고요." 호그돈은 고개를 끄덕였고, 릴가는 눈썹을 약간 올려 보였다. 다시호그돈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자네들을 쫓던 그 이상한 생명체들은 무엇인가?" "그건……." +=+=+=+=+=+=+=+=+=+=+=+=+=+=+=+=+=+=+=+=+=+=+=+=+=+=+=+=+=+=+=참, 그런데 이번 이름들도 괜찮은가요? ^^;;저는 어딘가의 특수한 이름, 주로 신화 같은 데서 나오는 그런 이름들을 그대로 따서 쓰는 일은 없어요. 왜냐면... 아무리 애를 써도본래 이미지가 도저히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기 때문! (머리가 나빠서란 얘긴가...;;)물론 그런 이름들을 잘 쓰시는 분은, 신화 이름들의 일반화에 공헌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름에 어떤 의미가 있냐고 물어보시는 분이 있으셨는데, 글쎄요.. 뭐라고 딱 잘라서 말할 수가 없네요. 이름마다 제각각..^^;(어떤 경우엔 의도하지 않은 의미가 생겨나는 경우도...;)다만 이름은 꽤 주의깊게 짓는 편입니다. 인물의 이미지,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의 통일성, 종족별 특징, 성격, 외모, 어감, 성과의 어울림, 기타등등.... 굉장히 많은 것이 고려되고 생각되어.... ....맘대로 지어집니다. ^^;;이름에 대해선 나름대로 많이 연구를 합니다. 예전에 어렸을 때엔,무작정 온갖 이름들을 가나다순..(무식하다..--;)으로 모았었고, 그이후엔 언어별, 나라별로 정리하기 시작했지요. 옛날 이름에서, 요즘이름에 이르기까지. (취미인가...)글 속에서 어떤 지역이 설정되면, 그 지역의 분위기에 맞는 나라나지역을 연상해 봅니다. 그런 다음, 기조를 맞추어 이름들을 짓지요. 지나가는 엑스트라 한 사람의 이름이라도 잘못 지어지면 분위기를 망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파비안네 가게 옆 무기상점집 딸 벤야, 이름 예쁘지 않습니까? ^^;파비안네 동네 사람들 이름은 다 공통적인 인상에 의거해서 지었거든요. 물론, 마을 이름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에에..물론 사용한 이름중에서도 실패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게다가 제 맘에 든다고 여러분 맘에 든단 법도 없고요. ^^나중에, 혹시 시간이 남으면(으음..;;) 인물별로 이름의 유래를 시리즈로 적어볼까 생각중이네요. ^^;(지금까지 만든 이름들 중 성공작 리스트라도 만들어 볼까...;;)그리고 또 물어보신 글 올리는 시각은... 하루를 넘기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키는 차원에서, 밤 12시를 넘기지않는다는 것 말고는 대중이 없군요. ^^;한동안 엄청 늦게 올리다가... 갑자기 빨리 올렸다가... (대낮에도 올린 일이 있다.. 딱 한번)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995번제 목:◁세월의돌▷3-2.고대의거인과 은둔…(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9 22:38 읽음:124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2. 고대의 거인과 은둔 검사 (4) 가능한 한 짧고도 감정이 휩쓸리지 않게끔 나는 우리 마을의 비극과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마쳤다. 아버지가 나를 찾아왔다는 말,그리고 그의 신분에 대한 이야기를 약간 망설이며 꺼냈을 때, 릴가의눈이 이상한 빛으로 반짝이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러나 그 빛은 곧사라져 버렸고,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게에 불을 질러서 깨끗이 태우고, 다음날 밤에 여행을 떠났지요." "이 아가씨, 아니 유리카도 함께?" 나는 잠깐 유리카를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아뇨. 유리카는 오는 도중에 만난 거예요." 그러자 이번에는 호그돈과 릴가의 눈이 유리카 쪽을 향했다. 유리카는 약간 망설이면서 웃더니 입을 열었다. "어쩌면 호그돈은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짐작할 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굳이 지나치게 숨긴다는 것이 성실한 덕목이 아닐 수가있겠지요." 그 순간 나는 에졸린 여왕 앞에서도 낮춤말을 쓰던 유리카가 어째서 이들에게는 높임말을 쓰고 있는지 의아해졌다. "나도 아가씨의 상처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나았는지 궁금했소. 분명 절벽 위에서는 중상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나 멀쩡하오. 이유를말해줄 수 있겠소?" "나는 무녀예요." 아주 짧고도 간단하게 말을 해치웠다. 릴가와 호그돈의 얼굴에 약간 당황한 기색이 흘렀다. 그러나 릴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떤?" "제 옷을 보시고도 모르겠다곤 안 하시겠지요? 나는 죽음의 아스테리온, 그런 언데드 몬스터에 의해 받은 상처 정도는 저절로도 나아요." 잠깐동안 다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번엔 호그돈이 말했다. "그건, 아스테리온 중에서도 아주 고위 무녀만이 가능한 건데?" 유리카는 대답이 필요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나는 새삼유리카를 다시 쳐다보았다. 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잘 입이 떨어지지않았다. "유리…… 그러면, 아까는 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왜 내가 계속 다치도록 자신은 뒤에 물러나 있었는지. 이런 말 하긴싫지만, 정말 그런 거였다면 오히려…… 오히려, 나보다 더 앞에 나서서 싸웠어야 옳지 않아? 유리카는 내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파비안, 그렇지 않아. 나는 저들에게 직접 대항할 수 없어. 네가굉장히 위험했던 순간, 이럴 때는 나도 결국 일어나서 그들에게 손을댔지만, 근본적으로 나는 그들과 서로 대적해선 안돼. 절벽 위에서나는 네 검에 주문을 걸었었지, 내 검이 아니라." 이해가 가지 않았다. 릴가와 호그돈도 끼여들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직접 대항해선 안 된다고? 나를 통해서만, 그러니까…… 나를 도구로 삼아서만 대항할 수 있다고?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다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유리카는 가만히 내 얼굴을 다시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파비안, 나는 그들을 직접 베었던 만큼 내 영력을 소실시켰어."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녀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아무리 몰라도, 영력의 소실이라는 말을 모를 만큼 무식하지는 않다. 초자연적인 존재를 다루는 자들은 그만큼 자신의 영적 단계를 고양시키기 위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수행이나 고통, 또는 내가 다 알 수 없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게다가 그런 것을 한다고 반드시 영의 단계가 능력으로 환산되는 것만도 아니다. 어쨌든간 '영력' 이라고 부르는 정도의 어떤 '힘' 을갖기 위해서는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필요했다. 적어도 그렇게 알아 왔다. 그런데 그런 것을 그렇게 경솔하게 소실시켰다고? "넌…… 도대체, 그런 말을 왜 하지 않고……." 그러나 유리카는 약간 심각해졌던 얼굴을 부드럽게 펴더니 한 마디를 던졌다. "네가 죽도록 놓아 둘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야." "흠, 으흠-." "흠흠, 큼큼." 갑자기 호그돈과 릴가가 헛기침을 하기 시작해서 나는 당황했다. 그들이 우리 사이를 뭔가 이상한 걸로 오해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나는 황급히 팔을 저으면서 아니라고 해명하려다가 옆구리가 쿡 결렸다. "그게 아니…… 으큭!" "이거 옆에 있기 미안한걸?" "둘은 잘 어울리는 한…… 팀이군 그래." '한 쌍' 이라고 말하려다가 나의 애원 섞인 협박의 눈초리를 받은릴가는 말을 정정했다. 유리카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다. 저 애,설마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좋다는 건 아니겠지? 이야기가 좀더 오갔으나 유리카는 그 이상의 이야기, 그러니까 자신이 왜 나와 함께 다니고 있으며 그 목걸이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은 채 다른 이야기들로 내용을 메웠다. 나조차도 처음 듣는 유리카의 고향 이야기도 나왔다. 그녀의고향은 로존디아와의 변경에 면해 있는, 우리 나라에서도 가장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크로이츠 영지에 속해 있다고 했다. 거기는 꽤 북쪽인데도 엠버리 영지만큼 춥지는 않으며 멋진 샘과 좋은 사람들이있는 소박한 마을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멋진 곳이겠네. 거길 언제 떠난 거야?" "글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오래 됐는걸." "에이, 그럼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겠네." 대륙 전체를 여행하기라도 한 양 말하던 릴가도 거기까진 가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200년도 넘게 살았으면서 켈라드리안에서 한 발짝도 나가본 일이 없다는 호그돈도 물론 마찬가지다. 나는 다시 새로운착상이 떠올라서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거기 한 번 들러볼까?" 음…… 유리카가 이유 없이 이 여행을 서두르고 있다는 걸 깜빡 잊었군. 유리카는 정색을 했다.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우린." 저 점에 대해서 물어도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다른 두 사람이 궁금한 빛을 얼굴에 떠올리는 것을 보고는 점잖게 도리질을 해주었다. 나는 절벽의 괴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 보았다. 호그돈이 대부분 죽었으며 나머지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글쎄, 우리를 구한 것은 호그돈 혼자가 아니라지 뭐야. 릴가는 약간 흥분한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많은 괴물들을 베었는데! 한 번 검을 휘두르면 서넛씩 잘려 나가고…… 호그돈이 몸집이 크고 또 자네들 가까이 있었으니까 그가 다 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건 정말 실례야! 나는 20년도넘게 검과 함께 한 대륙 최고 수준의 검사로서 그런 괴물쯤은 문제도되지……." 실례라고 하니까 가만히 있는 편이 나을는지 몰라도, 난 정말이지못 봤단 말씀야. "저, 그러니까…… 어느 쪽에 계셨죠?" 유리카도 생긋 웃더니 한 마디 했다. "숲 안쪽에 계셨던가요?" "……." 릴가는 더 이야기할 의욕을 잃었는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물론 우리는 잠시 후에 아이들처럼 삐진 릴가를 달래기 위해 그의 무훈을 마치 전설 속의 용사, 또는 녹보석의 기사나 뭐 그런 것이라도 되는 양떠들어대어야 했다. "시간이 늦었군." 호그돈이 문득 일어서서 창을 열어 밖을 내다보더니 말했다. 통나무집에 창도 있고, 정말 잘 만들어진 집이다. 밖은 캄캄했다. 릴가가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그럼, 다른 이야기는 다음 날 하기로 하고, 오늘밤은 푹 자도록하게나. 아가씨, 아니 유리카는 하나밖에 없는 침대를 파비안에게 뺏겨서 안됐는걸? 호그돈은 침대에서 자질 않아. 긴의자에 이불을 두툼하게 깔아주지. "네, 감사합니다. 의자를 갖다주시면 그냥 이 방에서 자겠어요. 파비안이랑 좀더 이야기하다가 잘게요." "그러시게." 갖가지 의문이 덜 풀린 상태로 일단 네 사람(주아니는 말이 내내없길래 보니까 좀전부터 자고 있었다)의 대화는 끝났다. 호그돈이 일어나더니 밖에서 긴의자를 가져왔고, 그 위에 릴가가 요를 몇 겹으로깔아 주었다. 둘은 호그돈의 방에 가서 잔다면서 나갔다. "이거, 호그돈 자네가 한번 굴렀다 하면 나는 그냥 즉사야. 알지? 조심해, 조심해." 나가면서 릴가가 농담조로 하는 말이 들렸고, 호그돈의 웃음소리가들려왔다. 둘이 나가자 유리카는 자기의 잠자리를 확인하고는 내 곁으로 다가와 의자를 끌어 앉았다. 난롯불이 타닥타닥 기분좋게 타올랐다. 따뜻하고 커다란 침실에 편안히 누운 채 이렇게 쉬면서,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 유리카의 얼굴을 올려다보자니, 낮에 있었던 일들이 마치 꿈만 같다. 내가 했던모든 일들도 다 아득한 옛일 같다. 그녀는 나를 보며 가볍게 미소했다. "그 동안, 내 이야기 해주지 않고 숨겨서 미안해. 앞으로도 좀더숨기는 것들이 있겠지만, 언젠가는 다 밝힐 거니까 이해해 줘. 정말약속해…… 괜찮겠어, 파비안?" "그래…… 나도 호그돈이 말했던 것처럼 너한테 사정이 있다면 굳이 캐내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나는 지금까지 함께 오면서 내내 부지런히 물어댔던 것은 다 잊은양 홀가분하게 대답했다. 사실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은 호그돈의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고 감명받은 부분이 있어서다. 나는 다시 자세를 낮추어서 편안하게 누웠다. 그렇게 움직이는 것도 꽤나 힘들었다. 유리카가 의자에서 일어나서 내 등을 부축해 주었다. 유리카의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는 깨끗하면서도 시원한 풀향기 같은 것이 났다. "우리가 아까 싸웠던 것, 네 말대로 정말 암흑 아룬드의 영향이었을까?" "아마…… 그럴 거야. 나조차도 아무 이유 없이 주체 못하게 화가났었으니까. 그래서 괜한 억지도 부리고. 암흑 아룬드는 동료간의 불화를 의미하는 달이기도 하지." "아냐, 나야말로 지나치게 트집을 잡았으니까. 지금 생각하니 정말이해가 안 가는 일이야." "나도 마찬가진걸." 우리는 마주보고 서로 빙긋 웃었다. 에참, 이러고 보니 마치 싸웠던 것이 정말 어린애 장난이었던 것처럼 생각되네. 잠시 그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가 나는 다시 물었다. "무녀라는 사실은 왜 지금까지 숨겼는데? 이제 밝힐 거였다면, 굳이 숨길 것까진 없었잖아?" +=+=+=+=+=+=+=+=+=+=+=+=+=+=+=+=+=+=+=+=+=+=+=+=+=+=+=+=+=+=+=저녁을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요...T_T고사리나물이 너무 맛있더라니... 친구한테 빌린 톨킨 작품 일러스트집, 너무 예쁘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3996번제 목:◁세월의돌▷3-2.고대의거인과 은둔…(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29 22:38 읽음:124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2. 고대의 거인과 은둔 검사 (5) 내 질문에 유리카는 약간 자조적인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다. 램프가 줄여지고 난롯불에 비치고 있는 유리카의 발그레한 얼굴은 약간신비스럽게까지 보였다. "그 어떤 사람도 죽음의 무녀 곁에 가고 싶어하지 않아. 누구나 존경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지. 나는 그것을 알고 있어. 너라고 어떨거라는 상상, 함부로 하기 어려웠어. 아냐, 너의 진심을 의심해서가아니야. 솔직히 네가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것도 네가 아스테리온에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그럼, 아스테리온에 대해서 잘 알게 되면 너를 대하는 태도가 바뀔 거란 그런 말이야?" 나는 약간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리카는 고개를 기울이면서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아냐, 그럴 거야." "그런 식으로 말하기야?" 유리카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잠깐 일어서더니 그녀의 손위에서 잠든주아니를 폭신한 수건에 가볍게 쌌다. 그런 다음 릴가의 의자를 난롯가에서 약간 떨어뜨려 놓더니 그 위에 얹어 놓았다. 주아니는 세상모르고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쟤가 65살이라니, 세상에 6살이라도믿겠다. 유리카는 다시 침대가로 돌아왔다. "아냐,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아. 그래, 모르는 일이니까 그런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러더니 유리카는 하품을 했다. 나는 실컷 잔 셈이니 몰라도 유리카는 그다지 쉬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이야기를 더 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유리카가 졸린 모양이니 이야기는 다음으로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하품은 의도적인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고싶지 않은 이야기, 하지 않아도 돼. "그만 자." "그래, 그래야겠다." 유리카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말했다. "잘 자. 악몽 꾸지 말고." "너도." 램프 불빛이 천천히 줄어들다가 깜빡깜빡하더니 드디어 꺼져버렸다. 난로의 타닥거리는 소리만이 가끔 들리는 가운데 나는 홀로 누워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는 살아있어. 아마도…… 운이 좋았기 때문에. 나흘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매일 죽을 먹으면서 옆에서 성찬을 즐기는 것을 바라보는 고통만제하면 상당히 쾌적한 하루하루다. 숲속의 통나무집은 꽤나 지내기가좋았고, 두 주인은 친절했으며, 유리카는 어느 때보다도 쾌활해 보였다. 주아니조차도 이 집을 마음에 들어했다. 그리고 내 몸 상태는 차츰 나아지고 있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릴가와 우리 아버지가 아는 사이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시시하게 지나가다 마주친 사이가 아니다. 처음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가 눈을 반짝이던 이유를 알게된 것은 다음날 오후쯤이었다. 릴가는 내가 혼자 누워 있는 방으로들어와 다가앉더니 다짜고짜 물었다. "아르킨은 요즘 잘 지내나?" 아르킨이 누구인가 잠깐 생각해야 했을 정도로 갑작스런 질문이라나는 눈을 껌뻑이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깐 상황의 갈피를 잡으려고 애쓰는 사이에 그가 빙그레 웃었다. "고향에서 만났다면서. 어때? 괜찮아 보이든?" "그…… 그렇긴 한데,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릴가는 손을 내저으며 웃음소리를 내었다. "예의바르게 물으려고 애쓰지 말게. 나는 그와 옛 친구 사이야. 나도 처음에 자네 머리 색깔을 보고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싶었지. 그런데 이렇게 딱 들어맞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옛 친구요?" 이거 참 놀랍다. 이런 데서 아버지 친구를 만나게 되다니. 릴가는 아버지가 구원 기사단의 수련 기사이던 시절 - 아버지한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도 놀라운 일이었다 - 함께 짝지어 다니던 수련 기사였다고 했다. 꽤나 절친했던 사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곧 정식 기사가 되고 기사단에서 빠르게인정을 받기 시작하는 동안, 그는 내내 정식 기사조차 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이런 말을 아주 웃으면서 쉽게 했지만 나는 문득 그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해졌다. "그저, 별 거 아니었어. 아르킨과 나는 길이 다른가 보다, 그렇게생각했지. 아르킨이 구원 기사단 안에서 서열 6위인 프랑드(봄)의 기사로 결정되었을 즈음, 나는 수련 기사직을 때려치우고 방랑의 길을택했지. 정말이지 비교도 안 되게 재미있었어. 왜 지금까지 이렇게하지 않고 멍청하게 거기 있었나,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질 정도로말이야." "……." 릴가는 정말 아무런 사심도 없다는 듯 싱글싱글 웃으면서 옛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곧 호그돈을 만난 이야기며 어디서 무슨 아가씨를 만났다는 둥 자기가 겪은 과거의 모험들을 신이 나서 늘어놓았다. 내가 처음의 이야기로 돌리기 위해 말을 끊고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었다. "그럼, 그 후로 아버지는 한 번도 못 만나셨어요?" "왜, 만났지. 방랑이란 게 그래서 좋은 것 아닌가. 온 대륙을 돌아다니다가 님-나르시냐크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군. 그래도 꽤나오랫동안 그 구원 기사인가 뭔가를 해보고 싶어했지 않은가? 그럭저럭 하다가 녀석의 다른 영지가 있는 예모랑드 영지에도 가보았고. 하르마탄 섬은 정말 가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더군. 바다의 풍경이아주 그만이었어. 언젠가 죽기 전에 다시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야. 그 곳의 항구는……." "만나서, 어떠셨어요?" "좋았지." 릴가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은 거인 호그돈을 연상케 하기도 했고 일견 나르디를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호그돈 쪽에 가까웠다. 7년이나 숲속에 산 사람은 저렇게 되는 걸까. 켈라드리안은 영혼이 깨끗해지는 숲인가. "옛 친구 만나서 안 좋은 사람 있겠어? 나는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많았지. 방랑하면서 겪은 수많은 이야기며 재미있었던 사건이나 아슬아슬한 위기 등등…… 그런데 아르킨은 워낙 세상일에 치이다 보니그런 이야기를 다 들을 여유는 없어 보이더군. 뭐 어때. 역시 녀석과나는 길이 달랐거든. 녀석은 자기 일에 만족하고, 나는 내 생활에 만족하고. 물론 대접은 기가 막히게 잘 받았지. 언제 한 번쯤 다시 가볼까나……." 이윽고 릴가는 그날 오랜만에 만난 김에 아버지와 검 대련을 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 이야기는 내 눈을 반짝거리게 할 만한 이야기였다. 그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직접 검을 휘두르는 일보다는 기사단 내의 각종 사무에 시달렸으면서도 검 실력이 전혀 녹슬지 않았고,오히려 녹슬기는커녕 더 발전한 것 같았다며 아버지를 침이 마르게칭찬했다. "놀랍더군. 나도 스스로 꽤나 발전했다고 자부했었는데, 그 이상이었어." "지금은요?" 어린아이 같은 질문이란 건 알지만 나도 역시 한 아버지의 아들이라,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모양이다. 릴가는 씩 웃더니 대답했다. "지금, 지금이라…… 모르긴 해도 릴가 하이로크가 한 네 명은 있어야 당하지 않을까? 아냐, 세 명으로도 될까? 뭐야, 어쨌든간 세 명이고 네 명이고 간에 그렇게는 될 수 없으니 졌다고 봐야지. 아르킨이 나 안보는 동안 어디 박혀서 술만 실컷 마셔대고 허송 세월이나했다면 모를까, 아냐, 그 녀석 그럴 리가 없지. 아주 철저한 친구라구. 수련 기사들 중에서 제일 먼저 발탁되어서 정식 기사가 되고 그렇게 빨리 기사단장이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야." 그리고 이제 걸어다닐 만큼 몸이 회복된 나는 릴가가 아침마다 검연습을 한다길래 그걸 구경하려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 통나무집앞마당에 앉아 있다. 앞마당에는 큼직한 거위들이 나와 돌아다니고있었다. 나중에야 안 거지만 거인 호그돈은 나와 유리카가 처음 찾아왔던 날 거위를 데리고 산책을 하러 갔었다고 했다(우리가 보았던 커다란 닭장의 정체가 그거였다). 세상에, 개를 데리고 산책을 간단 이야긴 들었어도 거위하고 산책한다는 이야긴 난생 처음 들었다. 그것도 숲으로 말이야. 호그돈은 거의 어린아이 키만한 크기의 거위를 스무 마리나 키우고있었고 마치 사람들이 개를 키우며 사랑하듯 그 거위들을 사랑했다. 릴가는 몸을 풀고 시작하려는 듯 검 대신 나무 막대를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다. "얍!" "이엽!" "헙!" "하아압!" "……." 언제 제대로 시작할건지, 원. 내 몸이 다 나을 때까지 쉬었다 가라고 두 사람은 친절하게 말했고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 솔직히 '세월' 을 보내고 있다. 나는 에졸린 여왕이 아르단드를 통해 전했던 '그들이 이번 달에 피해야 할것들을 알려줄 것이다' 에 대해서 기억해냈지만 그들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양 그런 이야기는 입밖에도 내지 않았다. 또 하나 이상한 건 유리카가 평소와는 달리 별로 조바심을 보이지않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 유리카는 마치 상냥하고 발랄한 농가의 소녀처럼 시간을 보냈다. 거위들을 먹이고, 청소도 하고, 숲속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나야 거기 따라갈 수가 없지만 말이다. 혹시 괴물들의 잔당이 남았을지 모르니까 돌아다니지 말라고 말했는데, 유리카가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기 칼자루를 툭툭 쳐보이는 바람에 나는 기가 막혀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또 영력을 깎아먹었네 그딴 소리 할려구 그래?" "내 영력이지, 네 영력이냐?" "그러지 말고 가서 거위 먹이나 주든지……." "너야말로 빨리 나아서 식사 준비라도 좀 해보면 어때?" …… 정정하겠다. 유리카와 나는 '농가의 남매' 같았다. 릴가는 한참 동안 몸을 풀더니 막대를 한쪽으로 던지고 기운차게외쳤다. "어때, 음악 틀고 할까?" 유리카와 나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음악! +=+=+=+=+=+=+=+=+=+=+=+=+=+=+=+=+=+=+=+=+=+=+=+=+=+=+=+=+=+=+=글 갈무리하는 법은, 제가 이 게시판에 자세히 써 놓은 것이 있답니다. li 모래의책 해보시면 '모음집 보내달라는 분들게' 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다른 글들은 거의 다 2-3 이런 식으로 붙어 있는 것들이니까, 금방눈에 띌 거예요. 아마... 길어도 십여분 안에 다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또, 오랜만에(?) 추천해 주신 분, 감사합니다- ^^계속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저도 기뻐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088번제 목:◁세월의돌▷3-2.고대의거인과 은둔…(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30 20:53 읽음:117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2. 고대의 거인과 은둔 검사 (6) 릴가는 잠깐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이상한 조그만 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상자 옆에는 빙글빙글 돌리면 돌아갈 듯한 손잡이가 튀어나와있고, 그 위에는 나팔 같은 것이 달려 있다. "해 볼까?" 릴가는 손잡이를 잡더니 장난스럽게 속력을 내어서 후닥닥 돌렸다. 드르륵- 드르륵- 드륵- 드륵- "……." 우리가 궁금해서 말조차 멈추고 있는 참인데 릴가가 드디어 손을멈췄다. 그러더니 우리에게 - 사실은 거의 유리카에게 - 눈을 찡긋해보이며 손을 손잡이에서 뗐다. "어어……." 우리가 처음에 왔을 때 들었던 그 음악이잖아? 마치 농부들의 춤곡 같은 그 음악에 맞춰 릴가는 장난스럽게 한 바퀴 돌더니 유리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실까요?" 유리카가 내 쪽을 보며 생긋 웃어 보였다. 저, 설마……. "좋아요." "……." 이거야 정말. 릴가와 유리카가 신나게 마당에서 반쯤은 엉터리로 빙글빙글 돌고있는 동안 나는 그 상자가 어떻게 된 물건인지 죽지 않을 만큼 궁금해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감히 만져보지는 못하고 몸이 허락하는 한있는 대로 고개를 돌리고 꼬아 가며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음악이나오는 동안 손잡이가 조금씩 돌아가고 있다. 처음 릴가가 돌렸던 반대 방향으로. 상자는 몹시 낡아 있었다. 한 100년은 묵은 것 같았다. 나는 소리를 높였다.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 "몰라, 내 거 아니고 호그돈 거야!" 그래서 나는 이 당황스런 물건을 앞에 놓고서 뭔가 이유 없이 나를기분 나쁘게 만드는 듯한 둘의 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음악은 멈출줄 모르고 계속 반복이다. 가만히 들어보니 짤막한 멜로디를 계속 되풀이해서 연주하고 있다. 나는 '나는 촌놈' 이라고 이마에 붙여놓은셈치고 이제는 아예 일어서서 상자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어이, 다들 뭘 그렇게 돌고들 있어?" 호그돈이었다. 우리는 얼굴에 제각기 자기 나름의 웃음을 머금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계면쩍은 웃음, 우스운 일을 들킨 것을 숨기려는 의도가 가득한폭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발랄한 까르르 소리. "릴가, 자네는 오늘은 검 연습 대신 춤 연습인가? 건너 마을에 예쁜 아가씨라도 하나 봐 뒀나?" "예쁜 아가씨라면 여기 이 아가씨 만한 사람이 없던데?" "예쁜지는 몰라도 춤 솜씬 엉망이죠?" 유리카는 재치 있게 대답하더니 내 쪽으로 다가와서 같이 상자를들여다보았다. 유리카도 굉장히 신기해하는 눈치다. 유리카가 뭔가이미 알고 있지 않고 나와 함께 신기해하는 건 참 쉽게 볼 수 있는현상이 아니었다. "정말, 신기하네?" 호그돈에게 물어 봤지만 그도 이걸 어디서 구했는지 하도 오래 되어서 잊어버렸단다.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고, 만졌다가는 망가져 버릴까봐 속을 들여다 본 일도 없다고 말했다(하긴 거인의 그 손가락으로 만져보았자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궁금해졌지만 결국 궁금증을 해소 못한 채 아침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릴가, 오늘은 검 연습 보여준다더니 이상한 것만 보여 줬네요?" "하하, 내일이라도 보여 주지 뭘." 농담삼아라도 좀 있다가 보여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호그돈은릴가가 검을 들고 휘두르는 것은 아침나절밖에 없다고 했다. 그 밖의시간은 모두 다른 일을 하면서 보냈다. 가끔 나무 막대를 들지는 몰라도 낮시간에 검은 절대 만지지 않는 것이 그의 철칙이었다. 물론, 저번처럼 위험에 처한 소년 소녀들이 있을 때는 예외라고 그는 말해 주었다. 유리카는 빠르게 식사를 끝내고는 거실(?)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있는 호그돈하고 이야기 상대나 해준다며 밖으로 나갔다. 유리카가나가자, 나는 얼마 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음…… 그러지 말고 저 몸 좀 나아지거든 검 지도 좀 해주시지 않으실래요? 우리 아버지는 대단하실 지 몰라도 저는 18년간 잡화점 일로만 잔뼈가 굵어서 검하고는 도통 거리가 멀거든요. 덕택에 여행하다 보니 불편이 많네요. 좀 배웠으면 하는데, 그래 주실래요?" "왜, 아버지한테 가서 검 솜씨 자랑하고 싶어?" 릴가는 내 죽을 한 숟가락 뺏어 먹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자기 앞에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음식들을 산처럼 쌓아 놓고서 뭐하는 거야, 글쎄. "아니면, 내 검 솜씨를 한 번 시험해보고 싶어서?" "무슨 소리예요? 그만한 실력은 갖고 있지 않다구요." 릴가는 다시 자기 식사로 돌아가 입 안에 파이 조각을 던져 넣으면서 의외의 말을 꺼냈다. "무슨. 저번에 자네 실력에 대해선 익히 봤어. 우리가 오기 전에몇이나 베어 넘겼는지 알아? 30이상이야, 30. 자네 나이에 절대 가능한 일이 아니라구." "…… 유리카도 있었는걸요……." 나는 말끝을 흐리면서 생각에 잠겨 봤다. 내가 정말 그만큼이나 검솜씨가 늘었나? 그땐 무아지경에서 검을 휘두른 때도 많아서 그만큼이나 숫자가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냐, 본래 아버지의 피를이어받아서 체질이 전사였다거나, 조금만 가르쳐도 대단한 실력을 갖게 되는 전설의…… 으으, 그만 하자. 릴가는 잠깐동안 입의 것을 씹는데 열중하고 있더니 꿀꺽 삼키고는내 쪽을 바라보았다. "뭐, 좋다면. 못 가르칠 것도 없지. 이거 아르킨이 나중에 알면 비웃겠는데." "그럴 리가요." 웃으면서 반쯤은 장난처럼 부탁했지만, 나는 이제 내 몸을, 그리고좀더 넓게는 나와 여행하는 동료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먹구구의 실력으로는 안된다. 더 이상 내 옆에서 누군가가 죽는 모습은 보기 싫다. 그건 정말, 정말 재미없는 일이다. +=+=+=+=+=+=+=+=+=+=+=+=+=+=+=+=+=+=+=+=+=+=+=+=+=+=+=+=+=+=+=친구 아이디를 빌려서 어제 하이텔에 가보려 했는데, 세상에나... 나우누리보다 더 접속이 안 되는 것 같아요...;;어제는 접속 한 번 해보려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접속 시도 무려 30여번 이상... 절대 안되는 번호도 하나 있더군요. ^^;물론 나우누리도 만만치 않지만.... --;통신 서비스들은 대부분 이런 점에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접속이 안될 때, 그냥 포기하는 일은 드뭅니다. 왜냐면,접속이 안되어서 쌓인 스트레스는..... 접속이 될 때만 풀리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이냐....)접속하다가 가장 화가 날 때는,되는 척 전화 걸리는 소리 내다가 갑자기 노이즈로 안될 때. 그리고 되는 것 같더니, 3840에서 멈추고 전화비만 먹어버릴 때. (강제 접속 종료로 끊고 나갈땐 피눈물이 난다...)(또 드는 생각, 분명 한국 통신하고 계약 맺고 낙전 수입 나눠먹기하고 있을 거야...)(공중전화 낙전은 애들 학교에 컴퓨터라도 놔주지...)(요즘은 그것도 안 놔주나?)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089번제 목:◁세월의돌▷3-2.고대의거인과 은둔…(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30 20:53 읽음:117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2. 고대의 거인과 은둔 검사 (7) 검은 비가 내렸다. 최근 삼일 째 계속해서 그치지 않는 비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건만 매 해 이 비를 볼 때마다 섬뜩한 느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어떻게 저렇게 먹물처럼 검고 끈적거리는 비가 내릴 수가 있을까. 낮인데도 온통 밖은 어두웠고, 태양은 분명 떴겠지만 밖으로 나간대도 아마 보이지 않을 것 같다. 창은 덧문까지 꼭꼭 닫혔지만 비 떨어지는 소리는 끊이지 않고 들렸다. 검은 비가 내릴 때에는 밖에 나가지 못했다. 암흑 아룬드가 오기전에 이럴 때를 대비해서 음식을 많이 저장해 놓는다고 했다. 통나무집 옆에는 커다란 저장고가 따로 달려 있고, 뭔가 가지러 갈 때를 대비해서 이쪽 본채와 지붕도 잇대어져 있었다. 하긴 거인 호그돈이 먹는 양을 생각할 때, 웬만한 저장 갖고는 어림없을 것 같기도 하다. 거기엔 숲 밖 마을에서 가져온 각종 식료품들, 그리고 릴가와 호그돈이 사냥한 여러 산짐승들의 고기가 잘 손질된 채 천장에 주렁주렁걸려 있었다. 훈제 소시지나 포도주 통, 순무나 브로콜리, 귀리 같은야채, 설탕이나 소금 같은 것들도 잔뜩 저장되어 있었다. 밖에 나가지 못하니까 다들 조금씩은 우울해져 있었다. 점심식사를 하던 도중 유리카가 말을 꺼냈다. "비가 그치는 대로 떠나겠어요." 아주 미세하게, 다들 서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움직이고 있던나이프와 포크를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유리카는 다시 말했다. "이제 파비안의 몸도 거의 나았고 하니까요. 비가 그치면 떠날게요." 잠시 동안 서로 포크가 접시에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요즘 들어 밤낮으로 밝히고 있는 커다란 램프가 나무바닥에 붉은 빛을뿌리고 있었다. "암흑 아룬드엔 언제 다시 비가 올지 몰라." 호그돈이 한참만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릴가가 고개를 끄덕이며말했다. "암흑 아룬드에 여행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야. 봄이 되어 아르나 아룬드가 되거든 가라구. 아르나 강을 따라 아르나 시도 보고 말야. 좋잖아? 계절에 어울리는 일이기도 하고, 또……." "고마운 말씀이지만, 그렇게까지 한가하지 못해요." 유리카는 딱 잘라 말하더니 다시 입 안에 빵을 잘라 집어넣었다. 나는 말없이 생각해 보았다. 오늘 아침 날이 밝았을 때, 암흑 아룬드가 이미 반 정도나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속에 떠올랐다. 암흑 아룬드는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일기가 나빠진다. 아르나 아룬드가 되어서 날씨가 갑작스레 확 개일 때까지, 마치 다시는 봄이 오지 않을 것처럼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닫는 것이다. 몇 번이나 경험해서 이미 알고 있다. 어린아이 시절에는 마치 이 일기가 영원히 계속될 듯이 여겨져서 두려워한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역시 암흑 아룬드 후반에 여행하는 것은초반보다 두 배는 더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면 유리카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일찍 떠나서 무엇을 얻을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호그돈은 단순히 에졸린 여왕의 부탁이라는 그 한 가지만가지고, 이렇게 우리를 오랫동안 보살펴 주고, 아니 이제는 더 붙잡아 놓으려고까지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는 무언가 물을 것이 있다는 확신이 섰다. "우리가 아르단드를 만나서 이 집에 머무르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그 집의 주인이 우리에게 무언가 해 줄 말이 있으리라는 이야기도 들었었어요." 호그돈이 묵묵히 얼굴을 들어 나를 보더니 다시 음식에 열중한다. 그런 일은 자기는 모른다던가, 아니면 말할 생각이 없다거나 어느 쪽도 아니고 그저 묵묵부답 고기만 씹고 있다. 내 몸이 나아져서 요즘은 식사를 부엌에서 함께 했다. "릴가는 어때요? 우리한테 무슨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음……." 희석시킨 포도주를 약간 마시더니 릴가는 눈을 감고 잠깐 생각에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여전히 말은 하지 않았다. 평상시그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잠깐의 침묵 후에 유리카가 말했다. "파비안, 더 물을 필요는 없어. 이 두 분은 우리를 얼마간 떠나지않게끔 잡아 놓으라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거야. 에졸린 여왕은 우리가 그 '악령의 노예' 들을 만날 지도 모를 것을 걱정했던 걸 거야.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 머무르지 않으려고 했었고, 그래서 벌써 만나버렸잖아. 물론 이제 길을 떠나게 된다면…… 어쩌면 또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악령의 노예' 말고도 그 괴물들을 부르는 이름에는 '죽음이 내친자식', '백열의 시체' 등등 몇 가지가 더 있다고 했다. 호그돈은 저괴물들이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지는 몰라도 약 200여년 전에도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서 나를 놀라게 했다. 그 200년 동안 저들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을까? 뜻밖에도 유리카가 그렇게 말하자 호그돈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야." 유리카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호그돈 쪽으로 돌렸다. "그렇다면, 말씀해 주세요." 식사가 마침 끝났다. 호그돈은 입가를 냅킨으로 닦으며 일어서더니말했다. "그래, 에졸린 여왕님의 말씀을 전해 주지. 그렇게까지 말하니 이제 그만 이야기할밖에." 이날의 식사를 치우는 것은 나와 유리카의 몫이었다. 나는 그릇들을 들고 나르면서 유리카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서두르는 거야? 왜 서두르는지 내가 좀 알면 안돼? 그러면 나도 함께 서둘러 줄 것 아냐." "아직은, 아직은."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하기에 이번에는 달리 물었다. "비가 그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날 참이야?" "일단, 호그돈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지. 그렇지만 일단은 떠나는쪽이야." "내가 가지 않는다 해도?" 유리카는 접시를 들고 가다가 잠시 멈추었다. "…… 그렇지는 않아." 식사를 치우고 유리카는 차를 한 잔씩 만들어서 돌렸다. 우리는 난롯가에 큼직한 사슴 가죽 깔개를 깔아 놓고서 그 위에 둘러앉아서 차를 홀짝였다. 유리카가 난롯불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호그돈을 바라보자 그는 기침 소리를 내었다. "파비안과 유리카, 그대들이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그게 누구죠?" 유리카가 빠르게 묻자 호그돈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일단,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듣게." 낮인데도 끊임없이 내리는 검은 비 때문에 주위는 온통 어두웠다. 켈라드리안의 페어리들이 약간 걱정이 되었다. 지붕이 없는 숲속에서그들은 무엇으로 이 검은 비를 피할까? "그는 앞으로 이삼일 안에 여기에 도착할 것이네. 아니, 그들이라고 해야 맞겠군. 그들을 꼭 만나고 가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또한 그것이 자네들에게도 좋고. 파비안이 심하게 다쳐서 요양을 해야 했기에 굳이 부탁받은 일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네만,유리카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말하지 않을 수가 없군." "그들이 누구죠?" "예언자…… 검은 예언자들." 나는 붉은 난롯불빛 속에서도 유리카의 얼굴이 일순 어두워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당장 일어설 것처럼 약간 움직였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나는 몰라. 그러나 그들을 꼭 만나야 해." "만나지 않겠어요." "유리카." 호그돈은 묵직한 목소리로 유리카를 불렀다. 나는 검은 예언자들이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유리카가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것만은 알수 있었다. 나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유리카가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만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좀더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그리고 유리카, 네가 왜 그들을 만나고 싶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말야." "옳은 말이야." 한참 동안 가만히 있던 릴가가 문득 손뼉을 한 번 딱 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침묵이었다. "꼭 그들을 만나야 한다는 건 에졸린 여왕님의 생각인가요?" 호그돈이 대답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뭐라고 이유를 말씀하시던가요?" "자네들이 여기서 그들을 만나지 않고서 그저 떠난다면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고,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 마지막 일을 그르칠 거라 하셨다. 페어리의 여왕이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지. 그녀에게는이미 지난 일들과 앞으로 올 일들을 가로지르는 어떤 예지 같은 것이깃들어 있다네." "더 이상의 말씀은 없으시고요?" 호그돈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유리카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얼굴은 눈에 띄게 흐려져 있었다. "유리, 왜 그들을 안 만나겠다는 거야?" "……." 유리카는 잠시 침묵을 지켰으나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리며 계속 바라보고 있는 나 때문에 결국은 입을 열었다. "그들은 검은 예언자, 나는 검은 옷의 아스테리온이라고 불리는 죽음의 무녀, 비슷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들은 완전히 달라. 서로가 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상극자의 힘, 부딪치는 힘이야. 우리들은 서로 만나는 것이 금기처럼 되어 있어. 사실 검은 예언자란 어떤 인간이든 일생에 단 한 번도 만나기 어려운 자들이기에…… 그런 금기가평상시엔 그다지 소용이 닿지 않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 없는금기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야. 왜냐고 묻고 싶겠지?" "물론이야." +=+=+=+=+=+=+=+=+=+=+=+=+=+=+=+=+=+=+=+=+=+=+=+=+=+=+=+=+=+=+=계속해서 드는 생각... 가끔은 새롬을 종료시켰다가 새로 실행하면 접속이 되는 수도 있다. 이건 우연일까, 필연일까? 가끔 전화를 알아서 끊으면서 "busy" 라고 뜰 때는 나보고 바쁘냐고 약올리는 걸까, 바쁘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걸까? 걸어도 걸어도 메시지 전달이 안된다는 어떤 여자 목소리가 나오는번호는.... 내 모뎀 탓인 걸까? 14400으로 걸면 아주 잘 걸린다는 말이 있었는데, 정말일까? 결국...01411로 걸고 말았다. 왜 이게 더 잘 걸리지? 그러나...엄청나게 느렸다. --;그러나 접속 자체가 지나치게 감격적인 나머지, 끊으려니까 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오늘은 쌓인 원한 풀기 잡설이었어...)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200번제 목:◁세월의돌▷3-2.고대의거인과 은둔…(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31 22:20 읽음:112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2. 고대의 거인과 은둔 검사 (8) "생명의 무녀라는 흰옷의 듀나리온들도 자연 신앙가인 트루바드 음유시인들과는 접촉하지 않아. 왜? 그들도 근원을 따져 보면 동일하다고 할 정도로 같지만, 힘을 사용하는 방식이 반대이기 때문이야. 트루바드들이 자연의 힘을 만들고 키운다면 듀나리온들은 그 힘을 사용하고 또한 근원으로 되돌려 주지. 그들은 서로를 증오하지는 않지만서로 관계치 않아. 섣불리 관계했다가는 내부의 질서를 부숴 버리는결과가 올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럼…… 검은 예언자와 아스테리온도?" 유리카는 검은 옷을 깨끗하게 세탁하자마자 다시 그 옷만을 입었다. 유리카가 흰옷을 걸치고 있던 것은 처음 여기에 왔던 날 저녁뿐이다. 흰옷을 입는다고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속한 곳의 질서를 그녀도 지켜야 하는 것이리라. 눈을 들자 유리카가 고개를 젓는 것이 보였다. "똑같지는 않아. 생명의 힘은 키운다, 되돌려준다, 고 말한다면 죽음의 힘은 거둔다, 정화한다,고 해. 거두는 자는 나와 같은 아스테리온, 그리고 검은 예언자는 정화하는 자들. 우리는 서로를 꺼려. 서로의 질서를 존중하니까." "유리카, 그것을 그들도 모르는 바는 아닐 거야. 그러나 너도 그들이 여기에서 너를 만날 것을 모르고서 온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지?" 갑작스런 릴가의 말에 유리카는 대답할 말이 없는 듯 잠깐 머뭇거렸다. "검은 예언자들이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모르고서 움직였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나? 나는 없네. 그들의 예지는 이 세상의 운명들과 인연들을 꿰뚫고 있으며, 그들의 통찰은 세상의 질서를 뛰어넘어 우리가 깨달을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속하지. 그들이 이리로 오기로 했다면, 여기에서 아스테리온 무녀를 만나게 되리라는 사실도분명히 알고 있을 거다. 그들이 세상사에 관여치 않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어." 창문이 꼭 닫혔는데도 어디선가 바람이 들어와 장작에 붙은 불꽃을흔들리게 했다. 너울거리는 불꽃이 네 사람의 얼굴 위로 일렁인다. 그 중에서도 호그돈의 커다란 몸집은 반쯤은 검은 그림자 속에 내려앉아 있어 어찌 보면 무섭게 웅크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호그돈은이윽고 몸을 펴더니 한쪽에 쌓아 두었던 장작 한 개를 집어 난로 안으로 던져 넣었다. 파시식, 작은 불가루들이 튕겨나는 것이 보인다. "유리카가 그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면 그건 그 때의 문제다. 만나고 싶지 않다면 너는 그들을 피해 있으면 될 것이다. 일단은 기다리는 것이 좋아. 어쨌든 파비안은 반드시 그들을 만나지 않으면 안되니까. 에졸린 여왕님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 호그돈은 잠깐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유리카의 얼굴을 주의 깊게바라보았다. "235살이나 되는 나이에 비해 나는 그다지 현명한 거인이라고 할수는 없다. 거인족들이 흔히 그렇듯, 나는 은둔자이고 세상의 일은잘 몰라. 친구라고 할 만한 자도 여기 릴가 이외엔 달리 없고. 에졸린 여왕님과는 100년도 넘게 알아왔지만 그녀는 미래의 일을 언제나잘 알고 있다. 그녀의 나이는 감히 예측할 수 없으며, 그녀의 지혜또한 마찬가지지. 우리가 그녀의 행동이나 말을 가끔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나는 그녀가 필요없는 말을 하는 걸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그를 만난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더한 깊은 세월의 냄새가났다. "우리 두 은둔자가 한참 세상으로 달려나가고 싶어할 나이의 자네들 발목을 잡는 것이 어찌 보면 우습게 보일는지도 모르지. 그저 하루하루를 소탈하고도 가능하면 즐겁게 살아가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모르고, 어떤 것도 관심 없는 자들이 말일세. 그러나 발이 닿는 곳으로 무작정 걷지 말라. '발길은 천길 벼랑 위를 헤매이면서 마음은 꿈을 꾸고 있을 수 있으니.'." "환영주 아룬드의 경구." 유리카가 문득 말했다. 호그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군, 현명한 아스테리온. 그대의 그런 현명함으로 오늘의 제의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게. 에졸린 여왕은 그대를 '봄의 공주' 라고 부르더군. 그대에게는 지금보다 봄의 여행이 더 값진 것들을 가져다 줄 거야." 호그돈은 말을 마쳤다. 나머지 사람들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 때, 릴가의 익살스런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검은 비를 맞으면 머리카락이 빠져. 대머리가 되고 싶은가?" +=+=+=+=+=+=+=+=+=+=+=+=+=+=+=+=+=+=+=+=+=+=+=+=+=+=+=+=+=+=+='세월의 돌'이 드디어 유니텔로도 갑니다! 유니텔에 계시는 azit님께서 환타지 동호회 '환'(go fantasy)으로퍼가겠다고 하셔서 허락해 드렸습니다.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1편부터 올라가기 시작할 것 같습니다. 유니텔 역시.. 제가 구경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역시,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이로서 현재 '세월의 돌'이 가는 곳을 헤아려 보면.. 하이텔 환타지 동호회, 천리안 검과 마법 동호회, 채널아이 환타지동호회, 포항공대 bbs 'posb', 이번 유니텔 환타지 동호회까지 모두5군데가 되었습니다. 물론 나우누리를 합하면 6군데지요. 수고해주시는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201번제 목:◁세월의돌▷3-2.고대의거인과 은둔…(9)-End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5/31 22:20 읽음:115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3장. 제2월 '암흑(Darkness)'2. 고대의 거인과 은둔 검사 (9) 비가 개었다. 6일 만이었다. 저녁 무렵, 조금은 구름이 걷힌 하늘에 보고 싶지 않은 달이 떠올랐다. 오늘은 보름, 달은 여느 달이나 다름없이 둥글다. 그리고 그가운데 사스나 벨이 검은 상장처럼 박혀 있는 것이 보인다. 유리카는 일단 더 이상 떠나겠다는 고집을 피우지는 않았다. 다만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비가 그쳤는데도 밖으로 나가보려 하지도 않았고, 별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저녁을 먹고서 좀 지나자 큼직한 거인의 나무 컵에 담긴 오트밀을마신 다음, 커다란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 물던 호그돈은 문득 숲으로이어지는 작은 길 쪽을 내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가 올 지도 모르겠군." 거인의 예감이란 거의 정확하다는 릴가의 반 농담 섞인 말을 나중에는 곧이듣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오랜만에 밤공기나 마실까 싶어마당을 돌아다니며 큼직한 그림자같은 숲을 불안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던 때였다. 밤이 어두워 몇 걸음 앞도 내다보기 어려워졌을 무렵 - 암흑 아룬드의 달은 평상시와 비슷하게 보이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빛이 짧았다 - 희미한 등불을 밝혀 든 일단의 무리가 길 저편에 나타났다는 것을 릴가가 알렸다. "모두 집안으로 들어가라. 내가 나가겠다." 유리카는 어차피 방안에서 나올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고, 나는 릴가와 함께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느 새 나타난 주홍빛의 불빛들이 일제히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매우 긴장해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들은 예의바른 자들에겐 자기들도 예를 지키는 자들이니까." 릴가의 말을 듣고도 나는 그다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처음 검은예언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날 이후로 유리카에게 그 동안 이렇게저렇게 물어 본 결과, 그들이 두려운 저주의 예언들, 주로 불길한 기운과 말을 전하는 무리라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무례를 범하여 얻은저주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씻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로서는결코 무리가 아니다. 아니, 씻을 방법이 없지는 않다고 했다. 누군가가 그 저주를 대신받으면 된다고 하지만, 그건 방법이 없다는 말하고 똑같다. 누가 남의 저주를 대신 받는단 말인가? 그것도 얼마나 지독할지 짐작도 안가는 끔찍한 걸 말이다. 거기다가 암흑 아룬드가 아니고서는 만일 마주치는 일이 있다 해도결코 외부인에게 말을 걸지 않는 자들이란다. 물론 그들과 마주친다는 것 자체가 어렵고 마주쳐도 알아보는 것 역시 어렵다. 바로 곁에가만히 서 있어도, 무슨 까닭인지 마치 그림자처럼 거의 눈치챌 수없는 것이 검은 예언자들이라는 말에 나는 왠지 오싹해지는 느낌을받았다. 또한 그들은 모든 필요를 자급자족하고, 모든 문제를 그들스스로 해결하며 세상사에 결코 관여치 않지만, 세상에 일어나는 일치고 또한 그들이 모르는 것도 없다고 했다. 유리카도 죽음의 무녀라고는 했지만, 내가 아스테리온을 잘 몰라선지 이들처럼 괴기스런 자들로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나는 검까지 등뒤에 단단히 메고, 완전하게 무장을 했다. 그들과싸울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왠지 정식 복장을 갖춘모습으로 그들을 만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겐 별다른 복장이랄 것은 없었기 때문에 일단 아무거나 있는대로 갖추고 보았다. "문을 열게, 릴가." 호그돈의 목소리가 들리고 릴가가 내 쪽을 한 번 바라보고는 벌떡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그 날,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또는, 느꼈다. 다른 어떤 색깔도 없는, 오직 검은 빛깔밖에 없는, 새카만 후드 달린 로브를 둘러쓴 약 20여명 가량의 무리가 차례로 들어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 중에 맨 앞에 선 자는 길고 괴상하게 꼬여 있는 주목 로드(rod)를 짚었고, 송아지 만한 검은 사냥개를 데리고 있다. 모두 로브 안쪽으로 작은 램프를 들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덮인 후드 안쪽과 로브 속이 괴상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자는, 맨 뒤에 따라 들어온 장대한 키와 로브안쪽으로도 단단한 어깨를 느낄 수 있는 자였다. 그들은 모두 얼굴도보이지 않았고 복장도 똑같았기 때문에 어떤 구별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처음의 로드를 가진 자와 마지막에 들어온 자만은 다른 자들과 눈에 띄게 구별되어 보였다. 물론 그들 역시 키나 몸집은각양 각색이었다. 마지막에 들어온 거한의 로브 안쪽으로 낡은 칼집의 긴 검이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것이 문득 눈에 띄었다. 알 수 없는 두려운 느낌이 그지없이 온화하고 안락한 곳이던 호그돈의 통나무집 거실에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천장이 높다랗고 장려한 궁륭으로 가득찬 신성한 신전에 서 있는 기분으로 나는 못박힌 채 앞을 바라보았다. "파비안, 이리로 와라. 달타라수, 이 쪽이 파비안 크리스차넨이네. 달타라수는 검은 예언자들의 수장이신 분이다. 살아 생전에 그를 한번 보는 것은 매우 영광스런 일이지." 나는 한 발 나서면서도 온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달타라수라고 불린 검은 사냥개를 데리고 있던 자는 내 쪽으로 한 발짝걸어왔다. 그리고는 후드를 걷지 않은 채, 고개만을 들어 내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아주 어두운 후드 안쪽, 내게는 그 눈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눈을 어디 두어야 할 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가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지막하면서도 강한 힘이서린, 동시에 싸늘한 기운이 가득한 목소리가 내 생각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 세월과 시간의 강을 뛰어넘어 여기, 새로이 전대(前代)의 일을 완성하고자 하는 자여, 그대의 도래를 환영한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간, 아주 짧은 황금의 화살. 내가 지금 듣고 있는 목소리가, 과연 지금 내 앞에 있는 저 사람의목소리인가?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두 장에 걸친 3장, 제2월 '암흑(Darkness)'이 모두 끝났습니다. 다른 아룬드에 비해 좀 짧았습니다. 내일부터 새로운 아룬드라... 내일은 또 6월, 여름의 시작이죠? 사실 얼마 전부터 이미 여름을 방불하게 덥긴 했지만..^^;현실에서도 새로운 달에 들어가는 순간, 글 안 세상에서도 새로운아룬드(달)로 접어드니 어쩐지 기분이 새롭습니다. 일부러 맞추려 한 것도 아닌데, 조금은 실감이 더하네요. ^^*새로운 기분으로 열심히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내일부터는 4장, 제3월 '아르나(Arna)'가 시작됩니다. 아르나 아룬드 첫 장의 제목은 '마브릴의 땅으로'입니다. (와... 짧아서 좋다)거인과 유쾌한 검사가 있는 따뜻한 집을 떠나서, 다시 다른 세상으로 나갑니다. 안락하고 푸근한 느낌을 주는 숲 속의 숨은 집에서, 넓은 대평원으로요. 이런저런 설정들... 마법(등장했었나?)같은 것들의 설정을 어디서참고하느냐고 물으셨는데, 에에.. 제 머릿속에서 나옵니다. 제 머릿속에 무엇무엇이 들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워낙 잡다하니...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308번 제 목:◁세월의돌▷아르나 아룬드의 시작입니다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6/01 23:35 읽음:906 관련자료 없음----------------------------------------------------------------------------- 드디어 4장입니다! 느리게 가는 것 같긴 해도, 이럭저럭 벌써 4장이 되었습니다. 노장로(Elder Sage) 아룬드, 음유시인(Troubard) 아룬드, 암흑(Darkness)아룬드가 모두 끝나고, 오늘부터 봄이 오는 '아르나(Arna) 아룬드'입니다. 아르나 아룬드는 현실의 달력에 대비시켰을 때는 3월 정도에 해당하겠지만, 날씨는 여기의 3월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본래 봄은 언제 왔다 가는지 모르게 흐지부지 왔다 사라지는 계절이잖아요? 그러나 제 글 안에서 봄은 아주 찬란한 계절입니다! 바로 전 아룬드의 끔찍한 일기와 비교해 봤을 때도 그렇고, 아르나아룬드의 약간은 변덕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날씨는 많은 시인들의찬양의 대상이었습니다. 천지에 신선한 풀들과 이슬에 반짝거리는 꽃들이 피어납니다- 녹양방초(綠楊芳草)라는 말 그대로... '아르나'는 달력을 장식하는 14개의 아룬드 가운데 인간의 이름을가진 두 아룬드 중 하나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이미 등장한 일 있는파비안의 생일이 있는 달, 파비안느(Pabianne) 아룬드입니다. 그러나파비안느는 아르나와는 달리 실제 존재했었는지 잘 알 수 없는 전설속의 신(神)적인 여전사이며, 달 앞에 가려진 작은 달의 이름이기도하기 때문에, 상징적 의미가 더 강하고 보통 인간이라고 하기엔 좀무리가 있죠. 하지만 아르나는 파비안느에 비하면 그런대로 가까운역사 속에서 실제 존재했던 인물이고, 농가의 처녀였다고 알려진 보통 사람들에게 아주 친근한 인물입니다. 물론, 그녀는 수많은 음유시인들에게 끝없는 시상을 제공한, 아주용감한 사랑을 했었습니다. 그러니, 아주 평범한 인물은 아닌 모양입니다. ^^;게다가 아주 재치있고, 사랑스러우면서도, 당찬 여성이지요(아르나의 얼굴이 대단히 아름다웠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질 않아서요...^^; 그래도 아주 풋풋한 매력이 있었을 것 같네요). 이번 편에선 제목대로 마브릴의 나라 세르무즈로 갑니다. 말은 잘통합니다만... 풍습이나 민족성(?) 등은 약간 다른 곳이죠. 또, 4장에선 앞서 나왔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과 다시 해후할 것같군요. ^^ (누구일 것 같습니까? 맞추셔도 상품은 없는데..^^;)그럼, 4장 1편 '마브릴의 땅으로' 시작합니다. (오늘 분위기는 완전히 아룬드 소개. 앞으로도 이런 방식으로 나가볼까...?)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309번제 목:◁세월의돌▷ 4-1. 마브릴의 땅으로 (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6/01 23:36 읽음:102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4장. 제3월 '아르나(Arna)'…… 처녀 아르나의 별 '아르나니(Arnani)'가 지배하는 아룬드. 암흑 아룬드가 끝나고 시작되는 부드러운 날씨와 변덕스런 일기를 가진아룬드이다. 고대의 이스나에-드라니아라스인 레오 로아킨과 사랑에 빠졌고, 그로 인해 얻었던 많은 행복과 함께 그에 상응하는 대가 역시 치렀던인간 처녀 아르나의 사랑을 기념하는 아룬드이다. 그녀의 사랑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수많은 시와 노래, 그리고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어서 대륙 어디에 가나 들을 수가 있으나, 다만 그 내용에는 약간씩차이가 있다고 한다. 아르나와 레오 로아킨의 이름은 연인들에게 시련을 줄지는 몰라도 결국은 맺어지게 해준다는, 아주 효험있는 맹세의 집전자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이름을 두고 한 애정의 맹세를 깬 연인에게 배신의 대가를 반드시 가져다주는 걸로도 알려져 있어서 섣불리 거론할 수 없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녀가 어느 나라 사람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설이 많으나,아르나 강과 아르나 시가 이스나미르에 있는 것으로 보아 엘라비다족이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대부분의 마브릴 족들은 이 가설에반대한다. 로존디아 땅에는 이스나미르보다는 훨씬 작지만 다른 아르나 강이 있으며 레오 로아킨과 아르나가 처음 만났다는 작은 언덕이남아 있어서 역시 아르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아르나강물은 시장거리에서 팔리는 근거가 불분명한 '사랑의 묘약'에서도반드시 재료로 쓰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또는 그렇게 선전된다). 또한 이 때는 대륙 각지에서 봄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프랑딜로아(봄 제전)'가 있으며 많은 연인들이 이때에 사랑을 시작하고 또한많은 고통을 받는다. 뭐든 쉽게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고 실제로그렇게 많은 일이 시작된다. 처녀들은 이 때에 매우 아름다워져 결혼도 이때가 가장 잦다고 한다. 그러나 잘못된 사랑의 시작으로 고통이시작되는 경우가 그만큼이나 많은 때이기도 하다. 제1열정기라고 하며 "고귀한 처녀를 따라 미망의 상자속에 갇히다" 라는 경구처럼 무분별하고 어린 열정과 그로 인한 희생을 표현하며또 그러한 희생의 고귀함을 나타내고 있다. 행복한 만큼의 대가, 오래도록 고통받을 사랑의 시작, 아름다움 뒤에 감춰진 악한 의도, 자신이 원하여 상처받음, 순수함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함, 생애를 가르는 기다림 등을 암시한다. 이 아룬드를 상징하는 빛깔은 녹색이다. - 점성술사들이 달력에 적는 각 아룬드의 의미,그 중 세 번째. 1. 마브릴의 땅으로 (1) 처녀는 말했다. "내가 그대를 구해 줄 수가 있어요. 상응하는 대가만 낸다면!" 레오 로아킨은 그녀에게 물었다. "처녀여, 그 대가가 무엇이오? 내가 지금 빠져 있는 곤경에 비추어볼 때 그 대가가 무엇이든 간에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생각이 드오만." 처녀는 다시 말했다. "약속하시겠지요? 고귀하신 이스나에-드라니아라스. 대가는 일단제가 그대를 구해 드린 다음에 받도록 하지요. 흰 햇살이 봄을 비추고 있고 이런 날은 밀린 빨래를 하기가 좋은 때예요. 어머니도, 그누구도 모르게! 그러니 오후가 되기 전에 그대는 동료들에게 돌아갈수가 있을 거예요." 레오 로아킨이 대답했다. "그대를 만난 것이 마치 물의 정령을 만난 것만큼이나 기쁘오!" 처녀가 대꾸했다. "미라티사 정령을 만났더라면, 저보다 훨씬 더 솜씨있게 해냈겠지요! 그대처럼 고귀한 이스나에에게 저처럼 대가도 바라지 않았을 거고요." 그리하여 아르나는 레오 로아킨을 그가 빠져 있던 곤경으로부터 구해 냈다. 이스나에에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뚜렷한 구분이 있다. 아르나는 솜씨있는 처녀였고, 그래서 레오 로아킨이 할 수 없는 일, 즉 그의 진창에 빠진 옷과 신발을 금방 손질하여세탁했으며 그를 자기의 방 안에 숨겨 주었다. 레오 로아킨에겐 갈아입을 마땅한 옷이 없었다. 그래서 아르나가 그의 방으로 돌아왔을때, 매우 애매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흰 햇빛이 숲을 비추는 따뜻한 봄, 할 일을 다 한 농가의 처녀는그에게 약속한 대가를 요구했다. - 트루바드 음유시인 메란 두하스 作<처녀 아르나> 1장 37편 "말 좀 천천히 몰 수 없어? 여기부터는 평야가 아니잖아." "빨리 몰면 빨리 갈 텐데, 뭘." "이제 국경에 가까우니까 사람들이 지나다닐 거야. 눈길을 끌어 보았자 국경을 넘는데 방해가 될 뿐이란 말이야." "우리가 국경을 넘는 것을 우리 나라 사람들이 왜 방해를 한단 말이야?" "당연한 소리지. 나라에서 월급 받는 관리들은 공으로 노는 것이아니란 말이야. 이제 차지야크 영지에 다 왔어. 천천히 가. 보통 여행자들처럼 눈에 띄지 않게." 그래서 나는 그 동안 빈 평야를 신나게 질주해 오던 재미를 포기하고 말을 속보 정도로 걷게 했다. 상쾌한 봄 공기다. 여기까지 오는내내 이틀 정도만 제하고는 내내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았다. 좀 걷다 보니 우리가 가는 길을 가로지르는 작은 시내가 나타났고 유리카와 나는 그것을 기분 좋게 뛰어넘었다. 말발굽에 약간 물이 튀길 정도일 뿐 이 정도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니다. 처음 말을 제대로 타기위해서 노력하던 것을 생각하면 스스로 대견하기까지 하다. 냇물은 이제 비스듬하게 굽어서 우리 옆을 따라오고 있었다. 달릴수록 이제 큼직큼직한 나무들이 들판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온통 파르스름해지기 시작한 들판에는 개양귀비나 노랑 사프란, 금작화등을 심심지 않게 볼 수 있었고 크로커스는 이제 거의 다 졌는지 잘보이지 않았다. 마른풀들 사이에서 사이좋게 피어나는 꽃들을 보니눈이 즐겁다. 하늘은 드맑았고, 지평선 너머로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제 곧 마을일텐데, 남은 음식은 먹어버리고 가는 게 어때?" 유리카가 제안했고, 곧 우리는 근처 냇가의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앞서 마을에서 준비했던 점심 도시락을 펼쳤다. 땅콩버터와 치즈, 다진 쇠고기가 든 샌드위치를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냇물을떠 마셨다. 잠깐 쉬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유리카는 뒤로 벌렁드러누워 버렸다. 약간 멀리 있는 듯이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말했다. "아, 좋다. 좋은 날씨야." 오늘은 아르나 아룬드 25일. 켈라드리안을 떠난 뒤 아르나 강을 따라 걸어서 아르나 시에 들렀다가, 거기서 말을 두 마리 구해서 도보여행에 종지부를 찍고 승마 여행을 떠난 날로부터 벌써 한 달여가 흘렀다. 그 동안 우리가 했던 일은 그저 끝없는 평원을 매일같이 달린 일밖에 없다. 사흘이나 나흘에 한 번 꼴로 마을에 들러 잠깐씩 여관에서쉬고, 다시 인적 하나 발견하기 어려운 벌판을 계속해서 달렸다. 중간 중간에 많은 영지와 도시들이 흩어져 있지만, 이스나미르의최대 곡창 지대이기도 한 이곳 벌판을 총칭하는 이름은 '드라니아라스 대평원' 이라고 따로 있다. 이 이름이 이스나미르 건국의 중요한주인공들이기도 한 이스나에-드라니아라스, 즉 귀족 이스나에를 칭하는 말에서 따왔다는 것을 이야기해 준 것은 역시 유리카였다. 그렇게듣고 보니 류지아와 만났던 헤렐 역시 이스나에-드라니아라스라고 했던 생각도 난다. 그 양반은 귀족이라는 말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말이다. 드라니아라스 대평원을 구분 짓는 지리적 기준은 위로는 이진즈 강상류고, 아래로는 우리 나라 최대의 호수이자(사실 유일의 호수인지도 모르겠다. 지도에 표시된 게 그것밖에 없었던 것 뿐이니까) 지하수 호수인, 아라스탄 호수 변의 아라스타니아 숲이다. 물론 서쪽으로는 세르무즈와의 국경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대륙 최대의 대하(大河)인 이진즈 강은 상류가 끝나고 중류가 시작될 즈음, 이스나미르, 세르무즈, 로존디아 세 나라가 맞닿아 있는 좁은 삼각 모양의 땅을 매우 공교로운 모양으로 아슬아슬하게 가로지른다. 그리고 우리가 목적하고 있는 곳이 바로 거기다. 우리는 그 근처에서 '어떻게' 국경을 넘은 다음, 숲을 지나 이진즈강 본류에 접근해서, 배를 이용해서 이진즈 강을 타고 하라시바 시까지 곧장 가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 부근에서 이진즈 강의 유량이 많아지면서 유속도 빨라지는 것을 생각하면 꽤나 빠르게 세르무즈의 중심지를 가로질러 갈 수 있다는 계산이다. 물론 이 멋진 계획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일이자 가장 큰 문제, 또는 난점이라고 할 만한 점은 바로 '어떻게' 국경을 넘느냐 하는 그문제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날씨를 만끽하며 마치 소풍 나온 것처럼 앉아 있으니 그런 문제도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나도 함께 뒤로 드러누워 버렸다. 코로 흠씬 들어오는 향긋한 봄풀 냄새. "암흑 아룬드에 일어났던 일들이 마치 꿈꾼 것 같아." "아르나 아룬드가 되면 매년 드는 생각이잖아?" 내 옆에 머리를 나란히 하고 누운 유리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싱긋 웃어 보였다. "이제 이 말들도 국경 도시에서 팔아야겠네." "유쾌한 말 여행이 끝나는구나." 유리카는 약간 측은한 듯한 말투로 말하며 우리 옆에서 풀을 뜯고있는 두 마리의 말을 바라보았다. 내 말은 갈색에 흰 반점이 있는 놈으로 이름은 '하비야나크' 였고(유리카는 비웃었지만 나로서는 이 이상 좋은 이름은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검은 색과 흰색이 반반 섞여 있는 다른 말은 유리카가 좀 짓궂은 의도로 '크림초코 파이' 라고불렀다(보통은 크림초코로 불리게 되었다). 둘 다 온순하고 얌전한말들로 비싼 돈 준 값을 하는……, 아니 훌륭한 짐승들이었다. "이제, 끔찍한 말 여행이 끝나는 거야?" 주아니는 우리보다 훨씬 먼저 냇가에 흩어 놓은 샌드위치 주머니옆에서 죽을 것처럼 하고는 누워 있다가 우리가 주고받는 말에 맥없이 반응했다. 유리카와 나는 얼굴을 마주보고는 혀를 차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이텔에 접속하는 보다 쉬운 방법들을 알려주신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에.. 그리고 저번 편, 조금 짧았죠? ^^;Luthien, La Noir『게시판-SF & FANTASY (go SF)』 34310번제 목:◁세월의돌▷ 4-1. 마브릴의 땅으로 (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6/01 23:36 읽음:98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4장. 제3월 '아르나(Arna)'1. 마브릴의 땅으로 (2) 주아니가 '끔찍한 말 여행' 이라고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주아니는 땅의 종족답게 천둥처럼 온 사방으로 흔들리며, 벼락처럼쏜살같이 달려가는 말 위에서 심각한 소화 장애와 구토, 그리고 두통과 무기력증을 호소했다. 한 달이나 그렇게 여행하고 있었으니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질 법도 하련만, 처음만큼 심하지는 않아도 어쨌든 주아니는 말 위에서 가는 것을 아직까지도 끔찍하게 두려워했다. 지금까지 무슨 고생을 해도 괜히 왔단 말은 한 일 없는 주아니가처음으로 고향에 되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한 것도 말을 타고 세 시간쯤 달렸을 때였으니 말 다 했지 뭐. 유리카가 말 이름을 크림초코 파이로 부르는 것도 다 말을 타는 것쯤은 아아주- 시시한 일이다, 라는 것을 선전하려는 듯했는데, 그 안에는 주아니를 놀려 보려는 의도가 꽤나 다분한 것 같았다. "저 앞에 있는 도시 이름이 님블이던가?" "응. 님블, 님블." "이제 끝까지 왔구나. 설마 이 도시 이름은 맞겠지." "뭐, 맞거나 안 맞거나 별로 이젠 신경도 안 써." 이런 말에 대한 대답치고 좀 이상한 유리카의 마지막 말에는 물론다 이유가 있다. 내가 갖고 있는 지도는 지금까지 꼭 반 정도는 맞고반 정도는 틀렸다. 그러니까 다음에 나타날 도시의 이름이 맞을 보장은 정말 딱 반이다. 내기를 걸어도 될 정도였다. 실제로 여기까지 오면서 우리는 가끔 내기를 걸어서 아침에 깨워주기나, 식사하고 자리치우기나 그런 걸 결정하는 데 지도를 가끔 써먹었다. 그야말로 용도가 전혀 엉뚱한 지도였다. …… 용도가 엉뚱한 점에서는 내 검도 만만치 않지. "이제 그만 쉬고 가자. 어차피 가면 여관 침대에서 쉴 텐데, 여기서 오래 지체할 건 없잖아." 여관의 침대는 봄 정취는 별로 없다. 그러나 한 달여나 봄 들판을가로질러 말을 달리면서 정취란 정취는 종류별로 다 맛본 터라 별로미련은 없었다. 오히려 여관 침대에 대한 그리움이 좀더 컸다. "가자." 우리가 목적지를 님블(그런데 과연 님블일까)로 잡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일단 계획상, 이진즈 강과 가까워야 한다. 그런데 이진즈 강은 세르무즈 깊숙이 중심부로 들어가기 때문에 국경을 넘자마자 강과 만나려면 별 수 없이 위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켈라드리안에서 약간아래로 진로를 잡아서 거의 똑바로 드라니아라스 대평원을 가로지른것도 다 이유가 있다. 그런데 이진즈 강이 세르무즈로 막바로 들어가는 위치는 앞서 말한그 삼각형 모양의 지형, 그러니까 로존디아까지 국경을 맞대고 있는그 지역이다. 삼각형 끝 모양의 로존디아 땅이 튀어나오고 그 위로이진즈가 지나간다. 다시 말해 먼저 로존디아로 들어갔다가 다시 세르무즈로 진입해야 한다는 황당한 진로가 나온다. 남의 나라 하나에들어가는 것도 이렇게 골머리가 썩는데, 필요도 없이 두 군데나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니까 이는 일단 제외. 그렇다고 그 바로 아래로 들어가기에는 세 나라의 국경이 마주 닿은 곳이라 경비가 삼엄하고 분위기가 흉흉하다. 그런 데로 접근해봤자 득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바로 세 나라의 관문 도시인 차지야크 영지의 중심 도시 자이로크도 제외. 그래서 우리가 찍은 것이 좀 허름하고 별로 사람도 오가지 않는 님블이었다. "난 도시 이름이 그대로 '님블' 이라는 데 걸겠어. 내기거리는 말들을 누가 나가서 팔아오느냐. 어때?" "그래, 난 님블이 아니라는 데 건다. 네가 지면 난 말 파는 데는아예 손뗀다. 제값 못 받으면 알아서 해." "누가 할 소리. 너야말로 산 값 만큼 못 받으면 알아서 해라." 대륙 최고의 점원을 뭘로 보는 거야(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도 좀허풍이 세져 있었다)? 죽죽 뻗은 참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곧이어 그 주변에 갈색 지붕의 집들이 선 것이 보였다. 풍경이 눈에 익으려는 순간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이제 그 주변에서 일하고 있는 나무꾼 몇 명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시 외곽의 나무꾼 집들인 모양이다. 말을 타고 있으니 처음 눈에어렴풋하게 들어오는 대상을 상상하기 시작하는 것과 더불어, 거의다음 순간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점이 있다. "안녕하세요- 저기 보이는 도시 이름이 뭐죠?" 마침 나무를 옮기던 사람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들더니 '님블'이라는 짧은 말로 내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 가 아니라 오후의 귀찮음을 안겨 주었다. 님블은 마을보다 조금 큰 수준의 도시, 그러니까 간신히 도시라고불러줄 정도의 크기였다. 거리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고, 굳이괜찮은 여관이 어디냐고 물을 필요도 없어 보였다. 우리는 천천히 대로를 걷다가 '은빛 갑옷' 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관을 발견했다. 은빛갑옷이라니, 왠지 모르게 굉장히 잘 지켜줄 것 같은 느낌인걸(게다가아버지가 떠오르기도 하고). "그럼, 일단 들어가서 방 잡은 다음에 좀 씻고, 그리고 가서 말 팔아 오시죠." 유리카는 내기에 이긴 뒤부터 내내 생글생글이다. 저렇게나 이기는것이 좋을까. 이 지도, 온갖 점으로 우리를 놀랍게 하는군. 분명, 분명, 지도에는 없었단 말이닷! 왜 저기 난데없는 산이 솟아있는 거야앗! 물론 우리가 산을 넘어갈 건 아니고 저 쪽에 엄연히 길이 나 있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하잖아! 저만한 산을 빼먹다닛! …… 이렇게 외쳐 봤자 지도 값 환불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부터 산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지도를 놓고 톡톡히 손해 보상을 받아야 된다는 둥, 이런 거 판 놈은 완전히 사기꾼(반은 맞았으니반만 사기꾼인가?)이라는 둥 맹렬히 투덜대고 있는 동안, 어둠 속에서 유리카가 내 어깨를 슬쩍 밀면서 한쪽을 손가락질했다. "저기 봐, 저기 저기." 내 눈이 유리카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내민 손가락을 따라가고,그 끝에서 불이 환하게 밝혀진 세르무즈의 관문 초소를 발견하는 순간 이번엔 주아니가 주머니 속에서 내 옆구리를 쿡 찌른다. "파비안, 저기도 봐." "……." 결국 우리는 아까 봤던 길, 국경을 넘는 쪽으로 이어지는 길게 난대로변에서 무려 네 개나 되는 초소를 발견하고 말았다. 저게 다가아닐지도 몰라. 어디 몇 개 더 숨어있을 수도 있어. 그건 그렇고, 쟤네 들은 뭐가 저렇게 의심할 게 많아서 초소가 무지막지하게 몰려 있는 거야? 마브릴이라는 놈들, 의심만 많아가지구선. 마브릴을 욕해봤자 지금은 득될 것이 전혀 없었다. 대로를 편안하게 지나갈 수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양국 주재 대사가 발행해 준 통행 허가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잘도 초소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일단 길을 따라서 갈 데까지 가보자 싶어 여기까지 온 우리는 상당히낭패한 심정으로 우리를 앞질러 간 상인들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어쩐다? 저런 곳을 뚫고 간다는 건 불가능해."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실이다. 말을 팔고 이익을 남겼네 아니네,쓸데없는 실랑이를 해가며 저녁을 먹은 다음, 우리는 여관 주인에게새벽에 깨워 달라고 부탁하고는 잠깐 눈을 붙였다. 지금은 새벽 4시. 지나가는 사람이 별로 없을 텐데도 세르무즈 쪽 국경 초소들에는 모조리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우리처럼 슬쩍 넘어가려는 사람이 꽤 많나봐." 정말 그런 모양으로 초소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약 다섯 명 이상씩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또 다른 군인들이 어디에서 순찰을 돌고있을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중대한 결정을 내릴 시기가 왔다. "유리카." 밤중에도 고양이처럼 반짝거리는 유리카의 녹색 눈이 나를 향한다. 이런 밤에 보면 가끔 무서울 때도 있다. "너, 산 잘 타니?" 잠깐 기다린 다음 유리카의 언제나처럼 자신만만한 대답. "이래봬도 달크로이츠 산맥 아래 크로이츠 영지 출신이야." +=+=+=+=+=+=+=+=+=+=+=+=+=+=+=+=+=+=+=+=+=+=+=+=+=+=+=+=+=+=+=추천해주신 분, 고마워요. ^^(오랜만이네요...^^;;)오늘 날씨 희한했죠? 비가 올 듯 말 듯... 아... 방금 너무 방이 후덥지근한 것 같아서 창문을 열었더니비가 오네요... 쏴아...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387번제 목:◁세월의돌▷ 4-1. 마브릴의 땅으로 (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6/02 22:47 읽음:87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4장. 제3월 '아르나(Arna)'1. 마브릴의 땅으로 (3) 아마도 크로이츠 영지 주변에 있다는 산들은 설산은 아닌 모양이다. 아니면 일년 중 한 달만 눈이 온다거나, 아니면 있는 거라곤 바위밖에 없는 산이라 절대 올라갈 일이 없다거나. 처음의 자신만만한 대답과는 달리 아직 눈이 쌓여있는 지역까지 올라오자 유리카는 한 발짝 한 발짝이 조심스러웠다. 물론, 유리카가조심스레 내디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보기에 불안하다보니 그래 보였다는 말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으앗! 파비안!" "내 손잡아!" 아니면……. "유리카, 거기 앞에 밟지마. 미끄러울 거야." "하앗-, 미끄러져!" "……." 주머니 속에서 길을 가는 주아니가 부럽다고 유리카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주아니는 유리카가 미끄러지거나 넘어질 때마다 자기가 말 위에서 오면서 고생한 것에 대해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실컷 웃어댔기 때문이다. 내 생각인데, 아무래도 이번 일들로 둘 사이에는 쉽게 풀 수 없는 원한이 남을 것 같다. 산은 꽤 높았다. 꼭대기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었지만, 최소한 초소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올라갔다가 내려갈 필요는 있었다. 지도도없이 무작정 올라온 참이라 - 지도에는 아예 없는 산이란 말이다! 마치 유리카 두 번째 만났을 때의 이름없는 들판 생각이 나는군. 그 식으로 하자면 우린 지금 없는 산을 올라가고 있는 건가 …… - 이 산의 반대편 기슭이 가능한 한 세르무즈 안쪽으로 깊게 뻗어들어가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유리, 눈 덮인 산에서는 그렇게 막 발을 내딛지 말라고. 그리고몸을 앞으로 좀 숙여. 네가 가볍긴 해도, 미끄러지지 않는 건 아니란말야. 그건 몸으로 이미 체험했을 텐데?" "체험하다 못해 온 몸이 산 증거야." 유리카가 한 삐딱한 대답은 아마도 여기저기 멍이 든 데가 많다는의미인 것 같았다. "업어라도 줄까?" "시끄러. 네 배낭이나 신경써." 물론 저렇게 대답할 줄 알았기 때문에 한 제안이었다. 어쨌든 유리카는 영 기분이 별로인 것 같다. 지금까지 오면서 그녀가 뭔가 잘 못하는 건 별로 본 일이 없는 나한테까지 그럭저럭 구경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꼭두새벽에 단잠에서 깨어나눈 덮인 산을 올라 보라! 얼마나 자신이 불행하게 느껴지는지 실험해보고 싶다면 말이다. 다행히도 약 1시간 정도 올라갔을 때 좀 평평한 지형이 나왔다. 이 산이 얼마나 높은지는 몰라도 그 '엉터리 지도' 가 빼먹을 정도의 높이라면 정말 좋겠다. 그래, 그 지도는 고귀한 신분이라 시시한산 정도는 안중에도 없을 거야. 우리가 그런 지도를 들고 어디 이런데까지 올 줄 알았겠느냐고. 별로 필요없어 보이는 부분이라 대충 썼을 거야. 어쩌면 이 산은 주로 밀입국자들의 비밀 루트로 이용되는곳이라 고의적으로 빠뜨렸을 수도 있어. …… 이젠 이 지도의 심정까지 점점 이해하게 되는 걸 보니 무생물과 교감하는 능력이라도 생기는 중인 건가? "파비안, 좀 쉬었다가 가자." "올라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아직 해도 제대로 안 떴잖아." "그런 일반적인 기준의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나한테는 여길올라오면서 보낸 1시간이 드라니아라스 대평원을 달린 시간에 맞먹는단 말이야." 주아니가 고개를 뾰족하게 내밀고는 생글거렸다. "나로선 아침에 일어나 눈 비빌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인걸?" "오오, 둘 다 장난이 아닌 시간 개념이군." 나는 좀 과장스럽게 놀라 준 다음 유리카를 위해 잠깐 구릉에서 쉬기로 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피해서 산등성이 아래로 다가갔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 가운데 - 여기에서 '우리' 에 주아니를 넣는다는 건 처음부터 좀 어폐가 있지만 - 처음부터 말을 제대로 탈 줄 알았던 건 유리카밖에 없었다. 나는 아예 못 탈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잠깐잠깐 동네 근처 어디 왔다갔다할 정도였지, 가로지르는 데한 달이나 걸리는 이런 대평원을 말을 타고 여행할 작정으로 배운 일은 없다(결국 지금 배운 셈이 되었다). 그러니까 유리카한텐 그 시간은 꽤나 쾌적하고 빨리 흘러간 시간이었겠지. 근데, 왜 눈 덮인 산간 마을에서 자란 내가 이 설산이 별로 반갑지않은 거지? 그새 애향심이 죽었나?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그 이유는 곧 확인되었다. "인기척이야." 넋놓고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던 유리카는 재빨리 깔고 앉았던 배낭을 집어들면서 고양이처럼 도사렸다. 어떻게 저렇게 빨리 알아챘나했더니 주아니가 지금 유리카 주머니에 가 있다. 아마도 아까의 원한관계에 대한 빚 정산을 위해 간 것 같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용도로소용이 닿았다. "이쪽으로." 나는 유리카를 손짓해서 능선 위쪽으로 올라갔다. 바위들이 튀어나와 있고 수풀이 우거져 있어서 몸을 숨기기에 적당해 보이는 지형이었다. 옆에는 암벽이 길게 앞으로 튀어나오면서 솟아 있다. "뭘까?" 물론 우리처럼 몰래 산길을 통해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일 수도있다. 그렇다면 무척이나 반갑겠지. 어디에나 뒷구멍이나 샛길은 있기 마련이고, 그런 걸 우리가 발견한 거라면 지도의 불성실도 모조리용서할 만큼 고마운 노릇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럴 때는 가장 나쁜 경우를 우선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하는 것이 순리에 맞았다. "좀더 엎드려." 나는 눈에 몸을 대기 싫어하는 유리카를 좀더 아래로 누른 다음에관목 수풀 사이로 밖을 엿보았다. 눈을 헤치는 발자국 소리가 좀더분명하게 들리고 뭔가 말하는 소리도 들렸다. 대강 발자국 소리로 예상해 보건대 약 열 다섯 명 정도인 것 같다. 그리고 쩔그럭대는 저소리는 아마 갑옷이나 그 밖의 것들이 부딪치는 소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병사들이야." "그렇다면 순찰병들이겠네?" "십중팔구 그렇다고 봐야지." 옆에서 조그맣게 유리카가 이런 데까지 와서 순찰대원하고 마주치다니 참 운이 없네 어쩌고 하면서 불만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렸지만솔직히 나도 똑같은 심정이다. 이럴 때면 정말 마브릴들의 철저하고진지한 근성이 새삼 싫어진다니까. 아르마티스 족이나 네이판키아 족들이 세운 나라에 들어가는 중이라면 오죽이나 좋아. 널럴한 종족들은 죄다 나라도 못 세우고 그 꼴이람. 참, 널럴하니 못 세우는게 당연한가? 투덜거리는 것을 그만두고 이 위치에서 뭐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검을 조용히 뽑았다. "유리, 눈 위에서 잘 움직일 자신이 없으면 나오지 마." 우리가 올라오던 길의 반대쪽에서 머리 하나가 불쑥 솟았다. 투구대신 털모자를 쓰고 있다. 혹시 보통 사냥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음 순간 왼손에 든 방패가 보이는 바람에 나는 그 생각을 그대로 삼켜 버렸다. 눈 덮인 산 위에 올라오면서 방패 따윌 들고 다니다니 바보 같다고속으로 웃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조금이라도 유리한 상황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고개를 돌린 틈을 타서 능선 아래쪽을 흘끔 내다보니상당히 완만하고 부드러운 굴곡의 경사에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곱게 쌓인 것이 보였다. 그걸 보니 뭔가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위험해, 위험해." 내가 혼자 중얼대며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유리카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가,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군인들은 계속해서 위로 올라왔다. 내 생각대로 열다섯 명이었다. "저거…… 저들이 신고 있는 게 뭐야?" 유리카가 주아니가 귀에 달라붙었을 때 정도의 목소리로 조그맣게속삭였다. 저거? 갑자기 고향 생각 나게 하는 물건들이 떼거지로 눈앞에 있잖아? 눈신이었다. 내가 그들의 발자국 소리만으로 숫자를 정확하게 계산했던 이유를깨닫고 있는 중인데(저들이나 나나 열 다섯, 스물 하는 식의 딱 떨어지는 숫자를 좋아했던 탓도 있지만), 그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산등성이 위는 눈이 얼어 있고, 또 비탈쪽은 그나마 벗겨져있어서 발자국은 별로 남지 않았지만 처음에 우리가 있던 그 아래쪽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뭔가 흔적을 찾으려는 듯 몇은 그대로 남아 있고(아마도 한 계급이라도 높은 놈들이리라), 나머지는 주위로흩어졌다. 왠지 아까 떠오른 생각을 다시 고려해보고 싶어지는데. 그리고, 그 중의 하나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하나라면 어떻게 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나머지 열 넷이 그다지 멀리 있질 않다. 즉시 도망친다고 해도 눈 위에서는 빨리 걷지 못하는 유리카가 걸린다. 짐도 있다. 상황은 내 판단을 한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가능할까? 가능할까?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다. "유리, 내 배낭에서 밧줄을 꺼내 놓고, 그리고 네 배낭을 앞쪽으로돌려 메고 있어. 주아니는 안전한 데로 들어가 있도록 해 줘." "밧줄은 무엇하…… 알았어." 유리카는 물으려다 말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가 내려놓은 배낭을열어 뒤졌다. 나는 그 사이에 아까 뽑았던 검은 다시 뒤로 꽂고 짧은대거를 꺼내어 든 뒤, 그들과 우리 사이에 우뚝 솟은 암벽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눈신을 신으면 눈 위를 걸을 때 좋긴 한데, 그다지 빨리 움직일 수는 없다. 눈신을 신고 뛰는 모습은 솔직히 뛴다는 말이 아까울 정도니까. 그러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다른 자들이 알고, 이쪽으로 다가오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릴 테고, 계산해보건데 그 정도면 내 계획을 이행하기엔 아슬아슬하게 딱 맞을 것 같다(내 밧줄 묶는 솜씨를 고려에 넣었을 때). 나는 암벽에 등을 대고 붙어 섰다. "……." 바스락대며 다가오는 소리. 나는 숨을 힘껏 들이쉬었다. 그리고 대거를 움켜쥐었다. "흡……." +=+=+=+=+=+=+=+=+=+=+=+=+=+=+=+=+=+=+=+=+=+=+=+=+=+=+=+=+=+=+=그림을 잘 그린다면, '세월의 돌' 안에 나오는 사람이나 풍경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켈라드리안을 그려 보고 싶고... 하비야나크 마을도 그려 보고 싶어요. 유리카의 옷은 표현한 대로 그렸을 때 과연 괜찮을까(처음 나타날 때 꽤 신경써서 생각했었습니다..^^;), 릴가 하이로크의 익살스런 얼굴은 과연 어떨까, 등등. 녹색 머리카락의 거인은 또 어떻게 보일까요? 디자이너인 언니한테(언니도 세월의 돌을 읽거든요) 그림을 좀 그려 보랬는데, 오늘 수채화로 약간 풍경을 그려 놨더군요. 바위와 나무들...그런데, 정말 예쁩니다..^^*계속 그리라고 졸라야겠어요. ^^아마, 사람이 여러 가지 재능을 다 갖기란 힘든가 봅니다...^^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388번제 목:◁세월의돌▷ 4-1. 마브릴의 땅으로 (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6/02 22:47 읽음:85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4장. 제3월 '아르나(Arna)'1. 마브릴의 땅으로 (4) "……." 짧은 순간에 끝났다. 내 앞을 지나가려는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채암벽 안쪽으로 힘껏 당기면서 다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먼저 손으로 대거를 뽑아 목젖에 들이댔다. …… 그러면서 나는 고향을 떠난 지 이제 두 달 정도일 뿐인, 나자신을 매우 대견해하고 있었다. "입 다물어. 안 그러면 해칠 것 같으니까." 내 스스로 생각해도 오묘한 주문을 해 놓고서 나는 녀석을 질질 끌다시피 능선 위로 올라갔다. 암벽이 교묘하게 우리를 잘 가려 주었다. 나는 내 계획을 떠올리고 다시 한 가지 주문을 첨가했다. "들고 있는 것들, 하나도 떨어뜨리지 마." 나한테 정작 필요한 걸 버리고 오면 큰일이지. 유리카가 밧줄을 꺼내 놓았길래 그걸로 서둘러 녀석의 손을 돌려묶었다. 그리고 대강대강 주위에서 풀을 뽑아 뭉쳐서 입 안에 틀어박은 다음 밧줄로 다시 동여맸다. 유리카가 남은 밧줄을 다시 배낭에집어넣으려 하길래 나는 손으로…… 하려다가 손이 너무 바빠 입으로제지했다. "또 쓸 거야. 그냥 둬." 녀석을 다 묶고 나자, 바닥에는 바닥이 둥근 방패 하나만 덩그러니놓여 있게 되었다. 좀 불안해 보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 처음계획이 저걸 보면서 시작된 거나 다름없으니까. 나는 밧줄을 들어 내 발에 방패를 단단히 동여매기 시작했다. "뭐하려는 거야?" 유리카가 눈이 동그래져서 묻는다. 나는 일단 설명은 생략하고 작업을 재빠르게 마쳤다. 배낭을 짊어지고는 유리카를 불렀다.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한 작업이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심각하고 진지한 빛을 눈에 담아 유리카를 똑바로 봤다. "유리카, 지금 저 친구를 묶어 놓은 일이 임시방편이란 건 알겠지?" "응." "나머지 열 네 명을 이길 순 없으니, 여기서 도망쳐야 되겠지?" "물론이야." "그런데 들키지 않고 갈 길이 없지?" "그런…… 것도 같네." "내게 방법이 있다면, 따를 거지?" "응?" 유리카가 갑작스런 말에 갈피를 못 잡으며 뭔가 질문하려고 입술을벌린 순간, 나는 유리카의 허리를 덥석 잡았다. "뭐, 뭐하는 거야!" 제발 발버둥쳐서 내 얼굴을 걷어 차지만은 말란 말야. 그리고 목소리도 괜히 크게 높여서 다른 친구들을 부르지는 말아 줘. "제발 참아 줘. 이 일에 대한 보복이라면 내려가서 원하는 대로 실컷 받아줄 테니까." 나는 두 손으로 유리카를 훌쩍 눕혀서 받쳐 안았다. 두 팔이 그녀의 등과, 무릎 아래에 가게 단단히 잡고는 아직도 눈이 동그란 그녀를 보면서 엄숙하게 한 마디를 남겼다. "움직이지 마, 목뼈 부러질지도 모르니까." 촤르…… 촤좌좌좍! "와앗!" 유리카는 급기야는 비명을 질러버리고 말았다. 뭐, 괜찮다. 이제는 녀석들이 따라와봤자 별 수 없을 거다(실제로따라오는지 어떤지 확인할 정신 따윈 이미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나더러 선택하라면, 마브릴 군대 100명이 뒤에서 쫓아오는 것을 막아 달라는 것보다, 내려가는 능선에 튀어나온 돌멩이한 개가 없기를 바라겠다. 이 상황에서 하나만 행운이 주어진다면 분명, 나는 넘어지거나 날아가거나 부러지거나 하지 않고 무사히 여길내려가는 행운 쪽을 선택할거다. 내려간 다음에야, 어떻게든 도망가겠지. 츄우우- 촤아아- 츄촤아- 촤라라-지금 나는 유리카를 양팔로 안은 채, 발에 묶은 방패를 스노우보드삼아 산등성이를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오래간만에 타는 것이라 시작은 약간 불안정했지만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그렇지만 잠깐 균형을 잃었다 하면, 둘 다 거짓말 안 보태고다리 하나씩은 부러지고 남을 판이다. 등뒤의 검과 배낭, 그리고 앞에 안고 있는 유리카 사이에는 무게차이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잘못 한쪽으로 쏠렸다 하면 그대로 여기에서 열네바퀴쯤 구르고, 다음엔 죽지 않을 만큼 유리카한테 두들겨맞겠지(그 때 유리카가 제발 나를 때릴 힘이 있는 상태이기만을 바랄뿐이다). 내려가는 속도가 나한테도 끔찍할 정도였다. 내려갈수록 경사가 위에서 보기보다 훨씬 심했다. 귓가에 바람 닿는 소리가 마치 성벽 꼭대기 깃발이 돌풍에 펄럭이는 소리에 비견할 만했다. 이렇게 바람이 센 데도 얼마나 긴장해 있는지 이마에서는 땀이 쉴새없이 솟아 흘렀다. 눈을 아플 만큼 힘주어뜨고 앞을 살폈다. 이 계획에서 내가 고려한 것은 세 가지다. 첫째, 나의 재빠른 밧줄매듭 솜씨. 둘째, 둥글고 평평한 방패 바닥. 셋째, 유리카의 가벼운몸무게. 그러나 나는 엉뚱한 곳으로부터의 정신 공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런 위험한 생각을 해냈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 할 거 아냐!" 나는 중심을 잡고 앞의 장애물을 보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간신히 대답했다. 그러나 질문 내용과는 한참 동떨어진 대답이다. 다시말해 대답은 했지만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 나는 외쳤다. "뭐, 뭐라고! 잘 안 들려!" "말도 안하고 이런 일 벌이냐아아-!" 유리카가 한층 옥타브를 올려서 악을 쓰는 바람에 간신히 이번엔알아들었다. "말했으면 어쩔 거였는데?!" 내 목소리도 유리카에 못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안하고서는 지금상황에서 대화란 불가능했다. 게다가 두 가지에 정신을 쓰자니 금방자세가 불안정해졌다. "몰라서 묻니? 마브릴들을 불러서라도 말렸을 거다!" "……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고맙군 그래!" 배낭 주머니에서 머리를 내민 주아니가 환호성인지 비명인지 모를소리를 지른다. "우와와와아아아앗!" 스노우보드, 아니 방패는 잘도 미끄러져 내려갔다. 옆으로 능선과나무들이 쉭쉭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대답하느라(정확히는 질문 알아듣느라) 머리를 쓰지 않으니까 다시 그럭저럭 균형이 잡혀서 바닥에 닿는 촉감이 괜찮다. 이 정도면 괜찮다. 끝까지 잘 내려갈지도 모른다. 이 정도 스릴 넘치는 활강은 고향에서도 해 본 일이 없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버렸다. "이얏호!" 당장에 주변에서 반격들이 있었다. "앞에 잘 봐!" "이게 누굴 죽이려고! 넌 신나는지 몰라도 난 죽을 맛이야!" 나는 신난 김에 대답도 막 했다. "야, 앞은 잘 보고 있으니까, 나도 신나는 장면에서는 좀 기분 좀내자!" "그러다가 저기 갖다 처박으면 네가 책임질래!" 한 시간동안 올라왔던 거리를 1, 2분만에 거의 다 내려왔다. 몇 번쯤 아슬아슬하게 나무 등에 부딪칠 것을 피했는데, 그 때마다 두 동료들의 귀청 떨어질 듯한 비명으로 '정말로' 부딪쳐 버릴 위기를 간신히 넘겨야만 했다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나중에는 나까지 커다랗게외칠 수밖에 없었다. "너무 크게 말하지 말아-! 저 아래에서 이상하게들 쳐다본단 말이야앗-!" "너야말로 너무 소리지르지 마." "파비안 네 목소리가 제일 커." ……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소외되어 있었지. 계속 내리막이던 길이 저만치 앞에서부터 언덕처럼 불쑥 솟은 것이보인다. 저쯤에서 멈춰야겠다. 계속 내려가다가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겠으니까 기회 있을 때 멈춰야지. 이만하면 충분히 도망친 셈이기도 하고, 또 속도도 너무 빨라 은근히 겁도 난단 말이야. "멈출 거니까, 조심해!" 여전히 말들이 많았다. "이미 아까부터 더 할 조심이 없을 정도야!" "내 평생 이렇게 조심해본 적이 없으니 너나 조심해!" "너의 조심이 곧 우리의 안전이다!" "이런 이상한 판쪼가리에다가 내 목숨을 맡겨야 하다닛!" 맨 마지막 말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던 말인데. 산기슭이 가까워지자 튀어나온 바위들이 많아서 거의 곡예를 해야했다. 유리카를 안고 있으니 과거의 멋진(?) 방법으로는 멈출 수 없고, 주의 깊게 발을 꺾긴 했는데 간신히 앞으로 넘어지는 것을 면한정도였다. 촤자자자악! "으아악!" 유리카의 비명 소리를 배경으로 나는 간신히 방패를 멈출 수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하나밖에 없다. "파비……." +=+=+=+=+=+=+=+=+=+=+=+=+=+=+=+=+=+=+=+=+=+=+=+=+=+=+=+=+=+=+=구상을 위해서 종종 여행 사진집 같은 것을 본 일이 있어요. 프랑스나 독일의 시골 풍경, 북구의 항구들, 히스 들판... 그러면서 직접가봤다면 더 좋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북잉글랜드와 아이슬란드, 그리고 칠레는 정말 가보고 싶습니다! (안토니아 수잔 바이어트가 쓴 '소유'라는 소설을 읽어보면 누구라도 북잉글랜드에 가보고 싶어집니다..마찬가지로 파블로 네루다의'추억'이라는 자서전을 읽으면 칠레에 가보고 싶어 못견딥니다. ^^;)세계 구석구석, 숨겨진 곳들을 보면서 느긋하게 여행할 수 있다면참 좋을 것 같아요. 언니 친구 중에 한 언니는 능력있는 카피라이터인데, 한 1년 일해 돈 벌더니 말레이시아로 가서 일자리 구해서 1년쯤 살며 말레이시아어도 배우고, 또 돌아와서 다른데 취직해서 돈을벌더니, 호주로 날아가서 또 1년쯤 살다가 돌아왔다더군요. 지금은또다시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다...^^;;국민학생때 김찬삼이라는 사람이 쓴 세계여행기(우리 나라 70세 국민교양을 책임진 삼중당문고! 물론 세로줄...--;)를 읽었을 때부터,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져 왔던 꿈인 것 같습니다. 몇 년이고, 그렇게돌아 다니는 세계 여행요. 하하, 전 아직 제주도도 못가봤습니다-그리고, 이렇게 머릿속으로 환상의 세계를 헤매입니다.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475번제 목:◁세월의돌▷ 4-1. 마브릴의 땅으로 (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6/03 21:59 읽음:698 E[7m관련자료 있음(TL)E[0m----------------------------------------------------------------------------- +=+=+=+=+=+=+=+=+=+=+=+=+=+=+=+=세월의 돌(Stone of Days)=+=+=+=+=+=+=+=+=+=+=+=+=+=+=+=+ 4장. 제3월 '아르나(Arna)'1. 마브릴의 땅으로 (5) 유리카가 뭔가 더 말하기 전에, 나는 멈추자마자 유리카를 내려놓고는, 잽싸게 뒤로 물러나려다가 그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발에 방패를 묶어 놓은 채로 뒷걸음질을 치려고 했으니 당연한일이라 할 수 있다. 이미 경사가 꽤 완만해져 있어서 넘어졌더라도 둘 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겠다 싶었지만, 대신 그런 일 저지른 나는 살아남기 힘들었겠다는 상상을 하는 가운데, 유리카의 살벌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파비안!" "야, 잘 내려왔잖아. 아무 일 없었잖아? 그러면 된 거 아냐?" "이 일에 대한 보복은 내려가서 받겠다고 한 게 누구야?" "이, 일단 이건 좀 풀고, 그리고……." 나는 황급히 손을 놀려 밧줄을 풀어냈다. 그리고 방패를 발에서 떼어내자마자 뒤로 재빨리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퍼…… 캉! 간신히 잘 피했다 싶었는데 유리카가 숫제 양손으로 방패를 덥석집어들더니 간단하게 한 대 갈겨 버렸다. 저걸 제대로 맞았으면 지금쯤 황천길을 헤매고 있겠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반쯤 죽어 가는 시늉을 함으로써, 연이어 날아오는 방패 공격가운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만, 이랬담 봐." 그 정도로 끝난 것도 다행이었다. 방패를 저만치 덤불 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런 다음 얼얼해진 귓불을 만지면서 조심스럽게 언덕을 넘었다. 그 아래 산기슭이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아래에는 산을 감싸도는 큰 길이 잘 닦아져 있었다. 산 위에서 우리를 쫓아오는 기색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산기슭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우리가 내려온 기슭 아래 길이 상당한 크기의 대로인데도, 아직 지나가는행인이 없다. 불만이냐고? 무슨, 다행이지. 우리는 일단 몸에서 눈을 깨끗이 털어 내고, 머리카락을 단정하게만진 다음(바람에 머리가 얽혀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재빨리 최대한 멀쩡한 여행자로 변해서 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얼떨결에 넘어버린 산을 위로 다시 한 번 올려다보니, 눈덮인 꼭대기는 꽤나 높이 솟아 있는 모양이다. 위쪽에 구름이 서려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이런 산을 빠뜨린단 건 말이 안 되는 거였어. 우리는 걸어가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했다. 일단 위에서 본 마브릴 병사들이 우리의 방법을 따라하려고 한다면…… 음, 아마 아무도 못 내려오겠지(마브릴 병사 15명, 눈벼랑을 굴러 전멸하다!). 그렇지 않고 그저 걷든지 뛰든지 해서 내려온대도 한 두 시간은 걸릴것이 분명해 보여서 일단 다음 마을까지 가면 쫓길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거기까지 가면 의심받을 필요야 없겠지. 어디이 나라라고 돌아다니는 여행자가 한 명도 없지는 않을 거 아냐. 일단 가능한 한 번화한 도시를 찾아 요기를 하고, 이진즈 강이 있는 쪽을 알아내어서 강둑에서 적당한 배를 잡아타는 것이 급선무다. 그것만 잘 되면 기분 좋게 강을 타고 세르무즈 깊숙이 들어갈 테니,그때부터는 안심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우리 손에 있는 골동품 엉터리 지도조차도 소용 없는상황이 되어버린 터라, 어디로 가야 좋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길을 따라가고는 있지만, 이리로 가면 뭐가 나오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붙잡고 물어? "안녕하세요, 마디크. 어제처럼 훌륭한 아침-.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어디 있나요?" 내가 어떻게 할까 결정을 아직 내리지도 못했는데, 유리카가 벌써저 앞에 나타난 농부 차림의 남자 하나를 붙잡고 생긋 웃으며 묻는바람에 나는 몹시 당황했다. 게다가 마디크? 저 사람 이름을 어떻게알고 있는 거야? "아아, 여행하는 프로첸인가? 마을이라면 이 길을 따라 두 시간만가면 아르장띠외 마을이 나와. 좀더 큰 아세이유 시는 점심때까지 걸어야 하지." "감사합니다, 마디크. 가까운 마을에서 쉬었다 가야겠네요. 도시가좋긴 하지만 점심때라니 너무 멀어요." "좋을 대로 하게. 그럼 어제처럼 좋은 여행을." "네, 마디크도요." 나는 영문을 몰라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다. 프로첸은 또 뭐야? 저사람은 왜 유리카의 이름을 멋대로 지어 부르고 있지? 그 사람이 다시 사라지자 나는 걷기 시작한 유리카를 따라가서 조그맣게 물었다(아직 멀리 가지 않은 '마디크' 에게 혹시 들릴까봐서다). "너 저 사람 이름 어떻게 알아? 아는 사람이야?" "이름? 모르는데?" 유리카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웬 발뺌이지? "아까 불렀잖아?" "내가 언제?" 나는 걸음을 빨리 해서 유리카 옆으로 다가갔다. "아까, 마디크라고 그랬잖아!" "아, 마디크?" 뭐야, 저 표정은. 유리카는 아주 우스운 것을 보았다는 듯이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음, 저런 표정은……. "푸하하하하하하……." 급기야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군. 유리카는 키득키득 웃더니 내게 설명했다. "'마디크' 는 세르무즈에서 말하자면 '아저씨' 같은 뜻이야. 그냥결혼한 나이의 남자에게 붙이는 호칭 같은 거라고. 약간은 경칭의 의미도 있고." "그래? 그럼 프로첸도?" "그건 '아가씨' 정도 되는 뜻이야. 결혼 안한 여자한테 붙이는 경칭이지." 유리카의 설명으로 나는 젊은 남자에게는 마디렌, 결혼한 여자에게는 '프론느' 라고 경칭을 붙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두 나라 모두 똑같이 공용어를 쓰는데 저런 희한찬란한 명칭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다. 좀더 설명을 들어 보니 예의를 갖춘 자리 같은 곳에서서로의 성에 붙여서 부르는 수도 있단다. 이를테면 '친애하는 마디렌크리스차넨', 또는 '소금 좀 주실래요, 프로첸 오베르뉴?' 같은 식이라는 거다. "그거, 헷갈리면 좋을 거 없겠네?" "그럼. 멀쩡한 마브릴들 사이에서 난 '엘라비다' 족이요- 하고 선전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이건 로존디아 사람들도 똑같이쓰는 명칭이야. 차크라타난에 가면 어떻게들 하는지 모르겠지만, 마브릴들은 누구나 써." 그래서 나는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것이 한꺼번에 네 개나 늘었다. 마디크, 마디렌, 프론느, 프로첸이란 말이지. "그런데 '어제처럼 훌륭한 아침' 이란 건 무슨 소리야?" "그거? 그냥 인사법이야." 나는 어이가 없었다. "어제가 혹시 끔찍한 태풍 부는 날씨였다거나, 아니면 그 사람한테아주 재수 없는 일이 있었던 날일 수도 있는데, 그럼 어떻게 인사를해?" 유리카가 피식 웃는다. "그건 상관없어. 거기서 '어제'란 건, '어제, 오늘, 내일' 하는 그'어제' 가 아니고 아주 옛날, 그러니까 까마득히 먼 과거 시대를 말하는 거거든? 아침인사 뿐 아니고 '어제처럼' 이라는 것은 아주 흔히쓰이는 인사법이야." 거참 희한하다. "도대체 왜 그렇게 말하는 거래?" "전사 부족에서 출발한 마브릴들은 지나간 고대 시대가 항상 지금보다 훌륭했다고 생각해. 너도 알다시피 기록이나 전설에 남아 있는고대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몸집도 크고 강력한 힘을 가졌던… 즉, 전사로서 훨씬 훌륭했었던 사람들이라고 하잖아? 게다가 인간이 지닌능력의 범위도 지금과 비교되지 않게 넓었던 때라고 하니까. 뭐, 믿을 수 있는 이야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강한 전사를 숭배하는 마브릴들이다 보니 누구나 그 시대에 대한 강한 향수 같은 것을 가지고있는 그런 거야. 그래서 늘 '어제처럼' 이라는 말이 아무 데나 붙어다니는 거고." "아무 데나?" "아무데나지 뭐야. 사람의 인격을 칭찬해도 '어제같이 훌륭한 사람', 훌륭한 일을 해도 '어제 같은 업적', 심지어는 음식 맛이나 물건을 칭찬하는 데까지 쓰이니까 말이야. 생각해봐. 어제처럼 맛있는빵, 이라거나 어제처럼 훌륭한 갑옷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들리겠는가." 그건 정말 그런 것 같다. 정말 그 말은 굉장히 바보같이 들렸다. 누군가 이스나미르에 와서 그런 표현을 쓴다면 바보로 오인 받기 딱좋을 것이다. 어쨌든 기억할 게 또 하나 늘어버렸다. 뭔가 좋은 것을 칭찬할 때는 '어제처럼' 이라는 거지. 이거야 정말, 아무 데나 썼다가 혹시 엉뚱한 예외에 걸려서 괜히 들통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결국 나는 이렇게 긴 이야기를 들었을 때면 언제나 하게 되는 질문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넌 언제 세르무즈를 와 봤길래 그렇게 잘 알아?" "말했잖아. 나는 너보다 훨씬 오랫동안 여행했었다고." 내가 중얼중얼 대며 생각나는 대로 이 말 저 말에 '어제 같은' 이라는 말을 붙여보며 키득키득 웃고 있는 동안 이미 우리는 두 시간여를 걸어 그 '마디크' 가 말해준 첫 번째 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그냥 지나치자." 유리카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저 네 가지 호칭들은 마브릴들의 나라에 있는 내내 나옵니다. ^^;스토리가 좋다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에.. 세월의 돌 모임이라... 저는 생각도 해본 일이 없군요^^;칠레사에 관련된 책 추천해주신 분, 감사합니다. 나중에라도 꼭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대 칠레사요? 물론 관심 있지요- ^^;)Luthien, La Noir.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476번제 목:◁세월의돌▷ 4-1. 마브릴의 땅으로 (6)-End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6/03 21:59 읽음:67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4장. 제3월 '아르나(Arna)'1. 마브릴의 땅으로 (6) "혹시 알아? 그 마디크가 가다가 우리를 쫓는 마브릴 군인들하고만날지도 모르잖아. 혹시 서로 인상 착의를 제대로 기억하고 설명할수 있다면, 그가 우리더러 이 마을로 가란 말을 했다고 하겠지. 여긴게다가 작은 마을이고 하니 찾으려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좀더가는 게 좋겠어." "그럴 바엔 괜히 물어봤네?" "아냐. 어차피 아무도 없는 길에서 그냥 지나갔대도 우리를 기억하기가 쉬웠을 거야. 그래서 일부러 물어보았어. 우리가 아르장띠외 마을에 묵는다고 생각한다면 우린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거 아냐." 나는 약간 입을 벌렸다. 그리고는 말해 주었다. "…… 용의주도하군." 그래서 우리는 점심때가 가까워질 즈음 아세이유 시에 도착했다. 아세이유 시는 우리의 희망대로 이진즈 강에 면해 있는 도시다. 세르무즈는 이진즈 강 줄기를 따라 각종 물자가 오고 가기 때문에 강변에 면한 도시들은 어디나 꽤 번창한다고 들었다. 여기도 예외가 아니었는지, 어디 가나 활기 있게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등짐을메고 부지런히 걷고 있는 장사꾼이나 나귀와 수레를 부리는 상인들을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도시, 꽤 멋이 있는데." 나는 손을 이마에 대고 마치 바다에 면한 항구처럼 여러 대의 배가대어져 있는 선창가 쪽을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파란 강물을 언뜻 본듯도 하다. 높게 죽죽 솟은 돛대들에 내려진 여러 개의 돛이 강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주변에는 강을 따라 붉은 지붕과 갈색 지붕들이 줄이어 늘어서 있었다. 갠 아침 하늘은 파랬다. 여러 가지 색깔들이 깨끗하게 어우러진, 물의 도시다운 풍경이었다. "일단 배를 좀 알아보자." 우리는 도시 가운데로 통하는 길을 가로질렀다. 바닥이 갈색과 흰색 돌로 포장되어 있어서 상당히 깔끔하고 예뻤다. 몇몇 아이들이 가끔씩 서로 쫓고 쫓기는 놀이를 하면서 저들끼리몰려서 뛰어갔다. 걸어가며 흘끗 보니 해적 놀이를 하는 모양인데,아마도 이진즈 강이 꽤 크다보니 강을 타고 오르내리는 해적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냐, 해적이라기 보다는 수적(水賊), 또는 호적(湖賊)이라고 해야 맞겠다. 우리는 선창가에 도착했다. 유리카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럴 만 했다. "배들이 색깔이 너무 예뻐." 배쌈과 난간 틀에 칠해 놓은 색깔들이 재미있었다. 빨강, 파랑, 노랑 등등 원색은 말할 것도 없고, 자주색이나 보라색, 연한 하늘색에흰 줄무늬가 들어간 것, 봄 새싹 같은 초록색, 떠오르는 해 같은 주홍빛 등 너무 다양했다. 항해를 하면서 파도에 닳고 암초 같은 곳에부딪치다 보면 배쌈 부분은 색깔이 닳기 마련일텐데(우리 나라에서는배쌈에는 칠을 하지 않는다. 역청이나 바르면 모를까) 왜 저렇게 곱게 칠을 했나 모르겠다. 나는 중얼거렸다. "색깔별로 골라잡으란 건가?" "하하, 나라면 빨간색." 유리카는 유쾌한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사람들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진즈 강. 내 어머니의 이름과 같은 바로 그 강. 대륙 최고의 대하. 앞서 계획을 세울 떄 몇 번이나 이진즈 강을 타고 내려가겠다는 말을 해 왔었지만, 막상 강물을 눈앞에 대하고 보니 감정이 색다르다. 그러니까, 이 강은 정말로 우리 어머니와 같은 이름인 것이다. 마치, 내 어머니의 자매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서 어쩌면……이모처럼까지 느껴지는 강. 나는 인사라도 하는 기분으로 그 강 앞에 잠깐 동안 서 있었다. "파비안, 안 오니?" 그리고 나는 다시 싱긋 웃으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부두 위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옆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사람들이 나와 다른 종족들이란 게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우리 나라의 어느 항구 도시에 와 있는 기분이다.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렇게 무시하고 싫어하는데, 겉모양만은 웬만해선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브릴들이라고 해서 우리와 그다지 용모가 다르진 않다. 다만 그들은 대부분 약간 눈꼬리가 치켜올라가 있는데, 엘라비다 족 중에도그런 사람들은 많으니까 그렇게 큰 차이라고 할 수도 없다. 또 엘라비다 족보다는 체격이 좋고 키가 큰 사람이 많은 편이라는데, 나도그다지 키나 체격에서 뒤지는 편은 아니니까 내가 특별히 눈에 띌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일단 선창에 가까이 대어져 있는 배로 다가갔다. 연보랏빛 배쌈과흰 돛의 배였다. 짐을 부리는 선원들과 물건을 넘겨받거나 사려는 사람들로 주변은 몹시 붐볐다. "여객선이 따로 있진 않을 거 같은데." "여기서 승객도 받는가 일단 물어 보자." 길게 솟은 배쌈 옆에 장부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붉은 윗도리의 선원 한 사람이 있기에 사람들을 헤치고 가까이 갔다. 그는 큰 소리로옆의 선원 한 사람에게 싣고 갈 물품 목록을 불러 주고 있었다. 그옆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설탕 다섯 푸대! 됐군. 포도주 열 세 통! 그래, 다음……." "저, 실례합니다만, 말 좀 물을게요." 내가 말을 걸었지만 얼굴이 희고 키가 유난히 큰 선원은 들은 척도하지 않고 장부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할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유리카가 갑자기 내 앞으로 나섰다. 그러더니 얼굴에 한껏미소를 띠고는 불쑥 외쳤다. "마디크! 배 좀 태워주실래요?" "어디까지 가는데." 우와…… 사람 차별하는군. 선원은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지만 장부를 들여다보면서 분명 대답을 했다. 내가 속으로 인종 차별, 성차별, 계급 차별, 빈부 차별 등등 별별 가지 단어를 다 생각해내고 있는데 유리카가 다시 웃으면서대답했다. "그건 이 배가 어디까지 가는가에 달렸죠." "하라시바까지 간다." "아! 그것 참 좋은 소식인데요?" 물론…… 좋은 소식이긴 하군. "언제 출발해요?" "오늘 밤." 그 말을 듣더니 유리카는 이 배를 타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배삯은 어떻게 지불하나요?" "중간에 내릴 생각이 없다면 종착지인 하라시바까지 일시불로 30메르장. 아니면 하루에 5메르장씩 꼬박 내는 방법이지. 그 순간 나는 몹시 당황해서 생각했다. 아아, 지금까지 깜빡 했구나. 여기는 세르무즈고 돈 단위가 다르구나. 그럼…… 돈은 어디서 바꾸어야 하지? 그러나 유리카는 이런 고민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 동요도 없이 마치 자기 나라에서 하듯 당연한 질문으로 돌입했다. "하라시바까지 얼마나 걸리는데요?" "7일 정도면 간다." "그럼, 앞의 걸로 할래요. 한 사람 당이에요?" "둘이면, 60메르장." "돈은, 탈 때 내면 되죠?" "저녁 7시까지 와."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선원은 단 한 번도 유리카 쪽으로 고개를돌리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카는 계속 얼굴에 호의 어린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야기는 끝났다. 우리는 가볍게 선원에게 인사를 하고는 혼잡한선창 위에서 내려왔다. 사람들을 헤치고 다시 돌아 나오면서 기분 나쁜 것도 잊어버릴 겸기지개를 한 번 죽 켠 다음, 유리카에게 말했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 한 번도 안 쳐다보다니, 어지간히 바쁜가 보다." 유리카는 속으로 뭔가 생각하는 듯 하다가 내 말에 피식 웃어버렸다. "바보야. 안 쳐다보긴 뭘 안 쳐다봐. 장부 밑으로 내 얼굴을 몇 번이나 곁눈질했는지 알아? 내가 왜 웃고 있었는데." 순간, 갑자기 까닭모를 울화가 치밀었다. "뭐야? 그럼 너 저 녀석한테 잘 보이려고 지금까지 웃었다는 거야?" "그럼, 내가 뭣 때문에 웃었겠니?" "아니, 그럴 필요가 뭐가 있니? 그거 아니면 다른 배를 타면 되는거고, 그렇게 함부로……." "이제 와서 갑자기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 얘는. 배를 타고 가는게 중요하지, 그거 말고 또 중요한 게 있어? 여긴 바다에 면한 항구도 아니고, 아무 때나 우리가 가는 곳까지 떠나는 배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야. 언제까지 시간을 낭비하고 싶니?" 유리카는 단번에 내 말을 일축해버리고는 앞으로 척척 걸어가 버렸다. 나는 당황스런 심정이 되어 그 자리에 잠깐 멈추어 섰다. 내 윗옷주머니에서 주아니가 머리는 내밀지 않은 채 말하는 소리가들렸다. "파비안, 그런 것은 아무나 참견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나는 화가 난 나머지 주아니에게도 이유 없이 퉁명스런 말투로 대꾸했다. "그럼, 누가 참견할 수 있는 건데? 우리는 이미 친구 아니었나?" 주아니는 평소와는 달리 내 화내는 듯한 목소리에도 개의치 않고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친구지. 그러나 '애인' 은 아니잖아?" +=+=+=+=+=+=+=+=+=+=+=+=+=+=+=+=+=+=+=+=+=+=+=+=+=+=+=+=+=+=+=4-1 끝입니다. (우... 심하다, 작가는 각성해라...)가, 각성하고 있습니다. ^^;제일 길었던 '엘프의 이름을 가진 도시 --> 무려 34편!' 이래로 최단 규모의 장이 탄생했군요. <-- 무려 6편;; 히로인요? 여기까지 읽으신 결과 누구일 것 같습니까? 힌트 : 이미 등장했다. --;파비안의 어머니 이진즈 크리스차넨, 이름밖에 안 나온 무기점집딸 벤야 킬른, 소녀 점쟁이 류지아 나우케, 설산의 불빛 여관 여주인래프티 고르만(--;), 아스테리온 무녀 유리카 오베르뉴, 꼬마 로아에주아니, 이미 죽은 엘프 이베카 민스치야, 켈라드리안 페어리 족의여왕 에졸린, 그녀의 딸이자 지금은 돌덩어리..인 라우렐란..... 히로인 후보로 지금 저한테 생각나는 사람은 이 정도입니다. ^^;; 추천해 주신 says님, 오랜만에 보는 추천이라 기뻤습니다. 감사합니다- ^^Luthien, La Noir. 제 목 :◁세월의돌▷4-2. 마음의 침범 (1)게 시 자 :azit(김이철) 게시번호 :737게 시 일 :99/06/29 07:23:49 수 정 일 :크 기 :8.8K 조회횟수 :103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562번제 목:◁세월의돌▷ 4-2. 마음의 침범 (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6/04 22:28 읽음:222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4장. 제3월 '아르나(Arna)'2. 마음의 침범 (1) "인간족의 처녀여. 그대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소." 아르나는 눈썹을 곧게 올리고, 둥글게 둘러서서 그녀를 바라보는일곱 명의 고귀한 이스나에-드라니아라스들의 눈동자에 시선을 차례로 보냈다. 둥글고 부드러운 선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흰 뺨과 이마에는 결심을 품은 자의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이 흘렀다. "그런 결정은 내가 할 것입니다." "어째서?" 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높은 장로가 그녀에 대답에 동요하여 약간흔들린 목소리로 되묻자 그녀는 몸을 돌렸다. 농가의 처녀였던 아르나에게서는 지금 앳된 아름다움과 순결한 매력만큼이나 당차고 굽히지 않겠다는 투지가 빛났다. 과거의 그녀로서는 감히 발을 들여놓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곱장로의 자리' 에서도 그녀는 아무것도 겁내지 않았다. 충분히 예의는지켰지만, 그녀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는 수줍어하지도 않았고,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는 나의 것이에요. 내 것을 두고 이래라 저래라 참견할 권한이여러분에겐 없어요, 고귀한 분들이여. 그는 이제 이스나에-드라니아라스이기 전에 아르나의 연인이니까. 그것이 먼저예요." 장로들 사이에 술렁거림이 퍼져나갔다. 그녀의 말은 확실히 놀라운 것, 이들 일곱 장로에게 '결정은 내가하겠다' 라는 식의 말을 한 자는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영적 존재들가운데서도 가장 고귀한 이스나에-드라니아라스를 두고 '나의 것' 이라는 말을 뱉은 여인도 일찍이 없었다. - 트루바드 음유시인 메란 두하스 作<처녀 아르나> 24장 138편 "이 여관이 괜찮아 보인다." 처음 들어갈 때 널찍하게 닦여 있던 대로와는 달리, 여기저기 좁은골목길이 어지럽게 이어져 있는 도시 안쪽으로 들어가 우리는 묵을곳을 찾았다. 누구한테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리고 서로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묵묵히 걷고 있다가 문득 유리카가 한 건물을 가리켰고, 나는 별 대꾸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신 주아니가 대답했다. "그래." 하얀 회벽과 갈색 창틀, 역시 갈색인 문틀에 계단 세 단을 올라가게 되어 있는 입구였다. 문 위에는 '인어의 푸른 눈빛' 이라는 낡은현판이 걸려 있고, 문 옆에 난 창 위에는 붉은 작약이 한아름 꽂혀있었다. 계단을 올라가서 보니 문 위에 네모난 램프가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지막한 천장과 그 위에 머리에 부딪칠 정도로 달린 램프, 그리고 바로 눈앞에 숙박부가 보였다. "방 있나요? 오늘 저녁까지만 머물 건데요." 유리카가 앞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무심한 얼굴의 여주인은 고개를약간 들어서 우리를 흘끔 보더니 다시 숙박부로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방은 하나면 되겠소?" 순간, 누구 얼굴이 더 붉어졌는지 나는 모르겠다. 유리카는 그 순간 마치 바닥에 떨어진 뭔가를 주우려는 듯이 몸을굽혔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진 것은 없었고, 그녀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 동안 당황한 심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숙박계 옆에 걸린 새 머리 장식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뇨. 따로 두 개 주세요." 꽤나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흐르고, 유리카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주인은 처음과 똑같은 무심한 얼굴로 다시 한 번 우리 얼굴을 쳐다본 다음 선불이라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여기 이스나미르 화(貨) 환전하는 곳은 없나요?" "메르장 금화 대신 존드 금화도 받아요. 대신 1 대 1.2 비율로 계산하죠. 여기뿐 아니라 환전하는 곳에 가도 똑같소." 나는 돈을 치렀다. 그리고 유리카도 자기 돈을 꺼내 탁자 위에 얹어 놓았다. 언제 구한 건지 몰라도(적어도 내가 보고 있을 때는 아니다), 유리카는 메르장 금화를 갖고 있었다. 마치 일행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각기 열쇠를 받아들고 우리는말도 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주아니, 어디서 잘래?" 이 말도 보통 여관을 올라갈 때마다 농담조로 묻는 말이지만, 오늘은 왠지 이 말조차 낯설게 여겨졌다. 주아니는 이따가 저녁 먹은 다음에나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방 앞에서 유리카가 말했다. "방에서 좀 쉴래." "그래. 점심 먹을 때 보자." 우리는 각자 방으로 헤어졌다. 주아니는 일단 내 방으로 따라온 셈이 되었고. 방에 들어가 배낭을 한쪽에 던져 놓고 검을 풀어 한쪽에 놓자마자나는 침대 위에 털썩 몸을 던졌다. 밤잠을 안 잔 것도 아닌데, 왠지심신이 모조리 피곤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침 겸해서 아까 오는 길에 길거리 수레에서 고기를 끼워 파는 둥근 빵을 사먹었기 때문에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다. "하아……." 침대에 누워 있는데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왜 이러지? 특별히 한숨 쉴 만한 일은 없는데. 마브릴 군인들도 잘 따돌렸고, 운 좋게 오기로 정한 도시가 이진즈강을 끼고 있는 도시였고, 탈 배도 쉽게 구했다. 배는 하라시바까지간다고 하니 일단 거기까지 가는 일은 걱정할 게 없다. 바다로 가는것도 아니고 강을 따라가는 거니 특별히 배 여행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까. "휴……." "파비안, 왜 자꾸 한숨을 쉬고 그래?" 주아니가 침대 위를 돌아다니다가 내 얼굴 옆으로 다가왔다. 뭐라고 대답해야겠지만 왠지 그것도 귀찮다. 그저 가만히 혼자 좀 있었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그냥." 무성의가 뚝뚝 떨어지는 대답을 하고 나서 나는 부츠를 한 쪽씩 벗었다. 벗어서는 방구석으로 내던졌다. 보통 잘 정리해 놓는 편인데오늘은 그런 것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팔베개를 하고서 몸을 뒤척거려 가능한 한 편안하게 자세를잡았다. 베개를 탁탁 두드려서 머리맡에 기울여 놓고는 애써 편안하게 머리를 기댔다. 다리를 벌려 죽 폈다. 그러고도 뭔가 불편한 것같다. 왜 이렇지? 아무래도 좀 쉬어야 할 것 같다. 너무 정신이 피곤해. 그래, 아마도 오랜만에 갑자기 스노우보드 타는 걸 해서 그럴 거야. 더구나 익숙한 보드도 아니고, 그런 애매한 물건을 타고서 그것도 유리카를 안고 내려왔으니 그럴 법도 하지. 거의 죽을 뻔한 셈이잖아. 팔다리가 오늘 갑자기 너무 긴장한거야. 그리고 남의 나라에 왔다는 긴장도 있겠지. 기억해야 할 것도 많이 생겼고. 그 뭐랬더라, 마디크, 마디렌, 프론느, 프로첸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또, 어제처럼좋은 아침이라…… 쳇. 이번에는 팔도 양쪽으로 길게 펴서 편안하게 놓았다. 팔을 갑자기펴는 바람에 주아니가 얼른 비켰다. 미안하다고 해야겠는데 그럴 마음도 별로 안 내켰다. 주아니가 말한다. "깜짝 놀랐잖아." "…… 응." 사과와는 무관한 대답이군. 머리 옆으로 주아니가 왔다갔다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상하게 신경이 쓰인다. 예전에는 별로 안 그랬는데, 지금은 왠지 신경이 쓰였다. 내가 지금 좀 민감해져 있나봐. 유리카하고 있으라고 할 걸 그랬나. 주아니가 묻는다. "피곤해?" "응……." "산에서 내려온 것 땜에?" "…… 응." 내 대답은 무성의의 극치를 달렸다. "잘래?" "응." 이번 대답은 정말 간결했다. 주아니는 침대 머리맡으로 가더니 요령 있게 작은 탁자로 옮겨갔다. 그리고는 거기 놓인 작은 그릇(무엇에 쓰는 것인가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담뱃재 터는 그릇 같다.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우리 나라 여관에는 저런 것 없었는데)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 안에서 몸을 뒤척여 편안하게 자리를 잡는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안 건데, 주아니한테는 푹신한 이불 같은 것은 그다지 필요없었다. 로아에들은 딱딱한 땅이나 나무열매 사이에서보통 자기 때문에 그런 것은 사용하지 않는단다. 그래서 주아니가 단단한 그릇 속에 들어가 누워도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도 잘래." "응…." 나는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나니 어제오늘 겪은 별가지 일들이 영상으로 다 떠오른다. 님블 시에 들어와 은빛 갑옷 여관에 들어간 일, 거기서 쉬고 새벽에 일어나서 길을 걸은 것, 초소를 피해 밤중에 산길을 힘들여 오르고, 유리카가 많이 힘들어했던 것, 마브릴 군인들을 만나 급히 쫓긴 일, 그리고……. 갑자기 유리카를 덥석 안아 올리던 순간의 감촉이 너무 생생하게떠올라 나는 몹시 당황해 버렸다. +=+=+=+=+=+=+=+=+=+=+=+=+=+=+=+=+=+=+=+=+=+=+=+=+=+=+=+=+=+=+=본래, 이번 장의 제목은 아주 유치의 극단을 달리는 것이었는데,동생의 고견을 받아들여 바꿨습니다. 괜찮은가요? 5월 통계에서… 1등이더군요..^^;;;(1등이라는 걸 도대체 얼마만에 해보는 건지 까마득...;;;)하하..긁적....어쨌든 다 여러분 덕분입니다. ^^또, 드디어 1번 파일이 3000을 넘었습니다. ^^*역시- 읽어주시는 여러분 덕분입니다. 참, 여러분- 혹시 제 글 분위기와 잘 맞는듯한... 좋은 음악이 있으면 좀 추천해 주시겠어요? 저는 음악을 들으며 글 쓰는 걸 좋아하는지라..^^ 특별히 어떤 장면이라거나 어떤 인물에 관련되어서 어울린다- 하는 것도 좋고요. (프레야 님이 추천해 주신 Secret Garden의 'Dawn of a NewCentury'는 자료실을 뒤져서 아주 잘 듣고 있답니다. ^^ 정말 멋지더군요. 아..그나저나 자료실에서 ra/rm 파일 삭제되면 낙이 하나 줄어드는데..)Luthien, La Noir. 출력이 끝났습니다. [Enter]를 누르십시오. ━━━━━━━━━━━━━━━━━━━━━━━━━━━━━━━━━━━제 목 :◁세월의돌▷4-2. 마음의 침범 (2)게 시 자 :azit(김이철) 게시번호 :738게 시 일 :99/06/29 07:24:10 수 정 일 :크 기 :9.5K 조회횟수 :97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563번제 목:◁세월의돌▷ 4-2. 마음의 침범 (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6/04 22:28 읽음:219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4장. 제3월 '아르나(Arna)'2. 마음의 침범 (2) 전에도 몇 번 느낀 일이 있다. 유리카는 그 당찬 말솜씨나 칼을 쓰는 재주 같은 것과는 달리 몸은굉장히 가볍고, 손은 몹시 여리다. 나보다 아는 것도 많고, 훨씬 오랫동안 여행했다고 하지만, 그리고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나보다 대처가 영민하고 재빠르긴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는 공상 속에 가끔 빠지는 것이다. 내가 과연 그럴 수나 있을까. 그녀는 내가 없었던 때도 잘 여행해왔던 것처럼, 내 곁을 다시 떠나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잘해나가지 않을까. 문득, 가장 오래된 기억, 그러니까 그녀가 그릴라드의 잡화점 앞에서 사과를 깨물고 있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왔다. 아직 겨울이던,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가운데, 나무상자 위에 앉아빨간 사과를 들고 있던 은빛 머리카락과 초록 눈동자. 아련하고 희미한, 마치 꿈같은 영상. ……. 나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눈을 떴다. 말을 잊어버린 것처럼 한참 동안 천장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다.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눈을 뜨고 있었을 뿐, 무엇을 본 것은 아니었다. 뭔가 아련하고도, 안타까운 기분. 이 기분은 뭐지? 눈을 똑바로 뜨고 내가 무엇을 생각해내려 하는지 알아내려 했다. 이 기분에 대한 원인을 찾아내려 했다. 그러나 애써 생각을 집중할수록 희미하기만 한 연상은 자꾸만 흩어져 날아간다. 눈을 뜨고 있다고생각했는데, 시선은 어느 순간 다른 기억을 쫓아가고 있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 …… 나는 악령의 노예라는 기괴한 자들에게 쫓겼었다. 평생 한 번도 느껴 본 일 없는 지독한 공포를 느꼈었고, 평생 한 번도 해 본 일없는 지독한 싸움을 했다. 그 후유증으로 열흘 가량을 누워지낼 정도로. 사람에게라면 하지 못했을 끔찍한 살육이 절벽 위에서 벌어졌었다. 그 모두, 아니 대부분이 내가 저질렀던 일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똑같이 당했을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것은 내가 저질렀던 일이었다. 지금도 내가 어떤 정신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을지, 다시 생각할수록 아득하다. 절벽위에 흩뿌려졌던 그 수많은 싸움의 흔적. 그러나 왜 내게는 그것보다 더 생생하게 떠오르는 다른 영상이 있는 것일까. 기억이 난다. 내 귓가를 내내 울리고 있던 말. 내 머릿속에서 수십 번이나 메아리치던 말. 다치지마. 죽지마. 수십 번이나 고개를 가로 저으며 외쳤던 말. 아마, 아마 내가 갑자기 그런 광기 어린 살육으로 돌입할 수 있었던 것은 유리카가 다쳤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나는 안다. 그 순간내 감정이 가닥가닥 찢겨나가던 그 기분을. 그건 마치, 어머니의 시체를 보던 순간마저 떠올리게 하는, 걷잡을수 없는 어떤 폭발과도 비슷했다. "……." 그리고 유리카와 등을 마주 대고 검을 가다듬던 기억. 내 귓가에 들려 왔던 목소리. [좋은 친구야, 넌.]그 말에 대해 어떤 대답도 할 새가 없었지. 아니야, 할 겨를이 있었다고 해도 나는 아마 할 말을 찾지 못했을 거야. 나의 좋은 친구. [등이 따뜻해…….]난…… 네 생각을 하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 뭔가가 내 눈가 관자놀이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 나는 흠칫 놀라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양손바닥이 얼굴을 가렸다가, 아래로쓰다듬으며 내려왔다. 그 손 안에 따뜻한 물기가 묻어 났다. 무얼까…… 이것은? 나는 몸을 돌려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양팔로 얼굴을 가렸다. 내가 나 자신에게 말하는 소리가 약하게 줄여져 들린다. "답답해……." 눈을 가늘게 뜨고 창 쪽을 바라보았다. 한층 밝아진 햇살이 커튼사이로도 따갑다.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있던자리에 주아니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걸까. 침대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만져 보니 약간 부은 것 같다. 상당히 부석부석했다.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들어올 때 보았던 좁은 골목에는 뭔가 찬거리를 사 가지고 가는 아주머니 한 사람이 보인다. 아이들은 보이지않았다. 포석이 깔린 거리는 조용했다.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면서 세수를 할까 하고 세면장으로 들어갔다. 물을 퍼담아 얼굴에 끼얹었다. 차가운 것이 얼굴에 닿으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 수건을 꺼내 얼굴을 훔쳤다. 다시 방으로 나왔다. 약간의 허기가 느껴졌다. 시간을 알 길이 없어서 다시 한 번 거리를 두리번거려 봤지만 참고가 될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아래로 내려가 볼까 싶어서 신발을 찾아 신는데, 문득 주아니가 누워 있던 그릇 안에 작은 쪽지가 놓인 것이 보였다. "……." 다가가서 집어 올렸다. 조그맣게 넷으로 접힌 쪽지였다. 펼쳐 들었다. 곤하게 자는 것 같아 깨우지 않았어. 네 점심 이야기를 주방에 해 두었어. 일어나거든 내려가서 먹어. 주아니는 내가 데려가. 이따가 6시 정도에 돌아올게. 그때까지 깨지 않고 있다면, 이 쪽지를 보지 못하겠지만. 유리 그제야 방안에서 익숙한 향기가 떠돌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물론 착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침대 머리맡에 작은 의자가 가까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아까 내가 누울 때에는저기 있지 않았었는데. 의자로 다가가서 그 위를 만져 보았다. "……." 당연히 온기는 없었지만, 나는 한참 동안 그 위에 손을 얹고는 멍하니 서 있었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검은 마룻바닥에 선명하게보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몇 가닥 보인다. 손가락으로 그 중 하나를집어올렸다. 길고…… 희게 빛나는, 마치의 악기의 현처럼 소리를 낼 것 같은,주인 잃은 실 가닥. 잠시 후에 나는 그 머리카락을 왼손 손가락에 감으면서 아래층으로내려와 있었다. 유리카가 뭐라고 말을 했는지, 내 얼굴을 보자 주방장이 아무 말도없이 그냥 한쪽 테이블을 가리킨다. 그 쪽에 가서 앉아 있으려니까곧 김이 오르는 따뜻한 닭고기 스튜가 내 앞에 날라져 놓였다. 식당 역시 바깥에서 보던 모습처럼 하얀 벽에 초콜릿 색깔 나무로벽 주위가 둘러진 깔끔한 모습이었다. 창이 열려 있어서 거기로 햇빛이 들어왔다. 점심 시간이 지나서인지 식당에 있는 손님은 나밖에 없었다. 주인이나 급사로 보이는 남자가 한구석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한참 동안 먹고 있는데, 문득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간으로 하얀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아- 봄날씨 치곤 더워, 더워." "뭐 시원한 것 없을까?" 갑자기 수선스런 말소리가 들리며 네 명의 여자가 한꺼번에 문으로들어왔다. 모두 키가 늘씬늘씬 큰 것이, 숙박부 쪽의 낮은 천장 아래가 순식간에 가득 찬 것 같다. 나는 닭 스튜를 먹다가 말고 문득 고개를 들어 그쪽을 쳐다보았는데,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저절로 숟가락을 멈추었다. 문득 옆을 보니 졸고 있던 주인인지 급사인지 하는 남자도 번쩍 눈을 뜨고 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거 아니잖아." "그래, 늦었지만 식사나 하고 여기서 잠깐 쉬었다가 가자." "프론느, 식당에서 좀 있어도 되죠?" "뭐 차가운 음식 같은 거 좀 없나?" 그들은 모두 말이 많았다. 다시 숟가락을 움직이면서 보니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둘에 하나는 내 또래 정도로 보이고, 마지막 한 명은 나보다도 좀 어려 보인다. 젊은 여자들끼리만 넷이나 모여서 일행으로 다니는 것은그다지 보기 쉬운 게 아니라서 꽤나 눈에 띄었다. 게다가 그녀들은 모두 상당한 미인들이었다. 그 중 하나가 마치 유리카 같은 은색 머리카락을 하고 있어서 나는그 여자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마브릴 가운데는 은색 머리가 많다고 하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나보다는 좀 나이가 있어 보이는 20대 아가씬데, 다시 보니 은빛이긴 하지만 유리카처럼 자연스럽게 반짝이는 빛은 없었다. 유리카의머리카락은 작은 은색 폭포처럼 햇빛을 받으면 찬란하게 빛이 난다. 나는 내 손가락에 감은 머리카락을 흘끔 내려다보고는 혼자 피식웃었다. 그들은 식당으로 다가오더니 가장 큰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급사가 다가오기도 전에 각자 자기가 먹을 것들에 대해서 꽤큰 목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오리 구이 먹을 거야. 여기 잘 할래나?" "아아, 난 시원한 것. 차가운 음료수나 일단 한 잔 마시고. 아직얼음 띄운 것은 없겠지?" "얘는. 지금이 여름인 줄 아니? 과일 파이나 좀 먹었으면 좋겠다. 뭐가 좋을까? 어쨌든 배가 고파." "잘 먹어 둬야 돼. 앞으로 한참은 이렇게 못 먹을 테니까. 마디크,여기 주문 안 받아요?" 안 그래도 나보다 훨씬 눈을 똑똑히 뜨고 그녀들을 보고 있던 그남자는 그 쪽으로 벌써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들은 밝은 햇살을 받으면서 명랑하게 떠들고 있었다. 모두 바지 차림에 여행하는 사람다운 복장이고, 두 여자는 허리에 롱소드를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 이 '그' 의 나이는 적게 잡아도 약 40살 이상으로 보였다 -자못 과장스런 몸짓으로 아가씨들 앞에서 허리를 굽히더니, 은근한목소리로 물었다. "뭘 드릴까요?" "나는 레몬 시드 케이크 큰 것 하나랑, 돼지고기 미트볼, 양상추샐러드, 차가운 소다수 한 잔." "오리 통구이 잘 해서 한 마리 갖다 주시고요, 과일 한 접시 주세요. 다른 것 뭐 또 없나?" "연어 훈제 구이 있어요? 아세이유에서는 연어를 먹으라던데." "저는, 저기 저 애가 먹고 있는 닭요리 주세요." 갑자기 그 중 내 또래인 여자가 손가락을 들어 내 쪽을 가리키는바람에 나는 흠칫 놀랐다. +=+=+=+=+=+=+=+=+=+=+=+=+=+=+=+=+=+=+=+=+=+=+=+=+=+=+=+=+=+=+=에.. 추천해 주신 세 분, 모두 감사합니다- 굉장히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쁜 문체(과연?)라는 것은 안 좋은 것인가요? ^^;;에또, 아침 수업 학점들은 어쩌나요...^^;그리고 그림은요, 다 그린 것도 아니고, 스케치북에 그린 거라 올리기는...^^;오늘 날씨 좀 덥더군요. 시원한 밤 되시길- ^^Luthien, La Noir. 출력이 끝났습니다. [Enter]를 누르십시오. ━━━━━━━━━━━━━━━━━━━━━━━━━━━━━━━━━━━제 목 :◁세월의돌▷4-2. 마음의 침범 (3)게 시 자 :azit(김이철) 게시번호 :747게 시 일 :99/06/30 06:15:12 수 정 일 :크 기 :7.8K 조회횟수 :100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639번제 목:◁세월의돌▷ 4-2. 마음의 침범 (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6/05 20:20 읽음:217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4장. 제3월 '아르나(Arna)'2. 마음의 침범 (3) 고개를 들고 보니 그 여자는 아직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 봤던 미르보만큼은 아니었지만, 빨간색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에마치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 듯 쏘아보는 까만 눈매가 굉장히 도전적이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같은 닭요리를 먹겠다면서 뭐가 불만이야? 그녀들의 식사가 나올 즈음, 나는 식사를 마쳤다. 창 밖을 내다봤다. 혹시 유리카가 오지 않는가 해서 살펴봤지만 아직 오는 기색이 없다. 시간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카운터로 다가갔다. "지금 몇 시죠…… 프론느?" (나는 끝의 말을 쓰려고 정말 머리를 많이 굴렸다)여주인은 왠지 식당에 나앉아 있는 아까 그 주인인지 급사인지 모를 남자를 계속 곁눈으로 감시하면서 주방 안에 놓인 램프시계를 보고 시간을 말해 주었다(그 행동으로 보건대 그는 여관의 주인임에 분명한 것 같았다). 벌써 5시가 가까웠다. 난 거의 저녁을 먹은 셈이군. 유리카는 저녁 먹으러 와야 할 텐데왜 안 오는 거지? 나는 방으로 올라갈까 하다가 유리카가 오는 것을 기다리려고 식당한쪽에 가서 다시 앉았다. 저녁이 가까워오니까 햇빛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 그래, 그러니까 우리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가자." "저녁엔 배가 고플지 몰라." "아라디네, 닭 요리 다 먹은 거니? 과일 좀 집어먹어." "됐어. 난 과일이 싫어." "그러니까 피부가 그 모양이지." 갑자기 까르르 웃는 소리. 나는 의자를 끌어당겨 창가로 가서 앉았다. 그녀들은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떠들었다. 그러다가 한 명을 서로 지분거리기 시작했는지 누군가가 신경질적으로 뭔가 말하면서 의자를 드르륵 밀고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관 주인과는 달리 그녀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창밖을 지나가는 과일 수레를 내다보고 있었다. 과일과 꽃을 함께 파는장사꾼이었다. 세르무즈는 기후가 온화한 편이라 꽃이나 과일 등이색이 아름답고 맛이 좋다고 하던데 정말인 모양이다. 과일들이 하나같이 커다랗고 즙이 풍부해 보였다. 유리카가 전에 가게 앞에서 사과 먹던 생각이 난다. 살아 있는 사과라고 했던가? 어디 저것들도 살아 있는지 한 번 시험해 보기 위해서 몇 개 사다가 유리카를 줘? 내가 나가서 진짜로 사과나 몇 개 살까 하는 생각을 하는 참인데누군가가 갑자기 내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이 느껴졌다. "…… 어?" 검은 위층에 두고 내려온 참이라 흠칫하여 몸을 돌리는데 아까의빨강머리 소녀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와 같은 닭요리를 갖다달라고하던 소녀. 나는 의아해서 창틀에서 손을 떼며 눈을 올려 떴다. 소녀는 약간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는데, 마치 시비라도 거는 듯한 말투로 입을열었다. "얘기나 해." 나는 무슨 소린가 싶어 대꾸했다. "…… 얘기?" 내가 한 대답은 지극히 평범하고도 이런 상황에 일반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저 소녀의 행동과 말투, 그리고 표정이 나에비하면 훨씬 비 일반적이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빨강머리 소녀는 마치 나한테 화가 난 것처럼 날카롭게 내게 쏘아붙였다. "이런 상황에서 꼭 그런 식으로 얘길 해야겠니, 넌?" "……?" 나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져 버렸다. 나는 그녀가 말하는 그 '이런 상황' 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거니와, 내가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게다가 그걸 내가 책임져야 할이유는 더더욱 없다. 그런데 왜 저 애가 나한테 화를 낸담?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미안해. 네가 말하는 상황이 뭔지도 모르겠고, 너한테 별로 들을이야기도 없을 것 같애.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프로첸." 나는 마지막 말을 쓰는 것에 일말의 희열감을 느끼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마도 생각건대, 나는 그 말을 정확하게 쓰기 위해서 신경을 너무 쓰다보니, 나한테 말을 걸던 소녀가 어떤 상황이 될 지에 대해선 도무지 신경을 쓰지 못한 모양이었다. 식당 안에서 갑자기 커다란 웃음소리들이 폭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터졌다. "우하하핫-!" "파하, 파하하, 파하하하하…… 글쎄, 프로첸이래-!" "하하하- 훗훗, 아라디네, 그만 이리로 와. 완전히 보기 좋게 채였잖아." "불쌍해서 눈물이 다, 푸하하하…… 날려고 그래…… 히힛, 푸히히히힛…… 하하하……." 사실 그녀의 이름이 아라디네라는 것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다른 생각에 잠겨서 그녀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엔 그녀들이 끔찍할 정도로 웃어대는바람에 나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상황이파악되었다. 세상에, 차였다고? 아니, 차이다니 누구한테? 나는 계단을 올라가다가 멈추어 섰다. "……." 아라디네, 라고 불린 소녀의 얼굴은 그야말로 불쌍했다. 고집스럽게 생긴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진 데다 눈은 금방 눈물이 뚝뚝 떨어질것처럼 발갛게 부풀어올랐다. 그녀는 내가 일어나자 내 쪽으로 약간몸을 돌렸던 그대로, 비스듬히 선 채 마치 마루에 못 박힌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겠다. 저 빨강머리 소녀가 저렇게 된 것은 대부분 자기 동료들의 비웃음 때문이지, 내가 어떻게 한 탓은 아니라고. 그러나 저런 모양을 보니 사람으로서 동정하는 마음이 일지 않을 수없었다. 더군다나 나 때문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잖아. 게다가 그 과정에 내가 한 몫 했다는 것이 전혀 거짓말은 아니기도하고(그러나 분명!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란 말이다!). 자, 어쩐다. "그만 이리 와, 아라디네." "뭐야, 또 삐졌어? 하여튼 저 애는 성격이 저래서 큰일이라니까." "저렇게 못됐으니까 남자애들도 싫어하지." 그 중 나이가 가장 적은 소녀가 입을 비죽이면서 마치 자신은 어디가도 인기가 있다는 듯이 목소리 톤을 높여 한 마지막 말은, 나까지도 비위상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어쩌면, 나이도 어리면서 언니에게저렇게 예의가 없담. 게다가 더 우스운 것은, 두 큰언니들이 모두 맞다는 듯이 고개를끄덕이며 수긍하는 얼굴을 했다는 점이다. 솔직히 너(열 여섯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소녀)의 어린아이 같은 노란색 머리보다는 아라디네의 빨간 머리카락 쪽이 훨씬 나아 보인단 말이다. "……." 아라디네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녀들이 떠들기 시작했을 때, 나는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저러다가 제풀에 풀어져야지 뭐. 언제 쟤가 달랜다고 풀어지는 거봤니?" "우리 쟤 빼고 맛있는 거나 더 시켜 먹을까?" "쟤 도시락도 주지 마. 아유, 하여튼 성깔하고는." 마침 주방에서 심부름꾼으로 보이는 소년 하나가 뛰어나오는 것을보고 나는 나직하게 그를 불렀다. 그가 다가오자 계단 위로 데리고올라가서는 그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주었다. 손에 금화 한 개가 놓이자 그는 입이 이만큼 벌어져서는 나갔다. 솔직히, 이건 내 철학에 맞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 방으로 들어갔고, 몸을 다시 침대에 던졌다. 내 얼굴까지 덩달아 화끈거린다. 가서 세수나 다시 할까. 나는 유리카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파비안- 파비안, 그만 나가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 "파비안- 아직도 자니?" 아아, 지금이 몇 시지. "파비아아안-!" 아.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고, 동시에 문이 덜컥 열렸다. "뭐야? 도대체 언제까지 자겠단 거야? 6시야, 배 타러 가자." +=+=+=+=+=+=+=+=+=+=+=+=+=+=+=+=+=+=+=+=+=+=+=+=+=+=+=+=+=+=+=어제... 어떤 분이 남겨주신 쪽지를 읽고 분명 저장하겠다고 'y'를 쳤는데,그냥 나우가 날려먹었습니다. 아아...화나..--;게다가 pgup을 해도 앞부분은 이상한 색동화면(?)으로 지워져버리고... (예전에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나면 화면 복사로 떠서 개인보관함에 w를 치고 붙여넣었었지요)그래도 제 글이 오아시스가 되어 드렸다니, 정말 기쁩니다. ^^(그래도..나오는 한숨- )Luthien, La Noir. 출력이 끝났습니다. [Enter]를 누르십시오. ━━━━━━━━━━━━━━━━━━━━━━━━━━━━━━━━━━━제 목 :◁세월의돌▷4-2. 마음의 침범 (4)게 시 자 :azit(김이철) 게시번호 :748게 시 일 :99/06/30 06:15:32 수 정 일 :크 기 :8.2K 조회횟수 :97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640번제 목:◁세월의돌▷ 4-2. 마음의 침범 (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6/05 20:20 읽음:217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4장. 제3월 '아르나(Arna)'2. 마음의 침범 (4) 유리카가 은빛 눈썹을 찡그린 채 문 앞에 선 것이 보였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황급히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왜 이렇게 잠이 많아졌지? 누웠다 하면 아무 때나 그저 자버리다니. 유리카는 꿈에서 보던 그대로, 반짝거리는 은빛 머리카락을 어깨위에 늘어뜨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꿈에서는 뭔가 말하려했던 것 같은데. 아아, 그만 꿈에서는 깨어나야지.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지금까지 계속 잔 거야? 밥도 안 먹고?" "아, 아니야. 점심 먹었어." "그럼, 또 잔 거야?" 주아니가 고개를 내밀고는 종알거린다. "하여튼, 잠꾸러기래니깐. 옛날엔 안 그랬는데, 이젠 잠꾸러기 다됐어." 잘났다. 알았으니까 빨리 준비하면 되잖아. 급하게 얼굴을 씻고 부츠를 신은 다음, 겉옷을 입고 망토를 집어들었다. 검을 등에 메고 배낭을 어깨에 걸었다. 순식간에 모든 일이 끝났다. 그 동안 유리카는 손을 허리에 얹은 채 내가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자, 빨리 했지?" "뭐 빠뜨린 거 없고?" "응? 아…… 저거." 두리번거리다가 주아니가 누워 있던 그릇 안에 놓인 유리카의 쪽지를 집어들었다. 유리카의 눈썹이 가볍게 움직였다. "이미 봤는데, 그건 뭘 하려고?" "아…… 그냥." 대강 얼버무리고는 유리카보다 먼저 문을 빠져나왔다. 아래로 내려가는 큰 계단으로 급히 걷자니 유리카가 조금 떨어져서 뒤를 따라왔다. 나는 게으르게 누워 있던 것도 만회할 겸, 계단을 급하게 뛰어내려갔다. 뒤에서 유리카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체크아웃 했으니까 다시 말할 필요없어!" 나는 돌아보진 않고 고개만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나도 체크아웃하려고 빨리 가는 것은 아니다. 그냥 너한테 부지런한 척 해보려고그러는 거지. "어때, 유리? 이보라구, 금방 가잖아." 농담조로 중얼거리면서 막 1층으로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파비안-!" 어어……. 나는 당황해서 멈추어 섰다. "그, 저……."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이었다. 아라디네가 눈앞에 보인다싶더니, 그녀가 내 앞으로 달려들었고, 나는 완전히 기습적으로 뺨에키스를 받아 버렸다. "아……." 그 순간, 내게 무엇이 가장 신경이 쓰였을 것 같은가? 주위 손님들의 감탄한(과연 무엇에?) 눈빛? 아라디네의 여자 형제들이 바라보고있는 질투 어린 시선? 한쪽 테이블 위에 놓인 내가 보낸 물건? 모두 아니었다. "……." 내가 가장 긴장했던 사실은, 내 뒤를 따라오던 유리카의 구두 소리가 딱 멈춘 일이었다. 내가 당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참인데, 아라디네가 즐겁게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내 귀에는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은 아까와는 딴판이었고, 아주 밝게 빛나고 있었다. "꽃이랑 과일, 모두 너무너무 예뻐. 너무너무 기쁘고. 이렇게 생각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 잊지 않을게. 나,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서아까 화났던 것도 싹 잊어버렸어. 이 정도 감사 인사는 해도 되는 거겠지?" 그녀는 '너무너무' 라는 말을 짧은 말속에서도 무려 세 번이나 사용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엄청나게 많은 꽃과 과일을 바라보면서 무진장 신경이 쓰였다. 급사 녀석한테 금화를 준 것이 잘못이었다. 녀석은 아마 돈이 너무 많이 남은 나머지(남은 돈은 팁으로 가지라고했음에도) 양심에 찔려서 가능한 한 돈을 많이 들여 저것들을 샀음에틀림없었다. 난 결코 저렇게나 많이 사라고 한 일이 없다. 테이블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프리지어와 싱싱한 과일들이그득히 놓여 있었다. "그, 그게……."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차마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유리카가 무슨 표정으로 지금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까. "아라디네……, 그러니까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윽……. 나도 모르게 주워들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는, 실수했다고 다시생각하는 참인데 아라디네가 밝게 대답했다. "그냥, 아라딘이라고 불러." 그 순간, 뒤에서 다시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바닥을 울리는 부츠 뒤축의 소리. 나는 긴장해서 하려던 말을 잊어버릴 뻔했으나 간신히 일단 거의 내게 안기다시피 해 있는 아라디네를 뒤로 밀어냈다. 아라디네도 위를 쳐다보는 모양이었다. "아……." 아라디네가 유리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에 대해서 나는 생각할 여유가 없다. 내 머리는 유리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바빴다. 갑자기 내 등뒤에서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중 가장 밝고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프로첸? 파비안이 새로 사귄 친구인가 보죠? 전 파비안과 같이 여행하는 친구고, 이름은 유리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 나는 지금 내 귀의 성능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있다. 아라디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아까 말했다시피 그걸 생각할 여유는 없었으므로 전혀 짐작이 안 갔다) 굉장히불편해 보이는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유리카와는 달리(유리카가 어쨌는데?) 기분을 숨길 줄을 몰랐다. 그녀의 기분은 그녀의 얼굴에 그대로 다 드러났다. 물론, 목소리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낮아져 있었다. "나는…… 아라디네라고 해요. 만나서……."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황인 나조차도 이젠 그녀의 기분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다.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유리카의 깜짝 놀랄 만큼 예쁜 얼굴에 위축되고 있는 중임에 틀림없었다. 아라디네의 자매들은 다시 그녀를 지분거릴 건수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는지 뒤에서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아아, 이 상황, 이상하게흘러가고 있어. 유리카가 재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파비안이 좋은 선물을 했나 보네요? 참 좋은 친구예요. 내게도 정말 잘해줘요." 순간, 나는 다시 불안감에 휩싸였다. 유리카의 목소리에서는 친절함 밑에 가려진 뭔가 단단한 얼음 같은 것이 느껴졌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예쁜 꽃들이에요. 저렇게 많은 꽃은 처음 받아봤어요." 아라디네는 갑자기 어찌 됐든(그러니까 유리카가 예쁘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목소리가 살아났다. 저건 무슨 상황이지? 그러니까…… 설마. "네. 저도 저렇게 많은 꽃은 구경한 적도 없어요." 이게 아냐, 이게 아냐. 내가 머릿속으로 열심히 고개를 흔들어대고 있었지만 유리카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한결 같았다. 도저히 수습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점에서는 아라디네도 결코 지지 않았다. "저도 이런 멋진 일은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유리카가 잠깐 말이 없다. 나는 순간을 포착해서 뭔가 말을 하려고몸을 돌리려 했으나, 유리카가 계단을 두어 단 마저 내려와 내 옆에내려서더니 정말 발랄하게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희는 배 시간이 바빠서 이만 가봐야겠네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프로첸." 굳이 통성명을 했는데도 '프로첸' 이라는 경칭을 써서 마지막 말을한 유리카는 말을 끝내자 내 쪽을 쳐다보았다. 겉보기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은 평온한 얼굴로. "뭐해, 파비안. 어서 가야지. 배 떠나겠다." 나는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아, 그래." 아라디네는 우리가 반말을 쓰는 사이라는 점이 다시 신경이 쓰이는모양이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잘 가 파비안. 다음에 또 봐." "응……, 아라디네…… 도 잘 가." 그러나 그녀는 나를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캐릭터 인기 투표를 하면 어떠냐는 분이 있으셨어요. 에에..그런데 제 글에 솔직히 별로 인물이 많이 안 나와서요. 다른분들 인기투표보면 수십명도 넘는 인물들이 경합을 벌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세월의 돌은 주인공끼리 5위까지 알아서 나눠먹기들 하고 나면, 나머지는 과연...하하..^^;몇 명이라도 충실한 형상화에 집중하다보니, 많은 인물을 등장시키지는 못했네요.(긁적)물론, 어제 부로 네 명이나 새로 등장했습니다만..^^;;(하긴..가끔 전혀 엉뚱한 엑스트라가 인기있는 경우도 있긴 하더라만... 세월의 돌에선 어떤 인물이 독자들에게 많은 각인을 남겼을 지궁금해지긴 하는군요)참, 감상 보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오늘 더웠죠? 짜증나는 일 없이, 편안한 밤 되시길 기원합니다-Luthien, La Noir. 출력이 끝났습니다. [Enter]를 누르십시오. ━━━━━━━━━━━━━━━━━━━━━━━━━━━━━━━━━━━제 목 :◁세월의돌▷4-2. 마음의 침범 (5)게 시 자 :azit(김이철) 게시번호 :749게 시 일 :99/06/30 06:15:52 수 정 일 :크 기 :7.7K 조회횟수 :101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838번제 목:◁세월의돌▷ 4-2. 마음의 침범 (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6/06 23:40 읽음:212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4장. 제3월 '아르나(Arna)'2. 마음의 침범 (5) "아라딘이라고 불러. 그게 내 애칭이거든." "그래…… 아라딘." 나는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어 그렇게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유리카는 앞으로 나서 걸어가더니 아라디네의 자매들 사이를 마치헤집어놓다시피 가운데를 뚫고는 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녀들은 길을비켰지만, 뭔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유리카의 뒷모습을 쏘아보며 저들끼리 쑥덕였다. 그러나 내 눈에는 유리카가 그녀들에게가 아니라 마치 나한테 시위를 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꽃 고마워. 잊지 않을게." 내가 문을 나서려는데 아라디네가 굳이 다시 말을 걸었다. 아아, 이젠 거의 수습 불가능이야. "…… 그래." 나는 문을 나섰다. 선창가로 가는 동안 나는 유리카에게 말을 걸 엄두도 못 냈고, 내옆에 나란히 서서 걷고 있는 유리카 역시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가끔 주아니가 뭐라고 하면 대답할 뿐, 내게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끔찍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점점 어두워 오는 저녁 골목이 꼭 내 마음 같군. 서로의 발소리만 들으면서 꼬박 선창가까지 걸었다. 선창가엔 조금일찍 도착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같으면 둘이 이야기하면서 이거저거 가리키고 웃고 그러느라 좀 더 걸렸을 텐데, 둘 다 걸음에만신경 쓰면서 빨리 걸었으니 빨리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선창에 올라서자 아침의 선원이 배다리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우리를 흘끗 보더니 말했다. "들어가서 칼메르를 찾아라." 우리는 배다리를 건너 배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배는 선령이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겉에는 칠을 깨끗하게 했지만 안쪽에는 여기 저기 낡은 판자 사이에 새 판자가 박힌갑판이 보였으며, 고물 쪽은 오랫동안 파도와 부딪쳤기 때문인지 몇군데가 깨어졌고 나무가 검게 썩은 부분도 보였다. 그렇지만 그럭저럭 강을 따라 항해하기에 그다지 나쁜 배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며 우리가 낼 돈을 생각한다면 이만해도 썩 훌륭한 셈이었다. "칼메르 씨…… 아니 마디크 칼메르를 찾는데요." 나는 하마터면 말을 실수할 뻔했지만 내가 붙잡은 선원은 듣지 못했는지 별로 개의치 않고는 손을 들어 선미루 방향을 가리켰다. 그쪽에는 사람이 꽤 많았기 때문에 나는 누구를 말하는지 몰라 다시 그선원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이미 성큼성큼 내 뒤로 지나가 버리고 없었다. 일단 선미루 쪽으로 걸어갔다. 배가 띄워진 것이 강이라고는 해도 배 위를 걷고 있자니 미세하게바닥이 흔들흔들 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한 번도 이런 큰 배를 타본 일은 없지만(유리카와 셔벗 강을 건널 때 탔던 조그만 배를 제하고는 사실 배 자체를 타본 일도 없다), 설마 내가 뱃멀미를 할 리는없겠지 하고 생각하며 별로 걱정하고 있지는 않았는데, 이 흔들림을느끼자마자 갑자기 약간 불안한 기분이 되었다. "마디크 칼메르가 어느 분이죠?" 곧 우리는 한 사람 앞으로 안내 받을 수 있었다. 희끗희끗한 수염이 가슴에 덥수룩한, 60줄의 늙은 선원이었는데 우리를 보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랭그와르가 말한 귀여운 손님들이 자네들이었나? 60메르장, 내게 내고 여기에 사인을 해." 칼메르는 그랭그와르가 누군지 설명하지 않았지만, 말 안 해도 짐작이 간다. 아마 처음의 키가 크고 얼굴이 흰, 말없는 선원이겠지. 그건 그렇고, 그렇게 대꾸도 제대로 안 하던 주제에 남들한테 말할때는 '귀여운 손님들' 이라니 좀 심했군. 다행히 나도 여관 주인으로부터 돈을 좀 바꾸어 두었기에 30메르장을 낼 수 있었다. 유리카도 돈을 내고, 우리는 칼메르가 들고 있는커다란 장부에 사인을 했다. "배는 좀 있어야 떠나니까, 그 동안 배라도 구경해. 어이, 아시에르! 여기 와서 이 손님들 좀 선실로 안내해 주게나!" "넷!" 기운찬 대답 소리가 들리고 곧 누군가가 우리 앞으로 달려왔다. 유리카와 나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순간 나는 입을 딱 벌렸다. "나……." 내가 입을 벌려 말을 다 하기 전에, 달려온 '아시에르'라는 젊은선원이 나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는 다행히 칼메르의 등뒤에있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내게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입을 커다랗게 벌린 것은 칼메르에게도 잘 보였다. "뭐야, 아는 사람인가?" '아시에르' 는 이번엔 세차게 도리질을 해 보였다. "아, 아니요……."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말을 마쳤지만 아직도 놀란 것을 다 진정시키지 못한 채 '아시에르' 의 얼굴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칼메르의 앞을 떠날 때까지도 계속 그랬다. 왜냐고? 정말 아는 얼굴이니까! "어, 어떻게 된 거야?" 칼메르한테서 멀어지자마자 나는 '아시에르' 의 옆구리를 팔꿈치로쿡 찔렀다. 그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보다시피." "보다시피라니! 어떻게 마브릴들의 배에 있는 거야?" 나를 보고 그는 다시 한 번 싱글싱글 웃었다. 저 웃음, 잊어버릴수가 없지. 나는 참다못해 자리에 멈춰 서서 녀석의 팔을 잡았다. "야, 나르디!" "아아. 내가 경력이 다양하다는 거 잘 알잖아." '나르디' - 이제 그 이름을 부르겠다 - 는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간단한 셔츠 차림에 팔을 걷어붙인 것이 영락없는 소년 선원의 모습이다. 지는 석양에 붉게 물든 얼굴은 그새 봄볕에 좀 그을렸지만, 시원스런 선을 그리는 금갈색 눈동자와 눈썹은 여전히 고귀한 인상을풍겼다. 그는 갑판 가운데 있는 승강구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아름다운 일행이 있는데, 소개를 좀 부탁해도 될까? 내 이야기는나중에 할 테니까 말야." 나는 아직 유리카에게 말을 걸기가 좀 껄끄러웠기 때문에 어떻게할까 좀 망설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데에는 아까도 봤듯유리카 쪽이 훨씬 탁월하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유리카는 나르디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유리카 오베르뉴라고 해요, 마디렌. 파비안과 함께 여행하고 있지요.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유리카에게 말을 걸 기회다 싶어서 입을 열었다. 물론, 주변의 다른 선원들이 듣지 않도록 조그맣게. "유리, 나르디는, 아니 여기서는 아시에르라고 불러야겠지만, 우리와 같은 엘라비다 족이야. 굳이 마디렌이라고 하지 않아도 돼. 게다가 나하고 나이도 같거든." 나르디는 싱긋 웃으면서 유리카가 내민 손을 잡았다. "저는 여러 이름이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아시에르라고 불리고 있죠. 이스나미르의 꽃이 은빛 꽃잎을 지니고 있으나, 먼 이종족의 땅에서도 가장 빛나는군요." 나르디의 고풍스런 인사말을 알아듣는 데는 한참 걸렸다. 마브릴가운데는 은빛 머리가 많지만 엘라비다 중에서는 드문데, 그럼에도불구하고 여기에서도 그녀가 가장 아름답다는 말이리라. 물론 유리카는 나와는 달리 금방 알아들었다. 그녀는 생긋 웃었다. "거친 선원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고풍의 인사말을 들으니, 별과 검의 노래라는 이름이 왜 있는지 알겠습니다." 이건 좀 쉬웠다. 우리가 타고 있는 이 배 이름이 '별과 검의 노래'호였다. 이젠 내가 그들 사이에서 무슨 말을 해야 되는 차례가 아닌가 싶어어물거리고 있는 중인데 나르디가 승강구 해치를 열었다. 아래로 이어져 있는 줄사다리가 보였다. 나르디가 식당 급사처럼 안내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유리카에게 말했다. "아름다우신 프로첸, 먼저 내려가십시오." 음…… 왠지 근지러운 상황이 이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예전에 나왔던 인물, 드디어 나왔습니다. ^^;(두리번... 기다리신 분 없었죠?)조회수 3000, 축하해주신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읽어주셨으니3000인데, 제가 축하를 받으니 좀 죄송하군요..^^;;요즘 날씨가 더워지니까, 밤에 글 쓰다 보면 baquibulre가 가끔 출몰하는군요...윽...너무 싫어..--;컴퓨터 옆에 필살 신문지 뭉치를 준비해놓고 있긴 한데.. 정말 전벌레는 못 견뎌요. ;;언니가 오늘 치약 형태의 구제약을 사갖고 왔는데, 과연 효과가 있을지(무려 8000원이었습니다;;). 써보고 좋으면 알려드리죠. ^^Luthien, La Noir. 출력이 끝났습니다. [Enter]를 누르십시오. ━━━━━━━━━━━━━━━━━━━━━━━━━━━━━━━━━━━제 목 :◁세월의돌▷4-2. 마음의 침범 (6)게 시 자 :azit(김이철) 게시번호 :750게 시 일 :99/06/30 06:16:14 수 정 일 :크 기 :10.5K 조회횟수 :96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839번제 목:◁세월의돌▷ 4-2. 마음의 침범 (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6/06 23:41 읽음:214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4장. 제3월 '아르나(Arna)'2. 마음의 침범 (6) 내려가면서 나는 왜 나르디가 유리카를 먼저 내려가게 했는지 알수 있었다. 내려가다가 고개를 위로 들면 뒤따라 내려오는 사람의 옷안쪽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유리카가 지금 안에 바지를 입고 있긴하지만, 어쨌든 치마와 같은 겉옷을 입고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당연한 배려였다. 아래로 내려가서 우리에게 배당된 선실로 들어갔다. 예상한 바였지만, 우리는 한 선실을 함께 쓰거나, 아니면 다른 여자 승객들이나 남자 승객들과 각기 선실을 함께 사용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우리가 각자 선실을 한 개씩 사용할 만큼 배는 크지 않았고 선실도 넉넉하지 않았다. "여자 승객들이 몇 명 더 오기로 했어. 그러니까 프로첸 오베르뉴는 그들 중 한 사람과 함께 선실을 사용할 수도 있을 거야. 파비안,너는 나와 함께 지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다른 선원 한 사람과 함께 선실을 써야 할거야." 몇 가지 설명을 듣고 논의를 대강 한 결과, 일단 유리카는 오기로되어 있다는 그 여자 승객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본 다음에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나르디는 일단 우리 둘에게 각자 선실을 하나씩 배정해준 다음, 좀더 사정을 두고 보자고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우리가 헤어진 이후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좀이야기해 볼까? 어때, 파비안 네가 먼저 할래?" 선실 안에는 강 저편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 나 있어서 그쪽 풍경을 내다볼 수 있었다. 해가 지고 있는 중이라 나르디는 램프를 켰다. 유리카가 나가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나르디는 이제배가 출발할 때가 되어서 자기 같은 견습 선원은 별로 할 일이 없다고 말하며 웃었다. 나르디가 밖에서 의자 하나를 가져와서 우리는 하나는 침대에 앉고둘은 의자에 앉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르디와 헤어지고 유리카를 만난 과정, 그러니까 붙잡혀 이상한 곳에 갇혔던 이야기, 다음으로 켈라드리안을 지나온 이야기(페어리의 여왕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적절히 뺐다. 이 사람 저사람에게 함부로 말하고 다닐 만한 성질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악령의 노예들에게 쫓기고 거인 호그돈의 통나무집에 머물렀던이야기를 간단하게 마쳤다. 드라니아라스 대평원을 가로지른 이야기는 별로 할 것이 없었다. 유리카와 내가 마브릴 군인들을 따돌리고 국경을 넘은 이야기에서나르디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언젠가 내가 스노우보드 타는 것을 꼭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유리카가 보는 건 좋을 지 몰라도 함께 내려오는 건 절대 못할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너와 이 프로첸 역시 여기서 엘라비다라는 것을 이야기해선 안 된다는 거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여기서 로존디아태생이라고 이야기해 두었어." "그건 왜?" "내가 로존디아에서 이 배를 탔거든. 또 그렇게 해 두면 사람들이고향에 대해서 물을 때 대답하기도 편하고. 너도 이진즈 강이 로존디아 쪽을 지나오는 거 알고 있잖아? 나는 이베카 시에서 켈라드리안쪽으로 가지 않고 달크로이츠 산맥 쪽으로 여행해서 곧장 이진즈 강을 타고 내려왔거든. 그리고 로존디아에 잠깐 들렀다가, 다시 거기서이 배를 얻어 타고 세르무즈로 들어온 거지. 나도 이 배를 탄 지는얼마 되지 않았어." "세르무즈의 마브릴들은 엘라비다보다 로존디아 태생 마브릴들을더 미워한다고 하던데?" 내 걱정스런 말투에 나르디는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냐. 세르무즈와 로존디아가 이스나미르와 세르무즈, 또는 이스나미르와 로존디아보다 서로들 더 아웅거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들이 같은 마브릴 종족이라는 것은 잘 인식하고 있어. 로존디아는 미워해도, 로존디아 인을 미워하지는 않는 거지. 아직까지 나한테 로존디아 태생이라는 이유로 시비를 건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유리카가 설명하듯 덧붙였다. "세르무즈와 로존디아가 심심하면 국경 근처에서 소규모 전투를 벌이곤 하지만, 일반 시민이 서로 국경을 넘는 데는 별로 제약이 없다는 거 알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거와는 좀 다른 관계로 맺어져 있는 나라들이라고." 나는 세르무즈와 로존디아가 어쩌고 하는 것보다는 유리카가 내게말을 다시 걸었다는 사실이 더 기뻤지만, 일단 그러냐는 듯이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르디, 너 그때 왜 그냥 편지만 남기고 떠났냐? 무슨 바쁜 일정이라도 있었어?" "하하, 별로 그런 건 아니었어." 나르디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러느라 그의 머리에 씌워진두건이 약간 벗겨졌다. 두건 사이로 보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보고는나는 흠칫 놀라 말을 약간 더듬었다. "야, 너 그 머리……." "아아, 이것." 나르디는 숫제 두건을 벗어 버렸다. 그러자 내가 놀란 이유, 그의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 내렸다. 나르디의 머리카락이 진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헷갈리고 있는 참인데 나르디가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물들였어." "아니, 왜?" "왜, 이 색깔 별로냐?" 나르디가 농담조로 말하면서 제대로 상황을 설명하기도 전에 유리카는 나르디의 얼굴을 잠깐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본래 머리 색깔은 아마도 금발? 어울렸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알았어?" 내가 묻자 유리카는 시선을 천장을 향해 굴리면서 대답했다. "마브릴 사이에 들어와서 종족을 숨기고 싶다면, 가장 문제가 되는머리 빛깔. 그게 금발이니까." "맞았어요." 나르디가 웃으면서 수긍을 한다. 로존디아에 들어가기 전에 머리를갈색으로 물들였다고 했다. 마브릴들 가운데에도 노란 머리는 가끔있지만, 그들의 빛깔은 금발이라기 보다는 밀짚 빛깔 정도로, 그다지빛나지 않는 평범한 노랑이다. 나르디의 본래 머리색 같은 환하게 반짝거리는 빛 좋은 금발은 이스나미르에서만 볼 수 있다고 했다(물론,이스나미르에서라고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걸 '축복 받은 금발' 이라고 부른다). 갈색은 대륙 어디에서나 흔한 빛깔이었다. 나르디는 앞서 질문에 대해 곧 대답했다. "그땐 그냥…… 떠난 거였어. 아마도 나하고 다른 길로 가는 것 같아서. 인연 있으면 또 만날 거라고 생각했지." "뭐야, 난 그때 너하고 동료가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솔직하게 - 이건 과거의 나르디한테서 옮은 증상인 것 같았다- 말하자 나르디는 멋쩍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너하고 같이 여행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좀혼자 다녀야 할 이유가 있었거든. 그러나 이렇게 만났잖아? 사실, 다시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었다구." 나르디는 대강 얼버무리려는 듯이 다시 그 예의 미소를 지었지만나는 생각했다. 저걸 믿어야 돼, 말아야 돼. 전에 진담도 거짓말처럼하던 녀석이 저 녀석인데…… 어라? 그러고 보니? "나르디, 너 말투 많이 고쳤다?" "로존디아에 들어오면서 고쳤어." "헤, 그렇게 쉽게?" "그거야 뭐……, 예전에도 고치려면 고칠 수 있었던 거였는걸. 그저 별로 고칠 생각이 없었을 뿐이지. 마브릴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말해선 안 될 것 같더라고." 그 때 갑자기 밖에서 여러 사람의 외침 소리가 울렸다. 출항! 출항! 이라고 몇 사람이 외쳐대고 사람들이 이리 저리 뛰어 다니는 듯한 소리가 선실 천장을 울렸다. "나, 잠깐 나가봐야겠다. 이따가 다시 올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프로첸." 나르디는 벌떡 일어나더니 문득 생각난 듯이 덧붙였다. "참,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나르디라고 하면 안되고 꼭 아시에르라고불러. 아시에르 롤피냥이라고 했거든. 프로첸 오베르뉴도 신경 좀 써주세요. 그럼." 나르디는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시에르 롤피냥이라. 그 어감에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브릴들의 이름은 다 저런가? 그러나 나르디의 대답에 대해서는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다. 내가그렇게 고치랄 때는 들은 척도 않더니, 고치려면 금방 고칠 수 있는거였다고? 내가 속으로 약간 괘씸하다고 여기고 있는데 유리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선실은 내가 배정 받은 선실이었다. "어디…… 가?" "내 방에." 나르디가 있을 때와는 판이하게 차가워진 태도로 유리카는 자기 배낭을 집어들더니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유리카가 주아니까지 주머니에 넣은 채로(물론, 주아니는 낯선 사람이 앞에 있으니 절대 머리를 내밀지 않았다. 주아니가 나르디를 알아봤는지는 이따가 물어봐야겠지만 그러지 못했을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주아니의 눈썰미에 대해선 내가 잘 안다) 나가 버려서 나는 갑자기 혼자 덩그렇게 남아 있게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단단히 감정이 상한 모양인데 저걸어떻게 풀어준담. 일단 주변을 좀 둘러보았다. 선실은 한쪽 구석에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고 침대 위에 둥근 창이나 있었다. 방의 크기는 긴 쪽 벽 너비가 약 6큐빗 정도로 세로로 길고 좁다란 편이었다. 의자도 구석에 하나 놓여 있다. 선실은 낡긴 했어도 청소 하나는 잘 되어 있었다. 한쪽 옆에는 뭔가 넣을 수 있는 벽장이 있었는데, 옆방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기울어진 벽면에 붙어 있었다. 아마도 그 안의 벽장 모양은 세모로 움푹 들어가 있을 것 같다. 7일 정도의 항해랬으니까, 일단 배낭을 풀어서 몇 가지 짐을 정리해서 벽장에 넣어 놓았다. 수도까지 죽 강을 따라가는 여행이니까 풍랑이나 그런 걸 만날 리도 없겠고, 그저 천천히 유람하듯 편하게 가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편하게 가기 위해서는 가장 큰 관건인, 풀어야 할 문제가있었다. 나는 선실 구석에 놓여 있던 낡은 샌들(아마 수많은 승객들의 발이거쳐갔음에 분명한)을 발에 꿰어 신고는 선실 밖으로 나섰다. "유리, 잠깐 나하고 얘기 좀 해." 나는 유리카의 선실 문을 두드렸다. 그 때 정말로 배가 흔들, 하더니 물위로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배다리를 걷고 밧줄을 푼다음, 본격적으로 강물을 따라가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나는 배의 가벼운 흔들림에 몸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면서 다시 문을 두드렸다. "유리, 자니?" 대답이 계속 없다. 문을 열어 볼까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갑자기 누군가가 등뒤에서 양쪽 어깨를 덥석 잡는 것이 느껴졌다. 나르디인가 싶어서 돌아보았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이다.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서 내 앞에 선 사람을 보았다. "네가…… 어떻게?" +=+=+=+=+=+=+=+=+=+=+=+=+=+=+=+=+=+=+=+=+=+=+=+=+=+=+=+=+=+=+=추천해주신 세 분, 고마워요- ^^에... 우울해하고 있진 않은 걸요. (긁적...^^a)환타지답다... 정말 기쁜 말이네요. ^^*감상 메일 보내주시는 분들, 감사히 읽고 있답니다. ^^제 글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께선 저와 비슷한 감성, 취향을 가지신분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몹시 좋아집니다. 혼자 꾸는 꿈보다여럿이 꾸는 꿈이 훨씬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지요. 실제로.. 그 꿈은그렇게 여러 사람의 환상 속에서 살아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살아나서,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질 것만 같아요. 음악 추천 보내주신 분들께도-, 잘 들을게요~ ^^글을 쓸 때, 딱 맞는 음악을 찾는 건 정말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Luthien, La Noir. 출력이 끝났습니다. [Enter]를 누르십시오. ━━━━━━━━━━━━━━━━━━━━━━━━━━━━━━━━━━━제 목 :◁세월의돌▷4-2. 마음의 침범 (7)게 시 자 :azit(김이철) 게시번호 :751게 시 일 :99/06/30 06:16:53 수 정 일 :크 기 :8.4K 조회횟수 :101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991번제 목:◁세월의돌▷ 4-2. 마음의 침범 (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6/07 23:48 읽음:212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4장. 제3월 '아르나(Arna)'2. 마음의 침범 (7)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아라디네였다. 나와는 달리 아라디네는 전혀 놀라지 않은 모양으로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만나게 된 것이 매우 즐거운 모양으로 뺨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도 이 배 타. 장부에 사인할 때 파비안 이름을 봤어.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너무너무 기뻐." 음…… 나도 그렇게 말해주고 싶긴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유리카를 어떻게 달랠까 뾰족한 수가 없어서 고민인데, 문제의 당사자인 아라디네가 눈앞에 있어서야 일이 제대로 되다가도 망쳐지겠다. 그렇다고 잘못 만났다는 표정을 지을 수도 없고 해서 나는일단 억지로라도 웃어 보였다. "아……, 그랬구나. 만나서 반가워. 다른 일행은?" "물론 같이 있지, 불행하게도 말야(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슬쩍 웃음을 지었는데 나로선 그 웃음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여자 승객과 선실을 같이 쓸지도 모른다고 했는데,그게 그럼 아까 본 네 친구인가?" 그제야 상황이 짐작이 갔다. 여자 승객들이라는 게 아라디네와 그녀의 자매들을 말하는 거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런 공교로운 우연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겠지." 저만치 승강구 쪽에서 정말로 아라디네의 자매들이 걸어오고 있는것이 보였다. 그들을 데려오고 있는 것은 물론 나르디였다. 그녀들은가까이 와서 내 얼굴을 보더니 수선스럽게 놀라는 시늉을 했다. "어머! 이런 데서 또 만나게 되다니!" "아라디네, 좋겠구나?" 나는 정말 당황스럽고 다른 데로 가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 자리에서 그녀들의 이름까지 모두 알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가장 나이가 많은 아가씨는 올디네, 둘째는 블랑디네, 다음은 물론 아라디네, 그리고 막내는 미르디네. 예상대로 그들은 모두 친자매 사이였다(친자매들의 머리색깔이 왜 저렇게 다른지는 나도 궁금했다. 올디네와 미르디네만 똑같은 노란 머리고 블랑디네는 은색, 아라디네는 붉은색이니말이다). 그들의 성은 바르제였다. 미르디네가 커다랗게 말했다. "그럼, 누군가 마디렌 크리스차넨의 친구 프로첸이랑 방을 같이 써야 한단 말이네?" "누군가가 아니고 누군가 '들' 일수도 있어, 미르딘." 블랑디네가 새침하게 받았다. 그러더니 곧 말을 이었다. "미르딘은 너무 어리고, 우리 둘은 너무 크니까, 아라디네가 같이써야겠네." "맞아.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해선 안되잖아." 올디네까지 그렇게 말했다. 내가 또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하고 있는 참인데 뜻밖에도 아라디네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프로첸 오베르뉴랑 방을 같이 쓰겠어." 그러더니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굴리면서 덧붙였다. "셋보단 둘이 쓰는 편이 훨씬 편할 테니까." 나는 저녁이 늦도록 유리카의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방에서 나오지 않는 건지, 내가 보지 않는 곳만 피해서 돌아다니고있는 건지, 아무리 찾아봐도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나는 아라디네에게 붙들려서 내내 골치 아픈 대답들을 하지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출신을 숨겨야 하는 상황에서 사정을 모르는사람과 친구가 된단 건 상당히 곤란한 일이다. 아라디네는 호기심이무척 많았다. 조금 이야기하다 보니 공교로운 우연의 원인은 곧 밝혀졌다. 이날강 하구 방향으로 떠나는 배 가운데 승객을 태우는 배는 이 배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뱃전에 서서 밤바람을 받으며 이야기했다(절대! 이런 상황은 내가 원해서가 아니다). 나는 유리카가 어디에 있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찾으러 갈 수가 없어서 애가 탔다. "부모님은 뭘 하셔?" "아아, 그게…… 음, 돌아가셨어." "두 분 다?" "아…… 그… 런 셈이지." "저런, 안됐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셨는데? 병으로? 아니면 사고로?" "그으, 그러니까……." 좀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아라디네와 이야기하는 요령을 터득할수 있었고, 그래서 이야기는 조금 수월해졌다. "고향은 어디야? 멋진 곳이야?" "먼 곳. 말해줘도 아라딘은 모를 거야. 너는 어디서 태어났는데?" "나는 항구 태생이야. 저 아래쪽, 마리뉴라는 곳인데, 꽤 크고 아주 멋진 부두가 있는 곳이지. 거기엔 대륙 연안을 돌아다니는 수많은배가 정박해 있고……." 그럭저럭 하다가 밤이 되어 버렸다. 그 동안 나는 아라디네와 그녀의 자매들이 하라시바에서 내려서 이진즈 강의 작은 지류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이라는 것(이 사실은 나를 더욱 실망스럽게 했다. 세상에, 하라시바까지 같이 가야 하다니!), 그녀들은 로존디아에 있는 친척집에 다녀오는 길이라는 것(이 역시 놀라웠다. 적국인줄 알았는데 친척집에 다니러 갈 수도 있단 말이지), 두 언니들은 미르디네만 예뻐하고 그녀는 이유 없이 미워한다는 것(이건 내가 지금까지 관찰한 바와 같았다), 미르디네 역시 그녀를 무시하고 싫어한다는 것 등등 그녀에 대해 거의 알 만한것은 다 알게 되었다. "언니랑 동생이 모두 그러는 데 아무 이유가 없어?" "아무…… 이유가 없지는 않을 거야." "무슨 이유인데?" "난, 어머니가 다르거든." 아아. 하르얀의 일도 있고 해서, 나는 금방 그녀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복 형제라는 게 금방 친해질 수 있는 사이는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녀에게 새삼 동정이 갔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붉은 머리 이외에도 유난히 피부가 가무잡잡하고, 머리도 곱실거리는데다 다른 자매들보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이었다. 어쨌든 이제 그만 유리카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뱃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만 자려고?" "아니, 유리카를 찾아봐야겠어." "나도 같이 찾아볼래. 어차피 방도 같이 써야 할 텐데." 쯔으……. 왜 나는 이런 상황만 생긴담. 이럴 때 나르디라도 나타나주면 좋을텐데, 그 녀석조차 뭐가 바쁜지 출항한 뒤로는 얼굴 보기가 힘들다. 함께 방을 쓰게 된다면 이것저것 이야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나저러나 지금, 내가 유리카를 찾는다고 해도 아라디네와 같이있는 걸 보면 과연 그녀의 화가 풀어질까? 괜히 더 문제만 꼬이는 거아냐? 나는 아라디네가 옆에서 걸으면서 뭐라고 종알거리는 것은 귓전으로 흘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왜 내가 아라디네와 있으면 유리카의 기분이 나빠지지? 아니, 그 판단은 확실한가? 아냐, 맞아. 유리카가 저러기 시작한건, 내가 아라디네한테 꽃을 준 다음부터야. 그럼 왜 그러는 걸까? 주아니 말대로 우리가 친구일 뿐이라면, 친구가 다른 친구를 사귀는 것을 싫어할 필요가 있을까? 그럴 필요는전혀 없겠지. 그렇다면 왜? 만약 그렇다면, 나는 유리카가 다른 남자 친구를 사귀면 기분이 좋을까? 순간 나는 대답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려서 갑판 위에 멈춰 서고말았다. 아라디네가 가던 대로 한 걸음 나를 앞서가다가 내가 걸음을 멈춘걸 알고는 자기도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만약에, 만약에 유리카가, 이를테면…… 나르디하고 친하게 지내게된다면? 내가 말릴 일은 아니지. 친구가 친구를 사귀는 것은 막을 일이 아닌 거야. 그러나 내 마음은? 정말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아라디네의 궁금한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파비안?" "아라디네, 잠깐 나 혼자 있게 해 줄래? 선실에 가서 생각 좀 해봐야겠어." 나는 영문 모르는 아라디네를 갑판에 남겨두고 앞갑판 승강구로 내려갔다. 더 이상 뭔가 설명할 기분이 아니었다. 배 가운데를 가로질러 선미 쪽의 선실로 걸으면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결정은 사실 이미 내려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결론을 내려버리기에는 뭔가 내가 겁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게뭘까. 나는 유리카의 선실 문을 다시 두드려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선실 문이 열려 있었고, 안에는 누가 있는 기척이 없었다. 밤 되면 강바람이 찰텐데, 얘는 어딜 이렇게 열심히 돌아다니는 거야. 도대체 누구하고 같이 있는 거람. 나는 내 선실로 다가가서 문을 열었다. "……." 내 침대 위에 유리카가 앉아 있었다. +=+=+=+=+=+=+=+=+=+=+=+=+=+=+=+=+=+=+=+=+=+=+=+=+=+=+=+=+=+=+=여러분.. 모음집 대신 전체 한꺼번에 받는 방법은 -LI 모래의책 해보시면 제가 그걸 주제(?)로 쓴 글이 있습니다. ^^;(제목을 세월의돌 갈무리 무작정 따라하기..정도로 지을 걸 그랬나요? ^^;)어쨌든, 많은 분이 찾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유니텔...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군요. ^^;;저는 전혀 가볼 수가 없는 곳이라, 읽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조차잘 몰랐답니다. 그런데 두 분 글 보니까... "그러한" 것 같군요. ^^(그러하다니...어떻다는 걸까;;)Luthien, La Noir. 출력이 끝났습니다. [Enter]를 누르십시오. ━━━━━━━━━━━━━━━━━━━━━━━━━━━━━━━━━━━제 목 :◁세월의돌▷4-2. 마음의 침범 (8)게 시 자 :azit(김이철) 게시번호 :752게 시 일 :99/07/01 02:43:29 수 정 일 :크 기 :7.9K 조회횟수 :94 『게시판-SF & FANTASY (go SF)』 34992번제 목:◁세월의돌▷ 4-2. 마음의 침범 (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6/07 23:48 읽음:218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4장. 제3월 '아르나(Arna)'2. 마음의 침범 (8) "유……리, 지금까지 어디 있었어?" 유리카는 가만히 대답이 없다. 나를 보고 있지도 않고 그저 방 한구석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문간에 그대로 서 있었다. 잠시 동안 우리는 말없이 그러고 있었다. 유리카가 천천히 입을 연다. "나 찾아다녔어?" 왜 저런 말투지? "물론이지. 배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단 말이야." 내가 문을 닫고 들어와 의자에 앉는데 유리카의 말소리가 들렸다. "선실에는 한 번도 안 돌아왔잖아." 나는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유리카는 이미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내 방에 와서 기다리고있는데, 바보같이 다른 데만 찾아다니고, 그리고 다른 여자 애하고괜한 이야기나 실컷 하고. "미안해. 나, 너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계속 찾아다녔었어." "이 배가 그렇게 컸던가?" 그 말에 나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의자에 앉고 보니, 유리카가 앉은 침대 옆에 작은 꾸러미가 놓인것이 보였다. 처음 보는 거라 뭔지 모르겠는데, 손수건 같은 것으로싸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한 번 쳐다보고, 유리카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그녀는 무표정했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하려고 나는 입을 열었다. "너도…… 나한테 할 이야기가 있었어?" 아아…… 왜 내가 하는 말은 이런 것밖에 없을까. 유리카가 가만히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옆의 꾸러미를들어 수건의 매듭을 풀었다. 그 안에는 샌드위치가 들어 있었다. "이거……." 뭐라고 해야 할 지 결정도 못한 상태에서 입을 여는데 유리카가 먼저 말했다. "네가 저녁을 일찍 먹었으니, 밤이 늦어지면 배가 고플 것 같아 여관에 부탁해서 만들어 두었었어." "……." 나는 잠시 자리에서 못 박힌 것처럼 유리카 손위에 얹힌 샌드위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말들이 오갔다. 그 중에서제일 많이 떠오른 것은 물론 '바보' 였다. 그러나 하나도 말이 되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머리에서 열이 오르는 것 같다. 손이고 발이고 다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잘못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 애써 뭔가 말하려 했지만 하나같이 제대로 된 말은 떠오르지가 않았다. 몇 번이고 그대로 삼켰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해야 할 말이뭔가 따로 있다는 야릇한 확신으로 온 몸이 달아 있었다. 유리카가 내 눈을 보고 있다. 내가 뭔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내 입에서 간신히 나온 말이래 봐야 이런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생각……." 유리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고프면 먹어. 놓고 갈게." "유리, 잠깐만……." "피곤하고 졸려." 유리카의 말소리는 뭐라고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마치 매끄럽게다듬어진 보석처럼 투명하고도 단단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유리카를 잡으려고 했지만 마땅한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고도 내가 유리카한테 '친구' 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내가 할수 있는 게 도대체 뭐야? 유리카는 문을 열었다. 나는 뭔가 말을 해야 했다. "유리……." 잠깐, 아주 잠깐 멈추는 듯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유리카의 몸은그대로 문 사이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뭔가가 내 손 사이로 그냥 흘러서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거의 다 흘러 떨어졌다. 얼마 남지 않았다. 잡아야 해, 잡아야 해. 놓칠 수 없어, 놓칠 수 없어. 나는 힘껏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이, 그냥내 마음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을 힘껏 외쳤다. "내가…… 내가, 널 제일 좋아하는 걸 정말 모른단 말야?!" 아아……. 나는 그 자리에 얼어 버린 것처럼 멈추어 섰다. 아니다. 내가 아니라 시간 자체가 얼어붙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시간 뿐 아니라 공간도, 그 자체 그대로, 꼼짝 않고 멈춰 서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 한 말이 무엇에 대한 대답인지 나조차도 몰랐다. "……." 유리카는 문 앞에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멈춘 시간과 공간, 그들과 함께 그렇게 배경처럼 멈추어 서 있었다. 그렇게 멈추어 서 있었다. 아니야. 너는 배경이 아니야. 내 세상에서, 너는 중심이야. 그렇게 서 있지 마. 왜 너는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니? 너에게는……. 너에겐…… 내 말이 들리질 않니?! 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딛으면서 그대로유리카의 허리를 뒤에서 감싸안고 끌어당겼다. 유리카가 잡고 있던 문고리가, 내가 그녀를 끌어당김에 따라 저절로 당겨져 문이 덜컥,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움직이지 않는 석고상처럼, 가벼운 종이 인형처럼, 실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그렇게 그녀는 내 품안으로 아무 저항 없이 안겨왔다. 내 심장이 뛰는 소리. 그리고 매끄러운 그녀의 목덜미에 가 닿는 내 뜨거운 입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온 몸에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 그 순간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내 행동에 대한 판단도 할 수없었다. 유리카가 무엇을 생각할까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냥, 내 행동과 내 정신은 완전히 합쳐져 버린 것처럼, 나는 어떤것도 할 수 없었다. 나한테 어디서 이런 일을 할 용기가 솟았을까. 말이 없는 유리카, 마치 영원히 말하지 않을 것처럼……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듯이 느껴진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문득 내 귀에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파비안…… 네 마음, 나 알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순간, 그저 그녀의 말을 듣는 수밖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너도…… 내 마음, 알지?" 갑자기 목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아서 나는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게 지금까지 내 가슴속을 답답하게 하던 원인인 것같았다.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것 같다. 아, 아니야. 이런 건 아니지. 유리카는 손을 들더니, 조용히 그녀의 허리를 감은 내 손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을 몇 번이나 잡은 일이 있지만, 이렇게나 부드럽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파비안……." "…… 그래." "우리…… 이 마음…… 잊지 말자, 알았…… 지?" 그래. 몇 번이고, 죽을 때까지라도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만 수십 번, 수백 번 소리쳤다. 그래. 그래. 그래. 그래. 그러면서 고개를 계속, 계속해서 끄덕이고 있었다. 내가 턱을 움직이는 데 따라 그녀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는 부드럽게 자기 허리에서 풀어냈다. 세게 감싸안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손을 움직이는 대로,나는 그저 아주 쉽게 손을 풀었다. 손을 내려놓고 나서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 없이, 그저 서 있었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어쩌면 나와 같은 이유였기 때문인지도모른다. "…… 잘 자." "너도……." 문이 닫혔다. 나는 오늘 밤, 아마 잠을 자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좋은 추천, 감사해요- ^^읽는 사람이 배경과 상황, 인물 자체에 몰입할 수 있는 글을 너무나 쓰고 싶었거든요..^^;그리고 주아니... 요즘 여러 분들한테 인기를 얻고 있는 예상 외의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종종 메일에서도 주아니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거든요..^^; (혹시 동정표 아닌가요...? ;; 하여간 예상 못한건 쓰는 저뿐일는지도..--;)어쨌든, 주아니는 끝까지 주인공과 함께 할 인물입니다. 얼마간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으로 조금 비중이 줄어들었다...하더라도 같은 빵을 유리카나 나르디랑 함께 나눠 먹으려니 역시 몸무게 비율상 비중이.....어라, 무슨 헛소리지..--;;게다가 바르제 네 자매나 기타 등등, 요즘 인물이 많아졌습니다. 다시 인기 투표를 고려해봐도 좋을 정도로요- ^^;(주아니의 인기를 시기하며 구석에서 울고 있는 기타 인물들...)에에, 어쨌든 주아니한테는 꼭! 전해주도록 하겠습니다. ^^줄어든 대사는 나중에 이자 붙여 돌려주겠노라고요 ...^^;음..파비안이 계속 강해지면 과연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까요? 적어도 박스 몇 개 정도는 거뜬히 들고 나르는... 아냐, 이웃 생선가게나 철물점과 연합하여 장터 싸움의 일인자 정도로 키울까... 노, 농담이었습니다..^^;;Luthien, La Noir. 출력이 끝났습니다. [Enter]를 누르십시오. ━━━━━━━━━━━━━━━━━━━━━━━━━━━━━━━━━━━제 목 :◁세월의돌▷4-2. 마음의 침범 (9)게 시 자 :azit(김이철) 게시번호 :753게 시 일 :99/07/01 02:43:51 수 정 일 :크 기 :9.6K 조회횟수 :92 『게시판-SF & FANTASY (go SF)』 35072번제 목:◁세월의돌▷ 4-2. 마음의 침범 (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6/08 21:46 읽음:214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4장. 제3월 '아르나(Arna)'2. 마음의 침범 (9) 내가 일어난 것은 해가 중천에 거의 떠올랐을 즈음이었다. 일어날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세수를 하기가 무섭게 유리카의 선실 문을 두드렸다. "유리." 문을 두드리면서 내가 어제 했던 말들을 생각해 보았다. 솔직히 논리적으로 맞는 말은 하나도 한 게 없다. 그 상황에서 왜 그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앞뒤가 맞지도 않았으며, 그런 행동을 했어야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내 감정에 무작정 따르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린 것뿐이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유리, 유리!" "뭘 거기서 그렇게 부르니?" 저만치에서 승강구가 열어 젖혀지는 소리, 그리고 햇살이 한가득배 내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커다란 빛의 기둥이 거기에 세워진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환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주변의 모든 것들이 마치 백열광 아래의 하얀 수정들처럼 갑작스럽게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나는 눈을 비볐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훨씬 밝은, 내가 찾는 그녀의 빛나는 머리카락이 거기에 늘어진 것이 보였다. 눈이 부셔 바라볼 수도 없을 것 같은환한 빛 때문에 그녀 머리의 은빛은 햇살이 연주하는 악기처럼 너울거렸다. 유리카는 승강구로 머리를 내밀고 나를 바라보면서, 모든 빛을 무색하게 할만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해, 나오지 않고.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 무슨 대답이 필요하겠어. 나는 승강구로 달려가 줄사다리를 단숨에 올라갔다. 그녀는 승강구앞에 쪼그리고 앉아 내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빙긋 웃고 있었다. …… 너무너무, 말할 수 없이 예뻤다. "멋져." 유리카는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뱃전으로 걸어갔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라 뱃전으로 다가갔다. "와아……." 그지없이 맑은 하늘 아래, 봄볕 가득한 검푸른 강물을 배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배쌈 아래로 하얀 물거품이 끊임없이 솟아나고, 계속뒤로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밤에는 볼 수 없었던 멋진 모습이다. 저 건너 까마득하게 멀리 보이는 강변에 도시와 집들이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색색가지 빛깔의 지붕들과 손을 흔들며 강변을 달려오다 멀어지는 꼬마 아이의 모습까지. 주변은 그림을 그려 놓은 것처럼 생생한 색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멋지지?" "응." 여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금방 나는 그 생각을 철회했다. 여기는 누가 뭐라 해도 세르무즈땅 아닌가) 넓은 강을 배를 타고 따라가는 기분은 근사했다. 우리가 지금 따라가고 있는 이진즈 강은 폭이 거의 200큐빗에 달하는, 내가 지금까지 본 중 가장 큰 강이다. 아르나 강을 봤었지만, 그때 본 것은 상류였기 때문에 기껏해야 폭은 50큐빗 정도에 불과했다. 더구나 여기는 이진즈 강 중에서도 아직 상류에 속하는 부분이고 보니, 지금까지 말로만 들었던 그 규모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놀라지않을 수가 없었다. 대륙의 젖줄이라는 이름이 새삼스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파비안, 잘 잤어?" 머리는 내밀지 않고 주아니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와서 나는 쿡 웃었다. 옷 속에 있으니 말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그래 그래, 잘 잤어." 강바람이 불어왔다. 뱃전에 선 유리카의 긴 머리카락이 흩어져 뒤로 날렸다. 그녀는 팔을 가볍게 걷고 있었는데, 난간에 올려놓은 하얀 팔과 손이 마치 순수한 석고로 만든 아름다운 조각품처럼 깨끗하게 빛나고 있었다. 문득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꾹 눌러 참았다. 물론 지금까지 오면서 몇 번이나 손을 잡은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왠지 그 때와는 좀 다르게 느껴져서다. 나는 그저 뱃전에서 긴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날리며 강 너머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그저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지금은 그것으로도 충분히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나는 곧 그렇게 유리카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나만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갑판 위를 볼일이 있어 지나가는 선원들 중 거의 전부가 한 번은이쪽 뱃전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물론 그들의 이유는 매번 달랐다. 우리 옆에 늘어져 있는 밧줄의 조임새를 확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저쪽 강변에 보이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들은 꼭 한 번은 유리카와 내가 선 쪽을 쳐다보았다. 유리카는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것처럼 배쌈 아래로 기가 막히게맑은 물 속에 간간이 보이는 물고기들을 손가락질하며 음악 소리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강변의 어린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물고기들은 배를 따라오다가 금방 흩어졌고, 금방 다시 새로운 무리가 따라붙곤 했다. 유리카는 그것을 흥미 있게 바라보았다. 가득한 봄이었다. "파비안, 여기 있었어?" 아아, 나르디. 지금만은 네가 나타난 것이 굉장히 원망스럽구나. 나와 유리카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고, '아시에르 롤피냥' 선원에게인사를 했다. 어제 유리카를 찾아 돌아다니면서 눈치챈 거지만, 젊은선원 아시에르는 배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배 안의모든 사람들로부터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녀석은 초보 치고 일 솜씨가 상당히 좋았고 - 이건 예전에 나도 느낀 것이다. 녀석은 항상 이상한 재주가 많았다 - 어른들에게 친근하고 싹싹하게 행동했다. "날씨 좋지, 파비안?" "멋진 봄날씨예요." 유리카가 내 대신 밝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르디는 유리카 옆에가서 뱃전에 팔을 짚더니 싱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바람이다시 불어와 나르디의 짤막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나는 속으로녀석이 아직 금발이었다면 이 환한 햇빛 아래서 훨씬 멋졌을 거라는생각을 했다. "점심 아직 안 했지? 선장님께서 손님들과 점심 식사를 같이 했으면 한다고 하셔서 그 얘기를 해주러 온 거야." 나는 또 선장 앞에서 이것저것 거짓말을 하려면 피곤하겠구나 하고생각하는 참인데, 문득 유리카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좋은 소식이네요, 마디렌 롤피냥. 파비안은 아직 아침도 안 먹었으니 몹시 배가 고플 거예요." 유리카는 나르디의 가짜 이름을 잘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르디가 엉뚱한 것을 기억해 냈다. "하하하… 파비안, 너는 내가 떠나던 날과 마찬가지로 내내 늦잠이로구나?" "야, 그건……." 18년 가까이 늦잠 한 번 제대로 못 자 봤는데, 억울하게도 두 번의우연의 일치가 나를 완전히 늦잠꾸러기로 낙인찍어 버렸다. 유리카는거기다가 전날 인어의 푸른 눈빛 여관에서 내가 하루 종일 잤다는 이야기를 꺼내서 이 가설을 완전히 사실로 굳혀 버렸다. "그러나저러나, 어디까지 가는 거야? "하라시바에서 내릴 거야." "하라시바엔 무슨 볼일인데?" "그을쎄……." 나는 적당히 대답할까 어떻게 할까 하다가 어제 아라디네와 이야기하다가 익힌 요령이 문득 떠올랐다. "그건 그렇고, 넌 언제까지 이 배에 있을 건데?" "나? 나도 하라시바에서 내릴까 싶은데." 헤에……. 내 요령은 잘 먹혀들어 갔지만 나르디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너 이 배 탄지 얼마 되지도 않았댔잖아? 선원이면 계약한 거 아냐?" 나르디는 고개를 흔들면서 웃었다. "아냐. 나 이 배 탄지 벌써 한 달은 된다. 이진즈 강은 지겨울 정도로 보았어. 뱃일도 꽤 익숙해졌고. 이 배는 강을 타고 계속 왕복하는 무역선이거든. 이 도시 저 도시에 특산물들을 날라주는 거지. 하라시바도 이미 가 봤어. 지금 이 뱃길도 처음 가는 게 아냐. 어쨌든나, 같은 일 계속 되풀이하는 거 좀 지겨워하거든. " "그럼 계약은 곧 끝나는 거야?" "이미 이야기해 두었어. 계약 갱신 안하고 그만 내리겠다고." "너 좋아하는 선원 양반들이 섭섭해하겠다." "그럴까? 하하하……." 셋이서 즐겁게 웃고 있는데 한 선원이 저만치에서 외치는 소리가들려왔다. "아시엘(아시에르의 애칭. 별과 검의 노래호의 선원들은 거의 나르디를 저렇게 불렀다)! 자네, 저 위에 올라가서 퐁텔로 시가 얼마나남았는가 좀 내다보겠나?" "네, 도냐넨 선원님! 물론 그러죠!" 나르디는 손을 들어 경례하듯 이마에 붙였다가 재빨리 떼고는 시원스럽게 웃으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아마 그의 저런 태도가 완고한선원들의 마음에 드는 걸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곧 나는 나르디가마스트에 걸린 줄사다리를 타고 위로 재빠르게 올라가는 것을 볼 수있었다. 별과 검의 노래호의 장루는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사람이 거기에 올라가는 걸 보니 충분히 눈이 어지러웠다. "좋은 사람 같아." 유리카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나는 문득 놀랐다. 유리카가 처음 만난 남을 칭찬하는 일은 참 드문 일이라서다. "아, 물론……." "잘 아는 사이야?" "아냐. 나도 저번에 우연히 만나고서 지금이 처음인걸." 속으로 약간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참인데, 별로 반갑지 않은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르제 자매들이었다. 아라디네가 제일 먼저 소리쳤다. "아, 파비안!" +=+=+=+=+=+=+=+=+=+=+=+=+=+=+=+=+=+=+=+=+=+=+=+=+=+=+=+=+=+=+=어제.. 제 주제에 안 맞는 연애담을 올린 것이 화근이었는지,.... 눈에 다래끼가 났어요. T_T(평생 처음 나본다....;;)한쪽 눈으로 화면을 보려니 몹시 눈이 피로하네요. 아휴... 며칠 전부터 눈 언저리가 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급기야는사고가 벌어진 셈이 됐네요... 도저히 글 쓸 컨디션이 안되어 하나만 올렸습니다. 눈이 나을 때까지... 하나씩만 올릴게요. 용서해 주세요..흑흑;;낫고 나면 다시 두 개 올리죠. 아휴..정말 괴로워요;;또, 추천해주신 여러 분들에게 모두모두 감사를- ^^*명작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합니다. (구, 군계일학...^^;;;)여러분이 인물들에 친근감을 가져주신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에요. 앞으로도 개성을 잃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좋은 글'이라는 말이 아무리 흔하게 쓰인다고 해도, 누군가에게서그 말을 직접 듣는 것은 또다시 느낌이 새롭습니다. 더 열심히 쓰고싶다는 생각을 위해 이보다 나은 것이 없는 것 같아요. ...물론, 다래끼가 다 나은 후에요..T_TLuthien, La Noir. 출력이 끝났습니다. [Enter]를 누르십시오. ━━━━━━━━━━━━━━━━━━━━━━━━━━━━━━━━━━━제 목 :◁세월의돌▷4-2. 마음의 침범 (10)게 시 자 :azit(김이철) 게시번호 :754게 시 일 :99/07/01 02:44:18 수 정 일 :크 기 :5.8K 조회횟수 :100 『게시판-SF & FANTASY (go SF)』 35166번제 목:◁세월의돌▷ 4-2. 마음의 침범 (10) -End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06/09 23:04 읽음:211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4장. 제3월 '아르나(Arna)'2. 마음의 침범 (10) 유리카는 내 쪽을 흘끗 보더니 피식 웃었다. 나는 그녀가 화가 다풀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역시, 조심할 건 조심해야지. "아, 아라디네구나." "아라딘이라고 부르랬잖아." 그녀 뒤로 올디네, 블랑디네, 미르디네도 걸어와서 우리 앞에 섰다. 그녀들도 물론 예쁘지만 어디로 보나 유리카만큼은 아니다. 나와유리카는 뱃전을 등지고 그녀들을 향해 돌아섰다. "뭐 하고 있었어?" "날씨 감상하고 있었지." "날씨 좋지?" "응." 아라디네와 유리카는 어젯밤 같이 선실을 썼기 때문에 이미 아는사이였고, 다른 여자들과는 잠깐 동안 인사를 나눴다. 이 배에 승객이라고는 이들과 우리가 전부였다. "선장이 함께 식사하자고 한 말, 들었어?" 아라디네가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까 어떤 젊은 선원이 와서 이야기해 주었어." 아마 나르디를 말하는 거겠지. 나는 손을 들어서 저기 있다고 장루쪽을 가리키려는 참인데, 미르디네가 갑자기 끼여들었다. "그 사람, 멋있었어!" 하…… 이것, 참. 미르디네는 보기보다 솔직하군. 나는 속으로 슬그머니 우스워져서 어떻게 대답을 할까 궁리하고 있는데 유리카가 난간을 짚었던 손을 들어 저 위를 가리켰다. 아가씨들의 눈들이 모두 한꺼번에 위를 향했다. "저기, 저 꼭대기에 있네!" 미르디네가 다시 한 번 외쳤고, 그제야 보았다는 듯 블랑디네의 감탄이 이어졌다. 잠깐동안 아가씨들은 나르디를 놓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그녀들도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음을 알았다. 유리카조차도 말했다. "좋은 선원이지요." 나르디는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은 스타일이었군. 미르디네는 장루에서 아예 눈을 뗄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 동안올디네와 블랑디네는 유리카에게 말을 걸었다. 유리카는 하라시바까지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고, 블랑디네는 자신들도 거기에서 내린다며함께 여관에 머물면 어떻겠냐는 친절한(!) 제안까지 했다. 물론 내가듣기에는 그건 전혀 친절한 제안이 아니다. 나로서는 그만 그녀들과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유리카는 일정이 바쁘니 하라시바에 오래 머물 것 같지않다며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 동안 미르디네는 다른 곳에 신경이 완전히 가 있어 우리 사이에오가는 이야기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아예 양손을 이마에 들어얹고는 햇빛을 가려 가며 위를 쳐다보는 데 정신이 없었다. 나르디는장루 꼭대기에 서서 한참 동안 뱃머리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아, 저러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저런 데서 어지럽지도 않을까? 선원이란 직업은 정말 멋져-." 흐음…… 저 애는 나르디가 겨우 선원이 된 지 한 달이며, 그것도조만 간에 작파할 작정이란 걸 알까? 올디네는 미르디네를 끌어당겨 목을 감싸안아 주며 말했다(올디네는 무척 키가 컸다). "네 말대로 그는 선원이잖아. 이제 배를 내리면 헤어질텐데." 파하, 나는 나르디도 역시 하라시바에서 내린다는 이야기를 할까하다가 꾹 참았다. 내 경우를 생각해 봤을 때, 나르디라고 그녀들을꼭 달가워하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런 이야기라면 자기가 하고싶으면 직접 하겠지. 그러나 올디네의 이야기가 미르디네에게는 심각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정말, 그렇네." 미르디네는 잠깐 생각에 잠기는 표정이더니 우리가 모두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자 갑자기 표정을 바꿨다. "뭐, 괜찮아. 처음부터 금발이 아닌 것이 걸렸었어. 난 나랑 같은금발 머리인 것이 좋거든. 헤어진대도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저 대답이 진심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는 두 가지점에서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 나르디의 진짜 머리 색깔을 그녀가 보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보일까 하는 점 때문이었고, 둘째, 미르디네의 머리는 금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평범한 노란빛이었기 때문이었다(그것도 내가 기억하는나르디의 금발에 비교했을 때 말이다). 유리카도 그 생각을 했는지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미르디네는 우리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위만 쳐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내려온다." 줄사다리를 거의 내려온 나르디가 중간에 갑판 위로 훌쩍 뛰어내리는 바람에 몇몇 여자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나야 녀석이 얼마나 몸이 가벼운지 잘 알고 있으니 그다지 놀랄 것도 없었다). 나르디는 배 꼭대기에서 부는 센 바람 때문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가씨 손님들이 나타난 것을 보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더니 곧 내 쪽을 바라보았다. "파비안, 잠깐 보고 좀 하고 올게. 선장실로 안내해 줄 테니까 기다려. 프로첸 오베르뉴도요." 그가 나를 향해 그렇게 외치더니 곧 상갑판 쪽으로 뛰어가 버리자덕택에 바르제 자매들의 시선은 모두 내 쪽으로 쏠렸다. "아는…… 사이예요?" 미르디네가 나한테 직접 말을 건 것은 그게 처음이었다. +=+=+=+=+=+=+=+=+=+=+=+=+=+=+=+=+=+=+=+=+=+=+=+=+=+=+=+=+=+=+=4장 2편 끝입니다. 내일부터는 5장입니다-4장은 굉장히 빨리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요즘 한쪽 눈으로 보는 세상.... 머, 멋지군요..;여러분도 한쪽 눈으로 모니터를 몇 시간만 들여다 봐 보세요. 감동받은 일도 없는데 눈물이 저절로 흐른답니다. (주루룩.. T_T)위로 편지, 쪽지 보내주신 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꼭, 금방 나을 거예요. 그렇죠..? (물론 다래끼의 안녕을 기원하시는 분도 계십니다만...--;)추천해 주신 분께- 언제나 그렇게 좋은 느낌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진 보내주신 분, 전부 다 너무 멋있어요- ^^저도 세월의 돌의 세계가 이런 곳일 거라고 생각했었던....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버렸습니다. Luthien, La Noir. 출력이 끝났습니다. [Enter]를 누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