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돌 8-1왕국의 장미(1)~(9)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09/30 (21:51) 게시물 번호 : 5---▷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60 , 줄수 : 25◁세월의돌▷ 약초 아룬드 시작입니다. 인도자 아룬드 끝, 약초 아룬드 시작입니다! 드디어 여름이네요..... 지금 여름은 다 끝났는데. 쩝.. 그냥 추억을 살린다 생각하시고 보시길. ^^약초 아룬드 첫 편의 제목은 '왕국의 장미'입니다. 개인적으로 조금도 망설임 없이 단숨에 지었던 제목이었습니다.. ^^ '핏빛 하늘의만가' 같은 제목은 얼마나 고생을 시켰었는지.. 윽윽;글 첫머리 시에서 느껴지듯, 오랜만에 아름답고 행복하고 경쾌한분위기가 될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지금까지 글 안에서 수십 번이나 언급되었던 순백의 수도, 달크로즈가 드디어 등장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이고 성인지 지켜봐주시길.. 그러나... 많은 분들이 아쉬워하시는 주아니는 여기서도 별로 등장이 없을 것 같군요... 등장시키고 싶어도 어쩔 수 없어요, 여러 사람들과 함께 행동할 때는. 최소 인원으로 단촐해지면 다시.. ^^그리고 식량이나 축내고 하는 일 없는 주아니가 싫다!는 분들도 등장하고 계신데, 실상 주아니가 먹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09/30 (21:53) 게시물 번호 : 6---▷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104 , 줄수 : 232◁세월의돌▷ 8-1. 왕국의 장미 (1)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 약초의 별 '에를라니(Erlani)'가 지배하는 아룬드. 에를라니는 치유와 의료의 별이며 또한 이를 행하는 자들을 보호한다. 이 아룬드의 유래는 어쩌면 초여름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약초들이 새로이돋아나고 또 높은 효능을 발휘하는 것과 관계가 깊을지도 모른다. 옛문헌은 이 아룬드가 여전사 파비안느의 친구이며 '분홍빛 유리병을가진 아가씨'라고 불렸던 에디에르나의 아스엘(Acelle The Edierna)에게서 유래했다고 전하고 있다. 제8월을 지배하며 한 해의 중심축을나란히 이루는 파비안느와는 반대로 온화한 마음씨를 가진 아스엘은,그림 속에서 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키 작은 아가씨로 흔히 그려지며,거의 언제나 흰 치마 가운데 손을 모으고 작은 유리병을 들고 있다. 유리병 속에 든 분홍빛 물은 그녀가 평생토록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을 고쳤다는 에디에르나의 약의 물이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에디에르나는 많은 고증 끝에 아라스탄 호수변의 숲속에서 발견된,흔적만 남은 옛 마을과 같은 곳으로 믿어지고 있다. 에를라니는 육체의 상처 뿐 아니라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별이기도 하며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고통을 벗고 새로운 삶을개척하게 되거나 또한 그러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다. 모든 아룬드가그렇듯, 약초 아룬드 역시 그 가운데 양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장 온화한 치료자를 상징하는 동시에 억지로 상처를 없애려는 일을스스로 경계한다. 떨쳐내어질 수 없는 옛 고통을 애써 지우기 위해행하는 모든 무모한 일들은, 바로 새로운 상처를 만들어낸다. 치유자는 동시에 가장 두려운 살해자이기도 한 것이다. 우기가 끝나고 물기를 듬뿍 머금은 산과 고원, 초지에 무수한 약초들이 번성하는 시기인 이 때는 본격적인 여름을 알리는 매우 아름다운 날씨가 계속되며 오랜 질병을 고치기에는 가장 적기이기도 하다. 약초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최고의 약효를 발휘하며 마법과 연금술에사용되는 비밀의 약들을 만들때도 대부분 이 시기를 이용한다. "모든 상처는 반드시 자신의 약을 가지고 있다"라는 경구가 인용되며 과거의 고통을 직시함,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감,오랜 미망에서 벗어남, 상처를 잊으려 새로운 상처를 만들어 냄, 자신의 고통을 잊으려 다른 사람을 고통에 빠뜨림, 잊을 수 없는 중대한 도움을 주거나 받음, 오랜 여행을 잠시 멈추고 편안한 안식을 취함 등을 암시한다. 이 아룬드를 암시하는 빛깔은 분홍빛이다. - 점성술사들이 달력에 적는 각 아룬드의 의미,그 중 일곱 번째. 1. 왕국의 장미 (1)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붉은 장미를! 사랑스럽고 상냥한 소녀에게 흰 장미를! 겨울부터 기다려왔던 초여름 오늘 만개(滿開)의 축제피어나는 나이의 젊은이들은 거리로 한껏 쏟아져 나오고일부러 모르는 체하려 하지만 그 나이는 어쩔 수 없죠. 편편한 바닥만 발에 닿으면 홀린 듯 저절로 춤추게 되는걸. 고개를 갸웃거리는 귀여운 아가씨, 도톰한 입술은 향기로워라장밋빛 뺨은 활짝 개었고 탐스러운 발등은 춤출 듯 까딱이고사뿐사뿐 다가오는 걸음, 몰랐었나? 아니, 이미 알고 있었죠수 번의 여름을 홀로 보내고 그대만이 내 손 잡을 사람이란 걸진심을 말하는 그대의 아가씨에게 오늘의 활짝 핀 장미를 주어요. 오랫동안 안타깝게 기다려 왔죠, 그대가 어른 되는 이날이 오기를상냥한 이웃의 꼬마 소녀가 어느새 마음 속 가득 차버린 날부터여름 축제에 첫 발 딛는 소녀는 초록색 드레스와 잎사귀 장식그런 그대를 위해 내 웃옷도 녹색 우단을 잘라 멋지게 장식했죠겨울부터 기다려왔던 초여름 오늘 만개(滿開)의 축제피어나는 나이의 젊은이들은 거리로 한껏 쏟아져 나오고일부러 모르는 체하려 하지만 그 나이는 어쩔 수 없죠. 귀여운 연인의 손을 잡고 경쾌한 한 바퀴를 빙글, 빙글!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붉은 장미를! 사랑스럽고 상냥한 소녀에게 흰 장미를! - 세르네즈 델페즈 지방 구전 희극<세르네질로아 로델린느> 3막 1장 서곡 "그대 나라의 수도와는 또다른 아름다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라시바에 필적할 도시는 그 어느 땅에도 없소." 다시, 다가닥대는 말발굽 소리. "마침 날씨가 적당하군요. 최고의 아름다움을 그대 눈에 또 하나더하는 기쁨이 오늘에 이루어질 수 있을 것만 같소." "조금, 기대해 보죠." 그린 듯 섬세하고 선명한 동그라미들이 겹쳐 뭉쳐진 뭉게 구름들이산머리에서 피어오르고 있다. 하늘은 눈에 갖다대고 태양 빛에 겹쳐본 진청빛 사파이어의 빛깔, 흠집 없이 새파란 물감이 곱게 풀어져천지를 뒤덮었다. "여긴 하라시바에 가본 사람이 많아요. 아마, 두 도시의 경쟁을 위한 안목있는 심사관이 여럿일 듯한데요." "그것이 적절한 비교라면, 또한 겸허한 자의 마음에 온화한 즐거움을 더하게 되겠죠." 더할 나위 없이 드맑은 날씨 가운데 백여 기의 말이 대로를 따라걸어간다. 길은 곧게 이어지고 이어져 저 보이지 않는 고개 아래로사라져가고 있다. 고갯마루를 거의 올랐다. 하늘이 가깝고 뭉게구름이 손에 잡힐 듯 닿아온다. 산들바람이 살아 있는 것처럼 뺨에 장난치며 와 닿았다. 공기마저도 향기로운 땅. 그리고 오늘은 약초 아룬드 5일, 길었던 여행이 일단 끝난다. "저건, 들었던 것과는 좀 다른 빛깔이네요?" 유난히 긴 손가락이 들어져 고개 아래를 가리켰고, 말들의 진행이멎었다. 손을 들어 신호하자 뒷 대열도 그 자리에서 말을 멈추었다. 눈이 부시고, 벅찬 공기로 숨이 막히는 듯하다. 저 먼 푸른 땅, 초여름의 신선한 태양 아래, 오랫동안 이야기로만 들어왔던 땅, 음유시인이 노래하고 전설이 기억해온 땅이 있다. 우리가 발딛고 선 고개 아래 골짜기 사이로, 부채처럼 겹겹이 접히며 펼쳐진 도시, 저 먼 곳으로 멀어지고 또 멀어지는 그림같은 땅과집들이 총총이 보인다. 고개 아래 이어진 골짜기는 여자들의 여러 폭겹쳐진 치마 같기도 하고, 길게 주름져 늘어진 베일처럼도 보인다. 그런대로 평탄한 중앙의 평지 옆으로 사이사이 접시처럼 솟아오른 평평하고 좁은 땅들이 있었고, 그런 곳마다 작은 집들이 밀집해 있다. 나는 수도의 땅이 이렇게 척박한 산세 가운데 위치한 곳이리라고는상상도 하지 못했다. 산 속을 뚫고 나오는 좁은 강이 누군가의 머리카락에서 풀려 떨어진 띠처럼 도시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른다. 이진즈 강 하류에서 갈라져 나온 지류, 수도의 젖줄인 크로즈님 강이다. 수도를 둘러싼 크고작은 산들 가운데 하나에 강이 흘러들어오는 동굴 통로가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접시 위에 솟은 깨끗한 빛깔의 하얀성이 보인다. 하얀 빗물로 새로 씻어낸 것처럼, 바로 어제 세워진 것처럼 순수하고 천진한 흰빛. 탑 꼭대기마다 푸르고 흰 깃발들이 경쾌하게 펄럭인다. 날씬한 탑들과 하얀 돌이 쌓인 성벽을 두른 천상의 도시, 헤아릴수 없는 정교한 창과 테라스가 태양 아래 섬세한 빛을 발했고 드넓은정원은 초여름빛으로 단장한 찬란한 녹색 융단이었다. 우아함과 웅장함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눈부시도록 빼어난 달크로즈 성은 성장을한 기품있는 여인, 또는 그 가슴에 반짝이는 고풍스런 브로치의 흰보석처럼 바라보는 입에서 저절로 찬탄을 자아냈다. 도시를 둘러싼외곽성 따위는 없었다. 아니, 필요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싼 험준한지형 자체가 천연의 요새였고, 그 가운데 펼쳐진 땅은 마치 작은 손바닥들을 이어 놓은 듯했다. 그것은 신성한 수도 달크로즈, 순백의 보석. 마치 이곳에 오기 위해 지금까지 여행을 했던 것만 같다. "저 성을 봐요, 노란 색이지 않나요? 마치 황금빛으로 빛나는군요. 달크로즈는 흰색 성이라고 들었는데." 그녀는 트집을 잡는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달크로즈의 흰 벽은 노란 햇살 아래 금빛을 띠고 있다. 나르디는 그런 잔-이슬로즈를 돌아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비록 여전히 말안장에 몸이 묶여 있기는 하지만, 국경을 넘어 여행하는 내내 그녀의 태도는 침착하고 기품있는 것이었으며, 어쩌면 그런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는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처음볼제크 마이프허가 죽고 장례가 끝난 이후 이틀이나 한 마디도 입을열지 않던 그녀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듯 저렇게 잘 적응하는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법도 하다. 잔-이슬로즈는 기사들과 대화를 했고, 나와 유리카, 나르디에게도적당한 호의를 보였으며, 어떤 날 내 착각 가득한 눈에는 여행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정말,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포로가아니라 이쪽 나라를 구경하십사 정중히 모셔가는 걸로 생각했을 정도다. 단, 그런 그녀도 아버지에게만은 태도를 달리하지 못했다. 아직까지 둘은 한 마디도 직접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달크로즈의 입지는 완벽했다. 우리가 지금 들어서고 있는 길은 수도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는 크로즈 고개다. 비교적 평탄한 입구와 오르막에도 불구하고 수월찮은높이를 자랑하는 이 고개는 정말, 달크로즈 시로 들어오는 단 두 개뿐인 관문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크로즈 고갯길은 외국 사절에서 떠돌이 상인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는 통로다. 고갯길 군데군데에 각종 치안과 외부 경계를 위한 초소가 세워져 있고,고개를 내려가 도시 안쪽으로 들어서는 곳에 커다란 출입관리소가 세워져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달크로즈 시를 둘러싼 산들 곳곳에 드러나거나 숨겨진 초소들이 약 백여 개나 세워져 있다고 했다. 철벽 수비라고 하긴 그렇고, 지역 방어라고 봐야 하나? 나머지 한 입구는 크로즈님 강을 타고 들어오는 뱃길이다. 산을 뚫고 들어와, 다시 산을 뚫고 나간다. 수도 바깥쪽에서 들어가는 입구와 달크로즈로 나오는 쪽 모두 네 군데에 수문을 만들어 출입을 엄중히 통제하고 있는 곳이며 그 곳으로 수도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 대부분이 드나든다. 일반인들은 이 길을 이용할 수 없었다. 이진즈 강이가장 넓어지는 하류에서 갈라져 나온 마지막 지류임에도 불구하고,크로즈님 강의 수로는 그다지 넓지 않아서 조금 큰 보트 정도면 모를까 범선은 드나들 수 없었다. "달크로즈는 항전 요새에서 시작한 수도라서 그렇네." 나르디의 얼굴은 햇살 좋은 여름빛 속에서 다른 누구보다, 그 어느때보다도 밝고 쾌활해 보였다. 비교하자면 별과 검의 노래호에서 다시 그와 마주쳤을 때 시원스럽게 미소짓던 얼굴 정도가 떠오르는데,지금은 그 때의 단순한 유쾌함과는 좀 다른 빛, 말하자면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왔다는 안정감과 자신감이 더해져 보인다. 분명, 떠나고싶어해서 뛰쳐나오다시피 궁정을 나왔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더라도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란 역시 다른 걸까? +=+=+=+=+=+=+=+=+=+=+=+=+=+=+=+=+=+=+=+=+=+=+=+=+=+=+=+=+=+=+= 홈페이지 가보신 분은 위에 묘사된 달크로즈 성 사진, 보셨죠? ^^아주 똑같진 않지만 굉장히 비슷한 사진이었어요. 겨울 풍경이었다는 것만 빼고... 그리고 달크로즈 사진은 한 독자분께서 보내주신 것이라, 저도 출처를 모른답니다. 그리고 캐릭터 일러스트가 없냐고 많은 분들이 물으시는데, 저는그런 그림 솜씨가 없답니다.. ^^;오늘 밤 12시로 300회 기념 이벤트(감상&캐릭터 인기투표)가 마감입니다! 얼른얼른 보내주세요... ^^음.. 시간이 조금 넘어도 내용이 멋지면 봐드립니다만.. ^^(사실 지금까지 보낸 모든 메일들이 다 멋졌었다는.. ;)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01 (23:53) 게시물 번호 : 7---▷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77 , 줄수 : 234◁세월의돌▷ 8-1. 왕국의 장미 (2)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1. 왕국의 장미 (2) "달크로즈는 이스나미르의 건국과 함께 세워진 도시라네. 그러니까벌써 수도가 된 지 5백여년은 된 거지. 올해는 듀플리시아드 499년,듀플리시아드 연호를 쓰기 시작한 때부터를 이스나미르의 본격적인시작으로 치니까." 그렇게 오래된 도시 치고는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상당히 아름답고정비도 잘 되어 있다. 처음부터 계획을 잘 해서 세워진 것처럼, 그런데 그 옛날에도 도시 계획 같은 것이 있었나? 나르디는 말을 이었다. "오래 전 대륙에 수많은 나라들이 세워져 세력다툼을 벌이던 시절엔 지금 이스나미르 인의 근간을 이루는 엘라비다 족이 이 천연의 요새 속에서 수많은 침입을 물리쳤고, 역사에 남은 처절한 항전도 몇번이고 벌였었다고 하네. 그 때엔 이 도시는 정말로 요새 도시 그 자체였지. 또 보다시피 항전에 적절한 지형이라 마지막 보루로서 매번죽을 힘을 다해 지켜내어야만 했던 땅이기도 했고 말이네. 대륙에 지금의 3국 체제가 갖춰진 듀플리시아드 3백년경 이후로는 그런 싸움은거의 없어졌지만……. 그렇지만 이제 이만큼이나 나라의 세력이 커진지금, 달크로즈는 나라 한가운데 있는 평화로운 도시가 되어 버렸고,저 철저한 요새로서의 성격도 많이 퇴색되었네. 참, 저길 보게. 저기보이는 달크로즈 성." 나르디는 말 위에서 손을 들어 달크로즈 성의 흰 성곽을 가리켰다. 우리는 그럭저럭 고개를 거의 내려와 있었다. 이제 머리 위로 높이올려다보이는 그 성은 거대한 여신이 늘어뜨린 흰 드레스처럼 아름답고도 엄숙한 느낌을 주었다. 일행은 모두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 위치에서 보았을 때 가장 장엄한 느낌을 주거든." 우리 모두는 고개를 들어 성을 올려다보았다. 저 오래된 성이 어쩌면 저렇게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할 수 있을까. 부서진 돌이라도 있을 법한데 그런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달이 보수를 하나? 아니면 성에 흠집 하나라도 내면 엄청난 벌금이라도? 나르디는 오랜만에 보는 달크로즈 성의 자태에 푹 빠진 것 같았다. 잔-이슬로즈도 고개가 뻣뻣해질 정도로 성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탑의 꼭대기는 도토리 고깔을 쓴 것처럼 초컬릿 빛깔이었고, 성문의침형 아치와 수십 개에 이르는 창틀의 빛깔도 마찬가지다. 성벽 군데군데에는 멀어서 잘 알아볼 수는 없지만 몇 개나 되는 장식석과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진 것이 보인다. 그 위로 몇 개나 되는 하얀 술 달린 푸른 깃발이 펄럭였다. 한참만에 나르디는 고개를 저으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성을 떠나 있는 동안 부모님만큼이나 보고 싶었던 친구가 하나 있다네." 친구? "친한 친구가 있었어?" "응, 아주 친한 친구지. 그러니까 그게 몇 살 때 부턴가, 아마 열한 살 때였지. 그 때엔 그 녀석도 아주 조그마했는데." 네 친구라니, 네가 열한 살일 때 마찬가지로 어린아이인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 나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심 나르디의 친구라는 그 녀석이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금했다. "그런데 지금은 크고?" "그럼. 내 키의 두 배는 되는걸." "뭐?" 내 의아한 표정을 보며 나르디는 고개를 뒤로 젖혀가며 웃었다. 뭔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아니, 네 키의 두 배라니 그게 사람이냐?" "사람?" 나르디는 한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이 멈추는 데는한참이나 걸렸다. 그 웃음 소리를 뚫고 잔-이슬로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자 전하 역시 저와 비슷한 친구를 가지셨던 모양이군요." "그렇습니까?" 둘은 서로 마주보더니 상대방에게 미소를 보냈다. 조금 후에 유리카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이야." "말?"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나르디는 조금 후에 자기와 어려서 함께 자랐던 그 말은 프레아데니 즉 '호수 위에 뜨는 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온 몸이 새카만 흑마라고 말해 주었다. 나르디가 잔-이슬로즈에게 고개를 돌리며그대의 말은 어떠했느냐고 묻자, 그녀는 간단하게만 대답했다. "전하를 처음 만났던 때에, 제가 타고 있었던 것이 바로 그 말이지요." 우리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말은 그날 전투로 내가 죽였던 것이다. 천천히 말을 몰면서 나르디는 달크로즈 성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해 주었다. "달크로즈는 이스나미르의 건국 기초를 닦은 고귀한 이스나에-드라니아라스들이 세운 성이네. 이전이든 그 이후든, 인간의 힘으로 저런성은 결코 다시 세울 수 없다고 말해지지." 왜 그런 걸까? 물론 아름답긴 하지만 인간은 세울 수 없는 성이라니, 무슨 특별한 점이라도 있나? "저 지형을 보게. 만일 저런 위치에 사람의 힘으로 성을 세우려고했었다면, 아마 그 나라는 국민들의 내란으로 멸망했을 걸세. 국민들을 동원해서 저런 곳으로 수많은 목재며 돌을 옮기려고 마음먹는 왕이라면 실제로 쫓겨나 마땅하기도 하고." 나르디는 자기가 태자인 주제에 거침없이 저런 소리를 잘도 하고있었다. "저 성이 저렇게 방금 지은 것처럼 깨끗한 건, 지금은 이 세상에서사라지고 없는 마법이 달크로즈 성의 돌들에서만은 이상스럽게도 아직 가시지 않고 있기 때문이야. 저 성은 최초로 놓여진 초석부터 차례로 하나하나 부수지 않는 이상, 결코 무너지거나 낡거나 더럽혀지지 않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스나에-드라니아라스가 저기에 그 마법을 걸었지. '처음 세워진 그 모습대로 영원하라'라는 마법이야." 내가 그 마법의 이상스런 이름에 고개를 갸웃대고 있자 유리카가거들었다. "마법은 그 사람의 의지로 되는 거라고 말했지? 마법력이 높은 자라면 임의대로 몇 개고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낼 수가 있어. 다만 그것을 자신의 의지에 '각인'만 시킬 수 있으면 되는 거야. 에…… 물론 쓸만한 새 마법을 생각해 내는 창의력도 있어야 하지. 그런데 웃긴 건, 이게 사실 마법사들에게는 '각인'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단 말씀이야." 유리카는 재미있는 말을 했다는 듯 웃었지만 나는 정확히 이해가가지 않았다. 하긴 마법이란 쓸모가 있는 걸 만들어야지, 오리가 말처럼 빨리 달리는 마법을 만들어 내 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어? 오리를 타고 달릴 것도 아닌데. 나르디는 우리 대화를 웃으며 지켜보고 있다가 혼잣말하듯 다시 말했다. "왜 달크로즈에만은 마법력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걸까? 이유는 몰라. 물어 볼 마법사들도 죄다 같이 사라져 버렸으니, 누구한테 묻겠나?" 정말 그렇네. 아참, 유리카한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내가 유리카에게 쓸데없는 기대를 품은 시선을 보내는 동안, 다시움직이기 시작한 일행은 수도의 출입관리소에 도착했다. 이미 미리전령을 보내 두었던 터라, 출입관리소에는 태자 일행을 영접하기 위한 몇몇 관리들이 나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하!" "이제 오십니까, 태자 전하!" 구르듯 달려나오는 관리들을 말 위에서 내려다보자니 좀 우습기도하다. 물론, 내 취미가 고약해서 환영차 달려나오는 사람들을 말 위에서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태자의 일행인 만큼, 저들 앞에서 말에서 내려설 필요가 없으며, 실제로 내려서서는안된다는 소리를 오는 동안 들었던 탓일 뿐이다. 수도에 아직 발가락한 개도 들여놓지 않았는데 벌써 해선 안 되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폐하께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하…… 어찌 소식도한 번 없이 이제야……." 말들 앞에 엎드린 한 관리가 뭔가 몇 마디 말을 늘어놓으려 했던모양인데 뜻밖에도 나르디의 냉정한 목소리가 그걸 잘랐다. "안내하라." 며칠 전부터 내가 느끼기 시작한 사실이 있다. 세르무즈에 있을때, 그리고 전투가 벌어지던 때에는 이 일행의 책임자는 아버지였고,태자인 나르디의 권위는 상당히 형식적이었는데 수도에 가까워지기시작하면서 그 권위의 축이 반대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구원 기사단의 기사들은 아버지의 말에 언제나 절대적으로 복종했으며, 또한 세르무즈에 있을 때라 해서 나르디의 명령을 무시한일은 없었다. 그러나, 초기에 나르디는 명령이라는 것 자체를 거의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이 있어도 아버지를 통했고, 직접적으로 전면에 나서는 일은 피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나르디는 점차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지 않게 되었고, 모든 명령을 직접 내리게끔 되었다. 첫 작전회의 때 조금 안쓰럽게 보이기까지 하던 나르디의 위치는 이제 완전히 바뀌었고, 수도에 도착한 지금, 모든 발언은 당연한 것처럼 나르디의 몫이 되어 있었다. 태자의 지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나는 처음 그 신분을 알았을 때보다 지금에 와서 훨씬 실감나게 느끼고 있다. 출입관리소에서는 거의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다. 일행이 더 늘어났다. 왕궁 관리 몇 명과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왕실 근위 부대 십여 명이 따라붙었다. 내 눈으로 보건대, 솔직히 저 근위 부대가 구원기사단보다 그다지 더 나아 보이지는 않는다. 왕실 근위대라면 분명기사 중에서도 최정예만 모아 놓은 것일 텐데? 잔-이슬로즈는 달크로즈에 들어서자 다시금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적국의 수도에 들어선 지금, 그녀는 엄연히 포로였다. 달크로즈 성에 이르기 위해 도시 중심가를 모조리 가로지를 필요는없었다. 이 도시의 구조는 꽤나 이상해서 도시의 중심부를 이루는 집들과 시장, 각종 시설물 등은 맨 아랫쪽 분지에 밀집해 있었고, 거기서부터 연잎들이 서로 엇갈려 맞대어진 것처럼 좁은 땅들이 이곳 저곳에 불쑥불쑥 솟아나 있다. 물론 그런 곳들에도 다양한 건물들이 자리잡은 것이 보인다. 달크로즈 성은 그 가운데 가장 넓고, 높은 곳에위치한 언덕 - 이렇게 불러도 좋다면 - 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중앙 분지를 거칠 필요 없이 그 연잎(?)들만 밟고서도 성이위치한 곳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투표, 많이 보내 주셨네요. ^^;조만간... 은 아니고 집계에는 좀 시간이 걸릴 것 같네요. 홈페이지에 있는 달크로즈 성, 사진 주신 분께서 출처를 알려 주셨어요. 독일에 있는 노이슈반 슈타인 성이라네요. (어디지?) ^^;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01 (23:55) 게시물 번호 : 8---▷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92 , 줄수 : 189◁세월의돌▷ 8-1. 왕국의 장미 (3)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1. 왕국의 장미 (3) 일행은 도시 중심부로 내려가 보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달크로즈 성으로 향했다. 아니, 미룬 것은 나만인지도 모른다. 나는 몇번이고 그 특이하게 이어진 오르막길을 따라가면서 저 아래쪽에 펼쳐진 예쁜 집들과 광장, 건물들, 시장 등을 흘끔흘끔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규모면에서만 본다면 내가 지금까지 본 도시들 중 최고였다. 하라시바는 평원에 위치한 도시라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볼 기회는 없었기 때문에, 그 넓이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겠다. 어쨌든 꽤 큰 편이던 이베카 시나 드워프들의 수도 파하잔과 비교했을 때, 달크로즈의풍경은 훨씬 오목조목하고 넓었다. "아직도 마음이 안 바뀌신 겁니까?" 성문 앞에 거의 다다랐다. 엘다렌은 나르디의 질문에 대답이 없었다. 아마도 마음이 바뀐 바 없다는 무언의 대답이겠지. 나르디는 재차 물으려다가 생각을 달리한 듯, 다시 시선을 앞으로향했다. 우리 앞에 왕실 근위 기사들이 두 열을 만들어 서고, 관리들이 앞서 나아가 보초들에게 성문을 열도록 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고개를 들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내 생각해오던 것을 찾았다. 있었다. 성문 꼭대기 침형 아치 위쪽에 박힌 열 네 개의 보호석. 파하잔에서 사라졌다던 그것이 여기에는 그대로 있었다. 레 끌로슈의 보호석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그것들은 모조리 흰빛과 푸른 빛 뿐이다. 박힌 모양은 그리 일정하지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건지, 마치 아이들이 조약공깃돌을 흩어 놓은 것처럼 그것들은 불규칙하게 늘어서 있었다. 육중한 성문이 좌우로 크게 열렸다. 달크로즈 성은 해자도 도개교도 없는 성이다. 그렇게 말하면 우리고향의 영주님 성이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물론 그것과는 상황이 틀리다. 일단 성 전체에 무너지지 않도록 마법이 걸린 성이 아닌가! 또한 외부로부터의 침입 문제로 볼 것 같으면, 아무리 해자와 외성이삼엄하게 갖춰져 있다고 한들 저 천연의 방벽인 험준한 산과 고개들을 넘어 달크로즈 시 안으로 들어온 적들을 막을 만한 마지막 보루가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성 자체에 별다른 방비가전혀 없다니, 궁금한 생각이 들어 나는 성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 조금 기다리는 동안 나르디에게 슬쩍 물어 보았다. "아아, 그건." 나르디는 손을 들어 저 아래 분지 쪽을 가리켰다. "저 아래의 백성들이 이미 침략자들에게 유린당한 바에야, 기껏 왕족들이나 살 수 있는 조그마한 성을 지켜서 무엇하겠느냐는 의미라고알고 있네." 오…… 저런, 우리 나라 꽤 괜찮은 나라였잖아? 내가 뭔가 대꾸하기도 전에 다시 대열은 움직였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엘다렌, 번복은 없기예요. 어차피 번복이란 게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 엘다렌은 여전히 침묵 시위중, 즉, 뜻을 바꾸지 않았다는 요지의대답을 한 셈이 되었다. 나와 유리카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어깨를으쓱했다. 더 이상 이야기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다는 의미에서 한 몸짓이다. "알았어요. 거기 가고 안가는 게 무슨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고,싫으면 별 수 없죠." 나는 손을 한 차례 휘휘 내저은 다음, 푹신한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내 생각보다 쿠션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바람에 중심을 못잡고 다리까지 들려 뒤로 넘어갈 뻔 했지만, 다행히 지금은 방 안에유리카와 엘다렌, 주아니밖에 없었다. 아까처럼 최소한 복장과 겉모양만은 나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들로 보이는 '시종'분들이 줄줄이 서있는 데선 덩달아 나마저 훌륭한 사람인 체 하느라 고생이 많았지만말이다. "엘다 생각도 일리가 있어. 한 나라의 왕이 다른 왕을 만나는 것은알현이라고 하지 않지. 왕과 왕은 동등한 존재니까 동등한 지위에서서로 만나야 하는 거야. 지금 그게 가능하지 않다면 만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권위를 지키는 일일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도 국민도 없지만, 엘다렌은 누가 뭐래도 왕인걸. 아니, 다시 말해 그 마음 속이 여전히 왕이라는 거지. "그런데, 우리 이런 옷을 입어야만 해?" 나는 보다 실질적인 고민으로 돌아가서 시종들이 놓고 간 옷 가운데 내가 입을 웃옷을 들어올렸다. 왕을 만날, 아니 알현할 때에는 꼭이런 옷을 입어야 되냐? 의외로 유리카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어디 가나 거기에 맞는 법도라는 것이 있으니까. 그들의법도를 지켜줘야 할 때에는 지켜줘야지. 우리는 손님이고, 그 쪽은주인이거든." "그렇지만, 주인의 입장이 있으면 손님의 입장이라는 것도 있는 거아냐?" 사실, 내 옷은 우리가 처음에 입을 뻔했던 옷에 비해서는 그렇게까지 끔찍하진 않았다. 처음대로 금실은실 수놓인 괴상한 서커스복 같은 걸 입으라고 했다면 이런 고민 할 필요도 없이 안 입는다고 딱 잘라 거절했을 테지만, 곧 나르디가 보냈다는 다른 시종들이 찾아와 내놓은 옷들은 그래도 예의상 입어 줄 정도는 되었다. 나는 그렇다 치고, 저 유리카가 입을 드레스의 심각하게 파인 어깨랑 거기에 달린 큼직한 비단 꽃은 정말이지 너무하다. 여자 옷이니만큼 저걸 나르디가 고른 것은 아닐 테지. 만약 녀석이 골랐다면 쫓아가서 한 대 쥐어박아 줘야 되는데. 나는 드레스 자락을 들어 보며 말했다. "그럼 넌, 이 옷 입을 거야?" "무슨 소리야. 난 안 입어." 아니, 이게 웬 불공평한 소리야? "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입어야 되고, 너는 안 입는다니?" 유리카는 당연하다는 말투로 곧장 대답했다. "첫째로 난 이 나라의 국민도 아니고, 게다가 일반인이 아닌 아스테리온 종단에 몸담은 무녀야. 내가 한 나라의 왕을 알현하는 자리에가는데, 거기서 종단의 옷을 입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 내옷은 내 신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야, 내 옷도 내 평민 신분을 상징하는……." 내가 받아치려는데 그동안 유리카 옷의 비단 꽃 안에 기어들어가려애쓰고 있던 주아니가 문득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파비안, 네가 어떻게 평민이니? 넌 이 나라 최고 기사단 단장의맏아들이라면서?" 나는 말문이 막혀서 우물댔다. "야, 그건…… 아니, 아버지도 작위는 없댔는데……." 유리카가 딱 잘라 말했다. "잔말 말아. 넌 네 아버지를 위해서나, 나르디를 위해서나, 심지어이 나라의 국민 자격으로 보아서도 저 옷을 입는 수밖에 없어. 사실,네 아버지 입장도 생각해 보라고. 18년을 잃어버렸던 아들이 처음 왕앞에 나서는데 겨우 초라한 여행자 복색이나 하고 있어서야 되겠어? 우리가 보기엔 충분히 훌륭한 옷이지만, 네 아버지의 친구들이나 주위 귀족들, 특히 폐하를 생각해 보라고. 그들의 눈이 우리하고 같을리가 없잖아? 그들 눈에 네 아버지를 초라하게 만들고 싶은 건 아니겠지?" 젠장, 그래, 입는다 입어. 까짓거 입으면 될 것 아냐. 정말 다행이었다. 우리가 이스나미르의 국왕 이그논 폐하를 만나게된 곳은 녹옥실이라는 이름이 붙은, 국왕의 알현실 가운데서도 중간크기 정도라는 방이다. 들어서니 바닥에는 녹색 융단이 깔려 있고,정면으로 방의 중간을 가르는 세 개의 계단 위로 테이블과 의자 몇개가 놓아져 있었다. 옥좌라고 보기엔 아무래도 좀 평범해 보이는 그런 것들이, 그것도 정면으로 줄맞춰 놓여 있지조차 않았다. +=+=+=+=+=+=+=+=+=+=+=+=+=+=+=+=+=+=+=+=+=+=+=+=+=+=+=+=+=+=+=홈페이지에 여러분들이 남겨주시는 방명록, 굉장히 재미있게 읽고있답니다. ^^ 굉장히 여기 저기에서 오셨는데 그래도 나우누리가 가장 많은 것 같네요. 하이텔도 많고요. 요즘 진행되는 부분은 오랜만, 아니, 처음으로 나오는 noblesse 이야기인 셈이군요. ^^;한 독자분께서 세월의 돌 200일 이야길 해주셨는데.. 맞나요? 제가계산엔 워낙 약해서.. ^^;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02 (20:52) 게시물 번호 : 9---▷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96 , 줄수 : 183◁세월의돌▷ 8-1. 왕국의 장미 (4)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1. 왕국의 장미 (4) 그것 참, 그렇게까지 화려한 치장도 되어 있지 않고, 그저 다른 복도들과 마찬가지로 벽에는 허리 정도의 높이에 맞춰 새겨진 작은 부조들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테이블 위에는 다과가 차려져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내 눈으로는 찻주전자나 잔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알아볼 능력조차 없었다. 계단 위 우측에 양쪽으로 여는 육중한 나무 문이 하나 있다. 아마저기로 알현 받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모양이다. 문에는 뭔가 이것저것 조각이 되어 있었다. 역시 내용은 알 길 없었다. 그리고 커다란 창문이 그 너머로 나 있다. 두꺼운 녹색 커튼이 걷혀 있는 유리 창문 너머로는 달크로즈 시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그것만은 꽤 구경거리였다. 방 안에는 아직 아무도 와 있지 않았다. "이거, 먼저 앉으면 안 되는 거겠지?" 방 안에는 방금 나가버린 시종들 외에 나와 유리카, 주머니 속에숨은 주아니 뿐이다. 나르디가 아마 함께 여행한 친구들을 소개하겠다고 일부러 조촐하게 자리를 마련한 모양인데, 이런 상황에서 제발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겠지. 나르디는 다행히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국왕 폐하, 왕비 전하, 태자 전하 드십니다." 의외로 조용히 한 시종이 들어와서 알리자, 좀전에 내가 계단 위로쳐다본 문이 좌우로 열리더니, 문을 연 시종 둘이 안으로 먼저 들어와 양쪽에 서고, 국왕 폐하가 들어섰다. 기분이 이상하다. 왜 내가 저 훌륭한 세 분께 영접을 받는 기분이지? 우리 쪽은 둘이고, 저쪽은 무려 셋이 한꺼번에라니. 그러고 보니, 테이블 주위에 놓여 있던 의자는 모두 다섯 개였다. 나는 들어오는 분들의 얼굴을 제대로 올려다보기 전에, 여기까지오면서 배운 그대로 먼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는 유리카도마찬가지다. 여기는 일단 알현실이니까, 왕족을 뵈러 들어오는 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없지 않겠어? 고개를 들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꽤 한참이나 걸렸다. 다들 의자에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건가? "일어나라." 온화한 목소리가 고개를 숙인 내 귀에 들어왔다. "파비안 나르시냐크, 국왕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만수무강하십시오, 국왕 폐하, 왕비 전하, 태자 전하. 저는 유리카 오베르뉴, 아스테리온에 몸담은 무녀입니다." 유리카의 인사는 역시 나보다 능숙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들어 높으신 분들을 그제야 자세히 보았다. 이그논 루아 듀플리시아드, 이스나미르의 국왕 폐하다. 내 평생 이렇게'왕'을 가까이에서 보는 일, 아니 보는 일 자체가 있으리라고는 엘다렌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었는데. 그것도 한 명 보고 나니 계속해서 보게 되는군. 그런데, 내 아버지보다 조금 나이가 많으시다고 들었는데, 이미 머리가 희끗희끗한 것이 거의 노인의 풍모다. 국왕이라는 직업은 역시사람을 일찍 늙게 하는 건가? 나는 감히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못하고 찻잔으로 시선을 보냈다. 왠지 자세히 뜯어보았다간 불경죄에 걸릴 것 같았다. "이리로 올라와 앉아요." 이번에는 왕비의 목소리. 우와…… 이거,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거야? 왕비 아마리에는 듣던대로 정말 상당한 미인이었다. 틀어올린 갈색머리카락과 긴 목이 상당히 우아한…… 아니, 그것보다 진짜 젊은 부인이잖아? 프론느 헤르미보다도 나이가 더 어린 것 같네? 아니, 젊은부인이 아니라, 젊은 아가씨라도 믿겠다! 내 머릿속에 흘러 다니는 생각과는 딴판으로 나는 황송하다는 듯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영광입니다." 나와 유리카는 천천히 걸어 계단 위로 올라가, 남은 두 개의 의자에 하나씩 앉았다. 올라와 앉으니 여기 전경은 정말 기가 막혔다. 성이 도시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계단처럼 아래로 차례차례 펼쳐지는 달크로즈 시의 풍경은 그야말로 그림책에 나오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내 귀에 드디어 나르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 참, 친구의 부모님을 뵈었다고 생각하고 마음 편히 가지게. 있는 격식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없는 격식까지 만들어 낼 필요는없지 않은가?"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쾌활한 목소리와 얼굴에 가득한 미소…… 는 그렇다 치고, 녀석의 차림새란……. "야……." 나는 뭔가 말하려 하다가 버릇대로 말할 뻔 하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에참, 여기까지 오기 전부터 나르디를 예의바르게 부르는 버릇을 조금 들여 놓는 건데, 맨날 '야', 아니면 '임마', '녀석'등으로부르다가 갑자기 이런 자리에서 보니까 입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를모르겠잖아. 그러나 당황한 나와는 달리 전부터 두 가지 호칭을 자연스럽게 번갈아 구사하던 유리카는 생긋 웃으면서 나르디를 향해 말했다. "옷이 잘 어울리십니다, 태자 전하." 음…… 나도 안 어울린다는 것은 아니야. 새하얗고 몸에 꼭 맞는 바지에다 소매가 희한한 모양으로 부풀려진블라우스, 어깨와 허벅지에는 금실 자수, 단추는 보석인지 투명하게반짝이고 있다. 흰 비단 조끼를 입고 있는데 거기엔 한수 더 떠 붉고푸른 자잘한 보석들이 주머니 주위에 가득히 박혀 있다. 조끼에 금테두리는 또 어떻고, 하여간에…… 한마디로 정말 희한한 옷이었다! "고마워, 유리카. 사실 이 옷은……." 나르디는 슬그머니 장난스런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 "자네들 깜짝 놀라라고 일부러 고르고 골라 입은 건데. 이 옷, 정말 끝내주는 의상이지 않은가?" 나는 녀석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대꾸할 수도 없고,왕과 왕비의 눈치를 보긴 했지만, 결국은 소리를 죽여가며 웃느라 곤욕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벌써 상황을 눈치챈 이그논 국왕은 의외로 부드럽게 웃었다. "태자는 예전부터 소소한 일에서도 장난하기를 즐겼지." 아마리에 왕비는 가벼운 미소만 지었을 뿐, 조각처럼 가만히 앉아있다. 잠시 후 그녀가 직접 입을 열어 다과를 권했다. 나와 유리카는똑같이 차를 두 모금씩 마시고, 마들렌 쿠키 한 개씩을 집어 먹었다. 차는 무슨 차인지 내가 알 재간은 없어도, 어쨌든 향기로웠고, 또한몹시 뜨거워서 나를 골탕먹였다. 유리카로 말할 것 같으면 어째서 나와 똑같이 하게 되는 것인지 까닭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훨씬 침착해 보였다. "태자로부터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나르시냐크 단장의 아들이라고했던가?" "예, 폐하." 오히려 국왕에게 말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적어도 실수로 반말을쓸 염려는 없었으니까. 나는 시선을 왕의 흰빛 섞인 금빛 수염으로가져갔다. 슬그머니 눈을 올려 얼굴도 재빨리 살펴보았다. 처음엔 몰랐는데, 지금 보니 또렷한 이목구비와 금갈색 눈동자, 빛 좋은 금발,나르디와 많이 닮은 얼굴이다. 나르디가 늙으면 저런 얼굴이 될까? "훌륭한 아들을 되찾게 되어 아르킨이 많이 기쁘겠고나. 아르킨과나는 군신 관계를 떠나 어려서부터 오랜 친교로 맺어진 사이, 내 아들과 아르킨의 아들이 친우라 하여 이상할 것은 없겠지. 앞으로도 태자의 친구로서 태자를 많이 도우라." "황공하옵니다, 폐하." 흐음,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배운 바에 의하면, 왕이 뭐라고 말했을 때에는 '예, 폐하', '황공하옵니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를 돌아가며 차례대로 쓰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 다음은'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쓸 차롄가? +=+=+=+=+=+=+=+=+=+=+=+=+=+=+=+=+=+=+=+=+=+=+=+=+=+=+=+=+=+=+=홈페이지 방문객 수가 천명을 넘어섰더군요.. 혹시 백 분이 열 번씩의 방문을... ^^;;혹시 멋진 풍경 사진 파일을 갖고 있으시고 그 사진이 세월의 돌의어느 장면에 맞다고 생각하신다면, 설명을 써서 보내주세요. ^^ 선별하여 홈페이지에 실어드릴게요. (단, 너무 작은 사진이거나 해상도가 너무 낮으면 곤란하고요.. 또, 사진 옆에 양복입은 관광객이 걸어가고 있거나 한다면...;;)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02 (20:53) 게시물 번호 : 10---▷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105 , 줄수 : 193◁세월의돌▷ 8-1. 왕국의 장미 (5)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1. 왕국의 장미 (5) "갈 길이 바쁘다고 비록 들었으나, 잠시라도 성에 머물면서 망중한(忙中閑)의 시간을 갖는 것도 고된 여정에 도움이 될 터. 또한 태자의 환궁을 축하하는 파티가 내일 저녁 거행될 예정이니 또한 참여하여 궁정 귀족들의 면면을 익히고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하라." 음, 그러니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누가 해준 말이었는지, 정말 기가막히게 맞는군. 이그논 국왕은 이번엔 유리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검은 옷을 잠시 바라보는 듯했다. "그대는 아스테리온이라고?" "예, 폐하." 어쩐 일인지 유리카도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대답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직 나어린 소녀가 무녀의 중임을 감당하기 쉽지 않을 터, 그런만큼 신중하고 지혜있는 자라 할 터이니 태자의 친구로서 감히 손색이 없다 하겠노라." "황공하옵니다, 폐하." 어떻게 된 거야? 질문 방식이 똑같은 건가? "무녀가 무녀의 복색을 갖춤은 비록 어떤 자리라 한들 지당한 일이겠지. 그러나 내일 있을 파티에서는 좀더 아름다운 옷을 내릴 터이니한번쯤 입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노라. 귀족의 딸들 가운데서도 보기드문 아름다운 소녀이거늘, 그 나이에 걸맞는 즐거움을 가져 보는 것이 어찌 죄가 되리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앞으로 누군가 왕궁에 갈 일이 있다고 하면 반드시 이 3대 대답 목록을 전수하고야 말리라고 나는 다짐했다. 나 역시도 한 번 왕궁에왔는데 두 번 오지 말라는 법 있겠어? 내가 열심히 차례를 헛갈리면 안되겠다고 생각하며 대답들을 다시생각해보고 있는데, 나르디가 불쑥 말했다. "농담 아냐. 내일 파티엔 꼭 와줘야 하네." "야, 물론…… 가고말고요." 이따가 나르디를 따로 만나거든 꼭 주의를 주고야 말리라. 국왕 폐하 앞에서 나한테 말 걸지 말라고. "유리카도, 약속이다?" "태자 전하의 명이시니 사양치 않고 받들겠나이다." 우리 셋 사이에는 유리카의 대답 때문에 또다시 웃음을 억지로 참는 끅끅 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르디는 입가를 가렸다가, 차를 한 모금 홀짝 마시고는 다시 입을열었다. "파티엔 이슬라도 올 거야." 이슬라? 이슬라가 누구였더라? 내가 고개를 마음대로 기울이지도 못하고 고개만 숙인 채 열심히이슬라가 누구인가 생각하느라 끙끙대는데 옆에서 유리카의 목소리가들렸다. "세르무즈의 잔-이슬로즈 아미유 드 네르쥬 공주 전하 말씀이십니까?" 커어……. 나르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잔-이슬로즈라는 이름이 좀 길어서 애칭이 없느냐고 했더니알려 주더군. 하라시바 궁정에서는 모두들 이슬라라고 부른다고. 괜찮은 어감이라 나도 쓰기로 했네." 이슬라? 이슬라? 하긴, 그거 괜찮은 이름이다. 확실히 짧아졌군. 그렇지만…… 내가 나르디 이름을 부르듯 그녀 이름을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어감 좋은 이름을 불러 보긴 날 샜군. 그런데, 적국의 공주이자 포로인 그녀가 파티에 참여한다고? 나르디는 내 의아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가볍게 설명을 덧붙였다. "어차피 세르무즈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닌데, 이곳에 머무르는동안 정식 손님으로서 접대할 생각이네. 물론, 감시에 소홀해선 아니되겠지." 잔-이슬로즈 공주가 과연 즐거운 마음으로 파티에 참여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군. 다과를 권할 때 이래로 아마리에 왕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 태자를 많이 돌봐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오. 소식이 없는 몇 년간 얼마나 걱정하였는지 모른다오. 든든한 친구들이 곁에 있어 주었다 하니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없소." 젊은 왕비의 목소리는 비록 아직 충분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지는못했지만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며 나름대로 어울리는 우아함을 지니고있었다. 비록 나이 어린 왕비라 해도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꽤 잘 해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어느 걸로 대답을 할까? "황공하옵니다, 전하." 음, 이게 적절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몸이 불편하여 내 직접 파티에 참여하기는 어려울 듯하오. 접대에소홀함을 부디 용서하기 바라며, 성에 머무는 동안 즐거이 지내 주기바라오." 어, 이번엔 무슨 대답을? 대답 목록에서 적당한 것이 없잖아? "소홀이라니, 당치 않으시옵니다, 전하. 저희는 아무 불편이 없사오니 가히 심려치 마시옵소서. 옥체 미령하심을 조속히 보중하길 바라마지 않사옵나이다." 내 대신 유리카가 적절해 대답해 주었다. 나는 내 목록에 '당치 않으시옵니다'와 '심려치 마시옵소서'를 추가해 넣었다. 몇 마디 이야기가 더 오간 뒤에 온 몸이 근질거리는 회견은 드디어끝났다. 이 날의 차 맛과 쿠키 맛이 어땠는지에 대해 누가 나중에 물으면 무조건 훌륭하고, 또 훌륭했다고 마구 주장할 참이다. 다시 말해,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왕실 쿠키가 맛있지, 설마 뭔가 잘못되기야 했으려고. 창으로 비스듬히 햇살이 든다. 테이블 위의 흰 다기가 은은한 빛을내고, 크지 않은 방은 정말 이름에 걸맞는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국왕이 일어서고, 이어 왕비가 일어섰다. 몸을 돌리는데 이상한 것이 눈에 띈다. 왕비가 입은 옷, 약간 헐렁한 듯한…… 어, 그러고 보니? 혹시…… 아기를 가지신 건가? 물어볼 입장도 아니고, 쳐다보는 것도 실례가 될 터라 나는 궁금한것을 꾹 누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세 분 폐하와 전하들이 왔던 문으로 나간 후, 나와 유리카는 잠시 기다려 다른 문으로 나왔다. 우리는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 괴상한 복장의 나르디가 복도에기댄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 언제 이쪽으로 나왔냐?" +=+=+=+=+=+=+=+=+=+=+=+=+=+=+=+=+=+=+=+=+=+=+=+=+=+=+=+=+=+=+=멋쟁이 검에 대해 질문 보내주신 분이 있네요. 파비안 본인 이외에닿는 모든 것들에 열이 전도된다면, 등 뒤로 닿는 옷이나 비가 올 경우 비를 맞을 때에도 열이 전도되느냐고 물으셨지요...(맞죠?)재미있는 질문이었습니다만, 너무 조작적으로만 생각하신 듯하네요. 이야기 속에선 멋쟁이 검이 마법을 지녔고, 따라서 주인 외에 타인의 손길을 거부한다는 것이 기본적 컨셉이지요. 그리고 그 마법이란 제 설정 속에서는 마나와 같은 것이 아니라 의지와 정신의 힘이고요. 멋쟁이 검의 마법이 파비안의 의지와 정신의 힘에 따라 조절된다는 것은, '잃어버린 땅으로의 여행' 편에서 여명검의 고향으로 갔을때 이미 설명되었었죠. 간단히 말씀드려서, 검이 타인의 손에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나,칼레시아드와 보크리드를 이루는 것이나 모두 똑같이 파비안의 의지와 정신의 힘에 연유합니다. 그러므로 파비안 스스로는 정확히 느끼고 있지 못하지만 실제로 검은 그의 의지에 맞추어 움직이고 있는 셈입니다. 파비안이 페어리들의 펀치에 검을 집어넣어 수증기를 만들고자 했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죠(물론,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파비안이 처음 검을 잡았을 때, 그의 손에도 잠깐 동안 뜨거웠던 것을 생각해 보면요). 헬코즈나 티무르에게 협박을 할 때에도마찬가지고요. 그렇다면, 파비안이 그 힘을 잘 쓰기만 하면 타인의 손이 닿아도뜨겁지 않게 만들 수 있냐고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파비안은 지금그런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으니(단순히 검의 능력이라고만 생각하고있으니) 그런 마음을 먹을 가능성은 희박하겠죠. 파비안은 마법의 운용에 있어 아무 지식도, 경험도 없는데다 구경한 일조차 적으므로 존재감조차 사실 희박하지요. 제 세계에서 마법은 운용자와 별개로 존재하는 일은 없습니다. 마법 걸린 아티팩트라 하더라도 그 주인의 힘이 별 볼일 없으면 제대로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을 잘 택했어야지.. (파비안이 보크리드를 해내는 날은 언제나 올까...)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03 (20:09) 게시물 번호 : 11---▷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80 , 줄수 : 183◁세월의돌▷ 8-1. 왕국의 장미 (6)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1. 왕국의 장미 (6) 나르디는 영락없는 개구쟁이로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그럼, 내가 점잖은 분들하고 마주 앉아서 무슨 재미가 있겠나?" 그는 벽에서 몸을 떼더니 양손을 예복의 주머니에 찌르며 옷이 구겨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다시 싱긋 웃었다. 그는 눈을 잠시 가늘게뜨더니 말했다. "나하고 같이 안 갈 테냐? 난 이제부터 그동안 성이 얼마나 변했는지 구경하러 갈 참인데." 푸하, 두말하면 잔소리지. 나르디를 따라 다니는 것보다 더 편하게성을 구경하는 방법이 또 있겠어? "안내나 잘해." "길은 잃지 않겠지?" "아무리 그래도 태어나서 십 몇 년을 죽 살아온 집이야. 최소한 네가 하비야나크 아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다네." "뭘, 백년도 넘게 살아온 파하잔에서도 길을 잘 모르던 엘다렌을생각해 보라고." 그리고, 바로 말했던 그 다음날 저녁이 되었다. 아니, 저녁은 아직 아니고 지금은 저녁 직전이다. 저녁이란 역시저녁을 먹은 다음부터가 저녁이라고 할 수 있지. 아직 저녁은 안 먹었으니까 저녁은 아니야. 그럼 점심인가? 음…… 뭔가 말이 이상해지는군. "엘다렌, 여전히 같은 생각이라고요?" 엘다렌은 또다시 무응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흐음, 그렇다면 뭐 할 수 없지. 나하고 유리카하고 갔다가 올게요.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께서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난 안 갈래." 어라? 나는 놀라서 유리카를 바라보았다. "안 간다고?" 유리카는 여전히 검은 아스테리온의 옷 그대로다. 어제 나르디와함께 성 안을 돌아다니면서 그녀의 예쁜 얼굴과 대조되는 이 복장은가는 곳마다 상당한 눈길을 끌었다. 시녀들조차도 고운 빛깔로 된 하늘하늘한 옷을 차려입고 있는데, 이런 궁정에서 상복을 연상케 하는새카만 옷이라니 좀 시선을 끄는 게 아니다. 게다가 그 옷 모양이 또한 좀 이상한가. 대부분의 시종이나 시녀들은 아스테리온 무녀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선지, 그저 그녀의 복장을 이상하게만 보았던 듯했다. 그런데 나르디가 우리를 데리고 앞장서 들어갔던 서재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오오, 전하, 오셨습니까?" 서재 안에는 다른 사람이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 호리호리하게 키가 크고 약간 앞으로 등이 구부정한 5,60대 정도의 남자. 영락없이학자로 보이는……. "아, 타데아 선생님!" 나르디는 큰 소리로 부르면서 달려가 그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세상에, 저 자는 아르노윌트의 재수 없는 검술 선생하고는 도대체무슨 관계지? 한참동안 두 사람이 저들끼리 회포를 푼 뒤에 이야기를 듣고 보니그는 나르디를 어려서 가르친 선생이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 분야라는 것도 검술하고는 전혀 무관했다. 태자의 선생님이 아닌 지금은 궁정 학자, 다시 말해 궁정에서 주는 돈 받고 책 읽고 글 쓰는 사람. 세상에, 좋은 직업이기도 해라. 물론 머리 좋아야 하는 거겠지만,주로 몸으로 때우는 일만 해오던 내 눈에는 완전히 놀고 먹는 직업으로 보였다. 그런 그가 유리카를 바라보자마자 말했다. "오오, 아스테리온 무녀이십니까?" 그랬다. 아스테리온 종단은 유리카가 살았던 2백년 전에 비해 많이쇠퇴해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스나미르에서는 듀나리온의 생명의 계를 지키는 일이 거의 국교에 가깝게 널리 퍼져 있었고, 아스테리온의발상지라는 마브릴 족 나라들은 예전부터 그다지 종교에 구애받는 편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심지어 마브릴 족인 마르텔리조의 리스벳에라르드조차 듀나리온의 계를 지킨다고 했었잖아? 사실을 말하자면 듀나리온이나 아스테리온이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집단은 못된다. 스스로의 정해진 계율을 지키며 세상 여러 곳에서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트루바드나 검은 예언자들이나 마찬가지로 한 원칙 하에 모인 자들의 집단이라는 의미가강할 뿐, 신도를 거느리는 종교는 아니었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계를 일반인들에게 강요하지도 않았고, 그들이 신성시하는 것을 함께신성시하라고도 하지 않으며, 서로를 비방하는 일도 없었다. 가끔 대륙 여기저기에서 생겨나곤 하는 이상스런 '종교'라고 하는 것들과는그 수준이 달랐다. 어쨌든 2백년이 지난 지금, 이상하게도 아스테리온의 세력은 많이위축되어 있었고, 무녀로서 새로 입문하는 사람들도 드문 모양이었다. 그래서 젊은 무녀인 유리카를 보자 그 학자 타데아는(이렇게 부르는 편이 낫겠다. 원, 엉뚱한 사람이 자꾸 생각나니) 정말로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놀랍네요. 언제 입문하셨습니까? 죽음의 계를 지키는 일이 쉽지않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아니, 그보다 영의 단계는 많이 높이셨습니까?" 무녀들이 얻는 것이 영력이니만큼, 그들은 무녀로서 단계가 높아지는 것을 영의 단계를 높인다고 말한다. 타데아의 말은 무녀를 만난학자로서 당연한 예의로써 물은 질문이었다. 유리카는 그저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입문이지요, 뭐." 거짓말인 거 나는 다 안다. 2백년 전 유리카의 영적 단계가 거의최상위에 다다라 있었다는 것을 이미 전해 들은 나로서는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그런 것쯤 다 설명할 생각은 없는모양이었다. 나 같으면 자랑하고 싶어서 좀이 쑤셨을 텐데. 아니, 영의 단계가 높아지면, 그런 것 자랑하고 싶은 치졸한 마음 쯤은 저절로 사라져 버리는 건가? 어제 일이야 어쨌든, 유리카가 파티에 가지 않겠다는 것은 정말 의외였다. "아니, 이유가 뭐야?" "어제 나르디한테 얘기 들었잖아." 그게 설명의 다다. 그래, 나르디가 했던 이야기라면 나도 같이 들었었다. 파티에 대한 거라면, 아마 서재에서 학자 타데아와 함께 소파에 둘러앉아 했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일 텐데, 그게 뭘 어쨌다고? "내일이 약초 아룬드의 첫 파티라는군." 나르디가 그렇게 말하자 학자 타데아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말했다. 그는 어깨가 워낙 구부정해서 고개를 그렇게 끄덕이자 꼭 조는것처럼 보였다. 눈도 워낙에 작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정말로 첫 파티로군요. 약초 아룬드의 첫 파티라면예의 장미론으로 또 한참이나 시끄러울 텐데요?" "선생님 말대롭니다. 마침 제가 환궁한 것을 축하하는 파티이기도하니, 이번 건은 예사롭게 지나가지 않을 것 같군요. 제가 영 적당하지 못한 때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됩니까? 하하하……." 한참이나 둘이서 끼리끼리 오가는 얘기에 이해를 못한 우리가 중간에 말을 자르고 묻자, 학자 타데아는 또다시 버릇처럼 조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대답해 주었다. "모르시겠지요. 약초 아룬드는 바로 여름의 시작, 초여름의 첫 파티가 있을 때면 언제나 호사가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는 이야깃거리가있습니다. 바로 장미 논쟁이죠." 장미 논쟁? 거 이름 한번 요상하다. +=+=+=+=+=+=+=+=+=+=+=+=+=+=+=+=+=+=+=+=+=+=+=+=+=+=+=+=+=+=+=저것이 바로, 이 편의 제목이 '장미 논쟁'인 까닭입니다. ^^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03 (20:10) 게시물 번호 : 12---▷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112 , 줄수 : 179◁세월의돌▷ 8-1. 왕국의 장미 (7)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1. 왕국의 장미 (7) "솔직히 저는 굉장히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유래는 이렇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20년 쯤 된 일인가, 이스나미르를페릴린 국왕 폐하의 아드님 루드로엘 국왕께서 통치하시던 땝니다. 그 때에도 태자 전하의 이름은 나르디엔이었지요." 알고 보니 학자 타데아의 주 업무는 왕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이런 이야기는 거의 전공과 같은 분야였다. 그는 이야기를 잘했고, 스스로도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때는 초여름, 바로 이맘때쯤인데 나르디엔 태자 전하의 비를 간택할 때가 되어 궁정에서는 파티가 잦았지요. 꼭 귀족 아가씨만이 태자비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때에는 나라에서 많은 아가씨들이 달크로즈로 모여들고, 파티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아무래도 결국은 어느 귀족 아가씨가 비로간택되기 마련이지요. 궁정에서 여러 귀족과 왕족들간의 돈독한 친분관계나, 아가씨들이 치장하는 데 드는 모든 비용들, 태생으로부터 교육받는 각종 예의와 몸가짐, 그리고 어려서부터 주의깊게 가꾸어 온외모 등에 있어 평민 아가씨들이 귀족을 당하기란 어려운 일이거든요." 아마 그렇겠지. 나는 흥미가 생겨 물었다. "그래서요?" 학자 타데아는 나보다는 유리카의 얼굴을 쓱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말을 이었다. "거의 태자비가 될 것이 확실한 귀족 가의 아가씨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때의 나르디엔 태자 전하는 그다지 연애에 관심이 없는 분이라 누가 태자비가 되느냐에 대해 본인의 일인지 과연 의심스러울정도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래서 그 아가씨가 거의 확정적이었죠. 만일 나르디엔 태자 전하가 적극적으로 이 아가씨가 좋다, 저 아가씨가 싫다, 이런 식으로 나섰다면 그렇게 되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해서……." 그러나저러나, 듀플리시아드 왕가에서는 웬만해서는 후손에게 같은이름을 짓지 않기로 유명한데 어째서 똑같은 나르디엔이 둘일까? 세르무즈의 네르쥬 왕가에서야 프랑도비네 14세도 모자라서 그 아들인태자까지 프랑도비네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걸 묻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거의 확정된 줄로 모두들 알았었는데, 갑자기 한 아가씨가 나타난겁니다. 그것도 평민 아가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가씨가 그다지 훌륭하지 못한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파티장에 있는 어느 귀족 아가씨보다도 나아 보였다는 겁니다! 놀라운 일이었죠. 그야말로 꾸미는 것 자체가 필요 없는 타고난 미인이었던 겁니다. 게다가 성격도쾌활하고 꾸밈없는 것이, 자유분방하시던 나르디엔 태자 전하가 딱좋아할 만한 아가씨였죠." 호오, 유리카처럼? 내 시선을 느꼈는지 못 느꼈는지, 유리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재촉했다. "계속 해보세요." "태자 전하는 오히려 그다지 개의치 않으시는데, 귀족 아가씨 쪽에서 못 견디게 불안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꺼낸 것이 바로 장미 논쟁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지위와 친분을 이용하고 싶었던 겁니다. 파티장에서 누가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인가를 여론으로 결정하려 했던거죠. 즉, 누가 그 날의 장미인가, 미모 뿐이 아니라 모든 태도나 자질 면에 있어서 누가 가장 뛰어난가를 가리자는 의견을 내놓았던 겁니다. 물론, 태자비 간택이라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괜시리 그런 것을 비교하고 알아보자는 데 점잖은 귀족들이 찬성했을 리 없었겠죠. 하지만, 때는 때였고 많은 아가씨들과 그녀들의 부모들은 모두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의견에 찬동했습니다." 알 것 같았다. 다들 자신이 뽑히게 되면 그게 곧 연애에 무심한 태자에게 태자비 자격으로서 받아들여지리라는 계산이 선 거겠지. 어차피 그냥 있어봐야 안될 거, 한 가닥 가능성이라도 잡고 도박이라도걸어 보자 이거 아니야. 속으로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나보다 유리카가 먼저 웃어 버렸다. "아하하하하……." 우리는 모두 유리카가 웃음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카는정말로 우습다는 듯이 키득대며 한참을 웃었다. 오히려 내가 어리둥절해질 정도였다. "하하, 하하…… 미, 미안해요, 계속하세요. 후훗, 아하하……." 까닭은 나중에 물어보리라 생각하면서 일단 다시 학자 타데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되었냐고요? 이긴 것은 장미 논쟁을 시작한 귀족 아가씨였습니다." 어라, 이건 의외의 결말이잖아? 그 예쁜 평민 아가씨가 이겨야 되는 것 아냐? 학자 타데아는 내 표정을 보고는 짐작했다는 듯 빙긋 웃으며 말을이었다. "까닭은 이렇습니다. 남자분들이야 취향대로 투표했겠지만, 아가씨들은 생각이 달랐던 겁니다. 누가 보아도 가장 예쁜, 그러나 낯선 아가씨, 그녀가 갑자기 이기게 되면 그 누가 기분이 좋겠습니까? 오히려 너무 예쁘면 사람들의 질시를 받게 되는 법입니다. 차라리 처음의귀족 아가씨 쪽이 이기는 편이 훨씬 감정상 낫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학자 타데아가 들려 준 이야기의 전말은 이랬다. 그러니까 매해 초여름의 첫 파티마다 가장 아름다운 장미를 뽑는 풍습 아닌 풍습이 그이후로 생겨버렸다 이거지. 거기다가 나르디 역시 그 야릇한 논쟁을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옮겨보자면……. "우스운 건, 왕궁에 혼기에 가까워지는 나이의 왕자가 있을 때면이 논쟁이 더욱 활기를 띤다는 것이네. 왕국의 장미로 인정받은 아가씨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부상(副賞)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왕자와함께 그날 파티의 모든 댄스에서 릴(reel)의 앞장을 서는 것이야. 내가 아직 어렸을 때엔 이건 그저 여흥삼아 가볍게 지나가는 정도였는데, 점차 내 나이가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열띤 경쟁으로 변해 갔지. 이건 마치 마상 시합에서 우승한 기사가 마음에 드는 아가씨에게 화환을 바치는 것 이상이야. 만약 이런 풍습이 없었다면 기사의 화환을받고 본의아니게 결혼 상대자로 낙점되어버리는 아가씨의 기분 같은건 절대로 몰랐을 텐데. 그거, 그렇게 썩 좋은 기분만은 아닌 듯하더군."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표정은 몹시 웃겼다. 더욱 웃겼던 것은 녀석이 자신을 '혼기에 가까워지는 나이'라고 표현한 점이다. 세상에, 너하고 내가 나이가 같은데, 혼기가 어쩌고 저쩌고 한단 말이냐? 어쨌든간 나르디가 오래간만에 궁정으로 돌아온 지금, 이번 파티의논쟁이 치열하리라는 것은 이제 나조차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유리카가 파티에 안 나가겠다는 건, 쓸데없는 논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건가? "바로 맞췄어. 난 그런 이상스런 데서 유래한 불필요한 논쟁의 대상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아." 유리카의 생각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유리카가 나르디와 함께 릴의 앞장을 서는 것도 그다지 달가운 일은 아니고말이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파티 내내. 그렇지만, 국왕 폐하가 권한 일인데? "그거, 거절해도 괜찮을까?" 유리카는 나보다 대담한 건지, 아니면 자기 일이라 자기가 결정해야 옳다고 생각한 건지, 어쨌든 처음 뜻대로 파티 불참을 밀어붙이고말았다. "파비안, 나 없다고 다른 아가씨한테 함부로 눈돌리면 혼나-." 유리카가 파티장으로 가기 직전, 내 옷을 가다듬어주면서 재치있게말하더니 가볍게 눈을 찡긋, 해보였다. 걱정 푹 놔라. 어디에 간들너보다 더 사랑스런 소녀는 없을 테니까. +=+=+=+=+=+=+=+=+=+=+=+=+=+=+=+=+=+=+=+=+=+=+=+=+=+=+=+=+=+=+=제 하이텔 아이디를 몰라서 그냥 나우 E-mail 로 보낸다는 분들이종종 계신데, 제 하이텔 아이디는 나우누리 아이디와 똑같습니다. 즉, '모래의책' 이지요. E-mail을 위한 영문 아이디도 같고요. enjolas@nownuri.net, 그리고 enjolas@hitel.net 이니까요. 그리고 goldbeer 님, 제가 아이디를 잘못 썼습니까? 죄송합니다. ^^; (금빛 맥주와 시원한 맥주의 차이는...;)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04 (22:20) 게시물 번호 : 13---▷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116 , 줄수 : 202◁세월의돌▷ 8-1. 왕국의 장미 (8)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1. 왕국의 장미 (8) "너도 살짝 구경하러 와." 내 말에 유리카는 가볍게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아프다고 핑계대고 안 나가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구경을 하러 가겠니?" "갑자기 나았다고 하지 뭘." "파비안 크리스차넨- 어서 늦기 전에 파티에나 가세요-." 그녀는 뒤에서 두 손으로 등을 밀며 나를 문쪽으로 밀어냈다. 나는못이기는 체 웃으면서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엘다하고 주아니하고 놀면 돼. 왕비 전하께서 나를 위해 저기 파티 음식들도 보내셨잖아." …… 파티 음식들에는 벌써 주아니가 들어가 그 안에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는지 빠짐없이 말해 줄게!" 그리고 나는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안내를 받지 않고 내가 어찌 길을 찾겠는가!) 파티장에 도착했다. 나는 이미 파티 음식 축소판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심각하게 놀라지는 않았다. 어쩌면 일부러 많이 놀랄 것을 생각하고 마음을 굳게먹었던 탓인지도 몰랐다. 또한 나르디와 돌아다니며 궁정의 사람들을여럿 만난 탓에 모여 있는 화려한 복장의 수많은 사람들에도 그다지압도되지 않았다. 매끄럽고 화려한 최고급 새틴, 산뜻하고 경쾌한 느낌의 모슬린, 빛을 받는 방향에 따라 빛깔이 변하는 시폰벨벳, 섬세한 주름이 아름다운 크레이프 등 갖가지 고급 천으로 만든 드레스들이 정원 가득 핀 꽃송이들처럼 연회장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놀라지 않은 나도 달크로즈 성의 건축에대해서는 정말 볼 때마다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회장의 기조를 이루는 빛깔은 단연 흰 빛이다. 연회장을 둘로 나누는 둥글고 흰 기둥들이 한 가운데 활짝 열린 입구에서부터 저 안쪽다른 문에 이르기까지 죽 이어져 있다. 기둥의 숫자는 모두 열네 개였다. 아마도 열네 달을 나타내려 한 것인 듯, 기둥들의 머리에는 각아룬드를 상징하는 다양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다. 고개를 들고 바로 입구에 가까이 선 기둥 두 개를 바라보았다. 하나는 노장로 아룬드의 노인이 한 손에는 낫을 들고 긴 수염을 늘어뜨린 채 의자에 앉은 모습, 다른 하나에는 황금 아룬드의 빛나는 엘릭시르와 수확의 곡식들이 늘어진 모양이 정교하게 조각된 것이 보인다. 높이 솟은 천장은 불꽃 모양의 화려한 궁륭이 폭죽처럼 늘어졌고,갈라진 부채꼴 면마다 천상의 것인 양 찬란한 과일과 꽃들이 놀랄만한 솜씨로 그려져 있다. 천장과 벽은 황금 띠와 빨간 보석들로 긴 테두리를 이루며 장식되어 있다. 대리석 바닥은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매끄럽고 단단했으며 역시 금으로 된 줄이 무늬를 그리며 박혀 있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닫힌 문 양쪽에 요정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두 소녀가 조각되어 있다. 굳어진 흰 잎새와 포도 덩굴 사이로 상체만 벽에서 내밀고는,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보이지 않는 눈동자로 연회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초여름의 첫 파티답게 테이블마다, 벽걸이마다, 입구와 기둥 모두가 신선한 여름 장미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장미 빛깔은 모두 붉은색과 분홍색, 흰색으로만 골라져 있다. 어쩌면 오늘 있을 장미 논쟁을환기시키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덕택에 오늘 연회장에는어느 구석으로 가나 향긋한 꽃향기가 진동했다. 둘러싼 벽마다 섬세하게 그려진 무엇인지 모를 전설속의 사건들,그 가운데 내가 얼른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제3아룬드의 처녀 아르나가 레오 로아킨을 시냇가의 오두막 앞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아르나는 빨랫감을 들고 있고, 레오 로아킨은 젖은 옷을 걸친 채 그녀에게 무언가 부탁하려는 자세로 서 있다. 저 이야기라면 나도 잘알기 때문에 나는 그림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파비안 나르시냐크 님, 이쪽으로." 나는 여기서 꼼짝없이 내 의견과는 무관한 파비안 나르시냐크가 되어 있었다. 이러다간 내 이름 잊어버리겠다. 하지만 아버지를 괜시리골탕먹일 생각은 없으니 한동안은 얌전히 이 이름을 써야겠지. "파비안, 왔느냐." 세상에, 아버지가 와 계셨다. 아까 전에 시종에게 물어본 바로는 아버지가 파티에 나타나실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정말 거의, 파티나무도회 같은 데 참여하는 일은 없으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오늘이 자리에서 아버지를 만날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아버지, 오셨군요!" 아버지의 주위에는 몇 명의 동료 또는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모여 서 있었다. 그 가운데 선 푸른 예복 차림의 아버지를 보고 나는눈을 휘둥그렇게 뜨…… 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사람들에게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파티용 예복도 아버지가 입으니까 우스워 보이기는커녕 당당한 풍채와 넓은 어깨에 기막히게 잘 어울린다. 아버지를보고 나니 갑자기 연회장 곳곳에 널린 귀족들이 한순간에 작고 볼품없어 보였다. 겉모양만 기사가 아닌 진짜로 강인한 기사인 아버지는비록 검을 가지고 오시진 않았지만, 진정한 위엄과 품위라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버지는 주위 사람들을 차례로 소개해 주었다. "…… 그리고 이 분은, 구원 기사단 부단장 한젤 리안센 공이다." 리…… 안센? 부단장? 나는 인사하다가 말고 퍼뜩 고개를 들어 한젤 리안센의 얼굴을 살폈다.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웃고 있는 키가 큰 중년 기사, 그 얼굴에서 내가 찾아보려 한 것은 별로 발견되지 않았다. 티무르의 붉은머리카락도, 교활한 미소도 그에게는 없었다. 단단하고 각진 이마와선량한 눈매, 붉은 기가 도는 금발, 오히려 아주 깨끗하고 담백한 성품을 가진 인물로 보였다. "하하하, 이거 반갑구나. 내 막내 아들녀석과 하르얀이 꽤 친하다고 들었는데, 맏아들이라고 했지? 어디, 그렇다면 내 맏아들하고 인사를 해야겠는걸. 엘비르!" 바로 내 등뒤에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대답이 들렸다. "예, 아버지!" 곧 내 옆으로 다가온 키가 훤칠한 붉은 금발의 소년, 그는 아버지의 말을 이미 들은 듯 내게 선뜻 손을 내밀었다. "엘비르 리안센이라고 한다. 구원 기사단의 수련 기사로 있지. 나르시냐크 단장님을 매우 존경하고 있다. 두 분 어른들의 친교를 더욱빛낼 수 있는 우정을 함께 쌓을 수 있었으면 한다." 나는 내민 손을 잡으며 나와 거의 비슷한 눈높이의 그를 정면으로바라보았다. 티무르의 형이랬는데, 어느 모로 보나 그와는 딴판으로달랐다. 엘비르 리안센은 시원스럽고 뚜렷한 윤곽의 꽤 잘생긴 얼굴이었고, 전체적으로 거의 아버지를 빼다박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나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당당하면서도 침착한 태도다. 티무르가나와 나이가 같으니, 엘비르는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겠다. 나는 그처럼 멋지게 말하지는 못했다. "반갑다. 나는 파비안… 나르시냐크, 앞으로 많이 도와 주었으면한다." 계속해서 나는 거의 연속적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꼭 닮았다며 감탄했고, 다른 사람들은 엘자스-오를리테에서의 전투 이야기를 들었다며 태자와 아버지를 훌륭히보필한 것을 칭찬했다. 나로서는 그걸 보필이라기보다는 '엉겁결' 정도로 부르는 것이 나을 것 같지만 말이다.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께서 드십니다!" 음악이 멎고 낭랑한 의전관의 목소리와 함께, 춤을 추던 사람들이기둥 사이 길을 중심으로 파도처럼 죽 갈라졌다. 요정 조각이 있는정면 문이 시종들에 의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십여 명의 시종과 시녀를 뒤에 거느린 이그논 국왕과 아마리에 왕비가 등장했다. 내 관심사는 그보다 뒤에 있었다. 비록 일단 몸을 숙이느라 보지는못했지만 다음 고개를 드는 순간 분명히 보았다. 의전관은 다시 외치고 있었다. "태자 전하 드십니다!" 일단 다시 몸을 수그리긴 했지만 나는 괜시리 기분이 유쾌해져서킥 웃었다. 아무리 태자라고는 해도, 태자보다 더 점잖아 보이는 엘비르보다는 나르디 쪽이 재미있는 녀석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다시 허리를 펴려는 순간, 의외의 발표가 있었다. "세르무즈에서 오신 잔-이슬로즈 아미유 드 네르쥬 공주 전하 드십니다!" +=+=+=+=+=+=+=+=+=+=+=+=+=+=+=+=+=+=+=+=+=+=+=+=+=+=+=+=+=+=+=옷감에 대한 고증... 도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새틴은 우리말로는 '공단'이라고 하는 비단의 일종입니다. 광택이있고 매끄러운 견직인데, 고급 드레스를 만드는 최고급 원단이지요. 물론 좀 좋지 않은 새틴도 있고... 그건 양산 만드는데 쓴다더군요.^^;모슬린은 비단이 아니고 모직인데 예전엔 드레스감으로 굉장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물론 모직이라고 해서 두꺼운 천은 아니고, 가볍고탄력성도 좋은 천이죠.. ^^ 요즘은 좀이 잘 먹는 특징 때문에 거의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폰벨벳은 벨벳의 일종입니다. 벨벳은... 흔히 빌로드라고 부르는바로 그 옷감이죠. 그 짧은 털이 매끄럽게 난 천 말이에요. 둘 다 기본적으로 견직, 즉 비단이고 시폰벨벳 대신 시폰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하지요. 역시 가볍고 부드러운 고급 천이죠. 크레이프는 천 자체에 섬세한 잔주름이 잡힌 것으로 역시 고급 실크입니다. 요즘에 여자들이 입는 옷 중에도 이걸 비슷하게 모방한 합성 섬유가 많죠? 참고로, 이 모든 천들이 한 시대에 유행한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04 (22:21) 게시물 번호 : 14---▷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135 , 줄수 : 211◁세월의돌▷ 8-1. 왕국의 장미 (9)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1. 왕국의 장미 (9) 장내가 술렁이며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대부분 오늘 파티에서 그녀를 보게 될 거란걸 알고는 있었던 듯하나, 이렇듯 정식으로 등장할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가운데 길을 비워두고 양쪽에 몰려서 있던 귀족들은 일단 허리를 굽혔다가, 다음 순간에는 너도나도 목을 빼고 적국의 공주 잔-이슬로즈의 얼굴을 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기대했던 공주의 모습은……. "우와……." 저절로 나오는 탄성을 간신히 삼켰다. 붉은 갑옷을 걸치고 맹수처럼 검을 휘두르던 그녀,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던 고귀한 포로, 달크로즈 성에 도착해서 헤어지기까지의 쾌활한 처녀의 모습,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지금 시녀를 거느리고 연회장에 들어선 그녀는 완벽한 한 사람의공주, 그대로였다. "전사 체질의 공주라고 들었는데……." 내 옆에서 엘비르가 놀란 듯 중얼대는 소리가 절대 무리가 아니다. 전쟁터에서의 그녀를 본 나조차도, 그녀가 갑옷에 검을 들고 있던 모습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잔-이슬로즈는 새카만 머리카락과 가볍게 그을린 꽃잎같은 피부를더욱 돋보이게 하는 흰빛과 분홍빛의 새틴 드레스를 입었다. 치마폭과 가슴, 소매는 모두 깨끗한 하얀 색인데 드레스 자락과 테두리에싱그러운 핑크빛이 마치 살짝 물든 것처럼 선명하게 번져 있다. 소맷자락, 치마의 주름과 우아한 프릴, 리본, 이 모두가 이 핑크빛 번짐으로 장식되어 드레스 자체가 마치 살아 있는 진짜 꽃처럼 향기로운색감을 띠었다. 거기다가 긴 머리채를 부드럽게 말아올렸다가 다시 한쪽으로 늘어뜨린 매력적인 손질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이어 박힌 은제 서클렛과은은한 장식핀이 검은 머리빛깔과 대조적으로 빛났다. 공주가 없는이 달크로즈 성에서 진짜 공주가 있다면 아마도 그녀다. 그만큼 우아하고 정교한 발걸음으로 그녀는 걸어내려왔다. "…… 오오, 놀랄 만하군……." "왜 저들의 공주가 마브릴 족 최고의 미인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 그저 싸움 잘하는 아가씨라고만 하다니…… 도무지 그 왕가의 생각이란 이해할 수가 없군." "그야말로 초여름의 장미, 그대로가 아닌가!" 수많은 연회장의 남자들이 감탄하여 수군대는 가운데 그녀는 연회장의 한쪽으로 가 섰다. 마침 내 쪽과 가까웠다. 그녀의 날카롭지만 또한 생생한 눈동자와 빳빳한 속눈썹, 뾰족하고고집스런 얼굴 윤곽은 유리인형처럼 곱게만 꾸며진 귀부인과 귀족 처녀들의 그늘에서만 가꾼 미모를 무색케 하는 야생적인 매력이 있었다. 그녀의 가볍게 그을린 피부만 해도 그렇다. 그녀는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자신있게 말을 달리는 여전사가 아닌가! "파비안, 여기서 보게 되는군요." 그녀가 가장 먼저 말을 건 사람이 나였던 탓에, 모든 사람들의 눈길에 이번엔 내게로 쏠렸다. 나는 허겁지겁 머리를 굴렸으나 도대체멋진 대꾸를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왕족 질문시 대답 목록세 가지, 아니 수정증보판 다섯 가지가 떠올라왔지만 이번엔 어째 적당한 게 하나도 없었다. 이거 '아름다우십니다'도 아니고,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해? "…… 멋있어요." 결국 가감없이 튀어나온 내 솔직한 말에 그녀는 가볍게 싱긋 웃었다. 그 역시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꾸민 듯 미소짓는 웃음과는 달랐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한 번 웃었을 뿐이었다. "릴 댄스는 장미 논쟁이 끝난 뒤부터 시작이야. 그 전엔 그냥 릴없이 가볍게 춤을 추지. 저기, 곧 시작이겠는데?" 내 곁에서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고 있는 엘비르는 스물 한살이고, 곧 결혼하기로 약속한 아가씨가 있다고 했다. 그것 참 놀라운 일이군. 스물 한 살은 귀족들 사이에 결혼할 나이라는 거야? 우리동네에서는 남자는 아무래도 스물 다섯은 되어야 결혼이 어쩌고 얘기가 나오는데. 그럼, 결혼할 아가씨는 도대체 몇 살이지? "아, 리리안은 열 아홉이지." …… 유리카보다 한 살밖에 안 많잖아. 엘비르는 결혼할 거라는 사실 이외로도 어느 모로 보나 소년이 아닌 당당한 어른이었고, 태도 역시 침착하고 사려깊은 것이, 티무르의형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그 앞에서 티무르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르얀의 문제도마찬가지고. 아버지는 하르얀은 여행차 수도를 떠났다고만 말했을뿐, 어디로 무엇하러 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아니, 몰랐다고 하는편이 정확하겠지. 설마 그가 사병을 데리고 배를 몰아 나를 공격하려했을 것이라고 어찌 상상하겠어. 나는 기분나쁜 생각을 떨어 버릴 겸, 고개를 들어 쌍쌍이 춤추기시작한 귀족들 쪽을 바라보았다. 온갖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한 아가씨들, 예복으로 성장한 귀족 청년들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그너머에 선 국왕 일가에 눈이 머물렀다. 왕비는 몸이 불편하여 나오지못할 것 같다고 하더니, 마음이 바뀌었는지 모습을 드러냈고, 완연히늙은 티가 나는 국왕은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은 채다. 나르디는 한사람과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파티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사람들사이로 문득 나와 눈이 마주쳤다. "……." 그의 눈이 빙긋 웃는다. 그는 잠시 후 그 자리를 떠나 내 곁으로왔다. "전하, 환궁을 경하드립니다." 엘비르가 예의바르게 인사했고, 나도 덩달아 허리를 굽혔지만 나르디는 쾌활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파비안, 새삼스럽긴. 같이 돌아온 주제에." 이윽고 나르디는 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물었다. "유리카는? 정말로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나는 나르디에게는 제대로 귀띔을 해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유리카가 나오지 않겠다는 그 이유가 되는 행사가 어차피 궁중의 풍습으로 어느 정도 정착된 일이라는데, 그런 이야기가 국왕과 왕비에게들어가 보아야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대신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저, 왕비님께선……." 나르디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대번에 알았다는 듯 말했다. "아, 몸이 조금 나아지셔서. 아기를 가지신 것 때문에 요즘 거동이많이 불편하신 모양이네." "야, 넌……." 알고 있었냐고 물으려다가 다시 생각하니 나르디도 나와 같이 돌아온 터, 미리 알았을 리가 없었다. 나르디는 내 어정쩡한 표정을 보고는 싱긋 웃었다. "나도 돌아와서 알았다네. 올해 안에 태어날 것 같다던데, 은근히기대가 된다. 지금까지 늘 죽 혼자였던 터라, 동생이 생긴다니 기분이 좀 야릇해." 저 녀석은…… 정말로 저번에 유리카가 말했던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걸까? 왕위는 누가 이어도 상관없다고? 나르디는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돌리더니, 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슬라, 왜 혼자 있어요?" 나르디는 지나가는 쟁반에서 잔을 두 개 집어들더니 잔-이슬로즈에게로 걸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엘비르가 문득 말했다. "전하께서 마브릴 족 공주님께 호감을 가지신 모양인데?" 아니, 뭐, 뭐…… 뭐야? 완전히 당황하여 다시 나르디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잔-이슬로즈가 나르디가 내민 술잔을 건네받는 것이 보였다. 키가 훤칠한 잔-이슬로즈에 비해 나르디는 아주 조금밖에 크지 않았다. 나르디가 오늘입은 예복은 전체적으로 흰색에 붉은 장식줄이 들어간…… 저런, 꼭잔-이슬로즈의 옷하고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어울리잖아? 엘비르는 다시 한쪽 쟁반에서 내 몫의 잔 하나를 집어 건네주면서말을 이었다. "그러나 잘 될까? 적국의 공주인데." 하긴…… 좋아해도 큰일 아냐? 어쨌든 두 사람은 그다지 다정스러운 자세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괜히 계속 쳐다보기가 머쓱해서 고개를 파티장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으음?" 내 주위에 웬 아가씨들이 저렇게 많은 거지? +=+=+=+=+=+=+=+=+=+=+=+=+=+=+=+=+=+=+=+=+=+=+=+=+=+=+=+=+=+=+=잔-이슬로즈가 입은 드레스의 모양은 우연히 보게 된 멋진 장미꽃의 생김새에서 착상한 것입니다. 꽃집에 가서 물어보시면 아마 어떻게 똑같은지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장미 이름은 에볼루션(evolution)입니다. 릴 댄스는... 좀더 읽어보시면 뭘 말하는지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 물론, 실제로 있는 말이지요. 티무르의 형 엘비르... (티무르가 누군지 잊어버리신 건 아니죠? 이베카 시에서 파비안을 길드에 가뒀던 녀석 말입니다)는 처음부터계획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사실 이 두 이름은 예전에 읽었던 한 신문기사에서 얻은 것입니다. 물론 형제의 이름이었고, 그래서 당연히형제로 쓸 생각이었죠. 물론 리안센은 제가 만든 성입니다만. ^^;아샨타 400회 축하드립니다! 그야말로 위업이로군요. ^^Luthien, La Noir. 1999/10/06 (00:14) 게시물 번호 : 15---▷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81 , 줄수 : 186◁세월의돌▷ 8-1. 왕국의 장미 (10)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1. 왕국의 장미 (10) 나는 일부러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가 다시 그 쪽을 보았다. 그대로였다. 대여섯 명은 되는 아가씨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입은 옷은 모두 다르고 머리모양도 달랐지만 어쩐지 다들 비슷비슷한 느낌을 주는 여자들이다. 아니 잠깐, 뭐가 비슷한 거지? 얼굴생김새도 다르고, 머리색깔도 다른데? 그렇지만…… 역시 비슷한걸? 나는 눈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 다시 술을 홀짝이면서 아가씨들에게서 등을 돌려 엘비르 쪽을 바라보았다. 엘비르가 나를 향해 빙그레웃었다. "왜 그래? 아가씨들이 기다리고 있잖아." "기다리다니?" 윽…… 술맛이 희한하잖아. 엘비르는 정말로 점잖았다. 내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가 억지로인상을 펴는 것을 보았지만, 적당히 못본 체 하며 지나가는 말처럼말해 주었다. "하이볼(Highball)이네." 그나저나 물을 건 물어야지. "누가 날 기다린다는 거야?" "자네가 춤신청을 해주도록 기다리는 아가씨들 아닌가." 뭐, 뭐야? 나는 더더욱 당황하여 황급히 그 쪽을 보지 않도록 몸을 아예 돌려버렸다. 그리고는 뭔가 다른 할 일은 없을까 허겁지겁 생각하기 시작했다. 엘비르가 문득 말했다. "춤을 별로 즐기지 않나 보군?" 엘비르가 일부러 예의바르게 말하고 있는 것을 안다. 안 즐기는 정도가 아니다. 내가 이런 데서 추는 춤을 알 턱이 없잖아! 내가 춤을 추어보았다고 해 봤자…… 가만있자, 예전에 하비야나크에서 살 때 마을 축제가 있으면 가끔 추어봤던 정도겠다. 그렇지만그런 데서는 춤 정도야 아무렇게나 추어도 좋았고, 또 스텝이 정해진춤들도 여기서처럼 격식에 맞춰 꼭 그대로 따라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마을 잔치 같은 것이 있으면 처음엔 제대로 추다가,나중에 다들 술 몇 잔씩 들어가고 나면 멋대로 빙빙 돌며 돌아가기마련인 것이다. 그렇게 해도 다들 환호하고, 박수도 쳐 주고.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나는 춤을 추어 보았다고 말할 입장이 아니란 말이다. 끔찍한 일이 생겼다. "엘비르!" 연보랏빛 태피터(taffeta) 드레스를 입은 자그마한 여자가 엘비르의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다가와서 내 쪽을 흘끗 보았다. 엘비르는정중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더니 내게 그녀가 자신의 약혼녀인 리리안 아이슬리라고 소개했다. 키가 몹시 작지만 꽤 귀엽게 생긴 여자다. 내가 얼떨결에 그녀에게 엘비르와 비슷한 방법으로 인사를 하고 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뒤 엘비르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엘비르는 대답했다. "아아 물론, 아름다운 리리안, 저와 춤을 추어주시겠습니까?" 둘은 내 곁을 떠나 춤추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나타난 아가씨가 내 보호자를 낚아채어 사라지자 나는 갑자기혼자가 되어버렸다. 이런 끔찍한 일이, 저 아가씨들에게 걸리면 곤란해! 내 생각에는 아랑곳없이 몇 명의 아가씨들이 내 곁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뭔가 다른 일을 하는 체 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마땅한 것이 없었다. 하긴, 무도회에서 할 만한 일이 춤이나 잡담 말고 뭐 별다른 거라도 있겠어? 절망적으로 테이블에 다가가 음식이라도 먹을까 하는 참인데, 정말천만다행하게도, 약간 얼굴이 상기된 나르디가 내 곁으로 다시 다가왔다. 나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나르디는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방금 이슬라 공주에게 장미 논쟁에 대해 설명했더니, 왜 장미만뽑느냐, 거기에 비견되는 훌륭한 잎사귀도 뽑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시는군. 정말, 재치있으신 분이야." 휘유- 그래, 난 지금 무슨 이야기든 좋다고.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그렇지만 부상(副賞)으로 주어질 왕자는있어도, 공주는 없잖아?" "하하, 이슬라도 부상 따위가 되는 것은 원치 않겠지." 벌써 그 '논쟁'은 시작되고 있었다. 마치 중매쟁이들이 여기저기찔러보고 다니듯, 몇몇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귀부인들이기꺼이 그 일을 떠맡아 돌아 다니고 있었다. 몇몇씩 짝지은 그녀들이파티장 이곳 저곳에서 담소를 나누며 의견을 들어보고는 이후 종합해서 발표하는 것이 왕궁의 방식인 모양이다. 하긴, 왕궁에서 아가씨들을 놓고 공개 투표를 할 리도 없고, 거수로 결정하는 것도 아닐테고,저런 우회적인 방법을 통하는 수밖에 없겠지. 한켠에는 왕비를 중심으로 귀부인들의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다들이야기하는 품으로 보아 왕비의 임신이 주된 화제인 듯했다. 저 아이가 왕자라면, 정말 어떻게 되는 거람. 돌아다니던 부인들 중 두 사람 정도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들은 태자인 나르디에게는 정중히 허리만 굽힐 뿐 의견을 묻지 않았다. 들었던 대로 마지막 결정권자는 태자라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그녀들은 곧 내게로 다가와 인사를 했다. "파비안 나르시냐크입니다." "아아, 아르킨 나르시냐크 단장님의 맏아들!" 이미 알고들 있을 텐데도 그녀들은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으며 탄복한 듯 양손을 맞잡고는 미소를 지었다. 과장스런 몸짓이 정말로 익숙한 모양이다. "정말, 그 아버님에 아드님이세요. 어쩌면 이렇게 훤칠하고 잘생겼을까. 아주 쏙 뺐네요, 꼭 닮으셨어." "맞아요. 아르킨 단장님도 저렇게 가끔이라도 파티에 나와 주시면풍채로 보나 위엄으로 보나 다른 귀족들과 감히 비교가 안 되잖아요? 어째서 다시 혼처를 찾지 않으시는 건지." "글쎄 말여요. 이만큼이나 장성한 아들이 있는 나이이신데도, 저렇게 계시면 애꿎은 처녀들 가슴만 두근거리게 하신다니까." "그렇지만 파티에서 춤 한 번 추지 않으시는 분이잖아요. 아무래도한량 귀족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분이시다 보니까……." 뭐, 뭐지, 이 아주머니들? 나는 왠지 궁중의 귀부인들도 내가 살던 동네 아주머니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들을 다시 보았다. 그녀들은 내 시선을 느낀듯, 가볍게 목을 가다듬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래, 장미 논쟁에 대해서는 들으셨지요? 그녀들은 다시 한 번 연회장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말한 여론들에대해 한참이나 떠들었다. 누구네 집 무슨 아가씨, 무슨 드레스 입은아무개 아가씨, 누구는 이번엔 틀렸고, 누구는 굉장히 애쓰는 것 같다는 둥, 나는 알지도 못하는 이름들을 정신없이 한 바가지는 들은다음에 거기에 따라오는 설명들도 다시 몇 바가지는 뒤집어 써야 했다. 그녀들이 다시 나를 향해 입을 열 때까지 나는 이름들의 홍수에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어떤 아가씨가 예뻐요? 올해 왕국의 장미는 누구 같아요?" "아무래도 친분 있는 아가씨가 아직 없으니만큼 공정한 의견을 말해 줄 것 같아요. 정말 여기서 듣는 의견이 진짜 확실한 것 아닐까? 어때요?" "저, 그러니까……." 나는 홍수 속에서 스스로 수영을 깨쳐서 간신히 기어나온 다음에간신히 뚝뚝 떨어지는 이름들을 가다듬으며 뭔가 의견을 말하려 했다. 아무 말도 안할 수는 없고, 유리카도 없는 바에 아무나……. 아, 그게 아니잖아? "당연한 걸 물으십니까." +=+=+=+=+=+=+=+=+=+=+=+=+=+=+=+=+=+=+=+=+=+=+=+=+=+=+=+=+=+=+=장미 논쟁에 대해 여러 분들께서 관심을 보여 주시는군요.. ^^;220년 전에 장미 논쟁의 시발이 된 그 아름다운 평민 아가씨가 유리카가 아니냐... 는 의견을 말씀하신 분들이 제일 많은데, 유감스럽지만 아닙니다(뭐, 그렇지만 아주 틀린 생각이었다고 할 수도 없지요). 이미 또한 많은 분들이 지적하셨다시피, 유리카는 220년 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거든요. 유리카는 218살이니까요. 그럼 그 아가씨는 누구냐고요? 글쎄요.. ^^뭐.. 세월의 돌 다음 작품 쯤에 등장할지도 모르지요. ^^;;;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06 (00:15) 게시물 번호 : 16---▷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94 , 줄수 : 174◁세월의돌▷ 8-1. 왕국의 장미 (11)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1. 왕국의 장미 (11) 갑자기 내 목소리가 자신만만해지자 그녀들은 약간 놀란 모양이었다. 한 부인이 물었다. "그러니까 누구?" 나는 고개를 잠시 돌려 내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녀 한쌍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까보다는 좀더 친밀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당연히, 잔-이슬로즈 공주님이지요. 단연 돋보이지 않습니까?" 한 사람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내게 물었던 부인은 거보라는 듯 옆의 부인을 쳐다보았다. "내가 뭐랬어. 역시 저 공주님이랬잖아." "그래도 달크로즈, 아니 이스나미르의 장미를 뽑는 건데 적국의 공주가 말이 되나? 그녀는 어쨌든 안돼." 어라, 그런 문제가 또 있었나? 어쨌든 달리 번복할 생각도, 또 번복할 이름도 갖고 있지 않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만 가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은 저들끼리 쑥덕이다가 다시 다른 사람들을 향해 떠났다. 그것 참, 생각보다 복잡하네, 거. '논쟁'의 결정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쌍쌍이 돌아다니던 젊은 부인들이 나르디를 따로 불러 저마다 귀띔하는 것이 보였고, 나르디는 알았다는 듯한 표정만 지었을 뿐, 뭐라달리 말하지 않았다. 음악은 흘러나왔지만 춤들은 잠시 멈췄고, 사람들은 기둥 오른쪽의 넓은 연회장에 모인 채 릴 댄스가 시작되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테라스가 있는 쪽으로 두 단 정도 계단이 올라간 쪽에 나르디가 서 있었다. 그가 골라잡아 첫 릴을 도는 아가씨가 올해 달크로즈 성에서 왕국의 장미가 된다. 왠지 나르디의 입장이 좀 우스울 것 같았다. 취향대로가 아니고,여론대로 상대를 고른다니 말이다. 조그맣게 소근대며 웅성이는 사람들, 음식 테이블이나 음료 테이블쪽에 모여 있던 좀더 나이든 사람들도 이제 태자가 주도하는 릴을 돌기 위해 모두 빈 손이 되어 자신의 짝과 함께 서 있었다. 나르디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가 나온 것일까? 이곳의 선정 방식은 좀 특이한 것이, 돌아다니던 젊은 부인들이 서로 의견을 취합해서 한 사람을 결정해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자신이 얻은 결과를 각각 태자에게 이야기하는 식이다. 그러면 태자는 그 가운데 자신의 취향을 적당히 섞어 상대를 고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의사가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음악이 조그맣게 잦아들더니, 다음 곡을 준비하는 조용한 전주로변했다. 이제 선택할 때였다. "……." 유리카, 이걸 구경하러 왔으면 좋았을 텐데. 나르디가 가만히 서 있다가 결심한 듯,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사람들이 물결처럼 양쪽으로 갈라져 선다. 나르디는 자신있는 걸음걸이로 다가가더니, 갑자기 중앙에 서서 양쪽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조용해져 있었다. "……." 성큼성큼 다가간 나르디가 멈춘 곳은 약간 뒤쪽에 있던 잔-이슬로즈 공주의 앞이다. 몇 사람인가가 황급히 옆으로 물러나고, 그는 공주에게 손을 내밀며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그 순간 일제히 집중된시선이 두 사람의 얼굴로 떨어졌다. 특히 수많은 아가씨들의 얼굴에떠오른 당혹한, 그리고 질투 어린 빛들이란. 고개를 드는 녀석의 입가에 머문 미소는 이런 애매한 순간의 것으로는 꽤나 묘하게 매력적인 데가 있었다. 잔-이슬로즈는 약간은 도전적인 자세로, 마치 뭔가를 묻는 듯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잠깐, 길지 않은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눈빛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잠시의 멈춰진 순간. 그러나 이윽고, 그녀는 나르디의 내민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은 연회장의 가운데로 나란히 걸어나갔다. 사람들 사이로 경악의 소곤거림이퍼져나갔다. "저런……! 전하께서……." 그러나 어쨌든, 여기에서 나르디의 선택을 번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악사들은 신나게 준비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르디가 잔-이슬로즈의 손을 잡고 릴 댄스를 위해 맨 앞으로 걸어나가자, 다른 사람들도 자석에 끌리는 쇳조각들처럼 주르르 자리를잡아나갔다. 아아, 나르디 녀석, 잘 됐구나. 왜 망설였던 거지? 손을 마주잡은 두 사람은 아까 내가 보았던 그대로, 예복에서부터모든 자세에 이르기까지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잘 어울렸다. 세련된 동작과 흠잡을 데 없는 미모를 지닌 둘은 마치 얼음 위를 미끄러져 나가는 활짝 핀 꽃과도 같았다. 잔-이슬로즈가 나르디보다 세 살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당당하고 우아한,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한 쌍이다. 나는 잔-이슬로즈 공주가 저렇게 여자다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또한 처음으로 깨달았다. 처음 연회장에 나타났던 때의 당당함과는 또 다른, 상냥한 매력이 그녀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나는 이 연회장에 있는 사람 치고 저 댄스에 끼지 않을 수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야, 나르디의 일만 신경쓰느라 정작 내 일은 잊었잖아! 두 줄로 나란히 선 남녀들이 손을 마주잡고 릴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황급히 두리번대며 도망칠 곳을 찾았다. 그러나 아까와마찬가지로, 역시 이곳은 숲 속이나 동굴 속이 아니기 때문에 숨을곳 따위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꾸준히 구석구석을 두리번댔다. 이제 다음 순간, 바로 끌려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순간이었다. 연분홍빛 오건디 드레스를 입은 아까 그 아가씨, 검은조젯 크레이프 드레스의 다른 아가씨, 또 다른……. 그때였다. "……?" 내 눈에 환영 비슷한 것이 문득, 비치고 지나갔다. 어라, 저게 뭐였지? 나는 눈을 비비며 다시 보았다. 분명 있었다. 테라스 밖, 테라스에달린 유리문 밖으로 보인 하얀 치마인지 베일인지 하는 것, 방금 사라졌는데……? 저기, 다시……. "아……!" 내 눈에 흰 환영이 똑똑히 보였다. 새하얀 옷자락, 엷은 베일로 된 띠, 같은 빛깔의 머리카락을 살짝장식한 작은 진주의 빛, 그리고 가볍게 스치는 초여름의 바람. 손을 내밀고 있었다. "……." 갑자기 내 머릿속에 신선한 샘이 솟아나 다른 복잡한 생각들을 일시에 지워 버린 것 같았다. 희미한 듯하면서도 눈동자를 가득 채우는, 청색으로 맑은 하늘 아래 하얀 환영. 시원하게 빛나는 별빛과 하늘 높은 곳을 움직여가는 동그란 구름, 가볍게 열려진 유리문 밖에서불어오는 향긋한 손짓. 그녀가 웃고 있었다. "유리……." 나는 다른 것은 잊어버리고 테라스로 손을 내밀었다. 손에 매끈한문고리가 잡혔다. 문고리를 돌려 열고 들어간 다음, 밖으로 걸쇠를걸어 잠가 버렸다. 볼 테면 보라지. 하지만 방해하는 것은 안돼. 하늘에는 하얀 달, 그리고 테라스에는 높이 걸린 장식등. 그리고 내 앞에는 그 무엇보다 희게 빛나는 나의 소녀. +=+=+=+=+=+=+=+=+=+=+=+=+=+=+=+=+=+=+=+=+=+=+=+=+=+=+=+=+=+=+=파비안은.... 한눈 팔기엔 너무 멋진 짝이 있잖아요, goldbeer 님. ^^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06 (20:23) 게시물 번호 : 17---▷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115 , 줄수 : 176◁세월의돌▷ 8-1. 왕국의 장미 (12)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1. 왕국의 장미 (12) "어떻게……." 바보 같은 말을 했다. 유리카는 가볍게 손가락을 들어 내 입술에갖다대더니 생긋 웃으며 연회장을 손가락질했다. "음악이 나오잖아. 들어봐." 유리문으로 차단된 밖의 음악은 조그맣게 줄여져 있었지만 그런 대로 들을 만했다. 연회장 안에서는 이미 릴을 끝내고 왈츠가 한창이다. 빙글빙글 돌고 있는 다채로운 빛깔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러나테라스에는 음악소리보다 풀벌레 소리가 더욱 생생하게 들렸고 아래쪽 정원에서부터 올라오는 꽃과 풀 냄새가 온통 가득 차 있었다. "한 곡, 어때?" 유리카는 벌써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나는 춤을 출 줄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잊었다. 그녀의 양손을 마주잡고 그 얼굴을 보았다. 어깨를 감싸는 넓은 케이프와 긴 리본, 무늬라고는 없는 눈부시게 새하얀드레스. 달빛에 빛나는 깨끗한 어깨위에 늘어뜨린 은빛 머리카락, 그위에 흠없이 드맑은 초록빛 눈동자는 어떤 장식 보석보다도 찬란하게빛났다. "이렇게, 다시 이렇게.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간다. 내가 발을 밟을뻔하자 그녀가 킥,웃는다. 내 손안의 그 손은 보드랍고 작았으며, 부서질 듯 깨어질 듯연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는 것이 도무지믿어지지가 않는다. 꿈속에 있는 것처럼, 나는 빨려 들어가듯 그 에머랄드빛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세상이 천천히, 아니 빨리 돈다. 바람이그녀의 긴 드레스 자락과 리본을 사뿐히 날리고 은빛 머리카락을 내어깨에 휘감기게 했다. 부드러운 소맷자락과 드레스의 끝이 드러난팔과 발치를 간질인다. 더듬거리는 내 손과 발, 시선 둘 곳 모르는내 눈동자는 녹색 호수에 어린, 날려갈 듯 가벼운 은빛 속눈썹들에머물러 있었다. 꽃잎처럼 싱그러운 연한 장밋빛 뺨, 시원한 눈매로 그녀는 나를 올려다본다. "어때? 이것 봐, 이제 할만하지?" 테라스, 둘만의 무도회. 차츰 춤추는 것이 편안해진다.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를 시선에도 이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옷자락과 옷자락이 스치는 사락이는 소리가듣기 좋았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음악소리와 내 머릿속 어딘가로부터 울려 나오는 또 다른 음악이 겹쳐지고 섞여든다. 내 팔에 안겨 있는 유리카는 내가 알던 소녀가 아닌 듯도 했고, 또는 가장 그녀다운 그녀의 눈동자를 하고는 더없이 밝게 활짝 웃기도 했다. 넓지 않은 테라스였지만, 우리 둘에게는 충분한 넓이였다. 밤의 향기를 뿜는 정원이 세상 모두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 예뻐." 유리카는 정말 그녀답게 빙긋 웃으며,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을했다. "너도 예뻐." 세상은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까. 무도회장 안에서 춤추고 있는 사람들조차 내게는 우리 둘을 위한아름다운 배경 틀처럼 보였다. 캄캄한 저 밤의 풍경 너머로 달크로즈시를 가득히 채우는 수많은 불빛들이 있다. 그 도시의 가운데, 이 나라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흰 성벽을 가진 달크로즈에서 흰옷의 그녀와 내가 손을 맞잡고 천천히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고 있다. 몇번이나 꾸게 될 거야, 이 때의 꿈을. 그리고, 한 곡이 끝났다. "연습 잘 했지?" 연습이라니, 나로선 평생 가장 기억에 남을 춤인걸. 우리 둘은 멈추어 서서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디선가 날아든 나뭇잎이 가볍게 바람을 타고 그녀의 드레스 자락에 내려앉았다. 그녀가 손을 들더니 내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손가락들이 하얀 건반들처럼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테라스의 유리문으로 연회장의 환한 불빛이 쏟아져 흰 옷자락을 물들였다. 다음 춤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파비안, 이제 우리 한 번 들어가서 추어 볼까?" 환영이 걷혔다. 즐거운 연회장의 말소리들이 파도처럼 귓가로 밀려들고 수백 개의 램프들이 정원의 꽃들처럼 한꺼번에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릴을 돌 준비를 하는 사람들, 수도의 왕궁파티…… 자, 이제는 즐길 수 있어. "자신 있는 거지?" 자신 있다면 그게 거짓말이지. "그럼." 테라스 문을 열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세상으로 다시 나가는 기분으로, 유리카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호오……." 사람들의 휘둥그래진 눈들이 우리를 맞았다. 아니, 정확히는 유리카 때문이겠지만, 그녀와 함께 들어온 내게도 눈길이 어느 정도는 쏟아졌다. 테라스에서 함께 있는 것을 본 사람도 있겠지만, 어렴풋한 그림자였을 것이므로 그들은 충분히 놀라 있었다. 누구인지 모를, 어디선가갑자기 나타난 깜짝 놀랄 만한 미모의 소녀에게로 온통 시선이 쏠렸다. 유리카의 새하얗고 우아한 드레스는 연회장의 불빛 가운데 그 어떤 화려한 드레스보다도 돋보였으며, 그것은 그녀의 존재 자체로도마찬가지였다. "어느 댁 아가씬가?" "처음 보는데……." 나르디가 잔-이슬로즈의 손을 잡은 채 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내가 좋아하는 그 미소. "아아, 왔구나, 유리카." 유리카는 뭔가 비밀이라도 감춘 듯한 표정으로 나르디를 향해 생긋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잔-이슬로즈에게로 향했다. "어머나, 공주님- 너무 예뻐요." 그녀의 말투는 언제나처럼 솔직했고, 잔-이슬로즈의 얼굴에도 가볍게 미소가 떠올랐다. "태자 전하하고 굉장히 잘 어울려요." 내 생각도 똑같았다. 나는 말로 하는 대신 크게 고개를 끄덕거려보였다. "너희들도야." 나르디의 쾌활한 대답, 그리고 곧 음악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춤을 추지 않고서야 연회장의 분위기가살 수가 없겠지?" 서로 손을 맞잡은 나와 유리카, 나르디와 잔-이슬로즈가 릴의 선두를 향해 걸어갔다. 나르디가 맨 앞에, 내가 그 다음에. 삽시간에 만들어진 열 가운데 마주보는 유리카와 나는 그 시선 속에서 어색한 듯하면서도 또한 순수한 기쁨을 주고받았다. 그 흰 뺨이 약간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다. 붉고 푸르고 노란, 온갖 빛깔의 펼쳐진 치마들,그러나 유리카의 순수한 흰 빛, 은빛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의 조화에 비견될 만한 것은 없었다. 마치 정원 가운데 한 송이뿐인 백장미처럼 그렇게 피어올라, 영혼을 송두리째 빼앗는 천진한 매혹. 릴의 시작이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왈츠의 기본 박자는 3/4박자입니다. 실제로 저렇게 세면서 배운다는군요. 유리카의 애프터눈 드레스 때문에 거의 백 장에 가까운 드레스 사진을 뒤졌었습니다.... 그러나 보람도 없이 결국은, 세세히 묘사하지않는 쪽을 택하고 말았네요. ^^; (겨우 묘사 두 줄...--;)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06 (20:25) 게시물 번호 : 18---▷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131 , 줄수 : 193◁세월의돌▷ 8-1. 왕국의 장미 (13)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1. 왕국의 장미 (13) 입속으로 유리카가 알려 준 대로 박자를 세어 가며 발을 옮겼다. 이것, 생각보다 재미있다. 비록 어색한 몸짓과 더듬거리는 발놀림이지만 나는 충분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유리카의 몸놀림은 우아하고 유연하여 어느 귀족 아가씨의 춤에 못지 않았고, 드러난 팔은 늘검은 옷 속에 감춰져 있었던 탓에 희고 매끈하다. 빙글, 돌면서 펼쳐지는 치마, 손을 잡아 올리자 손목에 걸린 은고리가 핑그르르 돈다. 주위에 온통 반짝거리는 빛이 있다. 어쩌면 내 눈에만 보이는 지도모를……. "어때, 괜찮지?" 연회장 안에서 문득 내 뒤로 다가온 나르디와 잔-이슬로즈, 나르디가 내게 말을 건다. 나는 대답한다. "야, 박자 세기 힘들어. 말 걸지 마라." 유리카가 가볍게 웃으며 눈인사를 보냈다. 다시 빙글빙글 돌며 멀어지는 가운데 나는 그녀가 나르디에게 인사한 건지, 잔-이슬로즈에게 인사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흰 꽃, 나의 흰 꽃. 아름다운 소녀, 저 먼 과거로부터 마치 나를위해 시간을 뛰어넘어 온 듯한, 내가 기다렸던 사람. 그 녹색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영원의 빛, 내 팔 안에 있지만 언제나 떠나는 순간을 예감케 하는 조용한 눈동자가 있다. 가장 행복한 가운데 드는 불안한 감정이란, 어쩌면 인간의 가장 오래된 위기에의 두려움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든 위기는찾아올 수 있지만, 현재를 즐기는 것은 사람의 마음. 그래서 나는, 이후 어떤 일이 다가올지 결코 알 수 없지만 지금의행복을 잊지 않도록 더욱, 더 생생하게 느끼겠어. 어떤 불행 속에서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지금의 눈동자, 새하얀 옷자락, 달크로즈의고귀한 성안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던 눈빛과 내밀어 잡았던 손을 내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 영원의 장소로. "미스릴 동전요?" 잔-이슬로즈의 얼굴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내심 매우 실망했다. 세르무즈의 공주인 그녀한테 이 궁금한 일에 대한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봐요." 이야기를 처음 꺼냈던 나르디는 주머니를 뒤져 그가 별과 검의 노래호에서 몰래 빼돌렸던 미스릴 동전 중 한 개를 흰 테이블보 위에탁, 올려놓았다. 동전에 새겨진 것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큼직한고양이의 모양, 예니체트리의 노란 고양이 키티아였다. 그녀는 동전을 집어 올렸다. "……." 나는 고기를 자르면서 그녀의 얼굴을 열심히 지켜보았지만, 뭔가있을법한 어떤 표정도 거기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숨기는 것 같지도않았다. 그녀와 함께 여행하는 동안 느낀 거지만, 뭔가 음모를 가지고 숨긴다는 것은 잔-이슬로즈의 솔직하고 담백한 천성과 도저히 맞지 않았다. 아니라면, 천성마저 완전히 숨길 정도로 대단한 고단수던가. 나르디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빵에 버터를 바르며 말을 이었다. "세르무즈의 국왕 폐하를 위해, 상인 몇이 이것들이 든 상자들을운반하고 있었지요." 상인 몇이라, 나르디는 아마 그 때 정말로 쾌활하고 붙임성있게 그들을 부르고 또 대답했었지. 그녀가 문득, 들여다보고 있던 동전으로부터 고개를 들더니 나르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세르무즈의 국왕 폐하께서 하시는 일을 왜 이스나미르의 태자 전하께서 아셔야 하나요?" 나르디는 가볍게 미소를 띠면서 답했다. "국경 침범의 문제와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두 사람의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로 어느 정도의 호감은 있으나, 또한 자국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의무와 그에 대한 충분한 의지도 가지고 있는 두사람이었다. "그들이 이스나미르의 국경을 침범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응당한처벌이 있어야 하겠죠." 그녀의 말투는 어쩐지 일전에 그들의 국경을 침범한 우리들을 의도적으로 질책하려는 것처럼 들렸다. 하긴, 틀린 말도 아니니 나르디가이번엔 뭐라고 반응할까? "저로선 구원 기사단의 정예 기사 열두 명을 희생시킬 정도의, 그런 가혹한 처벌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 나르디 녀석, 세르무즈와 싸우면서 희생된 기사들을 언급하고 있다. 잔-이슬로즈의 새카만 눈썹이 약간 꿈틀거렸다. 둘 다 대단한 자존심들이었다. 어젯밤의 파티로 오후가 가까워지는 지금까지도 피곤이 덜 가신 터였지만, 둘은 그렇지도 않아 보였다. 일부러 마련된 점심 식사 자리는 꽤나 흥미로워져가고 있었다. "소금 좀 집어 줄래?" 유리카는 무슨 생각인지 이 이야기에 거의 끼여들지 않았다. 나는소금을 집어 그녀에게 건네주면서 표정을 슬쩍 살폈다. 아무 일도 없는 양, 평화로운 모습. "그렇다면, '산'에 대해서는 아시겠지요?" 나르디는 유리카가 쓰고 내려놓은 소금을 집으면서 시선을 접시로향한 채 말했다. 잔-이슬로즈에게 하는 말이 분명했지만, 어떻게 듣든 상관없다는 투였다. 그러나 직선적인 성품의 잔-이슬로즈는 즉시 대답하고 나왔다. "산이라니요?" "이진즈 상류, 이스나미르의 체스트넛 카운티와 걸쳐진 지점에 '솟아난' 산 말입니다." "산이 솟아나요?" 이쯤 되자 모든 것이 확실해 보였다. 잔-이슬로즈는 산과 거기에서발견된 미스릴 동전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총애 받는 공주조차 모를 정도로, 극비에 행해지는 일이었던 것일까?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산이 솟아난 것이 분명하다면거기에서 다른 일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들, 그 이야기가온 나라로 퍼지지 않았을까? 아마도 보고가 줄을 이었을 텐데? 왕궁에도 이미 보고되었다고 했잖아? "거짓말하지 말아요, 이슬라." 나르디는 마치 소금 좀 집어 달라는 말과 똑같은 어조로 그 말을마쳤다. "……!" 잔-이슬로즈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잡았던 포크를 놓더니, 나르디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산이 솟아났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그 동전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라고……." "당신, 알고 있잖아요." 잔-이슬로즈는 다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나르디가 무슨 근거로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그녀를 몰아붙이는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나르디는 말을 하면서 내내 잔-이슬로즈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고, 그녀는 끈질기게 나르디를바라보면서 말을 했다. 그렇지만, 역시 거짓말에는 능숙하지 못한 그녀였다. "미스릴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하지만 그게 동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겠죠." 이쯤 되자, 나는 은근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가끔 글을 보내달라고 메일을 보내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이텔 아이디로 주로 그런 메일을 많이 받고 있네요. ^^;일일이 대답드리지는 않겠고요... 몇 번이고 썼다시피 보내드리는일은 불가능합니다. 에에.. 그리고.. 220년 전의 장미 논쟁의 주역인 평민 아가씨에 대해서 더 물으셔도 대답 안 드립니다.. ^^... 비밀이에요. ^^;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08 (00:19) 게시물 번호 : 19---▷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25 , 줄수 : 241◁세월의돌▷ 8-1. 왕국의 장미 (14)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1. 왕국의 장미 (14) 잔-이슬로즈는 말을 멈춘 채 가만히 있었다. 할 말을 찾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시선은 똑바로 앞을 향하고 있었지만, 무엇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 모습은 내 경험으로는, 어떤 감정을 남의 눈에 띄지않게 가만히 삼키고 있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 나르디도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는 한참만에 입을 떼어 말했다. "화내지 말아요, 이슬라." 놀랍게도 그 한 마디에 잔-이슬로즈가 고개를 돌려 나르디를 바라보았다. "아뇨. 난 당신이 우리 국왕 폐하께서 뭔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분 나빴을 뿐이에요. 귀국하는 즉시, 아바마마께 말씀드려그 사실에 대한 진상을 확실히 듣도록 하겠어요. 그리고 어떤 잘못이있다면 시정하도록 건의하고, 나르디, 당신에게도 결과를 전해 줄 생각이에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렇게 바보 취급당하는 상황은 확실히 싫군요." 잔-이슬로즈가 나르디의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기에 이번에는접시에 집중하고 있던 유리카조차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잔-이슬로즈의 대답은 정말 그녀의 성격 그대로라 이번에는 나르디조차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럽시다." 어젯밤 파티에서 왕국의 장미로 뽑힌 잔-이슬로즈 때문에 귀족 아가씨들의 항의가 대단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온갖 방법으로 결과를달리해 줄 것을 요구하는 소리들을 나르디는 한 마디 대꾸도 없이 묵살했다. 이 일의 최고 결정권자는 태자인 나르디였기에, 아무리 불만이 있다 해도 이후 간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뿐, 그의 결정을 억지로 번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태자가 고집을 부리는 것이 결코 귀족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르디는 그런 것도 무시했다. 그가 한 말은 단 한 마디였다. "당신들은 전쟁을 위해 태어난 마브릴 족과 이제라도 싸워보고 싶소?" 틀린 말은 아니다. 처음부터 그녀를 왕국의 장미로 결정하지 않았으면 모르되, 일단 발표된 일을 이런 식으로 다시 번복하는 것은 세르무즈의 공주를 대놓고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르디는 내게는 그녀를 고른 결정이 외교적 이유로 그런 것인 양 말했지만 나는왠지 믿어지지 않았다. 뭐, 내가 다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식사를 마쳤다. 잔-이슬로즈는 여전히 기분이 유쾌하지 않은 듯했지만, 일단은 덮어두기로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나는 일어나면서 물었다. "오늘 저녁 일정은 뭐지?" 유리카가 나르디가 대답하기 전에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말했다. "엘다렌한테 위문 공연이라도 해 줘야 하는 것 아냐? 너무 골방에만 박혀 있잖아." "이런, 골방이라니, 거긴 성에서도 제일 좋은 방 가운데 하나란 말이네." "그럼. 달크로즈에 나쁜 방이 하나라도 있겠어? 안 그래, 태자 전하?" "하다 만 성 구경이나 더 하자. 난 네가 입이 닳게 자랑하던 타로핀 회의장을 꼭 보고 싶은데." "야, 그건 나조차도 함부로 못 드나드는 곳이란 말야." "엄살 피우지 마, 태자 전하." 태자의 특별 손님인 우리들은 그야말로 어제오늘 뭐든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성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우리끼리 있을 때에는존대와 호칭조차 완전히 맘대로였다. 그러나 이런 시간이 오래 계속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릴 생각도 없는 듯,여전히 자기에게 주어진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 엘다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안다. "다시 떠나야지." 은빛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똑같이 빛나는 것은 나르디의 황금빛 머리다. 그날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신선한 아침빛은 방안에 앉은 네 사람을 골고루 비췄다. "그렇지, 엘다?" 엘다렌은 오랜만에 검은 로브를 입지 않고 앉아 있었다. 성안의 깊숙한 방에 있는 이상 다른 사람이 보고 더 놀랄 일도 없었고, 점점더워지는 날씨에 아무래도 저 두꺼운 로브는 고문에 가까웠다. "……." 나는 엘다렌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나르디 쪽으로 돌렸다. 평상복이라고 입은 것이지만 부드럽게 몸에 감기는 푸른 실크 상의와 긴 바지를 보고 있노라면, 역시 그가 내 생각보다 훨씬 준수한 소년이라는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성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주인인 그를 보면서, 어젯밤 생각했던 사실을 스스로 되씹으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제 함께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 "좋은 곳이야." 내 말의 의미를 그가 알아들었을까? 나르디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내게 돌리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우린 할 일이 있잖아?" 유리카는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우리 모두를 둘러보았다. 테이블 위에 앉은 주아니까지도. "그럼, 할 일이 있고 말고." 이틀 전, 파티가 끝날 무렵 아버지를 다시 만났었다. 그리고, 내목걸이를 보시고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잘 하고 있구나." 아버지의 뜻밖의 제안, 만약이라도 그 임무가 힘들거나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 이제 그만 수도에 머무르며 집안의 일을 배워 가는 것은어떻겠느냐고. 태자를 호위해 오는 이번 일로 어느 정도 성의 귀족들사이에 인정도 받고 위상도 생기고 했으니, 이제 목걸이의 일이 아니라고 해도 그만 나르시냐크 집안의 맏아들로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아닙니다, 아버지."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는 이 일을 끝까지 해내고 싶어요." 아버지에게는 아직 말할 수 없는 아룬드나얀에 숨겨진 막중한 비밀, 그걸 위해 나는 이미 아룬드나얀의 주인으로서 그 이름을 걸고엘다렌에게 맹세한 바 있고, 나 스스로에게도 약속한 바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만 곁에 두고 싶어하시는 마음은 안다. 아버지 친구분들의 아들들이 어떻게 성에서 아버지들을 돕고 있는지 이번 파티에서여럿 만나며 느꼈던 바도 있다. 특히 엘비르 리안센, 내가 스물 한살이 된다 해도 그만큼 어른스럽고 침착하게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리안센 부단장의 든든한 맏아들이던 그. 그러나 다른 어느 아버지들보다도 강한 위상을 갖고 계시던 내 아버지에게는 그런 존재가 없었다. 아무래도 귀족들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모르고 게다가 철없는 나는, 엘비르처럼 되려면 한참 먼 것 같단 말이야. "일을 멋지게 끝내고 나서, 돌아와 아버지 곁에 있겠습니다." 아버지는 그리고 빙긋 웃으시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아버지의 눈가에 생긴 잔주름들이 그 미소 속에서 문득 내 마음속에 각인되어졌다. "그래, 언제라도 떠날 준비는 되어 있었어." 그리고 이제 모든 시선이 나르디에게 모아졌다. "나는……." 녀석이 저런 표정으로 웃을 때에는 어떤 기분인지, 이미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 나르디의 어깨에 손을얹었다. 어쩐지 여행할 때보다 녀석의 키가 조금 커진 것 같기도 하다. "야, 넌 부모님 곁에 있어야지. 폐하께서 이미 춘추가 높으신데 언제까지나 일국의 태자가 세상 구경만 하고 돌아다닐 수 있겠냐? 나중에 우리 나라를 무슨 꼴을 만들려고 그래?" "……." 녀석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생각은 이미 결정된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동생 얼굴도 봐야잖냐? 개구쟁이 남동생일지, 혹은 이 성에 너보다 더 잘 어울리는 그야말로 멋진 공주님께서 태어나실지 말야." 나르디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내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나는그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그리고 그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파비안…… 그래도 넌 내 친구겠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이 가슴속에서 솟아올라왔다. 그래, 이녀석과 이제 헤어지는 거야. 처음 만날 때부터 참 마음에 들었던 녀석, 그렇지만 아마 잠깐 뿐일걸. 나는 다시 돌아올 테고, 아버지를모시고 네가 왕이 되는 것도 볼 수 있을 거야. 그건 좀 까마득한 미래일지도 모르겠지만. "야, 누굴 뭘로 보는 거야? 그럼 내가 네 친구지, 하인이라도 된단말이냐?" "그렇지만, 아마 조만간 신하는 되어야 할걸." 유리카가 옆에서 피식 웃으며 거들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우리 모두 다 웃고 있어. 잠시 후에 유리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게다가 넌 이 성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걸. 다시 같이 나가자고 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말야." 나중에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날의 파티장에 유리카를 나오도록 한것은 바로 나르디였다는 것을. 그녀에게 잘 어울릴 가장 아름다운 흰드레스를 일부러 준비시키고, 바로 그 테라스에서 나타날 수 있도록시종을 보내 안내를 시키면서까지 마음쓴 것은 두 친구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다. 이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그 멋진 파티에 우리 둘이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몇 번이고 생각한 끝에 만들어낸 좋은 선물이다. 좋은 친구. 다시 만나고 싶은 좋은 친구. 충분히 기분 좋게 헤어질 것만 같다. 이렇게 햇살이 좋은 날이잖아. 이런 날은 구질구질한 이별에 어울리는 날이 아니야. 깨끗하고가벼운, 미래를 기약하는 이별을 해야지. +=+=+=+=+=+=+=+=+=+=+=+=+=+=+=+=+=+=+=+=+=+=+=+=+=+=+=+=+=+=+=8-1. '왕국의 장미' 편 끝입니다. 장미 논쟁에 보여주신 많은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홍우 님, 전 지금 세월의 돌을 쓰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다른 글은 손도 못대고 있답니다. 그 외에 쓴 거라면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단편들 뿐이죠. 그건 보셨죠? ^^Luthien, La Noir. 1999/10/08 (00:22) 게시물 번호 : 20---▷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70 , 줄수 : 22◁세월의돌▷ 상처를 위한 상처 시작입니다. 8장 '약초'의 1편이 끝나고 2편이 시작됩니다. 약초 아룬드의 앞부분인 '왕국의 장미'와 뒷부분인 '상처를 위한상처'는 아주 다른 분위기의 글이 될 예정입니다. 약초 아룬드 시작 첫머리... "치유자는 동시에 가장 두려운 살해자이기도 하다"는 말에 걸맞는 배치가 될 듯합니다... 8장은 두 편으로 끝납니다. 요즘은 그럭저럭 한 장의 양을 맞추는데 조금이라도 감이 생긴 것 같네요. ^^;홈페이지에 남겨주시는 많은 방명록들을 굉장히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참, 홈페이지 주소가 야후 코리아에 등록이 되었답니다. 이제야후로 가셔서 '세월'이나 '전민희'... 기타등등 검색하시면 제 홈페이지가 뜬답니다. ^^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08 (00:25) 게시물 번호 : 21---▷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93 , 줄수 : 156◁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1)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1)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없어.]꿈인가, 몇 번이고 꾸었던, 결코 깨어날 수 없는 꿈. 몇 번이고 돌이키려 했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되고 마는……. 비가 내린다. […… 그렇구나.]비에 젖어 달라붙은 검은 옷, 그리고 고개 숙인 은빛의 머리카락. 너는 세상에 미련이 없다고 말했었지. 그 생각은 지금도 그대로일까? 나의 또 다른 친구들, 또한 한 종족의 지배자. 약속을 위한 희생……. 왜 이렇게 되었어야만 했을까? 빗소리, 멈추지 않을 것처럼 내리는 비. 잘그랑대는 팔찌 소리와 함께 주저앉은 내 어깨 위에 와서 놓이는하얀 손, 내 뺨을 어루만지는……. [괜찮아…….]왜, 왜, 꿈에서와 똑같이, 몇 번이고 그렇게 고통스럽게…… 나는알고 있었어…… 현실은 그렇게 되도록 하지 않으리라던 수십 번의맹세도…… 그러나 결국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버린 지금,나는 무엇을 기대하며 눈물을 참으려 하는 거지……? 비가 내 대신 눈물이 되어 뺨을 흐른다. [너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말이겠군.]빗속을 뚫고 묵직하게 들려 오는 목소리. 내 말을 믿고 자신의 왕국을 내버려둔 채 따라와 주었던 나의친구, 그러나 나는 결국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나약하고 무력한, 보잘것없는 마법사,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은 것밖에 없다……아마, 나는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숲 가운데 자신의 무기를 짚고 선 엘프는금빛의 머리를 들어 검게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작별 인사를 할 때인가…….]- 기억reminiscence VI "그래서 이슬라 공주는 언제까지 거기 있어야 한대?" "글쎄, 곧 세르무즈에서 귀국 교섭을 위한 사절을 보내오겠지. 물론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될 테고, 어쩌면 생각보다 그 조율이 훨씬 길어질 수도 있을 거야." "그렇다면, 연애하기에는 아주 적당한 조건이겠는데?" 말을 타고 둘러보는 수도의 전경은 아기자기한 멋이 있었다. 수도라고 해서 처음엔 무조건 크고 웅장한 것만 상상했는데 그런 것만이아니었다. 아래로 아래로 이어진 길을 내려가 도시 중심부의 분지(아르드-달크로즈, 보통 아르드라고 부른다고 했다)에 이르자 찬란한 색색가지 지붕과 고풍스런 종탑, 흰 회벽과 붉은 벽돌, 좁은 골목과 넓은 대로, 그 사이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활기찬 조화를 이뤘다. 수백 개의 간판들이 빽빽히 들어차 흔들리고 있는 시장 거리, 외곽으로 모여 있는 주거 지역과 짜임새 있는 방사형 도로 배치, 조각상과흰 물살의 분수대, 새로 지은 건물들 사이사이로 천연석을 그대로 깎아 만든 듯한 오래되고 튼튼한 옛 건물들. 여름의 자연 속에 푹 파묻힌 가운데 다채로운 빛을 발하고 있는 아르드-달크로즈의 자태는 내시선을 충분히 빼앗고도 남았다. 물론 크고 웅장한 것이 없지는 않았다. 일종의 공회당처럼 보이는석조 건물이 있었는데 세모진 박공벽 아래로 기둥이 죽 늘어선 모양이 이채로웠다. 기둥 하나가 내 키의 예닐곱 배 이상은 되어 보였고,둘레 역시 최소한 세 명은 손을 맞잡고 둘러서야 될 정도로 그 크기가 엄청났다. 게다가 기둥은 하나하나가 그냥 매끄러운 것은 없었고모조리 복잡한 부조와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으음?" 다시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보석을 몇 개 돈으로 바꾸어 두려고 잠시 시내로 내려간 엘다렌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나는 그 기둥들을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희한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 중의 한 기둥에 유난히 문자가 많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중에 어디선가 익숙하게 보아온 문자가 몇 개 있었다. "이걸 어디서…… 봤더라……." 나는 손을 내밀어 움푹 들어간 글자들을 만져 보았다. 사람들의 손이 많이 닿았을 텐데도 별로 닳지도 않은 듯, 글자들의 모서리는 아직도 처음 깎아낸 것처럼 날카로웠다. 모조리 읽을 수조차 없는 문자들, 기묘한 장식무늬들처럼 보이는 그 글자들 속에 손가락을 넣고 글씨를 쓰는 것처럼 파인 홈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여 가던 나는, 문득이 글자들을 어디서 보았었는지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위협하는것처럼 보이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등 뒤에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 검신에 새겨진 글자들을 비교해 보았다. 틀림없었다. "이게……." "파비안, 뭐해?" 다른 기둥을 구경하고 있던 유리카가 내가 이상한 기색을 보이는것을 눈치챘는지 내 쪽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기둥에 새겨진 글자들과 내 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것?" 나는 유리카에게 이게 고대 이스나미르 어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유리카는 벌써 내 질문을 눈치채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나도 모르는 글자들인걸." 나르디하고 헤어지지 않았다면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에 있는건축물이니만큼 좀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벌써부터 아쉽다. 녀석은 지금쯤 궁성 안에서 귀찮은 귀족들하고 놀아주느라 바쁘겠지. 나와 유리카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글자들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보았자 모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엘다렌이 오네."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돌아온 엘다렌을 붙들고 문자들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그는 예상대로 고개를 저었다. "드워프들의 역사에는 없는 글자다. 아마 고대 이스나미르 인들이쓰던 어떤 문자겠지." "그렇지만, 유리카도 읽을 줄 모르는 걸요?" +=+=+=+=+=+=+=+=+=+=+=+=+=+=+=+=+=+=+=+=+=+=+=+=+=+=+=+=+=+=+=요즘, 출판 준비로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수많은 메일과 추천사들을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네요... 굉장히 바빠지고 말았습니다.;;;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08 (21:26) 게시물 번호 : 22---▷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89 , 줄수 : 195◁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2)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2) 엘다렌은 내 얼굴을 한 번 쓱 쳐다보더니 다시 말했다. "유리가 읽고 말할 수 있는 고대 이스나미르 어는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말처럼 당시의 일상공용어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지금처럼 마법에 쓰이는 문자는 따로 있었지. 아마 마법에 쓰이는 축복 문자나 주문 글자, 그런 종류 중 하나일 거다." 충분한 설명은 아니었지만 더 알아낼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조각된 기둥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거리로 내려갔다. 이제 네 번째 동료를 찾아 떠나야 한다. 이번엔 크로즈님 강을 따라 내려갈 예정이었다. 달크로즈 양쪽에 있는 네 개의 수문은 국법상일반인이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일단 크로즈 고갯길로 빠져나가 바깥쪽에서 크로즈님 강을 따라 도보 여행을 하고, 수도에서 좀 떨어진헨마인 나루에서 배를 탈 예정이었다. 크로즈님 강은 달크로즈 외곽에서 시작되어 북쪽으로 넓게 펼쳐져있는, 대규모 목재 산지이자 이스나미르에서 가장 큰 숲인 상텔로즈숲 가운데로 흘렀다. 우리의 목적지는 거기였다. 엘다렌을 만나고 나서는 그렇게 무작정 길을 헤맬 필요가 없어졌다. 완벽한 가능성은 아니었지만, 상텔로즈에 그 '세르네즈의 하늘'이 있으리라고 우리 모두는 확신하고 있었다. "말했던 것은 알아봤어요?" 내가 슬쩍 묻자 엘다렌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약간만 고개를 끄덕였다. 엘다렌이 시내로 나갔던 데에는 보석을 환전하는 것 말고 다른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와 유리카, 엘다렌은 알고 주아니는 모르는 일이었다. "아, 잘 됐네요." 주아니는 내 주머니 속에 들어앉아 있었지만 우리 대화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주아니는 우리가 여행하면서 하는 일에하나하나 참견하지 않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적당히 넘어가 주는편이었다. "주아니, 잠깐 엘다렌한테 가 있겠어?" 이런 경우에도 별로 불만을 가지는 일이라고는 없다. 주아니는 얌전히 엘다렌의 주머니 속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또 느긋하게 들어앉은 채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여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나는 유리카한테 눈짓을 해 보였다. "그럼 엘다렌, 부탁해요." "엘다, 이따가 봐." "……." 나와 유리카는 엘다렌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그의 곁을 떠나복잡한 사람들 속으로 섞여들었다. "잘 될까?" "잘 되었을 거야. 엘다는 보기보다 철저한 드워프라고." 우리는 장난치는 아이들처럼 재빠르게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오랜만에 단둘이 손을 잡고 걷자니 그것도 나름대로 몹시 유쾌하다. 포석이 잘 깔린 거리를 반쯤은 신나게 달리며 지나갔다. 머리에 뭔가를 인 행상 아주머니와 부딪칠 뻔도 하고, 골목을 확 꺾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부서진 사과를 밟을 뻔도 하고- 달크로즈의 뒷골목은 큰 길이 잘 닦인 것과 대조적으로 좁고 오밀조밀한 미로였다. 오래된 도시를 모조리 큼직큼직하게 뜯어고치기란 본래 쉬운 일이 아니지. 달크로즈는 우리 나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수도이고, 그 전에도 수많은 종족과 무리들이 이 천연의 요새를 거쳐갔노라고 성에서만난 학자 타데아가 말해 주었었다. "이쪽?" "응, 그쪽!" 유리카는 다시 평소의 검은 옷으로 돌아가 있었지만,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녀의 흰 드레스는 생각할 때마다 나를 행복하게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녀가 그 하얀 드레스를 다시 입을날이 있겠지? 경쾌하게 돌바닥을 차는 네 개의 발걸음, 지붕들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하늘에는 초여름의 태양이 말갛게 떠올라 있다. 오랜 여행으로 더러워졌던 유리카의 옷과 내 옷 모두 달크로즈 성의 시종들에 의해 깨끗하게 세탁되어 있어, 입고 다니는 기분도 예전과는 달랐다. 햇빛은 기분 좋을 정도의 따뜻한 온기로 걷어올린 팔에와 닿았고, 눈꺼풀을 스치는 바람에도 산뜻하고 자유로운 도시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물 좀 마시고 갈까?" 분수대 앞에서 뛰던 걸음을 딱 멈췄다. 몸이 앞으로 넘어질 듯이휘청, 하면서 멈췄지만 둘 다 얼굴을 마주보고 피식 웃었다. 난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진 않았지만,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누비며 포석 위를 경쾌하게 뛰는 기분은 또 색다른 데가 있다. 채색된 장식 벽돌로 지어진 분수는 수반(水盤) 세 개가 각기 다른크기로 쌓아올려져 그 위에서 물이 솟았고, 다시 그 주위에 가늘게솟아오르며 손이 닿을 수 있는 곳까지 오는 물줄기가 십여 개 이상얽혀 있는 정교한 만듦새를 지니고 있었다. 허리 아래까지 닿는 분수의 테두리 벽에 몸을 갖다댄 그녀가 상체만 내밀면서 손을 떨어지는물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몸 뒤로 검은 치마와 머리카락이 거리로불어오는 바람에 펼쳐지고, 그렇게 선 유리카는 분수 안에 만들어 놓은 어떤 조각상보다 섬세한 손길이 닿은 것처럼 보였다. 하얗게 솟아오르는 물줄기 앞에 손바닥을 모아서 갖다 대고, 주위로 튀어 오르는 시원한 물방울들을 들여다보았다. 방울진 물들이 유리카의 머리로 뛰어들고, 소매를 온통 적셨고, 입으로 가져간 손우물에선 여름비처럼 시원한 물이 목으로 넘어왔다. "이것 봐!" 유리카가 불러서 고개를 돌리니 어느 새 물을 모아 담고 있던 그녀가 재치 있게 손을 움직여 내 얼굴로 물을 뿌렸다. 뛰어오느라 상기된 뺨에 와 닿는 차가운 물이 싫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도지지 않고 오른손으로 분수물을 쳐서 가볍게 물을 튀겼다. 그녀가 맑은 목소리로 시원스레 웃었다. 잠깐만에 서로의 뺨과 머리카락이 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젖었지만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물줄기 사이로 보이는 세상은 젖은 듯 찬란한 빛이다. 눈동자가 맑아지는 듯한 느낌, 투명한 수정이 세상 가득 들어찬 것 같았다. 늘이런 기분이라면 못할 게 아무 것도 없을 텐데. "야, 시간 없어. 그만 가자." 분수대에서 몸을 돌리면서 못내 아쉬웠지만, 시간이 없다는 말은정말이었다. 엘다렌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은 절대, 권장할 만한일이 못 되었다. 게다가, 주아니도 그러고 있다 보면 뭔가 수상한 느낌을 받게 될 테고. "그나저나, 주아니가 좋아할까?" 그럼, 좋아하고 말고지. 나는 머리를 흔들어 물을 떨어낸 다음,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뛰는 거야!" 방사형으로 펼쳐진 대로를 피해 골목골목으로 파고들었다. 달크로즈 시는 정말 유쾌하게 뛸 수 있는 거리들을 가지고 있다. 나중에라도 다시 이곳에 돌아와 달리기를 한다면 정말 즐거울 거다. "파비안! 저기, 저기잖아! 네 오른쪽 골목!" 기가 막힌 정지를 했다. 주위에 걷던 사람들이 놀라 뒤로 비켜설정도로 맹렬한 기세로 멈췄다가 다시 골목으로 뛰어든 우리는, 드디어 목적하고 있던 상점을 발견했다. 주아니, 너 알면 깜짝 놀랄 거다! "기분이 좀 이상하지 않니?" 유리카와 나는 천천히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실컷 뛰고 나자 몸이더워지기도 했고, 이제 중천에 뜨기 시작한 태양이 점차 뜨거워지는탓도 있었다. 유리카가 문득 내 얼굴을 쳐다보며 한 말에, 나는 무슨소린지 몰라 되물었다. "무슨 기분?" "지금 말야. 글쎄, 뭐랄까……." 뭐 이상한 거라도 주위에 있나? 이제 우리는 대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나는 거리를 두리번거려 봤지만 그저 길가는 사람들과 한쪽에 세워진 마차, 내 머리 위로 덜렁대는 식당 입구의 철제 간판에 '하얀 보석'이라고 쓰여진 것 말고는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냐, 괜한 기분이겠지." 유리카는 고개를 흔들어 버리고는 이번엔 나보다 앞서 걸었다. 대로변이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고 사람들의 생김도 전부 가지각색이었다. 금발 머리, 검은머리, 갈색 머리…… 여행자 복장, 상인처럼 보이는 남자, 행상 아주머니, 잘 차려입은 부잣집 꼬마들……. 유리카가 문득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직 시간이 좀 있을까?" +=+=+=+=+=+=+=+=+=+=+=+=+=+=+=+=+=+=+=+=+=+=+=+=+=+=+=+=+=+=+=오늘은... 뭔가 많이 올리는군요. ^^;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08 (21:27) 게시물 번호 : 23---▷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102 , 줄수 : 158◁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3)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3) "시간? 왜?" "뛰어서 그런가…… 좀 피곤한 것 같네." "뭐라도 먹을래?" 마침 길 한쪽에 손수레를 놓고 군것질거리를 파는 장사꾼이 있어그 쪽으로 다가갔다. 유리카는 옷의 긴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수레안을 들여다보니 우리가 구경해보지 못한 재미있는 먹거리들이 많았다. 꽃 모양으로 구워진 작은 케이크, 꼬치에 줄줄이 끼워서 소스를바른 구운 소시지, 치즈를 녹여 얹은 얇게 자른 빵, 설탕을 발라 구운 사과, 그 중에서도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하얀 크림 같은것에 눈길이 갔다. 이상스럽게 생긴 통 속에 가득히 하얗게 담겨 있다. 저런 거라면…… 이베카 시의 여관에서 본 것 같은데, '떠 있는섬' 이던가? "저게 뭐예요?" 유리카가 손가락질하자 마음 좋게 생긴 아저씨가 어디선가 고깔 모양으로 구운 큼직한 과자를 꺼내더니, 커다란 숟가락으로 그 크림을한 스푼 푹 떠서 그 위에 얹어 주었다. 으음, 뭔가 사지 않으면 안될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보니 보기보다 교활한 아저씨인지도 모르겠지만…… 으음, 유리카가 먹고 싶다면야. 유리카는 그걸 받아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어머!" 깜짝 놀라 다시 입을 떼는 바람에 내가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런 우리를 보며 아저씨가 껄껄 웃었다. "허허허…… 너희들, 여기 사람이 아니구나? 이건 '겨울 소환사'라고 하는 거야." 겨울…… 소환사? 낯선 이름에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자, 아저씨는 다시 유리카의것과 똑같은 것을 하나 만들어서 내 손을 쥐어 주었다. 얼떨결에 받고서 나도 한 입 먹어보려다가 유리카와 똑같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앗, 이거 왜 이렇게 차가워요?" 아저씨는 느긋한 웃음을 얼굴에 띤 채로 말했다. "그러기에 겨울 소환사랬잖아." 이름은 괴상했고, 처음에 놀라긴 했지만, 어쨌든 그 '겨울 소환사'는 눈물나게 맛이 있었다. 게다가 두 개째 먹다보니 그 이름도 이해가 갔다. 차가운 것이 몸에 들어가니 정말로 겨울이 소환된 것만 같았다. 마법이 사라진 세계이긴 하지만, 저렇게 재미있는 이름을 지어놓는구나. 유리카와 나는 순식간에 세 개씩 먹어치우고는 엘다렌과 주아니를위해 하나씩 사가기로 했다. 유리카가 더 먹고 싶어하는 눈치기에 그녀를 위해서도 한 개 더 샀다. 내가 돈을 치르려고 주머니를 뒤지며가격을 물었을 때였다. "하나 당 5존드씩만 내." 5존드? 세상에! "으윽, 뭐가 이렇게 비싸요?" 그 다음 순간, 아저씨가 지은 표정은, 정말 거짓말 안 보태고 내가큰사슴 잡화에서 여행자들을 등쳐(?)먹을 때 지은 표정과 똑같았다. 세상에. 나는 아저씨의 단호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내가 지은업보를 돌려받는 느낌이 들어 등에서 식은땀까지 흘렸다. "비싸다니, 이 겨울 소환사라는 게 어디 흔한 건줄 알아? 이 더운여름에 차가운 그대로 유지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이런 모양새로 처음에 만들어 내는 것 자체가 도저히 보통 노력으로는 안 되는 거란말이야. 거기다가 요샌 자릿세도 좀 비싼 게 아냐. 어쨌든 웬만한 장사꾼들은 감히 이거 만들어 팔 엄두도 못 내지. 만들고 보관하는 자체가 보통 고생이 아닌데다 자칫하다간 재료만 버리기 십상이거든? 하기야 마침 여름이 시작되는 때라 본래 이게 좀 비싸지는 때이긴해. 나도 나이도 어린 여행자들한테 조금 싸게 해주고야 싶지만, 그랬다가는 무서운 마누라한테 경을 치지……." 나는 거의 두려움까지 느끼며 그 말을 다 들었다. 그리고 그가 말꼬리를 흐렸을 때, 뒤에 이어질 말을 거의 정확하게 예견할 수 있었다. "…… 그러니까 4존드 80까진 해주시겠다는 거겠죠?" 아저씨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이 놈은 뭐지?'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잠깐이었고, 그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여간 나도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내가 물건 팔아먹는 실력이 수도의 장사꾼들과 맞먹는다는 사실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으며 43존드 20로존드를 고스란히 내는 수밖에 없었다. 왠지 오늘은 내게 한 푼이라도 손해본 여행자들을 위해밤에 봉헌 기도라도 올려야 할 것 같아. 정말 섬뜩한 날이야. "파비안, 표정이 왜 그래?" "나? 아, 아무 것도 아니야." 정말이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로군. 다시 나란히 거리를 걸었다. 겨울 소환사 한 개를 천천히 먹고 있던 유리카는 아까 잠시 기분이 좋아 보였던 것과는 달리, 다시 뭔가생각하는 듯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니?" "글쎄……." 우리가 걷고 있는 거리는 여름 안에 있었다. 대단히 흰 여름이다. 흰 햇살이 가끔 눈을 찌르며 눈앞의 시선을가렸다. 손안에서 겨울 소환사가 조금씩 녹는 것이 느껴진다. 거리는분명 똑바로 나 있는데, 주위의 사물들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양옆은내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다. 걷고 있는데주위가, 하늘이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내옆에서 걷고 있는 유리카가 손을 뻗어도 닿을 것 같지 않다. 주위의수많은 소음들이 점차로 줄어든다. 아니다, 사람들은 똑같이 오가고,또 말하고 있는데. 내 귓가를 울리는 조그마한 건반 소리. 어느 집인가의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것인가? 마치, 어떤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오후. "기분이 이상하지?" "으응……." 대로를 벗어나 조금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저만치 옆으로 통하는길로 붉은 머리를 가진 남자가 문득 지나간다. 아주 짧은 순간 시선을 스쳤을 뿐, 곧 본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내 시야에서 도망쳐 버린 사람, 붉은 머리, 저런 타는 듯한 붉은 머리는 아직까지 두 번밖에 본 일이 없는데. 미르보 겐즈와, 티무르 리안센. 흔치 않은 머리빛깔이다, 저런 빛은. "빨강 머리야……." +=+=+=+=+=+=+=+=+=+=+=+=+=+=+=+=+=+=+=+=+=+=+=+=+=+=+=+=+=+=+=홈페이지 방문자 수가 3천 명을 넘어가려고 하는군요...^^;많은 분이 방문해 주셔서 기쁩니다. 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09 (23:31) 게시물 번호 : 27---▷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65 , 줄수 : 190◁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4)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4) 내 옆에서 유리카가 문득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녀도 그 머리카락을 눈여겨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눈에 띄는 색깔이긴할거야. 그렇지만 이 거리엔 저렇게나 사람이 많은걸. 어떻게 하필이면 그 사람의 일을 둘 다 생각하고 있었을까. 천천히 흐르는 공기. 내 곁을 커다란 젤리처럼 흔들리며 흐르고 있다. 그 안을 우리는 약간은 힘겹게 걸었다. 공기를 휘젓고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목안이 답답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느낌이 목을 조여 오고있었다. "유리카, 잠깐만 멈춰봐." 그녀는 왜냐고 묻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멈췄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녀도 공기를 가르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이드는 걸까? "전에 푸른 굴조개호에서 네가 말했던 '예지'라는 것……."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낯설었다. "그런 것이…… 다시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닐까?" 내 말소리가 갖는 여운이 막 사라지려는 순간이었다. "비켜라!" "저, 저건 뭐야!" "아아악!" 갑자기 거리 전체를 온통 울리는 거대한 말발굽소리가 들리고, 순식간에 엄청난 크기의 거마가 시장 골목 쪽에서 불쑥 방향을 돌려 우리가 걷던 길로 뛰어들었다. 흰 점박이 무늬의 갈색 말,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 오고 있었다. 길을 걷던 사람들이 넘어질 듯 몸을 골목 안쪽으로 붙였고, 이미 뭔가가 부서지고 쏟아진 듯, 시장 안쪽에서는비명과 욕설이 들려나오고 있었다. 모든 일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어서!" 나는 내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유리카의 팔을 잡고 힘껏 뒤로 당겼고, 동시에 뒤로 내딛던 내 발은 뭔가를 밟고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아까 산 물건을 넣은 꾸러미가 허공을 휘젓고, 그녀의 손에들려 있던 과자와 흰 얼음 크림이 길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순간적으로 숨이 막힐 정도로 내 등에 심하게 와 부딪친 것은 어느 집의 돌로된 문설주였다. 탁한 숨을 내뱉는 내 흐릿한 눈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말발굽에 밟히지 않으려고 피하다가 넘어지거나 서로 부딪치는 것이 비껴 들어왔다. 가까스로 몸을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유리카가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앗!" "유리!"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유리카도, 나도, 아무도 상황을 정확히 보지 못했다. 유리카가 허리를 푹 꺾으며 한 손으로 왼쪽 어깨를 감쌌다. 대궁이 꺾인 꽃처럼 휘청이다가 거의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손에서 떨어져, 떨어지는 꽃잎처럼, 왜, 어째서? 그리고, 저건? 혼란 통에 우리 앞을 의도된 것처럼 스치고 지나간 사람이 있었다. 마치 이 혼란을 틈타려고 미리 계획했던 듯이,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않고 마치 제비가 날아드는 것처럼 우리 앞으로 달려들었다가, 다음골목으로 달려 사라졌다. 그러나 그를 쫓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감싸안으며 길바닥에 그대로 함께 주저앉았다. 내 손이 닿자 그녀의 온몸이 경련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리, 유리!" 그녀의 소매 윗부분이 찢어져 너덜거렸다. 하얀 손으로 감싼 어깨아래 상박 부분에서 선명한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다. 적은 출혈이아니다. 그 자가 칼을 가지고 있었어! "……." 얼굴이 일그러지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를 똑바로 앉히고 찢겨진 소매를 마저 찢어냈다. 내 양손도 온통 피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옷을 헤쳐내고 들여다보니 피로 범벅이 된 가운데 한눈에도 예리한 단검이 찢고 지나간 반 뼘 가량의 깊은 칼자국이 보였다. 피는그런 중에도 꾸역꾸역 계속 솟아났다. 상처만큼이나 이런 경우 쇼크가 가져올 수 있는 영향을 생각해야만한다. 유리카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가운데 미간이 바르르 떨렸다. 뭐라고 입을 열지도 않았다. 굳어진 얼굴,마치 차가운 밀랍인형같은 얼굴이었다. "어서, 의사를요!"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내가 고개를 쳐들고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몇몇 사람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어디론가 달려가는 것이 보인다. 의사가 있는 곳이 가깝다면 들쳐업고 가야겠다는 생각에그녀의 자세를 추슬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물었다. "의사가, 어디 있죠? 가깝습니까?!" 갑자기 둘러선 사람들을 헤치고 한 노파가 가까이 다가왔다. "출혈이 심해?" 행상 같기도 했는데, 얼굴과 눈매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이상한 할머니였다. 머리가 뜨거워진 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왜 묻는지도모르면서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끄덕였다. "어디……." 노파는 손을 펼치더니 흰 천에 싸인 몇 가지 약초를 내민다. 탠지,마조람, 세이지…… 나는 약초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 아니다. 그 중에서 입으로 씹어 붙이면 신기하게 출혈이 멎는 흰 줄기의 아스에를라(Acellerla) 풀을 곧장 알아보았다. 저건 대륙 전체에서도 하얀 산맥에서만 나는 고산지대의 특이한 풀이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노파의 손도 아스에를라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서 이미하얀 산맥에서만 나는 저 풀이 어떻게 말린 상태가 아닌 생풀 그대로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달크로즈에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가, 감사……." 말을 길게 하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나는 거의 빼앗듯 아스에를라를 집어 입안에 넣고 씹었다. 싸하면서도 씁쓸한, 아스에를라 풀 특유의 향과 생풀이 내는 맛이 동시에 입안으로 퍼졌다. 이 풀을 씹으면 입안에도 저절로 침이 괸다. 나는 거의 맛을 느낄 여유도 없이 풀을 씹었다. 입안에서 내어 피가 계속 흐르는 상처로 가져가는 손이 떨렸다. 더듬거리며 으깨어진 풀을 상처에 펴 발랐다. 그 사이에도 계속 흘러나오는 피를 보니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지려고 했다. 한 방울의 피라도흘러 떨어져 없어지는 것, 이 모두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다시 한 줄기 더 집어 씹었다. 그리고 다시 상처에 그것을, 이번에는 침착하게 붙였다. 피는 확실히 조금씩 멎고 있었다. "오오……." 아스에를라의 효능을 처음 본듯한 사람들이, 그 빠른 효과에 감탄하여 서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 번을 되풀이한 끝에 피가거의 멎자, 나는 유리카의 다치지 않은 쪽 손을 잡고 가만히 그녀를안정시키려 애썼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인형처럼 앉아 있지만 그녀가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직도 간헐적인 떨림이 멎지 않고 있었다. 아까의 노파가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다가왔다. 그 여자의 손에는 김이 오르는 컵이 들려 있었다. "이걸…… 조금 마셔봐……." 무슨 차인 듯했는데,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내가 차의 종류에 대해알 턱이 없었다. 컵을 받아들기만 했는데도 그 따뜻한 기운에 마음이안정되는 느낌이었다. 그 안에 든 연갈색 액체에서는 한 번도 맡아본일없는 희한한 향기가 났다. 주위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느껴질 정도로 독특하고 강한 향이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나도 한 잔 마셔보고 싶다는 가벼운 충동을 느꼈다. 고개를 흔들어버린 뒤 유리카를 향해 말했다. "유리, 마셔볼래?" +=+=+=+=+=+=+=+=+=+=+=+=+=+=+=+=+=+=+=+=+=+=+=+=+=+=+=+=+=+=+=사에구사 쥰의 멋진 일러스트 파일들 보내주신 miyu 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정말 전부 귀여워요. ^^ 그런데 제가 상상한 주아니와는많이 다르네요. 하하.. ^^어제 발표한 300회 기념 이벤트에서 뽑힌 유니텔의(하이텔이 아니었어요)spiritk 님과 나우누리의 리카도 님 감상이 홈페이지에 올라갔습니다. 구경들 가보세요. ^^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09 (23:32) 게시물 번호 : 28---▷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58 , 줄수 : 198◁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5)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5) 유리카가 천천히 내 손에서 손을 빼더니 컵을 받아들었다. 그녀가컵을 입술에 가져다 대고 조금씩 마시는 것을 보니 그렇게 다행스런느낌이 들 수가 없었다. 창백해진 얼굴에 약간씩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나무로 된 컵은 비록 행상의 손을 탄 것이라 낡은 것이고 지저분했지만, 지금으로서는그런 것이라도 그렇게 고맙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제야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으음?" 노파가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자기 좌판으로 돌아갔나? 다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두어 사람의 남자가 다가온다. 다가오는 품을 보아하니 의사인 듯해서 나는 일단 행상 할머니를 찾는 것은뒤로 돌리고 그들을 도와 유리카의 상처를 보게 했다. "저런……." 젊은 소녀가 대낮에 그런 난데없는 습격을 받은 것을 보고 나이가꽤 들어 보이는 늙은 의사는 혀를 쯧쯧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오면서 상황 이야기를 대강 들은 모양이었다. 상처를 살피고, 아스에를라를 붙인 것을 보더니 그는 참 적절한 조치였다며 이 풀이 갑자기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다. "아아…… 어떤 친절한 할머니가……." 복잡한 설명보다 일단 상처를 돌보는 것이 급했다. 누군가가 달려가 물을 떠 왔다. 의사가 급히 챙겨 가져온 듯한 가방을 뒤져 그녀의상처를 씻어내고 응급처치를 하는 동안, 나는 멍청히 그 광경을 바라보며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은 이상한 혼란을 느꼈다. 모든 일이 너무순식간에 일어나선가, 내가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일까, 내 눈앞의 모든 광경이 잠깐 동안 흐릿하게 보였다. "……." 엘다렌과…… 주아니가 기다릴 텐데……. 나는 눈을 비비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흩어진 짐을 좀 챙기고,그리고……. "다행히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군. 상처는 조금 안정하면 금방 아물거요. 그렇지만 한동안 이쪽 팔을 쓰는 일은 삼가야겠는데." 의사가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를 보고 하는 것이 틀림없었으나나는 그저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주위 사람들을 향해고개를 돌렸다. 뭔가 빠뜨린 것 같아, 뭐지? "저, 이것……." 멍한 머릿속으로도 정신없이 품안을 뒤져 사례금을 꺼냈다. 늙은의사는 사양하며 받지 않으려 했지만, 내가 억지로 쥐어주자 그 대신이라며 가방 안에서 상처를 돌볼 수 있는 붕대와 약을 조금 꺼내 주었다.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잘 안정시키시오.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움직이지 않고 침대에 있는 편이 좋아." "예……." 유리카가 가만히 자기 팔을 들여다보더니 내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얼른 한쪽 겨드랑이를 부축해서 올렸다. 그녀는 일어나더니 말없이 다만 의사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조심해요." 그녀는 사라져가는 의사를 잠시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걸을 수 있어?" "으응……." 그녀는 다시 뭔가 찾는 듯하다. 다시 물었다. "왜? 뭐 잃어버렸어?" "아니……." 그녀의 시선이 흩어져가는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내 머릿속에서도 떠올랐다. 할머니, 감사하다고 인사해야 하는데. "없어……." 그녀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내 팔에 기대며 걸음을 떼어놓았다. 나는 그 거리를 떠나면서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약초와 차를 주었던 노파의 모습은 거리 어디에도 없었다. 버려져 있는 좌판이나 행상의 등짐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런!" 엘다렌은 딱 한 마디 하더니 유리카의 팔에 싸맨 붕대를 보고는 내얼굴을 약간 질책하듯 바라보았다. 주아니가 놀라서 조르르 테이블위에서 이쪽으로 달려왔다. 엘다렌과 주아니가 기다리고 있던 곳은크로즈님 강이 달크로즈로 들어오는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외따로 떨어진 여관, '왕국의 문'이었다. 오늘 당장 떠나도 될 테지만, 일부러이렇게 잠깐 동안만 있을 방을 잡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유리카, 많이 아프니?" 유리카와 주아니가 처음 만났을 때가 문득 떠올라왔다. '너, 내가좋아, 쟤가 좋아?'하고 묻던 그 때 말이다. 탁자에 몸을 기대고 있는유리카를 올려다보는 주아니의 얼굴에는 걱정이 하나 가득했다. "응……." 아까 이후로 유리카의 목소리에 힘이 많이 빠졌다. 충격 때문인지,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몰라도 그 힘없는 목소리를 듣자니 마음이 쓰렸다. 유리카는 오른손을 주아니에게 내밀었다. 주아니가 얼른 올라가자 다시 말했다. "오늘, 재미있게 보내려 했는데…… 이상한 일이 생겨 버렸어." 주아니는 아직도 영문을 모른다. 나는 탁자 아래 내려놓았던 꾸러미를 들어올려 탁자 위에 탁, 얹었다. 유리카는 손바닥을 돌려 주아니가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게 했다. 엘다렌은 모르는 체 몸을 약간돌린 채 파이프에 담배를 채우고 있는 중이다. 오후의 햇살이 열린나무 창으로 들어와 탁자에 비스듬히 떨어졌다. 해질녘의 붉은 빛 섞인 진한 노랑색 빛이다. 탁탁거리며 거리의 포석 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리가 멀어진다. 이상한 하루의 끝. "늦었지만……." 나는 천천히 꾸러미를 묶은 끈을 풀면서 말꼬리를 길게 끌었다. 유리카가 짓궂게 다친 왼팔을 들어 손바닥으로 주아니의 시야를 가렸다. 유리카의 오른손 손바닥 위에 있는 터라, 주아니는 손바닥 뒤를넘겨다볼 방법이 없었다. "왜애? 왜 안 보여줘?" +=+=+=+=+=+=+=+=+=+=+=+=+=+=+=+=+=+=+=+=+=+=+=+=+=+=+=+=+=+=+=하이텔에서 무엇으로 문장력(?)을 연마(!)했느냐고 물으신 분께. 우선 제 보잘 것 없는 문장이란 옛 선현(이렇게 불러도 되나..)들이 쓰신 훌륭한 소설들의 문장에 감히 따라갈 바가 아닙니다. ^^;;예에도 드셨던 일기는... 내킬 때만 씁니다. ^^; 그렇지만 초등학생때부터 저는 짧든 길든 쓰고싶은 소설을 많이 썼어요. 처음으로 완성한 단편을 초등학교 4학년때 담임 선생님 책상에 놓고는 평가해 주십사고 편지를 써 놓았던 생각이 나는군요. 평가는 아마 무응답이었던 걸로 기억이 되고요. 그렇지만 계속해서 이것저것 썼었고, 또 손에 걸리는 글자가 써진 것들은 닥치는대로 읽던 때가 있었습니다. 학급문고에 처박힌 세로줄에 누런 책이든, 잘못 걸린 엄마의 요리육아책이든... 심지어 신문을 잡으면 광고까지 한 글자도 빠짐없이 읽었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삼촌의 정치학 전공책도 읽었지요(결국 저는 지금 정외과 출신이 되었습니다만;;) 지금 글 쓰시는 고등학생 분들 보면 옛 생각이 많이 납니다. 저도 자율학습 시간은 거의 소설 쓰기로 보내고... 쉬는 시간이 되면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가위바위보로 순번 정해서 나누어 보고...(불행히도 그땐 통신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서...^^;)그렇지만 몇 번의 시도 정도로 쉽게 나아지지 않는 것이 또한 문장임에는 확실합니다. 어려서는 안되는 문장 하나 붙들고 쓰고, 또 고치고 고치고 노트가 걸레가 될 때까지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렇게 써 놓고 며칠 후에 보면 또다시 영 이상해서 아예 종이를 갖다 붙이기도 하고... 소설쓰는 노트들이란 항상 지우개가루가 덕지덕지.. 제본된 부분은 너덜너덜...그리고 몇 달 안에 또다시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수준이라고 단정짓고는 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썼죠. 대충 넘어가지 않고 글자 하나까지 마음에 들때까지 고치는 건, 이야기 구성력을 키우는덴 도움이 되지 않지만 한 문장, 한 묘사를 잘쓰기 위해선 확실한 왕도입니다. 사전에 나오는 단어를 모조리 동원해서 열 번, 스무 번이라도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세요. 그래 놓고반년 후에 펼쳐봐서 쓰레기가 되어 있다면 또 고치세요. 바로 그런날들이야말로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어제 심혈을 기울여 쓴 문장이완벽한 쓰레기로 보이는, 매일같이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는 때이니까요.... ^^; (이건 정말로 발전 탓입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 때,난 왜 이렇게 못쓸까.. 하고 자학할 때가 결코 아닌 거죠. 이 때에꾸준히 쓰면 확실히 문장이 눈에 띄게 달라집니다)길게 보고, 오래 연습하세요. 그러다 보면 어느 날은 정말(물론 맛이 가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스스로 '이거다' 싶을 정도의문장을 백 줄에 한 줄 쯤은 쓰게 되는 것도 같습니다... ^^;;;Luthien, La Noir. 세월의 돌(Read Only)1999/10/11 (22:55) 게시물 번호 : 29---▷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21 , 줄수 : 198◁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6)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6) 주아니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몸을 틀면서 유리카의 손바닥 사이로 그 너머를 보려고 했지만 헛일이었다. 그렇지만 될 대로 되라며포기하거나 짜증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러고 보면 주아니가 조바심을내거나, 뭔가 재촉하거나, 짜증을 부리거나 화를 내거나 하는 것을한 번도 본 일이 없다. 마냥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어쩌면 가장 어른스러운 것도 같은 친구, 희한한 종족. "자아……." 나는 드디어 꾸러미를 다 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싼 종이를 펼치기 전에 약간 시간을 두었다. "뭐야? 뭐야?" 그러지 않아도 곧 보여 줄 거라고. 나는 꾸러미를 펼쳤다. 그리고 동시에 유리카가 주아니를 그 꾸러미 가운데 가볍게 내려놓았다. 밤, 호두, 은행, 도토리, 추자, 개암, 가시나무 열매, 상수리, 잣,땅콩, 해바라기씨, 마카다미아, 육두구…… "뭐야……?" 주아니는 당황한 것처럼 그 사이에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주위에가득한 온갖 나무열매들을 보면서. 그리고 동시에, 유리카와 내가 소리쳤다. "주아니, 생일 축하해!" 펑, 엘다렌이 샴페인을 땄다. 그리고 준비했던 아주 조그마한 잔에다가 드워프 족 특유의 정교한 솜씨로 샴페인 한 방울을 따랐다. 딱맞게, 넘치지도 않고 정확히 가득 찬 잔이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인주아니에게 건네졌다. "……." 확실히 잘 만들었다. 엘다렌의 저 굵고 뭉툭한 손가락이 어떻게 저런 것을 다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나무로 세심하게 깎아진 손톱 끝만한 술잔에는 손잡이가 있었고, 거기에 자잘한 무늬들까지 새겨져 있었다. 언제부터 저걸 만들고 있었을까? "엘다렌의 선물이야." 우리 몫의 잔에도 샴페인이 따라지자, 잔을 들어올리고, 조심스레꼬마 잔과 부딪쳤다. 아니, 건드리고 지나갔다는 표현이 옳을 지도몰랐다. 주아니가 대답할 말을 찾아내지 못한 채 잔을 양손으로 들고조금씩 홀짝이는 것이 보인다. 주아니는 마시고, 조금 더 마시고, 그리고 한참 후에야 말했다. "나는…… 이런 건 전혀 생각하지도……." "아아, 매번 네 몫의 잔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나봐. 어때, 나무열매들은? 이건 말이지……." 유리카가 내 말을 가로챘다. "주아니 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열매들을 다 보고 왔노라, 정도는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마음에 들어? 잘 봐라, 저기는 못 먹는 것도 있으니까 조심해야돼." "신기한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되돌아갔을 때도, 가출했다고 '족장어머니'한테 안 혼나지." 내가 뒷말을 덧붙이며 씩 웃었다. 달크로즈 시는 확실히 대륙의 수도라, 정말 별난 가게들이 다 있었다. 나르디한테 물어본 정보이긴 했지만, 진짜로 견과 열매들만 파는가게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그것도 제대로 이름조차 모르는 것들까지, 모조리 하나 가득 커다란 통에 쌓여 있는 가게였다니까. 나는 주아니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싱긋 웃었다. "생일은 좀 지났지만……." 주아니의 생일이었던 약초 아룬드 2일에는 정말 엄청난 일행들과함께 여행하던 중이라, 주아니와는 거의 제대로 이야기할 틈조차 없었다. 그럭저럭 6일이나 지나버리고 말았지만, 어떻게든 축하를 해주고 싶었다. 로아에들이 생일을 어떻게 지내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 족 방식으로 좀 해준다고 한들 나쁠 것은 없으리라는 점에서 우리들은 의견이 일치했다. "마음에 들어? 소감 좀 말해봐." 유리카가 짐짓 쾌활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여전히힘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렇기도 할거야. 그녀더러 지금 기운찬모습을 보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억지지. 주아니는 소감을 입으로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내려놓은 꾸러미안을 구석구석 들쑤시며 돌아다니는 중이었는데, 이리저리 움직임에따라 조그마한 열매들이 들썩이고 밀어젖혀졌다. 꾸러미 안에 조그마한 지진을 만들면서 주아니는 정말 열심히 그 속을 쑤시고 있었다. 잠시 후에 주아니는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아, 향긋해." 나무 열매 더미 속에서 한참만에 고개를 든 주아니의 표정은 정말로, 말로 다 못할 정도로 흡족해 보였다. 나와 유리카는 얼굴을 마주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엘다렌은 샴페인 잔을 단숨에 비운 다음다시 고개를 숙인 채 파이프 손질에 열중했다. 그의 무성한 수염 속에 있는 표정이 어떤 것인지 알 길 없지만, 그리 나쁜 것은 아니리라고 나는 확신했다. 그가 이 아기 같기도 하고 조숙한 어른 같기도 한꼬마 친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주아니가 뒤이어 말했다. "유리카 생일은 그냥 지나갔는데……." 아…… 알고 있지. 유리카는 그저 행복한 듯한 미소만을 지었다. 약간 피로한 듯한 미소이기는 했지만,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한 미소였다. 그리고 그녀는손가락을 내밀어 주아니의 조그마한 손이 잡을 수 있도록 하면서 말했다. "내년엔 꼭 챙겨 먹을 생각이야." 그래, 유리카, 다음 해 생일은 네가 싫대도 내가 챙겨 줄 거야. 그리고 그 뒤로도 계속, 계속. 없는 달 태생이라 생일도 없다고? 그렇게는 결코 두지 않을걸. 엘다렌은 주아니의 잔이 빈 것을 보더니 다시 솜씨 좋게 거기에 술을 따라 주었다. 사실 그 잔에 제대로 술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엘다렌밖에 없었다. 주아니는 잔이 차자 다시 홀짝이며 마시기 시작했다. 로아에들에게는 건배의 풍습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나는 잔을 유리카에게 내밀며 말했다. "주아니의 66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우리끼리라도?" 유리카는 약하게 미소지으며 내게 잔을 내밀었다. 잔이 부딪쳤다,아주 가볍게. 엘다렌에게도 잔을 내밀었고, 그는 파이프를 놓고 잔을들었다. 그가 중얼대듯 말했다. "샴페인은 마치 주스 같아서. 잔을 부딪치는 것을 자꾸 잊어버리는군." 그리고 우리 셋은 웃었다. 나무 열매 가운데 앉은 주아니는 정말로고향에 돌아간 것처럼 어울려 보였다. 소박한 기쁨이란 이런 걸 두고하는 말일 거다. 나는 잔을 반쯤 들이키고, 그리고 젖혔던 고개를 바로하며 유리카가 입술로 잔을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감기는 그녀의 눈꺼풀……. 탁, 뭔가가 바닥에 부딪치고, 물방울들이 한꺼번에 튀었다. "유리카!!!"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우당탕 넘어져 굴렀다. 탁자 위의 주아니는 깜짝 놀라 잔을 떨어뜨렸다. 엘다렌이 의자에서 훌쩍 뛰어내려 바닥으로 몸을 굽혔다. 나는 내 손에 들린 잔이 반쯤 기울어져 남은 술이 바닥에 줄줄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내 눈앞에 일어난 상황을 보았다. 눈을 비비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느 초여름의 하루,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버린 그 순간은 곧이어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많은 분들이 표지에 대해서 걱정, 또는 의견을 말씀해 주시네요. 그 중에선 불가능하긴 해도 저도 해보고 싶은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요. ^^가죽 장정에 금박 글씨 얘기하신 분... 정말 멋지겠어요. ^^하드커버로 된 매니아 소장본을 따로 발간했으면 좋겠다는 분...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역시 비싸겠죠. ^^;그리고 어떻게 글을 빨리 쓰냐고요? 음.... 제 비결은! .... 없고요(;;;), 그저 하루에 쓸 양을 대강 정해놓고 맞추려고노력한다는 정도겠습니다. ^^;하이텔의 kyunginh 님, 세월의 돌에 나오는 종교에 대해 물으셨지요? 글쎄요... 별다른 종교라 할만한 것은 나오지 않는 것 같군요. 듀나리온과 아스테리온, 트루바드와 검은 예언자도 성격이 종교집단보다는 길드에 가깝습니다. (물론, 길드란 이야긴 아니고요.. 자신의신념을 위해 모인 일종의 이익 집단이란 말입니다. 이들은 보통 존경을 받긴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교리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에종교가 전혀 없진 않습니다만, 파비안만 해도 그 '종교집단'이라는것을 매우 시시한 것으로 생각하는 대사가 나왔었죠. 예언자들은 '가장 오래된 어머니' 예니체트리를 신봉합니다만, 그것 역시 마치 오래된 조상에게 예의를 다하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이스나에 역시 종교적 신앙의 대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고 홈페이지 주소 물으신 분, fairytale.pe.kr입니다;;; 야후코리아에서 '세월'이나 '전민희'로 검색해도 나옵니다. 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11 (22:56) 게시물 번호 : 30---▷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19 , 줄수 : 187◁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7)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7) "안돼!" 마룻바닥에 흩어진 긴 머리카락, 쏟아진 샴페인이 적시고 있는 옷자락, 그리고 창백하게 감긴 그 얼굴, 그 얼굴……. 나는 정신없이 무릎을 꿇고 그녀를 안아 올렸다. 애써 추스르려 했지만 이미 의식이 없는 그 몸은 내 팔 안에서 축 늘어졌다. 한 손으로 뺨을 만져보고, 이마에 떨리는 손을 얹었다. 엘다렌이 다가와 그녀의 목에서 맥을 짚었다. 턱이 맥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입가에서 흐르는 것은…… 피……! "……." 입을 벌렸지만 한 마디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신없이 그 뺨을 내 얼굴에 갖다댔다. 아직은 온기가 남아 있다. 맥박도 뛰고 있다. 아주, 느리게…… 도대체 왜, 어떻게 된 거야? "눈……." 눈을 뜨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서 소리가 막혀 버렸다. 같이 몸을 숙이고 있던 엘다렌이 말없이 일어났다. 유리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서 바닥에 팔이 잘못 부딪친 탓에, 팔의 상처도 다시 찢어져 붕대에서는 이미 피가 벌겋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의식 없는그녀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침대에 눕혀라. 의사를 부르러 간다." 내가 무슨 말을 들었을까? 탕,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양손으로 그녀를 번쩍 들어 침대로 옮겼다. 입에서 다시 피가 흘러나왔다. 턱을 타고 목 아래로 흘러내렸다. 머릿속에 이미 뭔가 생각할 여유가 남지 않은 나는 팔을 들어 내 소매로 피를 닦아냈다. 침대에 반쯤 비스듬하게 앉혔다.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 입을 벌리게 해서 입안에 남은 피를 모두 쏟아내도록 했다. 선연한 핏방울들이후드득, 흰 시트를 적시고 아래로 흘렀다. "……."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그 얼굴이 맥없이 내 어깨로 늘어진다. 미세하게 눈꺼풀이 떨리는 것이 보인다. 여전히 의식이 없는 그녀의 몸은평소의 몇 배나 무겁다. 유리카……. 내 마음을 도무지 어떻게 가눌 수가 없다. 의식 없는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심장이 터져버릴 듯하다. 죽은 듯 감긴 그 눈, 시체처럼 핏기 없는 뺨, 내 온기를 나누어 줄 수 없는 파랗게 변색한 입술. 그녀에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나는 견디지 못하고 그 어깨를 끌어당겨 껴안았다. 내 온몸이 오한이 이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잠깐 사이에 이미 차가워진 그녀의몸이 문득, 부르르 경련했다. 내 어깨 뒤로 뭔가 뜨뜻한 액체가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 목을 타고 뒤로 줄줄 흘렀다. 유리, 괜찮은 거지? 말해봐, 괜찮은 거지? 눈을 떠봐. 내가 이렇게 애타게 부르는데, 너는 내 눈을 보지 않니? 내 목소리를 듣지 않니?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나보다 더 아무렇지 않던 너잖아. 나보다도 더 강한 너였잖아. 2백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여기까지 온 너야.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어디가 아픈 거야? 내게 말해주면 안 되는거야? 내가 알 수는 없는 거야? 유리…… 내 곁을 떠나지는 않는 거지……? 지금 내 관자놀이에서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는 것은 땀방울인가. 아마도 그렇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차가운 걸까. "유리는? 유리는?" "수건을 갈아 줄 때가 된 것 같군." 유리카는 정신을 잃은 후 내내 약 반시간 간격으로 각혈을 했다. 내가 잠깐 걸음을 멈추고 몸을 낮추자, 엘다렌이 다가와 유리카의 목에 감아 놓은 수건을 벗기고 다른 수건을 대고 돌려 묶었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뒤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엘다렌의 손에 들린 수건은온통 시커먼 얼룩으로 물들어 있다. 그걸 보니 다시 눈앞이 흐려지려고 했다. 나는 유리카를 들쳐업은 채 몇 개나 되는 거리를 뛰어다녀서 온 몸에서 김이 오를 정도로 열이 났지만, 내 등에 닿는 그녀의 몸은 얼음조각상처럼 차디찼다. 그 사실이 빠르게 걷는 내 걸음을 자꾸만 뒤로잡아당겼고, 순간순간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자꾸만 내가 시체를 업고 돌아다니는 끔찍한 환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아니야, 이런 생각은 아니야. 내 옆의 엘다렌이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밤이 너무 늦어서, 쉽게 들여보내 줄지 모르겠군."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나르디만 만날 수 있다면 일이 쉬워지겠지만 지금은 이미 밤 10시, 성을 지키는 위병대가 우리를 막을 지도 몰랐다. 내일 다시 오라고? 그건 죽으라는 것과 같아! 엘다렌이 데려왔던 의사도, 그리고 그 다음에 직접 들쳐업고 달려가 찾았던 세 사람이나 되는 의사도, 한결같이 고개를 저었다.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그녀의 종잇장 같은 얼굴이 금방 찢어져 버릴 것만같다. "무슨 독에 중독된 것 같은데, 도대체 그게 뭔지……." "보통 의사가 고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오. 이런 독은 내 생전 처음 보오." 젠장, 그것도 모르면서 당신들이 의사야! 온 몸에서 진땀이 흘러내려 땀으로 목욕이라도 한 것 같았다. 달리면서도 나는 생각해 보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가운데서도 그녀의일만은 또렷이 떠올라왔다. 독, 독이라니, 언제 중독되었단 말이지? 그녀를 찔렀던 그 칼에 독이 묻어 있었나? 하지만, 그렇다면 상처 부위부터 썩어 들어갔어야하잖아! 샴페인? 샴페인이라면 같이 마신 다른 사람들이 멀쩡할 리없고, 겨울 소환사는? 그건 나와 같이 먹었던 건데, 그러면 약초? 아니면 차가 문제였나? 약초도 상처에 발랐던 것이니 상처부터 문제가생겼어야 해. 게다가 내 입으로 먼저 씹었으니만큼 나도 같이 중독되었어야 옳잖아. 그렇다면 그 이상한 향기의 차! "그러면 달크로즈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가 누굽니까!"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의사에게 거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태도로윽박지르듯 물었었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왔던 말……. "달크로즈에서 제일 잘 고치는 의사야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궁정시의겠지. 그렇지만 시의에게 감히 봐달라고 할 수도 없고, 나머지야다 비슷비슷……." 그 말을 끝까지 들을 것도 없이,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그리고 이렇게 지금 밤길을 달리고 있다. 나르디, 제발 도와 줘. 너를 만나기만 하면 네가 안 도와줄 리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아. 오르막, 달크로즈 성으로 오르는 길은 모조리 오르막이다. 나는 힘든 줄도 몰랐다. 한 번 쉬지도 않고서 단숨에 성으로 이어진 길을 달리고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성문 앞에 도달할 때까지 한 번도 멈추지않았다. 내 귓가에서 북을 두드리는 것 같은 쿵쾅거리는 소리가 점차커지고 있다. 쿵, 쾅, 쿵, 쾅, 쿵, 쿵쿵, 쿵쿵쿵. 머릿속이 온통 웅웅거리며 울리고 내 불안의 속도만큼이나 그것은빠르게 커져 내 청각을 온통 장악했다. 내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돌바닥을 딛는 소리, 가쁘게 내뱉는 숨소리, 내 뒤를 따라오는엘다렌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 유리카, 조금만 기다려. 가지마, 유리카, 그 줄을놓으면 안돼. 그리고 나는 성문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 주세요!" +=+=+=+=+=+=+=+=+=+=+=+=+=+=+=+=+=+=+=+=+=+=+=+=+=+=+=+=+=+=+=하이텔의 운설전우 님께서 보내주신 질문들 답변입니다. 첫째, 외전 계획에 대해서는 아직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에제키엘의 이야기는... 가능하면 쓰고 싶지 않습니다만. 둘째, 세월의 돌이 이렇게 인기 있을줄 알았냐고요? 전 예언자가아닙니다.. ^^;셋째, 파비안은 에제키엘의 환생이 아닙니다. 넷째, 아르킨의 검에 대해서는.... 비밀입니다. ^^;다섯째, 유리카 자체가 무슨 봉인인 것이 아닙니다. 유리카와 엘다렌, 그리고 앞으로 등장할 다른 한 친구가 2백년 동안 '봉인된' 것입니다. 그건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인거죠. 2백년 전에 일어났던 이상한 문제들은 아룬드나얀과는 별개의 힘입니다. 아룬드나얀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힘이고요. 여섯째, 볼제크와 아르킨의 싸움에서 둘이 한 2백년 어쩌고 한 이야기에 대한 것도.... 역시 비밀입니다. ^^;일곱째, 아룬드나얀의 보석들이 되찾아지면서 이미 마법이 조금씩돌아오고 있습니다. 유리카만 해도 푸른 굴조개호에서 약간의 마법을보여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처음 이 세상에 깨어났을 땐 이런 것조차 할 수 없었다고 말했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아룬드나얀은 세상을 봉인하는 힘이 아닙니다)... 답변이 되었나요? (많군요... ^^;; 그러나 꽤 자세히 읽으신것 같네요)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11 (23:47) 게시물 번호 : 31---▷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24 , 줄수 : 225◁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8)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8) 위병들의 그림자가 달빛을 받아 어스름한 실루엣으로 빛났다. 움직인다. 아마도 저 아래에서 달려 올라오는 우리 일행을 좀전부터 보고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누구냐! 성명과 용건을 대라!" "나는……." 입을 다시 열려는 순간, 목구멍 속에서 참았던 호흡이 한꺼번에 덩어리져 터져나왔다. 말을 잇지도 못하고 기침부터 심하게 했다. 한참동안 발작적으로 기침을 하고 나서 훅, 숨을 다시 들이켰다. 팔다리가 굳어지고, 동시에 움찔움찔 경련이 일어났다. "나르…… 아니, 태자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오늘 아침까지 성에서 묵었었는데, 일이 생겨서, 아니, 빨리 전하께 좀 알려 주세요! 저는……." 내 말은 앞뒤를 알 수 없게 횡설수설했고, 위병들은 서로 얼굴을보았다. 그들 중에 가장 험상궂게 생긴 병사가 내 앞으로 다가들며호통을 쳤다. "이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전하를 불러달라느니, 되지도않은 소리를 지껄이느냐! 전하를 뵈려면 내일 날이 밝을 때 다시 찾아와 정식 알현 신청을 하도록 해라!"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니까요!" 내 목소리는 찢어질 듯 높았다. 위병들은 내가 악을 쓰자 흠칫 놀라더니 그 다음으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감히 폐하가 계신 성 앞에서 건방지게 목소리를 높이느냐! 호되게매를 맞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썩 사라져라!" "돌아가, 돌아가!" 위병 세 명이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며 몸으로 나를 밀어내려 했다.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휘청이며 물러났지만, 이 정도로물러날 내가 아니다. "내 숨이 멎지 않는 한, 여기서 한 걸음도 못 물러나!" 나는 유리카를 업고 오느라 멋쟁이 검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달릴 때 몹시 거치적거렸지만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도 없는 물건이라어쩔 수 없었다. 덕택에 멋쟁이 검은 지금 칼집도 없는 상태였다. "이놈이!" 가장 성질이 급한 듯한 위병이 검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일분 일초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그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도 않았다. 오직 성안으로 들어가 의사에게 유리카를 보이는 일만이 중요했다. 여름이었지만 아직 차가운 밤공기에 내 뜨거운 숨이 서리를 만들어냈다. 다른 성벽에서 경비를 서던 위병 둘이 소란을 알고 이쪽으로급히 달려왔다. 위병 다섯 명이 성문을 막으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사정을 몰라. 아마 죄도 없어. 그렇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내 시간, 내 가장 짧은 순간, 생명보다 소중한 몇 초를 낭비하게 해서 만일 유리카의 생명이 위험해진다면, 결코, 맹세코, 단 한 명도용서하지 않을 테다! 나는 나지막이 숨을 죽이며 말했다. 내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그들에게 다 들릴 정도는 되었다.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태자 전하를 불러 줘. 전하가 오시면 모든상황을 알게 된다. 나를 막은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만일 내 말이틀리다면 그때 가서 나를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 원하는 대로죽어 준다." 목구멍에서 계속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려고 했다. 내 몸 역시흥분하여 떨리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내 등뒤에서 계속 오한이 이는 그녀의 몸, 선뜩하게 쏟아지는 각혈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온 몸에서 끓어오르는 열기, 열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뜨거워진 동공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쏟아졌다.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시야가 흐리다. 그러나 핏발선 눈동자를 그들에게 향했다. 결코 그냥 물러설 수 없다. 온 몸이 후끈후끈 달았다. 땀과 눈물, 온갖 것으로 범벅된 내 감각, 그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오직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단한 가지! "저, 저……." 위병 중 하나가 나를 손가락질하며 움찔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다른 위병도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들의 눈이 모두 내게 향해 있다. 아까부터 계속 그랬던가? 모르겠다. 그러나 아까와는 다른 반응, 그들은 몹시 놀란 듯 두어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저 녀석……." "뭐, 뭐지, 저 검은?" 내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성 위의 망루에 사람이 나타나고, 횃불이 몇 개 올랐다. 바람이 불어와 닿자,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내 피부에는 오히려 통증마저 느껴졌다. 그제야 블레이드가온통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아무느낌도 없었다. 내 머릿속에 오직 가득한 한 가지 생각 때문에, 이미다른 것은 아무 것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위병들이 문을 막으며 나란히 늘어섰다. 대강 쫓아보낼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 아마도 제대로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듯했다. 엘다렌이 다가왔다. 나는 그녀를 조심스레 내려 그에게 부축하도록맡겼다. "……." 나는 앞으로 걸었다. 위병들 앞으로 똑바로 걸어가, 그들의 옆으로돌아가려 했다. 말없이 그들이 다시 내 앞을 막는다. 다시 돌아간다. 역시 막는다. 나는 똑바로 그 얼굴들을 올려다본다. "태자 전하를 불러 줘." 위병들의 긴장한 얼굴에서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여전히옆구리에 끼고 있는 검에서는 점차로 빛이 더한다. "비켜." 대답은 없다. 나는 그대로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려 밀치고 들어갔다. "이 놈이!" 거대한 저항의 힘, 그리고 한 순간 그것은 뚫렸다. 아마도 여명검의 뜨거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성문을 향해 달렸다. 내 몸이 성문에 힘껏 부딪치는 소리는성벽 안쪽을 울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순간 내 주위에 가득한 금속성의 소리들이 귓가를 울렸다. 달려온 위병들이 나를 둘러싼 채 칼을빼어들고 있었다. 가슴속을 꽉 막고 있는 이 답답한 심정을 도저히 풀어놓을 길이 없었다. 이게 아니야, 나는 싸우자는 것이 아니야. 위병으로 세우는 것은 언제나 가장 충성스러우면서도 고지식한 병사들이다. 그들은 한치 물러섬도 없이 내게 다섯 개의 칼을 들이대었다. "성문에서 물러나라!" 그들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비추는 것은 내 검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빛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동자도 열기로 흔들렸다. 아직까지 이렇게 휘황한 빛을 내는 여명검을 본 일이 없다. 내 눈앞에서 그것은 마치 수백 개의 횃불을 켜 놓은 것처럼 검은 밤 가운데 거대하게 타올랐다. 달이었다, 아니, 태양이었다. 불꽃은 내 시야를 모조리 가리고 아무 것도 볼 수 없도록, 들을 수도 없도록 휘저었다. 머릿속에서 기이한 악기의 울림소리 같은 것이들린다. 달각거리는 듯도 하고, 자그락대는 듯도 하고, 나뭇조각들을부딪치는 듯, 바람에 흔들거리는 주머니 속의 구슬 같은 소리,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우는 윙윙대는 소음. 기이한 리듬을 갖고 있는 그 소리가 내 머릿속을 꽉 메웠다. 점점 빨라졌다. 나는 앞으로 걸었다. "저, 저리가, 이, 이상한……." 다시 성문 바깥쪽으로 걷는 내 앞을 그들은 오래 막고 서 있지 못했다. 검을 뽑았지만 찌르지 못했다. 한 사람이 커다랗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대장님께 연락해라!" 한 사람, 아니 두 사람이 성안으로 달려들어간다. 나는 다시 멈춰섰다. 그리고 성문 쪽으로 돌아섰다. 한 사람의 위병이 뽑아든 검을 거두지 않은 채 나를 살기 등등하게노려보고 있다. 처음의 성질 사나운 위병, 그가 든 검도 투핸드소드였다. "감히 폐하가 계신 성 앞에서……." 그는 훌륭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내게 중요한것이 아냐, 이제는. 겁나지 않아. 자기 직무에 충실하고, 충성스러우며, 성실한 사람을 베는 것조차도. 나는 천천히 옆구리에서 검을 빼어 오른손에 쥐었다. "비키는 것이 좋다." 위병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쩡! 그는 왼손잡이였다. 왼쪽으로 내리쳐오는 검을 나는 어려움 없이검신을 높이 올려들어 막았다. 팅, 하고 상대방이 든 검에서 이가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손가락 한 마디는 될 크기의 쇳조각이 핑글 허공을 돌아 아래로 툭 떨어졌다. 내 팔에는 방금 부딪친 충격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너와 결투를 하자는 게 아냐. 그런 것은 필요없어. 내 길을 막지만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이이이익!" 긴 외침 소리와 함께 다시 검이 내리쳐 들어온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꽤나 자신 있게 정수리를 향해 똑바로 내리쳐져 들어오는 그의검은 어쩐지 내가 어느 때, 어느 순간 배웠던 한 검술을 연상시켰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내가 배웠던 그대로 행동했다. 치르륵! +=+=+=+=+=+=+=+=+=+=+=+=+=+=+=+=+=+=+=+=+=+=+=+=+=+=+=+=+=+=+=어제 오늘 홈페이지 안들어가졌죠? 몇 분이나 왜 안들어가지냐고물어보셨네요. 아아악... 그게 제 홈페이지의 문제가 아니라, 글쎄 나우누리에 올려 놓은 홈페이지 전체가 아예 들어가지지 않았었습니다.... 나우누리가 이제 홈페이지에까지 마수를...(어제 비가 왔다죠?)어제는 글도 못 올렸었습니다. --;휴... 이젠 정상화되었으니(좀전에 가봤답니다) 다시 가보세요. 주소는 아시죠? fairytale.pe.kr입니다. (어제 물어보신 분한테 설명까지 썼었는데.... 죄송합니다. 오늘 다시 가보시길. ^^;)Luthien, La Noir. freeboard by somo세월의 돌(Read Only)1999/10/11 (23:48) 게시물 번호 : 32---▷ 전민희 (enjolas@nownuri.net) 읽은 횟수 : 28 , 줄수 : 183◁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9)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9) 내 체인 메일이 긁히는 소리. 고개를 가볍게 틀면서 머리를 겨냥한검을 피하고, 그대로 몸을 재빨리 왼쪽으로 틀어 빼면서 검을 마치숏소드처럼 꺾어 잡아 검날을 통째로 밀고 들어갔다. 빈틈, 아니 방어 없이 텅 빈 공간, 그 사이로 거대한 낫처럼 휩쓸고 들어간다. "크으으윽!" "멈추어라!" 내 검이 닿기도 전에 지른 비명, 그리고, 나는 마지막 순간, 아슬아슬하게 검을 멈췄다. "파비안!" 익숙한 목소리. "나르……." 문득, 그 이름을 부르면 안 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실을 생각해 내는 순간, 온통 폭풍우 같은 혼란 가운데 있던 나는 문득 현실로 돌아왔다. "모두 검을 거둬라!" 또한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 이건 아마도, 엘비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르디가 제일 먼저 한달음에 달려와 내 팔을 잡았다. 내가 검을내리자 그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열기와 땀과 눈물로온통 범벅이 된 내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어떻게 된 건가, 자네?" "……."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유리카를 바라보았다. 나르디의 눈도 그 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조그맣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상에…… 어떻게……." 위병들은 태자가 몸소 달려나와 내 손을 잡고 이름을 부르는 것을보면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나르디는 무엇을 하다가 온 것인지몰라도, 성에서 본 일 없었던 또 다른 화려한 실내복 차림이었다. 치렁치렁한 것이 뛰어나오는 데에는 알맞지 않은 옷인 듯했다. 신발도갈아 신지 않은 실내화 그대로다. 그야말로 소식을 듣자마자 정신없이 성문으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나르디는 몸을 성문 쪽으로 돌렸다. 그의 눈동자에 분노가 어렸다. "내 가장 소중한 친구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성문을 막기만 하면 다인가?" "……." 대답할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나르디도 대답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책임은 나중에 묻겠다. 어서 가서 환자를 옮길 들것을 가져와라. 그리고 보르젠은 들어가 시의를 당장 대기시키도록 알려라. 빨리!" 보르젠은 아마도 태자의 시종인 듯했다. 한 사람이 즉시 고개를 숙이고는 성문 안으로 달려들어가는 것이 눈에 비쳤다. "엘비르, 자네에게 이곳 수습을 부탁하겠다."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태자 전하." 엘비르는 일전 파티에서와는 달리 지금이 정식으로 대답해야만 하는 때라는 것을 알았다. 나르디는 내 손을 다시 한 번 꽉 잡았다가,몸을 돌려 엘다렌과 유리카에게로 다가갔다. 엘다렌에게 인사의 뜻으로 고개를 가볍게 숙인 그는 곧 바닥에 무릎을 꿇고 유리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잠시 가만히 그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오르코시즈 중독인가?"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나르디의 말이 옳았다. 달크로즈 시내 의사 몇 명이 봐도 모르던 일을, 한 번에 보고 알아낸 나르디가 놀랍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지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성문을 통과하자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한밤중의 달크로즈 성에서는 가벼운 소란이 일어났다. 국왕 폐하께는 나르디가 직접 보고를 드리러 갔고, 들것으로 옮겨진 유리카는 왕족 가운데 환자가 발생했을 때 들어가는 격리실로 보내어졌다. 엘비르는 조용히 일을 잘 처리했다. 나와 엘다렌은 방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은 채, 유리카를 진찰하고 있는 늙은 시의 - 한밤중에 갑작스레불려와 약간은 당황한 듯한 - 가 뭔가 말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시의의 이름 때문에 우리는 한 차례 더 놀랐다. 그의 이름은 모즈나우케, 좀더 손쉽게 말하자면 그도 나우케 의사였다. 나는 대륙 어디로 가나 한 사람쯤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곳곳에 점조직을 갖고 있는 나우케 가문이 점차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한밤의 병실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병실이라고는 하지만 성안의 어느 방 못지 않게 장식된 온갖 고급스런 벽지와 벽걸이들, 침대에 드리워진 아름다운 비단도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창문은 꼭꼭 닫혀 있었고, 환자의 안정을 위해 피워진 향 때문에, 방안에는 희미한 연기가 떠돌았다. 가까이 다가갈수 없는 침대, 저 안에 유리카가 누워 있다. 시의 말고 두 명의 의사가 더 침대 곁에 붙어 있었다. 그들은 모즈나우케를 보조하는 수습의들이었다. 그들은 똑바로 선 채로 시의가뭔가 지시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확실히 오르코시즈 중독입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먹게 되었는지…… 일단 위세척을 위해 약을 먹이겠지만,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 시의가 한참만에 이마에 솟은 땀을 씻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우리보다도 더 빨리 두 명의 수습의들이 자신의 일을 찾아 흩어져 갔다. 한 사람은 시의의 말에 따라 필요한 약을 챙겼고, 또 한 사람은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에게 토사물을 받아낼 그릇과수건 등등을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나와 엘다렌은 거의 동시에 벌떡일어났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딛다 말고 말했다. "어떨지 모르겠다니요?" 궁금한 것은 많았다. 오르코시즈가 뭔지, 그게 먹는 것으로 중독되는 독인지, 그리고 얼마나 맹독이며 어떤 해를 끼치는 것인지……그러나 역시 가장 궁금한 것은, 그녀가 지금 어떤 상태이며 앞으로어떻게 될 것인가다. 그런데 모르겠다니? "세척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 잘 모르겠다는 말이네."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는 거야? 내가 다시 이어 물으려는 순간, 갑자기 문 앞이 소란해지더니 시종들과 수습의들이 모두 허리를 굽혔다. 고개를 돌렸다. 폐하를 뵙고돌아온 나르디가 급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시의는 일어서지 않았다. 환자를 돌보고 있는 왕궁 의사에게는 왕족이 들어올 때 일어서지 않아도 되는 특전이 있다. "어떤가?" 나르디는 길게 묻지도 않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고, 아직도 혼수상태인 유리카의 얼굴과 시의의 표정을 한 번 보더니 모든 상황을파악한 듯했다. "힘써 주게." 시의는 그제야 의자에서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시의 모즈나우케를 비롯한 왕궁 의사들은 세척 시술 준비에 들어갔다. 나르디는 내 얼굴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도 근심이가득했다. "…… 괜찮을 거네." +=+=+=+=+=+=+=+=+=+=+=+=+=+=+=+=+=+=+=+=+=+=+=+=+=+=+=+=+=+=+=제가 1-1-2번 글을 요청하시는 분에 대한 안내로 바꾸어 놓았었는데도 가끔 게시판에, 또는 제게 메일로 앞부분 글 요청하시는 분들이계시군요... 솔직히 열 네군데나 되는 연재를 유지하는 일도 쉽지 않거니와, 출판으로 먹고 사는 출판사 분들이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거지요. 제발 제가 아무 일 없이 세월의 돌을 끝까지, 그리고 다음 글도 계속해서 통신에 연재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T_TLuthien, La Noir. 번 호 : 22971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0-12 20:32제 목 : ◁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10)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10) 어쩌면 자신한테 하는 것인지도 모를 그 말. "……."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의사들이 시술을 위해 진지하게 나가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에 나는마지못해 병실에서 떠밀려났다. 병실에는 문병하는 사람이 기다릴 수있는 거실이 딸려 있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았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바닥까지 닿는 거대한 창문이 있었다. 조각된 나무틀이 붙은 유리창문이 닫혀 있고, 두꺼운 다마스크 커튼이 쳐져 있다. 여름이 되었는데도 이 커튼은 여름 것으로 갈지 않았다. 병실의 것도 마찬가지였었다. 금실 수가 놓아진 흑녹색 다마스크 커튼, 저걸 치면 낮에도 온통 캄캄해질 것만 같다. 마음이 답답해졌다. 저런 커튼이 마음속에도 하나 내려진 것만 같았다. "…… 오르코시즈는 어떤 거지?" 내가 한참만에 입을 뗐다. 이대로 계속 입을 다물고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처럼 느껴져서다. 나르디는 가만히 대답했다. "아주 특수한 독, 왕족이나 귀족들 사이에서만 알려져 있고 또 사용되는 독이네. 왜냐하면…… 거기에는 보통 사람은 얻기 힘든 재료가 몇 가지 들어가기 때문이야. 나도 오르코시즈 독을 만드는 데 쓰이는 그 복잡한 재료들을 전부는 모르지만, 일단은 환영주 하쉬 미오사를 만드는 데 쓰이는 달밤의 향초 레 민, 그리고 희한한 일이지만순수한 월장석(moonstone)이필요하다고 알고 있어. 아주 부드럽고독특한 향내,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유혹적인 향이라고 하지만 마셔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일이지. 오르코시즈에 중독된 사람을 본 일이 있어. 두 번……." "다른 독하고…… 뭔가 특별한 점이라도?" 묻고 싶은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말을 꺼냈다. 나르디는 잠시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천장에 달린 장식등을쳐다보았다. 장식등에 달린 크리스탈 장식추들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창문은 꼭 닫혀 있는데도. 그것들을 서로 몸을 부딪치며 자그락대고 있었다. "…… 제조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르코시즈를 쓰는 이유는,그 성분을 조절함으로서 피해자의 생명의 시한을…… 정할 수 있다는이유 때문이네. 엘다렌이 나르디 쪽으로 약간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물었다. "죽는가?" "……." 우리는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엘다렌의 질문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쩌면 가장 필요하고도 말하고 싶은 질문, 그러나 왜 그 말이 입밖에 나오는 순간 현실화되어버릴 것만 같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걸까. 나르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싶었다. 조용한 가운데, 주아니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났다. 주머니 속이라더욱 작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어디서…… 그랬던 거야? 언제?" 도저히 나로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나는 그 순간의 일을 떠올렸다. 희한한 향기, 그래, 정말 희한한 향기였었다. 그 낯선 노파가차를 내미는 순간, 내가 그 차를 마셔버리고 싶다는 약한 충동을 느꼈었지. 그래, 나르디의 말이 맞아. 그 향기를 맡는 사람을 마시고싶게끔 만드는 독약, 그 독특하고도 이상한 향기. 그것이 귀족들의독약 오르코시즈인가. 주아니의 목소리가 다시 나지막하게 났다. "내가 곁에 있었더라면, 그 약 냄새로 뭐가 들었는지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 그러나 주아니는 곁에 있을 수 없었어. 우리는 주아니의 생일을 몰래 축하하기 위해 일부러 주아니와 떨어졌던 것인걸. 주아니가 곁에만 있었더라면…… 그렇지만 주아니의 탓이아니야. 곁에 있을 수 있었던 나, 내가 모든 것을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야.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질책의 감정으로 호흡이 떨려나왔다. 간신히 나오는 숨을 조절하려고 해도 곧 다시 엉망이 되어버렸다. 난생처음, 내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은 온통 날카롭게 헤집어지고, 견디기 힘들만큼 맥박이 가쁘게 뛰었다. 동시에 내 손으로무엇 하나 할 수 없는데도 무언가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느낌, 누군가에게 죽도록 빌고 무릎꿇고 사정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끈 하나로 벼랑에 매달린 느낌, 아슬아슬한 절벽에 발끝 하나로 서 있는 느낌……. 누군가 내 말을 제발 들어줘, 옷자락을 잡고 미친 듯 매달릴 수 있는 사람, 그게 법칙의 노장로이든 죽은 자를 데려가는 사신(死神)이든 상관하지 않겠어. 이 텅 빈 느낌, 참을 수 없어. 왜 내 말을 듣지않아? 그 상대가 있기만 하다면 멱살을 움켜쥐고 검을 휘둘러서라도,그게 영원에 가까운 싸움이라 하더라도, 하겠어, 하겠어. 손이 닿을수 있는 곳에 대답을 줘. 내 목숨과 바꿔서라도, 제발 내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줘. 유리카, 죽지마, 제발 죽지마……. "……." 내 귀에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병실에서 나는, 그 뜻을 알 수 없는 기이하고 조그마한 소음이 들린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 버린 거야.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슨 희생이라도 마다 않을, 바로 그런 일이 미처 눈치채지도 못하는사이에 심장을 꿰뚫어버린 거야. 나는 누군가가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나는 어깨에 머무르고 있는 손길을 느끼고 고개를돌렸다. 놀랍게도 그 자리에는 아마리에 왕비가 서 있었다. "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말을 잃어버렸다. 가벼운 손인데도 마치 몸을내리누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일어서지 못한 채 그 시선 그대로멈추어 버렸다. 손이 거두어졌다. 목 뒤쪽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일어섰고, 허리를 굽혔다. "……." 그녀는 말이 없었다. 가만히 무표정하게, 그러나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지금이 몇 시지? 왜 여기에 왕비 전하가 계신 거지? 그 순간, 왕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그 자리에 못박아 버렸다. "그렇게 상냥하고 예쁜 소녀가 아프다니 안되었소. 내 직접 돌아보고자 나왔으나 아직 시술중이라 하여 기다리려 하였는데, 지금 보니그대 역시도 환자로군요."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유리카는 왕비의 눈으로보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일개 평민 소녀에 지나지 않았을 터였다. 비록 나르디의 친구라고는 하지만, 일국의 왕비로서 결코 쉽지 않은배려였다. 지금은 이미 한밤중이었다. 나르디가 조용히 일어서더니 다가가 왕비의 손을 잡았다. 이미 성년이 지난 아들과 젊은 새어머니의 사이가 어느 정도 좋은지는 알 수없었으나, 그 순간만큼은 나르디 역시 그녀의 마음씀에 감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전하, 시의가 드옵니다." +=+=+=+=+=+=+=+=+=+=+=+=+=+=+=+=+=+=+=+=+=+=+=+=+=+=+=+=+=+=+=책이요... 곧 나옵니다. ^^;;10월 안에요... (이런 말씀밖에 못 드리다니..)Luthien, La Noir. 번 호 : 22972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0-12 20:32제 목 : ◁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11)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11) 문이 열렸고, 나는 그보다도 먼저 문 앞으로 달려나가려 했다. 시의 모즈 나우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안 된다고? "여기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리카는요?!" 내 목소리는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던 거실에서갑자기 튀어나온커다란 소리였다.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그 소리는 컸다. "…… 아직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아니, 설명 드리지요." 아직은 괜찮다고?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다는 거야? 나우케 시의는 류지아의 할아버지쯤은 되어 보이는 쭈글쭈글한 얼굴과 새하얀 머리를 가진 비쩍 마른 노인이었다. 그는 왕비 전하와나르디가 앉기를 기다려 의자에 앉더니, 내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는 흠흠, 하고 기침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아까 말씀드렸지요, 오르코시즈 중독입니다. 그것도 심합니다. 이미 온 몸에 독이 퍼져서 위세척 정도로는 어림없습니다. 남은 것을다 토하게 했지만 이미 혈액 속으로 퍼져버린 것이 너무 많아요. 여기로 왔을 때 이미 중독된 지 다섯 시간은 넘은 것 같더군요." 나는 간신히 침착하려고 애쓰며 그 말을 다 들었다. 그 다음에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시의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은충동을 느끼며 그를 죽일 듯 쏘아보았다. 나우케 시의에게 잘못은 없었다. 다만, 내가 문제인 것이다. "…… 오르코시즈 독은, 중독된 지 반 시간만 지나도 이미 끝난 거라고들 하지요. 그만큼 맹독입니다. 다시 말해서……." 숨이 조여 들어오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기다렸다.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다지 감정적으로 동요하지는 않은 듯한 시의의 목소리가들렸다. "최선을 다했지만, 저희로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군요. 이것으로…… 그만입니다." 마지막으로 버티던 가느다란 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어져 나갔다. 끝? 끝이라고? 이것으로… 그만? 2백년을 살아온 그녀야.그렇게 쉽게…… 끝이라고? 누구 마음대로? 누가 결정하는데? 나는 테이블을 탕 치며 일어섰다.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왕비 전하 앞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나는 그에게 달려들 듯 테이블 위로 몸을 굽혔다. 바짝 마른 목소리가 종이처럼 찢어져 버릴 것 같았다. "방법이 없다고? 끝이라고? 가망이 없다는 말을 하려고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다는 거야!" 나르디가 일어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살아날 수 있다고 말해!" 나우케 시의는 나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다고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수십 번 도리질했다. "아니야. 받아들일 수 없어, 그럴 리 없어. 그렇게 두지 않아. 그만이라고? 끝이라고? 있을 수 없어, 결코, 절대로!" 나는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유리카에게 가려고 했다. 내 뒤통수에 대고 시의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의식은 곧 돌아올 겁니다. 가서 보시지요." 나는 그대로 문으로 달려나갔다. 시종들이 놀라서 피할 정도로 나는 미친 듯 그 문을 나가 유리카가 있는 병실의 방문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 주위에 누가 서 있는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대로 똑바로 앞으로 걸어가 침대 가에 손을 얹었다. 새하얀 얼굴, 그대로 지워져 버릴 것처럼 창백한 얼굴과 흰 머리카락이 하얀 시트 위에 흩어져 있다. 자칫 보았다가는 이미 없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입술에조차 거의 색깔이 없는 얼굴이었다. 감히 손을 댈 수조차 없었다. 마치 물 속에 비친 가벼운 그림자처럼, 그렇게손을 댔다가는 흐려지고,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입술을 안으로 사려 물었다.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침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 고요하다. 어떤 소리도 낼 수가 없다. 저 잠든 눈동자 뒤에서 그녀가 어떤 싸움을 벌이고 있을지 나는 알수 없다. 어떤 사력을 다한 투쟁을 하고 있을지, 그 생명을 지키기위해 얼마나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 것도 도울 수 없는 나. '유리, 유리카…….'속눈썹도 움직이지 않는, 그림처럼 고요하게 잠든 얼굴. 저 잠든 얼굴은 이미 모든 싸움을 끝낸 것처럼 평온해 보여. 그렇지만 아니야, 너는 포기한 것이 아닐 거야. 결코 그대로 물러설 네가 아니야. 나는 너를 잘 알아. 비록 그 싸움에서 지더라도…… 마지막 한 순간까지, 한 방울 남은피가 마저 다할 때까지, 그 손을 놓지도 않고 무릎을 꿇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을. 눈앞에 그 모습이 그대로 떠오르는 듯했다. "……." 내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처음으로 얼굴이 일그러지지도 않은 채 눈물이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는 듯했다. 이윽고 그 눈꺼풀이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가볍게 들어올려졌다. "…… 파비안?" 어쩌면, 그 목소리조차 평상시보다 약간 힘이 없을 뿐이다. 그녀는눈물 자국이 뺨에 그어진 나를 보고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고 있다. 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 영혼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벼랑에 서 있는지도……. "유리카……."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그 손을 찾았다. 그녀의 손이 조금 후에 내손을 찾아 그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그 손을 꽉 쥐지조차 못했다. 부서져버릴 듯 작고 연약한 손…… 그저 가볍게 잡으면서 다만 내 손에서 빠져나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 다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오른손을 이불 속에서 뺐다. 그 손이 내 뺨으로 다가왔다. "왜 울었어…… 난 괜찮은데……." 그 손가락들이 내 눈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스쳐지나간다. 그렇게짧았던 몇 개의 아룬드, 그녀가 그 손가락들처럼 내 인생의 한 켠을스쳐지나가 버릴 것만 같다. 그 손을 잡고 싶다. 내 곁에서 떨어지지못하도록, 그 손목을 잡아 가버리지 못하게 꽉 붙들고 싶다. "나 아무 데도 가지 않는걸……."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던 것 같다. 그녀가그 창백한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올렸다. 간신히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너…… 지금 한 그 말, 내가 기억해 둘 거야." +=+=+=+=+=+=+=+=+=+=+=+=+=+=+=+=+=+=+=+=+=+=+=+=+=+=+=+=+=+=+=글이 오랜만에 잘 써질 때마다 어머니께서 밥먹으라고 부른다.... 이건 무슨 법칙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3031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0-14 00:20제 목 : ◁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12)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12) "좋을 대로." 그녀가 다시 한 번 웃는다. 어쩌면 그 미소가 그렇게 꺼질 것만 같은지, 바람 한 번 불면 날려가 버릴 것만 같은 미소로 그녀는 웃었다. 아직은 내 앞에서 그녀는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아직은, 아직은…… 내가 무언가 해야만 해. 아직 그녀가 내 앞에서 웃을 수 있을때에. 나는 천천히 그녀의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가만히 중얼거렸다. "나중에…… 딴소리하면 가만히 안 둘 거야……." 끔찍한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았다. 잠시 깨었었던 유리카는 다시 잠들어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았다. 아마리에 왕비는 임신중이기도 한데다 나와 나르디의 간곡한 권유로쉬러 들어가고, 대신 엘다렌까지 우리 셋은 꼬박 밤을 새웠다. 주아니는 종족의 특성상 잠을 참을 수 있는 체질이 아니라, 잠시 잠들었다가 새벽이 되자 일어나 초췌한 우리 셋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창가에 새벽의 파란빛이 가득히 묻어 들어온다. 오늘은이렇게 어제와 다름없이 시작되는데, 이렇듯 어제와는 완전히 달라져버린 하루라니. "아침 식사…… 해야지?" 분명 나는 나르디와 함께 여행하면서 노숙도 하고, 서로 옷이 지저분하거나 며칠씩 목욕을 못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봐 왔는데,이상하게도 지금 하룻밤을 새운 그의 피곤한 얼굴이 몹시 낯설다. 뭐랄까, 그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왜일까, 그가 왕족의 옷을 입고 있어서인가, 여기가 그가 태어나고 자란아름다운 성안이기 때문이라설까. "그래……." 유리카의 창백한 얼굴, 저대로라도 좋으니 계속 있어만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 엘다렌은 하룻밤을 새웠지만 어제와 조금도 얼굴이 달라진 것처럼보이지 않았다. 그는 특별히 유리카의 얼굴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와 함께 긴 세월을 뛰어넘어 온 동료인 그녀가 이제 이렇게우리 곁을 떠날 지도 모르게 된 것에 대해 그의 감정이 남다르리라는것을 나는 안다. 아직 나머지 한 동료는 만나지도 못했다. 지금까지우리에게 너무 행운만이 따라 주었던 것일까? 문 밖에서 누군가 온 듯한 소리, 시종들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린다. 왕자가 밤을 새우는 바람에 덩달아 밤을 새울 수밖에 없었던 탓에 상당히 피곤한 목소리들이었다. 곧 문이 열렸다. 전하에 대한 인사, 그리고 곧 등뒤에서 한 사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 나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이제 가망이 없다고 해서, 돌볼 필요조차 없다는 건가? 이제야 나타나는 그가 조금도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시의 나우케 씨는 잠시 내 옆에 말없이 서 있었다. 나는 한참만에별 수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주름 많은 얼굴에는 고민과피곤이 묻어 났다. 그 얼굴을 좀더 쳐다보고 있었다. "별로…… 알아낸 것이 없지만, 일단 들어보시지요." 나는 그날 밤 처음으로 유리카의 침대 맡을 떠나 방 가운데 있는테이블로 가 앉았다. 나르디와 엘다렌 역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시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나라 최고의 의사 자리에 앉은 제가, 그 자리의 명예를 지키지 못하고 이렇듯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이 심히 송구스럽습니다. 비록 아가씨를 살려내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지난밤 늙은이의 밤잠 없음을 빌어 몇 가지 문헌을 뒤져보았습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들어 늙은 의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서글퍼 보였다. 시의라는 위치에 오른 사람, 스스로의 실력에 대해자부심이 대단했을 텐데……. "아마도, 여러 가지 문헌에 기록된 바로 미루어 보건대, 아가씨의생명은 길게 잡으면 두 달 가량, 만일 짧으면 일 주일 정도밖에 유지되지 않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셨던 중독의 직접적계기로 짐작되는 사건 이후 발작까지의 시간적 간격이나 현재의 용태를 관찰한 결과, 제 짧은 소견으로는 한 달 정도로 성분이 조절된 오르코시즈이리라고 생각됩니다." 한 달……. 견디기 힘든 오한이 온 몸에 찾아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며 팔로 몸을 감쌌다. 나르디는 고개를 기울인 채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더니 곧 내쪽을 보았다. "파비안." 천천히 그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도대체 유리카를 일부러 중독시키려 한 자가 누구였을까?"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그 노파의 얼굴, 아무 악의도 없어 보였었다. 아니지, 그가 우리를 속이고자 했다면 당연히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겠지. 그런데 그렇게 제조하기도 어렵고, 재료도 비싸다는 그런 독을 일부러 쓰다니…… 거기다가 우연인지 계획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만일 거리로 달려드는 말과 단검을 휘두른 자까지 동원한완벽한 각본 하에 그녀를 죽이려 한 것이라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렇게까지 그녀에게 뿌리깊은 원한을 가진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 모르겠어."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팔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 떠오르는 생각은 유리카가 제발 깨어 있지 않았으면 하는 것, 생명이 길어야 두 달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결국곧 알아야 할 것이라 하더라도……. 시의는 다시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이런 말씀 드리는 것이 제게도 마음 아픈 일이지만…… 오르코시즈 중독을 고칠 수 있는 의술은 적어도 이스나미르 안에는 없습니다. 젊어서 전국을 여행하며 의술과 약초를 연구했고, 웬만한 병은 안 대해본 병이 없는 저입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오르코시즈 중독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일 없으며, 그리고…… 매번 그 예언된 날짜와 약간의 편차만을 두고 죽어 가는 환자들만을…… 저는 십여 명 이상 보았습니다." 고개를 흔들 기운조차 없다. 새벽빛이 점차 희게 변해갔다. 빛을바로 대할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는다. 내 등 뒤로 비쳐들기 시작하는 햇살이 점차 테이블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실루엣을 방 너머로 길게 떨어뜨릴 때까지 나는 잠자코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나르디가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스나미르 안에는 없다면…… 다른 곳에는 있다는 말씀이오?" +=+=+=+=+=+=+=+=+=+=+=+=+=+=+=+=+=+=+=+=+=+=+=+=+=+=+=+=+=+=+=하이텔의 sun9876 님, 세월의 돌 홈페이지 주소는-fairytale.pe.kr입니다. ^^;;; (이것만 쳐도 갑니다)그리고 야후 코리아에서 '세월'이나 '전민희'로 검색해도.... 나옵니다. ^^;(자꾸만 fairytail이라고 생각하셔서 못 찾으시는 분들이.... 요정꼬리가 아니고 요정 이야기예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3032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0-14 00:21제 목 : ◁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13)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13) 시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세르무즈와 로존디아는 제가 돌아다녀 본 바 없습니다만…… 그어느 곳이든, 두 달 안에 몇백 년간 치료법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그 독의 해독약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만일 발견되었다면 한 곳에서만 알고 있었을 리 없죠. 오르코시즈는 그 독의제조상 특성으로 인해 흔히 성이나 궁성에서 발생합니다. 그러나 저는 달크로즈 다음으로 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살고 있는 하라시바의왕궁에서도 오르코시즈는 치료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고개를 창가 쪽으로 돌렸다가 말을 이었다. "실제로, 가장 최근에 그 독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잃었다는 것을알고 있으니까요." 그 때였다. 문이 난폭하게 열어제쳐지는 소리가 들리고, 우리 모두는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입구에는 잔-이슬로즈가 서 있었다. "……."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여 방금 말을 끝낸 시의를 향하는 것을 우리 모두는 보았다. 그녀는 잠시 그 매서운 눈길을 거두지 않고똑바로 그를 쏘아보았다. 지금만은 긴 드레스를 입고 있음에도 전장에서 갑옷을 걸치고 검을 휘두르던 여장군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그녀다. 나우케 시의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조용히 일어서더니 그녀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녀의 딱딱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말을 조심하시오." 나는, 그리고 표정을 보아 아마도 나르디 역시 하라시바 궁성에서죽었다는 그 어린아이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 그러나 잔-이슬로즈는 눈에 띄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오고, 문이 뒤에서 닫혔다. 시녀 두 사람이 따라 들어와 방안의 커튼을 걷고 램프의 심지를정리하여 껐다. "소란을 일으킨 점, 사과 드리겠소." 잔-이슬로즈는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조용히 걸음을 옮겨 유리카의침대로 다가갔다. 그녀가 허리를 굽히더니, 이윽고 앉았다. 다시 잠들어 있는 유리카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보고 있던 그녀는이윽고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르코시즈 중독은 고칠 방법이 없다고요?" 그녀는 아마리에 왕비의 이야기를 듣고서 곧장 이리로 왔다고 했다. 손님이라고는 해도 사실상 그녀는 성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어젯밤에는 소식을 전해들을 수가 없었다. 시의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가 아는 한에서는 그렇습니다." 잔-이슬로즈의 입가에서 조그마한 한숨이 새어나오는 것이 들렸다. 나르디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말고 가만히 중얼거렸다. "지금에는 에디에르나의 아가씨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건가……." 에디에르나의 아가씨, 분홍빛 유리병의 아스엘…… 그렇듯 많은 병자를 고쳤었다는 그녀도 오르코시즈 중독의 해독약은 만들어놓지 못했나……? 아니지, 그녀 시대에는 저렇듯 극악한 독약을 만드는 사람은 없었던 걸 거야. 계속해서 더욱 치명적으로 개발되는 독약. 그러나 독을만드는 사람이 있으면 해독약도 있어야 하는 법, 그런데 어찌 이 독에는 그에 맞는 의사가 없는 것일까. 그런데 잔-이슬로즈가 약간 이상하게 반응했다. "에디에르나의 아가씨? 에디에르나의 아스엘 말씀이오?" 누구나 아는 이름이라 그녀의 반문이 이상하게 여겨졌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에디에르나가…… 그대 나라의 아라스탄 호수 변에 있었던 마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저 전설일 뿐이지. 나르디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시의가 덧붙여 말했다. "세르무즈의 공주 전하께 말씀드리기에는 부적당한 이야기일지도모르나, 그저 폐허가 된 마을이 하나 발견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곳이 에디에르나라는 증거는 조금도 없었고, 그저 옛 노래에서 말하는 이야기로 인해 아라스탄 호수 근처 어딘가에 약을 다루는 자들의 땅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있어 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아라스타니아 숲 그 어디에서도 비슷한 흔적은 더 이상발견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 폐허를 에디에르나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지요." 이스나미르와 세르무즈, 로존디아는 전설과 관계된 땅이나 인물들을 하나라도 자기 나라의 것으로 하고자 다툼이 심하다고 알고 있다. 그런 가운데 나우케 시의의 발언은 확실히 세르무즈 공주 앞에서 한말로서는 파격이었다. 그러나 나르디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잔-이슬로즈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잔-이슬로즈는 얼굴을 굳힌 채 그 말을 들었다. 정교한 윤곽을 지닌 입술이 딱딱하게 다물어져 있었다. 나는 에디에르나의 아스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왜 그녀가 지녔다던 기적의 분홍빛 약물은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은 걸까. 그 약만있으면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는데, 왜 그걸 만드는 방법이 후세로 전해지지 않았을까? 혹시 그 약물의 효능에 대한 것이 단순한과장이라서? 갑자기 잔-이슬로즈가 고개를 똑바로 들더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면으로 내 눈을 보고 있었다. "한 번 노력해보지도 않고서 유리카를 죽일 건가요?" 뭐……? 나를 쏘아보는 그 검은 눈동자가 다시없는 열의로 생생하게 빛나는것을 나는 보았다. 그래, 유리카도 한때는 저렇게 눈을 빛냈었어. 지금은 저렇듯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를 감추고 보여주지 않지만……. 나는 물었다. "노력하다니, 무슨 말입니까?" 나르디도 잔-이슬로즈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여유를 두지도 않고빠르게, 그러나 진지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를 에디에르나로 데려가요." 나도 이제는 미간에 주름을 모으고 있었다. "에디에르나가 어디기에?" "두 달 안에 해볼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보지 않을 건가요? 아라스탄 호수에있다고 했어요. 호수 주변에 있지 않았으면 호수 가운데있겠지. 대륙 최대 넓이의 담수호라고는 하지만, 모조리 헤엄쳐 건너서라도 약이 있다면 찾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높아져 있었다. 그 얼굴이 전사의 의지를 가지고내게 대답을 재촉한다. 그녀의 진면목을 보는 것은 다른 때가 아닌바로 지금이었다. 어쩌면 저토록 모든 사람에게 그 열의를 전염시키는 전사란 말인가.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찌를 듯 높아졌다. 그리고 그 말은 비수처럼 내 가슴에 아프게 꽂혔다. "연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나는 테이블 아래로 내려진 주먹을 아프게 쥐었다. 그래, 약이 있기만 하다면 못할 일이 없다. 그녀를 다시 건강하게 할 수만 있다면나는 하지 않을 일이 없어. 길어야 두 달, 노력하지 않고 그 죽어 가는 얼굴만 지켜본다는 것이 말이나 되나! 내 곁에 앉은 나르디의 입술이 약간 움직였다. 곧 그의 입에서 그가 했어야 할 말이 떨어졌다. "이슬라, 무모해요." "무모하지만은…… 않다." 모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엘다렌이 어젯밤 이후로 입을 연 것은처음이었다. +=+=+=+=+=+=+=+=+=+=+=+=+=+=+=+=+=+=+=+=+=+=+=+=+=+=+=+=+=+=+=유리카가 죽을까봐 걱정해 주신 모든 분들께... 안부의 말씀을. 건강하세요. 건강이 최곱니다- ^^;(뭔가 새로운 캠페인이...;;)Luthien, La Noir. Dream Of Blue Sky --------------------------------------------------------------------------------작성자 : 루미 (arumy@netian.com) 조회수: 14 , 줄수: 1302[연재] 세월의 돌 8-2 - 14~20화번 호 : 23057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0-14 20:58제 목 : ◁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14)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14) 내 목소리가 힘들게 떨려 나왔다. "무모하지…… 않다니요? 그럼……." 하려던 말을 삼키고 나는 엘다렌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엘다렌은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일어섰다. 그리고 도저히 그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놀라운 일이지만, 엘다렌은 잔-이슬로즈의 손을 잡고 기사들이 하듯 거기에 입맞춤했다. "……!" "아……." 다들 완전히 말문이 막혀 버렸다. 키스를 받은 잔-이슬로즈 자신도놀라 커다란 눈동자로 엘다렌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엘다렌이 드워프라는 사실을 여행 도중 이미 알고 있었다. 드워프의 관습에도 저런 예법이 있었던가? 엘다렌은 우리 모두의 경악한 눈길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서 잔-이슬로즈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브릴의 공주, 그대의 놀랄 만한 용기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내게 한 가닥 영감과 희망을 남겼소. 그대가 물려받은 그 전사의 핏줄이 자손 대대로 영광 받기를. 그리고 그대의 제안, 그것이 내가 아끼는 동료…… 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면 나는 평생 그대에게 그것을감사할 것이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만은내 귀에 바로 들어왔다. 영감, 그리고 희망! 나는 벌떡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거의 낚아채다시피 엘다렌의 손을 붙잡았다. "그게 뭐죠?!" 엘다렌은 아주 천천히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손을 잡은 순간으로부터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파비안, 아라스탄 호수로 간다. 만일, 만일 그 자가 아직도 호수가운데 있는 그 섬에 살고 있다면, 틀림없이 유리카를 구할 수 있는능력이 있을 것이다." "그게 누구죠?" "엘다렌, 섬이라니요?" 잔-이슬로즈도 자신이 했던 말이 현실로 나타나자 좀 놀란 듯했다. 나르디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도 했거니와, 스스로이 나라의 태자인 것이다. 그런데 그가 모르는 섬이갑자기 호수 한가운데에 있다니? 그러나 엘다렌은 더 설명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모두의 간절한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리카가 있는 침상으로 걸어가더니 그녀를조심스레 흔들어 깨웠다. "설명해 줘요!" 도저히 참지 못한 내가 소리를 지르자 엘다렌은 아주 잠깐 동안 동작을 멈추더니, 다시 천천히 유리카를 흔들면서 입을 열었다. 뒤를돌아 보지조차 않았다. "그 자는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지금 한 이야기는 모두 못들은 것으로 해라. 유리카가 여행을 할수 있을 정도로만 기운을 차리면 바로 출발한다. 목적지도 모두 비밀에 붙여라." "……."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글썽해졌다. 나를 버렸던 운명의 끈이 다시 이어지려 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희망, 그게 무엇이라도 좋아. 어렵든 쉽든 끝까지 해낼 어떤 것, 그런 것 없이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아. 무리한 조건이라도 좋아, 어떤기회라도 좋으니까 내게 제발 기회를 주기만 해. 시의가 뭔가 아는 듯한 얼굴을 하고 엘다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말할 듯이 입을 움직였으나, 결국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르디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오늘 내로 출발이겠군요. 엘다렌, 제가 도와 드릴 일은 없을까요? 호위 부대를 보내드릴 수도 있고, 아라스탄 호수가 속해 있는레이븐 카운티나(Raven County) 버밀리온 카운티에 전령을 보내 돕도록 지시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가는 동안 유리카를 돌볼 의사를 딸려 드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여행 준비가 철저하게 되도록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엘다렌은 나르디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천천히고개를 저었다. "사적인 일로 나라의 군대를 동원할 수야 없는 일이지. 이동을 빠르게 하려면 인원은 적을수록 좋다. 더구나 아라스탄 호수에 이르러해야 하는 일은 은밀해야 하는 만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일은사양하는 편이 좋겠다. 마음만은 고맙지만, 지금까지 도와 준 것만으로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르디는 약간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함께 떠날 수도 없는나르디, 약간은 거리감이 생긴 느낌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렇지만 감사하다는 말씀은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함께 여행했던 일행이었고, 지금도 동료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당연한 것일 뿐입니다." 나르디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카를 잘 부탁하네. 꼭 다시 돌아와서 건강한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 독이 치료되면 성으로 와 주겠지? 유리카의 얼굴, 내게도 보여 주겠지?" 나는 천천히, 그러나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잔-이슬로즈가 다가와마치 기사들처럼 씩씩하게 악수를 청했다. 그녀의 손은 그야말로 전사의 것, 손바닥이 단단하고 손마디가 뚜렷한 그런 것이었다. "연인을 잘 지켜요. 서로를 지키면서 살아가요." 그녀의 말은 짧았으나, 마브릴 특유의 진지함이 깃들여 있었다. 마음속에 비친 약간의 섬광이 있었다. 너무도 어두운 곳에 있을 때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침대 쪽에서 약간의 기척이 있다. 유리카가 깨어나려는 모양이었다. 천천히 그 쪽으로 다가가고, 엘다렌이 옆으로 비켜 주었다. 나비 날개처럼 가볍게 움직이고 있는 그 속눈썹에 손을 대어보고싶었다. 천천히 그 뺨에 손을 가져갔다. 시트 위로 손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윽고, 그 녹색 눈동자가 열리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온통 창백하고 새하얀 가운데 그 초록빛이 얼마나 눈물나게 아름다운지 몰랐다. 나는 거의 정신없이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말조차 필요없었다. 봄의 보석, 봄의 공주. 그렇게 봄처럼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어. 봄은 매해 다시 되돌아오는 시작, 그렇게 다시 처음으로 모든것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시녀 하나가 창문을 조금 열었고, 거기에서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과 있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 목소리가 좀더 긴박하게 커졌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내게 이보다 더중요한 일은 없었다. 어느 순간 사라져버릴 지도 모를 유리카, 네 얼굴을 바라보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어. 몇 명이 더 들어왔고, 다시 더 이야기가 오갔다.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누군가가 방을 급히 달려나갔고, 보고하는 듯한 목소리가 방을울렸다.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고, 그리고 누군가가 내 등뒤로 다가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얹은 것은 엘다렌이었다. 가만히 그대로 유리카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엘다렌이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내게서 아주 멀리 떨어진 일처럼, 그런데도 그 말은 아주 정확히 잘 들렸다. "중대한 사고가 생겼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들이 밤새 반란 음모를 꾸민 모양이다." 왜 이렇게 한꺼번에 모든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 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은 이미 한 가지 일만 생각하는 것으로도 버거운데, 도대체 이건 무슨 사건이지? 도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인 거야? 성의 망루를 향해 정신없이 달리면서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켜서요!" +=+=+=+=+=+=+=+=+=+=+=+=+=+=+=+=+=+=+=+=+=+=+=+=+=+=+=+=+=+=+=홈페이지 개장 보름 정도 지났는데 카운트가 6000이 넘었네요. 홈페이지 대문에 쓰여 있는 것처럼 6000명의 독자분... 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한 분이 자주 오시기도 하겠죠? ^^;홈페이지에 와서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꽤 많아진 것 같네요. 그리고 저번 300회 이벤트에 당선된 감상 찾으시는 분들, 그 글들은 홈페이지에 있습니다! 거기 가서 찾아보시면 돼요.. ^^;주소 : fairytale.pe.krLuthien, La Noir. 번 호 : 23058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0-14 20:59제 목 : ◁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15)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15) 성의 동쪽 탑으로 향하는 좁은 계단을 급하게 뛰어올랐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계단을 오르다 보니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높긴 높다. 여기에 올라가면 아르드-달크로즈가 다 내려다보인다는 말이 거짓은 아닐 것 같다. 계단의 끝에는 육중한 문이 있었다. 이미 넘겨받아 온 열쇠를 넣고돌렸다. 삐걱, 문은 손쉽게 열렸다.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거대한 바람이 휘몰아쳐 내 얼굴을 때렸다. 나는 멈칫하며한 발짝 들여놓았다. 눈앞에서 하늘이 탁 트였다. 나는 흰 돌로 둘러싸인 직경 8큐빗 정도의 둥근 바닥에 서 있었다. 천장은 하늘이었고, 주위를 둘러싼 벽에는 큼직한 돌들을 요철 모양으로 쌓아 놓았다. 나는 아르드가 내려다보이는 쪽으로 다가갔다. 세상에……. "하아……." 배의장루에서 내려다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광경이 발아래 펼쳐져있었다. 까마득한 공간에 거대한 공기가 휘몰아쳤다. 머리카락이 바람을 가득히 품은 깃발처럼 타닥이며 나부꼈다. 한꺼번에 시선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마치 지도처럼 점점이 흩어진 집과 숲, 땅들……. 그러나 놀랄 만한 전망을 오랫동안 바라볼 여유도 없이, 달크로즈성과 아르드 사이에 몇 개의 통로가 되는 땅들을 점령하고 선 기사와병사들이 눈에 띄었다. 그 시커먼 갑옷들을 보자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여기에서 내려다 본 것으로는 1백여 명은 확실히 넘어 보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 말을 탄 기사는 세 명. 많다. 그러나…… 1백 명으로 한 나라를 정복할 수는 없는데. 좀더 자세히 살폈다. 아르드의 대로들 사이로 군사들이 배치된 것이 보였다. 약 십여 명 씩? 적지는 않지만, 결코 한 나라의 수도를점령할 수효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은 저들이 길을 막고있으며 성 외곽으로 배치된 본대가 들어오는 길을 막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달크로즈 시 안에 상주할 수 있는 군대는 국왕 직속의 근위대 뿐,그들은 정예군이기는 하지만 모두 합쳐서 약 1백여 명에 불과하다. 더구나 항상 1백 명이 모두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교대를 한다. 현재달크로즈 성 안에 머무르고 있는 근위대의 수는 기껏해야 50여명 정도였다. 그러나 성 밖, 아르드 외곽으로 나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간단하게말해 일단 크로즈 고갯길에 배치된 군사의 수만 해도 2백여 명 가까이 된다. 서 크로즈님 수로와 동 크로즈님 수로에 각각 7, 80여명의군사가 지키고 있다. 달크로즈를 둘러싼 산 전체를 따지면 천여 명에달하는 군사들이 수도를 에워싸고 지키고 있다. 그 밖으로는? 수도방위도시 님-나르시냐크에 대륙 최고의 정예, 구원 기사단의 수가 견습 기사를 제하고 천 삼백 명이다. 아버지는 이미 그리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블루 카운티 전체에 달크로즈 성으로부터 직접 지시를받는 3천의 기사들이 주둔하고 있다. 무슨 용기로, 저 숫자를 가지고 수도를 치는 거지? 도대체 어떤 바보 같은 자가? 그러나 달크로즈는 기이한 구조를 가진 도시라, 몇 개의 구릉과 오르막을 막으면 달크로즈 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완전히 막혀 버렸다. 현재 달크로즈 성이 고립된 상태라는 것은 맞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미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외곽 주둔군들이 성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을 터였다. 나는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걸 반란이라고 부르기엔, 수도는 확실히 평온한 상태였다. 아르드의 상인들은 시장을 열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바위에 계란치기, 수도의 강력한 군세에 비해 너무나 미약한 반항, 마치 어린아이 장난처럼 보이는 군사 행동이었다. 게다가 남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외부에서 군사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성을 점령해 버리기엔 또한 성의 위치가 교묘했다. 해자조차 없는성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성 입구에 이르는 길은 단 하나, 비록50명에 불과한 병사들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어느 정도는 버텨줄 수있는 지형이었다. 성에서 의자와 테이블들만 내온다고 해도, 튼튼한바리케이드를 치고 남았을 것이다. 군사 작전에 대해 지식이라고는 전무한 내가 보기에도 상황은 이랬다. 어쩌면 심각하게 걱정할 상황은 아닌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런 교착 상태가 단 며칠만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일행, 즉 유리카의 건강에는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 상황에서 성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며칠만 기다리면 금방 길이 뚫릴 지도 몰랐다. 그러나 며칠, 며칠을 기다린다고? 그 며칠이 모자라 마지막 순간, 손을 쓰지 못하게 되어버릴 지도모르는데?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이것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파비안 님!" 열린 문으로 한 사람이 몸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배의 장루에 있었던 때처럼, 바람이 심하게 뺨을 때려 얼굴이 몹시 얼얼했다. "태자 전하께서 뵙자십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내게 필요한 것은, 당장 이곳에서 빠져나갈 교묘한 술수야. "밖의 상황 보았지?" 나르디는 중신 회의에 참석했었는지 정식 예복을 갖추어 입고 있었다. 그가 선 채로 기다리고 있던 방에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봤지." 나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문득 태자 앞에서 함부로 먼저 앉아선 안 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도 나르디도 그런 것에는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나르디는 테이블에 반쯤 몸을 기댔다. 그가 나를 부른 곳은 책장몇 개와 테이블, 부드러운 불빛을 발하는 램프가 놓여진 조그마한 방이었다. 방은 오랫동안 비워 두었었는지 마른 먼지와 나무 냄새가 풍겼다. "한 5백…… 정도인가?" 나르디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들의 군세는 실제로 그것밖에 안돼. 며칠 안으로 결판나겠지. 그런데 다른 문제가 있네." 나는 의자에서 고개를 든 채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르디의앞머리가 길게 내려와 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그는 잘 빗어 넘긴 금발에 손가락을 쑤셔 넣어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렸다. 뭔가 곤란한 사정이 생긴 건가? "문제라니?" 나르디의 얼굴에는 도저히 말하기 힘들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단순히 망설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말해야 하는 이 상황이 제발,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그런 얼굴. 무엇이 그를 그토록 힘들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유리카를 데리고 나가는 것이 어렵다는 건가? 아니면 다른 문제라도? 그의 입에서 한참만에 힘겹게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 자네 동생이야." 동생? 동생이라니, 동생이 뭘? 내 사고가 아주 긴 길을 빙 돌아 그 말이 뜻하는 바로 되돌아오고있는 동안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리고'동생'이라는 말이 뜻하는 이름과 그의 행동, 그리고……. 생각의 흐름이 그곳에 미친 것은, 순간이었다. "저, 저 밖에?!" 나는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버렸다. "……." 말이 없는 나르디의 표정, 더 이상 고민할 필요는 없으나 아직 그말이 갖는 고통스러운 의미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동생, 내게 동생이라면 하나밖에 없다. 딱 한 번 보았었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르디 역시도 있었다. ……목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한 동생. 하르얀, 네가? "그가, 저기 가담했다는 말인가?!" 나르디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무슨 의미야? 가담하지 않았다면,그게 무슨 의미야? 그리고 그 입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대답이 떨어졌다. "하르얀은…… 반란군을 이끌고 있어." +=+=+=+=+=+=+=+=+=+=+=+=+=+=+=+=+=+=+=+=+=+=+=+=+=+=+=+=+=+=+=음..갑자기 동생이 보고싶어지는군요.... (제 동생은 얼마 전에 군대에 갔습니다)Luthien, La Noir. 번 호 : 23121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0-15 22:46제 목 : ◁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16)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16) 이끌고…… 있어……? 순간 단어의 의미를 잊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믿고 싶지 않아서일까, 이끈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느끼기 위해 내 사고는 또다시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그러나 어김없이, 그 생각은 잔인한 결론으로 되돌아왔다. 하르얀이 가지고 있던 배, 그리고 수십의 기사들과 수백의 병사들,그걸 가지고 그가……. 무모한…… 그런 일이 어떻게! "바보…… 바보 같은,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 나눠 본 일 없는 동생을 두고 바보라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견딜 수 없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려서부터 알던 동생처럼 마구 큰 소리로 야단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반란이라니, 녀석은 나보다도 어리다. 그리고 그때 본 바로는 그가 이끌고 있던 기사들도 거의 소년들이었다. 그들을 데리고 달크로즈를 점령하려 한다고? 기껏 5백 명의 군사를 데리고? 아예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 일이지! 그러나 나르디는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니네, 그는 하나밖에 남지 않는 선택을 한 거야." 나는 고개를 나르디에게로 홱 돌렸다. 그는 이제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르얀은 귀족들 사이에서 자랐다…… 그러니 만큼 자네보다는 귀족 사회의 생리에 대해서 잘 아네. 그는 푸른 굴조개호에서 내 얼굴을 보았지…… 내 실수였어. 내가 거기에서 그를 부르지 않았더라면이렇듯 극단적인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그런데 그 말을 이해하고 있는내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저 말은 무슨 뜻인가. 저 말은 하르얀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었다하더라도 그는 살아남지 못했을 거란 말인가? 아니, 죽이지는 않는다하더라도, 나르디는 이미 푸른 굴조개호에서 하르얀을 본 뒤 그를 벌할 마음을 확실히 가졌었다는 말이야? 태자의 일행을 공격한 사실, 그건 충분히 사형에도 걸맞은 죄목이된다. 하르얀의 마지막 선택…… 그는 태자에게 추궁 당하기 전에 스스로극단적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는 나르디가 어떻게 할지 이미 눈치챘던 거라고? 그런 것이 귀족 사회의 생리? "나르디."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를 쏘아보는 내 시선이 떨렸다. 내 머릿속에선 이상스럽게 서로를 견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던 아버지와 나르디, 세르무즈에서 달크로즈로 오는 여행 동안 느꼈던 그 인상이 서서히 되살아나 왔다. 어쩌면 나르디는, 하르얀을 제거하는 편이 훨씬자신의 입지에 득이 되리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그만 등골이 오싹해왔다……. "파비안." 내 이름을 부르는 그가 지금까지 그 어느 때보다 낯설게 보였다. 그와 나는 똑바로 마주선 채 겨우 일 큐빗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쳐 있다. 그를 친구로 삼기로 결정하면서, 이것으로 세 번째 신의에 대한 위기를 만났다. 그러나 확인할 필요가 있다. 내 짐작으로 그 신의를 깰 수는 없었다. 정말, 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나는 목소리를 높여말했다. 책과 몇 개의 가구뿐인 그 작은 방 안에 내 목소리가 가득히 울렸다. "하르얀을 죽일 테냐?" 나르디의 대답이 울렸다. "파비안, 그는 너를 죽이려고 했던 자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물었다. "하르얀을 죽일 테냐? 그럴 거야?" 나르디의 고개가 서서히 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르얀을죽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파비안, 하르얀은 반역자네. 지금 이 반란이 아니더라도 충분히반란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 나를 공격한것은 너를 죽이려다 실수로 그렇게 된 것이었지만, 그와 티무르 리안센, 그리고 몇 명의 귀족 소년들이 반심을 품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나도, 그리고 폐하도 알고 계셔! 파비안! 그는 지금 너와 이야기하겠다고 편지를 보내 왔단 말이다!"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지목하고 있는 것이 나르디가 아니고 나? "나와 이야기를?" "화살에 묶은 편지를 날려 왔네. 하르얀 나르시냐크는 네게 확실히할 말이 있지. 바로 자신의 증오를 네게 생생하게 전해주고 싶은 거다. 이 성에 이미 아르킨 단장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는 모양이지. 그는 왕가만큼이나 자신의 집안을 미워해. 그가 진실로 죽이고 싶어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란 말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그와 나는 둘 다 상처 입은 얼굴로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그와 이렇게까지 첨예하게 대립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미소가어울리던 얼굴에도 이번엔 단호한 의지가 가득했다. 입술이 꼭 다물려지고 얼굴 근육이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다. 복받치는 감정 때문에내 목근육이 실룩거렸다. 그가 감정을 누르고 숨을 삼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파비안…… 현실을 똑바로 봐라. 그가 푸른 굴조개호를 공격하고,거기에서 너를 굳이 찾아내어 죽이려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란 말이다. 그는 아르킨 단장과 사이가 좋은 아들이 아니야. 그리고 네 존재를 알게된 이후로, 네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너를 질투하고 있네. 나는 하르얀을 어려서부터 보아 잘 안다. 어머니가 죽은 뒤로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 마치 버림받은 아이처럼 자랐고,인정받는 아들이 되지 못한 것 때문에 자신만의 닫힌 왕국을 꿈꾸고기이한 열의로 주위 소년들을 끌어 모았어. 증오로 사람을 죽일 수있는 사람, 아버지를 닮은 네 눈동자 빛깔마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미워할 자가 바로 그야!" 나는 그 순간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을 길이 없었다. "닥쳐!" 나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다음 순간, 내 손에는 검이 쥐어져있었다. 가쁜 숨으로 눈앞의 블레이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나르디의손이 재빠르게 자기 허리에 걸린 검자루로 다가갔다. 잡으려다가, 그대로 그 앞에서 멈추었다. 내 눈동자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시선을 보내며, 그가 말하고있었다. "벨 테냐? 좋을 대로, 베어라. 그러나 그래 보았자 네 동생의 허황된 망상, 정신이상에 가까운 집착에 가담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 침착하려 애쓰고 있지만 그의 목소리도 흥분으로 떨리고 있는 것을나는 알았다. 나는 그대로 부들부들 떨며 가만히 서 있었다. 검을 거두지 않은 채로. 나르디는 웃음기를 잃은 눈동자로 가만히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말했다. "검을 들지 않은 자를 베는 것이 부끄럽다면, 내가 기꺼이 검을 쥐어 줄 수도 있어." 그의 손이 천천히 허리로 다가가고, 그 손에 검자루가 쥐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 아마 지금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나는 그대로 반역자로 끌려가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내 머릿속 한 쪽을더욱 가득히 채우는 것은 다른 생각이다. 왜,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편이 되어 적과 싸웠었던 우리가, 이렇듯 서로 검을 마주 대어야 하지? 무엇 때문에? 내 검은 불타오르지 않았다.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나르디는 검자루만을 잡은 채 검을 뽑지 않았다. 만일, 만일에 우리가 싸운다 해도 어떤 결과가 올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나는 나르디만큼의 실력은 없을 지도 모른다. 전에 엘다렌이 말했듯, 나는내 검에 맞는 의지를 지니기 전엔 결코 이 이상의 실력이 될 수 없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떠나, 그를 벨 자신 같은 것은 애초부터 내게없었다. 나는 그 사실을 느끼고, 다시 한 번곱씹었다. 거기에선 씁쓸한 맛이 났다. "파비안, 우리가……." 여전히 검을 뽑기 직전의 자세만을 취하고 있는 나르디가 뭔가 입을 열어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문이 덜컥 열렸다. "……!" +=+=+=+=+=+=+=+=+=+=+=+=+=+=+=+=+=+=+=+=+=+=+=+=+=+=+=+=+=+=+=첫 수정 작업이 일단락되었습니다. 기념삼아 마음껏 써봤습니다. Luthien, La Noir. 번 호 : 23122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0-15 22:47제 목 : ◁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17)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17) 문 밖에서 들어오려 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밖에서 비쳐 들어온 환한 빛 탓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내 시야를 가린 다른 것이 있었다. "하아!" 나르디가 그 특유의 놀라운 속도로 단숨에 내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몸이 내 시야를 가렸고, 그는 내 앞을 막아섬과 동시에, 손잡이만 애써 잡고 있던 검을 순식간에 뽑아, 낯선 침입자의 목을 향해 똑바로 겨누었다. 모두 문이 열리던 그 순간, 단숨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 "에…… 엘다렌?" 문이 닫혔다. 나르디는 그야말로 계면쩍은 표정이 되어 어쩔 줄 몰랐고, 엘다렌은 왜 둘 다 검을 빼어들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우리 둘을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나르디가 하려고 했던일, 궁 안에서 일하는 어떤 사람이 방을 들어왔을 경우 태자를 향해검을 빼어들고 선 내 모습을 그가 가리려 했음을 말이다. 그리고 그의 성격으로 보아, 부득이할 경우 상대를 죽였을 지도 모른다는 것까지도. 그는 그런 사람이다. 도저히 나로선 따라할 수 없는 나와는 다른사고방식,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쓰는 사람이 그다. 나와는 너무도 달라. 그의 정의는 나와는 달라. 그러나 그도 자신의 정의에 거의완벽할 정도로 충실했다. 나의 정의는…… 뭐지? "…… 무슨 일이에요?" 나와 나르디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검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서로 검을 겨누었던 상황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밖에는 하르얀이 와 있고, 그리고 그는 나와 이야기를 하려고 하고 있다. 그래, 하르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그 마음속을 나로선 전혀 들여다볼 수 없는 나의 동생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나는 듣고 싶어. 나는 나르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상스럽게 그 얼굴을 똑바로보기가 좀 무안했다. "하르얀을 만나러 가겠어." "내가 안내해 주겠네." 엘다렌은 간단한 말을 주고받는 우리 둘을 번갈아 본 뒤 천천히 말했다. "중신들이 나르디를 기다리고 있더군. 안내가 끝나면 빨리 가보는것이 좋겠다. 그리고 파비안." "예?" 심각한 얼굴을 한 엘다렌은 턱짓으로 문 밖을 가리켰다. "한시가 급하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유리카가 아까부터 내내 너를보고 싶어하고 있다." "……." 나를 위해 예비되어 있던 사실들은 왜 이렇게 한꺼번에 가혹하게나를 내리치는지. 나르디는 그늘이 드리워진 내 얼굴을 보더니 힘주어 말했다. "달크로즈 성은 어찌 되었든, 오늘 밤 안으로 빠져나가게. 나갈 수있도록 최선을 다해 길을 찾아보겠네." 그래…… 그 길이 있다면, 아니 그 길은 있어야만 해. 나르디가 앞장서서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밖은 확실히 환했다. 낮이 가까워오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따라 걸어나갔다. 흔들리는걸음을 똑바로 했다. 한꺼번에 나를 몰아치는 운명이라 해도, 결코결과가 오기도 전에 비틀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다. "하르얀……?" 아침에 망루 위에서 느꼈듯,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다. 바람 속에서 이리저리 휘말리는 머리카락을 추스르기가 힘들었다. 똑바로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려 했으나 자꾸만 시야가 가려진다. 양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리며 머리카락을 얼굴 뒤로 넘긴 채, 그자세 그대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있었다. "……." 얼굴이 자세히 보일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었다. 세 명의 기사를 거느리고 달크로즈 성으로 올라오는 좁은 길 아래 둔덕에서 있는 나의 동생. 순간 숨이 막힐 듯한 기묘한 감정이 가슴속에서치밀어 올라왔다. 어떤 문장도 새겨지지 않은 갑옷과 방패,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아더욱 작아 보이는, 바람 가운데 서 있어 더욱 가냘프게 보이는, 크지않은 키와 많지 않은 군세, 그토록이나 불안정한 운명, 나의 동생. 그리고 나와 똑같은 머리카락. "파비안 크리스차넨!" 이상한 일이었다. 그 목소리를 처음으로 듣는 순간, 나는 마음이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나이든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아니다. 소년의 미성에 가까운 가벼움과 찢어질 듯한 날카로움이 뒤섞인 소리.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내가 평생 들어보지 못한 기이한 떨림이 깃들여 있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 그의 말을 들어주고 싶게 만드는 이상한 힘, 협박에 의한 강요나 위엄 어린 충성의 요구가 아닌, 비록 약하긴 하지만 그 말에 따라주고 싶게끔 만드는묘한 힘이 거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고 싶어하는어머니가 느끼는 기분이 바로 이런 걸까? 저런 목소리는 평생 처음들어보았다. 목소리에도 마력이 깃들 수 있구나. 지금에 와서 내가 그의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릴 이유는 없지만, 혹시 다른 소년들의 마음을 끌어당긴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저 목소리아니었을까? 또한 그는 내 어머니의 성을 부르고 있었다. 그가 그것을 어떻게알았을까? "네가…… 하르얀이냐!" 잠시 가벼운 비웃음 비슷한 웃음이 터져 나와 그와 나 사이의 넓디넓은 공간을 기묘한 기운으로 채웠다. 이윽고 그는 다시 대꾸했다. "그렇지, 내가 하르얀이지. 하르얀 나르시냐크." +=+=+=+=+=+=+=+=+=+=+=+=+=+=+=+=+=+=+=+=+=+=+=+=+=+=+=+=+=+=+=저... 하이텔의 bikenous 님... 제 홈페이지는 fairytale.pe.kr 입니다! 결코... tail이 아니라고요...;;; 말씀하신 대로 tail이 꼬리인 것은 맞지만 제 홈페이지는tail이 아니고 tale, 즉 이야기예요. 요정 꼬리라니... 그런 이상한 이름을 지을 턱이 없잖아요. ^^;(그런데 요정한테 꼬리가 있나?)이 주소에 이런 문제가 있을 줄이야...;;;;Luthien, La Noir. 번 호 : 23123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0-15 22:47제 목 : ◁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18)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18) 나는 그의 말투에서 그가 나를 자기 집안의 장자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일단은 내버려두었다. 그의 말을 우선 들어보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그와 나는 둘 다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성문 바로 위에 자리잡은 가장 낮은 망루에 나와 있었고, 그는 성벽에서 쏘는 화살이 쉽게 닿지 않을 정도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떨어진 위치에 서 있었다. 하긴 지금처럼 바람이 불어서는 어떤 화살도 제대로 겨냥한 목표물을 맞출 수는 없을 터였다. 석궁이라면 혹시모를까. 그리고, 하르얀의 다음 말이 울렸다. "그 자리가 마음에 드는가?" 이 자리……? 아마도 나르디와 나의 관계를 두고 하는 말임에 틀림없는 듯했다. 나는 조금 생각한 다음, 다시 소리를 질렀다. "네 자리는 적당한가?" 그가 자기 뒤의 기사들에게 잠깐 몸을 돌려 뭐라고 말하는 것이 보인다. 곧 그는 대답해왔다. "아니지, 내게 적당한 자리는 바로 네가 있는 그 성이니까!" "그렇다면 들어오면 되지 않나?" "흥, 주인이 아닌 자가 있을 곳은 없다!" 명백한 반심을 드러내는 말에 저도 모르게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악기처럼 높게 울리는 하르얀의 목소리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 비슷하기도 했고 다르기도 했다. 잘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 배에서조차 잠시 스치듯 지나갔었던……. 어린아이,또는 어른. 내 인생의 낯선 이방인, 또는 나의 유일한 형제, 혈육……. "왜 나를 보자고 했지?" 잠시 바람 소리뿐, 침묵이었다. 지금은 달크로즈 시의 아름다움보다 그와 나 사이에 놓인 저 텅 빈공간에 몰아치는 바람이 더욱 선명하게 사고 속을 파고든다. 왜 그와나는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을까. 그리고 왜 그는 저렇듯 비웃는 어조로 내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뭐,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아마 방금 전에도 같이 숙덕거리다가 나왔을 테니까. 나르디엔은 잘 있나?" 하르얀은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본론이 아닌 다른 이야기들을 먼저 꺼냈다. 그러나 나로서도 그가 나르디의 이름을 직접 부르자 흠칫긴장했다.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은 그와 나만이 아니다. 수명의 사람들이 성에서도, 밖에서도 우리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는 사람이다. 지금 네가 하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수작이냐? 아버지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어떤 입장에 처하실지 생각이나 해 보았나?" 결국은 내가 먼저 말을 꺼내고 말았다. 예상대로 그는 발끈했다. "관계도 없는 주제에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네가 나와 내 아버지의 문제에 대해 관여할 바가 무엇이지?" 지나칠 정도로 나를 배제하려는 그의 목소리가 문득 나를 슬프게했다. 그렇지만 그 말대로 정말 그의 아버지이고 나와는 아무 관계가없다면, 왜 나를 불러서 이렇듯 이야기하려 하는 거지? "나는 네 형이야!" "웃기지 마!" 하르얀이 민감하게 반응하며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개의치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아들이다." 하르얀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다시 외쳤다. "네가 그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나조차도 되지못한 그 아들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나르디의 말이 맞다는 생각, 그는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이라고 했었다. 나는 다시 측은한 생각이 들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나보다 더 오랫동안 집안의 장자였어. 그런 네가 왜 이런 일을 벌이지? 내 존재와는 아무 관계없는 일 아닌가? 무엇 때문에 이런무모한 일을 벌이지?" "무모하다고 누가 말했지?" 하르얀의 목소리가 문득 이상하게 변했다. 마치, 내가 모르는 것을훈계하려는 듯한 어조였다. "무모하지 않아. 무모한 것은 너희들이야. 그 성을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어림없지. 너도, 너의 그 잘난 친구도, 그 부모도, 모두 필요없어. 기대하는 것이 좋아. 하긴 그 안에 네 이름을 굳이 거론할 필요는 없지. 너는 그저 일개 병사에 불과한데." …… 나르디가 한 또 다른 말, 하르얀은 그 뿐 아니라 나조차도 죽이고 싶어한다는 말은 역시 맞았다. 그는 이율배반적인 말을 지껄이면서 스스로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것같았다. 이렇듯 나를 따로 불러내어 이야기를 하면서, 끝까지 그렇게 된 이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문득, 그런 것이 광기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준비를 오래 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나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르무즈에서 너희들의 발자취를 쫓았었어. 그 지저분한 일행에나르디엔이 끼어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된바에야 그런 것쯤 이제 관계없는 일이지. 마르텔리조에서 내가 너희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알아? 잘난 니스로엘드의 기사, 키반 노르보르트가 내 길을 대신 앞장서 인도해 주더군." 키반이 우리를 찾아내었고, 그리고 그는 키반의 뒤를 따라왔다는말인가. 그의 말을 듣자니 그는 구원 기사단에 대해서도 감정이 좋지 않은듯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너는 왜 아버지의 기사단을 그런 식으로 말하나?" "그 기사단?" 바람이 윙윙대며 지나갔다. 저 아래에 선 하르얀은 감정이 끓어오르는 듯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나를 받아주지 않는 곳은, 다 세상에서 필요없는 곳이야! 구원 기사단? 그런 거 개나 주라지!" "말조심해!" 이번에는 내가 화가 나서 외쳤다. 이 기이한 싸움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기분들일까. 십 몇 년을 떨어져 자랐던 형제의 첫정식 대면, 그 상황에서 넓은 거리를 두고 서로를 경계하여 멀찍이떨어진 것은 무엇이며, 그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또 얼마나 우스운가. "아버지조차 모욕할 셈이냐?" "나를 모욕한 것이 바로 아버지야!" 자기 분에 못 이겨, 그는 발을 바닥에 세게 굴렀다. 왜 그는 일부러 나를 불러 놓고, 저렇듯 자신의 분노를 일부러 자극하는 것일까? 나한테서 뭔가 다른 대답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 않아? 나를 미행했었고, 그만큼이나 보았으니 나에대해 알만큼 알지 않아? 화를 내고 싶었나? 내게 화를 내고 싶었어? 잠시 둘 다 말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하르얀이었다. +=+=+=+=+=+=+=+=+=+=+=+=+=+=+=+=+=+=+=+=+=+=+=+=+=+=+=+=+=+=+=홈페이지를 나우누리에 올려 놓았더니 글쎄... 여기도 시스템 정기점검이 있나 봅니다;;;다른 데에도 있나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3124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0-15 22:47제 목 : ◁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19)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19) "그래, 오늘의 용건은 이게 아냐. 알려 주고 싶은 게 있어서 널 불렀지." 그는 뒤로 몸을 돌렸다. 뒤에 선 기사 하나가 그 손에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나는 문득 눈을 그 기사에게로 돌렸다. 투구를 벗고 서 있는 그 자의 머리는 핏빛 붉은 색, 저 머리 빛깔은? 멀어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하르얀에게 물건을 건네준 그 자는 똑바로 내 얼굴을 쏘아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그자세, 그리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상황들. 그는, 티무르 리안센이었다. "……." 그 역시 내게 감정이 좋을 리 없겠지. 하르얀은 티무르한테서 건네 받은 뭔지 모를 물건을 손에 쥐고 공중으로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나는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순간 피식 웃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물건에 대해 말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성 안에 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바로 어제 님-나르시냐크로 돌아가셨지. 난데없이 나타난 가짜 아들이 성을 떠나자마자 말이야. 어쨌든 좋아, 이제 그 성 안에 내가 그 실력을 인정할 만한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은 셈이야. 하긴, 아버지가 아무리 용병술이 뛰어난들 10대 1의 병력으로 뭘 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원체 생각지도 못한 일을 잘 꾸며내는 아버지라서." 하르얀은 다시 한 번 손에 쥔 것을 가볍게 던졌다가 받았다. 자기생각에 스스로 만족해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가 말을 끝내기를 기다렸다. "이제 성안에는 있으나마나한 상대들 뿐이라, 너무 싱겁겠다는 생각마저도 드는걸? 너무 전력의 차이가 나니만큼 한 가지는 가르쳐 주지." 그는 갑자기 오른손을 들더니 팔을 곧게 펴고 나를 향해 손가락을쭉 뻗었다. 성을 똑바로 가리키더니, 그는 커다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밤이 새기 전에, 달크로즈를 점령하겠다!" 나는 더 참을 수가없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나! 지금이라도 그만둘 수 있어. 내가 전하께 어떤 식으로든 말씀드려서……." "웃기지 말아!" 하르얀의 목소리가 문득 사나운 울림으로 변했다. "너는 나르디엔을 잘 모르는 거다! 그래, 좀 무서운 놈이기도 하지. 아마 왕이 되었다면 과거의 폭군이나 정복왕 정도는 우스운 정도가 되었을 테니까! 이그논 국왕쯤은 비교도 되지 않아! 그가 나를 용서해? 어림도 없는 소리 마라! 나르디엔은 내가 어려서부터 보아 잘알고 있지! 그 상냥해 보이는 얼굴 뒤에 얼마나 차가운 본성이 숨쉬고 있는지, 너는 아무 것도 모르는 거다!" 하르얀은 숨을 삼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굳어져 움직일 줄을몰랐다. "허울 좋은 태자 전하! 필요없는 상대에게는 가차없이 고개를 돌려버리는 잘나신 분! 사람을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 자! 아, 그런 사람이 또 하나 있지. 바로 내 아버지, 구원 기사단장 아르킨 나르시냐크!"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려고 했다. 하르얀, 하르얀, 내가 어려서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상상했던 그 형제는 이런너는 아니었어. 이렇게 만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아마도……남자 동생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 "한때 내게 조금 기대를 걸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때도있었지……." 점차 그 목소리가 증오로 가득해져 가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거대한 새처럼 바람이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잔인한 칼날처럼 피부를 찢고 날아가는 바람, 하르얀의 검푸른 머리카락이 마치 그 자체광기를 띤 것처럼 뒤엉키고 휘말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지. 이유는 몰라! 아니,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 그래, 네 운명은 다를것 같아? 어림없지, 절대 어림없어! 하긴, 이젠 다 필요없겠지. 너는그 성안에서 죽을 운명이니 말이다!" 하르얀의 마지막 말에는 비웃음이 묻어 있었다. 그는 절대 큰 소리로 미친 듯 웃지 않았다. 나지막하게, 증오로 가득 찬 목소리로 뇌까리고, 외쳤으며, 그리고 비웃듯 키들거리며 웃었다. "하르얀!"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서말해보라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않나? 성 안에 비록 병력이 적지만,며칠 안으로 동원할 수 있는 수천의 군사들이 블루 카운티 안에 포진해 있다. 네가 성을 점령한다 치자, 그런 다음은? 네가 폐하와 전하를 사로잡았다 한들, 쳐들어오는 군대가 네 말을 들어줄 것 같아? 결과적으로는 죽음 뿐이야!" "시끄러워!" 이제 하르얀은 아예 자기에게 불리한 말은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같았다. 그는 고개를 마구 미친 듯 흔들더니, 다시 커다랗게 외쳤다. "내 신경을 건드리지 마! 어차피 너는 네 일로도 충분히 바쁠 텐데?" 문득, 내 머릿속에 이상한 한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내 일……? "그래, 마지막 용건은 이것이었지. 어디 보여줄까?" 갑자기 하르얀은 자기 손에 든 것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더니 나를향해 길게 팔을 뻗어 내밀었다. 물론 그런다 한들 그게 무엇인지 내게 보이지는 않았다. 뭔가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 같긴 한데, 도대체뭐지? 희한한 빛이다. 하르얀이 손을 이리저리 돌림에 따라 마치 한쪽에거울을 붙여놓기라도 한 것처럼 빛이 났다가 안 났다가 한다. 다시한 번 손을 흔들자 날카로운 빛이 허공을 뚫고 날아와 내 눈까지 부시게 했다. 파르스름한 섬광이었다. "이게 무엇인지 알아?" 알 리가 없다. 나는 입을 다문 채 하르얀의 얼굴만을 응시했다. 만족한 듯 다시 손에 든 것을 이리 저리 돌리던 그는 커다랗게 외쳤다. "월장석, 이게 바로 월장석이라는 것이지!" 월장석……? 그게 뭘 어쨌다고? "아직도 모르겠나? 이런, 실망스러울 정도로 머리가 나쁘잖아. 월장석으로 무엇을 만드는지 모르나? 하긴 평민으로 자랐으니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지만, 궁정에서 아무도 안 가르쳐 줬나? 나우케 시의가그런 것도 모르던가?" 뭐……? 갑자기 나우케 시의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나는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의사, 월장석, 내가 모르는 것을 만든다고? 뭔가가 내 마음속에서 말하고 있다. 아직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이상하게도 그 무엇인지 모를 말을 듣고 싶지가 않다. 나는 고개를흔들었다. 괴로움, 대단한 괴로움을 가져다 줄 사실, 알고 싶지 않아. 결코 듣고 싶지 않아. 말하지 마. 그러나 하르얀은 조금도 내 마음을 읽지 못했다. "월장석 성분이 들어간 고귀한 차! 비싼 약! 아주 향기가 좋다지? 나는 아직 맡아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너는 알 것 아냐?" 하르얀은 마지막으로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한 마디를 뱉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마음은 갈가리 찢겨 나갔다. "내가 그걸 만드느라 돈 좀 썼었지…… 그렇지만 너와 너의 아가씨를 위해선 완벽한 준비였어." 저 얼굴, 저 비웃는 듯한 표정, 너는 무슨 짓을 했다고? 갑자기 튀어나온 거대한 말, 자객, 늙은 할머니……. 내 머릿속에 수십 가지의 잔상이 한꺼번에 몰아쳤다. 그리고, 멎어버렸다. "하르야아아아안!!!!!" +=+=+=+=+=+=+=+=+=+=+=+=+=+=+=+=+=+=+=+=+=+=+=+=+=+=+=+=+=+=+=크리스탈 님께-제가 글들을 굳이 관련글로 묶지 않는 이유는, 제 글에다가 직접관련글로 엮어 놓는 분도 계시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니까 세월의 돌을 관련글로 제가 묶는다 해도, 검색을 할 때 제 글만 나오게 되지는않습니다.. ^^;Luthien, La Noir. 번 호 : 23125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0-15 22:47제 목 : ◁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20)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20) 순간 내 머리는 완전히 돌아 버렸다. 이성 같은 것은 한 조각도 남김 없이 날아가 버렸다.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사고도, 판단도 멈췄다. 오직 내 몸 속에서 미친 듯이 끓어오르는 이 광란하는 피, 내 오감을 완전히 막아버리고 오직 한 가지 본능만이 충만하게 가득찬 이 알수 없는 덩어리, 피와 살점이 뒤엉킨 괴물만이 피부를 뚫고 튀어나왔다.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다. 내가무슨 행동을 하려는 지도 몰랐다. 하르얀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목이 터져라 소리지른 다음, 그 다음은……. "바로, 너, 네가!" …… 내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내 귀에 들리고 있는 것은 출처 모를 온갖 굉음 뿐. 검을 언제 뽑아들었는지 몰랐다. 머리 속에휘몰아치는 한 가지 사실, 하르얀, 네가 유리카를 죽이려 했나? 미친 듯 앞으로 달려들려는 나를 막는 것이 뭔가 있었다. "파비안!" 내 뒤에서 팔을 낚아채는 손길을 나는 거칠게 밀어 제쳤다. 다른힘이 또다시 나를 잡으려 했지만 그것도 걷어차 떨어뜨렸다. 뭔가 벽에 세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지만 상관없었다. 이번에는 뭔가 대단히억센 힘이 내 몸을 움켜잡으려 했다. 팔꿈치를 온 힘을 다해 돌려 치고 다음에는 주먹으로 내갈겼다. 내 손에 맞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조금도 관심 없었다. 단 한가지,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 건드리지 마,건드리지 마, 건드리지 마, 건드리지 마! 쩡! 다시 달려드는 무언가를 향해 이번에는 검으로 돌려 쳐버렸다. 뭔가 물컹하게 잘리는 느낌, 손으로 전해진다. 다음에는 찔러 버렸다. 더 이상 나를 방해하는 것이 없는 듯하자, 나는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려 했다. 죽인다, 죽여버린다, 모두 죽여버릴테다! 뭐야, 내 앞을 막는 이건? 난간? 갑자기 굉음을 뚫고 내 귀로 들어온 소리가 있었다. "하하하, 하하하,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웃고 있어……. 온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떨리는 가운데 뭔가 내 눈에서 흐르는 물이 주위로 흩어지며 바람에 날려갔다. 으스러져라 주먹을 움켜쥐었다. 간신히 트인 시야로 성 아래 저 가운데, 혼자서 미친 듯이웃어대고 있는 하르얀이 보였다. 죽음에 값하는 죽음……. "파비안, 안돼!" 그대로 돌아 계단을 달려 내려가려는 내 앞으로 가로막은 것은 뜻밖에도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나르디였다. 검을 뽑아든 나를 향해 그대로 빈손으로 팔을 벌린 채 완강히 고개를 젓는다. 내 핏발선 눈동자가 그를 쏘아보지만,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 그대로 달려가려는 내 몸을 힘껏 껴안았다. 망루의 좁은입구 너머로 경악한 나머지 아무 손도 쓰지 못하고 있는 중신들이 보인다. 나르디는 그다지 힘이 세지 못하다. 내가 밀쳐내고 달려 내려가고자 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검을 휘두른대도 마찬가지…… 그러나 그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그 누구에게도 시키지 않은 채 스스로 나를 껴안고 그 팔을 풀지 않았다. 내 뜨거운 몸에 비해 와 닿는 그의 피부와 옷자락은 차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이 와 닿은 서로의 심장이 둘 다, 온 몸을 울릴 정도로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진다. 내 시야에 가득한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으로 내얼굴에 달라붙고 휘감겼다. 내 어깨 너머로 돌려진 그의 머리에서 나를 달래듯, 그러나 스스로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파비안 안돼…… 지금 성문을 열고 내려가면 우리 모두 죽는다. 너나 나뿐 아니라 유리카도…… 하르얀의 노림수를 모르겠나? 당장이라도 밀고 들어올 준비를 마쳐 놓고는 일부러 자네를 자극하는 거다. 지금 문이 열리면 모든 것이 끝장, 끝장이야……. 내 말 알아? 내 말알아듣나, 파비안?" 나르디, 내 친구이자 이 성의 태자이기도 한 너. 이 모든 책임, 사람에게 지워진 이 모든 책임. "저, 전하……." 중신들은 그저 중얼대고 있을 뿐이다. 자기 생명을 위험에 내던져서라도 성을 구하려 하는 그 마음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일까. 친구를지키고 태어난 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거는 그를 대신할 마음이그들에게는 없는 것일까. 나는 서서히, 나르디의 팔을 내게서 풀었다. "……." 너의 눈동자, 나는 알아. 너의 마음도, 그것은 또한 내 것이기도한 그 마음. 나는 돌아섰다. 난간을 향해, 그 너머에서 웃고 있는 하르얀을 향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세상은 내가 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있다. 나는 검을 한껏 위로 높이 올렸다. 그리고……망루의 난간을 힘껏 내리쳤다. 텅! 뭔가 손에서 가벼운 저항이 느껴졌던 것은 한 순간이었다. 다음 순간 그것은 내 눈앞에서 똑바로 둘로 갈라졌다. 아주 깨끗한 단면을만들면서. 가벼운 노란 불티만이 타닥대며 튀었다. 마치 햄 한 덩어리를 베어내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내 눈에도 검을온통 휩싼 엄청난 붉은 광채가 보였다. 이상하게 그것이 조금도 놀랍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 몸의 일부를 보는 것처럼, 나는 무감동하게그것을 보고 있었다. "세, 세상에……." "달크로즈의 마법 걸린 성벽을……!" 그래, 유리카, 유리카가 죽어가고 있어…… 그녀의 목숨이 경각에달려 있어. 너는 그녀를 죽이려 했지. 그 어떤 정당한 이유도 없이. 그 누구보다도 생명력 넘치던 그녀의 얼굴을 그토록 창백하게 하고서…… 그런데 너는 웃고 있어, 그런데 이제는 한 순간이 아쉬운 지금, 성을 포위하고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어. 묻고 싶은 말들, 대답을 얻을 수 없는 묻고 싶은 말들. 무엇 때문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가 너에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내가 네게 무슨 피해를 주었기에! "왜! 왜, 왜, 왜!" 벌판 가운데로 길게 끌리는 메아리가 퍼져나갔다. 나는 반쪽으로갈라진 난간에서 거의 뛰어내릴 듯 몸을 내밀고 휘청거렸다. 선택할수 없는 이 모든 길들이 온 정신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 와 허리를 비틀고 꺾어 놓았다. 거의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답답했다, 가슴이, 온 몸이 알 수 없는 무엇, 단단한 벽으로 막히고 갇혀 있었다. 왜, 너는 그렇게 했어야만 했지? 어렵겠지만,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어느 순간부터 내게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한 운명, 아프더라도 그 채찍에 버텨내리라생각했었어. 내가 가지고 있는 미약한 의지의 힘이라도 모두 나의것, 버텨낼 수 없는 운명은 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런데 왜, 왜이토록 모든 현실은 내게 가혹한 거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과 뭔지 모를 온갖 것들로 온 얼굴이 젖고 이마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눈이 번들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대답을 들어야겠어…… 내게 닥친 이 모든 상황이 아무 이유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내가 겪고 있는 이 끔찍한 고통이 단한 조각의 인내조차 허락치 않아! "이유를 말해!" 나는 다시 난간으로 한층 몸을 내밀었다.하르얀의 얼굴이 흐려진눈으로도 똑똑히 보였다. "이유를 말해!" "이유를 말해줄까?" 하르얀이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한 발짝 앞으로 걸어나왔다. 내 시선에 그의 모습이 더욱 크게 들어왔다. 이상하게 저토록 멀리 떨어져있는 그의 얼굴을 알아볼 듯하다. 그 얼굴에 서린 표정조차도. 그 입가에 서린 냉소와 나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까닭 없는 증오로 가득찬 눈동자를 나는 보았다. 그리고, 나는 원하던 대답을 똑똑히 들었다. +=+=+=+=+=+=+=+=+=+=+=+=+=+=+=+=+=+=+=+=+=+=+=+=+=+=+=+=+=+=+=휴... 끝입니다. 가끔 따뜻한 개인사로 메일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계세요. 늘 즐겁게 읽고 있답니다. 시험이 아직 진행중이지요? 모두 시험 잘들 보시길... 시험 때문인지 글 올리는 분이 현저히 줄어든 것 같네요. ^^;Luthien, La Noir. Dream Of Blue Sky --------------------------------------------------------------------------------작성자 : 루미 (arumy@netian.com) 조회수: 3 , 줄수: 961[연재] 세월의 돌 8-2 21~25화번 호 : 23173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0-16 20:52제 목 : ◁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21)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21) "네가 내 방해가 되기를 원치 않으니까. 내 일에 끼여들지 말고 계집애한테나 신경 쓰라는 배려다. 그 생명이 언제 꺼질 지 모르는 불처럼 깜빡이고 있는 다음에야, 네가 성을 나와 나를 방해할 수는 없겠지?" 나의 그림자……. 어떻게, 너는 어떻게 그토록 내 모든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발겨 놓을 수가 있는 거지? 그림자, 벗어날 수 없는 천형.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이 울렸다. "거기다가 어젯밤 내가 이 모든 일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성안에서든 밖에서든 궁정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좋도록 하는 적당한방패가 되었지. 아마리에 왕비도 거기 갔었다면서? 오르코시즈가 비싼 만큼의 가치는 하더군. 좋았지, 아주 적당했어." 그는 내 반대쪽, 어두운 그림자였다. 앞면에 반드시 따르는 뒷면, 오른손과 왼손…… 아니, 어쩌면 그에게는 내가 그림자였을지도 모르지. 나를 닮은 자, 거울 속의 상대, 체스 판의 꼭 닮은, 그러나 색깔만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말. 그리고 그 그림자는 내 목을 조른다. "오늘밤을 넘기는 것이 관건입니다." 거대한 방이다. 한 사람이 말을 하자, 그 말은 한참이나 허공을 가로질러 천장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울림이 서서히 가루처럼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벽은 돌로 되어 있었다. 사방에 커다란 태피스트리들이 걸려 있다. 온갖 그림들, 온갖 색실과 솜씨들, 아주 오래된 세월의 냄새를 지닌, 먼지의 흔적들. 타로핀 회의실은 아니지만, 그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석조 회의실. 커다란 테이블과 수많은 의자가 거기에 늘어놓아져 있었다. 의자를 채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의자들은 반나마 비어 있었다. "통신 비둘기를 띄웠으니 적어도 내일 밤, 늦으면 모레 낮까지 적어도 천여 명의 병력은 도착할 것입니다. 님-나르시냐크에서도 3일안에 기사단이 파견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한 사람이 말하고 있다. 희끗희끗한 수염을 가진 이그논 국왕 폐하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진다. 나는 왜 여기에 있지? 내가 있어야 할곳은 여기가 아니야. 난 유리카의 곁에 있어주어야 해. 그 곳이 내가있어야 할 자리야. 자신을 괴롭히는 의문 속에서 나는 거대한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는 중신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내가 앉은 자리는 테이블의 맨 끄트머리, 주위를 둘러보기에 가장 좋은 자리였다. "그러나, 현재 성 안에 있는 병력은 정확히 57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휘관까지 포함한 숫자가 그겁니다." 다시 한쪽에서 들리는 말소리. 내 고개가 그 쪽으로 약간 흔들리며움직였다. 회의실 안은 오래 묵은 냉기가 깃들여 많은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좀 싸늘했다. 거기다가 그 많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치렁치렁한 옷과 거의 극소화된 움직임으로 인해 반쯤은 유령처럼 보였다. 이들은 대부분 귀족원을 구성하고 있는 대귀족들이고, 나머지는 국왕이직접 임명한 관료들이었다. 비율은 귀족원이 열중 일곱 정도로 많았다. "오늘 밤 안으로 점령할 것이라, 감히 호언장담했다 하더군요. 이제 조금 있으면 오후가 저물 것이고, 야음을 틈타 점령하려는 것이아니라면 이제 곧 공격이 시작되리라 봅니다." 이그논 국왕 옆에는 회의 시작 이후 내내 침묵하고 있는 나르디가있다. 나는 약간 흐려진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그럴리가 없는데 졸음과 비슷한 감각이 눈앞을 흐려지게 하고 있다. 왜이런 걸까. 내 몸을 휩싸고 있는 이 나른하고도 희미한 안개 같은 기운은 뭐지? 나르디는 국왕의 오른쪽에 앉아 계속 침묵을 지켰다. 신하들이 하는 말들을 일단 모두 들을 심산인 것 같았다. "현재 근위대는 그 숫자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비를 하고 있습니다. 근위대장 란셀 론하트 경이 총지휘를 맡고 있으며 성 안에 머물고 있는 궁인들을 모두 한 곳으로 대피시켰습니다. 만일의 경우 탈출을 위해서는……." 그 신하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말꼬리를 끌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국왕 앞에서 수도의 성을 버리고 탈출한다는 말은 확실히 아무렇게나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예측에 불과한 것이라도 결코 쉽게말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인 것이다. 그러나 이그논국왕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문득 국왕이 몹시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는 몰라도 마음은 벌써 노인인 것이 아닐까.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똑같이 침묵하고 있는데도 저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의 태자에 비해, 그는 확실히 지쳐있는 듯이 보였다. 입을 열기에도 지친 듯했다. 몇 개의 보고가 더 오가고, 드디어 신하들은 입을 다물었다. "……." 내 머릿속에는 유리카를 데리고 이 성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5백 명 정도의 군사들이 저렇게 지키고 있는 거라면, 야음을 틈타 빠른 말로 빠져나가는 것이 가능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것도 주의를 끌어줄 다른 누군가가 없이는 불가능하겠지. 한시가 급한데, 한 순간이 아쉬운데. "나르시냐크 단장이 없는 것이 이렇게 아쉬울 줄이야……." 한 중신이 한숨처럼 중얼거린 말에 내 귀가 문득 반응했다. 이상한것은 그 말을 들은 다른 중신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말소리가 들린쪽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저마다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는 듯한표정을 지었다. 마치 다들 알고는있지만, 말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것만 같았다. 결국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입을 열고야 말았다. "이곳에는 훌륭한 귀족 지휘관들이 많이 있소이다." "……." 아버지가 이스나미르 전체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용병술을 구사하는 지휘관이라는 것이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뭘까, 이 이상한 공기는. 아버지에게 도움 받기를 꺼려하는 귀족 중신들. 아니, 어쩌면 실력따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귀족 칭호를 필요로 하지않는 아버지, 이들과 무슨 알력이 있는 건가? 아니, 그보다는 바로반란을 일으킨 당사자의 아버지인 탓이겠지. 그러나 역시 아버지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 틀림없다. 저 세르무즈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마브릴 군대와 비교도 되지 않는 수효라 해도 아버지와 그 휘하 기사단이 도착했었을 때 얼마나 마음에 힘을 얻었던가. 그리고 실제로, 아버지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우리일행을 이곳으로 무사히 구출해 냈었다. 다시 회의장은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이제 그저 그런 말은 하나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확실한 의견이 없는 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선제 공격이 최선입니다." 저 과감한 목소리, 나르디가 드디어 시선을 똑바로 하고 중신들을바라보았다. 늙은 무관으로 보이는 중신이 고개를 들더니 나르디를 향해 조심스런 시선을 보냈다. 그러더니 조금씩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선제 공격이라니요…… 전하, 저들은 이미 우리의 전력을 정확히꿰뚫어보고 있습니다. 기습으로 저들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전 병력이 총출동해 보았자, 저들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미 알려져 있으니까요. 그저 무익한 죽음일 뿐……." "그러면, 이 고귀한 성을 그들의 발아래 두자는 말씀입니까?" +=+=+=+=+=+=+=+=+=+=+=+=+=+=+=+=+=+=+=+=+=+=+=+=+=+=+=+=+=+=+=..오늘도냐고요? 네.. ^^;Luthien, La Noir. 번 호 : 23174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0-16 20:53제 목 : ◁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22)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22) 사실 진부한 말이었는데, 나르디의 목소리는 상당히 이채로운 빛을띠고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태자인 그가 이런 회의장에서 발언하는 것은 거의 처음인 듯했다. 어쩌면 그런 탓이었을까? 나르디는 이회의장을 채운 귀족원의 늙은이와는 전혀 다른 생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그논 국왕은 이번 회의의 주재를 아예 나르디에게 맡긴 듯했다. "그런 말씀은 아니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는 설득력이 없는 나르디의 말이었다. 그러나 곧다음 말이 떨어졌다. "나는, 저 반란의 세력이 단 한 발짝이라도 달크로즈의 흰 돌을 밟게 되는 것을 결코 참을 수 없습니다!" 이럴 때 보면 그는 확실히 왕자, 아니 태자였다. 이 나라를 물려받을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직시하고 있는 그. 여행 도중에서도 유난히애국심이 강했던 그였다. 어쩌면 당연한 미덕이기도 할. "……." 앞서 말했던 중신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르디의 말에 동의하는것은 아니지만 제시할 적당한 대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서로 먼저 말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르디는 별로 주저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쪽 전력을 잘 알고 있으니, 도리어 물밀듯 자신만만하게 쳐들어오겠지요. 그 때가 되면 죽음을 무릅쓴 저항 역시, 한 푼 어치 가치도 없는, 그야말로 '무익한 피'가 될 것입니다. 죽음을 무릅쓰려면오히려 지금이지요.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 하나, 시간이아닙니까? 고귀한 성을 지키기 위해, 한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 가진것 무엇이든 내던져야 할 때가 아닌가요?" 무거운 공기가 실내를 짓눌렀다. 귀족원의 귀족들은 하나같이 나르디의 말에 동의하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바로 동의하는 즉시, 그 내던져야 할 목숨이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나르디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하르얀이 분명 야전을 감행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꽤나 고압적, 단정적인 목소리다. 아마도 이런 곳에서 효율적일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므로 기습을 하려면 해질녘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나르디의 눈동자가 귀족들을 죽 훑었다. 마치, 죽일 사람을 찾아내려는 듯한 섬뜩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야말로 잔인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에서 용기 있게 앞장을 서고 싶어할 분이 여럿이리라는 확신이 드는군요." "……." 이제 사람들의 고개가 눈에 띄게 테이블 아래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몇 명은 거의 눈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쥐구멍이라도 찾는지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생각했다. 저들도 어쩌면,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식이 반란에 가담한 경우일 것 같다고. 나르디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더니, 테이블한쪽에 얹혀 있던 종이 뭉치를 끌어당겼다. 그 가운데 맨 위에 얹혀있던 몇 장의 종이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종이가 사각대는 소리조차고요한 회의장을 날카롭게 갈랐다. 그리고 나르디는 종이를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딱딱한 목소리로한 마디 던졌다. "제가 이 명단을 굳이 읽어드릴 필요는 없겠지요?" 툭. 한 사람이 맥없이 떨어뜨린 손이 테이블에 부딪쳐 소리를 냈다. 나르디의 눈동자는 마치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조롱하려는 것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유리로 만든 듯 감정 없이 말갛게 빛난다. 바로 옆에 앉은 국왕, 이그논 폐하의 허공을 헤매이는 듯한 무심한 눈동자와는 대조적으로. 오직 고개를 바로 들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이번 반란에 연루되지않은 사람들 뿐이다.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어나르디만큼이나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연좌제를 적용하실 것입니까?" "……." 고개를 숙였던 사람들조차 생쥐처럼 재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나르디를 쳐다보았다. 결코 놓칠 수 없는 한 마디를 듣기 위해서다. 그래, 이 상황에서 그들을 처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바보다. 그렇다고 마땅히 적용할 것이라고 한다면, 이번엔 이들의 배신마저초래할 수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르디는 한동안 말없이 이들을 둘러보았다. 가장 적당한 말을 찾고 있는 듯했다. "걸맞는 행동을 한다면, 책임을 묻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주 간단하고도, 복합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 한마디였다. 그들을자유롭게 놓아 줄 생각도, 적대적으로 돌아서게 할 생각도 없는 이상, 저렇듯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말이 가장 적당했을 것이다. 그는 잔인하게 그들의 약점을 틀어쥐고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이필요한 곳에서, 그들을 적재적소에 써먹기 위해. 말이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한 마디가 들렸다. "'걸맞는' 행동일 때 말씀입니다." 걸맞는 행동이란 게무얼까. 그거야말로 해석하는 사람 마음이었다. 이에 대해 누군가 뭔가 말하려는 듯 고개를 들고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다른 곳에서 들려온 한 마디로 막혀 버렸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전하. 저를 선봉에 세워 주십시오!" 모두의 시선이 문간으로 향했다. 방금 문을 열고 들어온 듯한 엘비르 리안센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것도 갑옷과 손에 든 투구로 완전한 무장을 하고, 단지 관습대로칼만은 차지 않은 채 거기에 서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한 번 외쳤다. "동생의 불충을 목숨으로 갚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이 자리에 리안센 부단장은 없었다. 부단장인 그는 아버지와 함께님-나르시냐크로 떠난 후였다. 나르디는 의외라는 듯, 그러나 그를 잘 아는 내 눈으로 보기엔 실은 기다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엘비르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격한 표정, 그야말로 위엄을 갖고서. "충분히 보상될 것이오. 그야말로 '걸맞소'." 이리하여 중신들이 취해야 할 행동은 명확해졌다. 나는 그 가운데 눈에 띄게 흙빛 얼굴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파티장에서 그 이름을 소개받았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이슬리, 아이슬리 백작. 아마도 엘비르의 약혼녀인 귀여운 처녀 리리안의 아버지. 고개를 든 엘비르는 허락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다시 일어나 정식으로 절을 했다. 가라앉은 금발 아래 그의 얼굴은 내가 처음 보았던그대로 수많은 책임감과 젊은이답지 않은 깊은 사려를 지닌 그것이었다. 명예로 인해 받는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내린 희생에의 결정. 나, 그리고 나르디와는또 다른 사람. 문득 티무르의 얼굴이 겹쳐 떠오른다. 어린아이의 난폭함을 지닌그 눈동자, 치기 어린 표정, 그렇지만 그 역시 나라를 뒤엎으려 할정도로 야심차다거나 부모 형제에게도 칼을 들이댈 정도로 냉혹하게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러나 하르얀, 하르얀은? "부대는 직접 지휘할 생각입니다." 나르디가 언젠가 세르무즈의 막사 안에서도 했던 말, 그러나 어조는 사뭇 다른 그 말이 나를 생각 속에서 깨어나게 했다. "엘비르 리안센, 너를 이번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내 부관으로 삼겠다. 그리고 여러분, 현재 운용 가능한 병력을 일곱 명씩, 소조로나누어 각 부대 별로 탁월한 귀족원의 지휘관들께 그 지휘를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병력이 적다 하나 오랜 경험을 지니신 노장 분들의 지휘를 결코 가볍다 하지는 못할 것이니, 이번 싸움의 승산을거기에서 점칠 수 있겠지요. 물론 선정은 자의를 가장 중시할 생각이나, 부득이한 경우 선정 문제는 엘비르 리안센에게 일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서 이의가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이번 반란 문제에 연루되지않은 귀족들은 자신들은 열외이리라는 생각에 별반 이의를 제기할 필요를 못 느꼈을 터였고, 연루된 귀족들이야 감히 여기서 더 입을 열었다가는 어떤 소리가 떨어질 지 몰라 가만히 있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거의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전하." 갑자기 한 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계속 써대게 되는 것은, 혹시 하이텔 은색바람 님의 저주(^^;) 탓이 아닐까요? (저주가 아니고 마법이었을는지도...)Luthien, La Noir. 번 호 : 23178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0-16 21:01제 목 : ◁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23)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23) 돌아보니 그는 아까 '귀족원에는 훌륭한 지휘관이 많다'고 아버지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귀족에게 핀잔을 주었던 그 인물이었다. 좁은 미간과 날카로운 매부리코, 희끗희끗한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그의 이름은 쥐사키 로르보제 자작, 그는 나르디를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내게로 주었다. 그는 다시 나르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하." 나르디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하시오." "왜, 반란군 수뇌의 형 되는 파비안 나르시냐크를 전투에 참전시키지 않으십니까? 그는 엘비르 리안센 못지 않게, 오히려 그보다 더욱죄를 갚아야 할 처지가 아니옵니까?" 좌중이 갑자기 술렁였다. 수많은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향했다. 뺨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시선들은 남김없이 적대적인 빛을 띠고 있었다. "로르보제 후작의 말씀이 맞습니다. 죽음으로 죄를 갚아야 할 쪽은오히려 나르시냐크 집안 쪽입니다." "더구나 구원 기사단도 믿을 수 없습니다. 단장과 부단장의 아들이모두 반란군의 우두머리 자리에 있는 터에, 무엇으로 그 아버지들을믿는단 말씀입니까?" 엘비르의 분노에 찬 시선이 방금 말을 끝낸 레오카디 퀴디머 여공작의 얼굴에 가 꽂혔다. 그러나 살집 좋은 팔과 심술궂게 늘어진 뺨을 가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었다. "그들은 모두 왕가로부터의 귀족 칭호조차 거부한 자들입니다. 근거 없이 의심할 바는 아니나, 결코 무조건적 신뢰를 줄 대상도 아닌줄로 아뢰옵니다." 나르디는 천천히 눈을 들더니 그녀에게 대답했다. "이런 상황에 처하여, 무조건적 신뢰를 주어도 좋을 이들이 과연그 누구라 해야 옳겠소?" 퀴디머 여공작은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나르디의 말이 반란에 가담한 자식을 둔 귀족들 뿐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귀족 모두를 향한 것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형이 동생의 죄값을 대신하는 것이 요즈음의 분위기인 모양이군요. 오히려 부모보다 적당한 값이라 할 수도 있겠다 싶은데요." 귀족원의 일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위안 샤리두 백작이 내 얼굴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보는 내 쪽에선 그미소에 가슴속을 깊숙이 찔리는 기분이었다. 이런 상황에 처해 보는것은 처음이다. 저런 것이 바로 귀족들이 어려서부터 익히는 '우회적으로 찌른다'라는 것인가. 이제 내가 뭔가 대답해야 할 때였다. 그리고 그들이 기대하는, 해야 할 대답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내가 그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황인가? 나에게는 유리카가 있어. 그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어. 하르얀…… 녀석은 교활하게도 이 상황을 이용하려 했음에 틀림없어. 또다시 선택할 수 없는 두 개의 선택. 여러 개의 눈이 나를 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들이 아버지에게 책임을 묻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파비안은 내 대신 할 일이 있습니다." 나르디의 단호한 말소리가 모든 사람의 시선을 자르고 들어왔다. 나르디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들고 있던 종이를 말아 쥐면서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죄값의경중을 재는 것은 그대들이 아니라 폐하이시니까요." 아무도 대꾸하지 못하도록 말을 끝낸 나르디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파비안 나르시냐크, 병실로 가서 기다려라. 내가 조금 후에 해야할 임무에 대해서 말해 주겠다." 회의장의 천장은 높고 까마득하다. 일어나 허리를 굽히는 내 눈에보이는 바닥의 무늬들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어지러운 곡선이었다. 돌아 나오는 바닥의 울림, 감정 따위는 섞여 있지 않은 발자국 소리에 마음을 실었다. 문이 열린다. 그들이 한 발짝 멀어지고, 이윽고커다란 나무문으로 막혀 버린다. 나는 앞으로 걷는다. 계속해서 걷는다. 나와는 다른 세상에 있는 장식된 복도를 걷는다. 복도 양쪽에 엇갈려 세워진 커다란 유리의 교직, 그 창문으로 쏟아진 햇살이 번갈아어깨에 내려앉고 바닥을 밝힌다. 그것은 붉은 빛깔, 해지는 하늘의붉은 빛깔이었다. 그리고 검과 피, 붉은 비단의 빛깔이었다. 검은 어둠이 달크로즈를 그 꼭대기부터 뒤덮기 시작했다. 검은 시간이 가득히 내렸다. 환하게 밝혀진 불빛, 그러나 수백의 램프들로도 다가오는 어둠을한 순간도 늦출 수 없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나르디는 내가 그를 본 이래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갑옷으로 무장한채 내 앞에 서 있었다. 물론 그의 성격상 풀 플레이트를 걸친다거나하지는 않았지만 투구까지 손에 들고 선 그를 보니 정말로 이 성에서, 우리 나라의 수도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쪽 의자에 유리카가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 여행을 위한 폭이 좁은 바지와 검은 무녀의 옷을 걸치고, 또한 그녀의 얇은 숏소드도 허리에 차고 있다. 그녀는 모든 사실을 들었고, 어느 정도 걸을수 있을 정도로 몸도 회복되었다. 물론 그것이 본질적인 회복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오르코시즈가 주는 첫 번째 충격에서는 일단 벗어난셈이다. 물론, 오르코시즈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몇 번인가의발작을 더 동반한다고 들었다. 한 달 기한인 경우, 아마 앞으로 두번 정도. 테이블 위에는 푸른빛과 금빛 테두리가 둘러지고 물에 번지지 않는잉크로 그려진, 가로 세로 1큐빗 가량의 커다란 지도가 놓여 있다. 나르디가 가져오게 한, 몹시 정교한 이스나미르 전역 지도다. 군사적문제로 쉽게 반출될 수 없는 이런 물건을 내가 가질 수 있게 된 것도그의 특별한 호의였다. 대신 이상하게도 지도를 내어준 담당관은 내엉터리 고물 지도를 보고 매우 흥미로워하며 성으로 돌아오거든 다시한 번 보여달라고 말했다. 나르디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유리카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윽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유리카를 잘 보살펴라." 그리고 아마도, 이 성에서 가장 죽을 염려가 없는 사람일 잔-이슬로즈 공주가 그 곁에 서 있다. 그녀는 마치 상복처럼 새카만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똑같은 색깔의 챙이 넓은 벨벳 모자와 새하얀레이스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 드레스의 넓은 폭과 부드러운 물결짐은 굉장히 여성스러우면서도 또한 묘하게 활동적인 매력을 풍겼다. 그녀의 눈은 검었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채 또한 검었다. 그 모든 검은 색의 조화 가운데 성에서 지내는 잠깐 동안 눈에 띄게 희어진 섬세한 얼굴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유리카를 돌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도와주시기로 한 것에대해서도요." 그녀는 나와 유리카의 탈출을 위해 주의를 끌어 주는 역할을 맡았다. 제아무리 하르얀이라 하더라도 세르무즈까지 적으로 돌리고 싶지않은 바에야 그녀에게 손을 댈 리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손님으로 소개된 그녀다. 한 나라에서 내전을 일으키려는 자는 타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하는 법이다. "별 것 아니에요." 일견 냉정한 듯 보이는 대답이지만 나는 어둠을 이용하기 위해, 그리고 만일 발견되었을 경우 스스로의 신분을 빨리 드러내기 위해 저렇듯 주의 깊은 복장을 한 그녀의 배려에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르디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대의 일도 성공하길 빌어요." 나르디가 약간은 농조로 말을 꺼냈다. "세르무즈에서 이스나미르의 미래를 걱정해 준다니 놀랄 만한 일인데요." 잔-이슬로즈는 턱을 쳐들었다. 꼿꼿이 허리를 편 그녀의 오연한 자세를 바라보는 것이 그렇지 못한 한 사람 때문에 내 마음을 아프게했다. "나 역시, 이 아름다운 나라가 추잡한 반란 무리들 따위에 의해 무너지기를 원치 않아요." "그건, 다른 나라에 의해서라면 상관없다는 말씀?" "알 수 없지요. 그보다 먼저 포로로 데려온 적국의 공주를 이렇듯감시자 하나 없이 성 밖으로 내보내는 것에 대해 먼저 물어야 하지않을까요?" 말을 끝내며 잔-이슬로즈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렸다. 나르디도 미소했다. 둘은 충분히 서로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더 이상의말은 필요없었다. +=+=+=+=+=+=+=+=+=+=+=+=+=+=+=+=+=+=+=+=+=+=+=+=+=+=+=+=+=+=+=최근의 전개를 좋아하시는 분이 있으신가 하면, 싫으신 분도 있으신가봐요. 뭐.... 모든 분을 만족시키는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알기 때문에 다 까닭이 있으려니... 하고 있습니다. ^^;Luthien, La Noir. 번 호 : 23179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0-16 21:01제 목 : ◁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24)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24) 나르디는 이제부터 30분 후, 귀족들의 보강으로 인해 약 100여 명으로 늘어난 군대 중 70여명을 이끌고 성문을 나서도록 되어 있다. 뒷문으로 돌거나, 기습을 계획하지도 않았다. 오직 이번에 그가 반란군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비록 포위 당했다 한들 달크로즈 성을지키고자 하는 국왕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 용기 역시 줄어들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뿐이다. 그래, 나르디가 잔인한 계획을 세웠음을 나는 안다. 이번 전투로 여러 귀족들이 희생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목숨 바쳐 싸우지 않고서는 멸문이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는 귀족들은 더욱 열심히 싸울 것이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전제로 이번 계획을 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귀족 하나 감히 반발하지 못하는 것은이번 전투의 총지휘가 바로 태자 자신이었기때문이었다. 즉, 죽음을무릅쓰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다. 그러나, 나르디는 혼자 죽음을 무릅쓸 생각은 없었고, 단호히 그들을 함께 사지로 몰아넣었다. 과연 이 전투가 어떻게 될까? 그러나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엘다렌, 나르디를 많이 도와주세요." 엘다렌의 고개가 천천히, 그러나 굳게 끄덕여진다. 엘다렌은 우리와 함께 가지 않는다. 나조차도 방금 전에야 알게 된사실이었다. 이번 일이 생기기 전, 나르디는 파티가 끝난 이후에 엘다렌과 이그논 국왕 폐하가 동등한 위치에서 접견을 가질 수 있는 자리를 은밀히마련했다. 나나 유리카는 전혀 몰랐던 일이다. 엘다렌은 곧 다시 부활할 드워프 족의 왕, 그리고 그 종족이 가진 가능성은 결코 무시할수 없는 것이었다. 아마 나르디가 한 일은 엘다렌의 자존심과 자국의이익 모두를 고려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훌륭한 일이었음이 드러났다. 엘다렌은 정식 동맹자로서, 비록 아직은 한 명이지만 이스나미르의국왕을 도와 싸울 것을 결정했으며, 내가 그 모든 이야기를 듣게 된것은 바로 방금 전의 일이었다. 엘다렌은 말했다. "말을 타고 필사적으로 탈출하는 데 있어 난쟁이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도움이 되는 장소는 오히려 이쪽이다. 유리카의 몸이 낫거든 다시 되돌아와 만나자. 그런 다음 함께 미카를 만나러 가도록해야겠지." 엘다렌은 내가 가야 할 길, 그리고 내가 만나야 할 사람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설명해 주었다. 그렇더라도 이미 오랜 시간 의지가 되어온 그와 잠시나마 헤어진다는 것은 마음을 몹시 무겁게 했다. "가볍게 몸을 풀고 다시 만나도록 하지." 나는 안다. 그가 나와 유리카가 탈출할 수 있도록 활로를 뚫는 일을 하기 위해 이곳에 남는다는 것을. 나는 엘다렌의 손을 굳게 쥐었다. 그리고 그 두툼한 손이, 폭이 넓은 도끼가, 달크로즈 성을 구해내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임을 믿었다. 주아니도 그 손에 맡겨져 있다. "유리, 이제 가야지." 유리카는 정말 인형처럼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일어선다. 누구에게인사를 하지도, 작별의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물론 그녀가 말을 잃거나 또는 기억을 잃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랜 실신에서 깨어난 이후로 어떤 사실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유리카의 손을 잡고 문을 나서기에 앞서, 나는 나르디에게로 몸을돌렸다. "나르디, 나는 네가 말한 그 '걸맞는' 일을 하지 않아도 좋은 거냐?" 나르디의 얼굴에 가만히 웃음이 번진다. 나는 망루 위에서 죽음을무릅쓰고 나를 막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파비안 너는 말이지, 내 친구인 유리카를 살려내는 것이 가장 '걸맞는' 일이네. 네가 안 한다고 했어도 내가 시켰을걸." "……."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그 손을 한 번 쥐었을 뿐이었다. 잔-이슬로즈가 일어선다. 그녀는 마치 소풍이라도 나서는 것처럼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럼, 가죠." 나르디는 마지막으로 돌아서는 내 등뒤에 대고 덧붙였다. "유리카를 살려내지 못하면, 용서하지 않아." 나르디, 너도 성을 꼭 지켜내고, 그리고…… 살아라. 닫히는 문 너머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가장 앞장서 사지로뛰어들려고 하는 태자의 모습이 흘끗 비쳤다. 나의 친구, 그리고 나라를 지킬 책임을 짊어진 태자…… 꼭 다시 만나야만 할 사람. 그는 문 안쪽으로 사라져 버린다. 문이 닫혔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나르디의 시종인 보르젠이 직접 우리의 앞장을 섰다. 마구간으로안내하려는 것이다. 복도를 따라간 뒤 성벽에 바로 붙은 비상 계단을 내려갔다. 불은모두 꺼져 있어서 횃불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것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아주 작게 줄여져 있었다. 우울하고 차가운 밤. 유리 없이 높이 뚫린 창들로 방금 뜬파르스름한 달빛이 새어들어온다. 그렇듯 기쁜 마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날씨 아래 도착했던 고귀한 성, 순백의 보석 달크로즈. 지금 그곳을 떠나는 나는 친구들과모두 헤어지고 생명이 경각에 달린 유리카의 손을 잡은 채 도망치듯밤을 의지하여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계단은 좁고도 길었다. 간신히 걷고 있는 유리카가 발을 헛딛지 않도록 우리는 시간을 많이 지체해야만 했다. 횃불을 들고 걷는 보르젠의 바로 뒤에서 곧게 허리를 펴고 걷고 있는 잔-이슬로즈의 모습이어둠 때문인지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한다. 차갑고도, 싸늘한 여름밤. "이곳입니다." 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나르디와 약속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마구간 입구에 선 채 보르젠이 넘겨주는 고삐를 잡고서 내가 타게 될 말을 올려다보았다. 보르젠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떠오르는 작은 수건을 말의 코에 들이대고 잠시 동안 냄새맡게 하더니, 이윽고내 손으로 그것을 건넨다. 나르디의 손수건, 나는 그것을 겉으로 드러나도록 내 목에 잡아맸다. 프레아데니, '호수에 뜨는 별'이란 이름의 그 말은 나르디가 어려서부터 죽 함께 해온 애마였다. 나르디가 궁을 비운 동안에도 단 한번도 다른 사람이 탄 일 없는 말이다. 그리고 성을 떠난 동안에도 그가 그리워했던 단 하나의 친구다. 히힝, 히힝, 힝힝힝……. 거대한 흑마는 잠시만에 잠잠해지더니 내 말을 잘 듣게 되었다. 나르디가 일부러 빌려 준 이 손수건은 그가 이 말을 타게 되던 때부터항상 갖고 다니던 물건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말 프레아데니를 내게빌려주기 위해 일부러 말을 애써 설득했노라고 웃으면서 말했었다. 달크로즈 성에서 가장 빠른 명마가 바로 이 흠집 없이 새카만 말프레아데니다. 그는 빠르게 적진을 뚫고 달려야 할 나를 위해 이 말을 내게 주고, 자신은 다른 말을 탔다. 그 자신 역시도 사지로 가고있음에도. "유리카." +=+=+=+=+=+=+=+=+=+=+=+=+=+=+=+=+=+=+=+=+=+=+=+=+=+=+=+=+=+=+=소심남아 님, 보르헤스에 대한 저의 의견은.... 글이 완결된 다음에 다시 자세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정말로 시간이 없습니다...)그리고 chatmate 님, 월정석이아니라 월장석(月長石)이 맞습니다. 영어로는 moonstone이고요. 알칼리 장석의 일종으로 청색을 띤 섬광을 발하는 암석입니다. 스리랑카나 인도, 마다가스카르 등지에서 나지요. 주로 장식용으로 쓰이고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3180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0-16 21:01제 목 : ◁세월의돌▷ 8-2. 상처를 위한 상처 (25)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25) 내가 먼저 말에 오르고, 손을 내밀어 유리카를 내 뒤에 태웠다. 그녀가 가만히 팔을 내 허리에 감는다. 말에는 이미 여행에 필요한 짐들이 모두 꾸려져 매달려 있다. 다각다각, 말이 앞뒤로 몇 걸음 움직이며 오랜만에 달릴 준비를 한다. 유리카의 머리 양옆에는 진주와 조개가 달린 장식 빗이 두 개 단정히 꽂혀 있다. 머리 손질할 기운도 없는 그녀를 위해 잔-이슬로즈가손수 흐트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켜준 것이다. 은빛 머리와 잘어울렸지만, 아무 장식도 없던 때에도 생기라는 장식 하나로 충분히예뻤던 그녀였는데. 나보다 훨씬 승마 기술이 좋았던 유리카, 그러나 이제는 내 승마술을 믿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나는 새삼 내 허리를 감은 그녀의 손을한 번 꽉 쥐었다. "그럼." 보르젠은 계단으로 되올라가고 내 옆에는 이미 승마 준비를 마친잔-이슬로즈가 서 있다. 그녀가 탄 말은 네 발굽과 이마에만 흰 무늬가 있는 흑마였다. 그것은 마치 검은 벨벳 드레스에 흰 레이스 장갑을 낀 흰 얼굴의 그녀와도 비슷해 보였다. 물결치는 드레스 자락을양쪽으로 늘어뜨린 채, 검은 말 위에 가볍게 올라앉은 그녀는 그지없이 우아한 자태로 밤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우리는 잠시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보르젠이 태자에게 보고하러 갔을 테고, 그리고 모든 준비를 끝낸 채 기다리고 있었을 나르디는 즉시 성문을 열고 군대를 출발시킬 것이다. 어렴풋한 어둠 너머로 성문 위에 튀어나온 낮은 망루가 문득 내 눈에 띈다. 내가 잘라버렸던 그 난간은 마법 걸린 성벽의 일부이니만큼잘랐다는 자체도 놀라운 것이지만, 다시 복구할 방법 역시 없다고 들었다. 내가 나를 붙잡는 사람들을 뿌리치며 미친 듯이 찌르고 그었던망루 뒤편 벽면도, 마찬가지로 수리할 방법은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가려 놓기야 하겠지만, 마법이 없어진 이 세계에서 성 전체가 하나의연결된 마법체인 달크로즈 성의 돌 한 개라도다른 것으로 바꾼다는것은 성 전체의 마법을 모조리 거두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학자들은 말했다. 이 일에 대해 문책 받지 않게 된 것도 순전히 나르디의덕분이었다. 드디어 거대한 문이 삐걱이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깼다. 어렴풋한윤곽이 어둠을 가르며 움직이고, 다음 순간 수십 마리의 말이 출발하는 소리가 높이 울렸다. "갑시다." 이렷! 나지막하지만 날카로운 구령 소리가 언덕 위를 울리고, 두마리의 말은 쏜살같이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하늘은 불타고 있었다. 어디선가 타오르는 불길로 하늘은 온통 벌겋게 밝혀졌다. 그러나돌아볼 수가 없었다. 오직, 앞으로만 달릴 수 있을 뿐이다. 태자의 말 프레아데니는 과연 빨랐다. 두 명을 태웠는데도 잔-이슬로즈가 탄 말과 거의 속도가 비슷할 정도다. 귀가 멍멍해질 정도의속도로 보이지 않는 어둠을 끝없이 가르는 말발굽, 순간순간 캄캄한가운데 튀어나오는 물체들로만 그 속도를 느낄 수 있다. 한 발짝 앞도 보이지 않는 먹물 같은 어둠, 내 앞에 펼쳐질 내일 역시 저것과다를 것이 없다. 가슴을 터질 듯 채운 긴장과 고통으로 내게는 말의 속도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언덕을 내리닫고, 덤불을 뛰어넘고, 잔디를 짓이기며 끝없이 달렸다. 어딜까, 여기가 어딜까. 오직 말의 본능에만의지하여 이 전장을 벗어나려는 두 기수에게는 뭔가 생각할 여유조차주어지지 않았다. 유리카, 버텨줘. 조금만 더 참아 줘. 와아아아……. 귓전 너머로 아련하게 들리는 함성과, 무기들의 부딪는 소리. 어쩌면 나는 저기에 있었어야만 했다. 나르디와 수십 명의 귀족들, 또한수십 명의 병사들, 그들은 과연 얼마나 자신의 목숨들을 효과적으로지키고 있을까. 살아 있어주는 것이, 시간을 벌고 구원받는 것이, 그들이 해내어야만 할 가장 중대한 임무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있어주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조차 볼 수 없게 될 곳으로 나는 달려가고 있다……. 치마와 드레스, 레이스 장갑에도 불구하고 잔-이슬로즈는 놀랄 만한 솜씨로 말을 몰았다. 모자는 이럴 때를 대비하여 끈으로 단단히턱에 잡아매었다. 가볍게 몸을 수그린 그녀, 마치 검은 깃 달린 화살처럼 어둠 속을 달려간다. "이럇, 이럇!" 유리카가 손을 놓칠까 싶어, 그녀의 내 허리를 감은 그녀의 양손을단단히 묶고 몸도 안장에 묶어 놓은 것은 확실히 잘한 일이었다. 거의 정신을 잃을 듯 흔들리는 그녀는 이미 자신의 힘으로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이 도시를 얼마나 보고싶어했던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도시, 대륙 안에서도 손꼽힌다는이 하얀 도시를 얼마나 궁금하게 생각했었나. 달크로즈의 마법 걸린흰 성벽과 푸른 깃발들, 드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마치 정교한 예술품 같은 오밀조밀한 집들과 교묘하게 잇대어진 지형을 보고 얼마나감탄했었나. 그 도시를 이렇게 떠나고 싶어하게 될 줄이야. "……." 모두, 살아만 있어 줘. 다시 돌아와서 꼭 볼 수 있도록. 갑자기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소리가 왼쪽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울렸다. 말울음 소리와 칼을 빼어드는 소리가 울렸다. "멈춰라! 누구냐!" 쉬익-잔-이슬로즈가 말 옆에 달아놓은 그녀의 긴 검을 단숨에 뽑더니 여자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힘으로 나타난 상대방의 목을 힘껏강타했다. 끄윽- 하고 길게 끌리는 괴상한 신음소리와 이윽고 뭔가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소리. 다음 순간 우리는 잠시 늦추었던 말고삐를 다시 당겼다. "한시가 급해요!" 귀부인의 차림새를 하고도 강력한 전사인 그녀의 행동에는 일말의망설임도 없었다. 어쩌면 그 성격이 나르디와도 비슷할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투두두, 투두두, 다가닥, 다가닥……주아니를 맡긴 것은 마지막 순간을 대비해서다. 붙잡히는 순간 죽음을 당할 것이 뻔한 우리와 함께 있는 것보다, 드워프 족의 왕이며따라서 어떤 협상의 여지라도 있을 엘다렌과 있는 편이 주아니에겐훨씬 안전했다. 비스듬한 곡선을 그리며 성이 있는 언덕에서 벗어나고 있다. 귓가에선 창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엘다렌과 나르디, 그들을 뒤에 두고 이렇게 달리고 있다. 빗소리처럼 날카롭게 사각이며 밟히는 풀들과 말들의 콧김이 어둠을 뚫는다. 그들은, 그들은 어떻게될까, 어떻게 될까, 전투는 어떻게 될까. 내 곁에 있었던 그 누구도 다시는 곁을 떠나지 않기를……. 시내 외곽으로 돌아가는 길을 달렸다. 행인 한 사람 없다. 목표로하는 곳은 크로즈님 강이 시 밖으로 빠지는 수문의 입구, 이미 나르디가 명령장을 써 주었고 가기만 하면 바로 배를 타고 달크로즈 시밖으로 나갈 수 있다.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더 가면……. 등뒤에서 느끼지도 못했던 포위망이 다가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멈추엇!" 멈추지 않아. 그럴 수가 없어. 나는 친구들의 희생으로 지금 이곳을 벗어나는 거야. 헛되게 할 수 없어. 나는살아날 거야. 유리카를아라스탄 호수로 데려갈 거야. 그리고…… 꼭 다시 돌아올 거야.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여러 개다. 손쉽게 벗어나기 어려울 듯하다. 길은 일직선, 똑바로 달리는 것밖에 수가 없었다. "서랏, 서! 서지 않으면 쏜다!" 활을 들었을 것이다. 더욱 힘껏 말에 박차를 가했다. 저 앞에 외길이 끝나고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곳이 보인다. 갑자기 뒤따라오던 잔-이슬로즈가 날카롭게 외쳤다. "똑바로 가요! 저 교차로에서 헤어집시다!" +=+=+=+=+=+=+=+=+=+=+=+=+=+=+=+=+=+=+=+=+=+=+=+=+=+=+=+=+=+=+=리카도 님, 배에 대한 참고 자료를 구하고 싶으시다고요... 제가 참고했던 것은.... 일단 <크로스 섹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요즘에도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진선'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고,전세계의 유명한 건축물이나 탈것 등의 내부를 완전히 도해해서 그려놓은 거대한 그림책입니다. 당시 가격은 무려 7500원...(싸다..)참, 여기서 당시란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그렇습니다. 하여간 저도 신문 광고를 보고 당장 달려가 샀었는데 당시엔 굉장히 비싸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 질에 비하면 정말 형편없는가격입니다. (참고로 저는 25살)그러니까 이 책에 보면 거대한 갈레온을 완벽히 도해한 그림이 있지요. 생활상도 그려져 있지요. 물론 제 글에 나오는 푸른 굴조개는이 정도로 발전한 시대의 배는 아닙니다만... 하여간 엄청난 도움이되었습니다. 찾으실 수 있으면 좋을텐데... 다음은 그 이름도 드높은 두산동아대백과사전이 있네요. 그런데 또한 참고로 말씀드립니다만 이 백과사전 CD는 웬만하면 사지 마세요. 참, 별난 문제점들이 다 있습니다. 하긴, 다른 백과사전 CD들도 마찬가지인지 모르겠지만... 브리태니커99가 언제 한글판이 나올까... 그 다음엔 우스운 일이지만 C.S.루이스의 나니아 크로니클 중에서<새벽 출정호의 항해>를 참고했습니다. 제가 이런 배의 적정 선원 숫자를 몰라서 헤맸거든요. 이 책은 시공사에서 나와 있습니다. (한길사에서도 나왔던가..) 여기에 나오는 배는 작아서 좋았어요. (돛대가무려 한 개...; 갑판에는 닭장...;;) 오히려 걸리버 여행기 같은 책은 별로 도움이 안 되더군요. 그리고 전에도 언급한 일 있지만, 허먼 멜빌의 <백경>을 다시 보면서 배 위에서의 생활을 연구했었지요. 더불어 시공 디스커버리 중에서 <고래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도 있는데 괜찮은 자료가 좀 있지요. 제가 이 책을 산 이유는 백경에 반해서였다고라...^^;;; (그런데 문제는 여기 나오는 배는 모두 포경선입니다. 일반 범선과 헛갈리시면안돼요)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수집한 배 사진 엽서들... 마지막으로, 책이 아니고 배 모형을 파는 가게에 들어가 쪽팔림을무릅쓰고 한참이나 구경했었습니다. ^^;; 정말 그림에 나오던 다양한종류의 배들이 다 있더군요. 말로만 듣던 바크형이 어쩌고, 쉽형이어쩌고 하는 것들, 특히 항해 밧줄과 돛줄이 어떻게 이어져 어디로연결되어 있는지 제대로 구분하려면(줄만 당기면 돛이 올려지고 내려진다니, 신기하지 않으셨어요?) 얼굴에 철판 까시고 책들고 들어가실컷 구경하세요. (살 생각은 마세요...엄청나게 비쌉니다)제가 메일이 아니고 여기다가 직접(잡담이 긴 것을 싫어하시는 분도 있다죠..) 적은 이유는...좋은 정보 나눠쓰자!는 취지에서.. 하하..^^;;; (물론 이보다 훨씬 근본적인, 외서를 주문해서 산다거나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언어 장벽이란 무시할 게 아니라서.. 게다가가격 문제도 무시할 게 아니죠. --;)Luthien, La Noir.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26) 그녀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이미 안다. 그녀가 적을 막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그녀를 남겨두고 앞으로 달려야만 한다. "조심하세요!" 그 말로 끝이었다. 말 두 마리는 인적 하나 없이 어두운 교차로로뛰어들었고 나는 왼쪽의 좁은 길을 골라잡아 그대로 달려나갔다. 그녀는 말을 돌린다. 말이 급히 멈출 때 내는 날카로운 울음소리, 등뒤에서 한껏 오만하게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 멀어진다. "감히 내 길을 막는 자는 그 죄가 두렵지도 않은 것이냐?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위대한 세르무즈의 대장군, 서방 델페즈의 영주, 마브릴의 공주 잔-이슬로즈 아미유 드 네르쥬……." 별이 총총하다. 양쪽으로 끝없이 이어질 듯하던 지붕들이 드디어 걷히고, 내 시야에 펼쳐진 것은 달크로즈 시를 둘러싸고 언덕 사이를 좁게 이어지며시작되는 상텔로즈 숲의 모습이었다. 상텔로즈는 그렇게 산을 넘어블루 카운티 동쪽을 모두 메우며 무성하게 자라 있다. 모든 일이 끝나면, 엘프 미카를 찾으러 모두가 다시 만나 가야할 곳.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파비……." "유리카?! 정신이 들어?" 꺼질 듯 가냘픈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리는 말 위에서 내 귀를 파고들었다. 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말고삐를 더욱 세게움켜쥐었다. 깨어진 자갈이 깔린 길을 달린다. 말등이 몹시 흔들렸다. 유리카는다시 말을 하지 못했다. 다만 내 허리를 감은 팔에 약간 힘이 들어간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참아……." 그건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물소리가 들린다. 좁긴 하지만 꽤 급류인 크로즈님 강이 바위에 부딪치며 흐르는 소리, 이제 정말로 조금만 더 가면 돼. 저 강이 산으로 들어가는 곳이 바로 우리가 가려는 곳이야. 내가 달려간 길을 자신의 말로 막아선 잔-이슬로즈는 어떻게 됐을까. 그녀가 자신 있게 말한 대로 정말 아무 일 없었을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딛고서 달리고 있어.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도 이렇듯 간절히 바라는 것은한 가지. 아니, 그 모든 것들을 쓸데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기 위해이렇듯 간절히 바라는 것은 한 가지. "다 왔어!" 저만치 강이 산 속의 동굴로 굽이쳐 나가는 것이 달빛에 어렴풋이비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높이 솟아 있는 동쪽 산 그림자가가득히 시야를 덮었다. 강 입구의 수문이 보이고, 그리고 수도 전체에 난리가 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처럼 그 앞에 지키고 선수문장과 파수를 보는 두 명의 병사가 자그마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조금씩 말의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말은 아직 지치지 않은 것 같지만, 극도의 긴장 속에서 지친 것은 오히려 나였다. "멈추시오!" 저 앞에서 수문장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이번에는 말하지 않아도 정말 멈출 참이다. 드디어 수문 앞에 이르러, 말을 멈추려 하는 순간이었다. 쉬익-이히히히히히힝! 허공을 찢는 듯한 드높은 울음, 그저 멈추기 위해 울었던 것인지,다른 이유 때문인지 몰랐다. 다만 내 몸을 지탱하고 있는 말의 탄탄한 근육이 한 순간 허물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그리고 그것은곧장 정신없는 휘청임으로 이어졌다. "유리카!" 몸을 무리하게 뒤로 틀었다. 아예 허리가 휘청 옆으로 꺾여 바닥으로 떨어지려고 하는 그녀의 몸을 부축하려는 순간, 나는 말 엉덩이에박힌 한 개의 화살을 보았다. 작은 것이 아니다. 살의 굵기가 거의손가락 만하고, 그 촉은 아마 손목 굵기에 이를 거대한 인마 살상용화살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이히힝, 이히히힝, 푸르르, 히힝! 프레아데니는 놀랍게도 그냥 쓰러지지 않고 억지로 뒷다리만을 꺾으며 똑바로 몸을 지탱한 채 내려앉았다. 덕택에 말 아래로 떨어지지않고 안장에 묶인 유리카의 몸을 풀어낼 수 있었다. 그녀와 내가 말등에서 내리는 순간, 말은 나머지 무릎을 꺾었다. 그리고는 우리가 선 반대쪽으로 풀썩 쓰러지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 이 말이 아니었다면 두 명을 태우고 이렇게 먼 곳까지 속도를 유지하며 달려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울컥 눈물이 솟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추격자들은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들려오는 소리는 아마도 말 두 필,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달려든다. "유리카, 수문장에게로 가서 이걸 보여줘. 그리고 출발 준비를 하도록 해줘." 그녀에게 나르디의 명령장을 맡겼다. 유리카는 가만히 내 얼굴을바라보더니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뭐라고말하지도 않고 그대로 돌아서 수문 쪽으로 걸어갔다. 물 흐르는 소리가 유난히 생생하게 느껴진다. 마치 살아있는 듯 찰랑거리는 물소리를 옆으로 하고 똑바로 추격자들을 향해 섰다. 가볍게 검을 뽑아 힘껏 잡았다. 목에 감은 나르디의 손수건이 마치 뜨거운 고리처럼 목을 조였다. 숨이 막힐 듯했다. 그냥은 갈 수 없어. 나르디가 나와 유리카를 위해 빌려 준, 어려서부터 키워 온 가장 아끼는 말이야. 나르디의 친구, 그렇다면 그건 내친구라는 말도 되지. 그런 말을 죽였으니 그 값은 해야겠지. 어때,아니야? 나는 그대로 밟아버릴 듯 다가오는 첫 번째 말을 향해 검을 높이쳐들었다. "이건 첫 번째!" +=+=+=+=+=+=+=+=+=+=+=+=+=+=+=+=+=+=+=+=+=+=+=+=+=+=+=+=+=+=+=세월의 돌 홈페이지를 '한미르'하고 '심마니'에서도 이제 검색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야후 코리아에서처럼 '세월' 이나 '전민희'등으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주소는 아시죠? fairytale.pe,kr입니다. Luthien, La Noir. +=+=+=+=+=+=+=+=+=+=+=+=+=+=+=+=세월의 돌(Stone of Days)=+=+=+=+=+=+=+=+=+=+=+=+=+=+=+=+ 8장. 제7월 '약초(Herb)'2. 상처를 위한 상처 (27) 나는 말이 다가오는 순간 강물 반대쪽으로 몸을 날리며 두 손으로꽉 잡고 있던 검을 그대로 말의 옆구리에 푹 찔러 넣었다. 그리고 동시에 온 몸으로 부딪쳐 피가 뿜어 나오는 말과 그 기수를 힘껏 강물속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첨벙! "사, 사람 살려!" 물에 빠진다고 죽지는 않아. 엄살 피우지 말란 말이다. 나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다가오는 두 번째 말을 노려보며 하프 현을 퉁기는 듯한 묵직한 시윗소리를 들었다. 방향은 몰랐지만 아무 쪽으로나 일단 뛰어 피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불쑥 내 앞으로 다가들어 오는 말의 머리를 피해 한 바퀴 돌아 섰다. 방향이 바뀌었다. 상대방은 다시 활을 든다. 안됐군, 랜스가 있었다면 당장에 꼬치처럼 꿰어 버렸을 텐데, 기껏 활쏘기라니. 안 그래? 쉬익-검을 힘껏 반원을 그리며 돌리는 순간, 그 움직임을 따라 허공에서불길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치 방패처럼 검이 지나쳐 간 허공은 날아든 화살을 반대쪽으로 튕겨내어버렸다. 나조차도 생각지 못했던 효과였지만 적어도 나보다는 상대방이 더 놀랐다. 움찔, 하며 그는 말을멈추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두 번째, 간다!" 언제부터 칼레시아드가 이렇게 마음대로 될 수 있게 되었지. 불꽃이 흩날리기 시작한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 시선을 교란시키며앞으로 달렸다. 마지막 순간, 왼쪽으로 몸을 틀면서 이번에는 검을상대방의 엉덩이에 그대로 박아 넣었다. 녀석이 피하려고 몸을 트는바람에 허벅지와 말등이 한꺼번에 꿰어져 버렸지만 말이다. "크아아악!" 죽일 생각은 없었다. 나는 이번에도 등을 찔려 발버둥치는 말과 함께 녀석을 강물 속으로 힘껏 밀어 버렸다. 별로 좋은 말이 아니었는지, 주인이 물 속에 빠져버리자 저만 살겠다고 기슭 쪽으로 헤엄쳐가는 것이 보였다. 그래, 죽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머지는 내 관대함 밖이니 알아서들 해라. "유리카!" 나는 피묻은 검을 닦을 새도 없이 수문 쪽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는방금 일어난 일들로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수문장과 병사들이 있었고, 이미 이야기를 끝낸 듯한 유리카가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야기 들으셨죠?" 수문장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나를 괴물처럼 쳐다보는 눈은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거야, 이제 검도 빛나지 않잖아. "저기 저 말." 나는 쓰러져 있는 프레아데니를 가리켰다. 어둠 속에서도 검게 드러나는 커다란 그림자, 그걸 보니 나르디에게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이새삼 들었다. "태자 전하의 말 프레아데니입니다. 전하께서 친히 저희에게 주신말이죠. 그러니까 수도의 사건이 끝나거든 시체를 수습해서 전하께보내 드리도록 부탁드립니다." 일부러 빌려주었다고 하지 않고 그냥 주었다고 말했다. 나르디라면이 점을 갖고 뭐라고 왈가왈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달크로즈 시에서 문을 지키는 사람을 뽑는 기준상 고지식한 사람일 것이 틀림없는 저 수문장은 태자 전하께서 '빌려'주신 말을 죽였다는것을 가지고 따질지도 몰랐다. "그럼, 부탁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작은 배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돛도 없는, 그야말로 강을 건너는 데 쓸만한 보트다. 유리카가 오르고, 내가 뒤따라 올랐다. 수문장은 배가 튼튼하고 흐름이 곧바르기 때문에 누워서잠을 청해도 좋을 거라고 말하며 수문을 천천히 열었다. "전하께 반드시 우리가 무사히 나갔다는 이야기를 전해드리세요!" 수문장이 뭐라고 대답하는지는 이미 물결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않았다. 배는 놀랄 만큼 빠르게 강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갔다. 기슭에 선 세 사람과 어슴푸레한 숲의 윤곽,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것이 보인다. 달크로즈가 멀어진다. 올려다 보이는밤하늘은 검푸르고, 그 위에는 보석처럼 별들이 박혀 있다. 저만치불그레하던 하늘의 기운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그라들어있었다. 성문 앞에서는 싸움이 끝났을까. 유리카를 배 안에 조심스레 눕혔다. 그리고 그 위에 내 가죽 망토를 덮었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랗게 빛나는 달이 우리 뒤를 따라온다. 강물은 동굴 안으로 서서히 흘러들어 가고 있다. 마지막 흔적마저 사라져 버린다. 이제 하늘은 가려지고, 별도 달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화살처럼 빠르게 푸른 물은 흘러간다. 이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주위는 캄캄해진다. "하아……." 검은 물이 흐르는 소리, 시간처럼 빠르게 흐르는 강, 며칠 동안에내게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을 생각했다. 그것들 모두가 내가 문득손을 쓰기도 전에 스쳐 지나가 버렸다. 어떤 것은 행복한 기억을, 그리고 어떤 것은 상처를 남기고 순식간에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배가 조금씩 흔들리더니, 강 가운데의 느린 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가만히 손을 들어 유리카의 뺨을 어루만졌다. 내 손보다 더 차가운그 피부, 말로 다할 수 없이 따뜻했던 적도 있었다. 가장 캄캄한 곳에서 떠오르는, 가장 환했던 기억. "……." 환영처럼 흰 드레스를 입고 테라스 앞에서 내게 손짓하고, 미소하던 유리카.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난생 처음 추었던 어설픈 왈츠와, 오직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했던 그 모든 세상. 아직도 쟁쟁한 그 악기의 선율들과 내 손 속의 자그마한 손의 감촉. 흰 꽃, 더없이 예뻤던푸른 밤의 새하얀 꽃, 왕국의 장미. 바로,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기억……. "파비안, 나 네 얼굴이 보여." 유리카가 문득 말한다. 지금은 바로 옆의 뱃전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라 내 얼굴이 보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끄덕끄덕했다. 그녀가 보인다고 했으니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응……." "방금 고개 끄덕였지?" "으응……." 나는 다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가 진짜 눈으로 보든아니든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그녀는 이미 내가 어떤 행동을 할지다 알고 있다. 내 얼굴이 보인다는 말, 그건 네 마음속의 내가 보인다는 말일 거야. "파비안, 울지 마." 울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녀의 한 마디에 눈물이 글썽해지려 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사건 이후로 처음 듣는 가벼운 웃음소리, 그녀가 팔을 조금 움직이더니 내 손을 찾아 쥐었다. 배가 좌우로 가볍게 흔들린다. 저만치 지금보다는 훨씬 밝은 것처럼 보이는 밤의 세상이 조그맣게 뚫린 창으로 보인다. 푸르스름한 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이렇게나 빨라. 모든 것은 이렇게나 빨리 흘러가 버려. 일년쯤, 열 네 아룬드쯤, 금방 이야. 아주 금방 이야. 점점 가까워온다. 불규칙하게 뚫린 동굴의 입구가 빠르게 가까워온다. 손을 내밀면 금방 잡힐 것만 같은 달빛 젖은 푸른 잎새들과 저만치 계속해서 이어지는 강과 강변의 길이 보인다. 나는 동굴의 천장을올려다보았다. 시커먼 천장이 움직여 가고, 다시 움직여 가고, 그것은 어느 순간 까마득한 공간으로 탁 트인, 별 박힌 밤하늘로 변했다. "유리카, 우리 무사히 빠져나왔어." 유리카가 눈빛만으로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이미 알아볼수 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넓은 강으로 떠가는 배, 강기슭을 떠난 후 처음으로 노를 잡았다. 양손으로 쥐고는 힘껏 저었다. 노가 일으키는 하얀 물결이 손으로 만지고 싶을 정도로 시원하게 보인다. 다시, 다시 힘껏 저었다. 물소리, 바람 소리, 유리카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밤공기 사이로 퍼져나갔다. 우리에게 아주 희망이 없지는 않아. 적어도 이렇게 살아 있는걸. 어느 순간에든, 비록 죽음을앞둔 시점이라 하더라도, 당장 스스로 살아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희망이잖아. 반드시, 반드시 아라스탄 호수의 그 현자를 만나고, 그리고 다시건강한 모습이 되어 되돌아올 거야. "초여름의 공기야……." 초여름의 첫 아룬드인 약초, 상처를 받아들이고 고치려는 사람에게약을, 그리고 그 자체 받아들이지 않은 채 억지로 없애려는 사람에게는 독을. 그러나 상처를 위한 새로운 상처, 상처로서 상처를 지울 수는 없어. 하르얀, 너는 왜 네 상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니? 모든 상처에는 그 자신의 약이 있고, 모든 질문에는 반드시 답이있다고 했다. 너와 나 사이에 놓여진 커다란 문제에 대한 해답,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거야. 꼭 찾고야 말겠어. 강은 흐르고, 또 흘러간다. 흔들리고, 뒤집히며, 닿을 수 없는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 은빛 잔물결이 수없이 재잘대며 말하고 있다. 불안한 희망을 품고 떠나는 바로 그 기분을. +=+=+=+=+=+=+=+=+=+=+=+=+=+=+=+=+=+=+=+=+=+=+=+=+=+=+=+=+=+=+=8장 끝입니다. 다음은 9장, 파비안느 아룬드입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3739번 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17 21:18 읽음:251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 작은 달, 또는 마법의 달이라고 불리는 파비안느(Pabianne)가지배하는 아룬드. 작은 달을 볼 수 있는 것은 1년 가운데 파비안느아룬드밖에 없으며 다른 때에는 항상 태양의 뒤에 가려져 있다. 이시기 파비안느는 놀랍게도 엄청난 광채를 발하며 흰 낮에 모습을 드러내며, 점차로 다시 태양의 영향권으로 진입하여 파비안느 아룬드가끝날 무렵이면 태양의 안쪽 그늘로 들어간다. 흔히 작은 달의 여전사라고 불리는 파비안느는 '천공의 소녀', 또는 '시간을 베는 손'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으며 마브릴 족이 종족의 시조로 삼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가장 오래된 어머니'로 알려진 예언자 예니체트리와 함께 전설 속의 여성들 중 가장 오래되었고, 그만큼 많은 음유시나 문학 작품에 등장하며 과거 시대를 연구하는 데 있어 중대한 우의(寓意)와 상징들을 지니고 있다. 파비안느 아룬드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쉽게 흥분하고 거기에 모든것을 바쳐 열렬히 달려드는 것을 의미한다. 검과 활의 기술을 연마하기에는 좋은 때이나 부드러운 마음은 가로막히며, 대화로 해결될 일에도 무기를 들게 되는 때가 또한 이 시기다. 그러나 또한 반어적으로 치료와 안정을 다스리는 에디에르나의 처녀와 나란히 붙어 한 해의 축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1년 중 가장 더운 한여름, 찌는 듯한더위에도 불구하고 습기가 거의 없어 끈적거리지는 않는 날씨로, 이때는 산천의 물이 마르고 호수나 샘도 줄어들어 물을 확보하는 것이여행시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이는 물의 부드러운 성격을 잃어버리고 단호함과 잔인함이 부각되는 메마른 감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제1열정기인 아르나 아룬드에 이어 제2열정기라고도 말하는데 "검끝이 부러지는 것을 관계치 않고 달려들다"는 경구를 가지며 자신의얕은 능력을 지나치게 신뢰함, 자신감이 높은 성취 혹은 지독한 패배를 부름, 자신의 사명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가짐, 타인을 위해 모든것을 희생함, 죽음의 고비를 알지 못하고 지나침, 중대한 잘못을 깨닫지 못함, 어려움을 빠르게 돌파함, 적에게 강력한 피해를 줌과 동시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음, 잘못을 죽음으로 보상함, 온화함을 잃음으로서 중요한 것을 놓침 등을 암시한다. 이 아룬드를 상징하는 빛깔은 불처럼 타오르는 빛깔, 선명한 빨강이다. - 점성술사들이 달력에 적는 각 아룬드의 의미,그 중 여덟 번째. 1. 미망의 나라 (1) "엄마, 저 안개의 바다 너머 어렴풋이 보이는 길쭉한 섬에는 무엇이 있나요? 파도가 치는 밤이면 가끔 고운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나요?" "알려고 하지 말거라, 사랑스런 아가. 그곳에는 네가 알아서 좋을것이 없단다." "그럼, 가끔 좋은 음악 소리와 향기가 나기도 하는 저 담쟁이 돌벽아래 하얀 마을에는 누가 살고 있나요? 거기에도 저같은 아이들이 푸른 두건과 흰 앞치마를 두르고 뛰어 놀고 있나요?" "궁금해하지 말거라, 귀여운 아가. 거기에는 너와 감히 사귈 수 없는 악한 소녀들만이 살고 있단다." "또, 녹색의 장원 너머 여섯 개의 언덕과 이끼 낀 바위들, 맑은 날이면 수천 송이 꽃들이 반짝이는 숲에는 친구가 없나요? 순한 동물이나 아름다운 새들, 나비와 벌레들이 없나요?" "보려고 하지 말거라, 상냥한 아가. 세상엔 모두 언제고 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으려 도사린 사나운 짐승들뿐이란다." 그러나 그녀는 밤낮으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선 긴 머리를 아름답게 틀어 올린 오래된 나무가 다정스레 소녀를 맞았고 검은 철갑옷을입은 기사가 차가운 바닷가를 달렸으며 비밀이 숨겨진 숲에선 헤아릴수 없는 손들이 이야기를 품고 손짓하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는 동안 그녀를 둘러싼 백 개의 비싼 보석들과 열 벌의 화려한 드레스, 계속되는 달콤한 간식으로도 더 이상 성은 그녀의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날이 왔다. - 노르마크 지방 동화<세 개의 탑 이야기> 중에서 바다는 아니야. 분명, 바다는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넓고, 푸를 수 있을까. "지도를 다시 봐." 다시 봤다. 제대로 찾아왔음은 물론이었다. "맞다니까." 달크로즈 성에서 나르디가 준 지도는 전에 갖고 다니던 엉터리 지도와는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정밀하고 작은 것까지 빠짐없이 그려져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몇 번이고 놀랐다. 전과는 다른 이유, 도무지 틀리는 것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말이다. 기껏 둘에 하나의 비율로 맞아 들어가는 지도를 갖고 다니다가 이런 지도를 보니 그렇게 황송스러울 수가 없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간다. 한 곳에 가득찬 물이 만들어내는 여름 속의 가을 같은 공기가 기분 좋게 몸을 감쌌다. 반짝이는 수면에는 지는 해가 만드는 하얀 그림자들이 결따라 흘렀고, 저멀리 아련히 보이는 수평선과 그린 것 같은 숲의 자락은 꿈속에 들어온 듯, 경계를 잃고 일렁였다. 아라스탄 호수, 아라스타니아 숲. "나, 내려줘." 나는 무릎을 굽히고 그녀가 내려올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추었다. 정말, 그녀는 몸이 아픈 뒤로 눈에 띌 정도로 여위어서 발이 바닥에 닿았는데도 도무지 무게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무겁지 않았어?" 전혀, 라고 대답하는 대신 나는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리카는 오랜만에 발 딛은 흙바닥이 마치 신기하게라도 여겨지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새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땅을 밟아 보고 있었다. 어차피 여기에서 말을 둘 곳도 마땅치 않고 해서 마지막으로 들른마을에서 지금까지 타고 온 말을 잠시 맡겼다. 달크로즈 시를 빠져나오자마자 샀던 말이다. 물론 한 필. 유리카에겐 이제 스스로 말을 몰기력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고집을 부려 그녀를 여기까지 업고 왔다. 이제 검집을 몸 앞쪽으로돌려 메는 데에도 꽤나 익숙해져 버렸다. 더운 날씨, 호수에 뛰어들어 수영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어쩐지 그러기에는 바다를 연상케 할 정도로 너무나 넓고 깊고 푸른, 그리고 신성하게까지보이는 호수였다. 아라스탄 호수를 '대륙의 눈동자'라고 부른다더니정말 커다랗게 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마치 수평선을 더듬듯 호수 저 너머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잘 보이지 않는 저 먼 수면 위에는 물안개가 감돌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둘 다 호수로 다가가 적당한 기슭을 찾아서 발을 적시고, 손으로물을 떠서 얼굴과 목덜미를 식혔다. 태양이 서녘으로 가라앉아 가고있는 시간이었지만 파비안느 아룬드는 1년 중 가장 더운 때다. 우리는 잠시동안 나란히 앉아 맨발을 호수에 담근 채 물을 차며 놀았다. 호수의 한쪽은 마치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커다랗게 둥근바위들로 쌓아올려져 있어 앉아 있기에 좋았다. "조금 있으면 그 시간이 될 듯한데." 우리는 때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카가 조그마한 조약돌을하나 집더니 호수 속으로 휙 던졌다. 돌은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몇큐빗 앞에서 떨어져 조그마한 소리를 내며 물 속을 빠져들어 갔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이번에는 좀더 큰 것으로 골라 멀리까지 힘껏 날렸다. 돌이 저만치, 저 멀리까지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잠깐 후에 역시 물 속으로 떨어졌지만 이번엔 풍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너와 나를 합하면 평균치 둘이 생겨나겠구나."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네 몫보다 더, 더, 힘을 내고 있는 거 아냐." +=+=+=+=+=+=+=+=+=+=+=+=+=+=+=+=+=+=+=+=+=+=+=+=+=+=+=+=+=+=+=저... 지금까지의 잡담 모음집을 보내달라고 하는 분이 계신데요.. 저... 그거 완전히 노가다예요;;; 저 역시 잡담은 올리기 직전에쓰기 때문에 제게도 잔뜩 잘라진 파일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걸 다하나씩 클릭해서 잡담만 잘라서 달라고요? (참고로 요 앞에 withinus님께서 올리신 대로 지금 365회. ^^;)에에... 농담이 심하시네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3740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17 21:19 읽음:250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2) 호숫가에 가볍게 앉아 있는 그녀는 풍경 속에서 어느 순간 없었던것처럼 지워져 버릴 듯 그렇게 투명하고 희미해 보였다. 물의 정령인미라티사를 본 일은 없지만, 마치 저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생각이 들었다. 물 속에 빠지면 그대로 녹아버릴 것만 같은, 바람이불면 그대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종이로 만들어진 듯 파리하고연약한 흰 그림자. 나는 문득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왜?"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시선을 내게 향했다. 그 모든 희미함속에서도 오직 선명하게 살아 있는 듯 빛나는 것은 그 초록색 눈동자. 그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 그녀가 아직은 내 곁에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난다. "살아 있나 보려고." 그리고 내 말에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는 그녀. "응, 내가 어느 날 안 돌아보면 죽은 걸로 알아." 해가 호수 너머로 지고 있었다. 밤이 되면 추워질지도 몰라. 불을피워야겠어. 나는 일어섰다. "여기서 놀고 있어. 물 속에 들어가거나 하면 혼난다." "응, 물 속에 들어가면 그대로 미라티사 정령이 되어 버릴 테니까." 내 생각을 그대로 읽은 것처럼 그녀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주위에는 나무도 많았고, 오랫동안 비 한 방울 없이 마른 날씨 덕택에 잘 마른 나뭇가지들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한아름 안고 돌아오니 그녀는 물장난을 그만두고 몸을 숙여 물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 안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건가. 전보다 너무 초췌해진 그 얼굴을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나뭇가지들을 한쪽에 내려놓고 배낭을 뒤져 부시쌈지를 꺼냈다. 부싯돌을 찾아내고 불을 붙이려고 무릎을 꿇고 앉는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야!" 벌떡 일어나 손에 든 것을 내던지고 호숫가로 달려갔다. 조금만 몸을 잘못 가누면 그대로 빠질 것처럼, 상체를 한참이나 호수로 기울여홀린 듯 물 속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몸을 부축해 기슭으로 당기는동안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야, 빠져 죽으려고 그래!" 잃어버릴 뻔한 보석을 어루만지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바짝당겨서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소리를 질렀다. 유리카는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나 수영할 줄 알아." "할 줄 안다고? 네 몸이 지금 수영할 처지야?" "수영하려고 한 거, 아니었다고." "그럼, 정말로 미라티사 정령이라도 되어 볼 생각이었다는 거야!" 고개를 흔들어 간신히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유리카는 벌받는 어린아이처럼 내게 팔을 잡힌 채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소리지른 것이 미안해졌다. "화내서 미안하지만…… 걱정하는 마음도 좀 알아주란 말이야." "응, 알고 있어. 그런데……." 유리카가 그제야 고개를 들더니 손을 들어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영문도 모르고 그 쪽을 같이 바라보았다. "저기 뭐?" "얼굴 같은 것이 보였어." "얼굴이라니?" 나는 속으로 물 속을 들여다보니 얼굴이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하고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얘가 요즘 왜 이렇게 이상해졌지? 그러나 그녀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내 얼굴 말고, 다른 여자 얼굴." 온 몸이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눈을 깜빡거려 보았다. 해가 거의 다 졌다. 온 호수가 석양의 붉은기운으로 가득해졌다. "좀더 자세히 말해봐. 정령을 보았다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그녀가 이상한 것을 보았다는 자리로 다가갔다. "……." 물론 뭔가 보일 리는 없었다. 유리카도 다시 보일 거라고 기대한것 같지는 않았다. "자, 봐. 여기, 바로 여기에서 여자 얼굴이 천천히 떠올라왔어. 긴머리를 가진 여자였는데…… 몸은 물 아래쪽에 있는 것 같았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마치 신성한 법칙이라도 말하듯 침착하게 입을열었다. "사람이 물속에서 살 순 없잖아." "그럼 인어였나?" "그런……." 나는 '말도 안 되는'이라는 말을 꿀꺽 삼켜버리고는 다시 그녀가보았다는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아주 자세히 봤지만, 여느 물과 달라 보이는 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얼굴로착각하게 할 만한 그림자가 비칠 만한 것이 있는지. 그러나 그런 것역시 없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을 결국 꺼냈다. "잘못 본 것 아냐?" 유리카는 화내지도 않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분명히 여자 얼굴이었어. 몸 아래쪽은 보지 않아서 사람이었는지 물고기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살아 있었는걸?" "살아 있다니?" "나를 보고는 뭐라고 말을 하는 것처럼 입을 움직였단 말이야." +=+=+=+=+=+=+=+=+=+=+=+=+=+=+=+=+=+=+=+=+=+=+=+=+=+=+=+=+=+=+=이제 겨울이 오려는 마당에 한여름의 이야기를 쓰려니 좀 그렇네요. ^^;게다가... 이제 세월의 돌은 때지난 납량특집으로 가려는 것인가...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3880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18 22:36 읽음:242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3) "……." 더욱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타락한 영적 존재들 아닐까? 자연물 같은 데 붙어 있다가 사람들을 홀려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궁금한 것이 또 있었다. "야, 그런데 넌 물속에서 갑자기 웬 여자 얼굴이 떠오르는 데 놀라지도 않고 그렇게 멀쩡하게 들여다보고 있냐?" 손을 잡고 불을 피우려던 곳으로 돌아왔다. 내가 부싯깃을 놓고 부싯돌을 쳐서 불을 붙이는 동안, 그녀는 옛날 이야기라도 생각하는 듯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몇 마디씩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라스탄 호수, 미라티사 정령, 저녁 때…… 여자의 얼굴, 긴 머리, 여자의 얼굴……." "야, 그만 해라. 듣고 있으니까 점점 무서워지잖아." 부싯깃에 호르르 불이 붙었다. 미리 쌓아 놓은 가는 나뭇가지로 곧불이 옮겨갔다. 조금씩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주며 불이 커지도록 기다렸다. 이제 사위는 거의 완전히 어둑어둑해졌다. "한밤중까지 기다려야잖아?" "그렇지." 먹을 게 별로 없다. 사 가지고 올 수도 있었지만 취사 도구가 없는바에야 요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또 비스킷과 말린 고기,과일 몇 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여름에 먹기 적당할 정도로 시원한음식이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황송한 팬케이크 두 개가 전부다. 둘은마주보고 앉아 저 불에 팬케이크를 데워 먹을 길이 없을까 궁리했지만, 프라이팬도 석쇠도 없는 상황에 결국 굴복하고는 하나씩 들고서천천히 베물어 씹었다. "엘다렌하고 같이 다닐 땐 좋았는데……." 오랜만에 노숙을 하자니 엘다렌의 커다란 솥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인 모양이다. 유리카가 픽 웃었다. "그래, 그 솥에다가 뜨거운 스튜나 수프를 끓여 먹을 수 있었던 때가 좋았지."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가득한 하늘은 끝없이 검기만 한 호수와는 또 다른 대조를 이뤘다. 천지가 온통 새까만데, 한쪽에 지고 있는 에를라니 별이 보인다. 약과 의사를 수호하는 별 에를라니, 지금은 저 별의 수호가 간절히 필요해. 어디를 가나, 저렇듯 별하늘은 똑같기만 한 걸까. "잘들 있을까?" "……." 대꾸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소원을 바라는 것이 법칙의 장로의 비위를 거스를까 싶어, 나는 감히 그들의 안전을 간절히 빌지 못하고있는 나쁜 친구다. 그래도 내게 남은 행운이 있다면, 그들이 제발 죽지 않고 무사하기만을 바라고 있다. 엘다렌, 나르디, 주아니, 그들과모두 웃는 얼굴로 재회하기를. 분명 수도로 진격하셨을 구원 기사단, 아버지와 그 휘하 기사들은모두 잘 있을까…… 츠칠헨, 키반, 드모나, 카크다나, 루시아니, 딘,시그머……. "……." 아버지 생각을 하니 함께 생각나려고 하는 하르얀의 기억을 지우기위해, 나는 고개를 급히 흔들며 다른 생각들을 떠올리려 했다. 하르얀은 내가 감히 안전을 빌 수 없는 또 다른 사람…… 내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유리카를 중독 시켜 죽음을 기다리는 상태로 만들어버린 그인데도, 그토록이나 증오스럽고,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그인데도, 그를 생각하는 내 감정에는 어떤 다른 묘한 것들이 섞여 있다. 무엇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 없는 이 감정이 자주 나를 아프게 찔러서나는 이 여행을 하는 동안 내내 그에 대한 생각을 하기를 두려워했다. 그래, 내가 바랄 수 있는 거라면…… 죽지 말고 살아남아서 다시얼굴을 보자. 얼굴을 보고서…… 할 수만 있다면 네 뿌리 깊은 오해를 풀어 주고 싶다. 너를 용서하고 안 하고는 그런 다음에 생각하자. 비록 내 손으로 너를 죽이게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때까지는반드시 살아 있어라. "식욕이 별로 없어." "나도…… 그렇네." 호수의 물을 떠다가 마셨다. 그나마 날씨가 더우니 모닥불 가에 오래 앉아 있는 것도 못할 짓이라, 말린 고기를 다시 구워 보겠다느니사과를 고기로 싸서 굽겠다느니 온갖 실현 불가능한 요리들에 대해말로만 지껄이며 대강 식사를 마친 뒤, 호숫가로 다시 다가갔다. 여름은 여름이라 그새 이마에 배어 나온 땀을 다시 씻었다.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호수 변은 새카만 물이 끝없이 채워진 것이 정말 몬스터라도 나올 것처럼 으스스해 보였다. "지금 같아선, 아까 네가 말한 그 여자가 나온다면 난 그냥 기절해버릴 거야." "그럼 내가 파비안을 업고 돌아가야 되겠네." "응, 버리고 가지 말고 꼭 부탁해."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면 그녀의 생명이 얼마 안 남았다는것이 결코 사실이 아닌 것만 같다. 그냥 한때 꾸었던 끔찍한 꿈인양, 달크로즈 시에서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이 그저 잃어버린 전생의기억 한 조각처럼 여겨졌다. "잠깐 잘래?" 그렇게 한다고 좀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만약, 만약에라도 독을 없애기 바로 직전에 독이 발작하여 죽게 된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나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무리를 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돌봤다. 잠들 때마다 보이는, 그런 꿈처럼 되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그런데 정말, 무리하지 않는 것이 독을 늦게 발작하도록 하는 데무슨 도움이 되는 걸까? "그런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닌걸." 유리카는 나와 같은 관점을 갖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런 말을 할 때면 그녀는 마치 자기 일이 아닌 양 몹시도 무표정하다. 아마보통의 여자 아이 같았으면 시한부라는 말에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테지만, 유리카는 죽음의 무녀니까……. "그래도." 나는 고집을 부려 그녀를 모닥불 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펴고 눕게 했다. 아직 때가 되려면 몇 시간이나 남았다. "내가 깨워 줄 테니까." 죽음의 무녀라는 것은, 죽음을 피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조금 후에 그녀가 잠들자 나는 누우면 잠이 들까봐 일어나 주위를좀 거닐었다. 그러면서도 호숫가와 유리카를 번갈아 바라보며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했다. 또, 기다리는 것이 조금 일찍나타날 수도 있고 말이다. "휴……." 졸립지는 않아. 그렇지만 이 상쾌한 밤공기에도 불구하고 이토록가슴속이 답답한 것은 왜일까. 아냐,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지. 여기까지 여행해 오느라 거의 한달 여를 소비했다. 오늘은 파비안느 아룬드 4일. 달크로즈를 떠난 것은 약초 아룬드 9일의 밤. 유리카가 중독된 것은 약초 아룬드 8일. 나우케 시의가 말한 한 달 시한이 거의 다가오고 있었다. 밤새 소리가 아라스타니아 숲에서는 밤새 들려올 모양이다. 아마도나이팅게일인 듯한 그 새는 잠시 후에 또다시 잠깐 동안 울고, 날아서 어디론가 옮겨 앉는 듯하다가 다시 한 번 울었다. 예전엔 말로만듣던 이 호수, 귀족들이 가끔 휴양차 여행을 간다는 아라스탄을 보게될 줄은 정말 몰랐었지만 이렇게 오게 된 지금 그에 대한 기쁨은 조금도 없었다. 여기까지 오게 된 절실한 이유가 계속해서 여행하는 내내 가슴을 짓눌러 왔다. 아직은 저렇게 내 곁에 있지만, 언제 가버릴 지 몰라. +=+=+=+=+=+=+=+=+=+=+=+=+=+=+=+=+=+=+=+=+=+=+=+=+=+=+=+=+=+=+=잘 아는 사람한테 뭔가 부탁하기란 더욱 쉬운 일이 아니군요. 특히, 그게 디자이너일 때는 말입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3881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18 22:37 읽음:234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4) "……." 다가가 그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사이 숨이끊어져 버렸을까봐, 저 모습 그대로 영영 눈을 감아 버렸을까봐 두렵다. 확인할 용기가 내게는 없다. 나는 호숫가로 다가갔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배다. 우리를 싣고 갈 배. 배가 어디서 오느냐고? 배는 바로 저 호수 가운데에서 온다.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냐고? 쳇, 나도 솔직히 그렇게까지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들리지는 않는단 말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말을 믿는 수밖에. 엘다렌이 말하고, 유리카가확인한 그 이야기를 믿는 수밖에. 호숫가로 다가가 고요히 물결치고 있는 수면에 손을 잠깐 갖다댔다. 마치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사실 이렇게 손을 대고 확인해야 할 대상은 이 호수가 아니고 바로 유리카야. 그러나 나는 수면에 손을 대고 물결이 움직여 손바닥을 적시도록멍하니 있었다. 시선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호수 너머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배가 오고 있다고 해도, 보일 리가 없다. 혹시 불을켜고 오나? 설마, 그렇다면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 존재를 몰랐으려고. 더 이상 심장을 조이는 것 같은 그 기분을 참을 수가 없어, 나는호수를 바라보고 입을 열어 고함을 한번 질렀다. "아아아아아!" 다시 한 번. "아아아아아아!" 뭐든 올 테면 빨리 오란 말이다. 이렇게 실망할 지도 모르는, 아니실망할 것만 같은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꼴은 도저히 못 참겠단 말이다. 그래도, 그래도, 이걸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호수가 너무나 넓은 나머지, 정말 거기에 섬이 있는지 없는지는 바다에서 항해 도중 섬을 발견하는 것처럼, 정말 그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확인할 길이 없어 보였다. 도대체 누가 알아냈을까? 아니, 엘다렌과 유리카가 말한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거기까지 들어간 걸까? 사실…… 아무도 없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이지만……. 고개를 돌려보니 잠들어 있는 유리카의 모습이 어슴푸레한 윤곽으로만 보인다. 아직은 아무 일 없어. 그래, 발작이라고 했으니 정말뭔가 심각한 문제가 일어난 다음에야 죽거나 아니거나 무슨 수가 나는 걸 거야. 저번에, 오는 도중 딱 한 번 보았던 것 같은, 그런 발작 말이다. "……." 그 때, 그녀가 죽는 줄만 알고 얼마나 놀랐었는가. 그녀가 정말로죽게 될 때까지는 결코 보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깨어난 그녀를부둥켜안고 한참이나 어린아이처럼 울어 버렸었다. 나우케 시의의 말을 따르자면, 이제 그녀는 한 번 정도 더 발작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는 끝……. 지금, 몇 시나 되었을까.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은 이미 지고 없었고, 에를라니와 미오사니가천구 한가운데,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며 박혀 있다. 연한 분홍빛이나는 에를라니, 그리고 약간 붉은 기가 도는 노란 색으로 빛나는 미오사니. 미오사니는 다음 아룬드인 '환영주(幻影酒)'의 별이다. 과연그 때에도 이렇게 담담하게 저 별을 바라볼 수 있을까. 갑자기, 내 한쪽 귀에 삐그덕, 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 급히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어둠 속에서 물에 빠지지 않도록조심하며 다가갔다. 마치 해변이나 되는 것처럼 작은 모래사장과 가벼운 물결이 드나들고 있는 곳이다. 더듬더듬 발로 더듬다가 안되겠다 싶어 모닥불로 되돌아가 불붙은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들었다. 이번엔 제법 자신 있는 걸음걸이로 소리를 들은 쪽으로 움직여갔다. 삐그덕, 다시 들렸다. 마치…… 노걸이에서 노가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야! "……." 그러나 내 기대와는 관계없이 해변을 모두 비추어 보았지만 배 같은 것은 그림자도 없었다. 나는 망연히 불타고 있는 나뭇가지만 손에든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 것도없어? 그럼 그 소린 뭐였지? 그저 바람 소리였었나? "파비안." 나는 순간적으로 흠칫 놀랐지만, 금방 유리카의 목소리라는 것을알아듣고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 하얗게 서 있는 그녀는 사실 직접눈으로 보아도 유령 같았지만, 어쨌든 그녀의 얼굴을 아는 나로서는얼른 다가가 손을 잡았다. "깼어?" "뭔가 있어?" 나는 실망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유리카의 얼굴에도 어둠이 내렸다. 그렇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다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시간이 덜 됐나봐.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말로 아무도 타지 않은 배가 저절로 호숫가에 와 닿는다는 황당한 이야기에 대한 희망은 점차 엷어져 가고 있었다. "파비안, 옷 타겠다." "아……!" 타고 있는 나뭇가지를 잠시 잊고 있었다. 불똥이 몇 개 타닥이며허공을 날아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한 발짝 물러서 나뭇가지를 호수 속으로 휙 던져 넣었다. 휙-그런데……. "파비안, 저걸 봐!" 말하지 않아도 내 눈에도 보였다. 꺼져가는 나뭇가지가 물에 빠지기 직전, 문득 비추고 사라진 것. 그건, 나무로 된 조그마하고 길쭉한 것, 그것은……. 배였다! 유리카와 나는 흥분해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잘못 보았을지도모른다는, 별로 가능성이 없는 생각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모닥불로되돌아가 타고 있는 나뭇가지를 몇 개나 더 집었다. 다시 호숫가로돌아와 이번엔 방향을 정확히 가늠해서 던졌다. 다시 비추고 지나가는 조그마한 배의 실루엣, 노가 달리고 두 사람 정도가 간신히 탈 듯한……. 다시 하나 더 던졌다. 이번엔 배의 방향이 정확히 보였다. 이쪽으로 뱃머리가 향해져 있었다. 하나 더 던지자 어느 정도 거리로 떨어져 있는지 정확히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기다려." 호수가 얼마나 깊을 지는 전혀 모른다. 배가 저렇게 해변가로 오는게 아니라 애매한 데 떠 있을 줄 알았으면 낮에 돌을 몇 개 더 던져서라도 깊이를 좀 알아두는 건데.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없지. 아니,이젠 그런 것쯤은 중요하지 않아. 낮에는 분명히 없었던 저 배, 배가 나타났잖아! 온 몸에 기쁨이 차올라 다른 것은 더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웃옷을 벗어 모래사장에 내던지고 검을 풀어 내려놓았다. 다리를 걷고,물에 뛰어들기 위해 가볍게 몸을 풀었다. 유리카는 그런 나를 가만히지켜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기분 좋아?" "그걸 말이라고 하니!" 유리카는 약간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제는다시 보이지 않는 배가 있던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면서 다시 한 번고개를 움직였다. "왜, 뭔가 이상하니?" +=+=+=+=+=+=+=+=+=+=+=+=+=+=+=+=+=+=+=+=+=+=+=+=+=+=+=+=+=+=+=천리안의 파비안 님... '알려고 하지 말거라, 사랑스런 아가. 알면 다친다..' 라고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3882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18 22:37 읽음:233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5) 바로 물에 들어가려다 말고 내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닌데…… 아까 봤던 그 여자 얼굴이 생각나서 말이지……." "야, 지금 물에 들어가려는 상황에 그런 섬뜩한 얘기는 안 꺼내는게 도와주는 거란 말이야!" 그런 이야기를 듣는대서 물에 들어가는 것을 중지할 내가 아니다. 아침이면 없어져 버릴 테고, 혹시라도 다음 날은 나타나지 않을 수도있잖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안 올 수도 있잖아? 금일휴업이라든가, 휴가 갔다거나, 뭐 그런 것도 있단 말이야, 난 다 알고 있어! 지금 저기 배가 있는 저 순간, 지금을 놓치면 나중에 죽도록 후회하게 될 거라고!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나는 유리카를 안심시키기 위해 기운차게 외친 뒤 그녀의 손을 한번 꽉 잡아 주고는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금방 물이 무릎까지찼다. 물이 허리까지 오자 돌아보고 모닥불이 보이는 쪽을 보며 방향을 잘 가늠해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여름이었지만 아무래도 밤이라선지 몸에 와 닿는 물이 몹시 차다. 머릿속으로 셌다. 하나, 둘,셋, 넷, 다섯, 여섯, 이 정도면…… 여기쯤이었지? 쿵! 갑자기 머리에 뭔가 부딪쳐 오는 바람에 허겁지겁 자세를 바로하고는 손을 내밀어 눈앞에 있는 것을 움켜잡았다. 손에 닿는 것은 단단한 나무로 된 뱃전, 드디어 잡았어! 몸을 더 움직여 반 바퀴 돌아 배의 반대쪽으로 다가갔다. 대강 크기는 정말 두 사람 정도 탈 수 있어 보인다. 반대쪽에 도착했다고 생각하자 배를 호숫가 쪽으로 밀면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서서히 밀려간다. 호수에는 강처럼 흐름 같은 것이 없어서 좋았다. 저만치 유리카가 내가 호수 변을 찾지 못할까봐서 램프를 켜서 들고 있는 것이보인다. 이제 조금만, 다 왔어. "파비안!" 그래, 가서 대답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물이 찰랑이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은 환각이 든다. 음, 이정도면 발이 바닥에 닿을 때가 되었는데…… 아직인가? 문득, 나는 더 이상 배가 밀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이러지? 뱃전을 잡고 불쑥 몸을 위로 내밀었다. 그럭저럭 고향의 녹색 호수에서 헤엄치고 놀던 경험이 이 정도 움직임을 가능하게 했다. 고개를들어보니 유리카가 들고 있는 램프가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소리쳐 불렀다. "유리카!" "파비안, 왜 그래!" "이거, 배가 더 움직이지 않는데?" "배가 안 움직여?" 일단 다시 흘러가 버릴까봐 걱정은 되었지만 배를 잠시 내버려두고호수 변으로 다시 헤엄쳐 나왔다. 어라, 두 번만에 나오네? 바닥에 발이 닿았다. "이, 이상하네, 배가 저기에서 딱 멈춰 있어. 내 목소리는 갑자기 물에서 나와 생긴 오한으로 약간 떨렸다. 유리카가 신발을 벗고 몇 걸음 다가오더니 내게 램프를 내밀었다. 램프를들고 허리가 잠기는 곳 정도까지 다시 가서 앞쪽을 비췄다. 배는 멀쩡히 거기에 있었다. 이것 참, 기슭에 닿기를 거부하는 밴가? 다시 돌아와 유리카에게 램프를 건넸다. 그리고 말했다. "아무래도 저기까지는 가야 배를 탈 수 있을 것 같다. 내 등에 업힐래?" "잠깐만." 램프빛에 비친 유리카의 얼굴은 잠깐 생각에 잠긴 그것에 되어 있었다. 일단 가서 모닥불 가에 놓아 둔 짐들을 챙기고 숲으로 번지는불상사 같은 것은 없도록 불을 껐다. 그런 다음 다시 호수 변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유리카는 생각하던 것에 뭔가 해답을 얻은 모양이었다. "음…… 정말, 저기까지 가야 배를 탈수가 있겠구나." 뭐야, 실컷 생각했다는 게 아까 내가 얻은 결론이랑 똑같은 거냐? 나는 램프를 높이 들고 배낭을 바짝 올려 묶었다. 일단 짐부터 갖다 놓을 생각으로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유리카가 다시중얼거리듯 말하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스노이 녀석 , 아직도 마법을 쓰는 건가?" 그게 누군데 그래? 어쨌든간 램프를 가져가느라 머리까지 물에 잠기는 고생을 하긴 했지만 안전하게 짐을 갖다둘 수 있어서 다시 돌아왔고, 이번에는 유리카를 쳐다보면서 어떻게 하면 가장 젖지 않고 저 배까지 갈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겼다. 내가 너무 열심히 쳐다보고 있으니까 유리카가 어둠 속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주위에 있는 불빛이라고는 저배 위에 얹어 놓은 램프뿐, 그녀의 얼굴조차 똑바로 보이지 않았다. 문득 드는 묘한 생각을 지워버리려 애써 하던 생각에 집중했다. 업어도 발이 안 닿는 데가 있으니 결국은 다 젖을 테고, 목마를 태워? 램프처럼 손만 물위로 나오면 되는 문제도 아니고, 그것 참 골치아프구나. 지금 내 손에 남은 것은 멋쟁이 검뿐이다. 뭐야, 이걸로 나무라도베어 볼까? 부교를 만들어? 하룻밤 새겠네, 아주. 유리카가 입을 열어 말했다. "나 좀 젖는다고 무슨 일 안나." "안돼. 지금은 밤이고 공기가 차기 때문에 감기에 걸릴 거야……에취!" 말끝에 기침이 따라 나오는 바람에 했던 말이 아주 신빙성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 유리카가 키득키득 웃는 동안 검을 손에 잡은 채 이리 저리 발을 움직여 보며 좋은 생각을 떠올려보려 애썼다. 저기 보이는 저 램프, 저기까지만 가면 되는데, 쳇. 정말 가서 나무라도 베어 올까 보다. 발치에 와 닿는 찰랑이는 호수의 물결, 발끝으로 차면서 그 소리를들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도록 새카맣지만, 그래도 물이 어디에서어디까지 펼쳐져 있는지 대강 감이 온다. 낮에 보았던 저기쯤이 숲이있는 곳이고, 저쪽이 수평선이 보이던 곳. 그리고 램프가 있는 방향으로 죽 늘여서…… 어라? 나는 내 발을 내려다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검 끝에서 살짝 빛이 떠오르는 듯하다가 사라졌다. 다시 검을 움직이는데 또 빛이 난다. 끝에서만, 또다시 가볍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마치 검 끝만 불에 달구어 놓은 것처럼, 그렇게 보이는 빛이다. 유리카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도 발은 이미 젖어 있었다. "좀더 들어가서 물 속에 검을 넣어봐."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검은 물 속으로 쑥 들어갔다. 한 걸음 더 들어갔다. 검이 반쯤 물에 잠기는 순간, 갑자기 그어렴풋한 빛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물에 잠긴 부분 모두에서!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마치, 11월 같은 날씨입니다.... 그러나저러나 때지난 납량특집 세월의 돌은 여전히... (퍽~)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3883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18 22:38 읽음:235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6) 이 검의 속성이 불과 공기라고 들은 일은 있지만, 그렇다고 물을거부한다고는 생각한 일이 없는데? 더구나 여행하는 동안 이 검이 물에 젖을 일이 지금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비도 맞았고, 바다 한가운데 폭풍우도 만났었잖아? 그것 참, 그것 참. "파비안, 좀더 들어가 봐." 유리카는 마치 뭔가 알겠다는 듯한 말투가 되어 있었다. 시키는 대로 더 들어갔다. 광채가 한층 강해졌다. 좀 더, 좀 더, 그리고 그 다음에는……. 무, 물이……. "유리카! 이, 이리로 와서 봐!" 그녀가 물을 찰박이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 이제는 검에서 나는 빛으로 그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그녀가 다가왔을 즈음 더 당황스런 현상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점차 광채를 더하던 검이 이제는 순간적으로 표면에 닿는 물을 주위로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검을 더 깊은 곳으로 가져가기 시작할수록, 우리 앞에는 물이 갈라지면서 수로가 생겨나고 있었다. "……." 그야말로 새로 발견된 이 검의 황당한 기능에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니, 이런 실력이 있었으면서 어째서 지금까지는 알려 주지 않은 거냐고! 장난치자는 거야, 뭐야! 이…… 이렇게 당황스러운……. "파비안, 이거 갖고 잘하면 저 배까지 갈 수도 있겠는데?" 유리카가 내내 중얼거리던 이상한 이야기들에서 벗어나 드디어 실용적인 생각을 해냈다. 잘 됐다. 원인이야 어쨌든, 일단 이용하고 봐야겠단 말야. 나는 바닥에 앉아서 유리카더러 목마를 타라고 했다. "목마를 타라고?" 그녀는 좀, 아니 많이 주저하는 기색이었지만, 내 마음을 모르는것은 아니다. 단지 1분이 모자라서, 마지막 기회를 잃고 죽을 수도있는 일인데, 절대로 조금이라도 건강에 손상이 갈 지 모르는 일은안 시킬 테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 …… 너도 반대의 경우였다면, 역시 나처럼 했을 거잖아. 그녀가 가만히 다가와 내 어깨에 몸을 싣는다. 그래, 너라도 내가이렇듯 생명이 위험하다면 무슨 일이라도 했을 거잖아. 손을 올려 내밀어진 그 손을 잡았다. 전보다 훨씬 가벼워져버린 그손목을 잡았다. 그녀가 같이 내 손을 쥐는 것이 느껴졌다. 됐다. 나는 한 손에 검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자락을 잡아 올려." "응." 머리 위에서 대답이 들려오니 좀 기분이 이상하군. 나는 물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찰랑, 찰랑. 일단은 그냥 걸어 들어갔다. 유리카의 발이 물에 닿을 즈음이 되어멋쟁이 검을 가로로 들어 수면 높이 바로 아래에 갖다 대었다. 와…… 정말로 물이 케이크처럼 한 층 잘라지잖아! "세상에 이렇게 신기한 일이 많을 수가." 나는 계속 걸어 들어갔고, 이윽고 그녀가 배 위에 내려앉도록 한뒤, 나도 배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배가 워낙 작은 것이라 조금만힘을 주어도 앞뒤로 뒤뚱거리며 뒤흔들렸다. "이러다가 다 가기도 전에 뒤집어지겠다." 노를 잡았다. 도대체 얼마 만에 사람의 손에 잡은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노를 들어올려 보니, 물이 닿는 부분에는 모조리 녹색 이끼가가득히 끼어 있었다. 뱃전 아래쪽도 마찬가지였다. 노걸이, 그리고배가 조종하는 사람 없이 움직여 다니는 동안 물이 가끔 들어왔을 배안쪽에도 이끼가 낀 곳이 있어 미끈거렸다. "마치 고대의 유물 위에 올라앉은 것 같잖아?"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는 물이 새는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노를 젓는데 이끼들 때문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보통 오래 내버려둔 배라면 엄청나게 삐걱거렸을 텐데, 더 오래 내버려두면 이런 결과가 오는군. 유리카가 램프를 들어 배가 가는 앞쪽을 비췄다. 방향을 보는 것은그녀였다. "일단 죽 저어가자. 호수 안쪽까지 깊이 들어가 기슭에서 우리를볼 수 없게 될쯤이나 되어야 아마 날이 샐 거야." 그거, 꽤 끔찍한 말인데. 노가 물을 가르는 찰랑이는 소리, 가끔씩 삐걱이며 자신의 오랜 나이를 호소하는 배 안의 어느 구석구석, 바람이 보이지 않는 숲을 훑고 지나가는 소리, 수면을 얇게 쓰다듬는, 점차로 가득히 내리는 물안개. 빛 하나로 캄캄한 호수 위를 단둘이 떠가는 기분. 끝없는 세상에 단 둘 뿐인 듯한 기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세상은 어느 너머로사라져 버렸을까. 뺨과 옷이 안개로 젖어들기 시작한다. "얼마나 왔을까." 알 수 없는 말이다. 아무 것도, 오직 천지간에 보이는 것이라고는배 안에 실린 램프불과 하늘에 가득히 박힌 별들뿐이다. 그렇게 작은별빛들로 가득한 호수를 우리는 지나고 있다. "저기, 연금술사의 별 이스나니가 뜨고 있어." 나는 고개를 들어 유리카가 가리킨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천구가운데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는 황금의 이스나니. 연금술을 만들어낸 이스나에-드라니아라스들 때문에 '이스나에의 별'이라는 이름을갖게 된 별, 이스나니. 한여름인 지금 가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저별이 하늘에 떴다는 것은 이미 시간이 깊은 밤에 들어섰다는 이야기다. 각 계절과 아룬드의 별들은 하룻밤 동안 마치 1년의 주기를 보여주듯 그렇게 한 바퀴씩 돈다. 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밤을 새우고 있으면 각 계절의 별들을 웬만큼은 다 볼 수가 있다. "황금 아룬드에 우리는 과연 무얼 하고 있을까." 황금 아룬드는 이스나니가 지배하는 가을의 가장 끝 아룬드이다. 그 다음 아룬드는 노장로, 겨울의 문턱. 그 때엔 유리카의 몸도 다낫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무사하게 만나, 모두 함께 즐겁게 겨울을준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엘다렌과 나르디, 주아니, 그리고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 잔-이슬로즈 공주도 그 때엔 자기 나라로 돌아가있겠지. 그렇게 한 해의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다면 좋을 텐데. "파비안, 그때 나 꿈을 꾸었었어." "언제?" 한참을 가만히 있던 유리카가 문득 입을 열어 한 말에 나는 시선을하늘에서 거두어 그녀의 얼굴로 가져갔다. "그…… 푸른 굴조개호에서 정신을 잃고, 바르제 가 저택에서 눈을뜰 때까지 말야." "그걸 기억해?" +=+=+=+=+=+=+=+=+=+=+=+=+=+=+=+=+=+=+=+=+=+=+=+=+=+=+=+=+=+=+=......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3884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18 22:39 읽음:246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7) "응." 그녀와 나 사이, 바닥에 내려놓은 램프빛으로 얼굴 아래쪽만 환한유리카의 얼굴은 문득, 오랜 옛날을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참으로오랜만에, 그 눈동자는 다시 내가 닿을 수 없는 먼 곳을 헤매이는 듯한 눈빛을 띤다. 그럴 때마다 언젠가, 어디론가 가버릴 것만 같아, 내 마음이 얼마나 우울해지는지. "내 몸이 잠들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몸과 정신이 유리되어허공에 떠다니는 느낌, 내 몸은 저 아래에 있었고 나는 어딘지 모를곳을 헤매고 있었어." 나는 깜짝 놀라 말을 뱉었다. "영혼이 빠져나왔었단 말야?" "글쎄……." 그녀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들어 호수의 물을 만졌다. 그리고 그 젖은 손으로 다시 머리카락을 쓸어 뒤로 넘긴다. 물 한 방울이 램프 쪽으로 떨어져 유리갓에 맺혔다. 잠시만에 증발하여 날아가 버리는 그것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저렇게 짧은 인생인 걸까. "응, 그러니까 마치 에제키엘의 봉인으로 잠들어 있던 그 때하고비슷했다고 할 수 있을 거야." 유리카가 다시 말을 시작하고 있었다. "봉인되어 있을 때에 대한 기억이 있어?" "응, 그 긴 세월에 비하면 조금이지만……." 2백년의 기억이 모두 있다면, 그거야말로 불합리한 거야. 한 사람에게 그렇게 많은 기억을 강요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어. 심지어세월의 힘이라 하더라도 결코 그럴 순 없어.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어 있으니까…… 괴로운 기억은 잊고, 넘치는 기억은 지우고…… 그렇게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끔 몸은맞추어지는 거야. "참 이상하지?" "뭐가?" 유리카의 은빛 머리에 맺힌 물방울들이 작은 구슬 장식들처럼 빛나고 있다. 별들이 거기에 내려 있다. "꿈에서 본 너…… 손이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었어." "내가?" 네가…… 오히려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단 말이야. "으응…… 몇 번이고 불렀는데 대답하지 않았어. 아니, 그리고 그다음 순간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어. 바로 옆에, 바로 닿을 듯이…그런데 닿을 수가 없었어. 뭔지 모를, 마치 유리벽 같은 것을 가로막혀… 갈 수가 없었어. 그렇게 가만히 서로 바라보고만 있었어." 호수 위에는 한 가닥씩 가위질하여 날려보낸 것처럼 이음매가 매끈한 바람이 불어온다. 한 가닥, 유리카의 머리카락을 호수 위로 불어가게 하고, 또 한 가닥, 내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뺨을 스친다. "유리벽…… 잠시 후에 나는, 그게 내가 갇혀 있는 유리벽이라는사실을 알았어. 사방을 막고 있었고,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유리로 된 방." "갇혀 있었다고?" "응……." 차그락, 철썩, 찰랑……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배. 저 너머는 혹시 경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이 아닐까? "그래서, 빠져나왔니?" "아니……."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문득 지금도 그녀와 내 사이에 유리로 된 벽이 가로놓여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 있는데, 닿을 수 없다라. 나는 잠깐 노를 놓고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곧, 그녀의손에 내 손에 쥐어진다. 이렇게 닿을 수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나란히 앉아 서로를 보고,만질 수가 있는데. "아마, 나는 거기에 오래 갇혀 있어야만 하는 듯했어. 그렇지만나, 계속 너를 바라볼 수는 있었어. 비록 손은 닿지 않지만…… 너는내 곁을 떠나지 않았고, 내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어. 몇 번이고 유리벽을 만지면서…… 그렇게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있었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글쎄…… 잘 기억나지 않는걸." "아까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했잖아." "아…… 그건 그냥 느낌일 뿐이야. 또는 내가 그보다 더 뒤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한 건지도 모르고." 나는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떻게 깨어났는데?" "음……." 그녀의 머리카락이 이번엔 앞으로 날려와 내 손에 닿을 듯 가까운곳까지 수십 개의 곡선과 물결을 그린다. 깨어질 듯한 곡선. "아주 긴 시간이 지난 듯했는데…… 아아, 잘 기억나지 않아. 긴시간, 긴 세월이 흐르고…… 인내심 깊게 기다렸던 많은 시간들……그리고 내가 잘 기억할 수 없는 어떤 순간, 나는 문득 눈을 뜨고 내게 낯선 것들을 보고 있었어.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사실 다 사라졌어야만 할 것들이 이상하게 그대로 남아 있는 기분이었어. 또는 내게당연해야 할 것들은 사라져 버린 듯한, 마치…… 봉인에서 깨어나던그 순간과도 비슷했지……." "……." 고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적막. 그 속에서는 아무 것도 잡을 수가 없다. 소리지르고, 몸부림치고,부수고 집어던져도, 마치 캄캄한 물 속에 갇힌 것처럼 어떤 변화도가져올 수가 없다. 가장 무력한 자신, 그 무엇도 해낼 수 없는 자신……. 왜 이렇게 모든 일은, 손쓸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는 느낌일까. "파비안…… 내 손을 잡아 줄래?" 나는 노를 놓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두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 그리고 우리 둘은 손을 꽉 맞잡았다. 호수 위를 바람이 다시 한 번 천천히 스치고 지나갔다. 기다란 깃을 가진 새의 날개, 아니면 긴 털을 가진 거대한 빗자루처럼. 내 입에서, 조금씩 말이 흘러나왔다. 이해할 수 없는 온갖 단어들이 제멋대로 흐르고 밀려들었다.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되기까지는 상당히 오래 걸렸다. "유리카, 따라갈 거야…… 아무 데로라도, 너를 못 잡게 된다면…… 따라가…… 따라가서 되찾을 때까지…… 가지 말라고 말하지못한다면…… 그렇지만, 그렇게 꼭 가야만 하는 거야?" +=+=+=+=+=+=+=+=+=+=+=+=+=+=+=+=+=+=+=+=+=+=+=+=+=+=+=+=+=+=+=.....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3960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19 20:33 읽음:241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8) "가지 않아." 유리카가 진지한 눈동자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을 앞으로 약간 숙이고, 가까이에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가지 않아. 내 의지를 떠나 유리벽 속에 갇혀 있게 된다 해도, 반드시 네 곁에 있어. 꼭, 네 곁에 있겠어. 아무 데도 가지 않아. 한마디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해도, 손끝 하나 닿지 못하게 된다 해도,나는 네가 있는 그 곳에 반드시 있어."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약속을 한다. 왜…… 우리는 이렇듯 많은 약속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왜 모든 것이 이렇게 깨어질 듯 불안한 것일까. 캄캄한 호수 위를 떠가는, 의지할 데 없는 작은 배처럼, 그렇게 모든 맹세의 말은 기억을 스치고 바람에 날려간다. 나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되풀이했다. "…… 반드시 있어." "그래, 반드시 있어." 약속이 없어도…… 반드시 그곳에 있어. 우리는 손을 놓았다. "미래의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 단지 준비만이 있을 뿐이지." 그녀는 오랜만에 밝게 웃었다. 나는 노를 잡고 다시 젓기 시작했다. 그런데, 노를 두 번 제대로 젓기도 전에, 갑자기 턱, 하고 소리가나더니 노에 뭔가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나는 다시 노를 움직여 저으려 했다. 그러나 여전히 노는 걸려 움직이지 않았다. 노를 힘껏 안쪽으로 집어 당기려 했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거, 왜 이러지?" 손을 놓고 한쪽 노만 잡아서 있는 힘껏 잡아챘다. 덜컥, 뭔가 다시소리가 나더니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역시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위아래로조차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까딱도 하지 않았다. "이, 이거…… 마치 뭔가에 꽉 잡혀 있는 것 같아." "그럴 리가." 유리카가 고개를 흔들며 램프를 들어 오른쪽 뱃전을 비추었다. 유리카는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언제 넣어 두었는지 돌멩이를 하나 꺼내어 물 속으로 빠뜨렸다. 퐁당, 그것이 끝이었다. 돌이 떨어지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해, 지금 바닥이 얕아진 것은 확실히 아닌 것 같아." "그렇지만…… 이렇게…… 커다란 집게에 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않는…… 걸." 나는 다시 애써 노를 잡아당기고, 밀고, 누르고 온갖 방법으로 힘을 써보며 말을 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나는 배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쩌려고? 잘못하면 배가 뒤집힐지도 몰라." "겨우 셔벗 강을 건너면서 불안해서 떨던 때의 내가 아니라고. 긴강을 따라도 가고, 바다 항해도 했는걸." 나는 일부러 웃어 보이면서 발을 양쪽으로 단단히 딛고 일어섰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그 순간 느껴졌다. 왜, 배가 전혀 흔들리지 않지? "유리카, 배, 뱃전을 잡고 흔들어 봐." 흥분한 나머지 말이 떨려 나왔다. 유리카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넘어져." "그게 아냐. 배가 안 움직여." 그제야 그녀가 뱃전을 잡고 흔들어 본다. 몸을 앞뒤로 움직여도 본다. 그러나 배는 정말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호수 가운데 멈춰 버렸다. "뭐, 뭐지……." 갑자기 온 몸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램프를 빼앗듯 쥐고 선 채로 주위를 이리저리 비추어 보았다. 어디에도 검은 물 뿐,주위에는 육지도, 바위 한 개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일어서서 이렇게 움직이는 데도 배는 땅 위에 얹어 놓은 것처럼, 얼음 위에 붙은것처럼 정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럴 수가 있을까?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누구 얼굴이 더 질려 있을까? 내 쪽이었다. "파비안, 마음 다잡아." 유리카는 갑자기 일어나더니 배 한가운데에 섰다. 그러더니 내게손짓해서 자기와 등을 대고 서라고 했다. "왜……."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무슨 생각인 걸까. 내 등에 닿은 그녀의몸이 가쁜 숨으로 심하게 요동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은 거야?" "그것보다, 앞으로 괜찮아야지." 돌아본 그녀는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뭔가 받으려는, 아니주려는 것처럼, 그렇게 어둠 속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검을 바닥에 세운 채 꽉 잡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감, 길지 않은 여행 동안 나 역시 어떤 예지 같은것이 생겨난 모양이다. 위기가 다가왔다는 사실이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껴진다. "쉿……." 숨을 고르게 가라앉혔다. 서로의 숨소리 외엔 바람 소리 하나 없었다. 그런데, 한참 기다리고 있으니 어디선가 미세한 울림, 또는 떨림같은 것이 들려왔다. 유리카가 등뒤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파비안, 정신 똑바로 차려. 사람을 홀리는 악령인 듯해." "홀리면…… 어떻게 되는데?" "한 가지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 악령의 노예들 기억나? 그들이 바로 생명을 잃고도 잠들거나 이스나에가 되지 못하고, 저런 악령에 사로잡혀 생명의 수레바퀴를 뛰어나온 자들이야." 그 말을 들으니 전신에 한기가 돌았다. 악령의 노예들? 절벽 위에서 무수히 베어 던졌던 그 인과의 법칙을 벗어난 백열의 시체, 죽지않는 생명들? 그렇게 된단 말야? 유리카가 다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꼭,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야……." 유리카는 갑자기 말꼬리를 끌다가 말을 뚝 그쳤다. 그리고, 다음순간 나 역시 그녀가 말을 멈춘 이유를 깨달았다.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려서는 김치에 넣는 굴이 그렇게나 싫었는데, 지금은 굉장히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금방 담가서 먹는 김치일 때 굴을 넣으면맛있지요.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요? 오랜만에 김치쌈을 먹었거든요)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3961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19 20:33 읽음:231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9) "……." 들린다.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노랫소리였다. 아아아아아…… 아아…… 아아아…… 오오…… 오오오오……흐느끼는 듯한, 길게 끌리는 소리. 노래 같기도 하고, 울음소리 같기도 한 기묘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저 까마득한 먼 곳, 유리카가 서 있는 방향에서 들리는 그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높고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아, 하아, 하아……." 갑자기 숨이 가빠진다. 유리카가 가만히 왼손을 내리더니 내 오른손을 꽉 잡았다. 잡고 있는데도 손이 덜덜 떨린다. 두려움이나, 그런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온 몸에 이는 전율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까지 부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환한 빛 한 덩어리가 불쑥 생겨났다. 유리카의 손바닥 위에서 떨리고 있는 그 덩어리는 푸른 굴조개호의 뱃전에서 그녀가 보여주었던 그 마법의 빛덩어리와도 흡사했다. 그녀는 그때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빛을 호수 위로 날려보냈다. 팟! 허공을 뚫고 똑바로 날아가던 빛덩어리는 갑자기 배에서 약 20큐빗가량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뭔가에 삼켜진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유리카가 나지막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악령. 집착과 저주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 "무슨 말이야?" 그녀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이 호수는 너무 넓어서 세상의 변화가 별로 닿지 않았구나." 무엇인지 몰라도, 위험한 것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아. 그러는 동안에도 그 떨리는 목소리, 그 노랫소리는 점차 커지고 있었다. [라나이 이르 리마 하쉬나이 프라바예로 딜카…… 렐리시 렐키시,루아타체로 휘르홀네이…….]도무지 모를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게 끄는 울음 같은 소리가 뭔가 발음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도 오히려 섬뜩하게 다가왔다. 가까이 왔다는 것인가? "무슨 뜻이야?" 유리카는 침착한 목소리로 해석해 주었다. "들리는 것을 믿지 말고 발자국 소리에 미혹되지 말라. 흩어진 장난감을 되풀이해 쌓으니……. 고대 이스나미르 어 중에서도 북부 방언에 속하는 말이야." 실제로 그 발음은 내가 들은 일 있는 노르마크 어의 어감을 떠오르게 했다. 목소리는 점차로 분명해졌다. […… 데를론 다 렐키라 렐키라 브웨나틸 파스키티 리엘라이데 이데…….] "쌓아도 쌓아도 무너지는 궁전에 여인의 마음은 찢어진다." […… 다님사 알르그로엘 에 히키, 나린데 프라브로 엠넨, 에름나이 아뉘세스고 뎀덴 안데로그 휠…….] "혼례의 의복은 바래고, 베일은 짓밟히고 더럽혀져, 눈물이 호수를이루도록 끝나지 않는 부르짖음이여." 푸르스름한 안개만이 감도는 적막한 호수 위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번갈아 싸늘한 메아리를 뿌렸다. 더구나 그 내용 자체가 으스스하기이를 데가 없었다. 유리카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다지 옛날 사람은 아닌 듯한걸. 저 발음은 실제 고대 이스나미르 어가 아니라 이후 보통 사람의 발음에 맞춰 변형된 거야. 사실이라면, 아마 살아 생전 대단히 옛날 책을 좋아했거나, 또는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겠지." 하긴, 예전에 헤렐이나 유리카가 가끔 하던 말과는 달리 저건 알아들을 수 있는 발음이긴 하다. 예전에 나르디가 파하잔을 내려다보며말했던 '나스 라울 파랄다크', 즉 '땅 밑의 자랑'처럼. 어쨌든, 잘난 체를 했든, 옛날 책을 좋아했든, 지금 문제는 저 쪽이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잠깐 동안 노랫소리가 멈췄다. 유리카는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자기 쪽에서 어둠 속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 ** ** *** **, *** ** ** ***! ****, **** ** **********?" 와, 이거야말로 진짜 고대 이스나미르 어였다! 나는 급히 물었다. "뭐라고 한 거야?" "엔제라드리안 외르 프레 멜헬디 엘디, 게이르 누렘 가인 그리드! 타츠이르, 델로키츠 파이 주르다이에벨 토카이에? 호수 가운데 잊혀진 여인이여,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떤가, 내 말을 알아듣는다면 대답해 보겠는가?" "……." 나만 침묵한 것이 아니었다. 악령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라, 정말알아듣지 못한 건가? ……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한참만에 저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카미사, 다비헤 아룬드 에름…….] "그렇겠지. 그렇지만 끝은 다시 시작이야." 유리카는 이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대꾸하고 있었다. 내 생각으로도 저 상대는 분명 우리말을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 아니라면 살아 생전 무슨 말을 하고 살았겠어? 뭔가 다시 말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파바바밧! 갑자기 저쪽에서 하얀 불길이 커다랗게 일어났다.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가 다시 여기가 호수 가운데 배 위라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멈춰 섰다. 그리고, 유리카와 나는 그 흰 불길이 마치 들판에 번지는 불길처럼 호수 위를 달려 순식간에 우리가 서 있는 곳을한바퀴 휘감아 버리는 것을 보았다. 찬란한 빛의 고리가 생겨났다. "뭐, 뭐지?" 유리카는 여전히 침착하게 대답했다. "영의 불꽃, 흔히들 귀신불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저렇게 큰데?" "큰 귀신인가 보지." +=+=+=+=+=+=+=+=+=+=+=+=+=+=+=+=+=+=+=+=+=+=+=+=+=+=+=+=+=+=+=제게도 나름의 언어 설정은 있었답니다. 결코 귀찮아서 ****... 따위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어요..^^;;참, 제 지명들이 모두 고대 이스나미르 어로 된 것은 아닙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3962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10)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19 20:33 읽음:232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10) 말이 되나? 귀신인지 악령인지, 어쨌든 더 이상 우리와 대화하는 것은 즐겁지않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긴 우리라기보다는 유리카 얘기겠지만,하여간 나도 통역을 들어야만 하는 상황이 달갑지는 않았었으니까. 그렇지만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하얀 불꽃의 띠는 진짜 불처럼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자꾸 저 불꽃의 띠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지?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다시 보았다. 알 듯 말 듯 , 그러나 불꽃은점차로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천천히 조여오고 있었다. "파비안, 뒤에서 나를 꽉 껴안아 줘.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유리카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렇지만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저잡을 수 없는 악령을 상대로 무엇을 하려는 거지? 네 체력으로 버틸수 있는 일인 거야?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결코 넘어지는 일 없도록 단단히 잡았다. "응…… 됐어." 그 때, 나는 아까까지는 듣지 못하고 있던 이상한 음을 들었다. 차례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고 있는 소리, 가느다란 현을 퉁기는 듯한소리였다. 천천히, 다시 높아졌다가 이윽고 사라졌다. 기다리자니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흐느끼는 듯한 하프 소리다. 점차 한 층 한 층 화음을더해 가는 음악 소리다. "파비안, 귀 기울이지 마. 듣지 마." 그렇지만 들렸다. 처음 캄캄한 한밤중 호수 한가운데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으스스하다고 느꼈던 나는 어느새 온 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듯한 느낌을받았다. 한 차례 음이 연주되고 나자, 다시 처음의 멜로디를 처음부터 연주한다. 짧은 주기로 이상하게 빙글빙글 돌며 되풀이되고 있는그 음을 듣고 있자니 모든 것은 그저 되풀이되고, 되돌아가는 것이고, 그 어떤 행동도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시, 다시 한번, 끝났으니 다시 또 연주하겠지……. "파비안!" 유리카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래,여기는 호수 위였어. 우리는 배를 타고 있었었지. 그런데 왜 이렇게지금 멈추어 서 있는 거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었지……? 갑자기 내 팔을 잡아채는 것이 있었다. "파비안, 듣지 말라고 했잖아!" 유리카가 풀어지려고 하는 내 양팔을 힘껏 잡아당기는 바람에 나는정신이 언뜻 들었다. 그런 내 눈에 다시 굉장히 가까이 다가온 것처럼 보이는 빛의 고리가 보였다. "유리……." 아니야, 지금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녀를 걱정시킬 때야? 자기 몸 가누기도 힘든 그녀를 괴롭힐 때가 아니잖아……. "……." 아득하게만 보이는 빛의 고리, 그리고 다시 한층 가까워온 하프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스럽게도 그 하프 소리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만 같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점점 그 이야기가 뇌리에 파고들기시작했다. 마치 작은 사람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뭐라고, 뭐라고…… 말하고 있어. 뭐라고 말하는 거니……? 보내지 않아, 보내지 않아…… 결코 보내지 않아, 어디로든……나를 따라와, 나를 따라와…… 너 설마 나를 버리진 않겠지……? 약속했잖아, 우린 약속했어. 반지는 지금도 내 손가락에있어…… 작았던 그 목소리는 내가 귀를 기울이자 점차로 커져 나중에는 다른 소리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술에 취한 것 같은 기분이다. 호소하는 듯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그 목소리는 묘한 울림을 가진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마치 하프의 현과도 같은…… 그 목소리가내 귀를 온통 채우고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제 우린 하나가 될 거야, 누구의 방해도 없어잠깐의 죽음에서 깨어나면, 영원히 함께일 테지두렵지 않아, 내 손을 잡아주는 너의 손이 있어저 폭우가 쏟아지는 시커먼 호수도 두렵지 않아나를 따라올 거지……? 꼭 그렇게 할거지? 나는 믿고 있는걸, 네가 한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어이 찬란한 혼례의 예복도 다 너를 위한 것이 될 거야고통은 아주 잠시…… 그리고 행복은 영원. 이때까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행복을 꿈꾸는 사람처럼 달콤하게 흘렀다. 마치 그 행복에 나마저 도취될 것처럼, 정말 환희로 가득한 천사 같은 목소리였다. 진짜 노래가 아닌 그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한 가락조차 천상의 것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이제야 느낀거지만 그건 소녀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이윽고 우울하고 슬픈 빛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길게 끄는 음이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왜…… 오지 않아? 나 아직도 기다리고 있어……입술은 새파랗게 질렸고, 손등은 얼어붙었어……늦는 거야? 왜……? 나, 너무 지독하게 추워……온 몸을 웅크렸지만, 눈물조차도 차가워졌어……내 주위는 온통 새파랗구나, 내리는 빛조차도 파랗게 빛나네……젖은 머리카락이 안되었구나, 그토록 가볍고 부드러웠었는데……어떤 희망도 없는 싸늘한 밤, 난 아이처럼 아직도 울고있어……영원보다 깊은 호수 그 밑바닥에서 네 신부가 기다리고있어…… 내 눈시울도 약간 뜨거워지려 했다. 도대체 누가, 약속을 지키지않고 그녀를 저렇게 내버려둔 거지? 이제 그 목소리는 점차 높아졌고, 드디어 절규로 치닫기 시작하고있었다. 날카로운 굉음이 내 귀를 파고들어 나는 귀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어떻게 된 건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고, 나는 고스란히 그 찢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울음 섞인 목소리를 고스란히 들어야만 했다. 나름대로 지니고 있던 운율도 온통 뒤죽박죽으로 엉켜 버렸다. 나를 더더욱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그 어조에 서린 지독한 원한의감정이었다. 가만히 서 있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리게 할 정도로 강력하고도 잔인한 감정이 분노로 가득 차 물결쳤다. 뜨거운 손가락들이 온 공기를 잡아 누르고 찢어발기는 것 같았다. 차가운 호수 위에 떠오른 내 모습이 어땠지? 약속을 어기고 배반한 자의 기분은 어떤 거야? 반지를 내 손에 되돌려주면서 흘린 가증스러운 눈물, 그대로 벌떡 일어나 그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었어…… 알아? 하지만 이미 내 몸은 굳어져 그럴 수 없었지. 그래, 그걸 알았으니 내 앞에 뻔뻔스럽게 나타났겠지. 너희들의 결혼 기념일은 내 장례식 다음날이라지? 그 손가락에는 다시 새 반지를 끼었다지? 매일같이 너희들의 불행을 미칠 듯 바라는 것 말고는 조금도 쓸모없는 이 긴 시간은 순간순간 내 심장을 타들어가게 만들어! 이 차디차고, 얼음 속보다 더 추운, 버림받은 영혼의 눈동자 가운데 온몸이 물에 젖어 끝나지 않는 세상을 저주하는 세월을 알아? 네가 그걸 알아?! 네 목을 끊고 그 피를 마실 거야! 마지막 한 방울까지빨아먹고, 그 목을 늪 속에 던져버릴 테야! 갈가마귀들이살점 한 덩어리도 남기지 않는가 지켜볼 거야!!! 아라스탄…… 그 뜻은 '영혼의 눈동자'였다. +=+=+=+=+=+=+=+=+=+=+=+=+=+=+=+=+=+=+=+=+=+=+=+=+=+=+=+=+=+=+=애정이란, 가장 원한으로 변하기 쉬운 감정이죠...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3963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1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19 20:34 읽음:230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11) 침을 꿀꺽 삼키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마치 그감정이 그대로 내 몸에 전이된 것처럼, 지진이 일어난 듯 몸이 흔들렸다. 우리가 탄 배를 휩싼 광채의 고리가 점차로 조여져 온다. 그리고 우리 바로 앞에서 그 고리의 한 부분이 커다랗게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려는 걸까…… 왜 너의 원한이 우리에게 갚아져야만 하는거지? 그 순간이었다. "사령(死靈)의 어긋난 힘은 그 근원으로 되돌아가라!" 허공을 가르는 커다란 외침과 함께 갑자기 거대한 검은 광채가 반투명한 막처럼 치솟아 뻗어나갔다. 힘의 근원은 유리카였다. 내가 껴안고 있는 그녀의 몸이 가쁘게 요동치는 것이 느껴진다. 눈을 드는 순간, 두 개의 힘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치지지지지직! 마치 번개가 떨어질 때처럼 하늘에서 불꽃이 튀었고, 다음 순간 검은 막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우리가 탄 배 주위에 거대한 반구를형성했다. 반투명한 그 장막 위로 흰 불꽃이 미친 듯 튀는 것을 보니저것이 직접 와 닿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어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게다가, 도대체 어떻게 인간이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지? 도대체저건 뭘로 만들어진 거야? 유리카가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겨우, 방어 따위라니……." 그러나 자신만만한 태도와는 달리 유리카는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유리카, 그만둬……! 너는 지금……." 그리고 유리카는 다음 행동을 하기 직전, 대답했다. "여기서 둘 다 죽으면, 내 몸이 버티고 아니고 하는 것은 문제조차되지 않아." 그러더니 그녀는 다시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게다가, 이런 것쯤이야 내게는 집중조차 필요없는 일이야. 내 몸에 완전히 익혀진 마법들." 다시, 이번에는 그녀가 들어올린 오른손에서 거대한 빛으로 된 얇은 창, 스피어(spear)가 생겨나는 것이 보인다. 마치 나뭇가지처럼자라난다. 한 마디 말도, 시동어도 필요로 하지 않은 채 번개처럼 번쩍거리는 노란 광채의 창이 그 손에 쥐어졌다. 무게는 없는 듯, 그녀는 매우 가볍게 그것을 들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본 일도, 상상한 일도 없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왜이 호수 안에 들어온 그녀는 2백년 전에 이미 잃어버렸던 마법을 쓸수 있게 되었지? 그러나 나는 이 순간,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원한이, 긴 시간 동안 저 악령의 힘을강하게 했어. 세상에, 이스나에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쓰는 사령이라니. 이 세계에도 놀랄 만한 일들이 많은걸." 그러나 유리카의 목소리는 감탄한 것 같기는 했으나, 자신이 없다거나 두려워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자신이 잘할 수 있는일,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다는 듯한 저 말투는 새삼 그녀의 직업을떠오르게 했다. 그녀는 사령이나 악령 따위를 초자연적인 이유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녀 자신이 이미 초자연적인 힘에 닿아 있는 이상, 그것들을 그런 이유로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빛의 창을 든 그녀의 머리카락이 심한 바람으로 휘날린다. 바람은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녀는 창을 높이 비껴든 채 주위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던져야 할 대상을 찾는 것처럼. "대상을 잃어버린 너의 원한, 내가 할 일은 그걸 풀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겠지……!" 그녀가 말을 맺는 순간, 창은 소리 없이 그녀의 손을 떠났다. [아아아아아아악!]희한한 음조로 변화하는 기묘한 비명이 호수의 안개를 찢고 터져나왔다. 유리카의 손에서 떠난 가느다란 빛의 스피어는 곧장 똑바로 날아가 검은 막과는 아무 저항도 일으키지 않은 채 솟아오른 고리의아래쪽을 꿰뚫었다. 스피어는 순간적으로 거기에 녹아 들어가 버린다. 나는 혹시라도 실패한 것이 아닌가 싶어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내 생각은 틀렸다. 스피어가 녹아 들어간 부분은 기묘하게뒤얽힌 빛이 되었다가, 끊어져 버렸다. 남은 고리는 허공으로 떠올라마치 뱀처럼 휘청이더니 둥글게 뭉쳐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것은 거대한 사람의 모양으로 변했다. "……." 캄캄하던 호수 위에 세찬 바람 소리가 몰아쳤다. 허공의 별이 모두빛을 잃을 정도로 거대한 빛의 덩어리다. 이윽고 완벽한 사람의 모습을 이룬 그 영의 불꽃은 정교함만큼이나 섬뜩한 두려움을 자아냈다. 얼굴의 완벽한 윤곽, 늘어진 앞머리,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젖은 드레스, 귀에 달린 둥근 귀고리까지. 푸르스름한 빛을 띠기 시작한 그것은 매서운 눈빛으로 우리를 노려보았다. 말할 여지가 없었다. 하나의 인격체, 그 자체였다. 손을 들어올린다. 내밀어진 두 손에서 다시 흰 불꽃이 타기 시작한다. 점차로 커진다. 그걸로 우리를 둘러싼 검은 막을 뚫으려는 모양이었다. 유리카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만두는 편이 나을텐데! 영혼을 다 태우고 나면 돌아갈 곳조차없어진다는 것을 모르나!"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불꽃은 점차 커다랗게 타오르고 이윽고 손에서 흘러내릴 정도로 엄청난 크기로 변했다. 실제로 물로 만든 것처럼 거기에서는 빛이 방울져 계속해서 흘렀다. 손을 점점 위로 쳐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빛의 덩어리는 커다란 새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있던 유리카는 다급하게 두 손을 모으더니 눈을 감고 입속으로 뭔가 중얼거렸다. 처음으로 그녀의 입에서 마법의 시동어 비슷한 것이 흘러나왔다. "**** ** ****** ** ***……." 그녀가 말하는 동안 눈앞의 호수 물이 천천히 거품을 일으키며 마치 국자로 저은 것처럼 저절로 휘저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눈 한 번깜빡거리지 못한 채 그걸 지켜보는 동안 점차 빠르게 들끓기 시작한검은 물은 이윽고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며 허공으로 뚫고 일어섰다. 이것 참, 이 광경을 뭐라고 표현해야 해? "들어올 테면 들어와 봐!" 그녀가 마지막에 외친 말은 역시, 주문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녀 말대로, 몸 가운데 의지를 각인시키고, 원하는 순간 그걸포착할 수만 있다면 그가 외치는 말이 무엇이든, 들고 있는 물건이무엇이든, 그런 것은 상관없는 것일까? 그리고 그녀의 외침이 끝나는 순간, 유리카가 손짓하는 그대로 머리를 들어올린 그 물기둥은 형체화한 악령이 검은 반구막을 향해 날려보낸 빛의 새가 내려앉은 그 위치로 정확히 달려갔다. 그 순간 보니, 그 물기둥의 머리는 손가락을 벌린 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삐유우우륵! 진짜 살아 있는 새처럼, 그 새는 물로 된 손에 움켜잡히자마자 날카로운 비명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동시에 다급한 외침이 울렸다. [아, 안돼!]유리카는 대꾸하여 외쳤다. "그럼, 물러갈 테냐?" +=+=+=+=+=+=+=+=+=+=+=+=+=+=+=+=+=+=+=+=+=+=+=+=+=+=+=+=+=+=+=하이텔을 쓰면 바이오 리듬이 접속할 때 나오잖아요? 그거.... 가끔 보면 영 믿을게 못되는 것 같단 말예요... (오늘, 사고를 조심하라는 소리에 최악에 가까운 수치를 받아놓고도 기분만 좋게 하루를 보내고나서...)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3964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1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19 20:34 읽음:252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12) 거대한 푸른 안개로 된 여자의 형체가 천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빛으로 된 새가 물기둥의 손에 억세게 움켜잡혀 있는 동안, 그 거대한 인형은 서서히 녹듯이 사라졌다. 새는 살아 있는 것처럼 달아나려고 퍼덕거렸다. 날갯짓 소리까지,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그리고 그럴수록 물기둥으로된 손은 더욱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것을 세게 쥐었다. [놓아 줘…….]유리카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입술을 열어 말했다. "네 이름은 오리안느구나." 그 말이 말해짐과 동시에, 갑자기 주위를 압박하고 있던 공기 한가닥이 풀려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유리, 앉아!" 배가 휘청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배를 묶어놓고 있던 힘이 사라져버렸다. 그러고 나자 이렇듯 땅 위에서처럼 배를 밟고 선 우리에게는당장 문제가 일어났다. "너도 얼른 앉아!" 배는 거의 뒤집힐 뻔했으나 간신히 중심을 잡았고, 우리는 처음처럼 마주보고 앉은 다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카는 웃고 있었다. "버릇이란 참 신기한 거란 말야." "무슨 소리야?" 그녀는 머리를 귀에 걸어 뒤로 넘기면서 말했다. "겨우 반년 정도, 마법을 쓰지 않았을 뿐인데도 이렇게 급한 순간이 되어서는 마법을 쓸 생각을 하지 않잖아. 부상(浮上) 마법이든 뭐든, 충분히 쓸 수 있었을 텐데." "……."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 지 몰라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그러고 있는 동안 물기둥의 손은 빛의 새를 놓았다. 새는푸득거리며 허공을 한 바퀴 날더니, 이윽고 검은 하늘 속으로 녹아버린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물기둥이 서서히 내려앉더니, 다시 호수물이 되었다. 유리카는 천천히 입을 열어 다시 말했다. "아마 긴 세월로 성은 잊었겠지. 네가 모르는 것을 내가 알아낼 재주는 없으니 아마도 네 내력을 알아낼 길은 영영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유리카의 말이 끝나는 순간, 마치 어린아이처럼 조그맣고 심술궂은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너는 누구야……?] "나는 아스테리온, 죽음에 닿아 있는 자이지." [아스테리온……?]유리카는 고개를 흔들더니 다시 외쳤다. "그만, 죽었을 때의 나이로 돌아와서 이야기하지? 네 나이에 걸맞지 않는 흉내는 역겹잖아." 유리카가 그 말을 한 순간이었다. 본래부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지켜보고있던 눈이 하나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주위는텅 비어버린 듯했고 주위는 아까보다 더한 정적이 되었다. 마치…… 공기가 희박해진 기분이었다. 유리카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더니 말했다. "쳇, 도망쳐 버렸어." 마치 꿈을 꾸었던 것처럼 모든 것은 갑작스럽게 사라져 버렸다. 검은 반구막 역시 허공에서 그대로 지워져 버렸다. 유리카는 숨을한 번 크게 내쉬더니 잠시 어깨를 늘어뜨렸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있다가 그녀를 보고는 물었다. "힘드니?" "아니…… 너무 오랜만이라……." 수도로 돌아가게 되거든 방금 본 것에 대해서 나르디를 붙들고 실컷 자랑을 하리라. 엘다렌이야 2백년 전에 실컷 봤을 테지만, 지금시대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건 있을 수 없는 구경이었다고! 한참을 가만히 있던 유리카가 문득 말했다. "배가…… 움직이는 것 같지 않니?" "글쎄……?" 정말이었다. 노를 젓고 있지 않은데도 배가 저절로 서서히 떠가고있었다. 손을 물 속에 담가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한 번 그대로 두어 볼까?" "그런데, 호수에도 물결이란 게 있던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왜 배가 저절로 움직이지? "저 봐, 계속 가잖아." 이윽고 잠시만에 우리는 좀전까지 있던 장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나는 혹시라도 영의 불꽃이 다시 나타나지 않나 몇 번이고 되돌아보았다. "조금 편리하게 가볼까?" 유리카는 손바닥을 펴서 가볍게 움직이더니 동그란 불빛을 몇 개만들어 허공에 띄웠다. 마치 줄이라도 이어 놓은 것처럼, 배가 움직이는 대로 그대로 따라온다. 주위가 한결 밝아졌다. 기름도 아낄 겸램프를 끄고 나니, 오히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의 빛들로 비추어지고 있는 호수는 한결 몽환적으로 보였다. "여기서라도 마법이 되는 걸 알았으니까, 구경이라도 해두라고." 유리카는 흰 빛 때문인지 더욱 파리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는 나를향해 웃었다. 이미 만들어 놓은 불빛을 유지하는 데 더 이상 힘이 들지는 않았다. 나는 이제 노에서도 손을 놓고, 천천히 물이 흘러가는대로 배를 맡겼다. 캄캄한 호수를 가르고 나아가는 빛구슬 달린 배. 그 위에 그녀와나는 앉아 있다. 호수 아래 나뭇잎 몇 개가 떠가는 것이 언뜻 비쳤다. 내가 손을 내밀어 잡기도 전에 그것은 그대로 흘러가 버렸다. 배의 속력이 우리생각보다 좀 빠른 모양이다. 나는 궁금해하던 것을 물어 보았다. "세상의 마법은 모두 봉인되었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여기는 마법이 남아 있는 걸까?" "스노이 때문일 거야." 스노이는 엘다렌과 유리카가 불렀던, 우리가 만나러 가는 사람의이름이다. 그 말고는 성도, 다른 어떤 정보도 알려 주지 않았다. 세상에 알려지고 싶어하지 않는 그를 혹시라도 만나지 못할 것에 대비해서, 가능하다면 그 이름을 입밖에 내지 않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도 마법사야?" +=+=+=+=+=+=+=+=+=+=+=+=+=+=+=+=+=+=+=+=+=+=+=+=+=+=+=+=+=+=+=제 마법 체계는 아마 다음 소설을 쓸 때쯤이면 자세히 나올 수 있을 것 같네요. 참고로, 마나의 흐름이니... 하는 것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제가 발송한 선물이 도착하기 시작한 것 같군요. 받으신 분은 받았다고 짤막한 메모라도 남겨주세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4118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1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0 23:34 읽음:248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13) "마법사라기 보다는…… 글쎄다." 유리카는 딱히 뭐라고 말하지 않은 채 그저 옛날 생각을 하는 듯빙긋 웃었다. 무슨 생각이 났길래 저렇게 재미있어 하는 걸까? 어쨌든 유리카나 엘다렌이 아는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 남아 있다면, 뭔가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안될 거 아냐? 아니면그 자손이든지 말야. 에디에르나의 약사 가문쯤 되는 건가? 혹시 불사약이라도 만들어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건? 만일 그런 약이 있다면유리카의 독쯤은 아무 것도 아니겠지? 이렇듯 온갖 상상을 하는 동안, 마치 꿈속에서 보았을 법한 풍경으로 우리가 탄 배는 고요한 호수를 흘러갔다. 도시 몇 개를 합쳐 놓은것보다 더 넓은, 마치 바다와도 같은 호수에 대해서 이 주변 마을에살고 있던 그 어떤 사람들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영혼의 눈동자, 또는 대륙의 눈동자라고도 불리는 아라스탄은 그 수원을 알 수 없는 지하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만들어졌으며, 흘러들어 오는 강은 없고, 나가는 강만이 있다. 아라스탄 호수에서 흘러나와 북쪽으로 흐르다가로아킨 강과 합쳐져 바다로 흘러가는 그 강의 이름은 프레안데로,'호수의 눈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레이븐 카운티와 사프란 카운티의 경계를 이루며 사프란 카운티 전체 넓이의 약 반을 차지하는 아라스탄 호수 안에는 수많은 크고 작은섬들이 산개해 있다. 사실, 이 가운데 대부분의 섬들은 우리가 배를타고 들어간 남쪽 기슭이 아니라 레이븐 카운티의 경계 쪽, 즉 북쪽기슭에 모여 있고, 그래서 그 부근은 칼리엔 다 아이에, '섬의 바다'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고 했다. "그럴 듯한 이름인데?" "응, 옛날에 한 번 본 일이 있는데, 자그마한 바위 머리 같은 것들이 일부러 뿌려 놓은 것처럼 수없이 흩어진 기막힌 풍경이야. 구경하러 오는 사람도 많지." 우리가 이 배를 타고 칼리엔 다 아이에가 있는 곳까지 갈 가능성은별로 없어 보였다. 지금이 몇 시쯤 됐을까? 이 흐름은 우리를 어디로데리고 가는 걸까? "내 생각엔, 이 배가 우리를 스노이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줄 것만같아. 스노이의 집안은 항상 이런 식으로 숨어 있는 걸 좋아했거든. 더 윗대는 모르지만 적어도 스노이의 할아버지 대 까진 그랬어. 그땐더 나빴어. 산꼭대기에 숨어 있었대거든. 그것도 험한 산으로 고르고골라서." 유리카가 반말을 좋아한다는 것은 일전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간 그녀는 그녀 몸의 독을 없애 줄 대단한 현자를 놓고서도 그냥멋대로 이름을 불러대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 호수 안에 얼마나 더 섬이 숨어 있는지는 모른다는 이야기구나." "적어도 내가 듣기론, 아무도 횡단한 사람이 없다니까. 그리고 횡단했었다 하더라도 구석구석 모두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호수가 아니야. 이 호수엔 오죽하면 풍랑까지 일어난다고 하더라니까." 풍랑이라니…… 지가 무슨 바다냐……. 내가 속으로 투덜대면서 마법의 빛구슬들로 어렴풋이 진로가 보이는 앞쪽을 인상을 쓰며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유리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내 팔을 살짝 치면서 말했다. "노래, 불러보지 않을래?" "노래?" 유리카는 정말로 듣고 싶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있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내심 당황했다. 내가 아는 노래가 뭐가 있더라……. 아, 그래. 나는 얼른 대답했다. "구원 기사단의 장례식 노래를 내가 밤새 듣다 보니 외웠는데……." "장난하지 마, 파비안." 곱게 눈을 흘기는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 내 가슴속에는 약하게 슬픔이 차올라왔다. 이러고 있으니, 우리가 둘이서 여행하던 때가 떠오르려고 한다. 아, 그때는 주아니도 같이 있었지. 정말 좋은 기억이었는데. 그녀는 생생하게 활기가 넘쳤고, 나보다도 말을 빨리 달렸었지……. 내가 생각에 잠겨 있자 그녀가 재촉했다. "뭐해, 장례식 노래는 안돼." "야, 부를 생각도 없었어." 그녀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지금, 장난으로라도 그런 노래를 입밖에 낼 내가 아니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머릿속을 헤집으며 뭔가 멋진 노래는 없는가 생각해 봤다. 그것 참, 내가 그런 것을 언제 자세히 들어 두었어야지……. "네가 안 하면 내가 할 테야." 그러고 보면 유리카는 자신이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난 네 노래 쪽이 훨씬 듣고 싶은데." "뭐,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할 수 없지." 턱을 쳐들면서 노래할 준비를 하는 그녀는 그 장난스런 허세만큼이나 귀엽고, 또 사랑스럽다. 영혼의 눈동자여, 그대 호수여, 너무 아름답지 마오그대 아름다움에 취한 생명들을 손 쉬이 취하지 마오그 손짓과 그 눈빛에 헛되이 다가드는 그 손을 잡아시간이 흐르지 않는 땅, 그대 품속으로 데려가지 마오아, 사랑하던 어린아이여 아마빛 고수머리를 갸웃거리니아, 무심하여라 상냥한 발걸음, 어찌 그리 가벼이 옮기었나흰 뺨에 웃음 짓고, 검푸른 보석에 천진한 손을 내미니어찌 알으랴 그 걸음, 돌아오지 못할 땅으로 떠나갈 줄이야호수여 내 소년을 삼키고도 그대는 무심히 아름다우니잔인한 공주여, 그대 호수여, 그득한 메마른 눈물이여밤마다 꿈마다 푸른 안개 속 또 헤매어도 만나지 못해마르지 않는 눈물 긴 곡조 노래가 되어 이리도 흐르오 청아하고 높은 목소리가 캄캄한 호수 위를 춤추듯 흘러간다. 노래는 내용만큼이나 슬픈 곡조와 긴 끌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넋을 놓고 내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에도 흰 마법의 등불로 장식된 낡고작은 배는 끝없는 호수 위를 흘러간다. 노래 속 그녀의 소년은 아들이었을까? 아니면 어린 시절의 연인이었을까? 문득, 아까 만났던 악령이 흐르지 않는 시간을 저주한다고 외치던목소리가 떠올랐다. 이토록이나 크고 깊고 알 수 없는 호수, 여기엔서린 원혼도 이리도 많구나……. "영혼의 눈동자여, 그대 호수여……." 말없이 중얼거려 보고 있는데, 갑자기 배 한쪽에서 쿵, 하는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유리카가 노래를 그치더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벌써 도착한 걸까?" 유리카가 손을 내젓자, 동그란 마법 빛구슬 하나가 소리가 난 쪽으로 움직여 간다. 마침 내 쪽이라 고개를 숙이고 손을 물 속에 넣어보았다. 소매가 젖어 들어가는 느낌이 꽤 차고도 시원하다. 물 속을이리저리 휘젓는데 문득 뭔가가 걸린다. 더듬어 보았다. 둥그스름한바위 비슷한 것, 엷은 모래……. "정말 도착했나봐." "이 섬, 꽤나 큰 모양인데?" +=+=+=+=+=+=+=+=+=+=+=+=+=+=+=+=+=+=+=+=+=+=+=+=+=+=+=+=+=+=+=요새 책 언제 나오냐고 묻는 분들이 많으세요(벌써 나왔냐고 묻는분들도... ^^;). 10월 마지막 주에 나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원고 수정을 굉장히 공들여서 했고, 정말 글자가 닳도록 들여다보면서 오타 하나도 없게 해서 넘겼으니까 만일 출판본에서 오타가 나온다면.....전 울어버리는 수밖에요. T_T(정말... 누가 글자 하나를 다른 것으로 바꿔 놓는대도 알아볼 수있을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4119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1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0 23:34 읽음:234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14) 나는 내 머리 위를 뒤덮은 거대한 양치류 식물들을 올려다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거대한 뚜껑들이 이어지고 이어져 거대한 지붕을 이루고 있었다. 물론 그 지붕에는 구멍이 많이 뚫려져 있었고, 그래서다행히 하늘이 보이지 않는 상태까지는 가지 않았다. 유리카의 마법빛구슬들이 이리저리 날아올라 주위를 비추는 것이 마치 커다란 반딧불들이 돌아다니는 것 같다. 게다가 이 양치류 식물들 역시 내가 흔히 보아오던 고사리들보다는 몇 배로 컸기 때문에 정말 그런 식으로반딧불과 식물이라고 보니 대강 비율이 맞아 들어갔다. "이 섬이라고 뭘로 확신하지?" "아니면, 다른 데로 가봐야지 뭐. 또 아니면 또 딴데 가보고, 또아니면……." 이것 봐, 유리카, 이건 다른 일이 아니고 네가 죽고 사는 문제란말야. 좀 진지해져 봐. 아무리 죽음의 무녀라도 좀 심하잖아. "제발 여기여야만 하겠는데." 그렇다. 이 도시 몇 개는 저리가라로 넓은 호수에서 찾다니, 도대체 뭘, 어떻게, 무슨 수로? 우리는 발에 휘감기는 덩굴들을 걷어내고 군데군데 패인 물구덩이들을 피하며 조심스레 걸었다. 마치 얼마 전에 비가 내린 것처럼, 섬안의 공기는 습기가 많고 후덥지근했다. 분명 호수 안의 섬인데, 마치 항해 중에 내린 무인도처럼 고립된 느낌이 들었다. 하긴, 여기 아무도 없다면 그것도 무인도가 맞긴 맞군. 엷은 아침 햇살이 점차로 양치류 지붕 틈새로 새어들어 오기 시작했다. 한쪽 뺨을 가볍게 비껴간 햇살이 제법 따끔하다. 오늘은 꽤 더운 날이 될 것 같다. "더워." 해가 똑바로 떠오르고 나자, 우리는 우연히 발견한 개울가에서 목과 얼굴을 씻고 준비한 식량을 조금 먹었다. 유리카가 언제 마법 등불들을 없앴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사이 우리는 이 양치류숲속으로 꽤 깊이 들어와 있었다. 유리카는 검은 겉옷을 벗고 팔 없는 셔츠와 바지 차림이 되었다. 겉옷은 요령껏 허리에 질끈 동여매었고, 땀을 닦은 그녀 팔의 은팔찌가 한여름의 태양에 찬란한 빛을 발했다. 저렇게 보면 굉장히 건강하게도 보이는 그녀야. 정말로 독에 중독된 것이 맞을까? "지체할 시간이 별로 없어." 나도 동감이었다. "가자." 양치류 식물들은 갈수록 빽빽해졌다. 켈라드리안에서 페어리 여왕을 만나러 가던 때가 떠오른다. 빽빽한관목숲을 숨차게 헤치고 가느라 땀도 많이 흘렸었는데. 그렇지만 그땐 겨울이었고, 한 해 중 가장 더운 달에 있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않았다. 조금 더 걷자 그야말로 땀으로 목욕을 할 지경이 되었다. 이 거대한 식물들 사이로는 바람조차 별로 불지 않았다. "마치 온천 가에 와 있는 기분이잖아." 나는 온천이라는 것의 근처에도 가본 일이 없는 터라, 그녀의 말에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본래 이렇게 더운 섬인가, 아니면 파비안느 아룬드라서 이렇게 더운 건가. 정말, 이상한 식물들에, 이상한섬이야. 유리카는 갈수록 탈진해 갔다. 애써 감추려 하는데도 내 눈에 한걸음 떼 놓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게 되자, 나는 결국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힘들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잠깐만 쉬자."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그렇게 말했다. 여기서 탈진해서 쓰러져버리면 병을 고칠 수 있는 현자고 뭐고 다 소용이 없다고.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나는 자리에 그냥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마침 커다란 나무 아래라 최소한 햇빛은 막아 줄 수 있는 곳이었다. 유리카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더니 곧 내 옆으로 와 앉았다. 나무 기둥에 기대는 그 몸이 정말 예전 같지 않다. "물 좀 마셔." 묻지도 않았지만, 나는 물주머니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아니,내가 직접 다가가 그녀의 입에 물을 부어 주었다. 그녀는 지금 물주머니 하나도 제대로 들 힘이 없어 보였다. "나 이래서 어떻게 계속 가지?" 유리카가 맥빠진 표정으로 내게 웃어 보였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오르려면 멀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뺨을 움직이며 약간 웃으려 했으나 결국 그것도 포기해 버렸다. 주저앉아서 올려다보는 나뭇잎 사이의 하늘은 몹시도 파랬다. "여기 이 이상한 식물들은 모두 굉장히 잎이 크네." 그녀보다 사실 더위는 추운 지방에서 자란 내가 더 타는 편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겨울이었다면 좋았을 거야. 저 두꺼운 잎으로 둘둘 말고 자면 노숙도 문제없었을 텐데. 내가 겨울에 노숙을 하던 데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벌판이었단 말씀야. 정말이지 추웠지." "아마, 겨울엔 이 잎들도 다 떨어져 버릴지 모르지." 그러고서 한동안 말이 오가지 않았다. 둘 다 너무 쉬기에 바빴던탓이다. 나는 아무 데나 시선을 둔 채 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저너머의 숲에 뭔가 움직이는 것이 있는 것을 금방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그 와중에도 그걸 먼저 눈치챈 것은 유리카였다. 그녀는 간신히 다리를 움직여 내 발을 툭툭 쳤다. "왜?" "저길 봐, 누가 있잖아." 정말이었다. 숲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사람이었다. "어어……." 놀랍게도 가까이에 나타나 우리 앞에 선 그 사람은 짧은 원피스를입은 조그마한 소녀였다. "……."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고 그저 멀뚱히 바라보는 우리를 자기도표정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곱게 빗겨진 연갈색 머리, 이런 데에서 혼자 사는 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리본과 프릴이 달린 옷, 하얀 앞치마, 맨발이었지만 계속 맨발로 다녔다면 생겼을 굳은살이나 상처 같은 것 없이 방금 양말 속에서 꺼낸 것처럼 새하얀발로 저 진흙투성이 웅덩이를 밟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세 사람은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고있었다. 소녀는 잠시 후 두리번거리더니 한쪽의 나무 그루터기 위에 털썩주저앉았다. 옷이 더러워질까봐 조심하는 기미는 조금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저렇게 막 다녔을 텐데도 옷에는 얼룩도, 찢어진 자국도보이지 않았다. 하늘에서 떨어졌나? "저… 누구시죠?" 너무 이상한 기분이 든 나머지, 나는 그 소녀에게 저절로 존댓말을하고 있었다. 소녀가 약간 고개를 움직이는 듯했으나, 다시 침묵이었다. 다시 침묵, 정말로 다시 침묵. +=+=+=+=+=+=+=+=+=+=+=+=+=+=+=+=+=+=+=+=+=+=+=+=+=+=+=+=+=+=+=글 출판하는 것을, 단순히 글 쓰고 수정하고... 하는 정도로 생각했던 때도 있었는데...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4120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1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0 23:34 읽음:233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15) "……." 그만 일어서서 갈까 하다가, 혹시 길을 잃은 애라면 이렇게 그냥두고 갈 수는 없지, 하는 생각이 들어 애써 몸을 일으켜 다가갔다. 소녀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길 잃어버렸니? 물 마실래?" 내가 내민 물주머니를 한참 빤히 쳐다보고 있던 소녀는, 이윽고 그걸 받아들어 마셔보려 했다. 그러나 이런 주머니에 든 물을 마셔본일은 전혀 없는 듯, 서투르게 만지다가 그만 입 안에 몇 모금 넣어보기도 전에 반은 엎지르고 말았다. "저런!" 내가 물주머니를 얼른 받아들자 소녀가 일어나서 치마에 엎질러진물을 탁탁 털었다. 물방울들이 흰 앞치마를 조르르 굴러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다시 앉으면서 앞치마에 모으는 그 작은 손에서 이상한것이 하나 눈에 띄었다. 반지였다. 그런데 그 손에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큼직한, 그것도투박한 돌로 만들어진 묘한 반지였다. "……."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나는 잠시 엉거주춤하고 서 있었다. 딱히 할 말도 없었고, 더 줄만한 것도 없었다. 소녀는 나를 더이상 쳐다보지 않았다. 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유리카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유리카의 눈빛이 아까와는 달라져 있었다. 시선이 무언가를 향하고 있다. 그저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주시하고 있다. 나는 흠칫하여 내 아래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둘의 눈이 마주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 "……." 왜……지? 유리카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동시에, 소녀는 마치 위협 당한 짐승처럼 재빨리 몸을 웅크렸다. 거의 본능에가까운 속도로, 소녀는 나무 그루터기 위로 무릎을 올렸고, 등을 동그랗게 하며 잽싸게 쪼그렸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거두지 않고 있다. 상처 입은 짐승 같은 눈동자로, 그렇게 오그린 양팔 사이로 유리카를 놓치지 않고 보고 있다. 유리카의 손은 펴진 채 허공에 멈춰져 있었다. 그 입에서 천천히말이 흘러나왔다. "또…… 도망가려고 온 거야?" 소녀가 조금 입을 벌렸다. 뭐라고 대꾸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나온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만큼 놀랐다. 그대로 몸이 굳어져 버렸다. [아니야.]사방에서 울리는 듯한 그 목소리, 저런 목소리는……. 나는 거의 넘어질 듯 뒤로 후닥닥 물러섰다. 아까 소녀가 했던 그대로 나 역시 물주머니를 바닥에 엎지를 뻔했다. 간신히 너댓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고 그러고도 불안해서 손이 저절로 검손잡이로 갔다. 악령! 아니, 그것은 살아 있지 않은 자가 내는 목소리……. 내가 듣고도믿어지지 않는다. 저…… 렇게 눈앞에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데……! "……." 유리카가 다시 말하고 있었다. 그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오리안느… 네가 여기에 온 이유를 알겠구나." 오리안느……. 소녀는 웅크린 몸을 펴지 않은 채 계속해서 경계 어린 눈초리로 유리카를 바라볼 뿐이다. 몇 걸음 떨어진 내 눈에도 소녀의 몸이 바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치마 끝에 달린 리본이 나비 날개처럼 떨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카는 천천히 일어섰다. [……!"]소녀가 움찔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실제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겁에 질린 듯한, 그러나 적대감마저도 깃든 그 눈동자를 유리카에게서떼지 않은 채 고개를 천천히 움직였다. 유리카는 많이 다가오지 않았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리고 멈추었다. 그리고 입을 열어 다시 물었다. "그만 쉬고 싶지?" […….]대답하지 않았지만, 유리카는 소녀의 대답을 들은 듯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그렇게 하는 그녀는 마치 곤경에 처한 소녀를 도우러 온나이든 언니라도 되는 것 같이 보인다. 무얼까, 소녀는 공포감에도불구하고 피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까지 되짚어 찾아온 것이그녀다. 그녀가 유리카에게 바라는 것은 뭐지? "오리안느… 미움을 잊을 수 있어? 원망을 지울 수 있어?" [난 못해… 나는 그를 너무 오래 미워했어…….]대낮의 쨍쨍한 태양 아래에서 듣는 그 목소리는 한밤중에 듣는 것보다 오히려 더욱 낯설었고, 마치 고통스런 꿈속에 갇힌 느낌과도 비슷했다. 나는 더웠던 것도 잊어버렸다. 동굴 안에라도 들어와 있는듯 주위의 기운은 온통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유리카가 다시 다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겁에 질린 어린아이를달래는 것처럼 그렇게 가만가만히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려고 했어?" [엄마한테, 아빠한테…….] "어디 계신데?" [저기… 숲 너머에 집이 있어, 아주 예쁜 집… 꽃도 키우고 강아지도 있고, 엄마는 안느에게 줄 맛있는 케이크를 구워서…….]무슨 까닭일까, 마치 오리안느라는 그 소녀의 목소리는 보이지도않는 그녀의 옛집에 대한 기억을 마술처럼 고스란히 눈앞에 옮겨 놓는 듯했다. 내 눈에도 꽃과 강아지가 있는 예쁜 집, 케이크 냄새가나고 젊고 아름다운 부모가 있는 그런 집이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그 곳에서 호기심 많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지금과 똑같은 모습의오리안느조차도……. […아침이면 숲으로 산책하러 와. 그리고 친구를 만나고, 점심을먹을 때면 엄마가 나를 찾으러 와. 내 이름을 불러, 안느, 안느…….]그 순간, 유리카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휘장을 찢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렇지만 네 엄마 아빠는 이미 옛날에 죽고 없잖아!" 그리고 갑자기 하얀 대낮에 나타났던 백일몽의 환상은 산산이 깨어져버렸다. 오리안느는 말을 뚝 그쳤다. 그 눈에 눈물이 글썽해져 있다. 정말로 살아 있는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상한 그 얼굴, 곧 울음을 터뜨릴것처럼 부풀어 오른 볼을 보자 나는 그녀가 유령이라는 것도 잊고 가서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그러나 유리카는매정스럽게 다시 소리질렀다. "아무 것도 없잖아! 너는 죽었고, 그저 애증을 끊지 못한 채 가련하게 부유하는 타락한 악령에 불과하잖아!" +=+=+=+=+=+=+=+=+=+=+=+=+=+=+=+=+=+=+=+=+=+=+=+=+=+=+=+=+=+=+=하루에 다섯 개씩 올리다 보니까, 잡담을 쓰는 것도 상당히 큰일인걸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4121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1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0 23:34 읽음:232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16) 뚝. […….]오리안느의 커다랗게 부풀어오른 동공에서 드디어 눈물이 몇 방울,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소녀의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뚝, 다시 한 방울 떨어져 진흙 웅덩이 속으로 떨어져 파문을 일으킨다. 표정 없는 얼굴에서 또다시 새로운 눈물이 맺혀 떨어진다. 나는 유리카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리, 저 소녀는 도대체 어떻게 된……." 내가 끝말을 다 잇기도 전에 유리카는 입을 열어 말했다. "기억에 사로잡힌 악령, 모든 악령 가운데에서도 가장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내기 힘든 자들이 바로 저런 영이야." "기억에 사로잡혔다고……?" 그녀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순간에 머물러, 스스로 그 세상에 갇힌 자들, 주위에서 몇 번이고 일깨워 줘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고야마는…… 오리안느라는 저 아가씨는 결혼을 앞둔 나이에 죽었어. 그렇지만 저렇듯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행복한 때,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이 환영의 대낮을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그러다가 밤이 되면 잊어버리려 애썼던 온갖 슬픔과 악의에 다시금 새로이 사로잡힌 채 호수 위를 떠돌며 죄없는 사람들을 죽였겠지." 죽여…… 그래, 우리 역시 죽였을 거야. 유리카만 아니었다면. 누구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그녀의 연인에 대한 저주로 저렇듯 새로운생명이 되지 못한 채 흐르지 않는 시간을 살아온 그녀는. 오리안느는 눈물을 그쳤다. 그러나 오그린 팔다리를 펴지도 않고,그저 가만히 진흙 웅덩이에 고인 물을 내려다본다. 전날 내렸을 비로온통 흐려진 흙탕물이긴 해도, 가만히 흙이 가라앉도록 기다리고 보니 그 가운데 파란 하늘이 한 조각쯤은 비치고 있다. 그런 물웅덩이가 주위에는 몇 개나 패여 있었다. 그 속에서 조그맣게 줄여진 하늘,구름, 바람, 거대한 고사리의 잎새들이 고요히 흔들렸다. 여기도, 저기도, 또 저쪽에도. 수십 개의 부서진 거울들. "그들은 죽었어." 유리카는 대답 없는 오리안느를 향해 계속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죽었어. 너의 부모, 네가 아는 친구들, 네가 살았던 마을의 모든 사람들, 그리고…… 너를 배신한 애인도 죽었어." [죽지 않았어!]갑자기 쇳소리에 가까운 날카로운 목소리가 주위를 쟁쟁하게 울렸다. 웅덩이에 내려앉았던 잠자리 한 마리가 황망히 날아갔다. 유리카는 냉정하게 물었다. "죽지 않았으면? 그러면 어디에 있는데? 내게 보여줘 봐!" [그들이 죽었다면, 왜 나는 아직도 이토록…… 고통스럽지?]드디어 그 목소리는 소녀에서 벗어나 성숙한 처녀의 것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내가 고개를 돌려 본 오리안느는 그루터기에서 발을내려놓고 앉은 20세 가량의 처녀로 변해 있었다. 긴 드레스, 귀고리와 기다란 머리채, 아마 우리가 호수에서 보았던 모습과도 같을 그런모습으로. 그 손에 여전한 것은 소녀가 끼고 있던 돌반지였다. 그것은 여전히투박하고 커다랗게, 어울리지 않는 그 손에 끼워져 있었다. "네가 고통스러운 이유를 말해 줄까?" 유리카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오리안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가 내린 일 없는 여전한 한낮의 여름, 매미 소리가 아련히들리는 거대한 숲 가운데, 그러나 오리안느의 머리카락과 드레스는어느새 인가 흠뻑 젖어 있었고, 파랗게 변한 입술과 뺨에서는 쉴새없이 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왜 고통스럽지?]오리안느는 유리카보다 더 훌쩍한 키였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본그 얼굴은 나름대로 치기 어린 얼굴, 그러나 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유리카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건, 세상 사람 모두의 마음속에서 죽은 그 사람이, 네 마음속에서만 아직 뻔뻔스럽게 살아 있기 때문이지! 죽은 사람은 묻히고, 그리고 사람들에게서도 잊혀지게 되어 있어. 그러나 왜 너만은 그 사람을 애써 살려내고 있지?" 오리안느의 목소리는 고통스럽게 갈라졌다. [난 살려내지 않았어! 난, 난…… 그가 죽기만을 밤낮으로 기도해왔어!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오직 그와 그를 앗아간 여자가고통스럽게 죽기만을 기도해 왔었지!] "그럼 죽여!" 유리카는 다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약간은방어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오리안느는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것같았다.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그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면서 서서히 죽일 거야! 그 거짓을 말한 혀를 뽑고, 나를 바라보던 눈알을 파내고, 내게 반지를 끼워준 그 손가락들을 잘라낼거야! 손톱을 뽑아내고, 피를 모조리 말려서 죽일 테다! 한 조각 살점까지찢어내고, 삼켜버릴 테다!] "그래, 죽이라니까!" 나는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한 발짝 그녀들에게로 다가섰다. 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을 흘리고 있는 오리안느의핏발선 눈은 번들거리는 광기를 띠었고, 유리카는 비록 경계는 하고있을 테지만 그녀에게 너무도 가까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모를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어디선가 풀벌레 몇 마리가 한가롭게울고 있는 이 후덥지근한 여름의 웅덩이 안에서. 유리카의 목소리는 숲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오히려 고통받고 있는 것은 네 쪽이야! 너를 고통스럽게 서서히죽이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이란 말이다! 죽여서 없애 버려! 피를 말리든, 눈알을 파내든, 죽여버리고 다시 행복해지란 말이야! 그까짓, 거짓말밖에 모르는 파렴치한 것들이 너와 무슨 상관이지? 그까짓 썩어문드러진 것들이 너와 무슨 상관이지? 엄마, 아빠가 사랑하는 사랑스런 오리안느를 불행하게 할 권리 따윈 없는 것들, 모조리 쫓아내 버리란 말야! 네 속에서 쫓아내! 찢어발기고 죽여버려!" 마지막으로 상처 입은 오리안느의 처절한 목소리가 텅 빈 숲을 덮었다. 어딘지 모를 숲 한 쪽에서 새들이 푸드덕대며 날아올랐다. 하늘을 뒤덮는 울긋불긋한 새들의 날개가 허공을 수놓았다. [나,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러고 싶어어어!]유리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오리안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채,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뭔가를 달라는 듯한 몸짓이었다. "이리로 줘." […….]온 몸이 젖어있는 오리안느의 푸른 입술이 조금씩 달싹였다. 그러고도 그녀는 계속해서 망설였다. 무엇을 달라는 걸까? "이리로 줘. 그것이 없으면 너는 편안해질 수 있어. 두렵겠지만,이제 새로운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라. 그걸 내놓지 않으면다음 생에서까지 너는 지금의 인연으로 고통받게 돼." […….]오리안느는 두 손을 꼭 움켜쥔 채 뭔가 내놓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도움을 청하듯, 겁먹은 눈동자가 허공을 훑었다. 까닭은 몰랐지만,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 역시알 수 있었다. +=+=+=+=+=+=+=+=+=+=+=+=+=+=+=+=+=+=+=+=+=+=+=+=+=+=+=+=+=+=+=나우누리에서 홈페이지 서버를 바꾼다나.. 어쩐다고 내일 10시까지(맞나?)... 하여튼 들어가지지 않습니다. 나우에 올려 놓으니 의외로빠르긴 한데, 접근이 아예 안되는 날이 종종 있다는..;;글도 못 올려요. T_T여러분들이 홈페이지 안들어가 진다고 연락 주실 때마다 가슴이 찢어집니다..(그렇다고 말씀하시지 말라는 얘긴 아니에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4122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1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0 23:34 읽음:251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17)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정말 그런건가?]갑자기 다시 소녀로 돌아온 목소리에, 나는 눈을 비비며 다시 오리안느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물을 흘리던 젖은 드레스의 처녀는 온데간데없고, 노란 리본을 나풀나풀 날리는 작은 소녀가 다시 나무 그루터기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도 눈물을 흘린 흔적은 완연했다. "그럼. 나는 아스테리온, 그걸 원하는 거라면 넌 상대를 잘 만난거야." [아스테리온이라면…… 죽음의 무녀인가…….]소녀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지는 것이 보인다. 유리카는 여전히손을 앞으로 내밀고 기다리고 있다. 소녀의 손이 움찔, 떨더니 그녀쪽으로 내밀어졌다. 그녀가 빼서 손에 쥔 것은 돌로 된 반지였다. [약속하는 거지?] "그래…… 고통 또한 없도록……." 둘의 손이 짧은 순간 닿았다. 돌반지는 유리카의 손으로 건네어졌다. 긴 세월이 닿아 회색으로 바랜 돌반지, 본래부터 저렇게 돌로 만들어진 물건이었을까? "잘 했어. 이제 모든 것이 끝날 거야……." 죽음을 앞둔 사람의 두려움으로 오리안느의 얼굴은 그늘져 있었다. 한 번 죽었지만 그건 굉장히 오래된 기억이고, 또한 살아 생전의 기억 모두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반은 죽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제 영원한 망각으로 가려는 그녀는 다시 한 번, 이제는 완전무결한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무슨 이름인가를 말하는 듯했다. [히르켈…….]그녀는 그토록 고통스러운 멈춰진 시간들과 배신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앞에서 그 애인을 찾는 것일까……. 돌반지를 손에 쥔 유리카는 두 손을 모두 앞으로 내밀고, 손가락을세워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그어지는 것에 따라, 빛으로 된 동그라미가 생겨났다. 완벽한 동그라미, 그것이완성되자 유리카는 그 가운데 반지를 쥔 손을 내밀었다. 엄지와 검지로, 오리안느의 눈앞에 똑바로 보이도록 쥐었다. "후회는 없어. 돌아간다." 소녀는 이제 모든 준비를 끝낸 듯 침착한 눈동자가 되어 있었다. 이제 마지막 말이 될, 그녀가 한 마디를 뱉어놓았다. [방울 소리를 조심해.] "뭐, 뭐라고?" 까닭 모르는 내가 되물었으나 오리안느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유리카 역시 아무래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조심할게." 친절하지 못한 설명자들 덕택에 고민에 빠진 나는 아랑곳 않고, 유리카는 손바닥에 돌반지를 얹고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빛으로 된 고리는 허공에 그려 놓은 그대로 계속해서 떠 있었다. 뭔가 입 속으로 몇 마디 중얼거렸다. "***** *** * ******* ** ***……." 고개를 푹 숙인 오리안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는안타까운 심정이 이리도 차오르는데. 나를 죽일 뻔한 상대인데도 불구하고, 측은한 심정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하는데. 유리카는 말을 그치더니, 눈을 뜨고 갈색 머리카락을 곱게 묶은 작은 소녀, 긴 시간을 속박되어 있던 오리안느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말했다. "그럼, 안녕."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 오리안느의 몸이 희미해지는 듯하더니, 그녀를 이루던 색깔들이 마치 물감처럼 멋대로 뒤섞이고, 그리고 그것이 다시 투명한 빛으로 변해 빛고리 가운데 있는 반지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나 역시 보았다. 나는 엉겁결에 아직 안녕이라는 말도 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가버렸나, 정말……. "다음 번엔 살아 있을 때의 인생을 보다 아름답게 해봐." 유리카는 마지막 한숨처럼 중얼거린 말을 나도 들었다. 그녀의 손엔 돌반지 하나가 방금 본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놓여있었다. 그러나 그 반지는 그녀가 다시 두 손가락으로 잡는 순간, 재로 만든 것처럼 사르르 바스러졌다. 그녀의 두 손가락 사이로 돌가루가 흐르고, 반지는 사라져 버렸다. "유리…… 괜찮니?" 유리카는 창백해진 얼굴에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다. "응……."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물웅덩이를 뛰어넘어 그녀에게다가가 등을 내밀었다. "업자." "또?" 나는 검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너, 고집 부리다가 죽은 다음에 나한테 혼나고 싶어?" "……후훗, 아니. 아니야." 숲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을 계속해서 눈앞에서 내키는 대로 엮어내고 있다. 모퉁이를 돌면 또다시 거대한 고사리의 숲, 나무 뒤엔또다시 나무, 같은 하늘과, 같은 햇빛과…… 그러나 아까 만큼 기진맥진한 상태는 분명 아니었다. 굉장히 불행했을, 서로 사랑하지 못한사랑의 결과로 저렇듯 오랜 시간 틈새에 갇혀 있었던 사람을 보고 나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때, 후회하지않도록 그 일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나는 그 할 일이있다. 불행이라고만 생각했었던 지금의 상태, 그러나 나는 적어도 열심히 노력이라도 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 "그녀는, 오리안느는 어떻게 되는 거야?" "다시 태어나게 될 거란 것 말고는, 나로서도 알 수 있는 것이 없어." 문득 한 질문에, 내 등에 업힌 유리카가 대답하는 목소리는 매우조용해져 있었다. 오랜만에 그녀 직분에 맞는 일을 한 후로 그녀는꽤나 지친 듯했다. "그럼, 왜 본래 저렇게 된 거야?" "글쎄, 내가 그 영혼의 속을 약간 들여다본 바에 의하면……." +=+=+=+=+=+=+=+=+=+=+=+=+=+=+=+=+=+=+=+=+=+=+=+=+=+=+=+=+=+=+=사모적인 님께서 보내주신 장문의 질문에 대한 답.. ^^;첫째, 파비안과 나르디의 머리스타일은... 그리는 사람 맘일 것 같습니다. --; 참고로 대머리 아님, 올백 아님; 둘 다 짧은 머리고,아마 파비안 쪽이 좀더 짧을 것 같네요. 파비안이 숏커트라면 나르디는단발에 가까울 정도의 길이겠고요. 그리고, 엘다렌도 대머리 아닙니다..;;; 다만 아주 짧지요. 마치머리 위에 잔디를 살짝 입힌 것 같다고나..(말되나?)(저, 그리고... 파비안과 유리카 그림 보내주신 분... 파일명 때문에 아직도 못 열어보고 있습니다. T_T 그것 때문에 새롬98까지 깔려다가 실패했어요..)둘째, 주아니가 어떻게 생겼냐고요? 말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요정들처럼 날씬한 생김새는 아닙니다. 상당히... 통통한 편일 것 같군요. 팔다리도 짧고, 아기 같은 몸매지요. 팅커벨과는아주! 차이가 큰 것이 확실합니다만, 홍차 왕자는 안읽어봐서 앗삼이누구인지 모르겠어요. (그다지 만화를 많이 보는 편이 못된답니다)셋째, 푸른 굴조개가 굴이냐 조개냐....--; 정말 어려운 질문이로군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굴도 조개껍질 같은 딱딱한 껍질에 붙어 있다고 기억되거든요? 물론 우툴두툴하고 이상하게 생겼지만. 그냥, 그런 이름이려니 하세요. ^^; (요리로서의 굴이 아닌 생굴로서의 굴 정도로 생각하시면.. ^^)넷째, 홈페이지 대문에 그려진 검 말씀이세요? 그건 제 설정과는별 관계가 없습니다. 단순한 그림일 뿐.... 멋쟁이 검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4180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1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1 20:27 읽음:245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18) 유리카는 저렇듯 떠도는 영혼의 일이라면 어느 정도 들여다볼 수있노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미리 설명했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내게도 보여주었던 그대로 행복한 소녀 시절을 보냈던 오리안느의 어릴 적 친구, 숲에서 만나 끝없이 이야기하고 함께 걸으며, 서로 청년과 처녀가 되어서까지 깊이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 아마도 이름은 히르켈이겠지. 그리고 그 내용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은 둘의 사랑을 반대하는 수많은 난관들을 도저히 뚫을 수 없게 되자, 어려서 호수와 숲이 속삭여 주었던 그대로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그건, 호수에 봉헌 의식을 행한 다음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아라스탄 호수에 한 사람이 몸을 던지고 다른한 사람이 약속된 다른 날에 따라서 몸을 던지는 것. 그리하여 그들이 믿었던 것처럼 7일만에 두 몸이 다시 살아나게 되면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들의 약속. "그래서, 오리안느가 먼저 호수에 빠진 거야?" "그녀의 노래에서 들었잖아. 호수 밑바닥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부,왜 자신에게 오지 않느냐고, 너무도 춥고 기다리기 힘들다고……." 그러니까, 남자는 죽음이 두려워 배신을 했구나. "지나치게 무모한 방법을 택한 것 아냐?" "그게 문제가 아니지." 지금 유리카의 어조는 옛날 이야기하는 사람의 그것을 닮아 있다. 내심 흥미롭게 생각하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문제는 그 남자가 동의를 해 놓고서, 오리안느를 버린 채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버렸다는 거야.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동의하지 않았어야 할 약속 아니겠어? 그리고 사람들은 며칠이 지나 그녀의 시체를 건졌어. 모든 의식과 약속은 깨어졌고, 다시 되살아날 길은 완전히 막혀버린 거야." "……." 유리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리안느의 절망과 저주가 이해가 가. 비록 무모했을지 몰라도,적어도 서로를 믿고 약속한 일에서 그렇듯 버림을 받았어. 어린 시절부터 헤아릴 수도 없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 연인으로부터." "그래도, 그녀의 저주는 굉장히 섬뜩하던걸. 정말 지독한 원한이었음에 틀림없어." "그래서 그 저주는 효과가 있었지." "뭐, 정말?" 나는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조용히 웃더니 말을 이었다. "히르켈과 그 부인은 행복하지 못했던 듯해. 자세히는 몰라도 적어도 요절한 것은 확실하게 느껴졌으니까 말야. 정말 그게 오리안느의저주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걸음을 떼 놓았다. 아까부터 궁금한 것이있었다. "도대체 언제 얘기야?" "글쎄……." "그러니까, 마법이 믿어지던 시대의 이야기야?" 내 등뒤에서 유리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했다. "그걸 잘 모르겠어. 난 내 나이보다 적을 거라고 처음에 생각했었는데, 가만히 다시 느껴보니 많은 것도 같고, 하여간 확실하지가 않아. 워낙 손대기 어려울 정도로 생명에서 많이 벗어나 버린 영이었기때문에." "그런 걸 어떻게 그렇게 쉽게 되돌려 보냈니?" "그녀가 이미 그걸 원하고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찾아온 거였어.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호수에서 이미 알아본거지." "그런 거였나……." 그녀는 이제 그만 끝내고 싶어했다고……. "그녀는 너무 오래 고통받았어, 지나칠 만큼 길게. 그녀가 제대로기억하는 건 아마 자기 이름하고, 아까 중얼거린 약혼자의 이름 하나밖에 없을 거야. 오직 똑똑히 기억하는 것은 그 잔인하리만치 지독한원한과 저주뿐이지. 몇몇 어린 시절의 단편들하고… 부모의 이름도모르는 듯했고, 여긴 그녀의 고향도 아냐. 그녀의 고향이 어딘지도,왜 이곳으로 흘러들어 오게 되었는지도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어. 그래서 더더욱 그녀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 잘 들여다볼 수가 없었지. 그녀 스스로 남은 기억이 거의 없는 상태였거든……." "……." 나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걸으며 마지막 이야기를 들었다. 물구덩이와 진흙탕으로 가득하던 바닥이 점차 단단하게 변해 간다. 숲을 빠져나가고 있는 것일까? 그렇듯, 가장 행복했던 때의 모습으로 영영 살아가려고 한 저 영혼… 밤이 되면 호수 밑바닥을 떠돌며 희생자를 찾아다니고, 낮에는소녀가 되어 섬 사이 숲을 걸으며, 잡을 수 없는 시간을 허망하게 되돌려보려 했겠지. 저렇게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나무 사이로 그녀의집이 나타나고, 엄마 아빠가 손을 벌려 맞아주는 그런 어린 시절로…어떤 사랑의 고통도 없던 그 곳으로……나는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약간 슬픔을 느꼈었지만, 실상 다른 죽음이라 해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그녀는 기억조차 거의 잃어버렸지만, 본래 모든 사람이 일정 정도는 잊어버리는 것이 있잖아? 그렇게 오래 살면서 계속해서 잊고, 또 잊고 하다보면 자신에 대한 것도 잊을 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살아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담. 어쩌면, 영영 죽지 않는단 것은 생각보다 불편한 일인지도 모르겠군……. 그리하여 숲이 끝났다. 이미 저녁녘이었다. 나는 빠져나온 숲을 돌아보았다. 다시는 보고싶지 않을 덥고 끈적끈적한, 마치 '온천'같은 -나는 이곳을 걸어서빠져나오는 길고 긴 시간 동안 유리카에게 온천이 어떤 곳인가에 대해 대강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저 고사리 숲. 그렇지만… 나중에배로 되돌아가려면 다시 거쳐가야 할 텐데. 쳇, 배를 다른 데 대는 건데. "……." 유리카는 조금 전부터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 몇 가지 마법을 오래간만에 썼던 일로 피로가 극심했던 듯했다. 그야말로 누가 업어가도모를 정도로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지금 내가 업어가고 있다는 거나알까? 그런데 나는 숲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나타난 다 부서진 문에 몹시당황했다. "문?" 대답할 유리카는 잠들어 있었지만, 일단 중얼거려 본 다음 두 손은그녀를 업고 있었기 때문에 발을 들어 가볍게 밀었다. 빗장도 다 떨어지고 나무도 썩어 문드러진 터라 문은 내 발길질 한 번에 별 소리도 없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나무 먼지가 풀썩 오르는 것을 잠시 기다려 문지방을 넘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나는 더더욱 당황스러운 상황에 봉착했다. 문지방을 넘은 그 자세 그대로 나는 한참동안 입을 벌리고 있었다. 간신히 말을 뱉었을 즈음,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몇번이고 머리를 흔들어 보고 있었다. "마을이잖아?" 손이 없어서 눈을 비빌 수가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부서진 문 너머로 내가 지나온 숲자락이 보였다. 들어와 보고서야 안 거지만 굳이 문을 통할 필요는 없었다. 문 주위엔 담이나 벽 같은 것은 전혀 없었고, 그저 덩그러니 문만 혼자 숲앞에 서 있었다. "……." +=+=+=+=+=+=+=+=+=+=+=+=+=+=+=+=+=+=+=+=+=+=+=+=+=+=+=+=+=+=+=홈페이지에 곧 지도가 업데이트됩니다! 출판 관계로 이제 겨우겨우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어요. 관리하시는 분께 부탁해 놓았는데, 아마 오늘내일 중에 올라가지 않을까 싶네요. 지금까지 많이 궁금하셨지요...? ^^;그런데, 불행히도 지도에 지명 표시가 아직 없답니다...;;;아하하... 지도를 보고 지명과 이동 경로를 예상해 보시는 뜻밖의재미를 드리기 위해서...(퍽!)..가 아니고, 아직 문제가 좀 있어서그래요. 조만간에 지명도 함께 업데이트하겠습니다. 이걸 가지고 이동 경로를 예상하는 이벤트를 해볼까도 했는데(잔인하다...;), 아무래도 응모를 받는 방법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포기했네요. 그래도 재미삼아 한번씩 예상들은 해 보세요. ^^elysis 님이 생일선물로 보내주신 '드라니아라스 대평원의 파비와유리' 그림은 너무 잘 보았습니다. 정말 귀엽게 그리셨네요. 감사합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4181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1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1 20:28 읽음:266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19) 거참, 이런 곳에도 마을이 있었다니. 일단 놀람이 가라앉고 나자 그렇게 나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저렇게 폐허에 가까워 보이는 마을이라 해도 몇 사람쯤살아가고 있다면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을 테고, 우리가 찾는 것에대해 뭔가 물어보거나 도움을 받을 가능성도 있을 테니까. 발을 옮겨놓았다. 발이 바닥에 떨어지자 누르스름한 먼지가 인다. 진흙이 이겨 붙은 부츠가 금방 또다시 마른 먼지로 뒤덮였다. 문득방금 지나온 숲과 여기의 토질이 굉장히 다르다는 것이 떠올랐다. 저고사리 숲처럼 질척한 땅을 개간하여 마을을 세웠다면 처음에 고생좀 했겠는데. 꽤나 부지런한 사람들인지도 몰라. 저만치 앞에는 커다란 대로와 양쪽으로 늘어선 집들이 보였다. 그런데 이상스런 일이지만 지금 선 마을 입구에서 좌우로는 아무 것도보이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와 지평선, 문과 마을 사이는 뚝 떨어져 있었다. 열심히 발을 놀려 마을로 다가갔다. 대낮에 귀신까지 만난 터라,내 정신은 살아있는 사람을 좀 만날 필요가 있었다. 해거름의 묽은 햇살이 내려 도시를 붉게 보이게 했다. 언뜻 생각나는 것은 융스크-리테의 지하에서 본 드워프들의 수도 파하잔이다. 그도시도 저렇듯 붉은 먼지로 휩싸여 있었는데. 물론 그 때엔 나르디도, 엘다렌도, 주아니도 함께 있었지……. 황토색과 갈색의 흙 속에 내가 남긴 발자국들이 이어지고 흐려지고지워지며 사라진다. 물 속을 걷듯, 그렇게 다리가 무겁다. 안개인지먼지인지 모를 뿌옇게 부유하는 물질들로 시야는 희미하고, 먼 곳은공기 속으로 녹아들 듯 아스라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머리 위에 뜬하얀 마법의 달, 백열광을 내뿜는 천공의 소녀 파비안느의 자태. 한바탕 말이나 마차들이 지나간 뒤의 거리처럼 그렇게 먼지 가득한거리로 나는 걸어갔다. 이윽고 양쪽으로 늘어선 집들이 있는 곳까지 접어들자 나는 잠시멈추어 서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다 떨어진 나무 문짝, 덜렁거리는 창문틀, 먼지가 몇 층으로 쌓인입구의 계단들, 기이하게 비비꼬인 가지를 가진 말라죽은 나무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기둥…….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버려진 마을?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사라져가는 마을인가? 나는 애써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질렀다. "누구 안 계세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마른 바람 한 줄기가 발치를 스쳐갔을 뿐이다. 좀더 걸었다. 해가 지고 있다. 서쪽 하늘에 걸린 해가 마치 물속에서 보는 것처럼 흐물거렸다. 머리 위로 길게 펼쳐진 하늘에 붉은 구름들이 점점이 가득 차 있다. 불타고 있는 듯, 빠르게 변화하는 붉은구름들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마차 세 대가 나란히 지나갈 정도로 넓은 거리였지만, 먼지와 안개로 흐려져 멀리까지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그 속에서 계속해서 나타나는 집들의 모양은 한결같았다.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아니 있었다고는 해도 아주 오랜 옛날의 일일 것만 같은모든 풍경들. 빨랫줄에 내걸린 빨래는 새카맣게 변해 걸레로도 쓸 수없을 것처럼 보였고, 한쪽에 방치된 손수레는 바퀴의 살이 다 부러져간신히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걸을수록 비슷한 풍경은계속해서 이어졌다. 부서진 것, 썩어 들어간 것, 무엇인지 모를 것,버려진 것들……. 그 모든 것들은 흙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슈우우……. 바람이 불자 먼지가 날려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에취, 에취……." 발치에 언제부터 쌓였을지 모르는 흙먼지와 모래가 끌렸다. 양쪽으로 유령처럼 늘어선 집들을 곁눈으로 의식하며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똑바로 걸었다. 가끔 외쳐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혹시 누구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돌아오는 것은 먼지바람 뿐,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는 이곳은 텅 비어 있다는 단순한 느낌보다 몇 배로 고요했다. 마치 호수 바닥에 있는 것처럼,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무슨 짓을 해봐도 금방 다시 고요속으로 묻혀버릴 듯한, 아주 오래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오른쪽에서 불쑥 나타난 한 채의 집 앞에 커다란 통이 가득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뭘 파는 가게였을까? 한때 간판이 달려 있었을 듯한 철 가로대에는 낡아빠진 쇠고리 말고는 아무 것도 달려 있지 않았다. 조금 지나지 않아 나는 계속해서 같은 곳을 헤매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처음부터 계속 똑바로 걷고만 있고, 어떤 갈림길이나모퉁이도 나타난 일은 없는데도. 끝없이 일직선으로만 된 미로라는것이 있을 수 있을까? 뒤를 돌아보아도 지금까지 걸어온 것과 똑같고, 앞으로 펼쳐진 길도 똑같다. 나는 멈춤 없이 계속해서 걷고 있다. 문득문득 혼미해지는 정신을추스르며 이 이상스런 거리를 걷고 있다. 죽은 것처럼 내 등에 기댄그녀를 업고, 잘 옮겨지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걷고 또 걷고 있다. 점차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현실 속을 걷고 있는 것인지 머릿속에서 엇갈리기 시작했다. 발이 휘청였다. 다시 그녀가 넘어질까싶어 몸을 추스른다. 또 걷는다. 이 길이 언제 끝나지. 그만 이 마을을 나갔으면 좋겠어. 이럴 때 주아니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쉴 곳이 없을까……." 일부러 듣는 사람이라도 있는 양 소리내어 중얼거려 보면서 나는질질 끌리는 내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뒤를 돌아보니먼지 바람이 이는 속에 내가 지나온 자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발자국도 아니고, 마치 달팽이가 기어간 자국 같은 먼지 속의 조그만흔적, 나중에 누군가 본다 해도 사람이 지나간 자취인지 아닌지 알수도 없을 것 같은, 그리고 그 자취조차 곧 바람에 쓸려 사라져 버릴것만 같은. 정적과 고요. "……." 더 이상 소리쳐 볼 이유를 잃은 나는 이제는 입을 다문 채 묵묵히걸었다. 적당해 보이는 집이 나타나면 잠시라도 유리카를 눕히고 휴식을 취해 볼까 생각중이지만, 괜찮은 집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어느 집이든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현관과 뚫린 동공처럼 시커멓게입을 벌린 창문들 때문에, 감히 발을 들여놓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몇 번이고 발길을 멈출 뻔했다가 지나쳤다. 그래도 사람이 살도록 한때 다듬었던 곳이니 노숙보다는 나을 터인데, 들어가려고만 하면 꼭섬뜩한 느낌이 들어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기분이 드니 말이야. 좀괜찮아 보인다 싶어 자세히 보고 있으면 결국은 주위의 모든 집들 중가장 나쁜 것처럼 생각된단 말이야. 이런 식으로 걷다간 아예 마을을 벗어나 버리겠다. 아무 집이라도 들어가야겠다 싶어 발길을 멈추고 일단 눈에 띈 집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스쳤다. 딸랑. 딸랑. 내가 방금 들은 것이 무슨 소리였지? 모든 동작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지만 다시 들리지는 않는다. 잘못들었나 하고 다시 또다른 집으로 두 걸음쯤 옮겨놓는데 다시 무슨 소리인가가 들린다. 딸그랑, 딸랑, 딸랑. 이…… 번엔 분명히 들었는데. 딸랑…… 무슨 소리지? 소 목에 매다는 방울? 딸랑……. 아까보다 한층 커진 소리, 뭔가가 이리로 다가오고 있는 건가? 다가가려던 집을 등지고 섰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뒤꿈치에썩은 나무가 밟혀 부스러진다. 얼마나 속까지 썩었는지 부서지면서거의 소리도 내지 않는다. 잘 구운 쿠키를 하나 밟았대도 저것보다실감나게 부서질 거야. 그런데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경계심이 일어났다. 나는 삐걱이는 소리조차 거의 내지 않는 계단 위로 한 걸음 올라섰다. 다시 귀를 기울였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저... 잠시만 쉬겠습니다. 일요일 끝나고, 월요일 쯤 돌아올게요. 한동안 앞부분 수정과 글쓰기를 병행하면서 정신이 없었고, 수정이좀 끝난 것에 신이 나서 마구 빠르게 글을 썼던 것 같습니다. 빠르다고...다 좋은 것은 아니니까요. 하이텔에서 한 독자분이 편지를 주셨답니다. 예전 글보다 문장이흐트러지고 있는 것 같다고. 네...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최근의 글들은 이렇게 저렇게 바쁜나머지 전만큼 신경써서 퇴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퇴고를 덜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에 정말 뜨끔했답니다. 지적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한 사람의 독자에게 보이는 글이라 할지라도, 결코 다듬어지지 않은 맨얼굴은 안 되겠지요. 더구나 통신 글 가운데 최고라고 생각해주신다는 독자분이 있는 다음에는요... ^^;;참, 면목없습니다. 좀더...글을 다듬은 다음에 다시 천천히 올리겠습니다. 또 이번에 쉬는 데에는 글 문제 말고도 다른 문제도 있답니다. 이른바 집안 문제인데.... 제 하나뿐인 친언니가 오는 23일에 결혼식이에요. 그래서 온 집안이 눈코뜰새 없이 바쁘네요. 저도 제 일로 바쁘다고는 하지만, 절대 나몰라라 할 처지는 아니지요. 어찌어찌 하다보면 하루해가 다 가버리는 일이 자꾸 생기고요... 정말, 결혼식이란게 생각보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더라고요. 이런 일들도 겹치고 해서 내내 바빴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바쁘다고 해서 부실공사가 용서가 되겠어요? 결혼식도, 손님들 치르기도 다 끝나고, 월요일 쯤 해서 조금이라도더 다듬어진 문장을 가지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다섯 개씩 올려주셔셔 기쁘다는 독자분께는 정말 죄송합니다)400회는... 좀더 미루어져야 하겠네요. (지금까지 몇 회인지 아시는 분?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4667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20)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5 22:31 읽음:236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20) 마차가 다가오고 있나? 아니면 고양이라도? 갑자기 단편적인 상상들 속에서 번개처럼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말이 있었다. 방울 소리를 조심해! "……!" 이미 도망칠 틈이 없었다. 허겁지겁 뒷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다가현관에 부딪쳤고, 썩은 문이 부서져 뒤로 넘어갔다. 목을 막히게 할정도로 먼지가 올라왔지만 그런 것에 신경쓸 틈이 없었다. 뭔가가 다가오고 있어! 다각다각다각다각다각……. 먼지 가득한 대지를 밟는 선명한 말발굽 소리, 점차로 빨라지는 말발굽 소리가 이제 방울 소리를 지워버리고 그물처럼 사방을 덮쳐왔다. 한 마리, 그렇지만 거대하고 무게 있는 발굽 소리. 바로 앞까지 왔어!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말이 달려온다. 이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던 마을의 텅 빈 거리를말 한 마리가 질주해 온다. 뒤로 한 걸음, 썩은 문짝을 밟았다. 풀썩, 하고 부서지는 느낌이문짝 한가운데 발 모양으로 자국이 생겼을 것만 같다. 다시 한 걸음,집이 깨끗한지 아닌지 살필 겨를도 없었다. 한쪽의 어두운 구석에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인 유리카를 내려놓았다. 쥐조차 한 마리 없다.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배낭 역시 함께 내려놓았다. 해가 거의 떨어져, 뚫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유리카의 얼굴조차 제대로 비출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어쩌면 눈을 떴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다음 나는 검을 꼬나 잡고 현관 앞으로 달려가 섰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따각! 따각! 따각! 따각! 날카로운 발굽의 울림은 고요에 익숙해져 있던 내 귀를 마치 깨진종소리처럼 아프게 찔렀다. 귀를 막을 사이도 없었다. 폭풍처럼 순식간에 그 상황은 휘몰아쳐 다가왔다. 기사!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들이 회오리바람처럼 말리고 흐트러졌다. 나는 감히 현관을 나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저 힐트를 땀이 흥건할 정도로 꽉 움켜쥔 채, 발을 바닥에 못질한 것처럼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본 것은 이 아득한 공기 속에서 섬뜩하리만치 선명한 빛깔인새카만 말과 그 위의 검은 옷, 망토, 검은 갑옷의 기사. 그리고 그것은 다가왔던 것과 똑같이, 마치 순식간에 대지를 쪼개놓고 사라지는우레처럼 다시 멀어져 가 버렸다는 것뿐이다. 정신을 추스를 틈도 없는 순간이었다. 나는 눈을 번연히 뜬 채로,내 앞에 지나간 것을 믿지 못했다. 쇠징 위를 달리는 것처럼 귓속으로 사납게 파고들던 발굽 소리가멀어지고, 들리지 않게 되자 마지막으로 다시 남은 소리가 있었다. 딸랑… 딸랑… 딸랑……. 방울 소리……. 그리고 그 소리마저 정적 속으로 지워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서얼어붙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내가 본 것, 과연 무엇이었지? "……."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도 선명한 인상은 지워지지 않는 각인을 온 몸의 감각 속에 남겨놓았다. 나는 분명히 검은 갑옷의기사가 검은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그를 자세히 보기도 전에,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앞에서 사라져갔다. 이 버려진 도시에… 기사라고? 숨을 깊게 몰아쉬며 다시 유리카를 앉혀 놓은 집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빠르게 주위를 덮고 있다. 어딘가 쉴 곳을 빨리 찾아내어야만 했다. 왜 나는, 이 도시에서 그토록 애타게 소리치며 불렀던 '사람'이 나타났는데도 뛰어나가 내 존재를 알리지 못했지? 무엇이 나를 그렇게하지 못하도록 막은 거지? 이 도시에서, 달리 살아있는 존재를 더 이상 생각해 낼 수가 없다. 유일한 생존자, 나는 나가서 그를 불렀어야 했다. 부르고, 길을 묻고쉴 곳에 대해 이야기했어야 했다. 그가 나를 공격했을까? 그럴 이유는 조금도 없잖아? "유리, 유리……." 유리카는 약간 뒤척이는 듯했으나 여전히 깨어나지 않는다. 아까숲속을 걸으면서 그럴 지도 모른다고 말했듯이, 정말 이 상태 그대로하루 종일 자게 되는 걸까? 먼지 속에서 다시 그녀를 업었다. 이미 주위는 어두워서 서로의 몸에 얼만큼의 먼지가 묻었는지 알아볼 길은 없었다. 나는 서둘러 그집을 나왔다. 다른 집이라고 더 나을 것이라는 보장은 조금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집에서 도망쳐 나오고 싶었다. 한시라도 더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왜지? 그 기사가 나를 보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 나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걸음을 멈추어 섰다. 왜 나는 계속 그 기사를 피하려고만 하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아 결코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왜 본능은 맹렬하게 그 기사를 피하라고 외치는 거지? 어쨌든… 일단은 내 안에 있는 것들 중 하나라도, 선명한 의지를내보이는 것을 따라가고 볼일이야. 나는 서둘러 길을 걸었다. 얼른 이 거리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아까의 무거운 걸음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유리카를 업고 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눈앞에 어렴풋이 어떤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 그것이 내 눈앞에서 확실한 형체를 드러냈을 즈음 나는 멈추어 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한참이나 높이 솟은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저것은 집… 아니면 성? "유리, 어떻게 생각해? 우리 저기로 들어가 볼까?" 잠든 유리카가 대답할 리 없었지만 나는 무심코 그렇게 말하며 거리를 온통 가로막고 선 그 거대한 집을 바라보았다. 성이라고 하기엔지나치게 작고, 크기는 파하잔에서 본 엘다렌의 집보다는 클 정도다. 모양새는 아무래도 성에 가깝게 지어졌다. 기껏 탑과 회랑밖에 없다고 해도 말이다. 문은 닫혀 있었다. "흠, 크흠, 누구 계세요?" 아까처럼 큰 소리는 내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누가 들을까봐 겁내는 것처럼 나는 애써 간신히 들릴 법한 목소리로 있을지도 모를 주인을 불렀다. 하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역시 비어 있음에 분명했다. 문은 열려 있을까? 끼이이이익……. +=+=+=+=+=+=+=+=+=+=+=+=+=+=+=+=+=+=+=+=+=+=+=+=+=+=+=+=+=+=+=돌아왔습니다... ^^;홈페이지도 대강 정상화가 된 듯하군요. 휴우우우... 다시 fairytale.pe.kr 로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하여간, 앞문 뒷문 다 닫히지는 않아서 다행입니다. --;잘 안들어가져서 짜증나셨을 분들께 모두 죄송한 마음이네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4668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2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5 22:31 읽음:231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21) 이 문은 놀랍게도 지금까지 내가 만졌던 다른 모든 문들과는 달리부서져 넘어지지 않았다. 나무가 긁히는 약간의 마찰음을 내며 내 키의 약 두 배, 그러니까 말을 타고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진대문은 양쪽으로 열렸다. 문에 달린 쇠고리를 조심스레 잡아당겨 보았지만, 역시 떨어지지않는다. 이 마을에서 손을 대도 멀쩡히 있는 것과 마주치는 기분이꽤 신기했다. 나는 안으로 들어섰다. 캄캄한 회랑이 안쪽으로 까마득하게 뻗어 있다. 아니, 사실은 캄캄한 나머지 그 너머가 잘 보이지 않는다. "어둡지……?"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 유리카에게 혼잣말 대신 말을 걸면서,더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에 일단 램프를 꺼내 불을 붙였다. 부싯깃과부싯돌, 오랜 귀찮은 씨름 끝에 불을 붙이고 오랜만에 보는 친숙한불빛을 들여다보았다. "저길 봐, 응접실인가?" 제일 먼저, 온통 돌로 만들어진 방안으로 나는 들어섰다. 그렇게 먼지가 많지 않은 것이 우선 신기했다. 먼지가 될 만한 물건이 주위에 별로 없어서 그런가, 돌로 된 둥근 천장과 네모진 기둥들, 높지 않은 궁륭들, 이 모든 것들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않아 차가운 기운이 서린 것 말고는 그렇게까지 낡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무너질 기미도 없어 보였다. 조금 다가가 보니 벽에 불을 붙이도록 비죽 튀어나온 횃불대가 몇개 있고, 돌로 된 탁자 위에는 빛바랜 촛대가 놓여 있었다. 탁자 주위에는 의자가 두 개 있었다. 거기에 짐을 일단 내려놓고, 나는 검만을 가진 채 조금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물론 유리카를 이런 곳에혼자 놓아두고 갈 생각은 없다. 아치형으로 뚫린 문이 세 개, 그 가운데 오른쪽 통로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 여름에 추위라니……." 실제로 그랬다. 이 집안을 조금 돌아다니다 보니, 저절로 온 몸에싸늘한 한기가 돈다. 본래 대리석 같은 걸로 지어진 집은 여름에도꽤 시원한 편이다. 그러나 사람의 온기가 오랫동안 서리지 않아서인가, 이 집은 그보다 좀더 심하게 추웠다. 밤을 보내기에는 좋지 않은 조건이란 뜻인가……? 내가 몇 걸음 걷지 않아 들어선 곳은, 아니 들어섰다기보다 다다른곳은 바깥으로 향한 테라스였다. 테라스? 나는 난간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상한 것을발견했다. "이것 참……." 테라스 너머에는 아무 것도 바라볼 만한 풍경이 없었다. 아니,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이상하게도 이 테라스는 지나치게 낮은위치에 지어져 있었다. 달크로즈 성의 테라스와 비교했을 때, 이렇듯1층에 있는 테라스는 주로 절벽 꼭대기에 지어진 성이라야만 쓸모가있다. 이 집의 테라스는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그저 훌쩍 난간을 뛰어넘어 곧장 마당으로 나갈 수 있을 정도, 아예 현관의 일종이라 불러야 할 정도로 테라스로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돌아섰다. 내가 건축가가 아닌 이상에야, 테라스에 대해 연구해 보았자 남을 것은 없었다. 다시 돌아와서 이번에는 두 번째 통로, 즉 곧장 앞으로 뚫린 길로들어가 보았다. "여기가 집 안쪽으로 들어가는 덴가 봐." 어느새 대답하지 않는 유리카에게 말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린 나는 이 길이 좀더 넓고, 양쪽으로 여러 개의 통로가 있는 것을 보며그렇게 중얼거렸다. 하나하나 다 들어가 볼 수가 없어서 일단 끝까지가보기로 했다. 통로의 끝에는 문이 달려 있었다. 고리를 잡아 돌렸다. "……." 이건, 아마 침실인가 보네. 한쪽에는 휘장이 드리워진 나무 침대 위에 하얀 시트, 그런데 그렇게까지 더럽지가 않네? 그리고 조그마한 탁자와 창문, 내가 다음으로 램프를 들어 비춘 안쪽 벽에는…….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여기에 살았던 사람인가 봐." 물론 유리카는 대꾸하지 않는다. 나는 램프를 들고 그렇게까지 낡지는 않은 그림을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아마도 귀부인인 듯, 그러나 그렇게 화려한 차림새는 아닌 젊은 여자였다. 내가 알기로 귀족가문의 여자들이 이런 초상화를 그릴 때엔 있는 보석 없는 보석 사그리 총동원해서 몽땅 끼고, 걸고, 해서 그림을 그리게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나중에 그림을 보게 될 방문자들에게 한껏 잘난체를 하는용도로 쓰이기도 하는 것이 이 초상화라는 거였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이 집의 여주인은 그다지 부자는 못되었던모양이었다. 손가락에는 오직 반지 한 개, 그리고 목에도 목걸이 하나가 다였다. 귀걸이도 걸고는 있었지만, 화가한테 돈을 많이 주지않았던 모양인지 그다지 화려한 느낌으로 그려져 있진 않았다. 아마, 가난한 귀족의 집이었던 게야. 그러고 보면 이 마을 자체도 그다지 커 보이지는 않는데, 이 마을의 영주쯤은 되었던 건가? 아니, 이런 정도는 영지도 못 되고 기껏해야 기사령 정도 되었겠군. 요즘엔 이렇게 작은 마을은 나라에서 파견된 시장이 다스리도록 하거나, 그저 마을 사람들끼리 뽑은 촌장이 유지해 가더라도 내버려두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바라본 그림 속의 부인은 꽤나 청초하고 예쁜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냐, 어쩌면 화가한테 이 점에선 돈을 좀 얹어주었던 것일 수도 있어. 나는 상인 특유의 의심을 발휘하면서 방을 물러 나왔다. 부득이하면 이 방을 잠시 유리카의 침실로 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멋대로 응접실이라고 이름 붙인 처음의 방으로 되돌아온 나는 마지막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내가 도착한 곳은, 일종의 서재처럼 보이는 방이었다. "책은 몇 권 안되네……." 정말로 책꽂이에 비해 꽂힌 책은 몇 권 되지 않았다. 텅텅 빈 책꽂이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가운데 놓인 나무 탁자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엔 펼쳐진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음……." 겉장을 들쳐 보니 '히와칸 옹스트, <격언 Ⅷ>'이라고 적힌 붉은 글씨가 보인다. 겉표지의 색깔은 바랜 갈색이었다. 나는 펼쳐진 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 죽음, 그대는 의심하는가? 무엇을? 죽음은 되돌아오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것들 중에는 죽은 자들도 섞여 있다. 죽음은 끝인가? 그렇지 않다. 죽은 자들 중에서 가끔은,몇 번이고 되돌아오는 자들보다 더욱 오래 사는 자들이 있다. 비록 흔한 일은 아니지만, 어떤 자들의 기억은 죽음과생명의 수레바퀴를 뚫고 세상의 영속성만큼이나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하나의 기억이 온 곳을 잃어버리고 갈 곳을 잊으며 그와 연결된 모든 것에서 떨어져나간 뒤에도 홀로 빛을 발하는 경우, 그 영혼은 비록 그가간절히 죽음을 원한다 해도 결코 쉬이 수레바퀴 속으로 되돌아오지는 못한다…… 무슨 소린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내 생각으로 그 까닭은, 똑같은단어들이 몇 군데에서 되풀이해서 다른 의미로 쓰였기 때문인 듯했다. 저렇게 일부러 못 알아먹도록 쓰는 데는 무슨 이유라도 있는 모양이지? 나는 책에서 눈을 떼고 테이블 위의 다른 것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방금 까지 보지 못했던 특이한 물건으로 눈이 갔다. 나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흐음……." 그것은 강철로 만들어진 검은 투구였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음에는 확실했다. 한때 바람에 휘날렸을 술은 다 닳아 있었고 가리개는 이음새가 뻑뻑하게 굳어 거의움직여지지도 않았다. +=+=+=+=+=+=+=+=+=+=+=+=+=+=+=+=+=+=+=+=+=+=+=+=+=+=+=+=+=+=+=생일 축하 메시지 보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언니 결혼식 때문에 별로 챙겨먹진 못했답니다. 내년을 기약해야죠, 뭐.. ^^ 생일은 매해 오지만 결혼식은 평생 한번이니까... 결혼식때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신부 입장 하는걸 보니까왠지 눈물이 좀 나더라고요.... 왜 그랬을까..? 25년만에 처음으로 독방을 쓰게 되었네요. 왠지 조금 낯선 기분이듭니다... 언니가 신혼 여행을 갔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려요. 오늘도 잠깐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언니가 집에 왔을까..?'하고 생각하다가 어이가 없어서 픽 웃었지요. 아직은 짐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이제 돌아오면 마저 챙겨가겠고,그러면 정말 저 혼자의 방이 되겠지요. 글쎄요..무슨 느낌일까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4772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2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6 22:41 읽음:221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22) 문득, 뻥 뚫린 눈동자가 빤히 나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착각이긴 하지만,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투구를 다시 내려놓았다. 크지 않은 서재는 차갑게 얼어붙은 채 오랜 옛날에 사라진 주인조차도 이미 잊어버린 듯, 무심하게 그대로 그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다지 오래 있고 싶은 방이 아니다. 나는 그만 몸을 돌려 통로를 돌아 나왔다. 처음의 방으로 돌아오자, 나는 짐을 다시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이미 밤이 어두웠다. 그래도 깨끗해 보이던 두 번째 통로 끝의 방에유리카를 눕히고 잠깐 눈이라도 붙여 볼 생각이었다. 침실 문 앞에 다다라서는 문을 열어 놓을까, 닫을까 조금 고심했다. 열어 놓으려 해도 어쩐지 불안했고, 닫으려고 하니 또한 불안했다. 결국은 닫았지만 아무래도 석연치 않아 문 사이에 나무토막을 하나 괴어 놓았다. 시트를 만져보니 먼지도 그다지 많지 않다. 침대에 유리카를 눕힌뒤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깨어나지 않는다. 내일아침이 되면 눈을 뜨겠지. 그 녹색 눈으로 나를 보고, 아직도 죽지않고 살아있다는 걸 내게 실감케 하겠지. 도대체 나는 얼마나 이상한 땅에 와 있는 걸까……. "잘 자." 나는 짐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검을 내 옆에 내려놓은 뒤, 석벽 한쪽에 기대앉았다. 망토는 유리카에게 덮어 줘 버렸고, 나야 뭐 건강하니까. 좀 춥긴 하다. 지친 나머지 뭔가 먹을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물주머니에서 물만 내어 조금 마셨다. 달크로즈 성을 떠난 일이 아득한 옛 일만 같다. "……." 눈을 감자 오래된 기억들이 서서히 떠올라왔다. 사실 그렇게 오랠것도 없는 기억들이다. 나의 오랜 생활 터전이었던 큰사슴 잡화, 항상 뭔가로 얼룩진 흰 앞치마를 두르고 가게 안에 서 계신 어머니, 친절하던 에렌트 형이나 짓궂은 악동이었던 게퍼 쿠멘츠, 그런 것들이떠올라왔다. 하얀 산맥의 내게는 포근해 보이던 흰 봉우리들과 녹색호수, 그릴라드 고개에서 내려다본 초콜릿빛 지붕들도 뒤이어 눈앞을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사슴 잡화점 게퍼를 왜 그렇게도 미워했는지 그다지절실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이유야 기억나지만 글쎄, 지금 생각으론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것만 같다. 그런 것이 싸울 이유가 되나? 그러나 하르얀이 내게 갖고 있던 그 까닭 모를 전폭적 증오, 또는호수의 오리안느가 변심한 애인을 향해 뇌까리던 잔인한 저주를 떠올리면 지금도 온 몸에 싸늘한 오한이 인다. 그런 것이야말로 정말 사람의 몸과 마음이 견뎌낼 수 없는 미움이야. 인간으로서 가져서는 안되는 것, 어느 순간 마음의 경계를 뚫고 현실 속으로 뛰어나와 스스로의 생명을 가지게 되는, 그 사람을 떠나 하나의 독자적 역사와 삶을 갖게 되는 그것. 그렇게 인간을 탈출한 증오들이 이 세상의 수많은 두려운 것들을 만들어 왔어. 이런 생각들, 어쩌면 나 자신이 고향을 떠난 뒤로 좀 많이 달라져버린 것일 지도 몰라……. "유리카, 자니?" 대답이 없을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그저 한 번 중얼거려 본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가느다란 숨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잠시 동안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마음이 가만히 안정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내가 겪게 되었던 일들… 그런 것들로 해서 내가 전에 경험한 일은 어쩌면 사소한 것이 되어버리고… 그건 내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가? 하르얀과의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숙제, 나르디를 만나면서 몇 번이고 빠졌던 고민들… 엘다렌을 만나고, 또한 만나게 될 새로운 친구인 엘프와, 그들과 함께 해 나가야 할 문제들… 내가 만났었고, 그리고 지금은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 이런 많은 일들이 모두 내 마음속에 나도 모를 그림자를 남기고 갔음에 틀림없다. 여행 중에 내 옆을 스쳐지나갔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하나씩만 내게알려준 것이 있다 해도, 하비야나크 마을 안에서 계속 그대로 살아갔을 때엔 결코 손쉽게 알아내지 못했을 수많은 것들이 내게 쌓였을 거야. 이베카 시에서 만난 티무르, 켈라드리안의 페어리 일족, 두 번이나 만났던 바르제 자매들과 친절한 그녀의 부모들, 이진즈 강의 선원들, 마르텔리조에서 우리를 방해하기도 했고 도와주기도 했던 수많은사람들, 구원 기사단, 달크로즈의 국왕 폐하 일가와 귀족들. 나는, 고향에서의 나와 어떻게 달라졌을까. 서서히 머리가 혼미해졌다. 내 몸이라고 피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늘 있었던 모든 일들은 몸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피로하게 했다. 잠… 휴식의 끝에는 다시 시작이 기다리고 있겠지……. 죽음의… 끝에는? 돌아옴인가……. 이히히히히히히힝! 내가 들은 것은 아마도 말울음 소리, 내가 말이 나오는 꿈을 꾸려는 모양인가……. 이힝힝, 힝힝, 푸르륵, 이히히히힝! 한 마리가 왜 이렇게 시끄러워……? 다음 순간, 나는 사태를 깨닫고 눈을 번쩍 떴다. 문밖에, 뭔가가 와 있어! 내 손은 저절로 바닥에 내려놓아진 검손잡이를 빠르게 더듬었다. 검집 하나 제대로 없이, 참으로 무뎌지지도 않는 좋은 검이지. 또 하나의 내 친구라고 할 만하지.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거야? 문을 꽉 닫아버리고 싶었지만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했다. 다시 말이 푸르릉대는 소리가 들렸고, 말이 서 있는 곳은 우리가 들어온 문밖이 아니라 중간의 응접실을 거쳐 정면 통로로 들어온 이 방의 밖,즉 복도에 나 있던 여러 입구들이 통해 있던 안뜰임에 틀림없었다. 아까는 어두워서 그게 안뜰인지 건물 안인지 확인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분명히 확신이 섰다. 몸을 도사리고, 침대 위의 유리카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 여전히고요한 숨소리를 내고 있는 그녀. 검을 움켜잡은 채 나는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입구에서 빛이 새어들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빛… 어떻게 된 일이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창문 쪽을 바라보았지만 밖은 아직 밤이다. 내가 그렇게 오래 잠들었을 리가 없다. 그럼 저 빛은 뭐야? 이히힝힝힝힝힝! 말은 화가 난 것처럼 사납게 울었다. 발굽도 마구 세게 울렸다. 저렇게 말을 들여놓으면 안뜰을 다 밟아 놓을 텐데. 잠깐, 그러면 말에는 지금 기수가 타고 있는 건가? "……." 나는 갑자기 모든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인지 마술처럼 알아차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우리는 지금 아까 본 검은 갑옷의 기사의 집에들어와 있는 거야! "……." 온 몸이 갑자기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왜, 왜…… 그 검은 갑옷의 기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두려운 느낌이 드는 거지? 그렇지만 분명, 본능은 그를 피하라고 이렇게 가리키고 있는데. 내가… 이 사나운 범의 소굴로 유리카를 데리고 들어온 건가? 그렇다면 내가 여기에 계속 함께 있는 것이 그녀에게 위험이 될 수도 있어… 내가 다른 곳으로 저 자를 유인해서 데려간다면… 저 기사는 지금 우리가 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왜 저렇게 사납게 말을 몰고 안뜰을 돌아다니는 것일까? 그것도 한밤중에? 도저히 상황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혹시… 미, 미친 사람인가? 이 텅 빈 도시에서 홀로 사는?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나무토막으로 괴어 약간 열어둔 문틈 사이로 눈을 가져갔다. 불그레한 불빛, 이 불빛은 어디에서 새어나오는 거지? 그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소리를 들었다. [카아아아아아!]사람의 목소리는 아닌… 그러나 저 소리가 의미하는 바는 확실히알 수 있는……. 내가 자신을 따라 밖으로 나오기를 원하고 있어! +=+=+=+=+=+=+=+=+=+=+=+=+=+=+=+=+=+=+=+=+=+=+=+=+=+=+=+=+=+=+=.......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4773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2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6 22:41 읽음:224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23) 다각, 다각, 다각, 다각……. 말발굽 소리가 어디론가 멀어진다. 나가고 있다. 내게 따라오라고외친 뒤, 밖으로 나간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지? 나와 싸우고 싶다는 건가? 나는 테이블 위에서 아직도 켜져 있는 램프를 한 번 올려다보고는그 불빛이 비추고 있는 벽에 걸린 부인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혹시저 부인은 저 기사의 부인이었을까? 그렇다면… 아직 젊은 사람이겠구나……. 나는 몸을 일으켰다. 관절 마디마디가 몹시 쑤셨다. 그러나 나가지않을 수는 없었다. 여기는 그의 집이고, 그는 지금 나의 도전을 바라고 있다. 나는 그 외침소리에서 그것을 분명히 느꼈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 것은 이 순간 필요치 않았다. 나는 그 기사가 전하는 의사를 마치 새가 울음소리로 서로 의사를 소통하듯, 분명히 알아들었다. 유리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나가서 그와 대적한다면, 적어도 그녀는 안전할 거야. 기사,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자기의 아내의 방에서 쉬고 있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고 싶다면, 내게도전하라고 말하는 그 의지를 나는 똑바로 읽었다. 몸을 바로 세운 뒤, 나는 문을 걷어차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유리카, 갔다올게." 대답하지 않지만, 나는 대답을 들은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앞으로 곧게 뻗은 복도를 걸어나갔다. 이미 통로는 다시 어두워져 있었다. 알 수 없는 절망적인 심정이 가슴을 짓눌렀지만, 나는 내가 할일을 확실히 느끼고 있다. 문을 열고 다시 아득하게 펼쳐진 거리를 대했을 때, 나는 문득 뭐라 말할 수 없는 막막한 심정으로 잠시 멈칫거렸다. 다시 이 길 위에서야 하다니. 온 몸 구석구석에서 간절히 휴식을 바라는 자그마한 목소리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쓰러질 때가 아니야. 그 어느 때보다도 쓰러질 때가 아니야. 그는 어떤 상대지……? 그가 바라는 것은내 목숨인가? 이 마을을 지나는 자들의 피를 취하는 것이 이 폐허의마을에 사는 마지막 한 명의 생존자, 그 자의 한 가지 남은 저주받은바램인가? 그러나 질 수는 없어… 이건 가장 비싼 도박이야, 생명보다 큰 것을 건 도박, 내 평생에서, 결코 져서는 안 되는 내기! 나는 검을 움켜잡고 거리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고요하다. 거리 한 가운데로 나와 선 나는 양쪽을 막고 선 집들을 돌아보았다. 아니, 캄캄해서 사실은 잘 보이지조차 않았다. 램프는 유리카를위해서 놓아두고 나왔고, 주위에는 자욱한 붉은 안개가 끼어 달빛조차도 제대로 닿지 않고 있다. 나는 내 손에 쥐어진 검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과연, 이 검을 다룰 만한 실력을 지금 쥐고 있는 걸까? "하… 후……." 심호흡을 했다. 여전히 바닥에 쓸리는 붉은 먼지와 폐허의 모래들. 나는 선 자리에 발을 바로 딛고 시선을 똑바로 향한 채, 어디에서 다가올 지 모르는 위협에 귀를 기울였다. 너는 기사였지, 그렇다면 정정당당히 나타나야 하는 것 아닌가? 딸랑……. 그래, 그렇게 나타나야 하는 거지. 검을 세워 잡았다. 온 몸에 팽팽한 긴장이 터질 듯 차오른다. 입가가 바짝 말랐다. 물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귓가를 자극하는 소리,그 소리로 내 신경은 온통 집중되어 있었다. 딸랑, 딸랑, 딸랑, 딸랑-온다! 다각! 다각! 다각! 다각! 여전히 쇠징을 밟는 듯한 발굽 소리, 정면으로 다가온다. 일단은피할 자세를 하고 똑바로 검은 허공을 노려보았다. 랜스를 든 기사를처음부터 정면으로 상대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그가 어떻게싸우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그 순간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따각! 따각! 따각! 이히히히힝---! 거대한 말이 순식간에 어둠의 장막을 찢고 눈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나는 오른쪽으로 비키려 했다. 기사가 들었을 랜스는 내게는 아마도 왼쪽에 있을 터, 그 길이와 속도보다 빠르게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이곳은 너무나 어두웠다……. "크으윽!" 나는 왼쪽 어깻죽지에서 불로 지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대로오른쪽으로 먼지 속을 굴렀다. "큭……." 딸랑……. 어느 새 내 앞으로 사납게 달려들었던 기사는 나를 지나쳐 달려가버리고 없다. 상처를 입힌 나를 내버려두고 다시 가버렸단 건가? 왜유리한 싸움을 버리고 달아나지? 비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손을 가져가 싸쥔 왼쪽 어깨에서 뜨뜻한액체가 줄줄 솟아나 소매를 온통 적시고 떨어졌다. 먹물 같은 어둠이눈꺼풀에서 흘렀다. 견딜 수 없는 혼미함이 온 몸을 휩쓸었다. 간신히 검을 짚으며 일어났다. 견딜 수 없는 것이라도 견뎌야만 한다. 내가 왜 이 이상한 호수 속의 섬까지 와서 낯선 것들을 만나 전투를 벌이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한 가지, 그것을 얻기 위한 모든과정이라면, 내가 고난을 겪은 만큼 주어지는 보답이라면 기꺼이! "……." 세상의 모든 것에는 가격과 대가가 있는 거야. 몸을 돌렸다. 보이지 않는 어둠, 들리지 않는 적, 그 모든 것을 향해 본능 하나만으로 돌아섰다. 기다린다. 다시 달려들 그를 베게 될순간이 오는 단 한 번을 기다려, 나는 똑바로 선다. 새벽은 오는 건가……. 알 수가 없다. 내 머릿속을 오가는 모든 생각은 이미 한 가지 본능으로 모조리 지워진 뒤다. 서 있는 다리가 부들부들 떨린다. 얼마나버틸까. 물론, 내가 넘을 수 있는 모든 한계까지, 갈 수 있는 데까지간 뒤까지다. 검은 기사의 공격은 이상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 거리를 질주하여 나를 공격하고 다시 반대쪽 거리로 사라져 간다. 그리고, 그러고 나면 꽤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다. 거의 약 2, 30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을 몰랐을 때, 나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 홀로 서서, 내내 들리지 않는 방울 소리를 들었다고 착각하며 긴장으로 떨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미 세 번의 공격을 받은 지금, 나는 대강 느낄 수 있다. 기사는 방금 지나갔다. 다시 약 30여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동안 왼쪽 어깨 말고도 왼쪽 옆구리, 오른쪽 뺨이 찢어지고, 내가 볼 수는 없지만 상처들에선 아직도 피가 흘러 그렇지 않아도 걸레같은 옷을 더욱 얼룩지게 하고 있다. 피가 흘러나가는 것에 따라 생명도 흘러나가는 것만 같다. 나라고 그 동안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좀전 세 번째 공격때, 나는 기사의 공격 패턴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그가 달려오는 위치를 짐작하여 몸을 낮추고 있다가, 번개같이 옆으로 돌아 옆구리로검을 찔러 넣었었다. 그 순간 기사는 내 뺨에 상처를 냈고, 그런데……. 검은 기사는 아무 상처도 입지 않은 것처럼 그대로 다시 달려가 버렸다. +=+=+=+=+=+=+=+=+=+=+=+=+=+=+=+=+=+=+=+=+=+=+=+=+=+=+=+=+=+=+=이젠 홈페이지 괜찮지요? 마치 아픈 애 들여다보는 기분.... 참, 홈페이지에 올라간 지도 보고 지명을 추측해주신 분들이 몇 분계신데 맞는 데도 있고 틀리는 데도 있어서 재미있었어요. ^^(아아...역시 퀴즈 대회를 했어야 하나.. ^^;;)늦은 생일 축하 보내주신 분들도 감사합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4900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2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8 00:35 읽음:218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24) 내가 잘못 봤을까? 하긴 그 순간, 어떤 살아 있는 것을 벨 때의 그독특한 감각이 내 손에는 전해져 오지 않았었다. 그 감각, 전에는 그감각을 몹시도 견딜 수 없어 했었지. 피를 보는 것도. 그릴라드의 고개에서 에졸린 여왕의 친구,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니할룬과 처음 마주했을 때, 난 땅바닥에 엎드려서 '난 땅이야, 땅!'하고 마음속으로 죽어라 외쳤었다. 미르보를 꼭 돕겠다는 생각도 없었지. 당시 내겐 대신 죽어주기라도 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도움을 줄방법도 없었으니까. 그 때의 생각을 하자 문득 고소(苦笑)가 터졌다. 그 때의 내가 한심하게 느껴져서는 결코 아니다. 그 때의 나 역시나름대로 좋은 점들을 많이 갖고 있었다. 사실 나는 지금도 한심할만큼 실력이 없다. 즉, 죽여야만 하는 상대를 죽이지 않고 보내는 것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저 기사와의 끝날지 안끝날지 모를 싸움이 두렵다. 그것이 유리카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 해도 근원적인 두려움이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심을 했지, 이겨내기로. 그러나 결심이 두려움을 없애버리는 것은 아니다. 결심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 하고자 하도록 하는 힘이지, 결코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말을 타고 랜스를 든 기사와 검 하나로 대결하기란 힘든 일이야. 말에서만 내려와 준다면 좋을 텐데. 게다가 여긴 너무 어두워, 어둠이 나를 불리하게 하는 거야. 어떻게 주위를 밝힐 방법이 없을까……. 문득, 아까 유리카를 업고 걸어오면서 보았던, 통이 많이 쌓여 있던 집이 떠올랐다. 혹시, 그런 통이라면 기름을 담았던 것이 아닐까?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좋을 텐데. 밑져야 본전, 일단 가보고 볼일이지. "불을 켤 수만 있다면……." 기사가 다시 오기까지는 약 20여분의 시간이 남아 있다. 나는 걸음을 빨리 옮기다가 숫제 나중에는 뛰었다. 어떻게 내 다리에 뛸 수 있는 힘이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사가 달려간 방향으로부터 한 걸음이라도 멀어진다는 사실은 사소한 사실이긴 해도 나를 기쁘게 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다고 해서 도망쳤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도망칠 데도 없거니와, 자기는 저렇게 말을 타고 불공평하게 멋대로 왔다갔다하면서, 나는 한 자리에 꼭 서서 상대방을 기다려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겠어? 이미 어둠에 눈이 익어 약간의 빛으로도 주위를 식별할 수가 있었다. 달빛이 희미하게 내려온다. 나는 잠시 후, 내가 목적했던 집을찾아냈다. 전처럼 망설이는 마음도 없이 계단을 뛰어올라 문을 박찼다. 문은 예상한 대로 썩은 나무토막처럼 넘어졌다. 안쪽은 빛이 별로 와닿지 않아 어둡다. 나는 내가 입구를 가리고섰음을 깨닫고 좀더 안쪽으로 들어섰다. 카운터 비슷한 것이 놓인 현관을 지나자 안쪽에 널찍한 방이 자리잡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창문으로 새어드는 빛을 빌어 벽을 더듬더듬 만졌다. 손끝에 닿는 것은세로로 높이 쌓아진 통들, 주먹을 쥐고 두드려 보니 충분히 가득 찬소리가 났다. 이 마을이 멀쩡하던 시절에 쌓아 둔 통이라면 아주 오래된 기름이겠군. 뭐, 그렇지만 오래 내버려 둔 기름이라 해도 기름이 상한다는이야긴 아직 들어 본 일이 없으니까. 통을 꺼내려고 한쪽의 탁자를 끌어당기는데 뭔가가 소리를 내며 구른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더듬어 보니 손에 잡히는 것은 부싯돌이다. 다시 바닥을 기어서 돌아다니며 부시쌈지도 찾아냈다. 탁자를 통이 세워진 옆에 바짝 당겨 붙이고 그 위에 올라서서, 천장에 닿은 틈새로 손을 밀어 넣고는 맨 위에 얹힌 기름통을 하나 집어 당겼다. 내가 오히려 조심해야 하는 것은 기름통의 무게가 아니라, 통이 낡았다는 사실이었다. 바닥으로 물줄기 같은 것이 줄줄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물씬한 기름 냄새를 맡으며 나는 통 한 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또 하나, 또 하나. "휴……." 몇 개의 통을 내리는 동안 내 몸은 그야말로 통에서 조금씩 새는기름들로 온통 기름투성이가 되었다. 부족한 빛으로 내 몸에 엉겨붙고 젖은 것들이 어디까지가 피고 기름인지 구분할 길이 없었다. 여러개의 통들 가운데 하나를 질질 끌다시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른통들도 옮겨 놓으면서 허리가 몹시 쑤시는 것을 느꼈다. 상처 입은자리들도 기름이 닿자 지독하게 따끔거렸다. 내가 십여 개의 기름통을 모두 밖으로 옮겨 놓을 수 있었던 것은,그야말로 이기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마음속에서 솟아난 탓이다. 무거운 통들을 죽을힘을 다해 옮기는 동안, 이상하게도 온 몸의 피로를뚫고 어렴풋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시커먼 기름들로 더러워진 소매로입가를 훔치며, 나는 내게 주어진 부당한 상황을 깨뜨리는 것으로 그상황에 항의하겠다는 의지가 단호히 다져지는 것을 느꼈다. 다 옮겨놓고 나서, 밖에 세워져 있던 내가 처음 본 통들을 건드려보았다. 예상대로 그것들은 텅 비어 있었다. 문득, 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 딸랑……. 저 소리, 이제는 아무리 멀리서 들리는 거라도 단번에 알아듣겠다. 이미 방울 소리라면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니까. 도대체 방울은 놈의 어디에 달려 있는 거지? 어째서 말발굽 소리보다 먼저 들리는 거지? 쓸데없는 질문은 제쳐놓고, 나는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는 것을 잠시 미룬 뒤 거리로 달려나갔다. 내가 아직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을보여주어야 했다.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다시 온다! 검을 꼬나 잡고, 이번에야말로 상처를 입히고야 말겠다고 몸을 도사렸다. 내가 아무리 실력이 없고, 기사도 정식 전사도 아닌 그저 점원 아니면 여행자에 불과하지만, 적한테 제대로 된 타격 한 번 입히지 못했다면 그 치욕이 말씀이 아니지. 따각! 따각! 따각! 따각! 여전히 징을 치는 듯한 말발굽, 따가운 파열음이 귀를 때렸다. 일부러 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시선에 신경을 모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가 달려오는 방향이 아까와 약간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따각! 따각! 따가닥……약간은 멈칫거리는 듯한 말발굽, 그러더니…….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그, 그냥 지나가 버리잖아! 나는 바보가 된 기분으로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그가 내가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쪽으로 생각이 미치자 흠칫하여 소리를 질렀다. 어쨌든 말을 탄 사람을 따라갈 길은 없고 내가 할 수있는 거래야 소리지르는 것 말고는 없었다. "난 여기에 있다!" …내가 생각해도 좀 바보 같은 외침이군. 딸랑……. 들었는지 어쨌는지, 마지막으로 방울 소리를 남기며 기사는 다시저만치 멀어져 가 버렸다. 나는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어떻게 된 거야? 나를 공격할 생각이 없었던 건가? 그럴 리가 없어, 그렇다면 왜 굳이 집안에까지 들어와 소리를 질러나를 불러냈고, 저렇듯 몇 번이고 질주하여 거리를 오가면서 나를 찌르고 공격했겠어? 그렇다면, 방금 일은 어떻게 된 거지? 혹시 나를 발견하지 못했나? 아냐,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보아 그는 나보다 어둠 속을 잘 보는 듯했는데. 문득, 나는 내가 선 자리에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 아까하고 상황이 달라진 거라면, 내가 기름 가게가 있는 곳까지 달려온 것 말고는 없어. 그렇지만 같은 거리에서 일직선으로 좀 움직였다고 해서……알았다! 나는 허겁지겁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내가 거리의중심에서 한참 비껴나 기름 가게에 가깝게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또 다른 중대한 사실이 내 머리를 쳤다. 저 기사는, 항상 오가던 길만을 똑같이 오간다! 잠깐, 그렇다면 싸우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거야……? 나는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진 채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아니야, 아니야…… 그가 나를 향해 휘두르던 랜스를 기억하고 있어. 어둠 속에서 확실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저만치에서부터 나를 공격하기 위해 그는 랜스를 겨냥하고 왔어. 분명, 처음 마주쳤을 때 낡은 집 안에서 내다보았던 그는 랜스를 저렇게 들고 있지 않았어. 아니, 랜스는 눈에 띄지도 않았어. 어쩌면… 그는 그렇게 똑바로 오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취할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어떤 이유로? +=+=+=+=+=+=+=+=+=+=+=+=+=+=+=+=+=+=+=+=+=+=+=+=+=+=+=+=+=+=+=피곤하군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4901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2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8 00:35 읽음:231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25) 그렇지만 그다지 오래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가 일직선으로만 다니든 그렇지 않든, 나를 공격할 의사가 있기만 하다면 어쨌든 약 30분 뒤에는 반드시 다시 온다. 나는 그 시간을 충분히 활용해서 준비를 해야 한다. 다시 기름 가게로 달려가 통을 굴렸다. 나무통 한 개가 내 허리 높이에 닿는다. 어디에 불을 붙일까 생각하다가, 문득 단순히 주위를밝히는 것 말고 좀더 다른 용도로 이 기름통들을 사용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가 정말 거리의 중심선을 따라 일직선으로만 다닌다면, 그건 내게 좋다. 훨씬 유리하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러면 그렇게하도록 만들어 주면 될 것 아냐! 나는 즉시 작업에 착수했다. 드디어 그 기사와 맞닥뜨린 뒤 처음으로, 계획다운 계획이 내 머릿속에 섰다. 그리고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역시, 나는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이런 계획에 더 소질이 있는 모양이다. 기름을 일단 뿌렸다. 통을 굴리며 거리에 기름을 뿌리되 기사가 다가올 방향에서부터 조금씩 좁아지도록, 그러니까 새의 부리처럼 삼각뿔 모양으로 기름을 넉넉히 뿌렸다. 먼지투성이 거리에 기름으로 그린 커다란 V자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선을 따라 몇 개의 기름통들을드문드문 놓았다. V자의 끝, 꼭지점으로 와서 나는 거기에 몇 개의 통을 쌓았다. 대강 말이 뛰어넘을 수 있는 정도의 높이로 쌓았다. 확실히 때는 여름이라 이 일을 하는 동안 이젠 온 몸에 기름과 피에 더하여 땀까지 범벅이 되었다. 준비를 다 끝내고 나자 목이 몹시 탔다. 어디, 물이 없을까. "휴우……." 한숨을 내쉬며, 기름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보았지만 어디로 가나 기름 뿐, 마실 만한 물이라고는 조금도 눈에 띄지 않았다. 유리카 옆에놓아두고 온 물주머니를 가지러 가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없다면 안 마시면 되지 뭘…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혹시나 하여 그옆의 집으로 들어가 보았다.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어……." 이상한 일이다. 새로 들어간 이 집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단지 현관 뿐, 그 안으로들어가자 텅 빈 나무벽만이 서 있고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아닌가. 탁자도 의자도, 심지어 먼지나 망가진 물건 같은 것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다시 한 번 두리번거렸다. 무엇을 하는 곳이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겉은 분명 그냥 사람 사는 집처럼 생겼는데, 네 벽 말고는 아무 것도, 심지어 방이 나누어져 있지조차 않다. 짓다가 만 집인가? 그렇지만… 밖에는……. 다시 밖으로 나온 내 눈에 글씨가 지워져 알아볼 수 없는 조그마한간판이 걸린 것이 보였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이 집 주인은 집을 비우고 나가기 전에, 집안의 벽을 모조리 허물어 버리고 가버렸단 건가? 그것도 있어야 할 벽난로와 가구들, 그 모든 것들을 깨끗이 치워버리고 말야?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나는 밖으로 다시 나왔다. 그러고나자 다시 그 옆의 다른 집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을 참을 길이없었다. 도대체 이 집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다시 움직인 발걸음이 문을 걷어차고 들어간 세 번째 집에서 나는 더욱 터무니없는 광경을 보았다. "……." 말이 나오지 않는 광경이었다. 이 집은 숫제 벽조차 없이 내가 들어간 그 곳이 그대로 뒤뜰이었던 것이다! 뒤뜰 가운데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나는 다시 내가 들어온 입구를 돌아보았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 집이 앞면의 벽하나밖에 없는 경우가 있나! 벽 하나를 통과하여 그대로 뒤뜰이라니, 아니 그러면, 도대체 저문만 달랑 달린 벽은 왜 만들어 놓은 거지? 장난 삼아 집을 만드는사람이 있나? 만들다 말았다 친다 해도, 일단 네 벽이 먼저 만들어져야지 한 벽만 자세히 만들고 그것도 지붕의 물매까지 달아 놓고서 나머지 세 벽은 없다고?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도대체 이벽이 이렇게 서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이 달린 이 벽 위에는, 밖에서 보는 사람만 고려한 것처럼 비스듬한 지붕이 달려 있었다. 즉, 완전히 균형을 무시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다. 일부러 나머지 부분을 부쉈대도 저런 모양을 하고 남아있을 수는 없다. "……." 나는 갑자기 이 도시가 전보다 몇 배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다가가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캄캄하다. 두레박은 있어서 일단 움직여 보았다. 마음속에선 빨리 이 집, 아니 이 이상한 벽 안쪽의 뒤뜰에서 나가야 한다고 외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또한 미칠 듯한 갈증을 해소하고 싶다는 욕구도 그만큼이나 강했다. 삐이걱……. 그리고 두레박이 떠올린 것은 어둠으로 도무지 색깔을 알아볼 수없는 물이었다. 물이긴 했다. 나는 또다시 마음속에서 싸웠다. 저 물을 마셔? 아냐, 마시면 무슨 일이 생길 지도 몰라! 죽을 수도 있는 일이고… 나는 아직 죽을 수는 없잖아? 유리카의 독을 고치지도 못했는데……. 결국 나는 두레박을 한쪽으로 내던지고,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애써 돌려 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크흠, 큼, 으흠, 큭……." 마른 목으로 무슨 목소리든 똑바로 나올 리 없었다. 이제 시간이없다. 불을 붙일 때다. 나는 기름 가게 안에서 발견했던 부시를 이용하여 V자의 두 가지중간쯤에 작은 불을 피웠다. 기름이 많으니 불을 붙이는 것은 쉬웠다. 덜 썩은 나무토막을 두 개 주워 불을 옮겨 붙일 수 있도록 기름을 먹여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귀를 기울이는 일뿐. 딸랑……. 그리고 그 순간은 오래지 않아 다가왔다.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나는 나무토막을 힘껏 움켜잡았다. 그리고 하나씩, 불이 붙는 즉시V자의 양쪽 가지 끝에 놓아두었던 뚜껑을 잘라낸 기름통을 향해 정확히 겨냥하여 힘껏 내던졌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피웠던 불을 대강발로 비벼 껐다. 화르르……. 나는 기름을 흠뻑 씌워 놓았던 통에서 불이 오르는 것을 보는 즉시V자의 꼭지점, 통이 여러 개 쌓여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차피 저 기사는 오다가 멈칫거리며 되돌아가지는 않는 놈이다. 내가 무슨 준비를 해 놓았더라도, 일단은 똑바로 달려든다. 그건 확실하다. 다른 이유가 아니고 단순히 성격 문제라 해도, 어쨌든 그건거의 틀리지 않을 것으로 나는 확신했다. 또 하나, 몇 번 오가는 동안 눈치챈 것들 가운데 또 하나는, 그 기사의 키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는 통 뒤에서 대강의 위치를 잡았다. 쉬이이……. 나를 도우려는 건가. 바람이 마침 내 쪽으로 불기 시작했다. 내가 붙인 불은 양쪽의 기름통 두 개에 완전히 옮아 붙고 나자, 점차 바닥의 기름에 옮겨 붙기 시작했다. 그 정도 시간이면 딱 맞았다. 그리고 내 귀를 때리는 말발굽 소리.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불이 번지는 속도와, 기사가 달려드는 속도는 정확한 차이를 두고맞아떨어졌다. 불은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두 줄로 시시각각 달려들고있다. 그래, 네가 정중앙을 향해 달리기 싫다 해도, 일단 주위가 불로 둘러싸인다면 끝까지 정면으로 달려오는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그 불의 띠는 점차 좁아지며 한가운데로 모아진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따각! 따각! 따각! 따각! 따각! +=+=+=+=+=+=+=+=+=+=+=+=+=+=+=+=+=+=+=+=+=+=+=+=+=+=+=+=+=+=+=책이 나왔습니다. .... 뭐라 말할 수 없는, 묘한 기분입니다. 책 표지에 쓰여진 제 이름을 보는 것도 그렇고, 오래 전에 제가 고심해서 지었던 책 제목도,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사진을 보는 것은더더욱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기억할 수 없는 시간들 속에서제 손으로 썼던 글들이, 이렇듯 인쇄되어 찍혀 있는 모습은 어찌 생각하면 두렵기까지 합니다. 저는 예전부터 바꿀 수 없는 것을 싫어했어요. 컴퓨터를 쓰기 전에는 노트에도 항상 연필이나 샤프펜슬로만 썼지요.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는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활자화된 글이란... 정말 그런 것보다 더더욱 바꿀 수 없는, 이제하나의 독자적인, 살아 있는 개체가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두려운 기분은... 이런 것이겠고요. 또는 책임과도 비슷할.. 그런 감정인 듯합니다. 잡담 길면 싫어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오늘은 조금 길게 써볼 생각입니다. 왠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자꾸 생각이 나서요. 내일이라도 책에 쓰여진 제 약력을 보시게 될 분들은 아시게 되겠지만.... 저,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얼마 전의 얘깁니다.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이란 언제든 오기 마련입니다. 네, 많은 분들이 직장과 글쓰기를 병행한다는 것에 대해 감탄하셨었죠. 그러나그게 출판과 맞물리게 되자... 써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요. 학교를다니면서 글쓰는 것조차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요. 저 직장을 그만두고 좀 울었습니다. 오래 다니지도 못한 직장이었고 사람들과도 이제 좀 정이 들려는 그런 때였었죠. 분명, 혼나고 싫은 소리 들어도 할말 없을 제 이기적인 결정에도 불구하고, 다들 따뜻한 말씀으로 쓴다는 글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근무시간을 쪼개어 밖으로 나와 차 한잔 나누면서 했던 얘기들도 있었고... 그날 직장을 나와서 버스를 타고 가면서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몰랐습니다.(버스 안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었죠..)그렇게 의욕적으로 시작했었던 한 가지 일을 그만두고, 삶에서 한가지 일을 접어버리고, 그렇게 시작한 새로운 일에 대해 애착만큼이나 부담이 생기는 것을 어쩔 수가 없더군요. 부족한 실력에 부끄러운 이야기지만....저는 이제 글쓰기를 제 직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 직장에서 일하는 만큼, 그보다더 많이 노력하고 애써서 좋은 글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다잡아먹곤 합니다. 좋은 사람들한테 피해 입혀 가며 시작한 제 일입니다. 근성을 가지고 끝까지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직, 글쓰기에 있어 첫 발자국, 저는 아직 어린 작가입니다... 그러나 이제 어리다는 것으로(나이 얘기가 아닙니다) 용서받을 수는 없는 때. 미숙한 스토리와 문장, 주제, 어느 것에도 변명이란 쓸데없습니다.... 솔직히, 집안에서 반대를 좀 했습니다. 어른들은 안정적인 직장을 좋아하시죠. 글쓴다는 것... 어쩌면 도박과도 같아보이는 그런 일에 직장을 그만둔다니, 찬성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 걸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겠느냐며 많이들 걱정하시더군요. 약속을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걸로 생계를 유지해 내겠다고요. ..... 우스운 일입니다만, 어렴풋하게만 구상해 왔던 차기작 이야기가 작가 약력을 쓰는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제 차기작에는 아직 제목이 없었습니다. 차기작... 쓰고 싶은 생각이 요즘 들어 부쩍 듭니다. 글이 종반으로 치닫는 작가들은 다 그런다고요? ^^;대충이란 이제 용서없습니다, 저 스스로부터요. 책을 사서 보시게될 어떤 한 분... 한 분이라 하더라도 저는 책임을 져야만 하겠지요. 그 분이 치른 돈에 맞는 글이 되도록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잘 될까요? 벌써부터 두렵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써내지 못하고서는 감히 직업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없는 거겠지요. 직업이란그래요. 한 사람의 100원을 얻었더라도, 그에 걸맞는 가치를 돌려드리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슬픈 일입니다만, 못쓴 글은 팔리고 안 팔리고를 떠나서 도태되는편이 스스로를 위해서나, 독자를 위해서나, 판타지 소설 전체의 미래를 위해서나 바람직합니다. 제 글이 그렇다면... 그렇게 되는 수밖에요. 작가라는 직업은 아무나 가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차기작이 존재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세월의 돌'로 제가 글을 써도 좋다는 인정을 받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이제, 평가를 기다릴 시간입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4902번제 목:◁세월의돌▷ 1권이 출간되었습니다... 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8 00:35 읽음:2139 관련자료 없음----------------------------------------------------------------------------- 지금 제 무릎 위에는 '세월의 돌 1권'이라고 쓰여진 책이 놓여져있습니다. .....무슨 기분일지 짐작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꽤예쁜 책이고, 안의 편집 상태 등도 죽 훑어보기엔 문제 없이 괜찮습니다. 녹색 표지에 흰 글씨, 노란 띠지. 그러니까... '전민희 판타지장편소설'이라는 노란 글자도 보이고요. 며칠 전부터 오늘 나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조금 두근거렸습니다, 처음으로요. 사실 출판 결정에서부터 많은 일들이 꿈결처럼, 영화 한 편 본 것처럼 흘러가 버린 듯해서 오늘이 오기까지 구체적인 실감은 하지 못했었어요. 그리고 이제 책을 손에 쥔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근질거림 같은 것이군요. 눈을 떼었다가도, 다시 고개 돌려 들여다보고싶고, 덮었다가도 다시 펼쳐보고 싶어집니다. 새로 산 남의 책 읽듯,처음부터 하나하나 정독하고도 싶습니다. 독자의 기분이 되어서... 책 보시는 분들, 꼭 제게 따가운 질책을 아끼지 말고 내려 주세요. 자세한 이야기는 9-1-25 말미에 적었으니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오늘 밤, 제대로 잘 수 있을까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4958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2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8 21:08 읽음:219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26) 여기! 이히히힝힝힝힝! 히히힝, 힝! 거대한 말의 울음소리, 그리고 검을 들고 도사리는 내 머리 위로……. 그렇지, 뛰어넘어! 다가닥, 닥, 이- 히히히히히힝! 통 뒤에서 검을 꺾어 잡고 기다리는 내 머리 위로 달려드는 거대한말의 배, 나는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온 힘을 다해 팔이 빠져라 검을대각선으로 휘둘러 베었다. 일어선 머리 위로 지나가려는 기사의 말, 그리고 그 몸을 두동강내려 거대하게 내리쳐지는 검, 그리고 그 순간의 불꽃. 츄와아아아악!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엄청난 양의 피. 찢어진 말의 배에서뿜어져 나오는 그것을 얼굴 가득 뒤집어쓰면서, 나는 왼쪽 어깻죽지에서 지독한 통증과 동시에 손목이 꺾어지는 듯한 고통을 맛보았다. 뒤이어 내 머리 위로 내리쳐지는 말의 뒷다리를 피하려, 내가 세워놓은 통들을 밀쳐 무너뜨리며 앞으로 뛰었다. 쿠당당탕탕탕! 순간적인 칼레시아드로 그대로 뼈째 반으로 잘라진 말의 몸이 쓰러지는 소리, 주위는 온통 불바다, 그리고 돌아선 내 눈에 보인 것은……. "하아, 후, 하아, 하……." 폭풍처럼 숨을 헐떡였다. 이미 V자의 꼭지점에 닿은 불꽃은 속력이붙어 내가 무너뜨린 기름통들에 순식간에 옮겨 붙었고, 마치 폭발하는 듯한 거대한 불기둥을 이루며 솟구치고 휘몰아쳤다. 내가 베어버린 말과 기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제대로 알아볼 겨를도 없이 나는 정신없이 몸을 돌려 거의 쓰러질 듯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쿠구르르르르……. 불은 타면서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졌다고 생각하자, 돌아서서 불타는 쪽을 바라보았다. 거리 한가운데가 온통 이글거리는 불바다다. 내가 기름통을 생각보다 많이 꺼냈던 모양이었다. 한쪽에선 폭발을 일으킨 기름통의 조각이 하늘로 튀어 올랐다가 떨어졌다. 벌겋게 밝혀진 어둠 가운데 검은 연기가 쉬지 않고무럭무럭 솟아올랐다. 이만큼이나 떨어져 있는 나조차도 그 고약한공기에 숨을 잠시 멈추어야 했다. 저 정도면… 저 안에서 죽지 않고 살아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거야. 아마도 말안장 안쪽까지 베었고, 그리고 이번엔 분명, 잘라지는느낌도 났어. 그리고 쏟아졌던 피. 죽었나……. 그 순간이었다. 딸랑……. 그 순간, 나는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경험했다. 검을 다시 움켜쥐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저 소리, 오늘 밤 내내 결코 잊을 수 없는 저 소리… 저 불구덩이 속에서 설마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내 간절한 예상을 엎고, 불 속에서 검은 막대기가 불쑥 솟았다. 랜스… 그리고 그 창은, 한쪽 옆으로 힘껏 내던져졌다. 다음으로 저벅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말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저 발소리……. 검은 갑옷의 그림자는 불 속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 할 말을 잃은 채 나는 검을 힘껏 잡았다. 이제 남은 것은 혈투, 말을 잃은 저 기사와 마지막 남은 결투뿐이다. 상처라고는 입지 않은 듯한 걸음, 랜스를 내던진 그는 검을 뽑아들고 있었고, 그리고, 그리고……. "으아아아아악!" 내 비명 소리 따위는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온 몸을 둔기로 힘껏강타당한 것처럼, 지독한 공포감에 나는 완전히 압도당했다. 저, 저기사, 저 기사는…… 어떻게 이, 이런… 믿…을 수… 없는 일이……. 기사는 머리가 없었다. "흐, 흐으흐, 흐흐, 하흐, 으흐흐흑……." 그제야 내가 그를 보았던 순간 까닭 없이 느꼈던 공포, 비인간적일만치 전율스러운 감정의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모습을똑바로 보지 못했었지만, 그때 내 본능은 그의 정체를 꿰뚫어보았던것이다. 이제 그가 보통보다 키가 작아 보였던 이유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아니, 사실 나는 그가 키가 작다기보다는 뭔가 비균형적인 몸을가지고 있다고 느꼈었다. 검은 망토와 갑옷 위로 목이 반쯤 솟아 있다. 머리가 없는 몸, 살아 있지 않은 몸, 그러나 걸어다니는 죽은 자……. 그가 불에 타지 않았던, 그리고 아까 내 검에 찔리지 않았던 이유도 이제 확실해졌다. 맹렬하게 타던 불은 기름을 거의 다 태우고 나자 이상스러울 만큼빠르게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주위는 처음의 붉은 안개로 눅눅하게가라앉아 있었고, 이것이 불을 오래 타지 못하게 하는 원인인 듯한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목 없는 기사는 내 앞으로 다가와 우뚝 섰다. "……." 저절로 이가 딱딱 부딪치는 기분을 처음으로 느껴 보고 있다. 눈앞에 목이 없는 자가 서서 나를 바라보는 느낌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악령의 노예들과 맞닥뜨렸을 때에도 이런기분은 아니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과 마주하고 있는 기분, 저승의 문 앞에 서서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문득 드는 이상한 생각이 있었다. 저 자는 어디로 소리를 듣고 사물을 보지? 그러고 보니 문 밖에서소리를 질렀었잖아? 그런데 입이 없는데 어떻게 소리를 질렀던 거야? 그러나 그는 이제 소리지르는 방법 같은 것은 잊어버린 듯, 한 마디 소리도 내지 않고 그대로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헉, 흐윽, 헉……." 역시 그대로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베어도 베어지지 않는 몸, 찔러도 상처가 나지 않는 몸, 어떻게 공격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치 몽둥이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약간 몸을 휘청일 뿐, 그 줄어들지도 않는 힘으로 다시 무지막지하게 공격해 왔다. 목 없는 그 기사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고, 내리쳐져 오는 그검의 힘과 반비례하여 내 팔에선 점차 힘이 빠져 갔다. +=+=+=+=+=+=+=+=+=+=+=+=+=+=+=+=+=+=+=+=+=+=+=+=+=+=+=+=+=+=+=동아일보 전면광고, 보았답니다. ^^;... 이건 또 뭐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책 표지를 본 기분과는 또달랐습니다. 저보다는 부모님께서 즐거워하시네요.. ^^책 사보신 분들.... 전 거기 나온 사진과는 좀 많이 다르게 생겼답니다. ^^; 지금 출판사에서도 전부들 사진을 바꿔야 된다고 난리네요. 제가 보기에도...으음..^^;종로 서적에 아직 책이 없다고, 한 독자분의 항의 어린 말씀이.. ^^; 또 영풍 문고에는 있다던걸요? 이떻게 된 걸까...참, 대여점에서세월의 돌 보신 분 계세요? 출판 축하, 그리고 직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에 대한 격려 메일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많은 분들의 솔직한 메일 덕택에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큰 힘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주시는 분들 덕택에 많이 행복합니다... 정말입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4959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2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8 21:08 읽음:225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27) 꺼져 가는 불씨들과 아직도 군데군데 남은 불들이 어둠 속에서 짐승 떼의 눈동자처럼 깜빡이며 탔다. 붉은 안개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차가운 별들, 눈꺼풀을 내리누르고 팔다리를 점점 처지게 하는 새벽녘의 극심한 피로와, 문득문득 고개를 들 때마다 오히려 내 목을꽉 메이게 하는 그 솟아난 목 위의 텅 빈 허공. 도저히 익숙해질 수없는 광경들. 이길… 수… 있을까……. 챙! 창! 챙! 끊이지 않는 금속성의 파열음이 절망적으로 사방을 울린다. 부딪쳐오는 검을 쳐내고, 다시 쳐내고, 또 쳐낸다. 그 말고는 무엇도 할 수있는 일이 없다. 기회를 보아 찔러도, 힘껏 베기를 시도해도, 내게남는 것은 자초한 위기가 남기는 온갖 상처들 뿐. 정적, 바다 밑처럼 가득한 정적. 내 몸은 그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유리카……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가만히 잠들어 있겠지… 아직은 끊이지 않는 꿈을 꾸며, 그 속에서 너의 길지 않은 남은 생명을 헤아리고있을 테지……. 푸욱! 목 없는 기사의 검이 다시 내 가슴 아래쪽을 비껴 찌르고, 나는 상처를 감싸쥘 여유도 없이 비틀거렸다. 갑옷이 어느 정도 막아 주기는했지만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피… 비척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다시 검으로 앞을 막았다. 이 기사의 솜씨가 그렇게까지 뛰어나지않은 것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다. 그가 최소한 구원 기사단의 츠칠헨만큼만 실력이 있었다 해도, 아니 하다못해 하르얀만큼만 있었다 해도,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죽고 나면, 이 기사는 무슨 말을 타고 다닐까? 그 말은 살아 있는 동물이었나? 내 검으로 베어진 것을 생각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트컥! 다시 기사의 검이 내 어깨를 노렸고, 간신히 피했지만 다시 팔을드는 순간 오른쪽 어깨뼈가 심하게 결렸다. 순간적으로 심하게 떨며검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목 없는 기사는 그 순간을 노려 내 손을 내리치려 들었다. 눈앞으로 내밀어진 검끝이 보인다. 그것을 보고있는데 이상하게 내 머릿속에선 반사적으로 피하는 것보다는 어떤 생각이 먼저 일어났다. 이렇게… 이런 것은 아닌데……. 나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는 아냐, 내겐아직 할 일이 있잖아. 나…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크그그그그그극! 내가 들어올린 검의 힐트와 맞닿아, 기사의 검에서 긴 마찰음이 일었다. 그 귀에 거슬리는 굉음이 문득 내게 정신을 되찾아 주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이 기사에게 실제가 아니라 환각 속에서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츠캉! 목 없는 기사는 여전히 말이 없다. 집안에서만 말을 할 수 있나? 집 안에 머리를 두고 다니기라도 하는 건가? 집…안에 두고 다니는 머리? 트드드득! 나는 다시 약간 정신을 되찾아 힘껏 기사의 가슴을 찔렀지만 마찬가지, 갑옷을 약간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그래, 갑옷은긁히고 있어. 그 안에 비록 몸은 없지만, 그 자의 의지는 그가 입은갑옷과 무기, 그리고 말을 움직이도록 하는 거야. 그렇지만 그 역시확실한 실체는 아니야. 말을 벤 것은 칼레시아드의 힘이고, 지금 저갑옷과 약간이나마 마찰되는 것도 아마 그렇다. 이 죽은 기사를 움직이는 것은 마치 마법과도 비슷한… 역시 악령의 힘인가? 그렇다면, 그의 머리는? "하아아압!" 다행히 물리적 충격은 가해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달려들어 힘껏 그 기사에게 부딪쳤다. 목 없는기사는 휘청이더니 뒤로 몇 걸음 물러났고, 그 순간 나는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실행에 옮겨 보기 위해 몸을 빼어 유리카를 재워놓은 저택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결코 빨리 달리지 못했다. 다리에도 상처를 입었고, 온 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터라, 그리고 극심한 피로로 무거워진 몸으로는기껏 걷는 것보다 조금 빨리 갈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 뒤에서 기사는………나를 따라오고 있다. "후우, 후, 하아, 하……." 마지막 가능성마저 시험해보지 못한다면 해가 뜨기 전에 이 미망의도시에 쓰러지는 수밖에 없어. 발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가서, 마지막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어볼거야. 아마도 위험하겠지. 유리카가 거기에 있으니까… 어쩌면 함께 모든것이 끝나는 거야, 적어도 나만을 남겨두지는 않은 채… 내 주위에가득찬 수많은 가능성들, 그 중에서도 둘 다 사는 것에 거는, 그 중에서도 가능성 최저의 마지막 도박! 간다! 철컥, 철커덕, 철컥, 츠르륵-내 뒤를 따라오는 기사의 갑옷이 덜그럭대는 소리. 그는 다치지도않았을 텐데 결코 뛰어와 나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이미 내 마지막 운명을 알고 있다는 듯, 또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소용없는 것이라는 걸 아는 듯, 그도 아니면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다른판단력은 없는 것처럼 그렇게, 저벅이며 걷고 또 걷는다. 시야를 가득 메운 붉은 안개와 다가오지 않는 새벽, 이 마을은 온통 붉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거리를 오가며 질주하던 저 기사, 그가 기다리는 것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비척거리다가 바닥에 넘어져 구른다. 다시 일어난다. 무릎을짚고 다리를 의족처럼 움직인다.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다시 떼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서두른다. 그는 무엇을 잃어버렸던 걸까. 무엇을 찾고 있을까. 철컥, 철커덕, 철컥……. 쉽게 끝나지 않을, 느릿하고 우스운 쫓고 쫓김이 계속된다. 공포보다는 마지막 가능성을 붙잡는 간절함으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끌며미친 듯 나아가는 나와, 마치 내 걸음에 보조라도 맞추는 것처럼 천천히, 그렇게 천천히 따라오는 목 없는 기사. 싸늘한 밤, 어느 한 조각.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듯한 곳, 일직선의 미로를 끝없이 헤매이는기분. 이제 유리카가 있는 집이 보인다……. 막대기처럼 잘 구부러지지도 않는 다리로 몇 번이고 넘어질 듯 휘청이면서 도착한 문. 쓰러질 듯 그 문에 기대면서 나는 고개를 들어문 위에 그려진 문장 비슷한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내 머리통 만한사자의 얼굴 조각이 불쑥 튀어나와 있다. 내 몸의 무게가 실리자 문은 안쪽으로 열렸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한층 캄캄해지는 시야. 그러나……. 문간을 비추는 희미한 불빛……고요한 돌 복도를 울리는 내 발소리, 내 눈에는 유리카가 누운 방문에서 새어나오는 조그마한 오렌지빛 불빛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않는다. 목으로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입맛 더러운 물을 뱉어내지도 못하고, 나는 곧 다가올 기사의 발걸음을 기다리며 응접실로 들어갔다. 어디선가 희미한 빛… 말을 베던 때 이후로 처음으로 여명검에서희미한 붉은 빛이 나기 시작한다. 달구어진 쇠처럼, 발그레하게 달아오르고 있다. 뭘까… 어쩌면 이 검은 내 마음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처럼도 느껴져. 내 의지의 굳고 약함에 따라, 그 의지가 어느 만큼의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어쩌면 나보다도내 상태를 더 잘 아는 듯한 검. 마치, 유리카가 설명해 준 마법의 원리와도 비슷한 그것. "필요할 때야……." 나는 응접실 한가운데의 탁자를 힘껏 밀어붙여 유리카가 있는 통로를 막았다. 그런 다음, 서재가 있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흐윽……." 나는 넘어졌다. 비척이며 다시 반쯤 몸을 일으킨다. 한쪽 무릎이말을 듣지 않는다. 도저히 다리를 바닥에 세울 수가 없다. "……." +=+=+=+=+=+=+=+=+=+=+=+=+=+=+=+=+=+=+=+=+=+=+=+=+=+=+=+=+=+=+=세월의 돌 독자분들을 초청하는 조촐한 모임이 있습니다. ^^;나우누리 sf&fantasy 게시판에 오시는 분들은 이미 환타지 동호회에서 올린 공지를 보셨겠지만, 날짜는 이번 주 일요일(10월 31일)이고, 주최는 나우누리 환타지 동호회 '환타지아'입니다. 정기 모임 자리에 겸하여 출판을 기념한 '작가와의 만남'(왠지 거창...;;;) 형식의 이벤트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별것도 아닌 글쟁이를 첫 이벤트 작가로 불러 주시는 나우누리 환동 여러분한테 정말 감사드립니다. 행사 내용은- 작가와의 대화...라고 하지만 아마 잡담이 되겠고요(^^;), 질의 응답 자리...라고 하지만 역시 서로 묻고 서로 대답하는...(^^;), 그리고 거기다가 싸인회!...라고는 하지만 과연 책에 제싸인을 받아가고 싶어하는 분이 계실는지는...;;; (혹시 있으시다면열심히 싸인 연습이라도 해 보련만...) 어쨌든간에 책을 가져 오시면싸인은 해 드립니다.. ^^;;;물론, 나우누리 환타지동호회 회원이 아니신 분들도 이번 이벤트에는 얼마든지 참여해 주시기 바란다고 합니다. 시간은 3시고, 장소는신촌의 복지커피숍입니다. 2호선 신촌 전철역 3번 출구로 나오셔서홍익문고가 있는 큰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시면 오른쪽에 있습니다. 약도가 나우누리에는 올라가 있는데, 다른 통신망에는 없군요. 타통신망에서 참여하는 것도 언제나 환영합니다. 꼭 오시고 싶은데 저간단한 설명으로는 길을 못찾겠다! 하시는 분은 제게 메일을 남겨 주시면 약도를 갈무리해서 보내 드리지요...^^;;그럼, 그날 반가운 분들 얼굴을 많이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080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2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9 22:50 읽음:213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28) 기울어진 상태로 벽을 짚고 간신히 상체를 세웠다. 돌로 된 벽은깜짝 놀랄 만큼 차갑게 식어 있다. 어깨를 벽에 대고 한쪽 다리로만서서히 일어나는 동안 뭔가가 팔에 걸린다. 램프를 얹어 놓는 받침대, 그것을 부여잡고 애써 다시 걸음을 옮겨놓았다. 저기까지만, 조금만 더 가면 돼. 그러나 나는 방문까지 닿기도 전에 또 넘어졌다. 나 자신이 한심하고 이 상황이 너무도 안타까워 미칠 듯했다. 검을잡고는 애써 앞으로 내밀어 문을 밀쳐 열었다. 캄캄한 서재가 괴물처럼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두 걸음 밖 복도에 쓰러진 내몸은 나무토막처럼 굳어진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아무리 애를 써도완전히 맥이 풀린 팔다리는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흐윽, 큭……." 내 몸, 내 발, 내 손가락… 18년을 같이했던 이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기능이 정지해버린 것처럼 멋대로 꿈틀거릴 뿐, 제대로 된 움직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애써 팔꿈치로 벽을 밀치며 한 발짝 앞으로나가는 동안 튀어나온 돌 모서리에 걸려 허벅지 쪽이 심하게 찢어졌다. 고통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다시……. 분한 나머지 눈물이 흘러내린다. 뺨을 온통 적시고 바닥 한구석이흥건해지도록 눈물이 흐른다. 왜… 마지막 순간,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 거야……? 그 순간, 저 밖에서 나무문이 한 차례 커다랗게 삐걱이는 소리가내 귀를 뚫고 들어왔다. "!" 왔어……! 나는 미친 듯 온 몸을 버르적거렸다. 아무 데도 묶여 있지 않은데,마치 몸을 속박하는 사슬을 끊어내려는 것처럼 그렇게 정신없이 몸을뒤틀었다. 엄습하는 공포와 동시에 절망스러운 심정, 나 자신에 대한실망과 배신감, 움직이지 않는 몸에 대한 분노……. 저벅. 저벅. 철커덕. 철컥……. 귓가를 때리는 발자국 소리. 다가오고 있어. 다가오고 있어. 이렇게… 이렇게는 아니야……. 내겐, 지켜야 할 약속들이 있잖아… 유리카를 데리고 돌아가겠노라고 한 약속, 엘다렌에게 아룬드나얀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 언젠가돌아가 아버지를 돕기로 한 일, 어머니에게 무덤을 돌보러 되돌아오겠다고 이야기한 것… 어느 하나 지키지 못하고 이렇게 동떨어진 시간 속에서 사라질 수 있어? 너는, 이 모든 부당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테냐? 드디어, 바로 내가 있는 곳까지 다가온 발소리. 저벅… 철컥. 그리고, 흐릿해지려던 내 눈에 보인 것은 내 손에 쥐어진 검에서솟아 나온 엄청난, 마치 폭발과도 같은 불꽃의 발화였다. 저것은… 저것이 내 안에 있는 것? 다음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벌떡일어나 서재 안으로 뛰어들었다. 탁자에 부딪치고, 손을 내젓고, 원하는 물건을 찾아내고, 그리고……. "너 역시, 네 기억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나는 힘껏 불타오르는 검을 높이 쳐들었고, 그대로 검은 투구의 이마를 똑바로 내리쳤다. 쩡! 그 순간, 투구는 온 집이 울리도록 괴기스러운 비명을 올렸다. [크그그아아아아아아!]귀를 감싸쥘 사이도 없는, 온갖 저주와 고통과 기억의 무게로 눌린영혼이 마지막으로 외치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것 같은 찢어지고 갈라진 목소리가 서재를 채우고 내 머릿속을 채우고 마지막으로 버티던 정신을 앗아갔다. 나는 그대로 몸을 더 가누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뭔가 둔탁한 무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 온 몸 가닥가닥이 뜯겨져 나가는 듯한 느낌, 여기저기 뭔가가 떨어지고 구르는 듯한 소리… 그러나 이미 더 이상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혼미해지고, 시야가 흐려졌다. 머릿속에 커다란 휘장이 내려진 듯하다. 아주 새카만, 그리고 묵직한 휘장……. 끼르륵, 끼룩. 어디선가 새가 운다. 아마도 황금새 소리 같다. 새는 높은 곳에서울다가 곧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푸드덕대며 멀어지는 날갯짓 소리, 여름. 눈꺼풀이 노곤하다. 뭔가 따뜻한 것이 눈꺼풀을 가득히 덮고 있다. 잘 떠질 것 같지 않은 눈이지만 이러고 있으니 다시 잠을 자버릴 것만 같아. 주위가 몹시 밝다. 그런데 바닥은 굉장히 딱딱해, 차갑고. 게다가몸이 여기저기 쑤시는 것이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내가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누워 있게 됐더라? 으흠, 이건 무슨 냄새……. 눈을 뜨지 못한 채 천천히 상체만 일으켰다. 한쪽 팔꿈치로 바닥을짚었더니 정말 무지하게, 눈물나게 아프다. 아이쿠, 여기 무슨 상처라도 났나? 손을 들어 눈을 비비려는데 뭔가 몸에서 스르르 떨어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흠칫하여 일단 잡고 보니……. 내 망토? "유리카?" 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한 마디에, 어이없게도 갑자기 정신이들었다. 망토가 내 어깨까지 덮여 있다가 흘러내려 무릎께에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따가운 햇살, 그리고 저기 앉아 있는 것은……. "내 꿈이라도 꾸었어?" 그리고 나는 순간,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주위를 다시 두리번거렸다. 파랗게 갠 하늘과 높이 뜬 구름, 주위의여름풀들과 숲과 나무들. 한쪽에 놓여 있는 짐들, 그리고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가… 날 옮겨 놓았니?" "아니?" 유리카는 내게서 조금 떨어진 곳의 풀 더미 위에 앉아 있다. 안색은 창백하지만, 그럭저럭 문제는 없어 보였다. "야, 그럼 내가 처음부터 여기에 있더란 말야?" "뭐 잘못되기라도 했어?" 유리카의 옷과 머리에는 마른풀들이 조금 묻어 있다. 내가 뭐라고더 묻지도 못하고 다시 하늘도 쳐다보고 땅도 바라보고 하고 있으려니, 유리카가 내 기색이 이상하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천천히 몸을일으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물었다. "네가 깼을 때에도, 우리가 여기 있었어?" +=+=+=+=+=+=+=+=+=+=+=+=+=+=+=+=+=+=+=+=+=+=+=+=+=+=+=+=+=+=+=일간 스포츠에 광고가 실렸더군요.... 색깔이 들어가서 좀더 예뻐요. ^^계속해서 출판 축하 보내주시는 분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책이나왔다는 것만큼이나 축하해 주시는 분들 때문에 굉장히 기뻐요. 게시판에 출판 축하 써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과분한말씀들이 많아서... ^^;두키 님, 보내 주신 자료집 멋지던걸요? ^^ 빛그림에도 조만간 다시 돌아가야죠. 정상도 다시 가보고...(필로우 북이라면 저도 보고싶었던 영화인데..^^;)채널 아이 독자분들 몇 분이서 일요일 이벤트에 오신다고요? 물론환영합니다. ^^ (혹시 약도 필요하세요?)나우누리 환타지 동호회에서 이번 일요일 행사 예상 인원을 점검중이래요. '나 꼭 갈래~' 하시는 분들은 nowfan이나 nowfan2 아이디로간단한 메일을 남겨주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081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2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29 22:51 읽음:216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29) 유리카는 그야말로 내가 뭘 묻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깨 보니까 난 저기, 풀더미 위에 누워 있었는데? 네가 눕힌 것 아니야? 망토도 덮어져 있었고… 내가 깨서 네가 맨바닥에 그냥 누워있는 걸 보고 저 망토를 다시 덮어 준 거야." 나는 망토를 들어보았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망토는 내가 덮어 준 것이 맞는데……." 좋은 날씨다. 내가 무슨 일을 겪었던가 의심될 정도로. 정말로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 건가? 나, 그냥 꿈꾸었던 건가? "배고프다." 유리카는 배낭을 끌어오더니 내 앞으로 와 앉았다. 내 배낭은 이제극도로 쇠약해진 그녀가 들기에는 지나치게 무겁다. 유리카는 숨을몰아쉰 다음 생긋 웃더니 배낭을 열고 몇 가지를 끄집어냈다. 뭐 꺼낼 것이라고 해봐야 눅눅해져서 먹을 수 있을지 의심되는 비스킷, 그냥 씹기엔 좋지만 식사로는 아무래도 적당치 않다고 생각되는 말린고기, 아직은 단맛도 있고 그럭저럭 괜찮은 말린 복숭아 같은 것들뿐이다. 뭔가 식사다운 것을 좀 먹었으면 원이 없겠는데. 뭐 재료가 있어야 뭘 만들든 말든 하지. "물이라도 떠와야지."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큭……" 온 몸의 관절과 근육이 갑자기 한꺼번에 끊어질 듯 비명을 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내 입도 동지들과 함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크으으아악!" "왜 그래, 파비안!" 그리고, 그제야 나는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환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목 없는 기사의 성, 무너져 가는 마을, 텅 빈 거리 양쪽에 늘어선다 썩은 집들, 인적은커녕, 생명이라고는 쥐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던 그곳. 그런데… 그 모든 것은 다 어디로 간 거지? 정말 의아한 일이다. 내 옷에 묻었던 기름조차 한 방울도 남아있지않았다. 온 몸은 여전히 아프고 상처들도 그대로 있는데, 마치 혼자미쳐서 뛰어다니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공격했던 것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물은 내가 떠올게." 유리카가 일어서더니 거의 비어 있는 물주머니를 집어들고 가까운곳에서 들리는 물소리를 향해 덤불 속으로 사라졌다. 정오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시원한 물에 몸과 상처를 좀 씻어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 몸으로 다시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내가 애써 통증을 참고는 몸을 뒤척이며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고악전 고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주위에서는 풀벌레들이 한가로운 날개 소리를 울렸다. 이럴수록 더욱 어제 내가 겪었던 일과 지금의 현실 사이에 괴리감은 더해만 갔다. 마치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뻔뻔스럽게 시치미라도 떼는 것 같아 억울한 생각까지 들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냔 말야. 실컷죽어라 싸워서 이겼는데,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쓰러뜨렸던 적도 사라졌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하다못해 혼자서 비장하게 마지막으로 텅 빈 마을과 집을 돌아보는 폼조차 잡아보지 못하다니. 하긴… 지금 이 몸으론 성과 마을이 그대로 있대도 돌아볼 입장이아니다……. "크윽, 큼, 으흐으……." 유리카가 없는 동안 혼자 온갖 소리를 내가며 몸을 튼 다음, 상처들을 점검해 보았다. 죽을 만한 상처는 다행히 없는 듯했다. 내가 잘몰라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이상하게 근육이 굳어져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 것 말고는, 그리고 지독하게 피곤하며 피를 많이 흘렸다는것 외에는, 온 몸이 타박상과 관절 이상 투성이라는 것을 제하면, 그럭저럭 멀쩡한 듯했다. 말해놓고 보니 다시금 나는 역시 심각한 환자라는 생각에 점수를주는 편이 나을 듯했다. 몸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저절로 비명도 튀어나와 실감을 더해주지 않느냔 말야. "아이쿠야……." 정말 대책 없고, 어디 가서 대꾸할 말조차 없는 상처들이군. 나는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생각했다. 그러니까 남아 있는 것과 사라져 버린 것들을 하나씩 생각해 보았다. 나를 공격했던 그 기사… 기름통에 붙었던 엄청난 불꽃 속에서도아무 탈없이 걸어나오고 내가 미친 듯 휘두르는 검에도 상처 하나 입지 않던 기사는… 내가 마지막으로 투구를 쪼개니까 사라져… 아니,정말 사라졌었나? 그러고 보니 사라진 장면을 본 기억은 없는데? 그런데 그러고 있는 내 눈에 저만치 풀숲 사이로 이상한 것이 띄었다. 으음? 조금씩 말을 듣기 시작한 몸을 애써 질질 끌고 그다지 멀지 않은풀더미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뭔가 시커먼 조각들, 손으로 집어들고보니 낡은 쇳조각이다.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 녹이 슬대로 슬고 엉망진창으로 부식되어 엉성한 쇳조각들이다. 그런 것들이 몇 개나 더흩어져 있었다. 본래는 무슨 한 개의 물건이었나 보지? "파비안, 물 좀 마셔." 유리카가 돌아오더니 내가 움직여 간 모양새를 보고는 픽 웃어버렸다. 너도 내 상황을 자세히 안다면 결코 그렇게 웃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사정을 모르니까. 나는 유리카가 가져다 준 물을 몇 모금 들이켰다. 세상이 다시금 맑아 보이는 느낌이었다. "뭐니,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너무 많이 부식된 쇠라서 조각들을 맞춰 본대도 그게 본래 뭐였는지 알아내는 일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쇳조각을 내버려두고 유리카와 나는 물과 건량만으로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그녀나 나나 무슨 다른 식사를 준비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유리카는 단단한 말린 음식들을 씹느라 약간 고생하면서 내게 물었다.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있었지. 아주 엄청난 일들이 있었고 말고. 다 설명한대도 아마 반도 이해하지 못할 거다. 지금까지도 죽음이 가까이 온 일이 몇 번 있었지만, 이번만큼이나 절망적인 기분을 느껴본 일은 거의 없었다. 그텅 빈 마을의 미로 같은, 정확히는 일직선의 미로를 걷는 기분. 단층으로 된, 작고 싸늘한 기사의 성. 대답하지 않는 네게 계속해서 말을걸며 걸었고, 차가운 서재에서 읽었던 죽음에 관한 이상한 책과 침실에 걸린 귀부인의 낡은 초상화, 기름통을 운반하고 불을 붙이며, 다치지 않는 불사신에게 죽을힘을 다해 휘청이는 팔로 검을 휘두르던기분 같은 것들을. "아아, 뭐 별로." 결국 나는 이렇게 대꾸하고야 말았다. 그래도 여전히 흘끔흘끔 이상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는 유리카에게 그저 바보스러운 미소나 지어주면서 말이다. 시간이 지나자 그럭저럭 몸은 조금씩 풀렸고, 온통 땀과 피로 범벅된 지저분한 옷만 아니라면 상황은 많이 괜찮아졌다. 배낭을 다시 꾸렸다. 그런데 이걸 메는 일이 가능할까? "으랏차… 으윽!" 내가 쓰러질 듯 휘청이자 유리카가 깜짝 놀라 내 팔을 잡으려 들었지만 사실 그녀가 잡는다고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힘주어 배낭을 어깨에 걸었다. 어찌되었든 대강이라도 자세가 잡히고나니 모든 일이 한결 나아졌다. 가만히 누워있으려 했다면 오늘 하루종일이라도 모자랐을 텐데, 지금은 그러고 있을 때는 아니니까. 움직여야 할 때에는, 움직이게 되는 법이지. 그런데 몇 걸음 옮기는 순간, 내 눈은 또다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서점에 책이 없으면요, 음.... 갖다 달라고 우기세요.. ^^;(서점에 없어요~ 라고 말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네요. ^^;; 지방에까지는 그렇게 빨리 안들어가나봐요...)저...그리고 자꾸 글 모음집 보내 달라는 메일 보내시지 마세요. ^^;;;이제 400회가 얼마 안 남았네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163번제 목:◁세월의돌▷ 9-1. 미망의 나라 (30)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30 21:07 읽음:208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1. 미망의 나라 (30) 도대체 저게 뭐야? 저만치 풀밭 위에 시커먼 옷조각 같은 것들이 마치 갈기갈기 찢어내던진 것처럼 섬뜩한 모양새로 널려 있는 것이 보였다. "뭐지?" 다가가서 집어들어 보니 옷이 아니라 철판 조각들이다. 그런데 그모양이라는 것이, 가벼운 체인 갑옷이 많이 나온 후로 요즘엔 그다지쓰이지 않는 철판 갑옷의 앞판처럼 생겼다. 옆에 것들도 들쳐 보았다. 이건 정강이받이처럼 생겼네? 그런데 모조리 엄청나게 녹이 슬고 낡아 있었다. 몇 년 정도도 아니고 아예 몇십 년, 몇백 년 정도는 이대로 풀밭에 버려 놓았던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정말 그렇다면, 흙으로 반쯤 덮여 있다거나, 뭐 그래야 되잖아? 그렇지만 이건 방금 누가 소풍 끝내고 버려놓고 간 것처럼 기껏해야 잔디나 짓이기고 있을 뿐인데? 그러는 내 눈에 드디어 매우 익숙한 물건이 하나 보였다. "…검?" 정말이었다. 닳아빠진 장검, 이가 몽땅 빠지고 손잡이도 차마 손을댈 수 없을 정도로 누렇게 삭은 검이 하나 팽개쳐져 있었다. 나는 그걸 손에 든 채 한참이나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완벽해졌다. "……." "일부러 이런 이상한 것들이 있는 데 자리를 잡은 거니?" 유리카는 내가 자기를 재운 곳이 저 풀더미 위라고 아직도 철썩 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다. 쉽게 해명해 줄 길도 없었고, 나는 낡은 철검을 손에 잡은 채 망연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아까 저쪽에서 발견한철조각들의 정체도 이제 알 것 같다. 그건, 내가 부쉈던 기사의 투구였다. 그래… 바로 여기가 그 성이 있던 자리였던 거야. 유리카가 누워있던 저 자리, 기사가 쓰러진 곳, 투구가 떨어져 있던 곳, 내가 누워있던 자리, 거리 상으로 정확히 맞는다. 그럼… 그 성과 마을, 모든 것은 환각이었나? "사라져 버렸어……." 내가 투구를 부수는 순간, 그것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어. 본래부터존재하지 않았던 것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다시 현실의 숲으로되돌려진 거야. 그러면 그 모든 것들은 전부 목 없는 기사가 만들어낸 것인가? 그 기사의 기억 속에 나는 들어가 있었던 건가? "뭐가 사라졌는데?" 기억 속에 멈춰진 세계. 그제야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입구뿐이고 뒷벽은 없던 집, 그건아마 기사의 기억이 닿지 못한 부분이었겠지. 자신의 영지와 성, 집들을 기억으로 만들어 냈지만, 그가 보지 못한 부분은 충분히 있을수 있었을 거야. 그리고 그런 것들은 그대로 무(無)의 상태로 그 기억의 세상 안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의 기억 속, 나는 그대로 머무르고 싶은 한 기억 속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던 그를 만났고, 그속에서 그와 대결을 벌였던 거야. 그 기사는… 무엇을 그렇게 기억하고 싶었던 걸까. "잠깐만, 기다려봐." 나는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기사가 남긴 잔해들을 주워 모았다. 투구 조각들과 갑옷, 검, 정강이받이, 건틀렛으로 보이는 모든 철조각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 그러다 보니 문득, 그가 랜스를 들고 있었던 것에 생각이 미쳤다. 위치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려웠지만, 한참이나 돌아다닌 끝에, 나는 철로 된 낡아빠진 마구(馬具)들을 발견했고 그 한쪽 옆에 던져져 있는 녹슨 기다란 랜스,아니 철막대를 찾아냈다. 랜스 끝에 붙어 있어야 할 날카로운 창날은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비지땀을 흘리며 옮겼던 기름통들과 거기에 붙였던 불, 내가뒤집어썼던 말의 피, 그 모든 것들도 다 환상이었다니. 하긴… 그러니까 그가 불속에서도 전혀 타지 않은 채, 그대로 걸어나올수 있었던거겠지.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기억인데, 내가 그에게 무슨 상처를 입힐 수 있었겠어.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영혼이자, 실체로서 몸조차 갖고 있지 않았던 그에게. 나는 기껏해야 걸어다니는 갑옷과 싸웠던 거야. 나는 랜스도 들어서 그 곳으로 옮기려 했다. 그런데 나를 따라온유리카가 문득 허리를 굽히며 뭔가를 주웠다. "뭐야?" 그녀가 햇살 가운데 불쑥 쳐든 것은, 찬란하게 번쩍거리는 황금 방울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나는 대번에 알아보았다. 아, 그 딸랑거리는 소리! 그런데… 왜 이 방울은 낡지 않고 깨끗한 그대로인 거지? 유리카는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그 방울을 살펴보았다. "…이거, 예사 물건이 아닌 것 같은데?" "예사 물건이 아니라니?" 그녀는 방울을 흔들어 보았다. 딸랑, 딸랑… 어젯밤처럼 섬뜩하지는 않은 맑은 소리가 숲속으로 울려 퍼졌다. 마치 방울새의 울음소리처럼 듣기 좋은 소리다. 왜 어젠 그렇게나 끔찍하게 들렸던 거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단정적으로 말했다. "마법 걸린 물건이야." "마법? 무슨 마법?" 유리카는 방울을, 나는 낡은 랜스를 든 채 우리는 본래의 자리로돌아왔다. 나는 모아진 기사의 유품들을 비탈 쪽에 움푹 패여 흙이 드러난 곳으로 가져가 쌓아 놓았다. 그런 다음 손과 단검으로 주위의 흙과 자갈을 파내어 그것들을 대강 덮었다. 그러는 내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비록 영문은 몰랐지만 내가 어떤 일을 하려는 것인지 대강 눈치챈 듯했다. 죽음에 관련된 일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으로 나섰다. "그 뒤는 내게 맡겨 줘." 유리카는 내 배낭에 함께 넣어 둔 그녀의 물건들 속에서 작은 보석한 개를 끄집어냈다. 손톱 끝만한 노란 보석, 마치 고향에서 류지아가 헤렐을 불러 점을 칠 때 사용했던 그런 보석처럼 보였다. 그녀는그것을 흙더미 위에 얹어 놓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별다른 주문 같은 것은 없었다. 잠시 후 그녀의 손과 흙더미 속 물건들 사이로 희미한 빛 같은 것이 비치기 시작했고, 유리카는 입 속으로 뭔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들리진 않았지만, 들렸다 해도 내가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잠시 후에 눈을 떴고, 빛도 사라졌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오래된 기억은, 넘겨진 페이지로." 아무리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라 해도, 그것이 영혼을 속박하고 떠나지 못하게 한다면 깨끗이 지워지는 편이 오히려 나아. 그의 기억은, 멈춰진 기억 속의 세상은 사라졌을까. 영원히 사라졌을까. "가자." 나는 배낭을 집어들었고, 우리는 손을 잡은 채 그 자리를 떠났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 방울은 환각을 부르거나 강화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아. 듣는 사람에게 최면을 걸기도 하고." 그녀의 말에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정말 정확하잖아. 어제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이 바로 그거였어. 어떤 귀신도 영혼도 없는 평온한 숲길을 우리는 나란히 걷고 있다. 조금 걷다 보면 숲이 끝날 것처럼 나무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유리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눈을 가늘게 떠서 나를 바라보며 다시말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야기해 주지 않을 테야?" 어제 있었던 일이라……. "아아, 별 건 아니고… 가면서 이야기해 줄게." +=+=+=+=+=+=+=+=+=+=+=+=+=+=+=+=+=+=+=+=+=+=+=+=+=+=+=+=+=+=+=9-1. 미망의 나라, 끝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9-2로 이어집니다. ^^제 글쓰기를 격려해 주시는 분들... 여러분께서 계획하시는 모든일도 잘 되시길... 저...그 205페이지의 '거지반'이라는 말은 '절반 이상'이라는 뜻으로 '거의'와 같은 뜻입니다. 오자가 아니에요..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居之半이라고 나와 있군요. 그 괄호 문제는 잘못된 것이 맞군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164번제 목:◁세월의돌▷ 9장 2편 시작입니다. 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30 21:07 읽음:1764 관련자료 없음----------------------------------------------------------------------------- 9장 1편, '미망의 나라'가 끝나고9장 2편, '영원할 수 없는 안식의 땅' 시작입니다. 오랜만의 긴 제목이네요.... 과연 몇 글자나 제목에 적을 수 있을까...? 독에 걸린 유리카의 운명..이 결정되는 편일 것 같군요. 제 나름대로는 꽤 마음에 드는 편이 될 것 같습니다. 파비안느 아룬드의 의미에도 어울리는 이야기가 또한, 될 것 같고요. 또... 제가 꽤 좋아하는 인물이 새로 등장하게 됩니다. ^^내일 독자와의 만남 이벤트에 오시는 분들을 위해 싸인 연습 진행중입니다.. 과연 잘 될까;;;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165번제 목:◁세월의돌▷9-2영원할수없는안식의땅(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30 21:07 읽음:218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2. 영원할 수 없는 안식의 땅 (1) 죽은 자는 죽은 대로 있으며결코 일어나지 말지니라. 산 자는 산대로 있으며결코 사멸되지 말지니라. 하나의 생명이 꺾어져 뜻밖의 죽음에 이르매하늘이 흔들려 갈라지고 대지가 어긋나 뒤집어진다. 법칙과 질서가 바뀌고 우주가 첫머리를 되짚어가니한 생명의 무게는 실로 모든 생명과도 같아라. 있음으로서 이미 다른 것을 있게 하는 바, 생명이여그대가 눈을 감는 순간 존재는 암흑에 불과할진저단 한 개의 획을 그어 글자의 뜻을 바꿀 수 있음이니세상의 모든 일어나고 연유하는 일들도 이와 같음이라. 죽은 자는 죽은 대로 있으며결코 일어나지 말지니라. 산 자는 산대로 있으며결코 사멸되지 말지니라. - 듀나리온 무녀의 제3경전<로이츠 ; 돌> 108절 "포도다!" 파리한 그녀의 얼굴에 오랜만에 홍조가 떠오르는 것을 보는 것은기분 좋은 일이다. 그리고 첫새벽 이슬처럼 생기 어린 목소리가 내어두운 마음을 환하게 밝혔다. "아아, 내가 얼마나 포도를 좋아했는데. 마지막으로 포도를 먹어본 것이 2백년은 훨씬 넘었을 거야! 다시말해, 깨어난 뒤로 포도는 구경도 못해보았다 그 말이겠지? 상큼한 과일즙이 풍기는 향긋한 냄새가 숲 너머에서 점차로 코를자극하기 시작했다. 야생 포도덤불이 가까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주아니가 있었다면 몇십 큐빗 밖에서도 눈치챘을 테지만, 그래도지나치지 않고 이 쪽으로 오게 된 행운이 어디야? 특히, 지금처럼 먹을 게 부족한 상황에서는 말이다. "얼른, 얼른." 내 손을 잡아끌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유리카를 내가 무슨 기분으로바라보는지 그녀는 알까. "와아!" 내 발은 그 순간 둥근 돌을 밟고 약간 삐끗거렸다. 나는 한 발 늦은 덕택에, 포도나무 숲의 입구가 되는 곳에서 그녀가 벌써 늘어진포도송이 하나를 잡고 기쁜 기색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볼 수있었다. 그 위치에 멈추어 설 수 있었던 것은 또한 내게 주어진 행운이기도 했다. 마치, 우리들을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있던 포도원과도 같았다. 그리고 보랏빛으로 익어 빛나고 있는 탐스런 포도열매들 사이에서 그녀가 잠시나마 건강을 되찾은 듯 보이는 것은, 이후 내게 얼마나 아름다운 기억이 될까. 아, 좋은 냄새야. "이것 봐, 포도가 천지야. 게다가……." 그녀는 포도알 하나를 따서 입 안에 넣었다가 껍질과 씨앗을 뱉어내고, 마지막으로 손가락까지 빨고는 다시 덧붙였다. "아주 잘 익었어." 정말 좋은 얘기야. 그렇지? 정말 우리가 들어선 곳은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 작은 포도원이었다. 둥치가 큰 나무들로 둘러싸인 둥근 풀밭으로 들어서니 사방이 온통 포도송이였다. 아무렇게나 걷다가는 몇번이나 부딪쳐야 할 정도로 손닿는 곳마다 큼직한 열매들이 빽빽이매달려 있었고, 녹색 잎과 넝쿨이 파티 장식처럼 내려와 있다. 그리고 그 향기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가장 좋은 향수,가장 훌륭한 식탁에서 나오는 향도 여기에 비길 수 없었다. "잘 숙성된 술 냄새 같아." "포도주가 되었나?" 그리고 우리는 더 말할 필요 없이, 서로 질세라 경쟁적으로 포도를따먹기 시작했다. 잠시만에 손가락이 온통 보랏빛이 되었다. 이 포도는 껍질이 얇고과육과 껍질이 잘 떨어지지 않아서 통째로 먹어도 상관없는 남방산포도인 듯했다. 게다가 야생 포도치고는 지나치게 알이 크고, 일부러가꾼 것처럼 열매들은 빽빽하게 주렁주렁 달렸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그런 것을 다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서로 몇 개나 되는 포도송이를 먹어치웠는지 세어볼 생각도 나지 않았다. 호수 안으로 들어온 이래 이렇게 신선한 음식을 먹어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와 유리카는 똑같이 마치 왕의 만찬이라도 맛보는 기분으로 들떴다. 입안은 곧 포도의 새큼하고도 풍부한 즙 냄새로 가득해졌다. 한쪽에는 익은지 오래된 포도들이 벌어진 채로 방치되어 저절로 술맛을냈다. 본래 포도 껍질에는 효모가 있기 때문에 요령 좋게 나무에 매달린 채로 놔두면 반쯤은 저절로 포도주가 되기도 한다. 당분도 어차피 포도에서 나오는 거고. "후식으로 포도주나 한 송이?" 우리는 술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 포도를 몇 개 따먹고는, 그 덜 숙성된 깔깔한 맛에 얼굴을 찌푸렸다가 곧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웃기 시작했다. "너, 입가가 장난 아냐!" "넌 다른 줄 알아? 코끝에까지 묻었다." "뺨이랑 손가락이랑 온통 보라색이 된 게 누군데? 누가 보면 전염병에 걸린 줄 알겠어." "그 전염병은 네가 퍼뜨린 거라고 생각할걸?" 즙을 닦아내려 했지만 손에도 온통 묻힌 터라 이런저런 노력들은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엉뚱한 곳으로 점점 즙은 번져갔다. 내 웃옷 아래쪽과 유리카가 겉옷 안쪽에 받쳐입은 옷에도 금방 보라색 얼룩이 졌다. 서로 닦아주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내 우리는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큭큭, 아하하하……." "푸하하……." 실컷 먹고 났는데도 주위에 수북한 포도송이는 별로 줄어든 것 같지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포도로 가득 차버린 것만 같다. 우리는 배가 부르고 지치자 나무 아래에 나란히 주저앉았다. 먼 곳에서 새 한 마리가 꾸르륵거리며 목을 울리고 있다. "이 섬엔 정말 별난 게 다 있어." 유리카는 아까 오면서 내게 목 없는 기사에 관한 이야기를 다 들었다. 그녀는 별로 끼여들지 않고 죽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지만 자기일에 관계된 사건이니만큼 꽤나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난 우리 앞에 이렇게 정말 필요한 것들이 딱 나타나주는 것이 솔직히 더 신기해. "기억에 사로잡힌 두 악령이라… 저렇듯 오래되고, 게다가 아무리긴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저 정도로 힘이 강력해진 악령은 내가 살던세상에서도 흔한 일은 아닌데." "호수 안이니까 그렇게 오래 남았던 거 아냐?" 나는 이제 포도알을 가지고 이리저리 장난을 치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대꾸했다. 유리카는 아까 주웠던 황금 방울을 꺼내어 손바닥에 놓고는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네가 살던 시대에도 저들은 이미 이 안에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아무도 구석구석 탐험한 일 없는 호수가 여기니까." "그럴는지도." 배가 부르고, 날씨는 따뜻했으며, 주위에는 향기에 취한 풀벌레들이 붕붕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련하게 내리는 햇살에 비쳐 포도송이들이 마치 보랏빛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보석이 열린 나무라면 정말 멋질 거야. 루비로 된 사과, 자수정으로 빚어진 포도. 나는 문득 다시 물었다. "혹시 이스나미르의 건국보다 더 오래된 사람들일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고대 이스나미르 인이란 말이니? 오리안느라는 여자는 고대이스나미르 어를 못했다고. 나하고 대화할 때 봤잖아." "그렇지만 그 목 없는 기사는 아무 말도 안 했단 말야." "그럼 아무 말도 몰랐나 보지 뭐." "……." +=+=+=+=+=+=+=+=+=+=+=+=+=+=+=+=+=+=+=+=+=+=+=+=+=+=+=+=+=+=+=내일 독자와의 만남... 많이 기대되네요. ^^그러나...전 아침부터 다른 곳에서 실컷 먼지를 뒤집어쓰고 갈 것만 같아요. 슬퍼라...T_T내일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하나 준비중이랍니다.. 잘 될까?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293번제 목:◁세월의돌▷9-2영원할수없는안식의땅(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31 22:56 읽음:206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2. 영원할 수 없는 안식의 땅 (2) 유리카는 일어서더니 다시 포도송이를 하나 땄다. 이번엔 천천히하나씩 입에 넣어서 굴렸다. 내가 손을 뻗쳐 그녀가 든 송이의 포도알을 하나 따서 먹는데 그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이 포도, 꽤 빨리 익었잖아?" "왜, 벌써 8월인걸. 한여름이잖아." "이런 포도는 사실 늦여름에서 가을이나 되어야 제대로 여문단 말야. 혹시 그 전에 빨리 열렸대도 이렇게 잘 익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그게 그거지. 좀 일찍 열렸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문득, 스조렌 산맥에서 계절에 안 맞게 일찍 열렸던 구즈베리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또 산지기들 집에서 먹었던 멜론도. 유리카는 마치 내 마음을 읽는 것처럼 얼굴을 빤히 마주보며 말했다. "그렇지?" 계절이 빨라지고 있기라도 하나……. 우리는 서로 등을 기대고 앉아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이 포도송이 사이사이로 보이고, 그 가운데 보석처럼 빛이 내린다. 보드라운 잔디가 손등을 간질이고 죽 뻗은 다리는 풀 속에 푹 파묻혔다. 좋은 곳이야. 언제까지나 여름일 것만 같아. 내 어깨 옆으로 늘어진 유리카의 긴 머리채에는 개구쟁이 꼬마들이장난친 것처럼 포도즙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귓가로 눈을돌리니 색깔 진한 내 머리카락이 함께 얽힌 것이 보인다. 문득 그녀와 내 머리색깔이 서로 꽤 잘 어울린단 생각에 웃음이 났다. 우린 참 잘 만났어. 필요할 때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정말 다행이야. "유리카, 너 푸른 굴조개호에서 시즈카를 만났을 때 나한테 했던말 기억하니?" "무슨 말?" 마침 포도를 다 먹어서 나는 한 송이 더 따려고 몸을 일으켰다. 바로 머리 위에 아주 잘 익은 탐스런 포도송이가 하나 달려 있었다. 위로 손을 내밀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 보랏빛 보석으로 된과일. 유리카는 내 대답을 기다리며 일어선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취할 듯 향기로운 포도향……. 쉬익-그리고 내 눈앞의 장면이 갑자기 옆으로 비틀, 흔들렸다. "유리카!" 장면이 아니다… 내 눈앞에서 움직인 것은 유리카였다. 배경은 모두 멈추어 있다. 그리고 그녀 혼자만이 빠져나와 수많은 어지러운 은빛 곡선들과 함께……. 화살! 휘익- 탁! 다시 날아들어 나무줄기를 꿰뚫는 화살. 바닥에 주저앉아 그녀를재빨리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와 깊숙이 박힌 커다란 화살이 보였다…….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이었다. 검은 옷을 포도빛으로 적신 피가 순식간에 풀밭으로 번져 가는 것이 보인다. 그녀의 피, 한 방울조차도 생명처럼 아까운……. 휘익-다시 화살이 하나 날아들고 아슬아슬하게 방금 움직인 내 몸 위쪽을 스치고 지나간다. 상처를 처치할 틈도 없이 축 늘어진 그녀를 질질 끌다시피 바닥을 기어 포도 넝쿨이 얽혀든 나무 뒤로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피는 흘러 푸른 잎새들의 옷깃에 긴 혈흔을 남겼다.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진 그녀는 이미 시체처럼온 몸이 굳어져 있다. 겉옷을 헤치고 상처 자리를 보았을 때에는 저절로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으윽……." 의식이 없다. 그녀를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정신줄을 순간 끊어 가버린 것처럼, 그녀는 한 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이미 의식이없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내 몸을 스쳐 돌바닥에 튕겨난 화살을 보니 날카롭고 폭이 좁은데다 세로로 긴 은촉이 달려 있다. 맞은 상대의 살갗을 깊숙이 찢어 놓는 잔인한 무기다. 그걸 보니 도저히 그녀의 살에박힌 화살을 뽑아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움직일 때마다 상처가 상한다. 어떻든 뽑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퍽! 또 다른 화살이 이번엔 위협하려는 것처럼 포도송이 하나를 그대로관통했다. 소리를 내며 터진 포도의 즙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린다. 송이의 반이 뚝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고 끊어진 포도알이 주위에나뒹굴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숨을 들이쉬고, 화살대를 잡은 손이 떨리는것을 애써 눌렀다. 한쪽 손으론 그녀의 몸을 잡고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제발… 조금만 참아……." 푹! "……." 몸이 조금 흔들렸을 뿐, 그녀는 이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화살을 뽑아내 던지고 보니 손가락 세 개는 들어갈 것 같은 구멍이 뚫렸고 새빨간 피가 쉴새없이 흘러나와 흙바닥을 적셨다. 숨을 쉬는데 따라 간헐적으로 뿜어 나오는 피, 죽음의 빛깔… 이미제정신이 아닌 나는 손으로 그걸 막으려는 것처럼 더듬거리며 두 손바닥을 온통 피로 적셨다. 손가락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며 손을, 그리고 온 몸을 떨었다. 고개를 저었다. 다시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이런 일은없었어. 없었어. 결코 없었어. 손을 쓸 길이 없었다. 지혈을 할 수 있는 상처도 아니다. 그리고내겐 그런 능력도 그런 도구도 없다. 하얀 산맥의 아스에를라, 에디에르나 아가씨의 풀이 한 포기만 내 손에 있었더라도. 그렇게 급하게달크로즈를 떠나야 하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조금이라도 구해서 떠났을 텐데. 머릿속이 다시금 뜨거워진다. 뺨이 화끈거리고 격렬한 감정의 물결로 뒷목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저절로 이가 악물어지고 피투성이가된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내가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이모든 상황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버스럭, 버석, 버석. 그리고 내 귀에는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밟혀 넘어지는 길게 자란 풀들. 이쪽에서는 장거리용 무기가 없다는것을 알아채고, 아주 여유 있게 다가오는 발소리다. 그리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기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마음속에서 악마의 불꽃처럼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중독된 독은, 이제 마지막 발작 한 번이면 끝장이야. 몸이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는 그녀가 쇼크라도 일으키게 된다면… 여기까지 힘겹게 온 보람도 없이 나는 그녀를 잃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또다시 내 눈앞에서 죽는다는 것, 있어서는 안될, 결코 있을 수 없는일. 그녀를 잃게 된다면……. 그 누구라도 결코 용서할 수 없어. 죽이고, 죽이고, 죽일 테다! 서걱, 서그럭, 저벅, 저벅, 저벅. 가죽 망토를 꺼내 그녀의 몸을 덮었다. 검을 끌어당겨 잡는 손이흥분으로 조금 떨렸다. 그리고, 마지막 발자국이 다가와 서는 순간,나는 벌떡 일어섰다. "너냐……?" +=+=+=+=+=+=+=+=+=+=+=+=+=+=+=+=+=+=+=+=+=+=+=+=+=+=+=+=+=+=+=오늘 나우누리 환타지아에서 주최한 '세월의 돌 작가와의 대화' 이벤트에 와주신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와 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기뻤습니다. ^___^저는 아침부터 여러 가지 일에 시달리느라 저녁 식사 후에 일찍 나왔습니다만, 모두들 아직도 즐거운 시간들 보내고 계실지도.. ^^;환동 회원이 아니신 분들도 굉장히 많이 와 주셨어요. (조만간, 빠르면 내일 내로 방명록 올립니다! ^^... 그런데 방명록 안써주신 분들도 꽤 여럿이시네요..) 이번 기회로 잘 모르시던 분들끼리도 인사하시고 친하게 지낼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별 맛있는 것도 대접해 드리지 못하고, 너무 좋은 나머지 정신이없어서 한 분 한 분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듯해 너무너무 아쉽네요.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꼭 다시 뵙고즐거운 이야기 나누었으면 합니다. (싸인 너무 안 예쁘지요..;;)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못 오시고 격려만 보내주신 분들도요!)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294번제 목:◁세월의돌▷9-2영원할수없는안식의땅(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0/31 22:56 읽음:211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2. 영원할 수 없는 안식의 땅 (3) 질문은 필요없었다. 드디어 내 눈에 들어온 그가 어깨에 멘 화살통과 활을 저만치 던져버리는 것이 보였다. 키가 크고 꽤 잘생긴, 스물 서넛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이다. 마치나르디의 것과도 같은 반짝이는 금발 고수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렸으며, 어깨는 탄탄하게 벌어져 있었다. 얼굴은 마치 귀족가의 자제처럼반질반질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 눈동자, 그 눈은 자기가 한 모든 일에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무심한빛을 띠고 있었다. 스스로의 본능이 가리키는 대로 움직일 뿐, 어떤 죄의식도 감정도찾아볼 수 없는 그 눈은 사람과 사람이 마주보는 눈이 아니다. 짐승을 사냥하는 인간의 눈, 또는 인간을 잡아먹는 이종족(異種族), 또는맹수의 무감정한 눈빛에서 느껴질 법한 전율이 와 닿았다. "……." 그리고 긴 롱소드를 뽑아든 그는, 나 따위에게 긴말은 할 필요도없다는 듯 한 마디 말도 없이 검을 부딪쳐 왔다. 살기! 어쩌면 인간이 인간에게 보내는 살기보다, 한 마디 말도, 어떤 의사도 통하지 않는 상대가 띤 살기가 훨씬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설득의 한계를 넘어선 의사소통의 부재, 마음속에 한 점 평정조차 잃지 않고서 평온하게 상대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시도들. 그리고, 결코 질 수 없는 나는 손에 힘을 주며 왼쪽으로 날아드는상대의 검을 똑바로 쳐냈다. 그런데……. 푸퍽! 아……. 그의 칼은 내가 제대로 공격을 시작해 보기도 전에, 벌써 내 어깨에 난 상처를 쑤시고 빠져나갔다. 아물어가던 상처에서 새로운 피가터졌다. 쩡! 쩌정! 그리고 다시 부딪치는 검, 온 몸이 휘청일 정도로 강력한 검이 연속타를 가해 왔다. 어금니를 악물었다. 미친 듯한 악몽이 계속되고있었다. 결코 식지 않을 것처럼 엄숙한 얼굴로 빛나는, 짐승에게 땀을 흘리게 하는 여름의 태양. 츠컥! 한나절을 데워진 뜨거운 공기 가운데 한없이, 한없이 부딪쳐 가는짐승의 이처럼 하얗게 번쩍이는 검날……. 푸욱! 다시 내 어깨 안쪽의 살점이 찢겨 나가고 튀어 오른 피가 뺨과 목줄기에 끼얹어졌다. 비틀거리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검을 바로세워 쥐었다. 한 걸음 물러난 나의 적이 저 앞에, 마치 자연의 일부분처럼 서 있다. 푸른 눈, 머리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처럼 아무 표정도 없는 푸른눈동자. "그렇다 해도……." 벌써 허리와 배, 가슴과 다리에 네 군데도 넘는 상처를 입었다. 상처마다 그치지 않을 것처럼 붉은 피가 흐른다. 아직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나의 적은 흠없는 금발과 푸른 눈, 바람에 흩날리는 녹색의 자락 긴 옷을 걸치고서, 마치 이 장소에 방금 나타난 것처럼 흔적없이 깨끗한 모습 그대로이다. 한낮의 꿈 가운데 갑자기 불쑥 뛰어들어 까닭 모를 징벌의 검을 휘두르는 살해자, 모든 것이 선명한 여름의 정오를 가로지르며 내 피를 묻힌 검을 들고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않은 듯, 아무 죄도 없다는 듯, 낯선 천사처럼 한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다……. 휙- 휙-!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그 검은 어떤 때엔, 마치 버드나무 채찍처럼 유연한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그리고 백열의 찬란한 대지 가운데 결코 숨길 수 없는 분노와 투지로 어깨를 들썩이는 나를자신의 먹이로 삼고자 한 줄 한 줄 사나운 울림을 뻗어 온다. 구릿빛 날개를 가진 벌레 하나가 한 순간의 어지러운 반짝임을 남기고 시선을 가로지른다……. 끈적한 포도의 진액이 풍기는 달착지근한 냄새가 코끝을 떠돌며 방금 전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결코 꿈일 수 없는, 내 자신이 감당해야만 하는, 죽음만큼이나 정확한 모든 이유들. 하늘 한편에는 찌르는 듯한 작은 달의 빛, 여전사의 달이 한낮을가르는 열광적인 빛으로 휘황하게 빛난다. 파비안느, 오해로 맺어진매듭을 날카로운 검으로 단숨에 끊어버리는 그녀여. 핏빛의, 희고 밝고 모든 것이 명확한 정오. 촥! 그리고 나는 왼팔 상박부에 길게 찔린 상처를 입는다. 튀어 오르는피가 너무도 흰빛으로 문득 흐릿하고 아득해져,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난다. 춤을 추듯, 유연하고도 정확한 동작으로. 피에 젖은 소매가 너덜거린다. 검을 쥔 손에서 배어난 땀과, 손바닥을 모두 적셨던 유리카의 피가 끈적하게 엉겼다. 피와 땀이 풍기는비릿한 금속성의 냄새가 뜨겁게 데워진 공기 중으로 퍼져나간다. 결코 끊어지지 않는 길게 엮어진 증오… 모든 것이 무겁게 짓누르며 마지막 순간을 뱉어내도록 내 숨통을 누르고 있다. "… 전부가 아냐, 이게……." 내게 너무도 벅찬 상대라 해도… 내가 지금까지 배워 온 모든 것을엎어버릴 만큼 강한 적이라 해도… 내가 물러서고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 너는 내 앞에 서야만 한다. 그리고 내 증오를 받아야만 한다. 막히고, 또 막히더라도, 계속 마지막까지 내리칠 내 검을 받아야만 한다. 푸왁! 절망적으로 바라본 하늘은 한 순간 멍든 것처럼 핏빛 어린 보랏빛을 띠었다. 그리고 조금 후에 그것이 화살을 맞아 터지고 엉긴 포도송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죽음… 끊어지고 떨어져, 짓이겨지고 터져버리는 당연하고도 피할 수 없는 귀결. "어째서!" 내 검은 수십 번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간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랬듯 한 번의 동작으로 차단되고 밀어내어진다. "나를 죽이려는 거지? 무엇 때문에!" 예전에, 아주 오래 전에 들었던 것 같은 엘다렌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는 그 때부터 이 검을 일격필살의, 스스로에게 어울리는 검으로 만들었어야만 했을 지도 몰라. 그랬다면, 나는 지금 이 자를 맞아 이렇듯 죽음의 문턱에 서 있지않을 수 있었을까. 내가 목 없는 기사를 만나지 않았고 지금 기력이완전했다 하더라도, 이 자를 결코 쉽게 제압할 수는 없었겠지. 내가대적해 보았던 그 어떤 상대보다도 강력한 적. 더구나 까닭 모를 공격과, 까닭 모를 상처들. 엘다렌, 당신이 있었다면……. 츠챙! "왜, 그녀를 죽이려 한 거지!" 다섯 호흡, 이 안에 한 번은 그의 검을 맞는다. 그는 내가 어떤 방법으로 공격해 가든, 늘 그다지 다를 것 없는 방법으로 같은 박자를되풀이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인지, 그것만이 전부인 것인지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매번 똑같은 다섯 박자조차 나는 한 번도 깨뜨리지 못하고 있다. 내 솜씨란 것은, 이 정도로 아무 것도 아닌 거였나? 결코 솜씨라고조차 부를 수 없는, 조잡한 거였나? "그녀는… 네가 그렇게 죽이려 하지 않았대도……." 아무리 소리치고 외쳐도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다.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또는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처럼, 표정 변화조차전혀 없는 그는 그렇게 똑같이 다시 공격해 온다. 대화가 되지 않는 상태… 인간이 상대를 몬스터라고 생각하는 것은의사 소통이 되지 않을 때야……. 치륵! 다시 내 뺨을 긋고 턱까지 찌르는 검, 동시에 나는 소리지르고 있었다. "일초라도 네가 유리카의 생명을 줄인다면, 지옥 끝까지 가서라도죽일 테다!" +=+=+=+=+=+=+=+=+=+=+=+=+=+=+=+=+=+=+=+=+=+=+=+=+=+=+=+=+=+=+=이 전투신은....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지금까지 썼던 어떤 전투신보다 마음에 드는 부분입니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전투신에 있어서만은 저는 제 스타일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몇 번의 서로 다른 시도들을 했었죠. 한 번은 너무 길고 지겹다고, 한 번은 '긴장감의 고조'라는 면에서 그런대로 괜찮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인가가 더 있었지만, 별다른 비평이 없었던 탓에 그럭저럭 나쁘지는않았다는 이야기인가...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아, 동생과의 해전에서 진행된 전투는 썩 괜찮았다고 몇 분이 말씀해 주셨군요. ^^;)이번 전투신을, 저는 몇 개의 클래식을 되풀이해 들으면서 썼습니다. 느릿하고 평화로운 곡들이었죠. 영화처럼 장면을 연상했지요. 새하얀 여름의 백열광과, 느릿한 배경 음악 속에서 느껴지는, 마치 포기하고 그냥 져주고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온 몸에 가득한 피로와절망, 그리고 인간의 모습임에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상대에 대해서도.... 사실 몇십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 번 완성했다가 모두 지워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쓴 것도 이 부분이 처음이었습니다. (아직 다음 편까지 이어져요..^^;) 그리고... 솔직히 이제 제가 잘 쓸 수 있는 전투신이라는 것이 조금은 느껴지는 기분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어떤 분들한텐 마음에 안 드실 지도 모르고, 좀 길고 지루하달까, 아니면 주인공의 심리에 지나치게 치중한 전투신이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저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어떤 분들처럼 그렇게 짧고 명쾌하게만 진행되는 전투신은체질에 잘 안맞는 것 같아요. (누가 누구를 베었다, 죽었다. 다시 누구를 찔러서 쓰러뜨렸다...)다시 변화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한동안은 이런 방식으로 나가고싶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읽어보아도 꽤 마음에 든다는 기분으로 이번 글을 올립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390번제 목:◁세월의돌▷ 400회래요...;;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1 22:20 읽음:1616 관련자료 없음----------------------------------------------------------------------------- 400회였대요.... 어제 말이죠. 400회였대요.... 바보같아서 죄송합니다. T_T아...전 정말 대학 들어가면 숫자에 무감각한 건 문제가 안될 줄알았어요. 근데 아니네요..--;왠지 긴 말을 쓸 용기도 안 나는군요. 그냥 알려드리기만 할게요. 어제, 9-2. '영원할 수 없는 안식의 땅' 3화로 세월의 돌은 400회가 되었습니다. --;나우누리 sf 게시판에선 <아샨타>와 <에누마 엘리시>에 이어서 세번째인가요? ...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391번제 목:◁세월의돌▷9-2영원할수없는안식의땅(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1 22:21 읽음:204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2. 영원할 수 없는 안식의 땅 (4) 결코 끝나지 않을 벅찬 싸움은 흘러내리는 땀과 피를 비웃듯 점차로 강도를 더해 악령처럼 덮쳐들었다. 손목과 팔, 팔꿈치와 어깨가 차례로 저려 온다. 검을 쥔 손에 힘을가누기가 어렵다. 머리카락을 흠뻑 적신 땀방울이 공기를 가르는 몸의 움직임에 따라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결코 되돌아올 수 없는기력은 천천히,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몸을 빠져나간다. 구멍이 뚫린포도주 부대처럼, 생명을 이루는 피가 서서히 빠져나간다. 그러나 오직 사라지지 않는 것은 맹세와 약속, 내 입으로 뱉은 말을 지키고 이루려 하는 나의 의지다. "끝나지… 않아……!" 그리고 마지막 그 의지가 검에 불을 붙였다. 화르르르르……. 열기가 혀끝에 와 닿는 매운 맛처럼 온 몸을 적시고 휘돈다. 나무와 풀, 얽히고 섥힌 포도 넝쿨이 유적처럼 주름진 궁륭과 장식을 이룬 어디인지 모를 머나먼 땅, 이 모든 것의 끝일지도 모를 땅에서,단 한 순간을 사기 위해 나는 모든 기력을 짜내어 힘껏 그를 몰아갔다. 석고 조각 같은 그 얼굴에 피를 흘리게 하고 싶다. 네가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 동정심과 죄책감을 지닌, 피가흐르는 인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모조리 모아……. "타하!" 불꽃이 흩날리는 내 검과, 그의 단단하고도 유연한 롱소드가 허공에서 강하게 맞부딪쳤다. 지이잉! 그 순간, 귀를 찌르는 듯한 기괴한 파공음이 주위를 울렸다. 파바바바밧! 내 검의 불꽃이 마치 그의 검에 옮아 붙으려는 것처럼 휘말려 오르며 달려든다. 덩굴이 자라나는 것처럼, 수십 개의 손을 내미는 것처럼, 엄청난 불꽃이 치솟아 오르고 나는 정신을 잃을 듯한 열기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동시에 마치 불이 옮겨 붙은 듯, 상대의 검 역시타오르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스쳐간 놀라움의 빛. 이 모든 것이… 마치 아득한 옛날에 일어난 이야기의 한 자락인 것만 같다. "살아 있는 자라면, 살아 있는 사람답게……." 눈물, 시야를 흐리게 하는 눈물이 흘러 갈라진 입술의 상처를 녹인다. 뺨에서 흐르는 피와 뒤섞여 붉은 강물을 이루며 흐른다. 피로 된눈물, 그런 것이 있다면……. 저 쇠로 된 심장을 녹이고, 그 얼굴에 표정을 되돌릴 수 있을까. 츠르르륵! 불붙은 그의 검은 직접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다만 그 불길 속에서 상대의 검날은 약간 검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사신의 갈고리처럼 다시 달려들어 그것은 내 어깨를 찢고 체인 메일을 가르며 가슴에서 배에 이르는 깊숙한 상처를 낸다. "크으윽……." 안타까움, 안타까움……. 모든 것을 빨리 끝내버리고 유리카에게로 돌아가고 싶어. 마지막발작을 일으켰을지도 모를 그녀의 얼굴의 땀을 닦아주고 뺨을 쓰다듬어주고 싶어. 그 손을 잡고 그 이름을 불러,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게 하고 싶어. 마지막 순간까지 꼭 껴안아 주고 싶어. 죽음이란… 정말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인가? "찌르면, 피가 나도록……." 내 눈에 어떤 미묘한 변화가 포착된다. 그거였나……? 내 앞에 선너 역시 살아 있는 무엇인 것만은 틀림없는, 이 살아 있는 세상 속에서……. 그 다음에 네가 취할 동작은, 이런 것이겠지……? "죽는… 것!" 검을 잡은 왼손이 미끄러져 폼멜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가 닿는다. 마치 갑작스런 깨달음처럼 다가온 상대방 공격이 지닌 규칙성. 미리알고 있던 동작으로 내 몸은 다음의 공격을 위해 들어올린 그의 검을피하고, 약간의 휘청임 끝에 되돌려지는 그의 검날 아래로 힘껏 그목과 어깨가 닿은 부분을 내리쳐간다. 내 눈앞에 선한 것은, 아버지가 결투의 마지막에 취하던 자세. "……!" 예상대로 뒤로 몸을 빼는 것을 보며 내 검은 나 자신도 놀랄 만큼빠르게 방향을 바꾸어 그의 미간을 찔러 들어간다. 그의 상체가 뒤로젖혀진다. 그 다음은……. "멈추시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그러나 나는 잘 모르겠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늘 꼭대기, 아니면 벽 밖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너무나도 먼 곳에서 울린 목소리였다. 푸와아아아악! 내 검은 막아선 그의 검날을 그대로 자르고, 그의 가슴을 뚫으며배를 한꺼번에 갈랐다.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올라 내 손에까지 끼얹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이상하게도 그 역시 몸 안에 피가 흐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엇일까… 이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 쓰러지기 직전, 잠시 멈춰선 그 몸. 마치 굉장히 오래된 것만 같은 그 옛날의 순간, 내가 보았던 볼제크 마이프허의 자세와도 비슷했지만, 그는 내장이 흘러내릴 정도의내상을 입지는 않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바라본 그 얼굴에 처음으로표정이라 할 만한 것이 떠오르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내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렀다. "너는……." 푸른 눈동자,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던……. 그 눈에서 느껴지는 빛은…놀랍게도 평화였다. "……." 그리고 그 몸은 포도의 궁전, 푸른 풀의 융단 가운데 붉은 얼룩을그리며 무너졌다. 결코 죽지 않을 것 같던 푸른 눈도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부러진 검이 떨어졌다. 마지막 기술을 위해서는 기회가 필요하다. 그 기회를 잡지 못하면어떤 기술도 쓸모가 없다. 그리고 나는 한 순간, 마치 복잡한 그림의스케치 모양을 깨닫는 것처럼 바탕을 이루는 움직임을 보았고, 내게다가온 기회를 보았다. 마지막 순간에, 어쩌면 스스로의 종말을 보게되리라 생각했던 그 순간에. 해와 달이 함께 빛나는 어지러운 오후. 시간을 베는 손아래 흐르는붉은 피, 파비안느의 빛깔. 모든 것이 끝난 건가……. "이런……." 누구의 목소리일까……. 내 검에서 서서히 사그러드는 불꽃과 함께 내 몸은 갑자기 스스로버티지 못하고 심하게 비틀거렸다. 몸을 이루고 있는 껍질들이 무너져버린 것처럼, 내 몸뚱이는 조각조각 분해되어 버릴 듯 뒤흔들렸다. 주춧돌이 빠진 건물과도 같이, 홍수로 무너지는 거대한 둑처럼……. 눈앞의 광경이 뒤엉키고 휘몰아치는 것을 느끼는 순간, 내 무릎과뺨은 흙바닥에 닿아 있었다. 한 번도 느낀 일이 없는 감각… 그런데도 나는 알 듯하다. 내 몸이기억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그런 감각, 이건 너무 오랜 칼레시아드상태가 가져오는 육체의 붕괴 작용이야. 통어, 보크리드를 익히지 못한 채, 칼레시아드의 극대에 도달했을때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과정. 드디어 내 몸은 그 순간에까지도달했다. 칼레시아드의 완성, 그리고 내 몸은 무너진다……. "유리카……." 그러나 그냥 무너질 수는 없었다. 유리카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기전에는 결코 정신을 잃을 수 없었다. +=+=+=+=+=+=+=+=+=+=+=+=+=+=+=+=+=+=+=+=+=+=+=+=+=+=+=+=+=+=+=어제가.... 400회였습니다. 바보 작가는 저번 200회때처럼 이번에도 회를 세는 걸 까먹어 버렸습니다. 대강 400회가 가깝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제 마음잡고 세어보려고 했는데... 벌써 어떤 분들이 어제 400회였다고 축하 메시지를보내주셨네요. ;;;그, 그래요, 저... 숫자는 잘 못 셉니다. T_T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392번제 목:◁세월의돌▷9-2영원할수없는안식의땅(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1 22:21 읽음:207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2. 영원할 수 없는 안식의 땅 (5) 나는 검을 아무렇게나 놓아버린 채, 싸움 중에 멀어져 버린 그녀가누운 곳으로 기다시피 다가갔다. 망가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팔다리가이미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지만, 나는 벌레처럼 버르적거리며 풀을쥐어뜯고 몸을 끌어당겼다. 뺨을 찌르는 긴 잎사귀들이 상처를 헤집었지만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오직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그녀의 얼굴을 보고 살아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 영원히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해도… 너무 빨리 떠나는 것도 좋지 않은 거야. 살아있다는 느낌,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뜨거운 체온과 떨리는 심장의 박동… 자체로서의 행복……. "살아 있는 거겠지…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내 사지를 잡아당기는 이 무거운 혼미… 뿌리치고 또 뿌리치며 팔을 내저었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언뜻 떠오르는 것은 하얀빛, 무엇이었을까… 뭔가 밝게 빛나는 듯했어. 그렇지만 나는 이미잘 볼 수가 없어. 내 몸에서 끈적이며 흐르는 것이 땀인지 피인지 잘 모른다. 어떤용서도 없는 뜨거운 소금빛의 더위 속에서 눈꺼풀을 흐리게 하는 것이 눈물인지 안개인지도 모른다. 억지로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고 눈을 비비려 했다. 튀어 떨어지는 땀이 쇳물처럼 뜨겁게 살갗을 지진다. 그리고, 어렴풋하게 보이는 것은……. 유리, 너니……? 쿠르릉……. 끈적한 땀이 어느 순간 차갑게 식으며 피부에 말라붙은 습기로 변했다. 주위에 보랏빛 어둠이 번지고 있다. 검은 구름… 비가 오려는것인지도 몰라. 쏴아아아아……. 잠깐 사이에 이마에 빗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비는 순식간에 들판을 하얗게 적셨고 주위의 풀밭 사이로 도랑을 만들며 흐른다. 이미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제대로 인지할 수가 없다. 내가가고 있는 방향이 올바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게, 그렇게가고 있다. 모든 것이 끝일 지도 몰라… 그렇지만 내 손에 잡히지 않은 미래는 내 세계 밖의 것일 뿐이야. 그 몰아치는 시즈카 속에서, 너는 말했어. 떠나지 않아… 어디로든, 떠나지 않는다고. 나, 그 약속을 기억해. 나 역시 떠나지 않아. 그렇게 되지 않도록, 살아 있는 상태 그대로 너를 지키겠어. 피가돌고 맥박이 뛰는 그 상태 그대로, 숨결 한 조각도 놓치지 않은채…….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끝나지 않을 거야. 호수의 오리안느와 환영의 도시에 살던 목 없는 기사… 버릴 수 없는 기억만으로 이미 맥박이 멎은 생명을 영원히 지속시키고, 그 가운데 자신의 삶을 잔인하게부수고 망가뜨려버린 그들의 심정을 이제 알 수 있을 것만 같아.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과 서서히 이루어지는 존재의 소멸이 주는 잔인한고통, 종말이 주는 안식에의 갈구, 그러나 그 모든 것과도 바꿀 수없는 '기억'이라는 존재에 대해 이제 조금은 알 것만 같아. 스스로를 잊어가면서까지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억에 대해서. 나를 기억해……나를 기억해…… 결코 잊어버리지 마. 악령이 되어 영의 세계를 떠돌게 되더라도,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을버리지 않은 채 가지고 살아가는 편을 택하는 까닭. 이제 그걸 알 것만 같아……. 비가 아직도 오고 있다. 눈을 감고도 느낄 수 있다. 허공을 부유하는 듯 헐거운 내 영혼은지금도 비를 맞고 있다. 무엇을 보았지……? 내가 그를 죽였던가? 그녀는 살아 있는 건가? 나는? 따뜻하고 묵직한, 담요 속 같은 어둠이 내 주위에 가라앉아 있다. 짐승의 털 속에 묻힌 것처럼 아늑하고 부드럽다. 뜨뜻한 물 속에 잠긴 것도 같다. 아니, 피 속에 잠겨 있는 것도 같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길이 없는 기분. 내 주변의 그 모든 세계는 잘 있는 건가? 붉은 불빛들이 내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깜빡이는 듯도 하고 흔들리는 듯도 한 그 작은 불빛들은 수백 개의잠들지 않는 눈동자처럼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 시선이 닿는 몸 구석구석이 따끔거리는 것도 같고 기분 좋게 녹여 주는 것도 같다. 내 몸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축 처져 있다. 온 몸의 관절이 빠진 것처럼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주먹도 스스로 쥘 수 없다. 힘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내 몸이 아닌것처럼, 죽은 동물의 가죽을 들쓰고 있는 것도 같다. 나를 이리로 데려온 것이 누구지? "당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그 시간을, 나는 끈질기게 살아왔습니다……." 목소리. 느릿하면서도 신중한 목소리. 젊은 듯도, 늙은 듯도 한 나이를 알수 없는 목소리. 그러나 남자. 내 귀가 착각을 하는 것일까. 마치 사람이 아닌 허공이, 불꽃이나공기가 입을 열어 말하고 있는 듯 느껴지는 이 감정은. "아주 길었지요… 그러나 당신은, 마치 그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않았다는 듯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이군요……." 너울거린다. 눈앞의 붉은 점들이 한꺼번에 흔들린다. 가벼운 바람. "시간을 비껴 온 그 기분은 어떻습니까……?" 수백 개의 타일이 맞추어지고 떨어진다. 살아 있는 동안 결코 느낄수도, 셀 수도 없는 시간의 격자가 하나씩 하나씩 세워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헤아릴 수 없는 네모들, 시간이 이루는 그 무늬들……. 인간 생명의 길이로는, 결코 그 존재를 느낄 수 없는 접힌 시간의모서리가 있다. 그것이 접히는 것은 언제나 그 사람의 인생이 끝난뒤이다. 그 모서리를 접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다. 시간의 격자는, 자신의 죽음을 넘어서 눈을 뜰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그 길고, 끝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나는 시간을 비껴 오지 않았어." 그리고 내 눈을 뜨게 하는, 긴 시간 내가 물처럼 갈구하던 목소리가 울렸다. 맑은 울림으로 끊어지는 목소리. 그제야 내가 동굴 속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어지는 질문. "꿈을 꾸었습니까……?" 꿈, 내가 지금 있는 곳은 꿈속이 아니야. 그리고 그녀는 대답한다. "아주 길고, 이해되지도 않고, 잡을 수도, 기억할 수조차 없는 그런 꿈이었지……." 숨소리, 작지만 규칙적인 숨소리.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소리. 이끼와 풀과 비가 만든 습기의 냄새. 오래되었지만, 그만큼이나 오래살아남은 자연 그대로의 공간이 갖는 냄새. "당신에게 그 시간은 고통이던가요……?" 엄숙한 시간. 살아가면서 두 번을 다시 가지기 어려운, 나는 그런 시간 가운데누워 있다. 시간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그리고, 하나의 손이 내게로 다가와 닿는다. 뺨을 쓰다듬는 손가락, 그 손가락의 온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손을 움직여 그 손가락들을 잡을 기력이 없다. 그저 가만히 그 감촉을 감각할 뿐이고 은총처럼 그 손가락들을 느낄 뿐이다. 어떤 깨달음과도 같은 시간이 내게로 다가온다. 한 순간에 재로 씻겨나가는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지식들. 잃을 수 없는 것을 깨닫는다. 단순한 집착이 아닌, 오래 전부터 연결되어 있던 아주 길고 긴 숙명의 연결을 느낀다. 기도를 하는 건가? 그렇다, 나는 기도하고 있다. 눈을 감고도 나는눈을 뜨고 있다. 내 눈앞에 질기게 맺어진 동아줄 같은 생명의 줄이보인다. 그녀와 나 사이에 한층 오랜 시간을 연결되어 있던 그 무엇이 보인다……. 나와 그녀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알았던 것일까…….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고통스럽지 않았어." +=+=+=+=+=+=+=+=+=+=+=+=+=+=+=+=+=+=+=+=+=+=+=+=+=+=+=+=+=+=+=오늘 글이 몹시 많네요. 그것도 연재글은 두 개 뿐인데, 다른 글이세 개나 되는군요. 본래 홈페이지에서 생긴 사건에 대한 글은 잡담에넣으려다가 너무 길어져서 따로 뺐습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393번제 목:◁세월의돌▷ 홈페이지의 사건에 대해서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1 22:21 읽음:189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 홈페이지(fairytale.pe.kr)에서 있었던 작은 사건에 대해서 해명글을 씁니다. 오늘 홈페이지 운영해 주시는 분한테서 몇 개의 갈무리글과 사과편지를 받았습니다. 어떤 익명의 독자분이 저에 대한 비난조의 글을올리셨고, 그것에 대해서 다른 분이 반박을 하셨다더군요. 운영자 분께선 이것이 방명록에서 논쟁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두 글 모두를일단 삭제하셨다고 합니다. 임의로 한 일이라 죄송하다는 편지였습니다... 그런데... 먼저 글 쓰셨던(아래 surfer라는 분)께서 그것에 대해서다시 삭제 항의글을 올리셨고 그것에 대해 또다시 몇 개의 반박글이올라오고 있습니다. 일단 여기에 대해 제 입장을 말씀드릴게요. 우선 삭제건에 대해서는... 저는 홈페이지 운영을 전적으로 운영자분께 맡겼고, 저는 사실 운영할 능력도 없습니다(무식쟁이..;). 그래서 일단 기타 운영에 대한 권리들은 전권을 위임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저는 얼마 전에 직장을 그만두고 인터넷을 거의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일전에 잡담에도 썼듯, 저는 컴퓨터 프로그램내부 충돌로 익스플로러를 지워버렸고, 현재로선 집의 컴퓨터로 인터넷을 할 수가 없어서 며칠에 한 번 게임방에나 가서 홈페이지를 살펴보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운영자분이 갈무리글을 보내주기전에는 이 사건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고 사실 현재 올라오고있다는 관련글들도 아직 홈페이지에 직접 가서 살펴보진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홈페이지에 surfer 님이 썼듯)제가 직접 그 글을 삭제하게 했다는 비방은 부당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게 뭔가 부족한 것이 있으니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겠지요. 타당한 이유가 없는 비난을 수용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일단은 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을 생각입니다. 혹시... 스스로는몰랐다 해도, 비난하신 분이 말한 그런 점이 제게 조금쯤 있을지도모르니까요... 그러나 제가 즐겁지 않은 이유는 명확한 논거가 제시되지 않은 짧은 글인데다 인터넷의 익명성을 이용한 듯하다는 껄끄러운 마음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도무지 영문 모를 지적들이었으므로..; 오해를 없애기 위해 삭제된 처음 두 개의 문제글을, 운영자 분께서갈무리해서 보내준 전문 그대로 게재합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불미스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두 사람의 E-mail주소는 제가 임의로삭제했습니다. -------------Name surferComments 지독한 자기중심적 세계관. 예쁘게만 쓰려는 욕심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어 버린 작가. 모두가 자기 글을 칭찬해주기만 바라는 유아기적 사고방식. 비판의 글은 도무지 수용치 않는공주병. Name 익명Comments 아래아래... surfer? 통신에서 익명성을 이용해서 저런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여기에도 있군요. 나도 흉내내봤습니다. 통신 에티켓도 없고, 순전 희한한 이야기 하기 위해서 이름을 숨긴것 같은데, 이름 밝힐 용기가 있다면(결코 그런 사람으로는 안보이지만) 이야기나 해보지요... 치.사.합.니.다. 정말로. ------------이상과 같습니다. ....... 이런 사건이 있었네요. Luthien, La Noir. ps. 그런데.. 저, 공주병이라는 이야기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군요. ^^; 『SF & FANTASY (go SF)』 55394번제 목:◁세월의돌▷ 출판 기념회 방명록! 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1 22:21 읽음:1817 관련자료 없음----------------------------------------------------------------------------- 10월 31일에 있었던 모임 방명록입니다. ^^★나우누리 환타지아 10월정모 + 세월의 돌 출판기념 모임★ 정확히 몇 분이 왔는지 조금은 헷갈립니다. 방명록을 안쓰신 분도계시고, 왔다가 일찍 가신 분들도 있어서요. 그리고, 오겠다고 메일 보내시고 안온 분들이 많으셨네요. ^^;* 하고 싶은 말 :1. 하루 종일 너무 즐거웠어요. 와주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2. 식당에서 음식이 너무 늦게 나와서 죄송했어요... 3. 비가 와서 고생들 많으셨죠? 4. 제가 아침부터 고생하다가 녹초가 되어 일찍 간 것이 아쉽고.. 또 죄송하네요. ^^;5. 먼 곳, 그러니까 하이텔에서 오신 분들과 채널아이 환타지 동호회 시삽님, 그리고 함께오신 채널아이 독자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약도도 안 보내 드렸는데... 잘 찾아 오셨네요. ^^;(천리안에는 모임 공지를 올린 제 글이 아직 연재되지도 않았음이뒤늦게 밝혀졌습니다;;;;)6. 다음엔 싸인 연습 열심히 할게요...;;7. 왜 서울에서만 하냐고 항의하신 몇 분의 독자분께는 진심으로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8. 퀴즈 대회로 책 타가신 분들, 축하드립니다! =+=+=+=+=+=+=+=+=+=+=+=+=+=+< 방명록 >+=+=+=+=+=+=+=+=+=+=+=+=모래의책(전민희;루디엔) 여러분, 만나뵙게 되어 정말 반가워요! gbird(최대훈) 정말 반갑습니다. 더구나 전민희씨를 만나게 돼서... 즐거운 모임 되시길... 타리(라즈리) 민희 언니 축하드리구요.. 2권부터는 많이많이 인사말 써주세요. 일찍가서 죄송합니다. hawkshaw(미친호크) 돌작가에게 축하의 일검을 남기며... s2451( ) 빠른 버그수정 바랍니다. 에리니아(위니) 민희누나 축하... ^^ 오랜만이네요. 다들 약간씩변한 듯. 그럼... yoshua(정희정) 첨 뵙습니다. 모두들... 냐웅 ^^ (쭈볏;)에스텔82(현혜은) 전민희 님, 출판 축하드리고 앞으로도 좋은 글많이 써주세요! 휘파람새(래스) 이번엔 첨뵌분이 많이 오셔서 반갑네요. 그리구 민희님 축하드립니다. 컴온천사( ) <- 투명 / 처음 왔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놀랐어요. 끝까지 살아남는 환동이 되길 바라며. 민희님 축하합니다 ^^엘핀(심재훈) 몇 달전에 참석하고 이번에 두 번째인데 여전히 어색하네요. ^^선우세상(백선우) 한달쉬고 간만에 온 정모. 불쌍한 선우. 시삽에게 맞아 멍이 들다. T_T 흑흑 불쌍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사심사기(민병민) 웅~ 선우언니 따라 정모에 처음 왔다. 그런데 선우 언냐는 매일매일 날 구박한다는 걸 이 기회를 틈타 밝히고 싶다. 그 과격함으로(천하가 다 안다) 시삽을 제압(?)했다. 여자가 맞나?! 이건 선우언니가 먼저 썼기에 이런 것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럼.. 프레야(박영환) 정모 첨이네요. 재밌게 보냈으면... 이프리마(이원복) 로키형이 보챈다.. ^^; 오늘 재밌을 것 같당.. dflee(Loki) 피곤해서 죄송합니다아아... -.-;meenjoon(엑사일런 윤석준) 안녕하셔요. 추방자의 군주(LoE)를 쓰는 Exilan Flowcloud 입니다. 루디엔님의 출판을 축하드리고, 나우환동 여러분과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regolas(비회원이네요... 최여환) 나우 모임엔 첨이라 그런지 어색하네요. 좋은 시간이 되면 좋겠네요. gish98(성현) 안녕하세요. 세월의 돌 때문에 참석한 사람입니다. 재밌게들 보내세요! finesky(태섭 - 비회원) 예전에 편지 몇 번 보낸게 글에 대한 첫인연이었는데, 그 인연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계속 인연이 유지되길. PS. 출판 축하해요! ^_______^회향나무(은림) 오랜만에 뵈어요. 낯선 분이 참 많네요 ^^/// 루디언니 출판 축하드려요!!! 헤르미스(이슈) 오랜만에 오네요. 역시~ 모르는 사람이 참 많아. 쩝. 루디언니 출판 축하하구요~ 오랜만에 언니 뵈니 너무 반갑네요. 해커kgs(비평맨) 첨 와보는 거라서... 암튼 재미는 있습니다. 다음에도 와야징~앨리어트(수라) 정모는 무척 오랜만이네요. 루디누나 축하드리고요, 앞으로도 좋은 글 써주세요. everdawn(배째=새벽) 간만에 왔다. 정모.... 역시나 이번에도 無念... --;빨강우산(ReDra) 축하해. redin(이성현) 송휘형에게 끌려왔습니다;; 처음이라 떨려요...(크하하!)elfer(안치환;슈스린) ... 아..하..하..;;키노피오(조기현) 『D-197』 할머니가 속삭이며 내게 말했다. 피오가 돌아온다고! 하얀달비(신민경) 전민희님 출판 축하드려요~! 열심히!! 재미있게!! 읽겠습니당~! 가이트(KAGA) 루디엔 언니 책 나온거 축하드려요. ^^ 이번에도 여전히 모르는 사람이 많구만... 처음 뵙던 분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이 외에 제가 대강 계산하기로 방명록을 안 쓰셨던 분들... 맑은연꽃(윤정빈) 군, 부시삽이 방명록을 안쓰다니...;두키(박윤수) 님, 오셨을 때엔 방명록이 이미 걷힌 후였군요. ^^;꼬마호빗(도희정) 양, 방명록 꼭 쓰고 가랬더니...배신이얏! stairway(아라곤) 님, 식당에서 오셨죠? 제대로 얼굴도..;;;haneul(에델) 양, 헉... 너마저도..안쓰다니..;;;fullup(권지은) 님, 그런데... 조금 헷갈립니다. 정말 제 앞에 계시던 그 분 맞나요? (이건 사후 정보로 입수한 아이디였습니다;; 인사하고 얘기도 했는데 아이디를 모르다닛...;; 식당에서 제 맞은편왼쪽 끝에 앉아계시던 분께서는 꼭 제게 아이디 확인 부탁드립니다..^^;;)다솜바람(이동한) 님, 잊어버렸을 리가 없잖아요!;;; 너무 잘 기억한 나머지 방명록을 타이핑하면서 이름이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생각해 버렸답니다. 두키 님 아이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도같은 빛그림인 다솜바람 님은 방명록에 있었어... 하고 생각을... 어쨌든, 제가 빠뜨렸으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T_T이 외에도 혹시 제가 빠뜨린 분이 있다면 꼭 말씀해 주시길.. 그리고 죄송, 또 죄송합니다...(미리 용서를 빌고 있었다..--;)+=+=+=+=+=+=+=+=+=+=+=+=+=+=+=+=+=+=+=+=+=+=+=+=+=+=+=+=+=+=+=이상하게도 기존에 정모에 나오시던 분들은 많이 빠지시고, 새로운분들이 많았던 자리였습니다. 어수선하기도 했지만, 또 새로운 얼굴을 보아 즐거움도 많았었지요. 또한 모두 재미있었다고 말씀해 주셔서 기뻤습니다. 이만, 방명록을 마치며 오셨던 많은 분들과 오고 싶으셨으나 각종사정으로 못 오셨던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529번제 목:◁세월의돌▷9-2영원할수없는안식의땅(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2 22:40 읽음:214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2. 영원할 수 없는 안식의 땅 (6) 눈물이 흐른다. 관자놀이와 뺨을 타고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의 강이 흘러내린다. 그손가락들이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그것들을 닦는 것을 느낀다. 내 눈가를 닦아내고 뺨을 감싸고 눈꺼풀을 덮는다. 따뜻하게… 영원의 시간 속에서 나를 끝없이 위로할 그 눈물 어린 손가락을 느낀다. 서걱거리는 풀들이 바람을 맞아 물결처럼 누웠다 일어섰다 했다. 저 멀리 보이는 들판까지, 주위에 인적이라고는 우리 세 사람뿐이었다. "비가 왔지만 금방 마르는군요. 풀 소리를 들어보세요." "지금은 파비안느 아룬드잖아."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내 옆에 잠든 듯 누운 한 남자의얼굴을 잠시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검으로 찔렀던 바로 그 상대, 그때로부터 벌써 7일이 지나갔다고 했다. 아니, 그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의식이 없었던 때의 일은 다 기억할 수가 없다. 스노이, 그가 그렇게 말했다. "사실, 정말 이렇게 만날 거라고 확신하진 못했어요." 내가 말하자 '스노이'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마지막 순간을 버리지 않고 왔잖습니까……." 그는 말끝을 약간씩 끄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나는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다가 그의 갈대빛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남자치고는 특이하게 길게 길러 허리까지 닿는 그 머리카락은 유리카의 그것만큼이나 곧고 매끄러웠다. 약간만 바람이 불어도 부드럽게 물결졌다. 그는 또한 누구에게든 존댓말을 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저도, 이렇게 긴 시간을 뛰어넘어, 어린 시절의 추억인 줄로만 알았던 봄의 공주를 다시 만난 것이 때로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의 이름은 스노이안 데바키. 그리고 그는 젊고 아름다운 얼굴,내가 치명상을 입힌 그와 아주 비슷한 윤곽의 이목구비와 거기에 걸맞지 않는 긴 나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리카보다는 여덟 살이나 어렸다. "나가서 걷고 싶어." "아직 안돼. 이 중에 네 몸이 가장 정상이 아닌 것, 잘 알고 있잖아?" 유리카는 내 손을 잡고 있다. 여간해서는 놓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말을 잘 듣는 아이처럼 가만히 누운 채, 저만치 동굴 입구밖으로 보이는 긴 풀들의 물결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분다. 아주 좋은 날씨다. 좋은 햇살과 좋은 바람이 있는 때다. "너한테서 그 말을 듣게 되다니 유감… 이 아니고 꿈만 같다." 유리카는 내 말에 소리내어 웃는다. 그래, 그녀는 건강해. 그녀는이제 죽지 않아. 떠나지 않아. 나는 처음에 믿지 않았었지만… 그러나 엘다렌과 유리카가 '찾기만 한다면'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 그대로, 우리가 찾게된 '현자' 스노이안은 놀랄 만한 의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스노이안은 또한 유리카가 2백년 전에 보았던 꼬마에불과하다. 이렇게 변해버리고, 그래서 유리카보다 훨씬 나이든 얼굴을 가지게 된 그. 갖가지 방식으로 혼돈되는 시간들. 지나친 칼레시아드로 거의 뒤틀리다시피 망가진 내 몸의 균형을 되찾아준 것도 그였다. 비록 아직도 완전하지는 않기 때문에 긴 요양이필요하지만 말이다. 유리카는 물론 오르코시즈 해독을 위해 자기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그 옛날의 '꼬마'를 믿고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엘다렌도 몰랐을 것이다. 우리가 찾으려 했던 '현자', 스노이안의 아버지인 스노이켈이죽은 것은 약 10년 전의 일이었다. 아마, 유리카가 '스노이'라고 불렀던 그 이름의 주인인 스노이켈이살아 있었더라면 내가 스노이안의 동생을 저렇게 만드는 오해는 생기지 않았었겠지……. 느닷없는 침입자가 남긴 치명적인 상처, 스노이안과 스노이켈의 강력한 마법으로도 7백년이 넘은 그 생명을 한 순간도 더 붙잡지 못했다. 형과는 달리 검사의 길을 걸었던 동생 스노이엘, 그만큼이나 치명적인 실력을 지녔던… 그는 자기 아버지와 형을 제하고는 이성을 가진 종족과 대화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섬에서 태어났고, 이섬에서만 살았다. 그의 세상에서는 인간조차 들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으리라. 나를 바라보던 스노이엘의 눈은 확실히, 같은 종족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었었다……. 그리고 스노이엘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침입자에 대한 응징 방법을 확실하게 결정하고 있었다. 어떤 이유도 필요없었다. 토끼 한마리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로, 살인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스노이엘로서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는아마 필요하다면 사람 고기를 먹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멧돼지를요리해 먹는 것과 똑같은 기분으로. "오래 사는 기분은 어떤 건가요?" 풀밭 가운데 물결을 만들던 바람 가운데 한 줄기가 동굴 속으로 불어와 풀 냄새를 실어다 주었다. 긴 갈색 머리카락의 젊은, 아니 어린, 아니 사실은 긴 나이를 가진 스노이안 데바키는 자신이 살아온 2백년은 그다지 긴 것이 아니라고 답했다. "스노이켈은 엘프들에게 주어진 가장 긴 나이, 천년의 세월을 모두누리진 못했지만 적어도 7백년을 살다가 갔어. 아들들이 그만큼이나살려면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한지 알아?" 나는 그 세월을 다 볼 수 없다. 내겐 엘프의 피 같은 것은 섞여 있지 않으니까. "반나마 섞인 엘프의 피가 제게 어느 정도의 나이를 선사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스노이안의 동생 스노이엘을 보며 느꼈던 그 감정은맞았다. 그들은 나와는 다른 이종족, 비록 인간을 잡아먹지는 않지만동정심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 인간과 떨어져 산 그들은엘프와 인간의 피가 섞인 혼혈, 하프엘프 종족들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이 기억나요?" 내 질문이 조금 무례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어머니는 겨우 백년 남짓의 나이를 누릴 뿐인 인간이었으니까……. 스노이안은 웃었다. 거의 백여년만에 처음 인간과 대화하고 있다는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과 거의 다르지 않은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언어와 습관, 예의에 이르기까지 흠잡을 데라고는 없다. 갸름하고 단아한 얼굴, 직접 짠 옷감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긴 녹색의 겉옷. 물론, 인간과 단 한 번도 관계한 일이 없다는 동생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낯선 그 눈빛은 제하고. "아직은 생각납니다. 그러나 잊게 되겠죠." 평균적 수명을 넘고 나면 저런 것이 저렇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그는 물주전자를 찾아 몸을 일으키면서 덧붙였다. "그러나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제 수명이 충분히 길지 않을 수도 있죠." 그는 자신의 수명을 모른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하프엘프들에게는평균적 수명이라는 것이 없다. 인간보다 더 짧게 사는 부류에서부터,엘프보다 더 오랜 세월을 누리는 자들까지 있으니까. 그러나 그 얼굴은 겨우 스물 중반 남짓한, 어디까지나 깨끗한 젊은이의 그것이었다. 언제까지? 엘프도 죽을 때에는 늙고 쭈글쭈글한 얼굴을 갖게 되는지 나는 모른다. 묘한 일이다. 엘프는 겉으로 보기에 인간과 외양상 큰 차이를 갖고있지는 않았다. 평범한 머리색깔과 눈빛, 각양각색의 얼굴, 주로 마른 몸집이라고는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그들. 그러나하프엘프임에도 불구하고 스노이안과 스노이엘에게서 느껴지는 낯설고도 멀리 떨어진 듯한 느낌, 시간을 초월하여 생각하는 듯 아득한눈매와 손짓 하나에서조차 풍겨나는 풀과 바람의 냄새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그 피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이 아닌 다른 조상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들. 나무… 그렇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키 크고 말없는, 오래된나무였다. 내가 생각에 잠긴 동안 스노이안은 물주전자와 내가 먹을 약, 그리고 유리카가 먹을 약을 가져다 나란히 놓았다. "시간이 되었으니 약을 드셔야지요." 그는 친절한 의사다. 그의 동생이 나를 공격하여 거의 죽일 뻔했던것, 그리고 내가 그 동생을 또한 죽일 뻔했다는 것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한, 참으로 이상하리만큼 온화한 2백 10세의 하프엘프.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마음은 긴 세월산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닐 텐데. 내가 기대한 외모와는 달랐으나,내가 생각한 현자보다는 더욱 현명한, 참으로 이상한 늙은 젊은이. 내가 컵에 물을 따르고 그 안에 약을 타 넣자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아이를 보는 것 같은 그 미소를 보자마음속에 부끄러운 마음이 불쑥 솟았다. 항상심이라는 말이 그만큼어울리는 사람을 또 찾기란 어려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나와 스노이엘이 검을 겨루던 포도원, 그리고그다지 높지 않은 절벽 안쪽의 작은 동굴이었다. 그는 날씨가 좋을때면 나와서 지내는 집이 절벽 위에도 있다면서, 몸이 낫거든 보여주마며 웃었다. 그의 말로는 절벽 꼭대기에 평평한 땅이 있어서 그 위에 오두막과 약간의 가축, 각종 채소밭 같은 것을 가꾸고 있다고 했다. "그런 곳에 있으면 폭풍이나 바람, 비 같은 게 수시로 망쳐 놓을텐데요?" 스노이안은 내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면 또다시 만들면 됩니다." +=+=+=+=+=+=+=+=+=+=+=+=+=+=+=+=+=+=+=+=+=+=+=+=+=+=+=+=+=+=+=책에 실린 지도 말이죠, 앞면에 실린 것하고 뒷면에 실린 것이 약간 다르답니다. (책에 지도가 두 개인건 아시죠?)'세월의 돌의 세계'라고 쓰여진 칸이 하나는 오른쪽에 배치되어 있고, 하나는 왼쪽에 가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책이 접히는 부분으로가려지는 부분이 두 지도에서 달라요. 그러니까 앞쪽 지도에서 가려진 부분은 뒤쪽 지도에 가면 보입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531번제 목:◁세월의돌▷9-2영원할수없는안식의땅(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2 22:40 읽음:208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2. 영원할 수 없는 안식의 땅 (7) 세월의 힘일까… 짧다고도 할 수 있는 시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그 모든 일을 또다시 처음부터 새로 할 수 있는 마음은. 망가진집을 보고 당연하게 또 지으면 된다고, 또 가꾸면 된다고 생각하는인간이 몇이나 될까. 채소와 꽃나무, 그리고 우리가 이미 맛보았던 포도… 아마 그는 그가 키우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성격 그대로 온화하고 선량하게 키울것만 같다. "스노이안은 아버지를 참 닮았어. 어려서 보았던 귀여운 꼬마가 겨우 2백년 동안 이렇게 닮아지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유리카는 자신은 실제 수명이 백년이 채 될까말까 하는 주제에 그렇게 말하며 약을 마시더니 어깨를 부르르 떨며 인상을 찌푸렸다. 기침을 하면서 간신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큭, 스노이, 너무 써." 스노이안은 그가 즐겨 앉는 동굴 한구석 튀어나온 바위 위에 앉아특유의 표정으로 가만히 웃고 있었다. "본래 쓴 약이 몸을 빨리 보하는 법이지요, 봄의 공주님……." 온화하지만 엄한 의사이기도 한 스노이안이 약을 마신 뒤 물로 입을 헹구는 것조차 금했기 때문에 유리카는 한동안 헛구역질까지 하며고생을 했다. 내 약은 그 정도로 심하진 않다. 물에 타 넣고 나면 약간은 시큼한 것 같기도 한 묘한 약이다. 솔직히 내 관점으로는 약간상한 것처럼 느껴지는 맛이었다. 스노이안은 몸이 마르고 팔다리가 몹시 길었다. 그가 최고의 솜씨를 발휘하여 치료했는데도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 동생은 그보다는 조금 작은 편이다. 유리카가 2백년 전엔 없던 저 동생은 언제태어난 거냐고 물었을 때, 스노이안은 동생의 나이가 아직 60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해서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럼… 어머니가 다르군요?" "예, 물론……." 그것 참… 이상한 기분이구나. 세 부자가 모두 줄이자면 '스노이'가 되는 희한한 집안이었다. 또한 스노이켈의 아버지이자 이들의 할아버지인 아스트라한 데바키는에제키엘을 도와주었던 그루터기 엘프 일족 최고의 마법사였다고 했다. 유리카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흰 수염을 성성하게 기른 엄숙한 할아버지였던 아스트라한에게 유리카는 제멋대로 반말을 하고 짓궂게 굴었지만 또한 굉장히 귀여움을 받았었다고 스노이는 말했다. "저로선 참 신기하게만 보이는 누나였지요. 할아버지는 제겐 너무나 어려운 어른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2백 열살이 된 스노이안 데바키는 결코 누군가를 두려워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부드러움 속에는 그 어떤 두려운사람, 대단한 악인을 만난다고 해도 의연하게 자신의 할 말과 해야할 일을 할 강인한 모습도 숨겨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주로 배운 것은 의술이었고 지금도 그것밖에 할 줄 모른다고 말했지만 유리카는아스트라한과 스노이켈 모두가 대단한 마력을 지닌 마법사였다는 이야기를 하며 스노이안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스노이안은 유리카의 고집스런 주장에 그저 웃을 뿐이었다. "동생… 분은요?"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조심스럽다. 그러나 스노이안은 아무렇지않은 듯, 바람에 흐트러진 긴 머리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그의 손짓은 마치 하프를 타는 음유시인의 손가락을 연상시켰다. "스노이엘은 60년간 단 한가지 익힌 재주인 검술로 나름대로는 입신에 이르렀다고 여기고 있지만, 제가 생각할 때엔 아직 어린아이의손장난에 불과합니다. 과거의 놀랄 만한 조상들의 솜씨에 미치자면몇 배의 세월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 그건 이번에 파비안 님과 대결한 결과를 보아도 알 수 있지요……." "……." 스노이엘은 나 따위는 감히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난 검사였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스노이안은 자신의 동생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는 매우 냉정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나는 운이 좋았던 거야. 스노이안과는 또 다른 의미로 그 눈빛에서 느껴지던 부동심에 가까운, 결코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검을 가졌던 스노이엘을 사실 나는 당할 재주가 없었어. 60년간 익힌 검술이라면, 우리 아버지보다도 오래 익힌셈인걸. "비가 오는군요." 동굴밖에 비가 내린다. 입구에 길게 가려진 은빛 발이 반짝인다. 파비안느 아룬드에 이렇게나 비가 잦다니, 마치 방랑자 아룬드라도 벌써 온 것 같잖아. 지나가는 여름의 소나기일 거야. 금방 그칠 거야. 쏴아아아아……. 갈색의 동굴 밖으로 온 세상 가득히 비가 내렸다. 무성한 잎과 가지가 늘어진 저 너머 들판, 싸하게 내리는 빗줄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짝 말랐던 초지에 순식간에 물기가 차올랐다. 유리카는 갑자기 잠이 들기라도 한 것인지 눈을 가만히 감고 누워있었다. 부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대로가 편하다면 쉬는 것도 좋겠지. "두 분 모두, 앞으로 7일 정도는 더 몸을 쉬게 하셔야 합니다. 제가 가진 것은 마법이 아니라 의술이기 때문에 몸의 휴식과 조화가 없이는 어떤 회복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노이안이 마법을 전혀 모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우리가 호수 안으로 우리를 데려온 그 배에 대해서 말했을 때 그는약간 망설이며 매끈한 뺨에 처음으로 보는 홍조를 띠었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에 걸맞아 보이는 얼굴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아버지께서 걸어 놓으신 마법입니다. 저는 그저 유지시키는 것밖에 못합니다." 유리카가 문득 눈을 뜨는 듯하더니 갑자기 손을 움직여 익숙한 소리를 나게 했다. 나는 문득 드는 섬뜩한 느낌에 몸을 돌렸다. 짐승털로 된 이불 밖으로 나온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것은 목 없는 기사의땅에서 주워온 황금 방울이었다. "그럼 이것도, 스노이켈이 내버려두고 잊어버린 것?" 스노이안은 손을 내밀어 유리카로부터 방울을 건네받더니 그것을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처음 본다는 듯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로서도뭔가 까닭 모를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봄의 공주께서도 기억하시겠지만, 아버지께선 이 섬으로 들어오실때 외부의 것들과 연결을 끊기 위해 섬 전체에 마법을 거셨지요. 그러기 위해 섬 구석구석에 봉헌물을 바쳤고, 마법물들도 숨겨 두었습니다. 그 마법물들의 힘이 차단막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했기 때문에모든 마법이 사라졌다는 이 시대에 이르러서도 저와 제 동생은 약간의 마법을 누리며 살 수 있었지요. 그 배는 몇몇 잘 아는 친구들을위해서만 일부러 남겨 둔 것이었습니다.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를 방문자를 위한 것, 손님 대접에 소홀함이 없었다는 저희 집안의 전통을위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저도 한동안 그 배의존재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방울은……." 그의 긴 손가락 사이에서 황금 방울은 빗속에서도 반짝이는 한 줄기 햇살을 받아 날카로운 빛을 반사했다. "할아버지의 물건입니다." "할아버지라면, 아스트라한이 건 마법이 그 안에?" 유리카의 놀란 듯한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울렸다. 비는 생각보다 쉽게 그치지 않았다. 드러난 피부에 와 닿는 공기가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주위는 저녁때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신나게장난치고 노는 아이들처럼 비는 멋대로 들판을 뛰어다니고 수백 개의목소리로 재잘거렸다. "그렇다면, 대단한 물건이잖아?" 아스트라한은, 에제키엘을 제하고는 지금까지도 당할 자 없다는 강력한 마법사였다고 했지. "아마도 환각의 힘을 증폭시키는 물건이라고 생각됩니다. 저와 아버지가 이곳에 들어오기보다 훨씬 오래된 옛날, 할아버지께선 홀로이곳에 들어와 사신 일이 있습니다. 제가 이 물건에 대해 모르는 것을 보니 최근의 물건은 아니고, 그 당시 할아버지께선 외부의 침입을막기 위해 환각의 방벽을 치고 사셨던가 봅니다." "할아버지의 물건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400회 축하해주신 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다솜바람 님, 방명록에서 빠뜨리다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절대 잊어버린 게 아니에요! 메일에도 썼듯 착각이라니까요...;;)(과연 믿어주실 것인가....)fullup 님, 일요일 모임에 오신 게 본인이 맞으셨군요. 어쨌든 글쓰시는 분을 뵙는 것은 즐거워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679번제 목:◁세월의돌▷9-2영원할수없는안식의땅(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4 00:12 읽음:203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2. 영원할 수 없는 안식의 땅 (8) 내가 묻자 스노이는 방울을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가까운 가족의 마법력이 걸려 있는 물건은,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아스트라한 데바키는 에제키엘이 태어나기 전에 대륙 최고의 마법사였고,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 또다시 대륙 최고의 마법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인생은 에제키엘보다 훨씬 길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긴 연륜과 오랜 연구, 천분으로도 한 인간 젊은이의 마법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와 만났던 갓 스물의 앳된 젊은이 에제키엘은 천년의 벽을 뛰어넘어 그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아들 스노이켈과도 친구가 되었다. 에제키엘과 함께 다녔던 은빛 머리카락의 봄의 공주에 대해서는당시 열 살의 어린 꼬마였던 스노이안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스노이안은 위기의 순간, 스노이엘을 향한 내 검을 막지는 못했으나유리카의 얼굴을 제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다. 스노이안은 2백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유리카의 얼굴을 정확히기억하는 것에 대해서 가볍게 웃으며 그 이유를 답했다. "제가 그 아름다운 누나를 좀 좋아했었나 봅니다." 유리카는 웃었으나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문득 내가 좋아하는 유리카의 기나긴 나이가 느껴져 왔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똑같은 또래로 생각하고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 젊은 하프엘프이자 호수속 섬의 현자인 2백 열 살의 스노이안에게 뭐라고 말하기가 무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봄의 공주께선 잠들었다가 깨어나시길 잘 하셨군요." 스노이안의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 둘 다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약 사흘간을 더 쉬었다. 스노이안이 말한 이레가 다 되지는 않았지만, 파비안느 아룬드 16일이 된 이날 아침, 유리카는 스노이안이 아침을 먹으라고 부르지도않았는데 똑바로 일어나 앉았다. "이렇게 무작정 쉴 때가 아니야. 스노이안은 우리가 아침을 들기 전에 속을 깨우기 위한 쓴 약을 가져다주곤 했다. 그걸 먹는 일이 하루의 일과 중 가장 고역스런 일이었다. 그것 말고는 이곳 스노이안의 동굴에 머무르는 시간은 한 마디로평화, 그리고 모든 것을 잊은 듯한 삶의 멈춤이다. 시간은 더딘 듯빠르게 흘렀고, 가지 않는 듯 화살처럼 지나쳐 버렸다. 하루가 한해처럼 가는 듯 했으나 사흘은 몇 분처럼 사그라져갔다. 스노이안의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인가? 유리카는 하프엘프의 경우 인간의 피의 영향 때문에 비록 수명은길지만 완연히 늙은 얼굴로 오래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노이안은 스물 몇 살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젊은이의 모습 그대로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60살 가량이라고 한 그의 동생 스노이엘과 스노이안은 거의 나이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백 사십 살에 이르는 나이 차이인데도 두사람의 모습은 정말로 두세 살 차이나는 형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동생은… 언제 깨어나는 거죠?" "그대들이 떠난 뒤입니다." 그리고 나는, 스노이안이 일부러 동생을 치료하면서 일찍 깨어나지않고 오래도록 잠을 자도록 손을 썼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가 머무른 며칠 동안 단 한 번도 깨어나지 않은 채 스노이엘은 자신의 금빛머리카락을 베개삼아 끝없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와 마주치는 것이 불편할까봐 그렇게 한 것일까. "쉬어야 할 때는 쉬어야지요." 스노이안은 우리의 약을 각각 타 가지고 들고 오면서 유리카의 말을 들은 듯, 그렇게 말했다. 유리카는 약그릇을 받아들었지만 약을마시기 전에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렇게 쉬고만 있기엔 너무나 시간이 없어. 저, 파비안……." "크윽, 왜?" 마침 둘이 이야기하는 동안 약을 마셔버린 나는 그 쓴맛에 온 몸을떨었다. 혹시라도 스노이안이 자기 동생을 다치게 한 것을 이 쓴맛으로 보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근거 없는 의심을 해보며 나는 유리카의 부름에 대답했다. 그녀 역시 약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역시나어깨를 움츠리며 턱을 흔들었다. "으윽, 정말 쓰다니까." 그녀가 대답을 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간신히 입안의 쓴기운을 참아낸 그녀는 몸을 당겨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지금까지 이 여행을 서둘렀던 이유, 말해줄게." 이렇게 오래 함께해 왔지만 나는 아직도 그녀에게 듣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게 되었다. 그리고나름대로의 상상을 해 가며 내가 모르는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방법도배웠다. "엘프와 드워프를 하루라도 빨리 되살리기 위해서가 아냐?" 내 말에 유리카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저었다. "그렇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 말고도 있어." 스노이안은 웬일인지 아침 준비를 하러 가지 않고 잠시 자신의 돌의자에―앞서도 말했다시피 그저 동굴 한쪽에 튀어나온 돌부리였다―앉아 우리 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 보석을 찾아 넣고 되살림의 의식을 행하기 위한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어." "기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기한? 그리고 의식을 행한다고? 2백년 전 그 당시에 어린아이였을 스노이안 역시 이 이야기는 잘모를 것이다. 세운 무릎에 팔꿈치로 턱을 괴고 있는 그의 긴 갈대빛머리카락이 엷은 커튼처럼 가볍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지막 보석을 찾고 나면, 우린 하르마탄 섬으로 가야 해. 거기에재생의 의식을 위한 장소가 있어." 섬으로라고……. 모두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뿐이었다. 왜 보석을 모두 찾아 넣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 거야? 그러는 동안에도 유리카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문자 아룬드. 문자 아룬드가 오기 전까지 우린 나머지 두 개의 보석을 모두 찾아 하르마탄 섬까지 가야 해." "뭐라고?!" 겨우… 네 달밖에 남지 않았잖아! +=+=+=+=+=+=+=+=+=+=+=+=+=+=+=+=+=+=+=+=+=+=+=+=+=+=+=+=+=+=+=저는 스노이안이라는 이 인물을 몹시 좋아하고 있습니다... ^^11월 2일자 스포츠서울에 세월의 돌 관련 기사가 실렸더군요. 그런데 오늘에야 알게 된 거라 신문을 구하지 못했어요. T_T신문이란 하루만 날짜가 지나도 구하기가 아예 불가능하더군요... 이것 말고도 11월 3일자 동아일보, 11월 3일자 스포츠투데이, 2일자 스포츠투데이 등에도 광고가 났습니다. 보신 분 계세요? (왜 아무도 말씀을 안해주시는 걸까...;;; 저, 날짜 지나고 알게되면 신문을 구할 수가 없어서 그렇답니다...^^;; 어디선가 광고를보시면 좀 말씀해 주세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680번제 목:◁세월의돌▷9-2영원할수없는안식의땅(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4 00:12 읽음:207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2. 영원할 수 없는 안식의 땅 (9) 뺨이 싸늘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스노이안은 움직이지 않았고, 유리카는 확인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네 달? 내가 고향을 떠난 뒤로 여덟 달 동안 찾아낸 보석은겨우 한 개뿐인데, 남은 네 달 동안 나머지 두 개를 찾아내고 하르마탄 섬까지 가야만 한다고? "왜 그런 말을 이제야 하는 거야!" 나는 당황한 나머지 약간 탓하듯 소리를 질렀다. 유리카는 눈가를잠시 매만지더니 나를 달래려는 것처럼 다시 다가앉았다. "네 생각만큼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 다른 보석들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거든. 어쨌든 나는 충분히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봐. 물론낭비할 시간이 많지는 않지." 나는 갑자기 알게 된 사실로 약간 멍해 있는 상태라 그녀의 말을차근차근 되씹어 생각하지는 못했다. 다만 이젠 그녀 뿐 아니라 나조차도 굉장히 급해졌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지금의 평화로운 시간을그만 접게 되리라는 아쉬움 같은 것들이 마음속을 떠돌았다. 아무 것도 없는 듯하지만 또한 모든 것이 갖춰진 땅, 원하는 만큼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이 땅에서 오랜만에 쉬었던 나날들… 그러자 내가 지금까지 시간을 낭비하며 돌아다녔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떠올라왔다. 쉬는 시간마저도, 나름의 의미가 있어. "내가 이 모든 이야기들을 미리미리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나중에말해줄게… 지금까지 너는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하면 되는 거야." 그래… 그렇지만……. "수도로 돌아가고, 엘다렌과 나르디를 만나고 다시 세 번째 보석을찾으러 숲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네 번째 보석을 찾으러……." 무심코 중얼거려 본 일정이었지만 정말로 빠듯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네 번째 보석은 어디에 있는 거지? 아직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들은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유리카는 마치 내게 다짐하려는 것처럼 힘주어 말했다. "빨리 할 수 있어. 모든 일이 잘 될 테니까."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약간 높은 곳에 있는 스노이안의 고개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스노이, 우리가 지금 떠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긴 한 거겠지?" 스노이안은 우리가 마신 약그릇들을 나란히 포개어 놓더니 몸을 일으켜 다시 동굴 안쪽의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 동굴은 양쪽으로 입구가 뚫려 있어서 연기가 뒤로도 빠지기 때문에 안쪽에서 취사를 해도좋았다. 문득 갓 구운 빵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이곳에서 스노이안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는 기분은 바로 저런 거였어. 따뜻하고 부드러운 갈색의 빵 냄새, 세상이 언제까지나 평화롭고 아무 일 없을 것만 같은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어제와 다르지 않게 살아가는 일. 스노이안은 곧 아침 식사를 위한 빵 바구니와 따뜻한 수프 그릇을가져왔다. 아침은 이 빵을 수프에 찍어 먹는 것, 그리고 그가 직접짠 포도즙과 절벽 위의 농장 아닌 농장에서 가져온 달걀 하나씩이 전부였다. 굉장히 소박한 것이었는데도 스노이안은 그것조차 제대로 먹지 않았다. 엘프들은 음식을 많이 먹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들은자연을 바라보는 일과 풀 냄새, 숲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몸에 생기를 얻는다는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는 정말인 듯했다. "파비안 님은… 어느 정도 몸의 균형이 되돌아오긴 했지만 그대로떠난다면 한동안은 칼레시아드를 자제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보크리드를 익힌다 하더라도, 역시 어느 정도는 자제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고 봄의 공주께선……." 스노이안은 유리카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았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에 들었던 듯도 한 저 '봄의 공주'라는 이름만을 언제나 썼다. 2백년 전의 이름은 그의 입 안에서 세월의 무게쯤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사실 이미 몸의 독은 완전히 제거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독이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었기 때문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몹시 쇠약해 있지요. 정상과 다를 것 없다고 느끼시겠지만, 사실 굉장히 다른 병에 걸리기 쉬운 상태입니다. 면역력이 되살아나려면 시간이 좀걸립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새로운 어떤 병에 감염된다면 아주치명적이겠지요……." "그렇지만 모든 일이 늦어지는 것이 더욱 치명적이야." 나는 짐승털로 된 이불을 젖히고 천천히 팔을 움직여 빵을 수프 그릇에서 입으로 가져갔다. 여기에서 살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다른 일들은 그저 잊혀져 버릴 것만 같아. 모든 일들은 바람처럼 그저 날려가고, 구름처럼 그저 흘러가고 있어. "맛있어." 유리카는 빵을 한 조각 떼어서 천천히 평가라도 하려는 것처럼 혀끝으로 맛보고 있었다. 스노이안은 웃었다. "제 요리 솜씨를 감평하실 생각이십니까?" 의사의 소견(?)을 듣고도 나는 선뜻 어떤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여길 떠나 다시 앞에 펼쳐질 모든 일들은 모험, 결코 휴식이나안정과는 거리가 먼 일들이다. 우리가, 아니 그보다도 유리카가 그몸으로 버틸 수 있을까? 서둘렀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치는 것이 아닐까? 수도의 일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가 지금 돌아가면 모든 일이일단락 되어 있긴 한 걸까?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매일 같이 보았던 그대로 눈앞의 들판에서는 아침이 찾아왔다. 스노이안은 아침을 먹기 전에 혼자서 절벽 위의오두막에 올라가 채소밭을 살피고 약간의 가축을 돌보곤 했다. 가축이라 봐야 닭 두 마리와 양 한 마리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달걀을 가져오고 양젖도 가끔 짜 온다. 우리가 덮은 이불은 양털은 아니었고어떤 짐승인지 잘 알 수 없는 털로 만들어진 것인데, 내가 무슨 털이냐고 묻자 그는 조용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비가 와도 어김없이 비를 맞으며 밖으로 나간다. 엘프들은 겉보기보다 체질이 몹시 질기고 강하다. 자연의 작용들은 그들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스노이안은 비록 하프엘프였지만 엘프의 피를 더 많이 받은 것인지 그 늙지 않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비에도, 바람에도 개의치 않았고, 추위도 더위도 많이 느끼지 않았다. 오늘은 아침에 이른 비가 조금 내렸는지 머리카락이 약간 젖어 있었다. 내 목구멍으로 수프에 적신 빵이 넘어가는 소리가 한 번 크게 울렸을 때, 식사가 끝나도록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기만 하고 있던 스노이안이 문득 입을 열어 말을 했다. "엘다렌 님과 직접 의논을 해보시겠습니까?" 나는 몸을 후딱 그가 있는 쪽으로 돌렸다. 스노이안은 젖은 긴 머리를 말리려는 것처럼 마른 천으로 천천히 누르고 있었으며, 그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엘다렌이 여길 왔어요?" 내가 전혀 상황을 잘못 받아들였다는 것은 먹을 때 별로 소리를 내지 않는 유리카가 키득, 웃으며 수프 삼키는 소리를 냈을 때에야 알수 있었다. 그녀는 입을 벌리지 않은 채 얼굴에 긴 가로 곡선을 만들면서 씨익 웃어 보였다. "그냥 대화 말이야. 엘다가 어떻게 갑자기 여길 오니?" 그리고 스노이안이 말한 것이 마법으로 엘다렌에게 말을 실어 보내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그런 뒤에도 몇 번인가 키득거리는 웃음과 더불어 설명이 오간 뒤였다. "여긴 마법이 있지만, 거긴 없는 걸요?" 그리고 내 질문에 스노이안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이 세상에 마법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습니다. 아마 봄의 공주께서말씀하셨던 대로 에제키엘의 약속의 보석들이 하나씩 풀려나고 있기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저는 나가보지 않아 자세히 모르지만 적어도천문과 공기를 보고 느낄 수는 있으니까요……." 그런 걸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적어도' 느낄 수 있다고말할 정도로 사소한 것이냔 말야. 무슨 뜻인지조차도 모르겠어. 유리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엔 아스트라한과 스노이켈이 걸어 둔 마법의 힘 때문에 상당한 정도의 마법이 살아남아 있지만, 어쨌든 밖에서도 아주 가벼운 마법은 몇 개 돌아온 듯했어. 뭐, 여기에 남아 있는 그 지나친 마법력들 때문에 이스나에도 되지 못한 악령을 둘이나 만나 죽도록 고생한걸 생각하면, 그게 반드시 반가운 일인지는 의문이지만 말야." 우스운 일이었지만, 스노이안은 바로 이웃이라 할 수 있을 그 목없는 기사의 일과 호수의 오리안느 이야기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던 듯했다. +=+=+=+=+=+=+=+=+=+=+=+=+=+=+=+=+=+=+=+=+=+=+=+=+=+=+=+=+=+=+=수정과 글쓰기를 같이 한다는 것은 확실히 힘든 일이긴 하군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801번제 목:◁세월의돌▷9-2영원할수없는안식의땅(10)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5 00:22 읽음:201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2. 영원할 수 없는 안식의 땅 (10) 황금 방울은 선조의 것이라 스노이안이 다시 보관하기로 이야기가되었다. 사실 나는 그 방울이 좀 두려웠다. 지나치게 강력한 마법이깃든 봉인체인 그 방울이, 이제 겨우 작은 마법들이 돌아오고 있는세상에 나가 어떤 영향을 불러오게 될 지 아무 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그걸 맡기게 된 것이 오히려 굉장히다행스러웠다. "어쨌든, 이야기가 가능하단 말씀이십니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지요……." 나는 비록 잠깐일 뿐이지만 그와 지내보고 나서 그가 어떤 식으로말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스노이안 데바키가 저런 식으로 말하는 일일 때에는 거의 십중팔구 성공한다. 아니, 십중팔구가 아니라 거의열에 열이 성공이다. 그렇지 않고선 결코 그는 저런 식으로 말하지않는다. "그렇지만 당신, 마법은 모른다고……." 내 말을 막아버리기라도 하듯 유리카가 잘라 말했다. "그럼, 해보는 거지 뭐. 난 스노이를 믿어. 그 집안 사람들은 허튼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지." 점심때에 이르러 동굴 가운데에는 마음의 전송을 위한 약간의 준비가 이루어졌다. 유리카와 스노이안이 말한 약간 돌아온 마법이라는 것에 대해서라면 나도 기억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특히 이런 곳에 있자니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은 스조렌 산맥의 산지기 집에서 유리카와 나우케산지기가 함께 썼던 '마법 시선'이었다. 그리고 푸른 굴조개호의 뱃전에서 유리카가 만들었던 하얀 빛덩어리 비슷한 것, 그리고 또 잊고있었지만 유리카가 일깨워 주었던, 이베카 시의 여관에서 유리카가잠긴 문을 열어버린 일 등등.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정말이구나, 이 네 개의 돌과 아룬드나얀의목걸이 안에 마법력이 묶여 있다는 그 이야기는. 그렇지만 어떻게 일종의 거대한 질서라고 할 만한 것이 한 개의 목걸이 안에 넣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그걸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마법이 돌아온 세계를 보게 된후나 되어서일까. 스노이안은 동굴 안쪽에 정성껏 저장해 둔 잘 말린 장작들 가운데고리버들나무로 된 것을 따로 골라 입구 쪽에 쌓았다. 불을 피우려는모양이다. 그런 다음 하얗고 넓은 그릇에 물을 가득히 떠다가 그 앞에 놓았다. 이런 과정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는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불을 피우는 일은 간단한 것이라 나도 도왔다. 장작이 잘 손질되어있어서인지 일은 쉽게 끝났다. 간단한 준비가 끝나자 스노이안은 동굴 안쪽에서 입구가 바라보이는 쪽으로 앉았고, 유리카와 나는 그의 양쪽에 나란히 앉았다. 여름의 불인데도 이상하게 그다지 뜨겁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금방잘 타기 시작한 불은 연기도 별로 내지 않고 조그맣게 불빛을 만들어내었다. "해 봅시다." 물그릇은 스노이안의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준비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세 사람이고 마법의 시전자는 한 사람 뿐이기 때문이었다. 스노이안이 혼자서 엘다렌과 대화를 나누려는 것이라면, 동굴 벽에 혼자 기댄 채로도 충분히 손쉽게 마음을 날려보낼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약간의 정보 뿐이다. 그러나, 또한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것은 스노이안이 아니라 우리 쪽이었다. 스노이안은 가만히 눈을 감더니 한 손을물그릇 속에 담갔다. 나머지 한 손은 유리카의 손을 잡았다. 그녀에게서 정보를 얻으려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 엘다렌, 그가 어디에 있을지 생각해 봐." 함께 눈을 감은 유리카가 내게 하는 말이다. 나는 혼자서만 눈을감지 않은 채, 엘다렌이 지금쯤 달크로즈 성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했다. 스노이안이 달크로즈를 본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렇지 못했을 가능성이 큰 것 같다. 나는 가능한 한 집중해서 달크로즈 성의 생김새와 그 시가지의 모양에 대한 회상을 떠올려 갔다. 흰 돌벽, 아름다운 테라스와 푸른 깃발들, 레 끌로슈의 보호석, 그리고 부챗살처럼, 또는 수많은 접시들처럼 펼쳐진 둥글고 좁은 탁상지들과 계단을 오르내리며 펼쳐지는 시가지의 풍경… 내 검과 같은글자들이 새겨져 있던 오래된 돌기둥들……. 나는 너울거리는 작은 불꽃을 보고 있었다. 멋대로 움직여 이상한모양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장난꾸러기 꼬맹이 같은 불의 움직임을보고 있었다. 손바닥을 펼쳤다가, 다시 오므리고 이번엔 빙글 도는것 같다가, 풀어진 머리를 가다듬어 올리는 불……. 그리고 그 바닥에서 희미한 영상 같은 것이 천천히 떠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유리냐?]그 안에서 떠오른 거대한 은빛 도끼와 덥수룩한 수염, 붉은 눈매,불의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일렁이는 튼튼한 팔다리는 대지와 연결되어 있는 엄격한 난쟁이의 모습……. 마음속에 차오르는 반가움과, 혹시라도 다치거나 죽은 것은 아닌가 하던 짧은 걱정이나마 일말에 날아가 버리는 기쁨으로 나는 커다랗게 외쳤다. "엘다렌!" 불꽃 속에 나타난 영상인 그는 움찔, 놀라는 것 같더니 다시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파비안도냐?" 그의 시선이 향한 방향으로 보아 그에게 우리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처음에 유리카라고 생각한 것은 이런마법을 보낼 수 있는 것이 그녀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난 좀 예의 없이 소리를 질러 그를 놀라게 한 셈인데. "엘다, 잘 있었어? 별 일 없어 보이네?" [내게야 별 일이 있을 까닭이 있는가.]그는 금세 가볍게 놀랐던 것을 접고는 우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적어도 2백년 전에 마법을 스스로 겪어 보았으니만큼 나처럼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게는 별 일이 있을 리가없다는 그 말, 그 역시 유리카가 아직 살아 있을까 궁금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에게 얼른 기쁜 소식을 알려 줘야지. 그런 가운데 그에게는 아마 낯설 목소리가 천천히 낮은 울림으로다가왔다. "긴 세월의 무게가 그대에게 더한 현명함의 빛이여. 아룬드의 바퀴가 또다시 가져다 준 만남을 축복하며 기꺼운 인사를 보냅니다. 대지의 심장이 낳은 굳건한 종족의 지배자, 붉은 눈빛을 지닌 모나드의방랑자시여." 불꽃 속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 의아한 빛이 떠오르는 것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서 나는 기분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가말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불꽃 속에서 들리는 엘다렌의 목소리는마치 처음 만났던 동굴에서처럼, 돌로 된 입구 전체를 쇠북처럼 울렸다. [누구요, 2백년 전의 인사를 아는 자는.] +=+=+=+=+=+=+=+=+=+=+=+=+=+=+=+=+=+=+=+=+=+=+=+=+=+=+=+=+=+=+=스포츠서울의 기사를 찾아서 메일로 보내주신 여러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생각해 주시는 분들이 많다니... 정말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기사는 몇 번이고 잘 읽었고, 여러분들의 메일은 모두 간직하겠습니다. geopolar 님, baekds 님, 달의기사 님, rollee 님, 타임머신님, yuzhou 님... 모두 감사합니다. ^__^홈페이지에 올려 주신 reidin 님께도 감사드립니다(타임머신 아이디 쓰시는 분과 아마 같은 분이죠?).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802번제 목:◁세월의돌▷9-2영원할수없는안식의땅(1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5 00:22 읽음:208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2. 영원할 수 없는 안식의 땅 (11) 스노이안은 단정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스노이안 데바키입니다. 스노이켈 데바키와 체칠린 로알로미의 아들, 또한 천년의 은둔자 아스트라한 데바키의 손자인 부족한 솜씨의치유자입니다." 엘다렌은 잠시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그 이름들이 주는세월의 무게는 작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오래 망설이지 않은그는 이윽고 말했다. [뜻밖의, 반가운 만남이 아닌가. 그대라면 나도 어린 시절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나의 친구, 스노이켈은 어떻게 지내는가.] "아버지께선 십여년 전에 이미 자연의 혼이 되셨습니다.]엘다렌은 이번에도 조금 사이를 두었으나, 곧 대답을 했다. 갑작스런 정보들은 그에게도 약간 혼란을 가져다 준 모양이었다. [엘프로서, 그다지 나쁜 결말은 아니로군.]잘 알던 친구의 죽음을 놓고 저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 아닌 종족들이 갖는, 나로선 낯선 유대감 같은 것일까. 이윽고 엘다렌은 온화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설명을 듣지 않고도, 그는 이미 상황을 알아챈 듯했다. [그렇다면, 유리가 잘 있는 것은 그대의 덕택이로군.]유리카가 밝은 목소리로 대화에 끼여든 것은 그 때였다. 그녀는 이미 감았던 눈을 뜨고 있었다. "응, 엘다. 난 이제 건강해. 오히려 파비안이 많이 다쳤지만 그것도 스노이가 잘 돌보아 주었어. 곧 출발할 수 있을 거야. 어쨌든 이제 인사는 그만들 하고 용건을 말해야 할 때인 것 같은데." 그녀를 데리고 달크로즈를 벗어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하루하루심지처럼 타들어가던 내 심정을 그녀 역시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지난 일이 된 그녀의 오르코시즈 중독 같은 일, 더 이상 그런 걸로 우울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아주 강렬하고도 밝은 어조로말을 이어갔다. 그녀 뿐 아니라 다른 누구도 더 이상 그걸로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누군가의 걱정거리가 되는 것을 몹시도부담스러워하는 그녀. 동굴 속을 울리는 유리카의 목소리에는 빨강, 파랑, 노랑 같은 아주 밝고도 화사한 빛깔들이 느껴졌다. 모든 의심과 어둠이 걷혀버리고 맺혀진 진하고 선명한 빛깔들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란히 앉은 채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스노이안은 호숫가에 가라앉은 갈대처럼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배경, 변치 않는 자연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다행이다.]그러나 그 짧은 한 마디 안에 담긴 온갖 안도의 한숨과 감동과 감출 수 없는 기쁨에 대해 나 역시 모르지 않았다. 갑자기 처음으로 스노이안에게 감사하는 마음 외에, 유리카를 건강하게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 나 자신에 대해 미약한 만족감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하루도 잊지 못하고 걱정했을 엘다렌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있게 되었다. 정말 다행이야, 일이 잘 되어서. "그 쪽은 어때요? 주아니는, 주아니는 무사해요?" [주아니는 지금 내 옆에 있지만 목소리를 전해 줄 길은 없겠군. 아주 잘 있다.]마법을 거는 것은 이 쪽이었고, 따라서 엘다렌 쪽에서 주아니를 갑자기 마법에 참여시킬 방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엘다렌은 잠깐 가만히 있더니 다시 말했다. [유리카가 건강하게 되어서 너무 기쁘다고, 그리고 파비안에겐 아무 일 없느냐고 묻는군.] "아무 일 없진 않지만,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작은 일이니 걱정할 필요는 하나도 없다고 하세요!" 내 목소리도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 졸이게 하던일들이 모두 잘 되었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는 과정만큼 기쁜 것은 없었다. 엘다렌의 목소리도 기쁜 빛을 띠었다. [그것 참, 잘 되었군. 그러면 곧 돌아오는 건가?] "그것보다, 그쪽은요? 나르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요?" 아버지는? 그리고 하르얀은? 내가 묻고 싶은 말을 꺼내자 엘다렌의 밝은 목소리가 잠시 끊어졌다. 불길 속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 미묘한 표정을 알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석연치 않은 불안감을 느낀 나는 다시 한 번 소리 높여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누구 잘못되기라도 했어요……?" 엘다렌의 대답은 그렇게 오래 지체하지는 않았다. [나르디는 잘 있다. 부상을 입었지만 가벼운 것이라 관계없다. 네아버지께서도 무사하시다.]유리카가 갑자기 끼여들어 물었다. "공주님은?" [잔-이슬로즈 공주라면, 아직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을제하고는 아무 일 없다.]엘다렌의 목소리에서 마브릴 왕가에 대한 적대감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는 담담하게 말을 마쳤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 다음에 덧붙인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와 유리카는 충격으로 멍한 표정이 되었다. [수도에서는 여러 가지로 큰 일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큰 일이라면 역시 이그논 국왕의 갑작스런 서거와 태자 나르디엔 루아 듀플리시아드의 국왕 즉위 사실이겠지.] "즈, 즉위요?!" "…국왕이라고요?" 나르디가… 우리 나라의 국왕이라고……! 숨을 삼켰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아니, 맨 처음 해야 할 말이무엇인지 도무지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하긴, 태자가 언젠가 국왕이 되는 것은 정한 사실일는지도 모른다. 지금이 아니라 해도 결국엔 그렇게 되는 거겠지. 그래,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세상에……." …누구든, 여행 도중 만난 친구가 갑자기 태자 전하로 밝혀지고,이제 간신히 그 사실에 적응하려는 참인데 이젠 국왕까지 되어버린다면 결코 제정신일 순 없을 거다! 우리가 말문이 막혀 있는 동안에도 엘다렌은 이어 말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말을 여러 마디 할 정도라면, 달크로즈에선 정말 보통사람들이 평생을 두고 말해도 모자랄 정도의 사건들이 있었던 것임에틀림없었다. [이그논 국왕은 나르디가 부상을 당한 이후 반란군과의 마지막 전투를 직접 지휘하여 승리로 이끌었지만, 거기에서 중상을 입고 수도수복 사흘만에 숨을 거뒀다. 나르디가 병상에 누운 부왕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조차 천행일 정도로, 그림자는 빠르게 찾아들었지. 많은 사람들은, 나이보다 지나칠 정도로 노쇠해 있던 국왕이 마지막생명을 태워 전투를 치른 것이 결국 죽음을 앞당긴 것이라고들 이야기했다……. 수도 수복에서는 예상했겠지만, 구원 기사단의 공로가컸다. 이그논 국왕을 찌른 것이 누구였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것으로 반란군들의 처리가 어떻게 될 지는 적어도 명확해졌던 셈이지.]엘다렌의 말에는 단순한 사실들의 나열 뿐, 감정이라고는 섞여 들어간 흔적이 없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 묘한 싸늘함을 느끼고는 몸을움츠렸다. 내가 그 안부를 물어보아야 할 사람은 또 하나가 있다. 불안의 까닭은 거기에 있는 걸까. 약간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럴 이유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묻는 것이 망설여졌다. "하르… 얀은?" 그리고, 아까보다 훨씬 더 긴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와 나르디가 무사하고 아무 일 없다면, 잔-이슬로즈 공주 역시 잘 있다면, 그렇다면… 그들과 마주 싸웠을 하르얀과 그 추종자들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현자의 동굴 속을 흐르는 바람이 긴 꼬리를 끌며 지나갔다. 돌벽을긁는 듯한 소리가 어디선가 잠시 울리고, 그리고 사라졌다. 내 마음속을 긁어내는 듯한 소리, 미묘한 아픈 감각, 그리고 떨어진 흙조각들이 바람에 날려 가는 소리까지. 엘다렌의 목소리… 마치 그 소리들의 일부처럼 들리는……. [반란자들의 처리로서는 효수(梟首), 라는 오래된 방법이 있다.] "……." 유리카도, 그리고 스노이안조차 입을 다물었다. 바람조차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내 입에서 천천히, 아주 작은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떤 위안도 없을 부서진 마음과 맞출 길 없는 조각들이 허공에 흩어진다. 그렇게, 나누겠다고 마음먹은 말들은 입안에서 맴돌다 끝나버린다.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만나 그가 원했던 것, 그 이유들을 모두 듣고싶었는데. 왜 나를 죽일 만큼이나 미워했는지, 왜 무모한 일로 자신을 파괴하려 했는지, 그를 그렇게 만든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모두듣고, 그러고 나서……. "그는 당신의 혈육이로군요." +=+=+=+=+=+=+=+=+=+=+=+=+=+=+=+=+=+=+=+=+=+=+=+=+=+=+=+=+=+=+=이로서.... 드디어 세월의 돌에서도, 최소한 조연급으로서, 죽는사람이 나오는군요. 슬픔의 빛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881번제 목:◁세월의돌▷9-2영원할수없는안식의땅(1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6 00:27 읽음:192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9장. 제8월 '파비안느(Pabianne)'2. 영원할 수 없는 안식의 땅 (12) 스노이안이 입을 열어 말한다. 내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진다. 그 눈에 스노이안의 손이 담긴 물그릇의 수면이 가만히 떨리는 것이보인다. 파문, 다시 동그라미들. 그리고 조금 후, 그것이 내 감정의흐름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스노이안은 내 감정을 비슷하게 복제해내고있다. 나무, 바람, 공기. 그 감정들은 흰 물그릇의 물 속으로 차례로사라져 갔다. 한 방울씩, 한 개의 파문에는 하나의 하려고 했던 이야기들. "다른… 사람들도입니까?" 엘다렌은 대답한다. [각양각색, 모두 열 일곱 개의 머리가 고귀한 달크로즈 성의 흰 성벽에 달린 새로운 장식물이지.]그래, 티무르 리안센… 너 역시도……. "그랬군요." 유리카가 일견 담담한 듯, 그러나 갈래진 감정들을 추스르려는 것처럼 불쑥 말한다. 그래, 나는 나를 죽이려 했던 적의 죽음을 슬퍼할까닭이 없어. 나를 죽이고, 아버지를 해치고, 나라를 적으로 삼아 내친구들을 없애려 했던 그를 동정할 이유 따윈 조금도 없어. 그러나, 이 비는 무엇일까. 내 머릿속에 내리는 이 비는 무엇일까. 내 뺨을 타고 흐르는 물기는 무엇일까. 내가 사랑하지 않았던, 나를사랑하지 않았던 그의 죽음임에도 가슴 속 한 구석에 연결된 끈이 아프게 당겨 끊어진 것처럼 아릿한 통증이 심장을 파고든다. 하려고 했던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한, 한 조각 마음조차 나눠보지 못한 채 끝까지 오해로만 남은 나를 닮은 동생은 이제 이 세상에없어… 결코, 닳아지지 않을 답답함을 고스란히 남긴 채. 마치 옛 이야기처럼. 전해 내려오는 동화처럼. 슬플 것 하나 없는이야기. 아이. 검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가 둘 있었어. 서로는 서로의 분신. 그 중 하나는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려 했지만 결국은 스스로를 죽이고 말았지……. 나는 고개를 흔들고 눈물을 씻으며 이어지지 않는 말을 더듬거리며이었다. 말의 마디마디가 찌르는 듯한 날카로움을 가지고 나 자신을찢었다. "네, 네, 그래요… 다른 이야기를 합시다. 그는 죽었군요, 아아,그럴 줄 알았어요. 나를 죽이려 했고, 유리카도, 나르디도, 다 죽이려고 했잖아요? …끝났군요. 이제 우리도 할 일을 해야죠… 저기, 우리는 지금 세 번째 보석을 찾아야 하고, 할 일이 굉장히 많고, 시간은 없고, 또……." 말을 할수록 감각은 점차로 아득해져 갔다. 엘다렌은 지금 내 목소리를 모두 듣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아. 이런흔들린 목소리로, 어떤 것도 도움되지 않아. "저, 유리… 마저 엘다렌과 이야기를 나눠주겠어? 나는 잠깐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리고 말없는 가운데 시선들을 느끼며더듬더듬 동굴 밖으로 발을 옮겨놓았다. 동굴 입구까지 나왔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눈을 바로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다. "……." 하늘은 끝없이 맑아 있다. 빛은 재빠른 단어들처럼 쏟아지고 손 벌려 닿는 곳은 온통 우유처럼 흰 태양 속에 있다. 나는 장님처럼 손을내젓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곳은 세상의 질서가 닿지 않고, 감춰진 마법이 빠져나가지 않는닫힌 땅. 나는 이 가운데 있어. 이곳까지 찾아왔고, 내가 바랬던 목적을 이루었어. 세상 끝에 살 법한 이를 만나 이렇게 며칠 낮 며칠밤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한 날들을 보냈어. 그 모든 것들이 질서 가운데 있고, 어긋난 질서조차 조화의 일부가 되는 곳……. 잊혀진 하프엘프의 보호를 받는 땅 가운데, 그의 손길로 차례로 익어 가는 포도 열매들처럼 주위에 가득한 것은 오직 안정과 평화. 세상의 것이아닌 듯한 이 모든 자연들처럼, 영원히 잠든 듯 숨쉴 수 있는 땅에서얻은 며칠간의 휴식. 그러나… 이제 세상 속으로 돌아가야 할 때야. "나의 동생……." 그렇게 이 땅에서도 내 것인 슬픔은 찾아온다. 멀리 떨어져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버릴 수 없는 마음이 있는 한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행복할 수는 없어. 나는 천년을 사는 엘프가 아니고, 애증 가운데 백년을 보내는 인간에 불과하다. 짧은 인생 속에는 영원한 안식은 없지만, 그보다 훨씬 빠르게 격동하는 모든 감정들이 있어. 빠르게 겪고,그만큼 빠르게 사라져 갈 우리. 모든 것을 앞당길 수 없다면… 그만큼이나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할 일이겠지. 내 것인 감정, 하나도 버리지 않고서. "밝아……." 여름의 빛이 마지막 생명을 내뿜는 것처럼, 그렇게 들판은 너울거리는 열기에 들떠 있다. 열병 환자처럼 들뜬 그 뺨에 뜨거운 땀이 흐른다. 땅이 흘리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떨어진다. 그 가운데 선 나. "다시, 그 땅으로… 이젠 돌아갈 때야." 홧홧 하게 달아오르는 온 몸에서, 흐르는 소금기 어린 눈물에서,나는 동의의 빛을 얻는다. 짧은 안식은 끝났다. "넌 이 땅을 떠나지 않는 것이 역시 어울려." 유리카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그렇게 말하며 스노이안의 내민손을 한 번 잡았다. 내가 다시 그 손을 잡았을 때 나는 마르고 긴,또한 섬세한 그 손이 마치 아름다운 나무의 가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길게 늘어뜨린 갈빛의 머리카락도 결 고운나무의 섬세한 껍질 같다. 그렇게 나무처럼, 그는 자신이 뿌리박고자라며 계속해서 살아갈 땅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고마웠고요… 고마워요." 나는 절벽 속 동굴 안에 아직도 누워 있는 그의 동생 스노이엘을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가게 되면 그도 깨어날 것이고, 그리고 긴 설명을 하지 않는 그의 형으로부터 아마도 짧게 줄여진 이야기를 듣게 되겠지. "파나힐." 스노이안이 부르자 작은 배는 거울 같은 수면을 미끄러지더니, 가벼운 물소리를 내며 우리 앞으로 다가와 멎었다. 마치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배는 자기의 이름을 부른 사람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다. 우리는 섬의 맞은편 기슭, 우리가 상륙했던 지점의 반대쪽 호숫가에와 있었다. 이제 저 마법의 배를 타고,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아마도 긴 기억을 안고 가야만 하겠지. 나는 떠나기 전에 이 섬의 이름을 물어보았지만 스노이안은 자신도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내 머릿속에는 오래 전 스조렌 산맥에서 야영을 하며 유리카와 나르디에게 들었던 이야기, 천공의 일곱 별자리가운데 '시간의 강' 자리 가운데 있다는 '모든 섬'이 문득 떠올랐지만 그 말을 입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유리카는 배에 오르기 직전, 다시 한 번 스노이안을 바라보며 미소를 보냈다. 그녀는 스노이안을 이 호수 밖으로 몹시도 데려가고 싶어했었다. 이미 어른의 얼굴을 가지게 된 옛날의 꼬마 동생과 다시금헤어지게 된 것을 아쉬워했고, 그의 안식을 깨뜨릴 것을 알면서도 그능력이 세상 밖에서 쓰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 나무의 자손인 엘프로부터 절반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남은 생도 자신의 뿌리 곁에서 살아가겠노라고 조용히대답했다. 이윽고 스노이안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리카의 입에서 아마도 그 연원이 오랠, 그리고 미래에도 끝없이 계속될 시간의 말이 떨어졌다. "짧은 격랑 가운데 긴 안식, 작별의 인사는 덧없고 재회는 화살처럼 찾아온다." 그리고 스노이안은 또한 그가 가진 말로서 대답했다. "비록 다르게 태어난 종족이라 하더라도, 이해의 빛은 길고도 깊어라." 배가 움직인다. 노를 저을 필요는 없다. 스노이안이 자신의 마법으로 우리가 탄 배를 원하는 기슭까지 데려다 줄 것이다. 호수의 남쪽 기슭에서 우리가갈 곳은 상텔로즈 숲의 북쪽 자락, 환영주 아룬드 9일까지 엘다렌과만나기로 약속한 작은 마을이다. 코로시츠라는 이름의 나무꾼 마을. 섬이 멀어진다. 가장 먼저 바위 기슭에 서 있는 녹색 옷과 긴 갈대빛 머리의 스노이안이 사라지고, 나무와 숲, 먼 절벽과 그 안에 아직도 잠들어 있을 그의 동생과 긴 해안선을 따라 보이지 않는 손으로이어져 있을 마법의 장벽과 거대한 고사리 숲, 원혼들이 사라진 고요한 안식의 땅이 사라져 간다. 저녁 붉은 빛 속에서 검은 섬은 그림자에 삼켜지고, 이윽고 지워져버렸다. 배는 경쾌하게 호숫물을 가르고 나아간다. 낡고 작은 배는 젊은 현자의 마지막 선물인 마법으로, 마치 살아 있는 고기처럼 매끄럽고 재빠르게 나아가며 계속해서 겹쳐져 가는 무늬들만을 남겨 놓았다. 그배와 함께 우리는 다시 살아 있는 자의 세상으로 돌아간다. "축하해." 유리카는 몸을 내 쪽으로 굽히더니 미풍처럼 가볍게 뺨에 키스했다. 비록 한 번 들었을 뿐이지만 그녀는 잊지 않고 있다. 이 수많은일을 겪은 후에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눈을 보았다. 수많은 약속 없이도, 말하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는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배는 거울 같은 수면을 한없이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인터뷰랄까... 하여간 그런 것을 해봤네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다음 주 월요일자 신문에 나온답니다. <일간스포츠>요. 그리고, 아시는 분은 아실 잡지인 <뉴타입> 다음호에도 인터뷰가실립니다. <뉴타입> 기자분은 굉장히 재미있는 분이시더군요. ^^아, 그리고 물론 한국어판입니다(당연한 소릴..;;). 그리고 잘 되면, 오늘 인터뷰하기로 이야기하고 온 데서는, 아예환타지를 특집으로 다뤄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잘 되면 알려드릴게요. ^^아, 이번 수요일에 만나기로 한 대원외고에서 회지 만드는 친구들도 있네요. ^^... 덕택에.. 요즘 정신없습니다; (엔딩, 엔딩을 내야해!)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882번 제 목:◁세월의돌▷ 환영주 아룬드 시작입니다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6 00:28 읽음:1508 관련자료 없음----------------------------------------------------------------------------- 파비안느 아룬드가 끝나고, 환영주 아룬드의 시작입니다. 환영주(幻影酒)는 술의 이름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현재출간된 1권 분량에서 파비안이 류지아와 헤렐을 만나 점을 칠 때 저환영주라는 술이 등장합니다. 나중에 유리카가 그 이야기를 듣고서환영주를 사용할 수 있는 예언자였다니 대단하다고 감탄하지요. 환영주가 무엇인가에 대한 얘기는 아룬드 설명에 자세히 나오니까생략할게요...^^; 어쨌든 환영주 아룬드는 여름의 마지막 달입니다. 현실에서는 가을이 끝나가는 이 마당에... ...에에, 하여튼 첫 제목은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요즘 세월의 돌 1권을 읽고 계신데, 재미있으시다는군요... ^^; (눈이 꽤 나쁘신데도 돋보기 안경까지 끼고 보셔서 거의 다 읽어 가십니다)으음, 이런건 또 기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기분이네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883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6 00:28 읽음:187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 환영주(幻影酒) 하쉬 미오사의 별 '미오사니(Miosani)'가 지배하는 아룬드. 하쉬 미오사는 이스나에를 비롯한 각종 영적 존재들과의 대화를 주재하는 고귀한 제사술이자 '미혹의 술'이라는 그 이름이 뜻하는 바대로 사람에게 착각과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가지고있다. 주로 영의 힘을 빌리는 예언과 봉헌 제사, 드물게는 최면에도사용되는 이 술을 처음 빚은 것은 고대 이스나미르 왕국에서 '푸른지팡이'로 알려진 방랑 예언자 하갈드(Hagalde)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다른 전설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하쉬 미오사는 오랜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다양한 마법의 약들가운데에서도 그 효과가 가장 강력하고 직접적이지만, 이를 제어할수 있는 중요한 비전들이 세월 속에서 소실되어버린 까닭에 고통이나광란, 심하면 죽음에까지 이르는 폭력적이고 위험한 힘이기도 하다. 현재에는 과거와 미래를 점치거나 먼 곳에 있는 것을 보는 일, 사람을 가사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이나 가사 상태가 된 사람의 마음을알아내는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나. 과거의 기록에는 원하는 꿈을꾸게 하거나 병을 치유하는 것,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일, 심지어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데에도 쓰였다고 한다. 환영주 하쉬 미오사를 빚는 재료들의 정확한 비율과 시간, 조건의조성은 매우 까다로우며 잘못 만들어진 환영주는 치명적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 엘라비다 족과 마브릴 족의 국가에서는 환영주의 제조와사용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으나, 민간에서도 특수한 전통을 가지고제조법을 전수하는 사람들이 일부 남아 있다. 미오사니 별의 가호 아래 캐어지는 약초 리미니와 향료 레 민, 몇 가지 향기로운 과일들이주요 재료이나 다른 것은 비밀에 싸여 있다. 지난해에 담가 두었던 하쉬 미오사가 익는 늦여름 마지막 아룬드이며 습기를 머금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때다. 하쉬 미오사뿐만 아니라 다른 술들도 이때에 대부분 익게 되는데 이 때문에 술을 담그는마을에서는 술이 익는 것을 기뻐하는 작은 잔치들이 열리게 된다. 늦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땅과 대기에 가득한 시기로, '술을 마시고 길에서 잠들어도 좋은 달'이라고 흔히 불리기도 한다. "환영의 뒤를 따르니, 고뇌는 잊혀지고 대가는 빠르다"라는 경구로요약되는 것처럼 환영이란 예언임과 동시에 저주이며 행복과 위험을동시에 보여주는 불안한 축복이다. 환영주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잘못된 길로 들어섬, 다가올 재앙을 내다보며 불안정한 행복을 취하려 함, 알 수 없는 힘의 인도로 위기를 벗어남, 심연 속으로 도피함,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에 미혹됨, 신비롭다고만 생각하던 대상에가까이 갈 수 있게 됨 등을 암시하고 있다. 이 아룬드를 상징하는 빛깔은 미오사니 술의 빛깔과 같은 노르스름한 주황이다. - 점성술사들이 달력에 적는 각 아룬드의 의미,그 중 아홉 번째. 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1) "마법이에요!" 마음 깊이 탄복한 듯, 소녀는 양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달빛을 받은 나무가 마술을 부린 겁니다. 저 나무들은천성이 몹시 게으르거든요. 상냥한 숙녀인 달이 먼저 밤의 놀이를 준비하고 초대의 눈짓을 보내야지만, 나무들은 간신히 기지개를 켜고오랜 졸음을 털어냅니다." - 엘라비다 족 구전 설화<육각 수정 반지와 통곡하는 나무> 중에서 단단하고 매끈한 둥치를 지닌 거목들이 감히 시선이 가 닿을 수 없는 하늘 꼭대기까지 자라나 지붕을 드리웠다. 백 그루, 천 그루, 만그루… 모두 잘 자란, 좋은 나무들이었다. 나무의 행렬이 일부러 열 맞춰 심기라도 한 듯, 보이지 않을 만큼먼 곳까지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상텔로즈 숲은, 아름다운 곳이라기보다는 튼튼한 목재를 얻기에 오히려 제격인 것처럼 보였다. 숲 입구에 이르러 잠깐 멈춰선 채 상텔로즈를 만난 내 첫 번째 감상은 '천년만년의 땔감들이 크게도 숲을 이루고 있구나'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냐?" 그러나 상텔로즈의 의미는 '천연의 보석'이었고, 불행히도 이 가운데 '땔감'이라는 말을 고대 이스나미르 어로 적절히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땔감이라는 말은 목재라거나 하는 것과는 전혀어감이 틀리다. 어찌되었든 좋을 대로 난 '천연의 땔감'이라고 부르기로 마음을 정했다. 우리 일행은 다시 넷이 되었다. 아마 엘다렌을 만나기 전의 숫자였었지, 이건. 물론 나르디는 우리 곁에 있지 못하다. 그것도 이제 전처럼 사소한 이유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아니, 예전의 이유들이사소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지금에 비하면 아마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폐하께서는 잘 계시겠지?" 이 말은 요즘 우리 일행 가운데 유행하고 있는 말 중 하나였다. "아마도, 틀림없이." 대답이야 좋을 대로 하면 된다. 결코 대답이 중요한 질문이 아니니까. 저런 질문을 하는 기분이 얼마나 희한하냐면, 정말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하긴, 폐하라면 우리 옆에도 한 분 계시다. 드워프 족은 '폐하' 같은 쓸데없이 격식 차린 호칭은 잘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쨌든간 그도 왕은 왕이란 점에선 변함이 없었다. "우리 옆의 폐하도 잘 계시니까 말야." 엘다렌은 도끼를 등에 멘 채 고개를 한껏 들어 숲을 살펴보고 있다. 마치 오늘 내로 숲을 다 베기로 작정한 나무꾼 같아 보였지만 엘다렌 앞에서 그런 말은 삼가는 편이 좋았다. 일단 엘다렌은 엘프들만큼이나 숲을 아꼈고, 또한 그의 도끼는 나무를 베는 물건이 아니었으며, 보통 도끼란 물건은 나무를 벨 때와 살아 있는 것을 자를 때에는달리 관리해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물론 엘다렌의 도끼는 어떻게 관리해도 늘 기막힌 성능이었지만 그건 틈날 때마다 수시로 도끼 날을닦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까닭을 찾아야 할 것 같기도 했다. "엘다, 뭘 그렇게 봐? 사냥할 목재 물색해?"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나무가 빽빽할 정도로 밀집한 숲인 상텔로즈는, 북부 경계 일대에 수십 군데의 나무꾼 마을이 흩어져 있는대규모 목재 산지다. 상텔로즈의 나무꾼들은 일종의 길드를 형성하고이곳에서 배타적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커다란 도끼를 든 일행과 함께 하는 일 없이 어슬렁대다가는 영락없이'목재 사냥꾼'으로 보이기에 딱 알맞았다. 이 목재 사냥꾼으로 잘못지목되었다가는 영락없이 근처 나무꾼 마을에서 도끼 들고 쫓아오는일단의 사람들과 맞닥뜨려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쳐야 되는 상황이되기 십상이다. 이 근방에선 '나무꾼'의 반대말이 바로 '목재 사냥꾼'이었다. 상텔로즈 숲에서 나무를 베기 위해선 나라의 허가가 필요했는데 목재 사냥꾼이란 이 허가가 없이 나무를 베는 사람들 때문에 생겨난 말이었다. 정식 허가가 있는 나무꾼들이 이들을 미워하는 건 당연지사였고, 따라서 사실 저런 농담은 함부로 할 것이 못 되었다. "나무꾼 길드라는 전 대륙 유일무이의 조직이 있는 곳이 이곳이라고. 자칫하다간 뭔가 해보기도 전에 귀찮은 일부터 실컷 당하는 수가있어. 조심이란 할수록 좋지." 내 말에 유리카는 농조로 대꾸했다. "엘다라면 목재 아니라 나무꾼 사냥이라도 실컷 하고 남을걸……." 주아니도 끼여들었다. 주아니는 예나 지금이나 전설의 모험가 일행이라는 대명제를 여전히 신봉하고 있었다. +=+=+=+=+=+=+=+=+=+=+=+=+=+=+=+=+=+=+=+=+=+=+=+=+=+=+=+=+=+=+=프레야 님... 제가 싸인한 책을 친구가 2....만원에 사갔다고요?! 세상에...;;;;;(전 지금 충격으로 떨고 있습니다...)책이 7천원인데, 그, 그, 그럼... 싸인값이 무려 13000원??? 책을 벌써 사셨는데 저번 모임날 퀴즈 대회 상품으로 한 권 더 생기셨으니, 살 사람만 있다면 파실 수도 있는 문제지만... 저로선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질 얘기로군요...;; (13000원이면 네임펜을 몇 개살 수 있을까.. 펜 한 개면 싸인을 수백 장은 할텐데..)아아, 결코 탓하는 것은 아니에요... 하여튼 놀라서... 아니, 갑자기 두려워져서 그래요..;;; (아마 이 세상에서 전무후무한 분이실 것같습니다.. 그 책 사가신 친구분은..)아참, 세월의 돌 2권 내일 나옵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968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6 21:14 읽음:177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2) "우리가 사냥해야 될 건 보석이라면서? 그러니까 우린 보석 사냥꾼이지. 아니면 보물 사냥꾼도 있잖아. 그 편이 훨씬 멋진데. 이야기에도 보면……." 유리카가 짓궂게 키득거리더니 아예 말을 바꾸어 버렸다. "무슨, 우리가 사냥해야 할 건 다름 아닌 엘프야. 그러니까 우린엘프 사냥꾼이라고. 이런 얘기도 어딘가에 있었던 것 같은데." 결국은 엘다렌이 입을 열었다. "말들만 하고 있을 건가. 한시가 급하지 않나." 졸지에 사냥 대상이 되어버린 엘프 미카에 대해, 나는 머릿속으로상상력을 동원해서 그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물론 난 엘프를 본 일은 없다. 그렇지만 아라스탄 호수의 섬 안에서 만난 스노이안과 스노이엘에게도 엘프의 피가 반은 섞여 있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들과 비슷하게 생겼을까? 옛 이야기에 보면 엘프는 보통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했는데, 스노이안의 모습은 사실 천상의 아름다움이라거나 하는 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역시 어쩌면 보통 젊은이와도 비슷할 모습에 단정하고 침착한 몸놀림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선이 고운 얼굴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나무를 어머니로, 바람을 아버지로 삼았을 것 같았던 스노이안의 초월적 눈매에서 느꼈던것도 역시 인간의 냄새는 아니었다. 엘프는 멋질 거야. 분명, 놀랄 만할 거야. 엘프를 만난다는 건 켈라드리안에서 페어리들을 만난 것과 비슷한 경험이지 않을까? 비록이번엔 한 명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 이름도 멋진 엘프를 사냥하는 모험가 일행은 오랫동안기다렸던 상텔로즈의 숲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비가 그친 뒤라 갠하늘 아래에는 맑은 습기가 맺힌 투명한 공기, 그리고 나무 사이로이어진 길이 끝없이 갈라지고 갈라진 숲 속. 헤어졌던 일행과 다시만난 지 이틀째 되는 환영주 아룬드 11일의 일이었다. "만나 보면 안다." 미카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대한 엘다렌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유리카는 그저 웃을 뿐이다. 그녀는 그래도 미칼리스의 본명 정도는 말해 주었다. "미칼리스 마르나치야, 하얀 부리 엘프족의 수장.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지금 나이는 7백 아홉 살, 아마도." 유리카의 말이 맞다면, 내가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만났던 온갖 종류의 종족들이 지녔던 비상식적 나이들 가운데 최고령을 자랑하게 될것 같은 생각이 든다. 생일이 지났으니 주아니가 예순 여섯, 암흑 아룬드의 생일은 한 해의 마지막에 계산하니만큼 유리카는 2백 열 여덟이고 엘다렌은 3백은 넘었다고 하고, 켈라드리안의 거인 호그돈도 그정도, 아라스탄 호수의 하프엘프 스노이안은 2백 여덟 살, 아마 페어리 여왕 에졸린이 굉장히 나이가 많았을 테지만 정확한 나이를 알 길이 없으니까. 7백살이 넘었다라, 그렇다면 스노이안과 스노이엘 형제의 아버지인죽은 스노이켈과 비슷한 나이겠는걸. 그런데 그렇게 나이를 따지다 보니 왠지 나는 어린애가 되어버리는것만 같아 기분이 이상해져 버렸다. 뭐야, 다들 겉보기와 비슷한 나이를 가져 보란 말이야. 최하 주아니만 해도 내 나이 세 배가 넘다니,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동행해야만 하는 소년의 비애여. …갑자기 나르디가 보고 싶어지는 이 기분은 뭐람. "그런데, 엘프족의 수장이라고?" "응. 엘프 세 종족에 대해서는 얘기한 적 있지? 그루터기 엘프, 하얀 부리 엘프, 무지개 껍질 엘프 말이야." "응……."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생각했다. 주로 에제키엘의 동료들은 최소한 왕족 급이 아니면 취급을 안 했나 보군. 하긴 그러고 보면 내 동료들도 마찬가지잖아. 나르디까지 그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고. 나는 웃옷 주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주아니, 너도 혹시 너네 동네에 가면 공주나 뭐 그런 거 아니냐? 아니면 왕비라거나……." 불행히도 영문 모르는 주아니는 왕비도 공주도 아니었고, 내가 소외감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주아니는 오랜만에 떠올린 족장 어머니의무서움에 대한 기억으로 잠깐 들려고 했던 식후의 낮잠을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그건 그렇고, 정말 이 방법이 신빙성이 있는 거야?" "좀 잔소리 말고 잠자코 따라해 봐라." 이 넓다는 숲속에서 잠들어 있는 엘프와 그의 보석을 찾기 위해 우리가 택한 방법은 잠자코 따라하기엔 솔직히 문제가 많았다. 나는 멋쟁이 검, 아니 여명검―엘다렌 앞에선 반드시 이렇게 말해야 한다―을 뽑아들고 어슬렁어슬렁 나무들 사이를 걷고 있는데 이거야말로 나무꾼들과 마주쳤다가는 목재 사냥꾼으로 몰리기에 딱 알맞은 모양새였다. 유리카의 주장으로는 엘다렌의 붉은 보석, 아니 모나드의 눈동자를 찾았을 때에도 이 검이 반응을 보였었다는 건데, 그걸 믿고 숲속을 헤메기엔 지나치게 막연한 대책이라는 점에 대해서 그녀가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다. 이럴 바엔 수도를 떠나기 전에 아버지한테서프랑드의 별을 어떻게 찾았는지 좀 물어나 둘걸. 물론, 우리한테 제2의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대책이라는 것도 좀……. "엘다렌은 자기 고향에서도 길을 잘 몰랐던 거 같은데……." 어쨌든 엘다렌은 내 머릿속에서 길을 잘 찾는 난쟁이는 아니니 말이다. 엘다렌은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묵묵히 앞장서 걷고만있었다. 저 자신 있는 걸음이 길을 알아서 그런 거라면 나도 좋겠는데 말야. "어쨌든, 좀더 들어가야 하는 건 틀림없으니까 그렇게 투덜댈 건없어. 좀더 가보고 모든 걸 생각하자고." 그러나 그렇게 무작정 애매한 가능성으로 걸어 들어간 숲에서 그럭저럭 우리는 저녁을 맞고 말았다. 나는 고개를 젖히고 손차양을 만들어 나무들 사이로 조그맣게 보이는 하늘을 관찰하고는 말했다. "날 하나는 맑아서 천만다행이군." 그러나 내 동료들은 여전히 별로 사태의 심각성 따위는 느끼지 못하는 듯, 느긋하게 야영 준비에 착수했다. 크로즈님 강의 지류로 보이는 작은 강가에 자리를 잡은 다음, 오는 도중 사냥한 야생 오리를유리카가 직접 손질했고, 불을 피울 준비를 하던 엘다렌은 내게 배낭에서 꺼낸 그만의 특수 아이템, 즉 솥을 덥석 안겨주었다. "물 떠오라고요?" "……." 대답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 솥을 들고 강가로 걸어갔다. 멀리서부터 흘러온 물이 갑자기 넓어진 강폭 때문에 크지 않은 호수를 이룬 이곳은 흐름이 매우 완만했고 깊이는 오히려 얕았다. 단번에 물을 뜨기 위해 부츠를 벗고 바지를 걷은 다음 안쪽으로 좀더 걸어 들어갔다. 차가운 물이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한해 중 대지의 흙이 가장많은 열기를 머금는 때라는 폭염의 환영주 아룬드. 벌써부터 겨울 준비를 하는 건지, 나뭇잎 퇴비가 만들어지느라 땅바닥이 푹푹 익는 중이었다. 이런 날씨에 한나절을 넘게 걸었으니, 부츠 속의 발은 후끈후끈하게 달아 있었다. "주아니, 너도 덥지?" 물의 흐름이 매우 느렸기 때문에 나는 솥에 물을 떠서 그냥 강물속에 내려놓은 다음 주아니를 들여다보며 의사를 타진했다. 주아니는굉장히 목욕하는 것이 간단하기 때문에 대강 우리 사이엔 방식이 구축되어 있었다. "응." 주머니 속에서 꺼낸 주아니는 더위를 그다지 타지 않는 체질에도불구하고 꽤 땀을 많이 흘린 모양이었다. 나는 주아니를 마치 솔개가 병아리를 잡아챌 때처럼 등쪽으로 잘돌려 쥐고서 구령을 붙였다. "그럼 준비, 하나, 둘, 셋!" +=+=+=+=+=+=+=+=+=+=+=+=+=+=+=+=+=+=+=+=+=+=+=+=+=+=+=+=+=+=+=동생이 첫 휴가를 나왔어요. ^^편하다고, 널럴하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하긴 하지만 그래도 얼굴이 새까맣게 탔네요. 한여름에 군대엘 갔으니 당연한건가... 선배들, 친구들, 그리고 이젠 후배들까지― 군대에 갔다가 돌아오는 걸 몇 번이고 봐 왔지만, 그래도 군인이 된 친동생을 보는 건 좀다른 기분이네요. 기특한 듯도 하고, 신기한 듯도 하고... 하긴, 녀석도 세월의 돌 1권을 보더니 신기해하긴 하는군요..^^;;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5969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6 21:15 읽음:178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3) 퐁당! 그대로 물 속에 손을 담그며 팔을 한 번만 저으면 된다. 그걸로 끝이었다. 골풀옷은 물에 잘 젖지도 않을뿐더러, 로아에는 물속에 오래있으면 금세 체온이 내려가 버린다. 그들에게 수영이란 그야말로 개념 없는 얘기였다. "그만 노닥거리고 얼른 물 안 떠올래!" 유리카가 마치 어머니가 잔소리할 때처럼 소리를 지르자 머리에서물이 뚝뚝 떨어지는 주아니와 나는 마주보고서 피식 웃었다. 별다른 당번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녁 준비는 주로 엘다렌 차지였다. 그는 대강 먹고 치우는 식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먹을 만한요리를 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주로 야영을 하는 날 밤에 저녁을 준비할 때 적합했다. 다만, 그는 처음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결코 설거지는 하지 않았다. "예전에 함께 여행할 땐 설거지는 누가 했냐?" 엘다렌이 만든 오리 스튜를 파하잔에서 나르디가 주운 은숟가락으로 느긋하게 떠먹다 말고 의문이 생긴 나는 그렇게 물었다. 엘다렌은뭔가 구워 먹는 것보다 이렇게 설거지가 필요한 요리를 훨씬 즐겨 만들었기 때문에 그에게 식사 준비를 맡기면 설거지 할 사람이 꼭 필요했다. 유리카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응, 너 에즈가 얼마나 설거지를 잘 하는지 모르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마법으로?" "무슨 소리야. 진정한 마법사라면 결코 그렇게 마법을 함부로 아무데나 쓰진 않는다고. 게다가 에즈는 꽤나 부지런하게 손발을 놀리는사람이었거든. 확실히 책상물림 마법사 스타일은 아니었어. 뭐 하긴,나도 처음에 에즈의 설거지 솜씨를 보고 혹시 식당에서 자란 건 아닌가 의심했었다니까." 설거지를 하는 대마법사라……. 하여간 여행을 하게 되면서 에제키엘에 대해 가졌던 과거의 이미지는 남김없이 깨지고 있었다. 그럭저럭 친근감은 계속 더해가고 있지만, 왠지 존경심과 신비감이라는 측면에서는……. 유리카가 내 표정을 보고 있더니 숟가락을 한 번 빨고는 덧붙였다. "에즈는 설거지를 끝내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서 '반짝이는 그릇,찬란한 숟가락, 하루의 만족'이라고 말하곤 했지. 모르긴 해도 혹시어느 식당에 붙어 있었던 표어가 아닐까 싶어." "그, 그만두라고… 가치관에 혼선이 초래되잖아." 벌써 배가 부른 주아니가 한쪽에 기분 좋게 누워 있다가 문득 생각났는지 말했다. "그럼, 우리가 찾으러 가는 엘프는 뭘 했어?" 유리카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말할 것도 없잖아. 당연히 사냥이었지. 미카가 가진 건 멧돼지라도 한 방에 잡을 만한 엄청난 활이었다고. 사냥할 짐승이 있는 곳에서라면 저녁거리 걱정 같은 건 해본 일이 없어." "활? 아아, 엘프는 활을 쓰지?" 내가 이야기책에서 읽은 얘기를 생각해 내고 아는 체를 했지만 유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책들에서 반은 거짓말로 써놓은 얘기를 믿으면 안되지. 미카의 활은 그런 책들에 그려 놓은 것처럼 어린아이들이 갖고 노는장난감 활이 아니야. 얘기하지 않았어? 미카의 별명이 바로 '세르네즈의 푸른 활'이었으니까." 나는 그게 뭘, 하는 얼굴로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뭐, 활이 있으면 사냥에는 편리하겠지." "그런 정도가 아니라니까. 하여간 보게 되면 알아." 유리카는 더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듯 숟가락을 놓고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쳐다보고 말했다. "자, 그럼 대마법사의 뒤를 이어 설거지는 네가 하는 거겠지?" 뭐, 뭐라고……. 갑자기 억울해지고 만 나는 머리를 써서 덧붙였다. "야, 넌 그럼 예전에 뭘 한 거야? 너도 한 일이 있었을 거 아냐?" "나?" 유리카는 엘다렌의 그릇을 주섬주섬 포개어 설거지하러 들고 가기좋게 만들어 놓더니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작업 총감독." 상황은 피장파장이 되어 유리카는 결국 총감독의 의무를 마땅히 다하기 위해 내가 설거지하는 모습을 따라와 지켜보지 않으면 안되게되었다. 나는 이런 자잘한 일은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 못된다. "에제키엘은 평소에 뭘 입고 다녔니?" 솥을 헹구면서 내가 묻자, 부츠를 벗은 채 기슭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던 유리카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꾸했다. "뭐, 너하고 별로 다를 것 없는 차림이었어. 에즈는 마법 뿐 아니라 검도 썼기 때문에 로브 같은 옷은 별로였거든." "그럼, 대마법사께선 어떻게 옷을 최소한도로 적시면서 설거지를하셨는지, 혹시 남기신 비기 같은 거 없냐?" 내가 벌써 소매를 반 넘게 적신 채 투덜거리자 유리카는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파비안, 대마법사라면 적어도 자기 옷소매를 재빨리 말릴 방법 정도는 갖고 있는 법이라고." "…그래서 설거지를 직접 하셨군." 유리카는 한참 가만히 있더니 문득 말했다. "나, 옷소매를 빨리 말릴 방법은 없어도 그걸 조금도 신경 쓰이지않게 하는 방법은 알고 있는데." 가뜩이나 소매 뿐 아니라 옷 여기저기가 조금씩 젖어서 신경 쓰이던 나는 귀가 솔깃해서 대꾸했다. "뭔데? 해봐." 유리카는 슬쩍 바위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짓궂은 눈빛을 내게 보냈다. "이렇게!" +=+=+=+=+=+=+=+=+=+=+=+=+=+=+=+=+=+=+=+=+=+=+=+=+=+=+=+=+=+=+=아... 물론 파비안의 어머니가 조연급도 아니었다는 건 아니예요...^^; 너무 초반이었기 때문에...^^;;;aragorn 님이 보내주신 최근 글에 대한 짧은 감상도 잘 보았습니다. 출판 수정본을 만들 때 꼭 참고하겠습니다. 그리고 홈페이지 포워딩 도와주신 것도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나우의 테러들 중에서 한 가지로부터는 걱정을 덜었습니다..^^)하루에 팬레터가 몇 통이나 오냐고 물어보신 건 하이텔의 박영민님이시던가요? 솔직히 대중없이 멋대로입니다..^^; 한 통도 안 오는날에서부터 많게는 하루 7-8통까지도 오거든요. 물론 400회라거나,출판 발표라거나 하는 이벤트들이 있을 때에는 하루에 몇십 통씩 오는 경우도 있고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6173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8 00:48 읽음:159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4) 갑자기 나는 유리카가 끼얹은 물을 흠뻑 뒤집어썼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어쩌고 할 겨를도 없이 연속되는 물세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젖어 버렸다. 유리카는 장난스레 코를 찡그리더니 높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제 하나도 신경 안 쓰이지!" 나는 고개를 흔들어 물을 떨어낸 다음, 마주 커다랗게 대꾸했다. "아아니!" 혼자 젖었는데, 어떻게 신경이 안 쓰이겠어? 나는 물을 끼얹는 대신 어차피 젖은 거 신경 쓰지 않고 휘적휘적바위로 다가갔다. 깜짝 놀라는 유리카의 손을 잡아 확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중심을 잡을 새도 없이 한 번 휘청, 하고는 그대로 발부터 물속에 빠져 버렸다. "앗, 차가!" 나는 상의까지 몽땅 적신 그녀가 중심을 잡도록 도와주면서 짓궂게속삭였다. "이제 신경이 안 쓰이려고 해." "갈 데 없는 점원이라니까. 하여간 손해는 안 보려고……." 손을 들어 얼굴에 묻은 물을 씻어내는가 했는데, 어느새 유리카는잽싸게 내 어깨를 잡고는 물속으로 힘껏 눌러버렸다. "푸!" 나는 이번엔 물 속에 주저앉아 버렸다. 목까지 잠기고 나니 젖은것은 둘째치고 시원하긴 하다. 온 몸의 땀이 한꺼번에 씻기면서 더운스튜를 먹느라 달아올랐던 몸이 상쾌하게 식었다. 그렇지만 역시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다. 앉은 채로 유리카의 손을 잡고 이번엔 앞으로 끌어당겼다. "아앗!" 유리카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얼결에 물속에서 내 몸 위로 넘어져버렸다. 둘의 몸이 물속으로 한 순간 잠겨든다. 머리까지 잠긴 가운데 물속에서 눈을 뜨니, 유리카의 은빛 머리카락이 수면 너머 마지막남은 햇빛과 함께 반짝이는 수초처럼 흐트러져 너울거리고 있다. 그하얀 눈꺼풀이 문득 떠지더니 나를 바라본다. 둘이 내뿜는 숨결이 방울져 시야를 흐리는 가운데 나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묘한 기분으로물속에서 거의 무게가 없는 그녀의 몸을 당겨 끌어안아 버렸다. "……." "……."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물결 속에서 두 개의 손이 맞잡아지고, 두개의 뺨이 맞닿는 가운데 작은 햇살들이 수면 언저리에 눈부시게 부서져 너울거린다. 호흡이 모자랐지만 그보다 다른 까닭으로 더욱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온 세상이 젤리처럼 떨고 있는 듯 보였다. 물속에서의 몸짓은 마치 약간은 불안정하게 허공을 나는 것도 같았고매끄러운 비단에 싸여 있는 듯, 흰 베일 안에 가려져 있는 듯, 가벼운 커튼뒤에 숨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별 것 아닌 것으로도 사람의 마음은 곧잘 달라지곤 한다.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대담함이 갑자기 생겨난 느낌이었다. 물소리, 흐르는 강과 둘이 다투어 내쉬는 소리나는 숨결. "……." 그녀가 물속에서 내 얼굴을 마주보며 웃는다. 그 입가에 재미있어하는 미소가 어리고, 내 팔은 그녀의 허리를 더욱 끌어당겨 가까이밀착시킨다. 은빛과 흑청색의 두 가지 머리카락이 물 속에서 멋대로흔들리고 춤추며 얽혀든다.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게 될 때까지,나는 한때 잃어버릴 뻔했다가 다시 찾은 그녀의 몸을 놓지 않으려는것처럼 꼭 껴안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처럼, 몇 번이고 확인하려는 듯…….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다. "푸하!" 둘이 다시 색깔과 소리, 공기로 가득한 세상으로 솟아올랐을 때,온 몸으로 가득히 쏟아져 들어오는 신선한 호흡만큼이나 마음속에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유리카의 은빛 머리와내 검푸른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은 똑같이 투명한 빛이다. 비록털끝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젖어 버렸지만 물에서 방금 나온 몸에감기는 공기는 차고 상쾌했고, 살아 있는 듯 신선한 향기였다. 여름, 숲의 여름이야. "파비안, 너……." 그러나 유리카가 키득키득 웃으며 뭔가 말하려 하는 순간, 나는 무안한 기분이 불쑥 솟아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손을 내저으려다가 아예 몸을 돌려서 기슭 쪽으로 허겁지겁 걸어나왔다. 등뒤에서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얼굴이 갑자기 화끈 달아올라 고개를 돌려 볼 수가 없었다. "파비안!" 유리카가 부르는 소리가 났지만 끝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솥도 그냥 내버려둔 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저만치 엘다렌이, 그리고 아마 주아니도 멀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나란 녀석은 도대체 왜 이러지. 옛말에 노르스름한 주홍빛의 미오사니 별을 보면 술을 마시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 얘기, 정말인가 봐……." 나는 아직도 까닭 없이 유리카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엘다렌이 피워 놓은 모닥불이 저만치서 타닥이며 탔다. 우리는 날씨가 날씨니만큼 약간 불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폈다. 유리카는 괜히 해보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술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담요 위에 몸을 눕힌 채 이불은 덮지도 않고서, 그녀는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안 그래, 엘다?" 유리카가 몸을 약간 돌리며 엘다렌에게 묻자 엘다렌은 으음, 하는신음소리를 냈을 뿐이다. 주아니는 벌써 아까부터 세상 모르고 자고있다. 아마 한참 엘프 사냥하는 꿈을 꾸고 있을 거야. 뭘로 사냥하고있을까. 그물? 채집망? 내가 제풀에 피식 웃자 유리카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왜 웃니?" "아아… 그냥." 유리카는 잠이 안 오는 모양이다.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이 틀림없어서 나는 누웠던 몸을 반쯤 일으켜 앉았다. "무슨 술이 마시고 싶니?" "응… 하쉬 미오사라면 좋겠지만 꿈도 못 꿀 일이고, 그냥 좋은 과일주라도 좋겠어. 포도주도 좋고, 사과주도 좋고, 딸기술도 좋고……." 그녀가 한 말에는 유난히 '좋다'라는 말이 많았다. 그럼, 술은 좋은 것이고 말고. 지금 나도 한 잔 한다면 좀더 제정신이 되어서 얘기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나도 하늘 꼭대기로 올라간 미오사니를 보면서 문득 류지아가 헤렐에게 주던 그 술을 떠올렸다. 나중에 유리카가 그 술, 환영주 하쉬미오사에 대해서 좀더 설명해 주었었다. 나야 처음엔 그게 어떤 작용을 하는 술인지도 잘 몰랐지만……. "켈라드리안을 떠나고, 여긴 두 번째 숲이구나. 그렇지?" +=+=+=+=+=+=+=+=+=+=+=+=+=+=+=+=+=+=+=+=+=+=+=+=+=+=+=+=+=+=+=내일(11월 8일)자 일간스포츠를 오늘 저녁에 사서 보았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인터뷰가 실리기로 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인터뷰 기사... 전 몹시 당황했어요. 다른 부분은 그래도잘 나왔는데, '독자층의 급격한 확대와 함께 환상소설이라 이름붙인것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제대로 된 판타지가 없다며...' 운운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이야기일까요....;;;;;제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인터뷰 하면서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기껏 생각해 봤지만, 통신 독자들로부터 정통 환타지에 가깝다는 평을 많이 듣는 편이라고 얘기했었고, '한 번 전투에 수백 수천이 막 죽어나가는 그런 얘기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 기억밖에는..--; (세월의 돌에서 지금까지 죽은 사람을 전부 합쳐도 채 100명이 될까말까 하니까요... 그것도 반 이상은 첫머리에서 마을 사람들이 많이 죽은 걸로 때워질 거고...)마치 요즘 나오는 판타지 소설들이 다 똑같은 것인 양 이상하게 매도한 것처럼 들리는 문장 때문에 얼굴이 붉어지는군요. 여러 작가분들이 각각 나름의 영역을 개척하면서 개성있는 글을 쓰시는데, '제대로 된 판타지가 없다'는 건방진 소리가 판타지 좋아하시는 분들한테얼마나 우습게 들릴까요.... 저, 정말 걱정되고 있습니다...;;;;(기자님 입장에선 뭔가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는 부분을 강조하신거겠지만, 그 말을 진짜 한 것으로 되어버리는 저는 어떻게 하라고요...기자님은 좋은 분이셨고 글에 대해서도 꽤 세세하게 많이 물어보셨는데, 이 부분에서만은 제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셨나봐요...)혹시라도, 이 글 보시는 분들은 주위에 사실을 좀 알려주세요... 기사 내용에 제가 말하지 않은 얘기가 있다고요. 아무래도 차별성을 강조하는 것이 신문기사인 탓인지 모르겠지만, 한 적도 없는 얘기가 저렇게 쓰여 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일간스포츠 발행 부수가 얼마나 되는 걸까요...;;;)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6174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8 00:48 읽음:159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5) 갑자기 들려온 주아니의 목소리에 나는 벌써부터 잔다고 생각했던내 생각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유리카가 대답하고 있었다. "많이 다른 숲이지. 켈라드리안은 본래부터 엘프와 페어리, 지금은이스나에들의 고향인 숲인 '영원한 어머니, 영원한 처녀'이지만 상텔로즈는 대륙 최고의 목재 산지잖아." "거기서 유리카가 옛날 얘기 해주던 생각난다." 엘다렌은 자고 있을까? 발그레한 모닥불 너머로 어둠은 두꺼운 담요처럼 내려앉아 있다. 엘다렌의 누운 뒷모습이 한쪽 그늘로 그림자를 떨어뜨린다. 켈라드리안을 걷던 때는 겨울, 그때 유리카가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그래,이베카 시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엘프 여인의 이야기였어. 연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 도시의 이름까지 바꾸어버린 여자, 그랬지만 결국 봉인된 연인은 돌아오지 않았고… 뭐, 뭐,뭐라고? 나는 후닥닥 몸을 돌리며 유리카를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하게 은빛 머리 사이로 나를 바라보는 그 얼굴이 보인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야… 이, 이, 이베카가 미카의 연인이었던 거야?" 그제야 생각났다. 이베카에 대한 일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연인을 봉인한 것이 에제키엘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연인은 에제키엘과 함께 떠난 동료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 그러니까, 이베카가 그토록 기다린 남자는……. "맞아. 미칼리스 마르나치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몇백 년을 함께한 연인을 버린 하얀 부리 엘프가 바로 그였지." 이베카 민스치야… 미칼리스 마르나치야……. 이제 일어나 앉은 유리카는 몸을 웅크려 세운 무릎을 끌어안은 채숲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동그랗게 구부린 등을 곱게 덮었다. 2백년 전의 소녀, 그 머릿속은 아픈 기억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어. 잊어버려지지 않는 슬픈 관계들이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고 하나하나 발소리 죽여 따라와. "너, 그녀를 보았니?" 나는 다가가 주아니를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리고 유리카가 누운쪽으로 담요를 구기면서 다가갔다. 머리카락 속에서 유리카의 고개가 조금, 끄덕여졌다. "응……." "어떤… 엘프?" "한 번, 에즈와 함께 켈라드리안으로 미카를 찾아갔던 그 때 보았어. 말이 없고… 침착하고 또한 현명한… 아냐, 현명하진 못했지.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했잖아……. 매끄러운 갈색 머리카락과 좁고 갸름한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던 그녀는 마법사였어. 그녀의 마력 깃든 노랫소리에는 나무와 잎새와 샘과 바람까지도 귀를 기울인다고 했으니까. 그녀는 정말로 아름다운 나무, 화관을 쓴 월계수 같은 엘프였었지." 월계수 같은 여자… 내 머릿속에서 그 이미지가 얼른 떠오르지는않는다. "엘프는 갈색 머리카락이 많아?" "그루터기 엘프 일족은 대부분 갈색 머리를 갖고 있어. 봤잖아…스노이안의 갈색 머리카락, 그루터기 엘프의 피에서 온 거야. 그들의모습은 대부분 매끈한 껍질을 가진 키 큰 나무와 같은 느낌을 줘. 옛전설에서 그들의 피는 커다란 참나무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하니까……." 별을 바라보려는 것처럼 손바닥 위에 누워 있던 주아니가 문득 물었다. "그럼 이제 미칼리스라는 엘프와 만나면, 그가 그녀의 일을 물을까?" "아마… 아니, 결코 그렇지 않겠지." 유리카는 방금 전과는 달리 문득 분개한 것처럼 단호한 목소리가되었다. 나는 스조렌 산맥의 동굴 속에서 잠결에 들었던 엘다렌과 유리카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화가 난 듯도 했던 유리카가 날카롭게 말했던 '그 불쌍한 숙녀를 죽게 한' 미카, 그리고 그를 만나면그녀의 이야기를 꺼내지 말자고 했었지……. 유리카는 고개를 빠르게 몇 번 젓더니 다시 이어 말했다. "절대, 우리 역시 그녀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것이 좋아. 그를처음 본 모습 그대로 놓아두고 싶다면 말이지." 나는 까닭을 몰라 되물었다. "처음 본 모습이라니?" "그는 평상시, 아주 쾌활하고 무엇이든 잘 해낼 듯 행복해 보이는모습이지." 평상시라……. 고요한 나무와 같았던 여자… 그녀를 버리고 떠났을 때, 미칼리스는 도대체 어떤 기분이었던 걸까. 아마 중요한 일을 위해 떠났던 걸테지. 종족의 위기를 알고 그것을 되돌리기 위해 해야만 했던 일을하려는 거였겠지. 에제키엘을 따라 떠나고…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연인을 두고 2백년의 잠을 청하며 눈을 감을 때, 무슨 기분일 수 있을까. "그런데 유리,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유리카는 약간 고개를 들었지만 나를 쳐다보지 않고서 잠든 듯 움직이지 않는 엘다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어떻게 이베카의 이야기를 알았니? 너 역시도 2백년을 미칼리스와 함께 잠들었는데, 그녀가 자기 이름으로 그런 일을 꾸몄다는걸 어떻게 알았니?"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본 그녀가 웃고 있었다. 으음? "내가 봉인에서 깨어나서 네 아버지를 따라갔었다고 얘기했었지?" "그랬었지." 그리고 그 아버지는 우리 마을로 왔잖아. "그게… 좀 길었어." +=+=+=+=+=+=+=+=+=+=+=+=+=+=+=+=+=+=+=+=+=+=+=+=+=+=+=+=+=+=+=굉장히 피곤하군요. 새벽까지 새우면서 글 쓰고, 잠도 못잔채 아침에 다시 나갔다가 와서 그제야 한잠 자고, 다시 오후에는 나갔다가들어왔더니 밤낮이 마구 뒤섞이는 기분이네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6175번제 목:◁세월의돌▷ 2차 삭제 공지입니다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8 00:48 읽음:228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 2차 삭제 공지입니다. 이번에 삭제되는 부분은+----------------------------------------------------------------+| 7장 1편. 기억의 폭풍 (1) ---> 8장 2편. 상처를 위한 상처 (27) |+----------------------------------------------------------------+까지입니다. 삭제 날짜는,+----------------------+| 1999년 11월 10일 |+----------------------+입니다. 퍼가시는 분들한테는 따로 메일을 보냈습니다만, 이 공지 보신다면 날짜에 맞춰 삭제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4군데인가...15군데인가..)1권을 읽으시고 다음 부분 파일을 달라고 메일 보내시는 분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요..;그럼 죽 읽으시며 수집하시던 분들은 놓치지 않고 갈무리하시길... (나중에 보내달라는 메일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미리 말씀드리지만,한두 분한테만 특별히 보내드리는 건 불가능하답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6258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8 21:46 읽음:156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6) 그녀는 팔을 풀고 일어나더니 맨발인 채로 담요 위를 사뿐사뿐 걸어서 엘다렌에게로 다가갔다. 그 앞에 쪼그리고 앉더니 잠자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의 등을 탁 쳤다. "그만 자는 척하고 일어나. 오늘은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 "미카 녀석 이야기라면 굳이 할 것도 없지 않느냐." 엘다렌은 자세는 바꾸지 않았지만 정말로 잠이라고는 전혀 자고 있지 않았던 듯, 또렷하지만 음울한 목소리로 대꾸해 왔다. "뭐, 누워서 듣고 싶은 거라면 좋을 대로 하라고." 유리카는 엘다렌의 등에 아예 편안히 기대앉더니,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네 아버지는 첫 번째 보석 '프랑드의 별'을 찾은 다음에 하비야나크로 곧장 갔던 게 아니야. 그보다 먼저 다른 곳을 돌아다녔고 이베카 시에도 들렀었어. 따라서 당연히 나도 거기까지 갔다가 왔지. 이베카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 때 이미 들어서 대강 알게 되었고, 또 다른 문제는 충분히 짐작할 수도 있었지. 네가 도적 길드에갇혀 있을 때 손쉽게 찾아갈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도시에 미리 가보았었기 때문이었지." "그래?" 아버지는 무얼 하러 거기까지 가셨을까? 유리카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음… 모르긴 해도 티무르의 할머니가 거기 있었고 티무르가 하르얀의 심복이었으니만큼, 그때부터 이미 네 동생의 행동이 이상하다는걸 알고 살펴보러 간 것이 아닐까? 뭐,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말이야." "글쎄다……." 확실히 알 수는 없는 얘기였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끄덕거렸다. 유리카는 이어서 약간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베카는 생각보다 일찍 죽었더라… 나이로 보아 어쩌면 지금까지도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어. 미카가 봉인 당시에 약 5백살, 이베카도 그 비슷했을 텐데 그녀가 죽은 건 미카가 봉인되고 50여 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거든. 그가 없는 나날들은 그녀에게 너무길었던 것일까. 그녀는 미카처럼 매정하지 못해서……." "미카가 매정했던 것이 아니다." 엘다렌의 목소리가 불쑥 등 너머로 들려오자 유리카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럼. 매정하기 보단 지극히 훌륭한 엘프였지. 일의 대소 구별이너무도 명확한 나머지, 희생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었던 고귀한 정신을 지녔었지. 자신의 희생이든, 연인의 희생이든 가리지 않고서. 백년도 넘게 함께 했던 이베카를 떠나면서 단한 번 돌아 보지조차 않았지." 유리카는 에제키엘과 함께, 그리고 아마 엘다렌과도 함께 미칼리스를 데리고 켈라드리안을 떠나던 당시의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분명했다. 그래… 그런 순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 아마 나는 그러지 못할 테지만… 그런 순간 돌아보지 않는 사람도, 그리고엘프도 있어. 엘다렌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은 채 가만히 말했다. "유리, 너도 미카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면서 왜 그렇게 말하는 거냐." 어둠 속에서 유리카가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인다. 감정이 치밀어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나왔을 때, 나는 그녀가 무엇을탓하려 하는지, 누구를 원망하려 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지! 너무도 잘 알아서… 더욱 그런 그가 용서가 안 되는 거야……. 미카가 우리와 함께 여행하면서도 이베카를 얼마나 되풀이해서 생각하고, 그리워했는지 우린 다 알고 있었어. 하루도 그 마음을떠나지 않은 하나뿐인 인연, 그래서… 어떻게, 살아 있는 존재이면서,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의 곁을 영영 떠나는 가운데 한 번, 단 한번 돌아 보지조차 않을 수 있는 거니? 그런 행동이 가능한 걸까? 떠나면서 미카가 이베카에게 했던 말, 난 들었었어… 잊어버리라고, 잊어버리라고…… 어떻게 모든 고통을 자신만이 짊어지려고 하는, 그런이기적인 발상이 되느냔 말야! 남의 마음은 조금도 몰라주는!" 감정이 격해져 목소리가 높아진 그녀는 애써 치밀어 오르는 숨을삼키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미칼리스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유리카는 그녀가 그렇게 멋대로 이름을 줄여 부르는 엄숙한 동료들, 에즈와 엘다와 미카를 말도 못하게 아끼고 있어……. 그녀가 마음 아파하는 것은 그녀와는 너무도 다른 미칼리스와 이베카의 방식이었고, 그것이 그들에게주었을 상처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을 대신하여 저렇게 화를내는 것일 뿐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하라고 한 일 따윈 절대로 없는데, 멋대로 자신의 소중한 것을 희생해버리는 친구는 고마운 만큼이나 원망스러운 것일 거야. 그녀가 하고 싶은 말, 너무도 잘 알 것 같아. 왜멋대로 그렇게 자신을 아프게 하는 거야? 네가 아프다는 것은 나도지독하게 싫은 일인데……. 부재. 부재의 감정이란 몹시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래, 다 지난 일이니까." 감정을 간신히 삼킨 유리카의 목소리가 약간 잠긴 듯했다. 나는 내손바닥 위에 누운 주아니처럼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술의 별이 검은 하늘 가운데 노랗게 떠오른, 좋은 날씨의 여름밤이다. 일곱 별자리 가운데 하나인, 술병인지 물병인지 모를 저 병 모양 별자리의 주둥이에서 보석처럼 떨어진 한 개의 물방울이 바로 미오사니별이다. 정말이야. 미오사니를 보고 있으면 술이 마시고 싶어져. 미칼리스와 이베카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정말로 술이 한 잔 마시고싶어지는걸. "주아니, 그 이야기가 정말이야?" 따가운 해가 내리쬔 뒷머리가 뜨겁다. 손을 대어 보니 달걀이라도삶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이나 한 바가지 뒤집어썼으면. "그냥 그런 것 같다고. 나도 확신할 순 없어." "……." 엘다렌은 말없이 뒷머리를 긁었다. 유리카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내손바닥 위의 주아니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더니, 갑자기 풀썩 바닥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아아, 어찌되었든 일단 좀 앉아서 얘길 하자. 어차피 생각할 거라면 앉아서 하자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나무 사이 좁은 빈터에서 그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앉은 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잠시 쉬었다. 어디선가 앵앵거리며 날아가는 벌인지 뭔지 모를 곤충의 날갯짓 소리가 한가로이울린다. 앉아 있다고는 하지만 바닥도 그렇게 시원하지는 못했다. 환영주 아룬드는 술을 마시고 그냥 길바닥에 누워 잠들어도 좋을 정도로, 대지가 뜨겁게 달구어지는 때라잖아. 올해 들어 가장 심각한 더위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아, 지금. "머리를 잘라 버릴까보다." 유리카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불만스럽게 중얼거렸고 나는 대꾸를 안 할 수 없는 얘기라 한 마디 했다. "아마, 환영주 아룬드가 끝나자마자 후회하게 될걸." 내가 꺼내 땀을 닦는 손수건은 나르디가 달크로즈를 떠날 때 애마를 길들일 수 있도록 내 목에 걸어 주었던 바로 그 손수건이다. 나르디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 너무 오래 되었다. 그 강물처럼 시원한 미소를 한 번만 보았으면 좋겠어. 프레아데니가 죽어서, 나르디는 몹시 상심했겠지……. +=+=+=+=+=+=+=+=+=+=+=+=+=+=+=+=+=+=+=+=+=+=+=+=+=+=+=+=+=+=+=모든 시간이 왜 이렇게 촉박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6259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8 21:46 읽음:156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7) "유리, 이슬라 공주가 준 빗 있잖아. 그걸로 올려 보면 어때?" 달크로즈를 떠난 뒤 거의 잊고 있었던 물건을 문득 떠올린 것은 순전히 유리카가 계속 머리를 이리저리 쓸어 올려 어떻게 묶을 방법이없나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유리카도 아, 하는 표정이 되었다. "좀 줘봐." 엘다렌과 주아니는 처음 보는 것일 그 물건이 내 배낭에서 꺼내져그녀의 손으로 건네졌다. 진주와 조개들이 정교하게 엉겨붙은 모양을하고 있는 아름다운 장식 빗이다. 유리카는 빗 두 개를 넘겨받더니머리카락을 교묘하게 감아 올려서는 빗 두 개로 딱 고정시켰다. "아, 잘 됐는데." 목이 한결 시원해졌다는 듯,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머리를 올린 것을 보는건 처음이다. 나는 한참 가만히 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쁘긴 한데, 나이 들어 보여." "제아무리 들어 보인들, 2백 열 여덟 살로야 보이겠니?" "내 머리가 너처럼 하얗게 세려면 2백년으로도 모자라." 지지 않고 한 내 대꾸에 유리카가 입을 비죽 내밀어 보인다. 말은그렇게 했지만 사실 머리를 틀어 올린 유리카는 나름대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좀 성숙해 보이는 것도 같고, 귀부인같은 느낌도 있는 것 같아. 여자들은 머리 모양 하나로 저렇게 또 달라 보일 수가 있구나. "어쨌든, 주아니 얘기를 다시 들어보자." 엘다렌이 흠흠, 하며 본론으로 얘기를 되돌렸다. 주아니는 내 손에서 내려 풀 사이를 이리저리 걸어다니고 있었지만 엘다렌의 이야기를못 듣고 있지는 않았다. 주아니는 폴짝 뛰어 조그마한 돌멩이 위에올라앉더니 내 얼굴을 제일 먼저 올려다보았다. "확실하다곤 할 수 없어. 어쩌면 더운 땅에서 올라오는 아지랑이때문이었는지도 모르거든? 그렇지만 어쨌든,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단거야. 이상하게 갈라진 듯한 공간,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고 애써 보려고 하면 안보이지만 다시 아무 생각 않고 있으면 언뜻 보이는 그런거야." 주아니가 아까부터 하고 있는 이야기는 우리가 숲을 걷는 동안 주아니의 눈에만 문득문득 보였다는 이상한 '갈라짐 현상'에 대한 것이다. 뭐 '갈라짐 현상'이라고 하니까 꽤 묘하게 들리지만, 직접 보지못한 나로선 그 말고 딱히 적당한 말도 없었다. 정말 그렇게 말했다. 문득 눈을 돌리는 순간, 마치 두 공간이 잘못잘라 이어지거나 겹쳐진 것처럼 이상한 균열이 보였다는 거다. "그것 참… 그런 게 있을 수 있는 거야?" 이 가운데 마법에 대해 제일 무지한 나는 그렇게 투덜댔지만 엘다렌과 유리카는 나름대로 주아니의 이야기를 꽤 심각하게 들었다. 로아에는 인간, 엘프, 드워프 이 모든 종족들보다 훨씬 자연에 가까운존재들이었고 주아니가 가진 재주들은 확실히 나 같은 인간이 미치지못하는 데가 있다는 걸 나도 알고는 있다. 그렇지만, 머리로 이해가가야지, 이해가. 도대체 눈앞의 공간이 갑자기 잘라져 보이면 어떻게된다는 거지? 어떤 식으로 보인다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뭐,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어, 파비안. 그러니까… 그림을 하나그려서 반을 잘랐다고 생각해 봐. 그런 다음 그 그림을 어긋나게 맞춰 놓으면 어떻게 보이겠니?" 유리카가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야 약간은 감이 잡혔다. 유리카는이어서 또다시 설명했다. "그리고 그 자른 그림 두 장을 하나는 높이, 하나는 낮게 놓았다고생각해 보라고. 똑바로 위에서 내려다 봤다고 생각해도 그 사이의 틈이 느껴지지 않겠어?" "그건 알겠는데, 우리 주위의 공간이란 건 그림처럼 멋대로 잘라낼수 있는 게 아니잖아?"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엘다렌이 불쑥 끼여들더니 마치 주아니가 말한 그 균열을 찾으려는것처럼 주위를 한 바퀴 휘둘러보았다. 물론 동굴에서라면 드워프의눈썰미도 대단한 데가 있지만 여긴 숲이고, 엘프라면 모르되 그의 눈에 그런 것이 쉽게 띌 리는 없었다. 그러나 엘다렌은 우리 중 누구보다도 주아니의 말을 신용하는 눈치였다. "그럼, 잠깐 쉬면서 침착하게 그걸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는군. 만일 그런 것이 정말로 있다면……." 엘다렌은 잠시 말을 멈추고 신중하게 눈을 몇 번 껌뻑이며 생각을해보는 듯하더니 결국 말을 이었다. "엘프들은 그런 눈속임 수를 예전부터 즐겼지." "눈속임수요?" 그게 눈속임으로 가능한 일이야? 아니, 그럼 그냥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거야? 유리카가 고개를 흔들었다. "눈속임은 아냐. 정말로 이 근처 공간 어딘가가 구부러져 다른 공간이 만들어져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흔히 '결계'라고 말하는그런 것이지. 우리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는 길이지만 바로그 결계 가운데를 통과해 갈 수도 있는 거라고. 결계는… 말하자면입구도 벽도 없는 숨은 방과 같은 거야."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정말로 몰랐기 때문에 나는 솔직하게 대꾸하고는 더위를 조금 해결할 길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뒤로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유리카는 뭐 까짓 거, 하는 것처럼 양손을 들어 보이며 대꾸했다. "널 이해하게 하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야." "그럼, 어디 해봐." 유리카는 잠시 적당한 비유를 찾기 위해 입을 다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주아니는 다시 돌 위에서 내려오더니 계속해서 땅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음… 네가 이 숲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저 나무 뒤를 돌아가니까숲이고 뭐고 싹 사라져 버리고 불쑥 텅 빈 들판이 나타났다면 너는어떻게 생각하겠니?" "그런 일이 있을 턱이 없잖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게 하려면 어떤조건이 있어야 하겠느냐고." 나는 생각해 봤다. 숲이 사라져? 갑자기 대규모 목재 사냥단이 출현해서… 이건 아니고, 엄청난 불이 나서 싹… 이것도 아니고, 난데없는 벼락이 떨어져… 음음. 평소처럼 내 머리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질문이긴 했지만 이번엔조금만 더 생각해 봤다. 숲이 현실적으로 갑자기 없어질 순 없어. 무슨 수를 써서 갑자기 없앤대도 아마 흔적이 남을 거야. 마법 같은 것을 써도 마찬가지고. 그것도 갑자기 다른 풍경이 되어버린다라……. 나는 불쑥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갑자기 과거로 되돌아가기라도 했나?" 유리카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다. 맞았단 거야, 틀렸단 거야? "응, 반은 맞았어." 엘다렌은 우리를 쳐다보기보다는 주아니를 계속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주아니가 그 뭔가를 발견할 때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주아니는 자기 뒤통수에 달린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조그만 쥐처럼 이리저리 왔다갔다 거리고만 있었다. "사실 움직이지 않고도 가능한 거야. 첫째 조건은 시간, 그 다음은공간이지. 갑자기 네가 이 숲이 존재하기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고생각해 봐. 아니면 이 숲이 이미 사라져 버린 까마득한 미래로 가버렸다거나. 시간이라는 조건을 지우기만 하면 네 눈앞에선 별가지 장면들이 한꺼번에 펼쳐질 거야." "음……." +=+=+=+=+=+=+=+=+=+=+=+=+=+=+=+=+=+=+=+=+=+=+=+=+=+=+=+=+=+=+=Metal Gear Solid 엔딩 'The Best Is Yet To Come'을 듣고 있습니다. 좋네요. 삭제는 공지에도 썼듯, 내일입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6364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9 21:55 읽음:144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8) "존재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는 숲, 낮이기도 하고 밤이기도한 하늘, 네 옆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친구, 과거엔 있었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 길… 모든 것이 다 있을 수 있어." "그럴 수도 있겠지." 나는 개인적으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친구라는 개념이 마음에안 들었지만 어쨌든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 조건을 생각해 보자. 공간." 유리카는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들더니 흙바닥에 동그라미를 하나그렸다. 그리고 동그라미를 가로지르는 선을 그 안에 하나 그었다. 그리고 그것과 비스듬하게 마주보고 있는 선을 또 하나 그었다. "자, 이렇게 생각하자. 이 동그라미 안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야. 이 밖은 우리가 절대 알 수 없는 곳이고 있다고 믿지도 않는 외부 세계야. 우린 이 동그라미 안만 볼 수 있어." "그렇다고 치자. 그래서?" 유리카는 나뭇가지로 동그라미 안의 두 선을 가리켜 보였다. "이것 봐, 이 두 선은 나란하지 않지?" 선은 서로 비스듬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이 두 선을 동그라미 밖으로, 서로 가까워지는 쪽으로 계속 연장시키면 어떻게 될까?" "서로 만나겠지." "그렇지만, 그 만나는 점은 우리 세계 밖이잖아. 우리가 두 선이만난단 사실을 알 수 있니?" "모르… 겠지." "그럼, 우린 그 두 선이 서로 만나지 않는 선이라고 생각하겠네?" "…그렇겠지." 말해놓고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 동그라미 안에서만살고 있는 우리는 이 나란하지 않은 선이 언젠간 만난단 사실을 영원히 모른단 말인가? "…이상하네?" 내가 혼란스럽게 바라보다가 누운 자세를 바꾸는 동안 유리카는 멋대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리 눈에 보이 것과는 다른 모양을 가질 수있다는 걸 알면 다음 얘긴 쉬워. 이번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유리카는 손을 들더니 저쪽 너머에 있는 바위를 하나 가리켰다. "저 바위 뒤가 보여? 뒷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겠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아냐." 굳이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유리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바위 뒤로 가면 이쪽이 안 보이는 건 당연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만약에 한 자리에 앉아서 여기와 저기를 한꺼번에 볼 수있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하늘을 날면서 내려다본다면 아마 다 보이겠지?" "그렇지만 보이는 모양이 다를걸." "그럼 이건 어때? 만약 저게 바위가 아니고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거라면?" "그렇다면… 잘 보이겠지만 그건 그 너머 풍경이 보이는 거지, 바위의 반대쪽으로 돌아가 그쪽에서 보는 것과는 얘기가 다르잖아. 그쪽에서 보면 이쪽은 전혀 다른 풍경으로 보일 텐데." "파비안, 오늘 너 유난히 얘기를 잘 알아듣는데?" 유리카는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면서 칭찬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하더니 이제 다 되었다는 듯 갑자기 두 손을 포개어 내밀어 보였다. "자, 두 손바닥을 붙였어. 넌 내 오른쪽 손등만 보여. 반대쪽에 붙은 왼쪽 손등은 안 보일 거야. 그런데 이렇게……." 그녀는 손바닥을 떼더니 이번엔 두 손등을 모두 내 쪽으로 향하게해서 내밀었다. "…하면 어때, 둘 다 볼 수 있잖아? 저 바위 뒷면을 잘라서 이쪽으로 보이게 붙였다고 생각하면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볼 수 있어. 그러나 이건 현실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지. 그렇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불가능할 것도 없어." "어떻게?" "아까 동그라미 안의 선, 기억 안 나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이 세상 밖 어딘가에서 만나던 그 선 말이야. 이 세상 밖 어딘가에서누군가 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저 바위와 너와 나, 이 모든 것들이 전혀 다르게 배열되어 있을 수도 있단 말이야! 저 바위는 사실반쪽이 갈라져 둘 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도록 생겼을 수도 있어. 넌여기가 아니라 저 바위 뒤에서 사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정말 하늘 꼭대기에서 여길 내려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난 저 바위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일지 누가 아니? 어쩌면 이상텔로즈 숲 전체가 거꾸로 선 나무들일 수도 있고, 우린 땅 속에서역시 거꾸로 선 채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일지도 몰라… 세상 밖의 눈을 인정하기만 하면 불가능한 것은 없으니까. 사물의 모든 배열을 무시하고 거기에서 자유로워지고 나면, 너와 나 사이 한가운데 사실은 낯선 사람 하나가 앉아 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어. 비록 보이진 않지만, 그가 지금 다른 세상 안에 잠들어 있는 미칼리스 마르나치야일지 누가 아니?" "……." 유리카는 내 혼란스런 얼굴을 보더니 짓궂게 덧붙였다. "사실, 우리가 찾는 푸른 보석은 지금 네 손위에 놓여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천리안에서 세월의 돌 팬클럽이 생길 것 같습니다.... 일단 개설 신청서는 보냈다고 하고, 잘 하면 한 주 안에 개설이 된다는군요. 뜻밖의 소식이라 몹시 당황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세월의 돌을 사랑해 주시는 분들이 추진하시는 일이라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우누리에서도 fnmake에서 팬클럽 개설이 추진중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아직 구체적 진척은 없는 듯하고요(아마도 시삽 맡으실 분이없는 모양입니다....^^;;;), 천리안에서 생기게 된다면 최초로 생기는 것이 되겠군요... 천리안 팬클럽 개설 추진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우누리 fnmake에서 찬성글 써주신 많은 분들께도 모두 감사드립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6365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09 21:55 읽음:177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9) 나는 일어나 앉았다. 놀림 당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이상한 것을깨달은 듯한 기분도 든다.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후끈한 지열이 가득찬 숲은 변한 것이 없었지만, 공간의 배열과 시간의 배열, 이 모든것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니 사물들이 전부 제멋대로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술취한 눈으로 보는 것 같군. 유리카는 이제 마지막 설명을 하겠다는 것처럼 일어나더니 빈터를두어 번 오갔다. 틀어 올린 머리 아래 흰 목덜미가 시원하게 뻗어 있다. 그 위에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흔들거린다. "결계란, 바로 그런 다른 공간을 만들어내는 작업이야. 이 세상과시공간의 배열이 다른 공간을 만들어 세상 가운데 놓아두는 것이지. 생각 없이 숲을 지나가는 사람한텐 절대 보이지 않아. 바로 그 공간가운데를 걸어가면서도 전혀 그 세계를 볼 수 없는 거지. 그런데 말야, 파비안." "응?" 유리카는 내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진지해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끔, 이 사실을 알고 보려고 하는 눈앞에서는 그 다른 세계와의경계가 약간 흐트러지면서 그 구부러진 공간이 눈에 띄기도 한다는것, 아니?" 경계가 보여? "그렇다면……." 내가 주아니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뭐라고 말하려 하는 순간이었다. "파비안, 파비안, 방금 보였어! 엘다렌, 유리카!" 나는 벌떡 일어서고 주아니를 지켜보고 있던 엘다렌은 주아니가 방금 보고 있던 방향으로 급히 고개를 돌렸다. 저쪽, 주아니가 가리키는 것은 커다란 상수리나무가 버티고 선 숲자락인데 뭔가 특별한 것이라고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까 유리카가 했던 말을생각해보면……. "안 보여? 안 보여?" 주아니는 이번엔 아까처럼 고개 돌리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아니라 정말 제대로 뭔가 본 모양이다. 게다가 아직도 보이는 건지그 짧은 보폭으로 거대한 수풀―실은 짤막한 잔디였다―을 헤치고 달려갔지만 여전히 내 눈으로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유리카는 우리처럼 애써 뭔가 보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주아니에게 물었다. "어떤 거니? 설명을 해봐." 주아니는 눈을 잘못 돌렸다가 사라져 버릴 것을 걱정하기라도 하는것처럼,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그림책의 책장 중간이 접혀진 것 같은 거야. 이상한 균열이 보여. 흐물거리는 것도 같고, 하여간 뭔가 잘못 꿰매 놓은 천처럼 어긋나있어. 그 사이에 뭐가 있는지는 보이지 않지만… 아!" "왜 그러니?" "왜 그래, 주아니?" 우리들은 거의 동시에 합창하듯 물었지만, 주아니의 대답을 듣고똑같이 맥이 빠져 버렸다. "사라져 버렸어……." 쳇, 이런 식이어서야 과연 죽기 전에 찾을 수나 있겠어? 이번엔 쉽게 찾을 거라고 누가 말했더라? 우리는 요령을 바꾸었다. 유리카는 자신이 되찾은 몇 개의 마법을세심하게 점검해 보더니 그 가운데 한 가지를 골랐다. 아라스탄 호수에서처럼 모든 마법을 마음대로 쓸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거긴 스노이켈이 만들어 놓은 닫힌 공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고, 여기에서는 정말로 아룬드나얀의 두 보석이 되찾아진 것 때문에 조금씩 세상에 돌아오기 시작한 그 마법을 믿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주아니, 내 말 알아듣겠지?" "그렇지만……." 주아니는 겁을 내고 있었다. 로아에로서 60년도 넘게 살긴 했지만주아니도 마법이 존재하던 시대는 겪어보지 못했다. 자기 몸에 마법이 걸린다고 하면 아마 나도 조금쯤 두려워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유리카가 주문한 것은……. "마법이 문제가 아냐. 나 혼자 거기로 들어가라고? 그래서 못 나오면? 돌아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유리카는 주아니의 겁에 질린 눈동자를 꽤나 진지한 얼굴로 가만히들여다보고 있더니 갑자기 쿡, 웃어버렸다. "왜, 왜 그래?" "아아." 유리카는 고개를 몇 번 젓더니 다시 다짐하는 것처럼 말했다. 마치꼬마 아이들에게 할머니들이 다짐을 둘 때에 하는 그런 말투 말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어차피 우리도 거기로 갈 거란 말이야. 두 군데 사이에 연결 다리만 놓아지면 문제없이 갈 수 있어. 금방 뒤따라간다니까. 그냥 발견하면, 한 마디도 하지 말고 조용히 그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돼." 유리카는 주아니와 자기 사이에 '두 마음의 전송'이라는, 그녀의말에 의하면 아주 간단한 것에 불과한 마법을 걸 예정이었다. 마법이서로 걸려 있는 동안에는 서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가 가능하게 된다. 그렇게 한 뒤, 주아니더러 아까 본 것과 같은 그런 균열이 발견되면 굳이 우리에게 알릴 것 없이 다가가 그 안으로 들어가버리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 다음에 둘이 대화를 연결하면, 유리카자신이 금방 그 균열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거였다. 흐음… 안 그래도 유난히 겁이 많은 주아니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야. "……." 아직도 대답을 못하고 있는 주아니를 보며 나는 이 상황이 마치 예전에 스조렌 산맥에서 산적단 정찰을 보낼 때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 때는 뭐라고 말을 했더라. 나르디가 주아니에게 무슨 중대차한 임무와 의무감 같은 것을 고취시키는 이상한 소릴 했었고, 그리고 우리들도……. 유리카는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주아니, 너 아니면 우리가 누굴 믿으란 말이니? 이건 로아에들의특별한 능력이 아니면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놀라운 사실이고, 이기회를 놓치면 아마 우린 어떻게 푸른 보석과 엘프를 사냥해야 할 지모르게 될 거야. 게다가 넌 그 특별한 세상에 들어가 보는 첫 번째존재가 되는 거란 말야. 정말 흥분되지 않니? 우리들은 하고 싶어도결코 할 수 없는 그런 놀라운 모험이야." 엘프 사냥이라고… 미칼리스를 만나게 되면 저 얘기를 꼭 들려줘야할 텐데. 게다가 저럴 때의 유리카는 정말 확신을 가지고 저런 말을하는 건지, 그저 목적 달성만 하면 된다는 것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는단 말야. 주아니가 선량한 거야 전부터 다 아는 얘기고……. 그러나 유리카는 나라고 그냥 선량한 체 하고 있도록 내버려두지않았다. "안 그러니, 파비안?" "그, 그래……." 아무래도 공범이 되는 편이 속 편하지. 게다가 내 생각으로도 사실은……. "멋진 일일 것 같지 않냐?" 주아니는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마치 배신당한 연인 같은표정을 지었다. 너, 너무 잔인한걸. 그 표정을 보니 굉장히 나쁜 놈이 된 기분이라고. 주아니는 한참만에 대답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야……." +=+=+=+=+=+=+=+=+=+=+=+=+=+=+=+=+=+=+=+=+=+=+=+=+=+=+=+=+=+=+=잠시만 쉬겠습니다... 출판 일자가 계속해서 당겨지는 바람에 몹시 바빠져 버렸습니다. 게다가 이런저런 인터뷰 일정들... 출판사 측의 이야기에 의하면 다른 책들의 출간이 계속 늦춰지는 바람에 제때 원고가 들어오는 세월의 돌의 출간이 빨라지고 있다는 건데요... 뒷부분을 계속 써야만 하는 저로서는 걱정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중간쯤 나오고 뚝 끊기게되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거든요... 게다가 저는 출판사 측에서 교정 작업을 전부 마친 후, 마지막 교정도 직접 가서 다시 봅니다. 이것 또한 작은 일이 아닙니다... 1권에서 그러지 못하고 그냥 낸 다음에 금방 후회했거든요. 다른 분들이그냥 보시기에는 아무 문제가 아니더라도, 제 입장에서 보면 작은 토씨 하나도 거슬리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시간이 걸리고 고생이 되더라도(출판사는 정말 멉니다!) 꼭 마지막 교정은 직접 보겠다고 했습니다. 며칠이라고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 조금 쉬면서 수정할 원고들을전부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연재가 끊기지 않게 하려고 굉장히애썼는데 이런 말씀 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7859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10)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20 21:36 읽음:91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10) 마법을 거는 것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둘은 손을 맞잡…을 수는 없었으므로 대신 유리카의 새끼손가락을 주아니가 잡고, 입 속으로 같은 말을 세 번 되풀이해서 외웠다. 그 동안 유리카는 다른 한손으로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뭔가 세고 있더니, 마지막 순간 손바닥 위에 작은 불빛을 만들었다가 팟, 하고 없애 버렸다. "됐어." 주아니가 미심쩍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 된 거야?" 유리카가 되었다면 된 거지. 뭣하면 서로 떨어진 곳으로 가서 당장실험이라도 해볼 수 있잖아. 그 점에 대해선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둘이 같이 되풀이해 외웠던 말이 뭔가에 대해선 별로 설명하고 싶지가 않… 그러니까 정말로 별 말이 아니었는… 사실, 마법과는 거의무관해 보이는… 말해봤자… 쳇, 에라, 이런 말이었다. '아침 식사는 감자 피클, 점심 식사는 완두콩 스튜, 저녁에는 버찌수프라도 잘 먹었습니다. 아이 맛있어.' "……." 내참, 내 입으로 말해 보아도 걸리던 마법이 도로 다 풀릴 것만 같은 말이라니까. 도대체 감자하고 완두콩하고 버찌가 마법하고 무슨상관이란 말야? 아니, 그보다 도대체 그 세 가지는 먹을 수조차 없는음식이잖아? 그나마 콩 스튜라면 조금 먹을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감자 피클이라니? 버찌로 수프도 만들던가? 하여간 그야말로 전부 재료를 쓰레기로 만드는 조리인데다 낭비에 속하는… 가만, 그러고 보니 재료와 요리법이 하나씩 어긋나 있는 것 같은데… 아냐, 지금 이런 데 분개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아마 저건 아이들이 놀이에서 부르는 그런 노래들 중 하나일 거야. 난 잘 모르겠지만 2백년 전엔 꼬마 소녀들이 많이 불렀던 그런 노래들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고. 그렇지만 도대체 마법어라는 것들이 저렇게 매번 뒤통수를 쳐도 되는 거야? "야, 원래 마법어란 건 저런 식이냐?" 내가 다짜고짜 묻자 유리카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원래? 마법어란 건 마법사가 스스로 만드는 거라고 내가 얘기해주지 않았어? 그저 자기 마음에 들게 만들면 되는 거란 말야. 원래가어딨어." "그럼, 저거 네가 만들었지!" 유리카는 턱을 쳐들더니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 내가 만들었다. 불만이라도 있냐?" 우리가 다시 숲길을 걷기 시작한 후에도 유리카는 그 '마법어'를줄곧 흥얼거림으로서 마치 나를 놀리려는 것처럼 굴었다. 잠시 후에나는 포기해 버렸지만, 그녀는 꽤나 재미있는 선율에다 가사까지 바꿔가면서 노래들을 불렀다. 주아니를 혼자 바닥에서 걷게 해야 했기때문에, 우리들은 모두 굉장히 천천히 걷고 있었다. "셀러리 케이크와 호밀빵 통구이, 피마자 주스로 만찬을 만들었어요. 안녕하세요, 드셔보세요. 아이 정말 맛있어……." 으음… 그런데 저런 노래를 부르는 그녀가 꽤 귀여워 보이기도 한단 말이야. "뭐, 저 노래들은 그래도 낫다. 유리가 물건들을 떠오르게 할 때썼던 마법어들에 비하면 말이다." 보니까 뜻밖으로 엘다렌의 입가에도 참을 수 없다는 듯 약간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마 그도 유리카의 노래를 듣자니 옛날 생각이조금 났던 모양이었다. "무슨 노래였었죠?" 엘다렌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리카는 재미가 났는지 재빨리 노래를바꾸어 불렀다. "꼬질꼬질한 꼬마 녀석은 어디가 그렇게 간지러운지, 손톱이 빠져라 긁고 있네. 그렇게 긁어서 어디 구멍이 나겠어? 세발 갈퀴를 갖다줄 테니까……." "그, 그……." 완전히 입을 벌린 나를 보며 유리카는 노래를 그치고는 한참을 깔깔댔다. 주아니마저 저 아래에서 키득키득 웃었다. 엘다렌이 한참만에 웃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사실 저렇게 마법과 무관한 마법어를 만들어 붙이는 것은 아무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보통의 마법사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과 똑같은 명령어로 마법어를 만들어도, 의지를 잘 집중시키지 못해 실패해 버리곤 하니까." "정말… 그렇겠네요." 하긴 누구라도 감자 피클을 말하면서 머릿속으로는 마음의 전송을떠올리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 같긴 하다. 그렇다면 저렇게 엉뚱한노래를 부르는 걸 단순히 개구쟁이 짓이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겠는걸. 일종의 마법력 집중 훈련일지 알아? 나는 엘다렌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마법어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에 나오는 보통 마법사들의 마법어가 주로 다 비슷한 것은 까닭이 있었군요?" 유리카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마 이럴 테지? 파이어 볼! 하고 외치면 불의 공이 나타나 날아간다던가……."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하, 하하… 아주 잘 아는구나." 유리카는 손을 허리에 얹더니 한때의 한심한 기분을 되살리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럼. 그런 마법어를 쓰는 마법사들이 내 주위에도 한 다스쯤은있었어. 물론, 그렇게 외쳐놓고도 불의 공조차 안 나오는 한심한 자들이 그 중에서도 반이 넘었지만." 하여튼 마법이란, 여전히 꽤나 어렵고 복잡하고 잘 모를 것들임에틀림없어. 나는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에제키엘은 어땠니?" "에즈는 뭐, 나 같은 장난을 할 단계는 지난 사람이었으니까… 에즈는 사실 마법을 걸 때 별로 말을 하지 않았어. 별다른 손짓도 하지않았고. 그래서 우린 옆에 있으면서도 그가 마법을 썼는지 안 썼는지조차 모르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니까. 예를 들면." 유리카는 저 앞쪽에서 길을 막고 있는 커다란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그냥 걷고 있자면 갑자기 저절로 저 나뭇가지가 들렸다가, 우리가지나가고 나면 다시 내려오는 거야. 같이 걷던 에즈가 한 마디 말도없이 그렇게 만든 거지. 어떤 날은 모여 앉아 심각한 얘기를 하는 도중 갑자기 비가 내렸는데, 우리 머리 위만 마법막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우린 비가 오는 줄조차 모른 일도 있었다니까. 에즈는 우리하고그냥 계속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런 일을 같이 해버린거야. 그는 무슨 일을 하고 생색내는 걸 대단히 싫어했어." "헤에……그것 참." 다음에 이어질 내 말은 물론 '편리하군'이었지만 유리카도 한때 가졌던 대단한 마법을 지금에는 다 잃은 터였으므로 그 말은 그냥 삼키고 말았다. 나는 계속 걸어가면서, 여행하는 도중 닥치는 자잘한 장애를 한 마디 말도 없이 조용히 없애 주는 친구가 옆에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생각해 보았다. 좋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겠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일을 해버리다니. 약간은 속는 것 같은 기분이기도 하잖아? 갑자기 유리카의 목소리가 들려 나는 생각 속에서 깨어났다. "주아니, 주아니 어디로 갔니?" +=+=+=+=+=+=+=+=+=+=+=+=+=+=+=+=+=+=+=+=+=+=+=+=+=+=+=+=+=+=+=일단, 돌아왔습니다.... 너무 오랜만이지요? 혹시 안 돌아오는 것은 아니냐... 고 불안해하셨던 분들, 저는 연재 중단 안합니다. ^^;(그러나 fnmake에 쓰여 있던 연중.. 이라는 단어는 너무 잔인했어요. T_T)기다려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메일이나 메모, 게시판에 글남겨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앞부분 파일 자꾸 찾으시지 마세요.. 정 돈이 없으시면대여점이라는 최후의 수단도 있으니까요... ^^;;;돌아오긴 했지만, 5권 마감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7860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1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20 21:37 읽음:895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11) 정말이었다. 주아니가 없었다. 나는 당연한 까닭으로 한때 그랬던 것처럼 바닥에서 허우적대며 주아니를 찾을 자세를 취했다. 아니, 그 자세를 취하기 위해 재빨리 바닥에 엎드리려 했다. 생쥐를 찾을 때라면 물론 예전이나 마찬가지로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겠지만… 그러나 물론 지금은 그렇게 단순한방법으로 찾아질 상황이 아니다! 엉겁결에 취하려 했던 자세를 다시엉거주춤하게 멈추는 찰나, 유리카가 갑자기 입을 열어 주아니를 불렀다. "주아니! 응응, 들리니?" 내내 이 모든 계획에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던 엘다렌이 눈썹을 찌푸리며 유리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우리에게는 물론아무 것도 안 들린다. 유리카는 정말 주아니의 목소리가 들리나? …정말 그런 모양인데? "아아… 그래? 걱정하지 마. 금방 찾을 테니까. 정말이지 않고. 아무 일도 아냐. 아무 걱정할 필요없어.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보고들어갔는지, 그냥 설명만 해, 응?" 그저 유리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는 나와 엘다렌은, 한참 그러고 있다가 얼굴을 돌려 다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봤다. 다시 말하지만, 그 말고는 할 일이 없었으니까. "응! 그렇구나. 그러면……." 유리카는 선 자세에서 몸을 뒤로 빙그르르 돌리더니 뭔가를 찾는것처럼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한 곳에 시선을 멈춘 그녀는 입을 열어말했다. "찾았어! 그래서?" 허공을 보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마치 유령하고라도 말하는것처럼 느껴지지만……. 유리카는 고개까지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래? 와아… 그거 신기한데?" 보다못해 조금 참견할 수밖에 없었다. "유리, 혼자 좋아하지만 말고 좀 말을 해봐. 궁금해 죽겠잖아. 아니면 빨리 들어갈 방법에 대해 강구해 보든지……." 유리카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을 내저었다. "아아. 지금 하고 있단 말야. 조금만 기다려봐. 쉿, 안 들린다고." 유리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우리가 멈춰 선 위치에서부터 길 우측으로 길게 이어지기 시작한 자작나무 숲 쪽이다. 우리가 좀전부터따라 걷고 있는 길은 아마 나무꾼들이 다녀서 만들어진 길인 듯했다. 그 곳은 나무 사이사이로 환하게 든 볕과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들때문에, 지금까지 오던 곳과는 마치 전혀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흰색의 커튼, 녹색의 휘장이 달린 숲이다. 곧게 자란 잘생긴 나무들이일부러 모아 심기라도 한 듯 빽빽이 들어찬 그곳은, 정말로 한 발짝들어가면 다른 세상일 듯 밝고 맑은 빛으로 가득했다. 자작나무는 껍질을 벗겨 약으로도 쓰고 목판 같은 것을 만들 때에도 쓰는데, 그 때문인지 누군가 베어 가고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들도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가만, 가만. 그래, 됐어. 알겠어." 유리카가 아직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천천히, 숲 쪽으로걸음을 옮겨 보았다. 바스락, 딱. 마른잎과 나뭇가지가 밟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한 개의 자작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손바닥에 까칠하게와 닿는 하얀 껍질. 빻아서 하얀 가루로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백묵을 바른 듯한 그 나무를 잡고 서서 나는 숲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숲 안에 숲이 있다. 세상 안에 세상이 있다. "하얀 나무의 나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면서 문설주처럼 나란히 붙어 선 나무 두 개를 팔을 뻗쳐 잡았다. 나는 문 앞에 서 있어……. 여기서부터는 다른 숲, 하얀 나무의 세계다. 이쪽보다 유난히 햇빛이 잘 드는 것만 같은, 저 너머의 숲엔 무슨 재미있는 새 이야기가있을까. 곧추선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선 채 기분 좋은 눈매로 땅을 굽어보고 있다. 한 발짝, 들어가 볼까. 나는 문설주를 놓고 덤불을 넘었다. "눈이 도는 것 같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지다. 그저 자작나무들이 선 숲이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다시 보니 그 안엔 몇백 년을 감겨 올라갔을 것만 같은 두툼한 등나무 덩굴과 수백 개의 잎사귀가 벽지무늬처럼 얽혀 있다. 주홍빛으로 환한 능소화가 녹색 머리카락에 장식처럼 피어났고 덩굴장미가 끝모를 줄기를 늘어뜨리며 공터를 휘감았다. 그리고 두 걸음, 앞으로 내딛는 순간이었다그 둥치와 가지가 끝간데를 모르도록 거대한, 마치 하나의 왕국처럼 버티고 선 녹나무를 깨달은 것은 내 발치까지 뻗어 나온 주춧돌같은 겉뿌리에 걸려 한 차례 비틀거린 후였다. 다섯 아름으로도 모자랄 듯한 울퉁불퉁한 줄기가 산등성이처럼 하늘 지붕으로 솟았다. 그 자체로 하나의 숲이라 해도 좋을 수백의 가지와 수천의 잎새들은, 저마다 다른 무지개빛을 반사하며 찬란한 보석처럼 소리내어 흔들렸다. 바람이 잎새를 잡아 흔들고 지나가는 소리가 어쩌면 천진한 어린아이들이 조잘대고 지껄이는 듯, 귓가에 파도치는 생생함에 나는 가벼운 오한으로 몸을 떨며 손을 양뺨으로 가져갔다. 그것은 하나의 나라였다. 따로 하나의 나무가 되고도 남을 굵은 가지들에는 갖은 빛깔 깃달린 새가 깃들고, 영롱한 등딱지를 가진 벌레들은 부지런히 줄기를 오르내린다. 나무 한쪽으로 난 구멍에는 들쥐 또는 다람쥐의 흔적, 그그늘 아래에는 엉겅퀴와 찔레, 클로버가 가득한 연둣빛 풀의 대지가누워 있는 숲의 왕국. 다른 곳에서라면 한 번 눈길조차 끌지 못했을이름 모를 풀꽃들이 반짝이는 꽃잎을 저마다 빛냈다. 그리고 그 흙속을 파고들었을 보이지 않는 온갖 생물들. 신성한 나무. 이 나라보다도, 그 어떤 생물보다도 오래 살았을 대지의 어른을 나는 바라보고 있어. 한쪽 가지는 점차 마르고 딱딱해져가는 가운데, 다른 가지에는 새로 물이 오르고 싹이 돋아나는, 네 계절이 그 안에 모두 흐르는 듯한 나무. 시간과 세월의 나무. "파비안!" 그리고……. "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아까 전, 내가 다람쥐라고 생각했던 것은 혹시……. "파비아안! 내가 얼마나……." 나는 낮은 가지 위에서 손을 내밀고 있는 주아니를 보며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었다. 뭐야? 아까 어디론가, 다른 세상으로 갔다고했잖아? 그런데 왜 멀쩡히 저기 있는 거야? 나무로 다가가 손을 내밀고, 주아니가 손바닥 위로 올라올 때까지나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아니가 상기된 얼굴로 입을열고서야, 나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그런데 유리카가 먼저 안 오고 파비안이 먼저야?" "뭐… 라고?" +=+=+=+=+=+=+=+=+=+=+=+=+=+=+=+=+=+=+=+=+=+=+=+=+=+=+=+=+=+=+=홈페이지에서 있었던 세월의 돌 사인북 구입 이벤트에 참여해주신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이 참여해 주셨어요. 그 책을 모두 사다 나르는 일도 작은 일은 아니었다는...;;그리고 우려하셨던 분들께.. 지방으로 부친다고 우편료가 더 들진않았어요. ^^;그리고.. 신청하신 책은 다 부쳤으니까 받으신 분들은 받았다고 메모라도 남겨 주세요. ^^ (받았다고 메일 주신 분들도 모두 고맙습니다아-)세월의 돌은 현재 3권까지 서점에 나와 있습니다. 다음 주 중순쯤,4권 발매 예정입니다. 나우에서 팬클럽 만드느라 애쓰시는 분들께도 감사를...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8045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1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21 23:39 읽음:71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12) 그 때, 등뒤에서 밝은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소리야! 이렇게 왔잖아."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유리카가 한 손으로 엘다렌의 손을 잡고―까닭은 알만했지만 솔직히 상당히 우스꽝스런 모습이었다―빙긋 웃으며 거기 서 있었다. 여기서 '거기'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 거야?" "어디긴, 우리가 오려던 바로 '거기'지." 유리카는 굉장히 기분이 좋은 듯, 활짝 웃더니 엘다렌의 손을 놓고녹나무가 있는 풀밭으로 사뿐사뿐 다가갔다. 어리둥절해진 내가 방금전에 넘어온 문설주 모양의 자작나무들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고 있는 동안, 유리카는 녹나무 둥치에 몸을 기대며 행복한 듯 깊은 숨을내쉬었다. "여기에 다시 오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어." "여기 와 봤어?" 여전히 헛수고를 거듭하던 내가 수풀을 툭툭 차기도 하고, 이 나무저 나무 줄기 뒤를 들여다보고, 하늘도 올려다보고 하다가 문득 묻자, 유리카는 상기된 뺨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말했다. "에즈가 미카를 여기에 숨겨 놓았을 줄 알았다니까. 정말이야! 아까 주아니가 공간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고 했을 때엔 혹시 다른 곳일지도 모른다 싶어 긴가민가했지만, 역시 생각대로였어. 아아, 너무기뻐." "언제 와봤냐니까?" 내가 유리카에게서 다른 설명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그녀가 두서없이 지껄이는 이야기들이 계속된 후였다. 유리카가 여기 와본 것은 물론 2백년 전, 미칼리스와 에제키엘과 함께였고그때 무슨 사정이었는지 엘다렌은 없었다고 했다. 엘다렌이 말한 그대로, 특이하게 구부러진 공간인 이 결계는 엘프인 미칼리스가 만든것이었다. 게다가 결계란 반드시 한 장소에 멈춰져 있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유리카가 전에 여기 와 보았을 때엔 상텔로즈 숲이 아니라 켈라드리안을 통해 들어왔다고 했다! "그게 정말이야? 아무 데서나 들어올 수 있다고?" "그것하곤 좀 달라. 주아니처럼 그 미세하게 흐트러진 경계를 발견할 능력이 없는 바에야 안내자가 없인 결코 오지 못할 곳이니까. 게다가 그 안내자란 엘프들 중에서도 이 결계의 능력을 가진 자들에 국한된 것이고. 보통 사람으로선 아무리 설명해도 볼 수도 느낄 수도없는 그런 거야. 그건 그렇고, 로아에들이 엘프들의 결계에 저렇게손쉽게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단 사실은 나도 몰랐는걸." "그럼 나는 어떻게 들어오게 된 거야?" 유리카는 그제야 나무에서 등을 떼더니 약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사실은 나도 그게 굉장한 의문이야. 어떻게 너는 경계를 보지조차 못했고, 안내도 아무 것도 없었는데 혼자 저절로 여기 들어왔니?" "… 그건……." 나는 정말 모른다. 아까까지만 해도, 방금 전까지 있던 자작나무숲이 어디로 갔나 싶어 소용없는 탐색을 되풀이하던 내가 아닌가! 이곳에 들어와 난데없이 저 녹나무가 나타났을 때만 해도, 나는 내가아직 자작나무 숲에 있는 줄 알았단 말이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이 공간은 모두 미칼리스가 만든 거야? 저 나무도?" "음, 그건……." 유리카는 내 쪽으로 걸어나오더니 녹색 풀밭에 치맛자락을 펴고 주저앉았다. 문득, 햇빛이 등에 닿는 것이 몹시 따사롭게 느껴짐을 깨닫고 나는 놀랐다. 이곳은 한여름 무더위로 후끈후끈하던 바깥 세상과는 전혀 다른 날씨였다. 다가가 그녀 곁에 앉고, 엘다렌도 와서 앉았다. 잘 자란 보드라운풀과 꽃냄새가 향기롭다. 마치 켈라드리안의 페어리들이 만들었던 하룻밤의 여름처럼, 온화하고도 쾌적한 날씨를 가진 묘한 땅, 여긴 도대체 얼마나 넓은 걸까? "미칼리스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난 엘프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아마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이미지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싶어. 아냐, 이게 환상이라는 보장 역시 어디에도 없지. 어쩌면 이것들은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일 거야." 마지막으로 나는 가장 궁금한 사실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나가는 거냐?" 유리카는 두 손을 들어 보이더니 대꾸했다. "나도 몰라." "뭐야?" 나는 다짜고짜 튀어나온 대답에 당황했지만 유리카는 태평스런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당연하다는 듯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 있으면 이 장소를 만들어낸 엘프를 만날 텐데, 넌 뭘 그런걸 걱정하니?" 그, 그러니까… 으음……. 나는 한참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계산들을 해본 끝에 간신히 대꾸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에라, 나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유리카처럼 마음이라도 편한 편이좋겠지, 뭘. "아아, 날씨 좋다." 유리카는 기지개를 켜더니 푹신한 풀밭 위로 누워 버렸다. 그녀가그렇게 느긋한 것을 보니 어이없기도 했지만, 왠지 나 역시 마찬가지로 편안한 마음이 되어버렸다. 엘다렌은 일어나더니 뭔가 위험한 거라도 없나 찾는 것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아니 역시 이제 우리와함께 있게 되자, 처음의 불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날려버리고 신나게풀밭을 돌아다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녹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휴우……." 확실히 멋진 나무다. 이게 미칼리스의 머릿속에서 나온 거라면 그는 정말 대단한 엘프겠는걸. 그래, 아주 정확한 연상 능력. 그 정도의 연상력이라면 정말 최고의 마법사가 되고도 남았을 거야. 나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미칼리스도 마법사였어?" 유리카는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다가 대꾸했다. "아니. 미칼리스는 엘프 중에서도 전사에 속했어. 물론 이런 특수한 능력들을 갖고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대단한 전사였다고." "네가 설명한 마법의 원리대로라면, 미칼리스는 정말 대단한 '각인'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 나는 녹나무 줄기로 다가가 그 울퉁불퉁한 표면을 만져 보려 손을뻗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파팟! "으, 으헉!" +=+=+=+=+=+=+=+=+=+=+=+=+=+=+=+=+=+=+=+=+=+=+=+=+=+=+=+=+=+=+=네에... 전 실제 나이보다 좀 나이들어 보이는 얼굴이랍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8046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1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21 23:39 읽음:70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13) 내가 깜짝 놀라 지른 소리에 누웠던 유리카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엘다렌도 몸을 돌렸다. 주아니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파비안, 파비안, 왜 그래애!" 나는 줄기에 댔다가 뗀 손을 들여다보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분명히 봤다. 없었던 것이 아니다. 아직도 손바닥이 얼얼해. 내가 나무줄기에 손을 대는 순간, 분명히 있었어. 푸른 불꽃같은 것이 튀어나오는 것을 분명히 봤단 말이다! "……." 나는 들썩이는 어깨를 진정시키느라 잠시 대답을 지체했다. 숨을되풀이해서 몇 번 삼킨 다음 내가 외친 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나무에 귀신이 붙었어!" "……." "……?" "… 쯧쯧." 세 동료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침묵했다. 유리카는 일어나 앉아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오른쪽으로 젖혔다 왼쪽으로 젖혔다 하면서 마치 목운동이라도 하듯 움직인 다음, 다시 내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얼굴을 보니 다음에 할 말을 짐작할 수있을 것 같았다. "말 안 되는 소리 그만두고, 뭘 봤는지나 말해. 여긴 미칼리스가만들어낸 땅이야. 귀신, 아니 악령 따위가 있을 리가 있어?" 하긴, 듣고 보니 그랬다. 일부러 애써서 이런 결계의 세상을 만들어 냈으면서, 그 안에 귀신인지 악령인지 하는 걸 잡아넣는 사람이있다면 그건 분명 머리가 어떻게 된 놈일 거다. 엘프라도 마찬가지지. 그러나 내가 파란 불빛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유리카의 눈빛이 달라졌다. "파란 불빛? 어디서? 그 나무에서?" 그럼, 나무가 아니면 내 손에서 불이 나오기라도 했단 말이냐? 엘다렌이 먼저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자신도 나무에 손을 대 보았다. 그런데 당황스럽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리카는 한쪽 눈썹을 올리면서 엘다렌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더니 드디어 일어나서 나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꽤 엄숙한 표정으로 나무껍질에 손을 얹었다. 물론, 예상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유리카는 재차 다시 손을 대 보더니 이번엔 두 손바닥을 모두 대어보고, 마지막으로 뺨까지 대어 보았지만 역시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않았다. 나는 그 동안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나무에서 두어 발짝 떨어진 채 그녀가 하는 양을 쳐다보고 있었다. "파비안, 네가 착각한……." 한쪽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주아니가 꺼낸 말이 끝나기도 전에내가 분개해서 몸을 돌리는 참인데, 나보다도 먼저 유리카가 고개를단호히 젓는 것이 보였다. 그러더니 내게 가까이 다가오도록 손짓했다. "파비안, 이리 와봐." 솔직히 난, 아까 거의 작은 번갯불에 가까운 섬광을 본 터라 거기에 다시 손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겁을 먹었다고 말하기도 뭣해서 일단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나무 껍질을 가까이에서 다시 보니, 어이없게도 아까 본 것이 정말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무지 불이라고는 있을 수도 없을 것같은, 그것도 푸른 불꽃이라니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튼튼한 나무 줄기와 울퉁불퉁한 껍질이잖아. 번개가 뭘 어쨌다고? 정말로 내가 뭘착각하고 있는 건가? "그러니까……." 내가 다시 나무 줄기에 손을 가져간 순간이었다. 파바밧! "흡……." 이번엔 유리카도, 엘다렌도 분명히 보았다. 모두 이 어이없는 상황에 할 말을 잃은 모양이었다. 손을 지나 어깨까지 찌릿한 감각이 왔다. 내 손과 나무 줄기 사이에서 번개가 쳤어. 푸른 번개가, 그것도……. "파비안, 검, 멋쟁이 검을 대봐. 반응할 거야, 분명히." 유리카의 목소리가 드디어 긴장된 빛을 띠었다. 나는 검을 등에서뽑았다. 내 마음속에서도 오랜만의 예지가 잠깐의 눈을 뜨는 듯했다. 그래, 어떻게 해야 할 지 조금은 알 것 같아. 유리카와 엘다렌을 모두 물러나게 하고, 나는 멋쟁이 검을 높이 들어 나무줄기 한가운데를 힘껏 내리쳤다. 촤좌좌자자자작! 유리카의 반쯤은 당황하고, 반쯤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녀의 입에서 중얼거리듯, 낯선 단어가 흘러나왔다. "라이트닝 볼트야……." 라이… 그게 뭐야? 그러나 나도 눈으로 본 것은 분명히 있었다. 내가 손을 갖다 댔을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엄청난 푸른 불꽃이, 그것도 기괴하게 꼬인것 같은 뒤틀린 번갯불이 검과 나무 사이에서 튀는 것을. 도대체 뭐지? 뭐지? 뭐야? 엘다렌은 고개를 높이 들어 엄숙하게 나무를 위아래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한참을 생각한 듯, 그러나 그만큼이나 단정적인 말이 떨어졌다. "세르네즈의 하늘, 세 번째 보석이 이 안에 있다." 우리는 밤이 되기까지 기다렸다. 사실, 기다린다고 무슨 수가 난다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다만 경험상―어디까지나 2백년 전의 경험이니만큼 신빙성은 떨어지지만―이런 식으로 식물 안에 어떤 특별한 것이 숨겨져 있을 경우에는 달빛과같은 특수한 빛에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를 듣고 그냥 이러고있을 뿐이다. 사실 기다리는 것 말고 별다른 대책도 없고 말이다. "안되면 어쩌지?" 내 질문에 유리카는 단순하고도 명료하게 답했다. "미카한텐 미안하지만, 그땐 나무를 베는 수밖에." 제발 그런 일이 안 생기기를 바랄 뿐이다. 밤하늘에 떡조각처럼 뜬 흰구름 몇 개가 뜨기 시작한 별들을 가리며 흘러갔다. 난 처음 만나게 될 낯선 상대에게 다짜고짜 미안하다고양해를 구해야 하는 어색한 상황이 발생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나무를 벤다라, 이건 확실히 위험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나는열심히 하늘에 달이 떠오르길 기다리며 목을 뺐다. 엘다렌의 말을 증명할 만한 일은 좀더 있었다. 비록 두 번째 보석때와 양상은 달랐지만 여명검이 반응을 보인 것 말고도, 아룬드나얀을 가까이 가져갔을 때에 나무 줄기 안쪽에서 희미하게 푸른빛이 흘러나와 까칠한 껍질들을 적셨다. 마치 한겨울, 눈이 내린 벌판을 몰래 내다본 것과 같은, 그런 파르스름한 광채였다. 그래, 충분히 증거가 있다고. 거의 찾은 거나 다름없어. 나무는 그 자체로 특별한 점은 없었다. 철갑이 씌워진 것도 아니고, 그저 오래된 나무일 뿐이다. 솔직히 보석이 불에 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그냥 불을 확 질러버려도 충분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역시 생면부지의 상대에게 시작부터 무례를 범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나무를 바라보았던 내 첫 기분을 떠올려보면 심정적으로도 별로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쨌든, 그냥 멋대로 베어버리기엔 지나치게 멋진 나무잖아? +=+=+=+=+=+=+=+=+=+=+=+=+=+=+=+=+=+=+=+=+=+=+=+=+=+=+=+=+=+=+=복귀 축하해주신 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메일, 메모, 게시판의글 모두요. 그런데... 복귀 축하 만큼이나 지워진 글을 요청하시는 분이 많군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게시판에 쓰여지는 요청글만큼이나 메일로 당당하게(?) 요청하시는 분들의 숫자도 상당합니다. 그것도 많아지고 보니 나름대로 대단한 스트레스 거리가 되는군요.. --;분명, lt 세월의돌 또는 li 모래의책 해서 한 번이라도 찾아보신분이라면(나우누리의 경우) 제가 저 앞에다가 '99/9/22 이후로 글 찾는 분들께'라고 쓴 글을 보실 수 있었을 텐데요(2화 글파일을 내용과제목 모두 수정해 놓은 거지요). 거기다가 왜 지워진 글을 드릴 수없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는데... 그걸 읽어 보시고도 다시 요청하시는 분은 무슨 생각이신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8104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1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22 16:50 읽음:59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14) 그러나 달은 좀처럼 구름 뒤에서 머리를 내밀지 않았다. "하아아암……." 하품이 나온다. 이러다 자면 안 되는데. 무슨 기분인지 또다시 나무 가지 위로 기어올라가 있던 주아니는어느 새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로아에가 나무를 탈 줄 안다는사실을 알게 된 것도 새로운 수확이라면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군. 저렇게 짧은 팔다리로 뭘 잡고 올라가는 거지? 사람으로 치면 거의암벽등반 수준일 것 같은데. "파비안, 졸지 마." 유리카는 아직 눈가에 졸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쌩쌩한 모습이다. 엘다렌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데다 심지어 말조차 없으니 자고 있는지 깨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유리카가 가끔 바위를두드려 보는 것처럼 어깨를 톡톡 쳤다. 그러면 불쑥 튀어나오는 대답. "왜 그러나." 오늘을 피곤하게 보낸 것은 아무래도 나밖에 없는 모양이야. 졸음도 쫓을 겸 정신 번쩍 나게 나무에 다시 손이나 대 볼까 궁리하고 있는 중인데, 유리카가 일어나더니 뒷짐을 지고 풀밭을 잠시 거닌다. 눈에 익은 어둠이 흐릿한 가운데, 몸을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바라보며 등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곡선이 굉장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하는 동안 많이도 더러워진 검은 치마였지만어둠 속에 있으니 그런 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아, 달이 나와." 정말로 구름 속에서 달빛이 한 줄기 떨어져 그녀의 머리카락에 제일 먼저 내렸다. 나도 고개를 들고, 엘다렌도 어둠 속에서 웅크린 몸을 펴고 머리를 움직였다. "주아니, 그만 내려오게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유리카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그제야 그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들었다. 그런데 잠들어 있잖아. 어느 가지였더라? "주아니! 그만 일어나서 내려와! 달이 나왔어!" "……." 이런, 난 나무에 별로 접근하고 싶지 않단 말이야. 누군들 일부러번갯불을 맞고 싶어하겠어? 비록 작은 거라고는 하지만. "주아니!" 너무 작아서 숨소리조차 안 들리잖아. 어디 있는 거냐? 유리카의 목소리는 똑똑히 들린다. "달이 거의 다 나왔어! 조금 있으면……." 유리카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밤하늘을 흐르던 구름에서 벗어난 하얀 달빛이 물줄기처럼 우리가 있는 쪽까지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평소 보던 달빛보다 몇 배는 밝은 것 같은 느낌이다. 점점 한 발짝씩 다가오는 흰 광채, 마치 일부러 고개를 돌리는 것처럼, 그렇게 풀밭을 거치고 유리카와 내 머리를 넘어 녹나무가 서 있는 곳까지 다가간다. "으윽……." 난 몰라, 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나는 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서다가오던 달빛이 드디어 나무 머리로 내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쏴아아……. 물론 빛이 내리는 소리는 아니다. 바람이 불어와 잎새와 가지를 부드럽게 흔들고 쓰다듬어 내리는 소리였다. 잔가지들과 천 개나 되는잎새들이 차례대로 춤추며 재잘거리기 시작한다. 수백의 어린 잎눈과오래된 굵은 가지가 꼬마 손녀와 할아버지처럼 나란히 그네를 탄다. 다시 한 번, 물결처럼 지나가는 겉바람, 그리고 속바람이 크고 오래가는 떨림을 만들어 대지에 뿌렸다. 손을 내미는 것은 나무, 그리고오래된 어머니처럼 축복을 내리는 달빛. 잎과 풀과 가지와 들꽃을 한꺼번에 감싸고 휘도는 빛과 공기의 강물이 시선 닿는 모든 곳으로 삽시간에 번졌다. "와아……." 눈에서 어둠이 점차로 걷혔다. 세상 모든 것들이 빛을 받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들이 남김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땅바닥에 발 딛고 선 나조차도, 이 모든 자연과 함께 온 몸이 휘말려 나부끼고 날아가는 듯하다. 대지와 하늘이 내뿜는 숨이 살아 있거나 죽은 모든 것들을 새로 피어나도록, 한없이 작은 곳까지파고들어 흔들어 놓았다.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이 모든 것들이 살아 있어. 우우우우웅……. 각기 다른 곳에 서서 똑같이 거대한 녹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들을 하나 같이 휘둥그레지게 할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우웅……. 완전히 드러나 세상을 가득히 비추고 있는 달빛을 흠뻑 받은 나무가 이윽고 그것과 똑같은 푸르스름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줄기와 가지와 잎새와 눈, 작은 것 하나도 남기지 않고 휘황한 푸른빛으로 넘실거린다. 마치 불붙은 것처럼 빛난다. 푸른 광채로 타오르는 거대한 나무는 점차 마치 안개로 다듬은 겹베일을 씌운 듯 생생한 빛으로 반짝거렸다. 바람이 불자, 베일이 너울져 날린다. 그래,로존디아 땅이라고 했던가, 겨울이 되면 저렇게 아름다운 파란빛이밤하늘에서 커튼처럼 빛난다는 곳이 있었어. 저런 빛일까, 저것보다아름다울까. 나무는 빛과 더불어 희한한 음조를 냈다. 마치 그 긴 인생에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어 노래를 부르려는 것처럼, 약간은 어색하면서도 부드럽게 가라앉은 음색. 그건 정말 그 나무에 어울릴 법한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나무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저것 봐, 나무가 갈라지고 있어!" 유리카가 어느 새 내 곁에 와 서 있다. 그녀도 많이 놀란 듯, 또는이 아름다운 광경에 감동을 느낀 듯, 솔직하게 흥분된 목소리로 외치며 몸을 앞으로 약간 굽혔다. 나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내 눈에도 보인다. 나무 줄기 한가운데가, 마치 잘 익은 열매처럼스스로 갈라지고 있다는 것을. 쩍, 쩌억- 쩌억-그리고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짐작하고 있다. 유리카가 내등을 가볍게 떠민다. 나무에게로 가라고. 가서 나무가 주는 선물을받으라고. 나는 손을 놓고, 가슴속에서 목걸이를 꺼내 놓았다. 우우우우웅……. 나무가 또다시 수줍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나무는 아마 많이늙었을 테고, 그 동안 노래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을 거야. 그렇지만 처음 치고 아주 잘 부른다. 그 목소리, 평생에 걸쳐 노래를 부르는 새소리, 물소리, 풀벌레 소리에 비해도 전혀 손색이 없어. 그리고 갈라진 나무 가운데……. "세르네즈의 하늘……." 나를, 나의 아룬드나얀을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 온 푸른 보석이줄기 가운데 훈장처럼 박혀 있었다. 마치 나무의 일부분처럼 번쩍거린다. 진주조개가 진주를 품듯, 나무가 오랫동안 품어 이렇듯 성장시킨 것처럼 그렇게 보석은 나무와 완전히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 나무줄기 안에는 이미 2백년의 세월 동안 만들어져 버린 보석의 자리가섬세하게 매듭져 있었다. 자신의 심장 줄기 속에, 이 단단한 보석을 지금껏 품느라, 많이 아프지 않았을까? "내가… 가져가도… 되겠니…?"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하나만 올립니다. 내일 다시 두 개 올리겠습니다.. killon 님이 보내주신 유리카 그림, 참 예뻤어요. ^^말씀하신 대로 옷 모양은 달랐지만, 정말 미소녀던걸요. 다만... 손가락에 손톱이 없으니 왠지 좀 엽기적인 느낌이.. ^^;;;;;그림 잘 그리시네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8247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1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23 21:46 읽음:61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15) 나는 나무에게 양해를 얻고 싶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다가 본래의 부모를 만난 아이라 하더라도, 그 동안 키워 준 양부모의 허락도없이 멋대로 가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거야. 자기 자식이 아닌데도 자식처럼 보살피고 돌본 것을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어. 보석을 가져가면 빈 자리 때문에, 또다시 아프진 않겠니? 우우우우우웅… 우웅웅……나무는 마치 인자하게 무엇이든 주겠다는, 넓은 치마를 펼쳐 보이는 시골 부인네처럼 그렇게 부드러운 소리를 내었다. 내가 그 줄기가운데 찬란하게 빛나는 하늘의 조각, 부드러운 속줄기를 오랫동안상하게 한 푸른 돌을 향해 손을 뻗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그렇게 온화한 노래를 불렀다. 우웅웅… 우웅웅… "고마워……." 나는 이 보석을 그에게 맡긴 에제키엘 대신 인사를 해야 할 것만같은 생각이 들었다. 맡겼던 자가 직접 와서 인사하고 되찾아가지 못했지만, 2백년의 세월을 넘어 그 일을 다시 완성하라는 책임을 물려받은 부족한 나라도, 나무에게 인사를,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내 두 손은 푸른 보석을 감싸쥐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그리고 보석은, 힘들이지도 않고 저절로 내 손으로 떨어져 왔다. 세르네즈의 하늘… 정말로 여름의 하늘 한 조각이 그 가운데 있어……. 우우우우웅… 웅……. 나무의 목소리가 점차 약해져 간다. 그리고 검은 하늘을 푸르게 적셨던 베일도 점차 걷혀 갔다. "……." 줄기가 닫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줄기는 빈자리를 가슴에 품고 닫힌다. 웅……. 다시 나무가 노래를 부르는 일은 없을까. 그것은 저 나무의 처음이자 마지막 노래였을까. 내 손안에는 차마 눈뜨고 바라보기조차 어려운 광채의 덩어리가 있다. 지금껏 나무 줄기와 잎새, 그 모두를 빛나게 한 보석이 빛났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뚫고, 손조차 파랗게 빛나게 하는 그 푸른 보석을쥔 채 나는 이 장소에 가득했던 사라지는 마력을 지켜보았다. 보통의빛으로 돌아가는 달빛과, 속삭임을 멈추는 잎새들과, 오래된 녹나무의 마지막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의 만남이 만든, 다른 하나의이별, 이 모든 자연에 마법을 주었던 물건은 이제 제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내 손에 놓여 있었다. "가 버렸어……."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내가 보았던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마법은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고요한 밤의 숲만이 남아 있었다. "주아니!" 젠장,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주아니! 어디로 갔니!" 멋진 광경이 나올 때에는 정해 놓고 잠만 자는 녀석이란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최소한 그게 끝난 다음에는 다시 등장해야 하는 것 아냐? "주아니!" 밝아오는 새벽빛을 바라보며 잠시잠깐 들었던 선잠을 깬 나는, 엘다렌과 유리카 모두 주아니를 보지 못했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 벌떡일어났다. 그리고 벌써 반시간 째, 오랜만에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고수풀 속을 뒤지고 별의별 짓을 다 해 가며 이 사라진 도망자를 찾고있는 중이다. 왠지 마음속에 불길한 상상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어제처럼 빛나지는 않는 보석은 내 손에 여전히 있다. 세르네즈의하늘과 주아니의 키는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혹시 보석 대신그 나무 속에?! "으아아악, 말도 안돼!" "왜 그래, 파비안?" 내가 주아니를 찾다 말고 갑자기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자 유리카가놀라 돌아보았다. 불길한 상상을 전파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므로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어 버린 뒤, 다시 한참을 도망자체포에 몰두했다. 그러나 도망자는 정말 국경이라도 넘어 가 버렸는지 다시 반시간을찾았는데도 도무지 눈에 띄지 않았다. "이러다가 아침 되겠다. 일단 보석을 끼워넣은 다음에 시작하는 편이 낫겠어." 정말 보석은 다시 빛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풀밭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유리카와 엘다렌도 다가와 앉았다. "그전처럼 느낌이 와?" 유리카는 엘다렌의 붉은 보석을 끼웠을 때에 대해서 묻는 거였지만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처럼 무슨 굉장한 압력 같은 것은 느껴지지않는다. 대신 처음 나무 줄기를 잡았을 때처럼 뭔가 찌릿찌릿한 감각이 보석을 쥔 손에서 자꾸만 느껴져 신경이 쓰였다. "번갯불이라도 안에 들었나… 봐." 으, 따거. 정말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뜨끔뜨끔하다니까. "저 나무는, 이 바늘덩어리 같은 보석을 품고 있자면 고생 좀 했겠어." 유리카가 우습다는 듯 대꾸했다. "무슨 소리야. 그 보석이 너한테만 반응하는 거 몰라? 저 나무는아무 느낌도 없었을 거란 말이다." "그것 참, 불공평한걸." 아룬드나얀이 흙바닥 위에 놓여졌다. 그리고 뜨끔한 느낌이 올 때마다 코를 씰룩이고 있는 나는 보석 '세르네즈의 하늘'을 두 손을 꼭쥐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 내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되풀이된다. 머릿속은주아니 생각으로 온통 혼란하고, 계속해서 찌르는 듯한 감각은 양손에서 펄쩍펄쩍 뛰어오른다. 마음으로는 조금 더 안정된 뒤에 이 모든일들을 하고 싶었지만, 뭔지 모를 힘과 같은 것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붉은 보석, '모나드의 눈동자' 때와 같은 몸을 뒤흔드는 강력한 힘은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 몸과 귓가를 물결치며 흐르는 것은마치 파도와도 같은 바다, 강과 비의 감각이다. 나는 아직 준비가 덜되었다고 되풀이해서 되뇌었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준비가 되었든 안되었든, 다가와야 할 것은 다가왔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아.. 이번 27일 나우누리 환타지아 정모에서 성검전설(내 이름은요타)을 쓴 홍성호 군 출판 기념회와 싸인회가 있네요. 저도 나가서사인 받을 예정. ^^공지엔 세월의 돌도 같이 싸인 해준다고 되어 있고..^^;참, 나우누리 환타지아에서 <세월의 돌>과 <성검전설>의 공동 구매신청을 받고 있답니다. 제 홈페이지에서도 싸인북 구매 신청을 받았었지만, 그건 우송료가 첨부되는 것이었고 이번엔 그냥 정모에 나오시면 사서 싸인을 받을 수 있는 거래요. 환동 회원이 아니신 분이라도, 잠깐 시간 내어서 와 보시는 것도괜찮을 것 같네요.. (홍성호 군도 환동에서 꽤 오래된 원로 회원이랍니다. 동호회에 속해서 같은 취미 가진 사람들과 친분을 맺는다는 것도 좋은 점이 많지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8248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1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23 21:46 읽음:61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16) "흐읍……." 그 순간, 나는 깊은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킨 후, 딱 멈추었다. 가닥진 광채가 사방으로뻗어난다. 나는 이번엔 전보다는 확실히 내가 해야 할 일을 느끼고,내 의지로 손을 움직였다. 보석을 아룬드나얀의 자리에 넣기 직전,나는 또다시 똑똑히 보았다. 희미하게 수면처럼 흔들리는 보석이 넣어져야 할 빈자리,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이번엔 바다였다. 작은 창 너머, 힘껏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쿠르르릉……. 내 귀에는 그 파도가 움직여 암초 해변에 부딪쳐 가는 소리가 바로곁에 선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하얗게 부서지는 거품의 짠내,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 나는 망연히 내가 막아 버린 그 세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룬드나얀과 보석이 아물려 닫히자, 광채와 소리, 파도의 감각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어딜까. 그 암초 해변은 어디였을까. "파비안……."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유리카가 내 이름을 부른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린 나는, 목걸이를 놓아 버린 채 앉은자리에서 팔을 쭉 펴고 누워 버렸다. 그 순간, 생각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비아안!" 나는 누웠던 그 자세로 다시 튕기듯 벌떡 일어나 버렸다. 그리고두리번거리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주아니!" 이, 이건… 정말 놀랄 만한 일인데? 그렇게 찾아도 없던 주아니가 튀어나온 나무뿌리 위에 앉아 있는것이 보였다. 저긴, 저긴, 내가 아까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살펴본자린데? 그러나 내가 나의 황당함에 대해 토로하기 전에, 마치 아무 데도갔다오지 않은 것처럼 나무 뿌리 위에 단정하게 앉은 주아니가 먼저진지한 표정으로 우리 모두의 입을 막아버리고 남을 이야기를 꺼냈다. "그 엘프, 미칼리스를 봤어." "뭐야?" 유리카와 엘다렌이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그리고 나는 조금 다른내용으로 소리쳤다. "어디서!" 주아니의 대답은 그리고 우리 입을 더욱 더 벌어지게 했다. "나무 속에서." 그래서 우리는 이번엔 입을 모아 외쳤다. "뭐라고?" 이거 정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윽고 우리들은 모두 불쑥 튀어나온 나무 뿌리 위의 주아니를 둘러싸고 앉았다. 우리의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잠자코 고개만 이리저리 저어 보고 있던 주아니는 이윽고 직접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까 말이지, 나무 위에서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푸른빛이 나기 시작했었어."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깜짝 놀라서 나무에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알다시피 그렇게 빨리 내려갈 수 있는 내가 아니잖아? 간신히 줄기가 있는 쪽으로기어 들어갔는데, 다음 순간 나는 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어떤 캄캄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가 있었어." 유리카가 참견했다. "그게 나무 속이었다고?" 주아니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커다랗게 끄덕였다. "그럼. 아니면 어디였겠어?" 우리 셋의 미심쩍은 얼굴을 둘러본 다음에도 여전히 확신 어린 표정을 거두지 않고 있는 주아니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혹시, 나무 뒤로 돌아간 것 아냐? 아니면 껍질 안쪽에……." "아니라니까. 다음 얘기를 들어봐." 주아니의 설명을 따르면 저 나무는 껍질만 있고 속은 텅 비어 있으며(게다가 그건 아까 내가 벌어진 나무 속에서 보석을 꺼낼 때 본 나무 속의 모양새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이었다), 그 속을 따라가다보면 전혀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는 얘기였다. 그 다음은 설명이 뒤죽박죽이었다. 덩굴 식물이 어쩌고, 가시나무가 어쩌고 한꺼번에 뒤섞어서 얘기하더니, 결론은 엘프를 만났다는 거였다. 잠자코 있던 엘다렌이 물었다. "어떻게 하고 있던가." "자고 있던걸." 엘다렌과 유리카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모양이다. 뭔가 집히는거라도? 유리카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내 얼굴을 쳐다보고, 다시 주아니를 보더니 심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다시 한 번의 통과란 말이지." 무슨 소리야, 그게? 내게는 설명도 해주지 않고 일어난 유리카와 엘다렌은 나무 앞에똑바로 섰다. 엘다렌은 주아니를 손바닥에 얹더니 나무 껍질 앞에 그두툼한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나야말로 까닭을 모른 채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다가, 또 어디로 가야 하나 보다 싶어 배낭을 주섬주섬집어 메었다. 오늘은 워낙에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서 말이지. 그러다 보니 꽤 순응적인 사고방식을 얻었단 말야. 이번엔 또 무슨 방식이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준비를……. 어라, 주아니! "……." 주아니는 다시 사라져 버렸다. 이거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인걸. 벌건 대낮에 도대체 나타났다사라졌다라니, 건전한 상식을 가진 나로선……. 유리카가 나무를 향해 한 걸음 발을 떼 놓았다. 그리고 마치 문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그녀도 사라져 버렸다. "유, 유리카!" +=+=+=+=+=+=+=+=+=+=+=+=+=+=+=+=+=+=+=+=+=+=+=+=+=+=+=+=+=+=+=음..여러분, 시간 되시면 27일에 프리타임에서 봅시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8330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1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24 21:57 읽음:16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17)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당황한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나무를 노려보았다. 뭐야 이 나무, 이젠 사람까지 삼키는 거야? 혹시 괴물……. "파비안, 안 갈 테냐." 엘다렌의 조용한 목소리, 그렇다면 엘다렌도……. 엘다렌은 자기 배낭을 집어 메더니 나무에 부딪치려는 것처럼 머리를 들이밀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그는 뭔가로 지워진 것처럼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 나는……."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제 내 말을 들을 사람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건… 날더러 어쩌라고……. 조, 좀 설명이라도 해주고 갔어야 하는 것 아냐! 그렇게 다짜고짜가버리면 나같이 상식적 사고밖에 못하는 사람은……. 아니, 가만있자… 여기서 이렇게 망설이고 있다가 뒤를 못 쫓아가면 어쩌지? 그거야말로 큰일인데! 그런데 그야말로 내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생겼다. "안 들어오고 뭐해?" "으아악!" 내가 비명을 질렀대도 하등 이상할 일이 아니다. 나, 나무 속에서목소리가 들려… 아악! 나무 속에서 손이 하나 불쑥 튀어나왔다. 저 은팔찌는 어디선가 많이 보던……. 더 말하고 있을 사이는 없었다. 그 손에 손을 잡힌 나는 다짜고짜로 나무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캄캄한 어둠, 기묘한 이물감……. 나… 난, 살고싶어어어! 두툼한 등나무 덩굴은 둥글게 감겨 올라가며 마치 크로와상 빵과비슷한 모양을 만들어 내었다. 또는 어긋나게 꼬임을 만들면서 땋은머리처럼 늘어뜨려지거나, 틀어 올린 부인들의 머리카락 모양이 되어있기도 했다. 걸어 들어갈수록 한층 희한한 모양의 덩굴들이 지붕처럼 감기고 늘어졌다. 낮인데도 오히려 주위가 어두워 보일 지경이었다. 낮? 하긴 나무 속이 낮인지 밤인지 맘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 그러나 이제는 여기를 '나무 속'이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어폐가있을 듯했다. 우리는 이미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녹색의 긴 언덕을지나오고, 어찌 된 일인지 이놈의 나무 속에서 열심히 날고 있는 새들과, 신나게 자라고 있는 수십 그루의 나무들을 보았으니 말이다. 더구나 여긴 뭐야, 완전히 동굴에 가까운 덩굴 숲이 아닌가. 나무 속에 이런 게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어. 손을 뻗어 등나무 비슷한 그 덩굴 줄기를 조금 만져 보았다. 정말로 수백 년은 그 자리에서 그렇게 자라 얽힌 것처럼 단단하고, 그 안에 흐르는 수액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까칠한 껍질들이다. 나뭇잎들은생생한 녹색으로 물기를 머금었고, 바닥에 켜켜이 쌓인 썩은 잎들도몇백 년은 손대는 사람 없이 그대로 내려 쌓인 듯한 모양이다. 모조리 진짜임에 틀림없었다는……. "얼른 안 와?" 이 안으로 들어올 때 유리카가 보여 준 잔인한 배려… 로 인해 다행히 일행들을 놓치지는 않은 나는, 덩굴들을 향해 눈썹을 치켜올리고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다음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솔직히, 이곳은 내가 본 그 어느 곳보다 오래된 태곳적의 얽힘이가득한 숲이다. 수백 번 단단하게 맺어지고 얽히고 묶여, 이들은 마치 모두 같은 줄기에서 자라난 것처럼 하나로 뒤엉켜 있었다. 숲 전체가 한 줄기의 커다란 덩굴 같다. 그리고 나와 우리 일행들은 그 덩굴 속으로 들어가고 있고……. 쳇, 이미 나무 속인데 그 안에서 또 자라는 그 나무 속으로 또 들어가다니, 팔자가 사나워도 너무 사나운걸. 하긴, 사람이 죽으면 들어가는 관도 역시 나무로 짜는 것이긴 해. 그래도 무엇 때문에 엘프양반은 이런 곳까지 들어가 앉아, 아니 누워 있느냔 말이야. 나무도살아 있는 것이니만큼, 그 뱃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은 참 끔찍한 데가있단 말이다. 마치 잡아먹힌 것과도 비슷한 꼴이잖아. 게다가 들어오는 과정을 다시 돌이켜 볼 때… 하여간 나란 놈은,무슨 일이든 폼나고 멋지게 해내는 것과는 정말로 거리가 멀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좀 멋지고 의연하게 들어올 수 없었느냐고. 정말로 누가 볼까 무서울 정도로 우스운 꼴이었잖아. "미카… 미카……." 내 앞에서 걸어가는 유리카가 조그맣게 속삭이듯 말하고 있다. 마치 이 덩굴들에게 그의 안부를 묻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렇게 몇 번이고 중얼거린다. 바람에 흔들리는 덩굴손들이 알아듣고 그가 있는곳을 가리켜 주겠다는 것처럼 자꾸만 저 안쪽, 저 안쪽을 손짓한다. 더 깊이 들어가라고, 네 친구는 그 안에 있다고. 썩은 가지와 잎들이 세월 속에서, 그리고 내 발 아래 부서져 가는소리. "다 온 거야?" 길이 막힌 것을 보고 중얼거렸지만, 누군가의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다. 모두는 걸음을 멈췄다. 우리 앞에는 엉겅퀴와 찔레, 키 작은 측백나무, 그리고 계절에 맞지 않는 보랏빛 꽃송이들이 빽빽이 달린 가지들이 단단히 손에 손을잡고 길을 가로막고 있다. 닫힌 문처럼, 자물쇠처럼 잠겨 있다. 가지들은 모두 그 근원을 더듬어 볼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꼬여 갈래 없는 물결을 지었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본 하늘조차 새로 뻗어나기시작하는 연한 가지들로 반쯤은 그 얼굴을 가렸다. 잘 빗지 않아 삐죽삐죽한 머리처럼 튀어나온 가지들이다. 긴 것들은 마치 기사가 겨냥한 긴 창처럼 찌를 듯 앞으로 내밀어져 있다. 우리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좀 떨어져 섰다. 거대한 화관, 나뭇가지와 꽃을 엮어 문에 내거는 장식 같아. 보랏빛 조그마한 꽃들이 포도송이처럼 달린 꽃무더기에선 독하게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향기가 진동했다. "주아니, 여기였니?" 주아니는 아까부터 표정이 좀 이상해져 있었다. 내 어깨 위에 앉은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더니 한참만에 대답을 했다. "내가 왔던 때하고는 많이 다른걸." 내가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돌렸다. 귓가로 조그마한 얼굴과 눈동자가 약간 보인다. 그런데 꽤나 심각해진 얼굴이다. "왜 말 안 했니? 언제부터 달랐는데?" 주아니는 다시 한참 침묵을 지키더니, 불쑥 황당한 말을 내뱉었다. "처음부터." "아니, 왜 그런데……." 이번엔 대답이 빨랐다. "처음부터 아예 달랐으니 뭐라고 하겠어. 다시 되돌아가자고 할 수도 없고. 난 어둠 속을 빠져나오자마자 덩굴과 가시나무로 뒤덮인 어떤 빈터였단 말이야. 그리고 거기에 그 엘프가 있었고. 어쨌든 난 좀가다 보면 내가 갔던 데가 금방 발견될 줄 알았지. 그런데……." +=+=+=+=+=+=+=+=+=+=+=+=+=+=+=+=+=+=+=+=+=+=+=+=+=+=+=+=+=+=+=3권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번엔 지도 바탕 색깔이 좀 연해서 1권이나 2권에는 잘 안 보이는 한 가지가 눈에 띄실 겁니다. 네....국경선입니다. T_T꽤 주의해서 만들었던 건데, 1, 2권에는 너무 지도 바탕색이 진해서 잘 보이지 않았어요. 하얀 점선으로 된 것이 국경입니다. 그리고 4권은...아마 오늘쯤, 나왔을 거예요. 내일 쯤엔 서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엊그제 어머니께서 동네 서점에 갔다가 <세월의 돌>을 발견하시고는 기분이 좋아져서 돌아오셨어요. 저희 집같은 변두리 동네...에도들어오긴 하는군요..^^;; (기뻐라..)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8331번제 목:◁세월의돌▷10-1.나무와바람과달빛…(1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1/24 21:57 읽음:17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 (18) "……." 유리카가 입을 다물고 있다가 우리 앞을 막아선 덩굴들을 바라보고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이 안에 뭔가 있을 거라고… 그럼 주아니가 나무 속을 통해 들어와처음 보았었다는 곳은 혹시 이 안? 이윽고, 유리카의 입에서 단정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미카가 이 안에 있어." 엘다렌은 좀 불만스런 얼굴이다. 그는 한참만에 의견을 말했다. "푸른 보석을 찾아 넣었으니, 아마 지금쯤은 2백년의 잠에서 깨어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여전히 이 안에 잠자코 있을수가 있는가." "혹시 알아? 일어났지만 그냥 그러고 누워 있는 건지." "말이 되는가. 미카가 어떤 놈인지 모르나." 엘다렌은 그의 키로는 거의 다섯 배나 되는 그 뒤엉킨 덩굴과 가시나무의 덤불을 바라보고 있더니, 등뒤에서 도끼를 꺼내 잡았다. 이걸모조리 베고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내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엘다렌은 오히려 나를 이상하다는 듯 한 차례 흘끔 쳐다보았다. 그래도 나는 미심쩍은 어조로 물었다. "이 안에… 정말 공터가 있을까요?" 엘다렌의 대답은 간단했다. "들어가 보면, 알겠지." 그 말은 못 들어가면, 모른다는 말도 되는 거라고. 엘다렌은 배낭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도끼를 쳐들더니 다시 나를돌아보며 한 마디 했다. "돕지 않을 건가." "아, 아니요……." 에라, 다른 뾰족한 수도 생각나는 것이 없잖냐. 나 역시 배낭을 내려놓고 검을 잡아 뽑았다. 그리고 엘다렌이 왼쪽에 서자, 나는 오른쪽으로 다가가 서려고 했다. 으음? 얼굴을 찌를 듯 내밀어져 있던 덩굴 가지들이 약간 움직이는 것도같다. 지금 내가 착각을 하는 건가? 버스럭, 버스럭, 버석. 낙엽을 누군가 밟는 것 같은 소리, 이윽고 잎새들이 서로 부딪는소리가 나더니 정말로 내 앞으로 비죽 튀어나와 있던 가지 하나가 스르르 움직여 들려졌다. 나는 기겁하여 뒤로 후닥닥 물러났다. "에, 에, 엘다렌! 나무가, 나무가 움직여요!" 나는 당황해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서려고 했으나, 다음 순간 놀라운광경을 보고 그 자리에서 굳어져 버렸다. 세상에……. "……." 나무가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라… 열리고 있었다. 어디로 닿아 있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던 덩굴 가지들이, 마치 엉킨머리를 푸는 것처럼 서로서로의 손을 놓고 팔을 펼쳤다. 꽃무더기가허공으로 치솟고, 측백나무는 몸을 뒤튼다. 풀려지지 않는 굵은 가지들은 터널의 입구처럼 허공에서 둥글게 몸을 말았다. 거대한 덤불의중심으로 점차 뚫린 길이 생겨나고 있다. 빽빽한 가지들이 모두 비켜나 맺힌 자물쇠들을 풀고, 열린 문을 만들고 있다. 가로막고 있던 모든 것들이 마법처럼 감겨 올라가고, 감추어진 집을 방문객들에게 내놓고 있다. 이 모든 모습들은, 마치 연극을 위해 커다란 휘장이 걷혀 올라가는모양과도 비슷했다. 그만큼 굉장했고, 그만큼 아름다웠다. 유리카의 눈에 눈물이 글썽해져 있었다. 그녀는 마치 듣는 사람이있는 것처럼 허공을 향해 말했다. "멋진 광경이야… 에즈, 이 모든 걸 준비해 놓고는 2백년 후에 우리가 보고 신기해할 걸 생각하며 얼마나 많이 즐거워했을까……. 무척 재미있지 않았어……?" 이 모든 것은, 2백년이 지난 오늘에까지도 이어지는 대마법사의 마법… 모든 것을 짐작하고 이렇듯 길을 안배해 놓은 그는 이제 없는데, 나는 그의 자리를 과연 대신할 수 있을까……? "들어가자." 엘다렌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한 마디 하고는 제일 먼저 뚫린 터널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이로서 우리는 오늘 세 번째, 새로운 땅으로 발을 디뎠다. 길은 길지 않았다. "저길 봐……!" 그것은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었다. 덩굴과 가시나무의 숲 안에는 봄빛 연한 땅이 보드라운 풀을 머금고 펼쳐져 있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리는 것만 같다. 흰날개, 노란 날개를 가진 나비들이 공기 중에 떠다니듯 나풀거렸고,아직 피어나지 않은 조그마한 꽃망울들을 숙인 작은 은방울꽃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하늘은 뚫려 있다. 빽빽한 나뭇가지들로 둥글게난 창문처럼 그렇게 말간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따사로운햇빛이 한없이 쏟아졌다. 그리고 우리의 눈이 닿는 곳 한가운데,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는한 사람, 아니 엘프가 있었다. "……." 예상하지 못했던 금빛 머리카락……. 찬란한 곱슬머리가 흘러내려 옆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덮고 있다. 등허리에 닿을 정도로 길다. 햇빛 탓인지, 마치 황금을 깎아 만든 조각처럼 놀라운 광채에는 후광마저 어려 있었다. 그 빛 때문에 얼굴을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다. 유리카와 엘다렌 모두 봉인에서 깨어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정말로 저렇듯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이상스러울 정도로 그의 모습은 너무도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마치 사냥을 하다가 잠시 피곤해서 풀밭에 누운 것으로밖에 보이지않아. 그 누가, 저 평온한 모습에서 2백년의 잠을 연상할 수 있을까. 가벼운 낮잠, 백일몽에 가까운 짧은 꿈을 꾸는 겨우 몇 시간의 달콤한 잠을 자는 것처럼, 가벼운 숨소리와 비스듬히 늘어뜨린 팔. 풀 속에 묻힌 흠집 없는 부츠. 그는 키가 몹시 컸다……. "미카!" 유리카가 소리를 지른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녀가 조금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리카는 오른손을들어 입을 가렸다. 그리고 몇 걸음, 그가 누운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심정이 나와 비슷했다는 사실을 곧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너무도 그 때와 똑같은, 그런 모습일 수 있는 거야……. 아, 아무 걱정도 없는, 마치 단하루의 잠을 자고 깨어나려는 것처럼……." 말을 할수록 울음이 더 나는지, 그녀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다시 걸음을 떼어 미카의 옆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미칼리스 마르나치야… 당신이 살아온 인생보다도 더 짧은 잠이었을 뿐이야……. 겨우 2백년…… 엘프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잖아……." 그의 곁에는 커다란 활로 보이는 물건, 그리고 큼직한 가죽 화살통이 놓여 있었다. 세르네즈의 푸른 활, 그것이 당신의 별명이랬지. 엘다렌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아무 동작도, 심지어 숨조차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편안히 누운 채 아직도 깨어나지 않고 있는 그의 친구처럼… 그조차 갑작스레 돌이 되는 긴 잠에 빠진 듯, 그는 동상처럼 그렇게 굳어져 있다. 한 순간, 주위에 움직이고 있는 것은 여전히 나풀나풀 날고있는 나비 몇 마리뿐인 듯했다. 나도 동작을 멈추었고, 유리카 역시무릎을 꿇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자리. 그리고… 긴 세월을 넘어온 첫 목소리가 내 귀를 채웠다. "유리, 약속 지켜서 와 주었구나." +=+=+=+=+=+=+=+=+=+=+=+=+=+=+=+=+=+=+=+=+=+=+=+=+=+=+=+=+=+=+=1권은 빼고, 2권부터 그 뒤로 책 안에서 버그 찾으신 분은 꼭 연락주세요. ^^1권은 제가 직접 버그를 체크할 시간이 있었는데, 2권부터는 거의시간을 못 냈어요. 나중에 시간 내서 한꺼번에 살펴볼 생각이지만 혹시라도 오타나 버그가 보이면 연락 주시라고요.. ^^그렇게 버그 찾아 주시면 2쇄부터는 고쳐서 내 준대요.... (물론... 2쇄를 찍을 수 있을 것인가는 전혀 알 수 없는 문제지만..;;; 참고로 1쇄가 다 팔려야 2쇄를 찍는 거랍니다..)저한테 아이디나 소설의 캐릭터 이름, 심지어 머그 게임 속의 캐릭터 이름까지 지어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그건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제가 제 소설 안에서 이름들을 지을 땐, 제가 창조한대상들이니만큼 사물이나 인물의 특징에 대한 확실한 생각을 가지고있지요. 그런데 그렇게 지어달라시는 이름들은... 솔직히 제 마음에드는 이름이 여러분 마음에도 들라는 보장은 전혀! 없거니와, 사전정보가 전혀 없는지라 잘 짓기는 아주 힘든 일이랍니다. 굳이 억지로짓는대봤자 여러분 마음에 안 들 것이 뻔하지요. ^^;;Luthien, La Noir. +=+=+=+=+=+=+=+=+=+=+=+=+=+=+=+=+=+=+=+=+=+=+=+=+=+=+=+=+=+=+=1권은 빼고, 2권부터 그 뒤로 책 안에서 버그 찾으신 분은 꼭 연락 주세요. ^^ 1권은제가 직접 버그를 체크할 시간이 있었는데, 2권부터는 거의 시간을 못 냈어요. 나중에 시간 내서 한꺼번에 살펴볼 생각이지만 혹 시라도 오타나 버그가 보이면 연락 주시라고요.. ^^그렇게 버그 찾아 주시면 2쇄부터는 고쳐서 내 준대요.... (물론... 2쇄를 찍을 수 있을 것인가는 전혀 알 수 없는 문제지 만..;;; 참고로 1쇄가 다팔려야 2쇄를 찍는 거랍니다..)저한테 아이디나 소설의 캐릭터 이름, 심지어 머그 게임 속의 캐릭 터 이름까지 지어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그건 참 어려 운 문제입니다. 제가 제 소설 안에서 이름들을 지을 땐, 제가 창조한 대상들이니만큼 사물이나 인물의 특징에 대한 확실한 생각을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그렇게 지어달라시는 이름들은... 솔직히 제 마음에 드는 이름이여러분 마음에도 들라는 보장은 전혀! 없거니와,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지라 잘 짓기는아주 힘든 일이랍니다. 굳이 억지로 짓는대봤자 여러분 마음에 안 들 것이 뻔하지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4896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1-26 00:55제 목 : ◁세월의돌▷ 10장 2편 시작입니다. 네에... 어제로 글쎄, 10-1편이 끝났지 뭐예요;(까먹고 있었다..;)바보같은 에피소드 하나. 오늘 생각없이 한글로 써 놓은 글을 텍스 트로 저장하면서 파일명을 SD10-1-19라고 딱 써버렸습니다...(SD는 stone of days의 이니셜. 저는 세월의돌을 그런 이름으로 저장해 놓 는답니다. ^^) 그런 다음에 습관처럼 파일 머리로 가서 확인해보니XXXXXXX (1).. 아니, 웬 (1)? 그래서 기분 좋게 (19)로 바꿔버리면서 내가 이런 실수도 했던가... 생각하고 있는데.. 두 번째 올릴 파일을 보니 어라? 이건 웬 (2)? (20)을 잘못 썼나? 그리고 잠시 후, 저는 10-1이 어제로 끝나고 10-2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보가 아닐까.. 자기 글 편이 바뀐 것도 모르고 있다니..) 있지도 않은 10장 1편 19화를 만들어 낼 뻔 했지요. 네에... 그래서 10장 2편, '세르네즈의 푸른 활' 시작입니다...; (우여곡절이군..;)Luthien, La Noir. 번 호 : 24897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1-26 00:55제 목 : ◁세월의돌▷10-2.세르네즈의 푸른 활(1)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2. 세르네즈의 푸른 활 (1) "이름이 뭐지?" "비크." "흐음, 마치 남자아이 같은 이름이구나……." 그는 풀숲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 나뭇잎투성이 꼬마 엘프의 얼굴을 들여다보고,그 머리에 떨어진 낙엽 몇 개를 쓸어 떨어내 주 었다. 비크라는 꼬마는 그의 손길이 머리카락에 닿자 깜짝 놀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바람에 뺨과 턱에 붙어 있던 풀잎들도몇 가 닥인가 바닥으로 날아 떨어졌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는 여전히 마른 풀더미처럼 머리 위에 둥실 뜬 채 올라앉아 있었다. 문득, 어디선가 길게 끄는 듯한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몇 번 인가 더 이어지면서,그것은 알아들을 만한 어떤 목소리로 변했다. 그건 멀리서 아련히 들려 오는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였다. "이비… 이비… 어디 있니……." 그는 꼬마 소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앉으며 말했다. "저건 너를 부르는 소리? 네 이름은 이비였니?" "아냐. 틀렸어. 나는 비크야." "그건 사내애 이름이라니까." "상관없어. 나는 아버지를 따라서 커다란 활을 가진 숲의 보호자가 될 테니까." 그는 웃어버리는 대신 진지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거 좋구나. 그렇지만 이제 가보렴. 어머니가 찾잖아." "가기 전에, 네 이름을 말해 줘야지." 그는 잠시 눈을 껌벅거리며 꼬마를 내려다보았다. 그 역시도 아직 성년이 된 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지라, 어쩌면 이 꼬마와도 그렇 게 많은 나이 차이가 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는 그들 종족의 자랑 인 금발을 목 뒤로 넘기고 어깨를 한 차례 으쓱한 다음 대꾸했다. "내 친구들은 나를 '드노미린크', 즉 '푸른 활'이라고 부르지." - 기억reminiscence VII 미칼리스, 미칼리스 마르나치야. 하얀 부리 엘프족의 수장. 그의 곁에는 활과 화살통 외에 한 가지 물건이 더 있었는데 그것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커다랗고 흰 뿔피리였다. 그건 그 이름 그 대로 정말 새의 비죽한 부리처럼 생겼다. 그리고, 거대한 신인(神人)은 드디어 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그런데 그가 한 두 번째 말은 바로 이랬다. "엘다! 이 난쟁이 영감, 어찌 2백년 동안 하나도 늙지 않고 그대론 가 그래?" 그가눈을 떴을 때, 나는 거기에서 정말 우리가 찾았던 보석보다 더욱 푸르고 선명한 눈동자를 발견했다.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새파 랗게 맑은 눈동자, 나는 인간 중에서 아직까지저런 눈을 본 일이 없 다. 한 점 흐림조차 없는 바닷빛, 사파이어빛, 마치 투명한 글라스에담긴 독약과도 같은 빛깔. "7백살은 넘은 주제에, 누구더러 영감이라는 거야!" 엘다렌은 의외로 미칼리스의 농담에 심각한 반응을 보였다. 그게 정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둘의 평소 대화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 아차리게 된 것은 정말 그러고도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뭐야, 이 엘프난쟁이 영감아! 핫하, 이 이름을 오랜만에 불러보니 2백년 묵은 체증이다 내려가는구나!" "거, 2백년 동안 체증이 안 내려가고 지금껏 묵혔다면 고생 좀 했 겠는걸!" 이윽고활을 집어들며 우뚝 선 그를 올려다보며, 나는 내가 지금까 지 믿어 왔던 엘프에 대한 상식들을 전면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그의 키, 내가 지금껏 본 중 그보다 키가 큰 사람은 단 하나, 죽은 볼제크 마이프허밖에는 없었다. 아버지와 나란히 놓고 본대도 비슷할 정도의 놀라운 장신이다. 게다가 그의 손에 들리고 보니 그야말로 멧돼지쯤은 한 화살에 잡 고도 남을 것 같은억세고 거대한 콤포짓 보우. 보통 사람은 감히 활 줄을 걸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물건이 었다. 화살들은 아예 한 개한 개를 창으로 써도 될 것 같다. 그만큼 강력하고 날카로운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다. "유리, 넌 어떻게 늙기는커녕 더욱 예뻐졌구나? 에즈가 너한텐 봉 인의 마법 대신 천상의 미약을 주기라도 한 건가?" 쾌활한 엘프는 화살통을 어깨 뒤로 돌려 메고, 마치 잠시의 낮잠에 서 깨어난 것처럼 하품을 하고 긴 팔을 들어 기지개를 켰다. 그가 일 어서면서 그 머리가 태양에 더욱 가까워지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 락은 순금으로 된 잎새들처럼 한층 찬란하게 빛났다. 마치 산맥의 꼭 대기가 해를 그 안에 품고서 아련히 빛나듯, 드높은 머리 위에는 황 금 구름이 어린듯했다. 산맥의 비유는 다른 의미에서도 그에게 잘 들어맞았다. 수백 년을 단련되었을 근육들이 마치 스조렌의 산줄기들처럼 온 몸에서 넘칠 듯 흘러내렸다. 거대한 기둥처럼 대지를딛고 선 다리와 하늘을 받치고 도 남을 듯한 억센 팔은, 연약한 우아함에서는 느낄 수 없을 특수한 의미의 아름다움이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모든 것들은 완벽한 조화다. 일부러 그려 넣은 그림처럼, 그 자신의 숲과 신기로운 조화를이룬 그의 모습은 확실히 뭐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단 하나는 맞았다. 이 놀라운 엘프가 지닌 것은 기대한 바와 같이 내가 지금껏 본 일이 없는 아름다움, 그야말로 천상의 아름다움이다. 파괴가 아닌 조화와, 그것을 위한 강력한 힘이 온 몸에 깃든 그는 진 심으로 신비로울 만큼 특별해 보였다. 그러나, 그가 나를 향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을 때, 나는 그야말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네는, 닮았군?" 이번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커다랗게 외쳤다. "누구와 말입니까?" 그 엘프, 미칼리스는 약간 의아하다는 듯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나를 구석구석 살펴보았고, 그런 다음 마치 당연한 것을 모른다는 것처럼 대답했다. 그는 무슨 질문에도 잘 대답하지 않는 엘다렌은 아니었다. "누구라니, 에제키엘 나르시냐크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뭐… 라고요?" 나는 마치 그 순간 번개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자리에 우뚝 멈춰 서 버렸다. 에제키엘… 에제키엘 나르시냐크?! 에제키엘이 나르시냐크? 대마법사 에제키엘이, 나와 같은 핏줄이라고? "……." 내 머릿속이 갑작스런 충격으로 쿵쾅쿵쾅 울리고 있는 동안에도 미 칼리스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보며 몇 마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럼, 그 동안 몰랐단 말이야? 아무도 안 가르쳐 주었나? 아니, 자네에게는 아버지도없단 말인가? 그것 참." 머릿속에서 수많은 사실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뒤섞이며 이해되 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들었던 닮았다는 이야기의 의미, 왜 내가 아 룬드나얀의 주인이 될 수 있었나 하는 것,단순히 목걸이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인도를 받았던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나에게 반응했던 아룬드나얀의 모든 힘들, 왜 나는 대마법사의 동료였던 유리카와 엘 다렌, 미칼리스와 다시 동료가 될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것들……. 그래, 어쩌면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었어. …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 "왜… 지금까지 말해 주지 않았었죠?" 나는 일단 엘다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검은 돌처럼 침묵 을 지키고 있는 엘다렌 대신 유리카가 대꾸했다. "일부러 숨기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야. 우리가 오히려 놀란 것 은, 네가 그 사실을 네아버지에게서 듣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 어." 유리카는 내 쪽으로 몇 걸음 걸어왔다. 그리고 약간 고개를 기울이 며 말을 이었다. "목걸이가 너희 집안 대대로 전해진 것은, 나르시냐크 집안의 물건 이니만큼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왜 그 목걸이를 물려받은 너에게, 에제키엘과의 혈연을 말해 주지 않았는지모르겠단 말이야. 너야 18 년 동안 네 성조차 모르고 집안에서 떨어져 자랐으니 그때까진몰랐 던 것이 당연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로 뚝 끊겼다. "엘프 사냥은 끝난 거야?" +=+=+=+=+=+=+=+=+=+=+=+=+=+=+=+=+=+=+=+=+=+=+=+=+=+=+=+=+=+=+= 번 호 : 24898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1-26 00:56제 목 : ◁세월의돌▷10-2.세르네즈의 푸른 활(2)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2. 세르네즈의 푸른 활 (2) "사냥……?" 미칼리스의 목소리가 그렇게 웃기게 들린 일은 이전에도, 이후로도 없을 듯했다. 그는정말로 사냥감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약간 은 어이없는 듯도 하고, 또는 불행한 듯도 한 그런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마치 고대 이스나미르 인처럼 장대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한 금발의 엘프를 사냥하려고한 것이 내 손바닥보다 조그마한 로아에라고 할 엄두가 차마 나지 않아 나는 목소리의주인공을 소개하지도 못하고 바보처럼 실실 웃었다. 유리카가 웃음을 참으며 나서더니 말했다. "미칼리스, 우리 새로운 동료를 하나 소개할게." 주아니와 미칼리스의 첫 만남은 매우 어색하게 진행되었다. 주아니 는 첫 마디 이래로오래간만에 과거의 전통을 살려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미칼리스는 또한 그대로 로아에는 처음 본다며 눈을 커다랗 게 떴다. "이것 참, 놀랄 만한 동료를 두었는데?" 잠시 후 미칼리스는 계면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말에서 그가 조그맣다고 해서 전혀 주아니를 무시하고 있지 않다 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숲의 종족이었고, 자연에 가까운 종족들을 빠짐없이 알고 있으며 만나보기도 했지만, 숨기 좋아하는 이로아에 들만은 도저히 만나볼 기회가 없었노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이런 저런 이야기들로 지연되었던 인사가 오갔다. "미칼리스 마르나치야, 하얀 부리 엘프족의 수장이지. 뭐, 그 하얀 부리 엘프가 지금 몇명이나 남아 있는지는 이스나에들만이 알겠지 만." 자기 종족의 몰락에 대한 이야기인데도 스스럼없이 말하는 그의 말 투에 나도 조금씩 반해서, 내 쪽에서도 비슷하게 대답하게 되어버렸 다. "전 파비안 크리스차넨, 하비야나크의 큰사슴 잡화 점원이죠. 뭐, 그 큰사슴 잡화가 지금 뭘하고 있는지는 직접 태워버린 저만이 알겠 죠." "허어, 그건 안타까운 소식인걸. 이 세상에서 잡화점이 하나 없어 진다는 건 세상이 퇴보하고 있다는 증거인 거야." "엘프가 없어진다는 사실도 마찬가지고요." 대마법사의 후예가 기껏 잡화점 점원이라는 사실에도 그는 마찬가 지로 개의치 않았고,머리카락을 넘기며 심각한 일을 말하듯 대꾸했 다. "그렇지? 세상이 멸망하려나봐." 이야기는 이상한 쪽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세상을 구하려고 이렇게 깨어나신 거잖아요." 미칼리스는 내 대꾸에고개를 젖히며 시원스럽게 웃었다.조금 큰 편인 입에서 하얗게 빛나는 치아가 아홉 개,고르게 드러났다. "무슨 소리야. 세상은 자네가 구해야지. 에제키엘이 그렇게 말했 어. 그러니까 당연히그렇게 되어야지. 난 2백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 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고." 농담인지진담인지, 원. 미칼리스는 엘다렌, 그리고 유리카와 차례로 재회의 악수를 나눴 고, 대꾸는 없었지만주아니에게도 이렇게 만나게 되어 대단히 반갑 다는 둥 중얼대며 인사를 했다. 나는 스노이안을 보았던 탓에 그처럼 가늘고 길며, 갈색의 나무와 같은 엘프만을 연상해 왔는데, 미칼리스 는 그와는 달랐다. 하얀 부리 엘프라고 했던가, 그는 종족의 이름 그 대로 창공을 나는 커다란 매, 또는 독수리와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 었다. 스노이안은 그루터기 엘프의 피를 받은 하프 엘프, 그리고 미칼리 스는 하얀 부리 엘프. 똑같은 엘프인데도 정말로 많이 다르다. 엘프 세 종족은 숲 속의 세 가지 동식물을 대표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정말 이었던 걸까? 아 맞다, 이베카는 그루터기 엘프라고 했지? "아……." 나는 하마터면 이베카의 이름을 입밖에 낼뻔하고는 황급히 말을 멈 추었다. 미칼리스의의아한 얼굴이 내 쪽으로 돌려졌다. "뭐라고?" "아, 아뇨. 그저……." 내가 대강 변명을 하려고 궁색하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미 칼리스는 이미 방금의 대화에서 관심을 거두고 뭔가 다른 일에 신경 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떤 낯선 기색을 감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잠깐동안 고개를 움직이지 않고 있던 그는 곧 생각에 잠긴 얼굴을 풀 면서 말했다. "흐음, 엘다. 그러니까 자네, 내 물건 가지고 온 건가?" "말이라고 하는가." 엘다렌은 배낭을 열고 몇 가지 물건을 꺼내 놓더니, 가장 안쪽에서 흰 천으로 단단히싸인 물건을 하나 내놓았다. 그걸 보니 내 머릿속 에 재빨리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저건,파하잔의! 미칼리스는 흰 천에 싸인 그것을 받아들고 천을 벗겼다. 이윽고 천 이 떨어지고, 그 안의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 내가 기억하는 대로다. 미칼리스의 손에 들린 것은 파하잔의 화덕 에서 가지고 나온 바로 그 물건, 셋으로 분리되도록 만들어진 거대한 할버드였다. 미칼리스는 싱긋 웃더니 익숙한 솜씨로 할버드를 하나로 맞춰 끼웠 다. 놀랍도록 재빠른손놀림, 그 손에 닿아 움직이는 이음새 하나 하 나가 마치 옛 주인을 만나 반갑다는 듯 경쾌한 마찰음을 냈다. 번쩍 이는 도끼날이 햇빛을 받아 저 하늘 꼭대기에서 빛나고 있다. 그, 그래 좋다고… 그럴 수도 있다 쳐. 아무리 그렇긴 하지만, 엘 프에게 할버드라니……. "좋아……." 그러나 그를 위한, 그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할버드를 세워 구석구 석 살펴보는 미칼리스는 정말로 그 무기에어울리는 주인이었다. 그 리고 우리가 전에 파하잔에서도 보았듯 티끌만한 흠집조차 없는, 강 력한 파괴력만이 그 안에 살아 숨쉬는 무기. 그리고 미칼리스의손안 에서 그것은 익숙한 곡선을 그리며 숨을 쉬었다. "그럼, 시작해 볼 땐가?" 뭘? 미칼리스는 그 커다란 할버드를 아주 손쉽게 잡아 돌리더니 순식간 에 자세를 바꾸어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공격 태세를 취했다. 저런 식이라면 아예 곤봉처럼 한 손으로 들고 휙휙 돌리는 것도 가능 하겠다. 도대체 엘프가 무슨 힘이 저렇게 무식하게 센 거야?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도대체 뭘 시작한다는 거야? 뭐가 나타나나? 내가 입을 열어 뭔가 한 마디 물으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구르르르르……. 어디인지 잘 모를 곳에서 들려온, 기괴한 울음 소리 비슷한 것과 동시에 발딛고 선바닥이 약간 진동했다. 뭐야, 엄청나게 큰 것이 땅 을 밟기라도 한……. 그게 아니었어! 쿠구구구구……. 할버드를 단단히 비껴 든 긴장된 자세, 그리고 진지한 눈빛과는 딴 판으로, 미칼리스의입에서 나온 말은 마치 장난이 아닐까 싶을 정도 로 가볍고도 단순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일전에 <일간 스포츠>에 났던 제 인터뷰 기사가 스캔되어 나우누리환타지아 동호회에 업로드되어 있습니다. go fan 의 자료실에 가셔서 살펴보세요. 환동에서 알고 지내는 친구인 elenoa 님이 스캔해서 올려 주셨답니다. ^^ 27일에 있는나우누리 환타지아 정기 모임에 책 가져오시면 사인해 드린답니다.. ^^;; 어떤 분이 물어보셔서.. 물론, 회원 아니래도 올 수 있고요. (참고로, 그날은 <성검전설(내 이름은 요타)>작가님 출 판 기념회니까 홍성호 님 사인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아는 동생의 출판이라열심히 홍보, 홍보. ^^;)Luthien, La Noir. 번 호 : 24926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1-27 01:46제 목 : ◁세월의돌▷10-2.세르네즈의 푸른 활(3)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2. 세르네즈의 푸른 활 (3) "2백년 만의 아침 체조야." 지금은 오후라고요……. 내가 허공을 살피다가 간신히 상황을 깨닫고 시선을 땅으로 돌렸을 때, 한 발 앞으로내딛은 미칼리스는 이미 높이 쳐든 할버드를 힘껏 바닥에 내리찍고 있었다. 반쯤 부서지기 시작한 흙더미들이 정을 맞 은 돌조각들처럼 사방으로 날카롭게 부서져 날았다. 그 번쩍이는 도 끼날이 흙을 뚫고 들어가는 순간, 사방을 울리는 괴성이 그 속에서 튀어 올랐다. 그아아아아아! 게다가 동시에 놀란 나도 만만찮은 비명을 올렸다. "으아아아아아!" 미칼리스의 도끼날이 뚫고 들어간 땅바닥에서 녹색 액체가 터져나 와 섬뜩한 강을 이뤘다. 땅이 피를 흘리는 모습… 저도 모르게 몇 걸 음 뒤로 물러났다. 뭔가가 나오려 하고 있었다. 뭐지? 그게 뭐야? "초록색 수프라, 그거 맛없겠는걸." 미칼리스는 쉽게도 말하더니, 순식간에 몸을 솟구쳐 녹색 강을 건 너뛰어서는 반대쪽대지에 착지했다. 그 얼굴엔 가벼운 미소까지 떠 올라 있었다. 마치 이 상황을 정말로 즐거워하는 듯한 그 표정에, 나 는 까닭없이 기가 질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땅바닥을 가르는 거대한 균열과 더불어 큼직한 흙빛 머리가 솟구쳐일어났다. 머리, 머리가 솟구쳤다는 말이 정말로 맞다. 가로 8큐빗, 세로 5큐빗의 넓적한 입술처럼 생긴 기묘한 생물 체가 그 안에서 튀어나왔다. 그르르르르르……. 그리고 녹색 피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괴물은 우리가 있는 쪽으로 펄쩍 뛰어 달려들었다. "아아앗!" 유리카가 비명을 지른 것은 내가 그녀를 힘껏 잡아당겼던 탓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거의 넘어질 듯 뒤로 물러난 뒤 소리높여 외쳤다. "미카가 알아서 할 거야! 내버려 둬!" 나는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저 괴물을 봐라. 거대한 입술이라는 내 첫 번째 표현은어찌 그리도 잘 맞는지, 머리의 대부분을 차지하 는 것은 가로로 길게 찢어진 거대한 입이다. 그걸로 웬만한 사람 정 도는 한 입에 삼킬 수도 있을 정도로, 그리고 그 안에는 괴수의날카 롭고 탁한 빛깔의 이가 불규칙한 배열을 이루며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빨 한 개가 내 주먹만한, 그리고 뭔지 모를 지저분한 물질로 온통 너덜너덜한 그 입과이빨은 보는 순간 혐오감으로 온 몸을 굳어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박힌 거대한 녹색의 외눈! "좋은 운동을 하게 되면!" 마치 노래를 읊조리듯 하는 미칼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 였다. 그는 그 장대한 몸집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허공으로 도약했다. 인간으로서는 있을수 없는 몸놀림이다. 도저히 눈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는 아주 능숙하게 할버드를 쳐들었고, 뛰어오른 그의 발은 괴물 의 어깨에 가 닿았다. 착지, 그리고 내리침! "관절과 근육이 노래를 부르지!" 캬오와아아아악! 저, 저건… 관절과 근육의 노랫소리로는 좀……. 괴물의 정수리에 정통으로 할버드가 찍혀들어가자 녹색 피가 분수 처럼 솟구쳤다. 괴물은 동시에 미친 듯 몸부림쳐 그를 바닥으로 내던 졌다. 물론 그는 볼품없이 나가떨어지지는않았다. "이거, 입이 크다고 비명만 질러 될 일이 아니잖아?" 그는 한 발로 바닥을 디디며한 바퀴 몸을 돌리더니 이번엔 그대로 빙글 돌린 할버드의 날을 괴물의 배에 명중시켰다. 모든 동작은 마치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그러나 놀랄 만큼 힘이 넘치는 조화를 이뤘 다. 크캬캬캬캬캬! 괴물은 정수리와 배를 정통으로 공격당해 상처에서 피를 질질 흘리 는 가운데에도 양팔을 높이 쳐들더니, 믿을 수 없이 재빠른 동작으로 힘껏 팔을 휘저었다. 그 손에는 손 대신, 길고 날카로운 창날 같은 손톱들이 세 개씩 달려 있었다. 촤자자아악! 찢어진 입술 괴물… 이라고 내가 오랜만의 작명 실력을 발휘해 이 름 붙인 괴물이 한번 내저은 억센 손짓에, 잘 자란 나무 두 그루가 형편없이 몇 조각으로 갈라져 날아갔다. 흙바닥에 그어진 길게 패인 손톱 자국을 보니 사람의 몸 쯤은 종잇장보다 가볍게 찢어발길 듯하 다. 정말… 엄청난 힘과, 엄청난 예리함이 간직된 강력한 공격에 나 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미칼리스는 여전히 가볍게 뛰어 날이 선 손톱 공격을 피했다. 엘프는 겉모습이야 어찌 되었든 원하기 만 한다면 얼마든지 가뿐하게 뛰어오르고 몸을 솟구칠수 있는 것인 가? 그렇더라도, 너무나 위험하잖아! 그러나 유리카는 여전히, 그리고 이번엔 좀더 느긋해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참견하지 마. 나름대로 놀고 있는 거라고." 놀고 있어? 그 몸집에도 불구하고 괴물에 비하면 턱없이 작아보이는 미칼리스 는 이번엔 괴물의 팔을 노렸다. 그리고 정확한 겨냥으로, 두 번째 내 리쳐지는 그 억센 손목 하나를 여지없이 잘라서 내던졌다. 캬르륵! 캬캬캬르륵!! 괴물은 드디어 날뛰기 시작했다. 이래도, 이래도 안 도와줘도 된다 고? 그러나 흘끔 바라본 엘다렌조차, 마치 조금 있으면 담배 쌈지에서 파이프나 꺼내 불을 붙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평온하고 무료한 모 습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유리카는 이제 아예나무에 기 대기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가 괴물의 공격 범위에서 완전히 벗 어난 안전지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하나 남은 괴물의 팔은 한 층 강력한 힘으로 주위를 내리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저 괴물의 치명적 맹점이라면, 몸의 방향을 빨리 돌릴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맹렬한 움직임으로 놈은 팔을 내저으며 몸 을 돌렸다. 물론 여전히 소리도 질렀다. 퀴캬캬캬! 퀴캬캬캬캬악! "……." 내가 안절부절 못하는 것을 본 엘다렌이 황당한 이야기를 꺼낸 것 은 그때였다. "미카가 저 괴물을 5분 안에 처리한다는 데 저녁 당번을 걸지." "……." 유리카가 싱긋 웃더니 손을 깍지끼고 머리 위로 올렸다. 그리고 역 시 한 마디 했다. "난 3분. 설거지 당번까지 걸어볼까." 이들의 한가로운 대화 가운데 미칼리스는 피를 말리는 악전 고투… 가 아니라 실제로자세히 보면 꽤 한가로운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 괴물이 바닥과 주위의 숲에 만들어 놓은 끔찍한 상흔들을 내가 지 켜보는 가운데, 싸움은 정말 3분인지 5분인지 파악할 사이도 없이 끝 나버렸다. 미칼리스가 관대하게 괴물이 몸을 돌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할버드를 높이 치켜드는 것이, 괴물의 날카로운 손이 그가 선곳을 휩쓸어가는 것과 동시에 비쳤다. "케이크 자르기!" +=+=+=+=+=+=+=+=+=+=+=+=+=+=+=+=+=+=+=+=+=+=+=+=+=+=+=+=+=+=+=늦었습니다..^^;Luthien, La Noir. 번 호 : 24927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1-27 01:47제 목 : ◁세월의돌▷10-2.세르네즈의 푸른 활(4)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2. 세르네즈의 푸른 활 (4) 도무지 기술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멋진 말을 외친 그는 마지 막으로 괴물의 흙빛어깨에서부터 발 아래까지를 힘껏 내리잘랐다. 입술 괴물의 초록빛 케이크… 몰라, 하여간 괴물은 반쯤 허물어지더 니 온 공터를 거품섞인 피로 적시며 버르적거렸다. 괴물의 움직임이 잦아들 무렵에도 아직도 뛰는 심장 탓인지, 움찔 움찔 경련을 일으키는 몸에선 녹색 수프… 아냣!…… 녹색 피가 끝없 이 흘러나왔다. 이렇듯 차마 눈뜨고 보기조차 괴기스런 광경만을 남기고, 어이없게 도 싸움은 칼 한 번뽑아보기도 전에 마무리되고 말았다. 싸움을 끝 낸 후, 그동안의 모든 동작으로도 땀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은 미칼 리스는 시큰둥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이것 참, 케이크 자르기가 아니고 바나나 벗기기가 되어버렸잖아. 오랜만에 멋진 걸 생각해냈다 했더니만." "……." 미칼리스는 우리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나는 그의 부츠에만 약간의 녹색 피가묻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데, 조금 있자니 이상 하게도 그것이 차츰차츰 스며들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2백년만에 볼만한 체조였어. 그런데 3분이었는지 5분이었는지 알 길이 없게 됐네?" 유리카가 머리 뒤로 돌린 깍지낀 손을 풀면서 말하자 엘다렌은 고 개를 끄덕이더니 역시 말했다. "이건 모두 미카 네놈이 너무 일찍싸움을 끝낸 탓이다." "……."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최근 많은 일들을 겪었다고는해도 역시 보통 소년이었던 것이다. 다른 친구들 은 모두 2백년 전부터 위대한 전사들이었는지 모르지만……. 미칼리스는 당연히 대답했다. "뭔가, 그 표정들은. 내 생각엔 결과가 어찌되었든 저녁 식사 당번 은 엘다 네놈이고 설거지는……." 내 불길한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아 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심해!" 어… 설거지를 시키려는 게 아니고? 그러나 다음 순간, 내 눈에도 이미 보이기 시작한 것이 있었다. 뭐라 설명할 사이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힘껏 뽑은 검이 내 손에 탁 잡혔다. 그리고단숨에 미칼리스의 등 뒤로 한 걸음, 성큼 뛰어들 며 검을 높이 세워들었다. 재빠르게 달려드는 은밀한 침입자의 발소리. 츠르륵! 촤락! 그리고 나는 들었던 검을 내리쳐 그것을 끊었다. 푸퍽! 그리고 다음 순간 재빠르게 검을 뽑으며 도사린 다른 동료들의 눈 에도 공격자의 정체가 비쳤다. 당연히 모든 상황을 가장 먼저 알아차 린 것은 미칼리스였다. 그러나 그는 상황을 설명하는 대신 이렇게 외 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나무였다… 숲이 살아서 달려들고 있었다. 팔처럼 길다랗게 뻗어나와 미칼리스를 묶어버리려 하던 나무 뿌리 는, 내 검에 끊어지더니 기묘한 점액질의 진액을 뿌리며 꼬이고 뒤틀 렸다. 엘다렌과 유리카가 도끼와 검을 뽑아드는 데는 눈 깜짝할 시간 도 걸리지 않았다. 사방에서 나무 뿌리, 길다란 갈색의 가지들이 잎 새를 흩뿌리며 달려들고 있었다. 미칼리스가 잠들어 있던 숲, 우리가 들어가자 마법에 걸린 듯 저절로 길을 열어주던 그 숲의 가시 돋친 나뭇가지들이 이번에는 우리들을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괴물의 피가 바닥으로 온통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 은 것도 그때였다. 마치 땅바닥에게 피를 빨린 것처럼, 시체는 이제 거의 뼈와 가죽만 이 남아 있었다. 유리카가 날카롭게 외쳤다. "이건, 세 번째 봉인의 대가물이야!" 유리카가 한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여유도 없었다. 나는 발 목을 감으려 달려드는 길다란 뿌리를 펄쩍 뛰어 피하며 검을 바닥에 내리 찔렀다. 땅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것인 듯, 뿌리에는 진갈색의 흙덩이들이 엉겨 있다. 유리카가 오랜만에 발검술을 발휘해위로 달 려드는 가지 세 개를 재빨리 끊었다. 옷자락이 허공에서 깨끗한 곡선 을 그리며펄럭인다. 한 발로 자세를 지탱하며 날렵하게 몸을 돌리는 그 모습을 보니 그녀가 이제는건강하다는 것이 새삼 다시 실감이 난 다. 사샤샤샤삭-! 한 몸에서 돋아난 수백 개의 손처럼 달려드는 나뭇가지들은 서로 부딪치면서 기묘한쇳소리를 내었다. 숲 전체가 갑자기 긴 잠에서 깨 어난 듯했다. 2백년의 잠을 다 자고, 고픈 배를 채우려 먹이감들을 낚아채려는 것처럼, 사나운 손짓들이 온통 주위를 메웠다. 찌르고 자르고 잡아채는데 따라 지저분한 갈색과 보랏빛의 액체가 사방으로 튄다. 거기서 풍기는 냄새를 맡으니 뱃속이 뒤틀리고 구역 질이 나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냄새에서 어디선가 익숙한 느낌을 나는 받았다. 악령의… 노예들? 엘다렌의 도끼는 달려드는 가장 커다란 나뭇가지를 단숨에 베고는 춤추듯 뛰어올랐다. 엘다렌이 싸우는 자세는 언제나 그 모습과는 어 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선을 가지고 있다. 그는 차례로 기묘한 쉿쉿 소리를 내며 아래로 기어드는 뿌리와 가지들을 잘랐다. 그러나 우리 숫자에 비해 달려드는 괴물 나무들은 턱없이 많았다. 가지는 처음의 몇 개에서 수십 개, 이제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가지 와 뿌리들로 변해 있었다. 비죽비죽하거나 구부러지고 꼬이고, 흙과 잎새로 범벅된 그 모든 것들이 바닥으로,허공으로, 머리 위로, 숨쉴 틈도 없이 공격해 왔다. 마치, 빽빽한 그물이 사방으로 덮쳐드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점차 둥그렇게 둘러싼 숲에 의해 포위되고 고립되어 갔다. 공기가 부족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야. 나무에서도 살기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 숨이 막히는 듯하다. 허공을 뒤덮은 나뭇가지들은 마치 쇠꼬챙이처럼 몸을 꿰뚫고 들어올것만 같아. "크윽!" 엘다렌은 키가 작은 탓에 방어의 범위가 넓지 못했다. 배에서 쓰이 는 밧줄처럼 튼튼한가지 하나가 마치 칼처럼 그의 어깨를 찔렀고, 놀랍게도 찢어진 상처에서는 피가 흘렀다. 한 번의 공격에 성공한 나 뭇가지는 다시 달려들기 전에, 마치 뱀이 머리를 들듯 기묘한 모양으 로 도사렸다. 나는 공포감도 없앨 겸, 달려들면서 소리쳤다. "에라잇, 땔감으로 만들어주마!" 흐흠, 땔감 치곤 좀 냄새가 날 지도 모르지……. 어쨌든 검을 빠르게 휘둘러 뱀처럼 쳐든 머리를 동강내고는 스스로 도 경탄할 정도의 겨냥으로 줄기 하나를 세로로 쪼개 버렸다. 유리카 가 옆에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린다. 곧 그녀도 나를 흉내내어 소리쳤다. "에잇, 장작 패기다!" 그녀는 정말로 약간가는 가지 하나를 단숨에 검을 휘둘러 다섯 토 막으로 잘라 날려버렸다. 실제로 장작을 만들기에 가장 유용한 무기 를 가진 엘다렌은 작은 토막은 취급하지도않았다. 그러나 유감스럽 게도 그 훌륭한 무기는 이런 상황에서는 좀 속도가 느렸다. "엘다, 조심!" 유리카가 몇 번인가 달려들어 사이를 파고드는 가지를 쳐냈다. 그 녀라고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 번인가 손목에 감겨든 덩굴을 내가 재빨리 잘라냈다. 공터 한 가운데로 몰린 우리는 점차 등을 대고 돌아서면서 서로를 방어하기 시작하고있었다. 미칼리스가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 다. "에제키엘, 이 엉터리 마법사 녀석! 이거 순 나를 골탕먹이려고 꾸 민 일이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정말, 눈물의 여정 끝에 등장한 미칼리스로군요... 출연자 대기실 에서 코를 골며 자빠져자던 녀석을 간신히 끌어냈습니다. 그야말로 2백년의 잠이었다니까... 재미있는 편지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yes On Me 음악파일 보내주신 분께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도 CD로 갖고 있었답니다. ^^;;;;그래도 참 좋은 곡이지요? 처음엔 싫어했었는데... 그런데 저 노래를 왕정문이 불렀어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4966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1-27 23:46제 목 : ◁세월의돌▷10-2.세르네즈의 푸른 활(5)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2. 세르네즈의 푸른 활 (5) 나는 미칼리스와 등을 대고 있는 터라 그가 무엇을 하려고 준비하 는 중인지 몰랐다. 그러나 이윽고 갑자기 괴물 나뭇가지들이 맹렬히 미칼리스 쪽으로만 몰려들기 시작해서,내게도 겨우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활줄은 어느새 걸었는지, 그가 여유 있는 손놀림으로 화살통에서 화살을 하나 뽑는것이 보였다. "모든 악이란, 그 근원을 끊어버려야 하는 법이지. 내가 실수를 했 었군." 이때의그 목소리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상당히 가라앉은, 차가운 빛을 띠었다. 나는 그가 무엇을 겨냥하려 하는 것인지 깨닫지 못한 채 그 메겨진 화살 끝을 바라보고, 그것이 겨냥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 는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저……!" 수백의 크고 작은 나뭇가지들이 연결된 커다란 고목의 둥치, 그 가 운데에는… 놀랍게도뭔가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젤리처럼 유동하는 허연 점막과 그 가운데 기묘한 녹색으로 커다랗 게 번쩍이는 것은……. 눈이야! "… 세, 세상에……." 온 몸으로 섬뜩한 감각이 조수처럼 일렁이며 지나가는 것이 느껴진 다. 아까 그 괴물의눈! 그 눈이 살아 있는 한 피를 빨아먹은 나무들 은 똑같이 저렇게 변해버린단 건가? 분명 그 눈이야… 저 끔찍한, 나무 둥치 한가운데 박힌 거대한 외 눈은… 게다가……. 깜빡였어! 마치 온 몸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제야 눈을 돌린 유리카 조차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잠시 동안 나뭇가 지들을 쳐내는 것도 잊었다. 사실 지금 나뭇가지들은 마치 이성이 있 는 것처럼, 총력을 다해 활을 겨눈 미칼리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우툴두툴한 눈꺼풀… 수액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기묘한 점액질의 각막이 우리를 쏘아보고 있다. 나무 둥치는 비록 하나가 아 니었지만, 눈은 하나뿐이다. 거기에서 모든 가지와 뿌리들의 근원이 시작되는 듯했다. 그리고 미칼리스의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소리가 울렸 다. "뭘, 눈이 하나뿐이니 한번만 맞춰도 되어서 좋잖아?" 미칼리스는 힘껏 활줄을 당기며, 그러는 동안 다리에 엉켜드는 나 뭇가지들은 과감히 무시했다. 몇 개나 되는 뿌리와 덩굴이 감겼지만 놀랍게도 땅에 뿌리라도 박은 듯, 그의 거인처럼 탄탄한 다리는 꿈쩍 도 하지 않았다. 가지와 잎새 사이로 멀찍이 보이는 나무의 외눈까지 거리는 약 백큐빗. 이윽고, 탄탄한 팔근육에 의해 팽팽히 당겨진 그 활줄이 윙, 소리를 내며 울었다. 휘익-! 그아아아아아아아! 마치 어딘가에서 거대한 괴물이 외치는 듯한 고성이 울리고, 우리 는 단검날만큼이나거대한 미칼리스의 화살촉이 그 눈동자 한가운데 를 정확히 꿰뚫는 것을 보았다. 피! "아아악!" 유리카는 나무의 녹색 눈동자가 내뿜는 핏줄기가 허공으로 솟구치 는 것을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려 버렸다. 나로서도 역겹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뚫린 구멍에서는 피뿐 아니라 기묘하게 물컹거 리는 살점과 같은 것이 꾸역꾸역 뱉어지고 있었다. 그리고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솨솨솨솨솨솨……하늘을 가릴 것처럼 빽빽이 덮쳐들던 나뭇가지들이 순식간에 말라 버린 것처럼 죽은 덩굴로 변했다. 넋놓고 미칼리스의 놀라운 활솜씨 를 보고 있던 우리의 머리 위로, 아까까지살아서 달려들던 나뭇가지 들이 말라 비틀어진 채 한 짐이나 떨어져 내리는 바람에, 우리는거 기에 꼼짝없이 깔리고 말았다. 이번엔 예외라고는 없었다. 미칼리스의 화가 난 듯한, 그러나 내용으로 말할 것 같으면 굉장히 황당한 외침이 나무더미 속으로 들렸다. "뭐얏! 설거지라면 몰라도, 에제키엘 네 녀석에게 장작을 부탁한 일은 없단 말이다!" 이윽고 말라버린 가지들을 헤치고 머리를 내민 우리들은 마치 거대 한 새둥지 속에 들어앉기라도 한 것 같은 서로의 꼴에 피식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하… 마치 새새끼들 같군 그래." 미칼리스는 정말이지 그새 방금의 전투에 대해선 모두 잊어버린 것 처럼 유쾌하게 말하고는, 키가 작아서 아직 머리를 내밀지 못하고 있 는 엘다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또한 놀랄만한 힘의 소유자라 손쉽게 엘다렌을 나무 위로 끌어낼 수 있었다. 엘다렌은 간신히 나무 더미 위로 올라오더니 한 마디 했다. "이번에야말로 장작들이나 패 보지 그러나." 그리하여… 우리들은 다시 각자의 무기를 이용하여 그 사이 기묘하 게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을 자르고 밖으로 나왔다. 미칼리스는 마지막 으로 빠져나오기 전에 중얼거렸다. "여기다가 불을 지르면 가관이겠는걸……." 엘다렌이 그 무거운 목소리로도 농담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라도 하겠다는 듯,한 마디 거들었다. "그건, 나무를 사랑하는 엘프로서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미칼리스도 지지 않고대꾸했다. "바위와 동굴을 사랑하는 자네 드워프들이 얼마나 바위를 깨부수고 땅을 파 흩어 놓기를 좋아하는지, 내 다 알고 있다고." 엘다렌은 그에 대한 내 상식으로는 놀랍게도 이쯤에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얀 부리 엘프와 새둥지라니, 꽤나 어울리는 짝이긴 하군." 나가는 길이 막히지않아서 그래도 다행이었다. 바짝 마른 거대한 땔감 더미에 불을 질러보고 싶은 충동을눌러 참으며 우리는 덤불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것 참, 이건 모두 에즈 녀석의 짓이 틀림없어." +=+=+=+=+=+=+=+=+=+=+=+=+=+=+=+=+=+=+=+=+=+=+=+=+=+=+=+=+=+=+=세월의 돌 4권, 나와 있습니다. ^^(왜냐면....오늘 환동 정모에서 제가 싸인을 해준 분이 있기 때문 에..) 이번엔 번호 글씨가 빨간색에 가깝더군요. (점차 스펙트럼처럼 변 해가는 번호 글씨 색깔..)하이텔의 Vicryl 님, 그렇게 당장 '핏줄이다'로 이어지는 게 좀 무 리해 보였나요? 음... 저는 앞서 엘다렌도 똑같은 말을 했고, 그 말 을 되풀이해 들었다 보니 그렇게 직접 이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답 니다. ^^ (음...무리가 있었을까요?) 오늘도.. 한 개입니다. (왜 이렇게 힘든 건지;)Luthien, La Noir. 번 호 : 25001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1-28 23:01제 목 : ◁세월의돌▷10-2.세르네즈의 푸른 활(6)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2. 세르네즈의 푸른 활 (6) 미칼리스는 불만스럽게 어깨를 움츠렸다. 일행 중에 나보다 키가 큰 사람이 생긴 것은 처음이라, 나는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오랜만에 몸 좀 풀라는 배려였겠지. 2백년이나 잤잖아?" 유리카가 그렇게 말하자 엘다렌도 거들었다. "아마 특히 네 녀석을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임에 틀림없겠군. 유 리와 내 경우에는 별로……."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엘다렌은 갈수록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나 는 그의 말에 문득궁금증이 생겼다. "방금의 것들은 세 번째 봉인의 대가물들이라고요? 그렇다면 봉인 에는 모두 대가물이필요하다는 얘긴데, 유리카의 경우는 악령의 노 예들이었잖아요? 미칼리스는 방금의 괴물과 나무들이었고, 그럼 엘다 렌의 경우는 뭐였었죠? 기억나는 것이 없는데?" 정말, 뭐였을까? 유리카가 고개를 갸웃거린 다음 말했다. "그 때는 생각을 못했는데, 내 생각으론 그 박쥐 떼들이었을 것 같 아." "박쥐? 그… 시체 박쥐 말야?" 나는 속으로 꽤나 어이없다는 생각을 하며 엘다렌을 쳐다보았다. 대가물들이 별로 형평에 안 맞는 것 같은걸? 악령의 노예들의 경우 엔 우리들을 거의 죽일 뻔했었잖아? 그런데 그 박쥐라면……. 결국 나는 한 마디 하고 말았다. "왠지, 봉인의 대가물들이 수준 차가 너무 큰 것 같은데요……." 하긴, 이번에도 잠시잠깐이지만 죽음의 위협까지는 느꼈던 것도 같 군 그래. 그러나 유리카가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냐, 에즈가 2백년의 봉인을 위해 지불한 대가물들은 전부 다 지 나칠 정도로 위험했었어. 박쥐들의 경우엔 우리가 운이 좋았지. 땅과 흙의 나스펠 정령들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상 황이었단 말야. 넌 그 순간 정신을 잃어버려서 기억나지 않겠지만, 박쥐들이 비처럼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광경은 확실히 대단한 것이 었으니까." 그렇게… 되나? 그리고 유리카는 미칼리스를 한 번 쓱 올려다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우리에겐 지나치게 강한 동료들이 생겼잖아? 우리 가 둘이서 악령의 노예들에게 대적하던 때와는 사정이 틀려." "그럼, 에즈도 내 실력을 아니까 이렇게 위험한 짓을 할 수 있었던 걸거야. 바로 자던자리 앞에다가 짓궂게 대가물을 안배해 놓다니, 괘씸하긴 해도 꽤 깜찍한 녀석이잖은가." 미칼리스는 저런 말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하더니 활줄을 다시 활에서 풀어 놓았다. 콤포짓 보우는 활을 쓰지 않을 때에는 활줄을 풀어 놓아야 한다. 엘다렌은 한참 가만히 있더니 불쑥 말했다. "실력이 줄지 않았군. 오랜 친구란 좋은 것이다." "……." 미칼리스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엘다렌이 잊지 않고 가져 다 준 할버드를 잠시세워든 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로선, 전 에 유리카가 말했던 것처럼 어젯밤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과 비슷한 기분이 아닐까? 있어야만 할 누군가들이 이미 없고, 친구는 먼저깨 어나 많은 일들을 해 놓았지만 말이다. 할버드를 잡고 우뚝 선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애매한 상상 속 에서만 존재했던 고대인에 대해 보다 실감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 었다. 고대인의 키가, 몸집이 과연 그보다더 장대하고 또 우아했을 까. 약간 우울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는 아까부터 하늘에 못박힌채 기울지 않고 있는 듯한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 가세." 미칼리스와 엘다렌의 입에서는 내가 기대한 것과 같은 감사, 또는 치하와 겸양의 말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오랜 친구, 그리고 그의 무기를 잊지 않고 보관했다가 2백년만에가져다 준 그다. 그러나 둘 은 더 이상 눈을 마주치지조차 않았으며, 미칼리스의 말대로우리는 머뭇거리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커다란 나무였어요. 그 나무를 통해서 들어왔는데, 그게 참……." "그랬어? 그럼 그나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겠군?" 그러나 미칼리스의 가벼운 대꾸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처음 이 곳으 로 들어왔던 나무는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조바심이 일 기시작했다. 여기는 이상한 세계야. 태양이 지지조차 않아. 그래도 그 나무가 있는 곳까지는밤낮이라도 있었는데, 이곳은 정말로 세상 자체가 봉인되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냥 똑같은 곳이 계속될 뿐이 야. 저 풀, 저 언덕, 덤불과 하늘. 그 마법의 나무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은데……. "오랜만의 세상이란, 역시 살 만한 곳이야. 어떤가 엘다, 좀 있다 가 살아 있다는 것을확인하러 가보지 않겠나?" 난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것이 뭘 하러 가자는 것인지 몰랐 다. 그래서 엘다렌이대꾸하기만을 기다렸다. "지금은 이미 환영주 아룬드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엘다렌의 여느 때처럼 무뚝뚝한 대답이 뒤따르고, 미칼리스는 이거 야 정말, 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고개를 저으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게 뭔가. 난 느긋하지 않은 난쟁이는 질색이란 말이네." 엘다렌은 돌아보지 않고서 맨 앞에서 가장 열심히 걸어가고 있다가 대꾸했다. "경솔한 엘프도 역시 질색이다." "난 경솔하지 않아. 다만 살아가는 멋을 아는 것 뿐이라고." "그 멋이란 것이 가끔중요한 일을 그르치지." 다시 한참 동안 부스럭거리며 걷는 소리만 들렸다. 우리가 걷고 있 는 곳은 역시 이곳으로 들어올 때에는 보지 못했던 푸른 언덕길이다. 마치 우리말고도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지나다닌 것처럼, 수 풀 사이로는 구불구불한 길이 생겨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는 미칼리스에게 몇 번이나 도대체 여기가 어디며,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어떻게 들어오고 나가는 것인지에 대 해 물었지만 그는 너털웃음만 터뜨릴 뿐,시원한 답을 해주지 않았 다. 유리카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내게 충고했다. "엘프들에게 그런 것을 알아내려 한다는 것은 무리야. 나도 2백년 전엔 굉장히 궁금해했었지만 지금은 이미 포기했다고." 그리고 우리 주아니, 주아니가 이리로 들어오는 길을 손쉽게 찾더 라는 이야기에 대해서 미칼리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 로아에는 숲의 뿌리에서 생겨난 종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흙덩이, 숨겨진 흙덩이들이지." 그게 무슨 말인지는 지금까지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었다. 날씨는 좋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았고, 어디를 걸으나 푸르고 아름 다운 자연이 펼쳐져있다. 솔직히 시간이 없다는 문제만 아니라면 소 풍온 셈 치고, 여기에서 잠시 눌러앉아 놀아도 좋을 텐데. 물론 소풍 엔 맛있는 도시락이 필수 품목이지만…… 어라? 그러고 보니여기에 들어온 이후로, 우리는 전혀 배가 고프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그제야 생각이 미쳤다. 나는 미칼리스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여긴, 시간이 안 흘러요?" "글쎄다." 미칼리스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태평했다. 그는 엘다렌 바로 뒤에서 그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으면서 팔을 뒤로 돌려, 긴 할버드를 가로 로 등에 걸쳐 잡고 있었다. 솔직히 옆에서 같이 걷는 사람의 입장으 로는 조금 위험스럽기도 한 자세였다. +=+=+=+=+=+=+=+=+=+=+=+=+=+=+=+=+=+=+=+=+=+=+=+=+=+=+=+=+=+=+=굉장히 오랜만에 코피가 줄줄 흘렀는데... 덕택에 코를 하도 눌러 댔더니 멍자국 비슷한것이 생겼네요. 이렇게 안 멈추기는 또 처음. 거울보니까 바보같다... 아, 어제 잡담으로 따로 올려 놓기도 했지만 이번 편 '세르네즈의 푸른 활' 1화를 고쳤으니 다시 보세요.(10-2-1)중요한 것이 빠졌더랬답니다. 아마 글 안에 들어가서 엔터를 한 번 누르는 순간, 뭐가빠졌었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Luthien, La Noir. 번 호 : 25035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1-29 23:39제 목 : ◁세월의돌▷10-2.세르네즈의 푸른 활(7)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2. 세르네즈의 푸른 활 (7) "글쎄라니, 흐른다는 건가요, 안 흐른다는 건가요?" "글쎄, 시간이란 놈이야 항상 제멋대로라서." 이게 무슨 뒤죽박죽인 소리람.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머리를 긁었다. 내 생각인데, 미칼리스는 엘 다렌하고 좀 닮은 데가 있다. 미칼리스는 그나마 물으면 대꾸를 하긴 하지만, 그건 엘다렌이 아예 대꾸도 않는것이나 마찬가지인 대답들 이란 말이다! 들으나마나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잖아? 친구가 닮는다는 건, 과연 정말인 걸까? 그 미칼리스가 갑자기 언덕길의 끝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뒤에서 걷고 있던 나와 유리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다 왔다!" 다 왔다고? 나는 걸음을 빨리해서 그가 서 있는 언덕 끝으로 다가갔다. 내심 마음 속으론 우리가이 안으로 들어올 때 통과했던 커다란 녹나무의 모습을 기대하면서……. 그런데? "어디가 다 왔다는 거예요?" 언덕 너머에는 커다란 자작나무 숲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미칼 리스는 내 질문에는대답하지 않고 경쾌하게 숲 속으로 뛰어내려 발 을 디뎠다. 나도 뒤를 따랐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젠 자작나무 숲이라 니, 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를 공간 안에 별별 곳이 다 나타나는 구나 하는 생각으로……. 갑자기 내 뒤에서 유리카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멋졌어, 미카." 나는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뭔가 갑자기 기분이 이상 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얀 껍질을 가진 자작나무들…… 그리고 저 너머에 보이는 것은 두 개의 자작나무가마치 문설주처럼……. 뭐얏! "여, 여기가 어디예요?!" 나는 황급히 그 두 개의 자작나무가 있는 곳으로 달려내려갔다. 나 무를 잡고 그 너머에이어진 길을 내다보다가, 급기야 반대쪽으로 돌 아가 나무 사이로 이쪽 자작나무 숲을 보았다. 틀림없다. 이건, 이 건, 이건……. 처음에 내가 녹나무를 발견하기 직전의 바로 그 곳이잖아! "이제 어딘지 알겠지?" 유리카는 튀어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누르면서 내 옆으로 다가와 내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나는 아직도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깨달을 수 가 없었다. 지금까지 왔던 길을 되짚어 생각해 봤다. 분명, 우린 그 렇게 커다란 녹나무 따위가 있을 만한 곳은 보지도 못했고,그리 고……. 유리카가 싱긋 웃더니 간단하게 말했다. "거긴 미카가 만든 거나 다름없는 세상이야. 어디로 빠져나오고 말 고는 순전히 그의 마음이지." "그래도……." 미칼리스는미리 내 질문을 막으려는 것처럼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 리더니 말했다. "그럼, 그만 가볼까? 우리 난쟁이 양반께서 갈 길이 급하시다잖 아." 이윽고 우리는 그 자리를 벗어나 처음 우리가 야영을 했던 물가에 이르렀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내 의문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다짐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물었다. "그럼, 미칼리스 당신은 그 세상 안에 누군가를 가둬 두고 싶으면 영원히 가둘 수도있겠군요?" "미카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잖아." 유리카가 대신 대답해버렸고, 미칼리스는 그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싱긋웃었을 뿐이다. 나는 재차 물었다. "그럼 그 안에서 아까처럼 시간이 멈춘 듯 보이는 것은 에제키엘의 봉인 탓인가요, 당신의 힘 탓인가요?" "글쎄, 어느 쪽이지?"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해요!" 미칼리스는 다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결코 대답할 것 같지 않은 태도라,나는 정말 미칼리스는 엘다렌과 천상 친구일 수밖 에 없겠다고 생각하는 참인데……. "한 가지는 말해줄 수 있지." "뭔데요?" 미칼리스는 웃음을 그쳤지만 여전히 굉장히 재미있어하는 얼굴이었 다. 그들 세계에서상식일지도 모를 일을 내가 모르고 궁금해하는 것 이, 2백년 후의 세상으로 왔다는 사실을그에게 실감케 하는 모양이 었다. 신기한 것은, 그는 그 사실을 그다지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 지 않았다는 점이다. 엘다렌보다도, 유리카보다도 훨씬 더. "결계의 원리는, 실제로 봉인의 원리와 비슷해." 해가 점차 서녘 하늘로 떨어지는 중이다. 공기를 보아하니 오늘은 멋진 노을이 질 것같다. 언덕 꼭대기 같은 곳이라면, 아주 기막힌 광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환영주 아룬드의 노을이란 흔히 한 해 중에서도 가장 멋지다고들 말하는 것이잖아? 그럭저럭, 계속 오르막이기는 하구나. "다만, 봉인에는 다양한 종류와 방법이 있고 대부분 대가물을 치러 야 한다는 특징이 있지. 그러나 결계는 말이야," 미칼리스는 마음 좋은 형처럼, 좀더 설명하기 쉬운 말을 찾는 듯 머리를 갸웃거리며시선을 허공으로 굴렸다. 그의 어깨에 걸린 화살 통에는 아까까지 쓰던 할버드가 다시 셋으로 분리되어 매달려 있다. 그의 짐이라고는 그 화살통, 그리고 활 하나뿐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그렇게 짐이 없어도되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는 엘프는 숲속에서라 면 별다른 도구나 양식 없이도 충분히 오랫동안 살아갈 수 있다고 대 답하여 다시 한 번 내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노숙을 해도 별로 추위를 느끼지 않고, 부득이한 경우 물과 나무 열매 등만 있어도충분히 힘을 낼 수 있다는, 정말 편리하기 이를데 없는 종족이 그들이었다. 인간이 한 번여행을 하려면 가지고 다녀야 하는 것이 도대체 얼만데……. "영혼을 가두는 것, 그것과 비슷해." "영혼을 가두다니요?" +=+=+=+=+=+=+=+=+=+=+=+=+=+=+=+=+=+=+=+=+=+=+=+=+=+=+=+=+=+=+=한 독자분이 급기야는..... <세월의 돌 잡담 모음집>을 만들어 보내시고 말았습니다..;;;; 잡담만 약 300여 페이지라니...저도 엄청나게 두드려 댔었군요..; 하여간 그걸 정리한 독자분의 정열과 수고에놀라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렇게 잡담을 쓰면서도, 앞으로도 계속 정리하겠다고 말한 그 독자분한테 숙제를 만들어주는 기분이 되는건 왜일까요. --;;왜.. 가 아니고 당연한 걸까;혹시 조만간에 팬클럽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면... 거기에 한 번 업 로드해볼까 생각중입니다. 물론, 허락을 받고요. 버터 사탕을 빨면서.... 오늘도 한 편이네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5074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1999-11-30 23:47제 목 : ◁세월의돌▷10-2.세르네즈의 푸른 활(8) +=+=+=+=+=+=+=+=+=+=+=+=+=+=+=+=세월의 돌(Stone of Days)=+=+=+=+=+=+=+=+=+=+=+=+=+=+=+=+ 10장. 제9월 '환영주(Harsh Miosa)'2. 세르네즈의 푸른 활 (8) 내 발에 밟힌 나뭇가지가 딱,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이 길로 가면 해가 저물기 전에 상텔로즈 숲의 북서쪽 입구에 위치한 코로시츠 마 을까지 갈 수 있다. 일전에 스노이안의 마법으로 멀리 떨어진 엘다렌 과 대화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만나기로 정한 마을이 거기였다. 물론 나와 유리카는 코로시츠 마을까지 가기 전에 상당히 일찍 엘다렌과 마주치는 바람에 그냥 상텔로즈 숲 안으로 들어서 버렸지만 말이다. 코로시츠는, 또한 양조(釀造)로 유명하다고 했던가? "네가 아까 한 말에 대한 대답이야. 그 공간 안에 누군가를 가둘 수 있느냐고 했지?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주인이 아닌자가 그 안에 서 오래 살아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 못할 일이지. 영혼은 오래 오래살아가지만, 육체는 어찌될 지 아무도 알 수 없거든." "그럼, 그 안에서 죽을 수도 있다고요?" "그게 바로 우리가 결계가 아닌 봉인을 이용하여 이 2백년 뒤의 세 상으로 온 이유지. 아, 또 하나 이유가 있어." 미칼리스는 피식 웃더니 내 머리카락을 한 번 바라보았다. "에제키엘은 인간 마법사라, 봉인은 할 수 있어도 엘프의 결계는 만들지 못했거든." 그리고 미칼리스의 설명으로 나는 결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엘프 의 기술이라는 것을알게 되었다. 인간이 그것을 배우는 일은 매우 어렵고,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엘프 가운데서도 이 결계의 기술을 배우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타고나는 것 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더구나 그 결계 안의 세상이란 것이 그 안에 들어간 생물들에게 장 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 지는, 결계를 만드는 자신조차 잘 알 수 가 없다고 했다. 만들긴 해도, 그것의 본성까지는 다 모른다는 묘한 이야기다. 그래서 아까 잘 대답하지 않은 건가? "그러니까, 나처럼 마법사도 아닌 전사 엘프가 이 결계를 만들 수 도 있는 것이지. 결계의 능력이란 것은 같은 핏줄 안에서도 어디로 전해질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거든. 아마도 고대이스나미르 인들 의 기술 가운데 하나였을 텐데, 어째서 엘프들의 피에만 남아 있게 된것인지는 알 수가 없어. 엘프들조차 이 결계, 그 기이한 힘의 본 성을 다 알지 못하네."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데 미칼리스가 문득 덧붙였다. "그래서, 결계의 불안정함을 보완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났지." "뭔데요, 그게?" 그리고, 그의 입에서 떨어진 대답은 그야말로 뜻밖이었다. "엔젠이야." 엔젠이라면… 이 보석? 나는 오래간만에 품 안을 뒤져 미르보가 준 푸른 엔젠을 끄집어냈 다. 그리고 미칼리스앞에 그것을 내밀었다. "이거… 말인가요?" 그는 약간 굳어진 표정으로 내 손에서 라우렐란의 엔젠을 받아들었 다. 그리고 이리저리그것을 살펴보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약간 망설이는 기색이 있었다. "이건… 진짜로 엔젠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 이런 것을 가지게 되 었지?" "그건……." 몇 마디의 설명이 오가고, 이것이페어리의 공주 라우렐란의 엔젠 이라는 것을 들었을때 미칼리스는 정말로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그 의 입에서 익숙한 내용의 말이 흘러나왔다. "엔젠을 만드는 기술은 모두 실전된 줄로 알고 있었는데……." "2백년 전에도 그랬었나요?" 미칼리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드디어 해가 지고 있었다. 우리는 고 갯마루 위에 도달했다. "노을이 익는군……." 미칼리스는 언덕 아래, 저 너머로 새빨갛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감탄 비슷하게 말했다. 길었던 하루 끝에 홍염의 휘장이 긴 지평선으 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내리 덮이고,어둠이 찾아들겠지. 붉은 바다, 그 가운데 져 가는 태양은 광채의 익사체. "굉장하군……." 미칼리스의 말대로 노을은 무르익은 빛깔로 탔다. 그걸 보니 뭔가 모르게 목구멍에서침이 꿀꺽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기분이 지? 그리고 내 기분을 대신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술도 익었겠지." 2백년의 긴 잠을 깨어난 엘프의 발치 아래로 두 개의 길이 긴 띠를 이루며 너머로 이어지고 있다. 하나는코로시츠로 가는 길이다. 또 하나는? 버밀리온 카운티로 들어서는 관문도시 테틀란까지 이어지 는, 약 3일 이상 계속해서 야영을 해가며 걸어야 하는 길일 것이다. 미칼리스의 말에 엘다렌은 어깨를 약간 움직였다. 그의 이마에도 노을이 닿아, 우뚝선 그는 마치 황금으로 만든 난쟁이처럼 보였다. 붉은 눈동자는 루비의 보석. "갈 길이 바쁘다." 미칼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붉게 물든 금발이 굽슬거리며 어깨 위 에서 흔들렸다. "아냐. 난 2백년의 세월을 술 한 잔으로 날려버리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여행을 계속할 수 없어." "그리고 2백년 전의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은가?" 유리카가 슬그머니 내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둘의 이야기를 지켜 보자는 얘기인 듯했다. 미칼리스는 그리고, 진지함과 확신이 어린 어조로 딱 잘라 말했다. "소심한 자네 말처럼 그런 일이 일어날 리도 없겠지만, 혹여 그렇 다 해도, 술 한 잔이없는 세상 따위 지켜서 무엇 하겠나." "……." 엘다렌이 대꾸하지 않자, 미칼리스는 버릇처럼 화살통을 고쳐 메며 말했다. "나는 간다. 비록 환영주는 못 마신다 하더라도 싸구려 과일주쯤은 마셔도 좋은 날씨가아닌가." 그는 앞장서서 코로시츠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섰다. 그 뒷모습의 금빛 머리카락들이지는 노을 속에서 붉게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세 발짝을 더 내딛기 전에, 엘다렌이 발을 떼며 무뚝 뚝하게 말했다. "가자. 고집쟁이 엘프 녀석 같으니." 환영주 아룬드에는 한 잔 술로도 석 잔의 취기를 얻을 수 있는 때 라 했다. 그리고 또한한 잔 술로 열 잔의 기분을 낼 수 있는 때이기 도 하다. 맛있는 술, 환영주 아룬드에는 주홍빛으로 빛나는 미오사니 별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맛있는 술을 마실 수 있는 법이다. 아마 오늘 걸은 길은 다른 날의 두 배는 넘을지도 몰라. 어쩌면 우 린 미칼리스의 결계안에서 며칠 쯤은 그냥 보내버린 것일지도 모르 지. 그렇지만 잠든 채로 2백년의 나이를그냥 먹어버린 이들도 여기 에 있는걸. 무엇으로 위로가 될까. 잃어버린 세월은 무엇으로보상이 될까. 거기에 한 잔 술의 위로라도 더할 수 있다면, 하룻밤쯤 행복한 꿈 을 꿀 수도 있지 않을까. +=+=+=+=+=+=+=+=+=+=+=+=+=+=+=+=+=+=+=+=+=+=+=+=+=+=+=+=+=+=+=환영주 아룬드 끝입니다. 내일부터 방랑자 아룬드의 시작입니다. 가을 장마지요. 아.. 제 생각인데요, 하루에 한 편씩 연재하느니 하루 걸러 두 편 씩 하는 편이 어떨까싶은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홈페이지 방문자 수가 2만을 넘었더군요...(오랜만에 가서 살펴보 니까..) 구경 오신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저는 술 대신 뜨거운 생강차를 한 잔 마셨더니, 코 끝에서 오랫동 안 냄새가 가시질 않네요... 『SF & FANTASY (go SF)』 59181번 제 목:◁세월의돌▷ 방랑자 아룬드 시작입니다. 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02 00:03 읽음:1039 관련자료 없음----------------------------------------------------------------------------- 11장. 제 10 아룬드 '방랑자(Wanderer)'의 시작입니다. 첫 장의 제목은 '2백년 전 그때처럼' 이네요. 오랜만에 특이한 구 조(?)를 가진 제목이 되었습니다. (마브릴의 땅으로, 이래로 처음이 아닐까..)책이 나오면서 맨 앞에 달력을 실어버렸더니 이젠 다음 아룬드가뭔지 궁금해하는 분들은 없어져 버렸군요 ...^^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 있었는데... 이번 주에 있었던 가장 기쁜 일 중 하나는 드디어 여러 사람과 작업했던 어슐러 K. 르귄의 어스시 시리즈 3권 '머나먼 바닷가' 번역이끝났다는 거지요. 조만간에 통신상에서 보실 수 있게 될 겁니다. ^^(같이 한 사람들끼리는 제본도 뜨기로 했어요. 표지도 잘 되었고,안에는 사진들도 들어가는...예쁜 책이 될 예정이랍니다. ^^)맨날 쓰는 말, 재미있게 보세요!....이젠 좀 바뀔 때도 되었는데...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9182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02 00:04 읽음:137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 방랑자의 별 '에프랑지아(Eprangia)'가 지배하는 아룬드.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차가운 비가 내리는 두 번째 우기, 에름 로존드(Erm Lozond)에 속한다. 발육과 번성을 위한 다임 로존드의 비와는달리 에름 로존드의 비는 완성을 위한 마지막 고통, 혼자서 내딛어야하는 마지막 발자국을 의미하며, 일기는 어둡고 폭우보다는 추적추적한 비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내린다. 고독한 방랑자 에프랑지아는 특정한 인물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로존디아의 수도 아르나브르 근처에는 흔적만 남은 옛 성터가 있는데그곳에서 단 하나 남은 기둥에는 고대 이스나미르 어로 다음과 같은돋움 글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땅을 방랑하던 자 영혼의 벌판 역시 방랑할지니그대 에프랑지아의 혼이여 끝나지 않는 발자국이여연대를 알 수 없는 이 기둥에 새겨진 말이 에프랑지아가 '방랑자'라는 의미로 쓰이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이후의 오래된 시들에서도에프랑지아는 방랑자를 높여 부르는 말로 쓰이는 것이 발견된다. 흔히 에프랑지아라는 단어는 유쾌한 여행자나 모험을 즐기는 사람, 또는 정착할 곳이 없어 고통스러운 방랑을 계속하는 사람의 의미로는쓰이지 않는다. 많은 서사시에서 존경받는 현자의 모습으로까지 나타나는 에프랑지아는 뭔가를 탐구하고 사색하기 위해 홀로 여행하며,또한 그 자체를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로 여기는 침울한 철학자이다. 하나의 아룬드로서 에프랑지아는 가을의 결실을 얻기 위해 잠시 동안 자신 속으로 침잠하는 시기, 내면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준비하는 번데기의 기다림과도 같은 시기이다. 비록 실제로 방랑의 길을 떠나지 않더라도 인간의 삶 속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 에프랑지아가 되어야 하는 때가 있다. 마지막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 발 물러서 생각에 잠기는 것, 수많은 사람들의 훌륭한 조언을 얻은 후 마지막으로스스로의 마음이 말하는 조언을 얻기 위해 자신과 대화를 나누려는것, 인생 속에서 에프랑지아가 된다는 의미는 이러한 것이다. "마음은 꿈을 꾸면서 발길은 천길 벼랑 위를 헤매다"라는 경구가전해오며 철저히 혼자서 해야 하는 임무, 스스로의 힘으로 마지막 발을 내딛음, 중요한 준비를 위한 고독, 내면으로 침잠하여 자신을 직시함,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남,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준비함, 얽매인 것들을 모두 풀어버림, 인연있는 자들에게서 인연없는 자들의 땅으로 떠남 등을 암시한다. 이 아룬드를 의미하는 빛깔은 자주색이다. - 점성술사들이 달력에 적는 각 아룬드의 의미,그 중 열 번째. 1. 2백년 전 그때처럼 (1) 은빛 긴 머리와 은팔찌를 지닌 검은 옷의 어린 무녀, 매서운 붉은눈매와 거대한 도끼를 지닌 엄숙한 드워프, 황금의 머리 너머로 푸른활을 등에 멘 장대한 엘프, 그리고……. "이제 넷. 이걸로 필요한 동료는 전부인건가." 눈을 반짝이는 쾌활한 젊은이, 검푸른 머리카락의 에제키엘은 노래부르듯 가벼운 목소리로 드워프의 왕에게 답했다. "그럼, 진짜 모험은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지." 그 말의 끝을 푸른 활의 엘프가 받았다. "그럼, 진짜는 역시 내가 있으면서부터 시작이라고!" - 기억reminiscence VIII 옛 말에, 방랑자의 별은 밤길을 가는 여행자를 지켜 준다고 했다. "그렇지만, 에름 로존드에는 비가 쏟아지기 일쑤인데 별인들 제대로 볼 수 있겠어?"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흐린 하늘에서는 에프랑지아는커녕 초가을 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인 이스나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별이 없으면 나라도 지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유리카의 말은 언제나처럼 농담 반, 진담 반이다. 그녀가 어떤 식으로 나를 지켜줄 수 있을까? 그런 것까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을 믿는다. "응, 너만 믿을게." 내가 씨익 웃어 보이자 그녀는 놀리는 것으로 알았던지 곱게 눈을흘겼다. 굳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하늘이지만 밤공기는 산뜻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좋은 페이스다. 이대로라면 며칠 안에 카라드-리테에 도착하겠군." 이렇게 말하며 나를 따라 고개를 들어올리는 키 큰 엘프의 긴 곱슬머리가 램프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을 냈다. 나는 저 금발을 보고있으면 자꾸만 나르디가 떠오른다. 물론 미칼리스의 머리 쪽이 훨씬길었고, 그리고 아름다운 굽슬거림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미칼리스의 말버릇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가고 있다. 그는최악의 상황이 닥친다 해도 결코 우울한 말 따위는 꺼내지 않는, 그만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렇게 특별할 것 없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희망적인 말을 꺼냄으로써 동료들의 사기를 북돋는 특이한 존재이기도 했다. "이 페이스대로라면 아마, 밤참 시간 쯤에는 다음 마을에 도착할수 있겠지." … 그리고 엘다렌은 미칼리스의 말을 영 딴판의 의미로 해석하는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적당한 시간에 한 잔의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되는 거야." 유리카는 이번엔 엘다렌을 거들면서 미칼리스를 향해 짓궂게 웃어보였다. 이 오래된 두 동료들 사이에서 유리카의 행동은 굉장히 편안하고 자유스럽다.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고향 마을에 돌아온 사람처럼. 미칼리스는 등 뒤에서 흔들리는 활을 고쳐 메면서 빙긋이 웃었다. "그게 뭐 나쁜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미칼리스는 정말이지 술 없이는 며칠도 버티지 못하는 희한한 엘프였다. 엘프들이 본래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간 그는 내가 처음으로 본 엘프였으니, 이야기책에 나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그의 생활방식에 내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나르디와는 또 달라서 그는 처음부터 그다지 많이 마시지도 않았고, 좀 무리하게 마신다 해도 취하는 일조차없었다. 술을 마시나 안 마시나, 언제나처럼 쾌활했고, 언제나처럼따뜻했다. 그의 신조는 한 번 마실 때 석 잔, 딱 이것이었다. 내가 엘프들은본래… 하는 식으로 질문을 꺼내려 하기만 하면 그는 싱긋 웃으며 한마디로 가로막았다.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들은 주로 그루터기 엘프에 대한 내용일 경우가 많지." 하긴, 아라스탄 호수의 스노이안 정도라면 내가 생각한 엘프와 어느정도 맞아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온 몸에서 힘과 활기가 넘치는 미칼리스 역시 나름대로 신기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파비안, 너 자꾸 미카 따라서 술 마실 생각하지 말아." … 난 그다지 술을 잘 하지 못했다. +=+=+=+=+=+=+=+=+=+=+=+=+=+=+=+=+=+=+=+=+=+=+=+=+=+=+=+=+=+=+=외풍이 심해 가끔은 바깥보다 더 추운 제 방에 조그마한 난로가 생겼네요. 선풍기 비슷하게 생긴 녀석인데요, 저기 쓰여진 이름은 '열가마 원적외선'! 하하.... 켜두면 금방 뜨겁다가, 끄면 금방 추워진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저게 어딥니까. 헤헷, 게다가 회전도 돼요. (쓸 데는 없지만...)음냠.. <뉴타입> 12월호에서 제 인터뷰 기사 보신 분, 푼수스러운(?) 모습을 연상했는데 커리어 우먼 형이다라... 치, 칭찬인 걸로 생각하겠습니다..^^;;;(커리어 우먼이라...지금도 직업이 있으니 굳이 따지자면 커리어우먼 아니겠습니까...^^;;; 물론 밤낮이 바뀐, 백수스런 생활리듬을갖고 있긴 하지만.)그러고 보니, 오늘 뉴스에서 야간하면 수명이 단축된다고 그러던데...(나<-- 매일 야근)아참, 뉴타입에서 <세월의 돌> 기사 실린 곳은 244페이지입니다. ^^ 커다랗게 책 표지가 나와 있지요. Luthien, La Noir. ------방금 전에 올린 거 보신 분들, 죄송합니다. 실수로 조합형으로 저장했지 뭐예요. --; (한 번도 안하던 실수를...)빨리 고쳐야겠단 급한 마음에, 일단 지워버린 다음 다시 고쳐 올립니다. 정말...문제다...갈수록 실수의 가짓수가 늘고 있어.. ------ 『SF & FANTASY (go SF)』 59341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03 00:34 읽음:129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2) 이제 우리에게는 마지막 보석을 찾는 일만이 남았다. 가끔씩이라도아룬드나얀을 꺼내서 들여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세 개의 보석이 채워진 그 목걸이는 점차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 신비한 빛을 더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옛 이야기에 나오는 보물들처럼 위기의 순간이 닥쳤을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여기에 깃든 마력은 또한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휘어잡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지금나는 올바른 길을 택해 가고 있다. 분명, 그렇다. 목걸이가 그것을알려 주고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노른슨 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카라드-리테, 높은산지가 그리 많지 않은 이스나미르에서 신기할 정도로 높이 솟은 산이다. 게다가 카라드-리테는 약 30년 전만 해도 화산 활동을 했었던휴화산이기도 했다. 높이만큼이나 넓은 산자락이 곳곳에 퍼져 있고,또한 뾰족하고 날카로운 능선들 때문에 '드래곤의 이빨'이라고도 불린다는 산이다. 일행 가운데에서도 마지막으로 봉인되었다는 미칼리스는 에제키엘과 함께 카라드-리테에 직접 가서 보석을 숨겼으며, 길이라면 금방찾을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가 엘다렌처럼 길을 잘 못찾는엘프는 아니기만을 빌 뿐이다……. 흐린 달빛의 밤, 캄캄한 벌판에서 램프 하나를 둘러싸고 걷는 네명의 동료들. "마치, 2백년 전 그때 같지 않아?" 유리카가 문득 꺼낸 말에 다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뭔가 기척을 냈다. 2백년 전 그때, 아마도 내 대신 에제키엘이 이들 곁에 있었던 그때겠지. 동료들도 눈치채지 못하게 마법으로 나뭇가지를 들어올리고, 비를멈추게 해 버리는 마법사. 또한 전혀 거리낌없이 유쾌한 마음으로 설거지를 해치우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재치와 위트가 넘치는 젊은이였다는 에제키엘. 어느 모로 보나 나보다는 나은 사람. "무슨 소리야. 지금 우리 일행엔 신비로운 꼬마 종족이 있잖아." 미칼리스는 지금까지 주아니한테 변변한 말 한 마디 못 들어본 주제에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위로하려는 것이 주아니인지, 나인지, 아니면 이제 에제키엘이 곁에 없는 자신들인지, 제대로 구별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 하나만은 알 수 있을 듯했다. "그렇다면 다섯이라, 에즈도 원했던 숫자로군." 미칼리스를 만난 뒤 유난히 말이 많아진 엘다렌이 어둠 속에서 대꾸해 왔다. 내가 그들 둘이 모두 에제키엘의 동료였다는 사실 때문에간과한 점이 있었다. 또한 흔히 전해오는 이야기 속에서 엘프와 드워프는 항상 서로 앙숙지간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이들 둘은? "그럼. 2백년이나 지났는데 나아지는 것이 있어야지. 세상은 점점발전하고 있다고, 암." 마치 어느 땐가 내가 말했던 것과 비슷한 말을 뇌까리며 성큼성큼걸음을 재촉하는 미칼리스는, 비록 밤참 시간이 지나기 전에 마을에도착하려고 그런 것이었겠지만 내게는 마치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듯,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큰 걸음을 보고 있으면 정말 몇 걸음 안되어 목적하는 곳에 훌쩍 도착할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이 든다. "미카, 엘다의 짧은 다리도 좀 생각해 줘야지." 그렇게 말한 유리카와 미칼리스는 어두운 들판 위에서 나란히 웃음을 터뜨린다. 내가 입가에 비죽이 웃음을 물고 있으려니 지금 엘다렌도 나와 비슷한 표정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않지만 분명 그럴 것이다. 만나기만 한다면 싸움이 그칠 날 없다는 엘프와 드워프인데도 도무지 서로에 대한 불신이나 꺼리는 마음 같은 것은 찾아볼 수조차 없는엘다렌과 미칼리스가 처음부터 그랬느냐고 물었을 때 유리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둘이서 처음에 얼마나 싸워댔는지, 하여간 말도 못해. 나하고 에즈는 처음에 둘을 떼어놓느라 바빠서 여행이고 임무고, 아무 생각도못했어." 자세한 까닭까지 다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러던 둘이 서로를 가장믿음직한 친구로 생각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물론 모르는 사람이 처음 보기엔 둘이 서로의 약점을 찾느라 혈안이 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둘의 애정 표현 방식은 꽤나 과격했다. 내가 또 하나 궁금한 점은 왜 주아니가 이례적일 정도로 심하게 미칼리스에게 낯을 가리는가였다. 엘다렌과는 그토록 쉽게 친해졌던 주아니였다. 마찬가지로 자연에 가까운 종족인 엘프를 저토록이나 경계하는 이유가 뭘까. 그 까닭에 대해 미칼리스는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로아에와 드워프는 땅의 종족이지. 그들은 엘프나 인간처럼 자기들 안에서 부족의 구별이 없어. 드워프이면 모두 똑같은 드워프, 로아에도 마찬가지야. 그러나 엘프는 세 부족으로 나뉘어 있고, 각 부족은 서로 모습, 성격, 취향, 심지어 그 유래마저도 달라." "어떻게 다른데요?" 미칼리스는 보통 사람의 몇 배 이상, 심지어 로아에보다도 좋은 그의 시력을 이용하여 멀리 떨어진 마을의 불빛을 찾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지금부터 갈 마을인 헴넨은 외진 산자락에 위치한 곳이고 나르디가 준 왕국 지도에조차 겨우 조그마한 점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아마 이 지도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아무 표시도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들어가는 사람도, 나오는 사람도 없는 외딴 산마을.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마을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미칼리스는 이윽고 고개를 젓더니 내게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하얀 부리 엘프는 한때 날개가 있었다고도 하지." "날개요?" 눈이 둥그래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세상에, 대지를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생물에게 날개라니? 미칼리스는 램프 빛으로 내 놀란 얼굴을 흘끗 보더니 웃었다. "하하, 그렇다고 지금 날개를 보여달라고는 하지 마라. 어디까지나그저 전설, 옛 이야기일 뿐이야." "사실이 아닌 것도 아니잖은가." 엘다렌의 목소리가 끼어들자 나는 더욱 놀라 버렸다. 그럼 그게 단순한 전설이 아닌 사실이란 말이야? "하얀 부리 엘프는 새의 정(精)이다. 엘프의 몸은 흙에서 비롯하여영혼이 불어넣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의 정기가 합하여 먼저 영이 만들어지고 육신은 이미 살아 있는 것들의 몸을 빌렸다고 옛 글에서는말하고 있지. 엘프와 이스나에는 그런 점에서 영혼이 가질 수 있는형태의 양 극단에 서 있는 셈이지. 하얀 부리 엘프가 그들이 빌린 새의 몸에 가까웠을 때에는 커다란 날개가 달려 있었다고 하고, 실제로그 날개로 날기도 했다고 한다. 꽤 여러 그림들에 그 때의 모습이 남아 있지." 미칼리스는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웃고 있었다.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의 등에 날개가 달려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두 발 종족과 날개라니, 아마도 이상한모습일 것 같아……. "……!" 순간, 내 눈앞에 그려진 한 인상이 머릿속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다. 새하얗고 거대한 날개를 하늘을 뒤덮을 듯 펼친 채, 긴 계곡 위를맴도는 한 마리 사나운 새매. 번쩍이는 금빛 갈기가 깃발처럼 나부끼더니 어느 새 단단한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뜻밖의 조화, 그 모습은 완벽한 조화를 이룬 조인(鳥人) 그 자체다. 그의 모습은 새였다. 흰 날개와 긴 부리를 가진 야생의 거조(巨鳥). 그루터기 엘프가 가진 나무의 느낌만큼이나 견고하고 확실한 새의 이미지. 새의 정을 받은 하얀 부리 엘프. "……." 내가 말을 못하고 있자 미칼리스는 약간 당황한 듯한 웃음소리를내더니 얼른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를 접으려 했다. "그림에 그렇게 나와 있다고는 하지만, 7백년을 산 나도 날개의 흔적조차 본 일이 없어. 아마 있었다 해도 그건 인간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정도로 까마득한 옛 일일 테니까 신경쓸 필요는 없지." 미칼리스는 다른 친구들이 그를 화제삼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 없는 그다. 심지어, 2백년 전의 연인 이베카에 대한 일 마저도. "어쨌든, 새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공기의 종족인 하얀 부리 엘프와땅의 종족인 로아에가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로아에가 보기에 하얀 부리 엘프는 뭔가 불안정해 보이고, 금방이라도훌쩍 떠서 사라져 버릴 것처럼 못 믿을 인상을 주는 것이지." +=+=+=+=+=+=+=+=+=+=+=+=+=+=+=+=+=+=+=+=+=+=+=+=+=+=+=+=+=+=+=오늘은 출판사에 가서 곧 나올 5권 마지막 교정을 늦게까지 보고오느라 글 올리는 것이 늦어졌습니다. ^^;5권 출간 예정은 이번 주 토요일, 그러니까 12월 4일입니다. 기말 고사 준비들은 잘 되어 가세요? 밤엔 공기가 싸늘하더군요. 살짝 감기 기운이 도는 듯 했는데, 다시 괜찮은 듯 하네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9443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03 21:17 읽음:128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3) 그 말을 증명해 줄 로아에인 주아니는 이미 세상 모르고 푹 잠들어있었다. 그러고 보면 드워프와 하얀 부리 엘프가 저렇게 친구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구나. "마을이 가까워져 오는 것 같은데." 미칼리스의 매처럼 날카로운 눈이 이미 뭔가를 포착한 모양이다. 그는 지평선을 바라보다가 약간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했다. "이상하군. 연기 한 줄기 보이지 않는 묘한 마을이야." 엘다렌이 그 말에 대꾸했다. "아마도, 밤참 시간이 아닌 모양이지." 그 말은 미칼리스를 한참이나 웃게 만들었다. 그는 간신히 웃음을그치더니 말했다. "이 난쟁이 친구야. 인간들이란 드워프들처럼 토굴 속에 숨어 살면서 필요한 때가 아니라면 연기 한 줄기조차도 감추려 하는 종족이 아니란 말일세. 하하, 하하… 인간들이 밤참을 한날 한시에 일제히 먹는다는 생각만큼이나 우스운 건 없는 것 같은데?" 엘다렌은 대꾸하지 않았고, 이윽고 미칼리스가 발견했던 그 마을은점차 가까워졌다. 마을 이름이 정말 헴넨이 맞는가 아닌가 하는 내기는 더 이상 할필요가 없었다. 이 지도는 왕실 제작국에서 만든 나라에서 가장 정확한 지도였고, 더 이상 의심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지. 산자락을 타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확실히 이 마을은 외부와 연락하기가 쉽지 않겠다. 그다지 험한 지형은 아니었고, 램프 하나로도 그럭저럭 의지해서 길을 갈 정도는 되었으나, 이 마을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냥 스쳐 지나가기에 딱 알맞아 보이는 마을이었다. "오, 저기 불빛이 보이는군." 그리하여 우리는 미칼리스의 바램 대로 밤참 시간 정도에 맞추어헴넨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 입구에 이르자 한 사람이 쭈그리고 앉은 것이 보인다. 유리카가 먼저 활발하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여기가 헴넨 마을인가요?" "……." 어귀의 늙은 나무 곁에 쭈그리고 앉은 남자는 잠시 고개를 들어 우리 일행을 보더니 몹시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입을 쉽게 열지는 않았지만, 하여간 놀란 것임에 분명했다. "… 어디서들 오오?" "위트비 산맥을 넘어왔어요. 노른슨 산맥으로 가는 길이에요." 다시 유리카의 대답. 그 사람은 대답 내용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모양으로 다시 물었다. "어떻게들 오오?" 이때쯤에는 유리카가 뭐라고 대답할지, 나도 동시에 똑같이 대답할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머릿속으로 생각한 대답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걸어서요." 물론 우리 일행은 말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고, 눈으로만 봐도 여행자 행색을 금방 알아볼 듯한데… 어라? 그 사람은 어깨를 한 번 틀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상당히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기다려요, 잠깐만. 내 가서 촌장님을 불러서……." 촌장을 불러서 뭘 어쩐다는 것인지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말하는 것보다 일단 움직이는 것이 더 급했는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자리를 떠나 마을 안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우리는 갑자기마을 어귀에서 괜스레 들어가지도 못하고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고말았다. 유리카가 내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혹시 우리가 이 마을을 방문한 1천 번째 손님이기라도 한 걸까?" "여깁니다, 어서……." 그럭저럭 환대라고 부를 만했다. 우리가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 이마을에서 단 하나뿐이라는 여관으로 저절로 안내되었고, 게다가 제대로 치워진 단 하나의 방일 것만 같은 어느 방으로 또한 우리는 이끌려 갔다. 우리가 유리카 때문에 방 하나가 더 필요하다고 말하자 그들은 순식간에 그 나머지 방 하나를 치우기 위해 사라져 갔다. 여관 상태를 보아하니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군. "뭐, 그럭저럭 괜찮은데." 언제나 낙천적인 미칼리스는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자기 몸으로 매트리스의 탄력을 확인해 보면서 말했다. 정말, 엘프 가운데서도 귀족이라면 귀족인 셈인 저 금발머리의 고귀한 용모를 가진 엘프는 웬만해서는 불만이라는 것을 몰랐다. 다시 말해, 내가 다른 침대 위에 걸터앉아 보니 엉덩이로도 충분히매트리스의 굴곡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여기다가 밤참만 좀 괜찮게 나오면, 만사쾌조인 셈이야." 유리카는 우리가 천 번째 손님이나 뭐 그런 것이 아니라서 실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창가로 다가가더니 우울하게 달라붙어 앉았다. 그녀가 뭘 보는 것인지 몰라 나는 그 등 뒤로 다가갔다. "왜 그래?" "이 마을, 꽤나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나봐." "그래?" 솔직히 우리가 만난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비쩍 마른데다 얼굴색도 우중충하기 이를데 없었다. 뭐,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게 우리를 그렇게까지 환영할 만한 까닭이 되는 건 아니잖아. 그것도 촌장까지 불러 가면서 말이야. "유리 말이 맞다. 식량 사정도 좋지 않은 것 같군." 엘다렌이 알아본 것은 지금쯤 초여름에 수확했을 밀을 떨고 남은밀짚단이 어디나 그득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이런 한적하고 가난한 농촌에서는 지붕을 흔히 밀짚단으로 얹기도 하거니와, 그럴 만한 짚단도 없다면 농사를 어지간히 망친 것이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좋은 밤참도 기대할 수 없다, 그건가." 미칼리스는 이제 숫제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운 채 혼잣말을 지껄이더니 다시 말했다. "그렇더라도, 오랜만의 방문자에게 팔아먹을 술 석 잔 쯤은 있겠지?" 마치 그 말에 대꾸라도 하려는 것처럼 문이 덜컥 열리고 젊은 여자한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광대뼈가 몹시 두드러진 얼굴이었다. "저, 식사를……." 그 다음에 나올 말이 식사를 '했느냐'는 것인지, '필요하냐'는 것인지, 지금 내려와 '하라'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우리가 해야 할 대답은 이미 결정된 후였다. +=+=+=+=+=+=+=+=+=+=+=+=+=+=+=+=+=+=+=+=+=+=+=+=+=+=+=+=+=+=+=이틀에 두 개씩 연재하는 게 좋다는 분하고, 하루에 한 개씩이라도연재를 하는게 좋다는 분이 거의 반반이라, 도무지 결정 내리기가 어렵네요. ^^;지금 유자차를 마시고 있거든요. 일전에 큰외삼촌이 대형 박스로하나 가득 보내주신 유자 덕택에... 몇 년은 유자차 걱정은 없을 것같아요. (사실 지금 마시는 것도 작년 것..)얼마 전에 어디선가 마실 기회가 있었던 카모메일 차 생각이 나네요. 향이 기가 막히게 향긋한 허브티였는데.. (참, 허브 소주도 맛있다면서요? 저는 구경도 못해봤습니다만..) 그런데 그 찻집은 너무 비싸서 다시 마실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 다솜바람 님이 보내주신 CD는 잘 받았답니다. 오늘 저녁에야 겨우제 손에 들어왔어요. ^^아참, 아참, 한다한다하면서 연속 며칠이나 까먹던 말....위저드리완결 축하합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9588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04 20:04 읽음:124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4) "감사합니다!" 왜 감사해야 하지? 우리 돈 내고 우리가 음식을 먹는데. 그러나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은 후에도 마치 남의 몫을 빼앗아 먹기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 되어 한동안 음식에 손을 대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그 말은 맞았다. 빵 바구니에는 정확히 사람 숫자에 맞춘 듯한 네 개의 빵이 담겨있었는데, 나는 한참동안 그 빵이 혹시 작년에 만든 채로 지금까지내버려둔 것은 아닌가 의심해야 했다. 빵 껍질은 딱딱하게 말라붙었고 색깔은 전체적으로 누르스름한 것이 도저히 집어서 쪼개 볼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색깔부터가 묘한 수프. 왜 저렇게 붉은 기가 돌지? 당근이라도 잔뜩 넣었나? 더 놀라운 것은 포크, 나이프, 숟가락이었다. 희끄무레한 빛으로변색된 것이, 정말 굉장히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차라리 방으로 올라가 우리 배낭 안에 든 은숟가락을 꺼내 오고 싶을정도였다. "식사들 하지." 누가 한 말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향 마을에서 어머니와 정말 놀랄 만한 절약형 식단으로 살았던 나조차도 선뜻 포크를 들생각이 나지 않았으니까. 배가 고프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다. 놀랍게도 그래도 제일 먼저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한 스푼 떠 입안에 넣은 것은 유리카였다. 그녀는 입 안에서 수프를 굴리다가 삼키는 듯했으나 아무런 감상도 말하지 않았다. 표정에 변화도 없었다. 단단하게 굳은 치즈 덩어리를 집어서 한쪽에 쥐가 쏠던 흔적을 긁어내고 있던 미칼리스는 잠시 후 지쳤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정말엔간해서는 불만을 갖지 않는 그였지만, 이 상황에서는 정말 한 마디안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한 말이란……. "혹시, 술은 없습니까?" 있을 턱이 없다. 술을 담글 곡식이 있었다면 그걸로 좀더 나은 수프를 만들었을 테니까. 나는 유리카 다음으로 숟가락을 움직여 수프를 떠 먹은 다음 그녀가 왜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수프는 아무런 맛도 없었다. 그냥 맹물맛이었다. 아니, 약하게 소금맛이 조금 나기는 하는데. 아냐, 그것도 내가 착각하는 것일 수도있어. 미칼리스의 말에 여관 주인이 뭐라고 대꾸했는지 궁금해서 나는 카운터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너무 놀라운 사실에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 내가 말문이 막힌 것을 보고 유리카도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마치음식을 놓고 경의라도 표하고 있는 것처럼 가만히 접시들을 노려보고있는 엘다렌을 제하고는 우리 모두가 카운터 쪽을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식사하고 있는 우리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약 스물 몇 개쯤 되어 보이는 눈동자들이었다. "저……."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카운터 옆에옹기종기 모여앉은 것은 모두 어린애들이다. 모두 며칠씩 굶은 것처럼 퀭한 눈에 깡마른 팔다리를 가진 아이들, 부석부석한 머리카락이마치 먼지 앉은 빗자루처럼 보이는 꼬마들이었다. 조금만 더 작아지면 부엌을 쑤시고 다니는 꼬마 요정, 아니면 생쥐 무리로 변해 버릴것만 같은 소년 소녀들이 타버린 옥수수알처럼 까맣게 모여 있었다. "얘들아……." 덜컥, 의자 미는 소리가 들리고 유리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두어 발짝 아이들 쪽으로 다가가자 마치 놀란 토끼들처럼 아이들사이에서 가벼운 혼란이 일어난다. 어떤 아이는 허겁지겁 여관 밖으로 나가려는 것처럼 몸을 움직였고, 좀더 작은 아이는 카운터 밑으로기어들어갔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한 발짝 다가가자 그대로 흩어져 버릴 것만 같던 아이들의 무리는 실상 더 이상 줄어들지 않았다. 마치 쌓아 놓은감자 무더기처럼 건드리면 흔들흔들, 움직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었다. 눈동자들은 한결같이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아니정확히는, 우리가 먹기조차 꺼려하던 빵 바구니와 기타 것들을 향해있었다. "이리 와……." 유리카가 팔을 벌렸다. 아이들은 또다시 움직였지만 용기있게 다가오는 아이는 없었다. 물론 문밖으로 나가버리면 될 텐데, 겁에 질린눈동자를 하고서도 가는 아이는 없었다. 저 아이들은 여기를 떠날 생각은 없는 거야. 비록 무섭더라도, 도망쳐 보았자 별다른 희망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여기 이 자리에 있어야 혹시 빵부스러기 한 조각의 행운이라도 생길 수 있을 테니까. "이것 참……." 나는 미칼리스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를 흘끗 보았다. 새파란 눈동자와 금발이 이 온통 갈색인 여관의 홀 안에 이질적인 느낌을 줄 정도로, 지나치게 화려하다. 금발과 푸른 눈을 한 엘프의 수장은 곤란하다는 듯이 자꾸만 어깨를 움직이고, 고개를 이리저리 저었다. "것 참……." 우리 식탁에 고기는 없었다. 나는 어색한 자리에 앉은 것처럼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며 곤란해 하고 있던 미칼리스가 드디어 벌떡 일어나 여관 주인에게 말을 걸 때까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의자위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묘한 정적만이 감돌던 이 홀 안에 그의 목소리는 마치 푸른 번개처럼 크고 날카롭게 울렸다. "이것 보시오, 주인 양반.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군 그래. 도대체무슨 일이 있는 거요?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긴 거요?" "……." 카운터 앞에 유령처럼 앉은 채, 이 모든 상황을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 같던 여관 주인은 미칼리스의 커다란 목소리에 약간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눈을 껌뻑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아무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마룻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음, 흐음." 미칼리스는 소리내어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일어난 자세 그대로 홀을 휙 둘러보았다. 그의 큰 키로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충분했다. 그의 얼굴에 가득한 불만스러운 표정은 나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에 안 들어'하고 말하듯 고개를 젓더니 테이블 앞을 떠나 뚜벅뚜벅 여관 주인에게로 다가갔다. 엄청난 키의 전사인 그가 활까지 메고 다가가자 카운터 옆에 달라붙어 있던 꼬마들은우수수 흩어져 유리카가 있는 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여 갔다. 유리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냉큼 한 녀석을 붙잡아 꼬질꼬질한뺨을 쓰다듬고 그 지저분한 머리를 쓸어넘기는 동안 미칼리스는 카운터 앞까지 다가가 섰다. 주인이 고개를 들더니 약간 눌린 듯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을 왜 굶기는 거요?" 의외로, 주인의 입에서는 대답이 빨리 나왔다. "먹일 것이 없기 때문이오." 쉬어버린 듯도 한 그 목소리가 말을 맺는 순간, 문득 가늘게 떨렸다. 미칼리스는 다시 물었다. 그리고 마치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서로확인하는 듯한 질문과 대답들이 오갔다. "왜 없소?" +=+=+=+=+=+=+=+=+=+=+=+=+=+=+=+=+=+=+=+=+=+=+=+=+=+=+=+=+=+=+=요즘 메일이 올 때마다, 이것도 또 지워진 글파일 요청은 아닌가하고 보면 아니나다를까..... 그런 경우가 꽤 많네요. 가끔은 그냥 메일이구나 하고 읽고 있는데 결론은.... 몇 장 몇 장파일 보내주세요.. 하는 메일일 때도 있고요. 몇 번인가는 왜 안되는지 답장을 썼지만, 갈수록 많아지는 중이라서 이젠 아예 감당을 못하고 있습니다. 게시판에서 요청되는 것도 가끔 보고 있지만 메일에도답변 못하는 마당에, 굳이 거기까진 참견하지도 못한 채 그저 쳐다보기만 할 뿐. 대부분은 학생이라서 돈이 없다.. 고 말씀하시지만 그런 분들을 위해서 대여점이 생겼으니까요... 실제로 대여점에서 천 명, 만 명이봐도 저한텐 별로 이득되는 것이 없지만 그래도 그것까지는 '불법이다!'하고 막진 않잖아요. (뭐어... 어떤 분은 그것도 실은 불법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요.)심지어 어느 게시판인가에선 글을 길게 쓰는 작가들은 각성해야 한다.. 는 내용의 글까지 읽었었네요. 그것도 열 몇 권이나 되는 책을빌리려면 - 결코 사려면..이 아닙니다 - 1만 얼마인가의 돈이 든다는이유로 강력하게! 작가들을 질타하시더군요. 저로선... 짧은 것이든긴 것이든 다 보고 나면 다른 것을 또 보게 될 텐데, 한 시리즈의 길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진 잘 모르겠습니다. 10권짜리를 열 종류 보시든, 5권짜리를 스무 종류 보시든, 드는 시간은 비슷하지 않습니까? 돈도 비슷하고요. 혹시 한 종류만 보고 다시는 안 볼 생각이었다.. 고 하시면 할 말은 없지만. 아니면 보던 거라 울며 겨자먹기로 열 권이나 봤는데 결과적으로 재미가 없었다..는 말씀이실까? 어쨌든 그래서 참으로 이상한 논리라고 생각.(혹시 짧게 짧게라도 여러종류를 봤다는 것이 자랑할 거리라거나, 심리적 포만감을 주기라도하는 건가요?)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9748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05 21:43 읽음:112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5) "농사를 망쳤소." "왜 망쳤소?" "일할… 손이 없으니까." "어째서 없소?" 주인은 그제야 똑바로 눈을 뜨고 미칼리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입에서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 다 가져가 버렸어. 쭉정이같이 마른 애들만 남겨 놓고, 다 가버렸어. 하나도 돌아오지 않아." 그리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다가가지는 않은 채 물었다. "영주가요?" "영주였다면, 항의라도 해 보았겠지." "그렇다면?" 주인은 잠시 말하기를 망설이는 듯한 태도로 우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에 새삼스러운 경계의 빛이 가득하다. 뭐지? 뭔가쉽게 말할 수 없는 일이라도 일어난 건가? 주인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전염병… 아니 물론, 지금은 다 끝났지만… 그러고 나서부터 사람들이 모두 쇠약해지고 기력이 없어져서 밀가루 포대 하나도 제대로들 수가 없게 되었어. 그나마 조금 나았던 사람들을 마을 밖으로 보내 구조를 청하려 했지만, 가다가 사고라도 당한 것인지 한 사람도돌아오지 않았어. 여긴 보다시피… 들어오는 사람도 없는 곳이고……. 당신들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그야말로 천행이라 생각했지." 병이라는 말에 흠칫했던 나는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는 웬만한 지도에는 표시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이름없는 외진 마을이다. 우리 역시도, 마을의 존재를 미리 아는 사람이아니고서는 감히 사람 사는 곳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한적한 계곡 모퉁이에, 우거진 수풀로 가득찬 길이랄 수 없는 길을 따라 들어왔었다. 아마 이 마을이 속해 있는 영지의 영주 역시, 기껏 십여 호가 조금넘을까 말까 한 이 마을을 잊어버렸음에 틀림없었다. 더구나 또다른 증거로는, 우리가 이 마을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던'헴넨'에 대해 들어 본 사람이 이들 가운데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도있다. 그들은 저들의 마을이 그렇게 불리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여관 주인은 되풀이해서 말했다. 이들의 사정을 외부에 좀 알려줬으면 한다고, 가장 가까운 도시에만 알려 줘도 영주가 조치를 취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미칼리스는 사정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손을 들더니 선 채로 이마를 짚었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들어올렸을때, 그의 얼굴에서는 놀랍게도 못참겠다는 듯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모두 굶고 앉은 거요? 후후훗……." 나는 잠시 얼떨떨했다. 지금은 심각해야 할, 아니 슬퍼해야 할 상황이 아닌가? 뭐가 우스운 거지? 미칼리스는 모두의 의아한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킬킬거리며 웃더니 애써 웃음을 멈췄다. 꾀죄죄한 꼬맹이들까지도 영문 모를 얼굴이 되어 거대한 활을 멘 키큰 전사가 아이들처럼 키득거리는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왜 웃고 있냐 하면……." 미칼리스는 친절한 엘프라, 우리 모두의 궁금증을 오래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묻기 전에 먼저 설명을 하려는 듯, 그는 손을 내저으며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바라보도록 손짓했다. 사실 다른 데를 향한 눈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니아니, 하나만 우선 묻겠소. 기운이 없어서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가 없었단 말이지. 그럼 사냥은 할 수 있소?" 주인은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미칼리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 사냥에 능할 것처럼 보이는 상대방이 자기를 놀리려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그래, 안된단 말이지. 그럼 나무 열매를 따러 가는 방법도 있잖소?" "이미 남은 것이 것이 없소이다." 하긴, 여기까지 오면서 봤다. 조막만한 숲에, 수없이 찍힌 발자국의 흔적들. "그럼……." 그가 말을 끄는 것으로 보아 아마 정작 하려던 말은 이 말인 모양이었다. 미칼리스는 다시 한 번 활을 고쳐 메려다 말고 어깨에서 활을 벗겨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주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재료가 있으면 요리는 할 수 있는 거요?" 물을 긷는 것도 오랜만에 해보니 쉽지가 않았다. 사람이 직업을 바꾼다는 것은 과연 간단한 일이 아닌 듯했다. 처음 검을 휘두르게 되었을 때 고생한 만큼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쨌든 이 쪽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횃불 몇 개를 제하면이미 캄캄하잖아. "여기, 여기!" "나― 도!"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던 꼬맹이들이 그 사이 먹은 것도없는데 뭘로 기운을 차렸는지, 좋아라 사람들 뒤를 종종거리며 쫓아다니고 있었다. 덕택에 녀석들을 피해 다니는 것도 꽤 수고로운 일이었다. 걸핏하면 앞 뒤 안보고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사람들한테 부딪치거나 또는 물통을 쳐서 엎지르는 탓에 수고가 두 배는 드는 것 같다. 여기저기에서 이런 목소리들이 울렸다. "어어어, 조심해라 아가!" "얘, 얘, 얘, 다쳐!" 그러는 가운데서도 나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어쩌다가 시작된 것인가 몇 번이고 자문해 보았다. 되풀이해 생각해 보아도, 그저 우린 마을에서 하룻밤 자고가려던 여행자에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가, 아니 적어도 예전의 나라면 이들을 위해서 뭘 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했다. 난 예로부터 나를 공짜로 부려먹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굉장히 민감하게 저항했었단 말이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 우리 일행을 완전히 공짜로 부려먹고 있잖아? 게다가 심지어 나까지……. "파비안, 이 물통 좀 받아줄래? 나, 저 애들을 좀 진압해야겠어." +=+=+=+=+=+=+=+=+=+=+=+=+=+=+=+=+=+=+=+=+=+=+=+=+=+=+=+=+=+=+=<뉴타입>이 왔는데 말이죠.... ....저한텐 부록을 안 주는군요. --;(용산으로 쫓아가서 달라고 해볼까...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59847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06 18:26 읽음:113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6) 확실히 유리카는 그만한 체격의 보통 여자애들보다 월등히 힘이 좋은 편이다. 나는 그래도 내심 못마땅했던 그녀의 무거운 양철 물통을얼른 받아들면서 대꾸했다. "제발 좀 그래라. 진짜, 벌떼는 저리가라로군." "애들한테 벌떼라니, 좀 심하잖아." 나는 고개를 힘껏 흔들면서 말했다. "무슨 소리야. 이미 쏘인 것만 해도 몇 번이야." 유리카는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싱긋 웃으며 한쪽으로 걸어갔다. 정말이다. 지금 내 바지와 저고리 옷자락이 왜 이렇게 젖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저 벌떼들만이 알걸. "자, 얘들아!" 그 벌떼 같은 애들이 금방 그녀에게 모여오지는 않았다. '얘들'이라는 말이 자기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걸로 알았는지, 돌아보지조차 않는 녀석들도 있었다. 유리카가 그 정도로 굴복할 리는 없다. 그녀는 눈썹을 치켜뜨더니다시 외쳤다. "자, 늦게 오는 애한텐 아무 것도 없다!" 없다니? 뭘? 그러나 뭐가 없다는 것인지는 하여간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하도굶어서 그런지, 뭔가 '없다'는 말에 아이들은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순식간에 조그마한 벌떼들은 두 손을 들어 손짓하고 있는 그녀의 주위로 빼곡이 몰려들었다. "……?" 아이들은 아직까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나나 유리카, 우리 일행들에게 조금은 낯을 가렸다. 그래서 당장 달려왔지만 내어주는 것이없다고 해서 금방 뭐라 따지지도 못한 채 궁금한 눈길로 유리카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 너희들 배고프지!" 아이들이 저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들 사이에 선 유리카가 마치 엄마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빙긋 웃은 다음 물을 마저 쏟아 놓으러 갔다. 그녀라면 무슨 이야기든 알아서 잘 할거야. 여덟 개의 솥에 물이 가득 찼다. 엘다렌이 아마 그 가운데 반은 채웠을 것이다. 그가 든 물통은 다른 사람 물통의 세 배나 되는 크기였는데, 그 안에서 어린애 목욕 정도는 충분히 시켜도 좋을 것 같은 통이었다. 그가 그 통에 물을 길어날라오면 두 사람이 솥 옆에 달라붙어 서 있다가 받아들고 물을 부었다. 엘다렌의 유일한 문제는 키가 작아서 직접 물을 부을 수 없다는점이었으니까.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앓고 일어난 병자들이라 기운이 없었고 사실일하는 데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럼 나머지 반은? 거의 내가채웠지 뭐. 그렇다면 미칼리스는? "올 때가 되었는데……." 엘다렌은 빈속에도 담배 생각이 나는지 파이프에 쌈지 담배를 차곡차곡 옮겨 채우고 있었다. 미칼리스가 나간지 글쎄, 한 시간쯤 지난것 같은 느낌이 든다. 솥의 물이 끓을 동안은 시간이 있었다. 나는 여관 마당으로 나가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당 한쪽에서는 유리카가 이제는 아예 배고픔조차 잊어버린 것 같은 꼬마들을 데리고 정말로 재미있게 놀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된것인지 사정은 모르겠지만, 유리카가 아마 재미있는 놀이를 가르친모양이었다. 한쪽에서는 여관 주인이 시들시들한 야채들이나마 채마밭에서 뽑아바구니에 담아서는 들고 들어가는 중이다. 음, 저런 야채들로 과연맛이 제대로 날까. "멀리 가진 않았을 텐데." 엘다렌이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조금 지나지 않아 흰 연기가 마당으로 퍼져나갔다. 횃불 몇 개와 늦여름의 반디, 아이들의 기운찬―기운이라니, 도무지 영문을 모를 일이었지만―재잘거림들로 가득찬 이작은 마을은 분위기는 다르지만 어딘가 모르게 고향 마을을 떠올리게했다. 흐린 날씨 탓에 불그레한 하늘이 아직 날이 덜 저문 것 같은착각을 준다. 마치 날씨 좋은 늦여름의 해질녘 같아. 나는 재채기를 한 번 한 다음 물었다. "담배를 피우면 무슨 맛이 나요?" "……." 엘다렌은 대꾸하지 않고 연기를 길게 내뿜더니 파이프에 붙은 장식을 잠시 들여다보고 있었다. 파이프에 새겨진 것은 긴 몸을 한 드래곤의 머리였다. 저것도 라베닌드의 천벌, 달 갸라누인가? 한참만에 엘다렌이 한 말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지금도 몇 명인가의 엘프가 남아 살아가고 있을 거다. 미카는 아마 나보다 좀더 쉽게 자신의 할 일을 할 수 있겠지." 현재로선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드워프인 엘다렌은, 아마 깨어나게 될 동료들을 데리고 제일 먼저 온갖 복잡한 앞 뒤 상황들을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바뀐 풍습들과,달라진 시선 등에 대해서도 몇 번이고 달래어 가면서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미칼리스는? 어쩌면… 오히려 그들쪽이 더 말이 통하지 않을 지도 몰라. 2백년의 세월이야. 그들은 미칼리스에 대해서 이미 잊어버렸을 지도… 모르지. "어쩌면 의견이 분분해서 싸움부터 해야 할 지도 모를걸요." 나는 유리카가 가르친 듯한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꽤 아늑한 느낌으로 들려온다고 생각했다. 저녁 식사를 제대로 못해서 배는 고팠지만,오랜만에 주어진 휴식 같은 이런 기분도 그럭저럭 괜찮은 것이었다. 우리가 처한 것은 어쩌면 간단하다면 간단한 상황, 우리가 해결할 방법 역시 간단하기 이를데 없는 것. 조금 놀이와 노래를 가르치면 금방 저렇게 자기들의 불행을 잊어버리고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이나, 다른 도시하고는 연락이 닿지 않는까닭에 자기들의 문제만 생각해도 좋은 한적한 시골 마을의 사람들로우리는 둘러싸여 있다. 고즈넉한 밤, 어느 하루쯤은 이렇게 지내는것도 좋아. 빵 몇 개하고 치즈 조금만 있었으면, 정말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엘프를 전에 본 일이 있나?" 엘다렌이 먼저 화제를 꺼내는 것은 참 이례적인 일이라서 나는 조금 놀랐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미칼리스가 처음이예요. 다만 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아라스탄 호수에 갔을 때 하프엘프 스노이안과는 만난 일이 있죠." 실상 둘은 너무 딴판이라서 사실 '엘프'라는 종족의 일반화에는 별도움을 주지 못했다. 엘다렌은 파이프를 입에 대었다 떼었다 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 다시 한 마디 했다. "미칼리스는 상텔로즈 숲에서 태어났지. 그의 일족은 모두 그곳에서 살아 왔었고, 아마 지금도 몇 명쯤은 살아 남아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가 이베카를 만나서 켈라드리안으로 옮겨간 것은 사실 매우 놀라운 결정이었던 셈이야." 파이프에서 재가 떨어져 옅은 바람에 날린다. 엘다렌은 그다지 이야기 솜씨는 없는 편이었지만, 그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러더니 엘다렌은 갑자기 내 얼굴을 보며 불쑥 말했다. "자네는 아마, 켈라드리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나?" "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잠시 뒤통수를 긁었다. 켈라드리안은 저번에유리카와 함께 처음 가보았었다고 생각해 왔는데? +=+=+=+=+=+=+=+=+=+=+=+=+=+=+=+=+=+=+=+=+=+=+=+=+=+=+=+=+=+=+=어떤 분이 이렇게 외진 마을에 어떻게 여관이 있냐고 물으시네요. ^^; 뭐.. 여관이 오랫동안 영업을 안한 것은 이미 보신 대로고, 이마을은 과거에는 이렇게 고립된 마을이 아니었답니다. .. 그런 이야기가 자세히 설명이 안되었으니만큼, 독자님 말대로그냥 민박인 편이 나았을 수도 있겠네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0044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07 23:53 읽음:94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7) "아닌가?" 엘다렌은 간단하게 다시 내 혼란을 뒤집어 버리더니 앉은 자리에서일어섰다. 그는 일어서 보았자 앉아 있는 내 키보다 아주 조금밖에크지 않았다. "그렇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 엘다렌은 내 반응이 이상했는지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한번 흘끔바라보았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스스로가 더 잘 알 것 아닌가." "저, 그게……." 고향에서 들었던 나우케 남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그 때엔 자신만만하게 '난 우리집 지붕밑에서 태어났다고요!'하고 외쳤었지만 지금에 와선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이 했던 다른 이야기들이 전부 꽤 잘 맞아들어갔다는 것은직접 경험한 바니까. 거기다가, 숲에서 태어났다고 했지 않아? "솔직히… 제가 그걸 잘 모르… 그런데, 엘다렌은 왜 내가 켈라드리안에서 태어났다고 말한 거죠?" 그는 대수롭잖다는 듯 대꾸했다. "에즈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에제키엘요?" 나는 2백년 전의 마법사가 내가 태어나는 장소까지 알고 있었다는이야기에 당황해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니, 이게 있을 수나 있는일이야? 엘다렌은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말했다. "그렇게 놀랄 것까진 없다. 네 이름까지 알고 있었던 에즈니까." 이,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파… 비안이라는 이름을요?" "파비안 크리스차넨이라는 이름일 거라고 말해 주었었지. 왜 그의자손인데 성이 나르시냐크가 아닌지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했지만,이렇게 만나게 된 네가 어머니의 성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의문이 풀렸지. 게다가 에제키엘 녀석은 네가 파비안느 아룬드에 태어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엘다렌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내가 뭔가 더 묻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뚜벅뚜벅 걸어서는 마당 울타리 밖으로 나가 버렸다. 미칼리스가 돌아오는가 살펴보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혼자 남은 나는 도저히 이 사실을 혼자 생각하고 있을 수는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엘다렌의 뒤를 따라갔다. "이것 봐요, 엘다렌!" 거무스름한 그림자가 울타리를 돌아 가고 있다. 그는 내가 부르는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돌아보려 하지 않았다 "또 무엇을 알고 있었죠? 나에 대해서 또 어떤 이야기를 했죠?" 마법사 에제키엘, 그가 알았던 미래는 어디까지일까. 그는 우리가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도 이미 알고 있었을까? 우리가 무슨 일들을 겪게 될 것인지, 벌써 알고 있었던 걸까? 수많은사람들의 죽음과, 유리카의 중독과… 모든 돌이키고 싶었던 사건들을그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걸까! "엘다렌!" 내가 그를 따라잡았을 때, 그는 검은 짐승처럼 웅크린 야산의 숲자락 그림자 안쪽에 서 있었다. 빨갛게 빛나는 파이프 불빛으로 간신히있는 곳을 알아보았다. 내가 옆으로 가서 서자, 엘다렌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깊이 파이프를 빨아들였다가 다시 훅 내뿜었다.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흰 연기……. "에제키엘이……." 내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엘다렌이 그 말을 막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먼저 말을 꺼냈다. "아무리 에즈라고 해도 미래의 일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미래를 그런 식으로 알아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짓이지. 마치 마술처럼 사람의 예측을 벗어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듯 엉뚱한 방향으로 관철되어 버리는 것이 미래라는 것이다." "엉뚱한 방향으로 관철되다니요?" "이런 이야기가 있지." 새 소리,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초저녁의 고요함 가운데 우리는 서 있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기분이 이상해질 정도다. "태어난 마을을 떠나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몹시 바라던 소년이 있었다. 그가 결국 소원대로 고향을 떠나게 되는 것은, 사고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의지할 곳이 없어진 다음이야." "……!" 마치 내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나는 섬뜩한 기분으로 몸서리를 쳤다. 그렇지만 아니야, 나는 결코 고향을 떠나고 싶어서 안달한 일은없어. 엘다렌은 내 그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경우도 있지. 사랑하는 연인이 전쟁에 끌려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처녀가 있다. 그리고 그녀의 애인은 가벼운 결투로 허리를 부상당하고, 결국 반신불수가 되어 징집에 응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지." "그런 법이… 어딨어요." 나는 중얼거리듯 대답했지만 어느새 생각은 다른 곳을 헤매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들었던 말 가운데 하나다. 소중한 것을 잃은 후에야 임무를 완성한다… 라고 했던가……. 그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무엇을 잃고, 무엇을 완성한다는 말이었을까? "너 역시……." 엘다렌이 다음 말을 이으려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우거진 나무들이 부스럭, 움직이는 듯하더니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덤불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흠칫 놀라 뒤로두어 걸음 물러섰다. 마치 커다란 짐승이 튀어나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주위의 수풀 전체가 흔들리면서……. "뭐야, 보고만 있을 건가?" 튀어나온 것은 짐승 대신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니, 저……." 물론, 나타난 것은 그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 혼자만은 아니었다. 거대한 털북숭이 머리 하나가 제일 먼저 눈앞으로 불쑥 들이밀어졌다. 뭔가 하고 눈을 둥그렇게 뜨고 보니 큼직한 사슴이었다. 갈색 뿔이 길게 앞으로 솟은 것이 보인다. 족히 등 길이만 해도 2큐빗은 넘어보이는 놈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다음으로 기러기 세 마리가 밧줄로 엮어진채 내 어깨 위에 얹어졌고, 엘다렌에게는……. "뭐야!" +=+=+=+=+=+=+=+=+=+=+=+=+=+=+=+=+=+=+=+=+=+=+=+=+=+=+=+=+=+=+=오랜만에 편지 보내주시는 분들과, 또 몇 개의 메일들 덕분에 즐거워졌던 며칠간이었습니다. (하이텔 접속하면 나오는 바이오리듬은 내내 '사고를 조심하라'고 떠들어 댔지만)잠깐 선전. ^^어슐러 K. 르귄의 어스시 시리즈 4부작 중 국내에 출간되지 않은 3권 <머나먼 바닷가>를 아는 사람 몇이서 번역했답니다. 나우누리의꼬마호빗 님, radagast님, 천리안의 티누비엘 님, 그리고 저...이렇게 함께 팀을 짜서 번역했지요. 웅진 출판사에서 출간된 1권 <어스시의 마법사>, 2권 <아투안의 지하무덤>을 읽으신 분이라면 한 번 찾아보세요. 어제부터 하루에 1장씩 여러 사람이 나누어 올리고 있습니다. 하이텔 환타지 동호회(go fntsy)의 장편란, 천리안의 검과 마법동호회(go sword)의 장편란, 역시 천리안의 판타지 포럼(go fants)의창작연재란에 현재 올라가고 있습니다. 나우누리도 조만간 올라갈 거예요. 아마 나우누리는 환타지 동호회(go fan)의 장편란이 되겠지요. 해외의 정통파 판타지 가운데에서도 단연 몇손가락 안에 꼽히는 작품이니까 재미있게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참, 4권인 <테하누> 역시번역되어 올려져 있습니다(제가 참여하진 않았지만).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0166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09 00:34 읽음:75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8) 엘다렌은 갑자기 튀어나온 멧돼지의 털에 머리를 파묻히고는 소리를 질렀다. 마치 이불 속에서 들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자네한테 맡기는 거야."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나타난 미칼리스는 사슴을 둘러멘 채 긴머리에 낙엽을 잔뜩 묻히고는 빙그레 웃었다. 아마도 엘다렌에게는미칼리스의 목소리만 나타난 셈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한참만에야뒤집힌 채 안겨진 멧돼지를 제대로 돌려 멘 다음, 불퉁하게 한 마디쏘았다. "숲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드워프에게 갑자기 나타난 멧돼지의엉덩이가 반가울 턱이 있겠나." "미안해, 돌려서 안겨 준다는 것을 잊었어." 나란히 서서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니 정말 엄청난 양의 짐승 고기들이다. 이런 동물들이 저 숲의 어느 구석에 숨어 있었지? 미칼리스의 등에 걸린 활을 바라보았다. 시위가 풀어져 있긴 했지만 단단한 위용 그대로 다시 침묵하고 있는 활이 움직였을 모양을 눈앞에 떠올려 보았다. 저 화살에 꿰뚫린 짐승이 느꼈을 기분은 어떤것이었을까. 당사자인 미칼리스는 아주 유쾌한 모양이었다. "구경만 할 텐가? 물이 끓다못해 졸아들 지경일 텐데." 우리가 다시 여관에 도착한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얼빠진표정을 짓고 있었다. 게다가 한 말은 방금 전 내가 한 생각과 똑같은 말이었다. "저런 놈들이… 어디에 숨어 있었지?" 사실 나는 다른 점에서 미칼리스에게 놀라 있었다. 내가 생각한 엘프는 자연을 사랑하고 동물의 친구인……. 유리카와 놀고 있던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바람에 우리는 곧발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빼곡하게 둘러싸였다. 덕택에 저마다무거운 짐을 진 우리들은 짐을 좀더 오래 지고 있어야 하는 곤란한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야아, 사슴이에요?" "우와아… 이걸 다 어디서 잡아왔어요?" "저걸 봐, 새다, 새야!" 이윽고 아이들을 헤치고 앞으로 걸어갈 수 있게 된 우리들은 여관마당 가운데에 그 엄청난 식량―이 곳에 오는 순간, 짐승들은 이미식량이었다―들을 내려놓았다. 그 다음 일은 우리가 손대지 않아도좋았다. 사람들이 제대로 입을 열지도 못한 채 몰려들었고, 그들 사이를 헤치고는 유리카가 싱긋 웃으며 미칼리스의 곁에 다가와 섰다. "활 솜씨, 녹슬지 않은 거야?" "녹슬었으면, 수장의 자리를 내놔야겠지." 다시 보니 사슴의 옆구리에는 아직 화살이 꽂힌 채였다. 왜 뽑지않았느냐고 물어보니 그는 화살촉이 상하게 되어서는 곤란하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바쁠 때에는 그냥 뽑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뼛속까지 박혔을때에는 혹시라도 모를 사태를 우려해야 하거든. 은촉은 그렇게까지단단하지가 못해." 그러더니 그는 엘다렌을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저 친구가 미스릴 화살촉을 예전에 만들어 주었더라면 좋았겠지만말야. 게으른 건지, 원체 말을 안들어." "네 녀석이야말로 내가 만들어 준 화살을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좋았겠지." "뭐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잘 알면서." "그러면 강철 촉을 사용하면 되지 않나." "요즘 시대엔 별로 없는지 몰라도, 예전엔 이 은촉이 필요한 적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기억 나지 않는다는 건 아니겠지?" 뭔가 잘 알 수 없는 옛날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듯해서 나는 더 이상 둘의 논쟁에 참견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디서 기운들이 났는지 순식간에 그 모든 식량들을 옮기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요리 작업에덤벼든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유리카에게 말을 건넸다. "저 사람들, 기운이 없어서 식량을 구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과연정말이었을까?" 한밤중의 여관 마당에는 멧돼지 통구이를 위한 커다란 모닥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미 사슴 스테이크와 기러기 스튜를 있는대로 돌려먹은 뒤이긴 했지만, 마치 며칠은 굶주린 듯한 마을 사람들의 수에맞추기에는 그것도 턱없이 부족했다. "한술에 배부르려면 되나." 음식을 많이 먹지 않는 미칼리스는 기껏 사슴고기 몇 점을 씹은 것으로 이미 식사를 끝내고는 모닥불에서 떨어진 곳에 혼자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거무스름한 실루엣 뿐인 그에게로 다가가자 너털웃음을터뜨리며 그가 한 말이 이것이었다. 몇 번이고 그의 손을 붙들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늘어놓은 끝에 어느 마을 아주머니가 내놓은 딸기술을 병째로 가볍게 홀짝이고 있는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가 한 모금 얻어먹어본 결과 딸기술은너무 오래 묵힌 터라 그다지 훌륭한 맛은 못되었지만 미칼리스는 개의치 않았다. "진정한 애호가는 모든 술에서 나름대로 개성있는 맛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딸기술에선 개성있는 묵은 냄새가 났다. 미칼리스는 기댄 바위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말했다. "어때, 이제 내가 웃은 이유를 알 수 있겠나?"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꾸했다. "사람들이 다 당신처럼 활을 잘 쏘진 않는다고요. 게다가 인간 족은 당신처럼 그렇게 적은 음식 갖고는 충분한 활력을 얻을 수가 없다고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어. 아니라면 배우는 편도 좋겠지." "애써 배워도 잘할 수 없는 사람도 많아요." "배워 보고서 하는 말인가?" "내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곳의 사람들은……." "배우고 싶지 않은 자라면, 몇 시간 정도 배고픔을 잊게 해 줄 한번의 만찬을 얻은 것만으로도 운명은 관대한 편이다." 냉정한 말이었지만 그가 특별히 얼굴을 굳히거나 엄숙한 표정을 한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상적인 말투로 그렇게 말했고, 그 말의 무게에 대해 새롭게 느끼는 것도 없는 듯했다. "그렇지만… 그럼 당신 생각엔 이 사람들이 모두 바보에다 게으를뿐이란 말인가요?" 아름다운 엘프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도 없지." +=+=+=+=+=+=+=+=+=+=+=+=+=+=+=+=+=+=+=+=+=+=+=+=+=+=+=+=+=+=+=일반적 엘프의 범주(도대체 그게 뭐지..)에서 많이 벗어나는 미칼리스지만 나름대로 좋아해 주시는 분이 계시군요. ^^;하이텔의 lsyk31 님, 세월의 돌에서 제가 제일 멋지다고 생각하는묘사가 무엇인가라....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저는 주로, 최근에 쓴 부분을 더 좋아하는 편이라서요...;기억에 많이 남는 곳이라면, 아마도 파하잔일 것 같네요. 물론, 이건 지금 방금 생각났다는 얘기예요. 질문하신 걸 정말 답변하기 위해선 저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는 수고를 해야할지도 모른다는. ^^;나우누리의 hooh 님께. 그 오베르뉴 지방의 젊은이가 나오는 책 제목은 무엇인가요? 궁금하네요. ^^'추방자의 군주' 100회 축하드립니다. ^^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0277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09 23:33 읽음:18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9) "다만 상황을 타개할 능력이 그들에게 없었을 뿐인걸요. 그런 일들이야 사람들 사이에선 굉장히 비일비재……." 어둠 속에서 내 말을 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나서 자라고 살아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되는 일인지 알고 있나?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매 순간은 죽음의 위기로 가득 차 있어. 자연은 존재 자체로 이미 위협이다, 인간에게든, 엘프에게든. 인간을 축복하기 위해 자연은 만들어진 게 아냐. 자연 역시 너와 마찬가지로 살기 위해 태어난 존재에불과해. 네 발밑에 나 있는 풀 한 포기와도 이미 너는 경쟁 관계에있는 거다. 자연 가운데 생물들이 서로 공존공생 관계에 있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지만… 수억의 생물들이 서로 우연에 가까울 정도로 드물게 만나고 맺는 관계들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도움을 준다는 건 지독히도 드문 우연에 지나지 않아."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사물을 볼 수 있다는 엘프가 내 얼굴을 보고 있다. 한 몸을 가진 여러 개의 머리들처럼 서로에게 상처 주는 일은 꺼린다는 종족, 그 종족의 생각이 상처투성이 인간인 나와는 같을 수가 없어. 나는 상처투성이, 마치 습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를 다치게하지. 나는 충분히 생각한 다음에 입을 열었다. 방랑자의 밤공기가 그의이마와 내 뺨을 동시에 쓰다듬었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자연한테서만 위협을 받고 사는게 아니에요. 그들에게 주어진 온갖 종류의 어려움들 중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가장 효과적인 타개책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어요. 모든 위기에서 일차적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돕는다'라는의도가 조금이라도 퇴색되는 건 아니니까……. 실제로 인간은… 같은인간에게서 가장 많은 상처를 받고 있고 그것들은 또 다른 인간이 치료해 주죠. 그런 만큼이나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는 사람들은 너무도 많다고 생각해요. 짧은 인생 동안에도 누구나 몇 번씩은 마주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란 말이에요. 언제든, 언제나는아니더라도 그런 기회가 닿는 그 순간엔, 능력도 의지도 없고 심지어노력조차도 않는 인간들을 매번 돕지 않으면 안 된다고… 누구나 그래야 하는 걸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 미칼리스는 방금 전의 나처럼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구워지기 시작한 멧돼지 구이의 냄새를 코끝으로 맡으며 조금있다가 모닥불가로 돌아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나무 열매몇 개, 고기 몇 조각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배가 부르도록먹지 않으면 안 된다. 주위의 사람을 매번 마주칠 때마다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째서, 보다 조화롭고 예의바르다는 종족이, 보다 운명을 낯설고잔인한 것으로 느끼는 것일까? 모든 것은 본인의 책임이고, 죽음조차도 자신의 결정이기를 원하는 것이란, 의지이기 이전에 오만 아닐까? 한 생명으로는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바라는……. 그리고 그는 입을 열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야… 네가 방금 한 이야기는 2백년 전의 한 사람으로부터도 들은 일이 있어. 아마 너도 짐작할 사람, 내가 진심으로 대화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인간인 그 사람 말이야." "누구… 말이죠?" 그러나 내 손가락은 이미 짚고 선 울타리 위에 그 이름을 천천히쓰고 있었다. 글자들이 그려져 나간다. 이상한 사람, 이상한 마법사. 내가 알았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알지 못했던, 그리고 점차 다시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긴 그림자를 지닌 사람의 이름을 나는 썼다. 미칼리스의 목소리는 처음으로 무언가에 감동한 것처럼, 약간은 높아진 어조, 그리고 부드러운 떨림으로 흘러나왔다. "그래… 에제키엘 나르시냐크. 자넨 분명 그의 자손이 틀림없군." 내 오랜 핏줄……. 그 긴 시간을 무로 돌릴 만큼,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흔적. 나는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미칼리스는 말하고 있었다. 7백년의 나이를 가진 그는 2백년 전에겨우 몇 년을 같이 보냈을 뿐인 그의 친구에 대해서, 생생한 어조로말하고 있었다. "에제키엘은 나와 달랐었다.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은 아니었지…조화, 또는 배려와 예의라는 것이 애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의 인생 속에서 처음으로 깨달았는데, 이제 2백년이 지나그의 핏줄로부터 다시 확인을 받는군. 인간은 그 짧은 생명들 속에서도 잃어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군 그래……." 매캐한 연기가 별 박힌 하늘 꼭대기로 피어올랐다. 사람들은 몇 명씩 짝지어 어깨에 손을 두르거나 얼굴을 맞댄 채 둘러앉아 있었고,끄덕끄덕 졸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어머니들이 안아서 집안으로 데려갔다. 엘다렌과 유리카가 나란히 앉은 채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있는것도 보인다. 그렇게 앉아 있는 둘은 엘다렌의 키 때문에 마치 비슷한 또래처럼 보였다. 새벽으로 가는 밤은 그렇게 짙었다. "내가 느끼고 있는 자연은, 서로의 껍질이 깨어지지 않도록 극도로움츠리지 않으면 안되는 우울한 전쟁터일 뿐이야. 조화란 결국 고립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상처와 애증으로 점철된 끝없는 매듭줄가운데 얽혀 있는 인간만이 진실로, 진심으로 타인을 위할 수 있다는것. 그 진심이 전해지지 않아도, 진심은 진심 그대로 남는다. 진심을전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는 것 자체로도 그것은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아닌가… 에제키엘은 그렇게 말했었지……." 어둠 속에서 긴 실루엣을 가진 미칼리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가만히 검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비안, 바보와 무능력자, 게으름뱅이와 악당조차도 살아 있는 한계속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너는 말하겠나? 삶 속에서 그들이너와 마주치는 한 언제든 도울 필요는 있다고, 부득이 돕지 못하게된다 하더라도 상대를 바라본 마음 자체를 잃어선 안된다고, 그렇게말할 참인가? 단 한 명의 인간을 위해서라도 기꺼이 모든 인간을 버리겠노라고, 그리고 그 모든 '한 명의 인간'은 또한 몇 번이고 전체로서의 인간보다 우위에 놓여야만 한다고, 그 옛날의 네 조상처럼 너역시도 그렇게 말하겠나?" 나는 아직 그의 말을 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인간은 모든 인간보다 가볍지 않고, 동시에 그 각각의 모든 인간들은 누구도 잴 수 없는 가치들을 지니고 있다는 말… 그렇다면 희생은 누구의 몫? 모든사람이 그렇게 똑같이 중요하기만 하다면, 그 모두를 위해 희생할 한인간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바보와 무능력자, 게으름뱅이와 악당이살아갈 세상을 돕기 위해 자신을 버릴, 그 모든 세상보다 결코 가볍지 않은 한 인간은 누구란 말인가? 모순, 모든 것은 모순 속에서 돌고 있었다. 미칼리스는 이윽고 자신의 질문에 홀로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내 생각을 그렇게 바꾸지는 못해… 자연에 가까운만큼, 엘프는 짐승에도 가깝다. 그 삶을 준 순리대로 나는 개별적 삶을위한 종족, 그리고 상처를 견딜 수 없는 종족일 뿐이야. 불완전한 건흔히 말하듯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태어난 그대로의 상태에 가까운생명인 우리들 쪽인지도 모르지. 자연에 가깝다는 모든 종족들은 개별 개체들이 완벽하고 뛰어난 만큼, 전체로서의 사회성은 매우 불완전하니까. 이토록 영속하는 전쟁터 속에서 다가오는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는 나, 그렇지만 어쩌면 이대로가 좋은 건지도몰라. 불완전한 개인들이 모여 더 나은 사회성을 이루듯, 불완전한모든 종족이 모두 자신들의 본성을 유지해 나갈 때, 세상은 더 온전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 건지도 모르지. 확실히 나는 에제키엘에게 지나치게 물들어 버렸어… 엘프로서의 삶에 지장을 줄 정도로 말야……." 그는 손을 들어 이마를 매만졌다. 그 얼굴에서 문득 자조적인 웃음이 터졌다. "이토록이나 그리운 친구가 아닌가… 신기한 인간, 겨우 40년 남짓짧은 시간을 살다가 갔을 뿐이다. 게다가 녀석은 나빠, 엘프인 내겐마치 불량식품 같은 친구야.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그 모든 것에도불구하고 네 친구에게 세월을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어제의 일처럼그리워하도록 만드느냔 말이다……." 그렇게, 아무에게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 칭얼거리는 꼬마들의 잠투정 소리와 좀더 큰 아이들이 밤 늦은 것도 모른 채 까르륵대며 뛰는 소리가 끊일 듯 끊일 듯계속됐다. 방랑자 아룬드의 하늘은 완전히 개는 법이 없기 때문에,서녘 하늘은 아직도 막 해가 진 것처럼 불그레했다. 비를 품은 채 언제고 쏟아낼 준비를 하고 있는 하늘이다. 그 아래 붉은 모닥불은 재와 연기를 피워올린다. 검은 돌들처럼 그림자만으로 모여앉은 사람들은 움직이거나, 또는 움직이지 않는다. "파비안! 어서 오지 않으면 남은 것도 다 먹어버린다!" 유리카의 목소리… 그녀는 엘다렌 곁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래……!" 나는 대답한다. 그리고 어둠 속에 홀로 선 엘프를 되돌아보았다. +=+=+=+=+=+=+=+=+=+=+=+=+=+=+=+=+=+=+=+=+=+=+=+=+=+=+=+=+=+=+=파비안느 아룬드에 태어난 파비안의 이름은 삼월이, 오월이와 비슷한 것이다라.. 한참 웃었습니다, dolstone 님. ^^;나우누리 서비스가 또 엉망입니다. 메일도 안되고... 10시 반에 복구 완료 되었다고 말했지만, 그 글자를 읽는 순간, 또 저절로 끊어졌습니다. --;한메일로 보내주신 samangyuhee 님(아이디가 살벌..), 좋은 충고감사합니다. ^^르귄의 <테하누> 번역본이 어디있냐고 물어보신 분이 많아요. 일단나우누리에는 환타지 동호회(go fan)의 자료실과 장편란에 있습니다. lt 테하누 하시면 찾으실 수 있어요. 하이텔에는 있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번역하신 분한테 조만간 물어볼게요. 아아... 그러니까 <테하누>는 전혀 제가 참여하지 않았던 작업입니다. ^^; (제가 손댄 문장인 <머나먼 바닷가> 역시 같은 르귄의 책인데, 제가 손댄 문체가 어떻게 변하는지(망가지는지)를 보실 생각이있으시다면 좋은 비교 거리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테하누도.. 재미있습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0367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10)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10 19:54 읽음:136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10) "가게."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다. 그늘진 얼굴에 어린 표정이 잘 보이진 않지만, 빛을 받아 가느다란 실루엣을 이루고 있는 그의 입술은미소의 곡선을 지니고 있었다.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모닥불가로 뛰어갔다. 그래서 내 말에미칼리스가 마지막으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볼 수 없었다. 다시금 밝아진 하늘. 그러나 푸르스름한 습기를 머금은 공기. 오늘은 드디어 비가 올 지도 몰라. 아침 일찍 우리는 마을을 떠났다. 다음에 도착하는 도시에 그들의소식을 알려주기로 약속하고서. 몇 명인가 얼굴에 아쉬운 미소를 머금은 마을 사람들이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제 오랜만에 실컷 먹은 터라 곯아떨어진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꼬마들한테 안부 전해줘요." 아이들 사이에서 '예쁜 누나' 또는 '예쁜 언니' 로 불리고 있던 유리카가 아침 공기만큼이나 청명하고 상큼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확실히 뺨과 손등에 와 닿는 공기는 한결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이렇게 말도 없이 가버렸다고 애들이 아침부터 울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는데요." 유리카를 보며 그렇게 말하는 여관 주인의 얼굴은 어제보다 그래도한결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솔직히 우리가 뭐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다. 우리 고향에서도 일전에 스덴보름에 눈사태가 일어나 길이 막히자, 다른 세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길을 뚫고 식료품을 날라다준 일이 있었다. 무슨 보답을 기대하거나, 한 마디 치하의 말이라도일껏 들어보려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물론 그런 걸 받고 나서 최소한의 감사도 안한다면 예의 없는 동네로 찍히겠지만 말이다. "보고 싶을 거라고, 다음에 꼭 다시 들르겠다고 전해주세요." 우리가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가장 큰 일을 했다고 볼수 있는 미칼리스는 저만치 떨어져 숲길 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을 했는지 어쨌는지 관심도 없거니와그런 것에 대한 의식도 별로 없는 듯했다. 아마, 인간 족이었다면 저렇게 감사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 역시약간은 예의가 없는 것이 되었을지도 몰라. "……." 미칼리스는 겉으로 보기에 너무도 강건한 전사였기 때문에 그가 입을 다물고 있자 다른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쉽사리 말을 붙일 엄두를내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조금의 인사를 할 기회도 주지 않았고,우리는 마을을 떠났다. "활을 가르쳐 달라고? 왜?" 미칼리스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왜라니? 배우면 안 된단 말인가? "못 가르쳐 줄 이유라도 있어요?" 미칼리스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물론 아니지. 내가 궁금한 건 네가 배우고 싶은 이유야. 도대체무엇 때문에 활을 배우고 싶어하지?" "배우고 싶은… 이유라고요……?" 그것 참 이상한 반응이기도 하다. 엘프들은 대부분 다 활을 쏠 줄알지 않던가? 그들이 서로 가르치고 배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쏠 줄알게 됐겠어? 혹시 선천적으로? 결국 나는 가장 평범하고 당연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활을 잘 쏘고 싶으니까요?" 거기에 대한 미칼리스의 반응이 또한 희한했다. "활을… 잘 쏘고 싶어? 허, 그것 참." 그는 마치 신기한 별종이라도 만났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음 다시 앞으로 휘적휘적 걸었다. 우리는 길게 자란 억새밭을 지나고 있었다. 그는 우리 중에 가장 다리가 길었기 때문에 꽤 쉽게 발에 얽히는풀들을 헤치고 걸음을 옮길 수 있었고, 덕택에 걸음도 무척이나 빨랐다. "좀 천천히 가! 같이 걷잔 말야!" 유리카가 그렇게 외치고 나서야 그는 걸음을 조금 늦추어 우리가따라오기를 기다렸다. 하늘에는 낮게 깔리는 구름이 온통 연보랏빛으로 내려앉아 있었고, 주위는 완연한 가을 공기였다. "엘다의 짧은 다리를 생각해야지. 예전에 실컷 가르쳐 놨더니 벌써잊었어, 긴다리 미카?" 하긴, 나와 유리카는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엘다렌과 보조를 맞추어 걷고 있었다. 유리카의 질책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에 미칼리스는 그저 한 차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을 뿐 별다른 대꾸는 하지않았다. "놈, 본래 그렇지 않던가." 엘다렌이 말한 그 '놈'의 다리는 정말 엘다렌의 몇 배는 되고도 남았다. 그는 단단한 각을 지닌 그 얼굴을 마치 개구쟁이처럼 찌푸리면서 내게 아까의 질문을 되풀이했다. "정말, 활을 배우고 싶어? 진심이야?" "잠깐만요."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활을 가르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에요? 아니면 엘프들은 본래'죽도록 활을 배우고 싶다'는 상대가 아니면 절대 활을 가르치지 않나요?" 미칼리스는 내 얼굴을 멀뚱이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여서 나는 더욱 어이가 없었다. "그럼. 당연한 것 아닌가? 활을 배운다는 건 절대 쉬운 일도 아니고, 그다지 재미있는 일도 아니야. 하얀 부리 엘프들은 원하지 않는아이에겐 절대 활을 가르치지 않아. 즐겁지도 않은 일을 쓸데없이 고통스럽게 할 필요가 전혀 없지 않은가?" 나는 더더욱 어이가 없어져 되물었다. "활을 배우는 게 고통스런 일이라고요?" +=+=+=+=+=+=+=+=+=+=+=+=+=+=+=+=+=+=+=+=+=+=+=+=+=+=+=+=+=+=+=리필 잉크 넣으려다가 실패했습니다. 지금 손이 새까매졌어요... HP는 리필이 잘 안된다고 누가 그러더군요. 저도 리필 같은걸 별로믿지 않았는데, 아버지께서 사오시는 바람에요..;;저어... 조만간에 독자 싸인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번처럼 하는것이 아니고, 이번엔 출판사에서 공식적으로 준비하는 중이랬어요. 장소는 영풍문고고, 날짜는 아마 12월 21일 화요일일 것 같은데 아직확정은 아니랍니다(5시일 가능성이 크다죠). 조만간에 공고가 나갈거예요. 구경들.... 오시라고요..^^;;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0368번제 목:◁세월의돌▷ 3차 삭제 공지입니다. 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10 19:55 읽음:162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 3차 삭제 공지입니다. 이번에 삭제되는 부분은+----------------------------------------------------------------+| 9-1. 미망의 나라(1) ---> 10-1. 나무와 바람과 달빛의 마법(18) |+----------------------------------------------------------------+까지입니다. 삭제 날짜는,+------------------------+| 1999년 12월 12일 |+------------------------+입니다. 퍼가시는 분들한테는 따로 메일을 보냈습니다만, 이 공지 보신다면 날짜에 맞춰 삭제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받아가실 분들은 서두르시길.... 지워진 파일, 보내 달라는 메일이 제가 받은 것만 백여 통도 넘을겁니다...;; 모든 분이 다 특별한 사정이 있답니다. 용돈 재정이 파산이라는분도, 전부 모았는데 딱 그 장만 없다는 분도, 너무 재미있어서 책이 나올 때까지 도저히 못기다리겠다는 분도, 하드가 날아가서 지금까지 모은파일을 모조리 날렸다는 분도... 다 안타까운 사정이지만 저로서는 어쩌는 수가 없습니다. 메일 보내시는 분은 모두 한 사람쯤 보내주는 것은.. 하고 생각하시겠지만, 제게는 모이고 모여서 1백통, 2백통입니다...--;그러므로 특정한 분께만 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라 뭐라 더 말씀드리기도 뭣하지만, 현행법에도 엄연히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메일로 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세요...;;(어떤 날은 하루에 서너통도 옵니다. --; 저뿐 아니고, 퍼가시는 분들중에도 이런 메일에 시달린다는 분이 있으십니다... 정말 죄송해서 얼굴을 못 듭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0567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1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11 23:42 읽음:1252 E[7m관련자료 있음(TL)E[0m-----------------------------------------------------------------------------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11) 잠시 후 나는 사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미칼리스는 자기 활을 내려서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자, 이 활을 제대로 당겨서 활을 쏜다는 것이 쉬운 일로 보이나?" 활에는 시위조차 매어져 있지 않아서 나는 일단 시위라도 걸어 보려 했다. 그런데……. "하하하… 파비안 너, 활이라고는 만져본 일도 없었나 보군?" "그… 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영문을 몰라 여전히 열심히 활을 구부려 보려 애를 쓰면서 그에게 대꾸했다. 활은 뭘로 만들었는지 엄청나게 빡빡해서 구부리는일조차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약간 구부러져 있긴 하니까조금만 더 구부리면 될 것 같은… 어라? 활을 거는 데가 좀 이상하게 생겼잖아? 미칼리스는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이봐, 이봐, 활시위는 그 쪽으로 거는 것이 아니라고." 반대로 걸라고? 활이 휘어진 반대쪽으로? "이 쪽으로 구부리는 것조차 힘든데……." 불평이고 뭐고 할 여지도 없었다. 엘다렌조차 끼어들어 말했다. "콤포짓 보우는 본래 활이 휘어져 있는 방향의 반대로 다시 휘어서시위를 걸지 않으면 안 된다. 활이 쉽게 잘 구부러진다는 건 절대 좋아할 만한 일이 아니지. 시위가 헐거워져서는 그 활을 무엇에 쓰겠나." 그러니까 이런 말이었다. 시위를 팽팽하게 하기 위해서, 활 시위도항상 쓰고 나면 벗겨 두는 거고 활도 휘어진 방향의 반대로 꺾어서시위를 거는 거란다. 그러니까 활이 손에 익어서 매번 잘 휘어지게되도록 기대해서는 절대 안 되는 거였다. 그렇게 된다면 그 활은 버려야 된다. "… 알겠나?" "알긴 알겠는데……." 나는 활을 다룬다는 것이 과연 엄청난 팔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지금 실감하는 중이었다. 내 손에서 활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도무지제대로 휘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시위를 건다는 것은 더더욱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뭐야, 활이 지나치게 크고 뻣뻣해서……. 나는 물었다. "하얀 부리 엘프는 모두 이런 활을 써요?" "그럼, 장난감 활을 가져다가 무엇에 쓴단 말이야?" 그래서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저런 활을 다루는 거라면, 과연 아무나 배우려고 덤빌 만한 것이 아닐 수밖에 없을 거야. 하얀 부리 엘프라고 전부 미칼리스처럼 저렇게 탄탄한 근육질의 팔을 가지는 건아니겠지? 근육질 엘프 집단이란 별로 상상하고 싶지가 않은 상황이라서… 뭐? 엘다렌이 말하고 있었다. "하얀 부리 엘프는 대륙의 모든 종족들 가운데 드워프만큼이나 강한 물리적 힘을 지닌 유일한 종족이지. 이들 두 종족보다 힘이 센 종족은 딱 한 종족 뿐이야." 간신히 휘어지려 했던 활이 다시 내 손을 힘껏 후려치며 튕겨나 버리자, 나는 끔찍한 고통으로 손을 감싸쥐면서 오만상을 찌푸린 채 엘다렌을 돌아보았다. "으크크큭… 어느 종족인데요?" "거인." 거인이라면… 호그돈의? 누워 있던 내 가슴을 가볍게 누르던 호그돈의 힘은, 그가 마음만먹었다면 그대로 내 몸을 터뜨려 버리는 것도 가능할 정도로 엄청난것이었다. 나는 새삼 엘다렌과, 그리고 미칼리스를 쳐다보았다. "엘프가 장사라니… 도무지 내 상식과는 맞지 않는 일이라고요……." 미칼리스는 입술을 한쪽 끝만 슬쩍 올리며 웃더니 말했다. "인간들은 이상스럽게도 그루터기 엘프들을 좋아하더란 말씀이야. 어디가나 그들 이야기만 하고, 옛 이야기들도 그들에 관련된 것만 퍼져 있어서." "당신은 싫어해요?" 나는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다. 미칼리스의 연인이었던 이베카는그루터기 엘프였지 않은가. 그러나 미칼리스는 아무 거리낌없이 즉시 대꾸했다. "응, 싫어하진 않는데… 그 치들은 좀 약골이라서." 어쨌든 나는 하얀 부리 엘프에게 활을 배우려면 그들의 활을 배우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이 없다는 이야기도 곧 들어야만 했다. 정말 심한 노릇이야. 아까 저들 입으로도 말했잖아? 대륙에 존재하는 종족들가운데 그 엄청난 몸집의 거인을 제하면 하얀 부리 엘프와 드워프가가장 힘이 강하다고 말야. 그런 주제에 인간인 나한테 뭘 기대하는거야? 아… 그루터기 엘프를 만났더라면 좋았을 걸. "그루터기 엘프들은 좀 가벼운 활을 써요?" "아니." 미칼리스의 대답에 나는 무슨 소린가 싶어 다시 물었다. "그럼, 그들도 당신처럼 저런 무식한 활을 써요?" 그는 내 '무식한 활' 이라는 표현에 잠시 웃었으나 곧 대답해 주었다. "그들은, 장난감을 쓰지." 쳇……. 어쨌든 하얀 부리 엘프들이 왜 활을 배우기 싫어하는지는 알아버렸다. 나는 여전히 눈에 띄지 않게 미칼리스의 활을 휘어 보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어쨌든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저 활을 배워? 저렇게 말하는 것으로 봐서… 아마, 한 번 가르쳐 달라고 하면 제대로, 그러니까 절대 중도에 포기하게 하진 않겠지? 될 때까지 계속다그쳐 가며 가르치겠지? 다시 말해, 정말 고생문이 열리는 것일까? "어이, 어이, 그런 식으로는 활을 아예 부러뜨리겠는걸?" "제가 무슨 수로 이 쇠테 같은 활을 부러뜨려요?" 미칼리스는 투덜거리는 내게서 활을 다시 받아들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휘어서 시위를 걸고는 다시 내 손에 넘겼다. "당신은 엘프가 아니라 몬스터임에 틀림없어……." 나는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어서 되는 대로 지껄였다. 미칼리스는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파비안, 네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난 너보다 그렇게까지 힘이 세진 않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어어, 정말이라고." 그가 팽팽하게 걸린 시위를 몇 번 튕기자 윙… 하는 묘한 음조의소리가 울렸다. 그는 엘다렌을 쳐다보고, 다시 유리카에게 시선을 보냈다. 뭔가 동의를 구하려는 것 같았다. "안 그래?" 그 동안 나는 미칼리스에게서 이번엔 화살을 하나 받아들었다. 화살 역시 직접 만져보니 몹시도 튼튼하고 억센 물건이다. 이 정도면거의 단창 대신으로 써도 좋을 듯했다. 미칼리스는 훌쩍 뛰어서 제일 먼저 억새밭을 벗어나더니 내게 말했다. "자넨 다만 요령이 없을 뿐이야. 활을 잘 다루기 위해선 의외로 힘만큼이나 필요한 것이 이 요령, 그러니까 도구에 대한 감각이지." +=+=+=+=+=+=+=+=+=+=+=+=+=+=+=+=+=+=+=+=+=+=+=+=+=+=+=+=+=+=+=따로 글을 올려 말씀드렸다시피, 10-1편까지 삭제는 내일입니다. 하이텔의 풍경 님, 보석을 끼울 때 보이는 풍경은 다음번 보석을찾을 수 있는 곳이냐고요..? 재미있는 고찰이셨지만, 유감스럽게도아닙니다.. ^^; (이런 세세한 데 신경 써주시는 분도 있군요. ^^)6권 발간 예정은 16일입니다. 이번엔 무슨색 띠지, 무슨색 숫자일지 저도 궁금해지는군요.(지금까지 같은 색깔이 하나도 없었죠..;)엔딩을 향해 달려가랴, 7권 마감 맞추랴, 3교(마지막 수정)보러 출판사 들락거리랴... 거기에 조만간엔 싸인회까지.. 정신이 없네요;;요샌 광고가 어디 나오는지 감도 못잡고 있습니다. 챙길 정신이 없네요. 혹시 보시면 말씀 좀 해주세요..^^;게시판에 세월의 돌 요청건에 관한 글 써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0712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1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12 22:02 읽음:109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12) 검을 처음 배울 때에도 그랬지만, 활 역시 나름대로 까다로움을 갖춘 무기이긴 한 모양이다. 하긴 뭔들 처음부터 쉬운 것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기초가 되는 힘 자체가 부족한 마당이니 활을 배우기 전에힘부터 길러야 할 거 아니겠어? "일껏 애써봤자 시위도 하나 못 거는 저는 팔힘 기르기라도 먼저시작해야 하나요?" "아냐, 아니라니까." 낮이 되니 기온이 좀 올라갔다. 비가 올 것처럼 흐린 날이라선지,날씨는 기분나쁜 후덥지근함을 머금었다. 습기가 끈적하게 달라붙기시작했다. "조금 쉬어 볼까." 별로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미칼리스는 자기가 먼저 풀밭 한쪽에주저앉아버렸다. 우리도 곧 줄줄이 뒤따라 둘러앉게 되었다. "파비안한테 활 얘기를 좀 해줘야겠는걸." 미칼리스는 더운지 긴 고수머리를 손을 훑어내리더니 리본을 하나꺼내어 묶어버렸다. 저렇게 바짝 묶어 놓으니 뒷모습은 여자처럼 보일 수… 는 없겠군. 여자로 보이기엔 미칼리스는 지나치게 큰 키와 넓은 어깨, 그리고강건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얼굴 역시 조각칼로 거칠게 깎아 놓은것처럼 선이 강하고 굴곡이 심했다. 곱다거나 연약하다거나 하는 것과는 정말로 거리가 먼 모습, 그러나 그 얼굴이 아름답지 않았느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그의 얼굴이 지닌 아름다움은 들판에 흩어진 바위처럼 자연 그대로의 존재가 가질 만한 것, 다듬어지지 않은 매력이 깃든 그런 것이다. 몇 개의 먹선만 가지고서 가장 간단하면서도 멋진 그림을 그려 내는화가가 있는 것처럼, 살아 있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조물주 역시 어떤날은 그런 재주를 부려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엄숙하면서도 친근한 입매, 강건하고 거친 선으로 이루어진 얼굴의모든 윤곽선. 그리고 그의 그런 얼굴은 위엄 가득한 겉모습과는 딴판으로 유쾌하고 질박한, 그의 성품과도 잘 어울렸다. 미칼리스는 내 쪽으로 조금 다가앉더니 불쑥 말했다. "나하고 팔씨름을 해보지 않겠어?" "에엣, 제가요?" 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될 리가 없었다. 그가얼마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지금까지 실컷 구경했단 말이다. 그런 그와, 다른 것도 아니고 팔씨름을 하자고?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야." 유리카가 발딱 일어서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팔씨름을 하려면 탁자가 있어야지." "무슨 소리야, 난 분명 안 한다고……." 그러나 하게 되어 버렸다. 황당한 일이었지만 우리가 사용하게 된 탁자는 돌도 아니고 흙바닥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다 못해 나무 그루터기도 아닌……. 엘다렌의 등이었다. "흐음, 흐음." 졸지에 탁자가 되어버린 엘다렌은 그러나 크게 불평하지는 않았다. 미칼리스 역시 그다지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조차도 덩달아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 탁자 위에 손을 올려놓게 되어 버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키가 작고 등이 넓은 데다 단단한 체격을 지닌엘다렌은… 탁자로 딱 알맞았다. 주아니만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탁자라니, 너무하잖아……."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가운데 가장 선량한 주아니의 입장이었고……. "자, 시작해야지!" 흥에 겨워 배낭들을 한쪽에 치워 놓고 나와 미칼리스의 가운데, 그러니까 '탁자' 앞에 선 유리카를 보자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 참, 묘한 생각이지만 말야, 왠지 유리카 네가 우리 가운데 가장나이가 어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네가 어린아이처럼 행동한다는 말이 아니라, 어쩐지 본래부터 그랬던 것만 같아. 마치, 너는 소녀고 나는 이미 어른인 것처럼… 무슨 기분일까? 네 나이가 내 열 배는 된다는 걸, 나 역시 이미 알고 있는데 말야. "자, 오른손을 서로 잡고." 유리카의 말대로 손을 잡긴 잡았는데, 미칼리스의 손은 거의 내 손을 다 뒤덮어 버렸다. 게다가 마치 건틀렛을 낀 손을 잡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손바닥은 단단하기 이를데 없었다. 가죽을 하나 덧댄 것같은 감촉, 이렇게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되는걸까? "나란히, 그럼 하나… 둘… 시작!" 둘의 손을 잡았던 유리카의 손이 허공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내 세워진 팔로 엄청난 힘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흡……!" 절대, 장난이 아닌데. 나는 문득 나 역시도 마을에서 팔씨름으로 져 본 일은 없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나 역시 시시한 실력은 아니었단 말야. 너무 많은 곳을 여행하고 엄청난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동안, 그걸거의 잊고는 있었지만… 후으읍! "상당한데." 미칼리스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팔씨름 자체에 소홀하지는 않았다. 나는 '탁자' 위로 드러난 그의 걷어올린 팔에서 억센근육이 천천히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좀더." "……." 그렇지만 나는 그처럼 여유있진 않다. 저절로 왼손이 다가가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지치지도 않고 파도처럼 몰려드는 힘에 나는 터지려는 둑을 간신히 막고 선 기분이었다. 처음엔 손, 그 다음엔 팔이떨리기 시작하고, 나중엔 온 몸이 전부 부들부들 떨렸다. 손목에서터질 듯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진다. "파비안, 힘내!" 유리카의 응원에 피식 웃은 것은 미칼리스 쪽이다. 그는 여전히 팔에 힘을 주면서 대꾸했다. "이거, 에즈보다는 엄청나게 나은 힘인데. 확실히 2백년 동안 발전은 있었어." "에즈하고는 팔씨름 한 일도 없으면서." 유리카의 목소리가 다시 머리 위에서 들려왔지만 신경쓸 겨를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어차피 이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끝날 때까진 최선을 다할 작정이다. 그러나 확실히……. 질 것 같아. 주아니는 엉뚱한 쪽을 응원하고 있었다. "탁자를 위해서라도 빨리 끝내라고!" 미칼리스는 주아니의 말에도 대꾸했다. 저렇게 여유로워도 되는 거야?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쉽게 이기긴 어렵겠는걸." 미칼리스는 팔에 힘을 주기 위해 온 몸에 힘을 줄 필요는 없는 모양이었다. 오른팔에서는 삐끗하면 내 팔을 부러뜨리고도 남을 정도의힘이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왼손으로는 머리를 천천히 쓸어 넘기고 있었다. 혹시, 그는 지금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는 건가? "……." +=+=+=+=+=+=+=+=+=+=+=+=+=+=+=+=+=+=+=+=+=+=+=+=+=+=+=+=+=+=+=이 글과 같이 올린 글을 쓰다가 진이 다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미지에 제 사진 올려달라시는 분들.. 저는 스캐너가 없습니다. ^^;게다가 왠지 꺼려진다는...(책하고 신문, 심지어 잡지에까지 다 공개되어 있는데 무슨 소린진 모르겠지만..;;;)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0713번제 목:◁세월의돌▷ 글 삭제와 '머나먼 바닷가' 번역에 관련된 답변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12 22:03 읽음:1240 관련자료 없음----------------------------------------------------------------------------- 다음의 글은 제게 메일로 질문하신 어떤 분에게 보내려던 대답입니다. 인터넷 아이디로 보내셨는데, 제가 보냈던 답신이 도로 되돌아 왔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그런 현상이 잦은데, 이렇게 반송메시지가 온 후에도 메일은 제대로 도착해 있는 경우도 있더군요...;;그래서 이 게시판에 올리면 보실 거라는, 그리고 퍼가시는 분들도 제가 말머리를 ◁세월의돌▷로 달아서 올리는 게시물은 모두 함께 퍼가기로 되어있으니 어딘가에서라도 보실 거라는 생각에 이렇게 올립니다. 또한, 같은 생각을 하신 분이 또 있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요... 메일 보내신 분의 성함이나 아이디, 메일 전문은 개인 정보에 속하므로 밝히지 않습니다. 메일의 내용은 대강, 제가 이번에 여러 친구들과 공동 번역 작업에 참여하여 통신망에 올리고 있는 어슐러 K. 르귄의 <머나먼 바닷가>가 저작권 위반이 아니냐는 질문, 그리고 이런 식으로 남의 글을 (그것도 제 글 말미 잡담에 의하면 '망쳐서')올릴 수 있다면 어째서 제 글 <세월의 돌>은 그렇게 삭제하고, 또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세월의 돌>도 모두 삭제하도록 횡포를 부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불법 유통물인 <머나먼 바닷가>는 삭제하도록 하라고 권고하셨지요. 또한 평소에 통신 작가들이 출판을 하게 되면 통신상의 게시물을 삭제하는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통신 독자들의 인기에 기반하여 출판한 것이면서 그렇게 삭제하는 것은 배신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글은 소중히 다루면서 남의 글은 멋대로 망쳐서 게시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는 얘기입니다. 이에 대해서 제 생각을 몇 마디 썼습니다. ------------------------------- 이하는 이번에 '머나먼 바닷가'를 함께 번역한 모든 분들이 통신상에 올리실 때 함께 올리고 있는 소개글입니다. 그중 일부 문장이 그분의 질문에 충분한 대답이 될 것 같아 발췌해서 보냅니다. -----------------------<머나먼 바닷가>의 번역을 올리며... 이번에 소개할 글은 어슐라 K. 르귄의 어스시 시리즈 3번째 권 머나먼바닷가(원제: The Farthest Shore)입니다. 웅진(이종인, 윤소영 님 옮김)에서 처음 어스시의 마법사를 소개했던 것이 93년 겨울이었습니다만, 그후 2권인 아투안의 지하무덤이 나온 후로 6년이 지난 오늘까지 다음 권이나오지않고 있습니다. 이를 아쉽게 생각한,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여긴 이들이 모여 3권을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좋은책이 알려지길 바라면서, 혹시 우리의 오역으로 르귄의 멋진 책에 누가 되진 않을까 걱정하면서 번역을 마칩니다. 처음 르귄과 어스시를 대하는 분을 위해서 간략한 소개를 덧붙입니다. 르귄은 국내에 번역된 어스시 시리즈(3대 환타지로 꼽히기도 하는;)와 sf어둠의 왼손(혹은 암흑의 왼손)으로 알려진 작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sf계에서 노벨상을 받는다면 그녀가 될 것이라고도 얘기할 만큼 물흐르는 듯한 아름다운 문장과 세상에 대한 냉정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가진 작가입니다. 어스시 시리즈는 그녀의 대표적인 환타지로 어린 소년 게드가 한 명의 위대한 마법사가 되기까지(1권 어스시의 마법사), 그리고 아투안의 무녀 아르하가 한 명의 인간으로써 자유를 얻기까지(2권 아투안의 지하무덤), 그 게드가 아렌이란 소년과 함께 어스시에 찾아온 어둠을 물리치고상처받은 세계를 치유하기 위해 떠난 험난한 여행이야기(3권 머나먼 바닷가)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이야기(4권 테하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이야기는 테하누입니다만, 이 세번째 이야기인 머나먼바닷가도 그에 못지 않게 아름답고 굳센 이야기입니다. 함께 하신 분중 한분께서는 이 세번째 이야기가 시리즈 네 권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신다고하시더군요. 그럼 머나먼 바닷가와 함께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빕니다. (참고로, 4권 테하누의 번역도 이미 끝나서 업로드되어 있습니다. 3권을읽으시고 뒷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께선 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도와주신 여러분들,처음 번역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해주신, 에밀리(Elbereth@hitel.net)님. 감사드립니다. 테하누 번역 때부터 도움을 받았지만, 이번엔 아쉽게 참여하지 못하신로키(dflee@nownuri.net)님. 그리고 학교와 직장에서, 그리고 글 쓰시느라고 아주 바쁘신데도,98년 겨울의 끝자락부터 지금껏 거의 일 년간함께 해주신 세 분,번역 작업을 함께한* 래디(radagast@nownuri.net)님* 아카라(티누비엘; acala93@chollian.net,파르치팔; Acala@hitel.net)님편집을 맡아주신* 루디엔(모래의책; enjolas@nownuri.net모래의책; enjolas@hitel.net)님이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럼 멋진 작품과 함께 즐거운 환타지 여행을... 래디님, 아카라님, 루디엔님을 대표해서호빗(꼬마호빗; frodo@nownuri.net, earthsea@hitel.net)이올립니다. ---------------------------------------------------------------------p.s. 상업적 목적과 관계없이, 몇몇 사람이 모여 연구에 의의를 두고 번역한 것이니 저작권에 문제가 없습니다만(상업적으로 사용하실 때에는 저작권법에 걸립니다. 유념해 주시길), 혹시라도 전문번역가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출판본이 나온다면, 내일이라도 지우겠습니다. 연락주십시오, 멋진출판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p.s.2 천리안의 검과 마법 동호회(go sword)과 판타지 포럼(go fants),나우누리의 환타지 동호회 환타지아(go fan),하이텔의 환타지 동호회(go fntsy)에12월 6일부터 매일 한 장씩 올라갈 예정입니다. (총 13장)이를 제외한 다른 통신망에 올리실 때는 반드시 저희 번역자 분들중한 분(래디님, 루디엔님, 아카라님, 호빗)에게 알려주시고, 허락을받도록 부탁드립니다. 또한 출처를 분명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원제- The Farthest Shore: THE THIRD BOOK OF EARTHSEA저자- Ursula K. LeGuinPUBLISHING HISTORYAtheneum edition published September 1972Junior Literary Guild edition published November 1972Bantam edition / October 1975Korean Language translation in 1999by radagast@nownuri.netenjolas@nownuri.netacala93@chollian.netfrodo@nownuri.net------------------------------------------------------------------<머나먼 바닷가 총목차>1장. 마가목 나무 The Rowan Tree2장. 로크의 선생님들 The Masters of Roke3장. 호트 타운 Hort Town4장. 현자의 빛 Magelight5장. 바닷꿈들 Sea Dreams6장. 로바너리 Lorbanery7장. 광인(狂人) The Madman8장. 열린 바다의 아이들 The Children of the Open Sea9장. 옴 엠버 Orm Embar10장. 용비열도(龍飛列島) The Dragons's Run11장. 셀리더 Selidor12장. 메마른 땅 The Dry Land13장. 고통의 돌 The Stone of Pain---------------------------------------------------------------------저자 : 어슐라 K. 르귄(Ursula Kroeber LeGuin: 1929~ )1929년 10월 21일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Ishi in Two World'와다른 책 두 권을 쓴 작가인, 어머니 테오도라 크로베와 문화인류학자인 아버지 알프레드 L. 크로베 사이에서 태어났다.1953년에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파리에 유학하던 중 알게 된 젊은 역사학자 샤를 르귄과 결혼해 딸둘(엘리자베스와 캐롤라인)과 아들 하나(테오도르)를 낳았다. <로캐논의세계(1966년)>를 발표함으로써 작품활동을 시작한 르귄은 1967년에 <어스시의 마법사>를 발표, 보스턴글로브상을 수상했고, 1971년에 <아투안의 지하무덤>을 발표, 뉴베리상 수상, 1972년에 <머나먼 바닷가>로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들은 3백만부 이상 팔린 초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이런 성원에 힘입어 1990년에 <테하누>가 발표되었다. 1969년에 발표한 <암흑의 왼손(The Left Hand of Darkness)>은 휴고상(독자인기투표상)과 네뷸러상(비평가상)을 공동 수상한 최초의 장편sf가 되었다. 르귄은 환상소설, sf 뿐만 아니라 시, 수필, 희곡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해서 활발한작품활동을 하고있다. [Hugo 1970, 1973, 1974, 1975, 1988 & Nebula 1969, 1974, 1974]-------< 여기까지입니다 >-------이만하면 저와 제 친구들이 어떤 목적으로 번역을 하고, 글을 통신망에 게시하고 있는지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글 말미 잡담에 쓰여져 있던 '망가진다'는 표현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건 뭐랄까... 일종의 겸양이었다고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솔직히 저희가 이 번역을 하는 데에는 약 1년여의 시간이 걸렸고, 오프 모임을 10번은 좀 안되게 가지면서 함께 모여 문장을 연구하고 다듬었습니다. 해석이 안되는 부분 가지고 토론도 하면서요. 저도 밤을 새워가며 꼼꼼하게수정을 보았었고요.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그렇게 부끄러울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제 글을 번역이랍시고 멋대로 '개작'해서 통신망에 올린다면 기분이 어떻겠냐고 물으셨지요. 먼저 말씀드리지만, 제 글 <세월의 돌>은 이미 독자 한 분이 영문으로 번역한 일이 있으십니다. 물론 그 독자 분은 제게 직접 글을 보내셨고, 그래서 제가 그 글을 통신망에 올려서 여러분들과 함께 보았습니다. 저는 영어를 그다지 잘하지 못해서 그 번역의 수준을 논할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다지 개의치 않습니다.(물론 많은분들이 그 분의 번역을 칭찬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외국 친구에게 보내겠다고 하셨지만 역시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래에도 말하겠지만, 연구 목적의 번역이었으니까요. 물론 이런 경우에는팬으로서의 즐거움도 포함되겠지요. 팬클럽마다 많고 많은 '팬픽'들이 모두원작가의 허락을 얻은 것이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아참, 일전에 님이 물으신 일도 해서 참고로 답변드리지만, <세월의 돌 ;영문판>을 만드신 분, 그러니까 영작하신 분은 cybgira 아이디를 쓰시는 박효진 님이지요. 그 분은 출판된 <세월의 돌> 1권 뒷면에 추천사도 써주셨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곳에 잠시 연재도 하셨는데, 어찌된 일인지 현재는 중단된 것 같네요... 연구 목적이라는 말이 위에 있었지요. 그래요, 해외의 유명한 명작 판타지들이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국내에 소개되지 않는 경우가 굉장히 많지요. 그리고 판타지 문학의 발전을 바라는 사람들로서는 그런 명작들이 소개되지못하고 있는 것이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저희의 번역은 그런 분들에게 명작 하나를 소개하려는 것이지 이것으로 어떤 상업적 이익도 얻으려 한 일이 없습니다. 위에 썼다시피 책이 출판 된다면 언제든지 지울 생각입니다. 그러나,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불법으로 글을 가져다 운영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많은 방문자들로 광고 수익을 얻기도 하며(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그외에 인포샵 등은 아예 그런 글들로 클릭당 돈을 벌어 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게시물 자체의 성격이 좀 다르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출판사 얘긴데, 이번에 번역한 분들 가운데 한 분은 어스시 시리즈에 대단한 애정을 가지신 분이라 웅진 출판사에 직접 몇 번이고 다음 권(머나먼 바닷가, 테하누)들을 계속 출판할 용의는 없는지, 한다면 언제가 되는지 문의했었습니다. 그러나 웅진 출판사 측에선 이미 앞의 두권(어스시의 마법사, 아투안의 지하무덤)이 절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찍을 계획이 없으며 뒷권 역시 조만간 출판할 계획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시일이 지났으니만큼 지금은 그 출판사도 생각이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어쨌든 아직까지 그 책들은 소식이 없습니다)웅진 출판사 측에서 저작권을 샀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나온 지 굉장히 오래된 책이라서요. 그때는 예문 출판사판 '반지전쟁'처럼 저작권계약없이도 책을 내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 먼저 번역된 테하누를 본 어떤 출판사가 번역하신 분들께제의하여 출판교섭도 오간 일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테하누는 제가 참여한 작업이 아니라서, 어떻게 그 일이 끝났는지는 잘 모르지만요. 그러니 원문을 대조해서 읽어보신 분도 아니신 듯한데 그렇게 '망쳤다' 라고 단정지으시는 것은 좀 무리한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통신 게시후 삭제하는 문제에 대해서. 예, 일부 작가는 출판 계약이 되고 난 후 연재 자체를 중단해 버리기도 했지요. 그러나 많은, 대부분의 작가분들이 그렇게 하시지 않았고, 어떤 분들은 이미 출판작을 내시고도 다음 작품을(그것도 미리 출판사와 계약까지 마쳤는데도) 다시 통신에 연재하는 성의를 보이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저도 현재 준비중인 다음 작품을 통신에 다시 연재할 생각입니다. '배신'이라는 말씀을 하시기 전에 글을 쓰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이필요할지 먼저 한번쯤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직업을 갖고 계시는지잘 모르겠는데, 다른 직업을 가지고서 이 정도로 많은 글을 쓴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더구나 저는, 직장과 글쓰기를 잠시나마 병행해 보았으므로 이 점에 대해서는 꽤 잘 알고 있습니다. 통신에 연재되는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신다면, 그리고 굉장히 느리게 올라오는 작품들이 좀더 빨리 올라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일이 있으시다면, 왜 통신 연재 작가들이 출판이라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출판이 되고 나서 글을 삭제하는 것은 저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닙니다. 출판사에게 출판권을 설정해주는 일 자체가 이미 '복제, 배포권'을 그쪽에넘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실 뒷부분을 계속 연재하는 것도 어찌보면출판사측에서 관행상 배려하고 있는 것이 되지요. 그러므로, 삭제하지 말라는 말은, 출판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얘기가 됩니다. (실제로, 출판하게 되면 더 이상 연재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출판사도 있었으니까요)나이가 어느 정도 들게 되면, 사람은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됩니다. 네, 그건 현실입니다. 글을 쓰든, 다른 일을 하든, 돈을 벌어야 제대로 된 사회생활이 가능합니다. 혹시 굉장히 부자인 부모를 가진 사람이라면 조금 나을지도 모르지만요... 더 많은, 더 좋은 글을 쓰는 일을 자기 직업으로 삼기로 한 이상, 그 직업에서 자신의 생활비를 마련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주 큰 일입니다. 많은 분들이 글을 사랑해 주시는 것은 분명 기쁘고 고마운 일입니다. 좋은메일을 받고 감격한 일도 많았지요. 그리고, 그런 분들의 사랑이 기반이 되어 출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애정만으로도 만족하고 출판 같은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되려면, 제게는 제 한몸을 먹여살릴 다른 직장이 필요하겠지요. 저는 직장과 글에 동시에 전념할 만한 능력이 없어서, 한쪽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와서 다른 직장을 구하라는 것은 저더러 글을 그만 쓰라고 하는 얘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기껏 연재해서 독자들을 확보한 다음, 읽고 싶으면 책사서 봐라... 한다고말씀하셨지만, 삭제되는 날까지는 어느 정도의 기간을 두고 있고 미리 날짜를 예고하기도 합니다.(그렇지 않은 글들도 있던 것 같지만)또한 만일 지우지 않고 그대로 글을 둔다 해도 나우누리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리넘버링을 하고 앞의 글들을 지워버립니다. 통신상에 둔다고 영원 불멸은 아니란 이야깁니다. 한 번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간직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이미 대부분 다운받아 저장하고 계실 겁니다. 네.... 직장일이나 학업 등 현실의 일에 바쁘다보니 삭제 날짜를 놓쳤다.. 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제 삭제 기간이 보통 한달 이상의 간격은 되는것같지만..... 물론, 한달이나 통신에 못 들어올만한 사정은 얼마든지 많다는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의 바쁜 사정만큼이나 저도 생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생업을 놓고 누구의 일이 더 바쁘고 안 바쁜일이냐고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겠지요. 그래서 안타깝지만 그런 분께도 저는 삭제된 글을 보내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작권문제도 있지만요)게다가 제 생각입니다만, 제 글을 읽어주시고 사랑해주셔서 출판까지 이르도록 이끌어 주신 분들은 이미 제 글을 거의 다 읽으셨습니다. 지워진 후에오셔서 1화부터 찾는 분들은 대부분 앞의 사람들과는 다른 새로운 독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독자분들은..... 유감스럽게도 출판되었기 때문에 제 글을찾는 것입니다. 만일 출판되지 않았더라면 제 글을 지우든 말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중에 찾으시는 분들 가운데 책을 사 보실 여력이 안 되는분들을 위해서(사실 저작권문제가 어떻게 되는진 모르겠지만)'대여점'이 있습니다. 또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출판사 측의 이야기에 따르면, 통신에서 글을 읽었던 독자들 가운데 책을 또 사보는 사람은 상당히 적다고 합니다. 실제 출판을 통해 얻게 되는 독자들은 통신과는 무관한 일반 독자들인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독자들은, 주로 신문의 책광고나, 신간 부스에서 우연히 책을 접하게 되는 그런 독자들입니다. 이런 독자들은 그 수가 많기 때문에, 그 가운데 몇 퍼센트에게만 선택되어도 충분한 판매고를 올릴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므로 출판을 함으로서, 저는 전혀 새로운 독자들을 많이 얻게 되는 것이기도 하지요. 이만하면 대강의 대답은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긴 답변 쓰는 시간에 글 한 화라도 더 써라... 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번 작업은 친구들과 함께 많은 정성을 쏟아가며했던 작업이었고, 그런 일의 의의가 좋지 않은 쪽으로 오해를 사게 되는 것같아 이렇게 시간을 들여 해명하게 되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마찬가지 오해를 사게 되는 것이니까요. 괜히 글 연재하는 저 때문에 함께 고생한 친구들의 기분이 상하는 일이 없기를 또한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저도 글 한 줄 더 쓰는 편이 사실 좋습니다. (^^;) 긴 글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0930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1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13 23:59 읽음:103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13) 얼굴이 일그러지고, 턱이 후들거리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미칼리스도 입을 꽉 다물더니 한층 힘주어 내 손을 꽉 잡는다. 엘다렌에게미안해질 정도로 팔꿈치들은 그의 등을 짓찧어 눌렀다. 미끄러질 것같아서 왼손으로 팔꿈치를 괴었다. 문득 보니 미칼리스도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런 것이었다. "날이 흐린데." 내 다리 아래에서 거기에 대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비가 올 것 같은 공기군." 쿠르릉……. '탁자' 가 엎드린 채로 고견을 말한지 얼마 되지 않아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쏴아아……. 나무 몇 그루만 드문드문 선 벌판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득히 내렸다. 주르륵, 주룩. 눈가를 타고 떨어져 내리는 비 때문에 금세 앞을 제대로 볼 수가없게 되어버렸다. 미칼리스와 내가 맞잡은 손 위로도 하얗게 내린 빗가루가 튀어올라 작은 안개를 만들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차가워지고, 굳어진다. 그의 금빛 머리칼에도, 내 검푸른 옷깃에도 비는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젖어들었다. "감기 걸리겠어." 유리카가 말했지만 둘 다 쉽사리 멈추려 하지 않았다. 나는 버틸때까지 버텨보겠다는 마음, 나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미칼리스는……. "그만 하지." 갑자기 그가 손을 놓아버리는 바람에 나는 거의 그의 팔을 바깥쪽으로 꺾을 뻔했다. 그러나 미칼리스는 솜씨 좋게 왼손으로 내 손목을잡고는 나를 멈추게 했다. "그만, 이 대결은 무승부로 하지." "…후우, 후우……."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미칼리스에 비해 나는 숨이 턱에까지 차올라, 호흡을 조절하지 못하고 심하게 기침을 했다. 미칼리스는소리내어 웃으며 내 어깨를 잡고 등을 문질러 주었다. 갑작스레 힘이빠지자 팔이 내 어깨에 붙어있지 않기라도 한 느낌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오른손을 내려다보니 온통 시뻘겋게 되었던손이 간신히 다시 제 색깔을 찾아가는 중이다. 손등에는 미칼리스의손이 잡았던 손가락 자국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무승부라니, 말도 안 된다. 이건 분명 미칼리스가 이길 승부였다고. "이런, 비를 피할 곳이 없겠는데." 이윽고 '탁자'도 일어나 다시 드워프로 되돌아가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만치 나무가 보이긴 하지만 이렇게 내리는 비를 피하기에 그렇게 적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와 미칼리스는 둘 다 방금까지 힘을 썼기 때문에 아직까지 추운 것을 몰랐지만, 유리카는 금방오한을 느끼는지 양손으로 어깨를 감싸안고 있었다. 미칼리스는 목을 양쪽으로 움직이더니 왼손을 들어 오른팔을 주무르고 있었다. 나 역시 갑자기 긴장했던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팔을좀 주물렀다. "파비안, 활은 힘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야. 물론 전혀 힘이 없어서는 장난감이나 만지는 것이 적당하겠지만, 네 정도 힘이면 충분히 이런 활도 다룰 수 있다. 방금 팔씨름도 그 얘길 해주고 싶어서 시작한거야. 네게 부족한 것은 요령이라고. 매번 방금 한 팔씨름만큼이나힘을 써서야 간신히 시위를 걸 수 있다면, 화살은 한 대 쏘아보기도전에 이미 녹초가 되어버리고 말걸." 그는 이윽고 손목을 풀어주려는 듯 양 손을 힘주어 털면서 다시 덧붙였다. "시위를 건 다음에 매번 이런 운동이 필요하대서야, 어디 시위를풀어 놓고 다닐 수나 있겠느냔 말이야. 위급한 상황에서 당장 써야하는 무기가 활인데." 아직은 낮이라 비가 내린다고 주위가 캄캄해지진 않았다. 우리는자기 짐을 각기 집어들고 저만치 보이는 나무 아래로 일단 자리를 옮겼다. "다시 해 봐라." 미칼리스는 내게 다시 활을 넘겨 주었고, 나는 십수 번을 되풀이해서 시위를 걸어 보려고 했지만 여전히 잘 되지 않았다. 아까 힘을 너무 많이 써선지 팔 근육도 얼얼한 게 잘 말을 듣지 않았다. "시위를 걸게 되면, 그 때 활을 계속 배울지 안 배울지 결정해서내게 말해라." 느긋하게 울리는 그의 말투는 확실히 엄한 교관의 그것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할 순 없지. 나무 아래로 들어가자 그래도 머리 위를 때리는 비는 조금 잦아들었다. 우리는 짐을 내려놓았고, 미칼리스는 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몸의 체온이 내려갈 때는 좋은 술 한 병이 최고다. 하지만지금은 한 방울도 없지. 그 다음으로는 움직이는 것인데, 어디 다음마을이 나타날 때까지 뜀박질이라도 해 볼까……?" 아… 물론 농담이었을거야. 내리는 비로 머리와 옷에서 물이 줄줄 흐를 정도인데도 아무렇지않게 움직이는 그를 보니 문득 아라스탄 호수 속의 스노이안이 떠올랐다. 그 역시 비가 오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돌아다녔었지. 그래,엘프는 자연 기상의 변화에는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었어. 내가 배낭에서 망토를 뒤져내어 유리카에게 덮어 주고 있는데 갑자기 미칼리스의 기운찬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지! 엘다 자네, 오랜만에 도끼 겨루기나 해 보지 않겠나?" 젠장, 정말 비오는 와중에 별난 걸 다 하려고 든다니까. 그러나 엘다렌과 미칼리스는 정말로 그 '도끼 겨루기'라는 걸 시작할 모양이었다. 나는 비가 오는데 몸을 덥히겠다는 그 의도보다, 방금 팔씨름을 하고도 그 팔로 다시 뭔가를 하겠다는 미칼리스 때문에놀라 버렸다. 엘다렌은 도끼를 꺼내 들었고 미칼리스는 도끼창, 그러니까 할버드를 집어들더니 빙글, 한 바퀴 돌렸다. "저, 정말로 여기서 그 '겨루기'를 하려고요?" 엘다렌은 나를 흘끗 보더니 대꾸했다. "못할 이유 있겠나." +=+=+=+=+=+=+=+=+=+=+=+=+=+=+=+=+=+=+=+=+=+=+=+=+=+=+=+=+=+=+=사인회 일정이 확정되었습니다! 12월 21일, 오후 5시 영풍문고입니다. 가즈나이트의 이경영 씨, 카르세아린의 임경배 씨, 그리고 성검전설의 홍성호 씨(..^^;)하고 같이 공동으로 하는 사인회예요. (왠지 홍일점이 되는 듯한 불길한....;;;)자, 여러분도 많이 오셔서 불안에 떠는 저의 모습을 지켜보아주시길.... 솔직히 과감하게 OK라고 하긴 했는데, 속으로는 걱정이 많이되는군요..;;사인회라는 거, 뭐 어떻게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사인만 하면 되는거겠죠? 핫핫...;;;;(음.. 사인펜은 가져가야 되나..?)나우누리 환타지 동호회에서 주최했던 행사와는 또 기분이 다르군요. 그때는 그래도 아는 얼굴이 많을 거란 생각에 그렇게까지 긴장하진 않았는데 말이에요... 뭐.. 그 행사 덕택에 사인하는 건 많이 늘었지만 말이에요... 하하...(불안하게 웃고 있다..)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1154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1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15 00:35 읽음:98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14) 둘은 빗속으로 걸어나갔고, 나와 유리카와 주아니는 졸지에 관객이되어 그들을 지켜보게 되어 버렸다. 키가 약 세 배는 차이나는 둘이마주선 것을 보자니 까닭없이 웃음이 나온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있었다. 바람이 몰아치는 날씨는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이봐, 이봐, 우리 둘 다 2백년이나 잠을 잤으니 옛날 실력은 아닐거라고. 서로 좀 봐주면서 하는 게 어때?" 미칼리스는 웃으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고, 엘다렌이 뭐라고 대꾸했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미칼리스가 곧 그 말에 대답했다. "하여간 난쟁이 친구, 저 땅딸막한 몸에 든 건 고집밖에 없다니까." 우리가 계속해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모조리 미칼리스의 목소리밖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둘의 대화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대강 옮기자면 이랬다. "뭐야, 내 다리가 긴데다 할버드 자루까지 기니까 유리한 건 당연하잖아!" "하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건가? 하여튼 할버드 자루는 하나줄이고 할 테니 그건 상관 말라고." "엘프난쟁이 영감아, 고집 그만 부려. 안 그러면 맨손으로 하자고하는 수가 있어." "정말이야? 후회할 일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우리는 곧 후회할 일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저, 정말 저런 식으로 겨루긴지 뭔지가 된단 말야?" 싸움에는 문외한이라 할 만한 주아니의 놀란 듯한 중얼거림을 배경으로 미칼리스의 활기찬 외침이 들려왔다. "그럼, 간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대한 할버드와 도끼는 빗속에서 힘껏 마주쳐갔다. 짧은 도끼에 짤막한 난쟁이, 긴 할버드에 기다란 엘프의 '몸덥힐 겸' 해보는 겨루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물론, 장난은 아니다. 쩌정! … 정말이지, 연습도 진짜처럼 싸우는 양반들이란 말야. 내 감상은 그것뿐이었지만 유리카는 한껏 목청을 높여 소리치고 있었다. "둘 다 힘내고, 잘해 봐! 이번에 하면 백 스물 일곱 번째쯤 되는건가?" 하여간 유리카는 주로 싸움을 말리기보다는 부추기는 데 소질이 있었을 뿐 아니라 취미도 있었다. 빗속에서 벌어지는 둘의 진짜같은 싸움을 보고 걱정하기 시작한 것은 주아니뿐이었다. "저러다 다치지……." 이때만큼은 엄숙하다고 생각했던 엘다렌도 미칼리스와 똑같이 무모한 유희를 즐겼다. 먼발치에서도 빗속에서 휘둘러지는 도끼와 할버드는 상당한 속도를 지니고 있었다. 정말, 빗속이다 보니 잘못 보거나, 날이 미끄러져 다칠 가능성도전혀 없는 건 아닐텐데. 목을 빼고 빗물에 젖은 눈을 비벼 가며 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나를 흘끗 쳐다보더니 유리카가 핀잔을 주었다. "파비안, 한눈 팔지 말고 넌 활시위나 걸어." 아, 내 할 일은 그거였던가? 쏴아아아아……. 비는 잘도 내렸다. 들판에 도랑 몇 개가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길게 자란 풀들 사이로빗물과 흙이 섞여 흐른다. 별다른 지붕 밑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가앉은 관객석에도 비는 줄줄 샌다. 관객이 그럴진대 공연자들의 몰골은 말할 것도 없었다. 미칼리스의 곱슬곱슬한 금발은 물에 젖어 축늘어지자 생머리에 가깝게 변하는 중이고, 엘다렌은 수염에서 물을훑어내리기 위해 자꾸만 도끼를 멈추어야 했다. 진짜 결투하는 것도아닌데 계속해서 몰아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둘은 잠깐잠깐씩 쉬며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물론 우리에게는 미칼리스의 커다란 목소리가 주로 들렸고, 가끔 엘다렌의 목소리가 높아졌을 때에는 그의큰북 같은 목소리가 들판을 울리기도 했다. "우리, 이렇게 느긋해도 되는 거야?"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느긋했다. "어쩐지 방랑자 아룬드의 비가 인도자 아룬드의 비보다 더 따뜻한것 같은 느낌이 드는걸." 유리카가 나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응, 인도자 아룬드에 비를 맞던 때에 비해서 지금이 평화롭기 때문일까?" 보통은 인도자 아룬드의 비가 대지의 생물을 키우는 풍부한 비이고, 방랑자 아룬드의 비는 고독하고 우울하며 차가운 비이다. 인도자아룬드에는 비를 맞아도 잘 감기에 걸리지 않지만, 방랑자 아룬드에잘못 비를 맞았다가는 바로 몸살이었다. 가을이 가까워지는, 점차 싸늘해지는 날씨의 비니까 그런 거겠지. 그렇지만, 인도자 아룬드에 우린 세르무즈 군대의 추적을 피해 쉬지 않고 들판을 달려가고 있었어. 많이 떨었었고, 또 춥고 고통스러웠던 비였지. 지금은? "거봐, 너나 나나 예전 실력이 아니라니까! 벌써 몇 번 미끄러지는거야, 이거?" "……그런…… 변명… 라." 대강 무슨 말인지 알 만하군. "야, 잠깐! 다 좋은데 머리카락에 물 좀 짜고 하자!" "……." 둘은 잠시 무기를 바닥에 내던지더니 각자 머리카락과 수염의 물을훑어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사실 말로 하니 간단한 것이지, 굉장히 우스운 장면이었다. 미칼리스는 아가씨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머리카락을 한쪽 어깨 안쪽으로 쓸어내려서 손에다 둘둘 감기 시작했고, 엘다렌은 마치 빨래를 짜는 것처럼 수염을 비틀어 짰다. 둘 다남의 눈은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여기서야 볼 사람이라곤 두 사람과 한 로아에밖에 없으니까. "다시 해 볼까?" 둘은 거의 동시에 튕기듯 다시 무기를 잡았다. 나야 엘다렌의 결투솜씨를 본 일이 있으니 그가 번개같이 도끼를 다루는 것을 알고 있지만, 미칼리스가 할버드를 풍차처럼 휘두르는 모습도 확실히 장관이었다. 이 비가 내리는 속에서도 둘의 무기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흩어지지 않고 생생하게 들렸다. 유리카가 망토 자락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저들은 처음엔 정말로 지독하게 싸웠었어. 지금은 장난으로 저러고 있지만, 저 휘두르는 무기에 살기를 더했다고 생각해 봐." "내 눈엔 지금도 충분히 살기를 띤 걸로 보여." +=+=+=+=+=+=+=+=+=+=+=+=+=+=+=+=+=+=+=+=+=+=+=+=+=+=+=+=+=+=+=뭐랄까요....요즘의 전개에 대해서 달갑지 않게 생각하시는 독자분들이 있으신 것 같아요. 하이텔에서 한 분의 글을 읽고 '내가 정말지금 글을 부실하게 쓰고 있나'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음...음... 결론은, '잘 모르겠습니다' 네요....;;그런 게 있어요. 저는 예전에도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 일행이 이상한 우연들로 상황이 꼬이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답니다. 은하철도999에서, 메텔과 철이가 괜히 어느 별에 내렸다가 꼭 승차권 잃어버리고 난리치는 것 보면서 저는 치를 떨었어요..(부르르...) 안 내리면 될걸 괜히 내려가지고.... 이런 점에서 제가 쓰면서 희열을 느꼈던 장면이 두 군데 있어요. 하나는 일행이 푸른 굴조개 호를 타고 가다가 아이즈나하 항에 기항했을 때, '내렸다가 무슨 일이 생겨서 시간을 어기면 곤란하니까 내리지 말자'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지요....--;; 정말 전 이 장면을 쓰면서 속으로 득의만만하게 키득키득 웃었습니다.(제정신이 아니군..)그리고 또 하나는 여명검의 고향을 찾아가고 나서 빠져나오려다가 동굴에서 반대편 통로를 보고는 저길 가볼까? 하다가 귀찮아.. 하고는그냥 나오는 장면이지요. 괜히 그런데 가봐서 좋은 일 생기는 꼴을저는 못 봤거든요. 어느 얘기든지 간에.... 정말 그런데 갔다가 누가죽기라도 하면 전 TV 꺼버립니다. --; (홧병 도진다..)대신, 저는 본격적 갈등이 시작되기 전의 평화로운 장면 있죠? 뒷동산을 뛰어올라가는 주인공이라도 나오면서...(--;) 그런 장면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런 장면은 항상 너무 짧더군요. (흑흑.. 금방 악당이든 뭐든 나타나서 평화를 망쳐 놓습니다. 저는 정말 죽이고 싶어집니다..--;) 쓰면서 굉장히 즐거웠던 장면중 하나가 별과 검의 노래 호를 타고 처음 이진즈 강 여행을 시작할 때거든요. 뭐어... 제 취향일 뿐이니까, 취향이 이야기를 망쳐 놓아선 안되겠지요. 혹시라도 지금 흐름이 깨지고 있는지, 늘어지고 있는지, 잘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세월의 돌은 점차 암울한 방향으로 가고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제가 조금이라도 평화로운 상황에 집착하고싶어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찰나의 평화....에 불과할지라도.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1273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1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15 23:33 읽음:80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15) 내 대신 주아니가 대답했고, 그래서 나는 새삼 다시 그들을 쳐다보았다. 마침 두 도끼날이 허공에서 맞부딪친 참이었다. 번쩍, 마치 번개가 내리친 것처럼 빗속에서 날카로운 불꽃이 튀어올랐다. 세상에. 확실히, 끔찍한 장난임에는 틀림없어. 나는 그 동안 무심결에 계속 손을 놀려 활을 구부리려 애쓰고 있었다. 활은 걸릴 듯 걸릴 듯 하면서 자꾸만 손에서 뱀장어처럼 빠져나갔고, 나는 거의 반쯤은 체념한 채로 활줄을 되풀이해서 당겼다. "다시!" 두 개의 도끼날은 힘껏 다시 부딪쳐갔다. 보통 도끼였다면 날이 몽땅 나가고도 남았을 정도로 완벽한 날끼리의 마주침이었다. 즈즈… 쩡! "다시 감각이 돌아오고 있는데? 좋았어!" 나는 둘 중에 누구의 실력이 좋은지 모른다. 예전에 백 몇 번이나싸웠다는 동안 누가 몇 번 이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내 눈으로 보이는 둘은, 확실히 세상에서 다시 보기 힘든 전사들의 모습이었다. 나는 모른다. 누가 더 나은지. 누가 이기게 될지. 그리고 비록장난이라 하더라도 그 가운데 누군가 하나쯤 다치게 될는지도. 속도는 점차 빨라지고 있어! "차하!" 이제는 대화보다는 힘껏 지르는 기합이 비가 쏟아지는 들판에 울려퍼졌다. 보는 내 손에서도 땀이 흐르려 한다. 추운 것? 벌써 잊었다. "미카! 거리 조절을 잘하란 말야!" 그 가운데서도 유리카는 뭘 보고 하는 말인지 하여간 소리를 질러가며 주의를 주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그들만큼의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는 빠른 칼을 쓰는 만큼 시선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빨랐다. 우르릉…. 하늘이 곧 천둥을 토해 낼 듯,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린다. 비는 점차 세찬 바람으로 기울어지고, 비스듬히 비껴져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람을 받은 비의 방향은 엘다렌에게 유리했다. 미칼리스는 얼굴에사정없이 몰아치는 빗물을 떨어내려 고개를 흔들어 가면서도 여전히자신만만하게 할버드를 휘두르고 빈틈을 노려 단숨에 몰아쳐갔다. "미끄러진다!" 오랜만에 커다랗게 울린 엘다렌의 외침. 미칼리스는 그 말에 내려밟으려던 걸음을 간발의 차이로 돌렸다. 물이 촤악, 튀어올랐다. 우르르르릉… 콰쾅! 번쩍, 하늘을 찢는가 했더니 벼락이 내리꽂힌 것은 들판 저 너머의나무다. 이제 그만하면 말려야겠다 싶어서 몸을 일으키는데 뒤에서손이 나와 내 손을 잡고 끌어당긴다. 유리카였다. "말리지 마." "저러다 다쳐! 상처는 고사하고 벼락을 맞으면 어쩌려고……." 내 얼굴을 바라보는 유리카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봤자 저들 팔자 소관이야. 우리는 못 말려." "왜?" 그녀는 어깨를 약간 움츠리더니 말했다. "에제키엘이 있을 때에도… 못 말렸어." 촤촤좌자악! 미칼리스의 할버드가 엘다렌이 뛰어 피한 흙바닥을 날카롭게 찢었다. 놀랍게도 흙탕물이 빗속으로 거의 1큐빗은 튀어올랐다가 흩날렸다. 둘은 이미 바지와 소맷자락까지 모조리 진흙투성이가 되었지만여전히 방금 시작한 것처럼 멈추려 하지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빠른 동작들이다. 내 눈으로는 따라가는 것조차 힘들다. 피하는가 하면 어느새 달려들고 있고, 내리쳤는가 했더니 다시펄쩍 뛰어 물러난다. "……." "……." 들판에 수십 개의 내와 강을 만들며 비는 내려흘렀다. 미칼리스의뺨에도 커다란 진흙 얼룩이 생겼고, 엘다렌은 아예 목 아래로 온통진흙투성이였다. 그런데도 둘은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아니 무엇 때문인지 멈출 수 없는 그 무기들을 계속 휘두르고 휘둘렀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던 때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즐거운 일일수 있을까? 쿠르르르릉…. 쏴아아아아…. 유리카가 내 손을 찾아 쥐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걱정 마. 저들은 스스로와 상대의 실력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 서로를 다치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백 몇 번을 되풀이해 싸우는 동안… 누가 더 많이 이기고 졌었지?" 내 눈으로 보기에 둘은 도저히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둘 중 누구도 감히 따라갈 수 없으니만큼, 그들의 실력차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비가 오래 내릴까." 유리카는 내 질문을 잊어버린 것처럼 엉뚱한 소리를 하며 일어나더니, 나무 줄기 쪽으로 다가가 젖은 껍질들을 쓰다듬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의 일이었다. 위잉…. 어어? 언제 이 줄이 여기에 걸려 있었지?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손이 걸어버린 활시위를 보고 당황해서 입을벌렸다. 다시 한 번 튕겨 보았다. 여전한 소리, 윙……. 이게, 정말 내가 건 거란 말이야? "파비안, 화살도 한 번 메겨 봐. 응? 어서." 주머니 안에서 주아니가 재촉하는 말에 나는 얼떨결에 일어나 미칼리스의 화살통으로 다가갔다. 유리카가 나무 줄기에서 몸을 돌려 기댄 채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화살통에서 화살을 하나꺼냈다. 날카로운 은촉, 단창만큼이나 억센 대. "……." 나는 모든 동작이 서툴렀다. 어느 손으로 어디를 잡아야 할 지도몰랐다. 몇 번의 실패, 손을 이리 바꿨다 저리 바꿨다 하며 간신히활을 잡고, 화살을 어느 정도 비슷하게 메겼다. 틀릴 지도 몰라. 하지만 이런 것이란 거… 대강은 알 것 같아. 화살 오늬를 천천히 시위에 메겨 당기는 순간의 그 기분이라는 것은……. "파비안!" 어디선가 내 귓가에 들려 온 외침. 그러나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시윗줄을 당긴 채 천천히 겨냥을 들판 쪽으로 돌렸다. 내 눈앞에서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와, 그 끝에 저 먼 허공으로 날아가기 위해 잔뜩 도사리고 있는 반짝이는 은촉이 보인다. 사나운 발톱. 떨리는 살. 시(矢). "……." 손바닥을 울리고 있는 묘한 감각. 짐승의 근육이 떨리는 느낌. 가을비를 쏟아내고 있는 검푸른 하늘. 놓았다. +=+=+=+=+=+=+=+=+=+=+=+=+=+=+=+=+=+=+=+=+=+=+=+=+=+=+=+=+=+=+=밤샐 일이 줄줄이네요. 이젠 아주 퀵서비스로 교정지를 보내질 않나.... 별 짓을 다 해 봅니다. --;6권은 내일 나옵니다. 당일 서점에 깔린다는 보장은 없지만요..;매 권을 약 12일 간격....으로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엄청나게 촉박합니다. 엔딩을 못 낸 제 입장에서는..T_T)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1382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1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16 22:15 읽음:56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16) 쉬이이이익! 동시에 내게로 몇 개인가의 시선이 돌려진 듯했지만 나는 잘 느끼지 못했다. 단단히 당겨졌던 긴장을 풀어버리는 간단한 손놀림 하나. 화살은 제비처럼 튕기듯 날아올라 다음 순간에는 이미 내 시야에서벗어나 있었다. 나는 화살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몰랐다. 다만, 마지막으로 화살이 내 손을 떠나면서 짧게 내지른 비명 같은 소리만은 귓가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저……." 빗소리. 여전한 빗소리. "파비안 녀석, 확실히 희한해." "활을 만져본 것은 처음이라고 했나?" "믿을 수가 없어." 엘프 하나, 드워프 하나, 인간 하나는 한 마디씩 차례로 한 다음에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한참만에 로아에 하나도 입을 열었다. "배고파." 주아니는 여전히 실질적인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 나는 무안한 것도 감출 겸 투덜거렸다. "예전에 유리카가 말하길, 미칼리스와 함께 다녔을 때는 저녁거리걱정 같은 건 안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미칼리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불가로 다가앉았다. "그건, 사냥할 짐승이 있는 곳일 때 얘기야."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그러나 그나마 모닥불이라도 있는 것도 사실은 미칼리스의 덕분이었다. 그는 지형을 살펴보고는 어느 즈음에 나무들이 있을지에 대해서 대강 짚어 주었고, 그것은 또한 신기하게 맞아떨어졌다. 탁, 타닥. 어둠 속에서 발갛게 달아오른 모닥불은 젖은 공기를 태우느라 매캐한 연기를 냈다. 비가 멎은 것은 그다지 오래 전의 일이아니었다. "에… 에취!" 유리카가 심하게 재채기를 하더니 모닥불에 나무를 더 집어넣었다. 우리가 기껏 먹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빗물을 받아 모닥불에 끓인따뜻한 물이 전부였다. 좀전에 유리카의 제안으로 젖은 건량을 물에넣고 끓여 보았더니 그것 참 고약한 맛을 가진 죽이 되어서 거의 코를 쥐고 먹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거라도 먹는 게 어디야. 굶고 자면 병난다고." 유리카의 조금은 억지스런 주장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준것은 당연히 미칼리스였다. 그는 일단 노력이라도 했다는 것을 평가하는 데에는 항상 후했기 때문에, 기껏 만들어 놓았더니 맛이 없다고불평할 엘프가 아니었다. "아까도 봤듯, 엘프는 자연의 상태를 살피는데 항상 능하지." 내 말에 대꾸한 것은 미칼리스가 아니라 엘다렌이었다. 마치 그 말은 자연을 어린아이처럼 돌본다는 듯 들렸지만, 꼭 틀린 말인 것도아니었다. 미칼리스는 정말로 풀잎 하나를 보고 근처 흙의 상태를 알아냈으며, 해 지는 모양을 보면 다음 날의 날씨를 알았다. 그러므로나무와 들판의 모양만으로도, 그는 이 근처에 어떤 들짐승들이 살고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렇다고 해서 그 능력이 지금 우리의 배고픔을 달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물이라도 더 마셔봐." 그 와중에 엘프는 음식조차 많이 먹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 중 누구보다도 활기가 넘쳤다. 거기다가 그가 지금 어떤 모양새를하고 있느냐 하면… 인간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도저히 가능하지조차 않을 복장… 그러니까……. 그는 웃통을 전부 벗고 있었다. 비가 오고 지금처럼 차가워진 날씨에! 세상에, 인간이었다면 다음날 아침 동료들이 떠메고 가도 시원찮을 행동이라고. … 안 춥나? "안 추워요?" "으응?"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거겠지만, 나는 저절로 웃음이 푹 터졌다. "푸핫…." "왜 그래?" 뭐, 그렇게 건장한 몸―게다가 지금은 웃통을 벗고 있기까지 하다!―에 남자다운 얼굴을 한 그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싸매어 감아올린 것을 보고, 내가 웃는대도 날 원망할 처지가 아니라고. 게다가 심지어 하얀 수건이었다. "아, 아니라고요……." 그러나 말해 봤자 소용없었다. 그는 자기의 긴 머리카락을 싸매든묶든 땋든… 심지어 리본을 달지라도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그런 걸로 내가 웃는 것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그 하얀 수건이 자기가 준비해 갖고 다니는 거였겠어……. 어쨌든, 그는 마치 아이처럼 무릎을 세우고 턱을 괴더니 말했다. "인간들한텐, 좀 추울 수도 있는 날씬걸." 머리 위에 차갑고도 검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다. 눈앞에 타고 있는 붉은 불빛, 거기에 둘러앉은 동료들. 나는 내가 낮에 만졌던 활을 문득 쳐다보았다. 그것은 다시 시위가풀린 채 얌전히 화살통 옆에 세워져 있었다. 화살, 그래, 내가 쏘았던 그 화살. 그거 되찾지 못했었지. 모두가 보고 있었는데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사라져 버린화살. 마치, 다른 세계로 가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 꼴로 마을을 찾았었대도 아마 환영받긴 힘들었을걸." 유리카의 말에 우리 모두는 동감이었다. 좀전까지 우리, 특히 엘다렌과 미칼리스의 '몰골'을 이루는데 한몫 했던 옷가지들은 지금 한쪽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널려 있었다. 시냇물도 강도 발견하지 못해서결국 빗물에 대강 헹구는 걸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직도사실은 흙투성이나 다름없었다. 하긴, 우리도 조금 건강이 받쳐준다면 미칼리스처럼 옷을 벗고 있는 편이 여러 모로 나을지도 몰랐다. 왜냐면, 갈아 입을 옷조차 모조리 젖어 버렸으니까. 지금 나와 엘다렌, 그리고 유리카는 단지 흙이 묻지 않았다는 한가지 이유로 흠뻑 젖은 새옷을 입고 있었다. 모닥불가에 앉아 있자니무릎이라든가 팔 같은 데는 대강 말랐는데, 등이나 엉덩이 쪽은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럴 때야 단벌로도 끄떡없는 주아니가 부럽지. 암, 부럽고말고. "우리 모두, 잠시 뒤돌아 앉아서 옷이나 말려보는게 어때?" +=+=+=+=+=+=+=+=+=+=+=+=+=+=+=+=+=+=+=+=+=+=+=+=+=+=+=+=+=+=+=저도 춥군요.... 세월의 돌 홈페이지 갤러리가 약간.. 업데이트되었습니다. 구경가세요. ^^(fairytale.pe.kr)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1568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1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18 00:21 읽음:1511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17) 미칼리스의 제안으로 우리는 모두 모닥불을 등지고 앉게 되었다. 캄캄한 들판 쪽을 보초 서는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어둠은 들짐승처럼 들판 너머에서 가만히 웅크린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사방팔방 이렇게 텅빈 곳에서 야영을 해보긴 처음인 것 같은걸. "어때, 그만하면 활이 힘으로 쏘는 것이 아니란 것쯤은 알겠지?" 지금은 미칼리스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지만,낮에 내가 활을 쏜 직후 다가왔던 그는 결코 그렇지 않았었다. 그는내게서 활을 넘겨받은 후에도 한참이나 내가 건 시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고, 이윽고 무겁게 입을 열어 말했다. "자네, 무서운 사람이었군 그래." 그리고 나는 몸을 돌린 채, 지금 다시 저렇게 묻는 미칼리스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붉은 불빛 가운데서도 그의 눈은 생생한 푸른빛을 발했다. 마치 그의 눈동자 속에서만 하늘이 개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다시 해내는 것은 어려운데요." "하핫,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누구나 그렇게 다들 단번에 될것 같으면 세상에 어려운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금방 그의 목소리는 유쾌한 톤으로 변했다. 모닥불에서는 불똥이신나게 튀어오르다가 허공에서 서로 부딪쳐 부서지며 다양한 무늬를만들어 내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신기해." 나는 싱긋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저런 얼굴의 인간 전사에게서는도저히 느낄 수 없을 순수한 인상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내 활… 내게 세르네즈의 푸른 활이라는 별명을 만들어준 물건. 내가 이걸 처음 만들었던 것이 약 1백살 정도 되었을 때니까 벌써 6백년은 넘은 물건이지. 아직까지 이 활의 시위를 걸고 제대로 만질수 있었던 것은 나 이외엔 없었는데." "아니, 그런 걸 놓고 저한테 시위는 힘으로 거는게 아니라는 둥,그런 소릴 한 거예요?" 어이가 없어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칼리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냐아냐, 사실 내 활이니만큼 누가 만져볼 기회가 그렇게 많았던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잘 걸었잖아? 난 이렇게 말하면 네가 해낼줄 알았단 말야. 역시 생각대로였는걸?" "뭐예요?" 이거 이 양반, 아예 나를 시험했군 그래. 미칼리스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다시 물었다. "그래서, 활은 배울 테냐? 어떻게 할 거야?" "그게……." 확실히 활을 처음 쏘던 순간, 손바닥과 시위를 당긴 팔에 느껴지던특이한 떨림이란 상당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것만 생각하면배워보는 것도 꽤 괜찮을 듯했다. 그렇지만, 난 역시 게으른 건지 사서 고생이란 건 싫은데. 좀더 생각해 봐야겠다. "내일 아침까지 생각해 보고 결정해도 돼요?" 미칼리스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절대, 악독한 교관같지는 않은얼굴로. 등이 따뜻해지자, 조금씩 졸립기 시작했다. 옷이 쭈글쭈글하게나마대강 마르고 나자, 우리는 머리 위 나뭇가지에 널어 놓은 담요들도걷어서 만져 본 다음 바닥에 펼쳤다. 대강은 말랐지만 내일 아침이면다시 이슬로 축축해지겠지. 그래도 잠을 안잘 순 없잖아. 추운 밤이 되겠구나. 담요 안에 기어들어가 누워 있는데 내 옆에 있던 유리카가 조용히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파비안." "응?" 누워 있으니 목소리가 이상하게 잠긴 것 같다. "에즈 말야……." "에제키엘? 왜?" 그녀는 잠시 사이를 두더니 다시 말했다. "미카의 활을 처음으로 사용했던 다른 사람, 바로 에즈였어." "에제키엘… 활도 쏠 줄 알았어?" 놀라서 대꾸하는데 유리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물론 에즈는 너처럼 시위를 직접 걸 만큼의 힘은 없었고, 그냥 활만을 쏜 거였어……. 그런데 그가 장난처럼 처음 쏘았던 화살도… 다시 찾을 수가 없었어." "……." 묘한 기분. 어떤 상황에 접했을 때, 언젠가 한 번 했던 일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에제키엘과 나는 엄연히 다른사람, 내게는 다른 상황일 뿐. 그러나 2백년을 뛰어넘어 온 미칼리스와 유리카, 엘다렌이 느끼기에는… 어쩌면 같은 상황이 한 번 더 되풀이된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몰라. 그들은 나보다도 훨씬 놀라 있었으니까. 똑같은 활쏘기, 그리고 잃어버린 화살. "너는 에즈하고 아주 비슷해……." 나는 싸늘한 한기를 느끼며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래서 에즈도 활을 배웠니?" 유리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미칼리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럼, 저는 활을 배우기로 하죠." 나 역시도 이런 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미칼리스는 대단히 엄숙한 선언이라도 들은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끄덕거리며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금빛 머리카락은 굉장히 빨리 말라서 벌써 곱슬곱슬한 결이 살아나는 중이었다. 잘 빗어지지 않은 그 머리카락은 부석부석 뒤엉킨 것이 마치 머리 위에 금빛구름이라도 내려앉은 것처럼 보였다. 내 머리는 아직도 아침 이슬에 젖어서 머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데 말이다. "그래, 좋지." 그는 아주 쉽게 대답했다. 나는 마음 좋은 이웃집 형처럼 그렇게대답하는 그를 보며 문득 그 역시 하얀 부리 엘프족의 수장이었다는사실을 떠올렸다. 그에게선 엘다렌과는 달리 왕으로서의 위엄 같은것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딴생각을 하는 내 귀에 뜻밖의 이야기가 들려 와서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럼, 넌 대신 나한테 뭘 가르쳐 줄 거지? +=+=+=+=+=+=+=+=+=+=+=+=+=+=+=+=+=+=+=+=+=+=+=+=+=+=+=+=+=+=+=저... 사인회는 21일이고, 수요일이 아니라 화요일입니다.;;하긴... 저도 최근에 계획표를 짜다가 날짜를 이틀이나 헷갈렸습니다. 날짜 감각이 영 없는 건가...12일쯤에 오늘은 14일이야! 하고 당연하게 써 넣었다는...(결국 세 번이나 다시 짰습니다;)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1694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1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18 23:56 읽음:136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18) "네?" 내가 그를 가르쳐? 도대체 뭘? 그러나 미칼리스는 전혀 농담을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바라보며 정말 내가 뭔가 좋은 것을 제시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기대를 담은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도대체 뭘? "이, 이것 봐요… 혹시나 내가 당신한테 정말 가르칠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나야말로, 이것 봐."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엘다렌과 유리카는 대강 떠나기 위해 짐을정리했다. 남은 모닥불을 끄고, 배낭을 챙긴 다음 유리카는 커다란목소리로 뜨거운 물이나 한 잔씩 마시고 가자고 말했다. "그, 그래……." 물컵을 받아드는 동안 잠시 생각할 여유가 있었지만 여전히 해답은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미칼리스는 하려던 말을 꺼냈다. "이것 봐. 너와 나는 살아온 생애가 달라. 너는 이번에 19살이 되었다고 했지? 나는 비록 7백 살이 넘었지만 너와는 전혀 다른 삶을살았어. 너는 네 19년 동안 나와 다른 것을 배운 일이 한 번도 없단말이야?" "그렇지만… 내가 배운 것들이 미칼리스, 당신한테 쓸모 있으리란보장이 어디 있어요? 당신은 훌륭한 전사인데다……." "무슨 소리야. 세상에 쓸모 없는 재능이 어디 있나." 물을 마시니 몸이 따뜻해지면서 조금은 기운이 났다. 비록 어젯밤부터 아침까지 쫄딱 굶은 셈이긴 하지만. 미칼리스는 자기 짐―거의 짐이랄 것도 없는―을 집어들면서 말했다. "우리 일족에서는, 일방적인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아. 네가 내게 가르쳐 줄 것이 없다면, 나 역시 너에게 아무 것도 가르칠수 없어. 한쪽에서만 베푼 가르침은 결국 둘 사이에 필요없는 빚관계, 즉 위계질서를 형성하기 마련이지. 내 천성은 그런 것을 용납 못해. 네가 내 아랫사람이 아니듯, 난 네 윗사람이 아냐. 그러니까 잘생각해 봐. 네가 19년 동안 배운 것이 무엇이었는지. 남에게 줄 수있는 것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면, 참으로 쓸모없는 인생이라 하겠지." 벌판을 걸으며 생각해 봤지만, 이건 정말로 어려운 요구였다. 책에 나오는 인간 스승들처럼 '내 제자가 되기 위해선 3년 동안 밥짓고 물긷고 나무하고 마당 쓸어라' 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뻔했다. 3년이 지난다 해도, 스승이 될 정도로 대단한 사람한테 가르칠 만한재주를 어디서 얻어 온다는 게 쉬운 일인가? 솔직히 나는 혹시라도이런 식의 요구, 그러니까 하다못해 하루 백 번씩 시위를 걸었다 풀라든가 하는 그런 훈련 과정이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처음에 배운다고 말하기를 망설였었다. 그러나 미칼리스는 마치 내가 그런 걱정을 했던 것에 대해 일부러 벌이라도 주려는 것처럼 전혀 엉뚱한 문제를 냈다. "어때, 생각해 냈나?" 점심때가 될 때까지 미칼리스는 이제 이 문제로 나를 놀리기까지했다. 나는 볼이 부루퉁해져서는 생각하는 중이니 참견 말라고 쏘았다. 물론 생각한다고 대안이 서리란 보장은 조금도 없었지만 말이다. "미카, 여긴 점심 거리가 좀 있을 듯한데." 엘다렌이 문득 걸음을 멈추며 한 말이었다. 내 표정을 구경하느라한눈을 팔고 있던 미칼리스도 덩달아 멈추어 섰다. "흐음, 과연 그런데." 여전히 히스풀이 길게 자란 들판의 연속일 뿐이라 나는 뭐가 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유리카가내 팔을 툭툭 쳤다. "저기 봐, 저기." 뭔가가 지나간 흔적인가? 히스 틈새로 엘다렌이 있는 쪽을 바라보니 저만치 풀을 헤치고 간자국이 길게 난 것이 보였다. 하긴, 엘다렌이 발견한 거니까 저렇게실질적인 것일 가능성이 크지. 엘다렌은 엘프가 아니라고. 엘다렌이 입을 열어 내 예상을 뒤집어 버렸다. "주아니가 말해 주더군." 하, 하긴……. 그런데 풀을 헤치고 간 자국이 커서 나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설마 또 멧돼지? 또… 라고는 하지만 사실 한 번밖에 본 일이없군 그래. 이런 들판에 뭐가 살고 있는 걸까? 게다가 저렇게 크다니. "그럼, 활을 좀 써 볼까." 나는 미칼리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시위를 걸고 화살을 하나 뽑아메기는 동작의 유연함에 감탄했다. 내가 저렇게 하려면 얼마나 오래걸릴까. … 그것도 배울 수 있게나 되고 난 다음의 얘기지. "아, 따가워." 길게 자란 히스풀들은 그새 어제 내린 물기를 걷어내고 날카롭게날이 서서 드러난 피부를 찔렀다. "그런데 말야, 파비안." 미칼리스는 그다지 긴장하거나 하지는 않은 채로 내게 말을 걸었지만, 나는 짐승의 흔적을 발견하고 나자 그렇게 느긋할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왜요?" "자네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져." "에에?" 당황한 나머지 내 목소리는 약간 이상하게 튀어나왔다. 내가 재차묻기 전에 그는 다시 말했다. "너무, 에즈와 닮은 점이 많거든." "……." 내 말문을 막히게 하는 소리. 문득 이렇듯 어디선가 나타날 지도 모르는 짐승의 소리에 귀를 곧추세우고 긴장하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 처음 존재했던것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 어디선가 한 번 있었던 일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게 에제키엘이 아니라 하더라도,그 어떤 다른 생명이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한 마리 짐승으로서 이 들판을 헤매었을지도 모를……. 딸랑……. 문득 들려온 소리에 나는 잔뜩 긴장시켰던 어깨를 아플 정도로 바짝 움츠렸다. 무슨 소리, 무슨 소리지 이건? 방울 소리……. 딸강, 달그랑……. 이미 방울 소리에 한 번 당한 경험이 있는 나는 거의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질 정도로 흠칫했다. 근육이, 마치 활시위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무슨 소리야, 이건?" +=+=+=+=+=+=+=+=+=+=+=+=+=+=+=+=+=+=+=+=+=+=+=+=+=+=+=+=+=+=+=날씨, 정말 춥군요.... 매일 이런 식이라면 겨울 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어요. 한겨레 신문에 사인회 광고가 난 것을 봤네요. 휘유... 묘한 기분이에요. INMYRAIN 님께, <머나먼 바닷가>의 1부 격인 <어스시의 마법사>는말씀하신 그 이야기가 맞습니다.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지만 시골 서점 같은 덴 어느 구석엔가 숨어있기도 하더군요... 아니면 시립 도서관 같은 곳에 가보시든지요. ^^; 그 책들을 낸 웅진 출판사 측에도재고가 없다고 알고 있거든요. 여관 아가씨 이니에 히르카이에가 유리카와 귓속말한 내용은 이미등장했답니다. 음... 6권에는 나오는걸요. ^^들무새05 님께, 7장은 며칠 전에 출간된 6권에 실렸습니다. 7장 몇편의 2에서 10까지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7장의 앞부분 일부는 5권에, 나머지는 6권에, 그리고 앞으로 출간될 7권에도 일부 들어갈예정입니다. (7장은 깁니다..)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1847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1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19 21:42 읽음:134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19) 미칼리스의 꼬리 긴 눈썹이 꿈틀, 움직이고 유리카의 손이 검손잡이로 가는 것도 눈에 띄었다. 나는 다시 내 주머니 안으로 와 있는주아니에게 물었다. "무슨 다른 소리, 들리니? 방울 말고." "발소리. 발굽 소리." 뒷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발굽 소리?" 그러나 다음 순간, 주아니에게 뭔가 묻고 있을 필요는 없어져 버렸다. 달강, 달강, 따그랑. 하긴, 어딘지 모르게 전에 들었던 날카로운 황금 방울의 소리와는다르게 느껴졌었다. 아주 한가로운 듯한, 그리고 조금은 투박한 방울소리. 그리고 그 소리의 주인공이, 풀더미 속에서 우리를 향해 불쑥고개를 내밀었다. 엘다렌의 어이없어하는 한 마디. "소잖아?" 소였다. 갑자기 이 들판에 소라니? 쳇, 젠장, 그것도, 길잃은 소였다. "……." 우리는 우울하고 맥이 빠진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허허거리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소는 목에 방울 뿐 아니라 코뚜레까지 달려있는 소, 그러니까 완벽하게 '주인 있는 소'임에 틀림없는 모습이었다. 뭐가 불만이냐고? 젠장, 잡아먹을 수가 없잖냔 말이다! "근처 마을에서 고삐가 풀려서 나왔나봐. 어디에서 온 녀석일까?" 유리카는 가만가만 다가가 고삐를 잡고는 소 목을 어루만져 녀석을금방 얌전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고 보면 소는 본래부터 사람에게익숙한 것처럼 처음부터 우리를 그다지 경계하지도 않았고, 특히 유리카가 쓰다듬는 손길에 만족한 듯 가만히 있다가 '무우…'하는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래 봤자 아무 소용 없다. 먹을 수도 없는데길을 들여 봤자잖아. 아… 갑자기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배가 더 고파……. "다음 마을까지 끌고 가지 뭐." 미칼리스는 멋쩍은 표정으로 활을 내린 채 어깨를 으쓱하며 순하게생긴 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엘다렌은 소 궁둥이 쪽으로 돌아가 낙인이 있는가 살펴본 모양이었다. 갑작스런 뒷발 공격에 차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는 소 궁둥이를 살펴보더니……. "으음……." … 불쾌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소는 갑자기 그 자리에서 몇 덩이의 똥을 누기 시작했다. "……." "……." "뭐, 뭘 어쩌라는 거야……." 내, 냄새도 만만찮군……. 엘다렌은 약간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관찰한 결과에 대해서 말했다. "'고림보'라는 낙인이 찍혀 있군. 아마 농부의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그거야 마을에 가 보면 알겠지. 낙인을 찍는 거 보면 꽤 큰 목장의 소임에 틀림없을 거야." "우시장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난, 외양간만 되어도 만족하겠어……." 그 자리를 빨리 떠나는 것이 여러 모로 좋을 듯 싶었다. 유리카가고삐를 끌고, 우리가 서로 표정을 살피기조차 꺼리며 앞장 서서 걷는동안에도 분위기 파악 못하는 소는 끊임없이 똥을 누고 있었다. 얼떨결에 발견한 먹지도 못하는 소 한 마리 때문에 갑자기 잘나가는 모험가(?)들에서 소치기 일단으로 전락해버린 우리는, 일껏 발견한 소를 버리지도 못하고 계속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말이었으면 타기라도 하지. 아니, 안장이라도 있으면 짐이나 실을걸." 물론 말도 아닌데 안장이 있을 턱이 없었다. 똥냄새가 꽤 오랫동안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의 표정은 모조리 말씀이 아니었다. 나는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을 굶은 가운데, 점심을 먹을 기회의문전에서 좌절당한 자의 당연한 심정에 딱 맞는 불평을 내뱉었다. "에이 참, 확 구워서 소갈비로 만들어버릴까보다." "파비안, 소들은 그런 말 알아들어." 의외로 유리카가 소의 편을 들었다. 오는 도중 내내 고삐를 잡은것도 그녀였다. "알아들으라지. 지가 알아들은들 어쩔 거야? 내 생각인데 저 녀석은 소 중에서도 꽤 눈치 없는 부류임에 틀림없다고." "파비안, 우리 쟤 이름이나 하나 지을까?" 나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어져서 웃지도 못한 채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차가운 바람을 내내 맞은 그녀의 뺨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야, 금방 마을에 돌려줄 거 이름은 지어서 뭘 하게?" "왜, 저 녀석 표정 봐. 꽤 귀엽지 않아?" 소는 주제에 칭찬인 것은 알았는지, 마치 겸양하려는 사람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내저은 다음, 지평선을 바라보며 길게 울음소리를 냈다. 음무우우우우……. 그래, 예전에 호그돈 집에서 농가의 소녀로 보일 때부터 이미 알아봤었어야 했어. 아주 장단이 잘 맞는다, 맞아. "아예 소를 타고 가라, 응?" "맞아, 그럴까?" 우리는 잠시 후 소를 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유리카를 전부 달려들어 뜯어말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야, 야, 소를 아무나 타는 줄 알아? 소는 말이 아니란 말야! 무우… 음메에에에……. 우리가 심심할까봐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적당한 시점에 한 번씩 뱃고동처럼 울어 대는 소와 함께, 우리는 석양 무렵이 되어 목적했던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지도에 나타난 대로 마을 이름은 펜로즈. 나는 평상시 소에 대해 별 반감을 가져본 일은 없는데 말야, 소 한마리가 이렇게까지 사람의 인상을 바꿔 놓는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우린 정말 아무 짓도 한 게 없어. 소 한 마리를 끌고 나타난 죄밖에없단 말이야. 그러나 결과는 우울했다. "……?" +=+=+=+=+=+=+=+=+=+=+=+=+=+=+=+=+=+=+=+=+=+=+=+=+=+=+=+=+=+=+=한 해가 다 끝나가는군요. 내일이면 20번대 번호로 접어드는 날짜가 되네요. 12월 한달동안쓰겠다고 계획했던 양은 다 어떻게 되었는지, 쓸수록 점차 느려지는속도에 절망하는 중입니다. 윽윽.. 어떻게 되려고 이러지;;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2078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20)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21 00:12 읽음:137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20) 커다란 검, 커다란 도끼, 커다란 활을 각각 가진 세 남자와 한눈에봐도 빼어나게 예쁜 소녀 하나. 게다가 검이든 도끼든 활이든, 이'커다랗다' 는 점에서는 전부 결코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만한크기이기도 했다. 또한 미칼리스는 이런 시골 마을에서 결코 보기 힘들 대단한 전사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고, 나 역시도 겉보기에는 꽤그럴듯해 보이는……. 그러나 우리는, 기껏해야 소팔러 나온 농부 이상의 그 무엇으로도보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우리들이 아무리 멋진 모습이라고 해도, 이 일행에서 가장 중요하고 남의 눈을 끄는 것은 저 소 녀석이었단 말이다. 농촌 마을이면 소가 많을 법도 한데, 왜 다들 그렇게 소에 관심이 많은 거야? 그리고 사실… 비 맞고 대강 말린 우리의 복장이 멋지게 보이기엔좀 무리가 있기도 했고 말이다. 마을에 들어선 우리는 광장 즈음에서 멈추어 섰다. 많지도 않은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흘끔대는 가운데, 나는 의견을 말했다. "얼른 여관이나 잡죠?" 유리카가 얼른 끼어들었다. "외양간이 있는 여관이라야 해." "그거보다 먼저 소를 주인에게 찾아줄 궁리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촌장을 찾아가는 편이 좋겠다." … 이렇게 우리의 여정조차 모조리 소의 편의를 중심으로 움직이기시작하고 있었다. "… 녀석이 길에서 똥이나 안 쌌으면 좋겠어." 모든 것을 포기한 나의 마지막 소망은 이제 이것밖에 없었다. 촌장을 찾아가고 어쩌고 하는 복잡한 과정을 모두 거친 다음 우리는 사정을 대강 알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우리는 애매한 사정으로 고립된 헴넨 마을에 대한 이야기도 일단 해 두었다. 우리가 이것보다 큰 도시에 언제쯤이나 들르게 될 지는 알 수없는 일이니까. 촌장도 우리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정말무슨 조치를 취할지 안 취할지 그것까진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가 할수 있는 의무는 다 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알게 된 중요한 점은 그러니까, 이 소는, 이소는… 글쎄, 주인이 없다는 거였다! "아, 아니, 낙인이 찍혀 있는데 주인이 없다니요?" "그게 말이야… 고림보 목장은 얼마 전에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아완전히 망해 버렸어. 주인 부부는 죽었고, 짐승들은 죽거나 아니면대부분 제갈길로 흩어져버렸지.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라 재산을 물려받을 적당한 연고자도 없었고. 이놈은 아마 그 가운데서 살길을 찾아 나온 놈인 모양인데… 이런 놈을 발견하다니 운이 좋았군그래. 그냥 자네들이 갖지?" "네… 네?!" 뭐, 뭐야… 그건 이 상황에서 전혀 친절한 발언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흥분해서 뭐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이 촌장에게 잔소리를 해봤자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느끼고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게다가 촌장은 소를 발견한 우리를 몹시 부러워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어서 내 생각을 바꾸는 데 또한 한몫했다. 흠… 여행하는 입장에 소를 데리고 다닐 수도 없고 어떻게든 처분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나는 과감하게 '그럼 당신이 가져요!' 하고 말하는 성격은 절대 아니다. 저것도 살려면 다 돈인데 미쳤다고 공짜로 줘? 귀찮아 죽을 지경이면서 남 주긴 싫다니, 하여간 나도 웃기는 성격이다. 어찌됐든 일단 몬스터의 습격이라는 말에는 좀 긴장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촌장에게 물었다. "몬스터라면, 어떤 종류 말입니까?" "자네들이 그 이름을 알지는 모르겠네만… 요즘엔 몬스터들이 자취를 감춘 지 너무 오래되어서 말이지. 나도 정말 오랜만에 몬스터들한테 습격당했다는 얘기를 들어서 놀랬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떤 놈이었냐니까요?" 그는 정말로 우리가 몬스터라고는 구경도 못해봤을 거라고 단정지은 모양이었다. 촌장은 나이가 한 60은 넘어 보이는 노인이었는데,우리는 그럭저럭 겉으로 보기엔 그보다 나이가 적어 보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나와 주아니를 제하면 이들은 몬스터가떼거지로 활보하는 세상에서 살다 온 셈인데. "몸집이 크고, 날개가 달린…." 그가 거기까지 말하기가 무섭게 냉큼 대답들이 튀어나왔다. "가고일(Gargoyle)?" "와이번(Wyvern)?" "그리폰(Griffon)?" 2백년 전에서 온 엘프, 드워프, 인간이 한 마디씩 대답하는 동안촌장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괴물 잠자리? 거대 박쥐? 괴물 나방? 로크(Roc)?" 촌장은 유리카의 입에서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의 종류에할 말을 잃었다. 딱 두 가지 정보, 그러니까 '크다'와 '날개가 달렸다' 만 갖고도 저렇게 많은 몬스터들이 존재하다니… 역시 2백년 전은 별로 살아갈 만한 시대가 아니었던 거야. 셋 다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 것 같은……. 촌장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요즘에도… 몬스터를 쫓아 다니는 모험가들이 있었나?" 푸헤헤……. 촌장은 다시 한 번 우리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기색이었다. 자기몸집보다 커 보이는 배낭에 거대한 도끼를 꽂은 남자, 거대한 콤포짓보우에 어울리게 큰 키와 탄탄한 근육질의 몸을 가진 금발의 전사,아마 지금까지 본 중 가장 큰 검임에 틀림없을 내 멋쟁이 검과 날렵하고 영리해 보이는 미모의 소녀… 비록 옷차림은 후줄근하지만 하여간 이런 특징을 가진 우리를 그는 차근차근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말했다. "혹시 몬스터를 만났다가 쫓겨 오는 길이오?" "……." 젠장, 우리가 만났다가 쫓겨 온 건 몬스터가 아니고 줄창 쏟아진비란 말이야! …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편견을 뚫을 길은 조금도 없었다. 촌장은'몬스터한테 쫓겨 온 사람들'이라는 견해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고,마을 사람들 역시 '소끌고 다니는 사람들'이라는 견해에 완전히 익숙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관 마당까지 와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있었다. "하하, 역시 이리로 올 줄 알았다니까. 소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외양간 있는 우리 여관이 아니면 어디로 오겠어." "그, 그렇긴 하……." 결국은 우리 역시도 그 견해에 물들어버리고 말았다. 소를 여관 주인에게 맡기고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소똥 냄새에서 해방된 기쁨으로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이것 참, 단층밖에 없는 여관은 처음인데." 2백년 전 시대에서 살다 온 미칼리스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지만,어쨌든 이만하면 대륙 곳곳을 꽤 많이 여행한 셈인 나 역시 단층 여관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방으로 '올라갔다'가 아닌 경우를 처음당했다. "그건 그렇고, 우리가 카라드-리테에 꽤 가까이 온 것을 생각할때, 아무래도 몬스터의 창궐이란 마음에 걸리는 얘긴걸." +=+=+=+=+=+=+=+=+=+=+=+=+=+=+=+=+=+=+=+=+=+=+=+=+=+=+=+=+=+=+=연말 계획들은 세우고 계신가요? 모난성에 님, 대답이 늦었습니다만.. 세월의 돌 OST 중에는 저도 아직 못 구한 곡들이 많답니다. 저도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린다로스 님, 아스테리온은 말씀하신 대로 '별이 빛남' 정도의 뜻이 됩니다만... 큰개자리 말고 다른 데도 나온답니다. 으음.. 그러나찾지 못하시길 바라고 있습니다;;(전혀 엉뚱하거든요..)사인회는 내일 5시, 영풍문고입니다. 구경 오세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2264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21)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21 23:37 읽음:137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21) 자기 방에 짐을 두고 건너온 유리카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면서불쑥 한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몬스터의 창궐이란 언제 어디서든 마음에 걸리는 얘기라고." "아,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옆에서 미칼리스가 끼어들었다. "그런 건 마음에 걸린다고 하는 것이 아니지. 그 얼마나 다행스럽고 달가운 일이냔 말야. 난 옛 친구… 친구라고 하긴 뭐해도, 하여튼긴 세월을 살아온 자를 만나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는 건 썩 괜찮은일이지. 이 시대의 생명들은 너무 나이가 적어." "뭐라고요? 몬스터가 오랜 친구예요?" 내가 어이가 없어 되묻는데 유리카가 손을 내저어 내 말을 막았다. 그녀는 비를 맞은 이래 감지도 못한 머리가 가려운지 자꾸만 이리 저리 흔들면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우리 목적지는 카라드-리테야. 거기서 우린 흰 보석을 찾을 거잖아." "그게 뭐?" "그 흰 보석의 수호자가 자지 않고 깨어 있다면, 바로 이렇게 몬스터들이 날뛰게 되어 있단 말이야. 뭐, 미칼리스의 말대로일 수도 있지. 하지만 난 웬만하면 그 얼굴을 보지 않고 보석을 찾아 오길 바랬는데." "자다니? 이번엔 누가 보석을 맡아 가지고 있어?" "응." 내가 계속해서 그 얼굴을 쳐다보며 이어지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유리카는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말했다. "너한텐… 사실, 카라드-리테 앞에까지 가서 말하려고 했었어." "왜?" "너무… 놀랄 것 같아서. 흰 보석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 유리카가 뭔가 말을 이으려는 참인데 미칼리스가 불쑥 끼어들어 갑자기 말했다. "뭘 그렇게 망설일 필요가 있나? 어차피 알게 될 거, 처음 들어보는 이름도 아닐 텐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 아니라니요? 혹시 전에 만났던 사람이라도되나요?" "아, 아니 사람이 아니고……." "그럼 엘프도 드워프도 다 나왔으니 무슨 새로운 종족이죠? 아, 하프 엘프가 나왔었으니까 하프 드워프가 나올 차례… 흠흠." 엘다렌이 내게 심술궂은 영감 같은 눈길을 보내는 바람에 나는 하던 말을 멈칫하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내가 마음의 준비를 미처 다 하기도 전에 미칼리스의 설명은 불쑥 튀어나왔다. "드래곤이다." 나는 그들 모두의 예상을 깨뜨리고 잠시 잠잠한 상태 그대로 앉아있었다. 뭐,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농담인가? 그런 것 같진 않은데? 참, 드래곤이 뭐였었지? 다음 순간, 상황을 깨달은 나는 펄쩍 의자에서 뛰어오르다시피 하며 부르짖었다. "뭐, 뭐, 뭐, 뭐라고요?!" "자, 자, 그런 이야기는 정말 카라드-리테 밑에 가서 해도 늦지 않아. 일단 우린 이 마을에 나타난 몬스터에 대해서나 얘기해 보자고." 불행하게도 정말로 충격을 받은 내가 그 이후로 한 마디도 않고 있는 것이 다들 마음에 걸리긴 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일부러 과장스런 쾌활함, 아니 태연함을 가장하며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와이번, 와이번 떼라. 수십 마리의 와이번이 떼를 짓는단 이야긴2백년 전에도 들어본 일이 없는데 말야." 유리카의 말에 미칼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와이번은 필요하면 충분히 떼를 지을 수도 있어. 난 실제로약 백여 마리도 넘는 와이번 떼를 본 일도 있으니까." "그리고, 벽화에도 나와 있지." 엘다렌은 자기 배낭 위에 타고 앉은 채 그렇게 말했다. 그러더니미칼리스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 "하얀 부리 엘프 족과 과거에 대치한 적이 있지 않나? 물론, 날개가 있던 시절에." 또 그 날개 얘기야……. 미칼리스는 무안한 얘기라도 들었다는 것처럼 실실 웃으며 고개를내젓더니 앞서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와이번 한두 마리 정도라면 걱정도 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카라드-리테 쪽으로 계속해서 가다 보면 꽤 많은 몬스터들과 마주치게 될것 같은데." 그리고 '꽤 많은 몬스터'라는 말에 겨우 입을 열 기분이 든 내가간신히 한 마디 보탰다. "카라드-리테에서 무슨 몬스터 대회라도 열려요?" 진심이었다. 내게는 드래곤 역시 수천 마리의 몬스터들을 합한 정도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내가 아는 드래곤이 딱 하나 있지. 그 뭐랬더라, 그래, 달 갸라누. '라베닌드의 천벌'이라는 그 드래곤… 이 아니고 그의 조각상. 진짜 드래곤은 그거보다 훨씬 크다고 했던가? 드래곤은 말을 하던가? 아니, 인간과 대화 같은 것을 곧잘 하곤 하던가? 옛날 이야기 같은 거, 믿어도 될까? 옛 이야기에서… 드래곤은… 주로… 제멋대로였던 것 같은데……. 문득 주아니가 내 주머니에서 기어나와 탁자 위로 올라가는 것이느껴졌다. 하긴, 직접 비를 맞은 우리만은 못해도 축축한 주머니 속에서 고생스럽긴 마찬가지였겠지. 그러나 주아니는 그것보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우선이었던모양이었다. 그녀는 기어서 베개 위로 올라가더니 다른 말을 할 틈도주지 않고 대뜸 물었다. "와이번? 와이번이 뭔데?" 주아니는 나와는 달리 드래곤 따위… 보다는 와이번한테 보다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와이번은 말이야……." 주아니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이례적으로 미칼리스였다. 나는 주아니가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사죽을 못 쓰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번엔그래도 미칼리스와 좀 대화를 하게 되나 싶어 관심있게 둘을 지켜보았다. "드래곤을 줄여 놓은 것하고 비슷한 모습의 몬스터야. 크기는 한3-4큐빗 정도? 대신 앞발은 없고 뒷발로만 서지. 드래곤과 비교했을때 날개는 몸집에 비해 훨씬 큰 편이고, 비늘과 가죽으로 되어 있어. 또 긴 꼬리가 있어서 그걸로도 공격하고, 어금니에는 독이 있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지. 그렇지만 드래곤과는 달라서 브레스(breath)도 뿜지 못하고 말도 못 해. 바보거든." 하필 드래곤하고 비교하는 것은 무슨 심술일까. 미칼리스는 주아니의 환심을 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지―물론이건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종이를 끄집어내서 그 위에 그림까지 그렸다. 그래서 나는 엘프는 그림 실력 또한 대단하다는 사실도알게 되었다. 이윽고 종이 위에서 완성된 와이번의 모습은 정말 그럴듯해서 나조차도 고개를 끄덕이며 저렇게 생겼었구나, 하고 동의할 정도가 되었다. 살아오면서 멋진 그림을 볼 기회는 그다지 없었기 때문에, 내 눈에 미칼리스가 순식간에 끄적거려 놓은 그림은 최근 몇 년간 본 가운데 가장 멋진 그림처럼 보였다. "그림 실력, 대단한데요?" 내 칭찬에 대답한 것은 미칼리스가 아니라 엘다렌이었다. 미칼리스는 이제 아예 그림 위로 기어올라간 주아니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와이번의 여기는 무슨 역할을 하고, 날개는 어떻고 꼬리는 어떻다는 둥 이야기하느라 내 말에 대꾸할 여유가 없었다. "인간들이 흔히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 치고, 엘프가 못하는 것은없지." "다른 것도? 그러면… 노래도? 시도? 음… 춤도?" 미칼리스는 자기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 지도 모르고 주아니와함께 한참 동안 신이 나서 떠들었다. 둘이 동시에 와이번 박사가 되어 가는 동안 유리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춤은 안 봐서 어떤지 모르겠지만, 시와 노래라면 엘프들의 특기지. 어디, 한 번 시켜 볼까?" 그녀는 의자 위에 그대로 앉은 채 미칼리스의 발치를 툭툭 걷어차서 자기를 돌아보게 하더니 불쑥 말했다. "파비안이 노래를 듣고 싶대." "노래? 어떤 노래?" 내가 갑작스런 상황에 뭔가 대꾸할 말을 찾고 있는 동안 주아니가미칼리스의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다시 물었다. "와이번은 여기, 날개 꼭대기에 발톱도 있어? 응?" 이리하여 완전히 어수선하게, 제멋대로 아무 방향으로나 흩어지기시작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전혀 엉뚱한 방법으로 일단락되었다. 여관주인이 방문을 두드리더니 머리를 불쑥 내밀고 말했다. "목욕물 준비되었습니다." "그렇게 걱정하진 않아도 돼. 그렇게 무지막지한 친구는 아니야." 미칼리스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그렇게 말을 꺼냈지만 곧 그특유의 솔직함으로 사실을 고백해버리고 말았다. "물론, 드래곤 치고는 말이다." 불안 해소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재해 있을 지도 모를 '불굴의용기'한테 맡기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런데, 그 '불굴의 용기'님께서는 최근에 드래곤처럼 수면기에 들어가기라도 했는지, 내가 아무리 툭툭 치고 발로 걷어차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거 큰일났는데. "미칼리스, 전에도 궁금하게 생각했던 일인데요." "응, 뭘?" "당신은… 동물을 잡는 일에 아무 가책을 느끼지 않아요? 저, 엘프란 내가 흔히 듣기로는……." "자연을 사랑하고, 동물의 친구인 엘프?"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가득한 수증기 때문에 사실 잘 보이지않았다. 그도 내 얼굴이 안 보였을 것이다. 나는 따뜻한 물이 뚝뚝떨어지는 머리카락을 감싸쥐며 그가 들어가 앉은 커다란 나무 욕탕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커다랗다고는 하지만 세 명이나 들어가 앉으니그다지 넓다고는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하긴, 이런 시골 여관에욕탕이 있다는 것만 해도 기적 같은 일이지 뭐야. 여관 주인 말에 의하면, 이 일대에는 우리처럼 들판을 헤매다가 불쑥 나타나 목욕을 요구하는 여행자들이 많다고 했다. "뭐… 말이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지만, 이번에도 그루터기 엘프들때문에 생긴 편견인 건가요?" +=+=+=+=+=+=+=+=+=+=+=+=+=+=+=+=+=+=+=+=+=+=+=+=+=+=+=+=+=+=+=음.....오늘은 이례적으로 기네요;오늘 영풍문고에서 있었던 사인회는 성황리에 잘 끝났습니다. 찾아와 주신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__^천리안 세월의 돌 팬클럽에서 와 주신 분들, 나우누리 환타지 동호회에서 와 주신 분들, 그리고 sf&fantasy 게시판에서 자주 볼 수 있던 여러 익숙한 아이디들.... 모두 반가웠습니다. 물론 이 모든 분들말고도 저와 어떤 안면도 없는, 그래서 더욱 반가웠던 수많은 분들이계셨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학교 친구들도 몇 명 와 주었더군요. ^^;)긴장되기도 했고, 또 즐겁기도 했던 하루였습니다. 또 함께 사인한다른 작가분들도 만나뵈어 반가웠고요. (나중까지 남아 계셨던 분들몇은 저와 함께 출판사 관계자 분이 대접하신 저녁도 먹었지요. ^^)또 이런 기회가 생기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한 번 모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2643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22)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24 00:20 읽음:937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22) 미칼리스는 드러난 어깨에 젖은 머리카락을 그대로 늘어뜨린 채 잠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나보다 훨씬 위쪽에 있어서내가 쳐다보니 그의 턱선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답은 결국 천장 위까지 올라갔다가 내 귀로 들어왔다. "그렇진 않아." 엘다렌은 마치 죽은 드워프처럼 거의 턱까지 물에 잠긴 채 꼼짝도하지 않았다. 내가 들어왔기 때문에 물이 저렇게 올라간 건진 모르겠지만 조금 물을 튀기면 금방 코에 물이 들어갈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칼리스와 나한텐 거의 겨드랑이까지밖에 차지 않는 물이었다. 물은 적당히 따뜻했다. 나는 나른하고 노곤한 기분이 되었다. 차가운 비를 맞았던 일, 흙탕물에 온통 젖었던 것, 그리고 소똥 냄새…하여튼 어제 오늘 쌓였던 모든 피곤이 다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요?" 찰박, 다시 찰랑. 톡, 토독. 한동안 욕탕 안에서는 가끔 물이 움직이는 소리와 천장에 맺혔다가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한 질문을 거의 잊어버릴 즈음 해서, 한참만에 미칼리스는 불쑥 말했다. "유리가 가끔 하던 말이 있지… 죽음은 가끔 산 자를 위한 식량이된다고 하던가." 내가 예전에, 그러니까 화전민 이야기를 하다가 유리카한테서 들었던 말과는 조금 틀리긴 했지만 어쨌든 비슷한 내용인 듯했다. 미칼리스는 물속에서 팔을 올리더니 긴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내렸다. 사실, 어찌보면 그건 금발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할 만한 동작이기도 했다. 그의 머리는 거의 겨드랑이까지 닿았기 때문에, 곱슬거리는 머리칼들이 수면 아래에서 수초처럼 나풀거리고 있었다. "후회 없는 삶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사는 삶은 모두어제 했던 일에 대한 후회의 연속이야. 난 짐승을 죽이고서 안타까운심정을 가지지. 그러나 그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은 기운을 차렸어. 내 후회의 대가로 몇 명의 게으른 사람들을 네 말대로, 또는 에제키엘의 말대로 '도왔잖아'." "으음, 그렇긴 해요. 그렇다면 엘프도 인간과 그 점에서 그렇게 다른 건 아니군요?" "그렇진 않지." 죽은 드워프가 갑자기 살아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인간이든, 엘프든, 드워프든, 로아에든, 적을 만나서 자기 생명을지키기 위해 맹렬히 싸우게 되는 것은 똑같아. 멧돼지도 그렇고, 사슴도 그렇고, 심지어 작은 쥐나 곤충들조차 마찬가지지. 그렇지만 항상 네가 이긴다는 보장이 있는가? 너는 질 수도 있다. 죽어서 맹수의먹이가 되거나 악당의 노리갯감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기분이 어떻겠나." "죽었는데 무슨 기분이 있어요?" 내 대꾸에 엘다렌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잠시 가만히 있다가 다시 말했다. "하다못해 네 친구나 가족의 기분이라도 생각해 봐." "아주 더럽겠지요." 내가 냉큼 대답하자 그는 내 얼굴을 다시 보았다. 그러더니 천천히말했다. 물 찰랑이는 소리, 다시 고요. "엘프들은 복수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알고 있나?" "복수를 안해요?" "물론 부당한 습격, 이를테면 악한 자가 있어 죄없는 어린아이를까닭없이 죽였다거나, 돈이나 재물을 목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거나했을 때에는 얘기가 다르지. 그러나 서로가 서로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다가 한쪽이 졌을 경우, 엘프들 사이에서는 사후 책임을 묻지 않는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다. 연인의 복수? 부모의 피값? 아무도 그런것을 묻지 않는 거다." 말을 맺으며 엘다렌은 미칼리스를 쳐다보았다. "설명이 제대로 된 거냐?" 미칼리스는 잠깐 동안 그 기다란 손가락으로 수면을 튕기며 물장난을 하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아아, 당연한 거야. 결코 별다른 것이 아니야. 내가 아니면 상대방이 죽었을 것 아니냔 말이지. 내가 호랑이를 사냥하지 않았다면,호랑이가 나를 사냥했겠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자체로 우리는 우릴둘러싼 모든 환경과 투쟁을 벌이고 있단 말이야. 그 가운데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일쯤, 항상 일어나는 일들이지.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도 내 대신 죽어 줬던 수많은 생명들이 희생해 준 탓이 아니겠나?" 미칼리스는 평범한 말투, 편안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일전에 헴넨 마을에서 그가한 말과 똑같은 것 같으면서도 달랐다. 그는 그때 다가오는 외부의존재들에게 어쩔 수 없이 자기 보호라는 무기를 휘두르는 '엘프'일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해서 말했었지. 투쟁의 자연, 고통의 자연에대해. "남을 위해 굳이 나 자신을 희생할 필요는 없어. 그건 다른 생명들도 마찬가지지. 전에도 말했듯… 엘프들은 남을 잘 돕지 않아. 나 역시 마찬가지, 살아 있는 동안은 나 자신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위해서 살아가지. 그러다 보면 어느날 드디어 '나'가 희생될 차례가오게 된단 말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다지 억울해 하거나 화를낼 필요는 없어. 결정이 나기 전까진 모두 최선을 다해 싸우는 거지. 그리고 결정이 나면, 그걸로 그만이야. 왜 쓸데없는 원한을 만들고이기적으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 하고 외쳐야만 하나? 자신은 뭔가 남과 다른 특별한 존재인 줄 아는 건가? 그렇게 산다고 영원히 살기라도 해? 그건 누구한테나 언젠가 한 번은 일어날수밖에 없는 일인데."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듯 하면서도 이해가 될 것도 같은 말이다. 언제나 이기적인 생명, 그런데 이미 싸움이 다 끝난 마당에까지 이기적일 필요가 뭐냐는 말일까? 아니면 살아 있는 동안의 이기성은 생명으로서 당연한 특성이고, 그건 평등한 위치에서 계속적인 투쟁이 이루어지는 속에서만 가치가 있다는 말일까? 미칼리스는 이제 아예 느긋하게 발을 들어 물장구까지 치면서 다시말했다. "내가 네게 무작정 활을 가르치지 않는 것도… 어쩌면 비슷한 이유지."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 지 몰라 약간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렇지만… 실제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는 건 그렇게 단순하게 되지만은 않잖아요……." "물론 그렇지. 그렇지만 모든 복잡한 것 속에도 간단한 원리는 항상 숨어 있는 거야. 되든 안 되든 그걸 찾아 따르지 않는다면, 살아있으면서 배울 게 뭐겠나?" 첨벙, 첨벙. 똑, 똑. 어쩌면 일견 굉장히 깨끗한 사고방식인 것 같기도 했다. 복잡하고애매한 인연 관계에 얽매여 거기에 연연하며 살아가는 인간보다… 그렇지만,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잊는 것이 쉬운 일일까, 엘프들한텐? 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지금도 이렇듯 도저히 떨쳐버릴수 없는 기억을 갖고 있는데 말이다. 드래곤도 이렇게 끔찍히 무서워하고 있고 말이다… 에엣, 이 생각은 '불굴의 용기'가 잠에서 깰 때까진 안 하기로 한 생각인데. 어쨌든 그래서, 그는 이베카의 일을 저렇게 칼로 무 자르듯 정리할수 있었던 것일까? 아, 아니야… 그가 정리했는지 아닌지는 물어본것도 아닌데 내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지. 그렇지만 겉으로는 저렇게 평온해 보이잖아. 만일… 일전의 중독으로 유리카가 살아나지 못했다고 쳤을 때, 나는 과연 저렇게 겉으로나마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애매한 상태에서 되는대로 지껄였다 +=+=+=+=+=+=+=+=+=+=+=+=+=+=+=+=+=+=+=+=+=+=+=+=+=+=+=+=+=+=+=죄송합니다.. ^^;어제 기다리신 분이.....으음..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있었을 지도 모르니까.. 으음.... .... 그, 어쨌든, 그게 아니라... 어제 못 올려서 죄송합니다. ;;예정에 없던 일이 생기는 바람에, 어젯밤엔 아는 언니네 집에서 자게 되어버렸네요. 도저히 올릴 길이 없었어요....(긁적)어쨌든 정말 죄송합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2644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23)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24 00:21 읽음:894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23) "어쨌든… 엘프는 그래도 자연을 사랑하는 것만은 틀림없네요. 아마 인간이었다면, 이성이 없는 멧돼지 같은 거라고 해도 그게 아버지를 죽인 놈이다, 그랬으면 미친 듯이 찾아다니고 무슨 수를 써서든반드시 죽이고 말았을텐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엘프는, 살아가기 위한 엘프다." 엘다렌이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다른 모든 종족과 마찬가지로 말이지." 나는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참, 이상한 종족들이야. 나중에 드워프는 인간과 어떻게 다른지에대해서도 좀 물어보아야겠어. 아냐, 파하잔에 갔을 때, 나는 드워프들이 세워 놓은 달 갸라누의 조각상을 보고 몹시 당황했었지. 드워프족이 그토록 사랑하던 도시 '천년의 라베닌드'를 파괴하고 그들을 지하로 쫓아보낸 원수같은 드래곤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들은 그 드래곤을 저렇듯 정성들여 커다랗게 조각해서 도시 가운데 세워 놓았었어.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로아에는? 인간들의 전쟁을 로아에의 방식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것이 그들의 방식이라고 했던가? 그럼, 인간은? 인간은 뭐지? 어쩌면… 이 모든 종족들은 비슷한데 인간만 오뚝하니 특이한 것이아닐까? 서로간의 얽히고 설킨 애증에 익숙하고, 우연히 마주친 사람도 뜻없이 도울 수 있고, 배반과 복수에도 능하지만 그만큼 연민과희생에도 익숙한 인간 말이다. 목욕을 끝낼 때까지 내내 했던 생각들이었다. "오늘의 안건은 세 가지입니다." 유리카는 자못 장난스러운 엄숙함으로 종이를 집어 들고는, 저마다수건 하나씩을 들고 머리를 말리고 있는 세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괜한 논쟁과 머리아픈 생각들 때문에 남자들 쪽의 목욕은 꽤 늦어져 버렸다. 그래서 욕탕에서 나왔을 때, 유리카와 주아니는 이미 모든 것을 단정하게 정리하고는 테이블 앞에 앉은 채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목욕을 오래 하긴 했다. 손가락은 온통 쭈글쭈글하게 불어 버렸고,수증기에 섞인 약간의 땔나무 연기 때문에 목이 매캐할 정도니까. "첫째, 카라드-리테로 가는 도중에 많은 몬스터와 마주치게 될 것같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지요. 이에 대한 방비책이 있으면 좋고… 뭐,없으면 할 수 없고." 우리는 일어서 있는 유리카를 모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올려다보지 않아도 되는 것은 미칼리스밖에 없었다. 게다가 몬스터가 문제가 아니라, 그 카라드-리테에 가서 만날… 미칼리스의 말대로 하자면 '옛 친구'가 더 문제라고. "둘째, 우리 귀염둥이 '라-메르이르'의 거취 문제에 대해서 논의할필요가 있어요." 멀뚱하게 눈을 뜨고 있던 미칼리스가 불쑥 질문했다. "'라-메르이르'라면 '친근한 꼬마' 정도 되나? 그런데 그게 누군데?" 유리카는 턱을 치켜들더니 냉큼 대답했다. "누구긴, 외양간에서 쉬고 있는 우리 동료지." 도, 동료… 나는 당황해서 외칠 수밖에 없었다. "야, 그 녀석이 어떻게 동료… 게다가, 귀염둥이라니!" 유리카는 내 외침에는 조금도 아랑곳 않고 마지막 안건을 읽어 나갔다. "셋째, 파비안 크리스차넨이 활을 배우기 위해 미칼리스 마르나치야에게 가르칠 수 있는 일의 종류에 대한 약간의 조사가 있었습니다." 라-메르이르? 고대 이스나미르 어로 붙인 이름인 것 같은데, 뜻이야 어쨌든―솔직히 그 소 녀석은 절대 꼬마가 아니었다. 친근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아니,소한테 옛 이스나미르 어 이름이라니, 도대체 가당키나 하나?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가 중얼거렸다. "차라리 똥쟁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파비안!" 유리카가 발끈해서 소리질렀지만, 옆에서 미칼리스가 한 마디 하는바람에 그 효과는 유감스럽게도 반감되고 말았다. 그가 한 말은 이랬다. "똥쟁이? 그거 참, 그쪽이 훨씬 어울리는 이름 같은데." 유리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미카, 그러고도 네가 음율과 시에 능한 엘프야?" "뭘, 좋은 시인이란 어울리는 시어를 찾을 줄 알아야 하는 법이야." "똥쟁이? 그게 좋은 시어야?" "좋은 시어란, 어디까지나 그 대상과 상황에 어울리는 것만이 가치가 있는……." 유리카와 미칼리스 사이에서 한바탕 주거니받거니 입질이 오고가려는 참인데, 예전부터 싸움 말리는 당번이던 주아니가 하품을 하더니한 마디 했다. "그만들 둬. 지금 소 이름이 중요해? 다들 유리카가 말한 문제들에대해서나 생각해 보자고." "아아, 그래, 마지막 문제부터 생각해 보자." 미칼리스가 당장에 동의하더니 자세를 고쳐 바로 앉았다. 그 놀랄만큼 빠른 태도의 전환에는 확실히 감탄할 가치가 있었다. 유리카는 정말로 조사 결과를 발표하려는 건지 꽤 엄숙한 표정으로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는 신성한영혼들만이 알 거라는……. "물건 값 깎는 법, 잡화점 운영하며 손님 등쳐먹는 법, 남의 눈에안띄게 궁시렁대는 법, 온갖 신기한 일이 발생했을 때 건전하고도 평범한 보통사람의 사고방식에 의거하여 '깜짝'놀라기 등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봐. 아… 물론, 참새 그물 짜는 법도." 유, 유, 유리카, 너……. 유리카는 내가 화를 내기도 전에, 먼저 잽싸게 내쪽으로 돌아서더니 생긋 웃으며 한 마디 했다. "으응, 사실 그 말고도 좋은 점이 굉장히 많은데, 그건 도무지 남한테 가르칠 수가 없는 것들이라서." "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미칼리스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쩌면 나를 아주 이상한 놈으로 보는…… 으음? "그래, 그럼 그 가운데 뭘 가르쳐 줄 건가?" "네… 네에?!" 기대한 상황이 아니라고 해서, 늘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에제키엘의 모험이라 해서, 그렇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모든 모험들과 달랐던 것은 아니야. 여관에서 자거나 노숙을 하고, 식당에서 식사하거나 들짐승을 사냥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거나 방해꾼을 만나게 되는 여행. 그런 여행이지." "그럼, 저녁거리 준비할 녀석도, 저녁상 차릴 놈도, 설거지할 친구도 필요한 그런 여행이지." 유리카의 말에 기분좋게 말을 덧대는 미칼리스는 여전히 내가 자신한테 저 가운데 뭔가를 가르칠 거란 기대를 접지 않고 있어서 나를황당하게 만들었다. "응, 총감독도 필요하고 말야." +=+=+=+=+=+=+=+=+=+=+=+=+=+=+=+=+=+=+=+=+=+=+=+=+=+=+=+=+=+=+=어제 것까지, 두 개 올립니다. 오늘도 늦게까지 출판사에서 교정을 보고 오느라 몹시 피곤하네요... 결국은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이틀이나 이러고 있으니 어라?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셨을 분들도 있을 것 같네요... 크리스마스와 연말에 계획들은 있으세요? 음.... 저한텐 묻지 마시고요. --; (원고와 함께 연말을..)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2727번제 목:◁세월의돌▷Merry Christmas!(25일에 돌아옵니다)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24 14:23 읽음:816 관련자료 없음-----------------------------------------------------------------------------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오늘, 24일은 못 올릴 것 같습니다. 25일에 돌아오겠습니다.. (음... 노느라고 이러는 거라면 저도 좋겠습니다만.. --;)(여러분들은 물론 멋진 계획들 있으시겠지요? 흑흑..)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2971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24)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25 23:25 읽음:480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24) 유리카는 마치 정말로 필요하다는 듯한 어조로 한 마디 하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이었다. 하늘에는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하는 저녁별들이총총했다. 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생겨서 걷는데 지장을 주는 것 말고는 우리를 방해하는 것도 없었다. 혹시라도 몰라 긴장했었던 와이번이나 그 기타의 몬스터들, 그비슷한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공기는 적당히 시원했고, 저녁을 든든히 먹은 터라 몸에는 기운이 충분했으며, 동료들은 쾌활했고, 우리뒤에서는……음무우우우우……. 한가로운 소 울음 소리까지… 제, 젠장, 이건 아니란 말이닷! "정말, 시골길을 걷는 기분이야." 미칼리스는 소에게 아무런 경쟁 의식… 아, 아니, 불만을 가지고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진짜 시골에서 살아본 사람으로서 한 마디 논평했다. "제가 살던 시골은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고요." 그러고 보면, 난 왜 이렇게 저 소를 싫어하게 된 걸까? 여관에서 푹 쉬고, 실컷 자고, 아침도 점심도 심지어 저녁도 실컷먹고, 다시 하룻밤 더 자고, 지나칠 정도로 쉬었다 싶을 즈음 우리는다시 여관을 떠났고 이렇게 걷고 있는 중이었다. 어제 저녁에 떠날수도 있었지만, 이제 정말 몬스터가 나오게 될 지도 모르는 길을 밤에 걷는 것은 아무래도 바보짓이었다. 참, 어제 유리카가 제기한 안건들은 어떻게 됐냐고? 뭐… 이렇게 첫 번째 안건에 대한 대안으로 낮에 걷고 있잖냔 말이다. 그럼 두 번째는? 우리 뒤에 저 똥쟁이 소가 여전히 따라오고 있는걸 보면 몰라? 그럼, 세 번째는? "파비안, 웬만하면 빨리 결정을 하지." 미칼리스는 별로 할 일도 없는 참에 활이나 가르쳐 보는 것도 좋을것 같다는 소리까지 해 가며 나를 알게모르게 들볶았다. 그러나 쳇,유리카가 말한 내 모든 능력… 이라는 것들이 도대체 가르칠만한 성질의 것이야? 실습실, 그러니까 잡화점도 없는 이 마당에……. 도무지 내가 고른다는 건 불가능한 노릇이라, 나는 한숨을 쉬고서미칼리스에게 선택을 일임해버렸다. 그래서 그가 고른 것이 뭐였냐고? … 그건 물건값 깎기였다. 아마도 미칼리스가 유리카나 엘다렌한테서 전해 들은 우리들의 여행에 대한 얘기들 가운데 가장 인상깊었던 것이 바로 그거였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엘다렌의 평소 성격으로 보아 참 의외라고 할 정도로, 그는 마르텔리조 얘기를 하는 걸 좋아했다. 엘다렌이 받아들인방식대로, 거의 내가 한 일인지 의심쩍을 정도로 변형된 얘기들을 듣는 미칼리스의 반응은 주로 이랬다. "오! 그거 참 괜찮은데? 그 다음은?" 그러나저러나, 이런 어이없는 강의를 해야 하는 내 입장은 참으로난처하기 이를데 없었다. 왜냐고? 그러니까, 이런 건 주로 나 자신의인간성과 이미지를 갉아먹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마련이란 말이다. "음… 그러니까 물건의 가격을 낮추기 위해선 일단, 음, 음, 상품을 살펴보고… 트집을 잡지 않으면 안돼요." "물건에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말해야겠지." "아, 그런게 아니라… 별 문제가 아닌 것도 크게 부풀려야 된다는… 다시말해, 없는 하자도 만들어내야 된다는… 그런 얘기예요……." "없는 하자를 만들어 내? 상인이 안 보는 사이에 물건에 흠집을 내라는 건가?"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무, 물론 그런 말은 아니죠…. 그러니까, 문제가 전혀 없는 물건이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에, 물건의 지나치게 비싼 가격이든, 아주아주 조그마한 흠집이든, 심지어 마음에 안 드는 색깔이나, 만든지좀 오래 되었다는 거라든가, 다른 데서는 이것보다 더 좋은 물건이더 싸더라는 얘기나……." 말을 하면서 미칼리스의 표정을 흘끗 봤지만 도무지 이해하고 있는표정이 아니어서, 나는 염치 불구하고 예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말을 꺼내서 하다 보니까, 나는 점점 장광설을 늘어놓고 싶어지는 중이었다. "예를 들어서 주전자를 산다고 쳐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도 조금쯤 이지러진 곳이 있을 수도 있고, 변색된 부분이 없나도 살펴보고,뚜껑이 잘 맞는지, 손잡이는 편리하게 되어 있는지, 손이 긁힐 위험은 없는지, 이음새가 잘 맞물려 샐 염려는 없는지… 다 살펴본 다음엔, 나이드신 어머니께서 들기엔 지나치게 크다거나, 주둥이가 너무커서 물이 넘칠 거라거나, 만든지 오래되어 녹이 슬었을 수도 있다거나, 크기에 비해 값이 너무 비싸다거나, 손잡이가 각이 져서 물을 가득 담으면 손이 아플 거라거나, 주전자 몸체에 비해 물 붓는 곳은 너무 좁다거나, 심미적 관점으로 보아 너무 투박하다거나,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거나, 내가 아니면 팔 데가 마땅치 않을 거라거나, 일전에이거보다 더 큰 주전자가 더 싼걸 봤다거나, 누군가가 이 집의 물건은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거나, 옆집에서 산 주전자가 금방 망가지는걸 봤다거나… 그런 얘기들 가운데 몇 가지를 꺼내란 말이에요." "……." 내가 간신히 말을 마쳤을 때, 아니 간신히 내 입을 멈출 수 있었을때 미칼리스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내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어찌 보면 우수에 찬 전사와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생각에잠겨 있었으나, 결국 입을 열고 한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흐음… 그런데 말야, 물건을 사용하는 데엔 아무 문제가 안 될 거라면, 왜 귀찮게 그런 것을 생각해 내지?" "값을 깎는다면서요!" 미칼리스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정말로심각한 고민에 빠져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다른 동료들은 이해했나 확인해보려는 것처럼 엘다렌과 유리카의 얼굴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그 표정을 본 유리카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한 마디 던졌다. "미카, 이상한 고민은 때려치우고 노래라도 불러 봐." 비록 상인으로서의 자질은 턱없이 부족함에 틀림없지만… 역시 미칼리스한텐 내가 가지지 못한 수많은 능력이 있었다. 미칼리스는 참관대했다. 웬만한 부탁에는 그냥 '귀찮아' 또는 '싫어'로 대꾸하는법이 없었다. "노래? 무슨 노래?" "뭐, 그냥 오랜만에 미카의 노래를 듣고 싶은 것 뿐이니까 사실 어떤 노래든 상관없다고." "노래라면 너도 잘 했잖아?" 미칼리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유리카를 흉내내어 불쑥 노래부르기 시작했다. "아침 식사는 감자 피클, 점심 식사는 완두콩……." "푸핫, 푸하, 푸하하하하……." "헛헛……." 이번엔 엘다렌까지도 웃어버렸다. 마치 코맹맹이 꼬마쯤 되는 것같은 목소리였다. 유리카는 무안한 듯 코를 씰룩이더니 불쑥 나한테말했다. "저 노래가 어때서. 너야말로 제대로 된 노래를 안다면 불러봐." "내가 그런 걸 알 턱이 있냐? 일전에 아라스탄 호수에서도 말했듯내가 제대로 끝까지 아는 노래라고는 구원 기사단의 장례식 노래밖에없어." 미칼리스가 불쑥 참견했다. "노래를 꼭 알아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아니, 모르는 노래를 어떻게 불러요?" 그리고 미칼리스는 아주 엘프다운 대답으로 내 질문을 마무리했다. "만들면 되지." 쳇, 내가 엘프인줄 알아요? 없는 노래를 갑자기 만들어 내게. 그러나 내가 마음속으로 해버린 간단한 대답을 듣지 못한 미칼리스는 가만히 진지하게 생각하는 얼굴이다가 갑자기 웃음이 나오는 듯뺨을 실룩거리며 말을 이었다. "뭘, 엘다렌조차도 했던 일이라고. 인간들도 꽤 멋진 노래들을 부르는 걸로 아는데. 음, 드워프도 꽤 드워프다운 노래를 부르지." "드워프가 노래를 해요?" 그러나 엘다렌은 내 심각한 질문이 깃든 째려보기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음, 물론 그가 째려본다고 노래하는드워프가 아니란 건 안다. 가만있자, 그럼 그땐 어떻게 노래하게 만들었던 걸까? 무슨 요령이라도? "아아, 그럼. 방법이 있었고말고." 미칼리스에게 돌린 질문의 눈초리에는 금방 대답이 왔다. 그는 엘다렌을 흘끔 보면서 마치 그에게 들리지 않게 말하기라도 하겠다는듯, 목소리를 낮춰 가며 말했다. "너도 이미 알지 모르겠는데 말야, 엘다렌은 다른 건 몰라도 설거지하는 것은 아주 질색하거든." 오오, 그거라면 이미 알… 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짐작은 했었죠. 그리고, 나는 어떤 식으로 그에게 노래를 시킬 수 있었는지도 동시에 짐작해 버렸다. "에제키엘이?" 고개를 끄덕인 미칼리스는 잘 됐다는 듯 엘다렌의 어깨를 탁 때렸다. "좋아! 내일 설거지는 누가 할지, 다시 한 번 정해볼까?" 그게 엘다렌한테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내게도 큰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황급히 외쳤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엘프가 아니란 말얏! 그러나 나의 항변은 무시되었다. "아아, 좋아. 파비안, 너도 엘다렌이 평생 처음으로 설거지를 할수 있도록 멋진 노래 한 곡 만들어내야 한다. 꼭 협조해야 돼." 그러니까, 내가 노래를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노래를안하면 엘다렌 대신 내가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인 모양이었다. 쳇, 그런 내기가 그렇게 몇 시간 만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정말 오산이지. 정말이었다. 우리는 내기의 내용을 '그날 저녁 식사의 설거지'가아니라 '3일 후 저녁 식사의 설거지'로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꼴찌가 결정되지 않는 바에야 이런 내기는 하등 소용이 없는것이니까. 사흘 동안 골머리 썩인 것을 생각하면 그냥 설거지 몇 번하는 것이 몇 배 나을 텐데. 그러나… 엘다렌과 나의 꼴찌 경쟁은 아직도 진행중이었다. +=+=+=+=+=+=+=+=+=+=+=+=+=+=+=+=+=+=+=+=+=+=+=+=+=+=+=+=+=+=+=크리스마스는 즐겁게 보내셨나요? 뭐.... 저도 실컷 자고 저녁때나 일어나니 모든 일이 꽤 즐거웠던것처럼 느껴질 따름입니다....;크리스마스 카드 보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직 집에서 인터넷이 안되기 때문에 몇 개는 확인을 못했어요. 조만간에 게임방에 가서라도 확인해 볼 생각인데, 그거 언제까지 확인해야 되는건가요? 하이문 님께, 저는 '머나먼 바닷가' 이후로 별다른 번역 계획을 잡은 바는 없답니다. 어디에서 그런 소문을 들으셨는지요? 그리고 해석의 내용은 철저히 르귄의 문장을 따르는 선에서 해결하려 애썼습니다. 그것도 꽤 많이 짧게 나눈 겁니다. ^^;;그리고 pattern 은 '원형'으로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지금도 생각됩니다만... 처음에는 '무늬' 였었지요. 그러나 어스시의 마법사들은 자연 현상 속에서 메시지를 찾아내는 식의 일을(이렇게 설명해도 괜찮을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미의 근원이 되는 '원형'을 자연 속에서 발견한다는 뜻에서 유형, 패턴 보다는 '원형'을택했습니다. 현자들의 이름요? 마음에 안 드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름대로 본뜻에 알맞고 예쁜 말로 해석하려고 머리 싸맸었답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3136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25)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27 00:23 읽음:145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25) "다 되어 가?" "음, 으응… 그래, 어느 정도는." 그 3일 동안, 나는 까닭은 모르겠지만 이번엔 공짜로 가르쳐 주면서도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 같은 미칼리스로부터 노래 작법에대한 강의를 질릴 정도로 잔뜩 들을 수 있었다. 드디어 여행 막바지에 별걸 다 배우기 시작하는구나. 게다가 물건값 깎는 법을 가르쳐야하는 내 입장은 또 어떻고. 본래 그런 건 본능과 장시간의 경험에 의해서 조성되는 능력이지, 가르친다고 되는 건 아니란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미칼리스에게 활을 배우기 시작하고 있었지? 그건 또 잊을 뻔했네. 하도 다른 것들이 머리를 괴롭히는 바람에. 어쨌든 노래랄까, 시랄까 하는 것의 소재를 결정하고 착상을 잡는것에서부터 운율을 맞추는 법에 이르기까지, 예정에도 없던 새삼스런공부를 하느라 내 머리는 거의 터질 듯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소재를 골랐느냐고? 쳇, 뭐… 뻔한 것 아니겠느냐고. "아마 전무후무한 노래가 나올 거야. 기대해도 좋아." 나는 저녁 먹을 자리를 물색하기 위해 열심히 들판을 두리번거리면서도 이번엔 꽤 자신 있는 말투로 말했다. 우리가 걷고 있는 곳은 여전히 들판의 연속이었다. 카라드-리테의 위용이 저만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도 벌써 그저께 새벽의 일이다. 우리는 그날 밤을 새워 언덕을 하나 넘었고, 다시 히스풀로 가득한 들판으로 내려오는 가운데 정말 희한할 정도로 우뚝 솟은 그 산의 모습을 드디어 발견했다. 융스크-리테에 비하면 비교도 안되는 높이라고는 하지만, 게다가하얀 산맥에 있는 다른 험준한 산들보다도 낮다곤 하지만, 평야 가운데 홀로 우뚝 솟은 산이란 다른 때보다 유난히 높아 보이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카라드-리테는 그 높이보다 규모로 일단 압도하는 산이었다. '드래곤의 이빨' 이라는 별칭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란 것을 반증하듯, 우리 앞에 나타난 카라드-리테는 높직한 하나의 봉우리가 아니라 수없이 하늘을 향해 톱니를 드러낸 웅장한 벽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불 피울 준비를 해야지." 그렇게 모닥불을 준비하고, 미칼리스가 어느 새 사냥한 이름모를새 한 마리의 털을 뽑고 고기를 손질하고 하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해서 이 완성되어가는 노래에 거의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 아까 말을 안했었군. 내가 택한 주제는……. '금화'였다. "……." 멋지지 않아? 멋지지 않아? 정말 멋진 노래가 나올 테니 두고 보라고. "한 개의 금화, 1존드… 기막히게 매끄러운 표면과, 황홀한 금빛광채와, 천상의 짤랑이는 소리와… 으음……." 이런 정신이니 머리 위에서 다가오는 뭔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이유는 모르겠지만, 왜 다가오는 위기를 발견하는 데 있어 엘프보다도 소가 더 빠른 거지? 딸랑, 딸랑, 딸랑……. 음무우우우우웃! "뭐, 뭐야!" 소 치고는 정말 날카로운 울음…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참인데, 유리카가 날카로운 외침으로 내 주의를 일깨워 주었다. "위!" 주워모았던 장작들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나는 방향도 모르고 일단뒤로 펄쩍 뛰었다. 다음 순간, 검을 뽑아드는 내 귀에 허공을 가르는매서운 날개 소리가 울렸다. 그, 그……. "머리 숙여!" 더 많은 것을 판단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나는 검을 위로 쳐드는 것과 동시에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힘껏 몸을 던져 넘어졌다. 푸웃… 흙먼지란. "어딜!" 가벼운 외침이 왼쪽에서 나더니 익숙한 소리, 가볍게 공기를 울리는 시위 소리가 내 귀를 바짝 서게 만들었다. 나는 그 와중에서도 흙먼지 속에서 고개를 들고 그의 모습을 보려고 했다. 물론, 그렇게 하자 미칼리스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나를 공격하려 한 거대한 새의 정체였다. 저 거대한 가죽 날개와 비쭉한 머리, 주둥이, 한 쌍의 발과 발톱은, 그, 뭐더라, 어느 그림에서 많이 본 듯한……! "… 와이번!" 쳇… 생각해 보니 미칼리스가 그린 그림이었군. 키유르르르륵! 울음소린지 뭔지, 하여간 괴상한 비명을 지른 와이번은 거의 내 머리 위까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급한 김에 고개를 푹 수그리고 두어 바퀴 옆으로 몸을 굴려, 길게 자란 히스풀 속으로 굴러들어갔다. 가득한 풀잎들에 가려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있던 순간이었다. 음무웃! 음메에에엣! 마치 자기가 싸우기라도 하는 듯이 울어대고 있는 소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누군가의 타닥이는 발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왔다. 보이는 게 없는 터라 나는 도무지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바로 옆에서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울렸다. "안 돼!" 뭐가 안 돼? 게다가 그 다음으로 들린 것은 뭔가 말 비슷한 동물이 멀찍이 달아나는 듯한 소리, 말발굽 소리 비슷한 소리가 투다닥, 두다닥……. 뭐, 뭐야, 소? 내 옆까지 달려왔다가 다시 멈춰선 미칼리스의 다리가 바로 옆에서보였다. 밟힐까 걱정되어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나자 보인 광경이 또한 희한했다. 메에에에에엣! 키유륵, 키큐큐큐큐……! 보기 드문, 희한한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와이번 녀석은 저항도 심하고 먹을 고기도 별로 없을 우리 두발 짐승들보단, 훨씬 먹을 것도 많아보이고 순종적인 듯 싶은 저 네발 짐승 쪽을 택하기로 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소와 와이번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필사의 추격전을 펼치고 있었다. 가을이 오고 있는 들판을 마치 질풍처럼 달려 가로질렀다. 정말, 내눈에도 처절해 보였다. 멀리도 안 가고, 꼭 이 주위에서 빙글빙글 도네. "헤에……." 우스운 건, 이 와이번이란 종류가 본래 바보라는 미칼리스의 말이맞는건지 녀석은 일단 땅에 내려앉자 날아오를 생각을 못하더라는 거였다. 와이번이 저 커다란 날개로 높직히 날아올랐다가 한달음에 소등을 잡아챈다면, 비록 저 덩치를 하늘 꼭대기로 가져가진 못하겠지만 최소한 등심 몇 점 정도는 뜯어먹고도 남을 텐데. 와이번은 미쳤는지, 계속해서 그 두 다리로만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만찮게 빠르기도 했다. "오오… 무섭군." 나는 '안 돼'를 외친 유리카의 심정을 전혀 모르진 않았지만, 일단이 진풍경에 먼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고민을 덜어주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은 그 다음이었다. 나는 손나팔을 하고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똥쟁아! 힘내! 고지가 저 앞이다!" 참, 고지는 과연 어디지? +=+=+=+=+=+=+=+=+=+=+=+=+=+=+=+=+=+=+=+=+=+=+=+=+=+=+=+=+=+=+=500회 이벤트에 많이 참여해 주세요. ^^크리스마스 메시지 보내주신 분들께도 모두 감사. 그런데 한 분이보내주신 캐롤송은 들어볼 수가 없었어요..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3137번제 목:◁세월의돌▷+=+=+=500회 이벤트+=+=+=+=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27 00:23 읽음:1428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 500회 기념 이벤트=+=+=+=+=+=+=+=+=+=+=+=+=+=+=+=+ 세월의 돌 500회가 얼마 안 남은..... 것이 아니라 좀 많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500회가 되었을 때 발표할 작정으로 미리 공지를 드립니다. 이번 이벤트는 간단하게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 이번엔 상품이꽤 좋은 것이랍니다. ^^ +=+=+=+=+=+=+=+=+=+=+=+=+=+=+=+=+=+=+=+=+=+=+=+=+=+=+=+=+=+=+=+--------------------------------------------+| 세월의 돌 캐릭터 일러스트 공모 |+--------------------------------------------+위에 쓴 그대롭니다...^^;이번에는 한 가지 이벤트입니다. 좀더 복잡한 이벤트들은 모조리! 완결 때로 돌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홈페이지 방명록에나, 저한테 오는 메일들에나, 많은 분들이 "일러스트를 보고 싶다!"고 외쳐 주셨기 때문에 이번엔 기필코 이이벤트를 하지 않으면 안될 듯한 위협을 느꼈습니다...--; (실화)음.... 저는 영 그림 솜씨가 없거든요. --;그래서 독자 분들이 멋지게 그려주신 일러스트를 보게 된다면 굉장히 즐겁고 신기할 것 같아요. 물론, 저뿐이 아니고 많은 독자분들이 애타게 일러스트를 고대하고계시답니다. ^^물론 일전에 일러스트를 보내주신 여러 분들이 계십니다만, 보내주시는 대로 홈페이지에 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그럭저럭 저혼자만 보고 있었습니다.... (죄송해요..;;) 그러니까 일전에 보내주셨던 분들도 다시 한 번만 이벤트 기간 내에 보내주세요. 물론 새로그리셔도 되고 전하고 똑같은 그 파일을 다시 보내주셔도 된답니다. 이미 보내 주신 것은 제가 잃어버리거나 헷갈려버릴 가능성도 있거든요..;;그러니까, 이벤트 기간 내에 응모하는 일러스트들만(예전하고 같은것이 또 오더라도 상관없으니) 수상 대상에 넣도록 하겠습니다. +=+=+=+=+=+=+=+=+=+=+=+=+=+=+=+=+=+=+=+=+=+=+=+=+=+=+=+=+=+=+=#1. 일러스트 대상 : 꼭 주인공이 아니어도 되고, 물론 주인공들이어도 되지요. ^^ 세월의 돌에 등장했던 인물이라면 어떤 사람이라도좋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이 아니고 멋진 풍경이나 인상적인물건, 소설상의 장면 그 자체를 그리셔도 된답니다. #2. 형식 : 한 분이 여러 장을 보내주셔도 됩니다. 각각의 응모로칠 테니까요. 사이즈나 재료나 기타 등등은 전혀 제한이 없습니다. 물론.... 전자 메일로 올 수 있는 파일 형태라야겠지요..^^;단, 중요한 것! 일러스트 내부에 본인의 이름이나 아이디, 사인 같은 것을 잘 보이도록 첨부해 주세요. 이건 저 때문에 부탁드리는 것이 아니라 제 홈페이지에 올라갈 예정이니만큼 혹시 여기저기에 돌아다니게 될 가능성이 있을 지도 몰라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출처를 알수 없는 그림이 되는 건 싫잖아요? (나쁜 사람한테 걸리면 남의 그림이 되어버릴지도 모르죠. --;)그리고, <세월의 돌에 나오는 누구누구> <세월의 돌에 등장한 어디어디> 하는 식으로 그림 안에 설명도 덧붙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3. 접수 기간 : 500회가 올라가는 그날까지.(글 연재되는 동안500회까지 몇 회 남았는지 종종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4. 투표 방법* 나우누리와 하이텔의 경우 ID '모래의책'으로 메일을 보내주십시오. * 타 통신망의 경우 enjolas@nownuri.net또는 enjolas@hitel.net 으로 보내주세요. * 한 아이디로 여러 분이 응모하실 경우는 각각의 응모자 이름을밝혀주세요. (그림 안에 응모자 이름과 그림 설명 덧붙이는 것도 잊지 마세요!) #5. 심사* 심사는 전적으로 제가 합니다. 왜냐면.. 부탁할 만한 데가 없으므로...--;* 심사 기준- 소설상에 묘사된 인물의 이미지가 얼마나 잘 표현되었는가- 소설 상의 외양 묘사와 얼마나 잘 맞아들어가는가- 얼마나 완성도가 높은 그림인가- 그리고... 뭐 그 다음은 그냥 보기에 좋은 게 좋은 겁니다. ^^;;(문외한의 비극... 뭐 시간이 된다면 디자인 전공한 언니한테라도 물어 보지요. 그런데 언니는 신혼집이 너무 멀어서..;) #6. 발표* 일단, 기간 내에 접수되는 모든 일러스트는 발표 후 세월의 돌공식 홈페이지 fairytale.pe.kr 의 갤러리에 올라갑니다. 이벤트 기간 외에 보내주시는 것은 언제 올라갈지 알 수 없지요...(한꺼번에홈페이지 운영자분께 부탁해야 되기 때문에...;)* 발표는 500회가 올라가고 나서, 심사 기간을 좀 두고 나서, 적당한 때에.... 그러니까 너무 오래되지는 않는 때에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7. 시상* 상품 : 각 수상자에게 <세월의 돌> 1권 사인북 한 권씩(우송료 역시 제가 부담합니다)* 수상작의 숫자 :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봐서 좋은 작품이많으면 늘어나는 거고요, 아니면 줄어들지도 모르고요...(과연?) 일단은 세 명에서 다섯 명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엔 한없이 늘어날 가능성이 훨씬 많습니다... 문외한인 제눈에는 웬만한 그림은 다 이뻐보입니다. --;;) +=+=+=+=+=+=+=+=+=+=+=+=+=+=+=+=+=+=+=+=+=+=+=+=+=+=+=+=+=+=+=그럼, 많은 참여 기다립니다! 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3327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26)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27 23:36 읽음:1403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26) 미칼리스가 활을 준비하는 중이다. 유리카는 '친근한 꼬마'가 행여라도 다칠까 싶어 발을 동동 굴렀다. 음, 나도 내 식량… 흠흠, 뭐,하여튼 그런 걸 저 와이번 녀석한테 줄 생각은 없어. 나도 검을 꼬나 들었다. "이쪽으로만 와라!" 두 녀석의 발은 확실히 빨라서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준이 아니었다. 미칼리스도 겨냥을 하기가 상당히 애매한 모양이었다. "저건, 와이번 중에서도 새낀걸." 미칼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화살을 메기기만 한 채, 계속해서 겨냥방향을 돌리기만 했다. 혼이 빠져라 달리고 있는 소의 뒤를 따라 무식하게 질주하고 있는 와이번의 키는 약 3큐빗 가량. 엘다렌이 보다못해 나섰다. "파비안, 미카가 있는 방향으로 저 놈들을 몰아라. 잠깐이면 끝날테니." 위험한 생각 같은데, 과연 괜찮은 거겠죠? 그러나 나 역시 멋대로 괜찮다고 생각해버린 뒤, 미칼리스의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엘다렌과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유리카가 평소 역할 그대로 총감독, 아니 총지휘를 떠맡기라도 한 것처럼손을 내저으며 커다란 목소리로 외쳐댔다. "엘다, 저쪽! 파비안은 좀더 더 가! 아아, 그래. 됐어! 미카는 준비됐지?" 대답은 다들 필요없었다. 대강 마주보고 갈라선 나와 엘다렌은 다음 순간,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고 와이번과 소가 약 10초 후에 도달할 것으로 보이는 위치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오오, 이거 생각보다 신나는데? "너무 가까이 가지 마!" 물론 신만 나는 것은 아니었다. 두 도망자―물론 우리 입장에서 봤을 때―들은 처음엔 우리쯤은 아예 염두에도 없는 듯했으나, 잠시 후 내가 녀석들보다 한층 목소리를높여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그제야 우리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앗!" 어째 죽어가는 건 소가 아니고 내 쪽 같군. 우리의 존재를 인식한 소는 한바탕 울어제치는 정도로 자기의 의견을 표현했으나 와이번은 의견이 달랐다. 녀석은 뭔가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는지, 바로 뒤까지 쫓고 있던 소의 등허리 위를 겨냥하여 갑자기 펄쩍 뛰어올랐다. "어어억!" 어, 와이번이 소한테 업혔네? 드디어 와이번을 업은 소는 당황해서 아무 쪽으로나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얼결에 소는 미칼리스가 서 있는 방향의 정면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활이 겨눠져 있는데도 소는 눈앞에 뵈는게 없는지 정말무섭게 미친 듯 질주했다. "방향을 바꿨다! 미카! 조심해!" 엘다렌의 외침에 미칼리스는 친절하게 다시 외쳐 주었다. "조심은 와이번더러 하라고 해야지!" "에이 참, 자꾸 거짓말 할래요?" "거짓말이 아니야. 예전에 정말로 몬스터 고기를 먹으면 몬스터들이 두려워서 도망친다는 얘기가 있었단 말이야." "몬스터가 나타나기 전엔 절대 증명되지 않겠군요." 나는 미칼리스의 억지 주장을 믿는 척이라도 해 주려고 억지로 와이번 고기를 구웠다. 겉보기에는 그럭저럭 볼만했고, 냄새도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그런게 다 뭐란 말인가. 맛은 전혀 없는데. 나는 정말 하늘을 올려다보고 외치고 싶었다. 바로 이렇게. "젠장, 이러니까 몬스터밖에 못하지!" "그래, 와이번이 맛있었으면 예전에 인간이 가축으로 키웠을 거라고." 유리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절대 와이번 고기에 손대려 하진 않았다. 혹시 굶기라도 했다면 모르되, 저기 떡 구워진 새구이―이름은모르겠지만 적어도 맛에 있어서는 와이번이 신발 벗고도 못 쫓아올―가 버티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쳇, 그런데 와이번은 신발이 없잖아. "너무 상심하지 마. 우리가 와이번을 요리해 먹는걸 보고 저기 라-메르이르가 좋아하고 있잖아." "좋으면 자기나 먹을 일이지." 어쨌든 무슨 말로도 위로되지 않았다. 와이번 고기는 정말 지독하게 질기고 맛없었다. 와이번은 새끼라 해도 살이 연하거나 그런 건전혀 없는 모양이지? 쳇, 가죽 부츠를 통째 삶아 놓아도 이것보단 낫겠다. 새끼라는 점이 약간 도움이 되긴 해서, 미칼리스의 한 화살에 배가꿰뚫린 와이번은 다행히 간단하게 죽어 주었다. 소 위에 올라선 와이번이 얼마나 겨냥하기 쉬웠을지에 대해선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오늘 아주 평생 한 것보다 더 많은 운동을 했을 거라고 생각되는소 녀석은 멋대로 어둠 속을 돌아다니고 있다가 지금은 아예 방울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녀석이 자빠져 자고 있을 거라고멋대로 짐작해 버렸다. 그런다음 온통 힘줄로만 만들어진게 아닐까 의심되는 와이번의 다리 고기를 찢어 보려 애쓰다가 결국 포기한 나는 다시 한 번 투덜거렸다. "역시, 와이번보단 똥쟁이 녀석을 잡았어야 했다니까." 유리카가 발끈해서 외쳤다. "똥쟁이가 아니라니까!" 음무우우우우……. 그러나 유리카를 제외한 모든 일행은 녀석을 똥쟁이라고 부르는 쪽을 훨씬 기꺼워하는 듯했다. "뭐, 똥쟁이 녀석이 맛있긴 하겠지만 오늘은 운동을 많이 했을 테니 도살은 다른 날로 미루자." "미카! 어쩌면 똑같이……." 이렇게 말하는 양반이 진짜로 엘프라니, 아무도 안 믿을게 틀림없어. 저 말이 진심이 아니라고 믿고 싶어하는 건 아마 나뿐이 아닐거야. 주아니는 며칠 전 그림으로만 보던 와이번 모형을 실제 보게 되자,호기심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으로 자기가 언제 와이번에 대해 궁금해했냐는 듯 완전히 안면을 몰수했다. 게다가 그 와이번을 잘라서 굽니 볶니 토론을 벌이는 나와 미칼리스를 아예 똑같은 몬스터로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끔찍한 표정을 지었다. "로아에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들쥐 같은 건 안 먹는다고." 그래, 그건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아냐, 와이번보다는 들쥐 쪽이좀더 맛있지 않을까?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다음 일행을 둘러보며 툭 한 마디 던졌다. "젠장, 와이번 잡기보다 와이번 먹기에 훨씬 체력이 많이 소모된단걸 몰랐어. 이만 잠이나 자는 편이 좋겠다." 스스스슥, 스슥. 우리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그러니까 와이번이 몬스터일 수밖에없는 까닭은 다른 데도 있었다. 파샤샤샤샤사사……치컥, 치컥. 나는 누웠던 자리에서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움직이지 않은 채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곁눈 너머로 보이는 동료들은 모두 잠든 듯 담요 속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깨어 있는지 아닌지 알아낼길은 없었다. 아마, 이미 나처럼 깨어 주위를 감지하고 있음에 틀림없을 거야. 뭔가 다가오고 있어. 뭐지? 그때였다. 키큐르르르륵!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다. 검 손잡이를 끌어당김과 동시에 번개처럼 담요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나 상황을 제대로 알아채기도 전에 먼저 날아든 것이 있었다. 캬캬카르륵! "흐윽!" 순식간에 오른쪽 다리를 힘껏 할퀴더니, 힘껏 밀어 바닥에 넘어뜨렸다, 아니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내가 휘청이다가 주저앉아 버렸다. 긁힌 다리가 순식간에 뻣뻣해진다. 그래도 억지로 다리를 끌며몸을 홱 돌리는 순간 이번에는 머리를 힘껏 내리쳐 오는 단단한 가죽날개에 호되게 얻어맞았다. "픗!" 입술이 터져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본능적으로 담요를 끌어당겨머리를 감싸며 움켜쥔 검손잡이를 방금 전 뭔가 있던 뒤쪽을 향해 팔꿈치째 힘껏 내질렀다. 키륙! +=+=+=+=+=+=+=+=+=+=+=+=+=+=+=+=+=+=+=+=+=+=+=+=+=+=+=+=+=+=+=500회 기념으로 다시 인기 투표를 하자시는 분들이 있으신데요... 그건 완결 기념으로 미루겠습니다. ^^;600회는 올지 안올지 잘 모르겠고요... 그리고 스캐너가 없어서 일러스트를 스캔할 수 없다고, 그래서 그림을 그냥 우편으로 보내면 안 되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계신데요, 그건 저도 헷갈리는 문제이긴 합니다. 왜냐면, 그렇게 보내셔도 결국은 제가 스캔을 하지 않으면 안될 거거든요.... 홈페이지에 올리려면 어쩔 수가 없으니까요..;;음.... 게임방 같은데 스캐너 없나요? ^^;;; (제가 가봤던 데는 있던데...) 방배동 나우 오프라인에도 있긴 하더군요. 그런데 그건 일반 이용자들이 쓸 수 있는건지 잘 모르겠어요. 동호회 운영진들은 공짜로 이용할 수 있더라고요. 앞으로도 그렇게 문의하시는 분이 많으면, 한 번 우편 접수도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그림 보내주시는 분이 계시네요...^^;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3563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27)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29 00:01 읽음:1402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27) 뭔가 내 검의 힐트에 얻어맞아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퍼덕거린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앉은 채로 허리를 꺾으며 검을 휘돌렸다. 키캭! 그런 다음, 나는 소리를 질렀다. "지금 모두 깨어 있는 거야? 어서! 습격이야! 한두 놈이 아냐!" 이제 주위를 가득 메운 캬르륵대는 쇳소리 때문에 동료들이 뭐라대답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시 소리를 지르려 입을 벌리는데, 아까 얻어맞은 뺨이 부풀기 시작한 것이 느껴졌다. 입을 움직이기가 거북했다. "불, 불!" 간신히 엘다렌의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서둘러 아직 꺼지지 않은 모닥불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몇 번이고 검을 휘둘러 다가오는 괴물들을 막아야 했다. 모닥불로 다가가보니 한결 주위의 모습이 잘 보였다. 우리를 습격한 것은 몇 마리인지 제대로 헤아릴 수 없는 와이번 떼였다. 겨우 꺼져가는 모닥불의 빛만 갖고는 그 수효를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당장 모닥불 가운데로 뛰어들어 불붙은 장작들을 주위로 걷어찼다. 에제키엘의 부츠니만큼 불에 탈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캬악거리는 괴성과 함께 불똥을 피해 펄쩍 뛰어 물러나는 십여 마리의 와이번들이 보였다. 불 붙은 나무토막들이 튀어나가자 동료들의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유리카가 외치고 있었다. "부리, 그 속에 이빨을 조심해! 독이 있어!" 다행히 아직까진 이 뭐가뭔지 모를 상황 속에서 그 이빨이라는 것에 건들린 것 같진 않다. 아니, 와이번이 새야? 무슨 부리가 있다는거야? 주둥이를 말하는 건가? 하긴, 와이번이 새인지 아닌지 내가 알 바 있겠어? 타고 있는 나뭇가지를 들어 한 놈에게 힘껏 던졌다. 한쪽에서 고함소리가 터졌다. "파비안! 이리로 장작을 좀 던져주지 않겠어!" 미칼리스는 놀랍게도 언제 할버드를 맞춰 끼웠는지 이미 종횡무진휘두르며 싸우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좋은 생각이긴 했다. 나는검을 오른손만으로 휘두르면서 왼손으로는 장작을 하나씩 집어 이곳저곳으로 던졌다. "갑니다!" 마른 히스풀 벌판에 불이 옮겨붙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금방 곳곳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불똥들에 와이번들은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중 날개에 불이 붙은 한 놈이 날개를 펄럭이며 내 쪽까지 오는 것을 보고, 날개에 구멍을 몇 개 더 뚫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이번의 수효는 너무 많았다. "도, 도대체, 왜 이리로 갑자기 몰려온……."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렸다. "놈들, 우리가 낮에 잡은 와이번 새끼 때문에 몰려온거야." 어느새 성큼성큼 몸을 날려 모닥불이 있는 중심으로 다가온 미칼리스였다. 이윽고 유리카와 엘다렌도 이쪽으로 합세했다. 그래도 불이있는 곳이라 다른 곳보다 상태가 나았다. 나는 물었다. "아니, 와이번이 새끼의 복수를 위해 저렇게 단체로 몰려올 정도로머리가 좋다면 미리 말해 주셨어야죠!" "무슨 소리야, 저런 놈들이 복수 따윌 알 리가 있어?" "그, 그럼……." 대답을 다 듣지도 못한 채 몇 번이고 다시 검을 내리치고 휘둘렀다. 이제 우리 넷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전투해야 좋은지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나, 유리카, 미칼리스, 엘다렌의 순으로서로 등을 대고 돌아선 우리는 길고 무거운 무기를 휘두르는 나와 미칼리스, 짧은 무기의 유리카와 엘다렌으로 금방 역할 분담까지 되었다. "젠장, 왜 이렇게 많아!" 멀찍이서 다가오는 놈들은 나와 미칼리스의 차지다. 가장 긴 무기인 미칼리스의 할버드가 놈들의 머리를 몇 개 날려버리고 뱃가죽에구멍을 뚫었다. 나는 주로 날개가죽을 찢었다. 그리고 안되면 좁은몸통에 검을 쑤셔박았다. "위를 봐!" 갑자기 날아서 달려든 와이번 한 마리의 다리를 유리카의 검이 빠르게 긋고 지나간다. 발목이 잘라진 와이번은 고통으로 몸을 비틀며우리들 가운데 떨어져 내렸다. "엘다!" 그리고 놈의 숨통은 엘다렌의 도끼가 끝장냈다. 키큐큐큐, 큐르르르륵……. 놈들의 수효가 좀 줄긴 했으나 아직도 끄떡없는 대군단이었다. 날이 밝아야 미칼리스가 활을 좀 쏘든지 할 텐데, 아직 새벽이 되려면멀었나? 그 미칼리스는 그리고 하던 말을 마저 대답했다. "놈들은, 시체 냄새를 맡고 온 거다." "시체라니?" 나는 머릿속으로 그게 시체에서 더럽게 맛없는 고기 요리로 바뀐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 냄새를 맡는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쉴새없이 검을 휘둘렀다. 처음에 얻어맞은 뺨이 얼얼했고, 오른쪽 다리가몸을 돌릴 때마다 휘청였지만 아직까지는 크게 문제 없이 버틸 수 있었다. 쳇, 그런데 미칼리스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와이번 고기를 별로 안먹어서 이 녀석들이 이렇게 겁도 안내고 덤비는 건가? 나는 싸우면서도 궁금한 것이 생겨 물었다. "와이번이란 놈들은… 본래 이렇게 작아요?" 대답은 한참 후에야 들렸다. "그게 이상해. 어찌된 일인지 전부 새끼들 뿐이란 말야. 진짜 어미라면 몸 길이만도 저 녀석들의 세 배는 넘을 텐데, 그렇다면 우리가지금 이렇게 손쉽게 처리하고 있지도 못하……." 미칼리스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의 힘껏 휘두른 할버드가 와이번한 놈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 조각으로 쪼개버렸다. 유리카는 싸우면서도 불안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라-메르이르… 어디로 갔니… 귀여운 메르이르……." 그 소가 어느 와이번의 새벽 간식이 되었을지는 신성한 영혼들만이알거다. 틀림없어. 카캬캬캬캬캬륵! 캬르륵! 나도 지지않고 맞대놓고 고함을 질렀다. "야야야야야임마! 시끄러!" 뒤에서 미칼리스, 이어서 유리카마저 나직이 키득대는 소리가 울렸다. 좀더 여유가 있다면 더 실컷 웃었겠지만, 그럴 여유는 오늘 점심때쯤에나 갖게 될까. 우리 각각이 새끼 와이번 약 다섯 마리 이상을 쓰러뜨렸을 때, 동편 하늘에서 날이 밝기 시작했다. "어어, 날이 밝으니 놈들이 더 잘 보이는데." "안 좋은 점도 있다고요." 그러니까… 좋은 점을 따지자면 일단 적들이 잘 보이고 게다가 남은 숫자도 이제 십여 마리 정도로 그렇게 많지 않아보였다는 것, 그리고 안 좋은 점은……. 저거야말로 바로 어미 와이번! +=+=+=+=+=+=+=+=+=+=+=+=+=+=+=+=+=+=+=+=+=+=+=+=+=+=+=+=+=+=+=미츠루군 님, 굉장히 여러 인물의 일러스트를 보내주시는군요. 잘보겠습니다.. ^^ (개인적으로 주아니가 제일 나아요..^^;)500회가 될 때까지 응모를 받는다니, 그렇다면 지금 몇화째냐고 물으신 분이 있으셨죠? 제가 오늘 세어 보니까... 오늘 올라간 것까지모두 463화로군요. (혹시 틀리면 어쩌지...)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3731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28)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99/12/29 20:59 읽음:1476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28) "으음……." 확실히 엘다렌마저 저렇게 신음할 만했다. 만일 밤새 저러고 있었던 거라면 새삼 생각해도 등골이 떨려올 정도로, 엄청나게 거대한 와이번 한 마리가 싸움터에서 좀 멀찍이 떨어져 웅크린 것이 보였다. 아까 세 배라고 했잖아! 순 거짓말! 저건 어림잡아만 봐도 지금까지 우리가 베어넘기던 새끼들의 다섯 배도 넘어 보인다! 미칼리스조차 약간 질린 듯 중얼거렸다. "겨우 과자 조각 몇 개에 달려들 군단이 아닌 것 같은데." "과자 조각이라뇨?" 미칼리스는 이제 점차 다른 셋이 만든 원 안쪽으로 들어오며 활을준비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 질문에 대꾸했다. "와이번 같은 몬스터들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다. 죽은 동족은가장 좋은 간식거리지." "그, 그런……." 뭐라고 불평을 늘어놓을 틈도 없었고 사실 미칼리스한테 불평해 봤자 전혀 소용없었다. 하려면 와이번들한테 해야겠지. 야, 이 경우 없는 놈들아! 어떻게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점심거리냐아! 아참, 게다가 그 질기디 질긴 고기를 무슨 맛으로 먹냐아! 이리하여 와이번이 몬스터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또 하나 추가되었다. "라-메르이르으!" 유리카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소를 찾는 눈초리였지만 이미 그 소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감인지 다행인지는 내 아직 모르겠다만…. 어쩌면 저기 버티고 앉아 우리를 가소롭게 구경하고 있는 어미와이번이 이미 밤참으로 꿀꺽하셨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심지어 잡아먹은 흔적조차도 없네? 아예 한 입에 꼴깍 삼켜버렸나? 캬르륵! 캬르륵!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기존의 위험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십여 마리 정도 남은 와이번 새끼들을 일단처치하고 볼일이었다. "저 놈을 보고 있자니 왠지 맥이 빠지는데." 미칼리스는 한눈 팔듯 먼산을 바라보고 앉은 어미 와이번을 흘끔거리면서 중얼거렸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단은 할 일을 하고봐야 했다. 미칼리스는 활을 메기긴 했으나 어미 와이번을 겨냥하지는 않았다. 일단은 저러고 그냥 있으니, 귀찮은 것들을 처치할때까진그대로 두는 편이 낫다. 괜히 지금부터 성질 건드려 봐야, 한꺼번에처리해야 할 위험만 느는 거다. 대신에 그는 팽팽하게 당긴 화살을 가장 멀찍이서 퍼덕이는 와이번새끼를 향해 쏘았다. 쐐애애애액! 퍼억! 그 목줄기가 똑바로 꿰뚫리자 와이번은 벌렁 나자빠져 버르적거렸다. 어떻게 저렇게 멀리 있는 녀석의, 그것도 가느다랗게만 보이는목을 겨냥할 생각을 할까. 그만큼 자기 활솜씨에 자신이 있다는 말이겠지. 다시 또다른 화살, 그 넓은 화살촉에 또 한 녀석의 머리가 단숨에 달아났다. 얼른 없어져! 캬악! 캬악! 소리는 줄어들어 있다. 엘다렌이 버럭 소리지르며 뛰어나가더니 나란히 선 두 마리의 와이번을 나무 베듯 연이어 토막냈다. 지저분한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제 막바지다. 나 역시 다가오는 한 놈의뱃가죽을 가르고 날개의 피막을 찢고 그 머리를 쪼갰다. 검에서 불꽃이 일지는 않지만 신기하게도 뼈채 잘도 잘라져 나간다. 내 눈앞에한 놈의 눈빛이 번뜩이는 듯하더니 펄쩍 뛰듯이 날아올라 발톱으로머리를 채려 했다. 나는 친절이라도 베풀 듯 동시에 뛰어올라 놈의발목을 싹둑 잘라 버렸다. 푸슈슈슉……. 지저분한 피가 동료들의 머리로 온통 쏟아졌다. 기분 더럽다. 검을힘껏 머리 위로 솟구쳐 올려, 떨어지고 있는 그놈을 꼬챙이로 꿰듯꿰어 땅바닥에 내리쳤다. 그러고 돌아보니 이제 주위에 남은 것은 단두 놈뿐이었다. 이상한 일인데 말야, 지금 보니 와이번이란 놈들, 굉장히 이상하게생겼는걸? 아냐, 아까 덤비던 놈들은 저렇게 안 생겼었는데? 지금 덤비는 놈들만인가? 키큐르륵! 키큐륵! 아무리 봐도… 뭐랄까… 좀 기형이란 말이야……. 이미 우리가 죽여 쓰러뜨린 놈들 중에도 기형으로 생긴 놈들이 섞여 있었다. 머리가 펑퍼짐하고 목이 짧았으며, 어떤 놈은 다리가 유난히 길거나 날개가 기묘하게 접혀들어갔다. 눈이 얼굴 양쪽에 달리지 않고 두 눈 모두 똑바로 앞으로 볼 수 있도록 생긴 놈도 있었다. 이 놈들 뭐야? 어째서 저따위인거야? 혼혈이라도 되나? 집단 전염병이기라도 한 거냐? 쿠퀘에, 쿠퀘에……또 한 놈이 유리카의 검에 의해 세로로 목줄기를 잘리고는 기괴한신음 소리를 냈다. 그르륵대는 목에서는 뭔지 모를 허연 조각이 나와밖으로 너덜거렸다. 조금 후에 소리는 나지 않게 되었다. "이제 한 놈!" 결국 그 놈을 끝장낸 것은 엘다렌이었다. 나는 그가 단숨에 반으로쪼개버리는 놈의 모습을 잠시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째… 뭐랄까, 좀 뭔가 닮은 것 같지 않아? 뭐하고 닮았냐고? 글쎄……. "헉, 헉, 휴우, 휴우, 이제 1차 청소는 끝인가?" "그런 것 같은데." 엘다렌은 내 말에 대꾸하고는 몸을 거대한 어미 와이번 쪽으로 돌렸다. 그 와이번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몸을 약간 움직여 자세를바꿨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 눈에 들어온 것은! "라-메르이르으으!" 소였다. 아니, 쇠고기… 아니, 아직은 소였다. 그제야 우리는 그 와이번이 가만히 있었던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어미 와이번은 그 자세로 앉은 채, 뒷발로 소의 목덜미를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소도 기절이란 걸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말 많던 소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살았으면 소요, 죽었으면 쇠고기. 나는 새삼 불만스러워져 투덜댔다. "뭐란말야. 난 좀더 멋진 것을 구출하는 입장이 되고 싶단 말이야." 물론 유리카는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미카, 활을 쏴!" 물론, 유리카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활은 쏘아야 했을 것이다. 등뒤에 거대한 와이번을 내버려두고 한가하게 다시 여행을 계속할 여행자는 없을 테니까. 게다가, 그 여행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몬스터 사냥에 익숙한 고대의 전사들이란 말씀야. 아, 물론 나 빼고 한 말이라고. 키유우우우우우……. 와이번은 거대한 부리인지 주둥이인지 모를 것을 허공으로 쳐들고기이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미칼리스가 활을 메겨 그 시위를 바로 놓으려는 순간, 드디어 활동을 개시했다. "저, 저놈이!" 거대한 와이번은 소를 움켜잡은 채 하늘로 가뿐하게 비상했다. 피막의 날개가 좍 펴지고, 와이번이 약 20큐빗 상공으로 날아오르는 데에는 잠깐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 그런데! "저, 저걸 봐!" 세상에, 하늘엔 또 한 마리의 와이번이 있었다. 둘은 마치 부부라도 되는 것처럼 사이좋게 하늘을 몇 바퀴 빙글빙글 돌았다. 한 놈이 소를 잡아채고 있어 그렇게 높이 날지는 못하자,다른 놈이 마치 도와주려는 것처럼 좀더 아래로 내려왔다. 물론 우리들 두 발 가진 종족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새로운 와이번은 소를채간 와이번의 높이까지 내려오더니, 갑자기 더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캬와아아아악! "전부, 비켜! 달아나!" "수그려!" 놈의 목표는 물론 우리였다. 우리 넷은 동시에 네 방향으로 갈라져 필사적으로 달리다가 들판어느 한구석엔가 몸을 처박고는 달리기를 멈췄다. 우리 가운데 누구를 쫓아왔을까? 누가 제일 맛있게 생겼지? 미칼리스! +=+=+=+=+=+=+=+=+=+=+=+=+=+=+=+=+=+=+=+=+=+=+=+=+=+=+=+=+=+=+=새천년 연말 기념, 잠시 쉽니다.. ^^;Y2K도 무섭고, 연초에는 저희 집에 친척들이 들이닥치거든요. 남매계라나 뭐라나... 2000년 1월 8일자로 돌아오겠습니다. (왠지 굉장히 늦게 돌아오는듯한 어감이군요...;;)뮤즈라 님, 이런 식이니 15일까지 500회는 어렵겠지요? ^^; 넉넉히시간 두고 일러스트 스캔하세요-그럼 여러분, 즐거운 연말/연초 보내시고,멋진 2000년 계획들 세우세요! (저는 다이어리 속지라도 사러 가야겠군요...)Luthien, La Noir. 『SF & FANTASY (go SF)』 66319번제 목:◁세월의돌▷11-1. 2백년 전 그때처럼(29)올린이:모래의책(전민희 ) 00/01/08 19:29 읽음:329 관련자료 없음-----------------------------------------------------------------------------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1. 2백년 전 그때처럼 (29) "놈은 엘프 취향이었군……." 다양한 종족으로 이루어진 먹이들 가운데 엘프 쪽을 택한 와이번은거센 날갯짓으로 주위에 온통 바람을 일으키며 그 쪽으로 날았다. 어미 와이번이 움직이는 것은 확실히 아까 손쉽게 때려잡던 새끼놈들과는 달랐다. 날개를 몇 번 치자 주위의 공기가 온통 와이번 쪽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미칼리스는 어디 있지? 나와 유리카, 엘다렌은 벌떡 일어나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미칼리스의 활, 그 사이에 활을 메길 시간이 있었을까? 키큐큐큐큐큣! 우리 눈에 보인 것은 흙바닥에서 솟아나온 두 개의 큼직한 바위였다. 그리고 그 바위들 사이에 벌어진, 사람 몸 하나 정도 들어갈 법한 틈새였다. 바위틈 사이에는……. "새사냥이야! 아주 큰 새!" 심지어 우리 귀에까지 들리게 말을 하다니, 그거 일부러 들리라고그런 거지? 세 방향에서 달려온 우리가 와이번과 거의 비슷한 순간, 바위틈 근처까지 다다른 순간이었다. 바위틈 사이에 교묘하게 몸을 던져 누운미칼리스의 머리 위로 와이번이 약 10큐빗 이내까지 다가오는 것을보았고, 그리고……. 쉬이이이익! 이미 모습을 드러낸 태양빛이, 그 순간 은빛 화살촉에 부딪쳐 유리처럼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 한 줄기 섬광이 허공을 쪼개며 비치는듯하더니, 그것은 다음 순간 사나운 창처럼 날았다. 저 상태에서? 저위치에서? 화살은 날아가 와이번의 정수리에 정통으로 꽂혔다. 크캬캬캬캬략, 퀴르륵! 캬오오오오! 와이번은 허공에서 잠시 멈춘 채 퍼드덕거리며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미칼리스는 그걸 구경하고 있진 않았다. 벌떡 몸을 일으킨 그는활을 내던지고 당장 바위틈에서 튀어나와 뒤로 몸을 날렸다. 쿠콰쾅! 그리고 대지에 균열이 일어날 정도로 거대한 충격을 일으키며, 와이번은 떨어져 바위 사이에 처박혔다. 나는 내 눈을 제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저만한 크기의 몬스터를한 방에 죽이는 화살이라고? 그것도 단숨에 급소만 꿰뚫는? 미칼리스는 펄쩍 뛰어 다시 일어서더니 얼빠진 표정의 나를 보며위를 손가락질했다. "볼일 끝난거 아니잖아!" 아 맞다, 쇠고기! 다시 한 번 올려다본 와이번은 처음엔 우리를 다시 공격할 의사도있어 보였으나, 동료의 불행을 보고 쇠고기 수확에 만족하기로 했는지 퍼덕이며 기수를 돌렸다. 그대로 도망갈 심산인 듯했다. 미칼리스가 죽은 와이번 시체 밑에서 활을 아직 되찾지도 못하고 있는 참인데, 와이번은 느리긴 하지만 점차 저쪽 하늘로 멀어져 갔다. 이제 끝난 건가? 그런데, 저 소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한 듯한… 어라, 저 발에 달린게 뭐야? "저거, 네 배낭 아니냐?" 한참만에, 그러니까 와이번이 이미 거의 검은 점으로 변한 다음에야 뭔가 추리해낸 듯 미칼리스가 입을 열었다. 물론 여기서 '너'란내가 아니었다. 내 배낭은 그러기엔 너무 컸으니까. 그건 유리카였다. 유리카의 배낭은, 전에도 말했듯 몹시 가벼운데다 천으로 된 긴 끈이 달린 물건이었다. 내 생각인데 아까 해뜨기 전, 와이번 새끼들한테 습격당해서 정신없이 주위로 흩어졌을 때, 소도 마찬가지로 놀라날뛰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저 좌충우돌 소가 우리가 자고 있던자리까지 밟지 말란 보장이 없는 것이고, 아마 그러다가 발굽에 저게휘감겼겠지. 나는 멍한 표정의 유리카를 향해 위로라도 할 겸 말을 건넸다. "저 안에 뭐 중요한 거라도 들었냐? 비싼 거라도 있어?" 유리카는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정말 뭐 중요한 거라도 잃어버린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녀는 미칼리스가 어깨를 툭툭 치고, 엘다렌이 의아한 눈초리로눈썹을 꼬며 한참이나 바라보는데도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내가답답해져서 머리를 굴리다가 물었다. "아, 블로지스틴의 구슬? 그거 저 안에 들었지? 그거보다 더 중한거라도 또 있었어?" 말이 없는 그녀가 잠시 후 자기 품을 뒤지더니 나를 향해 뭔가를내밀었다. 얼떨결에 들여다보니 바로 그 블로지스틴의 구슬이 든 병이다. 어라, 제대로 있잖아? 그럼 도대체 뭘 잃어버린 거야? "왜 그래? 왜 그렇게 심각해?" 그녀는 내 손에 구슬병을 건네주면서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멍한 얼굴로 와이번이 사라진 하늘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참, 소 때문에 그러나? 하긴 그녀는 소를 꽤 예뻐했었지. "야, 똥쟁… 아니, 라-메르이르 문제라면……." 갑자기 그녀가 정신이 든 것처럼 내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일행 전부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뭔가가 아니라는 것처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고개도 저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우리가 야영하던 장소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았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그녀를 불렀다. "야?"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주아니……." 이, 이, 이, 이런 말도 안되는! 우리는 한참 동안이나 미친 듯이 야영 장소와 들판 구석구석, 들판을 태우다 꺼진 장작 조각들이 날아간 곳까지 정신없이 뒤지고 돌아다녔다. 물론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이름도 불렀다. 귀청이 찢어져라, 목이 터져라 불렀다. 거의 정신이 나간 것처럼 불렀다. "주아니! 주아니! 주아니! 주아니!" 그러나 '왜 그렇게 소리지르고 난리야'라고 말해야 할 주아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의 배낭을완전히 바닥까지 털어냈다. 별가지 물건이 다 나왔다. 들판에 쏟아진것 가운데에는 엘다렌의 솥 같은 커다란 것에서부터 부시, 지도, 단검, 기름주머니, 물주머니, 램프, 보석, 숟가락, 말라비틀어진 마른식량 나부랭이, 빨지도 않고 쑤셔박아 놓은 냄새나는 옷뭉치… 기타코풀다 놔둔 수건 쪼가리까지 모조리 있었지만, 우리가 찾는 조그마한 친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도 모자라 배낭을 뒤집어 바닥까지 탁탁 털어냈다. 젠장할 먼지만 잔뜩 쏟아져 나왔다. "에, 에취! 에취! 에취!" 내가 재채기를 연달아 몇 번이나 하는 와중에도 눈을 굴려 둘러본동료들의 얼굴은 모두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비록 정신없는 싸움에다 온통 혼란중이었지만, 기습을 당했고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았었지만, 우리들도 군데군데 다치고 타박상이니 긁힌 자국이니 하는 것들을 잔뜩 얻었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잊어버리다니, 이런 있을 수 없는! 유리카는 말했다. 어젯밤 주아니가 자기 배낭 안으로 들어가 잠을청하는 걸 똑똑히 보았다고. 더 이상의 가능성은 없었다. 잃어버린것이다. 우리 친구, 우리 동료, 상냥하고 사려깊은 꼬마 종족,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죽 지금까지 나와 함께 있었던, 나를 가장 걱정해주는 주아니를! 글썽하게 쏟아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삼켰다. 다들 말이 없었다. 가망은 없었다. 주아니는 다리까지 성치 못하다. 와이번이 어느 구석쯤에 있는 자기의 둥지에 운반해온 것을 내려놓고 쇠고기를 시식할 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어디든, 어떻게든, 숨거나 도망칠 수 있을 가능성은 굉장히 적다. 혹시 작은 몸집을 이용해서 몸을 숨기는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없어진 조그마한 주아니를 우리가 무슨 수로다시 찾아낸단 말인가! 주아니인들 우리를 어떻게 다시 찾아온단 말야! 늘, 늘 곁에 있어서 이렇게 될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이럴 줄 알았더라면 유리카가 전에 쓰던 마법,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할 수 있는 그거라도 걸어 두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얼마나좋았을까. 얼마나 좋을까. 영영 잃어버리다니. 이렇게, 이렇게 허망하게. "… 와이번이 어디로 갔을까요." "저 산이겠지." 미칼리스는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들어 카라드-리테를 가리켰다. 나는 한참 묵묵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 "어째서요." "왜냐면, 몬스터들은 반드시 드래곤이 있는 곳에 몰려들기 마련이니까 그렇다." "드래곤이 있는 곳이라고요……." 그러나 산은 산이었다. 동네 뒷산도 아니고, 작은 언덕은 더더욱아니다. 구름에 가려진 카라드-리테는 한층 더 크고 까마득한 것처럼보였다. 저 안에는 얼마나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 바위와 바위 틈새들이 있을까. 정말, 불씨만한 가능성이다. 아니, 그것조차도 없다. 눈곱, 겨자씨, 모래 한 알, 먼지 한 톨 만큼의 가능성이라고나 할까. "그렇더라도……." 그렇더라도, 가능한 한 빨리 가야 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잠시 잊었던 것… 몇 배로 보상할테니까. 제발 살아만 있어줘. +=+=+=+=+=+=+=+=+=+=+=+=+=+=+=+=+=+=+=+=+=+=+=+=+=+=+=+=+=+=+=오랜만에 돌아왔습니다.. ^^ 그동안 잘 쉬... 지는 못하고 사실은정신없이 보냈습니다만.... 그동안 몇 가지 소식이 있었습니다. 우선, 나우누리에 세월의 돌 팬클럽이 생겼습니다. 1월 5일자로 개설되었고 현재 80여명의 회원들이 가입하셨답니다. 글은... 하루에100개꼴로 올라옵니다... (허, 허걱...;;;)go fnjmh / go 전민희 / go 세월의돌 / go 세돌 / 해서 가시면 됩니다. 거의 매일 대화방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려서, 저도 가끔 가서 구경합니다. ^^;두 번째로는 보신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지만 '일간스포츠'에 판타지 작가들의 릴레이 단편이 실렸답니다. 제 글은 1월 5일자 26면에 <세기말 3중주>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새해 인사 보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멋진 편지들, 잘 간직하겠습니다. 500회 기념 이벤트로 일러스트 보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그런데 역시 연재를 중단하고 있으니 응모도 적더군요.. ^^; 그런데비웅 님, 그 그림들은 세월의 돌이 배경이 아닌 것 같던걸요? 정식응모입니까? 13일자로 8권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어딘가에서 이미 출간되었다는글을 읽고 당황했습니다...;;;나우누리의 chosd 님, 저는 '루나'라는 게임이 도대체 무엇인지도모릅니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았습니다..;;;(일전에도 한 분이 그 게임과의 연관성을 말씀하셨는데, 혹시 같은 분이던가요?) 저는 아는게임이 별로 없거든요. 혹시 게임기용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구해서해볼 길도 없겠군요...--;)질문 보내주신 분들의 것은 다음번에 답변하겠습니다. 자리가 모자라서...;; 아참, 29화로 이번 편은 끝입니다. (빨리도 말하는군..;;)Luthien, La Noir. 번 호 : 27212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10 00:04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1)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1) 한 개의 메르장, 반짝이는 금화가 있네뒷면에 새겨진 여왕님의 얼굴은 두말할 나위없이 아름답고빈 주머니 잡동사니와 짤랑이는 소리도 기막히게 경쾌하지만한 개의 메르장, 너무나도 작은 것이라지친 여행자, 하룻밤 머리 누이고 다음날 아침이면 쫓겨날 테고굶주린 이몸, 잘 차린 성찬 한 번이면 내일부터 사흘은 내리굶겠지한 개의 메르장, 지나치게 잘 만들었어기막히게 정교한 다듬새, 매끈하게 마무리된 동그란 모서리홀쭉하니 새겨진 '1'이란 숫자, 장님이라도 못 알아볼리 없지한 개의 메르장, 불평해도 늘진 않네이 손에 쥐어진 게 그뿐이라 해도 날 먹여살릴 놈을 찬양할 밖에가난한 이몸, 오늘밤 굶고 길바닥에서 잠드니보단 낫지 않겠는가- '균열의 날(Chasm's Day)', 저 너머의 시대에 불렸던가난한 기사의 노래 좋은 노래지. 내가 '존드' 대신 '메르장'을 등장시킨 것은 세 글자 운을 맞추기위해 그런 것이다. 그렇다 해도 내가 겨우 그런 까닭으로 세르네즈의돈을 노래에 등장시키게 되다니, 확실히 오랜 여행은 내게 남긴 것이있는 모양이었다. 아, 여왕은 누구냐고? 이름으로만 들었을 뿐이지만, 유리카의 모국이라는 로존디아에는 '주드마린'이라는 여왕 폐하가 계시다지 않아? 아마 거기도 메르장금화를 쓸 테고. 이 노래를 지금 느긋하게 동료들한테 불러줄 수 있는 상황이라면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기를 쓰고 고생해서 드디어 완성시킨 건데. 그러나, 지금은 노래를 부를 때가 아니다. "잠시 쉬지 그래." "싫어." 유리카는 그게 자기 배낭이었다는 것 때문에 까닭 모를 책임을 더느끼는 모양이었다. 미칼리스가 보다못해 한 제의를 딱 잘라 거절한채, 그녀는 쉬지 않고 바위 틈새를 딛고 풀뿌리를 부여잡으며 필사적으로 올라갔다. 내가 빌려준 건틀렛을 끼고 있긴 하지만 이미 손가락끝은 다 부르텄을 터였다. 절벽. 바위 절벽이다. "……." 일부러 약간 뒤처져 그녀의 뒤를 따라 올라가는 내 심정 역시 착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미 미친 듯 들판을 가로질러 이 산까지 도달하는데 걸렸던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마음은 자꾸 절망적인 쪽으로기울어졌다. 다시는 그 또록한 눈망울, 싸움을 말리던 목소리, 동료들의 일이라면 자기 일인양 흥분하던 귀여운 꼬마를 보지 못할 것 같은 느낌에 자꾸만 목구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올랐다. 만약 만분의일의 가능성이 맞아들어가 이번에 되찾게 된다면, 다시는, 다시는 떨어지지 못하게 할 거야. 배낭 같은데 들어가지 않게할 거야. 내 손으로 다시 그 동굴 속 로아에들의 나라로 돌려보내 줄때까지 절대, 절대 꼭 품고 다닐 거야. 용서해 줘……. 까악, 까악, 까아아아악……. 어디선가 우짖는 까마귀 소리조차 나를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이미 죽었어. 녀석은 죽었어. 바위에서 떨어지거나, 발을 헛딛거나, 와이번의 주둥이에 물려서 녀석은 죽었어. 듣기 싫다. "저리 가지 못해!" 까아아아아아옥! 그렇게 조그만 꼬마의 시체에, 저렇게 많은 까마귀가 몰려들 리 없잖아!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안 그래? 안 그래? 정말로, 안 그래? 안 그러냔 말야! 까아악! 까아악! "저 새새끼들이!" 난, 정말 한동안 날개 달고 날아 다니는 것들을 전부 증오하게 될지도 몰라. 와이번이든, 까마귀든, 모조리 다 죽여버렸으면 좋겠다. "까마귀……." 앞서 가던 유리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반은 미친 것처럼 이 절벽산을 쉬지 않고 기어오르고 있는 우리들의 신세는참으로 처량하고 한심해 보였다. 만분의 일, 아니, 천만분의 일. 이 까마득한 병풍같은 산에서 그조그만 꼬마를 찾아낸다는 건.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실반지 찾기,바다에 빠진 동전 건지기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미칼리스의 말대로,일단 와이번 같은 놈이 둥지를 틀 법해 보이는 저 첫 번째 봉우리까진 올라가야 했다. "안되겠어. 유리, 넌 쉬어야 돼." 중턱까지 간신히 오른 다음, 꼭두각시 인형처럼 늘어진 팔을 억지로 움직이며 새로운 능선으로 기어오르려는 그녀를 미칼리스가 막아섰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흔들며 그의 팔을 밀어제치려 했다. "유리, 쉬어라. 그 몸으론 오르기도 전에 절벽에서 떨어져 버린다." 엘다렌이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눈이 나와 마주쳤다. "……." 그녀와 주아니가 처음 만났던 켈라드리안의 메르농 샘이 떠오른다. 그녀는 말했었지. '내가 파비안보다 주아니 너를 더 좋아하게 될지누가 아니?'그래… 그 말대로 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녀에게도 이제 주아니는 굉장히 중요한 친구가 되었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미칼리스와엘다렌도 쳐다보았다. 와이번 그림까지 그려 가며 신나게 설명하던미칼리스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듣던 주아니, 같은 땅의 종족이라며엘다렌과는 몹시 친밀하게 지냈던 주아니……. 쳇, 이런 상황이라니 정말 참을 수가 없군. "유리, 잠깐만 쉬어. 이미 우리는 최선 이상을 하고 있어." 그녀는 맥없이 미끄러지듯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내가 한말은 반드시진심이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최선을 다하려면 처음부터, 싸움이 처음 벌어졌을 때부터 미리 주아니를 챙겼어야 했다. 그와이번이 날뛰고 장작불이 튀어 날아다니는 그 자리에 그냥 내버려두어선 안 되었다. 그때 나는 뭐라고 생각했었지? 아아, 엘다렌이 데리고 있을 거라는생각을 언뜻 했었던 것 같아. 무책임해. 정말 무책임하군. 슈우우우우우……. 우리가 택한 첫 번째 봉우리는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다. 손가락들로 치면 마치 엄지손가락 같았다. 저 너머로 카라드-리테의 삐죽삐죽한 봉우리들이 성의 첨탑처럼 줄줄이 솟은 것이 보인다. 그 사이에는짙은 구름이 층층이 깔려 있었다. 바람이 불자 구름들이 날려왔다. 줄줄이 양떼들처럼 조각조각 밀려왔다. 땀이 흠뻑 솟아난 등허리를, 약간 오싹하게 바람이 씻어갔다. "뭘 먹어야지." 먹을 것은 없었다. 우리는 사냥할 틈조차 없었던 것이다. 미칼리스의 말에 문득 깨달은 것처럼, 우리들에겐 엊그제 배낭 속에서 발견되었던 말라비틀어진 마른 식량이 나누어졌다. 이제 그나마있던 식량도 지금 먹으면 끝이다.허기가 져서 배가 홀쭉했다. 앉아서 뭔가 씹고 있자니 그제야 그 사실이 느껴졌다. 꾸르르르륵……. 억지로 바짝 마른 음식을 넘기자니 뱃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걸 들으니 또 주아니를 처음 만났을 때, 내 뱃속에서 울린 꾸르륵소리에 혼비백산해서 도망가려 하던 녀석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것참, 견딜 수 없는 기분인걸. "올라가 봐서… 없으면 어떻게 할 거야?" +=+=+=+=+=+=+=+=+=+=+=+=+=+=+=+=+=+=+=+=+=+=+=+=+=+=+=+=+=+=+=500회 이벤트 일러스트 보내주세요. ^^ (기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본인도 잘 모름..)templers 님이 보내주신 질문에 몇 개만 답변드립니다. 첫째로, 황혼검의 속성은 여명검의 불, 바람과 반대되는 땅과 물입니다. 아마 본문중에 나왔던 것 같네요. 그리고 그것도 투핸드소드인지는 앞으로 보시면 압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둘째로, 단행본 7권에 있다는 기억6에서 '자신의 왕국을 버리고 온친구'는 유리카가 아니라 엘다렌입니다. '빗속을 뚫고 묵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죠. 다음으로 천리안의 kai1101님의 질문. 파비안이 아버지한테 릴가를 만난 얘기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저도잘 모르겠네요. (...;;) 제가 안볼 때 혹시 했는지도... 나르디의 의도에 대해서 하신 짐작은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에필로그 반권은 '무리'입니다. 이미 전 10권이 될 예정이기 땜시...--; (준비해 놓은 스토리, 아직도 쌓였습니다. 어흐흑..)늦어지는 것은 반성하겠습니다만, 게을러서는 아니에요..;; 그리고홈페이지 업데이트 제가 안합니다. 할 줄도 모릅니다. --;그리고 애니화라고요? 뭐 제가 회사를 하나 차린다면 모를까..(이무슨 헛소리인가..;)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 (물론 애니화할만큼 좋은 작품이라고 말해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Luthien, La Noir. 번 호 : 27254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10 19:56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2)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2) 미칼리스의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억지로 턱을 움직여 딱딱한 육포를 씹고 있을 따름이었다. 육포는 얼마나 말랐는지 그렇게 한참이나 씹었는데도 육즙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목이 마르군……." 그러고보니, 주머니에 물을 채운 것도 꽤 오래된 일이다. 얼마나남았나 살펴보니 몇 모금씩 돌려 마실 정도밖에 없었다. "그냥 다 마셔버리죠." 나는 두 모금 들이킨 다음 가죽 물통을 옆으로 돌렸다. 다들 마시고 났는데도 물이 약간 남았다. 나는 유리카더러 마시라고 물주머니를 밀었다. "싫어. 그냥 둬." 그 목소리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상심하고 있는지 충분히 느껴졌다. 한층 이 상황이 안타까워졌다. 그렇게 쾌활하던 일행은 완전히침울해져서 식사 같지도 않은 이 식사가 끝날 때까지 더 이상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에제키엘, 그가 있었다면 금방 찾아내지 않았을까. 마법이든, 뭐든써서. 나는 무능력해. "그만 다시 갈까." 엘프와 드워프에겐 아직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엘다렌이 가진 인간 몇 명을 합한 것 같은 체력에 대해선 이미 여러번 경험한 바 있었고, 엘프인 미칼리스는 들판을 달리거나 산을 오르는데 그다지 힘이들지 않는 듯했다. 정말 마치 유흥삼아 등산하는 사람들처럼 아주 가뿐가뿐하게 절벽을 오르고 바위를 타넘었으니까. 어떤 때는 반쯤 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는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옛날, 그러니까 엘다렌이 말한 대로… 정말 저 하얀 부리 엘프에게아직도 날개가 있었더라면 지금 상황에서 훨씬 좋았겠지? … 다 쓸데없는 생각인걸. 카라드-리테는 완전히 바위산이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현무암 바위들이 즐비하게 나타났다. 그러니까 이 산은 휴화산이라고 했던가. 이건 예전에 화산이 폭발한 흔적인가. 아무래도 좋잖아. 덜걱, 쿠르르릉……. 잘못 디딘 바위 하나가 부서져 아래로 구른다. 내가 맨 뒤에서 가고 있어 다행이었다. 조심해야 했다. 이 돌들은 그렇게 단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걷고, 또 걷고, 오르고, 또 오르고, 기어오르고.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힘이 빨리 빠졌다. 그래도 이번엔 아무도 쉬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산을 잘 오르지 못하는 유리카는 굉장히힘들어했고 나도 허기진 데다 계속해서 움직이자니 체력이 소진되어허덕거렸다. 이윽고, 점심 때가 다 되어 우리는 첫 번째 봉우리 위에 도달했다. "휴우우우……." 미칼리스가 길게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바람이 갑자기반대로 불어 그 긴 머리가 시야를 온통 거꾸로 가려버리는 바람에,그는 다시 한참만에 머리카락을 헤치고 밖을 내다보았다. "이것 참……." 우리가 도착한 봉우리는 정말 한때 와이번 떼나 적어도 그 비슷한날개 달린 몬스터들의 둥지가 있었던 듯한 흔적으로 가득했다. 이런높은 곳까지 올라와 살려면 날개가 없고는 안될 테니까. 주위에는 무슨 동물인지 알 수 없었지만 먹고 남긴 뼛조각들이 잔뜩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 소용없었다. 그 뭔지 모를 몬스터들은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도 굉장히 오래 전에 옮겨간 것처럼 보였다. 말라비틀어진 잔가지들과 부서진 흙덩이들, 그게 전부였다. "젠장……."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이렇게 되면 어쩌란 말이야. 망연히 선 채로 한참 동안이나 바람을 맞았다. 너무나 절망스러운상황에 주저앉을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배낭조차 없이 빈손인 유리카의 얼굴이 가장 그늘져 보인다. 별로 희망은 없었지만 한 차례 외쳐 보았다. "주아니!" "저긴 뭐야?" 대답 대신, 들린 것은 유리카의 목소리였다. 분화구처럼 움푹 패인 정상 한구석에는 둥근 바위 같은 것이 커다랗게 무더기져 있었고, 그 사이로 거무스름한 틈이 내다보였다. 그저부서진 바위틈처럼 보였다. "뭘." 그녀의 말에 반응하여 그쪽으로 움직여 간 것은 엘다렌 뿐이었다. 그는 도끼를 꺼내어 몇 개인가의 자갈을 헤쳤다. 그런 다음 다시 도끼를 놓고 이번엔 손으로 바위 몇 개를 들어냈다. 그러고 나자 저 아래로 이어진 듯한 통로가 하나 나타났다. "……." 와이번이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통로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내 키 정도의 인간이나 드나들면 알맞을 법한 통로다. 미칼리스가들어가려면 머리를 좀 숙여야 되겠다. 뭔진 모르지만, 저런 것이 무슨 소용이야. 주아니가 저런 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 엘다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들어갈 테냐." "무엇 때문에 들어가요?" 내 대꾸가 좀 기분나쁘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신경이 곤두선 것은 모두 마찬가지일 텐데. 그러나 엘다렌은 쉽게 친절해지지 않는 것처럼 쉽게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는 잠시 묵묵히 사이를 두더니 다시 말했다. "로아에 친구는 없겠지. 그러나 우리는 어차피 산 안으로 들어가야할 입장이지." "아니, 대관절 왜요?" 그리고 이번에 대답한 것은 미칼리스였다. 그는 눈썹을 약간 올리더니, 일부러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우리가 드래곤의 레어(lair)를 찾고 있다는 것을 잊었어?" 뭐… 라고. 나는 잠시 동안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산 정상에서 불어오는바람이 머리를 엉망으로 뒤엉키게 했지만 손댈 생각 같은 건 나지 않았다. 아래로 펼쳐졌을 풍경을 내려다볼 마음도 내키지 않았다. 나는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 "주아니는 아직 찾지도 못했는데요." 마치 내 기분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듯이, 엘다렌의 대답이 울렸다. "우리의 목적은 흰 보석, 니스로엘드의 심장을 찾는 것이다." "……." 그렇지만 주아니는 아직 못 찾았어.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지 몰라도 어쨌든 아직 더 해볼 노력은 충분히 남았어. 지금그렇게 말하는 건, 여기까지 이렇게 급히 올라온이유도 주아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목적인지 뭔지 하는 것을 위해서였단 건가? 그렇게 말이 되는 거야?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 난 주아니를 찾기 전엔 아무 데도 안 가요." +=+=+=+=+=+=+=+=+=+=+=+=+=+=+=+=+=+=+=+=+=+=+=+=+=+=+=+=+=+=+=으음, 스캔, 스캔이라……. 스캐너가 없어서 이벤트 참여를 못하신다는 분이 생각보다 많군요. 저도 물론 스캐너가 없지만, 일단은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우편으로도 받을 지에 대해서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 그림에 대해선데요. 글 안에 나타나있지 않은 부분은 좋을대로상상하셔서 그리셔도 됩니다. 오히려 그 편이 좋지요. 저한테 메일을보내서 누구는 어디가 어떻게 생겼냐… 는 등의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답니다. 표현 안 된 부분은 내키는대로 그리시면 돼요. dipdip 님, 멋쟁이 검은 폼멜이 없을 뿐이지 힐트는 당연히 있습니다. 세상에 손잡이 없는 칼이 있을 수가... 뭐 만들면 있기야 하겠습니다만.. ^^;; 폼멜은 검손잡이 끝에 달린 둥근 쇠 같은 것입니다. 무게중심을 잡는 추 역할을 하지요. 폼멜이 없는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려면 대단한 힘이 아니면 안됩니다. 그리고 파비안, 유리카, 주아니, 나르디, 이베카... 등등을 전부그려서 보내신 미츠루군 님(팬클럽에서 이베카 닉을 쓰시던가요?),아무래도 최소한 노력상은 드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상품은 아시죠? <세월의 돌> 1권 사인북입니다. 리카도 님, 세월의 돌 팬클럽에 올리신 패러디 '벤야의 하루'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왠지 벤야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지려고 하던걸요. ^^; (자기가 죽인 주제에 말이 많다..)비웅이 아닌 '사웅' 님, 아이디 바꿔서 죄송합니다...;;; (도대체무슨 생각을 하면서 잡담을 썼던 걸까..--;)Luthien, La Noir. 번 호 : 27343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11 21:50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3)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3) "그 꼬마를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뜻밖에도 미칼리스가 입을 열었고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문득 화가 치밀었다. 아니다, 사실 화가 난 것은 엘다렌이나 미칼리스에게가 아니었다. 그건 나 자신에게였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면, 성실하기라도 해야겠지. 성실하지못하면 그러기 위해 노력이라도 해야겠지. 그것도 못했다면, 최소한결과를 되돌리기 위해 자기의 것을 내던지기라도 해야지. … 만일, 그것도 못하면? "… 더 찾아볼 겁니다." "어디를?" 추워. 산꼭대기의 바람은 추워. 이 상황은 내게 너무 추워. "파비안. 네가 그 꼬마를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알고 있어. 이해한다는 것, 다 알고 있어. 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혼자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파비안!" 나는 올라왔던 반대 방향으로 튀어나온 돌곶을 넘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부르는 소리는 엘다렌의 것이다. 나는 더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마지막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오늘 밤에, 이 장소에서 만나죠." 바보가 된 걸까?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뭘 할 수 있다고 이렇게 무작정 걷고 있는 걸까? 어디로 가고 싶은거야? 카라드-리테에는 자라는 식물이 별로 없었다. 산중턱 위로 올라오면서는 거의 붉고 검은 바위들 뿐이었고 가끔가다 바위 틈에서 자라는 고산 식물 몇 가지가 발견될 뿐이었다. 그것 참, 용암이 흘렀던거라 해도 벌써 30여년은 지난 일이라고 했는데. 그러나, 이상하게도 생명 없이, 죽어 있는 것 같은 산이다. 게다가 이 산은 지금까지 올랐던 다른 산들처럼 완만한 굴곡으로계속해서 이어지는 산길보다는 가는 곳마다 삐죽삐죽한 능선과 험로로 가득한 험악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날씨는 축축했다. 곧 다시비가 내릴지도 몰랐다. 춥다. 후두둑……. 젠장, 난 역시 예언자로 나섰어야 했어. 바위 뿐인 산에 비가 오기 시작하자 점차 산행을 하는 것은 힘들어졌다. 디디는 곳마다 미끄러지지 않을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바닥을 짚으면서도 곱아진 손이 부여잡은 것을 놓칠까봐 긴장했다. 지금 내가 목표하고 있는 것은 첫 번째 봉우리에서 올려다보였던 정상이 높은 두 번째 봉우리. 저기까지는 가볼테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건 거기까지 간 다음에 생각해 보겠어……. 후둑, 툭, 툭. 비는 다행히 오래 내리지 않고 그쳤다. 휘이이… 휴우우… 쉬이이……비가 그친 산에는 마치, 휘파람 같은 바람소리들이 가득하다. 이드래곤의 이빨 안에는 수많은 잔 이빨들이 가득히 나 있었다. 그 사이를 바람이 휘돌아 나가며 음악적인 소리를 울린다. 피리 같기도 하고, 비파의 현을 울리는 것 같기도 해. 비가 그치고 나자 서서히 안개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매끈한 바위구나. 저기는 또 어떻게 올라갈까. 좀 돌아가는 길이긴 하지만 저쪽의 튀어나온 바위를 잡고 오르는편이 낫겠어. 아, 저기엔 칡덩굴이 늘어져 있구나. 그렇지만 썩었으면 어떻게 하지. 저기 보이는 틈새에 손을 짚고 일단 한숨 돌리자. 그 위에 둥글게튀어나온 바위를 잡으면 저 너머가 보일지도 몰라. 여기쯤이면 중턱까진 온 것이 아닐까. 이런 절벽에서, 마치 아래로 떨어지려는 것처럼 한껏 고개를 내민 나무가 보인다. 우툴두툴한 껍질이 흉터처럼 가득 덮인 소나무다. 송진이라도 좀 씹을 수 있을까. 아냐, 저긴 너무위험해. 자칫하다간 아래로 떨어질거야. 배가 고프기보다는 오히려 아프다. 쓰리고 아프다. 물은 좀전에 내린 비를 받아 마시니 그럭저럭 해결되었지만 하루도 넘게 제대로 된음식을 채우지 못한 배에서는 끊임없이 트림이 올라왔다. 간혹 가다가 손가락이 마디가 없어져 버린 것처럼 꺾어지질 않는다. 그럴 때면반대쪽 손으로 손가락 마디를 풀어 주어야 했다. 머리카락이 많이 길어져서 눈가를 자꾸 찌른다. 내가 머리를 자른 것이 언제였지. 아마도 하비야나크에서가 아니었나. "주아니……." 그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왠지 현실성이 없게 느껴진다. 이 넓고 높은, 까마득한 산에서 조그마한 꼬마 로아에 하나를 어떻게 찾겠다고. 7백년을 산 엘프 미칼리스조차 처음 볼 정도로, 그렇게 숨기를잘하는 종족인데. 난 지금 과연 잘하고 있는 걸까. 난… 지금 산을 오르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자기 양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 동료들이 옳았을 수도 있어. 현실적인 판단, 효율적인 판단, 그러나 나는 매번 그렇게 하지 못했어. 그러지 못하고 살아왔어. 왜 그랬지…? 왜 나는 지금도 이러고 있지? 돌아갈까……? "아얏!" 잡았던 돌 하나가 부서지는 바람에, 튕겨나온 팔꿈치가 그 아래에있는 바위에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한동안 꼼짝달싹 못할 정도로 오른팔이 저렸다. 온 몸에 맥이 탁 풀렸다. 한참을 그 자세 그대로 우뚝 선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가득 끼어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다시 보니, 내 주위에 가득한 것도 안개가 아니고 구름인 것 같다. 아니, 어차피 그게그거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구름 속에 들어온 것만은 틀림없는 듯했다. 높이가 얼마나 될까? "후우……."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다시 몸을 움직이려 하니, 이번엔 정말로 굳어 버렸는지 관절이 삐그덕거리며 잘 움직이지가 않았다. 겨울 진흙탕의 얼어붙은 수레 바퀴처럼, 그것은 한참이나 움직이려 하다가 멈추고, 다시 움직이려 애쓰다 늘어졌다. 간신히 애써 바위 한 개를 넘고 나자, 솟아오른 절벽 아래 사방 10큐빗이나 될까 싶은 좁은 자리가 나타났다. 도저히 더 버티기가 어려워서 나는 바닥에 앉은 채 절벽에 몸을 기댔다. 잠깐만, 잠깐만 쉬어야겠어. 팔다리를 좀 주무르고, 그러고 나서 가야겠어. 앉은 채로, 내가 올라오던 쪽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내려다보이는 산 아래의 풍경……. 카라드-리테는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며, 싸늘한 표정을 지닌 산이다. 냉정한 돌인간의 얼굴, 움직이지 않는 미간과 이목구비를 지닌그의 영역은 넓고도 까마득했다. 수백, 수천의 돌인간, 또는 단 하나의 거대한 거인이 내게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회색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퍼져나간다. 보이지 않는 능선, 바닥을드러낸 계곡, 그늘에 숨어 도사리고 있는 크고 작은 바위들……. 그 눈동자는 어디에 있을까. 그는 나를 보고 있을까. 위잉……. 옷자락들이 펄럭이며 날린다. 그리고 동시에 산의 머리카락들도 바람에 한껏 일어났다. 나는 망연히 비어버린 머리로 그 모습들을 바라보았다. 휘말리며 갖은 모양을 만들고, 다음 순간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구름들이 손을 내젓고 너울거리며 덤벼들었다. 잠시만에 내 주위는 나 자신을 제하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등뒤에서 누군가 갑자기 어깨를 움켜잡는다 해도, 바로 그 순간까진 전혀 알 수 없을 듯했다. 안개 속, 그 이상함, 내 시야를 가리는신비들. 어두운 것도 아닌데 손을 내저어도, 소리를 질러도 아무 것도 뚫고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짙은 장막이 내게로 덮쳐들었다. 온통 내 몸을 감싼 하얀 물방울들, 구름, 안개……. 너희들은 무엇을 내게서 숨기려는 거지? +=+=+=+=+=+=+=+=+=+=+=+=+=+=+=+=+=+=+=+=+=+=+=+=+=+=+=+=+=+=+=일러스트 스캔 못하신 분들(오늘은 심지어 출판사로 전화해주신 분까지 계시더군요..^^; 마침 제가 출판사에 있어서 전화를 받았답니다)... 조만간에 우편물 받을 주소 공지해 드릴게요. 점점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아져서, 아무래도 우편 접수도 받아야할 것 같습니다. 조만간에 나우누리와 천리안의 팬클럽 회원 대상으로도 이벤트를하나 준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Luthien, La Noir. 번 호 : 27417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13 00:46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4)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4)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지만 물방울들이 차갑게 눈가에 맺히기시작하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적대적인 안개다. 그는 내게서뭔가를 빼앗아가려 하고 있어. 아니면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으려고획책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이러고 있는 가운데, 이 안개 너머에서는 어떤 괴물이 나를 바라보고 있을 지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만 일어나야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내가 앉은 곳의넓이를 알고 있었지만, 안개 속에서 공간도 넓이도 흐려져 버린 나로선 한 발짝만 내디디면 그대로 절벽의 끝일 것처럼 느껴졌다. 오직단단한 것은 내가 지금 몸을 대고 있는 이 바닥, 이 절벽 뿐이다. 나는 지금 안개 가운데 솟은 좁은 기둥 위에서 웅크리고 있는 거야. 위로도, 아래로도 측정할 수 없는 무게의 빈 공간들 뿐. 꼼짝할수 없어. 마치 안개에 묶여 버린 것처럼. "… 아…니……." 나는 주아니를 생각했다. 입술은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산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어.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산이 없는데, 나는 그녀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나의 동료들, 나의 유리카 역시도… 그렇다면, 나 자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손을 뻗어 바닥을 만져 본다. 단단하다. 돌이다. 그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여 본다. 돌바닥을 천천히 손가락으로 만지며 따라갔다. 어디까지 가 닿을까. 이제 금방 날카로운 절벽의 끝을 만지게 되겠지. 여기가 끝일까. 아직이야. 바로 다음일까. 더 손을 뻗을 수가 없어. "……." 나는 안개 속에서 뭔가를 찾는 일을 포기했다. 이 모든 것이 내 착각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이토록 짙은 안개 속에선, 구름 속에선, 조금도 움직일 수 없어. 내가 올라오던 길, 올라갈 길, 심지어는 동서남북조차 구별할 수가 없어. 아마 움직이면 더 심해질거야. 어지러워지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이렇게……. 나는 애써 배낭안에서 망토를 꺼낸 다음 더듬더듬 어깨를 감쌌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우스꽝스럽게 떨어지지 않으려고 바짝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이 곳의 넓이는 이것보다 분명 충분히 넓었지만, 나조차도 어쩔 수 없는 착시에 나는 지배당했다. 그런 다음 그래도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는 절벽에 다시 등을 기댔다. 잠시 이 안개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만 쉬는 거야. 조금 있으면 사라질 테니까. 산 위에서의 일기는 좀처럼 종잡을수 없는 거잖아. 나는 눈을 감았다. 차가운 습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눈꺼풀이 몹시무거워져 있었다. 뭔가 말해 보려 했다. 실제로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나는 차갑게 언 입술을 움직이며 힘껏뭐라고 말해보려 애썼다. 내 귀가 들었는지, 내 마음이 들었는지 알수 없지만, 내 입에서는 나조차도 믿을 수 없는 다짐들이 흘러나오고있었다. 기다려… 잠깐만 기다려……. 금방 갈게……. 따뜻한 침대의 꿈을 꾸었다. 그 다음에는 또 다른 꿈을 꾸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하얀 것은 시트 같기도 했고, 그냥 구름덩어리 같기도 했다. 잠시 후에 느껴진 것은 불이었다. 뭔가 따뜻한 불길 같은 것이 내곁에서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기분 좋게 몸을 덥혀 주었고, 그열기 속에서 나를 더더욱 깊은 잠 속에 빠지도록 유혹했다. 모닥불일까. 아니면 벽난로? 저것은 회색의… 아마도 바위 덩어리들. 그것은 산의 숨겨진 근육들. 검고 구멍이 뚫린 것은 현무암이라고 불리는 화산의 흔적들. 나는 딱딱하고 고통스러운 자갈과 돌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거기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 기묘하게 솟아난 돌기들이 문득 내 뺨에 와 닿았다. 긁힐 듯 울퉁불퉁하고 또한 날이 선 돌기들이다. 마치 버터를 만지는 사람처럼,손에 닿은 것을 단숨에 뭉개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조심스럽게, 스스로를 절제하는 듯한 손길이 와 닿았다. 나는 눈을 뜨고앞을 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혼례 베일 같은 흰 안개가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꿈속에서조차도. 마치 빛 속에서 장님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어떤 다른 곳에 와 있는 걸까? 내가 내 옆에서 내게 말을 거는 목소리를 인지하는 것에는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그 목소리는 한참 전부터, 내가 듣기 전부터 계속 말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가 들은 첫 마디는이런 것이었다. [용기일지도 모르고, 만용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만 잘못은아니며, 현명한 일은 더더욱 아니다.]잠시 후 주위는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것은 성긴 어둠이었다. 어디선가 희미한 광선이 스며들어 내 눈꺼풀에 옅은 빛을 뿌렸다. 나는잠시동안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떠오르기 직전의 태양이 주는 것 같은미명의 가벼운 따스함을 즐겼다. 다음 순간, 이어진 목소리가 들리기전까지는. 그것은 마치 청동으로 만들어진 듯한 묘한 질감의 목소리였다. 차가웠지만, 동시에 뜨겁게 달궈진 금속의 느낌을 가진 목소리였다. [기다리지 않았으나, 또한 예상했었지. 짐작한 바이나, 또한 다르구나.]친절하지 않았으나, 무례하지도 않았고, 내게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었지만, 그 말투에서는 어떤 어조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벽을보고 말하는 그런 말투, 듣는 사람 없는 독백, 그대로였다. 나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잠자코 누워 있었다. 실제로 나는어떻게 해야 할 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 낯선 목소리의 방문자를일어나서 맞아야 할지, 아니면 마치 곰을 만난 여행자가 죽은체 하는것처럼 계속해서 이러고 있어야 할지조차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 목소리는 보다 높아진 어조로 드디어 '질문'의 형태를띤 첫 번째 말을 했다. [너는 어떤 자이기에, 이 자리에, 이 곳에, 이런 모습으로, 이렇게누워 있을 수 있는가]그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낯선 천장… 지독히도 살풍경한 바위벽이 내 눈앞에 있었다. 나는잠시 후 그것이 머리 위로 불쑥 튀어나온 쟁반 모양의 바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장과 바닥을 제외하고, 다른 곳은 모두 훤히 뚫려 있었다. 다만 나는 약간 벽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곳에 눕혀져 있었다. 담요나 그런 것은 없었기 때문에 등이 조금 아팠다.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저쪽에, 내게서 멀지 않은 곳에. 여기는 내가 있던 곳이 아니었다. 물론 어떻게 옮겨진 것인지 기억할 수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최근의 것, 눈앞을 가렸던 짙은 안개는 거의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좀전까지 안개가 끼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려는 것처럼 희미한기운이 바람 자락에 묻어 있었다. 주위는 보였지만, 먼 곳은 보이지않았다. 그러나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내가 눈을뜨자 사라져버린 환영처럼, 그런 목소리를 가졌을 거라고 생각되는그 무엇도 주위에는 없었다. 안개가, 혹시 바위는? 그들이라면 그런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꿈을 꾼 건가? 다시 머리가 아파지려는 순간이었다. 어떤 그림자가 한구석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마치 석상이나 그림자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내가 깬 것이 분명하자 잠시 후 몸을 일으켜 내게로 왔다. 나는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그림자가 약간 머뭇거리는 것처럼, 아니 사실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것처럼 움직여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닥불 불빛 때문에 그의 행동은 저쪽 벽에 선명한 영상으로 비쳤다. 빛과 그림자로된 연극처럼. "안녕하시오." 낯설다. 아까만큼은 아니지만, 그 목소리는 아마도 인간이 가질 수있는 것중 가장 낯선 목소리였을 것이다. 안개나 바위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인사에 대답하는 대신 잠시 동안 머릿속으로 말을 더듬으며 앉아 있었다. 갑작스런 등장만큼이나 그는 나를 당황하게 하는 어떤 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말을 하지 않자 그는 내 곁에서 모닥불을 들여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 곳에서 주무시다니, 대담하신 건지, 어리석으신 건지 모르겠소. 잘못 움직였다간 천길 벼랑으로 떨어질 곳에서 그래, 잠이 오더란 말이오?" +=+=+=+=+=+=+=+=+=+=+=+=+=+=+=+=+=+=+=+=+=+=+=+=+=+=+=+=+=+=+=이 글을 쓰는 지금 전 나우누리 세월의 돌 팬클럽 대화방에 있답니다. 잠시 생중계에 들어갑니다..(재미삼아서..^^; 괄호 안은 닉네임)모난성에(유리카) 10-2를 지우신 것은 실수였다고 한 마디 써 주세요. 그리고 루디 님 덕에 즐거웠어요. 화도 많이 풀리구요. *^^*bible81(에렌) <- 피할수 없으면 즐겨라. 나우의 통장이라도..-_-;그저 틀을 바꾸려기 보다는 맞추어 가는 삶의 방식이 가져다 준 결과..-.-..나우의 통장은 친숙하도다! -_-kwgbae(스노이엘) 전 그냥 '자기 자신은 자신이 제일 모른다 써 주세요*^^*'프리free (이스나니) 저는 말보다 강렬한 눈빛을.. (여기서 회원들의 다양한 눈빛 추천... --+ +_+ $_$ *_* @_@◎.⊙ ₩.₩... 본인은 결국 그냥 나우시러! 라고 써달라고 바꾸셨습니다만... 결국은 한국축구 만세!로 바꾸셨다는..;)laluce (달갸라누) '세월의 돌, 영화화 하라.'(여기서 갑자기옆길로...^^;;;)------laluce (달갸라누) 에니 보다는 영화로 만들어야 할 것 같은. kwgbae (스노이엘) 게임은 어떨까요? 프리free (이스나니) 난 만화로 만들었슴 조켔다bible81 (에렌) 세월의돌 OST 는 스피드 메틀로.-.-.. nade (주아니) 게임은 소프트맥스에 의뢰를.. nade (주아니) 유리카역에....-_-..이정현.. nade (주아니) 주아니는 리틀스튜어트만든 제작진에 의뢰.. bible81 (에렌) 에렌은..-.-..그냥 본인이 출현을..(칼 맞겠다..-_-)모난성에 (유리카) 리틀스튜어트라.. 재밌겠던데.. *^^*kwgbae (스노이엘) 난 만화책이 나을듯프리free (이스나니) 차라리..애니하구 영화하구 만화책하구 게임하구 다 만들면 되자나여laluce (달갸라누) 그전에 스폰서 부터 구해야 겠죠. --;;모난성에 (유리카) 파비안 성우는 누가 어울릴까? -------자자, 다시 본길로 돌아와서... 다시 오늘의 한 마디...;;nade (주아니) -_-a..젊음은 3년모난성에 (유리카) 루디// 500회 이벤하시는 분들께요.. 유리 이쁘게 그려달라고 해주세요laluce (달갸라누) 루디// 달 갸라누도 투표 할때 좀 집어 넣어달라고 하세요. --;;;라우렐란 님은 별로 할 말이 없으시다고...주아니 님은 노인네 같은 말을 한 것 같다고 한탄하시다가 바꾸셨습니다. nade (주아니) i'm rock spirits 해주세요;;;그리고 나중에 들어오셔서 오랫동안 할 말을 고심하신 벨리앙 님.. 벚꽃아이 (벨리앙) 루디엔// 1000번 이벤트 정모때.. 짜장면은제꺼라고 해주세요.. (참고, 23일에 정모랍니다. ^^;)이상 중계를 마칩니다. ^^; 많이들 놀러오세요-Luthien, La Noir. 번 호 : 27463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13 23:54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5)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5) 말을 자꾸 함에 따라 그 목소리에 깃들었던 낯선 느낌은 사라지고,점차 그는 평범한 남자로 돌아왔다. 나는 아직도 이 상황에 적응하지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겨우 이 말만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 불을 피우시다니 대단하군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이 근처는 몹시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고, 주위에는 장작으로 쓸만한 것이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벼운 어조로 대꾸했다. "노련한 여행자는 급한 상황을 위해 차 한잔 정도 끓일 준비는 해가지고 다니는 법이오." "아, 예……."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내 손으로 컵 하나가 건네졌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것을 받았고,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고개를 약간 돌려 그의 얼굴을 보았다. 크림색 얼굴빛을 한 그는 겉보기의 미칼리스 나이 정도로 보였다. 얼굴은 완벽한 흰빛이 아니었지만, 그는 또한 새카만 머리채를 가지고 있어서 피부를 실제보다 더욱 희어보이게 했다. 어깨 언저리에 닿는 머리채를 뒤로 질끈 돌려묶었는데, 머리를 묶은 끈은 무슨 가죽을꼬아 만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가 모닥불에서 내 쪽으로 좀더 다가왔을 때 나는 놀라운사실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머리는 완벽한 검은 빛이 아니었다. 푸른빛이 섞인 검정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그를 올려다보며 조금 당황해 있었다. 저사람, 설마 우리 집안인가? 그럴 리는 없을텐데. 가문의 땅에서 수천만 큐빗은 떨어진 땅에서 갑자기 처음 보는 핏줄과 맞닥뜨린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이야? 하긴, 저 머리 빛깔이 우리 집안에만 있으란 법은 없으니까. 그렇지만 아직까지 내가 본 검푸른 머리는 나와 아버지, 그리고 하르얀뿐이었는데. 그러나 내 머릿속의 질문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뒤로 묶은 짤막한 머리꼬리가 마치 나뭇가지 사이로 갸웃이 내려다보는 새처럼 어깨 너머로 나를 쳐다보고있었다. 그 머리카락에서는 마치 청동을 녹여 만든 창날처럼 날카로운 윤기가 흘렀다. "내가 아니었으면, 굴러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심한 감기에 걸렸을거요." 그는 이제 무심한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딜까. 그것부터 물어놓아야 한다. 저 사람은 이제 그만 나를 두고 가버릴 수도 있었다. 호의를 베풀었고, 내 몸은 다치거나 아픈 데 없이 멀쩡하니까. 그가 돌보아 줄 필요 따위는 전혀 없으니까. 그는 정말 그러려는 것처럼 몸을일으키더니 자기의 짐가방을 끌어당겼다. 나는 이상스럽게도 약간 당황해서 그를 막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빠뜨렸어.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아… 나는 아직까지 감사하다는 말도 못하고 있었어. "그…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그는 내 치하를 들으려고 한 일이 아니라는 듯 급하게 손을 휘휘내저었다. 그는 동작이 몹시 컸고, 그의 차림새와 몸짓은 마치 마을에서 전문으로 약초와 버섯 등을 캐러 다니던 산꾼을 연상시켰다. "차를 마저 마시는 게 좋을 거요. 밤이 되면 산은 더욱 추워지니까." 나는 시키는 대로 차를 다 마셨다. 무슨 차인지 모를 그 물은 묘한풀잎의 냄새과 함께 또다른 향기… 뭐랄까 아주 더운 향기를 풍겼다. 마치 여름을 한 조각 그 안에 녹여 넣기라도 한 듯, 차는 그 자체의온도 이상의 어떤 열기를 품고 있어서 내 온몸은 금방 훈훈해졌다. 이름을 붙인다면 '더위의 차'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한 잔 더마신다면 이마에서 땀을 흘리게 될 지도 몰랐다. 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기분은 확실히 신기했다. 그러나 하르얀을 보았던 때와 같은 그런 묘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깊고인적 드문 산속에서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 쪽이 머리카락 색깔 같은 것보다 훨씬 신기한 우연일 수도 있었다. 무엇하는 사람일까…? 왜 여기에 있지……? "저… 이런 곳을 혼자 여행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물론 내 말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저쪽 봉우리 위에 내 동료들을두고 왔다. 그들과 헤어진지 불과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질문이 막혔지만 나는 곧 타개책을 찾아냈다. 안 그래도 물어볼 것은 많았다. "여긴 어디죠? 제가 있던 곳에서 많이 떨어진 곳인가요?" "아니. 바로 그 근처요." "저를 옮기느라 고생이 많……." 그는 이번엔 고개를 빠르게 내저어 내 말문을 막았다. 그는 칭찬을듣는 것이 몹시 어색한 듯했다. 그런 말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 이곳까진 어떻게 오시게 된 건가요?" 나는 질문을 도중에 바꿨다. 그는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말하면 그는 내게서 고개를 조금 돌리고, 마치 한쪽 얼굴로만 나를보려는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한쪽 눈이 나쁘기라도 한 건가? 설마 일부러 저런 자세를 취하는 사람은 없겠지. 나는 그의 연녹색 눈동자가 나를 관찰하도록 잠시 가만히 기다리고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가 가진 무거운 짐으로 눈이 갔다. 엘다렌의것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만만찮은 크기의 배낭은 뭔지 모를 야릇한빛깔의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는 배낭 안에 차를 끓였던 도구들을 챙겨 넣었다. 내가 쳐다보든 말든 할 일을 하고 있던 그는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대답을 해 왔다. "이 산에 드래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을 거요." "에……." 나는 뭐라 딱히 대답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했다. 그는 배낭을 닫아끈을 매면서 덧붙였다. "물론, 봤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사실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이든 아니든, 그게 내 직업에 별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소." "어떤 일을 하시는데요?" "보다시피." 그제야 그가 허리춤에 달고 있는 주머니에 눈이 갔다. 아마도 약초를 채취하는 사람? 그러나 이런 산에 약초가 있나?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말했다. "여긴 약초는 그다지 없어보이는 산이군요. 이런 산을 다니시려면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약초 뿐이라면 이런 산엔 오지 않을 것이오. 당신 말대로 바위뿐인 산이라 쓸만한 약초는 별로 없소. 그러나 드래곤이 정말 있든 없든, 이 산에는 상당한 숫자의 몬스터들이 있으니 그들이 내 밥벌이를만들어 줍니다." 그는이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말로 그만 가보려는 듯했다. 나는 차를 마신 뒤로 한결 기운이 나는 몸을 움직여 본 다음, 망토를털며 따라 일어섰다. 나는 저도 모르게 다음 질문을 하고 있었다. "몬스터는 어떤 도움을 주지요?" "몬스터들 가운데에는 보물을 모으기 좋아하는 자들이 있다는 소문을 못 들었소? 드래곤이 그렇듯, 드래곤이 있는 곳에는 항상 모여들어 들끓기 마련인 몬스터들 역시, 조촐하게나마 드래곤을 따라하지. 드래곤의 보화라면 훨씬 엄청나겠지만, 그런 것을 건드리는 것은 목숨 내놓고 해야 하는 일이고, 몇 마리 몬스터를 잡아가며 건지는 보석 정도는 꽤 수입이 좋소." 나는 그의 몸에서 무기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으로 몬스터를잡는지 궁금했지만 입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실력을 의심하는듯한 말은 조금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었고, 짙은 눈썹과 불쑥 튀어나온 이마뼈, 강한 턱선을 지닌 그는 꽤 고집스런 사람으로 보이기도해서다. 그는 유연한 동작으로 배낭을 다시 등에 메었다. 정말 한 치낭비도 없는 동작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저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구나. 보물 사냥꾼이라고 볼 수도있겠고, 어쩌면 미르보도 저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지. 순간, 그가 정말 이 산에서 오랫동안 지낸 노련한 산꾼이고, 더구나 몬스터를 쫓고 있다면, 물어보아야만 할 것이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월간 <북파크>라는 곳에서 인터뷰를 했답니다. 오늘요. 독자들과의 만남 형식이라 몇 분의 독자분들을 만났는데 분위기도좋았고 아주 화기애애해서 편안한 얘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북파크>는 서울 문고에 가시면 무가로 비치되어 있으니까, 다음달 호를 한 번쯤들 살펴보세요. 기회가 닿으신다면. ^^영화 <바그다드 까페>에 나오는 'Calling You'를 듣고 있습니다... Luthien, La Noir. 번 호 : 27515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14 22:29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6)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6) 나는 황급히 입을 떼어 물었다. 갑자기 난 생각에 가슴이 온통 쿵쿵 뛰었다. "호, 혹시… 이 근처에서 와이번을 본 일은 없습니까? 와이번들이둥지 트는 곳을 아십니까?" 그는 내 흥분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의 동요도 내비치지않은 채 내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대답했다. "물론이오." "어, 어디였죠?!" 그는 말하지 않고 잠시 나를 훑어봤다. 그는 뭔가를 자세히 보려고할 때면 버릇처럼 얼굴을 약간 옆으로 돌리고 한쪽 눈으로 사물을 쳐다보았다. 마치 얼굴 한쪽에 난 흉터를 감추려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 얼굴에 흉터 같은 것은 없었고, 그가 얼굴을 돌리는 방향 역시일정치 않았다. 그의 땅콩크림빛 피부는 단단해 보이는 만큼이나 잡티 하나 없이 말끔했다. "와이번을 보고 싶소? 와이번은 보물을 숨기지 않는데." "보물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까닭이 있어서……." 사실 그 와이번은 보석 쪼가리 몇 개 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중대한 보물을 훔쳐갔다. 주아니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보석 몇 개쯤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무얼 찾는 중이든, 와이번이 있는 곳이라면 내, 가르쳐 줄 수 있지." 나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천행이었어. 하늘이 도왔을거야. 이 사람을만나려고 내가 고집부려 여기까지 왔던 걸거야. 안개가 걷혀 사라지고 있었다. 주위를 흐르던 하얀 강이 저만치로미끄러져 가는 것이 보였다. 강은 다른 다른 산줄기를 향해 서서히꼬리를 끌며 흘러갔다. 연녹색 눈동자가 조그마한 불꽃처럼 저 너머에서 나를 향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볼수록 미르보를 닮았다. 정수리에서부터 똑바로하얀 선을 그리며 머리 너머로 사라지는 가르마, 양쪽으로 떨어지는머리카락은 이마를 삼각형으로 가렸다. 그는 목이 길었다.매끄러운뺨과 손등, 목덜미는 대리석으로 만든 석상을 연상시켰다. 나는 배낭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저는 파비안 크리스차넨입니다. 이렇게 구해 주시고, 또 도와 주기까지 하시니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이번엔 손을 내젓거나 하지 않았다. 대신 이마 위에 굵은 눈썹이 약간 움직였다. 짧게, 꿈틀거리는 경련이 지나가고, 그는 곧 자기 이름을 대었다. "나는 테아키, 라고 부르오." 테아키는 정말, 이런 산을 타며 몬스터들의 보물을 훔칠 수 있을정도로 굉장히 노련한 산꾼이었다. 내가 지쳐 있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정말 속도를 맞춰 그의 뒤를따라가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는 거의 나는 듯이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건너뛰었고, 미끄러질까봐 걱정하는 기색 따위는조금도 없었다. 실제로 그는 금세 미끄러질 것만 같은 곳을 디디고도마치 손발에 흡반이라도 달린 것처럼 척척 앞으로 나아갔다. "……."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자기 일을 제쳐놓고 나를와이번들의 둥지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주기로 한 것이다. 지도도 없고 지형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말만 듣고 찾기는 무리라고 딱 잘라말한 그는, 별다른 귀찮은 기색도 없이 지금 저렇게 앞장서 걷고 있었다. 나는 이미 여기가 어느 봉우리로 가는 길인지 잊어버렸다. 방향 감각도 확실치 않아서 오늘 밤에 다시 약속한 장소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비록 힘들긴 했지만, 나는 큰 무리없이 그의 뒤를 따라 몇 시간을 걸었다. 산세는 여전히 험했고 몇 번이고 미끄러졌지만 그때마다지체없이 일어났다. 주아니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겨서일까? 아니면 아까 테아키가 준 이상한 차때문인가? "이제 다 왔소." 그리고 거의 몇 시간만에 처음 입을 뗀 그의 말에 따라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저 너머로 비죽비죽한 바위들이 가득히 나뒹굴고 있는 비스듬한 평지가 보였다. 그 너머로는 다시 위로 솟아오른 절벽이다. 이곳 저곳에 흩어진 큼직한 바윗돌들은 모두 검었다. 그곳은 평지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바위 사이로 이어진 험로였다. 나는 눈을 깜박거리면서그쪽을 보았다. 둥지랄까… 그런 것으로 보일 만한 것은 얼른 눈에띄지 않았다. 절벽 쪽을 살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 옆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머리만 내밀고 있는 테아키에게뭐라고 물을까 하다가 잠시 더 그 바위 평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놀랍게도, 바위 가운데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살아 있었다. "저것……." "쉿!" 테아키가 짧은 휘파람 소리 같은 경고를 보냈다. 그와 나는 나란히몸을 붙인 채 평원 위의 바위, 아니 실제로는 바위처럼 보였을 뿐인와이번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광경을 보았다. 검은 바위들이하나, 또 하나, 저마다 기지개를 켜고 날개를 퍼덕이며 일어나고 있었다. 날개를 접고 머리를 그 사이에 처박은 채 둥그렇게 웅크리고있던 탓에 그들은 바위처럼 보였던 것이다. 10큐빗 이상은 되는 어미와이번들이 약 20여 마리나 있었고 좀 작은 놈들이 그 사이에 비슷한숫자로 섞여 있었다. 나는 숨을 삼키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눌렀다. 날개를 편다. 몸길이 만큼이나 크고, 날카로운 쌍대칭의 피막이 서서히 벌어져 하늘을 가린다. 긴 꼬리가 살아 있는 뱀처럼 머리를 쳐들어 쉿쉿거렸고, 벼려진 칼날 같은 발톱이 생생하게 번쩍였다. 긴주둥이는 엄숙하게 다물려져 있었고, 가끔 커다랗게 벌어져 허공을향해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 번뜩이는 노란 눈동자들! "……!" 그 눈빛이 나를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당황하여 얼어붙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와이번들은내 존재쯤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우아한 몸짓으로 평원 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몇 개인가는 진짜 검은 돌들이었다. 그들은 그 사이사이를 적당히,서로 몸을 부딪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돌아다녔다. 그건 마치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들과도 비슷해 보였다. "자, 다 왔으니 어쩔 테요." 나는 한동안 뭐라고 대답을 하기가 힘들었다. 우선 와이번들은 모두 똑같아 보여서 어느 놈이 소와 배낭과 주아니를 채간 놈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마치 무슨 의식이라도 행하듯 엄숙한 동작으로 가득찬 저 평원 위에 소를 잡아먹은 흔적 같은 것은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있었다. 게다가 가장 심각하게는……. 와이번이 너무 많았다. +=+=+=+=+=+=+=+=+=+=+=+=+=+=+=+=+=+=+=+=+=+=+=+=+=+=+=+=+=+=+=500회 이벤트 일러스트는 계속 받고 있습니다. ^^오늘, 우편 접수를 위한 새 공지가 나갔습니다. 살펴보세요. 아직 접수하신 분들이 많지 않아서 새로운 그림들을 많이 기다리고있답니다. 꽤 여러 분한테 상품(세월의 돌 1권 사인북)을 드리려고생각하고 있으니, 본인께서 보기에 약간 덜 만족스럽다 하시더라고그냥 응모해 보세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7578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15 23:26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7)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7) "……."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좀 도와주면 좋을 텐데. 뻔뻔스러운 생각인 것은 알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엘다렌도, 미칼리스도, 유리카도 없다. 되돌아가 다시 그들을 불러온다는 것도 좋은 생각이 못되었다. 흔적이라도 남아 있으면 확신이라도 할 텐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 와이번은 이리로 오지 않은건가? 나는 물어보았다. "와이번들은 주로 이렇게 모여 사나요?" "그렇지는 않소. 아마 이들도 단체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생각되는군. 아마 어떤 우연한 사건이 이들을 여기로 몰아넣었겠지. 지금은 저렇게 점잖게 움직이고들 있지만, 먹이가 없는 시기엔 하루에도 몇 번씩 물고 뜯는 싸움이 벌어져 진 놈을 먹이로 삼는 놈들이저들이오." 나도 와이번에게서 무슨 고대 생물의 우아함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대책은 필요했다. 나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가움직이려고 부스럭거리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친구를 찾으러 왔어요." 그 말에 그는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이 되었다. "저들이?" 푸핫…. 나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와이번의 친구로 오인받는다는 건 와이번이 눈앞에 없을 때라 해도 절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와이번 쪽에선 알아주지도 않는데. "물론 아니지요. 저들 가운데 하나, 아니 어떤 와이번이 제 친구를데려갔어요." 그러자 그의 입에서 뜻밖의 단어가 나왔다. "소?" 나는 순간, 와이번의 존재조차 잊고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는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급히 팔을 비틀어 뺐다. 그것은 매우 불쾌한듯한 동작이어서, 나는 내가 뭔가 큰 실례를 저지른 게 아닌가 싶어지레 겁을 집어먹고 그의 얼굴을 봤다. "……." 그러나,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뭐랄까, 마치 굉장히 의외의 일을 당했다는 듯한 표정, 얼굴에 나타난 것은 당황에 가까운 감정이다. 나라면 하늘에서 갑자기 잘 구워진 통닭이라도 떨어진다면 저런표정을 지을 지도 모르겠다. 깜짝 놀라겠지만, 어쨌든 나쁘지는 않은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말이다. 그러니까… 그도 단순히 놀란 것일뿐이지 기분이 나쁜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니까… 소를 보셨다고요?" 테아키는 하늘에서 떨어진 통닭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듯, 대꾸하지 않고 멀거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입을 열어 말했다. "그렇소." "어디에서요?" 나는 아직도 소를 봤다는 그의 말에 더 놀라야 하는 것인지, 방금보인 그의 반응에 더 놀라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한 채, 어정쩡한 어조로 물었다. 정신을 덜 차린 그의 대답도 박자가 꽤나 느렸다. "… 여기는 아니지만, 이 근처였소. "그래서요? 어떻게 됐는데요? 어디에 있죠?"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온 대답은 내가 오늘 들은 것 가운데 가장 충격적이고 황당한 말이었다. "그 소라면, 내가 먹어버렸는데." "… 머, 먹어……?"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을 딱 벌린 채, 침이 흘러내리는 것도잊어버리고 그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재빨리 고개를흔들었다. 절대, 절대 이 이야기를 유리카가 듣는 데서 해선 안되겠다. 무슨 소동이 날지 몰라. 게다가 세, 세상에, 소를 잡아먹은 것은와이번이 아니었단 말이야? 게다가 궁금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 어떻게 와이번한테서 그 소를 빼앗았는데요? 와이번은 죽었나요? 혹시 그 소 발굽에 아직도 가방 하나가 얽혀 있던가요? 아니, 아니, 소 한 마리를 혼자서다 먹을 수가 있어요?" "……." 내심 스스로도 엉망진창으로 질문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참인데, 그는 아직도 소가 내 친구였다고 생각하는 건지 곤란한 표정으로침묵을 지켰다. 내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그렇다면 어떻게 요리해서…' 라는 질문이 떠올랐지만 간신히 자제심을 발휘하여 입밖으로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참만에 입을 연 그에게선 또다시 황당한 내용이 튀어나왔다. "친구라는 것은 가방이오?" 이, 이 사람, 아무래도… 뭔가……. 그러나 이 사람이 아까까진 괜찮다가 지금 갑자기 이상해지고 있는거라면, 완전히 이상해지기 전에 뭔가 더 물어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얼른 다시 물었다. "물론 전 가방의 친구도 아니고요… 다만 그 가방 안에……." "혹시, 주아니라는 이름을 가진 로아에요?" 그리고, 나는 그날 세 번째 충격으로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주, 주, 주아니……."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분명 주아니… 내가 아는 단 하나의로아에 족 꼬마의 이름이다. 정말이다. 그럼, 괜찮은 건가? 아무 일없는 거야? "괘, 괘, 괜찮은가요?!" 나는 하마터면 다시 한 번 그의 팔을 잡을 뻔 했다가 간신히 멈추고는 외치듯 물었다. 그가 재빨리 조용히 하라는 것처럼 팔을 내저었다. 하긴, 와이번이 들으면 큰일이긴 했다. "물론이오. 내 은신처에서 지금쯤 잠들어 있을 텐데." 나는 맥이 탁 풀려버렸다. 내가 방금 전까지 주아니 녀석 때문에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죄책감과 후회로 수명을 줄이고 있었는데, 녀석은 와이번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엉뚱한 사람을 만나 더없이 안전하게 지내고 있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고집을 부리고 죽을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온 것은… 아, 아니지. 만일 이렇게 오지 않았더라면 테아키를 만나지도 못했을 테고, 그렇다면 주아니는 새로운 동료와 함께 다시 즐거운 여행을……. 왠지 그것도 별로 즐거운 상상이 아니었다. "그, 그래요… 그 꼬마 로아에가 바로 제가 찾던 친구예요. 걱정을많이 했는데 그렇게 멀쩡하다니 은근히 화가 나려고까지 하는… 어쨌든 찾아서 너무 다행이고 그건 전부 테아키 당신의 덕택이니 또한 너무 고마워서 뭐라고 말해야 할 지……." 테아키는 인내심 깊게 내 횡설수설을 다 들어 주었다. 그리고 대강말이 끝나는 분위기를 기다려 대답했다. "그런 것은 어찌 되었든 좋소. 그 주아니라는 자가 헤어지기 전에당신에 대해서 뭔가 얘기해 주었더라면 수고를 덜 수도 있었으련만. 그 자도 잃어버린 친구를 찾고 있음에 분명해 보였거든." 거기까지 말하더니, 테아키는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는 깜짝 놀라 동시에 고개를 위로 돌렸다. 아니, 와이번이 보면 어쩌려고저렇게……. 와이번! 큐르르… 키캬캬쿠쿠……. +=+=+=+=+=+=+=+=+=+=+=+=+=+=+=+=+=+=+=+=+=+=+=+=+=+=+=+=+=+=+=일러스트를 그리는 중이다, 밑그림을 그렸다, 또는 이미지를 잡는중이다... 등등으로 말씀하시는 분들은 많은데, 이것도 역시 마감 증후군인지 빨리 보내주시는 분은 별로 없군요. ^^;아참, 약속한 대로 알려드리자면 오늘로 471회입니다. 500회까지29회 남았습니다. (계산해 보니 일전에 알려드린 건 한 회 틀린 것 같다는..;;)어머니께서 일전에 제 방에 떠맡겨버린 허브(로즈메리) 화분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녀석이 너무 약해서 자꾸 죽어가네요...;어머니 말씀으로는 벌써 골병이 든 것 같다는데... 오늘은 은근히 마음에 걸려서, 안하던 짓이지만 맘먹고 가지치기에창문 열고(어..추워라..) 햇빛까지 쪼여 주었거든요. 그렇지만 과연어떻게 될는지. 저는 식물 같은거 키우는 덴 영 소질이 없거든요..;하루에 4시간 이상 햇빛을 쬐어 주고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두라고 되어 있지만, 겨울이다보니 그까짓 비위 맞춰 주는 것도 여간 번거로운일이 아니로군요. 게다가 전 물주는 것도 자꾸 잊어버리는지라..--;아무래도 주인 잘못 만난 탓에 조만간에 저세상으로 갈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쩝. Luthien, La Noir. 번 호 : 27636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16 23:53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8)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8) 큣! 큣! 큐큐큐키랴략! 캬르륵! 캬캬캭! 캬그그극! "……." 나는 더듬더듬 뒤로 물러서려다가 하마터면 절벽 뒤로 떨어질 뻔했다. 거대한 와이번 세 마리가 이쪽으로 다가와 벌써 우리 머리맡까지이르러 있었다. 우리가 몸을 숨긴 곳 바로 위까지. 이야기에 정신이팔린 새, 어느새 슬금슬금 움직여와 그 거대한 입으로 바위를 툭툭치고 있었다. 놈들은 우리를 발견했고, 그리고 잠시 누가 공격할 것인가를 결정하려는 것처럼 멈춰서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정말, 의논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럴 리는 절대 없었다. 캬캬캬캬캬캬캬큭! 이 거대한 몸집을 가진 놈들은 우리 둘이 저들 셋의 식사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서로를 향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물론 소리지르는 것만으로 만족하진 않았다. 다른 와이번들이 전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자, 놈들은 적대적인 노란 눈을 치켜뜨고 날개를 퍼득이며 싸울 태세를 취했다. 어어, 이런 곳에서 싸우면 우리들한테도 피해가……. 캬르륵! 한 놈이 펄쩍 뛰어오르더니 똑바로 다른 놈의 목덜미를 겨냥하고날아들었다. 그 거대한 날개가 펄럭이자 좁은 절벽 밑에선 회오리바람이라도 불어오는 꼴이 되었다. 나는 망토자락을 부여잡았고, 테아키는 흩어진 머리카락을 흔들어 넘기면서 뒤로 약간 물러섰다. 물론 다른 놈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키케렉! 와이번 두 마리가 서로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빙빙 도는 광경은 어떤 의미에서는 참 볼만한 광경이었다. 한 마리의 날개가 날카로운 바위를 때리자 엄청난 비명이 일어났다. 긴 꼬리들이 희한한 곡선을 그리며 서로의 빈틈을 파고들어갔다. 발톱에 긁힌 뱃가죽에서는 금세커다란 핏방울이 맺혀 흘러내렸다. 그러는 동안 세 번째 놈은 반대로 돌더니 한 놈의 뒤통수를 물어뜯으려 덤벼들었다. 뒤쪽에서 공격을 당하자 그 놈은 발끈하여 몸을 돌렸으나, 순식간에 두 마리한테서 공격당하는 상황이 되어 날카로운울음을 절벽 계곡에 내질렀다. 캬아아아악! "조만간에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테아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검을뽑아들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테아키에게는 검이 없었다. "저, 뭣하시다면 제 뒤에 숨으시……." 여전히 동작이 큰 테아키는 그럴 필요는 없다는 듯 고개를 커다랗게 흔들었다.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는데,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자기 할 일만 하면 된다는 듯한,아니면 눈앞의 상황만 해결된다면 내 생각 따위는 별로 관심 없다는듯한… 그런 태도였다. "싸우기보다는 쫓는 편이 좋겠소." 물론이지. 그러나 무슨 수로? 그는 내 생각과는 반대로 마치 나더러 물러나라는 것처럼 손짓을했다. 어쩌려고? 저렇게 큰 놈들은 우리 동료들이 있다해도 쉽게 해치울 수는 없을 텐데? 그러나 테아키는 지금까지 오던 것과 마찬가지로 뾰족뾰족한 바위들을 넘어 가볍게 절벽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뒤엉켜 싸우고 있는 세 마리 와이번과 저만치 평원에 돌처럼 웅크린 수십 마리의 와이번들을 한꺼번에 바라보고 섰다. 물론, 웅크리고 있던 와이번들도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저, 저……. "위험해요!" 캬랴랴랴략! 평원에서 수십 마리의 와이번들이 일어서기 시작하고, 엉켜 싸우던와이번들은 그의 존재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다는 듯이 하던 일만 계속하고 있는 동안, 그는 갑자기 팔을 허리에 얹더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더니? "타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황당해서… 가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와이번 떼를 보고숨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황당하게도 커다랗게 소리를 질러 자신의존재를 알리고 있는 그가 어리석어 보여서가 절대 아니었다. 순간, 와이번들의 동작이 딱 멎었다. 뒤엉켜 싸우고 있던 놈들까지그 자세 그대로, 모든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주위에 가득하던 모든 자연의 움직임들, 새나 풀벌레, 심지어 바람과 풀잎의 흔들림까지 멎은 듯했다. 내 눈앞의 모든 세상은 마치 돌이 되는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렇게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와이번들과 똑같은 이유로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 무엇 때문에? 내가 느낀 것은 어떤……. 공포, 명백한 공포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인 테아키가 나를 돌아보고 입을 열 때까지도 나는내가 받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온 몸의 피부가 부들부들 떨리고, 턱이 저절로 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내고, 움츠린 몸을 펴지도 못한 채, 나는 그렇게 까닭을 알 수 없는 공포에 떨었다. 이 감정은 어디에서 온 거지? 테아키? 그의 목소리? 아니면 그 말고 다른 것? 더 긴 생각은 해낼 수가 없었다.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그 이상의 생각은 하나도 해낼 수가 없었다. 그가 입을 열어 나를구원해 줄 때까지. "괜찮소. 당신에게 한 것이 아니니까." 나는 겨우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다, 당신… 어, 어, 어떻게, 가, 칼… 도 없이, 모몬, 몬스터, 들의, 보물, 보물을… 가져갈 수 있는지… 이, 이제에…야… 아알겠군…요……." 그는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굳어버린 와이번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는 나를묵묵히 바라보다가 불쑥,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갑시다." 그리고, 나는 그 손 위에 내 손을 놓았다. 마법은 깨어졌다. 우리는 석상처럼 얼어붙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는 와이번들 사이를걸어서 지나갔다. 그들은 우리가 처음 보았던 그대로 다시 검은 돌덩어리들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조각해 놓은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못한 채, 놈들은 질린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쩌면, 아까 내가 느꼈던 것보다 몇 배는 더한, 지독한 공포를 맛보면서. 그들은 도망치지도 못한 채 자기들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나가는 우리들을내려다보았다. 우리는 평원을 가로질렀고, 다음 절벽 사이로 난 길로 접어들었다. 나는 한 차례 돌아보았다. 아직까지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수십마리의 와이번들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싸우다 엉킨 세 마리가서로 껴안다시피 하고서 멈춰 있는 것도 보았다. 그들은 어쩌면 서로를 껴안고 있어조금쯤 위로라도 얻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보다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지금 내 앞에서 앞장서 걷고 있는 테아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이었다. +=+=+=+=+=+=+=+=+=+=+=+=+=+=+=+=+=+=+=+=+=+=+=+=+=+=+=+=+=+=+= 500회 일러스트 이벤트는 500회가 올라가는 날까지입니다. 28회 남았습니다. 하루에 한 개라면 28일 걸리겠지만, 꼭 그러라는보장은 없는걸요. ^^;팬클럽에서 회원 탐방이라, 통신 생활이 4년째가 되어가지만 회원탐방 대상이 되어본 건 처음인 것 같네요. ^^;8권 나왔습니다. 저는 아직 못봤습니다만... 추천해 주시는 분들께는 여전히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Luthien, La Noir. 번 호 : 27729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17 22:55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9)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9) 분명, 아까는 내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그토록 놀랐던 그가. 그가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손이 닿는 순간 나는 내가 느꼈던 공포를 거짓말처럼 잊었다. 이상한 사람. 과연 어떤 능력을 지닌 사람인 걸까. 그리고, 나는 이 알 수 없는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멀지 않소." 그가 동굴 앞에서 내게 한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동굴 입구를 바라보면서, 그 어두컴컴한 안쪽 길을 바라보면서, 파하잔으로 들어가던 때의 끔찍한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숨이 막힐 듯한 좁은 구멍을 30분 씩이나 기어가기도 하고, 뒷사람이 부딪쳐 오면 맨 앞에까지 고스란히 밀려갈 수밖에 없던 그곳말이다. 한치 앞도 못보게 캄캄해서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헷갈리는 융스크-리테의 안쪽, 거기 말이다. "그… 렇겠지요." 하긴 이런 동굴 속이라면, 은신처로 알맞긴 할 거야. 게다가 주아니를 만나기 위해선 이리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돼. 아무리 좁고 답답한 통로라도 참을 수밖에. 그래, 참자. 별 것 아니잖…… 어? 그를 따라 좁고 긴 굴을 통과해 나온 나는 내 예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장면과 마주쳤다. "화아……." 이 좁은 동굴 입구의 안쪽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넓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도 계속 까마득한 천장의 연속이었다. 그 거대한 굴의 벽면은 지고 있는 태양빛을 어렴풋이 받아, 약간의 황동빛광채를 띠었다. 좁은 길 따위는 없었다. 모든 입구는 컸고, 모든 통로는 탁 트여있었으며, 바닥은 편편했고, 안쪽은 어둠이었다. "어마어마하군요……."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들어감에 따라 환한 기운은 점차 가셨다. 마지막 빛이 사라지고 나자 사방은 완전히 어둠이었다. 내 눈앞에서걷고 있는 테아키가 간신히 보이다가 드디어 사라져 버렸을 때, 나는소리를 질러 그를 멈추게 했다. "불을 켜고 가야겠어요." 이상하게도 그는 램프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안쪽으로 가면 더 밝은 빛이라도 있나? 그, 뭐냐… 드워프들의 펠드로바드 광석처럼 말이야. 스스로 빛을 낸다던 그 광석처럼 램프 없이 주위를 밝히는 무슨 요령이라도 있는 걸까? 그는 내가 램프를 꺼내 켜도록 잠시 기다렸지만 그것을 그다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지는 않는 듯했다. 마치 구두끈을 고쳐 매는 상대를 기다리는 듯한 그런 투였다. "다 됐소? 그럼 갑시다." 참 이상한 일이었지만, 우리는 램프를 든 내가 뒤에 서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그가 오히려 앞장을 서는 비합리적인 모양새로 걷기시작했다. 조금 걷다가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앞이 보여요? 캄캄하지 않아요?" "아, 나는 익숙해서 괜찮소." 괜찮다니, 뭐 할 말은 없지만……. 들어올 때 했던 말과는 달리 우리는 꽤 오랫동안 걸어야 했다. 내가 든 램프의 불빛에 비쳐보이는 그의 그림자는 정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척척 발을 내딛고 있었다. 저 캄캄한 길에서 뭘 믿고 저렇게무작정 걷는 거지? 길을 완전히 외우기라도 했나? 길가다 마주치는돌부리 하나에 이르기까지…….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아! 음… 괜찮소." 정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 그가 마치 내가 놀랄까봐 걱정하기라도 하는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갈수록 이상한 사람이라고생각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테아키가 이 산에서 오래 머무를 때 사용한다는 동굴 은신처로 따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어떤 때는 며칠씩 이 산에서 나가지 않고 저장한 식량만으로 버티면서 일을 한다고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볼 것 하나 없이 황량하고, 약초나 그밖의 것들도 거의 자라지않고, 게다가 장작으로 쓸 나무조차 풍부하지 않고, 심지어 몬스터까지 들끓는 도무지 도움이 안되는 산이었지만, 그에게는 이 산 자체가훌륭한 삶의 터전이었다. 그는 이 산의 아주 작은 길까지 구석구석외우고 있었다. 게다가 아까 본 그 괴상한 능력으로 짐작해 본다면, 그는 정말 이런 직업에 적격인 사람이었다. 매번 그런 식으로 몬스터들을 쫓아버릴 수 있다면 말이지. 참새 그물로 페어리를 잡으러 다니는 미르보를생각해 볼 때, 그는 훨씬 깔끔하고 편리하게 일을 하는 셈이다. 그건정말 칭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한 일처리였다. 동굴 길에는 끝이 없진 않았다. 테아키가 걸음을 멈추었다. "다 왔소." 램프는 겨우 짧은 빛을 낼 뿐이어서, 여기가 어떤 지형인지 알기위해서는 좀 시간이 걸렸다. 램프를 한껏 높이 들어 이곳 저곳을 비추어 보았지만 워낙에 넓어서 동굴 구석까지는 빛이 닿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테아키의 뒤를 따라 몇 걸음 더 들어가 뭔가 밀짚더미 비슷한 곳에 안착했다. 테아키는 내 옆에 선 채로 뭔가 생각에 잠기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면 무슨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는 마치 그러면 그렇지, 라고말하는 것처럼 어깨를 몇 차례 으쓱거린 다음 동굴 구석을 향해 입을열었다. "뭘 거기서들 그러고 있소." 누가 있어? 테아키의 목소리가 가지는 메아리가 동굴 천장까지 채 닿지도 않았을 때, 잘 보이지 않는 동굴 한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꽤 여러 사람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였다. 혹시, 몬스터라도? 하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나칠 정도로, 박쥐 소리 하나 없이오긴 했었어. 살아 있는 거라곤 하나도 없는 것처럼, 그러니까 이 안에 뭔가 있다고 해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닌……. "으음, 흐음, 큼." 어라? 내 귀에 들린 것은 꽤나 익숙한 소리였다. 그러니까 익숙한 목소리를 가진 상대가 내는 소리였다. 나는 램프를 앞쪽으로 내밀면서 동시에 목을 죽 뺐다. 그리고 점차 윤곽이 드러나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았다. 아주 큰 키, 아주 작은 키, 그리고……. "유리카!" 이게 어찌된 일이야. 그러나 유리카와 엘다렌과 미칼리스는 나 못지 않게 놀란 얼굴로나를, 그리고 내 옆에 선 테아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칼리스가 입을 열어 한 마디 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이라고! 다들 도무지 입을 열어 뭔가 설명하려는 기색이 없어, 결국 내가일단 테아키와 이들을 서로 소개시켜야 했다. 테아키가 자신만의 은신처라고 말한 이곳에 어떻게 이 친구들이 들어와 있는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테아키가 아는 사람은 나 하나니까. 그 일을 할 사람은나뿐이었다. "저, 어떻게 된 사정인진 모르겠지만… 여기 이 셋은 제 여행 동료들이에요. 저와 함께 주아니를 찾고 있었고요. 아마… 이들 역시 주아니를 찾다 보니 이곳으로 오게 되었을 것 같은……." 말하다 보니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었다. +=+=+=+=+=+=+=+=+=+=+=+=+=+=+=+=+=+=+=+=+=+=+=+=+=+=+=+=+=+=+=홈페이지 방문자 수가 3만명을 넘었더군요. 와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기쁩니다. ^^하이텔 환타지 동호회에서 동호회 인기인 투표라는 걸 하더군요. 저도 엊그젠가 풍정낭식 님께서 쪽지를 보내주셔서 그제야 알았습니다만.. 솔직히 후보에라도 올라가다니 굉장히 의외에다가 감지덕지하고 있습니다... ^^;;; (추천하신 분들은 과연 어떤 분들이었을까..^^;;)글 보내달라는 메일이 다시 쇄도하고 있습니다... 못 보내주면 답장이라도 해달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런 메일이 하루에도 예닐곱 통씩 옵니다. 하이텔과 나우누리를 합쳐서요..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이 안 서는군요..;Luthien, La Noir. 번 호 : 27801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18 23:29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10)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10) 게다가 어느 쪽으로 들어왔지? 이쪽 말고 다른 통로라도 있나? 거기다가 저들은 램프도 갖고 있지 않은데, 뭘 보고 이 어두컴컴한 동굴 구석까지 기어들어온거야? 세 동료와 테아키는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 한 마디인사도 건네지 않았고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내 의무는 여전히 유효했다. 하던 설명은 말이 안되는 걸 깨닫고 멈추긴했지만, 일단 소개라도 다 해야 할 것 같아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저기 키 큰 엘프는 미칼리스, 드워프는 엘다렌, 그리고소녀는 유리카라고 하는데요, 그러니까……." 이럴 때면 나의 소개하는 솜씨는 형편없었다. 나는 어쨌든 간단한말로 이야기를 맺어 버렸다. "이쪽은 테아키, 라고 하고요." "테아… 키?" 뭐야, 남의 이름을 저런 식으로 되묻는 건 실례잖아. 그런데 그 실례를 저지른 사람은 우리 가운데 가장 경우와 예절에있어서는 철저하다고 할 만한 엘다렌이어서 나는 더욱 놀랐다. 나는램프를 들어 그들의 얼굴에 가까운 쪽으로 들이댔다. 그리고 세 동료의 표정이 한결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테아키를 쳐다보고 있었고, 말도 못하게 놀란 얼굴이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을 따라 테아키를 쳐다봤다. 뭐 잘못되기라도 했나? 무슨문제라도 있어? 그리고 제일 먼저 어색한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유리카였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용서하세요. 이렇게 허락도 없이 불쑥들어와 위대하신……." 그 다음 순간, 나는 테아키가 지금까지 나와 함께 다니면서 꽤 여러 번 보여주었던 행동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다. 그는 재빨리 팔을 커다랗게 내저으며 말을 멈추라는 듯, 괜찮으니 상관 말라는 듯한몸짓을 했다. 어쩌다가 램프 비춰주는 담당이 된 나는 양편의 얼굴이 서로에게잘 보이도록 램프를 높이 쳐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 순간, 또한 유리카의 얼굴에 떠오른 기묘한 표정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는 몹시 당황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 듯했고, 그리고 그 모든 감정에도 불구하고 알았다는 듯한,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겠다는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벌렸던 입을 한 번 다물었다가, 그 다음에 다시 굉장히 기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아… 테아… 키… 씨라고요." "파비안!" 물론 그 다음에는 감격의 상봉이 뒤따랐다. 이상스런 일이었지만,유리카와 엘다렌, 미칼리스는 여기까지 와서 주아니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듯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주아니를 찾으러 온 것이 아니었어요?" "아, 흠흠, 물론 그랬지." 이상스런 어조의 대꾸였지만 나 역시도 주아니를 다시 만나게 됐다는 기쁨 때문에 그런 것은 금방 잊어버렸다. 우리 다섯 동료들은 모두 한참 동안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주아니는 별 일 없이 건강한듯했고, 그 다음으로 우리의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꼬마 친구, 어떻게 와이번한테서 벗어난 건가?" "소는, 라-메르이르는 어떻게 됐니?" "가방은 어떻게 됐어? 게다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방금 잠에서 깨어난 주아니는 눈을 깜빡거리며 세 친구들의 질문을다 들었다. 테아키에게서 대강의 설명을 들은 나는 점잖게 뒤에 버티고 있었지만, 그들과는 다른 점에서 또한 놀라고 있었다. 주아니가,그렇게 낯을 가리고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는 주아니가, 어떻게 테아키를 전혀 겁내지 않는 걸까? 게다가 저렇게 편안한 표정으로 잠에서깨어난 모습이라니, 걱정이라고는 전혀 안한 듯한 모습이잖아? 왠지 배신감 비슷한 것이 느껴지는데. "흐음……." 갖은 이야기들이 오가는 동안, 테아키는 아무런 설명도 보태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램프 하나로만 밝혀진 거대한 동굴은 기괴한 그림자로 일렁거렸다. 나는 그 가운데 앉아 점차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분명히 자신의 은신처라고 말했어. 그런데 지나치게 황량하고, 너무 넓으며, 아늑한 맛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심지어 편안히 잠잘 만한 자리나 식료품 비슷한 것조차 하나도 보이지않았다. "… 그렇구나. 그래서여기까지 오게 된 거고."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카가 대꾸하고 있었다. 주아니는 자신을 구해준 것은 테아키라고 말했고, 그래서 그는 엘프, 드워프, 인간의 종족별 격식에 맞춘 감사들을 피하기 위해 다시 한 번 팔을 휘저으며 괴상한 동작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괜찮소." 그 다음은 나의 사랑스런 동료들이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된 것인가를 물을 차례였다. 이상하게도 이 셋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좀우물쭈물했다. "그게 말이지… 그러니까, 어떻게 찾다 보니까……." 미칼리스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을 꺼냈지만, 그도 맺을 말은 없는지 끝을 애매하게 흐리고 말았다. 나는 유리카를 쳐다보았다. "이 동굴 속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들어왔어? 아니, 램프도 없는데어떻게 들어온거야?" "아아, 그건… 네가 들어온 쪽 말고 다른 쪽에도 통로가 있었거든. 우린 그리로 들어왔어." 이번엔 좀 이해할 만한 대꾸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물었다. "그래? 그럼 여기까지 주아니를 찾으러 들어왔단 말야? 와이번은동굴에도 사니?" "……." 그리고 그녀의 대답도 거기서 막히고 말았다. 나의 사랑스런 동료들과 방금 만난 테아키가, 뭔가 나를 따돌린 채알 수 없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선 점차 커져갔다. 이들은 초면이 아닌가? 그런 것 같진 않았는데? 그런데 도대체무슨 까닭으로, 눈짓 한 번만 갖고서 그렇게 얘기가 잘 통하지? 게다가 아무래도 그건 나하고 관련된 일인 것 같은데 말야. "이것 봐요."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나한테 뭐 숨기는 것 있죠? 미칼리스, 엘다렌, 그렇죠? 유리카,말해 봐. 테아키 씨… 혹시 제 동료들과 전부터 아는 사이예요?" +=+=+=+=+=+=+=+=+=+=+=+=+=+=+=+=+=+=+=+=+=+=+=+=+=+=+=+=+=+=+=허브가 결국은 맛이 갔습니다...;왠지 모를 죄책감이 느껴지네요.. 나우누리의 chosd 님,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나우누리 외 통신망에서 오는 메일이 반 이상이에요.. ^^;(심지어 한메일로 보내면 심심하면 반송됩니다.. 왜 이러지?)책장 정리하다가 쓸데없는 책들도 꽤 많구나.. 생각이 들더군요. 일전에 대학때 교수님들께 책을 한 권씩 갖다드렸더니, 한 분이 마치교환이라도 하듯 덜컥 내주신 책... 물론 그 분이 쓰신 거지요. 제목은 '제2공화국과 한국민주주의'. --; 대학 다닐때에도 별로 관심 없던 방향이었는데 말이죠. 별 쓸데도 없는 이런 책들로 책장은점차 포화 상태를 넘어 갑니다...; (이미 포화 넘었음..)Luthien, La Noir. 번 호 : 27864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19 22:36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11)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11) "아니오." 그는 내 동료들과는 달리 망설임 없이 금방 대꾸했다. 그것 참. "그런데 왜 나는 전부들 짜고서 나를 바보취급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죠?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건가?" "파비안." 입을 연 것은 주아니였다. 주아니는 이어 말했다. "그렇지 않아." "뭐, 나도 나쁜 의도로 그러는 게 아닐 거란 건 알아." 물론이다. 주아니나 유리카가 나한테 뭔가 해를 끼치려고 거짓말을할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엘다렌도, 미칼리스도. … 테아키 씨라면 얘기가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나는 테아키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잠시 생각한 끝에 이런 상황에서는 '나르디 식' 질문이 가장 적절하리라는 결론도 함께내렸다. "그러니까 내 동료들과 테아키 씨는 알고 있는데나 혼자만 모르는어떤 중요한 문제가 지금 의사 소통에 장애를 가져오는 것 같은데,일단 사실을 밝히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편이 보다 능률적이지 않을까요?" 아, 그리운 나르디……. 내가 잠시 감상에 잠겨 있는 동안, 불쑥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럴 수도 있겠소." 어두컴컴한 불빛 가운데 테아키의 갈색 뺨이 희한한 광채를 내며번쩍이고 있었다. 뺨 뿐이 아니다. 턱선과 목, 손등과 이마 모두가마치 무쇠로 만들어진 것처럼 천천히, 가라앉은 광채를 띠며 빛났다. 나는 이상스런 기분으로 그것을 쳐다보았다. 사람의 피부가 저런 빛을 낼 수도 있나? 그러나 그는 내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잠시 침묵에 잠겨 있다가 다시 한 마디 말했다. "그 사실을 아는 편이 좋다면, 좋소. 내가 친구를 하나 소개하지." "친구라고요?" 내가 그렇게 되묻는데 갑자기 유리카의 팔이 불쑥 튀어나와 나를뒤로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몇 걸음 뒤로 물러난 다음, 나는 까닭을물으려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손가락을 세워입술에 갖다 대며 고개를 흔들었다. 말하지 말라고? "잠깐 기다리시오." 그는 별 설명도 없이 몸을 돌리더니, 몇 걸음 걸어가 우리 눈에는잘 띄지도 않았던 한 통로로 들어가더니 모습을 감췄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유리카는 나를 덥석 잡아당겨 뒤에서 끌어안았다. 마치 잃어버릴 뻔한 어린아이를 정신없이 품안으로 끌어당기는 어머니 같은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내 입을 막아버렸다. "조용히 해. 말하지 마." 나는 고개를 비틀며 간신히 소리를 냈다. "왜……." "조용히 하라니까! 제발, 조금만 참아." 물론 그녀는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었다. 유리카의 목소리는 바짝긴장해 있었고 속삭이듯 낮았다. 그러나 또한 단도처럼 날카롭게 날이 섰고, 기묘한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위기, 위험에의 감각. "……." 잠시 동안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엘다렌도, 미칼리스도, 주아니도 말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내가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명백한 두려움, 또는 압도적 감각앞에서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지독히 길게만 느껴지던 시간이……. 끝났다. 쿵. 쿠구궁. 쿠구구구구구궁…쿠궁, 쿵, 쿠쿠쿠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 유리카는 떨고 있었다. 손도, 다리도, 어깨도, 심지어 입술도. 그리고 영문 모를 공포에 나도 곧 전염되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엘다렌과 미칼리스의 표정을 알아보려 애썼다. 그들의 표정에서 뭔가알아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잠시, 엘다렌은 램프를 집어들더니 그 불을 꺼 버렸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캄캄한 어둠 가운데, 나는 있었다. 그리고짙은 밀도를 가지고 온 몸을 압박해오는 단단한 공기의 질감을 느꼈다. 실재감. 공기는 지금까지의 습관을 내버린 것처럼 그를 둘러싼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알려 왔다. 그렇게 그것은, 끝간데 모를 공간 속으로 한없이 팽창하고 있는 젤리였다.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는 긴장감 가운데, 나는 있었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궁……. 내가 뭔가 알고 기다리고 있는 건가? 몰라, 모르겠어. 왜 이렇게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없지? 쿵쾅, 쿵쾅, 쿵쾅, 쿵쾅……맨 끝에 들려온 것은, 다시 잘 생각해 보니 내 심장 소리였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를 공간 가운데 박아넣은 채로 굳혀버릴 것 같던 긴장감은 모두의 귀에 들려온 한 마디와 함께끝났다. 목소리. 뭐라 말할 수 없는 특이한 울림의 목소리. "들어오라." 일단, 컸다. 그리고 길었다. 뭐가? 글쎄… 뭐였지? 거대한 생물이 그 가운데 있었다. 내 시야를 가득히 채우고도 모자라, 그 안에서 한없이멀리 벗어나 있는 생명체. 우울하고 긴 목과 거기에 돋아난 잔인한 돌기들이 쇳소리를 내며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들과, 뭐라 말할 수 없는 빛깔로 번뜩이는 청동의 비늘들이 있었고, 그리고 튼튼하고 날렵한 척추뼈를 따라 산줄기처럼 뻗은 긴 꼬리가 있었다. 꼬리 끝에 이르기까지 불규칙하게 솟은 돌기들, 튀어나온 뼈들은 맨 끝의 가장 작은 것조차도 인간의 키에 미칠 정도였다. 모든 것은 까마득히 크고, 길고, 넓고, 단단했다. 내 작은 눈, 작은 머리로는 모든 것을 도저히 한꺼번에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그 존재를 한 번에 생각하고, 한 번에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고개를 들었고, 천장 꼭대기부터 저 아래로 이어진 그모든 것을 보았다. 똑. 똑. 똑. 어디선가, 알 수 없는 곳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커다란 물방울들은 바위에 떨어지는 순간 산산이 깨어져 은빛 가루가 되었고,곧 사라졌다. 우리가 들어선 바위 동굴은 소리의 울림으로 보아 좀전에 있던 곳보다 훨씬 거대할 듯했고, 희미하지만 충분한 빛이 가득히감돌고 있어서 주위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슈우우우우욱……. 바람이 어디선가 들어와 다른 곳으로 나갔다. 그러나 들어온 곳도,나온 곳도 발견할 수 없었다. 바람에 움직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주위의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지금, 이렇게어이없을 정도로 엄청난 감각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느라 이미 내 정신은 다 써버린 것 같은데. 압도된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만같은데. 그러나 내 입에서 가장 먼저 흘러나왔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불공평해……." 그랬다. 불공평했다. 저렇게 크고, 놀라운 생물이 어째서, 어째서 인간과 같은 작은 생물과 한 땅 안에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어떻게 거대한 산과 데이지꽃한 포기가 똑같이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야?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미칼리스였다. 내 뒤에 석상처럼 우뚝 선그는 말하고 있었다. 낯설지만, 어디선가 들었던 듯한 이름. 내가 알아야만 했던 이름. 나를 기다렸던 이름. "오르카, 라무아노드, 소르드. 레벤다드, 아르누이크 테아칸." +=+=+=+=+=+=+=+=+=+=+=+=+=+=+=+=+=+=+=+=+=+=+=+=+=+=+=+=+=+=+=음...긴 이름입니다. ;uernaril 님이 일러스트 이벤트에 응모해 주신 나르디의 말 '프레아데니' 그림.. 아직까지 인물이 아닌 그림은 처음이어서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공지에도 나왔듯, 세월의 돌과 관련되기만 하면 어떤 그림이라도이벤트 참여가 가능합니다. 숲이라거나, 강이라거나, 검이나 목걸이같은 것을 그리셔도 됩니다. iskra10 님.. 저도 사람이 마구 죽어나가는 얘기는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우려하신 대로 출판 일자가 계속해서 급박하게 닥치고 있습니다. 연재 속도를 올릴까... 그러면 500회까지인 이벤트 기간은 줄어드는 셈입니다만...(그보다 먼저 열심히 써야겠죠. --;)Luthien, La Noir. 번 호 : 27911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0 20:06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12)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12) "엘프들은 기억력이 좋군." 나는 미칼리스가 입에 올린 그 이름들에 대해서 말할 능력은 없다. 그 중 어떤 것이 진짜 이름인지조차 모르겠으니까. 설마하니 전부 다는 아니겠지. 그러나 그 목소리에 대해서 말하자면……. 마치 깨진 종을 울리는 것처럼 따가운 억양이면서도, 또 반대로 만돌린(mandolin)을 타는 듯한 묘한 음조가 함께 섞인 목소리였다. 이건 참,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온갖 특이한 목소리들을 들어 보았지만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희한한 목소리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상상으로 그려보는 일조차 힘들 정도로 거대하고 엄숙한 생명체의 목소리라는 것은. 내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단지 바람 소리나 그런 자연물의소리라고만 생각하고 넘겨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말은 내가이해할 수 있는 언어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내 나는 바람이, 또는 산이 말을 거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혼란해진 채로 서 있었다. 초록색의 눈동자. 유리카의 것과 같지만 느낌만은 완연히 딴판인초록의 눈동자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동빛과 금빛, 군데군데 붉은 기운이 번진 강철빛의 비늘과, 허공으로 천천히 오르는 금속성의 입김……. 유리카가 말하고 있었다. 처음의 당황은 접은 채로, 그러나 아직도완전히 안정되지는 못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레벤다드, 아르누이크 테아칸, 카라드-리테의 오래된 드래곤이여. 이곳까지 이끌어 준 호의에 감사드리며 또한 다른 의미에서도 같은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로도 위대한 그대에게, 헤아릴 수 없는 나이만큼의 현명함이 깃들길." 음, 나라면 저 다른 의미란 '우리를 그냥 살려 두어서'라고 생각할것임에 틀림없는데. 드래곤의 표정이라는 것은 도무지 알기 힘든 것이다. 아마도 감정이 있으니만큼 표정이 없지는 않을 텐데, 어쨌든 그런 건 내가 알 수없는 영역의 것임에 확실했다. 드래곤은 고개를 움직이더니 목을 허공으로 한번 죽 뺐다. 천천히 어깨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몸에 돋아난 돌기들이 마치 따로따로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별개의 움직임을 가지고 꿈틀거렸다. 나는 그 모든 동작이 이루어지는 동안 그저넋을 빼놓은 채 입을 벌리고 허공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드래곤은 거대한 동굴의 기둥처럼 솟아오른 바위 사이에 자리잡고앉아 있었다. 나는 저 생물이 일어섰을 때 얼마나 빠르게 움직일 수있을지, 그 앞발이 얼마나 재빠르게 움직여 눈앞의 물체를 낚아챌 수있을지 쉽사리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저 엄청난무게와 부피를 지닌꼬리는 또 어떤 식으로 움직일까. 저 입을 벌리면 그 안에선 과연 어떤 것이 쏟아져 나올까. 짐작이 안되는 것은 더 무서웠다. 나는 못박힌 채로 한 마디 말도꺼낼 수가 없었다. "……." 말하지 않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엘다렌 역시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드워프들이 드래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증오는 그어떤 종족보다 뿌리깊다고 들었다. 땅을 파고 지하를 개발하는 종족,그런 드워프들이 마주칠 수 있는 가장 큰 재앙 가운데 하나가 바로드래곤일 테니까. 게다가 드워프들의 역사 속에는 '달 갸라누'라는재앙의 드래곤이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이윽고 드래곤은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 입을 열어 미칼리스에게대답한 이래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없었다. "내 친구의 안내를 받아 왔을 것이오." 친구? 테아키, 테아키를 말하는 건가? 그러나 나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미 테아키가 누구인지는 짐작하고있었다. 아르누이크 테아칸이라는 이름을 가진(물론 용서받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간단히 줄였을 때) 저 드래곤, 그리고 테아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 뻔하지 않아? 더 생각할 것이 뭐가 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르누이크 테아칸은 계속해서 그 '테아키'에대해 말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좋은 친구지. 그의 안내를 받았다면 여기까지 찾아오는 것이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겠지." "……." 드래곤을 앞에 놓고 뭐 어쩌고저쩌고 따질 수는 없었지만, 도대체뭘 어쩌자는 거지? 놀리는 건가? 장난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드래곤의 목소리가 가지는 긴 울림은 동굴 안에서 쉽사리 사라지지않고 한동안 주위를 맴돌았다. 그래서 우리가 뭔가 말하기 위해서는드래곤의 말이 끝난 후 울림이 갖는 여운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지않으면 안 되었다. "아르누이크 테아칸… 물론 그대의 친구는 훌륭한 안내자였소. 친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 주시오." 미칼리스가 한 말에 나는 흠칫 놀라 그를 돌아보려다가 간신히 행동을 중지했다. 뭐야, 왜 저렇게 대답하는 거야? 테아키가 아르누이크 테아칸이고, 테아칸은 드래곤이고, 드래곤은 저기 있고… 하여간뭐, 그렇잖아? 친구가 어디 있다고 그래? 그러나, 아무도 그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감히 지적하지 못한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엘다렌이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젠 내가 한 마디쯤 해도 좋은 시점이었다. 드래곤의 머리는 워낙 컸고 초록색으로 번뜩이는 눈동자에서 표정을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가 나를 보았는지 어쨌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거나 저러거나, 이상스럽게도 모두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머리를 똑바로 들고 드래곤을 바라보며 뭔가 말을 한다는 건… 으음, 대단한 영웅들이 아니면 감히 엄두도 못 내는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침묵은 길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까닭없이 모두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엉뚱한 망상일 수도있는데, 도무지 그 가운데에서 다른 생각을 해낼 수가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내가 뭔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은 점차 커져 갔다. "……." 이, 이런 건 아닌데……. 혼자 만들어낸 망상 속에서 고통받고 있던 나는, 결국 무슨 말이든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궁지에 몰려버렸다. 한 마디, 한 마디, 말을하기만 하면 되는데, 왠지 갑자기 벽력같은 노성이라도 터질 듯한 이이상스런 기분. 으아아……. "저… 저어…… 그러니까……." 이쯤에서 내 머리는 완전히 비어 있어서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 어디까지가 이름인가요?" 뭐, 뭐야, 무슨 소리지! 나는 스스로도 얼떨떨해져서 고개를 푹 숙이며 몸을 움츠렸다. 그런다음 말을 한 마디 하고 나니 그제야 다시금 재빨리 돌아가기 시작한 머리를 급히 굴리며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해보려 애썼다. 으음, 그러나 역시 이게 아니었다는 사실만은 변함없이 빨리 느낄수 있었다. 뭐… 라고든 말을 하시라고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내가 다잘못했다니까요……. 갑자기, 머리 위에서 그 쇳소리 섞인 만돌린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500회 이벤트 응모, 여전히 받고 있습니다-우편 접수, 메일 접수 모두 받습니다. ^^ (공지 참조)저..혹시 페이지 4집 가사 갖고 계신 분 있으세요? 아니면 '블루 노트'의 가사만이라도... 귀가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몇 부분의 가사를 알아들을 길이 없더군요..;;그것 참, 유료서비스에조차 없다니... 굉장히 인기 없나 보다;;(기껏 발견한 것은 앨범 인덱스 밖에 없었다는..)나만 좋아하나..? Luthien, La Noir. 번 호 : 27973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1 20:56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13)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13) "테아칸, 정도면 적당하겠지." "네, 네에?" 유리카가 천천히 내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당기고 있었다. 그래,그녀도 역시 내가 뭔가 실례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만 뭐지? 저 대답은 별로… 아니지, 내가 드래곤의 목소리에서 무슨 감정을 제대로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라고. "부르기 쉬운 이름이 기억하기도 좋지. 어찌되었든 좋다. 네가 파비안이로구나. 에제키엘이 말했던 자손이 바로 너인가? 파비안 나르시냐크, 아니 파비안 크리스차넨이 되겠군.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던가." … 드래곤은 기억력이 좋을 뿐 아니라 남의 집안 가계에까지 정통했다. 나는 어찌 되든 좋다는 심정으로 얼른 대답했다. "네, 네에……." 이건왕족을 만났을 때보다 더 어렵군. 높은 사람을 만났을 때 생기는 뭔지모를 불안감에다가, 몬스터를 만났을 때의 공포심까지 함께더해진 셈이란 말야. 하나만 해도 견디기 힘들 텐데, 정말 불공평한생물이로군. … 내 머릿속에서 드래곤이란 그저 지위 높은 몬스터일 따름이었다. "일단, 맡긴 물건을 보여준 다음에 오랜만의 회포나 풀도록 할까." 회포? 인간을 본 지 너무 오래되신 모양이지요… 그 저, 그 말이 오랜만에 맛보는 별식에 대한 감정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닐 테지만……. 내 생각은 갑작스럽게 허공에 떠오른 광채 때문에 완전히 막혀 버렸다. 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위로 젖혔다. 우우우우우웅……. 어디에서 갑자기 빛이 솟아났는지 몰랐다. 드래곤과 우리 일행의사이, 바닥에서 약 20큐빗 높이 정도에 희고 동그란 빛이 생겨나 있었다. 너무 밝은 나머지 제대로 쳐다보기조차 힘든 빛의 공이다. 우리 모두는 앞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거나 돌렸다. 간신히 바라본 빛 속에는 뭔지 모를 어떤 물건이 들어있는 듯했다. 작은 동그라미, 또는 반짝이는 어떤 것…. 흰 빛 가운데 든 하얀 물건, 그렇다면 저것이 바로 흰 보석, '니스로엘드의 심장'일까. 문득, 페어리 여왕 에졸린이 참새 그물을 보여줄 때 썼던 방법이떠올랐다. 이 비슷한 방법이 아니었던가? 테아칸은 다시 입을 열어 말하고 있었다. "아직은 꺼낼 수 없다. 저것을 꺼낼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지." 그렇다면 그것 역시… 나라고? 눈을 찌르는 광채는 잠시 후 조금 덜해졌다. 둥실 뜬 빛은 그 자리에서 움직임 없이 멈춰져 있었다. 작은 달을 머리 위로 두고, 우리는다시 드래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번엔 아르누이크 테아칸이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닮은 얼굴임에는 틀림없군. 인간에게는 긴 시간이었을텐데, 그런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건가. 아니면 그 핏줄은 유난히 강한 각인을 가지고 있는 건가." "……." 이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듣게 되는 저 이야기에 나도 익숙해지고 있다. 에제키엘을 보았던 사람은 모두 '그를 닮았다'라고 말하고,아버지를 보았던 사람들은 또한 '그를 닮았다'라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에제키엘의 얼굴은 아버지와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어쩐지… 그렇게 즐겁게만은 여겨지지 않는 이야기다. "그리고 드노미린크, 이제 그대의 나이도 황혼에 접어들 때가 되었을 테지." 미칼리스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드노미린크는 그의 다른 이름인가? "아직은 인간에게라면 길다고 할 정도의 시간이, 나에겐 남아 있소. 더구나 내게는 2백년의 봉인된 시간이 있었으니 실제로는 더 길어진 셈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드래곤만큼이나 살수는 없는 종족이니 안심하시오." "무슨 소리. 나 역시 옛 생명을 만나는 것을 즐기지." "그토록 긴 생애에 그만큼의 기억력은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첫 균열을 보고 있음이야. 아직도 첫 균열, 생애 가운데 찾아온 첫 번째 균열이지." 그 말이 가지는 여운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테아칸은 천천히 몸을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치 산이 움직이는 것과도 같은 그 모습에 나는저도 모르게 몸서리를치며 뒤로 물러섰다. 천천히 긴 목과 고개가동굴 천장을 뚫을 것처럼 들어올려지고, 육중한 몸체는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섬처럼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내 눈에는 드래곤에게는감춰진 몸이 한없이 있어서 끝없이 땅 속에서 솟아오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엇갈리며 움직이기 시작한 비늘들은 수 가지 색감으로 문득문득 변했다.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연녹색을 띠기도 하고, 황동빛으로번쩍이기도 하는 찬란하고도 날카로운 비늘들이 수천 개의 바늘들처럼 시선을 아프게 찔렀다. 테아칸은 마치 바다 가운데 파도처럼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까마득한 하늘로 솟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아직 그대의 나이는 1만 살이 넘지 않았군요." 미칼리스가 한 저 말이 저렇게 높은 꼭대기까지 들렸을까? 그러나 드래곤은 마치 다리 쯤에도 귀가 하나 달린 것처럼 금방 대답해 왔다. "나이란, 자신의 삶이 짧다고 여기는 자들이나 세는 것이지. 긴 시간 살아온 엘프여, 그대의 나이를 아는가?" "알고는 있지만, 별로 말하고 싶지는 않군요." "그렇겠지." 미칼리스와 테아칸은 꽤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인 듯했다. 음유시인 정도가 있어 이 장면을 보았다면, 미칼리스의 풍채로 보아 드래곤을 사냥하러 온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생각해버릴 지도 모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를 꽤 존중하듯 대화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의 사이란 인간과 엘프의 사이보다 더 이해하기 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균열을 막을 소년이여." 나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기대했던 대답은 아니겠지만. "균열이라니요?" 표정이 보이지 않는 드래곤은 그 긴 목을 어딘지 모를 곳으로 향한채 먼 곳으로부터 대답해 왔다. "또인가. 당사자인 그대는 아무 것도 모르는 건가. 이건 인간들의오래되고도 나쁜 습성이야." 뭔가 탓하는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긴장하여 숨을 죽였다. 나만 이런 걸까? 다른 친구들은? 유리카는 내 손을 놓지 않은 채, 더욱 꽉 쥐었다. 그러더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인간들의 습성을 이해하지 못하시겠지요. 그러나 연약한 인간들은작은 일에도 곧잘 극복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는답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크고 중대한 일일 경우에는 가끔 원치 않는 부수적 감정이 생겨나 연약한 자아에 흠집을 만들기도 하지요. 이런 꼴이니 언제나 그런 것을 막기위해 애쓰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페이지 4집 가사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하하... 못 알아듣던 부분의 가사를 보고 나니 허탈했다는..^^;)잠시, 속도가 올라갑니다... 속도가 올라가면 500회도 빨라집니다...;Luthien, La Noir. 번 호 : 27974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1 20:56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14)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14) "물론, 그 비슷한 이야기는 2백년 전에도 들었다, 프랑데아미즈." 테아칸의 말 속에 섞여나온 고대어는 내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공용어만큼 명확한 발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나를 배려해서 저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프랑데아미즈… 아마도 저 말의 뜻은 봄의 공주.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일어선 드래곤은 그가 앉아 있던 동굴 구석에서 한 걸음 걸어나왔다. 드래곤의 한 걸음인지라, 그건 거의 우리 코앞까지 다가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감히 물러서지 못하고, 아니 사실은 물러나봤자 소용도 없을것 같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선 채로 고개를 뻣뻣해질 정도로 젖혀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올려다본다고 불쾌해하면 어쩐다? 뭐… 설마 그런 것까지 자세히 보겠어. "파비안 크리스차넨이라. 이유야 어찌 되었든 2백년 전에 예언되었던 자를 만나게 되니 약간은 세월이 지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군. 그대에게 '균열의 날'에 대한 설명을 하게 될 자가, 설마 내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는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유리카에게 속삭여 물었다. "야, '균열의 날'이 뭐냐?" 유리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드래곤을 쳐다보며 그의이야기를 들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것 참, 우울한 일이었다. 나는다시 고개를 젖혀 드래곤의 머리인지 아니면 동굴 천장인지 모를 것을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균열'을 막을 자가 '균열의 날'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니, 그것참, 무엇부터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그대는 고대 이스나미르 인들이 그 '균열' 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가?" "모르… 겠는데요?" 사실 나는 이 대답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보다 훨씬 더, 훨씬 심각하게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지금 고대 이스나미르 인 얘기가 왜 나와야되는지, 균열의 날은 균열이 일어나는 날이란 소린지, 균열은 무슨 뜻이며 어디에서 일어난다는 건지, 그러니까 땅의균열인지 하늘의 균열인지, 그리고 그게 내 임무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지… 기타등등. 그러나 그렇게 무식한 척 해봐야 절대 좋은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살아 있는 것들이 짐작할 수 없는 어느 때, 균열은 찾아온다. 균열은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인다. 균열은 징벌처럼 보이지만, 실은 균형의 또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균열은 잃었던 균형을 세상에 되찾아준다. 그것을 위해 죽는 자, 자신의 희생을 기꺼워하는 편이 좋겠지."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상한 기분이 문득 들었다. 아르누이크 테아칸이 한 말 속에서 느껴지는 '균열'에 대한 감각은 불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것만큼은 내게도 느껴졌다. 인간에게든, 엘프나 드워프에게든, 심지어 드래곤에게도 결코 행복한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그런 것이다. 게다가 그어감은 몹시 무겁다. 그러나, 그 균열의 결과를 기꺼워하는편이 좋을 거라고? 내 옆에서 미칼리스가 다시 입을 열고 있었다. "위대한 자여, 어쩌면 그것은 그대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일지도 모르오. 그대 종족에 비해 작고 어린 자들이 그대의 마음과 같아지는것은 무리요." 작고 어린 종족, 엘프, 드워프, 인간……. "길든 짧든, 균열을 두 번 겪을 만큼 긴 생을 사는 자는 아무도 없지. 고대 이스나미르의 그 괴이할 정도로 오래 살던 자들이라면 모를까. 균열의 날 앞에서는 그대나 나나, 마찬가지로 어린아이일 뿐이다." "그러나 위대한 자여, 그대와 우리는 세월을 볼 수 있는 눈의 깊이가 다릅니다. 같은 까닭으로, 그대는 균열을 기꺼워하라 말하고 우리는 균열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균열이 가져올 파멸을 막기 위해, 스스로의 종족을 지키기 위해, 2백년의봉인조차 마다하지 않은 우리들입니다." 봉인, 봉인은 균열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종족의 사라진 재생력을되돌리려 한다고 하지 않았나? "2백년은 어찌 보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 "긴 시간이 아니었기에, 이만큼의 유예도 있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드래곤의 인생에서는 짧을 테지만, 작은 종족 가운데 가장 오래사는 엘프, 그 엘프인 나에게조차 그것은 충분한 고통이 되었습니다." '고통'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미칼리스의 미간이 처음으로 가볍게찌푸려졌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가 치러야 했던 희생,2백년의 봉인을 위해 버려야만 했던 그 모든 관계들을 생각하고 있을까. 한 번도 그런 것을 표현하거나 말한 일이 없던 그다. 천진할 정도로 쾌활한 그를 보고 있으면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고통 같은 것은 겪은 일이 없을 것처럼 보이지. 행복한 것만 보고, 아름다운 것만들으며 자란 어린아이처럼, 그는 순수한 어조로 말하지. 말이 없는 엘다렌. 그리고 이번에는 유리카가 말하고 있었다. "그대를 설득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이해해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균열에 저항하고자 하는 생명들도 있고, 세상 속에 가득찬 수많은 생물들 가운데에는 이런 자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 넓고깊은 생각 가운데 넣어 주셨으면 하는 바램 뿐입니다." 드래곤은 고개를 약간내렸다. 녹색 눈동자가 천장 가운데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저렇게 까마득한 높이에 있으니, 그것도 보석 하나정도로 작아 보이는구나. "생명은 다양하지. 세상 역시 다양하지. 다양한 것은 좋은 일이지. 균열도 마찬가지. 균열은 세상이 지닌 수많은 다양성 가운데 하나다. 다양성을 지키고자 하는 힘이 바로 그것이지. 균열은 징벌이나 재앙이 아니라 세상을 지키고자 하는 힘이다. 이 세상에 사는 자들의 희생으로, 다음 세상에 살 자들의 세상이 만들어진다. 너는 희생이 싫은가? 세상을 위해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일이 아까운가?" 날카로운 만돌린의 음색, 거기에 대답하는 단호한 입술의 소리들. "생명은, 살아 있기 때문에, 살고자 하는 것이, 그 본능이자 목적이며 덕목입니다. 생명은 살기 위하여 다른 생명을 죽입니다. 균열의시대, 바로 이런 시대에 살았다는 것이 스스로의 생명을 가볍게 내던져도 좋다는 조건이 되어주지는 않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이, 자신의생명을 멋대로 내던지는 것은 권할 일도 강요할 일도 아니거니와, 심지어는 죄악이기까지 하지요. 모든 생명이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균열 없는 세상에 못지않게 세상의 질서를파괴하는 일이 될 겁니다. 균열에 저항하는 것, 그것 역시도 살고자하는 생명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죽음의 본당, 아스테리온의 고위 무녀인 그대, 프랑데아미즈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니 꽤 의외로군." 죽음의 무녀인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 "저라고 해서 할 수 없는 생각은 아니나, 저 혼자 해낸 생각은 아닙니다." "그렇지. 에제키엘, 그 자는 여러 친구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염시켰어. 바로 전염병 같은 자야." 테아칸이 한 그 말은 예전에 미칼리스가 했던 말, '불량식품 같은친구'라는 이야기를 상기시켰다. 불량식품, 전염병…… 모두 묘한 어감을 지닌 말들.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거대하게 선 채로 약간 목을 구부린드래곤도, 그 앞에서 형편없이 작아보이긴 하지만 당당한 자세로 선미칼리스와 유리카도, 그리고 말이 없는, 심지어 소개조차도 없는 엘다렌 역시도…….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무슨 이야기들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잠시 동안 잔돌 구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가 이어졌다. 나는 천천히, 그러나 결코 망설이지는 않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균열이 도대체 무엇이죠? 균열의 날은 언제란 말입니까? 도대체그것들은 아룬드나얀과 무슨 관계인 건데요? 멸망을 가져온다고요…? 균열은 멸망… 도대체 무엇이 균열을 만들죠? 그리고 그 모든 것이사라진 재생력을 되살리고자 하는 엘프와 드워프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건데요!" +=+=+=+=+=+=+=+=+=+=+=+=+=+=+=+=+=+=+=+=+=+=+=+=+=+=+=+=+=+=+=500회 이벤트를 메일로 응모하실 때는 제발 파일명을 한글 4자, 영문 여덟자 이내로, 특수문자는 넣지 마시고 보내주세요..;;안그러면 다운이 안 받아집니다...--;Luthien, La Noir. 번 호 : 27975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1 20:56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15)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15) 나조차 높아진 내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러나 이미 나간 목소리를 낮출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실수를 저지를 만큼 충분히 혼란되어 있었다. "파비안." 내 어깨를 짚은 것은 미칼리스였다. "우리가 막으려는 것이 바로 그 균열이다." "균열이라니요? 땅이 갈라진단 말인가요? 하늘이 쪼개지나요? 그것도 아니면 허공에 금이라도 간단 말이에요? 갈라지면? 그 사이로 뭔가 사악하고 나쁜 것이 들어옵니까? 아니면, 이곳의 생명들이 그 균열로 빠져나가나요?" "좋은 질문이야." 갑자기 머리 위에서 울린 대답에 나는 멈칫, 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쇳소리가 좀더 많은, 금속 무기의 마찰음 같은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균열이 눈에 보이는 어떤 틈새는 아니지. 그리로 어떤 힘이 들어오는지, 또는 나가는지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나조차도 모르고, 두 발로 걷는 자들가운데 가장 현명했다고 하는 그대들 인간의 마법사, 에제키엘조차몰랐으니까." "그러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거죠? 그 보이지 않는 힘이라는 것은?" 나는 나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대담하게 드래곤을 향해 묻고 또 대답하고 있었다. 테아칸은 몸을 약간 틀었다. 긴 목이 허공에서 마치먹이를 낚아채려는 매처럼 순식간에 떨어져 내렸다. 나는 잠깐만에내 눈앞으로 다가온 드래곤의 머리와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어버렸다. "……!" 숨이 막혔다. 내 키에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눈동자와 바로 코앞에서 마주하게 되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번뜩이는 녹색의 들판, 아니면 얼어붙은 호수와도 같아 보였다. 나를 향해 들이대어진 오른쪽 눈동자에는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지않으면 결코 알 수 없을 미세한 균열이 긴 가지를 뻗고 있었다. 그리고 투명하지만은 않은 그 눈동자 한쪽에는 무엇인지 모를 깊숙한 흠집도 남아 있었다. 어쩌면 저 균열은 인간으로 치면 핏줄에 해당하는것일지도 몰라. 저 흠집은… 혹시 전투의 흔적이랄까 그런 것은 아닐까? 또한 드래곤의 얼굴은 수많은 각질과 비늘, 무언지 모를 흉터들로가득했다. 어쩌면 흉터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나 매끈한 얼굴에 익숙한 종족인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몇 겹으로 겹쳐지고갈라진 껍질들로 뒤덮인 오래된 나무, 비늘 하나 하나에 스스로의 나이를 새겨넣은 것처럼 한없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돌기들이 거기에있었다. 나는 드래곤이 내뿜는 콧김 때문에 자리에서 비켜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숨결은 굉장히 뜨거웠다. 정면으로 맞고는 도저히 견뎌낼수 없을 정도로. "균열의 결과라. 참으로 어려운 문제야. 닥치기 전에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 고대 이스나미르에 살았다던 그 괴물 같은 자들이라고 해서 과연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세상에 닥칠 균열의 결과를, 인간인 에제키엘이 미리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지. 진심으로 놀랄 만한 일임에 틀림없어." 코앞, 바로 10큐빗 앞에서 말하고 있는 드래곤의 머리를 보며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멀리 있을 때보다 한결 생생하게 들려오는 테아칸의 목소리, 귓가를 후벼파듯 쟁쟁하게 울리는 단어들 속에서 내가 정신을 차릴 수 있는 것조차 신기하게 생각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나만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내 동료들 역시 애써 다리에 힘을 주려는 것처럼 등을 구부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마치 드래곤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에게 아프게 얻어맞기라도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어 말할 수 있었다. "어떤… 결과가… 오지요?" "죽지." 그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또한 지금까지와는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문득,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산다는 드래곤 역시도 저'죽는다'는 단어를 나와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하지 않는 드래곤 대신 미칼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뭔가에 짓눌린 것처럼 낮아져 있었다. "엘프와 드워프의 재생력이 왜 소멸되었다고 생각하지?" 그건… 소멸되었다고 하니까 그런 줄로 알았을 뿐이야. 소멸된 까닭이 뭐냐고? 그런 것은 모르겠는데… 왜 그들의 재생력은 사라져야만 했었지? 그게 균열의 탓이라고? "균열이야. 그 사이로 생명이 빠져나간다." 미칼리스의 말을 잇기라도 하듯, 유리카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리고, 엘프와 드워프 뿐만이 아냐. 인간의 재생력은 달랐을 것같아? 2백년 전에 세 종족은 균열 앞에서 똑같이 위기에 처했어. 그리고 두 종족이 파멸하는 동안, 인간만은 2백년의 유예를 얻어 살아남았어. 그리고… 에제키엘은 죽었어." 죽었어……. 갑자기 머릿속에서 빠르게 그려지기 시작하는 짐작들, 2백년 전 이들에게 닥쳤을 운명의 잔인한 전개를 느끼며 나는 뺨을 움찔거렸다. 에제키엘은 왜 죽었지? 그는 왜 죽었어야만 했지? 유리카의 입술이 움직여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희생양, 검푸른 깃털의 제물……." 그것은 예언시 '녹보석의 기사'에 나오는 말이었다. 에제키엘, 결국 그를 제물로 해서 우리는 살아남았다는 말인가. 엘프와 드워프를 되살리기 위해 미칼리스와 엘다렌은 시간을 뛰어넘어이곳까지 왔어. 그러나 그들의 종족은 2백년 전에 멸망당한 것이나마찬가지지. 그들은 이제 겨우 약속을 지킴으로서 자신의 종족들을되살리려는 것 뿐이야. 그런데 똑같은 재앙 앞에서 인간은… 우리 인간은 아무 문제 없이 지금까지도 살아 오고 있다……. 아마도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는 말을 멈춰 버렸다.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는 듯해서다. 그래,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 2백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제야 알겠어. 2백년 전의 균열이 두 종족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동안,에제키엘은 그것을 막을 방법을 찾으려 했고, 결국 완전히 막을 수는없어도 2백년 뒤로 유예시킬 수는 있는 방법을 찾아냈지. 그 대가는수많은 희생과 죽음… 그러나 그렇다면, 2백년이 지난 지금에 일어나야 할 일은 무엇이지? "… 제가, 제가 왜 아룬드나얀의 주인이 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에제키엘이 자신을 희생시켜 얻은 시간, 바로 2백년 뒤로 유예된 균열, 그 균열이 다시 닥치고 있군요. 그렇다면 인간의 재앙 역시 끝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제가 그것을 다시 막아야만 하나요? 에제키엘의 희생으로도, 그 모든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는 말인가요?" "그렇게 간단해 보이나? 그것이, 그렇게?" +=+=+=+=+=+=+=+=+=+=+=+=+=+=+=+=+=+=+=+=+=+=+=+=+=+=+=+=+=+=+=.... Luthien, La Noir. 번 호 : 27976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1 20:56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16)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16) 드래곤의 목소리에 깃든 우울한 감정은 놀랄만큼 빠르게 내 감정속으로도 파고들었다. 그 강력한 목소리는 상대방의 마음을 바꿀 수있을 정도로 기이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균열이 무엇이냐? 모르지. 왜 오는 것인가? 역시 모른다. 모든 마법의 총체, 가장 발달된 생명의 형태를 지녔었다던 현자들의 나라,고대 이스나미르를 멸망시킨 것이 바로 균열의 힘이다. 도대체 왜? 어째서 그 이후에 올 종족들보다 훨씬 우월하고, 도덕적이며, 높은이성과 지식을 지녔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능력마저 다루던 자들을이 세상에서 추방해버린 것일까? 그들이 가졌던 마법에 비하면 지금,아니 지금보다도 훨씬 거대한 마법이 세상에 퍼져 있던 2백년 전의마법조차 어린아이 장난에 지나지 않지. 그러나 '균열의 힘'은 그들이 더이상 이 세상에 필요없다고 판단한 거야. 그들이 멸망하는 편이, 세상을 위해 더 낫다고 여겼던 것이야. 왜냐고? 무슨 까닭이냐고? 모르지!" '모른다'고 말하는 드래곤은 제멋대로 한 내 상상 속에서도 굉장히낯선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심지어 테아칸 스스로조차, 그렇게 말하는 것을 달갑게 느끼지 않는 듯 잠시말을 멈추고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테아칸은 내게 균열에 대해 충분할 만큼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누군들 알 수 없는 재앙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내가 알아야 할 것은 결과야. 원인이 어떻게 되었든, 내가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니까. "균열의 날은 언제죠?" 내 목소리는 가라앉았고, 굉장히 냉정하게 변해 있었다. 내가 알아야 할 것에 대해 듣기 위해, 신경은 온통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올해, 문자 아룬드의 어떤 날. 그 이상은 알 수 없지." "그러면, 아룬드나얀은 그 균열을 막을 수 있나요?" "있지." "그렇다면, 왜 에제키엘은 2백년 전에 그 균열을 막아버리지 못했죠?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을 살아온 위대한 드래곤인 당신조차 당신 인생에 균열을 겪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어요. 그만큼 균열은 자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일 텐데… 고대 이스나미르를 멸망하게 하고, 바로 그 다음번에 돌아오는 것이 이번 균열인 건가요? 그렇다면 어떻게, 2백년 전의 균열은 지금으로 유예될 수 있었죠?" "그것이 바로, 에제키엘,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이지. 2백년 전에 균열을 완전히 막을 방법이 없었던 그는 2백년 후에 올 자네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고 모든 노력을 다했다. 두 멸망한 종족의 대표자를보내고, 너에게는 아룬드나얀의 힘을 남겼지. 그리고 심지어……." 테아칸은 잠시 사이를 두고 말을 멈췄다. 그런데 내 옆에서 이상한기척이 느껴진다. 고개를 약간 돌렸다. 유리카가 두 손을 꼭 싸쥔 채테아칸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마법사 자신이 후견인이 되어 준 소녀, 일생을 통해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누이인 아스테리온의 어린 무녀 역시 2백년 후의 알 수없는 세상으로 보내버렸지." 내 고개는 저절로 돌려졌다. 그녀를 향해, 바들바들 떨리는 얇은어깨와 꺾어질 것처럼 힘을 주고 있는 작은 손목, 빠르게 뛰는 맥박이 손에 잡힐 듯, 파르스름한 핏줄이 곧게 선 하얀 목을 바라보았다. 대마법사 에제키엘, 그가 내놓아야 했던 모든 것들. 그 중에서도가장 큰 희생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물었다. "어째서… 2백년 전에는 안되던 일이 2백년 후에는 됩니까? 2백년전 아룬드나얀의 주인은 하늘을 뚫고 땅을 가르는 대마법사였지요. 그러나 지금 아룬드나얀의 주인은… 보잘 것 없는 소년에 불과한…저일 뿐입니다." 미칼리스의 손이 내 어깨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가만히유리카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을 흔들고 뒤섞었다. 미칼리스의 입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숨기는 것을 몹시 싫어하지. 유리와 엘다가 지금까지 네게많은 것을 숨겨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것에 동의할 생각이 없었지. 뭐든 알고, 밝히는 편이 좋다고, 그렇게 생각해 왔어. 그러나… 이번 것은 달라. 네게 한 가지를 약속할 수 있다. 에제키엘이 왜 2백년 전에 균열을 막을 수 없었는지… 그 문제는 균열을 막는의식이 끝나는 순간, 너에게 말해 주겠다. 그때까지는 묻지 말아라. 그 전에 알려고 하지 말아라." 내 얼굴이 천천히 그에게로 돌려졌다. 그는 딱딱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으며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한 마디 했다. "나는,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킨다." "……." 이번에는 드래곤도 침묵을 지켰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위대한대마법사조차 못한 일을,그의 모든 능력으로도 겨우 2백년 뒤로 유예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보잘 것 없는 내가 무슨 능력으로? 내게 있는 것은 2백년 전과 똑같은 아룬드나얀 목걸이일 뿐인데. 내게는 그 이상의 어떤 능력도 없는데. "이유는 어찌 되었든 좋아요… 어쩌면 그런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어이없을정도로 평범한 나, 내게는 아무런 능력도 없어요. 모든 종족들 가운데 가장 뛰어났던 마법사, 천년에 한 번 날까말까한 인물인 나의 조상은 내게 자신의 어떤 능력도 물려주지 않았죠. 마법도, 지식도, 심지어는 의지조차도…. 그런데 그 대마법사를 아는 당신들… 그리고위대한 생물인 그대는 무슨 근거로 내가 그 일을 해낼 거라고 믿는겁니까?" 대답한 것은 유리카였다. "에제키엘은 준비했어." "무엇을?" "2백년 후의 네가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일을 내다보고 준비했어. 그리고 때는 이제 가까워. 목걸이는 너를 선택했어. 남은 것은 하나의 의식 뿐이야. 그러고 나면……." 나는 홱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까닭모를 분노가 마음속에서 솟아났다. "그래! 목걸이는 나를 선택했지. 왜냐고? 내가 에제키엘의 자손이기 때문이야! 다른 어떤 이유도 없지. 내게 어떤 훌륭한 점이 있기때문은 전혀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란건 고작 2백년 전의 그가 준비해놓은 일 그대로, 마치 심부름을 하는꼬마처럼 따라하는 것뿐…? 내게 어떤 의지가 있을 수 있지? 내가 무슨 결심을 할 수 있다는 거지? 난 인형이야. 꼭두각시야.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어. 심지어 나는 너희들을 돕겠다는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어… 엘다렌, 기억하나요? 내가 파하잔에서 한 약속… 타로핀을 걸고 한 약속은 결코 어겨서는 안되는 거라 했나요?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던가요? 자신이 없을 까닭이 없죠! 2백년 전에 설계해 놓은대로 움직이는 인형일 뿐인 내게 무슨 의지가, 무슨 결심이 필요하단말입니까! 그저 시킨 대로, 가만히 따라하기만 하면 되는 머리가 텅빈 헝겊인형일 뿐인데!" +=+=+=+=+=+=+=+=+=+=+=+=+=+=+=+=+=+=+=+=+=+=+=+=+=+=+=+=+=+=+=죽.. 이어서 읽는 편이 나은 부분인 것 같습니다. 네 개라.. 아직까지도 이럴 기력이 남아 있었군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8039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2 19:58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17)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17)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심지어 테아칸조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릎에서 힘이 빠진다… 나는 누군가 '그렇지 않다'고 말해 주기를 기대했는데…. 아무도 그렇게 말해주지 않아. 잔인한 진실, 늦었지만 이제야 제대로 본 것일 뿐…위로는 없어. 전혀 없어. "그렇군요… 아무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군요…. 엘다렌과 미칼리스와 유리카, 다들 나보다는 모든 점에서 뛰어나고 훌륭한 동료들이에요. 나 같은 것한텐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죠. 당신들은 에제키엘한테나 어울렸을 그런 동료들이니까…. 나, 난, 처음부터 아무 고민도 할 필요가 없었는데…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했었죠. 내가 과연제대로 할 수 있을까, 큰 일을 그르치지 않을 능력과 용기가, 의지가내게 있을까, 만일 없다면 어떻게 그런 것을 얻도록 해야 하는 걸까,훌륭하고 훌륭하고 또 훌륭한 당신들한테 나는 과연 어울릴 수 있는걸까… 그런 쓸데없는 고민들……." 나는 유리카에게로 한 발 다가섰다.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그저 맑게만 갠 눈동자야. "유리카, 너는 왜 나를 좋아했니? 나… 너한테 별로 어울리지 않잖아…? 너도 알고 있었을 텐데… 아스테리온의 고위 무녀이고, 2백년전엔 대단한 마법사, 게다가 나보다 수백배는 현명한 너인데, 겨우나 따위 바보를 좋아한다는 것이 말이 돼…?유리 너도, 내가 에제키엘의 자손이기 때문에 날 좋아하는 거니? 아룬드나얀의 주인이기 때문에…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내가… 단지, 단지… 에제키엘의 얼굴을 닮았기 때문인 거니!" 유리카의 손이 올려져 자신의 입을 막는 것이 보인다. 그 눈동자가한없이 커질 것처럼 부풀어오르고 있다. 그리고 떨리는 어깨와 창백해진 뺨, 그 모든 것은 내가 목숨을 걸 정도로 사랑하는 것들. 그러나, 또한 내 목숨을 지불해도 살 수 없을 정도로 비싼 것들. 너는 왜 나를 위해서 울지? 그 눈물은 굉장히 값비싼 것일 텐데…겨우 나를 위해서 흘리기에는 아깝잖아…? "파비안, 심한 말은 하지마. 너… 유리카를 울리는 것이 즐겁기라도 한 거야?" 드래곤을 만난 이후로 처음 듣는 주아니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를 거의 잊고 있었다. 나는 주아니가 어디에 있는가 찾으려고 시선을한바퀴 빙 돌렸다. 주아니는 놀랍게도 어느새 드래곤의 발치에 가 있었다. "주아니, 너……?" 주아니는 놀란 내 눈빛은 아랑곳않고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로 다시한 번 말했다. "너, 그러고도 유리카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어?" 나는 가만히 주아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대담하게 드래곤의 발치로 다가가 주아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주아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나한테… 오고 싶지… 않아…?" 주아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못본 체했다. 그리고 다시 말을이었다. "너 역시도… 나 같은건 필요없는 거니?" "파비안!" 그래, 주아니의 목소리는 본래 컸었어. 나는 손을 내미는 것을 그만두고 몸을 돌려 동료들이 있는 쪽을 향했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걱정은 마세요. 사정이야 어찌됐든, 제 할 일은 할 테니까요. 물론 약속한 것도 있지만 그런 거야 다 한푼어치 가치도 없는 것일 뿐이고… 어쨌든 나도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니니까요. 내 감정에 사로잡혀서 2백년을 간직해온 소원을 짓밟고, 수많은 종족들이 멸망하는것을 볼 정도로 대담한 녀석은 못 되니까요. 인형이라 해도, 인형의할 일이란 것은 있지 않겠어요? 저버리지 않을 테니까……." 갑자기 미칼리스가 성큼, 세 걸음만에 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번쩍, 내 눈앞에 불꽃이 지나갔다. "……." 돌바닥에 쓰러진 채로 나는 얼얼한 뺨을 싸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미칼리스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에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의 손아귀 힘에 대해서는 팔씨름을 해본 내가 가장 잘 안다. 보통때였다면 거의 정신이 나갈 정도로 심한 손찌검이었겠지. 그러나 내머릿속은 잠시 핑 도는 듯했을 뿐, 곧 정상으로 돌아왔다. 차라리, 몇 번이고 맞고 또 맞아서 이런 일들쯤, 다 잊어버릴 수있다면 좋을 텐데. 미칼리스의 입술이 움직여 말하고 있었다. "오랜 숲의 종족인 엘프는, 네 녀석에게 삶 따위를 구걸할 정도로자존심조차 잃은 종족은 아니다. 그런 식이라면 엘프든 드워프든 인간이든, 모조리 멸망해버리는 편이 나아. 의지를 가지지 않은 인간이세상을 가르는 질서의 힘인 균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럴바엔 균열이 가져오는 파괴의 힘에 수긍하고, 다음 세상과 후손을 위한 거름이 되는 편이 몇천배 더 나은 것이다."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까지 잊혀진 줄로만 알았던 엘다렌의 무거운 목소리가 고요를 뚫고 들려왔다. "저 드래곤의 말대로… 균열에 저항하는 것만이 본래 옳은 일인 것은 아니다. 균열은 더 큰 관점으로 보아, 세상의 균형을 되찾는 힘인것이지. 균열이 우리를 멸망시키려 한다는 것은, 세상의 균형이 인간과 엘프와 드워프의 멸망을 원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고대 이스나미르 인들의 멸망했기 때문에 우리 세 종족들이 생겨났던 것처럼, 미래에 올 새로운 생명들을 위해서 우리는 이제 무대에서 물러날 시간이된 거다…. 그러나 에즈와 나와 미카와 유리, 우리들은 비록 순종해야만 하는 고난이라 하더라도 끝까지 저항하는 것이 살아 있는 생명의 순리라는 것에 의견을 같이했다. 균열에는 순응하는 자만이 필요한 것은 아닐 거라고. 모든 생명의 순응을 전제로 그런 파멸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 거라고. 우리들은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자들이고,길어야 천년, 짧으면 백년밖에 살지 못하는 우리들. 그런 우리들이만년, 억년의 질서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용히 내준다는 것은 결단코 '악(惡)'이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악이 아니라면 그것은 패배하고멸망할 수밖에 없는 생명의 부도덕함일 뿐. 짓밟힐 풀잎 한 조각이라도 살아 있는 한, 삶을 위해 마지막 한 순간까지 뿌리에서는 물을 빨아들이고, 햇빛을 받으며 양분을 만들어낸다. 삶을 포기하는 자들로가득한 세상이라면, 질서고 뭐고 없이 남은 것은 멸망 뿐일 거다. 세종족뿐 아니라, 그것은 세상 자체의 멸망이다." 내 귓가에서 그 모든 말들은 윙윙거렸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 머리는 그 말을 이해하기도 했고, 어느 순간은 전혀 이해하지못하게 되기도 했다. 미칼리스는 내 뺨을 때린 손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 힘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생명들이 생존에의 본능을 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전 세계의 멸망보다 더욱 끔찍한 일인 거야. 그런 우리, 그렇게 집요한 삶에의 욕구를 가지고 모든 것을 버린 채 긴 세월을 넘어 여기까지 온 우리가,겨우 '나는 인형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자의 내키지 않는 도움을받아야 한다는 거냐? 그런 식으로 막아지는 균열이라면,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질서를 거스르는 악덕에 불과한 것!" 나는 입을 벌렸다. 그리고 난잡하게 고개를 저었다. 턱이제멋대로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그의 말이 내내 계속되는 동안에도. "우리가 멸망이 고통스러워서, 죽음이 두려워서 이렇듯 애쓰고 노력하는 것으로 보이나? 우리는 산 자의 본능을 따름으로서 세상의 질서를 지키는, 그렇게 애써도 균열이 막아지지 않는다 해도, 마지막순간까지 해야만 하는 그 일을 하고 있는 거다. 그렇게 하지 않는 세상은 이미 죽은 세상, 미래란 없어. 이렇게 애쓰고 노력해서 모든 일이 실패하고 결국 세 종족 모두에게 멸망이 닥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는다고요?" 미칼리스는 푸른 눈으로 주저앉은 나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동굴안에서 하늘처럼 맑아 있는 그 눈으로, 푸른 불꽃처럼 타오르는 눈으로 그는 나를 바라보며 똑바로 입술을 움직였다. "무슨 짓을 해도, 어떤 노력을 해도, 소용없이 멸망을 향해 달려갈뿐이라 해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를 마주하여 몇 번이고 뺨을 후려갈길 거다." +=+=+=+=+=+=+=+=+=+=+=+=+=+=+=+=+=+=+=+=+=+=+=+=+=+=+=+=+=+=+=유니텔에 세월의 돌 모임이 생겼습니다! 음... 저는 못가봤습니다만.. ^^; 메일로 개설되었다고 연락을 주셨더군요. 인덱스는 go stone이랍니다. 유니텔 아이디 있으신 분들은 한번쯤가보세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8042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2 19:59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18)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18) 나는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뺨을 향해 손바닥을 가져갔다. 손이 유난히 차가운 것도 아닌데 얼굴에 갖다대니 몹시 시원하다. 내 숨소리는 갑자기 커진 것처럼 동굴을 울리고 있었다. 더할나위 없이 열정적인 금발의 엘프, 그는 확신으로 가득찬 어조로 말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왜? 나는… 살고 싶은 열정이 부족한 건가? "너는 이 시대의 사람이야! 2백년 전의 우리 모두를 합친 것보다너는 이 세계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다! 우리들에 비해, 네힘이 작다고? 너는 수억년의 질서를 움직이는 균열의 힘 앞에서 한낱인간 하나, 엘프 하나, 드워프 하나의 힘이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지 모른단 말이냐? 균열의 힘이 산이라면, 우리 모두는 겨우 한 톨의 모래에 불과한 것이지. 개별 생명의 힘이라는 것은 보잘 것 없어. 네 나이는 저 드래곤에게는 겨우 하루살이 정도의 것에 불과하지. 균열의 힘이 이성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 모두는 그저 짓밟고 가도 좋은 길가의 잡초 이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잡초도, 삶을포기하는 순간 이미 잡초조차 될 수 없지!" 나는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천천히, 한 마디씩 되풀이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요?" "나, 너를 좋아한 것을 후회하지 않아." 갑자기 들려온 유리카의 목소리에 나는 몸이 굳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눈물은 걷혔지만, 상처받은 마음은 숨겨지지 않는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고개를 돌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네가 내 마음을 몰라준다 해도… 좋아하는 마음은 그 자체 그대로, 나는 끝까지 가져갈 테니까…. 그것 역시 '사랑'을 하는 사람의버려서는 안되는 의지야. 그런 것이 없다면 누군가를 좋아할 자격따윈 없을 테니까." 우울하다. 저 말을 듣는 순간, 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은 것인지 모르겠어. 내게 가장 옳은 일이무엇인지 판단할 수가 없어. 말을 마친 유리카는 내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동굴 벽으로 가서 그 몸을 기댔다. 서 있는 것이 힘든 것처럼.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간은, 멸망해선 안되겠지요… 다른 모든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수긍해서는 안된다고, 그러니까 인간이든 엘프든 드워프든 스스로가 이해할 수 없는 균열의 의지 같은 것은 따를 필요가 없다는 그런 말이로군요. 또한 반대로, 나는 지금'균열을 막는다'라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니, 그일을 할 필요도 없다는… 그런 말인가요?" "이해하고 싶어하지조차 않는다면." 미칼리스의 단호한 대답이 울리고, 잠시의 침묵 후 오랜만에 드래곤의 목소리가 높은 곳에서 울려왔다. "결과를 알고 있나?" "… 결과요?" "종족의 멸망, 재생력과 생명력의 멸실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아느냔 말이다. 네 종족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너는 알고서 그렇게 말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죽… 겠지요." 나는 겨우 그 말만을 하고서 생각에 잠겼다. 죽는다는 것, 그러니까 균열의 날이 도래하면 제 할 일을 하고 있던 모든 인간들이 그 자리에서 갑자기 죽어넘어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어떤 전조도 없이,그렇게 갑작스레 닥쳐온다는 것일까? 죽는 사람들은, 그렇게 갑자기 모든 것을 잊고 돌로 변해버리기라도 하는 건가? 드래곤의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이미 닥쳐오고 있다. 그리고 한 아룬드 정도가 더 지나면, 가장느린 감각을 지닌 인간족조차 명백히 느낄 수 있는 징조들이 나타날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 징조가 없지는 않지." "어떤 징조가… 있죠?" 목소리는 다른 곳에서 들렸다. "빨라지는날씨." 나는 얼어붙은 것처럼 그 말을 한 유리카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가없었다. 빨라지는 날씨, 빠르게 바뀌는 계절? 그리고 테아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이미 스조렌 산맥은 늦가을로 접어들어 있다고 하더군. 크로이츠영지는 아예 기후가 달라져 황량한 땅으로 변했다. 상텔로즈는? '세르네즈의 하늘'이 상텔로즈 숲을 떠난 후로 그 숲에 어떤 일이 닥쳤는지는 입에 담고 싶지조차 않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입을 열어 물은 것은 미칼리스였다. 드래곤이 말한 세 곳은 보석들이 숨겨져 있던 곳, 그리고 또한 내 동료들의 고향인 장소들이다. 모든 일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세상 속의 변화와 가장 무관하게 격리된 곳, 아라스탄 호수에서조차 계절의 급격한 변화는 완연했었다……. "드노미린크, 그대가 듣고 싶다면 말하지. 상텔로즈는 중심부에서부터 말라들어가고 있다. 그대의 결계 안이라면 아직 그대로일지도모르지. 그러나 숲은 이제 생명력을 잃었다. 더 이상 잎이 자라지도,꽃이 피지도 않는다. 있던 생명은 말라들어가고, 더 이상의생명은생겨나지 않는다." "……." 엘프 전사는 침묵했다. 그가, 옛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의 모습은아닌 것 같다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 바로 나였던가? 상텔로즈 숲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칼리스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인간이 혈육을,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의그것과는 어딘가 달랐다. 조국이 멸망했다거나, 고향에 참화가 닥쳤다거나 하는 소식을 들은 자의 얼굴도 아니었다. 물론 단순히 자신과무관하게 비극적인 상황을 접한 그런 표정도 아니었다. 비탄도, 눈물도 없으며, 분노도, 고통도 표현하지 않는, 무표정한 듯 하면서도 상처입은 눈빛. 손가락 하나 까딱한 일 없는데도. 귀퉁이가 떨어져나간찻잔처럼 한없이 초라해보이는 그의 어깨. 한참만에 나는 그 표정을 비유할 곳을 찾아냈다. 그것은, 마치 잘려나간 팔을 바라보는 사람과도 같은 눈빛이었다. "… 미카……." 아무도 위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될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잘라진 팔을 다시 붙여 줄 수 없는 바에는, 쓸데없는 말을 덧대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오직 테아칸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드노미린크, 그대에게 알려줄 좋은 선물이 하나 있지. 오래간만에만난 친우에게 주는 선물치고 합당할 것인지는 알 수 없군." 미칼리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드래곤은 그를 위로하려고하는 것일까? 그러나 테아칸은 말을 이었다. "아라스마드가 빛나고 있다. 그 빛이 이곳에까지 보인다. 거의 20년 만의 빛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다만 엘다렌과 미칼리스가 동시에약간 흠칫, 하며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보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이상의 것을 물을 마음은 나지 않았다. 나는 내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복잡한 상태에 있었다. 마법이 돌아오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했었지. 보석들을 되찾게 되면서, 세상은 이제 더 좋은 곳으로 변하려는 걸 거라고 생각했었지. 어린 소년같은 기분으로 마법이 돌아오게 될 세상을 신나게 상상한 일도 있었지. 그러나, 그러나, 이것들은 다 뭐야? "마법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도, 차라리 이대로였으면, 아무 변화도 없이 그냥 이대로였으면……." 물론 그것은 엘다렌과 미칼리스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자신들의종족을 살리기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온 그들이 아닌가. 그리고 당연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게는 되지 않아." 엘다렌이 다시 입을 열었고,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봉인에는 대가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마법은, 균열의 힘을 2백년간 봉인한 대가로 치러야만 했던 대가, 희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희생 의식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마법사였던 에제키엘의 목숨이 필요했다." +=+=+=+=+=+=+=+=+=+=+=+=+=+=+=+=+=+=+=+=+=+=+=+=+=+=+=+=+=+=+=눈이 많이 오네요... 눈이 얼어서 반짝반짝 하던걸요. 은가루처럼.. Luthien, La Noir. 번 호 : 28111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3 22:21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19)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19) 그리고 미칼리스가 동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선 채, 입술만을 움직여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목숨값으로 우리 모두는 살아 있다… 역사는 되돌려지지 않아. 다시 모든 일들은 되풀이되겠지. 기형의 생명들, 죽어가는 아이들,황폐해지는 마음… 너는 왜 이 세상에 몬스터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몬스터란 기본적으로 마법의 반대물들이다. 몬스터가 처음부터그렇게 흉폭하고 어리석으며 악한 존재였다고 생각하나? 생명의 시작은 누구나 깨끗해. 그리고 그 깨끗하게 시작된 생명을 몬스터로 만들어버리는 힘과, 그 몬스터를 퇴치하는 마법의 힘은 상극의 작용. 그러나 마법이 사라지자, 그 두 힘의 균형에 기대는 몬스터들도 대부분저절로 소멸해 간 거지.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작게 잦아들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그는고통스럽게 잠시 말을 멈추었다. "… 몬스터가 다시 생겨나고 있는 것을 보았겠지…? 그건 마법의힘이 돌아왔기 때문이기도 하지. 그러나 지금 다시 생겨나고 있는 몬스터들은 과거의 놈들과 어딘가 양상이 다르다. 너도 기형으로 생긴와이번들을 보았겠지? 그게 무엇을 닮았다고 생각해?" 닮았어…? 닮았다고… 누구를? 그런 생각을 한 일이 있었던 것 같아… 기형 와이번… 무엇을… 닮았지? 엘다렌의 목소리가 놀랄만큼 깊숙히 폐부를 찌르며 들어오는 것이느껴졌다. 마치 긴 창처럼 서서히 내장을 뚫고 들어온다. "인간이다. 인간의 일부가 몬스터로 변하고 있다." "말도 안돼요!" 내 외침이 허공을 뚫고 천장을 향해 퍼져나갔다. 미사의 홀처럼 높은 동굴의 꼭대기, 그 위로 낱말들은 쟁쟁하게 울리며 사라져갔다. 아무 소용없는 짓들. "어떻게! 몬스터와 인간이 같을 수 있죠? 그럼 예전의 몬스터들도모두 그렇게 인간이나… 엘프, 드워프 같은 종족들이 변해서 된 것이란 말인가요?" "그런 것은 아니야." "그러면요! 나, 난, 믿을 수 없어……." 팔을 뻗치고, 소리를 지르고, 힘껏 부정하고, 손바닥을 펴서 부당함을 호소하는 모든 일들, 현실 앞에서는 모두 쓸데없는 짓들. "과거의 몬스터들 역시도 생명이 부정한 힘을 받아 뒤틀린 결과로태어나는 것들이지. 그들도 스스로 번식을 하니만큼, 잘못된 환생의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이제 이렇듯 종족들의 경계가뒤섞이고 있는 것은 분명히 균열의 영향이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인간의 생명력은 드디어 눈앞으로 다가온 균열의 전조 앞에 점차시들고 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명의 경계가 약해졌어. 그리고과거에도……." 엘다렌의 목소리는 거기서 끊겼다. 그리고 놓치지 않고, 미칼리스의 목소리는 내게 잔인한 현실을 들이댔다. "엘프와 드워프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었다. 몬스터가 된 엘프,드워프를 상상해 본 일이 있나?" "믿을 수 없어……." 이제 내 목소리는 나조차도 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물통에 구멍이 뚫리면, 물이 새어나가지. 달걀의 껍질이 약해지면, 병아리는 태어날 수 없는 거야. 그리고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세상은……. "그것 뿐만이 아니야." 유리카가 등뒤에서 말한다. 그들은 모두 돌아가며 말한다. 내게 이런 충격을 주기 위해 지금까지 모든 것을 숨겨 왔었나? "너와 나를 쫓아왔던 악령의 노예들… 그들은 하비야나크에서보다켈라드리안에서 그 수효가 훨씬 불어나 있었어. 나는 두 번 모두를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지…. 그들은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스스로 증식할 수 없어. 결론은, 그 안에는 전에 인간이었던 자들도있었다는 이야기야." 인간이라니?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지금… 우리 마을 사람들이 그 안에 있었다고 말하는 거야?" "… 그들만이 전부는 아닐 수도 있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방금 들은 대답을 잊어버리려는 것처럼. 그러나 될 수 없는 일이다. 내 머릿속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합동 장례를 치를 때 시체들의 수효가 턱없이 부족했었다는 사실이 오랜만에떠올라왔다. 시체 대신 이름을 쓴 나무조각을 태웠던 가족들이 있었어. 그래서 놈들에게 잡아먹힌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었지……. … 에렌트 형도, 게퍼 쿠멘츠도, 심지어는 벤야 킬른도… 시체는없었는데……? 그, 그럼… 내가 그들을 다시 한 번 죽인거야…? 켈라드리안 숲,아르나 강 앞의 절벽에서 내가 미친 듯이 베어넘기고 찢었던 그들이내 고향 사람들이었다는 거야? "그런……." 눈앞이 흐려지고 흔들거렸다. 거대한 거품처럼 부풀어오르는 세상,물 속에 빠진 것처럼 흐늘거리고 뒤엉키는 세상… 내 눈앞에서 그것은 팍 깨어져 버린다. 눈물……. "나, 나는… 왜 내게 이런, 이, 일이……." 허공 가운데 빛에 감싸여 오롯이 떠 있는 흰 보석, 니스로엘드의심장. 나는 그 빛을 머리 위로 받으며 서 있었다. 그 흰 빛 너머로보이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답을 다 가졌을 것만 같은 오래된드래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야 됩니까? 위대한… 자여, 나는 당신을 부를 적당한 말을 별로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이 세계에 닥칠 다른 일들은 어떤 것입니까?" "모두 알 수는 없지. 그러나 인간 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이 한바탕 생명력의 혼란을 겪을 것은 자명할 것이다. 그러나 균열의날이 지나고 나면 결과는 분명해진다. 잃어버린 것은 되찾을 수 없게되고, 균열은 닫혀 세상은 다시 본래대로 되돌아온다. 사라지는 것은인간, 엘프, 드워프이다." "어째서죠? 어째서 그들만이죠? 그대와 같은 드래곤도, 로아에나페어리도, 그 외에도 온갖 생명들이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너는, 균열의 힘과 마주쳐서도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질문할 참인가? 그들은 균열이 선택한 자, 이번 세상에서 멸망함으로서 다음 세상을 준비해야 할 자, 그런 자들로서 선택된 것뿐." 균열의 힘이 선택했을 뿐이라고? 질문이란 없다? 의문도 가질 수 없다? 대답도 들을 수 없으며,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에 잠자코 순응하는 것뿐? 균열의 힘에게 이성이 있을 리 없다. 있다고 해도 우리가 이해할수 없는 종류의 것일 거야. 우리의 이해 밖에 있는 자연의 이성처럼,또는 정령들의 이성처럼. 나는 4대 정령에 대해서 들었던 이야기를기억하고 있어. 땅과 흙의 나스펠, 강과 비의 미라티사, 불꽃과 화덕의 블로지스틴, 바람과 폭풍의 요르실드. 세상에 드러난 종족들과는전혀 다른 사고방식 아래,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그들에대해서. 오히려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사실 세상의 질서를 위해훨씬 더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고 했었지. 어쩌면 우리는 모두 들러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들의 이성은 그들의 이성일 뿐. 인간인 내가 이해할 수없는 그런 자들의 결정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그런… 있을 수 없는…….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불공평해." +=+=+=+=+=+=+=+=+=+=+=+=+=+=+=+=+=+=+=+=+=+=+=+=+=+=+=+=+=+=+=막바지로 가는 것 같다.. 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셨더군요. 오늘 나우누리 세월의 돌 팬클럽 첫 정모가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 분들이 나와 주셨고 재미있는 분들이 많으셔서 아주 즐거운 자리가 되었답니다. 사실 오늘은 위산 과다... 인지 뭔지로 인해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습니다만, 어찌어찌 헤매면서 방배동까지 가고 나니까 많이 나아지지뭡니까. ^^; 그러나 다시 집에 오니 또다시 죽어가는군요...--;오늘은 이거 올리고 곧장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 같네요. 밤을 너무 자주 새면 해로워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8183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4 23:47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20)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20) 미칼리스와 엘다렌의 고개가 내 쪽으로 약간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말했다. "난 내가 죽고 난 뒤에 올 결과에 대해서는 볼 수 없어요. 아마 내후로 몇 대가 지나가도 그 결과는 알 수 없을지 모르고요. 자연이든,균열의 힘이든, 정령들이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죠. 그러나… 그들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나요? 좋은 결과가 올 거라고 무조건 믿고서 얌전히 죽어준다고 해도, 결과는 아무 일도 없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누구에게 반말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여기서 내 반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유리카와 주아니밖에는 없었다. 드래곤의 묘한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처음의 희한한음조 외에도 뭔가 다른 감정을 함께 담고 있었다. "변명하는 것인가?" 그리고 나는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자신있는 말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물론이지요." 나는, 죽을 때까지라도, 죽는 그 순간에 이르러서도 나 자신과 내가 아끼는 모든 존재들을 위해 변명할 테니까. 누구도 그것에 대해뭐라할 수 없어. 변명이 구차한가? 구구하다거나, 창피하다거나, 그런가? 무슨 말도안되는 소리! 내가 내 입장을 변명하는 것이 뭐가 창피하지? 나는 만년을 산 드래곤에게든, 영속불변하는 자연에게든, 말이라고는 씨알머리도 안 먹힐 것 같은 균열의 힘 앞에서든, 나 자신을 변명할 의무와책임과 권리가 있어. "나는 겨우 백년밖에 못 사는 인간이라서, 균열의 힘이 무슨 대단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못 믿겠어요. 내가 죽고 나서 천년쯤이나뒤에 올 결과를 미리 내다보는 힘은 내겐 없어요. 고대 이스나미르인들은 균열의 힘 앞에서 멸망했다죠? 우리보다 훨씬 대단한 능력과 지식을 지녔다던 그들이 설마 우리보다 힘이 부족해서 멸망했을거라고나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들은 아마 너무 지혜가 넘쳐난 나머지 이후에 올 미래의 결과까지 다 내다보고 기쁘게 균열에 순응했을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나는 그들에 비하면 하루살이에 불과한 존재니까, 하루살이에 걸맞는 생각과 행동을 할 생각입니다." 드래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고대 이스나미르인 만큼이나넘치는 지혜를 가진 생물이기 때문인가? 그러나, 하루살이이고, 하루살이로 살다가, 하루살이로 죽을 나는대답했다. "내 뒤에 올 전 미래, 모든 후손들이 나를 이기적이라고 욕한다 해도, 생명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거니까요. 나는 바라볼 수 있는미래만 바라봐요. 게다가 나는… 본래부터 보통 인간들보다 좀 이기적이고 이해타산에 능한 편이니까, 이런 모든 결정은 어쩌면 당연하고도 편안할 뿐입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미칼리스와 엘다렌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은이제 완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내 머리 위에서 드래곤은 입을 열어 말한다. 내 말에 대해 어떤 대꾸도 반박도 하지 않은 채, 다만 말한다. 대화는 그와 나 사이에서만 진행되었다. "아룬드나얀은 고대 이스나미르 인들이 자신들의 파멸을 막기 위해, 즉 균열의 힘을 막기 위해 만든 물건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그들의 긴 안목과 분별력으로 새로운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룬드나얀은 여기까지 왔다." 그래… 이 시대의 연약한 종족들에게 균열의 힘 따위를 막을 물건이 처음부터 있었을 리 없어. 저런 물건이라면 역시 고대 이스나미르인들이 만든 것이었겠지. "그리고 운명이었든 우연이었든, 그 아룬드나얀은 에제키엘에게 발견되었고 이 세상에 다시 닥친 균열을 막기 위해 쓰이게 되었다. 그돌은 옛 이스나미르의 고위 축복문자가 새겨진 타로핀이며, 또다른이름으로는 '세월의 돌', '시간의 돌', '사계절의 돌' 이라고도 하지. 그리고 아룬드나얀의 테두리에 쓰여진 글자는 '모든 힘을 흡수하며, 궁극에 달했을 때 다시 내어뱉는다'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균열의 힘조차… 빨아들이는? 그런 의미입니까?" "하르마탄의 마법진은 그것을 위해 에제키엘이 준비한 것이다. 물론, 그 마법진의 기초는 고대 이스나미르인들이 만들었다. 그들은 그장소가 바로 균열이 생기는 곳이라는 것을 알아내었고, 만년 후에 온마법사인 에제키엘도 똑같이 알아냈다. 그리고 에제키엘은 묻혀버린마법진을 손질하여 새로운 힘을 가진 것으로 재창조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의식을 행해 마법과 자신의 혼을 떠나보냈지. 그날 이후로 아룬드나얀 안에는 세상에 존재하던 마법의 모든 힘들, 그리고 에제키엘의 모든 마력마저 깃들어 있다." 온 몸에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 쾌활한 마법사 에제키엘은 죽었고그의 혼은 이 목걸이에 깃들어 있을 것만 같아. 그는 벌써 이스나에가 되어버렸을까? 또는 환생해서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는건가? "마법진은… 하르마탄의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들이 '피아 예모랑드'라고 이름붙인 성, 그 곳에 있다." 피아 예모랑드…? 어디선가 익숙한 이름을 들은 나는 잠시동안 고민에 빠졌다. 저 이름은 물론 점성술 아룬드의 별 이름이다. 그리고 또… 아버지의 영지예모랑드… 그곳의 성 이름! "나르시냐크 가문의 성?!" "바로 에제키엘이 죽은 후에 마법진을 기초로 삼아 그 성은 세워졌고, 또한 그 가문의 것으로 이어져 내려왔지." 그런……! 나로서는 이 일들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우연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물론 아니었다. 나는 에제키엘의 자손이고, 내 아버지의 영지와 성이 바로 에제키엘의 성인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드래곤은 하늘을 향해 다시 고개를 번쩍 들었다. 희미하지만 애매한 소음이 멀리서 줄여져 들려왔다. 나는 혹시 동굴 밖에는 천둥이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까닭인지 몰라도 이제는 그다지 드래곤이 두렵지 않았다. 물론 내게 무슨 갑작스런 용기가 생겨났을 리는없었다. 나는 다만, 내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로부터 에제키엘이 지녔던 의지를 느끼고 있었다. 천재일수록 자신의 생명을 아깝게 여길것 같은데, 그는 어떻게 '웃으면서' 미래를 믿고 자신의 생명을 내줄수 있었지? 그는… 미래를 내다보았다고 했나? 이 꼭두각시에 불과한 내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날지, 심지어 이름까지도 알고 있었다고 했나? "너의 의견과 나의 의견은 틀리다. 그것은 너는 인간이고 나는 드래곤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너는 소멸을 앞둔 종족이고, 나는 그소멸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넘어 다음 세상까지 살아갈 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드래곤들에게 역시 균열의 영향은 있었다. 이세상의 드래곤이 너희 인간의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든 것도 다 2백년 전 균열의 탓이지." 나는 잠자코,이제는 음악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어떤 어리석은 자의 의지라고 해도, 까닭이 있으며 그것이부당한 욕망에서 의거한 것이 아닌 이상, 결코 가볍게 여겨질 것은아니다. 너는 인간일 뿐, 고대 이스나미르 인이 아니며, 드래곤도 아니겠지.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자기 뜻대로 한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다." 허공에 떠 있던 니스로엘드의 심장이 가볍게 뛰어드는 것처럼 내눈앞으로 와 멈췄다. 눈앞으로 다가온 그 빛은 각막을 뚫고 내 머릿속까지 직격으로 꽂아넣어지는 듯했다. 나는 눈을 감지 않으려 애쓰며 계속해서 들려오는 말을 들었다. +=+=+=+=+=+=+=+=+=+=+=+=+=+=+=+=+=+=+=+=+=+=+=+=+=+=+=+=+=+=+=휴.. 어젯밤은 죽다가 살아났습니다.;;;앞으로 한동안 조심조심 살아야 할 것 같군요. 점심때까지 죽만 먹었습니다... --; (참기름에 간장에..)지금도 완전히 컨디션이 회복된 것 같지는 않아 조심스럽네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8184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4 23:48제 목 : ◁세월의돌▷ 11-2. 드래곤의 산 (21) +=+=+=+=+=+=+=+=+=+=+=+=+=+=+=+=세월의 돌(Stone of Days)=+=+=+=+=+=+=+=+=+=+=+=+=+=+=+=+ 11장. 제10월 '방랑자(Wanderer)'2. 드래곤의 산 (21) "더구나, 네 욕망은 단지 살고자 하는 의지 한 가지 뿐. 그것은 생명에게 주어진 의무와도 같은 것이며, 어찌보면 가장 깨끗한 욕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드래곤의 지혜는, 오랜 수명에서 근거한다. 고대 이스나미르 인은 드래곤보다도 오래 살았던 자들, 그들의지혜는 가히 측량할 길이 없겠지. 그러나 결코 오래는 살 수 없는 너희들, 너희들은 너희들의 길을 가겠지." 보석은 내 손을 기다리는 것처럼 울렁이고 있었다. 나는 손바닥을펴서 빛의 덩어리를 향해 내밀었다. "나는 너희들이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바라지 않는다." 내 손에 보석이 집혔다. 그것은 스스로 내 손바닥 위로 왔다. "후우……." 보석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마치 얼음덩어리를 잡은 것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얼음과는 달리 녹지 않았다.심장이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과는 전혀 다른, 마치 영원한 추위로만 뭉쳐진 것 같은 보석이었다. 니스로엘드의 심장, 그것은 겨울의 심장인가. "가라. 갈 길을 가라." 나는 목걸이를 꺼내고 아룬드나얀을 잡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보석의 자리 안에서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풍경들을 보았다. 이상하게 재단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오가고 있었다. 또한 이상하게 생긴 탈것들이 길을 오가고 있었다. 거리에는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수십 가지 색깔들로 가득히 쓰여져 있었다. 하늘은 흐렸다. 사람들은 바쁘고, 무심하며, 우울해 보였다. 혹시… 우리 뒤에 닥칠 미래의 모습인가? "최선을 다할 겁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마음속으로 물었다. 왜? 왜 너는 최선을 다하지? 그게…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인형이든 뭐였든, 내가 할 일을 의지를 가지고 하는 것과 그저 마지못해 하는 것에는 삶과 죽음만큼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보석은 이번에는 내 의지로, 아룬드나얀의 마지막 자리,내가 모를 세상을 보여주던 마지막 통로를 막았다. 네 개의 보석. '프랑드의 별', '세르네즈의 하늘', '모나드의 눈동자', 그리고 '니스로엘드의 심장'. 돌아오지 않는 에제키엘… 그러나 그의 일을 대신할 나. 아룬드나얀은 완성되었다. 카라드-리테는 검고도 붉었다. 산은 깊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휴화산이라고 했던가. 저 수많은 봉우리들 중 어느 쪽에서 용암을 내뿜는 거지? 이 산의 최고봉은어디지? 많은 것을 알고 가지만, 정작 이 산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알지못하고 가는군. "주아니, 앞으로 몸집이 큰 생물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내 앞에서하지도 마. 지금까지 전부 거짓말이었지? 드래곤도 두려워하지 않는용감무쌍 로아에가 겨우 목소리 큰 사람을 무서워한단 게 말이나 되겠어?" "이제부터 용자 로아에라고 불러 주도록 하지." "그, 그렇지만……." 주아니를 둘러싸고 신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것은 엉뚱하게도 미칼리스와 엘다렌이었다. 이상스럽게도 그들은 꽤 쾌활한 기분이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때 누구보다 앞서서 지분거렸어야 할 나와 유리카는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녀와 나는 아직 스스로들의 상처를 지우지 못했고, 그것은 산을 빠져나오는 내내도 마찬가지였다. "휴우, 겨우 나왔네. 별칭이 '드래곤의 이빨'이라더니 드래곤의 입속까지 들어갈 뻔했군." 미칼리스는 땀도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주제에 그렇게 말하며 산을돌아보았다. 어스름한 아침빛에 싸인 그 산은 머리 위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린 드래곤과 함께 밤새도록 대화를 나눈 셈이었다. 그것도 온갖 끔찍한 진실들을, 완전한 초긴장 상태에서 들었었지. 지금 다시 생각해보려니 뒷덜미가 서늘해지며 온몸에서 다시 식은땀이 나려고 하는군. 참, 내 마음 속 '불굴의 용기' 님에게 좀 안부를 전하긴 해야겠다. 언제 스리슬쩍 왔다가 다시 가셨는진 모르겠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꽤나 활약을 하시긴 한 것 같았어. 어쨌든, 지금은 가버린 것이 확실해. 정말이라고. 다시 해보라면절대 못할 테니까. 우리는 다시 히스 평야로 접어들었다. 주아니를 찾아 미친 듯이 달리느라 자세히 못봤었는데, 이 근처 들판도 꽤 나름대로 멋이 있긴했다. 참, 여긴 드라니아라스 대평원의 일부였었지. "드래곤은 저 산에서 계속 살게 되나요?" 산을 나온 후 나는 처음으로 입을 열어 말하며 미칼리스의 얼굴을쳐다보았다. 그는 언제부턴가 내 질문에 가장 대답을 잘 해주는 동료가 되어 있었다. "글쎄, 그건 드래곤 맘이지 내 맘이 아니잖아." … 물론 항상 쓸만한 대답을 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나는 어깨를으쓱거리며 중얼거렸다. "드래곤처럼 날아서 갈 수 있다면 좋겠네요. 이제, 드래곤이 말한'그 샘'을 찾아가고, 그러면 이제 하르마탄으로 떠나는 거로군요?" 우리가 하르마탄 섬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러야 하는 곳은아라스마드, 즉 '영혼의 샘'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아르누이크 테아칸은 '아라스마드가 빛나고 있다'라는 말 말고는 어떤 설명도더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샘에 가면 무엇을 보게 되냐고 되풀이해서 미칼리스에게 물었지만,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르누이크 테아칸의 말에 따르면, 아라스마드 샘은 아라스타니아숲의 남쪽 자락에 있으며 긴 동굴을 지나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고했다. 한참 말이 없던 유리카는 문득 고개를 들더니 중얼거렸다. 물론,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라-메르이르는 어떻게 됐을까……." 주아니는 소의 행방에 대해 전혀 설명해 줄 입장이 아니었다. 왜냐면 계속해서 유리카의 가방 안에만 들어앉아 있었으니까. 가방 안에서 뭐가 보였겠어? 주아니가 처음 가방 밖으로 기어나왔을 때에는 이미 테아키, 아니 아르누이크 테아칸의 은신처에 와 있었다고 했다. 주아니 입장에서는 와이번이 퍼덕거리며 날아가느라 흔들리는 거나,테아키가 가방을 입수해서 가져가느라 흔들리는 거나 매한가지였을것이다. "으음……." 지금 서로 말을 안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나는 유리카에게 라-메르이르의 일은 절대 이야기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드래곤이 한 입에 꿀꺽―어쩌면 와이번도 함께 통째로―했다는 이야기가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줄 리가 없었다. 자칫했다간 주아니까지 꿀꺽 했을는지도 모른다는…. 으음, 어쨌든 나조차도 흠칫, 했었던 얘기였으니까. 물론, 그 말을 할 때의 테아키의 표정을 다시 상상해보면 말야. 어제 산을 나오면서 내가 마음속으로 가장 감사했던 일은, 일전에들판에서 미칼리스의 억지 주장으로 좀 뜯어먹었던 와이번 새끼는 전혀 기형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사람고기를 먹었다고 생각해 봐. 그얼마나 끔찍하겠느냐고. 나는 다시 미칼리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드래곤, 아르누이크 테아칸은 왜 테아키를 자신이 아닌어떤 다른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하죠? 끝끝내 '친구'라고 표현하는걸 보니 영 기분이 이상해서." "그게 말야. 나도 궁금한 일이긴 한데… 드래곤이 오래 살다 보니좀 지루해서 장난을 하는게 아닌가 싶어." "……." 드래곤이 장난을 한다라, 전혀 달가운 상상이 못 되었다. 그런 건강아지나 고양이들이 하는 걸로도 족한데. 미칼리스의 설명에 엘다렌이 부가적인 이야기를 보탰다. "어쩌면, 파비안 너를 만난 것처럼 우연히라도 마주치는 사람들을능숙하게 속이기 위해 그 두 가지 모습에 각각 익숙해지려 애쓰다 보니, 저도 모르게 스스로 이중인격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 이중인격 드래곤이라고요?" 갈수록 태산이었다. 아르누이크 테아칸은 우리와 헤어진 뒤에 계속해서 이미지를 구기고 있었다. 제발 멀리서 우리 얘기를 엿듣는 능력따위는 없었으면 좋겠는데. "하긴 그래. 파비안 네가 설명한 대로라면 누구나 테아키라는 사람을 몬스터 보물 사냥꾼이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직업이니, 은신처니,기타 등등의 얘기들이 너무 그럴듯하잖아? 한두 해 연습한 실력이 아닌 것 같단 말야." "이상한 점이 없진 않았어요. 음… 나는 그가 지나치게 동작이 크다고 생각했었지요. 팔을 휘저을 때라든가……."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그렇게 몸집이 거대한 생물로서 당연한 일일 것 같았다. 그런 생물이 가벼운 눈짓을 한다거나, 손끝을 까딱거린다거나 해서 우리 같은 조그마한 생물들이 의미를 알아듣기는커녕,눈에 보이기나 할 것 같아? 그런 건 우리처럼 몸집이 비슷한 자들끼리 하는 거라고. 또 하나 생각나는 점, 그럼 그가 고개를 반쯤 돌려서 한쪽 눈으로만 나를 쳐다보던 것도 드래곤일 때의 버릇인 걸까? 우리들의 이야기에 유리카는 전혀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앞장서서 걷고 있다가 잠시 후, 고개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저길 봐." 우리 모두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세상에……." 처음에는 하나의 점이었다. 잠시 후, 까마득한 하늘 꼭대기에 거대한 날개가 펄럭이는 모습이보였다. 기류를 타고 나는 새처럼, 그 생물은 날개 끝을 길게 펴고한참 동안 비스듬하게 허공을 유영했다. 금빛의 갑옷은 아직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빛에도 선명하고 화려하게 번쩍였다. 어젯밤에 어두운동굴 속에서 보았을 때에는 그 비늘에 온갖 색깔이 섞여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지금 보니 아르누이크 테아칸은 오직 금빛, 순수한 금빛과녹색으로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허공을 가로지를 수 있는 가장 장엄한 생물이었다. 유리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로 가는 걸까." 상관없었다. 돌아보지만 않으면 되었다. 다시 와서 '어이, 빠뜨린얘기가 있는데…' 하는 짓만 안하면 되었다. 그거면 대만족이다. "아마, 이제 에제키엘과의 약속을 지켰으므로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는 것이 아닐까." 미칼리스는 그 거대한 갑옷의 생물이 하나의 금빛 점으로 변할 때까지 이마에 손차양을 대고 있더니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니스로엘드의 심장'을 정말 그가 지키고 있었던 거로군요?" 이윽고 금빛 점은 반짝, 하더니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갔을까. 또어딘가에서 이번엔 '어부 테아키'나 '사냥꾼 테아키' 아니면 '탐험가테아키' 같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게 되는 걸까. 일반적인 드래곤이 자신의 둥지를 거의 떠나지 않는 것을 생각할때, 아르누이크 테아칸은 나름대로 그 종족의 '에프랑지아'인 셈인지도 모르겠다. +=+=+=+=+=+=+=+=+=+=+=+=+=+=+=+=+=+=+=+=+=+=+=+=+=+=+=+=+=+=+=추워진다죠... 세월의 돌 9권은 1월 28일 예정입니다. 오랜만에 홈페이지에 들러 쌓인 방명록의 글들을 읽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분들이 와 주셨더군요... 헉헉.. 아직 끝까지 다 읽지도 못했어요. 그래도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운영자 분께서 쌓이는 질문들에 답변해 주시느라 많이 수고하시더군요... 죄송한 마음이.. 그리고, 일러스트 공모는 아직 진행중입니다. ^^.. 하도 일러스트 올려달라는 분들이 많으셔서.. 우편 접수, 되는 것 아시죠? 500회까지.. 얼마나 남았나..(뒤적..)아! 예.. 지금 이것 빼고 15화 남았습니다. ^^금방 올라갑니다... Luthien, La Noir. 번 호 : 28185 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4 23:48제 목 : ◁세월의돌▷ 점성술아룬드 시작입니다 12장의 시작입니다. 드디어 점성술 아룬드, 즉 11월입니다. 이제 엔딩까지 남은 것은점성술, 문자, 황금의 세 아룬드 뿐입니다. 많은 분들이 예상해 주신대로, 세월의 돌은 14월 '노장로'부터 다음해 13월 '황금'까지, 한해가 지나가면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으흠..! 왠지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 요즘입니다. 12장의 첫 번째 편은 '추억과 전설의 샘'이라는 제목입니다. 제목대로 샘이 등장하겠죠.. ^^ (썰렁...)이번에 쓸 부분은 꽤 오래 전에 시실리아의 마르살라 지방에 있다는 '시빌의 동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생각해 낸 에피소드였습니다... 그러니까 구상의 연원은 꽤 오랩니다. 성요한 제(6월 24일, 즉 하지입니다) 전날 밤, 그러니까 6월 23일밤에 이 동굴 지하의 샘에 찾아가서 그 물을 마시면 결혼한 여자는전 한해 동안 남편이 부정을 행했는지를, 처녀라면 앞으로 1년 이내에 결혼할 수 있을지 어떨지를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거하고는 전혀 다른 얘기로 변했습니다만. ^^;그럼, 또 나갑니다-Luthien, La Noir. 번 호 : 28186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4 23:49제 목 : ◁세월의돌▷ 12-1.추억과 전설의 샘(1) +=+=+=+=+=+=+=+=+=+=+=+=+=+=+=+=세월의 돌(Stone of Days)=+=+=+=+=+=+=+=+=+=+=+=+=+=+=+=+ 12장. 제11월 '점성술(Astrology)'…… 점성술의 별 '피아 예모랑드'가 지배하는 아룬드.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안온하면서도 싸늘한 일기가 주를 이룬다. 바람이 유난히 많이 불며 대부분의 과일이 열매를 맺거나 시들기 시작한다. 로존드의 영향으로 아직 공기에는 습기가 많으나 하늘은 한 해 전체를 통해 가장 맑아서 모든 별의 운행이 명확하게 보인다. 대부분의 천궁도는 점성술 아룬드의 하늘을 기본으로 해서 만들어진다. 이스나미르의 '맑은 샘(예마드)', 세르무즈의 '별의 아이(니그엘드)'과 같은 왕립 점성술 회의에 속한 점성술사들은 한 해 동안 그들이 보았던 예언적 상징들과 서로의 활동을 알리고 다음 해를 준비하기 위한 회합을 가지며, 각각 살펴본 별의 모양을 토대로 다음 해에대한 전반적 예언을 공식적으로 내어놓는다. 최초의 점성술사는 '푸른 로브'라는 이름으로 문헌에 나타나는 고대 이스나미르 인이며 그 혈통은 이후 '헬 위스…'로 시작되는 일련의 이름들로 이어진다. 고대 이스나미르의 '헬 위스 나르본', '헬 위스 카르모하드' 등은 모두 위대한 점성학의 대가이자 예언자였다. 이들에게 흔히 따라붙는 이름이 바로 '일곱 별자리의 예언자'로서 이이름은 현재에까지 하나의 칭호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일곱 별자리의예언자'라는 칭호를 받은 자들은 하늘의 일곱 별자리의 의미를 모두꿰뚫었다는 의미로 일곱 별자리가 새겨진 푸른 겉옷을 입는다. 점성술은 예언의 다섯 분야, 즉 자연점술, 매개점술, 강령술, 꿈, 그리고점성술 가운데 가장 으뜸을 차지하는 학문으로, 직관적이고 개인적예지에 따르는 다른 분야에 비해 상당히 정리된 예언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건너고 돌아보니 다리가 끊어지다"라는 경구가 보여주듯 미지의다음 세계로 나아간 후에는 결코 되돌아올 수가 없으며 운명을 극복하기 전에는 결코 휴식도 없음을 보여주는 때가 이 아룬드라고 할 수있다. 되돌아올 수 없는 결과로 나아가기, 고통스런 후회, 거부할 수없는 운명, 예지를 따르기, 미래를 내다보기, 이상을 위하여 다른 것들을 포기하거나 희생함 등을 암시한다. 이 아룬드를 상징하는 빛깔은 점성술사들의 전통적 옷 빛깔인 파란색이다. - 점성술사들이 달력에 적는 각 아룬드의 의미,그 중 열 한 번째. 1. 추억과 전설의 샘 (1) '영혼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숲 안쪽에는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는샘이 있으니 이를 '영혼의 샘', 즉 '아라스마드'라고 부른다. 이 샘이 있는 곳은 깊은 동굴을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으며 그 일대에는일년 내내 짙은 안개가 걷히지 않는다. 그러나 숲 근처에 사는 마을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이 샘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샘 근처까지 갔다온 사람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수많은 마법사들이며 예언자, 또는 호기심 많은자들이 이 샘에서 다투어 영혼을 불러내려 하지 않는가? 그것은 샘이원하는 자들의 소원을 모두 들어주지는 않는 까닭이다. 샘이 살아 있는 자에게 죽은 영혼을 불러내어 주는 것은 수십 년에 한 번, 샘에서붉은 광채가 비쳐 하늘까지 닿는 때 뿐이다. 그리고 하나의 영혼을불러내고 나면 샘은 다시 빛을 잃고 수십 년간 빛나지 않는다. 이 샘의 빛은 가까이 있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다. 안개를뚫고, 동굴 천장에 뚫린 거대한 구멍을 거쳐 허공으로 뻗어나는 빛의기둥은 오히려 멀리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자의 눈에 쉽게 띈다. 이 샘에서 불러내어진 영혼은 생전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를 불러낸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곁에 다른 사람이 있다 해도 그와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오직 불러낸 사람의 마음과 연결되어, 그 자의 말만을 듣고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서도 알 수 있듯, 아라스마드는결코 아무 영혼이나 불러내어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영혼 역시,부르는 사람의 소리에 응답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자유가 있기때문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은 영혼의 경우, 오랫동안 목적 없이 방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매우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상태가 되어 있기 쉽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자의 매우 절실한 소원, 또는 서로간생전에 맺어진 깊은 인연이 없다면 영혼은 쉽게 산 자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다. 류지 로 주하 作<알려져 있지 않은 것들에 관한 알려진 이야기들>14장 '죽은 자와 대화한 자들'3편 '아라스마드' 중에서 "안개가 상당하군." "상당한게 아니고 엄청난데요. 끔찍한데요. 가히 살인적, 엽기적인데요." 물론 이런 안개 속에서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거나 부러지거나 떨어지거나다치는 방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러니죽는 법이라고 없으란 보장은 없잖아? 앞서 가던 미칼리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것 봐, 안개 같은 것한테 하는 말 치고는 심하잖아." 안개는 귀가 없을 테니, 나는 그런 점에서는 완전히 안심이었다. 해가 떠올랐지만 안개는 가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밤이었을 때가 앞이 더 잘 보였던 것 같다. 그때 앞길이 거의 평평한 벌판이라는 사실을 알아두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자신있게 걸음을 내딛고있지도 못하겠지. 안개 속에서는 횃불조차 큰 소용이 없었다. 우리 모두는 밧줄로 서로의 왼손을 엮은 상태로 걸어갔다. 발부리에 돌이라도 걸릴라치면한꺼번에 비틀거리는 단점은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안하면 순식간에한 명쯤 잃어버릴지도 몰랐다. 가을의 숲은 고요와는 거리가 멀었다. 발밑에서는 끊임없이 버석거리는 죽은 잎새들의 소리가 났고, 가끔씩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잎들도충분히 앞을 볼 수 없는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점성술 아룬드 4일. 첫 가을의 아룬드가 시작되어 있었다. "드래곤의 산도 떠났는데, 새삼 몬스터가 나타나거나 하지는 않겠지." 손을 묶고 있다는 것도 불리한 점이었지만, 안개 때문에라도 제대로 된 싸움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또다시 미칼리스가 대답했다. "그렇게 믿는 수밖에." 그렇게 걸은 끝에 드디어 우리는 동굴 앞에 섰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어려운 곳에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근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가 찾는 샘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우리가 그 샘을 찾는다니까 저들 멋대로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하긴, 만일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이 샘의 존재를몰랐다면 그것은 순전히 이 끔찍한 안개 덕택이었겠지. 우리는 이 이불 속처럼 답답한 안개를 헤치고 무려 한나절이 넘는 시간을 걸어왔다. "안개, 는 고대 이스나미르 어로 뭐라고 부르죠?" "이에." 미칼리스의 대답이 안개 속에서 들려왔다. "그럼 '칼리엔 다 이에에' 쯤 되겠군요." 내가 아라스탄에서 들었던 '섬의 바다'라는 이름을 응용해서 그렇게 말하자 미칼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칼리엔 다 이에'. '안개'라는 말에는 복수형이 없어." 대답은 계속 미칼리스가 하고 있었다. 유리카와 나는 아직까지도서로 말을 걸지 못했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랬다. 둘 다 자존심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상황을 도무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었다. 내 생각은 바뀌었나? 내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 이젠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나? 모르겠다……. 우리는 동굴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동굴은 좁고 길었다. 안개는 심지어 동굴 속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 안개가 전부 그 샘에서 피어나는 거라면, 그건 샘이 아니라 바다쯤은 되겠는걸. 아라스탄 호수의 안개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우리는 우리 중에서 가장 눈이 밝은 미칼리스가 가는 대로 뒤를 따라가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미칼리스는말수가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아직 드래곤이 그에게 준다는 선물이 정확히 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샘을 통째로 준다는 말은아닐 테고, 샘에 뭔가 중요한 거라도 숨겨 놓았나? "아라스마드 샘에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나요?" 나는 이 질문을 결국 엘다렌에게 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다. 유리카한테 말할 수도 없고, 미칼리스도 말을 않으니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확실히 최악의 선택인데. "가 보면 안다." … 저런 대답일 줄 알았지. 주아니는 내 웃옷 주머니에서 머리를 내밀고 주위에 귀를 기울이고있다가, 입을 열어 말했다. "이상한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려." "동굴 안인데, 바람 소리가 뭐가 이상해?" 내 대꾸에 주아니는 고개를 흔들더니 다시 말했다. "아냐. 이건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닌 것 같은걸." +=+=+=+=+=+=+=+=+=+=+=+=+=+=+=+=+=+=+=+=+=+=+=+=+=+=+=+=+=+=+=예전에 잡담에도 썼다시피, 저는 점성술에 조금 관심이 있는 편입니다. 음... 점이란, 봐 달라는 사람 쪽에선 자신의 운명을 순간적으로나마 점쳐줄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 일이고, 점을 칠 사람 역시 남의 운명을 한순간 책임져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어서, 저는 쉽게 점을봐달라거나, 봐주겠다거나 하는 말은 잘 못하는 편입니다. 그 점에서 파생되어 나온 악운이 점을 쳐준 사람, 점을 봐달라고한 사람, 어느 쪽의 운명에 새로운 영향을 끼치게 될 지 모른다... 는 생각이에요. 마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서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려고 쏘아보낸 광파가 오히려 전자의 위치를 바꾸어버리는 것처럼, 점으로 누군가의 운명을 알아내려 하는 순간, 그 사람의운명이 미세하게 바뀔 수도 있다는 거죠. (좋은쪽이든, 나쁜쪽이든)약간은 미신적이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지만, 이런 정도의신념이없다면 점치는 도구 같은 데엔 손을 대지 않는 편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요즘은 취미삼아 하시는 분들도 많다죠..(점성학이든, 다른 것이든..) 물론, 저도 취미삼아 하는 데에 반대하지는 않습니다만(자신의운명에 관심을 갖는 것이 무지의 위험보다 낫다는 말에 저는 찬성입니다), 조금쯤은 진지해질 필요도 있습니다. 취미삼아..는 좋지만 장난삼아..는 약간 문제가 있으니까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8253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5 23:36제 목 : ◁세월의돌▷ 12-1.추억과 전설의 샘(2) +=+=+=+=+=+=+=+=+=+=+=+=+=+=+=+=세월의 돌(Stone of Days)=+=+=+=+=+=+=+=+=+=+=+=+=+=+=+=+ 12장. 제11월 '점성술(Astrology)'1. 추억과 전설의 샘 (2) 우리는 한참 걷다가 도중에 아무데나 주저앉아서 식사를 했다. 식사는 근처 마을 인가에 부탁해서 만든 도시락이었기 때문에 그럭저럭먹을 만했다. 심지어 물주머니에 담아온 우유까지 있었다. 나는 치즈와 햄이 끼워진 샌드위치를 베어물다가, 으깬 달걀과 야채로만 된 샌드위치를 손에 든 채 한참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유리카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나와 말을 하지 않게 되자, 미칼리스나 엘다렌, 주아니와도 거의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아주 필요한 간단한 말 한두 마디를 하는 것 말고는 하루 종일 그녀의목소리조차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날이면 나 아닌 다른 동료들이 그녀에게 말을 좀 걸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다. 내 마음 속에서는 그녀가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때의 그 모든 간절한 감정들이 문득문득 떠올라온다. 나… 그때의 심정이었다면지금처럼 그녀와 이렇듯 차가운 거리를 두고 있을 수 있을까? 그때의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나야? "응, 알았다." 주아니가 불쑥 말을 꺼내는 바람에 내 생각은 끊어졌다. 주아니는바닥에서 빵 부스러기를 들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발딱 일어나면서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뭘 알았다는 거야?" "그 소리 말야. 무슨 소린지 알았어." "바람 소리?" "응, 바람 소리긴 한데 말야……." 언뜻 보니 미칼리스가 주아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양상추 조각 조금이 들려 있었다. "바람이 좁은 곳에서 갑자기 넓은 곳으로 불어나가는 소리야. 이동굴 너머에 굉장히 넓은 곳… 아마도 천장이 하늘로 뚫린 곳이 있나봐." "그래?" 소리로만 그런 것을 알아낸다는 것이 신기하긴 했지만, 나는 그저그렇게만 대답했다. 다시 고개를 돌리는데 미칼리스의 얼굴이 다시한 번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얼굴에 피곤한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것이 문득 생각난 듯한 그런 얼굴, 우울하고 씁쓸한 미소였다. 그리고 엘다렌이 말을 했다. "얼른 식사를 끝내는 게 좋겠다." 무슨 까닭인지 몰라도, 이미 이들과 오랫동안 여행해 온 나는 엘다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은 알 듯했다.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분명, 친구인 미칼리스를 위해서 서두르고 있었다. 샌드위치를 다 먹었다. 유리카가 반밖에 먹지 못한 것도 보았다. 그녀는 못다 먹은 샌드위치를 엘다렌에게 넘겨 주었다. 나는 가죽 주머니의 우유를 마신 다음 그것을 옆으로 넘겼다. "뭐… 서두르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것은 없어." 미칼리스는 양상치 조각을 입가에서 떼면서 싱긋 웃었다. 엘다렌이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례적으로 보자기를 걷으며 식사한자리를 치우고 있었다. "기다리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길었으니, 더 길게 할 필요는없겠지." "기다리다니, 누가 말인가?" "그렇게 애써 모르는 체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자네도, 그렇게 신경쓸 필요는 없어." "기다리는 사람은 지치지 않는 줄 아는가." 미칼리스는 대꾸하지 않은 채 잠시 가만히 있었다. 손가락은 버릇처럼 긴 머리끝을 매만졌다. 한참만에 입끝이 뺨 가운데 움푹 패인자국을 남기며 벌어졌다. 그는 웃고 있었다. 천천히, 희망 따위는 없는 얼굴로, 자조적인 표정으로……. "죽은 여자가 다시 가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뭐… 라고? 미칼리스는 일어서고 있었다. 엘다렌이 뭐라고 다시 말했지만, 더이상의 말은 듣고 있지 않은 듯했다. 사실 나조차도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죽은 여자, 누구를 말하는 거야? "저, 미칼리스……." 내 귀에는 내 목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일어선 그는 마치 버릇이나 되는 것처럼 활을 고쳐메고, 머리카락을 넘기고, 다시 걸을자세를 취했다. 지금 가는 곳이 마치 여행 중에 마주치는 마을 여관쯤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걸음으로 가려 했다. 아라스마드의 의미는 '영혼의 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엘다렌, 샘에 가면 누가 있는 거죠?" 나는 하던 말을 맺지 못한채 이번에는 엘다렌에게 다그쳐 물었다. 엘다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저으며 그 역시 자리에서일어섰다. "쓸데없는 감상." 바로 옆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와서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돌렸다. 말한 것은 그녀, 유리카다. 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미카의 생각은 알고 있어. 가자. 가고, 만나면 되는 거야. 살아있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아닌데 서두르고 말고가 어디 있어? 기다리고 말고가 어디 있어?" 가장 먼저 걸음을 떼어 놓은 것은 유리카였다. 그녀는 손이 묶여있었기 때문에 잠시 발을 멈추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은 되지 않았다. "가자." 동굴은 입김으로 가득한 입을 벌린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베카 민스치야……. 그루터기 엘프 마법사, 한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그렇게져버린 여자. 현명했지만, 현명하지 못했던 여자. 바보같은 걸까…? 그런 판단은 누가 내릴 수 있지? 타박, 타박, 탁, 탁. 머릿속에서는 갖가지 생각들이 맴돌았다. 일행은 숨소리 말고는 완전히 침묵이었다. 방금전, 나는 영혼의 샘, 아라스마드가 죽은 자를불러내는 샘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샘이 영혼을 불러내어 주는것은 규칙적인 것도, 정기적인 것도 아니었다. 보통 때의 아라스마드는 일반적인 다른 샘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고인 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몇 년에 한 번이 될지 모르는 그 빛이 비치는 때, 그 때만은 그것은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해 주는 거울이 되었다. +=+=+=+=+=+=+=+=+=+=+=+=+=+=+=+=+=+=+=+=+=+=+=+=+=+=+=+=+=+=+=rollee 님, 멋진 지적이었습니다. ^^;일년내내 안개가 끼어 있는 숲이라면 제대로 식물이 자랄 수 없겠지요. 그리고... 발 아래에서 낙엽이 버석거릴 수도 없을 거고요. 음... 본래 이 설정을 했을 때엔, 동굴 주위에만 안개가 끼어 있다는 것이었는데, 제가 쓰다 보니까 한나절이나 안개 속을 걸어갔다고써버리고 말았군요. ^^;음... 평소에는 동굴 주위에만 안개가 끼는데, 이 계절에만 안개가좀 많이 끼는 걸로 해둘까.. 하고 지금 미봉책을 생각 중이랍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Luthien, La Noir. 번 호 : 28254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5 23:36제 목 : ◁세월의돌▷ 12-1.추억과 전설의 샘(3) +=+=+=+=+=+=+=+=+=+=+=+=+=+=+=+=세월의 돌(Stone of Days)=+=+=+=+=+=+=+=+=+=+=+=+=+=+=+=+ 12장. 제11월 '점성술(Astrology)'1. 추억과 전설의 샘 (3) 절실한 바램, 죽음과도 맞바꿀 정도로 간절한 소망. 그런 것이 없는 자의 소원은 들어 주지 않는다. 불러낼 수 있는 영혼은 서로가 서로를 간절하게 만나길 원하는 자들일 경우 뿐, 원한다고 해서 고대의영혼을 아무나 불러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이 샘은 고대의 지혜를 알고자 하는 자들로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장사진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샘이 방문자가 원하는 영혼을 불러내어 주는 것은, 그 샘을 처음으로 방문한 사람에게 뿐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일생에 단 한 번. 그리고 소원을 들어준 샘은 다시 그 빛을잃고 보통의 샘으로 돌아간다. 그 빛은 무엇일까. 어떤… 정령의 힘과 같은 것일까? 톡, 토독. 물이 떨어진다. 자욱하던 안개가 동굴 천장에 맺히고, 미지근한 이슬로 변해 떨어진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비밀을 감추려는 것처럼 샘은 이토록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미 죽은 자의 영혼을 만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문득, 기억 속에서 호수의 오리안느, 스스로를 옭아맨 잔인한 저주때문에 영혼의 몸을 죽이지 못했던 아라스탄 호수의 악령이 떠올랐다. 내가 만나본 영혼은 그녀가 전부였던 것 같은데… 아, 목없는 기사도 쳐야 하나? 어찌됐든 둘 다 굉장히 끔찍한 기억들인데. 이스나에가 될 수 있는 생명은 굉장히 적기 때문에, 이베카 역시이스나에가 되었을 거란 짐작은 하기 힘들었다. 악령도 아니고, 이스나에도 아니며, 심지어 환생도 하지 않은 영혼일 때, 그 영혼은 홀로고통스럽게 세상 속을 떠돌게 된다. 아무의 눈에도 띄지 못한 채,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못하면서, 심지어 그렇게 떠도는 영혼끼리조차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그녀는… 환생을 하지 않았을까? 이미 환생해 버렸다면, 역시 만날 수 없는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아라스마드의 빛은, 다른 이름으로 이미 환생한 생명의 영혼도 불러낼 수 있는 걸까? 동굴의 끝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천천히 동굴의 안쪽으로 가까워져 가는 몇 개인가의 발소리…이윽고 멎었다. "저것이… 그 샘인가요……." 내 목소리는 동굴의 벽을 타고 허공으로, 하늘로 퍼져나갔다. 주아니의 말대로, 머리 위는 탁 트인 맑은 하늘이었다. 우리가 나온 동굴에서는 아래로 이어진 약간의 내리막이 있었다. 그것은 화산이 폭발한 자국처럼, 커다란 대접처럼 패인 넓은 구덩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붉은 빛을 내고 있는 무엇인가가 고여 있는 것이보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게 핏물이 아닌가 의심했다. 동굴에 들어오기 전부터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샘에서 솟아나는 새빨간 빛은 진한 광채를 뿌리며 허공으로 뻗쳐 올랐다. 빛의 기둥이세워져 있었다. "아라스마드. 어찌하여 이런 때에 깨어나는 거지……." 그리고, 천천히 그 샘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미칼리스의 목소리는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꼭 나일 필요는 없지." 엘다렌은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라스마드가 보여줄 수 있는 영혼은 하나 뿐이다. 그리고 이미 샘을 보게 된 우리들은, 앞으로 다시 아라스마드가 깨어나는 일이 있다고 해도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는 더 이상 없었다. 일생에 한 번,샘을 처음 본 순간만 마법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있는 것은……. 어머니였다. "……."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을 비교할 수 있을까? 그가이베카를 생각하는 마음과, 내가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구에게나 보고 싶은 사람은 있어." 유리카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녀에게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겠지. 2백년이 지났다고 해서 보고싶은 마음이줄어들어 버리는 것은 아닐 거야. 더구나 2백년간 잠들었던 그녀의기억 속에선 어쩌면, 단 몇 달 전에 죽은 부모일 수도 있는 것인데. 나는 그녀의 부모에 대해 들은 일이 없어. "그렇지만, 나는 미카가 이베카와의 약속을 지키길 바래." 그녀는 일어나서 샘으로 다가갔다. 샘가에 선 그녀의 모습이 온통피에물들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다시 쪼그리고 앉더니 샘물을 들여다보았다. 손을 대지는 않았다. 단지 빛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물 자체가 붉을 것만 같은, 죽음의 경계, 아라스마드. "유리, 너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미칼리스가 샘가로 다가가 유리카의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처음으로 그 나이에 걸맞는 모습으로 되돌아간 듯했다. 그의 단단한 이마에, 흰 뺨에, 강건한 눈매에 어린 것은 지치고피곤한 자의 표정이었다. 머리 위로 뚫린 하늘은 여전히 대조적인 푸른 빛이었다. 가을의 가장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점성술 아룬드는 그 어느 때보다도흠 없이 갠 하늘을 볼 수 있는 때다. 유리카가 고개를 흔드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입을 열어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보고 싶은 것은 누구지? 대답은 다른 곳에서 흘러나왔다. "너… 에즈를 보고 싶은 거지?" 문득, 몸이 굳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모두를 여기까지 인도해 온 대마법사야. 누구라도 만나고 싶어했을 사람, 심지어 그를 만나는 것은 나조차도 바랬을지 모르는 일이지. 실제로 그는 내 어린 시절의 꿈 속에서도 몇 번인가 나타나곤했었으니까. 에제키엘, 그를 만나게 된다면 어쩌면 우리 임무에 대한 다른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될지도 모르지. 그는 누구보다도 좋은 조언들을 해줄 수 있을 거야. 생전에 미처 말하지 못했던 어떤 사실들을 말해줄지도 모르고. 더구나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그토록 자세히 알고 있었다던 에제키엘에게 아마 물어볼 것이 많을 거야. 실용적 관점에서 보면 가장 만나야만 할 사람은 아마도 그야. 그렇지만 지금의 기분은 그런 것과는 달라. "……." 유리카는 대꾸하지 않았다. 미칼리스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에즈, 에제키엘, 에제키엘 나르시냐크, 대마법사 에제키엘… 그 이름이 온통 내 주위를 휩싸고 도는 듯했다.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주 우스운 생각… 나, 2백년 전의 조상인 대마법사에게 질투를 느껴도 좋은 것일까,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같을 뿐인걸. 이 모든 것들이. 유리카가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고, 나는 눈을돌리려다가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똑바로 눈이 마주쳤다. "… 나……." 무슨 말을……? 왜 나는 아직도 불안해 하는 거지?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말들로 맹세하고 약속했던 우리들이잖아. 그런데 왜 나는 그 마음을 아직도 의심해야 해? 내가 바보라서? 의심밖에 할 줄 모르는 속 좁은 인간이어서? "… 에제키엘을 만날 필요 없어." +=+=+=+=+=+=+=+=+=+=+=+=+=+=+=+=+=+=+=+=+=+=+=+=+=+=+=+=+=+=+=에... 일러스트를 bmp파일로 보내주셔도 상관은 없지만... 2메가씩이나 되는 것들은 날잡고 다운받아야 되더군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8255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5 23:36제 목 : ◁세월의돌▷ 12-1.추억과 전설의 샘(4) +=+=+=+=+=+=+=+=+=+=+=+=+=+=+=+=세월의 돌(Stone of Days)=+=+=+=+=+=+=+=+=+=+=+=+=+=+=+=+ 12장. 제11월 '점성술(Astrology)'1. 추억과 전설의 샘 (4) 우리의 눈은 아직도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상황에서 마음이 오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녀의 대답이 이어졌다. "나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이 있어… 그것도 지금 내곁에 아무 일 없이 살아 숨쉬고 있는… 충분히 축복받은 거야…. 하지만 미카에게는 한 명 뿐이야. 다른 누군가는 있을 수 없으니까." 입술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고, 그 자리에서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베카를 만나는 것이 옳아." 침묵.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 더 이상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유리의 말이 옳다." 엘다렌의 목소리가 울리고, 또다시 한참 후에 미칼리스의 금빛 머리가 끄덕여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다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예전에 유리카가 했던 말을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 이베카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면, 그는 언제까지라도 쾌활하고 낙천적인 모습으로 있을 거라던. 그러나 지금의 당신… 그 역시도 자신다운 거야. 숨길 필요는 없어. 이 모든 감정을. "미칼리스." 나는 앞으로 걸어갔다. 샘이 발치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샘은 마치 물결이 있는 것처럼 가볍게 일렁이고 있었다. "나 역시도… 지금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기 때문에… 어머니를 만나지 않아도 좋아요." 나는 드디어 그들 곁에 가 섰다. 그리고 유리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그녀의 손 하나를 끌어당겨 감싸잡았다. 그녀는 미칼리스를 한 번쳐다보고, 미소를 지었다. "난 미카와 이베카의 결정을 몹시도 싫어했었지." 그녀의 말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런 식으로 사랑하는 연인들은 주위 사람들까지 아프게 하는 거라고… 원치 않는 희생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어. 바보같았던걸까? 어쩌면나는 그런 희생이 내게 가져다주는 선물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 나는 이미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의 선물을 받고 있었어… 그런 주제에 쓸데없이 투정하면서, 어린아이처럼……." 모두의 눈빛이 미칼리스를 향해 있었다. "난 자격 없는 친구야." 유리카의 말이 맺어지고,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엘다렌과 함께있던 주아니도 입을 열었다. "많이 늦긴 했지만 미칼리스에게도 선물, 어때?" 엘다렌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거절하지 말아라." 그래, 몇백 년이나 늦어버린 선물인걸. 거절할 시간 따위는 이미남아 있지 않아. 나는 유리카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렸고, 엘다렌도 곧 걸음을 옮겨놓았다. 미칼리스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들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샘을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산 사람의 피처럼 붉게 빛나는 샘을……. 우리들은 처음 들어왔던 동굴 입구까지 물러나왔다. 엘다렌은 아예동굴 안쪽까지 혼자 걸어가 버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으로가버리려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주머니 속에 든 주아니가 침묵하고있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는 않을 테지만. "유리카." 그리고 엘다렌의 뒤를 따라온 우리가 동굴 구석에 나란히 앉았을때, 나는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할 정도로 짙게 갠 녹색의 보석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바보같을까?" 동굴 밖 저만치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미칼리스의목소리, 그의 입으로 말하는 고대어를 나는 처음으로 듣고 있었다. 한 번도 자신이 가진 수많은 능력들을 자랑한 일이 없는 그라선지,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그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고대의 전사,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는 이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언어와 잘 어울렸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나는 고대어를 몰랐고, 또한 확실한 내용이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도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 다 바보야." 유리카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래, 네가 이베카를 바보라고 말하던 생각이 나. 켈라드리안의 숲 속에서, 너는 바보같은 선택을 한 바보같은 여자라고 그녀를 말했었지. "그러면 그런 바보가 저지르는 실수 같은 것은… 용서받을 수도 있는 건가?" 그녀의 고개가 약간 기울어졌다. 머리카락도 같이 갸웃거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여전히 그녀의 오른손을 두 손바닥으로 포개어 잡고 있었다. 손바닥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음… 어떤 실수이냐에 따라 다르지." "그 바보가… 나일 때는 어때?" 문득, 붉은 광채가 동굴 입구를 폭죽처럼 찬란하게 비췄다. 단 한차례, 그런 다음 모든 빛은 사라져 버렸다. "내다보지 마."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밖으로 향했다. 미칼리스가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내 귓가에는 그녀의 다음 목소리가들려오고 있었다. "그 용서해 주는 사람이 나라면……." 베일을 쓴 듯한 공기, 허공을 뒤덮는 너울… 긴 세월 유예된 모든이야기들이 침묵이 되어 흘렀다. 샘 가운데, 어렴풋한, 긴 갈색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유리… 너한테 전에도 한 번 물었던 일이 있었어. 그러니까 그것,왜 너는 이 세상으로 와야 했니? 가볍게 일렁이는 불빛이 동굴 입구를 희미하게 물들였다. 유리카와나는 서로 손을 잡은 채 동굴 입구에 마주앉아 있었다. 동굴은 피리처럼 긴 바람 소리를 냈다.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나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엘프는 인간보다 세월에 익숙한 종족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제 만났다가 헤어진 것처럼, 그렇게 서로 인사하고 안부를 물을 수 있을까? 아침은 먹었느냐고? 잠은 잘 잤냐고? 나라면… 저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했을까……? "처음 듣는 질문은 아니구나." 그녀의 말대로 나는 이미 융스크-리테의 지하에서 이 이야기를 물은 일이 있다. 그때 그녀가 뭐라고 대답했었지? "그 세상에 별로 미련이 없어서… 라고 내가 대답했었지?" +=+=+=+=+=+=+=+=+=+=+=+=+=+=+=+=+=+=+=+=+=+=+=+=+=+=+=+=+=+=+=일러스트 우편 접수들도 하나씩 도착하는군요... 물론 '그리고 있다'고 말씀하신 분들의 숫자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습니다만. ^^;아예 마감 날짜를 명시하는 편이 나을까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8256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5 23:36제 목 : ◁세월의돌▷ 12-1.추억과 전설의 샘(5) +=+=+=+=+=+=+=+=+=+=+=+=+=+=+=+=세월의 돌(Stone of Days)=+=+=+=+=+=+=+=+=+=+=+=+=+=+=+=+ 12장. 제11월 '점성술(Astrology)'1. 추억과 전설의 샘 (5) 그래, 그런 말이었어. 그녀는 아까의 미칼리스와 비슷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와서 피곤해져버린 사람 같은 그런 미소를 지으며 눈동자를 허공으로 돌렸다. 저도 모르게 그녀가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이 따라갔다. "미련은… 별로 없었어. 2백년 전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엘다,미카, 에즈… 이들 뿐이었으니까. 난 아버지 얼굴을 몰라.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어머니에 대한 것 역시 그다지 명확한기억은 없어. 나는 다섯 살때부터 아스테리온 본당의 무녀들에게 키워졌거든. 수많은 할머니들한테 둘러싸여 컸다고나 할까."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나는 속으로 무녀들이라니, 굉장히 까다로운 할머니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스테리온 본당의 무녀들은 아무리 나이가 어려보았자 열 다섯살 이상… 내게 친구라고는 없었어. 고아나 다름없었던 나를 그들이받아준 것은 어머니 역시 아스테리온 무녀였기 때문이었지. 그렇게몇 년간 외롭게 자란 내 앞에… 에즈가 나타났어." 나는 문득 떠올라서 물었다. "에제키엘은 너하고 몇 살 차이가 나니?" "에즈는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열 일곱 살이었지." 그녀는 특이하게 대답하면서 빙긋 웃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보다많은 차이구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물었다. "왜 너를 찾아왔는데?" "나도 처음엔 몰랐어. 그렇지만 솔직히, 고리타분한 할머니들과 깍쟁이 언니들 사이에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어떤 생활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 너 기억하지? 내가 나이가 어린데도 이미 아스테리온의 고위 무녀였다는 얘기 말야." "응." 실제로 열 여덟이라는 나이에 비했을 때 그녀가 지닌 마력은 대단한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아라스탄 호수에서 보아서 안다. 그리고, 켈라드리안의 거인 호그돈 역시 악령의 노예들에게 받은 상처가 금방 낫는 그녀를 보고 '그건 고위 무녀들만이 가능한 건데?'라고말했었던 것을 나는 기억했다. "나는 그것 때문에도 시기를 많이 받았어. 내 혈통에는 이상한 것이 섞여 있대. 그래서 어머니도 젊은 나이에 이미 최고위 무녀의 단계에까지 도달했었고, 그래서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멋대로 본당을 떠났다는 거야. 할머니 무녀들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지. 그녀들은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았어. 음… 어머니가 굉장히 예쁜무녀였다는 것도 한몫했을거야." 물론, 지금 유리카의 모습에서 그녀의 어머니의 모습을 충분히 볼수 있었다. 조금 달랐을지는 몰라도, 저런 외모는 갑작스레 나타날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사실, 아스테리온은 결혼을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결혼하는 무녀는굉장히 적어. 죽음의 무녀라는 이름은 보통 사람에겐 상당한 두려움과 부담감을 주거든. 남자쪽에서 아무렇지 않다 해도, 주위 사람들의눈이란 것도 무시 못하지. 편견을 뚫는다는 것은 말은 쉬워도 실제로해내기는 굉장히 어려워. 그렇지만 어머니는 결혼을 했어. 할머니 무녀들, 마흔씩 먹은 노처녀 무녀들과는 달리 말야." 우리 둘은 마주보고 미소를 지었다. 무슨 상황인지 대강 짐작이 갔다. "뭐… 물론 내게 잘해준 무녀들도 있었어. 안 그랬다면 나는 벌써모든걸 때려치우고 밖으로 뛰쳐나갔겠지. 게다가 나도 영악한 편이라다른 사람들의 노리개가 되는 일 따윈 사양이거든."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걸 나보다 더 잘 알 사람이 있을까?" "후훗……." 그녀는 턱을 약간 움직이더니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조금 들어보려는 듯 입구 쪽으로 몸을 굽혔다. 나 역시 잠깐 동작을 멈추고 귀를기울였다. "……." 방해해선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조금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미 호수의 오리안느, 그리고 목없는 기사까지 만난 일이 있는 나는 예전만큼 죽은 자들에 대한 공포심이 심하지 않았다. 오히려이야기로만 들어온 이베카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고, 어떤 목소리로어떤 이야기를 할 지 들어보고 싶었다. 이베카 시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 기다리는 기분은 어떤 것이냐고……. "잘 알아들을 수가 없네." 그녀의 말대로였다. 소리는 약했고, 중간중간 끊겼으며, 그나마도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무릎으로 기어서 밖을 좀 내다보았다. 여기서는 그나마도 너무 멀다. 미칼리스의 뒷모습은 잘 보였다. 그는 이제 일어서 있었다. 그리고 뭔가 희미한 빛, 긴 갈색의 커튼 같은 것이 보인다… 나로선 무슨 모습인지 알 수가 없어. 우리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고, 유리카가 말을 이었다. "에즈는 내 어머니를 알고 있었어. 내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를 잘아는 마법사가 있었는데, 그는 에즈의 스승이었대. 그가 나를 이곳에두지 말고 데리고 나오라고 말했다더군. 그 마법사는 이미 균열의 전조에 대해서 알고 있었나봐. 그리고 균열을 막기 위해 내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나는 에즈와 함께 세상으로 나왔고, 내가 꼬마에서 소녀가 될 때까지 그와 함께 많은 일들을 겪었어. 항상 같이 있지는 않았지만, 주로 같이 있었지. 2년인가 지난 후에 우린 남매를 맺었어. 나는… 그의 하나뿐인 누이동생이야"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뭔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녀를 내가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 아주 오랜 역사에 개입하고 있는듯한 느낌이었다. "에즈 역시 고아였거든……." 그녀는 또한 이어서 말했다. 여덟 살의 에즈를 제자로 삼아 자식처럼 키운 마법사와 그의 아내에 대해서. 몇 번인가 넘겼던 죽을 고비와, 그녀가 에즈와 떨어져 지냈던 얼마간의 시간들, 그리고 그의 결혼……. "에제키엘에게 아내가 있었어?" 내가 약간 놀라면서 묻자, 그녀는 희미하게 흔들리는 듯한 미소를지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에게 자식이 없었다면 파비안 크리스차넨, 네가 어떻게 이 세상에 있을 수 있겠니?" 아, 맞다… 나는 그의 자손이었지……. "그녀와 나는 사이가 좋았어. 어떤 걱정도 없던 시절을 가로질러간잠깐의 행복, 2백년 전 그 시절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그 때였던것 같아. 그들 부부와 함께 지내던 때. 그렇지만 길지 않았어… 에즈가 오랫동안 연구하고 준비해 왔던 균열의 기운은 드디어 찾아오고,우리는 그녀를 떠날 수밖에 없었지……." 그녀는 동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미카와 엘다와 함께 다니던 때도 재미있었어. 하지만 그 때우린 무거운 임무를 지고 있어서 마냥 가볍고 행복한 기분일 수만은없었지. 미카와 엘다, 모두 누군가 덜어줄 수 없는 자기만의 고통을짊어진 이들이야. 다른 것을 모두 떠나서, 멸망하고 있는 그들의 종족을 보는 것만으로도 각 종족의 왕이며 족장이던 그들에겐 살을 깎는 고통이 되었겠지. 그러나 그들은 내색하지 않았고, 쾌활했어. 그리고 나는 그 동료들이 바로 내가 사랑할 대상들이라는 것을 느꼈지…. 정착하지 못하고 늘 떠돌아다니며 한 번도 또래들과 어울려 본일이 없는 아이, 그게 나야." +=+=+=+=+=+=+=+=+=+=+=+=+=+=+=+=+=+=+=+=+=+=+=+=+=+=+=+=+=+=+=유리카의 '에제키엘이 결혼하지 않았다면 파비안 네가 어떻게 있겠니'라는 대사... 언젠가 천리안 팬클럽에서 했던 대답과 비슷한 대사로군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8257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5 23:36제 목 : ◁세월의돌▷ 12-1.추억과 전설의 샘(6) +=+=+=+=+=+=+=+=+=+=+=+=+=+=+=+=세월의 돌(Stone of Days)=+=+=+=+=+=+=+=+=+=+=+=+=+=+=+=+ 12장. 제11월 '점성술(Astrology)'1. 추억과 전설의 샘 (6) 목소리들이 끊길 듯 끊길 듯 들려온다. 나는 그 속에서 미카의 힘있는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나누어지는 엷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다.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긴 잎사귀의 목소리 같았다. 햇빛 속에서,천천히 흔들리며 말하는 커다란 여름의 푸른 잎사귀. 그리고 녹색 이끼 위에 선, 곧은 껍질을 가진 갈색의 나무. "에즈의 스승이 나를 데려오라고 시킨 이유… 그건 그가 내 역할을잘 알았기 때문이었어. 나는 한 시대의 가장 강력한 아스테리온, 그리고 젊은 아스테리온이야. 그리고 2백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에도나는 가장 젊은 고위 아스테리온이야. 그때 뿐 아니고 이번에도 나는… 나는… 균열을 막기 위한 의식의 매개가 되어야 해. 그게 내가여기까지 오게 된……." "매개……?"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커졌다. 매개? 그게 뭐야? 혹시 다치는 일은아니겠지? 내 목소리는 다그치듯이 높아져 있었다. "매개라니?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한다는 거야?" "파비안……." 그녀는 힘들게 웃었다. 무엇인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대단한 짐임에 틀림없었다. "균열의 힘은 세상을 바꾸는 혼돈의 힘이야. 기존의 질서를 엎고,다른 새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 우리와 같은 종족들의 생명을 앗아가버리지. 그 힘의 속성은 '죽음'인 아스테리온, 또는 검은 예언자와연결되어 있어." 퐁. 샘 안으로 뭔가가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나서 나는 몸을 흠칫 움직였다. 그러나 내다보지 않고 계속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그 힘은 세상 전체로 쏟아지는 힘이야. 그리고 피아 예모랑드의마법진은 그 힘을 인위적으로 한 곳에 모으기 위한 것이고. 그리고그 마법진 가운데 내가 서게 되지. 거기에서도 더욱 그 힘을 한 점에모으기 위해서… 나는 균열의 힘과, 아룬드나얀의 주인인 너를 연결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돼." 나는 내게 관심이 있는 한 가지만을 되물었다. "다치지는 않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불안한 듯, 그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오히려 네가 걱정돼. 너는 아룬드나얀 그 자체야. 그 힘이누군가를 죽인다면, 가장 먼저는 너야. 나는 그저 잎새와 줄기를 연결해주는 가지에 지나지 않아." 나는 약간 긴장하면서 물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있을 수 있는 거야?" "아룬드나얀은… 새로운 생명을 항상 요구해. 더 젊은 주인을 원하지. 아룬드나얀은 한 세대에서 점차 아래로 계승되어 내려가고, 결코위로는 되돌아가지 않아. 왜냐하면 그것은… 균열과 같은 속성의 힘이거든. 균열은 바로 격변의 힘, 변화와 새로운 세상을 위한 힘… 그래서 그 힘은 나이 어린 아스테리온인 나를 필요로 하고, 나이 어린주인인 너를 필요로 하는 거야. 아룬드나얀은 2백년 전의 힘을 삼켜그것을 유예시키고도 지금껏 건재했어. 이번 역시 아무 일 없이 잘될거라고 생각해." 그래……. 정말 잘될 거라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을 믿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르누이크 테아칸에게 말했던것처럼 하는 데까지 해보는 수밖에,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 그리고 해보기 전에 미리 결과를 아는 방법도 역시 없어. "두렵지 않니……?" 우리 둘 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나란히 손잡고끝을 향해 달려왔던 것처럼, 또한 시작을 향해서도 함께 갈 것을 믿었다. 나는 내가 품었던 의심만큼이나 힘껏, 그녀의 손을 쥐었다. "그래……." 무엇에 대한 대답인지는 우리 둘 다 몰랐다. 탁, 타닥, 탁, 탁. 발소리. 갑자기 동굴 안쪽에서 걸어나온 엘다렌 때문에 그녀와 나는 약간놀란 것처럼 앉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무표정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나가자. 끝났다." 끝났다고……? 우리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조각 푸른 거울이 머리 위에서 빛나고있는 붉은 샘의 땅으로 걸어나갔다. "……." 그리고 우리는 홀로 선 미칼리스를 발견했다. 그는 뒤돌아 서 있어서 그 표정이 어떤지 볼 길이 없었다. 우리가바로 뒤까지 다가가는데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고 말을 하지도 않았다. 유리카가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미카……." 대답은 없었다. 미칼리스는 고개를 수그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 그대로 한참이나 대답하지 않았다. 흐트러진 금빛 머리카락… 얼굴을 가린 그의 손은 컸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그의 감정을 모두 가릴 수는 없었다. 비록 몸은 돌처럼 굳어져 있었지만, 가슴만은 천천히 위아래로 물결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도 감정을 가지고 살아 있다. 아무리 초연한 체 하려 한다 해도언제나 그럴 수 있다면 그건 살아 있는 생명이 아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가파른 바위, 무심한 물, 변함없는 흙과 다를 것이 뭐가있을까. 도저히 짐작할 수는 없지만… 그가 울었을까? "……." 누구도 어깨에 손을 얹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저런 고통은 스스로의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위로를 받기 전에는 결코 줄어들지도,없어지지도 않을 거야. 샘 위는 텅 비어 있었다.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도 나타난 일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그 샘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아라스마드는 열렸었고, 그리고 닫혔다. 거짓말처럼 하늘은 밝았다. 밤도 아닌 낮이었다. 모든 것은 없었던일처럼 그렇게 훌쩍 가 버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명백한 증거가 우리 눈앞에 있었다. 어떤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던 그가 우리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까……. 하루의 흰 빛은 모든 눈동자를 깨끗이 씻고도 남을 정도로 하얗게내리고 있었다. "다 끝났어… 이제 가는 거야……." 세상의 곳곳에, 아픔은 남겨두어야 해. 많은 것이 남아있어도, 가야 할 이들은 간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다시 바다로, 이번에는 이스나미르의 바다로,그리고 대륙만큼이나 큰 섬, 하르마탄 섬에서 기다리는 마지막 약속을 위해서 간다. +=+=+=+=+=+=+=+=+=+=+=+=+=+=+=+=+=+=+=+=+=+=+=+=+=+=+=+=+=+=+=이걸로 이번 편은 끝입니다. 굉장히 빨리 끝났죠? 음.. 그리고 이제 500회가 진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지금 세어보니... 이제 앞으로 9화만 진행되면 됩니다. 음.. 9화를 진행하는데 과연 9일이 걸릴까요? 사실, 여기까지는 28일에 출간될 9권에 들어갈 내용입니다. 이미출판사에 넘긴 부분이지요. 그래서 일부러 급히 연재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는 28일에 다시 삭제에 들어갑니다. (슬퍼라...) 그전에 미리미리 받아놓으세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8362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6 23:27제 목 : ◁세월의돌▷ 12-2편 시작입니다. 12장 2편, '잊을 수 없는 마지막 항해' 시작입니다. 어쩌다보니 항해가 꽤 많이 등장하는 소설이 되어버렸습니다만... 이번이 마지막... 이.. 아닐지도 모르지만...(?)하여간, 점성술 아룬드는 맨 앞의 의미에 나온 대로 '재회'의 뜻을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물론 1편인 '추억과 전설의 샘'에서도 이베카와의 재회가 있었지요. 이번에는... 누구를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습니까? ^^이 추위에 하필이면 난로가 망가져서 손가락이 굳어질 지경이군요...(외풍 심한 방) 자판을 치는 일이 힘겹다니.. --;(이래서 오늘 글은 제대로 쓸 수 있을까..)일러스트 보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우편으로 보내주시는분들의 것은 한꺼번에 스캔을 해야겠군요. 그리고 뮤즈라 님께.. 9화로는 일러스트 완성까지 시간이 모자라시다니, 마감 날짜를 정해 보는 방향으로 해보겠습니다..^^;Luthien, La Noir. 번 호 : 28363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6 23:27제 목 : ◁세월의돌▷12-2.잊을수없는마지막…(1) +=+=+=+=+=+=+=+=+=+=+=+=+=+=+=+=세월의 돌(Stone of Days)=+=+=+=+=+=+=+=+=+=+=+=+=+=+=+=+ 12장. 제11월 '점성술(Astrology)'2. 잊을 수 없는 마지막 항해 (1) 당신을 잊기 위해 오랜 시간 많은 곳을 방랑했습니다. 대륙을 오가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섬의 흙을 만졌고, 숲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마음속에 간직된 그대의 영상을 더욱 강하게, 잔인할 정도로 각인시켰을 뿐, 내 방랑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우연히 바라본 구름은 그대의 모습을 하고 나를 굽어보았고, 지친목을 축이려 다가든 우물 속에서도 그대의 푸른 눈빛이 보였습니다. 그대는 어쩌면 그 모든 세상의 꽃과 바람, 향기와 속삭임 속에 빠짐없이 자리잡고 있을 수 있었는지요. 그리고 그런 것들을 바라보는 내 입가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습니다. 한참만에야 눈치채고 애써 지우려 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 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무모한 여행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그대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대가 내쫓는다면 이제는 문설주를 붙들고 댓돌 앞에 무릎을 꿇고라도 쫓겨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대의 신발을 품에 껴안고 아무 데도 가지 못하도록 할겁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도록, 그대의 눈이 가는 곳마다 맨발로라도 뒤쫓을 겁니다. 두렵지 않으냐고요? 예, 두렵습니다. 지금껏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이토록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본일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두렵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맺어지지 못하고, 또다시 태어나 서로를 찾기위해 헤매야 할까봐, 이 오래된 묵은 짐을 그대가 덜어주지 않을까봐, 그것이 두렵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말하곤 하지요. 그러나 그대가 불러 줄 이름 하나면 다른 것은 모두 허물 벗듯 내버릴 겁니다. 내 모든 힘과 능력과 진심을 다해서, 생애의 끝까지 그대를 사랑하겠습니다. 세상이 내일 멸망한다고 해도, 내 관심사는 오직 그대의사랑을 얻는 일 뿐입니다. 나, 에제키엘 나르시냐크, 그대의 노예로 삼아 주십시오. - 기억reminiscence VIII "저 집이라니까요!" 저 단호한 목소리, 진실만을 말하는 부릅뜬 눈동자, 아니라고 했다간 한 대 때릴 것처럼 치켜든 두 손……. "아, 알았다니까요……." 나는 고개를 대강 끄덕거린 다음, 슬금슬금 물러나 아까 전까지 있던 어느 집 처마 그늘로 되돌아왔다. 거기엔 나와 지금까지 생사고락을 같이했으며 시대를 뛰어넘어 세계를 구하기 위해 나타난 영웅적동료들… 이 마치 동네 꼬마들처럼 쭈그리고 앉은 채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어땠냐?" "그, 그러니까… 이번엔 저 집이라는데요." "흐음……." "거긴 아까 가본 데잖아." 그들은 잠시 침묵했다. 아니, 경건하고 폼나는 의미의 침묵이 아니라,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는 말이다. 나는 별 수 없이 궁색하게웅얼거렸다. "나 때문이 아니라고요……." 그렇다. 절대 나 때문이 아니다. 나는 길거리를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불만스럽게 눈짓하며 그 뒤꽁무니를 시선으로 뒤쫓았다. 더이상 물어볼 기운도 나지 않았다. 프론느 헤르미는 정말 걱정이라고는 조금도 할 필요 없다는 듯, 그도시에서 가장 큰 저택으로 들어가서 자기 이름을 대라고 했지만, 그녀가 고향을 비운 사이 도시가 엄청나게 발전을 했는지 우리는 도대체 어느 것이 가장 큰 저택인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달크로즈처럼 높은 곳에서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도 아니고, 모조리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을 놓고 우리는 우울한 고민에 빠지지않을 수 없었다. 물론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붙들고 우리가 찾는 집에 대해 손짓발짓을 해가며 설명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아무 의견도 없… 는 것이 아니고 너무 의견들이 풍부했다. 즉, 우리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모두들 자기가 가리킨 집이 바로 우리가 찾는 그 집임에 틀림없으며,우리가 그의 설명을 듣는 즉시 그 집으로 뛰어갈 기세가 아니면 몽둥이라도 들고 쫓아올 기세였던 것이다. 뭐, 이 모든 일이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적어도 이 도시에 대한 약간의 기본 지식을 갖고 들어온 셈이기도 하니까. 이 도시에 흔히 붙는다던 수식어를 붙여서,지금 우리가 도착한 곳을 설명하자면 이랬다. 우리들은 드디어 '거짓말쟁이 도시 룬서스'에 도착한 것이다. 아, 이 말이 어디에서 나온 말이냐고? 당연히… 바로 옆에 붙은 쌍둥이 도시 록서스가 아니면 어디겠어. "이렇게 큰 도시가 되어버렸나?" 언젠가 룬서스에 한 번 와본 일이 있다는 미칼리스는 처음 이곳에들어설 때부터 눈이 휘둥그래져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물론, 그가와 봤댔자 2백년이나 지난 얘기고, 2백년 전의 작은 어촌이 거대한항구도시가 되는 거야 긴 세월 속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룬서스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2백년 전의 엘프가 불쑥 나타나 돌아다니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닌 듯했다. 그의 엄청난 키, 여자들보다 더 화려한 금발, 장대한 활은 어디에서나 상당한관심을 끌었다. "와 멋있다……." 조그마한 장난감 활을 든 꼬마 소년 하나가 놀란 듯이 입을 벌리고그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당사자인 미칼리스는 곤란한 표정을 지을뿐 인간들에게 쉽게 접근하지 않았다. 사실 활로 말할 것 같으면 이제 나도 하나 갖고 있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물건이라 눈길을 끄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나는 머리를 긁으며 뭔가대책을 마련해 보려고 고심했다. "이름으로 집을 찾을 만한 도시가 아니란 얘기쯤은 해줬어야지." 유리카는 이제와서 소용없이 프론느 헤르미, 아니 헤르미 산토즈양을 원망하며 목탄을 꺼내더니 대강 그린 약도 위에서 또 하나의 저택을 지웠다. 우리가 친절한 룬서스 사람들의 우악스런안내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던 저택은 이걸로 모두 다섯 개째였다. 우리가 찾는 것은 바르제 자매들의 어머니인 프론느 헤르미의 친정이었다. 전해 달라고 한 편지는 내 품안에서 바다를 건너고, 평원에서의 추격전과 전투를 겪고, 왕궁을 지나 미망의 호수를 건너고 숲안의 결계를 거쳐 드래곤까지 만난, 세상 최고의 모험을 겪은 편지가되어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록서스 사람들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닐거야." 그 '거짓말쟁이 도시' 운운 말이냐. 우리는 푸른 처마를 가진 집그늘에서 다시 걸어나왔다. 그리고 아까의 친절한 시민이 사라졌는가 재빨리 살펴본 다음 슬금슬금 다음골목으로 도망치듯이 들어갔다. "점심이라도 먹을 테야?" "싫어." 나는 유리카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내 계산에 의하면 오랫동안행방을 모르던 딸의 편지를 전해준 사람한테 그 가족들이 점심 한끼대접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아주 진수성찬일 거고, 잘만 하면 저녁까지 얻어먹을 지 모르지. 그런 걸 내버려두고 돈을 들여 식사를 한다는 건 내 상식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말야. 비록 내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유리카는 한심한 표정으로 나를 한차례 쳐다본 다음 대꾸했다. "야, 타고난 점원, 넌 배고픈 것도 느낄 줄 모르니?" 하긴… 벌써 3시군. 나는 어물어물 대답했다. "음, 그건 미칼리스에 대한 교육 차원에서……." "교육? 무슨 교육?" 유리카가 먼저 눈썹을 잔뜩 치켜뜬 다음, 멋대로 대답해 버렸다. "파비안 쟤가 미카한테 물건값을 깎는 기본 자세를 습득시켜주기위해 이제부터 굶기 실습을 시킬 생각이래. 미카도 배고플 때 활 쏘는 방법에 대한 강의나 시작해 보지 그래? 어차피 굶는 김에, 보복도할겸." "……?" 미칼리스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알아들었다. 우리 둘은 앞서 걷기 시작한 미칼리스와 엘다렌 뒤에서 서로 짓궂은 째려봄을 교환했다. 우리는 골목을 빠져나왔고, 큰길로 접어들었다. 마차 몇 대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대로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날씨는 좋았다. 배를 띄우기에도 괜찮은 날씨일 듯 싶었다. 상점들은모두 깨끗했고, 첫가을에 새로 나온 반짝거리는 과일들은 식욕 내지는 식후의 디저트에 대한 욕구를 부추겼다. 이제는 완연한 모나드의한 가운데, 엷은 가을빛이 도시 가득 내려 있었다. 쾌청하게 맑은 하늘 아래 가볍고도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낙엽이이리저리 굴러다니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아직 대부분의 나무들은 가을의 첫 물이 든 노란 잎끝만을 단 채로 푸른 잎새를 머리 가득 이고있었다. 여물기 시작한 은행을 가득히 단 나무들이 줄줄이 선 채로행인들의 시선을 잡았다. 저 은행을 털 때 이 도시에 있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불고, 햇빛은 빛나고, 행인들은 제갈길을…어어! "자, 잠깐만요!" +=+=+=+=+=+=+=+=+=+=+=+=+=+=+=+=+=+=+=+=+=+=+=+=+=+=+=+=+=+=+=으아... 춥네요. Roshetti 님께서 우편으로 보내신 정성스런 일러스트들은 잘 받았습니다. 장면을 그리신 곳에선 정말 실감나던걸요. (특히, 유리카의입에 묻은 피.. ^^;;)favian 님, 으깬 달걀은 삶아서 으깬 달걀을 말한 것이었는데... (당연히 생달걀을 으깨는 일은..음.. 권장하고 싶지 않군요;;) 어쨌든 지적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아이디는 '파비안'?? Luthien, La Noir. 번 호 : 28446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7 22:49제 목 : ◁세월의돌▷12-2.잊을수없는마지막…(2) +=+=+=+=+=+=+=+=+=+=+=+=+=+=+=+=세월의 돌(Stone of Days)=+=+=+=+=+=+=+=+=+=+=+=+=+=+=+=+ 12장. 제11월 '점성술(Astrology)'2. 잊을 수 없는 마지막 항해 (2) 그러나 내가 안타깝게 손을 내뻗으며 이름을 부르려다가, 이름을몰랐던 탓에 그냥 아무렇게나 부른 그 여인은 벌써 언덕 위로 들어서는 우측 길로 접어들려는 참이었다. 긴 빵을 담은 바구니에 보자기를씌워 옆구리에 끼고, 긴치마에 이 지방 특유의 머릿수건을 한……. 나는 동료들에게 뭔가 설명할 틈도 없이 당장 앞으로 달려나가 그여자의 뒤를 쫓았다. "잠깐만요! 그, 저, 앞에 가는 아가씨… 아니, 아주머니, 아니 아가씨!" 머릿속에서는 순간적인 계산이 오고간 참이었다. 여자들은 주로 아가씨라고 부르는 걸 좋아한다던데, 아냐, 그러다가 자기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지도 몰라, 아냐, 저 여자가 프론느 헤르미와 비슷하다면 분명 아가씨라는 말에 반응할거야. 다행히 마지막 결론은 들어맞았다. "……?" 문제는 길거리의 십여 명에 달하는 아가씨들이 한꺼번에 나를 돌아보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아가씨들이 다른 아가씨들도 돌아본 것을 보고는 자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 건지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는 점… 이었다. 물론, 내가 부른 그 여자도. 이건 아닌데. "아, 아니, 저, 아가씨!" "……?" 결국은 발로 달려서 따라잡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그 여자의 뒤까지 따라가 섰을 때, 나는 여전히 십여 명 가까이되는 여자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저기요!" 그리고 내가 어깨를 두드리자 뒤를 돌아본 그 여자는……. "저 말인가요?" 기대 이상이었다. 나는 말문이 완전히 막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용모는 내게 숨을 막히게 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으며, 하려던 말까지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아참, 절세 미녀라도 만났느냐고? 물론…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외쳤다. "프론느 헤르미!" … 그녀는 프론느 헤르미와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내가 모든 것을 잊어버린 결과는 다른데에서 먼저 나타났다. 내 입에서 나온 '프론느'라는 말에 아까보다훨씬 많은 사람들이 나를 돌아보았던 것이다. 맞아, 여, 여기는 이스나미르였어……. 내가 속으로 이건 모조리 자기를 프론느 헤르미라고 부르게 한 프론느 헤르미의 탓, 아니, 하여튼 그 아주머니의 탓이야… 하고 중얼거리고 있는 동안, 갑자기 내 뒤를 쫓아 달릴 수밖에 없었던 다른 동료들이 숨을 몰아쉬며 도착했다. "왜 갑자기 뛰는 거야, 뭐라고 설명을 하고 가야할 것……." 그렇게 입을 열었던 유리카도 이 여자의 얼굴을 보고 말문이 막혀버렸다. 미칼리스는 영문을 몰랐지만, 엘다렌조차 놀랍다는 듯 두건을 약간 젖히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뭔가 말하기 전에, 그녀 쪽에서 먼저 반응을보였다. 그녀는 내 팔을 성급하게 잡더니 주위에 다 들릴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헤르미를 알아요?" 일은 잘 풀렸다. 프론느 헤르미와 신기할 정도로 닮은 그녀는 헤르미의 여동생이었다. 신기한 일은 그녀와 헤르미가 쌍둥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쌍둥이가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닮을 수가 있어요?" 내 질문에 그녀는 마치 자기 쪽에서 놀란 듯이 대답했다. "언니도 나하고 비슷한 모습으로 늙었단 말인가요?"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산토즈 가문의 집으로 드디어 들어섰다. 그제야 우리는 헤르미가 이 집을 '가장 큰 저택'이라고 말했던 까닭을 알 수가 있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도시의 공회당이었다. "여기가 집이에요?" 어이가 없어진 우리를 대표하여 유리카가 그렇게 물었고, 이름이'헤르시'라고 하는 헤르미의 여동생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공회당안마당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늑하게 보이는 작은 집이 한 채 세워져 있었다. "엄마!" 이미 결혼하여 헤르시 홀른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친정집 문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 미칼리스가 그래도 느긋하게 대꾸했다. "뭐 제일 커다란 집으로 들어가는 게 맞긴 했군." "그… 래……." 물론 공회당은 한눈에 딱 봐도 룬서스에서 가장 큰 건물이기는 했다. 그러나 공회당은 저택하고는 다르잖아! 비록 생긴 게 저택과 좀비슷한 모양새이긴 하지만, 저택은 저택이고 공회당은 공회당이지 않느냔 말이다! 우리는 잠시 공회당의 마당에 선 채 어물거리며 기다렸다. 공회당은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의 눈에 이상야릇한 일행으로 보일 우리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우리는오는 동안 헤르시에게 자초지종을 대강 설명했고, 그녀는헤르미와 똑같은 표정과 몸짓으로 '어머'를 연발하며 흥미진진하게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속으로 징그러울 정도로 닮았다고 생각하며그녀의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와 붉은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면 아라디네도 헤르미만 쏙 빼닮았었는데, 어쩌면 저 집안 피에는뭔가 모를 강력한 것이 들어 있는 지도 모르겠다. "들어오세요!" 헤르미… 아니, 헤르시가 드디어 작은 집에서 고개를 내밀며 우리를 보고 손짓했다. 우리는 서로 멋쩍은 듯 얼굴을 마주본 다음, 서로먼저 들어가라는 것처럼 눈짓을 보냈다. "흐음……." 결국 내가 제일 먼저 집안으로 들어섰다. 크진 않았지만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느낌을 주는 거실이 제일 먼저눈에 들어왔다. 겨자빛 소파 몇 개가 따뜻한 실로 짠 양탄자 위에 둘러 놓여져 있었고, 한쪽 벽에는 뾰족한 로즈메리 잎새로 만든 리스가걸린 것이 보였다. 야트막한 탁자에는 오렌지빛과 커피색, 그리고 아마빛 사각 천들을 이어 붙인 조각보가 깔려 있었다. 소파 위에는 할머니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짜다 만 뜨개질거리가 바늘까지 꽂힌 채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꾸벅, 고개를 숙여 먼저 인사를 하고 나자 얼결에 내 뒤에서 미칼리스와 유리카까지 꾸벅꾸벅 인사를 하는 것이 보였다. 엘다렌은 여전히 로브 안에서 기침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서 있었고, 주아니 역시 그 안에서 같이 아무 소리도 않고 잠자코 있었다. 이상한 것은 할머니 역시 우리를 보고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더라는 점이었다. "할머니, 냄새가 아주 좋아요." 잠시의 침묵 끝에 이윽고 유리카가 생긋 웃더니 할머니를 향해 다가갔다. 아침에 새로 내린 눈처럼 새하얀 할머니의 머리가 약간 끄덕여졌다. 천장의 서까래 사이사이에 말린 허브 다발이 매달려 있어서거실 안에는 온통 향긋한 냄새가 가득했다. 유리카는 말을 이었다. "게다가, 굉장히 멋진 장식이네요." +=+=+=+=+=+=+=+=+=+=+=+=+=+=+=+=+=+=+=+=+=+=+=+=+=+=+=+=+=+=+=잡지 뉴타입의 다음 달 일러스트 주제는 판타지라면서요? 음... 그냥 이번 500회 일러스트 준비하신 분들이시라면 그대로 거기에도 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일러스트 마감 날짜 말인데요, 아무래도 정확히 명시하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500회 올라가는 날까지.. 라고 해 놓고 제 연재 속도가 일정치 않으니까(한 개 올리다가.. 다섯 개까지 올리니..;;) 혼란을 초래하는 것 같아서요..^^;홈페이지 방명록에서도 고민하시는 분이 많은 것 같더군요. 날짜는, 설 지나고 2월 10일까지로 하겠습니다. (공지를 하나 올릴까...)그리고우편으로 보내시는 분들은 빠른 우편으로 하시면 길어야 2,3일 안에 도착합니다. 에.. 이것도 당일 소인 유효..라고 해야 하는걸까요? ^^;;파일로 보내시는 분들은 가능하면 jpg로... Luthien, La Noir. 번 호 : 28506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8 21:00제 목 : ◁세월의돌▷12-2.잊을수없는마지막…(3) +=+=+=+=+=+=+=+=+=+=+=+=+=+=+=+=세월의 돌(Stone of Days)=+=+=+=+=+=+=+=+=+=+=+=+=+=+=+=+ 12장. 제11월 '점성술(Astrology)'2. 잊을 수 없는 마지막 항해 (3) 그녀의 말대로 하얀 크레이프 커튼으로 가려진 창가에는 참으로 이상한 장식이 달려 있었다. 가볍게 잔주름이 잡힌 커튼을 배경으로 커튼 머리에는 뭔지 모를 이상한 나뭇가지가 하얗게 벗겨진 채 가로로달려 있고, 그아래엔 얇게 잘라 말린 모과, 빨간 고추, 표고버섯 따위가 실에 꿰어진 채 둥글게 매달려 있었다. 모과와 버섯들은 모두높이가 다르게 달려 있어서 정말 벽걸이 같은 느낌을 주었다. 유리카는 창가로 다가가더니 손을 내밀어 말린 모과 한 개를 만졌다. 동그랗고 납작한 가운데 씨가 있던 자리일 듯한 물방울 모양의구멍이 다섯 개 나 있었다. 창 너머로 연한 자두빛 햇살이 비쳐들었다. 다양한 허브향이 물씬하고 아늑한 천들로 꾸며진 천장이 낮은 이집은, 아기 이불 속에 들어온 것처럼 포근한 느낌이었다. 할머니가 고개를 약간 돌려 유리카 쪽을 바라보더니 뭔가 입을 열듯 하다가 다시 몸을 돌려 버렸다. 나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들은 선채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헤르시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헤르시가 우리를 향해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자, 자리에들 앉으세요." 우리가 겨자빛 소파에 둘러앉는 동안에도 할머니는 한 마디 말도없이 우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하다가 그냥 놓아버린 것처럼보이는 뜨개질 거리가 무릎에서 떨어질 듯 흘러내려도 그녀는 아무생각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헤르시가 다가가 할머니의 뜨개질거리를들어 한쪽 테이블 위에 놓았다. 유리카는 그러는 동안에도 자리에 앉지 않고 창가에서 모과와 고추와 버섯으로 된 장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일단 품속에서 편지를 꺼냈다. 그런다음 헤르시를 쳐다보았다. "이 분이 프… 헤르미 아주머니의 어머니신가요?" 헤르시는 내 실수 따위는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미 아주머니라, 그것 참 익숙해지지 않는 호칭이다. 나는 편지를 탁자에 놓은 다음 할머니 쪽으로 밀었다. "헤르미 바르제 아주머니의 편지예요." 할머니보다 헤르시가 먼저 불쑥 말했다. "언니, 결혼했어요?" "아, 예……." 나는 편지에 자세한 얘기가 쓰여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긴 설명은 하지 않은 채 할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할머니의 마르고 하얀 손이 천천히 무릎 위에서 움직여 편지를 향해 다가갔다. 밀랍으로 봉인한 편지를 뜯을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맥없는 손짓이었다.편지가 그 손에 들어가고, 약간의 떨림 끝에 봉투가 열렸다. 온통 허브로 채워진 작은 오두막의 조그마한 할머니,이 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모두 행복할 것만 같아. 그리고 그 순간……. "와아, 할머니! 허브 편지네요?" 유리카가 커다랗게 말한 대로, 할머니의 떨리는 손에 쥐어진 것은말린 허브 잎사귀와 향신료로 만들어진 작은 귤빛 엽서였다. 새로 나타난 상큼한 향이 방안으로 퍼져나갔다. 순간적으로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가져온 것이 이 집에서 태어난 아이가보낸 편지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저 편지를 받아 품안에 간직해서 여기까지 오면서도, 한 번도 저런편지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프론느 헤르미는 우리가 오늘같은 가을의 어느 날, 이 허브로 지어진 집에 들어와 이 편지를 전할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멋있어요. 헤르미 아주머니가 멋진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선견지명까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유리카는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대신 말하면서. 할머니가앉은 소파의 팔걸이에 다가가 걸터앉았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여 할머니와 함께 편지를 읽었다. 할머니의 머리카락과 그녀의 머리카락은언뜻 빛깔이 비슷한 듯도 했지만, 그녀 쪽이 훨씬 건강한 빛을 띠고반짝거렸다. "아… 아아, 아……." 편지 내용을 알 길이 없는 우리는 할머니와 유리카가 편지를 다 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긴, 굳이 따지자면 유리카도 2백 열 여덟이나 먹은 노파였다. 둘은 아주 사이좋게 향기 나는 엽서를 들여다보고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저건 엽서인데, 저 안에 기껏해야 얼마나 많은 얘기가 적혀 있을까? "……." 그리고, 안경 하나도 필요 없이 편지를 죽 들여다본 할머니는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그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우우… 응응… 아아바바바……." 나는 당황한 눈을 헤르시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어머니는 말씀을 못하세요. 선천적이시죠." 그제야 우리는 할머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고개를 들어 우리 모두를 둘러보는 할머니의 눈빛에는 잘 보이지않았지만 눈물이 어렸다. 비록 말을 하지는 못했으나 천천히 고개를돌려 가며 우리 모두를 하나하나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충분한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정직한 미칼리스는 자신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미리 알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기침 소리를 냈다. "으흠, 큼큼."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말을 하지 않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헤르미가, 어떻게 그렇게 명랑하고 쾌활한데다, 심지어 수다스러울 수가 있었을까? 동생인 헤르시 역시 헤르미와 비슷한 성격인 것처럼 보였는데. "어머니가 모두에게 감사한다고 하세요. 그리고 헤르미가 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러시네요." 할머니가 몇 가지 손짓을 한 것만 갖고 헤르시는 손쉽게 그녀의 뜻을 알아들었다. 하긴, 저런 말이라면 손짓발짓 안 봐도 벌써 알아듣겠는걸. 눈빛만 봐도 알겠다. 헤르시의 말이 이어졌다. "헤르미 언니는 어려서부터 여행을 좋아했어요. 아버지를 꼭 닮은성격이지요. 언니와 내가 소녀들이었을 때는 부모님께서 우리들을 데리고 이스나미르 전역을 여행 다니셨죠. 그러나 나는 한 곳에 정착해서 엄마처럼 이렇게 집을 꾸미는 것을 더 좋아했어요. 언니가 대륙전체를 구석구석 여행 다니면서 생애를 보내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어머니께선 그녀를 말리지 않았어요. 난 지금도 언니가 대륙 어딘가신기한 곳을 탐험하고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언니도 드디어 결혼을 했군요." "딸 둘 뿐이에요?" 질문을 한 것은 유리카였다. 헤르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훨씬나이든 오빠가 있어요. 오빠는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지요. 저녁때가 되면 둘 다 들어올 거예요. 아참, 저녁을 드시고 가세요. 꼭 보고 싶어하실 거예요."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나는 저녁을 먹으란 말에 그래도 계산이 완전히 틀리진 않았다고생각하다가 무심결에 질문을 던지고선, 실례가 아닌가 싶어 헤르시의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헤르미와 똑같은 느긋한 표정으로대답해 주었다. "공회당을 관리해요." "예……." 이 집안은 공회당을 대대로 관리해 온 집안이었구나. 그래서 여기서 가장 큰 집을 찾으면 된다고 말한 거였구나. 나는 도시 온 곳을헤매던 생각에 웃음이 나서 헤르시에게 말했다. "헤르미 아주머니가 우리한테 수수께끼를 냈지 뭡니까. 저희는 여길 찾느라고 정말 진땀을 뺐어요. 아까 헤르시 씨를 보지 못했다면아직도 헤매고 있을 지도 몰라요." 그녀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왠지 저건 수수께끼의 내용을듣겠다는 사람이 아니라, 수수께끼를 낸 사람 같은 얼굴인데? "언니가 뭐라고 했는데요?" "아…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저택을 찾아가서 자기 이름을 대면 모두 알 거라고… 저는 당연히 저택이라길래 공회당은 생각도 못하고……." 나는 그녀의 얼굴에 못 참겠다는 듯 미소가 번져 가는 것을 보면서그것조차 헤르미와 정말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닮았는데 천성은 정반대라고? 하긴, 가만히 보니 할머니와 헤르시는 전혀 닮아있지 않았다. 그 강력한 핏줄은 아버지한테서 유래한 건가? "풋, 푸훗… 그건 언니가 낸 수수께끼가 아닌걸요." "네?" 그녀는 빙긋이 웃더니 곧 대답해 주었다. "그건, 우리 가족이 언니한테 수수께끼를 낸 셈이에요. 물론 본의는 아니었지만." +=+=+=+=+=+=+=+=+=+=+=+=+=+=+=+=+=+=+=+=+=+=+=+=+=+=+=+=+=+=+=아카전, 잘 아시지요? 친한 동생이 거기서 직접 만든 타로 카드를 판매한다고 해요. 나우누리에서 회향나무 아이디를 쓰고 지금 sf게시판에서 '쥬얼리안 전설' 이라는 소설도 하나 연재하고 있는데, 본래는 디자인 전공이거든요. 의장 등록까지 마친 순정 만화 캐릭터 타로 카드고, 하이텔과나우누리의 환타지 동호회에서도 공동 구매할 정도로 괜찮은 물건이지요. 그림 뿐 아니라, 종이 질이나 케이스 등도요. (저도 한 벌 사서 갖고 있답니다. ^^ 참 예뻐요.)29일과 30일, 각각 11시-5시, 10시-5시에 한다는데, 혹시 아카전에참여하실 분들은 한번쯤 구경하러 가시라고요. ^^ 저도 시간이 된다면 응원하러 갈까 생각중이지만... 아직 확실하진 않네요. 뭔가 특이한 의상을 입고 온다고 했기 때문에 잔뜩 기대중이죠. ^^;아참, 늦었지만 ruledis 님께, 음악은 잘 듣고 있습니다. ^^에또.. 오늘 결국 5차 삭제분 삭제했습니다. 그런데 나우누리에서갑자기 황당한 버그를 일으켜 엉뚱한 것들까지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지정하지 않은 번호를 지워버릴 수가 있는가..;;)물론, 연재분은 아닙니다. 예전에 쓴 잡다한 공지들과, 300회 이벤트 결과 게시물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흑흑.. 전에 제 실수로 지워진 200회 이벤트 공지와 함께, 나중에 한꺼번에 팬클럽 정보란 등에 올리겠습니다. 아참, 300회 이벤트 결과는 홈페이지에도 있네요. 아시죠? fairytale.pe.kr요즘엔 굉장히 많은 분들이 자주 찾아보시는 것 같더군요. ^^Luthien, La Noir. 번 호 : 28594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29 22:38제 목 : ◁세월의돌▷12-2.잊을수없는마지막…(4) +=+=+=+=+=+=+=+=+=+=+=+=+=+=+=+=세월의 돌(Stone of Days)=+=+=+=+=+=+=+=+=+=+=+=+=+=+=+=+ 12장. 제11월 '점성술(Astrology)'2. 잊을 수 없는 마지막 항해 (4) 옆에서 가만히 있던 유리카가 불쑥 말했다. "그럼, 역시 저 공회당은 사실 산토즈 가문의 저택이었던 거로군요?" "에엣?" 그리하여 우리가 헤맬 수밖에 없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헤르시는 그들 가족이 이 거대한 저택을 공회당으로 내놓고 앞마당구석에 작은 집을 꾸며 살아가기 시작한 것은 10년이 좀 넘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헤르미가 이곳에 살고 있었을 땐 이집은 공회당이 아니고 산토즈 저택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별 일 아니라는 것처럼 웃으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본래부터 작고 아담한 집을 가지는 것이 소원이셨어요. 거대한 저택은 늘 부담스러워하셨죠. 게다가 아버지는 여행을 좋아하시는 분이시라 큰 집이 별로 쓸모도 없었고요. 그래서 의미있는일에집을 내놓기로 한 거예요. 물론 아버지께서도 이젠 늙으셔서 여행 다니는 것은 못하시고 요즘은 공회당 관리에 재미를 붙이셨지요. 모르는 사람들이 처음 이곳에 와서 아버지와 오빠를 보고 대대로 공회당을 관리해 온 집안이냐고 물으면, 그렇게 재미있어 하실 수가 없어요." "……." 방금 전까지 내가 했던 생각이 떠올라 나는 얼굴이 근지러워졌다. 하긴 정말, 볼수록 놀랄만한 집안이었다. 이만한 저택을 그냥 버리고 요렇게 작은 집에 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물론 이허브로꾸며진 예쁜 집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큰 집에서 살던 부자들이갑자기 작은 데서 살려면 몹시 좁고 불편할텐데……. "어머니는 말을 못하시니만큼 손님이 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세요. 그렇지만 오랜만의 손님이 반가운 소식을 가져오신 분들이라몹시 기뻐하시고 계세요. 물론 저도 기쁘고요. 언니 얘기를 좀더 해주세요. 어떻게 살고 있나요? 남편은 어떤 사람이고, 자식은 있나요?" 세상에… 정말 편지에 아무 것도 안 써 놓았군. 내 대신 편지를 읽은 유리카가대답해 주었다. "아주 재미있게 잘 살고 있어요. 아까 쟤가 프론느 헤르미라고 말하던 것 기억하지요? 헤르미 아주머니는 세르무즈 사람하고 결혼했어요. 남편 되시는 포웬 바르제 씨는 굉장히 온화하고 선량한 분이시고, 말하자면 아주 지참금도 풍부한 셈이었지요. 딸만 해도 셋이나있으셨거든요." "아… 네……." 유리카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저 말을 헤르시가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녀는 넘어갔다. 내가 옆에서 거들었다. "헤르미 아주머니가 낳은딸은 아라디네 바르제라고 하고요, 지금앞에 계신 분의 얼굴하고 꼭 닮았어요." 헤르시는 웃었다. 무슨 말인지 아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언니와 저와 오빠, 그러니까 저희 집 삼남매도 세 쌍둥이처럼 닮았답니다." 흐음,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유리카는 거기에 발랄하게 덧붙였다. "아라딘은 아주 상냥하고 좋은 소녀예요." 아, 그… 물론 굉장히 좋은 소녀지. 그런 다음 유리카와 헤르시 사이에서 한참 동안이나 재잘거림이 오갔다. 이럴 때만은 헤르시도 헤르미와 똑같은 성격이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내가 적당히 두 여자의 수다를 멈추고 우리가 점심을 굶었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라도 알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아참, 저희는 아직 점심을 못 먹었거든요? 죄송하지만 저녁을 조금 일찍 먹으면 안 될까요?" 유리카의 너무 솔직담백한 말에 나는 당황했지만, 헤르미는 전혀개의치 않는 듯했다. "아아, 그러세요? 저런, 어쩌다가 지금까지 식사를 못하셨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식탁을 차려 드릴게요." "흠, 으흠." 나는 '어쩌다 식사를 못했냐'는 말에 약간 불편한 듯 기침을 했고,그것은 유리카가 내게 귀여운 책망의 눈길을 보냈던 탓이기도 했다. "아니, 오늘 이렇게 일찍 올 줄 어떻게 알고 식탁들을 차렸지?" 우리가 부엌의 식탁에 둘러앉아 막 포크를 들려는 순간, 작은 집의문이 열리고 거실로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헤르시가 얼른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 "아빠! 오늘은 어떻게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결혼을 했대도 10년은 넘었을 것 같은 헤르시는 아주 자연스럽게'아빠'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 "아, 손님들이 찾아와서 말이지." "손님이요? 손님이라면 지금 여기 와 계시는데?" "여기에도 손님이 와 계시냐?" 이 할머니의 남편이라면 할아버지임에 틀림없을 텐데, '아빠'라고불린 사람의 목소리는 젊은이처럼 활기가 넘쳐서 나는 약간 놀랐다. 그건 그렇고 산토즈 씨 쪽에서도 손님을 이끌고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우리 일행은 몹시 배가 고팠음에도 불구하고 식사를 시작하지 못한 채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아아바, 우부부… 아아다다아……." 물론 말 못하는 노부인이 우리더러 상관말고 식사를 하라고 그런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더라도 어디 이런 애매한 상황에서 그냥 먹기만하고 있을 수야 있겠어. 거실에서 헤르시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으응, 아빠. 헤르미 언니의 소식을 가지고 온 분들이 계세요." "어허, 그래?" 이 집안은 20여년 동안 편지 한 장 없던 딸의 소식을 가져온 사람이라고 해도 도무지 충격적으로 놀라는 법이 없었다. 본래부터 방랑자가 많은 집안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안에서 식사들을 하고 계세요. 조금 기다렸다가 만나보세요." "그러자. 나도 손님들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해야 할 테니, 잠깐 여기에서 기다리마." 헤르시가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다. 워낙 작은 집이라 우리가 밖에서 오가는 얘기를 다 들었을 거란 사실을 알 텐데도, 그녀는 일부러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우선 식사들 하시고, 아버지를 만나시는 게 좋겠어요. 아버지의손님들이 꽤 여러 분이신 듯해서요. 부엌은 워낙 좁아서." 큰 집에서 살 때의 버릇이 남은 것인지 이 집 식구들은 손님 치르는 것이 그다지 낯선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포크를 잡았다. 빵에 마멀레이드를 바르고 있는데 밖에서 산토즈 씨와 손님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집나간 딸의 소식을 가져온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을 텐데, 우선 좀 쉬시구려." "친절하신 말씀이시군요. 갑작스런 방문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환영해 주시니 저희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는 나이프를 든 손을 딱 멈췄다. 밖에서 들려오는 손님의 목소리는 분명 내가 일전에 들은 일이 있는 사람의 목소리이다. 그것도 우연히 지나친 사람이 아닌 오랫동안함께 지냈던 사람의 목소리, 아주 익숙한 말투를 가진 한 사람이 지금 문 밖에 와 있었다. 어떻게… 이곳에……? +=+=+=+=+=+=+=+=+=+=+=+=+=+=+=+=+=+=+=+=+=+=+=+=+=+=+=+=+=+=+=오늘 좀 황당한 일을 당했습니다. 팬클럽에 질문/답변란이 있는데 늦더라도 가능한 한 시간 내서 대답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어제 새벽에 글을 쓰고 몹시 피곤한 상태에서 들어갔다가, 답변을 해야겠지 싶어서 몇 글자 적었습니다. 질문은 9권에 포함되는 부분이 어디에서 어디까지냐.. 는 것이었죠. 그래서 저는 시작하는 부분과 끝 부분의 챕터 제목을 써 드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인 오늘, 자고 일어나서 접속해 보니, 질문하신 분이 바로 제가 대답한 그 글을 바탕으로 '어디부터 어디까지파일로 보내달라'는 요청글을 sf게시판에 쓰셨더군요. 정말, 순간적으로 얼굴이 확 붉어졌습니다. 휴... 저는 이상한 데 부지런한 편이라 sf게시판에 올라오는 저에관련된 잡담들은 거의 전부 읽는 편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번뿐이아니고 수많은 분들이 게시판에다가 삭제된 글 요청을 한다는 사실을이미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하나 클릭해서 다 읽어봅니다. 그러나 뻔히 보면서도 모르는 체 하지요.... 한분 한분한테 항의하는 일이 용이하지도 않거니와, 그런 식으로 애쓴다고 없어지는 것이아니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물론, 기분은 나쁩니다만). 그렇지만, 이젠 아예 저를 바보로 만드시는군요. 그런 질문에 애써 답변한 저 자신도 한심스럽고, 내가 무엇 때문에출판사에 억지 써가며 연재를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결국은 일껏 연재를 하긴 합니다만, 이런 식으로 애쓰는 사람의 기를 꺾어놔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의욕이 떨어지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입니다... Luthien, La Noir. 번 호 : 28645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1-30 23:26제 목 : ◁세월의돌▷12-2.잊을수없는마지막…(5) +=+=+=+=+=+=+=+=+=+=+=+=+=+=+=+=세월의 돌(Stone of Days)=+=+=+=+=+=+=+=+=+=+=+=+=+=+=+=+ 12장. 제11월 '점성술(Astrology)'2. 잊을 수 없는 마지막 항해 (5) 밖에서는 계속해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원 별말씀을. 우리 집은 손님 대접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집이라오. 이렇게 찾아주시니 오히려 우리가 고맙소." "따님을 찾아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편안한느낌의 집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듣고 싶은 유일한 치하라오." 그리고 저 손님은 프론느 헤르미를 알고 있었다. 나는 식탁 건너편에서 고개를 든 엘다렌을 바라보았다. 그의 동작도 멈춰져 있었다. 유리카도 마찬가지였다. 헤르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몰랐다. 벙어리 노부인이 느릿느릿 식사하는 것을 돕고 있던 그녀는 이상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제일 먼저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밖에서 들려오는목소리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차례의웃음소리와 함께 산토즈 씨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그렇고, 당신 말대로 먼 세르무즈에서 이곳까지 자진해서 찾아올 정도의 약속이라면 확실히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겠소이다. 그것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당신한테 감탄했소." 까닭을 알 리가 없는 미칼리스가 우리들을 둘러보더니 우물거리던빵을 꿀꺽 삼키고 한 마디 했다. "왜들 그래?"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문밖에서 다음 한 마디가 들려오는 순간,엘다렌은 의자를 밀고 벌떡 일어섰다. 손님의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제가 원해서 한 약속이었고, 평생 지킬 생각입니다. 저의 가장 명예로운 약속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나 역시 식탁에서 벌떡 일어섰다. 엘다렌은 이미 문 밖으로나가고 있었다. 유리카도 일어나서 뒤를 따랐다. 노부인과 헤르시가놀라서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거실로 향한 문으로 나갔다. 그리고, 너무도 반가운 그 손님을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아티유 선장님!" 그리고, 그 역시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하고있었다. "선주님들! 다시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약간 그을린 그 고집스러운 얼굴, 다부진 입매와 날카로운 눈동자는 몇 달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입가에는 그 역시 기쁨을감추지 못하는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푸른 굴조개 호의 선장 아티유 지스카르트, 그였다. 나는 거의 선장을 얼싸안다시피 했고, 유리카도 반갑게 그 팔에 매달리며 환하게 웃었다. 겨우 몇 달일 뿐인데도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몇십 년만에 만난 것처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는 우리의 야단스런 환영에 답례한 후, 엘다렌에게로다가가 그 앞에 섰다. 엘다렌은 고개를 들어 키가 큰 그를 올려다보았다. "선주님… 이렇게 약속을 지키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동시에 그는 기사식으로 엘다렌 앞에 무릎을 꿇으며 인사했고, 키가 큰 그가 그렇게 앉자 엘다렌은 그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둘은 서로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반갑다." 엘다렌은 짧은 말밖에 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그 목소리 안에는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오래 함께 있었던 나는 그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얼떨떨해진 산토즈 씨에게 소개도 할 겸, 우리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산토즈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스카르트 씨, 당신이 찾던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소? 그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는?" 아티유 선장은 싱긋 웃으며 산토즈 씨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예. 이 분들이 바로 제 배의 선주님들이십니다." '제 배'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새로운, 그리고 동시에 즐거운예상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고 커다랗게 외쳤다. "푸른 굴조개가 여기에 와 있나요?!" 그리고 아티유 선장은 나를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물론이지." 푸른 굴조개를 다시 보게 된다! 나와 유리카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서로의 손을 맞잡았으며, 그러느라 부엌 식탁에서 영문을 모른 채 당황하고 있을 이들에 대해서는거의 잊어버렸다. 아티유 선장은 산토즈 씨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처럼 고개를 한 차례 숙이고는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들어오게!" 그가 문을 열고 외치는 순간이었다. 밖에서 한꺼번에 수십 개의 목소리가 한여름 햇살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정말, 그것은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들에 대한 기억들이 갑자기 되살아나 돌아온 것만 같았다. 길진 않지만 짧지도 않았던 헤어짐, 그 이전에 우리는 여름을 앞둔날씨 좋은 청명한 하늘을 함께 보았었다. "선주님들, 다시 뵙게 되다니 꿈만 같습니다!" "엘다렌 선주님, 여전하십니다! 저희를 봐서 기쁘시지요?" "파비안 님은 그 동안 키도 자라신 것 같네요?" "유리카 아가씨는 더 예뻐지시고요!" "어이쿠, 집이 좁아서 다 들어갈 수가 있어야지." "이봐, 비켜! 나도 좀 들여다보자!" 수십 명의 선원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려고 앞다투어 머리를 내미는바람에 이미 열린 문짝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흔들렸다. 재빠르게 먼저 안으로 들어온 선원들은 전부들 질세라 우리들을 둘러싼 채 손을잡고 흔들었으며, 어깨를 두드리고 고개를 꾸벅이며 수선을 피웠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이들과 헤어지던 바르제 저택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다. 그때도 이것과 비슷한 분위기였었지. 바스케스, 데스덴, 휼스트, 델고린, 딤스빌… 모두 반가운 얼굴들. 갑작스런 소란에 산토즈 씨는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곧 상황을 이해하고 빙그레 웃었다. "이거, 대단한 소란들인걸. 모두 공회당으로 가는 것이 어떤가. 전부 여기로 들어왔다간 이 집은 정말 무너질 지도 모르네." 그 말이 옳다 싶어 엘다렌을 돌아보며 나가자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유리카! 파비안!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죠?"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을바라보았다. 유리카도 놀라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시 추워지는군요... 아카전에 한번 구경하러 가보고 싶었는데, 결국 못 가고 말았네요. 아직까지 한 번도 못 가봤거든요. 어떤 분위기인지 궁금했는데.. 다음 번 기회가 있겠지요. ^^나우누리의 세월의 돌 팬클럽 회원 여러분께, 특히 카시페아 님께힘내시라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네요. 짧은 시간 동안 멋진 모임으로발전하고 있잖아요. 앞으로 좋은 일이 더 많이 생길 거예요. 여러분들을 다 좋아한답니다. 참, 하이텔에도 팬클럽이 생겼더군요. go sg2330입니다. 하이텔 쓰시는 분들은 한번쯤 가보시길. ^^Luthien, La Noir. 번 호 : 28718게시자 : 전민희 (모래의책)등록일 : 2000-02-01 00:20제 목 : ◁세월의돌▷12-2.잊을수없는마지막…(6) +=+=+=+=+=+=+=+=+=+=+=+=+=+=+=+=세월의 돌(Stone of Days)=+=+=+=+=+=+=+=+=+=+=+=+=+=+=+=+ 12장. 제11월 '점성술(Astrology)'2. 잊을 수 없는 마지막 항해 (6) "어떻게… 여길?"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글쎄… 블랑디네 바르제였다! 마치 마르텔리조에서 본 여관 아가씨 이니에 히르카이에처럼 종아리까지 오는 짧은 바지에 이마에는 선원들의 두건을 두르고, 환하게미소짓고 있는 낯익은 여자. 선원들을 뚫고 들어온 그녀는 영락없는한 사람의 선원이었다. 건강하게 탄 얼굴빛에 줄무늬 셔츠까지, 어느모로 보나 옛날 바르제 가에서 보던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나는 간신히 놀란 정신을 추스르며 물었다. "선원이 된 거예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블랑디네가 뭐라고입을 열기도 전에 집안으로 쏟아질 것처럼 입구에 낀 채 와글거리고있는 선원들의 틈을 간신히 뚫고 익숙한 얼굴의 금발 사내가 나타났다. 이번엔 나보다 유리카가 먼저 부르짖었다. "스트라엘!" 그리고 그녀는 약간 사이를 두고 다시 한 번 외쳤다. "두 사람, 결혼했군요!" 뭐, 뭐, 뭐, 뭐야? 내가 뒤로 자빠지지 않도록 유리카가 나를 좀 잡아야만 했다. 엘다렌마저 약간 놀란 듯, 로브 자락을 젖히며 한 마디 했다. "빠르군." 블랑디네는 성큼성큼 엘다렌 앞으로 다가가더니, 가슴 안쪽으로 넣어 걸고 있던 목걸이를 꺼냈다. 그녀는 목걸이를 벗지는 않은 채, 목걸이 추를 잡아 내밀더니 엘다렌에게 보여 주었다. "선주님의 선물, 잘 간직하고 있어요." 그녀의 목걸이추에는 새파란 빛깔로 번쩍이는 사파이어, 밤톨만큼커다란 보석이 달려 있었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즉시 알아보았다. 푸른 굴조개 호가 바르제 저택에서 출항하기 직전, 엘다렌이 나를 통해서 스트라엘에게 건네준 손수건 안에 있던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남편이 결혼 기념으로 제게 선물한 거예요. 선주님이 주신 물건을함부로 처분할 수는 없는 일이라면서요. 우리 부부의 기념품으로 오래오래 간직하기로 했어요." "……." 엘다렌은 아마 결혼 비용에 보태라는 뜻에서 그걸 스트라엘에게 주었을 것이다. 아직 젊은 항해사인 스트라엘이 그렇게 많은 돈을 저축했을 리가 없었다. 블랑디네는 어쨌든 상당한 부잣집 딸이었고, 그런그녀와의 결혼식을 초라하게 치른다면 바르제 가문 사람들에게 좋은기억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무도 불만 따위는 얘기하지 않는다해도 말이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 보석은 그대로 이렇게 남아있었다. 스트라엘이 다가왔다. 그는 우리를 향해 미소를 보낸 다음 엘다렌앞으로 가서 섰다. "선주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둘 다 과묵한 편이라 긴 말은 오가지 않았다. 선원들도 잠시 떠드는 것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블랑디네가 생긋 웃더니스트라엘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우리 결혼을 제일 먼저 예견한 분이 엘다렌 선주님인걸요. 편지에써 주신 말은 저도 읽어 보았어요. 별로 이른 결혼 선물은 아니었답니다. 우리 결혼한 지 이제 두 달 되어요." 엘다렌의 얼굴에 오랜만에 뚜렷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말했다. "사이는 좋겠지?" 엘다렌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대해 내가 놀라기도 전에, 블랑디네가 활발하게 대답한 말이 아예 주위 사람들을 모조리 나자빠지게만들었다. "그럼요! 이이가 얼마나 귀여운 사람이라고요! 전 결혼한 다음에더 흠뻑 반해버렸어요!" "……." 스트라엘은 당황한 것처럼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블랑디네는 조금도개의치 않고, 이제는 아예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뺨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블랑딘……." 그 순간 우리 모두가 돌이 되었대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바르제 저택에서 헤어지던 날 프론느 헤르미가 만들어 준 호박 프리터스를 먹던 때 이래로 스트라엘의 얼굴이 완전히 붉어지는 것을우리는 다시 한 번 목격했다. 다음 순간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 "아하하하하……." 비록 놀라긴 했지만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그 마음이 전염되는 느낌을 받은 것은 나 뿐만은 아니었던 듯했다. 블랑디네의 가슴위에서 푸른 사파이어 목걸이는 아름다운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공회당으로 갑시다!" "할 얘기가 아주 많아요! 가서 우리 밤새껏 얘기해 봅시다!" 작은 집에 지진을 일으키며 들이닥쳤던 선원들이 외치는 소리가 또한 파도처럼 거실 안을 가득 채웠다. 우리들 역시 할 이야기가 아주많다. 그들과 헤어진 후에 우리가 겪었던 많은 일들을 전부 얘기할수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이제 아티유 선장과 엘다렌이 바르제 가의 정원에서달밤에 나눈 이야기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든,엘다렌이 필요로 할 때 그곳으로 달려가겠다는 약속… 그는 그것을기꺼이 지켰다. 그의 자의로 한 약속이었고,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일을 명예롭게 생각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푸른 굴조개……. 돛마다 여전한 금빛 달무늬, 해군력이 강한 이스나미르의 항구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아름다운 배가 룬서스 항의 앞바다에 둥실 떴다. 마치 오랜 옛날이었던 것만 같아. "다시 이 배를 타게 될 줄이야……." 옆에서 유리카가 중얼거리고 있는 그대로였다. 살아 있으면 언젠가다시 만나리라고 생각하긴했지만, 지금 이 순간, 이 배를 타고 하르마탄으로 가는 마지막 항해를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감히 상상이나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만들어낸 것은 내 친구, 이제는 이스나미르의 국왕이 된 나의 좋은 친구다. "휴우… 나르디 녀석." 이제 국왕이 되어버리고 나니 없는 곳에서 이렇게 부르는 것조차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내 곁에 선 채로 싱긋 웃는 유리카는 작은 화분을 하나 안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화분에서 솟아난 줄기와 거기에 매어진 흰 리본에 얽혀들었다. 그녀가 안고 있는 화분은 하트 모양으로 된 허브 토피아리(topiary; 장식 나무)였다. 허브의 일종인 레몬버베나를 길게 길러 줄기들을둘로 나눈 다음, 끝을 동그랗게 구부려 흰 리본으로 묶어 놓으니 하트 모양의 테두리가 만들어졌다. 참 희한한 솜씨이기도 하다. 물론화분은 말 못하는 할머니인 산토즈 부인의 선물이었고, 또한 유리카를 위해서 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산토즈 부인이 비록 친 손녀는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손녀인 셈인 블랑디네에게 준 결혼 선물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외할머니를 만난 블랑디네도 기뻐했지만, 노부인의기쁨도 그에 못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사이였지만 두 사람은 이상스럽게도 마음이 잘 통했다. 우리가 그 집을 떠나오기까지 두 사람은 끊임없이 손짓과 입모양만 가지고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건 그렇고 저 조그마한 식물이 과연 바다를 건너 그녀의 집까지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선원 한 사람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곧 출항입니다!" +=+=+=+=+=+=+=+=+=+=+=+=+=+=+=+=+=+=+=+=+=+=+=+=+=+=+=+=+=+=+=구정 기념(?)으로 잠시 쉽니다.. ^^;저희 집에는 또다시 몇 명인가의 친척들이 나타날 예정입니다. 일이 잘못된다면 할머니만 오실 수도 있겠지만... 돌아오는 날짜는 구정 연휴의 마지막인 6일로 하겠습니다. 그 동안잊지 마시고.... 일러스트 그리신 분들은 보내주세요.. ^^;;;;블랑디네라는 것을 예견해 주신 분.. 저도 재미있었네요. ^^휴... 다 쓰고 나니 배고프다. ;요즘 정말 고민이에요. 10권은 어쩐다? Luthien, La Noir. +=+=+=+=+=+=+=+=+=+=+=+=+=+=+=+=세월의 돌(Stone of Days)=+=+=+=+=+=+=+=+=+=+=+=+=+=+=+=+ 12장. 제 11월 '점성술(Astrology)'3. 왕과의 약속나의 왕이시여. 그대가 전래의 보관(寶冠)과 조상들 앞에 맹세한 바와그대의 지킬 바 명예를 위해나, 살아왔습니다. 이제 그대의 진노한 얼굴이 눈앞에 선해그대의 상처받을 자존심이 걱정스럽습니다. 저 강을 건너라, 마지막 진격을 명령합니다. 빠른 새의 날개로 전해진 소식을 들은그대의 아름다운 눈썹이 어떻게 찌푸려질까요. 불복종과 외면을 결코 견디지 못할그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그대의 기사가 그대를 버렸다 생각하고는화가 난 나머지 잔인한 명령을 내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일생, 그대 위해 행하지 않았던 일이 없었듯이 모든 일은 또한 그대를 위해……. 이제 그대의 처분을 기다리려 합니다.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그대끝없는 시간 속에서도 영원히 사랑할 그대목숨 다해 지켜 드리리라 맹세하였고그 맹세 지키기 위해 그대의 명을 어긴불행한 기사의 주인이제 이 목숨 취하실나의 왕이시여. - 로존드아 기사, 로이카르트 르 덴 作<나의 왕, 주드마린> 중에서 폭풍의 고향. 섬이라기보다는 대륙에 가까운 거대한 땅. 롱봐르 만에 몰아치는대부분의 바람이 태어나는 곳이자 광풍, 시즈카의 고향. 우리는 그 섬에 드디어 도착했다. "바람의 땅이야." 이름 그대로, 배에서 내린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은 것은 혼을 빼놓을 것처럼 휘몰아치는 강렬한 모래바람이었다. 이 정도 크기의 범선을 댈 항구조차 없어서, 우리는 푸른 굴조개 호를 멀찍이 정박시키고 보트를 이용해서 섬으로 들어와야 했다. 그나마 보트를 저어 올때 바람이 몰아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하늘은 까마득하게 높고 맑았다. 공기는 싸늘했고, 겨울이 오고있는 바다는 이미 잠시 손을 담그고 있기도 힘들 정도로 차갑게 변해 있었다. 사람들도 대부분 망토 등을 걸친 차림이었다. 지는 해가 걸려 있는 먼 지평선에 울퉁불퉁한 붉은 바위산이 길게이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림자는 몹시도 길었다. 인기척도 없고, 짐승이나 심지어 벌레 한 마리조차 눈에 띄지 않는 낯선 섬의 첫인상은 쌀쌀맞고 불친절했으며, 심지어 적대적으로까지 느껴졌다. 위이이잉……. 바람은 따갑도록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 곳이야말로 바람의 고향,바람의 법칙에 지배되는 영토였다. 하르마탄 섬은 예전부터 대륙 태생의 사람들에게는 낯선 곳이자어떤 위험이 도사린 곳으로 생각되는 멀고 먼 땅이었다. 비균형적일정도로 큰 섬이 지도 한 가운데 웅크린 것을 보면서 묘한 이질감 같은 것을 느낀 사람은 나 하나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도 좁디좁은 도아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날씨가 좋은 날은 양쪽의 곶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는 그 땅은, 그러나 이 세상과는 다른 이상한 법칙에 속한 외딴 땅이었다. 그곳은 갈 수 없는 땅이었다. 적어도 대륙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는. 그러나 나의 집안은 저 땅에 대대로 영지를 가져 왔다지 않은가. 그들은 대대로 저 땅에 살아왔다지 않은가. 내 아버지의 고향, 그리고 어쩌면 나의 고행. 우리가 내린 곳은 이스나미르 령 하르마탄에서 가장 큰 만이자 동족 바다의 해류가 돌아 나가는 이자르보 만 안쪽, 드문드문 이어지는 좁은 모래톱들 중 한 군데였다. 배에서 내린 것은 나와 유리카,주아니, 미칼리스와 엘다렌, 아티유 선장, 스트라엘과 블랑디네, 그리고 몇 사람의 선원들뿐이었다.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그래도 대륙과 섬 사이에 배가 오갈 텐데, 어째서 그럴듯한 항구가 하나도 없는 거죠?" 우리는 몰아치는 모래바람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체 모래톱을 가로질러 언덕 너머로 이어지는 관목 숲으로 들어갔다. 나무들은 높게 자라지 않고 옆으로만 가지를 뻗쳐, 송곳처럼 뾰족뾰족한잎들이 무성하게 들어차 있었다. 잠시 바람이 가라앉자, 간신히 우리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아티유 선장이 그제야 내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항구가 없지는 않아. 물론 대부분의 중요한 항구는 도아 해협 서편에 밀집되어 잇고 이쪽에는 별다른 시설이 없는 편이지. 그렇지만우리가 여기로 온 건……." 블랑디네가 끼여들어 한 마디 했다. "도아 해협은 이스나미르 해군이 철저히 봉쇄하고 있거든요. 또남쪽 해안은 차크라타난의 영토이기 때문에 역시 함부로 근해를 항해할 수 없지요. 그래서 세르무즈 배는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결코하르마탄 동안으로 넘어올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스나미르 령 하르마탄의 동안은 아주 안전한 곳인 셈이죠." 나는 세르무즈 사람인 그녀가 이쪽 사정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가 싶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그녀가 싱긋 웃으며 스트라엘에게 눈짓을 하는 걸 보고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나는흠흠, 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래서요 선장님? 이쪽으로 온 다른 이유는요?" 아티유 선장은 대답하려고 입을 벌렸다. 그런데 그 순간, 다른 사람이 말소리가 먼저 울렸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 그렇지." 저 목소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나무들이 정확히 키 높이를 가릴 정도로 자라 있었고, 뜻밖의 목소리는 바로 그 너머에서 들려 오고 있어싸. 그렇지만 잊어버릴 리가 없잖아, 저녀석. 저 목소리.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알아들을 수 밖에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여기까지 오느라 모두 고생이 많았네. 다시 만나게 되다니, 이루말할 수 없이 기쁘군." 부스럭, 다시 나뭇가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사람.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나르디!" "파비안!" 세상에, 이녀석! 나는 녀석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관목 숲의 나뭇가지 사이로 나타난 사람을 덥석 얼싸안았다. 같이 얽혀 든 가지들이 두 사람의얼굴과 목덜미를 온통 긁었지만 둘 다 개의치 않았다. 포옹을 푼 다음나무를 헤치고 서로 얼굴을 보기까지는 그러고도 조금 더 걸렸다. "반갑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가장 아끼는 친구, 나르디엔 루아 듀플리시아드가 거기에 있었다. 빛 좋은 금발에 익숙한 얼굴 가득 내가 좋아하는 미소를 띠고서 여전한 모습으로 내 눈앞에 서 있었다. 그 이름을 말하고 보니, 그제야 그가 이제 '내 친구 나르디' 가 아니라 '이스나미르 국왕 나르니엔' 이라는 사실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러나 사실이 어찌 됐든, 녀석의 갑작스런 출현은 내게 크나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정말로,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 헤어진 지 백 년쯤 지나기라도 한것같아. "유리카, 건강한 모습을 보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 나하고 마지막 만났던 때에는 어땠는지 기억하는가?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는지 모르네." 그는 나와의 포옹을 풀고 곧 유리카에게로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엘다렌을 향해서도 고개를 숙이며 빙긋 웃었다. "반갑습니다, 엘다렌." "일국의 국왕으로서 그렇게 아무한테나 고개를 숙여선 안 될 텐데." 엘다렌의 첫 마디를 들은 나르디는 시원스럽게 소리내어 웃었다. "무슨 소리십니까. 당신도 일국의 국왕이 아닙니까. 게다가……." 그는 마치 그들끼리만 알고 잇는 추억을 떠올리기라도 한 것처럼내 쪽을 가볍게 곁눈질하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저는 달크로즈의 은인을 언제까지고, 처음 감사했던 마음 그대로 기쁘게 존경할 테니까요." "……." 엘다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나르디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나르디는 내 곁으로 슬쩍 와서 선원들의 눈에 띄지 않게주아니와도 오랜만의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혼자였다. 수행원도 없이, 일국의 국왕이 이 외딴 땅의 숲 속에서 혼자 돌아다니고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것처럼 예전에 우리와 함께 다닐 때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왔다. 다음으로 그는 미칼리스와 인사를 했다. "제 평생에 이렇듯 오랜 숲의 종족을 만나는 영광이 있을 줄은 감히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나미르의 국왕으로서, 또한 저개인으로서 그대를 깊이 환영합니다. 세월을 뛰어넘어 오신 하얀 부리 엘프 족의 수장이시여." "아, 예. 반갑습니다." 어찌 된 노릇인지 저 인사말들을 듣고 있자니 나르디 쪽이 오히려2백 년 전의 시대에서 온 것처럼 생각되었다. 미칼리스는 본래 복잡한 예절 같은 것은 별로 따지는 법이 없었고, 나르디 녀석은 예전부터 알았다시피…… "하하… 어쨌든 얘기로 전해들은 그대로시군요. 모르시지요? 제쪽에선 꽤 오래 전부터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답니다." 미칼리스는 나르디보다 머리 하나하고도 반 뼘 정도는 컸기 때문에 둘은 약간 떨어져 서서 서로를 쳐다보아야 했다. 미칼리스는 나르디의 말에 그야말로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너, 미칼리스를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냐?" 나르디는 싱긋 웃더니 아직까지 약간 떨어져 선 채로 입을 열지않고 있는 아티유 선장을 향해 다가갔다. 아티유 선장과 다른 선원들은 당연히 한 나라의 국왕에 대한 예우를 갖추기 위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훌륭해게 일을 처리해 주셔서 뭐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역시 전부터 생각한 그대로 참으로 믿을만한 분이십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르디는 어안이 벙벙해져 잇는 우리 일행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내 얼굴을 보고 재미있는 장난을 꾸미기라도 하는 것처럼 싱글거리며 말했다. "다른 얘기는 가면서 하자. 참, 이따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나 말이지, 왕 대접은 좀 해 줘라. 알았지?" "더 신기한 건 마르텔리조에서의 일이지. 오소블 섬을 중심으로해서 넓은 바다에 구역권을 발동시킬 거란 얘기를 꺼낸 것이 그 친구… 아니, 이스나미르 국왕 폐하가 아니셨더냔 말야. 그래, 이미선박 발주까지 들어갔다고 말했었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그거, 국가 기밀 아닌가? 그런데도 그렇게 거리낌없이 말해 주다니…. 어쨌든 간에 신기한 분이란 말야." "뭐, 이젠 비밀도 아니잖은가. 이제는 조금만 정보 빠른 친구들은다들 아는 얘기가 됐으니까." 선원들은 뒤에서 들리지 않게 말한답시고 소리를 낮춰 가며 속삭이고 잇엇지만, 워낙에 목청들이 좋아서 앞서 가는 내 귀에까지 다들렸다. 나는 남들 듣기에 약간 뭐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흠흠, 하며 헛기침을 해서 그들의 수다를 멈추게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뜻밖의 손님들을 많이 보게 될 거야. 기대해도 좋을 걸세." 나르디에게 할 이야기는 정말 며칠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로 많았다. 물론 들을 얘기도 그에 못지않게 잔뜩 있었다. 나르디가 세워놓았다는 숙영지(宿營地)로 들어가는 동안 우선 들은 이야기들 중에 가장 놀랄 만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 하르마탄에는 나르디 혼자 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스나미르의 가장 강력한 해군 함대인 흰 날개, '달크-하그르'가 주둔해 있으며 지상군 또한 약 4만명이 상륙하여 진을 치고 있다고 했다. "도대… 넌 호위병이 그렇게나 많이 필요하냐?" "하하하……." 음… 웃음으로 얼버무리려는 것은 예전이나 다름없군. 물론 그의손은 저절로 올라가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궁금했지만, 그가 당장은 설명해 줄 기미가 아니어서 일단 도착한 다음 다시 차근차근묻기로 했다. 어쨌든 나르디는 비록 자세한 내용까진 몰라도, 그와헤어진 이후 우리 일행의 여행에 대해 대강의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티유 선장을 룬서스로 보내서 우리와 만나도록 꾸미기까지 헸던 녀석이니까. 다음으로 내가 들은 흥미로운 얘기는, 하르얀 사건 당시에 엘다렌이 달크로즈 수복에 대단한 공을 세운 일로 해서 그리반센 가문과듀플리시아드 왕가가 동맹자이자 친우로서 대대로 친교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르디가 처음 엘다렌을 만나서 했던 말은 바로이에 대한 얘기였다. 그거 참, 엘다렌은 왜 지금까지 이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 "……." 물론 엘다렌은 지금이라고 해서 한 마디도 더 설명을 보태지 않았다. 하여간 무슨 말을 들으면 꿀꺽 삼켜 버리고 도무지 뱉어 놓질 않는단 말야. "아… 참, 국왕 폐하께서 승하하신 일에 대해서는 매우……." 내 말에 나르디는 약간 씁쓸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 바로 앞까지 도착해있었다. "나보다는 모후께서 많이 상심하셨지." 모후란 아마, 아마리에 왕비를 말하는 거겠지. 하긴… 그렇다면새로 태어날 아기는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아이가 되겠구나. 나는 망설이다가 이어 물었다. "괜찮으셔?" "응." 그는 짧게 대답했지만, 그 말에서 태어날 동생에게 영향을 끼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앗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잇엇다. 일행은 언덕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말문이 막혀 한동안 아래의 풍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게 다 네가 이끌고 온 군대란 말이지……." 그것은 천막의 바다였다. 4만 명이란 저렇게 많은 거였나……. 사각 모양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숙영지는 참호와 울타리로 둘러싸였고, 마치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하게 늘어선 천막들이 그 안에 빼곡히 자리잡고 있었다. 천막으로 이루어진 열 사이에는 마치 잘 지어진 도시처럼 십자형의 중앙로가 나 있고, 거기에서 이어져 나간길들은 사방으로 뚫린 큰 출입구 여덟 개, 그리고 그 세 배 정도 되는 숫자의 작은 출입구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숙영지의 정 중앙에 다른 것보다 크고, 푸른 천으로 된 천막이 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거기에 휘날리고 있는 깃발로 보아 그 천막이아마 나르디의 천막인 것 같았다. 전통적으로 파란색과 흰색은 달크로즈 왕가의 빛깔이엇다. 어쨌든 천막은 예전에 세르무즈에서 도망칠 때 구원 기사단이 쳤던 천막에 비해 월등 훌륭하고 컸다. 나르디의 천막을 중심으로 귀족들의 것으로 보이는 논색 천막들이 열다섯 개 가량 쳐져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천막들은 배치로 보아 아마 신분이나 목적이 다를 거라고 생각되었지만 내 눈으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는 없었다. 숙영지 옆은 절벽으로 된 거친 해안이었다. 그리로는 배를 댈 수없을 것처럼 보였다. 달크-하그르 함대의 배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 이제부터는 다시 왕이 되어야겠군." 나르디의 얼굴에는 아직도 예의 웃음이 남아 있었지만, 목소리는약간 달라져 잇었다. 그가 한 명의 호위병도 이끌지 않고 혼자서 우리를 만나러 온 아유는, 아마 다른 사람들한테 신경 쓰지 않고 맘껏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귀족이나 호위기사 따위가 그의 뒤를 따라왔다면 과연 우리가 서로 얼싸안으며 다시 만난 것을 기뻐할 수 있었을까. "내려가자." 내려가서 본 숙영지의 모습은 한층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기병들을 위한 마굿간들이 숙영지를 빙 돌아가며 세워져 있었고,숙영지 안에는 연설대와 연병장, 근처 강에서 물을 길어 오기 위한시설 등이 체계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심지어 화장실과 분뇨, 쓰레기더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효율적으로 관리되는 모습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보초들의 삼엄한 경계와 천막을 둘러싼 호위 기사들의 움직임 등도 말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폐하, 이제 돌아오십니까!" 숙영지 앞에서 낯선 얼굴의 기사 세 사람이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나르디와 우리 일행이 모습을 보자 얼른 뛰어나왔다. 그들의 뒤로완벽한 출동 태세를 갖추고 있는 백여 명의 별동대가 대기하고 있는것이 보였다. 나르디가 손을 들어 그들을 멈추게 했다. 긴 명령도 필요 없었다. 이미 모든 준비를 갖춰 둔 것인지, 우리는 금방 정면 출입구를 통해중앙 통로로 들어가 우리를 위해 세워 놓은 듯한 네 개의 천막 앞에설 수 있었다. 나르디는 우리 일행이 어떤 구성원을 가지고 있을지이미 전부 짐작하고 잇었던 모양이었다. "남자분들께선 첫 번째, 아가씨들께선 두 번째 천막, 그리고 선원분들께서 나머지 두 개의 천막을 나누어 사용하십시오. 오늘 저녁식사는 폐하의 천막에서 하시게 될 것입니다. 불편한 것이 있으시면언제든지 각 천막의 보초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굳이 따지자면 블랑디네는 아가씨가 아니라 아줌마였지만 그런것은 상관없었다. 기사들은 정중한 말투로 우리에게 설명을 마친 다음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가슴에 듀플리시아드 왕가의 흰 별이 새겨진 것이 보였다. 왕실 근위 기사인 듯했다. 우리가 각자의 천막에 짐을 풀고 나오는 동안 나르디는 다시 자신의 신분에 걸맞는 복장으로 갈아입엇다. 나는 그 동안 머리 속에서갖가지 계산을 굴려 보았다. 나르디를 만난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지만 그가 왜 여기에 와 있을까? 국왕으로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달크로즈에서도 갖가지처리할 일들이 산더미일 텐데. 더구나 적지 않은 규모의 함대와 군대를 이끌고, 이렇게, 전통적으로 본토에서 반쯤은 방치하고 있는하르마탄 섬에 와 잇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첫 번째 천막은 당연히 나와 엘다렌, 미칼리스가 사용하게 되었다. 바닷바람을 오래 맞아 얼굴이 뻣뻣해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천막에서 나와 숙영지 한쪽에 있는 세면장으로 세수를 하러 갓다.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통들이 죽 늘어놓아져 있는 곳이었다. 차가운 물에얼굴을 적시고 흔들면서도 내내 생각해 보았지만 이 이상한 상황에대한 해답은 얻을 수 없었다. 세수를 끝낸 나는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나르디의 천막으로 들어섰다. 이미 엘다렌, 미칼리서, 유리카, 아티유 선장, 그리고 함께 온선원들이 그 자리에 와 있었다. 나르디 곁에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였다. 나는 엉겹결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엘비르!" 엘비르 리안센, 티무르의 형이자 리안센 부단장의 맏아들인 그가이 자리에 나르디를 수행해 와 있었다. "……." 그는 나르디가 입을 열기 전인지라 내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다만 내 얼굴을 바로 쳐다보는 것으로 그가 나를 알아보았다는 표시를대신했다. 나르디가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내 수행 기사로 왔지. 엘비르 역시 달크로즈 수복 과정에서 공이커서 근위 기사단의 정식 기사로 내 곁에 두고 있네. 파비안과는 구면이겠군." 전에는 구원 기사단의 수련 기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르디의 말이 끝나고 그와 나는 악수를 나누었다. 기분이 약간묘했다. 그와 나는 같은 사건으로, 똑같이 동생을 잃었던 것이다. 엘비르의 단정한 얼굴은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내 얼굴을 조금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걸까. "그말고도 놀랄 만한 사람이 또 기다리고 있지." 나르디가 눈짓하자 천막 입구에서 대기하고 잇던 병사 하나가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가 데리고 들어올 사람에 대한 기대보다, 잠시헤어진 사이에 한층 왕다운 모습, 그에 걸맞은 자세를 지니게 된 내친구를 다시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는 예전에도, 왕자로서 충분한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의 눈짓 하나, 손짓 하나로 모든 것이 통제되고, 또한 그가 원하기만 하면 헤어진 친구들의 행로 정도는 충분히 미리 알아 낼 수 잇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에게선 젊은 나이에 갑자기 국왕이 된 당황스러움이나 서투름 같은 것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병사가 다시 천막을 젖히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늙수그레한 남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더라? "어……." 전혀 모르는 얼굴은 아니었다. 나는 잠시 헷갈리는 머리 속을 정리하려 애쓰면서 입을 벌렸다. 그 남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우리는 똑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마다크 에라르드!" 이게 어찌 된 일이야. 나는 내가 말해 놓고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서 주위 사람들을다시 돌아보았다. 엘다렌의 시선도 에라르드의 얼굴에 가 박혀 있었다. 마르텔리조의 배 기술자 에라르드, 푸른 굴조개 호를 만들 사람. 그가 왜 여기에 와 잇지? 내가 막 입을 벌려 질문을 하려는 찰나였다. "약속을 지키러 왔소." 에라르드가 입을 열어 한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머리 속이 멋대로뒤섞이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저 사람하고 무슨 약속을 했지? 내가뭐 잘못한 게 있었던가?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순간, 머리 속에 재빠르게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 그게……." 나는 말을 약간 더듬었다. 도무지 상황이 믿어지지 않아서다. 아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마르텔리조를 떠난 것은 키티아 아룬드였고, 지금은 점성술 아룬드. 겨우 6개월이 지났을 뿐이잖아? 겨우 6개월동안… 그 배를 만든드는 것이, 가능하기나 해? "약속을 지킨다는 얘기라면……." 내가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잇엇다. 에라르드 부녀와 당시 이면 계약한 열여섯 척의 배에 대한 일을 알고 잇는 것은 나와 주아니뿐이었다. 엘다렌도, 유리카도 이 일은 모르는데. 갑자기 이런 곳에서 사실이 밝혀져 버린다면 엘다렌은 뭐라고 생각할까? 으… 이게 아닌데. "아직 전부는 아니오." 마디크 에라르드는 전이나 마찬가지로 약간 피곤한 듯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입을 막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이야기를 다른 데로 돌릴 방법도 없고 해서 속으로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결국 그는 말하고 말았다. "아직 다섯 척뿐이오." 나 대신 다를 목소리가 대답했다. "다섯 척?" 쯔으… 유리카였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엘다렌의 얼굴을 쳐다보앗다. 에라르드 역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 사람이 왜 이러지? 분명, 내가 내 동료들한텐 모든 것이 비밀이라고 말해 두었잖아? 설마 잊어버린 것은 아닐 테고……. 물론 뭔가 따지는 것보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반가워해야 하는것이 순서였다. "어, 어쨌든… 반가워요. 프로첸 리스벳은 잘 있나요?" 그는 내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딸아이는 잘 있소. 보여 드릴 것이 있으니 이스나미르의 국왕 폐하께서만 허락하신다면 나가 보는 것도 좋을 듯하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르디를 보앗다. 나르디는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녀석, 도대체 뭘어디까지 꾸며 놓은 거야? 보여 준다는 거라면… 배? "그럼, 식사 전에 먼저 한 번 살펴보기로 할까." 나르디는 앉았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우리더러 함께 나가보자는 듯한 몸짓을 했다. 결국 모두는 천막 밖으로 나가 바로 앞에펼쳐진 해안을 향해 걸어갔다.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분명, 절벽 위에서 숙영지를 내려다보았을 때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분명히 보였다. 거대한 배, 수십 개의 돛 모두에 금빛 달무늬가 그려진……. 거대한 법선 다섯 척이 해안가에서 1백 큐빗 정도 떨어진 바다 위에 둥실 떠 있었다. "어, 어떻게……." 바닷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나르디는 웃었다. 녀석은오랜만에 우리를 만나더니, 마치 예전에 나와 처음 만나던 때처럼하루 종일 그치지 않고 웃어 대고 있었다. "에라르드 씨의 선물이야." 결국, 우리 모두는 상황을 알게 되었다. 아티유 선장이 우리를 찾아온 이유도. 나는 엘다렌의 눈길을 피하며 슬금슬금 나르디의 뒤편으로 움직여 갔다. 나르디 녀석이 얘기에 나오는 왕들처럼 거대한 망토라거나그런 것을 걸치고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엘다렌은 아직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도무지 그가 무슨 얘기를 꺼낼지 짐작할 수가 없엇다. 유리카는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으… 음… 주아니가 내 변명을 해 줄까? 아니, 이렇게 사람이많은데, 얼굴을 내밀 리가 없지. "저기, 놀랄 만한 사람이 하나 더 오는걸." 나르디의 말대로 절벽 해안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수십 명의 사람들이 걸어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조금 더 다가오니 얼굴들이 보였다. 그들 가운데 앞장 서고 있는 사람은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이번엔 아티유 선장이 나보다 먼저 커다랗게 외쳤다. "페스버스!" 그리고 그 사람도 똑같이 마주 외쳤다. 그 역시 이 곳에서 그를 만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아티유! 이 친구, 여기 있었나!" 아티유 선장이 한 달음에 달려가 그의 손을 움켜잡는 것이 보였다. 푸른 굴조개 호의 다른 선원들도 우르르 달려가, 각자 아는 사람들의 어깨를 얼싸안으며 놀라움과 기쁨의 인사를 나누었다. 대부분 아는 사이인 것을 보니, 페스버스가 이끌고 온 사람들은 모두 마르텔리조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페스버스, 저 사람이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 글허다면다른 사람들 모두……. 에라르드가 천천히 말하고 있었다. "페스버스 선장이 1호선을 맡고 있소. 배 이름은 선주님들께서 짓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소이다. 명명식 없이 항해를 시작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현재는 1호선, 2호선 하는 식으로 부르고 있소." 사람은 많았다. 그들 중에는 청어대가리 여관에서 얼굴이 익은 사람도 있었고, 카메이노의 경매 자리에서 떠들던 사람도 몇 있었다. 딱히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하여튼 그랬다. 갑자기 내가 마르텔리조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모두 어떻게 국경을 넘어서… 온 거죠?" 설마 우리들처럼 불법 입국일 리는 없고, 그렇다고 이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망명을 한 것도 아닐 테고…. 둘 다 아니라면 세르무즈의 국왕 폐하가 이 많은 사람들이 배를 이끌고 이스나미르로 가도록허가를 해 줬단 말이야? 뭔가 믿어지지 않는데. "다 방법이 있었지. 불법으로 온 것은 아니니 안심하시오." 페스버스는 그을린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대답한 다음, 곧 스트라엘 등의 어깨를 두드리기 위해 성큼성큼 걸어 올라왔다. 상황은 대강 짐작이 갔다. 나르디 녀석이 배를 전달해 주기 위해우리 일행을 찾던 사람들을 이리로 오도록 꾸민 것임에 틀림없었다. 정확히 어떤 과정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아티유 선장이룬서스로 온 것과 비슷한 방법이었겠지. 페스버스를 뒤따라 온 선원들은 곧 몰려와 엘다렌을 둘러쌌다. 미칼리스는 곁에서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난쟁이 친구의 인기가 엄청난데." 나도 알고 있었다. 제발 저걸로 기분이 좋아져서 날 용서해 주길간절히 바랄 뿐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선주님! 저, 저번에 푸른 굴조개 때 선원 모집에서 탈락한 녀석입니다! 이제 이렇게 선주님으로 부를 수 있게 되어서 기분이 썩 좋습니다!" "선주님, 저 기억하십니까? 그 날 새벽에 제일 먼저 만세 복창하자고 소리치던 녀석입니다!" "청어대가리의 프로첸 이니에가 안부 전해 달라면서 최고급 흑맥주를 열 통 보냈습니다! 청어대가리의 흑맥주라면 죽여주지 않습니까? 오늘 저녁엔 파티, 어떻습니까?" "지금 마르텔리조가 얼마나 잘 되어 나가고 있는지 모르시죠? 완전히 새 도시가 되었습니다, 새 도시가! 도와 주겠다는 유지들도 많이 생기고요! 이게 모두 선주님께서 희망을 주신 덕분입니다!" "그럼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선주님이 주신 희망이 점차 불어나서 도시를 가득 채운 겁니다!" 왁자지껄한 목소리들은 예나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나르디 뒤로 도망친 나까지 다자고짜 끌어 내어 신나게 손을 잡고흔들어 댔다. 유리카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왕이된 나르디한테 이런 식의 반가움을 표시할 수 없게 되자, 꿩대신 닭이라는 건지 까닭 없이 미칼리스까지 요란스럽게 반가워했다. 미칼리스는 자신이 졸지에 마르텔리조 사람들의 영웅이자 친구로 급부상한 것에 대해 당황한 나머지, 문틈에 잘못 끼어 오도가도 못 하게된 사람처럼 불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에라르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 달 안으로 세 척의 배가 더 도착할 것이오. 그러면 남은 배는 모두……." 나는 재빨리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커다랗게 소리쳤다. "아, 알았어요! 여러분들의 호의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만나게 된 것도 반갑고, 또 이 곳까지 온 수고에 대해서도……." "감사해야겠지." 드디어 엘다렌이 입을 열어, 내 말은 가로막혀 버렸다. 무슨 말을꺼낼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엘다렌은 첫마디를 꺼낸 뒤 잠시 가만히 있다가 다시 말했다. "모두 만나게 되어 반갑다. 그러나 저 배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배를 산 일이 없다." 에라르드가 다시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파비안 크리스차넨 님의 이름으로 된 계약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자." 으으… 드디어 비리가 완전히 밝혀지는구나. 에라라드는 미리 준비해 온 듯 품속에서 원통형의 좁은 통을 꺼내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서 동그랗게 말린 계약서가 나왔다. 그 때 분명 대강대강 즉석에서 만들었던 그 계약서가 틀림없는데, 어찌 된일인지 종이는 금박이 박힌 훌륭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되고 보니 거기에 쓰여진 내 글씨도 꽤 달필처럼 보였다. 계약서는 엘다렌의 손으로 건네졌다. 그가 묵묵히 계약서를 읽는 동안, 나는 숨을 죽이고 그의 얼굴을살폈다. 분명, 그는 한 푼도 깎지 않고 150맘 메르장을 그대로 내겠다고 말했었다. 그의 심각할 정도로 강한 자존심을 생각했을 때, 과연 그냥 넘어갈 수 있을는지……." "흠, 별 문제 없군." 그래서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을 때, 나는 그가 벌컥 화를내는 것 이상으로 놀랐다. "그렇습니다. 전혀 하자가 없는 계약서입니다." 에라르드는 침착하게 대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입을 열지도 못하고, 그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이 상황이 어떻게 된 일인가생각하려고 애썼다. 엘다렌은 이어 말하고 있었다. "파비안의 이름으로 된 계약서니, 나와는 관계없다. 나는 배를 산일이 없지만, 파비안이 배를 샀군." 저게 무슨 소리야? "열여섯 척이나 되는 배의 선주라, 그걸로 상단(商團)을 창립해도 되겠는걸. 축하라도 할 일인가?" 나는 엘다렌이 나를 놀리는 것으로 알고 소리쳤다. "엘다렌, 그런 식으로 놀릴 것까지는 없잖아요! 제가 잘못했지만,그 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계약서는 유리카의 손으로도 넘어갔다. 그녀는 한참 계약서를 들여다보고 나서,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맞는 말이네 뭐. 파비안, 부자가 됐네?" 이, 이, 이게 무슨……. 나는 엉거주춤하게 손을 벌린 채 엘다렌과 유리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선원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엘다렌은 다시 사이를 두었다가, 아주 확고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배는 네 거다, 파비안. 네가 샀으니 네 거다." 나는 결사적으로 항변했다. "저한테 돈이 어디 있어요!" "돈은 이미 지불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엘다렌이 에라르드를 쳐다보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돈은 모두 지불되었습니다." 엘다렌은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보며, 남의 말을 전하기라도 하는것처럼 말했다. "그렇다는군." "……." 선원들은 우리 사이의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도그럴 것이 마르텔리조에 있을 때도 돈을 낸 것은 엘다렌이었는데 우리 모두가 '선주'였지 않느냔 말이다. 따라서 이번에도 그들은 우리모두를 -심지어 미칼리스까지- 똑같은 선주로 간주했다. 나르디가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얘기가 잘 된 것 같군요. 그럼, 이만 안으로 들어갑시다. 여러분들을 위한 멋진 만찬이 준비되어 있을 테니까요. 국왕이 베푸는 만찬이니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나르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왁자한 환호성이 하늘을 뒤덮었다. 사람들이 모두 움직여 숙영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유리카가 다가와 눈을 찡긋하며 팔을 툭 칠 때까지,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열여섯 척, 그 배가 내 거라고? "바보, 엘다렌이 네 마음을 몰랐다고 생각해? 너, 처음부타 마르텔리조로 배를 찾으러 갈 생각 따위는 없었던 거잖아. 그 사람들한테 그냥 다 주고, 잊어버릴 생각이었던 거 아냐. 착하게 마음을 써서행운이 돌아왔다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들여." 유리카는 생긋 웃으며 다시 팔을 잡아끌었다. 엘다렌은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착하게 마음을 써? 내가 그랬던가? 유리카는 이윽고 한 마디 더 함으로써 안 그래도 혼란한 내 머리속에 마지막 결정타를 가했다. "나도, 이왕이면 부자 남편이 좋단 말이야." 아무래도 내가 충격에서 회복되려면 3박4일은 넘게 걸릴 것 같다. 나르디가 베푼 만찬은 야외에서 진행되었다. 바람이 좀 불었지만네 개나 되는 모닥불은 잘도 활활 타올랐다. 그 중의 한 모닥불에 나와 유리카, 미칼리스, 엘다렌, 주아니를 포함한 우리 일행과 나르디,아티유, 에라르드, 페스버스 등이 둘러앉았다. 청어대가리 여관의 이니에 히르카이에가 보낸 흑맥주의 맛은 기가 막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변질될 것을 고려해서 적당히 숙성될 날짜까지 맞췄다는 얘기가 정말이었나 보다. 물론, 선원들 특유의 허풍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만. 거기에 거대한 돼지 통구이들이 지글거리며 구워지고, 럼주를 넣어 건조시킨 팔뚝만한 소시지들과 새끼돼지의 넓적다리뼈가 그대로든 맛 좋은 햄, 버터를 발라 구운 옥수수나 훈제 연어, 구운 조개 등각종 음식들로 푸짐하게 나왔다. 접시마다 과일도 그득그득했다. 보고 있자나 달크-하그르 함대가 전부 먹을 것만 싣고 온 것은 아닌가의심스러워질 정도였다. "그러니까, 마르델리조와 그 근처 도시들의 배 만드는 인력을 모조리 다 동원해서 저 배들을 만드셨단 말씀이군요?" 마고랭 에라르드는 겉으로 보기에 늘 침울한 얼굴에 말씨는 느릿느릿, 꽤 답답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에게 맡겨진 일만은무슨 수를 써서든 사력을 다해 해치우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새삼 알게 되었다. 푸른 굴조개 호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물론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의 책임감은 내 예상 이상이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위해 그는 무리를 해서까지 자신의 자금과 인맥으로 동원할 수 있는모든 기술자들과 조선 자재를 집결시켰고, 완성된 배들을 인계하기위해 양국 국왕의 도움까지 얻어 이 곳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나는 그를 잘못 보아도 한참 잘못 보았다. 그는 결코 반쯤 사기치듯 얼렁뚱땅 만들어 낸 내 계약서에 얌전히 고개만 끄덕인 다음 돌아서서 자기 이익이나 챙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로 내게 배를가져오다니, 어찌 보면 나는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그러니까 하스벳의 그 온화한 듯하면서도 단호한 성품도 아버지를 닮은 것이었나 보다. 나는 에라르드의 무표정한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거 참,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장인 정신이란, 확실히 무서운 거다. 함부로 나 같은 사람이 몇 마디 하는 것으로 흐트러뜨릴 수 있는 단순한 게 아니란 말이다. 하긴그러니까 세르무즈 안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조선 장인이 되었겠지. "당연한 거요. 마르텔리조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약간 무안한 침묵을 뚫고 불쑥 말한 것은 페스버드였다. 그는 날카로운 눈매와 하얗게 센 머리카락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오늘은 꽤기분이 좋은지 부드러운 얼굴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위스키잔을 손아귀 힘만으로 부숴 버리던 그를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아직도 그가 약간 어려웠다. "참, 마디크 카메이노는 어떻게 하고 있지요?" 오랜만에 우리들 사이에서는 마브릴들의 호칭이 엘라비다 식 호칭과 뒤섞여 쓰이고 있었다. 그는 기분좋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유리카의 질문에 대꾸했다. "어떻게 하긴. 그냥 그렇게 지내고 있다오. 그 때 실패로 꽤 오랫동안 웃음거리가 되긴 했지만, 워낙 돈 있는 양반이 돼 놔서 함부로대놓고 어쩌지는 못하지. 사업도 그럴저럭 번창하고 있다고 하고. 다만 그 일 이후로 배라면 아주 치를 떤 다오. 어찌 보면 요즘 마르텔리조에서 새로 부흥의 조짐이 보이고 있는 조선업에 투자할 좋은재산가를 하나 잃은 셈인데." 물론 패스버스의 말은 농담이었다. 에라르드뿐 아니라 다른 누구라해도 카메이노를 위해서 배를 만들어 주고 싶어하진 않을 테니까. "프로첸 이니에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유리카의 말에 이번엔 내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 프로첸이라면 절대 여관을 버려 두고 여기까지 오지 않을걸. 나라도 큰사슴 잡화가 멀쩡했더라면 결코 그 가게 버리고 여행을 떠나진 못했을 거야. 프로첸 이니에나 나처럼 장사하는 사람들은 하루라도 가게를 떠나 있으면 그 날 올릴 수 있었을 매상이 머리 속에서계속 맴돌기 때문에, 절대 맘 편히 가게문을 못 닫지." 후훗, 그러고 보면 여행하는 동안 만난 이들 중 나와 가장 닮은 사람이라면 바로 그녀, 이니에 히르카이에였는데. 페스버스가 덧붙여 말했다. "요즘 가게 일말고도 그녀가 바쁜 일은 또 있소. 내가 항해를 준비하게 되면서 엘다렌 선주님께서 맡기신 돈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게 된 것도 그녀고, 거기다가 무슨 마르텔리조 부흥회인가 하는 데서 회장을 맡았거든. 정말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눈코뜰새없이 바쁘게 사는 프로첸이야." 나는 이니에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그 모습이 눈앞에 선해서 다시한 번 피식 웃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마르텔리조도 꼭 다시 찾아가 보고 싶었다. 물론 그말고도 세르무즈엔 갈 곳이 많지. 곧 드워프들로 가득 차게 될 파하잔도 가 볼 테고, 꽃의 수도 하라시바 구경도 새로 처음부터 해야 하고, 바르제 자매들과 프론느 헤르미를 보러 마리뉴 근처의 그 기분좋은 저택에도 가야지. 별과 검의 노래 호 선원들과 술을마시던 앙글라제 시도 기억에 남는 곳 중 하난데. "어쨌든, 정말 많이 놀랐어요. 갑자기 이렇게 만날 줄은 상상도못 했거든요." "그건 이쪽도 마찬기지요. 아티유, 이 친구가 여기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었고, 그보다 이분께서 이스나미르 국왕 폐하라는 데에또 놀랐고 말이요. 아직도 폐하를 처음 뵈었을 때에 기겁하여 소리지른 일은 잊혀지지가 않는군." 페스버스가 그만큼 놀랐다면, 다른 사람들은 더 했을 것이다. 그의말에 동의한다는 것처럼 아티유 선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나는 또 궁금한 것이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금방 나르… 아니, 폐하를 만나 뵐 수가 있었죠? 이만한 함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는데 세르무즈의 국왕 폐하께서 금방 허락해 주시던가요?" "물론 그럴 리가 없지. 공주 전하께서 도와 주시지 않았다면……." 아티유 선장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보다도 먼저 유리카가 다그쳐 묻고 있었다. "공주 전하요? 잔-이슬로즈 공주 전하 말씀이세요?" "공주 전하께선 세르무즈로 돌아가셨나요?" 아티유 선장과 페스버스 선장, 두 사람의 뱃사람은 의아한 표정으로 우리 둘을 펴다보더니 말했다. "우리 공주 전하를 알고 계시오? 그분은 또 언제 뵈었소? 아, 이스나미르 국왕 폐하와의 친분 덕택에 달크로즈에 가셨었소?" "……." 복잡한 설명을 하려니 상황이 애매했다. 달크로즈에서 있었던 짧은 반란 사건이 마브릴 족들에게 알려져 있는지도 확실치 않고…. 나르디가 웃으면서 나를 보더니 말했다. "조금 있으면 알게 되네. 아, 이슬라 공주 전하는 아직 세르무즈로 돌아가지 않으셨어. 어쨌든 그 문제는 잠시 후에 설명해 주지. 물론 이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한 데에는 공주의 배려가 컸지." 잔-이슬로즈 공주가 세르무즈에 돌아가지도 않았는데 뭘 어떻게도와 줬다는 것인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따가 설명한다는 말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푸짐한 음식에, 술까지 마시고 나니 배도 부르고 졸음이 쏟아졌다. 나르디가 일어나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을 부르더니 피곤한 사람들을 각자의 천막으로 안내해 주도록 지시했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흩어져 가고 있는데, 나르디가 가볍게 손짓을 해서 나를 불렀다. "파비안, 유리카하고 엘다렌, 그리고 저분, 미칼리스라는 분만 잠시 남도록 얘기해 줘. 따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거든." 그렇게 해서 주아니까지 모두 다섯이 꺼져 가는 모닥불 주위에 남았다. 캄캄한 하늘 위로 붉은 재가 휘날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섰는데, 나르디가 몇 가지 처리할 문제들을 지시한 다음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어색하게 웃었다. "물론 다들 피곤하시겠지만,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 잠시 남으시도록 부탁드렸습니다. 잠시 저와 함께 좀 걸으십시다." 바람은 밤이 갚어질수록 강해졌다. 일행은 숙영지를 벗어나 절벽 안쪽으로 이어진 숲 사이 오솔길을걸었다. 다들 말이 없었다.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 나르디 역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건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에대해서도 역시언급이 없었다. 날이 밝으려면 한 시간 정도 남았을까? "춥군." 그 말은 그 표현에 가장 어울리지 않을 미칼리스가 꺼낸 말이었다. 엘프는 우리들보다 추위를 타지 않을 텐데. 그러나 그는 정말 추운것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살이 있는 자들 사이에도 한기가 도는군." "아아." 앞서 걷고 있던 나르디가 마치 그 말을 알아들었다는 것처럼 기척을 냈다. 규칙적으로 나고 있던 발소리가 문득 약간 엇갈렸다가 다시 고르게 나기 시작했다. 램프를 들고 걷는 나르디를 보니, 융스크-리테의 지하에서 엘다렌한테 램프를 얼결에 넘겨받고도 불평 없이 열심히 들고 다니던 그가떠올랐다. 지금도 그 때처럼 캄캄했지만, 이번엔 하늘에 덮힌 커다란 가마솥 뚜껑에 빛 구멍들이 잔뜩 뚫려 있었다. 우측으로 이어지던 둔덕이 점차 높아지더니 이윽고 바위 절벽으로 변했다. 어디선가물소리가 들려 왔다. 나르디는 약간 서두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불쑥 물었다. "누구 만날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아아, 지금 안부를 물으러 가는 중이야." "뭐?" 이 황량한 땅에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안부를 묻는단 거야? 아는 사람이 이 근처에 살기라도 하나? 나르디는 조금 후에 덧붙였다. "자네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네." 수수께끼라도 내는 건가. 내가 아는 사람이 하르마탄에 와 있을 까닭이 없었다. 나 스스로가 이 섬에 오는 것이 평생 처음인데, 아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잖아? 혹시 마법이라도 쓰나? 스노이안이 썼던 것처럼 멀리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쳇, 나르디한테 그런 능력이 있을 턱이 없잖아. 그렇게 걸어서 드디어 우리는 물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도착했다. 우리 모두는 어느 새 높아져 버린 곳을 걷고 있다가 눈앞에 나타난벼랑을 보고 멈추어 섰다. "수영하기엔 추운 날씬데." 미칼리스는 움츠렸던 목을 펴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하더니 앞서몇 발짝 걸어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였다. 캄캄해서 잘 보이진 않지만 저 아래 강이 흐르는 듯했다. 물론 수영하자고 데려온 것이 아닐 거란 건 안다. 이제 그만 이유를 얘기해 줘도 좋을 텐데. "잠시 앉을까요?" 그리하여 우리는 다들 망토를 들쓴 채 절벽 위에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물 소리는 매우 가깝게 들렸다. 절벽이 생각만큼 높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선 말 없이 먼 곳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과 귀를 피하기 위해선 멀리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무슨 소린가 싶어 되물었다. "야, 누굴 만난다면서?" 나르디는 나를 보더니 미소지었다. "물론, 그 이유도 있고, 다른 할 얘기도 있다네." 유리카가 잠깐이라도 불을 피우자고 제안했고, 준비는 엘다렌과내가 도맡았다. 주위에는 마른 잔가지나 관목이 많아서 바람만 아니라면 불 피우기엔 좋은 조건이었다. 잠시 수고한 끝에 우리 눈앞에조그마한 불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며 나는 자리에 앉았다. 다시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여러분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르디가 갑자기 침묵을 깨며 불쑥 말을 꺼내자 불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들이 전부 그의 얼굴로 옮겨졌다. 엘다렌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왜 가는지도 아는가." "물론……." 나는 나르디가 말을 꺼내는 것을 들으며 그가 진짜 아유를 알고있진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엘프와 드워프를 되살리기 위한 의식에 대해서 알고 있을 뿐이겠지. 그렇지만 그 의식을 행할 장소가 여기란 것은 어떻게 알았지? "…저는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아주 중요한 일을 하시기 위해서… 그 곳으로 가사고 있다는 것만은 압니다." 나르디는 말을 멈추고 잠시 호흡을 고르는 것처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실… 그 까닭들은 굳이 제가 알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당연히 돕겠습니다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제가참견할 필요는 없는 일이지요. 제가 여러분께 드리려는 말씀은 그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장소이지요." 미칼리스가 처음으로 침묵을 깨고 기척을 냈다. "장소라니? 그 장소를 알고 있소?" "하르마탄의 예모랑드 영지, 피아 예모랑드 성이지요. 그 이상의것은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리카가 말했다. "그 성이, 무슨 문제가 있는 건데?" 이번 침묵은 길었다. 나르디는 어려운 말을 하기 위해 주저하는듯했다. 새벽이 밝기 직전, 밤의 마지막 자락은 칼날처럼 차가웠다. 하룻밤 중 가장 추운 때다. 절벽 위는 바람이 몹시 세찼다. 잠깐 바람이 자려는 순간, 그의 낮아진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아르킨 나르시냐크 단장이 그 성에 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는 고개를 퍼뜩 쳐들어 나르디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는 좀 전부터 이미 나를 보고 있었던 듯했다. 아버지가 피아 예모랑드 성에? 물론 그 곳은 아버지의 영지이니만큼 그 곳에 아버지가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나르디는 그 이야기를 저토록 심각한 얼굴로 하는 거지? 그리고, 아버지는 구원 기사단을 두고 어째서 이 곳에 와 계시다는 거야? "구원 기사단은?" 저절로 내 입에서 그 말이 튀어 나왔고, 나르디는 씁쓸한 표정으로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치 아라스마드 샘에서 미칼리스가 지었던 rm표정처럼, 유리카가 지었던 그 표정처럼. 네 녀석에겐 어울리지 않아. 세상에 지친 그런 표정은…. 막중한책임을 요구하는 자라에 앉게 되면서 생긴 고민들 때문인 거니? "역시,그 곳에 주둔해 있네." "어떻게 된 거야?" 이번엔 나보다 유리카가 먼저 물었다. 내가 이어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어? 어째서 님-나르시냐크가 아닌 그 곳에 가 있다는 거야? 아버지 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기사단은 수도를 지켜야할 임무가 있잖아?" 이제 나르디의 얼굴은 단단히 굳어져 있었다. 그게 차가운 바람탓인지, 다른 변화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곤내 얼굴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나… 다시 한 번 시험당할 것 같은생각이 들어. 너와 나 사이의 시험… 이렇게 되면 네 번째인가? 네 눈, 왠지 모르지만 슬퍼 보여.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함대와 군대를 이끌고 이 곳까지 와 있는 거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은 잘 보이지 않는 절벽의 바닥을 더듬고 있었다. 깊지 않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눈앞의 모든 것의 이상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 상황은… 뭐가 어쨌다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엘다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란인 건가." 반… 란……? 나르디의 입술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다면? 알 수 없는데, 너는 저 많은 군대를 이끌고 여기까지 와 있다는 겨냐? 명백히, 너는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데? "속단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 구원 기사단은 왕가의 허락없이 님-나르시냐크를 이탈하여 이 곳, 하르마탄까지 왔으며 이 행동에 대한 어떤 사후보고도 없었습니다. 구원 기사단의 총 병력은견습 기사를 제했을 때 1천 3백 가량, 견습 기사의 숫자는 그보다좀더 많겠지만 그들은 대부분 이 곳까지 이동하지 않고 님-나르시냐크에 남아 있습니다. 현재 피아 예모랑드 성에 있는 구원 기사단은약 1천 5백에 조금 못 미치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기사들이 이끌고 온 병사들과 예모랑드 영지에 있던 병력을 합한 숫자는 약 8천이상으로 짐작됩니다. 도합 약 1만 가량의 병력이 피아 예모랑드 성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전황을 보고하는 전령처럼 기계적으로 말을 마쳤다. 그런 다음 누군가의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잠자코 모닥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빛이 너울대는 흰 뺨과굳게 다물어진 입술의 윤곽,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그리는 곡선들을내 감각 속으로 받아들였다. 조각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그와 똑같이 움직이지 않는 다른 동료들 사이에서 모닥불만이 이리저리 춤을추고 있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야,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뭐지?" 측면으로 보이는 그의 입술이 약간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그는나를 보지 않았다. 내게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감정을 알았고, 그에게서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내가… 그 곳으로 가면 반란에 가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거냐?" "……." 다시 바람 소리만이 한참 동안 절벽을 울렸다. 동편 하늘에서는점차 날이 밝을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캄캄하기만 하던 시야에 붉은 기운이 조금씩 번져 갔다. "나는 까닭을 모르겠어. 아버지가 그럴 이유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해. 아버지가 왜 반란을 일으킨다는 거야? 듀플리시아드 왕가에반기를 들 이유가 어디 있지? 오랜 전통을 가진 구원 기사단의 단장이고, 얼마 전에는 자신의 아들에 대항해서… 달크로즈를 구하기도했잖아? 하르얀은 죽었어… 그걸로 끝났잖아. 모든 것은 그걸로 됐잖아……." 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정말로 아버지가 반란을 일으킬 이유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버지는, 아버지는 하르얀 때문에 그러시는 걸까? 아냐… 그럴리가 없어…. 하르얀은 분명, 구원 기사단을 저주하고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것 때문에 아버지가 똑같이 무모한 일을벌이신다고? 그럴 리가, 그럴 리가……. "나르디, 뭐라고 말을 해 봐……." 나르디가 약간 고개를 돌려 나와 엘다렌 사이로 뚫린 검은 허공을쏘아보았다. 뭔가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한참 동안 캄캄한 허공이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대로, 꼼짝 않고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겠어." 그의 대답이 한참 만에 울렸지만,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같은 기분이었다. 여전히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르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솔직해지자. 아르킨 단장은 이미 예전부터 왕가와 그다지좋은 관계가 아니야. 그건 사실 구원 기사단이라는 조직 자체와 왕가 사이의 관계에서 파생된 문제이기도 하지. 이미 정규 군대를 위협할 정도로 커져 버린 기사단과 왕가 사이의 오랜 알력의 문제란말이네. 국왕조차 참견할 수 없는 내규라고 했나? 이미 내 할아버지께서 재위하시던 때부터 왕가에서는 구원 기사단에게 더 이상 기사의 숫자를 늘리지 말도록 권고해 왔었네. 그러나 그들은 수도 방위를 책임진다는 명목으로 여전히 수련 기사를 받고, 정식 기사를 늘려 지금의 규모에까지 이르렀지. 수련 기사와 휘하 모든 병력을 합하면, 구원 기사단의 규모는 블루 카운티 전체 주둔군의 두 배에 달한다. 달크로즈가 속한 블루 카운티는 전국의 카운티 중 가장 많은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지역인데도 그런 상황이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나르디의 목소리에는 열기가 어렸다. 열병환자의 열에 들뜬 목소리처럼 뜨거운 입김으로 가득한 목소리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르킨 단장을 봐 왔지.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에는 멋진 검사이자 기사로서 존경했던 시절도 있었다." 감정은 점차 거칠어졌다. 좁고 고요한 절벽 위에서 파도처럼 강렬한 감정의 뒤얽힘이 몰아치고 있었다. "한때, 나는 네 아버지에게서 검을 배운 일도 있어." 아버지에게서……? 나르디의 허리에 예의 시미터와 검은 날의 숏소드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저 검을, 아버지가 가르쳤다고? "물론, 잠깐뿐이었네. 열 살도 되기 전의 이야기지. 내가 네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은 한 손 대검을 쓰는 법이었지만, 나는 그 후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운 검술을 더 애용하게 되었지. 그에게 검을 배운 것은 약 반년 정도였어. 그때는 락샤미야 의식을 치르기 전이라태자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하나뿐인 왕자의 검술 스승으로 대륙에이름이 자자한 검사를 들였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그 때는 기사단장도 아니었고 말이네. 기억하건데, 참으로 엄격하고도 잔인한 스승이었지." 나르디는 특별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소르는 딱딱했고, 마지막 음절들은 분명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아르킨 단장을 오랫동안 알아 왔지. 어쩌면 너보다 더 그를잘 알지도 모른다네. 나는 그가 얼마나 두려운 사람인지 전에도 알았고, 지금도 알고 있네." 그는 말을 끊었다. 그리고 드디어 모닥불에서 시선을 돌려 뭔가를찾아 내려는 것처럼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층 단호해진 그의 목소리가 내 귀 속을 파고 들었다. "충분히, 그럴 이유는 있어. 아직은 증거가 없을 뿐." "……." 그러나 그의 그런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니라고 소리치거나, 말도 안 된다고 화를 내지 못한 채 그저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 하나뿐인 핏줄인 아버지다. 비록 만난 지는 1년이 채 안 되어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해도, 나는 그를 안다고 생각했다. 엘다렌이 입을 열어 말했다. "아직은 모른다고 했나. 그렇다면 그것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굳은 심증이 있다 한들, 누구도 그 아들에게 확실한 증거없이 아버지를 의심하라고 말하지 못한다. 가서 확인하기 전에는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일이다." 미칼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라비다 족의 왕이여. 당신은 지금 우리가 그 곳으로 가서, 아니 그보다 파비안이 그 곳으로 감으로써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즉, 당신을 배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미칼리스의 긴 금발은 모닥불의 붉은빛에 물들어 한층 엄숙하게빛났다. 미칼리스와 나르디는 똑같은 금발이었지만 풍기는 느낌은많이 달랐다. 한 명은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 잊혀진 종족, 엘프이다. 나르디의 금갈색 눈동자가 약간 흔들리는 듯했다. 대답보다 바람이 먼저 길게 끌리는 비명을 남기며 스쳐 갔다. 이윽고 그는 대답했다. "그 대답은 파비안에게 넘기고 싶군요. 아직 저로선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엘다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째서인가. 친구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인가?" "아닙니다. 친구의 마음을 제멋대로 속단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이 될 수 없으며, 그의 마음은저의 마음이 아닙니다." 해가 뜨려는 절벽에는 점차 거센 바람이 불었다. 마지막 순간 해는 어김없이 떠오를 텐데도, 인간의 희망을 속이려는 것처럼, 그렇게 바람은 끝나지 않는 밤 가운데 불고 있었다. 바람은 피리를 분다. 한 번, 더 길게… 단지 그 누군가의 귀에만 들리는 피리를 분다. "파비안, 나는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네. 네 길을 막으려는 것은아니야. 내게는 그럴 자격이 없지.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 행동이가져올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네. 그래, 자네의아버지에 대한 문제다…. 내가 자네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이스나미르의 국왕일 뿐이라면 당연히 자네를 잡아야 하겠지. 아니, 어쩌면 벌써 반역자로 체포해야 했을지도 몰라. 그리고 실제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을테고,자네는 계획대로 피아 예모랑드 성으로 가서 아르킨 단장을 만날테고, 그 다음엔 어쩌면 정말로, 그를 돕게 될지도 모른다…그렇다고는 하지만, 나는, 나는……." 나르디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하기 어려운 말이 그 입에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것을 배신이라 부르지는 않을 생각이야." 한때, 나는 그가 국왕으로서 더없이 어울리는 자라고, 필요하다면모든 개인적인 가책을 무릅쓰고라도 해야 할 일을 해낼 거라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수많은 것을 희생하고라도 의무를 다할 책임과 소질을 타고난 사람이엇다. 아마도,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러나… 그는 또한, 친구로서도 더없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너는 어째서 그렇게 나를 특별하게 대우하는 거냐…. 어째서 나는 네 모든 기준 밖에 서 있는 거지……?" 나르디는 가만히 내 눈동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왜 네가 내 '친구'냐고 묻는 건가?" 눈가가 아파 오는 듯했다. 바람이 눈을 찢을 듯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나는 눈을 잠시 감았다. 어떤 끝에 와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와 닿았다. 그와 나의 우정 가운데 몇 번이나 닥쳤던 위기들의 마지막이자, 또한 가장 중대한 벽 앞에 부딪친 채로 우리는 마주 보고 있었다. 결정은 눈 앞에 있었다. 참으로 힘든 우정을 지켜 왔었어. 너와 나는 타로핀의 달에 우정을 약속했었지. 그 달의 이름에 맞는 신뢰를 쌓았고, 너도, 나도, 힘들여 그것을 지켰어. 왜 나의 동생,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내게 몇 안 되는 소중한 핏줄들은, 매번 네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걱일까. 꼭 그렇게 되어야만 했던 것일까. 본래부터 이렇게 되도록준비한 것은 누구지? 왜 너와 나는 그 날의 그 여관에서 만나게 되었던 걸까? 만일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네게 있어 다른 사람과 똑같은 타인에 불과했을 텐데. 네게 한 번의 고민조차 줄 필요가 없었을 텐데. 왜 너는 태자이고, 그리고 왕이어야만 하는 거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 아픈 기억 따위는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너도, 나도,서로를 상처 입히는 일 따위, 좋아하지 않잖아. 몇 번이고 의심하고, 다시 용서하고, 희생을 필요로 했던 그 모든일들……. "함부로 친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이름에 걸맞는 행동을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 그 이름의 굳고도 무거운 가치에 맞는 행동을 늘 해낼 수 있는 자가 과연 세상에 몇 명이나 있단말인가? 매번의 삶은 이렇듯 위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미칼리스는 말하고 나서 고개를 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동편 하늘로 보냈다. 허공에는 가느다란 빛선들이막 번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무거워. 친구라는 이름은 오래 가질수록 무거워. 그리고 너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너의 권리를 희생하려고 하고있어…. 아냐, 아니야. 너는 그래서는 안 돼. 너는 왕이야. 이 나라의 국왕이야. 그리고 그 나라는 나의 나라이기도 해. 너는 나라를 위해서 반드시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있어. 아프더라도 꺾어 버려야 할 것이 있어. 나의 나라, 내 어머니의 나라, 내가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나라. 그 나라를 지키고 대표하는 네가, 결코 그렇게 쉽게 약해져서는 안 되는 거야……. "나르디, 그런 약속은 온당치 못해. 나는 그 약속을 받아들이지않겠어." 그는 내 말에 반박하거나 대답하지 않은 채,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내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국왕은… 결코 그런 것을 쉽게 약속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닐 거야. 나는 적어도 그렇게 알고 잇어…. 나는 네 친구이지만 또한 이나라의 국민이기도 하니까…. 그래, 나는 그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아. 약속은 내가 하겠어." 붉은빛의 선들이 검푸른 하늘을 뚫고 두터운 구름을 가르며 퍼져나갔다. 광채의 강을 검은 새들이 날아 건너고 있었다. "나는 돌아오겠어. 반드시, 내 임무를 끝내면 네 곁으로 돌아오겠어. 결코……." 그리고 내 입에서도 힘든 말이 나오려하고 있었다. "…그 누구를 돕기 위해, 네게 검을 들이대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어. 어머니께서 물려준 내 이름과, 2백년 전의 대마법사가 물려준아룬드나얀을 걸고, 이스나미르의 국왕 나르디엔 루아 듀플리시아드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거다." 내 일생에 아룬드나얀을 걸고 한 맹세는 이것으로 두 번째였다. 내 눈에 비친 그의 금갈색 눈동자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내게서 얼굴을 약간 돌려 절벽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와 내가 맞닥뜨렸던 두터운 벽. 벽은 문일 수도 있어. 그 문을열고 나가지 않으면 안 돼. 어느 쪽이 되었든 간에. 그리고 이번엔 나야. 나는 그것을 알 수 잇어. 나는 그가 훌륭한국왕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모든 것을 걸고 확고히 믿고 있다. "파비안." 나르디의 얼굴이 다시 나를 향해 있었다. 그 얼굴에 그에게 낯선것 한가지가 보였다. 바로 그의 눈가에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 다른 곳에서 지금과 같은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 다시이런 기분을 맛볼 수 있게 될까?" 나는 손을 뻗쳐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앞으로도 늘 네 곁에 있을 테니까. 죽도록 실컷 보게 될걸." 그리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미 붉은 기운은 천지를 뒤덮고, 보이지 않는 저 지평선 너머까지 밝은 빛으로 감아들여, 모든 것을 고대의 유적 같은 찬연한 자태로 바꾸어 놓았다. 새벽의 안개는 불타는 바다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태양의 이마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광채의 바다 속에 잠긴 채, 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르디는 일어섰다. 그는 일어서려다가 발을 잘못 더뎌 약간 비틀거렸다. "그래, 그래…. 나, 나… 뭔가 멋진 것을 보여 주려고 여기까지온 거였는데, 잊어버렸군. 미안해. 미안해." 그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말끝이 약간 떨렸고, 뭔지 모르게 혼란된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어쨌던 그는 일어나더니 눈가에 맺힌 눈물을닦지도 않은 채 환하게 웃었다. 저 얼굴만은, 생애가 다 가도록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늘,마음 깊은 곳에서 기억해 두고 싶어. "엘다렌, 미칼리스… 이쪽으로 저를 잠시 따라오시겠습니까?" 우리는 나르디를 따라 절벽 꼭대기에서 일어나, 아까는 어두워서보이지 않던 사잇길을 따라갔다. 길은 구불구불 아래로 이어져 잠시만에 바위 절벽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로 나오게 되었다. 발 아래에서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잠시 후, 희미하게 밝아진 절벽 아래 넓지 않은 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 저기입니다." 우리는 절벽 한쪽에 구부러진 노송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가 커다란 바위를 붙잡고 그 아래의 강을 내려다보았다. 주위를 휩싸고 있던 안개는 점차 걷히고, 강은 그 본래의 빛깔로 맑게 빛나기 시작했다. 찰랑이는 물소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들려 왔다. 그 순간, 태양이 머리를 내밀며 붉은 그림자를 가득히 펼쳐 놓았다.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도 태양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저기!" 눈이 밝은 미칼리스가 제일 먼저 발견하고 짧게 외쳤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가자, 맞은편 절벽에 뚫린 바위 구명 수로를 통해 한 척의 배가 미끄러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런! 굉장히 작은 배가 아닌가?" 그것은 배라기보다는 보트, 아니 그것보다 더 좁고 긴 것이 마치버드나무 잎사귀처럼 생긴 날씬한 조각배였다. 나르디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카약(kayak)이라고 합니다. 하르마탄 섬에만 있는 독특한 배라고 하더군요." 워낙 기다랗게 생겨서 딱 한 사람밖에 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배였다. 실제로 한 사람이 거기에 타고 교묘하게 노를 저으며 강의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다. 한 개뿐인 노는 양쪽에 날(blade)이 달려있어서 가운데를 잡고 젓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잎새처럼 생긴 배는 쏜살같이 강을 가로질러 다가왔고, 그 머리위로 방금 떠오른 태양 빛이 강렬한 후광을 더했다. 배는 검은 빛깔이었고, 표면은 마치 물 위로 떠오른 커다란 물고기의 등처럼 매끈하게 반짝거렸다. 카약이라는 이름의 그 배가 좀더 가까이 다가오자, 배를 탄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워졌다고는 하지만, 우리와 그 배사이에는 허공을 가로질러 약 50큐빗에 달하는 거리가 있어싸. 검은 머리카락, 그다지 그을리지 않은 피부, 오렌지 빛 깃이 달린가벼운 여행자 복장과 노를 젓는 재빠른 손놀림, 그리고 애매하게흔들리고 있는 얼굴이 튀어오르는 물방울들 사이로 보였다. 갑자기내 머리 속에서 모든 것이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나는 다음 순간, 그 사람을 알아보고는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이슬라 공주님!" 나는 내가 그녀를 이슬라라는 애칭으로 불렀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망연해져 있었다. 잔-이슬로즈 공주, 분명히 그녀였다. 그런데… 세상에, 그녀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파비안……!" 내 이름을 부른 것까진 좋았는데, 그 다음에는 갑자기 요란해진물소리 때문에 뭐라고 말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도 내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손을 들어 커다랗게 저어 보이며 인사를 보냈다. 물론 그녀는 '카약'의 조종에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바로 다음 순간, 재빨리 노를 놀려 배가 기울어지지 않도록 바로 잡아야 했다. 나는 나르디를 돌아보고 다짜고짜 물었다. "야, 어떻게 된 거야? 공주 전하께서 어떻게 여기 계신 거야?" "공주 전하는 '계신' 거고, 국왕한테는 '야' 라니, 왠지 균형이 안맞잖은가." 그는 농담조로 한 마디 던지더니 자신도 잔-이슬로즈를 향해 손을흔들었다. 멀어서 이쪽을 쳐다본 그녀가 웃었는지 어쨌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어쨌든 간에 설명을 해 봐. 공주 전하께서도 너하고 같이 온 거야? 아니면 따로? 그, 뭐냐… 아직까지도 귀국하지 않았다고 했냐? 네가 잡아 놓은 거야?" 나는 계속해서 그 '균형이 안 맞는' 말투를 쓰고 있었지만 스스로는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나르디는 싱긋 웃더니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가리켰다. "내려가서 직접 물어 보게."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일행은 잠시 후, 절벽 아래로 내려가 손바닥만한 모래톱에 서서 저만치 카약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카약은 몇 개의 물결을 넘더니 금세 모래톱으로 밀려들어왔다. 잔-이슬로즈는 배가 모래톱에 닿아 멈추기 전에 발딱 일어나더니 재빨리 배에서 뛰어내려 이쪽으로 달려왔다. 얕은 강물이 그녀의 발치에서 시원스럽게 튀어올랐다. "파비안, 유리카!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파하잔의 지배자께서도 여전히 건강하시군요!" 나는 그녀를 만난 것보다 다른 것 때문에 넋이 나가 있었다. 아까까지는 멀어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이 갑자기 눈앞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나는 얼떨떨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그, 머리……." "아아, 어때요? 시원해 보이지 않나요?" 그녀의 긴 머리채, 갈가마귀의 우아한 깃털이 사라지고 없었다. 개구쟁이 소년처럼 귀밑으로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미풍에 나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처음부터 배를 타고 있던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당황하기는 유리카도 마찬가지였다. 잔-이슬로즈는 유리카의 표정을 보고는 싱긋 웃어 보였는데, 어쩐지 나르디의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웃음이었다. "머리…를… 자르셨군요……."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뻔한 얘기를 되풀이하는 건 무슨 까닭인건지. 하여튼, 유리카 역시도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녀의 손이 무심결에 자기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것을 보고 잔-이슬로즈가 말했다. "유리카 아가씨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예쁘군요." 그녀는 웃으면서 한 말이었지만 유리카 쪽에서 오히려 당황해 버렸다. 유리카는 급히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공주님께선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리시는군요." 나르디가 다가오더니 잔-이슬로즈와 마주 보고 가벼운 악수를 나눴다. 옆얼굴이었지만 서로 미소를 주고받는 것도 보였다. 둘은 언제 헤어졌다가 만난 거야? 함께 이 섬에 온 것이 아니란 말이야? 이윽고 그녀는 한 명의 낯선 인물인 미칼리스를 보고 약간 의아한표정을 지었지만 나르디가 몇 마디 설명하자마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나르디가 우리 뒷조사(?)한 이야기들까지 거의 다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말씀으로만 듣던 엘프 족이시라고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엘프의 예법에 맞는 인사는 알지 못하나 마음만은 충분히 알아주시리라믿습니다." 그녀의 예의바른 인사에 미칼리스 역시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금빛의 고수머리는 차츰 떠오르는 햇빛을 받기 시작하자 엘프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광채, 태양을 감춘 금빛 구름의 빛깔로 번쩍였다. "반갑습니다." 물론 미칼리스의 대답은 그의 엄숙한 겉모습과는 전혀 딴판으로늘 간단한 것이었다. 인사가 모두 오가고 나자 나는 궁금해서 참을수 없었던 것을 물어 보았다. "그러니까 공주님께선 아직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셨단 말씀입니까? 설마 아직도……." "아아, 물론 아닙니다." 잔-이슬로즈는 빠르게 대답하더니 어디로 잠시 가서 앉자는 손짓을 했다. 우리는 강변에 듬성듬성 놓여 있던 커다란 바위들 가운데하나로 가서 각각 발을 늘어뜨리고 걸터앉았다. 강물 아래로 보이는자갈은 하얗고, 푸른빛이 번지기 시작한 하늘은 깨끗하게 개어 있었다. 강물이 모래톱을 쓸어 가며 이런저런 무늬를 만드는 가운데, 카약이 갈색 잎새처럼 갸웃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공주는 이미 발이 젖었기 때문에 강물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가 입은 것은 몸에 달라붙는 간편한 바지였다. 짧은 머리만큼이나많이도 달라져 버린 모습이었다. "저는 이제 포로가 아니랍니다. 얼마 전에 몇 가지 사건이 있어서정식 손님으로 승격되었지요." 사실 공주인 그녀가 나나 유리카에게 존대를 쓸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가 나르디의 친구라는 것을 의식해선지, 대단히겸손한 말투를 썼다. "손님이라…지금도 이스나미르에 계시다는 뜻인가요?" "지금 이렇게 이 섬에 있잖아요?" 하긴 북부 하르마탄도 이스나미르 영지니까. 이스나미르에 있는것이 맞기는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의미로 물은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녀가 일단 본국으로 돌아갔던 거라면 다시 돌아올 이유가어디 있단 말이야? 세르무즈와 이스나미르는 엄연히 적국이 아니었나? 설마하니 여행차 놀러 왔다는 얘기는 아니……. "여기저기 여행하고 있는 중이지요." 그녀의 한 마디로 내 상상은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유리카는 나를 쳐다보며 안 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결국나르디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직설적인 질문은 유리카가 잘하는데. "야, 그러니까, 그게… 공주님께선 여기에 왜… 아니, 여기에 오신 것은 나르디와 함께… 아니, 그게 그러니까……." 유리카가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바람에, 나는 결국 생각나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잔-이슬로즈 공주 전하와 나르디엔 국왕폐하께선 현재 무슨 관계이십니까? 아까 손님이 되었다고 하셨지만, 갑자기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요. 게다가 하르마탄까지 같이 와 계시니 말입니다." 잔-이슬로즈는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싱긋 웃으며 고개를끄덕였다. 그녀가 고개를 움직이자 짧은 머리 양쪽으로 한 쌍의 귀걸이가 경쾌한 빛을 발하며 흔들렸다. 장신구 같은 것은 거의 하지않던 그녀였기 때문인지 저절로 한 번 더 눈길이 갔다. 무슨 보석인지 모르겠다. 도톰한 삼각뿔 모양의, 보랏빛으로 투명한 돌 이었는데 간소하고도 고귀한 느낌을 주는 꽤 멋진 귀걸이였다. 그녀는 내가 귀걸이를 쳐다보는 것을 눈치채고 나르디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나르디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갑자기 품안을 헤치고 뭔가를 꺼내 놓았다. 목걸이잖아? "똑같네?" 유리카의 말대로 나르디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는 잔-이슬로즈의귀걸이와 똑같은 보석이 달려 있었다.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똑같았지만 목걸이였기 때문에 보석은 한 개뿐이었다. 투명한 보랓빛으로 빛났고, 끈은 간단한 가죽으로 되어 있었다. 대강 짐작은 가는데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망설이면서헛기침을 했고, 내 기색을 알아챈 유리카가 대신 한 마디 하려는 순간이었다. "결혼식은 언제입니까?" 겨, 겨, 결혼식……. 미칼리스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소리에 나는 입을 딱 벌리며 고개를 후딱 돌렸다. 유리카도 약간 무례하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난지, 급히 손을 내저으며 잔-이슬로즈의 얼굴을 살피려 했다. 미칼리스는 유리카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다시 한 마디를 던졌다. "무야, 유리 너도 알고 있잖아. '아르나의 눈빛'은 보통 약속을한 사이에서 주고받는 물건이 아니지 않나?" 저 보석이 '아르나의 눈빛' 이라고? 나는 벌린 입을 재빨리 다물고는 유리카를 쳐다보며 확인을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아르나의 눈빛' 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무식한나도 언뜻 들어 본 일이 있었다. 레오 로아킨의 연인 아르나의 눈 빛깔과 똑같은 보랏빛을 가지고 있다는 보석인 알만딘(almandine)의별칭이 바로 '아르나의 눈빛'이라는 걸 말이다. 연인들을 위한 가장 강력한 사랑의 수호석이자 '아르나와 레오 로아킨의 이름으로된 맹세'를 행한 연인들이 나누어 가지는 돌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싸구려 보석이 아닌 탓에 평민들은 쉽게 지닐 수 없는지라실물을 본 일은 없다뿐이지. 그렇다면……? "저, 정말로… 둘이 미래를 약속한 사이란 말이에요?" 분명, 분명 두 나라는 지금까지 적국이었고 게다가 듀플리시아드왕가는… 전통적으로 고대 이스나미르부터 내려온 순수한 혈통의 보존을 굉장히 중요시하지 않던가? 그런데, 마브릴 공주와의…결혼이라고? 내 머리 속에는 양가의 반대 속에서 사랑을 쟁취해야만 하는 불운한 연인들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갑자기 떠올랐지만, 또다시한 마디로 나의 상상들은 완전히 깨져 버렸다. 잔-이슬로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이미 하라시바에 계신 부왕께서도 우리의 약혼은 축복해 주셨고, 이스나미르 귀족원의 동의도 이루어진 걸로 알아요. 이알만딘 귀걸이와 목걸이는 약혼 선물인 셈이지요." 이리하여 두 사람이 이미 약혼한 사이라는 것까지 드러나고 말았다. 엘다렌은 다시 한 번 빠르군, 하는 말을 해야만 했고 미칼리스는 그것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으며, 나와 유리카는 왠지 모를 배신감으로 나르디의 약간 붉어진 얼굴을 쳐다보았다. 주아니조차 주머니 속에서 의견 표시를 하기 위해 분주하게 꼬물거렸다. 아르나와 레오 로아킨의 이름으로 한 맹세라면, 단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해서 섣불리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반드시 두 사람의 애정을 맺어 주기는 하지만, 또한 맹세를 깬 사람에게는 어김없이 대가를 가져다 준다는 이름들이 아닌가. 나르디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 약간 웃은 다음, 잔-이슬로즈의 말을 받아 이었다. "그래, 네 생각대로야. 그런 맹세가 필요할 정도로, 이번 결정은쉽게 내려질 수 없는 것이었지. 아니,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이게 하기 어려운 것이었단 말이네. 자세한 설명은나중에 따로 해 줄 기회가 있을 거야. 어쨌든 친구들에세 약혼 사실은 알려 주고 싶었다네." 나는 한참 만에 엉뚱한 소리를 뱉는 것으로 소감을 대신했다. "너, 너… 예전에 마르텔리조 아가씨들은 연상이라서 싫다고……." 유리카가 재빨리 내 옆구리를 쿡 찔렀고, 나는 말을 실수한 것을깨닫고는 잔-이슬로즈를 바라보며 바보처럼 헤헤 웃었다. 그녀는 관대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나르디를 바라보며 말했다. "페하께서 연상이 싫다고 하셔도 이제 와서야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러니 그것보다는 제가 연하를 좋아한 탓이라고 생각하시는 편이 어떨까요?" "아… 아, 예." 결국 대담한 공주님한테 한 방 먹고 입을 다무는 것으로 사태는종격되었다. 나르디는 아직도 홓조가 가시지 않은 얼굴에 반짝이는눈을 하고는 그만 가자는 듯 몸을 일으켰다. 잔-이슬로즈는 카약을챙겨 놓으러 갔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이제 그녀도 우리를 따라숙영지로 돌아갈 참인 듯 했다. 나르디가 내 얼굴을 보더니 한 마디 던졌다. "도무지 기뻐하는 얼굴이 아니라니, 이거 섭섭한데. 축하한다는말도 안 해 주……." 나와 유리카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시에 커다랗게 외쳤다. "축하해!" 그것 참, 제일 중요한 말을 빠뜨리다니, 너무 놀란 나머지 머리가어떻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잔-이슬로즈의 가볍게 넘긴 앞머리가 미풍에 산뜻하게 날렸다. 새벽녘의 약간 차갑고도 깨끗한 공기가 점차 가시고 익숙한 아침 공기로 돌아오는 동안, 우리는 절벽을 거의 내려와 숙영지를 향해 걷고있었다. "휴, 그렇게 된 거구나." 둘이 어떤 식으로 서로에게 끌리고, 또 마음을 나누고, 어떤 식으로 사랑을 맹세했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말하려 들지 않는 바람에,대신 우리는 두 사람이 양국 왕가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물어 보았다. 그리고 지금 그 설득방식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하는 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설득이 아니고 협박이었다. 불법 침입한 타국의 태자를 전투 끝에 놓치고, 더구나 아끼는 공주까지 빼앗긴 세르무즈 국왕의 속은 몹시 쓰렸을 터였다. 실제로잔-이슬로즈를 돌려받기 위한 세르무즈 국왕의 사절은 생각보다 일찍 달크로즈에 당도했다. 그러니까 바로 달크로즈에서 하르얀이 일으킨 반란이 무마되고 처형과 국왕 즉위가 있은 직후였다. 물론, 그사절단은 국왕 즉위를 축하하는 목적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프랑도비네 14세의 사신은 조심스럽게 새로 즉위한 젊은 국왕을조금씩 떠보면서 어리다고 무시할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여간해서는 쉽게 공주를 돌려받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는지,그는 우회작전을 쓴답시고, 이스나미르가 수도에서 일어난 반란을가라앉히는 동안 세르무즈 측에서 거기에 관여하지 않고 점잖게 관망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를 꺼냈다. 거기에 나르디가 맞받아 친 대답은 이랬다. "맞는 말이오. 그래서 나는 더욱 공주 전하의 중요성을 절감하게되었던 것이오." 공주가 없었더라면 과연 세르무즈가 내란이 일어난 틈을 타서 이스나미르를 넘보지 않을 수 있었겠냐는 말이다. 그러니 더더욱 돌려보낼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사신은 이번엔 대담하게 말했다. "폐하의 그 말씀은 앞으로도 이스나미르의 평화와 발전은 세르무즈공주 전하의 자유를 볼모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글쎄요, 꼭 그렇지만은 않소. 평화와 발전이란 말의 의미란 다양한 법이니 말이오. 양국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두 나라 모두의 평화와 발전이라면 더욱 바랄 만한 것이겠지. 그 점에 대해서 세르무즈 국왕 폐하의 생각은 어떠하실지 궁금하오." "협력이라니요, 폐하?" 사신도 바보는 아닌지라 말 뜻은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돌아올 대답은 뻔했다. "이스나미르 국왕 나르디엔은 전사들의 나라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공주가 마음에 들었다고 전해 주시오." 잔-이슬로즈의 연기도 대단했다. 그녀는 프랑도비네 14세에게 눈물겨운 편지를 써서 두 나라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자기 한 몸 희생하여 이스나미르로 시집가겠다고 주장했다. 어짜피 돌려보낼 기약이 없는 공주를 되찾기 위해서는 전쟁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판에, 세르무즈 측에서도 이 조건이 그렇게까지 나쁜 것만은 아니었을것이다. 볼모로 잡혀 있는 공주보다야 결혼한 공주 쪽이 양국의 협력이나 체면을 위해서도 훨씬 보기 좋았을 테니까 말이다. 더구나태자비가 아닌 왕비의 신분은 이스나미르 안에서도 상당한 실세를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또한 이스나미르는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아직은 대륙 최강국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동전 사건도 한몫 했지." 그랬다. 세르무즈는 또 한 가지의 중대한 약점을 안고 있었다. '이름 없는 산'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독차지하려 했던 음모에 대한엄연한 증인으로서, 바로 나르디엔 국왕 자신이 있었으니 말이다. 잔-이슬로즈 공주는 부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교묘하게 그 점도언급했다. 프랑도비네 14세는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스나미르 귀족원을 설득하는 일이 있었다. 이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잔-이슬로즈가 쓴 계략이 주효했다. 그녀는 부왕의 답신 내용을, '만일 결혼을 한다면 모르되, 그대로 볼모로 있을 바에는 차라리 깨끗이 자결하는 편이 낫다. 만일 자결을 한다면 그 원한은 아버지가 반드시 갚아 줄 터이니 심려할 것없다' 는 식으로 전해 주었다. 다른 때였으면 모르되, 한 번의 반란 시도로 수십 명 이상의 귀족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본 때였으니, 귀족원에서도 전쟁이라면 무조건피하고 싶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구원 기사단에서 반란 조짐이 보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가운데 페스버스와 에라르드 일행이 선단을 이끌고 이스나미르로 오는 일도 함께 성사되었다. 나르디의 간단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충분히 당시 분위기를짐작할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 녀석도 알고 보니 연애 문제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녀석이었잖아. 과격한 공주님이야 말할 것도 없고. 게다가… 왕족들이란 분위기가 무르익기만 하면 연애고 뭐고 없이 곧장 결혼이로군. 둘이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결혼식 들러리는 두 사람으로 예약이다, 알지?" 나르디의 말에 유리카가 빙긋 웃으며 공주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알만딘 귀걸이가 정말로 잘 어울리는 짧은 머리의 그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으음… 왜 갑자기 이 상황에서 미르디네가 떠오르는 거람. 나중에 이 소식을 전해 주는 역할만은 사양하고 싶어지는데. "그건 그렇고, 도대체 저 카약인가 하난 배를 조종하는 건 언제배우신 거야?" 숙영지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나르디는 나를 향해 고개를돌리며 대꾸했다. "응, 하르마탄에 도착하자마자 당장 저걸 배우겠다고 하더라고. 아마 예전부터 저 배에 대한 걸 알고 잇어서 오랫동안 별렀던 모양이야. 하르마탄에 있는 강들은 주로 좁고, 지류가 많은데다 급류도상당한 편이라, 저 카약을 타기에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라고 할 수있지. 그러니까 저런 배가 개발되기도 한 거겠지만." "위험하지 않아?" 나르디는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소리내어 웃었다. 잔-이슬로즈는저만치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턱으로 가볍게 그녀를 가리키면서 웃음 섞인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나한텐 그녀를 막을 능력이 없다네. 그녀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뭐든 허락해 주고 싶어지거든."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앞을 앞질러 나르디는 숙영지를 경계하던 보초의 경례를 받고 잔-이슬로즈와 나란히 안으로 걸음을옮겼다. 나와 함께 뒤에 남은 유리카가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말했다. "쟤한테도 저런 면이 있었네." 그, 그래… 나한테만 있는 건 아니었단 말이야. 그리고 떠나야만 할 시간이 왔다. 점심 식사는 조촐했다. 나르디의 천막에 차려진 식탁에 둘러앉은것은 나르디와 잔-이슬로즈, 나와 유리카, 엘다렌과 미칼리스가 전부였다. 나르디에게는 부관인 엘비르 외에도 따라다니며 잔소리하는 것이주 업무인 늙은 귀족이 한 사람 있었다. 나르디의 말로는 귀족원에서 젊은 국왕을 위해 파견한 '보좌관' 이라는데, 나르디는 그 사람,레들로우 후작이 자신과 잔-이슬로즈의 결혼을 가장 반대했던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 레들로우 후작을 비롯한 몇몇 귀족들은 나르디보다 연상인데다, 강력한 배경을 등에 업고 있으며, 또한 용감한 전사이며 대찬 아가씨이기도 한 잔-이슬로즈를 왕비로 맞아들이게 되면 그녀의 존재가 국왕의 위엄을 가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모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귀족원의 입김이 약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겠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이 나르디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나는 확신할 수 있다. 그래, 저 귀족들이라면 아마 나를 그냥 피아 예모랑드로 보내는일도 상당히 반대했었겠지. "내게도 한 가지 약속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어." 식사가 끝나고, 나는 포크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나르디를 바라보며말을 꺼냈다. 나르디는 포도주 잔에서 입을 떼며 나를 쳐다보았다. "약속하겠네." 그는 내 말을 듣지도 않은 채 먼저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나에 대한 그의 신뢰가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 주는 일이기도 했다. "고마워. 그러나 우선 내 이야기를 들어 보고, 다시 결정해 줘." "그러지." 그리고 그와 나는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르디는 주홍빛 천에 금빛 라인이 있는 몸에 꼭 맞는 옷을 입고있었다. 잔-이슬로즈의 몸에 잘 맞는 좁고 긴 드레스도 똑같은 주홍빛이었다. 드레스에는 동그랗게 생긴 금박 무늬들이 드문드문 박혀있었는데, 금박 가운데 아주 작고 섬세한 나뭇잎 무늬들이 수놓아져있었다. 그 차림새는 곧 있게 될 두 사람의 결혼식 장면을 연상시켰다. 아니, 어쩌면 왕과 왕비가 된 두 사람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둘의 멋진 결혼식을 보게 되겠지. 그리고 두 사람이 앞으로 살아가는모습을 늘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될 테지. 정말… 그렇게 될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줘. 명백한 반란의 징조가 보이고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해도, 공격을 시작하지 말고 나를 기다려 줘." 나르디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내 시선은 그의 눈을 떠나 금빛 눈썹으로 갔다. 그 곡선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무리한… 부탁인 걸까. 잔-이슬로즈는 나를 한 번 바라보고, 그 다음으로 유리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약혼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잠시 후 다시 말했다. "…만일, 내가 문자 아룬드 5일이 되어서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 때는 나를 찾으러… 피아 예모랑드로 와 줘." 찾으러 와 달라는 말의 의미를 그도 모르지 않았다. 오늘은 점성술 아룬드 28일이었다. 피아 예모랑드 성까지의 거리는 말로 달려 약 하루 정도였다. 나르디가 우리 일행에게 타고 갈 말을 제공하기로 했으므로 오가는 시간은 도합 이틀, 아버지와의 대화는 사흘이면 족하겠지. 나는… 아버지를 설득해 볼 생각이었다. 나와 내 친구, 내 나라, 그리고 모든 동료들을 위해서, 되든 안 되든 도전해 볼 거야. 내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나조차도 자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해 보는 수밖에 없다. 나르디의 고개가 이윽고 천천히, 끄덕여졌다. "약속하겠네." "고마워." 쉬운 약속이 아니었을 거란 것을 알고 있다. 이제는 외줄을 타는것밖에 길은 없다. 실패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정말로 싸우게 된다면 어느 쪽이 이기게될까. 누구나 인정하는 대륙 최고의 전사이자 전략가인 아버지이다. 수적으로는 압도적으로 불리하다지만 아버지가 거느린 구원 기사단은 수많은 지원자들 가운데 몇 번이고 추려진 최고 정예 기사들이다. 츠칠헨도, 키반도… 딘이나 드모나도 거기에 있겠지. "너에게 줄 것이 있어." 나르디는 식탁에서 일어나더니 입구 쪽으로 걸어가 한 사람을 들어오게 했다. 들어온 것은 엘비르였다. 그는 손에 검 하나를 받쳐 들고 있었다. 나르디는 검을 받아 들더니 내게로 내밀었다. "……?" 나르디는 내게 이미 끔찍 무식한 검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검에 어울리는 일격필살의 정신도어느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 그런 것을 잘 알고 있을 그가 갑자기 왜내게 검을 주는 거지? 내가 묻기 전에 나르디가 먼저 설명했다. "이 검은 나르시냐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검이야.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르킨 단장도 한때 그 검을 쓴 일이 있었지. 가장 최근에는… 하르얀이 가지고 있던 검이네." 그랬구나. 나는 그에게서 검을 넘겨받아 손에 그것을 쥐어 보았다. 그래, 기억이 난다. 푸른 굴조개 호에서 하르얀과 마주쳤을 때, 그와맞댄 검이 바로 이것이었다. 내 검과 맞닥뜨려서도 부러지지 않던세이버. 분명히 상당히 좋은 검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검이란 말이지. 나는 검을 뽑아서 검날을 보고 싶었으나 천막 안이라 참았다. 힐트에는 놀랄 만큼 커다란 루비가 박혀 번쩍이고 있었다. 나는 저도모르게 엘비르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자네에게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자네 말고는 줄 사람이없어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말고는 이제 가질 사람이 없겠지. 앞으로도 사용할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지만. 문득 머리 속에서 의문이 떠올랐다. 우리 집안 대대로의 검이라면왜 그걸 아버지가 아니라 하르얀이 사용하고 있었던 거지? 그럼,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검은 뭐야? 그러나 입 밖에 내어 질문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고마움을 담아 나르디에게 미소를 보냈고, 그 또한 약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내 아들이 이 무식 거대한 검을 못 쓰겠다고 하면, 이거라도 주지 뭐." 잔-이슬로즈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벌써 아들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말했다는 것을 알고는 가볍게 마주 웃었다. 내 아들이라… 그런 아이를 언젠가 보게 되긴 하는 걸까? 글쎄… 어떤 거야, 유리카? "자, 출발해야지." 미칼리스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나는 다시 한 번 이들과 헤어져야한다는 사실이 몹시 아쉬워졌다. 그렇지만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린 서로 약속을 지킬 것이고, 모두 무사히 다시 만날 것이다. 식탁에서 일어나는데 잔-이슬로즈가 나를 슬쩍 한쪽으로 불렀다. 내가 걸어가자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봉인된 편지 하나를 내 손에건넸다. 천막 밖으로 나가면서 편지를 들여다보니 한 번 봉인되었다가 뜯겨진 흔적이 잇었다. 먼저 붙였던 봉인에는 어떤 문장이 새겨진 금형의 자국이 있었지만, 그 위에 다시 새로 붉은 밀랍을 부어서 붙였기 때문에 본래 모양을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겉봉에는 섬세하고 날씬한 필적으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아버지를 만날 때까진 뜯지 마세요 아버지를 만나 이야기가 잘되거든, 반드시 뜯지 말고 태워 버리세요. 아마도 아버지를 만나서 설득이 잘 되지 않으면, 그 때 뜯어 보라는 얘기인 모양이었다.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일부러 묻지는 않은채 나는 편지를 품안에 집어넣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었다. 나르디가 준비해 준 네 필의 말에 올라탄 우리는 숙영지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아티유 선장을 비롯한선원들과는 좀 전에 미리 인사를 나누었다. 곧 다시 돌아오겠다고말하는 것만으로는 좀 부족했지만, 그들은 우리를 이해해 주었다. "파비안, 나는 네가 잘 해낼 거란 걸 믿어. 그것이 무엇이었든." 나르디가 말 아랫\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말하더니, 다시 한 마디덧붙였다. "귀족원 사람들 중에서는 자네를 조심하라는 사람들도 있더군. 그래, 자네가 오르코시즈에 중독된 유리카를 업고 달려왔을 때, 성문 아래에서 자네가 뭔지 모를 검술을 썼다고들 그랬네. 이 세상에알려지지 않은, 아주 은밀한 어떤 것이라고 말이야. 나는 직접 안 보아서 모르겠지만 말이야. 뭔가 대단한 것일 테지?" 그가 왜 이 말을 내게 하는 것인지 나는 잘 몰랐다. 그래서 그저고개만 끄덕였다. 나르디는 이윽고 말에서 물러섰다. "곧, 다시 만나자!" 그 눈빛, 기억하고 있어. "안녕히 계세요, 공주님!" 유리카가 기운차게 외쳤다. "엘다렌, 주아니, 미칼리스, 모두 안전한 여행을 빕니다!" 말들이 오후의 태양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자 나르디의 마지막 말은 지워져 들리지 않게 되었다. 녀석의 입에서 주아니의 이름까지나왔는데, 나중에 공주에게 그 이름을 어떤 식으로 설명했을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잠시 소풍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그들도 곧 뒤따라올 것처럼, 저녁 먹기 전에 돌아와 다시 만날 것처럼,그렇게 돌아보지 않았다. 끝을 향해 달릴 뿐이다. 모든 것을 풀어 버릴, 마지막 결론을 위해. 하루가 지난 오후, 태양이 점차 지기 시작하는 시간에 우리는 어떤 높은 벼랑 꼭대기에 도달했다. 말을 멈추고, 우리는 눈 아래 펼쳐진 장관을 바라보았다. "저 성인가." 주홍빛 안개가 바다처럼 깔리고 그 아래는 어둠이었다. 저 가장 먼 시야 너머까지도 두터운 양탄자처럼 안개만이 가득한 땅이었다. 나무도, 새도, 그 어느 것 하나 보이지 않았다. 뛰어내린다면 한없이, 영원히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모든 것은 아득한 혼미 속에 있었다. 예모랑드 영지. 그리고 그 가운데 절벽을 딛고 솟아오른 검은 성은피아 예모랑드. 점성술의 별의 이름을 지닌 대마법사의 성. 붉은 안개 속에서 탑과 깃발들이 검은 실루엣으로 떠올라 기이한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탑들은 보였지만, 성의 기초를 이루는 성벽과 문은 보이지 않았다. 내 착각 가득한 눈에서 성은 마치 암흑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마법사 에제키엘이 그 기초를 세웠으며 2백 년의 세월 동안 그자손들에게 물려진 성이다. 균열의 힘이 집중되는 비밀의 마법진이저 안에 있고, 나를 기다릴지도 모를 내 아버지와, 그말고도 내 짐작으로 알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때를 기다리며 도사리고 있을 것만같다. "다 왔어. 모든 여행이 시작되는 곳, 모든 여행이 끝나는 곳. 그곳에 드디어 온 거야." 유리카가 말하지 않아도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엘다렌과 미칼리스가 침묵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와 주아니를 제외한 이들은 모두한 번씩 이 성에 와 보았을 것이다. 아니, 그 때는 성이 아니었겠지. 알 수 없는 폐허와 그 안에 숨겨진 마법진의 땅이었을 거야. 그리고그 후, 같은 자리에 2백 년을 서 있었을 저 성을 이들은 처음으로 보고 있는 걸 거야. "무엇을 기다리나. 무엇을 망설이나. 2백 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는데." 미칼리스의 말에 엘다렌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고, 이번의 마지막 장애는 과연 무엇일 것 같은가." 에제키엘에게는 분명 마지막 장애가 있었다. 그렇지에 균열을 완전히 막지 못하고 2백 년 후의 부족한 후손인 내게 모든 것을 맡긴것이다. 아직 듣지는 못했지만, 거기에는 어떤 비밀이 있을 것이다. 곧, 나도 알게 될 비밀이……. "자, 내려가지 않겠나?" 네 필의 말은 벼랑에서 돌아서 다시 쏜살같이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네 개의 검은 그림자처럼, 오랜 여행의 느림을 보상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들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끝의 길을 달려 내려갔다. 수많은 약속을 마음 속에 품은 채. +=+=+=+=+=+=+=+=+=+=+=+=+=+=+=+= 세월의 돌(Stone of Days)=+=+=+=+=+=+=+=+=+=+=+=+=+=+=+=+ 13장. 제12월 '문자(Word)'…… 문자의 별 '푸비아니'가 지배하는 아룬드. 갈색으로 깊어간 가을이 빛을 더함에 따라 모든 식물들은 시들고 공기는 점차 차가워진다. 날씨는 일반적으로 상쾌하며 일기가 온전해서, 여행하는 자와 머무르는 자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는 시기이다. 고대 아스나미르에서는 일부 마법을 몇 개의 문자를 쓰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이를 '주문 글자' 라고 부르며, 주로 타로핀으로 된석판에 철필(鐵筆)로 써서 마법이 시전되는 자리의 중심에 놓았다. 펜에 묻혀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잉크에는 환영주를 특정한 비율로 섞어이스나에들의 눈에 보이도록 했다. 주문 글자 체계는 현재 소실되어 일부만이 번역문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자 아룬드가 정해지던 시기에는 이처럼 마법력을 지닌글자들의 사용이 매우 빈번했으며 또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축복 문자, 신성문자 등이 존재했으며 각기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지긴 하지만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 중 가장 많은 단어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는 축복 문자는 최근까지도 그 중 일부가 전해지고 있는데, 가장 많은 글자를 볼 수 있는곳은 이스나미르의 달크로즈 시에 있는 '사자(死者)들의 홀' 이다. 사자들의 홀은 고대로부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영웅들 또는 이름없는 기사들이 묻혔던 거대한 납골당으로서, 그 입구에 세워진 일곱개의 기둥들에는 수천 단어가 넘는 축복 문자가 새겨져 있다. 문자 아룬드는 은밀하게 숨어 있던 진실을 마침내 찾아 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돌 위에 기록된 글자들처럼 오랫동안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찾아 낸 진실은 때론 가혹하거나 원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으나, 찾아 낸 이상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의미를 나타내려는듯, 고대 이스나미르로부터 내려오는 일부특수한 문서들은 이 때에 글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던 몇 개의 글자가나타나면서 특별한 의미로 변한다. 각지의 도서관에 흩엊 있는 이러한문서들은 수만 종에 달하는데, 평소에 오랫동안 연구해도 풀리지 않던비밀들이 이러한 문서 몇 장으로 인해 한꺼번에 풀리는 경우도 있다. 고대 이스나미르 인들이 숨겨 놓은 이러한 비밀들을 찾아 내기 위해문자 아룬드가 되면 대륙의 수많은 학자들이 각국의 왕궁 도서관으로모여드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사람을 위하여 신성한 문자로 기록해서 남기다' 라는 경구는 기록,즉 기억의 의무를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노력, 과거로부터 내려온 유산, 숨겨져 있던 진실이 주는 고통, 조상이나 영적 존재들의 도움, 과거에 대한 명확한 기억, 잊혀지지 않는 어떤 사건이나존재, 후대를 위한 의무, 그리고 오랫동안 지켜야 하는 약속 등을 암시한다. 이 아룬드를 의미하는 빛깔은 늦가을을 나타내는 가라앉은 갈색이다. - 점성술사들이 달력에 적는 각 아룬드의 의미,그 중 열두 번째. 1. 황금 글자들도 지워진다. 너 아룬드냐얀이여,그 검은 돌안에 감춘 시간의 의미를말하라. 그대 아룬드나얀이여,그 안에 무엇을 품으며, 무엇을 내놓을지그리고 네 주인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너 침묵하는 돌이여,기다리는 것은 천구에 새겨진 때임을말하라, 그대 세월의 돌이여,네 제물은 누구이며, 삶은 누구의 몫일지그리고 균열의 날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고(古) 이스나미르 왕국, 일곱 별자리의 예언자헬 위스 카르모하드의 축시<아룬드나얀>74~75연 절벽을 내려와 보니 확실히 바닥이 있기는 했다. 성은 이상할 정도로 검었다. 온통 검은 돌로만 만들어진 것처럼 바닥에서부터 탑꼭대기까지 온통 새카만 성이었다. 단지 역광의 영향으로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성은 검은 돌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검게 칠한 건가? 아니면 정말로 전부 검은 돌들인 거야?" 우리 모두 처음으로 이 성을 보는 것이었기에 그 질문에 대답 할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성은 점차 가까워질수록 위압적인 검은 몸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 성을 세운 자는 누구죠?" 에제키엘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성이 세워지기 전에 죽었으니까. 그가 완성한 것은 성이 아니라 성 안 어딘가에 있다는 마법진이었다. 물론, 성은 그 마법진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졌다. "에제키엘의 아내가 아닐까?" 미칼리스가 무심하게 말했고, 말 위에 앉아 있던 나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미칼리스도 에제키엘의 부인을 본 적이 있어요?" "으음." 그는 보았다는 것인지 못 보았다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말을 약간 앞으로 몰아 갔다. 나는 그 뒤를 따라 내 옆으로 다가온 유리카를 쳐다보았다. "부인은 어떤 사람이었니?" "조피?" 나는 꼬마 소녀 같은 그 이름을 약간 의아하게 여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유리카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조피스티네 위텔스바른이라는 꽤 복잡한 이름이었거든. 그러니줄여서 부를 수밖에." 유리카가 이름을 줄여서 부르는 것에 남다른 취미를 갖고 있다는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각 종족의 왕에 해당하는 엄숙한동료들의 이름조차 저렇게 바꿔 놓은 걸 보면 말야. "조피는… 굉장히 멋있는 여자였어. 에즈하고는 동갑이었는데 길고 멋지게 곱슬거리는 금발을 가지고 있었지. 크지 않은 키에, 연녹색 눈동자는 푸른 숲 속에 숨겨진 호수 같았어. 가벼운 활과 단검을사용하는 타고난 사냥꾼이었고, 늘 숲 속에서 살아가면서 산과 들을사슴처럼 뛰어다녔지. 날씬한 몸을 감싼 갈색의 짧은 가죽옷과 빛나는 머리띠, 허리에 꽂혀 있던 폭이 넓은 단검, 녹색 장갑, 늘 맨 발에상처투성이였던 하얀 다리 같은 것들이 생각나…. 그런 모습에도불구하고 특이한 고귀함을 지니고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숲의 처녀라고도 불렀어. 말이 없었고, 쌀쌀맞다고 할 정도로 낯선 사람에게는 차가웠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섬세하고 따뜻한 여자였지. 이 팔지……." 그녀는 손목에 끼워져 있는 은팔찌를 흔들어 보였다. "그녀가 내게 준 거야." 유리카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조피스티네의 어머니는 일찍죽었고, 아버지는 한때 궁정 학자를 지냈던 사람이었으나 그 즈음에는 숲에 은둔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상당한 예언력을지니고 있어서 뒷날을 어렴풋이 내다보고는 조피와 에즈의 결혼을반대했다. 그 때문에 그 둘은 한동안 고생했고 결국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정식으로 결혼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결혼한 것은 그녀의 나이 서른세 살 때였다. "그렇지만 조피는 아버지를 닮아서 어떤 때는 놀랄 만한 통찰력과 현명함을 보였어. 그녀도 어쩌면, 에즈와 자신이 오랫동안 행복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 둘은 한때 헤어져서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기도 했어. 그러나 에즈는 되돌아왔고, 그다음부터는 그녀의 아버지가 화를 내든 말든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어."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말했다. "금발 곱슬머리에 활이라… 왠지 미칼리스와 비슷했을 것 같은데." 그러자 유리카와 미칼리스가 동시에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돌아보았다. 미칼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넌 힐트에 블레이드가 붙어 있을 뿐인 검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 모른단 말이야? 활만 해도 조피의 활과 내 활은 종류가 달라." "그녀도 장난감 활을 썼나 보죠?"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짓궂게 말했지만 미칼리스는 내 말뜻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장난감이 아니지. 그런 것은 날렵한 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녀 나름의 일가를 이룬 활이었지." 미칼리스의 말에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왜 자꾸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야. 나도 그럼 날렵한 활을 배울 수도 있었잖아. 괴물 검에 괴물 활을 늘상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기분이 좋을 수만은 없는 것 아니겠어. 그러고 보니, 미칼리스도 그녀를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래, 그녀였다면 이 모든 일을 충분히 해내고도 남았을 거야." 유리카는 고개를 들어 이제는 올려다보지 않으면 않아도 될 만큼가까워진 피아 예모랑드 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 머리 속에떠오른 조피스티네, 나뭇잎과 햇살 속을 사슴처럼 뛰어 다니는 숲 속의 처녀의 모습은 어쩐지 엘프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름다웠을까. 아마도 뾰족한 턱과 섬세한 눈썹. 긴 목을 지녔을 것만 같아. 불친절한 숲의 여인, 낯선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금빛 눈썹을 찌푸리며 재빨리 사라져 버렸겠지. 그렇지만 나와 어떻게든 피가 닿아 있는, 그리고 대마법사의 아내가 된 여자…. 그런데 어째서 에제키엘에 대한 얘기에서 그녀의 이야기가 완전히 빠져 있을 수 있었을까? 참 이상한 일이다. 어쩌면 신기할 만큼 내가 활이라는 무기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것도 그녀의 피가 내 몸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비록,활의 종류는 좀 달랐지만……. "저게… 뭐지?" 문득 말을 꺼낸 것은 내 웃옷 주머니에 있던 주아니였다. 우리가말을 타고 지나가던 길은 성의 정문을 행해 곧장 뚫린 길이었다. 수레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비된 길이었는데, 저만치 보이는 길오른쪽에서 갑자기 몇 사람의 기사가 말을 몰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기사들이라면, 구원 기사단인가? 우리는 말을 멈추었다. 그들은 우리를 향해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멈추시오!" 안 그래도 멈췄는데, 뭘 또 멈추라는 거야. 기사는 다섯 명이었는데 모두 낯선 얼굴들이었다. "무슨 볼일이십니까?" 내가 목소리를 높여 묻자, 기사들은 우리 앞에서 말을 멈추더니잠시 살피는 듯한 눈길로 우리를 훑어보았다. "성으로 가시는 길이오?" "그렇습니다." 다시 내가 대답하자 그들은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잠시 동안 그렇게 기사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얼굴이 괜스레 근지러웠다. 그들은 목소리를 낮추어 저들끼리 수군거렷다. 그리고는 그들 중 한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혹시, 파비안 나르시냐크 님이십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물음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그건 내 이름입니다만." 그러자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둘과 셋으로 나뉘어져 양쪽으로 갈라섰다. 내게 이름을 물었던 기사가 다가와 나에게만 말하는것처럼 조용하게 말했다. "단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동안 목소리를 높여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일행의곁을 떠나 다른 기사를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우리를 들여보낸 거대한 도개교가 다시 올려지고 있는 것을 불만스럽게 바라보고있자니, 미칼리스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뭘, 별일은 없을 거야. 최소한 저녁 먹을 땐 불러 주겠지." 유리카는 나를 보고 있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잠깐 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다음, 몸을 돌려 나를 안내하는 기사의 뒤를 따라갔다. 겉으로 보이는 색깔 때문에 성 내부까지 검을 줄 알았는데 그런것은 아니었다. 성의 내벽은 장식도 없이 간소했고, 천장이나 복도등에도 그림이나 무늬 같은 것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같은성이라 해도 내 기억 속의 달크로즈 성과는 여러 모로 달랐다. 회색 복도는 한참 이어졌다. 복도에는 창이 거의 없었는데 가끔가다 하나씩 뚫려 있는 창이 보였고 그 곳에서 차가운 공기와 함께붉은 석양 빛이 들어왔다. 창에는 유리나 덧문도 없었다. 그저 벽 한가운데 네모나게 뚫린 구멍일 따름이었다. "이 곳입니다." 기사는 어떤 문 앞에 이르러 옆으로 비켜 서며 나 혼자 들어가라는 듯한 몸짓을 했다. 나는 다가가 문을 열었다. 넓은 방이었지만 방 안은 어두웠다. 이 방만은 성벽처럼 검은 벽으로 사방이 이루어져 있었다. 창은 하나뿐이었는데, 그나마 두꺼운커튼으로 반쯤 가려져 있었다. 눈앞에는 가로 세로 1큐빗 가량의 커다란 나무 상자가 하나 놓여 있을 뿐,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넓은탁자가 하나 보였다. 차갑고 황량한 느낌의 돌벽에는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 것 같았으나 희미해서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추운 곳이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 때문만이 아니라, 방 전체에 오래 묵은 냉기가 감돌고 잇었다. "어서 오너라."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주 오래 된 듯 느껴지는 그 어떤 날처럼, 검푸른 망토와 은빛 풀플레이투 갑주, 그리고 건틀렛을 끼고 손에는 투구를 하나 든 모습은,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비야나크와 도크렌 스커들판에서 보았던 기억 속의 아버지도 지금처럼 저렇게 대지라도 가를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아버지 역시 대마법사의 자손이니까…. 그리고 어쩌면 나보다 훨씬 그의 능력을 많이 물려받았을지도 모를, 그 혈통의 계승자니까. "오랜만입니다." 나는 전처럼 '보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겨우 그 말만했다. 비슷한 듯했지만, 모든 것이 전과는 달랐다. 우리가 만난 장소가 달랐고, 내가 느끼는 아버지의 전재가 달라졌으며, 우리가 만난목적이 달랐다. 나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때처럼 손을 내밀어 악수를했다. "보고 싶었다." "……."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말에 대답하지 못한 채, 아버지가 가리키는대로 탁자 옆에 놓은 의자에 가 앉았다. 창으로 들어오는 저녁 햇살이 눈앞에 있는 탁자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앉지 않고 천천히 걸어 탁자 맞은편으로 갔다. 햇빛을약간 가리며 그 자리에 서자 역광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을 잘 볼 수없었다. 단지 검푸른 머리카락 언저리가 연한 주홍 빛으로 물드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네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지 알고 있다." 첫마디를 듣고 나는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알고 있다고? 아버지는 천천히 오른손을 내밀더니 뭔가 어서 하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뭘 하라는 거야… 아니, 뭘 보여 달라는……. 아룬드나얀? 나는 내 품속으로 손을 넣어 단단한 목걸이를 잡았다. 목걸이는목에서 묵직하게 한 번 흔들리며 멈췄다. 나는 아주 짧은 순간 망설였으나 , 곧 그것을 잡아 꺼냈다. "그래, 잘 해냈구나." 네 개의 보석, 붉은 석양 빛을 받아 각각의 빛깔로 빛나는 그것들은 긴 여행과 긴 기다림 속에서 얻어 낸 것들이다. 이 목걸이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소원을 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그것도 살기위한, 바로 삶 자체에 대한 희망을 위해서. 나는 이 목걸이를 아버지가 주었으며, 임무를 내게 맡긴 것도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지금 내게 말하려고 하는 것은 뭘까. 이제 완성된 목걸이를 돌려 달라는것일까? 아니야. 아버지가 알지 못하고 잇는 목걸이의 비밀을 이제 말해주어야 할 때야. 이것은 단순히 한 집안의 보물이나 유산이 아니니까. 이 목걸이에는 내 동료들과 대마법사, 그리고 죽어 간 수많은 생명들의 소원이 담겨 있어. 나는 목걸이를 풀지 않은 채,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대담한 시선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역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까.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까. 아버지는 얼마나 알고 계실까. 그 때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균열의 날이 멀지 않았더구나." 나는 그 상태에서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눈꺼풀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어째서 아버지는 그것을 알고 계시는 거지? 아버지는 내 얼굴을 평온한 표정으로 바라보셨다. 그리고 천천히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게다. 네게 처음 이 일을 맡길 때에는전혀 말해 주지 않았던 내용이니까. 이미 너도 어니 정도는 알고 있는 모양인데, 내 말이 틀리느냐?" 나는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면 왜… 모른다고 하셨지요? 저한테 아룬드나얀을 주실때는 그저 가문의 유물이라고만……." "너를 속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네게 그렇게 무거운 이야기를 다 말해 버리면 네가 부담을 크게 느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아버지깨서는 전부 알고 계셨던 건가요? 제가 아룬드나얀의 주인이라는 사실도, 이것이 균열을 막는 물건이라는 것도,모두 알고 계셨던 건가여?" 아버지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나는 올려보던 시선을 거두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생각했다. 아버지도인가? 유리카와 엘다렌이 내게사실을 말하기를 꺼렸던 것처럼, 미칼리스가 에제키엘의 비밀을 말해 주지 않는 것처럼, 내 운명에 관련된 이야기인데도 언제나 나 혼자만이 모르고 있다는 것은? 아버지 역시 똑같은 생각이란 건가? 지금까지 내 임무에 대해 솔직했던 것은 드래곤 아르누이크 테아칸 뿐이잖아. "…너무하시군요. 매번 이렇게 어린아이 취급이라니요. 동료들이그러는 것도 모자라서, 아버지께서도 이러시는 것입니까." "그들은 2백 년 전의 세계에서 온 터, 네가 어린아이로 보일 수도있지 않겠느냐. 그리고 내가 하비야나크에서 만났던 너는 지금의 너와는 달랐지 않느냐." 아버지는 내 동료들에 대한 일도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확실히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하비야나크에서도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간단히여행을 떠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내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중대한보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감히 아무렇게나 들판에서 노숙을 하고 낯선 사람들을 사귀거나 할 수 있었을까. 잃어버릴까 봐겁이 나서 늘 눈치만 보고 다녔을지도 몰라. 대마법사의 자손이라는사실 역시, 쓸데없는 자만심을 높이는 데만 한몫 했을지도 모르지. 유리카 역시 2백 년 전 대마법사의 동료이자 누이동생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그녀를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대할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요… 사소한 감정에 불과할 뿐이니 그런 것은 넘어가겠습니다.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다시 한 번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르디의 이야기를 꺼낼 참이었다. 내 임무와 아버지의계획은 공교롭게 겹친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본래 아버지를 만나러 여기에 올 계획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목걸이를 완성하면 아버지에게 갈 생각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목걸이를 돌려 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내 것이고, 아버지에게는 아무 소용도없는 물건일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지니는 임무는 다른 무엇보다도막중한 것이니까. 나 역시 아룬드나얀을 내 것으로 소유한다는 것은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말해 보아라." "오는 길에, 하르마탄에 와 계신 국왕 폐하를 뵈었습니다." 나는 아버지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왕국 함대 달크-하그르의 움직임, 마르텔리조에서 온 수척의 배들,4만에 이르는 군대, 그리고 국왕이 수도를 비우고 이 곳까지 왔다는사실…. 아버지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 정도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나르디 쪽에서 일부로 숨기려고 한적도 없었을 테고. "그랬구나." 아버지는 그렇게만 말한 뒤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무엇을 생각하고 계신 것일까. 이제 와서 당신이 취한 행동을 후회하는 것은 아닐것이다. 그럴 일이었다면 처음부터 경솔하게 행했을 리도 없었다. 그리고 한 번 행한 일을 쉽사리 후회할 아버지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침묵 끝에 내 말이 이어졌다. "제가 국왕 폐하께 들은 그대로, 정말 그런 겁니까?"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드디어 아버지는 입을 열어 그에 대해 대답했다. "네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 그리고 구원 기사단의 주력이 모두 이 곳으로 옮겨 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국왕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 그 모든것이 의미하는 하나의 사실에 대해 묻는 것이라면……."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이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듣지 않으려는것처럼, 내 귀는 갑자기 성능을 잃은 양 침묵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을 뚫고, 아버지의 대답은 한층 선명하게 들려 왔다. "네 생각은, 맞다." 알고 있었어. 이미 이럴 것을 알고 있었어. 새삼스러울 것은 없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내 입에서 냉정한대꾸가 이어졌다. "그렇군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오히려 내 심장을 차갑게 만드는 듯했다. 차가운 얼음 조각이 목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왜입니까?" 내 입은 마치 내 몸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할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내 것을 찾기 위해서다." "아버지의 것이라니여?" "나의 것, 국왕이 빼앗아 간 나의 것이다. 나는 그것을 되찾을 생각이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문득 창에서 한 줄기 바람이 차갑게 불어 와 탁자 위를 쓸어 갔다. 붉은 광선 속에서 은빛 먼지가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네 조상들이 어떤 사심도 없이 왕가에 바치고, 그리고 대가는 커녕 배은의 보답만을 받았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 너는 아무것도 모르겠지. 대대로 흔들림 없는 충성만을 바쳐 온 나르시냐크 가문과 구원 기사단을 왕가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너는 전혀 모르겠지." 아버지는 천천히 탁자를 돌아 내 곁으로 다가왔다, 핏빛으로 변한석양이 정면으로 내 시야에 쏟아져, 나는 잠시 손으로 눈을 가려야했다. 아버지는 그러는 내게 검은 그림자처럼 성큼 다가와 탁자 위에 뭔가를 내려놓았다. 나는 눈을 뜨고 그것을 보았다. 화려한 금빛 자루의 장식 단검이었다. "네 할아버지의 물건이다." 나는 단검을 집어 들었다. 날을 뽑으니 금속 스치는 소리가 귓가에 날카롭게 울렸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단검이었다. 이건… 나르디가 가지고 있던 것과 아주 비슷한데? "그것은 현 국왕의 조부인 휴로엘 국왕이 태자 시절 네 할아버지와우정을 다짐하여 만들었던 두 자루의 단검 중 하나다. 네 할아버지가15세, 휴로엘 국왕은 16세 때의 일이었지. 그러나 결국 휴로엘 국왕은 결국, 우정을 깨뜨리고 백여 년 간 이어진 신뢰를 내버린 첫 번째왕이 되었지. 그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귀족들의 중상모략에눈이 멀어 나르시냐크 집안과 구원 기사단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나는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휴로엘 국왕이 즉위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르시냐크 집안과 듀플리시아드 왕가는 좋은 협력자이자 돈독한 우애로 맺어진 사이였다. 물론 친구와 같은 사이라고 해서 나르시냐크 가문이 신하로서의의무와 예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가문의 시조인 대마법사 에제키엘이 당시 국왕이던 나르디엔과 맺었던 친교가 후대에까지 이어져 온 결과였다. 에제키엘 이전에 나르시냐크 가문이 어떤 가문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네가 알다시피, 에제키엘은 그 모든 과거를 충분히 덮고도 남을 만큼, 국가와 이 세상에 크나큰 은혜를 베풀었다." 단검이 다시 테이블에 놓여졌다. 나는 생각했다. 나르디는 분명히이 단검과 매우 비슷하게 생긴 단검을 가지고 있었고, 내가 기억하다시피 그것은 이진즈 강의 물 속에 수장되어 버렸다. 물론,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긴 했지만 나르디는 그 단검을 조금도 아까워하는 것같지 않았다. 그리고 나르디는 처음 그 단검으로 벌레를 맞힌 다음얼굴을 찌푸리며 말했었다. 이거 준 사람만 아니었어도 내가 버리고갔다, 라고. 그것을 준 사람은 돌아가신 이그논 국왕 폐하였을까? 단검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 머리 위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단검은 두 집안의 마지막 우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 나는 아직까지 물려받은 그대로 이것을 간직해 왔다. 그러나듀플리시아드 가문의 후계자는 이 단검을 가지고 있을까? 확인되지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일이지." "……." 나는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나는 물었다. "그 말씀은… 왕가를 원망하고 계신다는 말씀이신가요?" "원망하느냐고 물었느냐?" 아버지는 내 족으로 약간 굽혔던 몸을 일으켜 다시 창가로 걸어갔다. 해는 시시각각으로 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머리 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말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그러나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그리 적당한 표현은 아니구나. 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원망이란, 자신이 입은 상처를 갚을 길이 없는 자들이나 품는 감정이다." 그 말씀은, 아버지께선 해를 되갚으시겠단 말씀이신가요? 그러나 그 말은 입 밖으로 말하지 못했다. 나는 우울한 표정으로입술만 짓씹었다. 나는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왔지 설득받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사실은 들을 필요가 있었다. 어느 한쪽의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쪽의 말만 듣고 일을 결정할 수도 없었다. 생각보다 뿌리싶은 뭔가가 얽혀 있다는 느낌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파비안, 잘 들어라. 휴로엘 국왕 이후로 우리 가문이 겪어 온 수모와 배은에 대해 너는 모른다. 구원 기사단이 어째서 달크로즈에서쫓겨나 님-나르시냐크를 주둔지로 삼게 되었는지, 어째서 구원 기사단장은 직위를 가질 수 없게 되었는지, 왜 내가 가능한 한 왕가와 거리를 두고 궁정 파티 등에 참석하는 것도 꺼릴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 그리고 결국 기사단을 이끌고 이 먼 땅으로 와서 이렇듯 국왕의 군대와 대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너는 모른다." 나는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두 가문 사이에 원한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그게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되는 것일까? 아니 물론, 상대방이 나를 죽일지도몰라서, 이쪽에서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도 있겠지. 그러나 나는 나르디를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나르디도 아버지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두 집안의 싸움에 휘말려 죽어 갈지도 모를 병사들,그리고 구원 기사단의 기사들은 어떻게 되는 건데? 그들이 죽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인가? 머리 속이 복잡했지만, 나는 겨우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님-나르시냐크는 수도 방위 도시가 아니었나요? 그 이름도 우리가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고……." "이름은 물론 그렇다. 그러나 수도 방위 도시라는 님-나르시냐크가 달크로즈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너도 지도를 보앗다면알고 있겠지. 일례로 하르얀의 사건이 일어나던 때에도, 님-나르시냐크에 있는 병력은 당장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만일 그것이 소년 기사들의 조잡한 반란이 아니라 정말 조직적이고 상당한 군세를갖춘 반란이었다면, 지금처럼 왕가가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어리석은 왕가는 내부의 적을 눈치채지 못하고,다만 강력한 군세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구원 기사단만을 향해 까닭 없는 의심을 품어 온 것이다. 결국 그 결과는 57명의 병사로 지켜지는 수도라는 어이없는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지. 어쩌면 그들은다른 어떤 것보다, 구원 기사단으로부터 달크로즈를 지키고 싶었던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쯤은 그들도 조금 깨달았을까." 물론 나도 하르얀의 사건이 왕국 귀족들의 자제들이 일으킨 반란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렇다면 분명 내부의 적인 셈이다. 내부의 적이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에도 오직 근거 없는 의심을 다른데로 돌리고 있었던 것이라고……? 분명 나르디는 구원 기사단을 의심하고 있긴 했다. 그러나 정말로기사단은 반역의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건가? 결국 이렇게 모든 것은 결과로 나타났지 않았나? 설마, 왕가조차 눈치채지 못하게순식간에 기사단 전체를 하르마탄으로 옮기고, 충분한 전투 준비와공성전의 방비까지 갖추는 일이 하루 이틀의 결심과 준비로 되는 것은 아니겠지. 식량도, 무기도, 방어구도, 겨울나기 대책도, 준비해야할 일은 산더미 같을텐데. 아니,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아버지는 이미 목전에 다가온 위협을느끼고 자기 방어를 위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지않은가. 그 모든 진실은 누가 알고 있지? 오해를 풀 수는 없는 건가, 이제 와서? 모든 것은 되돌릴 수 없는것이고, 내 친아버지와 가장 친한 친구는 결국 그렇게 검을 들이댈 수밖에 없는 처지란 건가? "네 할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느냐."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잠겨 있었다. 나는 약간 놀라 그런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어떤 감정이 절실하게 묻어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던 아버지이 목소리도 저렇지는 않았었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어린 시절의 친구이자 평생의 우정을 맹세한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또한 네 할아버지는 나라를 구한 대마법사의 후손. 두 사람의관계사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 말은 마치 나와 나르디의 관계를 겨냥해서 하는 말처럼 들렸다. 아버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나는 눈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국왕의 우정이라는 것은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들에게는 우정보다권력이 먼저다." "그럼 제 친구인 나르디엔 국왕 폐하도 역시도 그럴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국왕이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해도, 격국 모든 상황이 그를 그렇게하도록 만들 것이다. 더군다나 너는 네 할아버지의 자손이자 내 아들이며, 그는 휴로엘 국왕의 손자다. 겨우 두 대(代) 만에 되풀이되고 있는 일이다. 다를 것이라고 생각할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그럴 이유가 없어요. 무엇 때문에 나르디엔 국왕이 저를 배신한다는 말씀이지요?" "정말로 모르느냐?" 아버지는 다시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셨다. 내 얼굴을 꿰둟어버릴 것처럼 눈빛이 강렬했다. "너는 파비안 나르시냐크다. 휴로엘 국왕이 배신한 히크렐 나르시냐크의 손자이며, 이제 그들을 향해 반기를 들 나의 아들이며, 그리고 반란이라는 죄목으로 그들에게 처형된 하르얀 나르시냐크의 형이다. 게다가 그들이 가장 겁내는 구원 기사단의 실세, 나르시냐크 가문의 하나뿐인 후계자다. 이래도 네가 무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거냐? 그 허울 좋은 알량한 우정이 언제까지 가면 속에서 잠자고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이제 듀플리시아드와 나르시냐크는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왜 모르느냐!"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예요!" "핏줄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버지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테이블 끝 쪽을 걸어가더니 그 끝에 놓여 있던 상자를 집어 들어 내 쪽으로 옮겨다 놓았다. 높이는 한뼘 정도밖에 되지 않은 납작한 상자였다. 나무로 된 뚜껑을 열자 상자 안에는 흰 천이 덮여져 있었다. 건틀렛을 낀 아버지의 손이 그 천을 낚아챘다. "!" 천이 걷어지자 초상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처음에 그것이 나르디의 초상화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보니 금발과 날카로운 윤곽은 비슷했지만 좀더 나이 든 사람의 초상화였다. 완벽한 예복 차림에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고, 나르디보다평범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스물다섯 정도 되었을까? 눈빛 역시달랐다. 검은 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그림 속에서 나를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누구입니까?"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고 초상화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그 밑에 또 다른 그림이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새로운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역시초상화였다. 갈색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기고 있는 젊은이로서 나르디와 비슷한 나이였고 금갈색 눈빛도 비슷했다. 그러나 나르디만큼잘생긴 소년은 아니었다. 그는 예복 대신 가벼운 복장을 걸치고 있었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나르디와 거의… 똑같아 보이는 미소였다. "……" 두 점의 초상화가 내 눈앞에 나란히 놓여졌다. 나는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 초상화들을 쳐다보았다. "금발 젊은이는 죽은 이그논 국왕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다. 그리고 갈색 머리 소년은 휴로엘 국왕이 열일곱 살 때의 모습이다. 국왕이 되기 전인 태자 시절의 초상화지." 아버지는 한 걸은 다가와 휴로엘 국왕의 초상화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핏줄이 어째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인지 알겠느냐? 나르디엔국왕을 어려서부터 휴로엘 국왕과 성격이 굉장히 비슷하다고 왕가에서도 말해 왔었다. 실제로 휴로엘 국왕도 열일곱 살 때, 비록 짧긴했지만 약 2개월 간 달크로즈를 떠나 대륙을 돌아다닌 젓이 있었다. 태자 시절부터 총명하기로 이름났고, 네 할아버지인 히크렐 나르시냐크를 제 몸보다 소중히 여겨서 그를 모함하는 일이라면 물불 안가리고 화를 냈지. 그러나, 그런 그가 국왕이 되고 나서 네 할아버지를 어떻게 했는지 아느냐!" 얼굴이 화끈거려 견디기가 힘들었다. 입술이 뜨거운 나머지 입을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이제 두려울 정도로 감정이 격해져 있었다. 늘 침착하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던 아버지가 분노를억누르지 못하고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다. 내가 모르고 있는 어떤기억이 그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휴로엘 국왕은 할아버지를 어떻게 했다는 걸까. 이름조차 처음 듣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할아버지다. 그러나 그가 있기에 내가 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이, 지금 이 순간, 내 결정에이르기까지 이렇듯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핏줄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나는 열다섯도 되기 전에 아버지를 잃었다. 좀더 일찍 일었었다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랬다면 그 사실이 얼마나 분하고슬픈 일인지 잘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나는 모든 사실을 알 수 있는 나이였다. 이미 그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휴로첼국왕 즉위 2년째부터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지기 시작한 두 집안의 관계와, 그리고 수많은 귀족들의 질투와 모함이 그 사이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휴로엘 국왕을 비롯한 왕가의 사람들도어느 정도는 그런 경향에 의도적으로 동조했다는 사실도 말이다." 드디어 해가 져 버렸다. 창문 너머로 검은 커튼이 서서히 내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병사 하나가 불이 켜진 램프를 가져오자 아버지는 그것을 받아 들어 손수 촛대에 불을 붙였다. 세 개의 가지가 달린 촛대 네 개에 모두 불이 붙자, 캄캄한 암흑 속에 붉은 기운이 희미하게 서렸다. 아버지와 나는 그 가운데에서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바라보고 있었다. 볼수록 닮았다. 핏줄은 정말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와나,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 얼굴을 가진 걸까. 머리와 눈빛, 눈썹 한줄기 턱선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린 것처럼 참으로 닮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짙은 실루엣으로 떠올라 있는 아버지의 얼굴은 마치 미래의 내 얼굴을 닮아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네 할아버지는 휴로엘 국왕을 철석같이 믿었다. 이미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누군가가 국왕을 조심하라고 아버지에게 일러 줄라 치면, 벌컥 화를 내며 내 집에서 당장 나가라고 소리지르셨다. 나는 아버지가 그러실 때마다 , 저토록 변치 않는 충성심을지닌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국왕께서도 아버지를 저버리실 리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져, 마치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병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국왕의 부름을 받고달크로즈에 나간 아버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고개를 약간 돌리자 그의 얼굴의 어둠 속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열두 개의 초는 넓은 방안을 전부 비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방안에는 수많은 어둠들이 무리 지어 웅크리고 있었다. "내가 모든 사정을 알게 되었을 때… 열흘이나 지나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로 돌아온, 아버지의 나무토막 같은 손을 부여잡고나 자신에게 맹세한 것이 있었다. 미약한 어린아이에 불과한 내게힘이 생겨난다면, 아니, 반드시 그 힘을 길러서 이 분노와 치욕을 모조리 되갚겠노라고, 휴로엘 국왕과 그 자식에게, 그리고 그 자손에게 이 모든 것을 두 배, 세 배, 열 배로 되갚겠노라고 듀플리시아드성(姓)을 가진 자는 한 명도 남김없이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렇게맹세했고 그 맹세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 아버지의 말은 달궈진 쇠처럼 내 심장을 고통스럽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어린 열기는 절벽 위에서 들었던 나르디의 목소리에 어렸던 그것과 비슷했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버지의 그런 심정을 이해할 수있는 자식이 되기에는, 나는 너무 오랫동안 먼 곳에 떨어져 전혀 다른 성으로 자라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핏줄의 이야기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 이야기가 주는 감정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어 더듬더듬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 예, 저는 나르시냐크 가문의 사람이었지만 18년 간 크리스차넨 성을 가지고 자랐어요. 아버지도 보셨을 그 산마을은 수도에서 벌어지는 권력 다툼 따위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소박하고 평화롭기만 한 곳이었지요. 그렇다고 해서 할아버지의 불행이 저와 무관하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나르디엔 듀플리시아드의 친구로서 약 반년을 보냈습니다. 그는 제신뢰를 배반한 일이 없었고, 저 역시 그랬지요. 그래서 저는 그를 마음의 친구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봐 왔던 그는 이스나미르 국왕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게 어떤 잘못도 저지른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그역시 아버지의 적이 되어야만 하는 겁니까? 그가 아버지에게 어떤해를 끼친 적이 있나요? 아버지가 하는 이 일은 어쩌면, 듀플리시아드 가문 하나만이 아니라 이스나미르 전체에 혼란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 역시 이스나미르를 사랑한다. 그러나 듀플리시아드는 용서할수 없다. 내가 살아있는 한,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이스나미르가… 불행해진다 해도 말입니까?" "이스나미르를 누가 구했느냐!" 아버지는 갑자기 격한 어조로 외치더니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탁자 위에 있던 초상화들과 상자가 일시에 들썩거렸다. "너도 알지 않느냐! 에제키엘이 무엇 때문에 죽었지? 그가 무엇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균열을 막는 희생물이 되어야 했느냐? 지금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에제키엘에게 빚지지 않은 자가 과연 누가 있을까? 그가 이스나미르를 구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을 성싶으냐! 이 나라 전체는우리 가문에 의해 구원받은 것이다! 그렇게 구원받은 자들이 은혜를잊고 우리 가문을 멸문시키려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말이냐!" "그건 이스나미르 하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세상 전체를 위해서였어요…. 그리고 에제키엘 역시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잖아요?" "똑 같은 말이다! 이 세상을 구하면서 이스나미르 역시 구한 것이다! 2백 년 전의 나르디엔 국왕이 에제키엘에게 가졌을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그들이 2백 년만 기억했었던들,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부덕하고 배은망덕한 무리들이야!" 풀리지 않는 오해들…. 누가 먼저인지, 누가 먼저 의심하고, 누가그것을 원망하게 된 것인지 나는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오해인 걸까. 어쩌면 그것은 동시에 시작된 것인지도모르고, 누군가의 농간 때문에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만일… 이 싸움에서 이긴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스나미르 령 하르마탄은 예모랑드 왕국으로 거듭나는 것이지." "…대륙은?" "그것은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나는 이스나미르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것이 아니니까. 나는 오직 듀플리시아드를 용서할 수 없을뿐이다." 이 모든 것은 의미 있는 질문들이 아니었다. 내가 알 필요도 없었거니와, 4만의 군대를 이끌고 이 곳에 상륙해 있는 나르디엔 국왕과이스나미르에 남아 있을 수많은 군대들, 국민들, 귀족들… 그 모든것을 뚫을 수 있다고 아버지는 생각하는 것일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열두 개의 촛불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는 싸늘한 방에서 붉은 실루엣을 지닌 그림자가 다가오더니 팔을 뻗어 내 턱을 쓰다듬었다. 나는 굳어 버린 것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성공하기 어렵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것이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 해도, 나는 기꺼이 그 길로 한 발을 내딛을 것이다. 파비안." "네." 내 목소리는 내 귀에도 낯설게 들렸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맹세의 마음… 죽은 아버지 앞에서 한 맹세라는 것. 그것을 지키겠다는 마음. 아버지를 따르지는 못해도 아버지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어찌 보면 방향은 다를지 몰라도, 그 말은 미칼리스가 드래곤 앞에서 했던, 규ㄴ열 앞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끝까지 해 보겠다는 말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와는 달라서 죽은 어머니 앞에서 그런 맹세를 하지 못했다. 아버지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괴물들을 모조리 펴 없애겠다고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마음 같은 것을 몇십 년 간이나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아버지는 저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수많은 것들을 희생했었을 테지.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했었을까. 그런 길에는 개인적인 행복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다. 어쩌면 하르얀… 그가 아버지의 무관심속에서 고통받으며 불행한 인격으로 성장하게 된 것도 모두 그 맹세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지킨 맹세… 그것을 이제와서 내 몇 마디 말로 바꿀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행동이 단지 그 사실만으로 결정되어버려야 하는 것일까. 아버지의 복수는 나의 복수이니, 내가 신뢰하던 사람을 버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외면하면서? 전쟁…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구원 기사단과 이스나미르의 병사,내가 사랑하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슬퍼해야 하는 그 길로? 그 슬퍼하던 사람들 중 또 몇 명은 아버지와같은 마음을 품고 자신의 행복을 내던지며 고통스러운 삶을 택할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내가 왕으로서 인정하고 맹세한 나의 왕, 나의 친구… 그를 배신한다면 할아버지를 배신한 휴로엘 국왕의 행동과 과연 다를것이 있을까? 대답을 해야 한다… 설득하지 못할지라도, 나는 내가 생각하는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버지… 복수는 복수를 부를 뿐입니다." 아버지의 손끝이 내 턱선을 천천히 따라가자, 건틀렛을 낀 손가락이 내 뺨에 닿았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손가락이었다. 아버지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내 말을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저그렇게, 선 채로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그 어깨 너머는 암흑의 바다였다. 촛불 몇 개로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뵌 적이 없는 할아버지에 대한 아버지의 감정 역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이해하려고 해요. 그러나 저는 아버지와 다르게 살아왔습니다…. 다르게 자라왔으며 다른 우정을 맺고, 다른 일들을 위해 제 자신을바치며…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나르시냐크 가문과 맺어진 끈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 역시 제 신념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네 신념은 어떤 것이냐." 아버지가 문득 입을 열어 말했고, 그 순간 손가락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쉰 다음 말했다. "아버지는 당신이 사랑하신 분을 위해서 인생을 바치셨습니다. 저는 제가 사랑한 것들을 위해 제 인생을 바쳐 살아가겠습니다. 저는 아버지 역시 사랑하기 때문에 어쩌면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 이일을 도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적으로 삼고자 하는 자는 저의 가장 소중한 친구이며… 충성을 맹세했던 저의왕입니다." "그러나 그는 너를 죽일 것이다." 나는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르지요. 모든 진실은 세월만이 말해 줄 수 있는 것이니까요." "네가 먼저 치지 않으면 그들이 너를 칠 것이다. 한 번의 잘못된선택으로, 네 자신과 가문 모두가 죽음의 길로 들어설지도 모른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뀌어져버린 내 가치관에 대해 스스로 놀라면서, 나는 입을 열어 말했다. "누구의 오해와 배신에서 비롯된 것이든, 이 세상에 가득한 투쟁들 속에서 이기는 자와 지는 자는 늘 있어 왔지요…. 제가 아버지의말에 따른다면, 그것은 제게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던 나르디엔국왕을 제가 먼저 배신하는 일이 됩니다. 지금, 그와 저는 친구입니다…. 누가 먼저 공격하느냐에 따라 포획하고, 포획당하는 그런 관계를 버리자고 서로 약속한 사이인 거지요. 제가 만약 그 약속을 깬다면 휴로엘 국왕이 할아버지를 죽인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행동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리고 나는 언젠가 미칼리스가 했던 말을 말하고 있었다. "제가 죽지 않으면 상대가 죽겠지요. 18년 동안이나 제가 이렇게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의 수많은 도전들 속에서 제가 이겼기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었든, 아주 작은 벌레였든, 짐승이나 식물이었다고 해도, 매번 이겼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온 거지요. 그렇게 오랫동안 이겨 온 끝에, 이번에는 제 차례가 되어서 죽는다 해도 그리 원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그것이 상대방의 신뢰를 지키고 보답하려 한 결과라면……." 뜨거운 숨이 목구멍을 따라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내 결정에 대해 우울한 만족을 느끼며 마지막 말을 했다. "멸망이라 해도,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싸늘한 방 안을 채우는 것은 두 사람이 내뿜는 고통스러운 열기였다. 아버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도무지 볼 수가 없었다. 방안은 마치 다른 사람은 올 수 없는 이상한 세상처럼 암흑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그 안에 있는 나조차도 내 감정을 다 알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아버지에게 그렇다면 왜 하르얀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앞장 서서 진압했는지 묻고 싶었다. 그 때는 아직 시기가 아니라서? 아니면 그런 행동으로 왕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는 그렇게 희생시켜도 상관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 왜 하르얀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었는지, 왜 그를 사랑하지않았는지 묻고 싶었다. 또 나는 왜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는지도 묻고 싶었다. 나르디가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국왕의 임무에 미숙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니면… 균열의 시기를 미리 알고, 그 순간을 이용해서나르디의 공격을 조금이라도 저지하기 위해? 그리고… 아버지가 지금 어떤 기분인가도 묻고 싶었다. 평생을바쳐 준비해 온 일을 돕지 않겠다고 말하는 아들을 앞에 놓고, 무슨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그러나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내 몸이 암흑 속으로 서서히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침묵을 지켰다. "그만 나가거라, 파비안." 아버지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예전부터 느껴 오던 목소리와 비슷한 것으로 다시 되돌아가 있었다. "저녁식사 때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나는 검은 바다 속에 아버지를 홀로 남겨 둔 채 문을 열고 밖으로나갔다. "파비안!" 이곳 저곳에 앉아 있던 동료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유리카는 나를 껴안을 것처럼 달려왔다가 내 눈빛을 의식했는지 손을 맞잡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를 안내해 준 병사는 깊이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동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던 방은 아버지가 계시던 곳보다 훨씬 안락한 느낌을 주는 방이었다. 아마 손님을 맞는 곳인 듯 보였고, 테이블 위에는 그들을 위해 내놓은 듯한 다과도 놓여 있었다. 엘다렌은 밖으로 나간 병사 쪽을 한 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이 곳은 새로운 왕국인 건가." 그가 본 그대로였다. 이 곳은 이스나미르와 떨어진 별개의 왕국,아버지가 왕이라면 나는 왕자였다. 기사들과 병사들을 포함하여 이성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왕자에게 하는 예의 이상을 내게 보이고있었다. 나갔던 병사는 금방 다시 나타나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식당으로 오시라는 분부십니다." "…예." 예전에 세르무즈의 도크렌 시커 들판을 달릴 때도 그랬던 것처럼나는 나 자신의 가치에서 유래하지 않은 예의를 받는 데에는 몹시서툴렀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이 일어나 식당으로 행했다. 이미 네 층이나 올라와 있던 우리는 이번에는 한 층 내려갔다. 식당이라고 말한 곳은 중앙 홀이었다. 아직 아무도 와 있지 않았다. 식탁은 폭이 좁은데다 까마득하게길었고, 돌로 된 아치들은 묵직한 곡선을 그리며 천장으로 사라져갔다. 식탁 주위에는 수십 개나 되는 의자들이 놓여져 있어서 어디에 앉아야 좋을지 도무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이거야 정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꼭 한꺼번에 먹어야 하나?" 미칼리스는 가벼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걸어가더니 중간쯤에 있는 의자를 아무거나 골라잡아 걸터앉았다.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괸채로 빈 식탁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를 기준 삼아 우리들도 대강둘러앉게 되었다. 그렇게 앉고 보니, 정말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식당이었다. "복잡한 게 아니라도 좋으니, 아무거나 먹을 걸 좀 빨리 줬으면좋겠는데." 손님들은 한 명도 더 오지 않았는데 부엌으로 통하는 좁은 문이열리더니 음식들이 날라져 오기 시작했다. 정찬이기는 했지만 성찬은 아니었다. 우리는 먼저 식사를 시작해도 좋은 것인지 잘 몰라서한동안 음식이 놓여진 접시들만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그렇게 한참 만에, 우리들이 들어온 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이제야 식사할 사람들이 오는 건가 싶어 우리는 모두 몸을 돌려 뒤돌아보았다. 그 때 내 입에서 제일 먼저 외침이 터졌다. "츠칠헨!" 구원 기사단, 프랑드의 기사이자 나와 함께 잔-이슬로즈 공주를 사로잡는 작전에 나서기도 했던 젊은 기사, 츠칠헨 야스딩거가 아닌가! "모두들, 반갑습니다!" 그는 식탁 쪽으로 다가오더니 내게 먼저 깍듯이 절을 해서 나를 당황하게 했다. 그러고는 엘다렌과 유리카 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거 어쩐지 저를 보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분들 같군요. 구원 기사단이 모두 여기에 와 있는데 제가 빠질 리가 있겠습니까? 오랜만에 뵙게 되니 굉장히 기쁜데요!" "으흠, 흠." 엘다렌은 헛기침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았고, 유리카도 내 쪽을 한번 흘끗 쳐다본 후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미소만 지어 보였다. "아, 반갑습니다. 저는 미칼리스 마르나치야라고 합니다." 오히려 미칼리스는 그가 우리와 굉장히 친한 사이인가 보다고 생각한 건지 먼저 반갑게 말을 걸었다. 얼마 전에 우리를 열광적으로반기는 마르텔리조 사람들한테 너무 많이 시달린 나머지 새로운 태도를 개발한 모양이었다. "예, 저는 츠칠헨 야스딩거입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나는 츠칠헨이 꽤 반가웠다. 구원 기사단의 기사들 중에는그래도 내게 친근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고, 한 번 검을 맞댄 뒤로는 그에게서 형 같은 느낌도 받고 있던 터였다. 이 황량한 성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고 보니 다른 데서 만나는 것보다 더 많이 반가운 것같았다. "저도 반가워요. 그런데 츠칠헨, 그런 예의는 좀 거북한걸요. 혹시아버지께서 시키신 건가요?" "아닙니다. 저희들이 알아서 하는 거지요." 그는 밝게 웃으면서 의자를 끌어다 내 곁에 앉았다. 그제야 살펴보니 식탁에 차려진 것은 5인분의 식사였다. "단장님께선 다른 볼일이 있으셔서 나중에 따로 저녁을 들겠다고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의 말상대가 되어 드리겠다고 나섰더니 단장님께서도 좋다고 하시던걸요. 어서, 식사들 하시지요. 수프가 다 식겠습니다." 다행이 그는 아버지를 폐하니 어쩌니 하고 부르지는 않았다. 우리는 배가 고팠던 터라 서둘러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 츠칠헨에게 성의 상황에 대해서 조금 물어 보았다. 그는 별로 숨기는 것 없이 대답해 주었다. "예, 키반 노르보르트 님이나 그 때 야습 작전에 참여한 다른 기사들도 모두 여기에 와 있습니다. 물론 리안센 부단장님께서도 여기계시고요. 또 잘 모르시겠지만 모나드의 기사와 세르네즈의 기사도와 있답니다." 솔직히 이 말을 꺼내기는 좀 힘들었지만, 나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에게 물었다. "기사단이 왜 이리로 왔는지 알고 있어요?" "아, 그건……." 그는 약간 망설이는 듯한 얼굴로 웃어 보이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대답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나르디엔 국왕 폐하와 싸우기 위해서지요." 그는 이상하게도 나르디를 아직도 '폐하'로 지칭하고 있었다. 나는 더욱 의문이 나서 물었다. "왜 싸우는 겁니까?"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거든요." 이 정도가 되자 그가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내려고 애쓰고 있다는것이 드러났다. 그의 미간은 마음 속의 갈등을 반영하는 것처럼 가볍게 약간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  내게 다시 웃어 보인 다음 나이프를 움직여 고기를 잘랐다. 그러나 나는 한 마디 더 함으로써 그의 나이프를 완전히 멈추게만들어 버렸다. "제 아버지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입니까?" "……." 유리카도, 엘다렌도, 미칼리스도 식사를 멈추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시작한 이상 그만둘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마음 속으로부터 나르디엔 국왕을 반대하고 있는겁니까?" 그의 입술이 약간 일그러지면서 떨렸다. 그는 잠시 후 입 안에 든것을 마저 씹어 삼켰다. 음식물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제게 무슨 대답을 원하시는 겁니까? 파비안 님은 단장님의 아드님이시지 않습니까? 파비안 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기에제게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는 나르디엔 국왕 폐하께 충성하는 이스나미르 국민입니다." "……." 식사는 완전히 중단되어 버렸다. 세 명의 동료들은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하면서도 침묵을 지켰고,나는 츠칠헨의 대답을 기다리며 입을 다물었다. 츠칠헨은 고개를 숙인 채 식탁 모서리를 가만히 쏘아보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그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이윽고 입을 연 것은 유리카였다. "츠칠헨, 당신의 솔직한 생각을 말해 줘요." 그러고도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츠칠헨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마치 자신의 불쾌한 기분을 씹어 뱉는 것처럼 들렸다. "왜 저를 괴롭히는 겁니까…. 장난이라면 이제는 그만두시죠. 구원기사단은 충분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왕 폐하는 단장님과 해결될 수 없는 원한 관계에 있고, 왕가와 귀족들은 기사단의 규모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기사단 자체를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나르디엔국왕의 밑에서 저희들이 가게 될 길은 뻔합니다. 귀족들은 우리들이지금껏 세웠던 많은 공로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잊어버리고, 오직 자신들이 안심하기 위해서 은혜를 배신으로 갚으려는 겁니다. 이래도 우리가 하는 일에 당위성이 없습니까?" "중요한 것은 진심이에요." 유리카의 목소리가 짧고 단호하게 울렸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죽어요. 기사단 역시 지금의 반도 살아남을 수 없을 거예요. 당신도 달크-하그르 함대가 하르마탄에 도착해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지요? 나르디엔 국왕이 이끄는 4만의 군대가 이미 섬에 상륙해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더많은 군대를 충분히 동원할 수 있겠지요. 손을 대는 순간, 모든 것은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요. 스스로의 의지로 몇 번이고 숙고한 끝에 결정을 내려 움직인다 해도 남는 것은 후회, 후회 없는 삶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전부터… 당신을 이상한 아가씨라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당신은누구죠? 당신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도무지 18세의 소녀라고는 믿을 수가 없게 되어 버리는군요." 이윽고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지한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파비안 님, 당신은 어째서 아버지를 지지하지 않는 것입니까? 기사단에 속한 일개 기사, 한 사람의 병사라 해도 모두 단장님의 한 말이라면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당신은 그의 아들입니다. 그런데어째서 우리가 믿는 것을 당신이 믿지 못합니까?" "그것은, 그는 자신 안에 믿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오." 내 뒤에서 미칼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나이프를 놓은 채 장대한 몸집을 약간 앞으로 내밀어 츠칠헨을 바라보았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푸른 하늘이 박혀 반짝거리고 있었다. "자신 안에 신념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 자기 밖에서 진실을 찾고자 애쓰는 것이오. 스스로 내린 결정의 결과는 결국 자신의 몫, 아무도 대신 책임져 주지 않소. 왜 당신은 자신의 진실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 하시오? 자신의 진실은 결국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당신도그것을 모르지는 않지 않소?" 츠칠헨은 항변했다. 그는 자기보다 키가 큰 미칼리스를 올려다본 채잘생긴 얼굴에 단호한 감정을 드러내며 대꾸했다. "저는 제 결정에 의해 단장님을 따릅니다. 단장님의 진실은 저와같았습니다. 그러니 그를 따르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진실도 남과 같을 수는 없소." "저는 진심으로 단장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달칵, 포크가 접시를 건드리며 떨어졌으나 묵직한 양탄자에 묻혀소리는 나지 않았다. 츠칠헨은 잠시 꼿꼿이 몸을 세우고 잇다가 몸을 숙여 떨어진 포크를 집었다. 포크를 바꿔 줄 집사나 하인은 자리에 없었다. 그는 포크를 흰 테이블 보 위에 그대로 올려놓은 다음,더 이상 식사를 하지 않을 것처럼 의자를 뒤로 약간 뺐다. "저를 시험하려 하지 마십시오. 전 이미 마음을 결정했습니다. 바꿀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더 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마저 식사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다른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그리하여 우리는 입을 다물고 다시 식사를 시작했고, 츠칠헨은 간간이 입을 열어 우리가 알고 있는 기사들의 근황이나 그 밖의 자잘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들이 달크로즈 수복 작전에서 세웠던 공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그 사건이 모두 종료된 후 귀족들이 기사단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었다. 단장의 아들과 부단장의 아들이 s동시에 반역자로 처형되는 상황이었다. 하르얀은 전투 중에 이미 전사했고, 티무르는 붙잡혀 다른 소년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았다. 물론 반란의 진압에 큰 공을 세우긴 했지만 그 사건에 휘말려 수없이 죽어간 다른 귀족 집안의 사람들이 기사단을 어떻게 보았으리라는 것은듣지 않아도 알고도 남았다. 나도 나르디가 귀족들의 희생을 전제로한 잔인한 작전을 세웠던 것을 알고 있었다. 리안센 부단장과 엘비르가 어떻게 반목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있었다. 나도 짐작이 갔다. 결국 리안센 부단장은 이렇게 아버지를따라 새로운 반란에 가담했고, 그 아들인 엘비르는 그들을 정벌하러 온 국왕의 직속 수행 기사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식사가 끝났다. "특별한 용무가 있으셔서 오셨다는 것을 알고 잇습니다. 저는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만, 아마 오늘밤쯤에 단장님께서 여러분들을만나실 것 같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을 방으로 다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이전부터 츠칠헨이 얼마나 아버지에게 충성스러운가 하는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르디엔 국왕의 일을 말하는 순간,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분명히 보았다. 우리는 그를 따라 침실이 딸린 거실로 다시 안내되었다. 그는 여전히 내게 정중한 예의를 갖춘 절을 하고는 방을 나갔다. "따라오십시오." 한밤중에 잠들어 있던 우리를 깨운 것은 병사가 아닌 긴 로브를걸친 중년의 사내였다.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와 보니 동료들은모두 옷을 갈아입고 나와 있었다. 길이가 1큐빗이나 되는 세로로 기다란 램프를 든 남자는 우리 모두를 따라오도록 손짓했다. 자세한설명은 없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검을 꺼내 등에 메고는 그 뒤를 따랐다. 한밤중에 보는 성은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는 완벽한 어둠과 같았다. 계단 모퉁이를 지나치는데 어둠 속에서 얕은 숨소리가 들려 와그제야 그 곳에 보초가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초는 그야말로그림자 속에 가려진 채 아무 기척도 내지 않아서, 나는 그 옆을 지나치며 마치 살아 있는 인형의 곁을 지나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계 방향으로 굽어 있는 계단을 빙글빙글 돌며 따라 내려가는 동안, 문득문득 창 밖으로 보이는 게 하늘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하얗게 빛나는 몇 개의 별들 때문이었다. 어둠에 조금 익숙해지자 계단을 헛디딜 필요는 없어졌다. 어지러울 정도로 길게 나있는 계단을 땅 속까지 가 닿을 듯 끝없이 밟으며 내려갔다. 몇 층 더 내려가자, 창문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잠시 후우리는 계단이 끝나는 좁은 바닥에 내리섰고, 앞을 가로막고 있는검은 철문과 마주쳤다. 앞장섰던 갈색 로브의 사내가 절그럭거리며열쇠를 꺼내 돌리더니 문을 안쪽으로 밀어 열었다. 문은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서자 탕, 하고 닫혔다.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짙은 암흑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복도가 앞으로 뻗어 있는지, 옆으로 뻗어 있는지조차 분간할 길이 없었다. 아니, 복도가 아니라 어떤 넓은 방으로 들어온 건지도 몰랐다. 램프 빛조차 어둠의 밀도를 뚫고 그다지 멀리 나아가지못했다. "제 뒤를 바짝 따라오십시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우리는 이윽고 한 덩어리가 되어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좀더 걷자 양쪽에 벽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벽은 아주 오래 전에 쌓아 올린 듯한 커다란 벽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벽을 만져 보았다. 손 끝에 뭔가 묻어나는 듯했지만 캄캄해서 알아볼 길이 없었다. 계단이 나타났다. 로브의 남자는 램프를 들고 계단 중간쯤에 서서우리가 내려오도록 빛을 비추어 주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다시문이 나타났다. 그는 잠시 램프를 바닥에 내려놓더니 양 손을 뻗어문 이곳 저곳을 만졌다. "허." 엘다렌이 그런 소리를 내지 않아도 나 역시 알 수 있었다. 그 문은드워프들의 방식으로 잠겨져 있었다. 갈색 로브의 남자가 문 몇 군데를 만지자 덜컥, 소리를 내며 문은 안쪽으로 약간 밀려들어갔다. 그가 문을 밀어 열고, 우리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또다시 복도, 그리고 다시 계단. 몇 번이고 번거로운 일들이 반복되었다. 모퉁이에서 꺾어지고, 넓거나 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다섯단밖에 되지 않는 계단에서 수십 단에 이르는 것까지, 올라가는 계단은 하나도 없었다. 몇 개의 문도 지나쳤다. 나는 이미 방향감각을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만 아니었다면 몇번이고 같은 자리에서 맴돌고 있다고 느꼈을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그랬을지도 몰랐다. 빙글빙글 돌면서 계속해서 아래로내려가는. "멈추십시오." 앞서 걸어가던 갈색 로브의 남자가 멈춰 섰다. 그는 돌아서더니걸어오던 길의 왼쪽을 가리켰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래로뻥 뚫린 구멍이 하나 보였다. "사다리가 있습니다. 끝까지 내려가십시오." 그는 위에서 불빛을 한 번 비추어 준 다음 램프를 한 손에 든 채로오른손만으로 사다리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잠깐 만에 까마득하게 불빛이 멀어졌다. 캄캄한 암흑 속을 동전만한 불빛 하나가 흔들리며 내려가고 있었다. "이렇게 깊었던가." 미칼리스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고는 제일 먼저 사다리로 다가가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금방 어둠 속으로 잠겨 버렸다. 잠깐 시간이 흐른 뒤, 엘다렌이 헛기침을 하고는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음은유리카, 그리고 나였다공기의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문득 이 답답한 허공을 한꺼번에확 밝혀 줄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쪽 어디쯤에 벽이 있는지,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이렇듯 황량한 기분은 아닐텐데. 나는 내려가다가 문득 말했다. "이 성을 세운 것이 에제키엘의 아내, 조피스티네라고 했니?" 그다지 멀리 있지 않은 듯 저 아래에서 유리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거라는 거지, 정말 그랬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지. 이미 우리는 잠들어 버린 뒤니까." "만일 정말로 그녀였다면, 숲 속의 자연인이던 그녀가 이렇듯 정교한 미로와 지하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데." 끝이 없지는 않았다. 당연히 사다리 다음 단일 줄 알고 내딛은 발이 어느 새 바닥에 닿았다. 불빛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흔들리고 잇었다. 너무 오랫동안 캄캄한 허공을 내려오다 보니 불빛이 어디에있는지 한동안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선 채로 유리카의 손을 더듬어 찾았다. 쉽게손을 잡은 것으로 보아 그녀도 나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불빛이 흔들거리며 멀어졌다. 여기는 굉장히 넓은 곳인 것 같았다. 가만히 보니 불빛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천천히 움직여 가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후에 멈추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어둠에 어느 정도 시야가 익숙해졌는데도 보이는 거라고는 우리가 타고 내려온 사다리뿐이었다. 목소리가 울리는 것으로 보아 꽤넓은 곳 같기는 한데, 도대체 뭐가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군." 한참 만에 약간 떨어진 곳에서 엘다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목소리를 약간 돋구어서 물었다. "뭐가요?" 그러나 내가 한 질문은 완전히 잊혀져 버렸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희미한 빛이 쏟아지는가 싶더니, 주위가 하얀 광채로 둘러싸였기 때문이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머리 위에 직경 60큐빗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빛의 고리가 떠 있는 것을 발견한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우와!" 다시 보니 그것은 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점점 밝아지는 빛이 주위를 비추기 시작하자 한동안 눈이 부셔서 뜰 수가 없었다. 그러나조금 후에 눈을 비벼서 뜨고 보니, 빛의 고리가 주위의 절벽을 따라둥글게 돌아가며 박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일까? 매끈하게 다듬어진 고리를 이루고 있는 돌들은? 돌이아니면 뭐지? 돌이라 해도, 어떻게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 거지? 엘다렌의 입에서,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한 한 마디가 흘러 나왔다. "펠드로바드." 아, 펠드로바드! 그제야 생각이 났다. 드워프들의 수도, 지하의 파하잔을 밝히던 펠드로바드 광석, 펠드로바드 둠을 이루던 스스로 빛을 내는 돌 말이다. 저게 바로 그건가? 저 정도로 대단한 광채야? 엘다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는 좀더 내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펠드로바드를 조정할 수 있는 것을 보니, 마법이 돌아오긴 한 모양이군. 그러나 그 마법을 움직이는 자는 누구인가?" "오랜만이군요."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윽고 빛 속에서 서서히다가오는 검은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푸른 옷과 망토, 마치도크렌 시커 들판에서 경장비만을 갖추고 기사단을 지휘하던 그모습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서 아버지가 걸어오고 있었다. "몇 달 만이군요, 그리반센 씨. 그리고 유리카도 반갑구나." 엘다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유리카는 고개를 숙여 보이며대답했다.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는 이미 아룬드나얀에 관련된 모든 것을 아버지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저녁때 동료들에게 말해 주었고, 그들은 어쩐 일인지 짐작하고 잇었다는 듯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런 만큼 갑자기 아버지가 이 곳에 나타났어도 그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윽고 아버지는 다가와서는 미칼리스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둘이 악수를 나누는 동안, 나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사방에 박힌 펠드로바드 광석의 위치로 보아 이 곳 역시 저 고리의 크기 이상 넓지는 않은 듯했다. 펠드로바드의 빛은 한꺼번에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눈의 적응을 고려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밝기가 천천히 변했다. 지금 그것은 점차 밝아지는 중이었고, 그와 비슷한 속도로 내 눈도 익숙해져 갔다. 주위는 천연 그대로의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저 위에서부터 한참 동안이나 내려왔던 것을생각해 보면 이 곳은 일종의 원통형 공간으로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바닥이 아주 넓은 원통이었다. 빛은 점차 아래로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2백 년 전에서 오신 분들은 이 곳이 오랜만이시겠군요, 이렇듯한밤중에 일어나서 오시도록 한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 곳의 존재는 아직 저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비밀이므로, 이런 방법을취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제가 왜 여기에 왔는지 궁금하시겠지요." 아버지는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고는 몇 걸음 걸어가 어떤 딱딱한바위 구조물 앞에 섰다. 이제는 형편없이 작아져 버린 램프 빛이 저만치에서 보였다. 우리는 모두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우리가 목적하던 그 곳에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이……." 말 할 필요는 없었다.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아버지가 멈춰선 바위 구조물은 허벅지 정도 높이로 솟아 있는 넓고 둥근 원형의닫이었고, 그 옆에는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도 나 있었다. 펠드로바드의 빛은 점차 구석구석을 비췄고, 나는 둥글고 편편한 원형 단의중심에 뭔가 이상한 문양들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직경은 약 40큐빗 정도. 새카만 돌로 만들어진 단은 마치 거대한초콜릿 파이처럼 보였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났을 텐데도, 반반하게 다듬어진 표면과 옆면 사이를 잇는 모서리는 날카롭게 날이 선그대로 조금도 닳지 않았다. 아마도 타로핀, 그래서 변하지 않은 것이겠지. 아룬드나얀과 마찬가지로. 나는 잠시 후, 그 안의 문양 역시아룬드나얀과 똑같이 닮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계단을 올라가 단의 가장자리에 멈춰 서자 그 모든 것이 한눈에보였다. 우선 두 겹으로 된 커다란 원이 있었다. 마치 철필로 새긴것처럼 원반 위를 둥글게 달리는 두 선의 사이에 빙 돌아가며 새겨진 것은 틀림없는 열네 달의 문양들이었다. 내가 선 곳의 발치에는한 손에는 별,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는 점성술사가 새겨진 것이보였다. 그 옆으로 이어지는 방랑자, 환영주, 파비안느, 약초 아룬드의 무늬들……. 그 모든 것은 완벽하고도 정교했다. 점성술사의 옷에는 일곱 별자리를 수놓은 것까지 나타내어져 있다. 살아 숨쉴 듯 생생한 잎맥이입혀진 아스에를라의 잎새, 펼쳐진 천마의 날개 깃과 흩날리는 머리카락 한 가닥조차 놓치지 않은 천공의 소녀 파비안느의 자태, 술병끝에서 빛나고 잇는 광채 어린 하쉬 미오사, 고요한 밤의 눈매를 빛내는 솜털 가득한 노란 고양이에 이르기까지. 원반의 바닥을 이루고있는 그 모든 섬세한 문양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을 떠나 보는사람에게 어떤 신성한 감정마저 자아내게 했다. 마치 한 해 동안 내가 겪어 온 모든 일들이, 전부 이 돌 안에서 이미 일어나고 예견되었던 것처럼, 내 모든 움직임과 생각들이 실상은 한 치도 밖으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열네 달과 한 해, 벗어날 수 없는 바퀴들… 끝없는 세월의 흐름이모두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만 같은 돌.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찾아오려 했던 그 '세월의 돌'임에 틀림없었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주로 미칼리스와 엘다렌을 향해서 말하고 있었다. "저는 2백 년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나름대로 많은 문서를 읽으며 알아 보았습니다. 문자 아룬드에만 읽을 수 있는 비밀 문서들도 힘들여 손에 넣었지요. 그런 까닭에 대강의 의식 절차에 대한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적당한 시기에 파비안에게 아룬드나얀을 주어 여행을 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2백 년전의 의식에서 '천 년의 은둔자' 아스트라한 데바키가 맡아 주었던역할을 맡을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엘다렌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대가 의식을 집전할 생각이오?" "그렇습니다." 아스트라한 데밬라면 에제키엘과 우정을 맺었다는 당시 엘프족최고의 마법사이고… 호수의 현자 스노이안의 할아버지가 아닌가? 우리가 아라스탄 호수 속의 섬에서 발견한 마법의 황금 방울의 주인, 에제키엘을 제외하고는 천 년의 생애를 통틀어 최고의 마법사였다는 엘프가 아닌가? 나는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면… 에제키엘을 제물로 했던 그 의식은 스노이안의 할아버지가… 둘은 친구였고, 그러면 에제키엘의 죽음도?" 내가 들어도 무슨 말인지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의식에는 집전자가 필요하다. 그것은 어느 의식이나 마찬가지이지. 나는 네게 아룬드나얀을 주던 때부터 이미 그 집전자의 역할에대해서 깊이 생각해 왔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돕는 편이 가장 낫겠다는 결정도 내리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이미 아스트라한과 같은마법사가 없고, 그렇다면 대마법사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가 그 역할을 하는 편이 가장 낫지 않겠느냐." 아버지는 이번에는 유리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버지를 빤히쳐다보고 있었다. "유리카, 네 생각은 어떻지?" 유리카도, 그리고 엘다렌과 미칼리스도 잠시 생각에 잠긴 것처럼보였다. 나는 집전자가 무엇을 하는 자인지도 잘 몰랐고, 그 역할을 하는 데에 무슨 능력이 필요한지도 알 수가 없었다. 잠깐 동안세 동료들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침묵했다. 그러나 잠시 후, 엘다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대도 에제키엘의 핏줄이었지. 무슨 말인지 알겠소." 유리카는 엘다렌을 한 번 쳐다보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말했다. "파비안, 너… 그 가운데로 가서 서 볼래?"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단 위에 올라와 있었다. 나는 검은 단 한가운데로 발을 내디뎠다. 내 발 아래 세월의 무늬들이 스치며 지나갔고… 중심에 이르는 동안 두 겹의 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한가운데에 이르러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나는 그것이 텅 빈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먼저 봤던 너무도 생생한 무늬들 때문에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이다. 나는 수많은 별 들 가운데 서 있었다. 밤하늘처럼 검은 돌 위에서수많은 별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좀더 밝게 빛나는 별은 커다란 점으로, 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별은 작은 점으로…. 거대한 타로핀의 단 위에는 바로 천구의 모습이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원의 한가운데에는 동글납작한 구멍이 움푹 파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주위에 솟아난 돌기까지 아룬드나얀의 크기와 모양에 딱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룬드나얀과 똑같이 그 주위에 새겨진 글자들…. 그 글자들은 황금을 박아 넣어 만든 것처럼 황홀한 금빛을 냈다. 내 눈이 별들의 바다 속에서 별자리를 더듬고 있는 동안, 유리카는 원 주위를 찬찬히 한 바퀴 돌았다. 아버지와 미칼리스, 엘다렌은단 아래에 선 채로 그저 우리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하지 않았다. 다만 유리카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영혼의 우물이여… 검은 돌 가운데 봉인된 세월의 힘이여…. 그대들의 힘이 다시 열려, 삼켰던 것을 내보내고, 갈라진 세상의 틈새를 맺어 놓게 될 날은 언제인가……." 천천히 시를 읊조리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몹시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의 말은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대답하는 사람은 물론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살아 있는 것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 순간, 검은 돌 위에 움푹 파인 구멍들일 뿐이던 별들이 서서히 흰 광채를 뿜어 올리기 시작했다. 마치 돌로 된 단 속에 광채의근원이 있어서, 틈새로 빛이 뿜어져 나오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빛으로 둘러싸여 버린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유리카를바라보았다. 내가 바라본 그녀는 한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기도하는 것처럼 가슴 가운데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긴 머리를 앞으로 늘어뜨린 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녀가 있는 그 곳은 암흑 아룬드의 자리였다. "그대 앞에 이렇게 앉은 나는 어떤 자인가…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심연으로 되돌려 보내는 힘, 살아 있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별,암흑의 시스나 벨이여…. 그런 그대에게 죽음의 딸 아스테리온이적당치 아니한가요?" 내 눈에는 그녀가 무슨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의 신세에 대한 넋두리라도 늘어놓고 있는 것 이상으로는 들리지않는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말투가 전에 들어 본 어떤 말과비슷했다. 굳이 말하자면… 미치 류지아가 헤렐을 불러 낼 때 쓰던말과 어딘가 모르게 엇비슷했다. 그녀는 뭘 알아내려는 거지? 그리고 이 돌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잇기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가?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있는 동안 내 머리 속에서 이상한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도무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조금지나기 시작하자 그것은 또렷한 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나낯선 얼굴이었다. 내가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의얼굴이었다. 주위가 구석구석까지 환해지도록 점차 빛을 더하던 별빛이 어느순간을 기점으로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하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그사람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남자였고, 곧고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있으며, 우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생각 속에 떠오르고 잇는, 마치 오래 전부터 내 머리속에 숨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꿈 속에서 한 번쯤 보았을 법도 한, 그러나 결코 만난 적은 없는… 그 얼굴은 내가 그를 쳐다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 얼굴은 내가 전에 한 번 봤던 얼굴이었다. 나의 꿈, 융스크-리테의 삼나무 숲 가운데 내리던 별빛과 그 날의 꿈 속에 나타났던 남자……. 그러나 조금 후 별빛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자, 동시에 머리 속의영상도 그저 기억으로 변해 버렸다. 검은 돌은 다시 수많은 무늬가덧입혀졌을 뿐인 침묵하는 돌로 되돌아왔다. 유리카가 고개를 들기까지는 시간이 약간 걸렸다. 빛이 있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어둠에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녀는 이윽고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 눈은 마치 잠들었다가 깨어난 사람 같았다. 그녀는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내일이야. 이제 드디어 에즈도 좀 쉴 수 있게 되었구나." 나는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치 우리를 이 곳에 데려다주는 것말고는 다른 의도나 임무라고는 전혀 없는 것처럼, 아버지는한쪽에 약간 떨어져 선 채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루 해는 빨리 졌다. 이토록 빠르게 흘러가는 날은 처음이었다. 나는 하필이면 우리가 도착한 바로 다음 날이 '균열의 날' 이라는우연이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져서 그 점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만일 우리가 이런저런 이유로 하루 정도 늦어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 거란 말이야? 비록 서두르긴 했지만 우리는 프론느 헤르미의 친정에서도 하룻밤 머물렀고, 나르디와 만났을 때에도 그랬다. 뭘 믿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지? 내 말을 들으며 유리카는 싱긋 웃었다. 우리는 먼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성벽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성벽 꼭대기에는 수비하는 병사들을 위한 좁은 성벽길이 만들어져있었고, 길 바깥쪽으로는 작은 지붕과 세로로 좁은 창이 연속되는외벽이 솟아나 있었다. 그러나 그 위를 재미 삼아 걸어 보고 있는 주아니에게는 상당한 대로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건 아냐. 균열의 날이라고 해서 그것이 누구 생일처럼 몇월 며칠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라고. 균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어 있었어. 너도 날씨의 변화나 마법, 몬스터의 문제 같은 것들이균열의 탓이라는 것을 알고 있잖아. 다만 균열의 영향이 한계를 넘기 전에, 즉 문자 아룬드 안에 우리는 의식을 행했어야 했던 거지. 그 날짜는 말하자면, 내가 정한거야." "문자 아룬드라면 아직도 시작일 뿐이잖아. 그렇다면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었던 거였네?" "글세, 내 생각엔 아무리 만병통치약을 갖고 있다고 해도, 다 죽어 가는 환자보다는 이제 금방 병에 걸린 환자 쪽이 훨씬 치료하기쉬울 것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생각하는 체 하며 생각이짧다는 지분거림을 슬그머니 모면했다. 나는 머리 속에서 떠올랐던 검푸른 머리카락의 그 얼굴을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나 말이야… 어쩐지 에제키엘하고 핏줄로 이어져 있다는 것 말고뭔가 다른 연관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 뭐랄까, 마치 동시에 같은 틀에서 만들어진 그릇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야." 내 황당한 비유 때문에 유리카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웃었던 것과는 무관하게 그녀는 자못 진지하게 대답했다. "음… 네 비유가 맞는진 몰라도 무슨 관계가 있을 수는 있을 거야. 왜냐 하면 실제로 너와 에제키엘의 관계말고도 다른 많은 일들이, 마치 2백 년 전에 그랬던 것과 비슷하게 전개된 부분들이 있거든. 이를테면… 나르디, 그래, 나르디 말이야." "나르디가 뭘?" 그녀는 콧등을 슬쩍 찡그리면서 대답했다. "나르디엔 국왕 말이야. 2백 년 전에도 나르디엔이라는 이름의 왕이 있었다는 사실, 알고 있지? 달크로즈에서 왕궁 학자 타데아 씨가왕국의 장미 이야기를 해 주면서 언급했잖아." "나르디엔 태자 말이야?" "그래, 그 태자." 유리카는 머리끝을 매만지면서 자기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주아니가 떨어지지나 않을까싶어 눈으로 계속 녀석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2백 년 전 바로 그 해에, 그 나르디엔 태자 역시 왕위에 올랐어. 그러니까 에즈가 죽었던 해 말이야. 지금도 마찬가지잖아. 나르디도올해 왕위에 올랐다고." "그런……." 우연 같기도 했지만 이스나미르에는 대대로 이름이 같은 왕이 드물었다. 물론 자세한 것은 왕궁 역사를 연구하는 타데아 같은 학자들이나 알 일이었지만, 확실히 우연치고는 드문 일치인 것은 틀림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미칼리스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바람이 찬데, 그런 곳에서 춥지 않아?" 그는 소넹 종이를 비롯한 뭔가를 잔뜩 들고서 우리 앞에 와 난간에 기대 섰다. 나는 목을 빼면서 그가 든 것이 뭔지 살펴보았다. "이제 다 뭐예요? 그림이라도 그려요?" 미칼리스가 대답하기 전에 바로 그가 나타난 쪽에서 한 명의 병사가 급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잽싸게 주아니를 주워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고, 다가온 병사는 나를 한 번 보더니 허리를 잔뜩굽혀 절을 한 다음 미칼리스에게 말했다. "비록 보초 교대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저는 자리를 이탈해선곤란합니다. 가르쳐 주신다는 것은 감사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보아하니 종이와 그 밖의 물건들은 이 병사의 것인 모양이었다. 종이는 언뜻 보기에도 몹시 희고 고운 것이 흔히 '벨럼'이라고 불리는 귀중한 양피지 같았다. 갓 태어난 송아지나 새끼 양의 가죽으로 만드는 밸럼에다가 백악까지 발라져 있어서, 도저히 가난한 병사가 가질 만한 종이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물론 뒤따라온 병사의 손에는 거친 양피지와 가장 흔하게 쓰이는 검은색, 붉은색, 흰색의 분필이 들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빨리 해내는 편이 좋겠군." 잠깐의 실랑이 끝에 결국 이 귀중한 밸럼 양피지는 병사의 손으로되돌아가고 미칼리스는 거친 양피지를 손에 들었다. 가끔 화가들이하듯이 검은색 분칠과 흰색 분필을 같이 쥔 그는 벽에 기대 앉은 채로 돌바닥에 놓인 양피지에 재빠르게 스케치를 해 나갔다. 조금의망설임도 없이 순식간에 슥슥 그어지는 분필을 보면서 나는 뭘 그리는지 도무지 감을 못 잡았다. 사람 같긴 한데, 도대체 누구지? 내가 궁금해서 병사와 함께 조금씩 그려지고 있는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유리카는 의아하다는 듯이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미카, 그림을 가르쳐 준다고? 이 사람한테? 언제부터 그런 일을그렇게 쉽게 하게 된거야?" 미칼리스는 별 대꾸 없이 분필을 움직여 갔다. 그림은 점차 젊은여자의 초상으로 변해 갔다. 약간 통통한 얼굴에 긴 머리를 둥글게틀어 올리고, 팔은 가슴께로 모은 채 약간 먼 곳을 보고 있는 반신상이 점차 완성되어 가는 동안, 불안해하던 병사의 얼굴은 점차 찬탄으로 바뀌어 갔다. "대, 대단하시군요… 저는 며칠 밤을 되풀이해서 그리고 지워도,이 그림의 발끝에도 따라갈 수 없는데……." 병사가 그림을 연습하고 있다는 사실도 특이했지만, 미칼리스가자진해서그에게 그림 시범을 보이고 있다는 것 역시 이채로운 일이었다. 얼마 걸리지 않아 그림은 완성되었다. 나는 그가 그린 것이 누구인가 궁금해서 물었다. "누굴 그린 거예요? 모르는 사람인가요?" "저… 제 애인입니다… 약간은 다르지만, 거의 비슷해요……." 대답한 것은 병사였다. 아마도 애인의 모습을 말로 설명해 주었던모양이었다. 미칼리스는 아무 말 없이 그림을 마무리하고 있었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입체적인 모습의 여인으로 변하자 드디어 분필을 뗐다. 그는 종이를 집어 병사에게 건네 주었고, 병사가 그림을 들여다보며 입도 제대로 못 다물고 있는 동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멀리 떨어져 있는 애인의 초상화 한 장이 없어서 애태우다니,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이야……." 나는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유리카도 내 얼굴을 한 번쳐다본 다음 그림에 눈길을 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칼리스는 몸을 일으키며 내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뜻밖의이야기가 나왔다. "파비안, 너도 애인의 초상화 한 장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왜요? 헤어질 것도 아닌데." 내 입에서 저절로 그런 말이 나왔고, 미칼리스는 그러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됐고." 나는 의아하다고 생각하며 유리카를 쳐다보았다. 항상 곁에 있는데 초상화는 무엇에 쓴단 말이야? 초상화라고 하니 왠지 목 없는기사의 성에 걸려 있던 부인의 초상화가 떠올라서 기분이 나쁜데. "해가 지는구나." 유리카의 말에 우리는 일제히 서쪽 하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하늘은 참으로 넓었다. 마치 보이지 않던곳까지 하늘이 더 넓어 진 것 같았다. 해가 다 지려면 아직은 몇 시간더 남아 있었다. 남서쪽 방향에는 크지 않은 산이 웅크렸고, 거기서부터 서쪽으로는 거칠 것 하나 없는 넓은 평야였다. 우리가 이 성을 처음으로 바라보던 벼랑은 아마 저 산 어딘가에있겠지만 여기서는 모두 검은 그림자 속에 묻혀 알아볼 길이 없었다. 하늘이 흐린 것인지, 이상하게 빛이 덜한 듯한 태양이 가장 멀리있는 잎새들을 반짝이게 하는 동안, 성의 뒤편으로는 이미 어둠이내렸다. 바람이 미칼리스와 유리카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내 짧은 머리까지 흩어 놓으며 지나갔다. 내 머리는 꽤나 많이 자랐다. 일이 끝나면 머리도 좀 잘라야겠다. "일이 다 끝나면, 미칼리스는 숲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거칠게 깎은 조각 같은 미칼리스의 얼굴 위로 석양이 남긴 붉은얼룩이 흘러갔다. 그는 한참 만에 입을 열어 말했다. "상텔로즈로 가야지. 동족들이 거기에 있을 테니." "켈라드리안에도 있지 않나요? 저… 그루터기 엘프들 말이에요." 미칼리스가 여행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살던 곳은 켈라드리안이었을 것이다. 이베카를 남기고 돌아선 곳도 켈라드리안이다. 그는가볍게 싱긋 웃었다. "가 봐야겠지. 거기엔 내가 쓰다가 남겨 놓은 신발이니 옷가지 같은 것도 그대로 있을 텐데. 밥그릇도 있으려나." "그대로 있을 턱이 있어요? 2백 년이나 지났단 말이에요." 우리가 얘기하는 동안, 유리카는 성벽에 가까이 다가가 바깥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 중 몇 가닥이 내 목덜미에와 닿았다. 바람이 그 가닥들을 내 목과 뺨에 슬쩍 감아 놓고, 바닥에 내려놓은 벨럼 양피지도 저만치 날려 버렸다. 병사가 놀라서 종이를 집으러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유리카가 말했다. "애인은 어디에 두고 온 걸까.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이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을…. 초상화조차 저렇게 소중하게 안고 가는데… 꼭다시 만나야 할 텐데." "싸움이 없다면, 그렇게 되겠지." 나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로 되풀이해서 생각했다. 이 모든 일들이 끝난 뒤에는 다들 헤어지게 되는 걸까. 꼭 그럴 필요가 있나. 그렇지만 엘다렌하고 미칼리스는 할 일이 있으니까. "엘다렌은 파하잔으로 가겠지요? 드워프 동료들은 깨어나서 그를기다리고 있을 테고… 그렇게 폐허가 된 도시들을 다시 재건하려면정말 바쁠 테고……." "와서 도와 주면 좋겠지." 엘다렌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 와서 나는 몸을 돌리며 웃었다. 엘다렌은 풍채에 어울리지 않게 기척 없이 다닐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가끔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도 언제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엘다렌은 석양을 한 번 바라보고, 그리고 내 얼굴을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이제 오늘 밤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생각이 많은 모양이군." "엘다렌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요. 나보다는 2백 년을 여행해 온여러분들이 훨씬 더 말이에요. 굉장히 긴 여행이었을 테니까." 나는 그렇게 말해 놓고서 기분 좋게 웃었다. "그렇지만 엘다렌, 당신한테서 도와 달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지는데요, 한 반년쯤이라면 가서 파하잔 재건의 역군이 되어 보는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나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에게 믿을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는사실이 새삼 나를 즐겁게 했다. 엘다렌은 눈썹을 약간 치켜뜨더니말했다. "반년 정도로 될 법이나 한 일인가. 하려면 한 몇 년은 죽은 셈치고 해야지." "몇 년이라니, 그건 너무한데요. 저한텐 찾아가서 인사해야 할 친구들이 아주 많단 말이에요. 또 가 보고 싶은 곳도 많고요. 적당한선에서 타협을 해야 될 것 같은데." 나는 말없이 먼 평야만 바라보고 있는 유리카를 툭 치면서 말했다. "너는 어떻게 할 거니? 너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일단은 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미칼리스처럼 밥그릇에 옷가지를 챙기러 가는 것은 아니지만 말야." 미칼리스는 반박하지도 않고 그냥 웃었다. "나한테는 그 옷가지랑 밥그릇이 아주 중요한 것들인걸. 가서 꼭찾아야겠단 말씀이야." 유리카는 짓궂은 웃음을 띠면서 대꾸했다. "금그릇에 비단옷이라도 돼? 비단 옷이라고 해도 이미 좀벌레들이모조리 다 먹어치웠겠다." 나는 생각했다…. 아마 그것들은 이베카와 같이 살던 때의 유품들일 것 같다고. 그것말고도 많겠지. 낡았을지 몰라도 그 모든 물건들…. 그리고 이베카가 마지막으로 생활하던 곳과 그녀가 죽었던때의 이야기들도 전해 들어야 하겠지……. 내가 생각에 잠긴 동안 미칼리스가 불쑥 말하고 있었다. "파비안, 너도 켈라드리안에 한 번 가 보는 것도 좋지 않겠어? 에졸린 여왕도 뵙고, 비록 여전히 엔젠 상태인 채로 변화가 없지만 라우렐란의 안부도 전하고 말이야. 게다가 너도 태어난 곳쯤은 가 보는 것도 좋잖아?" "그럴지도 모르지요……." 아마 어머니를 숨겨 주고 내가 태어나는 것을 도왔다는 엘프들은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겠지. 어쩌면 내가 켈라드리안을 지나가는 동안 한 번쯤 내 모습을 봤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인간은 그들보다 훨씬 빨리 자라니만큼, 내 얼굴을 못 알아봤을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니 이제 간다고 해도 그들을 만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잖아? "저를 받아 준 엘프들은 아무래도… 못 만나겠지요?" 미칼리스는 긴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넣어 긁적거리다가 웃었다. "무슨 소리야. 하얀 부리 엘프 족의 수장을 우습게 보면 곤란하지. 켈라드리안의 그루터기 엘프들쯤이야 어느 구석에 숨어 있든 내가얼마든지 불러 낼 수 있다고." "어쩌면, 당신을 알던 엘프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글세, 몇 명쯤은 남아 있겠지. 다 죽어 버렸다면 곤란한 노릇인데. 남아서 내게 소식 전해 줄 자들도 좀 있어야 할 것 아니겠어?" 내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서 잠자코 있는데 놀랍게도 미칼리스가 덧붙여 말했다. "꼬마 비크가 어떻게 살다가 갔는지, 나한테 소식 한 마디 전해줄 자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루터기 엘프 녀석들도 영 예의가 없는 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유리카가 희미하게 미소지으면서 말해 주었다. "비크는 이베카의 애칭이야. '이비' 라고도 하지." "어려서부터 남자애처럼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것이 꿈이었던 녀석이라, 사내아이 이름 같은 '비크' 쪽을 더 좋아했단 말야. 난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어머니가 부르던 '이비' 쪽이 훨씬 어감도 좋고 예쁜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칼리스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아니 오히려 밝다고 해야할 목소리로 말해서 나는 적당한 대답을 찾아 낼 수가 없었다. "그, 그렇군요…. 아, 저는 '비크'도 괜찮은 것 같은데……." 왠 바보 같은 대답이람. 그러나 미칼리스는 웃었다. 그다지 우울하지는 않은 얼굴로, 소리내어 웃으면서 그는 양피지를 주워서 되돌아오는 병사 쪽을 바라보았다. 유리카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베카와 함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기뻐하고 있어……." 병사는 되돌아와서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림은… 무라고 감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앤리나와너무도 닮아서, 곁에 없어도 마치 같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군요. 나중에 앤리나도 보게 된다면 굉장히 기뻐할 겁니다. 저, 별 것은아니지만 답례로 이 벨럼 양피지를 드리고 싶은데……." 사양할 거라는 짐작과는 달리, 미칼리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양피지를 받았다. 그걸 갖고 뭘 하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그는 종이를 잘 말아서 한쪽 손에 쥐고는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병사는 황급히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원, 별 말씀을요. 그림에 비하면 정말 하찮습니다. 예전에 고향에서 저한테 그림을 가르쳐 주시던 밀브메 할아버지하고도 비교도안 되게 잘 그리십니다.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가 잇는지……." 병사는 몇 번이나 인사를 되풀이한 다음 그림을 소중하게 쥔 채로사라져 갔다. 우리는 까닭 없이 그의 뒷모습은 계속해서 쳐다보고있었다. 잠시 후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돌린 엘다렌이 나를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할 텐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아, 저는……." 나는 약간 말꼬리를 흐리면서 유리카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자신 있게 하고 싶던 말을 꺼냈다. "저는 우선 달크로이프 영지로 가야겠어요." 그런 다음, 유리카가 나를 쳐다보는 것을 모르는 체하고 덧붙여말했다. "'누가' 그리로 가겠다잖아요. 헤어지지 않기로 했으니 따라가는수밖에요." "……." 나는 아무 대답도 하고 있지 않고 있는 유리카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이 정도 말은 이제 마음대로 해도 좋지 않아? "물론 그 다음에는 네 쪽에서 나를 따라와 주는 거겠지?" 그런 다음 나는 그녀의 얼굴에 천천히 떠오르는 미소를 계속 바라보았다. 아룬드나얀의 임무가 끝난다 해도 너와 나는 헤어지는 것이아니야. 우리 여행은 끝나는 것이 아니야. 이번에야말로 더 행복하고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서 멈추겠어? 찾아갈 곳이 아주 말아. 만날 사람들도 많아. 네 고향에 가고, 그리고 내 고향에 가야지. 달크로이츠 영지에 있다는 멋진 샘물의 맛은 어떤지, 하비야나크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 모든 것을 보고 나서… 캘라드리안에서 페어리와 엘프들도 만나고, 호그돈과 릴가의통나무집에서 멋진 저녁도 대접받아야지. 파하잔도 가 보고, 상텔로즈의 엘프 일족도 만나고… 며칠이고 마음 내키는 대로 머물면서,몇 년이고 원하는 만큼 여행할 수 있어. "다시 한 번 같이 여행할 수도 있어. 나도 얘기로만 듣던 파비안의 고향 마을에 한 번 가보고 싶은걸. 재건해야 할 마을은 파하잔에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 미칼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고향을잃은 사람의 마음은 또한 고향을 잃어 본 사람이 짐작한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또 하나 늘어나는 셈일 것이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엘프와 드워프를 대동하고 귀향하는 내 모습에 놀라 자빠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을텐데. 아니, 설산의 불빛 여관의 홀에 죽치고 앉아 내가 겪은 수많은일들을 밤새워 이야기 하면서 고르만 씨에게 공짜 맥주도 좀 얻어 마실 수 있었을 텐데.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마을 사람들은 아마유리카 같은 소녀를 보면 눈이 휘둥그레져서 천사나 요정이라도 나타났다고 떠들어 댈지도 모르고, 아마 신기한 동료들 덕택에 큰 사슴 잡화는 초만원을 이루었을지도 몰라. 아마 벤야와의 소문 같은것은 이런 충격적인 사건들 덕에 완전히 잠잠해질 테고, 또 어머니는……. 거기서 내 생각은 뚝 끊겼다. 입에서 저절로 조그마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렇게 할 얘깃거리가 많아졌는데, 내 이야기를 들으며 박장대소하고, 또 머리를 쥐어박으며 핀잔을 주실 어머니는 이제 이 세상에없구나. 내가 1년 만에 돌아가도, 보고 싶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런의미에서 가게 청소부터 하라고 빗자루를 쥐어 주실 어머니는 이제땅 속에 누워 계시구나. "파비안."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유리카는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황당한 얘기를 꺼냈다. "내가 대신 엄마 해 줄게. 이제부터 엄마라고 불러." 나는 어이가 없어서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했다. "야, 나는 항상 어머니라고 했지, 엄마라고 한 일은 없단 말이야." "흥,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면 되잖아. 괜히 엉뚱한 소린." "그런게 아니잖아. 세상에 어머니하고……." 그 다음에 이어질 '…결혼하고 싶어하는 남자란 없단 말이야' 라는 말은 어찌어찌 삼켜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괜히 새침해진 척하는 것으로 내가 우울한 기분에 빠질 틈을 없애 버렸고, 잠시 후에는'너도 아버지가 없으니 내가 대신 아버지를 해 줘야겠느냐' , '나는어머니도 없으니 아버지 한 분은 있어 봤자다' , '그렇다면 네 엄마로 주아니를 추천한다' 등의 이야기가 실컷 오가는 동안 언뜻 떠올랐던 우울은 어느 새 날아가 버렸다. 나는 주머니에서 머리를 내민주아니에게 머리를 숙이며 물었다. "넌 어쩔 테냐? 고향으로 갈 생각이야? 족장 어머니한테……." "모, 몰라. 그런 생각은 나중에 해 볼래." 주아니는 족장 어머니 얘기를 꺼내자마자 허겁지겁 다시 주머니속으로 숨어 버리는 바람에, 결국 미래에 대한 설계는 들어 볼 수가없게 되고 말았다. 어느 쪽이든 내가 책임질 테지만, 주아니하고 헤어지는 것도 굉장히 아쉬운 일일 텐데. 솔직한 기분으로는 계속 같이 다녔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이제 정말 해가 지네." 유리카의 말에 우리 모두는 고개를 돌려, 이제 저 지평선 머리에걸려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그 날의 석양빛은 핏빛처럼 완전히 붉어 보였다. "그만 들어가서 마음의 준비라도 하는 것이 좋겠다." 엘다렌의 말대로였다. 우리는 성벽에서 그만 일어났고, 나는 고개를 돌려 텅 빈 벌판을 다시 한 번 바라본 다음 동료들의 뒤를 따라안으로 들어갔다. 쿵. 쿵. 이상한 소리가 들려. 미세한 진동도 느껴져. 무슨 일이 일어나고있는 건가? 쿵. 쿵. 쿵. 새벽녘에 있을 의식을 위해 조금이라도 자 두어야 했지만 나는 거의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과 또한 거기에 교차되는 기대감, 흥분 같은 것들이 계속해서 머리 속을 맴돌아 몇 번이고잠들 듯하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무슨 소리지?" 나만 잠을 깬 것은 아니었다. 하긴, 내가 깰 정도면 동료들은 이미전부 깨고도 남을 터였다. 제일 먼저 주아니가 쪼르르 내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왔다. "오래 됐어. 벌써 반시간째 저래." 음… 내가 잠이 들긴 했던 모양이군. 어차피 곧 날이 밝을 터, 나는 일어나 옷가지를 주워 입었다. 셔츠에 팔을 끼우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미칼리스가벌써 활까지 집어 든 채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모양이군.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가기도 하는데." 내가 반대편 셔츠의 팔을 끼우고 있는데 이번에는 유리카가 문을밀고 들어왔다. 미칼리스가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지 노크도 하지 않고 불쑥 들어오는 바람에 나는 약간 당황해서 엉거주춤한 모습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옷 입는구나." 그녀는 별로 꺼리는 기색 없이 그대로 서서 내가 옷을 마저 입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네 개의 방을 연결하는 중앙 거실에 모여 앉았다. 그러는 동안 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막연히 짐작하던 것이 이제는 확실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엘다렌이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공성전의 시작인가." 그럴 리가. 나는 분명히 약속을 했는데. 문자 아룬드 5일까지는공격하지 말아 달라고 분명히 부탁했는데. 나르디가 약속을 어길리가 없는데. 잠시 쿵쿵거리는 소리가 멎었는가 싶더니, 얼마 후 멀리서 군사들의 함성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목소리만으로는 어느 편인지구별할 길이 없었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듯했다.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리고 그보다 먼저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될지걱정되었다. 혹시, 방해받게 된다면? 나는 고개를 홱 돌려 유리카를 바라보며 물었다. "의식의 날짜를 늦출 수도 있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젠 안 돼. 어제 두 개의 아룬드나얀이 만났기 때문에 그 안에봉인된 힘이 눈을 뜨기 시작했어. 늦춘다고 해도 하루 이틀 정도밖에는 되지 않아. 더구나 의식은 마법진에 그려져 있는 천구의 모양이 머리 위에 오는 바로 그 시간에 행해지도록 되어 있어. 오늘 새벽이 아니라면 다음 날 새벽이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 다음 날일 테고.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 하루나 이틀 늦추는 것은 아무 의미도없을 것 같은데." "그럼, 어서 가야 하는 것 아니야?" 엘다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접전자가 없는 의식은 어긋나기 쉽다. 그리고 약속을 한 이상, 기다리는 것이 도리다." 다행히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방문 앞을 지나쳐 가는기사들의 저벅거리는 발소리, 약간 당황한 듯한 병사들의 외침, 먼곳에서 들려오는 함성, 그리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소음…. 좀더자세히, 좀더 먼곳에 귀를 기울이려 애쓰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덜컥 열렸다. 완전히 무장을 갖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검날에 묻은 피를 망토에 닦은 후, 검을 검집에 꽂았다. "갑지기 들이닥친 것을 사과드립니다. 이 소리 들리시지요?" 예의바른 어조였지만 목소리에서 긴장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우리는 한꺼번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지는 다시 말을 이었다. "공격입니다. 야습인 듯합니다. 그러나 싸움의 승패와 관계 없이더 중요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공교롭게도 일이 이렇게되기는 했지만, 일단 서두릅시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어두운 하늘 아래 병사들이 달려가는 모습이 언뜻 비쳤다. 들어온 것은 턱 아래 생긴 긴 흉터만 제외하고는 낯익은 얼굴, 니스로엘드의 기사 키반 노르보르트였다. "단장님! 여기 계셨습니까!" 키반은 즉시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는 그를 돌아보더니 우리에게말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방어에 대한 총책임을 맡긴다. 네 지휘권은 내가 돌아와 직접 인수할 때까지, 예상되는 시간은 오늘 해가 뜬 직후이다. 내 투구를 가져가라. 성 안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총력을 기울여 국왕군에게 피해를 줘라. 성문이 이미 열렸다고 했는가?" "예, 그렇습니다! 내부 배신자의 소행일 것으로 짐작되나 아직 밝혀 내지는 못했습니다. 돌아오실 때까지 온 힘을 다해 방어에 임하겠습니다!" "그럼, 부탁한다." 문이 열리고, 어둠 속으로 키반이 사라져 가는 것을 곁눈으로 보면서 우리는 성둘어 어제 갈색 로브의 사나이를 따라갔던 길로 달렸다. 밤 하늘은 수백 개가 넘는 횃불들로 벌겋게 밝혀져 있었다. 성의안이고 밖이고 가릴 것 없이 별빛조차 지워 버릴 정도로 거대한 불길들이 너울거렸다. 끊임없는 함성과 비명들이 귓가를 쟁쟁하게 울렸다. 어느 쪽이 이기거나 지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병사들이 달려가는 방향과 반대쪽이어서, 잠시만에 우리 주위에는 두세 명의 병사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아버지를 보자 일순 긴장하는 듯하더니 곧 부동자세를 취하며 허리를 굽혔다. 명령 따위는 오가지 않았으나, 그들은 아버지를 본 것만으로도 이미 새로운 명령을 받은 것처럼, 좀 전과는 다른 움직임으로 서둘러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달려가면서도 머리 속으로 계속해서 곱씹어 생각했다. 왜,왜 벌써 싸움이 시작된 거지? 나르디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유는뭐지? 결코 내게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어. 분명 어떤 까닭이 있을텐데, 도데체 왜? 이번에는 아버지가 앞장 서서 철문을 열었다. 어느 정도 안쪽으로들어가면서부터는 어제는 있는 줄도 몰랐던 횃불대들이 불이 죽 붙어 있었기 때문에 걷기가 한결 수월했다. 금방 사다리가 있는 구멍에 도달했다. 이번에는 구멍 아래 저 너머에 펠드로바드가 환하게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순간, 나는 갑자기 온몸이 바짝 긴장되는 것을느꼈다. 오래 전에 느꼈던 의식에 대한 두려움이 한꺼번에 되살아나가슴이 짓눌리는 듯했다. 급박한 상황 전개 때문에 저녁때 의식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들까지 거의 잊고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서, 나는 내가 해야할 역할과, 각각의 전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내려 애썼다. 사실 나는 그다지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혹시라도 어긋날경우, 일어날지도 모르는 갖가지 상황들에 대한 불길한 상상들이머리 속에서 꼬리를 물었다. 바닥에 내려서자 갈색 로브의 남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는 우리가 아니라 아버지를 보면서 말했다. 마법이 있는 시대였다면 마법사쯤으로 보였을지도 모를, 그런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횃불도 그가 붙여 놓았던 모양이었다. 펠드로바드의 빛을 받은 마법진, 거대한 검은 돌은 거인이 떨어뜨리고 간 메달처럼 조용히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시가 급한 와중에도, 우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거대한 아룬드나얀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우리의 눈은 모두 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마법진의 돌 위에 그려져 있던 천구의 모양을 떠올렸다. 내머리 위에서는 진짜 하늘이, 바로 저 모양 그대로 빛나고 있을 테지. 이것이야 말로 점성술사들이 말하는 '위에 있는 것과 같이 아래에도 있으라' 는 바로 그것인가. "시간을 재라." 갈색 로브의 남자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한쪽에 마련되어 있던테이블로 다가가더니 거기에 놓여 있던 커다란 그릇을 들여다보았다. 돌로 만들어진 그릇에는 물이 담겨 있었고, 가운데 뚫린 작은구멍으로 물이 한 방울씩 흘러 나왔다. 아주 오래 된 형태의 물시계인 모양이었다. 그는 그릇에 손을 넣어 손을 적시지 않도록 주위하며 눈금을 더듬더니, 입 속으로 무슨 소리인가를 중얼거리며돌그릇 바로 옆에 놓여 있던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았다. "정확한 시간은 봄의 공주께서 알고 계실 테지요. 그러나 의식의준비를 위해서는 대강의 시간 측정도 필요하니까요." 나는 아버지가 유리카를 '봄의 공주' 라고 불러서 흠칫 놀랐다. 그러나 유리카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가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그녀는 어제 밤에 그랬던 것처럼 암흑 아룬드의 자리로 가서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나서 마치 그림자처럼 미칼리스와 엘다렌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지금까지 나는 그들이 어느 달에 태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미칼리스는 마법진 위에 올라서서 잠시 주위를 둘러본 뒤에 환영주아룬드의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엘다렌은 타로핀 아룬드의 자리로 걸어갔다. 머리 위로 빛을 받으며 삼각형을 그리고 앉은세 동료의 그림자가 똑같은 방향으로 떨어졌다. 나는 주아니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빛이 구석까지 닿지 않는 것을 이용해서 슬쩍 녀석을 꺼내 물시계근처의 바위 위에 놓았다. 양해는 못 구했지만, 어찌 됐든 무슨 일이 생기는 것보다야 낫잖아. 내가 천천히 마법진 위로 올라서는 동안, 모두의 눈은 나를 향했다. 나는 한가운데로 가서 유리카를 바라보며 섰다. 그들이 마치 나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있는 듯한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아룬드나얀을 목에서 벗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그 동안 나는 아버지의 생일조차 모르고 있었다. 의외로 아버지는 아르나 아룬드의 자리로 가서 섰다. 어쩌면… 그래서 어머니와의 사랑을 섣불리 시작하고, 결국 이루지 못하신 걸까? 아버지의 손에는 낯선 꾸러미가 하나 들려 있었다. 흰 천이 풀어지고,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낡은 나무 지팡이였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것을 본 다음,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유리카의목소리가 먼저 울렸다. "에즈의 것인가요?" 아버지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당황해서다른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미칼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구하듯 엘다렌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엘다렌은 약간은 수상쩍은 눈길로 아버지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어찌하여 그런 물건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고, 또 이 의식의자리에 가저온 것인지 모르겠군." "제 집안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물건이 보존되어 왔지요." 아버지는 에제키엘의 로드(rod)를 앞으로 세워 쥐면서 말을 이었다. "2백 년 전 이 자리에는 저와 파비안은 없었을 테지만, 그가 있었겠지요. 여러분은 어제 일처럼 그를 기억하고 있을 테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은 자리에 없는 그를 이 자리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처음 그의 의지가 이 모든 일을 만들었고, 균열을막겠다는 의지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으니까요. 그는 없지만, 그의물건이라도 이 곳에 참여하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실제로는 다섯 사람이지만, 여섯 번째의 사람으로 그가 참여할 수 있도록." 동료들은 잠시 침묵했다. 동의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유리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저희 기분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한 마디로 그 물건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승인된 셈이 되었다. 아버지는 마치 마법사처럼 로드를 짚고 섰고, 유리카는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거의 되어 갑니다." 물시계 곁에 선 갈색 로브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고요한 가운데 그의 목소리는 천장까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모두의 눈길이 유리카에게 향했다. "시간." 그리고 드디어 그녀의 목소리가 퍼져 나와 높은 곳을 향해 흘렀다.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곧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수많은 세상 속에서 모두 이루어지는 것. 하루가 모여 한 해가되고, 1년은 백 년이 되며, 백 년은 수천 개의 만 년, 억만 년이 되어그물에 얽힌 생명들 가운데 되풀이되는 삶을 내린다." 나는 아직 눈을 뜨고 있었다. 처음에는 펠드로바드의 빛이 조금강해졌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녀의 몸을 감싸는 희미한 빛을알아볼 수 있었고, 그 빛이 바로 그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것은 그만큼 균질하지도 않은 것, 분과 분, 초와 초사이에 일어난 짧은 어긋남들이 모여 결국 거대한 시간의 균열을 가져오고, 갈라진 힘은 말이 통하지 않는 야생의 짐승처럼 날뛰리니,그에 이르러 의지를 가진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었인가." 뒤이어 미칼리스가, 그리고 엘다렌이 되풀이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엘다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입에서 천천히 짧게 끊어지는말들이 떨어졌다. "되풀이된다면, 모든 것이 되풀이된다면, 그것은 매 생애 동안 전생애에서 하지 못한 일을 해야만 한다는 의미. 날 때부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지에 놀라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바로 전생의 기억을 이루고자 하는 당연한 본능일 터." 그리고 미칼리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힘찬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들을 쏟아 내었다. "자신이 그만큼의 능력을 타고났다면, 반드시 그렇게 태어난 이유가 있다. 맞닥뜨린 어려움을 넘기 힘들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어려움을 반드시 넘어야만 한다는 의밈. 세상의 시련들은 포기하고 방관하는 자에게는 찾아오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고, 고통에는 까닭이, 희생에는 보답이, 맹세에는 그림자가 있다." 그들은 주문을 외우고 있지 않았다. 단지 균열을 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어떤 엄숙한 주문을 외우는 것보다 더욱 경건하고 진실해 보였다. 이윽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 종족의 생명은, 하나의 의지이다. 의지를 가진 자가 하나라도남아 있는 순간까지 그 종족은 멸망하지 않는다. 산 자의 생명력을빼앗아 가는 균열이여, 그대를 가둘 감옥을 가지고 의지의 집전자들이 찾아왔소. 프랑데아미즈, 세르네제 드노미린크, 모나데프랑지아,그리고 니스로엘데 비주." 차례대로 프랑드의 공주, 세르네즈의 푸른 활, 모나드의 방랑자,그리고… 니스로엘드의 심장인 건가. 아버지의 말에 따라 셋은 다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는 여전히 빛나고 있는 유리카를 바라보았고, 잠시 후 그녀가 손을허공으로 높이 들어올리는 순간, 손에 쥐고 있던 아룬드나얀을 마법진 가운데 꽂아 넣었다. 다시 한 번… 불이 켜졌다. 아니, 별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거대한 마법진과 결합된 아룬드나얀 위에 손을 얹은 채, 거기에서선명한 네 가지 색깔의 광채가 안개처럼 서서히 마법진 위로 퍼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하늘과 땅의 별자리가 같은 때, 의식은 시작되었고 이제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첫째는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보는 것……." 곁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리더니, 곧 줄여지면서지워져 버렸다. 파도 소리 비슷한 소음이 귓가를 감쌌고, 나는 육체의 눈과 관계 없이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는 눈이 천천히 떠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어제 밤 머리 속으로 확연히 보였던 에제키엘의 영상처럼……. 세상은 투명했다. 모든 것이 유리처럼 투명하게 비쳐 보였다. 시선은 가장 먼저 동굴 천장을 뚫을 듯 빠르게 머리 위로 직진했다. 시선의 움직임은 스조렌 산맥에서 유리카가 보여 주던 '마법 시선'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마치 물 속에서 투명한 수면을 통해 물 밖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내 시야는 모든 것을 통과해서 성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뒤엉켜 싸우는 것이 보였다. 성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국왕군의 복장을 한 군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성문은 누가 연 것일까. 곳곳에서 불길이 타올라 하늘을 벌겋게밝히고 있었다. 나는 내 시선이 누구를 찾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곧장, 화살처럼 달려들어 나는 그를 찾아 냈다. [나르디!]그가 있었다. 푸른 망토와 흰 갑옷의 나르디가 금빛 머리카락을흩날리며 피에 젖은 시미터를 쥐고 서 있었다. 다음 순간, 그는 익숙한 솜씨로 빠르게 검을 휘둘러 다가오는 적을 베었다. 입술은 꽉 다물어져 있었고, 검끝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허공을 갈랐다. 나는 녀석이 국왕이라고 해서 뒷전에서 결과만 기다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푸른 망토의 깃에도 이미 검붉은 얼룩이 점점이 번져 있었다. 나는 그의 표정이 어떤 다급한 일로 긴장되고 흐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몇 명의 기사들을 향해 끊임없이 뭔가를 명령했고, 명령을 받은 자들은 지체없이 흩어졌다. 그들은 뭔가를 찾고 있었다. 전투를 위해서 달려가는 자들이 아니었다. 내가 내 친구의 굳어진 얼굴을 조금 더 보려고 하는 순간, 눈앞의장면은 바뀌어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언뜻 보이는 뒷모습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은 키반이었다. 그는 무지막지한 속력으로 단숨에세 명 이상을 베어 넘기며 달려나가더니 성벽 끝에서 뭔가를 찾는것처럼 두리번거렸다. 그런 다음, 그는 동쪽 하늘을 한 번 바라보았다. 아마도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것이겠지. 장면은 다시 바뀐다…. 나는 검은 바다 위를 달려가는 한 척의 배를 보았다. 배의 모양은 어딘가 모르게 낯익었다. 푸른 굴조개 호를닮은 금빛 달무늬 돛을 가진 범선의 선창가에, 붉은 머리를 가진 소녀가 서 있었다. 나의 시선은 마치 갈매기의 비상처럼 재빠르게 그녀를 행해 다가갔다가, 거의 부딪칠 것처럼 가까워지는 순간 다시멀찍이 비켜 하늘로 날아갔다. 나는 어둠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잠깐 파도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내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어떤 성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워서 성은 수십 개의 불빛만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내 시선은 창문을 통해 어떤 방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훌륭한 옷을 입은 젊은 남자 하나가 앉아 있는 것이보였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내가 아는 누군가를 닮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손에 어떤 종이를 쥐고 있었다. 내가 창문을 떠나기 직전, 그는 종이를 펴고 그 위에 사인을 했다. 시선은 마치 깡충거리며 뛰어가는 아이처럼 지면에 닿을 듯 닿을듯하며 달려갔다. 이번에는 스조렌 산맥에 있던 산지기들의 집이 보였다. 집 안에는 나우케 남매의 삼촌인 운명 예술가 벵시아 나우케씨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왈라키나 드나르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훈훈한 기운이 감돌던 그들의 집은 마치 사람이 죽어 나간 곳처럼 적막했다. 또다시 다른 곳이었다. 아니, 이번에는 어디인지 알겠다. 수백 개의 나뭇잎들이 내 얼굴을 정말로 스쳐 지나가는 듯한 착각에, 나는무심결에 양 손으로 뺨을 감쌀 뻔했다. 그렇게 들어간 숲 안쪽에 거대한 통나무집이 보였다. 내가 '통숲저택' 이라고 이름 붙였던 그곳, 내가 여행중에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생활을 했던 곳 중 하나인거인 호그돈의 집이었다. 나는 불 켜진 창문을 뒤로 하고 호그돈이마당을 거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하늘을올려다보았다. 나도 같이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흐린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문자 아룬드에 내리는 눈이라……. 릴가가 버릇대로 요란스레 문을 열며 밖으로 나왔다. 그는 호그돈을 향해 걸어가려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손바닥으로 눈송이를받았다. 좀처럼 어두워지는 일이 없던 그의 표정도 흐려져 있었다. 릴가는 호그돈에게로 다가가더니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의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군. 파비안과 유리카는 잘 하고 있을까?]호그돈의 대답이 이어졌다. [자넨 달타라수를, 검은 예언자들을 믿지 않나?]내 시선은 릴가의 대답을 듣기 전에 그 자리를 떠나 다시 하늘로날아갔다. 눈이 날리기 시작한 검은 하늘로…. 그리고 한참 만에 다시 땅으로 내려왔을 때, 내 눈에는 익숙한 붉은 머리의 사내가 산길을 걷고 있는 것이 비쳤다. 나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미르보!]그는 빠른 걸음으로 바위를 넘고 수풀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에도 눈이 내렸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일 따위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성큼성큼 제 갈 길로만 가고 있었다. 그가 멀쩡하다니 페어리들의 상심이 크겠군.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가 걷고 있는 산길이 눈에 익었다. 설마 하얀산맥? 아직도 거기 있는 건가? 아니, 조금 다르다. 이상하게도 내 눈에 익숙하던 나무들은 모조리 뽑혔는지 베어졌는지 보이지 않고 주위엔 이상한 관목들뿐이었다. 돌연 뭔지 모를 이상한 그림자들이 나타나 미르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검을 뽑았다. 나는 그 괴물들이 왠지 낯이 익다고 느꼈다. 내가 한 번도 직접 본 일은 없지만, 저괴물들은 흔히 고블린(Goblin)이라고 책에 쓰여 있던 놈들이었다. 나는 일부러 괴물들을 자세히 보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본래 인간이나 그 밖의 다른 종족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굳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시선은 마르보의 전투가 끝나기 전에 그 자리를 떴다. 시선은 한동안 허공을 빙글빙글 돌았다. 회색 하늘에서 눈송이들이 꽃잎처럼 춤을 추었다. 한참 만에 눈에 띈 곳은 이상한 나무와 풀더미가 가득 말라 죽어 있는 곳이었다. 썩은 나무둥치들이 여기저기쓰러져 잇고, 뭔가 태운 듯한 흔적도 여러 군데 눈에 띄었다. 나는주위를 볓 번 되풀이해서 돌아본 다음에야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있었다. 내 기억 속에 있는 그 곳과는 너무도 달라져 버린 살풍경한숲, 상텔로즈임에 틀림없었다. 아마 근처 나무꾼 길드에서 죽어 가는 숲을 되살려 보려고 숲에 불을 지른 듯했다. '푸른 활' 이라는 별명을 가진 미칼리스의 고향인 상텔로즈. 몇 명남아 있던 다른 엘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숲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을까. 마지막으로 나는 바르제 저택으로 날아갔다. 침대에 미르디네가잠들어 있고, 머리맡에서 프론느 헤르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침대 옆에는 물그릇과 수건이 놓여 있고, 미르디네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올디네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가져온 대야를 내려놓고 수건을 물에 적셨다. 그 뒤에 바르제 씨가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자꾸만 왔다갔다하는 것이 보였다. 올디네는 어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말했다. [다들 그래요…. 의사는 엄두도 못 내겠더군요. 심지어 산파들조차 모두 이리저리 불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더라고요. 열일곱 살이되지 않은 아이들, 그러니까 성년이 되지 않은 아이들은 전부 미르딘처럼 앓고 있나 봐요. 마리뉴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래요.]그 집에서 아라디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더 보고 싶지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눈앞의 풍경이 급속도로 흐려지기 시작했다. 대충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재생력의 소멸이 아이들에게서부터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그렇지만 모든 것은 이제 곧 끝날 거야. 조금만 기다려. 계절에 맞지 않는 눈도 그칠 테고, 난데없이 나타난 별들도 다시 사라지고, 아픈 아이들도 씻은 듯이 낫고, 변종 괴물들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될 거야. 그래, 모두 다 깨끗이 사라지고 열린 틈, 균열은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닫히게 될……. "억!" 이 고함 소리는 낯익은 목소리의……. "엘다렌!"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도저히 믿을 수 없는광경을 보았다. 피… 검은 돌 위를 적시는 피는 누구의 것이지? 아룬드나얀에서뻗쳐 나오던 붉은 기운 위에 검붉은 액체가 겹쳐져 흘렀다. 어느 것이 빛이고 어느 것이 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붉은 기운은 모나드의것이었으나, 모나드의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엘다렌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 자리에 선 것은… 피묻은 검을 든 아버지였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거야, 이 모든 일이! 나는 모든 경고를 잊고 아룬드나얀에서 손을 뗀 채 자리에서 벌떡일어섰다. 그러나 나보다 먼저 벽력 같은 노성과 함께 그 자리로 달려든 것은 미칼리스였다. 그는 이미 할버드를 맞춰 움켜잡고 있었다. "미칼리스, 당신이 그 자리를 떠나 주길 바랬지. 고맙게도 내 수고를 덜어 주는군." 아버지의 냉정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전신에 오한이 일어나덜덜 떨었다. 아버지의 차가운 검과 미칼리스의 분노한 할버드가 첫번째로 마주치는 순간, 그들의 머리 위에서는 번개에 가까운 광채가튀었다. 나는 미친 듯이 뛰어내려 엘다렌을 찾았다. 마법진 아래로 떨어져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그를 찾아 내어 정신 없이 안아 올린 순간,커다란 기침과 함께 분수처럼 핏물이 쏟아져 내 옷을 적셨다. 어두운 탓에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다쳤는지 알아 볼 길이 없었다. 나는 답답한 나머지 고개를 번쩍 들고 소리쳤다. "펠드로바드를! 좀더 밝히지 않으면……." 그러나 내 말을 들을 갈색 로브의 사나이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후였다. 나는 손을 뻗어 상처 부위를 찾았다. 엘다렌의 피는 몹시도 뜨거웠다. 마치 쏟아진 피 자체에서 맥박이 느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만큼 강력한 생명력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상처가 난곳은 배 아래쪽이었다. 아랫배에서부터 비스듬하게 허리 뒤까지 관통된 모양이었다. 피는 위아래 할 것 없이 절망적일 정도로 쏟아져나왔다. 다시 살아날 수 없을 것처럼, 그렇게 흘러 나왔다……. "펠드로바드는……." 내 귓가로 약하지만은 않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놀랍게도 심한내상을 입은 엘다렌이 입을 열어 말하고 있었다. "…조절하는 장치가 있겠지만, 그것이 없을 경우에는 마법… 의지의 힘으로도 움직일 수 있다…. 그, 그것은… 쿨럭!" 손을 온통 적시는 새로운 피의 기운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들어천장을 쳐다보았다. 반지처럼 테를 이루고 있는 펠드로바드의 빛. 내 힘으로는 무리야. 나는 마법사가 아니야. 내게는 의지의 각인같은 능력은 없어. 그러나 그 순간 허공에 뜬 커다란 빛의 공이 내 눈에 뜨였다. 나는그제야 방금 전 마법진에서 유리카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하얀 광채에 감싸인 채로 약 7큐빗 상공에 누워 있었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길게 아래로 늘어뜨려진 채, 그녀는 모든상황에 애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또한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미동도 없이 떠 있었다. "유리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의식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고, 그리고 의식의 매개인 유리카가 이제그 역할을 위해 균열과 아룬드나얀 사이에 이미 자신을 맡겨 버린후였다. 그런 상태에서 엘다렌은 심하게 다쳤고, 미칼리스와 나는이미 자리를 이탈한 상태였다. 그녀는 의식이 끝난 후에야 매개체로서의 임무를 끝내고 다시 지상으로, 그리고 그녀 자신으로 돌아올수 있을 터였다. "미카… 는 어떻게 하고… 있나……." 아까보다 확실히 약해진 엘다렌의 목소리가 들려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물론 가슴곳에 가득 찬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은 조금도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마법진 위의 아버지와 미칼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움켜쥔 채, 무서운 기세로 계속해서 부딪쳐 가고 있었다. 미칼리스의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그 목소리는 내가 지금껏 알아오던 그와는 달리 흥분과 열에 들떠 강한 쇳소리를 내었다. "무엇 때문인가! 무엇 때문에 의식을 망치고 엘다를 공격한 거지? 넌 누구지? 뭘 원하는 거냐!" 아버지의 대답은 차가웠다. "나는 네가 알고 있는 그 사람 그대로다." "무엇을 원하는 거냐!" 촤창! 쩡! 아버지의 검은 레이피어(rapier)와 비슷하게 좁고 곧은데도 불구하고 날이 굉장히 강했으며,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났다. 미칼리스의 거대한 할버드가 내는 소리도 이에 못지않았다. 몇 번이고 얽혔다가 떨어지고, 다시 부딪치기를 반복하는 동안, 두 무기는완전히 제 상대를 만난 듯 번쩍이며 생기를 띠었다. 미칼리스는 검을 쓰는 상대를 만나자 할버드를 마치 봉(棒)처럼사용했다. 긴 할버드를 중간쯤 잡고 찰랑개비처럼 능숙하게 휙휙 돌리며, 기세 좋게 다가오는 공격들을 막아 나갔다. 물론 그의 괴력에가까운 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저히 우세를점칠 수 없는 싸움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아버지의 대답을 듣고 한결 더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파비안이 잘 알고 있지." 아버지가… 원하는 거라고? 종횡으로 날아드는 미칼리스의 할버드를 용케도 잘 피하며 아버지는 몇 번이나 결정적 공격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미칼리스는빈틈이 많은 듯하면서도, 사실은 빈틈이 없었다. 여기가 빈틈이다싶으면 어느 새 단단히 막혀 있고, 다시 한쪽이 허술한 듯하다가도용서 없이 그쪽에서 공격이 뻗어 나갔다. 그러나 미칼리스는 엘다렌의 부상 때문에 많이 흥분한 탓에 예전처럼 여유만만하지는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그가 진지하게, 총력을 다해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도대체 왜……." 그러나 아버지는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원하는 거라면 단 하나, 듀플리시아드 왕가의 완전한 멸살이지. 그러나 그게 이 의식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기이이이잉……. 마법진 전체를 흐르던 빛이 끊어지자, 검은 돌은 한 차례 이상한소리를 냈다. 아룬드나얀은 내 손이 떠나자 더 이상의 빛을 내지 않았고, 의식의 끈이 끊어진 유리카는 여전히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누가 이기기를 바라야 하는 건가…. 서로를 죽이지 않고는 끝나지 않을 싸움이었다. 벌떡 일어나 둘의 싸움을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으나,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될지모르는 엘다렌을 두고 멋대로 자리를 떠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유리카는?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유리카에게도, 미칼리스와 아버지에게도, 엘다렌에게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엘다렌은 내 품에서 간헐적인 경련을 일으키며 계속해서 피를 쏟았다. 그의 질기고 강한 생명력만큼이나 피는 진하고 뜨거운 열기를 띠었다. 그러나 잠시 후, 이상하게도 나는 그의 피가 멎는 것을 느꼈다. "춥군… 바람구멍 탓인가." 이제 엘다렌의 목소리를 받쳐 주던 강한 울림 없이 그저 목으로만간신히 나는 그의 말소리를 들으며 나는 울컥 쏟아지려는 울음을 간신히 삼켰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내가 이 고집 센 드워프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었던가를 깨닫다니…. 그러나 나는 그를 찌른 자를향해 검을 들이댈 수 있나? 아버지가 죽고 이 의식이 계속 되기를바랄 수 있나? "왜입니까!" 내 목소리가, 드디어 찢어지는 듯한 울림을 갖고 동굴 천장을 뒤흔들었다. "아버지, 왜죠! 왜 그러시는 겁니까? 왜… 도대체 뭘 하시려는 것이기에… 균열이 가져오는 결과를 모르시나요? 이 의식이 얼마나중요한 것인지……." 나는 그 순간, 아버지의 눈이 잠깐 동안 내게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 그 표정은 적의나, 광기보다는 뭔가를 안타까워하는 듯한 빛을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 나왔다. "나는 에제키엘의 힘을 원한다." 에제키엘… 이라고요? 미칼리스도 아버지의 말에 흠칫 놀란 듯 할버드의 움직임이 잠깐동안 멎었다. 그러나 싸움은 계속되었고, 두 무기가 내는 번뜩임도점차 빛을 더해 갔다. 더 강하게, 더 강한 폭풍우롸도 같이…. 둘은동등한 실력을 가진 호적수였고, 아버지는 저 볼재크 마이프허와 결투를 벌일 때보다 더욱 집중해서 미칼리스를 상대하고 있었다,. "에제키엘은 죽었는데, 어찌 그의 힘을 원한단 말이지? 그는 2백년 전에 죽었고, 그와 함께 그의 모든 능력도 사라졌다!" 미칼리스의 말을 들은 압지의 얼굴에 짧은 조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한 번 할버드와 검이 얽혀 둘이 서로의 힘을 가늠하며 대치하는순간, 아버지는 짤막하게 말했다. "에제키엘의 힘은, 2백 년 전 의식을 통해 아룬드나얀 안으로 흡수되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무슨 소리……? 미칼리스의 눈썹이 올라가고, 둘의 무기는 떨어지자마자 다시 강하게 서로를 쳤다. 갑자기 내 무릎에 누워 있던 엘다렌이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져서 나는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저… 저 검은……." 엘다렌은 놀라운 정신력으로 몸을 일으켜, 아버지와 미칼리스를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버지의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했지만 확연히 놀라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에즈의 검이 아닌가……." 저것이 에제키엘의 검이란 말인가? 아버지의 저 얇은 검, 저것이에제키엘의 검이라면……. 내 머리 속에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 추리를 엘다렌의 목소리가 확인해 주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절망감이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순간의 붉은 화염…을 사, 삼키는 싸늘한… 파도' , 황혼검(dusk blade). 결코… 쿨럭! …이길 수 없는 얼음의 검. 그걸, 그걸, 저자가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치르르… 챙! 내 머리 속에는 오래 전에 스조렌 산맥의 숲 속에서 꾸었던 꿈이 떠오르고 있었다. 검푸르고 긴 머리카락, 내 손에 쥐어졌던 차가운 기운을 가진 얇은 검, 그리고 마법사의 로드… 그랬다. 그것은에제키엘의 검이었고, 그리고 여명검의 쌍둥이 동생이었다. 그리고지금은 아버지의 손에 있는 검……. "미카 녀석, 알고 있는 건가…. 큭… 지금껏 한 번도 적과의 전투에서 물러난 일… 이 없는 놈이지, 저놈도…. 그러나 지금 이 순간,후우… 지금이 늘 놈이 말하던 '끝' 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나있는 건가……." 츠창! 쩡! 촤장창! 치컥! "그만둬요! 에제키엘의 힘은 이미 2백 년 전에 사라졌어요! 그런말도 안 되는 것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한단 말인가요!" "마음대로 단정짓지 말아라." 멈춰져 있던 공기가 들끓기 시작하고 있다. 머리 속의 혼란만큼이나 강한 폭풍이 동굴 전체에 몰아졌다. 누운 채로 허공에 떠 있는 유리카의 머리카락도 똑같은 바람에 휘날려 소용돌이로 변했다. 내 등과 뺨을 때리는 매운 바람은 롱봐르 만의 시즈카만큼이나 칼날 같은날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마법이 풀리고 있다…. 2백 년 동안 봉인… 된 마법, 그 마법이이제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엘다렌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저절로 멈추기시작한 출혈 이후로 그는 한결 침착한 목소리로 되돌아와 있었다. 나는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장 꼭대기에 알 수 없는 붉은기운이 번지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했다. 점차 기묘한 무늬를 그리며 번져 가는 그것은,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불길이었다. "유리카!" 의식이 없는 줄로만 알았던 그녀가 천천히 두 팔을 양쪽으로 펼쳤다. 옷소매 때문에 마치 검은 나비의 날개가 펼쳐지는 듯한 모양이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의식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뭔지 모를 힘이 그녀를 부여잡고, 놓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손목까지 허공에 못박힌 것처럼 펼친 채로, 손은 그대로 아래로 늘어뜨렸다. 천장의 붉은 기운을 받아, 그녀를 감싼 빛은 점차 붉은빛으로 변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커다랗게 외쳤다. "의식은, 의식은 어떻게 되는 거지요! 지금 이대로 그냥 방치하면모든 일은 어떻게, 유리카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 꼭 지금, 지금 이래야만 하는 것이었나요!" 내 목소리의 메아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나는 내가 딛고 있는땅바닥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흔들린다기보다는 잠에서 깨어나려는 것처럼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땅이 물컹한 푸딩처럼 부드러워져서, 마치 살아 있는 동물의 살갗을 밟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엘다렌을부축해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대로 있어라. 정령들이 움직이고 있는 거다. 그들도… 이 세상의 존재이니만큼… 하아… 후우… 균열을 막는 일을 방해하지는않는다. 다만, 깨어나는, 마법의 힘에, 반응하고 있는 것뿐이다." 돌로 되어 있는 단단한 땅바닥은 질척한 진흙으로 변했고, 손에도흙이 묻어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타로핀으로 만들어진 마법진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필생의 힘을 다해 상대를 죽이려 하고 잇는 두 전사 역시 변함없이 검과 할버드를 휘둘렀다. 나는그토록 잔인한 표정을 띤 아버지를 처음 보았으며, 그토록 격분한미칼리스 역시 처음 보았다. 아버지의 검에서 푸른빛이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했다. 미칼리스의 입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어리석은 자! 에제키엘의 힘이 아룬드나얀 안에 있다 해도, 그것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가? 너는 아룬드나얀의 주인도 아닌데!" "아룬드나얀은 이미 수많은 힘을 삼켰다. 아룬드나얀의 의미는'모든 힘을 흡수하여, 궁극에 달했을 때 다시 내어 뱉는다'는 것이지. 이제 마지막 균열의 힘을 삼킨 아룬드나얀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이미 벌써 마법의 힘을 내뱉기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 "다시 방출되는 그 힘은, 세 종족이 새로이 번성하기 위해 필요한것이다! 그런 힘을 혼자서 독차지하겠다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수 있지?" 아버지의 냉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내게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족이면 족해. 바로, '듀플리시아드왕가가 없는 인간' 이라는 종족의 번성이지. 엘프와 드워프 따위, 내게는 관심 밖이다." 미칼리스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진 채 분노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의 눈동자에 격노의 빛이 어리자 푸른 하늘에 번개가 치는듯했다.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의식을 방해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엘프와 드워프에게 갈 힘조차 인간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엘다렌을 공격하고, 유리카의 몸에 집중된 힘을 저대로 묶어 둔 채 의식을 중단시켰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칼리스를 죽이면… 모든 힘은 인간인 아버지에게 가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네 개인의, 힘이 되는 것은 아니지." 엘다렌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자 아버지가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나는 에제키엘이 남긴 문서를 읽었다. 그 역시 문자 아룬드에만읽을 수 있는 축복 문자 문서를 은밀히 남겼더군. 그 문서에 따르면,세상의 마법 전체의 봉인을 위해 희생된 자신의 힘이 다시 개방될때, 그것은 자신의 검과 로드를 향해 모아지게 될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 검과 로드를 쥔 자는 바로 나다."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복수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세상을 향해 뿌려져야 할 힘을한 손에 쥐는 것이, 그토록 필요한 일인가요! 한두 명의 생명을 죽이기 위해,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망치면서, 그것을 꼭 해야 하는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로드는 아버지가 서 있던 아르나 아룬드의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제 아버지가 로드를 가져온 이유가 확실해졌다. 아직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마법진 위에서, 나는 눕혀져 있던 로드가 천천히 스스로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처럼 똑바로서서는,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나는 저 로드의 모양을 가억하고 있었다. 꿈 속에서 내 손에 쥔 일이 있었던 바로 그 로드의 모양 그대로였다. 나는 눈을 부릅뜬 패,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믿을 수 없는 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로드에서 천천히, 어떤 액체가 흘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 방울,두방울, 땀을 흘리는 것처럼 떨어졌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서린 투명한 물방울들이 잠시 후에는 마치 비 오듯 줄줄 흘러내려 마법진위를 적시기 시작했다. "정령들 중에서도, 유난히, 휴우… 에제키엘과의 친화력이 강했던, 물의 미라티사 정령들이 모여들고 있는 거다. 그들은 저 로드를… 에제키엘과 똑같은 상대로 알아보고 있는 거야. 저자의 말대로… 로드에 마법이 깃들이기 시작하고 있다." 엘다렌은 그렇게 말하면서 놀랍게도 일어나 앉았다. 나는 감히 그의 상처를 살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네 정령 모두가움직이고 있는 셈이었다. 블로지스틴의 불은 점차 천장에서 아래로긴 혓바닥을 내밀기 시작했다. 니스펠이 깃들인 진흙은 살아 있는것처럼 조금씩 유동하고 있었다. 바람의 요르실드는 날개를 펼친 채동굴 주위를 사납게 휘돌았다. 마법진 위에 괸 흥건한 물이 흙으로 흘러 떨어지자 뜨거운 것에 닿은 것처럼 하얀 김이 치솟았다. 그러나그러는 가운데 유리카를 감싸고 있던 빛은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파비안, 네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니 유감스럽구나." 아버지는 한 발 뒤로 물러서더니 갑자기 왼 손을 뒤로 돌려 세워져있던 로드를 홱 잡아챘다. 로드에서 흘러내리던 물이 한꺼번에 미칼리스를 향해 날아가자 시야가 가려진 그는 무의식중에 아주 짧은 순간, 손을 멈추엇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손에 쥐어진 로드에서 알수 없는 짧고 푸른빛이 떠나는 것을 보았다. "저것은……." 그러나 입에서 채 말이 떨어지기 전에, 미칼리스는 순간적으로 뭔가를 잊어버린 것처럼 움직임을 뚝 그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잠깐의 정지가 풀리는 순간, 정면으로 달려든 아버지의 검에 이미선수를 놓친 미칼리스는 할버드를 양 손으로 쥔 채 정면으로 검을막으려 했다. 그러나 황혼검의 얇은 검날은 충격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직각으로 할버드를 향해 날아들었다. 푸른 기운…내가 꿈에서 보았고, 그리고 볼제크 마이프허를 죽일 때에도 보았던 똑같은 푸른 기운. 쩌정! 할버드의 자루가 똑바로 잘라져 나갔다…. 나무 막대처럼 반듯한단면으로 잘려진 할버드의 도끼 부분은 마지막 순간, 미칼리스의 손을 떠나 아버지의 무릎을 향해 날아갔다. 아버지는 피했으나 도끼끝이 무릎가리게를 찟고 상당한 상처를 남긴 듯햇다. 그러나 개의치않고 아버지의 검은 재빠르게 힘을 가누며 들어올려져, 다시 한 번무기를 잃어버린 엘프의 수장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 엘다렌의 놀랄 만큼 커다란 외침이 헛되이 울리는 가운데, 황혼검은 미칼리스의 어깨를 뚫고 들어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갑옷조차 없는 그의 장대한 팔과 어깨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미칼리스의 얼굴에,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안타까움도, 분함도, 슬픔도, 두려움도 아닌 내가 알 수 없는 어떤새로운 감정을 담은 그의 표정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무엇 때문일까. 무엇 때문에 그가 미소를 지어야 하는 것일까. 툭.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그의 오른팔이었다. 숲 속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던, 아름다운 고대인과도 같던 그 몸의 일부분이었다. 그 순간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언젠가 내가 보았던, 녹색 숲속에서 하늘을 뚫을 듯 당당하게 서 있던 금발 엘프의 모습……. "미칼리스!" 내 뺨을 비오듯 적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성을잃고 벌떡 일어서 마법진 위로 뛰어오르려 했다. 솟구치는 피…. 검은 돌 위에 떨어진 팔은 간헐적인 경련을 일으키며 꿈틀거렸다. 흰손끝이 가늘게 떨리며 마치 무언가를 잡으려는 것처럼 마지막으로한 차례 움직이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미칼리스는 서 있었다. 선 채로 자신의 잘라져 나간 팔은 내려다보지도 않고, 피에 물든 검을 든 아버지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햇다. 더 먼 곳, 갈 수 없는 더 먼 곳을 향해 있는 듯했다. 이제 아무 곳도 갈 수 없는 몸이 되었으면서 오히려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 차례가 온 것이군……." 그의 몸이 흔들렸다…. 나는 달려가 쏟아지는 피를 온몸에 받으며그를 부축했다. 아버지는 그런 미칼리스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미칼리스가 무릎을 꿇으려 하자, 나는 온 힘을 다해서 그를 단단하게 받쳐 마법진 아래로 내려오게 했다. 이미 그는 자기 힘으로 걸음을 내디딜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피가 너무 많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믿고 있던 것들,결코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돌변과, 결코 다치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던 동료들의치명적인 상처들을 바라보며 내 가슴은 점차 싸늘해졌다. 그것들은마법으로 잠시 지워진 글자들처럼 곧 다시 나타나는 것일까? 검은 마법진 위에서 금빛으로 빛나던 글자들이 빛을 잃은 것이 보였다. 무슨 까닭일까. 마법진의 힘은 어디로 가 있는 것일까. 그래, 틀렸어. 사라진 것은 결코 돌아오지 않아. 깨어진 의식도 결코 돌이켜지지 않아. 균열은 어찌 된 것일까. 지금 모든 힘들은 유리카 한 사람에게 완전히 집중되어 있는 건가? 나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마법진 위에 홀로 선 채로, 로드와 검을 한 손에 하나씩 쥔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2백년 전 에제키엘도 똑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 발이 나를 향해 한 발짝 움직였다. "파비안." 아버지는 다시 한 번 말했다. "파비안, 이리로 오너라." +=+=+=+=+=+=+=+=+=+=+=+=+=+=+=+=세월의 돌(Stone of Days)=+=+=+=+=+=+=+=+=+=+=+=+=+=+=+=+ 2. 운명, 그리고 영원그대를 위해 몇 글자, 적고 갑니다. 아직은 나 없는 그대의 생활을 상상할 수가 없군요. 너무 오랫동안함께 했기 때문일까요? 그대와 나의 집, 모든 것이 너무도 익숙해서 그 장면 속에 내가 없는 모습을 아직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곧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시 당당하고 씩씩하게 살 아갈 거란 걸 알아요. 내가 사랑한 그대는 늘 그런 모습이었어요. 몇 달 전에 당신을 기쁘게 하려고 사과주를 조금 만들어서 찬장안쪽에 숨겨 두었어요. 아마 조금 더 있어야 제대로 익을 텐데. 당신이 만드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과자에 어울리는 맛이 날지 궁금하군요. 내가 먼저 맛을 보고 자신있게 내놓았어야 하는 건데. 안타깝군요. 또, 내 일기와 책 몇 권 적어 놓은 것이 다락에 있는 쇠징 박힌 나무 상자에 있습니다. 곧 있으면 태어날 꼬마에게 물려주세요. 녀석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몹시 아쉽군요. 가는 동안도 내내 그 생각만 하게 될 것 같아요. 당신을 닮은 딸일까, 나를 닮은아들일까…….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우리, 다시 만날 거잖아요. 당신도 알고 나도 알 듯이, 우리, 여러 번 만났었고, 또다시 만날 거잖아요. 당신없는 세상이라면 다시 태어나고 싶지도 않으니까, 아마 법칙의 장로라 해도 결코 제멋대로 하지는 못할걸요. 나는 대마법사 에제키엘, 그 누구라 해도 함부로 내 운명을 바꾸진 못할 것입니다. 그정도는 조절할 정도의 영적 단계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조피. 비록 삶은 영원하지 않지만 그대와 나를 묶어 놓은 운명의 끈은영원할 것입니다. 당신은 내 오랜 짐을 덜어 주었고, 우리는 서로의 짐을 나누어 가졌지요. 이제는 결코 혼자 질 수 없는. 헤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잠깐 외출하는 것뿐, 당신이 생애의 저녁을 준비할 때쯤이면 나는 웃으면서 당신에게 돌아올 거에요. 그리고 곁에 서서 저녁 메뉴가 뭔지 궁금해하고 있겠지요. 언제나처럼 잘 가르쳐 주지 않는 당신 곁에서. 다시 만날 겁니다. 우리의 운명 속에서, 되풀이해서, 영원히. 에제키엘 나르시냐크,당신의 친구이자 또한 영원한 동반자. - 기억 IX 아버지는 얼굴을 약간 찌푸리더니 말했다. "상당한 무기로군. 미스릴을 뚫다니." 나는 아버지의 갑옷이 미스릴이라는 사실은 몰랐다. 미칼리스의 할버드가 마지막으로 할퀴고 간 자국은 아버지의 무릎에 꽤 깊은 상처를남긴 모양이었다. 팔이 잘라지는 순간에도 상대를 공격 할 수 있었던걸까. 그러나 아버지는 그 정도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비틀거리지도 않고 내 쪽으로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파비안, 네가 옳은 선택을 하기를 바란다." "옳은 선택이 뭐죠?" 나는 미칼리스를 바위벽에 기대 앉도록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데, 이상하게도 그 역시 피가 멎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말했다. "엘프와 드워프에게는 재생의 능력이라도 있나요?" "그럴 리가 없지." 들려 온 것은 엘다렌의 목소리였다. 그는 바닥에 누운 채로, 얼굴에약간의 조소를 띠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다시 꺼질 듯 약해져 있었다. 그는 이어서 미칼리스를 향해 말했다. "녀석… 이제 수많은 생명들과의… 전쟁에서 이겨 온 끝에, 드디어자신이 질… 때… 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의 마지막 목소리는 경련을 일으켜 부들부들 떨렸다. 미칼리스는대답하지 않은 채 머리를 바위에 대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지없이 평온한 얼굴…. 그가 한 팔을 잃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마법진 끝에 선 채로 내려오지 않고 멈추었다. 아버지 뒤로 미칼리스의 떨어진 팔이 보여서 나는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파비안, 너는 나를 도와야 한다." "제 친구들을 모두 죽인 다음에도 그런 말씀을 하실 건가요?" 나는 고개를 들어 유리카를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의 붉은 그림자,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는 요르실드의 바람, 창백한 옆얼굴의 그녀…. 그녀마저 잃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파비안, 너는 내 아들이다. 그 사실만은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 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에제키엘의 마법은이제 내 것이다. 이 힘만 있으면 지금 저 위에서 살육을 자행하고 있는 국왕의 군대를 모조리 몰아내고, 듀플리시아드 왕가에 대한 원한을남김없이 갚을 수 있다. 그들은 이제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인간은 균열의 영향에서 벗어날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순간을 간절히 기다려 왔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평생을 준비한 모든 일들이이루어지고, 새로운 임무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엘다렌과의 약속을 했고, 모든 종족이 다시금 번성하는 세상을 꿈꾸면서여기까지 왔다. 그런 내게 아버지는 새로운 진실을 받아들이라고 하는것인가……? "나는 왕국을 세울 것이다…. 마법사의 왕국, 대마법사의 핏줄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왕국…. 결코 누구도 나르시냐크의 형통을 무시하지못할 그런 왕국이 세워질 것이다. 너는 그 왕국의 태자가 되거라.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져가거라." 아버지의 목소리, 아버지의 표정…. 그것은 승리자의 것이었지만 오만이나 자부심보다는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어서 나를 더욱 혼란속으로 몰아넣었다. 내 동료들의 희망을 짓밟고 그들을 상처 입힌 아버지는 악당인가?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마음먹고, 사사건건 방해하려고 마음먹은 사악한 자인가? 그러나 저 얼굴은 뭐야? 왜 저토록 기뻐하는 거지? 원하는 것을 이뤄 낸 성취감과 행복감이 파괴자에게도 있을 수 있는 건가? 정말로, 정말로 이 상황이 평생토록 바라던 그런 상황인가? 이 상황이? 아버지는 내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표정이 혼란과의혹으로 흐려지고 고통스러운 상상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입을 열어 내 이름을 불렀다. "파비안……." 아버지의 목소리, 저 표정은 진심으로 나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왜? 단지 내가 아들이라서? 아니면아룬드나얀의 주인이라서? 그렇지만 원하던 힘을 모두 가진 지금, 그런 것은 아무 소용도 없잖은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없는데, 그런데도 내가 오기를 바란다는 것인가? 의식은 깨어졌고, 모든 것은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그것은 사악한 의도라기보다는 어긋난 희망과 염원 때문이었다. 결코 그 자체만으로는 비난할 수 없는 소원이, 다른 수많은 이종족들의희망을 앗아갔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파하잔은 되살아나지 못하고,엘프들은 점차 죽어 사라져 갈 것이라고? 약속을 믿으며 잠든 드워프들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나의 동료들은, 나의 동료들은… 2백년을 기다려서도 결국 이루지 못한 소망을 안고 죽어 갈 것이라고? 에제키엘이 원한 것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어. "거절한다면요……?" 아버지의 눈썹이 약간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렇다면, 너도 저들과 마찬가지로 되는 수밖에 없겠지."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나는 등 뒤로 손을 돌려 검손잡이를 잡았다. 아버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내가 검을 뽑아 양 손에 쥘 때까지,아버지는 검과 로드를 잡은 채로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고 싶지 않았어요." 힐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는 마법진 위에서 내려섰다. "나 역시 네가 내 아들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로드를 마법진 위에 내려놓고, 천천히 검을 앞으로 내밀어잡았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1년 간의 여행 속에서 알게 모르게 내 마음속의 기둥이 되어 준 사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를 만났을 때,아버지와 함께 지낸 몇십 일의 나날들…. 내게 아버지가 있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라고 생각했었지. 어머니를 잃은 슬픔 곳에서도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안이 되었던가. 그 후 곁에 있지 않아도 그 존재만으로도 내게 몇 번이나 빛을 주었던 나의 아버지…. 또한 몇 번이고 벅찬 마음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생각하던 아버지에게 내가, 검을 들이댄다고? 구원 기사단장, 대륙 최고의 검사, 결코 내가 이길 수 없는 사람. 황혼검이 아니라 해도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실력 차가 있었다. 내가 지금 검을 들지만, 아버지에게 털끝만큼의 상처라도입힐 수 있을까? 미칼리스의 실력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지않나? 그런 그를 쓰러뜨린 아버지다. 무엇을 바라며, 어디에 가도해야하나. 내 행동에는 과연 의미가 있는 건가. "최선을 다해 보는 것도 좋겠지. 그 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궁금하구나." 아버지의 한 마디는 그릴라드의 언덕에서 아버지와 대련을 하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그 때는 적대감 따위는 가질 필요가 없었다. 서로를 죽일 필요도 없었고, 다만 사이 좋은 아버지와 아들로서 아들의검 연습을 했을 뿐이었다. 그 순간 그대로 머무를 수만 있었다면……. 아버지와 나는 둘 다 검을 세워 들었다. 이상하게 눈이 흐려지려는것 같았다. 이럴 때가 아닌데. 최선을 한다고 해도 이기기 힘든 싸움이야. 감정에 휩쓸릴 때가 아니야. "일단 시작한 이상, 어떻게 하라고 했지?" 나는 마치 1년 전의 착한 아들로 되돌아간 것처럼 대답했다. "이겨서 눕히겠다는 각오로 하라 하셨죠." "좋은 기억력이구나. 그대로 해라." 서로 마주 보고 몇 걸음 돌았다. 내 등이 마법진을 향하고, 아버지가 내가 있던 자리에 섰다. 하나, 둘… 아버지의 검이 똑바로 찔러져들어왔다. "하앗!" 치컹! 두 개의 검이 얽혔지만 튀어오르는 불꽃은 푸른빛뿐이었다. 나는 아직 칼레시아드에 이를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옛날의 대련때와는 달리 아버지의 검은 부러지는 세이버가 아니라 에제키엘의 검. 여명검의 동생인 황손검이었다. 그래… 헤렐이 멋쟁이 검의 이야기를뭐라고 전해 주었더라. 여동생을 만나게 되면 조심해 달라고 했던가. 쩡! 창! 쩌정! 세차게 맞부딪치고 다시 옆으로 비켜 섰다. 어쩐지 아직은 제대로시작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너마저 죽을 필요는 없다. 유리카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내가 약속하마." "그렇게 한다 해도, 유리카 쪽에서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은 진심이엇다. 그녀는 죽는 한이 있어도 미칼리스와 엘다렌의상처에 대한 대가를 받아 내려고 할 것이었다. "……." 말없이 다시 부딪치는 검,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더 강해진 것 같은느낌이었다. 나도 이를 악물고 날아오는 검을 받아 친 후, 다시 반 바퀴 돌아 엘다렌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문득 바라본 엘다렌의 상처에서 이상한 점이 보였다. 엘다렌과 미칼리스 모두 처음에는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던 피가잠시 후에 저절로 멎었다. 이야기 속의 트롤(Troll)들처럼 스스로 재생하는 것도 아닐 텐데, 치명적 상처를 입은 그들의 피가 멎을 이유는없었다. 엘다렌의 배에 뚫린 구멍 주위에서 내가 본 것은……. 얼어붙은 피였다. "……." 갑자기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검을 받아 내려던 내 손이 삐끗거렸다. 나는 멀찍이 뛰어 물러나는 것으로 일단 몸을 보호했다. 그러나 내가 본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얼어붙은 피. 상처 주위에 얼어붙은 피. 꿰뚫어진 상처와 얼어붙은 피. 언젠가 한 번 본 것과 똑같은 그것은……. 어머니! "아아아아아악!" 내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와 동굴을 쟁쟁하게 울렸다. 나는허겁지겁 고개를 돌리며 미칼리스의 팔이 떨어져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이상하게도 더 다가오지 않은 채, 잠시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미칼리스 팔의 단면도 엘다렌의 상처처럼얼어붙어 잇는 것을 보았다. "파비안……." 나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미친 듯 외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 내, 내 이름을 부르지 마! 다,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야! 어, 어머… 니를 죽인 것이… 바로, 바로, 당신이었지!" 아버지는 대답 없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늘과 땅이 거꾸로 도는 느낌이었다. "그래. 내가 이진즈를 죽였다." "왜!" 칼로 찢어 가른 듯한 목소리가 빠르게 몰아치고 있는 공기를 뒤흔들엇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보다 더한 칼로 갈가리 헤쳐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내 계획을 방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처음부터 내게서 도망친 것 자체가 이미 나를 피하려 했던 것이지."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아버지는 숨길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만일 그녀가 내게서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너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이런 일들도 일어날 필요가 없었겠지. 내게 필요한 것은유리카뿐이었을 테고, 엘다렌이나 미칼리스는 여기까지 오기 전에 다른 방법으로 없애 버렸겠지. 그러나 이진즈는 내 손에서 도망쳤고, 너를 낳았고, 그리고 내 힘을 빼앗아 가 버렸다." "빼앗아 갔다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순간의 아버지는 정말로 나를 증오하는 것처럼, 어머니와 나를 원망하고 잇는 것처럼 차가웠다. "아룬드나얀은 대대로 더 젊은 주인에게로 옮겨 간다. 바로 네가 태어나는 순간, 나는 아룬드나얀의 주인으로서 힘을 잃어버렸단 말이다! 그래, 그래서 일들이 이렇듯 복잡하게 꼬이게 된 것이지. 자살 한 것으로 위장한 계략 덕분에 이진즈는 몇 달 동안 내 관심을 피해 너를낳을 수 있었고, 내가 사실을 알았을 때,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내가 너를 죽인다 해도… 힘은 내게 되돌아오지 않는다. 이미 더 젊은주인을 맛본 아룬드나얀은 결코 세월을 역류하는 법이 없단 말이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일이었다……. "시험 삼아 나는 새로 운 자식에게 힘이 되돌아오는가 보려고 결혼하여 하르얀을 태어나게 했다. 그러나 소용 없는 일이었어.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네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진작부터 알고있었지만 죽 기다렸다. 적당한 때가 될 때까지, 유리카의 봉인을 풀고, 그 뒤를 따라온 악령의 노예들이 그 마을을 없애 버리는 동안 나는 단지 너를 구하기 위해 네 집으로 갔다가 이진즈를 만났다. 그녀는내 비밀을 네게 모두 폭로하겠다고 하더군, 결코 네가 나를 따르지 못하겠다고, 내 일을 돕지 못하게 하겠다고, 그리고 내가 그녀를 죽이려했던 것마저 모두 네게 말하겠다고 하더군…. 그런 것을 보고 죽음을자초한다고 하는 것이지." 시험 삼아 하르얀을 낳았다고…? 유리카가 아버지의 뒤를 밟는 것을이미 알고 있었고, 일부러 악령의 노예들을 이용했단는 것인가? 그리고 나 하나만을 빼내기 위해 우리 집에 왔다가, 어머니를 만나고… 죽였다고? 그 모든 것은 계획적……. 나는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그 눈동자를 보며, 흥분이 점차 규칙적인 흐름으로 변해 가는 것을 느꼈다. 내어머니를 죽인 자. 나를 죽이지 못하자 나를 이용하려 했던 것뿐이었다는 말…. 동정조차 아깝다. 내가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감정의 낭비가 아깝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어. "용서받을 수 없는 자……." 나는 검을 세우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냉엄한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며, 검을 높이들었다. "하르얀도 내 손으로 죽인 터, 너라고 못할 이유가 없지. 준비는 되었느냐." 쉬이익, 쩡! 이제는 용서 없는 검이 그와 나 사이에 오갔다.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미칼리스가 말했던 것에 대해 명확히알게 되었다. 바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포기하는 마음과,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려드는 마음의 차이 말이다. 처음의 마음이 전자였다면, 이제 후자의 마음이 내가슴속을 온통 꽉 메우고 있었다. 죽어야만 한다면, 죽는 그 순간 까지! 츠쩌정! 머리 속이 불타올랏다. 순식간에 몇 번의 검이 오가고, 그의 검은내 어깨를 깊숙히 그었다. 얼음의 검의 냉기가 살갗 속으로 파고드는것을 느끼며, 흘러내리던 피가 금세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나는 쉬지않고 검을 휘둘렀다. 한 번, 또 한 번! 타타타당! 황혼검이 얼음의 검이라면, 여명검은 불의 검이다. 두 검이 같다면,내게도 똑같은 힘이 있다. 내 몸이 아직 칼레시아드를 견디지 못한다하더라도,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하아앗!" 묵직하게 내리쳐지는 내 검의 움직임을 그는 이미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내 검은 그의 검에 비해 훨씬 느렸고, 한 번의 일격을 노리기에는 상대가 너무 빨랐다. 내 검은 자꾸만 허공을 베었고, 그의 검은 용서 없이 파고들어 이미 내 다리와 허리에 상처를 입혔다. 차가운 상처는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엘다렌은, 미칼리스는 어떻게 견뎠던것일까. 목이 얼어붙은 것처럼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데. "겨우 그 정도인 거냐!" 그래. 오래 갈 수조차 없다는 것을 알아. 지금 내가 몇 번인가 당신의 검을 막았다는 것 자체가 신기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에게 결과란 없어. 그것은 무언가 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거야. 그저손을 놓고 죽으면 '살해당했다' 는 사실만이 남지. 그러나 나는 힘겹게 당신의 검을 한 번 막아 낼 때마다, 내 영혼 속에 내가 저항했었다는 사실을 새겨 넣고 있어! 푸욱! "으윽……." 이건, 마치 스노이엘하고 싸울 때랑 비슷해. 아무리 애써서 막으려해도, 똑같은 박자가 되풀이되고 나면 결국 한 번의 상처를 입지. 그러나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 결국 그 박자를 깨뜨렸었고,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신기한 일치지만… 나는 한 때 당신의검을 깨뜨리는 법을 배웠다고 할까……? "아직이야!" 사정없이 달려드는 검을 수없이 걷어 내고 상처를 입으면서, 내 마음은 몇 달 전, 암흑 아룬드의 어느 날을 향해 날아갔다. 호그돈과 릴가와 함께 지낸 통나무집의 마지막 며칠 동안, 만났던 자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에 대해서……. [나는 후라칸이라고 한다.]내 눈앞에 선 검은 로브 사이로 보이는 낡은 손잡이의 칼. 검은 예언자의 최고 무인이라는 '그림자 없는 검' 후라칸. 암흑 아룬드의 검은 비가 잠시 그친 공터에서, 나는 잘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마지막 숙간, 한 박자만 빨리 상대의 움직임을 예상하는 일.]후라칸의 낡은 손잡이를 가진 검은 내 어깨를 향해 똑바로 날아들다가 멈추었다…. 나는 이미 몇십 번이나 겨루어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채, 내게 무언가를 가르치려 하는 그의 번뜩이는 눈을 바라보고 숨을 거칠게 내쉬엇다. 그는 다시 한 번 말했다. [강한 상대에게 자신을 공격할 기회를 주고, 그것을 역이용하여 공세를 잡는다.]트컥……. 나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이제 나는 왜 휴라칸이 내게 배운 것을 숨기라고 했는지 알 것만 같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잊고 있다가, 가장중요한 순간에 떠올리라고 한 이유를. 나는 왼쪽 상박에서 피를 흘리며 몇 걸음 비척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달려들었다. "이야아아압!" 내가 달크로즈의 성문 앞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나르디에게 내 검술에 대해 진언한 자가 있다고 했지. 검은 예언자의 검술이란결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하르얀. 해전과 시즈카 속에서 내가 너를 이길 수 있었던 것도 바로그것 때문이었어. 트컹! 내 검은 아슬아슬하게 상대의 턱을 스쳐 가슴께의 갑옷에 긴 흠집을냈다. 그는 뒤로 훌쩍 뛰어 물러나더니 말했다. "1년 간, 많이 성장했구나. 이제는 확실히 대마법사의 핏줄답다." "마법 같은 것은 모르고,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필요한 것은당신을 쓰러뜨릴 힘이죠." "그렇다면, 한 번 가져 보아라." 그는 팔을 벌렸다. 마치 내 실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마치 어린 아들을 껴안아 주려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팔을 벌렸다. "하아아압!" 타당! 드디어 뜨거운 기운이 몸 안에 솟구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끼는칼레시아드의 기운이었다. 동시에 내 검도 조금씩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후라칸은 자기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를 맞아 싸우면서, 더구나 빠른 검을 쓰는 상대일 경우, 많은 움직임은 오히려 적에게 이득을죽 뿐이라고 말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힘을 비축한 뒤, 한 번의기회를 잡아 모든 것을 걸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고 했다. 잠시 후, 나는 그가 미칼리스의 할버드에 다친 무릎을 약간 절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의 다리 모양이 이상했다. 이제 용서란 없었다. 나는 왼쪽으로 뛰어들어 상대를 불편한 자세로 몰아간 다음, 자세를 낮추어 큰 검을 휩쓸 듯이 휘둘렀다. 붉은 불꽃이 길게 꼬리를 끌며 허공에 자국을 남겼다. 그가 다리를들어 피하며 동시에 왼쪽 뺨을 향해 검을 내리쳐 오자, 나는 그것을피하기보다는 고개를 약간 틀며 그대로 받았다. 푸슉! "으윽……."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니, 실제로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가워…. 두 눈동자가 얼어붙는 것 같아…. 캄캄한 가운데 푸른빛이 번뜩이는 듯한 느낌,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의 감촉……. 눈이 보이지 않아……! 내 두 눈을 베어 버리고 빠르게 방향을 바꿔서 다시 달려드는 푸른기운의 검이 머리 속에 하얗게 떠올랐다. 문득 나는 볼제크를 베 어버리던 그 검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 검이 어떤 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달려드는지 알 것만 같았다. 물론 이번에도 그렇게 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앞이안 보이는 지금, 선택은 하나뿐. 그 한 가지를 믿고 한 박자 먼저 움직이는 수밖에!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오직 하나의 기억과 본능만이 움직였다. 츄우우욱!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잔인할 만큼 차가운 냉기가 전신 구석구석으로 흘러가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 어머니도 느꼈을…. 그러나 곧, 냉기는 내 몸 속에서 흘러 나오는 뜨거운 기운에막혀 버렸다. 몸 가운데에서 뜨거운 기운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제는 완벽한 칼레시아드가 온 몸을 휩싸고 돌았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점이 내 어깨 근육을 끊으며 더 깊숙히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왼손으로 달려든 상대의 손의 위치를 정확히 가늠하여 움켜쥐었다. "!" 그렇게 하나뿐인 선택. 모든 것은 그 선택을 위한 것이었어. "같이 가시죠." 움켜잡은 황혼검이 내 몸 속을 뚫고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황혼검보다 긴 여명검의 칼날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내 입에서도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내 검이정확히 어디를 뚫었는지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거대한 칼날이 뼈와근육을 자르고 깊숙한 곳에 숨겨진 생명의 근원을 끊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온몸이 천천히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칼레시아드의 상태에서 나는 정신을 차린 채로, 있었어. 다시 할 수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런 것을 보크리드라고 부르는 건가……? 다시 해 볼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을지도 모르지……. 싸늘해진 손 끝에 뜨거운 액체가 뿌려졌다. 더 이상 서 있을 기운이없었다. 비척, 무릎을 꿇었다. 상처가 좀더 길게 찢어졌다. 그러나 나와 그 모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터라, 더 이상 살기를 바랄수는 없을 듯했다. 찢어진 눈동자가 얼어붙는 감각은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이제 나는 에제키엘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 한명의 인간을 위해서라도 기꺼이 모든 인간을 버리겠노라고, 그리고 그'모든 한 명의 인간' 은 또한 몇 번이고 전체로서의 인간보다 우위에놓여야만 한다던 그 말. 나는 그 말을 처음 들으면서 그렇다면 희생은 누구의 몫인지 의아해했다. 전체를 위해 하나를 희생할 수도 없고, 하나를 위해 전체를 희생할 수도 없다면 모두 중요하기만 한 인간들 속에서 희생해도 좋은자는 누구란 말인가, 라고…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나, 희생해도 좋다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을. 스스로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은 '다른 한 명' 이 아닌 바로'나' 라는 한 명뿐이었다. 내 검이 꽂힌 채로, 그의 몸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나는 느낄 수있었다. 내 입에서 한 마디가 흘러 나왔다. "에제키엘이 이런 것을 원했으리라고 생각해요……?" 잠시 후, 내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파비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눈앞에서 어떤 환상을 보며 말하듯, 천천히 흘러 나오는 중얼거림같은 것이었다. "파비안… 그것이 내 아들의 이름인가…. 왜 그 이름에 집착해야만했는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다만 아룬드나얀의 주인으로서 필요한 도구였을 뿐인데, 어느새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진짜 아들이 되어 버렸지. 왜 나는 내게 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 그럴 이유는 조금도 없었는데… 으흠, 쿨럭! 큼……." 세상은 빙글빙글 돌고 있엇다. 내가 무엇을 듣고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잇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따뜻한데, 그 검….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의 얼음 심장은 갖고 있지 못햇던 모양이야……." 내 몸에서 점차 칼레시아드가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내 눈에서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진즈… 당신, 대단한 여자야… 내게 배신당한 당신의 사랑을, 당신 아들이 모조리 되찾아 갔군……." 목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나는 그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을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핏줄이란 무엇인지 모르겠군……." 정적.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두들 어디에 있는 거지…? 엘다렌과미칼리스… 설마 벌써 죽은 것은 아닐 테지? 내가 지금 어디에 쓰러져있는 거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유리카… 꼼짝할 수가 없어. 네가 있는 곳으로 좀더 다가가고 싶은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어. 아버지의 기술은 상대의 오른팔부터, 마지막으로 몸 안에 내상을 입히는 것이었지. 지금 내 어깨도 완전히 끊어진 상태일 거야. 내장은 쏟아지지 않았나? 보이지 않으니 알수 없군. 캄캄한 암흑 속에서 상처는 점차 이해할 수 없는 뭔가로 변해 가고, 피는 느낄 수조차 없을 정도로 흘러 나가고 있다…. 끝이라는 것,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암흑……. 그리고 따뜻한 손이 내 뺨을 서서히 어루만지는 것이 느껴진다. 누구지…? 그 손길은 익숙한 것이다. 내가 아는,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의 따뜻한 손가락들이다. "파비안……." 가녀린 두 개의 손이 내 몸을 부축해 끌어당기고, 그리고 피에 젖은나의 몸이 따뜻한 품안에 안겨졌다. 정신을 잃을 것 같아…….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어. 지금 정신을 잃으면 영원한 암흑에 빠지고 말걸. 그 전에 한순간이라도 그 손길을 더 느끼는 것만이 내가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야……. "많이 다쳤구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따뜻한 온기 같은 것이 너덜거리는 어깨에서배까지 이어진 상처를 감쌌다. 잠시 후 나는 오른팔에 생기가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움직여 보니 아픈 곳이 없었다. 왼손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껴안고 있는 그녀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가 놀라는 기색을 보더니 조그맣게 웃었다. "마법이 돌아왔잖아. 아스테리온의 고위 무녀에게 이 정도 치유 술은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눈은……." 그녀의 손가락이 내 피투성이 눈을 어루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목소리가 약간 흔들렸지만, 그녀는 다시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다시 보이게 해 줄 테니까…. 내 얼굴도 못 보게 되어서는 곤란하잖아……?" "정말이니?" "그럼, 정말이지 않고." 나는 몸을 약간 뒤척여 그녀의 얼굴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쪽으로얼굴을 향했다. 그런 다음, 약간 웃었다. "그럼, 모든 일이 잘 된 거구나? 미칼리스와 엘다렌도 치료할 수 있는 거야? 모두 다시 건강해져서……."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들이 살아날 수는 있다고 해도, 종족으로서의 엘프와 드워프를 살려낼 길은 없어졌다. 그들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텐데. 모두 아버지 때문에……. "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모두 내 잘못이거든. 나, 사실은 네아버지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의심하고 있었어. 그렇지만 네 마음이다칠까 봐 걱정되어서… 모든 것은 나와 엘다가 처리하려고 했었던 거지. 이런 식일 거란 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렇지만 결국 모두 이렇게 되어 버렸고… 난 네게 할 말이 없어." "그런 생각은 하지 마. 누구의 잘못도 아냐. 누구를 탓할 필요는 없어.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고, 결국 모든 문제는 자신의 희생으로만풀 수 있다는… 에제키엘의 말을 이제 이해했거든."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목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슬픈가운데서도 웃고 있었다. 뭔가를 결정한 사람처럼, 그녀는 마치 나를곧 떠날 듯이 웃고 있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미카가 드래곤 테아칸 앞에서 네게 에제키엘이2백 년 전에 균열을 막지 못한 이유를 나중에 들려 주겠다고 했었지? 내가 그 이야기를 들려 줄게." 작고 여린데도, 그녀의 목소리는 동굴 전체로 서서히 퍼져 나가고있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이제 에제키엘이 내게 해 주고 싶었던말에 대해서 알게 되었으니, 그의 선택이 어떠했는지도 알고 싶었다. "아룬드나얀이 항상 보다 젊은 주인을 택하기 때문에 네 아버지가너를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 했었다는 이야기를 나도 들었어…. 나, 정신을 잃고 있지 않았거든. 그래, 그 말은 맞는 말이야. 에즈 역시 2백년 전에 똑같은 문제에 부딪쳤었어." 나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그녀를 바라보려 애썼다. 동굴은 한없이높고, 그녀와 나는 허공에 떠서 날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에즈는 처음엔 그 사실을 몰랐었지. 나도 조피스티네가 낳게 될 아이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으니까…. 둘이 굉장히 긴 시련을 겪은 끝에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었지? 그들의 첫 아이였어, 그 아이는. 에제키엘이 아룬드나얀의 비밀을 알았을 때, 이미 조피는 임신 8개월째에 접어들어 있었어. 만일 그대로 아이가 태어나서 단 1분이라도 햇빛을 보게 된다면, 아이는 아룬드나얀의 힘을 가져가 버려. 그러면 에즈는 더 이상 아룬드나얀의 주인이 아니게 되고, 눈앞으로 다가온 균열을 막는 일은 불가능해지지. 8개월이나 된 아이를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면, 어머니와 아이를 모두 죽이는 수밖에 없거든…. 그의 모든 마법으로도 도저히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었어. 너라면 어떻게 했겠니?" "나……?" "너와 나의… 경우였다면 말이야." 내가 유리카 너를 죽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언제라도 희생해도좋은 것은 자신뿐인데, 에제키엘 역시……. 내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리고 대답이 흘러 나왔다. "에제키엘은 자신의 죽음을 택했구나." "그래서 네 개의 보석이 생겨나고, 모든 일은 2백 년 뒤로 미루어졌어. 처음에 에즈를 가장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미카였지. 너도 알잖아. 미카의 방식은 자신의 사랑을 희생하고 떠나는 것이었다는 걸. 그러나 에즈의 방식은 모든 방법을 다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것이었어. 그는 세상의 모든 생명들보다 조피를 사랑했고, 그리고 모든 생명들이 또한 그 누구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 네 말대로… 버려도 좋은 것은 자신뿐이야." "이것 봐 유리, 너무 매도하지 마라. 나도 이미 에즈 녀석을 이해하고 있으니까." 갑자기 들려 온 미칼리스의 목소리에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잊고 고개를 번쩍 들며 두리번거렸다. "어디 있죠, 미칼리스! 무사한 거예요?" 미칼리스는 대답 대신 말했다. "시끄러운 자들이 오는구나. 잠시 자리를 비킬까." 그의 말대로 내 귓가에도 계단과 사다리 통로를 따라 병사들의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국왕군인지, 또는 구원 기사단의 병사들인지 알 수 없었지만 곧 목소리도 들려 왔다. "모두 멈춰!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라!"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 갑자기 모든 소음이 줄여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나르디의 목소리가 들린 듯도 했는데…. 잠시 후, 놀랍게도 내 눈앞에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풀과 나무… 그리고 하늘?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모습을 가진 아름다운 숲이 눈앞에 있었다. 나는 풀숲 속에 누워 있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 여기가 어디죠?"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유리카도, 미칼리스도, 병사들이나그 밖의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홀로 숲 속에 서 있었다. 머리가온통 혼동되는 느낌이었다. 마치 꿈을 꾸다가 깨어난 듯했다. "놀랄 것은 없어. 여기가 기억나지 않는 거냐?" 갑자기 바로 옆에서 미칼리스의 목소리가 들려 오는 바람에 나는 흠칫하여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나는고개를 돌리다가 굉장히 아름다운 늙은 나무 하나를 발견했다. 흰 껍질 자작나무들 사이에 선 여왕처럼 아름다운 나무. 보석 같은 잎새들과 산등성이 같은 껍질을 가진……. "저것은…! 여, 여기는 미칼리스를 만난……." 목소리는 웃었다. "하하… 이제야 한 거냐? 결계의 문은 어디에라도 만들 수 있다고말했잖아. 엘프의 능력을 우습게 보면 안 되지." "그런데 왜… 당신 모습은 보이지 않는 거죠?" "네가 눈을 잃었다는 사실을 잊었어? 너는 실제의 사물은 아무것도볼 수 없다고. 자, 유리." 곧 유리카의 목소리도 들렸다. "파비안, 우리… 여기서 굉장히… 좋았지 않았니……?" 이상하게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나무 껍질에 손을 얹었다. 생생하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하나의 세계와도같은 나무. 여전히 따뜻하고 온화한 날씨. 모든 비극을 잊을 수 있을것처럼,미칼리스의 목소리가 불쑥 들렸다. "그럼, 작별 장소로도 제격이겠지." 무슨… 소리야? 작별이라니? 누가, 누구와? 한참만에 유리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런데 그녀는… 울고 있었다. "파비안… 나, 나… 이제… 그만 가야 할… 것, 같아……."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거싱 느껴졌다. 나는 말을 더듬었다. "가, 가다니, 어딜 간다는 거야? 아니… 왜?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 다음으로 들려 온 것은 엘다렌의 목소리였다. 그는 마치 모든 상처가 치료되기라도 한 것처럼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의식은 깨어졌고, 균열의 힘은 완전히 용해되지 않은 채로 작은 아룬드나얀 속에, 풀려 나온 마법의 힘은 에즈의 로드안에 머무르고 있다. 본래 마법의 힘은 전 세상으로 퍼져 모든 균열의영향을 없애고, 두 종족을 되살리며, 세상을 본래대로 되돌려야 했으나, 네 아버지에 의해 그 본체는 에즈의 로드 안에 갇혀 버렸다. 네아버지가 죽자 주인을 잃은 마법의 힘은 이제 다시 아룬드나얀 안으로되돌아가려 하고 있다. 그러나 아룬드나얀은 균열의 힘을 머금어 이미포화 상태, 마법의 힘이 그리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아룬드나얀에 쓰여진 글귀대로 그것은 삼켰던 모든 힘을 도로 밷어 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끝장이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없잖아?" 미칼리스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쾌활하게 말했지만 나는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모든 일들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름다운 결계의 숲 속에서, 나는 홀로 부르짖었다. 푸드득, 놀란 새들이 날아갔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이죠? 왜 헤어져야 한다는말이에요!" "아룬드나얀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돼." 유리카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끼며 내젓던 손을 멈췄다. "우리 셋은 아룬드나얀의 보석으로 인해 세월을 뛰어넘어 살아 있었던 거야. 그 돌들은 위의 생명들이지. 모든 일이 잘 되었더라면 작은아룬드나얀은 저 마법진의 돌 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우리는 그 안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 거야. 그렇지만 불완전한 의식으로 인해 균열은마법진 안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작은 아룬드나얀 안에서 멈췄어. 지금그걸 없애지 않으면 마법은 다시 아룬드나얀 안에 갇혀 버리고, 대신균열로 인해 들어온 힘이 밖으로 넘쳐 세상 전체를 휩싸게 될 거야." "안 돼, 안 돼……." 나는 혼란 속에서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헤어지다니, 그녀를 잃다니, 동료들을 잃고 나 혼자 살아가라고? 무슨 의미가 있지? 내게 그녀가 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지……? 난 할 수 없어. 그럴 수 없어. 약속했잖아…. 몇 번이고 약속했잖아. 떠나지 않는다고, 시즈카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도 약속했었고,아라스탄 호수의 배 위에서도 약속 했었잖아. 난 기억하고 있어…. 내가 있는 곳에 반드시 있겠다고, 네 입으로 그렇게 다짐했었어. "말도 안 돼…. 결코 보내지 않을 거야. 나를 두고 가겠다고? 거짓말, 거짓말쟁이… 혼자 두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 누구인데… 우리의약속은 모두 어떻게 되는 거야!"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인지 모를 물기…. 나는 보이지 않는 그녀를 찾으려고 몇 번이고 고개를 돌리고 허공을 더듬었다. 오직 평화와 안식뿐인 아름다운 결계의 땅…. 그 숲 속에서 나는 혼자 헤 매고있다. 꽃은 아름답고 벌레들은 반짝이지…. 그녀도, 동료들도 없는 그땅에서 나는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린다. 맑고 푸른 하늘과 따뜻한 태양, 언젠가 우리가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드러누워 올려다보던 하늘과 숲……. "파비안, 울지 마……."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유리카는 울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내 머리카락을 날렸다….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 주던 나무가 바로 앞에 있었다. 그녀와 함께 손잡고 올려다보던 잎새와 가지가 바로 저 곳에 있었다. 푸르다…. 아니, 희다. 눈앞이 아득하다. 보이지 않는 그녀는 계속해서 울고 잇었다. 동료들은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내게 받아들이라고 하지 마… 내게 견디라고 하지 마…. 싫어, 네가 없는 세상 따위, 모두 필요 없어. 아니, 그 세상에 내가 있을 필요가 없어. 눈을 감으면 없어져 버리는 세상 따위, 그런 것 때문에 내가너를 잃을 것 같아……?" "파비안, 버려도 좋은 것은 자신뿐이라고 했어…. 나 역시 에즈의그 말을 믿어. 에제키엘이 조피스티네를 사랑하고, 모든 것을 희생해서 그녀를 지켰기 때문에 지금의 네가 있어…. 나는 지금에야 다시 한번 에즈의 선택에 감사해. 나는 너를 만났어…. 긴 세월을 뛰어넘어이 곳까지 오게 된 행운.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태어났어…. 그 때는알지 못했던 미래. 에즈가 바라본 미래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을 것같아." 침묵하고 있는 내 귀에 미칼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파비안, 시간이 좀 오래 걸리더라도 유리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냐?" 나는 홱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를 보려는 것처럼 눈을크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물론이지요! 얼마라 해도 반드시 기다려서……." 나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다시 태어난 다음 만나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물론 아냐." 미칼리스는 밝은 목소리로 말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곧 말을 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확신할 수가 없지. 왜냐 하면 그건 네 노력 여하에달렸으니까. 잘만 한다면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어쩌면… 죽을 때까지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고……." "노력하는 거라면 뭐든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할 테니까 제발 방법을 가르쳐 줘요!" "엔젠이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약간 더듬으면서 말했다. "엔… 젠 이라니요? 실전된 기술이라고 했던……." "결계를 만드는 엘프인 내게는 예외지. 그녀가 지금 엔젠이 된다면,보석의 파괴에 따른 생명의 소멸을 피할 수가 있어. 그런 다음 다시엔젠 상태에서 풀려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결계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엔젠이라고 하지 않았어? 봉인과도 다르고. 그 안에서 그녀는 영원히 살 수 있어. 다만……." "다만?" "나는 엔젠을 만들 줄만 알지, 엔젠을 풀 줄은 몰라." "……." 미칼리스는 침묵하고 있는 내게 다시 말을 걸었다. "아마 세상 어디엔가에는 있을 테지. 묶는자가 있으면 푸는 자가 존재하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야. 그래서 네게 노력이라는 말을 한 거지. 만일 내가 풀 줄 안다고 해도 이미 그 땐 나는 죽고 없을 테니까 도와줄 수가 없단 말이야. 네가 열심히만 찾는다면 분명 푸는 방법을 찾을수 있을 거야. 유리, 어때?" "미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백 년을 잠들어 이 곳까지 온 그녀다. 다시 잠들어야만 한다고, 다시 언제가 될지 모를 긴 세월 동안 잠들어야 한다고? 나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그녀는 잠시 후 말했다. "파비안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페어리의 여왕조차 풀지 못했던 엔젠…. 그러나 미르보도 엔젠을 만들 줄 알았다. 그런 것을 보면 정말로 어딘가에는 엔젠을 푸는 방법이있을… 수도… 있어. 나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번쩍 들면서 말했다. "잠깐, 그러면 미칼리스와 엘다렌도 엔젠이 되면 되잖아요?" 미칼리스의 웃음소리가 다시 났다. 그는 엘다렌을 돌아보며 뭐라고말을 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다시 말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래… 그렇지만 이미 여긴 드워프와 엘프의 세상은 아니지. 되살아나지 않는 그 종족들… 우리 종족은 이미 죽었어. 그들과 함께사라져 가는 편이 좋아. 굳이 홀로 남아서 재생되지 않는 생명을 잇고싶은 생각은 없어져 버렸어. 어차피 더 이상은 번성할 수 없는 종족…. 오히려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그들의 세상으로 가는 편이 낫지않겠나?" "하, 하지만……." 나는 엘다렌과 미칼리스 역시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다시 말하기 전에 미칼리스가 먼저 딱 잘라 말했다. "자, 쓸데없는 잔소리는 필여 없지. 이제 시간이 얼마 없어. 파비안, 네 발치에 아룬드나얀이 있을 거야. 지금 봐." 나는 허리를 굽히고 흙바닥을 보았다. 신기하게도 아룬드나얀은 풀숲 속에 누군가 흘리고 간 것처럼 놓여 있었다. 마법진은 아무 데도보이지 않았다. "이걸 받아." 내 손에 뭔가 막대기 같은 것이 건네졌으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에즈의 로드? "자, 유리카하고 작별 인사를 해라. 시간이 없어서 내가 '그만' 하면 딱 그쳐야 할걸. 엔젠도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니란 말야. 잠시자리를 피해 주는 게 좋을까? 이것 봐, 앨다. 잠깐 저리로 가자." 나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잠시 후 내 손에 뭔가가잡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 그리고 손을 올려 만져 본 것은 그녀의 뺨…. 허공을 쓰다듬는 손끝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걸렸다. 한없이 매끄러운 그 머리카락이 스쳐 갔다. "유리카……." "아마도 내 꿈, 이런 것이었나 봐. 유리벽 속에 갇혀 있는 꿈." 엔젠 속에 갇힌 그녀… 그리고 그녀는 항상 내 곁에 있다……. 그녀의 손이 내 눈가를 스쳐 갔다. 나는 상처를 느낄 수 없었지만그녀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볼 수 있게 될 거야." 눈물 어린 목소리로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마지막 순간,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니……. "파비안, 어차피 안 보이니까 눈을 감을 필요도 없겠지만, 나… 하고 싶은 것이 있어. 허락해 줄 거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긴 머리카락이 날려 내 뺨을 스치고… 두 개의 팔이 내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가 귓가로파고들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말. "그렇게 힘든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 그렇지?" 너와 함께 있었던 모든 기억들을 천 번이라도 다시 생각하고, 다시그리면서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힘들었던 일은 없었어. 홀로 있는내게는 보석과도 같을 그 모든 기억들……. 따뜻하고 보드라운, 매끄러운 감촉을 가진 무언가가 내 입술에 와닿았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뺨과 함께. 옷깃이 하늘로 날리고 있었다. 향기로운 바람이 둘을 감싸안고, 내 두 손이 올려져 그녀의 몸을으스러지도록 꼭 껴안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아…….]내 머리 속에서 내가 했는지 그녀가 했는지 모를 말이 들렸다. 나는환상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달콤한 입술… 이슬처럼 신선하고 눈물처럼 따뜻한 그 모든 것들. 모든 감각들이 새로이 열리는 기분… 세상은 나비 날개처럼 떨고 있었다. 영혼을 빨아들이는 듯한 입맞춤. 결코잊지 못할 거야. 눈을 감은 어둠 속에서 마지막 순간, 눈물을 머금은 채 웃고 있는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은 하늘로 날아갈 것처럼 너울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녕, 사랑하는 사람. 안녕, 나의 친구. 나의 연인. [운명조차 끊지 못하는 끈.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 속에서도 우리를묶어 놓을 거야.]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물 방울이 가득한 눈으로 미소지었다. 아득한 눈물 속에서 어렴풋하게 멀어지는 사람. 그러나 꼭 다시 만날거란 걸 알아……. [사랑하고 있어… 운명을 떠나, 영원 속에서.]나는 눈을 떴다. 숲은 푸른 햇살 아래 우울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도 그대로인 세상, 그 세상 속에서 나는 살아가야 해. "자, 우리도 가야지." 망연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선 내 귀에 미칼리스의 목소리가들려 와 나는 정신을 차렸다. 미칼리스는 이어서 말했다. "주아니, 안녕." 내 손에는 뭔가 단단한 돌멩이 같은 것이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조금 후, 내 어깨 위로 무언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주아니였다. 주아니는 말없이 내 주머니 속으로들어가더니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의식에는 항상, 검푸른 깃털의 희생물이 필요한 것이로군… 우리의제물은 네 아버지였던 모양이다." 엘다렌은 한 마디 하더니 나를 향해 다시 말했다. "그 로드의 끝이 아룬드나얀에 닿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매우 간단한 일이 아닌가." "설마 그것도 못 한다고는 안 하겠지?" 아마도 미칼리스는 싱긋 웃고 있을 것이었다. 그 사실이 더욱 나를슬프게 만들었다. 그는 똑같은 어조로 다시 말했다. "파비안, 이쪽으로 와서 내 품안에 손을 넣어 봐. 네게 주려던 것이들어 있으니까. 이거 오른팔이 없으니까 영 불편한 점이 많은데." 나는 소리나는 쪽으로 다가가 그의 몸을 만졌다. 울컥 목에서 뭔가가 솟아났다. 그의 품안에서 뭔가 작은 종이 뭉치 하나를 만질 수 있었다. "그거야. 지금은 안 보이겠지만 곧 보게 될 테니까, 그 때 가서 봐라. 작별 선물이라고 생각하라고. 아 참, 내 활도 가져가. 갖다 두고잘 연습해 보라고. 괴물 같은 활이라고 불평만 늘어놓지 말고." 잠깐 여행을 떠났다 돌아올 것 같은 말투…. 그러나 결코 다시는 볼수 없다니 어찌 된 일일까. 모든 것이 모순처럼 느껴졌다. "파비안." 약간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는 미칼리스 곁에서 나는 그의 손을 잡고있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 너무도 좋았던 친구들. "에즈와 조피의 방식, 그리고 나와 비크의 방식이라고 굳이 갈라 말한다면 조금 우스울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나는 내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쪽을 택했지만, 에즈와 조피의 방식도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어쩌면 균열이란 이런 식으로 성취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생각이 드는걸. 2백 년 전의 일과 지금의 일 모두, 고대 이스나미르의예언서에 이미 쓰여져 있다고 들었어. 물론 뭐가 어떻게 된다고 자세히 써진 건 아니지만, 에즈는 그 때 말했었어. '어째서 바꾸겠다고 마음먹었던 모든 일들이, 예언 그대로 되어 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라고…. 그러나 모두가 해야 할 일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움직였기 때문에 그 모든 결과도 올 수 있었고, 어쩌면 예언서에 쓰여 있었다는결과도 그리 나쁜 건 아니었을 것 같다고 생각해. 그래, 테아칸이 말했었지. 균열이란 것 역시, 결국 살아가기 위한 것이라고. 그러니까우리의 행동 역시 균열의 일부였을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우리 모두가 노력했기 때문에 미래의 많은 것들이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비록결과는 볼 수 없지만 말야." 그는 손을 내밀어 천천히 내 뺨을 쓰다듬은 다음 악수를 청했다. 나는 엘다렌의 손도 잡았다. 엘다렌은 마지막 순간에도 과묵하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역시 잊지 못할 것이었다. "이제, 비크를 만나러 갈 시간이구나. 더 오래 기다리게 한다면 착한 그녀도 화를 낼 테지……." 내 머리 속에는 하늘을 바라보며 긴 고수머리를 매만지는 미칼리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보이지 않는 로드를 잡고, 아룬드나얀을 향해 다가갔다. 수많은 하고 싶은 말들, 내가 잊었을지도 모르는 해야했던 얘기들… 그 모든 것들이 이제 한 번의 손놀림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었다.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짓누르는 무게란 얼마나 무거운지. "영원히, 안녕." 안녕, 아룬드나얀. 안녕, 즐거웠던 모든 나날들. 로드의 끝이 떨리고 있었다. 아룬드나얀의 보석들은 맑은 햇살 속에서 그들의 눈동자처럼 반짝거렸다. 봄의 초록, 가을의 붉은빛, 여름하늘처럼 푸른 보석……. 로드가 딱딱한 것에 닿는 순간, 나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는미칼리스와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선 엘다렌의 모습을 머리 속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다. 나는 눈을 뜬다.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머리 속에서 아른거린다. '세르네즈의푸른 하늘'을 꺼냈던 멋진 녹나무와, 자작나무 숲에 내리는 맑은 햇살… 환영주 아룬드에 보았던 그것들과, 다시 보았던 그 모든 풍경들,내가 느낀 모든 감정들이 흐트러져 뒤엉켜 있었다. "이제 깼니?" 내 눈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눈앞에는 흰 구름 같은것들이 가득히 끼어 있었다. 내가 들은 것은 분명 소녀의 목소리… 내가 잘 아는……. "유리카!" "……."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잘못 들은 걸까… 그렇지만……. "…유리카가 아니어서 미안해." 어떤 손이 내 얼굴로 다가오더니 내 눈에 씌워져 있던 것을 풀어 주었다. 붕대였을까…. 한참 동안 뭔가 둘둘 감긴 것이 풀어지고 나자나는 눈앞이 아득하긴 하지만 뭔가 보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개 속에서 형상이 어른거렸다. 고개를 흔들고 나자, 좀더 시야가 선명해졌다. 고개를 돌리는데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아…라디네?" 내가 누워 있던 침대 앞에 앉은 소녀는 분명 아라디네였다.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어떻게 된 거지? 왜 너는 여기에 있는 거지?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지?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아라디네의 눈동자도 이상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일어서더니 한쪽에서 거울을 집어 내게 가져다주었다. 나는 거울을 들여다볼 생각은 않고 입을 열어 물었다. "여기… 가 어디니? 나는 어떻게 여기에……." 그녀는 마치 할 이야기가 생겨서 기쁘기라도 한 듯 즉시 대답했다. "여긴 달크-하그르 함대의 가장 큰 배 안이야. 이스나미르의 나르디엔 국왕께서 타고 계신 배지. 지금 모두 하르마탄 섬에서 철수하고 있는 중이야. 네가 쓰러져 있는 것을 데리고 왔다고 들었어. 그, 저…다른 사람들은……." "……." 내 어두운 표정을 보더니 그녀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내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 이불 위로 툭 떨어졌다. 내가 흘리는 눈물에서조차 유리카의 향기가 나는 것 같다…. 그녀의 눈빛, 머리카락,모든 것이 말로 다할 수 없이 보고 싶어. "너는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니……?" 그녀는 말없이 자기 치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나는 손을 풀고 그것을 보았다. "이걸 왜 내게……?" 그녀가 내게 준 것은 황금 펜던트였다. 눈에 익은 물건, 내가 파하잔에서 주워서 유리카에게 주었다가 그녀가 다시 아라디네에게 준 물건이었다. 내가 묻자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들더니 말했다. "한 달쯤 전인가… 밤에 꿈을 꾸었어. 유리카가 나타나서… 내게 뭔가를 돌려달라고 하더라고. 나는 뭘 달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자꾸 되물었지만, 그녀는 뭔지는 말하지 않고 웃으면서 미안하지만 꼭필요하니 돌려달라고 말했어. 유리카가 나한테 준 것이 뭐가 있었던가… 한참을 생각해 봤지만 이 금 펜던트 말고는 없었거든. 그래서 그걸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블랑디네 언니 때문에 알게 된 마르텔리조 뱃사람들에게 부탁을 했더니, 그들이 프로첸 리스벳을 소개해 주었어. 그래서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만들어서 너희한테 보내는 중이라는배 한 척에 얻어 타고 올 수가 있었어. 그렇지만 하르마탄까지 가기도전에 달크-하그르 함대와 만났기 때문에, 배는 함대를 따라가게 되었고 나는 나르디엔 국왕의 배려로 이 배로 옮겨 올 수 있었던 거야." 나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유리카'라는 단어 한 마디에도 퍼뜩 놀라다가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기를 되풀이했다. 내 손에 쥐어진 금 펜던트… 그건 내가 그녀에게 주었던 유일한 선물이었다. 이제 그 것은 다시 내 손에 되돌아와 있었다. 나는 선물이라는 단어에 문득, 미칼리스가 내게 준 선물이 떠올라품속을 뒤졌다. 아라디네가 옆에 걸려 있는 내 헌옷을 가져다 주고서야 나는 그 안에서 종이뭉치를 찾아 낼 수 있었고, 종이를 헤쳐 내자그 안에는 작은 그림이 하나 들어 잇었다. "……." 유리카의 얼굴이었다. 아주 섬세한 깃펜으로 그려 넣은 그녀의 초상화, 딱 펜던트에 들어갈 만한 크기…. 나는 펜던트를 열고 그 안에 초상화를 집어넣어 보았다. 그것은 마치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딱 들어맞았다. "그 그림……." 아라디네도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미칼리스가 언제 이 그림을 그렸을까…. 문득 만져 본 종이가 벨럼 양피지라는것을 알고서 나는 그제야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다. 의식 전날, 성벽위에서 병사에게 그림을 그려 주고 얻은 그 종이, 그리고 거기에서 내게 애인의 초상화 한 장 그려 줄까, 하고 묻던 그. 나는 '헤어질 것도아닌데요' 라고 말했었고……. "미카……." 나는 더듬거렸다. 펜던트를 손에 쥔 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고개를 들어 침대 맞은편을 바라보니 멋쟁이 검과 함께 세워져 있는미칼리스의 활, 드노미린크……. 이불 위에는 아라디네가 갖다 준 손거울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 것을 집에 한쪽으로 치우려다가, 갑자기 가슴을 세게 내려치는 충격을느끼며 그 안에 언뜻 비친 내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서 빛나고 있는 내 것이 아닌, 그러나 익숙한 눈빛… 어떻게된 일이지? "이건……." 거울 안에는 두 개의 눈, 검푸른 빛깔과 녹색의 눈동자가 동시에 빛나고 있었다. 완전히 파열되었던 왼쪽 눈동자가 다시 살아나 그 안에들어 있었다. 봄의 초록빛, 익숙한 초록빛의 눈동자가 내 초췌한 얼굴을 갸웃이 바라본다. [걱정하지 마. 내가 다시 보이게 해 줄 테니까.]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유리카의 한 마디……. 내 손에서 펜던트가 떨어졌다. 두 개의 눈, 내가 잃었던 눈, 그리고내게 주어진 또 하나의 눈. 내가… 기억하는… 단 하나의 향기로운 눈빛……. 눈물이 흘러내린다. 뺨을 타고 내리는 한 방울, 두 방울… 그녀의눈동자와 내 눈동자에서, 똑같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눈 속에 아픈 보석이 박힌 것처럼 견딜 수 없는 눈물이 흐른다. 또한 미칼리스, 엘다렌, 나의 사려 깊은 동료들… 그들의 쾌활함과과묵함과 순수함과 애정 깊음을 나는 영원히 잃어버렸다. 다시 되찾을수 없는 수많은 추억들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을 견뎌야 하는 의미는 어디에 있는 거지? 대답해 줘… 대답해 줘, 유리…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장난스레 미소짓고, 제멋대로 핀잔을 주면서, 그렇게, 그렇게……. 아라디네가 당황하여 나를 바라보는 것도 상관 않고, 나는 이불 위에 엎드려 아이처럼 울었다. 내 곁을 떠나 버린 잡을 수 없는 모든것, 눈물처럼 흘러 사라져 버린 모든 것들을 다시 한 번 머리 속에서하나하나 떠올리면서. 처음과 끝, 잊을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차례로더듬으면서……. 한참 만에 내 입에서 간신히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고마워… 고마워, 아라디네……." "…키반 노르보르트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아르킨 단장의 죽음을알고 수많은 근위 기사들 사이에 스스로 달려들어 일종의 자살을 택했네. 확실히 놀라운 기사라,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가 죽인 기사들이 수십에 달했지. 마지막으로 무슨 환상을 보았던 듯해. 자네 이름을 중얼거렸다고 하더군……." 나의 살아 있는 친구……. "대부분의 다른 기사들도 거의 살아남지 못했네. 다만 우리에게 정보를 주고 성문을 열어 준 츠칠헨 야스딩거는 근위 기사가 되라는 제의나 기타 상급을 모두 거부하고 밤중에 말없이 떠나 버렸네. 나도 츠칠헨의 행동에는 많이 놀랐지. 그는 키반 다음 가는 아르킨 단장의 심복이었는데, 어째서 그렇게 한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나르디가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성을 미리 공격한 까닭을 나는 이제알고 있다. 성 앞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츠칠헨이 은밀히전한 밀서, 바로 아버지가 의식에 이르러 우리들 모두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는 모든 전략적 고려를 내던지고 급히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오랫동안 수색한 끝에 성의 비밀 통로를 찾아내고, 나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후였다……. "에제키엘의 로드는 황혼검의 잔해와 함께 달크로즈 성에 보관할 예정이네. 그렇지만 만일 자네가 가져가고 싶다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제 내겐 필요 없는 것들이야." 이제 많은 것을 잊어야 할 때다… 아니, 잊은 것처럼 살아야 할 때다. 나르디는 미칼리스의 결계가 풀리고 나를 발견한 다음, 유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모두 옮겨가게 했다. 그러나 황혼검은 어느 순간그렇게 된 것인지 몰라도, 고철처럼 변해 버린 힐트만 남았을 뿐 블레이드는 완전히 사그라져 버린 후였다. 그리고 미칼리스의 활과 엘다렌의 도끼… 엘다렌의 도끼는 일전에 달크로즈의 구원자로서 듀플리시아드 왕가와 그리반센 가문이 친우의 맹약을 맺었단 그대로, 달크로즈성에서 대대로 보관하게 될 것이다. "한쪽 눈은 어때?" 유리카가 내게 준 왼쪽 눈말고, 아버지에게 다친 그대로인 오른쪽눈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곳까지 따라 온시의 모즈 나우케가 심혈을 기울여 내 눈을 돌봐 주었고, 점차 나아지리라는 희망적인 말을 해 주었다. 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구원 기사단은 어떻게 되지?" 내 질문에 나르디는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달크-하그르 함대에서도가장 훌륭한 전함인 이 배는 거의 흔들리지도 않았다. 이제 거의 이스나미르에 도착할 때도 되었을 테지. "그 이름은 없어질 거야." 그렇겠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르디는 내 표정을 보고 이미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한 듯했다. 그는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귀족들이야 당연히 너를 그냥 두어선 안 된다고 떠들어 대지. 하지만 그들의 잔소리에 귀를 기울일 내가 아니란 것을 알잖아?" 내 존재는 나르디를 곤란하게 하고 있구나…. 아버지가 내게 했던말을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전에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어. "나르디. 나, 돌아가신 휴로엘 국왕 폐하와 내 할아버지인 히크렐의단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그 단검은 네가 일전에 버린 단검하고비슷하게 생긴 것이었지. 많은 오해가 있었을 거란 건 알아…. 그렇지만 그 단검에 대해서 좀 이야기 해 주면 안 될까?" 나르디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문밖의 시종을 불러 뭔가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잠시 후 그가 가져온 것은 그의 겉옷이었다. 그는 겉옷에서 뭔가를 꺼내 내 무릎 위에 놓았다. "네 할아버지와 내 할아버지 사이의 우정을 상징하던 그 단검… 그단검은 지금 달크로즈에 있어. 이건 그 단검을 본뜬 것이고, 돌아가신부왕께서 내 13세 생일 때 선물해 주신 거야. 내가 버렸던 것은 이 중에 한 개고." "그래… 그랬구나." 오해로 얽혀진 두 집안의 이야기를 다시 풀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듀플리시아드 왕가 역시 당시의 우정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휴로엘 국왕의 오해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오해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모두 소용 없는 일이었다. 모두 잊는 것이 좋을 뿐.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이야기는 했어요?" "아, 이슬라. 어서 들어와요." 잔-이슬로즈는 내게 다가와 진심으로 위로하고 싶어하는 눈동자로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귀에서 반짝이는 '아르나의 눈빛' 을 보니유리카가 떠올라 견딜 수 없었지만, 아부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형식적인 말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쾌활한 목소리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좋은 소식이 있어요." 그녀가 내게 주었던 봉인된 편지… 나중에 뜯어 본 그 안에는 세르무즈에서 그녀에게 보내 준 조사보고서가 들어 있었으며, 거기엔 볼제크 마이프허의 상처가 얼어붙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쓰여져 있었다. 아마도 잔-이슬로즈는 나르디에게 내 어머니의 상처가 얼어붙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거든 뜯지 말라고 했던 것이겠지. "나르디가 얘기 안 했어요? 전혀 모른다는 얼굴이네요? 당신을 위해서 멋진 걸 마련했는데." 그녀는 내 무릎 위에 종이를 하나 얹어 놓았다. 내가 그것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녀가 먼저 설명했다. "내년 아르나 아룬드에 나르디와 내가 결혼식을 올리게 되면, 세르무즈 백합 기사단 중에서 나를 호위하던 사람들이 이스나미르로 오게되죠. 말하자면 내 전속 근위 기사단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파비안 당신을 그 단장으로 임명하기로 했어요." "단장…이라고요? 나는……." 내가 뭔가 말하려는 것을 나르디가 먼저 가로막고 말했다. "싫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뜻이 아니고 이건……." 이번에는 잔-이슬로즈가 나르디의 말을 가로챘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아무 일도 안 해도 되니까. 부단장이 실질적 책임자가 될 거고 당신은 성에 있을 필요도 없어요. 그저 그 직함만 가지고 있으면 되는 거지요." 나는 눈을 들어 그녀와 나르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죠?" 나르디는 약간 하기 어려운 말을 할 때의 버릇대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모습을 보더니 잔-이슬로즈가 결국 먼저 말을 꺼냈다. 마치 나와 유리카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당신에게 세르무즈 국적을 줄 작정이에요. 국적 문제는 이미 부왕께 모두 부탁드려 놓았고, 백합 기사단의 명예 단장인 내 오빠 아를로이 전하께서도 당신을 백합 기사단의 일원으로 승인하는 문서를 보내주시기로 하셨어요. 당신은 내 영지인 델페즈 출신으로 등록될 거예요. 이스나미르 국적은 당연히 지워지게 되지요. 그렇지만 이렇게 하면 이스나미르의 귀족들이 당신의 처벌을 거론할 핑계를 완전히 잃게되고, 오히려 나와 세르무즈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리지못하게 되죠. 나르시냐크 성도 쓰면 안 돼요. 당신은 파비안 크리스차넨, 내 영지의 기사고, 내 기사단장이며, 세르무즈의 백합 기사예요. 누군가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내가 세르무즈 공주와 이스나미르왕비의 이름을 걸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돌아다니는 데는 불편이 없을 거야. 내가 평생 동안 어디든 갈 수있는 통행증을 발급해 줄 테니까. 또한 언제고 달크로즈에 찾아오게. 어떤 중요한 일이 있다 해도, 모든 것을 제쳐놓고 자넬 만날 걸세." 나르디는 손을 내밀더니 내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얼굴에서 나에 대한 걱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역시 유리카의 좋은 친구였다…. 또한엘다렌을 잘 알았고, 미칼리스를 기억하고 있었다. 잔-이슬로즈는 내 얼굴을, 아니 정확히는 왼쪽 눈동자의 빛깔을 흘끗 보더니 말했다. "기사단 이름을 '녹보석 기사단' 으로 할까요?" 내 손에는 유리카의 엔젠이 꼭 쥐어져 있었다. 녹색의 보석… 그리고 그녀의 녹색 눈동자… 잊지 않을 거야. 잊혀지지 않을 거야. 모든 것이 끝났고, 나는 처음처럼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 세월의 돌(Stone of Days)=+=+=+=+=+=+=+=+=+=+=+=+=+=+=+=+ 14장. 제13월 '황금(Gold)'연금술사의 별 '이스나니' 가 지배하는 아룬드. 이스나니는 사계절의 하늘을 통틀어 가장 밝은 별이며 그 뜻은 '이스나에의 별' 이다. 연금술을 통해 얻는 황금을 의미하는 이 아룬드의 별의 이름이 '이스나에의 별' 인 이유는, 연금술이라는 기술 자체가 이스나에-드라니아라스들의 기술에서 유래한 탓이다. 그 전수는 이스나에-드라니아라스였던 레오 로아킨이 인간 연인인 처녀 아르나에게 이 기술을 알려 준데서 시작된다. 연금술이란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물질들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엘릭시르(elixir)를 얻는 과정을 뜻하며, 엘릭시르는황금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만병을 고치며, 긴 생명을약속하고, 정신적인 영의 단계마저 높인다고 알려져 있는 신성한 물질이다. 연금술사의 임무는 해와 달, 열 네 아룬드의 별에 상응하는 14가지금속을 가지고 각 아룬드와 7자리 별자리 사이에 보이는 생멸 변화 법칙에 맞추어 기저 금속을 엘릭시르로 바꾸는 것이다. 해는 다시 태어나는 영, 즉 황금을 의미하며 달은 해를 낳는 금속의 영혼, 득 엘릭시르를 의미한다. 또한 이 과정 속에서 모든 생물의 삶과 죽음 사이에존재하는 법칙과, 한 영혼이 다음 단계로 고양되는 과정을 재현하고연구한다. 그러나 이 기술은 전수 과정이 은밀한 만큼 많은 부분이 유실되어이스나이데 력 8780년경 이후로는 제대로 된 연금술은 극히 드물어졌다. 처음 그 기술을 인간에게 전한 이스나에-드라니아라스들이 사라지고, 직접 기술을 배운 3세대 연금술사들까지 사라지고 나자 그들이 남긴 문서들은 지금에 와서는 일종의 수수께끼로 여겨지고 있다. 본래부터 엘릭시르를 얻을 수 있는 연금술사는 매우 소수에 불과하며 연금술을 배우고자 하는 자들은 혹독한 도제 과정을 거치고도 아주 일부에게만 그 기술이 전수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연금술을 성취하고자 하다가 광인이 되는 사람들이나 이스나에를 찾아 평생을 헤매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황금 아룬드는 모든 노력의 결과를 얻게 되는 시기를 뜻하며 엘릭시르는 반드시 이 때에 맞추어 얻어지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생명이 겨울과 다음의 봄을 위해 다시 태어남을 준비하는 시기로, 나뭇잎은 떨어지고 늙은 동물은 죽음을 맞으며 오랜 노력은 보상을 받는다. 연금술의 엘릭시르가 마지막 과정에서 죽음과 비슷한 과정을 겪은후에야 순수한 물질로 거듭나는 것처럼, 인간 역시 혹독한 고통과 노력의 끝에 얻고자 하는 깨달음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황금 속에서 새로운 영이 태어나다' 라는 경구와 함께 영적 성취와확장을 상징하는 때이다. 현실을 넘어 찾던 것을 성취함, 운명을 극복하는 데 성공함, 열매 맺음, 태어남과 죽음, 한 단계 고양된 영의 상태 등을 암시한다. 이 아룬드의 빛깔은 이름 그대로 황금빛이다. - 점성술사들이 달력에 적는 각 아룬드의 의미,그 중 열 세 번째. 1. 끝.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기사의 여행은 끝나지만 끝난 것이 아니니살아 있는 자의 여행은 끝나는 법이 없는 탓이다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탓에 옷깃은 낡아 떨어지고잃은 것에 대한 고뇌로 내딛는 발걸음은 무거우나그대가 세상에 가져다 준 봄이 싹을 틔우고그대 존재조차 모르는 자들, 얼굴에 웃음꽃 핀다새로운 여행 앞에서 걸음 망설임은 어찌 된 일인가잃은 것의 상처만큼이나 얻은 것을 잊지 않음이니그대의 이름은 잊혀지고 핏줄 역시 사라져그대 기억하는 자 없고, 그대 업적은 잊혀지리라이젠 스쳐 가는 행인, 또 평범한 이웃일 뿐이지만찬란한 녹색의 보석은 결코 그대를 떠나지 않으니그대, 녹보석의 기사여-고(古) 이스나미르 왕국, 이스나에의 무녀'레 클로슈' 엘리종의 예언시<녹보석의 기사>339-343연(종결)내 이름은 버기 맨슨. 직업은 음유시인. 그 이름만은 멋지지만 불행히도 벌이는 통 시통치 않은 노랫꾼이라네. 요 직업도 몇 놈 벌이 괜찮은 놈만 팔자 늘어지고, 나처럼 재능도 운도 시원치 않은 놈들은 그저 끼니나 안 거르면 다행인 거야. 그렇다고 또 무슨 노래에 대한 투철한 애정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재미라도 날 텐데, 나 같이 태생이 놈팽이인 놈은 그저 배부르게 실컷 먹고 늘어지게 잠이나 잘 수 있으면노래고 뭐고 모조리 귀찮을 뿐이니, 아무래도 직업 잘못 택했달 수밖에. 어찌어찌해서 꽤 큰 항구인 이 곳 델로헨까지 오고 나니 노자고 뭐고 땡전 한 푼 없어 다 떨어져서, 그야말로 동냥질이라도 않곤 저녁끼니까지 쫄딱 굶을 판이었지. 벌이가 좋다는 소문은 순 사발이었는지, 온 데 시인 어쩌고 나부랭이들이 떼지어 몰려다녀서 감히 나도 음유시인입네, 입내도 못 내어 보고 요러고 쭈그리고 앉았단 말씀이야. "어이, 이놈아! 거긴 내 자리다!" 제기랄, 이제 동냥거지 놈한테까지 쫓겨나게 되다니 음유시인 님 팔자 참 더럽게 구겨지는군. 그 누구였더라, 델로헨에 가면 괜찮을 거라고 나불거리던 놈, 채키토란 놈이던가, 핑구 놈이던가, 하여간 다시가기만 한다면 단단히 물고를 내야겠어. 다시 가긴… 노자도 없는 주제에 쓸데없는 주둥아리는. 큰 항구에 시장바닥이라 참 사람은 많이 오가더군. 한 때깔 나게 차려입은 놈도 건들건들 지나가고, 나보다 더 쭈그렁 상판에 누더긴지걸레짝인지 걸친 그런 놈도 웅숭그렸고 말야. 하긴, 나르디엔 국왕 치세에 들어오고 나서 요즘 장사꾼 놈들이 살기가 좀 좋아겼긴 해. 마브릴 공주가 시집을 오더니 세르무즈하고 아웅거리는 일도 싹 그치고……. 뭐, 좀 심심한 감도 있긴 하지만, 하여튼 이만하면 몇 년째 태평 성대지. 젊은 폐하께서 제법 하신단 말씀이야. 어느 놈들 말마따나 왕후폐하와 왕비 전하께서 계속해서 경사를 본 일이 정말 길조가 된 건가? 그 자매처럼 자라고 있다는 란즈미 공주님과 유리카 공주님 말야. 누가 더 예쁘다고 했더라? "아, 여기가 델로헨이구나. 예전에 그렇게 오려다가 결국 못 왔던데를 오고 나니 감회가 새로운데. 안 그래?" 과일 장수 좌판 옆에서 어떻게 썩은 사과라도 한 개 눈치껏 집어 볼까 싶어 기웃거리고 섰는데, 바로 옆에서 중얼거리는 놈이 있지 뭐야. 고개를 모로 꼬면서 슬쩍 돌아보니 그럴듯한 면상에 귀티도 좀 나는도련님이 하나 섰더란 말야. 허어, 그런데 눈 색깔이 짝짝이지 뭔가? 하나는 검푸르고, 또 하나는 녹색이었네. 약삭빠른 눈매를 보아하니 생김하고는 달리 세상 물 꽤나 먹은 놈같기도 하고 말야. 그런데 내가 이상했던 건 놈하고 얘기하는 사람이아무도 없더란 거야. 그래서 나는 놈을 미친놈 보듯 보았어. 누구한테 '안 그래' 냔 말이지. 그런데 조금 있자니, 바로 옆에서 웬 꼬맹이 목소리가 나질 않겠어, 글쎄. "그 때 뱃멀미,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라, 내가 굶다 보니 헛소리가 들리나? 아무리 봐도 꼬맹이 비슷한것도 안 보이는데, 어디서 난 소리란 말야? 그런데 잠깐 만에 사정을 알게 됐어. 녀석 어깨 위에 웬… 아주 조그마한 사람이 앉았지 뭐겠어! "히익!" 내가 놀라서 후닥닥 뒤로 물러나는데, 요 도련님이 날 돌아 보고 씩웃더라고. 놀리는 건지……. 다시 보니 나이는 한 스물 하나나 둘 정도? 어느 집 기둥뿌리 만한검을 등에 짊어진 것도 희한하고, 한쪽에 끼고 있는 활은 멧돼지도 단발에 잡게 생겼더군. 팔다리나 어깨 같은 덴 웬만한 기사들 못지 않게건장한 것이, 어쩌면 잘못 걸렸다간 크게 경치는 시장 깡패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어. 해서, 내가 비실비실 꼬리를 빼는데, 이 친구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날 붙잡지 않겠어? 뭐라고 물었더라. 그래, 붉은 머리에 참새 그물을 찾는 남자가 이 근처에 왔을 텐데, 못 봤냐고 했던가? 하여간에 지금 생각해도 내가 어쩌다가 그 친구랑 같이 점심을 먹게 됐는지 잘 생각이 안 나. 어쩌면 내가 너무 배가 곯은 나머지 먹는 소리 듣자마자눈이 돌아가서 따라갔는지도 모르지. 둘이서 나란히 파이에 통닭까지 시켜 놓고 뜯고 있자니 먼저 한 생각은 다 날아가고, 세상은 천국이 따로 없다 싶더군. 이 소리 저 소리하다가 내가 별 볼일 없는 음유시인이란 소릴 듣더니 이 친구가 대뜸하는 소리가 이래. "제가 멋진 노래 하나 가르쳐 드리죠." 시키지도 않는데, 그냥 다짜고짜 한 곡조 뽑는 거 있지. 한 개의 메르장, 반짝이는 금화가 있네뒷면에 반쪽, 여왕님 얼굴은 말할 것 없이 아름답고텅 빈 주머니, 짤랑이는 소리도 기막히게 경쾌하지만한 개의 메르장, 너무나도 적은 것이라지친 여행자,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이면 쫓겨날 테고굶주린 이 몸, 만찬 한 번이면 앞으로 사흘은 내리 굶겠지한 개의 메르장, 지나치게 잘 만들었어정교한 다듬새, 완벽한 조각에서 흠이라고는 찿을 수 없고'1' 이라고 새겨진 숫자는 장님이라도 알아볼 수 있다네한 개의 메르장, 불평해도 늘지 않네이 손에 쥐어진 게 그 뿐이라 해도 그거나마 찬양할 밖에가난한 이 몸, 굶고 길바닥에서 잠드니보단 낫지 않겠는가하여간 놀랐어. 어쩌면 남의 심정을 꼭 찌르는 노래를 그렇게 뽑는지, 음유시인이라는 내 직업이 무색해질 지경이었다니까. 별난 재주를다 가진 젊은이더라고. 안타깝게도 나는 붉은 머린지 하는 남자는 본기억이 없어서 정보도 못 주고, 그냥 식사만 잘 대접받은 셈이 됐지. 나는 은근히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그 짝짝이 눈 색깔에 대해서 넌지시 물어 봤는데, 그저 쓸쓸한 표정으로 웃기만 할 뿐 얘기는 전혀 안해 주더군. 아까워라. 괜찮은 소재가 될 수도 있었는데. 하여간 점심 한 번 잘 얻어먹고 헤어졌는데, 그 날 저녁대가 되어서다시 시장 구석에 어슬렁대다 보니 예전에 나한테 동전 몇 푼 뜯어간일 있는 벤튼이란 놈이 눈에 띄지 뭔가. 얼른 가서 붙잡으니 요놈이말을 돌리려고 딴소리를 찍찍 해. "저기 저 젊은이 보여? 화아… 정말 놀랐다니까. 내가 델로헨에서몇 달 쑤시고 다니면서도 처음 보는 놈인데, 글쎄 앉은자리에서 펼쳐놓은 물건 싹싹 다 팔고, 나중엔 심심한지 옆자리 할망구 물건까지 전부 갖다가 팔아주지 뭔가! 입에 사탕이라도 발랐는지 손님 한 명 잡았다 하면 온갖 신소리에 구미에 짝짝 들러붙는 말만 해서 뭘 팔아도 한개 파는데… 야, 나 음유시인 때려치우고 저 친구 제자나 해야겠어. 요즘 장사꾼 경기 좋다던데." 고개를 휙 돌려 쳐다보니, 어리? 아까 그 젊은이 아냐? 피식 웃으면서 한 마디 해 주었지. "저 친구, 노래도 네 녀석보다 나을걸." 그러자니 옆에서 웬 사람이 또 하나 끼어들더라고. "저 친구, 보통내기 아니오. 내가 일전에 다른 항구에 갔다가 한 번마주친 적이 있는데, 저 나이에 배 다섯 척짜리 거대한 상단을 이끌고다니는 대상인 이라니까! 배 이름은 전부 웬 사람 이름들인데 뭐더라,'유리카' 라고 우리 공주님 이름에 그 다음엔 미르킬라라던가… 아,대마법사 '에제키엘' 도 있어. 그런데 이상하게 육지에 내리기만 하면꼭 저렇게 혼자 나와서 잡다한 물건들을 파는 버릇이 있대. 세르무즈일대에선 모르는 놈이 없다던데." "마브릴 놈인 모양이지?" "생긴 건 엘라비다 같이 보이는데……." "저 키를 봐. 저 몸집하고. 마브릴이 아니면 저런 게 나오나." 떠들고 섰자니 파장 때가 되어 갑자기 광장 쪽에서 사람이 왁자지껄해. 구경거리 하면 또 안 놓지는 이 몸 아니겠나. 얼른 달려가 봤더니어이구… 정말이더군. 근처 오렌지 카운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대(大)시인, 마르크 올빈이 왔지 않겠나! 한때 '계관자' 트루바드에몸담기도 했지만 지금은 따로 돌아다니고 있다지. 아마, 그런 분의 노래를 듣는다는 것이, 내 아무리 얼치기 시인이라 해도 가슴 뛰는 일이아니겠냐 말야. 좀 있자니 소란이 진정되고 구경꾼들이 자리를 잡더군. 내가 이럴때면 진가를 발휘하는 새치기 정신으로 얼추 맨 앞줄까지 가서 앉고보니 바로 옆에, 그 짝짝이 눈 젊은이가 와 있지 않겠어? 허어, 나보다 늦게 온 주제에 어느 새 여기라니, 한 수 더 뜨는 놈이더라고. 여러 모로 보통내기가 아냐. "레 클로슈의 예언시로 유명한 '녹보석의 기사' 를 새로운 서사시로만들어 보았습니다." 요란스레 박수가 쏟아지고 곧 노래가 이어졌지. 물론 내가 훌륭한노래를 듣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원체 집중력이 없는 편이라 자꾸 딴전을 피우는 나쁜 버릇이 있단 말이야. 벌써 내 옆에서 나 비슷한 치들이 주절주절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더군. "아, 말야. 며칠 전에 다니러 온 성주님 조카, 엠버리 영지에서 온아르노윌트 님 말이야. 검 좀 휘두르는 모양이더라고. 어제는 아가씨들한테 완전히 우상이 됐지 뭔가. 게다가 얼굴은 좀 예쁘장해야지. 덤빌 테면 성으로 찾아오라는 식으로 엄포를 놨던 모양인데, 깡패들이어디 실력이 무서워 못 가나? 감옥이 무서워 못 가지. 난 체 하는 애송이 녀석인지, 아님 정말 제대로 실력 있는 놈 인진 몰라도, 하여간웃기게 됐어." "덤비는 놈이 없어, 그래?" "감옥도 무섭고… 성주님 눈밖에 날 것도 무섭고… 혹시 있을지도모를 실력도 좀 무섭고… 그런 거 아니겠나?" "그런 치한테 겁을 먹다니 델로헨 놈들도 한물 갔군. 자네가 한 번덤벼 보지 그래?" "에이, 농담도." 그런데 갑자기 이 짝짝이 눈 젊은이가 불쑥 끼어 들어서 한 마디 하지 뭔가. "그거 재미있겠는데요." 아주 손까지 쓱쓱 비비는 것이, 정말로 검 좀 만져 본 모양이지? 검하고 활하고 같이 갖고 다니는 놈 치고 둘 다 제대로 하는 놈이 드물다던데. 그러는 가운데 노래는 흘러흘러… 기사가 될 소년이 마을을 떠나는데까지 왔어. 저게 말이지, 얼마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새로운 형식… 그 뭐냐… '모티브' 란 건데(헤에, 나도 어려운 말을 좀 쓸 줄안단 말씀이야), 아주 얘기가 흥미진진해. 오늘은 처음부터 읊는 걸보니 초장만 읊고 말 모양이군.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몰라도 나도 저'모티브' 를 갖다가 하나 써 보려 했지만, 기분 내려고 술 한 잔 마셨다가 반시간도 안 되어 곯아떨어지는 바람에 포기했지. 그러니까 뭐더라?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소년이 괴물들한테 어머니를 잃고, 늦게야나타난 친아버지에게 임무를 받아 떠나는 그런 내용이었지? 그러다가이쁜 아가씨도 만나고, 왠 쬐끄만 로아에인가 하는 종족도 만나고 말야. 아참, 가만있자. 그러면 아까 저 젊은이가 데리고 있던 것도 로아에였나? 내가 눈을 꼬아서 옆에 앉은 녀석을 훔쳐보며 그 로아에를 찾는데이번엔 어디 있는지 통 모르겠더라고. 대신 목에다 아주 괜찮아 보이는 금 펜던트를 했는데, 도둑놈들이 침 좀 흘리게 생겼드만. 애인 얼굴이라도 넣고 다니나? 네 개의 신발이 걷고 있을 뿐, 이름 없는 들판은 완전한 고요파란 달빛 아래 빛나는 은발은 숨겨진 작은 폭포와도 같아라밤을 거니는 짓궂은 요정처럼 온 곳도 갈 곳도 없이 나타나서두르는 여행자의 몸차림을 비웃으며 가벼이도 옮기는 발걸음오랫동안 여행했는지? 소년은 생각 끝에 입을 열어 보았네고개 끄덕이는 소녀의 옆얼굴은 날씬한 초생달처럼 섬세하였지얼마나 오래 여행했는지? 대답 대신 예언의 한 마디 흐르네'수천 년을 여행해 이 곳에 왔고 또한 수천 년을 다시 헤메리라' "틀렸어요. 수천 년을 여행해 왔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않고 소년과 함께 영원히 있으니까요." 갑자기 낭송을 끊고 들려 온 진지한 목소리에 다들 놀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지. 그러나 난 그럴 필요가 없었어. 그거야 바로, 내 옆에서들려 온 소리였으니까! 그건 침착하고도 확신이 담긴 목소리였어. 구경꾼들이 웅성대는 가운데 올빈은 당황한 표정이 되어서 우물거렸어. 사실 당황이라면 나도 했지. 시인이 틀린 건지, 젊은이가 건방진건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확인해 줄 사람도 없고 말이야.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젊은이는 다시 쾌활한 목소리로 되돌아가서는 소리 높여 묻더군. 이상한 마력을 지닌 목소리였어. 다른 사람들도순간적으로 방금 전의 상황을 잊어버린 것처럼 그의 말을 듣고 있었지. "그래서요?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