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가든 16-20 제 3차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을 즈음, 그 수련생이 천사채용시험에 합격할 경우, 가장 먼저 강등될 사람은 '카일'이라는 소문이 도처에서 떠돈다는 사실이 당사자인 카일의 귀에도 들어왔다. 처음엔 자신을 시샘하는 상급천사들이 퍼뜨린 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천사의 입에서도 그 소문이 언급되기에 이르자, 카일의 불안도 극에 달했다. "천사시험의 수련생 중 한 명이 합격했다고 들었어요." 정오의 티타임에, 카일은 아가사의 찻잔에 향긋한 장미 차를 따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슬쩍 물었다. 아가사는 비단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카일을 향해 미소지었다. "합격 불합격은 3차 시험이 끝나기 전에는 아직 확실히 답할 수 없단다." "그렇군요." 티타임이 끝나면, 카일은 아가사의 서재를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 그 전에 알고 싶은 것을 물어두어야만 한다. 만약 수련생이 합격한다면, 누군가 기존의 천사 중 한 명은 강등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렇다면 그것은 자신이 될 것인지. "2차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을 보니, 분명 무척 우수하겠군요." 카일은 서재에 머무르는 시간을 연장시키기 위해, 대화를 계속했다. "맞아, 확실히 우수하지. 게다가 신앙심도 깊단다." 아가사로 하여금 칭찬하도록 만들 정도면, 상당히 잘난 거겠지. 자신이 강등되는 것은 이미 확정된 일이라는 생각에 카일은 상심했다. 그러나 자신이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가사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아서, 카일은 막 떨어지려는 눈물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참, 이 일은 내가 카일에게만 살짝 알려주는 건데.." 이런 자신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아가사는 무척 즐거운 표정으로 카일의 얼굴을 바라봤다. "2차 시험의 합격자는 악마란다." 카일은 말도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가사는 후후, 하고 웃었다. "역시 놀라는구나. 하지만 이 일은 나와 상급천사만 알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된다. 참, 그 악마는 인@ 피도 반절 섞여 있단다." 자신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는 것을, 카일은 못박힌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악마 출신의 천사.... 신이 그런 일을 허락하실까요?" 카일의 말에, 아가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신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될 이런 종류의 일을 내가 잊을 리가 있느냐. 악마 출신의 천사도 좋지 않니? 본인도 그렇게 바라고 있고, 만약 그런 능력이라면 나 또한 아주 기쁘게 그를 환영할 거다. 카일, 넌 무척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카일은 빨개진 얼굴을 가리려 도망치듯이 아가사의 서재를 나와, 정원 구석에서, 마음에 들어하는 장미 옆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을 흘렸다. 분홍색의 장미꽃은 마치 카일의 괴로움에 공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눈물에 맞추어 편편이 꽃잎을 떨구었다. 아가사가 마음에 들어하는 악마. 천사시험에 그 악마는 분명 합격할 것이다. 그 다음엔 자신은...... 생각하는 것만으로 상심해서, 회한의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태어날 때부터 천사였고, 앞으로도 쭈욱 천사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와서 빼앗기게 되다니,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처참한 일은 당하고 싶지 않다. 비참한 나날은 보내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소중한 아가사의 곁을 떠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운명의 수레바퀴는 이미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 주술을 걸어놓았다. 자신의 비참한 미래를 예견하고 카일은 울었다. 아가사의 분부대로 카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후 2차 시험의 유일한 합격자가 악마라는 소문은 어느새 천계의 도처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 소문 속에는, 카일이 모르는 사실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합격한 악마는 악마와 인간 사이에 난 아이래. 게다가 마왕의 14번째 아들인 바리에가 남긴 후손이라고 하더라구. 정말이지..... 마왕의 핏줄을 천계로 들이다니, 농담이 지나치잖아. 아가사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상급천사들이 아가사님을 알현하기 위해 모여서 기다리고 있는 회견실로 차를 내가면서, 카일은 이런 대화를 들었다. 그들은 모두 아가사보다 나이가 많고 성내에 출입한 경험이 풍부한 상급천사들이었는데, 큰 소리로 소문에 관한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가사님이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이상한 자를 선택하시니까, 천계의 천사들의 수준이 전보다 떨어지는 거 아니야? 요즘엔 능력이 떨어지는 천사들이 굉장히 많다구. 아무도 입밖에 내지는 못하지만...." 차를 내갔을 때, 상급천사들은 자신에 대해 적의의 표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카일은 입술을 악물고, 의연한 태도로 회견실을 나왔다. 그러나 방을 떠날 때 등뒤에서 울리는 조롱 섞인 웃음소리는 카일의 마음을 산산이 부숴트렸다. 카일은 장미꽃 사이로 달려와서, 흐느꼈다. 바보 취급을 당한 것도, 말대꾸 할 수 없었던 것도 모두 다 속이 상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능력은 기껏해야 꽃을 피우는 것 뿐,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바보 취급을 당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최소한 지금의 생활만이라도 지키고 싶다고......절박한 맘으로 소망했다. 그리고 운명은 카일의 편이었다. 천사의 제 3차 시험은 '장미의 성'에서 거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성안에 들어온 수련생의 모습을, 카일은 정원 귀퉁이에서 몰래 살펴보았다. 긴 흑발에 검은색의 눈동자, 어딘지 모르게 사악한 냄새가 나는 인형(人型)의 악마. 그 수련생이 회견실에서 아가사의 시험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카일은 아무에게도 부탁 받지 않았으면서, 그 방문객에게 차를 내갔다. 카일이 방안에 들어가자, 구석에 앉아있던 악마가 고개를 들었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멍해 있더니, 곧 부끄러운 듯이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자신의 미모에 놀란 거겠지, 하고 카일은 제멋대로 해석했다. "드셀." 말하면서, 차 쟁반을 악마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차를 낸 뒤에도, 카일은 바로 떠나지 않았다. 긴장으로 인해 굳어있는 손가락을 찻잔으로 가져가는 악마를, 그 검고도 사악한 생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선으로 가늠해 보고 있었다. "저...."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악마에게, 카일은 오만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시험의 답은, 전부 '아니오'라고 하면 돼요." 악마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나는 당신 편이에요." 그를 지지할 리도 없고, 시험의 내용 따위도 카일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단지 자신이 한 말이 악마에게 혼란을 주어, 대답할 때 착오를 일으킨다거나, 악마가 시험에 불합격하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시험 다음날, 카일은 좋은 소식을 들었다. 악마가 불합격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카일은 장미정원 안쪽에서 상급천사들의 대화를 듣고 알게되었다. 카일은 안심해서 마음의 돌을 내려놓았다. 그 날, 카일은 아가사의 서재에 불려갔다. 그 곳에서 카일은 아가사의 입으로부터 직접 "인간계에 가서 1년간 수행하고 오라"는 명령을 들었다. 말이 수행이지, '처벌'에 다름이 아니었다. "어째서 저를 인간계로 보내시는 겁니까?" 카일의 질문에, 아가사는 의자에 앉아 팔을 괴고, 손으로 뺨을 문지르면서 한 숨을 쉬었다. "카일, 나는 네 마음을 도통 모르겠구나." 아가사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이종족을 이 세계에 들이는 것에, 나 역시 불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불횬 눌러 죽이고, 나는 어떻게든 이 안온한 천계를 바꾸어줄 기폭제를 얻고 싶었던 거다. 그 결과 실제로, 한 두 가지의 능력만을 가진 천사들도 기를 쓰고 수행해서, 확실히 더 많은 능력을 구비하게 되는 효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카일, 너는 달랐다. 너는 자신의 능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에 대해 한탄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직접 지적 당하자, 카일은 일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양손을 꽉 움켜쥐고, 반문했다. "수련생이 합격할 경우엔, 하급천사인 내가 강등되는 것 아니었나요?" 아가사는 깊이 한 숨을 내쉬었다. "나는 신앙을 가진 자를 구하고 싶었다. 제 3차 시험에서, 나는 그를 합격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시험은 단지 형식이었다. 나는 그에게 단 한 가지 문제만을 물었다. 나는 그에게 '너는 신을 믿느냐'라고 물었고, 그는 잠시 사이를 두고 결국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별 수 없이 그를 불합격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가 너무 이상해서 물어보았더니, 시험을 치기 전에 한 금발에 녹색눈을 가진 굉장히 아름다운 천사가 그에게 그렇게 대답하라고 가르쳐 주었다고 말하더구나. 그건 바로 카일, 네가 아니냐." 그 악마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계획, 계획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하찮은 그 일이, 최악의 형식으로 아가사에게 알려져 버렸다고, 카일은 자책했다. "네 탓만은 아니다...... 그 악마도 너무 어리석었지. 하지만, 나는 그 우매한 자가 분명 너를 사랑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되는구나. 그렇다 해도 처벌을 면할 수는 없지. 네가 그 악마에게 한 행위는 분명 '죄'이다. 네 말을 믿고, 신성한 시험 중에 거짓말을 한 그는 불합격이라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니 카일, 너도 처벌을 피할 수는 없다. 1년 동안, 인간계로 내려가 있으면 네 본래의 면모를 분명 회복할 수 있을 게다. 나는 너에게서 천사의 칭호를 뺏을 생각은 없다. 네가 1년간의 '수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너를 다시 이 곳에 들일 것이다." "하지만 아가사님, 그 놈은 악마가 아닙니까. 우리들은 악마가 구원되었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악마의 일 따위로, 어째서 제가 책임을 느껴야 합니까?" 입을 뚫고 나간 카일의 진심에, 아가사는 상심해서 눈을 내리깔았다. "그 정도 일도 모르겠느냐, 카일. 신앙을 가진 영혼을 구제하는 것이, 우리들이 하는 일이다." 카일은 대천사 아가사가 하는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결국 카일은 인간계로 내려왔다. ■ 말이 수행이지, 실상은 아무 임무도 맡겨져 있지 않았지만, 카일은 천계에서 하던 자신의 일- 꽃을 피우는 일을 시작했다. 여러 군데 돌아볼 것도 없이, 카일은 마을 외곽의 작은 교회에 잠자리를 정했다. 대로변에 있는 큰 교회는 시찰하러 내려온 천사와 마주칠 가능성이 있었기에 피했다. 자신을 두고 천계에서 어떤 소문들이 돌고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다른 천사들과 얼굴을 마주하기도 싫었다. 카일이 인간계에 내려온 그 해 봄부터 여름까지, 작은 교회에는 예년 비해 수 배 이상 많은 꽃들이 피어났다. 아름다운 꽃은 교회에 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줄곧 부지런히 꽃을 피우는 일에 매달렸지만, 카일은 여전히 자신이 왜 처벌을 받아야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을 속인 죄 때문이라는 것은 자신도 알고 있다. 그러나 상대는 악마다. 악마에게 사소한 거짓말을 좀 했다고 해서, 왜 자신이 이런 처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가. 아가사의 이 번 처벌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가슴속에 의문을 품은 채, 약속했던 1년 중 가을이 저물었다. 교회지붕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카일은 천상에서 눈부신 빛이 비추는 것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카일은 황급히 교회를 떠났다. 이런 곳에서 다른 천사의 눈에 뜨였다간, 본래도 환영받지 못하던 자신이, 이후 천계에서 또 어떤 소문에 시달리게 될 지 모를 일이었다. 시찰천사는 교회 뿐 아니라 마을 도처를 순찰하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카일은 교회를 도망쳐 나와서, 시찰천사가 오지 않을 만한 장소를 찾아, 괴물들의 서식처인 숲까지 오기에 이르렀다. 이 곳이라면 절대 천사가 올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안심한 카일은, 숲 근처의 큰 나뭇가지 위에서 잠이 들었다. 시찰하러 온 천사를 피해서 도망오기는 했지만, 교회 안에는 아직도 자신의 기색이 남아있을 것이다. 상급천사라면 분명 그것을 알아차릴 테고, 결국엔 자신의 소재지 역시 알려질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일은 다시는 상급천사와 대면하고 싶지 않았고, 그 노골적인 혐오의 언사도 듣고 싶지 않았다. 누워있는 동안, 카일은 점점 잠에 빠져들었다. 편안한 햇빛이 비추는 가운데, 아가사의 성안에서 생활하던 시절에 대한 꿈을 꾸고 있던 카일은 나뭇가지가 스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강풍이 불어와, 살며시 눈을 떴다. 갑자기, 전신의 털들이 곤두서는 불쾌감을 느꼈다. 이 혐오스러운 감각은 뭘까....카일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숲 쪽에서 사악한 냄새가 풍겨왔다. 아마도 이곳은 괴물의 숲과 너무 지나치게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태양은 이미 상당히 저물어 있으니, 시찰하러 온 천사도 돌아갔을 것이다. 교회로 돌아가자....카일은 접었던 날개를 펼쳤다. 순간, 오른 쪽 날개가 뭔가에 잡혀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뭔가에 걸렸나보다 생각하고 고개를 돌린 카일은, 그곳에 있는 검은 그림자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자신이 잠자고 있던 가지 위에 악마가 있었다. 검고 큰 날개, 야수처럼 날카로운 손톱. 예리한 눈은 고양이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악마를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눈앞의 악마가 발하고 있는 박력은 보통의 악마들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 악마는 무척 강하다. 본능이 카일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낮은 목소리. 카일은 떨었다. 그의 힘은 마왕 정도의 수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에게는 승산이 없다. 카일은 날개를 펴고, 거칠게 깃을 쳤다. 악마가 놀라서 손이 풀린 틈을 타서, 카일은 날아올랐다. 죽을힘을 다해 날개를 움직여서, 곧바로 교회를 향해 날아갔다. 악마에게 있어선 귀문(鬼門)과도 같은 교회로. 그곳으로 도망간다면,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나 만나고 싶지 않던 상급천사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기를 카일은 마음속으로부터 간절히 빌었다. 제발 나를 도와줘. 분명 앞을 보고 날고 있었는데도, 불시에 무언가에 부딪친 카일은,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렀다. 부딪친 대상은 자신의 등뒤에서 쫓아오고 있던 악마였다. 구불구불한 손톱이 달린, 악마의 손이 카일의 어깨를 잡았다. "다가오지마, 더러운 악마!" 손을 뿌리치고, 다시 한 번 날아오른 카일은 날개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악마의 손이 자신의 한 쪽 날개를 꽉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싫, 싫어, 싫어-!" 카일은 정신없이 몸부림쳤다. 악마는 카일을 꼭 껴안고 공중으로부터 빠르게 지면으로 하강했다. 카일을 지면에 내리누르고 악마는 그 위를 덮었다. "어째서 도망가는 겁니까.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악마에게 볼일이 전혀 없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겁니까." 악마는 눈앞에서 변신했다. 그것은 인간에 굉장히 근접한 모습이었다. 카일은 깜짝 놀랐다. 그 검은 눈과 흑발은, 아가사의 성안에서 천사의 최종시험을 보던 바로 그 악마였다. 시험을 칠 때는 마법을 써서 자신의 원래 모습을 숨겼던 것이다. 카일은 공포로 가슴이 떨렸지만, 여전히 악마를 깔보는 투로 말했다. "그 때의 악마인가?" 악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과 닮은 모습에, 카일의 악마에 대한 공포심은 약간 덜해져 있었다. "왜 그 때 저에게 거짓말을 했던 겁니까." 악마는 진지한 눈빛으로 카일에게 물었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시험에 합격했을 겁니다. 어째서..." 네가 시험에 합격하여 천사가 된다면, 나는 천사의 자리에서 밀려날 테니까, 라는 말은 입밖에 낼 수 없었다.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카일은 얇은 입술을 깨물고,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악마를 밀었다. 뜻밖에 악마는 순순히 자신의 몸으로부터 물러났다. 그 순종적인 태도로 보아, 이 악마는 보기에는 무척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라고 카일은 추측했다. 힘이 약한 악마라고 한다면, 방금 전 그가 무서워서 도망갔던 자신의 행동은 무척 어리석지 않은가. 카일은 일어나서, 머리 위의 마른 잎을 가볍게 털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 악마가 천사가 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일이 아니야.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네가 천사가 안된 것은 다행한 일이야. 이렇게 사악한 모습을 한 자가 천사 속에 섞여있다니 이상하잖아? 나는 적절한 일을 했을 뿐이야." 카일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나도 원해서 이런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야." 악마는 미간를 찌푸리고 고개를 떨궜다. "이미 그렇게 태어났으니 별 수 없어. 악마의 모습으로 자랐다면, 악마로서 생활하면 되는 거잖아. 너 같은 존재가 천계에 오면 곤란한 일만 생길 뿐이야." 생각한대로 말이 흘러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유쾌해졌다. 하급천사인 자신은 천계에선 의견을 말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악마라면, 자신 쪽이 완전히 우위에 서있다. "자기 신분을 알았으면, 숲으로 돌아가라구." 신이 나서 오만하게 한 마디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몸을 휘감고 있던 손가락이 그를 붙잡았다. "충분해......" 돌아본 곳에 있는 것은 한 쌍의 고양이 눈이었다. 악마가 고양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외모가 정말 그렇게나 중요한 겁니까?"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날 때부터 천사였던 운 좋은 당신이, 심지어 인간조차 될 수 없었던 나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겁니까."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고 있지 못한 카일은 그저 불쾌하기만 했다. 이미 이 악마랑은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아졌다. 초조해져서, 카일은 아무렇게나 말했다. "넌 악마야. 마음속도 전부 검은 색으로 물들어 있음에 틀림없어. 변명할 생각하지마. 악마라면 악마답게 지하생활로 돌아가면 될 거 아냐." 악마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경악의 표정이 서서히, 서서히, 웃는 얼굴로 변해갔다. 그것은 무섭도록 사악한 미소였다. "....전에 괴물들이 말하길, 천사의 힘은 대부분 날개에 실려 있으니까, 천사를 죽이고 싶으면 날개를 겨냥하면 된다고 했었지." 악마는 구불구불한 손톱으로, 카일의 날개를 힘껏 쥐었다. "날개를 잃은 천사는 더 이상 천사가 아니겠지, 시험해 볼까?" 카일이 도망가는 것보다, 악마가 날아오르는 것 더 빨랐다. 가볍게 지면에 눌려진 카일의 뺨은 검은 색의 흙으로 더러워졌다. 이 얼굴, 천계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미모의 얼굴이 더럽혀졌다. ....생각한 순간, 날개에 한 줄기 격통을 느꼈다. "아악-!" 그런 통증은 카일이 과거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살아있는 육체를 억지로 찢기는 촉감에, 카일은 사지를 어지럽게 버둥거렸다. 그러나 통증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기절할 것 같은 아픔이 2, 3 차례 되풀이 되었다. "아아아악--!" 뚝, 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등위에 한 줄기 격통이 달렸다. 순간, 몸 속의 힘이 마치 녹아 없어지듯이 사라져 버렸다. 카일은 마침내 땅위에 엎드려 미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등위의 통증을 참으며 카일은 흙으로 더러워진 얼굴을 들었다. 시야의 끝에 한 쌍의 날개가 보였다. 카일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등을 만져보았다. 본래라면 응당 그곳에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거둬들인 자신의 손가락은 선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거....거짓말, 거짓말!" 카일은 악마가 자신의 날개를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는 광경을 보았다. "안돼......." 카일은 양손으로 머리를 누르고, 비명을 질렀다. 날개를 찢긴 천사는 천사의 힘을 잃는다. 아마도 영원히 잃는 것일 게다. "그, 그만, 멈춰. 부탁이니 그만둬 줘. 먹어버리지마, 내 날개......." 악마는 예리한 발톱으로 땅을 딛고, 가볍게 위로 날아올랐다. 악마는 나뭇가지 위에 앉아서, 뿌리 부분만 남은 날개를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 위로, 부드러운 깃털의 감촉이 느껴졌다. 위에서 점점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흰 색과 붉은 색의 깃털들을 카일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 악마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풀밭 위에 엎드려, 눈물이 말라서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고 있던 카일은 뼈를 에일 듯한 차가운 바람에 몸을 흠칫 떨었다.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강렬한 추위에, 카일은 본능적으로 따뜻한 곳을 구해 몸을 일으켰지만 곧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무게를 느껴본 적이 없었던 신체가 지금은 마치 납처럼 무거웠다. 혼자서는 어찌해도 일어설 수가 없어서, 카일은 들짐승처럼 땅 위를 기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처참한 상황에, 이미 말라버렸던 눈물이 또다시 흘러나왔다. 천천히 기어가던 중에, 카일은 자기 키보다 큰 나뭇조각을 발견하고, 가져와서 지팡이로 삼아 비틀거리며 걸었다. 오솔길을 걸어가던 카일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녹색치마를 입은 그 소녀는 마치 카일을 바라보는 것처럼, 시선을 이쪽으로 향하고 있어서 카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사들은 인간에게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술을 펼쳐놓기 마련이다. 자신은 분명 평상시처럼 그런 주술을 걸었는데, 어째서 저 여자 애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이봐요, 당신...." 엇갈려 지나가는 순간, 여자애는 동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자신의 모습이 인간에게 보인다는 사실에, 카일은 자신이, 술 중에서도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모습을 감추는 술을 펼칠 능력까지도 상실해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했다. "부상을 당한 것 같은데, 괜찮아요? 내 어깨에 기대봐요." 카일은 수치도 잊은 채 그 자리에서 한바탕 통곡한 뒤, 선량한 소녀의 어깨에 기대어 교회로 향했다. 카일에게 있어서 교회는 어려서부터 노닐던 장소이고, 목사 역시 눈에 익었지만, 목사에게 있어서 카일은 단지 한 명의 낯선 부상자일 따름이었다. 목사의 호의를 받아들여, 카일은 교회 안에 잠자리를 얻게 되었다. 목사의 부인은 카일의 등에 난 상처에 약초를 붙여주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간단한 치료가 끝난 후 카일은 곧 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 침대는 몹시 좁고 퀴퀴한 먼지 냄새가 났다. 누워있는 카일은 조금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더 곤란한 것은, 배가 울부짖고 있는 것 같은 기괴한 감각이었다. 그것이 "배고픔"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카일은 지금껏 "배고픔"이라는 감각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카일은 수치를 무릅쓰고 목사부부에게 음식을 나누어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수치와 맞바꾼 그 음식은 카일의 배를 달래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빈 쟁반을 앞에 두고, 아직 채워지지 못한 배를 끌어안은 채, 카일은 눈물을 참으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한밤중, 카일은 코가 썩을 것 같은 악취에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 주위에 무언가 발광체가 있었다. 분명 방안인데, 빛을 낼 물체가 뭐가 있을까.....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하고 있을 때, 창문을 통해 달빛이 비쳐 들어왔다. 방안에 떠있는 빛의 본체를 깨달은 카일은 "아!"하고 비명을 질렀다. 빛을 내고 있는 것은 괴물의 눈동자였다. 숲 속에 살고 있는 괴물들의 눈동자. 침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괴물들. 게다가 어느 괴물이나 하나같이,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몰골들이었다. 개처럼 생긴 괴물, 고양이처럼 생긴 괴물, 쥐처럼 생긴 괴물.......들이 악취를 뿌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카일은 침대 위에서 벽에 등을 바짝 붙인 채 덜덜 떨었다. 개처럼 생긴 괴물이 자신의 다리를 잡았을 때, 카일은 그 괴물을 발로 차내고 지면으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몇 걸음 채 가지도 못해, 다시 괴물에게 포위되어버렸다. "싫, 싫엇!, 싫어-" 수십 마리의 괴물들에게 둘러싸여, 바깥으로 옮겨지고, 그 길로 숲으로 끌려갔다. 카일은 너무 아파서 몇 번이나 비명을 지르다가, 결국 기절해버렸다. 부드러운 풀 무더기 위에 던져진 카일은, 관절의 통증을 참으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앞의 기괴한 광경에 할 말을 잊었다. 추악한 괴물들이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채, 일제히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러더니 돌연, 망가진 바이올린 같은 소리로 대 합창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천사의 고기, 천사의 고기." "천사의 고기는 참 맛있지." "맛있어, 맛있어." "얼마만이냐. 백년만일 거야. 빨리 먹고 싶네. 먹고 싶어 죽겠네." 카일은 웅크린 다리를 두 손으로 끌어안고, 찍 소리도 내지 않고 떨고 있었다. 괴물들과 자신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면서, 점점 참을 수 없게 된 카일은 벌떡 일어나서 괴물들을 향해 나는 듯이 달려나갔다. 그러나 그 두터운 벽을 뚫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카일을 붙잡은 괴물들은 악취를 풍기며, 코를 킁킁대며, 녹색의 혀로 카일의 얼굴을 핥았다. "아아아아악!" 겁에 질린 카일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괴물들은 녹색의 혀를 내밀었다.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어-!" 간구하며 사방을 둘러보던 카일은, 달빛이 비치는 나뭇가지 위에서, 자신의 날개를 앗아가 버린 악마의 모습을 발견했다. 절망이란 두 글자가 눈앞에 떠올랐다. 카일은 눈물을 흘렸다. 악마는 자신이 살해되는 모습을 보고 있을 작정인 것이다. 처참하게 먹히는 천사의 모습을. 괴물들의 손이 카일의 옷을 잡았다. 거칠게 찢겨나간 옷 틈 사이로 어깨가 드러났다. 어깨를 안고 웅크리자, 괴물들은 카일의 몸을 이리저리 잡아당겼다.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하는 괴물들 앞에서 섬세한 의복이 찢겨 나가고, 전라의 모습이 괴물들의 눈앞에 노출되었다.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천사는 본 적이 없어. 어서 먹자, 먹어버리자. 나는 다리." "나는 머리." "나는 오른손." 갈고리 같은 손이 카일의 다리를 잡았다. 그 손톱은 고양이처럼 희롱하지 않고, 곧바로 연약한 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힘껏 다리를 깨문다. 전력을 다해 다리를 잡아당기지만, 도망가지 못하고 결국 살갗이 찢겨 버린다. "아아악!" 카일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미친 고양이처럼 큰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누가 좀 구해줘, 살려줘, 살려줘......" 큰 그림자에 덮여서, 달빛이 사라졌다. 곁에 서있는 악마에 부딪쳐서 카일은 풀 위로 넘어졌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몸 위를 덮고 있던 괴물들은 마치 악마를 두려워하는 듯, 거리를 두고 서있었다. 악마가 자신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자신은 먹혀버릴 것이다. 뼛조각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팔을 잡혀, 끌어 안겨짐과 동시에 몸이 날아올랐다. 악마는 그렇게 자신을 안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악마야, 악마야. 그 천사를 돌려줘." 다리 아래서 대 합창이 시작되었다. "천사를 돌려줘. 혼자서만 먹는 건 너무 교활해. 너무 교활해." "천사를 돌려줘, 돌려줘." 이 악마에게 먹히는 건 저 아래에 있는 괴물들에게 먹히는 것만도 못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해치고 이런 처지에 빠지게 만든 원흉이 아닌가 말이다. 카일은 악마의 품속에서 두 팔을 마구 휘두르며, 발버둥쳤다. "아!" 악마의 외침과 동시에, 카일은 머리로부터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땅에 떨어지기 전에, 악마는 그를 낚아채어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죽일 거야!" 카일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누가 네 놈의 뱃속을 채워줄 음식이 돼줄까 보냐. 나는..... 나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울고 있는 동안 카일의 의식은 점점 멀어지다가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과도한 공포와 긴장에 뇌가 먼저 기권해버려서, 아무런 감각도 닿지 않는 안식의 세계 속으로 도망쳐버린 것이다. ■ 워렌은 서둘렀다. 작업실의 동료에게 붙들리는 바람에, 귀가시간이 이미 상당히 늦어 있었다. 그래서, 마법을 펼쳐놓은 북쪽의 길에 다다르자마자 바로 악마의 모습으로 바꾸어 비행을 했다. 북쪽 길의 입구가 시작되고 난 후 채 몇 분도 되지 않아서, 가까스로 집 현관에 도착한 워렌은, 현관 앞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후 의복을 정돈했다. 카일은 자신이 악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 모양이라도 상관없겠지만, 그는 자신의 악마형 외양을 몹시 싫어하니까. 외모에 신경 쓰는 모습은 무척 바보스럽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서 그를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국 변명이겠지만, 외모를 바꾸지 않으면 자신도 인간들의 틈에서 생활할 수 없을 것이다. 카일도..... 이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도 카일은 여전히 자신의 모습을 보면 싫어한다. 스네아처럼 아무 거리낌없이 이 외양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도 잘 알고 있다. 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본래의 외모를 보고도 기꺼이 다가서는 것은, 유일하게, 스네아 뿐이다. 집안에 들어서자 공기가 통하지 않기 시작했다. 괴물들이 이미 집 밖에 접근해 있었다. 카일이 무서워하며 울고 있을 것을 생각하고, 워렌은 급히 거실 문을 열었다. 카일 의자 위에 앉아서, 입가에 무언가 부스러기를 묻히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어제, 스네아를 위해 만들었던 과자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워렌은 카일이 꽃 이외의 음식, 그것도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돌아본 카일은, 눈에 띄는 부스러기를 급히 옷자락으로 훔쳤다. 그리고 나쁜 일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다. "스네아를 위해서 만든 것이긴 하지만, 당신이 먹고 싶다면 먹어도 괜찮아요." 카일을 돕기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그는 도리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 화난 표정으로 거칠게 일어나 방을 나가버렸다. 그러나 천사는 곧 얼굴을 굳히고 되돌아왔다. 순간적으로 울컥해서 방을 나섰다가, 복도에서 괴물들을 마주친 것이리라. 카일은 흔들의자에 앉아서, 불쾌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워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방에 가서 장미꽃을 씻었다. 꽃받침을 떼어내고, 수분을 충분히 뿜어주었다. 카일이 좋아하는 신선한 꽃이다. 물을 뿌려서 색과 광택을 회복한 꽃을 쟁반에 담아, 조용히 거실에 있는 탁자 위에 가져다 두었다. 카일은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으로 더듬더듬 꽃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정기를 빨린 꽃은 다갈색으로 말라 시들어버렸다. 워렌이 쟁반을 도로 가져가는 것을 보면서 카일은 몹시 싫은 감정을 느꼈다. 카일의 저녁밥이 해결된 후, 워렌은 주방 구석에서 빵과 물만으로 간단한 식사를 마쳤다. 거실로 돌아와 카일이 앉아있는 곳의 맞은 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 정경은 황혼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카일은 시집을 붙잡고 있을 생각이었지만, 그다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과자를 먹고 있는 것을 들킨 것이 불쾌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워렌은 고개를 저었다. "카일" 그의 이름을 불러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금색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리고, 녹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 "과자를 먹고 싶다면, 만들어 줄게요." 잠시 마음을 놓고 있던 카일의 얼굴이 분노로 창백해졌다. "나는 장미꽃 외에는 어떠한 것도 먹지 못한다는 것을 너도 알잖아!" 카일은 무릎 위의 시집을 탁, 하고 덮었다. "아아, 정말 사람 불쾌하게 만드는군. 아무리 네가 싫어도, 맘대로 떠날 자유조차도 나는 없단 말야! " 그 소리에, 이미 포기했던 일인데도 새로이 덮쳐오는 절망의 감정에, 워렌은 못들은 척 외면하고, 기한을 맞추기 위해 집에까지 가져온 목공예품을 가져다 작업을 시작했다. 날카로운 도구로, 작은 목제 브로치 위에 조각을 하기 시작했다. 힘을 주는 순간 미끄러진 칼끝이 손끝을 파고들어서 피가 흘렀다. 입으로 빨아들이자, 마비와도 같은 통증이 가슴을 때렸다. * 금색의 머리카락이 팔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피곤해서,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는 것을 잊어버린 카일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석유램프 아래서 흰 색의 피부가 빛나고 있었다. 1주일에 두 번 뿐이지만, 그는 이 육체를 자신에게 의탁한다. 워렌은 아름다운 자는 얼굴을 깨뜨리지 않으려는 듯, 살짝 껴안았다. ■ 워렌은 천사와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조부모의 무덤 앞에 장미꽃을 피워주던 카일. 단지 한 순간의 마음의 움직임에 의한, 충동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해도, 그것이 그 당시의 자신을 구원해 주었음은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그 일을 계기로 워렌은 다시 한 번 무언가를 믿고 싶어 졌다. 나쁜 일만 있을 리가 없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괴물들의 소굴에 살면서도 '양심'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날로 팽창해 가는 자신의 마력에 공포감을 느끼면서도, 그 힘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를 다스릴 수가 있었다. 힘의 증가와 더불어, 워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더 이상 괴물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이 진심으로 싸운다면, 그들은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인간들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괴물들이 사는 숲에서 계속 생활하고 싶지도 않았던 워렌은, 자신의 '보금자리'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숲의 괴물들은 워렌을 위협할 의사는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따지고 보면, 괴물들을 이루는 근본은 '악'이다. 숲 속에서 길을 잃어 괴물들의 먹이가 되어버리는 인간들을 볼 때마다, 비할 데 없는 공허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인간들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없다. 외모를 바꾸고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 생각을 했을 때 최초로 떠오른 것은, 비참하게 돌아가신 조부모의 모습이었다. 워렌은 자신을 박해하고 죄 없는 조부모를 살해한 인간들을,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그런 중에, 워렌은 우연히 이런 소문을 들었다. 천계에서 종족을 따지지 않고, 시험을 치러서 합격한 자들은 모두 천사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워렌에게 있어서, 그것은 참으로 꿈같은 소식이었다. 마물들의 세계도 아니고, 인간들의 세계도 아닌 곳. 그 곳이라면 자신의 자리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금발녹안의 '천사'를 떠올렸다. 천계에 가면, 그 천사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그 자비롭고 온유한 천사라면, 분명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다, 그런 희망에 부풀었다. 그 후 워렌은 미친 듯이 성경을 읽고,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비록 '악'의 능력이긴 하지만, 올바르게 사용하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시험을 치고 순조롭게 1, 2차를 모두 통과해, 마침내 최종시험에 도달했다. 운명의 최종시험. 워렌은 자신을 구원해주었던 바로 그 천사의 책략으로, 불합격되었다. 실의에 빠진 워렌은 감람수 숲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가슴속엔 풀 수 없는 의문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왜 그 자비롭고 온유한 천사가 자신을 해치는 듯한 일을 한 것일까. 의문의 해답을 얻지 못한 채 반 년이 흐르고, 워렌은 자신을 해한 금발녹안의 천사와 재회하게 되었다. 그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줄곧 감람수 숲을 떠나지 않던 워렌은 그날 따라 과일이 먹고 싶어서 숲을 떠나 부근의 마을로 향했다. 돌아오는 도중,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앉은 큰 나뭇가지 위에, ...바로 그 곳에, 그 때의 천사가 누워 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종교화처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보드라운 나뭇가지를 투과한 햇빛을 받으며 정신없이 잠에 빠져있는 천사를, 워렌은 숨을 죽이고 응시했다. 그를 해칠 의도 같은 건 결코 없었다. 단지 자신을 속인 이유를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면 좋았다고 후회했다. 그랬다면, 천사는 쭉 자기마음 속의 완미(完美)한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깨어난 천사는 자신의 외모를 나무라고, 자신의 피를 비난하고, 자신의 일체를 송두리째 부정했다. 자신에게 고통을 견딜 힘을 주었던 바로 그 입으로, 자신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떨어뜨렸다. 절망에 사로잡히고, 분노에 미쳐버린 워렌은 천사의 날개를 물어뜯고, 먹어버렸다. 그러나 그를 죽이진 않았다. 날개를 잡아뜯긴 나비처럼, 일생 땅위를 기며 살아가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렇게 천사의 힘을 잃은 천사가 괴물들의 먹이가 되어 쫓기는 비참한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가 미웠지만, 그의 죄는 죽음으로 씻겨 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천사의 힘을 잃고, 그 맛있는 고기를 목표로 하는 괴물들에게 매일 밤낮으로 습격을 당하던 카일. 그를 구한 후, 워렌은 그 나약한 생물을 언제나 자신의 곁에 두고 보호했다. 죄책감에서 시작되었던, 천사를 보호하는 행위는, 곁에 있는 아름다운 생물을 증오의 대상으로부터 사랑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비로소 워렌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뺨에 가볍게 입맞추면서, 천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괴물들을 두려워하는 가련한 모습이 되어버린 천사의 모습에 후회의 마음이 차 올랐지만, 품안에서 떨고 있는 따뜻함은 절대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수명이 짧은 인간과는 달리 이 천사는, 세심하게 보호하기만 한다면 줄곧 자신의 곁에 머물러 줄 수가 있다. 일생, 자신의 곁에 있어줄 것이다. "카일" 곁에 있는 것 만으론 만족할 수 없다. 소중하게 여기는 감정, 사랑하는 감정을 그 역시 자신에게 되돌려 준다면.... 제멋대로인 거겠지. 카일은 그를 천계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 자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카일" 나직이 불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금색의 속눈썹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눈꺼풀은 그냥 닫혀진 채 녹색의 눈동자는 자신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그런 순간의 느낌은 쓸쓸했지만, 스스로를 위로하듯, 워렌은 그 따뜻한 물체를 자신의 곁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