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작 : 코노하라 나리세(木原音瀨) 번 역 : 란 (tammi@yesthete.com) 장 르 : 리맨물 Cold light (4)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에 후지시마는 토오루를 내보냈다. 현관까지 같 이 따라갔지만 집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 토오루는 후지시마의 손을 놓지 않았다. 놓는 순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으나 입술을 꼬옥 깨문 채 우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모친이 사교 댄스 파티에 나가기를 기다려, 오후 8시 지나서 후지시마는 부친의 방으로 찾아갔다. 각오를 하고 방 앞까지 갔지만 좀처 럼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 얘기를 들어줄 지 어떨지도 모르는 일이었 다. 불안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런 후지시마의 등을 떠민 것은 애처롭게 울던 아이의 얼굴. 토오루가 이 집에서 불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정의감이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문을 노크했다. "누구냐?" 안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예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후 "들어와라" 하고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부친의 방에 들어가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어서 긴장으로 다리가 떨렸 다. 다다미 20장짜리의 넓은 방에는 주위를 빙 둘러싸듯 책장이 서 있었 고, 두 개 있는 창문 중의 하나가 크게 열린 채 레이스 커튼을 펄럭이고 있었다. 방의 중앙에는 커다란 소파가 놓여 있었는데 부친은 그 위에 느 긋하게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후지시마는 문에서 한걸음 들어선 장소에서 뻣뻣하게 굳은 채 그 이상 접근할 수가 없었다. 부친의 강한 시선을 정면에서 받아들일 수가 없어 고개를 살짝 수그렸다. "토오루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토오루라고…?' 하고 부친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미간에 주름을 새 기고 있는 부친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토오루를 그 아이의 부모님 곁으로 돌려보내주고 싶습니다. 여기에 있 어도 그 아이를 위해 좋지 않고, 본인도 돌아가고 싶어하고 있어요." 탁! 하고 책을 덮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후지시마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들었다. 순간, 노려보는 듯한 시선에 사로잡혔다. 부친은 오른쪽 팔꿈치를 소파 팔걸이에 올려놓고 턱을 고였다. "그렇게 말하라고 어머니한테 부탁 받았느냐?" 거짓을 허락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아닙니다." 부정해도, 엷은 미소를 떠올리고 있는 부친의 얼굴은 믿지 않는 빛이었 다. "창문을 열어 주지 않겠니?" 부친은 뜬금없이 그렇게 말했다. "날이 쌀쌀해지는구나, 닫아다오." 지금은 토오루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 생각하면 서도 후지시마는 시키는 대로 창가로 다가갔다. 벌레 소리가 울리고 있었 다. "<그 여자>는 외출했느냐?" 돌아보니, 소파 등받이 너머로 부친의 뒤통수가 보였다. "어머니는 사교 댄스 파티에 가셨어요." "사교 댄스라…." 중얼거리는 그 음성에 후지시마는 가슴이 지끈거리며 아파오는 것을 느 꼈다. 부친의 두다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모친은 즐겁게 춤을 추 러 다니고 있는 것이다. 매주…. "내가 너를 때린 적이 있느냐?" 그 질문도 아무런 맥락이 없는 듯 느껴졌다. "나는 화낸 적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넌 언제나 나를 겁내고 있어. 내 뭘 너는 그렇게 무서워하고 있는 거지?" '응?' 하며 물어와도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반항을 한다면 그래도 가능성이 있겠지만 넌 정말 터무니없는 얼간이 다. 주어지는 대로 사는 인생이란 상당히 편하고 즐겁겠지. 너는 기계 인 형처럼 그 여자가 지시하는 길만 걸어가면 되니까." 온 몸이 스윽 차가워졌다. 모친의 인형같은 존재인 자신을 인식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 는 자신을 참을 수 없이 부끄럽게 생각했다. 평상시의 자신이라면 여기에 서 분명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목적이 있다. 사명감이 후지시마를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은 제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쥐어짜낸 용기는 모기가 엥엥거리는 듯한 소리로 흘러나왔다. 부친이 오른쪽 어깨를 약간 움직였다. "그 여자가 너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토오루는 부모 곁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거다." "그, 그 애가 가엾어요." 싫다면서 울던 얼굴과, 힘껏 매달려오던 팔이 떠올랐다. 부친은 눈을 스윽 가늘게 좁혀 떴다. "지난달 아동상담소에서 토오루를 보호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었다. 학 교에서 쓰러졌는데 보호자에게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서, 돌고 돌다 나한 테까지 전화가 걸려온 거였지. 쓰러진 원인은 영양실조. 듣자하니 그 아이 의 엄마는 한달전에 집을 나간 뒤 행방불명이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부친은 사이드 테이블 위의 담배를 손에 들었다. "아파트에서 통장과 현금만 없어진 상태였다고 하더구나. 성실함과는 거리가 먼 여자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제 아이를 마치 기르던 고양이나 개처럼 취급할 줄은 몰랐다---. 너희 모자가 토오루를 내쫓고 싶다면 맘 대로 해도 상관없지만, 여기를 나가도 그 아이는 갈 곳이 없다." 후지시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부모 곁에 돌려보내 주기만 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하고 있 었다.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면…, 그 아이가 있을 장소는 도대체 어디 란 말인가? "얘기가 끝났다면 나가라. 네 얼굴을 보고 있기만 해도 속이 뒤집힌다." 가슴이 떨렸다. 당장 두눈에서 넘쳐흐를 것 같은 눈물을 참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머니께는… 제가 토오루 얘기를 했다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부탁 드립니다." 그 말만 남기고 후지시마는 달아나듯 부친의 서재를 뒤로했다. 북쪽 복도를 빠져나오는 순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눈물이 나왔다. 뚝뚝 흘러 떨어진다. 성가시다고---, 그토록 노골적으로 들은 것은 처음 이었다. 부친에게 자신은 보는 것조차 고통스런 존재임을 말로써 실감하 게 되었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언뜻 타에미의 모습이 보여서 후지시마는 오른쪽으로 돌아 부엌 쪽의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펑펑 울고 있는 모 습을 보이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모친에게도 고할지 모른다. 밖은 달이 밝았다. 어제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정원에는 꺾인 나뭇가 지와 져버린 나뭇잎들이 주위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발밑에서 작은 나뭇가지가 뚝 하고 소리를 냈다. 정원사는 언제 오는 걸까…. 그렇다, 화요일이다. 늘 화요일에 온다. 멍하니 걷다 보니 북쪽의 별채까지 와 있었다. 옛날의 흙 광이었던 자 취가 남아 높은 위치에 달린 창문으로 빛이 흘러들고 있다. 부친의 말을 저 아이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친엄마에게도 버림받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흙 광 앞을 지나쳐 동쪽 정원에 들어갔다. 언제나 이 방 앞의 초목만 손질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신기해서 정원사에게 묻자, 주인님이 아 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며 쓴웃음을 지었었다. 어릴 때는 부친 이 손질된 정원을 싫어하나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친이 시킨 일임을 알고 있다. 밀림 같은 정원을 통과했을 때였다. 눈앞의 풀숲이 바스락바스락 소리 를 내고 있었다. 놀라 뒷걸음질을 치는 순간, 검은 그림자가 눈앞으로 튀 어나왔다. 달빛 속에서 아이의 짧은 머리칼이 찰랑거리는 것이 보였다. 후 지시마는 당황해서 눈물로 젖은 얼굴을 강하게 문질렀다. "너도 산책하고 있었니?"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물었다. 토오루는 조금 고개를 수그리고 후지시마를 손가락질했다. "형아 방으로 가려고…." 부친에게 얘기를 해 주겠다고 말했다. 분명히 이 아이는 결과를 들으러 온 것이다. 후지시마는 콧물이 흘러나올 것 같아 황급히 훌쩍였다. "미안, 아직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어. 일이 바쁘신 것 같아서…. 다음에 여쭤봐 줄게." 토오루는 "흐음" 하고 중얼거리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후지시마 의 손목을 꼬옥 붙잡고는 눈만 위로 치켜뜨고 올려다보았다. "형아, 왜 울어?" 후지시마는 당황해서 눈가를 문질렀다. "아무일도 아냐." 그렇게 말하는 순간 다시 눈물이 넘쳐흘렀다. 급히 얼굴을 돌려도, 토오 르는 빤히 쳐다본다. "아무일도 없는데 울어?" 아무일도 없는 것은 아니다. 슬프니까 운다. 그 정도는 아이도 안다.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고 했거든." 말로 하는 순간, 다시 그 차가운 어조가 떠올라 눈물이 솟구쳤다. 토오루가 달래듯 오른손을 부벼주는 것도 서글픈 감정에 박차를 가했 다. "다음에는 분명히 괜찮을 거야, 형아!" 아이는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음에 형아가 그 사람을 만날 때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나 도 기도할게. 2인분 기도니까 틀림없이 신한테 빨리 갈 거야." 차가운 바람만 불어대던 가슴이 문득 모포에 감싸이듯 포근하니 따스해 지는 것을 느꼈다. 불행한 상황인데 어째서 이 아이는 남의 행복을 빌 수 있는 걸까? 후지시마는 아이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고마워." 토오루는 낯간지러운 듯한 표정을 지은 뒤에 생긋 웃었다. 그리고 후지 시마의 모친이 옛날에 자주 해주었듯이 후지시마의 머리를 안고 쓰다듬었 다. 상대가 작은 아이라는 것도 잊고서 후지시마는 가는 몸에 매달려 소 리 죽여 울었다. 토오루는 움직이지 않았다. 후지시마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 장소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도 후지시마는 아이를 자기 방에 재웠다. 토오루도 방에 오고 싶어했고 후지시마도 혼자 있기 싫었다. 침대 안에서 조금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떠드는 것은 토오루 쪽이어서 필연적으로 후지시마는 듣는 쪽이 되었다. 토오루가 잠든 뒤에, 그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후지시마는 생 각했다. 피 한방울도 섞이지 않았는데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듯한 친근감 이 든다. 이토록 <누군가>를 가깝게 느낀 적은 없었다. 설령 <불행>이 알게 해주었다 해도, 후지시마에게 그것은 처음 경험하는 종류의 감정이 었다. 오로지 누군가의 애정을 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사랑 스럽고 귀엽다고 생각하는 감정을 후지시마는 손 끝에 느끼고 있었다. 후지시마는 급속하게 토오루와 친해졌다. 초등학생과 고등학생이라서 그다지 공통되는 부분은 없었지만 늘 같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고독은 엷어졌고 토오루의 얘기를 일방적으로 듣기만 해도 즐거웠다. 별채에 있는 토오루를 위해서 후지시마는 부엌 쪽의 문 열쇠를 건넸다. 부엌 쪽의 문을 통해 집안에 들어오면 모친의 방 앞을 지나지 않고 2층에 올 수가 있다. 게다가 부친의 방 앞을 지나니까 우선 모친과 맞닥뜨릴 일 은 없었다. 어린 방문자는 매일밤 후지시마의 방을 찾아왔다. 후지시마가 공부를 하다가 책상 앞에서 깜박 졸다 깨보면 어느샌가 토오루가 침대에서 자고 있었던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언제 모친에게 들킬 지 모른다는 공포는 늘 마음속에 있었다. 하지만 토오루의 웃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그런 것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 이 느껴졌다. 토오루도 후지시마의 모친에게 들키면 혼날 것을 알고 있는 듯 모두들 잠든 11시 이후에 찾아오는 등,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토오루는 후지시마를 <형아>라고 불렀다. 초등학교 5학년이라고 들었을 때는 놀랐다. 어조는 야무졌지만 체구가 작아서 2∼3학년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얘기를 하자 토오 르는 골이 나서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낯을 가리나 싶었던 것은 처음뿐, 토오루는 날이 지남에 따라 잘 떠들 고 웃게 되었다. 물장사를 하고 있던 엄마와 둘이 살고 있었지만 아빠라 고 불리는 사람이 반년마다 바뀌었다는 것과, 어느날 돌연 그 엄마가 사 라져버린 것. 그리고 이 집에 맡겨진 뒤로 한번도 친아버지의 얼굴은 보 지 못했다는 것…. 듣고 있는 후지시마가 슬퍼지는 얘기를 토오루는 정신 없이 계속 떠들었다. 후지시마는 토오루에게 <엄마가 데리러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전했 다. 싫어도 이 집에 있어야 한다는 현실을, 토오루는 그저 묵묵히 듣고 있 었다. 버림받았다는 것을 엷게나마 깨닫고 있었던 듯이 보였다. 토오루를 위해 후지시마는 입욕 시간을 밤늦은 시각으로 바꾸고 같이 들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토오루가 방에 오게 된 지 2주일도 지나기 전의 어느날. 토오루를 등에 업고 욕실에서 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마침 2층의 문단속을 하러 올라온 타에미에게 들키고 말았다. 후지시마는 토오루와 친하게 지내고 있는 것을 모친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필사적으로 부탁했 다. 초로의 가정부는 선선히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타에미는 별채에 주인 님의 먼 친척 아이가 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식사만 날라다 주면 되고 그 이상은 상관 하지 말라고 모친이 단단히 일러둔 듯했다. 그래도 줄곧 신경쓰고 있었다 고 말했다. <부디 잘 보살펴 주세요> 하고 후지시마가 조심스레 부탁하자, 타에미 는 모친 몰래 토오루의 옷을 빨아주거나 별채에 있는 토오루의 방을 청소 해주는등 이것저것 보살펴주게 되었다. 토오루가 늦잠을 잔 바람에 이른 시각에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모친에게 들키지 않도 록 살며시 별채로 데려다주었다. 벌써 몇 년이나 한 집에 있는 가정부가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한 건으로 처음 알았다. 후지시마는 <형아>라고 부르며 자신을 따르는 토오루의 진실한 애정이 솔직하게 기뻤다. 때문에 후지시마도 토오루를 귀여워했다. 공부를 가르쳐 주고 옷장 구석에 있던 낡은 사전과 책과 옷들을 토오루에게 주었다. 토 오르가 학교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오면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얼마 전부터 모친은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졌다. 사교 댄스 파티며 친 구와의 회식이라고 하며 일주일의 반 이상의 밤을 밖에서 보냈다. 그것이 오히려 후지시마와 토오루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모친이 없으면 아무리 떠들고 놀아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토오루가 오고 나서 처음 맞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 후지시마는 고등학교 3학년, 토오루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어느날 옷장 정리를 하고 있던 후지시마는 구석에서 아이조메 기모노를 발견했다. 자신이 어릴 때 입고 있던 것으로, 펼쳐보니 지금의 자신에게는 상당히 단이 짧아져 있었다. 시험 삼아 토오루에게 입혀 보니, 마치 맞춘 것처럼 딱 맞았다. 토오루는 처음으로 입어보는 기모노에 잔뜩 신이 나서 온 방안을 휘젓고 뛰어다녔다. "그건 나기류라고 하는 아이조메 기모노인데, 아버지는 회사에서 그걸 만들고 계셔." 토오루는 기모노를 빤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밤이 끝나는 색이네." 후지시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밤이 끝나기 전에 하늘이 이런 색깔이 돼. 나, 이거 입고 마쯔리에 가 고 싶어." 토오루는 기모노가 꽤나 마음에 든 듯, 좀처럼 벗으려고 하지 않았다. 입은 채로 침대 위에 뛰어올라 후지시마의 책을 읽기 시작한다. 오른쪽 무릎만 세운 흐트러진 자세…, 그 모습에 후지시마는 전에 없이 가슴이 설레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매일 함께 목욕하고 있다. 토오루의 알몸 같은 것은 익숙하게 보아왔는 데, 벌어진 기모노 자락 틈새로 들여다 보이는 넓적다리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책을 읽는 지루한 표정에 색기를 느낀다. 후지시마는 당황해서 책상을 향해 돌아앉았다. 얼굴이 확 붉어진다. 아침에만 발기하던 그것이 어찌된 일인지 아무일 도 하지 않았는데 열을 띠며 단단해져 있다. 반쯤 발기한 상태에, 후지시 마는 의자에서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황급히 교과서를 펼치고 수학 공 식에 집중하자 가까스로 그것은 수그러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도한 것 도 잠시. 목에 휘감겨 온 아이의 팔에 후지시마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오는 줄 알았다. "그거 끝나면 내 공부 가르쳐줘." 향긋한 샴푸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아까 같이 목욕한 탓이다. 후지시마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일어서자, 놀란 아이를 향해 "잠깐 화 장실 갖다 올게…" 하고 말을 남긴 뒤 방을 뛰쳐나왔다. 화장실 안에서 후지시마는 자위를 했다. 머리 속은 아까 본 매끄러운 허벅지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연달아 몇번이나 사정한 뒤에 후지시마 는 자신은 이상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토오루를… 어린 남자애를 상대 로 자위를 하는 자신은 어딘가 잘못 됐다. 비정상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되었던 적은 없었다. 전혀 없었다…. 모친에게 상담하고 병원에 데려가 달랠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토오루 와의 일을 얘기해야 한다. 머리가 돈 데다가 말을 듣지 않은 것을 알면 모친은 반광란이 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후지시마는 자신이 무서워졌다. 무서워서 조금 울었다. 울자 마음도 가 벼워져 방에 돌아갈 마음이 내켰다. 방에 돌아가자 토오루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하지만 평소처럼 찰싹 달 라붙어 오지는 않았다. 눈만 위로 치켜뜨고 후지시마를 보고 있다. "형아, 괜찮아?" "응." 걱정스런 시선이 사라지지 않는다. <너를 상대로 자위를 하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어, 후지시마는 거 짓말을 했다. "배가 아파서 그랬어. 하지만 이제 괜찮아." "타에미 할머니한테 말해서 약 달래올까?" 애처로울 만큼 귀여운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다. "고마워. 하지만 이젠 정말 괜찮으니까." 후지시마는 애써 미소 지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 하자, 토오루는 후지시마의 배에 찰싹 달라붙어 왔다. 순간 심장이 쿵쾅 쿵쾅 무섭게 뛰기 시작한다. "이제 형아 아프지 않게 해 달라고 내가 기도할게." 후지시마의 배에 얼굴을 파묻고 말하는 통에 분명치 않게 들리는 소리 로 토오루가 중얼거린다. "고마워." 후지시마의 말에 토오루는 가까스로 굳었던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생긋 웃었다. 무심코 입맞추고 싶어지는 사랑스런 얼굴이었다. 그날 밤, 후지시마는 토오루를 벌거벗기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토오 르를 전라로 만들고는, 늘 보고 있는 작은 유두와 미성숙한 성기에 후지 시마의 눈은 못박혔다. 가느다란 목덜미를 만지고 작은 가슴의 끝을 집고 성기를 어루만졌다. 믿기지 않을 만큼 격렬하게 흥분하여 몇번이고 몇번 이고 연인사이처럼 끌어안고 키스했다. 밤중에 잠이 깬 후지시마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 았다. 정액으로 더러워진 잠옷을 갈아입은 뒤에도 자신의 침대에 돌아가 는 것이 무서웠다. 옆에는 꿈 속에서 만지고 보듬고 끌어안았던 상대가 새액새액 기분좋게 자고 있었다. 또 그런 무서운 꿈을 꾸지 않는다는 보 장은 없다. 후지시마는 의자에 걸터앉아 책상 위에 엎드렸다. 그래도 토오루의 숨 소리는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안된다 안된다고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망상은 심해졌다. 매일밤처럼 토 오르를 만지고 끌어안는 꿈을 꾸었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입욕 시 간이 두려워졌다. 같이 욕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화장실에서 미리 사정해 두지 않으면 토오루의 알몸을 본 것만으로도 간단히 발기했다. 다이렉트 한 몸의 반응에 후지시마의 머리는 따라가지 못해, 사정하면서 이상한 자 신이 슬퍼서 몇번이나 울었다. 하지만 그것도 두달 세달 지나는 동안 점점 감각이 마비되어 갔다. 결 국, 하고 싶다는 욕망에 이기지 못하고 토오루가 잠든 뒤에 살며시 키스 했다. 남자끼리…, 게다가 아이라는 금기를 뛰어넘어 어루만지는 입술은 부드럽고 달콤하여, 죄의식 속에서도 몹시 흥분했다. 후지시마는 망상에 휘둘리면서도 토오루를 멀리 하려고는 생각하지 않 았다. 전보다 더욱 더 곁에 두고 싶은데 그렇게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 이상 무슨 짓인가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도, 토오로를 위해서도 떨어 지는 편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가 되는 것은 쓸쓸했다. 자신을 따라주는 존재가 가슴 저리도록 사랑스러웠다. 망상에 머리가 침식 당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다. 그날 후지시마는 최후가 되는 진로 희망 조사표를 담임에게 제출했다. 하지만 모친이 권하는 대로 유명 국립대의 경제학과로 결정해 버린 것을 줄곧 후회하고 있었다. 모친은 아들이 대학의 경제학과에 진학해서 미래는 사업을 물려받을 것 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중학교 때까지는 후지시마도 그럴 작정으로 있었 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한 당시부터 무료한 쉬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읽던 책에---, 문학에 흥미를 품게 되었다. 그곳에는 후지시마가 모르는 세계가, 사랑 있는 가족과 연인의 모습이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것도 책의 세계에서는 알 수가 있었다. 작품의 본 질을 깊이 추구하는 것의 즐거움…. 후지시마는 배우는 것에 대한 흥미라 는 것을 그곳에서 처음 알았다. 하지만 모친에게는 국문과에 진학하고 싶다는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 었다. 모친의 말을 거역하게 되는 것이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 했기 때문이다. 오래 갈등한 끝에 후지시마는 하나의 방법을 유출해 냈다. 대학에서는 문학을 전공한다. 하지만 졸업하면 문학과는 일절 연을 끊 고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도록 경영 공부를 하겠다고. 후지시마는 만일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2일 전---, 진로 희망 조 사표 제출을 모레로 앞둔 밤. 식사를 마친 뒤 거실에서 느긋이 커피를 마 시고 있는 모친에게 후지시마는 결심하고 말을 꺼냈다. 경제학과가 아니 라 국문과에 진학하고 싶다고. 그 이유도 말하고, 졸업 후는 경영 공부를 하겠다는 것도 이야기했다. 모친은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었다. 들은 뒤에 빙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책은 <취미>로 읽으렴." 그뿐, 모친의 시선은 손에 들고 있던 잡지로 다시 쏟아졌다. "하지만…" 하고 계속 말하려고 하는 후지시마를 모친은 가볍게 노려보았다. "엄마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거니?" 날카로운 음성에 후지시마는 그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것을 단념할 때는 항상 똑같은 과정을 거쳤다. 그것은 불이 타는 것과 비슷하였는데, 땔감을 늘리지 않으면 언젠가 꺼져서 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진로 조사표를 제출하기 직 전까지…, 그리고 그 뒤에도 고민했다. 그날 후지시마의 침울한 마음을 눈치챘는지 토오루는 찰싹 곁에 달라붙 어 있으면서도 거의 떠들지 않았다. 그것은 토오루 나름의 배려처럼 여겨 져서 기뻤다. 침대에 들고 나서도 후지시마는 생각했다. 진로에 대해서는 하는 수가 없다고…,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몇번이나 자신을 타일렀다. 잠이 오지 않아 책이라도 읽자는 생각에 스탠드 라이트를 켰다. 불빛이 켜지자 옆에서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뚜렷이 보였다. 후지시마는 기분 좋게 자는 얼굴을 응시했다. 그것은 가슴 뿌듯하도록 귀엽고 사랑스런 존 재였다. 진로에 대해서는 하는 수 없었다고 해도, 이 아이만은 절대로 놓고 싶 지 않다고 생각했다. 토오루가 없는 날들이란 생각할 수 없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 동안, 미칠 듯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토 오르가 <우웅>하고 신음하며 돌아눕는다. 시트 밖으로 튀어나온 팔은 아 직 까무잡잡하다. 여름 방학 내내 학교 풀장에 수영만 하러 다니고 있던 탓이다. 한때는, 이대로 햇볕에 탄 채 있으면 어쩌나 걱정될 만큼 검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상당히 하얘졌다. 여름에는… 둘이서 마쯔리에 갔다. 그때까지 후지시마는 모친 이외의 사람과 마쯔리에 간 적이 없었다. 그런 곳에는 나쁜 사람들도 많이 모인 다며 친구와 둘이 가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 여름의 마 쯔리 날도 모친은 어딘가 외출했다. 모친이 나가길 기다려서 후지시마는 타에미의 도움을 받아 둘이 아이조메 기모노를 입고 저택을 빠져나갔다. 토오루는 잔뜩 들떠서 후지시마의 손을 마구 끌어당기며 빛이 화려한 야점에 다가가서는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곤 했다. 마쯔리에 가는데 아 무것도 사줄 수 없는 것은 불쌍한 일이었다. 결국, 용돈을 받지 못하는 처 지인 후지시마는 생각한 끝에 자신이 아끼던 책을 고서점에 팔아 1,000엔 정도의 돈을 손에 넣었다. 그것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금붕어 낚기를 했다. 금붕어 야점의 아저씨가 "너희들 형제냐?" 하는 말을 듣고 토오루는 활짝 웃으며 기뻐했었다. 귀여운 아이를 자신의 안에 모두 녹여 넣고 싶다. 전부 갖고 싶다. 이 아이를 갖고 싶다. 하반신에서 용솟음쳐 오르는 욕망이 후지시마의 마음을 검게 물들여간 다. 후지시마는 토오루에게 몸을 숙이고 메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건 드렸다. 한번 브레이크가 풀리자 그 뒤는 봇물 터진 듯 치달릴 뿐이었다. 후지 시마는 아이의 입술을 빨아올린 뒤 그 잠옷 상의를 크게 걷어올렸다. 두 개의 엷은 색의 작은 알갱이를 손끝으로 만졌다. "우웅" 하고 몸을 꼼지락 거리고 아이가 눈을 가늘게 떴을 때도 그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뭐…?" 잠이 깬 토오루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듯, 그저 두 팔다리를 바둥바둥 움직일 뿐이었다. "착하지…." 가빠져오는 숨결을 눌러죽이며 후지시마는 토오루를 달랬다. "착한 아이니까 가만히 있어……." 잠옷 하의를 팬티째 끌어내린다. 매끄러운 가랑이에 드러누워 있는 작 은, 아직 껍질을 쓴 성기를 보며 후지시마는 격렬하게 욕정했다. 오른손으 로 그것을 살며시 잡자, 토오루는 허리를 비틀며 싫어했다. "싫어! 만지지 마!" "아주 조금이니까." 순간, 복부에 강한 충격을 느끼고 후지시마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아픔으로 배를 끌어안고 바닥 위에 몸을 웅크린다. 가까스로 얼굴을 든 후지시마가 본 것은, 잠옷의 허리를 꼭 붙잡은 채 굳은 표정으로 떨고 있 는 어린 아이였다. 크게 흐느낀 토오루의 두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떨어져 내린다. 그 순간, 후지시마는 자신이 범한 죄를 싫을 만큼 실감했다. "미, 미안…." 후지시마가 가까이 다가가자 토오루는 무서운 것이라도 보듯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이제 하지 않을 테니까. 미안, 미안…." 토오루는 새끼 고양이처럼 날쌔게 침대에서 뛰어내리자 방에서 달려가 났다. 큰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작은 발소리가 멀어져간다. 쫓아가고 싶었 지만 후지시마는 달리기는커녕 제대로 일어설 수도 없었다. 자신을 덮친 무서운 충동의 여운이 아직도 다리 사이에서 열을 띠고 있 었기 때문이다. 이 무슨 파렴치한 인간이냐. 후지시마는 자신을 비난했다. 토오루는 아직 초등학생이고, 실수로라도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었다. 미움 받았는지도 모른다. …미움을 받으면 그 아이에게까지 미움 받으면 이제 어떻게 하면 될 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렸다. 토오루인 줄 알고 후지시마는 황급히 문 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복도에 서 있는 것은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방금 전에 복도에서 뛰는 소리를 들었는데, 너였니?" 후지시마는 반사적으로 "아뇨" 하고 대답했다. "그래? 그렇다면 됐다. 잘 자렴." 모친의 발소리는 바로 사라져갔다. 후지시마는 혹시나 토오루가 방에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자지 않고 밤을 지샜다. 그러나 '통통' 거리는 작은 발소리는 아무리 기다려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은 되돌이킬 수 없다. 그러니까 무릎 꿇고 빌어서 라도 토오루에게 용서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그런 일을 해놓고도 후지시마는 토오루가 곁에 있 어주길 원했다. 이제 만지지 않을 테니까, 두 번 다시 손끝 하나 대지 않 을 테니까, 곁에 있어주길 바랐다. 그 아이는 처음으로 후지시마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갖고 싶다고 생 각하고 선택한 것이다. 모친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후지시마 자신이 구 한 것이다. 그 아이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가까스로 자신 안의 대답에 도달했을 때 밤은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 다. 계 속 ----------------------------------------------------------- 『 "밤이 끝나는 색이네. 밤이 끝나기 전에 하늘이 이런 색깔이 돼." 』 『 그 아이는 처음으로 후지시마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모친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후지시마 자신이 구한 것이다. 그 아이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 후지시마가 토오루에게 저지른 배반이란, 이번 편에 나온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란. 2001. 08. 31 코노하라 나리세(木原音瀨) & 란 pres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