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d light (6) 문득 눈을 뜨자 주위는 캄캄하고 쌀쌀해져 후지시마는 작게 몸서리를 쳤다. 불을 켜고 시계를 들여다보니 오후 7시. 3시간 정도 잔 것 같았다. 부자연스런 자세로 잠든 탓으로 등이 삐걱이며 아파왔다. 병원에서 갖 고 돌아온 가방도 침대 아래에 모로 쓰러져 있는 그대로다. 후지시마는 가방을 발밑으로 끌어당겨 안에 든 것을 꺼냈다. 그때 문을 노크하는 소 리가 들렸다. "후지시마 상, 저녁식사 다 됐어." "…알았어." 자기 방으로 도망쳐들어오기 전에 토오루와 말다툼을 하고 분위기가 어 색해졌다. 하지만 문밖에서 들여온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응어리도 느껴지 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그도 냉정해졌는지 모른다. 후지시마는 자기가 식탁 앞에 앉지 않으면 토오루도 식사를 시작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서둘러 방을 나섰다. 만약 토오루가 배를 곯 고 있다면 기다리게 하는 건 너무 불쌍한 일이었으니까. 부엌의 식탁에 놓인 요리는 색색깔로 보기에도 매우 아름다웠다. 연어 뫼니에르에 크림 스튜, 버섯 소테에 야채 샐러드. 요리를 배우기 시작할 무렵에는 자주 실패를 했었는데, 겨우 반년 사이에 이렇듯 눈부시게 그 실력이 향상된 것이다. "뫼니에르는 처음 만들어 봤는데 어때?" 조용한 식사 도중에 불쑥 물어왔다. "맛있어."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토오루는 뺨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후지시마가 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 장을 봐왔는지, 상점가의 아줌마 성 화에 못 이겨 연어를 사고 말앗따고 넋두리를 했다. "사실은 닭고기 구이를 하려고 했거든. 그런데 먼저 우오마루에 들렀던 게 잘못이었지 뭐야. 방금 들어온 연어가 신선하다고 하도 권하는 바람에 그만 사버렸어." 언제나 덤을 주고 연어도 맛잇으니까 상관없지만…, 하고 중얼거리면서 눈만 위로 치켜뜨고 후지시마를 올려다본다. 이쪽의 기분을 살피는 듯한 눈이었다. "나 후지시마 상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후지시마는 젓가락을 멈추었다. "뭔데?" "이따가. 얘기가 길어질 것 같고." 왜 연인이 될 수 없냐는 이야기를 다시 꺼낼 듯한 기분이 들어서 우울 해졌다. 추궁당하면 이번에야말로 아무말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 이다. "후지시마 상이 곤란해할 만한 건 묻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 마치 마음 속을 꿰뚫어본 것처럼 토오루는 말을 덧붙였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토오루와 마주 앉아 처음 질문을 받는 순간부 터 후지시마는 궁지에 몰렸다. "나하고 후지시마 상이 같은 곳에서 알바를 하다가 알게 됐다고 전에 들었는데 무슨 알바였어?" 기억을 잃은지 얼마 안되었을 때 토오루가 어떻게 자신들은 알게 된 사 이냐고 물은 일이 있었다. 호적상으로는 형제지만 사실은 새빨간 남남으 로 1년만 함께 산 적이 있다----는 자신과 그의 복잡한 관계를 이야기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서 알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무슨 알바?" 대답을 하지 않는 후지시마에게 토오루는 다시 물었다. 거짓말이 거짓 말을 낳는 괴로움 속에서 후지시마는 뭐든 좋으니까 적당히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밖을 달리는 자 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차…,차…. "정유소였어." 그것은 굉장히 흔해빠진 대답 같은 기분이 들었다. 토오루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라면 또 몰라도 후지시마 상은 정유소에서 알바할 분위기가 아닌데. 그거, 내가 몇살 때?" 구체적인 나이까지 물어와 후지시마는 생각했다. 중학생은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다. 고등학생이 알바를 하고 있다는 이 야기는 자주 듣지만 학교에 따라서는 금지하고 있는 곳도 있다. 그렇다면 졸업하고 나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열여덟살이었던 걸로 기억해." "그럼 계절은?" 토오루와 처음 만난 계절이 머리 속에 오버랩햇다. "여름이었어." "흐음, 그래서 얼마나 오랫동안 같이 일했어?" "1년쯤…." 불현듯 토오루가 두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분노의 기척을 풍기는 소리와 기세에 후지시마는 등줄기가 움찔하고 떨렸다. "후지시마 상, 거짓말하고 있지?" 어떻게 알았을까 하고 당황해하는 사이에 토오루는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 이력서를 썼었지? 그때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택배 회사에 취직했다고 했었잖아. 1년이 나 정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는 말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구!" 이력서를 썼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멍청한 것에도 정도가 있다. 이래서는 더 이상 변명의 여지도 없다. "…미안해. 잠깐 차,착각을 했어." 그래도 여전히 얼버무리려고 하는 후지시마에게 토오루는 <거짓말>이 라고 말을 뱉었다. "착각햇다니 거짓말이야.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 않은 거잖아!"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을 만큼 궁지로 몰린다. 후지시마는 소파 위에서 몸을 작게 움츠리고 고개를 수그렸다. "왜 숨기려고 하는 거야? 똑바로 말해.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알게 됏는지, 후지시마 상이 어째서 기억을 잃기 전의 나를 좋아했었는지 사실대로 말해줘." 무릎 위에서 움켜진 두손이 작게 떨렸다. 덥지도 않은데 등줄기에 땀이 배어나온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초등학생이었던 너를 좋아하게 되어 욕정을 못 이 기고 '희롱'했었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틀림없이 경멸당할 테니까. "왜 가르쳐주지 않는 거야?" 다시 추궁당해 후지시마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내…,수치니까…." 애초에 어째서 토오루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기억을 상실했다는 것을 알고서 왜 과거 이야기를 하지 말자고 결심했을까? 물론, 토오루가 일으 켰던 교통사고를 숨기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자신은 토오루에게 심하게 미움받고 있었다. 성적 행위와 잔혹한 처벌 사건 이후 마지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경멸의 눈으로 응시당했다. 아무 리 사과해도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은 변할 줄을 몰랐다. 그런데 기억을 잃은 토오루는 그런 눈빛으로는 후지시마를 보지 않았 다. 당연하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사실을 가르쳐주면 예전과 똑같 이 경멸의 눈초리로 후지시마를 볼지도 모른다. 이제는 미움받고 싶지 않 았다. 그런 눈빛을 받고 싶지 않았다. "나는 후지시마 상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후지시마 상을 수치스럽게 생 각하지 않을 거야." 토오루가 풀쑥 중얼거렸다. "내 감정은 변하지 않아." 후지시마의 마음이 풍랑을 만난 배처럼 흔들린다. 넘실넘실 흔들리기 시작한다. 정말로 미워하지 않을까? 그런 부끄러운 일을 이야기해도 미워하지 않 을까? 응시해오는 눈은 진지했다.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도 같은 눈을 하고 있 었다. 어쩌면 지금의 토오루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좋아하게 된 것이나 어리석은 행위에 대해 모두 이야기해도 웃으며 받아들여줄 지 모른다. 하 지만…, 마음을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 뒤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와 사랑을 나눌 수 있을가? 대답은 NO. 지금의 그가 용서해도 틀림없이 예전의 그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 리고 후지시마 스스로도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물속으로 잠겨가는 자신의 영상이 명확히 뇌리를 스쳤다. 사랑을 나누 게 되면 틀림없이 자신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내딛게 된다. 갖고 싶어서, 너무나 갖고 싶어서...,이젠 아무에게도 넘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 마음에 응해줄 지금의 토오루라면 괜찮다. 하지만 만약 기억이 돌아오면? 몸과 마음에 그에게 사랑받은 추억이 가득한데 그 모든 것을 부정당하면? 경멸당하면? 그리고 토오루가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다면…? 그때에 자신은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을까? 필시 후지시마는 자신을 살아해주지 않는 연인을 끝없이 그리워할 것이 다. 흡사 지옥과 같다. 토오루를 받아들이는 그 순간부터, 이번에는 언제 기억이 돌아와서 버 림받을까, 경멸당할까 하고 불안해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토오루는 일어나서 소파에 앉아있는 후지시마의 등뒤까지 천천히 걸어 왔다.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기척에 후지시마는 떨었다. "후지시마 상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건, 옛날 기억은 옛날의 나하 고만 공유하고 있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아냐…." "정직히 말해줘. 그런 거지? 그렇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어!" 위에서 떨어져내린 성난 목소리에 후지시마는 몸을 움츠렸다. 과거는 가르쳐주고 싶지 않다. 연인사이가 되고 싶지도 않다. 지금 이대 로가 좋다. 지금 이 상태로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토오루와 함께 살고 싶다. 한번은 좋아한다고 말해준 그 추억만 잇으면 자신은 충분했다. 그 이상의 행복은 바라지 않았다. 그 이상의 불행을 거절하듯이…. 등뒤에 서 있던 토오루가 정면으로 돌아와, 등을 둥글게 마는 후지시마 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예전의 나를 제발 가르쳐줘." 토오루는 빌 듯이 무릎 위에 있는 후지시마의 손을 위에서 움켜잡았다. "어디에서 만나서 내 어디를 좋아하게 됐는지 가르쳐줘. 다른 건 몰라 도 좋아. 그것만 가르쳐주면…." 토오루는 애절한 눈으로 바라본다. "기억을 잃기 전의 일을 알면 지금과 옛날이 하나로 이어질 거야. 전부 알고 그래도 내가 후지시마 상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아무 문제도 없잖아. 나는 나니까. 틀림없이 기억이 돌아와도 나는 후지시마 상을 싫어하게 되 지 않을 거야. 오히려 어째서 더 일찍 좋아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고 이상 하게 생각할 거야, 틀림없이." 말뿐이라도 생각했다. 깊은 경멸의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던 과거의 토오루가 간단히 후지시마 자신을 용서할 리가 없었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이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이 사람만 빼앗을 수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없다고까지 생각했다. 더는 상처받기 싫었다. "난…." 이가 덜덜 떨린다. 그러는 사이에 두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연달아 넘쳐흐르는 눈물은 후지시마의 손을 움켜쥔 토오루의 손등 위로 몇방울이 나 떨어졌다. "어,어째서 우는 거야?" 토오루는 당황한 듯 쩔쩔매며 후지시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부탁이니까 제발 울지마." 곤란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소리가 되지 않는 목소리가 스며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해…." "됐으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돼!"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제어 기능이 마비된 듯이 눈물은 뚝뚝 떨어져내린다. 토오루는 난처한 듯이 후지시마의 주위를 이리저리 걸어다니다가 거실에서 뛰어나갔다. 현 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혼자가 되지 더욱 눈물이 솟구쳐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가까스로 북받쳤던 감정이 밀물처럼 천천히 물러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손끝으로 눈두덩을 만지자, 부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굴을 씻으려 고 일어서는 순간,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면서 현관 문이 열렸다. 토오루가 거실로 뛰어들어와서 그대로 부엌으로 돌진하더니 덜그럭 왈 그락 식기가 부서지지나 않을까 싶을 만큼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뭘 하는 걸까 멍하니 보고 있던 후지시마의 앞에, 토오루는 긴장 된 표정으로 작은 접시를 들고 돌아왔다. "이, 이거…." 숨을 헐떡이면서 내민 것은 조금 형태가 이지러진 케잌이었다. "역 앞의 케잌점밖에 열려짔지 않아서…. 급히 돌아오느라고 조금 모양 이 망가져버렷지만 맛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고마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후지시마는 접시를 받아들지 않았다. 도저히 뭔가 를 먹을 수 있을 만한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앉아." 토우루는 후지시마의 오른손을 붙잡아 강인하게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직접 케잌을 잘라내어 후지시마의 입가에 가져다 주었다. 먹으라는 명확 한 태도에, 어쩌면 좋을까 생각하면서 입을 벌렸다. 약간 강인하게 그것이 입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그리고 맛을 보기도 전에 토오루는 <맛있어?> 하고 물어왔다. "응." 입을 오물오물 움직이면서 대답했다. 토오루는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서 <미안> 하고 풀쑥 중얼거렸다. "막무가내로 이런저런……,물어봐서 미안." 사과한 후에 토오루는 고개를 떨구었다. "후지시마 상의 우는 얼굴을 보면 머리가 패닉을 일으켜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게 돼. 그래서…. 좋아하는 걸로 기분을 풀어주려고 하는 건 얕은 꾀라고 생각하지만…그래도…." 그러나 그 얕은 꾀에 후지시마는 위로받고 있었다. 토오루가 후지시마 자신을 달래기 위해 일부러 사다 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뻤다. 케잌을 먹은 뒤, 토오루는 더이상 두 번 다시 후지시마 앞에서 <과거를 알고 싶다> 고는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