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d light (8) 점심 때가 조금 지나 비는 그쳤지만 그 흔적은 검은 물웅덩이와 접은 우산을 들고 걷는 사람들의 모습에 남아 있었다. 해 아래서 가짜 피크닉을 즐긴 후 후지시마는 토오루에게 밖에서 저 녁식사를 하자고 청했다. 아침 저녁으로 쉬지 않고 요리를 만드는 손을 가끔은 쉬게 해주려는 생 각에서였는데 <후지시마 상이 나가자고 한 거 처음이네> 하고 토오루는 뛸 듯이 기뻐했다. 사고 싶은 물건이 있다는 토오루를 위해 오후 4시라는 조금 이른 시간 에 맨션을 나와 백화점에 갔다. 토오루는 앨범 한권과 티셔츠 한벌을 샀 다. "나, 사진 찍을까." 앨범을 사면서 토오루는 풀쑥 중얼거렸다. "본격적인 전문 사진이 아니라 놀러 갔을 때의 스냅 사진 같은 걸 찍어 두고 싶어." 카메라는 작년 크리스마스때 토오루에게 선물했었지만 <흥미없다> 고 버림을 받아 옷장 깊숙이에서 자고 있다. 사진은 후지시마가 아는 한 기 억을 잃기 전의 토오루가 갖고 있던 유일한 취미였다. 기억을 잃고 나서 는 전혀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지만…. 어딘가에서 무엇인가 이어져 있는 걸까, 멍하니 생각한다. 백화점의 에스커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도중에 토오루는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후지시마 상. 한군데 더 들러도 돼?" 어디로 가나 햇떠니 주방 용품 플로어였다. 토오루는 그곳에서 케잌 빵 틀을 손에 들고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후지시마 상, 이거 뭔지 알아?" 토오루는 중앙에 기묘한 구멍이 뚫린 틀을 후지시마의 앞에 쑥 들이댔 다. "…글쎄." "시폰 케잌 틀이야. 가게에서 만든 적이 있는데 실패해서 찌그러뜨리고 말았어."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어서 살 줄 알았지만 토오루는 그것을 조심스레 다시 돌려놓았다. 사지 않아도 되냐고 묻자 조금 더 공부하고 나서 사겠다는 대답이 돌아 왔다. "내가 케잌을 잘 만들게 되면 후지시마 상의 생일날 엄청나게 커다란 홀케잌을 구워줄게. 초코렛을 듬뿍 듬뿍 얹어서…." 떠들면서 걷고 있던 토오루가 갑자기 "우왓!"하고 소리를 질렀다. 작은 여자애가 고무공처럼 뒤로 튕겨나간다. "미,미안!" 토오루는 자신의 다리에 부딪혀 퉁겨나간 아이에게 황급히 달려갔다. "괜찮니?" 이제 겨우 세 살을 넘겼을까, 아이는 깜짝 놀란 듯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토오루를 쳐다보고 눈을 깜빡거리는 아이의 얼굴을 본 후지 시마는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아이도 후지시마를 알아보았다. 순간,안 아일으키는 토오루의 손을 뿌리치고 후지시마의 발치로 날아왔다. "아빠!" 그곳에는 8개월 전에 헤어진 딸아이의 모습이 있었다. 어째서 이런 곳에……. 후지시마의 머리는 패닉에 빠진다. 다리에 매달려 울음을 터뜨린 아이를 예전의 습관으로 후지시마는 가슴 에 안아올렸다. "왜 그러니, 마호. 울지 말아…." 오랜만에 보는 딸아이의 얼굴은 울고 있는 탓으로 뺨도 코끝도 빨개져 있었다. "엄마는 어디에 있니?" "몰라." 중얼거린 후에 아이는 후지시마의 목덜미를 꽉 끌어안고 매달렸다. 보 드라운 뺨을 고양이처럼 부비부비 문지른다. "아빠아, 왜 아빠는 한번도 집에 안 와?" 천진난만한 질문이 후지시마의 가슴을 윽죄었다. "마호는 아빠를 계~속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에." 옆에 다가와 선 토오루가 깜짝 놀란 얼굴로 후지시마를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하핫"하고 썰렁한 쓴웃음을 지었다. "저어,후지시마 상…." "앗! 엄마다아!" 마호가 소리친 순간, 토오루의 몸이 흠칫 크게 떨렸다. "엄마! 아빠가 있어!" 돌아보니 그곳에는 한때 아내였던 여자, 에미의 모습이 있었다.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좋아하던 감색 원피스에 하얀 가디건을 입고 있 다. 에미는 몹이 놀란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지만 "건강해 보이네요" 하고 말하며 다가와 생긋 미소 지었다.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혼자 왔어요?" "…아니." 돌아보자 에미의 시선은 토오루에게 향했다. "같은 회사에 계신 분?" 에미는 후지시마의 과거를 모르고, 이야기한 적도 없다. 토오루의 존재 를 설명하는 것은 어려웠다. 때문에 쉬운 방향으로 달아났다. "아, 그래." 토오루가 수그리고 있던 얼굴을 들고, 그리고 가면처럼 뻣뻣한 얼굴로 웃었다. "난 이만 돌아갈 테니까…. 후지시마 상은 천천히 있다 가주세요. 저어, 오늘은 여기까지 함께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후지시마가 <회사 사람>이라고 에미에게 말해버렸기 때문에 토오루는 그에 맞는 태도와 말을 남기고 달아나듯이 에스컬레이터로 달려갔다. 외 식할 예정이었는데 기다려주지는 않았다. 토오루가 이 상황을 보고 무엇 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저어…, 여보." 남자가 사라진 에스컬레이터 부근을 줄곧 바라보고 있던 후지시마는 눈 앞에 있는 한때의 가족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말을 걸어오는 바 람에 가까스로 떠올린다….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예요. 연락이 안 되서 곤란해하고 있엇거든요. 잠 깐 할 얘기가 있는데…." 에미는 길다른 속눈썹에 감싸인 눈을 살며시 감았다. "지금 시간 좀 내줄 수 있겠어요?" 아무리 토오루가 걱정되어도 후지시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전처와 자신에게 매달리는 딸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마호를 안은 채 후지시마는 백화점의 커피샵에 들어갔다. 떨어지기 싫 어하며 마호는 후지시마의 무릎 위에서 내려가려고 하지 않았다. 떼를 쓰 는 딸아이를 에미가 엄하게 꾸짖어도 눈동자를 적시면서 완고하게 저항했 다. "마호는 아빠가 무지 무지 좋단 말야…." 후지시마는 딸아이의 등을 쓰다듬어주면서 죄의식에 시달렸다. 토오루가 사고를 일으킨지 한달도 지나지 않아서 후지시마는 아내와 이 혼했다. 무릎 꿇고 사죄하며 이혼해 달라고 부탁한 후지시마에게 에미는 놀란 얼굴로 잠시 생각하게 해달라고 말햇다. 그리고 1주일 정도 생각한 끝에 후지시마의 청을 받아들였다. 에미는 모친이 후지시마의 결혼 상대로 데려온 여성이었다. 나이는 한 살 아래로 집안도 좋고 취미는 꽃꽂이와 피아노와 요리라는 현모양처를 그림에 그린 듯한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거부할 강한 이유도 없어서 후지 시마는 스물네살 때에 결혼 하였고 다다음해에 마호가 태어났다. 틀에 박힌 듯한 결혼이었지만 그래도 잘 해나가고 있었다. 후지시마가 에미와 섹스를 하지 못햇다는 단 한 점을 빼고는…. 그 일로 후지시마가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을 에미는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헤어지고 싶 다는 청을 이유도 묻지 않고 들어주었던 것이다. 마호가 생긴 것은 아침 의 생리 현상을 이용했기 때문으로, 제대로 된 섹스라고는 말할 수 없었 다. 행위를 한 후에 후지시마도 에미도 정신적으로 상처입고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생긴 것이다. 그 무렵 후지시 마는 매일처럼 <아이 소식은 아직 없니?> 하고 모친에게 들볶이면서도 아내와 섹스를 하지 못한다는 말은 하지 못한 채 위에 구멍이 뚫릴 만큼 강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모친이 손자를 바라는 이유가 단순히 후지 시마가의 후계자를 원하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에미는 즐겨마시던 얼그레이를 한모금 마셨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집에 전혀 오질 않는다고 어머님이 말 씀하시길래 줄곧 걱정하고 있었어요. 제대로 식사는 하고 있는지. 당ㅅ니, 요리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까." '아니면 좋은 사람이라도 생겻어요?' 하고 에미는 짓궂게 미소지었다. 웃는 얼굴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이 아름다운 사람을 사랑할 수 잇다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가족같은 애정이지 연인 에 대한 사모는 아니었다.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처음 만났을 때는 당신이 무서웠어요. 별로 웃어주지 않았고…. 하지만 데이트를 하다보니, 서툴지만 다정한 사람이라 는 걸 알고 좋아하게 되었죠." 에미는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은 나하고 마호를 매우 소중히 아껴줬어요. 굉장히 다정했지요. 같 이 있을 수 잇다면 사랑을 나누지 못해도 좋다고까지 생각했었어요." 확실히, 섹스를 못 한다는 부분을 빼면 잘 해나가고 있었다. 상냥한 아 내에 사랑스런 딸. 이상적인 가정이었다. "당신이 이혼하고 싶다고 말을 꺼냈을 때는 쇼크였어요. 하지만 당신이 그걸 신경쓰고 있었던 건 알고 있었고, 나도 여자로서의 자신감을 잃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는 안도했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도 싫었지만." 마구 들떠서 놀다가 지쳤는지 마호가 후지시마의 품안에서 꾸벅꾸벅 졸 기 시작했다. "나 말예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당신보다 연상이지만 귀여운 사 람이에요. 마호도 귀여워해줘요. 내년에 결혼할 예정이에요. 그러닊 이 제 마호의 양육비를 보내줄 필요없어요." 우리 두사람 이번에야말로 행복해지기를…, 하고 에미는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