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6 원작: 코노하라 나리세 번역: 치사토 집에 없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초인종을 한 번 누르자마자 타테하라는 현관까지 나왔다. “뭐야, 아쯔시였냐” 낡아빠진 티셔츠에 청바지, 담배를 문 채로 타테하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들러도 될까 해서” 쉰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너, 목소리가 왜 그래. 감기?” “…. 조금” 나오키에게 강간당해서, 목이 쉴 정도로 소리를 쳤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다. 애매하게 말을 흐린다. “뭐, 어쨌든 들어와. 그런데 쉬는 날에 수트라니, 경리과가 그렇게 바쁘단 얘기는 못 들었…” 말을 하다가 그만둔다. 타테하라는 씨익 웃고는 무언가를 알아챈 것처럼 ‘아아, 그렇지’ 하고 중얼 거렸다. 거실에 들어옴과 동시에, 아쯔시는 허물어지듯 소파 위에 쓰러졌다. “뭘 뻗어있는 거야” 맥주를 양 손에 들고 거실로 돌아온 타테하라는, 예의 없는 아쯔시를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아쯔시가 대답도 없이 소파에 파묻혀 있자, 허리를 굽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너 이상하잖아. 얼굴은 빨갛고, 눈도 부었어” 손끝이 볼에 닿았다. 그 감촉에 아쯔시는 과민할 정도로 흠칫, 하고 반응해서, 타테하라도 놀라서 ‘뭐야’ 하고 짧게 중얼거렸다. “혹시 몸이 안 좋은 거 아냐” 그렇게 말하고, 거실을 나갔는가 싶자, 체온계를 가지고 돌아왔다. “열 재 봐” 37도 8분. 타테하라는 한숨을 쉬고, 자동차의 키를 쥐었다. “너 말야, 집에 가서 자라. 내 차로 데려다 줄 테니. 혹시 오늘 맞선본 거 아냐?” 아쯔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몸이 안 좋을 때 맞선이라니, 최악이었겠구나” “절대로… 거절당할거야” “그런거 신경 쓸 거 없어. 오늘은 몸이 안 좋았던 것 뿐이니까 말야” 어깨를 두드려 주는 손. 불쾌한 그것을 완고하게 거절할 수도 없었다. 만지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분명히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서 있을 수 있겠어? 어깨에 기댈래?” 돌아가고 싶지 않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오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아쯔시는 자신의 양팔을 꼭 쥐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가게 해 줄 수 없을까” 타테하라의 움직임이 일순 멈춘 듯이 보였다. “…나는 괜찮지만, 집에 돌아가는 편이 마음이 편하지 않겠어?” “집에 돌아가기 싫단 말야” “나오키랑 싸움이라도 했냐” 이름을 들은 것 만으로도 몸이 떨린다. 타테하라는 작게 웃었다. “별일이군. 나오키가 가출했다는 얘기는 엄청 들었지만, 네가 삐져서 집을 나왔다는 건 처음 아니냐” “미안…” “뭘 사과를 하고 그래. 자고 가기로 했다면 저 방으로 가. 아무리 뭐해도 수트 입고 잘 수는 없는 거 아냐. 잠옷 빌려 줄 테니 갈아입어” 잠옷을 빌려서 침대까지 점령하고, 담배 냄새가 나는 시트 안에 기어든다. 눈을 감았으나, 잠자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자지 않으면, 가만히 있으면, 싫어도 어젯밤의 일이 떠오른다. 등이 지끈지끈거려 몸이 떨려왔지만, 그것이 열이 나는 탓인지, 어제의 공포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좀 어때” 발로 미닫이문을 열고, 타테하라가 쟁반을 한 쪽 손에 들고 방에 들어온다. 아쯔시에게는 죽을 건네고 자신은 편의점에서 사온 도시락을 먹는다. 일부러 자신을 위해 죽을 끓여 준 건가 하고 생각하자, 무뚝뚝하면서도 다정한 마음씀에 가슴이 메었다. 몸이 건강해서, 아쯔시는 감기 같은 건 걸린 적이 없었다. 남을 돌봐 준 기억은 있어도, 간호 받은 기억은 없다. 누군가가 돌봐주는 것은,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은 기쁘다. 단순히 기쁘다. 그리고 깨닫는다. 타테하라의 아파트에 묵는 것은 처음이라는 것을. 나오키를 맡은 후부터, 저녁식사만이라도 함께 먹자고 결심하고,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는 일 이외 에는 반드시 집에 돌아가도록 하고 있었다. 편의점 도시락을 게걸스레 먹어치우는 옆모습. 동갑의 친구. 경리부에도, 타테하라를 마음에 두고 있는 여사원은 많이 있다. 아쯔시에게는 맞선이라도 보라고 부추기는 주제에, 당사자 본인은 그런 일에는 일절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자보다 일이 재미있다’ 고 잘라 말하는 친구는 시원시원해서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타테하라에게는 꿈도 목표도 있다. 그것을 향해 똑바로 달리고 있다. 그에 비해 자신은 뭔가. 14세 때에 이자와에게 사로잡힌 채로, 그 추억만으로 살고 있다.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쳐다보고 있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시선이 마주쳐 ‘뭐야’ 하고 반문당했다. “네가, 눈부셔” 타테하라는 눈썹을 찌푸리고, ‘무슨 바보같은 소릴 하는 거야’ 하고 조금 귀찮은 듯이 내뱉었다. 그런 점도, 굉장히 타테하라다웠다. 식사를 끝내자, 다시 침대에 눕혀졌다. 하지만 졸립지 않다. ‘안 자는 거냐’ 하고 물어와서, 졸립지 않다고 말하자, 타테하라는 방의 텔레비전을 켰다. 아쯔시는 침대 위에서 한쪽 팔을 괴고, 평소에는 보지 않는 야구 중계를 타테하라와 함께 보았다. 광고가 나오자 타테하라는 일어서서, 돌아왔을 때는 무선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자고 갈 거면 나오키에게 연락해줘. 걱정할 지도 모르니까” “아… 응” 대답을 하고 받아들었으나, 정직하게 말하면 전화 같은 것 걸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오키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미안하지만 나 대신 걸어 줄 수 없을까” 타테하라는 “응?”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목소리가… 그… 이상하고 하니…” 이상하다고 해도 말을 못하는 건 아니다. 전화하는 정도, 간단한 일이다. 타테하라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아쯔시의 손에서 수화기를 빼앗아 들었다. 나오키는 아파트에 있던 모양인지, 두세마디 이야기를 한 후에 타테하라는 전화를 끊었다. “나오키가 알았다고 했어. 그건 그렇고 너희들, 얼마나 야단스럽게 싸운건데 그래?” 입을 다물자, 그 이상은 묻ㅈ ㅣ않았다. “뭐, 나하고는 관계 없으니까 어찌 됐든 상관없지만…” 그렇게 말하는 타테하라가, 설사 농담으로라도 폐가 된다는 듯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약간 졸려져, 눈을 떴을 때에는 방의 불빛은 희미하고, 타테하라는 침대 밑에 이불을 펴고, 스탠드 라이트의 불빛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아쯔시가 눈을 뜬 것을 알아차리자, ‘밝아서 깼어?’ 하고 물어왔다. “괜찮아. 그런데, 땀을 흘렸을 지도 몰라. 미안” “신경 쓰지마. 그것보다, 아픈 데는 없어?” 고개를 끄덕였으나, 타테하라는 몸을 일으켜 아쯔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해 줄 건 없는지, 있으면 사양말고 말해” 다정한 말이, 아픈 몸을 살짝 감싸온다. 아쯔시는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타테하라는 상냥하네” “뭐야, 새삼스럽게. 친구가 아프면 누구든지 간호 정도는 해 주는 거야. 게다가 난, 오늘 조금 기쁘단 말야” “폐를 끼치고 있는데 뭐가 기쁘다는 거야?” 타테하라는 웃었다. “너는 친구하는 보람이 없는 녀석이니까. 고등학교 때부터니까 몇 년이냐, 벌써 18년 가까이 사귀고 지내는데, 힘든 일이 있어도 나한테 먼저 상담도 하지 않으니까 말야. 좀더 나를 믿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런데 오늘은 녹초가 다 돼서 우리집에 오더니 재워달라고 제멋대로 굴지를 않나, 웬지 기뻐서” “폐… 끼치고 싶지 않아” 어깨를 으쓱하는 타테하라의 눈은, 다정했다. “네가 그런, 뭐든지 혼자 껴안고 끙끙 앓는 성격이라는 걸 알 때 까지는, 어째서 그렇게 나한테 쌀쌀 맞은 건지 신경쓰였었다구. 지금은 알고 있으니까 괜찮지만 말야” “타테하라는 타카시의 친구였으니까…” 다정한 눈이, 조금 험악한 기색을 띤다.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너무 너한테 의지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너는 바보냐” 화가 난 타테하라의 목소리에, 아쯔시는 놀랐다. “타카시의 친구였으니까, 라니 그건 또 뭐야. 나는 ‘너’ 의 친구이기도 하단 말야. 요전번에도 이상하다 고 생각했었는데, 너 설마하니 내가 타카시 친구지, 너하고는 남이라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냐,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타테하라는 친구잖아. 단지, 나보다 타카시하고 사이가 좋았으니까… 그래서, 내가 너무 친하게 굴면 안 될 것 같아서…” 타테하라는 초조한 듯이 베개를 쳤다. “뭐야 그건. 타카시가 죽은지 몇 년이 지났는지 알기나 해? 8년이란 말야. 타카시하고 같이 있었던 시간의 갑절을, 나는 너하고 같이 있다고. 그런데 어째서 ‘친하게 지내선 안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느냔 말이다. 확실히 나는 타카시와 사이가 좋기는 했지만, 벌써 옛날 얘기잖아. 죽은 사람을 붙잡 고 하소연을 할 수가 있냐, 위로를 받을 수가 있냐. 나는 죽은 녀석보다, 살아있는 너하고 사귀고 싶단 말야. 그런 거, 당연하잖아”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아쯔시는 어안이 벙벙해서 친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화가 난 눈이 조금씩, 안타까운, 애달픈 표정이 된다. “그거야, 타카시는 재미있는 녀석이었지. 같이 있어도 질리지 않았는데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어. 하지만 말야, 나는 너도 좋아한다구. 쌀쌀맞아서, 처음엔 차가운 녀석이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어. 너는 서툴지만, 다정한 녀석이야” 눈물이 흘러넘쳤다. 왜 울고 그래, 하고 타테하라는 티슈를 아쯔시에게 내밀었다. 아쯔시는 티슈를 구겨서 얼굴에 대고 눌렀다. “너의 좋은 점을 알려면,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말야” 불쑥 타테하라는 중얼거렸다. “그런 너니까, 나오키 역시 같이 살 수 있는거야. 낳아 준 어머니는 죽고, 맡겨진 삼촌한테는 남자 연인이 있고, 그런데다 그 두사람도 사고로 죽고, 맡아 줄 사람이 없어서 결국에는 삼촌의 연인의 쌍둥이 형에게 맡겨지다니, 생각만 해도 엉망진창이다. 나는 그런 상항에 그렇게 복잡한 애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은 것만도 훌륭하다고 생각해” “그, 그렇지만 나오키는 몇 번이나 가출을 했었는데…” 떠올린다. 맡은지 얼마 안됐을 때쯤, 나오키는 몇 번이나 아파트에서 달아났다. 이유도 없이 그냥 휭 하고 나가버리는 것이다. 멀리까지는 갈 수 없었으니 곧 찾아냈지만, 그런 나오키를 경찰에게서 데려올 때마다, 아쯔시는 비할 바 없는 패배감을 맛보고 있었다. 세 끼 꼬박꼬박 먹여 주고 있지, 도시락 역시 매일 싸 주고 있다. 더러운 옷은 입히지 않았고, 학교 행사에는 회사를 쉬고서라도 참가했다. 육아서도 몇 권이나 읽었다. 큰 소리를 치고 화낸 일도, 물론 손을 든 적도 없다. 적극적으로 아이와 잘 해나갈 생각이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도 내가 싫으냐, 차라리 고아원에 가는 편이 나았다는 거냐, 하고 어린아이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묻고 싶었다. 어느덧 중학생이 된 후부터는 가출도 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것은 여기 있을 수밖에 없다고 포기한 나오키의 타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처음에 나오키가 그렇게 가출을 한 건, 네가 싫어서가 아니고, 그 반대로 말야, 좀 더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길 바랬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가출해도 언제나 멀리까 지는 가지 않았잖아. 그것도 번화가 같은, 금방 경찰에게 발견될 만한 장소였어. 그녀석은 머릿속에서 네가 얼마나 자기를 걱정하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런 말을 들어도, 믿을 수가 없었다. “말이 없고, 언제나 화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말야, 나오키는 네가 좋은 거야. 그래서 응석을 너무 부린 거라고 생각해. 그녀석이 정말로 너에게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아무리 돈 걱정이 있어도, 대학에 합격하자 마자 네 집을 나갔을 거야. 아니 그럴 것까지도 없이, 일부러 너한테 저녁을 짓게 하는 짓 따윈 안할 거 아냐. 아무 말도 안 하니까 모르는 거지, 그 녀석은 너한테 응석을 부리고 있는 거라구” 눈물이 솟아올랐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좋아해서 응석부리고 있는 거라면, 어제의 폭력은 뭐란 말인가. 짜증나는 일을, 아쯔시의 몸을 괴롭혀서 해소하려는 듯한 그 행위는 뭐라는 걸까. 게다가 맞선 전날인 걸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저녁때가 돼서 식사가 나오는 건 당연, 자신은 써먹기 좋은 가정부 이외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런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너 오늘, 눈물샘 엄청나구나” 어깨를 떨며 우는 아쯔시에게, 타테하라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몸이 아파서 그런가. 그렇지만 그렇게 울 건 없지않아” 자신을 걱정해 주는 친구의 목소리. 흐느껴 울면서, 다정한 기척을 곁에 느끼며, 아쯔시는 눈을 꼭 감았다. ------------------------------------------------------------------------- 저번에 5편이 굉장히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감상에 기뻤습니다^^; 계속 이렇게만 해주시면 이거 얼른 끝내고 코노하라 나리세의 최신작…(이랄까, 올해 초 작품) 번역 들어가겠습니다. (헉.. 협박인가 흥정인가..-_-) 항상 보잘것없는 번역 예쁘게 보아주시는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