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82 이수영 (ninapa ) [쿠베린] 막 간 극 ...독주 07/30 01:43 268 line KUBERIN..... 술이란 잔인한 것. 아무도 모르게 밑바닥에 감추어둔 추악한 비밀을 꺼내 냉혹하게 표면으로 끄집어낸다. 술이란 뜨거운 미혹의 마법. 막 간 극 독 주 "술 한잔 더 할까?" 스카가 물었다. 나는 녀석의 손에서 맥주잔을 받아들다가 고개를 돌려 가게를 정리하는 사 라에게 물었다. "독한 건?" "갖다 먹어! 하지만 너에게 줄 건없단 말이야!" 사라가 표독스레 외쳤다. 스카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왠 독한 것? 잘 취하지도 않는 주제에?" "아아..그냥 먹고 싶은데." "만약 원한다면 무레주가 있어.아주 독한 놈이야..." "이름이 그게 뭐냐? 무레주?" 내가 미심쩍어 바라보자 스카가 취한 얼굴로 킬킬 웃어댔다. "소문에 따르면 그 술은 주정뱅이가 오줌 싼 걸로 만든 술이래." "죽여주는군." 내가 기가 막혀서 고개를 젓자 스카는 킬킬 거리면서 그 것을 가지러 일어 섰다. 비슬 비슬 몇번이나 쓰러질 듯하면서 녀석은 어디론가 나가더니만 돌아오지 않는다. 기다리고 앉아있는 나에게 사라가 흘긋 물었다. "이제 안 자? 술은 그만 하지?" "아아...한 잔 더. 한동이만 더 줘." "미쳤어? 장사해야지! 그만 좀 먹어! 무슨 술을 동이로 퍼먹어?" 그녀는 팽 돌아지는 소리를 내지르고는 쾅쾅 소리를 내면서 부엌으로 가 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진짜 오랜만에 혼자가 아닌가. 사방은 고요했다. 멀리서 개짖는 소리가 들리고 마을 전체는 잠에 빠진 듯 침묵에 잠겨있다. 나는 눈을 감고 몇번이나 몇번이나 잠이나 잘까 하고 생각했지만 머리는 너무나 맑고 뚜렷해서 기기묘묘하게도 옛생각이 자꾸만 났다. 갈색의 청동빛의, 그리고 오만한..그녀. .................. 눈을 감고 그대로 손을 뻗으면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이 만져진다. 그리고 살짝 눈을 뜨면 나를 바라보는 매혹적인 눈동자가 몇번이나 봐도 질리지 않는 황홀한 빛깔로 미소하고 있었다. 가끔은 타오를 듯이, 가끔은 어린애 같이, 가끔은 우스꽝스럽게, 몇번씩이 나 변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 는 지 깨닫게 되곤 했다. 그녀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여자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나의 도전자였다. 순종적이고도 나를 사랑해마지않는 그런 여자들을 놔두고 그렇게 격렬한 아름다 움을 가진 그녀를 사랑할 때 부터 모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녹색빛을 띄운 갈색머리칼을 휘광처럼 온 몸에 휘감고 자신 과 비슷한 여자들과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들을 거리낌 없이 쳐부수었다. "오호호호호호호...." 그녀의 격렬함, 그녀의 강인함, 그리고 요염할 정도로 매력적인 몸과 눈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사로잡은 상대를 똑바로 보는 도발적이고도 도전 적인 눈매가 나를 미치게 했다. 나는 그녀에게 미쳤다. "여자인 주제에 언제까지 도전할 샘이지?" "왕에게 도전할 때까지이지. 물론."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에 내가 당신에게 지고도 살아남는다면 나는 당신을 이길 만큼 강한 아이를 낳을 거야. " "내 아이로 나를 꺾겠다구?" 나는 그녀를 안은 채 비웃었다.그리고 그녀의 호기를 자랑스러워 했다. 아아, 나도 그때는 젊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우스개 소리로 들었다. 나는 강했고 나는 자만했고 나는 오만했다. 그녀의 몸을 안고 그녀의 마음을 가졌다고 자만했다. "너같은 여자는 세상에 없어." "당연하지,나는 최고니까." 그녀는 그렇게 대꾸하면서 갑자기 내 팔뚝을 손톱으로 가볍게 긁었다. 살점이 찢어지도록 세차게 긁고 흐르는 피를 핥으며 그녀는 말했다. "아직 강해. 당신은 너무 강해,쿠베린." "당연한 소릴 하지 마라. 나는 왕이야." "나는 강한 자가 좋아. 강한 자를 쓰러뜨리는 게 나의 즐거움이야." "나도 그래." 그녀는 선명한 푸른 눈을 들어서 날 쏘아보았다. "언제나 언제나 당신은 내 눈앞에 있어. 왜 나는 남자로 태어나지 않았을 까?" "그건 네가 내 아내가 되기 위해서야." "흥!" 그녀는 발딱 일어서서 내 침상으로 부터 걸어나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평소처럼 웃어 넘겼다. ................ 문득 왼 팔을 들어서 지금은 아무 자취도 없는 흰 팔을 쓸어보았다. 이 팔뚝에는 그녀가 남긴 흉터가 있다.성체로 돌아가면 선명히 피부위에 남을 상처가 이 자리에 있다.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강력했던 도전자 중 한 명이 내 심장에 보이지 않는 손톱을 박고 이 팔뚝에 절대로 지워지지않을 흉터를 남기고 사라졌었다. 지금 보이는 아나스톤 처럼 현란한 빛깔을 가진 그녀의 눈이 아나스톤보다 도더한 마력을 가지고 나의 심장을 쥐어 뜯었다. ........................ "일족의 딸 일렌, 위대한 왕 쿠베린에게 도전합니다." 그녀가 부락 한 가운데에 서서 그렇게 말했을때 나는 그녀에게 심한 배신 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그녀를 이렇게 사랑하는데도 알아주지 않는 것일까. 오로지 내가 아이를 주고 싶은 여자는 그녀뿐이라는 것을 왜 알아주지않지? 왜 여자인 그녀가 이토록 강함을 추구한단 말인가. 그녀가 강한 것은 내 아내로서도 충분히 강하지않은가. 그녀가 바란다면 나는 몇번이고 몇번이고 어떤 놈이든 죽여줄 수 있는데.그녀가 바라기만 한다면 이 세상 전체를 다 뒤집어 엎어도 상관하지 않는데! 그녀를 위 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는데 그녀는 왜 나를 이런 식으로 배신하는 것 인가! 나는 증오와 배신감으로 온 몸을 떨었다. 역대 왕의 도전자 중에서도 물론 여자가 있었다. 왕이 여자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드문 경우고 왕이란 언제나 사내가 하는 것이다. 강한 사내가 왕이 되어 일족을 거느리는 것이다.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왜 이렇게 강한 여자가 나와 동시대에 태어났고 왜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나의 도전자가 되어 선 것이지? 나는 증오로 불타는 눈을 들어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어떤 도전자보다도 당당하고 단호한 태도로 나를 마주보고 서 있었 다. 여자는 남자보다 대담하다. 그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정신을 흐트리지 않는다. "일렌, 그 도전을 받아들이겠다." 나는 증오로 어두어진 눈으로 그녀를 쏘아 보며 대답해 주었다. ................... "술...더 줘?" 갑작스레 계단 위에서 사라가 말했다. 그녀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던 듯 약간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되었어." "뭔가 기분이 좋지않은거 같네. 흐응, 여자를 꼬시다 실패했어?" 나는 웃었다. ............. 찢겨진 살과 부러진 뼈를 가지고 바닥에 누운 그녀를 보면서 내 전신에 박힌 그 녀의 부러진 손톱을 뽑아내면서 나는 내 손에 쥐어진 그녀의 심장을 씹었다. 나를 배신한 그녀, 미쳐버릴 만큼 미웠다. 피로 젖어버린 그 머리털을 바라보면서 그 심장을 씹었다. 절대로 아이를 갖지 않으리라. 내가 아이를 갖게 하고 싶은 여자는 나를 배신하고 나를 버렸다. 나를 이길 아이따윈 누구도 낳지 못할 것이다. 뜨거운 광기, 증오,배신감,이루 말할 수 없는 처절한 분노. 그녀는 내 심장을 꿰뚫는데 성공했다. .............. "어쩔 거야? 안자?" "넌 가서 자라." "스카를 기다린다면 이미 늦었어. 그는 아마 취해서 바닥에 널부러져 있을 걸." 사라가 재촉했지만 나는 계속 앉아있었다. 그녀는 들어가지 않고 몸을 반쯤 일으킨 채 나를 바라보고 우물거렸다. 그 때 갑자기 저벅 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덜컹 거리면서 문을 열고 누군 가가 들어섰다. 스카다. "어이,어이, 술이 이것 밖엔 없어." 비틀 비틀 스카가 내 앞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리고는 풀린 눈으로 내 앞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는 털썩 자리에 앉더니 술 병의 뚜껑을 열었다. "야, 마셔." "냄새가 지독하군, 뭘로 만든 거야?" 내가 얼굴을 찌푸리자 스카는 히죽 히죽 웃었다. "알게 뭐야? 취하면 되는 거지 뭘 그렇게 따지냐?" 그 말이 맞다. 나는 술을 마셨다. 그게 뭘로 만들어졌던 그건 술이다. 아무리 여자라고 해도 그건 강자였다. 도전자였다. 영원히 아물것 같지 않은 상처를 남긴 그 여자를 내가 영영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녀를 내가 죽였든 그녀의 심장을 내가 씹어 삼켰든 그녀를 사랑했 기 때문이다. 이 생명 전체를 다 태워 버릴 정도로. .................... 그 심장을 씹어 삼킨 뒤 나는 심장이 사라진 그녀의 시체를 끌어 안고 울 었다. 미친 듯이 울부짖고 광기에 사로잡혀 나는 그 순간 죽었다. 내 몸의 일부분이 죽어 떨어져 나갔다. 비늘이 나간 것인지 아니면 사지가 나간 것인지 혹은 심장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녀의 피투성이 시신을 부여잡은 채 하염없 이 그 자리에 널부러져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듀나시가 와 주지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어떻게 되었을지 나로선 짐작도 가지않 았다. .................... 세월이 이렇게 흘러서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그녀는 정말 나를 사랑했을까. 단지 나를 도전의 상대로, 왕으로 바라본 것 뿐이 아닐까.나는 그녀를 사랑했을 뿐 사랑받지 못한 거 아닌가.그녀가 날 진정 사랑했다면 도전했을리가 없을 것 인데.그녀는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던 건가. 백여년간 나는 그 일로 고통스러웠다. 결국 어떤 수컷도 사랑받고 싶어서 버둥거리는 짐승, 이렇게나 오랜 세월이 지 나고 그녀를 이 손으로 죽인 주제에 나는 바라는 것이다. 그녀가 나를 사랑했기를. 그녀의 마음속에 내가 있었기를. 이제 그녀는 죽어서 나는 알아 낼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녀 의 휘날리는 갈색 머리칼 속에 도사린 강렬한 도전의 눈동자, 죽음을 향해 서라도 몇번이고 뛰어 오를 그 강인함, 그리고 그 오만한 기품, 그것은 사 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안길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만이 남은 남자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쓰다듬는 위로거리다. 그리고 배신감에 눈이 먼 멍청한 수컷의 신세 한탄인 것이다. "야, 뭘해? 술이나 마셔. 네가 가져오라고 했잖아?" 스카가 꼬부라진 어투로 나를 다그친다. 뭐어, 이것도 좋군. 이것도 좋아. 때로는 여자가 없는 사내끼리의 우정도 좋다니까. 막간극 독 주 종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