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28 이수영 (ninapa ) [쿠베린] 별 전 엘프의 아이 1998-12-16 23:24 216 line KUBERIN... 어느 새인가 내 눈등 위에 올라선 잔인한 운명의 여신은 얼기설기 얽힌 실타래를 살피며 은색의 가위를 든다. [별전] 엘프의 아이 초록의 풀잎이 흔들리고 있다. 반듯하게 누워 있던 소년은 부시시 일어나 앉았다. 바람이 무표정한 소년의 얼 굴을 건드려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지나갔다. 소년의 흰 이마와 금빛의 머리칼은 짙은 녹음 속에 녹아들어서 그 자리에 박힌 돌멩이처럼 자연스러웠다. 아직 예닐곱살 정도 될 듯한 소년은 몸을 웅크리다가 인적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짙은 녹색의 숲을 바라보았다. 그가 언제나 도망치듯이 웅크리는 수풀속의 정령 들이 그에게 말을 걸어 온다. 희고 투명한 몸체를 가진 이목구비가 없는 여인이 작은 두 장의 날개를 흔들면 서 소년의 머리 위에 앉았다가 날아오른다. 토끼처럼 긴 귀를 가진 동그라한 얼 굴을 한 작은 정령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다가 풀쩍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정령은본래는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이목구비가 없는 여인의 모습을 한 정령을 자꾸만 자신의 앞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수풀 안쪽에서 바스락 하고 인기척이 들려왔다. 소년의 무심한 얼굴이 잠시 일그러지다가 오만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소년은 앉 은 자세를 바꾸지 않고 오히려 꼿꼿이 목을 들고 정면을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후에 아름다운 녹색빛을 띈 갈색머리를 한 두 명의 엘프들이 나타났다. 엘프들 은 모두 흰 피부에 청명한 푸른 눈을 하고는 옆에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산딸 기와 무언가 이름도 모를 나무 열매를 한 가득 채운 채 그들은 바구니를 옆에 끼고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의 아이네." "그렇군." 두 엘프는 무심히 지나쳤다. 소년은 입술을 깨물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간의 아이네. 그렇군. 엘프들은 오로지 그 말만 할 뿐이었다.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잘 생긴 아이인지 못생긴 아이인지 나쁜 아이인지 착 한 아이인지 똑똑한 아이인지 멍청한 아이인지 남자아인지 여자아인지 아무 것 도 상관하지 않는다.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가 있어도 그를 보지않는다. 소년은 다시 턱을 괴고 무릎을 끌어당겨 앉았다. 엘프들에겐 그가 돌멩이와도 같고 바위와도 같고 풀잎과도 같고 나무와도 같고 조그마한 벌레들, 개미들과도 같은 것이다. 그는 발끝으로 와글 와글 굴러 다니는 벌레들을 짓밟아 죽였다. 그도 벌레는 벌레일 뿐 그 벌레가 어떤 벌레인지 관심이 없다. 그 벌레가 나뭇잎을 많이 갉아먹는 벌레인지 날 수 있는 벌레인지 얼마나 빨리 기어갈 수 있는지 그런 것 따윈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에겐 벌레는 벌레 일 뿐. 밟아 죽여도 무력한 벌레일 뿐. 소년은 벌떡 일어나숲속으로 가서, 당장에 걸친 셔츠를 벗어들고는 그것으로 물을 담아 땅벌의 집안에 물을 흘려 넣었다. 물이 가득 차 땅벌의 애벌레들이 모조리 물에 잠겨 죽어버리고, 그 무수한 알들이 썩어 버리고, 날개가 젖은 벌들 이 주둥이와 더듬이를 흔들어 죽어가는 것을 그는 지켜 보았다. 차가운 물을 벌집 안에 무심한 얼굴로 들이 붓고 그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 보 았다. 소년은 땅벌을 죽이고 메뚜기를 잡았다. 메뚜기의 다리를 하나 씩 하나 씩 떼어 내고 그 다리 없어 벌버둥 거리는 메뚜 기를 거미줄 위에 달아 놓았다. 버둥거리는 그 기척을 보고 시커먼 거미가 파르 르 쫓아와 버둥거리는 메뚜기를 칭칭 감으며 묶어 버린다. 그 모습을 소년은 바라보았다. 걸으면서 그는 벌레를 죽이고 나뭇가지를 꺾고 돌멩이를 걷어차면서 자신이 그 들과 다름을 증명하고 있었다. 바람은 불고 숲속은 언제나 활기에 찬 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 와중에 죽어버린 것들이 썩어가는 고목 위 불길한 버섯들마냥 모여 있다. 햇볕은 지나치게 뜨겁다. "아크." 갑자기 그의 주변이 회전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선 엘프를 본다. 그의 엘프는 그를 바라본 채 한 숨을 쉬고 있었다. 키가 휜칠한 백금발의 엘프의 왕은 손을 뻗어서 아크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땀 방울이 묻어난다. 그는 웃고, 그의 땀으로 얼룩진 이마를 쓰다듬고 나서 소년을 안아 들어 올렸다. "밖에서 너무 놀면 지쳐. 넌 인간이니까 몸이 그렇게 강하진 못하지." 소년은 그의 목을 무표정한 채로 끌어안았다. 그가 태어나서 제일 처음 본 웃는 얼굴을 한 이 아름다운 엘프는 그가 시커먼 마법사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의 양부가 되어 있었다. 엘프는 그를 안고 엘프의 마을로 걸었다. 지나가던 엘프들이 그를 향해 인사한다.상냥하고 웃는 얼굴이 그들의 얼굴에 배어나와 우아하고 유연하게 그들의 왕에 대해서 인사했다. 소년은 자신의 양부이자 엘프들의 왕인 그를 향해 인사하는 엘프들을 냉혹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양부에게 인사하는 것이지 자신에게 인사하는 것 은 아니었다. 그들은 '엘프' 이고 자신은 '인간' 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을 좋 아하지도 않고 인간을 좋아할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아하지만 차가운 엘프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소년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체온을 가진 엘프인 엘프의 왕이 조용히 말했다. "씻고 오렴. 그리고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소년은 그를 바라보았다. 엘프의 왕은 약간 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새둥지에서 새알을 훔쳐낸 것이 너니?" "이유 없이 뱀을 눌러 죽인 게 너니?" "물고기를 잡아서 먹지도 않고 나무에 꽂은 것이 너니?" "매미를 잡아서 날개를 뜯고 머리를 잡아 뜯어 꼬챙이를 꽂은 게 너니?" "나비의 날개를 발기 발기 뜯은 게 너니?" "네." 그가 대답하자 양부는 화를 냈다. 그는 화를 내는 얼굴로 말했다. "벌이다! 절대로 네 방에서 나오지 마!" 그는 화를 냈지만 실제로는 화를 내진 않았다. 그는 기분이 나빠 보였지만 실은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는 왜 그랬는지 이해도 하지 못하지만 받아들인다. 소년은 턱을 괴고 자신의 양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프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는 것을 소년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화를 내지도 않고 즐겨 웃지도 않고 소리내어 싸우거나 시비를 걸지도 않는다. 그리고 따스 하게 안아주지도 않는다. 그것이 엘프다. 소년은 엘프의 방처럼 다듬어진 자신의 방에 틀어가 박혔다. 주변에 늘어진 무수한 마법서들이 유일한 즐거움, 그는 부친의 유품이자 어머니 의 유품인지도 모를거울 앞에 서서 그 것들을 바라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은 부드러운 금빛 머리칼을 한 흰 살결의 소년. 그는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아크는 아름다워. 아크는 착한 아이야..." 그는 거울을 잡고 속삭였다. 거울 속의 금발 소년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고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기 기묘묘한 표정이 되어 버린다. 죽음처럼 조용한 방, 발자국 소리조차 내지 않는 엘프들의 방. 그는 거울을 보면서 속삭였다. "너는 나의 친구야, 너는 아크. 나도 아크." 거울을 쓰다듬으면서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마법서를 읽고 또 읽고 읽으면서 자꾸만 자꾸만 생각한다. 방안에 있는 또 다른 친구, 그는 따사롭고 나를 안아주고 나에게 말을 걸어주 고 나만을 생각해준다. 그 친구는 나와 같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엘프들은 아름답지만 자신은 아름답지 않다. 어떤 엘프의 아이도 자신처럼 생긴 아이는 없다. 그는 자신의 머리칼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신의 얼굴과 손과 발 과 다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바닥에 누워서 마법서를 본다. 마법서를 보며 자신의 손을 그리고 다리를 바라본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아크. 이젠 일어나야지." 문이 열리고 양부가 들어섰다. 그는 눈쌀을 찌푸리고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이 마를 쓸어 넘기면서 잔소리를 시작했다. "바닥에 늘어진 저건 뭐냐!" 그가 고개를 돌리자 마법서로 쌓여진 작은 담장이 보였다. 침대를 둘러싸고 온 통 담을 쌓은 그 모습을 보고 그는 입을 벌렸다. "에..?" "이런 짓은 왜 했니? 깔끔하게 정리하렴." 아크는 잠시 동안 생각했다. 자기 전에 저렇게 했었나 하고 그는 생각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옷을 끼어 입고 널려진 책들을 정리하다 말고 그는 움찔했다. 벽에 걸린 거울에는 누군가가 서툰 글씨로 무언가를 써 놓았다. 거울에 쓰여진 이런 저런 글자들은 마법서의 주문들이었다. 그렇지만 그 것을 썼던 기억은 없다. 그는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위에 저런 걸 써놓은 건 누구지? 손가락을 뻗어서 그 거울을 만져 본다. 소년은 웃었다. '그 친구'가 썼구나. 소년은 웃었다. '그 친구'가 장난을 쳤구나. 그는 손을 뻗어서 거울을 만지고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거울 속에 자신이 있고 그를 아는 친구가 있다. 그는 거울을 만지고 이마를 거울에 댄 채로 눈을 감았다. 마법의 주문이여 나에게 나를 주소서 마법의 신이여 나에게 나를 주소서 마법의 힘이여 나에게 나를 주소서 이름으로 그 힘을 가진 자들이여 나에게 나를 주소서 나에게 체온을 주게 하고 내 이름을 주게 하고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해주소서 그는 그렇게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가 빙긋 웃자 그가 이마를 뗀 그 자리에 그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금발의 소녀가 있었다. [별전] 엘프의 아이 종.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