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호 : 25427 게시자 : 이수영 (ninapa ) 등록일 : 1999-12-08 01:02 제 목 : [쿠베린] 제 20화 광 란 1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1 비릿한 액체가 쏟아져 내린다. 그것은 내 손을 타고 내 팔뚝을 타고 내 허리를 타고 내 다리를 타고 대 지 위로 흐른다. 따스하다. 뭉클한 것들이 발 끝에 밟히는 것을 무시하고 앞으로 걸었다. 앞에 선 자 들이 입을 한껏 벌리고 비명을 올리는 듯 하지만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걸어가면서 손을 움직인다. 무력한 액체가 쏟아지고 바닥은 젖는다. 후각은 이미 마비되었지만 내가 쫓는 자들의 기색은 느낄 수 있다. 놈들은 쥐새 끼처럼 잘도 숨는다. 나는 바닥을 기고 온통 지릿한 냄새들 사이에서 놈들 의 행적을 찾는다. 손바닥에 닿는 물컹거리는 것을 씹으면서 주변을 다시 살핀다. 멀리서 시체를 찾는 야수들이 울고 있지만 감히 이쪽으로 오지는 못한다. 포식하라. 작은 것들아. 멀리서 누군가가 울고 있다. 그 침통한 소리는 울음으로 시작해 마침내 광소로 이어져서 울고 있는지 우는 지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지금 왜 울고 있을까. 눈이 가늘어 진다. 콧구멍이 열린다. 냄새. 녀석들의 피 냄새. 숲은 놈들을 숨길 수 없다. 숲은 철저히 강자만을 섬기는 곳, 내가 놈들을 쫓는 한 숲은 놈들을 숨겨 줄 수는 없다. 놈들이 그런 것을 바랬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 나는 웃 었다. 걷는다. 걷고 있다. 바위를 건너뛰고 나무를 튕겨내면서 걷는다. 바닥에 널부러진 무력한 조각들을 밟으며 걷는다. 사냥감을 쫓는 것은 생 애의 즐거움, 그래, 누구도 알 수 있겠지만 사냥감을 쫓는 것은 더할나위 없이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는 일이다. 언제부터 사냥을 즐겼더라? 내 첫 사냥감은 무엇이었더라? 기억도 나지 않지만 제일 먼저 기억나는 것은 한 살인가 두 살때 굶주린 배를 채우게 한 마리 사슴이었었다. 사슴떼를 찾아내서 그 중 가장 약한 놈을 고른다. 강한 놈을 고르다가 실 패라도 하면 그 수치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 제일 약하고 가녀린 녀석을 골 라 그 가느다란 목덜미를 후려갈긴다. 발굽에 채이는 일을 하지 않는 게 좋다. 만약에 채이기라도 하면 가슴뼈가 으스러질 수도있다. 가장 어린 사 슴이라고 해도 인간 하나 둘 쯤 갈비뼈 부러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까. 가장 큰 사슴이라고 한다면 한 번의 뒷발길질로 가볍게 뼈가 부러질 테니 까. 나는 가장 약한 사슴을 발견했다. 태어난 지 일주일 가량 되어 보이는 그 놈은 커다란 밤빛 눈을 하고 나를 발견했다. 부드러워 보이는 눈빛이 예쁘고 귀여웠다. 보드라워 보이는 털빛 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녀석이 목이 가늘다는 점이었다. 부러뜨리기 좋도록. "쿠아아아아아아!" 건방지게도 자기 주제를모르고 덤벼드는 사냥감이 있다. 녀석은 이를 드러내고 수풀 속에서 갑자기 뛰어나왔다. 어리석기 짝이 없 지 않은가. 나는 지금 죽이려고 놈들을 쫓는 중인데 죽여달라고 튀어 나와주다니. 녀석의 철검이 내 가슴을 찔러온다. 철검따위를 내 앞에서 휘두르다니, 내 아이를 찌른 그런 인간의 무기로, 내 여자를 찌른 그런 인간의 무기로 내 앞에 나서다니. 녀석의 목줄기를 손톱으로 틀어잡은 채로 땅바닥으로 집어던졌다. 손톱의 가장 예리한 부분이 녀석의 목줄기를 그대로 꿰뚫었다. 녀석의 철검이 허 공으로 튀어 오른다. "끼아아아아아......" 비명소리가 터져나온다. 아아, 이 소리가 듣고 싶었다. 아니 이 소리 가지고는 모자란다. 목줄기를 손톱에 꿰뚫린 채 녀석이 대롱 대롱 허공에 매달렸다. 녀석의 몸무게로 꿰뚫린 목이 천천히 찢겨져 나가기 시작한다. 녀석은 다리를 어 떻게 해서든지 지탱하기 위해서 버둥거리면서 허공에서 몸부림을 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녀석의 목은 단숨에 찢겨져 나갔다. 핏줄기가 반원을 그 리면서 숲안을 냄새로 채웠다. 녀석은 바닥으로 굴렀다. 목의 반쪽이 찢어져나갔어도 녀석은 살아 있다. 물론 그렇지, 사인족도 그 렇게 간단히 죽지는 않아. 나는 사인족의 생명력에 감사한다. 녀석의 전신 의 뼈를 산채로 박살낼 수 있는 녀석의 생명력에 감사하며 녀석의 살가죽 을 벗겨내도 살아있는 녀석의 강인한 핏줄에 경의를 표한다. 녀석의 가슴을 가른다. 녀석의 몸안에서 내장이 흘러나온다. 뛰고 있는 심장이 보였다. 사인족의 심장은 묘인족의 그것 보다 조금은 작다. 그렇지만 역시 단단하 게 생명을 자랑하고 있다. 그 심장에 손톱을 대고 가볍게 그었다. 퍼엇 하 고 내 얼굴로 피가 튀긴다. 강인한 생명을 가진 피, 내 피를 식혀줄 피. 내 머리를 맑게 해줄 피. 녀석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심장을 씹는다. 녀석은 아직도 살아서 비명 을 올린다. 오오, 강인한 사인족의 피. 뜨거운 액체가 목안으로 흘러들어간다. 온 몸을 황홀하게 하는 그 미혹의 액체. 내 아이의 피가 흘렀을 숲 안으로 녀석의 피가 흐른다. 내 여자가 흘린 피 속으로 녀석의 피도 흐른다. 심장을 씹어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녀석의 냄새로 코안이 완전히 막혀있 다. 여기는 어디였더라? 이번은 몇 번째지? 기억도 나지 않아.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냈다. 하늘은 회색빛이다. 주변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어리석은 자들의 어리석은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래, 와라, 제발 와라. "여기...여기다!" "저기 괴물이 있다!" "저기야!" 비력한 인간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나는 웃었다. 전신으로 피가 끓는다. 미치고 있다. 미치고 있다. 나는 지금 미쳐간다. 내 앞으로 와라, 내 앞으로 와서 내 속을 식혀라. 화살이 날아들며 내 앞을 희롱한다. 나는 웃으면서 전신에 힘을 모았다. 두 번째의 변신모드에 들어간다. 전신 으로 미칠 것 같은 광기가 치솟아 오른다. 자아, 미쳐보자, 내 앞을 막는 모든 것들에게 미쳐보자. 이성은 필요 없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광기 다. "쿠베린........."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어느 새인가 숲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검은 숲이 온통 입을 벌린 듯 공 허하게 보인다. 이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리도 다 줄어들었다. 그리고 안개로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한다. 지독한 안개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어디더라, 난 왜 여기에 있지? "재미있군." 누군가의 목소리다. "당신이 그렇게 미치다니 정말 오랜만인걸." 누구의 목소리일까? 귀에 익은 그 목소리는. "나를 잊었나? 너무 오래되서 잊었어? 아니면 너무 많은 여자들을 안았기 에 잊었나?" 부드러운 손이 내 턱을 쓰다듬는다. 그 손은 우아하게 호를 그리며 굳어버린 내 어깨에 내려 앉았다. 부드러운 손길, 날카로운 웃음. 요염하고도 강인한 눈매를 가진 그녀가 날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녀의 두 팔은 내 목에 매달려 있고 그녀의 입술은 내 것에 와 닿는다. 풍만한 가슴이 내 가슴을 압박해 왔다. 입술이 떨렸다. "......일렌." "기억하고 있었나봐? 내 심장을 찢어 삼킨 주제에?" "여전히 아름답군......" 나는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내 목에 두 팔을 얹은 채 머리를 내 가슴에 기대 었다.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가슴을 천천히 애무해 왔 다.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해봐." 나는 그녀를 내려다 보며 나직히 물었다. "응?" 여전히 요염한 눈매, 생기에 가득찬 그 오만한 입매를 바라보면서 나는 오래 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날 사랑했었나?" 그녀의 얼굴이 웃는다. 늘씬한 몸은 온기를 담고 내 몸에 찰싹 붙어 나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내 심장을 찢고도 그런 말을 해?" "나를 사랑했었나?" "이기적인 남자." "나를 사랑했었나?" "잔혹한 자. 더할 나위 없이 오만하고 잔인한 자." 일렌이 도톰한 입술로 속삭이며 말했다.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는다. 혀끝이 입술을 더듬었다. 나는 그 감각을 음미하면서 그녀의 몸을 천천히 끌어 안았다. 내 안의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었던 여자.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전신의 피가 모두 머리로 오른다. "대답해봐, 나를 사랑했었나?" "사랑했어...미치도록 사랑했어." 그녀가 대답했다.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황홀하게 바라본다. 욕정에 가득찬 눈동자, 그 숭배 에 가득한 눈동자를 보면서 나는 그녀의 눈을 직시했다. "정말로 나를 사랑했었어?" "물론. 당신이 날 죽일 때까지는.....왜 날 죽였어?" 그녀가 갑자기 분노의 기색을 담고 날 바라본다. "왜 날 죽였어? 용서할 수 없어! 잔인하고 더러운 놈!" 그녀다운 말투로 일그러진 입술이 욕설을 퍼붓는다. 그런 그녀를 마주 보며 그 뺨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감촉, 있을 수 없는 황홀한 느낌. 천천히 입술을 대자 그녀가 내 목을 끌어안는다. "보고 싶었어. 쿠베린...." 으스러지도록 그녀를 끌어안자 그녀는 행복한 신음을 내뱉었다. "나도 역시 그랬어." 그리고 나는 또다시 그녀의 심장을 뚫었다. 피가 뚝뚝뚝 바닥으로 흘렀다. 나는 손에 쥔 심장을 천천히 들이 뽑아 바닥으로 던졌다. 내 몸을 끌어안 은 일렌은 피를 토하며 천천히 미끄러진다. 그리고 내가 손을 놓자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피에 젖은 청동빛 머리칼, 정말 오랜만에 그 모습을 보 는 군. "심한 짓을 하는 군. 전혀 죄책감도 없다는 건가?" 갑자기 누군가가 또 말을 걸었다. 정면을 쏘아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지독한 안개다. 안개가 아 니라 마치 장막처럼 느껴졌다. "이번엔 또 누군가?" 안개 속에서 웃음소리가 낮게 들려온다. 낭랑하고 귀에 익은 목소리. 검은 머리칼을 한 소년이 나뭇가지 위에 앉아 나를 바라본다. 희뿌연 안 개는 마치 그만을 위한 듯 놀랄 정도로 선명하게 그의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동그마니 안개 속에서 홀로 선명한 빛을 띄우고 있다. "이건 또...." 회색 눈을 빛내며 아직도 소년기의 티를 못 벗은 내 형이 웃음을 터뜨렸 다. "오랜만이야, 쿠베린." "그렇군, 형도 진짜 오랜만이군." 아련하게 그리운 그 무언가가 가슴 속을 천천히 채웠다. 내 앞을 달리던 형, 내 옆을 달리던 아우, 같은 배에서 난 나의 형제들. 그리고 어머니. 형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천연덕스레 물었다. "형제들은 다 죽고 이젠 너와 휴런만 남았네? 그지?" "그래." "네가 나를 또 죽일 것인지 나는 궁금해. 또 날 죽일 거야?"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그렇지, 맞아. 그랬어. 난 형을 죽였었지. "아마 그렇게 될 거 같군." "어째서지? 너는 죄책감이라는 게 없어? 네 아내를 또 그렇게 죽이고도 또 나를 죽일 텐 가?" 정말 이상하다는 듯이 형이 고개를 갸웃했다. "형제들은 네가 다 죽였잖아? 데로스도 죽였고 나도 죽였고." "그래, 도전의식에서 다 죽였지, 루아스형." "전혀 후회라는 게 없어?" 잔인한 물음을 던지며 형이 웃는다. 천진한, 내가 어릴 때 보던 그 얼굴로 웃는다. "없어." 나는 한 걸음 다가서서 형의 목줄기를 잡아 비틀었다. 내 손아귀 아래서 아직 어린 소년의 몸을 한 형이 쓰러진다. 형의 얼굴은 파리해진 채 목이 뒤틀려 널부러진다. 안개 속은 일렌의 피에 이어 형의 피까지 겹쳐 온통 피비린내로 가득해졌 다. 숲은 안개에 휘감긴 채로 나에게 적의를 보내고 있다. 잔인한 놈, 잔인한 놈, 누구든 죽여버리는 이기적인 놈, 치사하고 죄악감 도 없는 놈...... "전혀 후회가 없다라...." 누군가 또다시 나타났다. 나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가슴이 떨렸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나의 왕, 나의 백부였다. 그는 여전히 늠름한 가슴으 로 날 바라본다. 검은 머리칼, 나보다도 큰 키, 나보다도 더 넓은 가슴, 그는 몇 백번을 싸 워 이긴 백전노장다운 묵직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나에게 다가온다. 무섭다. 두렵다. 나는 다시 초라한 어린 애송이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 옛날 맛보았던 공포가, 스물거리며 내 가슴속으로 피어 오른다. 공포, 공포라는 두 글자가 나와 함께 걸었던 것은 수 백년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수 백년의 시간을 넘어 그를 마주 하고 있었다. 여지껏 내 마음 속 한 구석을 지키고 있는 가장 무서운 존재, 내 어릴적 가장 강 했던 존재. "무서워하고 있군, 쿠베린." 그는 마치 모든 내 감정을 알고 있다는 듯이 위압적인 눈빛으로 나를 쏘 아보며 물었다. "정말로 후회가 없단 말이지? 형제를 죽이고 아내를 죽이고도 후회가 없 어?" "없소, 나의 왕." 나는 심호흡을 하며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내뿜는 위압감으로 질색할 것 같았지만 나는 그의 정면으로 향해 걸 었다. 내가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존재.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가 우울한 얼굴로,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정말로 너는 냉혹한 녀석이구나." 그러나 나는 그를 이겼다. 그러니까 또 한번 할 수 있다. 손을 뻗었지만 그는 방심한 것인지 무심한 것인지 여전히 그 큰 눈으로 날 바라볼 뿐이다. 심장을 꺼냈다. 핏줄기가 얼굴로 쏟아져 그 액체가 눈 앞을 붉게 물들인다. 그는 심장이 뻥 뚫린 채 뒤로 쓰러진다.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뻐금 거리는 그는 전혀 무섭지 않다. 그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둔중한 소리를 내며 땅 위로 쓰러졌다. 기분 더러운 무언극처럼. 재수없는 인간들의 희극처럼. 안개 속은 여전히 모호하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여전히 정신은 아득하고 귓전도 아득하다. 나는 살아 있는 것 같지도 않 다. 차례차례 죽은 자들이 나타나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웃기지도 않아 다 시 웃음을 터뜨렸다. "웃겨." 머리 속이 차가와 졌다. 두 손을 들여다 본다. 나는 강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강한 쿠베린이다. 수백을 죽이고 수만을 죽이고 아직도 살아서 숨쉬 고 있는 쿠베린님이시다. 과거의 무엇이 나타나든 과거의 어떤 것이 지랄 을 하든 나는 나다. 과거는 과거고 나는 나, 절대로 희롱당하는 것은 질색 이다. 내 나이가 몇인데 지금 과거따위로 희롱당해서 헤롱거릴 것으로 생 각하나? "나와봐라, 인간의 어리석은 마법사." 번 호 : 25428 게시자 : 이수영 (ninapa ) 등록일 : 1999-12-08 01:02 제 목 : [쿠베린] 제 20화 광 란 2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2 갑자기 모든 것들이 바뀌었다. 나는 숲이 아니라 인간들의 구조물 안에 서 있다. 피로 잔뜩 얼룩진 돌벽 과 바닥에 깔린 타일들이 갈가리 찢겨진 시체들 사이로 듬성듬성 보였다. 여기가 어디더라? 그렇군. 여기가 바로 마튜스 안이군. 사방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숨 막힐 것같은 정적 속에 나는 서 있었다. 오래된 마튜스의 성벽에 그려진 벽화는 이미 핏자국으로 온통 가려져 아 무 것도 보이지 않고 인간들의 집기들이 부서진 채 바닥을 뒹굴고 있다. 창에 장식되었던 커튼과 장식물들은 찢겨진 시체들과 어우러져 이상한 색 깔을 발하고 있었다. 그 옛날 엘프의 아가씨를 조각한 대리석의 조각상이 한 쪽 팔을 잃은 채 홀로 어리숙하게 서있을 뿐 지금 이 자리에서 서 있는 것은 나 혼자였다. 마튜스의 성안, 그것도 성주의 거처인 안성이 틀림없어 보인다. 이 홀은 분명히 기억에 있다. 하지만 왜 내가 이 곳에 있지? 사냥감들을 죽이러 쫓아 다니다가 이 곳까지 들어온 건가? 얼마나 죽인 것인지 잘 모 르겠다. 이 자리에 널부러진 시체들 이외에도 분명히 더 있을 것이다. 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두 번째 변신이후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언제까지 웅크리고 있을 거냐?" 내 음성이 홀 안을 울렸다. 시체와 핏덩이만 가득한 화려한 홀 안이 어딘가 묘하게 그로테스크해서 웃긴다. 기분 나쁜 정적도 신경에 거슬리고 무엇보다 내가 변신을 풀게 된 이유도 기분이 나쁘다. 두 번째 변신을 하고 풀면 기력이 소모되어 무척 피곤하고 배가 고프다. 그렇다고 바닥에 널린 시체를 먹긴 싫고 무언가 싱싱하고 맛있는 것을 먹 었으면 좋겠다. 갑자기 울적해진다. "안나오면 찾아낼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끼익 소리와 함께 내 정면의 문이 열리며 붉은 옷을 걸친 녀석이 나타났다. 그 녀석의 옆에는 오우거 비슷하게 생긴 누런 털의 녀석들 다섯이 으르렁거리며 따라 들어섰다. 붉은 옷을 입은 녀석은 키가 작은 꼬맹이였다. 붉은 눈을 한 그 꼬맹이는 지저분한 금발을 하고선 퍼런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이 손에 쥔 자그마한 기생목으로 만 든 지팡이가 살아있는 뱀처럼 꾸물거리는 모습이 이채롭다. 거 희안한 물 건일세. "미혹의 마법이냐? 애송아?" 내가 웃자 녀석은 퍼런 얼굴로 나를 경계하듯이 바라본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이를 드러내며 환히- 빌어먹게도 환히 웃어 보인다. 물론 그 얼굴이 잘생긴 얼굴이었다면 귀엽다고 이쁘다고 해 줄 수도 있었겠지만 녀석의 얼 굴은 푸르딩딩한 데다가 코는 납작한 주끈깨 투성이의 면상을 하고 있다. 그 얼굴로는 빈말로라도 귀엽다고는 할 수 없었다. 왜냐면 나는 어디까지 나 수준 높은 미의식을 가진 분이시니까. "당신이 쿠베린? 정말로 지독한 괴물이네." 새된 소리를 내는 그 주둥이를 한 대 후려패고 싶어진다. 저런 목소리는 원래 싫어한다. 게다가 녀석의 마법은 나를 상당히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나는 희롱당하 는 건 질색이다. 특히 미혹의 마법이니 뭐니 하는 것 따위는 정말로 질색인 것이다. 그래서 녀석이 입을 여는 그 순간 몸을 날렸다. "우아아아아앗!" 녀석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내 손톱은 이미 녀석의 코 앞까지 와 있었다. 그러나 녀석의 몸을 막아서는한 몸뚱이로 인해 나는 상당한 지장을 받았 다. 눈 앞에서 다시 피가 튀긴다. 지겹기도 해라, 시야를 방해하니 정말 로 짜증스럽다. 오우거 비슷한 녀석이 내 앞을 가로막으면서 반토막이 났다. 이 별로 대 단찮은 근육질의 쓸모 없는 녀석은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면서 널부러졌다. 그러자 그 뒤를 이어서 좌우로 두 녀석이 달려들어 내 발길을 막아 섰다. 이런 지저분한 것들! 그 두 녀석의 목줄기에 세 개의 손톱자국을 남겨주면서 시체를 밟고 튀어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근깨 꼬마가 나에게 마법을 날렸다. "킬링!" 녀석의 기괴한 지팡이에서 시커먼 새 같은 것이 튀어 나오더니 나를 덮쳐 왔다. 나는 뒤로 몸을 제끼면서 내 바로 뒤에서 나를 덮치기 위해 팔을 뻗 고 있던 오우거의 팔뚝을 잡아채 그 시커먼 놈에게로 집어 던졌다. 퍼엇 하고 녀석의 몸뚱이가 그 시커먼 새에 닿자 마자 가루가 되어 사방에 핏방 울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이거 생각보다 살벌한 마법이구만. "제길! 킬링!" 꼬맹이는 분한 듯 다시 연신 나에게 마법을 날린다. 그렇지만 한 번 그 수법을 본 이상 또 당할 마음은 전혀 없다. 목줄기를 덜렁거리며 달려드는 근육질의 멍청이들의 팔을 한 개 잡아뜯었 다. 피와 함께 부우우욱 하고 별로 상쾌하지 못한 소리가 터져 나오자 나 에게 덤벼들었던 나머지 한 놈은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 "이거 받아!" 나는 그 뽑아낸 팔뚝을 꼬맹이에게 집어던졌다. 그리고 녀석에게로 전력 질주했다. 그 팔뚝이 시커먼 것에게 잡혀 가루가 되는 동안 나는 녀석의 가슴팍을 후려갈겼다. 그러나, 불행히도 퉁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톱은 그녀석의 가 슴 바로 앞에서 튕겨나와 버렸다. 철벽을 후려갈긴 것 같은 둔통이 은은하 게 손가락사이로 느껴졌다. "제기랄!" 실드를 펼친 녀석은 여전히 퍼런 낯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팔 한쪽을 잃고 신음을 터뜨리면서 피를 쏟아내고 있는 오우거 한 마 리와, 나에게 도전해 봤자 죽음뿐이라는 것을 깨달아 버린- 조금 현명한 오우거 한 마리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헐떡거리는 오우거의 숨소리와 신음 소리만 홀 안에 울려퍼졌다. "어때? 애송이? 이리 나와 보시지." 내가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이를 드러내며 웃자 녀석은 퍼렇게 질린 낯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넌 괴물이야." "인간은 자기가 상대할 수 없는 존재를 만나면 괴물이라 말하지. 괴물은 즉 인간에게 있어 서 강하고 알 수 없는 무적막강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라 할 수 있지. 아까는 고마웠다. 쓸 모없이 간만 큰 꼬맹아, 감히 이 몸 의 기분나쁜 추억들을 몽땅 끌어내어 내 머리를 식게 해준 거 아낌없이 보답할게. 어떻게 해 줄까? 어떻게 죽여주길 바래? 내가 원하는 대로 죽 여주도록 하지." 나는 녀석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어차피 실드 안에서는 마법을 바깥으로는 펼칠 수는 없는 것이다. 천천히 뒷짐을 짓고 걸으면서 나는 주근깨 애송이를 호위하고 있던 오우거 중에 내가 팔을 들이 뽑아 버렸던 녀석을 돌아보았다. 아아, 너무 괴로워 하네, 도와주어야 겠구만. 녀석은 내가 자신을 보자 겁에 질린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봐, 내 가 도와주려고 하잖아! 녀석이 도망치기도 전에 녀석의 어깨위로 뛰어 올랐다. 신장만으로는 녀석 이 나보다 훨씬 크지만 힘이라든가 기품이라든가 기타등등의 면에서 녀석 은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어깨위로 올라서서 녀석의 머리통을 잡고 가볍게 돌렸다. 우두두둑 하고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소리가 터져나 오자 마법사 녀석은 마치 토할 것같은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 머리통을 잡아 뜯어냈다. 오우거의 피부란 아주 단단하고도 질긴 편이 라서 내가 잡아 뜯는데는 상당히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결국 깨끗이 찢겨 지지 못해서 울퉁불퉁 살점이 떨어져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쳇, 아름답지 못하구만. "하아, 하아...미쳤어. 미쳤어..." 꼬맹이가 나를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나는 만족스레 바라보 다 말고 오우거의 머리통을 집어 던지고 치솟는 피에 얼굴을 박고 피를 마 셨다. 목이 말랐다. 쩝쩝 거리는 소리가 홀안을 울렸다. 나도 웬만큼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오우거를 먹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변신이 풀린 상태라 무척 배도 고프고 피로한 데다가 앞으로 내가 뭔 짓을 더 할지 알수 없는 순간 아냐? 당연히 힘을 비축해야 지. 이 마당에 내가 오우거든 트롤이든 따질 처지는 아니지 않겠어? 나야 원래 미식가이긴 그것도 상황을 봐서 그런 거라구. 아아, 그래 역시 머리가 식어서 너무 너무 좋아. 이제야 머리가 돌아가 내 가 뭔 일을해야 할지 뭐가 제일 중요한지 착착 머리에 떠오르는 구만. 다 저 놈 덕이지. 미혹의 마법인지 뭔지가 죽어버린 놈들을 다 끌어내와서 내 머리통을 탁탁 두들겨 시원하게 만들어 준 거잖아? 이렇게 고마운 것을 어떻게 보답하면 좋을까? 나는 친근한 미소를 띄우면서 아직도 실드안에 앉아 있는 녀석을 바라보았 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입가에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웃는 나의 모습이 너무나 친근해서 참을 수 없었던 지 녀석은 갑자기 지팡이를 들어 올려서 다시 외 쳤다. "킬링!" 저 놈은 저 마법 밖에 모르는 거야? 아님 저게 저 놈이 가진 가장 큰 마 법인 거야? 나는 먹고 있던 오우거의 몸뚱이를 다시끔 닥쳐오는 시커먼 놈에게 집어 던지고 동시에 바닥에 뒹굴고 있던 오우거의 머리통을 꼬맹이 녀석에게 집 어 던졌다. 퍼억 하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부딪쳐 오우거의 머리통이 박살이 났다. 아아, 조금 늦었군. 실드가 벌써 완성된 상태였잖아? 왜 저 마법을 쓰는지 이해가 간다. 킬링 하고 외치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 모양이군, 뭐, 바람이여 나의 몸을 노리는 적을 쳐다오 운운하고 튜나처럼 외치다가는 분명히 내 손에 머리통 깨져 죽고 말겠지. 거 생각보다 교활한 꼬맹이로구만. 바로 눈앞에서 오우거의 머리통이 터져나가자 꼬맹이의 얼굴은 이제 퍼런 게 아니라 허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뇌수와 뼈, 살점등이 주르르 실드에서 미끌어지더니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이 녀석은 무척 나 에 대해 재삼 생각하게 되었는지 갑자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너, 너, 너는 대, 대체! 무엇때문에...무엇 때문에 이러는 거냐!" 그런 말을 물어 보는 건 조금 늦었다고 생각지 않냐? 가만 있자, 내가 지금 왜 여기서 이러고 있었더라? 또 생각이 안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놈이 감히 이 쿠베린님에게 미혹의 마법이라는 같 잖지 않은 것을 걸었다는 점이다. "기운이 언제 빠질까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군." 나는 녀석을 향해 매력적으로 웃어 보였다. 실드를 펼치는 것도 상당한 소모니까 저대로 버티는 것은 정말 어려울 게 다. 그러니까 나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 같군. 그럼 그동안 나도 좀 쉬 어 보자. 그리고 머릿속을 좀 정리를 해 봐야 겠다. 여기가 마튜스인 것은 맞는 것 같은데 대체 내가 언제 왜 어떻게 하여 이 곳에 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저 꼬맹이가 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유인해 온 건가? 아니면 내가 놈들을 쫓다가 여기까지 온 건가? 왜 내가 여기 있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녀석은 내가 방심하고 있다고 여겼는지 갑 자기 공격을 해 왔다. "윈드 브레스터!" 화악 하고 무언가가 잘려져 나가는 것 같은 박력있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는 그 보이지도 않는 그 뭔가가 내 앞으로 그대로 쇄도해 온다. 피 할 틈이 없었다 라고 하면 나도 내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겠지, 나는 재빨리 도약했다. 그 뭔가가 바로 내 발치를 스쳐지나가자 싸늘한 한 기와 함께 날카로운 아픔을 맛보았다. 그리고 바로 내 뒤에서 웅크리고 있 던 단 한 마리의 살아있는 오우거의 몸뚱이가 말 그대로 반토막이 되어 깨 끗이 잘려져 나갔다. 위잉 위잉 하고 귀가 울린다. "제길!" 또 한번 펼치려고 손을 뻗는 녀석의 정면으로 나는 그대로 쏘아갔다. 실드가 뚫렸다! 좋았어! 손톱을 뻗어가자 녀석이 황급히 주문을 외운다. "화이어 애로우!" 불로 만든 화살 같은 것이 내 정면으로 날아왔다. 그 놈이 빠른 지 아니 면 내 손톱이 빠른지 어느게 먼저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는 그 뜨거 움을 모른 체하고 녀석에게로 곧장 내뻗었다. 자, 닿아라! 퍽 하고 손톱에 녀석의 벌린 입이 그대로 걸렸다. 주문을 외워 실드를 도 로 복구하려던 참이었던 지 녀석의 벌린 입 사이로 손톱이 들어가 그대로 꿰뚫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가슴이 타올랐다. "우앗!" 뜨겁다. 나는 그대로 심장까지 타들어가는 그 잡히지 않는 불꽃의 화살을 움켜쥐려 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 놈은 집요하게 살아있는 물건처럼 불길을 누그러 뜨리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내 가슴으로, 심장으로 파고 들어온다. 이대로 두 면 그대로 심장이 꿰뚫릴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 일, 나는 단호하게 그 화살이 꽂힌 가슴을 쥐어뜯었다. 퍼억 하고 내 살이 뽑혀져 나왔다. "허억 허억..."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시커멓게 타버린 내 살갗을 뜯어 내면서 나는 가슴을 바라보았다. 뼈가 드 러날 정도로 깊이 패여나간 가슴을 보면서 고통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제 길, 재수없는 마법. 바보짓이다. 이게 얼마나 바보짓인지 나도 알고 있었다. 뼈저린 후회가 가슴으로 밀고 올라왔다. 눈 앞에 널부러진 꼬맹이 하나 죽이기 위해서 내가 내 가슴팍을 후벼내다 니, 조금 기다렸으면 이 자식을 가볍게 죽여버릴 수 있었는데 왜 이런 짓 을 한 거지? 생각좀 해봐, 쿠베린, 대체 왜 이래? 평상시의 나답지 않아. 대체 왜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내가 왜 이 놈과 싸우고 있었던 거지? 왜 마튜스에 내가 와서 이러고 있어? 나는 그 놈의 빌어먹을 고왕국으로 가던 참 아니었던가? 홀안을 한 번 더 돌아보고 나는 일단 이 자리를 뜨기로 마음 먹었다. 머릿속이 뭔가가 낀 것처럼 온통 몽롱하다. 일단 정상적인 사고는 가능한 것 같은데 이렇게 내가 오락가락하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다시 배는 고 프고 지쳤고 바보 짓을 해버렸다. 이 상처가 다 나으려면 뭔가 잘 먹어두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일단 먹을 것을 찾아 배를 채우고 지금 이 엉망진창의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생각을 좀 해보자. 뭔가에 무척 화가 나 있긴 했던 것 같은데 무엇에 화가 나 있었는지는 기 억이 안난다. 일단 내게 덤비는 모든 것을 다 없애면 그게 뭔지 해결이 나 겠지. 막 홀을 벗어나기 위해 문을 나서고 보니 복도역시 피비린내 투성이다. 어두침침한 복도 아래 널부러진 시체들은 대부분이 인간들, 인간들 사이 에 얼치기 사인족같은 것들도 조금 끼어 있다. 어쨌거나 아낌없이 부담없 이 끝장을 내서 시체를 늘어놓은 꼴을 보아 하니 내가 한 것이 아니라면 묘인족의 짓으로 보인다. 허, 역시 저것도 내가 한 것인가? 이거 수백은 되 고도 남겠는걸? 대체 언제 죽인 거야? 저것들은? "지독하군, 그대가 쿠베린?" 그리고 또 한 녀석이, 아니 또 다른 놈들이 내 고민을 해결해 주기위해 나타났다. 번 호 : 25703 게시자 : 이수영 (ninapa ) 등록일 : 1999-12-13 03:41 제 목 : [쿠베린] 제 20화 광 란 3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3 "..........." 나는 한동안 너무나 뻔한 상황에 말을 잃었다. 길죽한 복도, 기괴한 차림새- 흑마법사가 흔히 입는 검은 로브를 걸친 녀 석과 휘황한 붉은 색과 노랑색이라는 기이한 색채로 로브를 해 입은 녀석- 를 한 적이 나타났다. 덕분에 좁은 복도는 꽈악 막힌 상태, 그 상황에 어울 리게 복도 옆 면을 장식한 알록달록한 색유리가 햇빛을 쏘아 보내어 뭔가 야릇하고도 심각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마튜스의 놈들, 거 참 되게 화려한 걸 좋아하는 군, 비싸고도 손 많이 가는 색 유리로 복도를 통째로 장식하다니, 저런, 저런. 어쨌든 분위기만은 만약에 내가 인간의 전설에 나오는 용사 비슷한 물건 이라면 최후의 악당, 즉 마왕, 바로 앞에 있을 법한 중간 단계 악당의 분위 기라고 느꼈을 게다. 그리곤 외쳤겠지, "저 놈들만 물리치면 마왕은 타도되는 것이다! 용사의 뒤를 따르라!" 근데마왕이라고 불리는 건 나지, 참. 내가 마왕이든 저 놈이 정의의 용사든 어쨌거나 두 명의 녀석이 내 앞을 가로 막고 있었는데,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네 녀석으로, 두 놈은 마법사처럼 생겼고 다른 두 놈은 그 놈들의 종자 내지는 노예 같이 생겼다. 줄여서 말 하자면 두 놈의 졸개를 거느린 두 놈의 마법사가 내 앞을 막았던 것이다. 맨 앞에 선 알록달록한 로브를 걸친 녀석은 많이 낯이 익었다. 낯이 익었다고 말하면 내가 아는 놈이란 뜻이냐?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너무 흔한 얼굴이라서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란 뜻이다. 본래 잘생긴 얼 굴은 잘생긴 대로 흔한 얼굴이고 못생긴 얼굴은 못생긴 데로 흔한 얼굴인 법이다. 드넓은 대륙 위에 흔하게 널린 금발의 미남자 중에 한 명인 녀석 은 미남이라 부를 수는 있겠지만 너무 흔한 얼굴이라서 나에게 전혀 감명 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허긴, 사내새끼 얼굴에 감명 받아 뭔 즐거움이 있 겠나. 녀석은 웃음을 지은 채로 내 앞에 서서 감히 팔짱을 끼고 있다. 감히 날 상대로 해서 그런 쓸데없는 여유까지 부릴 처지냐? 네가? "과연 마왕이로군."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피식 웃는다. 웃긴 왜 웃어? 가소롭게스리. 그리하여 나는 긴말을 하지 않고 전진했다. 앞으로 손톱을 주욱 뻗고 녀석의 머리통을 향하여 말 그대로 전진했다. "죽어라!" 갑자기 녀석의 면상이 히죽 웃었다. 어라? 그리고 그 순간 녀석의 몸뚱이에서 튀어나오는 물건에 경악했다. 키에에에엑! 소리를 내지르면서 튀어나온 그 것은 두 눈은 독수리를 닮았고, 아니 대가 리는 독수리를 닮은 괴이한 물건이었는데 물론 날개 대신 달린 것은 뱀처 럼 유연한 몸통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목줄기를 그대로 부리로 찍어 간다. 나는 달리던 발은 그대로 둔 채 허리를 유연하게 틀어 그것을 간신 히 피해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이 놈의 물건은 나의 옆구리를 향해 다시 짖쳐 오더니 내가 숨을 들이키며 피하기가 무섭게 다시 내 두 눈을 향해 돌진해 온다. 이 놈의 것을 피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나는 몸을 뒤로 휘었 다. 아리따운 무희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뒤로 몸을 잔뜩 제치면서 발톱을 들어 올려 녀석의 턱주가리를 냅다 걷어찼다. 그러나 아프지도 않은 지 이 놈은 핑 하고 공중으로 튕겨올라가 내 발톱에 찢어진 대가리를 하고 나를 원독에 가득찬 시선으로 노려본다. 연두색 바탕에 마름모꼴의 눈동자가 섬 뜩하게 움직였다. 에? 이 놈 부서지지도 깨지지도 않는 걸. 이것도 처음부터 '살아있던' 놈은 아닌 거 같다?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다시 덮쳐왔다. 그러나 이 몸께서는 이 물 건의 가장 큰 약점을 아시고야 말았다. 그리하야 나는 몸을 홱 돌려서, "이야아아아압!" 하는 기합성과 함께 닥쳐오는 놈을 뒤로하고 나는 힘껏 달렸다. 즉 도망쳤 단 말이다. 녀석이 기가 살아 나를 미친 듯이 쫓아온다. 일직선의 복도를 바람처럼 달 리자 뒤에서 지껄이는 너무나 흔한 면상을 가진 별 볼일 없는 녀석의 쓰잘 데기 없는 말이 들려온다. "으하하하하하...저게 무슨 지상 최고의 종족이란 말이야?" 오냐, 진짜 개똥만큼도 쓸모 없는 눈을 가진 녀석이로다. 자식이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 구만. 나는 일직선으로 하염없이 달리다 말고 왼발을 힘껏 바닥에 내리꽂았다. 퍽 하고 복도의 타일이 박살나면서 주저앉았다. 물론 나는 그거 주저앉게 하려고 그런 동작을 취한 것은 아니었기에 팍하고 내리찍는 그 순간 너무 나 우아하고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는 역시 너무나 우아한 자세로 반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를 쫓던 이 이상한 부리를 가진, 뱀도 아니며 독수리도 아닌 것은 내 속 도를 쫓아오질 못해서 나를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녀석이 두 눈을 부릅뜨 면서 괴이한 소리를 내지르는 순간 나는 다시 맹렬한 기세로 내달리면서 녀석의 길죽한 몸통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의 우아한 발톱 이 녀석의 길죽한 몸통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던 것이다. 키에에엑 하고 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퍼엉 하고 별로 쓸모 없는 머 리통을 가진 마법사 녀석의 팔뚝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옳거니, 저것이 바로 본체인가? "이런! 젠장!" 그런 소리를 내지른 알록달록이는,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내면서 두 팔뚝을 앞으로 내밀었다. "파야! 사야! 나와라!" 녀석의 로브자락 사이로 드러난 팔뚝에는 시커멓거나 시퍼런 문신같은 무 늬들이 줄지어 그러져 있었다. 녀석은 그것을 내 앞으로 내밀며 의기양양 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죽어라!" 정말, 너무나 많이 들어서 이제는 물린 소리로군. 그러나 여기서 내가 저 놈을 상대로 시간을 질질 끌어서야 어디 지상최고, 지상 최강의 멋진 분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어디까지나 강하고 멋 진 분이란 머리도 좋아야 하는 법이다. "타아아아아아앗!" 나는 가슴을 부풀려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복도의 색유리창이 진동하고 그 다음에는 내 앞에서부터 유리창이 줄지어 창창창창 하는 소리와 함께 모조리 터져나갔다. "우앗!" "앗!" 아낌없는 나의 목청에 터져나간 유리들은 말 그대로 아낌없이 산산히 흩어 지며 녀석들의 몸통 위로 떨어져 내렸다. 물론 나에게 쏟아져 내린 유리조 각들은 나의 늠름한 몸통에 튕겨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녀석들의 연약한 몸 통은 유리조각에 이리저리 찔리고 찢겨졌다. 그 덕분에 뭔가 자기 팔뚝을 이용해 공격을 하려던 너무나 흔한 면상을 한 녀석은 여기저기 다쳐 피투 성이가 된 채 나를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이 치사한! 네가 이러고도 왕이냐!" 치사? 흥, 원래 싸움이란 치사한 거야. 그리고 진 놈은 꺼이 꺼이 울며 돌아서는 게 정상이지. 내가 뭔 인간의 기 사라고 난 걸레 제국의 걸레 기사단의 서열 어쩌구의 어쩌구 저쩌구입니다 이제부터 싸우겠습니다 따위를 외쳐야 한단 말이야? 그리하여 나는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놀고 있네." 그렇게 말하고 녀석의 바로 앞까지 돌진해 한 대 걷어 차려는 순간, 이번 에는 다른 한 편의 마법사 녀석이 튀어 나왔다. "실드!" 또 실드야? "이 치사한! 네가 그러고도 마법사냐?" 내가 그렇게 말해주자 녀석들은 기가 찬 표정을 짓고 날 바라본다. 그러나 그도 잠시 실드에 튕겨나간 내가 주춤거리는 동안에 이 녀석들의 부하인 듯한, 어디까지나 부하인듯한 두 놈이 나에게 팔을 뻗어왔다. 말 그대로 뻗.어.왔.다. 그리고는 내 발목을 잡는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 놈들이 고개를 들자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 다. 일단 녀석들은 눈이 두 개지만 입은 하나라고 말하기엔 너무 컸다. 얼 굴 아래쪽 전체가 다 입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게다가 입안 전체는 이빨 로 가득 차 인간이라기엔 지나치게 이빨이 많다. 아인족도 아니겠지? 이런 면상이라면? 그 것뿐만이 아니다. 녀석들의 피부는 회색빛이고 무엇보다 몸통 자체가 인간의 세 배쯤 된다. 어디로 보나 나는 완력이 세요, 나는 힘이 센 놈이어 요 하고 전신으로 말해주는 듯한 놈들이다. 그런데 왜 내가 이 놈들의 존 재를 무시했냐고? 그건 아주 간단한 이유다. 내 머리통이 뭔 일인지 잘 모 르겠지만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마법사들만 눈에 들어왔던 탓이 다. 냉정해야지. 냉정. 콰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복도의 벽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정확히 말하면 부딪친 게 아니라 내동댕이쳐져서 벽면과 완전히 온 몸으 로 딥키스를 했다. 그 딥키스의 원인은 녀석이 내 발목을 잡고 휘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런 상황이 분명히 있긴 있었는데? 아, 머리가 띵 해. 콰아아앙 하고 다시 한번 내동댕이 쳐졌다. 이번에는 이빨까지 흔들리는 거 같다. 이러다가 코뼈 부러지는 거 아냐? 콰아아아앙 하고 세 번째. 이번엔 벽면이 아닌 복도와 딥키스. 온 몸으로 이 건물을 사랑하게 되는 구만. 하지만 코뼈가 부러지고 이빨이 빠져서야 이 아름다운 얼굴을 유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자아, 머리를 굴려. 아무리 어딘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머리통이긴 하지만 쌈박질에 져서야 내 이름 석 자를 내 놔야지. 내 손에 죽어간 무수한 영령들을 생각해서 이렇게 주인도 아닌 노예녀석에게 당해선 안되는 거지. 내 손에 죽어간 자들이 얼마나억 울하겠어? 그럼, 그렇고 말고. 힘을 내자. 끙! 네 번째로 나를 이번에는 기둥에 키스시키려는 상황에서 나는 단번에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두 손바닥이 기둥에 닿는 그 순간 재빨리 탄력을 준다. 이거 언젠가 그때와 너무 상황이 비슷하다니까. 독창성이 부족해. 싸움도 독창성이 필요한 것인데. 그러자 내 몸은 휘익 하고 허공으로 떠오른다. 이 때 유연한 자세로 몸을 구부려 날 잡고 있는 녀석의 팔뚝을 움켜쥐고 우드 득! "캬아아아악!" 저번 상황과 너무 같으면 뭔가 기분도 찝찝해. 비명지르는 녀석의 팔뚝을 사쁜히 즈려밟고 나를 향해 돌진하는 녀석의 머 리통을 걷어찼다. 녀석이 뒤로 홱까닥 하고 넘어가는 것을 기다려서 이번 에는 나도 뭔가 색다른 것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자빠진 녀석 의 발목을 잡아 채서 이 놈도 나와 똑같이 온 건물을 전신으로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키아아아악!" "케엑!" 괴이한 비명이 애처롭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나는 녀석의 발목을 마구 휘두 르면서 나를 향해 돌진해 오는 다른 한 녀석의 머리통을 이 놈으로 후려갈 겼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실드로 둘러싼 채 입을 저억 벌리고 날 바라 보는 두 놈의 시시껄렁한 녀석들의 실드 위에도 몇 번 후려갈겨 주었다. "크아아악!" 비명소리가 얼마나 큰지 온 복도가 쩌렁 쩌렁 울린다. 그럼 못쓰지, 녀석 아, 나도 똑같은 걸 겪었는데 난 비명 안 질렀어. 피가 튀기긴 튀기는데 색깔이 거무튀튀하다. 아무래도 이 놈도 정상적인 물건이 아니라 마법으로 만들어낸 거 같이 보인다. 나는 너무나 온 몸으로 이 건물을 사랑해서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녀석을 피투성이 복도 위에 던 져 놓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두 놈을 향해 돌아섰다. 그 두 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박살이 난 자신의 종자 비스끄무리 한 것을 바라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이 잔인한...." "잔인무도한 놈아!" 싸우라고 시킨 주제에 웬 말들이 그렇게 많아? 내가 왜 마왕이라 불리는 지 알고 싶다며? 거, 마왕 마왕 하다 보니 왠지 마음에 드는 군. 이 두 놈을 내버려두고 전진하도록 하자. 그래봐야 실드 안에서 웅크리고 못나오니까 말이다. 아냐, 잠깐만!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야, 꼬맹이들아, 공격해봐." 내가 팔짱을 끼고 녀석들에게 말하자 녀석들은 잠시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다. 나는 팔짱을 끼고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너희들이 무척 피곤해 보이는 걸 보니 내 마음이 아프군. 자아, 얼른 공격 해. 그리고 얼른 끝내자." 두 놈은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 실드란, 참으로 쓸모 있으면서도 쓸모 없 는 물건이기도 하다. 물론 공격을 막을 수는 있다. 하지만 공격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공격해 보라니까." 내 이런 상냥한 표정을 보고 녀석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 지 알 수는 없지 만 녀석들은 이를 드러내며 화를 냈다. 그리고는 역시 아까 무슨 주문을 외우려다 만 그 괴이한 문신을 가진 녀석이 팔뚝을 드러내면서 악을 질렀 다. "파야, 사야! 나와라!" 윙윙 소리와 함께 녀석의 팔뚝에 그려진 시퍼렇고 시꺼먼 그림들이 꿈틀거 린다. 우와, 이건 처음 보는 물건일세. 저 꿈틀거리는 게 대체 뭐하는 걸까. 그리고는 길게 말할 여유도 주지않고 녀석들이 튀어 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내가 박살낸 유리 조각을 힘껏 집어던졌다. 파공성을 내면서 유리조각이 날아드는 것과 동시에 시뻘건 피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으아아아악!" 두 팔뚝을 내 놓은 녀석이 두 팔뚝을 잃으면서 뒤로 넘어진다. 시퍼렇게 질린 그 낯짝을 보면서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녀석의 팔뚝에서 튀어 나온 두 마리의 괴이쩍은 물건은 자기가 갈 곳을 잃자 마자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날개 달린 뱀과 같이 생긴 녀석과 다리가 여덟 개쯤 달린 도마뱀같이 생긴 두 놈은 덩치가 나보다도 컸다. 저런 것들과 싸워도 재미는 있겠지? "이, 이런!" 옆에 있던 녀석이 당황성을 터뜨리면서 팔뚝을 부여잡고 있는 녀석을 부축 하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공중으로 치솟았던 그 두 마리 의 괴물들이 다시 아래로 급강하를 하더니 실드를 뚫고 가차없이 아가리를 벌렸다. "으아아아악!" 팔뚝을 잃은 녀석의 목덜미를 깨문 도마뱀같이 생긴 녀석은 역시 도마뱀과 같은 길죽한 꼬리로 녀석의 두 눈을 꿰뚫었다. 그와 동시에 날개 달린 뱀 처럼 생긴 녀석은 자기 주인이었던 녀석의 가슴을 그대로 꿰뚫고는 심장을 깨물었다. 비명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나는 이 황당한 전개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자기가 데리고 있던 괴물들에게 박살나는 마법사는 온 몸을 뒤틀면서 바닥 에 쓰러졌다. 전신에 구멍이 난 채로 피를 분수처럼 흘리고 있었다. 그 옆 에 있던 녀석은 부축도 하지 못하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이 두 괴물이 자신을 바라보자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블레이드! 블레이드! 윈드아머!" 공기를 자르는 소리가 터져나왔지만 두 괴물은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마치 눈 앞에 있는 마법사가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된 듯이 이빨을 드러내 며 신속하게 달려들었다. 제일 먼저 날개달린 뱀이 녀석의 팔뚝을 물어 뜯 었다. "으아아악! 저리 비켜! 난 네 봉인자가 아니야!" 녀석이 두 팔을 흔들어대면서 비명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가이에락, 파이에로몬."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갑자기 터져나왔다. 그러자 마법사 녀석을 공격하던 두 괴물이 홱 고개를 돌리고는 허공을 본 다. 내가 박살낸 유리창 사이로 공중에 둥둥 뜬 시커먼 로브의 녀석이 보였다. 그 녀석이 팔짱을 낀 채로 이 쪽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리로 와라." 시커먼 녀석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두 괴물은 홱 소리가 나도록 튀어 올라 와 그 시커먼 녀석의 품안으로, 정확히 말하면 로브를 걸친 녀석의 소맷자 락 속으로 사라졌다. 허어, 이거 상당한 구경거리로군. 얼결에 살아난 애송이 녀석은 그 시커먼 녀석의 존재를 발견하자마자 얼굴 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는 말 그대로 쿵 소리나도록 바닥에 납작 엎드 려서 머리를 조아렸다. "가장 위대하신 암흑마도의 제왕, 룬 킬트 더 마이오스, 그랜드 마스터께 인사 올립니다!" 나는 이 간지러운 소리를 들으며 귀를 팠다. 번 호 : 26443 게시자 : 이수영 (ninapa ) 등록일 : 1999-12-28 00:26 제 목 : [쿠베린] 별 전 높은 성의 공주님 [쿠베린 별전] 높은 성의 공주님 KUBERIN...... 사랑하는 나의 연인이여 당신은 나의 육체를 원하나요 아니면 나의 영혼을 원하나요 아니면 나의 지위를 원하나요 아니면 나의 재물을 원하나요 그도 아니면 단지 사랑을 원하나요 [별전] 높은 성의 공주님 ".....그리하여왕자는 거친 가시덤불을 헤치고 정면에 보이는 음침하고 낡 아빠진 탑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높고도 높은 탑의 꼭대기에 자 그마한 창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왕자님은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공 주님이 저기에 계시구나 하고......." 엘란트라는 읽던 것을 멈추고 슬그머니 모후를 바라보았다. 모후는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공허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중 이었다. 엘란트라는 뭐라 말을 걸려고 하다가 단념하고 계속 읽어 내려갔다. "마침 그 때 그 작은 창가에 선 아름다운 공주님이 보였습니다. 그녀는 눈 부신 황금빛의 머리칼을 휘날리면서 백옥같이 흰 피부를 드러낸 채로 울고 있었습니다. 왕자는 그 아름다움에 숨을 멈추고 한 걸음에 칼을 뽑고 탑으 로 다가갔습니다. <공주님, 울지 마십시오, 제가 왔습니다!> 왕자의 씩씩한 말에 울고 있던 공주님은 환하게 웃었습니다. <오, 왕자님, 드디어 절 구하러 오셨군요! 저는 믿고 있었답니다!> 그리하여 한 눈에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높은 탑을 사이에 두고 서로 눈 물을 흘렸습니다..." 지겨운 이야기, 지겹게도 똑같은 이야기, 행복한 결말. 왕자와 공주의 사 랑, 용사와 공주의 사랑, 마왕퇴치. 그런 이야기책을 모후는 끊임없이 읽게 한다. 그리고........ "하아..." 엘란트라는 한숨을 삼키면서 흘긋 모후를 바라보았다. 길게 땋아 내린 갈색머리는 흰 머리칼은 한오라기도 없었지만 생기 없는 창백한 얼굴과 공허한 회색눈은 과거 왕실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공주님이 라는 말이 무색해 보였다. 엘란트라는 기대하면서 모후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모후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왕자는 백마를 묶고 탑의 꼭대기로 향하는 문을 열었습니다. 문은 왕자의 손이 닿자마자 활짝 열렸고........" 모후는 멍하니 이야기를 들으며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서 갖가지 색깔을 뿌리면서 방안으로 스며들 고 있었다. 늦은 봄날의 나른한 오후, 차 한 잔과 더불어 쿠키 냄새가 달콤 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멀리 창 너머로 보이는 후원의 활짝 피어 흐트러진 꽃들이 현란한 색채를 자랑하는 시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후는 공허했다. 완전히 생기를 잃은 눈으로 그녀는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마마마? 계속할까요? 아님, 그만 읽을까요?" 피시식하고 모후는 대답대신 웃음을 지었다. 웃음은 허공중에 흩날렸고 그 대상은 엘란트라가 아니었다. 10여년간 봐 온 모습이었다. 달라질 것도 없었다. "낮잠을 주무실래요?" 다시 물었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다. 엘란트라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잔인하고 포악한 괴물들을 하나씩 없애면서 왕자는 드디어 꼭대기에 도착했습니다. 작고 낡은 문고리를 잡아 문을 여는 순간 무서운 불꽃이 왕 자를 덮쳤습니다. 비명소리를 내지르면서 왕자는 쓰러졌고 고통으로 몸부 림쳤습니다. <공주, 공주!> <왕자님! 정신 차리세요! 이 잔인한 마왕같으니!> 공주님은 울면서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뜨거운 불꽃은 왕자의 몸을 둘러싸 고 점점 강해질 뿐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말발굽소리와 함께 왕자의 백 마가 방안으로 뛰어들어왔습니다. 백마는 거친 말발굽을 들어 불꽃을 걷어 찼으며 그러자 놀랍게도 불꽃은 삽시간에 사그러들기 시작했습니다. 놀란 왕자가 고개를 들어 백마를 보자 백마는 어느새인가 흰 옷을 입은 청년으 로 변해 있었습니다. 흰옷에 푸른 머리칼을 가진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 했습니다. <이제 나의 저주가 풀렸도다, 나는 물의 정령 마스칼리에.> 마스칼리에가 미소를 짓자 왕자의 몸의 상처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 했습니다. 공주님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왕자는 감격하여 마스칼리에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스칼리에는 푸른 빛을 흩뿌리면서 천천히 말했습니다. <나는 마왕의 저주를 받아 백마로 화해 피해있었던 것이다. 이제 너의 덕 분으로 저주가 풀렸으니 너에게 이것을 주마.> 마스칼리에가 준 것은............어마마마?" 모후는 일어서서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었다. 난간에 기대어서 그렇게 불안한 자세를 하고 있기에 엘란트라는 모후의 손을 잡았다. "미트라." 갑자기 고개를 돌려 모후가 속삭였다. "너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여자가 되렴." 그녀는 햇빛 속에서 아름답게 웃었다. 10여년만의 첫 번째 미소. 그리고 엘란트라의 손을 가볍게 밀고 그대로 창 밖으로 뛰어 내렸다. 흩어지는 꽃잎. <그리하여 왕자와 공주는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하여 공주와 용사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영원히 행복한 공주님은 없다. 엘란트라는 눈을 감고 책을 덮었다. 어머니는 높은 성의 공주님,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가련한 공주님. 그 공주님은 원하지도 않은 왕자가 찾아와서 미쳐버렸다. 그러니까 이제 새로운 공주님은 왕자를 찾기 위해 길고 아름다운 치마를 자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새로운 공주님은 용사를 찾기 위해 바닥까지 찰랑이는 긴 머리칼을 자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별전] 높은 성의 공주님 완. 결. 번 호 : 26450 게시자 : 이수영 (ninapa ) 등록일 : 1999-12-28 02:10 제 목 : [쿠베린] 제 20화 광 란 4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4 킬트는 공중에 뜬 채로 무심히 녀석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공중에 떠 있는 녀석은 흑마법사라기 보다는 시커먼 유령 처럼도 보인다. 생각해 보면 이 놈으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었지. 그럼에 도 불구하고 이 놈을 참아주는 나는 얼마나 도량이 넓은 놈인가. "용서를! 용서를!" 녀석이 너무나 사시나무 떨 듯이 떨고 있어서 조금은 불쌍해졌다. "쿠베린, 적당히 해 둬라." 갑자기 녀석은 덜덜 떠는 애송이를 본 척도 않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킬트 녀석을 바라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뭘 적당히 하라는 거야?" "그 정도 죽였으면 됐지않나?" "뭘 그 정도 죽였으면 됐다는 거야? 넌 뭐 점잖은 놈이냐?" "............얼마나 더 죽여야 그 놈의 잘난 자존심이 치유되는 거냐?" "여기서 왜 나의 하늘같은 자존심이 나오지?" 이 녀석이 갑자기 왜 끼어들어? 킬트녀석은 한 숨을 쉬었다. "너와 유티아 만으로도 이미 마튜스는 시체의 산이다." "유티아?" 유티아가 거기서 왜 나오지? 내가 어리둥절해서 녀석을 바라보자 킬트는 한 숨을 내 쉬었다. "어쨌든 이 놈은 내가 맡을 테니 이 자리를 떠나라." "아, 떠나는 건 떠나는 것인데 왜 네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지?" "네가 모든 인간들을 다 죽이기 전에 온 것 뿐이야." "난 별로 죽인 적 없어." 킬트는 시커먼 눈으로 시커멓게 날 바라보았다. "별로 죽인 적 없어? 이 시체의 산으로도 부족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시체의 산? 이 홀안의 녀석과 복도안의 녀석들을 말 하는 건가? "이봐, 전쟁터에서라면 이 정도 죽는 건 흔한 일 아냐?" "이건 전쟁이 아니라 네 화풀이잖아? 그 덕에 인간들이 무수히 죽어 넘어 지고 말이야." "그럼 인간의 전쟁은 화풀이가 아니란 말이야?" "인간의 전쟁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너의 그 같잖은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한 쌈박질과는 달라." "헤에, 인간의 전쟁이 의미가 그렇게 깊었냐? 그럼 룬드바르는 왜 전쟁을 일으켰는데? 대륙의 수많은 인간들의 전쟁은 다 의미가 그렇게 깊어서 전 쟁 끝나면 땅따먹기냐?" "이봐, 네가 이해 못하는 것이야. 인간들의 전쟁에는 의미가 있다." "오호라, 너무나 심오해서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의미?" "쿠베린!" "헤에, 너도 인간이라고 내가 이러는 게 싫다는 거냐?" 킬트는 찢어진 눈으로 나를 묵묵히 쏘아 보았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뭔가 하려고 했었는데. 여전히 머릿속이 흐릿하다. 뭔가 내가 빼먹고 있는 게 있는데. "네 심정은 이해한다만...적당히 해 두는 게 어떠냐? 아무리 죽여도 그들이 살아돌아오는 건 아냐." "그들?" 나는 어리둥절해서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누구지? "사인족을 아무리 죽여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아. 게다가 사인족은 안그래 도 숫자가 너무 줄어들었다. 네가 삼일간 얼마나 죽였는지는 하늘만이 알 겠지만....." 잠깐, 삼일간? 삼일간이라니? 그건 무슨 소리지? 내가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에 바닥을 기던 애송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 더니 슬금 슬금 뒷걸음질을 친다. 녀석은 나와 킬트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기회인양 얼굴이 허옇게 된 채로 땀을 줄줄 흘리면서 은근 슬쩍 달아나고 있었다. 녀석이 막 기둥을 돌아서는 순간에 킬트 녀석이 입을 열었다. "봉인수라는 게 뭔지 아냐?" "몰라." 흠칫하고 달아나던 녀석이 고개를 푹 숙이며 멈추어 섰다. 녀석의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리는 것이 너무나 확연해서 나는 왠지 슬퍼졌다. "방금 네가 본 것이 바로 봉인수다. 너, 소환수는 알고 있지?" "알지." "이세계(異世界)에서 소환해서 부리는 것이 소환수인데, 그것과 마찬가지로 봉인수 역시 이세계에서 소환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녀석이 이 상황에서 마법강의하는 거야? "소환수가 쉽게, 아님 봉인수가 쉽게?" 갑자기 이 놈이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녀석이 던지는 질문에 응해주 기 위해서 바닥에 널려진 수많은 색색가지 색유리 중에서 가장 큰 것을 녀 석에게 아낌없이 던져 주었다. 물론 그 색유리는 킬트녀석의 주변에 가자 마자 팍 하고 먼지처럼 바스러 졌지만 나는 나의 응답이 녀석의 마음에 들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너 같은 무식한 녀석은 물론 모르겠지만 소환수는 주문만으로 불러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쉬운 일은 결코 아니지." 녀석은 이를 갈면서 나를 눈꼬리가 찢어져라 째려보았다. "당연하겠지." 나는 이제 편안한 자세로 돌입했다. 안그래도 가슴팍은 찢어져서 아파 죽겠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변신모드 가 풀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탓이라 무지 피로해서 누워서 자고 싶었다. 그 전에 뭔가 더 먹었으면 좋겠지만 먹을 거라곤 바닥에 퍼진 종류도 알 수 없는 괴물녀석뿐인지라 먹을 수도 없다. 그리하여 나는 기둥에 두 다리 쭈욱 뻗은 상태로 팔짱을 끼고 조금 피로한 다리를 그놈의 괴물 녀석 다리 위에 올려놓고 녀석의 이야기를 옛날 이야 기 흘려듣듯 듣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그런데 소환은 해야겠고 소환수를 주문만으로 필요할 때마다 불러낼 자신 은 없는 녀석들은 어떻게하느냐 궁금하지?" 전혀 안 궁금하다. 나는 손톱소제를 하면서 무시했다. 물론 나의 무시도 역시 무시하면서 킬트는 말을 이었다. "마법원으로 소환한 뒤에 자기 몸뚱이에 봉인하는 거야. 그리하여 필요할 때마다 봉인을 푸는 거지. 자기 제어 주문에 의해서 말이야." 오호, 그 말은 조금 나로서도 흥미진진한 말이다. 그럼 아까 녀석들이 불러 냈던 그 도마뱀과 뱀대가리 같던 것들이 바로 봉인수?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흠이 있지. 하기야 마법에는 댓가가 따르는 법 이니까." 특히 흑마법은 댓가가 따른다고 고쳐말해야 하는 것 아니야? 그건 그렇고 내가 왜 여기서 이 녀석의 말을 일일이 듣고 앉아있어야 하는 것인가? 허긴 내가 일어나서 이 자리를 떠도 이 놈은 따라 다니면서 설명을 계속하 긴 하겠지. "봉인한 몸에 상처를 입으면 봉인수도 상처를 입는다는 거지." "그럼 아까 내가 저 놈 팔뚝 잘라냈을 때의 경우는 뭐야?" 내가 궁금해서 묻자 킬트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읊조린다. "봉인한 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니 봉인수는 봉인이 풀린 거야. 그러니까 자 신을 구속한 녀석을 공격한 거지." "즉, 그동안 날 부려먹은 게 억울하다. 너도 죽어봐라 라는 의미란 거냐?" "대가가 돌아온다는 부메랑 효과이지만, 뭐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호오, 거 참, 마법도 꽤 공정하군. 너무나 공정하고 공정해서 야멸차게도 느껴지는데. "그럼 말야, 뭐 심장이라든가 그런데 봉인할 수도 있는 건가?" 내 말에 킬트는 한심한 듯이 바라본다. "너, 심장에 줄 가게 하고 싶어?" ".........." 킬트는 내 대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시선을 돌려서 엉거주춤 서 있는 녀석을 향했다. 녀석은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서 있을 수도 없다는 듯 애매모호한 태도로 킬트의 시선을 어떻게 해서든 피해보겠다는 듯이 은 근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피아드, 네 녀석과 올리스가 감히 내 봉인수들을 훔친 일 에 대해선 눈을 감기로 했다." 헉 하고 녀석이 고개를 들고 킬트를 바라본다.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 킬트를 보다가 그 다음에는 무릎을 다시 꿇고 두 손을 땅에 짚은 채 외쳤다. 더할 나위 없이 감격한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녀석이 악악거리는 것을 바라보던 킬트의 눈에 잔인한 빛이 스쳤다. "올리스가 죽는 것을 보았겠지?" "........네." "너는 봉인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올리스는 세 개나 봉인했더군." "네, 네....제자는 그저....." 녀석이 어리숙하게 입술을 떠는 동안 킬트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긴 듯 소 맷자락을 들여다 보았다. 그 안에 봉인수라도 있는 양 심각한 얼굴로 그걸 바라보고 있더니 뒤이어 말을 이었다. "긴 말은 않겠다. 어떻게 할 것이냐?" ".................사, 삼년형을 기꺼이 받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킬트의 눈썹이 가볍게 위로 올라갔다. "...사년형!" 급히 애송이가 말을 바꾼다. 그래도 킬트의 표정이 변함이 없자 녀석은 다 시 다급히 입을 열었다. "오년형이요!" 지금 장난하냐? 내가 어처구니없어서 녀석을 바라보는 동안 킬트는 손을 휙 내저었다. 그러자 그의 소맷자락에서 무언가가 튀어 나와 녀석에게로 쏜살같이 날아 갔다. 녀석이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그 순간 퍽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앞 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뒤통수에 갑자기 이상한 벌레같이 생긴 것이 올라타 앉은 것이 보였다. 그 벌레는 다리가 열 개쯤 달린 괴이 하게 생긴 갈색으로 손가락만 한 크기였지만 그 자빠진 마법사의 뒷목을 두 개의 집게로 파고 들더니 꾸물꾸물하고 녀석의 목으로 기어들어갔다. 녀석이 기어들어가는 동안 애송이마법사는 있는 대로 비명을 올리고 있었 다. 아, 기분 찝찝하겠다. 마침내 흔적도 없이 그 괴이쩍은 벌레가 다 들어가고 나자 침을 질질 흘리 며 헐떡이던 마법사 녀석은 절망에 빠진 듯한 얼굴로 푹 하고 바닥에 엎어 져서 한동안 일어나지도 못했다. 흠, 저건 무슨 벌레냐? 또 이상한 장난질을 치는 건가? 설마하니 킬트의 말을 안들으면 저놈의 벌레가 팍 하고 치솟아 올라 심장 으로 기어들어가 두 집게로 푹 터뜨린다든가 혹은 아래로 내려가 내장을 토막친다든가 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나 저 음침우울한 녀석다운 수법이로군. "가거라." 킬트가 짧게 말하자 녀석은 진땀을 줄줄 흘리는 얼굴로 고개를 간신히 들 었다. 그리고는 비틀 일어서서 말 그대로 비슬비슬 걸어서 내 시야에서 천 천히 벗어났다. 아니 벗어나려고 했다. "잠깐! 너, 말 좀 묻자. 그 룬드바르 황제인지 왕인지 하는 녀석, 이곳에 있 느냐!" 내가 묻자 녀석은 날 흘긋 같잖지도 않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나의 치켜든 주먹을 보고는 얌전히 입을 열었다. "이미 이곳을 떠난 지 사흘 되었소이다." "사흘?" 또 사흘? "그럼 어디로 갔는데?" 다시 입을 다무는 녀석. 안되겠군. 이런 놈은 머리통속에 벌레를 넣었든 걸레를 넣었든 조금 주물 러주어 이 몸의 위대함을 뼈저리게 느껴야만이 현명해지겠는걸. 흐... 내가 히죽이 웃으며 녀석을 바라보자 순간 창백해진 녀석이 다시 재빨리 대답한다. "고왕국으로....! 고왕국으로 전진하셨소!" 내가 거성을 나와 걷는 동안에 본 광경은 모두 한 가지 일색이었다. 피와 살, 시체더미들로 가득찬 이 요새는 이제 도무지 살아 있는 것들이라 고는 시체를 뜯기위해 모여든 벌레들뿐이었다. 이제 후각은 완전히 피 냄 새로 가득차서 느껴지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석양이 진다. 이제 곧 날이 저물 것이다. 아까부터 묘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자꾸만 사흘이라고 하는 그 말이 걸린 다. 어제 뭘했었지? 기억나지 않아. 그럼 그저께는 뭘 했더라? 역시 기억나지 않아. 그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너, 생각보다는 냉정하군. 울고 불고 할 줄 알았는데." 킬트가 뒤에서 천천히 걸으며 입을 열었다. 바닥에 질척이는 살점들이 맨 발에 와 닿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시체들 은 이제 굳어가고 있어서 닿는 감촉은 차고 축축하며, 질척거린다. 무엇보 다 찬 것이 기분 나쁘다. "뭘 울고 불고해?" "저번에 그 푸른 아인족꼬마 일도 있고 해서 울고불고 할 줄 알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킬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킬트는 무표정한 채로 자신의 발치에 걸리는 머리통을 가볍게 걷어 차 피하면서 걷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유티아는 휴런이 데리고 북상하고 있어. 한 발 먼저 말이야. 너는 도저히 막을 자신이 없다고우는 소릴 하길래 내가 왔지." "유티아를 왜 휴런이 데리고 간다는 거지? 지금 고왕국으로 갔다는 말이 지?" 킬트는 시선을 돌려서 날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한다. "너 설마....." 킬트는 갑자기 그 재수없는 면상에 미간까지 찌푸리며 날 다시 바라보았 다. 그렇게 봐 봤자 이 몸이 훌륭하시고 뛰어나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 는 일이야. "기억 못하는 거냐?" "뭘? 아아, 어제 뭘 했는지 기억 못해. 나 술이라도 퍼 마셨던가?" 기묘한 얼굴로 날 바라보던 녀석이 찬찬히 말했다. "왜 사인족을 죽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단 말이지?" "에? "왜 미친 듯이 사인족을 죽이러 다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머릿속에 뭔가 불꽃이 어른거린다. 알 수 없는 섬뜩한 기억. "왜 화를 냈었는지, 왜 난리를 쳤는지 기억이 안나?" 내가 물끄러미 녀석을 바라보자 킬트가 조용히 말했다. "과연, 이 지긋지긋한 철벽의 심장을 가진 쿠베린님이 어떻게 그 긴긴 세 월 속에서 살아왔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구만." "뭔 소릴 하고 싶은 거야?" 팔짱을 끼면서 녀석을 보았다. 듣기 싫은 소음이 윙윙 귓가에서 일렁였다. 그래, 듣기 싫다. 이 것은정말 로 듣기 싫어. 녀석의 시커먼 눈이 날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딸아이와 미트라가 죽었다. 끔찍하게 살해되었지." =========================================================== 슬럼프인가 봅니다. 아아...육아일기라도 쓸까.;;;; =.= 졸려. 제 목:[쿠베린] 제 20화 광 란 5 관련자료:없음 [19182] 보낸이:이수영 (ninapa ) 1999-12-30 08:11 조회:3098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5 "하하하하하하핫..........." 그랬었나? 그랬었군, 그랬었나봐, 그렇게 된 것이었군. 물끄러미 바라보는 킬트의 시선을 받으면서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목이 찢어지고 배가 가슴에 달라붙도록 킬킬거리고 계속 웃었다. 너무 웃다보니 기침이 나오고 눈물도 나왔다. 그렇지, 너무 웃어서 눈물이 다 나온다. 킬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녀석은 팔짱을 낀 채로 내가 웃는 것을 바 라보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이 녀석과는 이상하게 자주 얽히는 것같군. 내가 아이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었는데 결국은 또 아이를 죽이고 말았다. 여자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었는데 결국은 또 죽이 고 말았다. 너무나 허탈해져서 웃음이 튀어 나온다. 하하하 하고 세 번 웃고 나서 크크크하고 또 세 번 웃어본다. 웃기는 군, 정말 웃겨. 뭐가 웃기는 지 모르겠지만 너무 웃겨서 말이 안나와. "가자." 나는 웃다 말고 고개를 돌려 킬트를 바라보았다. "어딜?" "어디긴 어디야? 당연히 고왕국이지, 거기에 그 놈들이 있다며?" "......유티아를 보고 가라." "뭐하러?" 내 말에 킬트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네 여자잖아? 네 여자가 네 아이를 잃어서 괴로워 하고 있는데 너는 그녀 를 위로도 하지않을 참이냐?" "아이를 지키는 것은 여자의 몫이야. 내 할 일이 아니란 말이다." 기가 막히다는 듯이 킬트가 날 바라보았다. "뭐라고?" "여자가 아이를 지키는 거야, 나는 귀여워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했 다고 생각하는데?" "이.....녀석! 넌 네 아이가 죽었는데도 그런 소릴 하는 거냐!" "그래,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죽는다는 건 그런 거야. 죽임을 당하고 죽고, 다 그런 거지. 묘인족의 아이가 그렇게 죽었다는 건 치욕적인 일이긴 하지만 말이야." "너! 머리라도 이상하게 된 것 아니야?" 킬트가 나직하게 물었다.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물론 이상해졌지, 이상해지고 말고. 지금 내가 서 있 는 건지 앉아있는 건지 나도 나를 잘 모르겠으니까 굳이 놀랄 것은 없다고 봐. 나는 대체 지금 어떤 상태지?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 거지? "헬시에 헬!" 갑자기 시커먼 불꽃이 일렁이면서 나를 덮쳐왔다.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튀어오르자 그 뒤를 기다렸다는 듯이 시커먼 불꽃이 살아있는 양 나의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손톱을 들어 휘젓는다는 그런 어 리석은 일을 행하는 대신에 나는 재빨리 몸을 숙이며 그 시커먼 불길 속으 로 돌멩이를 하나 집어던졌다. 으싸! 파식하고 뭔가 야릇한 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을 듣는 그 순간에 그 불길 속 을 뚫고 무언가 뾰족한 것이 내 면상으로 그대로 짖쳐들어왔다. 우왓!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드는 그 것은 아까 보았던 봉인수인지 소환수인지 하 는 그 괴이한 물건이었다. 날개가 달린 뱀과도 같은 그 것이 입을 좌아악 벌리자 바늘처럼 날카로운 이빨들이 열을 지어서 나는 위험한 놈이어요를 외치고 있었다. 그래, 나도 위험한 놈이란다. 녀석이 내 팔뚝을 물어뜯기 위해 아가리를 있는 힘껏 벌리고 닥쳐온다. 오 오, 좋아 좋아! 어디 물어봐! 물어봐! 물어보란 말이다! 녀석이 내 팔을 무는 그 순간에 나는 녀석의 목줄기를 잡아 움켜쥐었다. 물컹하는 촉감과 싸늘한 기운이 손목까지 치밀어 오른다. 차가운 감촉, 소 름끼치는 한기였다. 그렇다고 어마 차가라 하고 손을 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녀석의 목줄기 를 잡아 비틀어서 말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아니, 치려고 했지만 녀석이 내 팔뚝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는지 도무지 이빨을 빼려고 하지를 않는다. 이 자식, 그렇게 내가 좋냐? 그렇게 나를 사모하냐? 그럼 온 몸으 로 사랑하게 해주마. 손톱으로 녀석의 목을 내찔렀다. 창창하는 소리로 녀석의 몸뚱아리는 요동 을 할 뿐 상처도 나지 않는다. 그래? 상처도 안나? 그럼 어디 끝장을 보자 구! 녀석을 쥐고 서로 애정을 확인하고 있는 동안 또 한 녀석이 뛰어들었다. 바로 아까 나타났었던 그 도마뱀새끼였다. 그래, 도마뱀새끼 놈아! 왔냐? 그리 질투나냐? 있는 힘껏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드는 그 도마뱀은 차가운 뱀대가리와 달리 불덩이처럼 화끈거리는 열기를 품고 달려들고 있었다. 아픔이 팔뚝전체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뱀대가리를 떼어내지 못했다. 그렇지 만 정면으로 다가오고 있는 이놈의 도마뱀새끼의 애정을 마다할 수는 없는 상황인지라 녀석을 잡으려 손을 뻗혔다. 그러자, 이 놈이 다리가 많다는 것 을 자랑하려는 것인지 재빨리 피해낸다. 이 자식, 피하긴 어딜 피해! 나의 이 불타는 사랑을 받으란 말이다! 녀석의 다리 한쪽을 겨우 잡았다. 화끈하 게 달아오르는 손가락에서 고기타는 냄새가 난다. 으아, 뜨거! 녀석의 주둥이를 잡아 내 팔뚝을 물고 있는 뱀대가리녀석의 목줄기에 틀어 박았다. 그러자 치직 지직하고 괴이한 소리를 내면서 뱀대가리가 몸부림을 하기 시작했다. 내 손톱이 박히지도 않는 이 괴이한 놈이 뜨거운 도마뱀녀 석의 이빨에 상처가 난 모양인지 내 팔을 문 아가리를 놓았다. 때는 이때 다. 그 지긋지긋한 뱀대가리 녀석의 몸체를 잡아다 패대기를 치는 것과 동시에 도마뱀녀석의 몸뚱아리도 바닥에 후려갈겼다. 그래, 이 자식들이 상처도 안 생겨? 좋아, 좋아! 그럼 아낌없이 밟아 주겠어! 터뜨려 죽여주겠단 말이야! 우하하하핫! 죽으라구! 죽어버리라구! 갑자기 싸늘한 액체가 툭툭하고 뺨에 와 닿았다.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하늘을 보았다. 시커먼 하늘아래서 창공의 여신이 비를 뿌린다. 비는 장대비도 아니고 보 슬비도 아닌 그저 보통의 그저 그런 비였다. 물론 비가 올려고 마음을 먹 었으니까 비가 오는 것이겠지만 문득 뺨에 와 닿아 내 눈안까지 들어와 흘 러내리는 빗물은 참으로 내 마음에 들었다. 차가운 것이 온 몸에 닿아, 화끈거리다 못해 이글거리는 전신을 식혀주고 있었다. 좋아, 좋아, 목이 마르군. 입을 벌려서 한껏 비를 마셨다. 아무리 입을 벌려도 들어오는 것은 몇 방울의 빗줄기뿐이다. 내가 아무리 강해도 내 손은 두 개고 내 발은 두 개이며 내 발톱은 스무개에 불과해서 모든 악당과 모든 악귀와 모든 쓸모없는 것들에 대해 지켜주는 데에는 한 계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그것이 약해 빠진 인간인 담에야........ 알고 있는데도 가슴 속에 자리잡은 분노는 이글이글 타올라 갈 곳을 모르 고 헤메고 있었다. 불끈불끈 치솟는 뭔가가 치밀어 그대로 변신해버릴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불행이라고 해야하나, 지금 나는 부상중이고 게다가 배가 고프고 지쳤고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적어도 사흘 간 변신모드로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하하하핫..... 아무리 내가 고명하시고 훌륭하시고 강하면서도 멋진 분이라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변신모드로 변할 기력은 없었다. 그러니까 뭐어, 그런데로 그 런데로.......... 차가운 액체가 어느새인가 뜨거운 액체로 변했다. 뺨위로 닿는 액체는 뜨듯미지근한 상태로 줄줄 흘러서 목까지 흘러내린다. 차가운 빗속에서 내 뺨위로 내리는 액체만이 따스하다. 내 팔뚝으로 흐르 는 액체도 따뜻했다. 내 가슴위로 흐르는 액체도 따스했다. 전신에서 흘러 넘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따뜻했다. 갑자기 기억이 나서 부르르 떨었다. 손 끝에 닿던 차가운 감촉, 고통으로 굳어버린 그 몸뚱이와 이제는 파랗게 변해버린 붉었던 입술, 한때는 내 품안에 안겨서 웃고 있던 그 표정이 가 슴 저 밑바닥에서 폭팔하듯이 치밀어 올라왔다. 가련하게도, 가련하게도, 가련하게도..... 작은 손, 내 손바닥의 반밖에 안되는 그 작은 손을 한 내 딸의 팔, 갈기갈 기 찢어진 내 딸의 몸뚱이, 내 품안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투정부리던 그 작은 얼굴이, 죽음의 여신 앞에서 부서져있었다. 터진다. 터진다. 터지고 있다. 숨이 막혀서 말도 안나온다. 숨이 막혀서 말도 할 수없다. 가슴이 터져나갈 것만 같다. 아무 것도 들리지않는다.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온 몸이 전신이 찢어져 버릴 듯이 고통스럽다. "허억...허억..."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핏방울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다가 빗물과 엉겨 분홍빛 색깔로 변해간 다. 바닥은 진흙, 검붉은 진흙위로 붉은 물감이 흘러 기묘한 색깔을 낸다. 가슴은 불타오르고 입안은 말라 비틀어져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다. 정신 이 아득해진다. "아우, 아우우우우욱..." 가슴이 쥐어뜯었다. 심장을 뜯어 발기고 이 고통을 덜어내고 싶다. 심장이 뛰고 뜨거운 액체가 손안을 가득 메운다. 그래서 더더욱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깨닫게 된다. 그들은 차가왔었다. 그들은 차가와서 소름이 끼쳤다. 나는 따스하다. 나는 따뜻하다. 그러니까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검푸른 밤의 여신이 등장해 있었다. 그녀는 어느 새인지 보랏빛 보석상자를 열어 은빛과 금빛으로 반짝이는 무 수한 보석들을 토해놓았다. 그 가운데 빛나는 노란 색을 띈 거대한 달은 지나치게 뚜렷해서 눈이 다 부셨다. 나는 반듯하게 누워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눈을 뜨자 마자 보이는 것이 밤하늘이겠지. 그리고 나 는 지금 노천의 땅바닥에 누워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차갑고 온 몸 이 딱딱하겠지. 그리고 나는 지금 채 굳지도 않은 진흙에 전신을 박고 있 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온 몸이 축축하고 미끌미끌하겠지. 그리고 나 는 지금..........아아, 관두자. 피곤해 죽겠다. 이렇게 하늘을 오랫동안 본 것은 얼마만일까. 진짜 맑게 개인 밤하늘이었다. 흑옥석을 사방에 깔고 그 위로 사금을 아낌 없이 뿌려놓은 밤의 여신의 호방함에 감탄했다. 많이도 깔았네. 그녀의 보 석상자는 텅텅 비었겠구만. 긴긴 세월....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나의 짧은 시간 동안 요 일년이 가 장 다사다난한 때가 아닐까? 아니지, 앞으로 한 몇 십 년쯤 지난 뒤에 나 는 또 다른 소릴 하게 되겠지. 모든 것을 다 뒤로 넘겨 하하 웃고 나는 후 회따위는 안한다고 잘난 척을 해봐도 분명한 것은, 나는 지금 후회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인간과 같이 산 것을 후회한다. 나는 인간에게 정을 준 것을 후회하 고 다른 묘인족들과 달리 산 것을 후회하며 묘인족 고유의 삶의 방식을 거 부한 것을 후회한다. 가장 강하고 매력적인 여자를 취해 아이를 낳고, 강한 자가 나오면 도전자 를 받고, 내키면 여행을 하고, 자연의 여신이 원하는 대로, 바람의 여신이 권하는 대로 그렇게 살았어야 했다. 강해보이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 를 죽이기도 하고, 내키는 대로, 원하는 대로 킬킬대면서 그렇게 살아야 했 다. 만약에 그리했다면 지금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다. 이렇게 가슴이 터져나가 지는 않았다. 아직 성년도 채 맞이하지 못한 내 딸은 내 연인이 채 되지도 못하고 죽어 버린 미트라와 함께 죽었다. 바보같은 딸년 같으니! 제 애비를 닮았다면 그렇게 죽지는 말았어야 했 다! 제 애비는 수많은 것들을 다 죽이고 이렇게 팔팔하게 잘 살고 있는데 그 애비 앞에서 한낱 사인족 따위의 더럽고 치사하고 지저분한 종족에게 죽임을 당하다니, 네가 내 딸일 리가 없어! 유티아가 딴 놈과 자고 내 딸이 라고 한 거 아냐? 절대 내 딸일 리가 없어! 절대로! 내 딸은 그렇게 어리 석지도, 약하지도 않아! 젠장할! 내 딸이 아냐! 가여운 미트라, 바보같은 년,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년! 내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에 모가지를 비틀 년! 대체 왜 죽은 거냐? 너 같은 인간의 공주님이, 인간의 공주님이 왜 거기서 내 아이를 끌어안고 죽어버린 거냐? 이런 아무 도 모를 곳에서 왜 이렇게 왜 이따위로 죽어버린 거냐? 대체 왜! 왜! 아냐, 죽지 않았을 지도 몰라, 가서 확인을 해보는 게 좋겠다. 분명히 내 착각일 게야. 그들이 죽은 게 아니고 닮은 누군가가 죽은 거야, 그래, 이렇 게 누워있을 때가 아니고 얼른 가서 확인해 봐야지. 이건 다 꿈일 지도 몰 라, 그들이 죽었을 리가 없어! 비시식 하고 일어나려는 순간 온 몸이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숨이 컥 하고 막히자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지독한 고통이 온 몸을 타고 흘러 부들부들 떨리게 했다. 너무 아프면 온 몸이 덜덜 떨린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젠장........ 너무 아프니까 이렇게 아프니까 실감해 버리고 만다. 모든 것은 꿈이 아니라는 것, 모든 것은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채고 말았다. 사방은 조용했다. 멀리서 우는 밤새와 추위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울고 있는 어떤 끈질긴 벌레들이 수풀속에서 지껄여대고 있었다. 대지의 여신은 오지랖도 넓고 포 용력이 지나쳐서 받아들여선 안될 자들도 받아들이고는 진지하게 날 바라 본다. 그래, 당신, 잘났수, 이 땅바닥에 언젠가 나도 드러눕게 되겠지만 당 신, 너무 그러는 거 아냐. 당신은 당신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런 식 으로 어린 것들을 가차없이 죽여버리고 당신 그렇게 잘났냐고! 깊게 숨을 들이키고 그 다음에는 다시 내 쉬었다. 말라비틀어진 목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내가 죽여버린 시체들이 바로 내 발치에서 구르고 있다. 그 시커먼 형체들 은 밤의 여신의 보석들에 비추어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낸 채로 날 조롱하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들은 돌아오지않아. 자연의 여신은 절대로 되돌려 보내주지 않는다구. 한 번 흘러간 물은 되돌릴 수 없고 태어난 애기는 도로 뱃속으로 들어갈 수 없듯이 역시 죽은 자들도 다시 되돌아 올 수는 없단 말야.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 산 자들은 산 자들. 무수히 몇 번을 되뇌이고 몇 번이나 들은 말이지만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고 그들은 죽었다. 젠장, 나는 아.직.도. 살아있고 그들은 이.미. 죽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이미 딱딱하게 내 손가락과 손톱사이에 박힌 진흙들을 바라보았다.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숨을 천천히 내 쉬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천천히 울었다. 오늘 밤까지만 울자. 제 목:[쿠베린] 제 20화 광 란 6 관련자료:없음 [19891]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0-01-13 17:15 조회:2437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6 "이제 울만큼 울었냐?" 눈을 뜨니 시커먼 녀석이 어느 새인지 머리맡에 앉아서 날 들여다 보고 있 었다. 뭐야? 이 녀석은 요즘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한 위안부생활을 시작한 건가? 린 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역시 매달려서 이런 자세를 취하고 있 네. 코는 마비되어 뭔 냄새인지 구별을 못하고 있지만 눈과 귀는 정상적인 활 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더불어 뱃속의 내장들도 존재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배고파." "........." 킬트는 한숨을 삼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들여다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눈이 퉁퉁 부었다. 잘난 묘인족의 왕." "그러냐?" 나는 아직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버티고 있는 팔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 몸 을 일으켰다. 겨우 앉자 마자 그제서야 온 몸뚱이가 일제히 나 여기 있어 요를 외치기 시작했다. 팔도 쑤셔대고 다리도 쑤시고 어깨, 허리 할 것 없 이 모조리 쑤셔대기 시작했다.전신에서 우득 우득 소리가 나는 것을 들으 면서 나는 킬트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어이, 먹을 거 없냐?" "네가 베고 누운 걸 먹지 그러냐?" 킬트는 퉁명스레 쭈그리고 앉아서 시커먼 옷자락을 툭툭 털어보였다. 내가 베고 누운 게 뭐더라? 돌아보니 웬 인간의 팔 다리가 보인다. 물론 머리통은 없지만 어쨌거나 팔 다리는 건재하고 몸뚱이도 건재하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킬트 를 바라보았다. 죽은 지 최소한 삼일은 넘은 듯한 이 걸 먹으라고? 신선하 지 못한 것을 먹으면 체하는 법이야. "그런데 넌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카나리안에게 부탁 받았다고 했잖아." "그 색마꼬맹이에게 뭘 부탁받아? 내 시중을 들어주라고 하디?" "너, 아무래도 한 숨 자고 나더니 머리가 돌아버린 것 같군." "아니, 이제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 나는 킬트를 물어뜯는다는 그런 엄청난 상상을 하면서 일어섰다. 우드드드 득하고 팔 다리에서 엄청난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일단은 그건 접어두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사방은 진흙투성이. 마튜스의 일대는 인간들의 마법사와 엘프의 마법사와 인간병사와 쪼가리 엘프들의 쌈박질로 온통 난장판을 이루어서 땅이 패이고 나무가 뽑혀져 나 가고, 사방이 그을렸다. 그런데다가 어느 누군가가 쓴 마법의 비따위 때문 에 온통 진흙탕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흙탕 가운데 내가 누워있고 내 주변으로는 온통 시체더미들이 여기저기 벌레들의 밥으로 자빠져 있다. 시체들은 인간이 가장 많았지만 인간이 아닌 것들도 있고 인간이 아닌 것 은 확실한데 대체 뭔 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아마도 저 썩 어빠질 마법사들이 만든 것이겠지. 킬트는 그런 것들을 돌아보며 다니고 있었다. 재미있군, 자신의 제자들이 만든 것을 검사하는 시험관처럼 녀석은 매서운 눈매를 한 채 그 시체들을 들여다 보고 있다. 햇빛은 이 마튜스를 감싸고 있었다. 창공의 여신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듯 이 태연자약하게 순결한 햇빛을 보내준다. 항상 순결한 햇빛, 어떤 처녀도 이 정도로 깨끗할 수는 없을 듯이 깨끗하고 순결한 햇빛, 아무도 건드리지 도, 밟지도 못할 그런 깨끗한 햇빛. 나는 햇빛을 받으면서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은 얼마전의 난장판이 전부 거짓인 듯이 온통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그러고 보니, 이곳 세룩-엘라마이야에 와서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 본 것은 처음이로군. 온통 빡빡한 거목들로 가득 채워진 이놈의 산맥 한 가운데서 이렇게 뻐엉 뚫린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야, 처음. 그건 그렇고 배가 고프니 이렇게 하염없이 있을 수는 없지. 배는 채우고 기운을 보강해야 눈물도 흘릴 수 있는 법이야. 아무 생각 없이 거닐던 산사슴 한 마리를 잡아 뜯으면서 나는 킬트가 입을 다물고 앉아있는 꼬락서니를 주시했다. 킬트는 말 한마디 없이 멍청히 나 무 그룻터기에 앉아서 인간이라곤 하나도 없는 마튜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는 마튜스의 모습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사방에 널린 시체 에 둘러싸여 불멸의 장벽이니 아무도 함락시킬 수 없는 곳이니 하고 말도 많던 그 드워프의 장벽만 덩그마니 남은 채 인간이든 엘프든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잘난 체 최고라는 둥 최강이라는 둥 불멸이라 는 둥 하는 말을 내뱉어선 안되는 법이다. 특히 인간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것으로, 백년도 채 살지 못할 것들이 웬놈의 영원불멸의 존재를 그렇게도 많이 안단 말인가? 걸핏하면 영원의 맹세니, 불멸의 맹세니 떠들어대고는 지키는 건 10년도 넘기기 어려우니, 끌끌 끌...... "어디로 갈 거냐?" "고왕국." ".............." "간단하잖아? 거기에 그 놈이 있고 거기에 내 딸이 있고 그리고 거기에 내 가 죽일 놈들이 득시글거리는데 뻔한 이야기지." 킬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진짜 강하구나." "그걸 이제 알았냐?" "그들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한 게 어제인데 오늘 너는 배가 고프다고 밥을 먹고, 그리고 멀쩡히 웃으며 걸어 나간단 말이지?" "그래." 나는 다 먹은 넙적 다리뼈를 등 뒤로 던져내면서 대꾸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사는 지 진짜 모르겠다." 한숨을 쉬고선 킬트는 턱을 괴고 시선을 돌렸다. "고민하는 내가 다 바보같아 지는군." "너, 바보 맞아." "........." "네 색마아들네미는 지금 뭘 하는데?" "고왕국으로 가고 있어." "고왕국으로 가서 뭘 하겠다는 건데?" "룬드바르제국군과 싸우게 되겠지." "결국 네 제자들과 싸우겠군?" 킬트는 턱을 괴고 앉은 자세를 그대로 한 숨을 내쉬었다. "너도 무척 약해졌군. 예전이었다면 널 배반한 제자들을 살려두었을 리가 없었을 텐데. 말 그대로 모두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리곤 으하하핫 하고 웃 어버렸을 게다." "그랬던가?" "널 배신한 제자들 몇을 그 왕년 죽여버렸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냐?" 그렇다. 그게 언제더라. 한 백여년 전쯤 되나? 아님....., 에라, 모르겠다. 알 바도 아니고. 자기 눈을 속이고 황금을 챙겼다고 녀석들을 산채로 불에 태우고 그을려 온 몸의 털을 없애버린 뒤에 맨들맨들한 꿀에 버무려 땅개미굴에 집어던진 놈이 바로 이 앞에 있는 킬트 놈이다. 또 한 놈은 뭔 뱀굴같은 데에 집어 던져 넣고 산채로 그 뱃속에 뱀을 집어넣었었지. 산채로 내장을 뜯긴 놈도 있었다. 하여간 수많은 희안한 벌칙을 그대로 적용했던 이 사악하기 짝이 없는 이 놈이 지금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이렇게 감상에 빠져서 멀뚱거리 고 있는 건지. "그 애들은, 내가 직접 만들어 키운 애들이야." "그래서?" "그런데.....그렇게 죽여버리기엔......" "네가 죽이지 않으면 그들이 널 죽일 게다." 킬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죽고 싶으냐? 실컷 살았으니까?" "요즘은 내가 대체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쿠베린." "네가 뭐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시선을 텅 빈 마튜스로 향했다. "이백여년간, 그 긴 긴 세월 중에 내가 내 몸으로 산 기간은 고작해야 사 십여년에 불과해. 나머지는 다 다른 자의 몸을 빌어 살아왔지. 물론 알맹이 인 영혼은 나의 것이지만 가끔 거울을 보면 대체 이 게 누군가하고 놀랄 때가 있어." 나는 여전히 먹기에 열중했다. 녀석이 뭐라 고민해도 나는 해줄 말도 없다. 그리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고민, 나로서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나도 지금 복잡해 죽겠다. "카나리안이 나를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자고 일어나면 나도 거울을 보고 순간 놀랄 때가 있으니까. 이백여년, 그 긴 세월을 이렇 게 살아온 나도 내 모습을 보고 놀라버리니까." "그러게 그렇게 맨날 몸뚱이를 바꾸니까 그렇지. 좀 진뜩하게 못하냐?" "네가 부순 몸뚱이만도 벌써 몇 개인데 그러냐!" 킬트가 날 사납게 쏘아보며 외쳤다. "네가 날 자극하니까 그렇지. 부수고 싶게 만들잖아?" "죽어라. 이 괴물." "괴물은 어느 쪽인데 그러냐? 나는 묘인족으로서 정상이지만 너는 인간으 로선 괴물이야." 순간 킬트는 멍청히 날 바라보았다. 어리석은 것. 순간의 존재가 영원으로 다가가려면 그만큼의 단련이 필요한 법이다. 물론 킬트는 보통의 인간보다 훨씬 강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자기 의 아이가 눈앞에 있다면 누구든 그것에 좌우될 수 밖엔 없겠지. 생각해보면 그도 그럴 것이, 카나리안의 아비가 킬트라고 해도, 킬트의 진 짜 몸은 이미 한 줌 흙이 된 지 오래이고 카나리안의 아비노릇을 했던 그 몸뚱이도 흙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그 주제에 카나리안에게 내가 네 아 비란다 하고 나서봐야 카나리안이 그걸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지 않 은가? 애를 만들려면 영혼이 문제가 아니라 몸뚱이가 필요하니까. 그렇게 따지면 카나리안의 원수가 킬트일 수도 있다. 왜냐면 킬트가 카나 리안의 아비가 되는 몸뚱이의 소유주를 죽였으니까. 아아, 뭔가 복잡해졌 다. 기분으로는 분명히 킬트가 아비이긴 하겠지만 그 몸뚱이를 준 자는 킬트가 아니니까 누구든 헤메일 수 밖엔 없다. 아무리 온화한 엘프라도 그걸 참아 줄 순 없겠지. 그러니까 킬트녀석이 애초에 잔정에 흘러 잘못했다는 거 잖 아. 아니지, 참, 내가 남의 말하고 있을 참이 어디 있나? 얼른 가자. 얼른 가서 끝장을 보자. "어디 가냐?" "고왕국에 간다." 내가 몸을 휘익 돌리며 대꾸하자 킬트는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회복이 빠르군." 회복이 빠르니까 이 몸을 향해 최강의 존재라 부르는 것 아니겠냐? 나는 달렸다. 킬트녀석이 뒤에 남아 웅크리고 앙앙 울든 질질 짜든 그건 내 알 바가 아 니니까. 물론 알고 싶지도 않고. ============================================================ ======== 잡담이라는 건 꽤 어려운 일로, 게으른 자에게는 더더욱이 어려운 일인지 도. 얼마전 이런 저런 이야길 하다가 어떤 분이, "왜 잡담을 안써요?" "게을러서요." "서비스가 부족하군요. 잡담을 통해 작가를 더 잘 알 수 있는 겁니다!" 라고 야단을 맞았다. 그런 뒤 시어머니께서 내게 질문을 던지시는데, 그 질문이란 것은.... "넌 일기 같은 거 많이 썼겠구나." "별로 안썼는데요." "육아일기는 안쓰냐? 다들 쓴다는데? 너도 썼겠지?" ".....안썼는데요?" .....찔렸다. 그리하여, 일기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잡담도 써보기로. 그러나, 나는 게으른 데다가 쓰자! 라고 해서 반드시 일기를 쓰는 것도 아 닌 고로, 결심을 하기를, 이렇게 매번 연재할 때마다 일기를 쓰기로 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새해부터는 일기를 쓰는 거야! 육아일기 겸용, 잡 담겸용 일기를 쓰는 거다! 하고 엊그제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잡담일기 1. 2000년 1월 12일 수요일, 비옴. 제목: 일기에 대하여 오늘의 중요한 일 : 1. 애가 밤낮을 되찾았다. 만세!! 2. 피씨방에서 쿠베린을 썼다. 3. 잡담겸 일기를 쓰기로 했다. 언제 중단될 지는 모르 지만. 흐, 처음이니까 일기에 대해서 쓰자. 음, 일기라는 것을 너무 오랜만에 쓰니까 쑥스럽군. 하지만 뭐, 이건 잡담 겸용일기니까 부담없이 쓰도록 해 보자. 그러고 보니 일기를 마지막으로 쓴 것은 고등학교 때로 어언 10여년 이상이 흘렀다. 물론, 대학교 때는 안 썼다. 왜 안썼냐 하면, 역시 게으른 탓이다. 간혹 친구들이 내 앞에서 예쁜 다이어리를 꺼내들고는, '오늘은 수영이와 함께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재밌었다. 그리고 스파게티 를 먹었다.' '오늘 라리에서 먹은 케이크는 좋았다' '오늘 프레피의 홍차는 일품이었다' 따위의 글을 적는 것이 무척 부러웠다. 나도 그렇게 쓰기로 했지만 작심삼분이라고, 펜을 따악 드는 순간 애라 모 르겠다 하고 집어던져 버리는 것이다. 다이어리에 스티커도 붙이고 온갖 색깔의 펜으로 글씨도 예쁘게 쓰고 그런 것이 무지무지 감탄스러웠는데 결 국 나는 해 보지 못하고 말았다. 뭐, 할 수 없지. 어쨌든 간에 나도 국민학교 즉, 초등학교 때부터 일기를 쓰기는 썼는데 그 내용이라는 게 다들 그렇듯이 학교 선생님에게 검사 맡기 위한 뻔한 것으 로, ' 7시에 일어났다. 아침 밥을 먹고 학교에 왔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갔다. 가 는 길에 군것질 하다 혼났다. 그래서 슬펐다....;;' 하는 그런 내용이었다. 물론, 선생님께 지적 받기 싫으니까 빠짐없이 느낀 점은 쓴다. 그리고 조금 머리가 커서는 역시 그런 유치한 일기를 쓸 수는 없으니까 괜 히 계절의 풍광이 어쨌고 저쨌고, 집에서 이랬고 저랬고, 이런 책을 읽었 고, 저런 책을 읽었고 하는 말 그대로 잘난 척하는 일기를 쓰게 된다. 물론 선생님들이 요구하는 대로 솔직히 쓸 수는 없다. 왜냐? 혼나니까! 그리고 후환이 두려우니까. 선생님들이야 언제나 솔직히 일기를 써라, 느낀대로 써라 라고 하지만, 어 린 내 생각에도 솔직히 쓰라면 진짜 두려운 일이 벌어지기 쉽다. 아무개와 싸웠다....라고 하면, 대개 어릴 때엔 격렬하니까 "아무개 죽어버 려랏!" 이라든가 "XXX야! XXX하고 XXX해버려랏!" 하는, 차마 문자로 옮 기기 민망한 감정을 갖게 된다. 물론 커서도 별로 다를 건 없겠지만, 그런 걸 어떻게 일기에 쓴단 말인가? 저주문 내리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나중 에 그 아무개가 그 일기를 보게 된다면....뒷탈이 무섭다.;;; 그 뿐만이 아니다. 솔직히쓰라고 하면, 틀림없이 일기를 쓰면서 부글부글 끓기 마련이다. 특 히 방학 끝날 무렵에는 더더욱이 끓어 올라, "....일기 따윈 쓰기 싫어! 일기 쓰라는 선생님 미워!" "일기 쓰라는 엄마 미워!" "이 세상에서 일기숙제를 없애다오." 라든가를 쓰고 싶어진다. 그런 솔.직.한. 글들로 가득 찬 일기장을 검사하는 선생님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 뭐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일기 쓰기를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는 편이다. 즐겨 일기를 썼던 때는 사춘기 시절 감정에 푸악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 괜히 시 한 수 써 놓고 아아 멋져 따위 중얼거릴 때 이후로는 없다. 물론, 그건 중학생 때였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이미 나는 늙어가는 처지. 일기란 여전히 나에겐 난해한 물건으로 그 중 가장 난해한 부분은 매일 써 야한다는 점이다. 뭐 일주일에 한두 번 써도 괜찮다고는 하지만, 생각해보 면 그렇게 쓰게 되면 그건 일기가 아니라 주기(週記)라고 불러야 할 테니 말이다. 뭐, 어쨌든 나는 잡담을 쓴다고 하는 거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으하하하핫;;;; ps 캐릭터 인기도를 한번 알아보려 합니다 ^^ 마음에 드는 캐릭터들을 10명 내외로 보내주시지 않겠습니까? 의외로 쿠베린에는 실명^^의 인물들이 상당수 있으므로 그 분들에게 보답(?)을 하고자 합니다. ^^;; 그럼 멜 부탁드립니다. 제 목:[쿠베린] 제 20화 광 란 7 관련자료:없음 [19903]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0-01-13 20:55 조회:3015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7 남이 기쁨이라 불러도 아픔인 것은 아픔, 남이 고통이라 불러도 쾌감인 것 은 쾌감. 어느 것이 옳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게 삶이다. 내달리는 발 끝에 채이는 시체들이나, 발톱에 걸려서 공중으로 흩날리는 풀잎들이나 내게는 다 마찬가지. 사슴 한 마리 죽이는 거나 얼굴도 모르는 아인족을 죽이는 것도 내게는 마찬가지. 남들이 뭐라해도 내 속에 있는 것 은 내가 판단할 따름이다. 숲안의 것들은 참혹함에 지쳐 조용히 널부러져 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도 이젠 피로함을 내보이고 어서 이 침입자들이 나가기만을 기대 한다. 하늘 아래 가장 많은 나무를 가진 세룩-엘라마이야, 이제는 이 암흑 산맥도 인간들의 살육에 지쳐버렸다. 뺨을 스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창공의 여신이 벌린 옷자락 사이로 푸른 살 내음이 난다. 대지의 여신이 뿌리는 살아있는 것들의 냄새가 천천히 천천 히 콧속으로 스며 올라 머리 끝까지, 머리 속 깊은 곳까지 파고 든다. 그 래, 그래, 난 살아있다. 고개를 들고 힘껏 달렸다. 약간은 찌뿌드하던 팔과 다리도 힘껏 내뻗는 힘을 따라서 유연하게 움직이 기 시작했다. 내 팔과 다리, 내 충실한 이 몸도 죽어 넘어질 때가 있다. 불 끈불끈 치솟는 이 심장도 타올라 쓰러질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 모두들 언젠가 죽듯이 나도 죽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새삼스레 죽는 것을 앞당길 필요는 없다. 아무리 고통 스러워도 산 자는 살아가야 하지, 그래서 내가 살아가는 동안 죽인 모든 것들을 헛되게 해서는 안되지.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이기적인 것, 나는 나 를 위해 다른 것들을 죽인다. 뺨이 따뜻해졌다가 순식간에 다시 차가워진다. 짭짤한 액체가 뺨 위로 흐르는 그 순간 허공으로 튕겨 나간다. 나는 살아있고, 그들은 죽었다. 그러니까 앙앙대고 떠들어대는 대신 살아가 라. 뒤를 돌아보지 말고 후회도 하지 마라. 따라 죽겠다는 말도 안되는 감 상따윈 집어치워라. 다 모두 내탓이라는 같잖치도 않은 자괴심따윈 갖다 버려라. 나는 지금 여기서 달리고 있고 미쳐있다. 미쳤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 미치지 않고선 살아갈 수가 없다. 잠까아아아안! 감상은 이제 그만! 여기서 끝! 우는 것도 여기서 끝! 끊을 것은 끊고 자를 것은 자르자! 나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새액새액하고 숨소리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보니 상태가 썩 좋은 것은 아니다. 자아, 여기서 머리 를 굴리자. 첫째, 나는 지금 킬트녀석의 말에 따르면 약 사나흘간은 제 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게다가 기억이 없다는 것은 내가 변신모드인 상태로 최소 사흘 간 있었다는 이야기다. 변신으로 있는 시간은 최소 하루가 기본 시간. 그 기본 시간을 무려 세 배나 초과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는 것은..........체력 이 바닥나 있다는 것은 뻔하디 뻔한 소리인데. 둘째, 나는 부상 중이다. 체력이 바닥나 있는 상태로 무리하게 바보 천치같 은 쌈박질을 하는 바람에 가슴은 한 주먹 뜯어내 구멍이 뚫린 상태고 팔 다리도 삐걱삐걱하는 걸 보니 뼈도 금간 부분이 있는 거 같다. 아까부터 아파 죽겠다고 바르르 떨리고 있는 이 팔뚝도 그러고 보니 어제 그 괴이한 봉인수들과 싸울 때 화상을 입었다. 이거, 온전한 데라곤 이빨밖에 없는 거 잖아? 셋째는 더 심각한 문제. 나는 배가 고프다. 이런 부상을 입은 상태로는 사 슴 한 마리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 사냥을 하기로 했다. 사냥을 해서 배를 채우고 휴식을 취하자. 최고의 몸상태만이 최고의 결과 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자아, 자아. 숨을 들이키고 쉬자. 쉬어. 젠장, 눈물은 이제 그만 흘리기로 했는데. 뜨겁다. 시끄러운 햇볕이 뺨을 후려갈기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눈을 떴다. 워낙에 온 몸이 아팠기에 나는 맨 처음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흠, 이상은 없는 것 같군. 내가 누워있던 곳은 절벽에 불쑥 튀어 나와 있는 커다란 바위 위였다. 사 방에 덤불과 마른 넝쿨, 그리고 내가 잡은 사슴가죽과 뭔지 모르는 털복숭 이의 가죽을 둘둘 감고 자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햇볕이 직통으로 내 면상 을 후려갈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붕이 없는 곳에서 잔 것도 오랜만의 일이군. 하품을 하고 팔 다리와 인사를 나누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자, 눈이 부셔 견 딜 수가 없다. 제길, 그렇게 찌르지 좀 말라고, 안그래도 일어날 테니까. "아우우우우웅." 이 절벽을 올라가면 다른 길이 나온다. 즉, 노스엘스턴으로 가는 길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노스엘스턴으로 가는 그 길을 내버려두고 서쪽으로 돌면 거기에 고왕국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왕년 내가 남긴 흔적들이 여기저기 나무 둥치에 남아있어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래서 평소에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필요한 법이다. 이런 걸 생활의 지혜라 부르는 법이지.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었다. 움직이는 데에 어려움은 없다. 나는 바닥에 누 워서 스스로 육포가 되기를 자청하고 있는, 사슴고기의 마지막 부분을 잘 라내 입안에 넣었다. 조금 질기군, 아아, 마미의 뜨끈한 스튜가 먹고 싶어. 선지를 듬뿍 넣은 그 선지국과 사과와 후추로 맛을 낸 새끼 돼지 통구이도 먹고 싶고. 이런 밋밋한 고기는 이제 질렸다. 너무 말라서 침이라고 흘려 넣기 전엔 넘어가지도 않는군. 어허, 뻣뻣해. 차라리 다른 걸 한 마리 잡아서 먹어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어디 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여긴 절벽인데? 고개를 들고 위를 쳐다 보자 무언가가 꼬물꼬물 기어 내려오고 있다. 참고 로 말하자면 이 곳은 절벽의 중간 지역, 다시 말해 절벽에서 혼자 툭 잘난 척 튀어 나온 바위 위다. 톡톡 하고 위에서 꼬물거리며 내려오는 녀석이 흘리는 돌멩이가 내 발치로 떨어진다. 이러다가 내 머리통에 맞는 거 아냐? 그 놈의 돌멩이를 피하기 위해 절벽에 찰싹 붙어서 녀석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그 위 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터져나왔다. "잡아!" "저 암살자를 잡아랏!" 허어, 저건 또 누굴까? 꼬물거리던 녀석은 누르틱틱한 옷을 걸치고 있는 녀석이었다. 밑에서 보는 거니까 잘 보이지는 않지만 누르틱틱한 옷에 누르틱틱한 신발에 누르틱틱 한 머리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흠, 멀리서 보면 이 놈이 도드라져 보이질 않겠구만. 주변의 절벽과 같은 색깔의 옷을 걸치고 있으니 말이야. "죽어랏!" 갑자기 위에서 다량의 돌멩이와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젠장! 이러다 내가 맞겠다. 나는 잽싸게 벽에 몸을 붙이고 날아드는 화살과 돌멩이 기타등등을 피했 다. 위에서 꼬물거리는 녀석은 그 많은 것들에 맞지도 않았는지 여유작작 네 다리, 아니 두 팔과 두 다리를 이용해서 내려오고 있었다. 어라? 자세히 위를 쳐다보니 절벽 위에서 꼬물거리는 녀석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것은 분명히 룬드바르제국군이다. 그 유별난 깃털모자 덕에 잘 기억을 하 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건 분명히 룬드바르의 적이란 의미가 아닌가? 호오, 이렇게 먼 곳에서 룬드바르의 적을 만나다니 감회가 새롭구만. 내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그 꾸물이는 꾸물거리며 내가 있는 바위 위에 도달했다. 그리고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내가 달라 붙어 있는 벽쪽으로 맹렬히 달려왔다. 아니, 달려오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바 로 나와 시선이 따악 마주쳤다. 누르틱틱한 그 녀석은 정말로 누르틱틱이어서 머리까지 누르틱틱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누르틱틱일 수 있는 것은 머리에 누르틱틱한 두건을 푸욱 눌 러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그 두건 사이로 두 눈알만 내놓고 있 었다. 다행히 그 눈알은 까만 색이었다. 어쨌든 주춤하던 녀석은 내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자 위에서 내려오는 화살의 비를 피해 잽싸게 절벽으로 달라 붙었다. 그리고는 나를 노려보면 서 은근슬쩍 살기를 피워 올린다. 건방진 자식, 피하도록 친절히 대해주었더니 내게 감히 살기를 날려? 그 때였다. 그 화살의 비 중 한 방울이 갑자기 그녀석의 어깨위로 투욱 떨어져 내렸 다. 덕분에 화살이 터억 꽂힌 녀석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올렸다. "으아아아악!" 그리고는 갑자기 비틀 비틀하더니 바위 아래, 즉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리 는 게 아닌가.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절벽에 부딪쳐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황당해서 아래를 내려다 보려다 말고 허공을 보았다. 거, 황당하네. 여기까지 내려오고선 저렇게 죽다니 말이야. 위에 있던 병사들은 녀석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죽었다 만세 따위등 을 외치고 물러서는 듯했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 보기 위해 바위 끝에 와 서 고개를 숙여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머리통을 얻어맞을 뻔했다. 피융하고 갑자기 누르틱틱한 놈이 아래서 튀어 오르는 게 아닌가. 녀석은 손에 가느다란 줄을-역시 누르틱틱한 줄이었다-어느 새인가 바위 한 끄트머리에 박아 놓고 있었는지 그 줄을 매고 뛰어 내렸다가 다시 기어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 찢어질 듯한 비명도 녀석의 수작이었던 모양이다. 녀석은 날 힐긋 보더니 어깨에 박힌 화살을 손으로 잡아 뽑아 내었다. 그 리고는 옷가지를 벗고 피가 솟아나는 그 어깨를 헝겊으로 묶었다. 그 조치 를 취하는 동안 나는 이 녀석의 움직임이 기묘하게 낯이 익어서 턱을 괸 채 녀석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중이었다. "넌 누구냐?" 녀석은 날 빤히 바라보더니 아예 못들은 척을 한다. 이 자식이? "룬드바르군에게는 왜 쫓긴 거냐? 아무리 보아도 엘프나 아인족같이 생기 진 않았는데?" 녀석은 대답대신 얼굴에 뒤집어 쓰고 있던 누르틱틱한 두건을 벗어던졌다. 헤엣? 녀석은 약간 갈색으로 그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평범한 얼굴인 것 같기는 한데 뭔가 얼굴이 다르다. 약간 가늘게 찢어진 눈매와 약간 낮 은 코, 그리고 작은 입술을 하고 밋밋한 눈썹을 하고 있었다. 못생겼다기보 다는 이건 엄청나게 이질적인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소년처럼 어깨가 좁고 가늘다. 이런 체구로 아까처럼 절벽을 휘익 휘익 뛰어 내리고 기어 올라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짧고 시커먼 머리칼을 한 녀석은 역시 까 만 눈으로 날 매섭게 바라보더니 짧게 묻는다. "너야 말로 뭐냐?" 나는 그 무례하고 건방진 녀석의 말을 듣고 녀석의 생명의 은인이 되기로 굳게 결심했다. 퍼억 소리와 함께 녀석이 뒤로 나자빠지자 마자 나는 녀석의 발목을 쥐고 절벽으로 조용히 들이밀었다. 그러자 으악하고 비명을 지를 줄 알았더니, 이 자식이 놀랍게도 발목을 내게 잡힌 채로 몸을 기이하게 뒤틀더니 두 주 먹으로 내 복부를 가격하는 게 아닌가! 퍼억 하고 녀석의 주먹이 내게 닿 는 순간 나는 상당한 충격으로 뒤로 물러섰다. 하마터면 녀석을 풀어줄 뻔 했다. 이럴 수가! "이 자식이 제법 재주가 있잖아?" 나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녀석의 발목을 쥐고 아래로 좌우로 대롱 대롱 흔 들어주었다. 그럼, 그럼 아낌없이 귀여워 해주지, 나는 너의 생명의 은인이 되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다고. "풀어!" 짧게 외친 녀석이 놀랍게도 그 와중에 품안에서 단검을 풀어내어 날 찔러 온다. 퍼렇게 반짝이는 비수의 날을 보고 나는 어마 뜨거라 하며 녀석을 허공으로 집어 던졌다. "우앗!" 녀석에게서 처음 놀람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물론 놀랐겠지. 녀석의 몸뚱이는 허공으로 치솟았지만 그 다음 순간 너무나 충실하게 대지 의 여신에의 사랑으로 아래로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가 평지 라면 쾅 하고 코뼈정도 부러졌겠지만 여기는 다행히도 절벽이다. 따라서 아래로 떨어져 내릴 곳이란 아주 아주 멀어서 녀석의 몸뚱이는 급전직하로 쏜살같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아.........." 이번엔 녀석의 입에서 진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아, 기뻐. 이제 녀석의 생명의 은인이 되어 줄 수 있겠구만. 나는 떨어져내리는 녀석의 뒤를 따라 몸을 던졌다. 녀석이 바둥거리면서 떨어지는 것을 보며 아주 기쁘게 녀석의 등덜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녀석보다 빨리 떨어져야 녀석을 잡을 수 있을 테니 있는대로 몸을 웅크렸 다. 이거 놓치면 살인자이고 잡으면 생명의 은인이라, 아슬아슬한 순간이잖 아? 터억 하고 녀석의 옷자락이 손안에 잡혔다. 기쁘지? 난 이제 생명의 은인 이야.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한 손으로 녀석을 잡고 한 손 으로는 절벽을 쥐었다. 퍼퍼퍽 하고 불꽃이 튀기면서 내 손톱이 다섯 개의 줄을 절벽에 그리기 시작했다. 다섯 개 손톱으로는 부족하니 그 다음에는 발톱을 슬쩍 밀어준다. 그럼 바바바박 하는 소리와 함께 발톱이 또다시 절 벽에 줄을 그린다. 내려가는 속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바로 이 때, 놀라운 속도로 녀석을 절벽에 밀어 붙인다! 퍼억 하고 큰 소리가 나긴 했지만- 아마 갈비뼈 정도는 한 두 개 부러졌겠지- 이 녀석은 성공적으로 추락을 멈추고 절벽에 박혔다. 오오 드디어 나는 친절하게도 이 녀석의 생명을 구 해준 것이다. "으윽윽...." 녀석의 입안에서 피가 터져나와 주르륵 흘렸다. 물론 아프겠지. 하지만 떨어졌어봐, 여기서 이렇게 아픈 걸로는 도저히 끝 나지 않을 게야. 안그래? 나는 녀석을 질질 끌고 다시 절벽의 위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의 혼절한 녀석을 지고 올라가는 거라 아주 간단했 다. 마침내 다시 바위 위에 올라선 나는 녀석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면서 미소를 던졌다. "너 누구니?" 나의 이 상냥한 질문에 피를 포롱 포롱 흘리며 헐덕대던 녀석이 재빨리 대 꾸했다. ".....훈이라고 합니다." 무척 예의 바른 녀석이구만. 그런데 뭔가 낯익은 이름일세? 녀석은 우욱하고 자기 가슴을 움켜쥐었다. ".....모욕을 주지 말고 죽이시오." 고개를 숙인 녀석을 보면서 나는 오랜만에 옛날 기억들을 뒤적였다. 어디 더라? 어디서 이 이름을 들었더라? 이거 상당히 귀에 익은 이름이란 말이 야.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상당히 낯익은 몸놀림을 하고 있었지. "죽이는 건 어렵지 않은데 너, 혹시 나 모르냐?" 녀석은 찢어진 눈매를 들어 날 바라본다. 아까 좀 부딪쳤는지 녀석의 오른 쪽 눈이 실핏줄이 터져서 벌겋게 충혈되어 있다. "모르오, 너같이 강한 놈은 모르오. 룬드바르군은 아닌 듯 싶은데?" 이 녀석 그러고 보니 말투도 좀 이상한 데가 있군. "응, 아냐, 난 지금 룬드바르 황제놈을 죽이러 가는 길이라 널 죽이고 싶은 마음은 솔직히 별로 없어." 대체 이 놈을 내가 어디서 알고 있는 거지? 아리송하네. 녀석은 내 말을 듣자 마자 고개를 반짝 들고 바라본다. "웃? 정말이오?" "그래. 그런데 너도 진짜 황제놈을 죽이러 온 거냐?" "네. 그렇소." 녀석은 진지하게 말했다. "이유는 뭔데?" "녀석은 내 가족들을 해치고 또 내 나라를 범하려 하고 있소." 뭔가 조금 심각한 이유네. "그래서 녀석을 용서할 수 없는 거요, 그래서 나는 그 황제놈을 죽여서 그 목을 내 나라로 가지고 갈 거요." "그거 가지고 가서 뭘 하게?" "당연히! 우리 집 앞에 걸어놔야 하는 거요!" "............." 조금 이상한 놈이라는 건 확실한 것 같군. "집앞에 걸어 놓을 이유라도 있나?" "그야, 훈이 룬드바르의 황제를 죽였다라는 증명이지요. 너는 그것도 모르 오?" 녀석이 진지하게 말한다. 나는 또 녀석의 말투에서 뭔가 거슬리는 점을 느 꼈다. "너라고 하는 강한 놈이 나를 도와주신다면 나는 정말 기쁠거 같으오." "내가 왜 널 도와주는데?" "음, 같은 목적이니까. 만약에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할 지라도 나를 방해 하진 않겠지요? 당신같이 강한 놈은 사실 혼자서도 모든 걸 할 수 있을 테 니까." 녀석이 불안한 듯 흘긋 날 바라본다. 거참, 이거 뭐라고 말해야 되나. 이 녀석 뭔가 무지 무지 거슬리게 말하는 데 그걸 꽈악 집어서 말하기가 어렵네. "너의 나라가 어디냐?" "동방교국." 녀석은 진지하게 말했다. ============================================================ ============ 아, 글마다 앞에 시 비스끄무리한 것이 나오는데 그거 제가 쓴 거 맞습니 다.^^;; 버어딜런의 시와 포우의 시도 나왔었지요. 제가 쓴 게 아니면 by 아무개 라고 표기해 놨습니다. 오오, 이제 일기처럼 되어간다! 잡담일기 2 2000년 1월 13일 목요일 비오다 눈뿌림 제목: 술에 대하여 오늘의 중요한 일: 1. 쿠베린을 연이어 올리다! 2. 세정이가 우유 130cc 먹다! 흠, 연이어 글을 써 보는 군. 이게 다 엄마덕이다. 엄마가 세정이를 보고 있으니까. 제목이 술에 대하여 이니, 술에 대해 쓰기로 한다. 흠, 술. 술이라는 건 참 이상한 것이다. 세 잔 마시면 아쉬워서 버둥거리고 한 병 마시면 알딸딸해지고 두 병 마시 면 흐뭇해지며 세 병 마시면 괴로워진다. 물론, 소주의 경우다. 양주의 경 우는 반으로 줄여서...;;; 내가 어릴 때에, 즉 아직 호랑이가 소백산 기슭에서 노닐고 노루와 사슴 이 집안 뜰까지 들어와 밤참을 얻어먹던 시절, 나의 최초 술은 소주였 다.;;;(잠시 먼 산을 바라본다) 7살 때 정도라고 기억하는데, 온 식구들이 소풍을 갔다. 그 당시만 해도 뭐 소풍이라는 것은 들뜨고 행복한 물건이어서 다들 기쁨에 겨웠다. 그리 고 당연한 일이지만 부모님들은 고기를 굽고 애들은 김밥과 과자를 먹었는 데 고기를 구우면 반드시 따라오는 필수적인 아이템인 소주가 끼어 있었 다. 즉, 어른들은 고기 굽고 술 마시며 노시고 계셨다는 이야기다. 한편, 풀밭에서 다른 애들과 놀던 나는 어린이답게 과자를 너무 먹은 나머 지 목이 말라서 물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리고 드디어 컵과 물을 발견하고 는 발칵발칵 들이켰던 것이다. 물론, 그 다음 기억은 없다. 그것이 첫 음주. 기억이 없다는 게 슬프다. 기억에 남는 첫 번째 맥주도 역시 7살 때. 할머니께서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언제나 따던 오비맥주-아, 오모맥주 로 정정-가 그것이다. 할머니는 기분이 좋으시면 나를 앞에 앉혀 놓고, "허어, 한 잔 따라 보니라." "엽, 그럼 한 잔 올리겠나이다." "어, 잘도 따르는 구나, 그럼 너도 한잔." "엽, 기꺼이 받겠나이다." 이렇게 된다. 그 다음 본격적으로 대중(?)앞에서 마신 술은 물론 제사 때. "음복해라, 음복." "와아아아아..." "아, 저는 술은 좀...어제 진탕 마셔서 머리가 울려요." "안돼! 음복이야!" "흑..." 한 술 하는 우리집안 식구들은 모이면 무조건 술이 나오는데 그 술의 종류 도 무지 다양하다. 여자들은 간단히 포도주로 시작한다(물론 법주로 시작 할 때도 있다). 그리하여 조금 세게 나가면 소주와 양주로 발전한다. 물론, 남자들도 비슷하다. 음복을 위하여 처음에는 법주를 마시지만 그 다음은 소주와 양주로 발전한다. 물론 양주가 없으면 소주로 계속 이어지다가 결 국은 맥주로 입가심을 한다...라는 순서지만. 이렇게 마시는 술은 본격적으 로 마시기 시작하면 우리 사촌들과 우리 삼남매가 마시는 술만도 소주만 한 박스가 넘고 법주만 댓자로 세 병이 넘는다. 물론 맥주와 양주, 포도 주, 매취순은 세지도 않는다. 왜냐? 술은 개인 취향대로 마시니까 정량을 모른다가 정답이다. 오죽하면 우리 남편이 "나도 끝까지 함께 마시며 가고(?) 싶어요..."를 부르짖을 것인 가...;;; 뭐, 어찌되었든 우리나라 주류 소비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는 중에 나 는 임신을 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걱정을 했다. 임신하면 당연 금주가 아닌가. 그런데 그게 아쉽지 않은 게, 지금도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애를 가지니 술 이 전혀 땡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놀라와라. 간혹 다른 분들이 나보고 다들 담배도 하느냐고 묻는데- 심지어 어떤 분 은 내가 골초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원래 담배는 싫어한다. 기관지가 약해서 골골거리는 탓에 담배는 상당히 싫어한다. 남편이 피우면 밖으로 내쫓는다. 그래서 물론, 금연하는 건 쉬운 일이다. ^^ 훗, 애 덕분에 바른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요즘은 애도 낳았고 시간도 그럭저럭 석 달이 지난 지라 술이 슬슬 먹고 싶다. 좀 지나면 먹어보도록 해야지.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것은 적포도주. 얼마 전 동생이 좋은 술을 구했다는데 먹어봐야지 ^^ 제 목:[쿠베린] 제 20화 광 란 8 관련자료:없음 [21567]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0-02-10 23:40 조회:1454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8 이름이라는 건 정말로 기묘한 의미가 있다. 맨 처음 나는 룬드바르녀석의 이름을 그냥 룬드바르 녀석이라 불렀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인간들은 그를 처음에는 대공이라 불렀고 그 다음에는 사악한 침략자라 불렀고, 그 다음에는 황제폐하라 칭한다. 그리고 요즘은 대륙을 통일하려는 대망을 간직한 영웅으로 변해가고 있다. 대륙을 통일한다는 것은 실은 인간들만의 이야기다. 인간이 아무리 여기 저기 침 략을 한다고 해도, 하늘을 나는 새들을 장악하지도 못하고, 숲안의 짐승들 과 그 안의 아인족들과 인간들 사이에 숨어있는 모든 수인족들, 그리고 깊 은 산 속에 숨어있을 무수한 존재들을 전부 제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 론, 이 녀석은 최초로 고왕국까지 전진하고 있었다. 이 암흑산맥을 넘어 아 무도 장악하지 못했던 고왕국까지 전진하는 이 녀석의 행보는 실로 대단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하지만' 이다. 그건, 그렇고... ..., 대체 이 놈을 내가 어디서 봤지? "그러니까 당신은 대단히 빠르게 달리고 있으오." "나는 원래 빨라." 그나 저나 어떻게 이 놈은 날 따라 달리는 걸까? 놀라운 속도다. 물론 땀 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기는 하지만 나를 뒤따라 달린다는 것 자체가 놀람 그 자체다. 아인족중 가장 강하다는 푸른 아인족의 린도 나를 뒤따르지 못 해 내가 들쳐업고 뛰었을 정도인데 이 놈은 인간인 주제에 나를 따라 달리 다니. 나는 녀석을 돌아보지도 않고 거목을 하나 발톱으로 찍으며 다시 도약했 다. 녀석은 내 뒤를 이어 도약하다 말고 거목에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지만 잽싸게 손바닥을 대어 튕겨내더니 다시 내 뒤를 따라 내달렸다. 숲은 이제 끝나가고, 앞으로 남은 길은 고왕국으로 향하는 길뿐이다. 아, 방금 고왕국 으로 가는 결계석을 지나쳤다. 그건 그렇고 이 인간놈을 데리고 달릴 수 있다고는 나로서도 상상도 못했다. 녀석의 움직임은 인간이라곤 믿어지지않는, 거, 자꾸 반복하게 되지만 인간 답지 않은 속도와 정확함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문득 녀석이 땀을 줄 줄 흘리긴 하지만 호흡이 거칠지 않다는 데에 놀라 달리던 걸음을 멈추었 다. "이봐." "말하시오." 녀석이 내가 팔짱끼고 멈추자 자신도 내 앞에 멈추어 서며 말했다. 녀석의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지만 호흡은 그런데로 거칠지 않았다. 게다 가 눈도 지쳐서 널부러질 것 같은 흐릿한 상태가 아니라 똘망똘망했다. 체 구가 가녀린(?) 이런 놈이 날 따라오다니. 감탄함과 동시에 나는 의문을 느 꼈다. 이 놈, 혹시 또 킬트의 그 빌어먹을 제자들이 만든 모조품아냐? 진짜 인간이라면 이렇게 말짱할 리가 없잖아? 그러고 보니 생김새도 이상해, 역 시 그 이상한 취향을 가진 놈들이 만들어낸 모조품일 지도 몰라. 내가 녀석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는 동안 녀석은 바짝 달라붙은 옷가지를 적당히 벌려 바람을 맞았다. 그리고는 생각난 듯 묻는다. "근데, 이봐, 당신은 정말로 빠르시오만, 대체 어떤 단련을 하고 있는 것이 오?" "단련? 원래 이 몸께서는 강하신 분이시다. 물론 그동안 무수한 녀석들을 쓰러뜨려 온 나의 시간도 한 몫을 하지만 말이다." "오오, 그랬군. 나는 너같이 강한 놈은 처음이기 때문이오. 사실 나도 무수 한 강자를 만나 그들을 쓰러뜨려 왔지만 당신같이 강한 놈은 처음이오." 너라고 하든지 당신이라고 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게 어떠냐? 나는 부글부글 끓는 기분을 억누르면서 애써 웃었다. "네녀석은 인간이 맞냐? 아니면 동방교국인은 다 너 같은 거냐?" 녀석은 두 눈을 깜빡이더니 갑자기 하하 웃기 시작했다. "아아, 너도 똑같은 걸 묻는 구료. 동방교국인들도 단련을 하지 않은 자들 은 약하오. 그러나 나는 단련을 했고, 따라서 당연히 강한 거오." "단련? 그 단련이란 건 어떤 거지?" "아, 당연히 사람을 죽이는 단련이오." 녀석의 말에 나는 잠시 동방교국인들에 대한 나의 상상을 접었다. 이 인간 들은 역시 정상이 아니었던 게야. 녀석은 나의 태도를 오해했는지 잘난 척 가슴을 펴고 의기양양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들 가문은 무척이나 강한 가문으로 본국에서도 약 5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오. 물론, 이 곳 서방인들은 우리들의 강함을 모르고 계시오." 관두자. 나는 녀석의 말을 귓등으로 들은 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황급히 녀석이 숨을 삼키며 뒤따라 달리는 것을 무시하고 일단 내 페이스로 달리 기로 마음먹었다. 초록빛은 검은 빛이 되고 바람은 존재를 가지고, 바위는 계단이 된다. 땅위의 모든 것들을 모두다 겨드랑이 밑으로 두고 뛰어오른다. 땅은 땅, 하 늘은 하늘, 그 선명한 경계를 넘으며 심장 소리를 듣는다. 심장 소리, 심장 소리, 두근두근두근... ... 이처럼 손이 닿지 않은 숲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인간들과 아인족들과 엘 프들에게 둘러싸여있던 숲은 이제야 제 정체를 드러내고 내 앞에서 위용을 자랑한다. 강자에게만 굴복하는 숲의 것들이 일제히 나에게 아는 척을 하 며 존재를 과시한다. 그래, 안녕한가, 큼직하고 늙어빠진 이름도 모르는 나 무, 안녕한가, 나무 위에 숨은 이름 모를 넓적한 새. 안녕한가, 수풀 속에 숨어 날 보고 도망치는 자그마한 사슴. 바닥을 기는 작은 도마뱀과 커다란 도마뱀, 그리고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창공의 매. 나는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며 웃는다. 이 숲 안 모든 것들이 듣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내는 소리, 냄새들을 느끼면서 웃는다. 이런 건 몇 년만일 까? 내가 어린 시절 홀로 숲을 거닐며 성년을 맞이했던 그때였던가? 인간 이 드물고 드물었던 그 옛날, 아무도 없는 원시림의 숲을 헤메이고 아무도 없는 계곡에서 물을 마시던 그 옛날, 그 때는 적막한 공기 속에 무수한 것 들이 냄새를 피어올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자, 잠깐! 여기서 이러면 또 곤란해. 옛날이여를 외치는 것은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일. 제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나가자. 이러다 내가 갈 길을 잊고 바보처럼 헤벌레 숲에 취할까 무섭구만. "자, 자, 잠까아아안!" 갑작스런 외침 때문에 나는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 렸다. 그렇군, 나는 혼자 달리고 있던 게 아니었지. 저 멀찍이 한 녀석이 헐떡대는 게 보인다. 나는 걸음을 되돌려 그 녀석의 가까이로 다시 달려갔다. 바위를 건너 뛰고 시냇물을 건너뛰고 나무를 찍 으면서 녀석의 곁에 도착하자, 녀석은 바짝 마른 개구리처럼 바닥에 널부 러져 있었다. "저, 정말...저, 정말 빠르시오." "너도 꽤 하네, 여기까지 쫓아온 걸 보니." "학학학........" 녀석이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나는 입을 열어 조용히 물었다. "쉬는 김에 물어보자. 너는 어떻게 룬드바르를 암살할 계획이냐?" 녀석의 반쯤 감긴 눈이 반짝 떠 졌다. 땀으로 범벅이 된 녀석은 심장을 입 으로 토해낼 듯 헐떡거리면서 바닥을 기더니 웬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바 닥에 주욱 그었다. "잘 보시라." 잘 볼테니 네 심장이나 튀어나오지 않게 부여잡아라. "여기, 여기, 헥헥헥... ..., 우리들은 지금 막, 헥헥헥... ..., 고왕국의 경계를 넘어서서, 헥헥헥... ...," 천천히 말하라고 말하는 대신에 나는 바위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대체 이녀석을 언제 본 거지? 냄새도 낯설고 얼굴도 낯선데 왠지 동작만은 눈에 익단 말이야. "헥헥헥... ..., 고왕국의 수도로 진격하고 있는 황제를, 헥헥헥... ..., 쫓아가고 있는 중이라 그거요. 그렇지 않소?" 그렇다고 치자. 녀석은 호흡을 정돈하면서 다리를 꼬고 바닥에 철썩 앉더니 막대기로 괜히 줄을 죽죽 그어 보였다. 그러면서 진지한 나머지 홀라당 뒤집힐 듯한 눈으 로 날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고왕국의 수도는 장방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방사형의 대로가 수도를 꿰뚫 고 있다고 들었소. 그리고 그 수도의 중심에 존재하는 것은 왕궁, 그 왕국 으로 진격하기란 찬 죽 훌렁 마시기보다 쉽다고 생각하오." 차, 찬 죽 뭐, 어쩌고 저째? "따라서 황제는 중군을 이끌고 그 방사형 대로를 따라 진격할 거라는 정보 를 이 분이 입수하셨오. 따라서 이 분은 황제의 부하중 한 명으로 변장하 여 그 뒤를 따를 작정이오." "들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 내가 웃겨서 말하자 녀석은 흐 하고 입가가 주욱 찢어진 맹한 웃음을 선보 였다. "이 분은 여지껏 실패라곤 단 한번 만 해본 분이오. 그 외에 이 분은 실패 라곤 없오." "이봐, 실패라곤 단 한번만 해봤다구? 단 한번도 없는 게 아니고?" "물론이오. 이 분은 무척이나 강하오, 단 한번의 실패후 각고의 노력 끝에 완벽하고 절묘한 수법을 많이 개발하였오." 이걸 지금 내가 말이라고 듣고 있어야 하는가? 나는 잠시 하늘을 보았다. 이 헤벌쭉 웃는 녀석은 다시 진지한 어투로 묻는다. "당신이란 놈은 어찌할 거요? 당신도 황제를 노리는 거요?" "정확히 말하면 나는 황제 옆에 있을 마법사들을 노리는 거지." "마법사도 아니고 마법사들? 그렇다면 여러명을 노리는 거요?" 이게 말뜻을 아주 잘 알아듣네? 녀석이 다시 히죽 웃었다. "나도 마법사 아주 싫어하고 있소. 만약에 당신이 마법사를 죽일거라 한다 면 나는 기꺼이 협력하고 싶어졌소." 나는 한 숨을 내 쉬고 이 녀석을 무시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녀석이 뭔 짓을 하든 내 알 바가 아니다. 그리고 이 놈이 협력따위를 얻을 나도 아니 지. "난 가련다." "아, 내가 약해 당신의 모가지를 잡아 대단히 미안하오. 어서 가시오." 녀석은 선선히 말했다. 이런 면은 조금 다른 놈들과 다르군. 다른 놈들 같 으면 같이 하자, 도와줘요를 연발할 텐데 말이야. "이 그림자 가문의 훈, 절대로 은인은 잊지 않으오. 도와주어 대단히 감사 하오." "알았다." 홱 돌려서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녀석이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 지 알 바 아니지만 어쨌든 내달리면서 녀석의 정보를 생각해 보았다. 나도 고왕국에는 가본 적이 없는데 녀석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뭐? 수 도에 대로가 뚫려있어서 침략이 용이하다고? 하? 정말 웃기는 나라야. 그 신비의 고왕국이라는 곳에 대로가 뚫려있다니? 이 암흑대륙 깊숙이에 박혀 있는 나라가 대로를 뚫었다니? 그건 또 뭔소리야? 아, 가만, 잠깐, 잠깐. 잠 까아아안! "그림자의 훈?!" 나는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하다말고 고개를 팩 돌려 뒤를 돌아보았 다. 녀석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나는 한동안 멍청히 뒤를 바라보다가 고개 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 잡담일기 3. 2월 9일 수요일. 춥다. 제목: 통신소설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써놓고 보니 뭐, 상당히 심각한 이야기가 되는 듯 하군. 하지만 오 랜만에 그럴듯하게 열이 받았다. 원래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그다지 구애를 받는 편이 아니다. 그가 그러면 그런가부다, 그가 아니라면 아닌가 부다 하고 넘어가는 편인 데 얼마전 나우와 천리안에 갔다가 썩 기분 좋지 않은 것을 보았다. 뭐, 가 끔 통신에 글 올리다가 소설을 출판하게 된 분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듣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전민희씨의 후기에 보면, 어떤 분이 어디까지 출판된 건가요? 어디서부터 가 출판되지 않은 건가요? 라고 묻길래 애써서 여기까지가 출판한 부분이 고 여기부턴 아닙니다 라고 대답을 했더니 그 물었던 당사자가 게시판에 떠억 하니 '이만큼 보내주세요' 라고 글을 올렸다고 했다. 그리고 소설을 출판하자마자 멜이 갑자기 폭주하면서 글 보내주세요, 뭉텅이글 주세요라 는 글들이 서슴지 않고 온다고 한다. 뭐, 나도 겪었던 일이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 편이긴 하지만 때때로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젠 화가 난다기 보단 슬프기까지 하다. 어차피 통신에 올라왔던 글이니까 보는 것, 다운받는 것 공짜다. 일단 올라 오면 씹는 것도 내 맘이고 저장하는 것도 내 맘이다 까지는 있을 수 있다 고 생각한다. 출판된 거 알고 있지만 글 좀 보내주세요, 죄송해요 라고 말 하는 것은 그래도 애교라고 생각한다. 미안한 걸 아니까. 지인들끼리 모여 서 서로 뭉텅이글 몰래 주고받는 거,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나도 그러니까. 그러나, '통신에 올라와서 조회수 높아졌으니까 우리가 널 키워준 거다. 그러니까 네 글 갖고 우리가 어쩌든 그건 우리 맘이다. 일단 올라온 거니까 통신소 설은 공개된 것이다, 따라서 작가 너무 땍땍거리지 마라. 은혜도 모르는 것 들아.' 라고 말하는 것은 저작권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게 아닌 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글을 통신에 올리고 싶은 맘을 싹 가시게 한 다. 얼마 전 지워졌던 아샨타 관련 잡담을 읽다가 나는 기가 막혀 버렸다. 그 렇다면, 통신에 굳이 글을 올리는 이유가 없지 않을까? 분명히 처음에는 즐거움으로 글을 올렸다가 출판되게 되었지만 출판이 아니고서도 내 글은 내 글이다. 작자가 글을 올려서 보는 사람 즐겁고 본인 즐거우면 그걸로서 좋은 일, 그러다 호응이 좋아서 출판되게 되면 작가는 기쁘다 고맙다 라고 생각하다가도 정이 떨어지게 된다. 실제로 나도 상당히 그렇게 되었다. 안좋은 꼴을 많이 보면 정이 떨어지는 건 인지상정이다. 통신에 글 올리 다가 소리 없이 사라진 작가들은 대부분 그런 일을 겪었다고 생각해도 될 듯싶다. 글쎄, 다른 분들이야 어쨌든 간혹 나도 이런 저런 글들을 볼 때마 다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럭저럭 글을 올리는 게 2년이 넘어가고 있어도 말이다. 나는 아샨타의 일 같은 경우는 작자가 잘못한 것은 한 가지에서 두 가지 라고 생각한다. 내가 다른 분을 잘못했다 나쁘다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첫째는 출판되니까 삭제합니다 라는 글과, 더 이상 연재는 않고 글 좀 다 듬겠습니다 라는 공고문을 안띄운 것이다. 그 것 이외에는 공식적으로 잘 못한 것은 없다고 본다. 글 연재하다가 사라진 것은 의리상 문제가 되긴 하지만 그건 작자 마음이니까 별 수 없다. 독자는 너무해 라고 욕을 할 수 는 있겠지만 그건 우리 껀데 왜 니 맘대로 하냐 라는 소리는 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나도 아샨타 잘 보다가 사라진 것에 대해 씁쓸했다. 기분도 나빴다. 왜 연 재하다 말고 공고도 없이 사라졌나 기가 막히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건 작 가 맘인 것이다. 작가가 자기글 지운다는 데 대체 뭐라 할 수 있나? 그 것 이외에도 조용히 사라진 글들이 더 있다. 그런데 그 분들의 글에 대해선 조용하고 아샨타에 대해서 시끄러운 것은 역시 그게 인기작이기 때문이겠 지만. 하지만 그렇게 화를 낼 정도로 그 글을 좋아했다면 글 쓴 사람을 그 렇게까지 깔아뭉갤 수가 있는 것일까? 좋아한 만큼 배신감이 너무 커서 그 런가? ;;;; 통신 독자들이 이렇게 횡포하다면 글을 올리는 즐거움은 반감된다. 이렇게 된다면 니 글은 개판이야, 좀 잘쓸 수 없냐 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게 낫 다. 글은 작가 것이다. 보는 사람이 씹고 찧을 수는 있어도 본질적으로는 작가 것이다. 통신에 올라왔다고 해서 그 글이 다른 사람의 것이 되는 건 아니다. 불법복제품이 왜 우리나라에서 성행하는 지 생각 좀 해줬음 좋겠 다. 아, 심각해졌다. 끌끌.....;;;; 제 목:[쿠베린] 제 20화 광 란 9 관련자료:없음 [21568]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0-02-10 23:41 조회:1378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9 고왕국, 그랑프라임, 프라임, 어찌되었거나 지지리 못난 엘프쪼가리들의 왕 국. 원래 인간들의 왕국에 대해서 어떠한 환상도 품지 않는 나이지만 솔직히 말해 이번만은 조금은 환상을 품었다. 무엇보다 천여년 가까운 세월을 버 텨온 왕국이잖아? 당연히 뭔가 있을 거라는 환상을 품을 수도 있지. 하지 만 그 환상이라는 것은 고대 엘프 풍의 옷을 걸치고 흉내를 내고 있던 그 어줍잖은 태자녀석을 보는 순간 완전히 깨졌다. 인간이 대체 엘프 흉내를 내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아무리 말랐어도 오크는 오크이며 아무리 키가 커도 드워프는드워프다. 머저리 같은 것들. 천년동안 그 머저리 짓을 해왔 다면 머저리들이 쌓이고 쌓여 길가에 지천으로 깔려있겠군. 결국 길가다 밟히는 것들 모두가 다 머저리라는 말이 된다. 나는 갑자기 이대로 발길을 돌려 내 사랑스런 도시 엘리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나지막한 둔덕을 넘고 막 길다운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전쟁터의 시체다운 태도로 길가에 이리저리 부서진 인형처럼 구 르고 있었다. 가느다란 몸매를 한 고왕국인 특유의 병사들이 대부분이었고 가끔 생각난 듯이 룬드바르제국군 녀석들의 깃털 모자가 바닥을 구르고 있 었다. 피에 젖고 흙이 묻은 시체들과 혼자서 색깔 찬란한 그놈의 깃털 모 자는 무척이나 대조를 이루고 있어서 어딘가 아귀가 안맞는 기분이 들었 다. 원래 고왕국으로 가던 길의 초병들이였는지 혹은 정찰대였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약 이십여구의 시체들 대부분은 고왕국 녀석들이 었다. 그리고 발자국이 사방에 널려있다. 그 수많은 발자국탓으로 그다지 좁지도 않은 길바닥은 온통 구멍투성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길은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즉, 다시 말해 녀석들의 발자 국이 이놈의 길바닥을 완전히 밭 갈 듯이 뒤집어 엎었단 이야기다. 이런 정도면 적어도 수백을 넘었을 게다. 역시 제대로 길을 찾고 있었군. 나는 코를 들어서 시체냄새 이외의 것을 찾기위해 노력했다. 인분냄새와 인간이 무두질한 가죽냄새, 그리고 입안이 알싸한 그 쇠냄새. 냄새들은 사 방에 널려 있었다. 나는 길을 따라서 다시 발을 옮겼다. 제대로 뒤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니까 조금 속도를 높이는 게 좋겠다. 햇빛은 여전히 빌어먹게도 찬란하다. 등덜미로 와 닿는 노란 광선은 적당 한 열기를 전신으로 보내주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이 곳은 춥다. 엘리야의 벽난로가 그리워지는군. 아아, 기묘한 기분이다. 나는 사슴 넓적다리를 하나 입에 물면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연달아서 파란만장한 시간이 계속되기는 내 살아오면서 처음일 지 도 모르겠다. 인간세상에서 살아온 것은 줄잡아 오십여년 정도인가, 아니면 육십? 어쩌면 백년일 지도 모르지. 엘리야에서 살아온 것만도 이십여년이 니까. 엘리야... ... 깡패, 상인, 하플링, 오크, 드워프, 아인족, 창부, 인부, 용병, 어부. 그 모든 존재들이 엘리야에서 살고 있다. 그들이 정말로 이 땅위에 존재하고 있다 는 것을 그 작은 항구도시 하나에서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나는 고기를 천천히 씹으면서 입밖으로 넘쳐난 피를 혀끝으로 핥아 삼켰 다. 정말로 인간이 대륙 전체를 장악하면 드워프들이 편안하게 망치질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오크들이 숲속에서 겔겔겔 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인가? 인어 들이 웃으면서 바닷가에 놀러올수 있을 것인가? 아인족들이 카페트를 팔러 올수 있을 것인가? 하플링들이 빵을 구울 수 있을 것인가? 수인족이 지금 처럼 태연하게 자신의 몸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엘프들이 자신들의 지 나치게 기나긴 이름을 읊을 수 있을 것인가?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하기에는 나는 너무 나이 가 들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순진하지 않다. 제기랄. 다 먹어치운 뼈를 집어던지면서 나는 다시 일어섰다. 잠을 자고 싶지만 별로 잘 새는 없을 것 같다. 룬드바르 제국군은 나보다도 앞서 나가고 있 고 나의 일족들은 이미 고왕국에 있을 것이다. 이 속도로 나가면 나는 제 국군을 앞지를 수 있다. 겨우 나보다 닷새 먼저 출발한 그들을 따라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니, 이 발자국으로 보건대 오늘 해가 지기도 전에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겠군. 그건 그렇고 정말 이 자식들 빠르군. 인간의 군대가 웬일로 이렇게나 빨 라? 순간 나는 멍하니 발걸음을 멈췄다. 어째서 아직까지 그 생각을 못했던 걸까? 당연하지 않나? 이 암흑산맥은 어느 누구도 들어오지 못했던 최악의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 에 난데없이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다니. 그런 일이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저 빌어먹을 엘프숭배집단이 그 동안 무사해왔던 것은 그 들이 잘나서도 아니오, 인간들이 못나서도 아니다. 단지 이놈의 세룩-엘라 마이야산맥이 너무나 험준해서 그 가는 길목이 너무나 험준해서 대군을 이 끌고 들어올 수가 없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헌데, 이 급조된 군대인 룬드바 르제국군은 수천, 아니 어쩌면 수만이나 되는 군대를 어떻게 이 암흑산맥 깊숙이에 보낼 수가 있었던 건가? 그것부터 미리 생각했어야 했다. 자, 생 각해! 생각해! 바닥을 다시 바라보았다. 땅바닥에 찍힌 무수한 발자국들. 이 발자국들은 정말 어디서 나타난 거지? 공중에서 툭 떨어진 것도 아닐텐데 어떻게 앞 뒤도 없이 고스란히 이곳에 터억하니 찍혀 있는 거야? 나는 뒷걸음질을 쳐 서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역시 그렇다. 이 앞은 발자국이 없다. 말 그대로 갑자기 뚜욱 하고 나타난 발자국들. 아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 아니 어쩌면 맨 처음부터, 마튜스에 갑작스레 나타난 그 군대들 부터도 이상했다. 대체 그들은 어디서 나타난 거지? 이 묘인족의 다리를 이기고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다는 게 가능한 일이란 말이 야? 게다가 어째서 이 암흑산맥의 나무들은 하나같이 전혀 다치지 않은 채 고고한 척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거지? 인간들이 나무를 그대로 두고, 숲을 그대로 두고 통과했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인간들은 걸어다니는 흉 신이다. 그들이 지나간 길에는 남아나는 게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산 맥의 나무들은 다친 곳이 거의 없는 원시림 그대로의 모습을 자랑하고 있 었다. 부서진 나뭇가지, 짓밟힌 벌레 하나 없이 이동하는 군대. 소리 소문도 없이 닥쳐와 번개같이 상대를 쓰러뜨리는 군대. 나는 멍하니 서서 여지껏 내가 지나쳤던 사실들을 하나씩 하나씩 떠올렸 다. 맙소사. "야, 오늘은 어디지?" "잔소리마. 그러나 저러나 정말 발이 아프군." "걸은 건 실제론 얼마되지도 않으면서 엄살은." "배가 고파." "전리품은 챙겼어?" "뭘 한게 있어야 챙기지, 너무 서둘러 오느라 아무 것도 챙길 수 없었 지....." 언제나 그렇듯 인간의 군대는 시끄러웠다. 나는 그 거대하고도 거대한 나 뭇가지 위에 앉았다가 이리 저리 움직이며 녀석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냥 박살을 내는 것도 괜찮긴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는 아니다. 뚱뚱한 녀석이 앞서서 네모난 상자를 이고 가는 홀쭉한 녀석에게 말을 걸 고 시시덕거리자 앞서가던 말대가리같은 녀석이 조용히 하라고 고함을 지 른다. 녀석, 여기서 제일 시끄러운 놈은 네 놈이다. 어쨌거나 인간다운 걸 음걸이로 뒤뚱이면서 풀숲을 뒤지며 걷는 녀석들은 불쏘시개로 쓸만한 것 들을 찾고 있었다. 바로 녀석들이 걸어온 저 편에 제법 그럴 듯한 넓은 장 소에서 다른 녀석들은 저마다 개미처럼 움직이며 잠자리와 식사를 준비하 고 있었다. 시퍼렇다못해 검푸른 녹음 속에서 녀석들이 움직이는 것은 어쩐지 기묘한 위화감이 든다. 녀석들은 숲의 정적을 깨고 불을 붙인다, 식사준비를 한다 하며 떠들어대느라 바빠 보였다. 각자 무기를 그런대로 챙겨들고 있는 것을 보아 녀석들은 그런대로 정병이 라 부를 수 있는 군대인 것 같다. 약 칠팔백은 되어 보이는 녀석들은 경비 를 서는 놈들, 주변을 살피고 있는 놈들, 이런 곳까지 나와 차를 마시면서 사방을 훑어보고 있는 오만한 자세의 녀석들까지 다양한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녀석들은 혼자서 움직이는 일은 삼가고 있는 듯해서 조 금 실망이다. 뭐, 어쨌거나 저렇게 지도를 봐가며 이리 저리 살피는 저 놈 이 우두머리인 것 같은데? 아, 아니다. 그보다 먼저 막사가 마련된 곳, 룬 드바르 녀석들이 좋아하는 짙은 남색의 막사가 쳐진 곳이 바로 우두머리의 처소가 틀림없다. 모두들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 안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두머리, 두목, 두 령, 대장, 왕, 황제등 우두머리의 종류들이 모두 제일 먼저 편하게, 제일 먼 저 안전하게, 제일 호화스럽게, 제일 맛난 것을 먹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 른 놈들의 막사는 아직 펼쳐지지도 않은 이 곳에서 제일 먼저 막사는 물론 이오 식사할 탁자까지 펼쳐 놓고 음식을 늘어놓고 있는 저 놈이야 말로 우 두머리인 것이다. 시퍼런 낯짝을 한 음침한 얼굴의 여자 하나와, 노리끼리한 낯짝을 한 두 명의 사내놈은 모두 마법사의 로브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다. 회색 로브를 걸친 여자와 검은 로브를 걸친 사내놈 모두가 피로한 기색이었지만 등 뒤 로 보이는 녀석들은 전혀 피로한 빛을 띄우고 있지 않았다. 그 등 뒤에 선 녀석들을 보고 나는 이 세 놈들이 모두 킬트의 제자임을 확신했다. 정말로 독창성 없는 이 놈들은 전에 마튜스의 성에서 보았던 오우거와 비슷하지만 오우거는 아닌 그 덩치만 큰 놈들과 같은 것들이었다. 정말 맛은 없었 지....... 녀석들은 역시 이 세 놈 마법사들의 호위인 듯 그들의 등 뒤로 두 팔을 주 욱 늘인 채로 입을 헤 벌리고 이빨을 드러낸 채로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 다. 그 덕분에 지나가던 병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낯짝이 퍼런 계집은 아무리 보아도 미녀라고는 하기 어려웠지만 일단 눈 코 입은 제대로 다 박혀 있었는데 무척 지친 듯 헐떡이고 있었다. 그 옆에 서 알랑거리면서 이걸 드세요 저걸 드세요 하고 있는 두 사내놈은 얼굴은 노리끼리 했지만 그런데로 반반한 낯짝이었다. 낯짝 퍼런 계집에게 문득 노리끼리1이 어깨로 담요를 덮어주자, 이에 질새라 노리끼리2가 계집에게 이걸 드세요 하면서 스프그릇을 내민다. 아니, 내민다기 보다는 거의 바치 는 수준의 몸짓이었다. 그것을 여자가 받아 들자 노리끼리2는 괜히 몸을 비비꼬면서 뒤로 물러섰다. "피로하시지요? 마스터?" 담요를 덮어주었던 노리끼리1도 질새라 괜히 여자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 했다. "..........." 그러나 여자는 말이 없다. 아마 말하기도 귀찮은 듯 반쯤 눈을 감은 채 입 을 다물고 있었다. 스프그릇을 쥔 손이 가볍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무척 지친 것은 확실해 보였다. "마스터, 따스할 때 드십시오." 억지로 노리끼리2가 다시 권하자 여자는 대꾸도 없이 땀을 줄줄 흘리며 그 릇을 입에 대고 훌훌 마셨다. 아,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식사를, 따끈하고 향긋한 향신료를 넣은 식사를 한 것은 언제적의 일이던가? 별로 맛도 없는 저런 덩치들을 씹어 삼키기만 했으니....쳇. 그건 그렇고 역시 저 두놈은 여자의 노예가 분명하군, 마스터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제자의 탈을 쓴 노예이거나 노예의 탈을 쓴 제자겠지. 문득 그 세 녀석에게 병사1이 다가섰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깃털모자와 칼을 찬 멀쩡하게 생긴 병사1로 아마도 이 부대의 책임자나 지휘관은 되는 듯한 녀석이었다. 녀석의 뒤로 기사같은 모습의 졸개1, 2가 서 있었다. "몸은 어떠십니까? 마르테르님?" 그 말에 여자에게 알랑거리던 노예1이 고개를 쳐들고 병사1을 노려보며 오 만하게 대꾸했다. "말해 두었을 텐데. 마스터께선 다섯시간 이상 휴식을 취해야 한다." "다섯시간 이상? 이미 세 시간이 지났소이다. 이렇게 느긋하게 굴다간 앞 선 부대를 놓치겠 소이다." 불만스러운 어조에 노예1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병사1은 사십가량되는 사내였지만 노예1은 고작해야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 이었다. 허긴 이 얼굴이 진짜 그 나이의 얼굴인지는 미지수지만. 녀석은 검은 로브자락을 가볍게 흔들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똑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게 하는 걸 보니 살기가 싫은 모양이군." 그 살벌한 어조에 병사1이 굳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졸개1, 2가 분격한 얼굴로 검자루에 손을 댄다. 그 모습을 보던 노예2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바보같은 것들이군." "이, 이 무슨 무례요? 나는 상황을 이야기 하는 거요! 더 이상 늦을 수는 없다고 하지 않았소? 이미 황제께서도 앞에 나가신 이 때에 우리가 더 늦 을 수는....!" 그러자 노예1은 눈을 부릅뜨며 한 걸음 나섰다. 그의 손에 이미 시커멓게 뭉글거리는 기운이 쏠리는 것을 보고 병사1은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섰다. "무례?" 이글거리는 검은 기운이 녀석의 손아귀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마치 살아 있는 짐승이 그 손바닥안에서 이글거리는 것을 병사1과 졸개1, 2는 공포의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기다려." 앉아있던 퍼런 낯짝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직도 눈을 반쯤 감은 얼굴로 고저없이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한 시간뒤 출발할 것이다. 그렇게 알도록." "하, 하지만 선두부대는........." 목숨이 두렵지 않은지 뭐라 한 마디 덧붙이려던 병사1은 사납게 쏘아보는 노예1의 시선에 입을 닫았다. "앞에 가는 놈들도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그럼 수도에는 언제 진입할 수 있소?" "다음에 너희들이 눈을 떴을 때는 바로 고왕국의 수도일게다." 그렇게 말한 여자는 할말 없으면 꺼지라는 듯 다시 눈을 감았다. 피로가 역력한 그 얼굴을 보고 병사1은 뭐라 더 물으려하다가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섰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조금만 더 지체한다면 바로 여자의 뒤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자신들을 먹음직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덩치큰 괴 물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는 조용히 발자국 소리 도 내지 않고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여자와 노예1, 2는 별로 높지도 않은 코를 높이 세우며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아니 두어가지를 결심했다. 제 목:[쿠베린] 제 20화 광 란 10 관련자료:없음 [21569]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0-02-10 23:42 조회:1512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10 "안녕, 쿠베린." 미트라가 웃었다. 희고 매끄러운 진주빛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날 사랑해?" "그래." "날 사랑해?" "그래." "날 사랑해?" "그래." 멍하니 계속해서 그 말만 되뇌이면서 그녀가 웃었다. 그 웃는 입가로 검붉 은 핏줄기가 떨어진다. 핏줄기는 점점 양이 늘더니 입안 전체로 흘러내리 고 그 다음에는 파삭 소리를 내며 그녀의 얼굴을 부서뜨렸다. 그녀의 몸에 서 흘러내리는 피는 무서운 기세로 파도처럼 일어나 그녀의 전신을 삼키고 곧 내게로 밀려온다. 대체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기에 온 세상을 그녀의 피로 가득 채우는 것일까? 내 전신을 적시고도 모자라 시야에 들어오는 모 든 것들이 전부 피에 잠겼다. 나는 숨이 차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팔 다리 를 움직여 헤엄을 친다. 그녀의 핏속에서 헤엄을 친다. 무언가 잡히는 게 없나 싶어 손을 허우적거리니 그녀의 팔 다리가 산산히 흩어져서 핏속에 떠오르고 그 뒤를 이어 그녀의 임자 잃은 머리가 둥둥 떠오른다. 부서진 인형처럼 흐트러진 모습으로, 갈색의 머리칼은 이미 피에 젖어 검은 색. 그 머리가 나에게 묻는다. "날 사랑해?" 눈 앞에 떠오르는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나는 눈을 떴다. 전신을 적시는 것은 그녀의 피가 아니라 내 땀이다. 내 뺨을 적시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땀이다. 나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미트 라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답을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대답을 한다. 젠장할. 눈 안쪽이 뜨거워진다. 가슴 한 구석이 다시 불로 지지듯 뜨거워진다. 아이가 죽고 여자가 죽고. 인간이 죽고 묘인족이 죽고. 수많은 생명들이 그 렇게 덧없이 대지의 여신에게 바쳐진다. 아이가 죽어도 해는 떠오른다. 여 자가 죽어도 바람은 분다. 세상에 소중한 것은 나 자신밖에는 없다. 그들이 죽었어도 세상은 돌아간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분명히 저번에 사슴 한 마리를 먹었었는데? 그 림자의 훈이란 녀석과 함께 달렸었는데?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머리를 식히자. 아이를 잃은 게 처음이라 이런 것이다. 여자를 잃은 것은 처음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론 처음이지. 아니, 세상에 똑같은 죽음이 있을 리가 없지. 똑같은 상실은 있을 리가 없어. 몇 백년이나 온갖 일을 다 겪고 수많은 죽음을 거쳤는데도 새삼스레 고통스러운 것은 그 때문이다. 모든 생명이 똑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듯 죽음도 똑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얼마 전 린이 죽고 미트라가 죽고 내 아이가 죽고 나는 또 죽이고 죽고..... 머릿속이 아득하다. 할 일이 없이 이렇게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닥을 파면서 별로 소용도 되지 않는 일을 자꾸만 떠올리고 있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없기때문이야. 제길. 적당히 좀 하자구. 룬드바르 군은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밤이라고 해도 그들은 이미 행군할 준비를 다 갖춘 채로 정렬해 있었다. 수 백의, 어쩌면 천명 정도 될 법한 그 군세가 일제히 일곱 명으로 열지어 선 채 창끝을 하늘로 향한 채 도열 해 서 있다. 밤의 여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선 무모한 거인의 머리털처럼 보이는 그 인간들의 창날들은 창백한 별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나는 나무 위에 올라 앉아 그들을 지켜보았다. 수백의 군세는 창과 검을 들고 무언가를 기다리며 정면을 향하고 있었는데 그 긴장된 얼굴에 흐르는 표정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 수백 명 중 아무도 소리를 내는 자는 없었다. 모두들 진지하게 정면을 주시한다. 그리 고 그들의 시선 끝에는 세 명의 마법사가 서 있었다. 그 여자와 그녀의 노 예들이다. 조금 회복한 것인지 회색로브의 여자는 하얀 얼굴로 두 눈을 부 릅뜬 채로 지팡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뭐라고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로 지껄이는 동안 텅 빈 허공이 다친 짐승처 럼 신음소릴 냈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그녀의 정면으로 주먹만한 구멍 이 열렸다. 곧 그 구멍은 사람 머리통만큼 커지더니 그 다음에는 문짝만하 게, 그 다음에는 웬만한 요새의 대문짝 만하게 커졌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동안 그녀의 옆에 음침한 얼굴로 섰던 노리끼리한 얼굴의 노 예1이 자신들의 뒤에 서 있던 병사1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잔뜩 긴장해 있던 병사1은 뒤를 돌아보며 팔을 크게 휘저었다. 녀 석은 소리라도 내면 큰 일이 날까봐 그러는 지 입을 꽉 다문 채 긴장한 얼 굴이 공포로 파리하게 질려있다. 맨 앞 줄의 일곱명의 병사들이 창끝을 앞세우고 전진했다. 그들은 그 구멍 을 향해 낮게 욕설을 퍼부우면서, 기도문을 외우면서 겁에 질린 채로 나아 갔다. 첫 번째 병사들이 사라지고 나자, 그 다음 열의 병사가 줄지어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이것이다! 나는 맨 뒷줄에 선 병사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것도 서슴지 않기로 했다. 이 것이 바로 룬드바르가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다. 이들 마법사가 길을 열지 않았다면 어떻게 어떻게 묘인족의 발걸음보다도 빠르게 이 곳까 지 올 수 있었겠는가! 병사들의 걸음은 빨랐다. 아니, 빠르고 싶지 않지만 빠를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파리한 얼굴로 겁에 질린 사슴들마냥 앞의 동료를 따라 구멍으로 달려들어갔다. 아니 아예 몸을 던지는 듯이 황급히 뛰어들었다. 시간의 제한이 있는지 여자 마법사의 얼굴은 파랗다 못해 피를 토할 듯 허 옇게 질려있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노예1, 2들은 그녀의 상태를 바라보면 서 이를 갈 듯이 서두르라고 낮게 외치고 있었다. 이제 곧 마지막 열의 병 사들이 구멍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병사들 사이에 재빨리 끼 어들었다. 어차피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을 테고 누가 누군지 얼굴도 잘 모를 테니까. "앗!" 한 녀석에게 발을 걸었다. 그랬더니 급히 서둘러 걷던 녀석들 예닐곱명이 일제히 으악 하고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뭘 하는 거야? 이 바보 멍청이들아!" 지휘관인 듯한 녀석이 쓰러진 놈들에게 낮게 욕설을 퍼붓는 동안 나는 나 뒹군 녀석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달렸다. "어서 서둘러!" 노예1이 낮게 외치면서 혀를 차자 흐트러진 줄을 채 정비하기도 전에 마구 잡이로 달려온 병사들을 병사1이 급히 구멍 속으로 밀어넣었다. 병사1이 서둘러 서둘러 하고 외치는 소리를 귓전으로 들으며 나는 재빨리 구멍 속 으로 발을 집어 넣었다. 찌잉 찌잉 하고 울리는 귀를 잡으면서 나는 하마터면 앞의 녀석과 부딪쳐 나뒹굴 뻔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된 듯 손이 발이 되고 발이 손이 되 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 때문에 나는 혀로 내 손을 핥아보았다. 젠장, 눈앞 이 빙빙 돌았다. "어지러, 어지러워." "정신 차리고! 어서 정렬!" "아유, 죽겠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겨우 주변을 살핀 순간 나는 입을 저억 벌렸다. 오렌지 빛으로 사방이 가득 차 있다. 오렌지빛의 둥글고 둥근 지붕들이 마치 공을 엎어놓은 양 보였다. 그 둥근 지붕들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었지만 대머리가 된 불쌍한 어떤 녀석 들이 모두다 고개를 숙이고 절하는 것처럼 보여 나는 왠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인간들의 취향이란 참 다양하기도 하지, 델리암의 삐죽삐죽한 지붕 들에 비해서 이곳의 지붕들은 뾰족하면 큰일이라도 날 듯 둥글둥글 맨들맨 들했다. 그 반질거리는 지붕을 설마 기어올라가 닦기라도 한 것인지 윤이 나고 빛이 난다. 그렇지, 어쩌면 이 곳의 하인들 중에는 지붕닦기 하인이 있을 지도 모르지. 게다가 바닥, 바닥은 주홍빛인지 분홍빛인지 잘 알 수 없는 타일로 깔려 그 지긋지긋한 진흙을 밟지않게 도와주고 있었다. 아아, 정말 반가운 일이야. "정렬해! 정렬!" 녀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다시 돌아보았다. 어떤 녀석이 말한대로 우리들, 아니 나와 별 볼일 없는 녀석들은 말 그대 로 대로, 커다란 길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은 정면의 둥글둥 글한 지붕들로 이어진 건물로 향해 있다. 그 반대편은 흰색의 담장 사이에 선 대문- 이걸 정말 대문이라고 불러야 할지 알수 없지만 하여간에 대문이 있었다. 이거 뭔가 조금 묘한 기분이군. 다시 말하자면 나와 이 별볼일 없는 놈들은 어딘가 궁성안으로 이어지는 대로에 서 있었다. 그것도 대문조차 거치지 않고 말 그대로 툭 허공에서 떨어진 것처럼 말이다. 나도 놀랐지만 더 놀란 것은 아마도 그 대문- 붉은 색을 칠한 반원형의 어 마어마하게 큰 대문-옆에 선 녀석들인 듯 싶다. 녀석들은 전에 내가 노스 엘스턴에서 본 그 대로의 모습으로 쇠꼬챙이처럼 가느다란 다리를 드러낸 채로 바늘 꼬챙이같은 검을 치켜들고 서 서 얼이 빠진 얼굴로 바라보고 있 었다. 너댓명 되던 녀석들은 새된 비명소리를 내지르면서 이리뛰고 저리 뛰고 하고 있었지만 정작 이 곳으로 다가오는 녀석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경비를 해결해." 헐떡이는 숨을 삼키면서 여자 마법사가 말했다. 그러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몇몇 병사들이 미친 듯이 달려나가 멀거 니 선 경비답지 않은 경비들을 해치웠다. 녀석들은 별 반항도 하지 못하고 금방 거꾸러졌는데 그 모양새를 보고 나는 정말로 이놈의 고왕국이란 곳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길다란 담장은 제법 높았지만 적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게다. 그 거대한 문 은 크긴 했지만 적을 멈출 수 조차 없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이 건물 이 대체 뭐하는 건물인가를 돌아보았다. 건물은 맨들거리는 지붕을 지고 약 일곱채 정도 보였다. 크기가 다들 각각이지만 그 중 가장 큰 것은 역시 정면에 보이는 건물, 둥근 지붕에 어울리게 둥근 기둥이 줄지어 서 있는 게 보인다. 그 오렌지 빛의 기둥에는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조 각들 사이 사이 마다 색색으로 빛나는 보석들이 박혀서 눈을 즐겁게 해주 고 있었다. 건물로 올라가는 계단은 역시 옅은 분홍빛을 띈 돌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난간마다 조각된 장식이 세월의 풍화를 전혀 타지 않은 양 새로 워 보였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이 악취미의 붉으레 죽죽하고도 맨들맨 들한 건물을 올려다 보면서 나는 앞으로 걸었다. "우리들이 첫 번째로 도착한 것인가?" "알 수 없지. 하지만 우리보다 앞서 출발한 부대는 대체 어디있는거지?" "그보다 여긴 어디야? 설마 고왕국의 궁성인거야?" "이야, 저 건물봐! 보석이 박혔어!"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들이내미는 병사들 사이에서 여마법사의 노 예2가 날카롭게 외쳤다. "페사야 페세! 키마이라 페세!" 그 순간에 갑자기 하늘에서 찌이잉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머리위로 무언 가가 튀어 나왔다. 나타난 것은 키메라였다. 녀석은 상당히 넓은, 아니, 좀 넓은 날개를 좌악 펴서 사방을 덮듯이 위용을 자랑하려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소환한 소환자를 내려다 보았다. 아니 내려다 보려 했다. 그러나 녀 석이 어찌 이 몸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쪼맨한 키메라 따위가 이 몸이 이 렇게 버티고 섰는데 인사도 없이 그냥 자기 할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 다. 녀석은 소환자에게 시선을 돌리다 말고 홱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길쭉하게 찢어진 두 눈은 나를 보자 마자 살기에 찬 얼굴이 되어서 이빨, 아니 부리인지 주둥인지를 일그러뜨렸다. "키메라! 저 건물에 바람을 일게 하라!" 소환자 노예2가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녀석은 들은 체도 않고 날 쏘아보느 라 여념이 없다. 녀석은 자기가 고개만 돌리면 내가 튀어 올라 자신을 죽 일까봐 겁에 질려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귀여운 놈에게 히죽 미소를 던 져 주었다. "키메라! 소환자는 나다!" 아무리 소리쳐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키메라를 향해 노예2가 열받았는 지 큰 소리로 고함을 다시 질러댔다. 그래도 키메라는 나를 보는 시선을 멈추지 않았다. 때문에 내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자길 보는 줄 알고 공포 에 질려 주춤주춤 밀려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마 뜨거라 하고 도망 가는 놈들 탓에 나 혼자만 댕그마니 그 자리에 남았다. 그제서야 노예2도 여자도, 노예1도, 졸개들과 같이 섰던 병사1도 나의 존재 를 눈치챘다. 그들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그냥 보 기만 해서야 이 몸이 존귀하신 쿠베린님이란 사실을 알 리가 없다. "키메라!" "저 놈이 누구길래 키메라가 이러는 거지? 마법사인가?" "저 자는 누구야?" 모두 한 마디씩 던지는 동안 갑자기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첩자다!" 그녀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지르자 마자 졸개들이 갑자기 창날을 곧추 세 우며 날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나에게 와르르 몰려들 었다. 나는 이 불쌍한 인간들을 넓은 자비로 발로 걷어 차버리고 나를 계 속 야리고 있는 키메라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이리와, 이리와, 까마귀자식아." 키메라는 잔뜩 깃털을 곧추 세우더니 아가리를 있는대로 벌리면서 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는 소환자가 뭐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나를 향해서 광풍을 내뿜어댔다. 흐, 사악한 데서 끊었다. 잡담일기 4 2월 10일 목요일. 그런대로 따스하다. 제목: 뒤집기에 대하여 여기서 말하는 뒤집기라는 것은 막판 뒤집기도 아니오, 부침개 뒤집기도 아닌 애가 뒤집는다는 말이다. 지금 세정이는 4개월에 접어들었다. 덕분에 뒤집기를 개시한 지는 약 20여일이 지났다. 한쪽으로 뒤집는 것은 능숙하지만 다시 도로 눕는 자세로 환원하기는 힘든 까닭에 녀석은 두 팔 로 버티다가 으으으으 하며 신음성을 내뿜어 날 부른다. 그 으으으 소리가 '그 어떤 행위'의 소리와 아주 흡사해서 남편은 자주 착 각을 한다. "저 놈 응가하는 거 아냐?" "아냐, 기운 쓰는 소리야." "하지만 응가 하는 소리인걸." "두 팔에 힘쓰는 소리야. 여기서 좀더 소리를 지르면 그때는 한계라는 의 미가 되지." 조금 후에 끄으으로 바뀌고 그 다음에는 아으 아으로 바뀌고 그 다음에는 킹킹대다가 그래도 내버려두면 철푸덕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엎드려 잠 이 든다. 사실 이 녀석이 팔 힘이 없었을 시절에는 으으 소리만 나도 화들 짝 놀라서 달려가 뒤집어 주었지만 이 녀석이 이제는 고개를 이리 저리 뒤 집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킹킹이 아니라 응애 수준으로 변해야 만이 달려간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상당히 웃기는데 덕분에 잠버릇도 기이하게 되었다. 분명히 반듯하게 누워 자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면 90도 회전한 채 로 침대 난간에 두 다리 올려 놓고 자고 있다. 베게는 저 멀리 떨어져 있 고 노리개는 바닥에 떨어져 있으며 이불은 다 차버려서 둥글둥글 김밥을 말고 있다. 4개월 짜리의 잠버릇이 과연 90도 회전, 180도 회전이 가능한 것인가 대해 나는 상당히 고민을 했지만 뭐, 세정이 본인은 별로 괴로워 하는 기색도 없고 듣자 하니 건강한 애일수록 몸부림이 심하다고 했으니 좋은 쪽으로 믿기로 했다. 사악 사악 부드럽게 뒤집는 솜씨에 대해서는 뭐 별로 나쁠 것 없는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하도 뒤집기에 열심이다 보니 우유 먹은 걸 토해낸 다는 점이다. 녀석은 먹고 나서 한 10분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홱까닥 뒤 집는다. 그리고 우욱, 주르르르륵 이다. 덕분에 옷을 하루 두세 번씩 갈아 입고 침대시트를 자주 갈아야 했다. 그래서 얼마 전 부터는 턱받이를 해주 었다. 그랬더니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소문에 듣자 하니 5, 6개월이 되면 침을 한 두 방울 수준이 아닌 바가지 로 흘린다고 하니, 턱받이 두 개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지금 세 개 인데 그 세 개로도 맨날 이런 거 저런 거 흘리고 있으니 대 여섯개는 준비해야 할 지도.... 허...육아일기다워졌다. 핫핫핫............ 제 목:[쿠베린] 제 20화 광 란 11 관련자료:없음 [22924]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0-03-03 02:35 조회:589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11 고양이. 고양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키우는 짐승이다. 주로 여자들이 즐겨 키우며 크기는 천차만별이다. 집안에서 키우는 이 짐승은 발톱이 수시로 나오고 들어가며 귀는 두 개, 다리는 네 개, 두 개의 커다란 눈알은 황금색이 대부 분이다. 성격은 그다지 온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데로 키울 만한 짐 승이란다. 마미는 왕년에 고양이를 키웠었는지 나를 보고 고양이라 불렀다. 대체 그 고양이라고 하는 짐승 어디가 나와 닮았다고 하는 것인지 가끔 나는 혼란에 빠진다. 물론 발톱이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점은 닮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슬렁거리는 태도라든가 여기저기 부비는 그 맹한 모습, 게다가 결정적으로 네 발로 걷는 그 몰골, 주먹만한 대가리 등은 아 무리 보아도 나와는 닮지 않았다. "흐음........" 지금 내 눈앞에서 얼어붙어 있는 일곱 마리의 고양이들을 보면서 나는 그 움직임과 그 몰골을 살피는 중이었다. 이렇게 큰 고양이들은 나도 처음 보 았다. 회색빛과 오렌지빛이 잘 조화된 이 짐승들은 저마다 각자에게 어울 리는 보석 목걸이를 하나 씩 걸고 있다. 회색 고양이에겐 루비가, 흰 고양 이에겐 사파이어, 푸른 빛 고양이에겐 희디 흰 오팔이 빛난다. 문득 너무 너무 아까워져서 나는 고양이에게 손짓을 했다. 녀석들은 나를 보고 완전 히 얼어붙어 있었지만 내가 손짓을 하자 네 다리를 달달 떨며 바닥을 기어 다가왔다. 허어, 걱정하지 마. 너희들에겐 그 보석이 전혀 어울리지 않아. 그렇고 말 고. 원래 보석이란 보석의 즐거움을 아는 자들이 가져야지 너희들 같은 짐 승들이 보석을 달아봐야 목만 무거울 게야. 녀석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 해서 나는 녀석들 목에 걸린 목걸이에서 보석을 하나씩 떼내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하나, 둘, 셋, 넷, 다섯, 음...작지만 질은 좋은 보석이구만. 그런 나를 화려한 옷매무시에 회색의 눈동자를 가진 계집아이가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다. 이봐, 아무리 노려봐야 나는 구멍 안뚫려. "쿠베린! 대체 지금 뭘하고 있는 거야?" "쿠베린,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악을 쓰면서 튜나가 되물었다. 내가 돌아보자 튜나는 팔짱을 낀 채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 다. 이 명도 긴 하프엘프의 옆에 선 조인족의 전사는 나의 모습을 물끄러 미 바라보다가 내 시선을 받고는 얼른 고개를 돌린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아크가 내 주머니를 흘금거리면서 다시 물었다. "몸은?" "보면 모르냐?" 우리들, 아니 나와 떨거지들은 지금 제법 큰 건물 안에 있었다. 건물은 전 에 내가 보았던 대로 둥근 천장을 아주 높이, 높이 띄워 바닥과 천장과의 사이는 무슨 원수라도 진 듯이 멀게 만들어 놓았다. 그 천장아래 선 나와 녀석들은 저마다 각자에게 어울리는 자세로 앉아서 쉬고 있었다. 튜나와 엘레, 그리고 조인족의 여왕과 조인족 몇 명이 앉아 있는 그 주변을 돌아 보면서 나는 잠시 동안의 일을 되새기려고 했다. 난장판의 싸움속에서 갑자기 등장한 이 조인족 일행들은 너무나 날렵하게 나타나 내 앞에서 그 존재를 과시했기 때문에 나는 길게 말을 이을 생각도 없었다. 물론 조인족의 여왕께서 무척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야기는 들었어." 낮게 튜나가 내게 속삭였다. "뭘?" "미트라와 딸 아이가 죽었다고....." 내가 대꾸도 않고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우물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휴런에게서 들었어." "휴런과 다른 놈들은 어디 있지? 여기서 만났냐?" "응, 휴런과 유티아, 이에르네들은 지금 신전을 들쑤시고 있어. 룬드바르군 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말이야." "그렇군. 녀석들은 나보다 빨리 왔는걸." 내가 그렇게 말하자 튜나는 나를 조심스레 다시 바라본다. 그 시선을 보면 서 나는 그녀가 이 쿠베린님께서 당장이라도 발광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 고 불안해하는 것을 곧 알수 있었다. "녀석들은 왜 신전에 있는 거지? 룬드바르군이 노리는 게 신전의 아이템이 기 때문인 건가? 보통이라면 룬드바르군은 고왕국의 군대와 싸우고 있을 테니까 그 쪽에서 날뛰는 게 보통 아냐?" 내 말에 튜나는 고개를 저었다. "쿠베린, 이미 고왕국은 정복되었어." "헤에?" "이미 고왕국은 룬드바르 제국에 편입되었다고." "헤에? 그것참 빨리도 끝났네? 설마하니 사나흘 사이에 모조리 끝난 거 냐?" "그게......." 튜나는 갑자기 등을 돌렸다. 아까부터 가만히 고양이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던 작은 소녀가 이쪽을 바 라본다. 쪼만한 이 계집아이는 아까 내가 고양이들의 목에 걸린 보석들을 주머니에 넣자 매우 분개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 꼬맹이였다. 그러고 보니 낯선 얼굴은 이 계집애 하나다. 나는 새삼스레 그 계집애에게로 시선을 돌 리면서 튜나에게 물었다. "저 계집애는 누구야?" "아아.......그게 말이지..." 튜나는 조금 복잡한 얼굴로 망설였다. "왕의 외동딸, 뭐 그런 거냐?" "에? 어, 어떻게 알았어?" 튜나가 놀라 나를 향해 되묻는다. 나는 팔짱을 끼고 조금은 한심한 기분으로 계집아이와 그 계집아이를 지키 듯이 날개를 펴고 선 조인족의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여왕은 약간 웃는 얼 굴이 되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들 사이에 끼어 앉은 계집아이는 여 왕이 자신의 무엇이라도 되는 양 건방지고 도도한 표정으로 날 쏘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무너무 뻔한 이야기로구만. "어떻게 알았냐니까! 너, 설마하니 고왕국의 누구라도 만난 적이 있어?" "아니, 너무 뻔해서 그런다. 고왕국은 멸망했고, 왕이나 왕의 일족은 모조 리 룬드바르에게 잡혀 가거나 뭐 그런 상태이므로 여기 조인족의 여왕께서 애완동물 하나 키우는 셈 치고 그 중 온순한 공주 하나를 받아들였더라... 뭐 그런 이야기 아니냐?" "애완동물은 아니에요." 조인족의 여왕이 쓴 웃음을 짓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일어서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내게 손을 잡힌 채로 온후하게 말을 이었다. "조의를 표합니다. 왕." "뭐, 그런 거지요." 나는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면서 다시 물었다. "조인족들은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된 거지요? 다른 놈들, 아크라든가 엘프 의 엉덩이라든가 하는 그런 떨거지들은 다 어디로 가고 여기에 혼자 계시 는 겁니까? 아름다운 분?" "위대한 백마법사와 엘프의 왕께서는 지금 룬드바르 황제를 만나고 계시는 중이고 우리들은 여기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헤에에에?" "다시 말해서 룬드바르군과 엘프들은 싸우지 않기로 이미 조약을 맺고 있 는 것 같습니다." 자아, 여기서 튜나의 말을 종합, 분석해 보도록 해야 겠다. 룬드바르군은 고왕국에 너무나 빨리 진입했다. 엄청나게 빨라서 고왕국의 군대들이 돌아볼 새도, 군장을 갖출 사이도 없이 진행되었다고 했다. 물론, 그 약해서 길거리에 내다 버릴 정도의 고왕국군이 군장을 차릴 준비를 하 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고 해서 룬드바르군을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 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간에 그들은 너무나 빨리 들어와 왕을 위협했고 왕은 침실에 앉아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댄다. 그 의식이 끝나자 마자 황제 는 고왕국의 왕궁의 옥좌에 터억 하니 올라앉았고 뒤를 이어 왕자들이 줄 줄이 잡혀 유폐되었다고 했다. 정말 말 그대로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그렇게 다들 멍하니 입 벌린 상태로 고왕국의 군대는 무장해지를 당했고 룬드바르제국군은 지금 현재 사방에 널린 고왕국군대에게서 항복을 받으러 바삐 뛰어다니고 있는 중이라나. 그리고 그 와중에 내가 터억 하니 수도 한 가운데에 나타나서 키메라랑 한 바탕 신나게 했었던 것이다. "공간마법사야." 내 말에 튜나가 입을 벌렸다. "뭐라고?" "꽤 강한 공간마법사가 녀석들을 이끌고 공간을 열며 여기까지 당도했다 구. 나도 지금 막 그들의 군대에 섞여서 여기 도착했다니까. 그러게 그 놈 의 마법길드를 박살냈어야 했다구." "기, 기다려봐! 그럼 공간마법사가 룬드바르군을 이끌고 공간을 열어 여기 까지 왔단 말이야? 그게 진짜야?" "물론이지, 내가 바로 그렇게 왔다니까."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공간마법으로 군대를 데리고 온단 말이야?" "하지만 사실인 걸. 내가 그렇게 왔다구." "하지만 말이야, 공간마법이라고 해도 가 본적도 없는 공간을 불쑥불쑥 드나드는 게 아니야. 공간마법을 쓰기 위해선 그 장소에 가 본 적이 있어 야 해. 그렇다면 룬드바르의 마법사들은 이곳 고왕국에 와 본 적이 있었단 이야기잖아? 고왕국에는 외지인이 거의 들어온 적이 없었다고 들었는데." "이야긴 간단한 거지. 배신자다." "배신자? 이런 곳에 나라를 팔아먹을 배신자가 있을 리가?" "배신하려고 맘만 먹으면 나라가 아니라 제 자식도 팔아 넘기는 게 인간 인 걸 뭐."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공간마법이 어떻게 가능했을 거라 생각 하냐?" 설마하니 룬드바르가 가진 마법사들이 모조리 엄청난 천재라서 아무 곳이 나 제 맘대로 휙휙 넘나들 거라고는 나도 상상치 않는 걸. 만약에 정말로 그런 공간마법사가 있다면 이 세계 저 세계 오락가락하면서 천하무적이 되 었겠지. 나는 다소 한심한 얼굴로 튜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과연 엘프들은 새대 가리라고 하더니 여전하구만. 역시 이 모든 것은 경험과 이 우수한 추리력 의 차이라고나 할까. "고왕국 내의 배신자가 룬드바르에게 붙은 거야. 그래서 그들이 군대를 이끌고 잠입한 거지." "에엑?" "녀석들이 이렇게 빨리 무슨 수로 들어왔다고 생각해? 오래 고인 물은 썩 는 거고, 고왕국은 너무 너무 썩어있었으니까 그걸 참지 못한 머리 좋은 놈들이 밖으로 뛰쳐나간 거겠지." ".................쿠베린." "얼마나 오래 묵었으면 고왕국이겠냐? 그 고왕국이란 세 글자가 모든 것 을 말해주는 거지." 그 말에 갑자기 뒤에 앉아 있던 꼬맹이가 빽 하고 소리를 지른다. "무엄하다!" 나는 대꾸대신에 옆에 겁도 없이 어슬렁거리던 고양이를 집어들어 계집애 에게로 던졌다. "꺄악!" 당연한 일이지만 비명소리를 내지르면서 계집애는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계집애의 옆에 섰던 조인족 전사 하나가 내가 던진 고양이가 깨끗 한 백옥석 바닥에 닿기도 전에 재빨리 낚아챘다. 덕분에 고양이는 핏덩어 리가 되는 것을 겨우 면해 오줌을 갈기면서 냥냥거리고 울부짖었다. 튜나 는 입을 저억 벌리고 그 모양새를 바라보다가 나를 향해 건방지게도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우, 우, 우흑흑흑흑....아앙......." "룬드바르군이 너무 빨라서 이상했었어. 하지만 대체.....그 많은 군대를 공 간을 열어 데리고 왔다니. 왠만한 공간마법사로는 불가능한 일이야. 그 정 도의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역시 대륙에서 몇 안될 텐데!" 튜나는 약간 풀이 죽은 듯 엘레를 바라보았다. 엘레에게 무슨 동의를 구 하듯 약한 모습을 취하는 그 가증스러운 모습에 나는 가쁜하게 대꾸해 주 었다. 뭘 배신 정도로 그렇게 충격을 먹나? 인간의 배신이야 수많은 세월 속에서 흔하고 흔한 그런 일인 걸. "암흑마도에서 이끌고 나온 마법사가 이 십명 이상이라고 하니까 가능했 겠지. 내가 죽인 마법사만도 예닐곱명 정도 되는데, 아, 물론 약해 빠진 놈 들 빼고 말이야." 튜나는 등 뒤에서 고양이들을 쓰다듬고 있는 꼬맹이를 흘긋 돌아보면서 조인족의 여왕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꼬맹이를 바라 보고 있었다. 마치 어미새가 새끼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이라 나는 조금은 우울해졌다. 계집애가 우는 것을 모른 척하고 나는 조인족 여왕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여왕께서도 룬드바르군과 싸울 마음이 없는 건가?" 여왕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태도로 조용히 날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으면서 나는 다시 물었다. "룬드바르군과 싸우지 않겠다는 엘프와 뜻을 같이 한 거요?" "아니오."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우리는 엘프와는 다릅니다. 그들이 중립을 선언하더라도 우리들은 붙잡 힌 동족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만 둘 마음은 없습니다." 동감이다. 엘프들이 뭔 난리를 치든 말든 우리들은 그만 둘 수 없었다. 룬 드바르는 그 일단의 오크 발싸개 같은 킬트의 멍청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녀석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냥 놔 둘 수도 없고, 녀석들도 그냥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녀석들이 조 인족을 건드린 이상, 그리고 사인족을 건드린 이상, 우리들 고대의 부족들 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나의 아이들은. "우흑흑흑......." 낑낑거리는 계집애를 무시하고 나는 튜나를 향해 물었다. "그건 그렇고 먹을 건 없냐?"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말귀를 알아듣는 것처럼 고양이들이 갑자기 벌떡 일 어나 일제히 벽을 향해 돌진했다. "우왓!" 놀라서 튜나와 계집아이가 비명을 지르는 동안 고양이들은 말 그대로 겁 에 질린 양떼들처럼 벽으로 가서 붙었다. 공포에 찌든 양양 거리는 소리를 내지르면서 녀석들이 어떻게서든 밖으로 나가려고 문과 벽을 박박 긁는 것 을 만족스레 바라보면서 나는 시익 웃어 보였다. "이 것들, 분명히 말귀를 알아듣는 걸? 이 고양이들은 대체 뭐에 쓰는 것 들인지 설명좀 해 보실까?" "신의 귀라고 해요." 계집애는 오만하게 말했다. 그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기 위해 손을 내미 는 것을 보고 재빨리 튜나가 여자애를 뒤로 숨겼다. 계집애는 불만이 가득 한 얼굴로 입술을 툭 앞으로 내밀고는 너무 울어 시뻘개진 눈가를 비볐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건방진 태도로 어깨를 으슥했다. "당신은 너무나 무식해서 뭐가 뭔지 모르는 모양인데. 이 고양이들은 신 의 귀라고 불리는 신성한 동물이에요. 신전에서 키우는 것들이죠. 그런 신 성한 동물의 물건을 훔치다니. 비열한 도둑같으니." 그 말을 듣고 우하하하 하고 나는 크게 웃었다. "비열한 도둑? 아, 아, 그런 오해를 하다니. 나는 이 녀석들이 존경의 의 미로 바친 보석을 주워 담았을 뿐이야. 어디까지나 녀석들 스스로 바친 거 지, 내가 훔친 건 아니지. 혹시 너 훔친다는 의미를 잘 모르는 거 아니냐?" "시끄러워욧! 당신같은 비열한과 이야기를 하는 내가 수치스러워!" 계집애의 말에 나는 잠시 머리를 짚고 튜나를 바라보았다. "이 애를 던져도 될까?" "아니." 상황파악을 잘 못하는 계집애를 위해서 나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이 밤톨만큼도 못한 계집애야, 너는 말이지, 지금 왕녀도 아니오, 공주도 아닌 시시껄렁한 거지 계집애가 된 거란다. 원래 망한 나라의 공주들은 다 들 노예가 되는 거야. 다시 말해서 너는 노예가 되었고. 그 까닭에 이 대단 하신 쿠베린님께 감히 그 주둥아리를 놀려서는 안되는 거란다." 웃 하고 계집애가 입술을 우물거리자 옆에 있던 튜나가 내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에요?" "사실을 말하는 거야. 원래 사실 파악이 빨라야 앞으로의 미래가 있는 법 이지. 나는 공주에요 따위 말해봐야 지금 거지인 신분이 달라지는 건 아니 거든." "지독한 말 그만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나 말해봐요!" "뭘 어떻게 해?" 내가 되묻자 튜나는 계집애를 품안에 안은 채로 나에게 호통치듯이 물었 다. "룬드바르군과 싸울 거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지금 엘프들이 그 들과 계약을 하고 있는 것을 어찌 생각하는지, 게다가 당신의 묘인족들이 지금 신전이란 신전을 마구 돌아다니며 살육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 나는 튜나가 떠들든 말든 몸을 숙이고 잔뜩 겁에 질려서 벽에 달라붙은 고양이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이리 와봐라. 이리 와. 안 잡아 먹을 테니까. 고양이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저마다 각각의 빛깔을 띄운 눈을 대굴대굴 굴리면서 조심조심 다가왔다. 그리고는 조로록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 다. 물론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을 짓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말귀를 알아듣는 녀석들답게 조신한 태도였다. "쿠베린!" 튜나가 한 마디 던지려는 순간 나는 녀석들을 향해 틱 하고 손톱 하나를 꺼내들어 보였다. 그러자 고양이들은 일제히 털을 잔뜩 곧추 세우면서 뒤 로 사사삭 하고 피한다. 그 몰골을 바라보며 나는 친절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아, 너희들 중 누가 내 밥이 되겠냐?" "쿠베린!" 튜나가 한 숨을 내 쉬면서 내 팔을 잡아 당겼다. "이 신의 귀라고 하는 고양이들은 전부 저 아이의 유일한 친구에요. 쿠베 린." "유일한 친구? 일곱 마리나 되는데 뭐가 유일이냐?" "저 애는 다리를 못 움직여요. 그래서....." 작은 소리로 튜나가 속삭였다. 나는 그런가 하고 아까부터 건방진 태도로 앉아 있는 계집애쪽을 바라보았다. 작고 가는 병적인 흰 얼굴을 보면서 나 는 다시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여긴 그럼 어디야? 신전 아니냐?" "빨리도 묻는군. 여기는 신전이야. 일루미나야여신의 신전이라고 하더군." 나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돌아보았다. 코 끝에 희미한 피 냄새가 흘러들 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지?" ..........유구무언;; 제 목:[쿠베린] 제 20화 광 란 12 관련자료:없음 [22925]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0-03-03 02:38 조회:556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12 나는 박살난 신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상. 신의 조각. 신이 어떻게 생겼나 하고 인간들이 상상하는 모습. 바보 같은 인간들의 습성. 보고 만지지 않으면 느끼지도 못하는 속된 인간들의 신. 가장 무지막지하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사랑스러운 우리들의 여신께서는 인간들에게는 별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인지, 아니 면 그저 그들이 눈 앞에 선 여신을 보지 못하는 것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다. 굳이 이름을 붙여봐야 신은 신인 것을 일루미나야든 알루미나야든 그게 진짜 신의 이름 일 리는 없지 않은가. 설마하니 신이 자신을 소개할 때에 <나는 일루미나 야 라고 해. 그러니까 그렇게 불러줘.> 따위의 말을 지껄일 거라 생각하 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이 박살난 신상은 결이 고운 청옥석으로 깎아 만든 것이었다. 푸른 빛깔이 도는 투명한 옥석으로 만든 신상은 마치 엘프의 고 귀한 처녀처럼 보이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이런 조각상은 가격도 꽤 할 거니까 보물축에 드는 것일 텐데 이걸 박살을 내 놓은 게 아까워 죽겠다. 어떤 망치로 두들겼는지 인정사정 없이 산산조각이 나서 홀 안 여기저기에 구르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신관같은 인물들로 보이는 녀석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다. 머리가 깨지고 배가 찢어진 그 형편없는 시체들을 이리 저 리 피해 걸으면서 나는 자리에 남아 있는 냄새를 찾아서 코끝을 들어 올렸 다. 자, 다시 여기서 수수께끼 하나. 대체 여기 있는 녀석들을 죽인 것은 누굴까요? 허옇고 금빛나는 휘황찬란 한 옷을 입은 녀석들의 머리통을 까부수고 다리몽둥이 부러뜨린 자들은 누 구일까요? 허름한 옷을 입은 쑥대머리 사내들이 곳곳에 널려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 그 찬란한 신의 조각을 박살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천민들의 짓이다. 천벌을 받을 것들." 꼬마 계집애가 바퀴 의자에 앉아서 중얼거렸다. 계집애는 화려한 장식을 땋은 머리에 잔뜩 박아 휘황한 색깔을 사방에 퍼 뜨리고 있었다. 계집애는 잘난 척 비웃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가 내 시선과 마주치자 금새 홱 고개를 돌려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니까, 천한 신의 지배를 받는 것들이 한 짓이란 말이야....." "다시 말해서 평민들이 들고 일어나 룬드바르 만세, 썩어빠진 왕족과 귀 족들을 물리쳐 주세요 했다는 거잖아?" "이, 바, 발칙한! 천민들따위는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엇!" 계집애가 또 그런 소릴 하기에 나는 이 놈의 바퀴 의자를 박살내줄까 아 니면 잘난 척하는 이 길다란 머리 끄댕이를 잡고 휘휘 돌려줄까 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옆에 서서 한숨을 쉬고 있는 여왕을 봐서 참았다. 참, 여왕, 거 대단한 계집애를 맡았네. 다리도 성치 못한 계집따위는 어디에 써먹겠어? 시중을 들어줄 줄 알아? 그렇다고 지 주제를 알고 바닥에 처박혀 있길 해? 주제도 모르는 게 입만 살아서 나불거리니. 끌끌. "배신자가 누군지 너무 뻔해서 말도 안나오잖아?" 내 말에 튜나가 고개를 그덕였다. "그렇네. 역시 평민들 중 누군가가 룬드바르에게 다가갔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네."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여기서 이렇게 하고 있을 거야? 왕궁 안에 룬드바 르가 있대며?" "응. 그러나 마법사들은 신전에 갔다고 해. 쿠베린은 어딜 갈거야?" 튜나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했다. "왕궁부터 가보지." "왜?" 긴장한 얼굴로 튜나가 물었다. "가까우니까." 생각해 보면 내 생전, 이렇게까지 마법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놈도 진 짜 드물다. 아니, 전례가 없었다고나 할까? 그런 걸 보면 킬트녀석의 그 말 도 안되는 암흑마도의 힘이라는 게 제법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인리히 룬드바르. 그 녀석의 이름을 듣게 된지 3년도 채 되지 않았다. 아 니, 2년정도 밖에 안되었을 텐데 이 놈의 힘은 이미 대륙전체를 들어 올렸 다 내렸다 하고 있으니. 장난이 아니라고 할 밖에. 녀석 휘하의 마법사들은 금지된 마법인 언데드의 술법을 써서 적을 박살내고, 저 사인족을 돌격부 대 내지는 선발부대로 활용하고, 적을 급습할 때는 공간마법사를 이용하며, 적이 강할때는 만들어둔 괴수부대를 사용한다. 이렇게 엄청난 마법사 집단 을 거느리게 되다니, 저 놈의 운도 엄청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그러 나, 그러나 말이다. 여기서 녀석은 삐끗해버린 것이다. 이 쿠베린님을 건드리다니. 묘인족을 건드리다니. 가만히 놀고 있는 묘인 족을 건드려 여기서 불꽃을 피워 올리다니. 바보 아니야? 나는 누구 말대로 쭈욱 펼쳐진 방사형의 대로를 통해 걷고 있었다. 이 늠 름하게 걷는 이 모습을 보며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아니, 제지하지 않았 다기 보다는 아무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고왕국의 수도라는 것은, 상상외로 엄청나게 컸다. 금빛 둥근 지붕을 덮고 있는 건물들은 왕궁만이 아니라 보통의 큰 건물 대 부분이 다 그런 형식이었던 모양이다. 길은 깨끗하게 돌이 깔려 있고 담장 은 깨끗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리고 그 깨끗한 붉은 벽돌로 만든 골목길 마다 룬드바르 군의 복장을 한 녀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약탈하느라 바쁘다. 녀석들은 저마다 한 주머니씩 차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들 주변으로 비명을 질러대는 여자들과 남자들이 길 바닥에 무슨 강아지 끌 듯 끌려 다니고 있었다. 저마다 화려한 금빛과 초록, 연두 같은 선명하 고 매끄러워 보이는 옷을 걸친 그들은 척 보기만 해도 엘프들과 착각이 될 만큼 아름다운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후줄그레한 시커먼 옷 을 걸친 사내들이 억척스레 이리 저리 끌고 가는 것이다. 나는 어느 쪽에 도 해당되지 않는 평범한 옷에 덥수룩한 머리에 안그래도 피로 얼룩덜룩한 몰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거 약간 서 운하군. "살려줘!" "이게 무슨 짓이냐!" 저마다 질러대는 소리는 비슷하다. 네깟것들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하느냐 가 주된 화제인 모양이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험악한 몰골의 앙상 한 자들이 끌고 가는 화려한 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 선명하고 깨끗한 장식된 바닥과 그림이 그려진 울긋불긋한 담장 너머로 여자들을 강간하고 남자들을 학살하는 자들이 있다. 피가 그 화사 한 분홍빛 벽화에 튀어 거무튀튀한 얼룩을 남기고, 오렌지빛 선명한 바닥 의 타일에 뇌수가 튄다. 그 너무나 선명한 색깔을 피로하게 여기면서 나는 왕궁으로 걸었다. 튜나와 엘레는 그 말도 안되는 계집애를 지키고, 조인족의 여왕은 내 뒤 를 따랐다. 세 명의 조인족 전사들이 굳은 얼굴로 그 학살의 현장을 회피 하듯이 고개를 떨구고 따라 걷는 것을 보고 나는 여왕에게로 손을 내밀었 다. "이런 꼴 별로 좋아하지 않지요?" "..........네." 그녀의 우아한 흰 목을 바라보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여왕께선 이런 분쟁을 많이 보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나는, 아니 우리들은 분쟁이 많은 종족은 아니지요." 그 완고하게 굳은 턱은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턱을 치켜든 여왕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좌시하기엔 고통 스럽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요? 룬드바르 휘하의 마법사들이 저지른 일을 그대로 내버 려 둘 것은 아니겠지?" 내가 웃으면서 묻자 여왕도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지요. 우리들 조인족의 희생도 사인족 못지 않아요. 더더욱이 그들은 우리들의 여자를 잡아 갔으니까요." 나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아아, 나긋나긋한 허리. 향기로운 피와 살의 냄새가 난다. 그녀가 가지는 건강하고 강인한 삶의 냄 새. 화장기 따위는 없는 여인의 순수한 그 냄새.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코 를 묻었다. 역시 좋아. 여자라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여자는 아이를 만들어 내어 내 앞에 드러내 놓는다. 여자란 생명.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 인하고 유약한 그것- 생명을 키우고 보듬어 내는 놀라운 존재. 나는 조인족전사들이 발작하기 전에 그녀의 목덜미에서 얼굴을 떼며 웃었 다. "그럼, 여왕. 시작해 봅시다." 왕궁이라 이름 붙여진 궁을 향해 우리들은 맹렬하게 달려갔다. 처음 우리들을 본 자는 눈을 크게 뜰 사이도 없이 목이 댕강 하고 잘려져 나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놀람의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두 번째, 세 번째의 병사가 조인족 전사들의 손에 의해 심장이 찢기워 바닥으로 나동그 라진다. 피의 냄새가 콧속을 완전히 채우고 뛰는 심장에 박차를 가한다. 날 아라, 날아! 달려라, 달려! 발끝으로 죽은 자를 밟고 손 끝으로는 산 자를 찌른다. 조인족이 얼마나 죽이는 지 나는 모르고, 내가 지금 얼마나 죽이고 있는 지 나도 모른다. 황금빛으로 뒤덮힌 섬세한 기둥을 피로 물들이고, 꽃을 새긴 화려한 타일 을 시체로 뒤덮으면서 나는 내달리고 있었다. 룬드바르 군이든 누구든 내 앞을 막으면 무조건 죽였다. 엘프의 냄새를 찾아 내 달리면서 나는 지금 어쩌면 인간으로선 제법 상당한 위치에 오른 놈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약간은 흥분했다. 하인리히 룬드바르, 하인리히 룬드바르, 놀랍게도 내게 자기 이름을 기억하게 만든 그 어떤 발칙하고 방자한 놈 때문에 나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대단한 녀석이잖아? 이 몸께서 이름을 기억하다니 말 이야. "서랏! 누, 누..."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문을 막아선 녀석의 목을 댕강 잘라버렸다. 휘익 휘 익 녀석의 모가지가 피를 뿜으면서 문을 박았다. 엘프의 소녀를 새긴, 조각 으로 가득한 거대한 문짝을 발로 걷어 차면서 나는 큰 소리로 웃고 싶어 졌다. "쏴, 쏴라!" 문짝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어떤 녀석, 아니 녀석들이 안 쪽에서 일제히 나에게 화살을 날렸지만 그 화살이 내게 도달하기도 전에 나는 벽을 밟고 튀어 올라 높은 천정에 매달린 샹데리아에 매달렸다. 화살이 무참하게 바 닥에 가 박히는 것을 구경하면서 나는 샹데리아에 유유히 매달린 채로 주 변을 돌아보았다. "세, 세상에! 인간이 아냐!" "저건!" "폐하를 보호하라!"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제법 튼튼하게 생긴 녀석들이 옥좌에 앉은 녀석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더니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 금새 인간의 벽이 생긴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낯익은 얼굴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여어, 잘 있었나? 엉덩이?" 엘프의 왕은 엉거주춤한 채 일어서려다 말고 도로 자리에 앉고 있었다. 그의 옆에 앉은 아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 지만 그 얼굴에는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의 옆으로 엘프들 몇이 앉 거나 서 있었다. 그들 중에 그 색마 녀석도 끼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나는 재빨리 그들의 옆으로 뛰어 내렸다. "정말 어쩔 수 없군." 한탄하듯이 엉덩이가 말했다. "뭘 어쩔 수 없단 말이냐?" 나는 피식 웃었다. 시선을 다시 튼실한 기사들로 담을 쌓은 녀석에게로 돌 리자, 그 쪽에서 움찔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이미 내가 복도와 문가에서 죽인 자에게서 흘러나오는 피 비린내로 방안, 아니 홀 안은 가득 차있었다. 아마 여기는 왕궁에서도 대전에 해당하는 지 엄청나게 높은 천장에 상당히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곳곳에 널린 황 금과 옥, 그리고 보석으로 치장된 것만 보아도 이놈의 고왕국이 얼마나 할 일 없는 녀석들인가를 단적으로 드러내 놓고 있는 듯했다. "누구냐?" 온통 기사들에게 둘러 싸인 채 앉아 있던 녀석이 일어서서 그 인간담을 헤치고 앞으로 걸아 나왔다. 녀석은 여전히 가무잡잡한 얼굴에 오만하게 생긴 낯짝을 하고 있었다. 걸쳐 입은 옷은 그 왕년 델리암의 왕이었던 시 든 오이가 걸쳤던 것과 비슷하긴 했지만 길이가 짧았다. 고왕국의 기사나 부랑이와는 전혀 다른 굵고 쭉 뻗은 다리와 팔이 제법 단단해 보였다. "뭐가 누구야? 너 나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냐?" 내 말에 옆에 있던 녀석들이 악악 하면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 무례한 것! 대체!" "감히 대제께!" 악악거리는 녀석들을 모른 척하고 나는 씨익 웃어 주었다. 녀석은 나를 잔뜩 찌푸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렇군, 저 녀석은 내가 어린 몸일 때 봤었지? "분홍주둥이는 어디에 있지?" "분홍...주둥이?" 녀석이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날 바라보며 묻는다. "너는 누구냐?" "건방진 녀석. 이 몸에게 감히 너는 운운하다니." 내가 웃자 녀석은 조금 더 초조해졌는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 러나 그 순간 녀석의 앞에 있던 젊은 기사들이 파르르 떨며 내 앞으로 돌 진했다. "이 무례한 녀석! 죽어라!" 이 건방지고도 무례한 행동에 대해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 가? 나는 관대하게도 녀석의 머리통을 깨끗이 분리시키는 것으로 응당의 보답 을 해주었다. 그 뒤를 이어 덤벼드는 녀석들 서넛을 일제히 반토막으로 만 들어 놓자 마자 그제서야 공포가 그들의 머리 위로 올라 앉았다. ".....허, 억....이, 인간이 아니군." 놀란 음성으로 몇몇이 중얼거리는 동안 엘프의 왕이 나를 제지했다. "기다리게. 쿠베린." "기다리고 있잖아?" 그럼 내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거지 뭘 하는 걸로 보이냐? 안 기다렸으면 이 자리에 한 놈도 살아 남지 못했고 말고. "그가 쿠베린인가?" 그제서야 경악한 음성으로 룬드바르 녀석이 입을 열었다. ^^;; 훗........오랜만입니다. 잡담일기 3월 1일 수요일 그런대로 맑음 제목: 게으름에 대하여.....;; ...........사람은 게으르면 아무 것도 못하는 법이다. 즉, 나는 작심삼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아....;; 이것도 일기라도 쓰기 싫도다. 제 목:[쿠베린] 별전 마녀를 위한 노래 1 관련자료:없음 [22927]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0-03-03 02:47 조회:553 [쿠베린 별전] 마녀를 위한 노래 높이 나는 새들은 땅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걷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1 "삼공자를 죽여주면 돼." 어두운 흑자색의 커튼 너머로 두 명이 서 있었다. 방안은 짙고 붉은 카펫과 무거워 보이는 금빛 수술이 달린 테피스트리로 장식되어 있었다. 언뜻 보아도 호화스러운 방, 그 방안에 가득한 가구들은 소유자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리석을 깎아 만든 테이블도, 호화로운 빌로드를 덧씌워 만든 의자도 먼지가 하얗게 쌓 여서 결코 이 방이 주인을 자주 만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박제된 독수리가 눈을 노랗게 뜨고 노려보고 있는 그 아래로 방주인은 초 조하게 발끝을 움직였다. "댓가는?" "황금으로 십만길레 내 놓겠다. 알고 있겠지? 십만길레라는 돈은 결코 작 은 게 아니라......" "이십만." "노, 농담하지마! 이십만이라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회색 로브로 얼굴을 가린 자는 방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 주인은 호화로운 에메랄드의 브롯지를 달고, 그에 어울리는 에메랄드와 사파이어로 치장된 반지를 다섯 개나 끼고 있었다. 그의 허리띠에 달린 손 바닥만한 호박은 어떤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물건이었다. 그 시선 을 느꼈는지 다소 퉁퉁한 손을 가진 방주인은 자신의 손등을 급히 가렸다. 그리고는 더듬으면서 약간은 항의섞인 응답을 내 놓았다. "좋아, 그렇게 하지. 이십만을 내 놓을 테니까." "선금으로 십만." "알았어. 선금으로 십만." 하인리히는 장갑을 벗으면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늘어진 시체들이었다. 시체들은 온통 숲 안을 가득 메우고 말할 수 없는 악취를 풍겨내고 있었다. 맙소사, 모처럼 귀향한 이런 날 이런 꼴부터 보게 되다니. 그는 낮게 욕설을 퍼부우면서 옆에 선 젖형제이자 부관인 마르케스에게 장 갑을 건넸다. 마르케스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듯 한 얼굴이었다. 모처럼 냉혹한 빛이 가신 그의 회색빛 눈동자를 보고 하인 리히는 조금은 안도했다. '이 녀석도 사람은 사람이군.' 간신히 참고 있긴 했지만 하인리히도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욕지기를 참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 그가 연약 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구 짓인지 알수는 있나?" "모릅니다. 짐승도 아니고....이 근처에는 그레이트 오크도 없고, 사나운 수 인족들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인간이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걸." "트롤이 혹여 했을 지도 모르지만, 이 근처는 트롤이 나오는 지역이 아닙 니다." 대답한 것은 살벌한 눈빛으로 당장이라도 호통을 칠 듯한 표정의 세레스 였다. 세레스는 하인리히에게 배속된 기사지만 할로엔백작의 아들이다. 서 자이긴 해도 할로엔 백작의 아들인 이상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반년만의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하인리히가 수도 뮤네이젠로 향하던 길에 발견한 것은 형용이 불가할 정도로 학살된 영민들의 시체였다. 제법 큰 마 을의 주민들 오백여명이 몰살당한 채로 숲안에 널려 있었다. 남녀노소의 구별을 전혀 두지않은 지나치리만큼 공평한 학살장을 바라보면서 하인리히 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치안대는?" "저기에 있습니다." 세레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면서 가리켜 보였다. 풀 숲 한 구석에 서서 토악질을 해대는 서너명의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하 인리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기랄. 어떤 놈인지 밝혀내!" 보통의 인간이라면 어린애를 반쪽으로 찢어서 나뭇가지에 걸어놓는 듯한 미친 짓을 할 리는없었다. 게다가 그럴 만한 힘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시체들을 돌아보던 세레스가 낮게 신음하며 하인 리히에게 주의를 주었다.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하인리히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낮으막한 붉은 버섯 옆에 자그마한 구 슬이 한 개 떨어져 있었다. 피로 물든 그 구슬은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그 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하인리히는 소름이 끼치는 것과 동시에 그 구슬 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어떤 미친 놈이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수인족이 광란을 일으켰다고 해도 오백여명을 한 번에 학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트롤이 나타났다면 근처 마을에서도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 근 처는 항구 바레로아에서 가까운 곳으로 트롤이 소금물을 뒤집어쓸 위험을 감수하고 나타났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하인리히는 나뭇가지 위에 걸쳐진 어떤 여인의 조각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뭇가지 위에 걸쳐진 인간의 사지는 어떤 거대한 괴물이 씹다 만 찌꺼기처럼 널려 있었다. 내장과 검붉게 변한 살점들이 푸른 수풀 곳곳 에 널려 있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시체 조각들이 밟혔다. 파리떼와 송장 벌레들이 그 살점을 찾아 눈앞을 가리는 바람에 그는 앞으로 나아가길 한 순간 주저했다. 이래서야 아무리 능란한 병사라 할 지라도 토악질을 하는 게 당연하다. 하인리히는 억제했던 토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어와 다시 코를 막았다. 옆에 섰던 세레스가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 역시 손수 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있는 중이었다. 놈은 산채로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서 사방으로 던졌다. 남녀 노소 상관치 않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쫓아서 이 숲까지 들어와 갈가리 찢어 죽이고는 유유히 사라진 것이다. 이건 도대체가 인간의 짓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 지만, 이 근처에서 대체 수인들이 있다는 소문은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룬드바르공국은 이 백여년이래 수인족이 가장 적은 곳 중에 하나였다. 공 국의 북부에는 그레이트 오크의 서식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레이트 오크는 사나운 만큼 자신들의 거처를 범하지 않으면 일부러 튀어나오진 않는다. 그들은 영토 확장에는 그다지 취미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 근처에는 대 규모의 수인족 거처지는 전혀 없었다. 바다를 접하는 이 해양국에서는 소 금기를 싫어하는 이종족은 거의 없어서 굳이 찾는다면 가끔 발견되는 인어 와 항구도시에 호기심으로 찾아들었다가 사라지는 호비트들과 순한 그레이 오크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도 어디까지나 항구도시 일대에서 가끔 발견될 뿐이지 이런 공국의 깊숙한 곳에서는 거의 돌아다니지 않는다. 룬드바르 공국의 사람들은 폐쇄적이라 인간과 다른 모습을 한 그들을 고이 받아주지 않는다. 따라서 수인족도 이곳까지는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없지, 어떤 난폭한 수인족이 들어왔다가 이 마을 주민들에 게 발각되어 이들을 죽였을 지도 몰라.' 만약에 그렇다면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다른 마을에도 위험이 닥칠지도 몰라. 마을 자치대들에게 빠짐 없이 알 려두도록." "네, 명심하고 다른 지역에게도 알리겠습니다." 치안대의 대장은 굽실거리면서 온 몸으로 무능함을 외치고 있었다. 하인 리히는 이 잔혹한 시체더미를 훑어보다가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이 곳에 있다간 온통 시체냄새를 뒤집어 쓸 것이 뻔했다. "이제 서두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르케스가 안색이 나쁜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삼공자 하인리히 룬드바르는 룬드바르 대공의 두 번째 비인 바탈리아 부 인의 이남일녀중 차남이었다. 원래 이공자이자 바탈리아부인의 장남이었던 헤르겐은 사냥중 불행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승마의 명수이자 궁술의 명인인 그가 낙마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그 뒤를 이어서 하인리히의 누 나이자 헤르겐의 누이동생인 샤레이아가 또 갑작스런 열병으로 눈을 잃고 장님이 되더니 곧이어 불행한 사고로 실족사한 채로 그녀의 거처에서 발견 되었다. 계단에서 실족한 나머지 목이 부러져 죽어 있었다고 시녀들이 일 제히 증언했고 대공은 침통한 마음을 억누르며 유일한 딸을 그렇게 장사지 냈다. 연달아서 계속 아들과 딸을 잃은 바탈리아부인은 거의 반년간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잠을 자지도 못했고 독을 시험해주는 시종이 없다면 밥 도 먹지 못했다. 매일 매일 반은 울면서, 반은 울부짖으면서 지낸 그녀에게 유일한 희망은 형 헤르겐보다 능숙하지는 못했지만 그런데로 우수한 하인 리히였다. 하인리히는 19세 때 눈 앞에서 형 헤르겐을 잃었고 그 다음에는 20세 생일 전날에 누나 샤레이아를 잃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자신의 모 친이 반미치광이가 되어 유폐되는 일을 겪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그는 지나칠 만큼 건강해서 대공의 뒤를 이어 거침없이 배를 타고 외해(外海)로 나가곤 했다. 덕분에 삼공자 하인리히는 해양국인 이 곳에서 가장 많은 배 와 충성심이 넘쳐나는 사악하고도 잔인한 일당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런 그가 저 대공비 히르모니아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공의 첫째 부인인 대공비 히르모니아 세르오네 룬드바르는 세르오네 집 안의 장녀로 태어나, 대공의 정략결혼의 상대가 되었다. 물론, 그녀는 대공 자인 라데츠의 모친이기도 했다. 세르오네집안은 룬드바르 공국의 삼분지 일을 쥐고 있는 대가문으로 역시 뿌리는 해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맨 처음 룬드바르 공국이 생길 때 초대 룬드바르 공작은 자신의 주군인 오르볼트 국왕에게 이 남쪽 지역의 해적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워낙에 용맹했던 룬드바르공작의 이남인 데오오라 룬드바르는 서른의 젊 은 나이에 그 당시 군도를 거점으로 내해와 외해를 장악하고 있던 해적들 중 대부분을 복속시키고 자기 휘하의 사병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장남 에 밀라르 룬드바르가 룬드바르공국을 이어받고 지나치게 강건한 자신의 아우 를 제거하려던 그 순간 휘하의 해적들을 이끌고 자신의 친형을 공격했다. 기사단을 거느리고 있던 에밀라르는 이십여일간 싸웠지만 백전노장이 되어 버린 이 거친 동생에게 패하여 목을 바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노대 공은 장남 에밀라르의 잘린 목을 바라보면서 사나운 둘째 아들 데오오라에 게 대공위를 물려주게 되었던 것이다. 대륙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룬드바르 공국을 가리켜 해적소굴이라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르오네 가문은 이 때 데오오라의 왼편에 서서 제일 먼저 칼을 휘 두른 해적 일가이기도 했다. "여자를 부르길 바라십니까?" "아니."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침대에 발을 길게 뻗으면서 하인리히는 눈 을 반쯤 감고 대꾸했다. 숲을 빠져나와 북상하는 길목 제일 첫 번째에 위 치한 마을에서 여장을 푼 일행은 그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이 십여명 정도 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작은 마을의 여관에선 그나마도 다 감당할 수가 없어서 결국 두 개의 여관에 일행을 나누어야 했다. 마르케스는 자신 과 하인리히를 한 방에 배치하고 세레스가 이끄는 일곱의 병사를 다른 여 관으로 보냈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할로엔 백작의 아들인 세레스는 대공 비 일가의 육촌에 해당했던 것이다. 여관방에서는 그의 장화를 벗기던 종자는 마르케스의 손짓에 뒤로 물러서 서 밖으로 나갔다. "오자마자 괜한 걸 봤어." "뭐어, 앞으로 갈 길은 더할 지도 모르죠." "악담이냐?"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마르케스는 냉혹해 보이는 얼굴을 한층 더 차갑게 했 다. 하인리히의 유일한 지기인 마르케스 옥크토는 하인리히의 유모 벨큐레의 아들이란 것 이외에도 공통의 적이 있다는 데에 목적을 같이 하고 있었다. 마르케스는 평민이란 신분에도 불구하고 현재 기사위를 받고 있었다. 워낙 에 거친 룬드바르공국에서는 그런 일이 드물진 않았지만 흔한 것도 아니었 다. 평민이 기사위를 받기 위해선 보통 귀족기사가 해야 할 일의 최소 다 섯 배의 전공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마르케스는 그 것을 해냈다. 그는 무 표정하고 냉혹하고 절도 있게 평민임을 비웃는 모든 귀족들을 가차없이 물 리치고 기사위에 당당히 올라섰다. 대공은 그를 위해 보검을 하사하고 영 지를 내렸다. "원하던 것을 얻었군, 축하해." 그 기사서임식의 날, 당시만 해도 성격상 그다지 어울리는 일이 없었던 하인리히는 마르케스에게 조소 어린 인사말을 건넸다. "아직." 마르케스는 냉혹하게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차가운 회색눈과 갈색머리를 한 마르케스는 하인리히보다 머리 하나는 크 고 나이는 5세 연상이었다. 과묵하고 절대로 머리를 숙이지 않는 비사교적 인 성격을 하인리히는 미워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워하고 있 었던 것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야?" 약간은 술기운으로 하인리히가 웃으면서 묻자 마르케스는 대답대신 키가 크고 잘생긴 헤르겐과 같이 춤추고 있는 금발의 샤레이아를 바라보았다. 그 회색 눈에서 빛나는 놀랄만큼 온화한 눈동자에 하인리히는 숨을 멈췄 다. "........농담이겠지?" 하인리히가 다소 잔혹하게 물었지만 마르케스는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해 서 샤레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샤레이아는 18세, 마르케스는 22세, 하인리히는 17세의 밤이었다. "옛 생각이 나는군." 마르케스는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하인리히는 천장을 바라보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천장에 부딪치는 빗소리 가 들려오고 있었다. 약간 눅눅한 공기 때문에 침대에 깐 시트가 금새 축 축해 졌다. "오랜만의 귀향이니까 그렇겠지요. 이제부터 정신을 놓으시면 안됩니다." "알고 있어." 하인리히는 눈을 감았고 마르케스는 탁자에 다가가 놓여진 포도주를 한 잔 따랐다. 그는 평소대로 제일 먼저 은으로 만든 숟가락을 대어 보고 그 다음에는 마법사가 건넨 해독용 약초가루를 살짝 뿌렸다. 포도주에 별 반 응이 일어나지 않자, 그는 그제서야 그것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약간 맛 을 보았다. 그리고 한 참 뒤, 빗소리를 음미하듯이 허공을 바라보던 그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하인리히에게 포도주잔을 건넸다. 하인리히는 마르케스가 내미는 잔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고 마시면서 중얼거렸다. "그 암여우가 아직도 난리를 치고 있을까?" "당연하겠죠." "..........라데츠가 올해 몇 살이지?" "저랑 동갑입니다." 그 말에 하인리히는 마르케스를 돌아보았다. "너는 몇 살인데?" "올해 서른 둘 됩니다." 하인리히는 무표정한 부관을 바라보면서 다시 시선을 포도주잔으로 돌렸 다. "그럼 그때로부터 7년이나 지난 거군." 마르케스는 유일한 목표였던 샤레이아를 잃었고 하인리히는 누이와 형을 단숨에 잃었다. 그것만으로도 성격적으로 전혀 다른 두 사람은 한 덩이가 될 수 있었다. 하인리히에게 믿을 자는 단 하나였다. 피는 통하지 않지만 같은 젖을 먹고 자란 남아 있는 유일한 형제다.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하인리히는 잔을 비웠다. 따스한 기운을 느 끼면서 그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내일부터 다시 보이지 않는 칼날이 난무 하는 수도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마르케스가 자신의 장화를 벗 기는 것을 느끼면서 천천히 잠으로 빠져 들어갔다. 제 목:[쿠베린] 별전 마녀를 위한 노래 2 관련자료:없음 [22928]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0-03-03 02:48 조회:427 2 하인리히가 잠이 들자 마르케스는 문가에서 가까운 침대에 앉아 차고 있 던 칼을 빼어들었다. 눅눅한 공기와 소금기 많은 바다에서 지내온 시간이 너무 많아서 아무리 고급인 강철로 만든 칼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닦아야 했다. 그는 장신에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태도로 아주 천천히 칼날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보검을 대공에게 하사 받기는 했지만 그가 쓰고 있는 칼은 저자거리에서 파는 평범한 칼이었다. 기사들이 멋으로 차고 다니는 보검보 다는 뭉툭하고 두둑한 해적용 칼이 그의 성미에는 잘 맞았다. 그런 칼이라 면 칼등으로 쳐도 상대는 뼈가 으스러지고 칼날로 베면 몸통의 반은 잘려 나간다. 그 정도 위력이 없다면 무기라 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 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 하인리히는 실제로 샤레이아와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 섬세한 얼굴에 금발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룬드바르인이라기 보다는 북부 미인형에 가까워서 때때로 대공의 딸이 아니라는 소문까지 돌 았었다. 그러나 소심한 바탈리아부인이 그런 일까지 저지를 여자는 아니었 다. 마르케스는 충성심은 전혀 없었지만 하인리히만은 꼭 지켜주리라고 생 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샤레이아와의 약속이었으니까.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와 그는 등줄기를 곧추 세웠다. 다급한 발자국 은 그의 예상대로 맹렬하게 다가와 그의 방문 앞에서 멈췄다. "전하!" "무슨 일이냐?" 하인리히 대신 마르케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칼자루를 쥔 채로 일어섰지 만 문가로 다가서진 않았다. 갑작스런 공격에 대비해서 그는 하인리히가 누워 있는 침대가로 다가갔을 뿐이었다. "범인을 잡은 것 같습니다! 아, 아니, 지금 또 다른 희생자들이 나왔습니 다!" 떠들고 있는 것은 해적출신의 피오였다. 그는 문가에 서서 흥분한 채 외쳤 기 때문에 마르케스는 알았다라고만 대답하고 잠시 망설였다. "가자." 침대에 누워 있던 하인리히는 잠이 완전히 달아난 얼굴로 일어서고 있었 다.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닐 텐데요. 여기 치안대에게 맡겨두는 게 좋겠습 니다만." "아니, 나는 단지 그 사악한 일을 저지른 자들을 보고 싶을 뿐이야." 하인리히는 마르케스의 무표정한 얼굴을 향해 가볍게 말했다. 침대 머리에 놓여있던 검과 망토를 등에 걸치고 장화를 신자 마자 하인리히는 턱을 들 어 마르케스를 재촉했다.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르케스는 낮게 욕설을 퍼부었다. 희생자는 사냥꾼이었던 모양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에 사람들은 갖가지 횃불을 치켜 들고 그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체는 냉혹하고도 잔인하게 갈기갈기 찢겨진 채로 늘어 져 있었다. 사냥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가죽조끼와 가죽 신발이 조악하게 만들어진 주머니칼과 함께 얼굴이 반쪽 남은 시체에 달라붙어 덜렁거렸다. 피는 이미 빗길에 거의 다 씻겨 내려가 창백한 살점만 드러내고 있어 붉은 횃불 빛에 드러난 모습은 이미 인간이라기 보다는 히멀건한 살덩어리로 보 였다. 마을 사람들은 질척이는 진흙을 밟고 서서 그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공포와 증오가 그들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하인리히는 예민하 게 느꼈다. "범인이란 게 누구지? 범인을 누가 봤다며?" 그가 재차 묻자 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세레스가 그를 향해 대답했다. "저길 보십시오." 그가 가리키는 곳을 천천히 올려다 본 하인리히는 입을 벌렸다. 시커먼 덩어리가 마을 어귀 고목에 달라붙어 있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달 라붙어 있다기 보단 걸려 있었다. 아마도 사냥꾼들이 한 것인지 그 덩어리 여기 저기에는 창과 칼과 도끼등이 어지럽게 박혀 있었다. 그 모양새가 마 치 고슴도치 같아서 하인리히는 순간적으로 그 것이 대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인리히가 손짓하자 그의 종자중 한 명이 횃불을 그 덩어리에 갖다 댔다. "억!" 그 불빛에 드러난 형상은 곰도 아니고 트롤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짐승이었다. 덩치나 모양새는 큰 곰과 같았지만 머리통은 길죽 한 곰의 주둥이와 달리 코가 없는 그 자리에 거대한 입만이 있었다. 그리 고 그 입안은 온통 삐죽한 이빨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늘어진 몸체의 다리는 모두 여섯 개, 발톱은 곰과 달리 날카로운 칼날을 이어 만든 듯 길 고도 예리해 보였다. 네 개의 눈이 핏기를 담고 이글거리는 횃불에 따라 번들번들 빛이 났다. "대체 저게 뭐야?" "알 수 없습니다. 저런 괴물은 본 바가 없습니다." 촌장인지 자치대 대장인지 잘 알 수 없는 중년의 사내가 아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인리히는 그 짐승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낮게 물었다. "이거 단 한 마리만 있는 것이야?" "발견된 것은 단 한 마리입니다. 사냥꾼 열 일곱이 숲을 뒤지다가 발견한 놈입니다. 살아남은 사냥꾼은 단 두 명입니다. 그나마 그 한 명이 바로 저 기 늘어진 시체이고, 다른 한 명은 집에 누워 있습니다. 심한 상처를 입었 습니다."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소리를 등뒤로 하고 하인리히는 다시 숙소로 향했다. 일단 한 놈 잡기는 했지만 대체 저 놈 하나가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을까? 물론 숙련된 사냥꾼 열 여섯을 잡아 먹은 놈 이긴 하지만 오백여명을 모두 학살한 범인이라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어 보 였다. "어떻게 생각해?" "다른 놈들도 있겠죠. 적어도 서 너 마리는 되지 않을까요?" 마르케스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그는 흥분한 얼굴로 짐승의 시체를 바라 보고 있는 세레스를 흘긋 보았다. 세레스는 아직 스무 살의 애송이였다. 집안 사람들과의 반목이 워낙 심하 다는 이야기는 듣고 있지만 신용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믿을 만한 인간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전하!" 갑자기 등 뒤로 세레스가 말을 걸었다. 하인리히가 돌아보자 세레스는 흥분한 얼굴로 급히 외쳤다. "저 짐승이 또 있을지 모릅니다. 숲안을 수색하게 해 주십시오!" 하인리히는 무감동한 어조로 되물었다. "이 밤에 말인가?" 비가 내려 앞이 잘 보이지도 않고 바닥은 진흙으로 질펀거리는 이런 날에 어떤 야수가 있을지 알 수도 없는 숲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들어가겠다고? 하인리히는 짧게 조소했다. "난 부하들을 개죽음시키는 취미는 없어." 그는 면박을 당한 세레스가 굳건 말건 신경쓰지 않고 몸을 돌렸다. 망토는 이미 젖어들고 있고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장화는 진흙에 주륵 주륵 미끌어진다. 하인리히는 희미한 한기를 느끼면서 여관으로 향했다. "마르케스님." 세레스의 말에 하인리히의 뒤를 따르던 마르케스는 몸을 돌렸다. "이대로 놔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곧 수도로 들어가야 하고. 여기엔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농부들의 자치대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끔찍한 괴수들을 맡기고 그냥 가버린다는 것은......." "요점이 뭐냐?" "말 그대로입니다. 몇 명을 이끌고 숲을 수색하게 해 주십시오." 마르케스는 흥분으로 눈을 빛내고 있는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년 반의 해상 생활에서도 얻은 게 없는 것인지 이 청년은 무모한 열정을 앞세 워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했다. 어찌보면 이 성격은 하인리히와 닮은 일면 이 있었지만 하인리히보다도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마르케스는 그를 냉정 히 바라보며 대꾸했다. "전하의 말대로다. 이 밤에, 지리도 모르는 숲에 들어가 미지의 괴수와 맞 닥뜨리겠다? 그래서 뭘 할 테냐?" "하지만 기사란 것은........" "나아갈 때를 알고 움직여라." 마르케스는 일축하고 몸을 돌렸다. 세레스 덕분에 완전히 몸이 젖어버렸 다. 그는 불쾌한 기분을 억누르면서 이미 여관으로 들어가 버린 하인리히의 뒤 를 따랐다. "세레스녀석은, 말이지." 하인리히는 젖어버린 옷을 벗어 낡아빠진 나무 의자에 걸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아 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를 도와서 그의 진흙투성이 장화를 종자에게 건네고 마 르케스 역시 옷을 벗었다. "자기 육촌과는 전혀 안닮았는지도 몰라." "쓸데 없는 짓을 하는 점은 닮았습니다." 마르케스의 냉담한 말에 하인리히는 쓴 웃음을 지었다. "라데츠가 쓸데없는 짓을 했던가?" "귀족에게 완벽한 면세권을 부여했죠." 마르케스는 간단히 대꾸하면서 속까지 젖어버린 셔츠를 움켜 짜냈다. "어차피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어." "영지가 있는 귀족들은 세금의 십분의 일을 바쳐야 하는 거였죠. 원칙 은?" "원칙은 그랬지. 그러나 아무도 지키지 않아. 할아버지때 이래로 세금을 내는 귀족은 없어." "그러니까 멍청하다는 거겠죠." "네가 귀족이 아니니까 세금을 안낸다고 화를 내는 거겠지. 귀족들은 세 금을 내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구." 하인리히는 포도주 병에 손을 뻗어 한 잔 따르면서 말했다. 밤비에 젖은 몸은 으슬으슬 추웠다. 그런 그의 손을 막으면서 마르케스는 아까 한 대로 다시 은침을 포도주 잔에 넣고 그 음에는 다시 약초가루를 뿌렸다. 침을 삼키며 포도주를 기다리고 있는 하인리히를 모른 척하고 마르케스는 포도 주를 한 모금 삼켰다. "추워. 어서 줘." "잠깐 기다리십시오. 즉효성의 독이 아니라면 시간이 걸릴 테니까." 마르케스는 무미건조한 어투로 그를 제지하면서 잠시 포도주잔을 노려보 면서 기다렸다. 자신의 몸으로 검사하는 이런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잘 알 고 있지만 일일이 종자를 불러내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마르케스는 포도주잔을 하인리히에게 내밀었다. 하인리히는 그의 손에서 재빨리 잔을 빼앗아 단숨에 들이켰다. 아까부터 덜덜 떠느라 얼굴이 퍼렇게 질려있었다. "침대에 들어가십시오. 더운 물을 준비하라고 이를 테니까요." "알았어. 아, 마르케스. 내 망토는 덜 젖었으니까 그걸 걸치고 나가." 막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마르케스에게 하인리히가 덧붙였다. 순순히 망토 를 등에 걸친 마르케스는 치밀어 오르는 한기에 부르르 떨었다. 비에 젖어 체온을 상당히 빼앗긴 데다가 걸친 것은 얇은 속옷 뿐이었다. 그나마 망토 라도 걸치니 조금 나았다. 살인이 나고 사고가 난 지라 마을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으나 사방은 조용했다. 이미 밤이 깊었고 비까지 내리는 이 을씨년스러운 날씨 탓으로 나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듯했다. 비 내리는 소리 이외에 는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마르케스는 천천히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 계단 앞에 서서 아래층을 내려다 보았다. 아래층은 조용했지만 벽난로를 피웠는지 열기가 느껴졌다. 계단을 따라 내 려가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벽난로 앞에 서 넛의 여행자들이 두런두런 떠들 고 있었다. 음식냄새를 맡으면서 마르케스는 점원을 불렀다. "이봐." "네!" 상대가 높은 분이라는 것을 잘 아는 점원이 급히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발을 담글 더운 물과 탕파를 준비해 줘." "네, 알겠습니다." 점원이 사라지자 마자 그는 벽난로 앞으로 다가가 손을 쬐었다. 아직 축 축한 망토와 몸에 달라 붙었던 젖은 옷가지 때문에 불쾌했던 그는 이 온기 가 말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햇빛이 내리쬐는 해양에서 뛰어다녔던 지라 이 축축한 기운과 음산한 날씨는 무척이나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었다. "불을 가리지 마." 누군가가 낮게 말했다. 마르케스가 돌아보니 그의 바로 뒤에 불을 쪼이고 있던 여행자가 앉아 있 었다. 전신이 온통 젖은 그 여행자는 로브를 둘둘 몸에 말고 있었는데 그 로브 끝자락에서 계속해서 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진흙이 잔뜩 묻은 장 화나 지팡이가 꽤나 멀리서 온 여행자로 보여서 마르케스는 순순히 옆으로 물러섰다. 그 여행자의 일행으로 보이는 다른 자가 문득 머리에 둘러쓴 로브를 벗었 다. 물이 계속 떨어져 내려 불쾌했던 모양이었다. 순간, 마르케스는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크게 떴다. 황금빛의 머리칼을 한 여행자는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룬드바르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희디 흰 피부에 마치 소녀같은 용모를 한 청년은 마 르케스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그를 힐긋 바라보았다. 젖은 금발 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디서 왔나?" 마르케스는 조용히 물었다. 약간 미심쩍은 일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델리암에서 왔지요." 상냥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청년은, 소녀같은 미소에도 불구하고 지독하 게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르케스는 섬뜩한 기분을 느끼면서 다시 물었다. "도보로 온 건가?" "네에." "무엇 때문에 여기 온 거지?" "그런 걸 일일이 말씀드려야 하나요?" 청년은 조각 같은 미모로 웃으면서 되물었다. "수상하니까." 마르케스는 그렇게 대꾸하고 다른 자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의식했는 지 마르케스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여행자는 천천히 로브를 벗었다. 여자였다. 짙은 색을 한 금발을 가진 그녀는 황금빛의 눈을 한 채 마르케 스를 바라보았다. 밀빛 피부와 치켜 올라간 황금빛의 눈동자, 황금색이라기 엔 조금 어두운 금발을 가진 그녀는 말할 수도 없이 황홀한 눈빛을 하고 마르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내 동생은 지금 긴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미소가 갑자기 그 입가에 떠올랐다. 붉은 입술은 말할 나위 없이 매혹적 이어서 마르케스는 한순간 넋을 잃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는 자신이 아 직은 세레이아를 잊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차가운 눈빛으로 여자 를 마주 보았다. "여행의 목적과 이름을 대라." 그녀는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향내가 퍼졌다. 그것을 마르케스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름말인가요? 나는 카산드라, 제 동생은 마베릭이라 한답니다." "여행의 목적은?" "수행이지요. 우리들은 쓸만한 마법사랍니다." 그녀는 빙긋 웃어보였다. 마르케스의 머리 한 구석에 의심이 떠올랐다. 방금 본 그 괴이쩍은 짐승, 그리고 난데없이 나타난 이 두 명의 마법사. 원래 룬드바르에는 마법사가 흔하지 않았다. 오히려 드문 편에 속했던 것이다. "당신은? 당신은 하인리히 전하이신가요?" 그 말에 마르케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이 여자가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하인리히가 이 곳에 머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대단히 미심쩍은 남매다. "그런 것을 왜 묻지?" "당신이 그토록 비싼 흰 사슴의 망토를 걸치고 있으니까요." 마르케스는 문득 자신이 걸친 하인리히의 망토자락을 거머쥐였다. 뭔가 위 험했다. 이 자들, 겉모습은 대단히 아름답지만 너무나 위험한 자들이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그들을 노려보았다. "나를 사랑하세요." 갑자기 황금빛의 여인이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뭐라고?" 마르케스는 눈을 치켜떴다. "나를 사랑하세요. 당신은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이 마녀야!" 마르케스는 허리에서 칼을 빼 들었다. 여인의 황금빛 눈 안쪽에서 불꽃과 도 같은 것이 순간적으로 타올랐지만 그는 그것에 정신을 빼앗기진 않았 다. 그가 칼을 빼들자 옆에 앉아 있던 금발의 청년이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누님, 이 작자, 꽤나 고집스럽네. 현혹의 마법에 걸리지 않는거야?" "글쎄다. 그것도 재미로군." 그녀는 녹아내리는 듯 달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르케스가 막 그녀를 향해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 갑자기 그의 눈앞이 새 하얗게 변했다. "마르케스?" 둥근 얼굴의 세레이아가 그를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진심이야?" "네, 진심입니다." 세레이아는 조금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조금 얼굴을 붉혔 다. "하지만 아버진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제가 기사위를 따내고 전공을 세운다면 마음을 바꾸실 가능성은 있습니 다." "하긴,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내가 대단한 가문에 시집가도록 대공비가 용서치 않겠지." 그녀는 킬킬 웃었다. "어쩌면 나와 마르케스가 결혼하는 것을 대공비가 도와줄 지도 모르겠 네?" 그 말에 마르케스는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불안해. 알고 있겠지만 오빠가 그렇게 죽은 것은 대공비의 짓이 틀림없어. 그 여우가 우리 오빠를 죽였어. 그러니까 다음에는 틀림없 이 하인리히야." "세레이아님." "마르케스가 하인리히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지만 말야, 나 에겐 믿을 사람이 마르케스 밖에는 없어. 그 애도 마르케스라면 믿고 있을 걸." 세레이아는 또렷한 갈색 눈으로 마르케스를 올려다 보았다. 그 얼굴에 미 소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마르케스는 하인리히를 지켜줘. 그 애가 오빠처럼 죽지않도록 말이야." "네. 세레이아님." "세레이아라고 불러. 그리고 말이지....."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마르케스를 약간 부끄러운 듯 올려다 보았다. "키스는 언제 해 줄거야?" 그 말에 웃음을 낮게 터뜨리면서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입술 을 살짝 겹치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낮게 웃었다. 눈을 떴다. 마르케스의 눈 앞에 있는 것은 알몸의 여자였다. 그녀는 세레이아와 비슷한 금발을 흰 어깨에 흐트러뜨리고는 마르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흥미진진한 물건을 바라보는 듯한 그 무미건조한 눈빛을 보면서 그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깨닫고 아연해졌다. "깼네?" 그녀가 낮게 웃었다. "마녀,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그가 낮게 이를 갈며 묻자 그녀는 쿡쿡 작은 소리로 웃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흔들리는 금발은 사실 숨막히도록 아름다웠지만 마르케스는 그런 것 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재미있는 사내로군. 나와 실컷 놀아놓고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다니?" 그 말에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고개를 돌아보니 그의 몸은 지금 침대 기둥 네 군데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그가 움직이려고 팔을 움직일 때마다 철컹 철컹하고 그를 묶은 쇠사슬을 소리를 냈다. 낯선 방이었다. 분명히 그가 있었던 곳은 여관의 일층이었을텐데 눈을 떠 보니 그가 선 곳은 낯선 방안이었다. 방은 호화스럽고 달콤한 향기가 났다. 밖은 보이지 않았다. 창문에는 호사스럽지만 두터운 커튼이 창문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고 어두운 방을 비추는 촛불은 향기가 나는 향초였다. 귀족집 안에서도 여간해서는 쓰지않는 향초를 보고 마르케스는 냉정하게 머리를 굴리려고 애썼다. 지금 이 눈앞에 있는 여자가 대체 누구고, 자신에게 원하 는 게 뭔지 알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급한 것은 혼자 있 을 것이 뻔한 하인리히였다. "뭘 원하는 거냐? 마녀?" "흐음. 여전히 뻣뻣한 사내로군. 그 정도로 뜨거운 밤을 보냈으면서 말이 야." "대체.......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별로 약간 기분을 돋궜을 뿐이야. 하인리히전하." 마르케스는 눈살을 찌푸리고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그 웃음을 보고 마르케스도 모르게 조소를 머금었다. "이제 무슨 일인지 알 것 같군. 너는 내가 하인리히전하일 거라 생각하고 유혹한 거냐? 미안하지만 나는 하인리히 전하가 아니다. 나는 그의 부하일 뿐이지." 그 말에 여자는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네가 하인리히가 아니라고?" "후, 실망시켜 미안하군, 전하에게 미인계라도 펼치려던 모양이지?" 마르케스는 한껏 비웃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여자가 실망하여 분노를 터뜨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여자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 의외의 반응에 마르케스 는 잠시 그 황금빛의 여자를 살펴보았다. "그 아름다운 몸뚱이로 전하를 유혹해서 무슨 일을 하려는 거냐? 설마하 니 전하의 애인이라도 되고 싶었던 거냐?" 그녀는 화도 내지 않은 채 재미있다는 듯이 마르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그는 약간 당혹했다. 이 여자의 모든 것은 뭔가 보통의 여자와 달랐다. 그녀는 턱을 괸 채로 알몸을 가리지도 않고 마르케스의 옆에 엎드 렸다. 그리고는 마르케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여자의 체온이 벌거벗은 팔에 닿자 마르케스는 그제서야 자신도 여자도 완전히 알몸이라 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이 달아오를 수치스런 상황이었지만 그는 스무살 짜리 애송이는 아니었다. '대체 이 여자는 뭐냐? 뭘 바라는 거지?' "그럼 당신 이름은 뭐지?" "마르케스 옥크토. 기사다." "하인리히의 부하라고? 그의 가장 가까운 부하인가 보지? 그의 망토를 빌 려 입을 정도로?" 그 말에 흠칫하는 마르케스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즐겁다는 듯이 고양이처 럼 웃었다. "당신, 꽤 대담한 남자로군. 내가 아름다운가?" "마녀주제에." 마르케스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녀는 화를 내지도 않고 빙글빙글 웃었 다. 갑자기 차가운 칼날이 그의 목에 와 닿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몸을 굳 혔다. "대답해봐."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지?" 그는 목줄기를 파고드는 칼날을 느끼면서 되물었다. 목에서 흐르는 피가 침대 위를 적셨다. 뜨끈한 액체를 느끼면서 마르케스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여자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기묘한 빛깔. 이런 눈을 한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을 덮었다. 따스하고 뱀처럼 요사한 입술이었다. 마르케스가 피하지 않자 그녀는 입술을 겹친 채 웃었다. 비인간적일 정도 로 매끄러운 피부와 눈동자는 확실히 아름다웠다. "하인리히전하에게 무슨 볼일이지?" 마르케스는 조용히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자와 키스해 본 것 이 대체 얼마만의 일이던가? 그는 7년만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를 죽이려고." 놀라운 대답은 아니었다. "왜?" "부탁을 받았으니까."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의 이마위로 젖은 금발이 몇가닥 흘러내렸다. 이 여자의 이 이상할 정도로 빛나는 미모는 그녀의 웃음에 따라서 점점 빛 을 발하고 있었다. "누구에게?" "호사인 세르오네." 그녀는 순순히 말해주었다. 호사인 세르오네라면 세르오네 집안의 장남이다. 대공비의 오빠로 막강 권 력을 휘두르는 인물. 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마르케스는 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네가 세레이아님과 헤르겐님도 죽였나?" "아니." 그녀는 단숨에 부정하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을 마르케스는 반쯤 은 어이없는 기분으로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 이야길 나에게 하는 이유는 뭐지?" "하인리히를 죽일 마음이 갑자기 사라졌기때문이지." "뭐?" 마르케스는 입을 다물고 그녀가 말을 하길 재촉했다. 비록 알몸으로 뒹굴며 사로잡힌 몸이긴 하지만 머리는 정상적으로 굴러가 고 있었다. 이 여자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고 룬드바르에서도 드문 마법사 였다. 그녀는 지금 하인리히를 죽이도록 의뢰받았으면서도 그를 죽이지 않 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처음엔 죽일까 하고 생각도 했었지만, 그래봐야 세르오네 가문만 좋은 일을 굳이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나는 룬드바르란 이 나라가 무척 마음에 들었어. 여기에서 뿌리를 내리고 싶다는 생각도 할 정도로." 마르케스는 말없이 재촉했다. "그래서 결심했지. 차라리 하인리히쪽을 도와 대공위를 잇게 해주면 어떨 까 하고 말이야." 그녀는 기분 좋은 듯 두 다리를 주욱 펴면서 속삭였다. 그 움직임으로 마 르케스의 팔뚝에 그녀의 젖가슴이 와 닿았지만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 다. 그런 그를 향해 빙긋 웃으면서 그녀는 낮게 물었다. "어때? 사상 최고의 마법사를 한 편으로 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일 테 지?" "뭘 보고 널 믿지?" 마르케스가 재차 묻자 그녀는 흐음 하고 웃음을 지었다. "너에겐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어. 마르케스 옥크토. 물론 하인리히에게도 말이야. 나와 손을 잡던지 아니면 죽던지 둘 중 하나지." "어째서지?" "오다가 숲을 보았겠지?" 그녀는 악마처럼 웃었다. 소름이 끼치는 그런 웃음을 머금으면서 그녀는 한가롭게 마르케스의 머리 칼을 쓰다듬었다. 지나치게 다정해서 소름이 끼치는 그런 움직임이었다. "그런 짐승들 백 마리 정도를 상대로 너희들 이 십 여명이 살아남을 거라 고 생각해?" 제 목:[쿠베린] 별전 마녀를 위한 노래 3 관련자료:없음 [22929]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0-03-03 02:48 조회:402 3 하인리히는 기다렸다. 밤에 갑자기 사라진 마르케스를 기다리면서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는 이미 그쳤다. 질척거리는 땅바닥만을 남기고 이제는 푸른 하늘이 드 러나고 있었다. 마르케스가 갑자기 사라질 이유란 단 한 가지, 그의 죽음, 혹은 납치였다. 하인리히는 초조해지는 기분을 억누르기 위해 물병에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절대로 나 없이 음식을 먹어선 안됩니다." 마르케스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마르케스가 사라진 이상 그가 믿을 수 있는 인물은 극히 적었다. 전적으 로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은 마르케스와 그가 어릴 때부터 길러낸 해적 출신의 애송이들 몇 뿐이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는 물병과 탁자에 놓인 식사를 바라보았다. 벌써 이틀 간 온 종일 굶은 그는 허기와 굶주림으로 목이 탔지만 그 보다 더한 문제는 마르케스의 행방이었다. 만약에 그가 진 짜로 시체가 되었다면 하인리히는 당장 엄청난 위험에 봉착해 있는 셈이었 다. "젠장." 그는 주머니에서 은침을 꺼내 물병에 독이 있는가를 검사한 뒤에 마르케 스가 하던 것처럼 약초가루를 슬며시 뿌렸다. 다행히 물은 여전히 투명한 채로 변함이 없었기에 그는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마르케스가 전부터 말 했던 것처럼 그가 죽는다면 마르케스의 친우이자 부하인 베일러스를 불러 야 했다. 베일러스는 지금 바다에 있었다. 그가 거느린 선단이 여기에 도착 할 즈음이면 하인리히 자신은 죽어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마르케스를 건드린 놈이 누굴까? 설마하니 세레스놈인가?" 그러나 마치 아니라고 말하듯 세레스는 허둥지둥 마을 곳곳을 뒤지며 마 르케스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진심인지 아닌지 하인리히로선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 세레스의 휘하 전부가 그의 행방을 찾기위해 난리 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덕분에 안그래도 어수선한 이 작은 마을은 무척 시끄러웠다. 마르케스가 사라진 뒤 그의 부하들은 하인리히의 방을 이중 삼중으로 눈 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었다. 마르케스와 최소 십 년 이상 지내온 부하들인 지라 어느 정도 믿을 수는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는 없었 다. 그들의 동요를 느끼면서 하인리히는 한숨을 내 쉬었다. 사흘, 사흘간 기다리고 이 곳을 떠나리라고 그는 결심했다. 마르케스가 죽었는지 살았는 지도 모르고 여기서 그렇게 오랫동안 지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성격 으로 보아 이때껏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불길한 이야기였다. 하인리히는 제멋대로 자란 머리칼을 움켜쥐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젠장! 마르케스까지 건드리다니! 죽여버릴 테다!" "침착하시지요." 갑자기 그의 등 뒤에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하인리히는 놀라 몸을 돌렸다. 그의 침대 뒤쪽으로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 는지 두 명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놀랍게도 이틀간 행방불명이던 마르케스 와 금발을 한 미녀였다. "마르케스!" 하인리히는 놀라 손을 뻗다 말고 멈칫했다. "무사하십니까?" 마르케스는 여전히 무감동한 회색눈으로 하인리히의 몸을 살폈다. 그 시선 을 받으면서 하인리히는 얼굴을 구겼다. "너, 대체! 여자랑 노느라 안 나타난 거냐!" 그가 고함을 지르자 마르케스는 눈살을 찌푸렸고 금발의 미녀는 기분 좋 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을 들으면서 하인히리는 조금 흠칫했다. 지나치게 차가운 그 웃음소리는 결코 그녀의 외관처럼 듣기 좋은 것이 아 니었다. "나는 카산드라라고 합니다. 하인리히 전하." "넌 뭐냐?" 하인리히가 미심쩍은 눈초리를 던질 때 그녀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세르오네님에게서 부탁을 받고 당신을 죽이러 왔습니다. 나는 강한 마법 사거든요." 그 말에 하인리히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제서야 상대가 소리도 없이 그의 방안 한 가운데에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렇게 나타날 수는 없었다. 마법사가 드문 룬드바르인들은 마 법에 대한 공포가 남들보다 더 강했다. "그래서?" 하인리히는 마르케스와 여자를 번갈아 보며 되물었다. 마르케스가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자와 함께 나란히 서 있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기에 그는 약간 여유를 두고 물었다. 어차피 상대가 진짜 마법 사라고 한다면 자신을 죽이는 것은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일 것이다. 게다 가 상대가 그를 죽이려 당장 덤벼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뭔가 할 말이 있 는 듯했다. 하인리히는 오히려 약간의 흥미를 느끼면서 그녀를 똑바로 바 라보았다. 그 시선에 카산드라는 웃었다. 상당히 만족한 듯 웃으면서 그녀는 옆에 말없이 선 마르케스의 팔을 잡아 살며시 연인처럼 기댔다. "그러나 마르케스를 만나서 설득을 당했답니다." 그 말에 하인리히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르케스는 무표정한 대로 그녀를 흘긋 보았을 뿐 그 말에 대해 정정할 마음은 별로 없는 듯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다시 말해 너는 나를 죽일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이냐?" "네. 단지 세 가지만 다짐을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힘이 되어줄 수도 있 어요." "세 가지?" 하인리히는 미심쩍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산드라는 두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두 손바닥 사이에 푸른 기운이 맴도 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갑자기 화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시퍼런 비늘을 가 진 짐승이 떠올랐다. 그 짐승은 사람의 팔뚝만한 크기였지만 찢어진 두 눈 과 송곳 같은 이빨을 드러낸 채로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그 사나운 모 습에 마르케스와 하인리히 모두 눈을 크게 뜨며 주시했다. "가라. 가서 죽이고 와라." 그녀가 싸늘하게 말하자마자 그 짐승은 홱 하고 몸을 돌리더니 창문을 향 해 돌진했다. 그리고는 창문을 가차없이 꿰뚫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지고 차가운 바람이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디로 간거지?" 하인리히가 묻자 그녀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달콤하게 웃었다. "숲안을 떠도는 짐승들을 죽이러." "뭐?" "마을 사람들을 습격한 짐승들 말이지요. 그 마수들을 죽이러 간 겁니다." "저 작은 것이 그것들을 죽일 수 있다는 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하인리히가 중얼거리자 카산드라는 도도하게 웃었 다. "저것은 그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지요. 뭐, 궁금하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에 확인할 수 있을 거에요." "지금이라도?" 하인리히가 묻자 마자 갑자기 비명소리가 찢어질 듯이 울려퍼지기 시작했 다. 그 짐승들의 시체는 마을 어귀에 널려 있었다. 하인리히들은 그 시체들을 바라보며 망연히 입을 벌렸다. 짐승들은 갈가리 찢긴 채로 바닥에 피를 뿜으며 쓰러져 있었는데 그 주변으로 마을 사람들 로 보이는 사람들의 시체도 같이 몇 구 놓여 있었다. 자치대라고 하는 자 들이 와서 겁에 질린 사람들 사이에 끼어 그 시체들을 돌아보고 있는 동안 카산드라는 시체더미 앞으로 다가가 두 손을 다시 내밀었다. 그러자 우걱우걱 하는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시커먼 짐승이 튀어 올랐다. 비명을 올리는 사람들을 좌우로 두고 그 짐승은 부들부들 떨더니 갑자기 배가 불룩불룩하기 시작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듣기 싫은 소음과 함께 퍼 억 하고 피와 살점이 튀었다. 배를 가르며 그 퍼런 뱀과 같은 짐승이 튀어 나온 것이었다. 그 것은 피에 젖은 상태로 긴 혀를 내밀어 할짝 할짝 핥았 다. 여덟 개의 발과 갈래갈래 찢어진 꼬리를 가진 그것은 마치 도마뱀처럼 도 보였지만 길게 찢어진 입사이로 보이는 송곳같은 이빨덕분에 도마뱀이 란 착각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리 돌아와." 카산드라가 손을 뻗자 그 것은 홱 몸을 돌리더니 맹렬한 속도로 그녀의 손아귀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동요했다. 마을 사람들과 주변에 섰던 하인리히의 부하들 모두가 겁에 질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즐기듯이 카산드라는 하인리히를 바라보며 아리따운 태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다 없앴습니다. 하인리히전하." "..............." 공포로 말을 못잇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하인리히는 심호흡을 했다. 이것은 엄청난 행운이던가 아니면 가장 끔찍한 악운일 것이었다. 무서운 힘을 가진 마법사가 영웅의 뒤를 돕는다는 전설은 흔히 있어 왔지만 하인 리히 자신은 이런 힘을 가진 마법사를 상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겐 힘이 있고 병사가 있었지만 마르케스 이외엔 믿을 자가 없었다. 지금 눈앞에 선 이 여자 마법사를 믿는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녀를 휘하에 둘 수 있다면 모든 것은 역전될 것이었다. ".....바라는 게 뭐냐?" 그녀에겐 힘이 있었다. 원한다면 그녀는 하인리히를 단번에 죽이고도 남 을 힘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그에게 다가와 기꺼이 손을 잡을 것 을 요청한 것이다. 흥분으로 떨리는 주먹을 내리며 하인리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바라는 것을 말해라." 마르케스는 그녀의 힘을 보고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강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되어 줄 수 있었다. 제 목:[쿠베린] 별전 마녀를 위한 노래 4 관련자료:없음 [22930]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0-03-03 02:49 조회:413 4 "나에게 지위를 주세요. 궁정마법사정도면 좋겠지요." "그건....앞으로의 일이야." 하인리히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다시 여관방에 돌아온 그들은 금발의 화사한 미청년과 함께 나란히 앉아 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물론 하인리히는 식사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음식에 자연스레 손을 대면서 금발청년이 물었다. "우리들은 앞으로 당신이 룬드바르 대공이 되었을 때의 일을 말하는 겁니 다. 당연하잖아요?" 하인리히는 새파랗게 젊은 미청년을 바라보면서 약간 갈등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단순히 룬드바르대공으로 만족할 인물은 싫어요." 빵을 씹으면서 해사한 청년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상냥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나와 누님정도로 강한 마법사를 가진 군주가 시시하게 이런 남쪽 귀퉁이의 공국정도로 만족한단 말인가요?" 그 말에 하인리히는 주먹을 쥐었다. "최소한 대륙제패, 대륙제패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군주가 될 자격 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지요? 누님?" "그렇고 말고." 카산드라는 웃으며 포도주잔을 입에 댔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대륙의 통일, 그리고 그 군주가 나의 군주일 것. 그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룬드바르대공전하? 아니, 하인리히 황제폐하?" 쿡쿡쿡 하고 하인리히는 웃기 시작했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기 시작 해서 갑자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너무 발작적으로 웃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종자들이 불안해 할 정도였다. 하인리히는 너무나 유쾌한 나머 지 눈물까지 나올 것 같았다. 여지껏 목숨을 부지하느라 급급했던 그에게 대륙통일의 황제가 되라는 그 들의 말은 정말로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먼 미래의 이야기가 될지 혹은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너무 나 유쾌했다. "맞아, 그래, 맞는 말이야. 사내로 태어나서 그 정도는 해야해. 바다는 넓 어, 내가 나다닌 바다는 대륙보다도 넓을지 몰라. 그러니까 대륙통일, 그 정도 생각해 볼 만 하군." 그는 쿡쿡 웃으면서 옆에 앉은 마르케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정말로 대륙을 통일하고 싶어졌어. 이 좁은 땅덩 이에서 굴러다니는 돌멩이 취급은 이제 질색이야." 마르케스는 무심한 얼굴로 흥분한 하인리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장 큰 델리암왕국은 부패했고 다른 군소 왕국들은 태평성대에 이가 빠 졌어.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갑자기 빛나기 시작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마르케스는 희미하게 미소 를 지었다. "그 영토가 바다로 시작해서 바다로 끝나는 왕국, 저 산맥너머의 고왕국 과 장벽너머의 동방교국까지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대 제국." 하인리히는 자신을 바라보는 카산드라를 주시하며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움직임에 카산드라가 눈을 크게 뜨자 그는 시익 웃었다. "그런 제국을 만들도록 네가 도와줄 건가?" "네."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너의 조건은?" 손을 잡은 채 하인리히는 카산드라를 재촉했다. 그녀는 금빛 눈을 빛내면 서 매혹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첫 번째는 나를 궁정마법사로 할 것이었죠?" "승락한다." "두 번째는 대륙을 정복할 것." "좋아." "세 번째는 마르케스를 나에게 줄 것." 그 말에 하인리히는 눈을 크게 뜨고 마르케스를 돌아보았다. 마르케스의 얼굴은 평소대로 무표정해서 그 감정을 알 수 없었다. "그건 무슨 뜻인가? 마르케스를 달라는 건? 그의 목숨을 달라는 건가? 아 니면........?" "그를 내 연인으로 달라는 거지요." 여자로선 입에 담기 어려운 뻔뻔한 말에 하인리히는 순간 입을 벌렸다. "마르케스를 준다면 나는 당신을 불사신에 가깝게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최강의 마수를 당신의 휘하에 놓고 이 십여명이 넘는 최고의 마법병단을 당신에게 건네주지요. 그리고 대륙 전체를 내리칠 가장 강력한 군대를 만 들어주겠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을 대륙통일의 제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거에요." 카산드라의 엄청난 말에 하인리히는 말을 잊고 마르케스를 바라보았다. "마르케스?" 마르케스는 대체 이 여자의 진심이 어디까지인가 궁금해졌다. 난데없이 나타나더니 갑자기 하인리히의 휘하가 되겠다고 말하고, 그 다 음에는 자신을 달라고 말한다. 여자가 말하기엔 지나치게 수치스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 그녀를 그는 주시하면서 이 여자의 허풍을 언 제까지 믿어야 하는가 고심했다. "마, 마르케스? 너는 이 여자가 좋은 건가?" 하인리히는 7년간 여자와 만나지도 닿지도 않은 지독한 철벽의 사내를 바 라보며 물었다. ".............." 마르케스는 묵묵히 카산드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그 에게 던지고 있었다. 재미있다는 그 눈길을 받으면서 마르케스는 순순히 고개를 그덕였다. "하인리히전하를 돕는다면 나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너는! 너의 마음은?" 하인리히가 의외로 격한 어투로 물었다. 그 뜻밖의 태도에 마르케스는 그게 마법사를 얻기 위해 부하를 팔았다는 자책감인지, 혹은 그저 부하의 환심을 사려는 가식적인 행동인지 알 수 없 었다. 하인리히는 격한 성격이지만 뱀처럼 차가운 데도 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마르케스는 하인리히가 보이는 당혹한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 면서 되도록 그것이 후자 쪽이길 바랬다. 그래야 하인리히는 오래 살 것이 었다. 그리고 그게 그의 바램이었다. "나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 여자는 매력적이니까요." 마르케스의 말에 하인리히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샤레이아의 죽음이래 마르케스가 어떤 여자에게도 다가서지 않는다는 것 은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가 갑작스레 나타난 정체 모를 여자마법사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 다. '하지만 어쨌거나..........마르케스는 동의한 것이로군.' 하인리히는 조금 씁쓸한 기쁨을 맛보았다. 그가 자신을 위해 당연히 동의해 줄 것을 알면서도 재차 물어본 것은 정 말로 위선적인 행동이었다. 이 상황에서 분명 마법사의 이 조건은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마르케스도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재차 다른 말을 입에 올렸다. "그럴 순 없어. 마법사여, 다른 기사를 골라. 마르케스 말고 다른 기사들 도 얼마든지 잘생기고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많다구." 그 말에 카산드라는 훗 하고 웃음을 지었다. "나는 젊고 아름다운 남자를 찾는 게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저 회 색 눈을 한 저 남자입니다. 전하가 싫다면 없었던 일로 해도 상관없어요. 야망을 지닌 군주는 당신 하나 만이 아니니까." 그 말에 마르케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전하." "마르케스!" "저 여자와 같이 지내겠습니다, 전하." 하인리히는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무심한 얼굴을 한 마르케스는 여마법사의 동생이라고 하는 금발의 미청년과는 전혀 다른 바위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무표정하고 냉혹한 회색 눈을 바라보 면서 그는 잠시 말을 잊었다. "누님의 취향은 정말 이상하군요, 저 남자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어요?" 마베릭은 나른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산드라는 마르케스가 하인리히와 나란히 나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표정이 없이 담담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부하들은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의 옆으로 다가서길 꺼려 해서 그들은 약간 떨어져서 말을 몰고 있는 중이었다. 하인리히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마르케스의 뒤를 바라보면서 카산드라는 야릇하게 웃었다. "재미있는 주종이야." "그렇군요." 마베릭은 카산드라를 흘긋 보았다. "하지만 나는 저 남자의 매력을 모르겠는데요. 친애하는 누님?" ".............마스터와 닮았어." "어디가요?" 약간 긴장한 음성으로 마베릭이 묻자 카산드라는 낮게 대꾸했다. "그 무심한 회색 눈이 말이야." "마스터는 회색눈이 아니에요. 아니, 우리로선 마스터의 진짜 눈색깔은 알 수도 없다구요." "그야 그렇지. 그러나 나는 마스터의 눈이 회색일 거라고 생각해. 저런 눈 빛일 거라고 생각한다구." 카산드라가 킬킬 웃자 마베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닮지 않았어요. 저건 무력한 인간일 따름이에요. 마스터에 감히 비 교할 수는 없어요." "무력한 인간인 주제에 나를 무서워하지 않았지." 카산드라는 즐거운 듯이 대꾸했다. "저 회색 눈이 공포로 물드는 것을 보고 싶어. 마베릭." "이거야 참......" 마베릭은 한숨을 내 쉬었다. "저 회색 눈이 마구 마구 동요하는 걸 보고 싶단 말이야." "누님도 참 대단하군요. 그런 간단한 이유입니까?" 마베릭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곁눈질로 암흑마도 최강의 마법사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가장 지독하고 가장 잔인하며 암흑마도의 마스터를 제외하고는 가장 강한 그녀는 자기 자신을 모르는 듯했다. "정말 단순한 이유로군요. 누님." 당신은 그저 사랑에 빠진 거랍니다. 암흑마도 최강의 마법사님. 마베릭은 웃었다. 별전. 마녀를 위한 노래. 완. 결. 조금 나중에 올리려다가 그냥 올립니다.... 이 이야기는 그러니까 룬드바르가 마법사들을 거느리게 된 동기입니다만 더 자세한 뒷 이야기는 차츰 나오겠지요.^^;; 제 목:[쿠베린] 제 20화 광 란 13 관련자료:없음 [23484]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0-03-13 01:16 조회:3933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13 겁대가리 없이 날 바라보는 눈을 나도 마주 바라보았다. 이 녀석은 겁이 없는 편이겠지. 나도 그래, 겁이 없는 편이지. 녀석은 나를 처음 보는 듯이 아주 자세히 훑고 있었다. 어딘가 묘하게 나는 절대로 욕심쟁이가 아니어 요 라고 외치는 듯 보이는 간결한 갈색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어려있다. 그래, 이 몸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냐? "일단, 앉지." 엘프의 왕이 나에게 조용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나는 하인리히 녀석의 타오를 듯한 구애의 시선을 받으면서 의자에 앉았 다. 이봐, 그렇게 애절하게(?) 바라보면 나도 마음이 떨려. 주변은 조용해졌다. 바닥에 뒹구는 시퍼런 머리통들과 바닥에 흐르는 시뻘 건 선혈과 이리 저리 흩어진 주인 잃은 무구들을 스윽 훑어보면서 녀석이 나에게 말을 건다. "이게 무슨 짓이지? 전에도 말했지만, 쿠베린, 당신은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자, 여러분, 잠깐만. 지금 여기서 이 놈이 뭐라 했는지 다들 들으셨겠지? 이야기 꾼, 음유시인, 이봐, 다들 적어 놔. 저 오세리안해의 주인이며 뭐, 좁아 터진 룬드바르 평원의 주인이자 대륙의 정복자인 분이, 너무 너무 한 일이 많아서 자기가 뭘 했는지도 기억을 못하네. 얼마나 그동안 저지른 일 들이 많았으면 이렇게까지 멍청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걸까? 녀석의 말에 내 옆에 앉아 있던 모든 엘프들이 아연한 얼굴로 녀석을 바 라본다. 정말 기 막히네. 사람 죽여 놓고 너 왜 죽었냐 하는 식 아냐? 이런 걸 엘리야 식으로는 '과부 욕보이고 눈물 닦는다' 라고 하지. 이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녀석은 이 모든 자들이 전부 야릇한 눈초리로 바라보자 흠 하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네 녀석이 눈썹을 일부러 움직이지 않아도 눈썹은 눈썹이야. 다 눈 위에 달려 있지. "전에 말했을 때 옆에 있던 분홍주둥이 녀석은 어디있지?" "분홍 주둥이?" 녀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옆에 선 자를 향해 다시 묻는다. "누굴 말하는 거지?" 옆에 서 있던 검은 머리에 회색 눈을 한 남자가 조용히 대꾸했다. "마베릭이겠죠." "마베릭....을 분홍주둥이라고 부르는 건가? 하?" 녀석은 뭐가 재미있는 지 킬킬거리면서 날 바라보았다. "마베릭은 왜?" "그 녀석을 죽여야 하거든." 내가 미소짓자 녀석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러나 대담하게도 녀석은 나 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이 경우 대담하다고 하는 게 아니다. 간이 배밖에 튀어 나와서 퉁퉁 뛰어 다닌다고 말해야 할 게다. "네가 마베릭을 죽일 수 있을까?" 나는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이 말 같지 않은 일에 대해선 길게 말할 것이 없으니까. 그도 잠깐, 나는 보다 너무나 즐거운 사실을 발견했다. 아, 나도 둔해졌어. 저걸 왜 몰랐을까? 나의 시선이 룬드바르 본인이 아니라 녀석의 바로 옆, 아니 그 옆의 옆에 쏠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집중했다. 룬드바르의 옆 에 마누라처럼 달라붙어 있는 검은 머리 기사 옆에 팔짱을 끼고 선 누렁털 의 사내와 갈색털의 사내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그리고 한 순간 한 줄기 바람처럼 무엇인가가 내 뒤통수를 스쳐 갔다. 시선이다. 냄새 나는 시선. 웃으며 돌아보니 다른 병사들과 함께 문가에 서 있던 은빛 털을 가진 두 놈의 젊은 녀석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 녀석들은 나를 바라보면서 점점 숨이 거칠어 지고 있었다. 녀석들의 눈가에서 피어 오르는 숨길 수 없는 흥분의 빛과 공포의 빛, 그리고 살의 가 뭉개뭉개 치솟아 올라 이 좁지도 않은 대전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사인족?" 낮게 아크가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쨍그랑 하고 엄청난 소음과 함께 대전의 맨 꼭대기에서 갑자기 유리조각 이 쏟아져 내렸다. 비명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유리조각은 마치 박살난 보석처럼 황홀한 빛을 사방으로 뿌리면서 우아하게 흩어져 내렸다. 그 아래 있던 몇몇 인간들이 피를 뿌리면서 다급히 피하려했던 것도, 돼지 잡듯 울려퍼지는 비명소리도 그 황홀한 아름다움을 어쩌진 못했다. 바깥의 빛과, 대전안에 있던 샹데리아에서 흐르는 빛이 박살난 색유리와 함께 형형색색의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 유리조각과 함께 등장한 네 명은 말 그대로 전설속에 나오는 여신처럼 등장했다. 붉은 날개를 공중 한 가득히 펼쳐내고 있는 조인족의 여왕과 그녀의 뒤에 마치 청동으로 만든 기둥처럼 버티고 선 세 명의 전사는 묵묵히 대전안을 훑어보고 있었다. "조인족!" 몇몇 녀석들이 감탄에 비명을 섞어서 야릇한 소리를 내지르는 동안 조인 족의 여왕은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들어서 룬드바르를 직시했다. 그 황홀한 아름다움에 한 동안 말을 잊었는지 녀석은 입을 벌리고 여왕을 멍 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녀석의 민첩한 부하들은 별로 소 용도 없는 인간의 벽을 몇겹이나 싸서 자신들의 주인을 보호하려고 했다. "..............처음이군요. 인간의 왕." 짧게 조인족의 여왕이 말했다. 그녀는 경멸의 기색조차 띄우지 않은 채 그 를 바라보고 있었다. 룬드바르는 황홀에 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듯 다시 수컷 특유의 능글맞은 표정으로 변하 고 있었다. "그렇군요. 조인족의 여왕이여." ".............." "당신께서도 이 곳에 조약을 맺으러 오신 거요? 아니면 여기 있는 쿠베린 처럼 나에게 시비를 걸러 오신 거요?" 그 뻔뻔한 말에 내가 막 뭐라 할 찰나였다. 푸앗 하고 무엇이 룬드바르의 앞으로 튀어올랐다. 그것은 시뻘겋고 시커먼 액체로, 룬드바르의 바로 앞에 몇 겹이나 벽을 쌓 은 기사들 열 명중 일곱 명의 몸안에서 튀어 올랐다. 얼마나 빨랐는지 자 기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그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 신들의 팔뚝이 잘려나가고, 가슴이 쪼개지고, 머리가 잘려진 것도 모르고 두 다리는 서 있기만 했다. 마침내 여기저기서 숨막히는 비명이 흘러나오 자 그 제서야 목을 잃고 심장을 잃은 시체들은 푸들푸들 떨다가 앞으로 고 꾸라졌다. 나는 조인족의 여왕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움직임은 전혀 없었던 것 같지만 그녀의 옷깃 한 군데에 핏방울이 미세하게 튀어 있었다. 그녀의 손톱은 나와 달라 갈쿠 리처럼 둥글었지만 잔악해서 그 손톱 끄트머리에 방금 그녀가 죽여버린 기 사의 심장 조각이 달라 붙어 있었다. "우, 웃.....!" "시비를 걸러 온 게 아니오. 인간의 왕이여. 나는 당신의 죄를 물으려고 왔소." 여왕은 전혀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룬드바르 만이 아니고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얼마나 무 서운 존재들과 얼굴을 맞대고 있으며, 이 눈앞의 아름다운 여인이 밖의 수 많은 경비들을 어떻게 물리치고 이 곳으로 들어온 것인지를 깨달았던 모양 이다. 갑자기 이 둔한 인간들 사이로 공포라는 것이 물결처럼 일어나 순식 간에 그들의 시야를 덮어 버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죄를 물을 자격이 그대에게 있다고?" 룬드바르가 동요한 얼굴을 숨기고 큰 소리로 묻자, 조인족의 여왕은 더더 욱이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납치된 우리 동족은 어디 있으며, 왜 우리들을 건드려 수 많은 자들을 해쳤는가?" 그 말에 녀석은 얼굴을 찌푸렸다. "전쟁이다. 전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일 따위 나에게 일일이 물을 셈인가?" 녀석은 뻔뻔하게 그렇게 말을 잇더니 여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외쳤다. "전쟁에 휘말린 것 뿐이잖은가! 그대의 일족은 그저 전쟁에 휘말렸을 뿐 이다. 희생자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 일을 나에게 묻고 싶다면 그대들 이 죽인 내 병사에 대해서 나도 묻고 싶은 걸!" 나라면 그 대담성에는 박수를 쳐주겠지만, 여왕은 슬프게도 내가 아니었다. "그런가? 전쟁에 휘말린 것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 그대는 전쟁을 할 때 산 속 깊이 지내는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일족을 이끌고 들어갔다. 이것은 역대 어떤 인간도 하지 않은 짓이지. 이 것은 우연이 절대 아니다." 여왕은 지나치게 조리가 정연해서 나는 속에서 불이 날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줄줄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야? 어차피 인간들 따위는 알아듣지도 못할 것을. "여왕, 길게 말할 거 없소. 그런 걸 알아들을 놈이라면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았지. 저기 저 면상을 보면 몰라? 저 놈은 자 기 이외의 어떤 존재의 아픔에도 고개를 돌릴 자가 아니야. 자기 앞에서 지금 몇이나 되는 기사가 몰살을 당했어도 말짱하잖아?" 내 말에 여왕은 슬픈 듯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군요. 묘인족의 왕. 인간은 너무나 많아서 하나 하나가 소중한 존재 라고는 생각지 않는가 봐요." 그녀는 슬픈 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엘프들의 왕을 돌아보았다. 엘프의 왕 은 망연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엘프의 왕이여, 가장 오래된 지혜를 가진 한 분이여." 그녀는 너무나도 슬프게 말했다. "당신은 인간을 너무나 신용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바람처럼 그녀의 뒤에 있던 자들이 움직였다. 날개가 움직이는가 하는 순간 그들은 이미 홀안에 있는 병사들을 향해 덮쳐가고 있었다. 이거, 이거, 늦으면 곤란하겠군. "사인족을 건드리는 놈은 내가 죽여버린다!" 맨 처음은 바로 문가에 서서 잔뜩 도사린 은빛 털을 가진 두 녀석이었다. "사인족!" 녀석들은 내가 외치자 대답대신 이빨을 드러냈다. "지긋지긋한 묘인족!" "이 몸께서 너희들의 목숨을 손수 걷어 가시려고 여기 왔다는 걸 영광으 로 여겨!" 나는 녀석들이 몸을 변화시키는 것을 느끼면서 일직선으로 허공을 날았다. 내 발 끝에 몇몇 인간들이 고꾸라졌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녀석 들은 노랗게 눈을 빛내면서 당장에 몸을 수그리며 변신모드에 들어갔다. 1 단계 변신을 지나서 녀석들이 단숨에 2단계 변신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너희들로 이제 사인족은 몇이나 남았을까?" 눈 앞이 붉게 타올랐다. 녀석들이 완전히 누런 털로 뒤덮히고 네 개의 팔뚝을 드러낸 채로 포효하 는 것을 몽롱하게 들으면서 나는 내 몸안에 흐르는 피를 느꼈다. 피는 역 류하고 나의 심장은 터질 듯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뿜어낸다. 내 온 몸 작고 가는 혈관으로 퍼져나가는 격류가 온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어 놓았 다. 터질 것 같은 묵직한 고통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튀어 나왔다. 나는 고 함을 치고 있었다. 고함 소리, 고함 소리. 사인족사인족사인족사인족사인족사인족사인족사인족사인족사인족사인족...... .......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 트라....... 네 개의 팔뚝을 잘라내며 광분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기뻐서 덩실덩 실 춤을 추었다. 내 딸아, 너의 팔을 잘라낸 것처럼 모든 사인족의 팔을 잘라내고, 너의 다 리를 잘라낸 어떤 녀석처럼 모든 사인족의 다리를 잘라내고, 너의 배를 헤 집은 것처럼 모든 사인족의 뱃속을 헤집어 심장을 파낸다. 터져라, 심장! 사인족의 감탄할 만한 심장, 터지고 또 터져서 내 딸 보다 백 배 천 배는 고통스러워해라! 가슴에 손톱을 집어 넣어 녀석의 심장을 끄집어 내던지고 손안에 잡히는 따끈한 내장을 비틀어 꺼내 허공으로 내던진다. 강인한 사인족의 생명력이 나에게 뜨거운 피를 뿜으면서 덤비는 것이 너무나 기뻐서 나는 웃음을 도 저히 참을 수 없었다. 봐라, 미트라, 가련한 공주님! 너를 죽인 이 악당을 이 용사께서 이렇게 박살내 줄거야. 너의 심장을 꿰뚫은 것 이상으로 녀석들을 짓밟고 너에게 고통을 맛보게 한 것 이상으로 녀석들을 몰살시킨다. 이 세상 어디에도 미 트라, 너만은 단 한 명, 사인족따위보다 훨씬 무게가 나가는 무지막지한 내 아가씨, 가련한 내 공주님. 한 녀석이 나를 향해 노골적인 공포의 표정을 지으면서 뒤로 물러서고 있 었다. 2단계 변신까지 한 주제에 나를 향해 그런 태도를 취하면 정말 슬프 지. 슬프고 말고. 너는 말이지, 강해야 해. 내 모든 분노를 다 감당해 낼 정 도로 강하고 강하고 또 강하고 질기고 질기고 또 질겨야 하고 말고. 그래, 이리로 와! 네 놈의 손톱을 잡아 부러뜨리고 네 놈의 전신의 뼈를 박살내 고 네 놈의 살점을 갈갈이 뜯어서 집어 삼키겠어! 그래, 배가 고파! 배가 고파서 뱃가죽이 등에 달라 붙을 것 같아! 도망치다니, 사인족 양반, 그럼 못써! 나는 도망치는 한 녀석의 모가지를 비틀어 대며 녀석의 두 목줄기에 손톱 을 박았다. 손톱은 녀석의 강인한 근육을 제대로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지 만 녀석의 어깨 뼈가 박살나게 만들어 놓았다. 비명을 지르며 녀석은 어깨 위에 올라앉은 나를 떨구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려고 했지만 나는 녀석의 두개골 밑 부드러운 연골을 향해 손톱을 밀어 넣었다. 푸욱 하고 부드럽게 박히는 그 감촉은, 살보다도 연하고 내장보다도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주르 륵 하고 노란 색의 액체가 녀석의 머리에서 흘러내렸다. 녀석의 눈알이 반 쯤 튀어나오고 혀가 길게 빠져 나온다. 천천히 녀석의 몸뚱이가 제어와 힘 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보며 나는 녀석의 목덜미를 덥석 물고 우드득 우드 득 씹기 시작했다. "흐흐... 으흐흐흐....." 모두가 날 바라보고 있다. 조인족의 전사들과 인간들, 그리고 엘프들은 나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 었다. 나는 사인족의 뇌수를 삼키면서 아직도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제기랄, 대 체 왜 이렇게 배가 고픈 거지? 왜 이렇게 허전한 거야? 마미의 스튜가 그 리워, 그녀의 통구이가 그리워. 사방이 다 고요했다. 내가 씹어 삼키는 사인족의 뼈가 아드득 아드득 부서 지는 소리만이 대전 안을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 한 명, 바로 룬드바르 옆에 서 있는 사인족 만이 유일하게 살아 남 은 녀석이었다. 얼레, 너무 빨랐어. 벌써 세 놈이나 죽여버렸어? 천천히 죽 일 걸, 너무 급했네. 나는 겁에 질려 꼼짝도 못하는 사인족 녀석을 향해 씨익 웃었다. "네가 마지막이야." 내 시선을 받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녀석은 으르렁거리면서 다급히 외쳤 다. "나는 불사다." "허? 불사?" 나는 마지막에 남은 사인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물었다. 겁에 질린 녀석은 갈색 털을 잔뜩 도사린 채 변신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 는 녀석의 앞에 서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친절하게 되물었다. "사인족이 불사란 이야기 나 들은 적 없는데?" 그리고 불사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까지 좋을 것도 없을 텐데. 네 놈같이 약해빠진 놈으로선 말이야. 오히려, 이 경우는 너무 너무 나를 즐겁게 해주 는 것이야. 나의 웃음을 보면서 녀석은 주제에 화가 난 것인지 이를 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마, 마법이다." 녀석이 대꾸같지도 않은 대꾸를 하면서 나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 리고 동시에 별로 대단치도 않은 두 개의 손을 내밀고, 그 날카롭지도 않 은 손톱을 들이밀며 내게 돌진해 왔다. 달려나오며 2단계의 변신을 거듭한 녀석은 내 주먹을 받고 뒤로 튕겨나가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여력을 못 이겨 바닥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갈라졌다. 이미 근처에 선 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녀석이 피를 토하면서 천천히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을 지켜보았다. 녀석의 눈동자는 노란 색에서 천천히 흰 색으로 바 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가 흰자위와 같아지는 순간 녀석이 바닥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일직선으로 튀어 오른 녀석은 나를 향해서 그대로 어 깨로 들이밀었다. 두 팔을 앞으로 들어 올리면서 녀석의 몸체를 막자 엄청 난 충격이 글자 그대로 머릿속까지 달려들어와 이빨이 덜렁거릴 정도였다. 자, 잠깐, 아무리 나라고 해도 설마하니 나, 여지껏 변신도 하지 않고 싸우 고 있었네, 그려. 갑자기 팽 소리와 함께 머리가 뒤로 돌아갔다. 뻐억하고 별로 상쾌하지 않 은 소리와 함께 나는 뒤로 나자빠졌다. 녀석의 주먹이 나의 턱 한가운데를 명중시켰던지 턱이 얼얼하다 못해 빠개질 것 같았다. ".......................크으으앙" 녀석이 이를 갈면서 그렇게 외쳤다. 갑자기 웃음이 나와서 나는 시익 웃고 말았다. 웃는 바람에 턱과 입술이 아프다. 이런, 입가가 찢어졌네. 저 녀석의 저 소리는 틀림없이 <지긋지긋 한 묘인족> 이거나, <나는 묘인족이 싫어요> 라든가, <묘인족이 무서워요 >와 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가련한 녀석. 무섭냐? 무서워? 그렇다면 나를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그렇다면 이 내가 변신하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우오오오오오오오오..........." 경쾌한 고함, 포효, 여지껏 지르지 않았던 소리.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두 손에서 손톱이 튀어 나오고 숨겨졌던 발톱 이 자랑스레 튕겨 나왔다. 그래, 그래. 3단계 변신한 녀석을 앞에 두고 이 런 무례한 짓을 해선 안되는 거야. 녀석은 나의 변신에 놀랐는지 그대로 나를 향해 뛰어 들었다. 그리고 고개 를 앞으로 내뻗으면서 비명같은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녀석의 전신에 난 털이 일제히 나를 향해 쏟아져 나온다. 공기를 갈가리 찢어대는 파공성 과 함께 녀석의 털이 수백, 수천이 일제히 내 몸뚱이에 들이박혔다. 끔찍한 감각이 가슴과 배에, 그리고 얼굴에서 일제히 몸부림을 치며 내 뇌수로 달 려 들었다. 고통, 고통, 선열한 고통. "크흐, 크흐. 하, 하하하하하하하...........!" 첫 번째 변신이 지나가고 그 다음 두 번째 변신이 시작되었다. 나는 온 몸 을 숙이고 내 몸안에서 살갗 안쪽으로 파고들어 오려는 사인족의 바늘같은 털들을 위해 전신을 흔들었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조금더 조금더 하는 소리를 외치면서 이 이물질들을 튕겨내려 애쓰고 있었다. 사인족의 녀석은 내가 변신을 더 하기 전에 끝내려는 듯 미친 듯이 달려들어 나를 할퀴기 시작했다. 사인족 놈들이 가진 그 짧은 손톱이 어느 새인지 인간들의 보검 으로 화해서 나를 내찔러온다. 그 보검이 내 가슴으로, 내 심장으로 찔러들 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갑작스런 열기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 파하하하하하하.......!" 두근두근하고 심장이 뛴다. 격렬한 움직임으로 심장이 뛴다. 이것이었다. 이것이었을 게다. 미트라와 나의 아이를 상처낸 것은. 어째서, 어째서 사인족들은 인간들의 무기를 사용하는 것일까? 묘인족과 조인족에 비해 짧고 왜소한 손톱을 보강하기 위해 녀석들은 인간들의 무기 로 자신들의 적을 죽인다. 대체, 이 놈들은 그토록 인간을 증오하면서도 가 장 인간들과 닮아 있는 것일까.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눈앞은 이미 새빨갛게 물들고, 귓가에서 들리는 소 리란 단 한가지, 상대의 심장소리뿐. 이거야, 이게 바로 내가 바라던 황홀 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나의 즐거움. 내가 바라는 것은 이 것이었다구. 인간들이 사라지고, 룬드바르가 사라지고, 엘프들이 사라지고, 조인족이 사 라지고, 마침내 사인족조차 사라졌다. 서 있는 것은 오로지 나와 '상대' 뿐. 어디에서 들리는 지 알 수도 없는 웅웅웅 하는 기묘한 소리가 내 몸을 덮 어간다. 미트라, 가련한 내 아가씨, 채 자라지도 못한 내 딸, 혼자 싸우다 죽어버린 조그마한 파란 내 아들. 울부짖는 자들의 소리. 내 숨소리인지 남의 숨소리 인지 잘 알 수 없는 작은 소음들. 땅 바닥에서 속삭이는 작은 벌레들의 움 직임. 살아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다 없앤다. 내 앞에서 강한 척을 하며 감 히 내 앞에 서서 움직이는 놈들은 다 죽인다. 나는 이 자리의 왕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자이다. 나는 강하다. 나는 강하다. 나는 강하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춤을 춘다. 내 심장소리에 맞추어 박수를 친다. 나를 막는 것을 부수며 웃음을 짓는다. 살육의 여신과 죽음의 여신이 내 어깨 위에 내려 앉아 나의 웃음소리에 맞추어 악기를 연주한다. 연주 소리는 내 가 들은 것 중 가장 흉측할 정도로 아름답다. 광기의 여신이 나에게 미소 를 짓는다. 대지의 여신은 내가 제물을 던져 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 천공 의 여신은 나를 굽어보며 손짓을 한다. 나는 미치고 미쳐서 이 온 몸에 도 는 피가 부르는 노래에 맞춰서 노래하고 춤추고 웃음 짓는다. 두 다리는 무엇을 밟는 지 알 수가 없고 두 팔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눈앞에 서 울부짖는 것은 대체 무엇이고 내가 짓밟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다 나가! 미친 듯이 도망가라!" "대적하지마! 당장 이 자리를 피해!" "어서! 어서 달아나라!" 누군가가 외치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내가 아는 녀석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웃으면서 춤을 춘다. 내 춤사위에 들떠서 검붉은 선은 제 멋대로 허공에 그림을 그린다. "제기랄! 미쳤어! 진짜 미쳤어!" "저, 저게 쿠베린 맞아?" "오오, 맙소사! 저 놈이 저렇게 되는 것은 대체 몇백년만의 일이냐?" "어서 나가!"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을 무기력하게 들으면서 움직인다. 어떤 녀석이 떠들고 어떤 녀석이 강하고 그런 것은 이제 상관이 없었다. 내 앞에서 강 한 놈, 그 놈을 죽이면 된다. 자아, 이 자리에서 내가 말한대로 되는 거다. 일그러진 움직임을 한 어떤 녀석이 실제로 내 눈앞에서 일그러졌다. 녀석 의 팔뚝을 잡아 뜯어 삼키면서 내가 말하고 있다. "너, 불사라며? 불사라고 했지?" "미쳤어!" "불사라면 죽지 않는 거잖아? 그런 거지?" "어서 피해!" "이렇게 찢어도 죽지 않아? 그런 거냐?" 가슴을 향해 그대로 주먹을 뻗었다. 녀석의 강력한 근육이 항거하듯이 내 주먹을 튕겨냈지만 그 순간 다시 또 한번 나는 녀석을 후려갈겼다. 몇 번 이나 후려갈기자 녀석의 몸이 고통을 못이겨 공중으로 튕겨 올랐다. 녀석 의 몸뚱이를 쥐고 흔들며 바닥을 후려갈기고 벽을 향해 집어 던진다. 단단 하기 이를 데 없는 그 몸뚱이 덕분에 화려한 벽면에 금이 갔다. 벽면을 가 득 메운 색깔은 빨강과 검정. 나는 달려가 녀석의 뒤통수를 잡아 그 검정 색 얼룩이 진 벽면에 치대며 짓이겨댄다. 녀석의 이빨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황홀감. 그러나 허탈하다. 이 놈은 너무 약해. 너무 약해. 강한 놈은 없는 거야? 더 강한 놈은 없는 거 냐? "아크! 저 놈을 향해 한 대 갈겨!" "안됩니다! 지금 녀석을 공격했다간 놈이 절 향할 거라구요!" "젠장할! 그럼 어서 여길 빠져나가자!" 강한 자. 강한 자. 강한 자.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인족의 냄새. 사인족이 몇이나 내 아이를 죽였어. 내 사랑스런 아이들을 둘이나 죽였어. 내 가련한 아이들을 둘이나 죽이고 감히 내 앞에서 잘난 척을 했어. 절대 로 잊지 못하지. 내 핏속에 맹세코 절대로 잊지 못하지. 강한 놈은 내 앞에 서 죽어야 한다. 강한 놈을 죽이고 또 죽여 내가 이 지상에서 가장 강하다 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나는 강하고 강하다. 자아, 어디야? 강한 놈은 어 디 있지? 나는 고개를 천천히 위로 올렸다. 붉은 날개. 붉은 색. 강함. 압도적인 강함. 이제껏 본 자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강함. 심장박동이 강해진다. "피하십시오!" "어째서 피해야 하지? 저, 정말 강하군." 흥분한 눈길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흥분과 전율의 눈빛, 기쁨의 눈빛이었다. 그것은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 었다. 두근거리는 박동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멋지다!" 그 것이 나를 향해서 일직선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것이 다가오 는 것을 가슴 뿌듯한 즐거움으로 기다리면서 한껏 미소지었다. 그래, 와라! 강한 자! "그만해요!" 콰앙 하고 '그것'의 손톱이 나의 팔뚝을 파고 들어 상처를 냈다. 나의 손톱 은 '그것'의 옆구리를 길게 찢어 핏방울을 뿌렸다. 이렇게 기쁠 수가. 온 몸이 기쁨을 노래했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격렬한 환희로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어 그 붉은 머리칼을 휘어잡 으려 손을 뻗었다. 손톱이 튀어 나오며 그 것의 심장을 노린다. '그것'은 나 의 손톱을 튕겨내며 건방지게도 나의 심장을 향해 잔뜬 휘어진 손톱을 내 리 찍었다. 핏방울이 튀기며 배에 상처가 생겼다. 끝이 구부러진 손톱은 내 살갗을 길게 찢으며 단단한 배 안쪽의 살까지 상처를 입혔다. 화끈한 고통 으로 흥분이 일어나 내 손톱은 순식간에 서른 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내 손톱은 그 것을 만지지 못했다. '그것'은 유연하게 허공을 움직이며 나를 바닥으로 내리 찍었던 것이다.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나는 그 것에 대한 갈 망으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아, 닿고 싶다. 닿아서 갈기갈기 찢고 싶다. 거대한 몽둥이 같은 것이 내 얼굴을 직격했다. 나는 그 것에 튕겨져 다시 바닥으로 깊게 곤두박질쳤다. 정신이 한동안 아득해질 충격이었지만 고통 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선홍색으로 물든 흥분이 심장을 파먹고 곧 머리조 차 파먹어 버릴 테니까 나는 괜찮다. "오오오오옷!" '그것'이 포효했다. 피로 물든 전신을 흔들며 나도 마주 웃었다.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 강 한 자가 눈 앞에 있다는 것은 생애 최고의 즐거움. 기쁨. 삶의 보람. 그리고 그 것이 갑자기 찾아왔다. "내가 죽어서 기뻐?" 심장이 하나 정지했다. 붉은 머리칼을 휘감고 손톱으로 그 것의 심장을 꺼내려는 순간 심장이 정 지했다. "내가 죽어서 기뻐?" 무서운 여자. 내 생애 최고로 무서운 여자. 죽이고 또 죽이고 하염없이 죽였던 그 무서운 여자. 심장을 짓이기고 내 손으로 그녀의 심장을 파서 내 입으로 씹어 삼켰다. "내가 죽어서 기뻐?"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 여자다. '그것'은 여자다. 강한 여자다. 차가운 것이 급속도로 흘러들어와 등줄기를 단숨에 꿰뚫고 지나갔다. 심장 이 멎으며 차갑게 조소했다. 믿을 수 없어. 그녀는 죽었다. 그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누구? 퍼억 하고 무언가가 내 목줄기를 쥐어 뜯었다. 화끈한 아픔이 얼굴까지 튀 어 올라 한 순간 눈을 감았다. 심장이 아픔으로 오그라들었다. "멈춰!" 그래, 멈춰. 나는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 멈춰. 일렌. 이제 그만 내 심장을 놔줘. 천천히 눈을 뜬다. 흘러내리는 붉은 액체를 느끼면서 천천히 눈을 뜬다. 눈앞에 있는 것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도도한 미녀, 변신이 차츰 풀려가 고 있는 붉은 머리칼의 미녀였다. 그녀의 둥근 유방이 내 눈앞에 드러나 있었다. 피로 젖은 그 둥근 유방은 찢겨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나 나에게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내 손톱에 잔뜩 낀 것은 붉은 깃털. 붉은 피. 울컥하고 전신이 흔들렸다. 뜨거운 액체가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끝입니까?" 뭔가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그래." "이제 재미있어지려던 참이었는데." 살의와 흥분이 범벅이 된 눈동자로 날 바라보면서 그녀는 피로 물든 입가 를 혀로 핥았다. 나 역시 그녀를 마주 보며 혀로 입가를 핥았다. 내 피와 남의 피가 한데 뒤엉켜 기묘한 냄새가 났다. 차가워지는 몸을 느끼면서 나 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뒤 늦은 아픔이 욱신거리고 찾아들었다. 여기 저 기 미끈거리는 액체 때문에 짜증이 났지만 참고 일어섰다. 붉은 날개의 여 왕은 내 목덜미를 반쯤 찢었던 모양이다. 피가 쉴새 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 상처에 손을 대려다 말고 아픔 때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는 옆구리 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녀 역시 발가벗은 상태였고 길게 찢어진 옆구리에 서는 당장이라도 내장이 흘러내릴 듯했다. 그 상처를 누르며 그녀는 팔뚝 에 난 상처를 천천히 핥았다.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방은 온통 시체투성이였다. 팔다리가 온전한 시체는 하나도 없다. 사인족 들의 시체는 형체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갈가리 찢겨진 상태고, 그 와 중에 엉킨 인간들의 시체는 말할 것도 없다. 내가 발광하는 동안 조인족전 사들도 나름대로 화풀이를 한 모양이었다. 저 정신없는 아크 놈과 엘프들 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남은 것은 오로지 조인족의 여왕과 나, 그리고 시체 더미들 뿐이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룬드바르 녀석은 어디 갔어? 뜨끈할 정도의 살육의 열기가 지나간 뒤 그녀와 나는 한동안 말없이 자신 의 상처를 핥는데 열중하기로 했다. 뭔가 우스워져서 나는 웃음이 새어나 왔다. "왜요?" "아냐, 그런데 저기서 꿈틀거리는 것은 대체 뭐라고 생각해?" 내가 시체더미들 사이를 가리켜 보이자 여왕은 눈썹을 찡그렸다. "흥미롭군요." 나와 여왕은 시체더미들 사이로 걸어갔다. 걸을 때마다 피가 뚝뚝 떨어져 매우 성가셨고 변신의 여파로 눈앞이 제법 어지러웠다. 인간의 팔 다리를 하나 주워 들어서 여왕이 툭툭 무언가를 건드렸다. 그러자 그 무언가가 허 어어어억 하고 기묘한 소리를 내뱉었다. "이걸 살아 있는 것이라고 불러야 할까?" "글쎄요............" 머리는 목과 직각으로 헤어져 있었다. 가슴은 다 빠개진 채로 심장도 사라 지고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심장을 파낸 사람은 나였다. 나는 쭈그리 고 앉아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장이 다 튀어 나가고, 팔 다리는 기괴하게 찢어져 여기 저기 흐트러진 모양새를 한 이 것은, 사라진 심장을 다시 재생하기 위해 헐떡이고 있었다. 내가 뽑아낸 심장 중에 반 토막이 아직 이 놈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던지 그 것을 중심으로 혈관과 혈관이 엉기며 어떻게든 살아나기 위해 버둥거리고 있었다. 눈알이 다시 노랗게 된 그 것은 이리저리 힘없이 눈알을 돌리며 나와 여왕을 번갈아 보고 있었 다. 다 부러진 이빨들은 피를 머금고 찢어져버린 입술사이로 삐죽이 드러나 있 었는데 그 모습이 나이 먹은 인간 노인네들 같이 보여 뭔가 우습다기 보단 처절했다. "이걸 마법이라고 하는 건가요?" 여왕이 조용히 옆구리를 누른 채 물었다. 상처가 아프긴 아픈 모양이다. 허 긴, 나도 아프다. 주먹만큼이나 살점이 떨어져 나간 목덜미를 움켜쥔 채로 나는 대꾸했다. "불사의 마법이라나." 그 녀석을 쭈그리고 앉아서 들여다 보니,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그렇구나. 이대로 놔두면 너 되살아 나는 거냐?" "...허억, 허억....." 그런가 보군. 녀석은 나와 여왕을 필사적으로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눈알이 핑핑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어지러울 정도였다. 헐떡 이는 녀석의 숨소리와, 말 그대로 꿈틀거리는 그 심장의 발악을 지켜보면 서 나는 편히 죽어 넘어진 녀석들의 시체를 힐긋 보았다. "약한 주제에 뭐하러 불사따위 되는 거지? 몇 번이나 계속해서 죽어보려 고? 불사라는 건, 죽지도 않지만 강해지지도 않겠지? 결국은, 말이야." 내가 물었지만 녀석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턱을 괸 채 녀석의 필사적인 심장을 손톱으로 톡톡 건드리며 다시 물 었다. "이번에 네가 또 살아나면 나는 널 또 죽일 거야. 그리고 뒤돌아서서 네 가 살아나면 나는 널 또 죽이지. 너, 그런데도 또 살아나고 싶어?" 대답은 없다. 헐떡이는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지겨웠다. "그리고 계속 계속 그 짓을 반복하다보면, 너는 사인족 중에서 홀로 살아 남는 녀석이 되겠군. 대지의 여신에게 돌아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계속 살 아남으면서 지긋지긋하겠구만." 대답은 역시 없었다. 녀석은 뒤로 넘어가는 눈알을 어떻게 해서든지 제대 로 돌리려고 애를 쓰면서 버둥기고 있었다. "근데 말이야. 잘라낸 팔뚝도 재생되는 거냐? 아니면 그건 그대로 남되 그 저 심장만 계속해서 뛰는 거냐?" "............" 이젠 제법 말을 하려고 버둥거린다. 나는 턱을 괴고 앉아서 그 필사적인 심장을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이런 짓을 한 마법사 놈이야 말로 지긋지긋하지 않냐? 아니면, 역시 너희 들은 불사의 힘을 얻는 대가로 자신들의 동족을 버린 거냐?" "...............제길." 녀석이 발음이 마구 새는 이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인족은 이제 사인족의 왕 이외엔 아무도 남지 않은 거로군. 허기야, 남 아 있어도 어차피 내가 다 죽일 거니까." 나는 친절하게 녀석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어차피 너희들은 멸망당할 것이었잖아? 아이도 없으니까 말이야." "크으..........우, 우리는.....멸..멸망하지 않아." 열심히 대꾸하는 녀석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웃었다. "왜?" "......마, 마법의 힘을 빌어서라도, 천한 인간의 힘을 빌어서라도..........우리들 일족은, 일족은.....사라지지 않을 거야. 절, 절대로........." 나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미안하군. 하지만 말이야. 마법이든, 혹은 숙명이든간에, 너희들은 어 차피 멸망하게 되어 있어." 증오로 나를 쏘아보는 눈을 마주 보며 나는 녀석의 반쯤 재생한 심장을 움 켜쥐었다. "커억!" 그 몸이 마구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친절하게 그 심장을 잡아 뜯어냈다. 지긋지긋한 핏방울이 반쯤 일그러진 녀석의 얼굴에 까지 튀어 올랐다. 녀석은 파들파들 떨면서 온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왜냐면 내가 사인족을 멸망시킬 거거든. 그건 마법의 힘보다도 네 놈들의 똥고집보다도 훨씬 강한 거야." 녀석의 눈앞에서 심장을 눌러 터뜨리면서 나는 그 텅빈 가슴팍을 발로 짓 밟았다. 울컥울컥 검은 피가 터져나오는 것을 모른 척하고 나는 뒤를 돌아 보았다. 조인족의 여왕은 망연한 얼굴로 물끄러미 그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당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었나?" 내 말에 그녀는 흐 하고 쓴 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나야 말로 당신보다 사인족을 더 증오하는데도 역시 당신보다 는 못하군요." "왜?" "방금 저는 그 자를 살려둘까도 생각했었습니다." "왜?" "................살아있는 자로서의 연민이죠. 뭐." "연민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로서의 오만이지." 내 말에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컥컥거리는 녀석의 듣기 싫은 소리가 사라진 홀 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이제 서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인간도 엘 프도 그 외의 것들도 없었다. 나와 그녀만이 오만하게 서서 조각난 시체들 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런 허무를 느끼면서 나는 아픔과도 같은 짜증 을 되씹었다. 대체, 이 게 다 뭐야? 저번에 마튜스의 경우와도 같군. 설마 하니 나는 저번에도 3단계 이상의 변신을 했던 건가? 먹지도 않을 시체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강하지도 못한 것들을 짓밟아 죽여 버리고 이러고 서 있는 거야? 정말 이거 기분 더럽군. 대체 이게 몇 번째더라........ 그녀는 붉은 빛이 도는 눈으로 나를 차분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구 리에 난 상처는 어느 새인가 반쯤 닫혀서 이제 피는 멈춘 것 같았다. 그렇 지만 아마도 달리기라도 하면 금방 터져버릴 것이다. 나의 상처는 살점 전 체를 뜯어낸 것이라 여전히 피가 흘렀다. 하지만 처음보다는 덜하고 그나 마도 점점 멈추는 중이었다. 그녀의 상처중에서 가장 심한 것 중 하나는 역시 날개에 당한 상처였던 모양이다. 내가 손톱으로 할퀸 날개의 가는 뼈 가 몇 개쯤 박살 난 모양인데 그 부분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묘인족의 왕." "왜?" "........누구였지요?" "왜?" "그저 궁금한 것뿐입니다. 당신을 멈추게 한 것은 누굽니까?"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향해 물었다. 젊고 젊은 이 아름다운 아가씨는 아직 사랑의 고통을 모르는 것 같다. 나는 갑자기 엄청나게 길고도 긴 세월의 무게를 느끼며 그녀의 맑은 눈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너잖아." "그건 아닐텐데요?" 나는 대답대신 웃었다. 제 20화 광. 란. 종.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