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쿠베린] 별전 마녀를 위한 노래 1 관련자료:없음 [22927]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0-03-03 02:47 조회:764 [쿠베린 별전] 마녀를 위한 노래 높이 나는 새들은 땅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걷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1 "삼공자를 죽여주면 돼." 어두운 흑자색의 커튼 너머로 두 명이 서 있었다. 방안은 짙고 붉은 카펫과 무거워 보이는 금빛 수술이 달린 테피스트리로 장식되어 있었다. 언뜻 보아도 호화스러운 방, 그 방안에 가득한 가구들은 소유자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리석을 깎아 만든 테이블도, 호화로운 빌로드를 덧씌워 만든 의자도 먼지가 하얗게 쌓 여서 결코 이 방이 주인을 자주 만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박제된 독수리가 눈을 노랗게 뜨고 노려보고 있는 그 아래로 방주인은 초 조하게 발끝을 움직였다. "댓가는?" "황금으로 십만길레 내 놓겠다. 알고 있겠지? 십만길레라는 돈은 결코 작 은 게 아니라......" "이십만." "노, 농담하지마! 이십만이라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회색 로브로 얼굴을 가린 자는 방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 주인은 호화로운 에메랄드의 브롯지를 달고, 그에 어울리는 에메랄드와 사파이어로 치장된 반지를 다섯 개나 끼고 있었다. 그의 허리띠에 달린 손 바닥만한 호박은 어떤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물건이었다. 그 시선 을 느꼈는지 다소 퉁퉁한 손을 가진 방주인은 자신의 손등을 급히 가렸다. 그리고는 더듬으면서 약간은 항의섞인 응답을 내 놓았다. "좋아, 그렇게 하지. 이십만을 내 놓을 테니까." "선금으로 십만." "알았어. 선금으로 십만." 하인리히는 장갑을 벗으면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늘어진 시체들이었다. 시체들은 온통 숲 안을 가득 메우고 말할 수 없는 악취를 풍겨내고 있었다. 맙소사, 모처럼 귀향한 이런 날 이런 꼴부터 보게 되다니. 그는 낮게 욕설을 퍼부우면서 옆에 선 젖형제이자 부관인 마르케스에게 장 갑을 건넸다. 마르케스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듯 한 얼굴이었다. 모처럼 냉혹한 빛이 가신 그의 회색빛 눈동자를 보고 하인 리히는 조금은 안도했다. '이 녀석도 사람은 사람이군.' 간신히 참고 있긴 했지만 하인리히도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욕지기를 참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 그가 연약 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구 짓인지 알수는 있나?" "모릅니다. 짐승도 아니고....이 근처에는 그레이트 오크도 없고, 사나운 수 인족들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인간이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걸." "트롤이 혹여 했을 지도 모르지만, 이 근처는 트롤이 나오는 지역이 아닙 니다." 대답한 것은 살벌한 눈빛으로 당장이라도 호통을 칠 듯한 표정의 세레스 였다. 세레스는 하인리히에게 배속된 기사지만 할로엔백작의 아들이다. 서 자이긴 해도 할로엔 백작의 아들인 이상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반년만의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하인리히가 수도 뮤네이젠로 향하던 길에 발견한 것은 형용이 불가할 정도로 학살된 영민들의 시체였다. 제법 큰 마 을의 주민들 오백여명이 몰살당한 채로 숲안에 널려 있었다. 남녀노소의 구별을 전혀 두지않은 지나치리만큼 공평한 학살장을 바라보면서 하인리히 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치안대는?" "저기에 있습니다." 세레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면서 가리켜 보였다. 풀 숲 한 구석에 서서 토악질을 해대는 서너명의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하 인리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기랄. 어떤 놈인지 밝혀내!" 보통의 인간이라면 어린애를 반쪽으로 찢어서 나뭇가지에 걸어놓는 듯한 미친 짓을 할 리는없었다. 게다가 그럴 만한 힘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시체들을 돌아보던 세레스가 낮게 신음하며 하인 리히에게 주의를 주었다.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하인리히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낮으막한 붉은 버섯 옆에 자그마한 구 슬이 한 개 떨어져 있었다. 피로 물든 그 구슬은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그 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하인리히는 소름이 끼치는 것과 동시에 그 구슬 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어떤 미친 놈이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수인족이 광란을 일으켰다고 해도 오백여명을 한 번에 학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트롤이 나타났다면 근처 마을에서도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 근 처는 항구 바레로아에서 가까운 곳으로 트롤이 소금물을 뒤집어쓸 위험을 감수하고 나타났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하인리히는 나뭇가지 위에 걸쳐진 어떤 여인의 조각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뭇가지 위에 걸쳐진 인간의 사지는 어떤 거대한 괴물이 씹다 만 찌꺼기처럼 널려 있었다. 내장과 검붉게 변한 살점들이 푸른 수풀 곳곳 에 널려 있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시체 조각들이 밟혔다. 파리떼와 송장 벌레들이 그 살점을 찾아 눈앞을 가리는 바람에 그는 앞으로 나아가길 한 순간 주저했다. 이래서야 아무리 능란한 병사라 할 지라도 토악질을 하는 게 당연하다. 하인리히는 억제했던 토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어와 다시 코를 막았다. 옆에 섰던 세레스가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 역시 손수 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있는 중이었다. 놈은 산채로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서 사방으로 던졌다. 남녀 노소 상관치 않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쫓아서 이 숲까지 들어와 갈가리 찢어 죽이고는 유유히 사라진 것이다. 이건 도대체가 인간의 짓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 지만, 이 근처에서 대체 수인들이 있다는 소문은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룬드바르공국은 이 백여년이래 수인족이 가장 적은 곳 중에 하나였다. 공 국의 북부에는 그레이트 오크의 서식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레이트 오크는 사나운 만큼 자신들의 거처를 범하지 않으면 일부러 튀어나오진 않는다. 그들은 영토 확장에는 그다지 취미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 근처에는 대 규모의 수인족 거처지는 전혀 없었다. 바다를 접하는 이 해양국에서는 소 금기를 싫어하는 이종족은 거의 없어서 굳이 찾는다면 가끔 발견되는 인어 와 항구도시에 호기심으로 찾아들었다가 사라지는 호비트들과 순한 그레이 오크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도 어디까지나 항구도시 일대에서 가끔 발견될 뿐이지 이런 공국의 깊숙한 곳에서는 거의 돌아다니지 않는다. 룬드바르 공국의 사람들은 폐쇄적이라 인간과 다른 모습을 한 그들을 고이 받아주지 않는다. 따라서 수인족도 이곳까지는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없지, 어떤 난폭한 수인족이 들어왔다가 이 마을 주민들에 게 발각되어 이들을 죽였을 지도 몰라.' 만약에 그렇다면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다른 마을에도 위험이 닥칠지도 몰라. 마을 자치대들에게 빠짐 없이 알 려두도록." "네, 명심하고 다른 지역에게도 알리겠습니다." 치안대의 대장은 굽실거리면서 온 몸으로 무능함을 외치고 있었다. 하인 리히는 이 잔혹한 시체더미를 훑어보다가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이 곳에 있다간 온통 시체냄새를 뒤집어 쓸 것이 뻔했다. "이제 서두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르케스가 안색이 나쁜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삼공자 하인리히 룬드바르는 룬드바르 대공의 두 번째 비인 바탈리아 부 인의 이남일녀중 차남이었다. 원래 이공자이자 바탈리아부인의 장남이었던 헤르겐은 사냥중 불행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승마의 명수이자 궁술의 명인인 그가 낙마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그 뒤를 이어서 하인리히의 누 나이자 헤르겐의 누이동생인 샤레이아가 또 갑작스런 열병으로 눈을 잃고 장님이 되더니 곧이어 불행한 사고로 실족사한 채로 그녀의 거처에서 발견 되었다. 계단에서 실족한 나머지 목이 부러져 죽어 있었다고 시녀들이 일 제히 증언했고 대공은 침통한 마음을 억누르며 유일한 딸을 그렇게 장사지 냈다. 연달아서 계속 아들과 딸을 잃은 바탈리아부인은 거의 반년간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잠을 자지도 못했고 독을 시험해주는 시종이 없다면 밥 도 먹지 못했다. 매일 매일 반은 울면서, 반은 울부짖으면서 지낸 그녀에게 유일한 희망은 형 헤르겐보다 능숙하지는 못했지만 그런데로 우수한 하인 리히였다. 하인리히는 19세 때 눈 앞에서 형 헤르겐을 잃었고 그 다음에는 20세 생일 전날에 누나 샤레이아를 잃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자신의 모 친이 반미치광이가 되어 유폐되는 일을 겪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그는 지나칠 만큼 건강해서 대공의 뒤를 이어 거침없이 배를 타고 외해(外海)로 나가곤 했다. 덕분에 삼공자 하인리히는 해양국인 이 곳에서 가장 많은 배 와 충성심이 넘쳐나는 사악하고도 잔인한 일당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런 그가 저 대공비 히르모니아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공의 첫째 부인인 대공비 히르모니아 세르오네 룬드바르는 세르오네 집 안의 장녀로 태어나, 대공의 정략결혼의 상대가 되었다. 물론, 그녀는 대공 자인 라데츠의 모친이기도 했다. 세르오네집안은 룬드바르 공국의 삼분지 일을 쥐고 있는 대가문으로 역시 뿌리는 해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맨 처음 룬드바르 공국이 생길 때 초대 룬드바르 공작은 자신의 주군인 오르볼트 국왕에게 이 남쪽 지역의 해적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워낙에 용맹했던 룬드바르공작의 이남인 데오오라 룬드바르는 서른의 젊 은 나이에 그 당시 군도를 거점으로 내해와 외해를 장악하고 있던 해적들 중 대부분을 복속시키고 자기 휘하의 사병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장남 에 밀라르 룬드바르가 룬드바르공국을 이어받고 지나치게 강건한 자신의 아우 를 제거하려던 그 순간 휘하의 해적들을 이끌고 자신의 친형을 공격했다. 기사단을 거느리고 있던 에밀라르는 이십여일간 싸웠지만 백전노장이 되어 버린 이 거친 동생에게 패하여 목을 바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노대 공은 장남 에밀라르의 잘린 목을 바라보면서 사나운 둘째 아들 데오오라에 게 대공위를 물려주게 되었던 것이다. 대륙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룬드바르 공국을 가리켜 해적소굴이라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르오네 가문은 이 때 데오오라의 왼편에 서서 제일 먼저 칼을 휘 두른 해적 일가이기도 했다. "여자를 부르길 바라십니까?" "아니."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침대에 발을 길게 뻗으면서 하인리히는 눈 을 반쯤 감고 대꾸했다. 숲을 빠져나와 북상하는 길목 제일 첫 번째에 위 치한 마을에서 여장을 푼 일행은 그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이 십여명 정도 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작은 마을의 여관에선 그나마도 다 감당할 수가 없어서 결국 두 개의 여관에 일행을 나누어야 했다. 마르케스는 자신 과 하인리히를 한 방에 배치하고 세레스가 이끄는 일곱의 병사를 다른 여 관으로 보냈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할로엔 백작의 아들인 세레스는 대공 비 일가의 육촌에 해당했던 것이다. 여관방에서는 그의 장화를 벗기던 종자는 마르케스의 손짓에 뒤로 물러서 서 밖으로 나갔다. "오자마자 괜한 걸 봤어." "뭐어, 앞으로 갈 길은 더할 지도 모르죠." "악담이냐?"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마르케스는 냉혹해 보이는 얼굴을 한층 더 차갑게 했 다. 하인리히의 유일한 지기인 마르케스 옥크토는 하인리히의 유모 벨큐레의 아들이란 것 이외에도 공통의 적이 있다는 데에 목적을 같이 하고 있었다. 마르케스는 평민이란 신분에도 불구하고 현재 기사위를 받고 있었다. 워낙 에 거친 룬드바르공국에서는 그런 일이 드물진 않았지만 흔한 것도 아니었 다. 평민이 기사위 를 받기 위해선 보통 귀족기사가 해야 할 일의 최소 다 섯 배의 전공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마르케스는 그 것을 해냈다. 그는 무 표정하고 냉혹하고 절도 있게 평민임을 비웃는 모든 귀족들을 가차없이 물 리치고 기사위에 당당히 올라섰다. 대공은 그를 위해 보검을 하사하고 영 지를 내렸다. "원하던 것을 얻었군, 축하해." 그 기사서임식의 날, 당시만 해도 성격상 그다지 어울리는 일이 없었던 하인리히는 마르케스에게 조소 어린 인사말을 건넸다. "아직." 마르케스는 냉혹하게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차가운 회색눈과 갈색머리를 한 마르케스는 하인리히보다 머리 하나는 크 고 나이는 5세 연상이었다. 과묵하고 절대로 머리를 숙이지 않는 비사교적 인 성격을 하인리히는 미워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워하고 있 었던 것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야?" 약간은 술기운으로 하인리히가 웃으면서 묻자 마르케스는 대답대신 키가 크고 잘생긴 헤르겐과 같이 춤추고 있는 금발의 샤레이아를 바라보았다. 그 회색 눈에서 빛나는 놀랄만큼 온화한 눈동자에 하인리히는 숨을 멈췄 다. "........농담이겠지?" 하인리히가 다소 잔혹하게 물었지만 마르케스는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해 서 샤레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샤레이아는 18세, 마르케스는 22세, 하인리히는 17세의 밤이었다. "옛 생각이 나는군." 마르케스는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하인리히는 천장을 바라보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천장에 부딪치는 빗소리 가 들려오고 있었다. 약간 눅눅한 공기 때문에 침대에 깐 시트가 금새 축 축해 졌다. "오랜만의 귀향이니까 그렇겠지요. 이제부터 정신을 놓으시면 안됩니다." "알고 있어." 하인리히는 눈을 감았고 마르케스는 탁자에 다가가 놓여진 포도주를 한 잔 따랐다. 그는 평소대로 제일 먼저 은으로 만든 숟가락을 대어 보고 그 다음에는 마법사가 건넨 해독용 약초가루를 살짝 뿌렸다. 포도주에 별 반 응이 일어나지 않자, 그는 그제서야 그것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약간 맛 을 보았다. 그리고 한 참 뒤, 빗소리를 음미하듯이 허공을 바라보던 그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하인리히에게 포도주잔을 건넸다. 하인리히는 마르케스가 내미는 잔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고 마시면서 중얼거렸다. "그 암여우가 아직도 난리를 치고 있을까?" "당연하겠죠." "..........라데츠가 올해 몇 살이지?" "저랑 동갑입니다." 그 말에 하인리히는 마르케스를 돌아보았다. "너는 몇 살인데?" "올해 서른 둘 됩니다." 하인리히는 무표정한 부관을 바라보면서 다시 시선을 포도주잔으로 돌렸 다. "그럼 그때로부터 7년이나 지난 거군." 마르케스는 유일한 목표였던 샤레이아를 잃었고 하인리히는 누이와 형을 단숨에 잃었다. 그것만으로도 성격적으로 전혀 다른 두 사람은 한 덩이가 될 수 있었다. 하인리히에게 믿을 자는 단 하나였다. 피는 통하지 않지만 같은 젖을 먹고 자란 남아 있는 유일한 형제다.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하인리히는 잔을 비웠다. 따스한 기운을 느 끼면서 그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내일부터 다시 보이지 않는 칼날이 난무 하는 수도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마르케스가 자신의 장화를 벗 기는 것을 느끼면서 천천히 잠으로 빠져 들어갔다. ----------------------------------------------------------------------- 제 목:[쿠베린] 별전 마녀를 위한 노래 2 관련자료:없음 [22928]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0-03-03 02:48 조회:606 2 하인리히가 잠이 들자 마르케스는 문가에서 가까운 침대에 앉아 차고 있 던 칼을 빼어들었다. 눅눅한 공기와 소금기 많은 바다에서 지내온 시간이 너무 많아서 아무리 고급인 강철로 만든 칼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닦아야 했다. 그는 장신에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태도로 아주 천천히 칼날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보검을 대공에게 하사 받기는 했지만 그가 쓰고 있는 칼은 저자거리에서 파는 평범한 칼이었다. 기사들이 멋으로 차고 다니는 보검보 다는 뭉툭하고 두둑한 해적용 칼이 그의 성미에는 잘 맞았다. 그런 칼이라 면 칼등으로 쳐도 상대는 뼈가 으스러지고 칼날로 베면 몸통의 반은 잘려 나간다. 그 정도 위력이 없다면 무기라 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 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 하인리히는 실제로 샤레이아와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 섬세한 얼굴에 금발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룬드바르인이라기 보다는 북부 미인형에 가까워서 때때로 대공의 딸이 아니라는 소문까지 돌 았었다. 그러나 소심한 바탈리아부인이 그런 일까지 저지를 여자는 아니었 다. 마르케스는 충성심은 전혀 없었지만 하인리히만은 꼭 지켜주리라고 생 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샤레이아와의 약속이었으니까.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와 그는 등줄기를 곧추 세웠다. 다급한 발자국 은 그의 예상대로 맹렬하게 다가와 그의 방문 앞에서 멈췄다. "전하!" "무슨 일이냐?" 하인리히 대신 마르케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칼자루를 쥔 채로 일어섰지 만 문가로 다가서진 않았다. 갑작스런 공격에 대비해서 그는 하인리히가 누워 있는 침대가로 다가갔을 뿐이었다. "범인을 잡은 것 같습니다! 아, 아니, 지금 또 다른 희생자들이 나왔습니 다!" 떠들고 있는 것은 해적출신의 피오였다. 그는 문가에 서서 흥분한 채 외쳤 기 때문에 마르케스는 알았다라고만 대답하고 잠시 망설였다. "가자." 침대에 누워 있던 하인리히는 잠이 완전히 달아난 얼굴로 일어서고 있었 다.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닐 텐데요. 여기 치안대에게 맡겨두는 게 좋겠습 니다만." "아니, 나는 단지 그 사악한 일을 저지른 자들을 보고 싶을 뿐이야." 하인리히는 마르케스의 무표정한 얼굴을 향해 가볍게 말했다. 침대 머리에 놓여있던 검과 망토를 등에 걸치고 장화를 신자 마자 하인리히는 턱을 들 어 마르케스를 재촉했다.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르케스는 낮게 욕설을 퍼부었다. 희생자는 사냥꾼이었던 모양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에 사람들은 갖가지 횃불을 치켜 들고 그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체는 냉혹하고도 잔인하게 갈기갈기 찢겨진 채로 늘어 져 있었다. 사냥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가죽조끼와 가죽 신발이 조악하게 만들어진 주머니칼과 함께 얼굴이 반쪽 남은 시체에 달라붙어 덜렁거렸다. 피는 이미 빗길에 거의 다 씻겨 내려가 창백한 살점만 드러내고 있어 붉은 횃불 빛에 드러난 모습은 이미 인간이라기 보다는 히멀건한 살덩어리로 보 였다. 마을 사람들은 질척이는 진흙을 밟고 서서 그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공포와 증오가 그들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하인리히는 예민하 게 느꼈다. "범인이란 게 누구지? 범인을 누가 봤다며?" 그가 재차 묻자 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세레스가 그를 향해 대답했다. "저길 보십시오." 그가 가리키는 곳을 천천히 올려다 본 하인리히는 입을 벌렸다. 시커먼 덩어리가 마을 어귀 고목에 달라붙어 있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달 라붙어 있다기 보단 걸려 있었다. 아마도 사냥꾼들이 한 것인지 그 덩어리 여기 저기에는 창과 칼과 도끼등이 어지럽게 박혀 있었다. 그 모양새가 마 치 고슴도치 같아서 하인리히는 순간적으로 그 것이 대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인리히가 손짓하자 그의 종자중 한 명이 횃불을 그 덩어리에 갖다 댔다. "억!" 그 불빛에 드러난 형상은 곰도 아니고 트롤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짐승이었다. 덩치나 모양새는 큰 곰과 같았지만 머리통은 길죽 한 곰의 주둥이와 달리 코가 없는 그 자리에 거대한 입만이 있었다. 그리 고 그 입안은 온통 삐죽한 이빨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늘어진 몸체의 다리는 모두 여섯 개, 발톱은 곰과 달리 날카로운 칼날을 이어 만든 듯 길 고도 예리해 보였다. 네 개의 눈이 핏기를 담고 이글거리는 횃불에 따라 번들번들 빛이 났다. "대체 저게 뭐야?" "알 수 없습니다. 저런 괴물은 본 바가 없습니다." 촌장인지 자치대 대장인지 잘 알 수 없는 중년의 사내가 아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인리히는 그 짐승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낮게 물었다. "이거 단 한 마리만 있는 것이야?" "발견된 것은 단 한 마리입니다. 사냥꾼 열 일곱이 숲을 뒤지다가 발견한 놈입니다. 살아남은 사냥꾼은 단 두 명입니다. 그나마 그 한 명이 바로 저 기 늘어진 시체이고, 다른 한 명은 집에 누워 있습니다. 심한 상처를 입었 습니다."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소리를 등뒤로 하고 하인리히는 다시 숙소로 향했다. 일단 한 놈 잡기는 했지만 대체 저 놈 하나가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을까? 물론 숙련된 사냥꾼 열 여섯을 잡아 먹은 놈 이긴 하지만 오백여명을 모두 학살한 범인이라고 보 기에는 어폐가 있어 보 였다. "어떻게 생각해?" "다른 놈들도 있겠죠. 적어도 서 너 마리는 되지 않을까요?" 마르케스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그는 흥분한 얼굴로 짐승의 시체를 바라 보고 있는 세레스를 흘긋 보았다. 세레스는 아직 스무 살의 애송이였다. 집안 사람들과의 반목이 워낙 심하 다는 이야기는 듣고 있지만 신용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믿을 만한 인간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전하!" 갑자기 등 뒤로 세레스가 말을 걸었다. 하인리히가 돌아보자 세레스는 흥분한 얼굴로 급히 외쳤다. "저 짐승이 또 있을지 모릅니다. 숲안을 수색하게 해 주십시오!" 하인리히는 무감동한 어조로 되물었다. "이 밤에 말인가?" 비가 내려 앞이 잘 보이지도 않고 바닥은 진흙으로 질펀거리는 이런 날에 어떤 야수가 있을지 알 수도 없는 숲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들어가겠다고? 하인리히는 짧게 조소했다. "난 부하들을 개죽음시키는 취미는 없어." 그는 면박을 당한 세레스가 굳건 말건 신경쓰지 않고 몸을 돌렸다. 망토는 이미 젖어들고 있고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장화는 진흙에 주륵 주륵 미끌어진다. 하인리히는 희미한 한기를 느끼면서 여관으로 향했다. "마르케스님." 세레스의 말에 하인리히의 뒤를 따르던 마르케스는 몸을 돌렸다. "이대로 놔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곧 수도로 들어가야 하고. 여기엔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농부들의 자치대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끔찍한 괴수들을 맡기고 그냥 가버린다는 것은......." "요점이 뭐냐?" "말 그대로입니다. 몇 명을 이끌고 숲을 수색하게 해 주십시오." 마르케스는 흥분으로 눈을 빛내고 있는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년 반의 해상 생활에서도 얻은 게 없는 것인지 이 청년은 무모한 열정을 앞세 워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했다. 어찌보면 이 성격은 하인리히와 닮은 일면 이 있었지만 하인리히보다도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마르케스는 그를 냉정 히 바라보며 대꾸했다. "전하의 말대로다. 이 밤에, 지리도 모르는 숲에 들어가 미지의 괴수와 맞 닥뜨리겠다? 그래서 뭘 할 테냐?" "하지만 기사란 것은........" "나아갈 때를 알고 움직여라." 마르케스는 일축하고 몸을 돌렸다. 세레스 덕분에 완전히 몸이 젖어버렸 다. 그는 불쾌한 기분을 억누르면서 이미 여관으로 들어가 버린 하인리히의 뒤 를 따랐다. "세레스녀석은, 말이지." 하인리히는 젖어버린 옷을 벗어 낡아빠진 나무 의자에 걸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아 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를 도와서 그의 진흙투성이 장화를 종자에게 건네고 마 르케스 역시 옷을 벗었다. "자기 육촌과는 전혀 안닮았는지도 몰라." "쓸데 없는 짓을 하는 점은 닮았습니다." 마르케스의 냉담한 말에 하인리히는 쓴 웃음을 지었다. "라데츠가 쓸데없는 짓을 했던가?" "귀족에게 완벽한 면세권을 부여했죠." 마르케스는 간단히 대꾸하면서 속까지 젖어버린 셔츠를 움켜 짜냈다. "어차피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어." "영지가 있는 귀족들은 세금의 십분의 일을 바쳐야 하는 거였죠. 원칙 은?" "원칙은 그랬지. 그러나 아무도 지키지 않아. 할아버지때 이래로 세금을 내는 귀족은 없어." "그러니까 멍청하다는 거겠죠." "네가 귀족이 아니니까 세금을 안낸다고 화를 내는 거겠지. 귀족들은 세 금을 내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구." 하인리히는 포도주 병에 손을 뻗어 한 잔 따르면서 말했다. 밤비에 젖은 몸은 으슬으슬 추웠다. 그런 그의 손을 막으면서 마르케스는 아까 한 대로 다시 은침을 포도주 잔에 넣고 그 음에는 다시 약초가루를 뿌렸다. 침을 삼키며 포도주를 기다리고 있는 하 인리히를 모른 척하고 마르케스는 포도 주를 한 모금 삼켰다. "추워. 어서 줘." "잠깐 기다리십시오. 즉효성의 독이 아니라면 시간이 걸릴 테니까." 마르케스는 무미건조한 어투로 그를 제지하면서 잠시 포도주잔을 노려보 면서 기다렸다. 자신의 몸으로 검사하는 이런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잘 알 고 있지만 일일이 종자를 불러내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마르케스는 포도주잔을 하인리히에게 내밀었다. 하인리히는 그의 손에서 재빨리 잔을 빼앗아 단숨에 들이켰다. 아까부터 덜덜 떠느라 얼굴이 퍼렇게 질려있었다. "침대에 들어가십시오. 더운 물을 준비하라고 이를 테니까요." "알았어. 아, 마르케스. 내 망토는 덜 젖었으니까 그걸 걸치고 나가." 막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마르케스에게 하인리히가 덧붙였다. 순순히 망토 를 등에 걸친 마르케스는 치밀어 오르는 한기에 부르르 떨었다. 비에 젖어 체온을 상당히 빼앗긴 데다가 걸친 것은 얇은 속옷 뿐이었다. 그나마 망토 라도 걸치니 조금 나았다. 살인이 나고 사고가 난 지라 마을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으나 사방은 조용했다. 이미 밤이 깊었고 비까지 내리는 이 을씨년스러운 날씨 탓으로 나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듯했다. 비 내리는 소리 이외에 는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마르케스는 천천히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 계단 앞에 서서 아래층을 내 려다 보았다. 아래층은 조용했지만 벽난로를 피웠는지 열기가 느껴졌다. 계단을 따라 내 려가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벽난로 앞에 서 넛의 여행자들이 두런두런 떠들 고 있었다. 음식냄새를 맡으면서 마르케스는 점원을 불렀다. "이봐." "네!" 상대가 높은 분이라는 것을 잘 아는 점원이 급히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발을 담글 더운 물과 탕파를 준비해 줘." "네, 알겠습니다." 점원이 사라지자 마자 그는 벽난로 앞으로 다가가 손을 쬐었다. 아직 축 축한 망토와 몸에 달라 붙었던 젖은 옷가지 때문에 불쾌했던 그는 이 온기 가 말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햇빛이 내리쬐는 해양에서 뛰어다녔던 지라 이 축축한 기운과 음산한 날씨는 무척이나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었다. "불을 가리지 마." 누군가가 낮게 말했다. 마르케스가 돌아보니 그의 바로 뒤에 불을 쪼이고 있던 여행자가 앉아 있 었다. 전신이 온통 젖은 그 여행자는 로브를 둘둘 몸에 말고 있었는데 그 로브 끝자락에서 계속해서 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진흙이 잔뜩 묻은 장 화나 지팡이가 꽤나 멀리서 온 여행자로 보여서 마르케스는 순순히 옆으로 물러섰다. 그 여행자의 일행으로 보이는 다른 자가 문득 머리에 둘러쓴 로브를 벗었 다. 물이 계속 떨어져 내려 불쾌했던 모양이었다 . 순간, 마르케스는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크게 떴다. 황금빛의 머리칼을 한 여행자는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룬드바르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희디 흰 피부에 마치 소녀같은 용모를 한 청년은 마 르케스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그를 힐긋 바라보았다. 젖은 금발 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디서 왔나?" 마르케스는 조용히 물었다. 약간 미심쩍은 일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델리암에서 왔지요." 상냥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청년은, 소녀같은 미소에도 불구하고 지독하 게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르케스는 섬뜩한 기분을 느끼면서 다시 물었다. "도보로 온 건가?" "네에." "무엇 때문에 여기 온 거지?" "그런 걸 일일이 말씀드려야 하나요?" 청년은 조각 같은 미모로 웃으면서 되물었다. "수상하니까." 마르케스는 그렇게 대꾸하고 다른 자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의식했는 지 마르케스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여행자는 천천히 로브를 벗었다. 여자였다. 짙은 색을 한 금발을 가진 그녀는 황금빛의 눈을 한 채 마르케 스를 바라보았다. 밀빛 피부와 치켜 올라간 황금빛의 눈동자, 황금색이라기 엔 조금 어두운 금발을 가진 그녀는 말할 수도 없이 황홀한 눈빛을 하고 마르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내 동생은 지금 긴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미소가 갑자기 그 입가에 떠올랐다. 붉은 입술은 말할 나위 없이 매혹적 이어서 마르케스는 한순간 넋을 잃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는 자신이 아 직은 세레이아를 잊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차가운 눈빛으로 여자 를 마주 보았다. "여행의 목적과 이름을 대라." 그녀는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향내가 퍼졌다. 그것을 마르케스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름말인가요? 나는 카산드라, 제 동생은 마베릭이라 한답니다." "여행의 목적은?" "수행이지요. 우리들은 쓸만한 마법사랍니다." 그녀는 빙긋 웃어보였다. 마르케스의 머리 한 구석에 의심이 떠올랐다. 방금 본 그 괴이쩍은 짐승, 그리고 난데없이 나타난 이 두 명의 마법사. 원래 룬드바르에는 마법사가 흔하지 않았다. 오히려 드문 편에 속했던 것이다. "당신은? 당신은 하인리히 전하이신가요?" 그 말에 마르케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이 여자가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하인리히가 이 곳에 머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대단히 미심쩍은 남매다. "그런 것을 왜 묻지?" "당신이 그토록 비싼 흰 사슴의 망토를 걸치고 있으니까요." 마르케스는 문득 자신이 걸친 하인리히의 망토자락을 거머쥐였다. 뭔가 위 험했다. 이 자들, 겉모습은 대단히 아름답지만 너무나 위험한 자들이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그들을 노려보았다. "나를 사랑하세요." 갑자기 황금빛의 여인이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뭐라고?" 마르케스는 눈을 치켜떴다. "나를 사랑하세요. 당신은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이 마녀야!" 마르케스는 허리에서 칼을 빼 들었다. 여인의 황금빛 눈 안쪽에서 불꽃과 도 같은 것이 순간적으로 타올랐지만 그는 그것에 정신을 빼앗기진 않았 다. 그가 칼을 빼들자 옆에 앉아 있던 금발의 청년이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누님, 이 작자, 꽤나 고집스럽네. 현혹의 마법에 걸리지 않는거야?" "글쎄다. 그것도 재미로군." 그녀는 녹아내리는 듯 달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르케스가 막 그녀를 향해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 갑자기 그의 눈앞이 새 하얗게 변했다. "마르케스?" 둥근 얼굴의 세레이아가 그를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진심이야?" "네, 진심입니다." 세레이아는 조금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조금 얼굴을 붉혔 다. "하지만 아버진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제가 기사위를 따내고 전공을 세운다면 마음을 바꾸실 가능성은 있습니 다." "하긴,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내가 대단한 가문에 시집가도록 대공비가 용서치 않겠지." 그녀는 킬킬 웃었다. "어쩌면 나와 마르케스가 결혼하는 것을 대공비가 도와줄 지도 모르겠 네?" 그 말에 마르케스는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불안해. 알고 있겠지만 오빠가 그렇게 죽은 것은 대공비의 짓이 틀림없어. 그 여우가 우리 오빠를 죽였어. 그러니까 다음에는 틀림없 이 하인리히야." "세레이아님." "마르케스가 하인리히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지만 말야, 나 에겐 믿을 사람이 마르케스 밖에는 없어. 그 애도 마르케스라면 믿고 있을 걸." 세레이아는 또렷한 갈색 눈으로 마르케스를 올려다 보았다. 그 얼굴에 미 소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마르케스는 하인리히를 지켜줘. 그 애가 오빠처럼 죽지않도록 말이야." "네. 세레이아님." "세레이아라고 불러. 그리고 말이지....."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마르케스를 약간 부끄러운 듯 올려다 보았다. "키스는 언제 해 줄거야?" 그 말에 웃음을 낮게 터뜨리면서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입술 을 살짝 겹치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낮게 웃었다. 눈을 떴다. 마르케스의 눈 앞에 있는 것은 알몸의 여자였다. 그녀는 세레이아와 비슷한 금발을 흰 어깨에 흐트러뜨리고는 마르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흥미진진한 물건을 바라보는 듯한 그 무미건조한 눈빛을 보면서 그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깨닫고 아연해졌다. "깼네?" 그녀가 낮게 웃었다. "마녀,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그가 낮게 이를 갈며 묻자 그녀는 쿡쿡 작은 소리로 웃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흔들리는 금발은 사실 숨막히도록 아름다웠지만 마르케스는 그런 것 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재미있는 사내로군. 나와 실컷 놀아놓고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다니?" 그 말에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고개를 돌아보니 그의 몸은 지금 침대 기둥 네 군데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그가 움직이려고 팔을 움직일 때마다 철컹 철컹하고 그를 묶은 쇠사슬을 소리를 냈다. 낯선 방이었다. 분명히 그가 있었던 곳은 여관의 일층이었을텐데 눈을 떠 보니 그가 선 곳은 낯선 방안이었다. 방은 호화스럽고 달콤한 향기가 났다. 밖은 보이지 않았다. 창문에는 호사스럽지만 두터운 커튼이 창문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고 어두운 방을 비추는 촛불은 향기가 나는 향초였다. 귀족집 안에서도 여간해서는 쓰지않는 향초를 보고 마르케스는 냉정하게 머리를 굴리려고 애썼다. 지금 이 눈앞에 있는 여자가 대체 누구고, 자신에게 원하 는 게 뭔지 알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급한 것은 혼자 있 을 것이 뻔한 하인리히였다. "뭘 원하는 거냐? 마녀?" "흐음. 여전히 뻣뻣한 사내로군. 그 정도로 뜨거운 밤을 보냈으면서 말이 야." "대체.......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별로 약간 기분을 돋궜을 뿐이야. 하인리히전하." 마르케스는 눈살을 찌푸리고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그 웃음을 보고 마르케스도 모르게 조소를 머금었다. "이제 무슨 일인지 알 것 같군. 너는 내가 하인리히전하일 거라 생각하고 유혹한 거냐? 미안하지만 나는 하인리히 전하가 아니다. 나는 그의 부하일 뿐이지." 그 말에 여자는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네가 하인리히가 아니라고?" "후, 실망시켜 미안하군, 전하에게 미인계라도 펼치려던 모양이지?" 마르케스는 한껏 비웃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여자가 실망하여 분노를 터뜨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여자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 의외의 반응에 마르케스 는 잠시 그 황금빛의 여자를 살펴보았다. "그 아름다운 몸뚱이로 전하를 유혹해서 무슨 일을 하려는 거냐? 설마하 니 전하의 애인이라도 되고 싶었던 거냐?" 그녀는 화도 내지 않은 채 재미있다는 듯이 마르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그는 약간 당혹했다. 이 여자의 모든 것은 뭔가 보통의 여자와 달랐다. 그녀는 턱을 괸 채로 알몸을 가리지도 않고 마르케스의 옆에 엎드 렸다. 그리고는 마르케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여자의 체온이 벌거벗은 팔에 닿자 마르케스는 그제서야 자신도 여자도 완전히 알몸이라 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이 달아오를 수치스런 상황이었지만 그는 스무살 짜리 애송이는 아니었다. '대체 이 여자는 뭐냐? 뭘 바라는 거지?' "그럼 당신 이름은 뭐지?" "마르케스 옥크토. 기사다." "하인리히의 부하라고? 그의 가장 가까운 부하인가 보지? 그의 망토를 빌 려 입을 정도로?" 그 말에 흠칫하는 마르케스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즐겁다는 듯이 고양이처 럼 웃었다. "당신, 꽤 대담한 남자로군. 내가 아름다운가?" "마녀주제에." 마르케스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녀는 화를 내지도 않고 빙글빙글 웃었 다. 갑자기 차가운 칼날이 그의 목에 와 닿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몸을 굳 혔다. "대답해봐."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지?" 그는 목줄기를 파고드는 칼날을 느끼면서 되물었다. 목에서 흐르는 피가 침대 위를 적셨다. 뜨끈한 액체를 느끼면서 마르케스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여자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기묘한 빛깔. 이런 눈을 한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을 덮었다. 따스하고 뱀처럼 요사한 입술이었다. 마르케스가 피하지 않자 그녀는 입술을 겹친 채 웃었다. 비인간적일 정도 로 매끄러운 피부와 눈동자는 확실히 아름다웠다. "하인리히전하에게 무슨 볼일이지?" 마르케스는 조용히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자와 키스해 본 것 이 대체 얼마만의 일이던가? 그는 7년만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를 죽이려고." 놀라운 대답은 아니었다. "왜?" "부탁을 받았으니까."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의 이마위로 젖은 금발이 몇가닥 흘러내렸다. 이 여자의 이 이상할 정도로 빛나는 미모는 그녀의 웃음에 따라서 점점 빛 을 발하고 있었다. "누구에게?" "호사인 세르오네." 그녀는 순순히 말해주었다. 호사인 세르오네라면 세르오네 집안의 장남이다. 대공비의 오빠로 막강 권 력을 휘두르는 인물. 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마르케스는 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네가 세레이아님과 헤르겐님도 죽였나?" "아니." 그녀는 단숨에 부정하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을 마르케스는 반쯤 은 어이없는 기분으로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 이야길 나에게 하는 이유는 뭐지?" "하인리히를 죽일 마음이 갑자기 사라졌기때문이지." "뭐?" 마르케스는 입을 다물고 그녀가 말을 하길 재촉했다. 비록 알몸으로 뒹굴며 사로잡힌 몸이긴 하지만 머리는 정상적으로 굴러가 고 있었다. 이 여자 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고 룬드바르에서도 드문 마법사 였다. 그녀는 지금 하인리히를 죽이도록 의뢰받았으면서도 그를 죽이지 않 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처음엔 죽일까 하고 생각도 했었지만, 그래봐야 세르오네 가문만 좋은 일을 굳이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나는 룬드바르란 이 나라가 무척 마음에 들었어. 여기에서 뿌리를 내리고 싶다는 생각도 할 정도로." 마르케스는 말없이 재촉했다. "그래서 결심했지. 차라리 하인리히쪽을 도와 대공위를 잇게 해주면 어떨 까 하고 말이야." 그녀는 기분 좋은 듯 두 다리를 주욱 펴면서 속삭였다. 그 움직임으로 마 르케스의 팔뚝에 그녀의 젖가슴이 와 닿았지만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 다. 그런 그를 향해 빙긋 웃으면서 그녀는 낮게 물었다. "어때? 사상 최고의 마법사를 한 편으로 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일 테 지?" "뭘 보고 널 믿지?" 마르케스가 재차 묻자 그녀는 흐음 하고 웃음을 지었다. "너에겐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어. 마르케스 옥크토. 물론 하인리히에게도 말이야. 나와 손을 잡던지 아니면 죽던지 둘 중 하나지." "어째서지?" "오다가 숲을 보았겠지?" 그녀는 악마처럼 웃었다. 소름이 끼치는 그런 웃음을 머금으면서 그녀는 한가롭게 마르케스의 머리 칼을 쓰다듬었다. 지나치게 다 정해서 소름이 끼치는 그런 움직임이었다. "그런 짐승들 백 마리 정도를 상대로 너희들 이 십 여명이 살아남을 거라 고 생각해?" ----------------------------------------------------------------------- 제 목:[쿠베린] 별전 마녀를 위한 노래 3 관련자료:없음 [22929]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0-03-03 02:48 조회:573 3 하인리히는 기다렸다. 밤에 갑자기 사라진 마르케스를 기다리면서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는 이미 그쳤다. 질척거리는 땅바닥만을 남기고 이제는 푸른 하늘이 드 러나고 있었다. 마르케스가 갑자기 사라질 이유란 단 한 가지, 그의 죽음, 혹은 납치였다. 하인리히는 초조해지는 기분을 억누르기 위해 물병에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절대로 나 없이 음식을 먹어선 안됩니다." 마르케스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마르케스가 사라진 이상 그가 믿을 수 있는 인물은 극히 적었다. 전적으 로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은 마르케스와 그가 어릴 때부터 길러낸 해적 출신의 애송이들 몇 뿐이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는 물병과 탁자에 놓인 식사를 바라보았다. 벌써 이틀 간 온 종일 굶은 그는 허기와 굶주림으로 목이 탔지만 그 보다 더한 문제는 마르케스의 행방이었다. 만약에 그가 진 짜로 시체가 되었다면 하인리히는 당장 엄청난 위험에 봉착해 있는 셈이었 다. "젠장." 그는 주머니에서 은침을 꺼내 물병에 독이 있는가를 검사한 뒤에 마르케 스가 하던 것처럼 약초가루를 슬며시 뿌렸다. 다행히 물은 여전히 투명한 채로 변함이 없었기에 그는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마르케스가 전부터 말 했던 것처럼 그가 죽는다면 마르케스의 친우이자 부하인 베일러스를 불러 야 했다. 베일러스는 지금 바다에 있었다. 그가 거느린 선단이 여기에 도착 할 즈음이면 하인리히 자신은 죽어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마르케스를 건드린 놈이 누굴까? 설마하니 세레스놈인가?" 그러나 마치 아니라고 말하듯 세레스는 허둥지둥 마을 곳곳을 뒤지며 마 르케스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진심인지 아닌지 하인리히로선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 세레스의 휘하 전부가 그의 행방을 찾기위해 난리 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덕분에 안그래도 어수선한 이 작은 마을은 무척 시끄러웠다. 마르케스가 사라진 뒤 그의 부하들은 하인리히의 방을 이중 삼중으로 눈 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었다. 마르케스와 최소 십 년 이상 지내온 부하들인 지라 어느 정도 믿을 수는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는 없었 다. 그들의 동요를 느끼면서 하인리히는 한숨을 내 쉬었다. 사흘, 사흘간 기다리고 이 곳을 떠나리라고 그는 결심했다. 마르케스가 죽었는지 살았는 지도 모르고 여기서 그렇게 오랫동안 지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성격 으로 보아 이때껏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불길한 이야기였다. 하인리히는 제멋대로 자란 머리칼을 움켜쥐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젠장! 마르케스까지 건드리다니! 죽여버릴 테다!" "침착하시지요." 갑자기 그의 등 뒤에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하인리히는 놀라 몸을 돌렸다. 그의 침대 뒤쪽으로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 는지 두 명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놀랍게도 이틀간 행방불명이던 마르케스 와 금발을 한 미녀였다. "마르케스!" 하인리히는 놀라 손을 뻗다 말고 멈칫했다. "무사하십니까?" 마르케스는 여전히 무감동한 회색눈으로 하인리히의 몸을 살폈다. 그 시선 을 받으면서 하인리히는 얼굴을 구겼다. "너, 대체! 여자랑 노느라 안 나타난 거냐!" 그가 고함을 지르자 마르케스는 눈살을 찌푸렸고 금발의 미녀는 기분 좋 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을 들으면서 하인히리는 조금 흠칫했다. 지나치게 차가운 그 웃음소리는 결코 그녀의 외관처럼 듣기 좋은 것이 아 니었다. "나는 카산드라라고 합니다. 하인리히 전하." "넌 뭐냐?" 하인리히가 미심쩍은 눈초리를 던질 때 그녀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세르오네님에게서 부탁을 받고 당신을 죽이러 왔습니다. 나는 강한 마법 사거든요." 그 말에 하인리히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제서야 상대가 소리도 없이 그의 방안 한 가운데에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렇게 나타날 수는 없었다. 마법사가 드문 룬드바르인들은 마 법에 대한 공포가 남들보다 더 강했다. "그래서?" 하인리히는 마르케스와 여자를 번갈아 보며 되물었다. 마르케스가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자와 함께 나란히 서 있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기에 그는 약간 여유를 두고 물었다. 어차피 상대가 진짜 마법 사라고 한다면 자신을 죽이는 것은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일 것이다. 게다 가 상대가 그를 죽이려 당장 덤벼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뭔가 할 말이 있 는 듯했다. 하인리히는 오히려 약간의 흥미를 느끼면서 그녀를 똑바로 바 라보았다. 그 시선에 카산드라는 웃었다. 상당히 만족한 듯 웃으면서 그녀는 옆에 말없이 선 마르케스의 팔을 잡아 살며시 연인처럼 기댔다. "그러나 마르케스를 만나서 설득을 당했답니다." 그 말에 하인리히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르케스는 무표정한 대로 그녀를 흘긋 보았을 뿐 그 말에 대해 정정할 마음은 별로 없는 듯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다시 말해 너는 나를 죽일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이냐?" "네. 단지 세 가지만 다짐을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힘이 되어줄 수도 있 어요." "세 가지?" 하인리히는 미심쩍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산드라는 두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두 손바닥 사이에 푸른 기운이 맴도 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갑자기 화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시퍼런 비늘을 가 진 짐승이 떠올 랐다. 그 짐승은 사람의 팔뚝만한 크기였지만 찢어진 두 눈 과 송곳 같은 이빨을 드러낸 채로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그 사나운 모 습에 마르케스와 하인리히 모두 눈을 크게 뜨며 주시했다. "가라. 가서 죽이고 와라." 그녀가 싸늘하게 말하자마자 그 짐승은 홱 하고 몸을 돌리더니 창문을 향 해 돌진했다. 그리고는 창문을 가차없이 꿰뚫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지고 차가운 바람이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디로 간거지?" 하인리히가 묻자 그녀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달콤하게 웃었다. "숲안을 떠도는 짐승들을 죽이러." "뭐?" "마을 사람들을 습격한 짐승들 말이지요. 그 마수들을 죽이러 간 겁니다." "저 작은 것이 그것들을 죽일 수 있다는 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하인리히가 중얼거리자 카산드라는 도도하게 웃었 다. "저것은 그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지요. 뭐, 궁금하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에 확인할 수 있을 거에요." "지금이라도?" 하인리히가 묻자 마자 갑자기 비명소리가 찢어질 듯이 울려퍼지기 시작했 다. 그 짐승들의 시체는 마을 어귀에 널려 있었다. 하인리히들은 그 시체들을 바라보며 망연히 입을 벌렸다. 짐승들은 갈가리 찢긴 채로 바닥에 피를 뿜으며 쓰러져 있었는데 그 주변으로 마을 사람들 로 보이는 사람들의 시체도 같이 몇 구 놓여 있었다. 자치대라고 하는 자 들이 와서 겁에 질린 사람들 사이에 끼어 그 시체들을 돌아보고 있는 동안 카산드라는 시체더미 앞으로 다가가 두 손을 다시 내밀었다. 그러자 우걱우걱 하는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시커먼 짐승이 튀어 올랐다. 비명을 올리는 사람들을 좌우로 두고 그 짐승은 부들부들 떨더니 갑자기 배가 불룩불룩하기 시작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듣기 싫은 소음과 함께 퍼 억 하고 피와 살점이 튀었다. 배를 가르며 그 퍼런 뱀과 같은 짐승이 튀어 나온 것이었다. 그 것은 피에 젖은 상태로 긴 혀를 내밀어 할짝 할짝 핥았 다. 여덟 개의 발과 갈래갈래 찢어진 꼬리를 가진 그것은 마치 도마뱀처럼 도 보였지만 길게 찢어진 입사이로 보이는 송곳같은 이빨덕분에 도마뱀이 란 착각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리 돌아와." 카산드라가 손을 뻗자 그 것은 홱 몸을 돌리더니 맹렬한 속도로 그녀의 손아귀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동요했다. 마을 사람들과 주변에 섰던 하인리히의 부하들 모두가 겁에 질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즐기 듯이 카산드라는 하인리히를 바라보며 아리따운 태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다 없앴습니다. 하인리히전하." "..............." 공포로 말을 못잇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하인리히는 심호흡을 했다. 이것은 엄청난 행운이던가 아니면 가장 끔찍한 악운일 것이었다. 무서운 힘을 가진 마법사가 영웅의 뒤를 돕는다는 전설은 흔히 있어 왔지만 하인 리히 자신은 이런 힘을 가진 마법사를 상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겐 힘이 있고 병사가 있었지만 마르케스 이외엔 믿을 자가 없었다. 지금 눈앞에 선 이 여자 마법사를 믿는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녀를 휘하에 둘 수 있다면 모든 것은 역전될 것이었다. ".....바라는 게 뭐냐?" 그녀에겐 힘이 있었다. 원한다면 그녀는 하인리히를 단번에 죽이고도 남 을 힘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그에게 다가와 기꺼이 손을 잡을 것 을 요청한 것이다. 흥분으로 떨리는 주먹을 내리며 하인리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바라는 것을 말해라." 마르케스는 그녀의 힘을 보고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강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되어 줄 수 있었다. ----------------------------------------------------------------------- 감상*감상*감상*감상*감상*감상*감상*감상*감상*감상*감상*감상*감상*감상* 쿠브 퍼오미 로또~ *^^* 제 목:[쿠베린] 별전 마녀를 위한 노래 4 관련자료:없음 [22930]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0-03-03 02:49 조회:584 4 "나에게 지위를 주세요. 궁정마법사정도면 좋겠지요." "그건....앞으로의 일이야." 하인리히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다시 여관방에 돌아온 그들은 금발의 화사한 미청년과 함께 나란히 앉아 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물론 하인리히는 식사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음식에 자연스레 손을 대면서 금발청년이 물었다. "우리들은 앞으로 당신이 룬드바르 대공이 되었을 때의 일을 말하는 겁니 다. 당연하잖아요?" 하인리히는 새파랗게 젊은 미청년을 바라보면서 약간 갈등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단순히 룬드바르대공으로 만족할 인물은 싫어요." 빵을 씹으면서 해사한 청년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상냥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나와 누님정도로 강한 마법사를 가진 군주가 시시하게 이런 남쪽 귀퉁이의 공국정도로 만족한단 말인가요?" 그 말에 하인리히는 주먹을 쥐었다. "최소한 대륙제패, 대륙제패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군주가 될 자격 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지요? 누님?" "그렇고 말고." 카산드라는 웃으며 포도주잔을 입에 댔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대륙의 통일, 그리고 그 군주가 나의 군주일 것. 그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룬드바르대공전하? 아니, 하인리히 황제폐하?" 쿡쿡쿡 하고 하인리히는 웃기 시작했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기 시작 해서 갑자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너무 발작적으로 웃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종자들이 불안해 할 정도였다. 하인리히는 너무나 유쾌한 나머 지 눈물까지 나올 것 같았다. 여지껏 목숨을 부지하느라 급급했던 그에게 대륙통일의 황제가 되라는 그 들의 말은 정말로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먼 미래의 이야기가 될지 혹은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너무 나 유쾌했다. "맞아, 그래, 맞는 말이야. 사내로 태어나서 그 정도는 해야해. 바다는 넓 어, 내가 나다닌 바다는 대륙보다도 넓을지 몰라. 그러니까 대륙통일, 그 정도 생각해 볼 만 하군." 그는 쿡쿡 웃으면서 옆에 앉은 마르케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정말로 대륙을 통일하고 싶어졌어. 이 좁은 땅덩 이에서 굴러다니는 돌멩이 취급은 이제 질색이야." 마르케스는 무심한 얼굴로 흥분한 하인리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장 큰 델리암왕국은 부패했고 다른 군소 왕국들은 태평성대에 이가 빠 졌어.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갑자기 빛나기 시작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마르케스는 희미하게 미소 를 지었다. "그 영토가 바다로 시작해서 바다로 끝나는 왕국, 저 산맥너머의 고왕국 과 장벽너머의 동방교국까지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대 제국." 하인리히는 자신을 바라보는 카산드라를 주시하며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움직임에 카산드라가 눈을 크게 뜨자 그는 시익 웃었다. "그런 제국을 만들도록 네가 도와줄 건가?" "네."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너의 조건은?" 손을 잡은 채 하인리히는 카산드라를 재촉했다. 그녀는 금빛 눈을 빛내면 서 매혹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첫 번째는 나를 궁정마법사로 할 것이었죠?" "승락한다." "두 번째는 대륙을 정복할 것." "좋아." "세 번째는 마르케스를 나에게 줄 것." 그 말에 하인리히는 눈을 크게 뜨고 마르케스를 돌아보았다. 마르케스의 얼굴은 평소대로 무표정해서 그 감정을 알 수 없었다. "그건 무슨 뜻인가? 마르케스를 달라는 건? 그의 목숨을 달라는 건가? 아 니면........?" "그를 내 연인으로 달라는 거지요." 여자로선 입에 담기 어려운 뻔뻔한 말에 하인리히는 순간 입을 벌렸다. "마르케스를 준다면 나는 당신을 불사신에 가깝게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최강의 마수를 당신의 휘하에 놓고 이 십여명이 넘는 최고의 마법병단을 당신에게 건네주지요. 그리고 대륙 전체를 내리칠 가장 강력한 군대를 만 들어주겠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을 대륙통일의 제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거에요." 카산드라의 엄청난 말에 하인리히는 말을 잊고 마르케스를 바라보았다. "마르케스?" 마르케스는 대체 이 여자의 진심이 어디까지인가 궁금해졌다. 난데없이 나타나더니 갑자기 하인리히의 휘하가 되겠다고 말하고, 그 다 음에는 자신을 달라고 말한다. 여자가 말하기엔 지나치게 수치스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 그녀를 그는 주시하면서 이 여자의 허풍을 언 제까지 믿어야 하는가 고심했다. "마, 마르케스? 너는 이 여자가 좋은 건가?" 하인리히는 7년간 여자와 만나지도 닿지도 않은 지독한 철벽의 사내를 바 라보며 물었다. ".............." 마르케스는 묵묵히 카산드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그 에게 던지고 있었다. 재미있다는 그 눈길을 받으면서 마르케스는 순순히 고개를 그덕였다. "하인리히전하를 돕는다면 나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너는! 너의 마음은?" 하인리히가 의외로 격한 어투로 물었다. 그 뜻밖의 태도에 마르케스는 그게 마법사를 얻기 위해 부하를 팔았다는 자책감인지, 혹은 그저 부하의 환심을 사려는 가식적인 행동인지 알 수 없 었다. 하인리히는 격한 성격이지만 뱀처럼 차가운 데도 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마르케스는 하인리히가 보이는 당혹한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 면서 되도록 그것이 후자 쪽이길 바랬다. 그래야 하인리히는 오래 살 것이 었다. 그리고 그게 그의 바램이었다. "나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 여자는 매력적이니까요." 마르케스의 말에 하인리히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샤레이아의 죽음이래 마르케스가 어떤 여자에게도 다가서지 않는다는 것 은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가 갑작스레 나타난 정체 모를 여자마법사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 다. '하지만 어쨌거나..........마르케스는 동의한 것이로군.' 하인리히는 조금 씁쓸한 기쁨을 맛보았다. 그가 자신을 위해 당연히 동의해 줄 것을 알면서도 재차 물어본 것은 정 말로 위선적인 행동이었다. 이 상황에서 분명 마법사의 이 조건은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마르케스도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재차 다른 말을 입에 올렸다. "그럴 순 없어. 마법사여, 다른 기사를 골라. 마르케스 말고 다른 기사들 도 얼마든지 잘생기고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많다구." 그 말에 카산드라는 훗 하고 웃음을 지었다. "나는 젊고 아름다운 남자를 찾는 게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저 회 색 눈을 한 저 남자입니다. 전하가 싫다면 없었던 일로 해도 상관없어요. 야망을 지닌 군주는 당신 하나 만이 아니니까." 그 말에 마르케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전하." "마르케스!" "저 여자와 같이 지내겠습니다, 전하." 하인리히는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무심한 얼굴을 한 마르케스는 여마법사의 동생이라고 하는 금발의 미청년과는 전혀 다른 바위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무표정하고 냉혹한 회색 눈을 바라보 면서 그는 잠시 말을 잊었다. "누님의 취향은 정말 이상하군요, 저 남자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어요?" 마베릭은 나른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산드라는 마르케스가 하인리히와 나란히 나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표정이 없이 담담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부하들은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의 옆으로 다가서길 꺼려 해서 그들은 약간 떨어져서 말을 몰고 있는 중이었다. 하인리히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마르케스의 뒤를 바라보면서 카산드라는 야릇하게 웃었다. "재미있는 주종이야." "그렇군요." 마베릭은 카산드라를 흘긋 보았다. "하지만 나는 저 남자의 매력을 모르겠는데요. 친애하는 누님?" ".............마스터와 닮았어." "어디가요?" 약간 긴장한 음성으로 마베릭이 묻자 카산드라는 낮게 대꾸했다. "그 무심한 회색 눈이 말이야." "마스터는 회색눈이 아니에요. 아니, 우리로선 마스터의 진짜 눈색깔은 알 수도 없다구요." "그야 그렇지. 그러나 나는 마스터의 눈이 회색일 거라고 생각해. 저런 눈 빛일 거라고 생각한다구." 카산드라가 킬킬 웃자 마베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닮지 않았어요. 저건 무력한 인간일 따름이에요. 마스터에 감히 비 교할 수는 없어요." "무력한 인간인 주제에 나를 무서워하지 않았지." 카산드라는 즐거운 듯이 대꾸했다. "저 회색 눈이 공포로 물드는 것을 보고 싶어. 마베릭." "이거야 참......" 마베릭은 한숨을 내 쉬었다. "저 회색 눈이 마구 마구 동요하는 걸 보고 싶단 말이야." "누님도 참 대단하군요. 그런 간단한 이유입니까?" 마베릭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곁눈질로 암흑마도 최강의 마법사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가장 지독하고 가장 잔인하며 암흑마도의 마스터를 제외하고는 가장 강한 그녀는 자기 자신을 모르는 듯했다. "정말 단순한 이유로군요. 누님." 당신은 그저 사랑에 빠진 거랍니다. 암흑마도 최강의 마법사님. 마베릭은 웃었다. 별전. 마녀를 위한 노래. 완. 결. 조금 나중에 올리려다가 그냥 올립니다.... 이 이야기는 그러니까 룬드바르가 마법사들을 거느리게 된 동기입니다만 더 자세한 뒷 이야기는 차츰 나오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