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쿠베린] 제 22화 의지 1 관련자료:없음 [35337]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1-03-26 20:41 조회:3896 제 22화 의지 KUBERIN...... 빛을 향해 걷는다 그 빛에 눈이 타고 몸이 타오를 지라도 걷지 않으면 안될 길이 있다 1 "배 안 고파?" "전혀요." 에닌의 야멸찬 말에 실망하면서 나는 어깨를 으슥했다. 하는 수 없는 일. 배가 안 고프다니. 정말로 비극적이야. 이렇게 맛있는 사슴 넓적다리를 그 냥 썩히자니 사슴이 불쌍하다고. 그러니 내가 대신 먹어 주지. 안타까워라, 안타까워. 에닌은 슬픈 눈길로, 아니 꽤나 허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이 불안해서 어깨를 슬쩍 안아주었더니 나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아 아, 정말로 요염해졌는걸. "슬퍼요." "뭐가?" "그 사람은, 그녀는 정말로 슬퍼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녀가 바로 쿠베린님이 죽이겠다고 하신 그 마법사지요?" "그래." 그러고보니 그 여자를 잡아 눌러 아이들이 있는 곳을 뱉게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아니, 이런 황당한 일이! 그런 걸 다 잊어버렸다 니! 나는 무의식중에 넓적다리뼈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재빨리 에닌 이 내 옷자락을 잡았다. "어딜 가시려는 거예요? 어차피 늦었어요." 에닌의 말에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잠시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참, 어처구 니없는 일이로다. 어쩌다가 이렇게도 멍청한 일이 되었던가. "그녀는 그가 죽어서 슬퍼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그녀를 공격하신다는 것은 비겁하지 않은가요?" "내 애들이 어떤 일을 당할 줄 알고 비겁운운 하는 거야? 원래 나는 비겁 이라는 두 글자와는 아주 친한 사이야." 에닌은 금방 주눅이 든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뭐 하지만 어차피 지나간 일, 채인 애인 찾아 헤매는 것처럼 허망한 것도 없듯이 일단은 접어두자고. 그러면 일단 생각해 두었던 일이나 해결하자. 내가 갑자기 침묵하자 약간, 아주 약간 겁에 질린 에닌은 조심스레 나를 향해 물었다. "화, 화나셨나요?" "아니." 나는 가슴팍에 매달린 무한의 주머니를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주머니 는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푸욱 하고 바닥으로 손가락 마디만큼 꺼져 들어갔 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다. 입구를 열어서 손을 집어 넣고 이리저리 더듬자 이런 저런 물건들이 일제히 자기 존재를 과시하며 튀어 나왔다. 금, 은, 보석, 왕관, 목걸이, 귀고리, 팔찌, 발찌, 항아리....... 비취 침대도 있었지만 꺼내지는 않았다. 대포알도 있었고 어디선가에서 주운 보검도 있 고 마검도 있었으며 수정으로 만든 지팡이라든가, 황금으로 만든 류트라든 가, 황옥으로 만든 피리, 금화, 은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염없이 쏟아져 나오니까 에닌은 이제 얼이 빠진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주머니는 내 주먹만한데 나온 물건은 이미 집 한 채 보다 조금 작은 크기 로 차곡차곡 쌓였으니까. "......무, 무척 많이 들어가네요!" "응." "아직도 멀었나요? 지금 찾으시는 거 뭐죠?" "고양이." "신의 귀 말씀이군요. 그런데 그 주머니는 어차피 마법이 걸려 있을 텐데 왜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이죠?" "그거 참 좋은 말이군. 하지만 말이야 나는 지금 그 놈의 고양이의 진짜 형태를 도저히 알 수 없거든. 그래서 그래." "네?" "그건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진짜 고양이는 아니었어. 그러니까 진짜의 모습을 모르니까 그걸 집어 올릴 수가 없다는 말이야." "아아." 에닌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나는 열심히 뒤졌다. 그 고양이가 고양이 모습을 한 보석이라든가 뭐 그런 거가 진짜 모습이라 고 한다면 정말로 찾기 쉽겠지만 내 생각인데 절대 그런 게 아닌 것 같단 말이야. 굳이 예를 들자면 고양이가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놈은 이미 고양이의 탈을 벗어 고양이가 아닌 게 되어 버렸을 가능성이 대단히 컸다. 그렇다면 대체 본래의 모습이란 게 뭐야? 일곱 개의 기둥이니까 일곱 개의 막대기? 그럼 그 막대기라는 것의 크기 는? 설마하니 하늘까지 치닫는 거대한 기둥일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고 해서 내 팔뚝만한 막대기라면 기둥이라 불리지도 않을 테고........흠, 역시 비유니까 모양새는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그럼 역시 고양이로 찾는 게 가 장 손쉽지. 아, 이건 200여 년 전에 어떤 드워프에게서 받은 도끼로군. 여전히 번쩍번 쩍 빛나는 걸. 어라? 이건 그 왕년 아리따운 엘프 메사나엘에게서 받은 정 표가 아니던가? 그녀는 잘 있을까나? 2, 300년쯤 흐르긴 했지만 엘프니까 살아 있겠지. 어쩌면 에닌 만한 딸내미가 있을 지도. 하아, 이건 땅의 엘프 에게서 얻은 황금의 관. 거추장스럽구먼. 두둑한 게 투박하기도 해라. 나중 에 잘 녹여서 다른 물건으로 만들어 봐야지. 그건 그렇고 이 놈의 일곱 개 의 기둥이라는 것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내가 에닌과 함께 들어온 숲은, 궁전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 고왕국의 수도라는 것은 사실 꽤 야트막한 분지로 둘러싸여져 있긴 한데 그 분지란 것을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숲이 빽빽했다. 곳곳에 녀석 들이 관도나 혹은 사냥길로 사용한 길들은 엘프의 후예를 자처하는 놈들답 게 그다지 반반한 편이 아니었다. 꾸불꾸불 이어지는 그 길들은 수도로 향 하는 길이라는 이름도 무색하게 꽤나 좁아 터졌다. 덕분에 룬드바르군대는 제일 먼저 길부터 넓히고 있는 중이었다. 이 좁아터진 길들은, 당연한 일이 지만 수천년 된 거목들을 해치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비비 꼬여 있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나무를 밀어버리고 길을 내는 것과는 꽤나 대조적이었 는데 숲의 자녀들인 자신들이 감히 숲을 훼손할 수는 없다고 그렇게 지껄 이는 것을 언젠가 들은 적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인간의 손이 닿은 이상 숲 이란 온전할 수는 없는 법. 고왕국 놈들은 소문에 의하면 지하로 길을 뚫 고 있다고 한다. 즉, 위급할 때 지름길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하도를 뚫어 놨다는 것이다. 그 지하도는 드워프가 설계하고 노예들- 왕족이나 귀족 빼 면 다 노예니까 모으기 어렵지는 않았을 게다- 이 목숨 깎아가며 들이 팠 다고 한다. 어쨌든 그 지하도를 보고 룬드바르군도 꽤나 만족한 미소를 흘 리고 있긴 하겠지만 어쨌거나 그 지하도로 대군이 드나들 수는 없으니 녀 석들은 열심히 열심히 길을 닦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여기저기서 나무를 베느라 꽤나 바쁜 소리가 난다. 에닌은 오랫동안 그 여마법사와 인간녀석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듯했 다. 대체 무얼 그리 열심히 생각하는 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룬드바 르에 대해 의외로 동정적이라는 데에는 조금 놀라버렸다. "그런데 그 신의 귀를 찾아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놈들이 찾아 헤매는 이유가 있겠지. 직접 물으려고." "고양이가 말을 하진 못하잖아요?" "놈들은 고양이가 아냐." 에닌이 말하는 순간, 나는 드디어 찾던 것을 찾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일곱 개의 색깔을 가진 수정처럼 보이는 보석이었다. 빛에 따라서 이리저리 빛깔을 바꾸는 그 길죽한 보석들은 육각형의 수정처럼 맑은 색으 로 빛났다. 이 것이 고양이였단 말이지? 참으로 기발하기도 하다. 고양이로 변한 보석이라니. 아니지, 이걸 기둥이라 부르다니. 민망하기도 해라. 아니, 민망 그 자체다. 빨강, 하양, 노랑, 초록, 파랑, 회색, 보라색을 가진 이 보석들을 손바닥으로 굴리면서 나는 그것들을 향해 물었다. "그래, 너희들은 대체 뭐냐?"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답해 줄 리는......." 에닌이 뭐라 막 말하려는 순간 갑작스러운 빛과 함께 주변이 하얗게 변했 다. 흰 색. 흰색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무채색에 가까운 기묘한 색채가 나와 에닌을 덮었다. 그것은 보석으로부터 시작되어 날개를 편 새와 같이 유유 히 빛의 장막을 뻗어 주변을 감싸버렸다. 사방은 온통 흰색 뿐이었지만 묘 하게도 눈이 아프거나 피로하지도 않았다. 아니, 그저 흰색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온후한, 환하다는 것을 지나 어딘가 포근한 빛깔이었다. 그 거짓 말처럼 온화한 빛 속에 잠겨서 나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어디선가 향기가 느껴졌다. 맑고도 상큼한 그 향기는 꽃향기 같기도 하고 과일향 같기도 했다. 그 향기에 이어,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뺨에 와 닿았다. 매끄러운 비단에 얼굴을 묻은 것 같은 감각, 그리고 뒤이어서 느껴 지는 따스한 온기는 여인의 가슴처럼 온후했다. 손가락을 뻗어서 무언가 만져보려 했지만 만져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각이 손끝부터 발끝까지, 아니 머리털 끝에서 발끝, 발톱끝까지 이 어져 전신을 두루뭉실하게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느끼는 쾌락에 가까운 감각, 기분은 둥둥 뜨고 머리는 뱅뱅 돈 다. 절로 입이 벌어져 웃음이 연신 새어 나왔다. 대체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지? 행복감? 만복감? 도취감? '거참, 이 정도의 기분이라면 당장이라도 죽어도 좋겠는걸.' 하고 무의식중에 생각하는 찰나, 나는 혀를 살짝 깨물었다. 바보같이, 감각에 취해서 별 같잖치도 않은 생각을 했구만. 절대로 멍하니 죽어선 안되지. 이런 감각도 살아 있으니까 느끼는 거 아니겠어? 자아, 살 아보자고 살아보세! 아직도 나에게 할 일이 너무나 많아! 나를 기다리는 미녀들을 생각해. 나를 위해 요리된 음식들을 생각하라고. 여기서 굴복하기 엔 나는 너무나 해야 할 일이 많거든. 나는 열심히 고개를 돌리고는 발을 굴렀다. 여기서 죽자고 늘어져 있어선 안 되는 법이다. 워낙에 할 일이 널려 있잖아? 단지 마법사들을 족치는 것 이외에도 할 일은 많아. 나는 단지 마법사를 죽이기 위해서 살아 있는 것 은 아니라고. 게다가 느낌만으로는 부족해. 나는 실제로 비단에 얼굴을 묻고 꽃향기를 맡으며 난로가에 앉아 온기를 구하겠어. 느낌으로 배가 부르진 않다고. 물 론, 기분이야 좋겠지만 말이야. 허어. 그러고 보니 이 감각만으로 말한다면 마치 인간의 마약같은 기분인걸. "아......." 에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흰 빛 속에 홀로 선 에닌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잔뜩 얼 굴을 붉힌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목덜미까지 붉어 진 것을 보니 뭔가 묘한 상상을 한 게 아닐까 싶었다. 다가가 에닌을 끌어 안자, 그녀는 묘한 탄성을 내질렀다. "아!" "에닌, 기분 좋은 거 같군." 내가 머리칼을 쓸어주며 피식 웃자 에닌은 몽롱한 표정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나는..........나는 이대로 죽어도 좋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넌 아직 어려. 아직 애도 안 낳았고 연애도 못 했잖아? 연애란 일생일대 최고의 숙업이야. 그런 것도 못해보고 죽다니."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줄줄 흘러 그녀의 길죽한 귀까지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몽롱한 얼굴은 행복감에 차 있었지 만 내 품안에서 굳이 나오려 하지 않는 걸 보니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든다. 에닌이 혹시 나랑 결혼이라도 한 꿈을 꿨나? 그렇지 않고서야 내 품안에서 이렇게 황홀해 할 리가 있어? "에닌, 할 일 많다고 했잖아?" 내가 휙휙 흔들자 에닌은 몽롱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 앉 아 버렸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바닥에 뺨을 대고는 멍하니 중얼거렸 다. "난, 나, 나는 죽어도 좋아요.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이 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은 없을 거에요. 게다가.......나는, 지쳤어요." 정말? 남자랑 사귀어 본 적도 없을 텐데? 연애도 해 본적 없을 텐데? 엘 프니까 진짜 맛있는 음식도 먹어 보지 못했을 텐데? 키스라든가 포옹이라 든가, 낯간지러운 밀어라든가 뭐 그렇고 그런 거...... 여자랑 남자랑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 그게 얼마나 기분 좋은지 경험하지도 못했잖아? 그런데 도 이 두루뭉실 애매한 기분에 헤롱거릴 작정이야? 나는 혀를 쯧쯧 찼다. 뭐, 허기야 그녀가 움직이기 싫다고 해서 내버려둘 나도 아니지. 나는 그녀의 몸통을 옆구리에 낀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희뿌연 안개도 아닌, 그렇다고 해서 수증기도 아닌 아른아른 거리는 기운 들을 마주하며 나는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바보도 아닌 이상 나타나는 게 어떠냐?" 귀가 들어 본 중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는 게 어떤 것인지 필설로서 형용 할 길은 없지만, 눈으로 본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표현할 길은 없지만 어쨌거나 나타난 것은 그랬다. "안녕하세요?" 하늘색의 하늘거리는 의상을 걸친 금발의 머리채를 구름처럼 틀어 올린, 팔등신의 미녀는 표정 풍부한 커다란 눈을 살짝 찡그린 채 미소짓고 있었 다. 풍만한 가슴은 투명해 보이는 옷감에 휘감겨 살짝 드러나 있었고 한 줌 밖에 안 될 허리는 풍만한 둔부를 아슬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길고도 매끄러운 흰 다리는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면서 수컷으로 하여금 <아, 내가 수컷이었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사랑스러 운 목소리로 물었다. "쿠베린님?" "........누구야? 설마하니 여신?" 보통의 여자치고는 훤칠하게 큰 키를 가진 금발의 미녀는 고개를 다시 갸 우뚱하고는 미소지었다. 그녀의 옆으로 흰 공간을 가르고 갑작스레 흑발의 미녀가 나타나자 나는 다시 눈과 귀가 호강하는 감각으로 절로 입이 찢어 졌다. 어딘가 도발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흑발의 미녀는 요염한 눈매로 날 바라보 며 살짝 미소지었다. 유혹적인 그 미소에 나도 모르게 앞으로 내달릴 뻔했 지만 아아, 나는 그러기엔 너무나 노숙하고도 능숙하고도 멋진 분인지라 그녀의 요염한 미소에 그저 마주 미소지어 주었다. "여신이 둘이나 등장한 건가?" 흑발의 여인은 금발의 여인과 나란히 서서 붉은 빛이 도는 자주색 눈빛을 반짝였다. 깊어 보이는 눈매는 뭐라 말할 수도 없이 농염해서 바로 옆에 선 금발의 청순한 미녀와 엄청나게 대조적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흑발의 여인이 나에게 인사를 건넬 즈음, 갑자기 흰 공간을 가르고 긴 갈 색 머리칼을 늘어뜨린 소녀가 등장했다. 그녀는 아직 열 댓살 정도로 보이 는 가녀린 미소녀였는데 커다란 회색눈을 반짝이는 것이 뭐라 말할 수도 없이 귀여웠다. 가늘고 흰 팔을 드러낸 민 소매의 드레스를 걸친 그녀는 자그마한 악기를 든 채 나를 향해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 나는 순간적으로 내 자신의 취향을 의심했다. 설마하니 나의 숨겨진 취향이 가녀린 미소녀였던가? 어째서 저런 미소녀에 게 마음이 동하는 것이지? 미트라처럼 키우면 매력적인 미녀가 되리라는 무의식적인 예감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까? ".........믿을 수 없어." 나는 심각하게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소녀는 커다란 눈을 뜨고 날 보며 물었다. "쿠베린? 왜요?" 그녀의 옆으로 갑자기 또 한 명의 여인이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등장한 여인은 인어처럼 연둣빛의 머리칼을 하고 있었지만 인어보 다도 아름다웠다. 짙은 녹음을 연상하게 하는 깊고도 맑은 녹색의 눈동자 는 갈색의 매끄러운 피부와 더불어 건강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그녀 는 다른 미녀들과 마찬가지로 나란히 그들 옆에 서서 나에게 미소를 던졌 다. ".............장난하나?" 나는 그저 입을 벌린 채 여신처럼 매혹적인 여인들이 줄지어 나타나는 것 을 구경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다음에 등장한 여인은 물의 엘프처럼 하늘색의 머리칼을 가진 미녀였 다. 그녀는 얼음처럼 차가운 미모와 냉혹할 정도로 냉정한 눈길로 내 마음 을 들쑤셨다. 다른 여인들과 달리 내 쪽을 향해 친절한 미소는커녕 경멸에 가까운 시선을 던진 그녀는 오만하게 턱을 돌린 채 나를 외면했다. 마치 너 따위는 먼지쪼가리만큼도 대단하지 않아 라고 말하는 듯한 그 눈길은 내 호승심을 단번에 갈아엎어서 나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고 어디론가 가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의외로 나, 불타오르기 쉬운 체질 일 지도 모르겠군. 그 다음에 등장한 미녀는 고집 센 표정의 붉은 머리의 미녀였다. 그녀는 커다란 붉은 눈을 뜬 채 나를 바라보더니 마치 내가 말을 걸지 않아서 화 가 났다는 듯 흥 하고 괜히 코웃음을 쳤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녀와 내가 아는 사이인가 하는 착각에 빠져 인사를 하고 말았다. "안녕?" "흥!" 그녀는 내가 인사를 하자 오히려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 면서도 나를 향해 한 번 시선을 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이거 어쩐지 전형 적인 튕기는 미녀 아닌가? 그 다음에 등장한 여인은 오히려 평범했다. 그녀는 마치 지나가는 보통의 여자처럼 부드러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의 갈색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그녀는 다소곳한 자세로 서서 나를 향해 조금은 수줍고도, 예의바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눈부신 미녀들 사이에서 그녀는 너무 평범해서 오 히려 확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대체 이게 뭐야?" "쿠베린님이 보시는 우리들의 진실한 모습입니다." "우리들.......이라고 하면?" 나는 그제서야 내가 그 놈의 일곱기둥인지 작대기인지 하는 일곱 개의 수 정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내 손아귀에는 보석들 대신 축 늘어져서 황홀한 듯 두 뺨을 붉히고 있는 에닌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는 정상적인 공간이 아니군. 역시?" "그렇습니다. 여기는 쿠베린님이 만든 공간이지요." "내가 만든 공간?" 여인들은 각자의 개성대로 살풋이 웃었다. 크게 웃는 여자, 조용히 웃는 여 자, 호탕하게 웃는 여자, 그리고 비웃는 여자까지 다양한 모습들이었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의 공간이란 의미이지요." "나는 이런 거....바란 적 없는데?" "편안한 상태를 가장 좋아하시니까 이런 모습이지요. 솔직히 말한다면 이 런 공간을 만들어 내는 분은 저희들로서도 처음이랍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희고, 아무 것도 없지만 부드럽고, 온후하며, 상쾌하고, 달콤한 기묘한 감각 들이 혼재된 텅 빈 곳. 설마하니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곳이 이런 곳 인가? "그럼 에닌이 보는 것은 내가 보는 것과는 다른 것이란 의미인가?" "그렇습니다. 다 각각의 눈으로 공간을 봅니다. 그리고 역시 각각의 눈으 로 우리들을 보지요." ".......나는 여인을 원했었구나." 아아, 내가 생각해도 꽤나 원색적이군. 하지만 눈은 즐겁네. 내가 히죽 웃자 그녀들도 같이 각각의 개성대로 웃었다. 그녀들은 내가 편안한 자세로 바닥에 걸터앉자 천천히 따라 앉았다. 그에 따라 아슬아슬 한 맨다리가 그대로 드러나, 나는 여인들의 매혹적인 일곱 쌍의 다리를 즐 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그래, 이야길 해보자구. 너희들은 뭐냐?" "쿠베린님은 저희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뭔 기둥이라며? 나는 뭔 작대기인가 생각했었지."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설마하니 이 미녀들이 일제히 쭉쭉 뻗은 작대기로 돌변할까봐 걱정스러워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미녀들은 일제히 웃기만 할 뿐 변함은 없었다. "오랜 시간동안 저희들은 인간의 신전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그 곳에서 모셔져 있었지요. 신성한 물건으로서 말입니다." "대체 어째서 신성한 물건이 된 거지? 실제로 너희들은 신성한 물건인가? 그리고 대체 왜 마법사들이 너희들을 가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어?" 나는 턱을 잡은 채로 흑발 미녀의 허벅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 그 녀의 허벅지는 거의 예술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 내 심미안은 역시 훌륭해. 이게 다 내가 바란 모습이라는 거지? "몰라요." 갑자기 내 시선을 의식한 흑발의 미녀는 요염하게 날 쏘아보며 다리를 꼬 았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다말고 갑자기 돌변한 그녀 때문에 나는 순간적으로 당 황했다. 하지만 부드러운 얼굴을 한 여인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에 나는 곧 그녀의 반응조차도 내가 바란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색한 웃음 을 흘렸다. "알았어, 어서 말해봐." "모르는데요." 이번에는 발랄한 소녀의 얼굴을 한 보석이 말했다. 그녀는 양 손으로 턱을 괴고 무릎을 세운 상큼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아이고. 내가 상큼한 매력 운운하다니. 어쩌면 나의 깊숙한 곳 어디에선가 소녀취향의 미의식이 꿈틀 거리고 있었나보다. 그러나 저러나 상큼하든 시큼하든 모르는데요라는 그 말은 꽤나 기분이 거슬려서 나는 짧게 되물었다. "너희들이 모르면 누가 알어?" "인간들이 알겠죠." 흐응 하고 코웃음을 치며 붉은 머리의 미녀가 도톰한 입술을 내밀며 말했 다. 나는 그게 귀여워서 헤벌레 웃음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정말 몰라?" "몰라욧." 빨간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며 그녀는 새침하게 말하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아이고 귀여워라, 지금 이거 튕기는 거지? 여기서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흥." 내가 붉은 머리의 아가씨 머리를 쓰다듬는 순간 갑자기 차가운 비웃음소 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은발의 아가씨가 싸늘한 표정으로 날 쏘아보 고 있었다. 오만한 가는 콧날에 매달린 조소라는 두 단어에 화들짝 놀란 나는 그녀의 그 시선을 마주 쏘아 봐 주었다. "뭐야? 불만이야?" "색마." 짧게 말한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울화가 치밀었지만 붉은 머리칼의 미녀에게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자상하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일렌."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순간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소리가 어떤 것인지 생전 처음 알았다. ------------------------------------------------------------------------------ 제 목:[쿠베린] 제 22화 의 지 2 관련자료:없음 [35530]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1-04-02 23:16 조회:3589 KUBERIN...... 빛을 향해 걷는다 그 빛에 눈이 타고 몸이 타오를 지라도 걷지 않으면 안될 길이 있다 "무슨 재수 없는 농담이냐?" "아뇨, 제 이름은 일렌이 맞아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혹적으로 말했다. "웃기지 마!" 두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손아귀에 힘을 주고 당장이라도 부서 뜨릴 듯이, 미친 듯이 그녀를 흔들었다. 이리저리 힘 없이 흔들리는 그녀의 고개를 보며 나는 갑자기 그 머리를 물어 뜯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있을 수 없는 일. 그녀는 죽었다. 나를 배신하고 나에게 죽었다. 그런 그녀 의 이름을 사칭하다니. 그런 그녀의 이름이 대체 왜 여기서 튀어 나오는 거야! 눈 앞이 시뻘겋게 물들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 는 이 발칙한 것을 없애고 싶은 충동에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아무도 일렌 을 사칭할 수는 없다. 일렌이란 존재는 단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자 도 일렌이라 스스로 말하며 나를 희롱할 수는 없단 말이다! 흰 목줄기를 움켜쥐고 단숨에 목을 졸랐다. 그녀는 놀란 눈을 크게 치켜 뜬 채로 고통 스런 신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절대로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 그녀 는 감히, 감히 일렌을 사칭한 것이었다. 격렬하고도 가장 비참한 증오로 나는 그 흰 목을 부러뜨리고 그 심장을 찢기 위해 힘을 주며 웃었다. 이를 갈며, 당장이라도 타오를 것 같은 눈을 부릅뜨고 웃었다. "사랑해." 어느 순간, 시간이 정지하고 갈색의 머리칼이 흩어진다. 청동빛 머리칼이 손안에서 흐트러지며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아찔한 감각. 믿을 수 없을 정 도로 다정한 살결의 내음. "사랑해, 죽을 정도로, 죽일 정도로." 눈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나와 뺨 위로 흘러 떨어졌다. 그렇다. 몇 번이고 나는 그녀를 죽였다. 실제로도, 마음 속으로도. "나는 일렌이에요. 쿠베린." 그녀가 속삭였다. "잊으면 싫어." 그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대체, 무엇에 그렇게 화를 내고 있었는지 조차 잊어버렸다. 나는 멍하니 그 머리를 끌어안았다. "너를 사랑해." 일렌이 대답했다. "바보 같으니. 이미 알고 있는 걸." 하지만 알고 있다. 이 머리칼은 붉은 색. 초록빛이 감도는 갈색의 머리칼은 아니었다. 일렌은 이처럼 가냘프지 않다. 일렌은 이처럼 온화한 어투를 쓰 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이미 죽었다. 이것은 내 미련, 내가 가진 끊임없는 자책감의 증거. 그렇구나 하고 나는 멍하니 기억해냈다. 나는 그녀에게 단 한 번도 사랑 한다는 말 따윈 건네 본 일이 없었다. 이상도 하지, 수십의, 수백의 여자들 에게 실 없이 건넸던 그 말을 왜 일렌에게는 하지 않았을까. "의외로 나, 꽤 멍청한 거 아닐까나......." 나는 피식 웃었다. 눈물 때문에 꽤나 짭짤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뭐,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멀리 할 수는 없겠지. 이게 내 감정인 게다. 수 많은 여자들과 보내는 몇 백의 세월동안 단 한 번도 그녀를 잊을 수 없었 다는 것을, 지금 막 깨달았다. 일렌이라는 붉은 머리의 미녀를 안은 채 나는 옆에 앉은 소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회색 눈을 가진 앳된 소녀는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하는 지 알 수 없다는 것 같은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천진한 얼굴을 보고,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곧 깨달았다. "네 이름은?" "미트라." 그녀는 내가 손을 뻗자 방긋 웃으며 내 손에 매달려왔다. 작은 소녀를 끌 어 당겨 품안에 안은 채 나는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비로우면서도 명랑 한 그 커다란 눈이 소녀다운 작은 얼굴에 너무도 잘 어울려 나는 왠지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안녕, 내 공주님." "나는 공주님이 아냐." 미트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투덜거렸지만 나는 그녀의 어깨를 바짝 안아 당 기며 속삭였다. "건방지게 굴지마.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야, 이 몸께서 공주님이라 불러준 여자가 흔한 줄 아냐?" "쳇, 나는 공주님이라 불리는 거 싫어." 투덜거리는 그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처음으로, 애정을 담아서, 놀리는 것도 장난치는 것도 아닌, 실제로의 애정 을 담아, 존중과 친애의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키스했다. 어린 소녀의 몸은 내 품안에서 점점 부풀어올라 순식간에 처녀로 변했다. 커다란 회색눈은 변하지 않았지만 가녀린 몸은 처녀의 풍만함으로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나는 그 처녀가 된 미트라의 얼굴을 잡고 조용히 쓸어 주었다. "사랑하는 내 공주님, 너보다 아름다운 공주님은 없어." 미트라가 환하게 웃었다. 피로 물든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명랑하고도 경쾌한 얼굴로 고집 센 턱을 흔들며 잘난 척하고 웃었다. "그야 당연하지!" 나는 고개를 들고 미트라의 어깨를 안은 채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여자 들을 돌아보았다. 그녀들은 각각의 표정을 지은 채 그림처럼 앉아서 날 바 라보고 있었다. 코웃음을 치는 냉정한 여인은, 이에르네. 그랬지, 그녀는 언제나 나를 향 해 화를 내고 있었지만 나를 언제나 사랑해 주었다. 언제나 나를 질책하고 언제나 앞을 향해 달리는 여자. 틀림없이 몇 년, 몇 십 년이 지나더라도 내 곁에서 내달릴 그런 강인한 여 자. 꿈결같은 금발머리를 흩날리며 수줍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득한 내 젊 은 날 나에게 아이를 낳아 주기 위해 애쓰던 가련한 인간의 여인,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상냥하고도 다정한 여인. 그렇다. 내 손으로 그녀의 시체를 태워 주었었다. 그래도 달콤한 임종을 거둔 그녀는 순진한 얼굴로 나를 바 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으응, 쿠베린, 당신은 여전하네." 내가 손을 뻗자 그녀는 예전처럼 내 손에 얼굴을 비비며 꿈결같은 눈동자 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이 세상에 내가 전부라는 듯이, 이 세상에 나 밖에 없다는 듯 행복한 눈. 그 행복한 눈을 보고 나도 행복했었다. 그래서 그녀가 늙어 죽을 것이라 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못했었다. 상대가 죽어 소멸해버린 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꽤나 괴로운 일. 나는 그 녀의 반짝이는 금발을 집어 들며 풍만한 가슴을 쓸어 내렸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듣는 것은 행복하다. 나는 그녀의 금발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옆에 요염하게 앉아 있는 흑발의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턱을 괴고 앉아서 흥미진진하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나를 처음 본다는 듯 반짝이는 눈동자가 기묘해서 나도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 녀는 누구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연둣빛 머리칼을 한 여인도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누굴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누 군가이길래 이렇게 내 앞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것은 확실한 듯한데 대 체 저게 누구지? 일단 기억나지 않는 것은 젖혀두자. 고민해봐야 결론 나는 것도 없으니까. 당면 과제나 해결하자고. 나는 갈색머리칼을 한 평범하고도 온후한 인상을 가진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단정하게 앉은 채 내가 미트라와, 일렌, 그리고 인간의 여 자를 안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호기심이라기 보다는 자상한 그 눈 매를 보며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금방 깨달았다. "마미?" "응." 그녀는 웃음이 묻어나는 어투로 대답하며 두 팔을 벌렸다. 그 두 팔에 안 기면서 나는 그녀의 작은 몸을 토닥였다. 허어, 이렇게 마미가 날씬하던 것 이 언제적 일이던가? 아니지, 그녀는 이렇게 날씬했던 적이 없었다. "마미, 꽤나 이쁜 걸." "하하하하....." 마미는 작게 웃었다. 그렇다. 그녀는 웃었다. 포근한 웃음을 드러낸 그녀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웠 다. 요염하지도, 청순하지도, 가녀리지도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자리에 있는 어떤 여자들에게도 지지 않을 빛을 가지고 그녀는 고요히 앉아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하, 하하....전부 인정하지. 여기, 꽤나 행복한 공간이잖아? 이렇게 바라는 바대로 최고의 미녀들이 최고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말이야. 이게 바로 일 곱 수정들이 할 수 있는 힘인가?" 나는 마미의 무릎에 머리를 벤 채 벌러덩 드러누웠다. 희고도 온후한 공기를 가진 공간. 따스한 향기, 부드러운 맛을 가진 이 기 묘한 공간 속에서 나는 미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편안히 물었다. "잊지는 않아. 여기는 내가 만든 공간, 그리고 너희들은 내가 사랑했던 여 자들이야. 그러니까 도망갈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 그래, 너희들이 하는 일이라는 게 누군가의 마음 속을 뒤져 들여다보고 이루어주는 건가?" "어떤 존재냐에 따라 다르지요." 마미의 느낌을 가진 보석이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 베개가 된 자신의 허벅지를 조금 은 편안히 했다. 그녀만이 아니고 내 주변에 몰려든 여자들은 각각 내 팔 다리를 주무르며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내 옆에 누워 있는 에닌은 여전히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반쯤 뜬 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언뜻 보면 잠을 자는 것처럼도 보인다. "저 애는 어떤 꿈을 꾸는 것일까? 너희들이 만든 공간에 저 애도 들어가 있는 건가?" "그녀가 만든 공간이겠지요." "왜 깨지지 않지? 나는 이게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걸 알고 있어. 이게 환 각이라면 벌써 깨져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왕년에 나에게 미혹의 마법을 걸었던 녀석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마미가 옆에서 속삭여 주었다. "이것은 환각이 아닙니다. 쿠베린님." "환각이 아니면 실재 하는 거야?" "네, 이것은 우리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당신의 바램을 그대로 비추어 주는 공간이에요." "그럼 너희들은 신인가? 어떤 것을 아예 만들어내는 것을 신이라 부르잖 아?" 나는 대굴대굴 구르며 내게 말하고 있는 마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녀는 미소를 지은 채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들도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모릅니다. 주인님. 그저 우리들은 존재할 뿐." "주인님이라는 것은 우스운 일이잖아." 나는 나른해지는 몸을 마음대로 늘어뜨린 채 대답했다. "나는 너희들을 내 주머니에 넣었을 뿐 너희들의 주인은 아니야. 모든 것 은 대지의 여신에게 돌아간다. 바다에서 사는 것들은 바다의 여신들에게, 날리는 것들은 천공의 여신에게. 그 모든 것이 공정한 자연의 여신의 품안 에 있는 거라고. 인간도 아닌 주제에 주인님운운이라니 창피한 줄을 알아 라." 마미는 흠칫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가요?" "그렇게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인간에게 이용당하는 거 겠지. 그래, 너희들 자신도 왜 인간들이 노리는 지 모르는 것이냐?" "모릅니다." "아는 건 대체 뭐냐? 너희들은 귀만 있고 머리는 없냐?" 내가 코웃음치자 보석들은 일제히 속삭였다. "뭐라구?" "............."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들은 마치 파도처럼, 마치 바람처 럼, 냄비에 물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 소리는 점점 커 지고 커져서 순식간에 주변을 다 삼킬 것 같았다. 나는 그녀들에게 둘러싸 인 채 내가 만든 하얀 빈 공간에 까만 점이 생겨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 치 보글보글 스튜가 끓어오르는 듯한, 그 기묘한 소리는 여인들이 저마다 입을 오므리며 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면서 나는 새삼 그녀 들이 살아 있는 게 아니라 그저 하나의 물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인님?"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인님?" 그녀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갑자기 내 앞에 드러낸 시커먼 공간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시커먼 구멍 안에 빛이 있었다. 그 빛 속에 있는 것은, 자그마한 언덕이었 다. 아니, 자그마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어폐가 있다. 산은 산인데 산 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민망한 수준의 나지막한 산. 그 산 꼭대기 위에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건물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신을 모신 신전이라 고 불릴 만한 화려함을 가진 그 건물은 수십 개의 새하얗게 빛나는 둥근 기둥들로 지탱하고 있었다. 섬세한 열 일곱 개의 꽃잎을 가진 커다란 페리 아신꽃을 새긴 신전의 그 하얀 기둥들을 주욱 걸쳐 들어서면 그 흰 기둥들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와 중앙의 원형의 홀을 비췄다. 그 홀의 정 중앙에 는 1메테르 정도의 높이로 올려진 제단이 있고, 그 제단의 위에는 적어도 4메테르는 될만한 거대한 석상이 서 있었다. 방패를 들고, 창을 든 이 석상 은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신성한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 모양새로 봐선 뭔가 인간의 신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 석상의 앞에 인간이 있다. 그는 거대한 기둥 사이에 놓여진 석 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대인의 옷차림을 한 그는 아직 십대의 소년처럼 보였다. 창백하고도 매끄러운 소년다운 얼굴. 하지만, 여기 저기 찢어진 고급 능직의 휘장에는 피가 묻어 꽤나 심상치 않은 비극을 겪은 듯 잔뜩 굳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단으로 오는 복도 곳곳에 핏자국이 언뜻 보였다. "신이여........" 그는 흰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제단에 몸을 구부렸다. 무릎 아래로 피가 방 울방울 떨어지며 원을 그렸지만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흙과 피에 젖은 검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소년은 제단 위에 던진 상태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신이여, 도와주세요, 주신(主神) 파스여, 나의 나라를 구원해 주세요." 그는 피에 젖은 손가락을 들어 석상에 손을 얹었다. 석상의 발치에 그의 피에 젖은 손가락이 닿고 애절한 흐느낌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석상은 변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대로 석상은 석상일 뿐이었다. 문득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석상 아래 쓰러진 소년을 향해 칼을 든 사 내들이 나타났다. 사내들은 소년이 석상아래 움츠리는 모습을 보고 비열하 게 웃더니 가차없이 그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가련한 소년의 목이 그 칼 날에 가차없이 잘려져 나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상의 가슴에 부딪쳐 떨어졌다. 피. 흰 대리석상에 묻은 소년의 피. 석상은 당연한 일이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그의 검붉은 피 를 뒤집어 쓴 채 고고히 서 있을 뿐이었다. 전신(戰神)의 모습을 한, 갑주 를 입고 거대한 칼날을 든 턱수염을 기른 사나운 얼굴을 한 사내의 모습의 석상은 가슴에 검붉은 핏자국을 그대로 매단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 다. 소년의 목이 바닥으로 구르며 피를 뿌릴 때에도 성난 병사들이 소년의 몸을 난자하듯이 칼질을 해댈 때에도 석상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어둠. 마치 어릿광대 놀음을 보는 듯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며 새로운 막이 올랐 다. 이 번에는 작은 소녀였다. 소녀는 바짝 마른 얼굴에 윤기 없는 긴 머리칼 을 늘어뜨린 채 제단 위에 앉아 있었다. 이미 쇠락한 듯 잔뜩 이가 빠지고 금이 간 대리석의 제단 위에 걸터앉은 소녀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 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초점 없는 동공은 틀림없이 눈이 보이지 않는다 는 증거였다. 그녀는 턱을 괴고 있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소리로 그녀는 속삭였다. "나는 죽어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소녀는 턱을 괸 채 낮게 노래를 계속했다. 노래는 자장가처럼 잔잔하고 기복이 없었지만 어딘가 서글펐다. 어린애들이 부르는 동요처럼 리드미컬했지만 경쾌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노래를 계속하면서 발장난을 하며 제단을 툭툭 걷 어 찼다. 그에 따라 낡은 석상의 제단은 약간씩 흔들렸지만 소녀는 그만두 지 않았다. "신은 죽었어." 소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머지 않아 갑작스런 소란과 함께 흰 베 일을 쓴 여인들이 걸어 들어 왔다. 그녀들은 무언가 은 쟁반에 그릇을 받 쳐들고 있었다. 그 그릇을 내미는 여인들의 표정은 비장하기 짝이 없었다. "신의 부름이십니다." 여인들의 말을 듣고도 소녀는 무표정한 채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여인들이 내미는 그릇을 받아 들고 천천히 마셨을 뿐이었다. 눈 먼 소녀는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속삭였다. "나는 죽어요, 신이여." 그녀의 입가에서 피가 솟아올랐다. 검붉은 피가 제단 위를 적시고, 마침내 석상의 발치를 얼룩지게 할 때에도 석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전신의 석상 은 그저 그대로 허공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서서 소녀의 핏줄기를 빨아들였 다. 다시 어둠, 이거 뭘까? 과거의 역사? 이런 식의 이야기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걸. 어떤 비극도 결국은 남의 일, 과거의 일일 뿐인데 이렇게 나에게 보여봐야 무슨 상관이지? 게다가 인간들의 역사따위 나에겐 관심도 없어. 여신도 아닌 남신의 구질구질한 석상을 언제까지 봐야 하냐? 석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신전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해가 뜨고 달이 졌다.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석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소녀와 소년과 그 외 다른 자들의 울부짖음을 들으 며 그대로 서 있었다. 석상의 얼룩진 부분은 전혀 지워지지 않은 채 오히 려 점점 그 얼룩과 자잘한 상처를 늘리며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냈 다.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석상은 어딘가 모르게 서글펐다. 저게 전신의 모습을 한 녀석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그런 서글픈 모습. "바램이란 것은 무엇일까." 석상 앞에 어떤 녀석이 갑자기 등장했다. 마치 별로 재미도 없는 구질한 인간의 연극을 보는 것 같군. 차례차례 나타나는 이 몰골들이라니. 이미 이때는 신전의 그 수십개의 둥근 기둥들은 꽤나 많이 상했다. 금이 가고 기울어진 기둥들에는 그 예전의 화려했던 조각들은 다 깨어져 나가고 둔탁한 형태만이 남아 있었다. 어허, 시간이 꽤나 지난 모양이구만. 녀석은 마법사의 로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여자들의 베일도 아닌 어 정쩡한 길이의 두건을 쓴 채 석상 앞에 서서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 마른 두 종아리가 드러난 녀석은, 사십대 정도의 안색이 나쁜 사내였다. 그는 고대인의 복장을 한 채로 숱이 적은 땋은 머리를 천천히 쓸어 내리면서 석상을 향해 중얼거렸다. "신이여, 당신은 대체 어떤 인간의 바램을 들어 주었나요? 아니, 바램을 이루어주지도 못하는 신이라는 게 필요하기나 한 건가요?"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석상을 향해 조소를 던졌다. 그의 손에는 망치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보통 목수나 석수들이 쓰는 망치보다도 작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망치를 든 그는 주저 없이 석상 을 향해 내리쳤다. "나, 엘로르 쿠스차야! 이 영혼이 무저갱에서 헤맬 지라도! 인간들의 저주 를 받을 지라도! 그대들 신을 저주하노라! 그대들의 무심함에 대하여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자, 나 쿠스차야는 너희들 신을 저주한다!" 그의 망치가 석상을 내리찍었다. 금이 가고 색이 바랜 대리석상은 그의 망 치질에 가차없이 부서져 내렸다. 망치에서 나는 소리는 온 공간을 전부 다 울릴 듯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신에 대한 인간의 비명처럼, 인간에 대한 신의 비명처럼 울려 퍼지는 그 망치소리는 마치 절규와도 같았다. 나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애달피 울어대는 어린 소년소녀들과도 다름이 없 는 그 애원하는 소리는 망치소리를 타고 증오로 변해 온 공간을 뒤흔들고 있었다. 결국은, 바램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증오로 변하는 선망과 존경은 어쩌면 저리도 이기적인가. "나를 증오해도 좋아! 이젠 이따위 석상 따위! 석상 따위에게 빌지 말아 달란 말이다!" 그는 증오로 눈을 새까맣게 물들이며 고함을 질렀다. 쩌엉쩌엉 울려대는 그 망치 소리와 더불어 석상은 부서져 사방으로 그 조각들을 날렸다. 겉으 로는 얼룩져 있었지만 그 흰 대리석의 석상은 안쪽은 눈부시도록 희었다. 오히려 깨지면 깨질수록 빛이 나는 것 같은 그 모양새를 보며 나는 약간은 흥미진진해졌다. 그래, 잘했다. 차라리 부숴라. "누구냐!" "감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그 석상을 깨던 쿠스차야라는 남자는 곧이어 그 망치소리를 듣고 달려온 사람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그의 피가 얼룩진 망치는 이미 다 부서져 내린 석상 아래서 도드라진 불길한 색깔을 띄고 누워 그 남자의 증오를 드 러내 보였다. 피에 젖은 망치와 하체가 부서져 무너져 내린 석상. 그 기묘한 모습을 지 켜보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이걸로 끝인가? 이 것은 이 근처에 서 일어난 사건들인 것 같은데 옷차림이나 뭐 그런 걸 봐서는 고왕국보다 도 훨씬 전의 일인 듯도 싶다. 대체 이런 사건들과 일곱 개의 기둥이라는 이것들과의 관계는 또 뭐야? 가만 있자? 쿠스차야라고 한다면......굉장히 귀 에 익은 이름인걸? 그 뭔 구질구질한 신의 이름이 쿠스 뭐 어쩌고저쩌고 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다. 부서진 석상은 다시 만들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무너져 가는 제단 위에 놓 여져 있었는데 또 몇 번이나 계속해서 해와 달이 스쳐지나갔다. 이제 신전 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주변에 굴러다니는 흰 대리석조각들이 그 왕년의 화려했던 위용을 드러내고 있을 뿐, 신전의 주춧돌 사이에서는 푸 른 이끼가 자라고, 억새풀이 자라나고 잡초들이 자라나며 그 왕성한 대지 의 여신에의 예찬을 노래했다. 석상은 여전히 누워 있었다. 하체가 부서져 나가고, 잔뜩 이끼가 끼고, 잔뜩 부서져 버린 그 석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이미 반 이상 부서져나간 제단 위에서 그대로 누워 있다. 석상의 손가락 사이로 토끼풀이 자라고, 석상의 허리춤에선 엉겅퀴가 자라나 길게 늘어졌다. 해와 달이 스쳐지나가고 바람과 비가 그 석상에 몇 번이나 침범 하는 그 시간이 지나가고, 문득 그 무너진 석상 근처로 한 소녀가 다가왔 다. 얼굴을 반쯤 가린 소녀는 거친 손마디를 가지고 있었다. 가축이라도 키우 는 듯 허리춤에 매단 빈약하게 생긴 회초리가 그녀가 걸을 때마다 한들한 들 흔들렸다. 그녀는 진흙으로 더러운 앞치마에 손을 어색하게 닦더니 무 너진 석상 앞에 서서 조심스레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는 어색한 표정으 로 자그마한 들꽃을 바쳤다. "어머니가 병에서 낫게 해주세요." 그녀는 약간은 쑥스러운 듯 아무도 없는 석상 앞에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 더니 들꽃을 제단 위에 올려놓은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 보다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이 반쯤 부서진 석상이 두려운 것인지, 어려운 것인지 애매 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도 망쳐 나갔다. 그 순간 나는 그 때 소녀의 발걸음에 따라서 하나 씩 뭔가가 석상에서 튀 어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일곱 개의 빛 덩어리였다. 소녀가 종종걸 음으로 이미 쇠락한 신전을 한 걸음 벗어날 때마다 그 부서진 석상의 조각 에서 빛이 떠올랐다. 색색으로 빛나는 그 빛 덩어리는 곧이어 반짝반짝 윤 이 나는 수정으로 화했고, 곧 그 수정은 눈부신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일곱 개의 빛나는 기둥으로 변하더니 잠시 후 주변은 그 광채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옛날의 아름다웠던 대리석의 신전보다도 더 화려한, 그 보다도 더 커다란 일곱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빛의 신전이 생겨났다. 어째서 일곱 개일까? 대체 어떤 이유로 일곱 개일까? 나는 멍하 니 그런 생각을 하며 그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자가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들을 낳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풍년이 들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들이 일제히 절을 한다. 기도를 한다. 일곱 개의 빛의 기둥을 향해 인간들이 기도를 한다. 빛의 기둥들은 마치 무지개가 그대로 지상 위에 내려선 듯 우아한 빛깔을 뿜어내면서 고고히 서 있었다. 그들이 무너진 석상의 위에서 빛을 내고 있는 것을 이미 사람 들은 잊고 있는 듯했다. 이 빛의 기둥들이 석상에서 나온 것도 그들은 모 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기쁨과 외경에 찬 얼굴로 기도하며 바라고 또 애원하고 있었다. 그 옛날 석상 앞에서 죽어간 인간들처럼. "이건 대체 뭘까." 어느 순간, 또 다시 빛의 기둥 앞에 한 사내가 등장했다. 자줏빛 망토를 걸 치고 있는 사내는 왕관을 쓰고 고대인다운 땋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턱수염을 기른 그의 각진 턱에는 뺨과 입가를 연결하 는 긴 흉터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뭐랄까 번쩍번쩍 빛나는 그 두 눈 덕분에 구질한 인상은 전혀 없었다. 그는 넓은 가슴을 활짝 편 채 미소를 짓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가녀린 몸집을 한 소년과 소녀가 턱수염의 약간은 겁에 질린 채 빛의 기둥을 바라보고 있었다. 빛나는 일곱 개의 기 둥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듯, 겁에 질린 두 아이들은 저마다 사내의 자줏빛 망토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 것을 신의 기둥이라 부른다고 한다. 바라는 것은 전부 들어준다고 했 다. 너희들의 바램도 말해보아라." 왕관을 쓴 사내는 건방진 표정으로 턱 끝으로 소년과 소녀에게 말했다. 소 년은 긴장된 얼굴로 크게 외쳤다. "그랑프라임이 영원하기를!" 그렇게 소년이 외치자 왕관을 쓴 사내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신께 기도하지 않아도 상관 없다. 우리들은 언제나 강하다. 우리들 보다 강한 자는 대륙에 존재하지 않아. 우리들이 두 팔을 벌려 아인족과 함께 하는 한, 우리들보다 강한 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낮게 대답했다. "하지만 전, 아인족들은 좋아하지 않아요." "제스엔, 나의 아들아. 너의 그런 마음은 왕국에 도움이 되지 않아. 외견 은 중요한 게 아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다양한 종족들과 어울려 사는 넓 은 마음이다. 저 넓고도 거친 산맥을 보아라. 저 산맥, 저 산맥이 바로 우 리들의 방벽이자 터전이다. 거인족이 누웠다는 저 거대한 산맥을 우리들이 일구고 가꾸어 만든 것이 우리들의 그랑프라임. 자랑스레 가슴을 펴고 생 각해라. 이 땅위에 사는 자라면 어떤 자든 가슴을 열고 맞이하는 것이다." 왕관을 쓴 사내는 커다란 눈에 웃음을 머금고 노래하듯 말했다. 고대인이 란, 뭐랄까 꽤나 음율이 담긴 어투로 말하는 것 같아서 노랫가락을 듣는 기분이 든다. 그래, 이봐, 너 말 잘하는 구나. 소년은 약간은 어색한 듯 어깨를 움츠렸지만 사내의 말에 순응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 소녀는 더 움츠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 었다. 남매로 보이는 이 두 소년소녀는 자신들이 애써 말한 소원이 사내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듯했다. "아이엘. 말해보아라. 너의 소원은 무엇이냐?" 사내는 소녀를 바라보며 자상하게 물었지만, 아마도 그것은 본인생각일 것 이다. 사내는 길게 난 흉터덕분으로 아무리 잘 봐줘도 자상하게는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가 그렇게 고개를 숙이며 묻자 소녀는 더더욱 겁에 질 린 듯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모, 몰라요." "허어, 말해봐. 아이엘, 이 기둥은 뭐든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아이엘이라는 소녀는 약간은 불안한 얼굴로 기둥들과 사내를 번갈아 보았 다. 그리고는 약간은 주저하며 입을 다물었는데 그 것이 꽤나 답답했는지 사내는 조금 다그쳤다. "저는......저는........." "말해." 옆에 있던 소년도 다그쳤다. 소녀는 갑자기 다그치는 소년을 향해 원망스 런 시선을 던지다가 자꾸만 다그치는 두 사람에게 밀려 기둥의 앞으로 다 가섰다. 소녀는 몇 번이고 망설이듯 입술을 달작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기....저기......" 소녀는 자신을 쏘아보듯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살짝 떨었다. 이 소녀는 아무래도 별로 말하고 싶은 소원은 없었던 듯 망 설임은 꽤나 심했다. 허기야, 할 말도 없는데 괴이쩍은 기둥 앞에서 미친 놈 마냥 소원을 비는 것도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겠지. 그러나 저러나, 이 작자들 꽤나 낯익은데 혹시나 이거 고왕국의 시조왕쯤 되는 놈들 아냐? 저 제스엔이라는 이름은 분명 엘프 호레아이엘과 맺어져서 고왕국을 세웠다는 그렇고 그런 놈의 이름 같은데. 저 빈약하기 짝이 없는 놈이 아름다운 고 대엘프를 꼬셨단 말인가? 거참, 세상 말세로다. "아버지, 저는........." 소녀는 말하려다 말고 뒤에 선 왕관을 쓴 사내를 향해 울상을 지어 보였 다. 그러나 사내는 주저하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그냥 말해보라는 그런 몸 짓 같다. "저는........" 아이엘이란 계집아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다시 기둥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더듬으며 말했다. "저는, 고양이를 가지고 싶어요.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영리한 고양이를." 그리고 주변은 다시 흰색으로 물들었다. 나는 한동안 텅 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당한 결말이다. 그래, 소원을 이루어주려고 애를 쓴 신의 조각들이 바로 이 보석들이라 치자고. 그런데 이 놈들이 결국 고양이 몰골을 하고 있는 게 조만한 계집애가 고양이를 바랬기때문이란 말이야? "이게 다냐?" 내가 누운 채로 보석들을 돌아보자 그녀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꼬맹이 이후 누구든 너희들에게 소원을 빈 녀석들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런데 왜 너희들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이지?" "다른 모습을 원한 자는 없었습니다. 단지 소원을 빈 자들만이 있었을 뿐 이죠." "그런데 아직 내 질문은 끝나지 않았어. 너희 같은 대단한 힘을 가진 존 재들이 왜 신전에서 어슬렁거리며 병신계집애의 노리개가 되어 있었던 거 야?" ".........." 보석들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 같은 힘이라면 저 놈들, 그러니까 룬드바르의 군대정도는 물리칠 수도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잖아? 그런데 아무도 너희들에게 바라지도 않았 단 말인가?" "수 백 년 간, 우리들에게 소원을 빈 자들은 없었습니다." 보석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그렇다면......너희들의 힘을 아는 자들이 아무도 없었단 말이야? 설마하 니? 뭔가의 기록에도 남아 있었을 텐데?"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날 이후, 그랑프라임의 왕은 저희들을 기르며 아무에게도 우리들이 누구인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결국은 왕실의 놈들이 너희들을 독점했다는 말이겠군." 나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이 정도의 대단한 힘을 가진 녀석들을 보통 인간들에게 풀어 놓을 리가 없지. 고왕국의 왕들은 이 고양이들을 왕실에서 키우면서 이 놈 들이 대체 어떤 놈들인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이다. 그저, 고양이라 고, 성스러운 고양이라고만 말했을 게다. 그리고 결국 이 고양이들은 고양 이로 키워졌겠지. "하지만, 그 긴 긴 세월동안 너희들에게 소원을 빈 자들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일단 너희들은 신의 귀라고, 신전에서 귀히 여겨진 것들이잖아? 그러 니까 뭘 몰라도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따위의 소원 정도는 빌 었을 텐데." 보석들은 일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 저렇게 움직이는 몰골을 보자니 어째 정 떨어지네. 과연 살아 있는 것들은 아니라니까.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들은 저희들에게 빌지 않았습니다." "그래, 너희들에게 안 빌고 텅 빈 신상들에게 빌었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대굴 굴러서 아직도 멍하니 누워 있는 에닌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행복한 꿈인 모양이었다. 이런 행복한 꿈에서 깨우기란 꽤나 마음 아프지 만 그래도 꿈은 꿈. 현실은 현실이다. 두 발이 있는 이상 현실에 발을 붙이 고 자박자박 걸어가야 하는 법. 산 것은 산 것답게 움직이자고. "에닌." "......" "에닌!" 에닌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보석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언제 깨냐? 이 애는?" "그녀가 바라는 것은 망각입니다." 보석이 대답했다. "망각?" "네, 그녀는 망각을 원했습니다. 행복했던 시절의 어린 날을 기원했습니 다. 그녀는 그 꿈을 꾸며 평안을 얻었습니다." 나는 미소짓고 있는 에닌의 얼굴을 보았다. 그렇군. 과연 아직도 상처란 아물지 않은 것이다. 아니지, 그런 식으로 가 볍게 아물 상처였다면 그건 상처라고 할 수도 없을 거야. 그동안은 오히려 이 애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괜찮겠거니 하고 방심했었어. 누구든 무력으 로 짓밟히는 것은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게다가 그것도 몇 년간 이나 마음도 가는 어린 아이가 당한 것 아니던가. 느물느물한 다 큰 놈이 당한 것과 어디 같은가? "이 공간은 내 것인데 왜 에닌이 이러고 있는 거야?" "당신은 평안을 원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공간에 들어선 그녀 역시 평안을 구할 수 있게 된 것이죠." "평안이라는 게 그저 누워 잠만 자며 꿈만 꾸는 것이라면 내가 바라는 게 아니야." 나는 에닌을 안아 올리며 천천히 일어섰다. "내가 바라는 평안이라는 것은, 피가 들끓을 정도로 뛰고 움직이며 가슴 찢어지는 일들과 일들 사이에 얻는 휴식, 내가 한 일과 내가 당한 일들 사 이에서 얻는 시간을 말하는 거야. 나는 허망한 꿈을 바라지 않아. 나는 휴 식을 바라는 거라구." 순간, 공간은 깨졌다. 3 나는 눈이 퉁퉁 부운 에닌과 함께 걸었다. 내 주머니 안에서 이리 저리 흔들리고 있을 그 놈의 보석들을 내버려 두고 나는 두 발로 땅 위를 걸었 다. 콧속으로 스며드는 냄새가 향기롭지만은 않아도 이게 바로 흙냄새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발바닥과 살갗으로 스쳐지나가는 풀잎이 따가워도 그게 바로 숲이니 어쩔 수 없는 거다. 눈이 부시고 몸 여기저기가 쑤셔도 그게 내 몸뚱이니 어쩔 수 없는 거야. 아, 그래도 내 몸뚱이는 훌륭해. 정 말로 멋지지 않은가. 나는 내 몸뚱이가 정말 좋아. 이 몸뚱이를 만들기 위 해 수백년간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후. 역시 이 몸은 멋져. 어떤 미친놈이 와서 바꾸자고 한다면 그 놈 모가지를 댕강 잘라줄 테다. "쿠베린님........." 뒤에서 에닌이 불안한 듯 불렀다. "왜?"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 "그런데 왜 자꾸 어깨를 으슥거리세요?" "응, 어깨가 잘 있나 확인했다." 내 말에 에닌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퉁퉁 부운 눈과 충혈된 눈은 불쌍 하지만 아름답지는 않다. 가끔 눈물 흘리는 여인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나 는 그 말이 얼마나 왜곡된 이야기인지 잘 알고 있다. 눈물이 나오면 콧물 도 나오고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고 붓는데 대체 어디가 아름답다는 거야? 그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지저분한 거야. 물론, 지저분해도 뭐랄까 불쌍해 보이니까 그저 귀엽게 봐주는 거지 그 모습 자체는 결코 아름다운 게 아니 라고. 눈을 비비던 에닌은 약간 불안한 듯 날 보며 말했다. "어떤 일이 있었나요?" "몰라도 돼." "행복한 꿈을 꾸었어요. 어릴 때의 꿈이요." 에닌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입을 열어 말했다. 약간은 어색한 미소를 짓는 그 얼굴이 꽤나 귀여워서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 아빠가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냐?" "네....." 방긋 웃는 에닌을 보고 나는 마주 웃어 주었다. "귀여운 꼬마였을 거야." "저는 별로 예쁜 편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커지면 미인이 될 거라고 다들 말씀해 주셨죠." "응, 그래, 그건 나도 장담하지. 넌 미녀가 될 거야. 이미 요염한 맛이 나 오기 시작했다고." 나는 엄숙하게 말해주었다. 그러자 에닌은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인가요?" "물론이지, 나의 안목은 모든 종족들이 다 인정하는 바야. 내가 미녀다 라 고 말하면 그건 미녀지. 물론, 내가 아니라고 하면 그건 아닌 거야." 내 말에 에닌은 기쁜 듯이 웃었다. 이봐, 에닌, 넌 아직 어려. 나의 상대가 되려면 20년쯤 더 갈고 닦으렴. 나는 아직은 아비의 마음가짐으로 에닌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래, 아직 은 아비의 마음이지. 그렇고 말고.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요?" "맨 처음 이야기가 시작된 곳." "그게 어딘데요?" "고왕국의 수도를 다 내려다 보는 가장 높은 산." "거긴 왜요?" "그 곳에서 일이 시작되었거든." ------------------------------------------------------------------------------ 제 목:[쿠베린] 제 22화 의 지 3 관련자료:없음 [35814]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1-04-12 19:20 조회:3168 KUBERIN...... 빛을 향해 걷는다 그 빛에 눈이 타고 몸이 타오를 지라도 걷지 않으면 안될 길이 있다 엘루리아 쿰, 고왕국 그랑프라임의 수도. 분지로 둘러싸인 거목들의 도시, 그리고 나지막한 야산들로 둘러싸인 태고의 도시. 도시는 숲과 야산으로 이루어져 대로는 몇 개 되지 않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이 곳에 와서는 위쪽을 올려다 본 적은 거의 없었던 듯한데. 허 어, 그것은 결국 무척 바빴다는 이야기로군. 아니, 어쩌면 어허 아하 따위 더 이상 지껄일 새는 없을 듯 싶기도 하다. 고개를 들어 북쪽을 보면, 푸른 하늘 아래 엉거주춤 엎어져 있는 엉덩이 같이 생긴 야산이 하나 보인다. 그 야산은 정말 엉덩이처럼 두리둥실 두 개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는데 푸른 수풀과 적당히 엉긴 누런 화강암과 어 우러져 이 암흑산맥의 산등성이치고는 꽤나 헐벗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 그렇다. 저것은 과연 엉덩이로군, 헐벗은 엉덩이. 나는 에닌의 손을 잡은 채 씩씩하게 걸었다. 조금 속도를 빨리 할까 싶어 에닌을 덥석 안아 들어 올리고는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에닌은 얌전히 내 목에 팔을 감고 조용히 가쁜 숨을 억누르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가 그녀가 그동안에 느꼈던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말해준다. 두근, 두근, 그래요, 나 꽤 괴로웠다구요, 아니야, 나 괜찮아욧. 아뇨, 나 괜찮지 않아요. 나는 괴롭고 증오스럽고 한스러워요. 두근두근, 아니요, 그 런 거 다 잊을 수 있어요. 하지만 다른 이들은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기억 할 거에요. 이런 일을 당하고 어떻게 살아 나갈 수 있을까요? 아무리 씻어 도 더러운 기분은 사라지지 않아요. 두근두근, 그 옛날 아빠 엄마와 같이 지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런 일 따위 없었던 그 옛날로. 인 간의 남자들에게 짓밟히기 이전의 옛날로. 두근두근.......두근두근....... 어린아이야. 세상에는 괴로운 일이 많단다 따위를 지껄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남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물건이다. 내 손가락 에 박힌 가시가 남의 허벅지에 박힌 칼날보다도 아픈 법. 그러니까 잘난 척 구는 놈들따위는 시궁창에 던져버려라. 나는 할 말이 없다. 세상에는 불쌍한 놈은 없다. 불쌍히 여기는 놈들만 있 을 뿐. 에닌, 너는 불쌍하지 않아. 너는 너 자신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데 혼자 그러고 있을 뿐이야. 나는 동정하지 않아. 동정하는 놈들이야말로 자부심에 가득 차 남들을 아래로 보는 것들이지. 그러니까 네 심장 소리 좀 어떻게 해봐라. 나는 워낙에 이해심이 넘쳐서 네가 두근거리는 소리만으로도 너무나 잘 느낀단 말이다. 오오, 여신이시 여, 당신은 왜 나를 이처럼 이해심 많은 분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왜 이 리도 현명하게 만들어 놓으셨단 말입니까? 그리고 왜 이처럼 명민한 분으 로 만들어 놓으셨단 말입니까? "꺄악!" 놀란 에닌이 비명을 질렀다. 물론, 그녀는 내 생각을 알고 비명을 지른 건 아니다. 내 발밑으로 화살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그놈의 화살을 여유 작작 피하 며 다른 곳으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오오, 여신이여 당신은 왜 내 육체마 저 이토록 완벽하게 만드셨단 말입니까? 정말 당신은 뭘 좀 아시는 분이로 군요. 살펴 볼 것도 없이 그 화살이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아는 나는 또 한 번 여유 작작 한 바퀴 맴을 돌아 보이며 나무 둥치에 발톱을 박고 잽싸게 나 를 향해 달려, 아니 날아오는 화살 서 너 개를 후려쳐 주었다. 화살이 풀기 없이 나동그라지자 비명소리 비슷한 소리와 함께 칼과 창을 앞세운 놈들이 일제히 튀어 나왔다.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녀석들은 비슷 한 복장을 하고 있는 품이 아무리 보아도 별로 동정을 받을 만한 모습들이 아니었다. 룬드바르의 병사들다운 그 놈의 색색가지 깃털을 꽂은 놈들은 나를 보자 살기와 공포에 찬 눈길로 쏘아보며 외쳤다. "그 때의 그 괴물이다! 죽여라!" 그때의 그 괴물이라니, 정말로 한심한 발언이로다. 나는 한 바퀴 더 돌아 녀석들을 밟아 줄까 하다가 에닌을 안고 피를 보는 짓은 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고 말고. 여인을 품에 안고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정말로 예의 없는 일이지. 나는 나를 향해 달려드는 녀석들을 향해 상큼한 미소를 던지며 내가 발톱 을 박고 있던 그놈의 거목 쿠야마...뭐더라, 어쨌든 간에 이놈의 나무둥치를 손톱으로 후려갈겼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아름드리 거목이 갸우뚱하자, 나를 향해 달려들던 녀석들의 얼굴이 시퍼래졌다. "으악!" "피, 피해라!" 거목이 갸우뚱하며 자리를 못 잡는 듯하길래 나는 상냥하게 쓰러져 가는 나무에 손톱을 박아 방향을 지정해 주었다. 그러자 고맙다는 인사와 더불 어 거목은 먼지를 휘날리며 천천히 쓰러졌다. "캬아아악!" "우악!" 비명소리와 함께 녀석들이 사라졌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 거목이 무너지며 잔가지들도 같이 나자빠졌는지라 원하든 원치 않 던 간에 병사들은 납작하게 깔렸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는 소 리를 들으며 나는 살아남은 병사들의 행운에 감탄했다. 대지의 여신의 사 랑을 담뿍 느끼며 땅 바닥에 얼굴을 박고 기분 좋게 누워 있어라. 너희들 은 오늘 여신의 자비로 행운을 잡은 거라구. 이 나에게 감히 칼날을 들이 대고도 살아 남았으니 말이야. 나는 미소를 지으며 에닌을 안은 팔에 힘주 어 달리기 시작했다. "오호 오호, 나는 쿠베린, 나는 잘난 분, 너무나 잘나서 어디선가 울고 있 는 수놈들이 한 보따리....." 자아, 울지들 마라, 언젠가는 나 같이 멋진 분으로 태어날 수 있는 영광이 주어 질 테니까. "쿠베린님." 에닌이 품안에서 속삭였다. 나는 통통 뛰어 오르는 가죽공처럼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도약하며 달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휘날리는 나의 멋진 검은 머 리칼과 힘 좀 쓰는 이 잘 빠진 다리를 생각하면 이것도 나쁘진 않아. "..........설마하니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니죠?" "뭐가?" "저어, 그 노래요." 에닌이 약간은 수줍은 듯 어색하게 말했다. "뭐가?" "설마 정말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서........" "훗, 에닌, 너는 아직도 날 모르냐? 나는 어디까지나 진실만을 말하는 분 이란 사실을 잊으면 곤란해." ".........." "진실, 진실! 그 진실이라는 것이 눈에 보인다면 그것이 바로 나! 이 쿠베 린님이시다. 나로 말하면 미와 진실과 지성과 지혜의 결합체! 거기에 완벽 한 육체와 완벽한 미모로 온 여신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런 분 이란 말이다!" ".............정말요?" "물론이지!" 나는 당당하게 선언하며 계속해서 내달렸다. "그런 걸 의문시하다니, 에닌, 역시 넌 어리구나." 나는 시익 웃어주었다. 에닌은 그 말에 갑자기 얼굴을 확 붉히더니 항의했 다. "전 어리지 않아요." "글쎄다. 완벽한 성인여성들은 내 말에 의문을 가지지 않던데?" ".....그, 그건...." 에닌은 다소 당황한 미소를 지으며 전후좌우를 훑어보았다. 나는 시익 한 층 더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완벽한 여성만이 완벽한 남성을 알아보는 법이다. 훗, 에닌, 너는 아직 어리다니까." "난 어린애가 아니라니까욧!" 갑자기 에닌은 큰 소리로 말하다가 흠칫 놀라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렇게 그녀가 큰 소리로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자기 목소리에 자 기 스스로 놀란 듯 얼굴을 붉히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쿠베린님은, 짖궂으세요." "훗, 나는 상냥해. 나는 상냥하고 친절하며 나 자신이 바로 친절의 화신이 지." "그렇다면 쿠베린님은 진실하면서도 상냥하고, 강하시면서도 아름다운 분 이군요." "음, 이제야 이해하는 군." "엉터리야!" 깔깔대고 갑자기 에닌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아가씨가 소리내어 웃은 것은 대체 얼마만의 일인가. 나는 흐뭇한 얼굴 로 마주 웃으며 그 이마에 키스해주었다. 에닌이 얼굴을 붉히자 나는 더 큰 소리로 웃어주었다. "이제 너도 어른이 되어가는 모양이군, 나의 이 매력을 눈치채는 걸 보면 말이야." "엉터리!" 에닌은 더 커다란 소리로 웃었다. 오랜만에 듣는 엘프꼬맹이의 웃음소리는 푸른 하늘에 너무나 어울리는 깨 끗한 울림을 가지고 숲속에 울려 퍼졌다. 그래, 숲의 여신이여, 당신들의 자녀들이 내는 소리를 듣고 기뻐하시라. 당신의 딸이 오늘 웃음을 겨우 되 찾았으니 품을 열어 보듬어 주시오. 이 당신의 자녀는 꽤나 아픔을 많이 알아 버렸단 말이야. 검은 빛을 띤 녹색의 숲 속에서 나는 엘프의 웃음과 함께 달렸다. 저 구 질구질하게 얽히고 설킨 인간들의 욕망 위에 세워진 인간의 신전으로. 신전으로 걷는 동안 이렇고 저런 것들이 막아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새삼 길게 할 말은 없다. 워낙 내 발 끝에 채이는 게 많아서 나는 그저 이리 차 고 저리 차며 상냥한 웃음을 건네주었다고 밖에 더할까. 그렇다. 세상에는 내 발에 채이고 싶어 눈물을 흘리며 온 몸을 던져오는 좀 모자란 것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나를 사모해 왔다면 나도 사양하지 않겠다. "저놈, 저자야!" "저 괴물을 막앗!" 비명소리와 함께 우르르 와르르 쓰러지는 녀석들 사이로 뛰고 달리며 나 는 크게 웃어주었다. 가련하기도 하지, 기특하기도 하지. 그토록 평소에 나 를 사모해 왔단 말이더냐. 너희들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주지. 나는 녀석들이 바라는 대로 차 주기도 하고 던져 주기도 하면서 인간의 병사들이 만들어낸 벽을 뚫고 산을 올랐다. 뭐, 산이라고 부르기도 무안한 조그마한 산을 오르며 나는 에닌을 향해 말했다. "정말 이 엉덩이 같이 생긴 산에 어지간히도 많이 모여 있구만." "네?" "저길 보라고, 넘쳐나는 것들을." 내가 보석들의 참견으로 보았던 광경, 쇠락하고 무너져 내린 대리석의 주 춧돌만 남은 신전터에 꾸역꾸역 중무장을 한 병사들이 나타났다. 짙푸른 녹색의 수풀 위에 버티고 선 녀석들은 돌멩이보다도 많아 그놈의 야트막한 야산을 전부 덮고 있었다. 이 정도 숫자에, 이정도 무장을 한 자신들이 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 그 의기양양한 면상에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봐라, 룬드바르의 어린 아이야, 아니, 인간의 황제여. 너는 병 사들을 수 천 수만 모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들이 살아 있는 것인 이상 반 드시 물리 칠 수 있어. 모조리 죽이지 않아도 병사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거든. 너, 두려움이란 게 뭔지 좀 알아야 하지 않겠 냐? "어, 어쩌죠?" 에닌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아예 땅바닥이 보이지도 않 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병사들과 녀석들이 번뜩이고 있는 그 창날들을 바라보며 입술을 씹고 있었다. "글쎄다." 나는 느긋하게 대꾸하면서 주변을 주욱 훑어보았다. 주변은 오히려 조용했다. 녀석들은 나 하나를 둘러싼 채로 천천히 맴을 돌 고 있었다. 아마도 나를 완전히 포위할 심산이었는지 크게 소리치거나 동 요하는 놈들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둘러싼 병사들의 얼굴에는 두 려움과 호기심과 증오에 가까운 기묘한 살의가 번뜩여 결코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물론, 이 정도의 살의에 몸을 사리고 <어마나 무서워요> 따 위를 지껄일 나는 결코 아니지만 어쩐지 예감이 썩 좋지는 않은 걸. 한 눈에 보아도 적어도 수 백은 넘을 듯한 병사들은 슬금슬금 움직이며 나를 완전히 에워싸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창날을 내 쪽으로 돌려 내밀며 위협하듯 칙칙거렸는데 그 모양새가 마치 개 몰 듯 하는 것 같아 영 우습 다. 병사들이 내게 내민 시퍼렇게 빛나는 창날은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번쩍 은빛을 내며 화려한 장식을 이루었다. 나를 둘러싼 은빛의 꽃다발을 바라 보며 나는 그 창날 사이로 또 다른 움직임이 이는 것을 그냥 지켜보았다. 흔들리는 창날 사이로 한 무리의 녀석들이 병사들 사이로 끼어 들고 있었 다. 그 녀석들은 다른 병사들과 달리 제법 거센 기운을 띤 채 내 쪽으로 다가와 나를 포위했다. 냄새가 다른 녀석들이 약 삼십. 이건 어쩐지 익숙한 냄새로다. 노란 눈. 노란 머리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인족 치고는 거친 얼굴 생김새. 덩치는 오히려 사인족보다도 크지만 사인족보다도 약한 것들. 나는 모처럼 녀석들을 찬찬히 관찰했다. 놈들은 사인족과 정말로 흡사한 냄새를 가지고 있었다. 그 냄새는 누린내와 흡사한 발정기의 강아지 같은 냄새였지만 사인족 특유의 매캐한 유황냄새 같은 것은 없었다. 사인족의 체취는 약간 유황냄새처럼 매캐하다. 녀석들은 공격할 때 언제나 약간씩 고개를 앞으로 숙여서 돌진하는 버릇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일 반적인 이야기지 실제로 사인족 놈들이 정말 돌진하듯이 덤벼드는 짓거리 는 결코 하지 않는다. 아무리 모자라도 녀석들도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지 긋지긋한 놈들 아니던가. 그건 그렇고. 참으로 못 봐주겠군. 그 면상들이라니. 사인족과 닮은 몰골이되 전혀 사인족 같지 않은 것들. 변신도 하지 않았는 데 비죽이 튀어나온 둔탁한 손톱이나, 입술 사이로 드러난 송곳니, 투실투 실한 손 등 위의 누런 털. 사인족이 어떻게든 원했던 그들의 후손이 저런 것이었던가. 아니지, 이것은 인간들이 사인족을 만들려고 했다는 증거품. 갑주까지 걸친 가짜 사인족 창병들이라. 어디엔가의 이야기책에서라도 튀 어나올 모양새들이군. 두 겹 세 겹에 걸친 녀석들의 방어진은 어쩐지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엄청나게 중요할 것 같은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그렇고 말고, 이곳에 뭔가 엄청난 일이 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사인족인가요?" 에닌이 내 팔뚝을 잡으며 속삭였다. "아니." 쪼가리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쪼가리도 아닌 가짜라고나 해둘까.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그놈의 존재의 증명, 존재의 혼돈, 존재의 의미 등등 존재와 관련된 그 고상한 척 할 수 있는 모든 단어들과 연관해서 생 각해보건대, 진짜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것들은 다름 아닌 저 놈들 아냐? 저 놈들이야 말로 헷갈리는 거잖아? 사인족으로 이름을 붙였지만 실제로는 사인족이 아니고, 사인족이 자기 자식들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아닌 것들. 인간이 만들어 내서 사인족 에게 건넨 것들. 저거야말로 알 수 없는 것들이지. 뭐, 녀석들은 존재의 증 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만. 무식하게도 녀석들은 나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는 위협하듯 입가 를 바르르 떨며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그 괴이한 몰골에 나는 오히려 웃음 이 나왔다. 이빨이 좀 나오고 침이 뚝뚝 떨어지는 몰골은 언제 봐도 멍청 하기 짝이 없어. 그런 표정으로 설마하니 날 위협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 는 건 아니겠지? 내가 녀석들의 정신상태와 분수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잇는 동안 갑자기 병사들과 병사들의 사이, 그리고 가짜 사인족 사이가 떠들썩해지기 시작했 다. 뭘까나 하고 살피기도 전에 곳곳에서 악악 윽윽 소리가 터져 나오며 병사들이 사방으로 날리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흩날린다. 팔 다리가 흩날 리는 것도 있고 몸뚱이가 흩날리는 것도 있고, 병장기가 흩날리는 것도 있 다. 중요한 것은 퍽퍽 팍팍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병사들이 나뒹굴고 있다 는 것이었다. 나를 에워싼 녀석들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어리기 시작했 다. 녀석들은 뒤쪽에서 들려오는 그 괴이쩍은 소리를 확인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듯했지만 나라고 하는 분을 앞에 두고 감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는지 그저 창을 가늘게 떨며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나야 뭐 아쉬울 것도 없기에 고개를 쭈욱 뻗어 사방을 훑어볼 수 있었다. 어허 참, 정말로 대단하구만. 저런 리드미컬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 는 녀석들이라니. 어허, 어허, 이러다 춤이라도 추겠다. 퍽퍽 푹푹 소리와 악악 윽윽 소리는 적당한 운율까지 맞춰가며 보는 사람도 경쾌하게 터져 나왔다. "으어억!" "마, 막아!" "끄악!" 비명소리는 맨 뒤쪽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곧 그 범위는 바짝 말라비틀어 진 지푸라기에 불 옮겨 붙듯이 사방으로 퍼졌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마치 수확기의 농부들이 밀을 베며 돌진하는 형태라고나 할까? 맹렬하게 앞으로 돌진하며 낫을 휘두르는 농부들과 그들의 손길에 따라 흩어져 나가는 지푸 라기들. 말 그대로의 몰골이었다. 어디선가에서 어긋났던 다크시온과 듀나시들이 말 그대로 병사들을 날리 면서 내쪽으로 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나를 보자 너무나 반가웠 던지 시뻘개진 눈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얼마나 반가우면 두 눈이 시뻘개 져서 살기를 풀풀 날리고 있을까나. 얼마나 반가웠으면 저렇게 입에 거품 까지 물고 있을까? "오지 마십시오!" "오지마!" 비명같은 소리와 함께 내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 제 목:[쿠베린] 제 22화 의 지 4 관련자료:없음 [35815]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1-04-12 19:22 조회:3862 KUBERIN...... 빛을 향해 걷는다 그 빛에 눈이 타고 몸이 타오를 지라도 걷지 않으면 안될 길이 있다 4 이것은 원초적인 어떤 것. 그 옛날 강하고도 강한 것들이 지상 위를 지배할 때 내 뿜던 기운. 공포. 뭐라 말할 수 없는 탈력감이 등덜미를 짓눌렀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에닌이 뭐라고 새된 비명소리를 내질렀지만 잘 들리지 않 았다. 에닌을 안고 있던 팔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이런 것은 처음이다. 진 땀이 살갗을 비집고 흘렀다. 눈 앞은 아득하고 귓속으로 윙윙대는 이명 때 문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왕!"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뭐라고 계속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도 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일까? 누가 뭐라고 하는 거지? 진땀이 배어나오는 손바닥을 땅에 짚고 어떻게든 몸을 추스르기 위 해 나는 결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참을수 없는 소름끼치는 감각, 난생 처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공포감. 이게 대체 뭐지? 어떻게 이런 감각 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냐? 나는 그 목소리를 알아듣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저어 보았다. 머리를 흔들 었지만 여전히 웅웅거리는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지독한 이명 때문에, 눈앞이 아른거리는 현기증 때문에 구토감이 치밀었다. "왕!" "쿠베린!" 이름. 쿠베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버텼다. 나의 이름은 쿠베린. 나는 묘인족의 왕이 다. 내가 이 이름을 얻기 위해 나는 수백의 도전자를 죽였고 수천의 일족 을 죽여왔다. 내가 나이기 위해 잃은 모든 것들에 걸고서, 나는 이 자리에 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면을 보고, 그게 어떤 괴물이든 이겨야 한다. 나는 묘인족의 왕이다. 절 대로 묘인족 앞에서 왕이 져서는 안된다. 나는 이겨야 한다. 아니, 나는 이 긴다. 이를 악물고 덜덜 떨리는 무릎을 당겨 세웠다. 말을 듣지 않는 다리는 완 전히 풀려 있었지만 두 주먹을 땅에 후려갈기자 그 아픔 덕인지 그럭저럭 말을 들었다. 정면을 보라. 앞을 봐라. 나는 지지 않는다. 아니, 나는 이긴 다. "흐." 입술을 비집고 웃는다. 웃지 않으면 안되고 말고. 무릎을 세우고 천천히 허리를 폈다. 비틀비틀 몸이 제멋대로 비틀렸지만 그럭저럭 몸을 세울 수는 있었다. 에닌을 일으켜 안는 것은 무리였지만 최 소한 몸을 가눌 수는 있었다. 몇 번이고 두 눈을 부릅뜨고 앞을 보았다. 온통 뿌옇게 흐려진 광경들뿐 이었지만 어쨌거나 앞은 보인다. 살의라고 할 것이 특별히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의외였다.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서 나는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심호흡. 좋아. 일단 심장 두 개는 정상이 되었구만. 이제 정상으로 돌려야 할 것은 바로 이 몸뚱아리다. 웃자. 웃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이 끔찍한 압박감을 억누르기 위해 나 는 치밀어 오르는 것을 도로 삼켰다. 비실거리며 토하는 몰골을 적에게 보 일 수는 없지. 무겁고 거대한 손이 내 등줄기를 짓누르는 것 같은 감각을 이기기 위해 나는 조금은 삐딱하게 섰다. "후우." 몇 번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집중하자 정면이 보였다. 그래. 앞에는 인간의 병사들이 창날을 앞 세우고 서 있군. 그리고 그 옆에는......... 나의 일족들이 서 있었다. 다크시온이 시퍼렇게 된 얼굴로 내쪽으로 달려 오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보인다. 그의 앞을 막아선 가짜 사인족놈들 이 말 그대로 실 끊어진 인형처럼 흩날렸다. 그렇지만 그는 내 앞으로 다 가서진 못했다. 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송곳니를 드러낸 채 울부짖고 있었다. 그가 외치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아련하고 희미하 게 들려왔다. "왕! 쿠베린님!" 이봐, 다크. 그렇게 악악거리지 말아. 아주 비참한 상태는 아니라구. 이거, 아무래도 마법진종류 겠지? 전에 당했었던 흡력진인가 뭔가 하는 그 런 종류로 어쩌면 봉인진인지도 모르지. 나는 비틀거리면서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 나갔다. 발바닥을 잡아당기는 뭔가가 땅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내 발이 이렇 게 무거운 것은 내 생전 처음이었다. 듀나시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보인 다. 그도 뭐라 망연하게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자세한 것은 들리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악을 지르고 있는 다크에 비해 꽤 침착하게 보였지만 정말 그 런 것도 아닌 듯 뒤에서 몇 몇 놈들이 그를 향해 검을 휘둘러대는 데도 피 하지도 않고 있었다. 피하지 않고 뭘 하는 거야 라고 나는 입을 열어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체 입안까지도 그놈의 마법진의 힘이 미치는 것인지 혀가 움직이지 않는 다. 어라? 그러고 보니 눈앞이 잘 안보이는 것도 결국은 눈꺼풀이 잘 떠지 지 않기 때문이었나? 이를 악물어 보려 해도 윗니와 아랫니가 잘 붙지 않 는다. 이거야 말로 모자란 천치 몰골 아닌가? 침이라도 입가에서 줄줄 흘 러내리고 있는 거 아냐? 나 같이 잘난 분이 그런 몰골을 보여서야 어디 쓰 겠나? 세상의 모든 여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겠느냐 그 말이야. 나는 억지로 손을 움직여 턱을 잡아 보았다. 다행히 축축하지 않은 걸 보 니 침을 흘리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손이 움직이고 발이 움직이니까 이제 두 눈을 다시 부릅뜨고, 그 다음에는 입을 벌려 보자. 내가 입을 벌리자 새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귀로도 내 소리가 잘 안 들리는데 이거 다른 놈들은 당연히 못 듣겠지. "멍청아." 그렇게 애써 말해보았건만 입안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는 아우아우 뭐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뿐이었다.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고 나는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잡아 당겨 보았다. 아, 다행이다. 머리칼이 다 빠진 줄 알았네. 하 도 머리가 빠개지듯 아파서 말이야. 다크시온이 악악거리면서 내 앞 뒤로 왔다갔다 하느라 바쁜 동안 나는 녀 석이 내 바로 앞, 3 메테르 앞에서 빙빙 맴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렇다면 진의 크기는 사방 3메테르 정도인가? 생각 외로 작은 걸? 아니지, 작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꽤 힘이 강력하다는 의미도 되고 또 하나로 말하 자면 이 나를 이 사방 3메테르 밖에는 안 되는 이 진 안에 몰아 넣었다는 의미니까 내가 꽤 멍청한 짓을 했다는 이야기도 되는군. 역시 병사들이 나타나자 마자 녀석들을 쓰러뜨리고 무조건 직진해야 하는 것을, 에닌을 안고 있는 때문에 살생을 줄이려고 머뭇거렸던 것이 이런 결 과를 초래한 것이다. 어쩌다가 내가 멍청하게 이런 마법진에 걸렸나.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사방을 훑어보고 있는 동안 갑자기 주변이 환해졌 다. 아니, 환해졌다기 보다는 내 앞에 가려져 있었던 희뿌연 막이 투명해졌 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누군가 박수를 짝짝 치면서 지껄였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숨을 내 쉬었다. 이런 허탈하고도 바보스러운 일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분홍주둥이였다. 희고 매끄러워 보이는 동방교국 산 최고급 비단을 걸친 녀석은 금발머리를 엘프처럼 흩날린 채 팔짱을 끼 고 있었다. 주변으로 모여 선 그 가짜 사인족 녀석들이 나를 향해 이를 드 러내고 있었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녀석들이 내 앞으로 다가서길 두려워한 다는 것을 금방 알수 있었다. 그렇다. 이 마법진, 평소의 마법진이 아닌 것 같다. "이 거 뭐하는 물건이냐?" 내가 어버버 하고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비집고 외치자 분홍주둥이는 눈을 크게 뜨며 박수를 열렬하게 치기 시작했다. "대단하십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저 유명한 고대의 용족의 드 래곤 피어를 이겨내시다니요!" ".......용족의 드래곤 피어?" 내가 눈을 크게 뜨려고 노력하면서 비뚤어진 입으로 되뇌이자 녀석은 느끼 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고대 용족 중 가장 강한 용들만이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힘 이지요. 신족마저도 억눌렀다는 힘입니다. 지금 쿠베린님이 들어가 서 계시 는 곳이 바로 드래곤 피어로 이루어진 마법진이지요. 그거 만드느라 저는 정말로 힘들었는데 쿠베린님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시네요." ".............그게 어떤 건데?" 나는 질질 끌리는 발을 억지로 끌며 앞으로 더 나섰다. 진의 실체를 만져 보고 싶은 기분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몸에서 힘 을 더 빠져나갔다. 고개를 들고 있는 것 자체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수 백, 수 천의 바윗덩어리가 내 머리 위에 쌓여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신화에 따르면 성년에 이른 용족 중 십분지 일 만이 이 힘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상대를 억압하고 누르는 힘.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당연히 가지는 본연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이죠. 더불어 말한다면 이 진은 보통 용족의 드래곤 피어보다 세 배 정도 강한 것입니다." 생긋 웃는 녀석의 면상을 갈기갈기 찢고 싶다는 일념으로 나는 앞으로 더 내딛을 수 있었다. 그래, 저 놈의 면상을 쪽쪽 찢어 갈기고 쿡쿡 찔러 박살 을 내보자구. 그럼 얼마나 시원하겠느냐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나는 몇 발자국이나 앞으로 나갔다. 옆에서 보는 놈들이야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비틀비틀 걷는 내 몰골이 꽤 나 우스웠겠지만 나는 정말로 힘들다. 힘들고 말고. 당장이라도 마베릭놈의 얼굴이 잡힐 듯했지만 손톱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제기랄, 위축되어 버린 근육은 손톱을 꺼내지 못했다. 나는 이빨을 악문 채 몇 발자국 더 앞으로 가 마베릭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오, 이러시면 곤란해요." 그 순간 보이지 않는 막에 닿은 듯 파직하는 소리와 함께 손이 튕겨 나왔 다. 말이 튕겨나온 것이지 하마터면 손을 잃을 뻔했다. 나는 몇 번이나 뒤 로 물러서서 도로 주저 앉고 말았다. 그 놈의 반탄력이 얼마나 센지 간신 히 서 있는 게 고작이었던 나는 몇 바퀴나 굴렀다. "잊으시면 곤란하지요. 쿠베린님. 저는 당신의 힘을 원하는 것이니까 결코 해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충분합니다." 마베릭녀석이 그렇게 지껄이고 있는 동안 악악 거리던 다크시온과 듀나시 가 마베릭을 향해 돌진해왔다. "이놈! 이 더러운 마법사놈!" 녀석들이 돌진해 오는 것을 보며 마베릭은 싸늘하게 웃었다. 제기랄, 저 녀석들도 마법진에 걸리는 거 아냐? 내가 그런 불안감으로 입 을 벌리는 순간, 마베릭의 손에서 눈부신 광채가 터져 나왔다. 마법이란 것. 눈을 감고 몇 번을 생각해도 마법이란 정말로 기이한 것. 태초에 엘프들과 용족이 정령을 부리면서 썼던 언령의 힘이 인간들 사이로 흘러내려 오며 꽤나 많이 변질되었다. 인간의 마법이라는 것은, 정령을 부려 그 힘을 극대 화시키는 고대의 마법에 비하여 더 한층 악랄하고 교묘하며 사악하다. 그 러고 보니, 요즘 들어 정령술을 쓰는 인간을 본 적이 없군. 아크 녀석정도 만이 정령마법을 동시에 시전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시커먼 킬트녀석도 사용할 수 있을지 몰라. 짧은 순간 다크시온과 듀나시의 전면에 있던 땅이 그대로 함몰되었다. 그 들은 땅이 주저 앉기 전에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러자 마베릭의 옆에 있던 가짜 사인족 놈들이 일제히 무언가를 집어 던졌다. 그것은 하늘을 새까맣 게 메울 정도로 거대한 그물이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펼칠 수 없을 정도 로 커다란 그물은 두 녀석의 몸을 완전히 덮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두 녀 석 모두 손톱을 꺼내들어 휘둘렀다. 하지만 그물은 단단했다. 녀석들의 손 톱은 그물과 마주치자 그것을 잘라내기는커녕 팅팅 소리를 내며 튕겨나갔 다. 그들의 얼굴에 비로소 당황스런 기색이 떠올랐다. 몇 번이나 손톱으로 그 그물을 후려갈기며 몸에 그물이 닿는 것을 피해보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그 물이 너무 컸다. 다크시온은 갑자기 몸을 틀더니 자신의 뒤에 있던 듀나시 의 몸을 걷어찼다. 퍼억 하고 듀나시의 놈은 뒤로 튕겨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다크시온의 몸 체로 시커먼 그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이를 갈면서 그물에 얽매인 채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하지만, 듀나시는 다크덕에 뒤로 물러서 그물에 갇 히진 않았다. 그는 경악에 찬 얼굴로 다크와 그물을 번갈아보더니 곧이어 사나운 눈초리로 마베릭을 쏘아보았다. "네 놈!" "묘인족도 희생이란 것을 하는 군." 마베릭놈은 느끼한 태도로 그렇게 지껄이더니 어깨를 으슥했다. 그물로 완전히 둘러쳐진 다크시온은 꿈틀거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여기를 빠져나가 뒤를 노려라!" 듀나시는 일그러진 얼굴로 나와 다크를 번갈아 보았다. 물론, 여기서 그가 마베릭에게 정면으로 달려든다면 별로 승산은 없을 지도 모른다. 분명히 마베릭녀석은 우리들을 잡기위해 꽤나 많은 고심을 한 것 같으니까 말이 다. 듀나시의 평소 성격을 생각해보건대 녀석이 날칠 것 같지는 않았다. 하 지만, 듀나시는 나의 이런 기대를 저버리고 악을 내지르며 내 앞으로 달려 들었다. "쿠베린!"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내 이름을 부르는 듀나시는, 아주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어릴 적 내 뒤를 쫓아다니던 어린 꼬맹이로, 나에게 다리를 잃 은 뒤 증오로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렸던 그 과거로. 그의 손톱이 나를 둘러 친 마법진을 후려갈겼다. 파직파직하는 불꽃이 튀 며 진을 둘러싼 공간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마치 살아 있는 투명한 생물체 처럼 내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 꿈틀거리는 진을 보고 악을 쓰는 듀나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바로 뒤에서 마베릭이 그를 향해 그물을 던지는 것이 보였다. "피해! 바보야!" 내가 고함을 질렀지만 듀나시는 듣지 않았다. 평소의 그 냉정함이 거짓인 양 녀석은 발광하듯이 악을 써대면서 나에게 달려들기 위해 몸을 던져 마 법진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쿠베린! 쿠베린!" 그렇구나. 이 놈도 결국은 묘인족. 우리 일족은 눈에 피가 오르면 뵈는 게 없지. 나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듀나시의 몸을 둘러싼 그물은 금방 그의 몸을 조여들었다. 듀나시의 얼굴 에 순간적으로 공포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나는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파 직거리는 진의 반탄력이 내 팔뚝을 후려갈겼다. 우드득 소리를 내며 팔뚝 의 뼈가 부러졌다. 기이하게 꺾여진 팔꿈치를 보면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듀나시!" 듀나시의 몸이 변신을 시도했다. 그는 단숨에 삼단계로 변신하며 몸부림쳤 지만 그물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몸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그의 몸을 조여들었다. 대체 저 그물이 무엇으로 만들어졌기에. "이제 원하는 대로 된 거 같군요. 가장 강한 묘인족들을 이렇게나 사로잡 았으니 말입니다." 마베릭이 내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내가 부러진 팔을 하고 있는 것을 보자 얼굴을 찌푸렸다. "팔이 부러지신 겁니까? 정말 성질도 대단하십니다." "..........." 나는 말하는 대신 내 앞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듀나시를 보고 있었다. 다크 시온은 그물로 둘둘 감긴 채 가짜 사인족들이 들쳐메고 있었다. 몇 몇이 다크시온의 발길질에 나동그라지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녀석들은 다크시온 을 그물로 둘둘 싼 채로 옮기고 있었다. "네 목소리는 잘 들리는군." 내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마베릭은 내 팔쪽을 들여다 보다 말고 고개를 들 어 답했다. "아? 그야 당연하지요. 그 진은 제 꺼니까요." "사라진 용족의 힘을 어떻게 재현한 거야?" "그건 비밀입니다." 녀석은 윙크까지 해대며 느끼하게 웃었다. 그 미끈거리는 면상을 한 대 후 려 패고 싶었지만 두 팔 다 부러뜨릴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럼, 당신이 찾아오신 이 고대신의 신전에 뭐가 있는 지 보실까요?" 녀석은 자랑스레 말하며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 순간, 다시 커다란 하얀 빛이 작열했다. "환영합니다. 암흑과 파멸의 대신(大神) 오 테라쿠마 세카나파스의 신전에 오신 것을!" ------------------------------------------------------------------------------ 제 목:[쿠베린] 제 22화 의 지 5 관련자료:없음 [38867]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1-07-24 04:49 조회:3641 KUBERIN...... 빛을 향해 걷는다 그 빛에 눈이 타고 몸이 타오를 지라도 걷지 않으면 안될 길이 있다 5 오 테라쿠마 세카나파스. 별로 기억하고 싶진 않지만, 어쨌거나 너무 거창하고도 긴 이름이라 외워 버렸다. 아니다. 내가 머리가 너무 좋기 때문에 저절로 외워진 것 아닌가. 나에게는 필요한 것을 칼같이 기억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으니까. 빛이 사라지자 어둠이 찾아왔다. 온몸이 후들거리는 것은 그런 대로 참을 만하다. 처음 느꼈던 것처럼 끔찍한 기분은 없었다. 어쩌면 이거 별로 대단 한 게 아닌 지도 몰라. 애써 그렇게 생각해보았지만 팔이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 눈에 보 일 지경이었다. 턱도 아직은 덜덜 떨리고 있다. 거참, 이게 진짜 드래곤 피 어라는 것이라면 이렇게 당하지는 않을텐데. 나는 두 다리가 있으니 당장 에 달아나던가 달려들어 이 기운을 물리칠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좁은 공간안에 이렇게 가두어 놓고 이놈의 기운을 계속해서 뿜어내게 하다니. 죽으라는 것과 똑같잖아? 아이고, 정신을 빼면 입이 삐뚤어지겠군. 나는 고개를 돌려서 아직도 쓰러져 있는, 시커먼 바닥에 완전히 널브러져 있는 에닌을 만져보았다. 에닌의 온 몸은 싸늘했지만 숨이 끊어진 것은 아 니었다. 그녀는 그저 가는 숨을 몰아쉬며 늘어져 있었다. 기절한 것 같지만 기절치고는 상태가 심한 듯했다. "그거 아십니까?" 연극처럼 지껄이는 녀석이 또 등장했다. 어둠 속에서 흰 비단옷자락이 보 였다. 녀석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주절주절 잘도 떠든다. "엘프는 말입니다, 흔히들 순응하는 존재라고 알려져 있지요." 나는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에닌의 몸이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그 흰 옷 자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하니, 말도 못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녀석이 또 주절거렸다. 나는 팔뚝을 만져보았다. 부러진 팔뚝은 여전히 움찔거리고 있었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 상태로 놓여 있는 게 더 끔찍했다. 이 마법진은 정말로 지 독했다. 일단 앉아서 심호흡을 하고 부러진 팔뚝을 천천히 맞추려했다. 하지만, 이 상하게도 평소와 달리 근육도 뼈도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내 팔뚝을 지켜보았다. 여전히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머릿속에선 별로 그렇게 두렵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몸이 떨리는 것일까? 이거야 말로 몸 따로 마 음 따로 인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어둠 속에 희뿌옇게 드러난 팔뚝은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다. 뼈가 부러진 게 처음도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물끄러미 지켜본 적도 없었다. 왜 상처 가 아물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 "왜 상처가 안 낫는지 궁금하세요?" 녀석이 또 끼어 들었다. 아, 매력적인 남자는 너무 피곤해. 저 녀석은 어 떻게든 나랑 엉겨보려고 부득부득 끼어 드는군. 입 다물고 있자. 시키지 않 아도 다 말해 줄테니까. 저렇게 입이 가벼워서야 어떻게 그 과묵하다 못해 무거워 비틀어질 킬트녀석과 같이 살았을까? 혹시 킬트가 저 놈의 수다를 견디다 못해 놈을 갖다 버린 게 아닐까? 내가 저 놈의 과거에 대해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녀석은 시키지 않 았는데도 계속 지껄여대고 있었다. "궁금하시죠? 제가 알려드리죠. 드래곤 피어는 말이죠. 살아있는 존재 그 자체가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 몸이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위축되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묘인족의 강인한 회복력도 위축된 거죠. 어떻습니까? 기분은?" 엿같아 라고 대답해주려다가 나는 뒤에 쓰러져 있는 에닌의 몸을 살펴보았 다. 온기는 있으되 꽤나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돌덩이 같다. "그 엘프소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엘프 자신의 특성 탓이지요." 엘프 자신의 특성이라. "엘프는 순응하는 존재라고들 하죠. 생명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 뭐겠어 요? 바로 죽음이죠. 즉, 드래곤 피어는 죽음을 느끼게 하는 힘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도 있어." 내가 대꾸하자, 녀석은 갑자기 기뻐진 듯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네, 그렇지요. 하지만 그것은 의지의 결과이죠. 본능적으로는 죽음을 두 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이란 것은 모두들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죠. 그 죽음이라는 게 생명의 파괴, 소멸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자들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겪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요." 그러고 보니,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난다는 둥의 말을 떠드는 인간들을 보면 알 수 있는 일. 결국 죽음이라는 것도 다 각자 알아서 받아들이고 생각한다는 이야기 다. "게다가 드래곤 피어는 계속해서 죽음이라는 것을 드러내놓고 압박한단 말입니다." 굳이 듣고 싶은 이야기도 아닌데 녀석은 계속해서 강조했다. 이것만은 꼭 들어야된다는 듯이 강조하는 그 어투를 듣다보니 조금은 녀석이 불쌍해졌 다. 가여운 것. 그래, 들어주마. 그동안 말을 못해 괴로웠나보구나. 맘껏 떠 들어. 대신, 안 들어도 원망하지는 마. "그 엘프 아가씨는 알아요. 엘프들은 죽음을 압니다." 나는 부러진 팔뚝을 쥔 채로 에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 백했지만 표정은 그다지 고통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지금 그녀는 가사 상태에 빠져 있는 겁니다. 드래곤 피어에 맞설 힘은 없다는 것을 아니까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에 맞설 수 없다는 걸 알 기 때문이죠." 용족은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죽음을 대변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잠시 동안 심오한 고찰에 들어가려다 말고 더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 기로 했다. "배고파." "........." 녀석은 내 말을 듣는 순간 침묵했다. 말 그대로 경악이 섞인 침묵이었다. ".......진짜, 배가 고프십니까?" "응." ".........드래곤 피어 속에서 시장기를 느낀단 말이죠?" "응." 녀석은 이제 놀라다 못해 화를 내는 듯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진짜죠? 저를 놀리시느라 그런 거 아니죠?" "아니지." 내 대꾸에 녀석은 굳어 있었다. 이런 걸로 놀릴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데. 메뉴라도 주욱 불러줄까.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녀석의 실루엣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나는 이제 야 비로소 눈이 그럭저럭 보인다는 데 안심했다. "죽음에 맞서서 배가 고프다니, 당신이란 분은 대체..........." 녀석은 갑자기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분해서 견딜 수 없다는 그 모 습은 수십 년간 여자분들을 후리던 놈이 어느 한 순간 자신이 남자를 더 좋아한다고 깨달았을 때와도 같았다. 아, 비유가 조금 이상한가? 그럼, 남자를 후리던 미녀께서 어느 한 순간 여자를 더 좋아한다고 깨달았을 때 와도 같은........더 이상한가? 어쨌든 간에 꽤나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내 가 배가 고프다는 게 대체 왜 충격이 되는 거야? 여기서 내가 오줌이라도 싸갈기면 이 놈 기절하는 거 아닐까?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어!" 녀석은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자세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 놈이 손톱을 물어뜯는 꼬라지를 보아 하니 정말 어린애 같았다. 제 맘대로 안 된다고 손톱 물어 뜯고 머리칼 쥐어 뜯는 놈들 많이 봐왔지만 이 놈의 모습은 정 말 미친 놈 같아서 혼자 보기 아까웠다. "너, 뭐하나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나는 팔뚝을 주물럭거리면서 친절하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너, 책하고 몇 몇 밖에는 아는 놈들이 없지? 그놈의 마법 공부와 킬트놈, 그리고 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좀 모자란 마법사 녀석들 이외엔 아는 놈들도 없지?"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녀석이 갑자기 말을 더듬었다. "너 분명히 책을 보고 지껄이는 거지? 엘프는 이렇다, 묘인족은 이렇다, 드워프는 이렇다, 인간은 아마 이럴 거다... 뭐 그런 식으로 말이야." 안색이 홀라당 변한 녀석은 손톱을 맹렬하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왜 이렇 게 약한 모습을 보이냐? 이 자애로우신 분의 마음을 흔들어 보려고? 그래, 정말 가엾구나. 내 너의 그 가련한 모습을 보아 사정없이 모가지 댕강, 심 장을 홀라당 뽑아 줄게. "세상 모든 게 다 책대로 굴러가냐? 네가 드래곤 피어를 맞아봤어? 이 게 어떤 느낌인지, 이게 어떤 것인지 다 알아? 아니지, 네가 날 아냐? 네가 모 든 것을 다 알고 추론할 수 있단 말이냐?" 내 질문에 녀석은 침묵했다. 점점 더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내 뱃속에서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 배고파, 나는 배고파, 이제 먹어야 해. 먹어서 더 강해져야 해. 이놈의 것을 이겨내야 해. 그리하여 끝장을 내자구. 필요한 게 많아. 피가 뚝뚝 배 어 나오는 고기와, 육즙이 잘 배어 나오는 구수한 스튜, 잘 그을린 사슴고 기도 괜찮지. 만약 더 있다면 호비트제 땅콩 빵과 호두빵이 좋겠어. 거기에 훈제된 베이컨과 매운 맛이 배어 나오는 겨자소스를 얹고 쌈박한 치즈를 두툼하게 썰어 넣은 샌드위치도 좋아. 그리고 달고도 강렬한 벌꿀술도 좋 아. 아니면 화끈한 흑맥주도 좋겠지. 먹자구! 먹게 해줘! 먹게 해달라구! 치, 침 나온다. 정말 나도 대단해. 내 뱃속은 말까지 한다고. 자기 생각을 밝히는 이렇게 대단한 뱃속 본 적 있냐?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뭔가 가 먹고 싶었다. 아, 맛난 것 잔뜩 먹고 따끈한 여자를 안고 누웠으면 좋겠어. 새로 깐 짚에 까슬한 시트를 덮고 그 위에 푸욱 자빠져 잤으면 좋겠어. 이런 생각을 하 다보니, 침이 더 나온다. 아, 쓰읍. 닦아 내고 정신을 차려야지. 이 미모에 침을 흘리다니. 이런 걸 남에게 보여주면 안되잖아? 나는 입가를 닦으면서 아직도 뭔가에 고민하듯 침묵하고 있는 녀석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침 흘리는 거 못 봤겠지? 에닌이 기절해서 다행이네. 한동안 침묵하던 녀석은 어느 새 피투성이가 된 손톱 끝을 노려보며 중얼 거리듯 물었다. "진짜 배고프단 말씀이시죠?" "내가 너 같은 어린애를 데리고 거짓말을 해 뭘 하겠냐?" "전에도 당신은 거짓말을 한 적 있으시잖아요?" 뭔가 꽤 원망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기에 나는 흠칫했다. 이봐, 그런 교 태.....스러운 눈빛은 집어 치워 줘! 내가 너랑 그런 눈빛을 주고받을 사이 냐? "그런 적 없어." "없긴요! 피를 준다고 해 놓고 제 목을 댕강 잘라버렸잖아요!" "네 목을 자른 적은 있어도 피 준단 말은 안 했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분명히 절 속였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너 안 속였어." "그 대단하다는 묘인족의 왕께서 지금 저 같은 한 낱 인간에게 거짓말을 하는 겁니까!" "아니." 녀석은 순간 숨을 들이켰다. 왜, 왠지 재미있어지기 시작하는데. 이 부러진 팔뚝과 온 몸을 짓누르는 이 감각만 없으면 어떻게든 꽤 재미있다고 할 만한데 말이야. "...........대단하시군요. 드래곤 피어 속에서 지금 농담 따먹기를 하시는 겁 니까?" "조금 있어보니 그럭저럭 견딜만 하네." 내가 명랑하게 대꾸하자 녀석은 입을 벌렸다. "..........공포로 마비되는 거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견딜만 하네. 내가 말이 많아진 걸 보니 느낄 수 있지?" 녀석은 조금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어쨌든 식사는 나중에 하셔야 겠습니다." "지금 주면 안 돼? 잘 못하다간 에닌까지 잡아먹겠는걸." 녀석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지친 듯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법진 안으로 음식물을 들여보내겠습니다. 그럼 되겠죠?" "그래." "...............믿을 수 없어." 녀석은 왠지 추욱 처진 어깨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가끔 생각하는 건 데 혹시 저 녀석 순진한 거 아닐까? 하는 짓거리는 분명히 변태이긴 한데 뭔 가 꽤 순박하잖아? 어린애 약 올리는 거 같아서 슬슬 재미까지 붙는 걸.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였다. 갑자기, 내 주변으로 불이 켜졌다. 처음에는 음식물이라도 나타나려고 불이 켜진 줄 알았지만 그것이 오산임 을 곧 깨달았다. 음식물은커녕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 이었다. 검푸른 이끼가 덮여 있는 돌무더기 위로 금이 죽죽 가 있는 기둥 몇 개가 보였다. 그리고 그 돌무더기 아래 늘어진 몇 구의 시체, 그 시체들은 죽은 지 한 참은 되었는지 잔뜩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옷 꼴을 보아 선 이곳 고왕국놈들 같았다. 사방이 완전히 꽉꽉 틀어 막힌 것처럼 보여서 나는 조금 실망했다. 출입구가 대체 어디인지 문도 안 보이고 구멍도 하나 안 보인다. 그렇다면 대체 아까 그 모자란 변태녀석은 어디로 간 거야? 설 마하니 마법으로 텔레포트라도 했단 말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빠져나갈 길은 녀석의 주리를 틀어 내야 한다는 말인데? 문득 구석탱이에 먼지구덩이에 자빠진 시체들 몇 구가 보였다. 옷가지는 갖가지로, 종족도 갖가지인 듯 수인족으로 보이는 녀석과 드워프로 보이는 녀석, 물론 엘프인 듯한 녀석도 보였다. 십 수명의 시체들은 고통스럽게 죽 어간 것인지 잔뜩 웅크리거나 아니면 꽤나 손상을 입은 모양새였다. 그 시 체들을 둘러보던 나는 잠시 동안 숨을 멈췄다. 회색의 돌벽 한 귀퉁이에 반투명한 유리인지 수정인지 알 수 없는 길다란 관이 줄줄이 놓여 있었다. 그 투명한 관 안에는 줄줄이 몇 구의 시체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꽤나 섬뜩했다. 아니, 몇 구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표현은 아니었다. 수 십 개의 시체들이 거꾸로 꼿꼿이 수정관 안에 담겨 있었다.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수정관 안에 있는 시체들이 혹시나 내 아이들일까봐 차마 바로 볼 자신이 없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게야. 내 아이가 저런 곳에 있을 리는 없지. 그렇고 말고. 하지만 확인은 해야 겠지. 한숨을 몇 번 내 쉰 다음 나는 눈을 부릅떴다. 짙은 회색과 허여멀건한 돌무더기 사이에 일렬로 늘어선 수십 개의 관은 제법 끔찍해서 왕년에 먹 었던 것들을 모조리 토해낼 지경이었다. 나는 잠시 동안 시장기를 잊고 그 관들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가 서 있는 장소는 거대한 지하광장의 일부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주 거대한 지하동굴 속인 듯했지만 그 지하동굴이라는 게 아무래도 누군 가가 깎아 내어 만든 것 같은 몰골이었다. 그 증거로 무너져 내리긴 했지 만 각이 반듯하게 진 모서리라든가, 무너진 돌더미 사이로 간혹 보이는 벽 돌같은 것들이 보였다. 어쩌면 이 곳에 커다란 건물이 있었던 지도 모른다. 여기는 아까 그 분홍주둥이 녀석이 말했듯 그 놈의 그 파괴대신의 신전이 었던 장소인 모양이다. 꽤나 거대한 규모인 것을 보면 이 이상한 이름을 가진 신에 대한 숭배가 대단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내 알기로 어떤 고대신 도 저런 수정관으로 자신이 신전을 장식할 리는 없을 터이고, 대체 저 수 정관들은 어디서 누가 가져온 것일까? "아직도 식욕이 있습니까?" 갑자기 툭 하고 한 구석에서 분홍주둥이가 나타났다. 나는 빛이 대체 어디 서 나오는 것일까 하고 고개를 들었다. 천장 한 구석에 희고도 둥근 광원 이 있었다. 그것에서 나오는 빛은 제법 강했던 모양이다. 좁지도 않은 이 곳을 꽤나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직도 식욕이 있느냐고 묻잖아요?" "있어. 하지만 네가 가져오는 음식은 안 먹기로 했다." "어째서요?" "음식물에 이상한 걸 탈까봐 그래." 녀석은 묘한 표정을 짓더니 내 시선이 닿아 있는 수정관 쪽으로 고개를 돌 렸다. "저걸 보고 계셨군요. 멋진 콜렉션이죠?" "...............저건 뭐냐?" "저와 누님의 콜렉션이지요. 꽤 오래 걸렸어요. 저걸 모으는데." 잔뜩 눈에 힘을 주고 보았더니, 눈알이 아프다. 하지만 아무래도 윤곽이 희 미한 탓에 자세한 것을 알 수는 없었다. 단지, 그 안에 담겨진 것들이 다양 한 종족들이라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수인족, 엘프, 드워프, 호비트, 아인 족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하게 들어 차 있었다. 내가 그것들을 묵 묵히 지켜보자 분홍주둥이는 자랑하듯 말했다. "아, 죽은 거 아니에요. 가사상태인 거죠. 참, 이거 정말 안 드실래요?" 녀석은 안타깝다는 듯이 갑자기 쟁반을 들이 내밀었다. 쟁반 위에는 잘 구 워진 베이컨과 꿀빵, 훈제 오리등이 놓여져 있었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 었지만 손을 내밀고 싶은 생각은 가셨다. "저걸 모아 뭘 할껀데?" "하긴요? 수집가에게는 수집 자체가 목적이에요." 녀석은 뻔뻔스레 말하고는 나를 향해 윙크를 던졌다. 나는 그 윙크를 무심 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가여운 놈이 있을 수가 있나. "책 속의 것 이외에 네가 아는 게 대체 뭐냐?" "네?" 녀석은 조금 당황한 듯 쟁반을 든 채로 날 바라보았다. 내 반응이 의외 였 던 모양인지 한 걸음 다가오기까지 했다. "책 속의 것 이외에 아는 게 뭐냐고 묻잖아? 진짜의 감정, 진짜의 일, 진 짜 인간, 진짜 아인족, 진짜 수인족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 "훗, 무슨 소릴 하고 싶어하는 지 압니다. 제가 저것들을 모아서 무슨 연 구를 하고 있다고 화를 내고 있는 거죠?" 녀석은 피식피식 웃더니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앉은 모습이 어린애처 럼 보여서 이유 없이 괜히 불쌍해 보이는 자세였다. 알을 낳으려고 애쓰는 암탉이 연상되어 나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이상한 걸 만들고 즐거워하는 어린애에게 뭔 말을 하겠냐. 내 피로 무언 가를 만들고 싶어하는 모양인데, 묘인족의 피는 다른 것을 낳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지 않냐?" "하지만, 갖고 싶은 걸요." 내가 네 장난감이냐? "하지만, 정말로 고통스럽지 않으신 건가요? 어째서 그 안에서 배까지 고 프고, 그 안에서 이렇게 태연자약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처음에는 분명히 당신도 타격을 입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었잖아요?" "그야, 그렇지." "그 드래곤 피어의 마법진은 제가 얼마나 많은 실험을 거쳤는지 모릅니 다. 그 안에서 엘프와, 드워프와 다른 수인족으로 몇 번이나 실험을 해봤었 어요. 당신 같은 반응은 난생처음입니다." "...............실험이라." 녀석은 턱을 고인 채 제법 심각하게 말했다. "엘프는 순응하는 자들이기에, 죽음의 공포를 느끼자 그 즉시 가사 상태 에 빠졌습니다. 드워프들은 개척하는 자들이기에 죽음의 공포를 느끼자 마 법진을 파괴하려고 애쓰더군요. 하지만, 그들도 곧 견디지 못하고 자멸했습 니다. 인간은 자해를 하던가, 미쳐버리더군요. 수인족들 대부분이 다 자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인족은 당신처럼 반항하다가 결국은 탈진해서 쓰러 졌구요." 결국은 그 들 하나 하나를 다 죽여보고 날 여기에 가둔 셈이군. 그런데 결과가 어째 시원치 않았다 그거지? 그래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지랄발광을 한 번 해봤고. 나는 쓰러진 에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닌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 다. "그거 아십니까? 살아 있는 것들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자해를 시작합 니다. 어떤 수인족은 자신의 팔뚝을 씹어 삼켜 팔 하나를 다 먹어버리더군 요. 또 어떤 수인족은 자신이 심장을 스스로 뜯어냈습니다." 나는 널브러진 시체들과 수정관 안에 담겨진 녀석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 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그저 순순히 잡혀 들어 갔으리 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 자리에 서서 나와 말을 하는 겁니까? 아무리 지상 최강의 종족이라느니 말을 하지만 결국 당신도 살아 있는 자일뿐인데." 나는 다시 시선을 녀석에게로 돌렸다. 혼란스러워하는 그 얼굴이 묘하게도 어려 보여서 나는 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이 놈도 결국은 어린애가 아닌 가? 킬트 놈은 정말로 죄를 많이 지었다. "묘인족 하나를 잡아다 실험해 봤습니다만, 당신 같은 반응은 아니었습니 다. 그도 그저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지요. 쿠베린님? 말을 좀 해보 시지요? 어째서 당신만은 다른 겁니까?" "이 세상에 똑같은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묘하게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배는 여전히 고팠지만 그 허기 때문에 오 히려 기뻤다. "나는 고대의 부족인 묘인족의 하나다. 그러나 묘인족이라고 해도 나와 같은 녀석은 단 하나도 없다. 나는 나니까." 녀석이 내 심오한 말을 알아듣든 말든 그것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 금 이 상황에서 입을 다물어도, 입을 열어도 결국은 다 마찬가지인 듯 싶 다. 이 이상한 마법진 안에서 내가 이처럼 태연자약한 것은 단 한 가지였 다. "나는 죽음이 두렵다. 고통이 두렵고, 슬픔이 두렵다. 그러나, 삶은 두렵지 않다." 내가 입을 다물자 녀석은 조금 미간을 찌푸리면서 낮게 중얼거리듯 물었 다. "그럼, 죽음의 공포보다도 삶에 대한 애착이 크다는 말인가요?" 뭐, 그 비슷한 이야기겠지. 식욕이 있다는 것 자체가 살아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나. 여자와 구르고 싶다고 하는 생각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것만 봐도 그렇고, 잠을 자고 싶다는 것도 그렇고. 아아, 나는 여기서 죽기 엔 하고 싶은 일이 너무너무 많아! 아니지, 내가 죽고 싶어도 세상이 그것 을 용서하지 않아. 왜냐고? 나를 원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지! 인 기 있는 남자는 그냥 죽지도 못하는 법. 흐흐. 녀석이 이상한 표정을 짓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나는 큰 소리로 웃었다. 내가 소리내어 웃자 마베릭이 얼굴은 점점 더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벌떡 일어서더니 바로 내 앞, 마법진 앞으로 달려들 었다. "웃지 마세요! 웃지 마!" 나는 계속해서 키득거리고 웃었다. 정말로 웃기지 않은가. 드래곤 피어, 가 장 끔찍한 죽음의 공포, 소멸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것을 등에 지고 배고 파하는 나라니. "웃지 말라니까! 어떻게 거기서 웃기조차 하는 거냐!" 녀석은 떼를 쓰듯 외치면서 고함을 질러댔다. "어째서 당신은!" 그가 그렇게 외치는 순간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녀석의 멱살을 덥석 잡고 그 목을 가차없이 꺾어버렸다. "컥!" 녀석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꼬맹아, 이 진이라는 물건, 드래곤 피어로만 이루어졌다는 거잖아?" "커, 커윽." 녀석의 몸이 추욱 늘어졌다. 놈의 부러진 목뼈가 삐죽하게 옆으로 솟아나 피를 뿜어냈다. "그렇다면, 드래곤 피어를 이겨낸 이 몸께서는 여기에 붙 박히지 않아도 된다는 거 아냐?" 녀석의 몸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퍽 하고 녀석이 멀리까지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다시 부러졌던 팔뚝을 바라보았다. 근육이 움직이고, 핏줄이 움 직이고, 뼈들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들은 다시 왕성한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래, 이거야, 살아 있으라고. 살아 있는 자들의 거대한 힘이 이거지. 그러나 그도 잠시, 내가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짜릿한 감각이 발끝부터 등 줄기까지 치솟았다. 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와 닿았다. "어허라?" 진위에 또 하나의 진이 더 쳐져 있었다. 이번에는 드래곤 피어와는 관계가 없는 평범한 보통 마법진인지 특별한 감각은 없었지만 빠져나갈 수가 없었 다. 손을 대어 보니 세 걸음 이상은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없다. 이런, 가증 스러운! 이 자식, 진 위에 진을 또 치는 가증스러운 짓을 했단 말이냐? 내가 진 안에서 왔다갔다하고 있는 동안 돌벽에 거꾸로 쳐 박혔던 녀석이 부스스 일어섰다. 핏줄기를 닦아내는 녀석의 모습은 여전히 태연해서 소름 끼쳤다. 몇 번쯤 더 박아서 얌전하게 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나는 녀석 을 사랑에 가득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어." 녀석은 나를 향해 흐트러진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까지 강한 거야? 이건 말도 안 돼." "훗, 말이 안 되긴. 500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강해지도록 노력했는 걸." "거짓말 말아요. 당신이 정말 강해지도록 노력한 게 며칠이나 된다고. 내 가 알기로 당신은 매일 밤마다 여자를 갈아댔고 매일 술을 퍼마시고 매일 먹고 자기만 했다구요!" 억지쓰는 꼬맹이처럼 외치는 녀석을 무시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리석은 녀석. 나 정도 되는 분이라면 그것이 바로 생활속의 노력이라 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녀석은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소리를 쳤다. 이번에야말로 화가 난 듯 이 를 가는 녀석을 문득 보다보니 묘한 생각이 들었다. 저 자식은 왜 이렇게 나 에게 집착을 하는 것일까? 피를 구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것 따위 사실은 진심이 아닐 지도 모른다. 묘인족의 피야 나 말고 다른 자를 잡으면 구할 수 있는 것이고 녀석의 힘으로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닐 터인데.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말이야."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내가 불쑥 말을 꺼내자, 녀석은 흘러내리는 피 를 소맷자락으로 닦아내며 나를 쏘아보았다. "뭐가요?" "너 진짜는 몇 살이냐?" 순간, 녀석의 얼굴은 놀랄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얼굴이 달아오른다는 것은, 사실 꽤 직접적인 감정표현으로 특히 남녀노 소 누구에게나 강력한 어필이 가능한 아이템이다. 특히 하얗고 뽀얀 피부 의 미소녀들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수줍은 듯 시선을 피할 때 강력한 효과 를 가질 수 있다. 나는 침묵했다. 아니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인기가 넘쳐흐르는 나이지만 멀대같은 사내놈에게 얼굴을 붉힌다는 미소녀 특유의 불멸의 어택을 받고 싶은 마음은 절대로 없다. 게다가 저 놈의 저 얼굴은 어디로 보나, 나어린 미소년들이 <정말 당신은 멋진 나의 우상이세 욧!>라고 보여주는 얼굴이 아니라 느끼하고도 피로하며, 피로한 동시에 절 망적인 표정이었다. 여기서 저 녀석이 <당신을 좋아해요. 저와 함께 사랑 의 도피를!> 따위의 말을 지껄여도 나는 절대로 놀라지 않으리라! 아, 이 것이야말로 전쟁터에 핀 사랑? 카아아악! 내가 왜 어린애를 데리고 도피하 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냐! "..............제 어디가 어려 보인다는 겁니까?" 굉장히 거북한 침묵 뒤에 녀석이 조용히 물었다. 뭔가 고집스럽게 말하는 녀석의 말을 듣고 보니, 문득 정말 이 놈의 나이 가 몇인지 궁금해졌다. 대개 나이 많은 녀석들은 어떻게든 어려 보이려고 애쓰고, 정말 어린 놈들은 나이가 많아 보이려고 바둥거리기 마련. 이 놈이 이런 표정으로 심각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있다보니 이 놈 나이가 보이는 대로 이십대 중반은 아닌 것도 같다. "분홍주둥이, 아니 마베릭이라고 했던가? 나는 연장자의 느긋한 마음으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킬트는 아이들을 많이 만들었지? 그 중 넌 몇 번째가 되는 거야?" "......" 녀석은 뭔가 불안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가 애써 다시 느끼한 표정으로 돌 아왔다. 꼬맹아, 늦었단다. 나는 너의 눈 속에 스쳐 가는 불안의 그림자를 이미 감지했다. "내가 알기로, 킬트의 아이들은 네 놈과 뻘건 머리를 한 미친 계집애, 그 리고 누렁이와 죽고 못사는 아헬이란 노랑계집애 기타등등이야. 그 외에 몇이 더 있지?" "모릅니다. 마스터는 우리들 몰래 다른 아이들을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르 죠." 뾰로통한 얼굴이 된 녀석은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뾰로통 이란 단어가 등장한 순간, 너는 이미 속내를 드러낸 게야. "어쨌든 킬트를 배신하게 된 이유가 카나리안, 그 약해빠진 쿼터엘프 때 문이라고 했던가?" 카나리안의 이름이 나오자 녀석의 이마에 핏대가 솟는 듯했다. 하지만 녀 석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입을 꾸욱 다물더니 내가 진 안에 갇혀 있 는 모습을 아래 위로 훑어보기만 했다. "솔직히 불어. 정말로 카나리안때문이야?" ".........대륙을 정복하고 싶었다니까요." 녀석이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며 대꾸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히죽 웃었다. "진짜?"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 겝니까? 전 당신에게 드릴 말이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넌 어린애야. 내 생각엔 고작해야 넌 십여세 밖에는 안 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무, 뭐라고요!" "그 미친 계집애가 제일 나이가 많은 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와 아헬의 태 도를 비교해 볼 때 아헬이 훨씬 더 성숙해. 물론 계집애는 사내새끼보다 성숙한 게 보통이지만 아헬이 그 누렁이 녀석을 대하는 태도는 아무리 보 아도 성숙한 여인의 태도거든?" ".......아헬따위와 절 비교하지 마십시오!" 갑자기 일그러진 얼굴로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아헬은 마스터가 그저 종족을 수집하기 위해 키운 합성체일 뿐이에요! 완벽한 것은 나와 누님뿐이라구요!" "역시 아헬이 나이가 더 많군. 그렇지?" "닥치라니까요!" 새빨개진 녀석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갑자기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아, 역 시 느끼한 녀석은 이렇게 좀 뭉개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니까. "네 누님이라는 그 미친 계집애의 나이가 몇인데?" "그런 걸 내가 왜 대답해주어야 하죠?" "뭐 굳이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가히 상상이 가니까." "..............스물 일곱." 거북한 어조로 녀석이 대답했다. "정말이야?" "그래요. 누님은 첫 번째 아이는 아니지만 결정체로는 첫 번째지요." "결정체와 합성체의 차이는?" 내 말에 녀석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합성체는 각 종족의 육체를 조합해서 이루어진 거지요. 결국은 이것저것 끼워 맞춘 거니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겁니다." 나는 문득 아헬이 헬레아스에게 보여주는 무조건적일 정도의 극진한 애정 을 떠올렸다.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태도로 그를 시중들던 모습은 어 딘가 어울리지 않았었다. 물론 헬레아스 녀석이야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 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사인족 놈들은 여자에 대해 굉장히 무지하니까. "결정체는?" "각 종족의 장점을 따서 직접 키워 낸 겁니다. 나와 누님은 여자의 자궁 속에서 나지 않았을 따름이지 보통의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구요." 어딘가 어설픈 자랑에 나는 한 숨을 쉬었다. "모가지 댕강댕강 잘라도 벌떡벌떡 일어나는 녀석이 보통의 아이라고 말 하는 거냐? 어울리지도 않아. 게다가 킬트 녀석이 보통의 어린애 따위를 만들 이유도 없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녀석은 정말로 상처 입은 표정을 했다. "무, 물론 보통의 아이가 아니지요. 나는 보통이 아니에요. 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마스터라고요. 다른 자들과는 다르지요. 나의 마법은 그, 그분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해요." 녀석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대꾸했다. 꽤나 자랑스럽게 떠들지만 어쩐지 어색했다. "그런가? 그럼 너와 그 미친 계집애와 비교해 보면 어느 쪽이 더 강해?" 내가 묻자 녀석은 나를 노려보며 피식 웃었다. "이간질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누님은 파괴력 쪽이 강하고 저는 다른 방 면에 강하니까요." "파괴력 말고 네 힘이 무엇인데?" "나는 생성의 마력을 씁니다. 보셨잖아요? 내가 만들어낸 것들을?" "사인족을 흉내낸 수인족 쪼가리?" "쪼가리라 말하지 마세요. 그래뵈도 그들은 수인족 보다 훨씬 강합니다." "하지만, 대가리 속에 든 것은 별로 없지. 이봐, 꼬맹아, 너는 그게 생성의 마법이라고 생각하냐?" "네?"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내면 그게 생성의 마법이냐?" "뭐라구요?" 녀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백마법사라고 하는 녀석들이 치유 따위에만 열중하고 새로운 생명체 따위를 만들어내지 않는다고 생각하냐? 정말 너는 그 이상하게 생긴 쪼가 리들을 만드는 게 생성의 마법이라 생각해?"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겁니까?" 녀석은 딱딱해진 얼굴로 날 쏘아보았다. "너희들이 데리고 다니던 오거 비슷하던 것들, 그것은 오거가 아니지. 오 거는 몇 백년 전부터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어딘가 산맥 깊숙한 곳 에서 살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것들은 오거가 아냐." 나는 내가 마튜스에서 박살냈던 두 놈의 오거 비슷하게 생긴 녀석들을 떠 올렸다. 살덩이와 핏덩이로 이루어져 있던 근육덩이들. 오거와 흡사하게 생 겼지만 전혀 다른 것들. "오거는 꽤나 이성적인 자들이야. 그들은 단 한 명의 상대와 결혼을 하고 자손을 단 한 명만 가지지. 상대와 싸우는 것을 즐기지만 함부로 싸우지는 않아." 녀석은 잔뜩 굳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집 센 그 표정에 나는 히죽 웃어주었다. "가장 큰 특징은, 오거는 절대로 인간 따위에게 부려질 자들이 아니라는 거지. 그들은 자존심이 높아서 절대로 다른 자들의 밑에 들어가지 않아. 심 지어 부모 자식간에도 그들은 굽히지 않아." 나는 빙글빙글 웃었다. "다시 말해서 너는 오거를 만들어낸 게 아니고, 오거를 파괴시킨 거지." "궤변을 늘어놓으시는 군요." 이를 갈 듯이 잔뜩 입가를 일그러뜨리면서 녀석이 중얼거렸다. "생성의 마법, 생명의 마법이란 말 따위를 그냥 집어치우고 말이야, 잡종 을 만드는 마법이라든가, 아니면 노예를 만드는 마법. 혹은 괴물을 만들어 내는 마법이라고 불러. 내 아무리 들어도 정말 가소로워서 들을 수가 없 어." 마베릭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모욕을 당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애의 나이가 정말로 몇 일까? 설마하니 열 살은 넘었겠지? 합성인지 결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위적으로 만들어 졌을 테니 태어나면서부터 성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킬트의 성깔 로는 절대 어린애를 만들어 낼 리가 없으니까. 녀석이 기저귀를 갈며 인간 의 아기를 키울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말 다 하셨으면, 이제부터 내가 말하도록 할까요?" 녀석은 잔뜩 찌그러진 얼굴로 살벌하게 말했다. 여지껏 보여주었던 그 느 끼하고 태연한 태도는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원래 이 놈은 이런 표정 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을 내 놓으십시오." "뭘?" "모르시진 않겠지요? 신의 귀. 신의 일곱 개의 기둥. 이 나라 고왕국을 지 탱해온 기둥들 말입니다!" "그게 뭔데?" 내 말에 녀석의 얼굴은 그대로 일그러졌다. "다, 다, 당신께서 가져간 그 물건들 말입니다! 일곱 개의 기둥을 내 놓으 라구요!" 녀석의 말은 이제 비명 같았다. "나 그런 거 몰라." 그 비명소리를 즐겁게 들으며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녀석은 그 순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 겠다는 듯 부들부들 떨던 녀석은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정말 모르신단 말이죠?" "몰라. 기둥이라니? 아무리 내가 힘이 세도 할 일 없이 기둥을 지고 다니 겠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좋습니다.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보여드리 죠." 갑자기 녀석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녀석의 손 끝을 따라 광원이 생겨나더니 갑자기 석벽 한 구석에 커 다란 구멍이 뚫렸다. 아니, 뚫렸다는 것은 옳은 표현이 아닐 지도 모른다. 원래부터 있었던 구멍이 드러난 듯 그 구멍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구멍 앞에 잔뜩 무언가에 묶인 세 명이 보였다. 그 세 명은 다 름 아닌 다크와 듀나시, 그리고 놀랍게도 사라졌던 미하라였다. 오랜만입니다... 이놈이 하텔이 계속 오류가 나서 몇 번이고 다시 올리게 되는 군요. 뭐 어쨌거나 할 수 없지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수호자 1, 2권이 출간되었습니다. 갑작스레 출간 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통신연재가 아닌 글은 저로서도 처음입니다. 그쪽과의 계약이 너무 급박했던 고로, 쿠베린이 연재가 늦어지게 된 겁니 다. ^^; 물론 빨리 쿠베린을 끝내려고 했지만 마음만 있었네요. 네, 마음만. (퍼억) 수호자는 전 5권 예정이고 앞으로 한 달에 한 권씩 출간될 예정입니다. 일단 예정은 그렇습니다. 핫핫핫....;;;; 쿠베린도 이달 말 7, 8권이 나올 겁니다. 책이 늦어진 것은 제 탓이 아닙니 다. 저는 칼 같이 원고를 넘기는 사람입니다. (으슥) 그러고 보니 그럭저럭 이 놈의 쿠베린은정말로 길게도 끄는 글이 되었군 요. 절대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이 거 연재하는 동안 워낙 일이 많이 생기 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협박과 격려를 빙자한 폭력을 하신 분들..... 씁쓸한 감사를 드리며 쪽지와 멜을 씹은 저를 용서들 하시길. 박종민님, 김지연님, v22000님, 여타 쪽지와 멜을 보내주신 분들, 그리고 종 종 나타나 저를 놀라게 한 현숙양에게도 감사를. ^^;; 그리고 현규야 잘 돌아왔다. ------------------------------------------------------------------------------ 제 목:[쿠베린] 제 22화 의 지 6 관련자료:없음 [40141]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1-09-08 21:26 조회:3124 KUBERIN...... 빛을 향해 걷는다 그 빛에 눈이 타고 몸이 타오를 지라도 걷지 않으면 안될 길이 있다 6 미하라는 넋을 반쯤 잃고 있었지만 사지 중 어디 한 군데가 없어지거나 한 것은 아닌 듯했다. 그녀는 무릎을 반쯤 꿇은 굴욕적인 자세로 비스듬히 엎어져 있었다. 그녀는 내 쪽은 보지도 않았다. 아니, 볼 여력도 없는 것인 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서 듀나시와 다크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웅크 리고 있었지만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그 일그러진 표정에서 나 는 그들이 나와 같은 드래곤 피어로 만든 마법진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금 방 깨달았다. "어떻습니까?" "뭘?" 나는 트릿하게 되물었다. "이들을 구하고 싶지 않습니까?" 마베릭은 음흉하게, 그 미끈한 면상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음흉한 표정으 로 물었다. 그 느끼한 면상을 보다가 나는 어깨를 멋지게 으슥해 보였다. "아니." 그 말에 마베릭은 턱이 빠진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실제로 턱 이 빠졌는지도 모른다. 녀석은 마구 마구 침을 튀기면서 소리를 질렀다. "장, 장난하지 마십시오!" "장난 아냐. 어떤 얼빠진 묘인족이 인질로 흥정을 하냐?" 내 말에 마베릭은 진 안에 갇힌 채 일그러진 얼굴로 버둥거리고 있는 그들 을 돌아보았다. 마법진은 은은한 우윳빛을 띈 채로 빛나고 있었다. 밖에서 보면 하얀 사발을 엎어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크기는 별로 크지 않았지 만 그 힘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정도란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들, 듀나시나 다크니까 그래도 제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게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인질로 가치가 없다는 겁니까?" "없다네." 나는 빙그레 웃어주었다. "저, 저, 여자는 당신의 아내입니다. 당신의 아이까지 낳은 여자지요. 그리 고 저들은 당신의 부하로, 혈족이고 가장 가까운 묘인족 아닙니까? 나, 나 는 알고 있습니다. 다, 당신이 저들을 얼마나 아, 아끼는지." 갑자기 말을 더듬는 녀석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저들은 내가 가장 귀여워하는 놈들이야. 듀나시는 나의 사촌형제가 되고 다크는 어릴 때부터 내게 붙어 있었던 녀석이지. 미하라는 내 아이를 낳았고." "그, 그런데 어째서?" 마베릭은 말을 더듬는 것을 억지로 억누르려는 듯이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아까부터 조금씩 이 녀석의 그 싱글거리는 면상이 무너져 내리는 게 꽤 마 음에 들었다. "내가 일일이 설명해야 알아?" 내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되묻자 녀석은 다시 처절하게 일그러졌다. 찌 그러진 솥뚜껑같은 얼굴을 한 녀석은 이제 주먹까지 휘둘러 보였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이제 그만 두시지요. 묘인족의 왕께서 이리도 치사 한 수작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치사하다니? 어떤 게?" 나는 방긋방긋 웃어 주었다. 마베릭은 일그러진 얼굴로 손짓했다. 그의 손끝이 닿는 곳에는 미하라와 듀나시들이 쓰러져 있었다. 듀나시는 몰라도 다크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 다. 녀석은 내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녀석은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 을 벌리고 벙긋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했다. "저들을 죽이고 싶지 않으면 일곱 개의 기둥― 정령석을 내어놓으시지요. 그것만 받으면 저는 당신과 굳이 적대할 마음은 없습니다." "나는 있는데?" 내가 대꾸하자 마베릭은 이를 악물었다. "내 놓으십시오. 아니라면 저들을 죽습니다." "죽여봐. 그리고 죽어도 할 수 없어." 담담한 내 말에 녀석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묘인족인 주제에 인질씩이나 되다니. 그거야말로 죽어서도 못 씻을 치욕 이지. 나는 녀석들에게 그런 치욕을 줄 수는 없어. 그래, 죽여."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린 마베릭은 손을 뻗었다. 조금의 주저도 없었다. 그리고, 둥근 사발 안에 있던 미하라가 일시에 부르르 떨었다. 아니, 그녀 의 전신으로 푸른 빛이 작열했다. 치익치익 하는 그 소리가 끔찍할 만큼 선명하게 굴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다크와 듀나시도 일제히 미 하라 쪽을 바라보았다. 미하라는 전신을 떨면서 비명을 올리고 있었다. 흰 피부는 갈가리 찢어지고 머리카락은 산발이 된 채 허공에 흩날렸다. "꺄아아아아아악!" 엄청난 비명소리였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주먹을 치켜올렸다. 그녀를 감싼 그 시퍼런 불꽃 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일어서려 애썼 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로 변신을 시도했다. 검은 털이 그녀의 등을 덮었다. 이미 찢어진 옷자락은 바닥에 모조리 흘 러내리고 피와 뭔가 알 수 없는 오물이 범벅이 된 채로 그녀는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도 일어섰다. 드러나는 송곳니와 손톱이 그 놈이 둥근 사발을 후려갈겼다. 채앵채앵 소리가 울렸지만 그녀는 그것을 뚫지는 못했다. 그 대신 손목이 부러졌는지 우득우득 소리를 내며 덜렁거렸다. "우아아아아악!" 비명은 절규가 되었다. 그녀는 시뻘게진 눈으로 사방을 노려보면서 진안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 치고 있었다. 그녀의 손톱 두 개가 다시 부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는 어깨로 진을 밀쳐내려 했다. 그러자 역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어깨가 탈골되며 피를 뿌렸다. 팔이 반쯤 뽑히면서 드러난 그 살점 과 허연 뼈가 시야에 드러났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이를 드러낸 채, 증오와 살의로 불타오르는 눈을 들어 그녀는 계속해서 진에게 공격을 감행 했다. 그게 얼마나 무모한 짓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마베릭 은 다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은 이번에는 붉은 빛으로 휘감겼다. 단단한 변신의 가죽 을 뚫기 위해서인 듯 시뻘건 불길은 뱀처럼 요사하게 그녀의 몸으로 달려 들었다. 누릿한 타는 냄새와 비명소리가 귓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나도, 듀나시도, 다크도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우리들이 지켜보는 모습을 보며 마베릭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내 놓지 않으시겠습니까?" "싸우다 죽는 거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묘인족은 싸우다 죽는 거다. 포로도, 노예도, 인질도 없어." "굉장히 냉혹하네요." 마베릭은 일그러진 입 꼬리로 웃었다. "아이를 구하러 온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지금 당신의 말은 마치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들리는 군요." 나는 마베릭을 바라보면서 침묵했다. 나는 아이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아이를 구하러 올 자는 어미인 로 오나이지 내가 아니다. 이 녀석에게 일일이 설명해 보아야 이 놈은 이해하 지 않는다. 아니, 못하는 것일 지도 몰라. 녀석은 그저 비정하다느니 냉혹 하다느니 하는 소리나 지껄여 댈 것이 분명했다. 만약 인간이라면, 지금 내 눈앞에서 마법의 불길에 휩싸인 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만약에 인간이었다면 나는 그를 구하러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 를 위해 굴욕도 참았을지 모른다. 마치, 그 옛날 스카를 구하려 했을 때처 럼. 하지만 미하라는 인간이 아니다. 묘인족이다. 묘인족인 그녀는 내가 자신 을 위해 굽힌다면 목을 그어 스스로 죽어버릴 것이다. 성년이 된 묘인족이 그런 굴욕을 참아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로오나가 반폐인이 되다시피 한 것도 결국은 그런 까닭이다. 우리들 중에는 <인질>이란 단어를 이해 못하 는 녀석들이 많다. 인질이란 게 대체 뭔지 왜 인질이라는 것 때문에 꼼짝 못해야 하는 지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침묵하는 것처럼 듀나시와 다크도 침묵하고 있었다. 아니, 침묵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진을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미하라 쪽은 보고 있지도 않았다. 지금 당면한 문제는 그녀가 아니라 자신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녀석들은 마베릭을 향한 살기는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녀석들 모두, 마베릭놈을 향해 이를 부득부득 갈며 버둥거리고 있 었다. 문득 나는 녀석들이 드래곤 피어라는 그 무적막강의 희한한 마법을 놈들이 이길 수 있는 지 궁금해졌다. 내가 이 것을 이겨낸 것처럼 녀석들 도 이겨낼 수 있는지 그지없이 궁금해졌던 것이다. "정말, 정말.......그녀가 죽어가도록 내버려 둘 참입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마베릭이 갑자기 외쳤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녀석 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잔뜩 구겨진 면상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 눈 빛에서 나는 배신감이라고 할 만한 감정을 발견하고 정말 어이가 없었다. 뭔 배신? "당신의 아내인데! 당신의 아내인데 죽어도 상관없단 말인가요! 당신, 저, 정말로 그렇게도 냉혹합니까!" "죽어도 상관없다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그녀는 약해서 너에게 잡 혀 죽어가고 있는 거야. 죽이는 건 너지 내가 아냐." 내 말에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당신 때문에 죽는 겁니다! 당신이 나에게 정령석을 건네주었다면 그녀는 죽지 않습니다." 억지를 쓰는 어린애 같아서 나는 웃음이 다 나올 정도였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미하라는 너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거야. 그녀는 너에게 죽는 거야. 나와는 관계가 없어." "어, 어떻게 관계가 없다는 겁니까!" 그는 이젠 비명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냉혹한 살인마 주제에 왜 난리를 치는 거야? 지가 죽이고 있으면서 왜 나 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이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논리일세. "당신의 아내인데,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아니, 사 랑하지는 않는다고는 해도 최소한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 것 아니었어요?" "당연히 좋아해.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 말에 녀석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부들부들 떨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죽어 가는데도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요?" "내가 태연해 보여?" 내가 다시 묻자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이 경직되었다. 녀석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재차 말했다. "정령석을 내 놓으면 됩니다." "나중에 죽여줄게." 나는 상큼하게 응답하고는 미하라 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 변신하고 있었다. 2단계의 변신과정을 거치면서 그녀가 걸치 고 있던 모든 옷가지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아니, 마베릭이 펼친 불꽃에 모두 재가 되어버렸다고 하는 게 옳은 말일 지도 모른다. 그녀는 두 번째 로 변신하면서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실, 드래곤 피어 속에서 변신하 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고통과, 치유되지 않는다는 공포였다. "끄아아........!" 비명은 내내 굴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몸에 난 털이 2단계의 변신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타올라 재가 되어 떨어졌다. 강철만큼이나 단단하던 털이 었다. 보통의 불꽃이라면 그을리는 것 이상은 결코 상할 수 없는 털이다. 그 털을 재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마법의 불꽃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녀의 팔뚝은 부러져 덜렁거렸다. 어깨는 탈골되어 허옇게 뼈를 드러냈다. 2단계의 변신임에도 불구하고 상처는 낫지 않았다. 발톱은 부러져 피를 뿌 렸고, 손톱은 두 세 개만 남기고 모조리 부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저항했다. 지글지글 살이 익어가고, 끔찍한 소음이 지나치게 예민한 귓속으로 뛰쳐 들어 왔다. 미하라는 묘인족 중에서도 강자에 속하는 여자였다. 그녀가 간 단히 굴복하리라고는 나도 생각지 않았다. 그녀는 살기와 공포로 이글거리 는 두 눈을 들어서 내내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절대, 절대로 포기할 성 격이 아니었다. "미하라!" 나는 큰 소리로 쩌렁하게 외쳤다. 내 목소리에 반응한 듀나시와 다크가 일제히 내쪽을 돌아보았다. 듀나시는 그제서야 나의 존재를 깨달았던 모양이다. 그는 갑자기 몸에 힘을 주며 내 쪽을 향해 다가서려 버둥거렸다. "미하라!" 미하라는 내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여전히 버둥거리고 있었다. 귀와, 머리의 일부분의 살갗이 지글대며 익고 있었다. 팔뚝과, 엉덩이, 등줄기에 걸쳐서 가슴까지 살이 익어 가는 고약한 냄새가 코끝을 마비시켰다. "미하라!" 그제서야 그녀는 내 쪽을 돌아보았다. 눈썹이 이미 사라진 그 시뻘건 얼굴 을 보며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에이리! 에이리를 생각해! 에이리를 생각해라!" 그 말을 그녀가 알아 들었는지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갑자 기 부르르 떨었다. "에이리는 아직도 어리다!' 내가 큰 소리로 외치자 그녀는 일그러진 입술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삐죽 이 튀어 나온 송곳니와 이미 찌그러진 입술 사이로 타액이 떨어져 내렸다. "까아아아악!" 그녀는 고함을 내질렀다. 불타오르는 몸체로 그녀는 진을 향해 부딪쳐 갔 다. 펑펑 소리가 나고 익어서 죽어버린 살점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녀는 굴복하지 않았다. 비명과도 같은 그 고함 소리 속에서 나는 그녀가 우는 것을 보았다. 달라붙은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흐르다가 곧 날아가 버렸다. 미하라는 고개를 바짝 들고 마베릭을 노려보았다. 처음 넋을 잃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눈초리로 이글거리는 살의를 담고 그녀는 마베릭을 향해 이를 갈았다. 그녀는 덜렁거리는 팔뚝을 주저하지 않고 덥석 잘라 던졌다. 아까와 달리 조금 유연해진 몸놀림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는 이미 불덩이였지만 의지는 그대로 살아 있었다. "에이리."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태우는 불꽃보다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마베릭을 향해 걸었다. 달리거나 뛰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그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그녀는 드래곤 피어를 통과했다. "대단하네요." 마베릭은 진을 빠져 나오자 마자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미하라를 향해 가볍게 손을 뻗었다. 시퍼런 전격이 그녀의 몸을 적중시켰지만 그녀는 나 동그라지는 대신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다시 달려들지는 못했다. 그녀는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면서 바닥을 기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마베릭은 한숨을 내 쉬었다. 마치 안쓰러운 양. 그 가증스러운 면상을 한 대 두들기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마베릭은 가증 스럽게도 혀를 찼다. "지독하네요. 묘인족도 묘인족 나름이란 말이 맞는 지도 몰라요." 그는 그렇게 어깨를 으슥하더니 가볍게 몸을 공중에 띄웠다. 문득 마베릭 이 나를 향해 물었다. "에이리가 뭔가요?" "미하라의 아들." 그 순간 그는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킬킬 웃어대기 시작 했다. "이야, 이야, 모성애라는 거예요? 정말 모성애라는 게 죽음보다 강한 건가 요?" "내가 여자가 아니라서 모르겠는데?" 내 말에 녀석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 웃어대는 몰골이 마치 미친 놈 같아 서 나는 마주 웃어 주었다. "정말 기가 막히네요. 쿠베린님, 당신은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글쎄다." 내 대꾸에 녀석은 피식 피식 웃으면서 바닥에서 어떻게서든 일어나려는 미 하라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그 이전, 갑자기 무언가가 그의 목을 댕겅 잘라버렸다. 피가 분수처럼 솟으며 텅 빈 공간에 반원을 그렸다. 녀석 의 목은 애들이 차고 노는 돼지 오줌보처럼 핑핑 튀어 바닥을 대굴대굴 굴 렀다. "어이, 어이, 살아 있어?" 나타난 것은 나의 버릇없는 동생 휴런이었다. 물론, 그의 뒤에는 카산과 튜 나, 엘레등이 섞여 있었다. 녀석은 바닥을 대굴대굴 굴러다니는 마베릭의 목을 모른 척하고 진안에 갇혀 있는 나와 다크, 듀나시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바닥에서 꿈틀거 리고 있는 미하라를 잔뜩 찌푸린 얼굴로 쏘아보며 물었다. "이거 뭐야?" "미하라." "에?" "미하라라구." "미, 미하라라구?" 휴런이 갑자기 비명소리를 내면서 미하라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만신창이 가 된 미하라를 향해 입을 적적 벌리더니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럴 수가! 누가 이런 짓을!" "네가 방금 목을 날린 놈이." 그 순간 휴런은 팩 돌아서더니 갑자기 널브러진 마베릭의 목없는 시체를 향해 발길질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가련한 시체를 이리 던지고 저리 던 지고 마구 패대기를 치더니 씨근덕거리면서 이를 갈았다. "이런 짓을 하다니! 이, 나쁜 새끼! 이 놈은 죽어도 용서할 수 없어!" 악악거리는 녀석을 보며 나는 혹시 이 놈이 미하라를 넘보았던 것은 아닌 가 하고 조금 의심스러워졌다. "아아아아악! 그 미녀를! 그 엄청난 미녀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아아악! 그 아름다운 백금발을 돌려줘어어어어어!" 휴런의 절규와 함께 내 앞으로 튜나와 카산이 다가왔다. "에닌!" 카산은 축 늘어진 에닌을 향해 달려왔다. 그는 악을 지르며 내 앞으로 뛰 어 들려다 말고 흠칫거렸다. 녀석도 왜 내가 움직일 수 없는가를 알아차린 듯했다. 하지만 녀석은 다짜고짜 고함을 질렀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미하라나 봐줘. 에닌은 그저 기절했을 뿐야." 내 말에 부들부들 떨던 카산은 어떻게든 다가오려고 손을 내뻗었다. 하지 만 바닥의 마법진이 번쩍거리자 녀석은 한 걸음 물러섰다. 이중의 마법진 이라는 것을 눈치 챈 듯 튜나는 계속해서 나와 에닌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 다. 카산도 그런 튜나를 따라 빙빙 돌면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사방 2메 테르 정도의 마법진 안에 드래곤 피어로 만들어진 1메테르 정도의 마법진 이 또 있다. "이 거 풀 수 있어?" "고단위 마법진입니다. 이건 흑마법이라서 저로선 모르는 것인데요? 이 문양과 이 계산은 생소한 것입니다." 카산은 ㅣ살짝 손에 마법력을 뿜어내며 진을 시험하듯 건드렸다. 그러자 내게는 보이지 않던 주변의 원이 번쩍 빛을 발했다. 두 겹, 세 겹으 로 그어진 원 안에는 본 적 없는 기이한 글자들이 번쩍거리며 자신들을 드 러내고 있었다. 그 앙큼스러운 모습에 나는 혀를 찼다. 글자인지 무늬인지 도 확실치 않은 것들에게 갇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보니 좀 허망하다고 나 할까. "아크나 킬트 놈을 불러와야 하는 걸까나."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뒤에 서 있던 튜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목 이 날아간 마베릭을 창백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는 색마놈이 있었다. 카나 리안은 튜나의 시선을 받자 내 쪽을 돌아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하죠." "너 할 수 있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서서 마법진의 모양새를 살폈다. 잠시 그의 얼굴은 잔뜩 찡그려지더니 내가 서 있는 바닥을 더듬거렸다.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 리를 중얼거리던 녀석은 한 손을 뻗더니 곧이어 낮은 소리로 바닥에 잔뜩 이상한 것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그러고 있는 동안 튜나와 카산 은 쓰러진 미하라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카산은 두 손을 뻗어 엘프의 자랑할 만한 치유술을 펼치기 시작했고 튜나 는 옆에서 그런 그의 모습을 관찰하며 약을 빼어 들고 있었다. 그녀가 펴 든 것은 엘프의 치료액인 듯했다. 다행히 미하라 역시 드래곤 피어를 빠 져나온 탓인지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미 모는 다시 되찾기는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일그러진 살점과 녹아 사라진 이목구비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의 의지는 지켜졌고 그녀의 명예는 나와 다크와 듀나시가 보는 가운데 살아났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에이리가 있을 테니 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눈 앞에서 별이 반짝였다. 누군가가 날 후려갈긴 게 아니라 번갯불이 번쩍이듯 순간적으로 내 눈 앞으로 빛이 번뜩였다. 내 앞 을 막아선 진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나는 화급히 마베릭을 향해 달려갔다. "그 녀석의 머리통을 잡아!" "에?" 구석에 서 있던 조인족의 꼬맹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녀석은 자신의 발치에 구르는 마베릭의 머리통을 집어 들었다. "이거 말입니까?" "그래. 그거 줘." 녀석은 의아해 하면서도 마베릭의 머리통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 머 리통을 잡아 들고 카나리안에게 물었다. "야, 색마. 너 저 드래곤피어의 진을 해체할 수 있어?" "에? 저, 저게 뭐, 무슨 진이라고요?" 카나리안은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물었다. 녀석은 내가 서 있는 진을 해제 했을 뿐, 에닌과 다크들이 서 있는 드래곤 피어 마법진은 해제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놈이 개발해낸 드래곤 피어를 뿜어내는 마법진이래. 너 해제 할 수 있어?" 카나리안은 그 말을 듣고는 멍하니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에닌은 여전히 꼼짝 않고 늘어져 있었다. 뒤늦게 말을 들은 카산이 지친 얼굴로 허옇게 되어 달려왔다. 마법진이 모두 해제 된 것으로 생각했던 그는 카나리안의 옆에 다가와 급히 캐물었다. "아, 안 되는 겁니까?" ".........이런 건, 처음입니다." 카나리안은 넋을 잃은 채 중얼거렸다. "당연히 처음 이겠지. 이 놈이 개발한 지 얼마 안 되었다니까. 풀 수 있 어?" "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을 것 같군요. 심각한 얼굴을 한 카나리안은 몇 번이나 마법진 주변을 빙빙 돌았다. 역시 새로 만들어 냈다는 이 마법진을 향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기어다니던 카나리안은 날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나왔습니까?" "걸어서." 내 질문에 녀석은 잠시 동안 침묵하더니 뒤에서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다크와 듀나시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분들은............." "드래곤 피어를 이겨내면 그 진안에서 걸어 나올 수 있어. 순전히 드래곤 피어 하나 만으로 만들어진 진이라고 했으니까." "하지만.......정말로 고대의 용족의 힘을 이런 식으로 재현하다니 믿을 수 가 없어요." 카나리안은 감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보다는 이 주변에 널린 시체를 보고 떠오르는 생각은 없어?" 내 말에 카나리안은 흠칫 몸을 떨었다. 안 그래도 에닌에게 정신이 팔린 그들 이외에 다른 자들은 모두 넋을 잃 고 유리관 안에 담겨진 시체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엘프들은 당 장이라도 졸도 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동족이 갇힌 유리 관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조인족들도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 유리관안 에 담긴 자들 중 혹여 조인족의 아이들은 없는가 살피고 있었다. "이런 짓을 어떻게......." 카나리안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퍼렇게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카산은 그 런 그를 부축하면서 구석에 늘어져 있는 시체들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저 들은 어찌된 거지요?" "드래곤 피어를 시험해 본 것 같아. 덕분에 시체가 되었지만." "그, 그럼?" 카산은 짐작이 되지 않는다는 듯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턱 짓을 했다. "어서 저 안에서 끌어내지 않으면 안 돼. 저 안에 오래 있으면 죽지도 살 지도 않은 상태가 될 거야." "그, 그냥 정신만 잃은 게 아니고요?" 카산이 급히 내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이봐, 잡아당길 옷자락이 내가 어디 있다고 이래? "드래곤 피어라는 게 어떤 건지 모르는 거야?" 낮게 카나리안이 속삭이듯 말했다. 충격이었는 듯 그의 목은 잔뜩 쉬어 있 었다. "드래곤 피어는, 곧 죽음의 날개라 불리우는 거야. 사신의 낫이라고도 불 리는 거라고." "그게, 그러니까 정신적인 공격인 거니까 의식을 잃으면 괜찮지 않나요?" 카산은 초조한 듯 에닌의 쓰러진 모습을 바라보았다. "의식을 잃으면 곧이어 숨 쉬는 것도, 심장이 뛰는 것도 안 하게 돼." "어째서요?" "죽음이 덮는 거니까. 죽음에 굴복하는 거니까." 카나리안은 급히 말하고 뻣뻣이 서서 이쪽을 보고 있는 듀나시와 다크쪽을 가리켜 보였다. "항의해야 해. 이겨내야 한다구. 굴복하면 죽는 거야. 아니, 양자 택일이 야. 고통을 영원히 겪거나, 아니면 죽거나." 무슨 소리인지 알아 들을 수 없다는 얼굴로 카산은 나와 카나리안의 얼굴 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엘프답지 않은 태도로 갑자기 이를 뿌드득 갈 았다. "이, 이, 이 잔인한 자!" 카산은 내 손에서 마베릭의 머리통을 빼앗아 들더니 인정사정없이 머리통 을 벽에 집어 던졌다. 퍼억 하고 피를 뿌리며 머리통이 돌벽에 부딪쳐 대 굴대굴 굴렀다. 뻐억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머리뼈에 금 정도는 가 지 않았을까? 그의 그런 태도에 옆에 있던 엘프들은 일제히 입을 저억 벌 렸다. "허억, 허억.....이, 이건 너무해. 대체, 대체 이 자는 이런 짓을 왜 하는 거 에요!" 그는 비명처럼 외치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엘프의 비명이 쩌렁쩌렁 주변 을 울리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는 카산을 위로하듯 튜나가 토닥여주었다. 조인족들은 말 없이 지켜보고만 있을 뿐 말이 없었 다. 조인족의 여왕은 다크들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대체 그 드래곤 피어의 진이라는 게 어떤 것이기에 저렇게 묘인족이 찌그러진 상태 로 자빠져 있는지 궁금한 듯 했다. 아, 아슬아슬 했네. 저 여자에게 내가 저렇게 망가진 모습을 보였다면 나는 정말 살고 싶지 않았을 게야. 나는 듀나시와 다크쪽으로 다가가 점잖게 말해주었다. "빠져 나와봐. 미하라가 해 냈어. 만약 네놈들의 힘으로 거기서 빠져나오 지 못한다면 너희들은 미하라에게 절대 고개 못 들어." 내 말을 들은 것인지 못 들은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진 안에서는 말 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다크는 내 입모양을 보고도 무 슨 소리인지 알았던지 쓰러져 있는 미하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일 그러진 입가를 억지로 바로 돌리려 애쓰며 한 걸음 내쪽으로 걸음을 옮겼 다. 듀나시도 그렇게 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하지 못했다. 그는 잔뜩 일그 러진 얼굴로 버둥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계속되면 몸이 천천히 산 채로 썩어 들어가게 될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 죽으면, 썩게 되니까. 다크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녀석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나는 그 것이 슬퍼서도 분해서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물은, 그저 몸을 제 어할 수 없기에 새어 나오는 것이지 별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일그러진 입가로 흘러내리는 타액도 마찬가지다. 녀석은 억지로 손을 들어 마법진을 건드렸다. 치직 하고 가볍게 소리가 나긴 했지만 여전히 진은 단 단한 사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일그러진 눈과 부들부들 떨리는 눈꺼풀. 하지만 다크는 여전히 움직였다. 아, 나도 저랬을까? 아이고, 차마 못 볼 꼴이었겠군. "아우가후우고앙?" 뭔 소리인지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최소한 다크가 말을 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꽤 고무적인 일이었다. 미하라는 비명 이외엔 말도 하지 못했었다.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다. 너, 우냐?" 내 말을 반쯤 알아 들었는지 다크는 억지로 흘러내리는 눈가에 손을 들이 댔다. 제딴에는 눈물을 닦으려는 행동인 듯했지만 손은 그의 의지를 배반 하고 제멋대로 귀를 건드렸다. 그 몰골에 나는 상냥하게 격려했다. "병신." 다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나는 아직도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듀나시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아 하니 내 격려가 필요한 것 같군. 응원해 줘야지. "병신, 너는 내 말 소리조차 못 듣고 있지?' 그 말을 듣기나 했는지 억지로 듀나시는 다크쪽을 바라보았다. 그 녀석의 그 일그러진 얼굴은 다크보다도 더 심했다. 눈썹은 아래로 처지고, 입가는 잔뜩 뒤틀려서 타액이 줄줄 새어 나왔다. 혀가 반쯤 나와 있는 것을 보아 하니 다크 보다도 상태가 심각했다. 녀석은 찌그러진 눈꺼풀을 벌벌 떨면 서 나와 다크 쪽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손은 닿지 않는다. 그 얼굴 에 깃들인 공포를 보고 나는 혀를 찼다. 듀나시의 공포. 그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내가 녀석의 다리 몽둥이를 부 러뜨릴 때보다 강할까? 듀나시의 일그러진 얼굴과 다크가 억지로 말을 하 려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의문을 느꼈다. 왜 다크보다도 듀나시가 더 약한 것일까? 듀나시가 다크보다도 더 강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차피 이 것 은 체력과는 관계없는 정신력의 싸움이다. 듀나시가 다리를 절든 말든 그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항상 질질 짜던 다크보다 냉정하던 듀나시가 왜 더 약한 것일까? "미하아나과아나사하?" 이제 겨우 말 비슷한 소리가 나왔다. 나는 다크를 돌아보았다. 다크는 제법 그런대로 볼만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녀석은 잘 안 움직이는 혀를 억지로 놀리며 흘러내리는 타액을 연신 손등으로 닦아냈다. "미하라는 괜찮아. 너희들 보다 훨씬 더 강한 여자지." "저마버사나주어거사스브가?" "뭔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다. 병신아. 너 사타구니에 달린 그거 떼 버려. 앞으로 여자들에게 추근대면 내가 대신 그거 다 뗀다. 듀나시, 등신아. 창 피한 줄을 알아. 그 면상이 뭐냐? 그 면상이?" 다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녀석은 달아 오른 얼굴로 억지로 턱을 움직였 다. "그런마하지마사요!" 하지만 듀나시는 여전했다. 녀석의 손등이 시퍼래진 것이 보였다. 손톱 빼 들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듀나시의 손톱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어색한 자 세로 자신이 짚고 있는 땅을 긁고 있었다. 아아, 제길. "정말, 방법 없어요?" 튜나가 에닌과 다크들을 번갈아 보면서 카나리안에게 물었다. 카나리안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뭔 계산을 하는 건지 뭘 그리는 건지 앞으로 봐도 모르겠고 뒤로 봐도 모르겠다. 녀석은 한동안 고 민을 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제 힘으로는 안 됩니다. 저기, 역시 아크님이나, 다, 다른 분을........." 이 상황에도 지 애비 이름을 안 대는 녀석을 보며 나는 혀를 찼다. "급한 걸 보면 모르냐? 이 마법진을 확 날릴 그런 마법 없냐? 해제는 안 돼도 뭐 그런 거 있잖아? 여기 쓰여진 것을 지운다던가."? "마법진이라는 게 발로 쓱 밀면 지워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설마 아 니겠지?" 튜나가 미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안 돼냐?" 내 말에 튜나는 핏대를 올렸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길게 떠들 수는 없다 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내쉬고는 카나리안에게 다시 물었다. "에닌은 얼마만큼 버틸 수 있을까요? 보아하니 확실히 저 묘인족들과는 상태가 다른데." 튜나의 말에 카나리안은 내 어깨 너머로 버둥거리는 두놈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튜나. 저 묘인족들은 저 상태로도 몇 시간이나 버틸 수 있어요. 어쩌면 저기 검은 머리의 다크시온, 다크시온은 극복해 버릴 지도 몰라요. 하지만 에닌은..........."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길게 말 안 해도 뒤에 무슨 소리가 올지 알만 했다. 그때였다. "그러니까 그 정령석을 내 놓아 보라고요." 우리들은 일제히 부르르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새인지 자기 머리통을 품안에 안은 기괴한 모습이 된 마베릭놈이 벌 떡 일어나 서서 지껄이고 있었다. 테페리77님, ANGELDOG님, 김지연님, 박종민님외 해외동포 여러분, 기타 인내하시는 모든 분들을 위하야..... 쿠베린 7, 8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9권도 곧 나와야 하겠죠? (쿨럭) 그, 그러니까 연재는 계에에에소오옥 되어야 하겠죠? (으음) 그건 그렇고 잡담 한 마디. 카이레스! 이 멍청한 놈아아아아앗! 그, 그걸 왜 버리냐앗! 그 귀하디 귀 한 아이템들을! 아까워서 보는 내가 눈물이 난다! 차라리 인피니티 로프로 디모나를 묶어 인피니티 백팩에 넣고 윈드워커 부츠를 신고 내 달려라! 그 리고 위협하는 거야, <백팩에서 나오고 싶으면 나랑 결혼해줘. 아이 원츄♡라고.> 여기서 ♡가 반드시 붙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고. 거절하면 위협해. 사 제간의 사랑은 위험한 것이라고. 그래도 거절하면 백팩을 멘 채 차라리 보 디발인지 삭풍의 미카엘인지 정체성 의심되는 놈과 싸워라. 훗, 싸우는 게 너의 운명이라면 그렇게 깨지듯 깨먹든 해보는 거야! 싸움은 사랑하는 님 (;;)과 함께면 무적이 되는 법. 나아가라, 카이레스! 싸워라, 카이레스! 그리하여 신화가 되어라! ........잡담이었습니다. ------------------------------------------------------------------------------ 제 목:[쿠베린] 제 22화 의 지 7 관련자료:없음 [40413]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1-09-19 21:47 조회:3236 KUBERIN...... 빛을 향해 걷는다 그 빛에 눈이 타고 몸이 타오를 지라도 걷지 않으면 안될 길이 있다 7 "끄, 끄아아아아!" "아악!" 엘프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몇몇은 말 그대로 시퍼렇게 질려 구 토를 하기 시작했으며, 몇몇은 벌레 보고 놀란 귀부인처럼 탄식하며 비틀 거렸다. 언데드마법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엘프들은 제 잘려진 머리를 안고 서 있는 마베릭놈의 꼬락서니를 도무지 참을 수 없었나 보다. 비명을 올리며 가장 마베릭쪽에 가깝게 서 있던 엘프 하나가 마법을 날렸다.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허연 빛을 뿌리며 달려간 마법력은 마베릭의 실드에 맞아 피식 꺼져 버렸다. 그러나 그게 도화선이 되었는지 엘프들은 졸도할 것 같 은 표정과 토할 것 같은 표정을 반반 씩 섞어가며 미친 듯이 공격을 시작 했다. "으악!" "저, 심해!" "오옷, 생명의 이름을 가진 이여! 용서하소서!" 엘프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나와 휴런, 그리고 조인족들은 잠시 침묵했다. 그들의 저런 발광을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오늘 이렇게 다시 보 니 참으로 새삼스럽다. 어쨌거나 마베릭의 실드는 강력하게 그를 감싸 안고 있었다. 엘프들 십수 명이 동시에 공격을 감행했는데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만!" 내가 고함을 치자 헐떡이던 엘프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 굴에 노골적으로 드러난 그 표정― 저런 몰골을 봐야 하느냐는 의문과 질 책이 담긴 그 표정을 바라보면서 나는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시끄러워." 그들은 현명하게도 곧 침묵했다. 물론, 그 침묵 전에 조금 소음이 일어났지 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너, 머리를 안 붙여도 괜찮아?" 내가 자상하게 묻자 마베릭은 조금 멋쩍은 얼굴로 옆구리에 낀 머리를 긁 적였다. "아닙니다. 곧 붙여야죠." "그러니까 머리를 잘라내도 죽는 게 아니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녀석은 빙긋 웃었다. 정말 옆구리에 제 머리통을 끼고 떠드는 놈과 대화를 나누자니 여기저기가 거북해졌다. "쿠, 쿠베린...." 모처럼 휴런이 말을 더듬으며 내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왜?" "재, 재, 재......" "떨지 말고 말해. 뭐가 어쨌다구? 네 놈이 실수한 게 아니야. 그저 저게 이상한 물건일 뿐." "물건이라니 너무 심하시네요. 저는 분명히 살아 있는 존재랍니다. 보통 인간과 조금 다를 뿐이죠." 마베릭이 느끼하게 한 마디 하는 순간, 휴런은 내 팔뚝을 꼬집으며 외쳤다. "재밌어!" "..........." 잠시 동안 우리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휴런은 내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얼어버린 마베릭의 면상을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아아, 저 상기된 뺨. 시커무리둥둥한 사내자식의 얼굴 붉힌 모습은 얼마나 끔찍한가. "재미있잖아? 저거 봐! 제 머리통을 옆에 끼고 떠들다니! 저런 구경거리 는 난생 처음이야. 조금 모자란 놈 같기는 해도, 저런 희한한 재주를 가졌 다니! 감동했어!" 감동이란 단어를 여기에 써도 되는 것인지 나는 잠시 동안 갈등했다. 하 지만 휴런은 어린 놈처럼 방방 뛰며 흥분한 눈빛으로 얼어버린 마베릭을 느끼한 시선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녀석의 느끼한 시선은, 돼지기름 엎어놓 은 것보다도 강력했으며 마차 바퀴 윤활유보다도 미끌거렸다. 녀석의 시선 에 공포를 느꼈는지 어지간한 마베릭놈도 애써 시선을 피했다. "아, 그러니까 그 진을 파해하려면....." 게다가 어떻게든 화제를 바꾸어 보려고 노력까지 하고 있었다. 허나, 휴런 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에게 있어서 에닌이나 다크따위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얼굴도 잘 보니까 꽤 귀여운 면이 있는 거 같아. 이봐, 귀염둥이, 다른 묘기를 한 번 부려보는 게 어때?" 휴런이 갑자기 휘파람을 불었다. 그 순간, 모두다 얼어붙었다. 귀염둥이? 잠시 동안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 분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감 에 사로잡혔다. 이 심각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단숨에 희극적인 상황으로 바꾸어 버린 휴런에게 모처럼 감탄하면서 나는 그 놈의 뒤통수를 한 대 갈 겨주었다. "아팟!" "지금 이 상황에 귀염둥이란 말이 나온단 말이냐!" "그럼 뭐라 부르리? 설마하니 노랑 대갈통이라고 부르란 말이야? 분위기 가 없잖아!" 휴런의 반문에 나는 다시 한 번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저 놈에겐 이미 분홍주둥이라는 이름이 있어. 굳이 노랑 대갈통이라 부 르지 않아도 돼." 내 대답에 휴런은 갑자기 씨익 웃음 지었다. 꽤 거북한 웃음이었다. "질투하는 구나? 쿠브형? 어이, 뭘 그런 걸 갖고 그래?" 내가 이 놈을 패기 시작했을 때는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 "그래서 계속해봐. 아니면 그 머리통 들고 손 들고 서 있던지." 내가 휴런을 두들긴 손을 털면서 마베릭에게 묻자 녀석은 왠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뭐, 고개라고 할 수도 없었다. 머리통을 옆 구리에 끼고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마시고 할 게 있기나 하나. 그런데 대 체 왜 얼굴을 붉히는 거야? 왜? 대체 왜? "그러니까, 그......진을 파해하려면 정령석을 꺼내 보라는 말이지요." 녀석은 뺨을 붉힌 채 슬쩍 휴런과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 은밀하고 도 야릇한 눈빛을 보고 나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어쩌라구! 어쩌라구! 아 악! 제발 부탁이야. 사내의 상기된 두 뺨 따위 절대 보고 싶지 않아! "그래서?" "뭐, 그렇다는 거죠. 그 덕에 저도 그 정령석 구경도 좀 하고 말이죠." 녀석의 말을 듣고서 옆에 있던 튜나가 재빨리 끼어 들었다. "저 놈의 말을 귀담아 듣지 마! 일단 아크님이나 킬트 마이오스가 오면 되니까. 아니면 시간을 더 주면......." "저런, 저런. 하프엘프아가씨, 너무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군요." 녀석이 평상시의 재수 없는 미소를 머금으면서 끼어 들었다. 하지만, 아무 리 네가 매끈한 미소를 지어 보여도 그건 엽기이상은 안 된단다. 어떤 미 친 여자가 머리통 옆에 끼고 선 놈에게 매혹되겠냐? "닥쳐! 너 같은 놈은 당장 머리 박고 죽어야 해! 만약 내게 힘이 있다면 네 놈을 몇 조각으로 갈가리 찢어 버릴 텐데!" 튜나의 열렬한 반응에 녀석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 미안하네요. 나는 머리를 박아도 죽지는 않거든요." 녀석의 여유만만한 대답에 막 튜나가 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아, 그럼 다른 재주를 한 번 더 부려보라고. 다음은 머리통으로 공차기를 해본다던가, 머리통을 옆구리에 붙인다던가." "......." "아, 머리를 엉덩이에 붙여보면 어떨까? 굉장히 야스러울 것 같지 않아?" 천연덕스레 끼어든 휴런 때문에 녀석은 다시 굳었다. "머리통을 엉덩이에 붙인다고 야해져?" 내가 의문을 표시하자 휴런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사내자식인데 가슴에 달라고는 할 수 없잖아?" "만약 저 게 여자였으면 가슴에 달라고 하려고 했어?" 내 질문에 휴런은 고개를 숙이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여자가 앞에 머리통을 달면 야해지나?" 휴런이 질문에 옆에 있던 튜나가 전속력으로 달려와 그 머리통을 후려갈겼 다. "야해지는 게 아니라 끔찍해진다! 지금 그런 대화를 나눌 정도로 여유가 넘치냐? 이 멍청아!" "이놈의 덜 빠진 하프엘프가!" 휴런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동안 마베릭놈은 정말로 돌이 되어 있었다. 어 쩌면 그의 그 짧은 생애사상 이런 소리를 들어 본 것은 처음일런지도 모른 다. 감사해라. 이 첫 경험을. 돌이 된 녀석을 모른 척하고 나는 가슴팍에 대롱 매달린 내 주머니를 풀어 들었다. "그걸 정말로 내 놓을 생각이에요?" 갑자기 튜나가 놀란 어조로 외쳤다. 옆에 있던 카산도 얼굴색이 변해 나에 게 다가섰다. "쿠, 쿠베린님, 설마하니 정말로 정령석을 내 놓을 거예요?" "아니면 에닌이 죽잖아?" 내 말에 튜나와 카산, 그리고 카나리안등은 입을 벌렸다. 상처 입은 미하라를 돌보고 있던 엘프들도 일제히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 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나를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면상들은 다 뭐냐? "그, 그러니까......미하라님이 죽는다고 해도 내 놓지 않던 것을 왜........" 카산이 어색한 어조로 말했다. 녀석의 얼굴은 눈물 범벅이었다. 그 기괴한 면상을 보다가 나는 마베릭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베릭도 묘하게 일그러 진 얼굴이었다. "저 엘프 계집애가 더 소중하다는 겁니까?" "뭐가 더 소중이냐?" 나는 주머니를 들쑤시면서 그놈의 기둥들을 찾았다. 금방 손에 잡히진 않 았지만 어쨌거나 한참 들쑤시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카나리안이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도 가혹합니까!" 그는 눈가가 시뻘게진 채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주먹을 쥐고 파르르 떠 는 몰골이 바람난 남편 다잡는 마누라 같은 모습이어서 조금 웃음이 나왔 다. 하지만, 점잖은 체면에 웃을 수가 없기에 나는 다정하게 대꾸해주었다. "가혹해?" "미, 미하라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도 그런 얼굴을 할 수 있습니까? 미하 라님은 평생동안 저 모습이어야 할 겁니다! 저런 화상은 낫지 않아요! 그 러, 그런데! 그런데!" 카나리안의 얼굴을 보다 말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기둥들은 잘 잡히지 않았다. 이 무한의 주머니는 보통 마법 아이템들 보다 결점이 많다. 무게가 많이 나간다는 것도 그렇고,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찾는 게 쉽게 잡 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물건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으면야 금방 찾을 수 있지만 물건의 모양새라는 게 어디 그렇게 쉽게 머릿속에 남는가. 오각형의 에메랄드를 생각하며 뒤진다고 해도, 오각형의 에메랄드가 어디 한 두 개여야 말이지. 오각형의 에메랄드가 박힌 물건부터 크고 작은 오각 형의 에메랄드가 줄줄이 잡혀 온다. 이렇게 되는 경우 한 개만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결국 한참동안 뒤적거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내 기억 으로 그 놈의 에메랄드는 주먹만한 크기였어도 사실은 손바닥만한 크기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무한의 주머니의 특성상, 결코 물건을 쉽게 찾을 수 가 없다. "저 엘프 계집애가 당신의 아내보다도 소중합니까?" 이번엔 마베릭놈이 불쑥 다시 물었다. 그 말에 시선이 일제히 내 뒤통수 앞통수에 와 박혔다. 나는 주머니를 뒤 지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미하라는 소중하지." "그런데 어째서?" 마베릭은 카나리안보다는 침착한 얼굴로 물었다. 그나저나 이 놈들은 어 째서 이렇게나 쓸데없는 데에 관심이 많은 것일까? 마베릭놈이 저렇게 묻 고 있을 때 공격한다는 그런 상상은 왜 못하는 거지? 그렇다고 내가 공격 해라 라고 외치면 저 놈은 재빨리 실드를 들어 칠 것 아냐? 좀 눈치 있게 구는 놈은 없단 말인가? 그래도 공격면에서는 쓸모 있는 게 휴런인지라 나 는 그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자 눈치 없는 휴런 놈은 내 눈짓을 받 고 내게 윙크했다. 커억. 느끼한 것. 저게 내 동생이라니. 혹시나하고 이번엔 조인족의 여왕 쪽을 돌아보자 여왕은 쓴웃음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예 그녀는 마베릭을 공격할 생각 조차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대체, 조인족의 여왕마마. 바로 그대의 족속들을 공 격한 놈들이 바로 저 놈이외다. 그런데 왜 저 놈을 공격도 않고 팔짱끼고 서 있는 거요? "왜 미하라님을 위해서 그것을 내놓을 수 없고, 에닌을 위해서는 내 놓을 수 있다는 건가요? 에닌이 당신의 아이를 낳은 미하라님보다도 소중하다는 겁니까?" 카나리안이 마베릭의 질문에 이어 또 질문을 했다. 아, 정말 미치겠네. 이 놈들 정말 그 따위가 뭐가 궁금하다는 거야? 공격 안 할거야? 나는 한숨을 피익 쉬면서 조인족의 여왕을 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 른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도 궁금히 여기고 있는 듯했다. 조인족은 우리들 과 생각이 많이 다른가? "미하라는 묘인족이잖아?" 어쨌든 나는 답해 주었다. 이런 소릴 하고 있을 정도로 우리가 여유가 있 었던 건지 묻고 싶었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대답해 주고 나는 주머니를 뒤 지다 못해 홱 아예 엎어 버렸다. "묘인족이라서 그녀를 구하지 않는다고요?" 눈치 없는 카산이 또 물었다. 정말 짜증나! 내가 슬슬 살벌한 시선을 풍기 기 시작하자 그제야 휴런이 끼어 들었다. "그야 미하라의 명예를 위해서지." "그게 명예랑 무슨 관련이........" 튜나가 삐죽거리며 휴런에게 다시 묻자 휴런은 어깨를 으슥했다. "싸움은 명예를 위한 거지. 삶은 명예를 위한 것이고 죽음도 명예를 위한 것이야." 휴런은 모처럼 그럴듯한 말을 한 뒤에 내가 물건 고르는 것을 어깨너머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떤 묘인족이 상대가 자신을 위해서 뜻을 굽힌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까? 어떤 묘인족이 그렇게도 쉽게 명예를 저 버릴까." "그렇게도 명예가 소중합니까?" 카나리안이 차가운 어조로 묻자 휴런은 의외로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명예란 이름값이다. 그것은 내가 도전에서 죽인 자들의 이름을 위한 이 름. 그들이 약하거나 비겁하지 않았다는 데 대한 증명. 내가 죽인 자들을 욕되게 하지 않겠다는 맹세." 휴런은 천천히 중얼거렸다. 녀석답지 않은 침울한 어조였다. "나의 명예는 내가 죽인 자들의 명예로 쌓아 올린 것이니까."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꽤 어색한 침묵이어서 나는 내 등뒤에서 내려 앉고 있는 그 침묵이란 놈을 두들기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지독하군요. 애정이라는 것은, 감정이라는 것은 명예든 뭐든 상관없다는 것 아닐까요? 미하라님이 정말 죽었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이 될까요?" 카나리안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나 엘프랑 같이 다니기 싫어. 지금 이 상황이 애정과 감정에 대한 고찰, 혹은 묘인족의 명예관에 대한 상고(詳考) 따위의 주제를 가질 시점이냐? 나는 화가 나서 마구마구 주머니를 뒤집고 흔들어댔다. 그러자 물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한 무더기, 두 무더기....... 카산 키 만한 황금과 보물들이 서 너 무더기쯤 생겨나기 시작하자 이제야 모든 시 선은 이쪽으로 쏠렸다. 역시 묘인족에 대한 고찰보다는 보물에 대한 고찰 이 훨씬 더 매력적인 게야. "대, 대체....." 뒤에서 카산이 더듬거렸다. 주머니 안에서 쏟아지는 것들은, 말 그대로 나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몇 백년이나 세월이 지난, 오래된 금화들과 은화들을 비롯해서 땅의 엘프 들이 진상해온 보석들과 고대의 보물들. 그 옛날 아리따운 엘프 아가씨에 게서 받은 머리칼로 꼬아 만든 활과, 어떤 드워프를 위협해 만든 황금으로 만든 가구들. 또,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딘가의 옛 신전에서 끄집어 내 온 보석들과 조각상들. 옥으로 만든 베개며 침대, 거기에 화려무쌍한 옛 여 신의 축복이 어린 목걸이와 귀고리. 땅의 엘프에게서 받은 그놈의 지긋지 긋한 불노불사의 관이며 축복의 성배등 그 외에도 잡다하게 시대를 초월한 갖가지 재화들이 짜랑짜랑 소리를 냈다. 휘황찬란한 보석과 황금들이 줄지 어 쏟아져 나오자 옆에 앞에 뒤에 있던 엘프들 마저 입을 저억저억 벌렸 다. "꺄아! 쿠베린, 당신 부자야?" 옆에서 튜나가 큰 소리를 내질렀다. 나, 부자인 거 몰랐냐? "미, 믿을 수 없어! 그렇게 부자이면서 쪼잔하게 의뢰금이니 뭐니 해서 꼬 박꼬박 돈을 받아 챙겼어? 정말 치사하다!" 튜나의 말에 동조하는 엘프들의 잡담을 무시하고 나는 할 일에 열중했다. 허어, 그러니까 사실 나는 돈에 연연하는 게 아니라구. 어디까지나 나는 성 의표시를 받은 거라니까. "저기, 그거 혹시 마법석 아닙니까?" 옆에 있던 카나리안이 쭈그리고 앉아서 내가 꺼내 놓은 보석 중 하나를 가 리켰다. 녀석, 보석을 보더니 금방 고찰 따위 걷어 치웠군. 보석들이 수북 히 발 밑에 쌓여 있었기 때문에 어떤 것인지 몰라서 나는 아무렇게나 대답 했다. "뭐, 그럴걸." "이렇게나 마법석이 많다니. 이건 마법 무구 아닙니까? 마법을 싫어하시 는 게 아니었습니까?" 녀석은 주먹만한 금강석이 박힌 보검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검신이 푸르 스름한 빛을 내는 그 보검은 대체 어디서 주워 왔는지 기억도 안 난다. 틀 림없이 그 금강석이 마음에 들어서 주머니에 넣어 놨던 것 같다. "아? 그거? 그 금강석이 예뻐서." 내 대꾸에 그는 더 이상 할 말을 잊은 듯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그 옛날 마왕들이 보물 모으기를 즐겼다더니......" 녀석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참을 고르던 나는 마침내 대굴대굴 굴러다니는 일곱 개의 정령석을 찾아냈다. 그 정령석은 정말 일곱 개가 한 세트인지 한꺼번에 손 안에 잡혔다. "그것입니까? 주십시오." 마베릭이 한 걸음 다가서기 전에 나는 정령석을 쥔 채 말했다. "나와라."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올라왔다. 그리고 눈 앞은 완전히 휘황찬 란한 빛으로 물들었다....가 아니고 그저 순식간에 시야가 허옇게 변해버렸 다. 그 때와도 같았다. 다른 것은 나만이 아니라 내 주변에 있던 모두가 한 꺼번에 같이했다는 것일 뿐. 쓰러져 있던 에닌, 날고 있던 조인족은 물론,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다크와 듀나시까지 함께였다. 심지어는 마베릭마저 도 그 엽기적인 모습으로 같이 있었다. "으아!" "뭐야?" "고, 공격이냐!" 발작하듯이 엘프들이 외치고 조인족들이 안절부절 소리를 질러대는 순간 휴런은 갑자기 손톱을 꺼내들어 허공에 대고 그어댔다. 공간이라도 찢겠다 는 건지 혹은 놈에게만 보이는 어떤 적이 있었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 "진정들 해." 내가 점잖게 말해줄 때까지 녀석들은 허옇고 아무 것도 없는 공간 안에서 버벅거리고 있었다. 허기야, 이 공간이라는 게 내가 편한 것이지 녀석들에 게 편한 것은 아니었는가 보다. 녀석들은 시퍼렇다 못해 허옇게 질린 낯으 로 나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렇게 허옇고 아무 것도 없 는 공간에 툭 떨어지면 다들 놀라는 게 당연한 것인가? "별 거 아니니까 입좀 다물어. 시끄러워 죽겠다." 내 말에 다들 바르르르 떨리는 입술로 침묵했다. 케엑, 죽겠구만. 마베릭 놈을 보는 동안 시선이 맨날 주둥이로만 몰리니. 이것도 심각한 문제로다. "안녕하세요. 쿠베린님." "안녕하셨어요? 나의 왕?" "안녕하세요. 사랑스런 분." 갑작스레 일곱 명의 미녀가 일제히 나에게 다가서자 일행들은 일제히 입 을 저억 벌렸다. 그녀들은 전과 달리 상냥하게 내 어깨에 매달렸다. 어떤 여자는 내 허리에 팔을 감았고 두 여자는 내 팔뚝을 끌어안았으며 작은 소 녀―아, 나도 이제 슬슬 취향이 바꾸려는가―는 내 목에 대롱대롱 매달렸 다. 그리고 다른 여인들은 홋홋 웃으며 내 뺨에 입술을 대었다. 머, 멋지다. 잠시 동안 나는 이 아리따운 여인들의 환대를 받으면서 주변 을 잊었다. 시끄럽고 지저분한 모든 것들과 잠시 안녕을 고하면서 이 사랑 스런 여인들에게 나의 넓은 가슴을 아낌없이 보여주어야지. "잘 있었어? 내 귀염둥이들?" 내가 멋진 미소를 지어 보이자 여자들은 일제히 두 눈을 반짝이며 환호했 다. "꺄아! 불러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정말 만나고 싶었어요! 나의 왕!" "아앙, 보고 싶었어!" 새침해 보이는 한 여인―이거, 틀림없이 이에르네를 닮은 화신이다―은 내 옆구리를 살짝 꼬집으며 눈을 흘겼다. 미트라를 닮은 소녀는 동그란 엉 덩이로 나를 슬쩍 치기까지 했다. 아, 정말 내가 이런 모습을 바랬단 말이 지? 그래, 맞아. 이, 인정하도록 하지. 나, 취향 바뀌었어. 조금 빈약해도 괜 찮아. 금발의 미인은 내 입술에 키스하면서 달콤하게 속삭였다. "다시 보게 되어 기뻐요. 쿠베린." "응, 나두." 그녀를 으스러지듯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들이 일제히 질투 어린 음성으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너무해! 너무해! 그녀에게만 키스해 주고!" "나두 해줘요!" "나두 해줘요!" 여자들의 항의에 나는 견디지 못하고 그녀들에게 일일이 키스를 해주기 시 작했다. 그러나 그 달콤한 장정은 금방 끝났다. 옆에 서 있던 튜나가 히스 테릭한 비명을 올렸던 것이다. "그, 그만 좀 해!"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상큼하게 웃어 주었다. "질투하지 마." "죽어버렷!" 금발의 그녀는 내 오른 쪽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고, 흑발의 그녀는 왼쪽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소녀는 내 무릎 위에 올라 앉아 있었고, 근사 한 허벅지를 다 드러낸 요염한 빨강머리의 아가씨는 내 바로 앞에서 보란 듯이 길게 엎드려 있었다. 내게 먹을 것을 연신 권하는 자상한 아가씨와 녹색머리칼의 미녀는 녹아들 것 같은 미소를 지은 채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그녀들이 움직일 때마다 팔이고 등이고 어깨고 허벅지고 간 에 보들보들한 감촉이 몰려들어와 나는 정말 이 정령석을 마베릭놈에게 줄 마음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아, 역시 이 것들도 나에게 와서 정말 즐거워하고 있잖아? "............세상에." "이건, 마, 말이 안 돼! 어째서 형에게만 여자들이 달라 붙냐고! 나도 매력 이라면 한 매력 한단 말이야!" 휴런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항의하는 그 한 편에서는 카나리안을 비롯한 엘프들이 일제히 얼굴을 시뻘겋게 한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녀 석들의 질투 어린 그 눈빛을 무시하고 나는 부드럽게 내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사랑스런 아가씨에게 키스를 던졌다. "........정령석으로 여자를 만들어서 이러고 노는 놈은 아마 저 놈이 처음이 아닐까?" 이를 갈면서 튜나가 중얼거렸다. "아닐걸. 남자란 다 그런 거야." 뭔가 달관한 표정을 지으며 휴런이 카나리안과 카산등을 훑어보자, 그들도 동의하는 지 시뻘건 얼굴로 침묵했다. 그래, 할 말 없을 걸. 나는 턱을 괸 채로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물론 내 입가로 과일을 까서 권 하는 아가씨의 손등에 키스하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게 키스를 받더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귀, 귀여운 것. ".........당신은 언제나 그래." 갑자기 이 사랑스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음산한 목소리가 터져나왔 다. 고개를 돌려보니 은근슬쩍 머리통을 제 자리에 갖다 박아 놓은 마베릭이 이를 갈고 있었다. 녀석도 사내라고 나의 이 미녀군단을 보고 질투를 억누 를 수가 없는지 어울리지도 않게 분홍 입술을― 끄어어! 또 분홍 입술이라 고 했어!―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그 퍼런 눈깔을 바짝 치켜 뜬 녀석은 주먹을 휘두르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모든 일이 당신에겐 심각하지 않은 건가! 대체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사 는 거냐!" 갑자기 녀석이 심각하게 묻는 탓에 주변이 갑자기 심각한 분위기로 돌변 했다. 나에게 항의하던 엘프들도, 조인족들도 휴런도 모두 갑자기 심각해진 마베 릭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두 눈깔 부릅뜬 건방진 녀석에게 피식 웃어 보였다. "나야 내 생각으로 살지. 넌?" "나, 나는!" 녀석이 바르르 떨었다. "남이 한 마디 하는 것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주제에, 남이 뭐하고 사는 지까지 참견할 참이야? 너는 존재의 부정을 당했다며? 그래서 넌 부정당했 다며? 그놈의 존재의 부정에 대해서 내가 기나긴 설교를 해 줄 수도 있지 만, 어차피 넌 부정당한 놈이니 상관없잖아? 그지?" "그, 그..........!" "냅둬. 나 이렇게 살게." 마베릭은 부들부들 떨었고, 아리따운 아가씨는 아리따운 손길로 내 입안에 달콤한 포도알을 밀어 넣었다. 나는 포도알을 씹고 그 씨를 그를 향해 뱉 었다. 포도씨에 얻어맞은 마베릭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가장 불쾌한 것은, 남의 척도로 나를 재는 것이다. 그런 말 못 들어 봤 나?" 마베릭은 침묵했다. 그는 웃음이 사라진 살벌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생소해 보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잔뜩 성이 난 어린애 같 은 모습이어서 굉장히 어울렸다. 결국은 다 그렇다. 결국은 성이 나서, 질 투가 나서 견디기 힘들어하는 어린애의 어리광이다. "이, 공간은 뭡니까?" 마베릭이 무뚝뚝하게 다른 것을 질문했다. "내 공간. 내가 만든 공간." "........그 정령석의 힘입니까?" "그래." "그 정령석은 당신을 주인으로 인정한 것입니까?" "뭐, 그럭저럭 그런 셈인가?" "그래, 그 정령석으로 여자나 만들어 노는 게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이었습 니까? 우습군요." 피식 웃는 녀석에게 마주 웃어 주고 나는 포도알을 집어 던졌다. 그것을 슬쩍 피해낸 녀석은 빈정거리는 웃음을 머금은 채 내 주변에 있는 여자들 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일곱 명이군요. 이 여자들이 바로 정령석입니까? 신의 파편치고는 굉장 히 실망스러운 모습이군요." "이 아름다운 모습이 왜 실망스럽다는 거냐?" 내가 묻자 녀석은 코끝을 치켜 올린 채 아니꼬운 자세로 지껄였다. "고작해야 당신의 쾌락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 아닌가요? 쓸모 없는 계집 의 몸뚱아리로 모습을 드러내다니 신의 파편이란 이름이 아깝네요." "그럼,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냐?" 내 질문에 녀석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역시 네 놈의 취미는 그런 것이었군. 이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고도 쓸모 운운하다니, 역시 네 놈은 남자를 밝히는 것이었군." 나의 현명한 판단에 감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그들은 나 의 이 판단에 감격한 듯 박수를 쳤으며 모두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몇은 이제야 마베릭놈의 그동안의 행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납득했으 며 몇몇은 안타깝다는 시선과 함께 야리꾸리한 시선도 함께 던졌다. "조금, 가끔은 진지해지는 게 어떻습니까?" 으드득 소리를 내면서 마베릭이 일그러진 웃음을 머금었다. 녀석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더니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자신의 앞에서 길게 누워 있 는 아리따운 아가씨에게 경멸이 담긴 냉혹한 시선을 던졌다. 녀석은 사랑 스런 아가씨를 보는 게 아니라,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돌멩이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에 우리 일행들은 <역시!>라는 감탄성과 함께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석이여, 그대들의 힘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소원하면 되는 겁니다." 앞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소원?" "순수한 바램이 우리를 만듭니다." 그녀는 그렇게 대답한 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 빛에는 정말로 나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면 당장 저 하늘하늘한 옷을 벗기고 그대로 쓰러지고 싶었지만 주변에 눈이 많으니 참는다. "바램?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서 신의 귀였던, 그러니까 고양이의 모습 이었던 그대들이 이런 모습이 되는 것인가?" 그가 그렇게 질문을 던질 때였다. 갑자기 휴런이 그의 앞에 나서더니 길게 말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 대로 그의 턱을 주먹으로 내갈겼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놀랍게도 마베 릭은 붕 떠오르더니 몇 메테르나 밀려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핏방울과 함 께 바닥에 대굴대굴 구르던 마베릭은 경악으로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들 었다. 그 얼굴에서 몇 개의 이빨이 두두둑 떨어져 내렸지만 그 웃기는 모 습을 보고 웃는 작자는 아무도 없었다. "...........설마!" "어라라? 정말 먹혔네? 여기가 쿠브의 공간이라 하기에 혹시나 했더니 역 시나네!" 기분 좋은 듯 휴런이 핫핫 웃었다. 녀석은 건방진 포즈를 취하며 나를 돌 아보았다. "여기에선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거지?" "어?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내가 어리벙벙해 묻자 휴런은 갑자기 잘난 척 가슴을 펴고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쿠브형은 마법을 싫어하잖아. 그런데 자기 공간에 마법을 용납할 리 없는 건 당연지사 하니겠어? 우하하하하하!" 오옷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잔뜩 일그러진 마베릭의 얼굴로 쏠 렸다. 마베릭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쏟아지는 자신의 이빨을 들여다보았 다. 낭패한 몰골이 된 녀석은 비틀 일어서긴 했지만 그 다음에는 기다렸다 는 듯 카산의 주먹을 받아야 했다. 오, 카산. 엘프사(史)에 길이 남을 주먹 이여. 그대 이름은 카산. "이, 죽일 놈! 이 사악한 자여! 에닌을 살려놔라!" 퍽퍽 소리가 정말로 무안할 지경이었지만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득 나는 에닌이 생각 나 고개를 돌렸다. 에닌은 여전히 쓰러져 있었다. "여기서 그 진을 해제할 수는 없습니다." 내 마음을 읽은 듯, 마미의 모습을 한 여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 말에 놀란 듯 카나리안이 끼어 들었다. "어째서요?" "이 공간 안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자는, 변함이 없습니다." "뭐?" 카나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그 증거로." 여인은 하얀 손을 들어서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오는 다크시온을 가리켰 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다크는 마치 마법진이라는 것이 없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일그러졌던 얼굴은 평소처럼 담담하게 돌아 왔으며 부러졌던 팔뚝도 다시 온전했다. 침을 흘리던 그 몰골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당당한 그 자세에 옆에 있던 자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하지만, 다크시온의 회복과는 달리 듀나시는 여전히 너덜너덜 했다. 팔뚝이 고, 어깨고 부러진 상태로 다리도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의식도 그다 지 또렷하지는 않은 듯했다. "왕." 다크시온은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멀쩡한 채로 너덜거리는 듀나시를 부축한 채 내 쪽으로 걸어 왔다. 마침내 녀석은 내 앞까지 걸어 오더니 한숨을 푸욱 내 쉬며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이, 이 녀석은 왜 그래?" 내 질문에 다크는 축 늘어진 듀나시를 내 발치로 던졌다. 내가 듀나시를 발끝으로 툭툭 치자 듀나시는 굴욕적이라는 듯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그 진이라는 게 드래곤피어라고 했습니까?" 담담한 어조로 다크가 널브러진 마베릭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래. 어때?" ".............짜증나더군요." 다크는 그렇게 말하고는 정말 짜증스럽다는 듯 카산에게 계속 얻어맞고 있 는 마베릭을 바라보았다. 카산은 다크와 듀나시가 제 발로 걸어 나오는 것 을 보고는 항의하듯 내게 소리쳤다. "왜 에닌은 안 일어나는 거예요?" 튜나는 축 늘어진 에닌의 몸을 부축하고 있었다. 이미 마법진이라는 게 무력하다는 게 밝혀진 지금, 주저는 잠깐이었다. 가 장 과감한 튜나가 에닌의 몸을 부축해 안고 카나리안의 앞으로 데려다 놓 았다. 카나리안은 그녀의 상태를 살피면서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그 모습 을 보고 카산은 재빨리 에닌의 옆으로 다가앉았다. 그녀는 파리한 얼굴로 여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숨결은 가늘어 심장만이 간신히 뛰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포기했으니까요." 마미의 모습을 한 여자는 그렇게 대답해 주었다. 온화한 얼굴에 전혀 어울 리지 않는 냉정한 어조였다. "무슨 의미죠?" 카나리안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에닌이 그 놈의 드래곤 피어에 저항하려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못 일 어난다는 의미야." 내가 대신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건 쿠베린님의 공간이라면서요? 그렇다면 뭐든 쿠베린님이 바 라는 게 일어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격렬하게 카산이 끼어 들었다.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쿠베린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지요. 쿠베린님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쿠베린님 본인에 한 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녀 가 어떤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이 공간 안에서는 그녀는 깨어나지 못합 니다." 아직도 거친 숨을 되새기면서 다크가 조용히 물었다. "그건, 이 공간만 아니면 그녀를 살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냐?" 그 질문에 나는 다시 보석들을 돌아보았다. 마미를 닮은 여인은 잠시 동안 침묵하더니 뭔지 쓸쓸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그렇게되면? 저기 있는 마베릭 놈도 다시 마법을 회복하게 되나?" 내 질문에 마미는 어깨를 으슥했다. 정말로 살아 있는 여자 같았다. "그렇겠죠?" "그럼 내가 여기서 저기 있는 저 녀석의 마법력을 없애 달라고 소원한다 면?" 그 질문에 마미는 웃었다. "한 번에 한 가지 씩입니다. 나의 왕." "그럼 내 소원이 한 번에 서너 가지를 한꺼번에 들어달라고 하는 소원이 라면 어떻게 되지?" 그 말에 보석들은 잠시 침묵했다. 내 눈에는 그녀들이 서로 시선을 마주 하며 의논을 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어쨌건 이들은 살아 있는 자들은 아니니까. 아니지. 가만 있자, 살아 있는 자들은 아니더라도 내가 인격을 부여했으니 까 이들은 내가 알고 있는 그녀들과 같은 인격을 가지고 있는 셈이 되나? "쿠베린님, 하지만 당신의 소원은 접수되지 않습니다."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마미의 얼굴을 한 보석이 입을 열었다. 뭔가 묘한 시선으로 여자들은 일제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에? 어째서!" 내가 놀라 되묻자 그녀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쌀쌀맞은 이 에르네의 보석은 사정없이 내뱉었다. "당신은 절실하지 않으니까요!" 안녕들 하셨습니까? --; 모처럼 자.주. 올리게 되었습니다. 기쁘시죠? 기뻐해 주시니 감사합니 다.(뻔뻔) ;; 얼마 전 다리를 삐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일주일 자리 보전하고 있는 중 입니다. 애 엄마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엉덩이 붙이고 쉴 수도 없는 입장인 지라 쉽게 나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리도 다쳤으니 글이나 써라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어디 쉽습니까? 다리가 다쳤으니 몸도 마음도 모 두 다쳐(;;) 그저 쉬고 싶은 마음일 따름입니다. 그건, 그렇고 얼마 전 인피니티 백팩에 관한 저의 잡담으로 인하여 수많 은(;) 멜과 메모를 받았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디모나 죽는다고. 그건 저 도 압니다.;;; 그저 해 본 말일 뿐입니다. 혹자께서는 제가 디모나 살해를 꿈꾸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분도 계십니 다만 저는 디모나를 죽일 정도로 미워하지 않습니다. 디모나. 예쁘지 않습 니까?;;; 맨날 뽀얀 피부의 백색미인만 히로인하란 법 있습니까? 까무잡잡 한 미녀가 히로인하면 안 됩니까? (뭔가 옆으로 새는 군....;;) 그건 그렇고, 한.성.욱님. 삐지셨다니 죄송스럽습니다. 저는 '해외동포 여러 분'이란 단어에 님을 그리며 글을 쓴 것인데 님께서 그리 곡해하시니 슬픕 니다. 그리고 jbg0130님, <수현아빠>께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지연님, 항상 감사드리고요. 박경용님, 무한의 주머니에는 생물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상하거나 썩는 것도 못 들어갑니다. 만약 들어가면 보 존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먹을 것을 거기에 넣고 다니지 쿠베린이 시체 뜯 어먹겠습니까?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뭔가, 역시 새고 있다.....;;) ------------------------------------------------------------------------------ 제 목:[쿠베린] 제 22화 의 지 8 관련자료:없음 [40448] 보낸이:이수영 (ninapa ) 2001-09-21 17:18 조회:3106 KUBERIN...... 빛을 향해 걷는다 그 빛에 눈이 타고 몸이 타오를 지라도 걷지 않으면 안될 길이 있다 8 "당신은 진실로 바라고 있지 않습니다. 절실하게 원하는 게 없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쌀쌀맞은 어투였지만 어딘가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묘하게 배려를 느끼게 하는 어조였다. "그럼, 카산. 네가 이 보석들의 주인이 되라." 나는 뒤에 서서 얼어붙어 있는 카산에게 말했다. 카산이 어물거리며 내 앞 으로 나서자 나는 보석들에게 다시 물었다. "이 아이가 보석의 주인이 된다면, 어때? 이 아이가 소원하면 이루어 줄 텐가?" 여인들은 차분한 눈으로 카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자들의 시선을 받자 시뻘게진 얼굴로 낮게 애원했다. "에, 에닌을 낫게 해 주세요!" 그 말에 보석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눈 앞이 샛노랗게 변했다. 아니, 황금색의 광채라고 해도 좋을 정도 였다. 너무나 갑작스런 변화에 눈이 적응을 못했는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빛으로 가득 차 사방을 볼 여유를 주지 않는다. 눈이 다 아리구만. 주변을 가득 채운 그 빛은 시야를 완전히 가려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빛에 휩싸인 채 나는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 진실로 바라는 게 없다.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없다라고? 그것은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 나는 일렌이 다시 살아 돌아오길 바란다. 그녀의 입술에서 나를 사랑한다 는 말을 듣기를 원한다. 어릴 적 드물게도 느꼈던 두려우면서도 가슴 벅찼 던 감정― 동경과 존경, 경외심을 담아 나의 왕이 살아 돌아오길 바란다. 내 손톱에 갈가리 찢기었던 형제들이 돌아오길 바란다. 지금 내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같이 드잡이질을 하며 낄낄대길 바란다. 사랑스런 나의 여 자들이 죽음에서 눈을 뜨고 일어나 웃음 짓기를 소망한다. 파란 내 아들이 대지의 여신의 품안에서 돌아오길 바란다. 가련한 나의 공주님이 두 팔 벌 려 내게 미소하길 바란다. 까불기만 하던 내 귀여운 딸이 내 품안으로 돌 아오길 바란다. 바란다. 바란다. 바란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슬픔. 이것도 바램이 아니던가? 어째서 내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하는가? 왜 내 소원은 거부당하는 것일까? "당신은 남에게 소원을 빌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지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보석들이 말했다. 전처럼 와글와글 떠드는 것 같은 목 소리가 아니라, 마미의 목소리였다. 그녀들은 마미의 목소리로 나직나직하 게 속삭였다. "<납득>하고 <이해>하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납득하고 이해한다라......." 나는 빛 속에 파묻힌 채로 킬킬 웃었다. 아아, 웃을 수밖에. 더 이상 내가 뭘 어쩌랴. "아실 거예요. 쿠베린님, 나의 왕, 나의 주인님." 그녀는 상냥하게 속삭였다. 그 상냥한 속삭임이 더 우스웠다. 나는 배를 잡고 한 참 웃었다. 너무 웃다보니 배가 아프고, 배가 아프다 보 니 슬슬 기분이 나빠졌다. 아, 그래? 그랬어? <이해>하고 <납득>해서 미 안해. 정말 미안하다구. "카산이 주인이 되는 거 아니야?" "소원의 주인이 되는 거지, 우리들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랍니다." 그녀는 내가 킬킬거리는 것에도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아, 그렇지. 동요할 이유는 없지. "우리들에게는 주인이 없습니다. 소원의 주인이 있을 뿐이지요." "그럼, 왜 소원도 없는 내가 너희들의 주인이 되는 거야?" 나는 눈을 감은 채 속삭여 물었다. "그야, 당신이 소원이 없는 자이니까요." "당신이 두 번째의 우리들의 주인." "소원이 없는 자." 그녀들은 동시에 속삭였다. 옥으로 만든 종이 일제히 흔들리는 소리로 영롱하고 아름답게 그녀들이 속 삭였다. 시냇물이 흐르는 것처럼 청량하고 수정처럼 맑았다. 그래, 너희들 은 그렇게 속삭이는 구나. 지나치게 아름답게, 그리고도 잔인하게. 갑자기 시야가 타악 소리가 나는 것처럼 트였다. 초록과 검은 색, 누런 색등이 마구 엉킨 곳, 숲이다. 아니, 낮은 관목들로 이루어진 나지막한 수풀이었다. 덕분에 멀리까지 자알 보였다. 바위산과 흐 트러진 잡목들을 멍하니 지켜보다 나는 여기가 그 놈의 신전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박살난 대리석 기둥들이 군데 군데 보였다. 이름 모를 하얀 꽃과 노란 꽃이 어우러진 잡목림에서 나는 머리를 한 번 흔들었다. 이게 처음도 아닌데 머리가 다 띵하구만. 기척을 뒤늦게 느끼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쪽으로 눈물로 엉망이 된 카산이 에닌을 안고 있는 게 보였다. 에닌은 눈을 뜨고 멍하니 카산의 품안에 안겨 색색거리며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그 옆으로 아직도 어리벙 벙한 얼굴을 한 엘프들과 잔뜩 긴장한 채 독이 오른 눈빛을 번쩍이고 있는 조인족들이 있었다. 그들 중 엘레가 튜나를 부둥켜 안은 채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게 보였다. 이 와중에도 끔찍이도 챙긴다. 그 악다구리같은 계집애 를. 어쨌거나 그들은 주변이 바뀌자 눈을 번쩍거리며 경계하고 있었다. 듀나시. 듀나시는 다크의 부축을 뿌리치고 혼자 서 있었다. 아직 다쳐서 온 몸이 얼룩덜룩했지만 제정신을 차리기는 했는지 눈은 다시 또렷해졌다. 하지만, 얼굴 전체에 남은 그 기묘한 패배감을 보며 나는 싸늘하게 물었다. "미하라는?"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다크가 듀나시 대신 대답했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자신이 걸치고 있던 옷가지를 들어 미하라를 둘둘 감고 있었다. 담담해 보이지만 그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번져 있었다. 문득 나는 다크가 정말로 드물게도 따스한 성품 의 소유자란 것을 새삼 깨달았다. 성년 전에도 성년 후에도 저렇게 변하지 않는 녀석은 정말로 드물다. 녀석은 성격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너무나 묘인족다웠다. 듀나시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악문 채 내 시선을 피했다. 그 얼굴 을 보고, 나도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요?" 카나리안이 두리번거리면서 물었다. 문득 카산이 아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내쪽을 바라보았다. "쿠베린님?" 나는 주먹을 천천히 펴 들었다. 내 손아귀 안에는 일곱 개의 정령석이 고 스란히 놓여져 있었다. 소원이 없는 자. 그래서 정령석의 주인이 되는 자. 정말 꽤 웃기는 짓거리 아냐? "그걸 내 주시지요." 나는 마베릭을 힐끔 보았다. 여기저기 터진 몰골이었지만 녀석은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상처도 잠시 뿐이었다. 터지고 찢어지고 멍이 든 그 상처들은 우리들이 보는 가운데 우아할 정도로 조용히 아물기 시작했다. 찢어진 상처는 살과 살들이 스스로 어우러져 아물었고 멍이 든 살갗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 새 말짱해진다. 오로지 녀석이 다쳤었다는 증거는 핏자국뿐이었는데 그것 도 그가 옷자락으로 스윽 문질러 버리자 금새 멀끔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마, 맙소사! 인간이 아냐." 옆에 있던 튜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엘프들은 이 비상식적인 일에 경악 하며 뒤로 물러섰다. 보지 않아도 녀석들이 얼마나 역겨워하는 지 뻔했다. "이제 놀아 드릴 시간은 없습니다. 내 놓으십시오." "이 미친 자식!" 그런 그를 향해 튜나가 발끈해 활시위를 당기려했다. 하지만, 마베릭은 그 녀 쪽은 보지도 않은 채 한 손을 휘둘렀다. "우앗!"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활시위를 당기던 튜나가 뒤로 나뒹굴었다. 핏방울이 튀며 그녀의 앞섶이 길게 베어졌다. 그런 그녀를 재빨리 감싸 안 은 것은 엘레였다. 엘레는 길게 날개를 빼 든 채 튜나를 안아 들고 있었다. 만약 그가 조금만 늦었다면 튜나는 반토막이 나고도 남았다. "이제 장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쿠베린님, 그걸 주시지요. 아니면 아무리 당신 측근이라고 해도 사정없이 죽여버리겠습니다." 녀석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말했다. 녀석은 오로지 나만을 직시하고 있었다. 마치 다른 놈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보여 옆에 있던 휴런등 은 화를 냈다. "너, 이 자식!" 휴런이 발작하듯 주먹을 다잡자 마베릭은 하얀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휴 런이 악을 질러도 여전히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휴런따위 는 알 바도 아니고 관심도 없다는 듯한 태도여서 꽤 열 받게 하는 데가 있 었다. "묘인족은 아무리 죽여봐야 당신을 움직일 수 없으니, 다른 것을 건드려 볼까요?" 그의 손 안에서 시커먼 불길이 일렁였다. 손바닥 안에 떠 오른 그것은 불 길한 내음을 풍기며 독사처럼 도사렸다. 그는 파란 눈빛을 검게 물들이면 서 시익 웃었다. 내게 보내는 그 경고의 눈빛을 맞받으면서도 나는 움직이 지 않았다. 그러자, 마베릭은 갑자기 내게서 시선을 떼고 생각났다는 듯 고 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카산과 엘프들이었다. 카산은 에닌을 안은 채 흠칫 뒤로 물러서며 실드를 펼쳤고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를 화내게 하지 마십시오." 마베릭은 조용히 말했다.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만 동동 뜬 녀석은 가면을 뒤집어 쓴 것같은 무표정으로 속삭였다. "정령석을 주십시오." "절대 주지 마!" 튜나가 악을 질렀다. 그녀는 정령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듯 잔뜩 굳어진 얼굴이었지만 활을 거두지는 않았다. 언제라도 당장 쏘아댈 듯 팽팽한 활 시위를 내내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에닌을 안고 있던 카산 도 이를 갈며 소리를 질러댔다. "절대로 건네주지 마세요! 우리들은 내버려 두시라구요!" 그 순간이었다. 그의 드러난 하얀 팔뚝이 갑자기 검붉은 얼룩으로 물들었 다. 아니, 물들었는가 싶은 순간 얼룩은 꿈틀거리며 튀어 나왔다. 돼지 내 장처럼 꾸불거리는 그것은 허공을 그대로 건너뛰어 카산쪽으로 달려들었 다. 카산의 실드에 부딪친 그 검붉은 것은 꿈틀거리며 키득거렸다. 말 그대 로 키득거렸다. 얼굴이고 몸뚱이고 구분도 안 가는 모호한 그 놈은 그저 꿈틀거리며 허공에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보이지도 않는 입으 로 키득거렸다. "허억. 어억." 몇몇의 엘프가 공포에 질린 신음을 터뜨렸다. "움직이지 마! 델카스타다!" 카나리안이 그렇게 외치는 순간, 그 시커먼 것은 카나리안을 향해 으르렁 거렸다. 그리고 검붉은 불길이 그의 몸을 그대로 덮쳤다. 파지직하는 거북 한 소리가 실드와 부딪쳤다. 불꽃과 불꽃이 색색으로 번뜩이는 그 모양은 보는 것만으로는 꽤나 어울렸다. 하지만 그 불꽃이 닿는 곳 주변이 온통 시커멓게 말라붙기 시작한다면 보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휴런이 갑 자기 카나리안의 옆에서 비켜섰다. "이게 뭐냐?" 그의 팔뚝에 튄 그 검붉은 불꽃은 아주 작았다. 하지만, 휴런의 팔뚝에 떨 어진 불꽃은 살아 있는 벌레마냥 그의 팔뚝 안쪽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피와 살이 튀기고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것은 휴런의 팔뚝을 그대로 꿰뚫었다. "우웃!" 물론, 그의 상처는 금새 피가 멈추기 시작했지만 눈꼽만한 그것이 드러낸 위력에는 다크와 휴런도 모두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공격은 오로지 엘프 들에게만 집중 될 뿐이었다. "실드가 그럭저럭 쓸만한 것 같군요." 마베릭은 흐응 하고 웃음지었다. 차가운 조소가 깃든 눈으로 녀석은 내쪽 을 돌아보며 상냥한 척 웃음을 지었다. "저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두시진 않겠죠? 그리고 내가 진심으로 싸우면 저들을 쉽게 죽일 수 있으리라는 것도 알고 계시죠?" 녀석은 키득거렸다. 그 키득거리는 얼굴 한 가운데는 음산한 어둠으로 가 득 차 있었다. 가면을 쓴 듯 하얀 얼굴과 빨간 입술만이 가운데 동동 떠 있는 것 같았다. "아아, 나는 마법이 싫어!" 휴런이 한탄하듯 외쳤다. 그는 갑자기 몸을 틀더니 마베릭을 향해 솟구치 기 시작했다. 그의 주먹이 마베릭의 실드를 후려갈겼다. 얼마나 새게 쳤는 지 물리적인 공격으로는 소리가 날 리 없는 실드에서 터엉터엉 하고 소리 를 내기 시작했다. 마베릭은 귀찮다는 듯 그를 흘긋 바라보더니 다시 내쪽 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실드를 거두지만 않으면 휴런은 그를 해칠 수도 없 었다. "젠장할!" 나는 휴런을 향해 조용히 명령했다. "뒤로 물러나." "형!" 휴런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상처난 팔뚝을 손톱끝으로 쓸어 내 더니 흥 하고 콧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어차피 엘프들의 곤란에 대해 그는 별로 참견할 마음이 없었는지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다. "하나도 재미없어!" 다크는 그런 그를 보고 쓴웃음을 짓고 있었고 휴런은 그런 그를 잔뜩 쏘 아 봐 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확실히 이 놈은 아직은 어렸다. 다크는 미 하라를 어깨에 둘러 멘 채로 내 뒤에 조용히 서 있었다. 마베릭에 대한 분 노가 크긴 하지만 나설 생각은 의외로 없어 보였다. 검붉은 어둠의 짐승―델카스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저것은, 킬트가 사 용하던 것이었다. 파괴와 죽음의 불꽃은 이계에서도 가장 소환하기 어려운 것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불꽃인 주제에 육식의 야수처럼 항상 으르렁거렸 다. 성질 더러운 저런 놈을 팔뚝에 봉인했다니. 마베릭놈도 확실히 보통은 아니다. 전에 내가 만났던 봉인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놈이었다. 델카스타가 길길이 날뛰며 카나리안을 공격하고 있는 동안 마베릭은 기묘 한 미소를 지은 채 카나리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실드를 펼친 자는 공격도 할 수 없는 법이긴 했지만 봉인수나 소환수는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 이니 다른 공격을 굳이 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델카스타는 갑자기 부르 르 떨더니 몸을 두 개로 나누었다. 그리고는 한쪽은 카나리안을, 한 쪽은 카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 맙소사!" 그 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또 한 번 부르르 떨자 놈은 각각 두 개의 몸 에서 또 두 개를 뽑아냈다. 그리고는 실드를 친 채 도사리고 있는 다른 엘 프들을 덮쳤다. "우왓!" 한 명의 엘프가 실드를 소진시키고 불꽃에 휩싸였다. "으아아아아아악!" 비명소리는 길게 이어졌다. 그의 전신은 검은 불덩이에 그대로 잡아 먹히 듯 시커멓게 물들었다. 으르렁거리며 킬킬거리는 그것은 작은 불꽃들을 사 방에 흩날리면서 비명을 지르는 엘프의 몸뚱아리를 그대로 녹여 제 몸속에 흘러 넣었다. "허억, 허억!" 갑자기 엘프 중 하나가 휘청거렸다. 바로 옆에 있던 자가 먹혀 버리자 공 포에 질린 듯했다. 그 순간 그를 향해 시커먼 불꽃은 녹은 치즈처럼 흐물 거리며 달려들었다. 그의 얼굴이 그 검은 불꽃에 휩싸이자 젊은 엘프는 미 친 듯이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비명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얼굴 전체에 휩싸인 검은 덩어리는 이 가련한 엘프를 말 그대로 얼굴부터 녹이기 시작 해 순식간에 전신을 먹어 치웠던 것이다. 비명과 공포에 휩싸인 엘프들을 향해 카나리안이 고함을 질렀다. "정신들 차려!" 우는 자들도 생겨났다. 카산과 튜나, 몇몇 엘프들은 실드를 펼치면서도 시 퍼런 얼굴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들 뿐이 아니었다. 숲은 그 검 은 짐승이 내뱉는 열기와 증오로 순식간에 시커멓게 죽어가고 있었다. 조인족의 여왕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날개를 반만 편 채 내 뒤쪽에 공중에 정지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둘러싼 조인족의 전사들도 그 저 조용히 공중에 떠 있기만 했다. 엘레만이 불안한 듯 튜나의 주변을 어 슬렁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공격은, 우습게도 오로지 엘프들에 게만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베릭." 내가 입을 열자 시선이 고요한 조인족들의 시선도 일제히 내 쪽으로 쏠렸 다. "이것으로 무엇을 소원할 테냐?" 내가 조용히 묻자 마베릭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뭐라구요?" "무엇을 소원할 거냐고 묻는 거다. 어차피 넌 이 일곱 기둥의 주인이 될 것 같지는 않아." "아아, 그렇습니까? 꽤 불쾌한 추측이네요. 제가 왜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거지요?" "질문에나 대답해라. 애송아." "대륙의 통일." 녀석은 주저하지도 않고 말했다. 태연자약한 그 면상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요." 녀석은 갑자기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마주 끄덕였다. "나의 군주를 위해서 대륙을 통일하고자 합니다. 어때요? 이 대륙의 통일 은 대륙사상 유래가 없지 않았나요? 엘프, 드워프, 고왕국, 그리고 다른 아 인족들과 동방교국까지 포함한 대 제국의 완성. 정말 근사하지 않습니까?" "그게 근사해?" "물론이죠, 무릇 태어났다면 대망(大望)을 품어 봐야 하지 않겠어요? 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군주는 역량이 있구요." 녀석은 갑자기 묘하게 삐죽거리며 웃었다. 덕분에 붉은 입술은 하얀 얼굴 사이에서 너무나 비정상적으로 튀어나올 듯 기괴해졌다. "우리들의 그랜드 마스터께서도 이 세상을 정복하겠다고 하셨었죠. 그럼 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털 빠진 개새끼처럼 추욱 늘어져 있단 말입니다." 녀석은 피식피식 웃었다. "그의 사랑스런 아들을 위해서 말이지." 내가 그의 말에 대꾸하자 마베릭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의 얼굴 은 마치 한 번 쥐었다 편 종이조각처럼 잔뜩 구겨져 있었다. "네에, 확실히 그렇지요. 자신의 병약한 아드님을 위해서 우리들을 배신하 셨지요." "그리고 너는 그를 직접 공격할 수도 없지?" 내 말에 그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킬트는 너희들이 카나리안을 공격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지? 그렇지?" 마베릭은 부르르 떨던 손을 꽉 쥔 채 나를 쏘아보았다. 그 얼굴에 담긴 증 오는 너무 확연해서 오히려 순수하다고 할 지경이었다. 녀석은 음산한 그 늘을 얼굴에 깔고 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거짓말입니다." "킬트는 저 애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너희들에게 무슨 짓을 해둔 게 분 명해. 저 애를 향해 너는 공격을 할 수 없어. 그렇지?" 내가 카나리안을 가리키며 말하자 마베릭은 입술을 깨물었다. 새파랗게 타 오르는 증오의 눈빛은 여전했지만 잔뜩 구겨졌던 그 얼굴은 차츰 나아졌 다. "나는 당신이 싫습니다." "언젠 좋다며?" "나는 당신이 싫습니다." "누구든 자기보다 잘나면 싫어지는 거야." 내 대꾸에 녀석은 피식 웃었다. 슬슬 머리가 식는 모양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묘인족의 임금님. 하지만 직접적으로 공격은 못해도 그 를 죽일 수는 있습니다." 마베릭은 하얀 손가락을 들어 카나리안을 공격하고 있는 델카스타를 가리 켜보였다. "저 놈을 봉인하는데 정말로 애 먹었지요." "칭찬해 줄게." 내 말에 녀석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미소 띈 얼굴로 내게 재촉했다. "안 주실 겁니까?" 나는 손안에 있던 정령석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밀었다. "받아라." 정령석들은 빛을 뿌리며 허공으로 날았다. 마베릭은 순간적으로 흐트러진 얼굴로 나와 정령석을 마주 보았으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정령석을 잡기 위 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일순간이었다. ".........헉." 피가 쿨럭 솟아 나왔다. 정령석은 녀석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지만 쉽게 얻은 것은 아니었다. 녀 석은 검은 피를 뿜어내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내 손톱 다섯 개가 녀석 의 가슴을 정면으로 관통하며 지나갔던 것이다. 뜨거운 피. 술렁대는 심장. 그 심장을 쥐어뜯으며 나는 녀석의 가슴에 내 주먹만한 구멍을 뚫어 놓았 다. 심장이 뜯겨져 나가며 생명도 같이 흩어져 나갔다. 마베릭은 온 몸을 떨며 고통으로 신음했다. 그러자 엘프들을 덮치고 있던 델카스타가 포효했 다. 그 울음은 거의 환희에 가까웠다. 봉인수들이 흔히 그렇듯 녀석은 봉인 자가 힘이 흩어지자 기쁨을 맛보는 듯 했다. 킬킬 웃음을 지으며 녀석은 몸을 뒤집더니 여기 저기 흩어졌던 자신의 몸뚱이를 하나로 합쳤다. 그리 고는 살기를 품은 채 쏜살같이 마베릭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마베릭 은 놀랍게도 그 몸을 한 채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녀석을 향해 하얀 손 을 쳐들었다. 그러자, 공격을 하려던 델카스타는 신음 같은 소리를 잔뜩 내 지르며 다시 그의 팔뚝 안으로 스며들었다. 쑤욱 하고 뭔가가 빨아들이는 묘한 소리를 내며 델카스타가 사라지자 사방은 조용해 졌다. 별로 소리도 내지르지 않는데도 정말로 시끄러운 놈이었다. 녀석이 사라지자 마베릭은 울컥 피를 토해냈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몸 뚱이는 이제 뒤틀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손에서 정령석을 떨구지 않았다. "정말로 대륙의 통일이 네 소원이냐?" 나는 발치에 쓰러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마베릭에게 물었다. 하얀 손과 팔뚝으로 검은 줄이 지나갔다. 검붉은 피는 그의 하얀 피부 위 로 줄줄 길을 내며 떨어져 내리며 작은 시내를 이루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의 피가 녀석의 가슴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입으로 피 를 토하면서도 녀석은 주먹을 풀지 않았다. "나는, 내 소원은.........." "소원을 말해." 나는 조용히 녀석의 심장이 터져 나간 가슴을 짓밟으며 명령했다. "나는, 나는............" 녀석은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피가 맺힌 그 시선 속에서 보석들은 여전히 영롱한 광채를 뿌렸다. 피가 아예 묻지 않는 것인 지도 모른다. "대륙의 토, 통일..........." "거짓말." 나는 조용히 재촉했다. 녀석의 머리통을 밟으면서 녀석의 손목을 밟으며 다시 물었다. "네 소원은?" 마베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가 작은 웅덩이를 만들 때까지, 녀석 의 몸이 경직되어 부들부들 떨릴 때까지 녀석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흘 러나오지 않았다. "보석의 주인은 나다. 하지만 네가 소원을 비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 아. 그러니까 말해. 소원은?" 나는 재차 물었다. 마베릭은 눈을 들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 안쪽으로 피가 차 올 랐다. 아니, 눈물이 차 올랐다. 그 공허한 눈빛. 그 눈빛을 보며 나는 재차 물었다. "소원을 말해!" 녀석은 피식 웃었다. 눈물이 줄줄 눈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믿을 수 없 을 정도로 천진한 어린애처럼 녀석은 웃었다. "내 소원은............" 보석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녀석은 나를 향해 중얼거렸다. 희미한 입가 로 잔물결이 일어났다. 엉망진창이 된 몸이 굳어 가는 듯 경련을 일으켰다. "..........살고 싶어." 그의 몸은 그대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동안 나는 녀석이 혹시 또 다시 움직이지 않을까 싶어서 툭툭 발로 건드려 보았다. 녀석의 손을 슬쩍 밟자, 손 안에서 보석들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나는 그 보석들을 주워서 다시 내 주머니로 밀어 넣었다. 손이고 발이고 온 몸에 피가 묻어서 꽤나 끈적거렸다. 멀리서 잉잉거리며 벌레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지의 여신이 부 리는 종들은 시체 냄새, 피 냄새에 지극히 민감하다. 질척거리는 발을 들어 서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마베릭의 몸은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다시 일어나던 것이 거짓말인양 녀석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고통으로 잔뜩 구부린 몸, 흙과 자신의 피로 뒤범벅이 되 어 눈부신 금발은 이미 제 빛깔을 잃었다. 파란 눈동자는 확장된 채 다시 움직이지 않았고 채 마르지 않은 눈물만 피와 함께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아." 나직한 신음을 터뜨린 것은 에닌이었다. 에닌은 카산의 품에 안겨서 마베릭의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녀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자들 모두가 전부 마베릭의 시체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시체 처음 보는 것도 아닐텐데 꽤나 웃기게 구는 군.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웅크린 마베릭의 시체는 갑자기 희미한 빛 을 발하더니 홰액 소리를 내지르면서 사라져버렸다. 놀란 자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저, 저런! 어떻게 된 거지?" "회귀마법입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회귀마법을 걸어 놓았어요. 무슨 일이 벌어지면 지정된 장소로 돌아오도록 말입니다." "그 무슨 일이라는 게 심장이 뜯겨질 경우를 말하는 걸까?" 내 말에 카나리안은 창백한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아무리 잘생긴 얼 굴을 한 녀석이라도 이런 표정은 정말 보기 괴롭다. "그런.....모양입니다. 그가 죽으면 지정된 장소로 돌아오게 걸어 두었던 모 양입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내가 한 말을 들은 듯했다. "정말일까요?" "뭐가?" "정말로 그, 그는............그는, 나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금제를 받은 것일까 요?" "보면 모르냐?" 나는 차갑게 말해주었다. 평소 치밀한 킬트의 성격 상 자기의 그 소중한 자식놈에게 성깔 더러운 제자들이 상처를 입히도록 내버려 둘 리 없다. 전 에, 카나리안을 공격하려던 마베릭 놈이 흠칫거리기에 적당히 추리해 보았 는데 맞았다. 그거지. 아, 역시 나는 명민하다 못해 영리해. "......어떻게 된 거지요?" 조인족의 여왕이 긴 침묵을 깨고 처음으로 내게 물었다. 그녀는 나를 무슨 괴물을 보는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뭐가?" "그는 분명히 소원을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왜?" "그의 소원은 진실한 게 아니었거든." 나는 입을 다물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죽음 앞에서도 허세를 부리는 녀석은, 인간뿐일지도 몰라. 혼자 죽어갔다 면 녀석은 솔직했을 지도 모르지만 여기에는 눈이 너무 많았는지도 몰라. 다른 자들의 눈을 의식해서 허세를 부리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특징. 약점 을 공격당했다고 파르르 떨고, 무시당했다고 발끈하고, 죽어 가는 마당에도 자존심을 내 세우며 고집을 피우는 것이야말로 인간. 곧 죽어도 자신의 약 한 모습을 부정하려고 허세만 부려대는 어리석음이야말로 인간. 아무리 부정해도, 아무리 부정당해도 네 놈은 인간. 저 지저분하고 어리석 으며 한심스러운 인간의 족속. 이봐, 어린애야. 수백이, 아니 수천이, 아니 수 만 명이 너를 부정한다고 해 도 내가 인정해 주지. 네 놈은 저 빌어먹게도 너저분한 인간이야. 가련한 놈아. 제 22화 의 지 완. 22화 끝났습니다. 으으으으으으음. 이제 9권의 중간을 넘겼군요. 일단 열중해서 글을 써야 하는데 여러가지로 쉽지 않군요. 가정(;)이 저를 항상 부릅니다. 으음, 이제 곧 추석. 추석이라 일도 많은데 어차피 한 동안은 잠적하게 되겠지요. 잠적하기 전 까지는 그래도 좀 끄적여 놔야 겠지요. 자주 올라와서 이상하다 하시는 분들, 사실은 수호자가 안 풀려서 이러고 있는 겁니다. 수호자와 쿠베린때문에 여러가지로 일이 안 풀리거든요. 이것 이외에도 써 놓은 글들이 꽤 있습니다. 쓰고 싶어서 꿈에서 보는 것들도 좀 있구요. 누군가 말했습니다. 마감이 닥쳐 오면 다른 글을 쓰고 싶어 지는 법...이라고요. T.T ..뼈저리게 실감합니다.;;; 일단 2년간 물려 있는 글을 올릴까 합니다. 이 글은 2년 전 부터 쓰던 글입니다만 어찌되었든 결판을 지어야 하니까 일부러라도 올릴려고합니다. 일을 벌여 놓으면 어쨌든 해결하려고 몸 부림치는 게 섭리... 훗...;; 그럼....안녕히. ------------------------------------------------------------------------------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