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어!!-1 닫혀진 눈꺼풀을 뚫고, 강한 인공의 빛이 눈을 찌른다. "자, 남쪽의 이국 처녀 다음은 일본인 청년입니다.??혼혈에다 이 갈색머리는 천연이구요.??보시다시피 부드러운 살결의 상아색 피부입니다." 바로 옆에서 크게 울리는 마이크 소리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머리가 억지로 뒤로 젖혀져 얼굴위로 세찬 빛이 쏟아지자, 아야세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스무살이라 나이는 좀 많지만 이 정도의 미모라면 문제될 게 없겠죠.??성질도 온순해서 다루기는 쉬울겁니다." 여전히 시끄러운 소리가 머리위에서 웅웅거리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았다. 제대로 사고를 꿰맞출 수 없는데다 고개를 흔들어보려 했지만 머리채를 잡고 있는 손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은 아무런 경험이 없는 새 것이지요.??그 점은 구입하신 분께서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옆에서 뻗어 나온 또다른 손이 가냘픈 아야세의 다리를 잡아 벌리자, 나체에 가까운 허벅지가 현란한 조명아래 확연히 드러났다. 흥분과 조소가 뒤섞인 웅성거림이 흘러나오고 따가운 시선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아야세는 벌려진 다리를 추스릴 기운조차 없다. 간신히 고개를 치켜올리자 가혹하게 빛을 방사하는 조명에 눈이 부셔 순간 눈앞이 흔들리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어스름한 실내에서 자신의 온 몸을 훓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만이 눈안에 들어온다. 강압적인 손에 의해 머리가 움켜진채로 아야세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럼 6천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나무망치 소리와 함께 객석에서는 거센 흥정소리가 빗발친다. "1억이 나왔습니다.??다른 분 안게십니까? 안 계시다면 이것으로...." 머리위에서 떠들던 남자의 목소리가 도중에 끊기고 객석은 희미하게 술렁인다. 그때, 복도에서 걸어나오는 구두소리가 들리면서 무대 근처 테이블에 묵직한 뭔가가 던져진다. 초점을 잃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아야세의 눈으로 어깨가 넓고 일본인답지 않은 큰 키, 몸을 꿰뚫는 날카로운 눈빛을 한 남자의 모습이 비쳐진다. 아야세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마치 청초한 한송이 꽃처럼 농염한 웃음을 띄고 있다. 남자가 능순한 손놀림으로 슈츠케이스의 열쇠를 열고 안에 든 지폐뭉치를 보이자 주위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1억 2천. 전액 현금이야." 찌는듯한 여름의 공기를 거부하듯 삭막한 방안을 에어컨 바람이 가득 메우고 있다. 목이 마르다. 사촌인 데츠오와 역에서 만나 함께 아야세의 아파트로 향하는 도중 바로 집앞에서 갑자기 나타난 여러명의 남자들에 의해 끌려갔던 일이 생각나자 아야세는 화들짝 놀라 일어난다. "갑자기 움직이지마. 가만히." 머리를 뒤덮은 두통에 아야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따스한 기운이 머리에 와 닿는다. 충격이 누그러지자 야윈 아야세의 몸이 소파에 다시 잠기듯 늘어진다. "물 마실래?" 절제된 물음에 아야세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방안을 가득 메운 빛 때문에 눈이 부시다. 어린아이처럼 눈을 비비고 시선을 들자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와 눈길이 마주쳤다. 깊은 윤곽에 야성적인 얼굴을 한 남자의 시선이 묘하게 부드러운 색을 띄고 있다. 뭐라고 말을 하려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아야세는 멍하니 남자의 두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직 약효 때문에 그래.??하룻밤 자고나면 괜찮아 질거야." 남자의 커다란 손이 다가와 달래듯 아야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긴 가죽 소파임을 알고 아야세는 그제야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아색 벽지로 둘러싸인 넓은 실내에 아야세가 누워있는 소파는 물론 모든 실내 장식품이 중후한 멋이 높은 생활수준을 말해주고 있다. 마치 상품책자에서 빠져나온 듯한 방안, 아야세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속삭이듯 묻는다. "여기는......" "내 집이다." 간신히 흘러나온 아야세의 목소리에 맞춘 듯 남자는 음료수를 건네준다. 감사의 표시를 한 후 아야세는 차가운 물을 한모금 마셨다. 차갑게 스며든 물의 감각으로 인해 머릿속이 조금 맑아진다. 긴 한숨을 내쉬고, 아야세는 다시 한번 남자를 쳐다보았다. 아야세의 깊은 호박색 눈동자를 남자도 내려다보고 있다. 건장한 몸을 구부려 자신을 응시하는 남자는 지금까지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고 부드러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저어,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고맙습니다.??전.... 기억이 잘 안나서..." 집앞에서 몇 명의 남자들에 의해 차안으로 끌려들어간 것까지는 생각이 난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때의 공포감이 떠오르자 지금도 몸 안으로 한기가 밀려들었다. 그후, 도대체 자신은 어떻게 이 방까지 오게된 것일가. 그 답을 구하기 위해 남자를 올려다본 아야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린다. 남자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아야세를 바라보고 있다. "...기억, 나지 않아?" 그 말과 함께 뭔가를 원하는 듯한 남자의 손이 아야세에게로 향했다. 단단하고 긴 손가락이 고개를 들어올리더니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아야세는 당황했다. 기이한 데자뷰와 불확실한 기억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머리를 흔든다. "죄송합니다.??저, 이제 돌아가야겠어요.... 사촌형이..." 앞뒤가 맞지 않는 기억과 남자의 강렬한 눈빛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아야세는 멍청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돌아간다고?" 한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을 듯한 단정한 외모에 섬칫할 정도의 위협감이 남자의 주위를 감돌았다. 방금 전까지 남자의 눈에 충만하던 부드러운 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신 무참하게 차갑고 무감정한 색으로 돌변했다. "저,저어..." 난처함이 미칠 듯한 공포로 바뀐다. 남자의 깊은 시선에 사나운 빛이 머물자 소파 위에 누워있던 아야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나는 상관없는 인간에게 거액을 쏟아 부을 정도로 인간성이 좋지 못해." 남자의 목소리가 비웃음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낮게 깔린 시선은 전혀 웃음을 띠고 있지 앟는다. "....웃." 남자의 손이 뻗어와 가녀린 아야세의 목을 잡았다. "내가 너를 산거야.??엄청난 돈을 주고 말이야." 뜨겁고 끈적거리는 혀가 목덜미를 핥자, 아야세는 공포로 그만 굳어버린다. 판매대상이 자신이라는 점과 눈앞에 서있는 이 남자가 자신을 샀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거듭된 혼란으로 경직된 아야세의 목에 남자는 계속 축축한 입김을 불어넣는다. "너는 내가 산 상품이야.??그러니까 날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말이지." 협박과도 같은 속삭임에 아야세는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이 배를 지나 옷속으로 파고들어 다리 안쪽에 닿았다. "앗" 짧은 탄성을 지르며 아야세는 기겁을 했다. 다른 사람이, 그것도 처음 보는 남자와 이런 식으로 접촉한 경험이 있을리 없지 않은가!! "이,이거...놔..." 짓누르는 남자의 육체를 밀쳐 내려해도 약기운에 취해 몸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 틈을 타 예리한 남자의 손이 위축된 아야세의 다리를 짖궂게 감싸안는다. 전신에 섬칫한 충격이 지나가고 아야세의 커다란 눈이 더욱 동그랗게 커졌다. 쓴 담배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그것이 그의 체취임을 안 순간 아야세의 몸 안에서 강렬한 수치심이 솟구쳤다. "나는 널 돈주고 샀다고." 남자의 손가락이 민감한 다리 안쪽을 자극하자 아야세는 그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안...안돼..." "가만히 있어.??약효가 떨어질 때까진 어차피 움직이지도 못한다구. 너도 포기하고 즐기는 편이 나을걸." 남자는 아야세의 귓복을 송곳니로 잘근잘근 깨물며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경험이 없다고 하니까 부드럽게 해주지." "만지지마..." 짜릿한 쾌감에 두려움마저 느끼며 아야세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얏!!" 앞뒤 경황도 없이 아야세의 몸이 뒤집어 지면서 둔중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다. 바닥에 부딪힌 이마와 어깨가 아팠지만 아야세는 올이 긴 융단을 잡아끌며 도망치려 했다. "피할 수 있을 것 같나."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아야세의 등으로 섬칫한 기운이 스쳤다. "아앗..." 등뒤로부터 탄탄한 팔이 내려와 바닥에 떨어진 몸을 순식간에 들어올린다. "네가 처한 입장을 1초라도 빨리 깨닫는게 신상에 좋을거다." 라며 목이 한줌에 들어갈 듯한 커다란 손이 가냘픈 아야세의 턱을 치켜올렸다. 열려진 허벅지를 어루만지던 다른 한 손이 떨고있는 아야세를 움켜진 순간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릴 새도 없이 뜨거운 점막이 하복부에 와 닿는다. "헉..." 끈적이는 열이 다리에 달라붙는다. 그것이 남자의 혀임을 알자 아야세는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킨다. "움직이지마. 물린다." 남자가 무시무시한 협박을 내뱉고 다시 행동을 개시하자 아야세의 눈앞이 하얗게 변해갔다. 이를 악물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자연에 순응하는 젊은 육체는 그가 건드릴 때마다 처절하게 반응해갔다. "싫어...아..."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아야세는 신음을 지르며 남자에게 항복을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아..." 어처구니 없는 충격에 아야세는 눈에 초점마저 잃었다. "귀여운 것." 남자는 정신을 잃어가는 아야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야비하게 내뱉는다. "앞으로 천천히 가르쳐주지." 남자의 두 눈이 야성적인 웃음을 띠었다. 돈이 없어!! - 2 세찬 샤워소리가 무작위로 생각을 메워갔다. 흰색으로 통일된 욕실 안에서 아야세는 떨리는 숨을 토해냈다. 뜨거운 온수가 가득 찬 욕조옆에는 욕실용 텔레비전과 라디오까지 구비되어 있었지만 지금의 아야세 에겐 그런 것을 신경쓸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벌써 10분 이상 샤워를 하고 있었지만 몸에 잔재하는 아픔이 생생하게 가실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자신조차 건드려보지 않은 몸의 은밀한 부분에 험악한 감촉이 아직도 남아있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 의해 자신의 몸이 지배되는 공포감이 떠오르자 아야세는 다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씻어줄까, 하고 속삭이던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린다. 아니,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아야세를 욕조로 옮기기 위해 야윈 몸을 가볍게 안아올린 그의 거센 팔과 머리에 남은 담배 냄새까지 아야세의 몸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남자의 손을 거부하고 혼자서 욕실로 들어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겨우 혼자가 되어 나름대로 어제의 일을 정리해보려고 했지만 너무나 비현실적인 사건의 연속이라 사고력이 마비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건 악몽이야. 자신의 한탄에 쓴웃음만 흘러나온다. 늪과 같은 지옥에서 겨우 벗어난 지금 모든 것이 눈앞에 현실로 다가온다.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에 아야세는 안도하며 준비되어 있는 대형타월을 몸에 둘렀다. 설핏 시선이 멈춘곳에 붙은 커다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야윈 청년이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을 볼때마다 아야세는 자신의 얼굴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씁쓸한 자조의 웃음이 핏기 없는 입술에 머문다. 병약했던 어머니는 오랜 투병 생활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남자인 자신에게 있어 이런 여성적인 아름다움은 심약하게 보일 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손목에 난 멍자욱을 발견했다. 손목뿐이 아니다. 거울에 비친 투명한 하얀 목덜미와 가슴, 하복부에도 혈흔이 남아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강한 힘에 구속되어 아야세의 몸 구석구석에 남자에 의해 새겨진 소유의 표식이다. 맨살에 닿은 융단의 감촉과 함께 눅눅한 자신의 숨결이 되살아난다. 가냘픈 아야세를 손쉽게 짓눌러버린 그의 커다란 손의 거센 힘이 떠오르자 아야세는 부르르 떨렸다. 눈을 꾹 감고 부정하려 해보지만 그래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강인하고 무서운 남자에 의해 자신의 모든 것이 뭉개져 버린 것이다. 거울에 비친 무기력한 자신으로부터 시선을 거두며 달리 갈곳도 없는 아야세로 침실로 돌아가자 그때 방문이 열렸다. "어머 아주 예쁘게 생겼잖아." 흠칫 놀라는 아야세를 보며 매끄러운 목소리가 한층 높아진다. 문앞에 나타난 사람이 어제의 남자가 아님을 깨닫자 아야세는 놀라면서도 안도하며 긴장하고 있던 어깨에서 힘을 뺐다. 선명한 초록색의 기모노를 입은 여성이 신기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침대에 앉아 있는 아야세를 내려다봤다. 여자는 가슴까지 내려온 탐스러운 검은 머리를 우아한 몸짓으로 쓸어 올린다. 길게 찢어진 두 눈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으며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용모는 음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잘 잤냐고 물으면 어리석은 질문이겠죠?" 빨갛게 칠한 입술을 내밀며 여자가 방긋 웃는다. 그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채 멍하니 있던 아야세는 다음순간 황급히 몸을 돌렸다. 처음만난, 그것도 젊은 여자 앞에서 타월과 시트로 몸을 감싸고 침대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제서야 떠올랐던 것이다. "어머머 괜찮아요.??당황하지 않아도 돼.??그보다 가노님은 어딜가셨나?" 재미난 듯 웃으며 여자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저어..." 점점 더 난처해진 아야세는 정사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시트를 끌어당겨 침대 위를 정리하려고 한다. "죄송합니다.??전, 여길 잘 몰라요." 쉰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는 아야세에게 여자는 마치 품평이라도 하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다. "이런 솔직하네.??너무 귀엽다.??맘에 드는데.??아, 난 소메야라고 해.??잘 부탁해." "전 아야세입니다." "알고있어요.??근데 가노님은 어디가신 걸까.??아야세옆에 착 달라붙어 있을 줄 알았는데..." 한탄 섞인 여자의 말끝을 이어 노기를 품은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소메야." 아야세는 순간 몸이 튕겨 나갈 듯한 충격을 느꼈지만 정작 이름을 불린 본인은 석연찮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다. 그곳엔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식기를 담은 쟁반을 든 채 서있었다. 어제 자신을 범한 그 남자이다. 주름 한 점 없는 고급셔츠에 넥타이 차림으로 가볍게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는 모습이 괜찮은 사업가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그가 어떤 조직 사회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결코 뒷세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아야세도 그의 시선 하나 하나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자신의 허약함을 부끄럽게 여기는 아야세로서는 선망의 대상인 그의 체격과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눈빛과 야성적힌 힘이 부럽기까지 했다. 거친 분위기를 내포한 긴 손가락에마저 그는 엄청한 흡인력을 감추고 있는 듯 보인다. 분명 여자라면 이런 남자의 탄탄한 팔에 안긴 순간 무조건적인 안도와 행복을 느낄 것이다. "늦었네요. 가노님." "누가 여기까지 들어와도 된다고 했지?" 분노의 기색을 감추지 않는 남자의 말을 들은척도 하지 않고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호들갑을 떤다. "설마 가노님 주방에 갔었어요?" 의외인 듯 놀라는 여자의 반응에 남자는 기분 나쁜 듯이 혀를 찼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쟁반에는 봉지에 든 인스턴트 스프와 통조림, 음료수, 과일 등이 잡다하게 담겨져 있었다. "이게 뭐예요.??환자음식으로는 너무 심한거 아니예요? 주방 근처에는 가본적도 없으면서 잘 보이려고 하니까 그렇죠.??나한테 부탁하면 될 걸 가지고..." "통조림 하나 딸 줄 모르는 녀석이 웃기고 있군." "녀석이라뇨.??전 여자에요. 여자!" "네가 무슨 여자야.??이 변태자식! 여자 옷이나 걸치고 다니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 쏘아붙이는 남자의 두 눈이 갑자기 침대위의 아야세에게로 옮겨졌다. 깜짝 놀란 아야세는 상처 입은 작은 동물처럼 안타까울 정도로 움츠러든다. 남자는 아야세에게 뭔가 말을 걸려다가 도로 입속으로 삼켜버리고 만다. 남자의 시선에 연민의 표정이 스친 것처럼 보인 것은 아야세의 착각이었을까. 그는 아야세한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여자를 향해 나가라며 윽박질렀다. 남자의 말에 의하면 기모노 차림의 미녀는 여자가 아닌 것이다. "잠깐만요! 난 엄연히 손님이예요.??도대체 그 태도가 뭐죠?" "손님이면 손님답게 굴어. 침실까지 들어오는게 손님이 할 짓인가?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곧 내려 갈테니." 완고한 남자의 기세에 밀려 여자는 투덜거리며 방을 나갔다. 겨우 조용해진 방안,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방금 여자가 나간 문을 열었다. "사무실에서 꼼짝말고 기다려.??안 그러면 두 번 다시 돈을 빌려주지 않을테다." 문앞에 붙어 서서 엿듣고 있던 여자의 어깨를 밀쳐내며 남자가 거칠게 문을 닫으며 소리쳤다. 문 밖에서는 한차례 욕하는 세된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남자가 문을 부서질 정도로 세게 닫자 잠잠해졌다. 그제야 여자가 없는 것을 확인했는지 남자의 시선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아야세는 다시 공포에 휩싸인다. "왜그래? 편안히 앉아서 뭘 좀 먹도록 해야지." 남자다운 논초리와 한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을 듯한 그의 단정한 모습에 기가 눌린 아야세는 쭈뼛거리며 침대 모서리까지 물러섰다. "저,저,전, 대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생각에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자신을 샀다는 그의 말의 의미도, 아니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조차 아야세는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는 대체 어디며 눈앞에 서있는 이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전,남자들한테 갑자기 붙잡혀서... 데츠오와 함께... 맞다, 데츠오는...!" 사촌형의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불안이 온 몸을 휘감았다. 어제밤, 아니 정확한 시간은 모르지만 집앞에서 자신을 덮친 그 남자들은 데츠오의 사채업자 들이었다. 아야세보다 두 살 많은 데츠오는 사치를 좋아해서 전부터 아야세에게 돈타령을 늘어놓곤 했었던 것이다. 아야세는 3년전 할머니를 여읜 후부터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부모님은 예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야세에게 할머니는 마지막 혈육 이었다. 후견인인 데츠오의 아버지로부터 할머니가 남겨주신 유산을 매달 송금받기는 하지만 결코 많은 액수는 아니다. 그러니 그런 아야세가 데츠오에게 빌려줄 수 있는 돈은 뻔한 액수인 것이다. 아야세에게 빌린것으로는 모자랐는지 데츠오는 사채업자한테 까지 손을 내민 모양이다. 자신과 함께 납치되었을 사촌형을 생각해내며 아야세는 시트를 힘껏 쥐었다. 아야세가 갑자기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이자, 남자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렇게 데츠오가 걱정되나?..." 조용한 남자의 목소리 밑으로 노여움이 깔려 있다는 걸 느낀 아야세는 입술을 깨물었다. "..데..데츠오를 아세요? 데츠오는 제 사촌이예요.. 저랑 같이 잡혀서...그래서..." "알고 있다." 진지한 아야세의 호소에 남자는 석연찮은 한숨을 토하며 약간 곤혹스러운 모습으로 넥타이를 풀고 아야세를 내려다 보았다. "내가 데츠오에게 돈을 빌려줬었지." "데츠오의 친구세요?" 아야세의 질문에 남자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내 사업은 사채업이다. 데츠오는 나한테 3백만 정도 잡혀있지." "잡혀있다면...데츠오가 3백만이나 빌려갔다는 말인가요?" 그의 입에서 나온 어마어마한 액수에 아야세의 목소리가 떨린다. 남자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침대 머리맡에 놓인 장식탁자에 걸터앉았다. "상환기간이 저번주였는데 데츠오 녀석이 모습을 감춰버렸지. 그런데 하필 아쿠시 녀석들한테 붙잡히다니-." "저,아쿠시라면..." 말에 의미를 묻는 아야세를 향해 남자가 담배를 내뿜었다. "비합법적인 도박장을 운영하는 녀석이야. 데츠오는 그 곳 내기 포커에서 수천만엔의 빚을 진 모양이야." "수,수천....." "너희를 납치한 것은 그 아쿠시 패거리들이다. 넌 데츠오의 빚대신 비합법적인 경매에 붙여진거야." 싸늘한 기운이 아야세의 등줄기를 스친다. "데츠오는....설마, 데츠오도..." 창백해진 아야세에게 남자는 어처구니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팔리지 않았나 해서? 그런 녀석을 살 정도로 돈이 썩어도는 사람이 있겠나. 장기라도 팔면 모를까." 남자의 대답에 아야세가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봐, 어디가려는 거야?" 강한 힘이 팔을 잡자 아야세는 고개를 들었다. "데츠오를 찾아야해요...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아야세를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에 노여움이 어린다. 다음 순간 무참하게 침대위로 내던져 진다. "데츠오는 너를 아쿠시에게 팔아서 그 대금으로 자신의 빚을 청산한거야! 그런 녀석은 걱정할 필요도 없어." 남자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잔인한 미소를 띄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도 네 맘대로 이 방에서 나갈 권리는 없다는걸 잊지 마라. 어젯밤에도 말했지. 난 너를 산 주인이란 말이다." 침대위에 무릎을 기댄채 남자의 손이 아야세의 이마를 억세게 누르고 있다. 메마른 남자의 뜨거운 손.. 그 강한 힘에 치욕적인 어젯밤의 기억이 되살아난 아야세는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나...나는...물건이 아닙니다." 힘껏 내지른 목소리는 남자의 비웃음에 의해 뭉개졌다. "내가 돈을 주고 산 이상 네가 어떻게 생각하건 그런건 아무상관 없어. 너는 평생 내 소유물일 뿐이야." "아니야. 그런...." 창백해진 아야세를 내려다보며 남자는 뭔가 생각해 냈는지 힐쭉거린다. "자, 그럼 이렇게 할까. 내가 널 구입한 대금과 데츠오의 빚을 전부 합한 금액을 오늘부터 네가 갚아나가는 거야. 모두 갚으면 넌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의 얼굴이 서로의 호흡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다. 아야세는 벌벌 떨면서 선택의 여지 없이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알았습니다. 도..돈은 다 갚겠어요." "좋아. 계약 성립이다. 데츠오의 빚이 3백만. 네 몸값하고 경비를 합해서 모두 2억. 이자는 열흘로 계산한다. 상환기간은 일단 무기한으로 해두지." 독기를 품은 웃음을 흘리며 남자가 아야세의 목덜미에 입을 가져간다. "이...이억..?!" 아야세는 놀라 소리를 지르며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2억이라니...,그리고 이자가 열흘계산이라면 도대체..." 아야세는 너무나 큰 충격에 목소리마저 떨려온다. "10일에 1할씩 이자가 붙는거지. 첫 번째 이자는 원금으로만 계산한다. 너의 경우는 원금이 2억이니까 실제 빚은 2억2천만이 되는거지. 이자가 열흘에 2천 2백만원, 한달은 6천6백만원이야. 알겠나?" "6...,6천...6백만원......" 어처구니 없는 숫자의 의미는 이미 이해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 "그런 이자라니...도저히...." "못하겠나?" 비웃음을 머금은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아야세가 세차게 고개를 흔든다. "데츠오의 빚도 제 몸값도 다 갚겠어요! 하지만 2억은..." "돈을 갚겠다. 마음가짐은 됐군." 말을 마치자마자 남자의 팔이 아야세의 가는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남자의 몸 아래 자신의 몸이 깔리자 아야세가 소리를 지른다. "앗..." "걱정하지마. 내가 그만큼 돈을 벌게 해줄테니까" 비아냥거리는 말투와 함께 남자의 커다란 손이 아야세의 엉덩이를 잡아 몸을 뒤로 돌렸다. 그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싫어...무슨... " "어젯밤에도 했었지? 너의 몸 한번에 50만씩 주지. 너는 그 돈을 모아 갚으면 돼." 무방비한 아야세의 목덜미를 한번 깨물고는 남자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고통에 신음하는 아야세를 남겨두고 남자는 방안 구석에 놓인 소형 금고를 열었다. 몸을 구부리고 있는 아야세에게 돌아온 남자의 손에는 지폐다발이 들려있다. "어젯밤 대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너무 불쌍하겠지?" 예리한 시선을 가늘게 뜨며 남자는 다발을 뜯었다. "몇번 했는지 기억해?" 희롱당하는 느낌에 아야세의 시선을 갈 곳을 잃고 그저 침대위를 헤매고 다녔다. 빳빳한 지폐를 세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리고 있다. "우선은 2백만이다. 하룻밤 벌이치고는 괜찮지 않나?" 남자는 아야세의 머리 위로 지폐를 뿌려대며 비웃듯 내뱉는다.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하얀 시트에 엉클어진 수많은 지폐를 아야세의 호박색 눈동자는 망연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알았으면 얌전히 안겨" 협박하듯 내뱉으며 남자는 가는 아야세의 무릎을 안았다. "그.. 그만두세요. 돈은 꼭 일해서 갚겠어요! 평생 걸려서라도 돌려드릴테니까" 어젯밤에 당한 폭행을 떠올리며 아야세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내질렀다. 남자는 물론 여자와도 경험이 없는 아야세에게 성을 돈으로 판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일하게 해준다잖아." 음흉하게 웃는 남자의 손은 다가와 무릎이 가슴까지 닿을정도로 올린다. 아야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난... 난 남자예요! 어떻게..." "상관없어. 어제도 잘했잖아." 저속한 웃음을 띄며 남자의 손이 아야세의 은밀한 곳에 닿았다. "앗" 조심스럽게 다물어진 그곳을 천천히 돌리자 아야세는 신음을 흘린다. "기분끝내주던데 너~!! 아주 죽이더군. 소질이 보여." 귓가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몸 전체가 떨리며 아야세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싫...어.." "...아주 예뻐" 밝은 불빛 아래 몸을 굽히고 들여다보는 남자의 시선에 자신의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조금만 건들여도 흥분하거든." 아야세의 다리를 파고든 남자가 웃음을 머금으며 속삭인다. "싫어!!..싫어.." 지폐가 흐트러져있는 시트위에서 아야세는 마구 얼굴을 흔들었다. "아프겠지. 걱정마라... 이제 곧 괜찮아 질거다." 상처입은 아야세의 몸에 치료를 해주었던 손이 지금다시 천천히 잠입을 개시한다. "아...야...돈은 아르바이트를 하든 뭘 하든 꼭 갚겠..." 필사적으로 흔들어대는 아야세의 강한 저항에 남자는 비웃듯 대꾸한다. "아르바이트? 요즘 보수가 얼마인지나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건가? 시체를 닦든지 유흥업소에서 일하든지간에 나랑 자는 것 이상 벌 수 있을거란 생각하느냔 말이다. 너 진짜 갚을 생각이 있긴 있는거냐?" 노골적인 남자의 말에 아야세의 몸이 저항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치 차가운 얼음손이 다가와 자신의 심장을 움켜쥔듯한 충격에 숨조차 쉴 수 없게 되버렸던 것이다. 신음소리를 내는 아야세의 입술에 뜨거운 남자의 입이 덮쳐왔다.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아야세의 입안으로 그가 밀고 들어왔다. "음.." 뜨거운 열기를 담은 이물질이 소리를 내며 입안을 맴돈다. "아.... 하....." 점막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울린다. 남자의 눅눅한 입김이 피부에 닿자 아야세는 눈물과 함께 몸서리를 쳤다. "아야세......" 호흡 사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강제로 아야세의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입속 민감한 부분을 감아올리자 섬뜩한 쾌감이 아야세의 머리끝을 스쳐간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참지못할 고통으로 흐느끼던 어젯밤을 떠올리며 아야세는 있는 힘껏 눈을 감았다.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마치 눈물샘이 터진것마냥 눈물이 눈썹을 적시며 끊임없이 뺨을 타고 내려왔다. "아야세?" 눈물로 얼룩진 시야속에서 남자가 놀란 눈으로 아야세를 불렀다. 대답도 하지 않고 시트안으로 얼굴을 숨기는 아야세의 뺨을 남자가 감싸 안는다. "보지...말아요.." 꼴불견인 울상을 보이기 싫어 아야세는 힘껏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남자의 힘에 당해낼 수 없어 강제로 고개가 돌려지자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눈물로 범벅이 된 아야세의 얼굴을 내려다 보는 남자가 낭패한 표정을 짓는다. "놔줘...왜... 이렇게..." 아야세의 힘 없는 거절의 말에 남자는 찡그리며 살짝 입을 맞춘다. 침대가 삐걱거림과 동시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아야세의 몸이 움찔하며 긴장했다. "가노님 잠시만..." 아야세를 올라탄 자세로 남자가 성가신 듯 돌아본다. 그러나 문 밖에서 들리는 긴박한 소리에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묵묵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간신히 해방된 안도감에 아야세의 몸이 힘없이 침대를 파고든다. 남자는 문 앞에서 소메야와 몇마디 나눈뒤 주저하는 눈빛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아야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지금부터 잠깐 나갔다 올게. 집안에서는 마음껏 돌아다녀도 되지만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말아." 조용히 그러나 엄숙하게 명령하는 목소리로 다짐을 하자 아야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침묵이 엄습한 방안 아야세가 짧게 한숨을 쉰다. 아직 그의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입술을 만지면서 아야세는 눈을 감는다. 돈이 없어!! - 3 "설마 이 집 주방에 들어올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소메야가 식탁에 앉으며 중얼거린다. 차를 끓이기 위해 주전자를 불 위에 얹고 아야세는 씁쓸하게 웃었다. 한 낮의 여름 해가 기능적인 주방을 따스하게 비추고 있다. 새로 장만한 듯한 스텐레스 씽크대와 네 개의 가스렌지, 그리고 술로 가득 찬 대형 냉장고가 갖춰진 주방 하나크기가 아야세의 아파트만하다. 큼지막한 창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아야세는 눈에 띠게 야윈 자신의 손목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하얀 속에 붉은 구속의 자국이 남아 있다. 아야세는 주전자 불을 껐다. 무슨 일로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자꾸만 두려운 생각만 머리에 떠올라 괴로워진다. 붙잡혀 있을 데츠오와 자신의 등을 압박해오는 막대한 금액의 빚... 가노라는 남자가 아야세를 산 날로부터 벌써 3일이나 지나갔다. 물론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망친다해도 숨을 만한 곳이 없는데다 또, 용케 숨는다고 해도 가노가 찾아내지 못할 리 없는 것이다. 학교는 여름방학이고 보니 친구들도 아야세의 부재를 알게 될 가능성도 없다. 가노의 말대로 소메야는 역시 여장 남자로, 가부기쵸에 자신의 가게를 갖고 있다고 한다. 싹싹하고 붙임성이 좋은 소메야는 그래도 아야세에게 신경을 써주는 편이였다. "소메야씨는 식사 안해요?" 식탁 위에는 가노가 주문해준 도시락이 한 개 놓여있었다. "난 먹고 왔으니까 차만 부탁할까? 아무튼 가노님도 어지간해. 아야세를 위해 매일 다른 가게 도시락을 사러 이곳 저곳 돌아다니니 말야." 깔끔하게 포장된,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도시락앞에세 아야세는 젓가락을 잡으며 복잡한 생각에 빠져있었다. 가노의 맨션은 기가 막힐 정도로 비싼 가구와 가전제품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전부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고, 특히 주방은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지, 그릇과 조리기구들이 쓸쓸하게 잠들어 있다. "아야세, 지금까지 혼자서 살았다고 했지? 정말 집안일 같은 것도 했어?" "간단한 건요." 오랫동안 혼자 지내왔던 아야세는 집안 일에 대한 저항감이 없다. 우선 집안 일을 하지 않으면 매일의 생활이 유지되지 않았다. 도와줄 친척도 없고, 남겨진 유산도 한계가 있는 이상,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곳에서의 생활에 조금 더 익숙해지면 기분 전환겸 집안 일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아야세는 힘없이 웃었다. 익숙해진다는 것이 가노라는 남자와의 관계를 의미한다면 자신은 평생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과 함께... "가노님은 틀렸어. 집안 일은 손끝한 대지 않거든. 하긴 돌봐줄 가족도 없으니까 상관없겠지만..." 아야세가 타 준 차를 맛있게 홀짝이면서 소메야가 한튼을 했다. "가노씨, 혼자 사시나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정한 가노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야세가 젓가락을 멈춘다. "혼자 산다기보다, 천애고아같은 존재지. 3년쯤 전인가, 암흑가의 큰 손이던 아버지가 살해당했거든..." 살해당했다는 말에 아야세의 등이 싸늘해졌다. "그때는 가노도 빈털터리라서 엄청 고생을 했었다나봐. 일단 해결은 봤지만 그때 옥신각신했던 상대가 바로 아야세를 판 아쿠시의 일가야. 지금은 이미 해산했지만." 소메야는 예리한 눈초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야세를 사러 아쿠시에 갔다고 했을 땐 솔직히 놀랐어." "...네?" "가노님은 지금도 그런 더러운 장사꾼이나 야쿠자하고는 사이가 안 좋거든. 아쿠시 녀석들, 가노의 사업을 눈꼴사나워하거든. 살아서 돌아온 게 신기한 일이지." 생사에 관련된 말이니 만큼 소메야의 말은 과장은 아닐 것이다. 아야세는 지금, 그가 여태까지 살아온 세계와 전혀 다른 차원에 서 있게 된 것이다. "뭐, 아무튼. 가노님도 타산적이야. 최근엔 아주 컨디션이 좋은거 같애." 요란스럽게 한탄을 하는 소메야의 말에 아야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노씨한테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아야세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소메야는 숨김없이 대답했다. "누구를 데려오고서부터, 징그러울 정도로 싱글벙글하는걸. 그 멋대가리 없고 품행방정한 남자가 밤에 놀러도 다니지 않는단말야!" 노골적인 표현에 아야세는 당황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확실하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소메야는 처음부터 가노와 아야세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와의 육체적 관계라는 현실에 아직까지 강한 저항감을 느끼는 아야세는 소메야에게 진실을 묻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머리 끝부터 결리듯 통증이 온다. 사실, 오늘은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괜찮아? 얼굴 색이 안 좋은데? 별로 식욕도 없는 거 같고."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도시락과 창백한 아야세를 번갈아 보며 소메야가 걱정스러운 듯 묻는다. "도시락이 맛없어?" "아니요, 아주 맛있어요." 장어구이와 제철 야채, 차가운 과일 디저트, 보기에도 화려한 도시락은 정말 맛있었다. 하지만 아야세의 식욕은 늘지 않았다. 몸 컨디션 탓도 있겠지만 누군가와 마주앉아 혼자서 식사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괴롭고 입맛이 떨어지는 것이다. "소메야씨, 아직 안 가셔도 괜찮아요?" 밥을 억지로 목안으로 밀어 넣으며 아야세가 묻는다. "그렇군. 이제 슬슬 나가봐야지. 미안해 식사하는데." 벽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하고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소메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맙다는 말을 하며 아야세는 소메야를 현관까지 배웅했다. 보통 맨션 문처럼 열쇠를 안에서 열 수도 있었지만 아야세는 한번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 아마 소메야가 자주 아야세를 방문하는 것에는 감시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다시 돌아온 주방은 썰렁할 정도로 넓어 아야세는 쓸쓸하게 식사를 마쳤다. 남긴 도시락을 버리기도 아까워 냉장고문을 열었다. 아야세정도면 두 사람도 들어갈 정도의 큰 냉장고 안에는 술과 간단한 안주밖에 없었다. 한숨을 쉬며 문을 닫는 순간, 현관에 인기척이 났다. 소메야가 뭘 두고 간 것일까. 주방 문 쪽을 돌아본 아야세의 눈동자가 휘둥그래졌다. 주방 입구에 서 있는 사람은 소메야가 아니었다. 문턱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커다란 가노의 모습을 보고, 아야세는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동요했다. "...앗."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다가와 자신의 허리를 끌어 앉자 아야세는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놀라지마, 밥은 다 먹었어?" 비아냥거리듯 삐죽이는 입술이 아야세의 가냘픈 목덜미를 핥자 아야세는 어깨를 움츠렸다. 귓가에 울리는 낮은 목소리가 담배냄새와 함께 피부를 자극한다. 가녀린 아야세의 등에 근육질의 가노의 가슴이 와 닿아, 어젯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가노씨, 일은..." "아, 금방 돌아 갈거야. 어젯밤엔 좀 무리했나 싶어서, 네가 어떤가 하고 보러왔어." 장난스럽게 웃으며 남자의 손이 허벅지를 더듬는다. "아직도 아파?" 남자는 청바지위로 엉덩이를 감싸쥐고는 아야세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일부러 낮은 목소리로 소근거린다. 깊게 울리는 목소리도, 여유 만만한 잔인한 이 남자의 동작도 모두 아야세에게 상처를 주며 막다른 곳을 몰아간다. "시간이 좀 있으니, 천천히 즐기자구." 턱을 쥔 채로 내뱉는 가노의 말에 아야세의 몸이 흠칫 굳어졌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입술을 대려던 가노가 의심하는 기색으로 동작을 멈춘다. "왜, 그래요...?" 등뒤에서 커다란 손이 더듬거리며 이마를 잡자, 아야세가 난처한 듯 소리를 질렀다. "...너, 열이 있잖아?" 갑자기 억센 힘으로 아야세의 몸을 돌려세우더니 정면에 그의 이마가 아야세의 이마에 마주 대어졌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두손으로 뺨과 목의 체온을 재며 이마를 부벼 댄다. "이봐, 열이 이렇게 심한데, 왜 누워 있지 않았지?" 꾸짖는 말투의 남자의 목소리는 굉장히 심각했다. 근 3일동안 아야세는 많은 시간을 가노아 보냈다. 할머니와 사별한 뒤, 이렇게 긴 시간동안 누군가와 지낸 적은 처음이다. 다른 사람의 간섭에 익숙하지 않은 아야세는 솔직히 말해 이런 가노의 진지함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누워있을 정도는 아니예요." "괜찮은 게 아니야." 손가락사이에 끼워둔 담배를 물통에 던져 넣고, 가노는 침실로 아야세를 끌고 갔다. 벽지와는 대조적인 검은 가구로 통일된 침실엔 엄청나게 큰 침대가 놓여져 있었다. 무일푼이던 남자가 단 몇 년 사이에 이렇게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자신도 죽을 힘을 다해 일하면 모든 빚을 갚을 수 있지 않을까? 아야세가 생각하는 것은 육체에 의한 상환이 아닌 정당한 노동에 의한 상환을 말하는 것이다. 아야세를 침대에 밀어 넣고, 가노는 방안을 휘둘러보더니 약상자를 들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약이 있나? 젠장, 해열제가 없잖아." 이번에는 해열제가 보이지 않자 가노는 허둥거리며 약상자를 뒤집었다. "기다려, 얼음 가져올게." 거칠게 복도를 지나가는 소리에 이어 주방에서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마루바닥에 금속제 그릇과 얼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저기...가노씨, 정말 괜찮아요. 이 정도는 항상 있는 일이라..." 겨우 얼음주머니를 손에 들고 돌아오자 아야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항상 그렇다고? 그럼 더욱 몸이 안 좋은 거잖아. 얌전히 누워." 아야세는 야단맞은 어린아이처럼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잔혹하게 아야세의 몸을 지배해온 남자의 과민할 정도로 걱정하는 모습에 아야세가 오히려 견딜 수가 없었다. "입 열어." 남자의 재촉에 아야세는 당황하며 입술을 열고 해열제를 받아먹었다. 음료수를 내민 가노가 심각한 얼굴로 위로하듯 목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야세는 왠지 기분이 좋아져 눈이 스르르 감겨 오는걸 느꼈다. 가노의 손의 열기가 신기하게도 아야세의 마음의 경계를 풀어준 것이다. 먹은 약의 효과가 있는지 조금씩 잠이 오기 시작했지만, 아야세는 따스한 이불 속에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다. "왜 그래, 자는게 좋을 거야. 안그러면 의사라도 부를까?" 안절부절거리며 방안을 왔다갔다하면서 가노가 묻는다.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 발열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아야세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잠들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혼자 지내던 아파트에서는 아무리 미세한 감기에도 불안과 고독이 밀려들었다. 의식을 놓아 잠들어 보면 그대로 끝없는 고독에 빠져들 것 같아 두려웠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해. 나는 사무실에 있을테니까." 잠시 동안 안정하지 못하고 침대 끝에 앉다가 일어서다를 반복하던 가노가 그대로 있다가는 아야세의 잠에 방해가 될 것 같았는지 겨우 무거운 허리를 들어올렸다. "...아." 불안으로 움츠렸던 아야세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의식적으로 뻗은 손이 가노의 셔츠를 잡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는 가노보다??오히려 남자를 붙잡은 아야세 자신이 더 놀랐는지, 붙잡은 가노의 셔츠에서 아야세는 반사적으로 손을 거둔다. "죄송합니다. 저, 전..." 당황하는 아야세의 머리 위에 가노의 손이 닿는다. 야단맞지 않을까 목을 움추린 아야세는 생각지 못한 온기에 시선을 올린다. "추워?" 식은땀을 흘리는 아야세의 이마를, 가노가 손으로 어루만져준다. 얼어붙는 둣한 자신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아야세는 고새를 가로 저었다. 시선을 거둔 아야세의 머리 위에서 가노가 씁쓸하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악의가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가노씨..." 이불을 들어올리는 기색에 아야세가 놀라 눈이 휘둥그래진다. 육중한 가노의 체중이 올라서자 침대가 출렁거린다. 피할 새도 없이 팔이 뻗어와 야윈 몸을 끌어안는다. 넉넉한 품안에 얼굴을 묻자, 진한 담배 냄새가 풍겨왔다. "...너무 긴장하지마." 어느새 아야세의 긴장을 간파했는지, 가노는 혀를 찼다. 겸연쩍은 듯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메마른 손으로 천천히 등을 쓰다듬어 준다. "약효가 돌면 금방 나아질거야...그러면 너..." 낮은 목소리로 타이르면서 아야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자." 듬직한 목소리가 울려온다. 신기하게도 아야세는 바로 눈꺼풀이 감기면서 몸을 감싼 온기속에서 안도감에 휩싸인다. 몸 안에 잠재된 불안과 고독을 불러일으키는 불쾌한 한기가 가노의 체온이 닿자 서서히 풀려 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긴장이 완화됨과 동시에 아야세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직도 아야세는 가노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정말로 가노가 아야세의 육체만을 목적으로 2억에 달하는 돈을 투자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노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남자인 아야세의 육체를 탐하면서, 가끔 이런 동정심을 발휘하는 것도 한때의 심심풀이인지도 모른다. 가슴에 서서히 밀려오는 가벼운 통증을 느끼며 아야세는 무의식적으로 가노의 품을 파고들었다. 열 때문인지, 자신이 너무나 나약해져 있다. 가노여서라기 보다, 분명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고픈 것이다. 건강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고독감이 이런 밤에는 지독히도 마음을 황폐하게 만든다. 할머니가 돌아가신후, 좁은 아파트로 혼자 이사했던 직후에도 이런 식으로 열이 났었다. 그 고독한 밤에도 지금과 같은 꿈을 꾼 것 같다. 외로움에 빠진 자신이 길에서 아버지를 만나 데리고 오는 기이한 꿈이다. 그 꿈속에서는 고열로 고생하는 자신을 아버지가 커다란 손으로 간호해 주었다. 발열의 고통이상으로 더 없이 행복한 따스함이 배인 그 추억이 가노의 체온으로 이어진다. 때때로 악몽에 시달리는 아야세를 달래듯 입을 맞춰준다. 엄청난 인내심으로 가노는 아야세의 등을 어루만진다. 땀을 닦아내고 온기를 나눠주는 가노의 입술이 귓가에서 속삭인다. 이윽고 호흡이 편해지고 다시 편안한 잠이 아야세를 재촉했다. 따스한 가노의 품안에서 아야세는 오랜만에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돈이 없어!! - 4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난 아야세는 다음 순간 작게 몸을 떨었다. 이마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가노의 얼굴이 있었던 것이다. 아야세의 몸에 긴 팔을 두른 채 가노는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뭉클한 충격이 가슴을 스친다. 최근 3일간, 가노와 매일 밤 같은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이 남자가 잠든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가노는 피곤함과는 거리가 먼, 몬스터 같다고 느꼈었다. 밤늦게까지 사무실에서 일하고 아침에는 아야세가 눈을 뜨기도 전에 침대에서 일어난다. 그런 가노의 얼굴만 아야세는 계속봐왔었던 것이다. 날카로운 시선을 닫고 잠든 가노의 무방비한 얼굴은 이 남자의 피로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 반듯한 코와 뺨을 만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그를 깨울까봐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간격이 넓은, 규칙적인 호흡을 내뱉는 가노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야세는 다시 눈꺼풀이 무거웠다. 얼핏 잠이 들 듯한 아야세는 머리맡에 놓인 전화에 착신 신호를 알리는 빛이 깜빡이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가노를 깨우고 싶지 않아, 벨소리가 울리기 전에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여전히 자고 있는 가노를 내려다보며 아야세는 작은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둠이 내린 여름 하늘은 더욱 습기를 머금어 피부에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아직 열이 내리지 않아서인지 몸이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말없이 빌려 신고 나온 그의 구두는 너무 헐렁거려 걸을 때마다 발이 아팠다. 그래도 열심히 길을 재촉하며 아야세는 가로등이 켜진 공원으로 눈을 돌렸다. 중앙공원은 넓은 데다 나무가 많아 겨우 8시가 지났을 뿐인데도 인적도 없이 으슥했다. 평소에는 날이 저문 후엔 절대로 혼자 찾아오지 않는 곳이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보도를 걸으며 아야세는 인기척이 없는 주위를 주의깊게 살폈다. "아야세, 여기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데츠오가 덤불 쪽 벤치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두리번거리고 있는 데츠오의 얼굴을 친척이지만 아야세와는 전혀 닮지 않은 모습이다. 지저분하게 뻗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데츠오는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이는 데츠오를 보자 아야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달려갔다. "잘됐다...정말 무사했구나." 아야세에게 있어 이 며칠동안 데츠오의 안부가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데츠오는 할머니 장례식때 처음으로 만나게 된 사촌이었지만 나이도??비슷한데다 지금가지 친척이라는 존재도 모르고 자란 아야세는 데츠오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갖고 있었다. "아무도 미행하지 않았겠지? 돈은? 돈은 가져왔어?" 계속 주위를 살피면서 데츠오가 물었다. "괜찮아. 근데 아까 전화로 말했다시피 정말 돈이 없어." 맑은 눈빛을 띠며 아야세는 솔직하게 말했다. 가노의 집에 머물고 있는 지금, 아야세의 수중에 지닐 수 있는 돈은 단 한푼도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경매에 붙혀져 가노가 자신을 샀을 때 이미 지갑은 물론 옷까지도 모두 빼앗긴 후였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므로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아야세의 것이 아니었다. "아파트에 가면 조금 있긴 한데." 외출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아야세는 3일동안 집에도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럴 시간이 없어. 어떡하든 그 남자 돈 좀 훔쳐 가지고 오지.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니, 넌." 질겅거리고 있던 껌을 바닥에 뱉더니 데츠오는 옆에 있는 휴지통을 발로 냅다 들이찼다. "훔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나저나, 넌 앞으로 어떡할거야." "당연히 도망가야지." 땀으로 흥건한 손이 자신의 손목을 잡자, 아야세는 고개를 들었다. "멍청히 있지 말고 따라와." 머뭇거리는 아야세를 보며 데츠오가 불안한 듯 재촉했다. "안돼, 데츠오. 나 아무말도 없이 나온거란말야.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걱정할거야." "걱정? 그 돈벌레가? 너 바보 아니냐?" 손을 빼는 아야세를 돌아보며 데츠오가 조소를 내뱉는다. "그 자식은 남한테 돈 뜯어내는 일 외엔 별 흥미를 못 느끼는 인종이야. 너따윈 신경조차 안쓸걸." 데츠오의 말이 생각보다 예리한 아픔과 함께 아야세의 가슴을 짓누른다. 확실히 가노는 아야세가 모습을 감춘다고 해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도망친 줄 알게 되면 당연히 놀랄 것이고 화도 내겠지. 하지만 결국, 가노에게 자신은 고액을 들여 구입한 장난감에 지나지 않다. 바로 한 시간 전 아야세의 고열을 걱정하고, 같이 있어준 남자의 체온이 몸 안쪽에서 굳어지고 있었다. "...그치만 데츠오, 너 가노씨한테 빚이 있잖아. 얼른 갚아야 해." "닥쳐. 아무튼 넌 나랑 가는 거야. 네가 없으면 안된단 말야." "무슨 소리야. 데츠오 내 말 좀 들어봐. 강제로 만들어진 빚이 라면 경찰서로 가자, 안그럼 갚아야지. 아저씨한테 의논해봤어?" "시끄러워." 아야세의 몸이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설교따위 필요없어, 아버지한테 그런 소릴 어떻게 해! 갚은수 있는 금액이면 나도 예전에 갚았다구!" "그거 아주 바람직한 생각이군." 갑자기 끼여든 목소리에 데츠오가 몸을 돌렸다. 아야세도 믿기지 않는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급정차한 은색 외제자동차에서 장신의 남자가 내린다. 등뒤로는 기모노차림의 소메야가 아야세를 보며 은밀하게 웃는다. "네가 빌려간 3백만을 받아야겠다. 초과 이자까지 합해서 말야." 가로등 빛에 비쳐 가노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납고 예리한 시선이 데츠오를 거쳐 아야세로 던저졌다. "아야세! 너 , 이자식, 날 팔았지?" 데츠오가 소리를 지르며 아야세의 어깨를 잡고 뒤흔들었다1. 사태가 파악되지 않은 듯 아야세는 데츠오와 가노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가노한테 들키지 않게 빠져 나오라는 데츠오의 말에 조심스럽게 가노의 눈을 피해 쉽게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가노는 처음부터 자신이 데츠오와 접촉할 것을 예측했던 것일까...... "젠장, 이 매춘부자식." 망현히 서 있는 아야세에게 악담을 퍼붓고 데츠오는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가노의 차에 뒤이어 나타난 밴에서 두 남자가 내려 양쪽에서 데츠오의 팔을 잡았다. "데츠오, 단념하지 그래, 빌린 돈을 갚는건 상식이야." "돈, 돈이 없어." 비명을 지르듯 데츠오가 절규한다. "그럼 그 몸으로 만들어야겠지." 양팔을 잡힌 데츠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몸, 몸으로....." 떨리는 목소리는 아야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설마 사촌형까지 자신처럼 강제로 모욕을 당하게 하려는 걸까. 아야세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이 묵묵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덧붙여 설명하는 것도 귀찮은 듯 가노는 불쾌하게 말했다. "다 뜯어서 팔꺼야. 간장, 신장, 각막... 이렇게 지저분한 녀석도 그럼 한 5백만은 될거다. 뭣하면 인체실험용으로 연구실에다 넘겨도 되고." "살,살려줘." 데츠오가 비명을 지르자 아야세는 그를 붙잡고 있는 남자들에게 매달렸다. "데츠오는 갚을 의사가 있어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가노가 한 쪽 눈을 치켜올린다. "아야세 넌 왜 그런 녀석을 감싸는 거냐? 아쿠시한테 너를 판 건 바로 그 녀석이야." 아야세의 몸이 흠칫 떨리자 데츠오는 연달아 고개를 저었다. "거,거짓말이야... 그런..." "마음대로 해." 노여움이 배어든 낮은 목소리가 대기를 진동한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야세의 몸으로 한기가 내렸다. "데츠오의 상환기간은 이미 끝났어. 할 수 있으면 아야세가 네가 지금 녀석의 돈을 갚아도 좋다." 강철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긴장한 아야세를 추궁했다. 지금의 아야세로는 수 천 만엔의 빚조차 갚을 능력이 없었다. 그건 누구보다도 가노가 잘 알고 있다. "녀석을 차에 실어. 나도 바로 따라가겠다." 대답을 찾지 못한 아야세의 옆에서 가노가 냉담하게 지시했다. "아야세, 너도 돌아간다." 내민 가노의 팔을 아야세는 여린 힘으로 뿌리쳤다. "만지지마." 차가운 절망이 입 안 가득 넘어온다. 가노의 목적은 처음부터 데츠오를 납치하는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아야세는 데츠오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데츠오가 연락할 때까지 가노는 자신의 육체를 지배하면서 한편으로는 값싼 동정심을 베푼 것 뿐이었다. "...전부 가노씨의 계획이었군요." 무너질 듯한 아야세의 자조에 가노가 어깨를 들썩였다. 감정이 격해지자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가노의 오른손이 뻗어와 아야세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그대로 나무쪽으로 밀쳐진 채 성난 입김이 뺨에 와 닿는다. "...그렇게 그 녀석이 중요해?" 감정을 억누르는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아니면 넌 누구한테든 그렇게 마음이 넓은가?" "앗" 순간 강력한 힘이 아야세의 다리 사이를 움켜쥐어 온다. 아야세는 고개를 젖혔다.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로 다가와 이를 세웠다. 짜릿한 감각이 공포와 함께 뇌리를 마비시켰다. "놔,싫어!" 남자의 입술이 아야세의 입을 막고 안쪽 깊숙이 혀를 들이민다. "...음." 신음소리를 낸 것은 가노였다. 망연자실해 있는 아야세의 혀 끝에 시큼한 철 냄새가 풍긴다. 아야세가 상처낸 가노의 입술에 피가 고여있었다. "아..." 아야세의 입에서 절망과도 같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번득이는 눈으로 아야세를 노려보며 가노의 혀가 입술의 피를 핥는다. 순간 공포감이 밀려온다. "앗..." 입술을 찡그린 가노가 아야세의 머리를 잡고 보도로 끌고 나왔다. "네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데츠오한테 보여 주자구." 비아냥거리는 가노의 말에 끌려나온 아야세의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이 예리한 남자는 내뱉은 말을 실천하기에 충분한 잔인함의 소유자임을 아야세는 의심치 않았다. "왜 그래, 새삼스럽게 창피한가. 어젯밤에 내게 안겼을땐 좋아했었잖아. 안그래,아야세?" "아야..." 가노는 아야세를 자동차에 내던졌다. 아야세는 가노의 차에 부딪친 고통으로 인해 꼼짝할 수도 없었다. "이리와, 데츠오도 좋아하겠지? 네 엉덩이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알게 될테니까 말야." 본네트위에 널부러진채 부자연스런 자세로 아야세가 얼굴을 찡그렸다. "싫어. 전부 당신 뜻대로 됐잖아...! 근데 왜 이런..." 아야세는 자신의 무력함에 코끝이 아려오는 아픔을 느꼈다. "난 널 돈으로 샀어. 그러니 이건 당연한 거라구." 더 이상 반박할 수 없는 말과 함께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로 내려왔다. "입,열어." 독을 품은 듯한 말에 아야세는 흠칫거렸다. 도저히 저항할 겨를도 없이 커다란 손가락이 치열을 짓눌러 온다. 입안을 헤집던 끈적이는 손가락이 부드러운 혀를 잡아끌었다. "...음." 자극적인 손가락의 움직임에 아야세는 신음소리를 냈다. 다리를 벌린 가노의 무릎이 음란한 몸놀림으로 아야세의 다리 안쪽을 더듬는다. 딱딱한 본네트위, 고통과 모욕으로 몸이 경직된다. "아..." 굳게 감은 눈썹이 고통으로 떨렸다. 무기력한 자신으로 인해 눈물이 흐른다. 힘겨워하는 아야세의 머리 위에서 남자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고 있다. "소메야!" 가노가 부르는 소리에 아야세는 눈을 번쩍 떴다. 세워둔 벤 옆에 서 있는 소메야가 무표정한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본다. "먼저 돌아가서 말한대로 진행하고 있어." 가볍게 끄덕이는 기모노 차림의 소메야가 차안으로 사라졌다. "아..." 본능적으로 데츠오가 탄 차로 피하려는 아야세를 가노의 팔이 붙잡는다. "넌 아직 안돼." 떨리는 아야세의 두 눈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에 잔인함이 서려있다. 두 팔을 잡혀 조수석으로 끌려가는 아야세의 눈에 고통이 서렸다. "아....아" 가늘에 이어지는 자신의 신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하다. 부셔질 것 같은 심장을 싸안고 아야세는 부자유스런 다리를 꿈틀거렸다. 엉덩이 안쪽 자신도 만져본 적 없는 은밀한 곳에서 뭔가가 흘러내린다. "아...앗" 음탕한 소리를 내며 새로운 감각이 넘쳐 나온다. "싫어...아.." 되돌아온 맨션 침대 위, 아야세는 힘없이 고개를 흔든다. 아야세를 짓누르고 몸을 탐할 때까지 가노는 아무런 말없이 화풀이를 해 댔다. 아야세의 목에 입술을 갖다대면서 가노가 비웃었다. "왜, 이제 한계인가?" 봉긋 솟은 가슴을 깨물리자 아야세는 격하게 몸을 흔들었다. 아야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자 가노는 붉게 물든 다리사이를 더듬기 시작한다. 아야세의 허벅지를 타고 내려오는 미지근한 감촉을 가노의 손이 닦아낸다. 더듬거리는 손놀림에 아야세는 눈을 감는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가노는 히죽거리며 아야세의 몸을 뒤집어 허리를 들어올렸다. 두 다리를 문지르며 곧추세운다. "안돼...놔..." "신음소리가 아주 능숙해졌군, 그래? 그렇게 데츠오앞에서 한번 해볼까." 가노의 말에 순간 아야세의 등이 굳는다. "아..앗" 웃음소리와도 같은 비명과 함께 고통이 밀려온다. 아직 익숙치 않은 고통과 감촉에 아야세는 소리를 내질렀다. "안돼...아...아." 남자가 귓불을 더듬자 한기와도 같은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헉.." 아야세의 몸이 움찔하자 남자가 천박하게 웃음을 흘린다. "아앗~!!" 아야세는 절규와도 같은 비명을 질러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다. 눈물샘이 터진 듯이 울먹이는 아야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노는 힘껏 엉덩이를 쥐었다. "...흑"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 몸을 비틀었지만 오히려 가학적으로 허리를 흔드는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낮은 가노의 입김이 둔부에 닿는다. "안돼..."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당하는 고통은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여기가 좋지?" 손으로 감싼 점막 안쪽으로 들이밀며 가노가 속삭인다. "...아...싫어..."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말을 내뱉으며 아야세는 힘껏 고개를 흔들었다. 모욕과 함께 그에 더한 쾌락이 온 몸을 내달린다. 단추가 떨어져나간 상반신에 겨우 걸치고 있는 셔츠는 땀으로 흥건했다. 온 몸에 치달은 쾌감을 부정하듯 아야세는 머리를 흔들어댄다. "부끄러워하는 건가? 이렇게 좋아하면서 데츠오랑 도망치려고 한 거냐?" 앞머리를 잡고 아야세가 저항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아니야...데츠오는..." 격렬하게 부정하는 아야세에게 가노의 시선이 더욱 잔인해졌다. "대단한 녀석이군. 넌 데츠오가 좋은 맘으로 널 데리고 갈거라 생각했나?" 가노의 격한 말에 아야세가 신음한다. 하지만 남자는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아야세의 턱을 난폭하게 잡아끌었다. "데츠오는 널 또 다시 아쿠시한테 팔려고 했던 거야." 노골적인 조소에 아야세의 눈동자가 얼어붙는다. "하긴 악질적인 취미를 가진 외국인한테 팔리는 편이 너한테는 더 나았을 지도 모르지." "그만하세요! 그만..." 가는 아야세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상치 못한 절규에 가노마저 움직임을 멈추었다. 남자에 의해 짓눌려진 몸, 아야세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차가운 눈물이 피부에 떨어진다. 이건 무엇 때문에 흘리는 눈물일까, 아야세도 알지 못했다. 배신은 데츠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야세 자신도 마음속으로는 데츠오에게 기대 하지 않았었다. 믿은 것이 아니라 믿고 싶었던 것이다. 이기주의인 사촌과 자신을 돈으로 산 남자조차 아야세는 믿고 싶었던 것이다. "...난..." 말을 잇지 못한 채 아야세의 입이 굳어졌다. 오열에 떨며 남자의 폭력을 무기력하게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아야세의 입술에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아..." 그것이 가노의 입술임을 알자 아야세의 몸이 흠칫 떨렸다. 축축한 혀가 아야세의 입을 열고 서서히 입안을 빨아들였다. 민감해진 혀의 맞닿은 감촉에 눈물이 고인다. "아야세..." 하지만 무엇보다 야윈 몸을 끌어안는 튼튼한 팔과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값싼 동정심은 어떤 말보다도 잔인하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애절함이 눈물과 함께 귓가에서 어른거린다. "싫어..." 남자의 가슴을 치는 아야세의 격한 저항에 가노의 두 눈이 초점을 잃고 다시 난폭한 분노가 스며들었다. 격앙된 남자의 손이 아야세의 머리위로 올려졌다. "...앗!" 순간 얻어맞을 것을 각오하고 아야세는 어린 동물처럼 몸을 움츠렸다. 막강한 남자의 폭력앞에서 아야세는 그다지도 무력했다. 하지만 숨을 죽이고 떨고 있는 아야세에게 가노의 손은 내려오지 않았다. "...너는 왜 모르는 거냐..." 노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갈 곳을 잃은 가노의 손이 아야세의 몸을 침대로 밀었다. "아니..이제 나한테 이용가치 따윈..." 벗어나려고 안달하는 아야세의 목을 힘껏 거머쥐었다. "...널 이대로 내버려두지 않아." 공포감마저 풍기는 눈길로 가노가 아야세의 목덜미에 혈흔을 남긴다. "헉..." 고통에 숨을 몰아쉬자 남자의 시선이 더욱 강해진다. "널 산 건 나야." 다리를 크게 벌리고 눅눅한 하부에 가노의 몸이 와 닿는다. "...아." 흥분된 열기가 점막을 자극하자 아야세는 소리를 질렀다. "만지기만 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기분이 좋은가?" 모욕적인 말에 아야세가 부정하듯 고개를 흔든다. 한계까지 열린 새하얀 다리가 아야세의 오열에 맞춰 경련을 일으켰다. "좋아. 미치도록 해주지." 접착제처럼 끈적이는 소리를 내며 가노가 아야세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꼭 껴안은 가노의 팔은 조금의 일탈도 용서하지 않는다. "아야...그만..앗." 무시무시하게 다가오는 타인의 몸이 저항하지 못하는 약한 몸을 잡고 뒤흔들었다. 고통을 못 이겨하는 아야세의 머리를 남자가 누르고 있다. 시트에 고정된 아야세를 내려다보며 가노가 눈을 찡그린다. "젠장" 남자는 세차게 허리를 밀어붙이며 고통을 호소할 틈도 주지 않고 아야세의 턱을 치켜올려 입술을 빨기 시작했다. 호흡하기 힘든 입을 벌리고 타액으로 가득 찬 혀가 입안을 맴돈다. "하아...아..."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깊게 빨아들이자, 배를 관통하는 듯한 고통이 하복부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고통과 충격으로 몽롱해지는 순간 아야세는 자신을 응시하는 남자의 눈을 보았다. 격앙되어 초점을 잃은 눈빛 속에 애절함과도 같은 괴로움이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너는 내 거야..."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린다. 참혹한 관계때마다 힘없이 소리만 지르는 자신에 아야 세는 눈을 감았다. 돈이 없어!! - 5 차갑게 식은 손 끝에 바스락거리며 지폐의 감촉이 잡힌다. 힘겹게 눈을 감고 아야세는 손안에 잡힌 지폐를 꾹 쥐었다. 방금 전까지 아야세의 육체를 마음껏 유린하던 남자가 몸값으로 남긴 돈이다.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평소의 아야세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난폭한 모습으로 지폐를 바닥에 내던졌다. 침실은 짙은 어둠에 잠겨있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더듬거리며 불을 켰다. 정사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옷장에서 긴 셔츠를 꺼내는 손위에 물이 한방울 툭 떨어졌다. 무심코 뺨에 손을 댄 순간, 그것이 눈물임을 알았다. "울지마...난 남자잖아. 보기 흉하게." 애절한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리며 아야세는 눈물을 닦았다. 육체의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마음이 약해진 탓일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며 아야세는 옷을 가다듬었다. 복도 끝에서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아야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가노씨?" 떨리는 아야세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린다. 그러나 뒤돌아선 사람은 아야세를 지배하는 잔인한 남자가 아니었다. "어머, 아야세 여기 있었네." "소메야씨..." 부끄러운 듯 중얼거리는 아야세에게 소메야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괜찮아?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소메야가 걱정스러운 듯 묻자 아야세는 핏기 가신 입술을 깨물었다. "...가노씨 어디 있는지 아세요?" "얼굴이 왜 그래...무슨 일 있어?" 아야세는 아무 일도 아닌 듯 힘없이 웃으려했지만 눈동자가 떨렸다. "저, 학교 그만두고, 일하려고 해요. 그것에 대해 의논 좀 할까 해서요." 갑자기 하얗게 수척해진 어머니의 모습이 머리 속에 떠오르자 아야세는 눈을 감았다. 차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 어머니의 병원비는 막대한 금액으로 불어났다.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밤낮없이 일만 하던 아버지는 어이없게도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나마 아버지의 생명보험금이 없었다면 어머니는 몇 달간 만족스럽게 치료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2년 전부터 아야세는 이미 할머니 집에 맡겨졌지만 혼혈며느리를 싫어한 엄격한 할머니는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 한번도 금전적인 도움을 준 일이 없었다. 이렇듯 아야세를 사랑하고 그리고 아야세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항상 물거품처럼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 곳엔 반드시 돈이라는 독이 자리잡고 있었다. 묵묵히 서 있는 아야세를 보고 소메야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우선 나랑 어디 좀 가자. 괜찮아. 가노님한테 허락받았으니까." 아야세는 소메야의 재촉을 받으면서도 머뭇거리며 방을 나갔다. 15층 맨션을 나와 조금 걸어가자 금세 신주쿠 번화가에 도착했다. 거의 막차도 끊길 시간인데도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취해서 떠드는 사람들, 길바닥에 주저앉아 킬킬거리는 여자. 술과 허영으로 가득 찬 눅눅한 거리를 비틀거리며 지나간다. 아야세는 이 곳에서는 명백한 이방인이다. 향랑에 취해 쾌락주의가 될 소질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아야세에게 이 거리의 네온사인은 너무나 눈부셨다. 결코 물들거나 더럽혀지지 않는 광석이 오염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야세를 돌아보는 소메야의 눈에 미소가 스쳐지나간다. "여기야" 소메야가 가리키는 곳은 반 지하인 상점 입구로 아야세는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조심스럽게 게단아래를 들여다보았다. 상점으로 내려가는 계단 난간은 조화로 된 장미가 둘둘 감겨있다. 소메야를 따라 검은 색 문안으로 들어선 아야세는 칙칙한 실내 분위기에 짐짓 놀랐다. "다녀오셨어요, 마마. 어머, 혹시 이 아이에요? 어머, 예쁘네!" 검은 머리의 여장남자가 한껏 교태를 떤다. "아,저,전..." "부르코짱, 손님 어디 계셔?" 당혹해 하는 아야세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소메야는 어두컴컴한 실내를 둘러보았다. 가게 안은 손님이 3분의 2정도 차 있었고 음탕한 교성과 알콜냄새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이곳은 소메야가 운영하는 게이바인 듯 했다. "뒤에서 도도짱이랑 엘레나짱이 지키고 있어요." 소메야에게 대답하면서 종업원은 힐끔힐끔 아야세를 관찰했다. "저기, 당신 이 머리 염색했지? 어디거야?" 아야세는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곤혹스러웠다. "저,그,이 머린 물들..." 아야세의 머리를 만지려는 종업원의 손을 소메야가 때린다. "자,그만해. 부르코짱, 한가한 애들 한 서너 명 데려다 놔. 바로 나갈테니까." 소메야에게 강제로 끌려가면서 아야세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소,소메야씨! 전, 죄송하지만 이런 일은 못해요..." 분명 자신은 가노에게 육체적인 관계를 강요당했지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직업이나 기호에 편견은 없지만 게이바에서 일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바보야. 널 고용하려는 게 아니야. 하긴 아야세정도라면 잘 팔리겠지만, 그랬다간 가노님이 날 죽이려들걸." 소메야는 웃으며 종업원통로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가노씨, 이곳에 자주 놀러 오나요?" 아야세의 질문에 소메야는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가노님이 이곳에 오는 건 이자를 받을 때나, 오늘처럼 사소한 볼일이 있을때만이야. 가노님은 장난으로라도 게이랑 시시덕거리는 남자가 아니거든." "하지만..." "진짜라니까. 한번은 한 게이녀석이 가노님을 쫓아갔다가, 맞아죽는 줄 알았어." 가노의 긴 손과 발은 직접적으로 폭력을 연상시킨다. 문득 창백해진 아야세를 보고 소메야가 웃음을 지었다. "아야세, 가노님이 싫어?" 갑작스런 질문에 아야세가 고개를 들었다. 좋고 싫은, 그런 단순한 선택에 대해 아야세는 잡혀온 5일 동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애초부터 아야세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말을 잃은 아야세에게 소메야가 더욱 농염한 미소를 보냈다. "남자의 순정을 몰라주는 애로군. 뭐 하긴 그런 무지막지한 순정을 알아달라는 쪽이 무리긴 하지만." 소메야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해 물으려고 하자 알루미늄 문이 열렸다. 좁은 방안에 앉아 있는 데츠오를 보고 아야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데츠오!" 아야세의 목소리에 데츠오도 고개를 들었다. 쇠약해져 있긴 했지만 상처는 없는 듯 했다. 설마 가노의 말대로 장기를 적출한 것이 아닌지 아야세는 걱정이 되었었다. "젠장...이 자식들, 악마야." 양팔이 붙들린 채 데츠오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을 하다니 너무한데. 빚을 갚는데 도와주려는 것뿐이라구." "뭐가 도와주는 거란 말야! 자기파산따위 할 수 없어!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자기파산이라니, 도대체..." 당황하는 아야세를 소메야가 머리에 핀을 꽂으면서 돌아보았다. "내일 데츠오가 비싼 물건을 사서 가노님의 루트로 전매할거야. 그 매상으로 빚을 갚는 거지." "...고액의 물건이라니, 데츠오한테 그런 돈이 있을 리 없잖아요." "맞아, 그래서 자기파산 신고를 하는겆. 그러면 상환의무는 없어지거든. 최근에는 심사가 좀 까다로와지긴 했지만." 서슴없는 대답에 아야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그런..." "사기지. 하지만 그 방법말고 빚을 갚으려면 데츠오, 정말 신장이라도 팔아야할걸." 파랗게 질린 아야세의 눈이 데츠오를 바라본다. "범죄인줄 알면서 그런 일을 시킬 순 없어요." "아야세." 소메야가 침착한 목소리로 부르자, 아야세는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데츠오가 가노님에게 돈을 빌린 건 사실이야. 갚을 수 없다고 해서 아, 그렇습니까, 하고 물러 선다면 사채업자는 어떻게 먹고 살겠어. 가노님은 자선사업을 하는게 아니라구." 뭐, 가노님의 경우, 경계심이 다소 가미된긴 했지만, 하고 소메야가 어깨를 들썩이며 중얼거렸다. "데츠오는 우리한테 맡겨. 아야세, 가노님을 만나고 싶어했지?" 마음속까지 간파하는 듯한 시선으로 묻자, 아야세는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가노씨는...지금 어디에?" 진지한 아야세의 모습에 소메야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쿠시야." 아야세가 의미를 묻기에 앞서 데츠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아야세가 경매에 붙혀졌던 곳, 데츠오는 그곳에서 비디오를 찍고 있었다지. 그 테잎, 아쿠시녀석들이 샀다고 해서, 가노님이 가지러 갔어." "비디오 테잎이라니 대체..." 놀라는 아야세에게 소메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겨우 웃는 표정을 짓었다. "데츠오의 말로는 아야세의 요염한 모습을 찍었다던데. 그리고 얼굴도."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는 아야세에게 또 다른 불안감이 떠올랐다. "가지러 간다니..., 가노씨는 아쿠시와 사이가 나빠서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물론이지. 그 경매때도 무사히 돌아온 게 기적이었는걸. 적진에 뛰어들어가다니, 제정신이 아니지 뭐야. 이번에야 말로, 살아돌아오기 힘들지도 모르지." 농담조로 내던지듯 말하며 소메야는 옷깃을 추스렸다. 아야세는 가노의 행동에 공포감을 느끼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말려야 돼요, 가노씨가..." "어디 가려고, 설마 아쿠시한테?" 정색을 하며 묻자, 아야세가 끄덕인다. "가겠어요."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아야세의 말에 소메야가 인상을 찌푸렷다. 예리한 소메야의 두 눈에서 웃음이 가셨다. "가노님이 지게 되면 너도 어떤 꼴을 당할지 몰라. 이번엔 경매 비디오뿐만이 아니야." "이길 리가 없어! 그곳은 손님이 길 수 없도록 조작했다구!" 대답하려는 아야세를 제치고 데츠오가 소리를 질렀다. "이 바보들아, 너희들은 죽어야 정신차리겠냐!" 절규하는 데츠오를 소메야가 힐끔 쳐다본다. "괜찮아요, 아쿠시의 가게를 알려주세요." 당당한 아야세에게 소메야가 방긋 웃는다. "결정됐네. 할 수 없지." 이마에 손을 대자 아직도 열이 났다. 과도한 긴장과 가노의 육체적인 징벌로 인해 다시 미열이 오르고 있다. 아야세가 탄 승용차 앞을 지난번 벤이 달리고 있었다. 가노가 의뢰한 몇 가지 물건이 차안에 가득 들어있다고 했을뿐, 그것이 무슨 물건인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아야세는 미열로 인해 뜨거운 입김을 내쉬며 바라보는 신주쿠거리는 심야가 지난 지금도 잠들지 않고 있다. 거리는 사람들로 넘치고, 건물로 가득 차 있으며 현란한 빛이 넘실댄다. 조명 하나하나에 인간의 생활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빛이 있는데 자신이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이상하기도 하고 설글프기도 해서 아야세는 눈을 감았다. "아야세 다 왔어." 조수석에서 부르는 소리에 아야세는 눈을 떴다. 소메야는 운전석의 남자와 두세마디 말을 나눈 뒤, 남자들에게 벤에서 짐을 내리도록 지시하고 먼저 가게로 들어갔다. "악취미로군." 자신의 음침한 가게와 비교하며 소메야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천정에서 내려온 번쩍이는 샹데리아와 기분 나쁠 정도로 빨간 카페트에 압도되어 아야세도 실내를 둘러보았다. 아쿠시란 눈을 뜻하는 인도의 고어이다. 그 점을 의식했는지, 실내 곳곳에는 동양적을 도안된 눈이 그려져 있었다. 소메야와 함께 실내로 들어가려 하자, 턱시도차림의 점원이 제지했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예약이 되어 있어서, 일반 손님은 받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가노님은 안쪽에 있나?" 깍듯이 고개를 숙인 점원에게 소메야가 무표정한 시선을 건넨다. "우린 가노님 일행이야. 전해줄 게 있어서 왔어." 긴장한 점원의 얼굴에 잠시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자, 이쪽입니다." 안내되어 간 곳은 반 지하인 넓은 홀이었다. 실내 중앙에는 포커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안쪽을 오늘은 사용하지 않는 듯한 작은 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아야세의 기억에는 없지만 그 무대위에서 자신이 경매에 붙혀졌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 속 가득 긴장감이 팽배함을 느끼며 아야세는 소메야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포커자리에 앉은 남자들 주위에 몇 몇 측근들이 서 있었고 그 외에 손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자리는 오로지 그들을 위한 자리임을 알고 아야세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위에 ,5백만." 40대 쯤 되어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가 불쾌하게 실내 안에 울린다. 맞은 편에 앉은 가노는 은색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끝났어. 다음이다." 이내 실내가 술렁이며, 가노옆에 놓인 지폐다발을 턱시도차림의 점원이 가져간다. 새 담배를 꺼내려는 가노의 시선이 문 앞에 서 있는 아야세에게로 가 닿는다. "너..." 가노가 일어서자 테이블을 둘러싼 남자들도 시선을 돌린다. "소메야, 왜 데리고 왔어. 빨리 돌아가." 노여운 기색으로 가노가 소메야를 쏘아보았다. "내가 억지로 데려가 달라고 했어요!" 소메야를 감싸기 위해 아야세는 목청을 높였다. "어때 여기 와서 앉으라고 해. 뭐하면 가노, 자네 장난감으로 해도 되잖아." 불룩 나온 배를 흔들며 중년의 남자가 의젓하게 손을 펼친다. 기름기가 철철 흐르는 남자의 묘한 시선이 아야세의 몸을 훑듯이 바라본다. "저 갈색머리는 지난 주에 여기서 가노가 사간 상품이구만. 벌써 맛은 보셨나?" 비아냥거리는 남자를 가노가 한심한 시선으로 돌아본다. "마실걸 좀 줘. 잠시 휴식이다." 우위를 확신해서인지 중년남자는 카운터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가노는 잠자코 일어나서 엄한 눈길로 아야세앞으로 다가왔다. "소메야, 잠깐 돈 좀 보고 있어." 하고 가노는 아야세의 손을 잡아 데리고 간다. "..." 돈이 없어!! - 6 호화로운 화장실 벽에 아야세의 등을 밀어댔다. "누가 이런데 오라고 했어?" 격한 목소리로 문책하자 아야세는 잠자코 입만 내물고 있었다. 데츠오를 붙잡은 이상 가노에게 아야세의 이용가치는 없을 것이다. 가노는 아야세에게 육체적인 관계를 강요했지만 그것도 한 때 호기심때문이리라. 그렇다면 가노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아야세의 비디오 테잎을 찾을 필요는 없다. 격정에 휘말려 이곳까지 왔지만 아야세는 가노의 마음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여기서 다시 경매에 팔려 얼마라도 돈을 손에 쥐는 편이 가노에게는 낫지 않겠는가. "여기가 어딘지나 알고 온 거야? 여긴 말야..." "알고 있어요." 소리치듯 대답하고 아야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노씨야말로 이제 그만하세요. 여긴 위험합니다." "그렇게 안돼. 저 하야시란 자식에게 볼일이 있거든." 쌀쌀맞은 대답에 아야세는 눈을 꾹 감았다. 등에 닿은 타일 벽의 차가운 기운이 옷을 뚫고 전해졌다. 욕실에까지 설치된 눈의 형상이 멍하니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다. "...제 비디오 테잎때문입니까?" 격앙된 아야세의 말에 가노의 담배가 잠시 흔들린다. "소메야 녀석 그런 것까지 말하다니." 말 속에 담긴 계면쩍은 기색에 아야세가 눈을 떴다. 이 남자는 정말로 그런 것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려는 것일까. "왜입니까, 가노씨!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나한텐 상관 있어." 가노의 거센 말투에 아야세의 몸이 흠칫 떨렸다. 아야세가 과민한 반응을 보이자 가노의 눈에 동요가 깃든다. "...미안 큰 소리 질러서." 낮은 목소리로 사과를 하자 아야세는 묵묵히 입술만 깨물었다. "테잎은 찾을 거야. 그리고 이건 나와 하야시와의 승부야. 너 때문만은 아니라구." "그런 말해도 소용없어요. 지금 당장 그만두세요." 진지한 아야세의 눈빛에 가노가 쓴웃음을 지었다. "무서운데." "말 돌리지 마세요. 부탁이예요. 가노씨, 빨리 이곳에서 나가요." 가노는 낮게 웃으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안돼. 이미 내기는 시작됐어. 승부가 날 때까지 자리를 뜰 수는 없지. 그리고 난 지금 지고 있단 말야." 라면서 빙긋 웃었다. 이곳의 도박 규칙에 대해 차안에서 소메야한테 듣긴 했지만 그건 정당한 방법이 아니다. 우선 포커에 참가하기 위해 막대한 현금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심한 것은 상대보다 고액의 돈을 걸지 않고 콜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바로 지게 되는 룰인 것이다. 콜을 하려면 양자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아무리 카드가 좋아도 돈을 걸 수 없고 상대가 콜에 응하지 않으면 지게 되는 것이다. 바로 현금을 보다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기는 식의 포커이다. "지고 있다니...괜찮아요?" "자식들 속임수를 쓰고 있어. 찾을 기회를 노려야지." 할 말을 잃는 아야세에게 가노가 담배연기를 뿜어댄다. "괜찮아. 승산은 있어." "하지만 속임수인걸 알면서도 돈을 내준단 말예요?" 갑자기 큰소리를 지르던 아야세는 당황하며 자제를 했다. 아야세는 오히려 가노가 태연하게 담배를 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속임수를 드러내는 건 비장의 카드같은 거야. 그리고 녀석들도 나한테 돈을 뜯어냈으니까 안심하고 있겠지. 그러니까 다음은 큰 건수가 나올 차례거든." 아야세의 동요를 살피며 가노는 천천히 담배를 비벼껐다. "건수라면..." 말을 하려는 아야세를 무시하고 가노의 왼손이 뺨으로 다가온다. 바라보는 가노의 눈빛이 아야세의 말문을 막았다. "열이 다시 올랐군." 남자의 낮은 목소리에 후회의 빛이 역력했다. 살이 맞닿자 바로 몇 시간 전 침대에서의 잔인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얼굴이 붉어진 아야세의 어깨를 가노의 손이 잡았다. "아..." 호흡이 겹쳐지면서 피할 틈도 없이 이마와 이마가 닿는다. 안겼을 때처럼 담배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눈앞에서 남자의 강한 시선이 번뜩였다. 아야세의 몸이 긴장되면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대로 가노의 입술이 다가왔다. "입 벌려." 귓가에서 울리는 속삭임을 거부하며 고개를 돌리자 작은 탄식과 함께 강제로 덮쳐진다. "음...음" 촉촉한 감촉이 아야세의 입안을 맴돈다. 관능적인 남자의 커다란 손이 아야세의 등을 따라 가느다란 허리를 두 손으로 받쳤다. 앞서 치룬 난폭한 관계의 속죄라도 하듯 남자의 손은 무서우리만치 부드러웠다. "가노..." 피하기 위해 고개를 흔드는 헛수고 끝에 겨우 입술이 풀려났다. 기진맥진한 몸을 벽에 기대고 아야세는 울먹이는 눈을 감췄다. "설마 자주 이러니?" 자주 열이 나느냐는 뜻으로 해석한 아야세는 머뭇거리며 끄덕인다. 남자의 몸으로 발열체질이 그다지 자랑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과연 가노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서 3년전..." 무슨 말인지 가노의 말이 흐지부지 끝났다. 답을 기다리지 않고 열린 문 쪽에서 팔짱을 낀 소메야가 웃고 있다. "정말 당신은 화장실에서도 그럴 맘이 생기나 보군요." 동요하는 아야세를 안고 가노가 인상을 썼다. "소메야" 비난하는 가노의 목소리에 소메야가 어깨를 들썩였다. "돈은 도도짱이 지키고 있어요." 칼날같은 시선이 더욱 험악해지며 가노는 욕실 벽을 손으로 쳐댔다. "그런 말이 아니야. 이 녀석 데리고 빨리 돌아가." "어머, 안돼요. 아야세는 자신의 의지로 여기까지 온 걸요. 마지막까지 지켜줄 권리가 있어요." "가노씨가 여기 있겠다면 전 절대 돌아가지 않겠어요." 가노의 품에서 벗어나면서 아야세가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가노는 다시 인상을 썼지만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시계를 쳐다보고는 화장실을 나갔다. "물건은 전부 가져왔겠지?" 가노가 묻자 소메야가 입을 삐죽거린다. "좀 시간이 걸렸어요. 슬슬 부를까요?"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아야세는 소메야와 함께 카운터 쪽 자리로 안내되었다. 자리를 지키던 도도라는 게이도 테이블에 도착한 가노와 바꿔앉으며 카운터 쪽으로 왔다. "그럼, 게임을 다시 시작해볼까. 어때, 갈색머리의 값은 정해졌어?" 입맛을 다시는 남자에게 가노가 비웃듯 말했다. "나도 이제 슬슬 솜씨 좀 발휘해야겠군요. 하야시씨." 금속 케이스를 들어올리는 가노를 보며 하야시가 과장되게 두 손을 벌린다. "좋지. 귀여운 구경꾼도 왔으니 한번 크게 놀아볼까." 하야시의 눈짓에 둘러서 있던 남자들이 안쪽으로 들어가 커다란 짐을 실은 웨곤을 가지고 나왔다. "이런..." 웨곤에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 지폐다발임을 알자 아야세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소,소메야씨. 저건." 소리를 낮추고 옆에 앉은 소메야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소메야는 싸늘한 표정으로 웨곤을 주시하고 있다. "...6억 정도 되겠는데." "6, 6억..." 놀라는 아야세를 뒤로, 지폐를 쌓아올린 웨곤이 테이블 옆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지폐라기 보다 조각난 거대한 종이로 만든 산과 같았다. "저렇게 막대한 돈을 내놓는다면 가노씨가 이길 승산은 없잖아요. 더구나..." 지금까지 속임수에 져온 내기에 가노가 무슨 수로 이긴다는 것인지. 가노옆에 놓인 것은 중형 금형 케이스 두 개가 전부이다. "그럼 마지막 판돈은 5백만이었지." 지폐산의 일부가 아주 조금 허물어졌다. 눈이 그려진 원색의 테이블에 각각 5백만의 판돈이 올려졌다. 배급받은 카드를 바라보며 몇 장 교환을 한다. 가노는 카드를 한 장만 바꾼 채, 테이블에 올려놓고 담배를 폈다. "그럼, 이 다음은 5천이다." 하야시가 이죽거리자 가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받고 2천." 가노 스스로 가방을 열어 안에서 황금빛 지폐를 꺼내 탁자에 던졌다. "그럼 그 위에 5천." 하야시의 지시에 맞춰 남자들이 돈을 쥔다. 네, 다섯 번만에 3억가까이 쌓여졌다. 지폐를 마치 애들 장난감처럼 다루는 모습에 아야세는 현기증을 일으켰다. 이것이 꿈이라면... 아니, 이건 악몽이야. "다시 5천. 가노, 자네 군자금은 어떤가. 이제 슬슬 저기 애들을 데리고 와야 하지 않나?" 하야시가 끈적한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자 아야세의 하얀 얼굴에 긴장이 더해졌다. 가노의 결단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이미 각오는 되어 있었다. 일어서려는 아야세를 소메야가 붙잡았다. "그럼 이제 제가 원하는 것도 내놓을 건가요?" 가노가 말을 꺼내자 하야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굉장한 집념이로군. 자네의 애완견 갈색머리의 적나라한 모습이 담긴 비디오테잎, 1억 어떤가?" 고액이 매겨지자 아야세가 의자를 밀치고 일어섰다. 미처 뭐라고 말리기도 전에 다시 소메야가 아야세를 끌어 앉혔다. "얌전히 있어. 지금 상황에서 1억이면 양심적이야." "하,하지만..." 아야세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거래되고 있는 것은 아야세 자신이 관련된 비디오테잎이다. 1억이라는 가치가 있을 리가 없다. "합쳐서 1억 5천. 저기 두 녀석을 합해서 얼마나 쳐 줄건가?" 하야시가 묻자 가노는 고개를 들어 문을 쳐다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가노를 따라 문 쪽을 바라보았다. 대형 금속케이스를 품에 안은 게이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1억 5천만 받을까요?" 태연히 발을 포개며 가노는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어, 어떻게 된거야?" "별거 아닙니다. 제 군자금이 도착한 것일뿐." 받아 든 가방을 가노는 기세 좋게 열었다. 가방안에 꽉 들어찬 지폐다발을 보자 하야시는 초조한 기색을 애써 감추려했다. "하! 일부러 2억이나 되는 돈을 운반해 온건가. 나는...." 옆에 놓인 웨곤을 가리키던 하야시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운반되어 오는 금속케이스는 한 개가 아니었다. 짙은 화장을 한 남자들이 줄을 이으면서 가방을 들고 나타났던 것이다. "설마, 밴에 있던 화물이..." 놀란 것은 하야시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야세도 기가 막혔다. "맞아. 돈 쌓아올리기 놀이라면 절대 지지 않지. 가노님은 돈을 항상 이런 시시한 놀이에만 쓴다니까." 투덜거리면서도 소메야의 눈은 재미난 듯 웃으며 보고 있었다. 아야세는 공포감마저 느끼며 가노를 보았다. "아직 나는 끝나지 않았어." 의자에 앉은 채로 가노가 턱을 치켜올렸다. "1억 5천, 받고 5천." 순간 하야시가 어이없어 하며 고개를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이블에 넘쳐나는 돈이 다른 탁자로 옮겨졌다. 현금은 이미 5억을 넘어섰다. "믿을 수 없어. 이런..." 망연히 중얼거리는 아야세를 보고 소메야가 희미하게 웃었다. "하야시는 더 걸거야. 5억이란 돈을 눈앞에 두고 물러설 그가 아니거든." "하,하지만 상대는 속임수를 쓰는데요." 덜덜 떨고 있는 아야세를 테이블에서 가노가 불렀다. "아야세, 마실 것 좀 가지고 와." 서둘러 일어난 아야세 대신 소메야가 바텐에 주문을 했다. "자, 이거 가지고 가서 응원해 줘." 대신 가져가려는 점원을 거절하고 소메야가 아야세에게 잔을 건네주었다. 잔을 꼭 쥐고 아야세는 가노쪽으로 다가갔다. "가노씨..." 걱정하는 아야세에게 가노가 카드를 집어들며 살짝 웃는다. 카드를 모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 아야세의 허리에 둘렀다. "가노...무슨 짓을." 설마 사람들앞에서 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무방비한 상태였던 아야세의 둔부를 가노가 함껏 끌어안는다. 남의 이목에도 개의치 않은 가노의 돌발적인 행동에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그만두세요." 떨리는 아야세의 가느다란 허리를 익숙한 손길이 어루만지고 있다. 당황한 아야세가 잔을 떨어뜨릴 뻔했지만 가노는 오히려 그 모습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벗어나려고 바둥거렸지만 불가능했다. 아야세의 옆구리에 가노가 웃으며 얼굴을 가져갔다. "어떻게 할거요, 하야시." 가노가 아야세를 희롱하는 여유까지 보이자 하야시의 얼굴이 울그락 붉으락해졌다. "받겠어, 거기에다 2천 더 내놓지." 손에 쥔 카드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가노가 다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받고 3천"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가노의 목소리에 아야세는 의자를 꼭 쥐었다. 아야세 앞에 놓인 테이블에 현금이 끝도 없이 쌓여져갔다. "4천. 나는 아직 남았어." 고급 위스키를 물처럼 넘겨버리고 가노가 웃었다. 하야시의 얼굴에는 초조와 동요가 추잡하게 뒤섞였다. 사실 하야시의 웨곤에 놓여있던 돈다발은 거의 테이블로 옮겨진 상태였다. "받아, 받는다구! 왜 그래 빨리 돈을 가져와!" 소리지르는 하야시를 남자 중 하나가 말린다. 무슨 일인지 귓속말을 하더니 하야시는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하야시는 가노를 돌아보며 비겁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노, 슬슬 마쳐야 될 것 같은데." 비굴한 하야시의 말에 가노가 아야세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소리요?" "자네 목적은 비디오 테잎이잖아? 그럼 이 비디오 테잎하고 위약금을 줄 테니까 오늘은 이쯤에서..." 하야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노가 비워진 잔을 테이블위에 걸칠게 올려놓았다. 커다랗게 부딪치는 소리에 아야세는 물론 하야시와 남자들도 숨을 죽였다. "웃기는 소리 하지마. 이 게임의 룰은 네가 정한 거잖아!" "그러니까 위약금을 낸다고 했잖아. 1억 줄게! 자네가 그 꼬마를 산 돈은..." 가노는 아야세의 손가락을 잡아 혀로 핥기 시작했다. "난 이 녀석 몸값하고 테잎이나 받자고 온 게 아니오. 도박이란 원래 돈을 버는게 목적 아닌가요? 하야시. 받을거요, 멈출거요. 선택하시오." 협박과도 같은 가노의 기세에 눌려 하야시가 말을 더듬거렸다. "알...알았어, 받을게." 하야시 주위에 긴장이 흘렀다. 가노는 히죽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를 손톱으로 두들겼다. "좋아, 콜이다." 예기치않은 말에 주위는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가,가노씨." 아야세가 무심코 소리를 내며 가노의 팔을 잡았다. 이 남자는 진심인가. 사기당하고 있는 이상, 카드로 이길 수 없다. 유일한 승산이었던 돈놀이를 그만두고 가노는 카드로 승부를 걸려는 것이다. 아야세조차 가노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충격은 하야시도 마찬가지였다. "콜...정말 콜이야?" 멍한 하야시의 목소리에 야비한 기색이 보인다. "좋아,콜. 이번 게임은 6억에서 콜이다!" 하야시는 기뻐하며 일어서서는 카드를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극도의 긴장에서 해방된 하야시의 눈은 확실한 승리에 빛나있다. 하야시의 손이 가노의 반응을 보며 투페어를 가리켰다. "어때?" 이것에 이기려면 스트레이트나 풀하우스밖에 없다. 간절한 마음으로 아야세는 가노의 손가락을 힘껏 쥐었다. 아야세의 긴장을 진정시키듯 가노가 손끝을 세웠다. 그리고 천천히 카드를 열었다. "이...이런!" 들여다보던 하야시의 입에서 비탄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가노가 스트레이트의 마지막 장을 테이블에 던져놓았다. "내가 이겼어." 가노의 목소리가 머리 속으로 들어온 순간, 아야세의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쓰러질 듯한 아야세의 몸을 가노가 일어나 안았다. "소메야! 돈 챙겨." 주위를 압박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소메야가 벌떡 일어섰다. 맥없이 테이블을 바라보던 하야시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이럴수는 없어." 울부짖는 하야시를 향해 가노가 아야세의 어깨를 잡고 인상을 찡그렸다. "게임에 지고 그런 소리나 하다니, 하야시답지 않군요." 비아냥거리는 가노에게 덤벼들 듯 하야시는 돈다발 앞에 막아섰다. "사기다! 가노, 너 속임수 쓴 거지. 그런 녀석한테 돈을 줄 수 없어." "사기란 말야..." 아야세를 의자에 앉히고 가노가 천천히 등 뒤 벽으로 걸어간다. 남자들이 달려들기 전에 가노는 천장에서 늘어뜨린 거대한 벽걸이를 손에 쥐었다. 다른 장식품과 마찬가질 벽걸이에는 악취미적인 눈이 그려져 있었다. 간의 손에 힘을 가하자, 천이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이런게 바로 사기아니야?" 벽에 나타난 소형 카메라를 가리키며, 가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카메라뿐이 아니지? 덕분에 내 패를 당신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거잖아." 분한 듯 이를 가는 하야시를 향해, 가노는 아야세의 목에 손을 뻗었다. 놀란 아야세의 젖은 눈동자가 가노를 올려다보았다. 갑작스런 충격에 말조차 하지 못하는 하야시가 테이블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이럴수가...5억...5억이야." 짐승과 같은 소리로 하야시가 절규한다. "이제 결판났군. 하야시." 가노는 테이블에 놓인 비디오 테잎을 손에 들었다. 돈이 없어!! - 7 "아직 전차도 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조용하군." 새벽을 기다리는 시간, 공기가 차가워 기분이 좋았다. 고가도로아래 작은 어린이 공원벤치에 앉아, 아야세는 옆에 서있는 가노를 쳐다보았다. "이제, 좀 진정됐어?" 아야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잠시 눈을 감고 아야세는 몇 분전에 일어난 일을 떠올렸다. 모두가 무사히 아쿠시를 나온 것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전부 가노의 수완덕택이다. 게다가 가노는 잘 걷지 못하는 아야세를 위해, 바로 차에 타지 않고 바깥바람을 쐬게 해준 것이다. "정말 가노님도 손이 좀 작은 거 아니야? 3,4억은 더 뜯어낼 수 있었는데 말야." 하얗게 질린 아야세를 내려다보며 소메야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현금으로 5억이예요. 그 이상 돈은..." 아쿠시에서 반출된 대량의 금속 케이스가 떠오르자, 아야세는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아마 평생 구경도 못할 금액이다. 그것을 속임수가 섞인 포커로 하룻밤사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이다니,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안돼지, 아야세. 사채업자가 그렇게 돈에 욕심이 없어서야 장사 끝이라구. 가노님의 아버지도..." 뭔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소메야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야세, 왜 가노님이 6억에서 끝을 냈는지 알아?" 아야세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신에게는 도박의 도자도 이해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6억이나라니...전 3천만엔도 자신 없어요." 아야세의 소심한 대답에 소메야는 재미난 듯 소리 높여 웃었다. "역시 넌 남자의 순정이란 걸 몰라." 기모노에 붙은 먼지를 털며, 소메야가 벤치에서 일어섰다. 빈정거리는 소메야를 아야세는 난처한 듯 쳐다보았다. "네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야." 갑잓런 소메야의 말에 아야세는 놀라 시선을 던졌다. "네 컨디션만 좋았다면 아마 3억은 더 땄을 걸." 소메야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자, 아야세의 어깨가 쳐졌다. "...역시 전, 가지 않은 편이 좋았겠군요." "그러니까, 그 순정이란게 웃기는 거라는 거지." 소메야가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만져주자, 아야세는 얼핏 웃음을 띠었다. "하지만 가노씨는 대단해요...상대가 속임수를 썼는데도 이겼잖아요." 아야세의 말에 소메야가 웃는다. "그건 말야..." 비밀스런 말을 하듯, 소메야가 아야세의 몸에 팔을 두르며 속삭인다. 놀라는 아야세의 주머니에서 소메야가 트럼프카드를 꺼냈다. "이건..." "가노님한테 물어봐. 그럼 난 먼저 갈게. 몸을 따스하게 하도록해." "아, 소메야씨..." 일어서서 쫓아갈 했지만 소메야는 손을 흔들며 대기하고 있던 벤으로 돌아갔다. "아야세." 뒤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아야세가 섬뜩 놀랐다. 빨라진 심장박동을 의식하면서 아야세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너무 황급히 달려와서일까, 숨을 헐떡이고 있는 남자가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미안해, 자판기가 보이지 않아서." 차가운 캔을 내밀자, 남자에게로 달려가고픈 충동이 일었다. 그런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주저하고 있는 아야세를 보며 가노가 단정한 눈을 찌푸렸다. "왜 싫어?" "아니예요. 그런게 아니예요." 아야세는 할 말을 찾지 못한채, 어린아이처럼 고개만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저..." 더듬거리는 아야세의 뺨에 가노의 커다란 손이 와 닿았다. "넌 미안하단 말만 하는구나. 네가 신경쓸 일은 하나도 없어." 가노가 아야세의 이마와 목을 쓰다듬으며 열을 확인한다. "조금 쉬는 게 좋겠다." 아야세는 가노와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시간은 이미 4시를 넘어섰다. 그렇게 한바탕 도박을 벌였던 가노도 피곤하지 않을리 없지만 남자는 하품한번 보이지 않는다. "저, 이거 소메야가." 소메야가 건네준 카드를 내밀자 가노는 난처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뭐예요, 이거." "본대로 포커 카드야. 욕실에서 나올 때 네 옷에 살짝." 남자가 방긋 웃자, 아야세는 한 박자 늦게 탄성의 소리를 질렀다. "설마..." "너를 만지는 척 하면서 카드를 바꿔치기 한 거지." 긴 손으로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가노에게 아야세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면 가노씨도 속임수를..." "그런 셈이지." 가노가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아야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적진 한 가운데서, 그것도 6억이라는 거금을 걸고 이 남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속임수를 쓴 것이다. 아마 발각되었다면 돈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 그런 얼굴 하지마. 널 끌어들여서 미안해." 가노가 웃으며 속삭이자 아야세는 몸을 떨었다. "아니예요, 전... 제 몸만 괜찮았다면 가노씨, 더 돈을 벌었을 거라면서, 그리고 비디오 테잎건도.... 정말, 나 가노씨가 절 구해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변변찮은 말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을 탓하면서 아야세가 괴로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는 약간 씁쓸하게 웃으면서 손을 뻗어 아야세의 목을 감싸안는다. 아직 첫 차도 움직이지 않는 이 시간. 두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용한 공원 한 구석에서 아야세는 저항도 하지 않고 가노의 품에 몸을 맡겼다. 가노는 열이 오른 아야세의 몸을 어루만지며 머리카락 속에 자신의 손가락을 묻었다. 가노의 담배냄새가 아야세에게로 다가왔다. "너, 정말 나 기억 못해?"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에 아야세는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만난 날에도 지금과 같은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안절부절하며, 뭔가 원하는 듯한 목소리. 하지만 이렇게 직접 귀에 와 닿는 소리는 정말 부드럽다. 그 부드러운 소리에 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가노에 대한 기억은 3일전 밤부터 시작된 게 고작이다. 이전에 가노와 만난 적이 있었다면 이렇게 생명력과 자신에 넘치는 인상적인 남자를 잊어버렸을리가없다. "...죄송해요." 솔직히 사과하는 아야세의 머리를 가노가 쓰다듬었다. 쓴웃음을 짓는 가노의 입김이 뺨에 닿는다. "하긴 무리겠지. 널 만난건 3년전, 그것도 딱 한번뿐이니까." "3년 전..." 반추해보는 아야세의 뇌리에 할머니의 장례식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자신은 마지막 가족을 잃었다. 생각해보니 그 겨울의 기억은 애매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 때까지 이름조차 몰랐던 친척이 줄줄이 아야세를 방문하여 돈과 토지, 집에서 옷까지 유산을 나눠주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죽음에서 겨우 안정을 되찾은 것은 혼자 지낼 아파트를 구하고 나서이다. 사소한 바람이 불 때마다 엄습해오는 침묵의 공포속에서 보내던 겨울날 자신이 가노와 만났던 것일까. "전 그 해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부모님은 벌써 이전에 돌아가시고..." 가는 목소리가 아야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얼어붙는 듯한 겨울에 느꼈던 고독감이 다시 온 몸에 젖어들었다. 아니, 바로 1주일전까지도 아야세는 고독이 지배하는 방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다. 가노의 옆에서 지낸 단 3일 동안 자신이 두려워하던 고독을 잊고 지낸 것이 아닐까. "...도쿄는 이런 건물들에 불빛도 이렇게 많은데 왜...왜 내가 있을 곳은 없는 걸까요?" 아야세의 내뱉은 말이 작게 떨린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갑자기 울고 싶은 마음이 가슴 가득 채워졌다. 대학생이나 된 남자가 소리를 내서 울 순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야세는 가노의 품안에서 몸을 떨었다. "그렇군." 무거운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진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아야세는 시선을 올렸다. 깊은 남자의 눈빛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아야세를 바라본다. "그때 나도 가진 것 다 날리고 빈털터리였지. 그렇게 될 때까지도 정직한 생활따윈 생각조차 안했었어." 맞닿은 몸의 진동으로 가노가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있을 곳은 아무데도 없다고 생각했어. 그것이 당연한걸. 3년전, 네가 구해주기 전까지." "구해줬다구요? 내가...?" 아야세의 물음에 가노가 토라지듯 미간을 모았다. "그렇다니까? 부상당해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를 네 집까지 데리고 갔었잖아." "그런 일이..." "정말이야. 내가 오히려 놀랐다니까. 처음보는 상처투성이인 남자를 집에 데리고 갈 줄은 생각도 못했으니까." 그것도 밥까지 먹여줬는걸, 하고 가노가 덧붙여 말했다. "그런데도 넌 까맣게 잊어버렸군." 아이같은 투정에 아야세는 가노의 팔을 잡았다. "그거 진짜 저예요?" "틀림없어. 다 조사해봤었으니까." 가노가 단언하자 아야세는 시선을 거두었다. 아무리 그 시기의 기억이 애매하다고 해도 부상당한 남자를 방으로 데려올 정도라면 분명 기억이 날만도 하다. 가노의 커다란 손이 아야세의 뺨을 만졌다. "그 때도 너 이렇게 열이 났었어..." 귓가에 울리는 소리에 아야세는 눈을 떴다. "너 열이 나서 한밤중에 내가 얼음주머니 해줬잖아." 그것도 잊어버렸구나, 라는 말에 아야세가 멀뚱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뭐야." 어린애처럼 빈정거린 것을 후회하는지 가노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난...쭉 아버지라고... 그건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저 기분 좋은 꿈을 꿨다고만..." 아야세의 말에 가노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꿈? 너, 열 때문에 아직 헷갈리는 것 아냐?" 격앙된 남자의 말에 아야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아버지라고? 아버지가 입술에 키스하냐." 목에 걸쳤던 손을 가볍게 흔들자 아야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키스...입술이라니, 대체..." 동요하는 아야세를 보며 가노가 마치 약점이라도 발견했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됐어. 기억도 못하잖아, 넌." 아야세가 반박하기도 전에 뜨거운 이마에 가노의 이마가 와 닿았다. 데츠오가 뜻밖에 나한테 돈을 빌리려 오긴 했었지. 하지만 경매장에서 널 산 건 그때의 보답을 하기 위해서였어." 가노의 두 눈이 처음으로 아야세에게서 벗어났다. 가노한테 육체를 지배당한 수치심이 되살아났다. "보답이라뇨, 가노씨. 당신 나한테..." "그러니까 네가 기억을 못해서 그런 거야. 난 3년씩이나 반한 상대한테 접근은커녕 얼굴도 못 보고 죽자사자 일만 했다구. 그런데 그만... 나도 억지로 한 건 나쁘다고 생각해. 나도 그런 식으로 하고 싶진 않았다고. 하지만 넌..." 높아진 가노의 목소리가 도중에 끊겼다. 할 말을 잃고 놀라는 아야세를 남자는 겸연쩍게 바라보았다. "...아야세?" 아야세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가노씨...난 데츠오를 붙잡으려고 날." "그래서 데츠오는 상관없다고 했잖아!" 공원안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부정하며 가노는 눈을 조아렸다. "나 너한테 반했어." 아야세의 몸이 순간 떨렸다. 아야세의 반응에 가노가 말을 이었다. "반하지 않고 어떻게 남자를 안을 수 있겠나?" "하지만 가노씨. 그런..." 어리둥절해 하는 아야세를 남자가 힘껏 끌어안는다. "앗..." 뼈가 으스러질 정도의 억센 힘에 아야세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익숙해진 담배냄새에 현기증이 났다. 피할틈도 없이 입술이 마주치고 입안 깊숙이 혀가 맞닿았다. "음..." 가노의 혀가 가장 민감한 부분을 더듬자 아야세는 몸을 움츠렸다. "가노..." "조용해." 간신히 떨어진 입술사이로 남자가 속삭인다. "나랑 가자." 가노의 믿음직한 팔이 아야세의 몸을 지탱했다. "역시 그 집은 싫은가? 네가 있을 장소로 말야, 어렵겠나?" 타협조차 없는 솔직한 남자의 말이다. 아야세는 눈을 감았다. 끊어질 듯 안긴 몸 안 깊은 곳에서 따뜻한 감정이 스며나온다. 잊고 있었던 사람의 온기이다. "아야세..." 부드럽게 불리는 소리에 이끌려 아야세는 가노의 셔츠를 쥐었다. 눈물이 흐른다. 흐느껴우는 아야세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멈출 수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가노의 입술이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하,하지만 난 남자랑, 그.. 그런 거 하는 건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아요?" 울먹이며 묻는 아야세의 말에 가노가 동작을 멈추었다. 강한 남자의 시선이 아야세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가볍게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뭐." 말끝을 흐리는 가노의 등을 아야세가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37도 6분. 잘 안내리네." 체온계 눈금을 읽으며 가노가 인상을 썼다. 만 이틀동안 누워 있었지만 아야세의 열은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체온계를 약상자에 담으며 가노가 따뜻하게 데운 인스턴트 죽을 꺼낸다. "괜찮아요, 가노씨. 이 정도 열은..." 바쁜 일 가운데 신경을 써주는 가노의 등에 대고 아야세가 작게 말을 건네었다. "시끄러, 일어나지마." 역시 가노는 들은척도 하지 않고 침대에 앉아 있는 아야세에게 죽을 내밀었다. 어제 새로 맞춘 기모노를 자랑하러 온 소메야도 가노의 과보호적인 간호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호들갑스럽다. 인스턴트이지만 무뚝뚝한 가노가 주방에 들어간 사실만으로도 놀랄 일인 것이었다. "가노씨, 제 차입금말인데요...전, 역시 학교 그만두고 일을 하겠어요. 열심히 일해서 조금씩 갚아드릴께요." 재차 말을 꺼낸 아야세에게 가노는 부드러운 웃음을 띄었다. "바보처럼 무슨 소리야." 긴장하던 아야세는 가노가 머리를 쓰다듬자 당황했다. 가노가 아야세의 머리에 손은 얹은 채 아야세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뭔가요? 이건." "뭐긴, 네 차입금이지." 아야세는 깜짝놀라며 서류와 가노를 번갈아 보았다. "2억 2천만 차입금에서 일단 데츠오의 빚을 빼고, 내가 하야시한테서 받은 비디오 테잎대금이 1억. 게이들 인건비, 현금으로 만든 경비 몽땅 합쳐서 3억 5천쯤 해두지." "3, 3억..." 놀라는 아야세를 내려다보며 가노가 재미난 듯 웃었다. "이자는 열흘단위로 계산하니까, 열흘에 3천8백5십만. 매달 이자가 1억천오백십만엔이야." "이럴수가..." 가노는 담배를 꺼내 물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아야세의 손에서 서류를 가져왔다. "학교를 그만둘 필요도, 밖에서 일할 필요도 없어. 관계 1번에 50만으로 하면 이자상황만 해도 매달 2백31번인가. 매일 한다고 해도 하루 일곱 번은 너무 무리겠지." 짖궂은 가노의 말에 아야세는 그저 입만 뻐금거렸다. "가노씨 그, 그런건 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약속? 그런 적 없는데." 가노가 딱 잡아떼자 아야세가 할 말을 잃었다. "네가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할 수 없다고 한 건 이 방법밖엔 없다는 말이었어." 히죽 웃는 가노에 아야세는 어이가 없었다. "어때 50만엔, 지금 벌 생각 없어? 열 있을 때 하면 열이 내린다던데..." 가노의 커다란 손이 가슴을 만지자 아야세는 당황하며 시트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오히려 무거운 체중을 실어오면서 옷속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가,가노씨..." 내지르는 아야세의 비명에 가노가 살짝 웃는다. "조금만, 응?" 귓가에서 속삭이는 달콤한 목소리에 몸을 움츠리고 아야세는 침대위에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얄미울 정도로 익숙한 손이 아야세의 몸에서 잠옷을 걷어냈다. 농염한 색을 띠는 가슴의 돌기를 입에 물자, 아야세는 몸을 떨었다. "앗..." 한층 높아진 교성에 가노가 웃음을 머금는다. "3억엔어치만 예뻐해줄게." 날카로운 남자의 이가 스치듯 아야세의 돌기를 깨문다. 허리에서 등으로 거부할 수 없는 쾌감이 치달렸다. "이,이럴수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아야세는 원망스런 빛을 드러냈다. 씩씩한 가노의 입술이 열에 들뜬 아야세의 몸을 헤집고 다녔다. "넌 너무 귀여워." 고집스런 손이 허벅지를 더듬기 시작했다. 아야세는 무릎을 붙이고 거부하려고 했지만 가노는 서슴없이 은밀한 부분을 누르기 시작했다. "가노...안돼..." 아야세의 쾌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움직이는 손에 의해 아야세의 몸이 조금씩 반응을 보였다. 강제이긴 하지만 가노는 아야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아야세가 울먹거리면서도 가녀린 팔로 가노의 목을 끌어안을 수 밖에 없었다. 아야세가 있을 곳은 바로 이 남자의 품안인 것이다. 쓴 담배냄새가 온몸을 휘감았다. "평생동안 다 갚아줘야 돼." 능청스런 가노의 목소리에 아야세는 살짝 성호를 그었다. 돈이 없어!! - 8 하얀 피부위로 끈적거리는 땀이 흘러 내려온다. 숨을 쉴 때마다 뜨겁고 축축한 대기가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오자 아야세는 기분이 불쾌해졌다. 한낮에도 거의 에어컨을 틀지 않고 지내던 아야세였지만 이 곳의 더위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아스팔트에 쏟아진 증폭된 열기가 콘크리트거리를 엄습한다. 작열하는 여름 햇빛 속에서 시선을 들어 아야세는 문에 걸린 간판의 글을 읽어내려갔다. 백지에 파란 고딕문자로 제도금융이라고 적혀있다. 가노가 운영하는 사무실이다. 2층 사무실과 15층에 있는 자택뿐 아니라 이 건물전체가 가노의 것이다. 그 때문에 맨션 입구를 통하지 않아도 직접 사무실에 출입할 수 있도록 전용 계단까지 만들어 두었다. 금융회사라고 하면 상가 빌딩에 커다란 간판을 내걸고 요란스런 광고를 해대는 것 외엔 아야세는 연상되는 것이 없었다. 처음엔 이런 고급 맨션 한켠에 회사가 있을 거라고 아무도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아야세의 걱정은 분주한 가노의 모습으로 보아 쓸데없는 것이었다. 영업시간도 딱히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노는 항상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가끔 일찍 들어와도 휴대전화가 울리면 바로 방을 박차고 나가기 일쑤다. 20대 후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혼자서 회사를 세우고, 신주쿠 중심가에 이렇듯 번듯한 빌딩을 소유한 가노의 수완은 정말 대단 그 자체였다. 사무소 입구로 시선을 향한 채로, 아야세는 지친 듯 콘크리트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섰다. 가노를 만나러 15층에서 내려왔지만 막상 사무실앞에 서자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해가 높이 떠있어서인지 손님의 출입이 뜸한 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아야세는 몇 번씩 한숨을 토해냈다. 난간 맞은 편으로 빌딩 숲이 보인다. 이 맨션에서 신주쿠역까지는 엎드리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깝다. 신주쿠역에서 아야세의 아파트까지는 전차를 갈아타고 40분 넘게 걸린다. 그러나 지금의 아야세에게는 전차를 탈 돈 한푼 없다. 연달아 한숨을 내쉬는 아야세는 계단을 오르는 인기척을 느끼고 난간에서 몸을 일으켰다. 언제까지 사무실 앞에서 얼쩡거리다간 영업방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문을 열 결심을 하지 못한 채, 계단을 올라오는 손님에게 길을 양보하려는 순간 아야세의 입에서 비명이 흘렀다. "우왓..." 갑작스런 충격에 가녀린 아야세의 몸이 화들짝 놀랐다. 청바지차림의 엉덩이를 커다란 손이 꽉 잡은 것이다. "무슨..." 아야세는 엉덩이를 잡은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뒤로 돌렸다. 그곳에는 한 여름의 햇빛을 받아 빛나는 짙은 금발머리에 서글한 눈매를 한 청년이 웃고 있었다.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며 짧은 머리를 금발로 물들인 화려한 용모의 남자다. 남자의 귀에 달린 귀걸이가 여름의 햇빛을 받아 현란하게 움직였다. "미안, 미안. 역시 남자였군." 눈깜짝할 사이 자신을 남자로 의심했다면서 웃자 아야세는 기가 막혀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 엉덩이가 너무 귀여워서 그만." "무슨...실례잖아요." 아야세는 반박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너, 알아? 여긴 사채업자 사무실이야. 여기 사장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고등학생한텐 안 빌려줄텐데." 남자가 사무실의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폭언을 거듭하자 아야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고등학생 아니예요. 전 대학생이예요!" 문을 열려던 손을 멈추고 금발의 남자가 아야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정말? 그럼 미안해. 착각했어." 만일 아야세가 여자였다고 해도 지나가면서 엉덩이를 만져도 된다는 법은 없다. 한 번 얼핏 보고 남자로 판단하기 어려웠다는 것도 아야세에겐 모욕적으로 들렸다. "아, 만진 보답으로 한마디 충고하겠는데 어차피 돈 빌릴 거라면 여긴 관둬. 이곳 사장은 장난 아니게 못됐거든."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 듯 금발의 남자가 아야세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사장이라면 분명 가노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으니 남자가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다. 굳이 말해주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아야세는 가노라는 남자에게 4억 가까이 빚이 있다. 만일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면 충고뿐 아니라 금융회사한테 돈을 빌리는 짓 따윈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같은 학생은 순식간에 다 털리고 어디로 팔려갈지도 몰라. 어쩌면 너네 아버지까지 깡통차게 될 지도 모른다구." "당신하고는 상관없어요!" 가슴속을 파고드는 아픔이 떠올라 아야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사촌인 데츠오의 얼굴이 스쳐지난간 것이다. 학생의 몸으로 막대한 빚에 쪼들린 데츠오는 현재 부모밑에서 감시당하고 있었다. 자기파산 신청을 했다고 들었지만 데츠오의 장래를 생각하자 끝없는 불안이 밀려들었다. 돈을 빌리러 온 것인지 아니면 상환하러 온 것인지 아야세를 오해하는 이 남자 자신도 역시 가노의 손님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머리를 물들이고 유행하는 옷차림으로 보아 생활고로 인한 차입은 아닌 듯 싶다. 유흥비 때문에 사채업자를 찾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데츠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그린 소리 말라구. 너 얼마나 빌렸어?" "그만하세요." 더욱 집요하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아야세가 발걸음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려고 했다. "내가 나쁜 소리 하려는게 아니야. 이봐, 이런 빌어먹을 곳에서 돈 빌리지 말고 나 있는 곳에서 아르바이트 할 생각 없어? 열심히만 하면 30만 정도는 눈깜짝할 사이에..." "이거 놔요!!" 남자의 손이 자신의 팔을 잡아 아야세는 큰 소리를 질렀다. 그때 아야세의 눈앞에서 사무실 문이 열렸다. 위압감을 동반하고 나타난 남자의 모습에 아야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다음 순간에는 충격과 공포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와주기는커녕 변명의 여지도 없이 문 앞에 선 가노가 그 장신에 걸맞게 길고 튼튼한 팔을 치켜들었다. 놀란 것은 아야세뿐만이 아니었다. "가, 가노형..." 아야세의 팔을 잡고 있는 금발의 청년 입에서 더듬더듬 말이 흘러나왔다. 가노는 청년을 쏘아보았다. "기온, 너..." 노여운 기색을 품은 낮은 목소리가 낮선 이름을 불렀다. 그것이 청년의 이름인 것을 아야세는 직감했다. 이 두 사람은 아는 사이인가. 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여유도 없이 가노의 손이 청년에게로 내려지는 것을 아야세는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왜 내가 이 멍청이땜에 이런 일까지 해야하는 거야." 사무실 안쪽에 있는 탕비실에서 얼굴을 내민 소메야가 투덜거렸다. 감색 기모노에 꽃 그림이 새겨진 천을 두른 시원한 차림의 소메야가 일회용 휴대 얼음주머니를 손에 들고 나타났다. 풍성한 검은 머리를 오늘은 높이 올려 묶은 탓인지 훨씬 키가 커보였다. 이 아름다운 사람이 남자라고 생각하면 아야세는 아직도 이상한 느낌이 든다. 겉모습만 문제삼는다면 자신보다 소메야가 훨씬 여성적이고 아름다웠다. 그 말을 하자 소메야는 기뻐한 반면 가노는 더없이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었다. 애초에 여자에게만 관심이 있었던 가노는 생리적으로 여장남자는 싫어하는 듯 했다. 하지만 아야세는 다소 입은 거칠지만 편안하고 상냥한 소메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무실앞에서 아야세한테 손을 대려고 하다니 너 목숨을 건진게 천만다행인 줄 알아." "나도 알았으면 절대 그런 정신 나간 짓은 안했을 거라구." 얼음주머니를 받아들며 상담용 소파에 앉아 있는 금발의 청년이 혀를 내둘렀다. 역시 아직 시간이 이른탓인지 사무실에는 아야세와 일행외엔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안쪽 사장실로 모습을 감춘 가노를 기다리며 아야세는 몸을 움츠리며 소파에 앉아있었다. 사무실문을 열면 바로 오른쪽으로 접수가 있고, 그 안쪽으로 사원 2명의 책상이 놓여있다. 금융회사라고 하면 딱딱하고 험악한 분위기가 연상되지만 가노의 사무실은 벽지와 천장이 우유빛으로 칠해져 있어 한결 밝고 청결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역시 이 곳에 오면 긴장이 되긴 마찬가지이다. "나도 딱 죽는 줄만 알았다고. 형이 진짜로 때리다니, 아마 두개골에 금이 갔을 거야." 가노한테 얻어맞은 머리를 끄적이며 엄살을 피우는 청년이 옆에 앉은 아야세를 쳐다본다. 가노뿐만 아니라 청년은 소메야하고도 친한 것 같았다. 소메야를 언니, 그리고 가노를 형이라고 부르는 걸 보아 인척관계가 아니라 연상의 사람에게 대하는 존칭으로 여겨졌다. 동요하는 아야세를 바라보며 금발의 청년은 히죽 웃었다. "이야-, 남자지만 끝내주게 귀여운데. 대학생이라고 했지. 이름은 뭐야? 지금 나 막 창작의욕에 불타오르고 있다구." "이 애만은 정말 안돼. 자꾸 그러다간 너 언제 도쿄만에서 시체로 발견돼도 난 몰라." "여전히 소메야언니는 입이 거칠구만. 아, 난 기온이라고 해. 이건 명함." 소메야의 충고를 무시하고 기온이 명함을 내밀자 거절하지 못한채 아야세는 쭈빗쭈빗 손을 뻗었다. 업무용 명함인가 했더니 명함 중앙에는 퉁퉁한 팬더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길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여학생용 간이 명함이다. 명함한켠에는 크게 기온이라는 글자와 감독, 카메라, 연출, 예술은 표현이다! 는 글귀가 귀여운 장식문자로 새겨져 있었다. "그냥 기온이라고 부르면 돼. 난 아르바이트로 AV비디오를 찍고 있거든. 아깝다...남자라도 상관없으니까 찍어봤으면 좋겠는데." "저,난..." 끝없이 주절거리는 기온의 기세에 눌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아야세는 사장실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가노가 나오지 않을까하는 아야세의 기대와는 달리 사원 한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가노보다는 약간 키가 작은 구바라고 하는 남자이다. 젊지만 얼굴표정의 변화가 없는 침착한 눈길로 인사를 한다. "기온씨 조금 후에 기재 준비가 끝나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것이 테잎입니다." 테이블 위에 놓은 상자를 보고 기온이 휘파람을 불고는 재빨리 손을 뻗었다. "뭐야, 이거. 기온 오늘 일이 있어서 온거야?" 의외인 듯한 소메야의 물음에 기온이 악동같은 미소를 지었다. "응, 가노형이 도와달라고 해서...히야 이거 죽이는데. 이거 좀 봐." 상자안에서 꺼낸 비디오테잎 한 개를 역시 아야세는 순순히 받아들었다. 어디서나 흔한 검은 색의 가정용 비디오테잎이다. 테잎중앙에는 워드프로세서로 적은 형광색 라벨이 붙어있다. "...[기절초풍! 거두 여고생.SM지옥]? 뭐야, 이거." 아야세의 손안에 든 테잎을 들여다본 소메야가 큰 소리로 적혀있는 제목을 읽었다. 비디오를 손에 든 채 할말을 잃은 아야세를 기온이 히죽거리며 쳐다보았다. "뭐라니, 이런 비디오 처음 봐? 이거 시사하는게 내 일이잖아. 형을 도와서 말야." "가노씨...를요?" 무심코 내뱉은 아야세의 반응을 즐기듯 기온이 상자안에서 계속해서 음란한 라벨이 붙은 비디오를 꺼냈다. 아파트에서 혼자 지낼 때 가끔 우편함에 들어있는 음란 광고물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사이에서 외설 비디오를 빌리는 것이 유행처럼 퍼져 아야세도 친구집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다. 원래 암거래되는 이런 테잎들은 판매나 구입 자체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가노의 주위에는 이곳 사무실을 드나는 손님을 포함해 평범한 직업이 아닌 부류의 사람들이 적잖이 많다. 가노자신도 정부에서 허가를 받은 업자이긴 하지만 다소나마 뒷골목 세계와 연계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더구나 이렇게 불건전한 물품을 취급하는 장면을 직접 보게되면 어쩔 수 없이 동요하게 된다. "나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돈 떼먹고 도망간 사람이 이걸 대신 보낸거야. 이 자식들 이게 꽤나 장사가 된다고 가노형한테 사정한거 같던데, 너도 같이 볼래?" 의미심장하게 웃는 기온의 등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서 있다. 분위기를 느끼고 기온이 돌아보기도 전에 가노의 손이 위에서부터 내리쳤다. 순간 그 곳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릴 정도로 큰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이구!" 너무 아픈 나머지 바로 소리도 내지 못한 기온의 입에서 격한 비명이 쏟아졌다. "가,가노씨!" 소파위를 뒹구르는 기온의 모습을 보고 아야세가 머뭇머뭇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 한번 더 그러면 죽인다." 아야세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가노가 기온에게 소리쳤다. 기분나쁜 듯 눈을 찡그리며 입에 문 담배필터를 이로 잘끈 깨물은 가노가 아야세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가노와 지내기 시작한지 2주일쯤 되지만 아야세는 아직도 이렇게 나란히 서 있으면 이 남자의 키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가까운 신장에 걸맞게 딱 벌어진 어깨와 등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가노의 튼튼한 골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인함에서 평소 느껴지는 야성적인 모습이 연상되었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손끝마디까지 예리한 힘이 내포된 것 같았다. "빨리 기재 준비해서 이 녀석 입에 테이프 좀 붙여. 아야세, 너는 이리와." 가노가 잡아끌자 아야세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가노와의 대화를 기온의 시선이 주시하는 듯한 느낌에 아야세는 도망치듯 사장실을 들어섰다. 안은 사무실에서처럼 기능적이며 쾌적했다. 가노의 성격이 반영되어 화려한 장식은 전혀 없고, 모두 중후한 목재가구로 통일되어 있었다. "정말 못 말리는 녀석이야." 계속 투덜거리며 가노는 아야세를 소파에 앉혔다. 소메야한테 듣기로 사장실 소파는 가노가 직접 융자 상담을 받는 거물급 고객만 앉을 수 있다고 했다. "여기 오는건 괜찮지만 앞으론 전화하고 와." "죄송합니다. 일하시는 중이라서 망설였어요. 전화도 방해가될까봐." 반사적으로 입을 열어 변명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가노는 아야세가 혼자서 맨션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다. 빚을 다 갚지 않고 아야세가 도망갈 것을 염려해서일까. "화난 거 아니야." 긴장하고 있는 아야세의 모습을 보자 가노가 멋쩍게 투덜거렸다. "오늘처럼 바퀴벌레같은 놈이 직접대면 기분이 나빠서 그래. 한번만 더 그러면 가만두지 않겠어." 바퀴벌레는 바로 기온을 두고 하는 말인가. 방금 전 강렬한 기세로 기온의 머리를 내려친 가노의 손을 떠올리자 아야세의 몸이 섬칫했다. "지금 시간은 괜찮아요?" 사정을 묻는 아야세를 가노가 예리한 시선으로 씁쓸하게 쳐다본다. "이제 곧 명절이 다가오네. 일이 겹쳐서 그때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조금 있다가 전화가 오면 바로 나가야해. 급한 일이야?" 진지한 눈초리로 바라보자 아야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급한건 아닌데, 가노씨 명절에도 쉬지 못하면 어떡해요. 성묘도 가야되잖아." 성묘라는 발상이 이상했는지 가노가 피식 웃었다. "나한텐 갈 곳도 없어." 담배를 입에 물고 가노가 농담처럼 어깨를 들석였다. 가노가 무엇보다도 일을 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야세는 이미 알고 있다. 잠이나 식사보다도 일을 했기 때문에 지금의 성공이 있는 것이다. "바쁜데 죄송해요. 방해만 해서.. 그럼 전 이만 방으로 돌아갈께요." 일어서려는 아야세의 손목을 가노가 크고 따스한 손으로 붙잡자 아야세는 놀라 쳐다보았다.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있어?" 진지하게 바라보며 묻는 가노를 보고 아야세는 작게 웃음을 지었다. 가노한테 용건이 있긴 했지만 뭔가를 사달라고 조르려는 것은 아니었다. 가노의 마음씀씀이를 고맙게 여기면서 조용히 고개를 흔드는 아야세의 등뒤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착신을 알리는 사무실에서의 호출이다. "미안, 오늘저녁에 일찍 집에 가게되면 그때 얘기하자." 가노는 사과를 하며 책상 위에 놓인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아야세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이 풀리자 피부에 닿았던 가노의 열이 사라졌다. "일 열심히 하세요. 그럼, 전 이만..." 무의식적으로 잡혔던 손목을 숨기듯이 긴 소매로 덮으면서 아야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수화기쪽으로 향해 사업 얘기에 열중한 가노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사장실문을 열었다. "참,아야세." 막 나가려는 아야세를 수화기를 턱에 괸채로 가노가 불러세웠다. "내일 외식하러 데려가 줄게. 저녁은 준비 안해도 돼. 알았지?" 거부할 수 없는 말투로 다짐을 하고 가노가 다시 전화에 열중했다. 잔잔히 배어드는 웃음을 보이며 아야세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외식하러 데려가 줄게. 헉!! 정말 유치해." 문을 열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소리가 사무실에 들렸던 것이다. 사장실을 나온 아야세에게 가노의 흉내를 내는 소메야가 과장스럽게 어깨를 들썩였다. 소파위에는 금발청년의 모습이 없었다. "기온은 아래 편의점에 먹을거 사러갔어." 아야세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소메야가 방긋 웃었다. "시끄러워서 혼났지. 그 에로비디오 녀석." 거침없는 소메야의 말투에 아야세가 씁쓸하게 웃는다. "가노씨와 같이 일하는 사이잖아요? 참 젊네요." "같이 릴은 하지만 뭐 그렇게 대수로운건 아니야. 기온은 가노의 후배야. 대학때." 생각지도 못한 소메야의 말에 아야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공은 아마 다를걸. 저 남자들이 다니는 대학도 있다니, 정말 놀랍지 않니?" 깔끔하게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을 입술에 대고 소메야가 한탄을 한다. 가노에게 대학시절이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소메야갸 말할때까지 아야세는 그런 점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기온하고 가노도 남자로선 꽝이야. 그저께도 그랬지? 데리고 나간다고 하면서 결국 일 때문에 취소했잖아." 자신이 경영하는 게이바에 나가기 전에 소메야는 거의 매일처럼 가노의 사무실이나 아야세를 방문하곤 했다. 아야세가 좀처럼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소메야는 자신과 가노의 사정에대해 훤히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 가노씨는 바쁘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왠지 행복한 듯 눈을 반짝이는 아야세를 보고 소메야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쉰다. "하긴, 그 남자한테 일을 빼면 아무 것도 남는 게 없긴 하지." 여전히 독설을 내뱉는 소메야의 말에 아야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소메야씨도 열심이잖아요. 술은 조금만 마셨으면 하지만." "아아, 정말 깜찍한 아야세! 멍청이 같은 기온한테 붙들리기 전에 얼른 방으로 돌아가. 야한 비디오 주인공 되기 전에 말야." 아직 테이블위에는 비디오테잎이 쌓여 있었다. 소메야에게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하며 아야세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돈이 없어!! - 9 아야세를 감싸고 있던 잠의 장막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멀리서 울리는 소리에 아야세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부드러운 카페트가 뺨에 닿는다. 천천히 몸을 들척이자 약간 열려있는 문틈으로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려온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려 공기가 눅눅하다. 저녁이 되자 비는 더욱 거칠어진 듯 하다. 시간을 확인하려고 시선을 돌리자 자신이 맨바닥 위에 누워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조금만 누워있으려고 했는데 그만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어린아이처럼 눈을 깜빡이던 아야세는 자신을 부르는 가노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직 가노가 돌아올 시간은 되지 않았다. 얼핏 든 잠속에서 가노의 꿈을 꾼 듯 소리가 들린 것은 자신의 착각인 것 같았다. 다시 바닥에 눕고 싶다는 유혹과 싸우며 하품을 참아 삼킨 아야세는 복도에서 들리는 난폭한 발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아야세! 어디있어! 이봐, 아야세!" 역시 가노의 목소리는 꿈이 아니었다. 화난 듯한 가노의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부드러운 카페트에 무릎을 대고 아야세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가노가 침실 문을 거칠에 열고 들어섰다. 가노의 예리한 눈빛이 화로 인해 씨근거리는 모습을 아야세는 공포와 충격으로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가노씨?" 아직 잠에 취해 있는 아야세의 목소리가 가노의 이름을 부른다. 남자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야세를 쳐다보았다. 노여움대신 놀라움이, 그리고 다시 화난 기색이 남자의 표정에 반복되어 나타났다. "아야세, 너..." 말로 채 하지 못하고 가노는 아야세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어디 있었어, 너... 아니, 이런데서 뭐하는 거야?" "...아...죄송해요. 저녁 금방 준비할께요." 서둘러 일어서려는 아야세의 팔을 남자의 손이 붙잡았따. "그런 걸 묻는게 아니야! 왜 옷장같은데 숨어 있는 거냐구." 방금 전 아야세가 빠져나온 의상실 방문을 가리키며 가노가 큰 소리로 따졌다. 가노의 침실은 넓어 유리벽과 문으로 된 작은 서재와 의상실이 갖춰져 있다. 바로 그 의상실 안에서 아야세가 낮잠을 잔 것이다. "누워있다보니까 깜빡하고..." "옷장안에서?" 믿기지 않는 듯한 말투에 아야세는 난처해졌다. "멋대로 들어가서 미안해요... 그냥, 다른 방은 너무 넓어 안정이 안되서." 조심스럽게 말을 하는 아야세를 내려다보며 가노의 눈썹이 치켜올려졌다. "너무 넓다고? 방이? 그래서 이렇게 비좁은 곳으로 들어가 누운거야?" 비좁다는 말에 아야세가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좁지 않아요. 그래도 전기가 들어오잖아." 손바닥만한 방에 작은 주방만 있는 집에서 지내던 아야세에게 옷을 넣어두기 위해 공간을 구분짓는 것 자체가 사치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맨션 맨 꼭대기인 15층 전체가 건물 소유주인 가노의 집이다. 침실을 시작으로 거실과 주방, 그리고 정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발코니 등 여러개의 공간이 차지하고 있다. 신주쿠 중심가라고 하지만 이런 사치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아야세가 심각하게 항의를 하자 가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가노는 긴 팔을 뻗어 아야세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야세는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가노씨?" 익숙한 담배냄새가 풍긴다. "...젠장." 가냘픈 아야세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가노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했는 줄 알았어." "네?" 가노의 말이 잘 들리지 않자 아야세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가노는 두 팔로 아야세를 끌어안고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힘을 주었다. 다시 한숨을 내쉬는 가노는 아야세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아무데도 없어서 도망간줄 알았잖아. 제길 걱정하게 만들지 마." 남자는 진심으로 걱정과 고통, 그리고 안도가 교차한 탄식을 올렸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져 아야세는 남자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들었지만 꼼짝없이 안겨있는 상태로는 가노의 머리와 양복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 "아무말 마. 어젠 갑자기 사무실로 오지않나." 어제 전화도 하지 않고 사무실을 찾아간 것을 책망하자 아야세는 가노의 옷을 쥐었다. "그건..." "온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게 아니야... 제길. 안에서 열지 못하도록 열쇠를 만들든가 해야지." 가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노는 언짢은 표정으로 투덜거리기만 했다. "알 수 없는 녀석이야. 넌 정말..."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리다가 가노는 말을 멈추었다. 가까이 아야세의 눈을 들여다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런 얘긴 관두자. 자, 어서 일어나. 나갈 준비해." 가노가 부드러운 손으로 머리를 어루만지자 아야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디가요?" "잊었어?" 벌떡 일어선 가노가 어린아이처럼 눈을 찡그렸다. "약속했잖아. 외식하러 간다고. 비가 오긴 하지만, 뭐 밖에 돌아다니지 않을 거니까." 가노의 말에 반사적으로 침실의 시계를 본다. 시계는 오후 7시반을 넘어섰다. 일에 쫓기는 가노가 이 시간 집에 오는 일은 흔치 않다. 자신과의 약속을 위해 무리해서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괜찮아요, 일은?" 아야세가 심각하게 묻자 가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응, 비디오 체크도 끝났으니까 전화 울리기 전에 빨리 나가자." 일어서려는 아야세에게 가노가 손을 내밀자 순간 잡아도 될지 망설여졌다. 어제 가노의 사무실을 찾아간 용건이 가슴에 남아있었다. 만약 지금 가노에게 시간이 있고 기분도 괜찮다고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말을 꺼낼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래, 아야세. 혹시 그 비디오 때문에 그래?" 아야세가 머뭇거리자 가노가 엉뚱한 추측을 한다. "빚대신 가져온 비디오야. 우선 업자한테 넘기기 전에 확인을 해야해서..." "저, 아니예요. 그게." 반사적으로 말은 꺼냈지만 아야세는 여전히 주저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고민하는 아야세에게 가노가 시선을 준다. "무슨 일이야?" 가노는 결코 참을성이 있는 성격이 아니다. 가노의 기분이 나빠질까봐 아야세는 결심한 듯 말했다. "저...가노씨한테 부탁이 있어요." 불안정한 아야세의 말에 가노가 의외인 듯 쳐다보았다. 아야세가 가노한테 부탁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야세는 남에게 매달리며 조르지 못한다. 3년전에는 할머니를, 부모님은 10년전에 연이어 잃었다. 유년기 이후로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어른이 없었기에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을 꺼리는 것이었다. "갖고 싶은거 있어? 말해봐. 뭐든 사줄테니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가노가 아야세의 얼굴을 들여보며 팔을 뻗어왔다. "물건은 아니고...저..." 가노의 따스한 관용의 눈빛에 용기를 얻어 아야세는 마른침을 삼켰다. 용건은 두가지이다. 어느쪽이든 가노는 좋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아야세는 마지막까지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집에...아파트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야세의 말에 목을 어루만지던 가노의 손이 멈칫한다. 가노의 눈에 스친 어두운 그림자를 민감하게 느끼고 아야세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런니까 가노씨가 일을 하는 낮동안 만이라든가 그런식으로요. 저녁엔 이곳에 와서 밤이나..저기... 아침에... 돌아가면." 마음속으로 여러번 정리해두었던 말이 소리가 되어 나오자 오히려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가노에게 잘 말하려고 하면 할수록 목소리가 떨려왔다. "대학에 등록되어 있는 주소도 그렇고, 냉장고안에 음식남은거랑 신문도 그냥 밀려서 쌓여있을 거에요... 그리고 가노씨는 가지 말라고 했지만, 이제 곧..."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가노는 아야세의 두 팔을 움켜쥐었다. 아플정도로 힘을 주자 아야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가노를 화나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 "가..." "이곳이 싫어?" 가노가 낮은 목소리로 물어오자 아야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가노의 눈에 넘쳐나던 관용의 빛은 사라지고 대신 서늘한 눈길로 아야세를 내려다보고 있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남자의 분노를 느끼자 입안이 따가울 정도로 건조했다. "싫고 좋고 문제가 아니라, 단지..." "그럼 어째서?" 아야세는 대답이 궁했다. 가노는 정말 화가 나 있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 어느 정도 가노가 싫어할 거라고는 에상했었다. 빚을 다 갚지도 않은채 아야세가 도망칠까봐 항상 가노는 경계하고 있었다. 그때문인지 아야세는 혼자 외출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노를 생각해서 도망치지 않는 것을 맹세하기만 하면 분명 이해해줄거라고 아야세는 믿고 있었다. "가노씨한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요. 전 여기서 생활비를 낼 돈도 없고... 집에 돌아가면 조금은 형편이 나아질지도 모르니까." 말을 잇는 아야세에게 가노는 위태로운 눈빛을 번뜩였다. "...앗..." 잡고있던 팔을 들어 있는 힘껏 아야세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돈 이라." 가노는 자조도 비웃음도 아닌 말을 내뱉었다. 아야세가 일어서려고 하자 가노가 발목을 손으로 낚아챘다. 그 충격으로 아야세는 몸을 비틀었다. 힘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어 가노의 앞까지 질질 끌려갔다. "앗!...가,가노씨, 잠깐만요." "조용히 해." 억양을 잃은 가노의 목소리가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히울렸다. 일그러진 두 눈이 마치 모든 고통을 대변하듯 아야세를 내려다보았다. "이 이상 쓸데없는 소리 떠들기만 해봐. 난폭한게 싫으면 내말대로 얌전히 있어." 허벅지로 내려가는 손을 뿌리치지 못한 채, 아야세는 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손이 차갑다. 몸 속의 동요를 억누르며 아야세는 손에 든 포크를 접시로 가져갔다. 기품있는 도자기 접시에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은색 포크가 닿는다. 어제 약속대로 가노가 아야세를 데리고 나온 곳은 니시신주쿠에 있는 화려한 레스토랑이었다. 깨끗한 외관과 고급스럽게 차려져나온 음식, 시중을 드는 점원, 모두 한눈에 이 식당의 격을 말해주고 있다. 일개 빈털터리 대학생이며 부모가 남긴 유산으로 근근히 생활하던 아야세가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아니다. 다시 포크를 들어올릴 기력조차 없이 아야세는 식사가 차려진 테이블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아야세 앞에 놓인 접시는 거의 건드리지 않은 채 이미 차갑게 식어있다. "좀 더 마실래?" 맞은편 자리에서 술을 권하는 소리가 들리자 아야세의 어깨가 잠시 흔들렸다. "...아." 가노가 술병을 내밀자 아야세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올렸다. 테이블에 놓여있는 아야세의 잔에는 아직 와인이 남아있었다.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아야세를 가노는 무심히 바라보았다. 가노는 이 식당 주인과 아는 사이이고 단골손님이라서 점원들도 어려워하는 존재인 모양이다. 테이블에 놓인 가노의 팔꿈치에서 시계를 찬 손목에만 눈을 멈추고 아야세는 속으로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입가에는 웃음을 띄고 있지만 가노의 얼굴에는 한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간파하는 듯한 가노의 시선은 희미한 웃음조차 엿볼 수 있다. 숨이 끊어질 정도로 잔인한 노여움이 남자의 가슴속을 가득 메우고 있다. 손을 저으며 짐짓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가노는 사나운 기색을 감추려하지 않는다. "왜그래, 아야세." 귓가에 울리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등줄기가 뻣뻣해진다. 가노가 자신의 차가운 손을 잡자 아야세의 눈썹이 떨렸다. 그 옆을 손님 두 사람이 지나갔다. "어, 가노형 아니야." 머리 위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아야세는 어깨를 움츠렸다. 어색하게 돌아본 시선 끝에 붉은 금발의 청년이 웃으며 달려온다. "역시 아야세도 함께구나. 좋겠다. 데이트?" 어제 사무실앞에서 아야세의 엉덩이를 잡은 바로 그 청년이다. 청바지차림으로는 입장이 불가능한 식당인만큼 오늘은 검은 양복차림이었지만 여전히 성실한 인상은 아니었다. "왠일이야?" 무뚝뚝한 가노의 말에 기온이 동반한 여성에게 눈짓한다. 머리가 길고 아름다운 여자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갸웃하며 급사를 부르고는 식당 안쪽으로 사라졌다. "처음 봤을 때도 상당히 하얗다고 생각했는데, 혼혈? 피부 정말 깨끗하다. 하지만 오늘은 좀 얼굴색이 안좋아 보이는데. 피곤해?" 아야세를 보며 염려하는 기온에게 불쾌한 기색을 비친다. "기온." "잠깐 얘기 좀 하는건데 뭐 어때. 46시간 아야세를 독점하면서... 뭐, 그런 얘긴 관두고." 스윽 주위를 살피는 기온이 불쑥 말을 꺼냈다. "형. 어제 비디오 말야, 나 손뗄래." 농담으로 여겨지지 않는 기온의 말에 가노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다. "돈 안 필요해?" "그야 돈은 좋지. 하지만 그 비디오는 너무 위험해." 중간에 말을 끊고 기온은 다가오는 급사를 돌려보냈다. "형. 다가하시라는 남자한테 그 비디오 받았다고 했지." 말을 이어가면서 기온이 힐끔 아야세와 가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대로 아야세앞에서 계속 해도 괜찮은지 양해를 구한 것인지 가노는 아무런 말없이 눈빛으로 끄덕였다. "요시이즈미라는 이름의 업자 몰라? 긴자에서 클럽을 운영하는 남자인데 다가하시가 준 게 그곳에서 빼온 물건인 것 같아." 기온의 말에 가노가 담배를 꺼냈다. "록본기의 요시이즈미말인가. 그러고보니 기온, 너 한번 그쪽하고 붙은 적 있었지."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익숙한 솜씨로 담배를 입에 문 가노에게 기온이 얼굴을 찡그렸다. "...알고 있구나. 그럼 다가하시건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테이블옆에 아무렇게나 쪼그리고 앉으며 기온이 가노의 담배를 빼앗았다. 기온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녀석들 형이 비디오 가져간 거 알고 벼르고 있을거야. 그 비디오 도로 가져갈 생각인가봐." 갑자기 시온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시끄럽게 됐는걸. 저기 요시이즈미가 와 있어." 주위를 둘러보는 기온을 따라 아야세도 반사적으로 주위 테이블에 시선을 주었다. 가노는 묵묵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신주쿠에 얼굴을 내밀다니 배짱도 좋군." "정치가가 뒤를 봐주고 있어서 기세등등하거든. 그 정치가한테 돈도 엄청 갖다준 것 같애." 자신의 양복 주머니에서 기온이 싸구려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매너없는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산뜻한 금색 라이터에는 앙증맞은 토끼얼굴이 그려져 있다. 맛있게 연기를 들이마시던 기온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드러났다. "이런, 요시이즈미녀석. 눈치챘나본데..." 경직된 기온의 표정에 가노가 천천히 시선을 던진다. 겁을 먹은 아야세가 주위를 둘러보자 카페트가 깔려있는 통로 맞은편 이쪽을 쳐다보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가노보다 약간 나이가 들어보이는 젊은 남자이다. 어설프게 내려온 앞머리를 하얗게 탈색하고 비싸보이기는 하나 품위가 없는 푸른 빛이 도는 양복을 입고 있다. 동행인 듯한 진한 화장을 한 여자와 함께 전원에게 뭔가 불만을 하는 듯하다. 저 사람이 요시이즈미라는 남자인가. "죄송해요, 형. 전 이대로 토껴야겠어요. 나중에 또 빵빵한거 있으면 연락해요. 아야세도 몸 조심해."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자 기온이 일어서서 가노에게 말한다. "맘대로 해." 담배에 대한 인사를 하고 가볍게 아야세의 어깨를 두드린 기온이 서둘러 테이블을 떠났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불안했지만 아야세는 잠자코 담배를 피고 있는 가노를 바라보았다. "도망치는덴 선수군." 거만한 목소리가 머리위에서 떨어진다. 올려다보니 요시이즈미라는 남자가 테이블 바로 옆까지 와있다. "하긴 그녀석 하나 잡는 것쯤이야 식은 죽먹기지." 남자는 말을 뱉으며 테이블에 앉아 있는 가노와 아야세를 흘겨보았다. 탈색한 앞머리를 끌어올리며 남자는 단정치 못한 시선으로 아야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주위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돌아보자 험악한 눈초리로 가라앉혔다. "너 신주쿠의 돈놀이꾼이라며?" 요시이즈미가 말을 걸자 의자에 앉은 채로 가노가 시선만 올린다. "음식이 이 모양이니 손님도 저질들만 오는군." 과장스럽게 어깨를 들썩이며 남자는 동행인 여자를 돌아보았다. 여자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 행동인양 요시이즈미는 가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기온이란 애송이랑은 친한 사이인가 본데. 그리고 우리 쪽 다가하시도 아주 신세를 많이 졌다고 하더군." 하얀 테이블보에 손을 대고 요시이즈미가 비아냥거렸다. "가까운 시일 내 답례를 할테니 기억해 두라구. 기온녀석것도 합해서 말야." 가노가 피고 있던 담배를 집어들어 카페트위에 내던진다. 의기양양한 요시이즈미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가노가 처음 말을 꺼냈다. "답례를 해 준다니 고마운 얘기이긴 한데.... 근데 넌 누구지?" 가노한테서 바보취급을 받자 요시이즈미는 순간 멈칫하다가 이내 얼굴이 울그락 붉그락 변해갔다. "이...겨우 돈놀이나 하는 녀석이 건방지게!" 탕, 하고 남자의 손이 세차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테이블위의 식기가 흔들리고 도자기와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린다. 가득 차 있던 아야세의 와인잔도 흘러 넘쳤다. 새하얀 옷에 붉은 얼룩이 튀자 아야세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본 가노의 두 눈에 처음으로 감정을 담은 빛이 스쳤다. "네가 정부 허가를 받은 것 따윈 간단하게 취소할 수 있어. 그러면..." 계속 떠들어대는 요시이즈미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가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앉아 있을 때는 당연히 요시이즈미의 시선이 높았지만 가노가 일어서자 바로 역전되었다. 넓은 어깨와 두툼한 가슴, 그리고 훤칠한 키이상으로 가노에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힘이 있었다. 기가 꺽인 요시이즈미앞에서 가노의 손이 테이블의 술병으로 뻗는다. 가노는 여유있는 몸짓으로 술병을 손에 쥐고 아직 남아있는 술을 요시이즈미의 머리위에 들이부었다. 투명한 붉은 액체가 남자의 머리에 쏟아졌다. 바로 옆에 있던 아야세는 물론 주위사람들도 그리고 요시이즈미 자신도 기가막혀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이런..." 자신의 몸을 적신 와인을 망연히 바라보며 요시이즈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요시이즈미를 그대로 무시하고 가노는 아야세쪽으로 몸을 굽혔다. "옷이 더럽혀졌잖아." 아무일도 없는 듯 아야세의 어깨를 감싸안는다. 몸이 흠칫 떨리면서 아야세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 너 무슨...!" 사람들 앞에서 술을 뒤집어 쓰고 이젠 무시까지 당한 요시이즈미의 격앙된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남자가 잡은 팔을 뿌리친 가노를 달려온 급사들이 말린다. "손님, 다른분들에게 피해가 되니 참아주십시오." 정중하긴 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종업원이 요시이즈미의 팔을 잡는다. 장신의 남자들에게 잡혀 식당밖으로 끌려나가면서 요시이즈미는 큰소리로 욕을 해댔다. "죄송합니다. 바로 자리를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가노와 안면이 있는 듯 나이가 들어 보이는 급사가 당황하며 아야세에게 다가왔다. "기분이 안 좋으시면 별실에 따로 시원한 음료수라도 준비하겠습니다." 자신을 걱정하는 것임을 알고 아야세는 핏기가신 입술을 깨물었다. "아...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작은 소리로 거절하고 아야세는 도움을 요청하듯 가노를 바라보았다. 끌려나간 요시이즈미는 신경도 쓰지 않고 가노는 역시 여유만만하게 빙긋 웃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론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아니, 나야말로 미안하네. 수고를 끼쳤군." 미안해하는 급사에게 사과를 하고 가노가 아야세의 어깨에 팔을 두른뒤 일어서려는 순간, 아야세는 몸이 부들부들 떨려 의자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 아야세." 휘청거리는 아야세의 허리를 가노가 왼팔로 안아올렸다. "옷이 지저분해졌군. 화장실을 좀 쓸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지금 타월을 준비하겠습니다." 급사는 정중하게 대답하고 화장실로 안내했다. 가노에게 기댄채 떨리는 발걸음으로 카페트를 밟았다. 평소라면 필시 다른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가노가 손을 대는 것을 거부하던 아야세였지만 오늘은 순순히 어깨를 기대고 화장실로 향했다. 은장식이 새겨진 화장실 문을 급사가 타월을 건네주며 열었다. 아야세의 몸을 안고 가노는 급사에게 팁을 주었다. 다행히 안에 사람은 없었다. 화장실이라고 부르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넓은 실내에 두 개의 대형 거울이 설치되어 있었다. 암적색의 카페트에서 바닥이나 벽도 화강암으로 바뀌어 날카로운 빛을 반사고 있다. 문이 닫히자 몸을 지탱하고 있던 가노의 팔이 풀리고 아야세의 몸이 휘청거린다. 벽과 이어진 화강암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모처럼의 저녁 식사가 엉망이 됐군."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며 가노가 투덜거린다. 떨리는 팔로 몸을 쥐어잡고 가노에게 등을 돌린채 아야세는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날카로운 구두소리가 울리고, 가노가 바로 등뒤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커다란 거울에 강인한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긴 팔이 뻗어와 아야세의 뺨을 어루만진다. "...가고싶어..." 새하얗게 질린 아야세가 울먹거렸다. 가노가 몸을 굽혀 아야세의 입쪽으로 귀를 가져갔다. "돌아가고 싶다고? 아직 식사도 안 끝났는데." 아야세의 뺨을 만지던 손이 가녀린 가슴위로 떨어진다. "...무슨..." 이윽고 가노의 손이 벨트위로 걸쳐지자 아야세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저항할 새도 없이 벨트가 풀리고 바지 안쪽으로 손이 침범해 들어왔다. "싫어..." "싫은게 어딨어. 옷을 벗어야지. 더러워졌잖아." 가노는 능글맞게 웃으며 아야세의 다리에서 속옷까지 벗겨냈다. 가노는 언제나 거침이 없었다. 2주일동안 아야세는 가노와 여러번 관계를 가졌지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가노가 원하면 언제라도 아야세는 가노의 발밑에 자신의 몸을 던져야 했다. 그것이 아야세와 가노의 계약이었던 것이다. "가노씨 부탁이에요...아...왜...이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시선을 거두고 아야세는 중얼거렸다. 아무리 가노를 거부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런 장소에서의 관계는 견딜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아까같은 소동이 있는후이니 만큼 언제 요시이즈미라는 남자나 점원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왜 그래? 쓸데없는 말 하지마." 연신 웃어대며 가노의 손이 마른 아야세의 몸중에서 유일하게 살집이 있는 하얀 엉덩이를 거머쥐었다. "앗..." 간신히 소리를 내는 아야세의 다리 안쪽으로 남자가 커다란 손을 들이밀었다. 메마른 가노는 뭔가를 찾는 듯 더듬기 시작한다. "헉..." 남자는 플라스틱 코드를 손에 쥐었다. "...아, 만지지 마..." 몸을 비틀어 피하려고 하는 아야세를 무시하고 가노의 손이 가련한 점막으로 뻗는다. 짙은 분홍색을 띤 코드는 조절기와 함께 테이프로 아야세의 다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은 아야세의 다리 안쪽 깊숙이 파묻혀 있다. "넌 돈을 갚기 전에는 전부 내거야. 어디서 뭘하든 내 맘이라구." 낮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가노는 씨익 웃는다. 이 무시무시하고 음란한 물건은 가노가 맨션을 나올 때 이미 아야세의 몸에 부착해 놓은 것이다. 아직도 자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야세에게 이건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 이렇게 가노의 분노를 사게 될줄은 아야세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노는 기구를 투입한 채 아야세를 차에 실어 약속대로 이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나온 것이다.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네 주제를 알아." "...아..." 가노의 잔인한 말에 숨이 얼어붙듯 이마를 맞댄 거울에 뿌옇게 김이 서렸다. 학생인 아야세가 4억가까이 되는 빚을 지고 있는 지금 가노와의 관계이외의 수입이란 없다. 그런데도 가노의 맨션에서의 생활은 전부 다 가노의 수입에 의해 지출되고 있었다. 식비나 생활비는 말할 것도 없이 옷이나 자잘한 생활소모품까지 아야세의 모든 것은 가노가 대고 있는 것이다. 4억이나 되는 빚과 마찬가지로 이런 현실은 아야세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아야세는 자신의 육체가 막대한 빚과 생활비와 같은 가치가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어머니를 닮은 여성스런 용모나 부드러운 머리카락, 투명한 피부색이 남성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것에 의문을 갖지 않을 정도로 아야세는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 더구나 겉모습뿐 아니라 자신의 성격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자기자신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야세는 남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줄곧 병원을 드나들던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위해 밤낮으로 일만 하던 아버지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아야세의 양육을 할머니에게 떠넘겼다. 엄격했던 할머니, 아름다운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했던 아버지. 아야세에게는 육친으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기억이 있긴 하지만 어린 아야세가 어리광을 부릴 부모님은 안 계셨던 것이다. 부모와 할머니마저 잃고 나서 3년간 끝도 없이 밀려드는 고독은 어느샌가 아야세의 내부에 벽을 쌓기 시작했다. "넌 내 말대로만 하면 돼." 축축한 혀끝으로 귓불을 애무하며 남자가 속삭였다. 아야세의 허벅지가 경직되었다. 둥근 이물질이 아야세를 자극하기 시작한다. "...음..." 신음을 내며 아야세는 무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허리를 비틀었다. "...아,싫어...누가..." "올지도 모르지." 이미 아야세는 흥분이 일기 시작했다. "어때?" "...아...말하지...마." 아야세의 다리 안쪽을 더듬으면서 가노가 감탄의 말을 내뱉었다. "움직이게 해줄까?" "...무슨..." 허벅지에 고정되어 있던 테이프가 난폭하게 찢어졌다. 반사적으로 가노를 돌아보려는 순간 배안에서 구토와 같은 충격이 내달렸다. "앗,아...아." 경직된 비명이 단발적으로 아야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가노가 전원을 켠 것이다. "아...! 가...노... 안돼..." 아야세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젖혔다. 숨을 쉴 여유도 없이 뒤흔드는 진동으로 인해 아야세는 위축되었다. "헉...앗...아." 미지근한 액체로 젖은 부분을 손끝으로 자극하자 다리에 힘이 빠졌다. "강아지 같은데." 코드가 꼬리처럼 보인다며 가노가 낮게 웃어댔다. "목줄을 하고 왔으면 좋았을걸. 갈 때 하나 사 가지고 갈까?" 아주 잘 어울려, 하며 음탕한 목소리로 말하며 가노의 손이 고양이를 쓰다듬듯 아야세의 목을 어루만졌다. "아...싫..." 진심으로 거부하며 몸을 떨었다. 어떤 악취미나 비상식적인 일이라도 가노는 그것을 실행하고도 남을 정도로 잔인하다는 사실을 아야세는 직접 몸으로 체험했다. "입은 그렇지만 몸은 이렇게 좋아하잖아." 남자는 감탄하며 더욱 힘껏 아야세의 다리 안쪽을 자극하자 아야세는 절망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아파...아파...가...노." 참을 수 없는 고통과 계속해서 엄습해 오는 절정의 파도에 정신을 잃을 것 같다. 젖은 가노의 입술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아야세의 입술을 핥았다. "말해." 한치의 동요도 없는 관능적인 목소리는 아야세에게 공포로 다가왔다. "...아." "나한테서 도망가려는 거지?" 귓가에 쏟아지는 소리에 아야세는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가노...나."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아야세의 다리에 가노가 손톱을 박았다. "아앗...아야..." 비통한 아야세의 비명을 가노는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입으로는 무슨 말인든 못할까." 에리한 남자의 눈이 아야세를 쏘아보며 말했다. "돈만 주면 넌 아무하고나 잘 녀석이야. 틀리냐, 아야세." 억양이 없는 조소에 한쪽 가슴이 저려왔다.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혼신의 힘으로 몸을 비틀어 오른손을 들어올려 가노의 뺨을 내리쳤다. 화장실에 울리는 메마른 소리에 놀란 것은 누구보다도 아야세 자신이었다. "...음." 얼어붙은 자신의 오른손과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가노를 아야세는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가노는 아야세에게 치욕적인 관계를 요구하기는 했지만 결코 폭력으로 복종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런 가노에게 손을 들어 폭력에 호소한 것은 아무리 격정때문이라고는 해도 용서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저." 몸을 떨며 뒷걸음질치는 아야세에게 가노가 손을 뻗는다. 오른손으로 가노가 자신의 입술을 만지자 약간의 피가 배어나왔다. 출혈을 확인한 가노가 아야세를 바라보며 웃었다. "배짱한번 좋군. 아야세." 젖은 가노의 혀가 동물적으로 입술을 핥아낸다. 아야세는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다. "엎드려." "아..." 강압적인 가노의 말에 공포감에 머뭇거리는 아야세를 가노의 손이 난폭하게 화강암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처음부터 길을 잘 들여놔야지 큰일나겠군." 화장실 세면대에 몸을 기댄 채, 가노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대고 배 안에서 요동치는 고통에 입술을 깨물고 있는 아야세의 머리를 가노의 손이 난폭하게 끌어당겼다. "...훗...아야." 화강암 바닥에 떨어진 작은 조절기를 가노가 발로 찼다. 울먹이는 아야세를 사나운 눈길로 내려다보며 가노가 양복을 벗었다. "싫어...가노, 용서..." 가노의 다리 사이로 끌려간 몸을 흔들며 피하려는 아야세의 얼굴을 남자의 손이 힘껏 내리쳤다. "아..." "빨리." 아야세는 도저히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음." 본능적으로 피하려했지만 머리가 끌어당겨져 입술에 가노의 몸이 닿는다. 아야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숨을 쉴 수 없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좀더 깊숙이 민감한 부분을 자극하는 기억이 뇌쇄적인 흥분으로 바뀌어 전율하는 자신의 몸을 아야세는 두려움과 함께 부정했다. "하아...욱..." 산소를 마시기 위해 움직이자 야릇한 소리가 났다. "잘 하는군." 천천히 담배를 피면서 가노가 야유를 보냈다. "으...윽." 아야세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할 수 없군." 가노가 뺨을 잡고 있어 아야세는 고개를 돌릴 수 조차 없었다. 다시 머리가 잡아당겨졌다. "음...욱..." 체내의 모든 액체가 역류하는 듯한 충격으로 아야세는 의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아...헉...아..하아." 머리를 잡고 있던 가노의 손에서 풀려나 아야세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다리에 화강암의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하지만 몸을 일으킬 기력조차 없이 아야세는 야윈 몸을 움츠리고 가쁜숨을 몰아쉴 수 밖에 없었다. "하아...하아..욱..." 대량의 공기를 들이마신 폐가 아파왔다. 머리위에서 가노가 담배를 비벼끄는 소리를 들으며 아야세는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멈추려해도 넘어오는 기침과 눈물로 몸을 떠는 아야세의 예상과는 가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발 밑에서 거친 호흡에 고통스러워하는 아야세를 남자는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 냉담한 가노의 얼굴에 희미하게 서글픈 듯한 표정이 스쳤다. 하지만 다시 가노는 표정을 바꾸고 아야세를 향해 쭈그리고 앉는다. "...아." 젖은 다리에 다시 가노의 손을 느끼고 아야세는 힘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만..." 아야세의 다리사이를 더듬던 손이 움직이고 있던 기구의 코드를 뺐다. "음...음..." 그 감촉에 아야세는 경련을 일으킨다. "일어설 수 있겠어?" 가노가 종이타월로 다리를 닦자 아야세는 아무말 없이 눈을 감았다. 아직 뭔가 들어있는 불쾌감에 아야세는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고 싶어... 용서해...줘.." 사그라질 듯한 아야세의 애처로운 모습에 가노는 눈을 가늘게 뜬다. 돌아가고 싶다며 아야세가 다시 쓰러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걸까,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낮게 빛나는 가노의 눈 속에 고통스런 감정이 감겨졌지만 아야세는 모든 생각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돈이없어!!-10 차가 멈추는 진동에 아야세는 잠을 깼다. 비스듬히 위치한 조수석은 침대처럼 아야세의 몸을 푸근하게 감싸주었다. 운전석의 가노가 엔진을 끈 것을 느끼고 아야세는 힘없이 눈을 떴다. 어두운 안개가 창에 내려 밖의 모습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아마도 가노의 맨션에 도착했겠지. 더 이상 아무데도 가지 않고 빨리 방으로 돌아가 몸을 씻고 싶었다. 하지만 일어나 차 문을 열 기력조차 없는 아야세는 자신의 야윈 팔을 끌어안았다. 차에서 내린 가노가 조수석으로 다가와 문을 열었다. 남자는 몸을 굽혀 안아 일으키려 했지만 아야세는 거부했다. "걸을 수 있습니다. 놔두세요..." 애처로운 아야세의 저항도 못 들은척 가노는 아야세를 안아올려 차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두 발이 완전히 공중에 뜨자 이번에는 떨어질 것 같은 공포로 인해 아야세는 저항을 그만두었다. "가노씨..."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누가 볼지도 모른다. 더구나 자택 지하주차장이면 누구든 아는 사람을 마주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에 몸을 움추린 아야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비가 그친 뒤의 특유한 눅눅한 여름의 대기를 들여마시며 아야세는 가노의 품안에서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딱딱한 콘크리트 지하주차장이 아니다. 짙은 먹구름이 걷히고 하늘에는 옅은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겨우 2대의 차가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과 바로 옆을 흐르는 시냇물 소리. 하나밖에 없는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2층짜리 하얀 건물은 할머니를 여위고 3년동안 생활해온 아야세의 아파트였다. 놀란 아야세를 안은 채, 가노가 천천히 아파트 계단을 올랐다. 두터운 철계단에 부딪치는 가노의 구두소리를 들으면서 아야세는 믿기지 않은 마음에 몸을 움츠렸다. 2층 첫 번재 서향 방 앞에 서서 가노가 아야세를 안은채로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를 꺼내 아야세의 방문을 쉽게 열었다. "열쇠...어떻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아야세를 고쳐 안으며 가노가 현관을 열었다. "내려주세요. 가노씨." 불도 켜지 않고 방 안쪽으로 들어가자 아야세는 다시 반복했다. 겨우 침대위에 누워져 아야세가 후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전기불을 켜려고 손을 뻗자 가노가 대신 켜 주었다. 형광등 불빛에 환해진 방안을 아야세는 둘러보았다. 미닫이 문 하나가 주방과 침실을 구분 짓고 있는 아주 평범한 방이다. 넓은 가노의 맨션에 익숙해진 탓인지 여느때보다 더욱 좁게 느껴졌다. 방의 넓이뿐 아니라 오래된 아파트는 천장도 낮다. 주방에서 방으로 건너갈 때에는 가노가 목을 숙이고 지나가야 했다. 익숙한 방에서 느껴지는 공허한 위화감에 아야세는 왠지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옷 벗어, 아야세." 돌연 건네오는 가노의 말에 아야세는 몸을 움츠린다. "닦아줄게." 가노는 양복윗도리를 벗어 옆 책상에 올려놓고 아야세쪽으로 다가왔다. 맘대로 방을 뒤적거렸는지 가노는 따뜻한 물로 적신 타월을 손에 들고 있었다. "괜찮아요...제가 할 수 있어요."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거절하는 아야세의 말을 무시하고 가노는 능숙하게 옷을 벗겼다. "가노..." "잠자코 있어. 닦기만 할거야. 아무 것도 안 해." 탈진한 몸으로 가노를 밀어내려던 아야세에게 남자가 나지막히 말했다. 난처한 듯 괴로워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아야세는 저항을 멈추었다. 올려다보니 남자의 눈길에 아픔이 배어 있었다. 가슴을 꿰뚫는 충격에 아야세는 긴장했다. "...웃." 가노는 아야세의 옷을 벗기고 다리를 타월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가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아야세의 몸이 경직되었다. 가노는 더러워진 아야세의 몸을 닦기만 할 뿐 만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무방비한 상태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자 사라져 버리고 싶은 수치심이 엄습해왔다. 일어설 기운조차 없이 누워있는 아야세에게 가노는 옷장에서 꺼내온 잠옷을 입혀주었다. 얇은 여름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리고 나서 가노는 담배를 꺼내 물고 방안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침대 끝에 앉았다. 은색 라이터로 불을 붙이면서 가노의 커다란 손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야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야세가 눈을 감았다. "...아파?" 평소다 더 낮은 조심스런 목소리로 묻자 아야세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고개를 흔들었다. 부자연스럽게 긴장하던 몸 안의 모든 근육들이 쑤셔온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거칠게 농락당한 마음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그것을 호소할 정도로 솔직하지 못한 아야세의 몸이 긴장되었다. "에어컨을 켜는게 좋겠지? 원하는거 있으면 말해. 사올테니까." 거듭되는 질문에도 아야세는 아무말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왜 가노는 이 방에 온걸까. 아야세는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아야세에의 말을 그렇게 싫어했던 가노가!! 아파트에 오긴 했지만 좀 쉬고 나서 다시 맨션으로 데려갈 것 인가. 아니면 아야세한테 질려 혼자 맨션으로 갈지도 모른다. 가노의 의도를 가늠하지 못하고 당혹해하는 아야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가노가 천천히 담배를 빨았다. 필터 가까이까지 핀 담배를 주방에 버리러 갔다. 돌아온 가노의 손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두 개의 금속조각이 있었다. "손 내밀어." 가노는 이불안에 있는 아야세의 오른손을 잡아뺐다. 하얀 손바닥위에 차가운 금속이 닿자 아야세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열쇠이다. 그 두 개의 열쇠가 의미하는 것을 아야세는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난 그냥 돌아갈게." 조용한 가노의 말에 아야세의 몸이 흔들렸다. 놀라움을 담은 아야세의 눈동자를 가노가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오늘은 여기서 자. 전기도, 수도도 아직 쓸 수 있으니까." 일어서는 가노를 쫓아 반사적으로 일어난 아야세가 고통의 눈빛을 띈다. 침대에 다시 쓰러진 아야세의 몸을 가노가 다시 일으켜세웠다. "괜찮겠어?" 등을 여러번 어루만지자 젖은 아야세의 눈이 가노를 바라보았다. "...왜." 채 끝맺지 못한 아야세의 질문에 가노가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다시 강렬한 눈빛으로 아야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오후에는 외출할지도 모르지만, 내일...와." 가노의 커다란 손이 아야세의 오른손을 잡았다. 아야세는 그제서야 비로소 건네준 열쇠의 의미를 이해했다. 하나는 아야세 방의,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가노의 맨션열쇠였던 것이다. 놀란 아야세의 머리를 가노가 쓰다듬었다. "혼자서 올 수 있겠어?" 거친 가노의 손에서 따스함을 느끼면서 아야세는 오열을 삼키려했다. 손 안의 열쇠를 꼭 쥐었다. 가노는 처음부터 이 열쇠 두 개를 준비해 주었던 것이다. 아야세가 남자를 거스르지만 않았다면 가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 열쇠를 주었을 것이다. "아야세. 전화하면 바로 데리러 올게." 속삭이는 가노의 입이 귓가에 살짝 닿았다. 격정을 눌러 참는 모습에 눈물이 흐르면서도 아야세는 겨우 고개를 저었다. 그래, 하고 약간의 낙담을 보이며 가노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일어나서 같이 가자고 한 마디만 하면 좋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지 못하고 아야세는 굳게 눈을 감았다. 동시에 뭔지 나쁜 예감이 들어 가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무시하고 아야세는 모든 것을 부정하듯 한숨을 토했다. "그럼 쉬어." 침대에서 가볍에 아야세의 어깨를 두드린 가노가 일어섰다. 불을 끄고 지갑에서 교통비를 꺼내 책상위에 놓았다. 아야세의 등뒤로 남자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전해진다. 혼자 남은 침대 속, 아야세는 힘껏 열쇠를 쥐고 떨리는 한숨을 삼켰다. 손 안에 쥔 은색 열쇠가 아름답게 빛났다. 아야세는 왼손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신주쿠역 홈에 서있었다. 가방 속에는 옷가지와 최소한의 소지품이 담겨있다. 신주쿠역에서 가노의 사무실까지 아야세의 걸음으로도 10분정도 걸린다. 오후부터 외출하는 가노를 위해 오전중에 신주쿠에 도착하려고 했지만 이미 시간은 오후 1시를 넘어섰다. 2주일간 방치해둔 냉장고와 싱크대를 청소하고, 짐을 꾸리는데만도 시간이 꽤 걸린 것이다. 신문은 이미 가노가 손을 써둔 모양으로 열흘전부터 배달되지 않았다. 갈아입을 옷뿐 아니라 사실은 냄비나 쓰던 조리도구를 조금 가져가고 싶었지만 짐이 너무 많아져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어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램과 함께 가노에게 말하려던 다른 한가지 용건도 그렇다. 가노의 맨션으로 돌아가기 전에 끝내려고 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그만둘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야세는 가노를 만나 다시 한번 솔직하게 얘기를 하고 싶었다. 불안한 자신의 심정을 얘기하고, 그래도 가노가 아야세를 곁에 두고 싶어한다면 아파트를 정리하려고 했다. 무슨일이 있어도 차분하게 말하고 서로의 틈을 메워야 한다. 그것이 아야세가 밤새 생각해낸 답이었다. 잠이 부족해서 몸은 조금 피곤했지만 기분은 의외로 상쾌했다. 육체를 강요당하는 가노와의 관계는 아직 아야세에게 있어 정신적으로 커다란 부담이 되고 있다. 하지만 성을 돈으로 팔아야하는 고통을 빼면 가노라는 남자와의 생활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체온을 나누는 따스한 느낌은 더할 나위없이 좋다. 집이라는 따스한 공간을 주겠다는 가노의 말이 지금도 아야세의 가슴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혈육의 정에 목말라 있던 아야세의 가정에 대한 동경은 각별했다. 부모가 그러했듯 아야세에게 잃고 싶지 않은 따스함은 언제나 흐르는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조금씩 세상이 퇴색해가듯, 절망과 고독은 항상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아 아야세를 괴롭혔다. 가족이든 친구든, 누군가를 열심히 사랑하고 싶다. 그 욕구는 언제나 아야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소중한 따스함을 잃게 되는 상상을 하게되면 주춤거리며 발을 빼게 되는 것이다. 손에 든 작은 열쇠를 아야세는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하얀 손으로 열쇠를 다시 힘껏 쥔다. 가노와의 생활을 주저하는 이유를 가노에게 말하자. 어제 혼자 아파트로 보내준건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자신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노의 성의에 보답하고 싶었다. 가노는 없을지 모르지만 빨리 맨션으로 가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했다. 태양이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지금 시간. 바람 한 점 없는 콘크리트 거리는 찌는 듯이 뜨겁다. 가부기쵸방면 도로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신주쿠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은 다양하다. 양복차림의 샐러리맨이 있는가 하면 여름방학을 즐기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눈에 띈다. 아마도 밤이 되면 더욱 사람이 넘쳐날 것이다.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일까. 신기한 생각마저 들었다. 인파를 헤치고 가부기쵸로 향하는 도로를 횡단하려는 아야세 옆으로 흰 자동차가 빠르게 지나갔다. 차 색깔이나 차종도 아주 흔한 자동차이다. 하지만 검게 썬팅된 창문이 가노의 차를 연상시켰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 흰 자동차가 정지했다. 아야세가 무심코 검은 창으로 시선을 향하고 보도를 건너려는데 갑자기 차 문이 열리자 발을 멈췄다. 아야세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젊은 커플도 갑자기 열린 차 문에 부딪쳐 항의를 하며 지나갔다. 그러나 아야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문이 열린 순간 안에서 뻗어나온 강한 팔에 멱살을 잡힌 것이다. "...무슨..." 다른 손이 소리지르려는 아야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곳은 대낮의, 그것도 인적이 많은 공공장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에서 나온 팔은 무시무시한 힘으로 아야세의 몸을 차안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몸을 빼내려고 허우적거리는 아야세의 배에 강렬한 주먹이 닿는다. 고통을 느끼고 몸을 구부린 아야세를 차안으로 잡아끌었다. 거칠에 아야세의 몸을 밀어 넣고, 난폭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힌다. "빨리 해." 아픈 몸을 일으키려고 발버둥치는 아야세의 입에 약품이 묻는 천이 대어졌다. 휘발성의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가 진동했다. 달리는 차의 충격으로 몸이 흔들리면서 아야세는 멀어져가는 의식속에서 단 하나의 이름을 불렀다. 머리가...아프다. 입을 열어 숨을 쉬려는 아야세는 몸 마디마디에 아픔을 느꼈다. 아직 부자연스런 몸으로 차 뒷좌석에 구겨진 채로 흔들리는 불쾌한 느낌이 남아있었다. 혼탁한 의식아래 아야세는 소리를 지르려는 노력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호오, 꽤 괜찮은데. 갈색머리. 정말 남자애 맞아? 아주 예쁘군." 웅웅거리는 남자의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네. 보기드문 상품이죠." "얼굴도 순진해 보이고. 사채업자 애인이라고 해서 나는 여자인줄만 알았지." "선생한테는 기분 좋은 오산이 되겠군요." 조소가 목덜미를 지나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부자연스럽게 꼬인 목으로 전류가 흐르듯 고통이 치밀었다. 충동적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입에 붙여진 접착 테이프에 의해 도로 입안으로 삼켜졌다. 눈 위로 쏟아지는 백색의 빛으로 인해 두통이 심해진다. "이봐. 조심해서 다루라고 했잖아! 손 좀 풀면 안돼나." 낯익은 독특한 억양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소리를 지르고 눈을 뜨려고 했지만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감각을 잃어가는 의식과는 반대로 머리 한 구석에 각인된 기억의 파장이 고개를 들었다. 돈이 없어!! - 11 고통과 공포가 뒤섞인 무서운 기억이다. 2주일전. 아파트 앞에서 낯선 남자들에게 납치된 순간의 영상이 사진처럼 각막에 떠오르는 것이다. 몇 번인가 얻어맞고, 아픔과 충격, 그리고 본능적인 공포로 사지가 마비되었다. 살해된다. 그 때도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한 치 앞을 알 수 없이 아야세가 신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살해되는 공포보다 거역할 수 없는 소중한 감정이 입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소리치고 싶은데, 움직이고 싶은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조용히 해, 기온. 넌 잠자코 카메라만 돌리면 돼." 아야세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이 멀어지고 몸은 매트에 쓰러졌다. 자신이 딱딱한 간이침대에 넘어지는 것을 자각한 순간, 눈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들어왔다. "요시이즈미, 너무 화내지 마. 그도 충분히 반성하는 것 같으니까." 덜그럭거리며 뭔가 기재를 준비하는 소리가 울리면서 남자들의 대화소리가 들렸다. 아직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아야세는 열심히 눈을 움직여 조금이라도 보려는 노력을 반복했다. "그런데 그 신주쿠의 사채업자라는 남자한텐 연락했나?" 신주쿠의 사채업자. 그 말에 아야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돌아오라고 속삭이던 남자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서 울린다. 한 여름 태양빛에 이글거리는 신주쿠의 거리를 지나 얼른 맨션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는 어디지. 신주쿠역을 나와 가부기쵸방면으로 향하던 도중, 하얀색 차가 앞에 와 섰다. 그리고 뻗어나온 손에 의해 뒷좌석으로 끌려들어 간 것까지 기억이 났다. "...아..." 아야세는 몸을 일으키려고 몸부림을 쳤다. 빨리 맨션으로 돌아가 가노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마음 한 구속에서 그렇게 되뇌이는 순간 억누를 수 없는 괴로움이 아야세의 온 몸을 휘감았다. "뭐, 일단...선생. 이 녀석 정신이 든 것 같은데요." 희미한 시야로 손이 보였다. 그러나 더 이상 손을 뻗지 않고 다른 팔이 아야세의 몸을 받쳤다. 가온, 하고 부르는 고압적인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고 팔의 주인은 페트병에 든 물을 타월에 적셔 아야세의 얼굴을 조슴스레 닦아주었다. "조금만 참아. 지금 테이프를 떼어줄 테니까." 접착 테이프에 물을 스며들게 하면서 아야세의 집에서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배려이다. 간신히 호흡이 수월해지고 아야세는 가볍게 기침을 한다. "괜찮아. 무리하게 움직이지 마."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어루만지자 아야세는 괴로워하면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생리적으로 고인 눈물보다 시야가 더욱 뿌옇게 보인다. 그러나 자신을 쳐다보는 젊은 남자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옅은 금발을 한 화려한 남자이다. 폭행을 당했는지 오른쪽 눈이 퍼렇게 부어오르고, 얼굴 곳곳에 멍자욱과 긁힌 상처가 있었다. 다소 인상이 달라보였지만 서글서글하고, 격이 없어 보이는 모습은 기억이 났다. "기온..." 이름을 부르려는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 머뭇거리는 아야세의 모습에 기온은 통절하게 얼굴을 찡그리고 다시 타월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어떻게 이럴수 있어. 불쌍하게도. 이 조그만 얼굴에 어디 때릴데가 있다고. 입술까지 터지고.. 몸속에다 알콜까지 넣었나보네." 마음이 아픈 듯 중얼거리는 기온이 오히려 얼굴상처가 심했다. "아야세. 침착하고 내 말 잘 들어." 아야세가 누워있는 간이 침대에 걸터앉아 기온이 말을 이었다. "좀 재수없이 걸린거야. 얌전히 있으면 이 이상 건드리진 않을거야. 반드시 가노형한테 다시 보내줄 테니까." 심각한 기온의 말에 아야세의 가슴이 불안으로 요동쳤다. "...아...여기는..."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꿈틀거리며 아야세는 겨우 소리를 냈다. 높은 천장에 화려한 조명이 보인다. 넓은 공간은 어딘가 실내인 듯 하다. 서늘한 대리석 벽에 짙은색의 카페트, 그리고 소파가 여러개 눈에 띄었다. 아야세의 주위를 둘러싼 종업원인 듯한 남자들외 손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실내 조명은 어두웠지만 아야세가 누워있는 침대를 둘러싸고 촬영기재와 조명기구가 세워져 있었다. "내가 경영하는 클럽이다. 기온의 말대로 볼일이 끝나면 바로 돌려보내주지." 옆에서 남자의 손이 뻗어와 아야세의 앞머리를 잡았다. 하얀 조명 불빛속으로 떠오르는 모습은 어제 레스토랑에서 가노에게 봉변을 당한 요시이즈미라는 남자였다. "...볼일...?"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아야세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네 몸과 교환으로 네 주인한테 받을게 있어. 너 가노의 애인이지?"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 아야세는 멍하니 눈을 허공에 두었다. 아야세는 자신을 가노의 애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요시이즈미의 말투나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아." 자신을 인질로 요시이즈미는 가노를 협박하려는 것을 아야세는 그제서야 이해했다. "기다려. 여기로 가노를 불러올테니. 가노한테 어제 신세를 졌으니까 보답을 해야겠지." "안돼..."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아야세는 소리를 질렀다. 어제 레스토랑에서기온과 가노가 나눈 화제가 단편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노가 입수한 비디오를 요시이즈미가 되찾으려하는 것일가. "무리...그런,...안...올..." 자신을 인질로 가노를 유인하는건 불가능하다. 한번 약점을 보이면 패배한다는 신념을 자신 때문에 가노가 굽힐 리가 없다. 무엇보다 어젯밤 그런식으로 남자를 거부한 아야세를 가노가 용서할 거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오히려 무슨 사정이 있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아야세에게 화가 나 있을지도 모른다. 아야세는 자신을 이용해서 가노를 협박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애초에 믿지 않고 있었다. "안 오면 곤란한데...그런데 남자였다니. 어제 저녁 봤을땐 딱 여자인줄 알았다고." 모욕적인 감탄을 내뱉는 요시이즈미가 가녀린 아야세의 턱을 들어올렸다. "기온은 네가 애인이 아니라고 우기지만...뭐 괜찮아. 이 정도 상품이면 남자라도 쓸 데는 많으니까." 호색적인 웃음을 보이는 요시이즈미는 아야세의 셔츠를 벗겼다. "구도선생." 요시이즈미가 부르자 뒤쪽 소파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섰다. 40대후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이다. 요시이즈미에 비하면 그나마 외모도 성실해 보이고 옷차림도 단정했다. 그러나 아야세를 내려다보는 눈길은 어딘지 음탕하게 느껴진다. 어디서 본 듯도 한 얼굴이지만 몽롱한 의식속에서는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름은 부르지 말게" 낮은 목소리로 질책하자, 요시이즈미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거만하게 명령하는 말투에서 구도의 강력한 위치를 암시한다. "죄송합니다... 기온. 촬영준비는 됐나?" 건방진 태도로 턱을 치켜들자, 기온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기온이 눈썹을 찌푸렸다. "...다시한번 생각해봐. 이런 꼬맹이 때문에 그 남자가 정말로 올거라고 생각해? 분명히 말하지만 조금도 상대해 주지 않을거야. 너 따위하곤.." 기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요시이즈미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맥주병을 집어들고는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기온이 아야세의 눈앞에서 비틀거렸다. "가노는 온다. 돈과 비디오를 들고 말야." 승리를 확신하는 요시이즈미의 조소에 기온이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뱉었다. "너희들 다 죽일거다." "기껏해야 사채업자가 뭘 할 수 있겠어. 이번 기회에 아주 뜨거운 맛을 보여주지." 요시이즈미가 어깨를 치자, 기온이 괴로운 듯 아야세를 보았다. 그 모습 그대로 기온이 아야세의 어깨를 스치고 소파근처에 있는 카메라쪽으로 걸어갔다. "자, 시작해볼까요, 선생님. 어떻게 하든 상관없습니다. 약속대로 얼굴은 찍지 않겠어요. 설마 나온다고 해도 완벽하게 편집할거니까 걱정마십시오." "마스타테잎은 나한테 주기로 약속했지. 기대하고 있겠어." 정욕에 넘치는 웃음을 흘리며 구도라는 남자가 양복을 벗었다. "기온, 준비됐나." 아야세를 비추는 현란한 조명밖에서 기온이 카메라필터를 들여다 보고 있다. 가정용 비디오카메라보다 조금 큰, 프로용 카메라이다. 다리에 받쳐놓은 한 대와 기온이 직접 어깨에 짊어진 것, 모두 2개의 렌즈가 아야세에게로 향했다. "...왼쪽 조명, 조금 더 세게. 고정 카메라는 그대로 스타트." 무표정한 기온의 지시에 따라 어딘가에서 차가운 기계음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어리둥절해 하는 아야세의 곁으로 넥타이를 풀면서 구도가 다가왔다. 얇은 셔츠 위로 남자의 손이 가슴을 더듬었다. 아야세는 혐오감으로 침대위에서 발버둥쳤다. "얌점히 있어. 기왕 이렇게 됐으니까, 비디오는 잘 찍어줄테니까." 차가운, 그러나 한편으로 욕정에 불탄 능글맞은 얼굴로 구도가 말했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자신의 몸을 비디오에 담겠다는 말에 아야세는 비로소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 "싫어..." 침대위로 덮쳐 오는 남자를 쫓아내려고 저린 손을 들어 완강히 거부했다. 하지만 알콜과 약으로 마비된 몸은 아야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구도는 손쉽게 아야세의 팔을 잡고 셔츠 단추를 위에서 순서대로 풀기 시작했다. "놔..." 반쯤 벗겨진 셔츠 사이로 지방으로 가득 찬 손이 가슴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직 꽃잎처럼 여린 가슴 주위를 더듬자, 아야세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좋군, 꽤 민감한데." 귓가에서 울리는 웃음소리에 아야세는 거센 혐오감이 밀려와 입술을 깨물었다. "피부도 깨끗하군. 손에 착 달라붙는걸... 비디오로 감촉까지 재현할 수 없는 게 안타깝군." 눈 안쪽이 아파온다. 분함으로 인해 넘쳐나는 눈물을 억지로 참고 있는 아야세의 몸에서 셔츠가 벗겨졌다. 에어컨으로 차가워진 공기 때문에 솜털이 부스스 일어선다. 눈을 감고 몸을 비트는 아야세의 머리 위에서 구도의, 그리고 옆에서 지켜보던 요시이즈미의 숨소리까지 들렸다. "우와... 끝내주는데..." 마이크를 조절하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소리를 쳤다. "아무래도 애인이라는 말이 사실인 것 같군." 하얗고 투명한 아야세의 피부에 핀 입술자국을 구도의 손이 더듬었다. 남자들의 감탄의 의미를 알고 아야세의 뺨이 붉어졌다. 늑골과 가슴, 옆구리와 다리안쪽까지 아야세의 몸에는 생생한 혈흔이 각인되어 있었다. 마치 수많은 상처처럼 아야세의 피부를 물들인 혈흔을 카메라 렌즈가 확대해서 찍고 있다. "...웃." "그 남자는 상당히 네 몸에 집착하는 것 같군. 청순한 얼굴을 하고서 말야. 이 정도면 꽤 개발되었겠는데." "...아..." 양팔 사이로 들어온 손이 가슴에 난 두 개의 돌기를 동시에 잡아당겼다. 아야세는 소리를 죽이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몸이 가노의 감촉을 기억하고 무의식적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금 아야세의 가슴을 더듬는 남자의 손은 가노의 애무와 달랐다. 끓어오르는 혐오감으로 아야세는 고개를 흔들었다. "봐. 벌써 흥분했잖아." 조금씩 반응을 보이는 부분을 구도의 손이 가볍게 와닿았다. 뒤에서 껴안는 자세로 무릎이 세워져 하복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놔...놔..." 저항하는 아야세를 무시하고 남자의 손이 천천히 바지지퍼를 내렸다.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온 기온이 아야세의 다리를 렌즈 너머 주시하였다. "...으..." 아야세의 다리 안쪽을 쥐고 아래 위로 가볍게 움직이자 허리가 마비되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아..." 몸을 떨며 눈을 감고 있는 아야세의 다리에서 바지를 벗기며 구도가 요시이즈미에게 웃음을 건넸다. "약효가 도는 것 같애. 대단하군. 비싼만큼 가치가 있어." 아야세는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애처로운 눈으로 구도를 보았다. "괜찮아. 네 주인보다 더 기분 좋게 해줄테니까. 평소에도 약을 사용해서 즐기고 있나?" 불안이 아야세의 몸을 휘감았다.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약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엄청난 공포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싫어...앗." "봐, 아주 좋아졌잖아." 구도가 성급하게 겁에 질려있는 아야세의 속옷을 끌어내렸다. 손으로 감추려는 것을 저지하고 메마른 손으로 반쯤 드러나기 시작한 아야세의 몸을 끌어쥐었다. "싱싱하군. 아주 귀여워. 색깔도 아주 예쁘군 그래. 요시이즈미, 자네도 와서 한번 보게나." 불쾌한 손길로 자신의 몸을 더듬자 아야세가 허리를 비틀었다. "욱..." 낯선 남자에게 가장 스치스러운 부분을 희롱당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더구나 아야세의 몸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구도가 주는 자극에 반응하고 있었다. 한심스럽게도 이 육체는 어느 누구의 품안에서든 흥분하게 되버리는 것일까. 이런 자신이 역겨워졌다. "...앗..아,안돼..." "더 기분 좋게 해줄게. 자, 뭐가 좋을까." 구도가 요시이즈미에게 턱을 치켜올려 신호를 보냈다. 은밀한 웃음을 띠며 요시이즈미는 소파위에서 작은 병을 꺼내온다. "안돼..." "차갑긴 하겠지만 좀 참으라구. 이걸 바르면 끝내주게 흥분될걸." 아야세는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머뭇거리는 아야세의 반응이 시원찮았는지 액체를 모두 쏟아 부은 구도가 더듬기 시작했다. "...아...차가..." 구도의 손이 더듬거리며 끈적거리는 액체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파..." "호오. 아주 멋진걸." "아,아파...그만..." "허리를 더 들어. 색이 아주 잘 나왔으니까 구석구석 비디오로 잘 찍어줘야지." 안쪽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아야세는 침대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알콜에 의한 부유감과 칠한 약의 효과때문인지 아야세의 몸에서 마지막 저항의 힘마저 희미해져 갔다. 괴로운 현실에서 혼탁한 의식속으로 도피하면 오히려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치와 공포의 감정은 아야세의 몸안에 잠재해 그를 놔주지 않았다. "이제 잠시후면 네 주인이 올거야. 그 때 너의 흥분된 몸을 확실하게 보여줘야겠지." 잔인한 구도의 말에 아야세는 눈물을 흘렸다. 아야세는 가슴 한 구석에서 단 한사람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고 있었다. 마중을 거절하고 혼자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야세를 믿고 허락해주었는데 돌아가지 않는 자신을 분명 가노는 경멸할 것이다. 가노를 실망시킨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소리를 죽이기 위해 무의식중에 악물고 있던 셔츠자락이 눈물과 타액으로 얼룩진다. 낯선 남자들에게 당한 공포보다 가노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아야세의 가슴을 더욱 괴롭게 했다. "약효도 거의 다 된 것 같으니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쭉 뻗은 아야세의 등을 구도가 혀로 핥으며 말한다. "안돼..." 발버둥치지 못하도록 주위에서 지켜보던 남자 한 명이 양 발목을 고정하자 아야세는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고개만 흔들었다. 마지막 의식마저 잃어가는 순간 가노의 이름이 목까지 올라왔다. "...웃." 아직 완전히 흥분되지 않은 구도의 몸이 아야세의 다리안쪽에 닿았다. 혐오감에 절규하는 아야세의 저항을 즐기면서 구도는 서서히 진입해왔다. 눈물이 끊임없이 뺨을 타고 내려왔다. 그 때 실내에 나타난 남자가 요시이즈미에게 귓속말을 했다. "요시이즈미님, 괜찮겠습니까?" 일어나 귀를 기울이고 있던 요시이즈미의 얼굴에 비겁한 웃음이 떠오른다. 요시이즈미의 기척에 아야세의 몸을 누르던 구도가 고개를 들었다. 야윈 몸에서 호흡을 압박하는 무게가 내려왔다. "왔나?" 구도의 물음에 요시이즈미가 웃음 띤 얼굴로 끄덕인다. "선생은 그대로 계속해 주십시오. 아주 그림 좋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멀어져가는 의식속에 들으면서 아야세가 무너져내릴 듯 가슴을 헐떡거렸다. 넓은 실내 어딘가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이는 남자들의 웅성거림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아야세의 몸으로 전해져왔다. "자, 봐. 벌써 마중하러 오셨군." 일단 행동을 멈추고 끈끈하게 속삭이는 구도가 난폭하게 아야세의 머리를 잡아끌었다. 눈물로 젖은 시야안으로 거대한 금속케이스를 든 장신의 남자가 보였다. 건장한 체격과 폭력적인 강력한 눈이 기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작렬하는 조명을 받으며 무참하게 망가진 자신의 모습을 가노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어서오게." 요시이즈미가 걸어나가며 건방진 태도로 가노에게 인사했다. 요시이즈미의 부하인 듯한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가노는 태연히 실내를 둘러보았다. 실내 중앙, 박스석을 개조한 간이 촬영장소에 시선이 멈추자 예리한 두 눈이 가늘게 떠졌다. "비디오와 돈은 가져왔겠지. 어디 보여봐." 고압적인 요시이즈미의 말에 가노가 윗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경계하는 남자들을 주시하면서 가노의 손이 담배를 꺼냈다. "거래를 하려면 우선 아야세를 풀어줘." 나지막한, 전혀 동요하지 않은 가노의 목소리이다. "...가...노." 아야세는 가슴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 가늘게 소리를 냈다. "오지...마." 오면...안돼. 난 가노의 족쇄가 되고 싶지 않아. 자신 때문에 가노가 손해를 감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위험에 처해서도 안된다. 구하러 와주었다. 버림받은 것이 아님을 느껴 안도하는 한편으로 가노를 궁지에 몰아넣는 자신의 존재가 한심해, 아야세는 눈물을 흘렸다. 뻣뻣하게 굳은 몸을 간신히 움직여 구도의 손을 뿌리치려했지만 다시 침대에 처박혀 붙들리고 말았다. "이 녀석을 꼭 잡고있어." "...헉..." 구도를 도와주기 위해 온 남자가 차가운 금속을 아야세의 뺨에 대었다. 날카로운 은색의 나이프다. "거래라고?" 아야세에게 칼을 들이댔지만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가노의 반응에 요시이즈미의 안색이 달라지며 거침없이 내뱉는다. 성큼성큼 걸어간 요시이즈미가 난폭하게 가노의 입에서 담배를 뺏었다. "자신의 처지를 알고나 있는거야, 너! 이건 거래가 아니야. 돈을 내놔." 퍽 하며 요시이즈미가 가노의 가슴을 후려쳤다. 큰 키를 자랑하는 가노의 몸은 그 이상으로 골격도 강하고 건장하다. 요시이즈미의 주먹에 약간 흔들릴뿐 쓰러지지 않는 가노에게 요시이즈미가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이...! 이 꼬마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다는 거냐!" 요시이즈미의 말과 함께 칼을 쥔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천천히 나이프가 뺨에서 턱, 그리고 목까지 더듬어 내려오자 아야세는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어... 엎드려서 어제 일을 사과하는 거다." 비열한 요시이즈미의 명령에 아야세가 몸부림쳤다. "...아, 안돼..." 무심결에 흘러나온 말은 그러나 가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야세를 주시하면서 가노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겨우 순순히 명령에 따르는 가노를 보고 요시이즈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큰 키를 구부리고 자신보다 시선이 낮아진 가노의 얼굴을 요시이즈미가 걷어찼다. "...안돼." 둔중한 소리와 함께 아야세가 비명을 질렀다. 계속해서 두 번 세 번, 요시이즈미의 구두발이 가노의 얼굴을 내리쳤다. 남자의 입술이 찢어지고 붉은 피가 배어났다. 가노가 피를 흘리자 요시이즈미는 자신의 우위를 확신한 듯 히죽거리며 계속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놔...! 안돼... 가노!"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아야세가 달려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눈물을 머금고 팔을 뻗는 아야세의 다리를 구도가 손으로 잡아쥔다. "...앗..." "가만히 보고 있으라구. 네가 발버둥치면 저 남자가 더 심한 꼴을 당하게 된다는 걸 알아야지." 축축한 손으로 위축된 다리안쪽을 더듬자 아야세는 몸을 돌렸다. 요시이즈미에 대한,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한 격렬한 분노로 아야세의 몸이 떨렸다. 어디로든 꺼져버리고 싶은 비참한 모습을 가노에게 보이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절규하고 싶은 충동에 아야세는 혼신의 힘으로 몸을 뒤틀어 아야세의 옆에서 칼을 들이대고 있는 남자의 손으로 힘껏 몸을 날렸다. "이 자식...." 차가운 충격이 왼쪽 팔을 스쳤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의 목을 칼에 대려는 순간 아야세의 어깨를 구도의 손이 잡아당겼다. "아야세!" 무참하게 밟히고 얻어맞으면서도 결코 소리한번 지르지 않았던 가노의 입에서 처음으로 오열이 흘러나왔다. 움추린 아야세의 몸을 남자들이 달려들어 붙잡았다. 상처입은 왼팔의 피부가 타는 듯이 아팠다. 그 이상으로 무력한 자신이 한심스러워 아야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보자식들! 꽉 잡고 있어." 요시이즈미가 고함을 지르자 아야세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젠장..." 요시이즈미는 당황하며 침을 내뱉고는 거칠게 씨근거리면서 가노를 둘러싸고 있던 부하중 한 사람에게 턱으로 신호를 보냈다. "케이스를 열어." 요시이즈미의 지시에 가노가 가지고 온 금속케이스로 손을 뻗은 남자가 그 무게에 얼굴을 찡그렸다. "이 안에 비디오와 돈이 들었나?" 바닥에 소리를 내며 운반된 금속케이스를 요시이즈미가 발로 가노의 눈앞까지 밀고 갔다. 일방적인 폭행을 당하면서도 예리함을 잃지 않은 가노의 눈이 요시이즈미를 쳐다보았다. 적군 한가운데 단독으로 뛰어들었음에도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는 가노를 보자, 우월감에 젖어있을 요시이즈미가 오히려 안절부절 못했다. 은색으로 빛나는 케이스에 오른손을 올리고 가노는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천천히 가노가 왼손을 주머니로 가져간다. "어리석은 짓 하지마. 그 꼬마를 더 이상 상처받게하고 싶지 않거든 말야." 요시이즈미의 협박을 무시하고 가노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튼튼한 금속케이스의 열쇠구멍에 은색 열쇠를 꽂았다. 철컥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가노의 손이 두터운 뚜껑을 들어올렸다. "...이런!" 가노가 뚜껑을 열자 요시이즈미의 입에서 불완전한 절규가 쏟아졌다. 케이스안에는 비디오도 돈도 없었다. "...우웃..." 손과 발이 묶인 채 고무테이프로 입을 틀어막은 어린 소녀의 모습이 어스름한 조명에 드러났다. 입고있는 흰셔츠와 체크스커트로 보아 고등학생인 듯 했다. 갈색으로 물들인 긴 머리가 헝클어진 채, 소녀는 케이스안에서 울고 있었다. 연약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소녀의 목에 가노가 재빠르게 칼을 들이밀었다. "무슨짓이야, 대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머뭇거리는 요시이즈미 대신 소리를 지른 것은 아야세의 몸을 희롱하던 구도였다. "미, 미카!" 침대위, 안고있던 아야세의 몸을 팽개치고 구도가 일어섰다. "본대로다."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더욱 위협적인 가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비디오도 돈도 이곳엔 없다. 요시이즈미, 네가 거래할 생각이 없다면 나도 그렇게 해주지." 굶주린 듯 낮게 번뜩이는 가노의 눈이 예리한 웃음을 띠며 소녀의 갈색머리를 잡아당겼다. 순간, 덤벼들려는 요시이즈미의 부하들을 가노가 쏘아보았다. "그만둬! 내 딸이다. 건드리지마." 당황하는 구도의 비명에 남자들의 얼굴색이 변했다. 아야세를 인질로 잡은 대신 가노는 구도의 딸을 납치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아야세는 자신이 유괴당한 것 이상으로 경악했다. 왼손에 칼을 든 채 가노가 소녀의 입에서 거칠게 테이프를 떼어냈다. 난폭한 가노의 행동에 고통을 호소하 듯 비명을 지르며 소녀는 몸부림을 쳤다. "아빠 구해줘요. 여기 어디야! 왜 그런 차림으로...!" 틀어막혔던 입이 풀리자 소녀는 자지러지게 울부짖었다. 어두컴컴한 실내 침대 위, 촬영기구를 앞에 두고 아버지는 벌거벗은 남자와 뒹굴고 있었다. 구도는 순간 자신의 몸을 쳐다보았지만 바로 입을 다물었다. "조, 조용히 해. 금방 구해줄 테니까! 요시이즈미!" 격한 말투로 요시이즈미를 질책하고 구도가 침대에 누워있는 아야세의 머리채를 잡았다. 또 한 사람이 목덜미에 칼을 들이대는 순간 비명이 흘러나왔다. 놀라서 돌아보는 시야속으로 현란한 조명의 역광을 받아 들고있던 촬영기를 휘두르는 기온의 모습이 보였다. 쿵, 하고 둔중한 소리와 함께 고가인 듯한 촬영기로 아야세를 붙잡고 있던 남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신음소리를 내며 아야세의 몸 위로 쓰러지는 남자의 손에서 기온이 칼을 뺏었다. "아아, 아깝다! 내건 아니지만 되게 비싼 카메라인데...! 괜찮아, 아야세?" 정신을 잃은 남자를 아야세의 몸 위에서 끌어내리고 기온은 손에 든 칼을 구도의 목에 갖다댔다. "어쩔래, 요시이즈미." 소녀의 머리를 틀어잡은 손에 힘을 주고 비장하게 가노가 물었다. "너희들이 아야세를 환영해 준 것처럼 여기서 이 여자를 발가벗겨 귀처럼 차례대로 잘라버리는 것도 좋겠지." 농담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가노의 협박에 구도가 침을 삼켰다. 입술을 깨문 요시이즈미의 손이 서서히 가슴께 주머니로 향했다. 요시이즈미가 아직 가노에게 대항하려는 의지가 있음을 알고 구도가 발작하듯 비명을 질렀다. "안돼 요시이즈미! 그만둬. 이 녀석 줘버려! 비디오도 돈도 다 필요없어. 그러니까 미카를..." 구도는 반라의 추한 모습으로 침대에 꿇어앉아 있었다. 피가 흐르는 아야세의 왼팔을 고통스럽게 쳐다보면서 칼을 든 기온이 기가막히다는 듯 한탄했다.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야. 이 아저씨야. 그걸로 끝날 것 같아?" 구도를 일으켜 세우며 기온은 바지에 쑤셔넣은 비디오테잎을 가리켰다. "남자애를 강제로 희롱한 건 경찰보다 매스컴에서 더 난리치겠지. 잘 알다시피." "무...! 내 얼굴은 찍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 바보같은 아저씨야. 편집하지 않는 이상 그게 가능할거 같애? 아주 확실하게 찍혔다구. 당신이 의기양양하게 아야세의 몸을 괴롭히는 장면 말야." 구도가 아무 말도 못하자 기온은 삐죽거리며 아야세의어깨에 옷을 걸쳐주었다. 일어서서 기온과 함께 걸으려 했지만 약때문인지 몸이 휘청거렸다. 겨우 상의를 입은 아야세는 자신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과 맨발로 카페트위를 걷기 시작했다. "형, 난 이 비디오테잎으로 좀 봐줘. 아야세를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구. 응? 부탁이야, 형 화내지마." 구도의 목에 칼을 대면서 기온이 심각하게 가노에게 소리질렀다. 정말로 아야세를 덮치는 영상이 녹화됐다면 이 비디오테잎은 구도에게 있어 치명적이 될 것이다. "도, 돌려줘! 그 테잎은 내거야." 침까지 튀겨가며 소리치는 구도의 머리를 기온이 손에 든 테잎으로 내리쳤다. "머리 좀 써요. 아저씨. 별 볼일 없는 클럽주인에다 음란비디오 판매업자에 불과한 남자보다야 어차피 관계를 맺으려면 유능한 사채업자가 더 낫지 않아요? 뭐, 얼마나 좋은 관계를 맺게 될지는 모르지만." 히죽거리는 기온의 말에 가노는 살짝 어깨를 들썩일 뿐이었다. "비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구도는 기온에게 맡기고 가노는 문을 지키고 있는 남자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남자들은 순간 주저했지만 내처 서 있기만 하는 요시이즈미를 보고 순순히 문을 열었다. 실내와 같은 색으로 통일된 복도 맞은편에 밖으로 연결된 문이 보인다. 소녀를 앞장세우고 복도를 나가려던 가노가 순간 뭔가 생각난 듯 손에 든 칼을 높이 쳐들었다. "가노씨! 무슨." 바로 직전 눈치를 챈 아야세가 가노의 팔로 달려들어 소녀의 왼팔을 찌르려 했던 가노의 손을 막았다. 칼이 공중을 휘둘렀다. 자신의 상처에 대한 복수를 하려던 가노의 행동에 아야세는 창백하게 질렸다. "그만두세요, 이제! 그 애는 보내 주세요." 가노의 손에 잡혀있는 소녀는 소리를 지를 기력조차 없는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세차게 흔들고 있 었다. 같은 인질로 잡혔다고는 하지만 아야세는 대학생에다 남자이지만 이 애는 아직 여고생이다. 더구나 아야세를 구하러 왔지만 너무 지독한 방법을 선택한 가노의 잔인함이 아야세는 솔직히 두려웠다. "조용히 해." 짧게 내뱉은 가노의 목소리는 억양이 들어있지 않은 냉담 그 자체였다. 다시 항의를 하려는 아야세가 갑자기 강한 힘에 의해 넘어져 콘크리트 벽에 등을 부딪쳤다. "아야세!" 소리를 지르는 기온의 목소리에 마찬가지로 가노에 의해 내동댕이 쳐진 소녀의 비명이 겹쳐졌다. 아야세의 눈에 가노에게로 덤벼드는 요시이즈미의 모습이 보였다. 짐승같은 소리를 내며 손에 쥔 칼을 가노의 머리로 찍어내리려고 했다. 일직선으로 휘두르는 칼끝은 가노에게 꽂히기 직전 움직임을 멈췄다. 가노가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손에 든 칼을 버리고 요시이즈미의 오른손을 쥐었다. "끄윽..." 간발의 차이로 가노의 무릎이 요시이즈미의 배를 강타했다. 동물적인 비명을 지르며 요시이즈미의 몸이 꺽였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노는 요시이즈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남자의 두팔에 내리꽂았다. 두꺼운 요시이즈미의 양복이 찢기고 칼날이 살을 파고들자 아야세는 고개를 돌렸다.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요시이즈미를 가노가 발로 걷어찼다. "기온." 부르는 소리에 기온이 흠칫 놀랐다. "아야세를 그 기집애랑 밖으로 데리고 가. 벤에서 구바가 기다린다." "알았어....근데 형은." 기온의 물음에 가노가 주위를 둘러싼 남자들을 쳐다보았다. "요시이즈미가 너희들한테 월급을 주고 있나?" 대답하지 못하는 남자들의 침묵의 의미를 알아채고 가노의 오른손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았다. "이번 달 월급을 받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 가노는 피로 얼룩진 왼손에 칼을 든 채 오른손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만하세요, 가노씨. 함께 차로..." 어깨를 잡고 있던 기온의 팔을 벗어나 아야세는 가노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나 간절한 아야세의 말에 가노가 웃음을 띠었다. 부드러운 눈빛이었지만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다. "안심해. 사업에 관해 말할 뿐이야. 금방 끝난다." 감정을 죽인 가노의 눈이 바닥에서 토사물과 피로 범벅이 된 요시이즈미를 내려다보았다. 그만하라고 다시 한 번 재촉하려는 아야세의 어깨를 기온이 잡았다. "괜찮아, 아야세. 가노가 알아서 할 거야." 죽이지는 않을거야. 조용히 속삭이는 기온에 의해 아야세는 출구로 향했다. 휘청이는 다리로 간신히 걸으면서 아야세가 어깨너머로 가노를 돌아보았다. 이미 아야세쪽을 보고 있지 않은 가노의 두 눈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눈이야말로 가노라는 남자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아야세는 절망과 함께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괜찮다니까." 반복되는 기온의 무거운 말을 가슴에 새기면서 아야세는 축축한 밤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돈이 없어!! - 12 바람도 없는 열대야다. 조수석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아야세가 힘없이 눈을 떴다. 낯익은 담배냄새가 부드럽게 아야세를 감쌌다. 가노의 차가 맨션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것임을 알자 아야세의 입에서 가녀린 한숨이 흘렀다. 창문너머 커다란 몸을 구부린 남자가 아야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꿈 이었나. 어제도 지금처럼 차밖으로 이끌어주는 가노의 모습이 생각나자 아야세는 멍하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낯선 남자들에 의해 신주쿠거리에서 납치된 것도, 온갖 칼부림 끝에 가노에 의해 구출된 일도, 전부 아야세의 꿈인 것만 같았다. 부질없는 자신의 상상에 쓴웃음을 지었다. 꿈이나 환상일 리가 없지. 이것이 지금 아야세의 현실인 것이다. 무서운 눈을 한 가노의 얼굴이 가슴에 박히자 아야세는 조수석에서 눈을 감았다. "아야세. 일어설 수 있겠어?" 가녀린 호흡을 반복하는 아야세에게 가노가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따스한 손이 아야세의 뺨에 닿는다. 아야세가 흠칫 몸을 떨자 가노가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미안...." 가노가 사과를 하자 아야세는 처음으로 가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주차장에 내려선 가노가 걱정스러운 듯 아야세를 보고 있었다. 진지한 눈. 상관없는 소녀를 인질로 잡고, 요시이즈미를 때려눕힌 그 잔인한 눈빛은 자취를 감춘 대신 고통스러운 빛이 머물고 있었다. 문득 아야세의 가슴속에 뜨거운 뭔가가 차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가노의 의한 안도임을 알자 아야세는 한숨을 쉬었다. "만지는거 싫겠지." 기온한테 들었다며 가노는 아야세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하지마. 몸에 남거나 하는 약은 아닌거 같으니까. 오늘은 푹 쉬도록 해." 차에서 내리라고 했지만 아야세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가노의 말대로 몸에 남는 약효 이상으로 절규하고 싶은 감정이 아야세를 다그쳤다. 말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할지 아야세는 알지 못했다. "...아파트가 더 낫겠어?" 양복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콘크리트 바닥위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가노가 조심스레 아야세를 바라보았다. "아파트에서 쉬는게 편하겠지? 이 시간이면 30분이면 도착해. 어떡할래." 화를 내는 것이 아닌, 염려하듯이 묻는 가노의 말에 아야세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은 아야세의 눈을 무슨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가노는 씁쓸한 웃음을 띠웠다. "괜찮아. 이제 앞으로 그렇게 당하는 일은 없을거야." 다시 시선을 피하면서 가노가 조수석 문을 잡고 일어섰다. "....아니...야..." 고통과도 같은 가녀린 목소리가 아야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동시에 손을 뻗어 아야세는 가노의 양복을 잡았다. 오른손으로 잡았지만 그것만으로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른 손을 뻗었다. "아니....예요.." 놀란 가노의 양복을 두 손으로 잡고 아야세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런 얼굴 안해도 돼, 아야세. 나는 방에 들어가지 않을게. 아침까지 차에 있을거야. 그러면 괜찮겠지?" 이성을 잃은 아야세를 진정시키기 위해 되도록 건드리지 않겠다고 가노가 달랜다. 그런 가노에게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당황하며 아야세는 양복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돌아가고 싶어..." "그러니까...." "아파트가 아니라, 난...." 말로 다하지 못한 감정대신 눈물이 흘렀다.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지만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강한 충동으로 아야세는 힘겹게 가노의 목을 끌어안았다. 혈액을 흐르는 알콜과 약의 효과가 아야세의 이성을 둔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야세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다가오는 아야세의 몸을 받아들인 가노의 눈에 의아한 빛이 스쳤다. 금방 아야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노의 손이 순간 허공을 헤맨다. "아야세, 너..." 머리 위에서 가노의 소리가 들렸다. 눈물이 흘러 넘쳐 아야세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힘껏 가노를 껴안을 뿐이었다. 천천히 가노의 손이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야윈 아야세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곳에 아야세의 몸이 존재하는 사실을 조심스레 확인한 가노는 손에 힘을 준다. 아야세는 부서질 듯 힘찬 가노의 포옹속에서 안도의 숨을 쉬었다. 등뒤에서 둔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더니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현관의 불이 켜졌다. "...아." 아야세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흘렀다. 안겨있던 몸이 바닥에 내려지자 몸이 휘청거린다. 구두를 벗은 가노의 팔이 아야세의 몸을 붙잡았다. 벗은 몸을 덮고 있던 모피가 벗겨지자 아야세의 몸이 위축된다. 몸 안에 잔재하는 알콜과 약품때문인지 몸이 진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가느다란 손이 눈에 보이며 서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가..." 벽으로 밀쳐지며 눈깜짝할 사이 입술이 겹쳐졌다. 지하 주차장에서 집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안에서 이미 한차례 입맞춤으로 충혈된 입술이 아파온다. 타액을 머금은 혀가 너무도 민감하게 된 입안을 헤집고 다녔다. "아...이런 곳에서..." 남자의 손이 다리안쪽을 밀어 젖히자 아야세가 애원을 했다. "조용히 해." 입술이 닿는 거리에서 달콤한 충격이 아야세의 허리를 스쳤다. 입맞춤으로 축축해진 가노의 숨이 뜨겁고 거칠다. 공기를 진동하는 관능적인 목소리에 아야세는 현기증마저 느꼈다. 몸이 뜨겁다. 현실감이 없는 부유감과 함께 열로 인해 아야세의 몸 안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구도가 직접 직장에 발라놓은 약이 뜨겁게 녹아내려 온몸을 적시는 듯한 느낌이다. 그때는 혐오감만 느꼈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가노의 체온을 원하고 있었다. "으...으...가노..." 다리를 어루만지는 가노의 손놀림에 아야세는 참을 수 없는 신음을 지른다.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콧소리가 섞여나오고 있었다. "아야세." "...아...!" 흐물흐물해진 점막에 가노의 손이 들어오자 아야세는 방사해 버릴 듯한 충격을 받았다. 두 손으로 가노의 몸을 끌어안으며 강하게 몸에 달라붙는다. "조금만 더 참아."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으로 건드린 아야세의 민감한 부분이 이미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입한 가노의 손을 아야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점막이 잡아삼키고 있었다. "...헉..." 신음을 내는 아야세의 목을 가노가 뜨거운 혀로 핥는다. 어때, 하고 묻는 듯한 느낌에 아야세는 가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현관앞에서 벽에 등을 기댄 채 이 남자는 정말 관계를 하려는 건가. 두려웠지만 거부할 수는 없다. 아야세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금 여기서 끝낸다면 가노는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아." 전신의 몸이 요동을 쳤다. 바로 앞에서 가노가 아야세를 내려다보았다. 똑바로 심장에 내리꽂힐 듯한 진지한 눈으로 가노는 아야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야세는 뜨거운 입김을 토해낸다. "숨 쉬어." 속삭임과 함께 떨리는 다리 안쪽으로 예민한 가노의 몸이 닿았다. 축축하게 젖은 몸이 아야세의 몸을 찾아 더듬는다. 무의식중에 아야세는 허리를 격하게 움직였다. 자기자신의 추태에 몸 안의 열이 높아만 간다. "전부, 나에게 줘." 귓불을 깨물자 강한 충동이 하복부를 스쳤다. "...앗..." 힘을 준 엄지손가락이 아야세를 헤집는다. 성급한 가노의 행동에 약으로 고양된 아야세의 몸은 맥박이 빨라진다. 무릎이 가슴언저리까지 닿을 정도로 한껏 올려지고 젖은 가노의 몸이 다가온다. "...아..." 무서운 압박감과 함께 뜨거운 물체가 배 안쪽으로 잠입했다. "...헉..." 하체를 자극하는 짜릿한 감촉에 아야세는 신음소리를 높였다. 호흡이 멈출 것 같은 실추감과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쾌감에 아야세는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운다. 아야세를 팔에 안고 왼팔의 상처에 조심스레 신경을 쓰면서 가노가 힘껏 밀어붙힌다. "괜찮아, 아야세." 몸 안에서 울리는 가노의 목소리와 신음을 지르는 자신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교차했다. 아직 이런 소리를 지를 힘이 남아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아...앗." 가슴이 압박되는 고통과 다리에 와 닿은 가노의 강한손.... 그리고 파고드는 가노의 촉감에 아야세는 눈물을 흘렸다. "욱.... 아아..... 하...." 자신이 만족했는지, 아야세는 동작을 멈추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어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지르는 아야세의 몸을 커다란 손이 움켜쥔다. 고통보다도 더욱 몸에 치닫는 충격에 아야세는 이미 한계까지 다달았다. "...음..." 약의 작용에 의한 절정감과 고통으로 아야세는 땀에 젖은 몸을 비틀었다. 흥분하는 아야세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가노의 손은 여전히 아야세의 몸을 더듬었다. 강한 자극에 가노는 평소보다 빨리 끝으로 치닫는다. "...음." 눅눅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익숙한 담배 냄새가 아야세를 감싼다. 천천히 무너질 듯 의식을 잃어가는 아야세의 몸을 가노가 껴안았다. 끌어안은 몸이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아야세는 몽롱해지는 의식속에서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를 쳐다본다. 지금 자신곁에 있는 사람은 낯선 남자가 아닌 틀림없는 가노이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뺨을 어루만지며 바라보는 가노가 부드러운 손길로 다가온다. "음...." 뜨거운 가노가 입술을 핥자, 아야세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마주치는 입술에 서로의 체온이 스며들었다. 아무리 숨이 막혀도, 가노의 체온을 놓치는 것이 안타까워, 아야세는 더욱 가노를 끌어 앉는다. 커다란 손이 아야세의 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욱...." 자신의 몸에서 가노가 멀어지는 것을 느끼고 아야세의 허리가 꿈틀거렸다. 잔재한 수치심이 선명해져, 눈을 감고 아득해져가는 의식에 몸을 맡겼다. "침실로 가자."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가노는 관계의 여운으로 마비된 몸을 껴안는다. "아... 욕실... 에..." 몽롱한 의식속에서 중얼거리는 입술에 가노의 진한 입맞춤이 더해졌다. "나중에....." 아야세를 안아 들고 긴 복도를 걸어가, 침실 문을 열었다. 청결한 시트 위에 몸을 눕히고 아야세는 가노를 바라보았다. 가노가 올라서자, 침대가 출렁인다. 얼굴로 내려온 머리카락과 뺨,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가노는 상처입은 왼팔을 쓰다듬었다. 벤에 대기하고 있던 가노의 부하들이 응급처치를 하고 붕대를 조심스레 감았다. 다행히 출혈에 비해 상처는 깊지 않아서, 흉터는남지 않을 것이다. 흉터가 남는다해도 남자인 만큼 그다지 문제될 건 없다. 그보다 오히려 가노가 끌고 온 소녀에게 상처가 나지 않아 아야세는 안심했다. "아파?" 그윽한 눈길로 쳐다보며 묻자, 아야세는 고개를 저었다. "가... 노씨.... 가...." 아직 남아있는 가노의 흔적을 느끼며 아야세는 가노의 무릎을 문질렀다. 자신의 몸에 아직 심상치 않은 열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약때문이라고는 해도 자신의 육체가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본능적인 공포가 생겨나, 아야세는 어깨를 떨었다. "이정돈 아무렇지도 않아." 가노가 아야세의 왼팔에 입을 맞추었다. "...미안." 번민하는 속삭임에 아야세는 가노를 쳐다보았다. 고통을 참는, 괴로운 눈빛을 하며 가노는 아야세의 뺨에 손을 대었다. "아직 힘들겠지. 긴장 풀고 편안히 쉬어." 부드럽게 울리는 가노의 목소리에 아야세는 참았던 소리를 내었다. "가노...." 가노의 입술이 아야세의 가슴을 더듬자, 달콤한 경련이 일어났다. "...아..." 가노의 움직임에 쾌감은 물론 , 과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몸이 비참해서 견딜 수 없었다. 방금 전 그렇게 격렬한 사랑을 나눈 후임에도 지금 다시 몸 안에서 끓어오르는 열에 맥박이 빨라졌다. "괜찮아. 그냥 널 안아주고 싶은 것 뿐이야." 등을 타고 내리는 손이 아야세의 엉덩이를 쥐었다. 가노의 섬세한 손이 아직 흥분을 가시지 않은 아야세를 달래듯 어루만졌다. "안돼...., 가노....." 자꾸 건드리는 자극에 의식이 흔미한 틈을 타, 아야세의 무방비한 몸을 더듬었다. 입술의 감촉만으로도 아야세는 몸을 비틀었다. "참지마." "...으..." 가노의 속삭임마저 자극이 되어 몸이 끈적한 반응을 보였다. "괜찮아?" 일방적으로 아야세를 쾌감으로 몰고 가는 가노의 손이 조심스럽게 스며들었다. "...헉...아...." 조각조각 부서지는 신음소리, 한번 가노의 몸을 받아들였던 아야세의 몸은 희미하게 저항하면서도 순순히 가노를 받아들였다. "하아..... 하...." 자신의 육체가 급속히 흥분하게 되자, 아야세는 가노에게 힘껏 달라붙었다. 이대로는 정시을 잃고 뜨거운 열이 몸에서 녹아내릴 것 같았다. "..앗..." 따스한 점막 안에서 감촉을 느낀 순간, 한계에 다달은 몸이 꿈틀거렸다. "욱........" "약 때문에 아직 괴롭지." 젖은 눈에서 미지근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리를 오므리며 이제 가노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과, 자극을 원하며 몸서리치는 육체가 서로 싸운다. "...가노...." "걱정하지마." 아야세의 몸을 돌려, 가슴까지 무릎을 밀어 넣고 다리를 크게 벌리자, 아야세의 다리 안쪽이 적나라하게 가노의 시아에 들어왔다. "싫어......." 방금 현간에서의 성급한 행위에 보상이라도 하듯, 가노의 움직임은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그 신중함에 오히려 안달이 난 아야세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헉...." "간다." "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몸에 결정적인 애무가 더해지지 않은 고통에 눈물마저 흘렀다. 어떻게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지 못해, 아야세는 주먹을 쥐고 힘없이 가노의 가슴을 쳤다. "....가.......노씨....." 울먹이며 가슴을 치는 아야세의 몸짓에 가노가 인상을 찌푸린다. "....미안. 역시 아직 싫었어?" 가노가 손으로 땀에 젖은 이마를 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힘들었지?" 아야세의 행동을 가노는 약에 의한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라고 이해해, 몸을 떼려고 하는 가노의 몸을 아야세는 반사적으로 다리로 잡아당겼다. 생각지도 못한 아야세의 반응에 가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경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아야세는 필사적으로 가노에게 몸을 붙였다. "...멈추지 ... 말아...요." 가노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아야세의 몸에 잔재한 약의 효력을 원망하는 표정까지 짓기도 했다. 거친 서로의 숨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눈물로 뒤범벅이 된 아야세의 뺨에 남자가 손을 대었다. 이를 악물고 아야세가 안긴다. "가노씨..." 가까이 다가온 가노의 검은 두눈이 강렬하게 아야세를 주시했다. 무릎을 받치고 있던 손이 다리 안쪽을 지나, 뺨으로 와 닿았다. 이어서 목과 머리카락을 어루만지자, 아야세의 눈에 안도의 눈물이 넘쳤다. "정말, 괜찮아?" 거듭된 물음에 아야세가 가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자신을 책하는 가노의 입술에 아야세가 자신의 입을 가져갔다. "....아..., 음....음." 혀를 부딪히며, 솟아오른 가슴의 돌기를, 그리고 몸을 더듬자, 아야세가 고개를 쳐들었다. "행복해." 가노의 감탄에 아야세는 눈앞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녹아 버릴 것 같애, ....느끼겠지." "....아 , 말하지...말아...요." 아야세는 무너져내리는 듯한 숨을 토했다. "아...앗." 밀고 들어오는 질식의 고통보다도 빠져나가는 충격에 소름기칠 정도의 전율이 흘렀다. 그것도 아야세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장소에서 흥분한 몸이 가노를 집어 삼킬 듯 재촉한다 . 가노를 받아들이는 아야세의 육체가 탐욕스럽게 그를 원하고 있었다. "아...가.... 노."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처럼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아야세의 뺨을 가노가 어루만졌다. "네가 요시이즈미에게 잡혔다는 말을 듣고...." 먼 의식속에서 남자가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웃... 욱." "솔직히 , 다리가 떨렸어." 고통과 쾌감으로 가득 찬 아야세의 눈에 가노의 입술이 닿았다. 아야세가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이 씁쓸한 독백이 젖은 한숨사이로 이어졌다. "....이렇게 부상까지 당하다니." 회한을 느끼며 아야세의 왼팔을 쓰다듬던 손이 입술에 남은 상처로 옮겨졌다. 미안하다고 가노가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야세는 그 말을 듣는 대신, 눈물로 얼룩진 시야속에서 가노가 입술을 적셔주는 모습을 보았다. ".....아....." 생각보다 먼저 육체가 반응했다. 떨리는 팔을 뻗어 아야세는 가노의 목을 끌어당겨, 상처입은 가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가노의 눈이 놀라는 기색을 바라보며 아야세는 천천히 가노의 상처를 핥았다. 비릿한 철냄새가 혀에 남는다. 어린아이처럼 열심히 입을 맞추는 아야세의 행동에 처음으로 가노의 눈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가노의손이 아야세의뺨을 끌어 앉는다. "가노...." 아야세는 다시 가노 부드러운 입술을 받아들였다. "음....." "웃.....하아...." "괜찮아, 아야세?" 혀로 아야세의 입술 상처를 핥던 사이에 부드러운 속삭임을흘렸다. 아야세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면서 쓰디쓴 담배맛이 나는 가노의 타액을 삼켰다. "아.......아....." 떨어진 혀를 본능적으로 쫓으면서 아야세는 아쉬운 숨을 내쉬었다. "....나도, 너무 좋아." 허리를 스치는 가노의 관능적인 목소리에 서로 끌어안은 몸이 쾌감으로 치달았다. 자신의 몸으로 가노가 행복을 느낀다는 말에 아야세는 몸과 마음이 모두 흥분되었다. "....헉....." 음란한 소리를 내며 가노의 몸이 아야세에게 닿았다. 어딘지 모를 민감한 자극에 아야세의 몸이 떨렸다. 자신은 부서질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하면 원할수록 가노는 자신에게 다가온다. 이런 일들을 자신이 아무렇지 안헥 여기게 되는 것을 두려워 했는지 모른다.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하기보다 오직 가노의 체온을 느끼고 싶다는 욕망만이 아야세의 가슴을 채워갔다. "아야세~!!" 숨을 죽이고, 아주 애절한 가노의 목소리에 아야세는 남자의 품안에서 몸을 돌렸다. "....아... 음....."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아야세의 몸을 가노가 사랑스럽게 더듬는다. "아직이지? 라며, 남자는 히죽 웃었다.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게. 말해. 아야세. 나한테만, 전부." 달콤한 속삭임에 아야세는 힘껏 가노의 목을 끌어안았다. 돈이 없어!! - 13 (End) "...그래서, 네가 오고 싶어하던 곳이 여기였단 말이야?" 멍하니 중얼거리는 가노에게 아야세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불만스러워하면서도 가노가 말처럼 그다지 언짢은 것이 아님을 아야세도 이제 알게 되었다. 국자가 든 물통을 오른손에 들고, 가노는 담배를 꺼냈다. 작은 삼나무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묘지가 하나 있다. 명절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두사람 외에 ㄴ성묘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부모를 잃고서는 할머니와 그리고 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혼자서 자주 찾아오던 곳이다. 넓고 큰 묘지는 아니지만 이 묘지 한 켠에 아야세의 부모와 할머니가 잠들어 있다. 할머니는 혼혈인 며느리를 완고하게 거부했지만, 어머니가 죽은 후에는 잠자코 아버지와 같은 묘석아래 어머니의 유골을 묻어주었다. 그것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할머니의, 아들과 며느리에 대한 최대한의 애정표현이였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느낄 수 있었다. 매년 명절에는 빠트리지 않고 찾아오던 이곳에 올해도 올수 있었던 것은 모두 가노의 덕택이다. 성묘하러 가고 싶다는 아야세에게 가노는 아무말 없이 자신의 일을 정리하고, 데려다 준 것이다. 명절을 지나친 것을 오히려 사과했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쁜일상 때문에, 자신의 가족묘조차 가지 않는 가노를 생각해서, 사실은 혼자서 올 작정이었지만 가노는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야세는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으로 왼팔을 만졌다. 3일전 유괴사건이 꿈이 아니었다는 증거로 아야세의 왼팔에는 아직 고통스럽게 붕대가 감겨져 있다. 이제는 그다지 아프지 않지만 돌이켜 보면 아직도 온 몸이 떨리는 듯한 공포가 엄습해 온다. 혈액에 직접 알콜을 주입한 탓에 이틀동안 일어설 때마다 구토를 느꼈지만 그것도 오늘 아침에는 많이 가라앉았다. 산림을 헤치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자, 아야세는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너의 아버지도 담배 피셨니? 가노의 물음에 아야세는 더듬어 생각하면서 끄덕였다. 한 모금 빤 담배를 가노가 향과 나란히 모앞에 두었다. "물, 한번 더 길어올까?" 배려해주는 가노에게 아야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묘석은 이미 깨끗이 씻었고, 가노가 주위 잡초도 뜯어주었다. 혼자 올 때는 한 시간 가까이 걸렸던 작업이 가노덕분에 오늘은 상당히 빨리 끝났다. "이렇게 깨끗하게 해주어서, 부모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오늘 정말 무리한 시간을 내줘서 미안해요." "신경쓰지 않아도 돼." 가노가 다시 새 담배를 꺼냈다. "그러고보니 아야세, 어제 기온녀석이 문병왔다가 두고 간 거 뭐야?" 긴 손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면서 가노가 물었다. 바람이 불면 시원하지만 명절이 지난지 얼마 안된 지금 시기는 아직 더웠다. 가노는 양복자켓을 차에 두고 셔츠에 넥타이 차림이었다. "기온시가 신경을 많이 써주셨어요... 그건 넥타이예요. 그림을 그리고 있는 토끼모양의." 짙은 감색 바탕에 파란색으로 윤곽만 그려진 토끼의 얼굴을 떠올렸다. 여성용 상품처럼 보였지만 넥타이를 준 기온의 말에 의하면 분명히 남성용이라고 했다. 아야세를 여자로 보고 그렇게 귀여운 모양의 선물을 준 것이라기 보다 기온은 정말 이런 모양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런 모양의 토끼가 나오는 그림책, 옛날에 본 것 같아요." 기억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야세에게 가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인기척이 없는 묘지 안, 삼나무 가지를 흔드는 바람이 조용히 흘러간다. "아야세, 학교는 언제 개강이야?" 돌연한 질문에 아야세는 가노를 올려다 보았다. 가노와는 30센티 가까이 키차이가 나기 때문에 아야세가 구부린 자세가 되면 정말 고개를 똑바로 들지 않으면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8월 말에 일주일동안 집중강의가 있고 9월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요." 가노가 가볍게 끄덕이더니 손목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단정한 가노의 옆얼굴은 눈부신 햇빛을 받으면서도 어딘지 싸늘해 보였다. "돌아갈 때 잠깐 들렀다 갈까? "어디요?" 일어서며 아야세가 물었다. "너의 아파트."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아야세의 어깨가 잠시 떨렸다. 본격적으로 개강이 시작되려면 아직 한 달 이상 남았다. 떨어져 지내는 것이 용인되지 않은데다 또한 3일전과 같은 사건이 생긴 이상 가노가 아파트를 처분하려는 결심은 당연한 일이었다. 머리로는 이해를 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아직 개운치 않은 점이 있어 대답을 회피했다. 입을 다물고 있는 아야세에게 가노는 담배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말한다. "오늘 당장 처분하려는 거 아니야." 의외의 말에 아야세가 고개를 들었다. "방을 처분하는 건 언제든 괜찮아. 그곳이 없어서 불안하다면 그냥 놔둬도 돼." 똑바로 가노의 눈을 응시하며 아야세는 손을 꼭 쥐었다. "하지만..." "우선, 필요한 것을 가지러 같이 가자. 어떻게 할래?" 남자가 진심으로 말하는 것을 알고 아야세의 심장이 빨라졌다. "아...하지만 저...방 열쇠, 잃어버렸어요." 되살아나는 기억에 손이 차갑게 식는다. 3일전 신주쿠역에 내렸을 때 요시이즈미의 가게를 거쳐 가노에게 구출될 때까지 자신의 소지품은 물론, 입고 있던 옷까지 전부 없어져버린 것이다. 그 안에는 아파트 열쇠뿐 아니라 가노의 맨션 열쇠까지 들어 있었다. "죄송해요, 모처럼..." 어깨를 떨구는 아야세의 목을 가노의 손이 쓰다듬었다.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문 채로 가노의 왼손이 아야세의 눈앞으로 뻗어간다. "이거지?" 짤랑 소리를 내며 아야세의 손에 두 개의 은색열쇠가 떨어졌다. "네 물건도 다 찾았어. 사무실에 있으니까 그것도 돌아갈 때 가져가자." 자신의 손으로 되돌아온 은색 열쇠를 아야세가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그러쥐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의 촉감이 손바닥 가득 느껴진다. "....고마워요." 잔잔히 배어드는 아야세의 말에 가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아파트를 그냥 두는 건 역시 비경제적이겠죠." 욕실과 화장실, 그리고 좁은 주방과 침실의 집세는 매달 5만엔이다. 할머니가 남겨주신 유산을 매달 송금받고 있지만 가능하면 그 돈은 가노에게 자신의 생활비로 주고 싶었다. 아파트에서 지내지 않는다면 자신의 고집 때문에 돈을 낭비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근데 어떡할래. 네 몸이 안 좋으면 오늘 안가도 돼." "가노씨 오후부터 스케줄이 어떻게 돼요?" "4시에 약속이 있는데 무슨 일이 있으면 휴대폰으로 전화하라고 했으니까 괜찮아." 빙긋 웃는 가노의 눈이 너무도 부드러워서 아야세는 결심을 굳히고 부모님의 묘석을 보았다. "그럼...부탁할께요." 아야세가 열쇠 두 개를 소중히 바지주머니에 넣자 가노가 어린아이에게 하듯 아야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럼 이거, 우선 봐." 가노가 내민 하얀 종이를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꼭 쥐고 아야세는 들여다보았다. 사회경험이 없는 아야세에게도 그것이 정식 청구서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10일마다 가노가 만들어주는 결산서형식하고 비슷했기 때문이다. "....뭐예요...? 이거..." 종이를 쥔 손을 떨면서 아야세가 조심스레 물었다. "뭐긴, 보는 대로. 우리 종업원의 시간외 수당하고 그 여자를 끌고 오는데 든 비용, 그리고 아파트를 처분하지 않을 경우 관리를 해야지. 그 유지비까지 합해서 네 차입금에 포함시켰어." 어이가 없어 어떻게 대꾸를 해야할지도 모른채 아야세는 열심히 청구서의 숫자를 읽었다. 청구서 마지막에 적힌 합계 금액 천2백엔 이라는 숫자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무리예요...지금도 전혀 빚이 줄지 않는데..." 아야세의 힘없는 말에 가노가 씨익 웃으며 긴 팔로 당장이라도 울음을 쏟을 것 같은 아야세의 뺌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걱정하지마. 새로 생긴 빚은 20일 단위로 이자가 계산되니까. 지금까지 이자가 3천8백5십만에 원래 4억2천만하고 이번 천2백엔 원금에다, 이자 4천6백2십만3십2엔이 되네. 엄청난데 아야세. 이대로 가다간 한달안에 5억대로 넘어가겠어." 가노가 재미난 듯 웃자 아야세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런 얼굴 하지마. 어젯밤 대금은 확실하게 챙겨줬잖아." "큰, 큰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이곳에서 그런 소리를!" 당황하는 아야세의 목덜미에 가노가 입을 가져갔다. 부모의 묘 앞에서 아야세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그들은 저 세상 사람이 되었으므로 가노가 내뱉는 말에 상관없이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아들이 4억이나 되는 빚을 안고 남자에게 몸을 파는 사실을 육친의 묘석에 직접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아야세는 가녀린 팔을 뻗어 필사적으로 가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역시 어림도 없었다. 몸으로 빚을 다 갚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다. "넌 정말 귀여워." 아야세의 뺨을 두 손으로 싸안은 가노가 아야세의 콧등에 입맞췄다. "너무해요, 가노씨... 제 사정 뻔히 알면서...." 모처럼 아야세가 항의를 하자 가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맞춤을 했다. "할 수 없지. 그것도 장사인데." 잠시 입을 떼고 예리한 눈으로 가노가 웃으며 말했다. "특별히 아주 싼게 한거라구." 전혀 싸지 않다고 소리치려는 아야세의 입술을 가노가 다시 덮쳤다. "하지만 네가 하기에 따라 이번에 한해 변제를 해 줄 수도 있어." "변,변제...?" 조심스레 묻는 아야세에게 가노가 살짝 입을 맞추었다. 호흡을 나누는 부드러움에 이곳이 야외임에도 불구하고 아야세의 등으로 전율이 스쳤다. "다시 한번 말해봐." 애무와 같은 속삭임이 귓가에 쏟아졌다. 가노는 아야세의 허리를 한 팔로 가볍게 끌어안고 등을 어루만졌다. "무슨...?"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은 내리쬐는 햇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랑 해서 좋았다고..." 놀라서 당황하는 아야세의 몸을 안으며 가노는 관능적인 목소리와 입김을 목덜미에 쏟아냈다. "엣...." "그때 그랬잖아. 멀쩡한 정신으로 말하면 이번 대금은 천2백엔으로 쳐줄게. 7천이나 줄어드는 거라구. 굉장하지. 네 빚이 줄어서 부모님도 기뻐하실 거야." "굉장하긴 하지만 어떻게..." 벗어나려는 아야세의 몸을 포옹으로 구속하며 가노가 웃었다. 짖궂은, 그러나 진지한 가노를 보며 아야세는 대꾸할 말을 포기했다. "이번에는 네 아파트로 가자." 악동과도 같은 눈을 하며 남자가 눈부시게 웃었다. 그 모습이 얄미운 듯 아야세는 가노의 품안에서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 "근데말야. 그 아파트, 벽이 좀 얇은 것 같아. 낮에 거기서 했다간 주위에 다 들리겠는걸." 한번 시험해 볼까, 하며 가노가 입을 맞췄다. 아야세는 손에 국자를 들어 가노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 "돈이 없어" 끝 - - "돈밖에 없어"로 이어집니다. - 돈밖에 없어 - 1 덜컹, 하고 멀리서 울리는 소리에 조수석 자리에 앉아 있던 아야세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런 아야세의 동요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듯, 텅 빈 자동차 안은 에어컨이 기세좋게 돌아가고 있었다. 선팅이 된 창문 너머로 눈을 돌렸지만 눅눅한 여름밤의 대기만 가득한 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불안한 자신의 모습만이 차장에 비칠 뿐이다.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핏줄이 비쳐 보일 정도로 새하얀 피부의 소년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선이 가느다란 여성적인 용모나 맑고 커다란 눈동자는 좋게 말하면 아름답지만 나쁘게 말하면 연약해 보이는 외모다. 그는 여전히 안절부절하며 비어 있는 운전석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혼자 남겨진 차안이 왠지 너무나 넓게 느껴져 아야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어깨를 그러안는다. 대학 일학년인 아야세는 여름방학중에 실시되는 집중강의에 등록했다. 그 강의 첫날인 오늘 아야세를 학교까지 데리러온 남자는 엔진을 켜둔 채 어디론가 가버렸다.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일을 알리는 휴대전화가 울린 것이다. 그 남자의 이름은 가노이며 아야세와 같이 사는 사채업자이다. 학생인 아야세와 달리 가노는 언제나 바쁜 일에 쫓기곤 한다. 지금도 낯선 유흥가 뒷골목에 차를 세우고는 누군가를 만너러 간다며 가노는 차에서 내렸다. 중후한 느낌의 시트 위에서 무료하게 멍하니 앉아 있던 아야세는 연이은 소리에 몸을 움추린다. 무거운 뭔가가 철판 위로 떨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다. 아야세는 망설이던 끝에 차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가노는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했었지만 행여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밀려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잠금 장치를 풀고 아야세는 조심스레 아스팔트에 발을 내밀었다. 끈적거리는 여름의 열기가 아야세의 몸을 휘감는다. "...앗...!" 주위를 둘러보던 순간 아야세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바로 오른쪽 건물의 비상계단에 사람 그림자가 보인 것이다. 지저분한 철재 계단 이층에서 뚱뚱한 남자 하나가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콰당, 콰당 하는 둔탁한 소리와 비명소리가 함께 들려온다. 땅을 울리는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진 남자의 몸이 방치되어 있는 쓰레기더미로 꼬꾸라지며 움직임을 멈췄다. 너무 놀란 나머지 아야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방금 남자가 떨어졌던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는 그림자가 하나 보인다. 훤칠한 키에 딱 벌어진 체격을 가진 남자다. 계단을 내려오는 단순한 동작 하나에조차 그의 주위에는 위압감이 흐르고 있다. 그는 틀림없는 가노였다. 문득 그에게 다가가려던 아야세는 쓰레기 더미에 파묻혀 있던 남자가 신음을 하며 몸을 일으키자 자리에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가, 가노씨. 좀 봐줘..."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가늘게 흐느끼는 애원의 목소리가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세히 보니 남자는 셔츠만 걸친 채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나랑 자네 사이에 왜 이러나, 응? 다음주에는 꼭 준비할 테니까..." 두 손을 모으고 연신 빌어대는 창백한 남자의 얼굴을 계단을 내려온 가노가 구둣발로 무자비하게 짓눌렀다. "사이는 무슨 얼어죽을 사이야. 너같이 더러운 돼지 새끼는 맛좀 봐야돼." 깊이가 있는 또렷한 말투의 낮은 목소리가 아야세의 고막을 울렸다. 내심 귀찮은 듯 내뱉은 가노의 말에 남자는 아스팔트에 몸을 붙이고 드러난 하체를 감추며 항의하듯 소리친다. "...너무한데, 이래봬도 나보고 끝내준다는 여자들도 많다고." "어떤 골빈 여자가 그딴소리를 해대냐. 이 변태새끼야. 여자랑 히히덕대고 있는 걸 보니 내가 말한 일은 벌써 끝냈나 보지?" 가노는 물고 있던 담배를 길바닥에 내던지고 말을 이었다. "지난달 빌려간 오백만엔의 상환날짜도 거의 다된 건 알고 있나?" 말투는 점잖았으나 가노의 목소리에는 한치의 관용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남자는 쓰레기투성이가 된 몸으로 뒷걸음질치며 소리질렀다. "다, 다 알아서... 잘 알아서 하고 있어요! 돈도 사실은 이번주에.... 그게, 요새는 손님들이 다 거지같아서 말야. 허벌나게 일만 시켜놓고 나중엔 돈도 안내고 토낀단 말야. 요전에도 언 놈이 팔백정도 떼먹고 달아나서 아는 야쿠자한테...." 두서없이 변명을 늘어놓는 남자의 얼굴을 향해 가노가 다시 구둣발을 날렸다. "누가 네 변명이다 듣자고 온 줄 알아. 이번 주 안으로 이자 갚지 않으면 전액 회수할테니 그리 알아." 얻어맞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건 나보고 목이라도 매라는 거야!" 거품을 품어내며 울부짖는 남자의 모습에 약간의 동정을 느꼈는지 가노의 표정이 잠시 부드럽게 풀렸다. "아, 그래. 그렇군." 가노가 안면에 웃음을 머금자 남자의 얼굴에 안도의 색이 비쳤다. "그,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우리 사이에 나를 어떻게 하진 않겠지! 가노씨, 아니, 가노사장!가노님..." 하지만 그순간 손을 맞잡고 다가오는 그 남자의 어깨를 가노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띈 채 발바닥으로 짓이겼다. "그냥 허무하게 끝낼 순 없지." 씨익 하고 비웃는 가노의 입술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맹수와도 같은 가노의 표정에 남자는 안색이 창백해진다. "죽기 전에 값나가는 부위는 몽땅 팔아버려야지. 장기는 기름기가 많아서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각막은 돈이 되겠지. 그리고 나서 맘편이 죽으라고. " 태연히 내뱉는 가노의 말에 남자는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의 비참한 절규를 했다. "사, 사람도 아냐...! 어, 어떻게 그런... 넌.. 악마야!" "악마가 돈 빌려주는 거 봤어? 눈알 빼고 죽기 싫으면 주말까지 일이라도 정리해 둬." 남자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고개만 힘껏 흔들어 댔다. "...아, 아, 알았어! 내 꼭 당신이 말했던 사람을 찾을게! 그러니까...." 괴로운 듯 소리를 질러대는 남자를 흘깃 쳐다보고 가노는 누르고 있던 발을 치웠다. 꺼져 하고 가노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내뱉듯 말하자 남자는 벌떡 일어서더니 아직 그럴 힘이 남았었는지 골목안으로 쏜살같이 사라져갔다. 하체를 드러낸 채 맨발로 도망치는 남자의 뒷모습에 시선을 두며 가노는 담배를 꺼내 문다. 얼어붙은 듯 꼼짝않고 서서 지켜보던 아아세는 시선을 돌린 가노와 눈이 마주치자 순간 몸을 떨었다. 아야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가노의 입에서 담배가 떨어졌다. 가노의 눈빛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아..." 망연히 바라보는 가노의 표정에, 아야세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질렀다.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마주보기만 할뿐이다. 오랜 침묵 끝에, 가노가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최근에 와서 안 사실이지만, 그건 가노가 초조할 때 하는 버릇인 듯 하다. 최근, 이라고 해도 가노와 아야세가 알게 된 것은 그다지 오래 전 일이 아니다. 처음 만난 것이 불과 2주전이었던 것이다. 친척이 내기 포커에서 진 빚 대신에 불법 인신 경매에 끌려나온 아야세를 일억이상의 막대한 금액을 투자해서 가노가 산 것이다. 그날 이후, 아야세는 3억 가까이 엄청나게 불어난 빚을 지고 가노의 맨션에서 함께 살고 있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면서도 지금까지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 온 아야세에게 가노와의 만남은 매일매일이 비현실적인 충격의 연속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 아야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망연하게, 그러나 어딘지 거북한 듯 물었다.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장신인 가노가 성큼성큼 걸어오자 아야세는 자신도 모르게 반걸음 뒤로 물러선다. "...아까 그 사람이 계단에서 떨어질 때...부터요." 조심스러운 아야세의 대답에 가노의 눈썹이 올라간다. "그럼 처음부터 다 본 거잖아!"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자, 놀란 아야세는 흠칫 몸이 굳어졌다. 그런 아야세의 반응에 가노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 화낼 일도 아닌데." 마치 주인에게 혼나는 강아지처럼 가노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불쾌해했다. "그래서 차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일까, 깊이 들이마신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가노는 아야세의 뺨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왠지 모를 온기가 느껴지자, 아야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소리가 나길래 불안해서 그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따스한 가노의 손이 아야세를 끌어안았다. "...앗." 다 피지 않은 담배를 아스팔트 위에 던지고 가노는 아야세를 안은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나오지 말라고 하면, 절대로 나오지마, 알았지." 낮은 목소리로 다짐을 하자, 아야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마른 아야세의 몸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것도 성에 차지 않는지 가노는 여린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후면 이미 늦는단 말이다. ...아야세, 오해하지마. 방금 그 녀석하고는 아는 사이야. 일반인은 그렇게 거칠게 다루지 않아. 평소에는 나도 부드러운 남자인데..." 변명같은 말을 늘어놓다가 가노는 그런 말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라도 했는지 도중에 말을 중단했다. "...젠장." 아야세를 품에 안고서 가노는 욕설을 내뱉었다. 평소 가노는 집요할 정도로 아야세의 행동 일거수 일투족을 제한 하고 잇다. 더구나 아야세 혼자 외출하는 것은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막대한 빚을 다 갚기 전에 자신이 도망이라도 칠까봐 경계하는 것일까. "안 좋은 꼴을 보였군. 액땜하는 셈치고 한잔하고 갈까?" 귓가에 닿을 듯 가가이 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노가 속삭였다. 그러나 아야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가노가 화를 내지 않을 정도로 약간의 힘을 주어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아무리 주위가 어둑어둑하긴 하지만 일단을 거리 한복판이다. 누가 볼지도 모르는 장소에서 서로 껴안고 있는 모습은 충분히 아야세를 난감하게 한다. "피하지마." 그런 아야세의 마음을 간파한 가노의 목소리에 웃음이 배어 있다. 가노는 아야세를 차 쪽으로 밀어 부치며 귓불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아...." 자동차와 가노의 몸 사이에서 아야세의 가슴이 요동쳤다. 낯익은 담배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가노의 냄새다. 치밀어오르는 수치심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가노씨, 이, 이러지 말아요..." 가노와 처음 관계를 맺은 뒤로 벌써 20일이 지났지만, 아야세는 아직까지 이런 식의 접촉에는 익숙지 않았다. "이 정도가지고 뭘그래. 집에 가면 끝내주게 해주지." 50만엔 어치말야, 하는 가노의 웃음섞인 말에 아야세의 뺨이 치욕스러운 듯 붉게 물들었다. 한 번 잘때마다 50만엔. 그것이 3억이나 되는 빚을 갚기 위해 아야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돈벌이였다. 가노가 원할때는 언제라도 자신의 몸을 그에게 바쳐야한다. 막대한 빚으로 속박당한 아야세에게 가노를 거절할 권리 따위는 없는 것이다. "아니며, 네 아파트가 여기서 가까운데 거기서 할까? 놀면 뭐해, 돈이나 벌어야지, 안 그래?" 가벼운 야유를 듣자 가노의 옷을 잡은 아야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파트, 라는 말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가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눈을 내리깔았지만 지울 수 없는 불안감에 아야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야세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가노가 넌지시 화제를 바꿨다. "...아야세. 너, 아직 그 편지에 신경쓰는 거냐?" 갑작스런 가노의 물음에 아야세는 눈을 번쩍 떴다. 가노는 아야세의 마음을 간파하는 능력이라도 있는 걸까. 애써 감추려던 노력도 아무 보람없이 그는 아야세가 안고 있던 불안을 너무도 간단하게 읽어낸 것이다. "아니, 그런 건 아니예요..." 부정하는 아야세의 목소리가 떨린다. 지금은 가노의 맨션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전에 혼자 지내던 아파트는 아직까지 처분하지 않았다. 몇 일전 대학교재를 가져오기 위해 가노와 함께 아파트에 갔을 때, 배달되어 있던 기분 나쁜 한 통의 편지가 아야세의 가슴에 그늘을 만들었던 것이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하얀 봉투에 컴퓨터를 이용해 깨알깥은 글자로 가득 쓴 편지가 들어 있었다. 내용인즉 현재 아야세의 주소를 묻는 것이다. 아야세는 가노와 지내는 사실을 학교 친구는 물론이고 아파트 관리인이나, 이웃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는 누군가가 아야세의 행방을 알기 위해 보낸 거라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편지에는 발신인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일방적으로 아야세의 주소를 캐묻는 편집증적인 문서와 함께, 편지에는 우표를 붙인 흔적이 없었다. 편지의 주인은 아야세의 아파트를 알고 있고 직접 편지를 두고 갔다는 말이 된다. 왠지 섬짓한 기분마저 들었다. 처음에는 전에 아야세를 팔아 넘긴 사촌을 의심했지만, 그는 가노의 존재를 알고 있으므로 이렇게 번잡스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장난이라고 넘겨버리기엔 왠지 께름직한 생각이 든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학교를 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그런 편이 나도 훨씬 맘이 놓이긴 하지만..." 빙긋이 웃으며 입을 맞추는 가노에게 아야세는 고개를 저었다. 아야세가 외출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가노가 겨우 학교에 다니도록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그 말은 결국 3주간의 생활을 통해 아야세가 결코 도망가지 않을거라고 믿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런 가노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소의 불안감 때문에 학교를 그만 둘 수는 없다. "괜찮아요. 이상한 편지도 한번밖에 오지 않았고... 학교엔 가겠어요." 단호한 아야세의 대답에 가노가 씁쓰름하게 웃었다. "하지만 주말까지 수없이 매일 있잖아." 가노가 말랑말랑한 엉덩이를 손으로 쓰다듬자, 아야세의 몸이 굳어졌다. "...앗..."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는 이로 깨물려고 하자 아야세는 당황했다. "네 목을 보면 꽉 물어서 자국을 남기고 싶단 말야." 가노는 눈을 부릅뜨며 아야세의 다리를 더듬었다. 아무래도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학교에 다닐수는 없겠지. 자신을 위해 자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요하는 가노의 웃음에 아야세는 수치심이 치솟았다. "제길, 괜히 학교에 보내준다고 해가지고. 주말까지 참아야 하잖아... 하지만." 가노가 갑자기 엉덩이를 힘껏 잡아쥐자, 아야세는 숨을 헐떡이며 몸을 뒤로 젖혔다. 엉덩이와 허벅지, 다리로 이어지는 격렬한 손길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친다. "안 보이는 곳은 괜찮겠지." "...아.." 가노는 축축한 혀끝으로 입술을 적시며 손이 스치고 지나간 장소로 얼굴을 돌렸다. 치밀어 오는 수치심과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흥분을 느끼며, 아야세의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돈밖에 없어 - 2 "이봐, 아야세! 여기야!"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아야세는 학생들로 가득 찬 식당을 둘러보았다. 남쪽 창가 자리에 같은 과 친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동이 담긴 쟁반을 들고, 아야세는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야, 쩨쩨하게 우동이 뭐냐, 우동이." 아야세가 들고 온 쟁반을 쳐다보며 옆에 앉은 이다가 이죽거렸다. 이다는 중간 체격의 단백한 용모의 남자로 아야세와는 학번이 이어져 있어 가끔 나란히 앉아 수업을 받기도 한다. "강의실 에어컨이 너무 세서 좀 추웠어. 그리고 우동은 싸고 맛있잖아." 우동은 학교 식당에서 가장 싼 음식중의 하나다. 강의실 에어컨 때문에 추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우동을 먹는 이유는 싼 가격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여름방학중에 열린 집중강의 이틀째. 아야세의 지갑 속에는 방금 우동값을 제하면, 9천7백5십엔이 남아있다. 평소의 아야세는 이만큼의 돈을 가지고 다녀 본 적이 없다. 저녁 식사대금이 포함되었다고는 하나, 2백5십엔짜리 우동이 아니라, 4백엔짜리 정식을 먹어도 될 정도이다. 또한 가노, 혹은 그 부하직원이 차로 마중을 오기 때문에 차비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지금의 아야세에게는 백5십엔의 차이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야세가 소지한 현금은 전부 가노의 지갑에서 나온 것이다. 학교에 가지고 온 돈뿐만 아니다. 매일의 식비와 광열비, 주변 용품과 옷값에 이르기까지 잡다한 모든 것을 아야세는 가노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인 것이다. 일찍 육친을 여읜 아야세에게 매달 숙부가 유산의 일부를 조금씩 보내주고 있다. 결코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다음 송금날짜가지는 아직 기간이 남았다. 가노는 필요없다고 하지만 이미 그에게 4억 가까이 되는 빚을 지고 있다보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자신의 존재가 가노에게 금전적으로 부담이 된다고 하면 적어도 쓸데없는 낭비는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야세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나 현금을 지니는 것도 끔찍하게 꺼려하던 가노가, 이렇게 용돈까지 쥐어주며 학교에 다니게 해 준 것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자신을 믿어준 가노에게 보답하고 싶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가노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너 그렇게 돈 아끼다가 노랭이 기우치처럼 되고 말거다." 빈정거리는 이다의 말에, 우동을 들고 자레 앉으려던 기우치가 불쾌한 듯 고개를 들었다. 기우치는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하지만 말수가 적은 탓인지 실제보다 작아 보이는 친구다. "닥쳐, 이다. 기우치는 검소한 거라구. 너도 좀 보고 배워라." 식사는 하지 않고 자리 맨 앞쪽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야마구치가 이다를 힐책한다. 턱에 수염이 텁수룩한 야마구치는 보기에는 일학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도 다른 대학을 2학년까지 다니다 중퇴하고 다시 이 학교를 진학한 것이란 소문이 돌고 있다. 시험 때마다 야마구치의 노트에 의지해온 이다는 대꾸 한마디 못하고 고개를 뻣뻣이 든 채 카레라이스만 난폭하게 휘저었다. "아야세, 차 마실래?" 담배 재를 털면서 야마구치가 묻자, 아야세는 가방을 끌어당겼다. "고마워, 근데 난 물통을 가지고 다니거든." 천으로 된 새 가방을 연 아야세는 물통을 찾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분명히 가방에 넣어두었는데." "아야세, 왜 그래?"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아야세가 돌아보자 그곳엔 식판을 든 도키가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예리한 용모의 도키가와는 성실한 성격때문인지 나이보다 어른스러운 인상을 가진 녀석으로 일면 재수했기 때문에 아야세보다 나이는 한 살 많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얼굴 한번 본적이 없었지만, 아야세하고는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덕분에 공통된 화제도 많고, 다정한 성격의 도키가와하고는 같이 어울려 다닐 기회도 잦았다. "가방에 물통을 넣어 갖고 왔는데 없어." 아야세는 일어나 다시 한번 가방 안을 샅샅이 뒤졌다. "...내가 사 가지고 올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기우치에게 아야세는 손을 내저었다. "됐어. 그런 것. 신경쓰지마." "이런, 노랭이도 아야세한테는 인심이 후한걸." "아야세, 방금 자료실에 들렀다 왔지? 그때 꺼내지 않았어?" 빈정거리는 이다를 한심한 듯 쳐다보고는 야마구치가 물었다. "맞아, 아야세. 거기 두고 왔나보다. 우선 내 거라도 마실래?" 진지한 표정의 도키가와가 들고 온 캔주스를 내밀자 아야세는 웃으며 거절했다. "괜찮아. 그렇게 목이 마른 건 아니야. 나중에 자료실로 찾으러 가지 뭐." 아마도 도중에 자료실에서 물통을 꺼냈을 지도 모른다. 아야세는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에 앉아 플라스틱 젓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아야세, 너 살 되게 많이 빠진 것 같다. 방학동안 무슨일 있었냐?" 이다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손을 뻗어 아야세의 이마에 내려온 머리를 잡았다. "...아, 뭐 별로...." 아야세의 가슴이 덜컬 내려앉았다. 여름방학이 되어, 사촌의 빚 대신 경매에 넘겨져, 사채없자, 그것도 남자에게 팔려갔다고는 아무리 친구라도 도저히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대답에 궁색해진 아야세의 머리를 만지며 이다는 여전히 히죽거리며 쳐다보았다. "...확실히, 말랐어." 이다의 행동에 눈썹을 찌푸리며 우동을 먹던 기우치가 한 마디 거든다. "아야세는 원래 여름에 마르는 체질이잖아. 그치만 한 달 정도 안 본사이, 뭐랄까... 좀 요염해 진 것 같긴 하군." 의미심장한 야마구치의 말에,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가노와의 관계를 들킨 듯한 느낌에 아야세는 당혹스러웠다. 요염하다는 말은 보통 남자가 남자에게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남자이면서도 가노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아야세의 육체는 조금씩 그런 상식의 벽을 허물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아야세의 하얀 피부와 긴 속눈썹과 커다란 눈동자, 매끈한 목덜미는 전에 느껴졌던 건강한 아름다움보다 오히려 요염하고 우수 어린, 농염한 분위기를 자아냈던 것이다. "목하고 어깨 근처가... 하긴 아야세는 원래 좀 귀엽긴 했지." 담배연기를 내뿜는 야마구치에게 기우치가 견제하듯 시선을 돌렸다. "...입고 있는 옷이 좀 달라져서 그런 거 아냐?" "기우치, 너 아야세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것 같다. 하긴 어제도 느꼈지만 아야세, 너 옷 좋다." "그래 아주 잘 어울리는데. 근데 말라서 좀 안돼 보인다. 내 오징어 튀김 먹을래?" 도키가와가 방긋 웃으며 접시를 내밀자, 아야세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처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가노가 사준 것이기 때문에 아야세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일일이 그런 걸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야세는 노골적인 친구들의 시선에 당황하며 우동을 후루룩거릴 수밖에 없었다. "고맙긴 하지만 괜찮아. 난 그다지 말랐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맞다, 너 혹시 돈대주는 아저씨라도 하나 잡은거 아냐? 그 뭐냐 원조교제라든가?" 짓궂게 웃어대며 이다가 묻자, 아야세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그런..." "...아야세가 그럴 리 있냐. 넌 어떻게 생각까지 그렇게 유치하냐." 기우치가 힐난하자 이다는 인상을 쓰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나타냈다. 기우치도지지 않고 도전적인 눈초리로 이다를 쏘아본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의 일로, 이다는 금방 어깨를 움츠리며 경멸하듯 비웃기 시작했다. "그만들 해. 그러다 싸움 날라." 생선튀김을 입에 물면서 도키가와가 옆에 앉아 있는 기우치의 팔을 툭툭 친다. 여유로운 도키가와의 말덕분에 갑자기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인기 많아 좋겠다. 아야세"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씨익 웃어대는 야마구치의 말에, 아야세는 숨이 탁 막혔다. 아야세의 반응에 놀랐는지, 야마구치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악의없는 농담이라고 해도 그것을 교묘하게 피해갈 정도의 여유가 아야세에게는 없었다. 이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떠들어 돌이킬수 없는 사태가 되기 보단 침묵하는 편이 나았다. 아야세는 잠자코 우동을 꾸역꾸역 먹어치운다. "...난 자료실에 물통 찾으러 갔다 올게." "내가 도와줄까." 식사도중임에도 불구하고 일어서려는 기우치를 아야세는 만류했다. "괜찮아. 그냥 보고만 올거니까." "그럼, 나도 슬슬 가볼까. 어차피 도서관에 갈 거니까 아야세, 같이 가자." 벌써 식사를 마친 도키가와가 아야세의 쟁반을 들어주었다. 고맙다고 말하며 일어서려던 아야세는 순간 이다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다는 아야세에게는 별 관심 없다는 투로 카레만 뒤적이고 있을 뿐이다. "아야세?" 쟁반을 든 도키가와가 재촉하자, 아야세는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왔다. 무거운 콘크리트 복도에 구두소리가 희미하게 울린다. 도서관과 연결되어 있는 이 건물은 교내에서 가장 오래된 교사중의 하나이다. 강의실뿐 아니라, 각 과의 연구실과 자료실로 사용하고 있지만 집중강의는 일학년에만 해당되기 때문에 교사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2층으로 올라간 아야세는 자료실 문을 열었다. 자료실은 강의실 반정도 크기로 작은 회의 탁자가 중앙에 놓여있고 삼면이 커다란 나무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인기척 없는 자료실에 불을 켜고, 아야세는 탁자쪽으로 다가갔다. 물통을 두고 갔다면 분명 탁자 위일 터인데, 비슷한 것도 눈에 띠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닥까지 구서구석 찾던 아야세는 갑자기 등뒤에서 뻗어나온 손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 이다..." 아야세의 입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쳐 맨 이다가 아야세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놀래키지 좀 마." 얼핏 웃는 아야세의 목덜미에 다시 이다의 손이 닿았다. "...아까는 설마 했지만, 이거 역시 키스 자국 맞지. 대단한데.. 너도 곧잘 하나봐, 아야세." 빈정거리는 이다의 말에 아야세는 자신의 목을 손으로 가렸다. 반사적인 아야세의 행동에 이다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이건..." 조심한다고 하면서도 어젯밤 직접적인 관계를 하지 않는 대신, 목과 둔부, 다리를 중심으로 가노가 격렬한 각인을 남긴 것이다. 일부러 깃이 높은 옷을 골라 될 수 있는 한 목이 보이지 않도록 신경을 썼지만 예리한 이다의 눈을 피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목을 누른 채로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한 아야세가 쩔쩔매고 있자 위로의 시선으로 이다가 쳐다보았다. "그거, 야마구치한테 당한거야? 아니면 기우치야?" 갑작스런 이다의 물음에 아야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인정사정 없이 놀림을 당할 각오는 되었지만, 왜 야마구치와 기우치의 이름이 거론되는지 아야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다는 팔을 뻗어 난폭하게 아야세의 왼팔을 잡았다. "이다, 왜 이래. 대체..." "상대는 여자가 아니지? 아야세. 순진한 줄 알았더니." 이다가 일방적으로 지껄이며 목을 쓰다듬자, 아야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반사적으로 이다를 뿌리치려고 하는 아야세의 몸을 이다가 거칠게 잡아당겼다. "놔..." 가슴을 밀어내려던 아야세의 아랫배에 예고도 없이, 이다의 주먹이 닿았다. "...욱." 생각지도 못한 고통에 아야세의 몸이 중심을 잃었다. 이다는 물건을 내던지듯 회의 탁자 위에 아야세의 가슴을 대고 짓누르기 시작했다. "...우..., 이, 이다..." 고통을 호소하는 아야세의 두 팔을, 등뒤에 서 있는 이다가 끈으로 묶기 시작한다. "찍소리 말고 있어. 나도 재미 좀 보자구." "안돼..." 귓가에 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이다의 손이 바지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아야세는 절박한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 흘러나온 것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가느다란 숨소리뿐이었다.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태를 아야세는 순간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노와 육체적인 관계를 갖으면서도 아야세는 아직까지 자신의 몸에 여성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힘으로 깔아 누르고 있는 상대는 친구다. "이다....! 놔...." 발을 버둥거리면서 저항하려 했지만 이다는 거칠게 벨트를 풀고 바지를 끌어내렸다. "이러지 마..." "조용히 해.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너도 쪽팔리잖아." 협박하는 이다의 말에 아야세의 몸이 경직되었다. 자료실 문은 안에서 잠글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았다. 언제 사람이 들어올지 모르는 장소에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아야세는 끔찍해졌다. "새삼스레 뺄 필요없잖아. 남자랑 꽤 놀아난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다 안다고 너 방학중에 거의 아파트에 없었잖아." 갑작스런 말에 놀란 아야세가 이다를 올려다보았다. 당황하는 아야세를 보며 이다가 히죽거렸다. "전화 수십번 했단 말야." 속옷 위로 다리를 움켜쥐자, 아야세가 허리를 치켜올렸다. "무...." 복잡한 머릿속으로, 몇 일전 아파트로 날라 온 수상한 편지의 존재가 떠올랐다. 그 편지의 주인은 아야세의 부재를 알고, 그 행방을 집요하게 탐색했을 것이다. 병적인 듯한 문구와 지금 자신을 덮치는 남자의 말이 묘하게 일치된다. 설마, 그 편지를 보낸 것이 이다였단 말인가?! 어째서, 라는 의문과 사라지지 않는 복부의 고통이 아야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기우치, 그 자식은 네 개잖아. 녀석 집에 가서 하루종일 그 짓해준거 아냐?! 다리를 잡은 손에 이다가 힘을 주자, 고통에 못이긴 아야세가 비명을 질렀다. 조금이라도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누르고 있는 이다의 팔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놔...! 이, 이다.??너... 왜 이래..." "야마구치 녀석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널 쳐다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단 말야...혹시 둘다 상대한 건 아니겠지?" "무...무슨 소리야! 왜 내가...남자하고..."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남아있던 속옷마저 무참하게 벗겨지자, 아야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만해..." 아야세의 엉덩이를 쳐다보며 이다가 감탄을 했다. "끝내주는데... 완전히 멍투성이잖아. 너 정말 원조교제라도 하냐?" 이다가 맨살의 감촉을 확인이라도 하듯 움켜쥐자, 아야세는 허리를 흔들었다. "....으.." 무릎으로 아야세의 몸을 탁자에 고정시킨 다음 이다의 손이 거칠게 아야세의 다리를 더듬기 시작했다. 설마 이다가 정말로 자신을 범하려는 걸까, 하는 공포감에 일순 눈앞이 깜깜해졌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해치우는 건데." "...욱..." "어때?" 민감한 부분에 이다의 손이 닿자, 아야세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 "반응이 좋은데..... 예사 몸짓이 아니야" "안돼... 이다.., 아파..." 거친 손놀림에 고통스러워하자, 자신의 타액을 묻혀 다시 아야세의 다리를 더듬기 시작했다. 이다가 억지로 다리 사이에 손을 밀어넣자, 공포와 고통으로 허벅다리가 경직되었다. "나랑 사귀자, 아야세." 끈쩍끈쩍한 목소리로더욱 집요하게 다리사이를 파고들었다. "욱..." 이다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이루 말 할수 없는 불쾌감이 솟구쳐올랐다.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등이 눌려 얻어맞은 배가 아파왔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해줄 수있어. 너 생각보다 훨씬 촉감이 좋은걸." 열정적으로 감탄을 하며 이다는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폭하게 더듬는 이다의 손이 몸을 자극하자 아야세는 활처럼 몸을 뒤로 젖혔다. "헉..., 아앗..." 허리에 둔중한 충격이 가해졌다. 치욕스런 감정과 동시에 온몸이 반응하기 시작한다. 아야세의 등이 떨리는 모습을 보며이다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느낌이 좋지?" 이다는 반응을 보인 아야세의 다리를 움켜쥐었다. "앗... 아, 아...." 소리조차 죽이지 못한 아야세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누가 데리고 놀았는지 모르지만, 너 상당히 민감하구나..." "욱..아...." "이쪽도 만져줄까?' 끈쩍끈쩍한 속삭임과 이다의 손이 다리 안쪽을 스쳤다. 순간 소름이 끼치며 그 부분이 위축되었다. "놔...!" 축축히 젖은 손가락이 아야세의 입술을 열고 입안을 더듬자, 아야세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괴로움으로 눈물이 흘러나오고 아야세는 정신없이 이다의 손가락을 물었다. "아얏..."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입안에 씁쓰름한 철 냄새가 퍼지고, 목구멍으로 구토감이 밀려온다. 온몸을 비틀면서 발버둥치는 아야세의 몸에서 이다의 손이 떨어져나갔다. "이 자식...! 무슨 짓이야!" 격앙된 고함을 지르며 이다가 손을 번쩍 치켜올리자, 아야세는 숨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얻어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감는 순간, 자료실 문이 열렸다. 겹쳐져 있던 두 사람의 몸이 반사적을 돌아보았다. "아, 됐어. 거기가지. 이런, 이게 왠 날벼락이야. 아야세." 낯익은 억양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깜짝 놀란 아야세의 시야안으로 노랑머리 남자의 웃는 모습이 들어왔다. 찰랑거리는 귀걸이며, 한창 유행하는 패션복장. 서글서글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잊을 리가 없다. 일주일쯤 전에 가노의 일과 연관되어 알게 된 기온이다. 꼼짝않고 있는 두 사람을 망연하게 쳐다보며 기온은 천천히 문을 닫았다. "이런 상황에서 좀 그렇긴 하지만, 일전에 실례가 많았어. 아야세 몸은 괜찮아?" 느긋한 기온의 말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이다가 누르고 있던 아야세의 몸을 바닥에 내팽겨쳤다. "누구냐...넌."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기온은 학교안을 어슬렁거리고 다녀도 아무런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학교의 학생이 아닌 점은 분명하다. "이런, 형씨 좀 살살 다뤄야지. 이 녀석한테 상처 하나 나기라도 하면 그날이 바로 형씨 제삿날이라고." 기온은 농담처럼 말하면서도 눈은 절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말을 듣자 아야세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야세, 너 설마 이 녀석하고...!" "나랑 아야세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 이거 참 기분좋은 오해인걸." 킥킥킥 하며 비웃는 기온의 태도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이다가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라, 폭력은 금물이야. 난 평화를 사랑하는 천재 에로비디오 제작자라구." 자랑스럽게 뽐내는 기온의 손에는 손가락 크기만한 작은 인형이 들려있었다. 전에 기온이 주었던 넥타이 무늬와 똑같은 애교스런 모양의 플라스틱 토끼이다. "무슨...." 드러난 다리를 감추려고 웅크리면서 아야세는 문득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귀엽지? 나중에 아야세한테도 줄게."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 거야. 집어치우지 못해..." 이다의 욕설이 끝나기도 전에 시끄러운 전자음이 실내에 진동했다. 바로 기온이 들고 있는 토끼인형에서 나온 소리임을 알고 아야세는 그제서야 그 용도를 이해했다. "이게 바로 치한격퇴장치란 거다. 방금건 몸풀기에 불과하다고. 진자 소리는 장난 아니지. 한번 시험해 볼까? 아마 아래층에 있는 학생들까지 놀라서 달려올걸." 기온이 득의에 찬 웃음을 짓자 이다는 핏기가 사라진 표정으로 아야세를 돌아보았다. 아야세는 아직 손목이 묶인 채 바지가 벗겨진 모습으로 쓰러져 있다. 이 현장을 학교관계자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변명조차 할 수 없다. "...제길..." 욕을 하며 이다는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거칠게 집어들더니 기온을 밀쳐내며 문쪽으로 걸어가면서도 미련이 남았는지 아야세를 힐끔 쳐다보고 나가버렸다. 멀어져가는 발소리에 아야세는 온몸이 떨려왔다. 그리고 완전히 들리지 않고서야 비로소 아야세는 몸의 긴장을 풀었다. "AV로는 '자료실, 한낮의 정사' 쯤 되겠군...이런. 요새 계속 당하기만 하잖아." 기온이 아야세의 안색을 살폈다. "다친데는 없어?" "...아...전....괜찮아요.....근데 기온씨가 여긴 어쩐 일이예요?" 도와준 것에 대한 답례보다도 학교 내에서 만났다는 사실에 더 놀란 아야세가 물었다. "정의의 편은 언제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니까." 기온은 과장스럽게 이마에 손을 갖다대며 웃었다. "저, 농담할 기분 아니예요..." "사실은 비디오에 출연할 여자를 물색할 겸 학교식당에 밥먹으러 왔지. 근데 여기 식당 끝내주던데. 우동국물이 그렇게 시커먼건 처음봤어. 어휴 도저히 못 먹겠더라." 비디오라는 말에 아야세가 흠칫 놀란다. 기온이 겉보기와는 달리 음란비디오를 제작,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생각난 것이다. "설마 아야세가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줄은 몰랐는걸. 아까 그녀석은 친구야?" 기온의 질문에 아야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온은 동정하는 표정으로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정말 그녀석한테 당했다면 큰일났을 거야. 가노형한테 들키는 날엔 그 친구는 태평양 물고기 밥에, 아야세는 자퇴에다 감금생활이 틀림없다고." 결코 농담이 아닌 기온의 말에 아야세의 몸이 굳어졌다. 친구인 이다한테 당한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이 사실이 가노의 귀에 들어간다고 상상하면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했다. 가노는 외출하는 것 뿐 아니라 아야세가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것조차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문 밖 출입이 금지될지도 모른다. "기온씨, 부탁이예요. 이 일은..." 불쑥 튀어나온 말에 아야세 자신도 당혹스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기온은 가노의 대학 후배이며 지금도 사업상 가노와 만나고 있기 때문에 기온도 가노의 성격은 충분히 알고 있다. "알았어, 걱정마. 가노형에겐 비밀로 해달라는 거지?" 한쪽 눈을 깜박이며 대답하는 기온을 보며 아야세는 죄악감을 느끼면서도 겨우 어깨의 힘이 빠졌다. "이것 참, 가노형 진짜 교육 잘 시켰네. 다른 사람한테 당하는 것 보다 형한테 혼나는 게 더 무섭다? 이거 문제 있는데..."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기온은 아야세의 손목에 묶인 끈을 풀어주었다. 황급히 아야세가 다리를 감추었다. "그건 나중에 해도 되니까..." 무릎 아래까지 내려간 바지를 필사적으로 끌어올리던 아야세는 갑자기 다리사이로 다가오는 기온의 손을 보고 놀라 소리를 질렀다. "....무슨!" 채 옷을 추스르기도 전에 기온이 아야세의 드러난 다리를 쓰다듬었다. "힘들 것 같아서 도와주려는 거야." 능글맞게 웃는 기온의 손을 아야세는 당황하며 뿌리치려 했지만 기온은 투명하게 빛나는 아야세의 다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됐어요...! 장난하지..." "아아, 괜찮다니까. 조금만 만져볼게." "...아." 아야세는 몸을 움츠리며 저항했다. 그러나 기온이 더욱 짓궂게 다리 안쪽을 더듬기 시작하자 아야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사실은 전부터 가노형이 그렇게 빠져있는 아야세의 몸이 보고 싶었어. 그러니까 조금만, 응? 대신 형한테는 말 안 할게." 기온의 말에 아야세의 등으로 한기가 흘렀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거부할 수 없는 쾌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노, 놓으란 말예요!" 간신히 기온의 손을 뿌리치며 필사적으로 바지를 끌어 올려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자신의 육체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에 아야세는 절규라도 지르고 싶었다. 이다에 의해서도, 기온에 의해서도 너무도 쉽게 반응해 버리는 통제할 수 없는 쾌감이 몸 안에 잔재해 있다는 사실이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왜 화를 내고 그래. 알았어." 미안해 하는 기색도 없이 기온은 아야세의 옷을 입혀주었다. 서둘러 몸을 추스르고 아야세는 거칠게 가방을 집어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기온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은커녕 따끔한 말조차 하지 못한 채 아야세는 바로 자료실을 빠져나왔다. 돈밖에 없어 - 3 국물을 떠서 간을 확인한 다음 아야세는 가스불을 껐다. 집에 돌아오면서 경황없이 산 조개를 넣었지만 맛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 무와 양배추로 만든 샐러드는 이미 냉장고안에 넣어두었다. 남은건 가노가 돌아올 때 즈음, 닭고기와 야채, 두부를 튀기고 양념장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 그래도 식탁이 허전할 것 같으면 내일 먹으려고 사다 놓은 참치를 꺼내놓으면 될 것이다. 거의 준비를 끝내고 주방을 둘러보던 아야세는 우울한 표정이 되었다. 저녁준비를 할 때는 괜찮았지만 아무 할 일이 없게 되자 암담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분전환을 위해 거실테이블을 정리하려고 주방을 나온 아야세는 깜짝 놀라 발을 멈췄다. 환하게 켜진 조명이 넓은 거실을 비추고 있었다. 우유빛 벽지와 대조적으로 짙은 색의 중후한 가구들이 거실을 장식하고 있다. 상품책자에서 방금 빠져나온 듯 깔끔한 방안에는 이상할 정도로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거실 한가운데 한 남자가 서 있다. 바로 이 집 주인인 가노이다. "다녀오셨어요. 오늘은 이르네요." 아야세의 목소리가 떨린다. 음식을 하느라 가노가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들었던 것일까. 존재감과 함께 엄청남 위압감마저 느끼게 하는 가노의 두 눈이 아야세를 바라본다. 순간 아야세의 몸이 본능적으로 동요를 일으킨다. 날카로운 남자의 눈빛에 위험한 빛이 떠올랐다. "왜 그래?" 낮게 울리는 남자의 물음에 아야세가 번뜩 정신을 차린다. 재색 양복을 벗으며 가노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었다. "...식사, 아직 안했죠?" 저녁식사 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지만 바쁜 가노로서는 비교적 이른 시간이다. 전에는 주로 외식을 했지만 아야세와 함께 지내고부터는 집에서 식사하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금방 차리니까 앉으세요." 자리를 피하듯 주방으로 돌아온 아야세의 머릿속으로 오늘 학교에서의 일들이 떠올랐다. 아직도 이다의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듯 하다. 가노의 부하가 운전하는 차로 맨션에 돌아오자마자 몸을 씻었지만 참을 수 없는 치욕과 혐오감은 아직도 아야세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아세, 맥주 먼저 마실까?" 묻는 가노의 말에 아야세는 애써 동요를 감추고 대답했다. 가노에게 말을 해야 할까. 자신도 남자이면서 같은 동성친구에게 폭행을 당할 뻔했다는 사실 자체가 불명예스럽지만 숨기려 하면 할수록 괴로움이 더해만 갔다. 무엇보다 아야세는 감추는데 서툴렀다. "저...가노씨...." 차가운 맥주와 잔을 준비하고 곁들여 생선 훈제를 내오면서 아야세는 말을 더듬었다. 가노는 마치 거대한 육식 동물같은 몸을 소파에 깊게 묻었다. "오늘, 학교 어땠어?" 간파당한 듯한 질문에 아야세의 몸으로 차가운 충동이 스쳐지나갔다. "...네?" "학교말야. 어땠냐고 묻잖아." 캔맥주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가노의 두 눈이 아야세를 포착한다. 목에서 울컥 넘어올 것 같은 기분에 아야세는 억지로 침을 삼켰다. "저....뭐..." 더듬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가며 아야세는 눈을 감아버렸다. 사실을 말하려면 지금이다라고 소리치고 싶은 충격이 가슴을 충돌질했다. "...별다른 일은...없었어요." 그러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고개를 숙인 아야세는 자신의 무기력함을 탓하며 손을 그러쥐었다. 가노는 맥주를 한모금 마시고 아무렇지 않게 그래, 하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손을 뻗어 옆에 놔둔 가방을 열어 하얀봉투를 꺼내고는 가노는 아무말 없이 그것을 아야세에게 내밀었다. "...?" 받아야하는지 주저하는 아야세에게 가노가 턱으로 가리켰다. "열어 봐." 아야세가 조심조심 봉투를 받아들었다. 부드러운 아야세의 눈썹이 희미하게 떨렸다. 봉투의 수신인은??가노의 사무실로 되어있었지만 발신인의 이름은 없고 우표도 붙어 있지 않았다. 아야세의 아파트로 보내진 기분 나쁜 편지가 순간 뇌리에 스쳤다. "이건..." 가노가 재차 재촉하자 불안한 표정으로 아야세가 봉투를 열었다. 수신인처럼 컴퓨터로 인쇄된 내용물을 본 순간 아야세는 자신의 예감이 적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앗..." 봉투를 열어본 아야세의 입에서 충격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편지와 함께 들어있던 몇 장의 종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선명하지 않은 칼라 확대사진이었다. "...아." 사진을 집어든 아야세의 눈에 더욱 심한 충격의 빛이 가해졌다. "어젯밤에 누가 찍었나봐." 가노는 조용히 다리를 번갈아 포개어 앉는다. 침착한 가노의 태도가 믿기지 않은 듯 아야세는 사진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동차 옆에서 안긴채 입맞춤을 하는 아야세의 옆 얼굴이 사진에 확실하게 찍혀 있었다. 가노의 말대로 어두운 밤에 촬영된 듯 사진전체가 뿌옇게 선명하지 않았지만 아야세를 아는 사람이 봤다면 그 피사체가 누구인지는 한 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모든 사진에 나와 있는 가노의 얼굴은 날카로운 도구로 그어져 있었다. "편지도 들어있어. 나더러 죽으라고 하더군. 너하고는 학교에서 매일 관계를 맺었다는데." 귀찮은 듯 얼굴을 찡그리며 가노가 아야세의 손에 든 봉투를 빼앗아 걸칠게 테이블위에 내던졌다. "이게 무슨 말이야, 아야세." 섬칫할 정도로 가라앉은 가노의 물음에 아야세가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학교에서 이다와의 사건이 번뜩 떠올랐다. 이다는 이번 여름방학동안 아야세가 계속 아파트를 비워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더구나 아야세의 소재를 캐물으며 강제로 폭행하려고까지 했다. "...학교 친구가 내가 아파트에 없는 걸 알고...혹시 그가 편지를 보낸 건 아닌가 생각은 했지만..." 중얼거리던 말이 끝을 맺지 못하고 도중에 끊겼다. 그 친구한테 당할 뻔했다는 결정적인 말은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손끝이 떨려오고 온 몸에 한기가 덮쳐오자 아야세는 숨을 죽이며 참았다. "근데...그 친구는 가노씨에 대해 모르고 있었고....그래서...." 원조교제를 하는거 아니냐고 다그쳤지만 이다는 가노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듯 보였었다. 사진이 어제 찍힌 것이며 그 일련의 편지들이 이다가 보낸 것이라면 이다가 아야세와 가노의 관게를 모를 리 없을 것이다. 편지의 발신인은 이다가 아닌 것이 된다. "그 친구가 이녀석이냐?"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고 생각에 잠긴 아야세는 가노의 말에 시선을 들었다. 거친 남자의 손이 두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내밀었다. 순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아야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선 채로 탁자에 엎드린, 겹쳐진 두 개의 육체가 작은 사진 가득 담겨있었다. 의기양양한 이다의 옆얼굴을 본 순간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이런..." 창백해진 아야세의 낭패한 표정을 바라보며 가노의 예리한 눈이 빛났다. "학교에서 별일 없었다....말이지." 앞서 말한 아야세의 말을 되풀이하는 가노의 목소리에 온몸이 얼어붙을 듯한 냉기가 흘렀다. 손에 진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 폴라로이드 사진도 편지와 함께 보내진 것일까. 그렇다면 분명 사진을 찍은 것은 이다가 아닌 것임이 틀림없다. 그럼 도대체 누가 찍은 것일까. 자신은 감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가노와의 관계도 학교에서의 행동도, 전부 이 편지의 주인은 알고 있다. "...아..." "학교에 가자마자 다른 놈이랑 놀아나다니." 결코 감정이 담겨 있지 않는 가노의 침착한 목소리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사죄나 변명의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그런 후회도 늦어 버렸다. 결국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임이 명백하자 아야세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아니면, 학교에 가는 목적이 그건가?" 가노가 담배를 꺼내며 어깨를 움추렸다. "벗어." 돌연한 가노의 말에 아야세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야세의 그런 동요를 못 본 척하며 가노는 입에 문 담배필터를 이빨로 짓이겼다. 쏘아보는 가노의 눈빛에 아야세는 마치 자신의 목을 조르는 듯한 공포감을 느꼈다. 가노는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다. 평소의 난폭함 중에서는 언제나 가노의 내재된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한치도 용납하지 않는 가노는 무섭다. "....나...." 변명이라도 하듯 말을 꺼냈지만 아야세는 울먹이며 시선을 피했다. 순간, 쾅 하는 격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뒤집어졌다. 가노가 발로 걷어찬 것이다. "...앗." 무심결에 비명을 지르며 아야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가 누구 것인지 똑똑히 알게 해주지." 축축한 소리가 온 실내를 적신다. 가노의 튼튼한 다리 위에 마주 보듯 앉아, 아야세는 숨을 죽였다. "....아...." 벌어진 다리 사이로 커다란 가노의 손이 꿈틀거린다. 끈적끈적한 손으로 아야세의 허벅지를 문질러 대고 있는 것이다. 가슴이 드러나도록 셔츠깃을 입에 물고 있어 호흡이 힘들어졌다. "헉...아....." 변덕스럽게 가노의 손이 다리를 지나 가슴을 쓰다듬자 아야세의 다리가 경직되었다. 너무나도 쉽게 흥분된 자신의 몸이 부끄러워 눈물이 나올 정도다. "욱....." 비웃음 섞인 숨소리를 일부러 귀에 대고 내뱉자, 아야세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조금이라도 자신의 훙분을 가라앉히려 했다. 두툼한 가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필사적으로 소리를 죽이려했지만 남자의 손길을 기억하는 육체는 세심한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을 하여 아야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허억...! 아아....." 끈끈한 소리를 내며 질퍽해진 다리 사이로 가노의 손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여지없이 닥쳐오는 고통으로 옷을 배어 문 아야세의 턱이 떨렸다. 그러나 아야세의 그런 몸짓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에는 눈꼽만큼의 자비심도 없어 보인다. 아무리 같은 집에서 격의 없이 지낸다고 해도 자신과 가노와의 사이에는 돈에 의해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라는 결정적인 틈이 있는 것이다. 그 틈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잔혹하고 모욕적인 명령이라도 아야세는 따라야만 한다. ".....으." 격렬해진 가노의 손놀림에 아야세의 입에서 셔츠가 떨어진다. "안돼...하지......마." 아야세가 소리를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지만 가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발갛게 부어오른 아야세의 다리 안쪽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아아........아파...." 체액으로 축축해진 다리사이로 가노의 몸이 비집고 들어왔다. 비아냥거리는 가노의 말속에서 조체하지 못하는 분노가 느껴졌다. "아야.....아..." 저항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가노의 노여움을 살 뿐이었다. "좋으면서 아픈 척 하지마." "....아........"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무표정하게 차가운 가노의 시선을 느끼자 신음히 흘러나왔다. ".......헉...그만....가노, 아파...." 더욱 거칠어진 가노의 손이 다리 안쪽을 자극하자 아야세는 고통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좀 돌려봐." 아야세의 다리를 잡은 채로 가노가 엉덩이를 가볍게 쳤다. 부딪치는 메마른 소리와 함께 아야세의 허리를 들어올렸다. "앗....." 스윽 하고 몸에서 가노의 손이 빠져나갔다. 아야세를 안은 채로 테이블로 손을 뻗은 가노가 담배 케이스를 집어들었다. "네가 해봐." "그런...." 생각도 못했던 가노의 명령에 아야세의 몸이 경직되었다. 절망적인 생각과 동시에 호흡이 거칠어진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 익숙해지면 더 좋을걸." 담배에 불을 부치며 가노가 낮게 웃었다. "처음엔 힘들겠지만 널 길들이기엔 딱인 것 같군." 번뜩이는 가노의 시선이 몸을 뚫고 지나가는 듯한 공포가 발끝까지 침투한다. "빨리 해." 다시 거세게 엉덩이를 내려치자 아야세는 눈물을 머금었다. 힘껏, 세상에서 자신을 차단이라도 하듯 눈을 감고 아야세가 가노의 다리로 손을 뻗었다. 그의 몸으로 얼굴을 가져가면서 아야세는 겨우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욱." 체온이 다른 몸이 아야세의 몸과 겹쳐진다. "좀 더 꽉 잡아." 담배연기를 내뿜으면서 빈정거리는 가노의 말에 아야세는 입술을 깨물고 가슴을 진정시켰다. 자신의 얼굴 바로 앞에 담배 불이 있는 것도 위험스러웠지만 그보다도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나는 음란한 소리가 더욱 아야세를 괴롭힌다. 가노와 몸이 스칠 때마다 반사적으로 뒤로 젖혀지는 허리를 가노가 그러쥔다. "후........" 학교에서 이다와, 그리고 기온이 더듬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야세는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천천히 허리를 내렸다. "....아....앗." 경직된 다리사이로 가노의 뜨거운 몸이 꿈틀거렸다. "눈을 떠, 아야세." 거칠어진 호흡으로 인해 헐떡이는 아야세의 목을 가노가 커다란 손으로 잡아당겼다. 뼛속까지 꿰뚫을 듯한 강렬한 가노의 눈빛에 흥분하던 아야세의 몸이 위축되었다. "넌 나만 생각해야 돼."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는 듯 낮게, 그리고 부드럽게 쏟아내는 질책에 아야세는 감당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몸에 남아 있는 이다의 잔재는 간 곳 없이, 열정적인 가노의 손길에 전신이 흥분되어 갔다. "....아, 가....노." 익숙치 않은 몸짓으로 가노의 몸을 스치는 아야세의 엉덩이를 살짝 잡고 흔들었다. "아.........욱..." 거친 숨소리를 내며 가노가 아야세의 몸 안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계속 이어진 마찰로 붉어진 아야세의 다리에서 힘이 빠진다. "신음소리 좀 내봐." 집요하게 파고드는 남자의 무게에 괴로워하는 아야세를 가노가 쏘아본다. "....헉...." 소파에 놓인 재떨이에 재를 떨면서 가노는 아야세의 몸을 들어올렸다. "아픈가? 아직 멀었어." "아........" "입으로는 그렇지만 네 몸은 좋아 죽을지경인 모양이군." 한계다. 노골적인 가노의 말이 더욱 자극이 되어 온 몸을 찌른다. "아......." "이래도 싫어?" 떨고 있는 아야세를 두 손으로 잡으며 가노의 두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아아,...안....."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어대는 아야세의 귀로 가노의 숨소리가 들린다. 가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야세의 다리로 손을 뻗자 땀과 체액으로 범벅이 된 몸이 굳어져갔다. "....으..." 끓어오르는 열정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자 가노가 아야세의 몸을 어루만졌다. 아야세는 가노가 만진 부분에 희미한 고통을 느꼈다. 이다에게 맞은 곳이다. "....빚이 없어질 때까지 넌 내 거야." 지배자와 같은 목소리에 아야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긴장된 자신의 몸을 가노에게 묻었다. "아....! 헉..... 가노.........." 여느때와 다른 또 다른 쾌감에 눈물이 흘러넘쳤다. "가....아.....야....아...." 연신 고통을 호소하는 아야세를 가노가 힘껏 끌어안았다. "...아...." "넌 누구거지?" 협박과도 같은 질문에 숨이 가빠진 아야세가 고개를 저었다. "말해." 절정에 다다른 아야세의 육체에서 가노가 손을 거두자 아야세가 소리를 질렀다. "아....안돼.....조금...." "아야세." "..아........" 가노가 귓불을 깨물자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비틀며 다시 움직였다. 축축해진 다리전체에 찌릿한 충격이 스친다. ".....아, 난....." 이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주체할 수 없이 사로잡힌 한심한 자신으로 인해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희미하게 떨리는 아야세의 등을 가노가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대답을 재촉하는 가노의 행동에 아야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먹거렸다. "가....노씨....의....." 이름을 부르고나서 가노의 목에 매달렸다. 그 다음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가식이나 고집도 모두 버리고 가노에게 내맡겼다. 가노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시간을 들여 천천히 아야세의 몸으로 손을 뻗었다. ".....아!..........하아.." 눈물로 얼룩진 아야세의 뺨을 가노가 어루만졌다. "입 벌려." 아야세는 저항할 생각도 못하고 순순히 입술을 열었다. 끈적이는 가노의 혀가 날렵하게 아야세의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음.....음...." 가노가 혀를 힘껏 빨아들이자 다리 아래로 충격이 전해졌다. "....후아,...아...." 깊고 깊은 입맞춤에 의식마저 몽롱해져갔다. 간간히 숨을 토해내며 아야세는 낮게 울리는 가노의 한숨소리를 들은 듯 했다. 눈을 뜨고 가노의 눈을 보고 싶었지만 넘쳐나는 눈물에 시야가 가려 아야세는 안타까운 한숨만 토했다. 돈밖에 없어 - 4 익숙한 진동을 동반하고 차가 멈춘다. 멍하니 눈을 뜬 채 아야세는 멀리 보이는 학교의 외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 뒤편에 있는 주차장이 아닌 정문 바로 앞에 차를 세우자 낯선 고급차의 등장에 등교하던 학생들이 모두 쳐다보았다. "네시에 사람을 보낼게. 그전에 끝날 것 같으면 사무실로 전화해." 운전석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아야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을 잡았다. 옆에 앉아 있는 가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그런 일이 있은 다음날 학교에 가는 것을 허락해 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하긴 아야세를 맨션에서 나가게 해준 것만도 기적이었다. 시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오늘도 아야세가 가노를 배반하는 행동이라도 하면 그는 그때야말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야수가 자신의 절대적인 우위를 확신하고 상처 입은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것과 비슷하다. 굴욕과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아야세의 몸을 무겁게 짓누른다. 가노에게 강요당한 육체적 관계에는 아직까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노와의 생활이 아야세에게 있어 결코 놓칠 수 없는 따스함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같은 순간에는 자신의 입장의 차이나 그 사이에 개입된 존재를 배제할 수 없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가노에게 몸을 피한 것은 아야세 자신이다.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묵묵히 차에서 내리려던 아야세의 팔을 가노가 붙잡았다. 예리한 가노의 시선이 똑바로 아야세를 쳐다보았다. 지난 밤 내내 아야세의 육체를 유린하고, 음란한 속삭임과 치욕적인 말을 연신 퍼붓던 남자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하나 없었다. 빈정거리는 듯한 웃음을 띠며 가노가 아야세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야세, 키스해." 뜻밖인 가노의 말에 아야세의 몸이 떨렸다. 선팅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곳은 학생들이 드나드는 학교 정문이다. 아야세의 얼굴을 아는 학생이 차 옆을 지나가지 말란 법은 없다. 아야세가 머뭇거리자 가노는 옅은 미소를 지며 바라보았다. "돈 액수를 정해주지 않으면 내 말도 안 들을거냐?" 가노의 묵직한 손이 아야세의 목을 감싸안았다. "....앗." 어제 저녁 가노가 남긴 혈흔으로 다시금 고통이 전해졌다. "잊지마. 넌 돈 때문에 나랑 자는 놈이야. 빚이 전부 없어질 때까지는 넌 내 소유물이라고. 알겠어?" 거침없는 분노를 내뱉는 가노는 모든 것을 간파하는 듯한 시선으로 아야세를 쏘아보았다. "........." 창백해진 아야세가 눈을 감았다. 몸 안으로 침투하는 절망적인 가슴의 고통을 억누르기 위해 아야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야세, 하고 가노가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눈물도 말라 얼어붙은 투명한 아야세의 눈동자가 가노를 바라보았다. 조수석에서 아야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운전석에 앉아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던지는 가노의 입술로 아야세는 조심스레 입술을 대온다. "....음." 침대에서 강요당할 때 외에 닿아보지 않은 가노의 입술은 왠지 두려움이 감돌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하듯 가볍게 입술을 대자 가노는 그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 겹쳐진 두 개의 입술 사이로 서로의 숨이 섞어져 나온다.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하고 아야세는 가노의 시선을 피한 채 차문으로 손을 뻗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가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왠지 석연치 않은 가노의 시선을 느끼면서 아야세는 매미울음소리가 가득한 한 여름의 대기속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아야세, 듣고 있냐?" 몇 번인가 야마구치가 부르는 소리에 아야세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인가 강의가 끝나버렸는지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제각각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아, 미안.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 "정신차려. 도키가와가 점심 같이 먹자는데." 도키가와와 기우치를 비롯해서 함께 강의를 듣는 몇 몇 친구들은 나름대로 점심메뉴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 안에 이다의 모습은 없다. 언제나 제멋대로인 이다이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천적을 경계하는 작은 동물처럼 아야세의 눈은 자연히 이다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보내온 기분 나쁜 편지의 주인이 이다인지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이다와 마주할 생각을 하면 역시 혐오감이 앞선다. 점점 신경이 곤두서 있다. "난 오후부터 강의 프린트 복사하러 가야되니까 매점에서 간단히 사 먹고 나중에 먹을래." "...복사하러, 그럼 도서관?" 아야세의 옆에 앉아 있던 기우치가 틈을 주지 않고 물었다. "응, 열람실에 가야겠지." 대답하며 일어서던 아야세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고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책상에 걸터앉아 야마구치와 얘기를 나누던 도키가와가 아야세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야세, 얼굴색이 좀 안 좋은 것 같은데?" 진지한 얼굴로 걱정하는 도키가와의 말에 기우치가 동조한다. "....오늘 오전부터 계속 이상하더라. 아야세." 걱정하는 친구들을 향해 아야세는 간신히 웃음을 지어보였다.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양호실 갈래? 내가 같이 가 줄게." 갑자기 자신의 팔을 잡고 일어서려는 기우치의 손을 아야세가 반사적으로 뿌리쳤다. ".......아." 과민한 자신의 반응에 오히려 아야세 자신이 낭패스럽다. 기우치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어제 이다와의 사건을 몸이 기억하고 있는 이상 타인과 접촉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리둥절하며 아야세를 쳐다보는 기우치의 눈에 충격의 빛이 스쳤다. 그 눈빛속에 위험한 증오의 빛을 본 듯 해 아야세는 섬칫해졌다. "기우치 임다. 그러면 어떡해, 아야세가 놀라잖아." 여유롭게 말을 내던지는 도키가와에게 담배를 문 야마구치가 한마디 했다. "놀란 건 오히려 기우치야. 괜찮냐, 둘 다?" "미, 미안해. 기우치 나, 좀 놀라서..." 솔직하게 사과하는 아야세에게서 기우치는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입 속으로 미안하다고 작게 중얼거린다. 겨우 한 숨을 내쉬던 아야세는 기우치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모습에 순간 몸이 경직됐다. 이다였다. 두 서너명 무리와 어울려 문 앞에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아야세와 시선이 마주치자, 이다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곁에 있던 한 사람이 이다의 팔을 잡아끈다. 무슨 일인지 귓속말을 주고받던 이다의 입가가 아야세를 바라보며 히죽거리는게 아닌가?! "맞다. 아야세. 그러고보니 너 오늘 아침에 자가용타고 학교왔냐?" 불쑥 내던진 도키가와의 말에, 이다에게 신경이 쏠려있던 아야세의 몸이 잠시 떨렸다. "...차?" 바로 기우치가 덤벼들며 말을 보탰다. "아, 나도 봤어. 교문 앞에 서 있던 볼보말이지? 끝내주던데." 아야세를 쳐다보며 야마구치가 쓴 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야, 아야세?" 기우치가 집요하게 캐묻자, 아야세는 난처한 듯 미간을 좁혔다. "으응, 아는 사람이 방향이 같다고 해서, 같이 그냥... 괜찮다니까 자꾸 타라고 해서 말야." 익숙치 않은 거짓말에 손끝이 저려왔다. 학교 친구들은 아야세의 변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아야세가 가노라는 사채업자와 같이 지내는 것도, 두 사람이 육체 관계를 맺는 사정도 결코 알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어딘가 그런 비밀을 알고 있는 자가 있다. 무의식적으로 아야세는 다시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곳에 서 있던 이다의 모습은 이미 없어져버렸다. "자동차라, 나도 빨리 갖고 싶다." "시내에서 차로 다니고 싶냐? 얼마나 막히는데..." 어느틈엔가 자신에서 차로 이어진 화제를 들으면서 아야세는 가방을 어깨에 맸다. "그럼, 난 갈게... 오후에 3호실에서 봐." 아직 뭔가 말하려는 기우치를 남기고,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다의 모습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아야세는 복도를 지나 도서관으로 향했다. 무리하게 움직이자 몸 안의 근육이 아파왔다. 열람실에 볼일이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식욕이 없어서 점심시간을 그곳에서 적당히 때울 작정이었다. 도서관 창문을 장식하는 밝은 햇빛에, 드문드문 매미 소리가 교차한다. 생각해야할 문제는 많이 남았다. 아야세의 아파트로, 그리고 가노의 사무실로 날라든 편지는 대체 누가 보낸 것일까. 만일 그것이 이다가 아니라면 그자는 어떻게 해서 학교에서의 아야세의 행동을 아는 것일까. 아무리 학교내 출입이 자유롭다고는 하나 그렇게 엉뚱한 짓을 할정도라면 눈에 띄게 마련이다. 순간, 아야세는 강렬한 시선을 느기고 뒤를 돌아보았다. 온 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순간적으로 터져나온 자신의 비명소리를 의식하고, 아야세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떨고 있는 아야세에 반해, 주위에는 수상한 기척이 보이지 않았다.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 햇빛이 아야세의 불안을 비웃듯이 밝은 빛으로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다. 도중에 끊어졌던 매미소리가 다시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울리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아야세는 몸의 긴장을 풀었다. 그러나 몸 안에 감도는 공포는 지워지지 않았다. 아야세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도서대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으로 3층에 있는 열람실로 향했다.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시선 끝으로, 청소도구를 손에 든 중년의 청소부 모습을 발견하고 아야세는 그제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인기척이 없는 복도를 울리는 청소부의 발소리에 힘을 얻어, 아야세가 열람실 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아야세는 왠지 모를 기운에 뒤를 돌아보았다. 방어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누군가에 의해 어깨가 잡혀진 것이다. "...무...!" 심장이 멈출 것 같은 충격에, 절박한 비명이 새어나왔다. 복도를 꺾어지는 청소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져간다. 입이 틀어막힌 채로 아야세는 복도 끝에 있는 청소도구창고로 힘없이 끌려갔다. "놔...." 커다란 로커와 지저분한 벽으로 둘러싸인 창고는 어둡고 좁았다. 문이 잠겨있지 않아 누구나 출입할 수 있지만 이런 곳을 드나드는 학생이 있을리 없다. 버둥거리는 아야세의 몸을 등뒤에서 껴안고 다른 손으로 문을 닫는다. "아는 사람이 태워줬다고?"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무슨..." "그냥 아는 사람이, 온 몸에다 키스자국을 남기나보지, 아야세. 형이 들으면 뭐라고 할까." 민감한 목덜미를 어루만지듯 뒷머리를 올리자, 아야세는 몸을 떨었다. "놔..." 있는 힘을 다해 남자의 몸을 밀어내고 벽으로 도망쳤다. 불이 켜져 있지 않은 어둑한 실내 안으로 밝은 노랑머리의 남자가 웃고 있었다. "기, 기온씨..." 아야세의 목소리가 애처로울 정도로 흔들렸다. "왜 그래, 어젯밤엔 그 아는 사람한테 무지하게 사랑받았나보지. 엄청 놀아나서 수척해진 얼굴도 볼만한데." 당당한 표정의 기온은 문에 기댄 채 히죽거렸다. "기온씨, 왜 여기에..." 중얼거리는 아야세의 목소리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어제 기온이 만졌던 손의 감촉과 함께 본능적인 경계신호가 아야세의 머리에 스쳐간다. "어설픈 AV보다 네 학교생활이 훨씬 자극적인 것 같아서, 재밌더라. 어쩌면 어제같은 죽이는 사건이 또 생길지도 모르고." 기온이 천천히 다가오자 겁을 먹은 아야세가 무의식적으로 벽쪽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이번에 어제 이상으로 형이 난리를 피우겠지만 말야, 어제도 죽다 살아났지, 아마." 기온의 말에 아야세는 뭔가 짚히는 것이 있었다. "기온씨, 당신..." 기온은 어제 가노가 아야세에게 화를 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당사자인 아야세와 가노만이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한사람. 수상한 편지와 함께 학교에서의 행태를 밀고한 자라면 가노의 분노와 그 뒤의 사태를 예상했을 것이다. "가노씨에게 얘기 했나요...? 어제 일, 설마...." 사진을 보낸 사람이 기온이었나,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두려움에 말로 내뱉지는 못했다. 기온이라면 어제 이다에게 당하던 아야세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을 수도 있다. 게다가 무엇보다, 이 학교 학생이 아닌 기온이 거리낌 없이 자료실까지 들어올 수 있다는 자체가 이상했다. 그러나 밀고자가 기온이라면 목적은 무엇일까. "아아, 사진 봤어? 잘 나왔지?" 아야세의 의혹을 간파한 듯 기온이 씨익 웃었다. 아야세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왜, 왜... 말 안하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랬지. 근데 그건 나도 만졌을 때 얘기지." 비열하게 웃는 기온의 모습에 아야세의 뺨이 달아올랐다. "그 사진땜에 아주 격렬했겠는데? 가노형의 독점욕을 자극시키기엔 더할 나위없이 안성맞춤이지." 은색 반지를 낀 기온의 손이 다가오자, 아야세는 거세게 뿌리쳤다. "뭐, 그런 정도로 헤어질거라면 아예 깨지는 편이 낫지. 형하고 헤어지면 나한테 올래?" 적개심을 나타내는 아야세에게 기온이 다시 손을 뻗어 아야세의 팔을 움켜쥐었다. 아야세의 등으로 한기가 내달렸다. "너를 모델로 할 꿈도 포기 못 하겠더라." "싫어요!" 단호히 거절하며 아야세는 기온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딱 잘라 말하지 말고, 이상한 짓은 시키지 않을테니까. 나랑 얘기좀 하자구." "저, 절대로 못해요." "아, 그래. 그럼 할 수 없군." 과장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던 기온이 다시 활짝 웃는다. 붙임성있는, 명랑한 표정을 지으면서 기온은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플로피디스켓을 꺼냈다. "죽이게 야한 사진, 학교 안에 뿌리고 다닐 수 밖에." 낮게 깔리는 기온의 말이 아야세의 가슴을 날카로운 흉기처럼 쑤셔댔다. 그리고 어제 보내온 적나라한 그림이 머리에 떠오르자, 아야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틀림없다. 역시 일련의 편지의 주인공은 기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왜? 어째서 기온이 그런 편지를 보낼 필요가 있었을까. 목이 콱 막혀와 말 한마디조차 내지 못하고 아야세는 눈만 동그랗게 떴다. 심한 충격에 눈앞이 캄캄해지기까지 했다. 이건 단순한 협박이 아니다. 암거래되는 비디오의 제작이나 그 유통에 관련된 기온이라면 언제든지 아야세를 몰래 촬영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일 것이다. "어때? 나랑 같이 갈래?" 아야세는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기온의 손에 끌려 복도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도움을 청하려고 했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소리를 내며 침을 삼키고 아야세는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학교는 그만두는 게 낫지 않겠어? 형하고 사는데 학력따윈 필요없잖아."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기온이 아야세를 돌아보며 비웃듯 내뱉는다. 모욕적인 기온의 말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라 발을 멈추었던 것이다. "목적이 뭐예요, 대체! 그런 사진하고 편지 보내는 이유가 도대체...!" "편지? 아아, 그거." 소리가 높아진 아야세에게 눈을 가늘게 뜬 기온이 피식거렸다. "아야세, 넌 너무 단순한 거 같애. 조금은 경계심이란 걸 갖는 게 좋다구. 이번 일도..." "아야세!" 순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아야세는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엘리베이터로 아야세를 따라온 것일까. 일층으로 내려가려는 아야세와 기온을 이층 로비에 서 있던 도키가와가 불러세웠다. "오, 저 녀석도 친구를 빙자한 애인인가?" 잡고 있던 기온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오히려 기온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야세, 복사 다했어?" 처음 보는 기온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도키가와가 계단을 내려왔다. "....복사는 아직. 기온씨, 이 손 놔요." 아야세가 작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뭘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하고 그래. 평소엔 음탕한 짓도 잘 하면서." "그만하세요!" 기온이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자 아야세는 다시 팔을 휘둘렀다. "무슨 짓이야. 당신, 그 손을 놓으라구. 아야세가 싫다잖아." 끼어들어온 도키가와에게 기온이 경계의 눈빛을 띄며 비꼰다. "이렇게 모범생처럼 보이는 녀석이 제일 재수없어. 머릿속으론 아야세에게 온간 짓 다하면서 친구인척 하다니." 지저분한 욕설을 내뱉는 기온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날카로운 비명이 이어졌다. 그것은 허를 찔린 기온과 당황한 도키가와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손목을 잡힌 아야세가 있는 힘껏 몸으로 기온을 밀쳐냈다. "야..." 좁은 계단 위에서 자신도 떨어질 각오를 하고 아야세는 기온에게 달려든 것이다. 갑작스런 아야세의 저항에 기온은 어리둥절했다. "위험해!" 균형을 잃고 굴러떨어지려는 아야세의 몸을 재빨리 도키가와가 팔을 뻗어 잡았다. 버티지 못한 기온만 계단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육체가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울리자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었다. 그다지 높지는 않았지만 잘못 부딪히면 큰 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아야세에게 기온을 걱정할 정신따윈 없었다. 절규하고픈 충동이 가슴에 차오를 뿐이다. 친구앞에서 모욕당했다는 동요와 그런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는 자신의 비참함이 한없이 서글퍼져 도키가와의 팔을 뿌리치고 아야세가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아야세!" 놀란 도키가와가 아야세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기온의 손에 든 휴대전화를 도키가와가 머뭇거리다 멀리 차버린다. 아야세는 자기자신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힘껏 달렸다. 돈밖에 없어 - 5 "좀 진정이 됐어?" 부드럽게 묻는 말에 아야세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다. 도키가와의 맨션은 그의 말대로 학교에서 바로 코닿을 거리에 있었다. "미안...강의 못 들어갔지." "아마 야마구치가 대리출석해 줬을 거야. 커피, 블랙으로 마시던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로 잔을 내오는 도키가와의 배려에 아야세는 그제서야 희미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사실은 혼자 있고 싶었지만 자신을 뒤쫓아와 위로해준 도키가와를 뿌리칠 수 없어 그의 맨션으로 오게 된 것이다. 도키가와의 맨션은 현관 바로 옆에 욕실과 화장실이 있고, 맞은편이 주방이다. 싱크대 옆으로 작은 식탁이 있었다. 아담하고 깔끔해서 남자 혼자 지내는 걸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다. "방이 안쪽에 또 있네. 참 넓다." 안쪽으로 보이는 검은 미닫이문에 시선을 두며 아야세가 말했다. 약간 멋쩍은 듯 눈썹을 찡그리며 도키가와가 머리를 긁적인다. "혼자 지내는 걸 얼마나 꿈꿨는데. 그래도 아직 부모님이 보태주고 있어서 폼은 안나지만....아야세 방도 넓지?" 아무렇지 않은 듯 바라보는 도키가와의 시선에 아야세가 난처한 듯 눈을 감았다. 아야세가 지내는 가노의 맨션은 분명 넓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일일이 말할 수는 없었다. 아야세는 애매하게 웃으며 커피를 한모금 입에 넣었다. ".....말하기 싫으면 됐어..... 근데 그 노랑머리 남자, 아는 사이야?" 식탁에 앉은 아야세의 등이 따끔거렸다. 침착을 잃지 않기 위해 차가운 냉커피를 목구멍으로 넘기고 아야세는 긴 한숨을 쉬었다. "응.....그냥. 잠깐." 건드리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마음과 누군가에게 털어놓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갈등을 일으켰다. 가노를 만나고부터 오늘까지 매일이 비현실적인 사건의 연속이다. 무엇보다도 돈에 의해 지배당하고, 그가 말하는 대로 육체관계를 맺어야하는 아야세와 가노의 관계야말로 정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분노하는 가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공포로 떨려온다. 수상한 편지와 몰래카메라, 그리고 밀도 등 이상한 행위로 아야세를 두렵게 한 범인이 기온이라는 사실도 아야세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아야세가 이렇듯 충격을 받았으니 가노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니, 그보다 기온은 어째서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일까. 설마 정말로 아야세를 감시하거나 육체에 대한 흥미 때문에 그랬다면 말이 안된다. 가노의 지배하에 있는 아야세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동시에 가노를 적으로 돌리는 것 밖엔 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육체에 그렇게 가치가 있다고 애초에 믿지도 않거니와 기온이 그렇게 어리석을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럼 기온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의문에 대한 답은 아무리 고민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대신 뇌리에 스치는 생각을 부정하기 위해 아야세는 반쯤 남아있던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기온은 교활하고 용의주도한 남자다. 만일 이렇게 친구 집으로 피신한 아야세의 행동을, 강의를 빼먹으며 다른 남자의 집으로 잠입한 것으로 각색하여 가노에게 보고할 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야세는 한번 가노의 신뢰를 저버린 경험이 있다. 가노는 쉽게 기온의 말을 믿을 것이다. 자신의 상상에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그렇다쳐도 도키가와에게까지 해가 미치게 된다. "도키가와, 커피 잘 마셨어......나 역시 그냥 집으로 갈래. 그러니 넌 학교에 가도록 해." 일어서려는 아야세를 걱정스러운 듯한 눈으로 도키가와가 말렸다. "아야세, 정말 안색이 안 좋은데. 어제 잠 못 잔 거 아냐?" 도키가와의 지적대로 어제 밤은 새벽녘까지 가노에게 시달리느라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어겨져 아야세는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아. 집에 가서 쉬면 돼." 사실, 이대로 가노의 집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도키가와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일어선 아야세는 현기증을 느끼고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머리가 무겁다. 수면부족 이상으로 온몸의 피로가 쌓여 생각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다. "것봐. 괜찮아?" 도키가와가 흔들리는 아야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무리라니까. 이런 몸으로 신주쿠까지 어떻게 가." 무겁게 짓눌리는 의식속에서 아야세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도키가와가 지금 무슨 말을 한거지. 신주쿠게 있는 가노의 맨션에서 지내는 것을 아야세는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학교에 등록되어 있는 주소나, 친구들이 아는 집은 아야세의 아파트뿐이다. "도키가와, 어떻게....." 어떻게 신주쿠에서 사는 것을 알고 있어. 그렇게 물으려던 입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수면부족이라고 하나 이렇게까지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리가 없다. 설마 방금 마신 커피에 약이라도 들어있던 것일까. 갑자기 무릎에서 힘이 빠져 바닥에 쓰러지는 아야세를 도키가와가 여전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떻게라니? 난 너에 대해선 뭐든지 다 알아." 도키가와의 눈이 예사롭지 않은 빛을 띄며 웃었다. 순간 아야세의 등으로 한기가 스친다. "좀 쉬다가." 도키가와가 다가오자 아야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안돼........" 일어나서 도키가와의 몸을 밀치려 했지만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멀어지는 의식속에서 아야세는 열심히 손을 흔들어대며 거부한다. "그 노랑머리....기온이라고 하지. 아야세가 녀석을 계단에서 밀어뜨릴 때 아주 멋지던걸." 기쁜 듯 중얼거리며 아야세의 몸을 도키가와가 안아올렸다. 몸집은 작지만 버둥거리는 아야세를 안고 간신히 잡고 구석방으로 통하는 문을 연다. ".......놔." 어두운 방안으로 끌려들어온 아야세의 눈이 갑자기 크게 벌어진다.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벽이나 천장 할 것 없이 사방팔방으로 크고 작은 사진들이 온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 거리고 딩쏘, 한여름의 수영장 등 사진에 찍힌 장소는 다양했다. 단 하나 항상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아야세임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럴수가........" 무의식적으로 아야세의 입에서 절망적인 신음이 새어나왔다. 벽옆에 있는 유리장식장안에 빈 물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제 학교에서 잃어버린 그 물통이다. 직감적으로 뭔가 느낀 동시에 참을 수 없는 구토가 목구멍으로 끓어올랐다. "너무 기뻐. 이걸 아야세에게 보여줄 수 있는 날이 오다니." 멀리서 울리는 도키가와의 말소리를 들으면서 아야세는 눈 앞이 흐려지면서 의식을 잃었다. 잡다한 소리가 희미하게 귀를 간지럽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눈을 누르고 있는 듯한, 저항하기 힘든 잠의 저편에서 아야세는 혼신의 힘으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맺혀있던 눈물로 시야가 흐려졌다. 눈에 비치는 실내를 아야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좁은 방에는 어울리지 않는 대형 모니터가 두 개 침대 옆에 놓여있었다. 그 모니터의 불빛이 어둑한 실내를 밝히고 있다. 그곳은 할머니를 여읜 후 혼자 지내던 아파트나, 생활감이 없는 가노의 맨션도 아니다. 깜짝 놀라 방안을 살펴보려던 아야세는 온 몸에 내달리는 야릇한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위로 끌어올려진 두 손의 근육이 찢겨나가듯 아파왔던 것이다. 피가 통하지 않아 차가워진 손끝을 움직이자 아야세는 자신이 광택나는 검은 가죽벨트로 손이 묶인 채 천장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창백해졌다. 두 발이 바닥에 닿기는 했지만 늘어난 근육에 고통이 가해졌다. 기억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여기는 도키가와의 맨션이다. "정신들었어? 손 안 아파?" 부드러운 목소리가 조용히 와 닿았다. 모니터옆에서 비디오 리모컨을 들고 있는 도키가와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야세는 고개를 들었다. 아야세의 표정 변화를 재미난 듯 바라보며 도키가와가 씨익 웃는다.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 아야세는 온 몸의 털이 거꾸로 솟는 듯 했다. "잘 찍혔지. 이래뵈도 연습 꽤 많이 했다고." 자랑스러운 듯 웃는 도키가와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오히려 아야세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커다란 화면 속 두 사람의 그림자가 서로 안고 있다. 어제 가노에게 보낸 장면 그대로 창백한 얼굴을 한 아야세가 남자의 입맞춤에 당황하면서도 비틀거리며 안기는 모습이다. "맘에 들어?" 도키가와가 다가와 뺨을 어루만지자 아야세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왜 이런 짓을....전부....기온씨하고 같이........" 몸을 비틀며 소리지르는 아야세의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생각보다 소리가 나오지 않자, 분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기온? 그런 놈은 상관없어. 물론 이다도 마찬가지고. 전부 나 혼자서 한거야." 모든 것이 귀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도키가와가 넋을 잃고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벽에 고정된 로프에 도키가와가 팔을 뻗자 아야세가 몸을 흔들었다. 로프는 천장에 매달린 도르래를 지나 아야세의 두 손을 묶은 벨트로 이어져 있었다. "엄청 힘들었다구. 이거 공사하는데. 이 집 천장은 약해서 말야. 기둥을 하나 더 넣었지. 물론 집주인한텐 아무 말 안하고." 아야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주절대면서 도키가와는 로프를 끌어당겨 고정시켰다. ".......욱." 천장의 도르래가 드르륵 움직이고 아야세의 몸이 위로 끌어올라간다. ".......앗." 바닥에 닿던 발이 공중에 떠오르자, 아야세는 발끝으로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벨트가 손목살을 파고들었고 두 팔의 근육이 팽창되어 온 몸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왜........" 아야세의 시선을 의식한 도키가와가 미소를 지었다. "안심해. 다치게는 안 할테니까." 예리한 군용나이프 끝으로 하얀 셔츠의 단추를 떼어내자 아야세의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만둬......." 핑, 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단추가 떨어져 나갔다. 차례차례 단추가 떨어져나가고 옷 사이로 투명한 아야세의 가슴이 드러났다. 매끄러운 피부는 식은땀을 흘리며 희미하게 떨고 있다. 도키가와는 흥분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겁먹지마, 아야세. 전부 보고싶어. 아야세, 너를 몽땅..." 뜨거운 숨을 토하며 도키가와의 손이 성급하게 아야세의 바지로 다가왔다. "안........" 허리를 비틀며 거부했지만 매달린 자세로는 어쩌지 못하고 속옷채로 바지가 벗겨진다. 적어도 자유로운 다리를 이용해 도키가와로부터 피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흉기를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제정신도 아닌 것 같았다. 약으로 인해 마비된 손발을 움직일 수도, 도키가와의 시선으로부터 하체를 숨길 수도 없게 되자 아야세의 뺨이 치욕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보지.......마...." 나이프를 손에 든 채 무릎을 꿇고 아야세의 다리를 들여다보는 도키가와의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아야세는 필사적으로 몸을 흔들어보지만 소용없었다. 도키가와의 손이 아야세의 다리에 와 닿았다. "으........." 천천히 쓰다듬던 도키가와가 여윈 아야세의 다리를 움켜쥐자 아야세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녹아들 듯 순백의 살에 입을 맞추며 도키가와가 가쁜숨을 내쉰다. 땀이 밴 도키가와의 손이 사랑스럽게 몇 번이고 어루만지자 아야세는 성감보다도 혐오감을 느껴 몸을 떨었다. "상상한 대로야.....아야세의 피부는 너무 아름다워. 인형같아." 끈적거리는 도키가와의 눈빛에 강렬한 빛이 스쳤다. ".......웃." 갑자기 다리가 들어올려지자 아야세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나온다. 한 발로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서자, 체중을 견디지 못한 로프가 위로 올려졌다. "...이거, 그놈이 한 짓이지?" 적개심을 담은 도키가와의 손이 아야세의 다리에 새겨진 혈흔을 힘껏 누르며 내뱉는다. 다리뿐이 아니다. 야윈 옆구리나, 엉덩이, 무릎뒤쪽까지 아야세의 몸에는 가노의 흔적이 무수히 새겨져 있었다. "용서할 수 없어... 내가 얼마나 소중히 해 왔는데." 시선을 돌린 아야세의 머리를 도키가와가 거칠게 잡아당겼다. "...아..."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는 아야세를 내려다보며, 도키가와는 나이프를 다시 바로 잡았다. "불쌍한 아야세... 이렇게 더럽혀지다니." 머리를 잡아당기는 잔혹함 뒤에 오싹할 정도의 상냥한 말이 흘러 나오자, 아야세는 입술을 깨물고 고래를 돌렸다. "헉..." 고집스런 아야세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등뒤로 돌린 도키가와의 손이 아야세를 그러쥔다. 날카로운 손톱이 살을 파고들자, 아야세는 구역질이 넘어와 머리를 흔들어댔다. "내가 예쁘게 해줄게... 그래서 우리 사진 아주 많이 찍자." 좌우로 벌어진 다리사이를 도키가와가 바라보며 속삭이듯 지껄여댄다. 미쳐버릴 듯한 모욕감에 젖은 아야세는 다리 안쪽에 더해지는 따스한 자극에 비명을 질렀다. "그만! 무슨 짓이야..." 드러난 다리 안쪽을 도키가와가 핥기 시작했다. "그만..! 싫...어." "아야세, 정말 예뻐... 몸도 민감하고. ... 근데 그런 더러운 놈한테 당하다니, 너무해." 필사적으로 허리를 피하려고 몸부림치는 아야세의 눈 안으로 엉덩이를 껴안고 있는 도키가와의 모습이 들어왔다. "움직이지마. 그놈이 더럽힌 곳 전부 깨끗하게 해줄게." 낼름 혀를 내밀며 도키가와가 아야세의 배를 어루만진다. "몸 안까지 전부 말야. 내가 씻어줄게." 입술을 일그러트리며 웃는 도가와의 농담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무시무시한 말에 아야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도키가와가 아야세의 엉덩이에 입을 맞췄다. "아야세... 아야세... 괴로웠지. 그런 사채업자랑 지내는 거...아야세, 얼마나 싫었을까. 당연하지. 녀석은 돈에 굶주린 더러운 하이에나같은 놈인걸.." 중얼거리는 도키가와의 말에, 강렬한 분노가 치밀어, 팔의 통증에도 불구하고, 아야세는 왼발로 도키가와의 배를 후려쳐 버렸다. "가노씨를.. 함부로 말.. 하지마!" 제대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말을 힘껏 내뱉었다. "가노씨..는..., 가노씨... 일은...." "닥쳐!" 도키가와가 손을 쳐들어 휘두르자, 아야세의 말이 끊겨버렸다. "욱..." 거세게 뺨을 얻어맞자, 고통이 머리안까지 울려댔다. 연거푸 두 번 더 이어지는 폭력으로 입안에 피가 고였다. "널 구해준 건 나야, 아야세! 그 놈이 있는 곳은 지옥이었잖아!" 울부짖는 도키가와를 향해 턱을 치켜들고 경멸하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아야세가 가노와의 생활을 힘들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도키가와가 가노를 욕할 권리는 없다. 아야세를 돈으로 구속하고, 억지로 육체관계를 강요하면서도 가노는 결코 폭력으로 아야세를 굴복시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야세를 일절 무시하고, 일방적인 감정을 강요하는 것을 가노는 두려워한 것이 아닐까. 비록 아야세에게 하는 행위가 똑같다고 해도 도키가와와 가노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뭐야, 그 눈은... 잠자코 노려보는 아야세의 눈을 보자, 도키가와의 목소리에 낭패가 깔린다. 그러나 보복이라도 하듯 바로 그의 손이 아야세의 엉덩이를 잡아 쥐었다. "그 놈한테 몸뿐아니라 마음까지 더럽혀졌구나, 아야세..." 다리안쪽에 손을 비집어 넣자, 혼탁해가던 의식이 고통으로 선명하게 돌아왔다. "악...!' 아야세의 엉덩이를 잡고 손에 든 나이프를 집요하게 움직이는 도키가와의 얼굴을 이미 친구가 아니다. 자기 멋대로 욕망에 취한 추한 도키가와이 얼굴을 아야세는 멀어지는 의식속에서도 쏘아보고 있었다.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가운데 오직 한 사람의 얼굴만이 떠오른다. 도키가와의 배신을 책망하기보다, 오히려 지금 순간, 아야세의 머리를 가득 메운 것은 자신을 지배하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가노의 걱정을 무시하고, 거짓말하고 속여온 자신이 더할 나위없이 후회스러웠다. 이렇게 자신의 힘으로 처리하지 못할 사태를 초래한 것은 자업자득이다. 자신이 미약함과 가노에게 미안한 마음에, 살이 찢기는 충격보다도 왼쪽 가슴이 더 저리게 아파왔다. "...아..." 조금이나마 도키가와의 손을 피하려고 발버둥치는 아야세의 귓전에 날카로운 물체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야세, 아야세..." 일순 도키가와가 미간을 찡그렸지만, 다시 아야세의 다리로 관심을 돌리고는 거칠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때 멀리서 금속 문을 따는 소리로 들린 것은 아야세의 간절한 소망으로 인한 환청이었을까. 다시 귀를 기울려보았지만 거칠어진 두 사람의 호흡만이 실내를 메웠을 뿐이다. "..앗." 끓어오르는 절망에 눈을 뜬 아야세는 다음 순간 들리는 굉음에 몸이 흔들렸다. 아야세뿐만이 아니다. 아야세의 몸을 연신 빨아대던 도키가와도 다시 두터운 철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커지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설마, 하는 생각과 안타까운 기대로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우..." 방안을 걸어다니는 난폭한 발소리. 옷이 벗겨진 채 발끝으로 간신히 천장에 매달려있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아야세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문이 열리는 순간을 바라보았다. "...아..." 폭발할 듯한 분노에 휘감긴 장신의 남자가 방에 들어선다. 절대적인 존재감과 위압감.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남자의 손에서 커다란 팬치가 떨어졌다. "가노..." 돈밖에 없어 - 6 알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자신은 가노에게 경멸당하고 버림받아도 당연했다. 그러나 자신의 육체에 대한 부끄러움보다도 본능적인 안도감이 앞서, 아야세는 애처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아야세가 신세를 많이 진 것 같군."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웃고 있다. 살을 에일 듯한 냉정함을 느끼면서도 아야세는 가노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너..." 도키가와의 목소리에 동요가 깃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재빨리 나이프를 꺼낸 도키가와이 팔이 등뒤에서 아야세의 턱을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침대 위에 놓여져 있던 휴대전화를 도키가와가 조작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다가오지마! 다가오면 경찰에 신고할거다." 생각지도 못한 도키가와이 협박에 아야세는 귀를 의심했다. "너 이자식,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왔겠다." 아야세를 누르고 있던 손으로 가슴을 더듬으며 도키가와가 입술을 찌그러트렸다. "기물파손에, 가택침입죄다. 너 전과가 꽤 있지 아마? 경찰한테 넘어가면 그날로 교도소행이라구." "그런..., 도키가와 네가 한 짓은...?" 고개를 흔들며, 소리를 지른 아야세의 귓불을 끝적거리는 혀로 핥았다. "괜찮아. 아야세, 말했잖아. 내가 널 구해주겠다고." 아야세 몸에 소름이 돋았다. 웃음을 머금고 있는 도키가와의 말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경찰을 부르기 싫으면 빨리 꺼져. 난 경찰따위 무섭지..." 도키가와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야세의 귓가에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욱..." 구부러진 도키가와이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갑자기 로프가 풀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야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조심스레 쳐다본 바닥에는 코를 손으로 잡은 도키가와가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는 아야세의 허리를 가노가 손을 뻗어 잡아당긴다. "가..." 순간 창백해진 아야세를 가노의 예리한 눈이 내려다보았다. 아야세의 입술에 난 혈흔을 보며 가노의 두 눈이 괴로운 빛을 띄었다. "돌아가자, 아야세." 돌아가자는 가노의 말에 아야세는 가슴 가득 안도감이 차올랐다. 그러나 바닥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도키가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 때, 마디 굵은 손이 다가와 아야세의 얼굴을 감쌌다. 너무도 따스한 가노의 체온이 느껴졌다. "이 녀석은 놔둬. 뒤는 기온이 처리할테니." 기온이라는 말에 가노가 씁쓰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고 있어. 기온녀석도 반쯤 죽여놓을 거야." "무슨..." "그 자식, 네 신변을 보호하라고 붙여놨더니, 도움은커녕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섬뜩한 빛을 담은 가노의 눈빛에 공포를 느끼며 아야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가노는 아야세와 기온사이에 있었던 접촉을 알고 있는 것일까. 말을 잃은 아야세는 침대맞은편으로 도키가와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전율했다. 짧게 호흡을 내쉰 가노가 도키가와의 멱살을 잡아 일으킨다. "...웃."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손을 쳐든 가노를 향해 아야세가 소리를 질렀다. "그, 그만하세요!" 노골적인 분노의 빛을 나타내는 가노가 아야세를 쏘아보았다. "방해 하지마라."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가노의 차가운 목소리도 아랑곳 하지 않고 아야세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소리쳤다. "안돼요, 더 이상 다치게 해선." 가노에게 죄를 범하게 해선 안된다.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아야세를 보고, 멱살을 잡힌 도키가와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거봐, 아야세는 날 좋아하잖아." 웃어대는 도키가와의 몸을 가노가 거칠게 내팽개쳤다. 데굴데굴 구르며 넘어진 도키가와의 눈앞에서 가노가 아야세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쓴 담배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웃." 가노가 입맞춤을 하자 야릇한 감각이 입안으로 전해졌다. "아......." 가노의 혀가 안달하듯 입술을 핥자, 의지와는 다르게 비음이 섞인 신음이 새어나왔다. 도키가와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지게 되어 몸을 피하려고 움직였지만 가노의 힘은 강했다. 발끝으로 지탱하는 몸이 힘들어진다. "음....아..." 거칠게 입안을 비집고 들어와 위축되어 있는 아야세의 혀를 끌어당겼다. "그만해!" 도키가와가 절박하게 비명을 질렀지만 허사였다. 가노는 도키가와를 한 쪽 눈으로 힐끔 쳐다보고는 씨익 웃었다. "....하아..." 입안에 고인 타액을 가노가 거세게 빨아들였다. 익숙한 자극에 짜릿한 충동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뜨거운 열을 생생하게 주고받는 가노와의 입맞춤에 아야세는 눈물이 글썽거린다. 이건....이 느낌은....결코 혐오감이 아니었다. "....후우..." 커다란 손이 천천히 등과 둔부를 쓰다듬는다. "아야세는 내 것이다." 탈진한 아야세의 몸을 가슴에 안고 가노가 말했다. 이 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우월한 목소리에 도키가와도 주눅이 든 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손목을 구속하던 벨트를 풀고, 고통으로 마비된 몸을 가노가 가슴으로 일으켜 세웠다. "이,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난 경찰따윈 안 무서워." 문으로 향하는 가노의 등에 대고 피를 흘리면서도 도키가와가 괴성을 질렀다. "하긴 유치한 협박편지나 몰래카메라, 변태행위는 잡기도 힘들고 죄도 가볍지." "그렇다. 잘 알고 있군. 그러니까 앞으로..." "그러나 도키가와. 너 경찰보다 더 무서운 게 뭔줄 아나?" 걸음을 멈추고 히죽거리고 웃는 가노의 왼손이 현관문을 잡았다. "무, 무슨 개떡같은 소리냐. 난...." 비웃으려하던 도키가와의 목소리가 다음 순간 찢어지는 듯한 비명으로 바뀌는 것이 들려왔다. "...무!" 가노가 음울한 미소를 지으며 문밖에 서 있는 여러명의 남자들에게 눈짓을 했다. 한눈에 봐도 모두 깍두기 머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맨뒤에 서 있는 거구의 남자는 낯이 익었다. 그저께 밤, 반라인 채로 길바닥에서 가노에게 혼줄이 났던 그 남자다. "도키가와. 애송이치고 이 방에 기재들을 아주 잘 갖춰놨군 그래. 게다가 아야세의 미행 조사하는데 흥신소에 부탁하니까 돈이 꽤 많이 들었지?" 가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야세는 쉽게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도키가와의 안색은 순간 흙빛으로 변해갔다. "이 녀석이지. 학생주제에 자네들 속이고 토낀 놈." 가노가 턱으로 가리키자 문 밖에 서 있던 남자들이 능글맞게 웃었다. "고마워. 가노...덕분에 겨우 잡았어." 뚱뚱한 배를 출렁거리며 남자가 과장스럽게 두 손을 비벼댔다. 그 모습이 꽤나 우스꽝스러웠지만 도키가와에게는 이미 웃을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럴수가...어째서....이렇게 쉽게...." 망연히 중얼거리는 도키가와에게 담배를 배어 문 가노가 냉정한 시선을 던졌다. "사업상 온간 정보를 듣게 되지. 경찰운운하기 전에 빚부터 청산하지 않으면 목숨이 남아나지 않을걸.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란 걸 잊은 모양이군." 말을 잃고 멍하니 눈을 뜨고 있는 도키가와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뒤를 부탁한다는 가노의 신호에 남자들이 일제히 방안으로 몰려들어갔다. 그리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담배에 불을 붙인 가노의 등뒤로 문이 닫혔다. 가노의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좋아진 아야세는 잠 속으로 빠져들며 달콤한 숨을 내쉬었다. "정말, 진짜로 잘못했어." 물속에 잠겨 차단된 듯 희미하게 낯익은 소리가 들렸다. "형한테서 아야세의 호위임무를 맡았는데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그치만 아야세가 날 계단으로 떨어뜨릴 줄은 정말 꿈에도...." "이제 됐어. 그보다 기온, 너 나한테 보고할 게 아직 남은 것 같은데?" 냉담한 기온의 말에 왼팔에 기브스를 한 기온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아...그, 그건. 저기 말야, 사실 녀석을 유인하려고 그냥. 아야세한테 농담으로...." 변명에 궁색해진 기온에게 가노가 눈을 부릅떴다.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발뺌할 수 없는 사태를 파악했는지 기온이 순순히 입을 다물고 하얀 붕대를 오른손으로 가리켰다. "뼈가 부러지면서까지 나한테 연락을 한 건 잘했다....하지만 기온. 잘 알아둬라." 조용히, 그러나 몸 안의 내장까지 얼어붙을 듯한 분노를 가득 품은 목소리로 가노가 말했다. 아직까지 잠들어 있는 아야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눈치채고 가노는 기온으 뺨을 후려쳤다. 기온의 몸이 굳어졌다. "앞으로 한 번만 더 내가 없는 곳에서 아야세에게 집적거리면 죽여버릴테다. 두 번은 없다. 알았어?" 간신히 용서의 말이 떨어지자 기온의 표정이 밝게 빛났다. "그, 그럼요! 훌륭하신 가노님을 거슬릴 정도로 바보 아니예요. 저! 그럼, 오늘은 이만! 아야세, 몸 조심해!" 황급히 일어난 기온이 문쪽으로 뛰어갔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났는지 기온이 발을 멈췄다. "....형하고 찢어지면 그땐 아야세한테 집적거려도 돼지?" 농담같지도 않은 기온의 말을 듣자마자 가노의 손이 침대 옆 꽃병으로 향하더니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가노는 손에 잡은 꽃병을 기온에게 던져버렸다. 문밖에서 기온의 미안하다는 소리가 들렸다. "....저걸 죽여, 말어." 씩씩거리는 가노의 목소리에 아까보다 크게 아야세의 속눈썹이 떨린다. 수면위로 떠오른 것처럼 의식이 선명해졌다. 가노가 목을 어루만지자 아야세가 반짝 눈을 떴다. "깼어?" 침대 위에 누워 머뭇거리며 바라보는 가노를 올려다 보았다. "...아픈데....없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어오는 가노에게 아야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몸을 쓰다듬어 주는 부드러움과 더듬거리는 말이 기묘하게 부조화를 이룬다. 자꾸 감기는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침대 옆에 서 있는 가노를 쳐다보았다. 몸에 남아 있는 약 때문인지 지독한 졸음이 전신을 휘감아 도키가와의 집에서 맨션까지 돌아오는 차안에서조차, 아야세는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런 새끼 집에 넙죽넙죽 가기나 하고." 기온에게 했을 때와는 다르게 씁쓰름한 표정으로 가노가 미간을 좁혔다. 거칠고 커다란 손으로 가녀린 뺨을 부드럽게 감싸자 아야세의 가슴이 전율했다. "기온녀석은 전혀 쓸모가 없어. 너한테도 당하고, 도키가와도 놓치고....내가 조금만 늦게 갔더라면..." "난....!"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아야세 자신이 놀랐다. 그것은 가노도 마찬가지인 듯 예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떠오르는 생각이 제대로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가노에게 해야만 하는 말이 아주 많이 있는데도 말해야 할 것도, 말하고 싶은 것도 소리로 내는 것이 어려웠다. 긴 한숨을 내쉬며 가노가 이마를 아야세에게 가져다 댄다. 생각외로 서툰 그 행동에 아야세는 자신이 울고 있는 사실을 알았다. "....욱..." 가는 어깨가 떨린다. 도키가와에게 당했던 공포가 생생히 가슴속에 떠오르자 아야세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가노에게 몸을 기대며, 낯익은 담배냄새를 맡으며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씻을 수 없는 죄악감이 몰려든다. "가노씨, 저...." "그만." 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가노의 상체가 아야세에게 다가왔다. 힘을 잃고 떨어지는 가노의 앞머리가 따갑게 아야세의 뺨을 찔렀다. "....미안." 회한을 동반한 가노의 사과에 아야세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가노의 손이 귀중품을 다루듯 담요 위에서 아야세의 몸을 더듬다가 뺨으로 이동했다. "기온한테 맡기는게 아니었어. 내가 계속 널 곁에 두었더라면...." 아야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은 항상 가노에게 괴로운 생각만 하게 하는 건 아닐까. 사과를 해야하는 것도, 가노를 괴롭게 한 것도, 전부 아야세가 할 일이었다. "들어....보세요. 전, 어제....학교에서...."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이 속눈썹을 적셨다. "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던 가노는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욱." 피를 토할 것 같은 심정으로 말을 이으려는 입술위로 갑자기 가노의 뜨거운 입술이 덮쳐오자 아야세는 숨이 막혔다. 조금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노가 뭔가 말했지만 그것을 듣기도 전에 다시 깊게 두 입술이 겹쳐졌다. 가노의 혀가 입술을 한번 빨고는 아야세의 입 속으로 들어온다. 소름이 돋을 정도의 짜릿함을 느끼며 아야세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런 아야세의 반응을 거절하는 뜻으로 오해했는지 가노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아야세...." 낮은 가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널 놓치지 않을거야." 축축한 입김이 아야세의 입술과 목덜미를 핥았다. "....음." 숨이 막힐 정도로 안긴 아야세는 눈물을 머금으며 가노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눈빛이 가까이 교차한다. 그곳에 있는 가노는 고압적인 자세의 가노가 아니었다. 애절한 빛을 담은 강렬한 눈으로 아야세를 쳐다본다. 도키가와에게 했든 무자비하고 냉혹한 모습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넌 내거야." 평소라면 두려웠을 그 말이 이상할 정도의 쾌감과 함께 아야세의 가슴에 녹아내렸다. 아야세는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가노의 목을 껴안았다. 돈밖에 없어 - 7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찡그리고, 아야세는 차가운 커피를 잔에 부었다. 이 맨션의 좋은 점은 방의 크기이상으로 창이 크고 많다는 점이다. 천연광을 한껏 받아 환한 방이 아야세는 제일 좋았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가을이 올 것이다. 어느덧 여름 집중강의가 끝날 무렵이 되자 아야세는 복잡한 심정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키가와의 집에서 수면제를 먹은 사건으로부터, 벌써 이틀이 지났다. 가노의 말에 의하면 도키가와는 이곳저곳 만들어 놓은 빚이 상당하다고 했다. 학교를 그만두게 될 것 같다는 말을 할 때의 가노의 냉담한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다도 그 이후로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에게 저지른 행위를 생각하면 동정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러나 도키가와가 학교를 그만둔다고 하자 아야세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자신이 이렇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타인과의 접촉이 희박한 환경에서 자란 아야세는 누군가, 혹은 자기자신조차도 격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적이 적었다. 그런 아야세에게 자신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관망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잔 속에 담긴 얼음이 녹아 경쾌한 소리를 냈다. 고민은 딱히 도키가와의 문제만이 아니다. 매일 아야세에게 새로운 격정의 숨을 불어넣는 남자의 존재는 당혹스럽고 남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다. 잔을 두 개 준비하고, 방금 프라이팬에서 꺼낸 후르츠 팬케이크를 새하얀 접시에 옮겨 담았다. 귀여운 토끼가 그려진 새 앞치마를 두르고 아야세는 주방을 나왔다. 앞치마와 대조적으로, 역시 새로운 주방용 장갑과 슬리퍼가 기능적인 주방에 화려함을 더했다. "가노씨, 간식 드실래요?" 커다란 쟁반을 조심스레 들고 아야세는 거실에 있는 가노에게 물었다. 오늘은 드물게 가노가 쉬는 날이다. 정기휴일이 없는 관계로, 오늘도 일단은 사무실에 직원이 한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가노도 금방이라도 나가야 될 지도 모르지만 다행히 호출 전화가 없어 가노는 느긋하게 거실 소파에 누워 있다. 사장이라는 직함으로 인해 날마다 양복을 입던 가노도 오늘만큼은 청바지에 셔츠 차림으로 쉬고 있었다. 쉬고 있다기보다, 오히려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배를 채운 괴수처럼 긴 소파에 몸을 묻고 가노는 아침부터 텔레비전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가노씨?"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누워있는 가노를 아야세가 들여다본다. "어?" 가노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아야세를 돌아보았다. 일에 쫓기는 가노는 예민하고 남자로서 멋져 보이지만 이렇게 긴장이 풀린 표정의 가노도 왠지 따뜻해 보인다. "팬케이크를 만들었는데, 드실래요?" 쟁반에서 달콤한 벌꿀과 버터향기가 풍기자 가노가 짐승처럼 코를 킁킁거렸다. 그리고나서 크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더니, 귀찮은 듯 얼굴을 찡그렸다. "....기온이 보내준 거구나. 그 자식. 이런 걸로 때울려는 건 아니겠지." 팬케이크에 들어간 작은 과일을 가노가 노려보자 아야세는 피식 웃었다. 가노가 말한대로 블루베리와 오렌지는 어제 기온이 보내준 것이다. 과일뿐만이 아니라 아야세가 입고 있는 앞치마도 기온이 보내준 것이었다. "아야세. 내가 없을 땐 그녀석하고 절대 말도 하지마." 벌써 셀 수도 없을 만큼 한 말을 가노가 다시 반복한다. "그런 멍청이도 아직은 이용가치가 있어." 현재 기온은 부상으로 인해 신주쿠의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 부상을 입힌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아야세다. 그래서인지 도키가와와 이다처럼 기온과도 얼굴을 맞대면 괴로워진다. 이다와 아야세의 모습을 폴라로이드 사진에 담은 것은 도키가와가 아니라 기온이었다. 가노의 지시로 학교에서 아야세의 신변을 살피던 중이었으니 그것도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서할 수도 없었지만 상처를 나게 한 사실에는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래요? 맛없어요....?" 뜨끈뜨끈한 팬케이크를 한입 베어물고는 포크를 접시에 내려놓는 가노에게 아야세가 조심스레 물었다. 대충 눈대중으로 만들어서 가노의 입에 맞지 않는 걸까. 당황하며 직접 맛을 확인하려고 자신의 접시를 드는 순간, 가노가 팬케이크를 꽂은 포크를 아야세의 눈앞에 갖다댔다. 먹어보라는 듯 포크를 흔들어 아야세는 살짝 입을 벌렸다. ".......음." 따뜻한 버터향과 벌꿀의 달콤함이 입안 가득 전해졌다. 설탕을 넣지 않아 조금 덜 단 듯 했지만 블루베리의 새콤한 맛이 느껴져 나름대로 괜찮은 맛이었다. 뭐가 맘에 안 드는 걸까, 하고 눈썹을 찡그리는 아야세의 입술에 가노가 손을 가져갔다. 커다란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에 묻은 꿀을 닦아내자 아야세가 놀라 가노를 쳐다보았다. 아야세의 놀란 눈을 보며 가노의 혀가 손가락을 핥아온다. "달아." 불쑥 내뱉는 가노의 말에 아야세는 순간 알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무슨..." 당황하는 아야세의 머리를 가노가 뒤에서 잡고 끌어당겼다. 저항할 새도 없이 마치 강아지처럼 아야세의 입술을 낼름 핥은 것이었다. "역시 달아." 거듭되는 가노의 말에 아야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가노의 팔에서 벗어났다. "....무슨.... 가노씨, 무슨 말......." "....그러니까, 달다고." 무심히 접시를 가리키자 아야세는 겨우 납득이 간다는 듯 가노를 쳐다보았다. "....혹시, 가노씨. 단 거 못먹어요...?" 문득 아야세의 입에서 새삼스런 질문이 흘러나왔다. 날마다 보는 가노의 식성은 대담무쌍해서 좋고 싫은 음식을 묻은 적이 없었다. 고기면 고기, 생선이면 생선, 양식이든 일식이든 가노는 아무 말없이 먹어치웠던 것이다. "네가 손으로 내 입까지 가져오면 먹을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가노의 말에 아야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렇게까지 해서 먹으라고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미안해요. 난 전혀 모르고.... 뭐 다른거 만들어 올까요?" 그래도 결국 순순히 사과를 하고 마는 아야세의 입으로 다시 가노의 손이 와 닿는다. "그러니까 먹여주면 먹는다니까." 아무래도 진심인 듯한 가노의 말에 난처해진 아야세는 뭔가 도움이 될만한 것이 없을까 하고 소파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노가 누워 있던 소파 위에는 사진 몇 장이 흐트러져 있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쉬는 날까지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아야세의 시선을 눈치챈 가노가 아무렇지 않게 사진 한 장을 들어 보여주었다. "볼래?" 순수하게 흥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화제가 바뀐 것이 반가워 아야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노가 손에 든 것은 로커앞에서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아야세의 사진이었다. 탈의실인 것 같았지만 대학에서는 체육 수업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고교시절의 사진.....? "어떻게 된거예요, 이 사진...." 솔직하게 묻는 아야세를 쳐다보며 팬케이크 접시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가노가 방긋 웃으며 포크를 집어들었다. "이번 보수 대신으로 내가 도키가와한테서 몰수한거야." 예기치 않은 대답에 아야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네....?" "내가 거기까지 출동한 비용을 받아내려고 했는데. 그 자식 돈은 땡전한푼 없더군. 집에 있던 가전제품도 다 팔아봐야 몇 푼 안되고 해서..." 주절주절 설명하며 직접 팬케이크를 조각조각 작게 자른 가노가 희미하게 눈썹을 떨더니 가장 작은 조각을 입에 넣고 삼키는 것이다. "아...무리하게 먹지 말아요.... 아니, 참 그것보다 난 도키가와한테 몰수했다는 말 처음 들어요. 설마....이거 도키가와의 방에 있던 사진아니....?" 어이가 없어하는 아야세를 보며 가노는 꿀이 묻은 입술을 찡그린 얼굴로 핥아먹었따. "자식이 고등학교 때부터 널 찍은 모양이야. 이거 봐, 너 머리 짧으니까 되게 귀여운데." 귀엽다는 말이 야유인 줄은 알지만 어쨌든 아야세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버, 버려요! 그딴 거!" 멀어져가는 의식속에서 본 도키가와의 방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아야세는 사진을 뺏으려고 손을 뻗었다. 노출은 되지 않았지만 탈의실안에서까지 몰래카메라로 촬영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졌다. 더구나 그것에 그치지 않고, 도키가와는 더욱 야한사진도 찍었을 터였다. "무슨 소리야. 그건 내가 뺏은거라구. .... 아님 아야세 네가 이걸 나한테 사도 돼지." 가노가 짖궂게 웃으며 말하자 아야세는 불길한 예감에 경계심을 나타냈다. "전 돈 없어요." "걱정하지마, 내가 벌게 해줄테니까." 예상대로 가장 두려워하던 대답이 나오자 아야세는 울상이 되었다. "....그런...." "사진 한 장 당 백만엔, 어때?" 눈앞에 가노와 껴안고 입맞추는 사진을 보여주자 아야세는 당황하며 소리를 질렀다. "너, 너무 비싸요! 아무리 그래도...." 포크를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야세에게 가노가 재미난 듯 대꾸한다. "할 수 없지. 그럼 10분의 1로 깍아줄게. 십만 어때?" 사진 한 장이 십만엔. 그것도 터무니 없었지만 자신의 야한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본 이상, 아야세는 투덜거리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알, 알았어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가노는 마냥 신나했다. "계약성립이다. 큰 박스 안에 든 게 세 상자쯤 되지. 아마? 아직 아래 사무실에 있는데 그것도 너한테 팔게." 순간 아야세는 가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상자 하나에 적어도 4백매 이상은 되는 것 같더라. 그런게 세상자면 천2백장. 한 장당 10만엔이면 1억 2천만엔이군. 나랑 한번 잘때마다 50만이라고 해도 적어도 2백4십번은 자야돼." 아야세의 손에서 들고 있던 포크가 떨어졌다.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린 채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아야세를 쳐다보며 가노는 다시 팬케이크를 꿀꺽 삼켰다. "4백장도 대충 센거니까 자세한 건 내일 다시 알려줄게." 명랑한 웃음과 함께 가볍게 어깨를 치자 아야세는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1억2천만엔, 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그 도깨비같은 숫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현실감이 없다. "안심해. 이번엔 이자 없으니까." 그리고 팬케이크도 달아서 그렇지 맛이 없는건 아니야, 하고 덧붙이는 가노는 접시끝을 손톱으로 가볍게 두들겼다. 테이블에 놓인 잔 속에서 찰랑, 하는 얼음소리마저 슬프게 들렸다. "가노씨는 왜 그렇게...." 뭐라고 불평이라도 하려는 아야세의 머리를 가노가 천천히 쓰다듬었다. 똑바로 가노를 쳐다보자 목구멍까지 올라오던 말이 가슴속에서 그만 녹아버렸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겸연쩍어지자 괜히 분한 마음에 아야세는 눈을 감았다.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샐쭉 내밀고 눈을 감은 아야세의 코끝을 가노가 이빨로 살짝 물었다. "왜 그런지 다 알면서." 달콤한 벌꿀과 버터향기가 코 끝에 진동했다. 아야세는 달콤한 가노의 입술을 얄미운 듯 째려보았다. 돈밖에 없어 - 8 작열하는 한 여름의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다. 하지만 이런 숨막히는 더위도 에어컨이 쌩쌩 돌아가는 이 실내에는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신주쿠 중심가에 위치한 이 15층 건물 맨션의 맨꼭대기층은 오늘도 시원하게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도시열로 가득 찬 신주쿠 거리에는 바람 한 점 없다. 그렇게 정지한 듯 움직이지 않는 창 밖을 아야세는 커다란 가죽소파에 걸터앉아 바라보고 있다. 한여름인데도 아야세의 얼굴은 조금도 그을리지 않았다. 혼혈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인지 원래 그다지 햇볕에 잘 타지 않는 체질인 모양이다. 창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 때문에 아야세는 긴 눈썹을 감았다. "아--, 바다에 놀러가고 싶구나." 그때 맞은편 대각선 방향에서 심드렁한 한탄이 들려왔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면서 소메야가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있었다. 화면에는 수영복차림을 한 남녀로 붐비는 해변을 비추고 있다. "정말 너무 더워 못살겠어. 근데 바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널따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소메야는 귀찮은 듯 머리를 쓸어올리며 투덜댄다. 덥다는 말과는 반대로 소메야의 얼굴은 차갑고 메마른 아름다움이 흐르고 있었다. 신주쿠에서 술집을 경영하는 소메야는 언제나 화려한 의상을 입고 정성스레 화장을 한다. 이 앞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 남자라는 사실을 아는 지금도 아야세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의 가게가 가노의 집에서 가까운 탓에 소메야는 수시로 아야세를 찾아오곤 했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화술이 뛰어난 소메야는 외출의 기회가 없는 아야세에게 심심찮은 말상대가 되어주곤 했던 것이다. 평소에는 기모노를 자주입던 소메야가 오늘은 왠일로 양장차림이다. 하얀 브라우스에 넉넉한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원피스의 디자인 자체가 평소 소메야의 취향보다는 약간 소녀풍이다. 그러나 검은 처네 프린트된 꽃무늬가 소메야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역시 기모노를 입을걸. 양장은 더워." 가슴에 달고 있는 하얀 코사지를 만지작거리며 소메야는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 소메야씨가 양장을 다 입고, 왠일이예요." 그 말에 맞장구쳐주며 아야세는 테이블위에서 차가운 잔을 들어 올렸다. 아이스티에 둥둥 떠 있는 얼음이 찰랑 하며 경쾌한 소리를 낸다. 화려한 소메야에 비해 아야세는 학생다운 칠부소매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다. 청량감 있는 하늘색 셔츠가 하얀 아야세의 피부와 잘 어울리는 옷차림이다. "여름 기획이야. 이번 주하고 다음주는 얘들 전부 이미지를 좀 바꿔보려고." 가장무도회같은 거라구, 라고 소메야는 덧붙였다. 전에 한번 아야세도 소메야의 가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여장남자들이 득실대는 그 술집에서 무엇을 접대하는 것인지 아야세는 자세히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종업원들이 여장을 하는 것이 바로 가장이 아닐까. "...힘들겠군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많은 아야세는 조용히 가장 적당한 말을 골라 대꾸했다. "돈벌기가 쉽지 않지. 돈이 없으면 새 옷도 못 사고, 여행도 못가는 걸." 빨갛게 칠해진 입술이 미소를 지었다. 부모가 남긴 유산으로는 생활하기에도 빠듯한 아야세로서는 옷이나 여행은 꿈도 못 꿀 처지였다. "아야세, 그나저나 여름 강의는 다 끝났어?" 소메야의 질문에 아야세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아야세는 바로 몇 일전까지 여름 강의에 출석했었다. 여름방학중 5일동안 일학년을 대상으로 한 강의였다. 그러나 강의내용은 둘째치고, 아야세에게 이번 강의는 그다지 좋은 추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나랑 놀러 안갈래? 바다말고 수영장이라도 가자." 생각지도 못한 소메야의 권유에 아야세는 난처한 빛을 보였다. "죄송해요. 난..." 시선을 피하는 아야세에게 소메야가 깔끔하게 다듬어진 눈썹을 찌푸렸다. "혹시 가노님 때문에 그래?" 소메야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아야세는 대답이 궁색해졌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애매한 미소만 지을 뿐이다. "맞다, 소메야씨. 후르츠팬케이크 먹을래요?" 어제 만들고 남은 재료가 생각나 아야세는 말을 피하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딴소리를 한다. "기온씨가 과일을 보내주었어요... 단 거 싫지 않으시면..." "팬케이크라..." 억지로 화제를 바꾸려는 아야세를 소메야가 슬쩍 째려본다. 그러나 그 이상 추궁하지 않고 소메야는 소파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그럼 한번 먹어볼까. 기온이 보낸 과일이란게 좀 걸리기는 하지만." 이상한 약같은 거 들은 건 아니겠지, 하며 비아냥거리자, 아야세의 눈에 웃음이 깃든다. "괜찮았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바로 해드릴께요." 거실에 소메야를 남기고, 아야세는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처럼 천연광이 내리비치는 주방은 3주전까지 혼자서 지내던 아파트의 주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검은 색으로 통일된 시스템 주방앞에 서서, 아야세는 팬케이크재료를 준비했다. 밀가루반죽과 생크림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다. 후라이팬에 버터를 두르자 향긋한 냄새가 주방에 퍼져나갔다. 아야세 자신은 특별히 단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부드러운 향은 기분을 가라앉혀 준다. 우울한 기억이 조금은 희미해지자, 아야세는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소메야가 찾아와 준 덕분에 기분이 풀린 것이다. 그런 생각 한편으로 아야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양 손목에 남아있는 검붉은 자국에 시선이 떨어졌다. 3일전, 같은 학교의 도키가와의 집에서 가죽벨트로 묶였던 흔적이다. 순간, 심한 한기가 등을 스쳐지나갔다. 아직까지 팔에 남아 있는 멍자국처럼 마음에 심어진 공포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야세는 몸을 움츠리며 천천히 숨을 길게 내쉬며 떨리는 손으로 후라이팬에 반죽을 넣는데, 갑자기 등뒤로 뭔가 기척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 거실에 있던 소메야가 따분해서 주방까지 따라온 것일까, 하는 생각으로 돌아본 아야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놀란 아야세의 표정을 보며 문 앞에 선 남자가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바로 이 건물의 주인이며 아야세의 동거인인 가노다. 언제부터 그 곳에 서 있었던 것일까. 입에 문 담배를 질끈 깨물며 콧잔등을 찌푸린다. 육식동물을 연상시키는 사나운 분위기 때문인지 단정한 가노의 모습이 잔인하게 보였다. 가노는 아직 젊지만 신주쿠에 내노라하는 큰손들은 고객으로 하는 사채업자로, 이 건물 이층에 사무실을 갖고 사장이라는 직함에 걸맞게 일 처리가 훌륭했고 또한 언제나 눈 코 뜰새없이 바쁜 사람이었다. 어제 하루 쉬었기 때문에 오늘은 특히 바빴을 것이다. 정오를 지난 지금 시간에 비교적 손님이 적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노가 집에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누구 왔어?" 불편한 기색의 가노가 성큼성큼 아야세에게 다가오더니 거칠게 넥타이를 풀며 어깨너머로 아야세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아, 저, 소메야씨가 와서..." "소메야? 또 왔나?" 귀찮은 듯 가노가 중얼거렷다. 혹시 가노는 현관에 놓였는 여자 신발을 의심한 것이 아닐까. 기모노를 좋아하는 소메야는 평소 조리를 애용하기 때문이다. "가노씨, 뭐 마실래요?" 냉장고로 다가가는 아야세의 팔을 가노가 붙잡는다. 가녀린 손목을 잡아당기는 가노의 커다란 손에 아야세는 새삼스레 흠짓 놀란다. "소메야에겐 맛있는 것 만들어주면서 난 물만 먹으라고?" 실실거리며 웃는 가노의 손이 아야세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가노의 가슴이 등에 닿자 옷 너머로 가노의 체온이 전해져 왔다. 창피해진 아야세는 목덜미까지 불게 물들었다. 가노에게는 심심풀이적인 행위인지 모르지만 아야세는 아직까지 그런 육체적 접촉에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월등히 머리 하나만큼 키가 큰 가노는 체격도 커서 몸집이 왜소한 아야세를 뒤에서 충분히 안고도 남으니, 어린아이 취급을 받아도 아야세는 저항조차 변변찮게 할 수 없다. 애초부터 아야세는 가노라는 남자를 거부할 권리도 없는 것이다. 아야세는 가노가 원할 땐 언제라도 몸을 바쳐야 한다. 그것이 아야세에겐 4억엔 가까이 되는 빛을 갚은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점심식사 아직 안했으면, 뭐...뭐라도 준비할까요...?" 동요하면서 몸을 빼려는 아야세의 허리를 가노가 끌어안았다. "괜찮아." 짧게 대답을 하고 가노는 아야세의 셔츠안으로 손을 집어 넣는다. 당황한 아야세는 피하려 했지만 가노와 가스렌지 사이에 서 있어서 꼼작달싹 할 수 없었다. "...앗.." 메마른 손이 배에 와 닿자 아야세의 목이 뻣뻣하게 굳는다. "단내가 나는 걸." 설탕과 버터 냄새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아야세의 채취를 빗대어 말한 것일까, 마른 어깨에 턱을 대고 가노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야세를 더듬던 가노의 손이 익어가던 팬케이크의 불을 껐다. 다시 셔츠안으로 파고든 손이 아야세의 가슴 위쪽으로 거슬러 갔다. 얼마 전 학교에서의 사건 이후, 가노는 그다지 심기가 편치 않았다. 본능적으로 아야세는 이 짐승같은 남자의 화를 살까 두려웠던 것이다. "...음..." 온 몸이 경련을 일으키는 듯 했다. 어제, 끈질기고 집요한 애무의 기억이 아야세를 괴롭혔다. "안돼.. 소...메야씨, 가..."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가슴을 더듬는 가노의 손을 필사적으로 잡아당겼다. 그러나 힘으로는 가노에게 당해 낼 재간이 없다. "...아..." "그냥 놔두면 가겠지."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하며 가노는 더욱 거세게 가슴을 애무했다. "너무 부드러워." 하얗고 매끄러운 가슴을 더듬으며 가노가 슬며시 웃으며 몸을 아야세쪽으로 숙이고 더욱 깊숙이 가슴안쪽으로 손을 뻗는다. "...그.. 만..." "좋으면서 싫은 척 하지마." 가노의 조소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 했다. 셔츠위에서 필사적으로 가노의 팔을 잡아당기던 아야세의 왼손을 가노가 잡아 올리고 입술로 가져갔다. "...음." 손목에 남아 있는 자국에 입을 맞추자 온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동요하는 아야세를 품에 안고, 가노가 한숨을 짧게 내쉰다. "좀처럼 안 없어지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아야세는 예리하고 빛나는 가노의 눈을 보았다. "..아야..." 가녀린 손목을 질끈 깨물자, 아야세의 입에서 작게 비명이 흐른다. 옅은 이빨 자국이 남을 정도로 잔인하게 깨문 가노의 혀가 손목을 핥기 시작했다. "이 멍 자국인 아 보일 정도로 그 위에 상처를 내줄까?' 농담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가노의 그 말에 아야세는 꼴깍 침을 삼켰다. 가노가 자신이 내뱉은 말은 어떠한 것이든지 실행으로 옮기는 잔인함의 소유자임을 아야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안돼..." "안된다고? 네 주제를 알고 그딴 소리를 하는 건가?!" 가노이 손이 턱을 누르며 부드러운 입술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내가 조금만 눈을 떼도 외간남자한테 이런 흔적이나 만들어오면서 말야." 가노의 적나란한 말에 아야세는 눈을 감아버렸다. "여기뿐이 아니지?" 가노는 아야세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무릎으로 다리사이를 강제로 벌렸다. 아야세가 힘을 주고 버팅겼지만 가노의 힘에는 당해낼 수 없다. 가노의 다리가 허벅지 안쪽을 민감하게 문질러대며 자극을 가중시킨다. "안돼... 가.. 노...." "안되는 게 어디 있어. 젠장, 내가 너무 풀어준 거 같군." 가노가 배에 남아 있는 구타의 흔적을 더듬자, 아야세는 신음소리를 냈다. 얻어맞은 직후와 비교하면 꽤 나았지만, 아직 몸 안에는 고통이 잔재해 있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아야세를 내려다보며 가노는 다시 인상을 찡그렸다. "...어제 내가 한 말 잘 기억하겠지." 나지막한 가노의 말에 아야세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고 곤혹스러웠다. "학교따윈 집어치워." 냉정한 말 한마디에 눈을 감았다. 어젯밤 막 잠에 드려는 아야세에게 가노는 똑같은 말을 되뇌었던 것이다. 이 맨션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3주가 조금 지났다. 처음에는 아야세 혼자서는 바깥출입조차 꺼려하던 가노였다. 학교에 다니는 것을 허락한 것도 그다지 좋은 마음이었을 리가 없다. 얼마 전 학교에서의 사건이후로 아야세의 정신이 불안정해지자, 생각 끝에 이 자퇴얘기를 꺼냈을 것이다. "...그,그런 얘긴.. 소메야씨도, 와있는데..." 변명과도 같은 아야세의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런 아야세의 동요는 가노의 노여움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앗." 턱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가하자, 아야세가 비명을 질렀다. "왜 내가 내 집에서 소메야 눈치까지 봐야 되는 거냐?" 화를 억누르고 있는 가노의 낮은 목소리에 아야세는 원초적인 공포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야세, 그렇게 학교에 가고 싶나?" 짙게 베어나오는 담배 냄새와 한풀 꺽인 듯 떨리는 목소리가 부드럽게 귓가에 감겨들었다. 아야세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끄덕이자, 가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제가 더 이상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어요. 저... 저번일은 특수한 경우였고, 그러니까..." 학교에 다녔으면 한다.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바램인지는 아야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현재 아야세는 식비에서 광열비 등, 모든 생활비를 가노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신주쿠 중심가에 위치한 이 맨션만으로도 예전에 비해 얼마나 파격적인가는 말 할 필요조차 없다. 막대한 빚과 함께 가노는 아야세를 양육하는 셈인 것이다. 그런 입장에 처해 있으면서 계속 학교에 다니겠다고 우기는 것은 사실상 뻔뻔스러운 노릇이었다. 공립대학에서 장학금을 받는다고는 해도 수업료 전액을 면제받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학배를 댄 돈이 있으면 가노의 빚을 갚아야하는 것이 순서인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지만 막상 학교를 그만 두기는 힘들었다. "폐를 안 끼치겠다고?" 가노가 조소하며 비아냥거렸다. "여태까지 그런 일은..." "하지만 넌 폭행당할 뻔 했잖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가노가 개수대를 걷어찼다. 소리가 너무 커서 아야세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긴 강의 때 친구로 여겼던 남자에게 폭행을 당한 사건을 아야세에게 있어 크나큰 고통이다. 그 생각을 하면 계속 학교에 다니는 것이 그리 썩 내키는 것은 아니다. 가노의 곁에서 지내게 된다면 학력따윈 필요하지 않다. 그런 기온의 말이 떠오를 때마다 아야세는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이대로 모든 생활을 가노에게 의지하고 실아간다면 분명 그럴지도 모른다. 가노도 아야세가 학교에서 얻은 지식을 이용하려는 생각은 없는 듯 하니가 말이다. 하지만 금전이나 육체적인 관계외에는 자신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아야세를 더욱 괴롭게 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부탁해요..저 열심히 공부해서 여러 방면으로 자격을 갖추도록 할게요. 그러니까 가..."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아야세의 말을 막으려 가노가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안돼. 대학따윈 안 가도 돼." 단호한 가노의 말에 아야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상처입은 기색을 애써 감추며 아야세는 가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뺐다.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제발요.." 거실에 소메야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아야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런 평소와 다른 아야세의 반응에 가노가 언짢은 기색을 나타냈다. 순간 가노의 커다란 손이 높이 치켜올려졌다. 얻어맞는 것이 아닐까하는 두려움에 위축된 아야세의 머리를 가노의 손이 가볍게 잡았다. "...아." 아픔보다 충격이 앞섰다. "학비는 어떻게 하려고 그래." 가까이 다가오는 가노의 예리한 눈빛에 머리 안쪽이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한 애절함이 가슴을 적셨다. "가노씨에게 아직 갚지 못한 돈이 많이 있지만.. 하지만 지금 장학금을 받고 있어서.. 학비는 그다지 많이 들지 않아요." "그야, 네 빚에 비하면 학비는 껌값 정도에 불구하겠지만 그래도 어떡할래. 부족한 학비를 벌기 위해 나랑 잘텐가?" 가노가 조소를 띄며 귓불을 깨물자 아야세는 힘껏 밀어냈다. "그만두세요. 그런 말투.." 냉정하게 대꾸하는 아야세를 보며 가노가 눈을 찡그렸다. "사실이잖아. 너 돈 벌고 싶지 않아?" 정곡을 찌르는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지금 아야세로서는 돈을 벌 수단이라곤 가노와의 육체적 관게외엔 없다. 차라리 그 돈이라도 착실하게 적립되어 학비로 쓰는 것도 괜찮은 생각인지 모른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하게 해줬으면 해요." "아르바이트라고?" 조소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가노의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 "잠꼬대같은 소리하지마, 네가 나랑 자는 거 말고 뭘 할 수 있단 거야?" 모욕을 느낀 아야세는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했다. "가, 가노씨한테 받는 만큼은 아니지만, 부족한 학비정도는 저도 벌 수 있어요." "고집도 센 녀석이군. 정 그렇다면 술집이라도 소개시켜줄까." 여전히 빈정거리는 가노의 말을 듣자 아야세는 컫란 눈을 들어 가노를 쳐다보았다. "전..." 목 안이 얼어붇은 듯 그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말싸움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감정이 격해져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하세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아야세가 흠칫 놀란다. 아야세의 몸을 구속하고 있는 가노만이 아무렇지 않게 눈을 돌린다. "뭘 엿보고 있는 거냐." 문 앞에 서 있는 소메야에게 가노가 불평을 한다. "들으려고 한 게아니에요. 손님인 저를 내버려두고 사랑싸움이나 하다니요." 천으로 된 주머니를 빙빙 돌리며 소메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좀 내버려두세요. 아야세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가노의 품에 안긴 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쩔쩔매던 아야세를 소메야가 턱으로 가리킨다. 가노는 불쾌한 푱정을 지으며 더욱 아야세를 끌어당겨 목에 코를 가져다댔다. "닥쳐, 이 변태녀석아." "너무해요! 그거 성차별 이라구요." 찢어지는 소메야의 목소리에 아야세는 머리 속이 캄캄해져 현기증이 났다. 소메야는 가노와 자신과의 관계를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이렇게 안긴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가노님은 너무 횡포가 심해요. 학교정돈 좀 다니면 어때서 그래요." 소메야가 팔짱을 끼며 말하자, 가노의 눈썹이 치켜올려졌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냐."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요. 그렇지? 아야세." 동의 구하는 소메야의 말에 지금의 아야세로서는 대답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어떻게 하면 현재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고민하기 바빴던 것이다. 지금이나마 다시 가노의 몸을 밀어내며 떨어지려고 하자 가노는 더욱 팔에 힘을 더욱 주었다. 담배냄새가 나는 품안에서 가노와 몸이 밀착되자 아야세는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 "아야세도 아야세야. 학비는 당연히 가노님이 내야하는 거 아냐? 시침 딱떼고 청구서 내밀면 되잖아." "그런..." "어이구, 하긴 아야세 성격에 그럴 수 있겠냐만.." 한숨을 내쉬는 소메야의 눈동자가 다음 순간, 뭔가를 생각해 내고 크게 번쩍 떠졌다. "맞아,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소메야가 딱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손뼉을 쳤다. "아야세, 우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안 할래? 학교 공립이지? 잘하면 학비정돈 벌 수 있을거야." 순간 소메야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가 안된 아야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농담이겠지." "농담이라니 무슨 말씀을.. 아야세도 조금이나마 맘놓고 쓸 돈이 필요하다구요. 더구나 가노님도 우리 가게라면 안심할 수 있잖아요." "안심같은 소리하네." "가노님이 소개하는 술집보다야 훨씬 품행방정할 걸요." "너 설마 이 녀석을 너처럼 만들려는 거 아니야?" 큰 소리를 지르며 화내는 가노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야세는 천천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요? 제가 소메야씨 가게에서...?" "마침 주방애가 출근날을 줄여달라고 했거든. 간단한 요리뿐이니까 힘들지 않을거야. 어때, 아야세?" 소메야가 부드럽게 미소를 짓자 아야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어요! 꼭 하게 해주세요." "아야세, 너...." "잠깐만요, 가노님." 화를 내려는 가노의 넥타이를 소메야가 다가와서 꾹 쥐었다. 가노가 불쾌한 시선을 보내자 소메야는 넥타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잠깐 귀 좀 빌려주실래요?" 소메야가 깔끔하게 다듬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공손하게 물었다. 가노는 그 큰 키를 소메야를 위해 숙이지 않았지만 소곤거리는 귓속말은 다 알아들은 듯 싶다. 가노와 소메야가 하는 모양이 수상한 듯 아야세도 몸을 돌려 들으려했지만 허사였다. 미심쩍어하는 아야세의 머리위에서 가노가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네? 나쁘지 않죠?" 작은 소리로 교섭을 끝낸 소메야가 방긋 웃었다. "도대체...." 불안해 하는 아야세의 몸을 겨우 가노가 풀어주었다. "아야세에게도 사회공부를 시켜야 한다구요. 밖에서 일하게 되면 기분전환도 될 거에요." 누가 옆에 딱 달라붙어 있으면 질식해 버린다구. 소메야가 웃으며 덧붙이자 아야세는 조심스럽게 가노를 올려다 보았다. 언짢은 듯 입을 다물고 망연히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가노가 아야세를 쳐다본다. "저,전...." "소메야, 이 녀석 일하게 되면 시급은 얼마나 줄 거지?" 쭈뼛쭈뼛 말을 더듬던 아야세는 가노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소메야가 구체적으로 가노를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야세의 아르바이트를 가노는 허락하려는 듯 했다. "손님 접대하는 거에 비하면 좀 낮지만....음. 천 오백엔이면 어떨까요." "수습기간은?" "한달. 그 후로는 능력에 따라 수당을 올려주는 걸로 하죠." 한마디 끼어들 틈도 없이 진행되어 가는 이야기에 아야세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야세, 조건은 어때?" 소메야가 갑작스레 묻자 아야세는 놀라 쳐다보았다. "괜, 괜찮아요, 정말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자 가노가 눈알만 움직여 아야세를 내려다보았다. "만약.....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그만 두게 할거다." 가노의 목소리가 다소 불쾌한 듯 했지만 아야세의 눈이 빛나기에는 충분했다. "저, 열심히 할게요!" "잘됐어, 아야세. 일은 언제부터 시작할래?" 너무 기뻐 뺨이 붉게 달아오른 아야세가 가노를 쳐다보았다. 가노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맘대로 하라는 듯 가볍게 턱을 치켜들었다. "내일부터 하면 어때?" "네. 좋아요." 너무나 좋아하며 미소짓는 아야세의 머리를 소메야가 어린아이처럼 쓰다듬었다. "아야세랑 함께 일을 하게 되어 나도 기뻐." 그렇죠, 하고 소메야가 동의를 구했지만 가노는 역시 아무말 없이 담배필터를 물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아르바이트를 허락해 줄 것임엔 틀림없다. 평소의 가노의 언동으로 보아 그것은 믿기 어려운 쾌거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머리를 숙이는 아야세에게 소메야는 빙긋 웃어주었다. 돈밖에 없어 - 9 "아야세. 5번 테이블 안주 아직 멀었어?" "2번 추가한 술 나왔나?" 좁은 주방 안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교차했다. "2번 술은 지금 엘레나씨가 가지고 갑니다." 철재 선반에 자석으로 붙여진 전표를 아야세는 안주 봉투를 찢으며 확인했다. 소메야가 운영하는 술집은 작은 건물 반지하에 위치해 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지상에서 바로 계단을 통해 들어올 수 있어서인지 분위기가 개방적이었다. 홀은 카운터와 박스석으로 되어 있고 규모자체는 아담해서 벽 곳곳마다 거울이 붙어 있어 가게안이 넓어 보이는 한편 손님들의 움직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평소 영업중엔 조명을 어둡게 하기 때문에 그다지 비좁은 인상은 주지 않는다. 청결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가게는 주인인 소메야의 꼼꼼함을 말해준다. 평일에는 오후5시부터 심야까지 영업하지만 7시가 좀 지나면 이미 3분의 2이상 가게안이 들어차곤 한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지 4일째. 이제 겨우 일이 손에 익었지만 한창 바쁠 대는 거의 살인적이었다. 주에 4일, 오후 3시경 출근해 대강 준비를 맞추고 가게의 개점시간을 기다린다. 아직 학생이라는 점과 가노의 지시로 오후 10시에는 귀가해야 되므로 중간에 휴식시간을 빼면 6시간이 아야세의 실제 근무시간이다. 일하는 시간 자체는 짧지만 밤늦게 귀가하는 일과 집을 나오기 전에 개인적인 볼일을 끝내야하기 때문에 생각외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게 분위기도 일의 내용도 처음 겪어보는 것 뿐이었지만 아야세는 금방 이 아르바이트가 맘에 들었다. 가게에 쏟아붓는 소메야의 강한 열정에 자극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너무 힘들게 안해도 돼. 대강대강 쉬면서 해." 소메야가 말을 건네자 아야세는 고개를 들었다. 새로운 주문전표를 전해주면서 주방에 있는 아야세를 살펴보기 위해 와준 것이다. "고맙습니다." 아야세는 활짝 웃으며 재빨리 안주를 접시에 담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소메야도 방긋 웃었다. 오늘 소메야의 의상은 비취색의 화려한 중화풍이다. 천으로 된 검은 구두에도 화려한 비즈가 박혀 있어 홀로 돌아가는 뒷모습이 우아한 나비처럼 보였다. "아야세, 미안하지만 끝나고 이 맥주박스를 카운터로 옮겨다 줄래? 그런 다음 쉬도록 해." 히구치라는 종업원의 지시에 아야세가 네, 하고 대답한다. 히구치는 30대 전후의 머리를 짧게 자른 키가 큰 남자다. 히구치를 비롯해서 이 가게의 종업원은 접대부나 급사들도 전부 남자였다. 평소에는 히구치와 다른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주방을 담당하고 있다. 주방을 나와 아야세는 복도에 쌓여 있는 맥주박스를 하나 들어올렸다. "영차......." 밀폐된 맥주병은 어지간히 무거웠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조심스레 내딛으며 아야세는 주방을 빠져 나왔다. 음식점의 그것도 물장사를 하는 가게의 주방일은 꽤 일이 많았다. 아야세는 병이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카운터 바닥에 내려놓았다. 박스를 내려놓고 저린 자신의 손을 한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익숙해지면 이런 맥주박스도 한번에 두 개씩 옮길 수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하나조차 제대로 들 수 없는 자신이 너무도 비참하게 느껴진 것이다. 가노라면 그 커다란 손으로 맥주박스 같은건 쉽게 옮겼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아야세는 씁쓸해졌다. 겨우 이 정도로 소리를 지르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아무것도 없다며 가노가 비웃을 것이다. 허리에 두른 앞치마로 손을 닦고 일어선다. 심플한 검은색 앞치마는 가게에서 지급된 것으로 앞치마와 함께 검은바지와 하얀 셔츠가 주방의 복장이다. 홀에는 접대를 하는 종업원이 항상 다섯명 정도 있지만 이번 여름동안 그들의 의상도 전부 가게에서 지급된 것이다. 모두들 화려한 여자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전에 소메야에게 들은 대로 지금은 여름 이벤트기간으로 여장이기보다 기이한 가장이라고 할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야세. 담배 좀 갖다줄래, 켄트로 말야." 냉장고에 맥주병을 정리하는 아야세에게 훤칠한 키의 남자가 말을 걸었다. 면도자국이 남아 있는 부르코라는 이름의 그는 대담하게 다리를 노출시킨 세일러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홀에는 간호사를 연상시키는 백의를 입거나 요정의 날개를 흉내낸 투명하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 차림과 마찬가지로 용모도 또한 부르코처럼 미모보다 화술로 손님을 사로잡는 자부터 여자처럼 아름다운 사람까지 천차만별 이었다. "저기....죄송합니다. 켄트가 어떻게 생겼지요?" 서둘러 일어서서 아야세는 담배가 놓인 선반으로 시선을 돌리며 묻는다. 카운터안에는 술과 함께 항시 수종류의 담배가 손님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 담배를 피워보지 못한 아야세는 이름조차 낯설었다. 좀체로 지명한 브랜드가 눈에 띄지 않자 이곳저곳 뒤적거렸다. "아래쯤에 있을거야. 하얀 케이스 끝에 초록색으로 띠가 둘러있어." 겨우 찾은 담배를 부르코에게 내밀자 그것을 확인한 부르코는 바로 옆에 있던 급사에게 테이블 번호를 불러주며 담배를 건네주었다. "죄송합니다. 찾는 게 늦어서...." 면목없이 고개를 떨구는 아야세에게 부르코가 법석을 떨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나도 담배 안 피우기 때문에 처음엔 담배이름을 하나도 몰랐다구." 위로의 말에도 역시 좀 미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아직 일이 서툴다고는 해도 자신에게 역부족임엔 틀림없다. 낙심하는 듯한 아야세의 어깨를 카운터 너머로 부르코가 부드럽게 두들겼다. "괜찮다니까. 그런 얼굴 하지마. 근데 아야세는 예쁘게 생겨서 주방보단 홀에 나오는게 더 나을텐데. 아마 인기짱 일걸." 완전히 농담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부르코의 진지한 말투에 아야세가 당황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예요. 전 절대로 못해요." 여장을 해야하는 조건이 아니더라도 도저히 자신이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홀에서 손님을 즐겁게 상대하는 것은 겉보기와는 달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술도 못하고 담배 이름조차 모르는 아야세에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구나 전 부르코씨처럼 눈치도 빠르지 않고...." "어머나. 말하는게 귀엽네." "맞아. 분하지만 사장님이 아야세를 아끼는 마음을 알 것도 같아." 카운터에 걸터앉으며 술을 마시고 있던 도도코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도코도 부르코처럼 미모보다도 화술을 내세우는 종업원이지만 오늘은 그 육중한 몸매에 걸맞지 않게 앙증맞은 백설공주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렇게 귀여운 애를 홀에 내보냈다간 단번에 능글맞은 아저씨한테 먹혀 버릴걸. 안돼지. 그랬다간 사장님한테 죽는다구." 여기서 말하는 사장은 소메야가 아니라 가노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가노가 이 가게를 운영한다는 뜻이 아니다. 아야세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가게안에 손님이 있을 때는 반드시 모든 종업원이 가노를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이 일대에서 가노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피하려는 은어와도 같은 것이다. 가노라는 남자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왠지 두려운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 가게안의 모든 사람들은 가노에 대해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무엇보다 가노와 아야세의 관계를 알고 있는 듯 했지만 아무도 기분나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치만 아야세가 아르바이트 하고 있으니까 사장님이 언제 감시할겸 오시지 않을까." "도도코는 사장님을 너무 좋아한다니까." 매니큐어를 칠한 손을 입에 대고 부르코가 살짝 웃었다. "하지만 캡 잘생겼잖아. 당연하지 않아? 그치 아야세, 평소 사장님은 어때? 휴일날엔 티셔츠에 청바지입고 빠칭코 하러 간다는데 정말이야?" "글쎄요...." 희희낙락하며 묻는 말에 아야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노가 빠칭코하는 모습을 본 적이 한번도 없다. 바로 얼마전 휴일날에는 청바지 차림으로 방에서 뒹굴거리며 반나절 동안 아야세의 사진을 정리하고 있는 건 본 적이 있지만.... 애초부터 가노는 어딘가로 놀러갈 정도로 편히 쉴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다.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자 이상스레 가슴이 아파왔다. 바쁜 가노에 비하면 주방에서의 아야세의 일은 댈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회사의 경영자와 아르바이트생의 책임감은 하늘과 땅차이인 것이다. 가노는 매일 막대한 업무량과 그 중압감을 견디면서 일을 하고 있다. 자신이 가노의 집에서 편히 지내다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입장이 되자, 새삼스레 그 사실을 통감하게 되었다. "아아, 사장님이 빠칭고에 가면 난, 구슬이 돼서 떨어지고파라." 다소 오버하는 도도코의 목소리와 함께 유리잔과 그릇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가게안의 시선이 그 소리가 나는 자리로 쏠렸다. 바닥에는 두꺼운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유리잔 하나 떨어지는 정도로는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개의 그릇이 떨어졌는지, 소리는 의외로 크게 울렸다. 알콜을 취급하는 가게내에서는 사소한 일로라도 그릇이 깨지는 사고가 빈번히 일어난다. 그것 자체는 그다지 희한한 일도 아니라, 아야세는 바로 주방으로 행주를 가지러 가려했다. 그러나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발을 멈추었다. 돌아보니, 그릇이 깨진 박스석 주위에서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가게는 서비스란 말도 모르나!" 술에 취한 남자가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어두컴컴한 조명탓으로 얼굴을 잘 보이지 않았지만 30대중반의 샐러리맨처럼 보이는 남자다. 요정날개차림의 종업원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열심히 남자를 구슬리고 있었다. "또 저 손님이야. 어떡해." 부르코가 도도코에게 귓속말을 했다. "에레나가 완전히 붙잡혔잖아. 왜 저런 앨 들어보내고 그러지." "어떡해 그럼. 단골손님의 아들이라는데. 아마도 거절하기 힘들거고..." 부르코와 도도코의 반응으로 보아, 그 손님이 횡패를 부리는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닌 듯 싶었다. "아야세. 위험하니까 안으로 들어가 있어." "하지만, 잔을 치워야되는데..." 아야세의 어깨를 밀어내며 부르코가 세일러복을 입은 팔에 알통을 만들어 보였다. "괜찮아. 이것도 다 우리들 일이니까..." 일이라는 말속에서 강한 직업에의 자부심이 내비쳐졌다. "야, 너! 뭘 쳐다봐." 소란을 피우던 남자가 카운터쪽을 향해, 큰 소리를 질렀다. 카운터 안에서 처음 본 아야세의 얼굴을 눈치챘는지, 남자가 술로 인해 충혈된 눈을 게슴츠레떴다. 힐끗, 도도코와 부르코가 눈을 마주쳤다. "꼼짝말고 있어!" 확실하지 않은 발음으로 소리를 치며 남자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술렁거리는 실내를 둘러보고, 남자는 휘청거리며 카운터로 다가왔다. 도도코와 부르코가 어깨로 아야세를 감쌌다. "손님, 자리로..." 부르코가 제지하려는 순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던 소메야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술을 마시려면, 좋은 기분으로 드셔야죠." 방긋, 하며 접대용 웃음을 보이며 소메야가 남자를 말렸다. 아무리 맘에 들지 않는 손님이라도 다른 손님들 앞에서 쫓아낼 수는 없었다. 만일 그랬다간 가게의 평판이 나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남자는 더욱 난폭한 태도로 기고만장해졌다. "나도 즐겁게 마시고 싶다구, 엉. 마담." 남자가 소메야의 어깨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만두지 못하나, 자네. 마담이 곤란해하잖아." 남자의 횡포에 참지 못한 옆 좌석의 남자가 불쑥 일어섰다. 이쪽도 어지간히 술에 취한 중년 남성이다. "시끄러!'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중년남서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불시에 얻어맞은 중년남성은 소파에 나뒹굴었다. 가게안의 손님들로부터, 지나치다는 비난이 흘러나왔다. "자, 이리와." 앉아 있는 사람들에 아랑곳 하지 않고 남자는 강제로 소메야의 손을 잡아끌었다. 무모한 남자의 힘에 의해 소메야의 몸이 휘청거렸다. 소메야도 역시 구타를 당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주위의 가슴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소메야가 아니라 남자였다. "욱..." 소메야는 재빠른 동작으로 남자의 팔을 뒤로 꺾었다. "으악...! 이거놔." 고통을 참지 못한 남자가 절박하게 소리를 질렀다. 알콜로 인해 감각이 마비됐다고는 하지만 힘껏 팔이 뒤로 꺾이는 아픔은 상당할 것이다. 신음하는 남자를 이미 웃음이 사리진 섬득한 표정으로 소메야가 내려다보았다. "내가 말했잖아요. 우리는 조용히 술을 마시는 손님만 받는다고." 차가운 말이 채찍처럼 내려앉는다. 어두운 조명아래에서도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메야의 눈이 분노로 불타는 모습이 보였다. 거침없는 적개심이 소메야의 얼굴을 뒤덮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소메야는 오른손으로 남자의 팔을 잡은 것이다. "...이...! 손님한테..." "손님이면 손님답게 굴어봐." 소메야가 눈짓을 하자, 도도코가 남자를 붙잡기 위해 후다닥 달려왔다. "이, 이거놔!" "여기선, 다른 손님들한테 방해가 되니까..." 버둥거리는 남자를 도도코와 부르코 두 사람이 문 쪽으로 끌고 갔다. 소메야는 냉정하게 남자를 힐긋 쳐다보았다. "괜찮습니까. 손님." 겨우 평정을 되찾자, 소메야는 맨 처음으로 소파에 쓰러진 손님에게 다가갔다. 호빵처럼 둥그런 얼굴을 부끄러운 듯 부비며, 중년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야, 마담 힘도 세구만. 괜히 잘난 척하다가, 창피만 당했네." 겸연쩍게 웃는 손님에게 용정차림의 종업원이 두 손을 모으고 아양을 떨었다. "아니에요! 사토무라씨, 정말 한터프 하시던데요." "험한 일을 당하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소메야가 정중히 머리를 숙이며 사과를 하자, 중년남성은 더욱 얼굴이 붉어지며 손을 내저었다. "그만 해. 내가 오히려 마담 덕을 봤지. 오늘 운이 좋았는걸." 사토무라라고 하는 손님에게 시종일관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발갛게 달아오르도록 부끄러워하면서 사토무라는 몇 번인가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손님들, 다 잊으시고 다시 좋은 시간들 가지십시오." 돌아온 도도코에게 추가주문된 술을 지시하고, 소메야가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야세." 갑자기 이름이 불리자, 아야세는 퍼득 정신이 들었다. "괜찮아?" 망연히 있던 시야 바로 가까이 소메야의 모습이 보이자, 당환한 아야세는 눈을 깜박거렸다. 카운터로 다가온 소메야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야세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안 좋은 꼴을 보였구나." 씁쓰레한 소메야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운터 안쪽에 있던 아야세는 그저 사태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소메야씨말로, 괜찮으세요?" 작은 소리로 묻는 아야세에게 소메야가 방긋 웃는다.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 일은 종종 있는걸. 그리고 그 손님은 전부터 한마디 해주고 싶었어. 근데 내가 좀 너무했나. 이러다가 장사 말아먹는 거 아닌가 몰라." 장난스러운 말투와 눈빛이 여느때의 소메야였다. 손님의 폭력에 화를 냈을 때와, 손님들에게 사과를 했을 때와는 전혀 분위기가 달랐다. 바로 사업하는 사람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요. 소메야씨, 정말 이 가게를 소중히 여기시니까. 그보다 전 아무런 도움도 못 되고.." 고개를 떨어드리는 아야세의 머리를 초록색 매니큐어를 바른 손으로 소메야가 쓰다듬었다. "무슨 말이야. 아야세한테 주정뱅이 상대가 되게 했다간 그날로 내 제삿날인걸." "가.." 불쑥 가노, 라는 말이 튀어나올뻔 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장님이라고 호칭으로 정정했다. 아야세의 말에 소메야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사장님은 상관없어요.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는 건 저니까요." 소메야의 웃음에 맥이 빠지면서도 아야세가 중얼거렸다. "어머나, 그렇지. 미안해." 방긋 웃는 소메야의 눈에 약간의 장난기가 베어나왔다. "그치만, 왠지 오늘따라 꽤 반항적인데." 물론, 가노에 대해 반항적이라는 말일 것이다. 갑작스런 지적에 아야세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래도 괜찮아. 나도 일단은 보수를 주고 있는 이상, 아야세를 특별취급하고 싶진 않으니까." 마치 노래를 부르듯 매끄러운 목소리로 소메야가 웃었다. "아직 할 일은 산더미같이 있단다. 우선, 깨진 잔들을 치울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올래?" -겣레謗 없어겞 - -겣렝막灌 살수 없어겥 이어 집니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1 꽃으로 뒤덮인 관속에서 그 사람이 고요히 잠들어 있다. 아버지가 급사한 밤을 아야세 유키야는 뚜렷하게 기억할 수 없었지만 새 나무관만이 말도 없이 두 번 다시 눈뜨지 않는 아버지를 감싸고 있다. 장례식은 아버지가 살던 아파트가 아니라 외아들인 아야세가 보관하고 있는 친모의 자택에서 치르게 되었다. 전날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가느다란 가을비가 할머니의 아담한 정원을 적신다. 아버지의 관은 문 열린 일본식 방안에 놓여 있고, 그 곁에는 머리가 긴 여성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바로 저녁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병원을 나가도 좋다고 허가를 받은 아야세의 어머니다. 초췌해진 그녀를 지탱하듯이 친척인 듯한 사람 둘이 교대로 시중을 들고 있다.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약해서 오랜 투병생활에 괴로워하던 어머니는 사랑하는 남편을 간호할 수도 없었다. 입원한 병원에서 부고를 듣고 할머니 댁으로 찾아온 그녀는 친척들이 경악할 정도로 격하게 날뛰었다. 소극적이고 얌전하며 쓰러질 듯한 미모의 소유주였던 어머니가 흥분한 목소리로 의미불명의 절규를 하는 모습은 아야세의 가슴에 가련하면서도 무섭게 새겨져 있다. 당시 아야세는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나이였으니 더욱 더 그럴 것이다. 정신을 되찾은 어머니는 그 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남편의 관 곁에 무너지듯 앉았다. 아름다운 어머니의 옆얼굴은 흙빛으로 물들었고 마른 입술은 때때로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을 흘리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사람밖에 알 수 없는 말로 조용히 대화를 하는 것일까. 어린 아야세의 눈에 부모님의 모습은 무척이나 부드럽게 보였다. 어머니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했던 아버지.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가슴은 이제 차갑게 식어 다시는 아야세를 안아줄 수 없다. 아야세는 작은 손으로 앉아 있는 어머니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누군가에게 힘껏 안기고 싶었다. 마음놓고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어머니가 퇴원하기만 하면 또 셋이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에 아야세는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영원히 이룰 수 없게 된 부조리를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다. 그러나 그게 허락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어린 아야세는 아플 정도로 알 수 있다. 돌아보지도 않는 어머니의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을 싣는다. 어머니도 분명 세게 안기고 싶을 것이다. 불특정한 누군가에게가 아닌, 관속에서 자는 그 사람에게. 그런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에게 아야세가 어떻게 떼를 쓸 수 있을까. 핑계와는 다른 곳에 있는 슬픈 자제심이 어린 가슴을 채워 간다. 아야세를 충분히 사랑해 주었지만 그래도 어머니만을 위해 존재했던 아버지의 가슴은 이제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얼어붙어 버린 것이다. 계속 서 있는 아야세를 눈치채지 못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금도 둘만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넋을 잃은 어머니의 옆얼굴이 애처로워서 아야세는 어머니의 옷자락을 마냥 붙잡고 있었다. 멀리서 들린 낮은 목소리에 문득 의식이 각성의 골짜기로 떠오른다. 넓은 침대 위에서 아야세는 긴 속눈썹을 떨었다. 빌딩숲을 물들인 저녁놀이 흩어진 시트 위에도 붉게 부서진다. 붉은빛으로 빛나는 창 밖을 보며 아야세는 힘없이 두세번 눈을 깜박였다. 저도 모르게 울고 있었는지,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이 흐른다. 내심 어릴 때 놀란 기억이 되살아난 아야세는 몸을 구부리며 아이처럼 눈물을 훔쳤다. 눈물에 젖은 속눈썹을 문지르며 아야세는 조금 전까지 자신을 감사고 있던 꿈의 잔해를 속으로 되새겼다. 아버지의 얼굴이 괴로움을 동반해 떠오른다. 가슴속에서 그 광경을 자꾸 되풀이하자 부모님을 부르던 자신의 목소리와 하얀 관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얼굴까지 생각날 것 같아 아야세는 눈을 꼭 감았다. 시트에 파묻힌 아야세의 용모는 섬세해서, 언뜻 보면 성별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여운 위험이 있다. 하지만 생기 넘치는 피부나 호박색 눈동자의 순수함이 아야세에게서 병적인 인상을 지워 준다. "알았어? 금액의 문제가 아냐. 절대 놓치지마." 남자의 낮은 목소리에 누워있던 몸이 흠칫 움츠린다. 침대 옆에, 수화기를 손에 든 남자의 기척이 있다. 무척이나 키가 큰 남자다. 깜짝 놀라 시트 위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아야세를 보고 두터운 손이 놀란 듯 어깨를 누른다. "또 연락하지." 목소리를 낮추고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깼어?" 남자는 깊이 스며들 듯한 목소리로 약간 동요하며 천천히 아야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무심코 손톱의 두께와 커다란 손바닥으로 시선이 간다. 아야세의 어깨쯤은 쉽게 부수어 버릴 듯한 손의 강건함은 야생미가 강한 이 남자의 용모에 아주 잘 어울렸다. "...가노씨, 일이 생겼나요...?" 전화 용건을 묻는 아야세의 목소리는 지금까지도 잠에 취해 허스키했다. 아까부터 그렇게 아야세의 자는 얼굴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남자는 침대가에 앉아 단정한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저물어 가는 거리의 빛이 셔츠를 입지 않은 남자의 가슴 근육을 인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자신의 몸과는 다른 남성적인 늠름함에 동경하는 빛을 숨기지 않고 아야세는 시트 위에서 고개를 들어 가노의 장신을 올려다보았다. 각도를 바꾼 아야세의 눈동자에 저녁놀이 고인다. "괜찮아. 별일 아니니까. 그나저나 일어날 수 있겠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자 아야세는 나른한 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몸 안에는 몇 시간 전에 교합했던 가노의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렇지만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어서 깊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려고 한 아야세의 뺨에 가노의 손가락이 닿았다.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손가락으로 살짝 눈물을 훔치자 아야세의 가슴이 두근하고 뛰었다. "아...저어...이건..." 눈물의 흔적을 들켜 당황한 아야세가 뺨을 문지른다. 부끄러움에 고동이 빨라지는 것을 의식하며 아야세는 가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전에 약속했던 대로 반나절의 휴일을 얻은 가노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예정이다. 정해진 휴일을 갖지 않고 매일 열심히 일하는 가노가 반나절이라고는 해도 휴일을 얻은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인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아야세를 지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특별히 비운것이라고 하면 더더욱. 누구를 만날 것인지, 그 사람이 가노와 어떤 사이인지도 아야세는 아직 모른다. 가노가 내키지 않는 듯 그 화제를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노의 일과 관계된 사람일까. 가노는 불과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인데도 신주쿠에 사무소를 가진 금융업자다. 대학생, 현재는 긴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는 아야세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매일 많은 사람과 사업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아야세는 가노의 사업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밤에 어디에 갈 것인지 다소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감정도 외출전임에도 상관없이 강인하게 침대로 밀어붙여진 피로에 둔해져있다. 남자의 손을 빌려 목욕을 한 후 한 시간정도 잤지만 아직 피부가 저린 듯한 예민한 감촉이 있었다. 오랜만에 부모님의 꿈을 꾼것도 그 때문일까. 흐른 눈물맛과도 비슷한 애절함과 꿈속에서 열심히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던 자신의 목소리가 혀 끝에 쓰리게 남아있다. "...아버지..." 불시에 내뱉은 중얼거림에 아야세는 눈을 크게 떴다. 가노의 말뜻을 깨닫고 한 박자 늦게 아야세의 뺨에 화악 뜨거운 피가 몰린다. 설마 잠결에 소리를 낸 것일까. "나, 옛날 꿈을 꿔서 그래서..." 당황해서 변호하려 한 아야세에게 가노가 부드럽게 눈을 좁힌다. 아야세가 부모님과 사별한 것은 10년도 넘은 옛날 일이다. 철이 들었을땐 이미 병약한 어머니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있었고, 그 어머니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아버지는 매일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아야세를 충분히 사랑해 주었지만 가족이 생활을 같이 할 수 있었던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았지만 역시 마음속에 희미하게 숨겨진 상흔은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자신의 약한 면을 들킨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숙인 아야세의 머리에 살짝 가노의 탄식이 닿는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내가 네 나이 땐 아직 부모님이 살아 계셨으니까." 가노의 목소리에 섞인 울림에 아야세는 시선을 들었다. 육친과 인연이 없는 것은 아야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가노의 부모님도 세상을 떠나신 지 오래인 것이다. "난 부모님 꿈을 꾼 적이 없으니까... 나름대로는 악몽이겠지만... 너는 훨씬 소중하게 키워졌겠지." 가노의 긴 팔이 뻗어와 머리를 흐트러뜨린다. 마디가 길고 마른 손가락은 모습도 손짓도 전부 남자답다. 뺨에 닿은 가노의 온기를 가까이에 느끼면서 아야세는 아버지의 온기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아..." 시트를 둘렀을 뿐인 어깨를 안기고 익숙한 담배냄새가 가까워진다. 혀를 살짝 내밀어 말라붙은 눈물을 핥아 주자 응석을 받아 주는 행동에 수치심이 피어오른다. 동시에 방금 전의 짙은 정사가 똑똑히 뇌리에 떠올랐다. 가노가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남자들끼리지만 자신들의 관계에는 생생한 육체의 교합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의 아야세라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는 지금 그것은 눈앞에 있다. 꺼림칙함을 지울 수 없어 몸을 움직이는 아야세의 뺨을 가노의 입술이 눈물과 함께 가볍게 빨았다. "...응..." 한숨을 뱉은 아야세의 머리카락을 커다란 남자의 손바닥이 부드럽게 쓸어 올린다. "나도 소중하게 대해 주고 있지?" 눈물을 핥은 가노가 꿀처럼 달콤하고 또한 진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낮의 햇살을 받으며 무릎에 안겨 있는 모습으로 몸을 겹쳤을 때도, 목용탕에서 몸을 씻겨 줄 때도 남자는 같은 목소리로 응석을 받아주는 이런 저런 말을 해주곤 한다. "...아..." 수치심에 저항이 둔해진 아야세의 입술을 가노의 혀가 말처럼 정중하게 핥는다. 몸을 경직시킨 아야세의 귓가에서 시트에 벗어던져진 손목시게가 불시에 작은 전자음을 울렸다. 출발을 알리는 신호에 가노가 얼굴을 찡그린다. "젠장. 끝인가."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가노는 낮은 신음을 뱉고 아야세의 턱을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갑작스레 가노의 체온을 잃은 피부가 싸늘하게 식는다. 가노의 온기를 잃으면 상실감을 느끼는 자신이 무섭게 느껴져서 아야세는 눈을 꼭 감았다. 저항하기 어려운 운명의 힘에 부모님을 잃었던 그 때처럼 주어지는 쾌감은 어찌됐든 가노의 온기를 놓기 싫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아야세에겐 무척이나 두려운 일이지만 말이다. 잊었던 꿈의 잔상이 형태가 없는 채로 아야세의 목을 막아 온다. 가노가 의상실 문을 열려는 것을 느끼며 아야세는 자신의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들에겐 신경 쓸 필요 없어. 빨리 끝내고 올 거니까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면 돼." 주침실에 어울리는 널따란 의상실에는 아야세가 정리한 옷이 보기 좋게 걸려 있었다. 가노는 그중에서 몇벌의 옷을 골라내 아야세에게 던졌다. 얇은 깃이 선 폴리에스테르 웃옷과 신축송이 있는 진갈색 바지는 착용감은 좋지만 정장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어떤 가게에 가는 것인지 예상도 가지 않았지만 아야세는 불안감을 입밖에 비추지 않고 가노가 준 옷에 손을 뻗었다.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는 가노를 곁눈으로 의식하며 시트 그늘에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미안, 깜박할 뻔했군." 머리 위에서 울린 목소리에 아야세는 투명한 시선을 들었다. "50만, 확인해 봐." 팔랑이는 소리를 내며 앉아 있는 시트 위에 빳빳한 지폐가 떨어진다. 손가락이 베일 정도로 예리한 현금의 의미는 새삼 물을 것도 없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지폐를 보며 아야세는 괴롭게 숨을 참았다. 5억에 달하는 막대한 빚. 그 존재가 서로의 입장 차이를 결정하고 있는 한, 아야세에게 가노의 말은 절대적이다. 섹스 1번을 50만으로 팔라는 계약을 제시받았을 때도 아야세는 가노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가노가 바라면 언제 어떤 치욕적인 요구를 하든 그에 순응할 수 밖에 없다. 빚을 갚기 위해 가노에게 몸을 판 대가를 아야세는 슬픔에 가득찬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나른함이 남아 있던 몸에 질이 다른 피로감이 휘감아 온다. 아야세는 가노의 눈을 올려다볼 기력도 없이 머뭇머뭇 지폐에 손을 뻗었다. 이렇게 받은 돈을 확인하는 시간이 가장 괴롭다. 현기증이 날 정도의 추태를, 가노에게 상품처럼 파는 자신을, 싫어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가노의 품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음란해져 소리를 질러댄 행위가 전부 이 돈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더욱 더 괴로워졌다. 내려다보는 가노의 눈에도 자신을 성을 상품처럼 팔 수 있는 사람으로 비칠 것이다. 다정하게 눈물을 닦아주던 남자의 손가락이 떠올라 금방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치솟는다. 자신의 더러움을 느끼며 아야세는 셈을 끝낸 지폐를 가노에게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50장 맞아요." 사그라질 듯한 목소리에 가노가 입끝을 올린다. 받아든 지폐를 가노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계산해 다시 한 번 금액을 확인했다. "50만 회수. 이제 됐지?" 씨익 웃는 모습에 아야세는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풀죽은 아야세에겐 신경 쓰지 않고 가노는 아이를 어르듯 호박색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모처럼 휴가를 얻었으니 나가지만 않으면 좀 더 벌었을 텐데." 가벼운 어조에 가녀린 어깨가 점점 더 처진다. 특별한 조소가 아닌 말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괴로워하는 아야세에게 남자의 말에 웃을 여유는 없다. "준비 끝났으면 나가자. 맛있는 걸 먹여 주지." 비위를 맞추는 목소리에 재촉받아 아야세는 가노의 앞에 안기다시피 해서 침대를 뒤로 했다. 화강암을 모방한 검은 벽지에 어두운 조명이 반사된다. 도착한 초밥집에서 저녁을 먹은 후 가노는 신주쿠 가까이의 고급 호텔이 즐비한 모퉁이에 차를 세웠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2 끌려간 곳은 높은 빌딩 5층에 위치한 아담한 바. 건물 전체가 깔끔해서 젊은 남녀나 양복 차림의 중년 손님들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다. 가노와 생활을 합치기 전의 아야세라면 결코 오고 싶지 않았던 건물이다. 가노가 발을 옮긴 가게는 그런 전형으로 아야세가 위축될 만큼 충분히 고급스러웠다. 시원하고 기분 좋은 공기 속에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가게를 채우고 있다. 키 큰 관엽식물이 곳곳에 있기 때문인지 조금 어두운 가게 안은 의외로 넓게 느껴졌다. 기분 좋은 어둠에 가라앉는 듯 가게 여기저기엔 몇 그룹인가의 손님 모습이 보였다. 아야세는 전에 가노의 소꿉친구가 경영하는 게이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었지만 똑같이 술을 취급하는 가게라도 이곳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활기찬 웃음소리나 환담의 떠들썩함은 적고 곳곳에 담배연기만이 무겁게 감돌고 있다. 낮은 웅성거림과도 닮은 손님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야세는 가노 뒤를 바짝 따랐다. "어서 오세요." 부드러운 소리가 들리고 가게 안에서 새하얀 전통옷 차림의 여성이 나타난다. 이 가게의 책임자일까. 검은 머리를 틀어 올린 침착한 인상의 여성이다. 조명 때문인지 나이는 20대로도 30대로도 또는 그 이상으로도 보였다.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이나 용모의 단정함이 여자의 외모에서 보이는 연령을 짐작키 어렵게 한다. 여자는 검은 눈동자로 가노를 보고 기쁜 듯 웃었다. "미안. 저사람, 꽤나 억지를 써서 데리고 온 거죠?" 두 사람은 서로 안면이 있는 듯 여자가 우아한 태도로 가노를 안으로 들인다. "아뇨, 그보다 가게는 어때요? 잘 되는 것 같으니 좋은데요."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 가노를 아야세는 커다란 눈동자로 살짝 올려다보았다. 가노 곁에서 산 지 한달이 지났지만 그가 이렇게 대답하는 걸 본 적은 얼마 없다. 일을 할 때는 보통 이런 말투를 쓰겠지. 하지만 아야세에겐 남자의 모습이 무척이나 신선하게 생각되었다. "모두 사장님 덕분이에요. 이렇게 좋은 곳을 찾았으니까요." 웃음을 담은 한숨을 쉬면서 여자가 가게를 둘러본다. "말로는 하지 않지만 우리 타카노하시도 으쓱해 하고 있어요. 늘 사장님의 실력을 자기 것처럼 자랑하고 있죠." 여자의 말에 가노가 입끝을 비틀어 쓴웃음을 지었다. 누구를 화제로 삼고 있는지 아야세는 알 수 없었다. 가노와 친한 사람일까. 카운터를 빠져나가 왼족으로 꺽어지자 안에는 박스형의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제일 앞쪽과 제일 안쪽의 의자에 남자 손님들의 모습이 보였다. 안에 앉아 있던 손님 중 하나가 가노를 발견하고 가볍게 손을 들었다. "...아저씨는 없군요." 두 사람만 있는 모습에 가노가 눈썹을 찌푸린다. 여자는 미안한 듯 어깨를 움츠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타카노하시는 회사에서 불러서 지금 막 나갔어." 소파에 앉은 손님중 하나가 담배를 손에 들고 가노를 돌아본다. 어깨폭이 넓은 바느질이 잘된 양복을 입은 남자다. 50대 중반으로 평범한 회사원과는 달리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걸 알 수 있는 품격이 있었다. "뭐라고? 그녀석, 날 불러 놓고." 입가를 비틀며 가노가 뱉어낸다. "정말 미안해요. 그 사람도 사장님을 만나는 걸 기다렸지만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어깨를 수그리며 여자가 사죄한다. "이제 그만하고 앉지 그래? 아버지 대리는 갔지만 아직 고문 변호사가 있으니 충분하잖아." 타이르듯 말을 던지고 아까의 남자가 가노를 자리로 이끈다. 아버지 대리라고 말한 남자의 말에 아야세가 깜짝 놀란다. 아야세가 잘못들은 게 아니라면 가노의 아버지 대리인 사람이 방금 전까지 이 가게에 있었다는 것일까. 가노는 3년쯤 전에 유일한 육친이었던 아버지와 사별했다. 아야세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무슨 싸움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런 세계가 현실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온 아야세에게 있어 가끔 듣는 가노의 주변 사정은 너무나 무섭고 끔찍하다. 그 때문인지 가노는 자신의 신변에 대해 아야세에게 말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럼 편히 즐기세요." 너무 놀란 나머지 멍하니 통로에 서 있던 아야세를 여자가 부드럽게 재촉한다. 정신을 차린 아야세는 인사를 하고 가노 옆에 앉으려 했다. 긴장한 아야세의 얼굴을 변호사와 그 옆에 앉은 40대 전후의 작은 남자가 잠자코 눈으로 쫓는다. 품평이라도 하는 듯한 남자들의 시선에 다시 한 번 자신이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통감하며 아야세는 위가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이 남자들 앞에서 가노는 자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할 것인가. "마실 건 뭘로 하시겠어요?" 묻는 여자에게 가노가 옆에 앉은 아야세를 본다. "버본 스트레이트. 이 녀석에겐 물을 많이 타 줘요." "잠깐만. 이 앤 아직 어린애잖아." 떨떠름한 목소리가 단박에 가노를 비난했다. 귀찮은 듯 가노가 양복 차림의 남자를 노려본다. "그럼 적당히 갖다 줘요." 빈정거림이 묻어있는 가노에게 여자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더 이른 시간에 약속을 잡았어야 했어. 이런 녀석을 늦게까지 데리고 다니다니. 네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잔소리를 늘어놓는 남자를 보며 가노가 미간에 깊이 주름을 새긴다. 가노가 테이블이라도 걷어차며 소리 지르는 것을 아닐까 해서 아야세는 몸을 움츠렸다. "시끄러워요. 이 녀석을 데려 오라고 한 건 당신들이잖아. 나한테 설교할 거면 자기 자식이나 바로 잡으시지." 거칠게 말하기는 했지만 가노가 던진 것은 아야세가 예상한 노성은 아니다. 가노의 말에 이번에는 남자가 말이 막혔다. "대단하군. 사장님도 소메야 선생님 앞에서는 꼼짝 못할까 생각했지만 이거야 원, 선생님도 그렇군요." 그때까지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웃으며 말한다. 귀에 익은 이름을 들은 기분이 들어서 아야세는 고개를 갸웃했다. "...소개를 아직 안 했잖아. 일 애기 외에 네가 누군가를 소개하는 건 처음이군." 불리한 화제를 끊듯이 변호사가 가볍게 헛기침을 한다.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마... 이 녀석이 아야세야. 지금은 내 집에 살고 있지. 아야세, 이쪽이..." 남자를 턱으로 가리키며 가노는 잠깐 말을 끊었다. "내 회사에서 기소 전문 법률을 담당해 주는 변호사 소메야씨야. 안쪽은 부동산 관계로 신세를 지고 있는 니시오카... 들으면 알겠지만 변호사는 그 소메야의 아버지지." 반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너무 놀라서 아야세의 눈이 커졌다. 아야세는 저도 모르게 소개받은 변호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머리에 흰색이 섞인 남자의 풍모는 콧대가 높고 가지런하다. 그런 눈앞의 남자에 아야세도 잘 아는 가노의 친구 얼굴을 겹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 변호사의 자식이라고 소개받은 소메야 카오루코는 같은 신주쿠에서 게이바를 경영하는 여장 미인이다. 여자보다 훨씬 화려한 미모를 뽐내는 소메야는 가노에게 기탄없이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이기도 하다. 가노와 소메야가 오랜 친구고 서로의 가정환경을 잘 아는 사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아버지랑도 알고 지내는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도 가노보다 파격적으로 살아가는 소메야에게 이렇게 엄격해 보이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의외다. "아,안녕하세요. 아야세라고 합니다..."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몰라서 아야세가 머뭇머뭇 고개를 숙인다. 아야세와 아들이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변호사는 난처한 얼굴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난 가노의 아버지와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지만... 제 아버지와 달리 조금은 착실한 사람으로 자라나 했더니 역시 피는 속일 수 없군." 아버지의 탄식에 가노의 불쾌한 기색을 비추었다. "...하지만 소메야씨의 그 가노가 선택한 것치고는 꽤나 예의바른 아이 같은걸." 가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변호사는 놀란 듯 덧붙인다. 가노는 뭔가 하려던 말을 참았지만 니시오카만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나이를 먹으면 솔직해지기 어렵지... 괜찮아요, 아야세. 이 무서운 선생님은 설교를 좋아하는 분이니까. 적당히 흘려 듣도록 해요." 뒷부분은 신경에 거슬린 모양이다. 그렇게 웃는 니시오카를 그는 복잡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니시오카. 또 쓸데없는 말을..." "이제야 후련하세요, 소메야씨? 나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마세요. 자식이 게이란게 들키면 이길 재판도 지게 될 겁니다." 신랄하게 내뱉은 가노는 긴 다리를 겹치고 팔을 뻗어 소파 등받이를 잡았다. 아야세의 목뒤까지 팔이 닿아 몸을 감싸안긴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뭣 때문에 그 놈과 의절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입이 닳도록 얘기했을 텐데." "쳇, 재수 없는 아버지라니까. 자기 자식의 성벽까지 취업차별이나 성윤리의 술책으로 이용할 셈이야?" 졌다는 표정을 띄우며 가노는 이마에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내가 지면 너도 난처해지니 쓸데없는 말은 안 하는게 좋을거다. ...그보다, 오늘 부른건 좀 신경 쓰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야." 목소리를 낮춘 그의 표정에 가노가 아야세를 흘끗 본다. 일에 관한 애기라면 자리를 떠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일어설 타이밍을 헤매는 사이에 변호사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코노미의 아들 기억해?" "...그래. 귀국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막힘 없는 가노의 대답에 그가 불쾌한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린다. "역시 빠르군. 타카노하시도 신경 쓰고 있어. 설마 이 신주쿠에는 얼굴을 들이밀지 않겠지만..." 역시 일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자 일어나야 할지 망설여진다. 살짝 가노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감정을 억누를 두 눈으로 조용히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심하라는 소린가." 거칠게 입술을 일그러뜨린 가노에게 니시오카가 다시 한 번 낮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죄송합니다...하지만 선대 사장님과 꼭 닮아서... 선대 사장님이 살아 계셨다면 으쓱해 하셨겠어요." 이렇게 중얼거리자 가노는 이번엔 정말로 오만상을 찡그렸다. 소리도 없이 나타난 아까의 여성이 가노와 아야세 앞에 차가운 글라스를 내놓았다. 가노의 표정에서 대화 내용을 읽었는지 여자는 생긋 웃었다. "니시오카씨, 사장님 심기를 불편하게 하신 건가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여자가 좌석을 휙 둘러본다. "아닙니다. 요즘 이렇게 대단한 젊은이는 없다구요. 이번에 이 가게를 입수한 방법도 정말로 뛰어나고... 대체 이 정도의 물건을 얼마에 입수했는지 아십니까?" 얼음이 녹기 시작한 위스키를 살짝 흔들며 니시오카는 테이블로 몸을 내밀었다. "나도 여기서 부동산 일을 많이 했지만 사장님은 이 정도의 물건을 차압으로..." "니시오카." 낮고 단호한 가노의 목소리가 채찍처럼 니시오카를 때린다. 목소리에 담긴 가노의 노기를 민감하게 느끼고 니시오카는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제 앞에서 값을 말하면 사장님도 난처하시겠죠. 하지만 아무리 타카노하시가 억지를 썼다고 해도 너무 싸게 빌려서..." "마담께 드릴 거라면 가게가 이 정도는 돼야죠. 다 뜯어고치고 개점 준비 비용도 몽땅 댔으니 사장님도 허리가 휘었을걸요. 안그렇습니까, 사장님?" 질리지도 않은지 니시오카가 동의를 구하자 가노의 눈이 긴장하고 있는 아야세를 힐끗 본다. 이 자리에 아야세가 있다는 것을 니시오카에게 알려주려는 동작이다. 분노를 품은 가노의 눈빛에 니시오카의 표정이 굳어진다. 가노를 둘러싼 격한 노기를 느낀 아야세는 뜻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전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자리를 비울 구실을 찾아 입에서 시원찮은 말이 튀어나온다. 남자들의 시선이 놀란 듯이 아야세를 올려다본다. 자신의 실패를 깨닫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 일어선 채 굳어진 아야세에게 여자가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이쪽이에요. 안내해 드리죠." 여자의 웃는 얼굴에 겨우 분위기가 누그러진다. 가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시선만으로 끄덕였다. "아, 저, 괜찮아요." 안내하려 일어선 여자를 거절하고 도망치듯 통로를 걷는다. 정말로 화장실을 써도 좋지만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까. 조금 헤맸지만 아야세는 관엽식물 사이를 헤치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피아노 연주가 끊긴 복도의 조용함에 저도 모르게 어깨에서 힘이 빠진다. 같은 층에는 술집이 두어 개쯤 있는 듯, 엘리베이터와 이어지는 통로가 넓다.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여자들이 갈지자걸음을 걷는 손님을 엘리베이터로 이끄는 것이 보였다. 엘리베이터 맞은편은 밖이 내다보이는 큰 창문으로 되어 있다. 그 창문 앞에 세 개의 의자가 놓인 것을 보고 아야세는 창가로 발을 옮겼다. 여기라면 가게 입구에서도 보이니 만에 하나 가노가 나온다 해도 금방 알 수 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며 아야세는 등이 낮은 천으로 된 의자에 앉았다. 한여름인데도 긴장 때문인지 손끝이 차가워져 있다. 정신을 놓으면 피로와 졸음에 휩싸일 것 같아서 아야세는 차가운 손끝을 꽉 쥐었다. 설마 귀뜸도 없이 가노의 아버지 대리라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물론 자신에게 가노가 하나하나 말해 주어야 하는 입장은 아니다. 그래도 가노의 그런 강인함은 언제나 아야세를 놀라게 했다. 아야세는 거리의 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에 자신을 비추고 아이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어두운 거리의 불빛 속에 의자에 앉은 하얀 얼굴이 떠올라 있다. 소메야의 아버지를 만난 것도 놀랐지만 갑자기 자신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된 그도 무척 놀랐을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의 친밀함을 생각해 볼 때 아야세가 가노의 맨션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까지 알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걸 생각하자 더욱더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된다. 가녀린 어깨를 축 늘어뜨린 아야세는 갑자기 등뒤에 느껴진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돌아본 시야에 두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둘 다 나이가 있고 나름대로 품질 좋은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꽤나 취했는지 얼굴이 붉었다. "무슨..." 설마 앉으면 안 되는 의자였던 것일까. 불안한 생각이 들어 물은 아야세를 남자들은 무례하게 내려다보았다. "거 봐, 남자애잖아." 뚱뚱하게 살찐 남자가 옆에 선 마른 남자에게 말한다. 마른 남자는 두꺼운 안경 저편에서 뚫어져라 아야세를 내려다보았다. "요즘은 남자애들까지 이렇게 머리를 갈색으로 물들이니까요... 이런데서 뭐 하는 거지?" 취해서 안 돌아가는 혀로 남자가 아야세의 머리를 잡아 올린다. 그제서야 취객들의 시비에 휘말린 것을 깨달은 아야세는 당황하며 일어섰다. "실례합니다." 남자들 옆으로 빠져나가려던 아야세의 팔을 남자 하나가 억센 힘으로 움켜쥔다. "...윽...앗..." 균형을 잃은 몸이 다음 순간 들어올려져 아야세는 큰 비명 소리를 질렀다. 등뒤에서 뻗어온 팔에 가녀린 팔다리가 가볍게 안아 올려진다. "가..." 놀라서 고개를 저은 아야세는 입에 올리려던 남자의 이름을 당황하며 집어삼켰다. 아야세의 마른 몸을 안아 올리고 있는 것은 가노가 아니다. 아야세가 불리한 상황에 가노가 타이밍 좋게 나타나 줄 리는 없는 것이다.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가노를 의지해 버리는 자신의 마음이 아야세는 창피했다. "(괜찮습니까?)" 머리 위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물어 온다. 일본어가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았지만 그게 정확한 북경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야세를 안은 드센 팔힘과는 달리 단정한 용모가 가까이에서 웃는다. 30대 초반이거나 조금 젊을 지도 모른다. 생김새는 중국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금세 판별하기는 어려웠다. 등뒤에는 남자를 안내해 왔을 거라고 생각되는 기모노 차림의 여자가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서 있다. 가게를 나와 여자에게 전송 받으며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도중 아야세를 위해 발을 멈추어 준 것일까. "...(괜찮습니다)" 무심코 북경어로 대답한 아야세에게 장신의 남자는 조금 쑥스러운 듯 웃었다. "미안해요...당신이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 다행이군요. 여기가 일본인 걸 깜빡했습니다. ...다친 데는 없으세요?" 유창한 일본어로 웃는 남자가 아야세를 팔에 안은 채 취객들에게로 눈을 돌린다. "취해서 실수한 거라고 변명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조용히 뱉어내는 남자의 말에는 고압적인 울림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겸손한 분위기까지 감돌아서 술에 취해 있던 남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갑작스런 젊은 남자의 등장으로 취객들이 흥이 깨진 건 명확하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선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다. 반박할 말을 찾는 남자들의 기색에 아야세는 마음을 졸이며 조그맣게 발버둥쳤다. "저, 저기...,이제 괜찮으니 내려 주세요." 가느다란 음성으로 호소했지만 남자의 팔은 아야세를 안은 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도움도 받고 뭐라고 할 수도 없었지만 남자에게 안겨 있는 건 너무나도 꼴사납다. 어떻게든 바닥에 내려서서 이 자리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며 아야세는 주위를 살폈다. 갑자기 아야세의 눈에 깊은 안도와 같은 양의 당혹의 빛이 서린다. 가까운 가게의 문이 열리고 건장한 체구의 소유자가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주변보다 튀는 그 장신을 아야세가 못 알아볼 리는 없다. "...아..." 아야세가 말하는 것보다 빠르게 가노의 시선이 복도로 던져진다. 담배에 불을 붙이려단 움직임을 멈추고 예리한 눈빛이 아야세를 휘어잡는다. 순간 남자의 몸이 격렬한 노기에 사로잡힌 것을 알 수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이 자식들!" 공기가 진동할 정도의 노성에 취객이 문자 그대로 튀어 올랐다. "오,오해야! 우린 아무 것도..." 성큼성큼 걸어오는 가노의 모습을 보고 공포에 질린 취객들은 일제히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려갔다. 비명을 지르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향해 달려드는 남자들에게 가노는 눈길 한번 던지지 않았다. "가노씨..." 발소리도 거칠게 다가오는 가노를 바라보며, 아야세는 남자의 팔안에서 빠져나오려고 열심히 발버둥쳤다. 가노는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아야세가 걱정되서 찾으러 나와준 것이 틀림없었다. 심한 호통이 날아올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지만 가노는 아야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노는 아야세를 안고 있는 남자를 아무말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 표정에 담겨진 감정을 깨달은 순간 아야세는 서늘한 충격을 맛보았다. 가노의 두 눈에 서려있는 것은 단순한 분노의 빛이 아니었다. 아야세쯤은 간단하게 죽여버릴 것만 같은 눈빛으로 가노는 등뒤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 가노씨..." 가노의 분노를 간파한 아야세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혹시 가노는 이 남자를 오해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런 친밀한 자세로는 변명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아야세는 초조한 마음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제가 취객들의 시비에 휘말려 있는데... 이 사람이 도와줘서..." "넌 입다물고 있어." 가노의 격렬한 목소리에 아야세의 몸은 싸늘하게 굳어졌다. 확실히 가노를 걱정하게 만든 것은 아야세의 잘못이다. 하지만 가노가 이런 식으로 화를 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놀라움 보다는 오히려 소름이 끼칠 정도의 두려움에, 아야세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여전하군요, 가노." 머리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야세는 깜짝 놀라며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큰 소리 내지 마세요." 남자는 싱긋 웃으며 정중한 동작으로 아야세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감격스러운데요. 잠시 못본 새에 꽤나 멋있어졌군요. 옛날에는..." 기쁜듯한 걸음걸이로, 남자는 곧장 가노에게 다가갔다. 남자와 가노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야세는 당황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닥쳐." 나지막하고 농담을 허용하지 않는 가노의 목소리에 조차, 남자는 싱긋 웃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무하는군요. 난 이렇게 당신을 좋아하는데." 미묘하게 낮고 무기질적인 목소리. 남자는 싱긋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 웃음이 의미하는 것을 탐색할 틈도 없이, 가노가 싸늘한 눈동자로 남자의 발밑에 침을 뱉었다. "내 앞에 두 번다시 나타나지 말라고 했을텐데." 분노를 감추려고 하지 않는 가노의 목소리에 남자는 과장스럽게 어깨를 떨구었다. "여전히 남폭하시군요. 아야세군...이라고 했죠? 가엽게도 이렇게 깜짝 놀라다니..." 남자의 팔이 아야세의 등에 살짝 닿은 순간 가노의 두 눈에 흉폭하기조차 한 강한 빛이 빛났다. "...앗, 아... 아파...." 아픔을 호소할 틈도 없이, 가노의 팔이 아야세를 무지막지하게 끌어당겼다. 커다랗게 휘청거리는 아야세의 몸을, 가노가 오른팔만으로 받아 안았다. 그러나 가노는 난폭한 행동을 사과하기는커녕, 아픔에 신음하는 아야세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똑바로 남자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속셈이냐, 코노미." 금속을 연상시키는 목소리로 가노가 묻는다. 코노미라고 불리운 남자는, 양 입술끝을 만족스러운 듯이 치켜올렸다. "물론 사랑하는 당신의 얼굴을 보러 온 겁니다." 입술사이로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가노는 비웃는 듯이 짧게 혀를 찼다. "내가 부러뜨린 앞이빨은 다시 났나보군." 가노의 말에 코노미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강한 감정이 떠올랐다. 깊숙이 묻어 두었던 격렬한 증오의 덩어리가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단정한 두 눈에 흔들리는 강렬한 감정. "...덕분에...전 잠시 신주쿠에 머물 예정입니다. 또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될 기회가 있을테니 잘 부탁합니다. 극히 한 순간, 코노미의 입술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마치 그런 감정의 표출따윈 없었던 것처럼, 코노미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가노는 그 인사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마치 불쾌한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말했다. "꺼져." 냉담한 가노의 태도에 코노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무서워라." 코노미는 과장되게 몸을 떨며 당황한 듯한 표정의 여성과 함께 멈춰있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가노, 대체 무슨 일인가." 등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일동은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가노마저 돌아오지 않자 무슨 일인가 싶었던 것일까, 가게 입구에 소메야가 서 있었다. 닫히기 시작한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코노미가 소메야를 향해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한순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소메야는 잠시 눈썹을 찡그렸지만, 다음 순간 곧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가노...지금 그 사람은..." 천천히 문을 닫은 엘리베이터가 코노미를 태우고 아래층으로 사라졌다. 신음하는 듯이 흘러나온 변호사 소메야씨의 목소리에는, 감출수 없는 동요가 배어 있었다. 그와 만난 것은 오늘밤이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이것이 이 남자에게 있어서 좀처럼 드문 강한 동요라는 것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코노미 녀석이야." 감정을 억누른 듯한 낮은 목소리로 가노가 내뱉듯이 말했다. 소메야씨는 단정한 입가를 씁쓸하게 일그러뜨렸지만, 그래도 겨우 냉정을 되찾기 시작한 얼굴로 코노미가 사라진 통로를 둘러보았다. "벌써 일본에 돌아와 있었다니...그래, 무슨 말을 하더냐?" 그 물음에 대답할 마음이 없는 것일까, 가노는 양복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고 가볍게 고개를 저은 후 가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타카노하시에게는 내가 말해 두마. 괜찮겠지, 가노?"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고 가노는 아야세를 내려다 보았다. 가노에게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아야세는 어색한 공기속에서 통로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노의 긴 팔이 뻗어와 아야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가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야세는 머뭇거리며 가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가노의 옆얼굴은 이미 아야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가노는 담배에 불을 붙인후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야세는 알 수 없는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코노미라는 남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가노가 절대 그 질문을 기뻐하지 않을 것은 명확했다. 가슴속이 서늘해져 왔다. 자신의 존재마저도 완전히 거부하고 있는듯한 가노의 에리한 옆얼굴. 좀전에 던졌던 가노의 노성이 귓속에 달라붙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아야세는 홀로 가슴 속의 고통을 삼켰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3 "아야세가 직접 싼 도시락이라니, 가노님은 정말 좋겠네." 심플한 소파에 아아하게 앉아있던 소메야 카오루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노의 사무실에 놓여있는 검은 사무요 소파조차 그가 앉으면 묘하게 화려해 보이니 이상한 일이다. 활짝 핀 꽃같은 그의 미모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매력이 있다. 그러나 한치의 빈틈도 없이 키모노에 몸을 감싸나 그 모습을 보고, 그의 성별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오늘 소메야는 윤기있는 검은 머리를 두갈래로 둥글고 낮게 묶고 잔머리를 불규칙하게 늘어뜨리고 있다. 양장에도 어울릴 듯한 헤어스타일을 반영해서일까. 몸에 걸치고 있는 키모노의 색은 장난스럽게도 칙칙한 물색이었다. 소메야는 이 사무실을 처음 열었을 때부터 단골손님이었다고 한다. 오늘도 가노에게 볼일이 있어서 자신이 경영하는 게이바의 문을 열기전에 사무실에 들른 모양이다. 점심시간이 지난 탓일까. 사무실은 마침 손님들의 발길이 끊겨서 매우 조용했다. 아야세와 소메야가 앉아있는 접객용 응접세트 앞에는 입구에서 보이지 않도록 높은 칸막이가 세워져 있었다. 칸막이 너머 사무실을 살짝 둘러봤지만, 책임자인 가노는 아직 회사로 돌아올 기색이 없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커다란 찬합을 바라보며, 아야세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3단 찬합 도시락 속에는 아야세가 가노와 부하직원들을 위해 만든 점심이 들어있다. "가노님이 늦네. 곧 돌아온다고 했는데. 요즘 바쁘다는 얘긴 들었지만 진짜였나봐." 의심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소메야에게, 아야세는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전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굉장히 바쁜 것 같아요. 어젯밤에도 돌아오지 않았고..." 아야세는 말꼬리를 흐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요 며칠간, 가노는 굉장히 늦게 돌아오거나 어제처럼 아예 돌아오지 않거나 둘중 하나다. 불과 5일전에 반나절 가량의 휴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가노는 바븐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정으로 그렇게 바쁜 것인지 아야세는 전혀 상황을 짐작할 수 없었다. 가노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역시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아야세에게 물어봤자 쓸데없는 일을 굳이 입밖에 낼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실제로 가노가 일의 고충을 털어놓는다 해도 자신에게는 가노를 도와줄 만한 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노도 일의 내용을 입밖에 내는 것을 싫어하고 있는 것이리라. 뭔가 가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귀찮게 여길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고심 끝에 아야세는 가노와 그의 부하직원들을 위해 도시락을 준비하기로 했다. 예전에 한 번 잔업이 계속되던 사무실에 저녁식사용으로 만들어뒀던 음식을 가져와서 호평을 받았던 적이 있다. 구실이 있으면 사무실을 찾아와도 화를 내지는 않을 거라는 어린애같은 기대도 있었다. 잘 생각해 보면 가노가 반나절의 휴가를 얻었던 밤 이후, 만족스럽게 대화를 나눈 적조차 없었다. 그날밤 가노는 아야세를 취객들로부터 구해준 남자와 얼굴을 마주친 순간부터 무서울 정도로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 맨션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도 가노는 필요최소한의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렇게 가노를 격양시켰던 것일까. 자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던 것일까. 아야세는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결국 일과 관련된 화제와 마찬가지로 가노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 하나 아야세에게 말해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저...전 역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저녁식사를 준비하려면 시장을 보러 가야 하니까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며 아야세는 지갑이 들어 있는 가방을 끌어당겼다. 가노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가 사무실에 없을 경우에는 처음부터 도시락만 놓아두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마침 사무실 입구에서 마주친 소메야의 권유로 소파에 앉긴 했지만 아야세가 긴 시간동안 사무실에 있었다는 것을 알면 가노는 과히 유쾌한 얼굴은 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뭐 어때. 좀 더 있다 가요. 어차피 윗층에 돌아가봤자 아무도 없잖아?" 소메야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아야세의 팔을 잡았다. 소메야의 만류를 거절하려고 입을 연 순간 아야세의 귀에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입구를 돌아보며 쿠바라는 이름의 사원이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손님은 아닌 듯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아야세는 칸막이 너머 사무실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양복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고 있는 가노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무더위가 남아 있는 밖에서 막 돌아왔으면서도 그는 짙은 회색 양복을 단추 하나 풀지 않고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사무실 입구는 결코 좁지 않았지만 가노가 서 있으면 매우 위압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사무실 책상에서 일어선 쿠바도 익숙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가노의 모습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센다가야쪽에도 들러봤지만 역시 프로 업자의 소행이야." 사무실안에 손님이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가노가 혀를 차며 말했다. "쫓을까요?' 짧은 쿠바의 물음에 가노는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코노미 녀석이 관련되어 있다면 미적지근한 방법으로는 무리야. 타카노하시에게 얘기를 해뒀어. 경비는 좀 들겠지만...확실하게 꼬리를 잡을 수 밖에 없어." 나지막한 가노의 목소리에서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분노가 느껴졌다. 가노에게 말을 걸 틈을 놓쳐버리고 만 아야세는 칸막이 뒤에서 숨을 삼켰다. "사장님의 말씀대로 야반도주할 가능성이 있는 손님은 리스트에 올려놓았습니다. 지금 미사오가 수금을 나가 있는데 그 참에 둘러보고 온다고 했습니다."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녀석이 있으면 확실하게 처리해. 자살하겠다면 말리지 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뼛속깊이 깨닫게 해 주도록."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업이 성립되지 않는다. 냉철한 가노의 말에 아야세는 주먹에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도저히 농담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일할 때는 언제나 이런 상태인 것일까. "사장님이 사무실을 비우신 동안 소메야 선생님의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저...그보다..." 머뭇거리며 입을 연 쿠바의 시선이 흘낏 아야세와 소메야가 앉아있는 응접 세트쪽을 향했다. 그러나 가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받아든 메모를 훑어보았다. "알고 있어. 좀전에 타카노하시의 사무실에서 우연히 만났거든. 이제 곧 이쪽으로 올라올 거야." 가노의 말대로 조금 늦게 사무실 문이 열렸다. 가노와 마찬가지로 옅은 회색 양복을 입은 변호사가 사무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야세는 자기도 모르게 맞은편에 앉아있는 소메야에게 시선을 향했다. 소메야도 아버지의 방문을 눈치채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우리 아버지야." 소메야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요전에 가노씨가 소개해 주셨어요." 아야세의 말이 의외였던 것일까, 소메야는 아름다운 눈을 크게 떴다. "혹시 타카노하시의 할아버님과도 만났어?" 소메야의 물음에 아야세는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저었다. "그분과는 만나지 못했어요...아무래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것 같아서..." 소메야도 타카노하시라는 인물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어떤 인물이며 가노의 아버지같은 존재라는 말은 사실일까. 물어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틀림없이 조만간 만나고 싶지 않아도 만나게 될 거야. 하지만 가노님도 진짜로 아야세를 좋아하나봐. 만에 하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우리 아버지한테 소개해두면 아야세 한사람 정도는 책임지고 돌봐줄 거 아니겠어." "무, 무슨 말씀이세요." 소메야의 말에 아야세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아야세한테 남자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보다..." 소메야가 목소리를 죽이며 입을 연 순간 등뒤의 칸막이가 느닷없이 커다랗게 흔들렸다. 깜짝 놀라서 위를 올려다보자 커다란 손이 칸막이 가장자리를 움켜잡고 있었다. "소메야! 또 네 녀석이냐!" 노성과 함께 칸막이가 밀쳐지며 분노로 가득 찬 가노의 두 눈이 나타났다. 가노를 말리려다 실패한 부하직원 한 사람이 창백한 얼굴로 숨을 삼켰다. 너무나도 뜻밖의 사태에 아야세는 할 말을 잃고 커다랗게 뜬 눈으로 가노를 올려다보았다. 가노도 아야세가 함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인지, 칸막이를 움켜쥔 채 아무 말 없이 아야세를 노려보았다. "여성을 방문할 때는 좀더 신중하게 행동해 줄 수 없나요?"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소메야가 엄숙하게 말했다. 입을 열긴 했지만 당장은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일까. 가노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칸막이를 무지막지하게 쓰러뜨렸다. 금속성의 칸막이가 바닥위에서 신경질적인 소음을 울렸다. 가노는 소파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아야세를 무시하고 험악한 표정으로 쿠바를 돌아보았다. "...저 .. 아야세씨가 와 있다고... 말씀드리려고 했지만..." 항상 냉정하고 침착한 쿠바의 목소리가 동요로 갈라져 있었다. "미,미안해요. 도...도시락만 놓고 금방 돌아가려고 했는데...그런데..." 자신이 이곳에 앉아있었던 것이 상상이상으로 가노를 화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야세는 튕겨 오르는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 "...됐으니까 그냥 앉아 있어!" 채찍처럼 날카로운 노성.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아야세의 표정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가노는 험악한 표정으로 소메야를 바라보았다. "...소메야, 너 두고보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장실을 향해 걸어가는 가노의 등뒤에서, 소메야가 항의를 표시했다. "잠깐만요. 그게 왜 내 책임이죠? 아야세가 알면 곤란한 일을 하고 있는 건 당신 책임이잖아요. 아빠, 뭐라고 한마디 해줘요. 아빠는 설교가 특기잖아요." 소메야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하며 느닷없이 사무실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일동의 시선이 사무실 입구에 서 있는 인물에게 집중됐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던 변호사가 문득 현실로 돌아온 듯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빠는 무슨 아빠! 너 아직도 그런 천박한 차림을 하고 있는거냐...!" "천박하다뇨, 너무하시네요. 아빠, 설교는 내가 아니라 가노님한테 하셔야죠." 가노는 한숨을 쉬며 호소하는 소메야를 무시하고 아야세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야세, 도시락이란게 이거냐?"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던져진 질문에, 소메야는 깜짝놀라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대답했다. "아, 네. 일을 방해해서 죄송해요..." "신경쓸 것 없어. ...아직 식사를 못했는데 마침 잘됐군. 그렇죠? 소메야 선생님." 가노는 반론의 여지를 주지 않는 어조로 말하며 도시락을 집어들고 사장실 문을 열었다. "열받아. 날 무시할 생각이야?! 보세요, 아빠. 단골손님인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건가요? 부탁이예요. 카오루코의 원수를 같아주세요오~." 애교있는 몸짓으로 호소하는 소메야를 바라보며, 변호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카오루코라고...? 그 이름만은 제발 그만두라고 했잖니!" 분노와 탈력으로 아버지의 목소리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 소메야는 아버지 앞에서 자신을 부끄러워할 생각은 조금도 없는 눈치였지만, 아무래도아버지는 다른 모양이었다. 확실히 아야세에게 있어서 소메야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름다운 여장남자였다. 하지만 여장을 하기 이전의 소메야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현재의 그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당연하리라. "좋은 이름이잖아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온 거예요. 요즘 세상에 이렇게 효성이 지극한 딸도 없을걸요." "그야 그렇.. 아, 아니지. 애초에 넌 딸이 아니잖아! 거기 무릎꿇고 앉아! 이 불효막심한 녀석아...!" 아버지의 노성이 울려 퍼진 순간, 그것을 덮어버릴 정도의 커다란 소음이 사장실 문에서 울려 퍼졌다. 가노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긴 채 주먹으로 두터운 목재 문을 내리쳤던 것이다. "...부자간의 만담은 다른 곳에 가서 해. 이러면서 비싼 고문료에 출장비까지 받아 챙길 생각이신가? 그럼 노닥거리지 말고 빨리 일이나 해요!" 노골적으로 분노를 드러내는 가노의 말에, 변호사는 작게 기침을 하며 넥타이를 고쳐맸다. "...이번 주말에는 집으로 돌아오거라. 어머니와 함께 다시 한번 얘기를 해 보자꾸나. ...물론 여장을 하고 오면 안된다." 낮은 목소리로 다짐을 받자, 소메야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 동작에 또다시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일까, 핏기가 가시기 시작한 변호사의 표정에 아야세는 자기도 모르게 소파에서 일어섰다. "죄, 죄송합니다. 전 이제 가봐야 겠어요." 아야세는 허둥지둥 신발을 집어들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가노의 분노가 점점 깊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야세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용기조차 없었다. "실례했습니다." 아야세는 깊게 허리를 숙인 후 서둘러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야세!" 가노의 목소리에 다시 한번 깊게 머리를 숙인 후, 아야세는 자신의 몸을 숨기려는 듯 힘껏 문을 닫았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4 나날이 가을색이 짙어지는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둘러싸인 거리. 아야세는 막 시장을 봐 온 저녁 반찬거리를 들고 바쁘게 움직이는 거리를 둘러보았다. 가노의 사무실에서 나와 그 길로 시장을 보긴 했지만, 바로 몇주일전이라면 이렇게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혼자 외출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던 가노도 요즘에는 역앞에 시장을 보러 가는 정도라면 그리 싫은 얼굴을 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제한이 느슨해졌다고 해서 아야세의 외출이 갑자기 빈번해졌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야세는 한곳에 오래 있는 것을 답답해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필요최소한의 외출만 허락된다면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유행하는 패션에 몸을 감싸고 커다란 쇼핑백과 핸드폰을 손에 들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틈에 섞이는 것보다는, 혼자 집안일에 몰두하고 있는 시간이 훨씬 마음 편하게 느껴졌다. 소메야난 가노처럼 이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호흡할 수 있는 인간과 자신은 근본적으로 어딘가 다르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기가 죽었는 것은 언제나 아야세쪽이고, 그것이 서늘하게 마음을 압박하는 것이다. 역시 뻔뻔스럽게 사무실을 찾아간 것은 잘못이었을까. 부하직원에게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리고 있던 가노의 모습이 떠올라 아야세는 가방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채업자는 반드시 악역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잔혹한 사채업자가 있을거라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가노라면 더더욱 그렇다.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가 돌아기신 후, 한달 이상이나 누군가와 함께 생활한 것은 처음이었다. 메마른 사막에 눈깜짝할 사이에 물이 스미는 것처럼, 가노의 존재가 아야세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좁은 아파트에서 호화로운 맨션으로 사는 장소가 바뀌었어도 아야세가 살고 있는 세계 그 자체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극히 좁고 한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텅 비어 있던 공간에, 지금은 가노라는 남자가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생각해보면 아야세는 가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아야세의 생활속에서 가노의 비중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을 자각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형태없는 불안이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그 괴로움은, 얼마전 아버지의 꿈을 꿨을 때 느꼈던 괴로움과 어딘지 닮아 았었다. 그 괴로움이 보다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좀전에 소메야 부자와 만났던 탓일까. 소메야의 아버지가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아야세는 그 이상으로 정면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그들 부자의 모습이 부러웠다. 손이 닿지 않는 것,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가슴속에 쌓여 가는 듯한 느낌. 아야세는 한숨을 삼키며 서둘러 맨션으로 향했다. 하지만 오늘밤에도 가노는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젯밤 무겁게 덮쳐오는 어둠속에서 혼자 잠들었던 기억과 유달리 넓게 느껴지던 침대가 떠올라 서둘러 있던 발걸음이 무심코 늦어졌다. "아..."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던 아야세의 바로 옆에 검은 자동차가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이곳은 불법 노상 주차가 많은 거리라 이런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아야세는 숨을 죽이고 과민하다고도 할 수 있는 반응을 보이며 몸을 피했다. 잊고 싶었던 공포가 문득 가슴속에 되살아 났다. 약 한달전 같은 신주쿠 거리에서, 아야세는 느닷없이 차속으로 끌려 들어가 몸을 속박 당했던 무시무시한 경험을 맛 본 적이 있다. 그것도 사람들이 잔뜩 지나다니는 백주대낮의 거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발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한 아야세의 눈앞에서, 느닷없이 차의 뒷문이 열렸다. 차는 아직 완전히 멈춰 서 있지 않았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아야세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본능의 경고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아파샆트를 박찬 직후, 아야세는 자신의 몸이 누군가가 끌어올리는 듯한 강한 힘에 의해 붕 떠오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무...." 어깨를 움켜쥔 강한 힘에,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혼신의 힘으로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아야세의 어깨를 잡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누가 좀 도와...!" 느닷없는 공포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침착하게 사람을 부르려고 하면 할수록, 목소리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조용히 하세요)" 침착한 남자의 목소리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일본인이 아니다. 가슴속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맛보았을 때, 아야세의 몸은 이미 차의 뒤좌석안으로 끌려 들어가 있었다. "(출발해!)" 아야세의 입을 막고 있던 남자가, 운전석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이거 놓...." 아야세는 온 힘을 다해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때 문득 아야세는 몸을 속박하고 있던 남자의 손이 풀어졌다. 그 이유를 의아하게 생각할 틈도 없이 아야세는 문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자 등뒤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넓은 차안에 울려 퍼지는 쾌활한 웃음소리. 지금 이 상황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에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문을 열려고 버둥거리며 남자를 뒤돌아본 아야세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당신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아야세를 바라보며 남자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가에서 눈물까지 훔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당신이 하도 열심히 저항하길래 그만..." 유창한 일본어가 숨결에 닿을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왔다. 모양이 좋은 입술사이로 하얗고 깨끗한 치아가 드러났다. "코노미..씨? 혼란한 머릿속에 느닷없이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며칠전의 기억을 되살아나게 만드는 정중한 북경어. 우아한 양복을 입은 서늘한 외모의 청년은 아야세의 가슴속에 강렬한 인상과 함께 새겨져 있었다. 얼마전 가노와 함께 갔던 바의 통로에서 만난 코노미라는 이름의 남자다. 동시에 머리를 너머 들려왔던 가노의 노성도 씁쓸하게 가슴속에 되살아났다. "기억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남자는 싱긋 웃으며 우아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게 대체..." "안심하세요. 당신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우연히 지나가는 걸 보고 말을 걸려고 차를 가까이 댔는데, 당신이 하도 놀라길래 그만...혹시 강제로 차에 끌려 들어간 경험이라도 있습니까?" "그렇다고 이런짓을..." "약간 장난기가 발동했던 것 뿐입니다." 코노미는 미안해 하는 기색따윈 조금도 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신경쓰지 말아주세요. 사과의 뜻으로 맨션까지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아야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코노미를 향해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힘껏 던졌다. 평소의 아야세는 결코 보이지 않는 폭력적인 행동이었다. "내려주세요." 차가운 목소리는 불쌍하리만치 갈라져 있다. 농담이었다고는 해도 용서할 수 없다. 죽음을 연상시킬 정도의 공포에 몸이 지금도 눈에 보일만큼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보기와는 달리 흉폭한 사람이군요." "그만 하세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싸늘한 불안감이 차츰 아야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의 불안따위는 아랑곳없이 차는 혼잡한 야스쿠니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잘 훈련되어 있는 듯한 운전수는 단 한 번도 뒷좌석을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차를 몰고 있었다. "....웃.." 느닷없이 뻗어온 코노미의 손이 아야세의 갸름한 턱을 치켜올렸다. 아야세는 움찔 놀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서늘한 코노미의 손가락은 결코 난폭하지는 않았지만 뿌리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강한 힘이 있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운 눈을 하고 있군요." 코노미가 부자연스러울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아야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날밤에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실례, 자기소개가 늦었군요. 전 코노미 키요타카라고 합니다. 조그만 수입업 사무실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코노미는 양복 주머니에서 꺼낸 명함을 억지로 아야세의 손에 쥐어주었다. 명함에는 지금 코노미가 말한 이름과 직함이 적혀 있었다. "요 몇 년간 일본을 떠나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신주쿠도 많이 변했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코노미는 시트에 몸을 묻은 채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며 탄식하듯이 말했다. 그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는 아야세는 그저 어떻게든 차안에서 도망칠 방법은 없나하고 주위를 힐끔힐끔 둘러볼 뿐이었다. "하지만 가장 놀란 것은 당신입니다. 친구인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뭣하지만, 설마 가노가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으니까요." 코노미의 입에서 가노의 이름이 나온 순간, 아야세의 등줄기에 오한이 흘렀다. 코노미와 가노, 이 두 사람은 대체 무슨 관계인 것일까. 그것은 코노미와 처음 만났던 그 날밤부터 줄곧 아야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의문이었다. "...친구?" 아야세는 머뭇거리며 의아한 듯이 물었다. 우호적인 코노미의 말과는 정반대로 가노에게 이 남자를 달갑게 여기는 분위기는 털끝만치도 없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그 격렬한 분노의 모습을 본후로 아야세는 가노에게 사소한 질문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요. 친구입니다. 소꼽친구라고 할 수 있겠죠." 아야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코노미는 싱긋 웃었다. "가노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그런 표현은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 말을 믿어도 좋을지 생각에 잠겨 있는 아야세를 코노미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언제부터 가노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까? 당신은...아직 상당히 젊은 것 같은데요." 코노미의 물음에 아야세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이면서도 가노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당하는 것에는 역시 강한 저항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기분이 상하셨나요. 하지만 줄곧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 나이에 집을 떠나서 생활하고 있다니, 부모님들도 걱정하고 계시지 않을까 해서요." 아야세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혼잣말같은 중얼거림에 코노미는 시트에 묻고 있던 몸을 일으켜 물끄러미 아야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득 불안감이 아야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살해당했나요?! 설마 가노에게?" 코노미가 아야세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아야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코노미는 아야세의 부모님이 살해당했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가노에게.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아야세는 재빨리 고개를 저을 수가 없었다. "아,아니예요! 그런..." 말도 안된다고 부정하려 했지만 끝까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코노미의 이상하리만치 진지한 눈빛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결코 농담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코노미의 눈동자가 아야세에게 말할 수 없는 불안을 느끼게 했다. "아닌가요...다행이군요..." 아야세의 부정에 코노미는 진심으로 안도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전신의 힘을 뺐다. 그리고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또다시 정면으로 아야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저는...제 부모님은 가노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조용한 코노미의 목소리에 아야세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너무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어버린 아야세를 바라보며 코노미는 싱긋 웃었다. 작은 강아지처럼 천진하기도 하고 성직자처럼 엄숙하기도 한 빛이 서늘한 코노미의 눈가를 채색했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전 벌써 가노를 용서했습니다." 겸허하다고도 할 수 있는 웃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서 아야세는 물끄러미 코노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당시 가노는 아직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고 있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아버지가 일궈놓은 신주쿠의 토양을 손에 넣을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 아버지는 그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였죠." 정면으로 응시하는 코노미의 시선에 아야세는 자기도 모르게 꿀꺽 숨을 삼켰다. "가노에게 살해된 아버지의 시체는 그야말로 무참했습니다. 제가 해외에서 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죠. 그때 전 우연히 일본에 잠시 귀국해 있었습니다...그 무렵에는 식사를 할 때마다 매일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죠." 코노미는 쓴 웃음과 함께 한숨을 지으며 시선을 피하듯 창밖을 바라보았다. "...놀라게 한 것 같군요. 당신은...가노와...서로 좋아서 함께 살고 있는 겁니까?"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아야세는 커다란 눈동자로 코노미를 바라보았다. 서로 좋아서 함께 살고 있느냐는 것은 서로 자유의사에 의해 함께 살고 있느냐는 뜻이다. 하지만 아야세와 가노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런 건...아니지만..." 자기도 모르게 꺼져 들어갈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어째서 그와 함께 살고 있는 겁니까? 확실히 가노는 매력적인 남자이긴 하지만 당신도 그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겠죠? 무섭지 않습니까?"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꼭 쥐며 아야세는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확실히 과격한 거래를 하거나 자살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채무자를 몰아붙이는 것은 가노도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같은 사람이 그걸 견딜 수 있을 리가..." "저는...가노씨의 사업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세히 알지 못해요...게다가 가노씨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은...제게...빚이 있어서..." "빚?! 당신이 가노에게?!" 코노미의 목소리에 긴박감이 더해졌다. 아야세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저어... 저를 이용해서 가노씨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라면 소용없어요. 제게 무슨 일이 생겨도 가노씨는..." "당신은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문득 무시무시한 기세로 뻗어온 코노미의 팔이 아야세의 등뒤에 있는 유리창을 세차게 쳤다. 온화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아야세는 작게 숨을 삼켰다. "...아..." 코노미는 차가운 눈동자로 공포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 아야세를 바라보았다. "말했을텐데요. 나는 당신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정중하지만 부정을 허락하지 않는 그 목소리에 아야세는 강한 압박감을 느끼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주시니 다행이군요." 싱긋 웃는 코노미의 눈동자에서 분노의 빛이 거짓말처럼 사라져갔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은 것일까. 아야세는 입안이 바싹 말라붙어 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곤란하군요. 당신은 아직 젊은데요." 코노미가 모양좋은 눈썹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저도 항상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가노는 결코 깨끗한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 아버지를 살해한 것보다 더 무서운 일도 얼마든지 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당신과 만났던 그 가게도 어떤 더러운 수법을 써서 손에 넣었는지..." 니시오카라는 남자가 말했던 차압이라는 말이 아야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차압으로 그 가게를 싼값에 손에 넣었다고 니시오카는 자랑스럽게 말했었다. 차압이라는 말의 의미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아야세에게는 코노미의 말을 부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저는 확실히 가노씨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그런 내가 가노씨의 일을 판단할 수는 없어요." 머뭇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말하는 아야세를 바라보며 코노미는 눈썹을 찡그렸다.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코노미는 작게 웃었다. "...가노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군요." 코노미는 조용하게 속삭이며 운전수에게 턱으로 신호를 보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는 가노의 맨션앞에 도착해 있었다. "당신이 가노에게 진 빚은 대체 얼마입니까?"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아야세의 얼굴에 놀라움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 질문에 대답해도 좋은지 망설여지긴 했지만 이윽고 아야세는 조금 자학적인 마음으로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5억...2천만엔 정도...예요." 이 숫자는 이미 아야세에게 있어서 금액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예전 가노에게 야유를 당한 것처럼 30번째 결재를 맞았을 무렵에는 아야세의 빚은 5억으로 뛰어올라 있었다. 아야세의 입에서 나온 숫자를 들은 코노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그것은 경악이라고 할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코노미는 낮은 목소리로 운전수에게 지시를 내린 후 길가에 차를 세웠다. 겨우 차에서 내려주는 걸까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쉰 아야세에게 코노미가 양복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서 내밀었다. "저는 당신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습닏. 가노도 지금은 당신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겠죠. 하지만 정말로 소중하다면 당신을 빚으로 묶어둘 수 있을까요." 그 말은 아야세의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을 안겨주었다. "저는 왜 당신이 그런 막대한 빚을 졌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직 젊어요. 조금이라도 지금의 생활에 의문을 느낀다면 가노가 더 이상 죄를 짓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노와 저는 친구니까요." 코노미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뭔가가 적혀 있는 종이를 익숙한 손놀림으로 잘라냈다. "먼저 당신은 가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저는 가노의 모든 죄를 알고 있고, 또 모든 것을 용서하고 있습니다." 코노미가 관대한 어조로 말하며 싱긋 웃었다. 그가 말한 가노의 죄가 살인이라면 그것은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어떨까요. 만약 가노에게 정말로 당신과 당신의 인생을 존중할 생각이 있다면 뭐든지 솔직하게 털어놓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가노가 당신에게 질리는 순간 거리를 헤매는 처지가 되겠죠." -가노가 자신에게 질린다- 그 말은 아야세에게 의외로 강한 효력을 발휘했다. 아야세는 애초에 가노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언젠가 가노가 자신에게서 흥미를 잃고 떠나갈 것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노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누군가의 체온을 빼앗겨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부모님의 불행을 지켜봐 온 아야세의 방어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가슴속에 느껴지는 이 서늘한 감정은 대체 무엇일까. 아야세가 바라는 것은 급격하게 가까워지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멀어지는 일도 없는 온화하고 평탄한 교류였다. 하지만 금전으로 묶여있는 자신들의 관계는 결코 평등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 뿐인가, 코노미의 말대로 일방적인 속박을 풀어버릴 권리를 지닌 것은 가노 한사람뿐이었다. "이걸 받아주세요." 코노미가 좀전에 잘라낸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그리고는 좀처럼 받으려고 하지 않는 아야세의 손을 잡고 긴 사각형의 종이를 살짝 쥐어주었다. "...이게 뭐죠...?" "수표입니다. 써 본 적이 없나요?" 아야세는 손에 든 수표와 코노미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길고 네모난 수표에는 꼼꼼한 필적으로 어마어마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얼핏 보기만 해서는 얼마가 되는 금액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소리를 내서 세어볼 수도 없어서 아야세는 수표에 적힌 금액을 확인하지도 않고 코노미에게 다시 내밀었다. "아뇨, 이건 당신의 것입니다." 코노미는 아야세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말했다. "제 서명도 들어있습니다. 이 수표를 이대로 은행에 가져가면 당장 현금 5억 2천만엔을 손에 넣을 수 있을겁니다. 아, 구좌의 잔고는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말씀을...받을 수 없어요! 대체..." 설마 이런 작은 종이 한 장에 5억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 이전에 코노미라는 남자가 장난으로라도 자신에게 이런 돈을 건네주는 이유를 아야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안됩니다. 가노를 위해서라도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세요. 자신이 가노에게 대체 어떤 존재인지를 말이죠." 코노미의 말은 아야세의 가슴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코노미의 말은 아야세의 몸을 구석구석 잔인하게 도려내는 것만 같아서 아야세는 제대로 몸을 가눌 수조차 없게 되었다. "좀전에 드린 명함뒤에 제 핸드폰 번호를 적어놓았습니다. 제가 힘이 되어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 코노미의 목소리는 지극히 부드럽고 상냥했지만 아야세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된다. 손에 들고 있던 수표를 마치 무시무시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이 집어던진 후 아야세는 힘껏 차문을 열었다. "고집이 세군요. 당신과 가노를 위해서인데." 등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아스팔트로 도망쳐서 뒤를 돌아보자 뒷좌석에서 몸을 내밀고 있는 코노미의 두눈이 생각지도 못 할 만큼 가까이 있었다. "...웃." 맑은, 하지만 어딘가 차가운 그의 두 눈은 아야세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눈동자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아야세는 힘껏 차문을 닫았다. "맨션까지 바래다드리지 못해서 유감이군요. 전 요앞의 힐튼호텔에서 묶고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 주십시오." 코노미는 의외로 깨끗하게 아야세를 놔준 후 차를 출발시켰다. 멀어져 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야세는 재빨리 보도블럭 위로 올라섰다. 머릿속이 지독하게 혼란스러웠다. 어쨌든 빨리 맨션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한 아야세는 어깨에 매고 있던 가방의 변화를 눈치채고 숨을 삼켰다. 가방사이로 작은 종이쪽지가 보였던 것이다. 꺼내서 확인해볼 필요도 없이 그것은 코노미의 서명이 담긴 수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코노미를 태운 차는 사라진 후였다. 홀로 남겨진 거리위에서 아야세는 몸이 떨려오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5 어젯밤부터 켜있던 조명의 빛이 아침 햇살속에 녹아 들어간다. 반짝반짝하게 닦여진 바닥과 상아색 벽지로 둘러싸인 거실에 흘러나오는 작은 한숨. 넓은 가죽 소파에 앉아서 충혈된 눈을 부빈후, 아야세는 장식장위의 시계를 바라보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젯밤 가노를 기다리다가 저녁도 먹지 않고 소파 위에서 밤을 세웠던 것이다. 애초에 침대에 누워있어 봤자 코노미의 말이 떠올라서 잠을 잘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어제의 기억을 더듬으려는 자신을 아야세는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같은 빌딩에 살면서도 가노의 예정을 아는 것조차 아야세에게는 어려웠다. 어제 오후 코노미의 차에서 도망쳐서 맨션에 도착한 후, 아야세는 가노에게 연락이 올 것을 기대하며 줄곧 전화앞에 앉아있었다. 물론 아야세도 전화가 울릴 확률이 극히 낮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야세는 그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노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렇게 하는 것 외에 아야세에게는 달리 아무 방법도 없었던 것이다. 예전의 아야세라면 울리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는 것 정도는 매우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가노와 함께 살기 전부터 아야세는 기대할 수 없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것을 쓸쓸하다고 느끼지 않게 되었으련만... 소파 옆에 놓여 있는 전화기를 바라보며 아야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가노와 함께 살기 시작한 후부터 때때로 인내심이 말을 듣지 않게 되곤 한다. 이것은 두렵고 좋지 않은 징후이다. 자신을 책망하는 듯이 눈을 감자, 또다시 어제의 일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아버지가 살해당했다고, 코노미는 단호하게 말했다. 동시에 자살하겠다는 녀석이 있으면 말리지 말라던 가노의 말이 싸늘하게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것은 과장된 비유 따위가 아니라, 가노는 정말로 사람의 생명따위는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는 남자인 것일까. 아야세는 예전에 가노가 채무자인 듯한 남자를 비상계단에서 발로 차서 떨어뜨리는 현장을 목격했던 적이 있다. 그때의 행동도 확실히 난폭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가노가 그 남자를 죽인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노의 일과 관련된 기억을 열심히 떠올리며, 아야세는 괜찮다고 몇 번이나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떨쳐버릴 수 없는 불안이 가슴속에 서서히 번져왔다. 가노가 필요이상으로 아야세를 사무실에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역시 뒤가 켕기는 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일까. 자신의 상상에 아야세는 힘없이 웃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곧 무겁게 가라앉아버리고 말았다. 지금 당장 가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한마디라도 좋으니까 이런 자신의 생각이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그렇게 부정해 주길바랬다. 하지만 지금 가노는 이곳에 없다. 그 이전에 실제로 얼굴을 마주치면, 가노가 모르는 곳에서 코노미와 만나고 게다가 수표까지 받아서 돌아온 아야세에게 그는 분노를 느낄지도 모른다. 아야세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거실을 나갔다. 그리고는 머뭇거8리며 침실로 들어가서 침대위에 걸터앉았다. 수면부족탓일까, 가벼운 현기증이 느껴졌다. 어딘가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질질 끌고, 아야세는 침대 옆에 놓아둔 가방을 끌어당겻다. 가방은 어제 외출하고 돌아왔을 때 그대로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가방을 열자 빳빳하고 구김하나 없는 수표가 마법처럼 들어 있었다. 1,10,100,1000...아야세는 소리를 내서 읽으며 그곳에 적혀있는 금액을 확인했다. 틀림없었다. 역시 5억2천만이라는 숫자가 꼼꼼한 필체로 적혀있었다.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야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신중하게 수표를 가방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코노미에게 이 수표를 돌려주려면, 자신이 직접 찾아가서 건네주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맨션을 나가서 호텔을 방문하는 것은 가노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짓을 해봤자 코노미가 수표를 받아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수표를 가방속에 다시 넣어둔 후 다른 한 장의 종이쪽지를 꺼내들었다. 코노미에게 받은 명함이었다. 그 뒤에는 수표에 쓰여 있는 것과 같은 필적으로 핸드폰 번호가 적혀있었다. 아야세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심장이 조여들어서 고통스러워질 만큼, 그 감정은 강렬하게 아야세를 사로잡았다. 화를 내도 상관없다. 가노가 단 한마디 만이라도 코노미의 말을 부정해 주면 그걸로 충분한 것이다. 제멋대로인 것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아야세는 이 마음을 가노에게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침대옆에 놓여 있는 전화를 향했다. 생각 끝에 아야세는 머뭇거리며 수화기로 손을 뻗었다. 서늘한 감촉이 손가락 뼈까지 스며드는 듯한 기분이 들어, 수화기를 집어드는 것이 두렵게 느껴졌다. 번호를 누르던 손가락을 멈추고 수화기를 다시 내려놓은 후, 아야세는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안돼. 역시 가노씨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어.- 아야세는 어깨를 떨구며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명함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숨을 삼킨 후 명함에 적힌 번호를 신중하게 눌렀다. 곧 벨이 울리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코노미입니다."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조용한 목소리.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건만, 아야세는 순간 뭐라고 말을 꺼내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침 일찍 죄송해요. 저 아야세인데요..." "아, 역시 당신이로군요. 안녕하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싹싹하게 웃는 코노미의 목소리에, 문득 목 언저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동시에 느껴지는 새로운 긴장감. "어제 주신 수표 때문에 전화드렸어요.... 전 역시 받을 수 없습니다." 아야세는 단호하게 말하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한참 일하고 있을 가노에게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서 상담하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이 마당에 골치 아픈 일에 말려 들어간 아야세를, 가노는 성가시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손가락끝이 자연스럽게 코노미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실은 좀전에 가노와 통화를 했습니다만... 그렇군요. 아직 가노에게 그 수표를 건네지 않은 모양이죠?" "전화? 가노씨와?" 설마 어제 있엇던 일이 코노미의 입을 통해 가노의 귀에 들어간것일까. 사이가 좋다는 코노미의 말을 믿을 수 없으니 만큼, 아야세는 심한 동요를 느꼈다. "거짓말...대체 무슨 얘기를..." 가노의 분노를 샀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기도 모르게 코노미의 말을 부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난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느닷없이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깜짝 놀랄만큼 강한 목소리에, 아야세는 움질 입을 다물었다. 언제난 온화한 노미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내다니, 자신이 뭔가 그에게 어처구니 없는 실례를 저지르고 만 것은 아닐까. 아야세는 어쩔줄 몰라하며 수화기를 고쳐 잡았다. "죄, 죄송해요. 전 코노미씨가 가노씨에게..." 머뭇거리며 사화하자 수화기 너머 쓴웃음이 들여왔다. "저야말로 갑자기 큰 소리를 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아야세는 약간이지만 겨우 긴장을 풀었다. "안심하세요. 가노에게는 어제 당신과 우연히 만났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보다 어째서 그에게 수표를 건네지 않은 겁니까?" 진지한 목소리의 물음에, 아야세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어째서라니...코노미씨와 전 어제 처음 만난 사이예요. 그렇지 않다해도 그런 큰 돈을 받을 수는 없어요. 코노미가 5억 이상이나 되는 큰 돈을 잘 알지도 못하는 아야세에게 진심으로 주려 한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굳이 코노미가 아니더라도,아야세게 그런큰 돈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역시 당신은 제가 생각했던 대로의 사람이구뇨. 솔직하고, 흥정따위는 할 수 없는 성격이고, 의외로 고집이 세고..." 코노미는 즐거운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야세는 눈썹을 찡그렸다. 도저히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농담은 그만둬 주세요. 저는..." "물론 농담이 아닙니다. 안심하세요. 그 돈은 제가 사업과는 별개의 투자로 벌어들인 돈입니다. 가노를 위해서라도 부디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코노미는 일말의 긴박감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의 출처가 아니라 막대한 금액 아닌가. "대체 무슨 말씀을..." "가치관의 문제겠죠. 저는 돈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당신은 분에 넘칠 만큼 가노를 소중하게 생각해 주고 있습니다. 빚으로 묶인 관계가 아닌...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가노와 마주보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까?" 보이지 않는 차가운 손으로 심장을 움켜잡힌 듯한 충격에 눈앞이 캄캄해 졌다. 수화기를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떨림을 멈추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아야세의 의지와는 달리 손가락끝은 소리가 날 정도로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주저할 것 없습니다. 제게 기부를 받았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부디 망설이지 말고 가노에게 건네주세요." 코노미의 말이 반쯤 귓속을 빠져나갔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떨림은 이제 아야세의 온몸을 커다랗게 뒤흔들고 있어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잠깐만요, 코노미씨! 설사 이곳을 나간다해도 저는..." 아야세의 외침은 도중에 뚝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무기질적인 충격과 함께, 아야세는 전화가 끊기는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었다. 뽑혀진 전화기 코드를 들고 있는, 등뒤에서 뻗어나온 긴 팔. 검은색에 가까운 갈색 양복에 쌍인 그 팔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야세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야세의 몸을 지배하고 있던 떨림이, 이번에는 거짓말처럼 딱 멈췄다. "전화를 하고 있던 사람은 코니미냐?" 낮은 목소리가 천천히 귓가에 울려 퍼졌다. 몸이 닿지도 않았는데도, 기척만이 날카롭게 전신을 압박하고있는 착각이 느껴졌다. "내가 없는 동안 그 녀석과 만났던 모양이군." 추궁학 있다기 보다는 씁쓸한 한숨이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아플만큼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얘기를 했지? 그녀석이 너한테 무슨 소릴 한거야?" 가노는 꼼짝도 하지 않는 아야세의 몸을 참을성 있게 돌려세우며 말했다. 그래도 아야세는 수화기를 꼭 움켜쥔 채 얼어붙은 눈동자를 크게 뜨고 있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내 말 듣고 있어? 아야세!" 가노의 입에서 공기가 떨릴 정도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아야세는 문득 꿈에서 깬듯한 표정으로 가노를 올려보았다. "...가노씨가 코노미씨의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의 목소리가 언가 멀리서 들려온 순간, 가노의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죽였다고? 내가 그 녀석의 아버지를?" 고막이 아파올 정도의 격렬한 노성. 순간 강렬한 공포가 치밀어올랐다. 사무실에서 봤던 가노의 모습과, 바의 복도에서 자신에게 소리를 질렀던 가노의 모습이, 공포와 함게 아야세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코노미씨가..." 고장난 녹음기처럼 되풀이해서 말하는 아야세를 바라보던 가노의 두 눈에 강렬한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닥쳐! 그런 녀석의 이름 부르지도 마!" 커다란 손이 어깨를 잡고 난폭하게 흔들었다. "...웃." 아야세가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리자, 가노는 손에서 힘을 늦췄다. 그리고는 아야세의 가냘픈 허리에 팔을 감고 몸을 끌어당긴후, 두손으로 뺨을 감쌌다. "잘 들어, 아야세. 그 녀석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전부 말도 안되는 소리야." 가까이 느껴지는 가노의 체온에, 아야세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정하며 참고 있던 어린애같은 감정이, 봇물이 터진 것처럼 넘쳐 흘렀다. 아야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가노의 가슴을 두들겼다. "하지만 가노씨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잖아요. 내가 아무리 물어봐도 한마디도..." 비명같은 아야세의 절규에 가노의 팔이 움직임을 멈췄다. 말해 버리고 말았다. 이런 감정적인 말대꾸를 한 것은, 아야세에게는 좀처럼 없는 경험이었다. 입밖에 내기는 했지만, 가노의 반응을 보는 것이 두려운 나머니 몸이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불긴한 침묵. 아야세의 어깨를 잡고 있는 가노의 손에 무시무시한 힘이 더해졌다. "...아파요..." "어제 웬일로 사무실에 내려왔나 했더니, 그래서 그런거였냐?" 가노의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만큼 차가웠다. 지금까지의 노성보다 더욱 격렬한 분노가 담겨 있는 목소리에, 아야세는 움찔 몸을 떨었다. "코노미 그 녀석이 그러라고 일러줬나 보지? 넌 그 녀석의 말을 믿었단 말이구나." 가노의 목소리에는 분노라기보다는 오히려 고통이 담겨 있엇다. "아니예요. 나는..." 부정하려고 한 아야세의 몸을, 가노의 팔이 주저없이 침대로 밀쳤다. 깜짝 놀라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가노의 몸이 아야세의 몸위로 덮쳐왔다. "...아..." 그 무시무시한 힘에, 목덜미에 서늘한 공포가 느껴졌다. 가노의 분노는 진짜였다. 애초에 아야세는 평소에도 결코 힘으로 그를 당해낼 수 없었다. "뭐가 아니란 말이냐, 아야세."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듯한 목소리. 커다란 손이 주춤거리며 도망치는 아야세의 발목을 잡았다. "...앗..." 발목을 잡혀 시트위를 질질 끌려 내려온 아야세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꼴불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리로 가노의 몸을 밀쳐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다리를 벌리고 누운 자세로 셔츠가 찢겨져 나갔다. "놔 주세요...!" 실사적으로 외쳤지만 발목을 잡고 있는 가노의 손은 느슨해지지않았다. 그뿐인가, 가노는 아야세를 엎드리게 한 다음 양손을 뒤로 묶어버렸다. "아파요...놔 주세요! 가노씨!" 청바지에서 벨트를 빼내는 가노의 무지막지한 힘에 시트에 묻혀있는 아야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가노는 자신을 안을 작정이다. 아야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몸을 열고 진흙처럼 끈적끈적한 쾌감에 밀어 넣고... 코노미의 말이 가슴속에 되살아나, 굴욕보다는 선명한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아야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그것은 가노의 잔인함을 더더욱 부채질했을 뿐이다. "입 다물어." 가노는 등뒤에서 손을 뻗어 아야세의 입을 막아버렸다. "읍... 으읍..." 몸부림을 치며 도망가려고 했지만, 호흡곤란으로 관자놀이가 지끈지끈 아팠다. 두 손을 묶여 있는 상태로는 가노의 손을 뿌리칠수도 없어서, 아야세는 비명같은 신음을 흘렸다. "우...."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질식의 고통속에서, 그 감정은 느닷없이 서늘하게아야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가노의 힘은 쉽사리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한 것이었다. 자신의 가냘픈 몸따위는 간단하게 부서져버리리라. 이 남자는 정말로 사람을 죽인 적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확신과도 같은 공포에 팔다리가 싸늘하게 식어왔다. "...웃.." 가노는 체중을 실어 아야세의 등을 찍어누르며, 버둥거리는 몸으로부터 마지막 남은 기력마저 빼앗아 버렸다. "웃... 아... 어... 읍... 으읍..." 가노의 힘 앞에서는, 아야세의 의지따위는 너무나도 허무하다. 가노는 아야세를 감정이 없는 인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혹시 아야세처럼 무력한 생물에게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 줄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압도적이 남자의 힘과 감정앞에서, 아야세는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절망을 느꼈다. "웃... 아앗..." 속옷마저 빼앗아버린 가노의 손가락이, 능숙하게 아야세의 그곳을 어루만졌다. 부정하는 마음을 배신하고, 길들여져 있는 몸은 약간의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해간다. 그것이 지독하게 수치스러웠다. 입을 막고 있는 손 때문에 충분한 산소를 들이마쉴 수 없어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눈물이 수치심 때문인지 분함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판단할 수 없었다. 귓불을 애무하는 입술이 손가락의 움직임에 맞춰 서서히 목덜미로 미끄러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코노미 녀석한테도 안겼나?" 그 터무니 없는 추궁에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만큼 격렬한 분노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자식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서는 네가 불쌍하다고 하더군." "...아...아앗..." 오싹할만큼 온몸을 지배하는 열기.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려해도 가노의 손에 감싸인 그곳은 이미 충분하게 반응하여 달콤한 이슬을 떨구고 있었다. "...믿지도 않는 남자에게 안겨도 반응하는 몸이니까 누구에게 안겨도 이렇게 되겠지." 가노는 손가락으로 애처롭게 충혈된 선단에 손톱을 세웠다. "웃..." 지독한 아픔과 둔탁한 쾌감에 날카로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호흡을 차단하고 있던 가노의 손이 겨우 아야세를 해방시켜 주었다. "...하아...우웃..." 순간 아야세는 콜록거리며 시트에 몸을 묻었다. 그러나 가노는 괴로워하는 아야세의 등을 쓸어주지도 않고 무자비하게 허리를 끌어올렸다. "좀 더 허리를 들어. 엉덩이가 잘 보이도록." 엉덩이를 높이 치켜올린 굴욕적인 자세에 수치심으로 눈앞이 새빨개졌다. 하지만 가노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는 것이 두려워서 아야세는 조금이라도 그의 몸에서 도망치기 위해 시트위를 기어 올라갔다. "싫어...앗...!" 가노는 난폭하게 아야세의 팔을 잡고 침대위로 내던졌다. 아야세의 필사적인 저항에 가노의 손가락은 더욱 무자비하게 살갗을 파고들었다. 노성보다도 두려운 가노의 변화를 느끼고 아야세는 그를 돌아보았다. "아..." 공포로 몸이 차갑에 얼어붙어 간다. 이럴때의 가노의 눈은 무엇보다도 두렵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가노가 원하는대로 강요당해 왔던 행위다. 그러나 오늘은 절대로 견딜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싫으냐. 나와 닿는게..." 가늘에 떨리는 아야세의 피부를 핥으며 가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시..." 가노의 손가락이 와 닿은 순간 아야세는 날카롭게 숨을 삼켰다. "...내가 만든 키스마크, 아직도 남아있군." 아야세의 몸중에 유일하게 살집이 있는 엉덩이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가노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싫어...보지...말아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만 아야세를 비웃으며 가노는 두터운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듯이 천천히 애무를 시작했다. "우..." 핑크색 점막으로 시선을 보내며 가노가 따뜻한 내부로 살짝 침입해 들어왔다. "이것만으로도 완전히 느슨해져 있군." 낮게 웃으며 말하는 가노의 목소리를 부정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를 낼 여유조차 없었다. 몸을 열고 들어온 손가락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열로 하반신이 무겁게 저려왔다. 이물질을 밀어내려고 하는 움직임을 무시하고 오일을 바른 손가락은 무자비하게 몸안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우웃..." 이런식으로 취급당하면서도 달콤한 신음을 흘리는 자신의 몸이 믿을 수 없었다. 싫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지만 가노는 또다시 몸안 깊숙이 침입하여 아야세의 가냘픈 몸을 긴장시켰다. "아야세, 넌 이렇게 천천히 어루만져 주는 걸 좋아했지." 가노는 그렇게 속삭이며 아야세의 은밀하고 부드러운 부분을 어루만졌다. 이대로 절정을 맞이해 버릴 것만 같은 쾌감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시...아...아...! 싫어...그만둬...요..." 하반신이 뜨겁게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비명과는 반대로 아야세는 좀더 강하게 자극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무너져 내릴 듯한 허리를 필사적으로 지탱했다. 몸과 마음의 균형은 이제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만족하지 못했을 리가 없을텐데, 너는 이것만으로도 쾌감을 느끼는 몸이니까." 가노의 손가락이 축축한 입구에서 느닷없이 음란한 소리를 내며 빠져나갔다. "웃...아아..." 느닷없이 자극을 그만둔 이유를 묻는 것처럼, 아야세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가노를 돌아보았다. 가노는 그 물음에 대답해 주는 대신, 힘없는 몸을 위로 향해 돌려 눕혔다. "싫어...싫어..." 되풀이해서 흘러 나오는 신음을 멈추려는 듯이 가노의 손가락이 축축하게 젖은 아야세를 움켜잡았다. 아야세는 흠칫 놀라며 몸을 커다랗게 젖혔다. 찢겨나가는 듯한 감각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긴 한동안 안아주지 않았으니까." "싫....어..." 가노는 보란 듯이 바지를 풀고 딱딱하게 고개를 치켜든 자신을 꺼냈다. 같은 기능을 갖고 있을텐데도, 아직 앳된 느낌이 남아있는 아야세와 달리 가노는 커다랗고 무시무시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아..."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아야세를 사로잡았다. 벌써 몇 번이나 가노와 몸을 맞댔지만, 아직도 두려움은 떨쳐 버릴수가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입안이 바싹 마르는 듯한 흥분에 하반신이 떨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우웃..." 순간 그가 침입하는 느낌에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는 마음과는 달리 쾌감을 배우기 시작한 몸은 조금이라도 빨리 가노의 몸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쓸 뿐이다. "네가 만족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대해 줄 생각이었는데." 비꼬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입구를 열었다. "...아..아앗..." 그러나 가노는 단숨에 침입해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삽입각도를 측정하는 것처럼 가볍게 허리를 당긴 후, 완전히 빠져가기 직전에 보다 깊숙하게 침입을 개시했다. ".....우...아파...." 부드러운 점막을 벌리는 아픔과, 그에 상반되는 안타까운 쾌감. "날 원해?" 달콤한 목소리가 입술이 닿을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왔다. "내게 안겨서 쾌감을 느끼고 싶지?" 부드러운 속삼임과 함게 축축하게 젖어 있는 그곳에 가노의 손가락이 와 닿았다. "웃.....싫어......아......" "아야세 넌 내몸을 좋아하지? 말해 봐. 다른 남자가 아닌 내게 안기고 싶다고." 감정을 억누른 속삭임에 가슴이 서늘하게 아파왔다. 어째서 가노는 이런 잔혹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그 의문은 뜨거운 열기와 동시에 차가운 모래처럼 아야세의 몸을 가득 메웠다. 가노에게 어째서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무슨 말을 들어도, 어떤 취급을 당해도, 자신은 불평을 늘어놓을 만한 입장이 못된다. 가노는 그저 계약대로 자신을 농락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우........." 어젯밤에는 그토록 듣고 싶었던 그의 목소리가, 지금은 잔혼하게 가슴을 잡아 찢었다.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눈물은 끊임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싫어... 절... 대...싫..." 끓어질 듯 말 듯 흘러나온 목소리가 흐느낌으로 떨리고 있었다. 아야세는 필사적으로 어린애처럼 고집스럽게 거절의 말을 되풀이 했다. 이 남자에게 강제로 안기는 것은 싫었다. 절대로 싫었다.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고 있는 가노를 올려다보는 것 마저도 괴로웠다. 자유를 빼앗긴 몸으로, 아야세는 가노를 거절하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결코 꺽이지 않는 아야세의 완강한 저항에, 가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렇게 흥분하고 있는 주제에 정말 귀염성 없게 구는구나." 커다란 손이 아야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난폭하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어중간한 위치에서 가노가 단숨에 몸안으로 침입해 들어왔따. "싫어...! 아앗...." "몸이 훨씬 솔직하군. 이곳은 내 몸이 없으면 쓸쓸하다고 말하고 있는걸." 신랄한 비웃음조차 온몸에서 소용돌이치는 뜨거운 열기로 인해 이해할 수 없었다. "앗...아 .... 아파.." 한계까지 다가와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래도 가노의 몸을 받아들이 내부는 갈망하던 자극을 좀더 깊게 맛보기 위해 탐욕스럽게 그를 조여들었다. 싫은데도, 견딜 수 없는데도 바싹 다가온 가노의 체온에 온몸이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러지...? 그렇게 기분좋냐..???" 아픔을 호소하면서도 남자의 우직임에 맞추려고 필사적으로 버둥치는 아야세를 내려다보며, 가노는 비웃음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녀석을 생각하지 마. 넌 나만 바라보면 돼..." 가노는 나젝 속삭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우웃..." 충분한 애무도 받지 않은채, 아야세는 튕겨나가 듯이 온몸을 젖히며, 결정을 맞이했다. 미칠 듯한 쾌감에 온 몸이 떨려왔다. 세좋게 튀어오른 체액이 복부와 가슴을 더럽혔다. "...너무... 조이지마..." "웃... 아아..." 지극히 가까운 거리애ㅔ서 느껴지는 가노의 숨결, 키스를 당하는 듯한 착각에 입안이 저려왔다. 한 번 결정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지배하는 쾌감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싫어...." 수치심으로 온몸이 떨려왔다. 눈물을 감추려고 힘없이 고개를 돌린 아야세의 머리카락을 가노의 손가락이 살짝 걷어 올랐다. "이봐, 혼자서만 즐기고 끝낼 생각은 아니겠지?" 힘없이 시트에 몸을 묻고 있는 아야세에게 가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비명을 지르는 아야세의 머리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가노가 흐트러진 상의를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땀으로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커다란 손으로 난폭하게 쓸어올렸다. 그 야생동물같은 움직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노의 몸을 받아들이고 있는 내부가 흥분으로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그만..." 다시 한 번 절정을 맞이하고 싶다는 충동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안돼." 아야세의 귓가를 혀로 애무하고 있던 남자가 관능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목소리의 밑바닥에 아야세가 건드릴 수 없는 괴로움이 스며있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었을까. 가슴속에서 그가 이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줬으면 하는 충동이 느껴졌다. 가노의 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바램과 그에게 안기고 싶다는 욕구가 하나의 몸안에서 강렬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아..." 아야세는 눈물을 흘리며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좀 더 날 원해 봐." 한숨에 가까운 똑같은 괴로움을 담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인다. 황홀한 쾌감에 빠져들어갈 것만 같은 자신을 아야세는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필사적으로 떨쳐버리려 했다. "웃...아아..." 문득 귓가에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야세..." 마음속을 들킨 듯한 착각에 아야세는 숨을 삼켰다. "아야세..." 그토록 바라던 속삭임. 아야세는 가슴속에 밀려오는 행복과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6 에어컨 소리가 윙윙거리며 끊임없이 귀에 울려왔다. 블라인드 너머 투명하고 높은 하늘이 보였다. 그러나 시간의 감각을 잃어버린 아야세에게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디선가 무거운 문이 여닫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야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기분으로 청결한 시트위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도 단조로운 고동을 울리던 심장은 급히 긴장감을 띄기 시작했다. 비록 침대위에서 몸을 숨길 방법은 없었지만 아야세는 숨을 죽이고 침실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렸다.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후 장신의 남자가 침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에어컨으로 싸늘해진 몸을 움츠릴 힘조차 없는 아야세는 남자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독하게 높은 위치에서 가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무리하게 시간을 내서 자신을 살펴보러 온 것임은 아야세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뭔가 할말을 찾기 위해서일까, 가노는 침실을 둘러보았다. 방안을 나섰을 때와 전혀 변함이 없는 실내의 풍경에 가노는 낮게 혀를 찼다. "...목 마르지 않아?" 긴 손가락이 머뭇거리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었다. 아무 반응도 없는 아야세를 바라보던 가노는 쓴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는 잠시 주저하던 끝에 아야세를 내려다보며 신중하게 입을 맞췄다. 가노의 셔츠가 어깨에 와 닿았다. 아야세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가노에게 몸을 맡겼다. 애초에 아야세에게는 남자에게 저항할 힘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아직도 오랜 시간 묶여 있던 팔은 무겁고 저릿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고 몸안에는 가노의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음..." 난폭하게 혀를 밀어 넣는 것이 아닌, 어딘지 머뭇거리는 듯한 어색한 키스. 기분좋은 감촉이 온몸을 감쌌다. "어째서 너는..." 가노의 속삭임을 듣고 싶지 않아서 굳게 눈을 감았다. 격정에 몸을 맡긴 채 자신을 안았던 남자. 그러나 지금 가노의 목소리에는 아픔과도 같은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왜 자신을 그렇게도 공포에 떨게 했던 가노가 이런 목소리를 내는 것일까, 아야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야세의 자유는 전부 가노의 것이다. 그의 지시대로 함께 살고 있고 그가 원할 때마다 몸을 열어야 하고 외출의 자유조차 제한되어 있다. 가노의 지시에 모두 따르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에게 이 이상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문득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과 가노의 관게에서 무언가를 바래도 좋은 입장에 있는 것은 가노뿐이다. 자신은 그저 마음이 없는 인형처럼 그가 원하는 대로 모습을 바꿔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가노가 원하는 대로 자신은 변해갈 수 있을까. 지금까지 자신이 가노의 바램에 충분히 응해 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가노도 뜻대로 되어주지 않는 아야세에게 화를 내는것조차 지쳐서 자신의 존재를 귀찮게 여기기 시작할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관계가 오래 지속될 리는 없다. 기묘한 관계의 끝은 틀림없이 가깝게 다가와 있는 것이다. "울지 마..." 당황한 듯한 속삭임과 함께 가노의 입술이 어색하게 눈물을 핥았다. 아야세는 아무말 없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자신의 눈이 무거운 눈물로 젖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익숙한 가노의 체온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피부에 와 닿았다. 가노의 의지로 이 체온을 빼앗겨 버린다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그 두려운 상상은 언제나 아야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의 힘에 의해 부모님과 할머니를 잃어버린 것처럼 언젠가는 시간이라는 괴물이 자신을 고독속에 밀어넣으리라. 정말로 마음따위 없는 인형이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적어도 가노와 만나기 전까지는 누군가를 잃어버리는 것이 이렇게나 두렵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이제 돌이킬 수는 없을 것일까. 차가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야세." 아야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를 바라보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다 줄테니까 누워 있어." 가노가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야세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구름위를 걷는 듯한 불안정한 발걸음으로 바닥위를 걸어서 침대옆에 뒹굴고 있는 가방을 집어들었다. 가방의 무게가 저릿한 팔을 아프게 파고 들었지만 아야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방안을 뒤졌다. "무리해서 움직이지 마, 아야세." "나는..." 아야세는 가노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빳빳한 종이의 감촉이 손가락에 와 닿았다. "가노씨를 믿지 않았던 게 아니예요...하지만 지금은 뭐가 진짜인지 잘 모르겠어요." 가냘프게 떨리는 목소리가 한심하게 느껴져서 아야세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코노미는 옛날부터 말로 사람을 구워 삶는게 특기였어. 그 녀석이 뭐라고 했던 간에 신경쓰지 마." "나는 지금 코노미씨가 한 말 때문에 이러는게 아니예요! 그저 나는 왜 가노씨가 내게는 아무것도 얘기해주지 않는 건지 그것이..." 아야세의 외침은 도중에서 끊겨 버렸다. 가노가 아무말도 해 주지 않는 이유는 아야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가노에게 있어서 아야세는 모든 것을 이야기 해줄만큼 가치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뿐인 것이다. 쏟아 내버리고 싶지만 쏟아내버릴 수 없는 부조리한 감정이 목안에서 소용돌이쳤다. "내 말 좀 들어봐, 아야세. 나는..." 가노는 눈썹을 찡그리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아야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목이 찢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만큼 커다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순간 가슴속을 막고 있던 무언가가 소리를 내며 튕겨나갔다. "이런 식으로 가노씨와 함께 사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자신의 목소리가 지독히 멀리서 들려왔다. 눈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두 눈이 분노같기도 하고 놀라움 같기도 한 감정에 의해 커다랗게 열리는 것을 아야세는 의식과는 다른 곳에서 올려다 보고 있었다. "돈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것도 사실은..." 이럴 때조차 돈으로 환산되는 육체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작게 입술을 떨고 있는 아야세를 가노의 두눈이 정면에서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이냐?" 내뱉듯이 말하는 가노의 목소리가 아야세의 호흡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애써 들이마쉰 산소가 폐속에서 차갑게 얼어붙어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아니 선택은 이미 끝났다. 가노가 던진 말은 그 결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건 상관없어. 나는 널 놓아줄 생각은 털끝 만치도 없으니까." 가노의 낮은 목소리에 아야세는 무너지기 시작하는 마음을 추스르며 굳게 눈을 감았다. 지금은 놓아줄 생각이 없더라도 반년후에는 어떨까. 1년후, 혹은 1주일 후에도 그가 자신에게 흥미를 지니고 있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도 가노는 지금과 똑같은 목소리로 네가 무슨 생각을 하건 상관없다고 말할까. "바보같은 생각 하지 마. 자, 이쪽으로 와서 누워라." 아야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바보같은 생각이 아니예요."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기 위해서 아야세는 강한 눈빛으로 가노를 올려다보았다. "가노씨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지도 모르지만 난 달라요..." 목이 갈라질만큼 큰 소리로 외치며 아야세는 움켜쥐고 있던 수표를 던졌다. 빳빳한 수표는 손가락을 베일만큼 날카로웠다. 이 종이조각은 아야세의 인생을 바꿔버릴 만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돈은 전부 갚겠어요. 지금 당장...!" 밀려오는 절망에 떠밀려 아야세는 비명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7 저물어가기 시작한 여름의 햇빛이 네모난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온다. 1인용 냉장고에 낡고 좁은 욕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싱크대. 한평밖에 되지 않는 좁은 부엌에 서서 아야세는 형광등 스위치를 켰다. 3년전 혼자 살게된 후부터 한 번도 구조를 바꾼 적이 없지만 작은 방안에는 나름대로 필요한 가구가 갖춰져 있었다. 비싼 물건은 하나도 없었지만 아야세에게는 애착이 느껴지는 소중한 가구들이었다. 야채를 볶아서 간단한 요리를 만든 후 아야세는 가스렌지의 불을 껐다. 그리고는 낡은 냄비 뚜껑을 열고 죽이 다 끓었는지 확인해 보았다. "...너무 많이 만들었나?"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온 혼잣말에 아야세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뭔가를 만들어서 먹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식욕이 조금도 없었다. 가노의 맨션에서 이 아파트로 돌아온지 이틀째. 처음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긴장이 풀린 탓에 그대로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잠이 들어 버렸었다. 충분한 수면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노의 흔적은 아직도 아야세의 몸을 괴롭히고 있었다. 아침 이른 시간에 눈을 뜨긴 했지만 금방은 일어날 기력마저도 없었다. 다행히도 가노가 돈을 지불해 놓은 덕분에 방안은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냉장고 안과 욕실 그리고 이불에 이르기까지 딱히 청소할 필요도 없이 당장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마치 한달 이상이나 이곳을 비워뒀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상상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물론 그 호화로운 맨션에서의 생활은 꿈이 아니다. 수표를 받아들었을 때의 가노의 눈이 떠올라 아야세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받아주지 않는 것은 아닐까하는 아야세의 걱정과는 달리 가노는 놀랄만큼 조용하게 수표를 확인했다. 수표에 적혀 있는 금액과 코노미의 사인을 보아도 그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실망같기도 하고 절망같기도 한 쓰디쓴 감정이 아직도 혀안에 남아있었다. 코노미에게서 수표를 받았다는 사실조차 가노는 더 이상 충궁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코노미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자신에게서 도망치려는 아야세의 마음은 잘 알았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아야세의 목안에 달라붙은 채 입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정산을 마친 후 5억 2천만엔의 수표는 수십만엔의 현금이 되어 아야세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현금이 전혀 없는 아야세는 다음 생활비를 받을 때까지 이 돈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야세의 손에 남은 것은 곧 없어져버리고 말 얼마 안되는 현금뿐이었다. 작은 상위에 차려진 1인분의 식사. 차려놓긴 했지만 도저히 수저를 들 마음이 생기지 않아 아야세는 작게 한숨을 쉬며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런 좁은 방안에 있는데도 아무 소리로 들려오지 않았다. 지나치게 조용한 공기속에서 아야세는 새삼 지금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온 몸이 구석구석 아프고 뜨거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누워버리고 싶었다. 잠이 들어 버리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아야세는 가볍게 고개를 저은 후 전화기로 시선을 향했다. 검은 구식 전화기 옆에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명함이 놓여 있었다. 신주쿠에 머물고 있는 코노미가 건네준 명함이었다. 코노미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받은 5억 이상이나 되는 큰 돈을, 아야세는 자신의 의지로 사용해 버렸다. 본래는 아파트에 돌아오자마자 연락을 취했어야 하지만 그럴 기력마저 남아있지 않았던 관계로 어영부영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물론 아야세에게는 5억이라는 큰 돈을 한꺼번에 갚을 능력은 없었다. 평생이 걸려서라도 갚겠다는 아야세의 말에 과연 코노미는 귀를 기울여 줄 것인가. 위기감은 확실하게 가슴속에 둥지를 틀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야세는 어딘가 현실감이 결핍된 기분으로 수화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전화번호를 확인한 후 천천히 다이얼을 돌린 다음 침대 밑에 주저앉아서 벨소리를 세고 있지나 다섯번째 벨소리가 울린 후 전화가 연결되었다. "저..." 마음을 결심하고 입을 연 순간 수화기에서 기계적인 부재중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코노미는 부재중인 모양이었다. 아야세는 어깨를 떨구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볼까 망설이던 끝에 아야세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어디에 전화를 건단 말인가. 침묵히 지독히도 커다랗게 귓가에 울려왔다. 아야세는 자리에서 일어설 기운도 없이 좁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3년이나 살아온 익숙한 방안에는 자신이 있을 곳 따윈 조금도 없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아야세는 힘없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한달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아야세가 생활할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낯선 장소에 내던져진 듯한 불안감이 아야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 이곳에 이사왔을 때조차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심장을 조여오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 지금이라면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쓸쓸함. 그것은 아야세가 가장 두려워하던 ㅡ 눈길을 돌리는 것조차 피해왔던 감정이었다. 누구의 체온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은, 아무리 좁아도 혼자 있기에는 지나치게 넓었다. 수화기를 집어들 용기는 고사하고 방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조차 견딜 수 없어서 아야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락을 취할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코노미를 만날 수 있도록 그가 머물고 있는 호텔에서 기다리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코노미에게 사과하고 돈을 갚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보지 않으면 안된다. 아버지처럼 몸이 부서져라 일에 몰두하면 쓸쓸하다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어져 버릴까. 슬픈 미소를 지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아야세는 문득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오다니 대체 누구일까. 짐작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누구일까를 생각하기도 전에 아야세는 튕겨나가 듯 문을 향해 달려갔다. 설마하는 생각과 혹시나하는 희망이 가슴속에서 교차했다. 모든것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건만 뻔뻔스러운 기대를 품고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이 가슴속에서 어린애같은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지금 나가요!" 아야세는 떨리는 손으로 낡은 자물쇠를 풀었다. 초조해하며 문을 열자 긴 그림자가 실내에 뻗어왔다. "가..." 입밖으로 튀어나온 이름이 부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석양속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본 순간 아야세의 눈동자에는 깊은 실망의 빛이 드리워졌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그는 아야세가 부르다 만 이름의 의미를 눈치챘으리라. 그래도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고개를 숙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코노미씨..." 낙담과 함께 밀려온 놀라움에 아야세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설마 코노미쪽에서 이곳을 찾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기 때문에 아야세는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죄, 죄송해요! 실은 저..." 문득 정신을 차린 아야세가 급히 사과를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코노미는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만류했다. "축하합니다. 이곳에 돌아와 있는 걸 보니 가노와의 관계는 청산한 모양이로군요." "죄송합니다...." 코노미의 웃는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아야세는 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깨끗하게 청소된 바닥위에 두 손을 대고 머리를 숙였다.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아야세에게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가노에게조차 이런 일을 강요당한 적은 없었지만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는 죄책감에 아야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전 코노미씨에게 받은 돈을 멋대로 써버리고 말았어요. 사과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평생이 걸려서라도 꼭 갚을 테니까..." "무리입니다." 단호한 대답과 함께 긴 손가락이 어깨를 잡고 아야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봤자 당신같은 사람이 5억을 갚는 것은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을텐데요. 제 목적은 돈이 아닙니다." 아야세는 당황하면서도 코노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진정하세요. 친구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뭐하지만 가노는 교활한...아니, 머리가 좋은 남자입니다. 당신을 잡아두기 위해서라면 수표를 받지 않을 방법따위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코노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빚을 갚겠다는 의사를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정도의 금액이 움직이면 그것이 상업행위에 의해 손에 넣은 것이든 단순한 양도에 의한 것이든 상당한 액수의 과세를 물어야 합니다. 게다가 현금이 아니라 수표니까 반드시 자취도 남는 법이죠." 아야세는 반론의 여지조차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입술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수표는 제가 당신에게 양도한 것입니다. 원칙대로라면 당신에게는 증여세를 지불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죠.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당신이 빚을 갚지 못하도록 만들 작정이었다면 가노는 당신에게 증여세를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새로운 빚을 가산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코노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야세의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아야세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수표를 받아들었을 때의 가노의 기분나쁠 만큼 무표정한 두 눈이 떠올랐다. 그 차가운 눈으로 가노는 아야세는 상상초다 불가능한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당신의 장래를 염려하는 가노의 배려였을 지도 모르고 또는 다소 세금을 내더라도 당신에게 돈을 받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판단했을 지도 모르죠." 코노미가 아야세를 위로하듯이 어깨위에 살짝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무거운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런 상황에서 가노가 자신을 배려했을 리는 없다. 가노가 자신보다 돈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날카로운 아픔이 되어 아야세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어찌됐든 슬슬 물러설 때가 됐다고 생각했던 거겠죠." 머리속이 휘청거리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제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입니다." 아직 넋을 잃고 있는 아야세를 향해 코노미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입술 사이로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살짝 엿보였다. "제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주지 않겠습니까?" "잠깐만요...돈은 확실하게..." "물론 사례는 드리겠습니다. 가노는 북경어를 전혀 모르지만 당신은 어느정도 할 수 있지 않나요?"그 물음에 아야세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같은 아파트에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 살고 있었고 지금도 대학에서 유학생과 교류하고 있으며 또 제 2외국어로 중국어를 배우고 있어서 간단한 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다. 하지만 열심히 권유하는 코노미의 진의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아야세는 당황하고 말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5억엔이라는 거액을 선뜻 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대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이대로 정말 돈을 갚지 않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코노미의 부탁을 간단하게 거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신이 망설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니까요. 이대로 서서 얘기하는 것도 뭐하니까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코노미의 말에 아야세는 자신이 그를 어두운 현관 앞에 오랫동안 세워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 죄송해요. 이런 곳에..." 당황하며 방안을 둘러보았지만 코노미를 대접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뇨,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외출할 준비를 하세요." 정중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아야세는 망설이면서도 방안으로 들어갔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8 짙은 남색 하늘을 물들이는 것처럼 거리는 이미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빛나고 있었다. 코노미가 직접 운전하는 차는 때때로 신중하게 길을 확인하면서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코노미는 친구가 경영하는 식당으로 안내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아야세는 식욕이 없었다. 오른쪽이 핸들이 달린 차는 오랜만이라 긴장된다며 코노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요 몇년간 그는 LA와 북경 그리고 상하이에 있는 사무실을 오가며 생활했다고 한다. 특히 상하이는 시가지의 재개발에 힘을 쏟고 있는 중이라 코노미같은 신예 사업가에게 있어서는 매우 살기 편한 도시라고 했다. 코노미의 유창한 북경어를 듣고 있으면 상하이라는 토지와 그를 관련지어서 연상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그는 유창하지는 않다고 겸손하게 말하긴 했지만 상하이어도 생활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본업인 무역회사는 어쨌든 부업으로 손대고 있는 투자는 컴퓨터의 발달로 사는 곳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 아무것도 없이 사업을 시작해봤자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은 어렵지만 상하이의 싼 물가는 매력적이라고 코노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일본의 고기나 쌀같은 건 세계적으로도 최고의 수준이니까요. 그것만큼은 어딜 가더라도 그리워지더군요." 감회깊게 중얼거리는 코노미를 바라보며 아야세는 겨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코노미도 어딘가 눈부신 듯한 얼굴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토파즈 같군요." "...네.?" 아야세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코노미가 불쑥 던진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눈동자 말입니다." 자신의 눈동자를 가리키며 코노미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정말로 아름다운 눈이로군요." 코노미가 진지한 표정으로 아야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국의 피가 섞여 있는 아야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유달리 색소가 옅었다.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코노미는 쑥스러운 기색도 없이 말하며 당황해하는 아야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화재를 돌리며 천천히 핸들을 꺾었다. "...사실은 일본에 있는 동안 맛있는 초밥집을 찾아 다니고 싶었지만..." 세련된 식당이 늘어선 거리에서 차를 멈춘 후 코노미는 눈으로 한 가게를 가리켰다. "도락을 목적으로 경영하는 가게라 음식은 그다지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틀림없이 술은 제법 괜찮은 것들이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코노미가 가리킨 가게를 바라본 순간 아야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들어가시죠." 먼저 차에서 내린 코노미를 따라 아야세는 놀라면서도 문을 열었다. 우아한 네온사인이 흘러 넘치는 거리속에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하얀 벽은 위압감을 풍기며 서 있었다. 착각할 리가 없다. 첫번째는 사촌형의 간계에 빠져서 끌려 왔었고 두번째는 소메야의 도움을 받아서 방문했던 고급 클럽이다. 빨라지는 고동과 함께 머릿속에서 경계신호가 울려 퍼지기 시작해싿. [아크시]. 인도의 고어로 눈을 의미하는 이름을 지닌 이 가게에 아야세는 결코 좋은 기억이 없었다. "코노미씨, 당신..." 아야세는 창백한 얼굴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문앞에 서 있는 장신의 도어맨이 코노미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코노미는 이 가게와 아야세의 관계를 알고 일부러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일까. "코노미씨! 전 코노미씨가 말씀하신 대로 가노씨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이예요. 만약 저를 이용해서 가노씨에게..." 아야세는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그러자 코노미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알고있습니다. 빚을 갚은 이상 당신과 가노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없죠." 그 지적에 아야세는 가슴이 지끈거리며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잠시만 저와 관계를 가져주실 수 없을까요?" 코노미의 긴 팔에 등을 떠밀려 아야세는 멍하니 가게 입구를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도망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마음과 수표를 써버린 이상 코노미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는 자책감이 마음속에서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 코노미가 정말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라면 이제와서 도망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아야세 자신에게 화가 미치는 것은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경솔함이 또다시 가노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불안이 밀려왔다. 코노미의 팔에 등을 떠밀려 아야세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가게안으로 한걸음을 내디뎠다. 긴장으로 굳어 있는 아야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코노미는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좀전에 말씀드린 아르바이트 말인데요..." 아야세는 투명한 눈동자를 들어 코노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게안은 예전에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색채에 뒤덮혀 있었고 그것이 아야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바닥에 깔려있는 새빨간 융단위에도 이 가게의 이름을 나타내는 눈동자 마크가 그로테스크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보수는 당신이 바라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일의 내용도 틀림없이 마음에 들 겁니다." 아야세는 아직 코노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려고 입을 연 순간 아야세의 눈앞에서 두터운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안내를 받은 곳은 역시 예전과 마찬가지로 반 지하에 있는 커다란 홀이었다. 홀안을 가득 메운 담배와 술냄새가 손님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아야세의 발밑에 얽혀 들어왔다. 세련된 바 카운트와 유희용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모두 고급스러운 차림을 한 손님들 뿐이었다. 그중에서는 가면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사람과 선정적인 드레스 차림의 여성을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 그 사람들의 시선은 대부분 홀 어디서나 바라볼 수 있는 넓은 무대를 향해 있었다. 예전에 아야세가 경매에 붙여졌을 때 끌려 올라갔던 바로 그 무대다. 천장에서 늘어진 몇겹이나 되는 긴 천으로 장식된 무대만이 환한 조명에 비춰 어두운 실내속에 떠올라 있었다. 아니,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은 무대라기 보다는 그곳에 서있는 사람들 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춘 아야세의 귀에 기계를 통해 증폭된 숨소리가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힘없는 흐느낌과도 같은 그 소리는 무대에 서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맞춰 때때로 날카로운 비명소리로 변하곤 했다. 무대위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갈색 피부의 여자가 용서없는 손님들의 시선과 조명속에서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남자들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욱..."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몸을 뒤흔드는 듯한 충격에 뻣뻣하게 굳어버린 아야세의 어깨를 커다란 손이 살짝 감싸안았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자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는 코노미의 얼굴이 보였다. "...아..." "그다지 고상한 가게가 아니라 죄송하군요." 코노미는 아무렇지도 않게 속삭이며 아야세의 어깨를 안은 채 가게안으로 들어갔다. 너무나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지만 코노미의 힘은 그것을 용서하지 않을만큼 강했다. "안심하세요. 저건 에피타이저니까요. 오늘의 메인 디쉬는 좀 더 정성껏 준비했다고 하더군요." 코노미는 힘없이 흔덜리는 여자의 몸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신음소리가 작게 잦아들자 관객들의 관심은 노골적으로 무대에서 떠나 각자 환담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건...대체..." "이 홀에는 엄선된 회원들밖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다소의 위법행위도 외부로 흘러나갈 염려가 없다는 얘기죠." 코노미는 싱긋 웃으며 게단을 내려 곧바로 홀을 향해 걸어갔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손님 몇사람이 아야세에게 노골적인 시선을 던져왔다. "자, 잠깐만요. 코노미씨." 도망치려고 했지만 어깨를 안고 있는 그의 팔은 너무나도 힘이 셌다. 코노미는 아야세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바 카운터 안에 설치된 문을 열었다. 무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야세는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눈동자에 각인된 잔상은 여전히 끔찍한 오한을 불러일으켰다. "코노미, 손님은 다 모였나?" 새빨간 융단이 깔린 복도 맞은편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짧은 통로 안쪽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본 순간 아야세는 소름이 돋는 듯한 긴장감을 맛보았다. 이 가게의 책임자로, 예전에 막대한 돈이 걸린 내기 포커에서 가노에게 패배한 적이 있는 하야시다라는 남자였다. "아야세군은...숙부님과는 벌써 아는 사이죠?" 아야세는 얼어붙은 눈동자로 코노미를 응시했다. 숙부...? 하야시다가 코노미의 숙부였단 말인가...? "오랜만이군, 아야세군. 오늘은 마음껏 즐겨주게." 놀라움으로 크게 열린 아야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하야시다는 음험하게 웃었다.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울리자 통로 안쪽에 대기하고 있던 검은 양복차림의 남자가 하야시다의 발밑에 무언가 묵직한 것을 던졌다. 그것이 양손을 묶인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아야세는 정신없이 그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니...니시오카씨..." 아야세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니시오카는 요란한 색깔의 융단위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상당히 심하게 맞았는지 얼굴은 무참한 멍으로 뒤덮혀 있었고 찢어진 입술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어깨에 와 닿는 아야세의 손가락을 느낀 것일까, 니시오카의 입에서 아픔으로 갈라진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무언가 말하려는 니시오카의 몸을 등뒤에서 다가온 검은 양복차림의 남자가 무자비하게 일으켜 세웠다. 니시오카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지만 곧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둬요!" 아야세는 재빨리 니시오카를 부축하기 위해 팔을 뻗었지만 곧 코노미에 의해 저지당하고 말았다. "당신은 타카노하시라는 남자를 알고 있습니까?" 여전히 온화한 목소리였다. 아야세는 고개를 들어 코노미를 힘껏 노려보았다. "굉장히 남자다운 신사입니다만, 숙부님과는 사업상 대립하는 관계죠. 표면상의 우호는 유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유감스럽게도 사이가 나쁜 것은 변함없는 모양입니다." 코노미는 니시오카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분은 타카노하시시와 관계가 있는 부동산업자입니다만, 오늘 밤 초대한 제 손님들에게 섞여서 가게안으로 들어오려고 행패를 부린 모양이더군요." 나시오카를 비난하는 코노미의 말은 아야세의 분노를 자극했다. 아야세는 그의 팔을 힘껏 뿌리치며 말했다. "이제 그만하세요! 상처를 입었잖아요. 이런..." 격렬한 분노로 물든 아야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코노미는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살짝 갖다댔다. "(조용히 하세요.)" 코노미는 짖궂은 눈빛으로 복도 끝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바닥에 깔린 새빨간 융단과 잘 어울리는 화려한 은색문이었다. "저쪽 방에 모셔둔 분이 오늘밤 저의 메인 게스트입니다. 당신이 그분을 접대하는 것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코노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핏기가 가신 아야세의 입술은 가늘게 떨렸다. 아야세의 표정의 변화를 눈치챈 코노미는 더욱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제게는 중요한 손님이지만 숙부님은 그분을 싫어하셔서요. 우리가 접객에 실패하면 손님의 목숨은 날아가 버리고 말 겁니다. " 잘 해보자고 미소를 지으며 코노미는 은색 문을 열었다. 비난을 하려고 입을 연 것도 한순간, 아야세는 열려진 문 앞에서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멈춰섰다. 정사각형의 방안에는 호화로운 융단이 깔려있었고 중앙에는 반짝반짝하게 닦여진 원탁이 놓여있었다. 결코 고상한 취미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비싸 보이는 실내장식을 볼 때 이 방이 특별한 공간이라는 것은 아야세도 알 수 있었다. 벽면에 설치되어 있는 놀랄만큼 커다란 TV화면에는 힘없이 몸을 늘어뜨린 소녀를 무대에서 끌어내리는 광경이 비추고 있었다. 물건처럼 취급당하는 불쌍한 여자보다도 아야세는 화면과 마주보는 위치에 앉아 있는 장신의 남자에게 눈길을 빼앗겼다. "가노씨..." 넋이 나간 듯한 목소리가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이곳에 있을리가 없는ㅡ 무엇보다도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지금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짙은 갈색 양복을 빈틈없이 차려입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는 남자. 강한 야성미가 느껴지는 얼굴속에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두 눈이 아야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는 아야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노가 보고 있는 것은 아야세의 등뒤에 서 있는 코노미 뿐이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부디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바랍니다. 가노." 코노미는 TV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도 가볍게 가노에게 다가갔다. "글쎄." 가노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긴 다리를 꼬고 앉았다. 가노의 뒤에 서 있는 세 명의 남자들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모두 검은 양복으로 몸을 감싼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들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하야시다 또는 코노미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이 가게의 종업원들이리라. 가노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서 저지하겠다는 기색이 얼굴에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피로 얼룩진 니시오카의 얼굴이 공포와 함께 떠올랐다. 가게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가노의 적. 예전에도 대립하는 입장에 놓여있던 가노가 이 가게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기적같은 일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런 위험한 장소에 어째서 가노는 또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일까. 물론 무슨 생각이 있어서 찾아온 거겠지만 그렇다고 가노의 안전이 보증되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당신의 취향에 맞게 준비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술과 안주를 바라보며 코노미가 과장스럽게 어깨를 떨궜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우두커니 서 있는 아야세를 끌어당겼다. "...앗..." "예쁜 분이죠? 난 특히 이 눈동자가 맘에 들어요.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만 마침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다길래 데려왔습니다. 이 분이라면 당신도 틀림없이 만족하겠죠." 도망치려는 아야세를 등뒤에서 안으며 코노미는 인형의 얼굴이라도 어루만지는 듯이 긴 손가락 끝으로 아야세의 턱을 고정했다. "...놓...." 턱에 닿아오는 코노미의 손가락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똑바로 향해 있는 가노의 눈빛이 두려워서 아야세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겁니다.)" 코노미의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와 닿았다. 깜짝 놀라서 숨을 삼키는 아야세의 모습을 가노는 의자에 깊게 몸을 묻은 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가노의 두 눈은 아야세의 느닷없는 등장에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지금 당장 가노에게 달려가서 사과하고 싶었지만 그의 분위기는 그것을 털끝만치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와 당신이 이 접대에 실패하면 그는 틀림없이 살해당할 겁니다.)" 그 조용한 속삭임에 아야세는 무의식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가노는 정말로 코노미의 북경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일까. 무표정한 가노의 시선을 받으며 아야세는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신이 내게 얌전히 협력해 주면 모든것이 잘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코노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야세는 온 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저어 저항을 표시하려고 했지만 턱을 잡고 있는 코노미의 힘은 너무나도 강했다. "...웃..." "가노 당신의 성격으로 볼 때 보는 것 보다는 하는 것을 좋아하겠지만... 이렇게 예쁜 분의 쇼라면 나쁘진 않겠죠.?" 코노미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아야세는 가슴속에 얼음 덩어리가 박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설마 코노미는 아야세에게 저 끔찍한 무대에 오르라고 하는 것일까. "싫...."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연 아야세의 귀에 코노미의 숨결이 와 닿았다. "(선택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달콤한 목소리와 함께 축축한 혀의 감촉이 귓볼에 느껴졌다. 아야세는 깜짝 놀라며 얼굴을 들었다.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정 싫다면 포기하죠.)" ㅡ 단, 그럴 경우 가노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더할나위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인 그 마지막 한마디는 아야세의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뭣하면 당신도 견학하고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나중에 테입을 보내드릴까요? 당신은 착한 사람이니까요.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남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하시겠죠.)" 즐겁게 웃으며 말하는 남자를 돌아보지도 못한 채 아야세는 떨리는 눈을 굳게 감았다. 숨이 막혔다. 자신이 코노미의 말에 따른다 해도 정말 가노의 목숨이 보장된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알고는 있었지만 아야세가 선택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주시겠죠)." 애써 목소리를 쥐어짜며 말하는 아야세를 바라보며 코노미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죠. 전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코노미는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가볍게 손가락을 울렸다. "협상은 성립됐습니다. 스테이지에 오를 준비를 하시죠." 아야세의 등을 어루만지며 코노미는 웃는 얼굴로 가노를 돌아보았다. "얘기는 끝났느냐, 코노미." 문앞에 서 있던 하야시다가 코노미와 가노 그리고 아야세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네. 돈의 위력은 대단하군요. 30만엔만 주면 기꺼이 스테이지에 오르겠다고 합니다." 코노미는 우두커니 서 있는 아야세에게 눈짓을 하며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어서 이런 일에는 익숙하다고 하더군요." "무..." 코노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깨달은 아야세는 반론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곧 등뒤로 다가온 검은 양복의 남자가 아야세의 어깨를 잡았다. "이런 청순한 분이 돈을 위해서라면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안길 수 있다니 일본도 무서워졌는데요." 진심으로 감탄한 듯이 말하는 코노미에게 입구에 서 있는 하야시다가 나지막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맞는 말이다...가노에게는 객석에서 제일 좋은 자리를 마련해 줬다. 부디 마음껏 즐겨줬으면 좋겠구나." "어때요, 가노. 당신은 이 분이 어떤 식으로 당하면 흥분하겠습니까?" "쓸데없는 소린 집어쳐, 코노미. 네 녀석이 원하는 게 뭐냐?"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가노가 처음으로 낮게 입을 열었다. 불쾌함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감동하고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일을 하고 있을 때의 가노의 목소리는 언제나 이런 느낌인 것일까. 아야세는 자신의 상상이 너무나도 두려운 나머지 입을 여는 것 조차 불가능했다. "친구인 당신을 대접하고 싶을 뿐입니다." 웃으며 대답하는 코노미를 향해, 가노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말이 안 통하는군."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가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자 등뒤에 서 있던 남자들이 재빠른 움직임으로 그와의 거리를 좁히며 양복주머니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따. 영화나 TV에서는 지극히 익숙해진 장면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검은 총구가 가노의 머리를 겨누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자 아야세는 갈라진 목소리로 짧게 비명을 질렀다. "손님은 얌전하게 앉아있어 주십시오. 당신을 위한 쇼니까요." 긴장하고 있는 남자들을 한손으로 저지하며 코노미가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노씨 객석으로 안내하도록 하세요. 나도 곧 뒤따라 갈테니까." 가노는 남자들의 얼굴을 둘러본 후 천천히 문 건너편으로 사라져갔다. 안도의 숨을 내쉰 것도 잠시, 어깨를 잡아당기는 강한 힘에 아야세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충분히 귀여우니까 의상은 더 손보지 않아도 되겠군요. 부드럽게 다루도록 하세요." 코노미는 즐거운 듯이 웃으며 문을 향해 팔을 뻗었다. "코노미씨!" 문이 열리는 것보다 빨리 아야세는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목소리를 쥐어짜며 외쳤다. "당신은 거짓말장이야! 나는 돈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예요!" 코노미를 화나게 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외치는 아야세를 코노미는 싸늘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은 코노미의 단정한 얼굴은 그만큼 무표정하고 기계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아야세는 처음으로 알았다. 싸늘한 침묵 끝에 코노미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제가 당신을 놀라게 한 것 같군요. 하지만 어차피 아르바이트를 해달라는 제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었죠? 보수가 좋은 일이니까 결과적으로는 만족하실 겁니다." "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코노미를 바라보며 아야세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은 단 한번도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지 않은가. 그 너무나도 뻔뻔스러운 대답에 이 남자의 양심을 엿본 듯한 기분이 들어서 아야세는 입술을 떨었다. "저도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당신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데 이런 결과가 되어버리다니..." 코노미는 한숨을 쉬면서 어린애처럼 눈썹을 찡그렸다. "이건 모두 가노때문입니다. 가노만 없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겠죠?" 아야세는 할 말을 잃고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코노미의 목소리와 표정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농담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하물며 자신의 호소가 부당하다는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는 것이다. "옛날부터 그랬죠. 제 이를 부러뜨리고, 아버지를 죽이고...제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게 만들기도 하고, 또 늘상 제가 찍어둔 여자를 가로채곤 했죠. 언제나 제가 하는 일에 일일이 트집을 잡았고 그러다가는 적반하장으로 절 원망하더군요. 정말이지 그 남자는..." 계속해서 가노에 대한 비난을 늘어놓던 코노미는 문득 뭔가를 깨달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여느때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의 협력에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제게 협력해 주시는 한 가노는 안전할 겁니다. 모처럼 준비한 쇼니까 잘 해봅시다." 아야세는 입을 열어 항의를 표시하려고 했지만 코노미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는 듯 종업원들을 향해 턱으로 가볍게 신호를 보낸 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뒤에 서 있던 종업원들이 아야세의 가냘픈 몸을 무지막지하게 복도로 밀어냈다. "코노미씨!" 필사적으로 외쳐봤지만 소용없었다. 코노미는 아야세의 목소리따위는 들리지 않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객석으로 되돌아갔다. 아야세는 절망에 빠져 다시 한 번 소리치려고 했지만 검은 옷의 남자는 그럴 틈조차 주지 않고 아야세의 몸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당겼다. "얌전히 해!" "...아..." 무대로 연결되는 문이 열렸다. 어둡고 긴 통로 안쪽에 지금은 조명이 꺼진 무대가 펼쳐져 있었다. 지저분한 통로와는 달리 호화로운 천으로 장식된 무대는 불길할 정도로 화려했다. 준비가 끝난 무대를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의 남자가 아야세를 훑어보며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끝내주는걸." 이죽이죽 웃는 남자들을 향해 종업원들이 아야세의 몸을 밀쳐냈다. "잘 해 보자, 꼬마. 부디 우릴 즐겁게 해다오."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야세는 난폭하게 무대 중앙으로 끌려나갔다. "...웃..." 무지막지한 힘이 아야세의 가냘픈 몸을 딱딱하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쓰러뜨렸다. 아야세는 상처를 입은 작은 동물처럼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싫..." 저항을 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등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아야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객석의 위치가 생각보다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야세는 두려움과 공포에 숨을 삼켰다. 동시에 사방에서 강렬한 인공조명이 쏟아졌다. "이거 놓..." 몸부림치는 아야세의 귀에 객석을 뒤흔드는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무대의 높이는 겨우 아야세의 허리에 닿을 정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낯선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다는 실감이 오한과 함께 온몸을 사로잡았다. "잘 해 보자구." 귓가에 들려오는 속삭임이 더욱 공포를 자극했다. 반라에 가까운 딱 달라붙는 가죽옷을 입은 남자가 아야세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싱긋 웃었다. 어깨에서 손목까지 치밀한 문신으로 뒤덮힌 팔이 뱀처럼 몸을 감아오기 시작했다. "...아..." 아야세는 남자의 팔을 힘껏 할퀴었다. 그리고는 아픔으로 느슨해진 남자의 팔을 뿌리치고 바닥을 기어서 도망치려고 한 순간 아야세의 눈앞에 가죽구두를 신은 발이 나타났다. "아얏....!" 방어태세를 취할 틈도 없이 난폭하게 어깨를 차여서 아야세는 아픔에 몸을 움츠렸다. "얌전하게 구는 게 좋을걸. 안 그러면 네 주인님이 죽을 지도 몰라." 코걸이를 한 남자의 속삭임에 아야세는 움찔 놀라며 객석을 바라보았다. 굳이 객석을 둘러볼 것 까지도 없이 아야세는 곧 목적의 인물을 찾을 수 있었다. 손님들은 작은 원탁에 두 세명씩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며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대와 가까운 자리에 가노의 날카로운 눈이 보였다. 가노의 옆에는 유쾌한 듯이 미소를 짓고 있는 코노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서 있는 종업원의 모습이 불길한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안돼..." 반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아야세의 팔을 문신을 한 남자가 난폭하게 움켜잡았다. 곧 두 사람의 남자가 떨고 있는 아야세를 바닥에 찍어누른 다음 두꺼운 가죽 벨트로 두 손을 뒤로 묶어버렸다. "...웃." "실컷 반항해서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는 것도 좋지만 이번 상대는 좀 벅차서 말야." 남자는 웃으면서 아야세의 셔츠를 난폭하게 잡아 찢었다. 천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단추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객석에서 만족한 듯한 웃음과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야세는 사방에서 꽂히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움츠렸다. 직접 손을 대고 있는 남자들뿐만이 아니라 객석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수치심이 밀려왔다. "부드러운 피부로군. 묶어두면 예쁜 자국이 남을 거야." 남자는 그렇게 속삭이며 검은 가죽끈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서 도망치려는 아야세의 상반신에 재빨리 끈을 묶어버렸다. "싫..." 딱딱한 끈이 살갗을 파고드는 고통에 아야세는 비명을 질렀다. 남자는 아야세의 어깨와 팔꿈치 사이에 장착된 고정용 금속구에 끈을 동여맨 후 힘껏 잡아당겼다. "...아...웃..." 몸부림을 치려고 하자 구둣발이 사정없이 등을 짓밟았다. 아야세는 온몸을 가죽끈으로 속박당한 채 고통과 굴욕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것좀 봐, 멋진 얼굴을 하고 있는걸." 코걸이를 한 남자가 객석에 보이도록 아야세의 고개를 치켜들었다. 분한 나머지 이를 꽉 악물었지만 그 표정의 변화마저도 즐거운지 객석에는 몸을 앞으로 숙이는 사람도 있었다. "주인님이 널 얼마나 잘 길들여줬는지 보여줘야지." 문신을 한 남자가 비웃음을 지으며 사슬이 달린 목걸이를 들어올리며 아야세의 몸을 난폭하게 일으켜 세웠다. 질식할 것 같은 고통에 거역하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앉은 아야세의 허리에서 또 한 사람의 남자가 옷을 끌어내렸다. "...이거 놓..." 다리를 버둥거리며 저항하려고 했지만 두 남자의 힘은 너무나도 강했다. 굴욕으로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울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이를 악물고 있는 아야세의 입에 긴 막대기 모양의 재갈이 물려졌다. "귀엽군. 이런 모습으로 조교를 당하는 건 처음이지?" 바지가 벗겨져 나간 하반신으로 뻗어온 손이 느닷없이 속옷 위에서 아야세를 움켜쥐었다. "...앗..." 아야세는 가죽 재갈을 꽉 깨물었다. 저항할 힘조차 없는 자신이 참을 수 없이 분했다. 설령 힘으로는 당해낼 수 있다고 해도 아야세는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없는 것이다. "전부 보여주도록 해." 싱글거리며 웃는 남자의 얼굴이 드러난 허벅지를 향해 다가왔다. 아야세는 참을 수 없는 혐오감에 숨을 삼켰다. "웃..." 본능적인 공포와 견딜 수 없는 혐오감에 토할 것만 같았다. 사람의 체온이 이렇게 기분 나쁜 것일 줄을 미처 몰랐었다. 연체 동물을 연상시키는 불쾌한 움직임으로 하반신을 어루만지던 팔이 객석을 향해 아야세의 다리를 커다랗게 벌렸다. 차갑고 메마른 조소가 공기의 흐름이 되어 아야세를 감쌌다. 자신을 향하고 있는 시선들. 호기심과 욕정에 젖은 시선이 살갗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무엇보다도 달려가면 닿을 듯한 위치에 가노가 앉아있는 것이다. "아..." 아야세의 양다리를 잔혹한 기구로 고정시킨 후 문신을 새긴 남자가 팽팽하게 조여진 피부를 핥기 시작했다. "...아...싫어...아앗..." "감도가 좋군." 등뒤에 서 있던 코걸이의 남자가 벨트로 묶여 있는 가슴의 돌기를 움켜잡았다. 가슴을 애무하는 손길에 몸부림치는 아야세를 책망하는 것처럼 하반신에 달라붙어 있던 남자의 손가락이 속옷안으로 들어왔다. "아...우웃..." 속옷안에서 움직이는 남자의 손가락에 아야세는 움찔 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실컷 즐겨 보자구." 다리를 다물려고 발버둥쳤지만 소용없었다. 따뜻하고 축축한 입술이 아야세의 미숙한 그곳을 천천히 감쌌다. "...아...! 아앗...!" 아야세는 눈을 크게 뜨며 가냘픈 몸을 뒤로 젖혔다. 지독한 혐오감에 온 몸이 떨려왔다. 전신의 피가 쏠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아야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시야의 구석에 가노의 모습이 비쳤다. 쾌감보다도 강한 충동이 가슴속에 밀려올라 아야세는 굳게 눈을 감았다. 참을 수 없는 혐오감과 동시에 굴욕적인 쾌감이 허리를 자극했다. 무표정한 가노의 시선을 받으며 낯선 남자들의 애무에 반응하고 있는 자신의 추태에 아야세는 흐느끼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가슴을 애무하고 있던 남자도 아야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희미하게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한 가슴을 핥기 시작했다. "우웃..." 입밖으로 새어나오는 자신의 신음과 마른침을 삼키며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아야세는 굳게 눈을 감았다.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을 그리고 그 행위를 수많은 시선들 앞에 드러내고 있는 현실에 머리속이 새하얗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남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처럼 일부러 고개를 움직이며 음란한 소리를 냈다. "우...아...아앗..." 발버둥을 치며 남자의 몸을 차버리려고 했지만 묶여있는 양다리는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만에 하나 아야세의 격렬한 저항이 가게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면 가노에게 어떤 보복이 가해질 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저항이 약해지기 시작한 것에 기분이 좋아진 것일까, 문신을 한 남자가 음란한 소리를 내며 아야세에게서 입술을 뗐다. "...웃." 소름이 끼쳤다. 가슴의 돌기를 혀로 애무하고 있던 남자가 손을 넣어 아야세를 움켜잡았다. 공포와 혐오감속에서 육체만이 의지를 배신하고 쾌감에 반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몸을 저주할 틈도 없이 날카로운 칼날이 서서히 속옷을 찢었다. "머리를 흔들면서 서비스를 해 봐. 팁이 날아올 거야." 문신을 한 남자가 축축하게 젖은 곳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웃...우웃..." 가련하게 물든 그곳이 시야에 들어와 아야세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보호를 잃은 아야세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손님들은 비웃음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 하게 해줄까? 아니면 엉덩이를 귀여워해 줄까?" 문신을 한 남자가 몸부림치는 아야세를 바닥에 엎드리게 한 다음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도망칠 힘조차 잃은 아야세는 심장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굴욕에 입을 속박하고 있는 재갈을 힘껏 깨물었다. "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어째서 눈물로 흐려진 시야는 자꾸만 가노의 모습을 찾으려 하고 있는 것일까. 원탁에 팔꿈치를 괴고 있는 코노미가 무대위에 있는 아야세가 아닌 옆에 앉아있는 가노의 옆얼굴을 싱글거리며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코노미의 시선은 아랑곳 없이 가노는 무표정한 두 눈으로 개처럼 엉덩이를 치켜들고 있는 아야세를 바라보고 있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9 "우..."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 끝이 은밀한 곳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가노는 아야세가 정말로 원해서 이 무대에 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코노미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노는 북경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렇다면 아야세가 돈 때문에 무대에서 몸을 팔고 있다는 코노미의 말을 믿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아니면 이미 자신의 곁을 떠난 아야세에게는 털끝만치의 흥미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웃..." "예쁜 색이로군." 아야세는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에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혐오감만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몸에 제동을 걸어 아야세는 더 이상 아무 반응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전신에 힘을 주었다. 따뜻한 눈물방울이 자제심을 배신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한 번 흘러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끊임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방울방울 떨어졌다. 아야세는 호흡이 떨려오는 것을 참으며 촉촉하게 젖은 눈을 감았다. 자신이 가노에게 있어서 이미 아무 가치도 없는 돌덩이 같은 존재라 해도 상관없었다. 낯선 이들에게 안겨서 쾌감을 느끼는 혐오스러운 동물이라고 경멸해도 상관없었다. 가노의 곁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도망쳐 나온 것은 자신이다. 이제와서 용서를 바랄 수 없다면 하다못해 이 몸이 가노를 위해서 뭔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뭐부터 넣어볼까?" 웃으며 말하는 남자의 손가락이 저항을 즐기며 천천히 민감한 아야세를 어루만졌다. "웃..." "오랫동안 데리고 놀라는 명령이 있었으니까 로터부터 시작해볼까?" 그렇게 대답한 남자의 손가락도 이미 한 개의 손가락을 받아들이고 있는 아야세를 살짝 어루만졌다. 감촉이 다른 두 개의 손가락이 동시에 부드럽게 희롱하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가노의 손가락을 떠올리려고 발버둥치는 자신을 억누르며 아야세는 묶여 있는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웃." 비장한 각오를 결심한 아야세의 머리위에서 문득 공기가 커다랗게 흔들렸다. 깜짝 놀라서 숨을 삼킨 순간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커다란 소음이 들려왔다. 화재를 알리는 요란한 경보음이었다. 이 자리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소리에 아야세의 몸을 희롱하고 있던 남자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객석의 웅성거림이 실내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문득 검고 커다란 그림자가 공기의 흐름이 되어 시야를 가로질렀다. 그것은 극히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야세는 한동안 뭐가 어떻게 된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경보음과 함께 둔탁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뒤따라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인간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비명이 들려왔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속에 가노가 발을 휘둘러 아야세를 안고 있던 남자들의 턱을 갈기는 모습이 보였다. "진정하세요. 화재가 아닙니다. 진정하세요!"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온 목소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손님들을 만류했다. 그 목소리와 동시에 가노에게 걷어차인 남자의 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우,움직이지 마!" 한 남자가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한 아야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외쳤다. 그러나 그와 거의 동시에 가노의 주먹이 무시무시한 힘으로 남자의 안면을 강타했다. "크윽..." 비틀거리던 남자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 입과 코에서 새빨간 피를 흘리며 경련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도 가노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가노의 눈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야세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경보음은 계속해서 신경을 긁는 것처럼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나지막한 가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경보음을 뚫고 선명하게 귓가에 울려왔다. 긴 팔이 다리으 속박을 풀고 가냘픈 몸을 가볍게 안아올렸다. "...아..." 드러난 피부를 통해 그의체온이 느껴져도 아야세는 아직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파악할 수가 없었다. 설마 그가 자신을 구해준 것일까. 거짓말이라고 부정하는 목소리가 가슴속에서 강하게 울려왔다. 그렇게나 심한 배신을 한 자신을 가노가 용서해 줄 리 없지 않은가. 놀라움으로 넋을 잃고 있는 아야세를 안고 가노는 무대 아래에 몰려 있는 남자들을 내려다 보았다. "가노!" 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대 여섯명의 종업원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온 코노미가 큰 소리로 미친듯이 외쳤다. 가노에게 맞은 것일까, 그의 늑골 위에는 무참한 멍이 퍼져 있었다. 문득 요란하게 울리던 경보음이 뚝 끊어졌다. 찢어진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닦으며 코노미는 무대위를 힘껏 내리쳤다. "이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격노한 코노미의 목소리에서는 아까까지의 정중함 따위는 털끝만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이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되풀이해서 손님들에게 진정할 것을 부탁하고 있었다. 경보음이 멎은 덕분에 관객들은 조금씩 진정을 되찾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접객용 종업원을 잡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손님들은 무대위의 상황을 엿보려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성가신 일에 휘말리는 것은 싫지만 느닷없이 무대위에 나타난 가노와 격노한 코노미의 모습에 흥미를 느낀 것이리라. "그 기세는 높이 평가하지만 자네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군." 웅성거리는 객석에서 걸어나온 하야시다가??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처럼 마련한 무대가 엉망이 된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에 아야세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가노에게 위지한 채, 아야세는 본능적으로 그의 셔츠에 뺨을 묻었다. "이곳은 내 가게다. 코노미의 손님이라길래 정중하게 대해 줬더니..." 하야시다는 내뱉는 듯이 말하며 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 옷의 남자들을 둘러보았따. "내 무대를 엉망으로 만든 책임을 져줘야겠어." 거리를 좁혀오는 남자들의 움직임에 아야세를 안고 있는 가노는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객석이 한눈에 들어오는 반면 무대에는 몸을 숨길만한 장소가 없다. 게다가 가노는 아야세를 안고 있다. 도망치기에도 반격하기에도 가노의 입장은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무엇보다도 상대는 수적으로 우세하고 게다가 손쉽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흉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웁..." 귓속이 윙윙 울리는 듯한 공포속에서 아야세는 재갈이 물려진 입술로 남자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자신을 바닥에 내려놓아서 두 팔이 자유로워지면 가노에게도 아직 승산이 있을 지도 모른다. 몸을 비틀며 그렇게 호소하는 아야세를 향해 가노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까불지 마. 난 지금 네 녀석의 바보같은 장난에 장단을 맞춰주고 있는 거야. 고맙게 여겨." 비웃음을 띈 가노의 목소리에 코노미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죽여버리겠어..." 코노미는 낮게 중얼거리며 양복 주머니안으로 손을 뻗었다. 코노미의 손에 들려진 권총을 본 순간 아야세는 깜짝 놀라며 숨을 삼켰다. 객석안이 거세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작은 비명이 울려퍼졌지만 그것은 공포에 의한 것이 아닌 감출 수 없는 흥분때문이었다. "손 들어. 다시 한 번 목숨을 구걸하게 해 주지." 큰 소리로 외친 코노미를 향해 가노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 가노의 이마를 겨냥하고 있는 코노미의 총구를 막기 위해 아야세는 급히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방아쇠에 걸려있는 코노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아야세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가노가 아야세를 안은 채 가볍게 손을 들어올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두 손이 아닌 오른손만을 들어올린 가노에게 분노를 느낀 코노미가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객석에서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무..." 하야시다의 입에서 메마른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객석과 가게안의 유희용 테이블에 앉아있던 몇몇 남자들이 느닷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던 것이다. 그 숫자는 아야세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열명에 가까웠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진 후 남자들은 숨기고 있던 권총을 들어 하야시다와 코노미를 겨냥했다.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건 네가 아닐까." 아야세를 팔에 안은 채, 가노가 천천히 무대를 내려왔다. "네 녀석이 아무런 꿍꿍이도 없이 나를 부를 리가 없지, 타카노하시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몇 사람 데려오길 잘했군." 가노는 여유있는 걸음걸이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코노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큭.." 굴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코노미에게 마지막으로 가노가 짧은 한마디를 던졌다. "이 가게의 회원증을 모으느라 타카노하시도 꽤 고생했다더군. 덕분에 제법 비싸게 먹혔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투로 내뱉듯이 말하며 가노는 객석을 뒤돌아 보았다. "하야시다씨,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를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 여기서 나를 쏜다면 틀림없이 타카노하시와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나지막한 가노의 목소리에 하야시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악물었다. "하야시다님...."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씁쓸한 목소리로 하야시다에게 귓속말을 했다. 확실히 지금 가노를 쏘는 것은 간단하다. 숫자만 놓과 봐도 코노미나 하야시다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니까 말이다. 상대가 가노 한사람이라면 그래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노 개인과의 분쟁 이상으로 사태가 커지면 하야시다도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 된다. 하야시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코노미를 바라보았다. "숙부님...!" 코노미의 입에서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야시다는 난폭한 손놀림으로 테이블위에 놓여 있는 유리잔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닥쳐!...알겠다. 빨리 이곳에서 나가!" 그 말에 가노는 비웃음을 지으며 아야세의 입과 팔을 풀어준 후 바닥에 내려놓았다. 오랫동안 재갈이 물려있던 턱에 느껴지는 불쾌한 통증. 그 이상으로 정신이 아득해 질 정도의 긴장감을 전신에 느끼며 아야세는 가노의 도움을 받아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바닥에 내려섰다.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손님들 사이에서 권총을 겨누고 있던 코노미가 힘없이 팔을 내렸다. 무모한 행동을 포기한 코노미를 바라보며 하야시다가 안도의 표정을 지은 순간 아야세는 튕겨나가듯이 바닥을 박차고 있었다. "가노씨!"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만큼 커다란 비명이 튀어나왔다. 객석에서 무대로 이어지는 통로는 결코 길지 않다. 커다랗게 열린 시야속에서 권총을 든 코노미의 손이 부자연스러울 만큼 천천히 치켜 올라갔다. "이러니까 내가 널 싫어하는 거야!" 코노미의 총구가 노리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가노의 등이었다. "...안돼..." 아야세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서 코노미의 팔에 매달렸다. "...쳇..." 아무리 가냘프다고는 해도 혼신의 힘을 다해서 달려드는 아야세를 뿌리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코노미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며 아야세의 몸을 난폭하게 밀쳐냈다. "이거 놔!" 아야세는 휘청거리는 다리를 지탱하며 총구를 막아섰다. 딱딱한 총구가 가슴을 스쳤다. 그래도 아야세는 아랑곳없이 혼신의 힘을 다해 코노미의 몸에 매달렸다. "이...!" 아야세를 밀쳐내는 것을 포기한 코노미가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실내에 울려퍼졌다. 한순간의 공백. 그리고 나서 곧 강렬한 충격이 온몸을 침범했다. "...웃..." 두번째 총성. 다시 한번 귓가에서 강렬한 음이 작열하며 몸속을 파고들었다. 아야세는 비틀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눈을 떴다. "아..." 멀리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였는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못한 채 아야세의 몸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아야세가 바닥에 쓰러지기 직전, 재빨리 뻗어온 손이 가냘픈 몸을 받아 안았다. 아마도 손님으로 위장하고 가게에 침입해 있던 가노의 동료중 한 사람이리라. 흐릿해지는 의식속에서 단단한 팔이 아야세의 등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직 젊은 남자였다. 남자는 긴 팔로 아야세를 끌어당겨서 안전한 테이블 밑으로 데려갔다. "정신차려!" 혼란해지기 시작하는 의식속에서 남자는 어딘가 낯익은 목소리로 외쳤다. 바로 옆에서 뼈를 걷어차는 둔탁한 소리와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것이 자신이 낸 비명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아야세는 텅빈 눈을 떴다. "아야세!" 가노의 절박한 목소리를 느끼며 아야세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흐릿한 시야속에 축 늘어진 코노미의 목덜미를 잡고 있는 가노의 모습이 보였다. 단단히 움켜쥔 가노의 주먹은 코노미의 피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피를 흘리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아야세는 처음으로 비명을 지른 사람이 코노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어설 수 있겠어?" 가노는 코노미를 바닥에 집어던진 후 아야세의 어깨를 향해 팔을 뻗어왔다. 가노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아야세는 머뭇머뭇 자신의 몸을 어루만져 보았다. 어디에도 상처는 없었다. 현실미 없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는 아야세의 옆에서 아야세를 도와준 남자가 검은 장난감같은 권총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는 시원하고 얇은 입술에 미소를 지으며 가노를 향해 권총을 내밀어 보였다. "니시오카씨도 무사합니다. 경보음을 울리는 게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남자가 나지막하게 귓속말을 하자 가노는 눈으로만 알겠다는 뜻을 표시했다. "하야시다!" 가노의 노성에 우두커니 서 있던 하야시다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잠깐만, 이건..." "죽이진 않겠다. 두 세발 더 걷어 차 준 다음에 도쿄 앞바다에 쳐 넣어도 분이 풀리지 않겠지만." 격노를 참고 있는 가노의 낮은 목소리에 하야시다의 얼굴에 식은땀이 배었다. "지금 당장 길을 비켜. 더 이상 쓸데없는 짓을 하면 전력을 다해서 댁을 박살내 버릴 테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금속적인 목소리와 함께 아야세는 가노의 팔이 힘없이 늘어진 자신의 몸을 또다시 안아 올리는 것을 느꼈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10 슬슬 전철이 끊길 시간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밤거리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긴 했지만 팽창한 듯한 밤의 습기에 땀이 배어나왔다. 화려한 네온불빛에 잠겨 무관심하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아야세는 넓은 등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 괴로움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걸었다. 코노미에게 부상을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아크시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애초에 그런 무시무시한 현장에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스스로도 믿겨지지 않았다. 귓가에서 울려 퍼졌던 총성이 고막속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꿈이 아니었다는 긴장감에 입안이 바싹 말라오는 것을 느끼며 아야세는 무의식적으로 헐렁한 청바지를 치켜올렸다. 아크시를 나온 직후 벤에 놓여 있던 옷을 받은 것이었다. 누구라도 입을 수 있도록 준비해 놓은 셔츠와 청바지는 사이즈가 매우 컸다. 아야세가 몸에 걸치자 마자 마치 커다란 푸대자루를 뒤집어 쓴 것 같았지만 그래도 몸을 가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색 셔츠에 가려진 피부위에는 꽉 묵여 있던 탓에 무참한 자국이 퍼져 있었다. 아픔보다는 불쾌감을 씹으며 아야세는 필사적으로 가노의 뒤를 쫒았다. 가노는 이 부근에서 차를 세워둔 모양이었다. 코노미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인지, 아크시에서 여기까지는 대기시켜 놓았던 벤을 타고 왔다. 긴 시간을 달려온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아크시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하면 안도감이 느껴졌다. 가노가 없었더라면 자신은 이렇게 아크시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으리라. 동시에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하고, 아야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노씨..." 아야세는 머뭇거리며 가노를 불렀다. 하지만 가노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차도를 향해 손을 들었다. 벤을 타고 올 때도 가노는 아야세에게 한마디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었다. 가노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먼저 일을 벌려 놓은 주제에 처음부터 끝까지 걸리적거리기만 했으니까 말이다. 결국은 가노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을 책망하며 아야세는 입술을 깨물었다. 손님을 찾아 달리고 있던 택시 한 대가 이쪽을 향해 미끄러지듯이 다가왔다. "타." 자신의 차가 있으면서도 가노는 어째서 택시를 잡은 것일까. 아야세는 망설이면서도 택시 뒷좌석에 올라탔다. 서늘한 공기가 기분좋게 살갗을 어루만졌다. 좌석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아야세는 문득 가노가 차에 올라타려 하지 않는 것을 깨닫고 움직임을 멈췄다. "잠깐만요! 가노씨는..." 가노가 반으로 접은 지폐를 자신에게 내미는 것을 본 순간 아야세는 깜짝 놀라며 외쳤다. 깊숙하게 허리를 굽힌 가노가 차문을 막고 서서 아야세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가노의 눈빛에 아야세는 숨을 삼켰다. 아주 오랫동안 이렇게 가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듯한 착각이 느껴졌다. 아야세가 가노의 맨션을 나온 것은 불과 이틀전이었다. 그러나 가노의 눈을 올려다 본 순간, 그 이틀동안 자신이 얼마나 황폐해져 있었는지 알게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형태없는 안도감과도 비슷한 감정에 울고 싶은 충동이 밀려들었다. 그의 두 눈에는 아크시에서 본 소름끼치는 차가움은 없었다. 하지만 아야세를 똑바로 응시하는 가노의 눈은 어딘지 현실미가 없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빛을 띄고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의 두 눈이 씁쓸하게 흔들렸다. "이제 두 번 다시 관련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아야세는 아무말 없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코노미를 가리키는 말일까, 아니면 가노 자신을 가리키는 것일까. 물어볼 용기조차 낼 수 없는 아야세의 눈앞에서 가노가 단호한 표정으로 택시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아야세를 내려다 본 후 운전수를 향해 출발해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가..." 차가운 유리창이 가노를 향해 뻗은 손을 가로막았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택시속에서 아야세는 주먹으로 유리창을 두드렸다. 하지만 택시가 출발하는 것을 흘낏 확인한 가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두운 거리속으로 사라졌다. 소리를 내어 가노를 부르려고 했지만 그 이름은 목안에 꽉 달라붙은 채 입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아크시를 나온 후 가노는 아야세에게 코노미와의 관계를 묻거나 추궁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가노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이미 욕설을 퍼부을 가치 조차 없는 인간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가노는 자신을 용서해 줄까. 목안을 꽉 메운 갈망. 그러나 아야세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또 하나의 목소리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가노가 또다시 자신을 용서해줄리가 없다. 이 이상 가노에게 미움을 받지 않으려면 아야세에게 남겨진 수단은 두 번 다시 관련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말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아야세의 생활은 가노같은 종류의 인간과는 무관계한 위치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대로 아파트에 돌아가서 문을 닫아버리면 자신과 가노 사이에는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우연조차 발생하지 않으리라. 그런 상상에 아야세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남에게 받은 돈을 이용하면서까지 가노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랬던 것은 아야세 자신이다. 그것도 자신이 상처받는 것이 두렵다는 어리석은 이유로. 가노가 비겁한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관속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한없이 바라보던 어머니의 옆 얼굴이 작은 가시처럼 가슴속에 되살아났다. 생전의 아버지에게 마음껏 어리광을 피울 수 없었던 것처럼 아야세는 관속에 누운 아버지의 품안에 얼굴을 묻을 수가 없었다. 슬픔에 잠겨 있는 어머니를 끌어 안을수도 없었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모든 것을 잊고 울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그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다만 아버지와 어머니를 슬프게 만드는 것은 죄라고, 아야세는 어린 마음에도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 아버지와 어머니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 - 그것은 이유의 한가지였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아야세는 설사 부드러운 형태일 지라도 자신의 기대를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말해도 소용없는 것, 부탁하면 상대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 그런것들을 파악하고 자신을 죽임으로서 누군가를 사랑한다. 어렸을 때부터 소극적인 수단으로밖에 타인을 대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던 아야세는 스스로도 놀랄만큼 체념이 빨랐다. 아니, 빠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친아들보다 병상에 누운 아내를 우선시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오랜 투병생활을 계속하던 어머니가 젊은 나이게 세상을 떠난 것은 운명이라고. 그 모든것이 특별한 비극이 아닌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라고 아야세는 줄곧 그렇게 납득하며 살아왔다. 이대로 아파트에 돌아가면 가노와 함께 살기 이전의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슴 아프고 쓸쓸한 일이지만 줄곧 눈을 감고 익숙한 생활속에 몸을 담고 있으면 언젠가는 시간이 마음의 통증을 둔감하게 만들어 주리라. 아야세는 숨을 죽이며 얇은 입술을 깨물었다. 거절당할 것을 알면서도 가노의 뒤를 쫓을 수는 없다. 마음속으로 몇번씩이나 몇번씩이나 그렇게 되풀이 하면서 아야세는 심장이 찢겨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손님..." 백밀러를 통해 두손에 얼굴을 묻고 있는 아야세를 바라보던 운전수가 불안한 듯이 말을 건넸다. 지금은 취객이 많은 시간대다. 아마도 운전수는 아야세가 멀미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온몸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아야세는 창백한 얼굴을 들었다. "...차를 돌려 주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입밖에 낸 그 말에 운전수가 눈썹을 찡그렸다. "차를 돌려주세요! 제발 부탁이니까 빨리..." 마르고 갸냘픈 몸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있던 것일까. 스스로도 놀랄만큼 커다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택시가 지금 어디쯤을 달리고 있는 것인지 아야세는 잘 알 수 없었다. 아직 그리 멀리 오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네온에 휩싸인 밤거리는 어디나 비슷비슷해 보여서 아야세는 초조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를 돌리라니... 하지만 손님..." 잠시 망설이던 끝에 아야세는 가노가 건네준 지폐를 내밀었다. "됐어요. 여기서 내려주세요." 미터기에 표시되어 있는 숫자는 처음 탔을 때와 똑같은 금액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능성따위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이대로 택시에 타고 있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아야세는 운전수가 당황하며 내민 잔돈을 황급하게 받아들었다.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린 후 아야세는 지금까지 왔던 길을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남자 몇몇이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아야세를 수상하다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직 앳된티가 남아있는 아야세의 얼굴이 이런 밤거리와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끈적끈적한 밤공기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겨우 가노가 택시를 세웠던 교차점으로 돌아왔을 무렵에는 숨을 쉬기가 어려울만큼 호흡이 흐트러져 있었다.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에서 아야세는 숨을 돌릴 여유도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연하다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가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소용없는 짓이었을까, 이제와서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자신만 상처입을 뿐이라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외치고 있었다. "안되겠어..." 이대로 얌전히 물러가라고 외치는 마음을 아야세는 주먹을 꼭 쥐며 떨쳐버렸다. 아직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미 가노가 집으로 돌아갔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야세는 그가 어딘가 차를 세워놓지는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거리를 둘러보았다. 4차선 도로 옆에는 높은 빌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지만 주차장 비슷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아야세는 망설이면서도 좁다랗게 뻗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큰 길에 비해 골목안은 가게의 규모도 작고 전체적으로 어두운 인상을 주었다. 아야세는 자신이 이런 곳과는 매우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게 마음을 먹고 골목안을 걷기 시작했다. "꺄악..." 발걸음을 재촉하던 아야세에게 몸을 부딪힌 여자가 커다란 비명을 질렀다. "죄, 죄송합니다." 당황하며 사과하자 젊은 여자는 동행인 듯한 남자의 팔에 달라붙어 아야세를 노려보았다. "어딜 보고 다니는거야?" 아직 젊은 남자가 술에 취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명백한 협박이 담긴 그 목소리보다도 시야의 끝을 가로질러가는 자가용 한 대가 아야세를 더욱 떨리게 만들었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는 광택있는 짙은 곤색의 차체. 희미한 어둠에 잠겨 검은색에 가까워 보이는 그 차체는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가노씨!" 아야세는 큰 소리로 외치며 튕겨나가듯이 아스팔트위를 박찼다. 느닷없이 달리기 시작한 아야세를 보고 젊은 남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등뒤에서 거기 서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아야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필사적으로 골목길을 달렸다. 미끄러지듯이 달리는 커다란 차체는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무리에 합류하려 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안 보이지만 언제 골목안에서 느닷없이 술주정뱅이가 튀어나올지 몰라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것이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었다. "가노씨!" 앞으로 몇미터만 달려가면 차를 따라잡을 수 있다. 좀전에는 입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던 이름이 커다란 공기 덩어리가 되어 목을 빠져 나왔다. 전력질주로 혹사당한 폐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을 참으며 달리던 아야세의 눈에 차의 진행을 막고 있던 신호등이 무정하게도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 보였다. 멈춰 있던 차가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젠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아야세는 혼신의 힘으로 운전석의 유리창을 주먹으로 두들기고 있었다. 검은 스모크 글라스 안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가속하는 차를 더 이상 따라잡지 못하고 아야세는 굴러 넘어질뻔 하며 발을 멈췄다. 거친 호흡에 폐가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설령 터진다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련이라는걸 알면서도 떠나가는 차를 다시 쫓으려고 발을 내디딘 순간 아야세의 시야에 빨간 테일 램프가 뛰어 들어왔다. 뒤따라 찢어질 듯한 급브레이크 소리. 아야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믿을 수 없는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천천히 허리를 폈다. 난폭하게 열린 차안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무신 짓이야! 갑자기 차앞으로 뛰어들다니!" 가노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엿보이는 이상하리만치 발달된 날카로운 송곳니가 그가 진짜로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차에 치었으면 어쩔 뻔 했어? 얌전히 돌아가라고 했잖아!" 가노의 격렬한 노성에 피부가 움찔움찔 떨려왔다. 그래도 아야세는 물러서지 않았다. "미안해요." 커다랗게 외치는 아야세의 목소리에 가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나..."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전해야 할 말은 언제나 목안에 달라붙어서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것일까. 쓸쓸함을 토로하는 말, 누군가의 도움을 원하는 말, 부모님을 곤란하게 하는 말, 그 모든것을 가슴속에 삼킴으로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고 믿어왔던 자신에게는 이럴때 할 수 있는 말 따위는 한마디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노를 뒤쫓아서 그를 만난 후 자신은 대체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실제로 가노는 자신을 뒤따라온 아야세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지 않은가. 이대로 모든것을 없었던 것으로 치고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아야세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자꾸만 약해지는 자신의 마음을 뿌리쳤다. "도, 돈을 빌려주세요!" 지저분한 골목안에 아야세의 목소리가 울려펴졌다. "5억 2천만엔... 부탁이예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가노의 태도가 불안한 나머지 아야세는 막대한 금액을 입에 담았다. 너무나도 막대해서 현실미가 없는 금액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야세가 코노미에게 빌린 금액이기도 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아야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숨을 삼켰다. 가노는 눈을 똑바로 뜬 채 아야세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노성과 함께 최후통첩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 몸을 떨고 있는 아야세의 눈에 천천히 담배를 꺼내 무는 가노의 모습이 보였다. "...담보는?" 생각지도 못했던 가노의 물음에 아야세는 말묵이 막혀버렸다. 물론 아야세에게는 5억을 빌릴만한 담보따위는 전혀 없었다. "...아...담보는 없어요...하, 하지만! 평생이 걸리더라도 열심히 일해서 갚을테니까..." 아야세를 바라보는 가노의 두 눈에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한 번에 50만엔을 받고 또 내게 안길 생각이냐?" 빈정거림이 가득 담긴 그 목소리에 아야세는 다리가 떨려오는 것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버티고 섰다. 예전의 아야세라면 이런 말을 듣는 순간 하고 싶었던 말이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서 물러선다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두려움보다도 강렬하게 아야세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제...두 번 다시 돈때문에 가노씨에게 안기지는 않겠어요." 아야세는 단호하게 말했다. 가노의 입가에 씁쓸한 비웃음이 번졌다. "거래가 성립되지 않는군." 가노는 낮게 중얼거리며 차문을 향해 팔을 뻗었다. "잠깐만요! 이상하잖아요!" 아야세는 차에 올라타려는 그의 몸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돈 때문에...그런 짓을 하는 건. 가노씨에게는 부자연스럽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아뇨, 가노씨에게도... 부자연스러운 일이기를 바라지만...하지만 나..." 뭘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가슴을 열고 그곳에 있는 진실을 보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이상 말로 표현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어리광을 받아준 이 남자를 위해서라도 이제 더 이상 도망칠수는 없는 것이다. "가노씨와는 절대로 싫었어요. 돈 때문에...??돈때문에 그런... 무, 물론 다른 사람과도 하고 싶진 않지만, 하지만 가노씨와는..." 핈하적으로 호소하는 아야세의 어깨를 커다란 손이 움켜잡았다. 불의의 충격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자 생각지도 못했던 가까운 위치에 가노의 두 눈이 있었다. 마치 고통을 감추고 있는 듯한 그 눈빛에 심장이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그것이 달콤한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그의 손가락이 강한 힘으로 어깨를 파고들었다. "...돈때문에 하는게 아니라면.. 좋다는 거냐?" 그의 말이 고막을 뒤흔들며 뇌속으로 침투했다. 그러나 아야세는 그 입술의 움직임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한동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네에...?" 아야세의 입에서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금전이 개입되지 않은 가노와의 사랑.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없을지 솔직하게 아야세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가노와의 접촉은 모두 돈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것을 제외한 그와의 관계는 생각할 수 조차 없었다. 그리고 막대한 빚이 사라진 순간 가노와 자신과의 관계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었다. 지금이라면 알 수 있었다. 아야세가 원했던 것은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보다 확실한 가노와의 연결고리였다. 예를 들면 가족처럼 말이다. 오랫동안 자각하지 못했던, 그러나 언제나 갈구해 왔던 돌아갈 수 있는 장소. 가노의 두 눈이 집어삼킬 듯이 아야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야세는 천천히, 그리고 깊게 숨을 들여마셨다. 지금까지 자신이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것은 당연하다. 누군가가 줄 것을 기대하며 기다려봤자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련만. "잘...모르겠어요..." 자신의 가슴속을 살피는 듯한 아야세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가노의 두 눈에는 무거운 낙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야세는 가노가 가버리지 못하도록 무의식적으로 그의 소매자락을 움켜잡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그런 짓을 하는 것은...지금도...무서워요. 하지만..." 그와 함께 살기 시작한 후로 한 번도 아야세는 가노와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입밖에 낸 적이 없었다. 물어봐도 대답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가노도 굳이 물어보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흥미가 없었던 것일까, 아야세가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혹은 아야세의 대답이 두려웠던 것일까. 어찌됐든 그것은 지금 아야세가 입밖에 내지 않으면 안되는 말이었다. "나는 가노씨의 곁에 있고 싶어요. 부탁이예요. 맨션에 있게 해주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빚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끝이라니, 그런건 싫어요!" 아야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노의 긴 팔이 가냘픈 몸을 끌어 안았다. 결코 능숙하다고는 할 수 없는 그 힘에 아야세는 순간 몸을 젖히며 도망칠뻔 했지만 가노의 두 눈과 마주친 순간 온 몸의 힘이 단숨에 빠져 나가버리고 말았다. 씁쓸한 담배 냄새가 밴 가노의 가슴. 공기의 뜨거움과는 다른 가노의 온기가 온 몸에 스며들어 왔다. "나는 돈과는 상관없이 널 안고 싶어." 가노는 그렇게 속삭이며 아야세의 몸을 꽈악 끌어안았다. 그 아픔이 느껴질 정도의 강한 힘에 아야세는 겨우 깊은 안도를 느꼈다. "나...혼자가 되는 것이 무서워서 돈이라는 연결고리가 없으면 가노씨가 떠나가 버릴 것만 같아서..." 능숙하게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낯간지러운 말이 되어 흘러나왔다. 이렇게 가노의 체온을 가까이 느끼고 있어도 그 불안은 언제나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강하게 아야세를 괴롭히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이제 먼 미래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소중한 것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소중한 것. 설령 그 형태가 가노의 마음과 완벽하게 겹쳐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아야세는 무엇보다도 이 남자의 존재가 소중했다.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마! 돈은 너를 평생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위한 구실이었을 뿐이야!" 낮은 목소리가 커다랗게 귓가에 울려왔다. "...네가 울건 아우성치건 상관없다고 생각했더. 너를 평생 내옆에 묶어둘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이라도 상관없다고... 하지만 너는..." 가노의 외침은 채 끝을 맺지 못하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고통을 참기 위해 일그러진 남자의 옆 얼굴을 아야세는 두 손을 뻗어 살며시 감쌌다. "제기랄..." 스스로에게 욕을 퍼붓는 가노의 목소리조차 지금은 무섭지 않았다. "지금까지 몇번이나 널 사랑한다고 했잖아!" 어린애같은 가노의 노성에 아야세는 그저 힘껏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11 "차압이란건 말야...." 넓은 욕실에서 나온 순간 가노가 아야세를 바라보며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가노가 준비해준 잠옷을 걸친 아야세의 피부는 가벼운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맨션에 돌어오자마자 곧 가노는 아야세에게 목욕을 할 것을 권했다. 무대위에서 낯선 남자들에게 애무를 당했던 불쾌감은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인 아야세에게 가노는 혼자 욕실을 사용할 것을 허락해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노가 아야세를 혼자 욕실에 들여보내는 것은 좀처럼 드문 일이다. 안심하는 반면 이러다 도중에 욕실에 들어오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고 있던 아야세의 예상을 뒤엎고, 가노는 단 한번도 욕실문을 열지 않았다. 아야세가 충분히 목욕을 마칠 때까지 그는 줄곧 벽에 기대서 탈의실의 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촉촉하게 젖어있는 머리카락을 닦는 것도 잊고, 아야세는 가노를 바라보았다. "얼마전에 소메야의 아버지와 만났던 가게 기억하고 있어?" 나지막하게 묻는 가노의 목소리에, 아야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만에 돌아온 가노의 맨션은 의외로 깨끗하게 정돈된 채 아야세를 편안하게 맞아주었다. 놀랄만큼 넓은 복도에서도, 자신의 아파트에 돌아갔을 때 같은 쓸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눈앞에 서 있는 가노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을 지금은 솔직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전 주인에게 그 가게의 권리서를 받고 300만엔을 빌려줬어. 이자는 한달에 10%. 선금 포함 한달에 55만엔씩 여섯번에 거쳐서 갚는다는 계약이였지. 결산이 밀리지 않은 한, 권리서를 맡긴 가게를 평소대로 운영하건 다른 곳에서 일하건 나도 불만은 없어." 담담하게 말하는 가노의 목소리에, 막 따뜻한 물로 목욕을 마친 등줄기에 오한이 흘렀다. "한달에 55만엔이나...." "...매달 말 우리 사무실의 직원이 가게로 돈을 받으러 가기로 되어 있었지. 계약한 날 밤 열두시까지 기다렸지만, 그 녀석은 결국 세번째 결산은 할 수 없었어." 그 가게의 주인은 그래도 130만엔 까지는 갚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런 음식점의 수입이 얼마나 되는 지는 상상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두달만에 100만엔이 넘는 돈을 마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가노씨는 130만엔밖에 회수하지 못했단 말인가요...?" 아야세는 가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가노의 긴 손가락이 아야세의 뺨에 달라붙어 있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살짝 뺨을 어루만지려던 가노는 문득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거둬들였다. "현금은. 단 가게의 권리서를 맡아뒀다고 했잖아. 한 번이라도 회수가 밀린 시점에서, 내게는 가게의 소유권이 발생하지. 그것도 가구나 유리컵 하나까지 전부." "...네?...? 하지만...." 아야세는 가노의 말을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130만엔은 갚았잖아요. 남은 것은 170만엔과 이자뿐인데... 전부...?" 반액 가까이 갚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가게의 권리서는 물론 비품에 이르기까지 전부 손에 넣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가게의 경영자는 달랑 몸뚱아리 하나로 내쫓긴 셈이다. 아야세의 의문은 가노가 당연히 예상하고 있던 것이였으리라. 그는 감정을 억누른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차압이란 거야. 입지상으로 볼 때 그 가게의 일반적인 평가가격은 6천만엔 이상이지. 애초에 빌려준 돈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아." "6,6천만엔...?! 그럼 그걸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리던가...." "은행에서 돈을 빌리 수 잇는 경영자라면 애초에 우리 사무실에서 돈을 빌리지 않았겠지. 300만엔이나 되는 현금을 빌리기 위해서는, 6천만짜리 가게를 통째로 담보잡히지 않으면 안돼. 그런 손님들을 잘 구워 삶아서 이익을 챙기는 게 내 일이지." 가노의 말에 가슴이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어버린 아야세의 가냘픈 몸을 가노는 무의식적으로 벽에 밀어붙였다. "지금 그 가게의 경영자는 우리 아버지의 옛 친구로, 나도 신세를 지고 있는 타카노 하시란 남자야. 애인에게 가게를 장만해주고 싶다고 전부터 씨끄럽게 굴어서 말야. 하도 난리를 치길래 결국 50만엔에 경영권을 빌려줬지." 가노의 입에서 튀어나온 액수의 어마어마함에, 아야세는 또다시 눈을 꺼다랗게 떴다. "하... 하지만 170만엔에 손에 넣은 가게잖아요?! 50만엔이라니..." 물론 실내장식까지 고스란히 갖춰진 가게를 그대로 빌릴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조건이다. 하지만 그래도 4개월만 지나면 원금을 뽑을 수 있는 가격설정은 횡포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못해도 70만엔은 받았을 거야. 타카노하시 그 녀석, 실내장식이고 뭐고 전부 갈아치울 만한 돈도 있는 주제에.... 니시오카라면 80만엔을 내고서라도 빌리겠다는 녀석을 찾아왔을 텐데 말야."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는 가노의 시선이 아야세의 목덜미에 아플만큼 꽂혀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허리를 숙여 목덜미에 키스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가노는 그런 마음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빌려준 사람이 타카노하시니까 좀 상황이 다르지만... 대체적으로는 다음에 들어온 녀석에게도 돈을 빌려줘서 또 싼값으로 차압을 하는 거야. 1년만 기다리면 만사 OK. 잘만 되면 제법 짭짤한 돈이 굴러들어오지." 지난번 사무실에서 들었던 가노의 냉철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자살해도 상관없다고 했던 가노의 말은 아마 과장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슴속에 치밀어 오르는 공포에 아야세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우리 사무실같은 곳에서 돈을 빌리는 녀석들에게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 처음부터 도망칠 작정을 하고 있는 녀석도 적진 않고. 너무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쪽이 망하게 돼." 가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따. "아무리 합법적이라고는 해도, 확실히 깨끗한 일은 아니지. ...그래도 넌 나와 함께 있고 싶으냐?" 주저하며 묻는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슬픔같은 것이 묻어있어서 아야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너처럼 깨끗한 세계에서 살아온 녀석이 이런 생활을 참을 수 있을지, 난 잘 모르겠어." 가노는 숨기려 하지도 않고 불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의 숫자도 만만치 않아. 코노미처럼 집요하게 원한을 품고 있는 녀석도 있지... 나와 함께 있는 한 앞으로도 오늘같은 소동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어. 그래도...." 괴로운 듯이 말을 이으려는 가노의 팔을 아야세의 손이 살며시 잡았다. "가노씨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시나요...?" 그 맑은 목소리에 가노는 잠시 아야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다가, 다음 순간 어딘가 눈부신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아직 만족할 수 있을만큼 일하지 않았으니까." 겨우 웃음을 보인 가노의 두 눈에 아야세의 눈동자도 부드러운 미소를 띄웠다. "다행이에요. 싫고 괴로운 일이라면 나도 괴롭겠지만... 가노씨가 선택한 일이라면 틀림없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 대학생에다 아르바이트 경험도 없는 아야세에게는, 이런 가혹한 업종의 경영자인 가노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가노 정도의 남자가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만큼의 가치는 충분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다." 귓가에서 속삭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가슴속에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요 한달동안 완전히 익숙해져버린 담배 냄새가 나는 가슴에 얼굴을 묻고, 아야세는 살짝 눈을 감았다. 겨우 이틀간의 공백이었는데도, 새삼 이곳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믿을수 없을만큼 안도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키스해도 될까?" 가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아야세는 그 말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네?" 놀라움으로 크게 열린 아야세의 눈동자를, 가노의 두 눈이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에게 키스하고 , 안고 싶어... 그래도 될까...?"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노골적인 유혹의 말을 들은 적은 과거에도 몇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야세의 수치심을 자극하기 위한 말이었을 뿐 동의를 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아야세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한, 가노의 입술은 결코 자신의 입술을 향해 내려오지 않으리라. 아야세는 작게 숨을 삼켰다. 이상한 긴장감. 이제 돈 때문에 관계를 강요당하는 입장이 아닌 것이다. 겨우 자신의 다리로 가노의 곁에 서 있는 거라는 실감과 동시에, 선택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신의 무거운 책임이 강하게 느껴졌다. 자신을 내려다 보는 가노의 두 눈에는 아무런 강압도 조소도 없었다. 아야세는 가노의 양복을 쥐고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아..." 다음 순간, 아야세는 놀랄만큼 강한 힘에 몸을 안겨 작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뒤이어 겹쳐온 가노의 입술은 그런 비명마저 삼켜버렸다. "음...."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체온이 달콤한 현기증을 불러일으켰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버리는 것만 같았다. 넓은 품안에 안긴채, 아야세는 가노가 유도하는 대로 입술을 벌렸다. "...아..."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온 가노의 혀 끝이 전신의 신경을 자극했다. "침대로 가자." 가노가 여유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야세는 수치심을 참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12 팽팽하게 긴장된 발끝이 청결한 시트에 수없이 많은 파문을 던진다.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침대위에 쓰러져서 깊은 입맞춤을 나누는 동안 가노의 손은 아야세가 걸치고 있던 옷가지를 하나 하나 빼앗아 나갔다. 시트의 상태로 볼때 자신이 없는 요 이틀동안 가노가 한번도 이곳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만한 여유조차 주지않은 채 커다란 손이 아야세를 안기 시작했다. "...응... 아아...." 가노의 손가락이 느껴진다. 불이 환하게 켜있는 방안에서 아야세는 부끄러움을 참으며 가노의 움직임을 돕기 위해 다리를 벌렸다. "아... 으음...." 피부위에 새겨진 상처자국을 애무하는 가노의 입술. 아야세의 몸에는 무대에서 남자들에게 새겨진 잔혹한 상처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덕분에 아픔은 조금 누그러졌지만, 시간이 지나자 상처자국은 더욱 선명해져서 아야세의 하얀 몸을 요염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아.. 아파요..." 혀끝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가노는 가슴에 난 상처자국에 세찬 키스를 퍼부었다. 아야세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으응.." 미끌미끌한 가노의 혀가 천천히 상처자국을 더듬으며 굶주린듯이 가슴을 애무했다. "딱딱해져 있어." 가노는 낮게 중얼거리며 아야세를 어루만졌다. 그의 말대로 옅은 핑크색의 돌기는 이미 딱딱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싫어..." 드러난 살갗위로 아플만큼 쏟아지는 가노의 시선에 아야세는 갸날픈 목소리로 호소하며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갸날픈 손목에도 애처로운 상처자국이 몇 줄이나 남아 있었다. 이 상처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지, 무대위에서 아야세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가노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낯선 남자들에게서 받은 폭력과 굴욕적인 시선은 가노의 팔에 안겨있다는 안도감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수치심의 제일 밑바닥에는, 자신을 향해 똑바로 꽂혀 오는 가노의 시선이 있었다. "보지... 말아요..." 한심하다는걸 알면서도 꺼져들어갈 것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노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야세는 혐오스러운 남자들의 애무에 쾌감을 느꼈었다. 집요하게 애무당했을 때는 재갈이 물려있지 않았더라면 수치스러운 교성을 지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저주해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자신의 추태를 가노가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온몸이 떨려오는 것만 같았다. "...네가 코노미 그 녀석에게 협박당하는걸 들었을 때는...." 문득 귓가에 들려온 가노의 나지막한 속삭임에 아야세는 촉촉하게 젖어오기 시작한 눈꺼풀을 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녀석을 박살내고 싶었어." 가노가 격렬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가... 노씨... 혹시 북경어를..." 아야세는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눈으로 가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가노는 어린애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코노미는 내가 북경어를 모르는 줄 알았나본데, 알아듣는것 정도는 웬만큼 할 수 있지." 그렇게 속삭이며 가노는 손가락으로 딱딱하게 부풀어 오른 아야세의 가슴을 가볍게 움켜잡았다. "...웃...." 아야세의 몸이 아픔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가노는 또다시 축축한 혀로 가슴을 핥기 시작했다. "죽여버 걸 그랬어." 농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낮은 목소리로 가노가 작게 중얼거렸다. "가..." 불안을 호소하는 아야세의 손목을 가노의 손가락이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신중하게 잡았다. "잊어버려." 가노의 진지한 눈빛을 응시한 순간 아야세는 숨을 삼켰다. 그의 눈에는 이미 코노미를 향한 무시무시한 분노의 흔적은 없었다. 혀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가노는 몇 번이나 아야세의 손목을 핥았다. "나에 대한것 외에는 전부 잊어버려." 심장을 파고드는 듯한 가노의 시선에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우..."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려는 아야세의 입술에 다시 한번 그의 입술이 겹쳐왔다. 새끼고양이를 달래주듯이 목덜미에 남아있는 목걸이 자국을 핥아주는 혀의 감촉에 아야세는 솔직하게 신음을 흘렸다. 귓가에서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아야세에게 지독한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도망치고 싶은 기분도 아직 마음속에 남아있긴 했지만, 아야세는 뜨거운 숨결을 내쉬며 그의 등을 감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으응... 아... 가노씨...." 무의식적으로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아앗...." "넌 정말 민감하구나." 가노가 감탄하는 듯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아야세는 촉촉하게 젖은 눈을 어린애처럼 찡그렸다. "귀여워." 그의 달콤한 목소리도 눈동자도, 모든 것이 두려울만큼 상냥했다. 가노의 체온과 호흡을 가까이 느끼는 것만으로, 머리속이 아찔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응... 앗... 안돼... 요... 거긴...." 은밀한 부분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에, 아야세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자극을 받지도 않았건만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곳이 작게 떨려왔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아야세의 몸을 내려다 보며, 가노느 소리없이 웃었다. "왜그래? 기분 좋지?" 뜨거운 숨결과 함께 속삭이는 가노의 목소리도 욕망에 젖어 있었다. 아야세는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공포와 굴욕밖에 느낄 수 없었던 무대위에서의 행위와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달랐다. 변화해가기 시작하는 자신의 몸이 믿겨지지가 않아서, 아야세는 어린애처럼 가노의 팔에 손톱을 세웠다. 두터운 가노의 손가락은 아야세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신중하게 자극하고있었다. "...응... 하아...." 전신에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기분 좋다고 말해 줘." "...아... 아니...." 어째서일까, 자기도 모르게 부정의 말이 흘러나왔다. 기분좋게 가슴을 눌러오는 가노의 체중을 느낀 순간, 그가 목덜미에 난 상처를 가볍게 깨물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싫어... 만지지 말아요..." 가노의 몸을 받아들일 때마다 느껴지는 공포는 아픔때문이 아니다. 확실히 아프기도 했고 그것이 두렵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아야세는 제어할 수 없는 쾌감이 두려웠다. 본래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은 육체이건만, 어째서 가노의 몸이 닿을 때마다 이렇게 미칠 듯한 쾌감에 빠져드는 것일까.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의 쾌감이, 익숙해져 있지 못한 아야세를 언제나 두렵게 만드는 것이다. "...으응...." 사랑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뜬 가노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을 느끼고 아야세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가노...!" 아야세의 외침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가노의 머리카락이 허벅지 안쪽에 와 닿는 것과 동시에 느낀 격렬한 감촉. "아...." 가장 민감한 곳을 섬세하게 자극하는 움직임에 아야세는 날카롭게 신음하며 몸을 젖혔다. "난 너와 함께 행복해지고 싶어." 달콤한 속삭임과 함께 몸안을 자극하는 손가락의 감촉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자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할 틈도 없이, 아야세는 가느다랗게 떨면서 절정을 맞이하고 말았다. "아... 우웃... 하아...." 부끄러움과 쾌감에 온 몸이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꽤나 빠른걸." "미안해요...." 흐느껴 우는 것처럼 말하는 아야세의 이마에 가노의 입술이 겹쳐왔다. "사과할 정도라면 기분 좋았다고 말해 줘." 자제할 수 없는 쾌감에 두려움을 느끼며 아야세는 필사적으로 가노를 바라보았다. "...가노씨는... 날 안으면... 기분 좋나요...?" 꺼져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아야세를 내려다보고 있는 가노의 두 눈이 생각지도 못한 솔직한 빛을 띄우며 크게 열렸다. 그것이 부드러운 미소로 바뀌었을 때, 아야세의 갸날픈 몸은 강한 힘으로 그의 품안에 안겨 있었다. "...아...." 아야세는 필사적으로 밀착해 있는 가노의 몸을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만큼 자신을 힘껏 끌어안고 있는 이 팔이 그저 사랑스러웠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지 못한 아야세의 내면에 언제나 자리잡고 있던, 필사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끌어안고 싶다는 욕구가 조금씩 충족되어 가는 듯한 실감. 지금 이 순간 이 팔은 자신만의 것이라고 솔직하게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네가 아니라면 이렇게 기분좋게 될 수 없을 거야." 쓴웃음이 섞인 가노의 목소리에, 달콤한 미소가 새어나왔다. 눈부신 듯이 눈을 가늘게 뜬 가노의 입술을 아야세는 스스로 입술을 열어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가노의 열을 확인하기 위해서 서툴게 혀를 움직였다. "응..." "괜찮겠어?" 아야세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앗... 아앗...." 호흡에 맞춰 리드미컬 하게 몸안을 자극하는 쾌감에 아야세는 어린애처럼 비명을 질렀다. 혼자서는 이렇게 비명이 흘러나올만큼 강렬한 쾌감은 얻을 수 없다. 아야세는 남자건 여자건 가노 이외의 사람과 사랑을 한 적은 없지만, 이 남자가 주는 열기가 특별한 것이라는 것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자신도 가노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네 몸은 너무 따뜻해서 녹아들 것 같아." 만족스러울 만큼 욕망을 침입시킨 걸일까, 가노는 아야세의 코끝에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웃었다. 가노의 단정한 이마에도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에 어린 적나라한 욕망의 빛에,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쾌감이 느껴졌다. "아... 아아... 또...."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자신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허스키하고 달콤했다. "또 뭐냐?"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가노의손이 또다시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한 아야세를 어루만졌다. "우웃...." "몇번이건 절정을 느껴도 돼." 가노는 그렇게 속삭이며 또다시 딱딱해지기 시작한 가슴의 핑크색 돌기를 쥐었다. "...아... 기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아야세가 느끼고 있는 쾌감은 연결되어 있는 몸을 통애 가노에게도 전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귓가에 와닿는 가노의 뜨거운 숨소리에 짜릿한 흥분이 발끝까지 느껴졌다. 나중에 부끄러움으로 괴로워 할 것을 알면서도 아야세는 끊임없이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 "어차피 전부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면, 몸만이라도 묶어두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아...." "이젠 몸 만으로는 부족해...." 그렇게 말하며 가노는 세차게 움직였다. "...가노... 아..." "아무리 발버둥쳐도 손에 넣을 수 없다면, 나와 함께 있어봤자 널 위험에 처하게 만들 뿐이라면, 차라리 포기해 버리는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그 낮은 중얼거림은 이미 아야세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말의 의미보다도 가노의 관능적인 목소리가 강하게 마음을 때려 아야세는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딘지 어린애같은 필사적으로 괴로움을 참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가노의 눈동자가 지독히도 사랑스러웠다. 가노의 마음속에도 자신과 똑같은 감정이 존재하고 있을까. 아직 그 마음에 정확한 이름을 붙일 수는 없었지만, 가슴에 스며드는 따스함은 무엇보다도 부드럽게 아야세를 감싸안았다. "각오해 둬." 아야세의 움직임에 맞춰 가슴에 난 상처자국을 핥으며 가노가 입을 열었다. "이젠 평생 놔 주지 않을테니까...." 가노의 달콤한 목소리에 온 몸이 세차게 떨려왔다. "...아... 가노씨...." 아야세는 몸 깊숙한 곳에서 가노의 고동을 느끼며 달콤한 절정을 맞이했다. 경련을 되풀이 하는 내부의 감촉을 즐기며 가노도 거친 숨을 내쉬었다. 가노도 이 몸을 통해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주 조금이지만 자신과 가노와의 거리가 좁혀진 것 같은 기분에 따뜻한 눈물이 아야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언젠가는 잃어버리게 될 따스함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은 도망치지 않고 이곳에 있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사랑해." 가노의 말이 온 몸에 스며들었다. 땀에 젖은 시트 위에서 아야세는 필사적으로 가노의 몸을 끌어 안고 몇번이나 몇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13 쨍쨍 내리쬐는 햇빛과는 달리 오늘은 습도가 낮은 탓에 제법 쾌적했다. 날씨가 화창한 것을 기뻐하면서 아야세는 가노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밝은 통로 오른쪽에 유리문이 보였다. 테이토 금융이라고 써있는 간판을 보자 자연스럽게 긴장이 밀려왔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가노가 사무실 문을 열었다. "왜그래?" 가노가 이상한 듯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아야세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야세는 넓고 밝은 사무실을 미지의 세계나 되는 것처럼 둘러보았다. "들어 와. 이제 화내지 않을 테니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가노의 목소리에 조금이지만 겨우 용기가 생겼다. 아야세는 주먹을 꼭 쥐며 긴장된 얼굴로 문을 열었다. 금융업자라는 말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는 달리 가노의 사무실은 그리 무시무시한 곳은 아니었다. 벽지의 색도 부드러웠고, 책장이나 대형 컴퓨터도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코노미의 꼬임에 빠져 아크시를 방문한 다음날 가노는 아야세를 사무실에 안내해 주었다. 아야세가 데려가 달라고 조른것은 아니었다. 점심식사를 하러 맨션으로 돌아왔을 때 가노가 먼저 말을 꺼내준 것이었다. "아야세!"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칸막이 안쪽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여성이 몸을 일으켰다. "소메야..." 소파에서 일어선 키모노 차림의 미녀를 향해 아야세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가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소메야가 재빨리 아야세를 향해 뛰어오며 말했다. "아야세, 이제 몸은 괜찮아? 그러지 않아도 지금 막 윗층으로 얼굴을 보러 갈까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어." 잘 손질된 손으로 아야세의 손을 꼬옥 잡으며 묻는 소메야를 바라보며, 아야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틀전에 일어났던 일을 제외하면 아야세의 몸상태는 결코 나쁜 편이 아니다. 아크시에서 일어났던 일을 알리도 없을텐데, 소메야는 어째서 이렇게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것일까. 아야세는 한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아... 가노씨, 설마..." 아야세는 머뭇거리며 가노를 바라보았다. 설마 가노는 그 수치스러운 사건을 소메야에게 전부 털어놓았단 말인가. "어젠 수고했다, 소메야." 가노는 문을 닫으며 소메야를 향해 말했다. 그 흔치 않은 감사의 말에 소메야는 싱글싱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훌륭하군요. 가노님도 아야세와 관련된 일이라면 남에게 인사를 할 줄 아는 인간이 될 수 있나 보죠?" "딱히 엄청난 일을 한 것도 아니면서 잘난척 하지 마." "어머나! 나의 활약이 있었기에 아크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어서 아야세는 머뭇거리며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왜 그래, 아야세. 미안해! 역시 몸이 안 좋아?" 소메야가 당황하며 아야세의 갸날픈 어깨를 감싸안았다. "저... 설마... 아크시에...?" 머뭇거리며 말을 꺼낸 아야세를 가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당연하지...아, 하지만 그때 난 맨얼굴 이었으니까 뭐. 혹시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그 말에 아야세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괘,괜찮아, 아야세?!" 당황하며 묻는 소메야를 가노가 성가시다는 듯이 밀쳐냈다. "일어설 수 있겠어?" 가노의 물음에도 고개를 끄덕일 자신이 없었다. 아야세는 가노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잠깐 기다려요, 가노님!" 아야세를 걱정하는 소메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을 뒤돌아볼 용기는 이미 아야세에게 없었다. 서둘러 다가오려는 부하들을 눈짓으로 저지한 후, 가노는 아야세를 사장실로 데려갔다. 가노의 권유대로 소파에 앉자, 사무실에 놓여있는 소파보다 훨씬 부드러운 감촉이 가냘픈 몸을 기분좋게 감쌌다. 특별한 손님과의 상담을 위해 준비된 이 방의 가구들은 모두 중후하고 우아한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아야세에게는 그런 것에 눈길을 돌릴만한 여유따윈 없었다. 소메야의 말이 자꾸만 가슴속에 울려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소메야가 그때 아크시에 있었을 줄이야. 타카노하시라는 사람의 동료들과 함께 객석에 섞여있던 것일까. 그렇다면 자신은 소메야에게까지 그 끔찍한 추태를 보인 것이 된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냐." 등뒤에 서 있던 가노가 아야세의 뺨을 달래듯이 어루만져주었다. "하지만 가노씨...." 아야세의 목소리는 힘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나... 부끄러워요. 이제 어떤 얼굴을 하고 봐야 할지...." 반쯤 우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아야세는 깊게 어깨를 떨궜다. 그냥 벗은 모습이라면 몰라도 그런 굴욕적인 성적행위를 아는 사람에게 보였다니, 믿고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어. 비상사태였으니까. 소메야따위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덩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잊어버려." 가노는 더더욱 고개를 떨구는 아야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내가 있을 때는 언제든지 이곳으로 와도 돼. 소메야도 사장실까지 따라오지는 않을 테니까." 그 말에 아야세는 깜짝 놀란 듯이 고개를 들었다. "소메야는 그렇다치고... 코노미, 그 녀석이 아직 일본에 남아 있는 것 같더군. 될 수 있으면 널 혼자서 외출하게 하고 싶지 않지만...." 쓴웃음을 짓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가노의 본심이리라. 그러나 그 이상으로 아야세를 놀라게 한 것은 그가 최대한 자신의 호소를 들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린아이같은 자신의 말을, 가노는 진지하게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쁨보다는 오히려 몸둘 바를 모르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어리광을 부리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아야세는, 어떻게 감사하면 좋을지 몰라서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미안하다." 아야세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일까. 가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자, 소파 뒤에 있던 가노가 씁쓸한 표정으로 미간에 주름을 짓고 있었다. "코노미 녀석에 대해서 말인데...." 가노의 입에서 튀어나온 남자의 이름에 온 몸에 남아있는 상처자국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틀전 그날밤 이후, 가노는 코노미라는 이름을 결코 입에 담지 않았다. 그래도 전신에 남아있는 상처를 의식할 때마다, 아야세는 굴욕과 혐오감에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곤 했었던 것이다. 코노미는 역시 아야세의 이름을 들먹이며 가노를 아크시로 불렀던 모양이다. 그런 지독한 배신을 당한 직후면서도 코노미의 도발에 응해준 가노에게, 아야세는 감사와 동시에 아무리 사과해도 모자랄 듯한 미안함을 느꼈다. 가노가 위험하다는 사실도 모르고 좁은 아파트에 틀어박혀서 멋대로 쓸쓸함에 젖어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한마디도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 가노의 배려가 더더욱 아야세를 괴롭게 만들었다. "난 절대로 그 녀석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어." 아야세의 눈동자에 강한 놀라움이 번지는 것을 보며 가노는 입술을 일그려뜨렸다. 가노의 등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던 코노미의 얼굴이 공포와 함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권총을 꺼내들면서까지 가노를 없애고 싶을 만큼 가노에 대한 그의 증오는 강렬한 것이었다.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흥미가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네가 자세한 사정을 듣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해." 가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설명해 줄 자신이 없어." 가노는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미간에 깊은 주름을 지었다. 자신을 똑바로 향한 그 눈빛에 아야세는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얘기해 줄게... 그럼 안되겠어?" 애원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한점의 어둠도 느낄 수 없는 그의 목소리에 아야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뜨고 똑바로 가노를 바라보았다. "...가노씨가... 코노미씨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죠?" 아야세의 물음에 가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의 힘을 조금 빼며, 아야세도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믿어요."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말한 후, 아야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아야세의 진지한 표정을 내려다보며, 가노의 두 눈에 처음으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진심이 서려있는 그 감사의 말에, 아야세는 겨우 자신이 가노의 곁에 서 있는 것을 허락받았다는 실감을 느꼈다. 아무리 친한 사람끼리라 해도, 서로의 마음을 전부 알 수는 없다. 그것은 가족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해 가는가. 그것을 하나하나 배워 가는 것이 진짜 함께 생활하는 것의 첫걸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야세, 넌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냐?" "어떻게 하다니...." 그의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어서, 아야세는 머뭇거리며 가노를 바라보았다. "이제 내개 50만엔에 몸을 파는 것은 싫겠지?"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무드는 가노를 향해, 아야세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대낮부터 그런 말을 듣고싶지는 않았다. 수치심으로 새빨갛게 물든 아야세의 목덜미에, 가노가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럼 내게 진 빚을 어떻게 갚을 지 생각해 봤어?" 관능적인 목소리가 파동이 되어 민감한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그 속삭임의 의미를 믿을 수 없어서, 아야세는 소파에 앉은채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네...?" 커다랗게 열린 호박색의 눈동자가 등뒤에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한 말의 위력에 만족한 것일까, 가노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5억 2천만엔. 기억하고 있지?" "...하지만 코노미씨의 돈은 돌려준 것이...." "물론 돌려줬지. 피해보상비를 빼고." 뭔가를 떠올린 것일까, 가노는 웃음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고보니 그 녀석, 너한테 이상한 보석을 줬었지. ...그것도 돈으로 바꿔버릴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가노는 차가운 눈동자로 웃었다. "...잠깐만요... 가노씨...!" "그때 너 나한테 돈을 빌려달라고 했잖아?" 이틀전 거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아야세는 입술을 떨었다. 분명히 아야세가 가노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그저 단순한 비유를 뜻하는 것 아니었던가. "내,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빚이 사라지면 그걸로 끝인 관계는 싫다는...." 필사적으로 주장하는 아야세를 바라보며, 가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야세가 실제로 돈을 빌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 쯤은 물론 가노도 잘 알고 있었다. "난...!" 혼란으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어린애같은 표정으로 울음을 터뜨릴 듯이 얼굴을 찡그리는 아야세의 머리르 가노늬 커다란 손이 어루만졌다. "확실히 빚이 없어지면 50만엔을 받고 내게 안기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다고 50만엔을 받고 내게 안기지 않으면 빚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뭐, 없던 걸로 쳐 줘도 상관 없지만, 네가 먼저 빌려달라고 했으니까 할 수 없지 뭐." 유쾌하게 웃는 가노의 모습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가노씨...." "나도 그렇게까지 악랄한 인간은 아니야. 귀여운 너를 위해서 이자는 싸게 받아주지." 너무나도 엄청난 충격에, 아야세는 할 말을 잃고 비틀거리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이런 건 확실하게 해 두지 않으면 안 되거든." 싱글거리며 웃는 가노를 노려볼 기력조차 없었다. "너무해요, 가노씨...." 목소리를 쥐어짜며 호소해 봤지만, 그는 여전히 희색을 감추지 않았다. "나도 때로는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일에 대해서만은 어쩔 수 없어서 말야." 가노는 전혀 미안해 하지 않는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자세한 계획은 둘이서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고... 사실은 말야, 사무실에 외국어를 할 수 있는??아르바이트생 한 사람을 고용할 계획인데, 아야세, 너 해볼 생각 없어?" 생각지도 못했던 가노의 말에, 아야세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엇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야. 서류 정리나 전표 입력, 굳이 따지자면 일반 사무실의 잡무같은 거라고나 할까." 싫으냐고 묻는 가노의 말에, 아야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나도 세차게 흔드는 바람에 가벼운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실제로 그것은 현기증에 필적할만큼 놀라운 제안이었다. "하겠어요! 저 열심히 할게요!" 기세좋게 외치는 아야세를, 가노가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나 같은 걸??고용해도 괜찮으시겠어요...?" 오늘에서야 겨우 사무실에 드나드는 것을 허락받은 아야세는, 그의 일에대한 지식은 거의 백지상태나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애초에 자신같은 인간이 가노의 일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충분해. 강의가 시작되면 일하기 편하게 시간을 조정하면 되고, 집에서 처리할 수 잇는 일도 있으니까." 가슴속에 급격히 따뜻함이 번져왔다. 가노의 말이 너무나도 가쁜 나머지 아야세는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의 손을 어루만졌다. "월급은.... 연수기간 2개월 동안은 시급 2천엔. 근무시간은 기본적으로 아침 10시에서 저녁 6시까지. 일하는 도중에는 사장인 내 지시에 절대로 따를 것. 일주일에 네 번 근무한다고 치고 계산해보면 한달에 23만 8천엔쯤 되려나." "시급 2천엔이라니, 그런...." 너무나도 큰 액수에 놀라는 아야세를 바라보며, 가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해 주겠어?" 대답을 구하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야세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노력할게요...!" 그러자 가노는 약간 쓴웃음을 지으며 아야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렇게 기뻐하면... 뭐랄까... 어떻게 할래? 오늘부터 시험삼아 일해 볼래?" 가노의 달콤한 속삭임에 아야세는 역시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이죠!" 반짝거리며 눈을 빛내는 아야세를, 가노는 눈부신 듯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가노의 따스함에 살짝 입술을 빼앗겨 아야세는 작게 숨을 삼켰다. 동요와 긴장은 아직 완전하게 아야세의 가슴속에서 사라져 있지 않았다. "...응...." 입술을 애무하는 촉촉한 혀끝. 아야세는 고민하던 끝에 입술을 열었다. 기분좋은 느낌과 부끄러움이 온몸에 서서히 번져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노의 긴 팔안에 몸을 맡기는 것은 언제나 지독한 안도감을 준다. 성적이 쾌락보다도, 무방비하게 있을 수 잇는 장소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야세는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웠다. "가...." 입술의 움직임에 맞춰 갸날픈 몸을 안고 있는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슴의 돌기를 어루만지는 그 손길에 아야세는 작은 목소리로 항의했다. "그, 그만 두세요... 저기..." 얇은 벽 하나로 차단된 사무실에는 가노의 부하직원들과 소메야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틀전 침대에서 나눴던 사랑의 기억이 아직도 몸안에 남아있는 것이다. 가족처럼 온화한 교류를 꿈꾸던 아야세에게는, 섹스가 동반된 관계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부담스럽다. 그날밤 가노에게 그 마음을 털어놓았건만, 그는 그것을 받아들여주지 않은 것일까. "가, 가노씨... 앗...." 가장 민감한 부분을 자극하는 긴 손가락의 감촉에 아야세는 갸날픈 몸을 뒤로 젖혔다. 자신의 의지를 배신하려는 열기가 두려워서 아야세는 필사적으로 가노의 손을 뿌리쳤다. 초조해 하는 아야세의 목덜미에, 또다시 부드러운 키스가 쏟아져 내렸다. "...어... 어째서...." "일하는 중에는 내게 절대 복종." 가노의 단호한 말에, 아야세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입술을 떨었다. "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넌...." 드물게도 말꼬리를 흐려버린 가노의 입술이 아야세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제기랄'이라는 어딘가 씁쓸한 중얼거림이 가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것마저도 사랑스럽다고 느껴야 하나. 어딘가 토라진 듯한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가노의 얼굴을, 아야세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각오하라고 했잖아." 그리고 또다시 키스. 달콤하게 겹쳐지는 입술을 느끼며, 아야세는 가볍게 쓴웃음을 지었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14 보슬비가 아파트 창문을 두드린다. 침대를 등진채 낡은 바닥위에 앉아 남자는 조용한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잠을 청하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남자는 결코 의식을 손에서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희미한 소음이 빗소리에 섞일 때마다 남자는 눈을 뜨고 체력을 소모하지 않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좁은 실내를 둘러보았다. 세평 남짓 되는 방 구석에는 석유 스토브가 빨갛게 타오르고 있다. 책상과 침대 그리고 작은 옷장과 작은 테이블외에 방안에 가구다운 가구는 없다. 테이블위에는 좀전에 저녁식사를 하고 남은 빈 그릇이 아직 치워지지 않은 채 놓여 있다. 그러나 방안에는 지저분한 인상따윈 조금도 없었고 오히려 기분좋은 생활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루하루의 온기가 방안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차가운 비에 젖어있는 바깥 세계와는 천지차이다. 달칵거리며 얼음이 녹아내리는 소리에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침대에 누워있는 소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몇시간전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한 추위에 잠긴 바깥 세계에서 남자를 구한 것은 이 작은 소년이었다. 칼에 맞아 부상을 당한 남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방안에 들인 소년의 무방비함을 처음에는 남자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스스로 치료를 마친 왼쪽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소년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열때문에 상기된 소년의 뺨은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래도 몇시간저과 비교하면 호흡이 제법 평온해져 있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틈새를 오가며 몇번이나 몸을 뒤척였던 소년도 지금은 깊은 잠에 빠져 남자를 안도시켰다. 우스운 일이다. 도움을 받은 자신이 자신을 도와준 소년을 간호하는 처지가 되다니. 혹시 소년은 열에 들떠 마음이 불안해진 탓에 낯선 남자를 방안에 들여준 것은 아닐까. 남자에게 식사를 차려준후 느닷없이 쓰러져버린 소년의 가벼운 체중이 아직도 팔에 남아 있었다. 때때로 소년이 몸을 뒤척일 때마다 남자가 올려준 얼음주머니속에서 채 녹지 않은 얼음이 달캉거리며 소리를 냈다. "괜찮냐?" 남자는 뜨거운 숨결을 토하는 소년의 이마에서 땀에 젖어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었다. 그 손길이 기분좋은 것일까, 반쯤 잠에 취해 있는 소년이 작게 몸을 움직였다. 불가사의한 존재에 닿는 기분으로 남자는 소년의 이마와 뺨을 어루만졌다.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결코 화려한 미모는 아니었지만 소년에게는 첫눈에 성별을 판단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이 존재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동성을 상대로 아름답다고 느낀 자신의 마음에 남자는 매우 놀라고 있었다. "...으응..." 소년의 입술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빨갛게 젖은 소년의 혀끝을 본 순간 남자는 충동적으로 소년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아...' 반쯤 잠에 취한 듯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년의 입술은 매우 부드러웠다. 남자는 바싹 마른 입술을 핥으며 그 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소년은 작게 신음하며 아무런 저항없이 입술을 벌리고 체온이 낮은 남자의 수분을 구해왔다. 열에 들뜬 소년의 입안은 달콤했다. 한 번 떨어진 입술을 남자는 다시 한번 아쉬운 듯이 혀끝으로 핥았다. 충동은 이미 가슴속에서 사라져 있었고 달콤한 입술의 감촉만이 씁쓸하게 가슴에 남았다. 남자는 소년의 이마를 짚어보고 열이 내린것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또다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토브의 불을 줄인후, 남자는 방안을 나설 준비를 마쳤다. 날이 밝기 전에 이 거리를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은 지금 쫓기고 있는 것이다. 자존심을 짓밟히고 비참한 도주를 해야 하는 남자의 눈이 소년을 돌아보았다. 아야세 유키야. 그 이름만이 남자의 차갑게 얼어붙은 가슴속에 깊게 새겨졌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15 두터운 구둣발 아래서 처참한 비명이 울려퍼진다. 계속해서 튀어나온 남자의 비명은 바닥에 깔려 있는 두터운 융단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닥을 기던 남자의 손이 책상다리를 움켜잡았다. 그 손의 주인은 아직 30대 중반 가량의 젊은 남자였다. 하지만 두터운 목제 책상은 매우 무거웠고 부상을 당한 남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옆으로 뻗어온 또 다른 발이 남자의 손을 짓밟았다. "자신의 입장을 조금은 깨달았나?" 낮은 목소리가 남자를 향해 가차없이 꽂혀왔다. 반짝반짝하게 닦여진 책상위로 손을 뻗으며 가노 소무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봐, 우라가미." 그 허스키한 목소리에 바닥위에 쓰러져 있던 남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가노가 소유하고 있는 넓은 사장실 중앙에서 가노를 비롯한 두 명의 사원이 중키에 평범한 체격을 한 남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보통은 영업시간이 끝난 이 시각이라도 필요하면 손님을 사무실에 들여보내곤 하지만 오늘은 특별했다. 이 우라가미라는 남자가 영업시간이 끝날 무렵에 사무실을 찾아온 덕분에 그 후에 찾아온 손님들은 전부 거절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해도 너, 잘도 내 사무실에 얼굴을 내밀었군." 내뱉듯이 던져진 그 말에 우라가미는 찢어진 입술을 깨물었다. "네 녀석이 종업원을 이용해서 계획적으로 돈을 안 갚고 튀어버리려고 했던 것은 나도 알고 있었어." "히익..!"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치려고 한 우라가미의 등에 가노의 용서없는 발길질이 날아왔다. 폐를 압박하는 듯한 묵직한 고통에 남자의 입에서 둔탁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만 둬..! 난 아무것도 몰라..! 나는..."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는 녀석이군!" 가노는 발버둥치는 우라가미의 배를 무거운 구둣발로 걷어찼다. 처참한 비명과 함께 우라가미의 몸이 넓은 실내를 굴러갔다. "나 역시 폭력은 좋아하지 않아. 알고 있겠지?"" 웃음을 머금은 듯한 억양을 띠고 있으면서도 가노의 목소리는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폭력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금융업자가 그 빚을 갚기 위해 채무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법률에 저촉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폭행의 현장이 만에 하나라도 다른 손님들의 눈에 띄면 사무실의 간판에 흠집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도 오늘처럼 어쩔 수 없이 폭력에 호소해야만 할 경우 가노에게는 일말의 용서도 없었다. 물론 무엇을 어쩔 수 없는 경우라고 판단하는가는 가노의 기준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쿠바, 이 녀석의 종업원에게 얼마를 쥐어줬나?" "220만엔에 초과이자가 붙어서 250만 정도입니다." 옆에 서 있던 부하직원이 가노의 물음에 간략하게 대답했다. "그럼 우라가미 너, 우리 사무실로부터 300만엔을 빌렸다는 증서에 사인하도록." 가노가 턱으로 신호를 보내자 쿠바가 재빨리 책상위에서 서류를 꺼내왔다. "도, 돈을 빌려주겠다고?" 큰 소리로 외치는 우라가미의 얼빠진 목소리에 가노는 용서없이 남자의 목덜미를 짓밟았다. "크윽..." "바보같은 소리 하지마! 어차피 돈은 도망간 종업원에게 받아 챙겼을거 아냐. 그 300만엔을 댁이 갚으라는 거야." 강력하레 내리꽂히는 가노의 눈빛에 우라가미는 피가 배어 있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따. "그...그런 돈이 있을 턱이 없잖아!" 침을 튀기며 주장하는 우라가미의 얼굴을 가노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이곳 신주쿠에서 금융업을 시작한지 약 3년째에 접어들지만 가노는 이런 상황을 넌더리날만큼 많이 겪어왔다. 돈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수단은 가리지 않는다. 적발되지만 않으면 범죄는 아니라고, 이런 무리들은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농담은 이정도로 끝내지, 우라가미. 댁은 사채에도 손을 대고 있다면서? 게다가 그쪽도 상당히 위험한 상태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걸..." 우라가미의 얼굴이 동요로 일그러졌다. 가노는 반쯤 피운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고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에어콘이 돌아가는 실내에 담배 연기가 천천히 공기속으로 퍼지며 사라져갔다. 마치 대형 육식동물을 연상시키는 동작으로 가노는 기대어 있던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옆에 서 있던 부하 직원들이 무의식적으로 그의 장신을 올려다보았다. 평균적으로 따져보면 부하직원들도 상당히 덩치카 큰 부류에 속하지만 그래도 가노의 장신과 어깨폭에는 미치지 못했다. 단정하지만 예리한 인상이 강한 얼굴탓도 있지만 그의 분위기는 항상 어딘가 폭력적인 힘으로 넘쳐 있었다. "안심하시지. 밀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맛있는 듯이 담배를 피우며 가노는 '그 대신' 하고 싱긋 웃으며 낮게 덧붙였다. "우리 사무실에서 빌려간 돈은 몸을 팔아서도 반드시 갚도록." "무, 무리야! 그런 돈을 누가..." 말귀를 못알아 듣는 우라가미를 바라보며 가노는 끌끌 혀를 찼다. "입 벌려." 가노가 던진 말의 의미를 우라가미는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반응이 느린 우라가미에게 짜증을 느낀 가노는 구둣발로 남자의 쇄골을 걷어찼다. 그리고는 비명을 지르며 벌어진 남자의 입안에 불이 붙은 담배를 던져 넣었다. 처참한 절규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순순히 돈을 갚는 것과 사채업자들에게 잡혀서 서서히 살해당하는 것과 어느 쪽이 좋아?" 싱긋 웃는 입술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가노는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뒹구는 남자를 난폭하게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차를 준비해 줘, 쿠바. 그리고 짐작이 가는 곳 몇군데에 이 녀석을 끌고 돌아다니도록." "아, 안돼!" 우라가미는 화상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입을 필사적으로 벌리며 쥐어짜듯이 외쳤다. 그 절규에도 아랑곳 없이 우라가미를 밖으로 끌고 나가기 위해서 사장실 문을 연 가노가 느닷없이 움직임을 멈췄다. 가노의 뒤를 따르던 부하직원이 이상하다는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여전히 난폭하시군." 팔짱을 끼고 있는 키모노 차림의 여성이 가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키가 큰 여자의 가슴 언저리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여자는 잘 손질된 손가락으로 예리하고 단정한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이 흠잡을데 없이 완벽한 미모의 소유자는 공교롭게도 여성이 아니다. 가노의 소꼽친구이자 이 사무실의 단골손님이기도 한 소메야 카오루였다. 소메야의 옆에는 사원 한 사람이 곤란한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조만간 폭력행위로 고소당할지도 몰라요." 소메야는 한숨을 쉬며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러나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가노의 귀에는 소메야의 말따위는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예리한 남자의 눈빛은 소메야의 뒤에 서 있는 남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늘씬하게 큰 소메야의 뒤에 자신의 몸을 감추는 것처럼 서있었다. 실제로 사장실에서 들려온 험한 욕설을 듣고 겁에 질려서 소메야의 등뒤에 숨어있었는지도 모른다. 긴 속눈썹에 둘러싸인 눈동자를 불안하게 뜬 채 그는 머뭇머뭇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흐린 청회색 셔츠에 청바지를 걸친 그의 모습은 이 사무실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동시에 하얀 그의 얼굴만이 기능적인 실내를 화려하게 채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투명한 하얀 뺨에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드리워진 그 얼굴은 남자라기 보다는 섬세한 여자처럼 아름다웠다. 가노가 남자지만 아름답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단 한사람ㅡ 이 아야세 유키야 뿐이었다. 가노가 그를 곁에 두기 시작한지 벌써 한달 가량이 지났따. 비합법적인 경매에 붙여진 그를 가노가 막대한 현금으로 낙찰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 후 가노는 이 아름다운 이의 자유를 돈의 힘으로 속박하고 있었다.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가노의 노성에 아야세는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떨고 있는 아야세를 본 순간 가노는 자신이 우라가미의 목덜미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폭행을 당한데다가 입안에 지독한 화상까지 입은 우라가미는 아야세와 소메야의 등장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낮은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가노는 당황한 표정으로 쿠바를 향해 우라가미의 몸을 밀쳐냈다. "이 녀석을 빨리 데리고 가!" 사무실을 나가도록 짤막하게 지시를 내린 후 가노는 아야세를 돌아보았다. "오해하지마, 아야세. 난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게 아니야. 그냥 잠시...친구간에 별 것 아닌 싸움을 한 것 뿐이라고나 할까..." 겁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아야세를 향해 가노는 어리석은 짓인 줄 알면서도 결국 변명을 늘어놓고 말았다. 그러나 아야세는 여전히 겁에 질린 눈으로 점점 더 몸을 움츠리기만 할 뿐이었다. 가노는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외쳤다. "소메야!" 쩌렁쩌렁 울리는 가노의 노성에 아야세의 어깨가 또다시 움찔 떨렸다. "너 어쩌자고 이 녀석을 이런 곳에 데려온 거야!" 느닷없이 분노의 표적이 된 소메야가 차가운 눈길로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데려온게 아니예요. 나는 돈을 빌리어 왔을 뿐이고 아야세와는 사무실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거라구요." "미, 미안해요. 나 8시가 되면 사무실에 내려 오라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아서..." 아야세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소메야를 감싸고 나섰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가노는 아차 싶은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확실히 오늘은 아야세와 저녁식사를 하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 일이 끝날 시간에 사무실로 내려오라고 말해둔 기억이 있었다. 우라가미의 출현으로 모든 예정을 싸그리 잊어버린 자신이 너무나도 어이없게 느껴졌다. 그것은 곧 가슴속을 치밀어 올라 우라가미에 대한 격렬한 분노로 바뀌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잘 붙잡아 둬." 가노는 우라가미를 연행해 가는 부하직원에게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리고는 짐승처럼 울부짖은 우라가미에게 일침을 가한 후 씁쓸하게 혀를 찼다. "일하는 중에 미안하지만 가노님 돈 좀 빌려줘요." 소메야가 기분나쁘게 간드러진 목소리로 가노를 불렀다. 가노게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것 중 한가지는 여장을 한 남자이다. 소메야도 에외는 아니어서 아무리 아름답다고는 하여도 생리적인 혐오가 앞서곤 하는 것이다. "오늘 영업은 끝났어. 빨리 돌아가!" 말을 붙여볼 틈도 없는 가노의 험악한 태도에 소메야는 정성껏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뽀족 내밀었다. "잠깐만요. 나같은 단골손님한테 이럴수가 있어요? 큰 돈은 필요없어요. 조금이면 돼용." 소메야가 과장스럽게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가노는 온 몸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끼며 소메야의 팔을 움켜잡았다. 확실히 소메야와는 아주 오래전부터 거래를 해 왔고 또 가장 신용할 수 있는 고객중 하나다. 금융업자와 손님이라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소메야와 가노의 질긴 인연은 중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지만 않다면 아무리 수입이 짭짤하다 해도 여장남자를 상대로 장사를 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가노의 본심이었다. "알았으니까 내일 다시 와." 가노의 손에 난폭하게 떠밀려 입구로 쫓겨난 소메야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왜 이렇게 짜증을 내신담. 아야세에게 험한 꼴을 들켜서 충격 받은 건가요?" 소메야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채 등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야세를 힐끔 돌아보았다. 순간 가노의 눈이 험악한 빛을 띄우는 것을 보고, 소메야는 승리에 찬 미소를 지었다. "어머나, 바로 그런 얼굴이 문제라니까요. 그런 얼굴을 하면 아야세가 무서워하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인상이 더러운데 그렇게 노려보면 못쓰죠. 그보다 한 번 웃어보지 그래요? 자, 치~~즈. 웃을 수 있겠어요?" "이 자식..!" 소메야의 멱살을 잡으려던 가노는 문득 아야세의 존재를 떠올리고 주먹을 거둬들였다. 이 이상 아야세를 겁에 질리게 하는 것은 가노로써도 피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융자를 받고 싶다면 필요 이상으로 아야세에게 접근하지 마." 닥치는대로 물건을 파괴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가노는 낮은 목소리로 내뱉듯이 말했다. "어머, 이건 필요 최소한의 접촉이라구요. 아야세가 맨션에서 도망가는 걸 막기 위한...다음 달에는 강의도 시작된다니 걱정이 많으시겠네요." 소메야가 생긋 웃으며 그렇게 말한 순간 가노는 자신도 모르게 접수 카운터에 놓여 있는 무거운 토기 재떨이를 집어들고 있었다. "가, 가노씨...!" 등뒤에서 아야세의 비명이 들려왔다. "다음에 봐, 아야세~" 비명인지 교성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남기고 소메야는 문으로 뛰어드었다. "두 번 다시 오지마! 알았냐!" 가노는 노성을 지르며 소메야가 사라진 문을 향해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쨍그랑 하는 커다란 소리를 울리며 재떨이는 무참하게 박살나 버렸다. "쿠바!" 카노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부하 직원을 불렀다. 긴장된 얼굴을 한 부하직원이 '네' 하고 대답하며 달려왔다. "난 이제부터 식사를 하러 간다. 내일 예정에 뭔가 변경사항이라도 있나?" 가노의 물음에 쿠바는 들고 있던 종이를 훑어보았다. 좀전에 우라가미를 끌고 사무실을 나갔던 남자와 이 부하직원의 얼굴은 마치 한판으로 찍어낸 듯이 닮아 있었다. 신주쿠에 사무실을 열었을 당시부터 가노의 밑에서 일해온 그들은 외모에서 기질까지 매우 공통점이 많아서 흡사 일란성 쌍둥이를 방불케 하곤 했다. 표정의 변화는 없지만 언제나 냉정하고 말수가 적은 그들의 능력을 가노는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실은 좀전에 사이토님으로부터 전화가 있었는데 내일 부디 만나뵈었으면 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차입건인가?" "자세한 말씀은 없으셨지만 아마도 그럴 겁니다. 일단 시간은 세시 반으로 잡아뒀습니다. 그리고..." 쿠바는 잠시 말을 끊고 준비해 둔 서류를 꺼내들었다. "예의 이타바시 토지건은 사장님께서 예상하신 대로 다른 회사에 저당권이 넘어갔습니다." 가노는 아무말 없이 쿠바가 내민 서류를 훑어보았다. 어제 토지를 담보로 융자를 받으러 왔던 손님이 있었지만 토지의 자기평가액이 너무나도 낮은 것에 의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담보는 잡을 수 있나?" "기대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회사로부터의 차압도 슬슬 시작되겠죠." 부하직원의 대답에 가노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 본 가노는 가볍게 눈썹을 찡그렸다. 우라가미와의 소란 덕분에 꽤나 늦은 시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확실한 담보가 없다면 이 융자는 거절해. 난 오늘은 이만 퇴근하겠다. 너도 사이토의 서류가 준비 되는대로 적당한 시간에 들어가도록." 부하직원에게 지시를 내린후, 가노는 씁쓸한 표정으로 넥타이를 고쳐맸다. 그리고는 잠시 시간을 둔 후 겨우 결심을 굳히고 아야세를 돌아보았다. "많이 기다렸지, 아야..."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연 가노가 놀라움에 움직임을 멈췄다. 아야세의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접객용 소파 옆에 서 있던 아야세의 모습이 사무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나쁜 충격이 가슴을 덮쳐왔다. 그것은 곧 분노에 가까운 차가운 감정으로 형태를 바꿨다. 그러나 그 흉폭한 감정은 느닷없이 울린 작은 소음과 동시에 산산히 흩어졌다. 뒤따라 들려오는 작은 비명. "아야세?"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가노의 시야에 소파뒤에서 나타난 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하얀 손이 아픈듯 머리를 문지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소파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머리를 부딪힌 모양이다. 왜 그런곳에 기어들어간 것인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가노는 성큼 성큼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뭘 하고 있는 거야!" 가노의 노성에 아야세의 몸의 흠칫 떨렸다.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아야세는 매우 낭패한 표정으로 가노를 올려다 보았다. 가노는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그런 험악한 광경을 보인 직후 이렇게 노성을 지르면 얌전한 아야세가 겁에 질리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저...저기...이게...." 아야세는 머리를 문지르며 머뭇머뭇 들고 있던 손수건을 내밀었다. "소파 밑에 떨어져 있었어요. 혹시 소메야의 손수건이 아닌가 싶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수선화가 새겨진 얇은 손수건은 누가 봐도 여자의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고보니 에전에 소메야가 이것과 같은 손수건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 듯했다. 가노는 눈썹을 찡그리며 아야세가 건네준 손수건을 아무런 주저없이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려고 했다. "아, 안돼요, 가노씨!"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아야세는 당황하며 가노의 손으로 뛰어들었다. 얌전한 아야세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 것은 매우 드문일인지라, 가노는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 보았다. "잊어버리고 간 녀석이 나쁜거야."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가노를 바라보며 아야세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만나면 제가 돌려드리도록 할게요." 아야세의 부탁이 하도 필사적이라 가노는 할 수 없이 손수건을 소년에게 건넸다. 소메야는 직업상 언제나 손수건을 잔뜩 갖고 다닌다. 이 사무실에 두고 갈 정도라면 버리더라도 크게 신경쓰지는 않을 물건이련만 아야세는 소중한듯이 손수건을 바지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미않다... 그.. 안 좋은 꼴을 보여서." 가노는 사과의 뜻을 담아 아야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뇨. 제가 바쁜데 방해한 것 같아요...." 당혹스러운 눈으로 미소짓는 아야세를 바라보며 가노는 내심 씁쓸한 아픔을 느꼈다. "말해두지만 그건 차입같은 게 아니다. 그 녀석은 사기꾼 비슷한 녀석인데..." 변명 비슷한 말을 늘어놓는 자신의 허무함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역시 아야세를 사무실로 부른 것은 실수였다. 가노에게 팔려오기 전까지는 평범한 인생을 살고 있던 아야세에게 가노가 살고 있는 세계는 너무나도 살벌한 것이다. 이 일의 더러움과 무시무시함을 될 수 있으면 아야세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많이 기다렸지. 밥 먹으러 가자." 달콤하게 울리는 가노의 목소리에 아야세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살짝 고개를 숙이는 옆 얼굴에는 오랜만의 외출을 즐거워 하는 기색은 없었다. 당연하다. 낯선 사무실에서 오랜 시간 혼자 팽개쳐진데다 그런 무시무시한 현장을 봤으니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않은가. '뭐가 먹고 싶냐? 아무거나 좋으니까 말해 봐." 아야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가노는 가냘픈 어깨를 감싸 안았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16 화려한 네온이 열기에 잠긴 신주쿠의 밤을 채색하고 있었다. 밤11시를 넘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장식하는 불빛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15층 건물의 최상층에서는 신주쿠의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빌딩 전체가 가노의 소유물이었지만 그는 특히 이 15층에서 내려다 보이는 신주쿠의 광경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더러움은 모두 어둠에 가려져 싸구려 네온만이 가득찬 거리. 결코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그 빛에는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24시간 깨어 있는 도시의 소란함이 불규칙한 생활을 하고 있는 그의 성미에 딱 맞았다. 간접조명의 비추는 맨션의 부엌에 서서 가노는 음료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눈 아래 펼쳐진 거리의 빛을 바라보면서 어깨에 끼고 있는 수화기를 향해 말했다. "...알았어. 세무사로부터 연락이 오면 반드시 보존을 해 둬. 내가 내일 확인할 테니까." 가노의 지시에 수화기를 통해 알았다고 대답하는 부하직원의 억양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형 패트보틀에 직접 입을 대고 물을 마신 후 가노는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람 하나쯤은 간단하게 집어넣을 수 있을 듯한 냉장고속에는 조리된 저녁식사가 얌전하게 들어 있었다. 1인분 치고는 너무 양이 많은 그 음식을 본 순간 가노는 무의식적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우라가미 말인데... 그래. 끝났으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좋아. 수고했어." 사무실에 남아있던 부하직원에게 노고의 말을 던진후, 가노는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어제 아야세에게 험악한 장면을 목격당했던 것을 또올리는 것만으로도 씁쓸한 기분이 밀려왔다. 얼굴이 무섭다고 빈정거린 소메야의 말조차 가슴에 떠올라 가노는 난폭하게 넥타이를 풀며 냉장고 안에서 유리볼에 담긴 샐러드를 꺼냈다. "그 녀석 또 먹지 않았나 보군." 침묵에 잠긴 어둠속에서 가노는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햄과 해물이 잔뜩 들어 있는 호사스러운 샐러드에는 아무도 손을 댄 기색이 없었다. 급한 용건으로 사업상 동료에게 불려나갔다고는 해도 이렇게 늦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애초에 가노의 귀가시간이 불규칙한 것은 어제 오늘 시작된 일이 아니다. 아야세와 함께 살기 전에는 아예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았을 정도다. 어울리지도 않게 씁쓸한 한숨을 내쉬던 가노는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가노씨...?"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린 가노의 눈앞에는 잠옷 차림의 그가 서 있었다. 가노의 모습을 본 순간 아야세의 커다란 눈동자에 문득 따뜻한 빛이 어렸다. 길을 잃은 강아지가 겨우 주인을 발견했을 때처럼 애처로운 아야세의 표정에서 가노는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아야세는 매우 얌전하다. 귀찮게 굴지 않는 대신 감정을 격렬하게 드러내는 일도 없다. 언제나 온순하고 조용한 눈으로 가노를 올려다보고 있지만 소리를 높여 웃는 일은 드물었다. 그것은 아야세의 선천적인 성격에 의한 부분도 많을 것이다. 또한 그를 손에 넣게 된 경위와 지배자적인 자신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아야세가 자신의 앞에서 위축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야세의 눈동자에 떠오른 안도의 빛은 곧 내리깐 속눈썹 아래서 불안한 빛으로 바뀌어 갔다. "어서 오세요. 죄송해요, 가노씨가 돌아온것을 눈치채지 못해서..." 아야세는 작게 사과하며 투명하게 비칠 듯한 하얀 맨발로 가노를 향해 걸어왔다. "지금 막 돌아왔어. 미안하다, 잠을 깨운 것 같구나." "아뇨, 그보다 식사 아직...이시죠? 곧 차려드릴게요." 아야세는 미끄러지듯 가노의 옆을 빠져나가 열려있는 냉장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아야세, 너 또 식사를 걸렀지?" 냉장고 문을 팔꿈치로 고정하며 가노는 희미한 어둠속에 떠오른 아야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가노의 말에 아야세는 곤혹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여름에는 식욕이 없어서요." 아야세의 손에서 하얀 접시에 담긴 고기를 받아들며 가노는 작게 혀를 찼다. 혼자 맨션에 놓아두면 아야세는 그다지 식사를 하려 하지 않는다. 더위에 의한 식욕감퇴라기 보다는 혼자 있을때는 뭔가를 먹으려는 기력이 생겨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제처럼 레스토랑에 데려가서 비싼 요리를 눈앞에 늘어 놓아도 아야세는 그다지 기쁜 얼굴을 하지 않았다. 어제는 식사를 하러 나가기 전에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기 때문일까, 물론 그럴 가능성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만이 이유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가노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가 여자였다면 얘기는 좀더 단순했을 것이다. 레스토랑에 데려가거나 보석을 사주면 간단히 기뻐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아야세처럼 비싼 요리를 앞에 두고도 머뭇거리며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짖는 일은 없으리라. "배 고프지 않아? 조금이라도 먹어 둬." 가노는 접시와 유리잔을 아무렇게나 식탁위에 늘어놓으며 아야세에게 말을 건넸다.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아야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네요. 먹을게요." 가노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생긋 웃는 아야세의 눈동자에 넋을 잃고 있었다. 아야세는 항상 가노의 거동에 떨고 있다. 어제 목격했던 광경은 아야세에게 있어서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도 아야세는 아주 사소한 순간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때가 있다. 가노는 무엇보다도 그 미소가 좋았다. 가노의 입가에 짖궂은 미소가 천천히 번져왔다. 샐러드가 담긴 유리볼을 식탁으로 운반하고 있는 아야세의 손목에 가노의 손가락이 와 닿았다. "가노씨?" 깜짝 놀라며 손가락 끝을 떨면서도 아야세는 이상한 듯이 가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배가 고파졌어." 아야세의 손목을 어루만지며 가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웃었다. 느닷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가노의 팔이 가냘픈 몸을 감싸안은 순간 아야세는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어중간한 경계심과 무방비함. 아야세를 내려다보던 가노는 온 몸이 떨리는 듯한 기묘한 흥분을 느꼈다. "키스해도 될까?" 귓가를 간지럽히는 나지막한 속삭임에 아야세의 몸이 흠칫 떨렸다. 새하얀 목덜미가 수치심과 동요로 새빨갛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이 가냘픈 어깨를 긴장시켰다. 긴장으로 온 몸을 떨면서도 아야세에게는 가노를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4억을 넘는 막대한 빚. 11부라는 횡포에 가까운 이자덕분에 그 빚은 나날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아야세의 자유를 속박했다. 어렸을 대 양친을 잃은 아야세에게는 방패가 되어줄 친척따윈 없었다. 가노와 관계에 의해 돈을 얻는 것만이 아르바이트는 고사하고 외출도 허락받지 못하는 아야세가 유일하게 돈을 갚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아야세." 가노의 달콤한 속삭임에 눈을 내리깔고 있던 아야세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몇번 입을 맞춰도 언제나 이런 어린애같은 동작을 보이는 아야세의 입술에 가노의 혀가 살짝 와 닿았다. "...으음.." 아야세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가노의 팔에 안긴채 반걸음 가량 뒤로 물러섰다. 메마른 소리를 내며 가냘픈 허리가 식탁에 부딪쳤다. "...읍...아아..." 따뜻하고 촉촉한 아야세의 입안은 매우 부드러워서 가노는 야릇한 흥분을 느끼며 입술을 겹치고 입한 깊숙한 곳에 혀를 밀어 넣었다.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예민한 점막은 살짝 스치기만 해도 짜릿한 쾌감이 느꼈졌다. "...후...아아..." 겨우 입술을 뗀 순간 아야세의 입에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가노는 힘없이 늘어진 아야세의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같은 남자이면서도 아야세의 몸은 한없이 가냘펐다. 여자의 가늘지만 탄력있는 육감적인 몸과는 다르다. 힘을 주면 부서져 버릴 것 같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딱딱한 남자의 몸인 것이다. 이 아야세의 몸에서 어디가 가장 말랐고 어디가 가장 살집이 좋은지 가노는 그 모든것을 알고 있었다. "아야세의 엉덩이, 굉장히 부드럽군." 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안고 있는 아야세의 엉덩이를 가노는 커다란 손으로 가볍게 움켜잡았다. 은밀하게 숨어있는 점막의 입구를 손가락 끝으로 살짝 어루만지자 가느다란 허리가 튕겨오르는 듯이 떨려왔다. "가..가노씨... 이런 곳에서..."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손가락이 가노의 가슴을 밀쳐냈다. 상기한 아야세의 뺨을 내려다보면서 가노는 내심 싱긋 웃었다. 남자에게 강요 당해온 육체적인 경험이 이제부터 시작될 행위를 상상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말했잖아. 이 맨션안에서라면 어디서든 안아주겠다고. 네가 혼자 있을 때 언제든지 떠올릴 수 있도록. "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가노는 아야세의 하반신에서 잠옷을 끌어내렸다. "..아..." 속옷마저 빼앗겨 무방비하게 드러난 다리를 가노의 손이 원을 그리듯이 어루만졌다. 아야세는 잠옷자락을 당기며 가노의 시선으로부터 필사적으로 하반신을 숨기려했다. 그런 어린애같은 동작이 남자의 가학성을 더욱 자극한다는 것을 아야세는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싫...어..." 가노는 한손으로 아야세의 손목을 잡고 남은 한 손을 하반신으로 미끄러뜨렸다. 가노의 손가락이 무방비하게 드러나 있는 아야세의 그곳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응..." "옷을 걷어 올려. 네 몸이 보고 싶으니까." 숨을 삼키는 아야세의 귓가에 잔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가노는 고개를 저으며 도망치려는 아야세를 살짝 돌려세워서 식탁에 손을 짚는 형태로 몸을 지탱하게 했따. 절대적인 체격차에 의해 아야세는 결코 힘으로는 가노를 당해낼 수 없었다. 등뒤에서 끌어안자 가냘픈 몸이 겁에 질린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 "...아...으응...음..." 아직 젊은 아야세의 몸은 자극에 약하다. 게다가 요 한달간 가노에 의해 집요하게 쾌락에 순응할 것을 요구당해 온 몸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싫어...." '네 몸은 정말 귀엽구나." 가장 민감한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애무하면서 가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가노에게 안겨 있는 아야세의 몸은 매우 하얗고 아름다웠다. 잠옷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가슴의 핑크색 돌기를 애무하며 가노는 거실의 유리창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외부의 어둠을 차단하고 있는 천장에서 바닥까지 이어지는 유리창은 마치 커다란 거울처럼 하나로 얽혀 있는 두사람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남자의 애무를 참고 있는 아야세의 얼굴이 매끄러운 유리창위에 애처롭게 떠올랐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몸을 보기 위해 비스듬하게 허리를 굽힌 가노는 문득 지독한 충격에 사로잡혀 움직임을 멈췄다. 아야세의 가냘픈 몸을 안고 있는 자신의 커다란 체구. 잘 닦여진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순간 가노는 처음으로 숨을 삼켰다. 아야세와 가노의 키 차이는 머리 하나 이상. 유달리 체구가 큰 가노가 가냘픈 아야세를 안고 있는 모습은 지독히도 폭력적인 광경이었다. 자신의 팔안에서, 그리고 유리창 위에서 떨고 있는 아야세의 새하얀 몸. 인상이 더럽다는 소메야의 말이 또다시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확실히 유리창에 비친 가노의 얼굴은 날카롭고 빈틈이 없었다. 이래서야 작은 초식동물이 사나운 육식동물의 이빨아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광경과 흡사하지 않은가. 그것은 가노의 지배욕을 자극했지만 동시에 매우 씁쓸한 것이기도 했다. 이제서야 겨우 아야세가 항상 새파랗게 질려 있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노씨...저...저녁 식사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는 아야세의 귓가에서 가노는 작게 혀를 찼다. "나중에. 제기랄...너도 밥 좀 부지런히 챙겨 먹어라." 순간 아야세는 흠칫 숨을 삼켰다. 가노의 말투가 너무나도 난폭했던 탓에 책망받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자신의 한마디가 필요 이상으로 아야세를 몰아붙이고 있다는 사실에 더더욱 씁쓸함이 밀려왔다. "미안하다. 그런 얼굴 하지 마." 가노는 떨고 있는 아야세를 달래기 위해 부드럽게 속삭이며 미소지었다. 그러나 유리창에 비쳐있는 자신의 입술사이로 유달리 발달한 송곳니가 드러나는 것을 보고 가노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아..." 아야세가 겁에 질린 듯 몸을 긴장시켰다. 가노는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아야세의 몸에서 팔을 거둬들였다. 가노의 지탱을 잃은 아야세는 무너질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갑자기 가노의 속박이 느슨해진 것일까.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아야세를 가노는 씁쓸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이런 표정조차 험악한 인상을 준다는 것을 깨닫고 가노는 손등으로 초조하게 얼굴을 비볐다. "...먼저 목욕하고 올게. 그리고나서 함께 식사하자." 섹스는 그만두겠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가노의 말에 아야세의 눈동자에 서려있던 곤혹의 빛이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나서 조금 뒤늦게 안도와도 닮은 표정이 아야세의 얼굴에 번져갔다. 아야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어색한 동작으로 하반신을 가렸다.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야세의 목덜미에서 달콤한 요염함이 풍겼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가냘픈 몸을 으스러져라 끌어안고 은밀한 내부의 감촉을 마음껏 맛보고 싶다는 욕구가 또다시 갈증처럼 고개를 치켜들었다. 방안의 불빛을 반사하는 유리창에는 그런 굶주린 남자의 두 눈이 비쳐있었다. 정말로 아야세를 부숴버릴지도 모르는 자신의 탐욕스러움을 본 듯한 기분이 들어서 가노는 유리창으로부터 시선을 피했다. 겨우 느릿느릿 일어선 아야세를 남겨두고 방을 나가려던 가노는 문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야세를 뒤돌아보았다. "아야세 너, 혼자서 밥먹는게 싫으냐?" "...네?" 잠옷을 주워들고 있던 아야세가 깜짝 놀란듯한 눈동자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내일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돌아오도록 하지." 아야세는 한동안 눈을 크게 뜬 채 가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점심도 함께 먹을까?" 그런 아야세의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가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야세의 눈동자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나갔다. "네...!"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야세의 표정에 가노의 입가에는 겨우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씁쓸한 감정을 삼키면서도 미소를 지은 채 가노는 혼자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17 "제기랄 벌써 한시잖아." 손목시계를 바라보던 가노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제 아야세와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고 약속했지만 상담이 길어지는 바람에 예정 시간이 훨씬 넘어 있었다. 비록 일때문이라고는 해도 아야세를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따고 생각하면 가슴속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또 아무것도 먹지않고 쓸쓸하게 방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아야세를 상상하고 가노는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난폭하게 맨션의 문을 열고 구두를 벗어 던지려던 순간 가노는 현관에 놓여 있는 신발에 시선을 멈췄다. 화려한 여자용 신발을 신고 다닐만한 사람이라면 짐작가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소메야, 이 자식..."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던 가노는 안에서 들려오는 화사한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웃음소리는 오른쪽 복도 끝에 위치한 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밝고 시원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소메야인 것 같았다. 어지간히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지 소메야의 목소리에 맞춰 때때로 부드럽고 명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가슴속에 서늘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가노는 웃음소리에 끌려가듯이 구두를 벗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어라, 가노님. 빨리 오셨네요." 가노의 귀가를 눈치챈 소메야가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가노에게는 그런 옛 친구에게 눈을 돌릴만한 여유따위는 없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가죽 소파위에 앉아 너무 웃어서 흘러나온 눈물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닦고 있는 아야세의 모습뿐이었다. 즐거운 듯이 웃고 있는 ㅡ 행복해 보이는 상기해 있는 뺨. 그러나 가노의 귀가를 눈치챈 순간 아야세는 당황해하며 그런 웃음을 거둬들었다. "어서오세요, 가노씨." 희미한 웃음의 여운이 남아있는 목소리가 당홍감을 머금은 채 가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럼 가노님도 돌아왔겠다, 난 이만 가봐야겠네." 소메야가 소파위에서 핸드백을 집어들며 몸을 일으켰다. 아야세도 소메야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해요, 오랫동안 잡고 있어서." "괜찮아. 나야말로 손수건까지 빨게 해서 정말로 미안해." 소메야는 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을 가리키며 생긋 웃었다. 지난번 아야세가 가노의 사무실에서 주웠던 손수건은 역시 소메야의 것이었던 모양이다. 우두커니 복도에 서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는 가노의 옆을 스쳐지나가며 소메야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졌다. "나중에 또 만나, 아야세. 오늘은 정말 즐거웠어." 소메야는 생글거리며 손을 흔들며 두꺼운 문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화사한 소메야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실내는 급히 침묵에 감싸였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가노씨. 준비는 다 됐으니까 금방 밥을 차려드릴께요." 아야세는 문을 잠그며 복도에 서 있는 가노를 돌아보았다. 현관을 가득 채운 하얀 빛속에서 아야세는 작게 미소짓고 있었다. "오늘 점심은..." 즐거운 듯이 말하는 아야세의 팔을 가노의 커다란 손이 힘껏 움켜잡았다. 깜짝 놀란 아야세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가노는 가냘픈 몸을 현관문에 밀어붙이고 있었다. "웃..." 아픔으로 크게 열린 아야세의 눈동자가 가노를 올려다보았다. "가...가노씨...?" 느닷없는 가노의 거동에 놀라고 있는 아야세의 옆 얼굴을 현관 오른쪽에 걸린 거울이 비추고 있었다.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거울속 칼날같이 예리하고 험악한 눈빛을 한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아파요..." 아야세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잡혀있는 팔의 아픔을 호소했다. 단단한 근육으로 뒤덮힌 남자의 몸 아래에 눌려 있는 아야세의 모습은 너무나도 애처로웠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이미 폭주하기 시작한 가노의 분노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단단한 남자의 주먹이 용서없이 아야세를 향해 날아왔다. "아앗..."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거울 속의 가노가 무참하게 부서져 내렸다. 거미줄처럼 금이 간 거울속에 비쳐있는 가노와 아야세의 모습은 매우 일그러져 있었다. "...아..." 싸늘하게 얼어붙은 아야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웃음의 파편조차 없었다. 사라져 버린 웃음도 웃음소리도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거울의 파편에 짤려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한 손으로 가노는 아야세의 목덜미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시...." "그렇게 비장한 얼굴 하지 마." 내뱉듯이 말하는 가노의 입가가 금이 간 거울속에서 싱긋 치켜 올라갔다. 뜨거운 숨소리가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오후의 밝은 햇살과는 어울리지 않게 침실은 괴로운 듯한 신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가노의 두 눈이 무릎을 꿇고 있는 아야세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으음...아아..." 남자의 쾌락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아야세의 입에서 음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발 제대로 좀 해봐, 계속 가만히 있으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다구." 가노가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질책하자 아야세는 괴로운 듯이 숨을 삼켰다. 몇번이나 가르쳐줬건만 아야세의 움직임에는 아직도 어색함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아야세의 모습에 가노는 쓰디 쓴 표정을 지으며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앗..." 가노는 강요하듯 아야세의 머리를 더욱 힘껏 누르며 말했다. "제대로 하지 못해?" "...어째서... 이런..." 아야세의 입에서 가느다랗게 흘러나온 거절의 목소리에 가노는 싱긋 웃으며 대꾸한다. "싫다 이거냐?" 잔혹함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 남자의 눈빛에 아야세의 몸이 흠칫 떨렸다. 가노는 천천히 손을 뻗어서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아야세의 하반신을 어루만졌다. "아...가..가노씨..." 아야세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직 앳된 느낌이 남아있는 아야세는 가노의 집요한 애무에 의해 달콤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네가 만족할 때까지 해 줬잖아." 가노는 거칠게 움직이며 아야세의 귓볼을 깨물었다. "싫어...더 이상은 말하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육체는 너무나도 탐욕스러워서 가노는 부득부들 떨고 있는 아야세의 허리를 난폭하게 침대위로 끌어올렸다. "이 몸을 산 건 바로 나야. 그런데 혼자만 실컷 즐기다니 넌 부끄럽지도 않은 거냐?" 잔인함을 머금은 웃음소리에 아야세의 뺨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때로는 돈을 받은 만큼 일해 보는 게 어떨까, 아야세." 가노는 아야세를 침대위로 끌어올리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 "무..." 가노의 신랄한 매도에 아야세의 눈동자는 절망적으로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아야세는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울지 마." 가노의 손이 타액과 체액으로 더럽혀진 아야세의 턱을 움켜잡았다. 커다랗게 열린 아야세의 눈동자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 육체를 마음껏 유린하는 것도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도 가노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지금 이 작고 가냘픈 녀석을 속박하고 지배하는 것은 다름아닌 가노였건만 아야세의 내면에는 그가 결코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씁쓸함이 분노가 되어 가슴을 태웠다. "웃어." 낮은 목소리가 아야세의 귓가를 때렸다. "웃으란 말이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아야세를 향해, 가노는 흉폭한 심정에 몸을 맡긴 채 미친 듯이 고함을 쳤다. 공기가 떨릴 정도의 노성에 아야세의 몸이 흠칫 떨렸다. 겁에 질린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시선을 피하는 아야세의 모습에, 가노의 분노는 단숨에 폭발해 버렸다. "...아앗..." 가노는 도망치려고 하는 아야세의 무릎을 잡고 가냘픈 다리를 무지막지하게 들어올렸다. "..싫어.. 가노씨...!" 폐를 압박당하는 고통에, 아야세의 비명이 괴로운 듯이 일그러졌다. "...아... 우웃...." 온 몸이 찢겨나가는 듯한 아픔에, 아야세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가노는 그 비통한 비명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아야세의 몸을 통해 느껴지는 쾌감을 맛보았다. 어떻게 하면 이 비통한 목소리에 음란한 쾌감의 빛이 섞일 것인지, 가노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아... 아아......." 가노는 잔인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움직였다. "...아앗...." 깊숙한 내부를 자극하는 가노의 움직임에, 아야세가 움찔 쾌감을 나타내며 몸을 젖혔다. "엉망이로군, 날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그렇게 기분이 좋은거냐." "제발... 그... 만...." 아야세의 입에서는 끊길 듯 말 듯한 애원이 계속 흘러 나왔다. "....가....노...." 아야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린애처럼 눈물을 흘리는 아야세를 내려다 보며, 가노는 날카롭게 혀를 찼다. "후.... 아아...." 괴로운 듯한 울음소리에 달콤함이 섞이기 시작했다. 무구한 아야세의 몸에 깃드는 일그러진 쾌락에 가노는 야생동물같은 동작으로 메마른 입술을 핥았다. "50만엔 어치만큼 날 즐겁게 해 봐, 아야세." 되풀이해서 흘러나오는 애원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가노는 이미 저항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허리를 안은 채 내뱉듯이 낮게 말했다.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에서 단조로운 호출음이 흘러나왔다. 몇번을 걸어도 연결되지 않는 전화에 초조함이 느껴져 가노는 눈썹을 찡그리며 작게 혀를 찼다. 저녁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보슬비가 아스팔트위를 검게 적셨다.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춘 가노는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하며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몇번이나 맨션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야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낮에 잔인한 행위를 강요한 가노에 대해 무시작전으로 나가기를 결심한 것일까. 확실히 아야세는 얌전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의외로 고집스러운 일면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났다고는 해도 일부러 가노를 무시할 수 있을만한 성격은 아니다. 그렇다면 너무 난폭하게 다룬 나머지 일어날 힘도 없어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은 아닐까. "제기랄..." 변하지 않는 신호에 초조함을 느끼며 가노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질투에 미쳐서 난폭하게 아야세의 몸을 안은 후 가노는 식사도 하지 않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오후부터는 큰 융자처와의 상담이나 집금 등 외출을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대로 집에 돌아간다 해도 어제와 똑같은 시간이 되어버릴 것이다. 옷을 추스리는 가노의 뒤에서 더러워진 몸을 닦지도 못하고 힘없이 누워 있던 아야세의 우는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대로 일어날 기력도 없이 넓은 방에 홀로 누워 있을 아야세를 생각하면 혀끝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누구를 상처입혀도 이렇게 뒷맛이 떨떠름한 적은 없었건만. "울고 싶은건 바로 나라구." 가노는 나지막하게 한탄을 내뱉었다. 자제를 할 수 없는 마음만큼 성가신 것은 없다. 아야세라는 인간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는 이상 그를 향해 기울어 가는 자신의 감정마저 주체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겨우 신호가 변한 순간 가노는 악셀을 힘껏 밟으며 착신을 알리는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나다." 액정화면에 표시된 자신이 경영하는 사무실의 이름을 확인하고 가노는 짧게 입을 열었다. "사장님, 실은..." 드물에 동요의 기색이 느껴지는 부하직원의 목소리에 가노는 자칫하면 힘을 조절하지 않고 엑셀을 밟을 뻔 했다. "아야세가 방에 없다고?"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큰 목소리가 넓은 차안에 울려 퍼졌다. 속도를 올린 자동차가 난폭하게 앞차를 추월하고 달려나갔다. "...죄송합니다. 방범카메라에 외출하는 아야세님의 모습이 찍혀 있었습니다만..." 사무실측에도 일손이 모자라서 아야세의 외출을 막을 수 없었다고 쿠바는 수화기를 통해 사과했다. "나간게 몇시쯤이지?" 가노는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여섯시쯤입니다. 사장님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 봤지만 연락이 되지 않아서 일단 메일을 보내놓았습니다만, 연락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또다시 앞차를 추월하며 가노는 씁쓸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상담중에는 거의 핸드폰의 전원을 꺼놓고 있다. 노트북을 들고 다니긴 하지만 오늘은 확인도 하지 않고 차를 나와 버렸던 것이다. "아야세가 방으로 돌아온 기색은 없단 말이지." 되돌아올 대답을 뻔히 알면서도 묻는 자신이 짜증스러웠다. "...네. 하지만 아야세님이 갈만한 곳은 예전에 살던 아파트 외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그런 말을 듣지 않더라도 친한 친구도 친척도 없는 아야세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아파트정도 밖에 없다. "나는 이대로 아파트에 가보겠다. 자네도 일이 정리 되는 대로 돌아가도록 해." 가노는 낮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린후 전화를 끊었다. 사무실의 일손이 부족했다면 부하직원들에게 아야세가 도망친 책임을 묻는 것은 말도 안되는 처사다. 감정적으로는 쿠바를 질책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아야세가 도망쳤다는 사실에 동요한 나머지 그럴 정신마저 없었다. 설마 아야세가 자신의 의지로 맨션을 나갈 줄이야. 어째서 라는 의문은 떠오르지 않았다. 짚히는 구석은 얼마든지 있다. 애초에 아야세가 자신의 곁에서 도망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은 언제나 가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제기랄." 놀라움이 가셔감에 따라 뭐라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가노는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조수석에 집어던졌다. 가노는 아야세에게 맨션과 아파트 양쪽의 열쇠를 주었다. 그것은 그에게 외출을 허락하고 아파트에 드나드는 것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열쇠를 건네서 속박이 느슨해진 듯한 안심을 줌으로써 거꾸로 아야세의 무단외출을 방지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아야세는 한쪽에서는 열리지 않는 자물쇠에 의해 맨션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맨션에의 출입은 모두 방범카메라로 감시하고 있지만 방을 나오는것 자체는 간단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노의 명령을 어기고 외출하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야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가노는 오늘 낮처럼 잔혹한 육체관계를 강요할 때마다 도망치면 이보다 더 심한 고통을 줄 거라고 아야세를 줄곧 협박해 왔다. 그런 가노의 잔인함을 잘 알고 있는 아야세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도망쳤던 것이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자신의 옆 얼굴이 운전석 창문에 비쳤다. 그 모습은 확실히 소메야가 말한대로 온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바로잡을 생각은 없었다. 가노는 액셀을 더욱 힘껏 밟으며 난폭한 움직임으로 핸들을 꺽었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18 습기를 머금은 밤공기가 몸을 감싸왔다. 낡은 아파트와 낮은 단독 주택들이 정적속에서 몸을 맞대고 있었다. 상점가에서 벗어나 있는 탓일까, 밤의 어둠속에 잠긴 거리는 정적에 감싸여 있었다. 소리없이 내리는 빗속, 가노는 우산도 들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이미 심야에 가까운 시각이었기 때문에, 아파트의 창문들은 대부분 불이 꺼져있었다. 가노는 거친 발걸음으로 2층으로 연결되는 낡은 계단을 올랐다. 페인트칠이 벗겨져 나간 낡은 철제 계단이 가노가 밟을 때마다 무거운 비명을 질렀다. 난폭한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노는 제일 서쪽에 위치한 방문에 열쇠를 곶았다. 얇은 나무문은 가노가 힘껏 걷어차면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처럼 약해 보였다. 실제로 걷어차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가노는 난폭하게 문을 열었다. "아야세!" 어둠에 잠긴 좁은 실재에는 사람의 기척따윈 없었다. 오랫동안 환기를 시키지 않은 탓에 모여 있던 열기가 불쾌하게 가노를 감쌌다. "아야세, 있으면 대답해." 가노는 손을 뻗어 형광등 스위치를 눌렀다. 아야세가 가노의 맨션으로 옮겨온 지 벌써 한달이 지났지만, 아파트의 전기와 수도는 아직 끊겨 있지 않다. 아파트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가노는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일주일에 한 번은 부하직원또는 아야세를 데리고 관리를 하러 방문하고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비워뒀음에도 불구하고 방안은 청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시 돌아올 사람을 잃어버린 방안에 쓸쓸한 정적이 감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책상위와 침대의 상태를 봐서도 아야세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도 안돼...."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만큼 쓸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몇번이나 방안을 둘러봐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숨을 죽인채 옷장안에 숨어있지 않은 것도 명백했다. 아파트에 돌아와 있을 것을 확신하고 있던 만큼, 아야세의 부재는 가노를 더욱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니, 초조함은 오히려 치밀어 오르는 불안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텅빈 아파트를 둘러본 순간, 처음으로 가노는 아야세가 자신으로부터 도망쳤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아파트 외에 가노는 아야세가 갈만한 곳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일찍 양친을 잃은 아야세는 줄곧 할머니의 손에 자랐으며, 그 할머니도 3년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아야세에게는 이시이라는 사촌형이 있었지만, 그를 찾아갔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가까운 사람을 잃은 슬픔에 겁장이가 되어 버린 탓일까, 아야세는 학교에서도 친구는 많지만 특정한 누군가와 친밀하게 지내는것은 서툰 녀석이었다. 그래도 대학이나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를 의지하고 맨션을 나간 것은 아닐까. 가능성은 여러가지였지만 가노는 어느 하나 이렇다 할 확신을 지닐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은 아야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또는 자산에게 필요한 부분외에는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가노는 물고 있던 담배를 힘껏 깨물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노는 여자에 부자유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0대 중반부터 이미 집에 있는 것보다는 여자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는 일이 많은 생활을 해 왔다. 어떤 여자도 가노의 발밑에는 기꺼이 몸을 던졌다. 가노 자신은 그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 왓다. 돈도 외모도 체력도, 자신에게는 여자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자부심이라기 보다, 그것은 오히려 단순한 사실이었다. 선택할 권리는 언제나 가노에게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여자. 풍만한 육체를 지닌 여자. 그리고 돌봐줄 필요가 없는 여자. 가노는 이기적인 자신의 욕망을 채워 줄 여자를 교만하게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 적도 없을 뿐더러, 하물며 상대를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 따위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아야세를 정말로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슴속을 무겁게 짓눌러 왔다. -두렵다-. 그 말을 떠올린 순간 가노는 불쾌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요 몇 년간, 무언가를 두렵다고 생각하는 감정을 맛 본 적이 있던가. 오늘 낮에 느꼈던 미친 듯한 질투조차 가노에게는 희귀한 경험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질투조차 아까운 여장 남자다. 소메야라는 이름을 떠올리기만 해도 울화가 치밀어 올라 눈살을 찌푸리던 가노는, 문득 가슴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핏기를 잃었다. 낮에 소메야와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던 아야세의 눈동자가 가슴속에 되살아났다.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현실이 되어 가노를 괴롭혔다. 가노는 여장 취미가 있는 남자따위는 인간의 범주에 집어넣지 않고 있다. 따라서 소메야는 아야세에게 있어서 가장 안전한 인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소메야가 맨션을 드나드는 것을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 소메야가 말했던 대로, 언제 어느 때 어떤 사고가 벌어질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동성의 육체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던 자신조차, 아야세라는 존재에게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가노의 발걸음이 튕겨나가 드 현관을 향했다. 하지만 아파트를 뛰쳐나오기 직전, 가노는 자신의 억측이 너무나도 편협하다는ㅡ 사실을 깨닫고 발걸음을 멈췄다. 만약 자신의 생각이 사실이라면 소메야를 쉽사리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야세를 데리고 갔다가는 무사하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소메야는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가노는 초조함을 억누르며 양복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떨리는 손가락으로 소메야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단조로운 호출음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반응은 없었다. 일하는 중일까 아니면 역시 아야세와 도망친 것일까. 분노에 사로잡혀 전화를 끊으려 했을 때, 문득 호출음이 끊겼다. "여보세요. 일하는 중에 번호도 알리지 않고 전화를 거는 무례한 사람은 대체 누굴까나." 빈정거림이 담긴 요염한 목소리가 들려왓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소음은 주방의 것이라고 추측되는 웅성거림. "나야. 소메야, 아야세 그고곳에 있어?" "....갑자기 무슨 소리죠? 아야세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잠시 침묵이 흐른 끝에,??소메야가 신중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몇번이나 말했잖아. 그 기분나쁜 말투좀 집어치워." 짧게 타들어간 담배를 싱크대에 버린 다음, 가노는 방안을 어슬렁 거리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좁은 아파트는 천장이 매우 낮아서, 부엌에서 방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허리를 구부리지 않으면 안됐다. "어머나, 아빠랑 똑같은 소릴 하네. 그보다 설마 아야세가 없어졌나요?" 소메야의 진지한 목소리에 가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합법적인 경매에 붙여진 것을 시작으로, 아야세는 그 입장이나 미모대문에 과거 몇번이나 위험한 일을 당한 적이 없었다. 그런 사건들을 떠올린 것일까, 소메야의 목소리에는 진심어린 걱정의 빛이 담겨 있었다. 직감적으로 소메야가 아야세를 배돌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가노는 안도와 동시에 낙담을 느꼈다. "... 저녁에 맨션을 나간후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더곤. 소메야 너 짐작 가는 곳 없어?" 소메야가 함께 있지 않다면, 가노에게는 점점 더 아야세가 있는 곳을 알아낼 방법이 없다. 이 여장 남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자신이 귀여워하고 있는 소년이 있는 곳조차 알아낼 수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가슴속이 불쾌해졌다. 새로 담배를 꺼내 물긴 했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한심한 기분을 지워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혹시 아야세가 스스로 맨션을 나간건가요? 제법이네, 그애." "지금이 감탄이나 하고 있을 때냐?" "화내지 말아요. 어차피 가노님이 아야세가 도망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짓을 한 거죠? 틀림없이 아파트로 돌아갔을테니까 더 이상 화내지 말고 데리러 가줘요. 그애의 성격으로 볼때 혼자 있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할 테니까요." "........아파트에는 돌아오지 않았어." 소메야는 의외라는 듯이 숨을 삼키며 말했다. "그건 놀랍네..." "짐작가는 곳이 없으면 끊는다. 그럼." "가노." 문득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가노는 전화기를 끊으려던 손을 멈췄다. 소메야가 '가노님'이라는 장난스러운 경칭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렇게 책망하지 말아줘. 가노가 모르는 아야세의 일을 내가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 조용하게 묻는 소메야의 목소리에서는 평소의 여성적인 느낌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운 소메야 본래의 목소리에, 가노는 복잡한 기분으로 한숨을 쉬었다. "소메야, 너 오늘 아야세와 뭔가 얘길 했었지. 그때 그 녀석이 뭔가..." "오늘? 아아.... 별다른 애긴 안했어. 아야세는 자신에 대해서 그다지 얘기 하지 않는 편이니까. 그런건 나보다 가노,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나지막하게 묻는 소메야의 목소리에 가노는 씁쓸한 심정을 느꼈다. 당연한 일이지만, 때때로 찾아올 뿐인 소메야와 함께 살고 있는 가노는 아야세와 함께 하는 시간의 길이가 다르다.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소메야와 자신 중 어느 쪽이 아야세와 친밀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막혀버리는 것이다. "가노 너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아야세가 찾아갈 만한 가게라던가, 장소라던가....." "시끄러워! 그걸 알면 내가....." 수화기를 통해 노성을 지르던 가노는 초조함으로 인해 난폭하게 커튼을 열어 젖혔다. 어두운 유리창을 두드리는 가느다란 빗줄기를 바라보던 가노가 문득 숨을 삼켰다. "....가노?" 가노가 느닷없이 입을 다물어 버린것이 이상했는지, 수화기를 통해 의아해하는 듯한 소메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물음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가노는 멍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든 손을 내렸다. 아까보다도 거세진 빗줄기가 소리없이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이 창문을 통해 지금처럼 빗줄기를 바라보던 기억이 가노의 가슴속에 되살아났다. 습기찬 여름의 장마비와는 다르다. 뼈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진눈깨비가 섞인 겨울비. 3년전 왼쪽 옆구리에 입은, 이제는 아플리가 없는 상처자국이 희미하게 저려왔다. 아버지의 죽음을 초래한 치졸한 항쟁은 지금도 가노의 옆구리에 생생한 상처자국을 남기고 있다. 상처의 깊이는 어쟀든 돌아갈 곳도 없이 쫓겨나서 출혈과 추위에 몽롱해져 있던 가노를 도와준 것은 한 사람의 소년이었다. 차가워진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나는 이대로 죽는 것일까. 기묘하게 싸늘한 죽음에의 감회가 옆구리에 남아 있는 상처와 함께 가노의 가슴을 덮쳐 왔었다. "가노?" 가노는 아직도 작게 외치고 있는 핸드폰을 바닥위에 집어던진후 문을 박차고 아파트를 뛰쳐 나왔다. 축축한 대기와 가느다란 빗줄기가 얼굴을 때렸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전력으로 아스팔트위를 질주했다. 변화가 적은 주택가는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도 가노의 바램대로 눈에 각인되어 있던 광경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가노는 희미한 기억에 의지하며 좁은 골목길을 하나 둘 꺾어 들어갔다. 분명히 본 기억이 있는 커다란 벽돌담이 눈에 들어온 순간 가노는 겨우 발을 멈췄다. 3년전 겨울, 가노가 처음으로 아야세에게 도움을 받았던 그 장소였다. 짧은 거리라고는 해도 전력질주를 한 탓에 지독하게 숨이 가빠왔다. 귓가를 메우고 있는 것은 서서히 거세지는 빗소리와 자신의 숨소리뿐. 가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를 맞으며 서 있는 낡은 벽돌담과 썩은 달걀색을 한 맨션의 외벽. 그러나 그곳에 아야세의 모습은 없었다. 차츰 거세지는 빗줄기가 양복을 적시는 것도 아랑곳 없이 가노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제기랄..." 메마른 자조가 흘러나왔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아야세가 이곳에 있을리가 없었다. 3년전 이곳에서 자신과 처음 만났던 것을 아야세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노를 구해줬던 그날 밤, 아야세는 지독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고력과 기억력, 그리고 판단력이 둔해져 있었기 때문에 아야세는 칼에 찔린 남자를 방안에 들였던 것이다. 열에 들뜬 아야세가 본 것, 그것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것도 모르고 자신을 향해 뻗어 온 상냥한 팔에 매료당한 것은 가노의 쪽이다. 침식을 잊고 일에 몰두해 온 3년간, 가노의 뇌리에는 항상 그 겨울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전부 혼자만의 헛된 환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도, 가노는 그 추억을 버릴 수가 없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가노는 무거운 구름이 뒤덮힌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야세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 어쨌든 대학의 친구들을 비롯한 아야세의 교우관계를 철저하게 조사해 보자. 울면서 괴로워하건 말건,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뼈에 사무치도록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있을 여유따윈 없다. 물이 고이기 시작한 아스팔트 위에서 가노는 차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흠뻑 젖어버린 구두가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물웅덩이를 밟았다. 그 물소리에 뭔가 작은 소음이 겹치는 듯한 기분이 들어 가노는 발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봤지만 역시 어두운 밤거리는 조용하게 비에 젖어 있을 뿐이었다. 길을 오가는 통행인들조차 없었다. 가노는 기분탓이었나 하고 눈썹을 찡그리며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때였다. 작은 소음은 이번에는 뚜렷하게 가노의 귀에 와 닿았다. 괴로운 듯이 되풀이되는 기침소리. 빗소리를 뚫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에 가노는 튕겨나가듯이 아스팔트를 박차고 있었다. 달걀색을 한 맨션 외벽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사람의 그림자라는 것은 곧 알 수 있었다. 마침 가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맨션의 처마밑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그림자. 맨션 출입구를 피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그늘에 그는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아야세'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난폭하게 물웅덩이를 박차는 구두발자국 소리에 그림자는 작게 움직였다. 무릎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든 소년의 눈동자가 거리위에 서 있는 가노의 모습을 발견했다. 처마밑에 앉아 있었으면서도 아야세의 얼굴은 용서없이 쏟아지는 비에 젖어 창백해져 있었다. 투명한 눈동자가 서서히 커다랗게 열렸다. 놀라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뜬 채 아야세는 비틀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보는 듯한 아야세의 눈동자에 곤혹의 빛이 번져갔다. 살짝 열리려 하던 아야세의 입술이 아무말 없이 다물어지는 것을 본 순간 가노는 재빨리 발을 내디뎌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어깨를 잡았다. "도망치지 마!" 가노의 입에서 튀어나온 격렬한 노성에 아야세는 흠칫 하며 가냘픈 몸을 긴장시켰다. 커다란 빗방울이 아야세의 뺨을, 그리고 가노의 뺨을 때렸다. "....도망치지 말아 줘...!" 피를 토하는 듯한 심정으로 쥐어짠 그 목소리는 애원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가노의 마음속을 점령하고 있던 사고 따위는 눈깜짝할 사이에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가노씨..." 가느다란, 그러나 또렷하게 가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ㅡ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가노는 가냘픈 몸을 힘껏 끌어안고 있었다. 팔안에 느껴지는 아야세의 체온에 달콤한 고통이 가노의 가슴을 스쳐지나갔다. 지금까지 몇번이나 안아왔던 사랑스러운 몸은 가슴이 아플만큼 가냘펐다. 힘을 주면 부러져 버리지는 않을까 싶은 그 가냘픔이, 지금처럼 무섭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아야세..." 힘껏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목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 응답하듯이 아야세는 머뭇거리며 가노의 양복을 움켜잡았다. 힘껏 끌어안지 않으면 잃어버리고 말 것 같은 불안이 아야세의 마음속에도 존재하는 것일까. 마주 안고 있는 서로의 체온이 비를 맞아 차가워진 몸을 따뜻하게 가득 채웠다. "가노씨, 가노씨..." 되풀이해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뜨거운 눈물에 젖어 있었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19 얇은 목재문을 닫은 것 뿐인데도 이상할만큼 빗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환하게 불을 밝혀둔 실내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가..." 낮게 잠겨있는 아야세의 목소리를 기분좋게 느끼면서 가노는 성급한 움직임으로 가냘픈 몸을 안았다. 모자가 달린 아야세의 셔츠는 비를 흠뻑 흡수한 탓에 꽤나 무거워져 있었다. 얇은 천을 통해 가느다란 어깨뼈가 드러나 보였다. "아야세..." 뜨거운 속삭임. 가노는 아야세의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으응..." 핏기를 잃은 차가운 입술이 기분좋게 느껴졌다. 가노는 몇번이나 몇번이나 부드러운 입술을 핥았다. "으음..." 아야세의 입술에서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왔다. 가노는 혀를 집어넣어 입 안쪽을 어루만졌다. 촉촉한 입안은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하고 따스했다. 뒤에서 끌어안긴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입술을 겹치고 있는 아야세의 목이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가노는 그 가냘픈 목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으응...아..." 가노의 손아래서 아야세가 고양이처럼 목을 울렸다. "아야세." 낮은 목소리로 몇번이나 이름을 부르며 가노는 각도를 바꿔 집요하게 아야세의 입안을 핥았다. "...아...하아..." 얽혀들어가는 혀가 부끄러운 것일가, 아야세가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가냘픈 아야세의 몸이 지금 이 팔안에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충동이 가슴속에 밀려왔다. 가노는 성급한 손놀림으로 아야세의 셔츠를 걷어올리고 비에 젖어 있는 피부를 직접 어루만졌다. "...아..." 커다란 손으로 가슴을 애무하자 아야세의 몸이 민감하게 반응을 보였다.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왔다. 상기한 아야세의 뺨에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던 가노는 그때 처음으로 아야세의 몸의 변화를 깨닫고 움직임을 멈췄다. "아야세, 너..." 가노는 눈을 크게 뜨며 가슴에 안겨 있던 아야세를 바라보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이마를 대보자 아야세는 당황하면서도 가노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굉장한 열이잖아!" 가노의 목소리는 놀라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 소동 때문에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아야세는 그다지 튼튼한 편이 못된다. 수면부족이나 다소의 무리를 계속하면 그것만으로도 미열을 내는 것이다. 자칫하면 자재심을 잃고 아야세를 안을 뻔 했던 것을 생각하니 온몸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열이 오르기 시작한 것일까, 아야세의 몸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너 언제부터 그곳에 앉아있었던 거냐?" 가노가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아야세의 구두를 벗기며 물었다. "언제부터...냐면..." 물을 흡수해서 무거워진 구두를 간신히 자력으로 벗으며 아야세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대체 어쩌자고 그런 곳에 있었던 거야! 얌전히 아파트에 있었으면 이렇게 젖지 않고 끝났을 것을..." 애초에 아야세가 맨션에서 뛰쳐나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 가노는 새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한심하게도 소메야를 질투해서 아야세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은 가노 자신이 아니던가. "...왠지 아파트로 돌아오면 가노씨에게..." "나에게...?" 가노는 커다란 손으로 말꼬리를 흐리는 아야세의 어깨를 안았다. 몸집이 작은 아야세와 가노는 결정적으로 시선의 높이가 다르기 때문에 가노는 허리를 굽혀서 아야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미안해요..." 결국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숙여버리는 아야세를 바라보며 가노는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하자." 가노는 부엌 옆에 있는 세면실에서 수건을 꺼내 아야세에게 던졌다. 그리고는 놀라고 있는 아야세의 몸에서 재빨리 옷을 벗겨냈다. "가, 가노씨. 맨션에는..." "내일 돌아가면 돼. 감기가 지독해지기 전에 빨리 옷부터 갈아입자." 가노는 자신도 젖은 옷을 벗으면서 아야세를 향해 말했다. 아야세의 눈동자에 살며시 따스한 빛이 번졌다. 가노는 아야세를 안아 올려 침대위에 눕혔다. 거절하는 것을 무시하고 아야세가 옷갈아 입는 것을 도와준후, 가노는 자신도 간단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옷장을 열고 아야세의 옷을 찾는 것은 간단했지만 가노가 입을 만한 옷은 쉽사리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서랍속을 전부 뒤져봐도 가노가 입을 수 있는 것은 하프 팬츠 달랑 하나뿐이었다.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요?" 아야세는 작게 기침을 하며 거의 반라에 가까운 가노를 걱정했다. 하지만 가노의 몸에 맞는 옷이 없는 이상 오늘밤은 이 차림으로 자는 수밖에 없었다. 비가 내린다고는 해도 아직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계절이다. 워낙에 튼튼한 가노가 이 정도에 감기에 걸릴 리는 없지 않은가. 가노는 침대위에 작게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는 아야세의 옆에 걸터앉았다. 가노의 맨션에 있는 침대와는 달리 아야세가 누워있는 침대는 작고 좁았다. 가노정도의 체격이라면 마음껏 몸을 뻗을 수도 없는 크기이다. 그래도 아야세는 한순간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긴 했어도 가노를 거절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좁아서.." 막무가내로 옆에 누운 가노에게 아야세가 살짝 몸을 기댔다. "...그래..." 가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아야세의 몸을 살짝 끌어안았다. 피부에 와 닿는 아야세의 몸은 역시 뜨거웠다. "불편하지 않아?" 가노의 물음에 아야세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비 때문에 습도는 불쾌하게 높았지만 아야세의 몸을 위해서라도 에어컨을 틀 수는 없었다. 형광등을 끈 실내에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또다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등을 어루만지며 아야세가 잠이 드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가노는 문득 팔안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에 눈을 떴다. "...미안해요. 내가 맨션을 나온 것은 가노씨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가 아니었어요..." 가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아야세가 작게 속삭였다. "내 스스로 확실하게 생각하고 싶었으니까..."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가노는 아야세의 가냘픈 등을 어루만졌다. "생각하다니, 뭘?" 낮고 허스키한 가노의 물음에 아야세는 살짝 몸을 긴장시켰다. "...나 언제나 가노씨를 화나게 하기만 하니까... 오늘도 가노씨는 그렇게 화가 나 있었는데... 나는..." 자신의 어떤 행동이 그렇게나 가노의 분노를 샀던 것일까. 아야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부당한 분노의 희생양이 된 분노도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 순수한 녀석은 그렇게까지 가노를 화나게 만든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조차 없는 자신의 무신경함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넌 아무것도 ... 잘못한 게 없어." 가노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아야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모든 것은 가노의 말도 안되는 질투에 의해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그래서 나, 결국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맨션을..." 아야세는 어린애처럼 주먹을 꼬옥 쥐며 말을 이었다. "밖으로 나왔더니 갑자기 불안해져서... 이곳 외에는 갈 곳도 없고... 하지만 이곳에 돌아오는 건... 가노씨로부터 도망친 것 같아서...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알 수 없었어요..." 모순과 고통으로 가득 찬 마음속을 서툴게 설명하는 아야세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가노는 아야세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렇다고 그런 곳에서..." 9월이라고는 해도 몇시간이나 비를 맞으며 웅크리고 있었을 아야세의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아파왔다. 나무라는 듯한 빛이 담긴 목소리에 아야세는 가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사과했다. "미안해요...하지만..." 뜨거운 숨결이 섞인 목소리가 가노의 가슴에 부드럽게 와 닿았다. "...다행이예요... 가노씨가 나를 발견해 줘서..." 놀라움에 할 말을 잃은 가노를 아야세의 눈동자가 머뭇거리며 올려다보았다. 열 때문에 멍해진 두 눈이 가노의 얼굴을 비쳤다. "있죠, 가노씨와 내가 처음 만났던 곳... 그곳이었죠...?" 어린애 같은 목소리로 던진 아야세의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노는 한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큰 동요를 느끼고 있는지조차 가노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아...그래..."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서 대답하자 아야세가 생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얼굴 전체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아야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깊은 잠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한 아야세를 가노는 얼굴을 바싹 대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히 울려 퍼지는 평온한 숨소리를 들으며 가노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당해낼 수가 없군." 나지막한 자조의 웃음이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웃음은 그다지 씁쓸한 것은 아니었다. 깊은 잠에 빠진 아야세를 내려다보는 그의 두 눈에는 부드러운 행복감이 있었다. 더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아야세의 몸을 고쳐눕혀준 다음 가노는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는 잠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곤하게 잠들어 있는 아야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몸을 뒤척일 수 조차 없는 좁은 침대에서 가노는 기분좋은 잠에 몸을 맡겼다. 돈으로는 살 수 없어 - 20 (완결) 창문을 통해 밝은 아침 햇살이 새어들어왔다. 어젯밤에 내리던 비도 완전히 멎어서 활짝 열려진 창문으로는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이미 하루를 시작하고 있는 옆집의 소음이 얇은 벽을 통해 들려왔다. "...으응..." 옆에 누워있던 아야세가 작게 몸을 뒤척였다. 침대머리에 몸을 기대고 있던 가노는 무릎위에 올려놓은 컴퓨터 화면에서 시선을 들었다. "가노씨..." 가노의 허리에 이마를 묻고 있던 아야세가 반쯤 잠이 깨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가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아야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깼어?" 아야세는 어린애처럼 눈을 부비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오랫동안 가노의 맨션에서 살고 있었던 탓에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아파트안의 풍경에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가노는 그런 아야세를 바라보며 커다란 손으로 머리카락을 천천히 어루만져 주었다. "일하시는 건가요?" 아야세가 가노의 무릎위에 놓여있는 노트북을 보며 물었다. "응, 간단한 확인만 하면 되니까 곧 끝날 거야." "...이 노트북 어제도 들고 있었나요? 몰랐어요." 아야세가 감탄한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가노는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아까 차에 놓아 두었던걸 가져온거야." "차? 그럼 바깥에 나갔다 온건가요? 옷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아야세를 바라보며 가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하프 팬츠를 가리켰다. "이걸 입고 나갔지." 가노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어젯밤 아야세가 빌려준 하프팬츠 한 장뿐이었다. 확실히 맨션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사무실이 문을 여는 것을 기다렸다가 부하직원에게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 달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잠깐 바깥에 나갔다 오는것 정도라면 이 계절에는 아직 하프 팬츠 한 장만으로도 충분하다. 또다시 컴퓨터로 눈을 돌린 가노는 옆에 누워 있는 아야세의 어깨가 작게 떨리고 있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야세는 가노의 허리뼈 부근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를 죽여 웃고 있었다. ㅡ 웃고 있었다. "아야..." 깜짝 놀라는 가노의 시야에서 아야세의 어깨가 더욱 세차게 떨렸다. 결국 아야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작게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왜, 왜 웃는 거야, 너...!" 가노의 목소리에는 보기 드문 강한 동요가 담겨 있었다. 작게 소리를 내며 웃던 아야세는 웃겨 견딜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가노를 올려다보았다. "그치만 가노씨... 머리도 엉망진창으로... 그런 차림으로..." 아야세의 말에 가노는 여기저기 뻗쳐 있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확실히 잠에서 깨자마자 빗질도 하지 않고 바깥에 나가긴 했지만 그게 그렇게 우스운 일인 것일까? "...이게 그렇게 웃을만한 일인가?" 진지하게 묻는 가노를 보고 아야세는 스스로도 너무 지나치게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미, 미안해요. 하지만 가노씨가 그런 차림으로 바깥에 나갔다고 생각하면..." 평소에는 그렇게나 빈틈없이 양복을 입고 있는데. 가노는 또다시 쿡쿡 웃기 시작한 아야세를 물끄러미 노려보았다. "...게다가 소메야씨가 해 준 얘기가 떠올라서..." "소메야?" "어제 여러가지 얘길 들었어요. 가노씨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던가... 중학교때 얘기라던가..." 또 뭔가를 떠올린 것일까, 아야세의 눈이 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밤중에 학교 풀장에 숨어 들었다가, 수위 아저씨한테 들킬뻔하자 수영팬티 하나만 달랑 걸치고 차도를 뛰어서 도망갔다면서요? 그거 정말인가요?"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로 묻는 아야세를 바라보며 가노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야세에게 들려주기에는 문제가 있는 사실에 다소 각색까지 더해진 것 같지만 짐작가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혹시 어제 소메야와 계속 그런 얘기만 나눴던 거냐?" 너무 기가막힌 나머지 화를 낼 기력조차 잃어버린 가노의 물음에 아야세는 문득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가노를 화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야세는 불안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가노씨가 어제 화를 냈던 것은 바로 그것때문이었나요..." 아야세의 말에 가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린 가노씨의 흉을 보면서 웃고 있었던 게 아니예요.??난 그냥 가노씨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그래서 소메야씨한테..." 필사적으로 설명하는 아야세의 뺨에 가노는 불가사의한 물건을 만지는 것 같은 기분으로 손을 뻗었다. 맞을 거라는 오해라도 하고 있던 것일까. 아야세는 흠칫 긴장하며 입을 다물었다. 애처롭게 열린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가노는 부드러운 뺨을 손가락으로 살짝 어루만졌다. "나..." "나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고?" 나지막한 속삭임. 작게 떨리고 있는 아야세의 눈동자가 밝은 아침햇살 속에서 호박색으로 빛났다.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는 아름다운 얼굴이 가노를 올려다보았다. 도망칠 곳도 없는 좁은 침대위에서 아야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달콤하고, 그리고 씁쓸하기도 한 감정이 가노의 가슴속을 덮어왔다. "나도 알고싶어." 가노가 긴 팔을 뻗어 아야세의 가냘픈 몸을 살짝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난폭하게 다루면 부서져버릴 것처럼 가느다란 팔에 머뭇거리며 얼굴을 묻었다. "너에 대해서 아주 많이 알고 싶어." 자신은 이 부드러운 몸의 전부를 원하고 있다. 육체만이 아니다. 마음속 혹은 세포 하나에까지 이르는 절대적인 지배를 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지금 이 순간조차 가노는 과거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던 자신의 전부를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이의 몸에 바치고 있었다. "아야세..." 가노는 부드럽게 속삭이며 부방비하게 열려 있는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가볍게 숨을 삼키는 동작마저도 사랑스러워서 가노는 부드러운 입술을 혀로 핥았다. "열은 내린 것 같군.' 아야세는 가노의 키스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침대를 빠져 나오려고 하는 아야세의 손목을 가노는 커다란 손으로 살짝 감싸쥐었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는 아야세의 몸을 다시 침대위에 눕혔다. "가..." 아픔을 주지 않을 정도의 힘으로 가노는 아야세의 새하얀 가슴을 어루만졌다. "대체 뭘..." 아야세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호소하며 가노의 손목을 잡았다. "괜찮겠지?" 가노는 싱긋 웃으며 아야세의 목덜미를 가볍게 핥았다. "하자." 새빨갛게 물든 귓볼을 살짝 깨물자 자신의 팔안에 안겨 있는 아야세의 몸이 움찔 튀어 올랐다. "아, 안돼요. 가노씨. 여긴 정말로 벽이 얇..." 필사적으로 호소하는 아야세의 뺨에 조금 수염이 자라기 시작한 뺨을 부볐다. 확실히 이러고 있는 지금도 얇은 벽을 통해 이웃집 주부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참아. 그게 무리라면 내가 계속 키스를 해 주지." 즐거운 듯이 웃는 가노의 목소리에 아야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생각해보면 가노 자신도 이렇게 밝게 웃는 것은 예전에도 그다지 없었던 일이다. "안돼요, 가노씨... 분명히 들킬 거예요." 가노는 당황하며 호소하는 아야세의 몸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잠옷 자락을 걷어 올리고 부드러운 엉덩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 필사적으로 소리를 죽이고 있는 아야세가 사랑스러웠다. "하긴 그래. 아까 노트북을 가지러 가는 도중에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아줌마 군단과 스쳐 지나갔었으니까." 가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커다랗게 열린 호박색의 눈동자속에 즐거운 듯이 웃고 있는 가노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뭐, 때로는 이런 자극도 나쁘지 않잖아? 하고 나서 맨션에 돌아가서 어제 네가 만들어준 밥을 먹도록 하자." 가노의 혀가 밉살맞다는 듯이 노려보는 아야세의 눈을 강아지처럼 살짝 핥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줄거지?" 가노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즐거운듯이 소리를 높여 웃었다. - END -